아버님, 1971년도도 이제 40여 일을 남기고 있사오니, 이 기간을 아버지께서 지켜 주시옵길 바라옵니다.
'승리적 통일기반 확보' 라는 표어를 바라보고, 이해를 아버지의 뜻에 합당할 수 있는 해로 거두어들이기 위해서 저희들은 부족한 정성들을 모아 10여 개월을 지내고 이 자리에 당도했습니다.
아버님, 어린 것들을 이끄시기에 얼마나 수고하셨사옵니까? 미숙한 것들을 가누시기에 얼마나 수고하셨사옵니까? 아버지께서 이 미급한 것들을 목적의 자리까지 재촉하시기에 노고가 얼마나 많으셨다는 것을 생각 하게 될 때에, 아버님을 대할 적마다 항상 부족한 것이 저희 자신들인 것을 이 시간 다시 한 번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이 임하는 곳에 진정한 아들이 있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당신이 마음으로 그리워 찾아오는 당신의 참다운 아들의 모습이 기쁜 자리에 있어야 할 텐데도 불구하고, 그런 자리에 서지 못한 자녀들을 찾아오시는 아버지의 마음은 늘쌍 외로와야 되고 늘쌍 슬퍼야 되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그런 아버지를 아는 저희들은 어서 속히 한스러운 복귀의 노정이 지나가기를 바라고 있나이다.
개인을 찾아 싸워 나오시던 아버지의 슬픔의 길도, 가정을 찾아 민족을 찾아 국가를 찾아 나오시던 아버지의 수난의 길도 저희들은 잘 아옵니다. 수많은 생명을 잃어 가면서 세계적인 최후의 승리의 길을 다짐하시던 아버님이 절대적인 각오를 하고 절대적인 승리를 결정하려는 신중한 자리에 서실 적마다, 땅 위에 있는 인간들은 항시 당신의 바람 앞에 상대의 자리를 결정하지 못한 채 올라갔다가는 떨어지고 가다가는 지쳐서 후퇴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았사옵니까? 아버님, 저희들도 그와 같은 운명길을 따라서 이 자리까지 찾아왔습니다.
오늘날 아버지 품안에 있는 것을 자랑할 수 없는 스스로의 모습을 바라보게 될 때, 또 나머지의 길을 지켜야 할 책임이 저희 앞에 있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타락한 인간들은 언제나 타락권내의 환경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요, 습관성과 그 인연을 벗어나기 힘든 것을 잘 아시는 아버지, 그러한 환경을 벗어나게 하기 위하여 개인을 몰아내신 아버지의 입장이 참으로 불쌍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끼옵니다. 그 몰림 받은 개인을 따라 나서는 과정이나마 아버지께서 사랑하고 품고 갈 수 없는 한스러운 복귀의 길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수를 가하여 가게 될 때는 원수들이 진을 치고 막아 같이 갈래야 같이 갈 수 없는 길이기에 항상 헤쳐 놓고 자기 스스로 가려 가게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수난의 길, 아버지의 노고의 노정을 저희들이 생각하게 될 때, 저희 눈앞에 보이는 높은 산정이 있으면 그 산정은 당신이 가야 할 길을 대표한 것임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사옵고, 험한 행로가 있으면 복귀의 행각의 노정에 있어서 슬프신 아버지의 정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사오며, 또한 그것이 인생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저희의 환경이요, 사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마음대로 갈 수 없는 노정인 것을 생각하게 될 때, 늘쌍 승리권에 서서 만민을 통치하는 권위의 자리에 계심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을 뒤에 두고 수난길을 따라서 타락한 인생들을 수습하면서 오시는 아버지의 비참함을 저희는 진정한 의미에서 동정해 드리지 못하였습니다. 당신이 걸어가시는 도상 앞에 당신의 슬픔을 제거시키기는커녕 고통과 비참을 가해 주었던 역사과정의 선조들을 저희들은 연상하게 되옵니다.
그러한 선조들의 혈통을 이어받은 후손들인 것을 자인하게 될 때, 오늘날 처해 있는 초췌한 자기의 모습이 불쌍하다면 불쌍한 모습이요, 처량하다면 처량한 모습이요, 그 누구도 사정을 보아 줄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인 것을 느끼게 되옵니다. 하늘에 계시는 저희 아버님은 이와 같은 무리를 찾아오셔서 이 길을 가야 된다고 얼마나 재촉하셨는가 하는 사실을 느끼게 될 적마다, 가기는커녕 도리어 짐을 가해 드리던 저희 자신들이었음을 생각하게 되옵니다.
아버님, 해가 가고 때가 지나감에 따라 당신 앞에 효의 도리를 세우지 못할까 봐 염려하는 무리들을 그리워하셨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 과연 불쌍하신 분은 아버지이심을 저희들은 진정으로 알아야 되겠습니다. 타락한 인생을 맞은 그날부터 수난의 나그네의 생활을 계속하시던 아버지의 사정을 돌아보고 다시 한 번 저희 스스로를 회고해 보게 될 때, 당신 앞에 면목없는 무리인 것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그와 같이 역사노정을 이끄시어 복귀의 한계선까지 끌어오기 위해 얼마나 얼마나 수고하신 아버님이신가를 생각하게 될 때. 저희는 허리띠를 졸라매고 아버지 앞에 결의하고 나서지 않으면 안될 자신들인 것을 다시 한번 발견해야 되겠습니다.
내 손이 쉬기를 바라는 자리에는 아버님의 손길이 가해진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내가 가야 할 발걸음을 주저하는 자리에는 아버지의 눈물의 발자국이 남아진다는 것을 저희들은 늘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내 몸이 쉬기를 바라는 자리에서는 아버님께서 나를 업고 험한 골짜기와 산정을, 수많은 수난을 넘어야 되는 것을 알고, 복귀의 운명길에 들어서신 아버지를 저희들은 동정해야 되겠습니다. 아버님이 쉬시기 전에는 쉴 수 없는 인간이 되어야 될 텐데도 불구하고, 쉬지 못하시는 아버님을 더욱더 쉬지 못하시게 하는 불쌍한 것들이 우리 인류였고 저희들 자신인 것을 느껴야 되겠습니다.
저희가 편안한 한날을 맞아 가지고 활기찬 자세로 웃어 보는 자리에서도 그 웃을 수 있는 자리를 기쁨으로 맞이할 수 없는 아버지이시요, 도리어 그 웃음길을 통하여 사탄의 조종과 저주가 남아질 것을 염려하시는 아버지이신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얼마나 심각하고 얼마나 기막힌 사정으로써 저희를 다짐하게 하시지 않으면 안 될 아버님인가를 생각할 적마다, 불쌍한 분은 아버님이요 고독한 분도 아버님이요 비참한 분도 아버님인 것을 느끼게 되옵니다.
생사의 접경에서 자유의 모습을 가리지 못하여 우왕좌왕하는 입장에서 아버님이 찾으시는 하나의 모습, 아들과 딸을 그리워해야 할 아버님이라는 것을 생각할 적마다, 그런 정상을 참작하지 못하는 저희들로서는 아버님의 심정을 바랄 수 있는 입장이 못 된다는 것을 느끼게 되옵니다. 그러나 아버지로부터 버려지면 저희들은 원수들 앞에 찢길 것이고 원수들 앞에 제물로 사라진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이 길은 포기할 수 없는 복귀의 길이요 포기할 수 없는 인생길인 것을 알았기 때문에 수많은 선조들은 죽을 고비를 넘나들면서도 이 길을 이어왔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아버님이 가시는 그 길을 따라가는 길은 용이한 길이 아닌 것임을 느끼게 되옵니다.
그러나 용이한 길이 아니더라도, 그 길이 아무리 험하고 길다 하더라도 인간들에게 있어서는 그 길이 일생, 일세기 이내에 멎어지는 길이지만, 아버님에게는 수천년 역사의 고비를 넘고 또 넘어야 할 책임이 있었사옵니다. 그러기에 아버지의 그 책임이 얼마나 지중한가를 생각하게 될 때, 저희 자신 앞에 가중되는 십자가가 아무리 과중하고 크다 하더라도 아버지의 노정을 확실히 알고 당신의 아들딸이 됐다는 것을 자인할 적에, 그 길은 아니 갈래야 아니 갈 수 없는 인생길인 것을 깨닫는 저희들이 되어야만 되겠습니다.
그러한 자리에서 아버지의 뒤를 따라가는 길이라는 것은 눈물의 길이요 고통의 길이요 한숨의 길이 아닐 수 없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신앙 길을 더듬어 나오면서 이 땅 위에서 행복을 그리는 그 자체가 어리석다는 것을 저희들은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아버님의 존영을 바라보게 될 때, 과연 수십억 인류를 당신의 나라에 이끌어들이지 않으면 안 될 책임이 당신에게 있다는 것을 저희들이 생각 하게 될 때, 내 한 생명이 언제나 당신 앞에 지름길로 달려가지 못하는 생활과 생애노정을 더듬어 온 것을 보게 될 때, 저희가 가는 길을 가로 막고 가로질러서 저희를 이끌어야 할 아버지의 입장이 얼마나 불쌍한가를 저희들은 느껴야만 되겠습니다.
아버지 이 시간, 여기에 모여든 어린 자녀들을 굽어살펴 주시옵소서. 저희 마음에 무엇을 지니고 있는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되겠습니다. 저희 자신들이 어떠한 길 모퉁이에 서 있으며, 어떠한 형상으로 가고 있는가를, 다시 산 자의 입장에서 응시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내가 어떠한 자리에 서 있으며 어떠한 길을 가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에, 하늘 것이 아니면 안 될 것을 저희들은 아옵니다. 지팡이를 짚더라도 하늘이 넘겨 준 지팡이를 짚지 않으면 안 될 것이고, 옷을 입더라도 하늘로부터 이어받은 옷을 입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생활하는 모든 일체가 하늘과 화합되지 않고는 어느 때 원수의 화살에 맞아 쓰러질까 염려되는 저희의 자리가 아닐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그야 말로 조심스러운 인생길이요, 신앙길이요, 복귀의 행각의 노정인 것을 생각하게 되옵니다. 나는 어떠한 자리에 섰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닐 수 없사옵니다.
아버님이여, 깊은 심정으로 아버지를 사랑하고, 마음을 다하여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심정을 기울여 당신의 거룩하심을 찬양할 수 있는 그런 때가, 자기 생애에 있어서 모든 것을 잊고라도 그럴 수 있는 때가 있었느냐고 묻게 될 때, 그런 때가 없었거들랑 불효막심한 자식이었던 것을 다시 한 번 회개해야 되겠습니다.
아버님과 저희들 사이에 한치의 거리를 남겨 놓고 붙들어야 할 손이 맞붙여지지 못하는 순간에 서 있다는 것을 느끼는 자리에 얼마나 있었느냐 할 때, 자기 일신이 죽음의 구렁텅이에 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아버지의 손길을 붙들기 위하여 죽음을 각오하고 나서는 때가 있었느냐고 반문하게 될 때에, 저희는 그러한 때가 없었지만 아버님은 얼마나 얼마나 그런 때가 많았었는가를 생각하게 될 때, 과연 아버지 앞에 부끄러움밖에 갖지 못하는 자신들인 것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버지, 이 시간 찾아오시옵소서. 저희의 부족한 마음들을 당신이 점령해 주셔야 되겠습니다. 부디 부디 저희가 사탄에게 삼켜지게 되어서는 안 되겠사오니, 아버님만이 주관하시고 아버님만이 임재하시옵소서. 내일의 승리를 바라는 무리가 되고 오늘의 험산준령을 타개하는 데 있어서는, 자신의 일체를 희생시켜 가면서 오늘 이 시간을 사수하는 무리가 되어야 된다는 것을 저희들이 다시 한 번 깨달아야만 되겠습니다.
철모르는 사이에 한 해가 가고 십년이 지나가고 청춘시대와 장년시대가 지나고 장년시대가 노년시대로 바뀌어 인생의 석양길, 혹은 숙명길을 바라보는 그런 길 앞에서 아버님으로부터 위로 받을 권한을 갖지 못하고 승리의 자기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는 덧없는 자리에 서 있다 하게 될 때는 얼마나 비참한 인생이 되는가 하는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 오는 청년시대가 무서운 것임을 느껴야 되겠고,오는 장년시대가 무서운 것임을 느껴야 되겠습니다. 노년시대가 찾아와 황혼길에 접어드는, 인생의 마지막을 바라보는 그 자리가 두려운 자리라는 것을 느껴야 되겠습니다.
그때가 오기 전에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죽고 죽고 또 죽는 한이 있더라도 슬픔의 최후를 남기지 않겠다고 모진 싸움에서의 승리를 다짐하는, 아버지의 마음속에서 사라질 수 없는 아들딸이 되고. 당신이 점령한 고지를 지키는 하늘의 용사들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가지고 여기 불초한 몸들이 아버지 앞에 부복하였사오니, 저희의 연약한 손길을 다시 더듬으시사 붙들어 주시옵고, 저희의 고독한 몸들을 아버지께서 찾아와 안아주시옵소서.
아버지, 저희들은 당신의 입김으로부터 나오는 말씀과 권고의 사연을 듣고 당신이 바라시는 소원을 저희의 소원으로 이어받아야 되겠고, 당신이 승리를 다짐하신다면 그 승리의 도상에 일치될 수 있는 하늘의 용사가 되어야 되겠고, 당신의 최후의 승리의 영광과 당신의 최후의 결정을 다짐하는 판정의 노정이 있다 할지라도 저희들은 그 길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그것이 그러한 복귀의 노정을 아시는 당신이 말씀하신 살고자 하는 자는 죽고 죽고자 하는 자는 산다는 사실을 과히 짐작할 수 있는 길인 것을 알겠나이다.
아버님, 이제 부족한 저희의 마음들을 수습하시고 이 아침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11월 중순을 또다시 맞이한 이때에 당신의 사랑으로 더욱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남아진 이해를 빛나고 영광스럽게 하기 위해 당신의 터전 위에서 최후의 길을 지키고 나서는 무리가 되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전국에 널려 있는 어린 자녀들을 기억하여 주시옵고, 일선에 나가 있는 어린 딸들을, 아버지, 지켜 주시옵소서. 이 나라 이 민족의 운명을 아버지,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준비하지 못하는 백성은 불쌍한 백성이 된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아야 되겠사옵니다. 준비하지 못하는 가정이나 개인은 불쌍한 무리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안일 도식하는 자리에서는 평화의 기원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자기가 가질 수 있는 것이 되지 못하는 것이요. 승리의 권한이 있다 하더라도 자기가 공고한 승리의 자리 위에 설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여기에 모인 당신의 자녀들만이라도 스스로 책임을 다하여 아버지 앞에 은사를 갚아 드리고 남아지는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싸움의 길, 수난의 길도 달갑게 가는 모습들이 되어야 될 것을 다시 느끼오니, 부디 부디 당신이 가는 길 앞에 일체를 맡기고 의논하고 따라가는 무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충성하여 당신의 뜻을 헤아릴 수 있는 자리에 섰거든 모든 짐을 짊어지고 가야 하는, 가고 싶지 않은 길을 당신이 저희들 앞에 맡기지 않으면 안 될 사연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이것을 아는 저희들이 그런 길을 원치 않는 자신들이 되었다면 이 이상 부끄러움이 없다는 것을 느껴야 되겠습니다.
내 몸이 으스러지고 마음이 상심되더라도, 아버지를 중심삼고 그러하기를 바라는, 효자의 인연을 따라가고 효녀의 인연을 따라가는 통일의 무리들이 되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지금 수택리에는 대학가의 무리들이 모여서, 이 시대적인 사명을 결정하는 기로에 서서 수련을 받고 있사오니. 그 자리에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그들이 얼마나 수고로운 역경을 거쳐 가지고 그 자리까지 찾아왔사옵니까? 이 나라와 접하고 대학가와 최후의 고비를 넘어야 할 이런 숨 가쁜 시점에 놓인 것을 생각하게 될 때, 내일의 이 나라 운명을 가름지어야 할 그 젊은이들을 아버지께서 품고 길잡이로 할 수 있는 때가 이제 다가왔사오니, 당신이 원하시는 뜻대로 당신이 그렇게 바라던 승리의 그 한 길로 수습하시사, 내일의 소망을 드높이고 영광을 다짐할 수 있는 대한민국의 한날이 어서 속히 오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니다.
아버지,1971년도도 이제 석양길을 달리고 있사옵니다. 여기서 저희들이 각각 지니고 있는 염원이 무엇이며 남긴 선물이 무엇이며 짐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될 때, 아무것도 갖지 못한 가벼운 몸을 가진 무리가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나라를 바라볼 때 숨 가쁜 짐을 짊어지고 있는 것을 느끼고. 교회를 바라볼 때 역시 수난의 피를 흘리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선 것을 느끼고, 자기의 가정과 개인에게 남아진 십자가를 다 청산짓고, 교회와 나라를 위하여 일신 전체를 바치고 나서야 할 시급하고 위급한 시대에 처해 있는 것을 느끼게 되옵니다.
아버님이여, 당신이 대한민국을 삼팔선으로 갈라 놓았사오니 삼팔선을 아버지께서 치워 주시옵소서. 남북이 갈라져 가지고 숱한 심정적인 사연이 엇갈리고 있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북녘 땅을 바라보면서 눈물짓는 사람도 많을 것이고, 또한 이 시간 이북에도 남녘 땅을 바라보면서 한스러운 환경에서 신음하고 있는 무리들이 있을 것을 생각하게 될 때, 불쌍한 이 대한민국의 운명을 이와 같은 비참으로 끝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을 당신 앞에 이끄시어 민족적 회개의 때가 오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제물이 되어야 할 책임을 짊어진 무리가 있어야 될 것을 생각하오나, 지금까지 그러한 그 어떤 단체도 그 어떤 종교 단체도 없었다는 것을 저희들은 여실히 알고 있습니다. 기성교단도 그러한 무리가 아닌 것을 알고 있습니다. 보잘것없는 저희들이 아니면 안 된다는 이 엄청난 사실을 생각할 적마다, 저희들이 가는 이 길 앞에 가중된 십자가의 노정이 아버지와 더불어 있어야 된다는 것을 알게 되옵니다. 그 십자가의 노정을 기꺼이 책임지고 나서겠다는 격동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는 비참한 곤경의 자리가 없어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오늘날 일신의 안일을 바라는 자들이 있사오면 아버지 앞에 면목 없는 무리들밖에 되지 못한다는 것을 느껴야만 되겠습니다.
아버지, 여기에 모인 무리들은 아버지와의 인연을 두터이 하고 아버지의 분부를 받기 위해서 모였사옵니다. 저희의 빈 마음 가운데 아버지의 은사만이 꽉차게 하여 주시옵고, 저희의 소심한 마음 위에 강한 아버지의 마음이 임재하시어서, 암흑의 자리에서 방황하던 저희들이 해방의 함성을 지를 수 있는 기쁨의 모습을 갖추어 가지고 최후의 결전장을 향하여 힘차게 달려가는 아버지의 믿음직스러운 자녀들이 될 수 있게끔 권고하여 주시옵소서. 그렇지 못하게 될 때는 아버지께서 또 슬퍼하신다는 것을 저희들은 느끼면서, 빛을 남기고 가는 무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진 빚을 청산짓고 뭇사람에게 빛을 지우고 가는 당신의 자녀들이 될 것을 다짐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전국에 널려 있는 자녀들을 이 시간 굽어 살피시옵고, 해외에 널리어서 분투하고 있는 어린 자녀들을 이 시간 당신의 심중에 기억하시옵소서. 어두운 이 땅, 험악한 이 땅 위에 당신이 안식할 수 있는 터전을 그 누구도 모르는 고요한 자리에서 개척하게 하여 주시옵기를 재삼 부탁드리옵니다. 모든 것을 맡으시옵소서. 참부모님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아멘.
신앙길을 가는 사람들은 신앙길을 가지 않고 있는 일반 사람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그들이 동쪽으로 가고자 한다고 해서 우리도 동쪽으로 갈 수는 없는 것이요, 그들이 자기를 중심삼고 살고 있다고 해서 우리도 그와 같은 생활을 따라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신앙자와 비신앙자는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 서로 가는 길이 같을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인간세계에 있어서도 그런 것을 쉽사리 헤아릴 수 있는 것을 미루어 보게 될 때, 하나님과 우리, 하나님과 타락된 우리 인간, 혹은 하나님과 타락된 세계에서 신앙길을 가고 있는 인간, 또 하나님과 모든 종교를 대표한 자리에 섰다고 하는 우리 통일교회의 개개인들을 볼 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고자 하는 길과 우리 통일교회 교인들이 가고자 하는 길이 일치되면 좋겠지만, 하나님과 우리는 사이가 먼 자리에 있고 또 거기에는 거리가 있으며 자유롭고 순조롭게 연결될 수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하나님이 가는 길 앞에 우리의 신앙자들은 언제나 보조를 맞추는 자리에 서지 못한다는 것을 쉽사리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가는 길, 즉 우리 통일교회 식구 한 사람 한 사람이 가고 있는 길과 하나님이 가고 있는 길이 같지 않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될 것이냐? 하나님이 머무는 자리와 우리 통일교회 교인들이 머무는 자리가 일치할 것이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그것은 일치할 수 없다는 결론이 자연히 안 나올래야 안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우리 통일교인들이 지금까지 걸어 나온 역사와 이 통일교회를 이끌고 나오는 하나님이 걸어 나온 역사와는 일치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개인을 중심삼은 하루의 생활을 미루어 볼 때도, 아침에 결심하고 나선 하루의 길에서도 여러 가지의 변태상을 우리는 느끼게 됩니다. 그러한 것을 잘 알고 있는 우리 자신들로서 하나님이 가는 길 앞에 나섰다는 나 자신의 결심이 얼마나 지속될 것이냐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볼 때, 우리의 변화무쌍한 하루 생활을 중심삼고 미루어 보더라도 하나님이 우리 들을 믿고 이끌고 가기에 합당하지 못한 자리에 서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볼 때, 하나님이 가는 길이 높은 길이라 하면 우리들이 가는 길은 낮은 길일 것이요. 하나님이 가는 길이 똑바른 길이라 하면 우리들이 가는 길은 꾸불꾸불 돌아가는 길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슬퍼하시며 간다 하게 된다면, 우리들은 슬픔의 길을 동경하는 것보다도 자기 개인을 중심삼아 가지고 스스로 기쁨의 길을 동경하고 찾아가는 자들이 아니겠느냐? 우리들이 좋아하는 것과 하나님이 좋아하는 것이 늘쌍 일치 되었다고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밥을 먹고 사는 하루의 생활에서, 혹은 시대가 가고 있는 사실을 두고 볼 때, 그 시간 시간이 언제나 하늘이 같이하는 자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리 전체의 생활 환경을 미루어 봐 가지고 알 수 있는 사실인 것입니다.
이러한 자리에 있는 우리라는 것을 결정지어 놓고 보게 될 때, 하나님이 우리를 이끌고 가는 데에는, 그 환경이 변모함에 비례해 가지고 하나님의 수고의 길밖에 남을 수 없다는 것은 더 말할 나위 없는 것을 우리가 아는 바입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 내가 기뻐하기를 바라고 원하는 그 무엇이 있다면, 그 바라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는 것이 못 되고 도리어 하나님에게 가중된 짐밖에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 오늘날 우리는 이 신앙길에 들어온 후의 시일이 길면 길수록 하나님과 더 가까워질 수 있는 내적인 인연을 남기는 것보다 도리어 슬픔의 내연을 많이 남기는 무리가 아닐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붙들어 줘 가지고 나를 대하여 기뻐하던 한때가 있었다면, 우리는 그 기뻐하던 한때를 언제나 그리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날에 그런 일이 있었으면, 언제나 그 지난날을 그리워하면서, 그때는 좋았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고 비교하는데, 그리워하는 지난날이 언제나 나에게 좋은 것으로 남아 내적인 사연으로 묻혀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오해일 것입니다. 지난날에 기뻐한 한날이 있었거든, 하나님이 그 기쁨을 다시 맞이하고 오늘날의 환경에 사는 우리 앞에 그런 기쁨을 갖다 주기 위해서는 얼마만한 수난의 길을 거치고 얼마만한 희생의 대가를 치러야 되느냐? 그런 기쁨을 자극하는 한때의 체험을 갖지 않고는 수난길에서 각성할 수 없는 인간인 것을 잘 아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한때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배가되는 희생의 대가를 치러서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모종의 결정을 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들은 기쁨의 한때를 그리워할 적마다 좋은 마음을 가지고 그리워하는 것보다 얼마나 부끄러운 수난을 하나님 앞에 짊어지웠던가 하는 마음을 가지고, 내가 다시는 그런 입장에 서서는 안 되겠다고 조심스럽게 스스로를 다짐하면서 하루하루의 신앙길을 가누어 나가야 하겠습니다. 그러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연속적으로 우리로 말미암아 슬픔을 푸실 수 있는 그런 무엇을 스스로 다짐하지 못하는 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갈 수 있는 길은 평탄하게, 기쁨으로 남아질 수 있게, 바라는 대로 찾아올 수 없다는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좋을 수 있는 한때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있으면 있을수록 현실에 있어서 하나님이 염려할 수 있는 길을 가서는 안 되겠다 해 가지고 스스로를 치고 스스로를 죄어 구속할 수 있는 입장에 서서 하나님을 부를 수 있으면 모르거니와, 그렇지 않고 옛날보다도 더 좋을 수 있는 무엇을 바라고 나가는 데 있어서는 하나님의 수고를 보다 가중시키게 되고 슬픔만 재촉하게 되는 것이 틀림없기 때문에, 그러한 신앙태도를 가지고는 보다 깊은 신앙길을 갈 수 없다 하는 것을 우리는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게 될 때, 하나님이 가는 길과 우리가 가는 길이 언제나 엇갈리는 것을 생활에서 잘 느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하루의 생활에서 자신을 중심삼고 그것을 완전히 비판할 수 있는 거와 같이 환경에 있어서도 역시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러한 내 뒤에는 가정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 내 뒤에는 국가 혹은 세계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나 자신이 내 뒤에 연결되어 있는 가정을 거느리고 혹은 국가나 세계를 거느리고 갈 수 있겠느냐 할 때, 거느리고 갈 수 없는 것입니다.
내 개인을 중심삼고 가정의 인연이 가중하면 가중할수록 내 한 자체의 변모를 느끼게 되고, 하나님과 상관된 자리에서는 환경이 넓어지면 넓어 질수록 여기에는 더 어려운 결과가 첨부된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기 때문에, 신앙자의 가는 길은 간추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간단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복잡한 환경을 가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간단한 자리에 처해 있다고 해도 자기 스스로가 바라는 소원을 세워 가지고는 갈 수 없는 것입니다. 나는 이러이러한 계획을 세워 가지고 이렇게 간다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그가 가는 길의 방향이 하나님과 언제나 일치될 수 있는 입장이 못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을 앞에 세우고 따라가야 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박자를 맞춰 줘야 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박자를 맞춰 드려야 하는 입장에 서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올바른 신앙길을 가려 갈 수 없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게 될 때, 여러분 자신들이 혹은 젊은 시대에 처해 있는 청년들이 '내가 이 길을 가야 되겠다' 할 때는 그 젊은 청년들이 바라는 그냥 그대로, 혹은 사회환경에 있어서의 일원, 한 사람의 젊은이로서 어느누구나 가는 그대로 갈 수 있겠느냐? 그냥 그대로 갈 수 없는 것입니 다. 반드시 그 환경과 고립된 자리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 자리가 고립되면 고립될수록 신앙길에서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가는 방향과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또, 그것이 쉬우면 쉬울수록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길로 인해서 어려움을 당하면 당할수록 그 사람은 신앙길에 가까와질 것입니다.
우리가 보는 데도, 수평선 이하를 봐도 90도가 있는 것이요. 수평선 이상을 두고 봐도 90도가 있는 것입니다. 반대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90도, 90도, 360도가 여기에서 달라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시는 그 방향이 라는 것은 한 일면을 취하고 있지만 그것을 중심삼고 360도가 둘러 있는 것입니다. 평면적으로만도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가시는 데는 평면적인 입장에서만 가시는 것이 아니라 입체적인 입장에서 가시고 있으니, 그 가야 할 길의 엇갈리는 도수라는 것은 몇 배, 몇 십 배 가중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려 가야 되는 길이 하나님이 가시는 길이기 때문에 그 한 길만 맞추어 가지고도 안 되는 것입니다.
내가 고생을 한다고 해서, 고생만 한다고 해도 안 되는 것입니다. 고생 하면서도 또 찾아가야 됩니다. 고생하며 찾아가는 데 있어서는, 고생을 당하는 쓰라림을 느끼는 자리에서 거기에 포위되어 가지고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다시 연구를 해 가지고 그 쓰라림을 극복하고 다시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그런 무엇을 되찾아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하나님이 가시는 방향과 맞추기란 힘들 것이 아니냐 할 때, 이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마음대로 먹고 사는 그 환경이 하나님이 나와 마음대로 접할 수 있는 자리냐 할 때, 그렇지 못한 자리입니다. 또 내가 좋아하는 친구와 만나는 그 자리가 하나님이 좋은 마음으로 대할 수 있는 자리냐 할 때 역시 그렇지 못한 자리인 것입니다. 내가 어느 누구보다도 행복스러워하며 살고 있는 그 가정이 하나님이 보시게 될 때 행복하다고 공인할 수 있는 가정일 것이냐 하면, 두말할 것도 없이 그렇지 못한 것입니다. 혹은 내가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국가가 나가고 있는 방향에 맞추어 나가는 그 길이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 있는 길이냐 할 때 그렇지 못한 것도 두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개인이 가는 길이 하늘과 엇갈린다 할 때는, 환경이라든가, 전체가 가는 길은 더더욱 하늘과 엇갈리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이렇게 보게 될 때에 하나님을 따라가는 것은 쉬운 길이 아닙니다. 얼마나 어려운 길일 것이냐?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어려운 길일 것이라고 우리는 결론짓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자, 이렇게 생각해 보게 될 때, 그럼 우리만 그런 것이냐? 신앙길을 가고자 하는 우리만 그럴 것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가는 길을 두고 볼 때. 하나님이 우리의 뒤에서 가야 되느냐? 아닙니다. 우리보다 앞서가야 됩니다. 우리는 따라가는 것입니다. 앞서가는 것과 따라가는 것은 달라요. 앞서가는 하나님은 개척의 사명을 해야 되는 것이요, 우리는 개척의 사명을 하지 않고 그 개척한 것을 본받아 따라가면 되는 것입니 다. 만약에 하나님이 높은 데로 올라가면 우리도 따라 올라가야 되는 것이며, 하나님이 낮은 데로 내려가면 따라 내려가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평지를 향해서 한없이 가게 된다면 그 평지를 한없이 따라가야 되는 것입니다.
올라가고 내려가고 혹은 평지를 따라가는 데 있어서, 자기 마음이라는 것을 일푼이라도 갖고 비판하면 할수록 그것은 손해 되는 길이 될 것입니다. 단, 가야 할 그 길은 따라가는 길일 것이다, 거기에 보조와 박자를 맞추어 가야 될 것이다, 하라는 대로 해야 될 것이다 하는 결론밖에 내릴 수 없는 것입니다.
신앙길에 있어서 '내가 이제 이 신앙길에서 올 곳에 다 왔다, 나로서는 바라는 대로 이미 다 이루었다' 할 수 있는 자리에 서지 못한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자기 스스로의 주장을 가질 수 없는 것이 아니냐. 이것은 여러분이 미루어 생각할 때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주장을 세우기 전에 하나님이 주장하는 그 주장이 무엇이냐, 이것을 모색 해야 된다는 거예요. 내가 기뻐할 수 있는 자리를 맞게 될 때 그 기쁨의 자리가 도리어 하늘의 길을 막을 수 있는 원수의 제물이 되는 자리가 아니냐, 하나님에게 슬픔을 가할 수 있는 자리요 사탄에게 기쁨을 가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냐 할 때, 그걸 생각만 해도 180도 돌아설 수 있는 나 자신, 그걸 생각만 해도 그 자리를 일시에 초월할 수 있는 나 자신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오관을 통하여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감각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루의 생활을 중심삼고 볼 때에, 이것을 어떻게 수습해 가지고 하나님과 박자를 맞출 것이냐? 이것이 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년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루가 문제되는 것입니다. 하루에 있어서도 24시간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시간 오관으로 느끼는 그 감정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늘을 향해서 수직으로 올라가고 있느냐, 수평선과 비교하여 볼 때 올라가는 방향을 갖추고 있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이것을 늘쌍 조정해야 되겠습니다.
내가 수평선 이하로 내려가고 있느냐, 혹은 사탄이 끌어당기는 선 이하로 끌려 내려가고 있느냐? 만일에 그러한 자리에 있다 할진대는…. 하나님과 같은 자리에 서서 가지는 못하더라도 상대적 입장에서 보조라도 맞추고 상하의 방향이라도 일치되고 있느냐?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 우리의 신앙길이 얼마나 모호했고, 얼마나 하나님이 믿을 수 있는 자리였나 하는 것을 다시 한 번 반성해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나를 하나님은 끌고 가는 것입니다. 끌고 가는 데 있어서는 기쁜 길, 좋은 길로 끌고 갈 수 없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나님이 가는 길에는 기쁨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만 이끌고 가면 별문제 이겠지만 인간 외에 원수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가는 길에는 반드시 원수가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 원수를 보게 되면, 개인보다도 가정보다도 국가, 세계가 원수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세계적인 발판을 동원하여 가고자 하는 신앙길을 막으려 하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판도라는 것은 하늘편이 아닙니다. 사탄의 도구요, 사탄의 장비요, 사탄의 무기인 것입니다. 사탄이 어느 때든지 명령을 내려서 하늘이 가고자 하는 길을 백방으로 막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이 가는 길은 어떤 길이냐? 하늘이 한 발자국씩 가야 할 때는 환경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지 않고는 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가로막고 있는 환경을 제거하고, 거기에 충정된 환경을 개척해 놓지 않고는 한걸음 한걸음 갈 수 없는 것이 아니냐,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길을 가는 데는 혼자 갈 수 없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인간을 데리고 가야 할 것입니다. 데리고 가는 데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이냐? 우리 인간만 중심삼아 가지고는 전폭적으로 방향을 갖추어 앞으로 전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을 뒤에 두고 원수와 싸우면서 나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따라가지 못하면 못할수록, 하나님과 거리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뒤에서 사탄의 포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 포로가 세 사람 이상만 되는 날에는 아무리 능력이 많은 하나님이라도 후퇴해야 되고, 하나님 앞에 탄식의 조건을 세워 가지고 항서를 남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 길이 되어 있다 하게 될 때, 오늘날 우리가 신앙길을 가는 데 있어서 하나님께 얼마나 빛을 지고 얼마나 부끄러운 자체가 되어 있는가 하는 것은 지금까지 우리의 신앙생활과 생애노정을 미루어 보게 될 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 것입니다.
사탄은 6천년 기나긴 세월 동안 하나님이 가는 길을 그렇게 막아 나왔습니다. 그렇게 막아 왔던 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평탄한 자리에서 갈 수 있는 그때는 어느 때냐? 그때는 지금까지 역사시대에서는 없었던 시대를 거쳐야 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안식할 수 있는 때는 어느 때가 되어야 될 것이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그때는 이지구성에 살고 있는 인간들이 그야말로 제 2의 해방을 완전히 받아 가지고 선두에 서서 하나님을 뒤에 모셔 놓고 하나님을 대신해서 사탄을 대해 싸울 전폭적인 책임을 짊어지고 전체의 책임을 감당할 수 있는 그때부터 시작됩니다. 그때부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이 자기 앞에서 안식하기를 바라는 것은 망상인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는 거예요.
오늘날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들은 이 절박한 세계정세를 앞에 놓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은 수많은 희생의 대가를 치러 가지고 민주세계와 기독교 문화권을 만들어 놓았는데, 이 민주세계와 기독교 문화 권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느냐? 기독교면 기독교를 보게 될 때, 자기 마음대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어떠한 특정한 종단이 있으면 그 종단은 그 종단을 창시한 창시자의 뜻을 따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수많은 종파가 있습니다. 종파들이 많지만 그 가운데 진정한 종파가 가야 할 길은, 하나님과 더불어 가는 길은 두 길이 아니라 하나의 길입니다. 그 하나의 길은 어떠한 길일 것이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우리가 찾아내려면 쉽사리 찾아낼 수 있는 길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 이냐? 이 시대에 있어서 어떠한 종교보다도 하늘이라는 명제를 앞에 놓고 고생하고 수난길을 즐거이 가겠다고 나선 무리가 있다면 그게 일치된 것은 아닐지라도 그래도 종교 가운데 제일가야 할 방향을 모색하겠다고 뒤넘이치는 무리가 아닐 것이냐. 만일 지상에 하나님이 인연을 두고 생각할 수 있는 단체라면 그러한 곳 외에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도 끝까지 참는 자는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끝까지 참는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 끝이라는 것이 나 혼자 죽을 수 있는 입장에서 죽어 갔다고 해서 끝이 아닙니다. 가정이 전부 다 희생될 수 있는 가정의 끝도 있는 것입니다. 혹은 민족이면 민족. 국가면 국가의 끝도 있는 것입니다. 또 세계의 끝도 있을 것이 아니냐.
그래서 끝까지라는 말은 가정적인 기준에서 싸울 수 있는 입장에 선 그런 끝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선 자리에서, 민족적인 싸움 이내에서의 끝이 아니라 그 제일 끝에서 바라보는, 그래 가지고 세계를 향한 노정을 남긴 자리에서의 끝이 아니라 세계의 끝을 지내고 나서 이제는 이 이상이 없다고 할 수 있는 자리에서의 끝이 아닐 것이냐.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 신앙길을 따라 하나님과 더불어 개인을 넘고, 가정을 넘고, 종족을 넘고,민족을 넘고, 국가를 넘어 세계 끝까지 갈 때까지의 그 수난이 얼마나 클 것이냐? 그 길을 일생 동안, 혹은 생애를 통하여 가야 되는, 필시 가야 할 그 누군가 있어야 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그 길을 모색하는 사람은 평안이니 안식이니 희망이니 소망이니 영광이니 하는 것을 바라는 마음 가지고는 그 끝에까지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 '죽고자 하는 자는 산다'고 했습니다. 자기를 내세워 가지고 그 무엇을 그리는 자리에서 산다는 것이 아니라구요. 죽고자 하는 자가 사는 것입니다. 죽고자 하는 자만이 산다는 것입니다. 개인의 승리의 자리에서 개인의 끝을 결할 수 있는 사람도 죽고자 하는 각오를 하지 않고는 개인으로서 승리를 결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가정과 더불어 죽고자 하지 않는 사람은 가정으로서 가야 할 끝을 하나님과 더불어 맞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건 두말할 것 없습니다. 또 민족이면 민족, 국가면 국가와 더불어 죽고자 하는 이런 일체가 통일된 자리에서 그런 것을 결하지 못하게 되면 그 국가의 뜻을 중심삼아 가지고 끝을 맞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세계도 역시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러한 결론을 두고 생각해 보게 될 때에, 여러분들은 언제 그 끝 된 자리에 서 봤느냐? 개인이 아니고 가정, 가정이 아니고 종족, 민족, 국가, 세계의 끝 될 수 있는 자리를 찾으려고 노력해 보았느냐? 하나님은 그 끝이 오기를 얼마나 바랄 것이냐? 내 개인의 끝이 이 순간에 있기를 바랄 것입니다. 이 순간에 있기를 바랄 것인데, 여러분은 이 순간에 내 개인의 끝을 결정짓는다고 맹세한 입장에서 얼마나 자기 신앙길을 다짐해 나왔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그렇지 못한 나 자신임을 발견하거든 다시 한 번 전폭적으로 자신의 신앙태도를 뜯어고쳐야 됩니다. 자신을 죽여 버려야 됩니다. 지금의 내 신앙자세는 근본적으로, 본질적으로 용납할 수 없다고 하며 그것을 무자비하게 타파해 버리고 새로이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미루어 헤아려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정은 언제 끝을 결할 수 있는 자리에 섰던고? 혹은 민족과 더불어 언제 끝까지 왔다고 할 수 있는 그런 자리에 서 봤던고? 혹은 세계와 더불어 언제 그런 자리에 서 봤던고? 그러한 자리가 하나님이 세우고자 하는 자리가 아니겠느냐. 그렇기 때문에 '죽고자 하는 자는 산다' 하는 그 말을 하늘이 누구나 편안하게 자연스럽게 교육할 수 있는 자리에서 말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죽고자 하는 자는 산다'는 말은 하늘을 증거한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을 증거한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의 생활의 내막을 선포한 것임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하늘은 죽음을 각오한 투쟁의 노정을 엮어 가고 있다는 배후의 사실을 우리는 새삼 깨달아야 될 것입니다. 죽기를 원하면 될 리 없는 것입니다. 이 말 자체가 모순된 말입니다. 그러나 이 타락한 세계는 엇갈린 세계, 반대의 세계가 되어 있기 때문에, 이 죽음의 자리에서 생명의 자리로 올라가기 위해서 완전 부정할 수 있는 최후의 극점이라는 것은 죽는 것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죽는 그 자리에서부터 세상의 인연이 끊어지고 하나님과 새로운 인연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하나는 이별하게 되고 하나는 상봉하게 되기 때문에, 하늘이 바라는 제일보의 기준이 그 자리밖에 없다는 것을 아시는 하나님은 단연코 그런 명령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가는 길과 우리 인간이 가는 길은 다를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인간과 사탄은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하늘과 사탄이 정면적인... (녹음 테이프 잠시 끊김 )
적병을 뒤에서 맞아 싸워야 하는 하나님의 입장인 것을 알고 '하늘이여, 나를 버리지 마옵소서, 내가 앞장서서 싸우겠나이다. 정면에서 저를 돌봐 주시지 않더라도 저는 당신이 가시는 길을 당당코 가겠나이다. 어서 이 길을 갑시다' 하고 재촉하고 권고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나에게 대드는 원수를 방어해 주고 대신 싸워줄 수 있고, 또 내가 거기에 보조를 맞추어 행동을 같이함으로 말미암아 원수세계에서 탈피할 수 있고 사탄의 포위망을 뚫고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늘이 데리고 가지 못해요.
이렇게 보게 될 때에 '하늘이여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하는 그 자체가 얼마나 위험천만한 것인가? 위험천만한 자리, 자기의 생명이 다할 수 있는 자리에 들어가더라도, '하늘이여 나를 돌보지 마시고 당신이 가셔야 할 이 이상 심각한 자리로 어서 가시옵소서'라고 하게 된다면, 그 자리는 하나님이 적진을 향하여 전진해 나가기 전에 이 무리를 끌고 가는 책임을 지겠다고 하는 자리가 아니겠느냐.
하나님이 가야 할 길 앞에는 원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조금만 방향이 틀어지면 언제든지 공격 받을 수 있기 때문에, 하늘이 나를 피해 주고 나를 돌보지 말고 전진하기를 바라는 것이 신앙자가 가야 할 길이요. 신앙생활의 본질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 봐야 되겠습니다.
여러분 보세요. 오늘날 기독교 교인들 혹은 목사들이 기도하는 것을 보면, 전부 다 하나님에게 뭘 해달라고 합니다. 자기 아들딸 중심삼고 '뭐 해주십시오' 혹은 자기 교회 중심삼고 '뭐 해주십시오' 그렇게 수천년 동안 기도해 온 교단이 어찌하여 지금 와서는 무력해졌는가? 그것은 이미 하나님이 계획하는 방향권과 하나님이 전투하고 있는 전쟁 마당과는 별도의 환경에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대해 부르짖어도 하나님이 미칠 수 없고 올 수 없는 거리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그리워하는 그 환경적 터전이 세상과 다른 것이 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그냥 그대로의 방향이요 그냥 그대로의 환경이요 그냥 그대로의 생활체제요 그냥 그대로의 모임이라 할진대는, 그 가운데에 하나님이 갈 수 있고 하나님이 있을 수 있겠느냐 할 때,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이 이미 떠나 지나간 자리가 아니냐 하는 것은 두말할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 통일교인들은 어떠냐? 그런 환경에서 다시 한 번 자기 자신을 중심삼고 생각해 보게 될 때, 여러분들이 어려울 때에는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어려울 때는 하나님을 찾는다구요. 무슨 문제가 생겨 가지고 자기가 수습하지 못하게 되면 '하나님 날 도와주시옵소서, 제가 이제야 진짜 깨달았습니다'라고 합니다. 자기가 어려움을 당했을 때 하나님과 더불어 어려움을 당했다면 거기에는 기도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그대로 그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동일한 자리에서 '아이고, 어렵습니다. 하늘이여, 구원해 주시옵소서' 하면, 하나님이 전진해 나가던 그 전선을 뒤에 두고 후퇴하여 자기를 이끌어 주라는 입장에 서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서는 아무리 기도를 하더라도 여러분이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번번이 그런 일을 당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전체를 위해서 선두에 서 가지고, 국가적인 최후의 길을 가겠다고 다짐하고, 혹은 세계적인 최후의 길을 가겠다고 다짐하고 하나님과 관계를 맺어 보조를 맞추어야 할 입장인데도 불구하고, 그 입장을 버리고 후퇴해 가지고 '나를 도와 주시옵소서' 한다면 아무리 불러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건 가능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여러분이 잘못을 했으면 잘못한 것을 솔직히 고백하고 각오하라는 것입니다. 잘못을 했으면 잘못한 만큼 벌을 받아야 된다구요. 벌을 피해 가려는 자세보다 자기가 행한 데 대한 응보를 당연한 것으로 맞아들일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벌을 주는 데있어서 열만큼의 벌을 줘야 하는데, 사탄이 '에이 요녀석, 잘못했다`고 하면서 열 이상 혹은 백만큼의 벌을 주는 날에는 하나님이 동원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접근시킬 수 있는 길은 그 외에는 있을 수 없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중요한 책임을 짊어지고 선두에 서서 전진하고 있는 하나님은, 낙오된 입장에 있는 사람이 아무리 부르짖는다고 하더라도 그 전선을 지켜야지 개인을 지킬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입장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아무리 기도해 보라는 거예요. 그건 일각이라도 도와줘서는 안 되는 거라구요.
그런 자리에서는 전우가 아무리 '아무개야, 내가 죽게 되었으니 같이 가자'고 해도 안 된다는 거예요. 그 전선에 있어서 승리를 촉구하고 국가에 충의 도리를 다하고자 하는 결의가 불타면 불탈수록, 그런 심정이 앞서면 앞설수록 그 동지를 제하고 가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전선에 있어서 최후를 결하는 그 순간에 있어서, 동지가 부르짖는 그 말을 중심삼고 거기에 관심을 갖다가는 도리어 자기 스스로가 불리한 자리에 서는 것이 아니냐.
그럴 때에 자기의 아무리 가까운 동지라 할지라도 그를 뒤에 두고 네가 하지 못한 것에 대한 배가의 책임을 내가 다해 내겠다고 도리어 선두에 서서 달려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 동지에게는 원수처럼 보이고 위해 주는 친구가 아닌 것처럼 보일지 모르나, 그 사람이야말로 진정으로 그 동지를 위하는 친구입니다. 그리고 그 동지 때문에 보다 나을 수 있는 승리를 다짐했다면 그 승리는 그 동지와 더불어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길이 있을 것 아니냐. 그렇게 되면 그 동지는 죽은 후에라도 나로 말미 암아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을 남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이렇게 볼 때, 자기를 돌보는 것보다 자기를 돌보지 않고 버리고 간 사람이 도리어 자기의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도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여러분은 지금까지의 신앙길에서 언제나 끌려 다니는 무리가 아니었느냐 '가자' 해도 가겠으면 가고 말겠으면 말고 하는 마음자세를 가진 사람은 하늘길을 못 갑니다. 그런 사람은 이미 사탄한테 걸려 있는 사람입니다. 사탄한테 걸리게 되면 사탄은 삼면에 닻을 걸어 움직이지도 못하게 꽁꽁 묶어 놓는 것입니다. 만약 통일교인이 그렇게 되었다면, 번번이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가고자 하는 사람이 그렇게 되었다면, 닻만 달아 놓겠어요? 꽁꽁 묶어 놓고 삼면으로 구속해 놓을 것이 아니냐는 거예요. 거기서 항거를 했다, 끊고 갔다 할 때는 그것을 끊고 가면 갈수록 차후에는 점점 용서가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하나님을 믿고 따라 나왔지만, 하나님도 잊어버리고 사탄세계에서도 갈래야 갈 길이 없는 구속된 입장에 처하게 된다면 그 누가 동정할 것이냐. 하나님도 동정을 못 하고 사탄도 동정을 못 한다구요. 그렇기 때문에 신앙길에서 충성을 다해 정성을 들여 가던 사람들이 끝까지 못 가게 될 때는 그 사람들의 말로가 비참한 것입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그 후손까지 비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부흥강사의 자녀들 중에는 훌륭한 사람이 없습니다. 왜 그런지 알아요? 그것을 알아야 돼요. 책임자의 자리라는 것은 참 두려운 자리라는 거예요. 부흥강사면 부흥강사가 자신이 잘나서 하나님의 은덕을 입었다고 생각하면 큰 오해입니다. 부흥회면 부흥회 가운데에서, 역사적으로 선조의 선한 공적이 있는 사람이 그 사람을 만나도록 택해 세워 왔는데도 불구하고... 그 사람을 택해 세우는 데 있어서는 반드시 어떤 선도자가 있어야 되겠다는 거예요. 그렇게 될 때 책임진 부흥사를 내세워서 그 사람을 찾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흥사는 자기가 잘나서 은혜의 역사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그 한 사람을 끌어내기 위해서, 그 사람이 움직일 수 있는 환경을 일으키기 위해서 자기를 통해 역사한다는 것을 언제나 생각해야 됩니다.
자기가 동기가 되어 가지고, 움직임이 전부 자기로 말미암았다고 생각 하면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다수의 신령한 사람들이 몇 년, 한 7년쯤 가다가는 다 내리닫아 꺼꾸러지는 것입니다. 전부 다 자기로 말미암아 시작되었고 자기로 말미암아 거둘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은혜를 받은 사람이 응당 자기가 받을 은사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감사하며 교역자면 교역자, 부흥사면 부흥사에게 제물을 바치게 될 때, 그 제물을 하늘에 직접 돌려주어야 하는 것이 그들의 책임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늘의 제물을 받았으면 대신 하늘 앞에 드려야 할 텐데도 불구하고, 그 제물을 하늘 앞에 드리지 않고 자기가 타고 앉아 가지고 자기가 소화시킬 때는 자기만 걸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일족이 걸려 들어가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책임을 짊어진 사람이 하나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그와 관계되어 있는 나라면 나라도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의 가정이면 가정. 일족이면 일족 전체가 걸려 버립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 그건 안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부흥회면 부흥회 때에 인연 되는 그 한 사람이라는 것은 그 시간을 통해 인연 된 것이 아니라 수천년 동안, 선조들이 그 한때를 맞기 위해서 인연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자리는 얼마나 심각한 자리인지 모릅니다. 그 한 사람을 세움으로 말미암아 전체가 가려 갈 수 있는 길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런 어려운 배후의 사연을 중심삼고 신앙길을 가는 개인과 하늘의 인연이 묶어져 나간다는 것을 생각할 때, 오늘날 신앙길을 간다는 우리의 생활을 반성해 보면 볼수록 하나님 앞에 슬픔을 많이 남기고, 빚을 많이 졌다고 하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통일교회를 믿게 되면 그래요. 통일교회를 믿게 되면 복을 받을 줄 알지만 복을 받는 것보다 오히려 점점 꼬여 들어갑니다. 가만히 보면 잘될 것 같은데 도리어 꼬여 들어간다는 겁니다. 그건 왜 그러냐?
그것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꼬여 들어가야 되는 것입니다. 통일교회를 믿고 나오며 열만큼의 욕심을 가졌는데 백만큼의 물질이 생겼을 때, 또다시 백만큼을 바랐다가는 영영 엇갈리는 길을 가고 마는 것입니다.
열만큼의 욕심을 가졌다면 그 열만큼의 것을 꺾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꺾어 버림으로 말미암아, 열만큼의 외적인 욕심을 침으로 말미암아, 내적 하나님과 열만큼 밀접하게 할 수 있는 불가피한 결과를 다짐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복을 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복이라고 하는 것을 갖다 주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싫다고 하는 것을 갖다 주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세상 사람들이 웃고 좋아할 수 있는 환경의 인연을 가지고 사는 것을 그냥 그대로 공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것들을 다 파탄시키는 것입니다.
만약에 파탄시키지 않으면 그들이 나를 물어뜯는 것입니다. 안 끊을래야 안 끊을 수 없게끔 그들이 다 물어뜯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물어뜯기 전에 끊기 싫어도 끊는 놀음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충이 벌어집니다. 여기서 그러한 일이 벌어지지 않는 종교는 참된 길을 찾아가는 종교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미루어 결론지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과 우리가 가는 길이 엇갈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 앞에 서 가지고, 6천년 동안 우리 '인생길을 가로막고 하나님의 섭리를 그르치고 파탄시켜 나왔던 사탄과 대결해 싸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싸움이 언제 끝날 것이냐? 끝날 수 없을 것 같은 싸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걸 알아야 돼요. 지금도 그 싸움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계속해 왔으며 지금 이 시간도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밤이면 밤, 여러분이 자는 시간이라고 해서 휴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밤이 되면 될수록 배수진을 치고 최후의 결전을 다짐하는 시간이 자기 앞에 가까와지는 것입니다. 나에게 편안함이 있을 때 하나님은 고통 중에 있는 것을 알면서 우리는 가야 되겠습니다. 나에게 고통이 극하면 극할수록 하나님의 권세는 나로 말미암아 유일한 입장에 설 것이 아니냐.
내가 하나님 앞에 빚지는 자리에 서서는 안 될 것입니다. 빚을 갚고 빛을 지워야 합니다. 하나님께 빚을 지을 수 있는 길이 무엇이냐? 자기의 역량이 미치지 못할 과중한 십자가의 길 외에는 하나님께 빚을 지을 수 있는 길이 없다고 하는 것은 자연적인 결론입니다.
이렇게 볼 때,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 네 집안식구가 원수다, 누구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지 않고는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는 등등의 말씀을, 이건 심각한 말이라구요. 왜 이런 심각한 말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가 하면,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 보조를 맞추며 살아 나갈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가려니 돌아서 가야 됩니다. 돌아서는 데는 옆을 봐서는 안 됩니다. 180도 돌아서야 됩니다. 이런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가는 길 앞에서 싸움을 책임지고 여러분을 이끌고 가야 할 책임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쉽겠어요? 그 싸움은 어떤 싸움인가 보라구요. 나 한 사람의 개체를 지키기 위해서는 어떤 싸움을 해야 되느냐? 세계를 막아내야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세계 뿐만이 아니라 그 나라를 방비해야 할 것입니다. 또 나라 뿐만이 아니라 종족이라든가 가정의 환경을 방비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들을 방비하기 전에는 하나님이 나를 못 데려갈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나 한 사람을 이끌기 위해서 세계적인 전선을 사수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게 사탄권입니다. (판서하심) 이게 세계라구요. 여기서 싸워 가지고 이걸 방어해야 되는 것입니다. 세계를 방어하기 전에는 국가기준을 마음 대로 왕래할 수 없습니다. 국가의 기준을 방어하기 전에는 마음대로 씨족의 기준, 종족의 기준을 왕래할 수 없습니다. 올 수 없다구요. 또 씨족을 방어하기 전에는 가정을 찾아올 수 없고 가정을 방어하기 전에는 개인을 찾아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효의 도리, 충의 도리가 무엇이냐? 이 길을 단축시키는 것입니다. 내가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특정한 개인을 통해 특정한 가정을 남기는 것이요, 특정한 종족을 남기는 것이요, 특정한 나라를 구해 나왔던 것입니다. 그것이 안팎으로 하나되어야 될 텐데 안팎으로 갈라진 자리에 있기 때문에 안팎을 중심삼은 나라를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 외적인 것이 이스라엘 나라요, 내적인 것이 유대교입니다. 유대교와 이스라엘 나라는 죽어도 같이 죽어야 되며, 망해도 같이 망해야 되는 것입니다. 승리해도 같이 승리해야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몸과 마음이 갈라져 있는 것이 이와 같이 국가기준을 중심삼고 통일성을 갖출 수 있는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그 기준은 무엇을 중심삼고? 완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중심삼고.
그 완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은 완전한 하나님의 사상을 이어받은 것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개인적으로 가고자 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하나님이 인간을 이끌고자 하는 것이요, 가정적으로 가고자 하는 것은 가정적으로 싸우지 않고 사탄의 참소에 걸리지 않는 가정을 만들기 위한 것이요, 민족적. 국가적으로 가고자 하는 것 역시 싸우지 않고 사탄의 참소에 걸리지 않는 민족과 국가를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적 기준이 되었다 하더라도 그 국가는 예수를 따라서 그와 하나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늘과 땅이 갈라져 있었지만 예수가 하늘의 품격을 지니고 땅에 와 가지고 하나됨으로 말미암아 영육을 중심삼은 국가 승리권이 비로소 사탄세계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권내는 사탄이 통치할 수 없습니다. 사탄이 침입할 수 없는 이런 나라에 하나님이 임재하시게 되면... 그렇잖아요?
만일에 그런 나라를 가졌으면 하나님은 종족이라든가 민족을 중심삼고 안식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라를 중심삼고 싸워서 이기게 되면 하나님은 하나의 종족장으로서 안식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에 종족이 싸워서 이긴다면 하나님은 가장으로서 안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국가적 승리권을 갖지 못하고는 하나님이 민족적인 안식권을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민족적 승리권을 갖지 못하면 종족적 안식권이 생겨날 수 없는 것이며, 종족적 승리권을 갖지 못하면 가정적 안식권이 생겨나지 못하는 것이며, 가정적 승리권을 갖지 못하고는 개인적 안식권을 갖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 위에서 하고 간 일이 무엇이냐? 그런 일을 다 못 했습니다. 예수 개인마저 사탄에게 침범을 받아 가지고 십자가에 돌아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찾아오는 데는 나라를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가정을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통일교회는 천주 주의(天宙主義)를 중심삼고 바라며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런 싸움을 책임지고 사수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여러분을 이끌어 주고 있다는 것을 실감해 보았느냐? 우리는 여기에서 만족할 것이 아니라 가정을 넘어가야 되고, 민족을 넘어가야 되고, 국가를 넘어가야 됩니다. 국가기준의 선두에 서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세계적인 전선에 국가를 대표한 수많은 하늘의 정병들이 나타나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커 가면 커 갈수록 하나님은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생겨 나기를 하나님은 얼마나 고대했던고! 이것이 넓어지고 넓어져 하나의 입장에 다 흡수되게 되는 것입니다. 승리의 순간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날을 얼마나 고대했던가를 생각해 볼 때, 여러분은 이런 나라를 생각해 봤어요? 지금까지 땅 위에 이런 승리권을 갖겠다고 다짐하는 신앙자들이 있었어요? '그저 나야 믿으면 천국가겠지' 하며, 예수 믿고 천당가겠다고...천당에 가게 되어 있느냐 말이예요. 믿기만 해 가지고 천당가게 되면 큰일난다구요.
그렇기 때문에 잘 믿는 사람의 종자를 남겨 가지고 이 땅 위에 승리권을 만들어, 개인이 안식하고 가정이 안식하고 종족 민족 국가가 일시에 안식할 수 있는 권을 이루어, 하나님이 주권을 잡고 명령해 가지고 그 국가를 통치할 수 있는 한날을 맞이해야 합니다. 그러지 못하면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통일교회 교인들이 가야 할 길은 개인으로 싸우는 길입니다. 개인으로서 싸우는 자리에 서게 될 때, 그 자리는 세계를 방어하고 나온 하나님이 찾아오는 숨 가쁜 자리입니다. 그 싸우는 시간은 짧아야 됩니다. 알겠어요? 그 시간은 짧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순간이 여러분에게는 은사의 시간입니다. 여러분이 통일교회면 통일교회에 들어와 가지고 지금까지 체험해 보지 못한 내적인 체험이 있으면 그 체험은 길게 가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서 기쁨을 느꼈으면 그 기쁨은 하나님이 보다 가중된 십자가를 맞게 하기 위한 기반으로 주신 은사인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그런 사람이라야 전진하지 그렇지 못하면 가는 길이 전진하는 길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여기에 서 가지고 언제나 하나님이 어떻게 해주기를 바라는 데, 그러면 하나님을 종으로 보느냐? 사탄의 종새끼 된 우리 인간 앞에 하나님이 늘쌍 종의 자리에, 심부름꾼의 자리에 설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냐. 그런데 찾아오라고요?
여러분은 기도 가운데에 하나님이 무엇을 가르쳐 주는 일이 있으면 그것이 쉬운 일인 줄로 알고 있습니다. 통일교회에 들어와서 여러분이 은사의 체험을 하게 될 때, 그 은사의 체험은 자기가 공을 안 들이고도 그렇게 되었으니 쉬운 것이라고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천만에요. 그건 쉬운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그런 자리에 서기까지는 수십 수천의 선한 선조 들이 희생되어 갔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것을 갚아 주고 통과시키게 하려니 할 수없이 그런 인연을 맺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는 짧은 인연 가운데서 그런 체험을 했지만, 역사적으로 배후의 수천년 동안 투입된 희생의 대가로 말미암아 그 인연이 맺어졌다는 생각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 자리는 두려운 자리입니다. 자기가 좋다고 해서 웃을 수 없습니다. 선조들을 모시고 그들의 공적을 찬양 하는 자리에서 그들이 기뻐하고 난 후에 자기가 기뻐하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그런 은사를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시일이 가면 갈수록 자꾸 옛날로 돌아가고 있다구요. 그거 왜 그러냐? 하나님의 은사 앞에 보답하고 감사할 줄 모르고, 하나님이 가중된 십자가를 짊어지고 자기를 찾아왔다는 것을 모르고 여기에 보답할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두 가지 이유입니다. 선조의 공적인 결과, 실적의 자리에 세움 받은 그 은사에 보답을 못 하기 때문이요, 그 다음에는 하나님이 이 자리를 맞게 해주기 위해서 배후에 배수진을 쳐 가지고 자기를 방비하고 있다는 사실에도 보답을 못 하기 때문에, 다시 말하면 선한 선조에게 보답을 할 줄 모르고 하나님이 찾아준 그 공적 앞에 보답할 줄 모르는 자리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보답할 줄 모르는 사람은 망합니다. 받았던 것을 도로 빼앗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 가지고 여러분이 빼앗기는 자리에 서 가지고는 아무리 노력해도 안됩니다. 빼앗겼으면 빼앗긴 그 자리를 다시 찾아 들어가야 합니다.
내가 보기에 우리 통일교회에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한때는 뭐 요령을 부리고 야단하다가 몇 해 지나고 나서는 휘주근하고 기진맥진해져서 도리어 그러지 않았던 것만도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지 않았던 사람들은 세상에 대한 미련도 있고 해서 나라라도 생각하고 나라가 위급할 때는 울고불고하기라도 하는데, 이런 패들은 여기에도 못 끼고 저기에도 못 끼어요. 처치하기 곤란한 그런 패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왜 그렇게 되느냐? 그 은사가 자기 때문에 생겼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큰 오해입니다. 여러분이 받은 은사는 여러분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 세계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영계에 있는 수많은 선조들 때문에 생긴 것이며, 인류 때문에 생긴 것이며, 하나님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의 하나님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과거를 위하고 현재를 위하고 미래를 위하고 세계를 위해서 생긴 것이기 때문에, 세계를 섭리하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때는, 그것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하나님을 위해서 일했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때까지 끝까지 참고 견뎌야 합니다. 그런데 통일교회에 들어와서 중도도 못 가 가지고 허위적거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 들은 수습할래야 수습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미치지 못할 때가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기도할 때 '아버지여, 내가 불쌍하게 되었습니다' 라고 기도하며... 하나님이 불쌍하게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이 불쌍하게 만들었는데 자기가 불쌍하게 되었다고 불평해 보라구요. 불평을 하면 할수록 하나님 과는 멀어지는 것입니다. 불쌍하게 만들었는데, 불쌍하게 되는 것은... 불쌍하게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불쌍해야 되는 거라구요. 왜 불쌍해야 되느냐? 나라를 위하고 세계를 위하고 보다 큰 것을 위할 수 있는 자리에서 불쌍해야 됩니다. 보다 큰 것을 위하는데 불쌍하게 되나요, 안 되나요? 그렇게 되는 법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를 희생시키고 가정을 희생시키고 종족을 희생시키고 민족과 나라까지 버려라, 거부해라 이겁니다.
하나님이 찾아 주고 싶어하는 새로운 민족을 위하여, 새로운 나라를 위하여 모든 것을 부정할 수 있는 자리를 거치지 않고는 하늘나라의 경계선을 넘을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하나님이 자기만 위해 주거나 자기만을 붙들어 달라는 입장에 서면 안 됩니다. 하늘의 전선을 남겨 놓고 자기를 위해서 희생해 달라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같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당연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기도할 때에 자기를... 사실 선생님이 심각한 기도를 할 때는 통일교회 교인들에 대해서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하늘이 찾아야 할 이 나라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이며, 하늘이 찾고자 하는 이 세계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이냐 하는 문제를 중심삼고... 그것은 남아집니다. 그렇지 않아요? 그것이 하나님이 바라는 전선입니다.
적진의 본영을 타파해 버리고 승리의 주도권을 거기로 옮기고 싶은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기 때문에, 그 권을 어떻게 격파할 것이냐 하는 문제를 중심삼고, 매양 그것을 위해 나가고 그것을 위해 연단하고 그것을 위하여 상대하고 그것을 위해 훈련하고 투쟁하고 다짐하는 그런 자리에 하나님도 찾아오는 것이지. 뒤로 돌아가는 데에 하나님이 올 게 뭐예요?
신앙세계는 어떤 의미에서는 미친 무리가 모여 있는 곳입니다. 여러분은 처해진 환경에서 가정을 바라보고 '아이고, 이젠 됐다. 내가 이룰 수 있는 가정이 되었으니 좋다' 하게 안 되어 있습니다. '국가적 세계적 기반을 닦기 위해 내 가정 전체가 가야 되겠다. 나 혼자 싸우던 것을 너와 내가 합해서 싸워야겠다. 사탄을 대해서 부부가 싸우던 것을 자녀까지 사위기대가 합해서 싸워야 되겠다' 이래야 되는 겁니다.
내 개인이 당하던 그 이상의 시련이 있더라도 우리 가정은 가야 되겠다, 가정이 당하던 시련 이상의 시련이 교회가 가는 길 앞에 있더라도 가야 되겠다, 교회가 당하던 그 이상의 시련이 있어야 민족이 갈 수 있고 국가가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민족이 당하던 시련 이상의 시련을 자청해 가야 되겠습니다. 국가가 당하던 시련 이상의 시련을 자청해 가야 되겠습니다. 이런 길만이 하나님께 접근하는 길이요 해방권을 화장하는 길입니다. 그 가외의 길은 해방권을 축소시키는 길이요, 하나님께 고통의 십자가를 지우는 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하기가 무섭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그걸 느껴 봤어요? 기도하기가 무섭다는 거예요. 쓸데없는 기도를 하려고 하면 입이 잘 안 떨어져요. 붙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걸 볼 때에, 자기가 거느리고 있는 단체면 단체를 보다 큰 것을 위해 희생시키려고 할 때 하나님은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하나님이 통일교회를 사랑한다면 이 통일교회 믿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나라를 위해 희생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한번 해보라구요. 그러면 대번에 하나님이 '오냐, 바라던 길이 그 길이다' 하는 거예요. 대번에 그러는 거예요. 통일교회 사상을 가진 수많은 사람이 세계에 널려 있으면 그 사람들을 몽땅 잡아다가 세계 앞에 회생시키겠다고 할 때, 하나님이 '그래라'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기뻐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야 천리원칙이 바로잡히는 거라구요.
하늘은 부모요, 땅은 자녀입니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서 자녀가 알 수 있을 때까지 키워 주는 것입니다. 철모르니까 키워 줘 가지고 그 자식이 철든 후에는 부모의 책임을 대신하게 하는 것입니다. 부모 앞에 진짜 효자가 되려면 부모가 죽기 전에 부모를 위해서 생명을 바쳐야 합니다. 그래야 참된 효자입니다. 하나의 군왕이 있으면 그 군왕 앞에 생명을 바쳐야 됩니다. 그것이 충신입니다. 그래서 죽기 전에는 충신이 못 된다고 했지요? 효자 중에도 진짜 효자는 누구냐? 늙어 죽을 때까지 일생 동안 부모 앞에 효도를 했다고 하더라도... 젊은 청춘시대에 부모 앞에 효하다가 죽어 간 사람과 일생 동안 늙어 죽으면서 효도한 사람, 어떤 사람이 낫느냐? 생명을 바쳐 효도한 사람이 낫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보게 될 때, 심정세계에서는 죽고자 하는 자가 산다는 것입니다. 반대, 역리를 중심삼은 섭리관적인 입장에서 볼 때, 그 말은 보다 당연한 발언이요, 세계사적이고 혁명적인 표현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 문선생은 여러분을 더욱 쳐야 되겠습니다. 나라를 위해서 살아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도망가서 선두에 서는 것입니다. 그게 사는 길입니다. 그 외에는 살 길이 없습니다. 편안하겠다는 녀석들은 앞으로 내가 전부 다 뭉그려 버려야 되겠다구요. 내가 손댈 때는 여지없을 것입니다. 그것 생각하라구요. 내가 이것을 알기 때문에... 여러분이 틀을 짜고 등지를 틀고 있는 그것이 남아진다고 생각하지 말라구요. 그것이 나라를 위하고 세계를 위한 것이면 남아져야 되지만, 자기를 위한 것일 때는 전부 들이 맞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것을 지금 모르고 있다구요.
창조이상세계 복귀라는 말을 중심삼고 볼 때, 모든 소유는 하나님의 소유가 된 후에야 나의 소유로 되는 것이요, 모든 가치의 결정은 하나님의 가치의 결정을 기반으로 하여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내 존재 의식도 내 존재 가치도 하나님을 위주한 데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부정하면 있을 수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 앞으로 대한민국이 살 길은 어떤 길이냐? 그런 자리로 몰아넣을 것입니다. 국민이 단결해 가지고 주권자와 더불어 '그렇다, 옳소' 하면, 대한민국은 안 망하는 거라구요. 안 죽겠다고 피하는 위정자가 있으면, 전부 다 망하는 것입니다. 그놈의 자식들은 망한다구요. 그놈의 자식들은 칼침 맞아 죽어야 된다구요. 그런 사람은 도망가기 전에 국민이 목을 자르는 것입니다.
통일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비상시대에 처해 있는 오늘날 이 정세 앞에 있어서 통일교회는 어떻게 할 것이냐? 꽁무니를 빼고서 그저 적당히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자 할 수 있어요? 그게 아닙니다. 우리는 일선에서 있는 것입니다. 공산당과 이마를 맞대고 총칼을 겨누어 최후의 판결을 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이라든가 중국을 중심삼고 지금 그런 행동을 개시 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환경이 부정하더라도 밀고 나가는 것입니다. 부정을 긍정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이 놀음을 하는 거라구요. 여기에 보조를 못 맞추고, 이 젊은 녀석들이 말이예요, 꽁무니를 빼고 길길하는 녀석들은 두고 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 가지고 잘된 녀석이 있나 보라구요. 통일교회 믿다가 그런 사람들 보라구요. 잘된 사람이 어디에 있나. 될 것 같지만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자신뿐만이 아닙니다. 자기의 아들 딸까지 피해를 입고 돌아가는 사실을, 이제 여러분이 그만했으면 주위를 한번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보게 되면 나 자신이 얼마나 무서운 자리에 서 있는지를 잘 아는 것입니다, 이런 등등의 문제를 두고 볼 때, 하나님과 우리 인간이 가는 길도 엇갈려 있지만, 하나님과 사탄은 정면적으로 엇갈려 있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려고 하면 사탄이 반격을 합니다. 그렇게 반격한 것이 6천년입니다. 인간역사가 시작된 그날부터 지금까지 계속되는 전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언제 쉬어 보았겠어요? 그것을 생각해 봤어요? 여러분은 피곤하면 잘 시간이 있습니다. 밤이라도 찾아오지요. 하나님께도 밤이 있어요? 사탄에게도 밤이 있어요? 보라구요. 사탄은 어떤 입장에 있느냐? 만일 후퇴하는 날에는 영영 영멸할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대한 민국이 일본에게 압제를 받았을 때는 해방될 수 있는 날이 있다는 소망 이라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사탄은 한번 후퇴하면 영영 영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탄은 언제나 결사적입니다. 그걸 알아야 돼요. 사탄은 놀이를 하는 것이 아니라구요. 결사적입니다. 사탄이 생명을 걸고 있으니, 생명을 건 사탄을 굴복시키고자 할 때는 생명을 아껴 가지고는 안 됩니다. 그러니 죽고자 하라는 것입니다. '죽고자 해라. 그러면 이기느니라. 사느니라' 이건 당연지사입니다.
사탄이 쉬고 있는 것 같아요? 여러분이 자기를 중심삼고 생각을 하게 되면, 사탄은 꽹과리를 치고 북을 치며 '야 됐다 됐어' 하는 겁니다. 사탄은 좋아하고 하나님은 물러가게 됩니다. 사탄은 '네가 그럼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 땅 위에서 좀더 존속할 수 있는 발판을 확대시키고 연장시킬 수 있게 되었구나' 하는 거예요. 이것은 용서할 수 없습니다. 자기를 위주해 가지고 산다 하는 사람은 전부 다….그렇지 않아요?
타락한 세상은 자기를 중심삼은 개인, 자기를 중심삼은 가정, 자기를 중심삼은 종족, 자기를 중심삼은 민족, 자기를 중심삼은 나라, 자기를 중심삼은 세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는 전부 다 나라를 중심삼고 야단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이 나라가 잘못되어 하나님의 아들도 때려잡은 것입니다. 하늘 앞에 있어서 나라 없는 백성은 서럽다는 것입니다.
가정을 못 가진 하나님은 개인적인 시대에는 언제나 제재를 받는 것입니다. 가정이 안식하게 되려면 종족이, 친척이 있어야 됩니다. 하늘 친척이 없게 되면 가정이 안식할 수 없습니다. 종족이 안식하려면 하늘 민족이 있어야 됩니다. 민족만 있어 가지고…. 여러분은 민족만 있으면 국가가 있게 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천만에요. 대한민국도 가인과 아벨로 갈라져 있는 거라고요. 민족이 둘입니다. 나라도 둘입니다. 다 그렇게 된 거예요. 세계도 둘이예요. 여러분은 그걸 알아야 돼요. 언제든지 둘이예요. 사탄 세계, 사탄 나라, 사탄 민족, 사탄 종족, 사탄 가정, 사탄 개인, 그것이 나를 대해 가지고 세계적으로 전개되어 있다구요. 이것을 전부 다 때려부수려면 개인을 중심삼은 세계관을 때려부수어야 하고, 개인 중심삼은 국가관을 때려부수어야 하고, 개인 중심삼은 민족관을 때려부숴야 하고, 개인 중심삼은 가정관, 개인 중심삼은 인격관을 때려부수어야 합니다. 우리 통일사상이 그거 하는 것입니다. 통일사상만 가지면 전부 때려부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지금까지의 세계관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국가관이 달라지는 거라구요.종족관이 달라지는 거라구요. 가정관이 달라지는 거라구요. 개인의 인생관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선 때려부수고 새로운 차원에 있어서의 하나님을 중심삼은 개인, 가정, 종족, 민족, 국가, 세계를 바라보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일체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개인을 중심삼고 출발했던 것을 전부 다 하나님을 위주해 가지고 다시 출발하게 되었으니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엄벙덤벙해요? 누가 엄벙덤벙해? 누구를 망치려고! 자기 한 사람 망하는 것은 좋다구요. 그러나 자기 한 사람 때문에 전체가 피해를 입는 거라구요. 그 가중된 십자가를 피할 수 있는 길이 뜻길 앞에 어느 때도 없지만, 그럴 수 있는 때가 있다면 그때는 오늘날 이 통일교회에서 통합된 사명을 하는 때입니다. 그것을 잘못하는 날에는 세계적인 공판정에서 사탄의 참소와 더불어 하나님 앞에 판정을 받아야 할 그런 운명길이 가로놓여 있는 엄청난 시대에 처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계적 판국에 머물러 있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소원이 무엇일 것이냐? 하나님은 그렇게 엇갈린 자리에서 싸우는데, 하나님이 싸움하는 것을 좋아하시겠어요? 양심적인 사람 일수록 싸움을 좋아합니까, 안 좋아합니까? 싸움을 좋아해요, 안 좋아해요? 좋아하지요? 양심적인 사람일수록 싸움을 좋아하지요? 「아니요」
그러면 이 우주 간에 있어서 최고의 양심적 중심이 누구냐 할 때, 누구예요? 하나님이예요, 하나님. 그렇지만 아무리 양심적이라고 하더라도 불의를 보고 '아이 좋다, 가만히 있어야 되겠다' 그래요? 불의를 보게 될 때는 분노가 폭발하는 것입니다. 양심적인 하나님이 불의를 보고 6천년 동안 격분해 가지고 싸움터를 준비해 나온 것이 아니냐. 여러분이 그걸 알아야 됩니다.
개인을 위주해서 세계를 망치는 놀음, 가정을 위주해 가지고 세계를 망치는 놀음, 종족을 위주해 가지고 세계를 망치는 놀음은 하나님 앞에 불효하는 놀음입니다. 그런 일체를 하나님은 용서할 수 없어서 때려 나온 것입니다. 그렇게 맞는 선두에 선 기독교를 쳤던 로마제국이기에, 400년 동안 세계를 휘어잡고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로마제국도 돌아가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400년 이내에 굴복당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이 세계가 기독교로 말미암아 굴복권내에 들어왔지만, 아직까지 차원을 높여 세계 국가, 하나의 이상세계를 촉구해야 할 현 단계에 들어와 가지고 허위적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도약을 해야 할 텐데도 불구하고, 위로 올라가야 할 텐데도 불구하고 거꾸로 내려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재 미국정세입니다. 하나님이 세계를 버리고 미국을 찾고자 하겠어요? 하나님은 미국을 희생시켜서 세계를 찾으려고 합니다. 미국의 운세는 꺾여 버리는 것입니다. 공산세계도 마찬가지요, 사탄세계도 마찬가지라구요. 하나님이 세계를 위해 세계적 주도권을 남기고자 하시기 때문에 국가적 기준을 중심삼고는 전부 다 허위적 거릴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전부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앞으로 이 세계를 이어받을 수 있는 주의 사상은 무엇이냐? 자기 국가를 희생시켜서라도 세계를 구하겠다고 하는 주의 사상입니다. 그런 사상을 가진 나라, 그런 새로운 운동을 중심삼은 국가와 국민이 등장하게 될 때, 이 세상에는 새로운 희망의 세계가 현현할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새로운 통일의 세계, 이상세계는 현현 될 것입니다. 나라를 넘어서지 못한 국가관, 역사관은 하나님의 이상세계를 인계 받을 수 없습니다. 그걸 여러분이 알아야 돼요. 뜻의 관점에서 볼 때, 이것은 불가피한 결론입니다.
통일교회의 여러분들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에 내가 앞으로…. 우리 통일교회가 커 갈수록, 내가 자리를 못 잡았는데 자리를 잡은 사람들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이냐? 생각해 보라구요. 내가 지금까지 걸어온 것은….
미국이 그렇지 않아요? 퓨리턴들이 미국 대륙에 상륙하여, 첫번째 한일이 무엇이냐? 인디언과 싸워서 피를 가려 가지고 그 영토를 점령한 후에 무엇을 했느냐? 자기 집을 짓지 않았어요. 자기 집을 먼저 지었다가는 그 나라는 망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미국을 이루지 못했을 거예요. 먼저 뭘 했느냐? 교회를 지었습니다. 인디언 민족과 싸워 피를 뿌린 것은 인디언 민족을 제물삼아 세계국가를 창건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것이 맞다는 거예요. 그것은 의에 섰다는 것입니다. 당당하다는 거라구요. 그렇지 않아요?
인디언들은 토착민입니다, 토착민. 하나님은 이런 백성을 중심삼은 제물을 촉구한 것이기 때문에, 이들을 회생시켜 가지고 하나님이 찾는 신앙의 해방을 하라고 한 것입니다. 자유 신앙과 해방의 세계를 촉구하는 자리에서 하늘 것을 찾기 위해 민족과 국가를 초월하여 초민족적인 기준 앞에 새로운 국가관, 세계관을 모색해 나온 것이 현재의 아메리카 대륙입니다. 수많은 민족, 복합성을 가진 민족들이 합해서 하나의 국가형태를 이루고 자유의 천국을 꿈꾸어 나온 것이 미국입니다.
거기에 있어서 인디안 일족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민이 해방 받을 수 있는 자유의 천국을 해방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일족을 희생시키지 않고는 안 되는 것이 하늘이 가는 길이기 때문에 인디언의 희생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그 터전을 닦았습니다. 그렇게 피를 흘리게 한 후에 뭘 했느냐? 자기 집을 지었다면 그 민족은 인디언한테 벌써 망했을 것입니다. 악한 사람이 선한 사람을 쳐 가지고는 망하지 않는 법이 없는 거라구요. 자기 개인을 중심삼고, 자기 종족을 중심삼고 미국을 세워 나오는 입장에 섰더라면 망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점령한 후에는 반드시 교회를 지었습니다. 교회를 지었다는 것입니다. 자유의 천국을 그리며, 신앙의 이상 동산을 꿈꾸면서, '하늘이 찾아가는 나라가 그런 나라가 아니겠느냐' 하는 문제를 중심삼고 교회를 짓고 그 다음에는 학교를 지었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늘을 위한 것이요, 학교는 후손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후대를 위해서 남기는 것입니다. 개인을 희생시켜 더 큰 후대를 바라보기 때문에, 지금은 망하더라도 후대에 더 큰 나라와 세계가 찾아올 것을 알고 그것들을 위하여 온갖 정성을 다 들인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자기가 머무를 수 있는 집을 지은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미국이 세계 문화를 움직일 수 있는 축복의 내용이 된 전통적인 사상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된다는 거예요.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 통일교회 자체는 어떠해야 할 것이냐? 나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이냐? 내 집을 마련하기 전에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교회를 먼저 마련해야 할 깃이 아니냐. 세계 만민이 추앙할 수 있는 교회를 마련해야 할 것이며 학교를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를 마련 하여 기쁨을 느끼는 그 환경에서, 학교를 세워 기쁨을 느끼는 그 환경에서 그들이 바라는 자리, 쉴 수 있는 터전을 찾아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쉬게 하고 후손들이 안식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놓고 나서야 비로소 자기가 쉴 수 있는 자리를 잡아 정착하는 것이 인간의 본연의 자세가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타락한 권내에서는 더더욱 그렇게 해야 될 것이 아니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통일교회도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1970년도에 들어서면서부터 때가 가까와졌습니다. 통일교회의 위신과 체면을 세울 수 있는 촉박한 시대가 왔기 때문에, 이것을 가리기 위해서는 우리가 전국, 혹은 전세계를 대표한 본부를 설정할 수 있는 곳을 만들어야 되겠습니다. 그렇게 하는 데는 우리의 피눈물을 개의치 않고 모두가 정성을 다해 모금을 해야 되겠습니다.
선생님은 공장이면 공장을 지어 가지고 한 15년 동안 정성을 들여 왔습니다. 여러분은 모를 거예요. 어떤 회사의 어떤 기업주보다도 더 정성을 들여 왔습니다. 정성을 들이는 데는 상대적 무대가 커야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단 한치의 땅도 좋고, 한 짜박지의 산도 좋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걸고 세계적인 경제권과 하나님의 해방의 터전을 모색하고 하나님이 안식할 수 있는 곳을 중심삼아 가지고 정성들여 나왔던 것입니다.
정성들여 나왔던 그 기준을 중심삼아 가지고 '하나님이 찾을 수 있는 외적인 성전 건설에 있어서 나는 그 이상 정성들이는 모험을 해야 되겠다. 지금까지 정성들인 터전에 있어서 스스로의 모험을 해야 되겠다' 라고 생각해서 지금 여의도 기지를 마련해 놓았습니다. 모험을 한 거예요.
내가 세상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내 일신의 안락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안식을 위해서 세계적인 전당을 마련한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대학교 부지를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대한민국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세계를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청평을 중심삼고 세계적인 수련소를 지으려는 것입니다.
이런 등등의 문제를 생각해 볼 때, 1972년도만 지나가게 되면 나 자신이 자리를 잡더라도 양심의 가책을 안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생님의 생활철학입니다.
그날이 올 때가 되면 세계의 인류 앞에, 어떠한 사람이라도 어떤 사상 주의자에게도 지지 않을 만큼 세계를 위하여 눈물을 흘리라는 것입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눈물을 흘려라. 네 자식을 잡아서 제물로 드리고, 아내의 배를 갈라서 제물로 드리라는 거예요. 자식 한 사람을 제물로 바치기는 쉬울 것입니다. 어머니와 아버지 그 자식까지 사위기대를 만들어 가지고 한꺼번에 칼로 쳐서 아브라함 이상의 자리에서 제물 드릴 수 있는 자신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통일교회를 지도하고 있는 문선생의 사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가정은 망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망해 떨어지고 극에 달해 타락하더라도 통일교회의 책임자는 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이것이 여기에 서 있는 사나이의 결의예요. 그렇게도 망할 수 있는 길에 몰아치고 그것으로 통일교회가 끝났다고들 하지만 그것을 깨치고 통일교회는 발전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의 눈에 좋은 집이 보이거든 제일 수고한 사람에게 그 이상 좋은 집을 만들어 주겠다고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되는 거예요. 내가 그 이상 좋은 집에서 살겠다고 하면 안 돼요. 혹은 길에 다니는 좋은 차를 보거든 하나님 말에 수고한 사람을 그 이상 가치 있는 것에 태우겠다고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놈의 악한 세계... 이런 사상을 가져야 한다는 거예요.
이 악한 세계에서 보여지는 것과 자각 일체는 하나님과 엇바꿔 가지고, 보다 가치 있는 것으로 세우겠다는 그리움과 사무침에 살고자 하는 것이 통일교회의 전통사상인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내 집을 잘 지어 놓고 잘산다고 자랑하는 그런 놀음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안팎으로 꿀리지 않는 기반을 닦아 놓고 자기 스스로의 안식의 터전을 가지고자 하는 것이 여러분을 지도하고 있는 스승이 가는 길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는 거라구요. 이 1971년도를 중심삼고 내 할 일을 다해 나가고 있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돼요. (녹음테이프가 잠시 끊김 )
통일교회의 문선생이 야망을 가져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통일교회 문선생은 백번 천번 망해도 좋다는 거예요. 그렇지만 선생님은 하나님의 소원과 일치한 소원을 갖고자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소망은 망해서는 안 되겠기 때문에, 나도 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을 가진 사람이 없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선생님은 죽을래야 죽을 수 없다고 다짐하는 생애노정을 달리고 있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 앞에 빚 안 지고 여러분 앞에 빛을 안 지기 위해서 밤이나 낮이나 불철주야 기도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1970년도부터 1973년은 세계적으로 최고 정상의 시대입니다. 보라구요.이 기간에 왜 세계정세가 급변해 들어오는지 알아요? 하늘이 바라는 단한 길, 하늘과 땅이 외로운 자리에서 서로 맞부딪혀 가지고 둘이 몸부림 치고 설 수 있는 한 거점이 이 땅 위에 찾아오는 세계적인 시대에 처해 있다는 것입니다. 격동하는 그런 사조가 오늘날 아시아와 세계를 대표한 대한민국을 중심삼고 그 가운데에 있는 통일교회와 연결되어 있는 이 심각하고 숨 가쁜 이 한때, 한 순간을 남북이 분립된 입장에서 서로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볼 때, 밤이 있다고 해서 밤이 아니요 낮이 있다고 낮이 아닙니다. 언제나 일체의 모든 것을 바쳐서, 이 거점을 어떻게 확보하고 이 뜻길을 어떻게 사수하느냐 하는 문제를 중심삼고, 일체를 부정하더라도 이것만은 남겨 놓아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나라도 없는 것이요, 교회도 없는 것입니다. 이걸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이 가는 길은 불쌍한 길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배고파하고 눈물 흘리며 탄식하는 그런 자리에 서게 될 때는, 거울을 바라보고 '이놈의 자식, 칼로 배를 쨀 거야? 하는 격분의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자기 자식들을 먹이지 못하는 부모의 입장, 물론,그거 알아요, 알아. 온 세상 사람이 다 아는 것입니다. 그 이상의 심각한 자리에서 느껴 본 사람이라구요. 처자를 뒤에 두고 삼팔선을 넘게 될 때, 누구 이상 창자를 끊는 듯한 아픔을 느꼈지만, 하나님에게 그 이상의 슬픔이 있기 때문에 나는 당연한 도리로서 보다 더 수난길을 찾아 나가야 된다는 결의를 하고 나선 것임을 내가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전통적 기반을 흐려 놓는 무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불쌍한 분인 것을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눈물짓는 그 이상의 눈물을 짓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안식하는 때에도 하나님은 슬픔으로 이중의 한을 남기고 여러분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돼요. '너희들을 그렇게 대했고, 너희들 앞에 은사로 찾아와 그렇게 인연을 맺었는데도 불구하고 고작 그 꼴이야'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서푼짜리도 못 된다는 거라구요.
그렇게 해 가지고 밥을 먹어? 차라리 똥을 먹는 것을 좋아하라는 것입니다. 자리에 누워 있어요? 똥바닥에 누운 것보다, 개똥바닥에 누운 것보다 더 하다는 거예요. 그래서 죽어지내는 거예요. 그런 사람은 악착같은 사탄들이 와서 더욱 신나 가지고 잡아갈 것입니다. 보라구요. 여러분에게 나라가 있어요? 세계가 있어요? 뜻이 있어요? 돈 몇 푼, 몇 만원에 팔려 다니고 올라갔다 내려갔다하는 그런 무가치한 패들이 여기에 자리를 잡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조종하여 이용해 먹겠다고 하는 패들은 망하는 거라구요, 망해요. 그 자리는 하늘 앞에 심각한 자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기도할 때 눈물 없이 하나님 앞에 나설 수 없는 것입니다. 밥을 먹더라도 밥상이 전쟁마당입니다. 빚지는 밥을 먹지 말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얼굴을 더럽히는 밥을 먹지 말라는 거예요. 이러한 문제를 두고 볼 때, 우리가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해 나온...
여러분 그거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통일교회 교인들은 다 체험했을 거예요. 기성교회의 예수 믿는 양반들 말이요. 그 기성교회와 우리들은 다르다구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올라가면 우리는 내려가는 거예요. 반대예요. 다르다는 거예요. 예수 믿는 사람이 기도 가운데서 예수님을 한번 만나려면 7년이상, 20년 이상 정성들여야 됩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예수를 믿지만 예수를 꿈에라도 한번 보기가 힘들 다구요. 못해도 20년 내지 40년은 정성들여야 되는 거라구요. 7년을 목숨을 걸고 생식하는 놀음도 해야 된다는 거예요, 사실은 이렇게 정성을 들여야 볼지말지하다는 거예요.
보라구요. 이 세상은 사탄권내에 에워싸여 있어요. 사탄은 공중권세를 잡은 자라고 말을 하지요? 어두운 세계의 왕이라고 하는 사탄이 하늘 보좌만 남겨 놓고 전부 다 점령하고 있다구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마음 대로 하게 안 되어 있습니다. 타락하여 혈통적으로 씨알머리가 글러 먹었다는 거예요.
이래 가지고 씨를 뿌린 것이 사망의 뿌리로부터 줄기를 뻗어 가지고 잎사귀가 되어 세계에 꽉차 있는 것이 세계 인류입니다. 이것을 뽑아 내고 하나님과 인연을 맺게 하기가 쉬울 것 같아요? 보라구요. 잎을 부정 하고 가지를 부정하고 줄기를 부정하고 뿌리를 부정해 가지고 나온 새로운 씨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정에 기초를 두고 그리워 눈물을 흘리되 눈이 물크러지도록 눈물을 흘려야 됩니다. 젊은 청년들이 사랑하는 애인을 그리워하며 우는 것은 문제도 아닙니다. 남자 앞에 여자가 문제되어 우는 그런 시시한 울음이 아니라구요.
지금 나라와 세계를 한꺼번에 잃고, 여편네와 아들딸을 몽땅 빼앗긴 비참한 입장에 선 것이 하나님입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알아요? 그 원수가 하나님 노릇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칼을 들고 들어가 잘라 버릴 수 없어요. 잘라 버리면 영영 마지막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이 나라를 보고 이 세계를 볼 때, 잘사는 민족이...그렇기 때문에 인류역사 가운데에는 수많은 문명이 발전되었다가 다 꺾여 나갔습니다. 그것은 전부 다 인간을 중심삼고 나왔기 때문입니다. 국가까지 발전할 수 있는 축복이라는 것은 나라를 위해서 쭉 정성을 들이면 발전하게 되어 있습니다. 정성들이면 말이예요, 타락했더라도. 그렇지만 나라를 이루었다가는 나중에 전부 다 꺾여 나가는 것입니다. 자기를 중심 삼은 나라가 되었기 때문에...
그 나라의 문화권이 세계를 위하고 인류를 위하고 하나님을 위한 입장에 서게 되면 망하지 않습니다. 왜 인류문화가 변천하는 곡선을 그리며 발전해 나왔는가를 생각해 볼 때, 하나님을 위할 수 있는 국가가 되지 못하고, 세계를 위할 수 있는 문명권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사탄 중심삼고 영광의 자리를 찾으려고 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것이 7단계를 넘어 가는 것입니다. 7단계를 넘어가면 자동적으로 때려부순다는 거예요. 이러한 발전적 과정을 거쳐 나오기 때문에 과거의 문명권은 망했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망하지 않는 주의는 세계를 위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 그런 것은 이방 사람이 원하는 것이다.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의(義)를 구하라' 라고, 이것이 표제라구요. 네 새끼들과 네 어미를 중심삼고 족속을 생각 하지 말고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겁니다. 그 나라와 의가 무엇입니까, 대한민국의 의가 무엇입니까? 세계의 대표가 되는 것이 대한민국의 의입니다. 세계 국가의 중심이 되어야 된다는 거예요.
통일교회의 패들 가운데 그 골수에 배어야 할 사상이 무엇이냐? 죽게 될 때 부르짖을 말, 남길 말이 무엇이냐? 하나님을 위하고 세계를 위해서 죽지 못했던 내가 하나님을 위하고 세계를 위해 죽으니 감사하다고 하는 말입니다. '아버지여, 저는 당신을 위하고 세계를 위해서 왔다 가나 이다'라고...그런 사람은 천국에 가겠다고 생각할 필요도, '아버지, 날 붙들어 주소' 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이미 천국에 간 것입니다.
그렇지만 세계를 위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위하지 못하면, 저나라에 가서도 그 세계를 찾기 위해 또 싸워야 된다구요. 알겠어요? 나라와 세계와 하나님을 위하지 못하고 자기 가정을 위했다면, 저나라에 가서 그 가정을 끌고 갈래야 갈 수 없는 싸움길을 억만 년을 허덕이며 가야 됩니다. 그 억만 년을 중심삼고 보면, 요 지상생활은 아무리 긴긴 시간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똑딱하는 순간입니다. 돌아갈 때는 복귀예요, 복귀. 그렇지요? 돌아갈 때는 이것은 똑딱하는 순간이예요. 제일 짧은 시간입니다. 안 그래요?
이 기준에 무엇이 있어야 되느냐 하면, 하나님의 뜻을 중심삼은 개인이 있어야 되고, 가정이 있어야 되고, 종족이 있어야 되고, 민족이 있어야 됩니다. 그 다음에는 국가가 있어야 되고 세계가 있어야 됩니다. 요자리엔 이것이 있어야 된다구요. 다 깨지더라도 이것은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 여기서부터... 그 개인이 돌아가는 것은 가정을 대표해 돌아가는 것이요. 종족을 대표해 돌아가는 것이요, 국가를 대표해 돌아가는 것이요, 세계를 대표해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안 될 때는 세계를 향하여 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을 해서 돈이 생겼을 때도 자기 아들딸에게 쓰겠다고 하면 망합니다. 보다 가치 있는 것을 위해 써야 합니다. 오늘날 통일교회 문선생에게 돈이 있으면 통일교회 발전을 위해서 쓰지 않습니다. 그것을 이 나라 이 민족을 위해서 아끼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단체는 망하지 않고 나라와 더불어 승리의 종족권을 이룰 수 있는 날이 오는 것입니다.
앞으로 돈이 생기게 되면, 대한민국이 뜻 앞에 서는 날에는 대한민국을 위해서 무슨 계획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세계를 위해서 할 것입니다. 그런 나라가 세 나라만 되면 한 나라는 매년마다 복귀된다는 것입니다. 경제정책도 한 3분의 1씩 나누어 미개한 나라를 위해서 세워 놓으면, 한 세 국가가 그렇게 하면 그 나라를 대번에 천국을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미국 같은 나라, 일본 같은 나라, 독일 같은 나라, 세 나라만 그렇게 만들어 놓으면, 일년에 세계를, 조그만 나라부터 대번에 천국을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렵지 않다구요. 열 나라만 되게 된다면 일년에 몇 개 국가를 복귀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뜻의 세계를 가려 하는 그런 무대를 바라보면서, 여러분들이 지금 등지를 틀어 가지고 행동하는 사실을 다 비판해야 되겠습니다. 통일교회 패들 앞에 그런 사상을 가지고 나선 스승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선생님만이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선생님보다 더 수고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는 것입니다. 나 자신도 밤에 잠을 잘 때는 회개하는 거라구요. '아버지, 저에게는 피곤하면 자기도 하고 쉴 수 있는 시간이 있지만, 당신께서는 6천년 기나긴 세월을 쉴 수 없는 뜬눈으로 최고로 신경을 곧게 세우고 제 갈 길을 더듬으면서 저를 위해서 수고하신 분인 것을 생각할 때, 제가 이불을 덮고 자는 것이 부끄럽사옵니다' 하는 거라구요. 자고 나서도 눈물을 홀리면서 회개해야 합니다. 이것이 여러분이 모르고 있는 통일교회의 사상적 밑바닥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이용하고, 여기에서 잘못하다가는 크게 걸린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돼요
여러분이 알다시피 어떤 대학을 우리가 지금 인수할 계획을 세우고 있지만, 돈이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구요. 사무친 심정이 하나님을 울릴 수 있는 입장에 서면 기적이 벌어지는 거라구요. 땅 위에서 하나님을 얼마나 통곡하게 했느냐, 나를 위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눈물을 지으셨느냐? 문제는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지극한 정성을 다하는 효자 앞에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을 새워 가며 그 아들을 축복해 주고 싶어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 아니냐는 겁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중심삼고 그러한 마음을 갖고 가는 단체, 그러한 입장에 선 사나이가 있다면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결심한 것에 대해서 반대하는 것은 꺾여 나가더라는 겁니다. 그것이 안 되더라도 하나님은 그 이상의 것을 갖다 주기 마련이기 때문에, 그것을 결정해 놓고도 걱정을 안 하는 것입니다. 통일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나와 있는 여러분들이 만일에 통일교회를 못 따라가게 된다면 여러분은 망할는지 모르지만 통일교회는 안 망한다구요.
이러한 등등의 문제를 두고 있는 시급한 현시점 위에서, 앞으로 남북 통일을 민족의 과제로 삼고 그 운명길을 가려 가야 할 것이 통일교회의 길입니다.
가인 아벨의 복귀를 못 하면 하늘나라에 못 가지요? 부모를 못 만나지요? 그렇죠? 「예」 가인 아벨의 싸움으로 뿌려진 것이 국가적인 가인 아벨로 열매맺어 이북은 가인이요, 이남은 아벨인 것입니다. 이것의 통일권을 갖추어야 할 아벨의 사명을 완결하지 못하고는 부모를 복귀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복귀를 못 하게 될 때는 부모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가인 아벨이 하나되지 않고는 부모를 만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책임을 못 했기 때문에 여러분을 대신해서 선생님이 이중적인 책임을 하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된다는 거예요. 그것이 좋아요? 여러분은 빚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가리느라 일생 동안 뼈가 녹아나더라도, 일생 동안 정성을 다해도 갚을 수 없는 빛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주제에 뭐 어떻고 안 알아주고…. 그것은 다 행차 후에 나발 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보다 내가 더…. 내가 여러분보다 더 고달픈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매를 맞아도 더 맞고 있는 것이요, 수난의 길을 가도 더 가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개인을 중심삼은 사정을 가지고 가는 사람이 하늘의 수난길을 짊어지고 가는 그분 앞에서 알아주지 않는다고 탄식을 해요? 그 탄식이 얼마나 가는지 보라구요. 애원할 수 없는 것임을 여러분이 알아야 돼요.
그렇기 때문에 하늘이 가는 길은 여러분이 가는 길보다 7년 앞서 있습니다. 한 단계 앞서가는 거예요. 종족적 시대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하늘은 민족적 수난의 길을 간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돼요. 민족이라든가 국가적 시대를 맞기 위해서는 세계적 수난의 길을 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은 세계와 더불어 싸운 터전 위에서 복귀해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알고 현재 여러분의 신앙의 자세를 재검토해야 되겠습니다. 민족적 비운을 목전에 두고 앞으로 여러분의 결의와 이 해결점이 엇갈리게 되면 어떻게 해결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보다 여러분이 희생하고 자신을 다짐하는 자리에 서지 않고는 하늘이 가는 길에 협조할 수 없고, 따라갈 수도 없다는 것을 잘 알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아버님, 아버지께서는 통일가를 사랑하시되 세계를 위하여 희생시키고 싶은 마음을 갖고 찾아오셔서 사랑하신다는 것을 저희는 미처 몰랐습니다.
아버지, 이 길에 든 저희는 당신께서 저희 한 사람을 위해서 이 길을 알고 나서게 하신 것이 아니라, 삼시대를 대표해서 이 길을 맞게 하신 것임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 길을 가는 도상에 있어서 저희가 '아버지여, 저를 지키시옵소서' 하는 것보다도, 아버지께서 저희를 얼마나 동정하는 마음을 가지고 대하고 계시느냐 하는 것이 문제인 것을 알았습니다. 동정을 받는 자리는 저희 스스로를 자랑하는 자리가 아니옵니다. 눈물을 머금고 참는 자리요 대중을 위해서 맞는 자리인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이 자리가 '아버지여, 통일가를 그런 길로 이끌어 주시옵소서' 하고 또다시 바라야 할 심각한 자리인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남북으로 엇갈려진 이 민족을, 아버지여, 지키시옵소서. 세계의 그 누구도 믿지 말라고 저는 외쳐 왔습니다. 미국도 믿지 못하고 아시아의 그 누구도 믿지 못한다는 것을 외쳐 왔습니다. 자주적인 민족이 안 되면 안 되는 것이요, 당신을 등에 지고 가는 민족이 안 되면 망한다는 것을 외쳐 왔습니다. 그것이 여실히 드러나는, 목전에 그 한계선이 드러나는 시기를 맞게 될 때, 등골이 보이고 살이 여윈 자리에 선 불쌍한 처지에 있는 이 나라 이 민족이 정상에 서서 그것을 알 때가 왔는데도 불구하고, 이것을 알아야 할 때인데도 불구하고 알지 못하는 현재의 참사를 직시하면서 이것을 알고 있는 저희들이 이제 결속해야 되겠습니다.
그야말로 나라를 위하여 충성할 때요, 부모를 위하여 효성을 다할 때인 것을 알았습니다. 저희의 생명을 다 바치고 전체를 제물삼아 고이 아버지 앞에 맡기고 당신을 위하여 최후의 길을 감수하며 걸어가야 하는, 마치 예수가 '다 이루었다'고 하던 그 기준을 향하여 가야 하는 심각한 자리에 놓여 있다는 것을 저희들이 망각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통일교회를 사랑하려거든 세계를 사랑하고 나서 통일교회를 사랑하기를 바라는 것이 통일사상이 부르짖어 온 것입니다. 하오니, 아버지여, 세계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통일교회를 채찍질하여 이끌어 주시옵소서. 통일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채찍질하는 것보다도 세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통일교회를 채찍질해 주시기를 바라옵니다. 이것이 전통적 사상이요, 아버지가 찾아오신 길인 것을 생각하옵니다.
이 시간 저희들이 마음으로 아버지께서 가시는 길을 바라볼 때, 불쌍하신 아버지라는 것을 느끼옵니다. 불쌍하신 아버지이옵니다. 저희가 아무리 비참한 환경에 몰아침을 당한다고 하더라도 그 사연을 가지고 아버지 앞에 나설 수 없다는 것을 저희들은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한 몸뚱이를 중심삼고 아내 앞에 자기의 사랑을 강요하는 그런 불쌍한 사나이가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자식을 중심삼고 볼 때, 부모의 사연 대로 효의 도리를 다짐하게 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종교를 지도하는 책임자의 입장에서 자기의 행복과 자기 종족 일당의 행복을 위해서 그들의 갈 길을 다짐하게 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전체를 위하여 다짐하게 하고, 전체 앞에 희생할 각오를 하게 해 가지고 내몰아야 될 길이 복귀행각의 슬픈 노정인 것을 저희들은 압니다.
여기에 모인 당신의 자녀들, 지금까지 손발을 움직였던 것과 오관을 통하여 느낀 모든 감정이 아버지와 상치되었음을 느껴야 되겠습니다. 이제 이 눈을 통하여서는 아버지를 직시해야 되겠습니다. 뚫어지게 응시해야겠습니다. 그 가운데 아버지의 형상을 또렷또렷하게 바라보아야 되겠습니다.
아버지, 이 손으로 모든 것을 만져 왔습니다. 지금까지는 추악한 사탄권내의 것을 만져 왔지만, 이제는 아버지의 사람을 만지고, 아버지의 제단을 만들고 아버지의 것을 만들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해야 되겠습니다, 그것이 크든 작든간에 노력해야 되겠습니다.
저희의 일신 전체가 그러한 과거를 지내 왔기 때문에, 이것을 밟고 올라서 가지고 당신과 일체화할 수 있는 승리의 모습을 다짐하여, 아버지께서 따라오셔서 의논하고 싶을 수 있는 스스로의 모습을 그리워할 줄 아는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 전국에 널려 있는 당신의 자녀들. 이곳을 그리워하면서, 스승을 그리워하면서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고 있사오니, 그 곳곳마다 당신이 긍휼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이후는 녹음되어 있지 않아 정리하지 못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