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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명을 따라서

일시: 1971.01.24 (일) 장소: 한국 전본부교회

[기 도]

사랑하는 아버님, 이 해 들어 네번째 맞는 안식일이옵니다. 당신의 분부와 사랑과 긍휼을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한 많은 복귀노정에 남아진 섭리의 뜻을 인간이 기필코 받아들여 그것을 생활노정에서 체득해 가지고, 온 만민을 아버지 앞에 복귀해 드려야 할 사명이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마다, 저희들은 시간이 바쁘고 또한 그 길을 배로 바쁘게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게 되옵니다.

이 아침, 여기에 부복한 당신의 자녀들을 긍휼히 보시옵소서. 당신의 마음이 저희 개체에 머무르고, 당신이 소원하시는 그 소원이 저희 개개인과 더불어 이 나라 이 민족과 세계 인류와 온 천주까지 미쳐질 수 있도록 하는 저희 자신들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당신이 승리의 한 날을 표방하기 위하여 길이길이 참아 나오신 그 슬픔의 노정을 생각할 적마다, 저희들은 하루빨리 맡은 바의 책임과 사명을 다할 것을 더욱더 다짐해야 되겠습니다. 저희들은 더욱더 절실하게 책임감을 가지고 일해야 되겠으며, 그 일을 위해 언제나 아버지께 의논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이 뜻은 저희들이 아니면 이룰 수 없는 뜻인 것을 생각할 적마다 당신의 힘과 능력으로써 저희들을 부축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아침, 전국에 널려 있는 당신의 자녀들이 이곳을 향하여 마음을 모아 머리를 조아리고, 또 당신을 향하여 축수(祝手)를 드리고 내일의 승리를 다짐하기 위하여 참고 기도하며 어려움과 싸우고 있는 줄 아오니, 그들 위에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고, 더우기 가정을 대표하여 나가 있는 어린 딸들 위에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그들이 느끼고, 그들이 싸우고, 그들이 생활하는 가운데서 아버님을 알고, 아버님을 모시고, 아버지와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당신의 거룩한 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이 나라 이 민족이 아버지 앞에 품길 수 있는 거룩한 터전을 넓히게 하여 주시옵고, 만민으로 하여금 당신이 남기신 뜻을 깨끗하고 거룩하게 이어 받을 수 있는 승리의 전통을 만들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여, 이 해에 저희들을 놓고 섭리할 거룩한 뜻을 어서 속히 이루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들은 벌어져 오는 뜻 앞에 있어서 충성을 다짐하고, 스스로 자신의 부족함을 제거하며, 참된 모습으로써 아버지 앞에 한걸음 한걸음 다가갈 줄 아는 자녀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여,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아침도 친히 같이하여 주시어 아버지의 뜻 가운데서 지내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인 곳곳마다 당신의 풍성하신 은혜로써 저희들과 같이 품어 주시옵고 보호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오며, 모든 전체가 뜻하신 대로 성취되기를 재삼 부탁드리옵고 원하옵니다.

영계와 육계가 합하여서 통일의 세계를 이루고, 만민과 피조세계가 합하여서 아버지의 영광의 나라를 창건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면서, 이 모든 말씀 참부모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말 씀

땅 위에 살고 있는 사람은 많되 하나님의 뜻 앞에 일치되어 그 뜻과 더불어 사는 사람은 적다는 것을 우리들이 알고 있습니다. 더우기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복귀섭리는 인간이 하나님의 심정을 중심삼고 자녀의 인연을 맺어서 그러한 개인으로 하여금 가정과 종족과 민족과 국가와 세계를 복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엄청난 과중에 있어서 하나님과의 심정적인 인연을 생애노정에 남기고 가야 합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뜻을 위해 가는 사람이 이 땅 위에는 과연 얼마나 되겠느냐 할때 그런 사람이 그리많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때와 소명

사람들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어떠한 선택을 받게 되면, 그 선택받은 자리에서 참된 승리자가 되려고 하고 더 빛날 수 있는 가치를 추구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사람의 욕망입니다. 그렇지만 이 욕망이 우리에게 소망을 자극시킬 수 있다 하더라도 이것을 실천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이 노력만 하면 누구나 다 성공할 줄로 알고 있지만, 성공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 앞에 있어서 소명을 받는다는 사실도 어려운 것이지만, 소명을 받아 가지고 감당한다는 것은 더욱더 어렵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우리 교회를 보더라도 1956년부터 지금까지 수난의 길을 거치면서 싸워 나왔습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모든 과정을 생각해 볼때 그 길은 평탄하지 않은 길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복귀의 길을 가는 데는 스스로 노력하는 것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개인이 찾아가야 할 길이 있습니다. 이 길을 가는 데는 각자 각자의 성품이 다르니만큼 반드시 원리 원칙을 중심삼아 가지고 응용하면서 자기 생활에 적용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의 생활 환경이 달라지고, 시대의 차이가 벌어짐에 따라 그때그때마다 하나님이 부르시는 길 앞에 있어서 상대되는 입장을 결정짓기 위해서는 내 스스로 노력하며 나가야 할 책임분담 5퍼센트의 노정이 언제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개인을 중심삼고도 그렇고, 교회를 중심삼고도 그렇고, 나라나 세계를 중심삼고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하루를 시작하는 아침이 오면 이 아침을 다같이 맞이합니다, 낮이 오면 이 낮도 다같이 맞이하고, 밤이면 밤도 다같이 맞이합니다, 그렇지만 개개인의 심령을 중심삼고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루를 맞이하는 데 있어서 시간상으로는 아침 나절을 맞는 사람이 심령상으로는 낮을 맞는다거나, 낮을 맞는 사람이 심령상으로는 저녁을 맞는 것같이 엇갈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람의 생애노정은 그 사람의 성품에 따라 엇갈려서 달리 받고 있고 달리 가고 있기 때문에 일정한 공식과 같이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맞지 않는 부분은 자기 스스로 맞추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아침부터 출발해야 할 텐데도 불구하고 저녁이나 밤부터 출발했다면, 이 밤 시간이라는 과정에서 자기의 갈 길을 암중모색해 가지고 올바로 찾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만일에 절기상으로 봄절기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여름 절기에서부터 시작했다면, 이 여름절기를 지내고 겨울절기를 지내 가지고 다시 새로운 봄절기를 맞이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엇갈려 있는 자기 개체의 심성이면 심성, 소성이면 소성이 뜻의 노정과 차이가 나는 것을 결부시키기 위한 싸움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태어나면서부터 백 퍼센트 하나되어 가지고, 그때에 적응될 수 있게끔 아침이면 아침, 점심이면 점심, 밤이면 밤, 하루 24시간이 뜻과 더불어 일치될 수 있는 소성을 지니고 태어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소명을 받드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맞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하루에 있어서 아침이면 아침, 낮이면 낮, 밤이면 밤, 계절로 말하면 춘하추동과 같은 입장으로 사람이 타고난 소성과 그가 뜻길을 출발할 때의 기준이 뜻의 때와 맞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탕감지어야 할 것이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대부분 탕감을 해야 되는 입장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와는 정반대의 입장에 서게 되는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뜻을 따라가는 데 있어서 모든 것이 순탄한 것이 아니라 반대적인 입장에 서서 따라나가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습니다. 뜻의 길을 가더라도 반드시 상충 역사가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어떤 사람들이냐 하면, 자기가 만일에 가을절기면 가을절기, 겨울절기면 겨울절기와 같은 때에 출발했는데 그 출발한 때가 어느 때인지를 확실하게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겨울이 지나고 입춘이 찾아오게 되는데, 이 입춘이 어느 때에 자기의 생활권 내에 찾아오는지 알기가 무척 힘들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오늘날 우리 타락한 인간들은 그와 같은 때를 맞추지 못하니까 자꾸 엇갈려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 때를 우리가 어떻게 포착해 가지고 맞추어 나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신앙생활에서 깨닫게 될 때, 여러분들이 주의해야 할 것은 그 때를 어떻게 잘 조절해 가지고 맞추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이것은 지극히 중요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잘못 맞추게 되면 하루가 엇갈리고, 일년이 엇갈리고, 십년, 혹은 수십 년이 엇갈려 가지고 하는 일에 모두 성과가 나타나지 않고 상충적인 결과만 나타나는 생애노정을 거쳐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생각해 보게 될 때, 뜻을 따라가는 우리들이 이런 때를 맞추어 나가기 위해서는 더욱더 깊은 신앙생활, 다시 말하면 깊은 기도생활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신앙자가 가져야 할 마음 자세

신앙생활에 있어서 어떠한 문제를 대하든가 혹은 어떠한 사건을 당하게 될 때, 이것이 자기에게 환영하는 입장으로 나타나느냐, 그렇지 않으면 두려움으로 나타나느냐 하는 문제를 여러분은 언제나 마음의 선이나 혹은 마음의 기준을 중심삼아 가지고 비교 검토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어떤 친구가 와서 신앙길에 있어서 문제 되는 것을 중심삼고 말하게 되면 그의 말을 처음 듣는 그 자리에서 그 말에 내 본심이 화동하고, 내 본심이 순탄하게 화합하느냐 하는 것을 언제든지 분석하고 비판해야 됩니다. 그 사람이 하는 말의 내용이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의 말을 듣는 자기의 처음 인상, 처음 감정, 그 느끼는 감각이 어떠냐 하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이것을 언제든지 스스로 생각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 말을 하게 될 때에는 그 말의 내용을 중심삼아 가지고 생각하기 전에 그 말을 들을 때에 먼저 나 자신의 마음과 몸이 어떠한 느낌을 갖느냐 하는 문제를 언제나 스스로 검토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습관이 되면 어떤 일이 있을때, 그것을 처음 대하게 되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자기에게 마이너스가 될지 플러스가 될지를 알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어떤 일이 좋게 느껴지지 않았을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이냐? 그것이 요구하는 방향의 반대로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렇게 해야 된다고 하는 사연을 전달받게 될 때 거기에서 느껴지는 모든 것이 반대로 느껴지게 되면 반드시 그 길을 그냥 가는 것보다 자기 스스로 반대적인 입장을 취할 수 있는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가 봐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얼마만큼 가게 되면 가고 있는 그 자체에 대해서 스스로의 마음 가운데에서 또다시 반대로 느껴질 해가 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맨 처음에 말해 준 그 길을 다시 가기 시작해야 됩니다. 이런 일이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의 길은 전후관계에 있어서 앞서 나가는 입장에 설 수도 있고, 떨어져 나가는 입장에 설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언제든지 이것을 조종할 수 있는 입장에 서지 않고는 뜻이 원하는 최종적인 정점까지 가기가 지극히 어려운 것입니다.

선생님 자신도 어떤 일에 대해 보고를 받을 때, 그 보고의 내용은 문제 삼지 않습니다. 보고를 받으면서 그 사건 자체에 대해 하나님께서 보시는 감정이 어떻겠느냐 하는 것을 문제시합니다. 그 감정이 나와 어떠한 관계를 맺겠느냐? 좋을 것이냐, 나쁠 것이냐 하는 문제를 언제나 비교 검토해 가지고 느껴지는 감각이 활용할 수 있는 것일 때에는 전적으로 행동을 개시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반대로 느껴질 때에는 그 행동을 주저하고 반대적인 입장에서 다시 그것을 비교 검토하는 겁니다. 그리하여 그것이 직접적으로 행동할 문제가 아니라면 기다리는 입장에서 그것을 언제나 염두에 두고 기도하면서 조정해 나가게 되면 반드시 자기가 바라던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고, 그 때가 어떤 때라는 것을 전한 사람, 즉 보고한 사람은 모르지만 선생님은 어느 정도까지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길에서는 소명을 받기도 어렵지만 그 소명을 받아 가지고 따라간다는 것도 지극히 어렵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신앙길을 가는 데 있어서 어떤 마음의 자세를 가져야 되느냐 하면 언제나 원만하게 마음의 문을 열어 놓아야 됩니다. 공기를 팽팽히 집어넣은 고무공과 마찬가지로 마음을 둥글게 가지고 누구에게나 치우치지 않고 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입장을 취해 나가지 않고서는 신앙길에 반드시 모험이 벌어지고, 뒤넘이치는 노정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것을 왕왕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을 조정할 수 있어야

마음이 언제나 우그러지지 않고 주체적인 입장에 있음과 동시에 원만한 자리에 서 있기 위해서는 언제나 자기 스스로 닦아 나가야 됩니다. 그러지 않고 격한 자리에 들어가게 되면 그 격함으로 말미암아 다음이 치우침을 받게 됩니다. 슬픈 자리에 들어가면 충격을 받게 되어 자기의 본성과 맞지 않게 마음이 이지러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자기의 심성을 중앙에 위치하게 하면서 자기의 심성이 어떻게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조정할 수 있는 생활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마음이 기구(氣球)와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음이 기구와 같이 높이 떠올라 있게 될 때는 모든 것이 관철됩니다. 그렇지만 이 기구가 저기압이 되면 쭉 내려오듯이 마음도 내려오는 기분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는 그 기준에서 그냥 옛날과 같은 자세를 갖고 있으면 이것은 반드시 이지러지는 것입니다.

내려오는 자리에 서게 되면 반드시 더 내려가든지, 반대로 밀고 올라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려오는 데는 어느 정도까지 내려와야 되느냐? 밑창까지 내려와야 됩니다. 밑창까지 내려오게 되면 반작용에 의해서 다시 올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기압이 자꾸 내려가는 입장에서 어느 기준까지 내려가게 되면 도리어 반작용에 의해서 올라가는 입장에 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내려가는 자리를 지키든가, 그렇지 않으면 현재의 입장에서 밀고 올라가는 작용을 하든가 해서 언제나 마음의 기준을 조정할수 있는 신앙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을 대하는 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갑이라는 사람을 대할 때는 갑이 어떤 타입의 사람인가 하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내가 그 사람을 한 시간 대하고 난 후에 영적으로 느껴지는 감각, 두 시간 대하고 나서 영적으로 느껴지는 감각, 그리고 하루종일 대하고 나서 영적으로 느껴지는 감각을 중심삼아서 그 사람과 내가 상대적으로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 하는 것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만일 내가 플러스이면 그 사람은 상대적으로 마이너스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플러스 입장으로서 열을 가지고 있는데, 그는 상대적인 마이너스 입장으로서 하나밖에 안 가지고 있다고 할때 그 사람과 마음이 기뻐 가지고 주고받게 되면 나의 영적인 그릇이 비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자기의 가진 것을 3분의 1이상 소모시켰다가는 보충하기가 상당히 어려운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언제든지 심성, 마음의 기준을 중심삼아 가지고 조정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만일에 자기 마음의 기준이 그 기준을 넘어 가지고 자기 중심의 위치의 변동이 벌어지게 될 때는 그것을 조정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지극히 어렵다는 거예요.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수 있는 사람을 통해서 내가 탕감적인 입장에 내려갔으면 그것은 빨리 보충이 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사람을 통해서, 또는 기뻐하시지 않는 환경에서 소모가 되어서 자기의 중심 위치가 이동되었다 할때는 그것을 바로잡기가 지극히 어려운 것입니다.

어떤 사람과 한 시간쯤 주고받고 나서 자기의 마음에 미쳐진 영향이나 혹은 타격받은 것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그 소모시킨 시간보다도 몇십 배의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타격받으면 힘이 쭉 빠지는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럴 때는 그것을 보충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 일을 1차 당하고, 2차 당하고, 3차 당하게 되면 나 자신의 위치가 어느 한계선을 벗어나는 입장에 서게 됩니다. 그 한계선을 벗어났을때 그것을 다시 보충한다는 것은 굉장히 힘듭니다. 왜냐하면 본성이 그렇게 되는 것을 환영하는 것도 아니요, 그 한계선을 벗어나게 된 것은 본성과 심성에 대해서 상충적인 입장에 섰다는 것이요, 심성을 제쳐놓고 그와 같은 자리에 나갔기 때문에 다시 넘어와 가지고 자리잡는 다는 것은 아주 힘들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대인 관계나 혹은 사업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제든지 자기의 신앙 자세를 올바로 잡아 가지고 모든 문제들을 비교 검토하면서 자기가 가야 할 방향에 한 시간 한 시간 점진적인 발전을 추구하지 않고서는 소명을 받들어 가지고 그 소명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곳까지 간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것입니다. 더더구나 타락한 인간들이 생활해 나가는 데 있어서는 우리만이, 혹은 나만이 이 길을 갈 수 있게끔 되어 있진 않습니다. 여기에 협조를 받아 가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입니다.

신앙의 초심자들이 주의해야 할 것

신앙 생활을 해 나가는 데 있어서 이 길은 누구나 다 같이 가는 길이기 때문에 누구나 다 협력의 대상이 된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가는 길 앞에 있어서 열 사람이면 그 열 사람 전부가 동료라기 보다는 오히려나 자신을 소모시킬 수 있는 상충적인 결과를 가져오기 쉽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생활의 기초 단계에 있는 사람들이 주의해야 할 것은 어떠한 책임자를 중심삼아 가지고 그 책임자를 따라가는 입장에 서서 자기의 심정 기준을 그와 맞추기 위해 노력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나를 지도하는 사람이 있으면 지도하는 사람이 나에게 명령할 때 좋은 명령도 하고 싫은 명령도 합니다. 그러면 좋은 명령을 받았을 때 자기의 마음의 느낌과 싫은 명령을 받았을 때 자기의 마음의 느낌을 언제든지 감지해 봐야 됩니다.

책임자가 오른쪽으로 가라고 했을 때 그쪽으로 가 본 자기의 마음이 어떠했는가, 또 그 명령을 한 사람이 무슨 목적으로 했는가 하는 것을 비교 검토해 봐야 된다는 것입니다. 뜻 앞에 좋은 목적으로 오른쪽으로 가라는 명령을 했다면 그 뜻을 따라 내가 오른쪽으로 따라갈 때의 마음의 느낌이 어떠하냐, 또 책임자가 뜻 앞에 나쁜 목적으로 왼쪽으로 가라고 명령을 했을 때, 그 명령한 사람의 목적이 무엇이냐, 과연 나를 위하고 나의 신앙길에 보탬을 주기 위해서 명령을 했느냐 하는 것들을 중심삼아 가지고 그것을 실지로 행하여 느껴 보면서 비교 검토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또, 내가 그의 명령을 실행하면서 그를 숭배하고 따라가는 마음은 언제나 변함없이 그를 위하는 자리에 서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뜻이 지향하는 길이 이렇다 하는 마음을 가지고 사심이 없이 공적인 마음만으로 쭉 움직여 봐야 됩니다. 움직이기 전에는 판단하지 말라는 겁니다. 움직여 보고 난 다음에 이것이 자기에게 출발할 때와 출발하고 난 후에 어떠한 차이를 가져 왔느냐 하는 것을 비교 검토해야 됩니다. 출발하고 난 후가 출발할 때보다도 좋았다 하게 될 때는 가라는 명령을 따라 간 그 일의 내용과 내 소성이 맞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상대적인 관계를 중심삼아 가지고 도전하여 찾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맨 처음 신앙길을 가는 초심자들이 더욱 주의해야 할 것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맨 처음 신앙길을 따라가는 사람들은 계시라든가 환상이라든가, 혹은 몽시라든가 암시로써 가르쳐 주는 것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즉각적으로 그 누구한테든지 이야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가 가만히 볼 때, 그것이 자기의 일생에 대한 문제가 된다고 하면 못해도 3년 이상의 기간을 실천하고 나서 말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또, 가르쳐 준 그 뜻이 이루어지겠느냐 안 이루어지겠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볼 때에, 그 가르쳐 준 계시든가 몽시라든가 하는 것은 즉각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3일이라고 했던 내용이 3개윌 만에 나타날 수도 있는 것이요, 혹은 3년만에 나타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50세 된 사람이 받은 계시가 30년 후에 이루어진다면 그 사람의 나이가 80이 되어 너무 늦기 때문에 그렇게는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최소한 3개월이나 3년은 두고 봐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 기간이 지나기 전에 말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책임없이 말하게 되면 기운이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으면 그 말씀을 믿어야 됩니다. 말씀한 내용의 대상이 자기 자신인데도 불구하고 자기가 어떠한 대상적인 내용을 이루어 놓지 않고 느끼는 것을 말해 버리면 그 말씀이 나갈 때 그냥 나가지 않습니 다. 반드시 자기가 가진 선의 양을 끌고 나간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옛날에 명문가에서는 자식을 교육을 시킬 때 아침에는 될 수 있는 대로 함부로 말을 하지 말라고 가르쳤습니다. 아침에는 될 수 있는 대로 먼저 말하지 말고 들으라고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신앙생활에서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나 사람을 대할 때 자기의 본심을 살펴보라

말을 듣고 대답하는 것은, 우주적인 원칙을 적용하여 말하는 사람이 주체적인 입장에 서 있다면 대상의 입장에 선 사람을 대할 수 있는 것이 존재세계의 자연법칙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그럴 때에는 대답을 해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주체적인 입장에 서서 말씀하게 될 때에 말씀을 듣는 상대가 이 100이란 말씀 앞에 100이라는 대상으로 나타나지 못하게 되면 반드시 스스로 그 말씀한 내용에 대하여 책임을 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책임을 진 사람일수록 더욱더 먼저 실천하지 않고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한 교단을 책임졌다든가, 한 나라를 책임졌다든가, 혹은 세계를 책임진 입장에 있는 사람이 있다면 더더구나 그렇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계시를 통해서 가르쳐 주었다고 해서 그것을 즉각적으로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말하려면 반드시 먼저 실천하고 나서 말해야 됩니다. 어느 단계까지 실천을 하여 자기와 관계를 맺어 놓고 그 누구와도 이 말씀을 듣고 나서 빼앗아 갈 수 없다 하는 자리에서 말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또, 빼앗아 갈 수 있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내가 실천한 것을 능가하지 않고서는 못 가져간다 하는 진척된 기준을 세워 놓고 말을 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그것을 넘겨 주는 일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누구를 위해서 기도해 준다 할 때에 그 시대에 하나님이 주시는 특정한 사명을 받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서 계속적인 은사를 퍼부어 줄 수 있는 사람을 위해 기도해 준다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을 위해 함부로 기도해 주다가는 오히려 자기가 치일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을 위해서 정성을 들여 기도해 주고 나면 말할 수 없는 탕감을 받게 됩니다. 지나친 탕감을 받을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보다도 선의 기준이 높은 사람을 위해서 기도해 주면 자기가 도움을 받습니다.

자기보다도 못한 사람을 위해서 기도해 주면 반드시 탕감을 받는 것입니다. 기도를 해준 그 사람이 받아야 할 탕감을 내가 받는다는 것입니다. 기도해 주는 사람이 받는 탕감으로 말미암아 기도받는 사람이 좋아지면 모르지만, 도리어 그 사람이 하늘에 손해를 끼치게 되고 악화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배가의 탕감을 해야 하는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적인 세계의 반응적인 현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을 중심삼고 우리는 뜻의 길을 가는 데 있어서 자기의 마음, 자기의 소성이 제반 사건을 대할 적마다 언제든지 그 일에 직접 풍덩 들어가는 자세보다도 그 일에 대해 첫감정이 어떠한가 하는 것을 감지해야 됩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말을 듣게 될 때 이것이 뜻 앞에 있어서 좋은 것이냐. 나쁜 것이냐? 이것이 내 앞에 플라스되는 것이냐, 마이너스되는 것이냐 하는 것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말을 하게 될 때, 말을 하는 그 사람의 태도라든가 그 사람의 외형이라든가 그 사람의 심각성이라든가 하는 것을 도외시하고 그 사람이 말하는 첫마디의 음성이 내 귀에 들릴 때 내 감정이나 내 본심이 어떻게 대하느냐 하는 것을 여러분들이 스스로 비교 검토해야 됩니다. 그러지 않고는 사탄세계에 포위되어 있는 이 환경을 타개해 나가면서 자기의 본성의 길을 올바로 개척해 나가기가 지극히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이러한 문제를 두고 볼때 이 기준을 찾지 못하고, 이것을 분간할 수 없는 자리에 서게 될 때에 반드시 기도가 필요합니다. 기도하는 데 있어서는 어떠한 목적을 중심삼아 가지고 1년이면 1년, 2년이면 2년, 3년이면 3년, 7년이면 7년이라는 기간을 정해 놓고 해야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어느 기간에 이루어지느냐 하는 것을 여러분이 검토해야 됩니다. 기도를 하더라도 한 번 기도하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신중하게 장기적으로 계속해 나가야 됩니다. 계속해서 나가게 되면 그 일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어떤 일을 기도로 이루어지게 하려면 3개월이라든가 3년, 혹은 몇 년씩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일생을 걸고 기도해야 할 문제도 있습니다. 또 자기 일대(一代)뿐만 아니라, 미래에 저나라에 가서도 기도를 하지 않으면 안 될 문제도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세계복귀 문제와 같은 전체적인 문제는 그렇게 정성을 들이며 나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정성은 뜻의 목적에 따라 들여야 한다.

개인적인 운세는 가정적인 운세를 막지 못합니다. 개인적인 운세는 가정적인 운세권내에서 지배를 받습니다. 또, 가정적인 운세라는 것은 그 동네가 흥하느냐 망하느냐, 즉 그 동네의 친척이면 친척, 종족이면 종족적인 운세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리고 종족적인 운세는 민족적인 운세의 지배를 받고, 민족적인 운세는 국가적인 운세의 지배를 받으며, 국가적인 운세는 세계적인 운세의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이 아무리 잘해 나간다 하더라도 세계적인 운세가 불운한 입장에서 몰아치게 된다면 대한민국 자체로서는 그 운세를 넘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입장에서는 대한민국 자체가 세계의 운세를 넘어 가지고 미래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 있는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대한 민국이 현재 세계 운세로 말미암아 침범받을 때의 운세보다도 정성들이는 운세가 더 크게 되면 세계의 운세를 넘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미래를 걸어 놓고 기도를 해야 합니다. 자기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자기를 중심삼고 기도하는 것보다는 반드시 더 큰 분야를 위해서 기도해야 됩니다. 나라라든가 세계를 위해 기도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 나라의 운세가 찾아 오게 될 때 모든 국민에게 평균적으로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국민의 이름으로서 누구나 노력하게 되면 그 운세를 맞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나라의 운세권내에서 세계적인 운세를 맞이하려고 할때, 아무리 그 나라에 충신이 많이 있고 선한 사람이 많이 있다 하더라도 맞이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계적인 운세를 맞이하려면 그 나라권내에 살더라도 세계적인 운세를 위해서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반드시 어떠한 인연을 통해서 세계적인 운세권내에 접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거기에 국경이 있고, 혹은 지형적인 차이가 있어서 떨어져 있더라도 그 세계적인 운세는 자기 가정과 더불어 자기가 기도한 터전과 더불어 인연이 맺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느 한 때 인연이 되면 10년이나 20년, 혹은 1대, 2대, 3대까지 거쳐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정성들여 가지고 세계적인 운세가 왔는데도 불구하고 지형적인 조건이라든가 국경, 혹은 민족적 관이라든가 하는 문제 때문에, 세계적인 운세와 인연맺지 못하고, 대할 수 없는 입장이라 하더라도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정성의 기간이 1년 혹은 10년이 소모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문제시하지 말아야 됩니다. 많은 기간이 경과했다 하더라도 어느 한 때에는 반드시 그 세계적인 운세는 국가를 휩쓸고 세계를 넘게 되기 때문에 그때가 되면 전부다 규합된다는 것입니다. 그때에 정성들인 사람이 없다 하더라도 그 사람의 후손권내에 있어서 일시에 찾아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에, 소명을 받아 가지고 뜻의 길을 가는 사람이 생각해야 될 것은 언제든지 정성을 들이면서 뜻의 목적을 찾아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찾기 위해 노력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선생님 자신도 복귀섭리의 전체적인 문제를 중심삼아 가지고 가는 길이 평탄하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나 스스로도 생각할 수 없는 초조한 자리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어떻게 감지해 나가느냐? 자기 마음에 있어서나 심정에 있어서 욕심을 가지면 절대 안 되는 것입니다. '내가 이런 일을 해보겠다. 내가 무엇을 해보겠다' 하면서 어떠한 계획을 딱 세워 가지고 3년이면 3년 계획을 세워 가지고 요렇게 한다 하게 될 때, 그것은 불가능할 때가 많습니다. 계획대로 되었더라도 이것은 인간적인 관에서 벌어진 계획이기 때문에 섭리와 상충될 때가 많습니다.

이런 상충적인 때를 조정하려면 반드시 그런 보고라든가, 되어지는 실상이라든가, 그 환경의 일원에 대한 전체적인 분위기라든가 하는 것을 통해서 지금 내가 나가는 방향이 그 운세와 대등한 입장에서 가느냐, 상충된 입장에서 가느냐 하는 것을 비교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대등한 입장에서 가게 될 때는 보조를 맞추어 가고, 상충적인 입장에 있을 때에는 반드시 맞추어 가기 위해서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남이야 뭐라고 하든 말든 정성을 들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신앙심이 떨어졌을 때 그 신앙심을 회복하려면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기구는 고기압일 때에는 올라가지만 저기압일 때에는 내려온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자기의 기준이 내려왔으면 이것은 자기의 정상적인 기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기압이라는 것은 평기압권내보다 내려오는 것이기 때문에, 즉 정상적인 기준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기준에 있는 사람은 언제나 우울감과 말하기 싫은 기분이 드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자기 자체내에 영적인 힘을 가져 가지고 올라갈 수 있는 자력이 있으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으면 내려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저기압대에 서게 되면 작은 일도 작은 일로 취급하지 않고 오히려 큰 일이 시작되었다는 마음을 가지고 그것을 끌어내린다는 것입니다. 기구는 평균점에서 머무는 것인데 끌고 내려가면 반대로 끌어 올리는 반대적인 현상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 작용을 중심삼고 놓아 주면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런 때에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가운데 특별한 사람으로부터 충고를 받는다든가 지도를 받는다든가 해야 됩니다. 그렇게 하면 다시 올라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자기의 본래 위치를 회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조정을 여러분이 스스로 할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내가 흥남 감옥에 있을 때, 그때는 내 일생에 있어서 중요한 시련기였다고 할까, 최후의 판결을 해야 할 그런 때였습니다. 그때에는 누가 무엇을 한다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어떤 때에는 열두 시간 이상 열 일곱 시간까지 일할 때가 있습니다. 밥을 먹는 시간만 빼놓고는 하루 종일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영계에서 힘을 전부 빼가는 것입니다. 신앙에 대한 모든 의식과 관념까지도 몽땅 빼가는 것입니다. 나중에는 마음까지 없어집니다. 마음이란 것이 생각조차 안 날만큼 빼간다는 것입니다. 순전히 몸만 남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되면 옆사람이 얘기하는 것을 다 듣지만 대답할 기력이 없습니다. 그러한 경지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경지를 어떻게 극복하고 원상으로 회복하여 넘어가느냐? 그것은 다른 사람이 대신 회복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러한 고빗길을 연장시킬 때는 누구의 힘을 빌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이겨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힘을 어떻게 보충하느냐? 그 자리에서는 절대 보충하지 못합니다. 그럴 때는 과거를 회상해야 됩니다. '내가 지금까지 이러한 신앙길을 걸어오는 동안 하나님께서 나 하나를 이렇게 인도하셨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자기 나름의 체험이라든가, 역사과정에 있어서 잊을 수 없는 사연들을 생각하면서 그때 느꼈던 감정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 감정을 어떻게 회복시키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언젠가 남이 모르는 것을 탐구하기 위해서 몸부림치며 기도하던 때에 하나님께서 해결점을 가르쳐 주셔서 기뻐하던 기억을 떠올리든가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자기는 현재의 시점에 있지만 현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옛날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내 일생에 있어서 뜻과 인연되면서부터 있었던 고빗길을 전부 모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내놓고 사정을 구하면, 그것은 근량이 나갈 수 있는 무엇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 가치의 대가로 내 영적인 분위기를 허락해 주시지 않을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런 가치를 들고 나오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 가치를 인정해 주셔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내용이 있지 않느냐'고 할 만한 내용을 아무리 생각해도 생각이 안 나고 밍밍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반대적인 일을 해야 됩니다. 자기가 은혜의 생활을 했던 때보다도 반대를 했던 때를 생각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즉, 싸움을 했다든가. 혹은 불쾌한 일이 있었다든가 하는 것을 생각하면서 반대의 경지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 반대의 경지에 들어가 가지고 현재의 입장보다도 더 떨어져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내가 어느 한계선을 넘어서면 안된다는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다 떨어져 내려가려고 하게 될 때 거기서부터 마음의 자중이 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것을 느껴야 됩니다. 갑자기 떨어져 내려가게 되니까 거기에는 반드시 반작용 현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거기에서 여러분은 그 작용을 중심삼아 가지고 '아, 그래도 나를 이 자리에서 구하시려는 하나님의 은사의 손길이 떠나지 않았구나' 하는 것을 느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거기에서 그것을 붙들고 지금까지 자기의 과거의 은사의 때를 가미시켜 가지고 살려 올라가야 됩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는 데는 수십 시간이 필요한 때도 있는 것입니다.

소명은 누구나 받을 수 있으나 소명을 따라가는 것은 힘들어

이런 문제들을 생각할 때, 신앙길을 간다는 것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너 무엇을 하라' 하는 소명은 누구든지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소명을 따라간다는 것은 무척 힘들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뒤에서 가시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앞서서 가십니다. 얼마나 바쁘게 앞서 가시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보조를 맞추지 못하리만큼 앞서서 가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귀섭리 도상에 있어서의 계획적인 섭리, 계획적인 사업은 힘든 것입니다. 인간을 중심삼고 안팎으로 계획을 세워 가지고 공식적으로 '이것은 이렇게 해야 되겠다' 하면서 365일이면 365일, 그 기간에 대한 전체의 평균적인 계획을 세운다는 것은 힘들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비약적인 발전을 통하여 나가는 것입니다. 개인에서 가정, 가정에서 종족을 타고 넘으면서 탕감시켜 나간다는 것입니다. 순리적으로 돌아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단계적으로 뛰어 올라가기 때문에, 여기에는 1년이면 1년이라는 일정한 기간을 통하여 계획적으로 일을 하다가는 막혀 버린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때에 뒤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들을 볼 때 소명을 받아 가지고 뜻의 길을 가는 사람들은 언제나 초조한 마음으로 나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단지 하나님과 내가 플러스와 마이너스의 상대적인 관계를 중심삼고 조정해 나가면서 자기 위치를 찾아 가지고 그때를 맞추어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를 적절히 포착해 가지고 행동을 개시하기는 심히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틀림없다고 할 때 행동하는 데 있어서 뒤져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기회가 지나가 버리는 것입니다. 총매진하여 돌진해 나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때야말로 있는 정성을 다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공기가 하나도 없는 고무공에다가 컴프레셔로 순식간에 공기를 집어 넣는 것과 마찬가지의 행동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행동이 필요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 통일교회가 지금까지 발전해 나온 것은 계획적으로 점차적인 단계를 거쳐서 발전한 것이 아니라 특정적인 일을 통해 가지고 비약적인 발전을 해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것은 교회를 움직이는 책임자도 그렇겠지만 여러분 개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을 대표한 중심이나 국가를 대표한 중심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가정을 움직이는 사람이나 국가를 움직이는 사람이나 세계를 움직이는 사람이나 하루를 염려하면서 나가는 생활은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하루를 중심삼고 보면 아침 점심 저녁과 같이 되어져 나가고, 일년을 중심삼고 보면 춘하추동과 같이 되어져 나간다는 것입니다. 또, 일생을 중심삼고서는 소년시대, 청년시대, 장년시대, 노년시대로 되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되어져 나가는 것을 보게 될 때에 개인적이든 국가적이든 세계적이든 범위는 다르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는 같은 공식의 노정을 가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봄절기에 해당하는 사람이 봄절기에 맞게 출발하는 일도 있지만 봄절기에 해당하는 사람이 가을절기에 출발하는 일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그 절기를 잘 맞추어야 됩니다.

그리고 모두가 봄절기에서 출발하지만 춘하추동과 같은 사절기의 형태를 모두 갖춘 사람은 없습니다. 봄절기에 출발을 해 가지고 여름절기, 가을절기까지는 같이 간다 해도 겨울절기에 들어가면 상충적인 역사가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음해 봄절기에서부터 터져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럴 때는 다이얼을 조정해 가지고 싸이클을 맞추는 놀음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생각할 때 신앙길을 간다는 것이 참으로 어렵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이걸 조정하는 방법은 다른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사람을 대할 때는 상대의 기준에 맞게 대해야

누가 척 말을 했다고 하면 말을 하는 사람과 하나님과 나 사이는 삼각 관계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와 그 사람 사이의 이 삼각관계에는 반드시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이 사위기대입니다. 하나님과 나와 그 사람과의 삼각관계는 3점인데, 그 3점이 목적하는 바를 하나님이 보시고 내가 보고 그 사람이 보았을 때 맞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안 맞으면 틀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틀어져 나간다는 거예요. 아무리 정성을 열렬히 들이더라도 뜻에 합당치 않으면 기운이 쪽 빠지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기도하지 않아도 알 수 있도록 여러분이 습관을 길러 나가야 됩니다. 첫번 느끼는 인상을 중심하고 감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이 말한 것을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기뻐하시지 않게 되면 여기에는 반드시 상충의 역사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처음 보는 사람인데도 속이 상해서 생각지도 않았는데 벼락같이 욕이 나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 단계까지 나가야 하는데 거기까지 나가기 위해서는 조정을 해 놓아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언제나 사람을 대하는 데 있어서 비판적인 입장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저 사람이 나에게 어떠한 느낌을 주느냐, 즉 말하지 않더라도 척 대했을 때 나에게 어떠한 느낌을 주느냐, 저 사람이 말하는 첫번째 어음(語音)과 더불어 내 마음이 어떻게 동하느냐 하는 것을 검토해야 됩니다. 다시 말하면 주체와 대상과의 관계에서 그것이 나에게 맞느냐 안 맞느냐, 그 감각 각도를 조정해 가지고 나의 위치가 어떤 위치냐, 하나님께서 추구하시는 선을 그어 거기에 플러스되는 것이냐, 마이너스되는 것이냐 하는 문제를 검토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것이 플러스되는 것이다 하게 될 때는 거기에 맞게 움직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여러분들은 보통 사람이 보는 것과 달리 그러한 체험을 쭉 발전시켜 나가면 우리 식구들을 감정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본부에서 교회에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할머니가 있다면 그 할머니가 말하는 어감만 가지고도 그 할머니에 대해서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좋지 않은 이야기를 하게 된다면 기분이 메스껍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가 하던 일까지 전부 잡쳐 버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을 다 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교회에 먼저 들어왔다고 해서, 오래 되었다고 해서 권위의식을 갖고 충고하면 속이 막 뒤집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신앙생활에 있어서 이러한 느낌을 감정하지 않고서 뜻을 따라간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것임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언제나 조심해야 됩니다.

선생님은 특별히 기도를 많이 한 사람이나, 더우기 영계를 통해 가지고 특별한 기도를 많이 하고 찾아온 사람에 대해서는 별로 말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지금 어떠한 단계에 있는지 금방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절대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낮다고 해서 이래라 저래라 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지금까지 쌓아온 공적을 중심삼아 가지고, 그것이 백이면 그 백에 대한 것을 그 사람 자신이 알 수 있게끔 대해 줘야 된다는 것입니다. 조건적으로 백이 되지 못하게 대해 주게 되거나, 백만큼 대해 줄 형편이 못 되면 마음에 플러스되는 그 어떤 내적인 기준을 중심삼고 백의 기준을 넘게끔 해주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집에 온 손님을 푸대접하는 것은 도의 세계에 있어서는 마이너스 입니다. 그런 사람은 어디에 가서도 자기의 위신을 세울 수 없는 것입니다. 집에 온 손님을 대할 때에는 반드시 그 사람의 기준을 알아 가지고 그 기준을 중심삼고 거기에 내 성심을 다해 가지고 그 사람을 대하게 되면 그 사람이 정성들인 것을 가지고 하나님은 내가 세워야 할 조건으로써 만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을 대하여 자기가 가지고 있는 귀한 물건을 준다든가, 자기는 비록 어려운 입장에 섰지만 자기도 하지 못한 일을 도와준다든가 해 가지고 자기가 할 책임을 백 퍼센트 이상 했다고 할 때는 반대로 제시하는 것입니다.

어느날까지는 자기가 하나에서 열까지 뭣이든지 요구하기만 하면 전부 들어주시던 선생님이었지만 어느 날은 반대하는 것입니다. 그 느낌이나 분위기에서부터 백 퍼센트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이럴 때에는 상대방이 어떠한 행동을 취하느냐에 따라 가지고 도의 세계의 심판이 벌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그 사람들은 모릅니다.

질서와 법도에 의해 생활하라

지금까지 우리 통일교회에 많은 사람들이 들어왔다 나갔지만 통일교회는 절대로 손해 보지 않았습니다. 나 자신도 지금까지 손해봤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그것은 반드시 내가 할 책임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책임을 다하는 것도 질서를 따라서 했기 때문에 손해 안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잔칫날에 온 손님은 잔치하는 그 날의 법도를 세워 가지고 그 법도에 따라서 처신하는 것입니다. 잔치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높은 사람, 낮은 사람 다 오더라도 같이 마음껏 대해 줘도 괜찮지만 잔치의식이 시작되는 그 식장에 가서는 질서에 의해서 대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거기에서 불평하고 불만을 품게 되면 그 사람은 지금까지 닦은 모든 선의 실적을 완전히 보따리 풀어 놓고 나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정성을 들이는 것은 누구를 위해서 들이는 것이냐? 하나님은 김 아무개면 김 아무개에게 무엇을 주었다 할 때 절대로 김 아무개만을 위해서 주었다고는 생각하시지 않습니다. 그 김 아무개도 나라를 위한 존재이기 때문에, 대한민국이면 대한민국의 운세에 대한 뜻과 더불어 준 것이지 개인을 중심삼고 준 것이 아닙니다. 세계 운세면 세계 운세의 뜻과 더불어 하나님이 그에게 허락했고 행동시킨 것이지 하나님이 그와 더불어 혜택을 입기 위해서 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그런 때에는 도의 세계에 있어서 반드시 심판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런 사람들을 진지한 입장에서 지도하고 얘기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 말을 듣지 않으면 그 사람은 거기서부터 완전히 탕감 받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10년이면 10년 동안 도를 닦은 보따리를 완전히 풀어 놓고 나간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이와 같이 도의 세계에서는 언제나 심판이 벌어집니다. 여기에는 언제나 전후좌우가 엇갈릴 수 있는 일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도의 세계에서는 자기 스스로가 자리를 잡겠다고 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도의 세계에서 '아, 내가 중심이다' 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사람을 지으시기 위해서 지극히 작은 미물에서부터 지어 올라가신 것입니다. 다른 환경을 다 만들어 놓으시고 거기에 대표할 수있는 존재로서 사람을 지으신 것입니다. 사람을 먼저 지어 놓으시고 다른 만물을 지으신 것이 아닙니다. 가장 작은 것부터 지어 올라오셨다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복귀역사는 재창조 역사니만큼 여러분도 자신이 설 자리를 만들어 놓고 서야지 자기 혼자 독불장군처럼 이래야 된다 해서는 안됩니다. 그러지 않으면 자기가 아무리 잘 서 있다 하더라도 탕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가 다른 종교와 다른 것이 무엇이냐 하면 누구의 혜택을 받아 가지고 기반을 만들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른 것입니다. 나 자신도 지금까지 그렇게 해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는 시련 고통을 받더라도 발전한다는 것입니다. 틀림없이 발전한다는 것입니다.

낮은 자리에 있더라도 희생하고 봉사하면

도의 세계에서는 수단과 방법을 이용해 가지고는 연결이 안 됩니다. 그런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정성과 의리와 참을 통해서 접붙여야 되는 것입니다. 접붙이는 데 있어서 수단과 방법을 가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탄세계에서 쓰는 수단과 방법을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겁니다. 세상에서는 수단 방법을 가지고 서로 빼앗아 가지려고 하는 놀음이 벌어 지지만 참된 세계에서 참되지 않고서는 관계를 맺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는 수단과 방법이 통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실된 입장에서 남을 위하는 자리에서 이것을 연결시키지 않고서는 연결이 안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신앙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는 어려운 문제가 많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소명을 받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소명을 따라가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소명을 따라가는 것도 어렵겠지만, 하나님을 위해서 충효의 도리를 다한다는 것은 더욱더 어렵습니다.

여러분들은 개개인의 때가 전부 다릅니다. 우리 통일교회 자체를 보면 민족이면 민족, 국가면 국가 단계의 복귀노정을 가고 있지만 여러분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교회에 협조하고 선생님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면 한 단계 앞서서 나가게 됩니다. 여러분이 왜 선생님을 따라 가려고 하고 선생님의 명령에 따라서 움직이려고 하느냐? 그것은 벌써 여러분들의 영인체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선생님을 따라가는 그 길은 뒤에서 돌아나가는 길이 아니라 한 단계 앞서 나가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지금 여러분은 소생단계밖에 안 되었는데, 하나님께서는 완성단계의 장성급에서 출발 명령을 하셨다면 그 차이가 얼마나 많이 납니까? 다시 말해서 여러분은 소생단계를 가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완성 단계의 장성급에서 명령하셨다 할 때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비약해야 합니다. 비약도 이만저만한 비약이 아닙니다. 그 기준까지 비약을 하려니 얼마나 무리입니까? 여러분이 소생단계인 3분의 1밖에 안 갔는데도 불구하고 완성단계의 장성급의 명령을 받았다면, 무리는 있지만 있는 정성을 다해 가지고 나가게 되면 비약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어떻게 인계받아야 되느냐? 본래 소생단계에 있는 사람은 완성단계의 장성급에 설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전체를 위할 수 있는 자리에서는 얼마든지 설 수 있는 것입니다. 전체의 중심되는 자리에는 설 수 없지만, 전체를 위하는 자리에는 아무라도 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당대에 하늘 나라의 보좌를 위해서도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심부름하는 거와 마찬가지로 전적으로 위하는 자리에서는 단계를 초월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단계를 초월하는 것은 자기라는 입장을 고수해 가지고는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완성단계의 장성급에서 출발하는 사람이 백 사람이 있는데 그 백 사람을 위해서 간다 할 때는 그 자리에 동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동참하는 데는 참가권을 가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봉사와 사역하는 입장에서 참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소생단계의 소생급에 있는 사람이 완성단계의 장성급에 가담해서 출발해 가지고 소생단계의 소생급 이상의 노력과 그 기간에 필요한 소모를 해서 전체를 위해서 나간다면 그 사람이 설 자리는 어느 단계냐? 소생 단계의 소생급 자리에 서야 되느냐, 아니면 완성단계의 장성급 자리에 서야 되는냐? 그가 설 자리는 완성단계의 장성급 자리라는 것입니다.

소생단계의 소생급에서 정성을 들이고 노력하게 되면 1단계씩밖에 못 올라가지만, 완성단계의 장성급에서 2단계까지 나갈 수 있게끔 정성을 들이고 봉사하면 2단계를 올라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을 마이너스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정성을 다 한 사람이라 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가 닦은 터전을 통하여 높은 자리에 인연을 맺었으면, 그 자리에 얼마든지 놓아 두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는 비약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그렇습니다. 좋은 친구들과 친분을 갖고 그 환경에서 희생하면서 친구들을 위한다면 그들 전체가 받들어 가지고 올려 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계에서 제일 빠른 길은 무엇이냐? 통일교회면 통일교회에서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통일교회 교인들이 영계로부터 계시받는 것을 전부다 알고 있습니다. 영계에서 그들에게 가르쳐 주는 것을 남이 받은 것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받을 것을 그들이 대신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그 가르쳐 준 것이 어떠한 단계의 것이냐 하는 것을 쭉 검토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만일 나와 관계를 맺지 않은 일이라 하더라도 나와 관계 맺어서 대신 해줘야겠다는 책임감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인들은 자기가 가르쳐 주는 것을 누구를 통해서 이루기를 원하느냐 하면 선생님을 통해서 이루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높은 위치에 있는 영인들이라도 그러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시를 받은 사람들은 전부 다 선생님을 통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원칙에서 반드시 선생님과 인연맺어서 가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복귀섭리는 이러한 복잡다단한 내용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계시받기는 쉬우나 실천하지 않으면 소용 없어

그렇기 때문에 신앙생활에 있어서는 절대 스스로 자리잡지 말라는 것입니다. 통일교회에 들어온 지 이틀도 안 되어 가지고 무슨 말을 듣고는 뭐 이러고 저러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는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자기가 씨가 되어 가지고 심어져서 싹이 트려면 어느 정도 기간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아직 뿌리도 내리지 않은 상태에서 나돌아다니면서 이러고 저러고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또, 영계에서 가르쳐 준다고 해서 그 사람이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선생님도 이 길을 나설 때에 하나님께서 출발하기 전부터 굉장히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너는 이러이러한 사명과 이러이러한 책임을 다해야 되는 것이다' 하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으로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사명을 완수할 때까지는 반드시 탕감의 과정을 거쳐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면 꺾여 나간다는 것입니다.

영통인 중에는 영계에서 가르쳐 주면 그것이 가만히 있어도 그냥 그대로 다 이루어지고 자기는 다 된 사람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천만에,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묵시록을 해석해서 가야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다시 말해서 역사과정을 두고 지내가야 할 탕감노정이 수없이 많다는 것입니다. 탕감노정을 모르면서 뜻만 알고 있으면 뭘 합니까? 그건 안 되는 겁니다.

계룡산 신도안이라는 곳에는 현재 수많은 유사 종교의 책임자들이 앉아 가지고 앞으로는 자기들에게 때가 찾아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가 찾아온다고 해도 그렇게 그냥 앉아 있어 가지고는 안 됩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탕감노정을 두고 체험해 가야 되는 것입니다. 때를 맞이하기 위한 일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때가 오기만 바라는 것은 망상적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문제를 두고 볼 때 여러분은 신앙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스스로 따라가면서 자기가 설 자리를 정지(整地)해야 됩니다. 모든 사람이 검토의 대상인 것입니다. 누구든 나에게 선하지 않으면 악한 것입니다. 나에게 플러스가 아니면 마이너스가 되고 마이너스가 아니면 플러스가 된다는, 전부 이런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무슨 말을 척 듣게 되면 그 말이 플러스되는 말이냐, 아니면 마이너스되는 말이냐? 무슨 행동을 할 때에도 이것이 플러스되는 행동이냐, 마이너스되는 행동이냐 하는 것을 검토해 봐야 됩니다. 다시 말하면 이것이 하늘 뜻과 신앙길 앞에 도움이 되는 것이냐, 도움이 되지 않는 나쁜 것이냐 하는 문제를 검토해 봐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뜻을 중심삼고 내가 가는 길이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그 길을 가기로 결심했다 하더라도 자기가 가는 길이 하늘 뜻 앞에 마이너스가 되는지 플러스가 되는지 대번에 알아야 됩니다. 아무리 친구가 뭐라 해도 검토해 봐야 됩니다. 이것을 감정해 가지고 결정을 내리지 못하면 그 사람은 언제나 팔려가는 것입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뜻을 따라 가는 데 있어서는 이런 복잡한 과정을 거쳐 나가야 되느니만큼 여러분 자신들이 다이얼의 조정법을 알아 가지고 이런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한다 하면서 조정할 수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때가 참 많은 것입니다.

선생님 자신도 변천기에는 삼면이 다 아득하게 막혀 버릴 때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뜻의 길을 따라왔는데도 삼면이 다 막혀버릴 때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막힌 것을 타고 넘어가야 됩니다.

그 막혀 버린 것을 뚫고 넘어가게 되면 반드시 새로운 길로 출발하게 되는데, 그것을 어떻게 넘어가야 되느냐? 그것을 넘으려면 비약을 해야 됩니다. 비약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것의 척도를 재야 됩니다. 그리고 그 담이 정상적인 코스에서 막혔느냐, 비정상적인 코스에서 막혔느냐, 비정상적인 코스에서 막혔다면 완전히 방향을 전환해야 됩니다. 비정상적인 코스에서는 뚫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해결이 안 됩니다. 소모전만 벌어 진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는 반드시 방향을 전환해야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내가 방향을 전환한다고 해서 협조해 주신다거나 따라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지켜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감정을 잘해야 하고 행동개시를 잘해야 됩니다. 여러분은 매일매일의 생활 속에서 이런 것을 검토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소년시대면 소년시대, 청년시대면 청년시대, 장년시대면 장년시대, 노년시대면 노년시대에 따라서 다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생을 통해서 검토해 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사명 분야를 알아야

그 다음에 나는 어떠한 타입이냐 하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나는 이러한 타입이기 때문에 이러한 분야에 맞는다. 나는 이러한 일방적인 소성을 가지고 있고 이러한 특성이 있기 때문에 이 길을 위해서 가야 된다' 하는 것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봉사해야 할 사명이 있고, 어떤 사람은 교육의 책임이 있고, 어떤 사람은 사업의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자기의 본심을 중심삼아 가지고 마음의 소리, 즉 첫번째에 느끼는 그 감각으로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봄을 맞이하면, 그 봄날이 덥다든가, 혹은 춥다든가 하는 느낌이 있는 것입니다. 또한 오늘 아침은 기분이 어떻다고 하는 느낌이 있습니다. 그 온도의 차이에 따라 피부에 접촉되는 감촉이 틀리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누구를 척 대하면 그 사람의 신앙 정도가 얼마나 올라갔느냐 하는 것을 대번에 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 정도가 낮은 사람들을 몇 번만 대하게 되면 금방 낙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슨 얘기를 해도 싫어지는 것입니다. 그 마음은 내 마음이 아닙니다. 싫어지는 그 마음을 두고 보면 내 마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신앙생활에 있어서 자기의 마음의 감정을 통해 가지고 몇 퍼센트의 자신을 갖느냐 하는 것을 감각을 통해서 검증해 가지고 그 실적기준을 세우고 생활적인 표준을 세워서 조정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러분한테는 선생님이 언제나 같이하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도 언제나 같이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심령 속에서 떠났다가도 봄이 되면 꽃이 피고 향기가 풍기는 거와 마찬가지로, 여러분의 심령동산이 열리게 되면 반드시 찾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특정한 사람 외에는 누구나 자연적인 법도와 순리적인 환경을 따라 가지고 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특정한 사람은 제재를 받을 때가 많습니다.

은혜의 역사를 하는 것을 보면, 뜨거운 역사를 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차가운 역사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역사하는 것도 여름 같은 역사나 겨울 같은 역사를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봄 같은 역사나 가을 같은 역사를 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차원이 다릅니다. 처음으로 은혜의 역사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 고통을 받으면서 역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피는 꽃과 같은 얼굴 모습을 하며 역사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사람을 대하면 '아, 저런 사람은 저런 타입이다'라는 것을 알 수 있어야 됩니다. 여러분이 앞으로 책임자가 되고 영계를 바로 잡으려면 그런 것을 전부 감정할 줄 알아야 됩니다. 그런 것을 감정하려면 먼저 여러분의 마음의 기준을 갖추어야 됩니다. 마음의 기준을 갖추지 않고서는 황막한 영계에서 기준을 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누구를 의지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정면에 서는 것도 아닙니다. 복귀의 길을 가는 데 있어서는 사람이 정면에 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위에서 내 갈 길을 관리하실 수 있는 원리 주관권내에 계시는 입장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직접 앞장서서 치시는 것이 아닙니다. 장성기까지는 하나님께서 협조해 주시지만 그 이후의 길은 전부 개척의 길입니다. 스스로 개척해 나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 통일교회가 여러분들이 모르는 그 이면에서 얼마나 많은 수난의 길을 겪어 왔는가 하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복귀섭리는 아벨적인 사람을 찾기 위한 것

이제는 우리 통일교회가 이만큼 기반을 닦았고. 여러분들도 가르침을 받을 만큼 받았기 때문에 내가 없더라도 뜻이 이루어질 수 있는 단계에까지 들어왔습니다. 여기까지 오는 데는 내적 외적인 투쟁이 말할 수 없이 많았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원리를 공부할 때 복귀원리라는 것을 배우지만, 이 복귀원리라는 것은 단순한 역사적인 사실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통일교회의 부활사입니다. 통일교회의 부활사인 동시에 선생님 일생에 있어서 탕감해 나온 선생님의 일대사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이것을 음미해야 됩니다.

그럼 아담 가정이면 아담 가정을 어떻게 아느냐? 또한 노아 가정이면 노아 가정을 어떻게 아느냐?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어떻게 아느냐? 만약 알았으면 아는 것으로만 해결되느냐? 아는 것만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안다 하더라도 실체기대가 없어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반드시 실체기대가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믿음의 기대를 세워 가지고 실체기대를 가져야 됩니다.

실체기대란 가인 아벨의 문제를 중심한 기대인데, 실체기대를 세우려면 사탄 앞에 아벨적인 입장에 설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이 아벨적인 입장인 사람은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즉 계대를 이을 수 있는 내용을 가지고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야곱이 이삭의 축복을 받고 나서 아벨의 자리에 섰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늘 길을 가는 데 있어서 역사적인 노아 가정이면 노아 가정을 대신해서 실체기대를 탕감복귀하려면 노아 가정과 같은 아벨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노아 가정에 대한 축복을 받은 대표적인 사람이 없어 가지고는 안 됩니다. 아브라함 가정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 가정도 아브라함 가정을 복귀시킬 수 있는 사명을 가진 아벨적인 사람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노아 가정이 실수한 것을 탕감하고 복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전부다 이렇게 나가는 것입니다.

모세 가정을 중심삼고 탕감복귀하는 데 있어서도 재차 아벨적인 탕감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노아 가정적인 아벨 기준을 닦은 후 사탄세계에서 노아 가정적인 기준의 실체기반을 닦아 가지고 탕감복귀해 나오는 것입니다. 전부가 이렇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절대로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을 두고 볼 때에 여러분이 지금 원리를 배우고 있지만 여러분은 이런 원리와 관계가 덜 되어 있지 않느냐 이겁니다. 이런 방대하고도 엄청난 노정에 있어서 그러한 것을 가려 가면서 이와 같은 기반을 닦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 원리는 선생님의 원리가 아닙니다. 오늘날 이 세상이 맞춰 나가야 되는 원리입니다. 앞으로의 세계도 맞춰 나가야 되는 원리인 것입니다.

복귀섭리는 가인과 아벨의 탕감역사

1970년부터 1972년도까지는 국가적으로 볼 때 최절정의 수난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대한민국은 북괴의 남침을 상당히 두려워하는 입장에 있습니다. 절정에 와 가지고 아슬아슬하게 넘어가는 것입니다. 지금 사탄 세계는 하늘 세계와 반대로 되어 있습니다. 하늘편 세계가 이렇게 뾰쪽하게 생겼으면 사탄편 세계는 이렇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사탄편 세계가 왼손처럼 이렇게 되어 있다면 하늘편 세계는 이와 반대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렇게 되기 위해서는 교차되어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행동으로 설명하심)

민주세계와 공산세계는 아벨과 가인의 입장입니다. 이 두 세계는 서로 마음과 몸이 갈라져서 싸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갈라져서 서로 대치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갈라진 그 기준을 중심삼아 가지고는 언제나 두 세계로 갈라지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때가 되면 하나를 중심삼고 내려가는 것입니다. (행동으로 설명하심)

그러면 이들이 내려가려면 어떻게 되어야 되느냐? 그냥은 안 내려가는 것입니다. 민주세계도 둘로 갈라져야 되고, 공산주의도 둘로 갈라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갈라져서 어떻게 되느냐? 세계적인 이원화시대에서 다원화시대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세계적인 공산주의가 민족적인 공산주의로 갈라지게 되고, 세계적인 민주주의가 민족적인 민주주의로 갈라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현재 민주주의는 이 단계에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내셔널리즘(nationalism)을 통해서 세계적인 민주주의가 아니라 민족적, 국가적인 민주주의로 떨어져 내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떨어져 내려가고 있다는 사실은 반드시 교차될 때가 되어 온다는 징조입니다.

그러면 어디에서 교차되느냐? 예수님을 중심삼은 복귀섭리를 보면 교회를 중심삼은 국가적 체제에서 교차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유대교와 이스라엘 나라를 중심삼아 가지고 교차시키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실패로 돌아갔기 때문에 탕감복귀 역사시대에 있어서도 교회를 중심삼은 국가적 체제에서 교차된다는 것입니다.

교회와 나라는 아벨과 가인의 입장이기 때문에 교회와 나라가 하나만 되는 날에는 하나의 새로운 국가 형태를 갖추어 가지고 올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교차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볼 때에 세계적인 새로운 체제인 제국주의, 민족주의 형태로 떨어져 내려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냐? 그것은 섭리적으로 볼 때에 새로운 민족주의의 출발의 시대가 우리 눈 앞에 다가오는 것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이런 문제들을 두고 볼 때, 탕감복귀역사는 가인과 아벨의 탕감복귀 역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벨이 없어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아벨이 없어 가지고는 실체복귀를 못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여러분 개인의 생활에서도 반드시 벌어집니다. 여러분 개인이 아벨적인 입장입니다. 자기가 아벨적인 입장이라고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아벨적 입장은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면, 야곱이 부모와 하나되었던 것처럼 여러분도 부모하고 하나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야곱이 아버지와 하나되었느냐 할 때, 야곱은 아버지와 하나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부모하고 하나되었다고 하는 것은 무슨 말이냐? 어머니하고 하나되었다는 말입니다. 야곱이 아버지 이삭과 하나되지 못했는데 어떻게 축복의 계대가 이어졌느냐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복귀역사는 모자협조의 노정입니다. 야곱은 이러한 모자협조가 잘 되었기 때문에 축복의 계대가 이어진 것입니다.

모자협조는 하나님의 아들을 탄생시키기 위한 것

그러면 이삭은 어떠한 입장이냐? 천사장형입니다. 천사장과 같은 입장이라는 것입니다. 천사장이 맞아야 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나님을 배반한 천사장은 사탄이 되는 것이요, 하나님을 환영하는 천사장은 에덴 동산을 맞을 수 있는 복귀형 천사장이 되는 것입니다. 이 복귀형 천사장이 나타나면 결과적으로 무엇이 나타나느냐 하면 타락하지 않은 입장의 해와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타락하지 않은 입장의 해와가 나타나야만 타락하지 않는 본연의 아들이 탄생되는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볼 때에 지금까지 종교는 남자들을 세워서 역사해 나왔습니다. 여자는 지금까지 하나도 관계없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남자들을 통해 가지고 무엇을 하셨느냐? 여자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자를 맞이하려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하면 하늘의 아들을 탄생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이 세상은 전부 사탄의 땅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종의 땅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하늘의 땅은 하나도 없고 종의 땅만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하늘의 땅이 없기 때문에 하늘의 아들을 보내려면 종의 땅을 빌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종의 세계에서 여자의 몸을 빌려야 되는 것입니다. 그 여자는 하나님을 배반하는 여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생명은 물론 모든 것을 언제든지 바칠 수 있는 여자라야 됩니다. 벌받을 각오를 하고, 망할 각오를 하는 여자이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리브가는 이삭이 장자 에서에게 축복을 해주려는 것을 알고 야곱에게 '아버지가 네 형 에서에게 축복해 주려고 한다'고 이야기해 가지고 야곱으로 하여금 에서 대신 아버지의 축복을 받게 했습니다. 이것은 가정 싸움입니다.

이삭은 에서에게 축복해 주려 했고, 에서는 이삭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서 사냥을 나갔습니다. 그러나 야곱과 리브가는 내적인 면에 있어서 하늘의 뜻을 생각했습니다. 자기의 입장이 아니었습니다. 리브가 자신은 희생하더라도 하늘의 뜻을 위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이삭은 에서를 축복해 주기 위해서, 자기가 좋기 위해서 에서를 사냥을 내보냈지만 아내되는 리브가는 야곱이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쫓겨날 각오를 했습니다. 이렇게 마음 바탕이 달랐다는 것입니다.

누구 때문에 그랬느냐? 이삭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닙니다. 또한 에서 때문에 그런 것도 아닙니다. 사탄 세계의 남자들을 부정하기 위해서 그랬던 것입니다. 사탄세계에 관계되어 있는 먼저 난 아들을 전부 부정하는 것이 었습니다. 먼저 난 그 남편과 아들을 부정한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뭣 때문에 그렇게 했느냐? 뜻 때문에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삭이 에서를 축복해 주기 위해서 사냥 보낸 것은 부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를 긍정하는 자리에서 에서를 사냥 보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심정적 자세에 있어서 리브가는 자기의 희생을 각오한 것입니다. 내가 이 집에서 쫓겨나는 한이 있더라도 내 사랑하는 아들이 하늘의 축복의 계대를 이을 수 있는 길이 있다면 무엇이라도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귀섭리의 심정과 일치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귀섭리는 무리를 해서라도, 희생을 해서라도 하나님의 뜻을 이 땅 위에 계승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만큼 섭리적 심정과 일치된 입장에 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을 계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 이것을 뜻적으로 볼 때 천사장은 해와를 꾀어 가지고 타락시켰기 때문에 탕감복귀 원칙에 의해서 해와의 입장에 있는 리브가가 천사장의 입장에 있는 이삭을 살짝 속임으로 말미암아 탕감복귀를 했다는 겁니다. 이렇게 안팎으로 내적인 모든 것이 일치됨으로써 야곱을 통해서 하나님의 축복을 얻어낼 수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리브가는 그와 같은 싸움을 해 가지고 결국은 아벨 입장에 있는 야곱을 사랑했습니다. 자기 남편보다도, 맏아들 에서보다도 야곱을 더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리브가는 자기 남편을 주고도 바꿀 수 없고, 자기 맏아들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소망의 가치적 존재로 야곱을 취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뭐냐하면, 여자는 복귀섭리의 뜻을 위해서 자기 남편과 자기 자식을 버릴 수 있는 심정적 자세가 되어 있지 않고서는 뜻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준 것입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리브가가 야곱과 하나됨으로 말미암아 뜻의 기반을 세웠던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훗날에 오실 예수님과 마리아를 말하는 것입니다. 마리아도 역시 뜻을 이루려면 자기 부모라든가 형제라든가 환경 같은 것들을 염두에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직 뜻만을 염두에 두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복귀섭리역사에서 본이 되었던 여인들

마태복음 1장을 보게 되면 4대 여인이 나옵니다. 그 중에 밧세바는 솔로몬의 어머니인데, 그 밧세바가 끝까지 다윗 왕을 미워했느냐? 만일 그랬다면 그녀는 솔로몬의 어머니가 못 되는 것입니다. 다윗 왕이 남편 우리야를 전쟁터로 내쫓고 계획적으로 자기를 점령했지만, 그렇게 된 것을 운명으로 돌림과 동시에 그것을 도리어 하늘의 크나큰 뜻이 있는 것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다윗왕이 이렇게 하는 것은 나쁜 의미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크나큰 뜻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겠느냐 하고 받아 들였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녀는 자기 남편이 희생되더라도 나라가 잘되기를 바라고 기도한 열녀였다는 것입니다.

만일 밧세바가 다윗왕을 미워하는 입장에 섰었다면 그녀에게서 절대 솔로몬 같은 왕이 태어날 수 없습니다. 자기 남편을 죽인 다윗왕에게 품고 원한을 복수하겠다는 마음이 있었으면 절대로 솔로몬이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밧세바는 자기 남편이 죽었지만 그 남편이 충신되기 위해서는 그 일신이 망하는 것은 물론이요, 아내인 자기까지도 군왕을 위해서 바쳐지는 것을 기쁨으로 알아야 한다는 고차적인 생각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밧세바는 남편이 그런 의미에서 '내가 군왕을 위해 일신을 다 바치고, 정성과 절개를 다 바쳐 가지고 가는 것이 본 남편에 대한 의리가 아니겠느냐'고 생각하고 다윗왕을 대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서 솔로몬왕이 태어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 다음에 기생 라합을 보면, 그녀는 거리의 여인인데 어떻게 예수님의 족보에 조상으로 올랐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녀가 여리고성을 정탐하러 갔던 이스라엘 정탐꾼들을 숨겨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라합은 술집 여인이었지만 생명을 각오하고 그들을 숨겨주었던 것입니다. 자기 나라와 자기 나라의 어떠한 남자들을 위하는 것보다도 생명을 걸고 그들을 보호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복귀해 나가는 금후의 세계에 있어서 여자들이 취해야 할 태도라는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라합이 하늘의 계대를 이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뜻이 있는 여인이었기 때문에 그랬겠지만 정탐꾼들을 대해 가지고 본심에 있어서 '어떠한 남자들보다 이들을 생명을 걸고 도와줘야겠다' 하는 마음이 강했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입장과 처지를 외면하고 그 모든 것을 넘어서 단 하나의 소망의 뜻 앞에 있어서 필요한 여성이 되어야겠다 하는 마음의 자세를 깊은 마음 가운데 간직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이방 여인으로서 이스라엘 민족이 원수인데도 불구하고 그 민족이 축복받은 민족이라는 것을 알고 그들을 위해서 협조하고 동조하는 마음이 있었다는 것은 그 무엇이 그녀의 생애노정에 언제나 같이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룻을 보게 되면 그녀는 남편이 죽어서 시어머니와 같이 살고 있었는데 그 시어머니가 보아스의 첩이 되라고 소개해 주었습니다. 이런 입장에서 룻은 '시어머님이 나보다도 더 고차적인 입장에서 내 갈 길을 염려해 주시고, 나의 모든 것을 염려해 주시는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시어머님의 말씀을 따랐습니다. 자기의 안팎에 대한 모든 것을 생각하면서 희생의 길을 갔던 것입니다. 이것은 모험하는 것과는 타입이 다릅니다. 이렇게 순응해 가지고 하는 타입은 앞으로 뜻을 세우는 데 있어서 대표적인 여성의 본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을 두고 볼 때, 신앙길에는 반드시 그와 같은 사명의 분담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통일교회 자체가 가야 할 길에는 모험적인 것은 없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걸어나온 노정은 여러분이 상상할 수 없는 모험적인 과정을 거쳐 나왔습니다.

소명의 길에서의 책임자의 중요성

소명의 길을 따라나오는 데는 내적인 투쟁이 언제나 있는 것입니다. 내적인 투쟁을 가려 가는 것은 책임자가 잘하지 않고서는 안 됩니다. 책임자가 잘못하면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책임자가 잘못하면 큰 문제가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좋은 것을 보더라도 지나치게 기뻐하지 말고, 나쁜 것을 보더라도 지나치게 슬퍼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자기 마음의 자세를 바로잡아 가지고 정부(正否)를 가려 가면서 조심스럽게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에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절대로 선두에 서지 않아야 합니다. 일을 해 나가더라도 1차 작전, 2차 작전, 3차 작전을 펴가지고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복귀역사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복귀역사는 거꾸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소생 장성 완성으로 역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중심삼고 볼 때 복귀역사는 아담의 아들과 아담과 하나님을 복귀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위기대를 복귀해야 하기 때문에 3단계를 중심삼아 가지고 복귀역사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나온 것이며, 이 3단계는 결국 한 케이스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일치되지 않으면 뜻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면 뜻을 이루기 위해 어떤 작전을 해 나가야 하느냐? 선생님을 중심삼고 볼 때 선생님은 완성의 자리에 있고 여러분들은 아들의 자리, 즉 장성의 자리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들어오는 사람들은 소생의 자리에 서게 됩니다. 이렇게 3단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될 수 있으면 선두에 서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천사장과 아담이 있었던 거와 마찬가지로, 천사세계와 사람이 있었던 거와 마찬가지로 언제나 이와 같은 입장에서 작전을 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 작전을 해 나가게 되면 선생님이 직접 나서지 않습니다. 반드시 식구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역사를 시키시는 것입니다. 중요한 문제는 식구를 통해 예고시켜 가지고 그 일을 실천하는데, 명령은 내가 하지 않고 식구를 시켜서 명령합니다.

이렇게 해 가지고 만일 그 일이 잘못되었다 하게 될 때는 누가 책임지느냐? 선생님은 책임지지 않습니다. 그 대신 식구가 잘못될 때 그 식구의 잘못을 선생님이 지도할 책임은 있습니다. 일을 실패해 가지고 선생님에게 보고하게 될 때는 내가 끌고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시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 교회가 그런 작전을 해나온 것입니다. 선생님이 선두에 서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전체의 안전 작전을 위해서는 불가피한 것입니다. 그런데 일반 신령한 집단의 책임자들은 직접 선두에 서 가지고 야단하고 있습니다. 책임자가 직접 선두에 서게 되면 모든 것이 정면적으로 부딪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내적 정비를 해야 하는 때

우리도 1960년도 개척시대에는 할수없이 선생님이 선두에 서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정면적으로 부딪쳤습니다. 선생님이 정면적으로 부딪칠 때는 위험했지만, 지금은 이렇게 간접적으로 작전을 진전시켜 나가기 때문에 위험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는 모든 것을 포섭할 수 있는 이념을 갖추어 가지고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식구들로부터 그들이 한 일에 대하여 보고를 받아 가지고 감정할 줄 알아야 됩니다. 감정할 줄 모르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 일이 틀렸는지 안 틀렸는지를 감정할 줄 모르면 그 일을 수습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일을 수습하지 못하면 나하고 관계를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일을 시키고 난 뒤에는 그 일에 대한 보고를 받아 가지고 그 결과가 잘되었는지 잘못되었는지를 감정해 나가면서 자꾸자꾸 높이 올라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발전의 원칙은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세계에서는 동지도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통일교회에는 삼위기대라는 조직이 있는 것입니다. 이 삼위기대라는 조직은 메시아격으로 서로가 도움을 주는 조직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을 가만히 보게 되면 신앙생활하면서 이런 가치를 모르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삼위기대가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를 모르고 산다는 것입니다.

삼위기대가 단짝이 되어 가지고 서로가 자기의 신앙생활을 고백하면서 횡적인 기반을 쌓아 나가야 합니다. 서로가 받은 은혜의 소성이 다른 것을 전부 총합해 가지고 기반을 닦아 나가면 빨리 발전할 텐데도 불구하고 여러분은 이것을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앞으로 그러한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더구나 금년부터는 과거와는 달리 내적인 정비를 해 나갈 때가 왔습니다. 그래서 지금 축복가정 부인들을 전도하라고 임지로 내보낸 것입니다. 부인들을 내보냈으면 남편들은 어떻게 해야 되느냐?

원리적으로 볼 때, 축복가정의 부인들을 전부 내보냈다는 것은 시대적으로 부인들이 앞장설 수 있는 때가 왔다는 것을 뜻합니다. 과거 1960년 대에 여자들이 앞장섰던 것은 개인의 입장에서 앞장섰던 것입니다. 그것은 타락할 때 해와가 앞장섰기 때문입니다. 1960년대가 아담 해와가 천사장하고 타락하기 직전의 시대라면, 지금의 시대는 해와가 행동함으로 말미암아 타락하여 떨어진 것을 복귀하는 , 행동의 출발자로서 나서는 시대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축복가정의 부인들이 나섰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때에 남자들은 어떻게 해야 하느냐? 지금 나가서 정성 들이는 여자들한테 져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그들보다 편안한 생활을 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부끄러워할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자들은 일선에 나가 움직이는 여자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남자들은 '저들이 움직이는 것 이상으로 내가 움직여 나가야 되겠다. 저들이 정성들이는 것 이상으로 내가 정성들여야 되겠다' 하는 마음을 가지고 여자들과 평등을 이루어 나가야 됩니다.

여기에서 선생님은 어떻게 해야 되느냐? 선생님도 지금 그들에 대하여서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들의 움직이는 결과에 따라 그들의 남편이나 그들의 가정이 앞으로 축복의 자리에 서고 못 서고가 결정되지 않겠느냐 하는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가정을 중심삼은 내적인 정비시대로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새로운 마음으로 우리의 의무를 다하자

이러한 모든 문제들을 총괄적으로 볼때 나 자신이 어디에서 어디로 가느냐, 다시 말하면 나는 어떠한 소성을 가지고 어떻게 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이것이 제일 문제되는 것입니다. 통일교회에 들어왔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더우기 1970년도부터는 하나님이 어떠한 입장에 서 계시느냐 하면, 우리를 고립된 입장에 세우기 시작하십니다. 지금까지는 내가 위해 주는 때였지만, 이제부터는 반대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는 여러분들이 떨어져서 따라오지 못하면 내가 내려가서 안타까와하면서 끌어올려 가지고 따라오게 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오뚜기같이 되는 것이 아니라, 뒤집어 세워 놓으면 또다시 넘어지는 느낌이 자꾸 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때가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옛날과 같은 태도를 가져서는 안 됩니다. 선생님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여러분들도 이런 경험을 해보았는지 모르겠지만, 선생님은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벌써 누구라는 감이 들어옵니다. 선생님을 싫어하는 사람은 싫은 감이 들어오고, 좋아하는 사람은 좋은 감이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때는 상당히 절박한 때입니다. 옛날에 이 뜻길을 출발하면서 그러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던 것이 자꾸 그렇게 되어 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제는 우리 통일교회도 질서를 잡아 가지고 엄격하게 나가야 할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영계를 통하는 색다른 사람들을 선생님에게 관계를 맺어 주시는 것을 보면 지금 때가 상당히 바쁜 때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이 있는 것을 알고 여러분은 이왕에 소명을 받았으니 열심히 따라가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통일교회에 들어온 것은 선조의 공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통일교회는 아무나 못 들어오는 곳입니다. 또, 선생님이 아무나 만나 주는 것을 하나님이 좋아하시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선생님이 아무나 만나는 것을 꺼려 왔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이러한 때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들어왔다는 것은 그 자체가 소명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소명을 받고 따라가기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교회에 와서 이렇게 모인다고 해서 가는 것이 아닙니다. 한 나라의 국민에게는 나라를 사랑해야 할 의무가 있듯이 여러분에게도 의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데는 반드시 나라 앞에 새로운 실적이 있어야 됩니다. 사랑은 반드시 상대적인 실적의 조건을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뭐냐 하면 사위기대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무엇이라도 갖다 주려고 합니다. 사랑한다고 해서 그냥 가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갖다 주려고 하느냐? 무엇이든지 주면 그것으로 말미암아 결부되는 것입니다. 창조목적이 그렇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주체와 대상이 주고받으면 반드시 번식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주체와 대상이 주고받으면 반드시 번식이 벌어지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창조의 결과를 가져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를 가져오면 너도 좋고 나도 좋다는 것입니다.

이 자체가 작은 것이지만 이것을 중심삼고 자기 본체가 좋아하는 것보다도 사상을 심는 것이 사위기대의 목적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불가피한 것입니다. 그 자체가 사위기대의 결과, 사위기대의 이상을 찾아나가는 길인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저 사람과 나와의 관계가 좋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 진심으로 사랑하고 정성 다하라

지금까지는 복귀하기 위해서 눈물을 흘리며 탕감해 나왔지만 앞으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제 탕감시대는 지나갑니다. 다시 말해서 통일교회 자체가 탕감할 때는 다 지나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 통일교회를 반대 하는 사람들은 전부 정리되는 것입니다.

앞으로는 세계적으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자기만 높다고 하는 사람들은 다 데려갑니다. 콧대 높은 사람들은 다 데려간다는 것입니다. 금년에 들어와서도 우리 뜻에 상충되고, 우리 뜻과 대적하고, 뜻과 더불어 약속했던 것을 실천하지 않은 사람들은 틀림없이 데려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얘기는 안 했지만 벌써 그런 사람들을 몇 사람 봤습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 통일교회의 여러분들은 지금까지 철없이 나오던 것과는 달리 이제는 질서를 세워서 나가야 되겠습니다. 이제는 점점 성인으로서 하나님의 아들딸의 책임을 다하여 효의 도리를 다할 수 있는 시대권으로 들어가느니만큼 여러분은 때에 대한 것을 잘 알아서 스스로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위치를 결정지어 가지고 보다 가치적인 내용을 다짐하면서 나가야 되겠습니다. 그래야만 여러분들도 발전할 수 있고, 뜻을 따라갈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무슨 일을 하게 되면 자신의 마음에 있어서의 내가 이것을 해야 이익이 돌아오지 하고 생각을 합니다. '3년노정을 가라' 하면 '이 노정을 가야만 내가 축복을 받지' 합니다. 이렇게 '받지' 하는 마음은 자기를 중심삼은 것입니다. '3년노정이라는 이 기간에 정성을 다해 가지고 하나님께서 찾고 싶어하시는 아들딸을 만나야지' 하는 것이 목적인데도 불구하고 '이 노정을 가야만 내가 축복받지' 하는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이건 벌써 다른 것입니다. 결과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아들딸을 찾아야겠다 해야지 축복을 받기 위해서라고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축복을 받는다는 것을 생각하기 이전에 새 사람을 찾아 가지고 사랑해야 됩니다. 축복받는다는 것은 사랑하고 난 후의 일입니다. 그런데 거꿀잡이가 되어 가지고 축복부터 받으려고 하기 때문에 그 일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3년노정을 가는 데 있어서는 사람을 만나야 하고, 사람을 만났으면 있는 정성을 다하여 사랑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만나겠다는 것과 사랑하겠다는 것은 내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들을 위해서, 그 사람들을 살려 주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사랑을 하게 되면 그 사랑들의 협조를 받기 때문에 나는 망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내 것이라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한번 일했다가는 떨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먼저 상을 받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열 두 형제가 있으면, 그 열 두 형제 가운데서 가장 먼저 상을 받는 사람이 되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먼저 상을 받아 가지고 거기에서 좋아하는 입장에 서려고 하지 말고, 나중에 상을 받아 가지고 좋아할 수 있는 입장에 서라는 것입니다. 열 두 형제 가운데서 먼저 열 한 형제가 상을 받으면 나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울어야 되느냐?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 형제들이 상을 받을 때마다 '저 것은 내가 받을 상을 대신해서 받는구나' 하고 생각해야 됩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노력하고 정성을 들임으로 말미암아 형제들이 저 상을 타게 되었다고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열 한 형제가 전부 상을 받게 된 것은 내가 협조를 했고, 내가 숨어서 노력을 했다는 입장에서 좋아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 후에 자기가 상을 받게 될 때는 어떻게 생각해야 되느냐? '이 상은 내 상이 아니다. 열 두 사람을 대표한 상이다' 하고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사람은 영물이기 때문에 내가 상을 받는다 해도 미워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전부다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선과 악의 갈림길

선과 악이 어디서부터 벌어지느냐? 다른 데서 벌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선과 악은 두 갈래 길인데 그 두 갈래 길이 어디서부터 벌어지느냐? 마음과 몸에서부터 벌어지는 것입니다. 즉, 내 자체에 있어서 몸과 마음의 두 갈래 길로 벌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몸을 따라가는 것은 악이요, 마음을 따라가는 것은 선입니다.

그러면 마음과 몸은 무엇을 중심으로 하느냐? 어떤 가정에 부모와 세 형제가 한 방에서 산다고 했을 때, 추운 날이 되면 몸은 '아, 춥기 때문에 어머니 아버지께서 주무시는 자리에 가서 자야지' 그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은 몸에 대해서 반대를 한다는 것입니다. 또, 먹을 것이 있으면 몸은 좋은 것을 어머니 아버지보다 먼저 먹고 싶어합니다. 손이 먼저 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마음이 브레이크를 걸게 됩니다.

몸이 하자는 대로 하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몸이 하자는 대로 하게 되면 부모를 잃어버리게 되고, 형제들도 다 잃어버리게 됩니다. 해보십시오. 몸이 하자는 대로 하면서 먹고 싶은 대로 먹어 보십시오. 그렇게 몇번 안 하면 전부 떨어져 나간다는 것입니다. 그 떨어져 나간다는 것은 무슨 말이냐 하면 점점 없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떠난다는 것입니다. 결국 맨 나중에는 자기가 사랑하는 아내까지도 떠나는 것입니다.

자기만을 위주해 가지고 나가는 사람에게 일어서는 그 아내까지도 떠난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마음이 떠나게 되고 그 다음에는 몸이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도망가기 마련입니다. 결국은 같이 살게 되어 있었던 식구들이 전부 떨어져 나가게 되어 혼자 고독 단신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망하는 것입니다. 자기만을 위주로 해 가지고 살게 되면 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마음은 '야, 이 녀석아, 너는 막내 아들이니까 여기 추운 데서 자야 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마음이 하자는 대로 한 달, 두 달, 석 달 해보십시오. 그렇게 되면 부모는 자기 형제들에게 '이 녀석들아, 동생이 저렇게 추운 데서 자고 있는데 너희들만 따뜻한 데서 잠을 자느냐? ' 하면서 자기 편을 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외로운 것 같지만은 결국 편이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걸 알아야 됩니다.

자기 편이 많아지면 어떻게 되느냐? 다섯 식구가 사는 데 있어서 그 전체 식구가 자기 편이 되었다 하면 어떻게 되느냐? 전부다 자기를 중심삼고 주위에 엉겨 붙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엉기게 되면 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중심존재로 세우려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선을 위해서 끝까지 나가는 사람은 아무리 고독단신이 되려 하고, 와서 엉기는 것이 싫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이 따라가서 엉기게 됩니다. 그렇게 엉겨 가지고 그 사람을 추방하고 바꿔치기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중심된 자리에 세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는 중심 인물이 되는 것입니다. 선을 위해 끝까지 희생한 사람은 반드시 중심인물이 됩니다. 중심인물뿐만이 아니라 주관자가 되고 주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또, 사람들은 그 사람의 지도를 받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어려움은 물론 모든 것을 그 사람과 의논해 가지고 그 사람이 좋다는 대로 움직이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선을 위주해서 끝까지 나가는 사람은 환경으로부터 배척받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사람에게 모여드는 것입니다. 불리한 입장에 서게 되더라도 그것은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불리한 조건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통일될 수 있는 동기가 벌어져서 그 사람은 자연히 중심인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강제로 되는 것이 아니라 뭇사람들이 원해서 되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은 주인 되는 주체로 모시려고 하기 때문에 그는 자연히 중심인물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선을 위해서 가는 길은 중심과 주인이 되는 자리를 결정하지만 악을 위해서 가는 길은 고립되는 것입니다. 주인의 입장에서 종의 입장, 종의 입장에서 고립된 입장으로 되어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우리는 '나'라는 한 몸을 중심삼고 언제나 이와 같은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런 싸움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길을 가는 데 있어서 자기 자신을 내세우면 반드시 실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원수까지 사랑하라

선생님이 사람을 대하는 데 있어서 어떤 사람은 아무 실적도 없지만 잘 대해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선조의 공적이 있기 때문에 잘 대해 주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보고 우리 통일교회 식구들이 오해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저 사람은 처음 들어왔는데 선생님이 잘 대해 주신다'고 하면서 반대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선생님이 틀린 것이냐? 틀린 것이 아닙니다. 선생님은 사람을 보는 눈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렇게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다고 해서 그것으로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자기가 가야 할 길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르쳐 주시는 것은 예약적인 주관입니다. 아담 해와에게 '만물을 주관하라'고 하신 것도 예약적인 주관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약적인 주관권내에서 실질적인 주관권내로 들어가려면 탕감의 노정을 거쳐야 됩니다. 피어린 투쟁을 통하여 그 대가를 치르지 않고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신앙길에는 용서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반드시 선한 길을 통해서 가야 됩니다.

이런 문제가 벌어지는 것은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타락하지 않았다면 이런 문제가 벌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타락하지 않았다면 몸과 마음이 하나되어 있기 때문에 상충이 벌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에 그러한 투쟁의 과정을 거쳐 나가는 것입니다. 신앙길은 이러한 경계선에서 좌우되기 때문에 여러분은 올바른 심성을 가지고 비판할 줄 알아야 됩니다.

만일 자기가 어떤 사람을 잘못 비판했다 할 때는 그 사람을 보면 머리가 숙여집니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식구간이라 하더라도 잘못 비판했을 때는 머리가 숙여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저런 모든 것을 알고 하루하루의 생활 속에서 그러한 기준을 찾아 나가야 하겠습니다. 하루하루의 생활에서 제일 무서운 것이 무엇이냐 하면 대인관계입니다. 사람이 제일 무서운 것입니다. 사람이 사탄보다도 더 무서운 것입니다. 우리 통일교회 교인들을 중심삼고 보더라도 제일 무서운 것이 무엇이냐 하면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유협회장한테도 얘기했지만, 선생님이 지금까지 밤을 새워 가면서 사람을 대하고 있는 것은 모든 사람들을 좋아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을 싫어해 가지고는 복귀역사를 책임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악한 사람도 좋아해야 하고 선한 사람도 좋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이냐? 왜 모든 사람을 좋아해야 하느냐 하면 모든 사람을 좋아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타락은 하나님 세계에서 반대되는 자리로 떨어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세계를 나쁘다고 하는 자리로 떨어진 것이 타락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자리는 어떻게 되느냐? 하나님도 이 세계가 나쁘다고 하게 된다면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복귀역사를 못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하나님께서 이 세계를 좋다고 하시면서 지으신 세계인데 타락해서 이 세상이 나쁘다고 하는 입장으로 내려오시게 된다면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쁜 일도 좋게 대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나쁜 일도 좋게 대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은 뭐냐 하면 원수가 없는 자리에 서라는 말입니다. 원수가 없는 자리에 서라고 하는 것은 에덴 동산에서 타락권을 맞이하지 않은 본연의 세계, 본연의 자리로 돌아간 상태가 되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것을 중심삼고 싸우는 것입니다. 전부가 그렇게 되기 위해 싸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맨 처음 사람을 대할 때에는 나쁜 사람이라 할지라도 나쁘게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감옥에 들어가서도 참 좋은 체험을 했다고 봅니다. 사형수들과 한방에서 자기도 했습니다. 세상에서 보기에는 그 사람들은 무서운 사람들입니다. 안 그래요? 세상에서 보게 되면 얼마나 무서운 사람들이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사형수를 대해 가지고 어떻게 보느냐? 사형수로 보느냐, 아니면 한 방에 있을때는 한 형제로 보느냐? 내가 먹던 밥을 같이 나눠먹고, 그가 먹던 밥도 내가 같이 먹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들어가야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결국 뭐냐 하면 신앙과 인격에 있어서 하나님을 중심한 원칙적인 기준에 설 수 있는 내용을 결정하는 좋은 기회가 되고 조건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등등의 문제를 생각하게 될 때 사람이 제일 무섭다는 것입니다. 사탄은 악한 문제를 취급하고, 하나님은 선한 문제만을 취급합니다. 그러니 선했다 악했다, 또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하는 일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남을 위해 살라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에 여러분은 될 수 있으면 신앙노정에서 상심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상심을 하게 되면 손해가 많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상심하게 되면 아무리 꿈이 크고 좋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멀리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알고 여러분은 소명받고 가는 데 있어서 잼대를 가지고 전후 좌우를 가려 가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겠으면 여러분들은 언제나 기도하며 정성들여 가지고 나가야 됩니다. 진실되고 겸손한 자리에서 '나를 이끌어 주시옵소서' 하게 되면 안 되는 것이 없습니다. '나는 부족합니다' 하면서 전체를 모시며 나가는 자리에는 발전이 있으면 있지 타락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는 여러분에게 '남을 위해서 살라'고 하는 것입니다. '남을 위해서 살라'고 하는 것을 표방해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릴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 여러분은 끝까지 식구들을 위하고 전체를 위해서 나가야 됩니다. 그렇게 나가게 될 때는 그 정상적인 때를 맞아 가지고 여러분이 설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할 때는 언제나 자기도 모르게 탕감적인 자리에 서게 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무슨 일의 결과에 대해서 세 번까지는 다시 기회를 주십니다. 세 번까지는 다시 기회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깨닫지 못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쫓아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나올래야 나올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는 그자리에 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우리 통일교인 가운데서 오래 된 사람들이 병이 난다든가, 혹은 다른 어떤 문제에 부딪히는 것을 보게 될 때 '저 사람이 저래서는 안되는데' 하는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선생님이 쓱 보면 느낄 수 있습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말을 해보면 자기가 지금까지 통일교회를 위해서 희생했는데, 뭐 어떻고 어떻고 하면서 불평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이미 자기의 재산 다 팔아먹는 것입니다. 가지고 있는 것을 뒤집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판하고 원망하는 조로 나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직접적으로 탕감하지 못하면 반드시 그의 아들딸에게서 탕감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물질에 대한 탕감이 없으면 아들딸들이 개구장이로 태어나 가지고 자기 속을 태우는 일이 벌어집니다. 반드시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물질에 대한 타격이라든가, 그 다음엔 심정을 중심삼고 남편이나 아들딸에 대한 문제가 계획대로 되지 않고 다 틀어져 나간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못 받게 될 때는 자기 몸에 대한 문제가 오는 것입니다.

복귀역사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구약시대는 물질에 대한 제물시대이고, 신약시대는 아들딸에 대한 제물시대이며, 성약시대는 부모에 대한 제물시대입니다. 이런 3단계를 거치기 때문에 뜻 앞에 불림을 받은 사람이 책임을 못 하게 될 때에는 제일 먼저 물질에 대한 탕감을 받는 것입니다. 통일교인들이 현재 다 어렵게 사는 것도 일리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어렵게 사는 생활을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뜻을 위해서 더 어렵게 살려고 해야 됩니다. 그러면 생활이 펴온다는 것입니다.

탕감복귀 원칙에는 용서가 없는 것입니다. 어렵게 산다고 해서 그것을 붙들고 암만 바둥바둥거려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 때에 '이 이상 더 어렵게 살더라도 뜻을 위해서 살겠다' 하는 마음으로 나가게 되면 그것을 뚫고 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지 못하고 그러한 문제를 중심삼고 해결하려고 하다가는 그 문제에 붙들려 뜻도 다 놓쳐 버리게 되고, 자기 선조들이 쌓아 놓은 공적까지도 전부 다 팔아 먹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물질에 대한 문제나 자식에 대한 문제, 그리고 자신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 다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 것들은 다년간 신앙 생활을 해 나가게 되면 다 아는 것입니다. 내가 잘했는지 잘못했는지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말 한마디를 잘못 했어도 대번에 안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내가 어떤 사람을 대해서 열만큼 책망을 했다 할 때는 그 사람에게 3배 이상의 축복을 해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생활을 하지 않고 자기 신앙의 위치를 유지해 나간다는 것은 지극히 어렵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 것을 볼 때 신앙생활이 얼마나 조심스러운 생활인가 하는 것을 여러분이 잘 알아야 되겠습니다.

​기 도

​사랑하는 아버님, 한많은 복귀노정의 앞을 가로막는 사건이 얼마나 많이 있었는가를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이와 같은 장면을 대하실 적마다 얼마나 외로우셨으며, 저희들이 이 고비를 넘어 주기를 얼마나 간곡히 바라셨사옵니까?

당신의 뜻을 따라 나오던 수많은 인간들이 수많은 고빗길에서 그걸 넘기를 바라시는 당신의 갈망에도 불구하고 넘지 못하고 스스로 흘러가 버린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사람들이 제아무리 모든 것을 요구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인간의 욕망을 중심삼은 것이라면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저희들은 잘 알아야 되겠습니다.

언제나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자기 스스로를 아버지 앞에 바치고 또 바치면서 내일의 소원 앞에 제물의 자리를 끌고 나가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정의의 자리에서 제물 되기를 바라는 생활을 스스로 가릴줄 알게끔, 아버지의 지혜와 총명을 허락하여 주시옵시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자고 아침에 일어나면 이미 어젯날의 계속이 아닌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루를 지내더라도 습관적인 하루가 아닌 것을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어제보다도 오늘이 당신 앞에 더 가깝고 다정함을 느끼게 하여 주시옵고, 선과 악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높고 예리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 뜻과 더불어 생각하고 뜻과 더불어 행하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내가 사는 생애노정이 뜻과 더불어 살았다는 기준을 언제나 갖추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 주체이시기 때문에 저희들은 절대적인 대상이 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저희들이 절대적인 대상의 자리가 되어 있느냐, 안 되어 있느냐 하는 그 방향이 일치된 3점을 중심삼고 볼 때, 나 자체는 언제나 유동하는 자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자리가 중심인 두 번째 자리이고 오늘날 복귀섭리노정에 있어서 이 두 번째 자리는 언제나 심판의 요건과 생사의 결판을 좌우시킬 수 있는 중요한 자리인 것을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나를 위하는 것은 복귀섭리노정에 있어서 언제나 원수요, 남을 위하는 것은 언제나 나의 갈 길 앞에 있는 모든 어려움과 수난의 길을 평탄케 하는 노정인 것을 저희들이 알았사오니, 저희들이 남을 위하는 길을 가게 하여 주옵소서.

저희의 심령이 고갈되면 그것을 저희들 스스로 해결할 것이 아니라 도리어 남을 위해서 더 희생하든가, 남을 위해서 더 고통받는 입장에 섬으로 말미암아 반작용적인 행로를 개척할 수 있는 길도 있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 당신을 위하여 정성을 들여 가지고 보다 가치적인 충성의 도수를 가함으로 말미암아 당신 앞에 접근할 수 있는 길도 있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문제는 남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있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아무리 찬바람이 불어 오더라도 나 자체가 옷을 잘 갖추어 입게 될 때는 그 찬바람도 상관없이 지나가지만, 나 자체가 여기에 대비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을 때에는 그것으로 말미암아 병이 나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치우침을 받는 것이 현상세계에서 되어지는 원리인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의 생활도 이런 원칙을 기준삼아 가지고 생활을 개선하여 자기 생애의 노정에 빛날 수 있는, 하늘이 바라는 가치를 다짐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래야만 아버지께서 기뻐하실 수 있는 아들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저희들이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옛날에 기뻐하던 자극적인 아들딸의 입장을 가지고는 오늘의 기뻐할 수 있는 아들딸을 맞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옛날보다도 오늘이 더 기쁠 수 있고, 가치적인 자극을 느낄 수 있는 아들딸이 되기 위해서는 보다 더 힘들고, 보다 더 높고, 보다 더 가치 있고, 보다 더 책임을 질 수 있는 자리에서 하늘이 믿을 수 있고, 하늘이 바랄 수 있고, 하늘이 직접 의논할 수 있는 자리에 서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알고, 보다 중요한 책임을 지는 것이 영광이요, 남보다도 더 힘든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이 자랑이요, 남보다도 봉사적인 생활을 하는 것이 가치 있는 생활이라는 것을 아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지금까지 통일교인으로서 때는 가까이 왔지만 때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 지 심히도 걱정이 되며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때는 때대로 가고 있지만, 오늘날 사람은 사람대로, 옛날 그 모양대로 있어 가지고는 아무것도 안 된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습니다.

봄이 되면 씨를 뿌리는 때로서 씨를 뿌리면 싹이 날 것이요, 여름이 되면 그 싹이 자랄 것이며, 가을이 되면 열매를 맺어 가지고 겨울이 되기 직전에는 거두어들이는 수확기가 있는 것을 압니다. 이러한 자연현상의 법칙에 의해 가지고 하나의 생존체가 전생애의 과정을 통해 거쳐 나가야 하는 것을 보게 될 때에, 오늘날 자기 자체의 일생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봄절기를 맞은 자가 있으면 여름절기를 맞게 하여 주옵소서. 여름절기에는 무성하게 자라는 잎이 좋은 것이 아니라 그 잎을 피게 하는 한 줄기가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줄기는 나만이 가질 수 있는 줄기로서 꽃이 피고 열매 맺어 가지고 그 열매가 일년이면 일년 전체의 가치를 종합할 수 있는 결실을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을 저희들이 알고, 신앙 생활도 그런 때가 있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저희 일생을 통해서, 뜻을 안 과정에 있어서, 어느 때가 봄절기고, 어느 때가 여름절기며, 어느 때가 가을절기이고, 어느 때가 수확기인가를 알게 하여 주옵소서. 수확기를 맞을 때에는 뜻을 중심삼고 전체를 바치고 정성을 다하여 수확을 해야겠사옵니다. 그리고 수확한 것을 저희의 것으로 할것이 아니라, 아버지 것으로 하였다가 저희의 것으로 받게 된다면 아버지와 인연을 맺어 가지고 모든 것을 소유할 수 있고 관계 맺을 수 있는 가치가 있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복귀의 노정을 가는 저희에게 있어서는 모든 것을 먼저 내 것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아버지의 것으로 해야 되겠습니다. 먼저 내 인격과 내 생활을 닦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인격과 아버지의 생활을 먼저 닦아 드려야 될 것이 오늘날 소명을 받아 가지고 따라가는 자들의 입장인 것을 저희들이 확실히 알아야 되겠사옵니다.

무엇보다도 하루의 생활을 통한 싸움에서 지지 말게 하여 주시옵고, 한달의 생활을 통한 싸움에 있어서도 지지 말게, 아버지, 축복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전국에 널려 있는 당신의 자녀들을 기억하여 주시옵고, 지켜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은 금번 순회노정을 마치고 처음 맞는 주일이옵니다. 이번 순회노정을 통해서 아버지의 말씀을 많이 들은 당신의 아들딸들이 그 말씀을 이해에 새로운 출발의 동기로 삼아 가지고 새로운 역사적인 기수가 되어, 빛나는 한해의 성과를 아버지 앞에 돌려드릴 수 있는 기쁨의 해가 되게 축복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니다.

이 시간, 이곳을 바라보면서 기도하는 당신의 수많은 자녀들과, 외국에 널려 있는 수많은 당신의 자녀들과, 천상세계에서 탕감 해원을 바라고 있는 수많은 영인들이 3시대의 한을 풀어 나가야 할 자기 자신들의 입장을 알고, 공고한 자리에서 내일의 소망 앞에 현재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 충성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만만사가 당신의 승리의 표준과 더불어 함께하고, 저희의 마음이 언제나 그것을 향하여 용맹스럽고 담대하게 달려가서 최후의 승리의 자리에 참석할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게 인도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면서, 이 모든 말씀을 참부모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