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아버님, 이 아침은 이달에 있어서 마지막으로 맞는 안식일 아침이옵니다, 이달도 당신의 뜻 가운데에서 보호하여 주신 것을 진실로 감사드립니다.
전국에 널려 있는 수많은 자녀들이 이곳을 우러러보면서 하늘의 은사와 생명의 인연을 간절히 바라고 있사오니, 그들이 있는 곳곳마다 당신의 후덕하신 사랑으로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내일에의 희망을 품고 싸움의 역로에서 승리하는 자녀들로 삼아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또한 전세계에 널려 있는 수많은 당신의 자녀들이 외로운 싸움의 노정에서도 이곳 한국 땅을 바라보고 아버님을 생각하면서 극복의 날들을 갖추어 나가고 있사오니, 그 자리 자리마다 당신의 무한하신 사랑과 자비로우신 은사로 같이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이 땅 위에 있는 통일의 무리는 물론이지만, 이 뜻을 이루기 위하여 역사노정에서 수고하고 영계에 가 있는 수많은 선조들과 뜻의 내연을 따라 피를 흘리고 간 수많은 조상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이 땅의 거점을 통하지 않고는 당신의 본연의 세계에 임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영인들의 승리의 해방을 아버지께서는 보잘것없는 저희들을 통하여 촉구하신다는 것을 알면 알수록, 저희들이 얼마나 중대한 책임을 짊어지고 있는가를 가일층 느껴야 되겠으며, 저희들의 생활이 저희 자신만을 위해서 사는 생활이 아니라 입체적인 세계를 위한 생활이라는 사실을 저희들은 더욱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영계에 있는 수많은 영인들과 천군 천사들이 지금까지 당신의 승리의 한날을 바라면서 수고로운 노정을 극복해 나왔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그들의 수고는 저희들로 말미암아 거두어져야 되겠고 저희들이 바라는 소원은 전세계인과 더불어 결실되어야 되겠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옵니다. 또한 현재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저희들은 상하로 연할 수 있는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이 시간 다시 한 번 느끼게 되옵니다.
사랑의 아버님, 수많은 종교인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그들이 가는데 있어서는 자기의 어떠한 종파를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의 심정의 일치점을 향해서 나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저희들은 아옵니다. 이것이 역사 노정을 거쳐온 종교인들의 사명이요, 현재 이 땅 위에 머물러 있는 종교인들이 가야 할 길인 것을 저희들이 알고 있사옵니다.
당신의 심정을 체휼하고 당신의 생명의 인연을 높일 수 있는 그 길을 이땅 위에서 결정짓지 못하면, 아버지와 수많은 선열들이 관계를 맺을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옵니다. 서로서로 고립된 수많은 당신의 자녀들이 이 땅 위에 있지만 이들을 생명으로 연결시켜 줄 수 있는 참다운 지도자가 없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그리고 전후좌우에서 이들이 갈 길을 동행하며 하늘을 모시고 가야 할 생활적인 터전을 갖고 있지 못한 것을 저희들이 깨닫게 될 때, 그래도 하늘이 소원의 터전을 가질 수 있으며 당신의 마음에 위안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은 보잘것없는 통일의 무리인 것을 느끼게 되옵니다. 비록 이 자리가 소수의 무리가 모인 자리지만 이 자리는 두려운 자리인 것을 느끼게 되옵니다.
당신의 뜻을 중심삼고 통하고 싶은 간절함이 역사과정을 통해서 지금까지 남아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그 누구와 내정을 통해 가지고 승리의 터전 위에서 당신의 아들과 딸의 모습을 맞을 수 있는 기쁨의 날을 당신이 가져야 되겠사옵니다. 한 가정을 중심삼고 찾아오신 당신의 소원의 뜻 앞에 세계를 대신하여 승리를 다짐할 수 있는 기쁨의 날을 아버지께서 맞이해야 된다는 사실을 저희들이 깨닫게 될 때, 저희들은 너무나 부족하였고, 저희들의 가정은 너무나 부끄러운 자리에서 살아왔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되옵니다.
개인들과 가정들이 연결되어 하나의 사회와 국가를 형성하고 세계까지 형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당신이 가야 할 길은 개인만을 위한 길이 아니요, 가정만을 위한 길도 아닌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표준적인 개인과 가정이 당신의 뜻과 일치될 수 있는 기점을 통하여 민족을 거치고 국가를 거치고 세계를 거쳐 천주복귀라는 엄숙한 과제를 친히 거쳐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 그 길은 너무나 멀고 너무나 복잡하고 너무나 큰 길인 것을 알게 되옵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할수록 현재 부족한 저희들이 처해 있는 이 거점이 당신이 거쳐 나가야 할 최후의 거점과는 너무나 거리가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옵니다.
아버지와 부자의 인연을 세우는 데 있어서는 저희들 자체나 저희들 가정에서보다 천주사적인 거점에서 인연을 세워야 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그 길을 가야 하는 자녀들 앞에는 아직도 생명이 엇갈리는 길이 도사리고 있고, 그 길을 달려들어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될 입장이 남아 있으므로 평안을 구하기 전에 십자가 도상을 밟고 넘어서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저희들은 자각해야만 되겠사옵니다. 저희들이 이러한 모습으로 아버지 앞에 나타나야 할 자녀인 것을 깨닫고, 하늘의 외로움을 망각한 채 자신의 외로움을 중심삼아 가지고 아버지의 분부를 받은 부족한 저희 자신이 되었다면 이것을 다시 한 번 비판해야 되겠사옵니다.
당신이 짊어진 삽자가의 수난의 고통은 현재 저희들이 처해 있는 입장과는 비교할 바가 못 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오늘날 저희들은 저희들 자신의 입장에 아버지의 슬픔이 가중될 수 있는 길을 찾아가야 되겠사옵니다. 그러한 노정이 참다운 인생길을 더듬어 가는, 당신의 심정적 내용을 이어받을 수 있는 자녀들이 설 자리가 아니겠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하게 될 때,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이 자리를 마음으로 바라고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되옵니다. 언제나 십자가의 어려운 수난길을 도맡으시지 않으면 안 될 아버지의 입장을 이 땅 위의 종교인들은 잘 모르고 있사옵고, 오늘날 통일의 무리도 모르고 있사오니 진정 이러한 사실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루의 감정이 통하는 그 시간에도, 하루의 사정을 놓고 움직이는 그 자리에서도 당신은 저희와 더불어 행보를 같이하지 않으면 안 될 딱하고 어려운 입장에 계시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 저희들은 자신의 어려움을 중심삼고 절망하고 탄식하는 자리에 설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거기에 하늘의 수고가 자기로 말미암아 사라진다는 것을 생각하며 어려운 길을 감사히 넘어야 되겠사옵고, 자기를 위한 십자가의 길보다도 민족과 나라와 세계를 위한 십자가의 길을 가기 위하여 선두에 설 수 있는 무리가 되지 않고는, 이 땅위에서 아버지께서 찾으시고, 사랑하시고 싶은 참다운 효자의 인연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저희들이 알아야 되겠사옵니다.
이 자리에 부복한 당신의 자녀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8월도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이달에 저희들에게는 사연이 많았습니다. 협회에서도 여러 가지 행사를 치렀습니다. 1971년이 어떠한 해라는 것을 저희들이 이미 알고 있습니다. 저희들이 이해에 있어서 민족을 걸고 교단을 걸고 수많은 가정들을 걸고, 혹은 3천만 백성들을 걸고 제시한 것을 감당해야 할 시대적인 사명이 촉구되고 있다는 것을 절감하게 될 적마다, 금후에 미쳐지는 대한민국의 운명을 당신이 염려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시아의 정세를 넘어 세계에 당신의 뜻을 남기기 위하여 염려하시는 당신의 마음도 저희들이 이어받아야 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새로운 아침을 맞이할 적마다 그날이 기쁨의 날이 되게 하고, 참고 극복해야 할 싸움의 도상에서 자신을 거두어 아버지 앞에 바쳐 드리지 않으면 싸움의 노정에서 벗어날 수 없는 무리라는 것을 저희들은 자각해야 되겠사옵니다.
저희들은 한마디의 말을 하는 데 있어서나 하나의 행동을 하는 데 있어서 분립된 자아를 발견해야 되겠으며, 환경을 하늘로부터 이어받아 가지고 그 환경을 이 땅 위에 상속시켜 주어야 되겠습니다. 피땀을 흘리는 한이 있더라도 이런 환경을 이 땅위에 이루어 놓지 않으면 안될 사명이 저희에게 있다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이것을 이루어 놓지 않고는 저희들이 전진할 수 있는 아버지의 아들과 딸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실히 깨닫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지금까지 통일교단은 모진 곡절의 노정을 걸어왔습니다. 그렇지만 현재 처해 있는 이 자리에서 평면적인 세계와 통할 수 있는 그 자리에까지 가기에는 아직도 가시밭길이 남아 있다는 것을 바라보게 되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이 길을 또다시 가야 할 입장에 계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아버님의 아들딸들로 태어난 것을 자각한 저희들이 비장한 결의를 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시점이라는 것을 알게 되옵니다.
원수들이 저희들에게 망하라고 저주하고 저희들을 사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고자 하더라도 저희들 개체개체가 서로 단결하여 하나의 모습, 내일의 강한 결속체가 되어 가지고 정상을 향하여 총진군하지 않으면 안될 행로가 저희들 앞에 있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아야 되겠사옵니다.
생사를 가리지 않겠다고 맹세한 실체로 나타나는 자신을 그리워하지 않고는, 당신이 원하시는 곳에서 아버지를 만나 가지고 기뻐할 수 있는 그날까지 남아지는 무리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이 시간 다시 한 번 느끼게 하여 주시옵소서.
긍휼이 많으신 아버지여, 자비와 동정의 인연을 가지고 지금까지 손해보고 오신 하늘이여, 부족한 저희들을 굽어살피시옵소서. 아버지의 본연의 권위와 그 위치를 두고 볼 때, 당신은 타락한 인간으로서는 감히 대할 수 없는 거룩한 분인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한 아버지께서 수난길에 있어서 홀로 책임을 지고 나오신 억울한 사실을 저희들은 애통하게 생각해야 되겠사옵니다. 하오니 저희들이 하늘땅 앞에 통고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불쌍한 인간을 통고하기 전에 불쌍한 하늘 부모를 통고해야 하는 저희들임을 알아야 되겠사옵니다.
비록 천국에 도달할 수 있는 자리에 임할지라도 저희들은 하늘의 권위를 바라기보다는 하늘을 위로하고 참고 넘어가야 하며 그러한 행로가 저희들의 인생노정에 거듭 남아 있다는 것을 절감해야 되겠사옵니다. 오늘도 그 싸움의 행로를 스스로 지키면서 내일의 개척자로서 승리의 모습을 그리워하고, 극복할 것을 다짐하는, 생활환경에서도 지칠 줄 모르는, 아버지가 자랑하실 수 있는 늠름한 아들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이 시간 다시 한 번 자각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내연을 따라 움직이고 아버지의 사정에 연결된 실체가 되어, 선의 결실체로서 이 땅 위의 발판이 되지 않고는 아버지가 행보하실 수 없다는 사실을 저희들은 느끼오니, 저희들로 하여금 하루바삐 외로운 길을 가시는 아버지를 위로하며 모시고 사는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오늘 8월의 마지막 안식일을 맞이했습니다. 이제 맞이할 9월과 이해의 남아진 날들을 아버지께서 지켜 주시옵소서. 1971년은 역사를 가름해야 하는 중차대한 해라는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습니다. 1971년이 지나가는 과정에서 이 나라, 이 민족이 참된 백성의 인연을 따라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시옵소서. 이 나라가 이 나라의 주권을 위하는 것보다도 천륜을 이어받을 수 있는, 영원한 주권의 인연을 가질 수 있는 길을 모색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남북이 분립된 이 환경을 직시하면서 내일의 통일의 자세를 갖춘 하나의 단일 민족의 권위를 자랑하고, 이 대한민국을 중심삼고 통일된 기반 위에 거룩한 제단을 갖추어 만민과 만국을 위한 승리의 한 날을 맞이하여 아버지 앞에 거룩히 분향할 수 있는 그날이 오기를 저희들은 바라고 있사옵니다.
수난의 대가를 치른 양이 크면 클수록 그날을 기쁘게 맞이할 것이고, 하늘을 위하여 공의의 인연을 추구하는 자리에서 각자가 인연을 다짐하는 생활을 해 나온다면 보다 가치 있게 아버지를 시봉하는 아들딸의 입장을 갖출 수 있다는 것을 직시하게 되옵니다. 오늘의 자아는 환경의 인연을 거치지 않을 수 없지만 현실은 흘러가는 것이오니, 이러한 것들을 붙들고 생명을 다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나를 부정하고 하늘을 공인하는 철칙을 거치지 않고는 복귀, 해원성사의 노정을 갈 수 없다는 사실을 저희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내마음이 그러하고 내 몸이 그러하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저희의 생활환경이 그러하다는 것을 알 적마다 저희들은 겸손히 엎드려 아버지를 불러야 되겠습니다. 아버지의 인연을 따라야 되겠습니다. 아버지의 싸움터에서 용사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어제까지 진정으로 아버지를 모시지 못했던 그 마음을 넘어서서, 오늘부터라도 죄악된 현실권내에 있어서 영원히 심정에 불타는 간절한 마음으로 하늘 아버지를 불러야 되겠사옵니다.
그렇게 간절하게 사무친 기준이 우리 조상인 아담 해와의 기준을 능가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자리에서 내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간곡한 마음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 천추만세 천주(天宙)의 실체를 갖추어, 슬펐던 역사와 현재 수난의 역사를 극복하시는 아버지의 영광을 그리면서 현재에 있어서 그러한 아버지가 되지 못한 것을 무한히 가슴 아파해야 되겠습니다. 자기 자신을 몽땅 제물로 바쳐서라도 아버지 앞에 기쁨의 한 날을 찾아 드리겠다고 몸부림칠 수 있는 참된 아들딸의 모습을 각자가 갖추어야 된다는 것을 이 시간 다시 한번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이 찾고 있는 부끄러움 없는 개인, 부끄러움 없는 종족과 민족, 부끄러움 없는 국가와 세계를 당신과 더불어 맞이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하늘의 해방권이요, 땅의 해방권이 오기를 저희들은 천번 만번 바라고 있지만, 아버지께서는 저희들보다 더 바라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아버지를 모실 수 있는 한 날에 대한 그리움에 사무쳐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생사가 엇갈리는 길에 있어서도 아버지를 입증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망각하면서 최후의 행로를 지킬 줄 아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앞에 다시 한 번 아뢰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아버지, 이 아침에 찾아오시어 부족한 저희들을 일깨워 주시옵소서. 아버지 앞에 완전한 자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저희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완전을 그리며 싸우면서 극복해 나오는 저희들은 그 전통을 이어받기 위해서 부복한 무리이오니, 저희들을 긍휼히 보시옵소서, 저희들의 마음 일체는 저희들 자신의 결과를 찾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 앞에 기여되기를 바라고 있사오며 당신이 찾고 있는 뜻의 결과를 그리워하고 있사옵니다. 이것만을 추구하며 싸우고 있는 통일의 무리이오니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다시 한 번 아버지의 긍휼의 마음과 동정의 사연이 저희 통일교단이 나가는 길에서 떠나지 말기를, 아버지께서 복빌어 주시옵기를 바라고 원하옵니다.
이 아침, 저희들을 통하여 바라고 있는 수많은 형제들 위에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본부의 이 자리가 얼마나 두려운 자리인가를 저희들은 다시 한 번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부족한 정성을 모아 아버지를 찾고 기도드리는 이 자리에 아버지께서 친히 강림하시어 각자의 심정에 새 생명의 인연을 연결시켜 주시옵기를 재삼 부탁드리옵니다.
오늘 모이는 곳곳마다 당신의 풍성하신 은혜로 생명의 인연을 두텁게 맺어 주시옵기를 바라옵니다. 모든 것을 허락하신 뜻 가운데서 성취하시옵소서. 참부모님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오늘은 '천국의 거점이 어디냐' 하는 제목을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은 누구나 바라는 땅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개인이 처한 자리도 그러하거니와 국가와 세계 전반에 걸쳐서 보더라도 우리가 요구하는 국가와 세계가 되지 못한 것을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더욱이 현재의 이 세계는 최후의 절벽에 부딪쳐 있습니다. 이렇게 갈것이냐, 저렇게 갈 것이냐 하는 문제에 그 누구도 결정적인 어떠한 방향을 제시할 수 없는 사정에 처해 있다는 것을 바라보게 될 때, 과연 이 세계를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어 가지고 선의 결과와 연결지을 수 있는 소망을 맞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누구나 이 세계는 절망의 세계라고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으로서 자기 나름의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은 있다 하더라도, 이 세계의 방향을 새로이 제시하여 만국은 물론이요 만민이 이런 결과의 선한 세계에 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며 세계의 슬픔과 세계의 고통과 세계의 딱한 사정을 체험하면서 절규하는 사람이 있느냐 하면, 그런 사람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느끼게 됩니다. 인간으로서 제시할 수 있는 방향은 다 제시해 봤지만 그 제시하는 방향이 인간에게 보다 높은 소망을 가져다 줄 수 있는 방향이 못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인간은 인류 역사를 통해서 현시대에 이르기까지 이것을 실현해 나오려고 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을 중심삼고 보더라도 대한민국을 책임진 주권자면 주권자가 앞으로 대한민국이 어떻게 갈 것이냐 하는 문제를 대해서 현재의 입장에서 자신을 중심삼고 방향을 취해 나가고 있지만, 그 노선의 방향이 세계의 현정세를 넘어 금후에 새로운 입장에서 제시될 수 있는 방향이냐 하면 누구나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느낌과 동시에 책임진 그 분도 그렇게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민주세계를 대표하는 어떤 선진국가가 있다면 그 국가의 지도자도 마찬가지일 것이며, 혹은 공산세계도 그러할 것입니다. 공산세계가 가는 방향을 두고 보더라도 역시 그와 같은 갈림길에 놓여 있는 현시점인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자기들이 주장하는 방향이 결정된 것같이 제시하며 주장해 나가고 있지만, 현시대의 엇갈리는 입장을 직시하게 될 때, '금후의 세계가 가야 할 방향은 이렇다'고 결정적으로 제시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정당하고 결정적인 방향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인간이 제시하는 방향을 가지고는 새로운 면에서 세계를 수습할 수 없는 것이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인간 외에 절대자, 즉 하나님이 계신다면, 그분은 이러한 역사적인 종말시대에 있어서 어떠한 방향을 제시하겠느냐? 하나님이 지금의 이 세상을 인간의 딱한 사정과 같은 입장에서 바라보고 계시는 것이냐? 즉, 하나님은 무슨 방향이나 대안이 없는 슬픈 입장에서 바라보고 계시느냐, 그렇지 않으면 대안과 방향을 제시하실 수 있지만 세계가 그 제시하는 내용을 받아들일 수 없는 입장이 되었기 때문에 제시하지 못하고 계시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 세계가 공히 하나님이 제시하는 방향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이 세계는 인간이 바라는 새로운 소망, 새 시대의 한 모습을 그릴 수 있는 가망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계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입장이 되지 못하였다면 하나님이 그것을 제시하더라도 인간은 그것을 찾을 수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그것을 모색하여 찾지 않을 때 이 세계는 비참한 세계가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면 이런 비참한 결과의 세계를 바라보고 그냥 내버려 두실 수 있겠느냐? 하나님이 참이요 사랑이라 할진대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기에 대한 어떠한 방향과 대책을 강구하여 쥐고 계실것입니다.
그러한 방향을 가진 하나님이라면 그 하나님이 접선하실 수 있는 거점은 어디일 것이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이 세계 자체가 거점이 될 수 없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 어느 특정한 국가를 중심삼아 가지고 그 환경과 하나님이 안팎의 내연을 같이하실 수 없다는 것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특정한 민족을 중심삼고는 그럴 수 있겠느냐 할 때에, 큰 곳에서부터 점점 작은 곳으로 내려가게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특정한 종족이 있으면 그 종족을 중심삼고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터전이 남아질 수 있느냐, 종족이 남아지지 못한다면 남아질 수 있는 씨족이 있느냐, 즉 종족을 대표할 수 있는 어떤 씨족 형태가 있느냐 하는 문제를 볼 때 우리는 그것도 자신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더 작은 범위의 자리까지 내려가 가지고 그 자리에서 그런 방향을 제시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떠한 종족도 씨족도 없으면 어떠한 가정은 있을 것이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오늘날 대한민국이면 대한민국에 있어서 우리 가정은 대한민국의 어느 가정에 못지않은 가정이라고 자신하는 가정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 가정의 주인이 천륜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할 수 있고 하나님의 뜻을 이어받을 수 있는 가정이 우리 가정이라고 자신하고 나설 수 있느냐 할 때, 그런 주인을 가진 가정은 있다고 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제시할 수 있는 거점은 가정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어디로 갈 것이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에, 개인을 찾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개인을 중심삼고 볼 때, 현재 어떤 면에 권위를 가진 사람이라든가, 부자라든가, 혹은 지식을 많이 갖춘 사람이 있다면, 그들에게 하나님이 방향을 제시할 수 있도록 안팎의 사정이 갖추어져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 개인 자신들이 하나님이 제시하는 방향에 일치될 수 있는 입장이 되지 못하고, 자기의 사정을 중심삼고 관계 맺고 있는 내용이 무엇이든지간에 그 방향에 관계맺을 수 없는 환경을 가지고 있는 입장이 되어 있다면 그런 사람들을 중심삼고는 인연을 맺기가 어려울 것이 아니냐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상류층의 어떤 특정한 개인을 통해서 그 거점을 찾지 못하고 제시하는 방향에 맞는 터전을 갖지 못하게 된다면 여기서 어떻게 될 것이냐? 하나님의 섭리가 후퇴할 수 없는 한, 중류층으로 내려가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중류층에는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있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자신 있게 결정적인 어떤 결의를 해 가지고 '자신 있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사람이 있다면 모르지만, 그런 사람이 없을 때는 그 중류층에서도 역시 하나님이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어떤 한 개인을 찾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중류층에서도 하나님이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개인을 찾지 못했을 때는 어떻게 하실 것이냐? 하류층으로 내려가실 것입니다. 그런데 하류층에 내려가서도 특정한 사람을 중심삼고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거점을 찾으려고 하다가 찾지 못하게 될 때는 어떻게 하실 것이냐? 이런 우리 입장에서 보게 될 때, 하나님이 그런 입장에 계신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하셔야 되겠습니까? 누구를 붙들고 그런 사정을 통고하실 수 있겠습니까? 사정을 통고할 수 있는 사람이 어떠한 사람이겠습니까? 하나님이 남자를 통해서 그런 사정을 해원하시려 했는데 그런 개인을 만나지 못했다 할때는 여자들을 통해서라도 그럴 수 있는 개인을 만나는 길을 모색하실 수밖에 없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입니다.
수많은 남자들 가운데 잘났다고 하는 사람들을 다 저버리고 아무런 관계도 없는 여인들을 대하여 이 엄청난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거점을 찾아 나오시는 하나님께서 어느 한 개인을 통하여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거점을 요구하게 될 때, 여기에서도 또다시 그 거점을 찾지 못하게 된다면 하나님은 어디로 가실 것이냐? 하나님이 원하는 인류는 어디에 가서 그와 같은 시운을 맞을 것이냐 하는 문제를 놓고 당연히 하나님도 염려 하시는 것이요, 우리 인간도 염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방비해야 된다는 것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이시라면 하나님께 책임이 있는 것이요, 이것을 방비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되는 것이 하나님의 책임이라 할진대, 모색할 수 있는 환경을 다 잃어버리고 그 누구도 믿지 않는 여자들을 중심삼고 최후의 소원의 일념을 제시할수 있는 거점을 바라고 있는 입장이라면, 오늘날 우리 인간들은 그것을 어떠한 입장에서 맞아들일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됩니다.
이미 하나님을 배반하고 이미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자리에 서 있는 인간들이기에 응당히 처단을 받아야 할 입장이지만, 세계적인 뜻을 남겨야할 터전이 인류이기 때문에 인간을 처단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 딱한 사정을 해결할 거점을 마련하실 수 없는 하나님, 나약하고, 미숙한 여인들을 통해서 거점을 찾기를 고대하는 자리에 계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할 것이냐 하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야 됩니다.
그 누구도 돌아보지 않는 노년기의 아낙네를 통해서 하나님이 찾아오고 계시다고 누가 자신 있게 공포한다고 해서, 오늘날 이 땅 위에 있는 사람들이 그 아낙네들을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환영하는 사람이 있겠느냐? 또, 현재에 나이 많은 늙은 아낙네들이 하는 말을 듣고 과연 하늘이 찾아와서 세계를 대표하여 하는 말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이러한 문제를 생각해 볼 때,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문제냐는 것을 우리는 현재 살고 있는 환경을 미루어 보아서도 잘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당한 사실일지라도 그것을 안팎으로 헤아려 보고, 하나하나 비교해 보아 가지고 자신에게 이익이 될 수 있는 길이 아닐 때에는 그것이 아무리 옳은 길이라 하더라도 번번이 그것과 관계를 맺기 싫어하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 개인의 습관을 두고 볼 때, 오늘날 우리 개인을 찾아와 가지고 세계적인 내용을 통고하시는 하나님의 사연이라는 것은 우리 개인에게 있어서 이익이 되는 조건으로써 맞아질 수 있는 내용이냐 하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제시하는 내용은 열이면 열 사람, 백이면 백 사람에게 이익이 될 수 있는 결과를 남겨 주는 것이 아니라 전부 다 손해를 보지 않으면 안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부정적 여건을 거치지 않고는 하나님이 제시하는 내용을 받아들일 수 없고 환경적으로도 그것을 인정할 수 없는 사실을 느끼고 알게 될 때, 과연 그것을 영원한 것으로 상속받아 가지고 자기 자체의 생애와 더불어 그 터전을 남기겠다고 하며 책임질 수 있는 젊은이들이 있겠느냐 하는 것은 더욱더 어려운 문제가 아닐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은 어디로 가실 것이냐? 노년기의 사람들도 그렇지만 장년기의 사람들도 하나님이 손댈 수 없다 할 때는 어떻게 하실 것이냐? 철부지인 청년기의 사람들을 통하여 그런 일을 또다시 하셔야 될 것이 아니냐? 하늘의 고충을 알아 가지고 자기 자신은 전체를 위하여 천번 만번 죽어 희생을 하더라도, 그것을 감사하게 여기며 어떠한 수난길도 책임지고 나설 수 있는 젊은이들, 특히 처녀면 처녀들 가운데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겠느냐? 만일 그 자리를 이어받고 나설 수 있는 하나의 가냘픈 여자가 있다면, 그 여자가 서는 자리는 지극히 외로운 자리요 무력한 자리일 것입니다. 여자의 입장을 볼 때 그 자리는 무척 외로운 자리일 것입니다. 여자가 장래에 갈 길은 자기 혼자 자주적인 입장에 서 가지고 가려 갈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여자는 어차피 한 남자를 맞이해서 가야 할 게 아니예요? 여자는 부모의 슬하에서 자유스런 환경을 허락받고 살 수 있는 입장이 아니냐.
만일 하늘 뜻의 방향을 알고 그 거점을 이어받겠다고 하는 한 소녀가 있다면, 그 소녀는 자기의 생명 전체를 희생할 각오를 하지 않고는 그 거점을 이어받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러므로 당장 사지(死地)에 들어가는 입장에 있더라도, 당장 내 일신의 체면과 권위가 땅에 떨어져 짓밟히더라도, 그 거점을 당당히 이어받겠다는 마음을 가진 소녀가 있겠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뜻을 아는 남성들도 이어받기 어려운 자리요, 뜻을 아는 여성들도 이어받기 어려운 자리인데도 불구하고 한 소녀가 그 자리를 이어받을 수 있는 입장에 선다 할진대는, 그 자리는 백 번 살겠다는 결의보다도 천 번 죽겠다는 결의를 해야 되는 자리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대한민국도 하나의 소망의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많은 희생의 대가를 치러야 됩니다. 내일의 소망을 이어받기 위해서는 내가 길이길이 살겠다기보다도 현재의 생활 가운데서 천만의 희생, 만만의 희생을 다짐하고, 이것을 가려 갈 수 있는 길이 있으면 그것을 찾겠다고 결의할 수 있는 사람이 되지 않고는 안 됩니다.
오늘날 인간을 대하여 손을 뗄래야 뗄 수 없는 하나님의 사정을 생각해 보게 될 때, 그러한 사연을 품고 있는 하나님은 우리 인류가 맞이해야 할 세계를 대표한 주인공이요, 나라면 나라를 대표할 수 있는 주인공이요, 가정이면 가정을 대표할 수 있는 주인공이요, 생명이면 생명을 대표할 수 있는 어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입장에 계시는 하나님은 얼마나 고독하시겠습니까? 그런 자리에 계시는 하나님은 행복한 것이 아니라 비참한 것이요, 그 입장이 무한히 고독한 자리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고독의, 한의 절정을 헤아릴 수 없는 비참한 자리라는 것입니다.
그런 비참한 내정을 품은 하나님이 하나의 소녀를 보고 역사노정에 있어서 누구에게도 토로하지 못하고, 이 시대의 어느누구에게도 토로할 수 없는 내용을 가슴을 헤쳐 놓고 말할 수 있는 입장을 찾을 수밖에 없다 할진대, 이는 말할 수 없이 억울한 자리요, 말할 수 없이 처참한 자리가 아니겠느냐 하는 문제를 우리는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만일 세계 전부가 반발하는 자리에 그런 하나의 소녀가 있다면, 하나님은 지금까지 배신의 역로를 참아 나오던 그 모든 억울한 심정을 털어 놓고 그 소녀와 더불어 가겠다고 세상에 없는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순간이 남아질 것입니다. 그러한 순간은 낮이면 낮, 밤이면 밤이라는 어떠한 시간을 넘어 우주의 심정을 에이는 서글픔이 엇갈린 시간일 것이요, 그 자리는 누구도 동정을 하지 않을 수 없는 비참한 자리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소녀 자체가 하나님의 내정이 그러한 것을 알고 위로할 수 있는 자리까지 못 갔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소녀를 붙들고 다시 일어서서 뛰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계시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게 될 때, 그러한 하나님을 맞기 위하여 가는 길이 종교의 길이요, 그러한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안식의 한 날을 개척하기 위해 싸워 나가는 생활이 종교인의 생활인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 종교인들이 이 땅 위에서 행복을 그리워한다는 사실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땅 위에서 긍정적인 생활 여건을 찾는다는 것을 시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부정의 인연을 찾아가면서 부정의 극(極), 자기의 전체를 희생하는 최첨단에 서야 됩니다. 자기의 생명이 좌우로 엇갈리는 자리에 서서 그것을 결판지을 수 있는 순간을 거쳐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결의를 갖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들이 종교인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그렇게 심각한 하나님이시라면, 내가 그 심각한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아들이 되고, 억울한 하나님이시라면 내가 그 억울한 하나님을 모시고 위로할 수 있는 효자가 되어 보겠다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 사람은 어떤 다짐을 해야 할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는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 있어서 무엇을 그 중심의 골자(骨子)로 남겼느냐 하면,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이런 말을 할 수 있었던 예수님의 비운의 자세를 우리는 더듬어 보아야 되겠습니다. 그 누구도 헤아리지 못하는 운명길을 가슴 깊이 추구하는 마음이 격하면 격할수록, 하나님의 내정의 인연이 가중되면 될수록, 하늘땅을 붙안고 누구보다도 통곡할 수 있는 경각의 자리를 체휼한 사람이 아니면 그런 말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이 땅 위에 세계적인 주권을 가지고 세계를 움직이는 어떤 국가가 있다 할진대, 그 국가가 그냥 그대로 '내일의 소망을 품고 우리나라만 살아가겠다'고 하면 그 국가는 하나님과 상치(相馳)된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어느 민족이 그러하다면 그 민족도 역시 하나님과 상치된 자리에 서게 되고, 혹은 종족, 가정, 개인이 그러하다면 그 종족, 가정, 개인 역시 그러하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세계가 악한 세계인 것을 알게 될 때 그것을 품고 미련을 남긴 자리는 하나님이 거점을 삼을 수 없다는 것이 당연한 일임을 여러분도 능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거점으로 삼기는 나라보다는 민족이 쉬울 것이요, 민족보다는 종족이 쉬울 것이요, 종족보다는 가정이 쉬울 것이요, 가정보다는 개인이 쉬울 것입니다. 개인 가운데서도 고집 있는 사람보다 연약한 사람이 쉬울 것입니다. 또 남자와 여자를 볼 때, 주관이 강한 남자보다 주관이 약한 여자가 더 쉬울 것입니다. 여자 가운데서도 인간 생활에 있어서 시달림을 받아 가지고 상처를 입은 그러한 나이 많은 여자보다도 아무것도 모르며 순정을 꽃피우고, 선을 꽃피울 수 있는 나이 어린 여자가 쉽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의 거점을 찾을 수 있다 하더라도 거점을 찾은 시간부터 그 자리에 있어서 뜻을 성취해 낼 수 있겠느냐 하는 문제를 볼 때, 가냘픈 소녀에게 책임을 지워 가지고 같이 가는 하나님의 입장이라면 그것은 비참한 걸음일 것입니다. 그 소녀를 통하여 그 소녀의 할머니 어머니를 움직이고, 그 할머니 어머니를 통하여 여자들을 움직이고, 그 여자들을 통하여 남자들을 움직이고, 그 남자들을 통하여 가정을 움직이고, 그 가정을 통하여 나라를 움직이고, 그 나라를 통하여 세계를 움직여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외로운 비운의 역사를 거쳐 천국을 향하는 하나님의 걸음이 얼마나 불쌍하고 딱하냐는 사실을 우리는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종교든지 현재 살고 있는 환경에서 내일의 소망의 내용을 제시할 때, 그 환경에서 그냥 그대로 살라고 가르쳐 주는 종교는 없습니다. 현실을 부정하고, 사회제도를 부정하고, 자기 삶의 터전을 부정하고, 자기의 생활을 부정하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악이 세계적인 판도를 점거하고 있는 현시점에서 참이라는 것은 악과 상관될 수 없는 것입니다. 상대적인 여건도 구할 수 없는 입장이 참의 기준이라고 생각하게 될 때, 참된 기준의 사람은 오늘날 악이 점거해 있는 사회의 여건에 보조를 맞추는 자리에서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참된 종교는 오늘날 인간이 살고 있는 악의 환경에서 긍정적인 여건을 일체 요구하지 않습니다. 부정 중에도 절대적인 부정을 합니다. 절대 부정하는 자리에서 숭고하고 절대적인 참의 뿌리를 내리고 싶고, 하나의 환경을 갖고 싶은 것이 절대적인 참의 자리에 선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가 하나님의 거처가 된다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 하는 역설적인 논법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사회 실정을 두고 볼 때, 어떤 장관이면 장관은 그 장관 자리를 잃게 될까봐 거기에 생명을 걸고 있습니다. 그 자리를 잃지 않기 위해서 제2의 길, 제3의 길을 택하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환경을 확보하기 위해서 자기의 재산과 생명을 걸고 있는 사실을 볼 때, 이런 판국에는 하나님이 찾아오실 수 있는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천국의 거점이 어디에 있느냐? 오늘날까지 수많은 기독교인들 가운데는 '예수님 믿어 천국 가겠다'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 천국의 거점이 어디에 있느냐? 예수님은 천국이 어디 있느냐고 묻는 베드로에게 '천국은 하늘나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네 마음에 있다'고 했거늘, 네 마음에 있다고 한 그 천국의 거점이 어디일 것이냐? 슬퍼하는 마음이 천국의 거점이 되겠느냐, 자기를 내세우려는 마음이 천국의 거점이 되겠느냐, 사회를 부정하는 마음이 천국의 거점이 되겠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이것들은 우리가 바라는 내용을 가진 거점이 아니요, 하나님이 찬동할 수 있는 천국의 거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천국의 거점을 찾는 사람은 이 땅 위의 그 누구보다도 고독한 자리에 부딪쳐야 된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왜 그러냐? 하나님이 고독하기 때문에 그 사람도 고독해야 되고, 하나님이 극복의 역사를 거쳐왔기 때문에 그 사람도 극복의 역사노정을 거쳐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늘땅에 슬픔이 가득하다고 해서 인간이 그 슬픔만을 느끼고 회개하고 통곡하며 눈물만을 흘린다면 그 자리가 천국의 거점이 될 수 있을 것이냐? 그것 가지고도 안 되는 것입니다. 새로운 기쁨을 누릴 수 있는 때를 바라면서 교단을 섬기는 반면, 이 세상의 죄악을 해결해야 되겠다는 마음의 결의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책임을 다짐할 수 있는 하나의 모습을 가리는 방향이 없어 가지고는 하늘의 거점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사실입니다.
그 거점, 천국의 거점은 어디냐? 사람들 가운데는 자기는 양심적인 사람이고 사회적으로 상당한 위치를 가지고 있고 사람들이 우러러볼 수 있는 자리에 있기 때문에, 천국은 자기에서부터 시작한다고 당당하게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선과 악이 같이 출발한다는 인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런 생각이 통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선과 악은 동시에 출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악이 동쪽으로 가면 선은 서쪽으로 가야 되고, 악이 움직이면 선은 정지해야 되는 것입니다. 또, 악이 욕망을 가지면 선은 욕망을 가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선과 악은 반대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생각해 볼 때, 하나님이 인간세상을 찾아 나오실 때 인간세상에서 그 누구보다도 소망을 가지고 하늘나라에 인연을 맺을 수 있을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출발은 인간세상에 대한 소망을 다 잃어버린 데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생활에서 만족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참다운 종교인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들도 잘 알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사가 엇갈리는 운명에 부딪쳐 슬픔의 절정에 들어가 자기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는 절망의 도탄 가운데 서게 될 때, 그 삶의 방향이 당연하게 내일을 그리는 습관적인 인생 행로에 서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생명까지도 부정하는 자리에 서서 새로운 가치를 더듬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나가는 데에서부터 참다운 선의 출발의 거점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러한 논거에 의해서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내 인격이 하늘의 거점이라고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느냐? 없는 것입니다. 또 '내가 지금 거느리고 있는 가정이 하늘의 거점이다. 하나님이 계시면 우리 가정을 모른다고 할 수 없다'고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있는 가정도 역시 없다는 것입니다. 혹은 우리의 종족은 이러이러한 역사적인 선의 공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의 종족을 모른 척할 수 없다고 자신할 수 있는 종족이 이 세계에 어디 있느냐? 그러한 민족이 어디 있느냐, 국가가 어디 있느냐, 주의 사상이 어디 있느냐 할 때, 기가 막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말이 무슨 뜻이냐? 천년 살기를 바라는 사람은 악의 세계에 있어서 자기 자신을 천년 이상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라야 천년 살겠다는 꿈을 꿀 수 있는 것이요, 만년 살기를 바라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만년 이상 희생하더라도 그것을 고맙게 생각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만 만년을 살 수 있는 소망의 거점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마찬가지로, 영원한 생명 영원한 행복 영원한 천국을 부르짖는 사람이 있다 하면, 그는 영원을 중심삼고 현시점을 극복해야 되며 현시점에 있어서 자기를 희생하고 참고 넘어갈 수 있는 자리에 서야 합니다. 이러한 자리에 서야만 영원한 거점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그 말이 사실이라면 하나님의 뜻은 언제 이루어질 것인가?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 뜻은 언제 이루어질 것이냐? 그런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역사노정에서 이 땅 위에 왔다 갔던 사람 가운데는 수많은 성현들이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문화세계에는 그 성현들의 가르침이 세계화되어 있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각 나라의 헌법, 그리고 대한민국의 헌법도 역시 성현들의 가르침 가운데서 중요한 골자를 중심삼아 가지고 되어 있는 것입니다.
역사노정에 있어서 많은 훌륭한 사람들이 이 땅 위에 왔다 갔는데 언제 한번 하나님이 그런 훌륭한 사람들과 손을 잡고 안팎의 생활이념을 의논할 수 있는 때가 있었느냐? 없었다는 것입니다. 생활이념이라 하게 되면 가정, 사회, 국가에 대한 것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생활이념을 의논할 수 있는 자녀가 있었다면 하나님은 덜 불쌍하셨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당신의 사정이 통할 수 있는 한 사람을 찾기 위하여 지금까지 수고해 나오신 것입니다. 그 하나의 사람을 만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이 땅 위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기 전까지 이스라엘의 4천년 역사에서 수많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참된 하나의 남성을 표준으로 세워 수습하기 위하여 노력하신 것입니다. 진정 하나님은 내심이 통할 수 있고, 사정이 통할 수 있고 내적인 인연이 하나의 공동적인 결의와 더불어 하나의 행보를 갖출 수 있는 거점을 이 땅 위에서 찾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수난길을 걸어 나오신 것입니다.
이 땅 위에 사람이 많지만 그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의 사정을 알 수 있는 특정한 한 사람을 찾아 나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찾아 나오시는 데는 역사노정에 있어서 평탄한 길을 통하여 찾아 나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 누구보다도 비참한 역사과정을 통해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을 한번 해볼 수 있는 남성이 있다면, 그러한 하나의 남성을 찾아 그 남성을 중심삼고 비로소 말을 한번 해보자, 그 남성과 한마디의 말을 해봐 가지고 그 한마디의 말을 통하여 기뻐하고, 그 한마디의 말을 통하여 하나의 인연을 거쳐서 폭을 넓히고 환경을 가려 가지고 한 사람의 생활권을 한번 가져 보자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금까지 그 한 사람을 찾아 나오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종교인들은 천국은 자기 종교를 통하여서만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그것은 모두 망상적인 말입니다. 수많은 종교가 각기 교주를 중심삼고 그 교주가 가르치는 교리를 통하여 하늘나라가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기독교만 보더라도 수십 개의 종파로 갈라져 있습니다. 자기 종파가 아니면 이단시하고 사탄시하는 현실에 있어서 그 교단이 하나님으로부터 공증을 받은 자리에서 그런 말을 한다면 모르지만 단지 자기 종파를 세우고 자기 종파를 남기기 위한 욕심에서 그러는 것입니다. 동기가 순수하지 못해요.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종단은 모두 망해야 된다구요. 만약 오늘날 통일교회가 그렇다면 통일교회부터 망해야 됩니다.
이렇게 볼 때, 종교의 사명에 있어 선결문제는 천국을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일차적인 목적이 아닙니다. 천국이 나오기 전에 천국을 이어받을 수 있는 하나의 특정한 민족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민족을 만들기 위해서 선민을 선별하여 택하신 것입니다. 역사상에 이런 선민사상이 있다는 사실은 악의 세상에 선의 일파를 남기기 위한 주도적인 사조가 역사의 배후에 남아 있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악의 세계에서 선민이 나오게 되면 하늘나라는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하늘나라의 백성이 나오기 전에 먼저 하늘나라의 자손이 나와야 됩니다. 백성과 나라가 나오기 전에 하늘나라를 이룰 수 있는 가정이 나와야 됩니다. 가정이 나오려면 하늘이 생애를 걸고 보장할 수 있는 하나의 남성이 나와야 되고, 하나의 여성이 나와야 됩니다.
그러면, 그러한 남성과 여성만 나오면 되느냐? 아닙니다. 그 남성과 여성을 통해서 아들딸이 나와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영원한 아들딸이라고 보장할 수 있는 하나의 가정이 나와야 됩니다. 이러한 가정이 없이 종족 민족을 이룰 수 없고, 그런 민족 없이 국가와 세계를 이룰 수 없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찾아 나오시는 거점은 개인입니다. 개인에게 울타리를 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종교는 개인 구원을 목적으로 해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찾고 있는 구원의 목적은 개인이 아닙니다. 가정이예요, 가정. 그러므로 천국 가정의 기반을 찾아 세우기 전에 천국 종족, 천국 민족, 천국 국가, 천국 세계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찾고 있는 남자는 어떤 사람이겠느냐? 어떻게 생겼겠느냐? 성경에 기록된 엘리야의 예언을 보게 되면,'이 세상의 끝날에는 악의 세계에 빠져 있는 인간을 구할 수 있는 주인공이 온다'고 했습니다. 새로운 인간세계의 주인공이 온다는 것입니다. 에스겔, 이사야, 예레미야등 4대 선지자들이 예언하는 것을 보면 모두 그 내용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누구냐?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이라고 합니다. 자기들이 예수장이니까 예수라고 하겠지만 일반 사람들은 어디 그럽니까? 불교 믿는 사람들은'예수가 왜 그 사람이냐? 동정녀 마리아가 누구고, 그 아비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추하게 난 예수인데…'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자기들이 예수를 믿으니까 마리아가 성령으로 예수를 잉태했다고 하지 불교에서 보면 예수는 사생아입니다. 그렇잖아요?
아버지가 없이 태어났다는 말은 세상에 통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믿기를 잘하니까, 주먹구구식으로 누가 어떻다 하면 그것을 믿으려고 하니까 통하지요. '야!' 하는 데 있어서 좋은 마음을 가지고 '야!' 하는지, 나쁜 마음을 가지고 '야!' 하는지를 판단할 수 있는 지능을 가진 사람은 '예'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인들 가운데는 별의별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사람들은 각기 자신이 하나님이 찾고 있는 기독교인이라고 하지만 어림도 없다구요. 그들의 내부에는 권위의식이 꽉차 있습니다. 거의 출세를 꿈꾸고 있어요. 그들은 악당의 사촌쯤은 될 거예요. 그러니 하나님의 선한 아들딸은 못 돼요. 이 자리에 그런 분들이 왔다면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섭섭할지 모르지만 할 수 없습니다. 섭섭해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남자 중에서 그래도 하나님이 관심을 가질 수 있는 남자는 어떤 사람이냐? 성인입니다. 성인은 세계주의자예요. 세계주의자가 아니면 성인의 반열에 못 들어갑니다. 성인을 보면 공자도 세계주의자요, 석가도 세계주의자입니다. 예수도 갈릴리 해변을 돌아다니다 33세의 총각으로 뜻을 못 이루고 죽긴 했지만 세계주의자입니다. 마호메트도 세계주의자입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성인 축에 못 들어가는 거예요. 소크라테스는 철인이지 성인은 아닙니다. 철인(哲人)은 진리의 왕은 될 수 있으나 생명을 주관하지는 못합니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생명을 주관 하느냐? 종교만이 생명을 주관합니다. 종교 가운데 무슨 종교냐? 하나님을 모시는 종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인에게는 생명을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성인은 세계적인 주의 사상을 갖고 있습니다. 또한 신을 부정한 성인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는 기독교의 우두머리가 되었지요? 석가도 불교의 우두머리, 공자도 유교의 우두머리, 마호메트도 회회교의 우두머리가 되었지요? 그러면 그들의 맨 꼭대기에는 누가 서 있느냐? 그들 자신이 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신이 서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많은 얘기를 여러분에게 할 시간은 없지만, 성인의 반열에 서기 위해서는 세계주의자가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통일교회를 보게 되면 통일교회 사상은 천주주의입니다. 통일교회의 주의는 세계주의보다 더 큰 것입니다. 그렇다면 통일교인은 성인들보다 더 낫겠다는 말이예요? 통일교인이 성인들보다 더 낫겠다면 하나님이 좋아할까요, 나빠할까요? 하나님께서 '고얀 녀석들, 너희들이 역사적인 성인들보다 더 나으려고 해? 라고 하시겠어요?
오늘날 기독교는 태평합니다. 예수 믿어 구원받겠다고 하지만 통일교회는 예수만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습니다. 성경을 보면 바울이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 8:35)"라고 했습니다. 주 예수의 사랑 가운데서 왜 못 끊어요? 끊을 자가 하나님이지요? 하나님은 끊을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시하는 조건과 하나님이 제시하는 조건은 다릅니다. 예수는 죽지 않으려고 하는데 하나님은 죽으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바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시옵소서' 한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를 보면, 과거에 생각하는 사람이 없을 때는 목사 노릇 잘 해먹었지요. 그렇지만 요즘 같은 시대에는 그 목사 노릇 해먹기가 힘들어요. 내가 통일교회의 책임자라고 생각한 적이 없어요. 오늘날 기독교는 사방으로 그 권위가 뚝 떨어졌어요. 조금 생각 있는 사람이 목사에게 성경에 대해 궁금한 것을 세 번만 묻게 되면, 목사 아니라 목사의 할아버지라도 대답을 못 하고 쩔쩔매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통일교회에서는 그 누구도 생각지 못하는 '천주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되고 안 되는 것은 여러분들의 결의에 달려 있습니다. 할 수 있다고 결의하면 되는 것이요, 할 수 없다고 결의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엉뚱한 생각을 하는 패가 통일교회의 패입니다. 그러나 엉뚱한 생각을 하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사람은 미친 사람입니다. 망상주의자예요. 그렇지만 엉뚱한 생각을 행동으로 나타내어 가지고 그것이 나타나는 날에는 엉뚱한 승리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천주주의라는 이름을 갖다 붙인 것을 이해할 수 있겠지요. 가망성이 없는 것같이 보이지만 가망성이 있기 때문에 하는 거예요. 그러니 여러분은 여기에 위안을 받으라는 거예요.
그러면 통일교회는 성인의 도리를 따라갈 것이냐, 성인을 가르쳐 줄 수 있는 도리를 찾을 것이냐? 난 성인의 도리를 따라가고 싶지 않아요. 여러분들은 어때요? 이 말에 반대하는 사람이 있으면 손들어 봐요. 만약 '성인의 도리를 따라가야지, 성인을 가르칠 도리가 있나?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사리판단이 부족한 사람입니다. 어린 소녀들도 그렇지 않다는 거예요. 통일교회는 성인의 도리를 따라가는 사람이 되지 말고 성인을 가르칠 수 있는 그런 것을 찾아가자 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백성으로 태어나 가지고 이왕 죽을 바에는 세계에 대한민국을 힘껏 자랑이라도 하고, 대한민국 만세라도 부르고,'이놈의 자식들, 내 손아귀에 죽을 것인데. 내가 한 발자국 더뎌서 이렇게 돼 있지, 본래 죽게 되어 있는 것이 너희들이다'고 말이라도 하고 죽으면 죽은 패 가운데서도 애국자로, 최고로 높이 올라가는 거라구요. 그렇지 않아요?
성인들의 마음에도 고통이 있었고 걱정이 있었습니다. 통일교인들은 그런 고통 걱정도 넘어서자는 것입니다. 그 주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는 극단적으로 밤이고 낮이고 뒤넘이치는 것입니다. 문제가 간단하지 않아요.
자, 그러면 앞의 얘기로 돌아가서 하나의 남자, 모델형의 남자가 있을 것이 아니냐 하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 공장도 그렇지만, 공장에 가게 되면 철형을 만듭니다. 동그란 형이나 사각형의 철형을 만드는데 여기에 돈이 가장 많이 듭니다. 여기에는 정성을 들여야 됩니다. 다른 부분은 스위치를 한 번만 누르면 자동으로 물건이 나오지만 제일 힘이 드는것이 이 철형(鐵型),즉 일본말로 '가다(かた)'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자들은 철형이 무엇인지 잘 모르지요? 아무리 단단한 쇠로, 아무리 강한 힘으로 누르더라도 그 철형이 변해서는 안 됩니다.철형은 그 무엇으로도 변모될 수 없는 단단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 철형을 깍는데도 구멍만 뻥 뚫어 놓아서는 안 됩니다. 외각형인 구멍이 있으면 알맹이가 있어요. 이 알맹이가 구멍에 딱 맞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힘들어요. 구멍을 뚫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쉬운 일이지만 여기에 자유로이 들락날락할 수 있는 형을 만들기가 제일 힘들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하나님이 이러한 외각형을 만들었다면 그 외각형에 딱 맞아 가지고 들락날락하는 것을 만드는 것이 더 힘들 것입니다. 그것이 사람이라면 하나님이 그런 사람을 찾을 것입니다. 밤이나 낮이나 들락날락해야 하는데 하나님이 틀림없다 할 수 있는 것이 있어야 될 것이 아니냐는 거예요. 할 수 없어도 그것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완전한 것을 계획하신다면 그것이 없어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마음에 꼭 맞는 것, 하나님이 '그 정도면 백점이다. 만점이다' 할 수 있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이를 악물고라도 그것을 찾겠어요? 그게 맞아떨어지면 물이나 기름을 부었을 때 그것이 뚝뚝 떨어지겠어요? 물이나 기름을 붓고 아무리 출렁거려도 흘러 나오지 않는 그것을 찾겠어요? 하나님이 절대적인 분이시니 절대적인 것을 찾을 게 아닙니까? 이 땅 위에 그러한 남자 형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남자를 하나님이 만들어야 됩니다.
성인이면 성인의 모델형이 있어야 됩니다. 미터 원기(原器) 하나가 프랑스 파리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러한 원형이 있어야 됩니다. 그 원형의 기준이 무엇이냐? 여러분, 좋아하는 옷이 있다 할 때, 그것이 내 마음에만 들면 돼요? 마음에도 들고 그 다음은 몸에도 맞아야 됩니다. 마음에 썩 들어 입어 보았을 때 몸에도 딱 맞으면 기분이 좋지만 몸에 안맞는다면 '에게게' 하며 실망하는 거예요. 그 옷을 입을 수 없는 겁니다. 또, 몸에 맞더라도 그 옷을 입고 걸을 수가 없고, 팔도 맞긴 맞는데 팔을 움직일 수 없고, 활동하기가 불편하다면 그 옷은 입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옷은 마음에 맞고, 몸에 맞고, 활동하는 데도 맞고, 3단계에서 다 맞아야 됩니다. 그래야 좋은 것입니다. 목적의 세계는 거기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목적 없이 기쁨이 생겨나는 법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고 몸에 맞고 생활에 맞는 남성을, 성경을 보고 '이 사람이다' 하고 그려 낼 수 있어요? 예수를 지독히 잘 믿는다는 양반들을 불러 놓고 '성경은 생명의 말씀이요,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게 하는 말씀이므로 그 성경에서 하나님이 찾는 형의 남자를 찾으라' 하면 그들이 찾을 수 있겠어요? 예수가 그리던 모델형의 사람은 이 사람 이라고 하며 성경에서 찾아낼 수 있겠어요? 문제가 크다는 거라구요.
예수가 왜 죽었어요? 왜 죽었어요? 모델 케이스에 꼭 맞는 사람이 있어서 죽었다고 하면 그게 말이 됩니까? 그런 시시한 말은 하지 말라는 거예요. 예수가 왜 죽었어요? 원형(原型)에 맞는 사람이 있어서 죽었어요, 없어서 죽었어요? 로마 병정들이 예수를 믿었다면 예수를 죽였겠어 요? 빌라도가 예수를 믿었다면 예수를 죽였겠어요? 제사장이 예수를 믿었다면 예수를 죽였겠어요? 그들의 모형이 예수가 바라는 모형과 같았으면 예수를 죽였겠어요, 같지 않으니까 죽였지요? 같지 않아서 죽였지요?
그럼 예수가 자원해서 죽었어요, 할 수 없어 죽었어요? '아바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피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한 것을 보면 예수는 자원해서 죽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기도를 한 번도 아니고 세번씩이나 했습니다. 그걸 따지고 들어가면, 이 땅에 죽기 위해서 왔다면 그런 기도를 할 필요가 뭐 있겠어요. 즐겁게 죽기를 결심하고 그 자리에 나서야지. 예수가 죽음이 두려워서 그런 기도를 했다면 예수는 구세주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 여러분은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님과 뜻이 맞아서 예수님이 죽었다고 생각해요? 맞지 않아서 죽은 거라구요.
어떤 사람이 지방으로 출장을 가서 그곳에서 일을 다 마치고 돌아왔다면 또다시 그곳에 출장을 갈 필요가 있겠어요? 또다시 가야 된다면 그 사람은 태만한 사람이고 회사에서 제거되어야 될 사람인 것입니다.
이런 걸 보게 될 때, 예수가 하고 싶어했던 그 생활, 예수가 만나고 싶어했던 그 사람, 예수가 같이 말하면서 계획하여 역사를 새롭게 편성하고 싶었던 그 배후의 전후관계가 어떠했느냐가 큰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는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요 16:12)",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못하거늘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요 3:12)",또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눅 12:49)"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 위에 불을 던졌지만 불이 안 붙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먼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어야 됩니다. 얼마만큼 맞아야 되느냐? 하나님이 영원한 목적을 중심삼고 영원한 이념을 그려 나가는 분이시라면 영원을 두고 마음이 어떻게 되어야 돼요? 맞아야 돼요, 안 맞아야 돼요?「맞아야 됩니다」 한 십년쯤 맞다가 안 맞으면 안 됩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께 영원히 마음을 맞추어야 됩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영원히 마음을 맞출 수 있고, 영원히 서로 좋아할 수 있는 아버지의 아들이 되어야 됩니다. 그런 아들이 되려면 슬픔의 대상으로 나타나서는 안 된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거기에 천국이 있을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뭐냐? 하나님의 몸에 맞아야 됩니다. 몸은 방향성이 있는 거예요. 방향성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생각은 사방의 중심점을 대신하지만 몸은 방향성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몸이 동으로 간다 하게 될 때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아들이 되려면 하나님과 더불어 동으로 가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따뜻한 것을 좋아하는데 예수는 찬 것을 좋아하면 되겠어요? 하나님은 지금 웃고 싶고 말하고 싶은데 예수는 자고 싶다 하면 되겠어요? 외적인 몸을 중심삼고 나타나는 모든 것들이 일치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만으로 되느냐? 아니예요, 하나님은 오순도순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괄괄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오순도순할 때는 오순도순해야 합니다. 안팎이 맞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안팎만 맞으면 다 되느냐? 그 다음에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과 일치가 되어야 됩니다. 그러려면 마음에 없는 일이 있을 수 있겠어요? 몸이 싫어하는 일이 있을 수 있겠어요? 몸 마음이 좋아하는 일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일이 있다는 거예요. 또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예수님도 그러한 일을 좋아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몸 마음을 중심삼고 행동이 일치되어야 하는데 그 행동이 집안에서만 일치되어 가지고 되느냐? 그것은 대사회 대세계에도 나타나야 됩니다. 그 대사회 대세계를 대해 나타나게 될 때에는 세계적인 권위를 갖추어야 되고 세계적인 법례와 위신을 갖추어야 되는데도 불구하 고, 집안에 있는 아들딸은 철부지여서 방안에서만 우리 아빠는 요렇다고 쫄랑쫄랑거리면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엄연하게 해야 될 때는 엄연하게 행동해야 되고, 엄숙하게 해야 될 때는 엄숙하게 해야 되고, 권위를 갖고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 영원히 좋아해야 되겠다 할 때는 가만히 앉아서 좋아하겠어요, 무엇을 하면서 좋아하겠어요? 가만이 앉아서 좋아할 수 없는 거라구요. 무엇을 하면서 좋아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는 데 있어서 무엇을 할 것이냐? 목적이 있다구요. 목적을 이루고 좋아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가 그런 생각을 해보았어요? 세례 요한이 '세상의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이다'라고 예수님을 증거했다고 해서 예수님이 다 되었어요? 아기를 낳아 가지고 그 아기를 사랑하지 않는 부모가 있어요? 부모가 낳을 때 아이를 사랑하면 다 되는 거예요? 어림도 없다구요.
예수가 태어날 때 사랑하는 아들로 태어났으니 예수가 죽을 때 하나님이 좋아했겠어요? 그런 말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땅 위에 예수를 보낸 것은 영원히 아들을 바라보며 좋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도 영원을 두고 슬퍼해야 하는 세상이 되었으니 비참하다는 것입니다. 뜻을 못 이룬 거라구요.
남자로 왔던 역사적인 성인들 가운데 누가 성인 중의 성인이냐?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다 할 때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법학을 연구하는 사람은 그 법학을 중심삼고 좋아하는 것처럼 자기의 전문 분야를 중심삼고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과거에 했던 일을 중심삼고 좋아하는 사람이 여러 가지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분야를 넘어서 가지고 전체의 분야에 적용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다 할 때는 일방적이예요, 사방적이예요? 어디, 여기 할머니들 어때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다 할 때 일방적이예요, 사방적이예요? 내가 사랑하고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일을 할 때 그 사람과 떨어져서해요, 같이 해요? 같이 하지요? 그러면 내가 슬퍼할 때는 떨어집니까, 아니면 그 슬픔을 같이합니까? 같이하지요? 또 내가 기뻐할 때는 떨어집니까, 같이 기뻐합니까?「같이 기뻐합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그건 아는구먼.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이 제일 좋아하는 성인은 누구냐? 대답은 간단히 나와 있습니다. 누구일 것이냐? 하나님이 무엇을 기준삼고 좋아하시겠느냐? 사랑을 가지고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런 방향을 중심삼은 성인의 가르침은 어떠한 것이어야 되느냐?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그리워하고. 거기에 따라가겠다고 안간힘을 다하는 내용을 가르쳐야 되고, 그렇게 몸부림친 사실을 남겨야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예수 그리스도가 세계에서 톱(top)입니다. 그는 '하나님은 우리의 주인이다. 하나님은 내 아버지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결론입니다. 하나님이 누구라구요?「아버지요」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는 그 아버지의 뼛골을 이어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가 슬퍼지면 자식도 자동적으로 슬퍼진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슬퍼할 때 '아버지 슬퍼해요?'라고 물어보고 슬퍼하는 자식이 있어요? 묻더라도 같이 슬퍼하면서 묻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이라는 정서적인 문제를 중심삼고 최고를 때려잡은 것입니다. 최고를 거머쥐고 나섰다는 것입니다. 욕심 많은 예수는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다' 하고 끝냈으면 되었을 텐데, 거기에다 '나는 누구냐 하면 하나님의 아들은 아들이되 독생자다'고 했습니다. 독생자가 뭐예요? 사랑이 있으면 그 사랑을 나누어 갖겠다는 사람이예요. 독차지하겠다는 사람이예요? 독차지하겠다는 거라구요.
사랑을 나누어 갖는 법이 있어요? 사랑을 두고 '야, 너 그만큼 갖고 나이만큼 갖자'고 할 수 있게 되어 있어요? 형제끼리도 부모의 사랑을 중심삼고 서로 내 아버지라고 다투는데…. 어제 내가 청평에 갔었는데 거기에 어떤 남매가 있었습니다. 그 누이가 자기 아버지에게 '내 아버지야' 하고 그 아버지의 무릎에 앉자 그 오빠는 '네 아버지도 되지만 내 아버지도 된다. 네가 아버지 무릎에 앉으면 나는 아버지 등에 업힌다' 하며 한술 더 뜨는 거예요. 앉는 것도 좋지만 등에 업힌다는 것입니다. 그러고는 어떤 것이 더 좋으냐고 헤헤 웃으며 자기 아버지라고 하는 것을 볼때, 사랑은 독점이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무릎에 앉은 동생에게까지도 오빠가 굴복하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것을 볼 때, 예수님은 욕심장이였다는 거예요. 또, 예수님은 세상의 수많은 남자들 가운데서도 하나님에 의해서 처음으로 태어난 아들이었습니다. 시시한 아들딸들은 다 필요 없고 진짜 아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절대자의 진짜 아들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진짜 아들이 되어 가지고 무엇을 하자는 것이냐? 하나님의 살림살이나 맡는 아들이 되면 뭐해요? 밥이나 배부를 때까지 실컷 먹고 살에 기름기만 흐르게 사랑받는 아들이 되고 싶은 사람이 있어요? 밥을 못 먹고 고생을 하더라도 아버지의 꽁무니를 따라다니면서 아버지 속에 알뜰하게 숨겨져 있는 뜨거운 사랑을 독점하겠다는 아들, 그런 아들이 제일 무서운 아들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예수님이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고, 하나님의 사랑을 내 사랑이라 했고, 하나님이 자신을 빼놓고는 사랑할 수 없다고 말한 것을 보면, 예수님은 성인이 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다른 성인들의 가르침은 인륜, 즉 인간의 생활권에는 들어 갔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처럼 심정권까지는 못 들어간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말하기를 '나는 신랑이요 너희들은 신부다'고 했습니다. 자기를 추종하는 추종자들과 그 주체가 관계를 맺는다면 신랑 신부 이상으로 관계를 맺는 자리는 없습니다. 상대적인 인연을 가지면 그 이상의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어디에 있어요?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나는 신랑이요 너희는 신부다'고 말한 것입니다.
신랑 신부의 관계이지만 지금은 사랑을 맺어서는 안 됩니다. 끝날에 깨끗이 준비해 가지고 맞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끝날에 예수가 신랑으로 올 때에 기독교인들은 신부가 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신부 되겠다는 양반네들 하는 것을 보면 참 훌륭하지요. 아침에 교회에 기도하러 와서는 '하나님, 나 왔소. 어제 아침은 싸웠지만 오늘 아침은 이렇습니다. 타락한 인간이니 어쩔 수 없지 않소? 어제 지은 죄를 용서하시고 …오늘은 모르겠습니다'라고 기도합니다. 생각해 보라구요. 그런 사람들이 예수님의 신부라구요?
그런 신부는 대학교수라 하더라도 발길로 차 버릴 가치도 없는 신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하늘나라의 황태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황태자가 그런 시시한 신부를 맞아서 일생 동안 같이할 수 있겠어요? 하나님은 사랑이니 그럴 수 있다고 할는지 모르지만 사랑에도 골수가 있다구요.
또 예수님은 신자들을 대하여 종이라고 하지 않고 형제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볼 때, 가장 정서적인 문제를 전부 규합해 가지고 어디에 못을 박았느냐 하면, 가정에다 못을 박았습니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가 소원하는 근거지는 어디냐? 가정입니다. 가정을 중심삼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찾고 있는 참아들이 나오면 참딸이 나와 가지고 참부부가 되고, 그 참부부를 통하여 참아들딸이 나오고, 그 다음에는 참형제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누가 바라는 소원의 기준이냐? 예수가 바라는 소원의 기준입니다. 이것을 갖지 못하면 그것은 낙제예요. 효자가 못 되는 것입니다, 그 소원의 기준은 예수가 바라는 기준도 되겠지만 예수가 바라기 전에 하나님이 바라시는 절대적인 소원의 기준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국에는 어떠한 사람이 가느냐? 세상에 있어서 깨가 쏟아지도록 의좋게 사는 어떤 부부가 있었는데 남편이 죽으면서 '당신, 나를 만나서 수고했소. 우리 둘의 사랑만은 아주 훌륭했소'라고 할 때, 아내가 '그렇고 말고요. 그것만은 훌륭했습니다'라고 했다고 해서 하나님이 '알뜰하게 살아온 너희들이 천국 가정의 모델 케이스'라고 인정을 해줄 수 있겠습니까?
또, 사랑하는 자식이 얼마나 예쁜지 그저 죽어서도 사랑하고 싶다는 부모가 있더라도, 그 사랑하는 자리가 하나님과 예수가 사랑하는 자리와 같은 자리의 사랑으로 공인될 수 있겠어요? 어때요, 공인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것을 공인할 수 있다면 세상은 큰일이 난다는 거예요. 같을 수 있다면 하나님이 구태여 이 땅에 예수님을 보내 가지고 그런 일을 할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종류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런 복잡한 문제가 있습니다.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하는 데 있어서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효도하여 청사에 길이 효자의 표준을 남긴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중심삼아 가지고 부자의 관계에 있는 예수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바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피하게 하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심각하게 하나님과 결정적인 문제를 해결하던 그 기준을 대표할 수 있는 효성의 기도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느냐?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천국에 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세상에서 재미있게 잘사는 부부가 되는 것보다 하나님의 공인 아래서 재미있게 잘사는 부부가 되어야 됩니다. 또, 자식을 낳아서 기르는 데 있어서도 자기들 끼리끼리 관계를 맺어 가지고 자식을 낳아 기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인 아래서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부자의 인연을 맺어 가지고 부모면 부모로서 자식을 더 사랑해야 되고, 부부면 부부끼리 더 사랑해야 되고, 형제면 형제끼리 더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오늘날의 이 세계가 사탄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악한 세계입니다. 악한 세계에서 자랑하는 사랑과 선한 세계에서 자랑하는 사랑과는 차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악의 세계는 평면적이요, 선의 세계는 입체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계에 있는 수많은 천군천사 천천만 영인들도, 또 지금까지 왔다 갔던 역사적인 성인 현철들도 모두 그 사랑에 매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에 갈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아내보다 더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요, 부모보다 더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요, 자식보다 더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랑하지 않으면 천국에 못 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절대적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네 아비나 네 어미나 그 누구보다 날 더 사랑하지 않으면 나의 제자가 못 된다'고 하였습니다. 또 거기에 첨부하여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은 나의 제자가 못 된다'고 했던 것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과 제일 가까운 사람이 되기를 강조한 것도 되지만 자기의 책임감을 제일 강조한 것도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천국의 거점은 어디냐? 예수님이 천국은 네 마음에 있다고 했던 말과 예수님이 찾아 나오는 소망의 거점과 일치가 되느냐 할 때, 이것은 성경 자체만 두고 보면 모순이요, 상충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 과정을 누가 연결시키느냐? 오늘날 이 기독교와 예수와 성신이 연결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예수가 찾아 나온 것은 무엇이냐? 마음속에 천국을 지닐 수 있는 남성으로서 그럴 수 있는 여성을 맞아 가지고 상대적 권(圈)에 천국 평면 기준권을 성립시키지 않고는 평면적인 지상에 천국은 건설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가 지상에 와 가지고 개인적으로 일치된 천국의 기반은 완성했는지 모르지만 상대인 신부의 환경을 중심삼은 천국의 기반은 완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을 소원으로 삼고 기독교가 수많은 희생의 대가를 치르며 길을 닦아 나온 것입니다. 이것은 끝날에까지 고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자가 가야 할 길은 어떤 길이냐 하면, 첫째는 내가 완전한 인간이 되는 것이요, 그 다음에 상대를 맞는 것이요, 그 다음에 가정을 이루어 아들딸을 낳는 것입니다. 아들딸은 낳아 가지고 무엇이 되느냐 하면, 자기 씨족의 족장이 되는 것이요, 족장이 되어 가지고 선의 족장들을 거느릴 수 있는 민족장이 되는 것이요, 민족장이 되어 가지고 주권자가 되는 것이요, 주권자가 되어 가지고 하늘 아버지와의 상대적 관계에 있어서 세계를 주관할 수 있는 최고의 승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건 남자가 가는 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 중에 세계를 자기의 것으로 만들고 싶은 욕심이 없는 남자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욕심을 갖지 않은 남자는 남자가 아니라구요. 사람 축에도 못 들어가는 남자입니다. 그러한 소망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없어서 그렇지 일자무식, 왕무식장이일지라도 세계를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은 것은 당연한 거예요. 그런 욕심은 인류역사 이래 미래까지 영원히 계속되는 것입니다. 이 말에 이의 있어요? 이의 있어요, 없어요? 나도 그런 사람인데 여러분은 어때요? 여러분은 안 그래요? 그런 욕심이 없다면 하나님의 아들이 못 되는 거라구요. 그런 욕심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우주의 제일 왕초 아니예요? 왕초는 속된 말로 쓰이는 말이지요. 다시 말하면 거룩한 분이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아들이 되려면 세계적인 챔피언이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남자, 세계적인 남자가 되어 가지고 세계적인 최고의 상대를 찾겠다고 하는 꿈, 우리 남자 청년들 그런 꿈이 있어요, 없어요? 대학을 가서 학박사가 되고 무슨 장(長)이 되면 고독단신이라도 좋다고 하겠지만 혼자서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혼자서는 행복할 수 없어요. 그래, 과부 되는 게 좋다는 여자가 있어요? 좋아해 보라는 거예요. 홀아비 되는게 좋다는 남자 있어요? 좋아해 보라는 거예요. 좋아할래야 좋아할 수 없습니다. 행복이란 상대적인 여건 하에서 성립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불쌍한 남자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천지를 네 마음대로 해라. 하늘도 마음대로 하고 땅도 마음대로 해라'고 했다면 예수님은 어떻게 했을까요? 간단합니다. 그것은 뻔하지 않아요? 천지에 부족함이 없는 안팎의 인격을 갖추어 가지고 '야! 천하야, 나 이러고 싶은데 너희는 어떠냐? 하고 물으면 천하가 '예이, 그리 하소서' 하는 자리를 원했겠어요, 원하지 않았겠어요?
여러분들 예수가 욕심이 없다고 생각하지요? 그런데 예수는 욕심장이라구요. 욕심장이예요. 종교의 도주들은 모두가 욕심장이예요. 통일교회의 문선생이라는 사람도 욕심장이예요. 욕심이 지독하게 많은 사람입니다. 욕심이 지독하게 많은데 무슨 욕심이 많으냐 하면 다른 사람과 내용이 조금 다른 것입니다. 그 내용이 조금 다를 뿐이지 욕심은 많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욕심이 없을 것 같아요? 성경을 보면, 예수님 당시에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는데 세리는 사람 취급을 못 받았습니다. 세리는 나라의 돈을 긁어다가 로마에 바치는, 나라를 좀먹는 패였습니다. 그러한 세리들과 로마인들을 대하여 예수님은 '하나님, 저들이 행하는 것을 알지 못하여 그러하오니 저들의 죄를 용서하시옵소서' 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그들의 종이 되기 위해서 그랬어요, 그들을 예수님의 종으로 만들기 위해서 그랬어요? 그들을 예수님의 종으로 만들려고 그랬다고 봅니다.
천국을 건설하려면 머리가 좋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천국을 설계하려면 머리가 있어야 돼요. 낫 놓고 기억자도 못 그리는 사람을 데리고 천국을 건설할 수 있겠어요? 그러니 머리를 가진 문화인이 필요하다는 거라구요. 예수님 당시에는 로마가 필요했다구요. 그때에 로마제국은 모든 문화의 집중지였습니다. 그런 로마제국이 필요했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로마제국이 갖추고 있는 문화권, 그 이상의 기반을 꿈꾸고 있었는데 이스라엘 민족으로는 어림도 없었기 때문에, 이 다음에 써먹을 수 있는 소망을 두고 그들의 죄에 대하여 용서를 빌었던 거라구요. 이 다음에 종으로 만들기 위해서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 예수가 하늘땅을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면 천하에 일인자가 되었겠어요, 안 되었겠어요?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는 데 있어서는 폭군같이 총칼로 위협하여 강제로 굴복시켜 가지고는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무엇인지도 모르게 만민이 굴복할 수 잇는 인격의 권(圈)을 가지고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일인자가 되면 그 다음에는 어디로 갈 것이냐? 세계의 군왕이 되어 가지고 세계의 모든 대통령들을 만나고, 만조백관을 거느리고 매일 조회를 하고, 국가를 다스리는 법을 중심삼고 가르치고 하는 것으로 끝나겠어요? 그렇다면 예수는 고독한 사람이라구요. 그러니 그 다음에는 어디로 가야 할 것이냐? 상대를 찾아가야 되는 거라구요. 예수 믿는 사람은 똑똑히 알라구요. 무엇을 해야 될 것이냐? 예수가 남자예요, 여자예요? 오늘 처음 온 기독교인들 기분 나빠요? 기분 나빠해도 할 수 없다구요. 내가 하는 말은 진리이니까.
남자가 태어날 때 여자가 없을까봐 걱정하면서 태어나요? 여자가 있는줄 알고 남자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염려하고 태어난 사람이 있어요? 남자로 태어날 때는 여자가 있는 것을 알고 태어나는 거라구요. 그렇기 때문에 남자가 그렇게 생겨났습니다. 또, 여자도 이미 남자가 있는 것을 알고 태어나는 거라구요. 그렇게 태어나는 것은 무엇을 하기 위해서냐? 상대를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이 말을 기분 나쁘게 생각하고 있다는 거예요. 예수님은 밥도 안 먹고 변소도 안 가는 줄로 알고 있어요. 거룩해서? 그 거룩하다는 것은 무엇이냐? 밥도 안 먹고 그저 졸장부로 앉아서 입맛을 짝짝 다시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비가 쌍쌍이 날면 이것이 최고로 거룩한 것이라구요. 봄이 되어 철새들이 날아와 지저귀는 데는 혼자서 지저귀는 거예요? 참새가 혼자 짹짹거려요? 반응이 없는데 아무리 지저귀어 보라구요. 그래 봐야 망하지 별수 있어요.
예수님은 성인인데, 성인의 갈 길이 어디냐? 세계를 다스릴 수 있는 인격자가 되어 가지고 그 다음에는 어디로 갈 거예요? 나라로 해서 세계로 나가 가지고 세계 끝에서 하늘로 둥둥 올라가겠어요? 어디로 가겠어요? 제자들을 중심삼아 가지고도 거느리고 그 다음에는 가정을 가질 남자로 태어났으니 가정을 찾아갈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그래요, 안 그래요?「그렇습니다」
그러니 예수의 한이 무엇이냐 하면 남자로서 할 일을 못한 것입니다. 예수가 가정을 가져 보았어요? 가정의 주인으로서의 예수가 되어 봤어요? 신부를 맞이하기 위한 신랑으로서의 예수는 되어 보았지만 가정의 가장으로서의 예수는 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아버지로서의 예수가 되어 보았어요?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이라고 하지만 예수를 대하여 반말로 아빠라 부르고 예수의 수염도 뽑고, 등에도 올라가고 머리에도 올라가고 그러는 아들이 있었어요? 아들이 자기 아버지에게 그렇게 한다면 죄가 되겠어요? 아빠로서의 예수가 되어 보았어요? '남자로 태어나 아빠가 되지 못한 것, 그거 복이구만' 하는 남자 있으면 손들어 봐요. 아빠 되고 싶지 않은 남자 있어요?
예수가 아빠가 되었다면 그 다음에는 사위를 얻고 싶겠어요, 안 얻고 싶겠어요? 며느리도 얻고 싶겠어요. 안 얻고 싶겠어요? 이렇게 생각하게 되면, '예수와 우리가 다른 것이 뭐 있어요' 할지 모르지만, 족보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것 뿐이지. 다른 게 뭐 있나요? 예수가 아들을 키워서 며느리를 얻어 가지고 그 며느리를 사랑 안 하고 싶겠어요? 또, 사위를 얻어 가지고 '이 도둑놈 같으니… 나에게 인사도 안 하고 우리 딸을 도둑질해 간 녀석' 이렇게 생각하겠어요? 사실은 도둑질해 간 것이지요. 며느리는 모르지만 말이예요. 딸을 도둑질해 간 것은 사위라고요. 그런 사위를 사랑하고 싶겠어요, 몽둥이로 머리를 때리고 싶겠어요?(웃음) 사랑한다구요. 그런 장인으로서의 예수가 되어 보았어요?
그래, 장인으로서 예수가 된다면 예수의 가치가 떨어질 것 같아요? 심정적인 면에서 인간다운 맛이 더 크면 컸지, 그런 것을 못 느끼는 남자 보다는 낫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가 족장이 되어 가지고 죽기 전에 아들 손자가 한 30명, 70명, 100명쯤 되어 가지고 예수의 일족을 이루어 놓았으면 예수의 기분이 어떠하겠어요? 생각해 보라구요.
이렇게 생각할 때, 예수가 찾는 신부는 어떠해야 되겠느냐? 예수가 찾는 형제는 어떠해야 되느냐? 예수에게는 아들딸이 없으니, 우리가 아들딸 되는 데는 예수에게 접붙여 가지고 양자가 되는 거예요. 가짜를 면한 아들과 형제밖에 못 되는 거라구요.
자, 시간도 많이 지났으니 이제 결론을 내립시다. 천국이라 했는데, 천국이 어디냐? 네 마음에 있다 하던 그 천국이 어디냐? 그것이 예수가 찾아오는 환경적 천국과 상치될 수 있는 내용이냐, 순응할 수 있는 내용이냐? 상치되어 가지고는 안 됩니다. 순응의 도리로써 들어맞아야 되는 것입니다. 환경적인 천국이 이루어짐으로 말미암아 지상천국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상천국을 원하지요? 지상천국에는 남자들만 살겠어요, 여자들만 살겠어요? 남자들이나 여자들만 살아 가정을 이루지 못한다면 1세기 이내에 몽땅 망해요, 안 망해요?「망합니다」 그러면 망할 천국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뭐예요? 가정이라구요.
그러면 어린양잔치가 무엇이냐? 하나님의 계획서대로 하나의 남자와 하나의 여자가 모델형으로서 딱 들어맞는 실체형이 나와 가지고, 하나님이 비로소 됐다 할 수 있는 그 하나의 남자와 하나의 여자를 품고 '오냐, 내 사랑하는 아들딸이다'라고 선포식을 하는 것이 어린양잔치입니다. 즉, 결혼식이라구요. 도깨비 사촌 같은 사람들이 모여서 신부를 찾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부의 도리를 따라 가려 가기 위한 것입니다.
그것은 어떻게 해야 되느냐?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본연의 기준을 상실했기 때문에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병든 사람을 병나기 전의 본연의 자리로 복귀시켜 놓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래 하나님이 하시려 했던 그것을 해야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하시려 했던 것이 무엇이냐? 양손에 붙들고 사랑에 취해 가지고 영원히 놓을 수 없고, 밤이나 낮이나 지옥이나 천국이나 어디를 가든지 '내 딸아, 내 아들아 오라 오라' 할 수 있는 아들딸을 가지려 하신 것입니다.
부모에게는 자녀를 찾아갈 권리가 있는 것이고 남편에게는 아내를 찾아갈 권리가 있는 것입니다. 또, 형님에게는 동생을 찾을 권리가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혈통이 같고 사랑의 인연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전부 다 첫사랑의 인연에 관계되어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 어머니도 첫사랑에 관계되어 있지요? 부부도 첫사랑에 관계되어 있지요? 형제도 첫사랑에 관계되어 있지요? 거기에는 주관의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 첫사랑은 누구를 중심삼고 관계맺어야 되느냐? 사탄을 중심삼고요? 아닙니다. 하나님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중심삼고 첫사랑을 맺어야 되는데, 이것이 안 되어 있기 때문에 오늘날 세상이 요동판국이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동판국이 된 이 세상을 공식 법칙을 통하여 내밀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런 악의 세상 위에 하나의 거점을 만들어 가지고 악의 세계와 한판 싸움을 하기 위하여 출발한 것이 통일교회입니다. 통일교회 문선생이 출세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예요. 하나님을 출세시키자는 거예요, 하나님을 해방시키자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해방시키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통일사상입니다, 통일교인은 그것을 위하여 결의를 하고, 그것을 위하여 개척자가 되고, 그것을 위하여 수난의 노정을 극복하며 가자는 것입니다. 여기에 모인 여러분들도 그것을 하기 위하여 모인 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에게는 그것을 위하여 초월하고 교파를 초월하여 단 하나의 목적 기준에 귀일되어야 할 공동적인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의 천국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여러분들은 지금 마음의 천국을 이루었어요? 어떤 목사들은 '내가 목사생활을 40년 50년 했으니 이제 나는 천국에 가겠지'라고 하겠지만 분석해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천국이란 영원한 곳입니다. 영원히 가는 곳입니다. 그곳에 영원히 가려면 지대(地帶)가 수평이 되어야 됩니다. 천년이 가도 만년이 가도 수평이 되어야 된다구요. 기울어지면 안 됩니다. 영원히 수평이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의 사람을 중심삼고 볼 때 나의 수평기준은 무엇이냐? 여러분의 몸과 마음이 수평이 되어 있습니까? 이것이 문제라구요. 예수님은 말하기를 '네 마음에 천국이 있다'고 했습니다. 천국은 영원한 나라이기 때문에 영원한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수평기반이 되어야 됩니다. 수평기반이 되려면 마음이 수평이 되어야 하고, 몸도 수평이 되어야 합니다. 마음의 수평기준이 높고 몸의 수평기준은 낮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되어야 됩니다. 몸과 마음이 영원을 두고 완전히, 절대적으로 하나되는 곳에서 천국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절대적으로 하나되는 데는 누구를 중심삼고 되어야 되느냐? 천국의 기준이 누구냐? 예수님이 나왔기 때문에 예수님 중심삼고 하나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정서적인 문제에서부터, 마음 몸의 문제, 생활적인 문제에까지 하나가 되어야 됩니다. 천국은 거기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람은 이러한 내용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태어난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 자신을 중심삼고 볼 때, 천국의 거점이 어디냐? 가정이냐? 아닙니다. 가정이 천국의 거점이 되기 전에 나 자신이 그 곳이 되어야 합니다. 나는 나인데 나의 어디냐? 마음입니다. 그 마음이 하나님과 수평이 되어야 됩니다. 마음이 하나님과 수평이 된 그 기준을 거점으로 하여 몸도 수평이 되어야 됩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싸웠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도 그런 기도를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자기의 마음의 일치점을 중심삼고….
예수님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에 일치점을 이루면 그 일치점을 중심 삼고 그 터전 위에 하나님의 뜻이 예수님의 마음에 옮겨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념이 예수님의 마음에 옮겨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마음과 예수님의 마음이 하나되는 데에서는 하나님의 내적인 천국 사상이 예수님의 마음속에 옮겨진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부일 신, 부자일신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일신(-身), 하나되는 데는 뭐가 있어야 되느냐? 돈도 아니요, 다른 무엇도 아닙니다. 그것은 정서적인 문제입니다.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고 나는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사랑 문제가 아니고는 묶을 수 없습니다. 그러한 기준, 예수가 하나님의 사상과 일치되었던 그 사상을 이어받은 마음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사상이 절대적이면 예수님의 사상도 천만년의 세계역사가 아무리 몰아내려 하더라도 꺾을 수 없는 사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상적 기반을 중심삼고 몸을 일체화시켜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몸 마음은 주인이 둘이예요. 하나예요? 주인이 둘이라구요. 이게 다르다구요. 그래서 천국을 못 이루는 것입니다. 두 주인이 싸우는데 천국이 이루어지겠어요? 사도 바울도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고 탄식했습니다. '오호라 고한 사람이다'고 괴로 와하는 사람이 천국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니 이게 말이 됩니까? 천국은 싸움이 평정되어야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싸움을 하고 있는 거라구요. 그러면 여기에서 무엇이 원수냐? 마음을 중심삼고 몸이 원수입니다. 몸뚱이가 원수라구요. 그래서 종교는 이 몸뚱이를 때려잡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몸뚱이를 때려잡는 방법은 마음에 강한 몇 배의 힘을 넣어 가지고 몸뚱이를 끌고 가게 하는 것입니다. 몸뚱이에 어린아이가 달렸더라도 끌고 가는 것입니다. 개구리에다 전기를 통하게 하면 개구리가 사지를 벌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런 힘의 세계가 있어요. 그 힘만 얻게 되면 가만히 있을지라도 세포가 터져 나가는 것과 같은 힘이 생겨나는 거예요. 그러한 방대한 발전소가 있을 때 이 발전소에 배선만 해 놓으면 전등에 불이 들어오지 말래도 들어오는 것입니다. 선만 연결시켜 놓으면 그 촉수에 따라 전기불은 순식간에 들어오는 거라구요. 그런 힘의 발원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힘의 발원지에 몸뚱이가 접하게 되면, 그 몸뚱이가 아무리 악하고 반대하더라도 그 반대하는 것을 이끌고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끌고 몇 고개를 넘어서면 비로소 거기에서 기권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게 동원이란 말입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어떻게 해야 되느냐? 몸뚱이를 강제로 때려잡아야 됩니다. 먹이지 말고 입히지 말고 고생을 시키라는 것입니다. 종교의 수도 방법은 이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이런 입장에 있는 여러분이 제일 싸워야 할 대상이 무엇이냐? 사탄이 문제가 아닙니다. 사탄의 대왕이 누구냐 하면 내 몸뚱이입니다. 양심은 하늘나라의 초소이지만, 몸뚱이는 하늘나라의 초소가 아닙니다. 사탄나라의 왕궁이에요, 왕궁. 사탄은 여기 세계의 제일이 되겠다고 합니다. 그러한 몸뚱이를 때려잡기 위해서는 이 세계를 이길 수 있는 힘을 가져야 됩니다. 나라를 이길 수 있는 힘을 가져야 되고, 민족과 가정과 자기의 정서적인 문제와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체의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는 힘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권을 갖지 않으면 불안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의 길은 육신을 중심삼는 것이 아니라 육신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걸 알아야 됩니다.
오늘날 통일교의 문선생이 이런 얘기를 하기 때문에 비난을 받고 지탄을 받고 있지만, 나 자신이 그러한 사실을 알기 때문에 몸이 싫다는 것을 다 하라는 것입니다. 몸을 부정하라는 거예요. 이것이 참된 종교입니다. 몸은 사탄세계의 거점이라구요. 하늘나라의 거점이 있고 사탄세계의 거점이 있으면 둘이 싸움이라든가 아니면 무엇이라도 해야 전진이나 후퇴가 벌어질 것이 아니겠어요? 몸은 세상을 중심삼은 악의 입장이기 때문에 무엇을 위주하는 것이냐? 자기를 내세우는 주의입니다. 이런 거예요. 자기를 내세우는 것이 타락의 첫걸음입니다.
그러면 하늘의 법도는 무엇이냐? 공의를 내세우는 것입니다. 사적인 것은 사탄 것이요, 공적인 것은 하나님 것입니다. 여러분은 공의를 위하여 가야 됩니다. 그런 노정에 있어서 모든 사람들이 아무리 반대하더라도 거기에 침해를 받지 않고 어려운 길도 생명력을 가지고 가는 사람이 있다 하면, 그는 봄을 맞이하는 천국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 교인들은 공산주의의 찬바람이 불고 민주주의의 부패의 냄새가 풍기더라도 거기에 침범받지 않는 무리가 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통일사상이요, 승공정신입니다. 이런 사상을 갖게 됨으로 말미암아 침범을 안받게 되는 것은 물론 새로운 시대에 있어서 하나의 씨, 즉 알맹이를 지니고 자기 자체의 모습을 그 환경에 여실히 다 드러낼 수 있는 자신으로 만들자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이 인격을 갖추어야겠습니다. 그러한 사랑을 심었기 때문에 그러한 사랑을 거두어 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가을 절기는 거두어 들일 때입니다.
그러면, 통일방안이 어디에 있느냐? 세계주의 가지고는 안 됩니다. 세계의 민주주의를 가지고 아무리 만들려고 하지만 그거 돼요? 안 되는 것입니다. 완전한 제품을 만들려면 먼저 부속품을 올바르게 만들어 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그러니 여러분 자체의 사람을 완전한 사람으로 만들 수 있는 완전한 공장을 만들어야 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완전한 종교입니다. 완전한 종교를 찾아 나오는 것입니다.
통일방안은 대한민국 남북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 차체에서 싸우고 있는 몸과 마음의 싸움을 어떻게 싸우지 않게 하고, 마음이 주도권을 잡고 평화의 기준을 유지시킬 수 있는 몸의 권을 어떻게 갖느냐? 그 몸을 연결시키면 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국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제자들은 예수님이 로마제국을 일시에 점령해 가지고 이스라엘의 군왕으로 군림하게 되면 자기들은 한 자리씩 해먹을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먼저 내 마음 가운데 천국의 기반을 닦아야 되고, 그 마음을 중심삼고 몸이 하나님과 하나될 수 있는 기반을 닦아야 합니다. 이것이 제일 큰 문제인 것입니다. 천국은 내 자신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의 거점은 내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 자신이 없는데 세계가 좋아지면 좋겠어요? 자기가 있어 가지고 세계가 좋아지기를 바라죠? 그렇죠?「예」 여러분은 죽는 자리에는 빠지고 싶어요, 가담하고 싶어요? 빠지고 싶지요? 나이 많은 70세 80세 노인이라도 죽는 자리만은 빠지고 싶어한다구요. 여기 할머니, 죽을 자리에는 빠지고 싶어요, 가담하고 싶어요? 나이가 많으니 앞으로 살아야 얼마나 더 살겠느냐고 하지만, 나이 많은 사람들도 죽을 자리는 싫지요? 그거 왜 그럴까요? 나이가 많아지면 점점 늙어지고 비참해지기 때문에 죽고 싶다는 사람이 많아야 할 텐데. 세상 사람들을 보라구요. 쪼글쪼글하게 늙은 얼굴을 해가지고 맨날 '아이고 죽기 전에 이러이러한 것을 보고 죽어야 할 텐데' 하는 거예요. 그 말은 무슨 말이냐? 죽기 싫다는 말 아니예요? 이것이 문제라구요. 이 세상에서 자기를 빼놓으면 다 싫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축에 못 들어가는 사람 이상 불쌍한 사람이 없는 거라구요. 병신이라는 것은 보편 타당한 정상적인 축에 끼지 못하는 것이지요? 병신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항상 자기가 문제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행복해야 되겠다 할 때, 행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몸과 마음이 하나되어야 됩니다. 그래야 될 거 아니예요? 몸은 편안하지만 마음이 심각해 보라구요. 그런 입장에서 고기를 먹고 남보다 두드러진 생활을 한다고 해서 '이 정도면 됐다'고 할 수 있어요? 그렇게 돼요, 안 돼요? 몸과 마음이 하나되어 가지고 바라보는 것마다 탐을 내고 춤추고 싶어해야 되는 거예요. 몸과 마음이, 속 다르고 겉 다른 사람이 인격 자예요? 선한 사람이예요? 아니라구요. 속 꼴과 겉 꼴이 같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국의 거점은 여러분 자체라는 거예요. 그러니 몸과 마음이 하나되라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을 통일하는 방안이 무엇이냐? 이것을 가르쳐 주고 넘어가자구요. 그것을 이야기해 줄까요?「예」 통일교회 원리를 보면 타락성 근성이 있습니다. 인간이 어떻게 되어서 타락했느냐?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누구를 중심삼고 믿지 못했느냐? 자기를 중심삼고 믿지 못했습니다. 알겠어요? 여러분은 이런 사실을 실감나게 알아야 됩니다.
그저 예수만 믿으면 천국 간다고 하지만 어디가 중심이예요? 그저 믿는다고 하지만 어디를 중심삼고 믿는다는 것입니까? 자기를 중심삼고 예수를 믿으면 안 되는 거예요. 예수를 중심삼고 믿어야지요. 예수의 사상을 중심삼고 내가 결심을 해야 돼요. 예수의 사랑을 중심삼고 내가 결심을 해야 되고, 예수의 심정을 중심삼고 내가 결심을 해야 됩니다.
그렇게 믿어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이냐? 하나되자는 것입니다. 그 목적관이 그렇게 되어 있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첫째는 믿어야 됩니다. 누구를 중심삼고 믿어야 되느냐? 주체를 중심삼고 믿어야 됩니다. 절대적으로 그 주체와 하나되어야 됩니다.
왜 그렇게 믿어야 되느냐? 왜 신앙을 강조하느냐? 하나님은 높은 자리에 있고 인간은 너무나 낮은 자리에 있기 때문에, 인간이 조건적으로 타당성 있는 무엇을 다리로 놓아 가지고는 하나님 앞에 올라갈 길이 없는 것입니다, 성경상으로는 6천년이라고 하지만 몇천만 년이 되는 거리를 갖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의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가기에는 너무 먼 거리입니다. 갈래야 갈 수 없는 길이기에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여 독생자를 보내신 것입니다.
국가적인 차원에 있어서 한 국가가 세계를 위하여 3분의 1을 투입할 수 있는 입장에 서면, 이러한 국가 3개국이 협조하면 한 나라의 예산을 넘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10개국이 협조하면 3개국을 해방할 수 있는 때가 올 것이 아니겠어요? 그러한 세계를 이룰 수 있다는 목적을 가지고 가는 것이 통일의 길입니다. 통일의 길은 하나님이 바라시는 천국의 길을 고대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 길에서만이 천국이 가능할 것입니다. 그 길 외에는 없습니다.
자기를 위주한 이 세계적인 사조의 종말기에 있어서는 그 길이 막혀 버렸기 때문에, 남을 위주하여 갈 수 있는 한 가지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돌아설 수밖에 없는 거라구요. 하나님은 이것을 아셨기 때문에 지금까지 이 길을 극복해 나오시면서 개인으로부터 그러한 사상을 바라고 가정, 종족, 민족, 국가, 세계까지 동원해 가지고 이 지구상에 천국을 건설하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철두철미한 자아로부터 가정 기반을 모색하여 뜻을 연결시켜 가지고 동포애를 넘은 심정의 유대를 세계화시키는 나라가 있다면, 그 나라는 틀림없이 하나님이 군림하시는 천국이 될 것입니다. 그 나라에는 슬픔이 있기 전에 기쁨과 희망이 넘칠 것이요, 고통이 있기 전에 고통을 책임질 수 있는 세계인이 있기 때문에 고통을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세계가 천국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천국의 거점이 여러분의 마음, 심정세계로부터 연결된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저희 조상들이 걸어온 길은 십자가의 길이 아닐 수 없는 것을 잘 알았사옵니다. 인류 조상들이 응당히 가야 할 노정에 있어서 아버님이 대신 십자가를 짊어지고 희생의 길을 걸어오신 것을 생각하게 될때, 이 뜻을 알고 난 저희들은 전통적인 사상을 이 시간에 엄숙히 이어받지 않으면 안 되겠사오니, 저희들을 일깨워 주시옵소서.
오늘날 나 아무개라는 이름은 자기를 중심삼고 불려졌지만, 아버님께서는 역사시대에 있어서 소망의 심정이 깃든 가운데 저희를 찾아오셨다는 사실을 미처 몰랐사옵니다. 이제 저희들은 역사시대에 있어서 당신의 수고의 걸음, 그 노정 위에 반기를 들고 반대의 화살을 던졌던 선조들의 입장을 대신 탕감할 수 있는 후손의 가치를 지녀야 할 자신들인 것을 알았사오니, 아버지여, 이 자리에 부복한 저희 자신들이 당신의 소원에 일치될 수 있는 거룩한 아들이 되고, 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한 모습들이 되겠다고 맹세하는 거룩한 순간이오니, 굽어살피시옵소서.
나를 밟고 넘어 찾고 싶은 가정을 찾고, 그 가정을 넘어 찾고 싶은 종족을 찾고, 그 종족을 넘어 찾고 싶은 국가를 찾고, 그 주권을 찾아야 되겠사옵니다. 민족과 국가의 관념을 초월하고 국경을 초월하고 모든 문화와 습관적 인연을 초월한 기준에 있어서, 저희의 전통적 문화의 기준은 아버님이 거동하시는 생활, 일보의 출발로부터 이루어지고, 저희가 자랑할 수 있는 모든 역사적 기원은 당신이 거동하실 수 있는 가정의 기원으로부터 이루어져야 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저희들은 엄숙히 그 기준에 화합할 수 있는 개체의 모습과 가정의 모습을 갖추어야 함을 알아야 되겠사옵니다. 그것을 준비하여 완결짓고 완비할 수 있는 생활권을 갖추어 나가야 하는 저희들은 누구보다도 불쌍한 자리에서 살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알았사오니, 그러한 저희들의 갈 길을 지켜 주시옵시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여기에 부족한 자식이 서 있사옵니다. 제가 저 자신이 되기를 원하지는 않았사옵니다. 아버지의 사정이 이렇다는 것을 알고 난 후부터 아버지의 눈물이 제 앞에 있기를 원하지 않았지만, 아버지께서는 늘 저보다 먼저 눈물을 흘리는 자리에 서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될 때에, 저는 목이 메이고 가슴이 메이는 사정을 느끼게 되옵니다. 아버지께서 불쌍하시다는 것을 느끼면 느낄수록 그것을 무엇으로도 갚아 드릴 수 없다는 것을 알 적마다, 일시에 쓰러지는 거름이 되더라도 그 길을 가기를 바라는 것이 이 자리에 선 자식의 마음이옵니다. 아버지의 효의 도리를 그려 가는 아들딸이 지켜야 할 전통적 사랑의 뜻을 이 자리에 모인 당신의 아들딸들이 이어받게 하여 주옵기를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들은 이미 죽음을 각오한 몸이옵니다. 당신과 더불어 죽는 자리에 있어서, 당신의 동정의 눈물이 사방을 감싸는 자리를 아니 가려고 해도 당신은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저희들은 그 자리를 도리어 무섭게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겠사옵니다. 이러한 저희의 입장을 느끼면 느낄수록 고마우신 분은 아버님이요, 사랑의 주체이신 분은 아버님인 것을 느끼게 되옵니다.
인류역사노정에 있어서 이 땅에 살고 있는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 중에, 당신의 심정을 더듬어 외로운 당신의 마음을 알아 그런 길을 가지 말라고 당신의 옷자락을 붙들며 갖은 수난길을 가로막고 통곡하는 무리를 만나게 되면, 당신은 그러한 무리를 붙들고 얼마나 통곡하시고 얼마나 사랑하고 싶어하시는가를 저희들은 느끼게 되옵니다.
그럴 수 있는 내적 사정이 통일교단이 걸어 나오는 배후의 터전이 되기를 바라고 나온 지금까지 그 길은 슬픔의 길 같았지만 당신은 그 길에서 승리의 일로를 다짐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수고를 하셨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아무개를 칭찬하기 전에 당신께 감사드려야 할 저희 자신들이요, 책임자들인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천국의 근거지는 저 자신으로부터임을 알았사옵니다. 천국을 찾아 나오는 기준이 어디고, 아버님과 갈라져 슬픈 날을 맞이했던 인간들이 다시 아버지와 상봉할 수 있는 거점이 어디냐고 묻게 될 때, 그 자리는 만민이 함성을 지르고 환영하는 자리가 아니라 비통과 비애의 소리가 교차되는 처량한 자리요, 핍박의 화살이 날아드는 자리요, 죽음이 엇갈리는 자리이옵니다. 그러한 자리가 아버지와 저희들이 만나는 상봉의 자리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이 억울한 사실을 저희들은 미처 몰랐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저희들은 당신의 아들이 되고 딸이 되기를 원하는 무리이오니, 저희들이 당신 이상의 수난길을 가겠다고, 몸부림침으로 말미암아 땅 위에서 살고 있는 아들딸로서 당신을 통곡시킬 수 있는 역사가 한두 번이 아니라 수없이 많아야 된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타락한 세상에 있어서도 자신의 영광을 밟고 넘어서면서, 자기의 체면과 위신을 상실하면서도 어버이를 위하는 길을 가는 자식이 있다면, 그 자식을 바라보는 부모의 심정은 흐르는 눈물로써 그 아들의 복을 빌어 주고 그 아들의 울타리가 되기를 원한다는 것을 저희들이 알게 될 때, 저희 통일교회 무리는 아버지를 위하여 효성의 도리를 다하는 자리를 그리워하고, 세계를 위하여 죽음의 수난길을 먼저 가겠다고 앞을 다투어 가는 무리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저희가 가는 이 길 앞에는 아버지의 눈물이 깃들어 있기 때문에, 이는 망하는 자리에 가도 망하지 않고 죽음의 자리에 가도 절대 죽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히 깨닫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들은 천국이 그립사옵니다. 아버지와 상봉하는 십자가의 수난길에 있어서 세계적인 도상을 넘고 평화의 안식처를 맞이하여 만민이 하늘의 소원 앞에 전부 기억할 수 있는 그날까지 저희들은 가일보 전진에 전진을 다짐하고, 맹세에 맹세를 하고, 자각에 자각을 하여 부디 최후의 전선까지 남아지는 무리가 되어야겠사옵니다. 그리하여 아버지 앞에 승리를 봉헌해 드리고, 아버지의 아들딸로서 상속받을 수 있는 그 자리까지 싸워 남아지는 무리가 되어야 된다는 사실을 이 시간 확실히 깨달아 천국을 건설해 가는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남아진 그날의 소원을 비운의 당신과 더불어 인연을 맺기 위하여 희생의 길 수난의 길을 기꺼이 책임지고 가는 개척자의 길과 십자가와 선봉의 자리를 서로 다투어 지키겠다고 하는 무리가 통일의 무리가 되게 하여 주시옵길 재삼 부탁드리옵니다.
오늘 남한 각지에 널려 있는 당신의 자녀들을 기억하여 주시옵고, 세계의 선교지에서 이국 땅에서의 슬픔의 날들을 맞이하며 스승 만나기를 고대하는 그들의 간곡한 소원을 성취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들이 그러한 자리에 그 나라를 구하기 위한 사랑의 주인공으로 섰사오니. 당신의 인연을 묶어 주기 위해 온갖 정성을 들이는 그들 위에 당신의 무한한 사랑의 손길로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만복의 소원인 안식의 동산을 위하여 세계 만민의 해방의 기치를 들고 제3차 해방권을 바라고 나가는 통일의 소망세계 위에 당신의 축복의 인연으로 영원히 같이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시간 모든 전체를 당신이 주관하여 주신 은사를 고맙게 생각하옵니다. 이 자리가 내일의 보다 가치 있는 자아를 발견하고 자각하는 자리로, 새로운 오늘을 맞을 수 있는 계기와 동기가 된 시간으로서 받아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오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님의 거룩한 이름 받들어서 아뢰었사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