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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은 나로부터 Ⅱ

일시: 1971.07.25 (일) 장소: 한국 전본부교회

[기 도]

사랑하는 아버님, 어린 자녀들이 이 아침에 당신의 존전에 부복하였사오니 굽어살피시옵소서.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나라는 저희의 마음 몸이 가서 살아야 할 나라인 것을 저희들은 아옵니다. 아버님이 통치해야 할 나라는 저희가 생애를 다 바쳐 받들어야 하고 성취시켜야 할 거룩한 나라인 것을 저희들은 아옵니다. 아버님께서 임재하시는 곳은 영원한 승리의 생명들이, 땅 위에서 정성을 들이던 뭇 자녀들이 아버지의 무한하신 사랑을 찬양하고, 아버지의 사랑을 중심삼고 길이길이 시봉해야 할 거룩한 곳인 것을 저희들은 아옵니다.

당신께서 심중에 그리고 있는 아들과 딸이 어떠해야 된다는 것을 저희들은 말씀을 통하여 잘 알고 있습니다. 온 천지의 인간들을 바라볼 적마다 당신의 영광을 찬양하여야 할 상대적인 실체요 자극적인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또한 기쁨을 자극하고 영광을 찬양할 수 있는 실체임에도 불구하고 주인된 인간들이 아버지의 목전에 있지 않았을 때 얼마나 슬퍼하셨고, 얼마나 기가 막힌 사정에 처해 있었는가를 저희들은 미처 몰랐습니다.

이 아침에 저희들을 깊은 잠 가운데서 일깨우시사 당신의 서러움이 무엇이었다고 마음으로부터 저희들에게 가르쳐 주시옵소서. 저희의 눈이 뜨여 있더라도 당신을 정면에서 바라볼 수 있는 눈이 못 되어 있고, 저희들의 걸음걸이가 바르더라도 당신이 원하시는 목적을 향하여 가는 데에 너무나 굴곡이 많은 걸음걸이를 하고 있는 저희 자체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원하시는 뜻을 위해서 달려가야 할 텐데도 불구하고 그러지 못하는, 타락권내에 처해 있는 원망스런 자신들임을 저희들은 잘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님, 마음으로 찾아오셔서 역사하시고 가르쳐 주시는 아버님을 늘 마음으로 모셔 드리지 못하고 마음으로 위하지 못하여 때로는 낙망하고 때로는 자신을 저주할 때가 있었던 것을 아버지께서는 알고 계시옵니다. 그러한 연약한 저희들을 아버님께서는 도리어 긍휼의 마음과 사랑하는 심정을 가지고 저희들을 위하고 싶어하시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아버님이나 저희들은 모두가 슬픈 모습인 것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겸손한 가운데 자기 자체를 참되게 가꾸어 가지고 당신 앞에 나타나는 그런 모습을 당신은 얼마나 만나고 싶어하셨습니까? 지성을 다하여 당신의 심정을 자극시킬 수 있는 참다운 마음의 아들딸을 얼마나 얼마나 고대하셨습니까? 이러한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 이 표준에 어긋난 자리에서 당신 앞에 사연을 통고할 적마다 괴로우면서도 대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아들을 대하는 아버지의 입장을 당신도 싫어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저희들 자신들도 그런 자리에 아버지를 모시고 싶지 않사오나, 타락으로 인한 한스러운 인연을 벗지 못한 연고로, 늘 하늘의 소신과 일치하지 못한 반역의 자리에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낼 적마다, 역사적 한과 우리 선조들의 범죄로 인한 타락의 원한을 저희들은 알게 되옵니다.

한스러운 정체를 수난과 십자가의 형틀에 못박아 놓고 최후의 당신의 심정과 당신의 동정의 인연을 그리면서 내일의 소망 앞에 접근해 가지 않으면 안 될 인생행로인 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아버님, 저희들을 이런 자리에 남겨 둘 경우 이것도 저것도 아닌 자신들이 된다는 것을 아옵니다. 그러기에 또다시 하늘 앞에 사정을 통고하지 않을 수 없는 불쌍한 무리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당신과 우리 사이에만 관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용납할 수 없고 아버지께서 참을 수 없고 아버지께서 양보할 수 없는 원수의 무리가 제3의 기점을 통하여 저희를 농락하고 있는 사실을 볼적마다, 그 원수가 미워서라도 저희를 아버지 앞에 끌어 가야 할 책임이 있는 아버지의 사정을 생각하게 되옵니다. 원수를 용인하는 입장에서 아버지를 부르는 불쌍한 저희들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을 위하고 원수를 미워할 수 있는 하루의 생활이 되게 하시옵소서. 그러한 일년의 생활을 아버지 앞에 가누어 드릴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게 하시옵소서. 저희들이 처하는 거처에 아버지를 모시고 만년 행복을 찬양할 수 있는 기쁨의 하루를 맞이하겠다고 몸부림치는 자신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당신의 성상이 어떤가를 알고 싶어하는 아들딸이 있거든 세상의 불쌍한 사람을 대표한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아직까지 당신보다 불쌍하지 않다는 것을 헤아려야 되겠고, 인류를 대하시는 당신의 수고가 어떠한가를 알고 싶어하는 자들이 있거든 이 땅 위의 누구보다도 자기의 자녀를 위하여 수고하면서 참고 이를 악물고 싸워 나가는 처절한 부모가 있다 할지라도 그 부모보다 더한 분이 아버지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나라의 불쌍한 것을 바라볼 적마다 그곳에는 아버지의 정경이 깃들어 있는 것을 느끼옵니다.

흘러가는 세계의 사조 가운데서 인류가 거쳐가는 한스러운 고빗길에는 당신의 한의 소용돌이가 아직까지 그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옵니다. 그러기에 전체를 구하기 위해 제물의 실체를 찾는 이 마당에 있어서 전체 앞에 염려의 대상이 되지 않겠다고. 아버지 앞에 염려의 대상이 되지 않겠다고 하루하루의 생활을 쪼개 가며 몸부림치는 아들딸이 있으면 그들 위에 당신이 언제나 머물고 싶어하신다는 것을 저희들이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님, 고요히 찾아오시어서 깊은 심정에 깃들어 있는 본연의 자체를 일깨우시옵소서. 당신이 가시는 목적의 그 소향(所向)을 따라 저희들도 기쁨과 더불어 소망과 더불어 이 길을 가기를 고대하지 않았느냐고 반문하면서, 기뻐하시는 아버지를 모시고 이 땅 위에서 살다가 당신 앞에 가야 할 운명을 지닌 저희 자신인 것을 생각할 적마다, 그런 자녀의 명분을 가져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을 깨달을 적마다 저희들은 진정 황공한 마음으로 아버지의 심정을 알아 드려야 하겠사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역사시대에 있어서 아담 가정으로부터, 노아 가정, 아브라함 가정, 모세, 세례 요한, 예수 시대까지 4천년 역사의 슬픔을 홀로 지니시고, 그 누구도 모르는 일면의 심정을 가누지 못하고 붙들고 오시는 것을 아옵니다. 이 땅에서 예수를 십자가에 내놓으시고 한스러운 가슴을 억눌러 가며 잃어버린 그 터전 위에 또다시 새로운 자식이 나타나기를 바라 나왔고, 허물어진 그 터전 위에 새로운 나라를 세워야 하는 아버지 앞에 수난길이 태산처럼 가로놓여 있더라도 다시 거동을 하여 새로운 소망의 길로, 가시밭길로 행보를 갖추지 않을 수 없었던 아버지의 처절한 사정을 저희들이 통감하옵니다.

'아바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며 아버지 앞에 최후의 단판기도를 드리던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을 저희들이 생각할 적마다, 이것은 저희들 앞에 일생을 아버지 뜻과 더불어 일치되어 승리의 신앙노정을 남기기 위해서는 그렇게 처절한 때가 많다는 것을 대표적으로 보여 준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 옵소서'라고 한 것을 볼 때, 인간의 뜻과 아버지의 뜻이 다른 것을 잘 느꼈던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을 저희들은 알 수 있습니다.

나는 쉬고 싶더라도 다시 전진해야 될 당신이었고, 나는 안일의 한 때를 고대하고 있더라도 치열한 십자가의 과정을 개척하지 않으면 안 될 당신이었고, 저희들이 땅과 더불어 소망을 갖고 싶어했지만 저희의 소망을 전폭적으로 부정해야 하는 입장에 서신 당신이었습니다. 인간의 감정을 갖고있는 이 땅과 상치되는 입장에서 인간들을 구하기 위한 당신의 수고는 말할 수 없이 컸을 것이옵니다. 그러한 아버지의 사정을 이제라도 동정할 수 있는 저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30억 인류가 살고 있는 이 지구상에 당신이 이 시간 새로운 소망을 가지고 찾아오실 곳이 어디냐고 묻게 될 때, 문화의 나라라고 자랑하는 선진국가의 입장에 있는 미국도 아니며, 다른 어떠한 나라도 아닌 것을 알고 있습니다. 또한 잘난 사람에게 찾아오실 것도 아니요, 유식한 사람에게 찾아오실 것도 아니요, 세계적인 명망을 가진 사람에게 찾아오실 것도 아닌 것을 알고 있습니다.

갖추지 못한 초라한 모습, 풍부하지 못한 환경 가운데서, 굶주리는 그런 비참한 자리에서도 아버지에 대한 염려의 마음이 앞서, 먹을 것이 있어도 먹지 못하고 눈물과 더불어 아버지 앞에 드리고 싶어하는 불쌍한 무리들의 손길을 거치지 않을 수 없는 아버지의 사정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봅니다.

생활 노정에서 나 자신이 그 어느때 당신의 마음 앞에 흡족할 수 있는 한때를 가졌으며, 그 무엇을 갖추어 당신의 마음 앞에 기억될 수 있는 한때를 가졌느냐 묻게 될 때, 그런 사연이 없는 저희들이옵니다. 이러한 부끄러운 자신들을 청산하고 비판하는 이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생명의 동기도 아버지요, 소망의 근원도 아버지요, 목적 성사의 기원도 아버지이며, 생사화복의 기원도 아버지인 것을 아옵니다. 그 아버지를 얼마나 모셨고, 그 아버지의 사정에 얼마나 동화했고 그 아버지의 동기에 얼마나 일치점을 가졌사옵니까? 당신은 언제나 발을 구르며 저희 사정을 염려했지만 저희는 잠을 자며 저희 정체를 망각하기가 일쑤였습니다. 이런 자신을 생각할 적마다 아버지, 아버지를 그리워하면 그리워할수록 아버지를 알면 알수록 저희의 죄된 사실을 폭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미급과 부족과 낙망의 첨단에서 절규하며 내일의 소망을 다 포기하고 자포자기한 그 자리에서 아버지의 염려와 더불어 사라질 수밖에 없는 인간이었지만, 그래도 이런 무리들을 통하여 당신의 세계적인 소망을 일깨우시겠다는 거룩한 뜻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할 적마다, 미급한 자를 통하여, 비천한 자를 통하여, 미완성된 자들을 통하여 최고의 완성과 최고의 고귀한 것을 찾으시려는 아버지가 얼마나 불쌍한 분이신가를 이 시간 다시 한 번 저희들의 마음속에 그려야 되겠습니다.

창조시에 하나의 흙덩이에 당신의 거룩한 손길이 닿게 될 때, 비로소 당신의 심정과 통하여 체온의 감촉을 느낄 수 있었던 것처럼, 하나의 흙덩이 모양으로 당신의 손길을 그리워할 줄 아는 어린 자녀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에게서 생명의 기원을 받아 사지백체의 모든 형체를 하나의 생명체로 만든 그 힘의 모체가 얼마나 거룩한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당신이 생기를 불어넣어 영원한 실존체로서 당신의 희망과 당신의 자극적인 상대의 중심으로 지으신 무한한 가치의 그 거룩한 존재를 그리워하면서, 기필코 그러한 자리에까지 달려가겠다고 이 시간 머리를 숙이고 부복한 무리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한 걸음 더 전진하고, 한 걸음 더 개척을 하고, 한 걸음 더 싸워 나가는 데 있어서 지치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이 시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저희들은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원수들의 치하에서 고아와 같이 사라져가고 흘러져 갈 불쌍한 무리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얼마나 초조한 마음을 갖고 저희를 각오와 결의로써 돋구어서 저희가 일시에 이곳을 지나기를 바라고 계시고, 고이고이 이끌어 주고 싶어도 저희들이 당신을 그리워하지 못했기 때문에, 저희들이 상대적 기준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저희들을 지도할 수 없었던 딱하고 기막힌 사연이 지금까지 얼마나 얼마나 많았는가를 저희들이 느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자식을 길러 본 부모들이나 사랑하는 동생을 키워 본 형님 누나가 있다면 그들을 먹이지 못하고, 불쌍한 자리에서 어려움을 당하는 정경을 바라볼 때, 그 마음속에 스며드는 고독과 그 마음속에 스며드는 원망과 비참이 어떤가를 느꼈을 것이옵니다. 본연의 마음이요 본성의 마음 그 자체인 아버지께서, 그런 심정의 소유자이신 아버지께서 고아와 같고, 몰리고 몰리는 가운데서 내일의 소망을 갖지 못하고 당장에 스스로를 부정하고 싶은 자포자기의 경각에 처해 있는 무리들을 바라보실 때에, 폭발되는 마음을 갖고 동정하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많으셨사옵니까? 저희들은 그러한 일이 저희 생활 가운데서 연속되고 저희의 과거로부터 현재와 미래에까지 연결된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한 둔한 무리이옵니다.

이러한 무리들을, 아버지, 일깨우시옵소서, 당신의 소망의 동산 위에, 당신의 위업을 상속해 주고 승리의 왕자 왕녀의 권한을 가꾸어 주고 싶은 당신의 마음이 저희가 모르는 가운데 수없이 저희를 거쳐갔다는 사실을 저희들이 다시 한 번 느끼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엎드린 이 자체가 아버지 앞에 수치스러운 모습임을 알게 될 때에, 잘난 마음이 이 몸에 임하게 하시어서 당신의 저주와 심판을 일시에 받더라도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갖게 하시옵소서. 그러나 당신은 사망의 본체가 아니라 생명의 본체요, 당신은 패자의 본체가 아니라 승자의 본체이시기 때문에 당신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고 당신의 인연을 알고 있다 하는 이 하나의 사실로 인하여 저희들을 버릴 수 없는 입장에 있는 그 아버지가 얼마나 불쌍하신 분이신가를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옵니다.

이제 당신이 저희를 부르시는 그 마음과 더불어, 그 음성과 더불어 저희들이 결의하고 일치단결하여, 한 개체가 일체를 이루고, 한 가정이 일체를 이루고 한 모임이 일체를 이루게 하시옵소서. 압축과 압력이 가해 들어오는 이 모든 어둠의 사망권을 저희들의 단결된 힘으로도 격파하기에 부족할 때에는 아버지의 힘을 가중시키어서 격파하고 남을 수 있는, 심정적 유대를 공고화시키고 또 천정적인 인연을 공고화시켜서 최후의 결정타를 가할 수 있는 저희 자신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오늘은 7월 25일이옵니다. 이날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이달의 마지막 안식일인 오늘 이 아침에 통일교단을 중심삼고 전국에 있는 당신의 자녀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특히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고 지방에서 책임을 수행하고 있는 자녀들, 각자에게 맡겨진 탕감노정을 걷고 있는 무리들도 있사옵니다. 어려운 길에서, 외로운 개척자의 노정에서 슬픔의 눈물을 흘리는 자들이 있다면 이들은 기필코 망하지 않을 것을 저는 알고 있사옵니다. 그들 위에 같이하여 주시옵고, 사명을 짊어지고 일선에서 수고하고 있는 이들을, 아버지, 격려하시옵소서.

우리의 나라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 가운데 있다는 것을 느끼고, 우리의 소망, 우리의 뜻이 먼 곳에서 이뤄질 것이 아니라 오늘의 생활, 한 순간 순간 촌각 가운데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하시옵소서. 이제 직접적인 시대권내에 있는 당신을 존귀하게 느낄 줄 아는 무리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하시옵소서. 한 번 당신의 뜻을 통고하여 안 되거든 두 번, 열 번, 백 번을 통고해서라도 당신의 안타까운 심정을 심어 놓을 수 있고, 당신의 처절한 모습을 보여 주는 무리로 남아져야 당신의 뜻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고 싸우는 무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전국에 있는 당신의 자녀들이 이곳을 바라보며 끝날에 맡겨진 사명을 염려하면서 남모르는 가운데서 정성을 들이는 무리들 위에 가일층 당신의 후대하신 사랑이 같이하시옵소서. 이 자리에 참석한 자녀들의 걸음걸음이 절대 헛되지 않기를 재삼 부탁드리옵니다.

이제 저희들이 배고픈 어린아이의 심정을 갖고 하늘을 동경하고 흠모의 심정에 사무쳐서 당신의 거동에 완전히 화합하여 상대적 실체로서 현현할 수 있는 거룩한 이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하늘과 땅이 일체화되어 당신이 거하실 수 있는 승리의 천국의 기원이 자체로부터 연속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오며, 모든 말씀 참부모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말 씀

땅 위에는 수많은 종교가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종교들은 자기 종교를 통하여서만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구원을 받음으로써 이 땅 위에서 자기가 바라는 소망을 성취할 수 있다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믿음만으로는 천국을 소유할 수 없어

개인이 원하는 최고의 소원, 혹은 최하의 어떤 바람이 있다 하더라도 역사과정에서 벗어나지 못한 수많은 수난길, 흑은 수고로운 길을 어떻게 극복하느냐 하는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요, 혹은 각자의 생활권 내에서 남보다 나은 생활의 터전을 어떻게 갖느냐 하는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생각하면서 각자의 신앙생활을 해 나가고 있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그런 무리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우리들도 모든 존재들이 바라는 거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나, 보다 선하고 보다 높고 보다 가치 있는 나 자신을 계발하려 합니다. 또, 보다 넓고 보다 높은 것을 소망할 뿐만 아니라 그 소망을 오늘날 생활무대에서 어떻게 전개시키느냐 하는 바람을 갖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두말할 바 없는 사실입니다.

성경에, 천국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천국은 네 마음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외부에 나타나는 상대적인 세계가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나 자신이 좋은 바탕의 씨를 갖지 않고는, 혹은 좋은 바탕에 화합할 수 있는 상대적 여건을 갖추지 않고서는 그것과는 관계를 맺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여러분이 슬픈 입장에 있을 때는 주위에 아무리 기쁜 사람이 있고, 기쁜 내용이 있다 할지라도 그 기쁜 사실과 관계를 맺을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기쁘기 위해서는 내 마음속에 기쁠 수 있는 내용을 지녀야 합니다. 내 스스로 생활권내에서 기쁠 수 있는 환경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공인하는 자리에서만이 우리들이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신앙자들 가운데는 앞으로 올 천국을 바라는 사람이 많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렇게 이렇게 믿고 나가면 천국이 내게 오리라고 믿고 신앙을 하고 있습니다. 현실생활과는 상관없이 믿는다는 그 조건만 가지고 천국이 나에게 인연이 되고 관계될 줄 알고 있지만…. 만일 내가 천국의 내정을 알지 못하고 생활감정이 통하지 않는 자리에서 단지 믿는 것만으로 천국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나의 생활권내에서 자극이 될 수 없고, 나 자체와 영원히 관계를 맺을래야 맺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천국이 얼마나 좋다는 것을 내가 느낄 수 있고, 그 천국의 범위와 내용이 어떻다는 것을 느낄 수 있고, 내 감정이라든가, 혹은 사정이 미칠 수 있고 통할 수 있는 내용을 지니고 있다면 거기에서 비로소 나도 기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다면 영계에 가서 우리들이 믿고 바라던 천국이 우리 앞에 나타난다 하더라도, 믿음을 통할 수 있는 내용을 벗어 나서 그 천국이 나에게, 그 천국의 모든 행복의 여건이 나에게 파급될 수 없다는 사실은 두말할 나위가 없는 것입니다.

믿는 것만으로는 그 실체를 감정으로 체휼할 수 없는 것입니다. 믿음을 중심삼은 실체의 생활을 통하여서, 혹은 내 자체의 직접적인 체휼을 통하여서 그것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단지 믿는다는 입장에서는 우리 타락한 인간과 타락하지 않는 하나님을 비교해 보게 될 때, 너무나 먼 거리에 있습니다. 그 거리는 수많은 역사시대를 거쳐온 거리입니다. 거기에는 수많은 악과 선이 엇갈린 사정으로 엉클어져 있습니다. 이런 인간 자체를 볼 때, 많은 수난의 길을 거치더라도 이 사정을 가려서 하나님의 본체와 접하기는 어려운 것이요, 인간 자체로서 그 거리를 단축시킬래야 단축시킬 수 없는, 일대일의 입장에서는 미칠 수 없는 입장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중심삼고 자기의 생명을 다하여 믿는 마음을 가지고 절대적인 하나님 앞에 절대적인 상대기반을 추구하는 데 있어서 신앙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신앙의 기준에 내가 도달하였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기쁨의 대상은 못 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만일에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믿는 사람이 있다 하면, 그 사람이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이냐? 그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는 일의 새로운 출발의 동기, 기점, 출발점은 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믿음, 절대적인 신앙을 가졌다고 하나님이 자기의 전체 내용을 좋아할 수 있느냐 하면 그것이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또, 그 자리가 감정적으로나, 혹은 사정적으로 완전히 통할 수 있는 자리냐 할 때 그렇지 못하고 시작밖에 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 자리는 소원의 세계와 인연지어 갈 수 있는 출발밖에 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출발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믿으면서 실천하는 생활과 생애 노정을 얼마나 남기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남긴 그 양이 천국의 내용을 인연지을 수 있는 내용이 되면 되었지 믿음 자체는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믿는 것만을 가지고서는 천국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믿음을 통하여서 출발의 인연은 마련할 수 있지만 그런 결정적 내용을 제시할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믿기만 해 가지고는 안 됩니다. 믿고 나서 무엇을 해야 되느냐? 실천을 해야 됩니다. 믿는 것만큼 실천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실천이 문제입니다.

믿음과 실천

실천과 믿음을 두고 볼 때 언제나 믿는 것이 앞서지 실천이 앞설 수 없습니다. 타락한 인간에게 있어서는 믿음이 강해야만 실천도 강하게 됩니다. 그러나 믿는 기준과 실천의 기준은 언제나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믿음만을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보다 나을 수 있는 실천의 결과를 바라고 믿음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들은 실천을 등한히 하고 믿는 것을 위주하고 있으니 하나님이 바라는 것과 엇갈려 있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합니다. 그러한 신앙생활을 항시 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입장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예수님 당시 12사도를 중심삼고 볼 때, 그들 또한 그런 신앙을 했습니다. 믿는 것만으로 보면 그들은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이스라엘나라를 구할 수 있는 메시아로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믿는 믿음의 기준은 그 즉석에서나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수많은 싸움을 거쳐서 가정이라든가 종족, 민족으로 나아가야 할 실천과정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때의 사도들은 누구보다도 죽음을 각오하고 생명을 걸고 맹세하면서 예수를 믿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실제로 생명을 내놓아야 할 때가 그들 앞에 휘몰아쳤을 때, 그들은 믿던 예수를 통하여 바라던 천국 이념, 전체의 소원을 일시에 포기했던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그들에게 믿음과 더불어 실천하여 그런 자리를 극복한 체험이 있었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셔야 할 운명에 접하였을 때 정작 십자가를 진 예수님을 배반하지 않고도 그 고비를 넘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믿는 것만을 제일로 하고 믿는 것만으로 전체의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 사도들 앞에 청천벽력과 같은 슬픔의 한날이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물론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어디까지나 실천을 위한 동기를 마련하는 데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천국이 어디에 있느냐고 할 때 천국은 믿는 데 있다고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천국은 나에게 있다고 했습니다. 나에게 있다는 이 말은 주체적 입장이 상대적 세계에 달려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주체적인 내용을 내가 결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결정할 수 있는 동기가 우리 인간에게 있다는 사실을 나타낸 것임을 우리들은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들이 기쁠 수 있는 내용을 결정해 놓지 않고는 아무리 하나님이 기쁘다 하더라도 그 기쁨은 우리와는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쁠 수 있는 동기를 가졌다면 상대적 입장에서 나 자신은 기쁠 수 있는 상대적 여건을 개척해 놓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아무리 기뻐하는 주체가 있더라도 상대가 없을 때는 그 주체도 기뻐하다가 마는 것입니다. 바라다가 마는 것이요, 시작하려다 끝내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그렇잖아요? 어떤 한 사람이 기뻐할 수 있는 내용을 갖고 있더라도 상대가 기뻐할 수 있는 입장에 있지 않고 슬퍼하는 입장에 있다면 기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기뻐할 수 있는 것보다도 슬픈 내용이 더 크게 될 때는, 기뻐할 수 있는 그 주체도 슬퍼하는 상대를 도리어 위로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상대가 슬퍼하게 될 때 슬픔의 자리에 들어가서 위로해 주고 싶은 것이 우리의 생활 감정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이 주체적 입장이고 우리가 상대적 입장이라면, 하나님이 우리를 대해 기뻐할 수 있는 입장에 있다 하더라도 우리가 슬픔에 잠겨 있는 것을 바라보게 되면 도리어 슬픔의 자리에서 우리를 위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는 신앙 기준만을 가지고 천국을 소유하려 할 것이 아니라, 그 신앙에 대비될 수 있는 실천적 기준을 어떻게 갖느냐 하는 것이 문제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십자가를 앞에 놓고 제자를 대해서 반문하신 것이 이것이었습니다. 자기가 어려운 죽음길을 가야 한다는 것을 아시는 예수님은 제자들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을 알기에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게 될 때 모두가 저버리고, 전체가 부정하리라는 것을 말하자 베드로 같은 이는 자신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모두가 부정하더라도 자신만은 부정하지 않겠다고 장담했습니다. 그 믿음은 절대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믿는 마음뿐이었지 실제 행동과는 먼 거리에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절대신앙 절대실천으로 어려움을 극복해 가야

이러한 관점에서 그들의 신앙과 오늘 우리들의 신앙을 비교해 보자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통일교회 식구의 입장에서 주장하는 뜻과 통일교회를 중심삼고 나가고 있는 신앙의 내용을 중심삼고 나와의 직접적 관계를 비교해 볼 때, 나는 얼마만한 기준을 중심삼고 신앙길을 가느냐? 통일교회를 믿는 데 있어서 어느만큼 믿고 있느냐? 믿는 데 있어서 절대적이냐? 그렇지 못합니다. 신앙을 하는 데 있어서 자기 생명에 연연하고 있지 절대적인 심정이 앞서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잘 믿고 그렇게 열심히 모시던 사도들까지도 천국의 실체 되는 예수와 더불어 십자가의 길에 동참할 수 없었던 역사적인 사실을 우리가 생각해 보게 될 때, 오늘 우리의 신앙의 정도가 옛날 사도들이 가졌던 그신앙에 미치고 있느냐? 본부에 살고 있는 개개인을 다시 한 번 냉정히 비판해 볼 때, 과연 본부에서 통일교회 신앙의 표준에 합격한 자로서 생활을 하고 있느냐? 자기 나름대로의 비판 기준과 자기 나름의 생활 기준을 중심삼고 나가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신앙 일색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신앙의 소원은 차후로 돌리고 자기가 바라는 소원대로 살아가는 무리가 많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신앙을 중심삼고 하나님이 최후의 승리적 권한을 요구하게 될 때, 과연 우리들 스스로가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는 승리의 결정적 기반을 취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절대적인 신앙을 갖고서도 하나님이 나에게 전면적으로 천국을 제시할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오늘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자기 나름대로의 신앙을 중심삼아 가지고, '자기 소신을 중심삼고 나는 이렇게 가면 될 것이다' 하며 나가는 신앙 가지고 과연 천국을 성사시킬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뜻을 위한다고 하면서 뜻을 빙자해 가지고 자기 자신을 입증하려고 하고 자기 자신을 합리화하려는 폐습적이요, 폐단적인 타락권에 있는 우리들, 사탄이 하나님 앞에서 모면하기 위해 전술을 쓰던 것과 마찬가지의 입장에 서 있는 우리 자신들이 과연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고, 확고부동한 터전을 사수할 수 있고 유지할 수 있겠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심히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한 우리들 자신을 두고 볼 때, 내 마음에 천국이 있느냐? 내 마음에 천국이 있다고, 내 마음에 천국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될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만일 천국을 가진 어떤 사람이 있다면, 그 누구를 막론하고 그 자체 가운데 속하고 싶어할 것입니다. 천국을 이룬 사람이 있다면 생명을 가진 인간이면 누구라도, 타락의 후손 그 누구라도 소망의 기점인 그 천국을 쉽게 이룰 길이 없겠기 때문에 그 누구든지 그곳에 머물고 싶어할 것입니다. 밤이나 낮이나 항상 누구라도 그곳에 가고 싶어할 것입니다. 그와 더불어 같이 가고 싶어할 것입니다. 그와 더불어 같이 살고 그와 더불어 같이 고생하고 싶어할 것입니다. 고생을 해도 같이 하고 싶고, 죽어도 같이 죽고 싶은 그런 터전이 천국이 아닐 것이냐?

거기에는 슬픔이 있다고 해서 갈라지는 것이 아니요, 고통이 있다고 해서 갈림길이 생기는 것이 아니요, 사지사판이 된다 하더라도 그 자리는 갈라질 수 없는 것입니다. 죽음을 극복하고 모든 어려움을 타개할 수 있는 주체적인 입장이 천국을 소유한 입장이라면, 그 천국을 소유한 사람에게 어떠한 어려움과 어떠한 수난길이 있더라도 그것이 그의 가는 길을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막을 수 있는 내용이 있는 자리에는 천국이 임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천국을 이루려면

이런 저런 문제들이 오늘날 뜻길을 가는 데 있어서 현실적인 문제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공인한, 하나님의 공증을 받은 내용을 지닌 입장에 있지 않고 가야 할 방향을 앞에 놓고 주저하는 입장에 있다면 천국이 임재해 가지고 거주할 수 있는 자리가 못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 타개하고 극복하느냐 하는 것이 시급한 문제입니다.

하늘을 대해 맹세하고 뜻을 위해 가겠다고 하기 전에 나 자신이 천국이 요구하는 필요적절한 상대적 실체가 되어 있느냐 하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 우선적인 문제입니다. '내가 이렇게 필요하지 않소?' 하고 자신있게 제시하는 사람보다 '나에게 천국이 필요하지 않소?' 하고 요구하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자기의 위신과 체면과 신앙의 연한을 가지고 자기를 공인해 달라는 사람보다도 자기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 제시해 가지고 하나님과 관계되어 있는 내용이 이렇다고 명시할 수 있는 사람이 더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이 앞서야만 천국이 그 마음에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고, 천국과 더불어 같이하고 있다는 것을 공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내용을 갖지 못한 사람은 천국과 관계를 갖지 못한 사람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방대한 뜻을 앞에 놓고, 혹은 하나님이 역사를 통해서 소원하시는 그 뜻을 앞에 놓고 얼마만큼 심각한 자리에서 그 뜻과 더불어 하나되어 있느냐? 그 뜻을 중심삼고 절대적인 신앙을 하고 있느냐? 바람이 불고 폭풍우가 몰아치는 한이 있더라도, 내가 죽고 망하더라도 '이 신념만은 틀림없다. 내가 틀렸으면 틀렸지 뜻은 틀림없다'고 하는 확고부동한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아침의 신앙과 저녁의 신앙이 다른 그런 신앙자세를 지니고 있으면서 천국을 그린다는 것은 너무너무 어리석은 일입니다.

만일에 천국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 길은 어떤 길이냐? 어떤 길이 되어야 하겠느냐? 자기를 생각하는 자리에서는 천국에 갈 수 있는 길이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이미 자신이 천국과 거리가 멀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면 자기라는 것을 타파해 버려야 합니다. 자기를 공격하는 데서만이 천국, 혹은 간접적인 천국이라도 개방될 수 있는 소원의 한 길이 남아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를 그냥 그대로 옹호하는 입장에서 상대적 환경을 자기에게 적응시키려 하는, 자기 스스로를 주체적 입장에 놓고 상대적 환경을 밀고 나가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천국과는 관계를 못 맺을 것입니다.

오늘의 제목과 같이 천국은 나로부터입니다. 아무리 상대적 천국이 완비되어 있다 하더라도 그 천국이 부를 때에 화답할 수 있는 나 자신이 못 되어 있으면 그 천국과는 상관이 없게 됩니다.

천국은 어떤 곳이냐? 사탄을 극복하고 난 자리가 천국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체를 극복한 자리가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 자체만을 극복한 자리가 아닙니다. 우리가 거주하는 사회환경, 타락한 세계권, 습관적인 환경권, 흑은 상습화된 자리에는 천국이 임할 수 없습니다. 이 상습화된 환경을 사탄이 고질적으로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사탄이 여기에 우거하고 있기 때문에 이 사탄의 환경을 극복하고 나야만 천국이 오는 것입니다. 천국은 사탄세계의 내용과 상반된 자리에서 이뤄집니다. 그럴 게 아니예요? 만일에 그렇지 않다면 천국이 될 수 없습니다. 천국이라는 이름이 붙었더라도 그것은 환경을 농락하기 위한 속임수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국이라는 개념은 사탄을 극복한 자리에서, 사탄이 상대할 수 있는 일체의 요인을 부정한 자리에서, 부정할 뿐만 아니라 청산지은 자리에서 성립될 수 있습니다. 사탄의 부정적 여건이 남아 있는 역사적인 유물이라든가 생활적인 모든 내용을 부정하고 청산지은 터전 위에서 천국이 긍정될 수 있는 것이지, 그런 여건을 남기고는 천국의 내용을 제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천국은 이렇게 고귀한 곳입니다. 절대적 기준 앞에 일치될 수 있는 그런 기준을 중심삼고 말하는 천국인데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가 그리는 천국의 개념은 너무나 혼잡합니다. 너무나 사(邪)된 입장에서 천국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이런 생활환경에서 절대적인 신앙기준을 가지고 극복하는 데서부터 천국이 생길 것이 틀림없으나 그것만으로 천국의 기원이 결정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터전 위에 수천년 동안 하나님을 수고시켰고 수많은 인류를 농락한 사탄을 극복해야만 천국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냥 그대로 순순히 믿고만 가는 자리에서 천국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습니다. 믿는 마음만 가지고서는 절대로 천국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이 가운데는 사탄이 언제나 싸움을 제시하기 때문에 싸움노정을 극복해야 천국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주권이 있어야 하는 겁니다. 또한 수많은 백성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수많은 가정들이 국가면 국가 체제내에 함께해 가지고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 전체적인 체제를 갖춰 나가야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의 입장에서 서로서로 상충이 없이 주체와 더불어 어느때, 어느 환경, 어떤 곳에서라도 화합하고 화동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생명을 바칠 각오를 하고 믿는 자리에서는 마음에 임재하는 천국을 느낄는지 모르지만, 실체적인 천국은 2천년 역사를 통하여 수많은 순교와 수난의 대가를 치르고도 오늘날 현실무대에서 성사되지 못했습니다. 천국은 그렇게 간단히 이뤄지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이 나로부터'라니 얼마나 심각한가

'천국은 나로부터', 이 말을 두고 볼 때, 이 '나'가 있는 이 자리가 얼마나 심각한 자리냐? 얼마나 우리 인간에 있어서 절대적인 입장을 대표하는 자리냐 하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성경 가운데도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주' 라는 말은 억천만세를 통하여 영생을 두고 잊을 수 없는 절대적인 내용을 갖춘 자리에서 인식할 수 있는 말입니다. 주 너의 하나님을 믿는 데서 천국이 도래하는 것이 아니라,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서 천국이 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데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질 것이 아니냐? 믿는 데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데서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지금까지 우리의 신앙이 얼마나 미급했고 원칙에 도달하기에 얼마나 먼 거리에 있었느냐 하는 것을 잘 알아야 되겠습니다. 혹시 여기 처음 온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개인을 중심삼고는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자리에는 못 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개인의 마음에 천국이 이루어져 가지고 개인을 중심삼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해서 천국이 되느냐? 그건 개인의 천국은 될는지 모르지만 전체 천국은 되지 못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하나님이 바라는 것은 개인의 천국이 아닙니다. 개인이 성립시켜 가지고 소유한 그런 천국을 바라보고 기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이 기뻐하는 것을 보고 천국이 다 되었다고 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께서는 기뻐할 수 있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어 그를 중심삼고 만국을 횡적으로 연결시켜 가지고 전체 천국을 모색하려 하셨던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메시아를 이 땅에 보내서 희생시킨 것입니다.

이런 것을 두고 볼 때 오늘 우리들이 믿고 나가는 신앙에 있어서 절대적인 한계점을 그어 놓고 '나에게는 이것이 절대적이다. 이 신앙을 누가 빼앗아 가랴' 하는 이런 자기 주장을 하는 입장에 서 가지고 하늘땅 앞에 자신을 갖고 외칠 자가 있느냐? 그러한 신앙조차 갖지 못한 우리 자신들이라는 겁니다. 이런 우리들을 하나님은 거느려 가며, 이끌어 가며 시시각각으로 우리가 기도하는 가운데 우리의 마음을 통하여, 영적으로 키워 나오고 계십니다. 그런 하나님을 두고 볼 때, 그분이 편안한 자리에서 우리를 키워 주고 일깨워 주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절대적으로 믿기 때문에, 이렇게 해주면 반드시 보답이 있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한 번 하고 또 하는 것입니다. 어느 한때에 알아주기를 바라는 믿음, 그런 절대적인 믿음이 있기 때문에 몇 번이라도 수고하고 몇 번이라도 손해보더라도 믿어 주고 또 믿어 주는 놀음을 거듭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믿기 전에 하나님이 우리를 절대적으로 믿고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사망권에 처해 있는 우리 자신들이 곁길로 가려할 때 하나님은 그 길을 막아 주고 가려 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두고 볼 때 하나님이 우리가 사랑스러워서 그러시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한 모습을 발견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믿음의 가치가 믿음의 아들 딸로서 나타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그런 사람을 그리워하며, 그 그리운 자체를 중심삼아 가지고 절대적으로 믿고 나가시기 때문에, 몇 번을 좌절당하더라도 인간을 믿어야 하는 입장에 섰기 때문에 우리를 도와주시는 것이지 우리가 좋아서 그러겠어요, 우리가 좋아서? 이것을 오늘날 우리 신앙인들이 생각해야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대해서 절대적인 신앙을 요구하는 그런 입장에 섰다는 것은 벌써 우리를 믿어 주고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런 입장에서 우리에게 절대적 신앙을 요구한다는 것을 망각하는 사람이 많은 것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인간에게 어떠한 체험을 시킬 때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에 지금까지 느껴 보지 못한 체험을 하게 되면 그 체험이, 자기가 정성을 들였기 때문에, 응당 하나님이 그렇게 해주어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절대적인 하나님께서 6천년 동안 수고하는 가운데 수많은 도인들과 선지선열들에게 피의 대가를 치르게 했는데도 아직까지 천국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그리워하는 아들딸을 맞지 못한 입장에 머물러 있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 일대에서 하나님이 나에게 은혜를 주었다고, 나를 좋아해서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입니다. 어디까지나 내일의 소망을 앞놓아가면서 그 소망을 연결시키려니 그런 무리라도 가누어 수습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되겠기 때문에 도와주신 것입니다. 그거 어쩔 수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내가 좋아서 은혜를 주신 것으로 생각하면 큰 오해라는 거예요.

영적 체험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어떤 사람들은 교만하고 당당합니다. 그럴수록 부족함을 느껴야 합니다. '환경이 잘못되어서 그렇지 난…'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런 사람은 앞날이 멀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도 바리새 교인들을 책망한 것입니다. 바리새 교인들은 교만했습니다. 외형적으로는 갖춘 것 같았지만 내심적으로는 갖추지 못했습니다. 벌써 내심적으로는 높은 자리에 있었습니다. '나는 나라를 대표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라를 대표하기 위해서는 역사적인 제물 과정을 거치고 하나님이 수고한 상대적 여건을 전부 다 갖추어야 할 텐데도 불구하고 그렇지도 못한 입장에서 '이 시대에 내가 나라를 대신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런 등등의 문제를 볼 때,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이 얼마나 상반된 입장에 서 있느냐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국은 반드시 오늘날 내가 바라는 나 자신을 극복하지 않고는 올 수 없습니다. 나 자신이 소원하는 원인이 되는것 몇 분의 일을 남겨 가지고는, 다시 말해 나로부터 동기가 되어 접할 수 있는 소원의 내용을 남겨 가지고는 천국이 오지 않습니다. 누구로부터 소원이 출발되어야 하느냐? 자기로부터가 아니라 상대로부터입니다. 혹은 뜻으로부터 출발되어야 합니다. 나로부터 동기가 되는 것은 천국이 될 수 없습니다.

자기를 부정하는 데서부터 천국이 이루어져

이런 관점에서 선생님 자신도 오늘날 통일교회에 대해서 염려하지 않을 수 없는 거라구요. 뜻이 동기가 되느냐, 내가 동기가 되느냐? 내가 동기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번번히 뜻을 뒤에 두고 자신을 동기로 할 때가 많은 것이 오늘의 인간들입니다. 뜻은 수난길을 요구하고 있는데 '나'라는 것은 그것을 배반하려고 합니다. 상반된 입장이라는 것입니다. 뜻은 오른편으로 가라 하는데 나는 왼편으로 가려고 합니다. '내가 통일교회에 들어와서 누구만큼 고생을 못 했느냐? 하는 조건을 제시해 가지고 자기를 해명하려고 합니다.

자기를 해명하려고 하는 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절대적인 신앙이라는 것은 자기를 해명하는 자리가 아니라구요. 해명당하는 입장에 서야 됩니다. 거기에는 일언반구, 어떠한 제시의 내용이 없습니다. 해명 당하는 입장이라구요. 잘했어도 잘했다고 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내가 백퍼센트 인정할 수 있는 것이라 해도 하나님이 볼 때는 하나입니다. 내가 백으로 인정하는 것이 하나님에게는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를 중심삼고 제시하는 입장에서는 찾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천국은 어디서부터 시작하느냐? 절대적인 신앙을 기점으로 해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신앙이라는 것은 자기를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자리는 자기를 절대 부정하는 자리입니다. 자기를 절대적으로 부정하는 자리에 서지 않고는 절대적인 신앙이 나올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세상만사를 중심삼고 거기에 긍정하면서 신앙길을 간다고 할 때 절대적인 신앙이 나올 것 같아요?

이러한 근본 문제를 놓고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을 보게 되면 하루의 생활권내에서 아침에 일어나서 밥을 먹고 하는 습관적인 생활을 하면서도 '나는 하나님을 대해서 당당하다'고 합니다. 그렇게 믿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천국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당당할 수 없다구요. 나를 공인하는 어떤 상대적인 요인이 없어 가지고는 절대적 신앙기준도 못 갖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신앙기준도 갖지 못했는데 절대적 신앙기준을 극복하고 난 후에야 이뤄질 천국이 성사될 수 있겠어요? 어림없습니다. 왜 그러냐? 그 자리에는 사탄이 머물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생명의 동기는 하늘로부터입니다. 욕망의 동기도 하늘로부터지만 사탄과 더불어 짝하고 있습니다. 얼룩덜룩하다는 겁니다. 흰 것보다 검은 것이 많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척 신앙길은 자기의 어떠한 관념을 중심삼아 가지고 찾아갈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통일교회에 들어와서 원리를 안다는 사람들, 혹은 여기 부장이나 간부들이 원리를 놓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원리 강의해 가지고 감동을 주는 입장에 있다고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말하기는 누구나 쉽습니다. 그렇지만 실천은 어려운 것입니다. 말이 나오기까지 그 배후의 고(高)와 깊이가 어떻드냐? 그것은 여러분 나름의 기준을 중심삼고서는 헤아리지 못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감정과 일상의 처신을 두고 볼 때 어떠한 생각을 하고 있느냐? 자기라는 것을 언제나 세워 나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세계에 있어서 제일….

예수님이 십자가를 안에 놓고 '아바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나에게서 피하게 하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 라고 기도할 때, 자신만만하고 당당한 자리에서 기도하지 않았어요.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라고 한 것은 예수가 이제 한번 가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운명인 것을 알면서도 인간을 대표하여 사정이라도 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응당히 안 될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런 기도를 했습니다. 여기서 만일 예수가 자기에게 처한 자리를 피하기 위해서 그런 기도를 하였다면 그는 메시아가 될 자격이 없습니다. 그렇게 가야 할 길임을 알면서도 피해 가야 할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체면을 무릅쓰고 그런 기도를 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신 이후 십자가 노정을 따라오는 인류 앞에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겠느냐? 그런 것을 대표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아들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입장에서, 불효자와 죄인의 칭호를 받으면서 아버지를 도운 아들의 권한을 세우기 위하여 그렇게 기도한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예수는 고마운 분입니다. 만일 예수가 자기 개인을 중심삼고 죽음이 무서워 그런 기도를 했다면 이는 만민을 위한 완전한 제물이 될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삭만도 못하다는 겁니다.

이삭은 자기 아버지가 자기를 데려다가 꽁꽁 묶어 가지고 제단에 올려 놓고 칼로 찔러 죽이려 했을 때 묵묵히 있었습니다. 죽음의 자리에 나가기 전부터 하나님 앞에 자기의 사정을 무시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 불평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언제나 부족하기 때문에 그런 자리에 서 가지고는 하나님을 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재창조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참된 신앙

이런 자리에 있기 때문에 이제까지 절대적인 신앙관을 갖고서도 천국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천국의 출발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천국을 이루려면 자아주관부터 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밥을 먹으나 어디를 가나, 일상생활이 하나님과 더불어 이루어져야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대상적 존재이지 주체가 아닙니다. 남편을 모시는 아내와 같은 심정을 가져야 하고 부모를 모시는 자식과 같은 심정을 가져야 합니다. 거동을 할 때는 '아무 데 가서 이것을 하고 오겠습니다'라고 부모 앞에 보고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직접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생활을 떠나서는 신앙생활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통일교회에서는 효자가 되어야 되고, 충신이 되어야 되고, 열녀가 되어야 된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자주적인 입장을 가지라는 말이 아니예요. 절대적인 자아 앞에 상대적인 자아를 공인시키라는 것입니다. 그 자리는 절대적인 자주, 자아 앞에 대상적인 입장에 있는 내가 어떠한 주견이 있더라도 그것을 공공연하게 주장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그건 민주주의와는 다릅니다. 자기 마음대로 주장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천국을 찾아 나가는 사람 앞에는 자기라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거기에는 정성과 극복만이 있을 수 있는 겁니다. 천국을 찾고 난 후에는 자기가 있을 수 있지만 천국을 찾아 나가는 자리에는 자기가 있을 수 없습니다. 민주주의 방식 가지고 안 됩니다. 자기를 주장할 수 있는 여건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 여건이 남아지는 한 그 세계는 사탄권입니다. 타락한 행위가 틀림없이 사탄세계를 만듭니다. 타락한 세계가 틀림없이 사탄권이라고 생각됩니다. 거기에는 사탄의 혈통적 관계를 중심삼아 가지고 사회, 혹은 세계가 이루어져 사탄의 제반적인 요인이 응어리져 오염되어 있습니다. 한 덩어리 되어 있습니다. 사탄의 피와 더불어 물들어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깨끗이 처단하거나 완전히 극복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길에서는 자기 주장, 자아관념이 있을 수 없습니다. 절대적 신앙이라는 것은 자아관념이 하나도 남지 않는 신앙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절대적으로 믿는다 할 때는 내 자체에 절대적으로 반대되는 요인이 하나도 없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중심삼고 하나되겠다고 하는 거기에는 자기 주장을 할 것이 없습니다. 주체가 요구하는 대로 완전히 일치해야 합니다. 완전히 일치한다는 것은 자기 스스로 주장할 수 있는 일편의 마음도 없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기 마음대로 주장할 수 있는 자리가 있다면 그 자리는 천국이 아닙니다. 자기 마음대로 소원하는 자리는 아무리 잘 믿었다 하더라도 거기는 천국이 아닙니다. 이런 근본 문제를 중심삼고 여러분은 심각히 생각해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 사람 자신도 역시 그런 문제를 중심삼고 심각하게 생각한다구요.

그러면 천국은 언제 나로부터 시작하느냐? 어느때에 가서 나로부터 시작할 수 있겠느냐? 천국은 나 개인에게만 한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 개인의 마음에 기쁜 천국을 이루었으면 그 기쁨의 천국을 어떻게 가정에 적용하느냐? 여러분, 이것이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예를 들면, 오늘날 통일교회에서 가르쳐 주는 원리를 보면 첫째는 제1의 십자가를 극복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극복하는 것이 제1의 십자가입니다. 그 다음에는 제2의 십자가를 극복해야 합니다. 가정에서 자기 아내면 아내, 부부면 부부가 뜻 앞에 일치되는 것이 제2의 십자가입니다. 제1의 십자가를 극복하기보다 제2의 십자가를 극복하기가 더 힘이 듭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원리적으로 볼 때도 역시 그렇습니다.

인간이 타락할 때 개인만이 타락한 것이 아니지 않느냐? 아담 해와 부부가 타락했고, 부부뿐만 아니라 가정이 타락했습니다. 그러기에 사위기대 복귀가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개인 완성과 아울러 상대 완성이 이뤄져야 하고 선의 번식권이 형성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내 개인이 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십자가의 길을 가야 된다는 겁니다.

뱀은 허물을 벗지 않으면 크지 못합니다. 허물을 벗기 위해서는 돌 틈바구니를 비집고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반대의 힘이 몸에 가해져야 허물을 벗는 것입니다. 어둠의 세력이 우리 몸의 피와 살에 하나되어 가지고 담뿍 씌워져 있는데 이것을 어떻게 벗느냐? 그것을 따라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지혜로움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반대, 전부 반대의 길로 가야 합니다. 완전히 벗기 위해서는 완전히 반대의 길로 가야 합니다

물질주관-타락인간이 극복해야 할 제일 첫 문제

그런 관점에서 볼 때, 나를 절대적으로 완전 부정했다 할 수 있는 자리까지 나가야 합니다. 사람이 세상적인 욕망, 즉 물질적 욕망을 왜 갖고 있느냐? 타락 때문입니다.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물질을 잃어버렸고,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상대를 잃어버렸습니다. 그 다음에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주관 권을 잃어버렸습니다. 이 세 가지가 문제입니다. 크게는 이 세 가지입니다. 물질과 사랑과 주관권, 요것이 언제나 문제입니다.

여러분 눈앞에 물질이 문제가 됩니까? 내가 억천만금을 뜻을 위해 쓰자할 때, 이의 있는 사람이 있더라도 참소하지 못합니다. '그 돈은 내 돈인데…' 할 거예요. 그게 자기 돈인가? 이렇게 물질이 참소하는 것입니다. '이 녀석아, 네 돈일 이유가 어디 있어?' 하고 말이예요. 하나님의 물건인데도 불구하고 타락권내에 떨어져 가지고 사탄권내에 있다 해서 그 물건을 자기 것이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물건이 참소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물질문제…. 그 다음에는 심정문제입니다. 신앙길에서 제일의 원수가 뭐냐 하면 돈입니다, 돈. 성경에도 재물과 하나님을 겸해서 섬길 수 없다고 했어요. 돈이 문제라구요. 그러면 돈을 어떻게 때려잡느냐?

선생님도 돈에 대해서 관심이 많습니다. 돈이 필요합니다. 뜻을 위해서는 자기 돈을 몽땅 털어서 쓸 수 있어야 합니다. 아끼는 것을 보다 가치 있는 것을 위해 써야 합니다. 아끼는 것보다도, 남겨 두는 것보다도 보다 가치 있는 것에 써야 합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물질에 인연된 것에 끌려가고 제약을 받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먹을 것이 있게 되면 자기가 먼저 먹겠다고 하는데,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는 요즘에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예요. 옛날에 군대에 가게 되면 먹을 것이 상당히 그리울 때가 많았다고 합니다. 감옥에 가게 되면 참눈물이 납니다. 먹는다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모릅니다.

전체 앞에 있어서의 인격의 기준을 무엇으로 평가하느냐 하면 배고플 때 어떤 행동을 하느냐를 보고 평가하는 것입니다. 배고픈 처지에 있을 때, '아이고, 배고파' 하며 배고픈 표시를 내며 경거망동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아무리 그 나라의 주권자고 그 나라의 정신적인 지도자라도 그는 지도자로서 빵점입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인격을 갖추고 있지 않은 무식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먹는 문제를 중심삼아 가지고 자제하고 극복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형무소면 형무소 감방 안에서도 감방장이 되는 거라구요.

내가 감옥에 있을 때, 어떤 지방에서 유명한 목사가 그의 사위와 함께 감옥에 들어왔는데 그 사위가 학질을 앓게 되었습니다. 이 병은 매일 그 시간만 되면 고열이 나는 병이라구요. 이렇게 깊게 고통받는 사위가 있는데도 그 목사는 학질약을 갖고 있으면서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 약을 제삼자의 미싯가루와 바꿔 먹었습니다. 감옥에서는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한 목사의 행동 하나하나가 그 사람이 그때까지 닦아 나왔던 신앙의 전부를 거덜나 사라지게 해 버리는 것입니다. 거기에서의 물질이라는 것은 인격 기준 전체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조그만 하나의 물질이 전체 가치를 결정하는 놀음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물질이라는 것이 무섭습니다. 여러분, 그렇잖아요? 만일 열 명이 같이 사는 데서 남보다 자신이 옷을 잘 입겠다고 하게 될 때는 걸려요, 안 걸려요? 남보다 내가 잘먹겠다고 한다면 걸려요, 안 걸려요? 다 좋아해요, 나빠해요? 나빠하는 거라구요. 이건 벌써 참소조건에 걸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먹고 입고 사는 것은 사탄세계에 있어서의 낚시밥이더라 이겁니다.

내가 지금 뭐 차를 타고 다니지만, 미국 식구들이 선물한 링컨 차가 부산의 창고에 그대로 있습니다. 그런데 그 차를 타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 걱정이 많습니다. 세상 사람 같으면 뽐내고 다니면서 간판을 자랑하려고 야단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나는 도리어 그 차를 팔아서 지방에 교회라도 사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런 차를 타고 다니면서 뽐내면 걸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낚시밥입니다. 사탄의 낚시밥입니다. 좋은 밥을 놓고 '아이고, 좋아라' 하고 숟가락을 들다가는 걸리는 겁니다.

선생님이 좋은 교훈을 가진 것이 뭐냐 하면, 감옥에서 밥상을 받아도 반찬이 없다고 '내가 통일교회 책임자인데, 통일교회 교인들은 나보다 잘 먹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하고 투정하지 않았습니다. 물을 놓고 맨밥을 먹으면서도 아버지를 부르며 '내일의 소망을 갖고 나오던 너 아니냐' 하고 나왔습니다. 거기에서는 반찬이 있다고 해도 밥과 함께 먹을 수 없어요. 감옥 안에는 식사하는 사람이 한 천 명 가까이 되기 때문에 국하고 밥을 같이 줄 수 없어요. 한 시간 내에 밥을 먹어야 하는데 국은 저쪽에서 밥은 이쪽에서 엇갈려서 준다구요. 그렇기 때문에 복잡합니다. 밥만 타는 데도 30분이 걸립니다. 그렇게 밥과 국을 타고 나면 식사시간이 끝나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식사시간이 끝나자마자 3분 이내에 작업장으로 출발해야 합니다. 나가서 일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 한 손에 국을 받고 한 손에 밥을 받고, 이렇게 갖추어 먹을 수 있는 여지가 없다는 거예요. 닥치는 대로 먹는 것입니다. 국은 국대로 밥은 밥대로 줄을 서서 주는 대로 먹는 것입니다. 밥을 먼저 받으면 밥부터 먹는 것입니다. 맨밥을 먹는 거예요. 거기에서 맨밥 먹는 법을 배웠습니다. 맨밥도 참 맛있습니다. 내가 옛날부터 누룽지를 참 좋아합니다. 누룽지. 누룽지. 하나님이 나를 훈련 잘 시켰다고 생각해요. 옛날에 내가 먹던 누룽지 맛이 그 맨밥 맛이에요. 거기에 이제 탄 맛이 조금 가해질수록 맨밥 맛 저리 가라 할만큼 맛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언제나 그렇게 국은 국대로 밥은 밥대로 먹었습니다. 그런 자리에서도 내가 뜻을 중심삼아 가지고 생명을 바칠 각오를 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효의 도리 충의 도리를 다하겠다고 하며 나갔습니다. 그런데 밥타령을 하고 반찬타령을 해요? 내가 그런 사람을 보면 속에서 불이 난다구요.

자신이 나쁜 집에서 살더라도 하나님은 더 좋은 집을 갖다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간부가 지금의 형편에서는 집을 사기가 어려운 지경인데 한 달에 만 오천 원씩인가 얼마씩 빚을 지면서 좋은 집을 얻었습니다. 그놈의 자식, 어떻게 되는가 보라구요.

내가 먹고 사는 생활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사람입니다. 언제나 생활적인 면을 잘랐다고요. 빚장이가 된다구요. 어머니로부터 '생활이 이렇게 되었으니…' 하는 독촉을 하루에도 몇 번씩 받습니다. 언제 갖다 주더라도 갖다 줘야 될 게 아니예요? 그렇다고 뭐 쓱 갚아 주지도 않는다고요. 여러분이 이 문제를 생각해야 됩니다. 물질이 내 앞에 원수입니다. 이것을 극복하기 전에 재물을 소유했다가는 큰길을 못 갑니다. 본래의 길을 못 가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이런 훈련을 20대에 다 마친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의 명령이 있으면 자식이고 뭐고 전부 다 저버리고 혈혈단신 보따리 짊어지고 미련없이 떠나는 거라구요. 이렇게 나온 것이 통일교회의 출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물질이 원수입니다. 좋은 것이 있으면 먼저 먹겠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식탁에 쭉 반찬이 차려져 있으면 고기 반찬을 그저 남이 한 개 먹으면 자기는 두 개를 먹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벌써 빵점입니다. 사탄이 빨간 줄로 그어 놓는 거예요.

피난을 나올 때도 그래요. 여기 원필이를 데리고 왔지만 말이예요. 배고픈 건 다 마찬가지라고요. 밥을 먹고 싶지 않아서 안 먹는 것이 아닙니다. 다 마찬가지라구요. 선생님은 좀 다르시겠지? 천만에 선생님은 더 하다는 거예요. 밥맛을 더 잘안다구요. 밥을 많이 굶어 본 사람이 밥맛을 더 잘 압니다. 피난 생활을 할 때에 밥을 해 놓으면 숟가락을 집을 때는 같이 집는 거예요. 그런데 먹던 밥을 놔두고 누가 먼저 숟가락을 놓느냐? 먼저 숟가락을 놓는 사람이 그 자리를 주도하는 사람이 된다는 거예요. 틀림없어요. 숟가락을 먼저 놓는 사람이 주인이 되는 거예요. 그런지 안 그런지 두고 보라는 것입니다.

시부모 슬하에 시집간 며느리 가운데서, 아들이 셋이면 세 며느리 가운데서 누가 신임을 받느냐? 어려운 살림을 하는 가운데서 숟가락을 나중에 들고 먼저 놓는 며느리가 더 귀염을 받고 후대를 받는 것입니다. 그런가 안 그런가 해봐요. 부인네들, 이 말이 틀렸거든 선생님에게 항의를 하세요. 항의만이 아니라 목을 자르라는 거예요. 틀림없다는 거라구요. 또 멋있고 좋은 옷을 전부 다 남들에게 주고 자기는 제일 나쁜 옷을 입고 사는 사람이 있다면 오래 안 가서 그는 주인이 될 것입니다. 우리 통일교회도 그렇지 않아요? 선생님은 고생을 좀 했습니다. 여러분도 고생을 많이 했지요? 그래도 힘이 나지요? 우리는 그것이 밑천이예요.

내가 지금 이층집에서 살고 있지만 내 양심은 그래요. 하나님을 위해서 집을 짓겠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내 신앙의 자세입니다. 그것이 근본이 되어 있습니다. 후대를 위해서, 미래를 위해서 하나님을 모시고 서로 잘살겠다고 해야 합니다. 자신만 잘살겠다는 사람은 망하는 것입니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그렇게 계속 가면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축복을 해주셨기 때문에 미국이 지금 잘사는 것이지, 같은 입장에서 다른 나라도 축복해 주어 미국과 대결하게 해 가지고 격투하게 될 때에는, '이 녀석' 하고 칼자루를 들고 나설 때에는 왕창 꺾여 나간다는 겁니다.

이제는 내가 집을 지을 생각을 해야 되겠습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 짓는 것이 아니라 외국 사람들에게 우리의 체통을 세워야 되겠기 때문입니다.

이런 등등의 문제를 생각할 때, 물질이 문제입니다. 타락할 때도 물질이 문제되지 않았습니까?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만물이 하늘 앞에 탄식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의식주 문제가 가장 중요하다고 하지요? 의식주, 이것이 사탄의 미끼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생활권에서 살면서 남들보다도 잘먹고 살겠다는 사람은…. 그런 사람은 하나님이 반드시 정돈한다구요. 그것은 철칙입니다.

만일 나라의 주권자보다 더 잘먹고 잘살면 법에 걸리는 거예요. 그건 불충이라고요. 남편을 가진 아내가 남편보다 더 잘먹고 지낸다면 쫓겨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 있다 이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에게는 언제나 물질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만물을 잃어버렸고 세계를 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복귀과정에 있어서 찾는 데는, 방법에는 순서가 있다는 겁니다. 사람을 먼저 찾고 물질을 찾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찾아 나오시는 방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물질을 완전히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계에서는 세상에서 잘먹고 잘살라고 가르치는 법이 없는 거예요. 죽을 고생을 하고 선을 행해야 복을 받아 잘사는 길이 있다고 가르쳐는 줬지만, 잘먹고 잘살라고 가르치는 법은 없었습니다. 이렇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물질이 문제입니다.

심정주관-타락인간이 극복해야 할 두 번째 문제

타락이라고 하는 것은 만물을 잃어버리고, 그 다음에 사람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나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나를 잃어버리게 한 것이 무엇이냐? 여러분이 슬퍼하고, 또 자기를 잃어버리고 자포자기하는 그 동기가 어디에 있느냐? 심정적 결여, 정서적 결여 때문입니다. 그렇지요? 요즘에 일어나는 청소년 문제를 보게 되면 부모로부터 소외당하는 데에서 일어납니다. 그런 환경이 누적되어 있기 때문에 부모를 불신하는 청소년 문제가 세계적인 문제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그 요인이 뭐냐? 정서적인 요인입니다. 정서의 결여로 인해서 모든 문제가 파탄되는 것입니다.

심정문제를 중심삼고 부자의 관계를 생각해 볼 때에, 어머니 아버지 아들딸 그냥 그대로 붙들고 천국을 가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렇지 않아요? 그냥 그대로 하나님과 같이 살고 그냥 그대로 아들딸을 전부 다 거느리고 천국에 간다면 얼마나 좋겠느냐 이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안 되어 있습니다. 이 정서적인 문제가 기쁨으로 출발하여 기쁨으로 끝날 수 있게끔 안 되어 있다 이겁니다. 기쁨으로 출발을 했더라도 슬픔을 느끼고 다시 기쁨을 찾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가 막히다는 거라구요. 아들딸로 태어났으면 부모와 더불어 같이 기쁨을 나눌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겁니다. 부모를 중심삼고 기뻐하는 것 이상의 슬픈 자리에서 기쁨을 찾지 않고서는 못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길입니다. 왜 그러냐? 사탄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모두 부정적인 사랑이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 통일교회가 지금까지 사회로부터 비판받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선생님이 가르쳐 줘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남의 집 아들딸로 태어났으면 아들딸의 책임, 혹은 남편이면 남편의 책임, 혹은 부모면 부모의 책임을 다하게 안 되어 있다 그겁니다. 모든 것을 부정하라는 것입니다. 부정하는데 있어서는 그 이상의 긍정적인 심정의 가치를 발견하고 부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망하지 않습니다. 그렇잖아요? 그 이상의 가치를 발견했기 때문에 부정하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서는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은 무엇을 갖고 오느냐? 보다 높은 사랑을 갖고 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랑하는 부모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한다. 사랑하는 부부지간이지만 하나님을 더 사랑한다. 사랑하는 형제지간이지만 하나님을 더 사랑한다'고 해야 합니다. 보다 높은 사랑을 가지고 좀더 가깝게 올 수 있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건 왜 그러냐? 보다 높은 사랑이 아니면 현재의 사랑을 부정할 수 있는 동기가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정할 수 있는 동기가 나타나지 않고서는 긍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통일교회에 들어가더니 자식을 몰라보고 남편과 아내, 그리고 부모를 몰라본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되느냐? 그건 바로 미쳤기 때문입니다. 까닭없이 미쳤느냐 이겁니다. 그렇게 됐다는 것은 새로이 나아갈 길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소망을 제시하며 나아갈 수 있는 새로운 소망의 한 기준과 뜻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을 따라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이냐? 죽기보다 힘이 든다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극복하기가 얼마만큼 힘이 드느냐? 차라리 죽는 것은 간단하다는 거라구요. 죽는 것은 한 번만 극복하면 되는 것입니다. 죽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구요. 내가 고문을 받으면서 그러한 고통을 많이 받았다구요. 기절해 가지고 쓰러지면 다시 일으켜서 또 고문을 합니다. 그 경계선이 아주 간단합니다. 죽는 것이 문제가 아니예요.

사랑하는 처자가 옷자락을 붙들고 눈물 흘리더라도 자기 혓바닥을 깨물어 피가 나는 아픔을 느끼면서 어려움을 잊어버릴 수 있는 둔한 신경을 갖지 않으면 가기가 힘이 드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뭐 본래 그렇게 타고나셨으니까…'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말도 말라는 거예요.

보다 가치 있는 것, 그 결과에 대한 가치가 어떻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그럴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극복해 나가는 길은…. 자식을 대할 때 당장이라도 목을 놓고 울고 싶은 마음이 복받쳐 올라오지만…. 해머를 맞고 쓰러진 소를 타고 앉아 목을 찔러 피를 빼내는 백정의 심정을 갖지 않고는 넘어설 수 없는 길이 이 길입니다. 그렇게 비참한 길입니다. 그렇지만 이 비참한 자리를 넘어서지 않고는 갈 수가 없거든요. 불쌍한 거라구요.

한번 잘못하는 날에는 영영 길이 막혀 버리는 거라구요. 십년 공부 나무아미타불이 되기 때문에 하늘을 올려다보며 땅을 내려다보며 상대적 감정을 둔화시키기 위한 싸움을 해 가야 합니다. 그런 무자비한 싸움 과정을 거쳐가야 합니다. 그러니 얼마나 힘이 들겠어요? 죽기보다 힘든 일입니다. 그렇다고 눈물짓고 찾아가게 안 되어 있습니다. 도리어 만날까봐 도망가야 할 입장이요, 사연을 들을까봐 귀를 막아야 할 입장입니다. 그런 일을 거치지 않고는 이 땅에서 하늘의 기지를 상속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이 심정적인 절벽을 어떻게 타개하느냐 하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주관성 복귀-타락인간이 회복해야 할 마지막 단계

그 다음 문제가 뭐냐 하면 주관권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주관하려고 하지 간섭받기를 싫어하는 겁니다.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어합니다. 잘못 행동하다가는 전부 망쳐 버리는 겁니다.

여러분이 어떻게 사는지 모르지만 이 단 위에 나설 때는 언제나 선생님 자신이 하나의 변호사라는 생각을 합니다. 나 일대(一代)에뿐만 아니라 역사에 남을 수 있는 하나의 변호인이 되어 가지고 어떠한 사람이 애국자가 되느냐, 혹은 역적이 되느냐 하는 문제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말 한마디에 의해서 역적과 애국자의 갈림길이 생긴다는 것을 생각할 때, 잘못 비판했다가는 내가 인류 앞에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잘 변호하게 될 때는 새로운 복귀의 천국을 찾아 세운 스승이 되고, 그런 입장의 애국자가 되고, 역사에 길이 빛날 수 있는 것입니다. 혹은 법철학이면 법철학의 사상적인 기준을 중심삼고 볼 때, 지금 이 자리는 책임을 완수할 수 있는 하나의 기원을 만들 수 있는 자리이지 않느냐? 이런 것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내가 이 자리에 나올 때는 자신 있게 나오는 게 아닙니다. 자신있게 나오는 사람들은 이미 실패에 접근하는 사람입니다. '이 몸에 하나님이 같이하시옵소서. 아무 유명한 개인이 같이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같이하시옵소서. 인간이 주관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주관하시옵소서' 하는 마음을 가지고 나오는 것입니다. 인간이 주관하기를 바라던 것이 타락의 동기가 되었기 때문에 하늘이 주관하실 수 있는 절대적 판도가 될 때까지 끌고 나가야 할 것이 통일교회를 지도하는 책임자가 해야 할 일입니다. 이것을 선생님이 밝혀 낸 것입니다.

단에 나서게 될 때는 언제나 그런 마음으로 나갑니다. 혹은 여러분에게 어떠한 지시를 할 때도 그래요. 선생님은 될 수 있으면 독단적인 입장에서 지시를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에게 선생님이 뭐 이렇다 저렇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습니다. 주관은 하나님이 하셔야 합니다.

책임자들에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자기가 기관장이 되건 책임자가 되건 자기 권위를 중심삼고, 사장이면 사장, 이사장이면 이사장이라는 말을 듣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러면 안 됩니다. 상대방을 위해 주고 싶고, 상대방이 인사하려고 할 때 그에게 먼저 인사하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축복해 주신다는 거예요.

우리 통일교회에 나온 지 오래된 사람들 가운데는 자기를 이렇게 푸대접 한다고 불평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은 내가 푸대접을 해도 당당하지 못합니다. 선생님으로부터 대접을 받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세상에도 그런 법이 없습니다. 자기를 들고 나와 가지고….

내가 3년 동안 경제적인 문제를 두고 모험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모험을 하고 있어요. 내가 이 모험을 하는 것은 내 일신을 위해서, 혹은 대한민국에 있어서 아무개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통일교회의 위신이 있기 때문에 그 위신을 살려야 할 책임을 지고 일하는 것입니다. 심각하다고요.

일의 결과적인 문제는 나는 모릅니다. 나는 이 일을 이루기 위해서, 이 표준을 중심삼고 권위를 세우기 위해서 하나님 이상 바라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이뤄지고 안 이뤄지는 것은 나는 모릅니다. 그 대신 그 책임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누구보다도 정성을 들인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 내가 돈이 없으니 돈을 대주십시오' 하는 기도는 추호도 안 합니다. 그러한 기도를 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은 이루어 주십니다. 그런 마음을 갖고 나간다는 겁니다.

이번 교역자 공청회에 한국 교계의 실황을 누구보다 잘 안다는 어떤 목사가 참가했는데 그가 하는 말이 통일교회는 정신이 없다는 것입니다. 기성교회는 그렇게 안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정신없다고 하는 사람이 더 정신없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통일교회 문선생이 주장하는 이 뜻은 이루어져 나간다는 것입니다. 두고 보라구요. 상상 외의 성과가 나타날 것입니다. 창조 역사가 벌어져 나갈 것입니다.

그러니 주간종교사도 1호, 2호, 3호 이렇게 호를 거듭하면서 가을이 지나기 전까지는 안심해서는 안 됩니다. 초조한 마음을 갖고 염려하고 잘되기를 바라면서 나가면 모든 사람도 그와 같이 동정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대할 때 벌써 마음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을 갖고 나가면…. 세상에서도 그렇잖아요? 높고자 하는 자는 낮아지는 것입니다. 주관성이라는 것이 사탄세계에서는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공석에 설 때는 그런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대학생들 한 2백여 명이 가평군 일대에서 계몽활동을 하고 있는데 내가 청평에 가서 이들을 불러다가 말을 하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나타나기를 꺼려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이러기를 바라고 있고, 또 이러이러해야 할텐데도 불구하고 내가 나타나서 말하게 되면 반드시 반대하는 사람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면 반대하는 그 사람을 쳐야 된다는 거라구요. 그렇기 때문에 공석상에 나타나기를 꺼려하는 것입니다.

목사 공청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그곳에 매일같이 들락날락하면서도 그들앞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왜 안 나타나느냐? 그들과 나와는 수십 년간 원수 사이였습니다. 원리 말씀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는지 모르지만 반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제 딴에는 한마디할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하면 급살맞게 됩니다. 그런 일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런 체제를 갖추어 나가시는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신문사에 있는 어떤 사람이 자기도 무슨 감투를 써야 될 것이 아니냐는 거예요. 이놈의 자식! 에덴 동산에서 감투내기 하다가 망한 것이 아니냐? 체질개선을 해야 합니다. 어느 곳인가 두고 보자는 것입니다. 네가 가는 길이 옳은지, 선생님이 가는 길이 옳은지 말입니다. 하나님은 누구를 좋아할 것이냐? 하나님은 전체를 위하는 입장에 선 사람을 좋아할 것입니다. 그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에게는 물질이 원수요, 그 다음에는 심정이 원수입니다. 그 다음에는 주관성입니다. 타락이란 그걸 잃어버린 걸 말하는 거예요. 그렇잖아요? 만물을 잃어버렸고 아담 해와의 가정, 천국의 기원인 가정을 잃어버렸습니다. 가정의 정서적인 터전 위에 세워야 할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 그 다음에는 주관권을 뒤집어엎었습니다. 엇갈려진, 반대적인 결과를 가져온 이것을 바로잡으려면 여러분이 나서서….

자기를 극복하는 것은 세계를 극복하는 것보다 어려워

오늘날 통일교회가 이만큼 활동을 했으면 내가 당장에 나서 가지고…. 어떨 때는 답답할 때가 많습니다. 무엇을 시키면 답답해요. 선생님은 성격이 상당히 급한 사람입니다. 손을 댔으면 빨리 끝을 내야, 예스(yes)냐 노우(no)냐를 딱 결정해야 돼요. 하는 것을 보면 답답할 때가 많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사람을 만나기가 무서워서가 아닙니다. 만일 내가 선두에 서 가지고 한번 잘못되는 날이면 천지가 녹아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답답하지만 나서지 않고 배후에서 제1차 작전, 제2차 작전을 하는 것입니다. 몇십 년이 연장되더라도 그 연장되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몇십 년이 연장되더라도 그 수고가 문제될 것이 아닙니다. 한번 잘못된다면 몇천 년을 해도 바로잡을 수 없는 이 엄청난 일을 어떻게 정당한 길로 이끌어 나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될수있으면, 앞에서 대신 시범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가 메시아가 되는 것입니다. 앞장서서 대신하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내세우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용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이룬 것이 틀림없으면 하늘의 것으로 자리를 잡아 가지고 그와 더불어 만민을 축복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통일교회 간부들을 그렇게 지도해 나왔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습관화되어 버리는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네 집안 식구가 원수라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 문선생 자신도 내가 거느리며 백 퍼센트 믿던 사람까지도 그 기준을 다르게 대해야 하는 것을 느끼게 되는 거라구요. 믿지 말라! 통일교회의 때가 되어 오는데 이 믿던 녀석들 때문에 망할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금년에 들어와서 내가 그것을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믿던 사람들 때문에 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제2의 방어선을 쳐 재분석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무조건 믿을 것이 아니라 조건적인 결과를 중심삼고 재분석해야 할 때입니다. 이것을 큰 교훈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주관권이라는 것이 원수입니다. 이 3대 고난을 어떻게 극복할 것이냐? 이것을 극복하기 전에는 사탄을 굴복시킬 수 없습니다. 그것이 원리입니다. 원리가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 개인 한 사람이 승리하기 위해서는 나 개인의 십자가를 극복해야 됩니다. 십자가의 극복이 그런 겁니다. 물질에 대한 것, 정서적인 문제에 관한 것, 자아 주관성에 관한 것을 모두 극복해야 합니다. 나이 많은 사람들을 쭉 보게 되면 주관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통일교회에서 오래된 사람들은 주관권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통일교회 문선생은 새로 들어온 사람이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면, 내가 바쁘더라도 될 수 있으면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려고 합니다. 못 들어 줄 때는 바쁜 일이 있기 때문에 그렇지, 마음만은 그렇지 않습니다.

선생님은 부모의 입장인 것입니다. 부모는 아들이 나이를 먹었더라도 아들을 대하는 마음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환경이 달라지더라도 본질만은 변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그런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겁니다. 외국 식구들이 오면 한국의 어느 지구장보다도 더 반가히 대해 줍니다. 왜 그러느냐? 모든 사람은 최고의 자리에서 연결되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대해 주어야 되는 겁니다. '선생님은 외국 사람만 알아주지, 수고한 우리들은 몰라준다'고 불평을 합니다. 그러면 불평하는 사람이 맞느냐, 선생님 가는 길이 맞느냐? 불평하는 사람들은 점점 기울어가지만, 선생님이 가는 길에는 발전이 있다는 것입니다.

외국 식구를 대할 때는 국가 대 국가로 보지 대한민국의 일원으로 보지 않는 겁니다. 아담 국가로서 해와 국가라든가 상대적 국가를 위해서 언제 정성껏 대해 줬느냐 이겁니다. 대한민국 사람을 중심삼고는 정성들이며 눈물과 피와 땀을 흘렸지만 그 외국사람에 대해서 어느때 정성을 다해서 대해 주었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그렇게 못 하지 않았느냐. 그런 관점에서 빚을 지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영적 생활이나 신앙 생활에서 혹은 책임자로서 하늘을 모시고 나가는 데 있어서 여러분이 알지 못하고 미치지 못하는 규약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이렇게 극복하고 나가야 합니다. 그저 할 수 없어 가지고 적당히…. 그래서는 안 됩니다. 신념을 가지고 청산지어야 되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을 위주하여 청산지어야 됩니다. 그래야 하늘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개인을 중심삼고 극복하기란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성격을 두고 보게 되면 선조를 잘 가져야 되겠다고 절실히 느낄 때가 많다구요. 수고는 남보다 많이 했는데 성격이 고약해 가지고 자기가 한 것을 전부 다 밑뿌리를 뽑아 놓거나, 홀딱 뒤집어 놓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는 그 이상 큰 일을 기대할 수가 없다구요. 그렇게 한 번, 두 번, 세 번까지만 하게 되면 그 이상은 바랄 수 없습니다. 자기가 모든 것을 다 하고서도 하지 않은 입장에 선다면 얼마나 기가 막힐 거예요?

사람들이 겉으로는 좋아하지만 속으로는 머리를 흔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성품을 잘 타고나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신앙길에 있어서 자기와 싸워 이긴다는 것은 세계를 극복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제1차 십자가, 즉 자아를 극복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가정적 사위기대를 이루려면

그 다음에 가정을 두고 볼 때, 가정은 나 하나가 아닙니다. 나 하나면 그저 굶어도 좋고 아무래도 좋지만 가정을 가지면 그렇게 안 됩니다. 가정의 주인이 되면 누구보다도 가정을 위해 정성을 들여야 됩니다. 문제는 그겁니다. 우리 통일교인으로서 축복을 받아 가지고 하늘 가정의 이름으로 엮어진 부부들이 얼마만큼 상대를 위해서 정성을 들이느냐? 복귀과정에서는 별수없습니다.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아담 해와가 서로 이용하려다가 타락하지 않았어요? 해와가 아담을 이용하여 타락했습니다. 천사장은 해와를 이용하여 타락한 것입니다. 이용한 것이 타락하게 된 원인이 아닙니까? 부처끼리 이용할 것이냐? 이용하게 되면 망하는 것입니다. 부처끼리의 원칙을 두고 볼 때 아내를 이용하겠다는 남편, 남편을 이용하겠다고 하는 아내는 망하는 거라구요. 그렇게 되면 복귀가 되지 않습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용당하라는 것입니다. 이용당하는 데는 무엇을 중심삼고 이용당해야 합니까? 사탄을 중심삼고 이용당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갖고 이용을 당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용당하더라도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가 이용하려고 하다가 나한테…. 자동적으로 기뻐하며 이용당할 수 있는 자리에 서지 않고서는 복귀가 되지 않습니다.

자기가 믿을 수 있는 아내를 만들기는 자기가 살아온 생애보다 몇 배 더 힘이 든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편하게 살고 있는 부처가 있다면 그들은 복받은 사람일는지 모르지만, 그 가정에 부딪치는 일이 있으면 깨어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만큼 상대를 위해 정성을 들였느냐가 문제입니다. 체면과 위신을 버리고 그를 위해 얼마나 노력을 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를 구해 주기 위해서 하나님의 심정을 갖고 노력하는 사람이 부모입니다.

상대를 딸과 같이 생각하고, 어머니같이 생각하고, 누이 동생이나 누나같이 생각하면서 치닥거리를 해주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주는 것이 심정적 복귀라는 것입니다. 상대를 얼마나 위해 주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대가 강제로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무서워서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뼛골에서 우러나서 움직이지 않을 수 없는 기준을 갖게 해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는 안심할 수 없는 거라구요. 이렇게 하는 것이 심정적인 복귀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가정의 규율을 세우는 것입니다. 부처간에 그렇게 되어야 하는데 두 부처가 자식들 대해 가지고 '아이쿠'하는 이 말은 걱정이 태산 같다는 뜻이라구요. 자기가 조금만 잘못하는 날에는 그것이 자기에게 미친다는 거예요. 이걸 여러분들은 생각해야 돼요.

통일교회의 간부들 가운데 공금이라든가, 물질에 대한 것을 잘못 다루어 가지고 인정에 의해 자기 가정을 중심삼고 공금을 쓰며 환경을 심정적으로 유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직접 자기 아들딸 앞에 독약을 배급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물질을 잘 다루어라, 사람을 잘 다루어라, 그 다음에는 자기 행세를 잘 하라는 거예요. 사탄세계에서는 이것이 걸린다는 거라구요. 공금에 대해서는 어떻게 할 것이냐? 공적인 사람들을 어떻게 대할 것이냐? 공적인 일을 어떻게 결정해서 처리할 것이냐? 통일교회 지구장들, 교회장들은 앞으로 일대 혁신을 해야 합니다. 공금에 대한 관리가 전부 잘못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금년에 들어와서는 어느 정도 교회에 보조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보조해 주는 주인이고, 우리의 어려운 사정을 해결해 주는 주인이라 하며 걸핏하면 선생님에게 편지질합니다. 그래 가지고 나라가 되고 교회가 될 것 같아요? 그래서는 안 됩니다. 뜯어고쳐야 합니다. 선생님이 편안한 자리에 있는 것 같지만 온갖 심혈을 기울여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별의별 도깨비 놀음을 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을 정상적인 입장으로 생각해서는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의 입장과 바꿔서 생각해 보라구요.

나라의 미래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통일교회를 희생시킬 것입니다. 나라의 운명을 어떻게 할 것이냐 할 때 통일교회를 희생시키는 것이 내가 바라는 것입니다. 국가의 체면과 세계의 체면을 세워야 할 그 길에 있어서 여러분이 갖고 있는 신앙은 거래하는 식의 신앙이라는 거라구요. 내가 지금까지 돈이 없더라도 하나님께 돈을 달라는 기도를 해보지 않았습니다. 가정을 중심삼고 찾아 나오는 것이 원리에서 가르쳐 주는 복귀의 길이지만 나는 '아버지여! 내 가정이 축복을 받아야 할 텐데…'하고 기도 한번 못 해봤습니다. 그것보다는 나라를 위해서,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 정성을 들였습니다. 이런 등등의 문제가 문제되는 것입니다.

한 가정에 있어서 자식이 많으면 많은 대로 탕감이 즉각적으로 적용됩니다. 자기가 개인적으로 공적인 책임을 못 했으면 탕감받아야 됩니다. 공적인 책임을 못 하면 탕감받아야 되는 거라구요. 그 탕감을 누가 받느냐? 자기 아들딸이 받습니다. 그것이 원칙입니다. 남의 아들딸이 탕감을 받기를 바라는 통일교인은 전부 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다면 왜 우리 통일 교인들은 고생시키고, 사탄세계는 가만히 놔두느냐'고 생각하는 그러한 사고방식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탕감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통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탕감이 아니라 벌을 주는 거라구요. 거기에는 탕감이고 뭐고 없다는 거예요. 이렇게 볼 때, 여러분의 행동이 즉각적으로 여러분의 아들딸에게 영향이 미쳐진다는 것입니다.

선생님 자신도 자녀들을 두고 회개할 때가 많습니다. 통일교회 책임자로서 이렇게 철부지해서 하나님을 염려시켜 드리는 일이 얼마나 많겠는가? 그것을 깨우쳐 주려니 하나님이 나에게 이렇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있어서는 나는 잘하려고 하다가 이렇게 됐지, 남을 벌주려고 하진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선의의 결과로 맺어질 것이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그래 두고 보는 것입니다.

내가 성진이에 대해 고맙게 생각하는 것은 그가 일본에서도 일본 협회장이나 간부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내가 아들딸에게 신앙에 대한 교육을 못 했다구요. 내 아들딸이라는 인연을 가지고 끼고 앉아서 밤을 새워 가며 이야기해 준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신앙 문제를 중심삼고 한 시간이라도 진지하게 이야기해 봤으면 생각이라도 나지요.

자식은 어머니 아버지의 거울입니다. 그러니 통일교회가 앞으로 망하느냐 흥하느냐 하는 것은 아들딸들이 증거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사람들을 농락한 사람이라면 자식들이 반대해야 되는 것입니다. 저주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거든요. 심은 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모든 여건을 보게 되면 선생님의 자녀들이 선생님을 반대하기 딱 좋습니다. 아버지라고 자식들에게 언제 한번 악수를 해보았느냐. 한 잠자리에서 자 보기를 했느냐, 손을 잡고 사정을 나눠 봤느냐는 것입니다. 고맙게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래도 나의 집안에 대하여 기대를 갖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을 고맙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내를 가졌다고 행복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아녀자도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행복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진 것입니다. 주체되는 사람은 행복하게 해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 자식이 있으면 자식도 행복하게 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3대 십자가를 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위기대 복귀가 가장 어렵습니다. 그것은 세계를 정복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통일교회에 있어서 2차 7년노정이 무엇이냐? 가정을 기준한 시대라는 것입니다. 3차 7년노정은 뭐냐? 자녀를 기준한 시대입니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그러므로 그 기준에 있어서 나는 어떻게 가야 할 것이냐? 1차 7년노정을 가는 사람들 앞에 끌려갈 것이냐, 선두에 설 것이냐? 내가 공식적인 21년 노정을 가는 데 있어서 힘이 있는 한 보다 큰 걸음으로 여러분보다 앞서가겠다는 것이 선생님의 생활철칙입니다.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믿고 있다고 자신할 수 있느냐

자 이렇게 생각하게 될 때, 천국이라는 것이 우리가 앉아서 믿고 있으면 갈 수 있는 곳이냐? 그렇게 바란다면 그것은 망상입니다, 망상. 천국은 누구로부터 이루어지느냐? 선생님으로부터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으로부터 되어지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천국을 이룰 수 있는 사유와 재료는 제시할는지 모르지만, 여러분 자신이 해야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해야 된다는 것은 놀면서 남이 가게 되면 나도 가고 남이 가지 않으면 나도 안 가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딱 결정을 해 가지고 그것을 중심삼고 짜임새 있게 가야 하는 것입니다. 공식적으로 타개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절대적인 신앙을 해야 합니다. 통일교회를 믿느냐 할 때 절대적으로 믿고 간다고 해야 됩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할 때 '이 사람들보다 더 사랑하는 것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하였습니다. 두 번째 '요한의 아들 시몬아'할 때, 예수님이 웃으면서 이야기했겠습니까? 그런 생각 해봤어요? 세 번씩이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표정이 어떠했겠습니까? 벙실벙실 웃으면서, 농담하면서 했겠습니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심각했을 것입니다.

일대에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심각한 자리에서 베드로를 바라보았을 것이 아니겠어요? 그 시선에는 천하가 엇갈릴 수 있는 내용이 들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때에 대한 절박감을 가지고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그 음성 또한 생애에 없었던 비장한 음성이 아니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태도도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한 자리에서 예수님께서 묻게 될 때 베드로의 마음은 어떠했겠느냐? 베드로가 대답한 걸 보면 그는 우둔하다면 우둔한 사람입니다. 잘못할 것을 뻔히 알고 세 번씩이나 묻는데도 당당코 '이 사람들보다도 사랑하는 것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하고 자신 있게 대답했던 것입니다. 어떤 면으로 보면 훌륭한 점도 있습니다. 그는 옳으면 옳고 그르면 그른 것을 확실히 하는 성격을 가진 사람입니다. 잘못했을 때는 백 퍼센트 단념하고 근본적으로 청산짓기 위해 신앙생활을 한 사람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청산을 했으면 틀림없이 청산했다고 하는 사람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회개했으면 그 회개가 하늘의 공인을 받은 회개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절대적인 신앙관을 가진 사람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기에 세 번씩 묻는 물음에 대하여 당당하게 자신있게 대답한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에 대해서 '야 아무개야, 네가 통일교회를 중심삼고 절대적 신앙을 하느냐' 하고 세 번씩이나 물어 볼 때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어요? 신앙을 하는 것도 자신이 없는 여러분에게 '아무개야,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고 묻게 될 때 '내가 이 사람들보다 당신을 더 사랑하는 것을 하나님이 아시나이다'라고 할 수 있는 자신이 있어요? 자신 있어요? 그러한 내용이 없으면 안 됩니다.

베드로가 그의 잘못을 회개하고 돌아서서 옛날에 예수님을 모시던 때보다 몇백 배의 신념과 결의를 할 수 있는 자신임을 자각했기 때문에, 옛날에는 그랬지만 이제는 절대 그럴 수 없다는 자신을 높이 평가한 안정된 기반 위에 섰기 때문에, 예수님이 부정하더라도 그것을 절대적인 부정으로 돌릴 수 있는 자신이 있기 때문에 그런 대답을 한 것입니다. 그런 터전에서 예수님이 그에게 천국 열쇠를 맡기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여러분에게 '야, 아무개야! 네가 통일교회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하느냐'고 묻게 될 때 '아, 내가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줄 하나님께서 아시지 않습니까? 라고 말할 자신 있어요? 그것이 간단한 말이 아닙니다. 한 번뿐만 아니라 세 번씩이나, 물을수록 더 심각해질 것이고, 물을수록 더 절박해질 것이고, 물을수록 더 기가 막힌 장면이 그 눈앞에 펼쳐질 것입니다. 그것도 깔고 넘어갈 수 있는 각오를 해야 하고 결의를 해야 합니다. 그런 결의를 하고 과거를 용서받고도 남음이 있을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야 합니다. 베드로에게 그런 터전이 있기 때문에 기독교가 그를 중심삼고 출발했던 것이 아니냐? 자, 그러한 신앙을 갖고 있다는 사람은 손들어 보십시오. '그런 것을 물어 볼 게 뭐야? 하며 기분 나빠하는 사람 손들어 봐요. 여러분이 기분 나빠해야 선생님이 좋아하는 거라구요.

이런 근본적인 자세를 두고 볼 때, 내가 믿는다는 것이 어느 정도인지 평가해 봐요. 오늘 저녁 집에 들어가면 말이예요. 그래프를 그려 보라는 것입니다. 내가 1960년대는 어떻게 믿었고 지금은 어떻게 믿고, 어느 점에서 왔다갔다하느냐 하는 것을 그래프로 그려 보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심령선 도표를 그려 가지고 1960년이면 1960년의 몇 월은 올라갔고 몇 월은 내려갔는지 그려 보라는 것입니다. 맨 처음에 믿을 때는 미친 호랑이처럼 세상의 짐승을 다 잡을 듯이 날뛰더니 1년 지나서는 떨어지구 2년 가고 나서 뭔가? 3년 가고 나서는 아이쿠, 4년째 가서는 오줌을 쌌는지 똥을 쌌는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농담이 아닙니다. 왜 그러냐? 돼먹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렇습니다.

믿음에 있어서 하나님이 바라보시면서 '너는 영구한 터전을 갖고 있다. 하나님이 신임할 수 있는 믿음을 가졌다. 행동과 믿음에 있어서는 통일교회에서 너만은 기준에 섰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됩니까? 행동은 제쳐놓고 거기에 보충될 수 있는 기대가 세워졌느냐 하는 것입니다. 원리에서 말하는 상대기대가 갖추어졌느냐 하는 것입니다. 상대기준을 통해 가지고 상대기대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상대기대가 없어 가지고는 존재기대가 형성이 안 됩니다. 그 상대기대가 돼 있어요?

천국을 맞기 위해 해산의 수고로 선의 터전을 넓혀 나가자

통일교회 문선생이 여러분을 어떤 기준에서 믿을 것이냐? 어떤 사람들은 선생님이 믿어 주지 않는다고 그러는데, 그냥 믿어 주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렇게 되면 여러분이 그 믿음을 자기 것으로 생각해서 거기에 박자를 맞출 게 아니예요? 그러면 어떻게 되겠어요? 하나님 자신도 믿기 위해서는 기대를 세워 가지고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생님에게 책임을 지워 가지고 책임자로 세울 때까지 간단히 믿어 주신 것 같습니까? 선생님의 과거 생활을 중심삼고 보면 하나님은 무정한 분입니다. 언제 동정해 주시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지나고 나서야 얼마나 절박했던가를 아는 것입니다. 새로운 길을 뚫고 나갈 때, 하나님은 언제나 번번이 어려운 데에 내세워 가지고 죽겠으면 죽으라는 식으로 내버려 두었습니다. 지금까지 그런 길을 통일교회 문선생이라는 사람은 개척해 나온 것입니다. 내가 원할 때 하나님은 동정을 안 해 주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통일교회 여러분들도 앞으로는 한 단계 축복해 주어 가지고 쓸 만한 사람이 있다면 잘 가려서…. 통일교회를 나왔던 도깨비 같은 녀석들이 수없이 하나님 앞에 약속하고 선생님 앞에서 몇천 번 약속을 했을 게 아니예요? 그러나 남아지지 못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배반할 수 있는 때에 있습니다. 사탄세계 같으면 백발 백중 배반하는 겁니다. '이제 이 사탄세계에서 남아질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무슨 교훈을 주려고 그러시느냐? 당신이 무슨 약속을 이행하시는데 그렇게 처절하고 안타까운 곡절을 거쳐 가시는 것이냐?' 하는 생각을 가지고 그 자리를 중심삼고 관심 있게 넓혀 가라는 겁니다. 나중에 알고 보면 그 자리가 축복을 거쳐온 자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통일교회 문선생이 테스트를 해 가지고 그것을 발견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망하지 않고 남아 있는 것입니다.

어떤 일을 하다 보면 목을 졸라매는 반대도 있습니다. 그러니 높아지려면 낮아지라는 것입니다. 낮은 자리에 가야 합니다. 그래 가지고 낮은 자리에서 올라와야 됩니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은 통일교회 문선생이 처음부터 당당한 독재자로 출발했다고 하지만 그 자리까지 나오기 위해서 천번 만번 수난의 길을 걸으며 나왔습니다.

여러분은 선생님이 역사과정에서 뒤넘이치고 내적 심정세계에서 투쟁한 역사의 흔적을 더듬을 수 없을 것입니다. 완전히 질식할 것 같은 칠흑 같은 암흑에 부딪쳤었습니다. 항로를 잃어 버린 배와 같은 입장에 부딪칠 때가 많았어요. 여기에서 단 하나뿐인 것은 무엇이냐? 자기 마음이라고요. 정의에 서느냐, 불의에 서느냐? 정의를 사랑하느냐, 불의를 사랑하느냐? 선을 찾아가느냐, 악을 찾아가느냐? '암흑 천지에서 추구해야 할 선의 주체는 바로 당신이요, 무의 세계에서 창조의 기틀을 처음으로 나타낸 분이 당신이 아닙니까' 하며 나가야 됩니다. 암담한 자리에서 선의 주체로서 걸어 나오셨다면 그 선은 흘러가 버릴 것입니다. 그 선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섭리해 나오신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전체를 위주한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체휼해 가면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나가면 방향이 가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팽이는 돌다가 중심을 잡으려는 힘이 약해지면 넘어지지요? 돌아가는 힘과 넘어지는 힘이 엇갈리는 그 경계선에서 새로운 방안을 모색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자리는 최고의 심각한, 예스(yes)냐 노(no)냐 하는 그런 첨단의 자리입니다. 여기에 있어서 자기 자체가 결승점을 바라보는 그런 표준, 또는 내정적인 교차점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길이 힘들더라 이거예요. 이렇게 통일교회를 이끌고 나왔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통일교회 문선생이 천국을 이루고 사느냐? 그렇지 못합니다. 그러면 무엇을 가지고 사느냐? 긍지를 갖고 사는 것입니다. 긍지를 갖고 사는 것이 무슨 천국이냐? 그 정신이 무슨 정신이냐? 하나님의 정신입니다. 하나님은 천국의 주인이시지만 천국의 주인의 생활을 못 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그 마음속에 수난의 천국을 품고 나오셨으니 나도 그 입장이 되어야 한다. 영광의 천국은 아직 오지 않았다. 그것을 위해서 이렇게 이렇게 간다'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난날을 반성하며 책임을 다해 나가자

결론은 평화의 천국과 영광의 천국은 수난의 천국을 대해 가지고 해산의 수고를 거쳐서 오는 것입니다. 해산의 수고를 해보지 않고는 영광의 천국을 맞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는 수난의 천국을 보위하고 나가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렇기 때문에 부정당하기가 일쑤요, 극복하기가 일쑤요, 반대받기가 일쑤요, 처절하기 일쑤입니다. 그러한 입장을 취하지 않고서는 영광의 천국의 터전과 그 기원을 세우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것입니다. 천국은 지금보다 전부가 더 좋은 나라입니다. 지금보다 더 좋을 수 있는 내용이 연속되는 나라입니다. 이것이 천국의 개념입니다.

천국에서는 행복의 요인이 어떤 모양으로 나타나느냐? 지금보다 더 좋은 것으로 연속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천국을 지탱하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보다 큰 보람을 얻기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이런 관념을 가지지 않고는 천국의 내용의 개념과 일치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개인보다도 가정을 위한 행복의 길을 가야 합니다. 더 큰 행복의 요인을 찾아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자유롭게 접할 수 있는 천국의 개념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그런 천국을 이 지상에서 맞기 위해서는 더 큰 것을 위해서 선의 터전을 넓혀 나가야 합니다. 수난 과정을 극복해 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통일교회에서는 개인을 희생시켜서 가정의 행복을 세워 나가라는 것입니다. 그건 그냥 되는 거예요. 가정을 희생시켜서 종족의 행복을 세워 나가라, 종족을 희생시켜서 민족의 행복을 세워 나가라, 민족을 희생시켜서 국가의 행복을 세워 나가라, 국가의 행복을 희생시켜서 세계의 행복을 세워 나가라, 세계의 행복을 희생시켜서 천주의 행복을 세워 나가라는 것입니다.

더 큰 행복의 이념을 오늘날 이 땅 위에 이루기 위하여 그 이념과 일치점을 갖고 나가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해산의 한날이 올 것입니다.

그렇게 나가는 사람이 자기를 주장하며 살 수 있어요? 자기의 욕심대로 할 수 있어요? 밥을 잘 먹고 나면 죄인같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 거 안 느껴 봤지요? 옷을 잘 입고서도 자랑할 것이 없다는 거예요. 민족을 구원하고 지도해야 할 책임이 있는데 언제 그들을 입혀 주고 먹여 주던 때가 있었느냐? 부끄러움을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나타나서 큰소리를 치지 말고 나타나기에 앞서 자신이 책임 못한 죄책감에 사로잡히는 입장에 서야만 남아지는 거라구요. 그래야 그런 자리에 남아지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용서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을 통해서 그런 터전에 서야 내가 남아진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과거도 그런 생활이요, 지금도 그런 생활이요, 앞으로도 더욱 그런 생활을 해야 될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제 내가 이렇게 생각합니다. 최후의 죽음의 자리에서 운명하는 그 순간에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소원이 무엇인가 하는 것까지 생각합니다. 생애에 어떤 일이 이루어지길 바라겠지만, 죽는 그때에 있어서 어떻게 죽을 것이냐 하는 문제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을 소화시킬 수 있는 인연을 어떻게 남기고 가느냐 하는 문제….

여러분이 일생 동안, 혹은 1971이면 1971년 한 해, 수만년 이 역사시대에 이어져 있는 이 시대에 얼마나 소득을 얻을 것이냐? 여러분 일대에 얻는 소득이 얼마쯤 되느냐? 여러분은 이런 문제에 매달려 있습니다. 그리하면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믿는데는 철저히 믿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천국은 나에게서 멀리 있는 것입니다. 쉬운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심각한 입장에서 정성을 들여야 갈 수 있는 자리에 있습니다. '천국은 나로부터' 하는 이 말은 심각한 말입니다. 타락권내에 있어서의 이 자리는 심각한 자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천국은 나로부터입니다. 오늘날 그렇게 엄벙덤벙해 가지고는 뭐…. 영광의 천국의 한날을 만민과 더불어 하나님과 더불어 맞이하기 위해서는…. 이것은 제삼자가 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선생님이 해주겠거니 하지만 어림도 없습니다. 교재는 만들어 줄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먼저 하라는 것입니다. 통일교회 문선생이 지금까지 하나님의 결재를 받아 가지고 하나님의 분부한 뜻을 위해 나왔습니다. 하느냐 못 하느냐는 생각 안 합니다. 되고 안 되고는 하고 난 뒤라고요. 하나님이 못 한 일을 한다고 하는 강한 동기를 갖지 않으면 결정적인 결과를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천국은 여러분과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중요합니다. 1960년대에는 기성교회 목사들이 반대하여 통일교회가 내려갔지만 이제는 내려간 운세가 솟구칠 때가 왔습니다. 여러분이 정성을 들여서 잘하면 새로운 시대적 혜택을 받을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그런 때이니만큼 천국 개념을 다시 시정해 가지고 여러분의 생활적인 모든 기준을 다시 점검하지 않으면 안 될 때가 됐다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는 앞으로 찾아오는 시대 앞에 부끄러운 입장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천국은 나로부터'라는 제목을 가지고 말씀드렸습니다.

​기 도

​아버님! 저희들이 진정한 의미에서 아버님을 사랑합니다. 다시 한 번 믿어 주시옵소서. 저희들의 생활을 통하여 진정 통일교회를 사랑합니다. 다시 한 번 믿어 보시옵소서. 저희들은 통일교회의 진리와 통일교회 역사와 통일교회 현재를 존중합니다. 다시 한 번 강림하여 주시옵소서. 나 자신이 어느 자리에 어떤 자체로서 어떠한 형태에 머물고 있는가를 비판할 때, 자기의 위치가 적나라하게 제시될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다시 한 번 역사적인 섭리의 뜻을 통해 미루어 볼 때, 수십년의 통일교회의 역사를 통해 미루어 볼 때, 통일교회 선생이 걸어온 거리를 심정적 내정을 중심삼고 다시 한 번 비교하고 비판해 보게 될 때, 우리들이 과연 통일교회 일원으로서 합당한 입장에 있느냐 하는 것을 다시 규명하지 않으면 안 될 현시점인 줄 아옵니다.

여기에 참석한 당신의 자녀들, 처음 말씀을 대하던 그 기쁨이 하나의 영양소가 되어서 하나의 줄기와 하나의 가지가 되고 잎을 이루게 하고 꽃을 피우고 결실을 맺게 할 수 있는 자리에 서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적나라하게 분석하고 비판하여 자기 자신을 확립시키고 가치 판단을 결정지을 수 있는 자각된 모습을 갖게 허락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천국은 신앙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동기와 출발은 될 수 있지만 내정적 결정은 이루지 못한다는 사실을 이제 알았습니다. 오늘날 상반된 생활 여건을 중심삼고 극복과 다짐을 하지 않으면 안 될 싸움길이 남아 있는 것을 알았사옵고, 이 싸움터에서 마지막으로 사탄을 자연굴복시키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알았사옵니다.

개인과 상대, 즉 가정을 중심삼고 사위기대의 복귀의 터전을 논하는 것이 통일교회 교리의 중심이 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나 자신에 있어서, 가정에 있어서, 개인의 사명에 있어서 부끄럽지 않느냐 하는 문제를 반문하게 되옵니다. 여기에 아버지 앞에 부끄럽지 않다고 장담할 수 있사옵니까? 지난 모든 환경을 중심삼고 볼 때, 아버님이 같이했고 아버님이 틀림없다고 하는 그 결정적 결과를 다짐짓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이제 그럴 수 있는 나, 그런 입장에 선 자기 자신을 다시 한 번 명시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이여, 대한민국을 천국화시켜야 통일이 된다 할 때, 한꺼번에 전체가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것보다도, 나 개인이 환경을 극복하고 초월하여 내일의 무대를 인계맡아 제2의 축복을 결정지을 수 있는 결의와 주체성을 가지고 나타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이것이 틀림없는 사실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는 자아를 발견하고, 그럴 수 있는 자아를 그리워할 수 있는 자신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니다.

지금까지 역사과정에서 저희들이 남겨 놓고 역사적인 와중에서 저희들이 제시한 표적이 흔들리는 세계 정세와 더불어 흘러가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무리 어려움이 오더라도 반석 위에 세워진 하나의 표준이 되게 하시옵소서. 표준뿐만이 아니라 광명한 빛을 발하여 암흑세계를 밝히는 하나의 등대와 같은 사명을 해야 되겠습니다. 이것이 오늘 통일교단의 사명이요, 통일교회의 노선인 것을 저희들이 알았기 때문에 그럴 수 있는 자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흑백을 가려야 할 입장에서 백이면 완전한 백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흑을 상쇄할 수 있는 백이 되어 아버지의 결정적인 보호와 아버지의 사랑과 긍휼권내에 서지 않으면 안 되겠사오니, 그런 자신들로서 남아지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자리에 참석한 당신의 자녀들, 이곳을 우러러보면서 정성들이는 그들 위에 무한하신 사랑과 당신의 가호가 같이하시옵소서. 세계에 널려서 외로운 길을 개척하고 있는 당신의 자녀들을 늘 당신의 깊으신 마음으로 보호 하여 주시옵소서. 저를 역경의 길로 몰아붙여서 저에게 승리의 결과를 상속시키기 위해 말없이 실적을 쌓아 가게 했던 거와 마찬가지로 이들에게도 같은 은사와 복을 빌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앞으로 다가올 세계를 직시하면서 내일의 개척자의 사명을 더디하지 않고, 오늘의 승리자의 모습을 봉헌하는 가치 있는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당신의 후덕이 저희 생활과 저희 생명 위에 넘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당신의 안내와 지도와 편달이 길이길이 생활권 안에, 직접적 간접적 주관 권내에 있게 하여 주시옵기를 재삼 부탁드리며, 모든 말씀 참부모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