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 아버지께서 저희들을 굽어살피시옵소서. 이달 들어 세 번째 맞는 안식일 아침, 저희들이 정성을 다짐하며 아버지 존전에 찾아 나왔습니다. 아버님이 거룩하심과 같이 저희들도 거룩하게 하여 주시옵고, 아버님이 선을 위하여 책임지시는 것과 같이 저희들도 선을 위하여 책임지는 자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이 바라시는 소원의 나라를 위해 무한한 인내로써 극복하시며 투쟁치 않고 지금까지 나오신 아버지, 그 자녀의 명분을 따르려는 저희들도 아버지와 같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악을 용납하지 않고 악과 대적하면서 선의 실천 무대를 확대하기 위하여 시간 시간을 쉬지 않으시는 아버지를 알았사오니. 저희들도 쉬지 않고 노력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아무개 아무개란 이름을 가진 저희 자신들이 아버지 존전에 부복하였사옵니다. 선을 따라 저희와 상봉하여 기뻐하시던 그 순간이 어느때였사오며, 저희를 만나 기뻐하심과 동시에 당신의 그 뜻을 사랑하는 아들딸이기에 통고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그 내용이 무엇이었사오며, 그 내용을 놓고 결의하여 당신과 저희가 일체가 되어 사망선을 극복해 넘자는 공동적 표어를 내걸어 맹세하고 나섰던 때가 어느때였던가를, 저희들, 다시 한 번 회상해 보아야 되겠습니다.
아버지 앞에 효성의 도리를 다하고 아들의 책임을 다해야 할 저희들. 아버지께서 기뻐하실 수 있는 길을 개척하기 위하여 슬픔의 길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고. 아버지께서 바라시는 소원의 터는 저희들 앞에 장애가 되는 그 고개를 극복하지 않고는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저희들이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지의 선한 입장을 세워 영광의 찬양을 돌려드리고 효성을 다짐하는 아들딸이 서야 할 자리는, 수난의 고빗길을 극복하여서 자기 일신을 몽땅 아버님 앞에 바치겠다고 맹세하는 사람이 아니고는 미칠 수 없는 자리이옵니다. 이러한 것을 생각할 때, 당신을 영광스럽게 그 자리에 모셔 놓고 만만세를 부르면서 당신의 사랑을 응당히 받을 수 있는 자격을 가졌다고 만천주 앞에 나타내 자랑하고 싶은 아들딸의 모습을 그리워하면서 당신도 극복의 노정을 되풀이해 나오셨사옵고 저희들도 그 노정을 따라가고 있사옵니다.
이것을 생각할 때 당신이 '이것이다' 하고 소리를 지르면 저희도 따라서 소리를 지르며 당신 앞에 감사와 찬양을 드릴 수 있는 최후의 한 기점까지 전진에 전진을 다짐하고 일보 가일보할 것을 다짐해야 되겠습니다. 이제까지 어려운 생활 가운데서도 모든 정성을 다했지만 그것이 미치지 못하였기 때문에 내일에는 그 정성이 미칠 수 있는 새로운 아침이 뒤미칠 수 있는 소망을 갖고 와 달라고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아버지 앞에 책임을 다할 수 있는 아들딸이 되어야겠습니다.
진정 저희들이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그 일치점 앞에 이끌림을 받고 다짐하며 당신의 명령에 따라 행진할 수 있는 자녀들이 되었느냐 하는 것을 스스로 반성해 볼 때, 아버지, 언제나 저희를 이끄시기 위해 또 수고하지 않으면 안 될 당신을 발견할 적마다 황공한 마음을 금할 수 없사옵니다.
그렇게도 수고하신 아버지께서 저희들로 말미암아 또다시 천세의 한이 될 수고의 일로를 남겨야 할 입장에 선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사랑의 인연을 따라 나서고 사랑의 가치를 찬양해야 할 아버지와 저희 사이가 기쁨의 인연이 아니라 도리어 부끄러움의 인연이 되고 수치의 인연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느끼면서, 당신은 불쌍하신 분이요, 아들을 그렇게도 잊지 못하시는 사랑의 주인공이라고 우러러볼 수 있는 저희들 각자가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이 거룩한 당신의 뜻의 표준은 개인을 위한 표준보다도 국가를 넘고 세계 전역을 거느려 가야 할 뜻의 길인 것을 생각할 때, 지극히 작은 나 자신을 움직여 나가기도 이렇게 힘들고 나 자신의 통일의 기준을 세우기도 이렇게 힘든데, 국가를 넘어 세계를 이끌어 가야 할 아버지는 얼마나 어려운 입장에 계시는가 하는 것을 저희들은 자신들을 두고 미루어 헤아리게 되옵니다. 이제는 저희들로 말미암아 아버지 앞에 어려움을 더 연결시키지 않아야 되겠다고 이를 악물고 맹세하는 자신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저희들이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당신 앞에 자기의 소원을 놓고 머리 숙여 기도하기 전에 당신의 뜻을 염려하면서 마음졸일 수 있는 효자 효녀가 되고, 나라에 대하여 충신 열녀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나라의 앞날을 위하여 마음졸이는 사람, 수심을 친구삼아 밤을 지새는 사람들은 자기 생애의 소원과 더불어 노랫가락을 부르면서 산 것이 아니라 한숨과 더불어 내일의 짓눌리는 수난길을 스스로 알고 전진해 나가는 무리가 되었다는 사실을 저희들이 알고 있습니다.
역사는 이런 무리로 말미암아 계승되고 이런 무리에게 바톤을 연결시켜서 내일의 소망, 피안의 행복의 터전을 향하여 달리고 있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한 걸음 더 달리고 또 달려야 할, 힘이 가중된 입장에 서서 목적을 향하여 조급한 마음이 앞놓아가야 할 텐데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하게 될 때는 하늘을 대표하여 달리는 자는 사탄을 대표하여 달리는 자 앞에 굴복해 버리고 만다는 사실을 저희는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사탄은 실체적인 세상을 근거로 하여 있사옵고 하늘은 무형의 실체권을 근거하여 있기 때문에 사탄의 실체적인 영향을 벗어날 수 없는 생활권내에 살고 있는 인간에게 있어서는 이 육계권내(肉界圈內)라는 것이 얼마나 무섭고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를 저희들이 알고 있습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는 사실보다는 육신이 마음을 사로잡아 가지고 당신이 원하는 입장에서 나갈 수 있는 사람이 못 되게 한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에, 저희는 강한 몸을 갖고 아버지 앞에 서야 되겠습니다. 그 강한 것이 선을 위해서도 강해야 되겠지만 악을 대하여도 강해야 되겠습니다. 마음이 원하는 데서는 육신이 약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강해야 되겠습니다. 무엇에 강해야 되느냐? 선을 위해서 강해야 되겠습니다. 악을 대해서도 강해야 되겠습니다. 아버님은 선 앞에 약한 마음을 말씀하셨고 악 앞에 강한 몸을 말씀하셨지만 저희들은 양면이 다 강해야 되겠습니다.
마음이 소원하는 것은 내 일신이 바라는 한 개인의 소원이 아니라 역사가 바라는 전체의 소원인 것을 생각할 때, 이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이 강하고 몸이 강하지 않고는 안 되겠기에 저희들은 과연 아버지를 닮아야 되겠습니다. 그 아버지의 평소의 모습을 대신할 수 있는 아들이 되고 딸이 되어야 되겠사오니, 그런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이제 1971년도도 절반을 넘어, 또 한 달도 절반을 지나 세 번째 맞이하는 안식일 이 아침에 긍휼의 사랑을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이 가운데 찾아와서 당신의 아들이요 딸이라고 하며 당신과 내정적 심정을 나누고 싶은 아들딸이 있사올 때, 원수의 환경 앞에 염려의 눈을 가지고 찾아 오시는 아버지가 아니라 자유롭고 자연스럽게 찾아오시는 아버지와 상봉할 수 있는 나 자신을 부복시키는 이 자리가 되게 허락해 주시옵소서.
각자의 마음과 몸이 당신께 사로잡힌 바 되어 언제나 저희들은 당신 앞으로 가지만, 당신은 저희를 업고 가는데 저희는 반대로 업히는 놀음을 해왔사옵니다. 당신의 움직임에 따라가려고 하지만, 언제나 그 반대의 입장이었습니다. 이것을 볼 때, 이기고 전진할 수 있는 승리적인 소원의 터전을 밟지 않고는 오늘 현재의 입장을 넘어갈 수 없는 입장에 선 것이 저희 자신이란 것을 저희는 깨닫고 있사옵니다.
지금까지 역사를 통하여 수많은 선조들을 찾아 나오신 아버지요, 늘 이 시대에 있어서도 저희를 대신해서 그러지 않을 수 없는 아버지인 것을 생각하게 될 때, 후퇴할 수도 없고 되돌릴 수도 없는 아버지의 심정을 저희들이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이제 저희가 당신의 손을 붙들고, 당신의 목을 안고, 당신이 원하는 것을 위하여 따라가고, 당신의 눈물 자국을 닦아 주고, 그 눈물 자국을 없앨 수 있는 아들이 되고 딸이 되게 하시어서, '나를 위해 수고의 길을 가지 말고 민족을 위하고 세계를 위해서 가 달라'고 할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고 원하옵니다.
저희들의 신앙생활은 상습화되고 있습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에도 그렇고, 미래에도 그럴 것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이와 같은 자리에 있는 무리가 어찌 아버님 앞에 행복의 요인을 촉구시킬 수 있으며, 내일의 부모의 아들딸이 될 수 있겠사옵니까? 과거엔 너무나 지루한 수난길로 아버지를 몰아넣었사옵고, 오늘 이 자리에서도 아버지의 부탁을 받고도 싫다고 머리를 흔드는 무리가 되어 있는 것을 바라보게 될 때, 늘 불효의 자리를 떠나지 못하였던 불효막심한 것들이 이 자리에 모였사오니, 아버지여, 다시 찾아오시옵소서.
진정한 의미에서 자극이 필요하고 새로운 충격이 필요한 것을 알고 있사오니, 당신의 사랑과 당신의 소망과 당신의 사정을 가지고 찾아오시옵소서. 소망에 처할 수 있는 자, 사정과 심정에 일치될 수 있는 사람들을 아버지께서 맞으사 역사를 두고 승리한 자리에서 의논하고, 미래를 두고 승리를 다짐하는 자리에서 의논할 수 있는 아들을 맞고 딸을 맞는 아버지가 되시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아침, 전국에 널려 있는 당신의 뭇 아들딸들을 굽어살피시옵소서. 무더운 삼복지절로 넘어가고 있는 이때에 일선에 나가 있는 당신의 딸들을 아버지께서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이 그들을 내세우고 그들과 더불어 가고 있사옵기에 그들이 가는 일선이 하늘의 일선이요, 그들이 싸우는 자리가 하늘의 진지라는 것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것을 알지 못하고 그 자리를 도피해 가는 무리들은 아버지 앞에 용납 받을 수 없는 역적의 도당밖에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 선악의 기준은 오늘의 통일교단에도 있는 것을 저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선한 딸이 있는가 하면 그 반대로 당신께 슬픔을 안겨 주는, 있어서는 안 될 무리가 있는 사실을 저희들이 알게 될 때, 아버지여, 일선에 남아진 그 무리를 통하여 당신의 수치의 모습을 드러내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은 한 사람을 중심삼아 가지고도 세계를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의 주인공이신 것을 저희들이 생각하게 될 때, 저희 한 생명을 탕감의 기원으로 삼으시어 전체의 승리의 터전을 다짐함과 동시에 민족과 세계 앞에 칭찬받을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할 수 있게끔, 아버지, 참에 남아지는 무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가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해서 그 사람들을 표준으로 할 것이 아니고, 그 자리를 지키지 못하는 사람을 표준할 것이 아니라, 적진을 향하여 새로운 결의를 가지고 총진군하는 무리가 되어, 하늘나라 앞에 추앙받을 수 있으며 하늘의 백성 앞에 총애를 받을 수 있는, 칭찬받는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전국에 널려 있는 당신의 자녀들을, 아버지, 키우시어서 당신 앞에 소원의 실체가 못 되고 당신 뜻 앞에 도움이 못 되거든 이번 기간에 청산짓는 놀음을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새로운 역사적 전통의 터전을 닦는 데 있어서 부끄러움이 없고 순수하고 깨끗한 터전을 넓히시어 만국 만민이 찬양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하나의 전통적 기지를 확보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아침 통일의 무리가 모이는 곳곳마다 당신께서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세계에 널려 있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아시아에 있는 이곳 한국의 일방을 향하여 정성을 다짐하면서 당신의 축복의 인연이 그곳으로 생명줄을 타고 연결되기를 바라고 있고, 혹은 남모르는 외국에서 피어린 심정을 기울여 가면서 이국 백성을 자기 생명처럼 여기고 희생의 길을 자기의 죄의 노정같이 생각하면서 싸우고 있는 통일의 역군들이 있는 것을 생각할 때, 이 자리에 모여 있는 저희들이 부끄러운 모습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아버지여, 지키시옵고, 아버지여, 가게 하시옵고, 아버지여, 전진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들에게 복을 주심과 같이, 그들과 같은 행동을 하여 복을 받아야 할 무리가 여기에 머물러 있는 자녀들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남은 수고하는데 나는 편안히 있겠다고 하고, 남은 하늘을 향하여 충성을 다짐하는데 나는 자신의 행로를 모색하는, 망할 수 있는 민족의 모습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확실히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내일의 소망의 날을 향하여 전진에 전진을 다짐하는 하늘의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만나기를 고대하면서 새로운 소식이 있기를 밤낮으로 하늘과 더불어 의논하고 호소하는 당신의 자녀들도 있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만복의 주인 되시는 아버님이여, 그들의 생명과 그들의 소원의 중심이 되시어서 부디 당신을 만날 수 있는 그날까지 순종하고 그 나라를 대표하여 세계 앞에 부끄러움이 없는, 하늘이 이와 같은 아들딸을 찾아왔노라며 칭찬하시기에 부끄러움이 없는 영광된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여기에 부복한 당신의 자녀들, 나이가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닌 줄 아옵니다. 나이가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치는 것이 젊은 사람 이상일 때에는 하늘은 그 사람과 같이하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아무리 어린 소년 소녀라 하더라도 당신을 그리워하여 생명이 엇갈리는 일이 있더라도 이 길을 가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거들랑 그들로 하여금 당신의 아들딸의 소망을 이루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그들을 하늘나라의 건국의 용사로 삼아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오늘 하루를 당신 앞에 맡기오니 당신의 거룩하신 이름을 가지고 눈물짓는 곳곳마다 당신의 영광의 터전이 넓혀지고 생명의 인연이 두터워지기를 간절히 원하옵니다.
이 한 시간을 당신이 맡아 주시옵소서. 당신께서 현현하시사 저희의 마음과 몸을 이끌어 가일보 전진할 수 있는 승리의 터전을 다져 아버지 앞에 감사드릴 수 있는 이 시간 되기를 재삼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님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니다. 아멘.
우리가 살고있는 이 세계를 바라보게 될 때 이 세계는 우리가 소망하는 하늘나라가 되어 있지 못한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계는 선한 사람이 없는 세계요, 우리가 참다운 인간으로서 소망을 둘 수 없는 곳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땅 위에서 살되 그 사는 것이 우리가 원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마지 못해서 살고 있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어느누구를 막론하고 마음으로 원하던 행복을 지녔다고 만세 혹은 만국에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느냐고 묻게 될 때 그런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뭇사람으로부터 추앙을 받는 자리에 있다 하더라도 그 사람 자신에게 묻게 될 때, 행복한 것이 아니라 그 누구보다도 불행한 자신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입장에서 사는 인류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 인류들이 지금까지 세계를 엮어 왔으니, 그 세계가 그 인류와 더불어 기뻐할 수 있는 세계가 못 되고 신음하면서 내일의 소망의 한날을 앞에 놓고 갈림길을 판결지어야 할 운명에 처해 있는 현재의 세계인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이런 세계 가운데서 특정한 무리들이 천국을 모색하면서 새로운 나라를 추구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 무리는 일반 사회에서 살아가는 보통의 일반적인 사람이 아니라 특정한 사람입니다. 그 특정한 사람이라는 것은 학식을 가진 사람도 아니요, 혹은 예술가도 아닙니다. 인간들이 추앙할 수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드러난, 대중이 공인할 수 있는 자리에 선 특정한 사람이 아니라 드러나지 않고 대중의 공인을 받을 수 없는 입장에 서서 천국을 그리워하면서 선하게 살아가고 있는 무리인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무리들이 누구냐 하면 종교인인 것입니다.
종교 가운데는 동쪽 방향을 책임진 종교도 있을 것이고, 남쪽 방향을 책임진 종교도, 있을 것입니다. 혹은 동서, 혹은 중앙…. 이와 같이 책임 수행을 달리하는 입장에 있지만, 어떠한 목적을, 확실하지 않은 목적을 바라면서 오늘의 생활을 제재하고 내일의 소망을 조정하기 위해서 온갖 심혈을 기울이며 사는 무리가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무리가 누구냐 하면 종교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종교인은 이 땅에 나서 생활하는 데 있어서 자기를 중심삼고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종교의 이념을 따라서 달려 가야 할 방향에 보조를 맞추어서 사는 무리들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종교 가운데도 여러 가지 종파가 있고, 종교인 가운데서도 여러 가지 각자의 사정을 가진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사정이 다르기 때문에 그 사정에 따라가는 방향도 다를 것이요. 그 방향이 다름에 따라 사람들이 현실 생활 가운데서 바라는 소망도 다르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갑(甲)이라는 사람을 두고 보면 갑이 동쪽을 중심삼고 생애노정을 걸어 가는데 있어서 그 생애노정이 일방적인 동쪽만을 갖추었다면 행복할는지 모르지만, 동쪽을 향해 가야 되겠는데 육신은 서쪽을 향하여 가지 않으면 안 될 입장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동쪽으로도 전진하지 못하는 것이요, 서쪽으로도 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최후의 판가리를 지어서 동쪽으로만 가는 사람이 될 것인가, 서쪽으로만 가는 사람이 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신음하며 이 한때를 극복해 넘어서지 않으면 안 될 자리에 서 있는 것이 우리 인생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종교를 신봉한다 할지라도 자기가 믿고 있는 종교 앞에 자기의 몸과 마음을 다 바쳐서 충성을 할 수 있는 자리가 되어 있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자리를 가려 가기 위해서는 수난길을 극복해야 됩니다. 그 극복의 표준이 되는 한계점이라는 것은 그 자신이 바라는 천국만한 내용의 한계를 두고 극복하면 되겠느냐? 열만한 천국이 있으면 열만한 어려움의 환경을 극복하면 되겠느냐?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열만한 천국을 바라면 열 배, 백 배의 결의와 각오를 하지 않고는 열만한 천국의 터전을 남길 수 없는 것이 우리 인생길이란 것을 여러분은 잘 알 것입니다.
하늘의 뜻을 품고 새로이 출발해야 할 그 목적 앞에 협조하는 환경이 되어 있느냐 할 때, 그 뜻 앞에 협조하는 환경을 우리는 맞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환경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자기가 이루고자 하는 뜻을 중심삼고 협조하는 사람이 있느냐? 협조하기는커녕 도리어 나를 이용하고, 이용할 뿐만 아니라 나를 깎아 내리고, 깎아 내릴 뿐만 아니라 나의 가는 길을 막고, 막을 뿐만 아니라 나를 희생시켜서 모해하고 반박하는 무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길은 아니 갈래야 아니 갈 수 없는 운명길로 알고 결의를 하고 나선 사람이 있다면, 그 결의는 열만한 천국을 바라는 결의가 아니라 백, 천, 만 배의 천국을 다짐하는 결의라야 합니다. 그런 결의를 갖지 않고는 주변 환경으로부터의 시달림을 통해서 그 결의한 것을 다 소모시키고 말게 됩니다. 열 이상의 내용을 갖추어야만 천국에 들어가지, 열 이하의 기준을 갖추게 될 때에는 천국 문 앞에서 쓰러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두고 볼 때, 이런 입장에서 생애노정에 있어서 선을 다짐하고 선을 가려 가야 할 우리 인생길이 얼마나 고달픈가 하는 것을 여러분은 잘 알 줄 압니다.
마음으로는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저 사람이 좋은 사람이다'하는 그것은 누가 말하지 않아도 아는 것입니다. 벌써 하루를 지내보고 한 달을 지내보고 일년을 지내 보면 '이 동네에는 누구누구가 선한 사람이다' 하는 것은 모르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좋고 나쁜 것을 헤아릴 줄 모르는, 그런 판단 기준을 갖지 않은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다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알고 있고 다 분별할 줄 알지만 자신이 그런 자리에 나가 서겠다고 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 마을을 두고 볼 때 그 마을에 백 집이 있으면 백 집 가운데서 '선한 사람은 저러저러한 사람이다' 하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그 선한 사람이 간 그 길을 자진해서 혹은 그 사람보다 앞서 가겠다고 하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겠느냐? 알기는 알지마는, 다 분별은 할 줄 알지마는, 그렇다고 말은 할 줄 알지마는 그 선하다는 사람 앞에 선두에 서 가지고 '나는 틀림없이 갈 것이다' 하는 것을 스스로 정해 가지고 그 길을 찾아간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기점을 찾아 새로이 출발하는 자리에 서기란 싸움터를 향하여 나서는 어떤 용사보다도, 어떤 영웅보다도 더 힘든 일입니다.
하나의 싸움이 있다면 그 싸움은 한때를 중심삼아 가지고 승패를 결정짓는 놀음이지만 선의 길을 가는 것은 한때만으로 승리를 결정지을 수 없다는 것을 마음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선을 결정하고 판결하는 것은 한때가 아니고 일년이 아니고, 십년이 아니라 일생을 두고 가야 할 길임에 틀림없기 때문에, 누구든지 선한 것은 잘 알고 잘 판단하고 잘 분별할 줄 알고 다 바라고 있지만, 왜 이 길에 척 들어서서 책임을 져 가지고 '나는 간다'고 할 수 있는 입장이 못 되느냐?
선이 머무는 자리는 한때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선은 영원과 더불어 동반하는 것이요, 선은 현재의 역사와 더불어 동반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역사와 더불어 동반하는 것이요, 선은 전체와 더불어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이렇듯 선은 영원과 미래와 전체와 더불어 인연맺는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그것은 영원한 끝까지 갔다가 돌아올 수 있는 내용이 되어야 되고, 전체와 더불어 관계를 맺으려니 전체를 넘고도 남음이 있어야 됩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에 선이 머무는 자리는 우리가 발견할 수는 있지만, 그곳과 우리가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생애를 걸고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십년 동안 아무리 잘했다 하더라도 하루를 잘못하면 그 하루가 십년을 말아 먹을 수 있는 것이 선의 길입니다. 십년 동안 아무리 수고한 가운데 잘해 나왔다 하더라도 한 순간을 잘못하게 될 때는 십년의 수고는 허사가 되는 것입니다. 반 평생을 자기가 원하는 선의 무대를 바라보고 노력하여 오점을 남기지 않고 따라 나왔는데도 불구하고. 반 평생의 접경에서 한번 잘못하게 될 때에는, 그가 지금까지 쌓아 온 선의 공적은 완전한 선으로서 하나님 앞에 선보이는 것이 아니라, 혹은 역사 앞에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미완성의 선으로서 결말을 보고야 마는 것이 아니냐.
이걸 볼 때 선을 향하여 가는 길은 일생과 더불어 끝을 맺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우리 인간들은 스스로 알고 있지만 알면서도 가지 못하는 것은 일생을 두고 계속적으로 전진해야 할 것이 선의 길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다 선한 길을 알고, 선한 사람을 판단할 줄 알고, 선한 사람이 되는 길을 알지만 힘들기 때문에 가지 못하는 것이 오늘 현세에 살고 있는 인간들인 것입니다.
그러면 선이라는 것은 왜 그래야 되느냐? 선은 영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선의 길을 가면 갈수록 슬픔이 가중되는 것이 아니라 가면 갈수록 기쁨이 가중되는 것입니다. 가면 갈수록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높은 곳을 향하여 올라가는 것이요,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시야가 넓어짐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세계적 인연이 자기와 더불어 관계를 맺고 들어오기 때문에 기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일생 동안 선의 길을 가는 데에 있어서는 시야를 높은 곳으로 향하기 때문에 보다 높은 곳으로 전진할 수 있는 입장에 서지 않고는 생애가 바라는 최고의 선한 기준까지 올라갈 수 없는 것이 아니냐.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천국을 바라고 있습니다. 이상향을 바라고 있습니다. 보다 평화로운 세계를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높은 평화의 세계, 그 평화의 세계는 어디서부터 시작되느냐? 인간 누구나 올라갈 수 있는 그 끝에서부터 시작되느냐, 더 올라가서 시작되느냐? 오늘날 타락한 인간 세계에 있어서 노력을 하고 정성을 다해 가지고 도달했다고 하는 그 자리에서 끝나게 되면, 그 자리는 타락한 세계의 종착점은 될 수 있지만 하나님이 창조하신 창조이상세계의 목적지는 될 수 없는 것입니다. 타락한 세계의 종착점이 되는 것과 동시에 새로운 천국의 출발점이 될는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천국의 종착점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대관절 생애를 다해 가지고 간다 하는 그 기준이 어떤 것이냐? 하나님이 임재하고 온 천주가 그 가운데서 행복을 찬양할 수 있는 자리에선 천국이 되어 있느냐? 안 되어 있습니다. 자기의 있는 정성을 다해 가지고 갔다 하는 그 자리가 천국을 중심삼고는 우리가 영원히 머물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 거기서 새로이 출발해야 할 출발기점밖에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하 그림을 그려 놓고 설명하시면서 말씀하심 )
천국이라는 것은 높은 산과[그림 1]같은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여기(①)서 출발해서 조금 올라가다가 내려오고 맙니다. 그 중심은 어디냐? 여기(②)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조금 더 올라가다가 내려옵니다. 이렇게 높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중심에 가까와지는 것입니다. 이 최고의 정상(⑧)을 기준으로 삼아 가지고 인간은 전진하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일생 동안 여기(⑦)까지 갔다가 후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물론 출발했다가 곧 후퇴해 버린 사람은 생각할 필요도 없고 여기 (⑦)─조금만 더 올라가면 정상인 곳─까지 올라갔다가 떨어지는 사람도 떨어지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림 1] 참조) 여기(⑦)에서 떨어 지게 되면 그만큼 고(苦)가 높은 것입니다. 비례적으로 고가 높다는 것입니다. 그 한사람이 피해를 입게 될 때는 그 한 사람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따라 나오던 수많은 사람이 피해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떨어지는 경우에는 피해가 많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적인 종교를 중심삼아 가지고 가는 길을 백방으로 허락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허락할 수 없는 입장에 선 하나님이 아니냐? 왜? 피해를 많이 입히지 않기 위해서.
그렇기 때문에 참다운 선의 길은 아직까지 모색할 수 없는 길로 남아져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어떤 사람이 요 기준(⑦)까지 올라갔다가 거기서 떨어져 가지고 피해가 크게 될 때는 후대의 역사를 완전히 가로막고 만다는 것입니다.
종교를 중심삼고 볼 때 그것을 추구하고 따르던 무리들이 하나의 뜻을 품고 출발했다가 최고의 정상에까지 이룰 수 있는데 9부 능선에 도달한 자리에서 떨어졌다 하게 되면, 가일보하면 전체의 정상에 도달할 것인데도 불구하고 일보를 전진하지 못하고 떨어지게 될 때에는, 그 피해는 그 자체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종교계 전체에 영향을 끼치고 아득한 후손에게까지 연결되어 완전히 그 종교의 문을 막아 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실들이 역사과정에서 섭리의 뜻을 대해 나오던 사람들 가운데 많았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종교가 어떤 기준까지 돌파해 가지고 정상까지 올라가는 데는 고비가 있습니다. 그러면 정상까지 올라가는 데는 어떻게 올라가느냐? 이것은 자기 자체가 종교의 터전을 중심삼아 가지고 개척한 길이 아니기 때문에 정상까지 올라가는 데 있어서 그 길을 찾아서 올라 가기 위해서는 주체자를 중심삼고 완전히 하나되어 가지고 붙들고 가든가 자기 혼자서 가든가 해야 합니다. 길은 이 두 길밖에 없습니다. '그냥 올라 가지' 하겠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비정상적입니다. 그럴 수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올라가는 데 있어서는 자기가 올라가든가 그렇지 않으면 붙들고 올라가든가 하는 두 길밖에 없습니다.
만일 정상에 올라갔다 할 때는 반드시 새로운 차원의 세계를 맞이할 수 있습니다. ([그림 1]을 가리키며) 이것(A)이 내적 세계요 이것(B)이 외적 세계입니다. 새로운 차원의 상응적인 입장에 있는 세계를 볼 수 있다 이 말입니다. 여기(②)에서 떨어지게 될 때는 이쪽 면(A)은 체가 없는 거예요. 면적이 생기지 않는다구요. 이쪽 면(A)에는 면적이 생기지 않는다는 거예요. 면적이 생길 수 없습니다. 이쪽 세계(A)는 공(空)이라는 거예요, 공.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수난길을 다 거쳐서 최고의 정상까지 왔다고 하더라도 최후의 문제를 중심삼고 볼 때는 또 넘어가야 합니다. 정상을 중심삼고 꼭대기만 올라가는 것을 소원할 것이 아니라 꼭대기를 넘어갈 수 있는 각오를 가져야 합니다. 저 꼭대기만 올라가면 된다는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꼭대기에 올라가서는 또 넘어가는 놀음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넘어갈 수 있는 여력이 강해야만 또 올라가는 길이 있을 때 따라갈 수 있는 것입니다.
정상에 올라가기만 하면 다 된다 하는 사람은 못 가는 것입니다. 그게 그럴 것이 아니냐? 정상이라는 것은 올라갈 수 있는 일면을 바라보고 있는 동시에 내려갈 수 있는 또 다른 일면을 바라볼 수 있는 곳입니다. 내려가기는 쉽지만 올라가기는 힘들 것이 아니냐. 여기에서 문제되는 것이 또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새로운 출발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출발하는데 있어서 출발도 내가 자주적으로 하지 않으면 따라가는 길밖에 없습니다. 두 길뿐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정상이하)에서 올라가는 길도 두 길이지만 여기(정상)에서 올라 가는 길도 두 길입니다. 새로운 정상을 향하여 올라가더라도 그것은 영원한 천국기반이 못 됩니다. 전세계가 머물 수 있는 기반이 못 됩니다. 또 하늘나라가 건국될 수 있는 터전이 될 수 있겠느냐 할 때 세상과의 인연을 청산을 짓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 이자 천국과 같은, 세상과 천국이 서로 통할 수 있는 입장이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반드시 청산지어야 합니다.
정상에서는 엇갈려 나간다는 것입니다. 이쪽 방향(①)과 저쪽 방향(②) 이 엇갈리게 됩니다. 아래쪽이 위로 올라가는 것이요, 위쪽이 아래로 내려 오는 것입니다. 왼쪽이 바른쪽이 되고 바른쪽이 왼쪽이 되는 것입니다. 엇갈리는 이런 형태에서 새로운 출발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천국의 기원은 여기(②)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림 2] 참조)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 '천국은 네 마음에 있다'고 했습니다. 천국은 내가 바라는 세계의 끝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 있습니다. 그 마음 자리는 어떤 자리냐? 사망이 물결치는 이 세계의 모든 요인과 더불어 일체가 되어 있는 자리가 아니라 그것을 극복하여 하나의 생명의 은사의 물결이 파급될 수 있는 기지입니다. 거기(정상)에서부터 중단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부터 새로운 인생의 가치를 모색하여 천국을 건설할 수 있는 하늘 백성으로서의 사명을 짊어진 우리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몸뚱이의 세계에서는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세계 가운데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기점이라는 것은 내 마음속에서부터 다짐해 가지고, 마음속에 그리는 것을 실천궁행(實踐躬行)해 가지고 거기에 일치될 수 있는 한 곳입니다. 그 한 곳을 찾음으로 말미암아 천국을 맞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국은 앞으로 나타날 어떠한 종말세계를 거쳐 가지고 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에서 하나의 기점을 그려 가지고 그 기점과 더불어 오는 것입니다. 그 기점을 중심삼아 가지고 저울질할 때 저울대를 수평으로 만들 수 있는 하나의 지지점(支持点)이 되는 것이 아니냐? 그 지지점과 같은 것입니다. 지지하는 그 점이 수평만 되어 가지고는 안 됩니다. 저울은 수평되는 것이 목적이겠지만 이것은 수평에서 바른쪽으로 기울어져야 됩니다. 무게가 왼쪽으로 기울어져서는 안 됩니다. 바른쪽으로 기울어져야 합니다. 바른쪽으로 기울어지는 그것이 출발입니다. 새로이 바른쪽으로 돌아가고 넘어갈 수 있는 것이….
그 수평된 것이 새로운 한 점을 결정할 수 있는 목적은 되지만 새로운 방향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기점은 못 되는 것입니다. 하나의 점은 될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방향을 전환시킬 수 있는 전체의 내용은 못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출발입니다. 방향을 전환시키는 데 있어서 출발점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천국은 어디에서부터 오느냐? 마음에서부터 시작되어 오는 것입니다. 마음의 어디서부터냐? 세상을 이긴 마음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아무리 환경적으로 천국이 와 닿았다 하더라도 내 마음이 악하고 내 마음이 그것을 그릴 수 없고 내 마음이 거기에 동할 수 없는 입장에 있다면, 천국이 와도 그 천국은 쓸데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국을 맞이할 수 있는 터전이 되는 것은 환경이 아니라 나 자신입니다. 나 자신이 문제입니다. 천국을 유지할 수 있는 지주, 지지하는 그 지지점이 어디냐 하면 환경이기에 앞서 내 마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천국은 어디 있느냐? 따르고 있던 제자들이 현실을 청산짓지 못한 자리에서 앞으로 올 천국을 중심삼아 가지고 행복의 터전을 갖추어 세계적인 권위와 출세의식을 갖고 있는 것을 보고, 예수는 그 근본을 격파해 버리고 '천국은 네 마음에 있다'고 한 것입니다. 마음의 천국을 그리지 못한 사람은 환경 천국이 되어도 그 천국을 움직일 수 없는 것입니다. 마음이 결심하지 못하고서는 완전한 행동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완전한 결심에서 완전한 행동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네 마음이 선을 얼마나 동경하느냐? 그 동경하는 것이 역사적 선과 더불어 하나되겠다, 아무리 피눈물 나는 환경이 있다 하더라도 선과 동행하기 위해 그것을 극복하겠다, 아무리 외로운 역사적 종말의 환경 가운데 투쟁의 노정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피해 가는 것이 아니라 격파하고 가겠다는, 그런 마음이 변치 않는 일로를 개척하여 그 마음에 일체가 될 수 있는 몸의 생활환경을 결의하고 다짐하는 데서부터 천국이 시작되는 것이지, 마음과 몸이 따로 행동하는 데에 천국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과 몸이 일체된 데서부터 천국 방향을 향한 전진이 벌어지는 것이지, 마음과 몸의 행동이 갈라지는 데서는 천국은 벌어지지 않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예수님이 설파한 것은, 마음과 몸이 일치될 수 있는 내용을 중심삼아 가지고 좌우로 기우는 것이 아니라 그 기우는 환경을 제거해 가지고 전진의 가중된 행보를 갖출 수 있는 주체성을 갖추어야만 천국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준 것을 우리는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천국은 남으로부터, 남에 의해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을 부정해야 됩니다. 나 스스로 가지 못하고, 내가 이것을 제시하지 못하게 될 때에는 그 누구로 하여금 제시될 것입니다. 그 누가 제시했다 할 때는 내가 천국 가려면 그와 하나되어야 합니다. 따라가야 됩니다. 절대적으로 보조를 맞추어야 됩니다. 그가 동으로 가면 나도 동으로 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가 동으로 가는데 나는 서로 가겠다, 그가 이렇게 했는데 이렇게 하면 안 된다 하는 마음을 갖고 가서는 안 됩니다. 거기에 비판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길은 두 길밖에 없습니다. 내가 가야 할 것을 원칙으로 하되 그 원칙을 수행할 수 있는 나 자신이 못 되었으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내가 가는 길인데 내 마음대로 하지'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럴 때는 반드시 딴 분을 통해서 가야됩니다. 그 딴 분이 누구냐? 오늘의 인간 앞에 표준이 될 수 있는 분입니다. 그래서 그 딴 분을 인간 앞에 가르쳐 주기 위해서 수많은 종교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갈 수 없는 타락권내에 있는 인간이기 때문에 자기 일생을 잴 수 있는 그 잼대를 가지고 영원한 세계를 재겠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영원한 세계를 잴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시대 시대마다 영원한 하나님이 같이 보조를 맞추어, '너는 이러한 사명분야에서 이만큼 책임을 져라' 하는 특정한 사명을 주어 하나님 대신 보조를 맞추게 하여 기반을 닦아 주는 세계적인 대표자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 대표자들이 그 시대의 환경권내에 있어서 지침이 되고 혹은 지주가 되는, 사람들을 지도할 수 있는 사명을 맡겨서 보내는 사람들이니. 그들이 수많은 종교의 교주들입니다. 우리 타락 인간은 자기 스스로 갈 수 없기 때문에 따라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가는 길밖에 없습니다. 따라가는 데는 한 중심을 중심삼아 가지고 이렇게 찾아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림 3] 참조) 그럴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느냐? 이렇게 중심을 찾아 가지고 그 중심에 정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세계의 어느 한 곳을 찾아서 그것을 향하여 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야 할 중심 곳은 인류 앞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그러면 세계는 어디로 가야 하느냐? 지금까지 역사상 인류가 바라던 행복의 기준이 되는 중심곳이 어디냐? 세계의 중심곳이 어디냐? 지금 찾아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공산세계냐? 민주세계냐? 아닙니다. 우리 아버지가 가는 길이냐? 그것도 아닙니다. 우리 동네의 이장이 가는 길이냐? 그것도 아닙니다. 우리나라의 나랏님이 가는 길이냐? 그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세계를 중심삼아 구라파면 구라파를 대표할 수 있는 어떤 지도자가 가는 길이냐? 그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민주세계 혹은 공산세계의 사상을 중심삼고 나가게 될 때 그 중심곳을 발견할 수 있겠느냐? 아닙니다. 그 중심은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중심은 인간역사와 더불어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생활 무대와 연결되어 가지고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딴 데 있는 것입니다. 딴 데 중심을 갖고 나온 것이 종교입니다. 이것은 지금 타락한 세계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중심을 목적으로 해 가지고 그 목적의 결과에 도달 하게 될 때, 인류역사가 행복을 촉구할 수 있고 온 세계의 평화의 기원을 세울 수 있는 그것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두뇌와 인간의 모든 조직과 인간의 모든 체제를 통하여서 그런 기지가 설정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통해서는 결정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느냐? 하늘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늘로부터 시작하는 데는 누구로부터? 잘 믿는 도주로부터가 아니라 도주를 지도하는 주인으로부터. 그 주인이 누구냐?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종말이 되면 될수록 전부 다 모호해져 갑니다. 가정이 중심이라 하였으나 가정도 모호해져 가고, 나라가 중심 이라고 했으나 그것도 모호해져 가고, 사상이 중심이라고 하였지만 그것도 모호해졌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무엇이냐? 사랑까지도 모호해졌다 이거예요. 그렇지 않아요?
인간 앞에는 가정이 귀한 것이요, 나라가 귀한 것이요. 세계가 귀한 것입니다. 이것이 소망의 터전이었습니다. 그런데 부모가 귀한 줄 알고, 나랏님이 귀한 줄 알고, 세계를 대표할 수 있는 어떤 지도자가 귀한 줄 알았지만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기 생명과 엇바꾸면서까지 절대시해 가지고 주창해 나오던 사랑, 자기의 생명까지 바치겠다고 하던 인간의 사랑마저도 이제는 모호해졌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한 남자면 남자, 한 여자면 여자가 서로 상대를 위해 생명을 바치면서 영원히 행복을 찬양할 수 있는 자리에서 사랑을 추구한 사람이 있느냐? 말은 그렇지, 그런 사랑조차 다 모호해졌다는 것입니다. 참다운 가정을 들고 나올 수 있는 이런 무엇도 없고, 참다운 민족, 참다운 나라, 참다운 세계, 참다운 사랑을 들고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말세입니다.
말세에는 모든 것이 희미해지는 것입니다. 희미한 것으로 출발하였기 때문에 끝도 희미해지는 것입니다. 그 희미한 자리에서는 확실한 나를 인정할 수 없습니다. 그때가 바로 이때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역사상에 모든 인류들이 중심을 찾아 헤매 나왔지만 그 중심점이 모호해졌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만으로 찾을 수 있고, 인간만으로 규합하여 가지고 결정될 수 있으면 가능할 수 있는 입장에 설 텐데 도저히 가능할 수 없는 현실, 역사적인 종착점에 지금 도달하고 있지 않느냐?
그렇기 때문에 중심점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어야 하느냐? 마음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 마음이라는 것은 오늘날 세상 사람들이 갖고 있는 그런 마음이 아니라, 선을 위해서 생명을 바치고 선을 위해서 자기 전체를 희생할 수 있는 마음입니다. 자기를 몇천만 번이고 부정할 수 있는 선을 중심삼은 기준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긍정할 수 있는 입장의 내용을 갖춘 자리에서, 자기의 그 마음의 터전을 중심삼은 것이 선이 아니라구요. 다시 말하면, 8부 능선에 들어왔으면 이 접경을 극복해 넘어갈 수 있는 하나의 출발의 기원을 공인받을 수 있는 선의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선의 기준이라는 것은 영원을 두고 전체를 대표해 가지고 관계를 맺을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역사가 선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가 그 선앞에 지배를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인격이 그 선을 자기 마음대로 지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선의 기준이 인격을 창출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선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선이 사람을 만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선의 기원은 나만을 중심삼은 양심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의 양심만을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무엇을 플러스시켜야 되느냐? 하나님을 플러스시켜야 됩니다.
하늘을 중심삼고 보게 되면 천륜(天倫)이 있고, 천정(天情)이 있을 것입니다. 인간이 인륜(人倫)과 인정(人情)을 가지고 역사를 엮어 왔다면, 그것은 천륜과 천정이 출발할 수 있는 기원이 되는 것입니다. 천륜을 대표할 수 있는 마음 바탕, 천정을 이어받을 수 있는 마음 바탕. 인륜에 결정적인 결실이 될 수 있는 마음을 중심삼은 인격, 인정에 결실될 수 있는 마음을 중심삼은 인격-이것은 최고봉의 인격, 그 자리에 선이 심어지지 않을 수 없는 인격이요, 선이 같이하기를 바라는 인격-을 갖춘 자리에서부터 천국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천국은 우리 인간이 살고 있는 세계와는 다른 것이라구요. 인간 세계에 인륜이 있고 인정이 있듯이 거기에는 천륜이 있고 천정이 있기 때문에, 천륜에 따라 천정에 의한 상대를 요구할 것이요, 천정에 의한 가정을 요구할 것이요, 천정에 의한 민족, 국가, 세계를 요구할 것이 아니냐! 천륜을 따라 규정되어진 사회체제를 고대할 것이 아니냐! 그 세계를 찾아가야 합니다.
그 세계는 오늘날 이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출발기점을 새로이 모색해 가지고 인류 종말 세계를 전체 앞에 알려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종말을 제시하지 않는 종교는 가짜 종교입니다. 그런 종교는 완전한 종교가 못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종교든지 고차적인 종교일수록 종말을 내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또 교조가 그 당시에 세계를 대표해서 책임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교조가 선한 세계를 인계받아야 할 사명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사명을 완수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명을 이 세상 끝에 와 가지고 이어주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와야 한다는 재림사상이 남아지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현 역사시대에 있어서 인류 사회에 결탁할 수 있는 하나의 출발 기점이 되고 하나의 종착점이 되는 것이 무엇이냐? 이 재림사상이 이론적으로 천국으로 출발하는 기점이 되는 것이요, 이념적으로 천국의 기원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세계적이어야 됩니다. 세계적인 중심이라는 것은 ([그림 3]을 가리키며) 여기에서 벌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차원이 다릅니다.
천국은 내 마음에서부터라고 했습니다. 우리 마음을 보게 될 때 마음도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있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작용하기 때문에 압니다. 작용하지 않으면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아느냐? 작용을 하기 때문에 안다는 거예요. 작용을 통해서 압니다. 전기가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아느냐? 전기가 작용하여 나타난 빛을 보아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전기가 통하면 반드시 작용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 작용은 어떻게 되느냐? 작용이라는 것은 독자적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 독자적으로 작용하는 물건은 없습니다. 세상만사 독자적으로 운행하는 것이 없습니다. 모든 작용 세계에 있어서 독자적인 작용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안 그래요? 작용을 하면 반드시 주고받는 거예요. 환경의 여건이 벌써 여기에 포괄되어 들어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잖아요? '내가 좋다' 할 때도 혼자 좋아해요? 좋아하는 작용의 대상이 있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입니다.
작용에는 반드시 상대적 요건이 필요합니다. 모든 물질세계 혹은 자연 현상 세계의 모든 것은 상대적 권내의 작용 현상을 통하여 우리가 느끼는 것이지, 작용을 통하지 않으면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작용은 혼자 할 수 없습니다. 독자적인 작용은 없습니다. 작용에는 상대 요건이 절대 필요합니다.
이렇게 볼 때 '양심은 혼자 작용한다'는 말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주체와 대상이 없어 가지고는 작용은 절대 안 벌어집니다. 열만한 주체가 있다면 그것이 작용하는 데 있어서 아홉만큼이면 된다 하는 입장에 서면 절대 작용을 안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여러분이 시내에 간다 할 때 손해나게 되면 절대 안 간다는 것입니다. 플러스가 되어야 간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양심의 가책을 중심삼아 가지고 매일같이 재촉하는데 그 마음이 작용해 가지고 나에게 마이너스되기 위해서 그러느냐, 플러스되기 위해서 그러느냐? 이 원칙을 놓고 따져 볼 때, 마이너스되기 위해서 그런다면 양심은 존재할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밤낮없이 나한테 천대받으면서도 그러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그것은 플러스되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움직이면 플러스가 틀림없이 나타나기 때문에 마음은 몸에 명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마음의 명령에 따라 몸이 움직이게 될 때는 어떻게 되느냐? 플러스가 되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입니다. 이익이 나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입니다. 마음대로 하고 보니 좋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왜 좋으냐? 이익이 났기 때문에 좋다는 것입니다. 하나에서 둘이 되었다 이거예요.
마음대로 못 하면 어떻게 되느냐? 둘 되려고 작용을 했더랬는데 마이너스가 되었다, 명령을 받았는데 행하지 않았다 할 때에는 어떻게 되느냐? 가책을 받습니다. 떨어져 내려가는 것입니다.
힘의 작용에서는 그렇다는 거예요. 힘의 작용을 보면 입력과 출력이 같지 않습니다. 나오는 힘은 반드시 작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작용하고 난 다음에는 왜 기쁘냐? 주체와 대상이 주고받아 가지고 작용한 후에는 커지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에서만 가능하냐? 사랑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사랑에서만. 딴 데서는 가능하지 않은 거예요. 힘의 작용에 있어서는 입력보다 출력이 작은 것이 원칙인데 사랑의 세계에서는 반대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상세계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세계에서는 희생하면 희생할수록 그 가치가 작아지는 거예요? 커지는 것입니다. 보통 힘의 작용과는 상반되는 것입니다. 소모되는 세상에 있어서 사랑의 힘만이 플러스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은 희생입니다. 사랑은 희생 운동도 하는 것입니다.
희생을 했지만 사랑하고 난 후에는 희생한 이상의 가치를 느끼는 것입니다. 고생할수록 사랑이 감소되는 것이 아니라구요. 투입했던 저항 요건이, 그 자체를 소모시키는 것이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니게 하는 것입니다. 보통 힘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저항이 있으면 그만큼 비례적인 마이너스를 가져오지만, 반대로 플러스를 가져오는 작용이 우주 가운데 하나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사랑의 작용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소모시키고 투입하면 할수록 망하는 것이 아니라 투입하면 할수록 플러스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있기 때문에 이상세계가 가능한 것입니다. 이상세계를 이루려면 희생해야 되는 것입니다. 희생하는 데는 힘을 가해야 되는데 힘의 원칙을 보면 나오는 힘이 작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상세계는 절대 안 나와야 된다는 거라구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상세계가 어떻게 희생함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느냐? 사랑의 힘은 반대되기 때문입니다. 차원이 다른 힘의 원칙으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야, 네가 잘살기 위해서는 그 무엇을 중심삼고 어떻게 해라' 그렇게 가르치는 양심은 없습니다. '네가 희생해라. 여러 사람 앞에 본이 되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본이 되라'고 하지요? 본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중앙에 딱 들어가 서야 됩니다. 전체의 본이 되려면 일면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양심은 네가 중앙에 들어가 서라고 합니다. 그러려면 이 사람은 동쪽으로 누울 수도 없고 서쪽으로 누울 수도 없는 것입니다.
딱 서 있어라! 딱 서 있는 데는 일년만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생 동안, 영원히 서 있으라는 것입니다. 중심이 되려면 그와 같은 자리에 서야 합니다. 그렇지 않아요? 일시적으로 서 있다가 나가자빠지면 중심이 안 되는 거라구요. 그렇기 때문에 영원히 서 있으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영원히 서있어야 되느냐? 영원과 통하지 않고는 중심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왜? 중심자리는 하나님이 서야 될 자리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설 자리를 대신해서 서기 위해서는 영원을 표준하고 서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를 중심삼은 선의 길은 영원을 표준하고 설정한 것입니다.
그러니 그 자리에 서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사방의 표준을 갖추지 않고는 나오지 못합니다. 양심은 중심에서 기울어질 때에만 명령을 합니다. 똑바로 딱 서 있으면 양심은 어떻게 되느냐? 작용 안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좋다고 춤이라도 추었으면 좋겠는데 안 춥니다. 딱 기울어질 때만 나타납니다. 또 더 높아지려고 할 때에 양심의 작용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내 마음과 몸이 하나되어 가지고 가만히 있을 때에는 양심은 작용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기울어지려고 할 때는 작용합니다. 또 높아지려고 할 때도 양심은 작용합니다.
그러면 기울어지려고 할 때는 어느 때냐? 악과 더불어 짝할 때에는 기울어지는 것입니다. 높아지려고 할 때는 어떻게 되느냐? 자기 자체가 높아지기 위해서는 자기 힘 가지고 안 됩니다. 새로운 주체를 바라볼 때에 높아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양심의 작용을 최극단적인 한계선까지 자극시키는 주체적 표준이 되는 것이 무엇이냐? 절대자이십니다. 영원한 존재이십니다. 유일한 존재이십니다. 그분이 누구냐?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인데 어떠한 하나님이냐? 나와 더불어 사랑의 관계를 중심삼고 맺어진 하나님입니다. 그 사랑이 있기 때문에 희생이 빛나는 것이요, 그 사랑이 있기 때문에 극복이 빛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있기 때문에 생애를 투입해 가지고 무(無)의 입장에서 개척해 나가더라도 무의 자리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없는 것 같지만 실재하는 것을 위하여 수고하는 입장에 설 때에 반대로 무한한 사랑이 그의 배후에 접선되어 오기 때문에, 양심은 이것을 향하라고 여러분에게 명령하는 것입니다. 그런가 안 그런가 보라구요.
높아질 수 있는 곳을 향하여 넘어가라 할 때 그냥 가라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하고 넘어가라는 것을 가르쳐 주는 입장에서 명령을 하는 것입니다. '야, 네가 그렇게 되어라' 할 때는 남의 것을 그냥 빼앗아 가지고 가라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이상의 노력을 해서 그렇게 되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 이상 노력해서 그렇게 되라는 것을 가르쳐 주는데도 그것은 생각하지도 않고 그렇게 되겠다는 것만을 생각한다는 거예요.
나쁜 곳이 있으면 양심은 '야! 거기는 가지 마라' 하고 가르쳐 줍니다. 가지 않기 위해서는 갈 수 있는 환경의 요건을 부정하고 극복해야 할 내용을 제시하면서 명령하는데, 이것을 인식치 않고 행하고 싶고 가고 싶어하는 존재가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부정적인 요건을 극복하고 감수하는 사람만이 천국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극복하고 부정하는 데는 그냥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기 때문이 아니라구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이예요.
병신 자식이 한 번 마음쓰는 것이 잘난 자식이 열 번 마음쓰는 것보다도 더 가치적으로 보답되는 것이 아니냐? 가치적일 수 있는 것은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냐? 그렇기 때문에 종교 가운데는 사랑을 빼놓은 종교가 없는 것입니다. 자비니 인(仁)이니 하는 것도 전부 그렇다는 것입니다. 전부 다 사랑을 두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면 '천국은 네 마음에 있다'고 했는데, 그 천국은 우리가 무엇을 중심삼고 이루어야 되느냐? 이 땅 위에 역사적인 세계를 이루어 나온 것이 인간인데 이 인간을 중심삼고는 천국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중심을 찾아 나가지만 그 중심을 찾아 나가면 나갈수록 중심이 희미해집니다.
옛날, 먼 거리에 두고 중심을 찾아 나갈 때는 그래도 가정을 안고 나라를 안고 찾으려고 했으나, 지금에 와서 중심이 가까와질 때가 됐는데 나라도 잃어버렸고, 가정도 잃어버렸고, 개인도 잃어버렸고, 다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작전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으로부터 다시 전진할 것이냐? 진리로써 전진하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에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고 했습니다. 머리로만 알아 가지고는 못 가는 것입니다. 머리를 원하느냐, 마음을 원하느냐? 심정을 원하느냐, 지식을 원하느냐? 학자의 아내가 되고 싶으냐, 사랑의 마음을 가진 사람의 아내가 되고 싶으냐고 물어 볼 때 세계적인 이름난 학자의 아내가 되고 싶다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더라도 자기만을 사랑해 줄 수 있는 남성을 원할 것이 아니냐. 남성도 그런 여성을 원할 것이 아니냐.
아무리 세계적인 대학자라 하더라도 사랑할 상대가 없다면 불쌍한 사람입니다. 홀아비나 과부가 되면 불쌍한 사람이라는 거예요. 그걸 보게 되면 인간은 반드시 머리를 중심삼은 것이 이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아무리 멋이 있더라도 서로 의논할 수 있는 상대가 없으면 불쌍한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것은 무슨 뜻이냐? 마음을 중심삼고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지식이 근본이냐, 사랑이 근본이냐 할 때 지식이 근본이 될 수 없습니다. 지식은 횡선(橫線)이요 사랑은 종선(縱線)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과학세계는 횡적인 세계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마음이 없어졌습니다. 참사랑의 마음이 없어졌습니다. 종적인 우주관을 대표할 수 있는 중심이 없어졌습니다. 종적인 자리는 둘이 아닙니다. 우주는 하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중심 수직선은 하나밖에 없는 것입니다. 중심으로 설 수 있는 그 자리는 많은 것이 아니라 하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횡선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요 하나의 중심을 중심삼고 선을 그을 때 횡선은 몇억만 개도 그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얼마든지 그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요 점(點)을 중심삼고 수직이 되는 선은 하나뿐인 것입니다. 그 수직이 될 수 있는 원동력의 기초가 어디서부터 시작되느냐? 인간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주체가 아닙니다. 내가 나 자신을 지은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은 창조적 결과물이기 때문에 상대적 위치에 있는 것이지 주체적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도, 이념적인 사랑도 인간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절대자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중심은 하나입니다. 그 하나의 중심이 나라의 중심이자 민족의 중심이요, 민족의 중심이자 가정의 중심이요, 가정의 중심이자 개인의 인격의 중심입니다. 이것이 전부 다 엇갈린 것이 아닙니다. 개인의 중심을 절대적 자리에 갖다 놓게 될 때는 가정의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나라의 중심이 되는 것이요, 세계의 중심이 되는 것이요, 하나님의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천정(天情)의 기원이 됨과 동시에 인정(人情)의 기원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게 될 때에는 인간이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기준을 찾아 나가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통일교회는 심정의 역사관을 말합니다. 심정은 무슨 심정이냐? 세상의 남녀들이 말하는 심정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횡적인 것으로서 전부 다 사라져 가는 심정입니다. 통일교회에서는 천정(天情)을 기원으로 한 심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심정의 기틀이 어디에 있느냐? 누구에게 있느냐? 가정에 있기 전에 나에게 있어야 됩니다. 사랑은 누가 하는 것이냐? 가정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해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진정한 사랑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당당히 권세를 부리고 명령을 하는 것이 아니라 희생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천리입니다. 그래야 가정의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랑의 근거지는 어디냐? 사랑의 근거지는 내가 아닙니다. 자기가 잘났다고 해서 '사랑의 근거지는 나로부터다' 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사랑의 근거지는 내가 아닙니다. 사랑이라는 명사는 대상적 관계에서 설정되는 것입니다. 공동의 이념을 중심삼고 설정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의 근거지는 누구에게 있느냐? 내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에게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어디서부터 시작되느냐? 나로부터가 아니라 상대로부터입니다. 상대가 없게 될 때는 아무리 미남자라 해도 혼자서는 사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은 상대로부터입니다. 사랑의 근거지는 내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것을 지금까지 못 했습니다. '사랑은 나로부터다' 사탄이 지금까지 그걸 심어 놓은 거라구요. 하나님으로부터지 나로부터가 아니라구요. 나로부터라고 생각하는 것을 전체적으로 뜯어고치지 않고는 역사를 돌릴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사랑은 나로부터라고, 부인은 부인대로 자기가 사랑의 중심이고, 남편은 남편대로 자기가 사랑의 중심이라면서 서로가 위하라니 그놈의 세계가 파탄이 벌어지지요. 사랑은 상대로부터입니다. 그 근거지는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에게 있기 때문에 그 사랑을 내 것 만들려면 그 사람 앞에 희생해야 됩니다. 사랑은 반드시 희생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또 사랑은 극복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 사탄세계를 극복할 수 있는 내용은 이 천지간에 있어서 딴 곳에서는 찾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중심삼은 사랑의 원칙을 따라가야만이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찾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석가모니가 말한 자비도 사랑이 없이는 안 나오는 것입니다. 유교에서 가르치는 인(仁)이라는 것도 두 사람의 관계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전부 다 상대적 관념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를 점령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사랑을 몽땅 독차지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있는 정성을 다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내놓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사랑을 상속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 있지요? 그래요, 안 그래요? 이런 원칙을 따라가는 아내가 쫓겨나는 예는 못 봤습니다. 그런 남편이 있다면 그 남편의 사랑을 싫다고 손을 저으며 도망갈 부인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희생과 극복이 원칙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을 왜 존중시하느냐? 보답을 바라지 않고 극복을 추구하고. 보답을 바라지 않고 희생하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어떠한 결과를 바라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만족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다 행복하다는 거예요. 주는 것으로써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받는 것으로써 행복한 것이 아니예요. 그래서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도 복이 있습니다. 왜 복이 있느냐? 하나님편을 대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천국은 네 마음에 있다고 했는데 그 천국이라는 곳은 어떤 곳이냐? 하나님의 사랑이 중심이 되어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중심이 되어 인연을 맺어 가지고 보편타당한 환경권을 설정한 곳이 천국입니다. 그러면 그 권(圈)에 가서 머무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어야 되느냐?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과 화합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됩니다. 그런 사람 외에는 못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과 화합할 수 있는 본질이 무엇이냐? 자기를 위주하고 나가는 사람은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상대를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투입하고, 자기의 모든 정성을 투입하고, 자기의 모든 것을 투입하고, 주고자 했던 사람만이 하나님의 사랑권내에 존속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역사상의 위인도 그랬고 성인도 그랬습니다. 그 나라 국민들의 마음속을 점령할 수 있는 주인공이 애국자가 되는 것입니다. 애국자는 그 나라를 위해서 자기의 생명과 재산을 다 주면서도 우는 것이 아니라 주면서 소망을 갖고 나가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아니고서는 역사에 남아지지 못합니다.
그런 역사적 내용을 통하여서 발전적 동기로 삼았던 성인들이 남아 있는 것을 두고 볼 때, 그런 역사적 인연을 따라서 종착점을 향하여 가는 곳곳에는 반드시 하나님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선은 그렇게 가는 것입니다.
악한 세계에 있어서 선은 어떤 자리에서 남아지느냐? 희생하는 자리에서 남아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 있다구요. 예컨대 그 동네의 주인은 칼부림을 하고 지팡이를 들고 다니면서 '야 이놈들아, 내 말 들어라'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림자와 같이 있는지 없는지 말없이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동네를 위하여 생활하고 희생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자주적인 입장에서 동네의 주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피동적인 입장에서 주인격을 이어받는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세상에서도 그렇지 않아요? 왈패 같은 사내가 여자를 따라다니면 싫어하지 좋아하는 여자가 하나도 없다구요. 그렇지 않아요? 보기에는 아무리 도둑놈같이 험상궂게 생겼더라도 그 사람이 여자에게 희생적인 사랑만 하면 그 험상궂게 생긴 얼굴에서 세상의 미중에 만물상의 미를 느끼게 된다는 거예요. 왜 그렇게 느껴지느냐? 하나님의 사랑은 무한인 동시에 창조적 미이기 때문에 새로운 미를 감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과 화합할 수 있는 내용을 갖추지 않고는 선이 못 됩니다. 사랑은 자기가 주체적인 입장을 강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상적인 입장을 강조해야 되는 것입니다. 왜 그래야 되느냐? 거 기분 나쁘지 않으냐? 천만에. 나를 강조해서는 갈 수 없는 길입니다. 나 혼자 고독 단신이 되어 가지고는 나라의 주인이 못 됩니다. 반드시 상대적 가치를 결정지어야 되는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는 반드시 가정에서 공인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상 천국 조직의 근본사상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남자가 여자 앞에 절대적인 공인을 받지 못하면 이상세계에서 절대적인 공인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한 여자 앞에 세계적인 가치를 공인받지 못하는 남자가 세계적인 가치의 세계를 맞이하겠다는 것은 모순되는 얘기입니다. 그런 가치의 세계를 당당히 맞이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분, 그런 가정의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그 가정은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그 가정은 주체가 되어 가지고 종족을 위해서 희생과 극복의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 목적은 자기에게 두는 것이 아니라 상대에게 두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계의 목적을 이루는 데 있어서 혼자서 '나, 세계의 목적을 이룬다'한다고 돼요? 상대의 세계를 넓힘으로 말미암아 세계적으로 범위를 넓혀 나가는 것입니다. 그 세계는 어떻게 사는 데서부터 시작되느냐? 남을 위하여 사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예수같은 양반은 그런 사상을 몸소 실천했습니다. 죽으면서도 원수를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당시의 로마와 같은 원수가 아니라 역사적인 원수를 대신해서 축복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너희들도 가자. 맨 꼴찌에라도 따라 오라'는 말이라구요. 그런 원수까지도 위하고 원수를 극복할 수 있는 동기를 가졌기 때문에 예수님은 하늘나라의 왕자가 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왕자는 하늘나라의 주권세계에 가더라도, 사탄세계에 가더라도 원수는 그 앞에 굴복하는 거예요. 자식이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려고 하면 그 자식들은 원수끼리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원수의 입장에 있는 사람의 아들 앞에 아버지보다 몇십 배 더 큰사랑의 맛을 보여 주면 그 아들은 굴복하는 거라구요. 그렇지요? 아버지보다 더 큰 사랑을 주게 될 때에는 그것으로 원수를 갚는 거예요.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나라를 살리기 위해서 온갖 희생을 다했는데도 불구하고 그 애국자의 가는 길을 막다가 죽임을 당했다 할 때, 그 아들이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려고 하다가 그 내용을 알면, 오히려 '아하, 우리 아버지가 훌륭한 것이 아니구나' 하고 굴복을 한다는 것입니다. 더 큰 사랑의 무대를 향해서 자기의 생명을 투입하며 가는 사람의 앞길을 침해하다가 위험한 일을 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하더라도, 그 한 사람의 위험은 그 개인의 위험이 아니요. 그 나라가 비운의 역사로 출발될 것을 알게 될 때에는 그 아들도 큰 사랑을 위해서 자기 아버지를 죽인 사람에게 원수를 못 갚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요, 안 그래요?
이런 관점에서 예수님이 원수 사탄을 사랑했던 것입니다. 얼마만큼 사랑했느냐? '너희들이 지금까지 로마제국을 중심삼고 그 주권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나를 원수로 대했지만, 나는 하늘땅을 통일한 세계의 권한을 가지고 너희들을 사랑하겠다. 너희들을 사랑하기 위하여 가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것을 알게 될 때는 그에게 완전히 머리 숙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요, 안 그래요?
오늘날 통일교회의 통일사상이 바로 그렇다구요. 나라의 배척을 받고 혹은 교단의 배척을 받고, 가정의 배척을 받아 나왔지만 배척받아 나오는 그 동기가 어디에 있느냐? 가정을 위해서, 통일교회 문선생이 가정을 위해서 배척받아 나왔다면 보증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운명적인 동기가 그렇게 되었더라도 자기 가정을 위하기보다 하나님을 위하게 될 때에는 틀림없이 보장받을 것입니다. 그래야지요? 여러분이 선생님의 노정을 따라오는 것이 선생님을 위주로 한 것이라면 따라올 게 뭐예요?
사탄은 언제나 이용해 먹으려고 합니다. 더 큰 사랑을 위해서는 더 큰 희생과 더 큰 극복의 동기를 중심삼아 가지고 국경을 넘어 세계에까지 확대시켜 나가자는 것이 통일교회사상이며 심정세계관입니다.
자기 혼자 행복하겠다는 사람은 행복해 보라는 것입니다. 내가 행복하겠다고 해서 행복할 수 있느냐 이거예요. 어림도 없다는 것입니다. 전체를 위하는 자리에서 행복을 찾아야 만고불변의 행복입니다. 그런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종교인이 가는 길이 이래서 어렵다는 것입니다. 요걸 구체적으로 모르고 가는 거예요. 모르고 가니까 그 대가가 나타나지 않을 것 같거든요. 하면서도 이거 왜 하는지 걱정한다는 것입니다. '세계의 경계선, 수많은 국가의 경계선, 수많은 민족의 문화의 경계선, 혹은 역사적인 경계선을 무사통과할 수 있는 하나의 비법이 이것이구나' 하는 것을 느껴 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진짜 사랑했느냐 안 했느냐 하는 것을 알기 위해서 하나님이 시험을 합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저 노친네는 통일교회 극성파로서 누구보다도 정성을 많이 들이는 사람이라 당연히 만복을 받고 잘 될 텐데 작년에 아들 죽고 금년에는 딸 죽어! 이거 뭐 별꼴 다 보겠구만. 하나님이 있다면 왜 그래?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럴 때일수록 그 노친네에게 마지막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라고 해서 죽을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진짜 뼛골이 녹아지는 사랑을 하늘과 더불어 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최후의 고비가 왔다는 것입니다. 그런 때가 마지막 때라는 것입니다. 선생님도 그러한 길을 거쳐왔습니다. 아브라함이 제물을 드리던 역사를 탕감해야 하는 원칙이 있기 때문에 심각한 장면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통일교회도 작년 70년도를 기점으로 그런 비운의 3년 역사가 깃들어 있기 때문에 탕감지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건 나쁜 것이 아닙니다. 이 3년 기간에 역사적인 섭리의 내용이 우리들 앞에 찾아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탕감법을 아는 여러분들이 '탕감은 우리 집에서 벌어져서는 안 되지. 탕감은 딴 집에서 벌어져야지' 하는 사람은 악한 사람이라구요. '우리 집은 탕감이 되었으니 남의 집에 탕감이 벌어지면 좋겠다' 하는 사람은 악한 사람입니다. 복받는 길은 '탕감은 우리 집에서 벌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예전에도 얘기를 했지만, 통일교회 역사에 있어서 순교한 제 1대조의 역사를 가진 가문이 되었다면 그 가문은 청사에 빛날 것입니다. 이런 얘기 생각나요? 그거 들었지요? 통일교회를 중심삼고 순교한 제 1대조가 태어나야 된다구요. 통일교회 문선생이 지금까지 그런 일을 해 왔습니다. 가만히 보니 이제는 희생할 수 있는 길이 있을 것 같지 않아요. 그렇지요? 공산당이 밀어닥쳐 가지고 잡아죽이기 전에는 민주세계에서는 그럴 것 같지 않다구요.
그렇지만 여러분은 뜻을 중심삼은 공적인 행로에 있어서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입장에 있습니다. 69년도에 36가정을 중심삼고 때가 그러한 때니 전체 동원하라고 명령했는데도 불구하고 동원 안 했을 때, 희진이가 나한테 와 가지고 '식구들이 전부 다 동원하라고 했는데도 동원하지 않으니 나라도 가야 될 것이 아니냐? 하고 들이댈 때 꼼짝못하고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가다가 객사했어요.
이것이 슬픈 일이냐? 기쁜 일이예요. 일면은 슬프지만 일면은 기쁜 것이 아니냐. 보라구요. 기쁨이라는 것은 슬픔의 접경을 넘지 않고는 안 오는 것입니다. 그래요, 안 그래요? 슬픔과 기쁨은 극과 극이어서 상관없는 것이라고 할는지 모르지만 천만에요. 기쁨이라는 것은 최고의 슬픔의 극점을 넘어 가지고 최고의 기쁨이 오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그렇기 때문에 자식을 잡아 제사드리라고 했습니다. 아버지를 잡아 제사 드리는 것은 아직 안 했다구요. 지금까지의 역사시대에 있어서는 자식을 제물로 드리라고 했지만 통일교회 역사시대에 있어서는 아버지를 잡아 제사드려야 합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런 입장에 있는 거라구요.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부모의 반대를 받는 것입니다. 부모가 여러분과 하나되지 못하면 반드시 갈라지는 거예요. 부모가 하나되게 되면 더 큰 고통을 부모가 받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가 발전하는 것을 원치 않는 면도 있습니다. 통일교회가 몇몇 사람만 중심삼아 가지고 세계적인 탕감을 해서 발전하면 좋겠어요. 떼거리가 많으면 얼마나 부산스럽겠어요?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많은 것을 원치 않습니다. 단 세 사람만 있으면 복귀가 되는 거라구요. 그렇지 않아요? 타락한 주인공이 누구예요? 아담, 해와, 천사장입니다. 부모 앞에 가인과 천사장의 사명을 할 수 있는 단 한 남성이 있으면 그것이 세계적 권을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 한 사람이 없기 때문에 다리를 놓아 가지고 이렇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나선형으로 발전해 나가는 것입니다. 나선형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 커지면서 발전해 나가는 것입니다.
사랑은 전체를 위해서 희생하고 극복하는 데에서 오는 것입니다. 사탄은 자기를 중심삼고 전체를 희생시키고 전체를 극복시켜서 사랑을 성립시키려고 하기 때문에 거기에는 투쟁과 상충이 없을 수 없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반대라구요. 자기가 전체 앞에 희생을 당하고 전체 앞에 극복을 당하는 입장에 서기 때문에 그런 사람을 싫어하는 사람은 세상에 없는 것입니다. 있어요, 없어요?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천국의 내용은 어떻게 되어 있느냐? 하늘나라의 내용은 어떻게 되어 있느냐? 하늘나라는 상충이 없는 세계입니다. 알겠어요? 상충이 없는 세계이기 때문에 위하겠다는 관념만 위주해 나가면 깨져 나가지 않습니다. 위함받겠다고 하는 생각만 가졌다고 하면 깨져 나가는 것입니다. 그럴 게 아니예요? 여러분이 이걸 알아야 됩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한 세계인데, 그 사랑이 충만한 세계의 본질을 분석해 보면, 사랑의 본질은 위함을 받겠다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위하겠다는 것이기 때문에 세상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의 가르침을 두고 보면 위하고 절대 복종하고 희생봉사하라는 것인데 세상에 이런 놀음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에 아무것도 모르는 거지패들이 하는 놀음 같지만 이것은 천법의 최고의 도리를 알지 못하고도 복받을 수 있게 하기 위한, 사탄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암호작전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수천년 동안 그런 작전을 해 나온 하나님이 얼마나 놀랍고 얼마나 불쌍하냐.
이제는 그것을 직접적으로 가르쳐 주고 제시해 줄 수 있는 환경의 터전이 오늘날 통일교회에 의해서 벌어져 나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통일교회가 이렇게 나가 가지고 망하거든 내 목을 자르라구요, 목을. 망할 것 같아요, 흥할 것 같아요? 대답해 봐요. 이렇게 나간다면 망할 것 같아요, 흥할 것 같아요?「흥할 것 같습니다」 절대적이예요? 「절대적입니다」 이것이 틀리는 한 하나님의 복귀고 무엇이고 없다는 것입니다. 절대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을 보다 차원 높은 자리에서 희생시키는 것이 지도자로서의 할 도리입니다. 이것을 못 하는 통일교회 선생이 될 때는 보따리 싸야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구요.
가정을 중심삼고 잘살고 있는 사람에게 가정을 중심삼고 죽으라고 하지 않고 나라를 위해서 죽으라고 하게 되면 그거 망하라는 거예요, 복받으라는 거예요?「복받으라는 것입니다」똑똑히 대답하라구요. 망하라는 거예요, 복받으라는 거예요.「복받으라는 것입니다」그거 틀림이 있어요, 없어요?「틀림없습니다」살림살이에 고달파하는 사나이가 시시해요. 너무 값없어요. 그러니 욕을 해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가정보다 빛나는 천국의 문이 개문될 수 있는 점진적인 동녘의 서광이 비쳐지는 터전이 있으니 그것이 무엇이냐? 민족입니다. 내 살림살이보다도 민족의 살림살이를 위해 고달파할 때는 그 사람은 민족이 옹호해 주는 것입니다. 그가 굶게 되면 민족이 그를 위해 눈물을 흘릴 때가 올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거라구요. 더 나아가 자기 나라를 위해서, 자기 나라를 넘어 세계를 위해서 희생하겠다는 무리가 있게 될 때에는 그 무리는 싸우지 않고도 세계를 지배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요 작전을 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오늘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면서 '너는 너를 위하여 지금까지 무슨 꿈을 갖고 나왔느냐? 하고 물어 보라는 것입니다. 그 꿈은 나를 위한 꿈이 아니라 하늘을 위한 꿈이요. 세계를 위한 꿈이요, 인류를 위한 꿈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진정 세계를 사랑하는 사람을 찾기를 원하거든, 일생 일대에 있어서 남녀간에 사랑하는 것보다도 세계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인류를 사랑하고 난 다음에 나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상대로 맞고 싶어해야 합니다. 그런 사랑을 하는 사람이 이상적인 남성이요, 이상적인 여성입니다.
충신이 될 수 있는 역사를 엮어 와 충신이 되느냐 안 되느냐 하는 것을 판가리지어야 할 때인데도 불구하고, 여편네 혹은 부모가 '아이고! 나라야 어떻게 되든 우리가 이제 만났으니 헤어져서는 안 됩니다' 그래요? 그런 여편네와 부모는 망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네 집안 식구가 원수'라고 한 것입니다. 발전의 역사의 관문을 거치지 않고는 천국갈 수 없는 역사적인 사연을 잘 아시는 하나님은 그 고빗길에서 목을 자르는 사람이 사랑하는 여편네요, 아들딸이요, 부모라고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알겠어요? 여러분이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통일교회에서는 축복을 해줘 가지고 잘살라고 했기 때문에 그 터전을 중심삼고 살려는 희망이 있는데, 이제 와서는 그것까지 몽땅 잘라 버린다 이거예요, 이 길에 있어서 한 사회, 개인, 가정이 축복받으려면 이 시대권에서 빛날 수 있는 매체를 만나 가지고 역사시대에 빛날 수 있는 통일혈족을 남겨야 됩니다. 이 길이 하나님이 요구하는 길로서 여러분이 응당히 가야 할 천명이 아니겠느냐? 당당코 좋은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길에서 나갔다가 다시 들어온 사람이 이 말을 들으면 가슴이 철렁 내려 앉을 것입니다.
요즈음 내가 원수시하는 것은 나라의 비운을 가로막고 역사적인 천국의 때를 만들겠다는 하나님의 거룩한 사명을 가진 자 앞에 자기를 중심삼아 가지고 행동하는 여편네들입니다. 그렇게 행동하는 여편네들은 자비라는 총으로 다 쏴 버리고 싶은 마음이 문득문득 든다는 거예요. 그게 좋은 생각이예요, 나쁜 생각이예요? 그래 가지고 망하는 거라구요. 민족을 위해 희생했는데도 불구하고 그 사람을 잡아죽이려고 하는 민족이 있다면 그 민족은 망합니다. 그 사람은 민족의 배반을 받더라도 절대 그것을 서러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계가 그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세계가 맞아 줘 가지고 갈길을 보호해 주는 것입니다.
한국의 통일교회 교인들이 선생님의 말을 안 듣고 일본 통일교인들이 말을 잘 듣는다면 어떻게 할까요? 그래도 한국 교인들을 책임자 입장에 세울 것이냐?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걸 알라는 것입니다. 적진에 가서 눈물 흘리라는 것입니다. 선을 대해서 책임지는 것 이상으로 적을 대해서 눈물 흘리며 가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면 통일교회 선생님은 어떠하냐? 어떤 사람은 선생님이 고급차만 타고 다닌다고 할지 모르지만 내가 고급차를 타고 다니는 것은 바쁘니까 그러는 것입니다. 내가 공장에 나가서는 아무리 피곤해도 좀처럼 대낮에 낮잠을 안 잡니다. 정 피곤해서 못 견디면 기도하다가 자면 잤지 낮잠은 못자거든요. 뭐 파수꾼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하늘 앞에 공복(公僕)으로서 빚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빚을 진 사람은 여지없이 꺾인다는 거예요.
통일교회가 망하느냐, 안 망하느냐? 안 망합니다. 이 원칙이 있는 한 원수들이 꺾여 나갔지 통일교회 문선생이라는 사람은 안 꺾인다는 것입니다. 안 꺾인다는 것입니다.
이 눈물의 골짜기가 어디로 흐를 것이냐? 그 골짜기가 민족이 만든 것이라면 그것을 넘고 갈 것입니다. 이런 사상을 가졌기 때문에 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길을 가는 데 있어서 자기 아들을 바치더라도 고맙게 생각하고, 여편네한테 매를 맞아도 고맙게 생각하고, 갖은 수욕을 당하여도 고맙게 생각하며 가는 것이, 응당 가야 할 길이 천륜의 도리를 밝혀야 할 선각자의 길이요, 개척자의 길이요, 천국 건설을 위한 기초가 아니겠느냐. 이 일념을 가지고 갈 때 나타났던 원수들은 망하더라 이거예요.
요 몇 년 동안에 내 마음에 참 충격을 준 사람이 몇몇 있습니다. 툭 튀어 나오는 말이 '이놈…' 이런 마음이 발동하게 됩니다. 이게 내 마음이냐, 이게 하나님의 마음이냐? 기도하려고 눈을 감게 되면 다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벌써 몇 번만 기도해 보면 다 압니다. 하나님의 마음이라면 대번에 안다는 거예요. 기도하려고 보면 깜깜해지는 거라구요. 이름까지 잊어버리고 얼굴까지 잊어버린다구요. 한 두번만 기도해 보면 '아, 이 사람은 멀지 않았구나' 하는 것을 대번에 압니다.
하나님은 무자비하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런 역사를 남기고 있고 현재에도 그런 사실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이걸 두고 볼 때 '너는 이 땅에 왔다가 어떤 종교를 만들겠느냐' 하는 문제를 생각합니다. '내 생명을 내놓고 움직이는 길이 아니더냐? 내가 차를 탈 때는 이게 마지막 길이다 생각하고 대답하는 말이 이겁니다.
그런 스승을 모시고 있으면서 염치도 체면도 없이 자기의 꼬리를 들고 자기를 위해서 사는 사람은 끝이 멀지 않다는 거예요. 그 자식들은 망나니가 될 것이고 그가 가는 길은 전부 다 파탄이 벌어질 것입니다. 외적으로부터 문제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얽어맨다는 것입니다. 나중에는 자기가 천벌을 옮겨 놓지 못하게끔 딱 포위되어 가지고 자탄과 더불어 사라져 버리는 비참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절대 그래서는 안 되겠다는 겁니다. 내가 이런 내용을 알기 때문에….
어떤 때는 식구들이 나한테 와 가지고 보고하는 것을 보게 되면 참 기가 막혀요. 저주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때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한번 더… 한번 더…'를 몇백 번 더 할 수 있겠느냐? 백 번을 넘지 못하게 될 때는 너는 어떻게 되느냐? 패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는 거예요. 그러니 천번 만 번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심정이 통일교회 가는 길 앞에 남아지는 한, 여러분들은 가는 데 요동이 있을는지 모르지만 통일교회의 발전일로를 막을 자가 없습니다. 지금까지 싸워 나온 게 그거예요. 많은 원수들이 있었지만 내가 원수삼은 것이 아니라구요. 나는 원수를 갚지 않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이 싸움을 하면서 원수의 이름을 불러 '하나님이여, 이 원수를 해결해 주소서' 하는 기도를 해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끝이 되어 오게 될 때에는 내가 그의 아들딸을 불러서 과자라도 사 보내려고 하는 거예요. 그렇잖아요? 세상에서도 벌 받게 될 때는, 최고 형을 받은 사형수가 형장에 나가게 될 때는 잘먹여 주지 않아요? 세상에서도 그렇지 않느냐구요. 제사법이 그렇다는 거예요. 하나님에게 제사를 드릴 때에, 국가를 중심해 제물을 보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런 사람에게 최고의 선물을줄 수 있는 아량이 없어 가지고는 망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만 하면, 사탄이 잘못되면 망하겠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따라다니지 않는다는 거예요. 악심을 가진 원수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거라구요. 잘못된 후에 하나님이 벌 주려고 할 때에는 사탄이 나타나지만 그런 색다른 입장의 원칙을 따를 때는 사탄이 나타나지 않는 거예요. 이런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어요.
우리 통일교회가 가는 길은 천국을 소유하기 위한 길입니다. 천국을 소유해야 됩니다. 천국을 소유하는 비결은 어디에 있느냐? 자기가 잘살자고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잘살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하고 세계를 위해 희생하는 데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길(③)을 바라보고 또 따라가야 됩니다. 알겠어요? 또 따라가야 됩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타락권내(①)에서 벗어나기 위한 씨름을 했는데 여기(②)에서 못 따라가겠다고 아우성치는 사람은 그어 버리는 것입니다. 최정상을 향해 참된 길을 가는 데는 내가 주체가 되지 않으면 따라가야 되는 것입니다. 따라가는 데는 누구를 따라가야 되느냐? 하나님과 더불어 관계되어 있는 사람을 따라가야 되는 것입니다.
따라가는 데는 어느만큼 따라가야 되느냐? 세계 끝까지 따라가야 됩니다. 어떻게 가야 되느냐? 좋아하고 기뻐하면서 가는 것이 아니라 눈물과 피땀을 흘리면서 희생하고 극복하면서 따라가야 됩니다. 이런 인생 노정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범위가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개인에서부터 가정, 세계가 한꺼번에 총동원될 때가 되걸랑 세계의 끝날이 된 것을 알라구요.
국가적으로 가는 통일교회의 끝날은 60년대였습니다. 세계적으로 가는 통일교회의 끝날은 70년대가 아니겠느냐?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새로운 70년대를 중심삼고 국가와 세계를 위해서 희생할 수 있는 통일의 전통적인 사상을 이어받을 수 있는 용자들은 누구냐? 하늘나라를 소유할 수 있는 하늘의 아들딸은 누구냐? 여러분이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안 된다면 어떻게 될 것이냐? 딴 나라 사람이라도 될 것입니다. 통일교회 문선생은 망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갖고 있습니다.
천국은 누구로부터? 나로부터. 그 나라는 것은 하나님과 더불어 관계를 맺은 사상을 자기 주체로 근거삼는 것이 아니라 그 주체를 보다 넓은 분야로 옮겨 가야 되는 것입니다. 개인을 사랑하는 만큼 가정을 사랑하고, 가정을 사랑하는 만큼 종족을 사랑하고, 종족을 사랑하는 만큼 민족을 사랑하고-그 민족은 개인을 대표한 거라구요-국가를 사랑하는 만큼 세계를 사랑하고, 세계를 사랑하는 만큼 하나님을 사랑해야 됩니다. 결론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려면 세계를 사랑하고 돌아와야만 됩니다. 결론이 그거예요.
하늘의 상속자가 되려면 세계를 사랑했다는 입장에 서야 합니다. 세계를 사랑했다는 입장에 서지 않고는 하늘의 상속자가 될 수 없습니다. 통일교회 문선생도 세계를 사랑했다는 그 자리까지 나가자는 것을 표방하고 어떻게 했느냐? 세계의 남녀들을 데려다가 대표적으로 축복을 해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국가적 대표 시대권으로 들어와 가지고 민족적 대표 시대권으로 자꾸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종족적 대표 시대권으로, 가정적 대표 시대가 될 때 세계가 통일될 것이 아니냐? 그렇게 되는 거예요. 천국은 나 개인도 머물지만 세계가 머물러야 되기 때문에, 세계를 안고 세계를 소화시킬 수 있고, 세계를 위할 수 있는 마음을 다짐해 나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출발기지에서부터 끝까지 자기를 위한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을 중심삼고 상대를 위한 사랑, 하나님의 아들딸을 사랑하는 입장, 그리고 희생과 극복의 내정(內情)을 거치지 않고는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이 7월 18일이니까 내일 모레면 전국 식구들이 동원되는 날입니다. 그렇게 되면 통일교회 교인들, 공직에 있는 사람들은 전부 다 동원되는 것이 원칙입니다. 이 기간만은 통일교회 교인들이 배가의 노력을 하라구요. 자기의 직장 외에 나라를 위할 수 있는 한 분야를 책임지는 놀음을 하지 않고는 공식적인 하나님의 아들딸의 권위의 자리에 못 나가는 것입니다. 이중의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낮에 그 일을 못 했으면 밤잠을 안 자고라도 하나님과 보조를 맞추라는 것입니다. 실체가 못 되거든 그림자라도 되어라 그 말입니다. 알겠어요?
신문사에 있는 사람들은 신문사의 책임만 다하면 되느냐? 천만에요. 천만에요. 통일교회 문선생이 교직자로서의 책임을 다했으면 되느냐? 천만에요. 사업가로서의 책임을 또 해야 됩니다.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냐? 나라를 다스리는 위정자들이 앞으로 잘못하면 브레이크를 걸어야 됩니다. 세계를 지도하는 사상적인 면에서 잘못할 때에는 브레이크를 걸어야 됩니다. 이렇게 범위를 넓혀 나가는 거라구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대해서는 신념을 가져라. 어영부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겁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해야 되는데 다하지 못했기 때문에 한이 되는 것입니다. 남에게 불평하기 전에 내 할 일을 다했느냐고 자문자답하라는 것입니다. 남을 바라보고 이러쿵저러쿵 비교하기 전에 내가 비교의 기준이 됐느냐를 자문자답하고, 하나님의 공인을 받으라는 거예요. 자문자답해 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을 가져야 됩니다.
금년에는 지금까지의 통일교회 헙회기구를 재편성하여 새로운 발전을 도모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앞으로 생활기준을 어떻게 세워야 되느냐? 사람을 만나게 될 때 떡 대하면 그 사람의 생활기준을 아는 거라구요. 그 사람을 대해 가지고 주고받는 데 있어서 하나님 앞에 마이너스될 것 같으면 그 자리를 털고 나서야 합니다. 둘이 만날 때도 하나님을 중심삼고 결속을 다짐해야 되고 셋이 모여도 결속을 다짐해야지, 여기에서 비판을 다짐하는 사람은 그 자체가 멸망하는 것입니다.
결속을 다짐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여러분 자신이 선생님만큼 고생했느냐? 하나님만큼 고생했느냐? 선생님만큼 복잡한 환경에 처해 가지고 묵묵히 침묵을 지키면서 사명을 완수해 봤느냐? 6천년 동안 진리의 모체를 품고 나오면서 가르쳐 주고 싶었지만 때를 바라보며 묵묵히 지켜 나왔던 그 하나님과 같은 입장이 되어 보았느냐? 입을 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입을 열고 이러고저러고하는 사람이 남아지나 보라구요. 두고 보라구요. 남아지지 않는다구요. 그런 사람들은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을 나쁘게 생각하지 말고 그 사람들이 자기를 통해서 우리가 중심 자리를 잡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교시의 재료로서 수습해 가지고 자기가 받을 피해에 대한 방비책으로 소화시킬 수 있는 주체성을 갖는 사람은 망하지 않는다구요.
선생님은 감옥에 들어가 고문을 당하는 자리에서도, '쳐라! 그 채찍이 나라의 충신은 꺾었을지라도 나는 못 꺾는다'는 사고방식을 갖고 나왔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통일교회 교인들이 선생님만큼 고생해 봤느냐 이거예요. 선생님도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는데 그 이상 수고 못 해 가지고 뭐 이러고저러고하는 사람은 대번에 걸리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못 가는 사람이라구요. 통일교회의 원수라구요. 제일 원수 되는 사람입니다. 차라리 믿지 않는 게 낫지. 따라다니지 않는 것이 낫지. 통일교회 문선생을 대해 가지고 그렇게 시끄럽게 하면 안 되는 거라구요. 여러분이 이런 것을 잘 감별해야되겠습니다.
우리가 앞으로 넘어야 할 고개는 많지 않습니다. 많지 않다는 얘기예요. 국가 기준을 중심삼아 가지고 남북통일을 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시아에 있어서 3개 국만 규합하고 나서는 날에는 세계는 우리의 품으로 규합되어 들어올 것입니다. 그 준비를 지금 하고 있는데 이것은 자기 살림살이를 중심삼고….
요전에 어느 아주머니가 찾아와서 하는 말이 '이렇게 어려운데 선생님 어떻게 했으면 좋아요?' 하면서 도와줬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어려운 것이 선생님 때문이었느냐, 뜻 때문이었느냐?'고 당장에 물었습니다. '뜻 때문에 그리 되었다면 내가 협조해 주마. 그것은 응당한 책임이다' 라고 했습니다. 뜻 때문에 그랬느냐? 아닙니다. 그러면 누구 때문에? 자기들이 잘못했기 때문에.
그러면서 또 하는 말이 '선생님은 아버지의 입장에 있기 때문에 자식이 어려우면 희생하고라도 도와주어야지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거 맞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 자식이 망할 수 있는 자리에서도 희생해야 되느냐? 법을 어겨서 옳지 못한 결과가 나타날 것을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밀어 줘야 되느냐? 그럴 때에는 무자비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래서 마음으로 상당히…. 지나가는 걸인들한테도 말없이 수십만 원까지 누구도 모르게 준 사람인데 그래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제일 마지막 사람을 중심삼아 가지고 그 사람에게 주는 거라구요. 그렇게도 할 수 있지만 식구의 입장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도와주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되느냐? 좋지 않습니다. 절대 도움이 못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흘러 나가게 될 때는 참 좋지 못한 결과가 나타납니다.
여러분, 보라구요. 교회도 선생님이 심각한 입장에서 도와주었는데 불구하고 그 표준에 일치하지 못할 때는 그 교회가 헤어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교회가 있다는 것입니다. 결과가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 일들이 많다는 거예요. 그런 것을 알기 때문에 나는 죽더라도 하나님 앞에 절대 그런 기도를 못 해봤습니다. '아버지 ! 내가 죽게 되었으니 도와주시옵소서' 나는 지금까지도 그런 기도를 못 해봤습니다. 감옥에 들어가서 고문을 받아 생사가 왔다갔다하는 판국에도 '나 죽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그런 졸장부 노릇은 안 했습니다. '그 이상의 자리에서 충의 도리와 효의 도리를 하고 하늘 앞에 가야 할 길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데 그 한계선까지는 못 넘어간 자리가 아니냐? 그 이상의 자리도 감사하며 가야 할 길이 남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시시한 자리에서 그게 뭐야? 그러면서 버텼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뭐가 그리 어렵다고…' 해 버립니다.
어떤 때는 그래요. 금년과 명년에는 내가 모험을 하려고 합니다. 경제적인 분야에 있어서 모험을 해야 되겠고 신앙적인 분야에서도 모험을 해야 되겠습니다. 각 분야에 있어서 모험을 해야 되겠습니다. 1972년도까지는 모험을 해야 되겠습니다. 될 수 있는 대로 널려 놓아야 됩니다. 될 수 있는 대로 널려 놓자는 것입니다. 널려 놨다가 수습하느냐, 못 하느냐? 수습을 하고 안 하고는 내가 책임을 안 집니다. 정성껏 하나님을 위해서 널려 놓는데 있어서 수습하는 것보다 더 큰 진실을 가지고 얼마만큼 정성을 투입하느냐 그게 문제입니다. 문제를 그렇게 생각하는 거라구요. 수습될까 말까가 아니예요. 수습하는 그 일보다도, 그 책임자보다도 더더욱 정성을 들여야 됩니다. 그런 수습은 하늘에 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이런 것을 밀어 주시지 않으면 뜻을 무엇으로 이루겠어요?
요즈음 우리 식구들을 가만 보게 되면 신문사에서 월급 준다 하니까 월급 못 받고 죽은 귀신들이 붙었는지 전부 다 그리로 가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래도 세상에 나가 일을 하게 되면 권위와 직위도 갖추고 해야 될 텐데 이젠 출세 기준을 중심삼아 가지고 이름을 달아 주어야 되지 않겠느냐?' 이런 사람들한테는 똥감태기를 씌워 주고 싶습니다. 이놈의 자식들! 통일교회 문선생이 그렇게 가르쳐 주었어요? 여기에서 생각하기 전에, 떡은 줄지 말지 한데 김칫국부터 마시는 거예요? 그런 사람은 오래 안가서 잘라 버리는 것입니다. 전체를 위해서 그래야 됩니다.
금년에 들어와서 전국 순회사들한테 말한 것도 이거라고요. 주체적인 사상을 중심삼아 가지고 자리를 잡아야 되겠다고 했습니다. 교회의 책임을 중심삼고 끝까지 충성하라고 했습니다. 딴 무엇이 있다고 해도 자기가 결실지어야 할 내용이 있는 것입니다. 내가 보리밭에 난 팥이라면 보리밭에서 팥으로서 열매맺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옮겨 주기 전에는 옮기지 않겠다는 굳은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아직까지 갈 길을 모색해야 하고 지금 산야에서 싸우고 있는 주제에 무슨 태양같이 빛나고 싶다고? 누구를 위해서? 그 아무개를 위해서? 그런 건 필요없다는 거예요. 지금은 할수없어서 그러지 조금만 더 있으면 뒤집어 놓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재출발을 해야 된다는 거라구요.
여기 김사장이 왔구만. 이사장이 좋아, 하나님의 아들이 좋아? 이사장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이사장은 바가지를 깨뜨려 버린다는 거야. 저 말단에 가서 종살이할 생각은 안 하지요? 여기 장영창이도…. 높고자 하는 자는 낮아져야 됩니다. 낮고자 하는 자는 높아지는 것입니다. 그게 원칙입니다. 그게 통일사상의 주류사상이라구요.
그런데 밥 바가지 때문에 찾아다니느냐 이거예요. 선생님이 지금까지 생활해 오면서 어머니한테 이번 달에는 생활이 어떻게 되는지 생활비 염려를 안 한다구요. 돈만 있으면 긁어다가 딴 데다 쓰려고 했지. 그렇다고 굶어 죽지 않는다구요. 일생을 그렇게 살아오고 있습니다.
통일교회 문선생은 처자들을 중심삼고 가슴 아픈 일을 안 당한 줄 알아요? 선생님 자신도 변소에 떨어진 사과를 보고 체면없이 주워 먹고 싶은 마음, 행동까지 하고 싶은 지경에 이른 때도 많다는 거라구요. 체면상, 하나님의 아들의 위신상 그러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오늘 여러분 자신들이 천국을 찾아 나가는 인간이라구요. 천국은 상대의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구요. 여러분 자신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거울에 비춰 볼 때마다 '이놈의 코는 욕심이 많게 생겼구만! 이놈의 눈에는 독사의 독이 박혀 있구만! 또 손에는 독수리의 발톱이 박혀 있구만! 마음보에는 살인 강도의 마음의 못이 박혀 있고, 화살이 박혀 있구만! 이놈의 자식! 고생을 시켜서 모가지를 잘라 내야지' 이런 놀음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편안히 먹고, 배때기에 점심 못 먹었으면 점심 찾아 먹이고, 저녁 못 먹었으면 저녁 찾아 먹이고 그거 언제 그렇게 다 해 가지고 하늘나라에 갈 것 같아요? 천만에요. 선생님 자신이 점심 못 먹기가 일쑤고, 잠자리에, 자는 시간이고 무엇이고 다 잊어버리고 이 놀음을 하고 있는데…. 체제가 어긋났다는 거예요. 이런 등등을 볼 때 통일교회 문선생은 무엇을 위해서 싸우느냐? 세계적 천국을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현재 통일교회를 중심삼고 지도하는 책임자로서 내 마음에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기 위해서, 개인적 천국을 상실하지 않기 위해서 싸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은 그거예요.
결국은 환경의 천국이 자동적으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 동기와 원천은 누가 되느냐? 지도자의 입장에 있는 내가 되어야 할 것이 아니냐? 그래 잠을 잘 자고 일어났으면 회개해야 됩니다. 밥을 잘 먹고 숟가락 놓을 때도 회개해야 됩니다. 편안한 날을 맞았으면 회개해야 됩니다. 그러지 않고는 망하는 것입니다. 그 회개의 마음을 가지고 전체가 복되기를 빌고 전체의 안식의 터전을 빌게 될 때는, 그 사람은 망하려 해도 하나님이 망하지 못하게 합니다. 사탄이 치려 해도 칠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세상에서도 자기가 잘못을 했으면 잘못했다고 솔직이 이야기해야 용서가 벌어지고 긍휼이 벌어지지요? 동정의 여지가 있는 것이지만 잘하고도 뻗대게 되면 국물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천국은 내 마음에서부터 벌어집니다.
그러면 통일교회 문선생 자신도 식구들 보기에 부끄럽지 않으냐? 요전에도 그래요, 주일에 아침부터 점심 저녁까지 한 열 세 시간동안 이야기를 하고 청평에 갔다구요.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데도 식구들이 땅을 파고 있었어요. 딱 정한 날짜에 자기의 책임을 수행해야 되기 때문에 안 할 수 없다는 거예요. 가자마자 너무 피곤해서 말이야, 앉아 가지고 이불을 펴고 잘 수 없으니 다리를 펴고 천막 안에 있는 이불에 떡 기대고 입을 벌리고 코를 골며 잤습니다. 그러다가 코고는 소리에 잠이 깼어요. 깨서 밖을 내다 보니 비가 억수같이 오는데 식구들이 곡괭이를 들고 땅을 파고 리어카를 끌고 가더라구요. 그것을 보고 내가 눈물을 흘렸다구요.
이 자리에 만일 하나님이 행차했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문선생이 생애를 거쳐 나오던 그 노정에 있어서, 최후의 통첩을 하던 하나님이 왔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그런 마음이 통일교회 문선생에게 있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피곤해도 선생님을 보면 될 수 있으면 자기를 바라고 그런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잔다고 해서 '통일교회 문선생은 잠자고, 우리들은 일하고…, 이런 마음이 있다면 그건 마지막이라는 것입니다.
요즈음 뭐 무슨 영장이 많이 나온대나? 갑호훈련이니 뭣이니 해 가지고 이럴 때 가겠다는 사람은 많은데 오겠다는 사람이 얼마나 있느냐? 끝나게 되면 오는 사람이 누구냐? 오는 사람이 없다면 진실된 마음을 갖고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구요.
어제께 여수가 고향인 한 청년한테 23년 만에 아버지의 전보가 왔는데, 일하다가 그 전보를 척 받으면서 '사탄이 나타났구만' 했다는 말을 듣고, '그래, 사탄이 나타났으면 너는 어떻게 행동할 것이며 사탄을 어떻게 처리 할것이냐? 생각하고, 처음에 갈 때에 돈 한푼 안 줬다구요. 2천원을 줘서 갔다 오라고 보냈습니다. '이 녀석, 사탄이 나타났다고 한 주제에 어디 가서 소식이 있나 없나 보자' 했는데 이 녀석이 어저께 왔어요. '야, 이 녀석. 너는 조건이 됐다. 내가 바라는 표준 앞에, 하나님 앞에 이 건물을 다 지어 놓고 자랑할 수 있는 조건이 됐다. 이 녀석, 잘 왔다' 하고 생각했습니다.
다들 힘들다고 가기를 바라는데 다시 돌아온 그 사람이 정말 통일교회 사람이라구요. 그런 사람들은, 갔다가 돌아온 사람들은 앞으로 일하는 사람 가운데서 갔다가 오지 않은 사람보다도, 남아서 수고한 사람보다도 더 빛날 수 있는 내용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아직까지 다 시험을 못 해봤거든요? 여러분은 명령받은 자리에 못 서 봤고, 그런 행동을 하는 자리에 못 나가 봤고, 이럴까 저럴까 할 수 있는 결정적인 입장에 못 서보았기 때문에 누구를 믿어야 되겠느냐? 갔다 온 사람을 믿어야 됩니다. 그래서 내가 오늘 가게 되면 무엇을 사다 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 사다 주지 말까요? 그 사람에게만 사다 주면 다른 사람들이 '왜, 그 사람에게만 사줘?'(웃음)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예요.
그걸 보면 통일교회 문선생은 팔자가 참 고약합니다. 잠을 자고 일어나더라도 엎드려서 기도해야 된다구요. 그럴 게 아니야? 잠자고 있는 이 시간에도 세계에 널려 있는 통일교인들이 복을 받겠다고 기도하고 있는 무리가 있지 않느냐? 그럴 게 아니야? 우리나라는 밤인데 미국은 낮이라구요. 피땀 흘리며 기도하고 있지 않느냐? 한국에 있는 선생님을 걸고 기도할 때에 하나님이 나 대신 그 모든 것을 처리해 줄 수 있느냐? 저들도 지쳐서 이제 자야 할 텐데 그러지 않느냐? 그런 송구한 마음이 통일교회 문선생에게서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외국 식구들은 선생님이 보고 싶어 난리라구요. 알겠어요? 보고 싶어해야 되고 만나고 싶어해야 돼요.
인감도장 하게 되면 철궤 깊은 곳에 처박아 놓지요? 지금 10억이 넘는 재산이 전부 다 선생님 이름으로 등기되어 있는데, 그걸 가져다가 사기해 먹으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내가 인감도장을 주머니 꽁무니에 차고 다니는 법이 없다구요. '누가 말아 먹으려면 말아 먹어 봐라. 나 이상 정의에 입각해서 정성을 다 바쳤으면 갖다 써라' 이거예요. 그러지 못해 가지고 자기의 체면과 위신을 가지고 그렇게 나오면 나는 싫습니다. 그런 사람이면 절대 이것을 안 내놓는다구요. 차라리 싫다고 하는 사람한테 해주면 해주지 주장하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해주지 않습니다. 그것이 선생님의 생활태도라구요.
그렇게 해주면 어떻게 될 것이냐? 누구 때문에 동기가 되었느냐 할 때 하늘 때문이 아닐 때에는 그 사람을 도둑놈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 됩니다. 그렇게 해줌으로 말미암아 막혀 버린다구요. 여러분은 그것을 알아야 돼요. 그런 사고방식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중심삼고 천국 가는 길이라는 것은 딴 것 없다구요. 나라를 위하고 세계를 위하고 인류를 위하고…. 그것은 끝이 없는 거라구요. 고달프다면 고달프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가슴이 조여 오고….
세상을 가만히 보게 되면 공직에 서 있는 사람이 불쌍한 거라구요. 있는 정성을 다했지만 행여나 뜻 앞에 실수를 해 가지고 나로 말미암아 천년 공적이 틀어지면 어떻게 될 것이냐? 빚진 사람이 돈은 없는데 빚을 갚아야 할 시간이 다 되어 가고, 그런 심경이라구요. 그런 생활을 지금까지 해 나오고 있습니다.
뭐 어떤 사람은 통일교회 문선생은 이제 일대에 성공했다고 합니다. 요전에 어느 대학 총장을 만나서 이야기를 하는데, 그 사람이 통일교회에 대해서 한다는 말이 '문선생은 이제 그만하면 보통 사람보다도 성공하지 않았느냐? 무엇으로 보더라도 이제 통일교회는 성공했다. 문선생의 이름은 역사에 남을 것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이름이 역사에 남으면 뭘해요? 그 자체가 역사에 남는 큰 명예를 얻었을지라도 저나라에 갔을 때 심정의 세계와 먼 거리에 가 있으면 뭘해요? 그 창피를 어떻게 할 것이냐?
세상에서 성공을 해서 뭘 하느냐 이거예요. 죽을 텐데…. 죽게 되면 하나님을 중심삼아 가지고 그 나라에 갈 텐데. 그 나라에 가 가지고 심정적인 반역자가 되면 뭘해요? 그런 것을 성공했다고…. 성공이 도리어 화다 이거예요. 요것이 언제나 내 왼발을 걸려고 하고 바른손을 걸려고 하면서 사방에서 걸어 제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 올무라는 것입니다.
끝날에는 자기가 제일 사랑하는 것이 자기 원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잘 요리하고 처리하는 데 있어서 양심에 꺼리끼지 않는, 양심 앞에 가름길을 만들지 않고는 천국에 가도 천국을 맞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문제다 하는 것을 기억해야 되겠습니다.
당신은 통일교회를 사랑합니다. 사랑하는 그 내연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통일교회를 위해서 계시는 아버지가 아닐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옵니다.
저희들은 아버님을 사랑합니까? 저희들이 아버님을 위해서 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 천국은 하나님으로부터 되는 줄 알았더니, 어떠한 스승으로부터 되는 줄 알았더니, 천국은 나로부터라는 것을 이제 확실히 알았습니다.
내가 찾아야 할 나라를 누가 찾아 줄 것이며, 내가 찾아야 할 세계를 누가 찾아 주겠습니까? 세계를 잃어버린 슬픔을 느끼지 못한 사람은 세계를 필요로 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라를 잃어버린 슬픔을 느끼지 못한 사람은 나라를 찾기 위한 생각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민족과 종족과 가정을 가졌던 사람이 그것들을 잃어버렸을 때, 갖지 못했던 사람은 모를는지 모르지만 가졌던 사람은 그것이 얼마나 비통한가를 알고 있습니다.
나 아무개는 세계를 대표할 수 있는 하늘의 아들이 되어야 하고, 나라를 대표하고 종족을 대표하고 가정을 대표하고 만민을 대표해야 된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 그 자리는 나만 홀로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내가 갈 때에 하늘에 계신 아버님이 따라가야 되겠습니다. 내가 가정에 머물 때 아버님이 여기에 찾아오셔야 되겠고, 내가 교회에 머물 때 아버님이 찾아오셔야 되겠습니다. 직장에 머물 때도 아버지께서 찾아오셔야 되겠고, 나라를 위해서 가는 길에도 찾아오셔야 되겠습니다. 세계를 향하여 가는 길에 있어서도 어느 한때 고독한 입장에서 가는 것이 아니라 천심과 천정을 따라 모심의 생활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이 땅 위의 뜻을 안 사람들이 가는 길인 것을 잘 알았습니다.
내가 그리워하는 것이 있다 할진대 당신이 찾고자 하는 세계를 그리워해야 되겠고, 당신이 찾고자 하는 나라를 그리워해야 되겠습니다. 또한 저희 들은 나라 가운데에 있는 개인을 사랑하는 것보다 나라를 대표할 수 있는 개인을 사랑해야 되겠고, 세계 가운데에 있는 개인을 사랑하는 것보다 세계를 대표할 수 있는 개인을 사랑해야 된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 그런 사람은 아버지의 마음을 품은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요, 아버지의 사랑을 가진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내 양심을 통하여 늘 충고하고 계신 것을 알았습니다. 양심은 나에게 환경을 극복하라고 명령하고 환경에서 희생하라고 명령하는데 그것을 원수와 같이 알았습니다.
내 마음에 어찌하여 이런 것이 있어 나를 괴롭게 하느냐? 바울이 통탄한 것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고, 두 개의 요인이 있어서 서로 가는 길을 가로막고 엇갈림이 있어 가지고 상응이 안 된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신음하였던 입장을 저희들이 넘어서야 되겠습니다.
이미 죽음길을 각오했던 맹세의 실체로서 죽음의 날을 맞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 감사해야 되겠습니다.
굶주림의 자리에서나 헐벗은 자리에서나 수욕의 자리에서나 개척의 자리에서나, 혹은 몸이 찢기우고 깎이울지라도 아버지만을 위로하는 자리에서 자기 자체를 잊어버리고 그리움에 사무칠 수 있는 자리에 있을 때에는 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알았습니다. 그런 자리에는 당신께서 안 계시는 줄 알았더니 거기에 계셨고, 나와 먼 곳에 계시는 줄 알았더니 너무 가까운 자리에 계신 것을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우리 몸 속의 심장은 쉴 사이 없이 24시간 고동을 울리고 있지만 너무 가까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때가 많은 것이 아닙니까? 당신이 너무 가까이 계시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자신이 너무 가까운 자리에, 너무 깊은 자리에 있기 때문에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먼 자리에 계신 줄만 알고 당신이 가까운 자리에 계신 줄을 몰랐던 불쌍한 저희들이었고, 떠난 줄만 알고 당신이 나와 더불어 같이 쉬고 같이 생활하고 계신 것을 몰랐던 저희들이었사오니, 당신이 나와 더불어 같이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발견할 수 있는 모습들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이제 사랑의 뜻 세계가 어디냐 하고 그 길을 찾게 될 때, 자기를 들고 나와 가지고 남아지는 무리는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희생하는 자리에서만이, 전체를 위하는 자리에서만이 남아질 수 있다는 것이 하늘의 도리요, 인간 본성의 도리의 원칙적인 궤도요 행로인 것을 저희가 확실히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여기에서 발전이 파동쳐 들어온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 누가 잘못되었다고 상대를 대해 혈기를 돋구어 평하는 사람을 보게 될 때, 그는 하늘의 왕자와 같고, 하늘의 왕녀와 같은 입장에서 권세를 잡은 사람 같지만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인 것을 저희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온유 겸손의 화신이 되고 스스로 희생의 제물이 되기 위하여 전체를 바치고자 하는, 나라를 위하여 그리워하고 세계를 위하여 그리워하며 현재의 입장을 극복하기 위하여 온갖 수난길을 감수하고 고독의 길을 감수해 나가는 아들딸이 있다면 그는 절대 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저는 알았습니다. 나 자신이 그런 길을 걸어올 때 아버님은 같이하였다는 것을 알았사옵고, 홀로 고독한 자리에 눕게 될 때 아버님은 나와 더불어 눈물을 흘리면서 나를 품고 밤을 새웠던 것을 알았사옵고, 아버님이 나와 상관없는 자리에 계신 것이 아니라 내가 아버지와 먼 자리에 있었다고 사죄를 구하는 자리에 섰을 때 아버님은 이미 나를 권고하고 새로운 소망을 주었던 것을 알았습니다.
통일교단이 금후에 가야 할 길을, 아버지여, 맡으시옵소서. 땅에서 제아무리 잘나고 제아무리 훌륭하다 하더라도 아버지의 거룩하심 앞에 미칠 바가 없고, 아버지의 절대적인 기준 앞에 상대적 요인을 갖출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좋은 것이 있다 하면 당신을 위하는 것으로써 결실되어야 되겠고, 자랑할 것이 있다 하면 당신을 앞에 놓고 자랑해야 되겠습니다. 이런 전통적인 사상을 남겨 놓아야 할 세계가 통일의 심정 세계인 것을 알았사오니, 그 길을 고이 달려가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망해야 할 운명을 각오했던 걸음 앞에 아직까지 생명이 남아 있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감사해야 되겠습니다. 원망과 저주 가운데서 축복과 인내로써 아버지를 찾던 그 자리에서 심정의 인연을 중심삼아 가지고 인정과 공인 가운데서 아버지를 추앙할 수 있는 환경을 맞을 줄 몰랐습니다.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낌과 동시에 아버지의 수고의 대가가 컸다는 것을 알고 감사 감격해야 될 오늘날 통일교회의 신도들인 것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신앙의 길에는 눈물이 말라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한날 순간의 위로의 터전을 찾기 위하여 애달픈 그 마음을 억제하고 먹을 것, 입을 것을 잊고 극복의 노정을 자처해 가는 걸음이 되지 않고는 안 될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
오늘날 통일가에서 여기 문 아무개라는 사람이 없게 될 때는 이 통일가를 아버지 뜻 앞에 일치시켜 끌고 갈 수 있는 사람이 그 누구냐고 묻게 될 때, 나라고 하며 나설 수 있는 아들딸이 있거들랑 만복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스승이 갖고 있는 권한을, 스승을 통하여 약속했던 것의 천배 만배로 약속하여 주시옵소서, 그것이 당신의 소원이요, 당신의 뜻을 상속받을 수 있는 무리들의 정상적인 심정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 이제 나라가 우리 앞에 놓여 있사옵고 세계가 우리 앞에 다가오고 있습니다. 아시아의 정세를 바라볼 때 기수가 될 무리는 누구냐 할 때 통일교회 신도들이 그 기수가 되어야 되겠고, 이 나라에 비운이 다가올 때 기수가 될 무리는 누구냐 할 때, 통일교회 교인들이 되어야겠습니다.
그 얼굴에는 나라를 위하여 수심에 싸여 있던 그런 역사가 깃들어 있고. 심중에는 나라의 애달픈 사정의 못자국이 남아 있는 사람들이 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아버님이 그러하기에 우리는 대한민국을 중심삼고 사랑하는 뜻을 세계에 남기지 못하면 이 민족으로서 사명을 못 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그 사명을 이어받을 사람이 없게 되면 하늘나라에 애국애족할 수 있는 무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확실히 깨닫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천국은 나로부터라고 하였사옵니다. 이 아침 여기에 모인 당신의 자녀들을 굽어살피시옵소서. 남을 대하여 사랑하기에 밤을 지새우고, 나라를 위하여 염려하기에 자신의 일생을 수포로 돌리고 수고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있으면 그 무리는 결코 망하지 않는 것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이 70년대가 저희 앞에 다가왔사옵니다. 축복가정들이 일선에서 싸우고 있사오니 이들의 거룩함을 찬양하여 주시옵소서. 전도의 실적만이 문제가 아니라 아버지의 내심의 사연에 동조하고 그 사연을 따라가는 인연 가운데 선 것이 얼마나 귀한가를 보고 살피옵고, 전후 좌우 사방을 가리어 그들의 갈 길을, 아버지, 보호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니다.
오늘 이 아침에 '천국은 나로부터'라는 말씀을 하였습니다. 내 작은 김 아무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그 마을이 아버지를 추앙하고 그 군과 그 나라가 아버지를 추앙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통일교회는 언제나 종교계에 있어서 석양을 맞는 그런 교회가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새벽을 향해 넘어가는 자정의 한 순간을 맞기 전에는 새벽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새벽도 영광의 새벽, 기쁨의 새벽이 못 되거든 자정의 그 자리를 피하지 않겠다고 몸부림쳐야 할 통일교회 신도들이라는 것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칠흑 같은 흑암세계에서 자기의 마음의 방향을 따라 천륜과 더불어 보조를 맞추며 엄숙히 밤을 지새워 가면서 정성들이는 무리가 되어 아침의 햇빛을 받지 못하겠거든 자정에 소망의 햇빛을 그리워하면서 눈물지을 수 있는 무리라도 되지 않으면 뜻과 더불어 경멸당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겸손히 아버지의 심정 앞에 다짐하는 이 시간이 되고, 천국 앞에 플러스시킬 수 있는 요인이 되는 심정적 주체를 갖추어야 할 자신인 것을 발견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옵니다. 오늘은 거룩한 안식일이오니 전국에, 전세계에 널려 있는 통일의 역군들 앞에 복을 빌어 주시옵고, 그들의 가는 도상을 지켜 주시옵기를 재삼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