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들이 아니면 당신의 나라를 찾을 수 없고, 저희들이 아니면 당신이 소원하시던 세계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 과연 당신은 슬픔의 하나님이 아닐 수 없음을 느낄 때가 많사옵니다.
아버지, 여기에 모인 당신의 자녀들을 다시 한 번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저희가 슬픈 입장에 계시는 아버지의 친구가 되고, 수난길을 극복하시는 아버지의 입장에 서서 아버지와 같이 참는 아들딸이 되고, 싸움터에서의 희생을 감수할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겠다는 맹세의 심정을 가지고, 이 시간 아버지 앞에 부복하는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을 위하여 맹세하고 나선 사람들은 많았지만,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당신을 저버리는 사람도 많았던 것을 저희들이 보았고, 잘 알고 있습니다. 부디부디 맹세하기 전에 당신을 저버리지 않는 실체가 되어야겠사옵니다. 당신 앞에 맹세하기는 쉽지만 그 맹세한 대로 실천하기는 심히도 어렵다는 것을 저희들은 생활 환경을 통해 잘 알고 있는 몸들이옵니다.
부족한 저희 자신들을 당신이 부족하다 하게 될 때 당신 앞에 감사할 줄 알고, 자기 일신에 탕감이 벌어지게 될 때 그 탕감이 자기 일신의 탕감뿐만이 아니라 자기로 말미암아 민족과 세계와 온 천주의 탕감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심정적 내연을 가지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아버지여, 이 날 이 아침에 저희를 불러 모으셨사오니, 당신의 소원 앞에 일체될 수 있는 저희 자신들이 되어 있는가를 생각하고, 자기 정체를 아버지 앞에 명백하게 드러내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아버지로 말미암아 감정을 받고 비판을 받고, 당신이 원하시지 않는 자신의 미흡한 점은 제거시키고, 완전무결하게 당신에게 일치될 수 있는 그 마음만이 이 시간 아버지와 인연맺게 허락하시사, 당신이 저희와 더불어 새로운 각오와 결의를 할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민족과 세계 복귀의 운명을 책임지기 위해 다짐할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고, 이 시간 당신의 영광이 저희 심령의 밑바탕이 될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악은 악대로 세우고 선은 선대로 분립시켜 세워야 하는 것이 아버지의 뜻인 줄 알고 있사오니, 저희 본성의 기준 앞에 반대되는 일체의 모든 요소를 제거시키시어 당신만이 임재하여 주시옵소서. 선만을 동기로 삼아 저희를 자극시키고, 결과의 인연까지 이끌어 가실 수 있는 아버지의 가호가 함께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 부복하였사옵니다. 자기 자체에 악의 요건이 남아 있는 채로 부복한 자 앞에는 당신이 같이하실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선만이 저희와 같이하여 미래를 향하여 새로이 다짐하고, 소망의 천국을 향하여 건설자의 책임을 다짐할 수 있는, 새로운 사명에 불탈 줄 아는 아들들이 되고 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세계적인 사명이 저희 목전에 다가오고 있지만, 스스로 준비해야 할 저희 자신들이 미급함으로 말미암아 찾아오는 때와 천운 앞에 책임 다하지 못하여 아버지 앞에 염려를 가해 주는 것이 저희 일상 생활이었사옵니다. 아버지, 저희들이 부족하오나 아버지의 모든 일체를 믿을 수 있게 저희들의 마음을 강하게 하여 주시옵고. 저희들의 모든 것을 당신 앞에 맡길 수 있는 저희 자신들이 될 수 있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그렇게 되지 않고는 당신이 역사하실 수 없다는 것을 저희들이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멀리 계시는 것 같은 자리에서 저희들이 몸부림치고 슬픔의 고통을 느낄 때에, 당신은 언제나 저희들과 같이 계신다는 것을 오히려 발견할 때가 많은 것을 느낄 줄 아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당신과 언제나 가까이 있다고 생각하는 자리가 오히려 먼 자리인 줄 아옵니다. 당신이 멀리 있으면서도 당신과 언제나 가까이 있다고 관념적으로 알고 신앙하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되겠사오니, 당신과 가까이 있으면 가까이 있는 것을, 멀리 있으면 멀리 있는 것을 자신이 확실히 느낄 줄 아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어야 되겠사옵니다.
아버지, 이 시간 저희에게 찾아오시어 당신의 내정적인 심정을 토로하여 주옵소서. 각양 각이한 사람들의 마음에 아버지의 심정을 체휼케 하시어서, 당신의 생명의 인연을 동기삼아 전진적인 생명의 인연을 자신의 생애노정에 남기고 갈 줄 아는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소수의 무리가 이 아침 이 자리에 참석하였사옵니다. 전국에 널려 있는 뭇 자녀들이 이 시간 서울을 향하여 정성들이고 있는 줄 알고 있사오니, 정성들이는 곳곳마다, 아버지여,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그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당신 앞에 몸부림치는 마음, 당신의 뜻을 염려하는 마음을 가졌거든, 그 자리에 친히 같이하시어서 천배 만배 더 많은 복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당신의 뜻을 위하여 책임지고 일선에서 수고하고 있는 당신의 딸들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그들과 그 지역을 책임진 아들과 하나되어 민족적 해원성사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고, 당신이 기뻐하실 수 있는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통일가의 식구들이 가야 할 운명의 길을 아버지 앞에 맡겼사오니, 아버지여, 맡아 주관해 주시옵소서. 다른 누가 저희들을 주관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사오니, 아버지께서 친히 주관하시어서 일체를 당신의 뜻과 더불어, 당신이 원하시는 소원과 더불어 일치되지 않음이 없는 것으로 남아질 수 있는 당신의 무리들이 되고, 당신의 백성들이 되고, 당신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의 아들딸이 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닌 것을 알고 있습니다. 지극히 어렵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아버지 앞에 정성에 정성을 가할 수 있는 저희들의 생활이 되고 충성과 효성을 다짐할 수 있는 나날이 되게끔, 존귀한 가치로 아버지와 함께 의논하고 아버지 앞에 돌려드릴 수 있는 생활을 하지 않고는 참다운 효성의 도리인 아들의 책임과 딸의 책임을 다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실히 깨닫게 하시어, 하루하루의 생활을 성별하여 아버지 앞에 온전히 바치기 위해 노력하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 저희들이 습관에 젖어 자기가 처한 환경에서 해탈하지 못하는 자리에 설 것이 아니라, 당신의 마음으로 그 환경을 소화시키고 역경을 헤쳐 나가 소화할 수 있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아침, 아버지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영계에 있는 수많은 영인들과 땅 위에 있는 수많은 종교인들이 하나되게 하시어, 당신이 원하시는 하나의 세계를 창건하는 데 상하가 협조하여 하나의 입체적인 세계를 이룰 수 있게끔, 아버지께서 축복하여 주시옵기를 재삼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이 자리에 찾아오시어 저희들과 같이 지내시옵고 이 날을 복되게 해주시옵고, 이날을 위해 눈물 흘리며 기도하는 무리들이 있으면 당신의 심정을 기울이시어 기억될 수 있는 이 날이 될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기를 재삼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모든 것을 아버지께서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참부모님의 거룩한 이름 받들어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여러분이 알다시피 오늘은 7월 4일입니다. 또 이 달 들어서 처음으로 맞는 안식일이고, 반 년을 중심삼고 볼 때, 첫출발을 하는 안식일도 되는 것입니다. 또 이날은 우리 교회에 있어서 지금부터 16년 전에 있었던, 선생님과 식구들이 잊을 수 없는, 이 민족과 기성교단에 대해 말할 수 없는 원망을 가질 수 있는 날이기도 합니다. 이런 것을 생각해 보면 벌써 많은 해가 거듭해 나온 것을 알게 됩니다. 그간 우리 교회에 있어서 여러가지 사정도 있었지만, 그 사정들 가운데서 우리 통일교회 식구로서는 그 날이 잊을 수 없는 슬픔의 한 날이 되었던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제 남은 6개월을 새로이 맞는 이 마당에서 1971년도 7월을 중심삼고 볼 때 1971년 7월이 있고 7월 4일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역사적 인연을 중심삼고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971년도가 있기 전에 1970년도가 있었고, 1970년도가 있기 전에 1960년대가 있었습니다. 혹은 50년대, 40년대, 30년대, 이렇게 거슬러올라가다 보면, 여기에 참석한 여러분들이 태어날 때, 혹은 태어나기 전 부모시대로 쭉 거슬러올라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이러한 역사시대를 회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역사시대에는 세계면 세계를 중심삼은 역사시대가 있는 것이고, 대한민국이면 대한민국을 중심삼은 역사시대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문중을 중심삼고 보면 김씨라든가, 박씨라든가 그 문중의 역사가 있는 것이고, 가정을 중심삼고 보면 그 가정의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길고 짧은 차이는 있지만, 역사는 반드시 있습니다. 가정 가운데에서도 개개인을 중심삼고 볼 때, 그 개개인에게도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게 되면 이 시간, 이 자리에 참석한 여러분에게도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과거를 지냈기 때문에, 그 과거는 여러분과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역사적 사연을 남겼고, 지금도 그것을 남기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의 역사적 사연과 현재의 여러분과는 분립된 것이 아니라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연결된 현재의 입장에서 자신을 다시 한 번 직시하면서 과거의 나는 이렇게 걸어왔으니 오늘의 나는 어떻게 걸어가야 되느냐 하는 것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내가 걸어온 과거의 역사가 참다운 역사였다면, 내가 걸어가야 할, 역사적 사실을 남겨야 할 현재의 입장에서도 자신이 참되어야 될 것입니다. 이 참된 것이 현재뿐만이 아니라 10년, 20년, 30년, 생애의 종말까지 참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길고 짧은 차이는 있을는지 모르지만 과거가 참이었으면 현재도 참이어야 되고 미래도 참이 되어야 됩니다.
내가 태어날 때서부터 내가 이 세상을 떠나는 그 때에까지 남겨 놓게 될 그 역사적 사실에 있어서, 대한민국이면 대한민국 앞에 어떠한 역사적 사실을 남겨 놓고 가느냐? 종족이면 종족 앞에, 혹은 후손이면 후손 앞에 어떠한 가치의 내용으로 남겨 놓고 가느냐? 이것은 타진해 보지 않더라도 어차피 역사에 남기고 갈 것은 틀림없는 것입니다. 좋은 역사를 남겼느냐 나쁜 역사를 남겼느냐, 선한 역사를 남기고 갔느냐 악한 역사를 남기고 갔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앞날이 없는 최후의 운명의 순간을 앞에 놓고 자기의 과거 역사를 생각해 보게 될 때, 미래가 없는 현재 입장에서 자기를 청산지어야 할 절박한 처지에서 과거를 회상하게 될 때, 자기가 민족 앞에 부끄러움을 가졌다면 그 입장이 어떠하겠습니까? 자기가 일생을 마치는 마당에서 자기의 부모면 부모, 친척이면 친척, 처자면 처자, 후손이면 후손들 앞에 후회할 수 있는 입장에 섰다면 그 입장이 어떠하겠습니까? 이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애가 어느 순간에 끝나게 될 때에, '내가 이 땅에 왔다가 남기고 가는 것이 슬픈 것이냐, 기쁜 것이냐' 하는 문제를 반드시 귀결짓고 가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잘났든 못났든 늙어서 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요, 젊어서 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기 때문에,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길고 짧은 역사를 중심삼고 슬픈 생애를 남기고 가느냐, 기쁜 생애를 남기고 가느냐 하는 두 가지 문제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과거와 더불어, 현재와 더불어 미래를 저울질해 나가면서 좋은 일, 나쁜 일을 가려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가려내는 순간이 언제냐 하면 현실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것을 가려내는 순간은 미래도 아니요, 과거도 아닌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현실. 오늘 하루가 선할 수 있는 역사를 만드는 데있어서 중심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살고 있는 이 한 시간이 과거의 역사를 결정지을 수 있는 순간으로 연결되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가 슬픈 역사로 남아지게 되면 현재의 입장도 슬픔에 휩싸일 것입니다. 또 현재의 입장이 슬픔의 침범을 당하게 될 때는 미래도 슬픔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문제를 두고 볼 때에, 슬픈 역사냐 기쁜 역사냐 하는 것이 어디서부터 결정되어져 나가느냐 하는 문제를 생각하면 할수록 심각한 문제인데, 그것을 결정짓는 내용이 오늘이라는 현실, 이 찰나의 순간들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렇게 볼 때 우주면 우주, 역사면 역사에는 어떠한 운명길이 있을 것입니다. 어떠한 목적을 향해 나가는 방향이 있을 것입니다. 또 그 방향에 수평선과 같은 하나의 선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선을 중심삼고 혹자는 80도, 혹자는 90도, 혹자는 100도, 혹자는 180도 등 각도를 달리하여 그 선에 일치하기 위해 그들은 방향을 갖추어 나갈 것입니다. 그 방향의 각도가 크면 클수록 그 사람의 선한 노정은 짧아질 것입니다.
한 선을 중심삼고 볼 때, 직선의 각도가 크면 클수록 선에 대한 거리는 짧아지고, 각도가 작으면 작을수록 반드시 그 거리는 길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생활이 하나님의 창조이상, 하나님의 창조원칙에 일치될 수 있느냐? 하나님이 바라시는 어떠한 선이 있다면 그 선의 방향을 중심삼고 몇 도의 자리를 갖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역사노정에 기쁠 수 있는 내용을 많이 남기느냐, 슬플 수 있는 내용을 많이 남기느냐 하는 문제를 생각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한 결정이 언제 되느냐? 과거도 아니요. 미래도 아닌 현재입니다. 그러면 현실 가운데서 자신이 가만히 있는데 선악이 결정되느냐?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가만히 있는데 선한 일이 결정되고 악한 일이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움직이는 가운데 선한 일과 악한 일이 결정됩니다. 이것은 틀림없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밥만 먹고 살고 자신과 관계없는 자리에서 그것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밥을 먹고 살고 있는 생활무대를 중심삼고 자신과 관계된 인연권 내에서 자신의 말과 행동, 마음 씀씀이에 따라서 선과 악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선과 악을 결정지을 수 있는 중요한 요건이 되는 것이 무엇이냐? 그것은 우리의 말과 행동과 느낌입니다. 마음을 중심삼고 감정문제에 들어가 내가 기분이 좋다든가, 나쁘다든가, 혹은 과거에 기분이 좋았다든가, 나빴다든가 하는 것을 가려 보게 되면 과거로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것이 언행심사(言行心事)라는 요건에 귀결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말을 해 놓고 행하지 못하게 되면 그것을 선이라 할 수 있느냐 할 때, 행하지 않은 만큼 악으로 귀결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을 해 놓고 행하게 되면 반드시 행한 만큼 선으로 귀결되는 것입니다. 행하는 데 있어서도 진실되게 했느냐, 의무적으로 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의무적으로 했다 하여도 거기에 진실을 가하면 가할수록, 그 가한 내용이 커지면 커질수록 비례적으로 선이 커진다는 것을 우리는 일상생활을 통해서 볼 때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건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선한 역사를 남겨야 할 필연적인 운명길을 가야 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길이라 할 때, 그 필연적인 운명을 결정지을 수 있는 요인은 몇 가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말과 행동과 마음쓰는 것과 느낌입니다. 여기에 귀결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상대의 말을 듣고 상대의 행동을 보고 상대가 '좋았다, 나빴다' 하고 평하게 됩니다. 그 사람이 자기에게 한 말을 놓고 좋은 사람이다 나쁜 사람이다, 흑은 행하는 데 있어서 참되게 행하느냐, 거짓되게 행하느냐의 문제를 중심삼고 그 사람이 선하냐, 악하냐 하는 것을 관찰하여 비판할 줄 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남은 비판할 줄 알면서 자기 자신에게는 어떻게 하느냐? 우리는 자기 자신에 있어서도 그와 같이 비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남을 대해서 비판할 수 있는 그런 기준, 그런 실력이 있으면 자기 자신을 중심삼고 말하였으면 확실히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말한 대로 얼마만큼 행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행하는 데 있어서는 마음도 두지 않고 자기는 상관하지 않는 자리에서 행해서는 안 됩니다. 절대적인 상관을 갖고 그야말로 온갖 정성을 다 기울여서 행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선악이 결정되는 것을 볼 때, 여러분 자신이 움직이는 데 있어서도 역시 얼마만큼 정성을 다해 자기가 말한 대로 실천했느냐 하는 문제가 여러분 일생 동안의 선악의 문제를 좌우시키는 것이 된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기에는 내가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감각적인 문제가 관계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보고 듣고 느끼는 데 있어서는 내가 말하고 내가 행동할 수 있는 기준을 세우기 위해서, 인격적인 기준을 완결시키기 위해서, 혹은 보강시키기 위해서 보고 듣고 느껴야 됩니다. 만일 보고 듣고 느끼는 감각이 자신에게 마이너스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 그것은 절대적으로 자신을 악 앞에 굴복시키는 것이요, 그 입장은 악 앞에 굴복하는 굴욕적인 입장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만일에 그것을 조정하지 못할 경우는 나도 악한 말을 하는 상대방과 같이 되는 것이요, 상대방이 보고 듣고 느끼고 행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입장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살아가면서 남긴 역사는 반드시 슬픈 역사가 될 것이고, 죄악된 역사가 될 것이 틀림없는 것입니다. 이걸 생각하게 될 때, 그러한 기준에 서지 않기 위해서는 단연코 이렇게 되는 것을 방지 하고 그것과 절연하여 좋고 나쁜 것을 가려 가지고 자기 스스로의 발전의 재료로 삼아야 됩니다. 나쁜 사람이 있으면 나는 저와 같이 나쁜 사람은 안되겠다 하고, 좋은 사람이 있으면 나도 저와 같이 좋은 사람이 되겠다고 노력하는 여러분이 되지 않고는 여러분 생애에 선한 결과를 남길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생애를 통해서 선한 결과를 남기지 못할 경우에 여러분은 대한민국이면 대한민국 앞에 빚진 사람이 되는 것이요, 가정이면 가정 앞에 빚진 사람이 되는 것이요, 남편이면 남편, 아내면 아내, 혹은 자녀 앞에 빚진 사람이 아니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생각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것을 결정지을 수 있고 이러한 생활의 전모를 좌우시킬 수 있는 기준이 되는 때가 어느때냐 하면, 바로 오늘이요 현실이라는 점을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 현실은 여러분을 사방에다 줄로 걸어 놓고 잡아당기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이 사방의 줄을 똑같이 잡아당기면 언제든지 중앙에서 중심을 잡을 수 있지만, 한편으로 잡아당기는 힘이 커지면 중심이 기울어지는 것입니다. 그 중심이 기울어졌을 때 자기 혼자 바로잡을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것을 자기 혼자 바로잡기는 힘든 것입니다. 중심이 기울어졌을 때 중심을 자기 혼자 바로잡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바로잡아 줄 수 있는 길이 있든가, 바로잡아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어 가지고 자기를 부축해 주는 입장에 서게 되면 바로잡을 수 있으되, 그렇지 않고 기울어진 입장에서 자기 스스로 바로잡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여러분이 신앙생활에서 잘 느껴야 됩니다. 더우기 우리는 아무런 목적 없이 사는 것이 아니고, 큰 목적을 중심삼고 신앙생활을 하는 신앙자이기 때문에 그런 것을 더 많이 느껴야 된다는 것입니다. 까딱 잘못했다가 중심이 기울어지기 시작하면 아무리 자기가 노력을 해도 바로잡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한번 잘못해서 중심이 기울어지면 잘못한 것의 몇십 배, 몇백 배, 몇천 배로 노력을 해도 바로잡기 힘든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심각한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면 많이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도 그렇지만 세상사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만일에 세상에서 무엇인가 한 가지가 틀려지기 시작했다 하면 그것을 고치기 위해서는 틀려지기 전보다, 그것을 시작하기 전보다 몇십 배 더 준비를 하고 그 이상의 노력을 투입해도 정상적 기준에까지 복귀시켜 놓기는 힘들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게 될 때에, 이 중심적 기준을 상실하지 않고 언제나 수직이면 수직에 딱 서서 중심이 기울어지지 않도록 현재의 입장에서 어떻게 유지시켜 나가느냐 하는 문제가 가장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중심이 기울어지는 것은 내가 대판 싸움을 하여 상대방에게 망신당했다고 해서 기울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중심이 기울어지기 시작하는 것은 한가지 기분 나쁜 일로 인한 감정에서부터 기울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어떤 감정을 가지고 상대를 보게 되면, 자기를 좋은 면에서 자극시켜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반대적인 면에서 자기에게 좋지 못한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을 보게 될 때는, 그 느낌 하나하나가 좋지 않게 느껴지고 자기의 기준이 틀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고 느끼는 데 있어서 기준이 틀려지게 되는 거예요.
그러므로 상대에 대해서 잘못 느끼고 말을 잘못했다가는 아차 하는 순간에 꺾여 나가는 때가 많습니다. 하나의 작은 감정 문제가, 하나의 느낌이 여러분의 신앙노정이라든가 여러분의 정상적인 인격생활에 있어서 선악의 문제를 좌우할 수 있는 중요한 요인이 될 때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잘못 봄으로 말미암아 내 중심이 꺾여 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잘못 느낌으로 말미암아 내 중심이 꺾여 나갈 수 있다는 거예요. 내가 잘못 느끼고 잘못 말함으로 말미암아 내 중심이 꺾여 나갈 수 있다는 거예요. 자신이 말하고 잘못 행동했을 때는 결정적으로 악한 결과에 부딪친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신앙생활에서 많이 느꼈을 것입니다. 신앙생활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많이 느끼고 있는 바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현실에서 언제나 문제삼아야 할 것은 무엇이냐 하면 '느낌을 바로잡아라, 느낌을 다스려라, 느낌을 잘 보호해라' 하는 것입니다. 내가 감정적으로 느끼는 모든 느낌에 대해서 각별한 마음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보고 느끼고 행동하고 말하는 데 있어서 올바르게 해야 되겠습니다. 이렇게 이렇게 하면 플러스요, 저렇게 저렇게 하면 마이너스라는 확실한 경계선을 가려 가지고 이 이상의 한계선을 넘으면 안 된다는 기준을 완전히 결정지어야 될 것입니다. 이 경계선을 넘어선 안 됩니다. 만일 그 경계선을 넘는 날에는 지금까지 닦았던 공적인 터전이 일시에 파탄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서 많이 느꼈으리라 봅니다.
여러분은 저울추와 마찬가지입니다. 조금만 많으면 올라가고, 조금만 적으면 내려간다는 거예요. 그러면 저울추가 어느때 정지하느냐, 저울추를 어떻게 완전히 정지시키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완전히 정지시키기 위해서, 저울눈을 잘 맞추어 저울추가 수평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오르락내리락해야 하는 거예요.
그 수평지점은 하나밖에 없는 것입니다. 수평지점은 하나인데, 그것은 머리카락 굵기보다도 작고, 수로써도 표시할 수 없으리만큼 작은 자리가 아니겠느냐는 거예요. 그야말로 숨 한번 쉬는 시간이 길다는 거예요. 숨을 내쉬고 들이쉬는 시간에 세계의 수평점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한다는 거예요. 그와 같이 지극히 순간적인, 몇십 분의 일초라는 기준을 중심삼고 여러분 생애의 방향이 왔다갔다한다는 것입니다. 혹은 어떠한 한계선을 중심삼고 왔다갔다한다는 거예요.
여러분이 배를 타도 그렇다는 거예요. 나침반이 가리키는 방향을 보고 그 방향에 맞추어 가야 하는데, 나침반이 조그만 흔들려도 왔다갔다하는 거예요. 그러니 나침반이 직행길을 가리키는 것 같지만 진짜 직행길은 못 가리킨다는 거예요. 그와 마찬가지의 놀음이 여러분이 생활하는 이 순간, 이 시간에 그려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악이냐 선이냐 하는 문제가 여러분이 생활하는 현재의 과정에서 가려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순간적으로 잘못하게 되면 과거가 몽땅 달아나는 것입니다. 잘못하게 되면 현실이 몽땅 부정되고, 미래가 완전히 절벽으로 막혀 버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어느 때에 결정되느냐 하면 과거도 아니요 미래도 아닙니다. 바로 현재에서 결정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그러한 기준은 각자가 다 다릅니다. 그것은 천성이 각자 다르니만큼 여러분이 느끼는 기준도 각자가 다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마음은 이래야 좋더라. 이럴 때는 기분 나쁘더라' 하는 것을 느껴 가지고 될 수 있으면 마음이 좋더라 하는 그 길을 향하여 개척해야 됩니다.' 기분 나쁘더라 하는 일은 죽어도 못 한다. '이걸 하는 시간은 죽는 시간이다' 해야 합니다. 사실 그것을 하는 시간은 죽는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람이 죽을 때에도 병이 나자마자 갑자기 죽는 것이 아닙니다. 병이 났는지 안 났는지 모르는 자리에서 죽음은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알 수 없는 자리가 죽음의 기원이라는 거예요. 죽는 시간까지는 시간적 차이가 있을는지 모르지만, 죽음의 기원이라는 것은 죽는지 마는지, 병이 났는지 안 났는지 모르는 이러한 찰나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여러분 각자의 천성을 중심삼고 '나는 이래야 마음이 편하다' 하는 기준이 있을 거예요. 그 기준대로 살아야 됩니다.
하나의 상봉을 향하여 올라가는 길이 사방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러분 개인이 가야 할 목적지는 하나이지만 여러분 각자의 천성이 다르니만큼 가는 방향은 각자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정도(正道)를 가기 위해서는 '이런 길을 가서는 안 된다' 하는 기준이 있어야 됩니다.
남자면 남자로서, 여자면 여자로서, 가정에 있어서 남편이면 남편으로서, 아내면 아내로서, 아버지면 아버지로서, 어머니면 어머니로서, 아들이면 아들로서, 딸이면 딸로서 혹은 친구면 친구로서의 한계선이 있는 것입니다. 각자의 성격이 다르니만큼 '아버지면 아버지, 어머니면 어머니에 대해서 이렇게 해야 한다' 하는 한계선 이상 넘어서는 안 됩니다. 그 한계선을 넘게 될 때는 반드시 악이 뿌리를 박게 되는 것입니다.
악이 한번 뿌리를 박게 되면 혼자 망하는 법이 없습니다. 항상 걸고서 둘이 같이 망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반드시 상대를 물고 늘어져 둘이 망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담 해와가 타락하면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악은 혼자 망하겠다는 법이 없고 반드시 물고 넘어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선은 혼자 망하려고 합니다. 사랑을 중심삼고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서 내가 죽더라도 너는 살아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악과는 다르다는 거예요. 부자관계에 있어서 악으로 출발했다면 아버지와 자식이 악해짐과 동시에 부자관계 자체가 악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은 일상생활에 있어서 확실한 규정을 내려 놓아야 합니다.
신앙생활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이면 하나님을 중심삼고 '나는 더 이상 다른 길을 안 간다. 이 한계선을 안 넘겠다' 하는 기준을 세워 놓아야 됩니다. 그것은 절대적입니다. 하늘편인 오른쪽으로는 내가 마음놓고 가지만, 다른 쪽을 갈 때는 어떤 때보다 심각한 자리에서 사력을 다해 분석 비판하여 이것을 타진해 가지고 악은 악대로 처단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러려면 한계 선까지 나가야 하는 어떤 어려운 문제도 극복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악 앞에 휘말려 들어가지 않겠다는 자신의 입장을 결정지을 수 있는 확고한 생애의 터전을 닦아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자신의 일생은 선한 생애로써 남아지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대해 가지고 하나님은 아버지의 입장에 계시고 우리는 아들딸의 입장에 있다면, '나는 하나님의 아들딸로서 이 이상의 길만 가지 그 이하의 길은 안 간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왼쪽으로는 절대 안 간다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무엇이 있어야 됩니다. 선(線)이 있어야 되고 각도가 있어야 됩니다. 목적을 향하여 전진하는 만큼 그 방향과 어떻게 일치되게 하고 그 각도와 차이를 어떻게 작게 하느냐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그러한 문제를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언제냐 하면 과거도 아니요, 미래도 아니요, 현실입니다.
그러면 그 기준 앞에 어떠한 태도가 필요하겠느냐? 여기서 필요한 것은 솔직함입니다. 솔직한 신앙자. 솔직하라는 것입니다. '나는 이렇습니다. 마음은 이렇습니다. 아버지, 나도 솔직하겠사오니 당신도 내게 솔직하게 대해 주십시오. 당신은 정의에 입각한 자리에서 얼마나 솔직한 마음을 가지고 나를 대해 주셨습니까? 내가 부정의 마음을 가진 입장에 있기 때문에 당신도 부정의 마음을 가지고 나를 대하시겠지만, 이제 마음에 있는 그대로를 가지고 대하려 하니 정의의 판단을 내려 나를 가려 주시옵소서'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심정은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다년간 거쳐오면서 절대로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기가 잘못했으면 잘못했다고 해야 합니다. 자기가 열만큼 잘못했는데도 '아버지, 저는 여덟만큼 잘못했습니다' 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열만큼 잘못한 것을 바라보고 계시는 하나님 앞에 나 자신이 솔직해야 됩니다. 그 하나님이 자신이 잘못한 것을 열만큼으로 바라보고 있어도 자신은 백만큼 죄를 범한 것같이 고통을 느끼면서 '저는 당신 앞에 용납받지 못할 사람이니 나를 멀리 하시옵소서'라고 하는 입장에 서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하나님과 얼마든지 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열만큼 잘못했는데도 자신이 너무 솔직해서 백만큼 고통을 느끼면서 '하나님을 대할 면목이 없습니다'라고 하며 도망가려고 한다면, 도망가려고 해도 도망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러한 입장에 서게 되면 하나님의 긍휼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않아요?
하나님은 열만큼의 죄로 바라보시는데 자기 자신은 백만큼의 죄의식을 느껴 가지고 고통을 받게 될 때는, 그것으로 말미암아 은혜를 받을 수 있다는 거라구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는 변명이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솔직히 바라보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는 '나는 이렇습니다'라고 하며 솔직해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는 것을 느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잘못해 놓고도 이러고저러고 변명이 많아요. 그건 솔직하지 않은 거예요. 솔직하다는 기준이 자기가 정한 기준이냐, 공적으로 정해져 있는 기준이냐 하는 문제를 볼 때, 이러고저러고 변명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마음을 중심삼고 그 기준을 정해 가지고 이러고저러고하는 것이지, 공적 기준을 중심삼고 이러고저러고하지 않는 것입니다. 공적 기준을 중심삼고 이러고저러고하는 사람은 남아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여러분이 이러한 생활태도에 어긋나게 될 때는 여러분이 상상도 할 수 없는 결과에 부딪치게 된다는 것을 여러분 자신이 잘 예측할 것입니다. 더구나 심각한 영적 체험을 한 사람들은 자신이 말 한마디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일주일 이상 회개해야 탕감이 되는 경우를 많이 느꼈을 것입니다. 일년 이상 회개해야 탕감이 가능한 것도 있다는 것입니다. 말이 그만큼 무서운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친구간에 있어서나, 부자관계에 있어서나, 혹은 부부관계에 있어서, 자식을 대하는 데 있어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대하는 사람 전부가 자기 본성적 기준에 의해서 각각 방향을 달리하고 있으면 그 방향에 있어서 나는 이 이상의 기준을 넘지 않는다는 기준을 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엄벙덤벙 휩쓸려 가게 되면 이것도 아니요, 저것도 아니요, 선도 아니요, 악도 아니라는 거예요. 그것은 하나님이 필요로 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차든지 뜨겁든지 둘 중의 하나가 되어야지 미지근해 가지고는 안 되는 거예요. 그러기에 악한 것을 행하고, 그것을 알고 뉘우치는 사람은 선한 길로 돌아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악을 행하고 나쁜 자리에 있으면서도 자기를 변명하는 사람은 언제나 그 자리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솔직한 생활이 필요합니다. 솔직해야 됩니다, 솔직한 신앙 생활이 절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생활에서도 솔직해야 됩니다. 그런데 변명이 많다는 거예요. 요즈음 전도하러 임지에 나간 전도대원들 중에 전도하다 말고 돌아온 전도대원들이 있는데, 그들을 보고 식구들이 '어떻게 돌아왔소' 하면 이러고저러고 변명이 많다는 거예요.
통일교회면 통일교회 전체가 움직이는 활동을 중심삼고 가야 할 복귀의 노정은 개인 혼자 못 가는 것입니다. 개인은 반드시 가정과 합하여 가야 합니다. 이것이 천국 들어가는 길입니다. 가정도 가정 자체로써는 못 갑니다. 가정은 반드시 교회와 합하여 가지고 가야 합니다. 또 교회는 나라와 더불어 가야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공식입니다.
그러면 보다 솔직한 길이 어떠한 길이냐? 보다 큰 것 앞에 솔직해야 합니다. 종족보다 큰 국가 앞에 솔직해야 되기 때문에 종족관이 있더라도 종족관만을 내세워서는 안 됩니다. 우리 종족관을 중심삼고 이렇게 해야 된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종족관은 보다 큰 국가관 앞에 굴복을 당하고 흡수를 당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국가가 종족에게 제재를 가하더라도 종족은 제재당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것이 타당한 공식이라는 거예요. 보다 큰 문제를 중심삼고 작은 문제는 흡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원칙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의 관(觀)이 아무리 차원 높더라도 개인의 관보다는 가정의 관이 차원 높습니다. 가정의 관보다는 종족의 관, 민족의 관, 국가의 관이 더 차원 높습니다. 더 나아가 세계의 관이 더 차원 높습니다.
대한민국이 하늘나라를 이루었다 하더라도 대한민국만의 하늘나라 가지고는 안 됩니다. 세계적인 하늘나라를 이루어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계의 수많은 민족이 가진 민족감정을 초월할 수 있는 국민들이 되어야 됩니다. 여기에는 이의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보다 큰 관(觀)을 가지고, 거기에 일치될 수 있는 내용을 중심삼고 언제 어느 환경에서든 개의치 않고 보조를 맞출 수 있는 사람은 반드시 선한 사람으로 남아질 것입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반드시 가다가 중단될 것입니다.
우리 통일교회가 가는 길은 개인보다도 가정, 가정보다도 종족…. 개인을 희생시켜서 가정을 찾아야 되고, 가정을 희생시켜서 종족을 찾아야 되고, 종족을 희생시켜서 민족을 찾아야 되고, 민족을 희생시켜서 국가를 찾아야 되고, 국가를 희생시켜서 세계를 찾아야 됩니다. 이렇게 원리적으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나라를 위해서 충성을 다한 사람이 '내가 이만하면 세계를 대해 당당하지 않느냐'라고 말할는지 모르지만, 그 나라를 중심삼고 대한민국이면 대한민국에서는 당당할는지 모르지만 세계를 대해서는 당당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세계 앞에 당당하게 되면 그 다음에는 세계를 중심삼고 하나님 앞에 도달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중심삼고 볼 때, 세계와 하나님은 하나입니다. 뜻 중심삼고는 하나님과 세계는 하나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 국가는 언제나 세계와 하나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되도록 만들어 나가는 것이 오늘날 통일교회가 가야 할 방향입니다. 이렇게 통일교회가 가야 할 방향이 제시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나 자신은 법도와 기준 앞에 어떤 생활을 하고 있느냐? 어떤 잘못을 하게 되면 여러분 자신이 잘못한 것을 압니다. 거기에는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여러분의 양심이 이미 공판을 해 가지고 결정지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잘 안다는 거예요. 잘못한 것이 있으면 마음은 반드시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거예요. 위축감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누가 설명하지 않더라도 자신이 잘못한 것을 다 안다는 겁니다. 그런데도 또 잘못하게 되면 날벼락을 맞는다는 거예요.
잘못한 것을 알면 겸손해야 합니다. 부끄러운 줄 알고 '당연합니다'라고 자기의 잘못을 시인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할 텐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돼 가지고 이렇다고 변명하려고 하고 철면피가 되려고 하는 사람은 며칠 못 가는 거예요. 가다 보면 자신과 하등의 상관없는 종착점에 이르게 되어, 이별하지 말라고 해도 이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별하고 난 후에는 만날래야 만날 수 없다는 거예요. 자기의 잘못을 변명함으로 말미암아 갈라졌던 사람은 그 변명 조건의 몇백 배를 노력해도 변명하기 이전의 자리를 다시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건 왜냐? 선과 악은 등위(等位)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엄연히 등위가 다른 것입니다. 선한 자리와 악한 자리는 엄연히 다릅니다. 자기가 잘못한 것을 알게 되면, 선한 사람 앞에서 자신을 가지고 당당하게 '내가 너와 같지?'라고 주장하지 못하고 자연히 머리 숙인다는 겁니다. 그건 왜 그러냐? 악의 보응을 받아야 할 사람의 등위는 다른 자리에 있기 때문에, 즉 악의 침입권내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잘못하면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것은 불가피하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철면피한 사람도 양심으로 그런 것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이 느낌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에 영계에 가서도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이 느낌이 없다면, 이런 것을 느끼지 못했다면 영계에 가서 고통은 무슨 고통, 고통이 없다는 거예요. 그러나 느낌이 있기 때문에 저 나라에 가서도 고통이 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신앙생활을 통해서 잘 알아야 됩니다.
신앙자들은, 진실한 사람들은, 참되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은 말 한마디 잘못하게 되면 안다는 거예요. 벌써 얼굴 빛이 달라집니다. 눈동자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대번에 안다는 거예요. 그런 사람들 앞에서 잘못을 했다가는 자기가 아무리 세상에서 큰소리를 치고 살았다 하더라도 도대체 무엇인지 모르게 자기 자신이 거북해진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아무 생각도안 하고 있는데 자신은 그 사람 앞에 가까와지면 가까와질수록 거북해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왜 그러냐? 선과 악이 처해 있는 등위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걸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그런 거북한 자리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에 대해 솔직히 직고해야 됩니다. '나는 본래 이러이러한 사람입니다'라고 솔직히 통고해 가지고 '나는 이와 같이 못된 사람이지만 당신은 선한 사람이니, 나 같은 사람을 동정하여 갈 길을 모색할 수 있는 방안이 있으면 나에게 친절을 베풀어 주시옵소서'라고 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기도하는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게 되면 자유스러운 환경이 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냥 그대로 버티고 서 있게 되면 아무리 자기가 한다 하더라도 마음으로는 수습되지 않습니다. 환경을 수습하지 못하고 나간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러이러한 사람으로서 당신과 관계를 맺고 싶습니다. 그러니 동정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하려면 솔직히 직고해야 됩니다. 그것이 기도입니다, 기도.
기도는 무엇이냐? 기도는 내가 가는 방향이 틀렸을 때 올바른 방향으로 가게 이끌어 주는 것입니다. 이런 놀음이…. 여러분의 생활을 보면 말 한마디, 행동 하나, 느낌 하나에 의해서 엎치락뒤치락하고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이 이러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 자신이 오늘날 현실 가운데에서, 숨쉬며 살고 있는 이 순간에 이렇게 저울질하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느껴야 되겠습니다.
그 저울눈을 맞추는 데 있어서는 솔직해야 쉽니다. 이것(저울대)이 평형(平衡)을 이루려면 저울끈을 굵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주 가늘게 해야 됩니다. 그리고 저울끈을 삐딱하게 놓지 말라는 거예요. 그렇게 하면 야마시(속임수)라는 거예요. 딱 맞게 해야 합니다. 정확한 눈금을 가리킬 수 있게끔 솔직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얼마나 솔직하게 했느냐? 모든 일은 이 문제와 관계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보다 솔직해야 합니다. 개인보다도 가정에 대해서 솔직해야 합니다. 가정보다도 교회에 대해서 솔직해야 되고, 교회보다도 국가에 대해서 솔직해야 되고, 국가보다도 세계에 대해서 솔직해야 되고, 세계보다도 하나님 앞에 솔직해야 합니다. 최후에는 하나님 앞에까지 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까지 가는 데 있어서 개인만 솔직하면 된다는 사람은 안 됩니다. '나는 양심적인 생활을 했으니 어디 가든지 당당하다' 할 수 없습니다. 그 양심적으로 생활했다는 것은 자기주변을 중심삼은 양심적인 생활이기 때문에 그런 생활을 아무리 많이 했다 하더라도 나라와 세계 앞에 플러스를 남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나라와 세계 앞에 빚을 지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성인 같은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하나의 법도, 하나의 천륜이 있으면 그 천륜의 방향과 한계선을 중심삼고 언제나 자기의 마음을 저울질하면서 산 사람입니다. 즉, 세계를 걸어 놓고, 혹은 하나님을 걸어 놓고 자기의 마음을 저울질하는 가운데 가책받는 모든 일체를 제거시키고 오히려 남이 느끼지 못하는 행복을 느끼고 가책을 느끼면서 산 사람들이 성인입니다. 그래서 성인은 세계적인 인물입니다. 자기 나라나 자기 민족만을 위해서 산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아요? 세계적인 사상으로 세계적인 생활방법을 가려 가지고 산 사람들이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남는 것입니다. 때문에 성인은 사상적으로, 정신적으로 주체의 자리에서 지금까지 세계의 역사와 전통을 키워 나오고 있지 않느냐는 거예요. 그것은 사실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솔직해야 합니다. 솔직하지 못한 두 사람이 있으면 싸움이 벌어집니다. 싸움이 안 벌어질래야 안 벌어질 수 없습니다. 솔직해야 될 텐데, 솔직하지 못하면 반드시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심판은 누가 하느냐? 솔직하지 못한 두 사람, 쏙닥쏙닥하며 좋아하던 그 두 사람을 누가 심판하느냐 하면, 난데없는 제삼자가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괜히 멀리하고 그 사람이 있는 것을 꺼려해 가지고 둘이만 쏙닥쏙닥하더라도 결국 말하지 않고 관계맺지 않았던 사람이 심판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런 일이 많지요? 괜히 기분 나쁘게 해 가지고 누구하고 싸우게 될 때 누가 판단하느냐면 제삼자가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 벌어 진다는 거예요. 이제 보라구요. 여러분들에게도 그와 같은 관계가 벌어져요.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서로서로 이야기를 하는데, 절대적인 원칙을 따라서 솔직하게 이야기하지 않으면 솔직한 사람이 심판하는 것입니다. 그 자리가 하나님의 자리입니다. 하나님이 그러한 자리에 계시다는 겁니다. 여러분이 솔직함의 주체되시는 하나님 앞에서 공개적으로 말하지 못하고 숨어서 뭐가 어쩌고저쩌고 쏙닥쏙닥하면서 행동하게 되면 누구한테 공판을 받느냐 하면 하나님한테 받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예요. 제삼자가 심판자의 자리에서 나를 심판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그렇잖아요? 죄를 지었으면 여기에는 증인이 필요하지요? 그렇지요. 죄지은 것을 무엇으로 결정하느냐 하면, 물론 당사자의 말 가지고도 결정하겠지만 증인의 말 가지고 합니다. 그 증인의 자리가 하나님의 자리라는 것입니다. 벌써 그 두 사람이 얘기하게 되면, 그 말이 솔직한 것인지, 솔직하지 않은 것인지 알 수 있다는 거예요. 솔직하다는 것은 참과 통하는 거라구요. 솔직하다는 말은 똑바로 인도해 간다는 말이라구요. 그렇지 않아요? 곧게 거느려 간다는 거라구요. 곧게 간다는 그 기준 앞에서는…. 벌써 쑥덕쑥덕 공론하게 되면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상대적인 입장에 서는 것이 아니라 반대적인 입장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 각도에 비례한 공판기준을 누가 세우느냐? 자동적으로 세워지게 된다는 거예요. 그리하여 심판은 누가 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둘이 싸울 때 제삼자가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두 사람이 싸우면 서로 옳다고 합니다. 그 판단을 누가 하느냐면 제삼자가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몸과 마음을 중심삼고 언제나 양심적인 생활을 하고 사는 데 있어서는 나 혼자가 아닙니다. 몸과 마음을 중심삼고 사는 데는 반드시 제삼자가 있습니다. 법이라든가, 혹은 사회 풍습이라든가, 혹은 도덕관이라든가 하는 그 어떠한 기준이 있습니다. 그 기준이 바로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는 저울대라는 거예요. 여기에 일치되지 않게 될 때는 반드시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생활권내에서 살고 있는 우리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의 인생은 지극히 심각한 생활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기가 아무리 10년 동안 정성을 다했어도, 한번 잘못하게 되면 10년의 정성이 몽땅 뭉텅 끊겨져 나간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야기 하나 하지요. 감옥생활을 오래 해보면 제일 그리운 것이 밥입니다. 요즘은 그렇지 않지만, 옛날에 군대생활하던 사람들도 가장 그리운 것이 밥이라고 하지 않아요? 감옥에서는 자기 어머니 아버지보다도 자기 아내보다도 자기 자식보다도 밥이 더 그립다는 거예요. 밥을 먹고 나서 배가 불러야 그리워지지 배가 고프게 되면 그리운 것이 다 없어져요.
배고플 때에는 밥이 만능권을 가지고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밥의 힘이 얼마나 위대하냐 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그런 데 가 봐야 아는 거예요. 배가 너무 고파 의식을 잃을 때가 있어요. 옆에서 밥을 먹게 되면 밥덩이만 보이지 사람은 안 보일 때가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잘 이해되지 않을 거예요. 체험 안 해본 사람은 모를 것입니다. 밥 가진 사람이 시퍼렇게 살아서 눈을 뜨고 있는데도 사람은 안 보이고 밥덩이만 보인다는 거예요. 사람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기 젓가락이 남의 밥으로 가는 거라구요. 가다가 주인이 있는 것을 느낄 때의 그 심정이 얼마나 기가 막히냐 하는 것은 여러분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 고통을 밥을 그리워하는 것보다 더 크게 느끼지 못하면 언제나 그 놀음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다가는 전체 앞에 비판받기 마련이라구요. 만일에 자기가 젓가락을 들고 갔다가 주인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 내심적으로 느끼게 되는 그 치욕, 그 비참함이라는 것은 밥 억천만 덩이를 주고도 느끼지 못하는 기가 막힌 것이기 때문에 다시 그것을 하라고 해도 못 하는 것입니다.
이걸 보면 모든 일의 악과 선에 있어서 탕감하는 데는 그 최고의 경지, 한 골수에 들어가지 않고는 그 일을 완전히 끊고 돌아설 수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선생님은 그런 것을 느껴 봤기 때문에 그러한 처지에 있는 사람을 보게 되면 기가 막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차입이 들어오면 잘 챙겼다 그 사람들에게 갖다 주었습니다. 그래야 마음이 편안하지, 그러지 않고는 그 사람을 볼 적마다 못 견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행동하면 마음으로 그만큼 시원하다는 거예요. 비참함을 느낀 대가로 물질적 조건을 중심삼고 몇십 배 탕감했다는 입장에 서지 않고는 마음이 해방 안 되더라는 거예요. 그러지 않고 그 사람들을 보게 되면 마음의 구속을 벗어날 도리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이 구속에서 벗어나려면 몇십 배 탕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물질적으로 시간적으로 그것을 탕감하기에는 지루한 시간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어떤 때는 말 한마디 잘못한 것 때문에 일주일뿐만 아니라 몇 개월 동안 가려서 넘어가야 할 때도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생활 속에서 그런 것을 많이 느꼈을 것입니다.
동료지간이나 사제지간에 있어서, 혹은 가정에 있어서 나와 관계맺은 사람들 가운데 변명하는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나 보세요. 여러분들은 자기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누구도 어떻고 어떻다고 하면서 다른 사람을 끌고 들어가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누구도 그랬는데, 동생도 그랬는데 왜 나만 나무라냐고 합니다. 이것은 거짓이라는 거예요. 자기가 잘못했으면 솔직해야 할 텐데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을 물고 들어가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타락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상 생활에서 솔직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더더욱 솔직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오늘날 통일교회면 통일교회에 있어서 선생님이 여러분을 중심삼고 전체를 움직여 나오는 데도 솔직해야 합니다. 선생님이 여러분에게 가르쳐 주는 데 있어서도 최고로 솔직한 자리에서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그것은 틀림없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을 이용하기 위해서 가르친다면 선생님 양심상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솔직하게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만일 선생님이 이렇게 가르쳐 줬는데도 불구하고 여러분이 행동을 못하게 될 때는, 그 책임은 선생님한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에게 있는 것입니다. 윗사람이 어떠한 것을 주면 아랫사람은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나쁜 것일 경우에는 항의할 수도 있겠지만, 좋은 것을 줄 경우에는 감사히 받아야 합니다. 복귀도상에 있어서 개인복귀 노정보다도 가정복귀 노정을 가르쳐 주겠다 할 때는 감사하며 받아야 합니다. 가정보다도 종족, 종족 보다도 민족, 민족보다도 국가복귀 노정을 가르쳐 주겠다 할 때는 감사하며 받아야 합니다. 대한민국을 위해 충신되라고 그 길을 가르쳐 줄 때는 무엇보다도 감사해야 합니다. 또 세계를 위해서, 하나님 앞에 사랑받을 수 있는 길을 가라고 가르쳐 줄 때는 무엇보다도 귀한 것이기 때문에 감사해야 합니다.
세계를 위하여 충성을 다하고 하나님 앞에 있어서 충성과 책임을 다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그 나라 앞에 떳떳한 것이요, 그 민족 앞에 떳떳한 것이요, 그 가정의 어머니 아버지 앞에, 그 누구에게든지 떳떳한 것입니다. 거울 앞에 서서 자기 자신을 바라볼 때도 당당하다는 것입니다. 솔직한 양심을 가지고 자기 자신을 찬양할 수 있다는 거예요.
'이만했으면 더 이상 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봐도 이 이상 할 수 없습니다. 나는 죽기까지 했습니다. 이 땅에 와서 이 이상 할 수 없습니다. 내 있는 기력을 다하고 정성을 다했습니다. 단, 한 가지 못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이 민족과 국가와 세계를 나와 같이 하나님 앞에 못 나가게 한 것입니다. 그것이 죄라면 죄지 나로서는 할 수 있는 것은 다했습니다'라고 할 수 있는 자리에서 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반드시 역사에 무엇인가를 남기고 갈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 당시의 환경에서 드러나지 않는 사람으로서 간다 하더라도 그 사람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세계가 그 사람의 사상을 이어받게 한다든가, 그의 후손을 통해서라도 반드시 그 사람의 가치를 열매맺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는 그러한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열매가 안 되면, 열매가 못 되면 종자라도 되게 하는 것입니다. 둘 중의 하나는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열매로서 기쁨을 맞이할 수 있는 자리에 못서더라도 그가 하나의 씨로 뿌려지면, 후대에는 반드시 그 결실이 수확되는 것입니다. 거두겠다고 노력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그 사람의 전통과 사상, 그 사람의 선의 실적은 부정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그것을 부정하시는 하나님이라면 하나님의 뜻은 이뤄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터전을 가꿔 주고 키워 주고 남겨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닐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계시는 한 그런 사람의 전통을 이어받은 후손이나 그런 사람의 사상을 가진 사람은 반드시 이 세계를 지배할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솔직한 신앙인의 자세를 누구부터 길러 줄 것이냐? 좋은 사람부터 길러 주자! 그거 좋다는 거예요. 그러면 가정을 중심삼고 볼 때 제일 좋은 사람이 누구냐 하면, 어머니 아버지입니다. 그 다음에 누구냐? 형님 누나입니다. 그 다음은 누구냐? 자기 부인이요. 자기 아들딸입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나 자기가 좋은 사람끼리 좋아하면, 그것은 전체가 좋은 것은 될는지 모르지만 자랑할 수 있는 선은 못 되는 것입니다. 그걸 누구한테 자랑하겠습니까? 누구한테, 자기 집안 식구들을 좋아하는 것은 으례 다 하기 마련이라구요. 안 그래요? 어머니 아버지 좋아하는 것도 자랑할 바가 못 되는 거라구요. 형제지간에 좋아하는 것은 자랑할 바가 못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드러내 가지고 '아! 나는 부모 형제를 이렇게 좋아했으니까 세계적이다'라고 해도 세계적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가정적인 것입니다. 그가 아무리 되어 보았자 효자밖에 못 되는 것입니다. 잘했다 하더라도…. 그건 특별한 것이 아니라 으례 그렇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선은 드러나는 것입니다. 높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높이 드러나는 만큼 높이 자랑할 수 있는 내용을 가지라는 거예요. 선이 높아지기 위해서는 그냥 그대로 좋을 수 있는 환경에서는 안 됩니다. 그 반대의 환경이어야 됩니다. 열만한 선을 이루는 데 있어서 그냥 좋을 수 있는 자리에서 열만한 가치를 가진 사람과 백만큼 수고하여 열만한 선을 이룬 사람이 있다면, 그냥 좋을 수 있는 자리에서 열만한 가치를 이룬 사람보다도 백만큼 수고하여 열만한 선을 이룬 사람이 더 귀한 것입니다. 그냥 좋을 수 있는 자리에서 열만한 가치를 가진 사람보다도 백만큼 수고하여 열만한 선의 기준에 올라선 사람을 더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아들딸이니까 하나님은 으례히 인간을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문제는 다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들딸을 사랑하는 것이니까, 그것이 무엇이 선이냐? 당연한 것이지…' 그렇게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자연적이다'라고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입장은 그것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타락한 원수의 자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체적인 선의 주체이신 하나님이 사랑하시니 자랑이 되는 것입니다.'우리는 하나님이 영영 대할 수 없는 원수의 자식이기에 원수처럼 대하는 것이 원칙인데도 불구하고, 이 원칙을 부정하고 또 다른 원칙을 제시해 주셨기 때문에 나도 선하게 되었고, 이런 사람들을 선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에 나도 또다른 원칙을 세워 행함으로 말미암아 선한 환경을 가졌구나. 내가 하늘을 위해서 이런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을 볼 때, 나를 위해서 그런 마음을 갖고 살 수 있는 사람을 남겨야 되겠구나' 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내가 희생을 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한 길은 그냥 그대로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좋은 사람끼리 좋아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예요. 솔직하라는 말은 상응적인 관계에서가 아니라 대립적인 관계에서 절충을 위해 필요한 것이니, 절대적으로 순응하는 입장에 서라는 말이지 상대적인 입장에 서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 타락한 사람은 솔직해야 합니다. 보는 것도 솔직히 봐야 합니다. 말하는 것도 솔직히 말해야 합니다. 위증은 통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통일교회의 책임자들, 식구들을 지도하고 있는 책임자들은 식구들보다 정성을 더 들여야 합니다. 책임자가 식구들보다 정성을 못 들였으면, 식구들보다 잠을 한 시간이라도 더 잤으면, 미안해 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들을 위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할 텐데도 불구하고 '명목상 나는 교회장이고 당신들은 교인들이니 내 지도를 받아야 된다'고 한다면, 이것은 강도들이나 하는 것이예요. 양심은 알고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양심은.
나는 요즘 우리 통일교회가 앞으로 돈이 많아지면 통일교회 패들이 어떤 녀석들이 될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누구한테 한 일년 동안 장부 대조도 안 하고 돈을 대주어 보면 좋겠다 그런 생각도 해봅니다. 그렇게 하다가 어느 날 장부를 가져오라고 하면 그 사람이 어떻게 할까요? 장부를 맞춰야 되겠으니 장부를 적당히 꾸며 가지고 올 것이 아니겠느냐는 거예요. 그걸로 통하겠습니까? 통하지 않습니다. 그 벌어진 간격을 좁힐 자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나갈 때는 큰 것으로부터 거꾸러져 나가는 것입니다.
어제도 내가 그런 것을 느꼈습니다. 어떤 우리 식구에게 돈을 주어 가지고 일을 하게 했습니다. 선생님이 여러분에게 지불하는 돈은 무서운 돈입니다. 공금 중에서도 공금입니다. 그 공금을 가지고 여러분이 책임수행을 하다가 그것이 안 되게 될 때는 선생님에게 보고한 다음에 제2의 목적을 위해 활용하게 되면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보고도 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처리했습니다. 그래도 그냥 잊어버리려고 했는데, 영계에서 그 사람 안 되겠다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생각하고 있는 중입니다. 속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기억 안 하고 준다고 좋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필요할 때는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는 선생님이라고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이용당하는 선생님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선생님을 이용하겠다고 하더라도 이용 안 당하는 거라구요. 해보라는 거예요, 누가 망하나. 그냥 그대로 하다가는 전부 다시 탕감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솔직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에게 돈을 타 가지고 갔다 나중에 장부를 꾸며 오는데 보게 되면, 몇백 몇십만 몇천 몇백 몇십 원까지 일전 한푼 틀리지 않고 딱 떨어지누만.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몇 번 그런 일이 있으면 그거 진짜일까 하는 생각이 되는 거예요. 그럴 수 있는지 생각해 보세요. 비상한 재간이 있는 거예요? 그런 것이 문제가 된다는 거에요. 적당은 통하지 않습니다. 더더욱 선생님은 원리를 중심삼고…. 즉, 통일 교회에 세계적인 사명이 있다면 첨단에 서서 걸어가는 선생님입니다.
선생님이 지금 기성교회 목사들을 중심삼고 원리공청회를 하려고 청평에 임시 수련소를 짓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천막을 쳐서 하려고 했어요. 그래도 6천년만에 처음으로 통일교회와 기성교회가 만나는데…. 이것은 우리 교회에 있어서는 역사에 다시 없는 단 한 번의 기회입니다. 이것은 다시 없는 기회입니다. 무엇이든지 1회가 귀하지 2회는 귀하지 않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돈은 없지요. 그렇다고 천막을 치려니…. 아벨은 가인을 복귀 하기 위해서 자기 생명을 바쳐 그 누구보다도 사랑하라고 내가 가르쳐 주었는데, 장마철이라 비가 오면 흙감탕이 될 텐테 고무신 신고 다니다가 미끄러지는 사람이 있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습니다. 물론 미끄러 넘어지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잘못이지만, 만일에 넘어져 가지고 다리가 부러졌다 혹은 죽었다 하게 될 때는 통일교회에 영원히 흠으로 남아지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잘못하다 넘어져 머리가 돌부리에 부딪치게 되면 뇌진탕으로 죽을 수도 있다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누구 때문에 죽었느냐? 통일교회 때문에 죽었다! 그 행사를 누가 주도했느냐? 통일교회 문선생이 결정해 가지고 주도했다! 그렇게 되면 결국은 문선생 때문에 죽었다! 이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작년에 수택리 수련소 짓느라고 내가 밤잠을 안 자고 야단했습니다. 새벽 두시 세 시까지 잠을 안 자면서 몸둥이를 들고 들이 모니까 청년들이 힘이 들어 가지고 나만 보면 도망갑니다. 어제도 청평수련소 짓는 책임자가 '선생님, 사람이 부족합니다' 하길래 내가 '이놈의 자식, 네가 24시간 밤잠 안 자면서 해봤느냐'라고 했어요. 24시간 밤잠 안 자고 해보고 나서 안되겠다고 해야지, 먹을 것 다 먹고 잠잘 것 다 자고 안 되겠다고 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선생님의 사고방식은 여러분들과 다르다는 거예요.
나 같으면 이렇게 한다는 거예요. 내 관은 딱 서 있다는 것입니다. 그 관을 중심삼고 여러분을 지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관하고는 틀리다는 거예요. 24시간 일을 해봤느냐는 거예요. 밤 아홉시까지 해서 안 되면 새벽 네 시 다섯 시까지 하는 거예요. 그렇게 해보고 나서 안 되면 그 일을 누가 책임지느냐? 자기들에게 일 시켰으면 하라는 대로 정성껏 하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건 번들번들 아침에 나갔다 저녁이 되어 들어와서는 '사람이 부족합니다' 이러고 있어요. 이놈의 자식 같으니라구…. 선생님 자신도 새벽부터 날뛰면서 일하고 있는데….
어제는 청평댐의 수문이 활짝 열려져 물이 많이 빠져 나갔습니다. 내가 한 3, 4년 청평을 왔다갔다하면서 정성을 들였지만 그렇게 물이 빠지기는 처음이예요. 우리가 축대를 쌓는다고 지금까지 돌을 얼마나 갖다 넣었는지 몰라요. 그런 한 날이 있기를 바라 가지고 지금까지 정성을 들여왔고 처음으로 물이 빠져 축대를 쌓아야 할 텐데…. 자, 이거…. 그때까지는 물이 차있는 가운데 축대를 쌓았기 때문에 몰랐는데, 물이 빠지니까 그 앞이 훤하게 비어 있는 거예요. 이걸 넓혀 놓으면 7,80평은 넓어지거든요. 그 아래까지 돌이 깔려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축대를 쌓아야 할 텐데, 돌 쌓는 사람 들을 가만히 보니까 일하기 쉬운 자리에서 쌓고 있어요 많이 쌓아야 벌이가 되니까. 절대로 어려운 일을 안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가만가만 미꾸라지 모양으로 빠져 나가려고 계산하고 타산해 가지고 그 누구도 한 발짝 안 나가려고 합니다.
물이 차 있을 때는 구부러지게 쌓아야 되는데, 물이 나간 다음에 보니까 직선으로 쌓을 수 있는 자리에까지 돌더미가 깔려 있지 않겠어요? '야 이제는 됐다'고 생각했는데 돌 쌓는 사람이 있어야지요. 그래서 내가 양말 벗고 나섰습니다. 축대는 쌓아 보지 않았지만 '이것은 이러니까 이래야 될 것이 아니냐' 이렇게 이치로 가르쳐 주면서 쌓으라고 했습니다. (녹음상태 불량으로 약간 정리하지 못했음)
그래서 오후 일곱 시쯤 되어서 다 쌓았습니다.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하는 것으로 보아 아마 그쯤 되었을 거예요. 만일 세상 사람들에게 일을 시켰으면 한 사날 걸렸을 거예요. 그래, 내가 청년들에게 호령을 해 가지고 후닥닥 한 시간 반에 물이 들어와도 괜찮을 만큼 축대를 쌓았습니다. 그런데 잘못 쌓아 가지고 이 다음에 무너지게 되면 타박맞을 게 아닙니까? 그래서 어제 시멘트 콘크리이트로 메꾸었습니다. 물이 고이기 전에 콘크리이트해 버리면 안 무너지는 거예요. 세상 사람들이 쌓게 되면 시멘트를 안 바르지만 우리가 쌓은 것이 무너지면 어떡해요. 위신이 있지. 또 비례적으로 볼 때 깊은 곳에 쌓았기 때문에 무너질 가망성이 많다는 거예요. 그렇게 된다면 전문가들이 쌓는 것이 낫지 전문가 아닌 사람들이 쌓은 것은 할 수 없구나 하는 평을 할 거예요. 그래서 모래하고 시멘트를 섞어 세멘떡을 만들어 가지고 발라 놓은 것입니다. (웃음)
일하는 사람들 보면 답답하다는 거예요. 사고방식이 다르다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가만히 안 둔다는 거예요. 물론 선생님이 가만히 있어도 누가 뭐라고 할 사람 없지만, 답답해서 눈뜨고 보지 못하겠거든. 이렇게 이렇게 하고 이렇게 해야 할 텐데 전부 다…. 그래서 내가 처음 얘기하지만 목수들도 꼼짝 못하는 거예요. 이치에 맞거든. '이것은 이렇고 이렇지 않느냐 어떠냐' 하면 '그렇습니다' 하는 거라구요. 그들이 틀리게 하면 이틀도 못 가서 또 바로잡아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또 오셨구만' 그래요. 그들은 선생님이 가르쳐 주면 기분 나쁘다고 할는지는 모르지만, 이치에 맞지 않는 이야기는 내가 안 합니다.
청평 우물물이 얼마나 맛있는지 모릅니다. 또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아요. 지금 더운 때이기에 땀 흘리며 일하게 되면 물을 많이 마셔야 됩니다. 아마 한 사람이 한 바께쓰 정도 물을 마실 거예요. 나도 지금 등에 땀이 나고 있지만 곡괭이질을 하다 보면 땀이 나니, 물하고 싸워야지 별 수 있어요? 그저 물을 떠서 마시는 거라구요. 사람들은 자기가 살던 지방을 떠나 물을 갈아 먹게 되면 설사하기 마련이지요. 그런데 팔도에서 별의별 사람이 다 와서 먹었는데도 아무 이상 없었습니다. 또 밥은 왜 그렇게 잘먹는지. 그저 밥을 해서 백두산같이 그릇에 담아 줘도 뭐 인사도 안 하고 금새 먹습니다. 잘 먹을 수 밖에 없어요. 힘으로 일하니까, 운동량이 많으니까 자연히 몸의 기능이 활발해져 소화가 잘 되게 되어 있다는 거에요. 그래서 일은 하지만 밥 잘 먹고 물 잘 먹는다는 거예요. 먹는 것보다 빼는 것이 많으면 몸이 비리비리해지겠지만, 빼는 것보다 먹는 것이 많으면 튼튼해지는 거예요. 어떤 녀석이 처음 여기 올 때보다 살이 많이 쪘길래, '이 녀석 살쪘구만'하니까 '헤헤' 하고 웃는 것입니다. (웃음) 밥 잘먹고 물 잘먹고 소화 잘 되니까 건강해지는 거예요. 이렇게 청평 물이 참 좋다는 것입니다.
수련소를 90평이 넘게 지으려니까 터가 작아서 파 놓은 우물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게 생겼어요. 할 수 없이 그 우물을 옮겨야 했는데, 그 우물은 옛날에 파서 돌로 쌓아 가지고 뚜껑을 해 덮은 우물이었습니다. 그래서 내 생각에는 뚜껑이 한 자 반밖에 안 되니 옆으로 파서 파이프를 연결하면 될 것 같았어요. 그래서 예산을 잡아 가지고 떡 준비를 하게 해서 구멍을 뚫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책임자가 와서 '이 우물은 다섯 자 묻었습니다' 그러는 거예요.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다섯 자나 묻었나? 하고 물어 보니 돌로 축대를 쌓으면서 다섯 자를 묻었다는 거예요. 원래 그 우물의 깊이가 아홉 자인데…. 그래서 내가 '이놈의 자식, 세상에 그렇게 하는 법이 어디 있느냐'라고 나무랬습니다. 그러니 물이 고일래야 고일 수 있어요?
요즈음에는 비가 와서 물이 많이 나오는데, 왜 이렇게 흙탕물이 나오는가 하고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까 그렇게 했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깊게 축대를 쌓았으면 그냥 두어도 흙탕물이 안 나을 텐데, 얕게 쌓았기 때문에 비가 오니까 흙물이 위로 올라와 흙탕물이 나오게 돼 있다는 거예요. 내가 곡괭이 자루를 쥐고 '이놈의 자식아, 머리가 그렇게 안 돌아가느냐'하고 나무랐습니다. 할 수 없이 우물을 다시 팠습니다. 그걸 다시 파야 되니 얼마나 기가 막히겠어요.
세상에 그렇게 하는 법이 어디 있어요. 묻었다가 다시 파려니 오죽 힘들겠어요.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했으면 파이프 하나만 연결하는 정도로, 얼마든지 간단하게 할 수 있었는데 말이예요. 그러고도…. 여기 통일교회 교인들도 그렇다는 거예요. 지금까지 전도한다고 임지에 나가서 사람만 잡아먹었지 전도했어요? 그러고 나서도 '3년 동안 열심히 했는데…'그러는 사람이 있어요. 3년 동안 나가서 해 놓은 게 뭐가 있어요. 그런 패들이 많다는 거예요. 자기 중심삼아 가지고 모든 것이 되게끔 안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녹음 잠시 중단됨)
원칙은 어디에든 통하게 되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인쇄소 같은 공장에 가서 일하는 것을 척 보면 얘기할 게 참 많아요. 그러나 모른 척하고 있는 거예요. (녹음 잠시 중단됨)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여러분들은 언제나 일을 하되…. 선생님의 사고방식은 절대로 그렇게 안 합니다. '이 일은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여기에 썼다가 다음에는 또 무엇에 써야 되겠다'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한 가지 물건을 만들 때는 반드시 그 물건이 두 세 가지의 목적에 사용이 가능할 수 있게 만들자는 것입니다. 집을 지어도 그렇습니다. 이 다음에 그 집을 뜯어서 다시 지을 것도 생각하자는 거예요. 그러나 목수는 집을 짓는 것만 생각하지 그 다음은 생각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고방식이 다르다는 거예요.
그러면 전체적인 문제를 볼 때 어떠한 사고방식이 좋겠습니까? 선생님과 같은 사고방식이 좋습니다. 오랜 역사를 두고 보면 그런 사고방식을 가진 나라가 부강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건 틀림없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 교인들에게 한 가지 일만 늙어 죽도록 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기술자면 기술자로서 전문 분야에 있다고, 예를 들어 펜을 쥔 사람은 죽을 때까지 펜만 쥐고 살겠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그럴 수 있어요? 그것만 해먹고 살겠어요? 사람은 어떻게 살다 보면 직장에서 쫓겨날 수도 있고 노동을 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니, 무엇이든지 해보라는 거예요. 30대까지는 무엇이든지 닥치는 대로 해봐야 하는 것입니다. 맨손 들고 나가더라도 어디 가서든지 먹고 살 수 있는 실력 기반을 닦아야 합니다. 정 어렵게 되어 식당 종업원 노릇을 하게 되더라도 잘 할 수 있게 밥하는 것까지 알아 두라는 것입니다. 배추나 무우 같은 것을 잔뜩 쌓아 놓고도 장단맞춰 가며 자를 수 있는 기술도 배워 두라는 거예요. 남자가 요리할 줄 안다고 해서 재수없나요?
내가 그래요. 지방 순회할 때 부인들이 밥하는 것, 반찬 만드는 것을 쓱 보게 되면 밥물은 얼마나 부었고, 시금치나물에는 어떤 양념이 들어갔고, 콩나물에는 어떤 양념이 들어갔다는 것을 다 알 수 있어요. 쓱 보게 되면 무슨 반찬은 어떻게 무친 것인지 다 아는 거예요. 그렇지만 할 수 있어요? 마음에 썩 들지 않아도 정성들여 상을 차렸으니 '감사합니다'하면서 먹는 거예요. (웃음) 내가 자취생활을 7년 이상 한 사람이예요. 습관이 되어서 많은 반찬이 필요 없습니다. 언제나 간편하고 맛있고 실질적이고 실용적인 것 하나면 됩니다. 언제나 일식 일찬이라구요. 맛있는 반찬 한 가지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즈음 상에 반찬을 수두룩 올려 놓는 것을 보면 아예 귀찮다는 거예요. 시장에 가 보면 철따라 반찬거리가 다르지요? 사람의 식성도 철따라 달라지는 거예요. 예를 들어 사람이 중국요리만 며칠째 실컷 먹다 보면 맵고 짠 김치, 깍두기가 먹고 싶어지는 거예요. 그런데 중국요리를 또 먹어야 한다면 그것처럼 죽을 지경이 없는 거예요.
내가 여름에 지방순회를 가게 되면 가는 곳곳마다 선생님이 오신다고 수박, 참외를 대접하게 됩니다. 그래서 수박 참외만 보면 '아이고' 하게 돼요. (웃음) 그것보다는 냉국, 찬물에다 장을 넣고 오이를 껍질도 벗기지 않은 채 썰어 넣은 냉국 한 사발 먹고 싶은데 그것을 누가 알아요? 그러니 환경에 맞게 거기에 적절하게 맞설 줄 알아야 된다는 거예요.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라는 거예요. 정성들이는 것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며느리가 매일같이 밤을 새워 정성을 들여 가지고 반찬을 만들었는데 맛이 없다 할 때는, 시아버지가 하루 이틀 사흘쯤은 수고했다고 하면서 먹지만, 그 다음부터는 수고가 다 무엇입니까? 그렇지만 정성들이지 않는 며느리라 해도 살랑살랑해 가지고 어디 갔다가 늦게 돌아와서도 '아버님, 늦게 돌아와서 미안합니다' 하면서 간단히 상을 차려 가지고 들어왔는데, 이건 거북이처럼 석달 열흘을 정성들인 며느리보다도 '시아버지가 요렇기 때문에 요런 것을 좋아할 것이다' 하면서 계절에 맞게 해 왔다면 반찬 한 가지에 보리밥이더라도 감칠맛이 나는 거예요. 그럴 수 있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물론 정성들여 자기를 모셔 주는 며느리도 좋아하지만 자기의 기분을 나쁘지 않게 해주는 며느리를 더 좋아한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기분을 맞출 줄 알아야 합니다. 너무 알랑거리는 것은 안 좋지만 기분 나쁘지 않게 적당히 알랑거리는 것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앞에 따지는 기도를 하면서 가만히 영적으로 느껴 보면 마치 묵직한 바윗돌이 누르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아, 하나님 잘 하셨습니다.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그저 굴러도 좋고 자빠져도 좋습니다'라고 칭찬하게 되면 하나님도 좋아하신다는 거예요.(웃음) 그러니 솔직한 것도 필요하지만 그 사람을 좋게 하기 위해서는 방법도 필요할 때가 있다는 거예요. 그렇지만 솔직한 것은 언제나 통하는 겁니다. 물론 솔직해 가지고 안 되는 일도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이해하고, 솔직하면서도 그 시대 감각에 맞고 환경에 맞게 조화의 미를 높일 수 있다면 그야말로 두말할 나위가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욕도 하면서 지도하는 사람이지만 시장에 가게 되면 몇십 년 시장에 나온 아주머니들하고 친구가 되어 앉아서 농담도 잘 합니다. '아주머니는 얼굴이 이렇게 생기고 코가 이렇게 생기고 눈이 이렇게 생겼기 때문에 돈 많이 벌겠구만. 아들은 이렇겠구만'하게 되면 '어, 당신이 우리 집을 어떻게 아느냐'고 깜짝 놀랍니다. 그러면 '알기만 해요. 잘하면 당신하고 사돈간이 될 수도 있다'고 합니다. 그래 가지고 물건도 싸게 사는 그런 놀음도 할 줄 압니다. (녹음 잠시 끊김)
내가 청평에 가게 되면 통일교회 문 아무개가 산에 올라갔다고 소문납니다. 그리고 나한테 관심 있는 사람들은 내려왔나, 안 내려왔나 확인까지 하는 거예요. 자, 이거 거북할 때가 많습니다. 영감이 잘나서 영감이 되는 것이 아니라 환경이 영감을 만들어 주는 거예요. 옛날에 개망나니 노릇을 했던 사람도 손자들이 많게 되면, 그 손자들 앞에서는 아주 점잖은 선군 모양의 태도를 취해야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환경이 그렇게 되니까 거북할 때가 많다는 거예요. 어떤 때는 좋지 않다는 거라구요. 그 발랄하고 말이예요. 점심 때가 되면 주먹밥을 해 가지고…. 그릇이 필요 없다는 거라구요. 솥이면 솥에다 냄비면 냄비에다 밥을 잔뜩 해 가지고…. 반찬이 없으니까 할 수 있어요? 무럭무럭 김이 나는 데다가 손으로 쓱쓱 소금을 발라 가지고 한 덩이 해서 '먹자!' 이래 가지고 꿀꺽…. 할아버지 손, 할머니 손, 아빠 손, 엄마 손, 고운 손, 미운 손 할 것 없이 한 덩이 집어다 쭈벅쭈벅, 들고 그저 된장이나 고추장에 척 찍어서 이렇게 먹는 것이 제격이라는 거예요. (웃음) 그게 좋긴 좋다는 것입니다. 개척시대에는 그게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자, 이거 차도 타고 다니는데 밥은 어떻게 먹나 한번 가 보자 하고 와서 선생님 밥 먹는 것을 보고 어떻구나 하고 쓸데없는 생각을 하게 된다는 거예요. 그걸 보게 될 때 이름난 책임자는 구속이 많다는 것입니다. 눈을 깜박해도 왜 깜박하느냐고 그럽니다. (웃음) 여자들을 보고 점심 때가 됐으니 점심 해 오라고 내가 눈을 깜박했는데도 다른 사람들은 다르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별의별 이상한 생각을 다 합니다. 이것은 비정상적입니다. 그런 것을 볼 때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적이 많습니다.
내가 어떤 때는 공석에서 욕을 잘합니다. 내가 욕을 함으로 말미암아 손해나는 것보다도 이익이 더 크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어느 한 사람을 수백 명 앞에 세워 놓고 욕을 하면 말이예요. '선생님이 저렇게 욕을 하시는데 얼마나 분하면 저러실까'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다 참고로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 한 사람이 제물됨으로 말미암아 나머지 수백 명이 욕 안 먹을 수 있게 된다면 당당히 욕을 해야 한다는 거예요. 처음 온 사람은 알지도 못하고 '선생님이라는 사람이 공석에서 무슨 욕을 저렇게 하느냐? 라고 생각할 거예요. 욕을 하려면 멋지게 해야지요. 칭찬하는 것은 욕이 아니예요. 그저 눈에서 눈물이 쑥 나오도록, 가슴이 섬찍하도록 해줘야 멋진 욕이라는 거예요. 그렇게 함으로써 그 사람의 잘못을 탕감해 주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죄수를 재판할 때, 검사가 형법 몇 조에 의해서 몇 년 징역을 구형하지만, 판사는 그 사람이 애국심이 있다든가 효성심이 있다든가 하는 변호사의 변론을 참고로 해 가지고 언도하잖아요? 판사는 형벌을 감해 줄 수도 있고 집행유예도 내릴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죽을 녀석이지만, 그 녀석 자체에 동정의 여지가 없다 할 때는 내가 욕이라도 해서 동정의 여지를 만들어 가지고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선생님이 공석에서 욕을 한다고 할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유 협회장은 통일교회 충신인데도 불구하고, 언제는 부려먹더니 죽은 다음에는 상은 못 주나마 욕을 한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나와 유 협회장과의 사이를 몰라서 그러는 것입니다. 다년간 같이 일을 해 나왔는데 모든 것이 백점일 수 있어요? 그래서 잘못한 것을 청산해 주기 위해서 공석에서 욕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정치적으로 할 줄 몰라서 안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슬쩍슬쩍 선생님을 속여 가지고 이중 삼중으로 생활하면 전부 다 나한테 걸려 넘어간다는 거예요. 좋다 좋다 하면서 잘못했다가는 난데없이 걸려 넘어지는 거예요. 하나님이 그렇게 해 나오신 거예요. 그러니 하나님이 그것을 얼마나 잘 아시겠느냐는 것입니다.
내가 핏대를 세우고 기분 나쁘게 되면 전체에게 문제가 되는 거예요. 한 사람은 전체를 좌우할 수 있는 동기와 인연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을 수습하지 않으면 그 사람이 병폐가 되어 가지고 전체에 폐단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누가 해결하겠느냐 이거에요. 여러분이 그것을 하지 못할 때는 선생님이 해야 하는 겁니다. 그럴 때는 뿌리를 뽑아 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욕을 할 수도 있다는 거예요.
이런 것을 볼 때, 어떤 일을 하든지 거기에는 기준이 있다는 것입니다. 일하는 데 있어서도 그 일하는 목적을 중심삼고 볼 때에…. '그저 일하라니까 하지, 그저 오늘 밥 먹었으니 땅 파라니까 파지…'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땅을 파는 데는 무엇인가 있어야 돼요. 조국을 창건하기 위해서 한다든가…. 생각이 달라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입체적으로 가치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입장에서 '하늘이여, 제가 피땀 흘리는 것을 삼천 만의 피땀을 대신한 것으로 탕감해 주십시오' 하면 탕감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공인할 수 있는 자리에서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자기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공적인 입장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 신앙생활에 있어서 전통적인 기준이라는 것은 자기 스스로를 중심삼은 기준에 의해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공적인 기준 밑에서 세워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다음에 아들딸에게 유언을 하더라도 '야, 아들딸들아, 너희도 나와 같이 나라에 충성하라'고 하려면 보여 줄 것이 있어야 합니다. '나와 같이 남을 위해서 선을 행하라'고 하려면 보여줄 게 있어야 합니다. 보여 줄 게 없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할 수 있는 공적인 기준을 중심삼고 자타가 공인하고, 자타가 추앙할 수 있는 요건을 갖춘 입장에서 자식들에게 얘길 해야 자식도 공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신앙생활에서 특히 주의할 것은 현실적 문제를 중심삼고 선악의 척도를 가려내는 것입니다. 아침에 쓱 나서게 될 때는 말이예요. 기도할 때 길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버지, 새로운 아침을 맞이하였으니 어제보다도 오늘이 더 선할 수 있는 길을 내가 가야 되겠습니다. 하오니 거기에 반대가 있거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인내력을 나에게 주시옵소서. 거기에서 꺾이는 졸자가 되지 않고 하나님의 위신과 권위를 세울 수 있는 아들이 되게 해주시옵소서. 그럴 수 있는 길을 오늘 가겠습니다. 나는 부끄럽지 않게 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면 되는 것입니다. 청산유수로 몇 시간씩 아무리 하면 뭘 해요. 행하지 않고 실적 없는 그런 기도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여러분이 알고 현재의 입장을 중심삼고 잘 가려 나가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어차피 죽습니다. 안 죽는다고 생각하는 사람 손들어 보세요. 나는 틀림없이 늙어서 죽는다고 생각하는 사람 손들어 보세요. 젊은 사람 손들어 보세요. 자신이 없구만. 암만 뚱뚱하고 양돼지같이 생겼어도 말이예요. '나는 80살 이전에는 안 죽는다'고 자신하는 사람 있어요? 장로교인인가 누가 죽었다면서요? 석온씨 노친네 어디 갔나요? 그렇게 펄펄하고 그렇게 야단스럽던 아주머니가 뭐 넘어져서 병원에 입원했는데 그만 죽었다는 말을 어제께 들었어요. 그래 오늘 장례날이라고요? 그것 보세요. 병이 들어 죽으나, 넘어져 죽으나 죽는 것은 마찬가지예요.
그렇게 생각해 보면 여러분이 안 죽는다고 자신할 수 있어요? 나이 많은 사람도 그래요. 언제 죽을지 알아요? 밥을 먹다가 숟가락도 놓기 전에 그 숟가락을 입에 물고 죽을지 누가 압니까? '난 그렇게 안 죽지. 그렇게 안 죽지' 하다가 그렇게 죽으면 어떡하겠습니까? 죽는 것에 대해서는 자신을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 일생을 두고 볼 때, 무엇을 남길 것이냐? 무엇을 남기느냐? 이것이 큰 문제입니다. 여러분이 이 터전을 밟고 섰을 때 당당할 수 있느냐? 여러분이 한 가지 행동이라도 잘 했으면 당당할 수 있지요? 일생을 살고 마지막 순간에 선이냐, 악이냐 할 때 '아버지, 나는 아버지 앞에 선한 아들입니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자격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이 땅 위에서 백승장군의 영광을 가진, 국가와 세계의 역사를 변혁시킨 영웅보다 더 위대한 것입니다. 그 전쟁이 선한 전쟁이 아니게 될 때는….
예수님은 돌아가실 때, '다 이루었다'라고 하셨습니다. 놀라우신 분이라는 거예요. 그 젊은 가슴에 뜻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죽음을 밟고 넘어 '다 이루었다! 다 이루었다!' 라고 한 말은, 자기가 해야 할 일에 대해서 정성과 노력을 다했고 투쟁과 인내와 극복의 최고의 한계선을 세우는 데 부족함을 느끼지 않고 자신만만한 입장에 섰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볼 때 훌륭하다는 거예요. 여러분들도 그렇게 되어야 하지 않겠어요?
선생님도 그렇습니다. 내가 차를 탈 때도 그냥 타지 않습니다. 영계를 동원하는 거예요. 파수군을 세워 가지고 차를 타고 갑니다. 이런 준비도 않고 차를 탔다가 운전수가 선생님과 심정이 맞지 않으면 사고가 날 수도 있습니다. 운전수가 사탄과 상대기준을 이루면 사탄이 들이받게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사탄은 언제든지 빈틈만 있으면 선생님을 공격하려고 하기 때문에 자기 직속 부하들을 시켜서 어느 곳에 가서 차를 부딪치게 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사탄은 통고하고 공격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제물을 바칠 때 '야, 내가 지금 제물 받는다 받는다' 라고 하나님이 그래요? 그렇게 하시지 않는다는 겁니다. 언제 받으셨는지 모르게 받으신다는 거예요. 그것은 자기가 모르는 것입니다. 인간이 알 수 있어요? 하나님은 아무도 모르는 가운데 제물을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 만일에 차를 타고 가다가 죽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냥 순식간에 일어나기 때문에 유언이고 뭣이고 할 수 있어요? 다 죽어 버리는데…. 만나서 이야기할 시간도 없이 죽게 될 때는 어떻게 할 거예요? 나는 그런 것까지 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차를 타고 다니는 것보다도 걸어다니는 것이 더 편합니다. 차를 타고 심각한 길로 가면 갈수록 운전수보다 내가 더 심각해집니다. 모든 문제가 그렇습니다. 그렇게 갑자기 죽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영계에 가서 '아이쿠-' 하는 거예요. 그러니 준비해야 합니다. 언제나 준비해야 됩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원리를 가르쳐 주고 있고 앞으로 가야 할 길을 남기고 있는 사람이지만, 원리원칙에 벗어나게 되면 용서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용서가 없다는 거예요. 만일 어떤 문제로 원리원칙에서 벗어나게 될 때는 사정 모르는 사람이예요. 무자비한 사람이예요. 선생님은 어머니 아버지 처자를 다 버린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개인 사정에 끌려 넘어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느 한계선까지 나로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그때는 언제 알았더냐 이거예요. 그게 필요합니다. 가정이면 가정을 대해서도 그렇고, 자식이면 자식에 대해서도 그렇고, 여러분이면 여러분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내가 뜻을 대하는 데에 있어서 솔직하고 단순한 내용을 가지고 가듯이 여러분도 그럴 수 있는 면을 가지고 목적지까지 갈 수 있도록 고이 데려가고자 하는 것이 통일교인들을 지도하고 있는 선생님의 소신입니다. 여러분도 그것이 필요합니다.
선생님은 솔직한 것을 좋아합니다. 엊그제 유종영 순회사가 와서 보고를 했습니다. 그 녀석도 승공연합에 있으면서 그저 바람을 피우고 다녔습니다. 뭐 나쁜 바람이 아니라, 세상에서 났다 하는 사람들과 어깨를 겨루며 매일 저녁 파티에 참석해 가지고 거드럭거리며 살았었거든요. 가만뒀다가는 사람 버리겠기에 내가 순회사로 내보냈습니다. 순회사는 밤잠도 제대로 못자는 거예요. 그러니 고생길로 들어선 거에요. 여러분은 순회사들을 동정 좀 해줘야 돼요.
어디 가나 통일교회 간부들이 욕을 먹고 다 이랬기 때문에 내가 고생 좀 시키려고 그를 순회사로 내보낸 것입니다. 순회사가 되면 잠 못 자거든요. 피곤하다고 해서 어디 가 가지고 '나 피곤하니 방을 좀 내주소' 할 수 있어요? 가자 마자…. 지방을 순회하게 되면 물 마실 시간도 없는 거예요. 내가 순회를 다녀 봤기 때문에 잘 압니다. 물 마실 시간도 없어요. 가자 마자 물 달라고 할 수 있어요? 변소 갈 시간도 없어요. 식구들이 꽁무니를 따라다니니…. 어떤 때는 '야 변소 좀 다녀 오자' 하고 첫번 인사를 할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할 수 없는 거예요. 그것을 나쁘다고 한다면 사정을 모르는 거예요. 그 사람이 나쁜 것이지 내가 나쁜 것이 아닙니다.
방에 들어가 앉게 되면, 그 사람들은 선생님을 대접하는 것보다 선생님이 오셨으니 무슨 소식 좀 들을 수 없나 그러는 거예요. 선생님 대접보다도 소식에 더 관심이 있는 거예요. 그렇다고, '선생님이 왔는데 대접도 안 해주고…' 이런다면 그것은 가짜예요. 밥이야 먹겠으면 먹고, 말겠으면 말고 그저 말씀을 해야 된다구요. 그래서 그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거예요. 그래, 늦게 가서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도중에 밥 먹겠다고 할 수 있어요? 그렇게 한다면 그 판은 망치는 것입니다. 끝도 못 맺고 말이예요. 그러니 그건 못한다는. 거예요. 이야기를 시작했으면 끝을 맺어 놔야 한다는 거예요.
그러다 보면 열두 시쯤 되어 가지고 밥을 먹게 되는 거예요. 그래 열두 시쯤 저녁을 먹고 상을 물리게 되면 밥한 사람들은 상을 치우고 들어가 자지만, 어떻게 금방 밥 먹고 돼지처럼 잠잘 수 있어요? 한 30분 정도 일을 해야 된다는 거예요. 이렇게 언제나 늦게 자게 됩니다. 또 식구들이 철야기도 한다고 하면 새벽에 일찍 일어나야지요. 고생길로 들어갔다는 거예요. 그러니 이 녀석들 밥 먹는 것보다 잠이 간절할 것이다…. 잠 잘 자던 녀석들 어디 한번…. 그랬는데 아니나 다를까, 무엇이 제일 힘드냐고 물어 보니까 '잠 못 자는 것입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 맛을 잘 알아야 돼요.
내가 유종영, 그 사람 성격을 좋아하는 것은 말이예요. 사람이 솔직하다는 것입니다. 그가 순회사로 떠날 때 사실은 기분 좋지 않았다나요? 그것은 선생님이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순회사로 떠날 때는 순회사에 대해 기분이 좋지 않았는데 지방에 가서 통일교회 교인들을 보니까, 없는 가운데에서도 그저 정성을 들여 위하려고 하고, 본부에서 선생님의 특명을 받고 온 순회사라고 선생님 이상으로 위하려는 것을 보고 감명을 받았다는 거예요. 아, 통일사상이 여기에 있구나…. 통일의 순풍, 봄바람 같은 기운을 느꼈다는 거예요. 그래 가지고 돌아와서는 공석에서 순회사가 절대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고 보고하는 것을 볼 때, 이 녀석 생기기는 맹탕하게 생겼지만 솔직해서 좋다는 것입니다. 그는 솔직한 데가 있어요. 좋으면 좋다고 하고….
어떤 때는 나한테 와 가지고 '선생님,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그걸 공적인 데 쓰려고 하는 것인지, 사적인 데 쓰려고 하는 것인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자기를 위해 쓰려고 하면 벼락을 치려고 했는데 가만히 보니까 통일교회를 위해서 그러는 거예요. 선생님에게 이야기하려고 얼마나 밤을 새워 가며 연구했겠어요? 그래서 '지금 생각한 것이냐, 며칠 전부터 생각한 것이냐?' 고 물었습니다. '며칠 전부터 생각했습니다' 하는 거예요. 그래, 그러면…. 그럴 때는 그 수고한 공적을 알아주어야 된다구요. 그것이 효과를 보든, 못 보든간에 수고한 공적을 인정해 주어야 됩니다. 그런 것을 몇 번만 잘라버리면 그 사람은 죽어 버리는 것입니다. 몇 번에 한번씩은 알아주어야 합니다.
그것은 울며 보채는 아이에게 젖 준다는 말과 마찬가지입니다. 젖을 먹고 또 먹겠다고 할 때, 아는 자식이라면 그 부모는 얼마나 기분 나쁘겠어요? 그렇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자식이 많이 먹고 빨리 크겠다고 하면, 자식이 빨리 커야 부모의 소원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무진장 보급해 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그와 같은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 대체로 사람이 선악의 길을 가려 가는 데 있어서 덕망지우(德望之友)를 많이 가질 수 있는 길, 혹은 윗 사람 앞에 인정받을 수 있는 길, 혹은 손아랫 사람 앞에 신뢰를 받을 수 있는 길은 변명이 아니더라 그거예요. 알겠어요? 여러분이 전부 다 타진해 보고, 비교해 보라는 거예요. 대체로 변명하는 사람들은 손해를 봅니다. 그러니 사건이 생겼으면 변명하지 말라 이겁니다. 선생님은 죽어도 변명은 못 하는 사람입니다. 들이 대 가지고 사실이 그렇습니다 하게 되면, 만약 방법상 달리 대답해야 할 때도 눈이라도 찡그리며 대답하지, 변명은 안 합니다. 선생님의 생활습관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걸 볼 때, 대체로 볼 때 솔직한 사람은 남아진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그 환경을 계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에 더더욱이나 '솔직한 신앙자'가 되는 것은 무엇보다 필요합니다. 그러면 솔직한 신앙자는 어디에서 가려지느냐? 현재의 입장에서 가려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과 일치되지 못하고 악의 침범을 받았을 때는 즉각 처리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은 무슨 일이 생기면 세 시간 이상을 넘기지 않습니다. 절대 넘기지 않습니다. 넘기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벌써 기분 나쁜 일이 있으면 그냥 흘려 버리는 것입니다. 기분 나쁜 마음을 가지고 대중 앞에 나가 이러고저러고하는 것은 가짜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문제가 심각한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놓고 우리 인생을 보게 되면 신앙생활에서도 그렇지만 대체로 일상 생활에서도 솔직한 생활철학을 지켜 나가는 사람은 남아집니다. 그런 사람이 역사적인 면에 있어서 공헌을 남기고 가는 사람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기 바랍니다.
지금 통일교회는 모든 면에서 첨단에 서 있습니다. 첨단에 서 있어요. 선생님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사람이 아니예요. 선생님은 상당히 예민한 사람입니다. 참 예민한 사람이예요. 그래서 우리 아들들도 예민합니다. 너무 예민하다는 거예요. 벌써 한마디 말을 들으면 그 말의 동기부터 파악 하려고 한다는 거예요.
본래 내가 세밀한 사람입니다. 방에 척 들어가서 몇 개월 동안 사용했던 물건이 그 자리에 없으면 기분 나빠하는 사람입니다. 책상 서랍 하나 열어 보더라도 무엇이 어떻게 어떻게 되어 있나를 세밀하게 다 봅니다. 무엇을 보더라도 무심코 보지 않습니다. 상하를 전부 가려 가지고 저기서는 무엇이 중심이냐, 어떤 것이 상(上)이냐를 보려고 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너무 그렇게 보려고 하다 보니 사람이 좁아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일부러 털털하게 하는 것입니다. 일부러 잊어버리려고 하고, 일부러 무관심하려고 합니다. 그런 면을 키워야 합니다. 그렇다고 원칙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더욱 그렇지만 원리 중심삼은 생활에 있어서도 언제나 솔직해야 합니다. 적당히 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을 삼 시대가 보고 있습니다. 과거의 선조가 보고 있고, 옆에 있는 현재의 사람이 보고 있고, 미래의 후손이 보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영계가 보고 있고, 하나님이 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변명이 필요 없습니다. 언제나 솔직해야 됩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일생생활에 있어서 가장 필요한 것이라고 선생님이 느꼈기 때문에 이야기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현실을 중심삼고 솔직한 생활을 습관화하여 선악을 가려 나가게 될 때, 하나님의 원칙에 입각하여 인정받을 수 있는 생애의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이 역사적인 과거를 남기게 될 때, 최후의 운명에 처하더라도 선한 것을 남기는 보람 있는 생애를 마치고 가게 될 것입니다. 눈을 감더라도 기쁜 마음으로 눈을 감을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해서 솔직한 신앙생활이 여러분 자신들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저희들이 뜻을 따라가는 행로가 평탄하기를 바라지만, 그 평탄한 것이 영원한 선을 보장시킬 수 있는 공고한 여건이 못 되는 것을 저희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 복귀노정을 가는 길에 있어서 염려가 되는 것은, 통일교회 문이라는 사람이 편안할 수 있는 자리에 선다고 해서 아버님께서 복귀도상에서 안심할 수 있는 자리에 계시겠느냐 할 때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옵니다. 편안한 오늘과 내일을 그리워하는 저 자신이 너무나 부족하다는 것을 느낄 때가 많사옵니다.
오늘날 통일교단이 민족의 환영을 받고, 세계의 환영을 받는다 해도 통일교회 교인들은 핍박이 없고 자유스러운 환경을 갖게 될는지 모르지만, 통일교회를 지도하는 중차대한 책임을 짊어진 사람에게는 편안한 날들이 허락되지 않는 것을 생각할 때에, 공적인 길은 언제나 희생의 길이요. 언제나 수난의 길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주는 자는 자기를 중심삼고 좋은 것을 주는 것보다도 하나님을 중심삼고 하나님을 대신하여 좋은 것을 주고, 부족한 마음을 앞놓아가면서 주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선 것을 저희들은 언제나 느껴야 되겠습니다.
말씀을 들고 나가서 말씀을 통고하는 자리에서도 그래야 되고 행동을 제시하는 데도 그래야 되겠습니다. 아무리 상하의 도리가, 확실하게 결정되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높은 자리에서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고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의 심정을 규합하여, 위로 끌어 올릴 수 있는 내적인 결연이 저희들에게 없다 할 때는, 완성세계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이와 같은 견지에서 하나님이 이 땅 위에서 그 누구를 찾아오실 것이냐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현재 세계 기독교권내에는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통일의 무리는 아버지가 낙망할 수 있는 무리요 길가에서 몰려온 무리들이지만, 행동은 하지 못 할지라도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 느낌만은 지니고 있습니다.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어떤 인연을 따라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자녀들 가운데 조금이라도 아는 자가 있게 될 때, 아는 자를 바라시고 아는 자를 찾고 계시는 아버지 앞에 이들을 먼저 세워야 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 저희들이 알았지만 행동을 다하지 못하게 될 때 저희들을 대하시는 아버지께서 슬픔의 일로를 내디딜까봐 두려워할 줄 아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저희들을 불러 모아 일깨워 주신 것은 그와 같은 자리에 서기를 바라신 것이 아니옵고, 보다 고차적인 자리에서 아버지가 기뻐하실 수 있고, 아버지의 영광의 흔적이 드러났다고 자랑하실 수 있는 자리에 서기를 바라신 것이 아니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언제나 저희들이 당신 앞에 염려를 끼쳐 드리고 언제나 당신 앞에 끌려가는 신세가 된다면, 당신의 아들로 태어난 사명을 다하지 못한 것이요, 당신의 딸로 태어난 사명을 다하지 못한 것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을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이것을 저희들이 무엇보다도 절실히 느끼고, 내가 무엇을 가지지 못하고 무엇을 갖추지 못했다 하더라도 이대로는 못 가겠다고 몸부림치면서 그날을 위해 준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시집을 가는 처녀의 마음과 같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시집을 가는 처녀가 알몸뚱이로만 시집을 가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니옵니까? 친척들 앞에 인연을 맺을 수 있는 예물이라든가 인사의 조건이 될 수 있는 것을 갖고 가야 하는 것이 신부의 입장인 것을 알게 될 때, 아버지로 말미암아 보냄을 입었다가 돌아가는 도상에 있어서 이 땅 위에 선한 영광의 터전을 바라면 바랄수록, 이 땅 위에 보내신 자신인 것을 알면 알수록, 당신이 바라시는 소원이 크면 클수록 저희들이 어떤 길을 가야 될 것인가를 생각하게 되옵니다. 이러한 것을 생각하게 될 때,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나이만 많아지는 것이 제일 무서운 것이요, 언제 죽을지 모르는 순간이 다가오는 것이 제일 무섭다는 것을 알게 되옵니다. 한 시간 한 시간, 순간 순간에 부끄러움을 넘기 위하여 몸부림치고, 고달픈 노정을 극복하기 위하여 저는 걸음걸이로라도 가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 사람은 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있사옵니다.
오늘날 통일교회 교인들 가운데 '나는 통일교회를 믿다가 망했다'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통일교회를 믿다가 망한 사람은 한 개인일지 모르지만 당신을 믿다가 망한 나라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믿긴 믿되 잘못 믿게 될 때는 망하는 것입니다. 여기 서 있는 통일교회 문이라는 사람이 망할 수 있는 장본인이 되어서 망했다고 하는 사람이 있을는지 모르지만, 저는 망하지 않기 위해서 싸우고 있습니다.
제 짐이 아무리 과중하다 하여도 그 짐을 당신과 더불어 의논하기보다도, 오히려 제 짐에 당신의 짐을 가중시켜서 내 짐으로 어떻게 소화시킬 것이냐 하는 마음으로 고달픈 나날을 보내야 할 것이 이 자리에 서 있는 이 자식의 책임인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행하고 나서 자랑할 것이 있다고 해도 지금까지 기쁜 날을 맞지 못하신 당신 앞에서 기쁜 날을 맞아서는 안 될 것을 잘 알았사옵고, 그것을 나라와 민족 앞에 돌리고 세계 앞에 남겨 주는 것이 아버지를 위한 저희들이 가야 할 길인 것을 알았기에 지금까지 이 교단을 이끌고 반평생의 행각의 노정을 지내왔나이다. 아버지, 통일교회를 사랑하시거들랑 '저'라는 사람을 중심삼고 사랑하는 것보다도, 당신이 바라시는 나라와 세계를 붙안고 사랑해 주시옵소서. 이것이 통일교단의 소원이요, 여기 서 있는 이 자식의 소원인 것을 아버지는 잘 아시옵니다.
아버지여, 저희들은 민족을 걸고 세계를 걸고 호소하면서 싸워야 되겠습니다. 저희들과 민족을 걸고 세계를 걸고 호소하면서 싸워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것을 저희들과 아버지만이 알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영계에 있는 선조들과 후손들까지도 그러한 것을 알아서 저희들을 대신하여 이 아들의 소원을 들어 달라고 아버지 앞에 기도할 수 있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시여, 당신은 이런 아들을 찾고, 이런 아들을 만나고 싶은 것이 당신의 소원이 아니옵니까?' 하고 영계에 있는 선조들과 천천만 성도들이 가담하여서 협조할 수 있는 인연의 범위를 넓혀 가야 하는 것이 지상인으로 가려 가야 할 아들딸들의 길인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외로움을 느낄 때 아버지께서는 언제나 지켜 주셨습니다. 제가 망하기를 바라던 사람들이 오히려 망하는 것을 저는 많이 보았고, 저를 고독한 자리로 몰아넣으려던 그들이 고독한 자리에 들어가는 것을 많이 보았고, 받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잃었고, 서고자 하는 사람은 쓰러지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이런 사실을 두고 볼 때에 저희들은 아버지 앞에 솔직해야 되겠습니다. 아버지 앞에 솔직함과 동시에 교회 식구들에게도 솔직해야 되겠습니다.
아버지, 저희들을 순박한 그 자체로 나타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온 백성 앞에 통일교회 무리는 믿을 수 밖에 없는 무리로 나타나야 되겠습니다. 저희들은 밤이나 낮이나 구김살이 없는 사람들로서의 권위를 지켜 사악하고 부패된 이 땅 위에 이러한 민족정기가 새로운 샘물로 솟아 나오게 된다면, 흐려졌던 이 동산이 소망의 봄절기를 맞을 수 있으며, 당신이 이 동산에 오셔서 목을 축이실 수 있고 발을 씻으실 수 있고 목욕을 하실 수 있는 한 깨끗한 안식의 보금자리가 되지 않겠사옵니까? 이것이 이 자식의 소원이오니 부디 그럴 수 있는 아들딸들이 많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자기의 출세를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무리보다 당신 앞에 순종하는 입장에서 말없이 쓰러져 간 사람들이 역사적으로 승리자가 되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통일교회 식구 가운데에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많게 하여 주시옵기를 재삼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오늘 이 아침에 거룩한 말씀의 시간을 갖게 허락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이제 저희들이 부모와 처자와 형제, 혹은 나라와 세계와 하늘을 대신하여 자기 자신이 취할 입장을 확실히 알고…. (이하는 녹음되어 있지 않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