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5일, 이날은 땅 위에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크리스마스라고 축하하고 있는 날이옵니다.
지나간 많은 역사의 날들을 통하여 당신의 기쁨과 더불어 당신의 소원의 심정을 통하고 당신의 지존하신 거룩하신 모습을 드러내어 존귀와 영광 홀로 받을 수 있도록 만민이 마음을 다하고 충성을 다해야 할 것인데도 불구하고 지루한 복귀노정에 있어서 인생들이 당신 앞에 얼마나 많은 십자가의 길을 남겨 놓았사옵니까? 수많은 우리의 선조들이 슬픔과 고통과 역경의 비참함 가운데서 밟히고 찢겨졌던 험한 역사의 슬픔을 지닌 아버지인 것을 다시 한 번 마음 깊이 회상하옵니다.
이러한 날들을 찾아 헤매면서, 넘고 넘어오면서 해원성사의 한 날을 소원하시던 당신의 소망의 날을 이 땅 위에 세우기 위해 약한 무리를 모아 민중을 편성하였고, 쫓기는 민족을 품으시고 지루한 역사 길에 있어서 약속하시면서 끌고 키워 나왔던 이스라엘 앞에 약속의 한 날을 맞이하여 만민을 구원할 수 있는 메시아의 한 모습을 유대 땅 베들레헴에 보냈던 그 사실이 역사적인 사실만으로 기억될 수밖에 없는 것이 얼마나 서럽고 원통한 것인지 아옵니다.
저희들은 오늘 그와 같은 내정의 심정을 살피면서, 그 아버지를 부를 수 있으며 그 메시아의 모습을 대신하여 어깨를 겨누고 당신 앞에 무릎을 꿇고, 역사적인 사정을 알지 못하였던 우리 선조들의 죄를 다시 한 번 뉘우치면서, 이날을 참다이 맞이하지 못하였던 과거의 이스라엘의 책임을 다시 한 번 회개하옵니다.
그런 날을 갖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역경에 몰리어 갈 곳 없이 십자가 도상에서의 죽음길을 자처하신 예수님의 행로와 더불어, 그 길을 따라 2천 년 역사노정에서의 피흘린 순교선열들이 죽음길에서 하늘 앞에 하소연하던 그 내정적인 인연을 다시 한 번 체득하는 자리에서 위로는 하늘을 위로하고, 아래로는 땅 위에 왔다 갔던 수많은 선조들을 위로하고, 현세에 있어서는 소망의 한 때를 맞이하기 위한 제2 이스라엘을 대표하여 하늘 앞에 스스로 부족한 것을 사죄할 수 있게 해주신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아버님, 진정 감사할 뿐이옵니다.
아버지, 이날은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기 위하여 형형색색의 축하연을 베풀고, 혹은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며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는 별의별 형태의 모임이 다 있을 줄 알고 있습니다. 더우기 이 시간은 세계에 널려 있는 수많은 교파, 수많은 교회가 당신의 존전에 무릎을 꿇고 메시아의 탄생을 축하하는 날이옵니다.
그러나 과연 그 가운데 아버지가 기뻐할 수 있는 모습이 있고, 하늘의 심정과 통하여 이것이 내가 걸어온 길이요, 내가 지금까지 당한 일이요, 내가 지금까지 소원했던 것이라고, 이들은 내가 만나고 싶었던 아들딸이라고, 친히 무릎 앞에 모아 놓고 역사적인 사연을 토로하면서 이 시대적인 한을 풀 수 있는 참다운 아들딸과 참다운 가정·종족·민족·국가가 있나 생각하게 될 때에, 이도 하늘의 슬픔으로 남아질 수밖에 없는 처량한 면임을 다시 한 번 생각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몰리고 쫓기던 이스라엘 민족의 모습이 세계적인 형태의 승리의 터전을 맞이하여 민주세계를 창건하였사오나, 이 가운데에 당신을 중심삼고, 생명의 원천이 되고 이 모든 세계를 통일하기 위한 하나의 지축이 되어 자리를 잡고 이 시간 아버지 앞에 대제사장의 직분을 갖추어 분향하면서 경배드릴 수 있는 참다운 민족과 종족과 참다운 가정과 자녀가 있사옵니까? 그러한 참다운 민족, 참다운 종족, 참다운 가정, 참다운 자녀를 당신이 얼마나 고대하고 있는가 하는 사실을 명심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황폐한 이 땅 위에, 이 민족 가운데 당신은 이미 저희들을 몰아내셨습니다. 외로운 고빗길에서 저희를 시련시켰습니다. 슬픈 자리에서 저희를 연단시켰습니다. 저희들이 때로는 핍박도상에서, 때로는 몰림길에서, 때로는 아버지만이 알 수 있는 환경에서 아버지와 더불어 싸워 나왔습니다. 그렇게 쫓김받고 몰림받던 무리가 오늘날 이 강산에 남아 있는 것을 생각할 때 이들이 통일의 무리인 것을 아옵니다.
이들의 뼈 속에는 당신을 향하여 호소하는 절규의 심정이 담겨져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이들의 골수를 통한 사지백체 신경 계통 전부가 당신만을 위할 수 있는 충절에 불타는 마음, 그 심정에 폭발될 수 있는 간절한 마음이 이들의 온 몸을 지배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참다운 아들인가 딸인가 할 때에, 아버지 앞에 당당하게 나서서 '그렇습니다'고 할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게 해주시옵기를 이 시간 아버지 앞에 간절히 부탁드리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역사적인 슬픔을 한하는 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시대적인 어려움과 시대적인 탄식에 눈물짓는 자녀가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알았습니다. 미래의 소망의 세계를 위하여 자기의 몸을 아버지 앞에 분향하기 위한 번제로서 희생의 산제물이 되어야 할 것을 깨닫는 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사랑하여야 할 통일의 자녀들을, 아버지, 이 시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차디찬 이날에, 아버지, 뜻을 위하여 이곳을 향하여 기도하고 있을 줄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 그들이 눈물지어 기도하걸랑, 그들이 아버지 앞에서 간곡히 심정을 짜면서 기도하걸랑 그 자리에 친히 동참하시옵시고, 내가 그러했을 때 당신이 위로하시던 손길을 다시 펴시옵고 외로울 때 권고하시던 그 위로로 그들에게도 같이하여 주옵기를 아버님 앞에 부탁드리지 않을 수 없는 사정을 들어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그들은 환경과 처지는 다르나 당신의 지체들이옵고, 그들의 사정과 생활적인 무대는 작으나 당신의 세계적인 사정과 무대에 통할 수 있는 그런 자리에서 내적 싸움과 외적 일면의 싸움을 담당하는 하늘 용사의 모습으로 인정하시옵소서. 그리하여 그들이 거동하는 곳에 승리의 자국이 남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그들이 움직이는 곳에 하늘이 환영하고 사탄세계는 물러갈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날은 이해에 있어서 마지막 맞는 성일이옵니다. 저희들이 숙원하였던 7년노정에 있어서 6년 고비를 넘어가는 마지막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과거 7년노정에 있어서 슬펐던 일을 그 마음에 되새기면서, 그 마음 가운데에 있었던 슬펐던 사연을 다시 한 번 회상해 볼 때, 그러한 것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아버지 앞에 미안함과 부족함을 금할 길이 없나이다.
그러나 슬픔과 외로움과 걱정에 가로막혔던 그 모든 사정이 민족을 원망하는 그런 사정이 되지 말게 허락하여 주옵소서. 그러한 길과 그러한 사정이 엉켜 있음은 이 민족과 세계 인류를 찾아나온 당신의 길을 개방하기 위함이었음을 생각하게 될 때에 민족의 부족함과 민족이 아버지 앞에 저지른 바의 죄가 있으면 그것을 용납하여 주옵시고, 인류가 아버지 앞에 남긴 바의 죄상을 용납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이 민족을 품으시고 갈 방향을 제시하시어서 참다운 당신이 지향하는 그곳을 향하여 한 사람이라도 낙오하지 않고 당신이 허락한 동산권 내에 들어가 승리의 개가와 더불어 환성으로써 아버지 앞에 존귀의 영광과 더불어 찬양할 수 있는 뭇 자녀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강토에 있는 수많은 당신의 교단과 수많은 자녀들이 이날을 축하하는 그 모임 모임 위에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고, 아직까지 열교에 있어서 도의 길을 가기 위해 수고의 길을 스스로 가는 수많은 종교인에게도 친히 같이하여 주옵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옵니다.
하늘의 한이 이 땅에 맺혀 있기 때문에 해원성사를 바라는 영계의 수많은 영인들까지도 이날의 기쁨과 더불어, 다가오는 7년노정에 있어서 승리할 것을 다짐하는, 새로운 약속의 계기를 맺음짓는 이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이 한 시간 아버지가 허락한 가운데 부족한 자신들이 이해를, 이날을 보내고, 다시 새해를 맞이할 수 있는 스스로의 내적 자각을 다짐하며 아버지 앞에 스스로 맹세하고 결의할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옵니다.
세계에 널려 이곳을 향하여 기도하고 있는 당신의 자녀들이 많은 줄 알고 있사옵니다. 그들이 지역과 환경을 달리해 갈라져 있사오나 마음은 하나되게 허락하여 주옵고, 아버지와 통할 수 있는 기준에서는 하나되게 하시어 남아진 우주복귀에 있어서 선봉자로서 개척자의 사명, 용사의 사명을 다하는 데 지치지 않도록, 아버지, 붙들어 주시어서 소기의 승리의 동산까지 이끌어 주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옵니다.
이 모든 전체가 합하여 아버지의 영광을 찬양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면서, 이 모든 말씀 참부모의 성호 받들어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예수님 탄신을 기념하는 크리스마스이니 축하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들도, 준비는 하지 않았지만 마음을 준비해 가지고, 외적인 단장보다도 내적인 단장을 하는 의미에서 이날을 기념하기를 바랍니다. (성탄 찬송 부름)
유대 고을 베들레헴 성중에 당신이 4천 년 동안 고대했던 메시아를 만민에 대한 속죄와 구속의 대업을 성취하고자 보내셨던 그날을 축하하는 날을 바로 오늘이라고 축하하는 날을 정하여, 지금까지 만민들이 기념하여 온 것을 저희들은 아옵니다. 아버지, 본래 이 크리스마스는 1월 3일로 지켜야 하는데 수많은 사람들은 알지 못하고 오늘을 역사적인 기원을 찾아 정한 날이라 하여 기념하고 있사옵니다. 오늘이 나신 날은 아니지만, 그날 대신 축하하는 이 시간을 받아 주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니다.
과연 민민을 구속할 수 있는 하늘의 왕자시요 만우주의 인생의 참부모로 오셨던 메시아, 그 모습을 맞이할 수 있는 참다운 이스라엘이 되지 못했던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아버지께서는 얼마나 슬프셨을 것인가를 다시 한 번 회상하게 되옵니다.
이 땅 위에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의 그날, 베들레헴 성중의 사관의 용납을 받을 수 없어 가고 가고 몰리고 몰리어 머무를 곳을 찾지 못한 마리아와 요셉의 사정을 저희들은 아옵니다. 만민을 구속할 메시아가 생각하지 않았던 노상에서 탄생했다는 이 서글픈 사실에 저희들 무슨 마음으로 어떻게 사죄해야 할지, 용서할 그 무엇도 없다는 것을 여기 모인 뭇 자녀들은 다시 한 번 민망함을 느끼옵니다. 그때에 이스라엘의 한 아들과 딸이 되어 모실 수 있는 그 영광의 자리를 가졌더라면, 그때 이스라엘 나라의 한 백성으로서 아버지를 대신한, 당신이 사랑하는 그 아들을 모시고 경배할 수 있었더라면…. 그렇지 못한 인생이 되었고, 그렇지 못한 이스라엘이 되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하나님에게 크나큰 서러운 조건을 남겼던 이스라엘의 죄상을 저희들은 규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버지! 그런 자리에서 태어나 서글픈 행로의 출발과 더불어 남 모르는 생육의 과정을 거치면서 이방의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어렸을 때의 예수님의 사정이며, 그가 갈릴리에 돌아와서 로마인 혹은 그 시대의 모든 이들로부터 주목의 대상으로서 자라고 외로웠던 예수의 생활을 다시 한 번 저희들이 회상해 볼 수 있는 이 시간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소망의 터전이요 싸움의 터전이 되어야 할 이스라엘의 교단과 이스라엘 나라는 예수님 앞에서 사라져 버리고 겟세마네 동산과 갈보리 산정에서 원하지 않는 십자가의 길을 나서야 할 비참한 최후의 길을 결정해야 했던 사실을 저희들은 잊어서는 안 됨을 다시 한 번 다짐해야 되겠습니다.
'아바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나에게서 피하게 하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 뜻대로 하시옵소서' 라고 하며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씩이나 아버지 앞에 몸부림치고 '맡은 바의 책임과 사명을 어이할까!' 하면서 그 마음을 억제하지 못하던 그 터질 듯한 가슴을 누가 헤아렸으며, 그 심정의 어려운 환경을 잊어버리고 아버지의 깊은 심정을 파헤치려고 몸부림치던 그 사연을 누가 알았겠읍니까?
몰리고 몰리던 이스라엘 민족과 오늘날 예수님을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이 한숨과 더불어 그 세계의 경지를 넘으려 했으나 그것을 건너간 사람이 없었사옵고, 그 내정적인 심정을 체득하려 하였사오나 그 경지를 파헤쳐 그 자리에 간 사람이 없었던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이 인류가 얼마나 책임 못 하였는가 하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역사를 거쳐오면서 직고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아버지, 이렇듯 복귀노정에는 하늘의 슬픔이 잠겨 있고, 아버지의 억울함과 분함이 어리어 있다는 사실을 저희들은 원리를 통하여 알았습니다.
수많은 민족 중에서도 달리 외로운 한민족을 통하여, 그 가운데서도 저희들 쫓김받는 무리를 통하여 아버지께서 이렇게 가르쳐 줬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 저희들 쌍수 합장하여 아버지 앞에 천만세의 한을 풀 수 있는 속죄의 제단을 갖추어 제사장의 책임을 다하고 그 책임을 짊어진 제사장의 직분을 대신하여 만민의 속죄제를 드릴 수 있는 당신의 거룩한 자녀들이 되어야 할 우리의 모습들인 것을 느끼게 될 때, 저희는 보기에는 부족한 모습이오나 역사를 빛내야 할 책임이 있사옵고, 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시대를 개척해야 할 사명이 있사옵고, 천국을 창건하지 않으면 안 될 선각자의 책임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오늘 저희들이 하늘을 너무나 자주적인 관념을 가지고 대했던 과거를 다시 한 번 뉘우치게 됩니다.
또다시 이 땅 위에서 이미 21년이라는 기간을 통하여 하늘의 역사는 시작하였사오나, 그 기간에 천태만상의 곡절 가운데서 하늘의 슬픈 고개를 넘기 위하여 고빗길에 부딪칠 적마다 아버지를 또다시 염려시키고 걱정스럽게 했던 지난날을 회상하게 될 때, 아버지, 뭐라고 아버지 앞에 아뢰올 말이 없사옵나이다.
그러나 몰리는 발걸음을 한곳으로 모으시어서 민족 앞에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데에 있어서 수많은 자들의 노고가 컸다는 것을 당신이 기억하여 주셔야 되겠습니다. 천만 번 부족한 모든 것도 용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아버지 당신의 심정이 맞는 효성의 도리를 다했다고 할 수 있는 아들딸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고 나서도 부족한 것뿐이요, 알면 알수록 더더욱 머리를 숙여야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 앞에 충효의 도리를 다할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아야 되겠고 다시 한 번 맹세하고 가야 할 것을 깨닫는 것이 심정의 세계인 것을 알게 될 때에, 가면 갈수록 부족함뿐이요, 가면 갈수록 눈물 없이는 아버지를 부를 수 없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 이날을 기념하는 데에 있어서 수많은 사람이 혼란하고 번잡한 그런 자리에서, 혹은 그 이름을 팔아 자기의 이익을 찾는 자도 있을 것이요, 그 뜻을 따라 자기의 향락을 추구하는 사람도 있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혹은 이런 환경적인 터전을 이용하여 하늘에 패역하고 배반하는 기준을 향해 가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요, 혹은 제단을 지키고 있는 무리들도 있는 줄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나 이러저러한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리고, 저희들만은 벌거숭이의 예수 그리스도를 살과 살을 맞대어 품을 수 있고 마음과 마음을 맞대고 몸부림치면서 품을 수 있는 참다운 어머니 대신, 참다운 아버지 대신, 참다운 형제 대신이 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마리아의 품에 품겼사오나 예수의 참다운 그 사랑의 심정이 하늘과 더불어 일치되지 못했고, 요셉의 무릎 위에 누었사오나 요셉의 심정과 인연맺을 수 없었고, 또한 앞으로 자기 올 동생들이 바라보는 환경 혹은 모든 친척들의 환경이 있었사오나 그 환경에서 환영받을 수 없었던 외로운 예수의 사정을 통찰하여 저희들은 그의 참다운 형이 되고, 동생이 되고, 누나가 되고, 부모가 되고, 친척이 되고, 혹은 백성이 될 수 있는 이 민족이 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들이 형식적으로 갖춘 무엇이 없다 하더라도, 오늘 저희들의 이 짧은 시간에 아버지 앞에 부복한 모습들을 기억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이 왔던 그 길을 바라보면서, 가신 소원의 한 일념을 다짐하고 뜻 앞에 더더욱 충효의 도리를 다하겠다는 거룩한 이 시간이 되도록, 아버지, 친히 주관하여 주시옵고, 예수께서 친히 이 시간을 살피시어 기뻐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하늘의 천천만 성도들과 12보좌를 중심삼은 12장로 이하 모든 전체의 하늘의 영인들, 혹은 사도 이하 거느린 모든 천적인 이스라엘 세계의 영인들을 합하여 땅 위에 해원성사의 한 날을 위해 협조할 수 있는 터전이 되게 하시옵고, 기억하는 이날 위에 기쁨과 자랑의 조건을 세울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옵니다.
만 영광이 당신 앞에만 돌아가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의 성호 받들어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오늘은 기독교의 수많은 교인들이 축하하는 날 중에서 제일 중요한 날인 크리스마스입니다.
우리 통일교회에서는 12월 25일을 지키지 않고 1월 3일을 크리스마스로 지켜 왔습니다. 이 날짜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역사가들도 확실히 알지 못합니다. 대략 추측해서 25일을 전후로 하여 일주일 혹은 이주일 이내의 어떠한 날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확실한 날은 모릅니다.
그러면 우리 교회에서는 어떻게 되어서 1월 3일을 지키느냐? 이것은 우리가 신령한 영계에 들어가 가지고 예수님과 대면해서 문답한다든가 해서 그 결과로 그날을 지키게 된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우리 식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원래의 크리스마스는 1월 3일, 틀림없는 1월 3일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지켜 오고 있습니다. 몇 해 동안은 그 날로 지켜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큰일을 해나가는 데 있어서 사회의 풍조라든가 혹은 세습적인 그 인연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거기에 보조를 맞추어 지방교회면 교회의 자의에 맡겨서 오늘 이날을 기념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부에서는 세상의 일반 교회처럼 외적인 단장을 하지 않았습니다. 간소하게, 도리어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는 이런 자리에 우리들이 모여 이날을 축하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나신 확정적인 내용과 통할 수 있고, 예수님을 그런 자리에 눕게 하신 하나님의 심정과 도리어 가까울 수 있는 자리가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에서 준비하는 것을 제재해 나왔던 것입니다. 그렇게 알고, 그런 의미에서 오늘 여러분에게 '성탄일을 맞이할 사명'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지금부터 약 2천 년 전, 여기 성경 말씀에 나와 있는 거와 마찬가지로 베들레헴 성에서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습니다. 비록 그 순간은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한 개인으로서 태어나는 시간에 불과했을지 모르지만, 우리 인류에게나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둘도 없는 날이었습니다. 이 날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타락한 인류에게 있어서는 새로운 광명의 날이 찾아질 수 있는 것이요, 이 날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이 비로소 지상에서 소원의 한 터전을 잡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날을 세우기 위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세우고 수많은 역사노정을 거쳐오면서 메시아를 보낸다는 것을, 즉 구세주를 보낸다는 것을 수많은 선지자를 통하여 약속해 나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은 이스라엘 민족을 그 날에 표준하게 하고 온갖 소원을 그 날에, 온갖 희망을 그 날에, 모든 이스라엘 민족의 삶을 그 날을 중심으로 해서 연결되게끔 몰아왔던 것입니다. 어떤 편안한 환경에 이스라엘 민족이 들어가서 그 환경으로 말미암아 그 날을 잊어버릴 수 있는 경지에 이르게 되면 이방 나라 사람을 동원하여 쳐서라도, 외로운 자리를 거치게 해서라도 그 날을 마음 깊이 그리워하고 생각할 수 있게끔 몰아왔던 것입니다.
또한 성경 여러 곳에다가도 메시아가 이 땅 위에 나타날 것을 예언해 놓았기 때문에 성경을 숭상하던 그때의 서기관 바리세인들은 어느 곳에서 태어날 것도 알았습니다. 더우기 자기들이 소망하던 메시아요, 이스라엘 나라를 세계적인 국가 형태로 전개시킬 수 있는 책임자로 믿었기 때문에 그 소망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간절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날을 맞이할 수 있는 스스로의 준비는 어떻게 되어 있었느냐 하면, 그 소망의 기준 앞에 일치될 수 있는 내적 심정의 기준이 되어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베들레헴 도성에는 수많은 집이 있었을 것이며 거처할 곳이 많았을 것이지만 갈 곳이 없어 외양간에서 예수가 탄생한 그 입장과 환경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때, 그러한 환경을 맞게 한 것을 본 하나님, 예수가 탄생한 그 장면을 바라보는 하나님 자신에 있어서의 내적인 사정은 말할 수 없이 서글픈 것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다시 한 번 명심해야 되겠습니다.
만민의 구세주로 오신 하나님의 독생자, 하늘의 황태자께서 이와 같이 비참한 자리에서 태어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사실, 누구보다도 영광스러운 자리에서 호화찬란한 환경을 지니고 만민이 환영하는 가운데서 탄생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소망이고, 그러하여야 할 그날인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민족은 그러한 환경을 갖추지 못했고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들이 바라던 소망의 실체가 머무를 수 있는, 혹은 탄생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바라보게 될 때, 소망한 바는 간절하였으나 직접적으로 대할 수 있는 스스로의 준비와 태도는 갖추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부정할 도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메시아가 틀림없이 온다는 것은 민족 전체가 알고 있었으되 그 민족이 오시는 메시아를 모실 수 있는 준비는 하지 못했습니다. 개인으로부터 가정, 이스라엘 민족 전체, 더더우기나 틀림없이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을 아는 그 민족이요 교단이었더라면, 책임진 교법사들은 남이야 어떻든간에 메시아를 맞기 위한 준비를 거국적인 행사로 준비라도 해 놨던들 메시아는 그와 같이 말구유에 눕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때에 어느 누가 오실 메시아를 위해서 방을 한 칸 마련한다든가, 혹은 그가 계실 수 있는 생활적인 환경을 마련할 수 있는 이스라엘 민족이었던들…. 헤롯왕 앞에 동방박사를 통해서 메시아가 탄생했다는 것이 보고될 때, 온 예루살렘 성전이 소동했다고 했습니다. 이 소문은 상하를 막론하고 모두가 들었을 것인데도 그 메시아를 찾아 모시겠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보게 될 때, 소원의 기준이 마음으로는 간절했지만 실제 생활에 있어서는 스스로 해야 할 준비의 터전을 소홀히 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여기서 부정할 수 없이 엿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환경을 바라보면서도 약속한 때는 이르렀기 때문에, 지상의 이스라엘을 구할 수 있는 메시아를 보내지 않을 수 없는 하나님은 때를 맞추어 이 땅 위에 메시아를 보냈던 것입니다. 따라서 마리아와 요셉은 몽중에 천사가 나타나서 가르쳐 준 모든 사실을 진정 그 마음에 품고, 태어날 그 아들이 이스라엘을 구할 수 있는 구주요 만민의 메시아로 온다는 것을 생활과정에서 절절히 체험하고 느꼈다면, 성경 말씀에 있는 거와 마찬가지로 동방박사의 증거함을 따라야 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지난날을 회상하여 그 마음에 예수 탄생을 명심했지만, 요셉은 여기에 대해 모른다는 입장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볼 때, 하늘의 명령을 받고 직접적인 사명을 짊어진 부모마저 하늘의 기준 앞에 합당한 부모의 자세를 갖추지 못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되겠습니다.
만삭이 되어 해산날이 언제 올지 모르는 마리아와 요셉은 거기에 대비한 준비를 해야 했습니다. 베들레헴 성을 찾아가게 될 것 같으면 거기에 사람을 보내서라도 여관을 준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런 준비도 없이 베들레헴을 찾아가 가지고 호적하러 온 수많은 사람들로 말미암아 여관마다 다 찼기 때문에 갈 곳이 없어 마구간에서 하룻밤을 새우는 기간에 예수가 탄생했던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볼 때 요셉가정 자체가 하늘이 바라는 바에, 하늘의 황태자를, 독생자를 보내는 심정 앞에 스스로 맞이할 수 있는 책임을 다 했느냐 할 때 책임을 못 했다는 것입니다. 마리아 자신도 그랬고, 요셉 자신도 역시 그랬고, 그 환경에 처해 있는 친척도 역시 그랬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탄생은 그 가족의 부부만의 기쁨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 종족 전체가 축하해야 할 일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이런 준비를 갖추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에 하늘이 바라는 소원 앞에 있어서 부모가 책임 못 한 사실을 부정할 도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 중에서 여기 처음 온 사람이 있어 '아, 믿을 수 없다'라고 의심되는 사람이 있다면 기도해 보라구요, 그런가 안 그런가.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 위에 찾아오되 복중으로부터…. 그의 어머니 마리아는 누구도 알지 못하는 사연 가운데 근심과 고통 속에서 10개월 동안, 복중에서부터 낳을 때까지 남에게 얘기할 수 없는 근심을 품고 살았습니다. 이렇게 복중기간에 있어서 하늘과 땅이 그를 맞이하여 환희할 수 있는 환경에서 편안한 생활을 하지 못했던 것도 서글프지만, 하늘 앞에 마리아 자신이 정성을 들이고 마리아 자신이 만민 앞에 스스로 이 일에 대해 확고하게 증거적인 사실로써 보여 줄 수 있는 외적 준비를 못했다는 사실 또한 하늘이 볼 때는 슬픈 일이었다는 것을 우리들은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합니다.
요셉가정에서 그러했기 때문에 유대교인은 더더욱, 이스라엘 민족은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태어난 예수는 하늘 땅의 사명을 짊어지고 오는 분이기 때문에 그가 어떤 환경에 태어나는가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보호하는 품에서 하나의 섭리의 목적을 책임질 수 있을 때까지, 갖은 서러움과 역경에 부딪히더라도 하늘이 작정한 그 목적을 위해서 준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는 이렇게 태어나서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자랄 때에도 역시 예수는 요셉에게 있어서는 의붓자식이었습니다. 요셉은 꿈에 마리아가 잉태했으나 그를 데려오는 것을 두려워 말라는 천사의 명령을 듣고 얼결에 데려왔지만 시일이 가면 갈수록 인간적인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하늘의 약속과 더불어 보내신 아버지의 입장에서 예수를 대해 준 것이 아니라 하늘이 보기에 염려하는 입장에서 예수를 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동생들이 태어나면서부터 더더욱 의붓자식의 서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많은 형제들과 더불어 자라게 될 때 그는 가정에 자기의 심정을 둘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그러했고 자라고 있는 동생들도 역시 그러했기 때문입니다. 그저 말없이 요셉가정의 생계를 돕는 데에 있어서 목수의 보조역할을 할 뿐, 협조하는 생활을 연속할 뿐이지, 자기 스스로의 소원이라든가 자기 스스로의 천척인 크나큰 사명에 대한 것을 부모 앞에 제시해 가지고 권고할 수 있는 입장에 서지 못했던 예수인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동생들까지도 예수를 미워했습니다. 형님이 나타나길 바란다면 어찌하여 예수살렘에 올라가지 않느냐고 비난하는 내용이 요한복음에 나와 있겠어요. 이것을 보게 될 때에 동생들까지도 그를 하늘이 보낸 메시아로 대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 이와 같은 명절날, 이스라엘 민족의 명일이라든가 혹은 그 가정에 좋은 날이 있으면 예수로부터 그 기쁜 일을 맞이할 수 있게끔 해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럴 수 있는 자리를 예수를 중심삼고 갖지 못하였다는 서글픔이 예수에게는 한으로 남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됩니다. 이렇게 자라 가지고, 뜻을 증거해 가지고 하늘의 사명을 실행하기 위하여 나선 도상에서부터 3년 여 생애를 지나면서 그가 간 최후의 길까지 우리가 더듬어 볼 때에 예수는 가정으로부터, 환경으로부터, 교회로부터, 혹은 그 사회로부터, 그 나라로부터…. 평화의 나라를 창건하겠다는 소망을 이 땅 위에 발 붙이고 펼 수가 없는 환경에서 살았다는 것을 우리들은 다시 한 번 회상해야 되겠습니다.
오늘 예수가 탄생한 이날을 기념하는 데 있어서 태어난 것만이 기쁜 것이 아니고 그가 태어난 목적이 무엇인가를 확실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가 온 것은 자기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하늘이 보내서 왔기 때문에, 개인으로 왔다 간 것이 아니라 위로는 하늘을 위해서 온 것이요, 아래로는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서 온 것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에 대한 책임과 민족에 대한 책임, 더 나아가서는 세계 인류에 대한 책임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시대의 제한된 책임만이 아니라 앞으로 올 후대의 역사적인 책임까지 짊어졌으니, 예수의 생애가 얼마나 고독하고 얼마나 어려웠었던가 하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래 가지고 이 심정적인 기준에서 그를 동경하고 그의 편이 되어서 그가 형님이 그리웠을 것이어늘 형님 대신이 되고, 동생이 그리웠을 것이어늘 동생 대신이 되고, 부모가 그리웠을 것이어늘 부모 대신이 되고, 혹은 친척, 삼촌 아저씨, 사돈, 그 모든 종족적인 환경이 그리웠을 것이어늘 그 종족적인 환경을 대신 하는 일원으로서 대신 위로해 주고, 그때의 외로움을 위로해 주어서 풀지 못했던 한을 풀어 주겠다는 간곡한 마음을 지녀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이날을 맞이하는 것이 하늘과 역사시대에 왔다 갔던 예수와 지금까지 믿는 성도들이 요구하는 바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태어나던 그 순간은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말할 수 없이 기쁜 순간이었습니다. 하나님뿐만 아니라 예수 자신도 역시 기쁜 시간이었습니다. 예수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도 역시 기뻐해야 할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기쁨과 예수의 기쁨과 이스라엘의 기쁨이 서로 따로따로 전부 갈라져 버렸던 것입니다.
하늘의 기쁨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간 곳이 없고, 복귀의 역경의 노정을 개척해 나오는 과정에 있어서 이스라엘과 더불어 슬픈 길을 걸어 나오는 하나님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기쁨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타락한 그날부터 수많은 민족과 국가가 있으되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는 국가와 민족이 아닙니다.
또, 복귀섭리의 뜻을 대신해 나왔다는 선조들을 두고도 역시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하나님이 기쁠 수 있는 날을 맞이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아벨에서부터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다음은 이스라엘 민족과 모세를 거쳐서 예수님 당시까지 오는 그 역사과정에 있어서 하늘이 진정으로 기뻐할 수 있는 날을 맞이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기쁨의 날을 맞이하기 위한 싸움의 노정은 거쳐왔지만, 기쁠 수 있는 한 날을 맞이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하나님에게 있어서 비로소 역사시대에 기쁠 수 있는 한 날이 찾아왔다면 그날이 어떤 날이었느냐 하면, 예수가 탄생하던 날이었습니다. 예수가 탄생한 날은 하나님의 기쁨의 날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함으로 말미암아 천상세계가 기뻐하고, 천상세계가 기뻐함으로 말미암아 하늘을 추앙하는 모든 도의 세계에 머물러 있는 백성이 기뻐해야 할 날인 것입니다. 그러한 날을 맞기 위하여 예수가 탄생한 것입니다. 예수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뻐하셨으니, 아버지가 기뻐함으로써 자식이 기뻐할 수 있는 날이라는 것입니다.
예수가 뜻을 이루어 드림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는 날을 예수만이 맞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지금까지 사탄세계에서 하늘이 이스라엘을 뽑아내어 이스라엘 민족을 편성하고 이스라엘 나라를 만들어 놓은 목적이 예수의 탄생의 기쁜 날을 국가적인 기쁨의 날로써 이루어 놓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 목적이 예수가 탄생하는 날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아담 한 자체만을 잃어버린 것이 아닙니다. 아담과 통할 수 있는 하나님의 소원, 아담을 통하여 이루려 했던 하나님의 기쁨, 이 전부가 깨져 버린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아담이 실수함으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것을 예수로 말미암아 재현하여 회복하기 위한 것이 예수를 보내신 바의 하나님의 소원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의 탄생은 이스라엘 나라의 탄생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그와 더불어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는 날을 예고하는 겁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승리의 나라로서 등장하느냐, 그러한 나라를 갖춰 가지고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과 더불어 기쁜 날을 맞이하느냐 하는 문제가 예수가 탄생하는 그날부터 제기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땅 위에 수많은 민족과 국가가 있으나 아직까지 거족적 혹은 국가적 기준에서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는 형태로써 나타내지 못했습니다. 이것을 연결시키기 위해 오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한 분이 기뻐함으로 말미암아 하늘이 기뻐하고, 예수 한 분이 기뻐함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나라가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기준이 예수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것인데도 불구하고, 과연 그날에 있어서 하나님이 기뻐하셨느냐 이것입니다. 과연 그날에 있어서 예수가 기뻐했겠느냐 이거예요. 과연 그날에 있어서 이스라엘 나라가 기뻐했느냐? 이런 것을 생각해 볼 때, 하나님도 기뻐할 수 없었고, 예수도 기뻐할 수 없었고, 이스라엘 나라도 기뻐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랬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해야 할 날은 아직 남아 있는 것이요, 예수가 기뻐해야 할 날이 남아 있는 것이요, 이스라엘 나라가 기뻐해야 할 날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해야 할 날과 예수가 기뻐해야 할 날과 이스라엘 나라가 기뻐해야 할 날을 찾기 위해 이날을 다시 예고하고 연장시켜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 예고한 날이 끝날입니다. 이 끝날을 표방하여 잃어버린 이스라엘의 재창건, 재편성 운동을 해 나오는 것이 예수가 왔다 간 후 신약복음을 중심삼은 제2이스라엘 창건의 역사인 것입니다.
민족적 터전 위에서 제1 이스라엘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세계적인 터전 위에서 제2 이스라엘을 편성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제는 세계적인 기반까지 닦아 가지고 끝날이 될 수 있는 이런 때에 우리가 도달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역사시대에 있어서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는 한 날이 와야 되겠고, 예수가 기뻐할 수 있는 한 날이 와야 되겠고, 이스라엘의 이념적인 국가가 기뻐할 수 있는 한 날이 와야 되겠습니다. 이스라엘이 예수를 맞을 때 삼위가 일체되어서 기쁠 수 있는 한 날을 가져야 했지만 갖지 못했기 때문에, 끝날에 있어서 세계적으로 그날을 맞게 하기 위한 것이 재림의 한 날이라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그때의 이스라엘 나라를 다시 한 번 회고해 볼 때, 사회적 환경이라든가 예수가 탄생하던 그 환경이 하나님이 소망하던 그 뜻과 부합되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슬픔이 연장되었습니다. 이러한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오늘 이런 날을 맞이하는 우리에게 있어서는 역사시대의 슬픔을 다시 한 번 분석하여 앞으로 올 그날을 준비할 수 있는 하나의 조건과 여건을 스스로 갖추어 나갈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날을 맞이하여 기념하는 모임을 갖는다는 것이 도리어 하늘 앞에 불공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가 마구간에서 탄생하는 것을 바라보는 하나님이 기뻤겠습니까? 아닙니다. 만일 헤롯왕의 아들이 태어난다고 한다면 만조백관이 옹위하는 가운데서, 수많은 백성이 찬양하는 가운데서 태어났을 것입니다. 추울세라 더울세라 온갖 정성을 다 합하여 거족적으로 그 아기의 탄생을 축하했을 것입니다. 또, 그 나라에서는 그날을 축하의 날로 정하여 경축행사를 거행했을 것입니다. 더우기나 로마 황제의 아들이 태어났다면, 지중해 일대를 중심으로 한 세계적인 판도를 가지고 세계를 움직일 수 있는 로마의 왕자가 태어났다면, 얼마나 수많은 민족이 찬양하고 정성을 다하여 예물을 보냈겠습니까? 그것만이 아닐 것입니다.
하물며 한때에 있어서의 왕의 아들로 태어나도 그러하거늘, 천추만대의 창조주요 만우주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의 왕자로 태어난다면 하나님은 그 아들은 얼마나 영광스럽게 맞이하기를 바라겠습니까? 하나님이 바라보는 표준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이스라엘 나라만이 예수를 맞아 주기를 바랐겠어요? 아닙니다. 땅 위에 살고 있는 수많은 민족이 거족적으로 그의 탄일을 축하하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그랬을 것 아니예요? 그런데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도 없는 환경 가운데서 태어나지 않으면 안 될 사정을 바라보는 하나님이 얼마나 딱했으면 이방의 점장이를 통해 가지고 이스라엘에 구세주를 증거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통한 일입니다.
유대의 모든 교법사들은 어디 가고 점성술객들이 예수를 찾아온 것을 오늘날 기독교에서는 기쁜 일로 말하고 있는 이 사실이 불경이라는 거예요. 하늘을 위하여 충성을 다짐하고, 시대적인 선각자로서 지도자적인 책임을 짊어진 교법사들, 서기관들과 제사장들은 어디 가고…. 교회면 교회, 이스라엘 나라면 나라, 제사장으로부터 서기관, 교법사가 일체가 되어 찾아와 가지고 수천 년 동안 정성들였던 가보를 예물로 갖추어 메시아 앞에 봉헌하여도 부족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관계도 없는 이방의 점성술객들이 찾아와 가지고 예물을 드렸다는 사실은 이스라엘의 모독이요, 하늘나라의 모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민족이 하지 못하고 교단이 받들지 못하니, 하늘은 탄생한 메시아를 땅 위에 공개시키고 인간 세상에 있어서 그가 찾아왔다는 조건적인 인연이라도 남겨 놓아야 할 뜻이 있기 때문에, 하늘을 숭상하고 세계적인 위대한 인물이 어디에 태어나는가를 관찰하면서 그를 찾고 고대하던 점성술객들 앞에 다리를 놓아 그들을 통하여 메시아의 탄생을 예고시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하나님의 서러움과 분함, 억울함이 얼마나 컸겠나 하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생각을 해봐요, 그렇겠나 안 그렇겠나? 뭐 동방박사가 찾아온 것이…. 그것은 기쁨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민족으로서는 '어찌하여 우리 민족은 동방박사 이상으로 하늘 앞에 충성을 다짐하고 스스로 제물된 생애노정을 거치면서 메시아 한 분을 모시기 위해 정성들이지 못했느냐? 그 이상의 사람이 왜 없었느냐?' 하는 것을 생각해야 돼요.
그것을 볼 때 메시아가 태어나던 그날이 기쁜 날이었으나,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유대교단을 잃어버릴 수도 있는 날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하나님과 멀다는 것이 증거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이것을 생각할 때 하나님은 얼마나 서러웠겠습니까? 4천 년 동안 그렇게 수고하면서 길러 나온 이스라엘을 외적인 중보자가 나옴으로 말미암아 메시아를 모셨다는 자리에 세워 놓지 않으면 안 될 하늘의 사연이 여기에 엮어졌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심정적으로 얼마나 괴로웠던 시간이었을까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가 이 땅에 온 것은 4천 년 하늘의 역사를 총탕감하기 위한 책임을 짊어지고 온 것입니다. 예수는 이스라엘의 운명과 세계사적인 운명을 책임지고 오신 분입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과거 현재는 물론 미래의 세계에 있어서 새로운 주권국가를 세워, 새로운 이스라엘을 창건하여 세계를 통일시켜야 할, 하늘나라를 창건해야 할 책임자인 것입니다. 이러한 책임자가 태어나는 그 자리가 마구간이라니 이것이 얼마나 원통하고 분한 일입니까? 그런데 오늘 기독교에서는 마구간에서 태어난 그 자체를 신성시합니다. 그 자체를 신성시한다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 모인 우리들은 그날을 어떠한 입장에 들어가 축하해야 되느냐? 이스라엘이 실수를 부정해 가지고 이스라엘의 인연을 되찾을 수 있는 입장에 들어가야 합니다. 예수를 맞을 수 있었던 동방박사 이상의 성의를 가질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런 입장에서 그가 태어날 수 있는 자리, 그가 태어날 수 있는 환경을 다 알아 가지고 태어나기 전에 복중의 메시아를 모실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태어난 메시아를 모시는 것만이 아니라 복중시대에서부터 모실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이스라엘 나라에서는 그러한 사람이 없었으며, 주님이 복중에서 하루하루 자랄 때 그 어머니의 괴로움을 제거해 주지 못했으며, 그 어머니의 하루의 생활이 편안하도록 책임지고 마련해 주겠다는 아낙네가, 사내가 없었던가! 주님을 복중에 있을 때부터 모시고 정성들일 수 있는 무리가 4천 년 동안 키워 온 이스라엘 나라에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민족적인 사명을 망각해 버린 이스라엘을 제거시켜 버리고 새로운 이스라엘적인 이름을 가지고 복중에 있을 때부터 그를 하늘의 왕자로 모실 수 있는 충신 열녀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한 인연을 가지고 하늘 앞의 메시아를 위하고 모시는 생활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에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의 아들이 예수가 틀림없다고 한다면 예수가 복중에 있을 때부터 모신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하늘 앞에 가까운 것입니다. 그가 불인(不人)이건, 병신이건간에…. 예수가 사도들을 택할 때도 그가 병신이라 하더라도 그를 먼저 택하여야 됩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제자들을 사랑하기 전에 그를 사랑해야만 된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런 아들딸이 있었던들, 그러한 사람이 있었던들 그런 사람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은 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있었다면 기독교는 이방의 종교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터전이 됐더라면…. 하나님은 사랑의 인연을, 충성의 인연을 밟고 옮겨 가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있었던들 예수가 몰려 죽더라도….
그런 사람들이 터전을 지켜 가지고 역사적인 인연을 상속받을 수 있는 준비를 한 터전 위에서 예수를 맞이했더라면 이스라엘의 역사는 옮겨 갈 수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못 옮겨 가니 이스라엘 민족 또한 옮겨 갈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못 옮겨 가니 예수를 중심삼은 기독교가 세계적인 종교로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로마에 가서 4백 년 동안 시련과 고통의 과정을 거치고 핍박을 받아 가지고 승리한 것보다 이스라엘 나라에서 어느 기간을 거쳐 가지고 승리했어야 했던 것입니다. 기독교의 승리의 터전이 로마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 서글픈 사실인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가 복중에 있을 때부터 하나님 앞에 정성을 들이고 마리아를 모셔 가면서 그의 손으로 하늘의 왕자를 받겠다고 기도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우리 인류가 책임을 다하고 하나님 앞에 뻗어나갈 수 있는 자세를 갖출 수 있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격을 갖출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자격을 상실했다는 것이 얼마나 원통하고 분한 것인가를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분하다는 것입니다. 이랬기 때문에, 복중으로부터 태어난 메시아를 맞이하지 못한 이스라엘이 됐기 때문에 앞으로 주님이 다시 오실 때에도 복중으로 태어나는 그 메시아를 맞을 수 없는 기독교의 역사가 예정되었다는 것입니다.
자라는 메시아를 맞이하지 못한 이스라엘의 역사를 지녔기 때문에 앞으로 주님이 이 땅에 와도 자라는 주님을 맞이할 수 없는 기독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이 그러한 역사적인 배경을 지녔기 때문에, 이 땅 위에 다시 오시는 주님도 뜻을 위해 십자가의 길을 가고 다시 부활적인 승리의 터전을 맞고 난 연후에야 비로소 이스라엘의 후계인 제2 이스라엘인 기독교는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인연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탕감복귀를 하는 데는 인류 역사적인 고비를 그냥 그대로 되돌려 재현시켜서 탕감해 나간다는 사실을 보게 될 때, 이스라엘이 얼마나 책임을 못 했는가 하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회개하게 될 때, 자기가 죄지은 것을 회개하는 것보다도, 이스라엘 민족이 이 땅 위에 메시아가 올 때에 맞이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지 못했던 죄를 회개해야 됩니다. 예수님의 복중시대부터 '오냐, 네 민족을 위하여 네 나라를 위하여 보내신 하늘의 왕자를 맞을 수 있는 자들이 너희들이로구나' 하면서 하나님의 마음속에 기억될 수 있는 이스라엘 사람 한 사람이 없었던 것이 한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여기 모여서 이날을 축하하는 데는 흘러가는 역사시대의 사람들이 축하하는 그런 흘러가는 날로 축하할 것이 아니라, 역사를 밟고 올라서 하늘이 예수를 보내실 때 마리아를 찾아오셨던 간곡한 심정을 대신하여 마리아를 모실 수 있는 이스라엘 백성으로서 메시아를 대할 줄 아는 그런 주인공이 되어 이날을 축하해야 됩니다. 그러한 자리에서 이날을 축하한다면 여러분은 세계사적으로 역사적으로 이러한 내용을 모르는 수많은 기독교인보다 하늘 앞에 가까운 심정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조건을 결정짓는 거룩한 자리라고 나는 자신하는 바입니다. (녹음이 잠시 끊김)
복중시대부터 맞이해야 할 메시아의 모습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안나 할머니가 예수가 메시아임을 증거했습니다. 메시아를 제일 먼저 안 사람은 안나 할머니였습니다. 예수를 복중시대 때부터 안 사람이 안나 할머니였던 것입니다. 그래, 안나 할머니가 알았으면 정성껏 모셔야 되는 것입니다. 정성껏 모셔야 된다는 것입니다. 메시아를 맞기를 고대하면서 일생 동안 성전을 지키면서 기도한 할머니라면 마리아를 만나 그 사실을 알았던 그때부터 마리아의 종이 되어야 했습니다. 종이 되어야 됩니다. 그가 어려울세라, 고통받을세라, 그 환경을 전부 주선해 가지고, 자기의 친척까지 동원해서라도 환경을 개척했어야 됩니다. 그랬으면 이스라엘의 인연을 상속받아 가지고 그 터전 위에서 이스라엘 역사를 재현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증거는 했지만 받들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또, 동방박사 세 사람이 있지요? 그 사람들이 복중에 있을 때는 모시지 못했지만 난 후에는 와서 증거를 했습니다. 증거하고는 모두 어디로 갔습니까? 동방박사들 어디로 갔노? 목자들 어디로 갔노? 안나는 어디로 갔어요? 다 가 버렸습니다. 다 가 버렸다는 것입니다.
본래는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 정성들이고 하나님과 일문일답하여 직접적인 계시를 받고 지도받는 특별한 선지자들이 있었던들 그 선지자들이 옹위하는 가운데서 마리아는 10개월 동안, 그가 자라는 기간을 지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가 목수 일을 할 게 뭐예요, 목수? 생각해 보라구요, 예수가 목수 일을 해서 되겠는가? 예수가 목수를 해서 되겠느냐 말이예요.
예수가 바라보는 그 시선은 이스라엘 나라를 바라본 것이요, 이스라엘 나라를 통해 세계를 바라본 것이었습니다. 그의 앞에는 개인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요셉 가정이 문제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때와 시기가 찰 때까지 스스로 준비하려니, 환경을 떠날 수 없는 예수였기 때문에 요셉 가정을 근거지로 하고 터전을 닦기 위한 수고를 여러 차례 했었지만 그 가정이 받들지 못하기 때문에 집을 나오게 되어 3년노정을 떠나게 된 것입니다, 집을 나오게 되어 3년노정을 떠난 것입니다. 집에서 알지 못했기 때문이예요.
예수는 집에 대해서 한이 많다는 것입니다. 천주교에서는 마리아 상을 갖다 놓고 믿고 하지만, 저나라에 가 보라 이겁니다. 예수님이 한이 많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갈릴리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자기의 모친이 포도주가 없다고 말할 때 '여인이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라고 했던 것입니다. 예수가 당연한 말을 한 것입니다. 당연한 말을 한 것입니다. 하등의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천륜을 배반하고 민족적인 사명과 소망을 전부 전복시킬 수 있는 동기를 내포하고 있는 장본인이 어머니라는 것이예요. 그래서 '여인이여 너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라고 한 것입니다.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 저런 것 생각해 볼 때, 오늘날 이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심판을 받아야 된다 이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통일교회가 필요한 것입니다. 때려 보라는 겁니다, 누가 깨져 나가나. 지금까지 통일교회에 나 혼자 남아 가지고 이런 일을 해 나왔습니다. 어느누구 한 녀석도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두고 보라는 겁니다, 누가 깨져 나가나. 부딪치는 날에 누가 깨져 나갈 것인지 보자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는 내가 맞고 나간다 이겁니다. 예수님이 지금까지 개인적으로 맞았고, 가정적으로 맞았고, 종족적으로 맞았고, 민족적으로 맞았고, 국가적으로 맞았으니 나도 맞는다 이겁니다. 맞지만 때가 오니 참아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참는 것은 내 개인을 위해 참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한을 풀고 하나님의 한을 풀기 위해서입니다.
그 대신 하나님이 위로받을 수 있는 그 나라를 못 가졌기 때문에 내적으로 깊은 자리에서 위로할 수 있는 터전을 찾기 위해 싸워 나오는 것입니다. 외적으로 몰릴 적마다 예수의 슬픔을 위로할 수 있고, 하늘의 곡절에 부대낄 수 있는 그런 환경이 된다는 것을 생각하고, 역사적인 고빗길이 여기에서 맺히고 풀릴 수 있는 동기가 된다는 것을 생각하고 참아 나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연은 하나님에게도 그러하고 예수님에게도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이렇게 외로운 생애를 거쳐간 것을 알아야 됩니다. 예수의 손은 까뀌를 쥐고 나무를 깎아서는 안 됩니다. 대패를 쥐고 나무를 밀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가 그래서야 되겠습니까? 그래야 되겠나 생각해 보라는 겁니다. 그러한 메시아를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이 4천 년 동안 준비시켜 나왔겠습니까? 예수가 살던 그 시대에 있어서 책임을 졌던 제사장, 교법사, 서기관들은 전부 지옥 제일 밑창에 가야 됩니다. 그래서 시대적인 지도자의 책임은 무서운 것입니다.
이들을 쳐서 땅에 집어 넣으려니 그들 앞에 하나되어 동조하고 지도받던 이스라엘 민족을 전세계의 지옥에 던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나라와 민족, 종족, 풍습 전부가 산산조각이 되어 세계로 날아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은 세계속에서 메시아가 다시 올 때까지 2천 년 동안 지상지옥에서 후회와 탄식하는 민족이 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그랬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다시 독립이 될 수 있는 때가 된 것은 하늘의 용서의 인연으로 이 땅 위에 어떤 기준이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우리 원리를 두고 볼 때에 아담은 첫아들이요, 예수는 둘째아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탕감복귀 역사에 있어서 임무를 중심삼은 탕감기준을 제시하여 세계적인 조건을 넘겨 놓아야 합니다. 그런 기준이 있기 때문에 2차대전 때 히틀러를 중심한 세력이 이스라엘을 배격하는 사탄편적인 주도세력이 된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이 역사적인 탕감을 해야 했던 것입니다. 6백만이 학살당한 것입니다. 민족이 많았다면 6천만이 학살당했을 것입니다. 그래야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성탄을 맞이하는 날에 있어서 우리들이 갖춰야 할 자격과 자세는 어떠해야 되느냐? 모여 앉아서 무슨 노래나하고 좋아하는 것보다도 엄숙한 자리에서 예수를 그리워하고 메시아를 고대하던 이스라엘을 대표한 역사적인 부활체가 되어 하늘이 약속한 메시아를 고대하던, 소망 시대를 거쳐 나오며 민족적 선조들이 바라던 그 모든 전통을 홀로 책임지고 예수를 친히 모실 수 있는 입장에 선 자신이 되어 가지고, 복중시대의 예수님을 모시지 못했던 것이 한이기 때문에 모실 수 있는 내가 되어야 된다는 것을 이 시간에 다시 한 번 느끼는 여러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메시아를 복중시대부터 정성을 다하여 모셔 가지고, 그가 태어나는 날이 자기 꿈을 실현되는 거와 같은 소망의 한 날로 기다려야 된다는 거예요. 왜 그래야 되느냐? 하나님이 이 땅 위에 메시아를 보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수고를 하셨겠어요? 민족을 만들어 가지고, 야곱이 얍복강에서 승리한 그 이스라엘 민족을 중심삼고, 이 민족이 원수세계에 몰리면 피해를 입을까봐 보호해 가지고, 사탄세계가 나라를 갖고 있기 때문에 한 국가 형태로까지 길러 가지고 그곳에 메시아를 보내셨으니, 그날을 기다리기에 얼마나 지루했겠습니까? 하나님이 4천 년 동안 막혔던 가슴속의 한숨을 내쉴 수 있는 순간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날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태어나는 날을 얼마나 기다리셨겠어요? 하나님은 10개월도 지루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복중의 메시아를 모실 수 있는 내가 되어서 그가 태어나는 날을 하나님과 같은 심정으로 지성을 다하여 바랄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준비했다가 그가 태어나면 이렇게 키우겠다고, 어렸을 때는 어러한 옷을 입히고 어떻게 키우겠다고, 어떻게 모셔야 되겠다고 마음의 단장을 해 가지고 그날을 고대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어야 됩니다.
만일 그렇게 하겠다는 사람이 있었다면 마리아가 다윗성 베들레헴에 찾아갈 때 혼자 가게 했겠습니까? 그가 가는 주위에는 수많은 군중이 옹위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 만삭이 되어 가지고 하루하루가 염려스러운 판국인데 그냥 가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주위에는 수많은 군중이 가고, 며칠 전부터 다리를 놓아 가지고 베들레헴에서 제일 좋은 여관을 마련했음에는 틀림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 수 있는 사람을 갖지 못한 마리아와 예수의 환경이었음을 부정할 도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그런 환경에서 예수님이 태어났다고 생각해 보라구요. 그랬더라면 문제는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베들레헴에 호적하러 온 모든 사람의 수보다 그를 옹위하고 그가 머무는 환경을 지키는 사람의 수가 더 많았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겠습니까? 그럴 수 있었다면 어떻게 됐겠느냐는 것입니다. 문제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베들레헴에 탄생한 메시아를 동방박사가 맞이하겠어요? 동방박사가 맞겠느냐 말이예요.
이스라엘의 슬픔이 그것이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슬픔이 그것이라는 거예요. 어찌하여 이방 사람이 예수를 맞아요? 모인 군중이 동방박사가 증거하는 것과 같은 환경적인 일이 벌어졌다면 사태는 일시에 전국적으로 벌어졌을 것입니다. 성경학자들은 베들레헴에서 메시아가 탄생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환경적으로 이것이 일시에 국가적인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랬다면 예수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생각해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여러분 듣기 좋으라고 생각해서 하는 말이 아니예요.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인 선조들 앞에 책임을 추궁하는 시간인 것입니다.
우리 통일교회는 앞으로 역사시대를 탕감하고 이 시대를 창건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역사시대를 탕감하려면 역사시대를 심판해야 됩니다. 잘했고 못했고를 심판해야 됩니다. 그런 후에야 시대에 대한 사명과 책임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기원을 밝혀 놓지 못하고는 시대적인 사명을 할 수가 없어요. 더우기나 그것은 하늘의 역사와 연결되어 내려온 역사이기 때문에 이것을 밝히지 않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문제를 명심해야 되겠습니다.
예수를 복중으로부터 모셔야 됐어요. 그가 태어날 때 강보에 쌌다고 했어요. 강보, 보자기로 싸다니…. 그 보자기가 어느 누가 만든 보자기예요? 그거 생각해 봤어요? 어느 누가 만든 보자기일꼬?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만들었을까요? 생각해 보라구요. 나그네 신세에 갑자기 벼락을 맞은 거예요. 불의의 사태를 만난 거예요. 그런 상황에서 누가 만들었을까요? 혹 거지가 만들지나 않았을까? 얼마든지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외양간에서 해산하는 형편이니, 그 상황에 어디 손 가까운 데에서 찾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말할 수 없이 비천한 어떤 아낙네의 손을 통해서 만든 보자기인지도 모릅니다. 이게 될 말입니까? 이스라엘은 어디 갔어요? 메시아가 처음 입는 옷이 하늘이 생각하지도 않고 하늘이 꿈도 꾸지 않았던 그런 사람들의 손을 거쳐서 만든 강보라니, 4천 년 동안 하늘이 준비한 이스라엘은 어디 갔느냐 이겁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손으로 꿰맨 누더기라도 좋아! 이런 걸 생각하면 분하고 원통합니다.
또, 그가 태어나서 목욕을 했다면 어디서 했을까요? 생각을 해 보라구요. 누가 시켰을 것인가? 마리아가 아기를 낳았으니 동네 부인들이 달려왔을 것입니다. 생각지도 않은 사태가 벌어졌으니, 아기를 낳아 본 부인들은 그 사정을 알기 때문에 협조하는 겁니다. 그 아기 예수를 씻어 주었을 상황을 생각해 보라구요. 어떤 대야, 어떤 그릇에 물을 떠 가지고 와서 씻어 주었을 것인가? 소 여물을 퍼주던 뚝배기인지도 모릅니다. 혹은 죄짓고 당장 하늘 앞에 형벌을 받을 사람이 쓰던 세수대야인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이 그걸 생각을 해야 된다구요. 이스라엘은 어디 갔는가! 누가 태어난 그를 부축하여 목욕을 시켜 주었을까?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 신자들이, 하늘 앞에 정성을 다하여 그 아기가 탄생하는 그 시간을 맞아 가지고 목욕시킨 조상을 가졌다면 얼마나 영광이겠습니까? 그런데 그 메시아의 몸을 사탄들이 드나들 그런 손길로써 씻어 주다니 이 불경을 무엇으로 하늘 앞에 사죄하겠습니까? 이런 것을 생각이나 해봤습니까? 목사들은 그저 거룩하지요.
난 궁금했습니다. 그때 그가 젖을 먹을 때 어디에서 먹기 시작했을까? 24시간은 보통 지내는데 뉘어 놓고 물을 처음 먹일 때 어디에서 먹였을까? 혹시나 외양간은 아니길 바랬습니다. 이 땅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물을 먹는데, 처음으로 젖을 먹는데―어떤 것이 외양간인지 다 알지요?―소 오줌 똥 냄새가 진동하는 그런 자리에서 먹는 것을 시작하다니, 그 자리에서 울음을 터뜨리다니! 생각을 해보라구요. 그런데 뭐 예수가 탄생할 때 말구유에서 탄생해서 강보로 쌌다고, 그 강보를 무슨 하나님의 옷자락같이 생각하고, 그 말구유가 하늘의 보좌라고 생각하는 모양지요? 거기에는 하나님의 서글픔이 어려 있다는 것을 통일교회 패들은 똑똑히 알아야 되겠어요. 그러한 역사적이 한이 깃들어 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그 한을 탕감하기 위하여 시대적, 역사적인 책임을 감당해야 합니다. 또한 그러한 사명을 짊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를 잉태하여 가지고 그 무거운 몸을 이끌고 다윗성을 찾아갈 때에 그를 부축해 주는 우리의 조상이 못 되었다는 것이 한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가 해산하는 수고와 역경 가운데 있을 때 밤을 새워 가며 시중들지 못한 것을 염려해야 할 이스라엘 민족인데도 불구하고 잠만 자고 꿈에도 그걸 생각하지 않았다는 사실, 이것들은 하늘의 벌을 받아 마땅합니다. 하늘이 살아 있다면 벌을 받아야 됩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을 맞을 수 있는 진정한 축하를 할 수 있고 진정한 송영을 할 수 있는 첫노래를 불러 하늘 앞에 화답할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날 때뿐만이 아닙니다. 날 때까지 하나님의 위로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돼요. 날 때도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는 장면을 우리들이 이루어 드려야 되고 낳아 가지고는 예수가 기뻐할 수 있는 우리들이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30여 생애 가운데 그의 주위에서 그를 시봉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가 태어남으로 말미암아, 당신을 기쁘게 할 수 있는 모습을 고대했고, 당신의 심정의 위안처를 찾기를 바랐던 하나님은 도리어 예수를 보내 놓고 서글픔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아담 해와로 말미암은 제1차적인 서글픔보다도 예수로 말미암은 제2차적인 서글픔이 더 컸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태어나던 그 순간에 하나님을 위로해 드리지 못한 사람들의 후손된 우리는 그날을 탕감복귀해야 되겠습니다. 고이 아버지 앞에 나아가 '그런 역사적인 우리 선조들에 의해 당신의 가슴에 슬픈 심정의 못이 박혀 있는 것을 푸시옵소서' 하고 기도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이날을 맞기 위해 비로소 흰옷을 새로 해 가지고, 아버지 앞에 모실 때 입어야 했으나 잃어버렸던 그 옷을, 더럽혀졌던 그 옷을 다시 빨아 가지고, 첫 번 입지 못하고 더럽혀진 옷을 빨아 입고 아버지 앞에 나와서 다시 아버지의 뜻을 받아, 하늘의 왕자를 대해야 할 신세인 것을 서글퍼하면서 맞이해야 할 시간이 이 시간인 것을 여러분이 느껴야 되겠습니다.
태어나면서까지 하늘의 서러움을 남긴 예수, 이 땅 위에서 30여 생애를 지내면서의 예수, 그는 얼마나 외로웠던가! 그는 4천 년 역사를 부활시켜야 할 하늘의 책임자요, 피폐한 이스라엘을 로마의 속국으로부터 해방시켜야 할 사명을 짊어진 메시아인데도 불구하고 환경적인 어려움을 타개할 내적인 고충과 시련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런 내적인 고충을 누구한테도 이야기할 수 있는 환경이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자주독립국이 아닌 식민지였기 때문에 하늘이 원하는 뜻을 입을 갖고 있으되 말할 수 없는 입장이었습니다. 자기 부모한테도 이야기할 수 없는 입장이었습니다. 묵묵히 밤이면 하늘의 별을 바라보면서 내적으로 속삭이고, 낮이면 쉬는 시간에는 뜰 앞에 흘러가는 냇물을 바라보면서 말하던 예수였습니다. 스쳐 가는 바람결과 더불어 친구했고, 지나가며 우는 새와 더불어 친구하기를 일삼던 예수였습니다.
그는 이 땅에 왔지만 친척도 없었습니다. 친척 같은 패는 많았지만 친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열두 살 때 예루살렘 성에 갔을 때 제사장들과 성전에서 하늘의 말씀을 나누고 있을 때, 그의 부모들은 하룻길을 갔다가 예수가 없는 것을 알고 찾아 나선 것을 보라구요. 그런 것을 보게 될 때에 그들은 예수를 정상적인 사람으로 취급을 안 했던 것입니다. 진정한 메시아의 소견과 일치될 수 있는 환경적인 종족이 없었던 것을 생각할 때 얼마나 외로웠겠습니까?
그는 홀로 아버지 앞에 호소할 적마다 숨은 눈물을 흘리면서 스스로의 책임을 다짐해야 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그런 내적인 생활을 쌓아 나왔던 예수였습니다. 예수의 그런 시대를 생각해 볼 때, 그런 생활환경에 있어서 친구가 되고 혹은 유모가 되고, 그 마음의 위안자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또 그 억센 환경을 실날 같은 어린 몸을 가지고 타개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책임적인 분야를 염려하면서 눈물로써 품어 주고, 자는 그의 외로운 모습을 보고 하늘 앞에 눈물로써 기도하던 한 사람이 있었느냐? 이 얼마나 원통합니까?
남과 같이 입고 싶은 것도 많았을 것입니다. 세상에 많은 부모가 자기 자식을 사랑하지만, 그것으로 만족할 예수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도 그것으로 만족할 분이 아닙니다. 이념적인 심정을 통하여 하늘을 등에 지고 땅 위에서 예수를 품고 그 장래를 염려하면서, 부디부디 고이 자라서 이 민족을 해방하고 세계를 구원해 달라고 기도해 줄 수 있는 협조자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 얼마나 기가 막힙니까?
그때의 제사장들을 하나님이 볼 때 전부 한꺼번에 모가지를 잘라 버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혼자 말없이 쓰러져 입은 채로 자고, 먹는 대로 먹고, 그 주변에서 보호하는 사람도 없는 생활을 한 예수를 나는 알아요. 나는 잘 압니다. 그런 사연을 갖고 있으니….
이런 날을 맞이할 때 그런 이야기를 하려면 내 가슴이 막힙니다. 남 모르는 세상에 남이 알지 못하는 뜻을 품고 왔다 간 그 외로운 사정을 누가 알겠습니까? 모르는 것이 당연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타락한 후손들이 모른다고 생각하니…. 예수의 사연이 그랬다는 것을 여러분이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통일교인들은 뭘할 것이냐? 예수가 바라보던 그 나라, 바라보던 그 세계, 이스라엘 문화가 로마제국을 항복시키고 하늘의 창국의 이념과 더불어 승리의 개가를 아버지 앞에 돌릴 수 있는 그날을 꿈에서나 깨어서나 얼마나 고대했겠습니까? 그가 보고 느끼는 오관을 통하여서 그날을 고대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이 수고하여 세운 이스라엘을 잃어버릴 수도 없는 것이 섭리인 것을 알게 될 때, 무지한 이스라엘을 위하여, 그들이 잠을 자는 그 시간에도 그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지 않으면 안 되는 책임을 짊어지고 홀로 헤매던 예수의 배후의 생애는 성경에는 없습니다. 성경에 없는 것이 도리어 복입니다. 그걸 안다면 여러분은 밥을 먹고 살지 못합니다. 옷을 입고 살지 못하게 됩니다. 네 활개를 펴고 잠을 잘 수 없는 것입니다, 죄인이니까.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예수의 생활의 이념과 그 배후의 심적 고충을 성경에 기록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알고 우리들은 감사해야 됩니다. 그렇지만 당하고 간 그분의 맺힌 바의 한은 풀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풀 도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풀지 않고는 땅 위의 해원성사가 안 됩니다. 땅 위의 해원이 성사 안 되면 하나님이 기쁠 수 없기 때문에 이 일을 풀기 위해서 다시 와야 되는 겁니다. 자기가 맺고 갔으니 자기가 아니면 풀 길이 없기 때문에 자기 이름으로 와야 된다는 겁니다. 통일교회에서는 이런 내정적인 인연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심정을 논하고 나온 것입니다.
예수도 육을 쓴 인간이었으니 하고 싶은 것이 없었겠어요? 하고 싶은 것이 많았겠지요? 그럴 것 아니겠어요? 그렇다면 내가 그의 주위에서 밤이나 낮이나 언제든지, 천 가지 만 가지를 요구하더라도 구해 드릴 수 있는 자신이 되어야 되겠다, 외적인 기준은 못 되더라도 그런 경우에 그의 손을 붙들고 십 년 후에, 이십 년 후에 천배 만배 해주겠다고 마음으로나마, 말로나마 위로해 줄 수 있는 내가 되어야 되겠다 하는 마음을 중심삼아 가지고, 예수 당시에 있어서의 형님 중의 형님이 되고 어버이 중의 어버이가 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그래야 형제가 되는 것입니다. 통일교회의 식구라는 말이 거기서부터 생긴 것입니다.
예수에게 진정한 어버이가 없었고, 진정한 형제가 없었고, 진정한 친척이 없었던 심정을 헤치고 들어가, 그 앞 좌석에 가서 예수를 재차 환영하여 당시에 예수를 맞아 줄 수 있었던 어머니보다도, 형제보다도, 그 민족보다도, 그 누구보다도 더 그를 품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그의 앞에 가기에 부끄럽지 않다는 것입니다. 30여 생을 사신 예수의 생활적인 무대 앞에 위로의 대상이 없었고, 기쁨의 상징체가 없었던 것을 여러분들이 재현하여 비록 역사시대는 지나갔을망정 심정의 세계를 더듬어 올라가 기도로써 그를 위로하고, 그 시대적인 사명을 내가 지금 상속해 가지고 그가 사랑하고 싶었던 그 민족을 사랑해야 되겠고, 그가 사랑하고 싶었던 그 세계를 실제로 사랑할 수 있는 터전을 닦겠다고 생명을 각오하고 나설 수 없는 여러분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역사적인 모든 흠을 밟고 올라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 당시에 맺혔던 시대적인 한, 즉 그의 생애적인 한을 오늘 이 시대에 있어서 우리를 통하여 풀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리에 서야만 예수가 태어난 날을 축하할 수 있는 입장에 선 식구의 자리를 회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번은 그래요.
셋째는, 예수가 소원한 것은 무엇이겠느냐? 물론 하루 생활환경에서 자기를 반겨 맞아 줄 사람도 필요하겠지만, 이스라엘 나라의 주권을 로마 제국으로부터 탈환하여 가지고 새로운 이상적인 이스라엘 창건을 이룩하는 것이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나간 것도 그런 때를 바라보면서 나간 것입니다. 그런 때가 하늘에 예약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참고 나갔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나라의 백성들은 하늘 앞에 슬픈 내용을 세웠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의 이슬로 사라져야 할 운명에 처해 있었지만, 예수의 소망 가운데 이스라엘은 살아 있었습니다. 소망적인 이스라엘은 살아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이스라엘이 배반하고, 물러가고, 쓰러질지라도 예수의 소망 가운데 깃들어 있는 이스라엘 나라는, 엄연히 역사와 더불어 살아 있었다는 것입니다. 소망의 이스라엘 나라와 더불어 생명을 같이하고, 소망의 이스라엘 나라를 창건하기 위해서 현실을 밟고 넘어가는 길이 십자가의 길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 개인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의 기독교인들이 '예수 믿고 천당 갑시다' 하는데,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그것은 개인주의입니다. 그런 사상이 아니라는 겁니다. 예수는 더 큰 의미의 엄숙한 과제를 놓고 죽어간 것입니다. 이스라엘 천국을 위해서, 이스라엘 천국을 구현하기 위해서 죽어갔던 것입니다. 나라를 구하기 위한 입장에 선 백성이 되어야 하고, 백성 가운데 들어간 종족이 되어야 하고, 종족 가운데 들어간 가족이 되어야 하고, 가족 가운데 깃들어야 할 개인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나라 창건을 위주로 한 개인인 겁니다. 내 개인구원을 위주한 이스라엘 나라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관념이기 때문에 하늘을 팔아먹고, 나라를 팔아먹고 별의별 놀음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런 교회는 부패합니다. 그러므로 끝날이 되면 자리를 못 잡고, 어느누구든지 이것을 점령할 수 있는 환경으로 흘러가야 됩니다. 하나님이 그날을 보기 위해 참고 나왔던 것입니다.
오늘날 흘러가는 이것을 다시 잡아 가지고 소망적인 이스라엘을 중심삼고 십자가에서 밟히지 않고 부활과 더불어 행로를 개척해 나갈 소망의 이스라엘 나라, 지상의 천국을 창건할 그 이념은 영원히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한이 무엇이냐? 그의 이념을 중심삼고 하늘 앞에 서약을 하고 하늘나라를 창건하여 만민 앞에 예수의 모습을 통하여 하늘의 권위를 나타내고자, 하나님의 승리적인 권한으로 만세를 주관할 수 있는 승리의 날을 맞이하고자 한 것이 예수의 소원이었는데 이날을 맞이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그의 친구가 되고, 살면서도 그의 친구가 됨과 동시에 이념적인 면에서도 그의 친구가 되어야 됩니다. 이념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혁명적인 입장에서 그보다 먼저 죽을 수도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의 제자들을 좀 보라구요. 그게 무슨 사도입니까? 난 사도란 말을 제일 싫어합니다. 죽게 되니 다 도망갔지요? 그랬으니 이념적인 이스라엘도 전부 잃어버린 것입니다.
다행히도 이름도 없이 쓰러져 가던 오른편 강도만이 예수가 운명하는 경각에 위로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에, 예수가 땅을 잊어버리지 않을 수 있는 하나의 조건이 되었던 겁니다. 그 죄수가 이스라엘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할 수 있는, 용서받을 수 있는 하나의 조건이 됐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강도 때문에 이스라엘 나라가 끝날에 해방을 받는 것입니다.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이르리라' 한 말 때문에 지상 복귀시대에 있어서 이스라엘 나라가 독립이라는 명사를 가지고 하늘 앞에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강도나마 없었더라면 어떻게 될 뻔했어요? 이스라엘 나라는 영원토록 흘러가 버렸을 것입니다.
난데없는, 인연도 없는 강도가 인연이 되어 그의 반열에 동참했던 거와 마찬가지로, 기독교는 난데없는 민족들이 받아 가지고 하늘나라 이스라엘의 특권적인 혜택을 입고 나가게 된 것입니다. 영국 같은 경우를 보더라도, 역사를 찾아보면 대개 좋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의 뜻을 받들어 가지고 잘살게 됐습니다. 오늘날 미국 같은 나라가 복받게 된 동기도 그렇습니다.
의를 위한 싸움 도상에서 책임을 질 수 있는 이스라엘이 되지 못하고 제자들이 되지 못했던 그 한을, 이 세계 앞에 정의에 입각하여 책임을 질 수 있는 민족적인 정기를 받든 것이 오늘날의 미국이기 때문에 하늘이 축복해 주어서 오늘날 민주주의를 지배할 수 있는 권내에 들어서 있다는 것입니다. 그 강도로 말미암아 사도들도 부활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도 강도가 있었기 때문에 다시 온다는 것입니다. 그가 없었다면 예수가 부활해 가지고 그 모든 것을 해낼 것 같아요? 베드로, 야고보, 요한, 12제자가 뭐가 그리워서! 그 녀석들은 전부가 배신자인데. 하나님이 배신자 찾아가는 분이예요?
그렇지만 배신하는 그 자리에서 배신의 고개를 넘고, 죽음권을 밟고 넘고 자기의 모든 입장을 희생시키면서도 예수의 편된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로 말미암아 예수가 다시 찾아가 이스라엘에 대해 잊을 수 없는 자리에 섰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스라엘은 강도를 모셔야 된다는 것입니다. 고맙게 생각해야 된다는 거예요.
예수는 소망적인 이스라엘을 바라보면서 역사적인 사명을 해 나왔습니다. 그러나 지난날 역사시대의 제1 이스라엘을 헤아려 볼 때 예수의 마음에는 이스라엘을 잃어버린 풀 수 없는 서러움이 남아 있습니다. 그때에 새로운 하늘나라를 창건하기 위한 사명을 짊어지고 이스라엘을 바라보았지만, 이스라엘 민족이 배반하고 배척했던 그 한이 그의 가슴에 매여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느 한 시대에 있어서 풀어야 됩니다. 풀어야 됩니다. 이 한을 풀지 않으면 예수의 생활적인 면과 이념적인 면에 있어서 친구가 될 수 없습니다. 이걸 풀지 못하고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의 가슴속에 맺혀진 한을 풀지 못하면 천국이 올 수 없습니다. 그분을 맞이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세계도상에 있는 어떤 나라가 주님이 오시는 끝날에 있어서 책임을 지고 옛날에 실패했던 제1 이스라엘의 사명적인 분야를 재현시켜 역사적인 이스라엘 부활권을 결정지어 가지고 사탄에게 '너희들이 이것을 유린하지 않았느냐?' 하고 그것을 다시 빼앗아 가지고 때려 넘길 수 있는 기준을 잡아야 됩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 한 주님이 오실 수 없는 것입니다. 탕감복귀가 그렇습니다. 그래야 그 한이 풀릴 것 아니예요? 한을 풀려면, 예를 들어 분한 마음이 맺혀 있으면 듣기 싫더라도 '이랬기 때문에 그렇지 않았느냐?'라고 해명을 해야 그것이 풀리는 겁니다. 예수에게 맺힌 역사적인 한, 민족을 통하여 맺힌 그 한을 어떻게 풀겠느냐? '그 민족적인 한이 이랬기 때문에 이러한 환경을 제시하오니 이것을 보고, 이것을 대신 받고 푸시오' 해야 된다는 겁니다.
탕감복귀 원칙에는 용서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통일교회 교인들을 죽음의 길로 몰아내는 겁니다. 예수를 배반한 무리들, 12사도 배반하고 도망갔던 것을 넘어가려면 스스로 따라오겠다고 하는 무리를 쫓아내어 죽음길에 들이미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 죽겠다고 도망을 갔지요? 난 반대예요? 따라오겠다고 하는 자들을 죽을 길에 처넣는 거예요. 예수를 따라다니다가 죽는 것이 아니라, 예수 없이 죽을 수 있는 자리에 있어야 되는 겁니다. 예수와 더불어 죽는 것은 쉽다는 겁니다. 예수를 배반했던 죄를 탕감하기 위해서는 예수가 없는 데서도 예수를 위하여 죽음길을 대신 갈 수 있는 자리에 서야 합니다. 그래야 그 민족이 배반했을 때의 서글픈 마음을 탕감하여서 사탄을 대하여 '이 자식아!' 하고 때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네 이놈, 이러한 조건으로써 내 가슴에 못을 박고, 하늘에 한을 맺고, 이스라엘의 민족적인 사망권을 만들어 놓았지? 이런데도 풀지 못할 거야?' 하면서 사탄을 추방해야 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에서는 통일교회 선생님을 따라가겠다고 하는 무리를 무자비하게 고생길에 내몰았습니다. '죽음길을 가라!' 하고 내몬 것입니다. 거기에서 보따리 싸 가지고 도망가는 사람은 다 인연이 없는 사람입니다. 홀로 죽더라도 응당히 역사적인 모든 죄를 탕감하는 입장에서 죽겠다 하고, 죽더라도 예수가 민족을 안고 세계를 안고 간 것과 마찬가지로 창건의 이념을 중심삼고, 세계복귀를 이념을 중심삼고 십자가를 등에 지고 죽음길을 고이 가던 발자취를 따르겠다 하는 마음을 가지고 죽어서 지키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 그것을 지키겠다 하고 사탄의 화살을 맞지 않고 죽지 않고 부활의 권한을 갖고 나타나야만 민족 해원성사의 터전을 마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겠기 때문에 오늘 통일교회는 그것을 모방하여 지금까지 나온 것입니다.
주위에서 별의별 소리를 다 해도 우리는 아랑곳없습니다. 들어 줄 여유가 없습니다. 내 갈 길이 바쁘니 동네 개야 짖겠으면 짖고, 길에서 낙오되어 쓰러지겠으면 쓰러지고, 상관없는 행객이야 쓰러지려면 쓰러져라 이겁니다. 상관할 수 없어요. 갈 길이 바쁘기 때문에 상관을 못 하는 거예요. 민족적인 한을 탕감할 수 있는 역사적인 사명이 있기 때문에, 이런 길을 개척하고자 하여 나는 여러분을 이끌고 나온 것입니다.
그럼 이렇게 이끌고 나와서 뭘할 것이냐? 구원의 목적이 개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나라를 구원하는 데 있기 때문에, 구원복귀 승리의 터전을 마련하게 될 때는 종족복귀는 물론이요, 가정복귀, 개인복귀는 자동적으로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래 신앙자가 가야 할 길이요, 예수의 전통적, 본간적(本幹的)인 사상인 것입니다. 그런데 천국 가기 위해서 믿어요? 이 껄렁껄렁한 패들, 이놈들을 내가 전부 이 지구상에서 추방하려고 한다구요. 그런 교회는 망해야 됩니다. 나라를 찾지 못하고 망해야 됩니다. 나라가 나라를 상관하지 못하는 거예요.
다시 한 번 얘기하겠는데, 지난날의 역사는 흘러갔어요. 이 역사가 다시 한 번 상봉하여 풀려야 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역사적인 거리를 남겨 놓고 하나님을 위로할 수 있는 아무런 조건을 갖지 못한 내 자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여러분이 배우고 있는 원리를 중심삼고 원리 배후에 있는 특별한 심정의 인연을 통해서 아담 가정에서부터 해원성사하자는 것입니다.
아벨에 대해 하나님이 이러했고, 가인을 대한 하나님의 서글픔이 이러했고, 노아의 가정을 대하던 하나님의 섭리가 이러했으니 그 내정의 심정이 어떻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엎드릴 적마다 그걸 생각하면 피가 뛰쳐 나오는 심정을 느끼면서, '아버님, 얼마나 수고하셨습니까?' 하고 눈물로써 위로하고 '아버지를 내 가정에 모시고 천년 만년 살고 싶다. 환경이 어려우면 어떠하고, 핍박이 심하면 어떠냐?' 하며 내 맘으로 모시는 그 정성으로 남 모르는 가운데 내적인 천국의 기준을 닦아 가지고 '승리적인 천국이, 세계적인 승리적 심정의 터전이 나로 말미암아 닦아졌습니다' 해 가지고 '이제 나로부터 이 육적인 세계에서 제1보의 행차를 단행하시옵소서. 하늘의 권고를 바랍니다' 하며 나설 수 있는 자녀의 명분을 갖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명분을 갖춰야 할 것이 우리의 사명인데도 불구하고 오늘 통일교회 성도들을 볼 때, 그런 무리가 많지 않은 것을 절감하게 됩니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 않아, 나는. 나는 그렇지 않아요. 이를 위해서 나는 생애를 몇천 번 아버지 앞에 바치겠다고 각오를 했고, 죽기를 몇만 번 내적 외적으로 다짐했는지 모릅니다. 화살이 몰려들고 모진 시련에 부대낄 적마다 '내 아버지 가신 길' 하며 참았습니다. 내 아버지입니다. 남의 아버지가 아니예요. 하나님이란 말은 안 씁니다. 내 아버지가 가신 길! 내 아버지! 내적인 '내'라는 의미는 넓고도 큽니다. 내적이라는 의미도 포함되고 자기 편이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전부가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것을 느끼면서 복중시대, 육신시대, 이념시대, 이 3시대를 거쳐서 그 마음속에 기억될 수 있고, 그 생활 속에 기억될 수 있고, 그 이름 속에 새겨질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되어야만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딸이 지금까지 그런 자리를 통해서 찾아 나온 길에 있었기 때문에, 그가 그런 길을 닦아 나오는 시대적인 구원섭리 과정을 거쳐오기 때문에 그 섭리과정에 있어서 동행하고 동사할 수 있다는, 이때의 사명을 생각할 때 그걸 무얼 주고 바꿀 겁니까? 뭘 주고 바꿔요? 세상의 명예는 한때일 뿐 흘러가는 것입니다. 세상의 행락은 한때일 뿐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가는 길, 우리들이 남기는 터전은 영원히 영원히 하늘과 더불어 지내질 것을 생각하면 이 길 이상 더 나은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통일교회는 불쌍하지 않습니다. 불쌍하지 않아요.
내가 지방을 순회할 때 눈물로써 그들을 대할 때가 많습니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참고 가는 걸 보게 될 때 서글프게 생각합니다. 얼마나 참느냐, 비참하면 비참할수록 비참한 가운데서 하늘과 심정적인 결탁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위하여 고생하겠다고 하며 굶으면서도 빈 식기를 붙들고 밥을 그리워하면서 아버지를 부를 수 있는 그 자리에는 하늘의 간장이 녹아나는 겁니다. 혹은 뜻을 위하다 철창에 갇혀 매를 맞고 옷이 찢기고 눈물짓는 그러한 고문의 자리에는 하늘의 심정이 폭발되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아버지 앞에 효자의 명패를 박겠다고, 충신의 명패를 박겠다고 다짐해야 합니다. 우리 역사시대에 그런 사람이 없었거늘 이런 역사적인 심정의 배후를 알아 가지고 하늘을 위로하고, 지금까지 역사적으로 한 많은 순교 열사들을 해원성사해 드려야 되겠다고, 당신들이 간 길이 이러하거늘, 나도 이 길을 감으로써 당신들을 위로하고, 당신들의 한을 풀어 주기 위한 약속을 가까운 미래에 두고 기필코 성취해 드리겠다고 다짐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럴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통쾌하고 의의 있는 일입니까? 여러분은 그렇게 각오해 봤어요?
통일교회는 그러한 원칙과 그러한 생활터전과 그런 이념적인 일을 해 가지고, 예수 앞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둘도 없는 친구가 되어야 됩니다. 하나님 앞에 둘도 없는 효자 충신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통일교회 전통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 이외의 존재들은 전부 사기꾼들입니다.
그 전통만이 남아지게 될 때, 거기서부터 하나님의 개인은 다시 한 번 소생할 수 있는 것이요, 그 전통만이 남아지게 될 때, 하나님의 아들딸이 고이 자랄 수 있는 것이요, 그 전통만이 남아지게 될 때, 하늘나라는 재창건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틀림없는 철칙입니다. 이런 내적 사연을 여러분이 생각하면서 그렇지 못했던 과거의 자기를 비판하고 현재의 그렇지 못한 자기를 정비해 가지고 내일의 숙명적인 내 운명을 새로운 터전으로 마련하겠다고 결의하고 나설 수 있는 시간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이렇게 재차 결의할 수 있는 시간이 되어야만 하늘이 요구하는 성탄절을 맞이할 수 있는 자격을 결정할 수 있는 중요한 이 날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각오와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이날을 맞게 될 때 하늘이 감사하게 되고 예수님도 이날을 맞는 의의를 갖게 되고 앞으로의 소망의 이스라엘이 우리로 말미암아 안 될래야 안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생각하고 오늘 이런 내용을 가지고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이 1966년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7년노정을 넘어가는 데 있어서 제일 시련이 많았던 6년째 되는 해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내가 오늘 새벽에 가만히 생각해 보니 어이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이 길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시련을 당했습니까? 정말로 곡절이 많았습니다. 예배를 한 번 보려면 싸움을 하고, 예배 도중에 끌려 나가서 몽둥이 찜질을 당하고…. 그러던 한 많은 6수의 탕감시대를 넘어가 가지고, 이제는 통일교회가 어디를 가든지 이 민족이 그렇게 대우하지 않을 수 있는 환경적인 터전이 마련되었습니다. 일면 서글픔도 있지만 일면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옛날에 여러분이 이런 날 하루 예배를 드리기 위해 얼마나 도망다녔습니까? 선생님 한 번 만나기 위해서 야간에 담을 넘어 도망하던 일도 있었지요? 여러분이 무엇 때문에 그랬습니까? 그 목적은 여러분 개인을 구원하고 개인들이 좋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나라와 그 의를 위해서였습니다. 선생님은 지나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나라의 인연은 영원히 남는 것입니다. 그 나라의 인연을 맺기 위해서 선생님이 필요한 것이고, 그 인연을 통하기 때문에 선생님이 필요한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선생님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날들을 보내고, 이제 오늘 1966년 마지막 주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제 이날은 오지 않습니다. 7년노정 중에 6년째의 마지막 날인 것을 생각하면 일면 서운하고 일면 기쁘고 그렇습니다. 7년노정의 마지막 해를 맞이하는 초하룻날이 주일이 되는구만요. 햐! 이것이 어떻게? 우연의 일치인지, 그러기를 바랬던 것인지, 그렇게 들어맞는 걸 보고 난 기쁘게 생각합니다. 어떻게 초하룻날이 주일이 될까? 또 오늘 크리스마스가 어떻게 주일일까? 이런 것을 전부 생각해 볼 때, 기쁜 날과 슬픈 날, 혹은 슬픈 날과 기쁜 날이 엇바뀌는 역사적인 전환 시기라고 생각됩니다. 이렇게 생각해 볼 때 소망에 넘치는 무엇도 없지 않아 있어요. 그 대신 앞으로 우리의 사명은 큰 것입니다.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 민족적인 해방의 봉기를 이 세계 앞에 들어 가지고 북한 땅을 해방해야 됩니다. 북한 땅을 해방해야 돼요.
그러기 위해서는 이제부터 남아진 제2차 7년노정을 중심삼고 여러분을 어떻게 또 내몰아야 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지금까지는 탕감과정에서 여러분이 수고했습니다. 이제는 탕감과정이 아닙니다. 열 번 뿌리면 열 번 거둘 수 있습니다. 선생님도 지금까지의 7년노정이 끝날 때까지는 탕감시대를 맞아 수고함으로써 하늘과 연결된 겁니다. 그런 시대를 넘어서서 이제는 민족과 더불어 갈 수 있는 7년기간이 또 있기를 바라는 거에요. 그런 기간이 또 있을 거예요. 내가 지금까지의 탕감시대에서 고생도 했고 별의별 일을 했지만 하늘을 환영하고 하늘을 맞이할 수 있는 그런 일을 못 했으니 앞으로 또 무슨 일을 할지 모릅니다. 여러분을 끌고 거지 소굴로 갈지 모르고, 노동판에 갈지도 모릅니다. 각오하라구요. 그럴 수도 있다는 겁니다. 집을 잡고, 지금 내가 차를 타고 다니지만, 내 발이 차 대신 될 때가 올 거라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의 계획대로 안 되는 날에는 내가 또다시 해야겠다. 이 통일교회 패들이 책임을 못 하게 되면 내가 또 탕감해 줘야 되겠다'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좋겠지요? 그러면 좋겠지요? (이후의 말씀은 녹음이 되어 있지 않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