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아버님, 수많은 인간들이 살고 있는 이 세계 가운데, 복잡한 선악의 투쟁이 엇갈리는 행로 가운데서 저희들이 초조하게 이 환경을 가려 가야 할 책임을 직시하면서 내일의 승리의 한 곳을 향해 싸워 나가고 있사오니, 그 싸움터 위에 있는 저희들에게 당신의 무한하신 가호와 사랑과 긍휼이 항상 떠나지 마시옵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옵니다.
오늘은 이 달 들어 세 번째 맞는 안식일이옵니다. 이 자리에 부복한 당신의 자녀들을 굽어살피시옵소서. 당신 앞에 드려지는 몸 마음은 거룩하지 못할지라도, 당신이 찾아오셨던 소원성취의 뜻은 다 이루지 못했을지라도, 당신이 떠날 수 없는 이곳인 것을 생각하면 할수록 부족한 자신이 아버지 앞에 충효의 면목을 갖추지 못했음을 진실로 죄송하게 생각하옵니다.
엎드려 자신의 마음을 정하고 있는 이 자리가 아버지와 엇갈리는 자리가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아버지를 정면으로 대하여 당신이 분부하시는 말씀과 당신이 내리시는 사명을 받을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기를 진실로 바라면서 아버지 앞에 부복하였사오니. 마음으로 현현하시옵고 몸으로 나타나시옵소서. 그리하여 당신이 저희와 인연을 맺지 않을 수 없어서 간곡한 마음으로 찾아 나오시던 역사적인 사정을 토로하시옵소서.
섭리노정에 있어서 당신이 기뻐하실 수 있는 아들과 딸의 인연을 굳건히 맺을 수 있는 자랑스런 이 시간이 되었으면 하옵니다. 또한 저희들이 뜻을 바라보고 나오는 과정에 있어서 생애를 두고 믿을 수 있고 기뻐할 수 있는 이 아침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오니, 긍휼히 보시고 살피시옵소서.
죄지었던 자기 자신을 슬퍼함과 동시에 자신의 거듭되어 나온 과거가 아름답지 못하다는 것을 알면 알수록 당신의 거룩함을 나타내고 당신의 무한하신 사랑을 대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한 자신인 것을 깨닫게 되옵니다. 이러한 자신을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오로지 당신의 사랑과 당신의 긍휼과 당신의 영광이 같이하여 주시옵기만을 진실로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당신을 찾아 여기에 모인 개개인의 마음과 몸은 비록 다를지라도 그 목적은 같을 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저희들 앞에 명령하시는 사명 분야는 같을 줄 알고 있사오니, 저희들이 당신의 그 명령에 순응할 수 있는, 혹은 복종할 수 있는, 더 나아가 아버지 앞에 산제물로 바쳐 드리는 거룩한 이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그럴 수 있는 이날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당신이 긍휼히 보시옵길 원하옵니다.
당신이 이 세계를 살펴보실 때에 당신의 마음에 잊을 수 없는 곳이 어디며, 발걸음을 재촉하여 찾아가 머물고 싶은 자리가 어디냐 할 때에, 수많은 교단들은 자기들이 믿는 그 자리, 수많은 교인들은 자기들이 있는 그 자리라 하지만, 진정으로 아버지를 모실 수 있고 아버지와 상봉할 수 있는 자리는 아버님이 잘난 자리에서 찾아오시는 것이 아니라 저희 아들딸들이 잘난 자리에 서 가지고 아버님이 기뻐할 수 있는 내연의 심정을 갖추는 자리인 줄 아옵니다. 그런 심정을 갖지 않고서는 아버님이 찾아오실 수 있는 방향을 갖출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저희 생애에 언제 아버지와 상봉하고, 언제 아버지의 품안에 품기며, 언제 아버지와 더불어 일하고, 언제 저희가 아버지와 함께 싸워 승리의 개선가를 드높이 부르겠는가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에 아버지와 같이 있을 수 있는 자리를 알지 못하는 불쌍한 자녀들이오니 이들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가 저희들을 협조해 주시는 사실을 고맙게 생각하고, 명령하시는 방향을 향하여 행군할 수 있는 전열을 갖추어야 할 것인데도 불구하고 늘 아버지의 사정은 제쳐 놓고 자기의 사연과 자기의 사정에 얽매여 자기를 중심삼고 정병 되기를 바라는 부족한 모습들이었던 과거를 용납하시옵고, 현재의 입장을 제거시키시어 당신의 일체의 요건이 저희 자신들에게 연락 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당신의 사랑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아들딸이 되게 해주시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오니, 아버지, 버리지 마시고 찾아와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이제 아버지께서 저희 각자에게 '네 자신이 아버지가 원하는 곳에 가겠느냐. 아버지가 내린 거룩한 사명을 책임지겠느냐'고 심각한 자리에서 묻게 될 때에, 당신이 심각한 것 이상 심각한 자리에서 사무친 심정을 가질 뿐만 아니라 실천하고 남음이 있을 수 있는 자신이 되겠다며 아버지와 상봉하는 시간을 기꺼이 대하고, 아버지께서 명령하시는 말씀을 받아 기꺼이 진행시켜 나갈 수 있는 당신의 자녀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이시여! 이 아침 전국에 널려 있는 자녀들이 서울 이곳을 바라보면서 기도하고 있사오니, 그 곳곳마다 당신의 사랑의 마음이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가정을 뒤에 두고 나가 있는 어린 딸들이 남한 각지에 널려 있사옵니다. 이들이 이와 같이 나가 움직이는 것은 자기 일신의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요, 자기들이 요구하는 그 무엇을 찾아 나선 걸음이 아니라 민족과 뜻을 위한 걸음임이 틀림없다는 것을 아시는 아버지여, 늘 부족한 인간이요, 언제나 하다가 지치는 인간인 것을 생각할 때, 반 년 세월의 과정을 거친 그들의 심정에 당신을 위한 정열이 더욱 복받치게 하여 주시옵소서. 당신 앞에 효성의 도리를 다하는 것을 보람있는 생애의 한 토막으로 알고 당신 앞에 바쳐 드릴 수 있는 거룩한 이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들을 일선에 내세우고 바라보고 있는 남편과 자식들이 더더욱 아버지와 가까운 자리에 서야 할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한 자리에 서게 된다면 그 딸이 얼마나 불쌍하겠습니까? 이것을 아시는 아버지여, 그들의 가정을 지키시고, 그들의 아들딸을 지켜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들이 이와 같은 길을 가는 것은 이 1971년도에 지금까지 세계에 없었던 하나의 사건을 제시하여 이 민족이 망할 수 있는 운세를 가로막기 위한 것이요, 인류가 가야 할 십자가의 길을 탕감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자리에 친히 같이하시어서 이들의 마음을 모으시옵고, 그들이 가는 방향을, 아버지, 수습하시옵소서. 이들을 하나의 승리의 귀결점으로 당신께서 이끌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그들이 기도하고 땀 흘려 활동하는 모든 것이 당신의 마음과 당신의 뼈속에 기억된 바 되게 하시옵소서. 이 민족이 당신께서 잊을래야 잊을 수 없고 기억치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자리에 세워지기를 바라는 이들이오니, 아버지께서 이들이 하는 일을 대하시어서 이 기간이 이들의 생애노정, 혹은 섭리도상에 있어서 잊을 수 없는 자랑의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고, 자랑의 기틀이 되게 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시간 여기에 운집한 자녀들을 친히 맡아 주시옵고, 세계에 널려 있는 당신의 자녀들 위에도 이 시간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이 한국을 바라보며 밤낮 만나기를 고대하는 그들의 마음을 긍휼히 보시옵고, 당신을 생각하는 그들의 마음에 당신의 은사와 당신의 위로가 친히 같이하시옵소서. 세계적인 사명을 감당하는 데 있어서, 살아 있는 아버지를 증거하고 기뻐할 수 있는 아버지의 심정을 소개하는 데 있어서 충성을 다하는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곳곳마다 당신께서 현현하여 지도하여 주시옵기를 재삼 부탁드리옵니다. 이 시간 이후의 일체를 맡아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참부모님의 이름 받들어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뜻을 대해 나가는 신자들에게 있어서는, 신앙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하나님과 어느 한 때에 상봉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자기에게 어떤 소망이 있을 때 그 소망의 대상을 만난다는 사실은, 그 소망하는 내용이 크면 클수록 귀중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바라는 소망이 일대(一代)뿐만이 아니라 세계적인 소망일 때에는 그 소망의 주체 되는 것, 혹은 그 소망의 주체 되는 분을 만나는 시간은 역사적인 시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 나라를 중심삼고 볼 때도, 그 나라가 소망하는 어떤 것, 소망하는 어떤 분, 즉 그 나라 전체에 있어서 역사적인 분을 만나는 그 시간은 역사적인 운세 앞에 있어서 가장 귀한 시간이 될 것입니다. 세계를 중심삼고 볼 때도 이 세계가 어떤 목적을 향해서 움직이고 있는데 그 목적을 성사할 수 있는 한 곳, 그 목적을 성사시킬 수 있는 한 분을 만난다는 것은 세계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상봉할 수 있는 시간을 잘 맞느냐 못 맞느냐 하는 것이, 자기 앞에 혹은 전체 앞에 그 기회를 유리하게 맞느냐 못 맞느냐 하는 문제를 결정합니다. 잘 맞고자 하는 것을 소망하고 나가는 것이 사람들의 마음이겠지만 잘 맞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 때를 맞는 데 있어서, 찾아오는 그 기회가 국가적인 기준이라면 국가로서의 운명길을 지내 나오는 과정에, 혹은 그 나라가 거쳐 온 여러 과정에 천운이 있었다면 그 천운을 맞은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 때가 열 번이 있었다면, 그 열 번 찾아오는 운세를 그 나라가 얼마나 적합하게 맞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열 번 가운데에서 여덟 번을 잘 맞았다면 잘 맞지 못한 두 번은 슬픔으로 남아졌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새로이 찾아오는 한 때를 맞는 데 있어서 하나님이 바라시는 소원의 기준은 과거에 두 번 맞지 못하였던 것까지도 탕감시켜 놓고 역사시대에서 맞이했던 어떤 때보다도 더 가치있게 맞이하는 것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바라시고 과거에 하늘의 운세를 만나지 못하였던 그 민족 앞에 다시 찾아올 것이 아니냐? 과거의 어느때보다도 더 잘 맞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이 다시 찾아오셨는데도 불구하고 또 못 맞게 될 때에는 거기에 과거 열 번 가운데 두 번 맞았던 그 슬픔까지 플러스시켜 가지고 그 슬픔과 더불어 돌아설 수밖에 없을 것이 아니냐? 이런 문제를 우리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복귀섭리를 추진해 나오는 하나님의 뜻을 중심삼고 역사과정을 미루어 볼 때에, 하나님은 어느 한때 인간과 상봉하기 위해 찾아 오시지 않은 때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개개인이 자기의 선조가 지내온 역사적 과정과 전통이 다름에 따라서 현실에 처해 있는 입장이 전부 다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의 천태만상의 사연을 중심삼아 가지고, 개개인의 성품을 따라 사망권내에 있는 인간들을 부활권내로 돌이키기 위한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찾아오실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소원의 목적을 감당하고 그 뜻 앞에 일치될 수 있고, 하나님이 바라시는 소원 앞에 사랑받을 수 있고, 칭송 받을 수 있는 입장에 서야 합니다. 그런 환경, 혹은 그런 자리에서 그분을 맞아들이게 될 때에 하나님은 우리를 기쁨으로 대하실 것입니다. 기쁨으로 대해 가지고 기쁜 사연으로 연결하고 기쁨 가운데서 끝을 맺고 기쁨으로 남아지게 될 때는, 만났다가 헤어지더라도 다시 만날 수 있는 마음, 다시 기쁨으로 만나고자 하는 소원을 가지고 헤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지금 우리를 만난 자리보다도 더 가치적인 자리를 중심삼고 다시 만나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돌아설 것이며, 그런 기쁜 자리에서 상봉의 시간을 가진 우리 자신들도 지금 하나님을 만났던 그 이상의 기쁨의 자리를 미래의 소망으로 남기고 헤어질 것이 아니냐? 이렇게 헤어졌던 입장에서 다시 만나는 자리는 어떤 자리가 되겠느냐? 하나님은 그 자리가 옛날보다 낮은 자리이기를 원치 않으실 것입니다. 그 자리가 보다 높은 자리이기를 바랄 것이고 가치적인 면에서도 옛날보다 그 내용이 확실한 자리, 혹은 보다 높고 보다 귀한 자리이기를 바랄 것이 아니냐?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 우리가 일생을 살아 나가면서 어떤 소망, 혹은 어떤 뜻을 품고 나가는 데 있어서 그 뜻의 때와 혹은 그 뜻을 중심삼은 어떤 사람을 만나는 자리가 자기가 바라 나오던 소원과 일치되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요, 거기에서 일치되어 가지고 헤어지게 될 때에는 다시 새로운 목적을 중심삼고, 새로운 사명을 중심삼고 헤어질 수 있는 자리에 서야 된다는 것입니다.
처음에 만났을 때 그 이하의 내용을 가지고 헤어지게 된다면 누구도 다시 만날 수 있기를 원치 않을 것입니다. 다시 만날 수 있는 시간은 멀어지게 될 것이 틀림없습니다. 기쁘게 만났다 헤어진다 하더라도 헤어지는 그 자리가 내일의 소망을 가일층 다짐할 수 있고, 더 높은 소망의 터전을 소원하면서 기쁜 마음으로 헤어지는 자리가 되어야만 역사적 발전이 제시되는 것이요, 우리가 소망하는 기쁨의 내용이 남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렇지 못하게 될 때에는 상봉의 시간을 맞지 않았던 것보다 못하고 상봉의 장소를 맞지 않았던 것보다 못하다는 것은 두말할 바 없습니다. 이것은 개인을 중심삼고 그러할 것이고, 가정을 중심삼고 그러할 것이며, 대한민국이면 대한민국을 중심삼고 그러할 것입니다. 세계면 세계를 중심삼고서도 그러할 것입니다.
천태만상의 선수들이 운동장을 달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인간들이 순차를 달리해 가지고 어떤 목적을 향해서 가고 있습니다. 자기 나름의 어떤 소원성취의 한 때와 소원성취의 한 곳을 향하여 움직여 나갈 것입니다. 그러면서 소년 시대를 지내곤 청년 시대를 지내고, 장년 시대를 지내고, 노년 시대를 거쳐갈 것입니다. 이렇게 갔던 조상이 선하였으면 그 후손이 선한 바톤을 이어받아 가지고 갈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연결된 역사적 사연들을 품고 그 무엇인지 모르게 전진일로에 서기를, 혹은 발전을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희망의 길을 가겠다고 하는 것이 오늘 인류의 군상들이 아니겠느냐?
인류가 모여 있는 곳에는 나라도 있습니다. 현재의 입장에서 보면 선진 국가도 있을 것이요, 후진 국가도 있을 것입니다. 또 거기에는 수많은 종파도 있을 것이요, 수많은 종파 가운데에 수많은 종교인도 있을 것입니다. 수많은 종교인들 가운데는 역사의 배경과 문화의 배경이 다르고 환경의 여건이 다른 입장에 서서 고민하면서 소망을 품은 사람도 있을 것이고, 기뻐하면서 그 소원을 품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바라보게 될 때에, 세계 인류 개개인이 공히 찾아야 할 하나의 목적은 '이것이다' 할 수 있는 어떤 표준이 있을 것입니다. 혹은 세계의 수많은 가정들은 '이렇게 가야 된다' 하는 표준이 있을 것입니다. 종족이면 종족, 혹은 민족이면 민족, 국가면 국가는 '이렇게 가야 된다' 하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모든 국가들이 합한 세계도 '기필코 이 길을 가야 된다'고 하는 그런 결정적인 한 코스가 있을 것입니다.
이 코스는 수많은 지류(支流)가 모아져서 하나의 본류(本流)를 이루어 그것이 대해(大海)로 들어가는 어귀에 이르게 될 때에 전체가 한 곳으로 흘러 내려가는 코스와 마찬가지입니다. 한 곳으로 흘러가는 그 코스에서는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가야 된다고 하는 절대적인 것만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지류의 입장에서는 다릅니다. 환경이 다른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남쪽으로 흐르지 못하면 북쪽으로 흐를 때도 있을 것이요, 동쪽으로 흐를 때도 있을 것이요, 서쪽으로 흐를 때도 있을 것입니다. 지류는 이처럼 그 환경에 따라 동서남북 사방으로 방향을 달리할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최후에 대해를 향해 들어가는 어귀에 이르러서는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일치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의 방향을 갖춘 강줄기와 대해가 맞부딪치는 그 자리, 역사적 배후나 사정이 천태만상으로 다르다 하더라도 대해와 맞부딪치는 상봉의 자리에서는 한 모양이요, 한 형태로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과거의 소원과 지금의 소원이 다르겠느냐? 혹은, 그 소원이 북으로 남으로 동으로 서로 왔다갔다할 수 있겠느냐? 설령 그렇게 갔다 하더라도 그것은 본래 그렇게 가야 된다는 그 원칙적인 방향에 일치시키기 위해서 하신 것이 아닙니다. 환경을 피해 가고, 처해 있는 입장을 넘어가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지 목적은 아닙니다. 원칙적인 길을 가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방향이지 정상적인 방향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야 됩니다.
그러면 개인이 바라는 최고의 자리와 민족이 바라는 최고의 자리와 세계가 바라는 최고의 자리가 각각 다를 수 있겠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것은 다를 수 없습니다. 천이면 천, 만이면 만, 과거에 위대했던 사람이나 현재에 유명한 사람 누구를 막론하고 인간이 바라는 기준은 다 마찬가지입니다. 최고의 자리를 바랄 것입니다. 최고의 자리를 바라야 되고, 또 그 바라는 기준이 서로 틀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틀리다면 강물로 말하면 바다로 들어갈 수 있는 강물의 입장이 못 되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어떤 환경에 처하더라도 그 환경을 극복해 가지고, 즉 그 환경에 내가 순응할 것이 아니라 그 환경을 빨리 넘어서 가지고 최후의 한 점에서 세계 운세를 맞고, 국가의 운세, 민족의 운세, 혹은 가정의 운세를 맞아야 됩니다.
운 중에는 가정의 운도 있고, 개인의 운도 있을 것입니다. 아침에 집을 나갔다가 저녁에 돌아오면서 '아, 오늘은 운이 좋았다. 오늘은 재수가 있었다' 이런 말을 하잖아요? 그러나 아무리 재수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 재수 있었던 자체만을 보면 좋을지 모르지만 전체를 두고 볼 때에는 그 반대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오늘 이 시간에 좋다고 하는 것이 내 생애에 있어서 영원히 자랑할 것이 못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내 개인의 생애노정에 있어서 처음 맞는 기쁨의 날이요, 자랑의 한 날이라 하더라도 역사의 방향에 미루어 보고, 역사의 목적과 부합시켜 볼 때에 과연 기쁠 수 있겠느냐 할 때에, 기쁠 수 없는 일이 태반일 것입니다. 방향이 다르다는 거예요.
지류로서 동서남북 사방으로 흐를 수 있는 환경의 여건을 가졌다 하더라도 동서남북 사방 가운데에 삼방(三方)은 부정받아야 할 입장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최후에 가야 할 방향은 하나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 하나인 주류의 전통은 어디로부터 연결될 것이냐? 지류 중에는 흘러오면서도 주류에 가까운 방향을 따라 흘러오는 지류가 있을 것입니다. 그 지류 가운데에서 제일 가는 지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럴 것 아니예요? 대해로 들어가는 방향과 일치되어 가지고 흘러 나가는 주류가 있을 것입니다. 지류 가운데에 주류가 있을 것입니다. 그 주류가 전통적 내용을 연결시킬 수 있는 하나의 주체적인 표준이 될 것입니다.
개인이 가는 데 있어서도 그런 주류와 같은 어떤 형태, 즉 표준적인 형태와 만나게 되는 때가 있을 것입니다. 개인에 있어서는 그 주류를 만날 수 있는 때가 대해로 들어가는 때인 것입니다. 자기가 바라는 어떤 큰 희망을 가졌다면 그때가 그 희망이 이루어질 수 있는 출발점이 될 수 있는 것이요, 계기점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에, 그런 주류와 상봉할 수 있는 지류가 있다 할 때에, 그 지류가 있는 자리는 어떤 자리여야 되느냐? '그 자리는 일생동안 내가 따라갈 수 있는 자리다. 찬양할 수 있는 자리다' 이렇게 찬양하며 갈 수 있는 자리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올바로 간다는 것을 알고 가는 사람들이 있느냐? 그것을 안다는 것은 힘든 것입니다. 만날 때도 모르고 만나고, 또 만나 가지고 그렇게 따라 흘러가면서도 그 흘러가는 자리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류역사는 지금까지 미지의 과정을 거쳐왔고, 또 미지의 목적을 향해 가고 있는 서글픈 역사인 것입니다. 이렇게 역사과정에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숱한 고빗길을 거치면서 방향을 맞춰 대해까지 나온 것입니다. 그 흘러온 곡절이 길면 길수록 흘러나오는 과정에서 인연되었던 때, 인연 되었던 사연, 그 기회, 상봉의 때는 가치 있는 것입니다. 그 때를 얼마나 가치 있게 느껴 봤고, 그 자리에서 얼마나 기뻐했고, 그 때를 만나는 것에 대하여 얼마나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대해 보았느냐 할 때, 그것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여러분 자신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복귀섭리를 추진시켜 나오는 하나님의 뜻을 중심삼고 볼 때에, 하나님은 인간이 알든지 모르든지 역사를 어떤 주류의 방향에 일치시켜 나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종교인들은 종교의 형태를 갖추어 가지고 지류의 사명을 대행하면서 하나의 주류의 권으로 들어가는 어귀를 향하여 흘러가는 그런 입장을 지내 나왔을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문제되는 것이 무엇이냐? 어떠한 종교가 있으면 그 종교가 가야 할 길이 어떤 길이냐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처한 지류가 어떤 방향으로 간다는 것을 알고 가는 종교인은 행복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가고 있다. 본래 남쪽으로 가야 하는데 이렇게 동으로 조금 기울여서 가는 것이다. 그러니 동쪽으로 가서 되돌아가야 된다' 하는 이런 입장에 있는 것을 모르고, 가는 길을 통 모르고 곧장 간다고 생각하면 방향이 어긋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이렇게 가는 길을 모르고 있습니다. 인류역사를 한 방향으로 하나의 형태로 규합해서 하나의 세계를 향한 새로운 시대, 새로운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권내로 이끌어 가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그 방향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들이 그 방향을 모른다면, 다시 말하면 남으로 가야 되는데 동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면 이 방향을 누가 돌릴 것이냐? 이것을 모르고 가는 개인과 종족을 그냥 내버려두면 가다가 파탄되고 말 것입니다. 막혀 버릴 것입니다. 그러니 되돌아와야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정성들여 했던 일을 그만두고 되돌아와 가지고 다시 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도 그렇잖아요? 정성을 들여 했는데 안 되었다면 또 정성들여 그것을 하고 싶은 마음은 없을 거예요. 이러한 환경에서 사탄은 늘 인류가 정성들이며 가는 길을 어떻게 하든 뚝뚝 잘라 버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정성들였던 사람이 돌아서 와 가지고 다시 정성들여야 되겠다고 할 때에 처음보다 더 정성을 들이면 모르지만 그만한 정성으로는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 그 이하의 정성을 들여 가지고 출발하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곁길로 갔다가는 열 번이면 열 번 다 돌아서고 싶은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걸 알아야 돼요. 사람 마음이 그렇잖아요? 백만큼 정성들였던 것이 전부다 깨져 나갔다, 혹은 안 됐다, 틀렸다 하게 되면 또 백만큼 정성을 들여서 죄겠어요? 안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다시 출발을 하려면 백 이상의 정성을 들여야 됩니다. 백 이하의 정성을 들여 가지고는 안 되기 때문에 백 이상의 정성을 들여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안 되는 줄 알면 백 이상의 정성을 들일 수 있는 그 무엇이 있어야 합니다. 정성을 들이려면 그 이상의 무엇을 발견할 수 있는 입장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그 정성은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귀섭리 과정에 왔다 갔던 선조들을 두고 볼 때, 하나님은 역사과정에서 그 시대를 대표해서 어느 선조를 세워 가지고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과 상봉시켜서 지긋지긋한 회생을 치르게 해 가지고 그 목적을 중심삼고 나가게 했습니다. 그가 그렇게 뜻을 중심삼고 나가다가 틀어지게 되면 하나님은 그 공을 봐서라도 그를 다시 들어 써야 할 텐데도 불구하고 왜 그를 다시 들어 쓰시지 않았느냐? 이런 문제가 여기에 귀결됩니다. 과거에 백만큼 정성들인 사람이 실패하여 뜻의 목적을 이루지 못한 자리에 서 가지고는 백 이상의 정성을 들일 수 있는 기원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무엇으로부터 그 이상의 자극을 받아 가지고 새로운 결심의 내용을 반영시킨 사람이 되기 전에는 반드시 그 길에 다시 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역사적인 사실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렇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정성들여 가는 길에 있어서 어떤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냐? 정성들이는 것으로 끝내는 사람이 아니라, 나는 저 먼 세계를 향하여 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소망하는 곳이 멀면 멀수록 불행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행복한 것입니다. 기독교가 그렇게 해서 발전해 나왔습니다. 소망하는 곳이 멀면 멀수록, 고빗길이 많으면 많을수록 한 단계 한단계 넘어가기가 지루하지만 정성을 들여서 가야 됩니다. 정성을 들였는데도 안 되면 거기에서 쓰러져 망할 것이냐? 아닙니다.
하나님은 복귀섭리를 하시는 데 있어서 개인적인 시대가 지나면 가정적인 시대를 열어 놓으십니다. 개인적인 시대에 있어서 그 뜻을 이룰 수 있는 상봉의 때를 갖지 못했다 하더라도 가정적인 시대가 있다는 것입니다. 가정적 시대에 가서는 개인적 시대보다 더 정성들여야 됩니다. 가정적 시대에서 그 때를 맞지 못했다 하더라도 종족적 시대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내용을 알고 그러한 소원을 갖고 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일대에 망하지 않습니다. 망하더라도 그런 사실이 틀림없이 있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자기의 사랑하는 후손에게 '너는 이렇게 가야 된다' 하는 유언이라도 남겨서 바톤을 넘겨 줘 다시 출발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고 가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 통일교회 교인들이 가고 있는 길과, 인류들이 가고 있는 길과, 불신자들이 가고 있는 개개인의 길은 전부 다릅니다. 그러니 하나의 역사적인 주류의 형태를 따라가야 됩니다. 그 주류를 따라 가는 데는 과거로부터, 높은 데로부터, 하나님이 계시다면 하나님으로부터 흘러 나오는 그 주류를 따라가야 됩니다. 그렇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역사의 기원에서부터 흘러 나온 역사적인 모든 사연을 묶어 가지고 미래의 세계적 소원의 때까지 연결시켜 주는 주류의 형태가 섭리도상에, 혹은 하나님의 뜻을 바라는 역사의 배후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과 상봉하려니 주류는 역사시대로부터 현재를 거쳐 미래까지 연결될 수 있는 그런 일치점을 찾아 나가야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현시대에 우당탕 뛰어나온 사상 가지고는 안 됩니다. 역사시대의 인연을 거쳐 나온 바탕이 있어야 역사적인 전통을 전체적인 면에서 대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 나온 것 가지고는 안 됩니다. 여러분, 미국을 보면 말이예요. 미국 사람들은 구라파 사람들한테 꼼짝 못합니다. 미국이 아무리 선진국가라고 하더라도 미국의 역사가 얼마가 되느냐 하면 3백여 년밖에 안 됩니다. 아무리 살기가 좋다고 해도 역사가 3백여 년밖에 안 됩니다. 그들이 자랑할 수 있는 것이 구라파의 문명을 이어받아 가지고 그 터전 위에서 이루어진 것들이기 때문에 그 터전을 빼면 아무 것도 아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전통의 기원이 확고부동한 터전을 갖춘 그 터전 위에서 역사와 일치된 자리에 목적성사의 기반이 세워지면 그것은 역사가 보증하는 것이요, 이 시대가 보증하는 것이요, 미래가 입증해야 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통일교회는 하나님의 심정을 들고 나오고 있습니다. 창조시대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심정과, 타락시대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심정과, 복귀시대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심정과, 복귀완성시대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심정이 다 다릅니다. 기독교회에서는 하나님은 구원하시는 하나님, 언제나 기뻐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 정도밖에 모르고 있습니다. 통일교 회에서는 기뻐해야 할 하나님이 소망하던 것을 이루지 못하고 슬퍼하시는 하나님이요, 고통받고 있는 하나님이요, 그런 가운데서도 싸우고 개척해 나오시는 하나님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런 인연을 중심삼고 볼 때, 우리가 인연된 이 인연이 망하는 인연이냐? 이런 인연을 맺고 있다는 사실이 나쁜 것이냐 할 때, 이 인연은 하늘의 인연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통일교회의 주류사상이 하나님의 주류사상과 일치될 수있느냐? 천년 전, 혹은 몇천년 전, 구약시대의 아벨시대, 타락하기 전 아담시대, 창조시대의 하나님까지 올라가 가지고 제일 꼭대기의 자리에까지 일치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때로는 동으로 가고 서로 가고 별의별 노정을 거쳤지만, 그 모양이 그렇게 흘러갔지만 세상 사람들이 가는 길이나 역사를 엮어 온 수많은 도인들, 혹은 수많은 성현들이 간 길보다 못한 것이 아니라 그 길보다도 더 곧다는 것입니다. 짧다는 거예요. 그래야 주류가 되는 것입니다. 길어서는 주류가 안 됩니다. 짧아야 주류가 되는 것입니다. 모든길 가운데에서, 흘러나오는 길 가운데에서 짧은 길이어야 됩니다. 그럴 게 아니예요? 주류는 가까운 길, 직선에 가까운 길이어야 됩니다. 직선이 못되면 그 직선이 못된 길 가운데에서도 제일 짧은 길이어야 됩니다. 휘었더라도 제일 짧아야 됩니다. 제일 짧은 길을 거치지 않고는 직선으로 가지 못합니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 일생을 하나의 지류와 같은 입장에서 생각해 볼 때, 만나고 싶은 주류에 언제 합류되느냐? 이게 문제라는 거예요. 내가 흘러가다가 언제 주류에 연결될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계의 끝날이 되어 하나의 세계를 표방하는 이 때에 있어서, 세계 만민이 하나의 평화의 세계를 모색해 나가는 이 때에 있어서 이 곳이 대해의 입구, 대해의 어귀가 되어 세계 전체를 묶어야 됩니다. 무엇을 중심삼아 가지고 묶느냐? 주류를 중심삼아 가지고 묶어야 합니다. 이렇게 묶어지지 않고는 대해로 흘러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한때가 있어야 합니다.
종래의 문화도, 역사도, 종교도, 사상도 전부 다 묶어져야 됩니다. 묶어지는 데는 중심적인 사상으로 묶어져야 됩니다. 하나님이 가시는 희생의 노정과 고충의 노정을 중심삼고 하나로 묶어져 가지고 흘러가야 됩니다. 흘러 들어가는 데는 누가 앞서야 되느냐? 주류사상을 책임진 무리가 앞서야 됩니다. 그런 무리가 선두에 서야 합니다. 그래야 될 것 아니예요? 길이가 짧은 길을 가는 사람이 앞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통일교회가 그런 사명을 위해 나간다고 하면 통일교회는 앞서 있어야 됩니다. 역사의 한가운데에서 앞서가야 됩니다. 뒤따라가면 망합니다.
통일교회 교인이 역사적인 하나님, 현시대적인 하나님, 미래적인 하나님이라는 이런 명사를 안다는 사실은 놀라운 것입니다. 하나님을 중심삼고 하나님의 입장을 아는 데 있어서는 누구보다도 잘 아는 입장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누구보다도 가까운 입장이라는 것입니다. 가까운 입장에 있다는 것은 주류에 속할 수 있는 거리가 가깝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류와 만날 수 있는 거리가 가까운 입장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입장에 선 여러분들은 상봉의 인연을 가해 가지고 하나의 큰 강을 이루어 대해로 들어가는 시점에 와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역사의 흐름 가운데서 민주와 공산의 두 세력이 맞부딪치고 있습니다. 이 둘이 흘러와서 한 곳에서 부딪치고 있습니다. 소용돌이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두 흐름이 합세하는 곳에는 소용돌이가 치게 되어 있습니다. 오른쪽에 있는 것이 왼쪽으로 가고 왼쪽에 있는 것이 오른쪽으로, 자기 위치를 뒤틀면서 소용돌이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부작용이 벌어집니다. 서로서로 엇갈립니다. 그래서 그 환경이 뒤집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돌다가 어떤 주류의 방향을 따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방향을 거쳐 나가는 데 공산세계의 방향을 거쳐 나가느냐, 민주세계의 방향을 거쳐 나가느냐? 그런 문제가 벌어질 것입니다. 방향을 거쳐 나가는 데 있어서 주류에 가까울 수 있는 방향, 주류가 가는 목적의 방향과 일치되어 수습해 가야 합니다. 그 출발점을 동기로 하여 환경을 수습해 나가 하나의 흐름을 이루어야 될 것이 아니냐? 이런 문제를 생각해야 됩니다.
그러면 오늘날 그러한 세계를 중심삼고 통일교회를 볼 때, 민주세계와 공산세계가 부딪치는 이런 사회 환경에서 우리는 그 방향을 다른 곳으로 끌고 나왔습니다. 여기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다른 곳이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그 목적하는 바는 하나님이 가야 할 곳, 뜻과 마주칠 수 있는 그 곳이 되어야 됩니다. 그런 것을 주장하는 단체면 단체, 국가면 국가, 혹은 그러한 세계적인 사상을 가진 단체가 있다면 그 단체가 역사를 지배할 것입니다. 그것이 역사의 표준이 될 것이고, 역사의 기준이 될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역사의 목적을 완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가 갈라져 있듯이 한국도 남북으로 갈라져 있습니다. 엇갈려 있습니다. 아시아가, 나아가 전세계가 여기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종교계를 두고 보면 외적인 면에는 문제가 없지만 내적인 면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통일교회를 가만히 두고 보면 심상치 않다는 거예요. 통일교회가 역사적으로 내려오는 기성종교와 부딪쳐 가지고 기성종교가 깨지느냐, 통일교회가 깨지느냐? 어떤 것이 주류의 자리를 대표해서 앞서느냐? 아무리 봐도 기성종교는 그럴 수 없습니다. 두 흐름이 부딪치게 될 때, 보다 강한 흐름이 키를 잡아 가지고 나가는 길이 있다 할진대, 그 흐름이 비록 짧더라도 새로운 길을 모색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 한국의 종교계는 뒤넘이치고 있는데, 혼란한 풍토를 조성했는데 그 가운데에서 드러날 수 있는 하나의 방향을 갖춘 교회가 통일교회가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통일교회는 해방 이후에 나타나서 지금까지 시련과 갈등을 겪으며 부딪쳐 나왔습니다. 그렇지만 결국 통일교회에는 종교계면 종교계에 그래도 새로운 차원의 소망의 그 무엇을 안고 있다고 볼 수 있는 풍토권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통일교회가 방향을 잡아 가는 와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방향을 잡고 그 방향을 향하고 있고, 이미 신앙적인 면에서는 자랑할 수 있다고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렇게 나가는 방향이 세상 사람들의 방향과 같을 것이냐? 같은 방향이 아닙니다. 같지 않습니다. 밥을 먹을 때에도 상에다 올려 놓고 먹어야 행복한데, 이 길을 가는 사람은 찬이고 뭐고 그저 밥만 먹어도 행복하다 할 수 있어야 됩니다. 남과 같이 뭐 안팎으로 전부 다 갖춰야 행복한데, 달랑달랑하니 혼자 다니는 나그네 신세가 되더라도 행복할 수 있어야 됩니다.
자기 자신을 중심삼은 입장은 그러하지만 통일교회가 가는 입장은 다릅니다. 차원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돈벌기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니고 교회를 위해 사는 사람이라고 해야 합니다. 이렇게 가는 것이 자기 자신을 중심삼고 볼 때는 꺼꾸로 가는 것 같지만 길을 가는 데 있어 서는 더 빨리 바로 가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러니까 어디로 가야 되겠습니까?
이런 점에서 오늘날 이 세계의 사조와 종교를 훑어보게 될 때, 오늘날 통일교회가 뒤넘이치며 가는 방향과 현재 갖추어진 내용을 두고 볼 때 우리는 소용돌이치는 그런 와중에 있는 민족 앞에 하나의 방향을 제시해 가지고 이래야 된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시아는 이렇게 가야 된다. 그렇지 않으면 살 길이 없다'고 깃발을 들고 주장할 수 있는 입장인 것입니다. 세계는 이렇게 해야 살 길이 있지 그렇지 않으면 살 길이 없다고 당당히 주장했을 때 하나님께서 '옳다, 그렇다'고 하실 수 있게 되면 그 사람은 틀림없이 통일의 한 살림꾼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될 거 아니예요?
이제까지 사연을 한번 쭉 펴 놓게 되면 그 내용이 전부 다 다를 것입니다. '어떤 역사를 거쳐왔느냐, 그것이 좋았던 역사냐, 슬펐던 역사냐?' 하게 될 때 그 역사가 좋았건 슬펐건간에 사연이 그 가운데에 전부 다 반영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어떤 결과로 나타났느냐? 전체의 사연을 합해 가지고 나쁜 결과가 나오게 된다면 그것은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연을 통틀어 보게 될 때 나빴던 사람도 좋고 좋았던 사람도 좋고, 저 사람도 좋고 이 사람도 좋아야 합니다. 그것은 너도 바라는 것이고 나도 바라는 것이고 여자나 남자나, 나이 많은 사람이나 나이 적은 사람이나를 막론하고 인류 전체가 바라는 것이어야 합니다. 사람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바라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슬펐던 모든 것이 좋은 것에 접할 수 있는 찬스를 맞을 수 있지 않겠느냐? 그 자리는 슬펐던 사람들이 기쁠 수 있는 자리가 되는 것이고, 기뻤던 사람은 더 기쁠 수 있는 자리가 되지 않겠느냐? 슬픔으로 출발한 역사가 기쁨으로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는 신호를, 혹은 그러한 때를 갖지 못할 적에는 비운의 역사로 출발한 인류는 행복한 새로운 세계로의 출발을 할 수 없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때가 우리 앞에 다가오고 있습니다.
만일에 처녀로서 세계 대통령이 된 사람이 있다면 그녀는 여자로서 세계를 대표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그 처녀가 시집가는 날 여자들이 '내가 저 입장이 되어야 할 텐데 저게 저게 뭐야' 하면서 반대하겠어요? 반대하지 않을 것입니다. 찬양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를 대표해서 저런 여자가 나와 가지고 여자의 권위를 자랑할 수 있다는 것이 참 놀랍도다'고 찬양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그렇게 되지 않았다고 '아이고 원수야. 우리 대한민국 사람이 아니고 딴 나라 사람이니 안 되겠다'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나'를 중심한 관념을 어떻게 제거하느냐가 문제입니다. 그때에는 인류를 대표한 자리에서 맞이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때가 있을 것입니다. 대한민국에도 그런 때가 있을 것입니다. 이 나라, 한민족을 중심삼아 가지고 흘러가는 지류와 같은 입장에 있던 대한민국이 세계의 대민족권의 흐름을 중심삼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때에는 거기에 어울려 가지고 세계를 수습해서 빨리 빨리 전체가 화합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입장에 서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주류가 되는 것입니다.
미국 사람들이 세계를 개척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이냐? 그 사람들의 마음이 그렇다는 거예요. 그들은 남의 나라에 가더라도 남의 나라의 나쁜 것을 꼬치꼬치 캐는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을 연구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그 나라 그 민족이 급속히 발전할 수 있는 내적인 요인인 것입니다.
'내가 아니면 안 돼!' 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기독교에선 '아이구, 장로가 아니면 안 돼. 선교사가 아니면 안 돼' 그런다는 거예요. 천태만상의 별의별 사연이 있는 것을 볼 때 송장 떼거리가 굴러 나오더라도 그것을 붙안고 같이 흘러 나가야 할 판국에 '이것을 내가 해야 돼' 하며 바둥거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다가는 한 발자국도 못 가고 망하는 거예요. 망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통일교회는 대해로 흘러 들어갈 수 있는 큰 강 줄기의 입장이 아니냐? 앞으로는 그렇게 될 거예요. 사탄까지도 해방시키자는 거라구요.
이런 관점에서 우리 통일교회가 해야 할 사명을 두고 볼 때, 우리 통일교회가 그야말로 앞으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관문을 통과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때가 있을 것 아니예요?
종적인 수천년 역사를 횡적으로 탕감복귀하려면 거쳐온 그 모양으로, 7년이면 7년, 7개월이면 7개월, 7일이면 7일, 7수를 거쳐 나가야 됩니다. 그렇게 해야 될 게 아니예요? 그런 입장에 있는 통일교회 교인들은 전부 다 그러한 기간을 싫든 좋든 거쳐야 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망하는 것입니다. 싫든 좋든 거기에 도수를 안 맞추면 안 되는 그런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통일교회 교인들은 할머니나 할아버지나, 처녀나 총각이나 할 것 없이 누구나 7년노정을 가야 됩니다. 그것이 공식입니다. 여기에는 상하가 없는 것입니다. 굶어 죽을 입장이 된 사람을 살리려면 밥을 먹여야 됩니다. '아이고, 굶어 죽기도 싫지만 밥먹기도 싫다'고 하는 사람은 죽어야지 별 수 있어요? 밥을 안 먹으려는 사람을 살리려면 입을 벌려서라도 퍼먹여야 됩니다. 그런 일이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신세를 지고 갈 것이냐, 자의로 갈 것이냐? 신세를 지고 가면 나중에는 '다시 갈 수 없을까? 하게 됩니다. 그래 이 길을 가는 데 신세를 지고 가느냐, 자기 힘으로 가느냐? 즉, 자의에 의해서 하느냐, 타의에 의해서 하느냐? 기쁘게 가느냐, 슬프게 가느냐? 아니면 기뻐서도 아니고 슬퍼서도 아니고 마지 못해서 가느냐? 마지 못해서 가는 것은 슬프게 가는 것보다는 나은 것입니다. 기쁘게 갔느냐, 마지 못해서 갔느냐, 슬프게 갔느냐? 문제가 거기에서 벌어지는 거예요. 세 갈래 길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문제입니다.
기쁘게 가느냐, 슬프게 가느냐, 마지못해서 가느냐, 그 다음에는 안 가느냐? 이렇게 되니 네 갈래 길이구만. 그러나 안 갈 수는 없습니다. 안 가는 것은 거꾸로 가는 거예요. 나가자빠져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안 갈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가는 데는 넘어져 가지고 가느냐, 뒤로 가느냐, 아니면 옆으로 가느냐, 바로 가느냐? 이런 일이 벌어집니다.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에서 '나 통일교회 안 믿겠다'고 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마음에서 반대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마음이 그렇다는 거예요. 반대하는 사람에게 왜 반대하느냐고 물어 보면 '교회에서 날 몰아대니 섭섭해서 반대했지'합니다. 섭섭해서 반대했다는 거예요. 좋아서, 기뻐서 반대하고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조금 섭섭하게 하니까 할 수 없이 반대한다는 거예요. 통일교회를 안 가겠다는 사람은 반대하지 않는 거예요. 떨어져 나간 사람이 반대를 하지만 그 마음속에서는 통일교회를 생각하지 않아야 할 텐데 하면서도 자꾸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기성교회에 나가면서 뭐라도 해먹겠다고 정성들이게 되면 '자, 이 길을 갈래 안 갈래' 하며 영계에서 자꾸 보여 주는 거예요. 이런 걸 보면 팔자소관 같은 생각이 듭니다.
통일교회는 어떻다고 할까? 지독하다면 지독하고, 고집이 세다면 고집이 셉니다. 한번 들어오면 빠져 나갈 수 없는 곳이예요. 어떤 문제를 두고 생각할 때도 '사실이 그렇지' 하고 보면 벌써 원리적으로 그렇다는 거예요. 그러니 어디를 가든지 이것을 떼어 버리고는 괴로와서 못 사는 거예요. 이걸 떼어 버리고도 괴로와하지 않고 살 것 같으면 내가 선두로 달려갔을 겁니다. 가면 갈수록 태산이예요. 들어와서 '아이구 속았다' 활개치고 나가려고 하면 털썩 하고 걸린다는 겁니다. 팔, 손, 눈, 코가 다 걸려 가지고 '아이구나 죽소' 하게 됩니다. 이렇게 다 걸려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 문선생이 이렇게 됐지요. 이거 남은 잘사는데 나는 무슨 팔자가 이렇게 거세 가지고…. 안 그래요? 그렇지만 자기 일신으로는 이 운명을 벗겨 버릴 수 있는 능력을 갖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대해로 빨려 들어가는 그런 한 형태권에서 벼락같이 흘러 내려가는 판국인데 거기에서 나 잘났다고 할 수 있어요? 그 흐름 가운데서는 잘났다고 하지 못한다는 거예요. 그렇게 가다 보니 결국은 이렇게 됐습니다. 안 간다고 세상의 다른 길을 찾아가더라도 결국은 이 길로 돌아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돌아와서 알게 될 때는 다시 새롭게 결심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과거에 정성들였던 터전 위에 서서 또 정성들일 수 있는 거예요. 그렇게 안 서게 될 때에는 힘들지만 말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볼 때, 여러분들은 기쁘게 갔느냐, 슬프게 갔느냐, 마지못해서 갔느냐? 그 무엇이 있어서 가고 있습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흐르는 강줄기와 같은 터전이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표준으로 대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이 길밖에 없습니다. 주위의 흐름이 어떻더라도 이것을 맡아 가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이 사람이 만일 틀어지게 될 때에는 전체가 거꿀잡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정성들이는 인간들을 조정하면서 '야! 됐다. 가라'고 할 수 있는 운전사가 있을 것이 아니냐?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 아니겠느냐? 그럴 거 아니예요? 하나님께서 운전하실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운전을 받아 가지고 '옳소이다, 옳소이다' 하고 하나님의 뜻에 동조하면서 조종해 나가는 그 무엇이 땅 위에 있어야 될 것이 아니냐?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는 종교입니다. 종교 가운데에서도 하나님께서 제일로 바라보는 최고의 종교가 있을 것이 아니냐? 그것이 통일 교회입니다. 사실이 그렇다면 좋겠지요? '사실이 그런지 안 그런지 어떻게 알아, 내가 지내 봐야지' 할 것입니다. 눈으로 봐야 압니다. 구경해 봐야 아는 것입니다. 이 길은 여러분이 늙어 죽더라도 가야 할 길입니다. 끝을 맺어야 됩니다. 자기보다 뜻이 중요한 것입니다.
옛날에 유협회장 있을 때는 어떤 사람이 '통일교회에 가면 그 유협회장 이라는 사람 눈이 보기 싫어서 안 나간다'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별의별 사람이 다 있습니다. 유협회장 눈이 표준인가요? (웃음) 통일교인이 뭐가 어떻고 원리 말씀은 좋은데 교인들이 사랑이 없다고 하는 등 별의별 말을다 들었습니다.
통일교인은 시집가서 시누이와 시동생들을 보살피지 않으면 안 됩니다. 모든 사람을 다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야 그 문중을 이어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야 어머니가 되고 할머니가 되는 것입니다. '아이고, 난 그렇게 못 해' 하면 어머니도 못 되고 할머니도 못 됩니다.
부모 잘 만났다고 좋은 게 아닙니다. 부모가 고생을 지긋지긋하게 해서 요만한 기반을 마련했는데, 죽느니 사느니 고생해 가지고 요만한 기반을 마련했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한테 좋게 해주겠어요? 어림도 없는 것입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것이 이치입니다. 그러니 고생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탕감해 나가는 것입니다.
신앙길은 부정하며 가는 길입니다. 사방을 부정하고 한 곳만을 알고 가는 길입니다. 앞으로 그런 때가 올 거예요. 그런 때가 언제냐? 대한민국에도 그런 때가 있을 거예요. 그럴 게 아니겠어요? 우리 통일교회 교인들이 움직여야 할 통일교회의 때가 왔습니다. 그리고 교회끼리 만날 수 있는 때가 되었습니다. 앞으로는 나라와 만날 때가 있을 거예요. 나라와 만나 가지고 나라한테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나라를 끌고 가야 합니다. 세계 앞에 서서 세계를 끌고 가야 합니다. 그럴 수 있는 길이 있어야 될 게 아니예요? 그냥 끌려가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이 만일에 가정에서 엄마 아빠가 잠들었을 때에 맛있는 것을 혼자만 먹었다고 합시다. 아침에 일어나서 '엄마 아빠, 내가 엄마 아빠가 사랑하는 딸이지만 엄마 아빠가 주무실 때에 맛있는 것을 나 혼자만 먹었어'라고 하면 엄마 아빠가 기분이 좋겠어요? 자랑하기에 앞서 나눠 먹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해야 합니다. 사랑이 도리어 채찍이 될 수 있고 화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 통일교회에서 내가 좋은 것 받았으니 나라야 망하겠으면 망하고, 세계야 망하겠으면 망해라. 나 좋으면 됐지' 하면 안 됩니다. 대한민국이고 뭐고 다 밀쳐 놓고 '우리를 반대하더니 벌 받아도 싸다. 우리는 살아서 통일교회 앞에 나섰으니 야, 자랑하자'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원하시겠어요? 나도 원하지 않지만 여러분들도 원하지 않을 거예요.
요즘 통일교인들을 가만히 보게 되면, 옛날에는 식구끼리 서로 그리워 가지고 뭐 못 만나면 안 되니 만나야 된다고 하며 필연적인 운명같이 알고 그렇게 날뛰던 사람들이 이제는 '식구라는 것도 다 싫소. 다 그런 거야' (웃음) '핏줄로 인연된 부모가 좋고 처자가 좋고 형제가 좋지, 핏줄이 다른 통일교회 형제는 그냥 그래' 한다는 거예요.
옛날엔 서로가 외로우니까 이 동산을 바라봐도 그렇고, 저 동산을 바라봐도 그렇고, 아무리 세월을 두고 봤댔자 적막강산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떨어져 있으니 아무리 해도 사정을 통할 수 없는 입장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형제들을 붙들고 통일교인들끼리 간절히 소원하던 마음의 십분의 일만 쏟았어도 재깍 통일교회 식구가 되었을 걸, 내가 잘못했구나'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예요. 그렇지만 잘못한 것이 아닙니다. 어차피 그 자리에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새로운 길을 따라가야 되는 것입니다.
시냇물이 흐르는 것을 보라구요. 옛날에 흐르던 물이 흐르는가 보라구요. 새로운 길을 따라가려면 반드시 부작용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게 원칙이라구요. 그런데 그게 싫다고 하는 거예요. 옛날에는 좋았는데 지금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엇갈리는 것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 엇갈리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연적인 현상인데, 이 환경을 누가 극복시키느냐? 이 환경을 극복시키는 사람이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주류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피해 가지 않고 극복해야 남아지는 것이요, 주류를 이어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통일교회의 때가 많이 가까와졌습니다. 여러분은 몰라도 선생님은 알아요. 내가 해방 직후에 이 길을 출발할 때에는 단 십분도 마음 놓지 못했습니다. 어떤 때는 검은 구름 떼 같은 어둠의 압력이 막 몰려 오는데 소리를 질러 가지고야 그것을 막아낼 수 있었습니다. 있는 힘을 다해 비등한 힘을 갖추어 균형을 취해야 방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격퇴시키기 위해 결사적으로 힘을 투입하고 노력을 하던 한 때가 있었습니다. 이제는 때와 더불어 뒤넘이침으로써 점점 풀려 나가고 있지만, 그런 때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는 이 장소에서 다른 장소에만 가게 되면 싸우는 거예요. 세계적인 사탄과 싸우는 거예요. 눈을 부릅뜨고 격투한다는 거예요.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제는 아무리 음산하고 터가 세다는 곳에 가더라도 거리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아무 곳에 가 있더라도 시시한 것이 근접하지 않는다구요.
애들이 바다에서 돌팔매질을 하고 있는데, 여기에 큰 노도가 밀려와 가지고 한번 부딪치게 되면 잔잔한 파도들이 깨져요, 안 깨져요? 그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달라지는 것입니다. 확 달라집니다.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모를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서 방향을 갖춰 가지고 점점점점 밑창에서부터 올라오는 것입니다. 통일교회가 끝에서부터 올라오는 것입니다. 높은 데까지 쭉 올라왔다면 거기에 걸린 것은 다 흘러가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생각해 볼 때 지금의 때가 아주 좋은 때라는 것입니다.
하늘의 때는 가까왔는데 이 세계의 때는 복잡하다는 겁니다. 반대라는 거예요. 알겠어요? 외적인 때는 복잡한데 하늘의 때는 출발입니다. 알겠어요? 대한민국이 안팎으로 반대하는, 종교계에서도 반대하고 나라에서도 반대하는 제일 복잡한 때에 제일 끝에서 통일교회가 출발했습니다. 그때가 1960년대예요. 이제 이것이 기원이 돼 가지고 교회도 반대 안 하고 나라도 반대 안 하니 외적인 세계와 같이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건 왜 그러냐? 내적으로 통일교회를 중심삼고 탕감을 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통일교회는 민주세계와 공산세계와 맞서서 수많은 종교를 중심삼고 세계의 해방을 위해 나아갈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가 되었습니다. 필시 불원한 장래에 그렇게 됩니다. 그러한 여건이 지금 눈 앞에 벌어지고 있어요.
이렇게 볼 때에, 이제는 그야말로 대해로 들어가는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개인이 바라던 최고의 희망의 때요, 가정이 바라던 최고의 희망의 때요, 나라가 바라던 최고의 희망의 때요, 민주세계와 공산세계가 바라던 최고의 희망의 한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가 오는 데는 나팔을 불고 옵니까? 전보치고 와요? '4·19의거가 일어난다' 하는 전보를 받은 사람 있어요? '5·16혁명이 난다'는 전보를 받은 사람있어요? 그렇지만 망한다 망한다 하니까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새로운 내일이 찾아오더라는 거예요. 동지가 지나면 그 다음에는 뭐가 와요? 봄기운이 살랑살랑하고 오는 것입니다. 있는지 없는지, 닿는지 마는지 와 가지고 하루 이틀 죽 지내고 보면 '아, 봄이 왔구나' 하는 거예요. 봄이 오면 찬바람이 싫어서 아낙네들은 물 길러 가기 싫어합니다. 그렇지만 양달에서는 꽃이 피는 일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살림살이가 벌어진다는 거예요. 마찬가지로 세상은 반대하지만 통일교회 자체는 꽃피는 봄을 맞아 새로운 살림살이를 하는 입장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개인이 바라던 때, 민족이 바라던 때, 세계가 바라던 때, 하늘땅이 바라던 때, 하나님께서 만나고 싶어하시는 그런 때가 온다고 하면 누구든 보따리를 싸 가지고 그때를 맞으려고 마중나갈 것입니다. 여러분은 안 그러고 싶어요? 그 때에는 자기 아들이 7대 독자니 뭐니 하면서 '그 아들을 놓아 두고 나는 못 가겠소' 하면 둘이 다 망하는 거예요. 그럴 때는 '야, 이 자식아, 나가야 돼. 이 자식아 나가야 돼' 하면서 안 가면 발길로 차고 들이 패서라도 가게 해야 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급에 있을 때에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가나안 땅에 데리고 가기 위해서 '출동이다. 이번 14일까지 떠나지 않으면 망한다' 할 때 그들이 어떻게 했겠어요? '갈 것이냐, 안 갈 것이냐' 하는 말에 이스라엘 민족은 '우리가 애급에 와서 400년 동안 고생 고생해서 이렇게 자손도 불고 남부럽지 않은 환경에서 살고 있는데 우리가 밥이 그리워요, 뭐 부족한 것이 있어요? 나는 그냥 여기서 살고 싶어요'라고 했을 때, 모세는 도끼자루로 그들의 목을 치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놈의 자식들, 나라를 배반하는 놈들…' 이러면서 그들을 때려 갈기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그럴 때가 온다는 모세의 말을 믿었겠어요? 도둑 같은 세상에 불한당이 와서 사기쳐 먹으려 한다고 생각하고 무슨 말인들 안 했겠어요?
그것을 생각해 보면 그 배후에서는 하나님이 몽시로 보여 주는 것보다도 강력한 출동부대가 나서 가지고 안 가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는 일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냥 그대로 순순히 '가자, 떠나자' 할 때에 '예' 하고 나섰겠어요? 안 나서니까 할 수 없이 10대 재앙을 내려 공포의 분위기를 만들어 가지고 때려 온 것입니다. 안 가면 망한다고 하면서 말이예요. 이것이 하나님이 하실 일이예요?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이 아직까지도 가나안 복지로 가는 책임을 못한 것을 탕감받고 있는 것입니다. 배후에 천태만상의 불상사가 맺혀 있는 것을 수습하려니 하나님께서는 별의별 일을 다 하시는 거예요. 이렇게 해서 안되면 저렇게 하고, 또 저렇게 해서 안 되면 또 다르게 해 가지고 그 환경을 한 데로 몰아 넣어서 처리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 그렇게 하는 것이 죽이려는 거예요, 살리려는 거예요? 살리려니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피난을 가야 하는데 애기가 배가 고파 엄마 젖꼭지를 물고 젖을 빨아먹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애기가 피난을 알아요? 인민군을 알아요? 인민군이 와서 곡괭이와 창으로 사람들을 찔러 죽이는 것을 알아요? '우리 애기 젖 먹고 있는데 다 먹거든 가야지' 하는 어머니가 있다면 그게 어머니 예요? 그때는 어머니가 아니라구요. 원수라구요. 애기가 울면 애기의 입을 틀어막고라도 가야 되고, 거꾸로 업고라도 가야 됩니다. (웃음) 그렇게 해서라도 피난을 가는 것이 어머니의 사명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아이구, 애기가 젖을 못 먹으니까 안 됐구나'하는 게 어머니의 사랑이요? 어머니의 사랑에도 한계선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아는 통일교회 문선생이 눈치코치 볼 수 있겠어요? 가정에 아들딸이 다섯인데 못살고, 남편은 병이 들었고, 애기들은 병신이더라도 선생님은 그 부인을 출정을 시키려고 합니다. 못 가겠다고 하면 눈을 딱 감고 나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되는 거예요. 그것이 사랑이라는 거예요. 그럴 수 있는 때가 있습니다. 그때가 지금인 것을 알아야 됩니다. 어떤 사람은 통일교회가 여자들에게 전도하라고 시키니까 막힌다고 하는데, 막혀도 좋다는 것입니다. 그게 통일교회 문선생의 식입니다. 통일교회의 전도 길은 막히지만 세계의 갈 길은 트인다는 거예요. 나라의 갈 길은 트인다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여자들에 의해서 말이예요.
통일교회 망해도 좋다는 거예요. 한 천 이백 명쯤 죽어서 대한민국이 영원히 천운을 탈 수 있다면 그것을 단행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렇게 죽는 사람이 멸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제물적인 입장에 서면 일생 일대에 충성을 다해도 못 갈 하늘나라의 상속권을 받을 수 있는 영광의 자리에 참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때가 올 것입니다. 여러분이 모르고 여러분의 어머니 아버지가 모르지만 바라는 때요, 여러분의 선한 선조들도 몰랐지만 바라던 때요, 오늘날 인류도 모르지만 바라는 때인 그 때를 맞기 위하여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어제 청평에 가서 모터보트를 운전해 봤어요. 모터보트를 몰면서 내가 똑바로 가라고 핸들을 수평으로 딱 맞추어 놓으면 틀림없이 똑바로 가는 거예요. 그렇지만 손을 조금만 움직이면 그만큼 방향이 틀어지는 것입니다. 또 몸을 싹 움직이게 되면 보트가 그만큼 움직여요. '야, 이것 봐라. 세상에 이런 법이 있구만. 지극히 미미하고 하등의 상관이 없을 것 같은 것이 결정적 요인이 되는구만' 하는 생각을 해보았어요. 핸들을 한번 힘차게 꺾어 봤어요. 그랬더니 다 싫어하는 거예요. 그것을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졸던 사람도 꿈꾸던 사람도 다 싫어합니다.
그렇게 한꺼번에 꺾어 돌리는 날에는 희생이 많습니다. 무지한 백성이 희생되는 거예요. 무지한 세계를 그렇게 꺾어 돌리면 희생이 많은 것입니다. 그런 때가 심판의 때가 아니겠느냐?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일수록 남모르게 조금씩 조금씩 꺾어 돌리는 거예요. 통일교회가 그런 식입니다.
통일교회가 욕을 먹었지만, 다들 망한다고 야단했지만 저 멀리에 있는 표준을 바라보고 가는 것입니다. 그 먼 표준을 바라보고 가는 데 있어서는 가까이 있는 것은 아무것도 안 보이는 것입니다. 그 표준을 택해서 나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가느냐? 거 틀렸다 틀렸어' 하는 것은 눈 앞에서 보았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그럴싸하게 보인다고 해서 그냥 갔다가는 옥살박살이 납니다. 옥살박살이 나도 좋아요? 이 세계를 돌리려면 세상 사람들과 같아서 돼요? 안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그 길을 가야 됩니다. 그 길이 무슨 길이랴? 비참한 길입니다. 세상과는 반대의 길입니다. 그 길과 인연되지 않고는 그 목적을 이룰 수 있는 길을 못 가는 것입니다.
앞으로 어떤 때가 되느냐? 통일교회에 오는 사람들 중에 '내가 기성교회에서 그래도 목사노릇을 몇십년 했는데, 통일교회에서 나를 몰라보다니…. 협회 이름으로 초청해 놓고 문선생님이라는 사람은 왜 인사도 안 해? 이거 인사불성이 아니냐? 그런 사람이 어디 있어? 하면서 뭐 어떻고 어떻고 소문을 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를 몰라봐요? 자기 좋아서 초청한 거예요? 그런 사람은 '내가 통일교회 교인이 되었으니 나 밥 잘먹게 만들어 주소' 할 것입니다. 그것을 원한다는 거예요.
자기들의 살림살이를 하는 데에 통일교회가 밥을 먹여 주어야 한다는 거예요. 자기가 전주에 살면 전주에까지 와서 먹여 달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죽거든 간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지금 누구도 만나지 않습니다. 선생님은 그들이 필요로 할 때에 만나 주는 동네 사람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철석같이 약속해 놓고 뭐 이래' 할는지 모르지만, 내가 철석같이 행하라고 약속했지 말만 하라고 했어요?
여러분 보십시오. 대운을 맞이해야 할 통일교회입니다. 그러려면 어떻게 되어야 하느냐? 여러분이 주장하려고 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 여러분의 주장은 다 풀어져 누룩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순수하니 휩쓸려 들어가야 합니다. 대해로 들어가는 권내에 있을 때는 아무 것이나 먹으면서 그 방향에 일치되는 놀음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대운, 즉 천운을 맞이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나를 보고 운명론자라고 할는지 모르겠지만 천운이 있습니다. 세계의 운이 있고, 나라의 운이 있고, 가정의 운이 있고, 개인의 운이 있습니다. 개인은 가정이 망하게 될 때에는 고통을 받는 거예요. 또 아무리 행복한 가정이라 하더라도 나라가 망하게 될 때에는 다 깨져 나가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깨질 수 있는 운명이라구요. 대한민국이 아무리 잘났다 해도 세계가 뒤넘이치면 거기에 말려들어가는 겁니다. 그렇지요? 아무리 세계의 운세가 크더라도 천운이 굽이칠 때에는 거기에 말려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지혜로운 사람들은 천운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망상주의자들이 종교인들입니다. '몇천 년 후에는 우리 주님이 오신다' 하고 기독교에서 말하고 있는데 그거 미친 사람들이지 올바른 사람들입니까? (웃음) '몇천 년 후에 세계를 심판하고 악한 무리를 다 쳐 버리고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들을 데려다가 나라를 만들고 천국을 만든다'고 합니다. 그때가 언제냐고 하면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온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오는 줄 모르지만 온다는 것입니다. (웃음) 그런 생각하면 기가 막혀요.
지혜로운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천운을 탈 수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천운을 타자는 겁니다. 여러분, 천운이 좋아요, 나빠요?「좋습니다」 아폴로 11호가 좋아요, 나빠요?「좋습니다」 달나라에 착륙했으니 좋지요. 그런데 달에 착륙하면 그냥 기분이 좋아요? 그냥 좋아요? 좋을 수 있게끔 되어서 좋아요, 그냥 그대로 좋아요?「좋을 수 있게 되어서 좋습니다」 좋을 수 있게끔 되어서 좋은 것이지 좋을 수 없게끔 되었다가는 어떻게 돼요? 팔자를 고치는 거라구요. (웃음) 어디든지 둥둥 떠다니는 거라구요. 좋을 수 있게 되어 있어 가지고 좋아야지 좋을 수 없게 되어 있는데도 좋다 하게 될 때는 그것으로 끝장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러기에 천운을 타자는 것입니다.
대한민국도 천운을 타자는 것입니다. 통일교회는 대한민국의 운을 타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무슨 운을 타자고요? 천운을 타야 된다는 것입니다. 천운 가운데는 시시한 노동자 운도 있습니다. 개인의 운도 있다구요. 양자의 운도 있다구요. 아들의 운도 있다구요. 그 운 가운데 무슨 운을 타자고요?「아들의 운입니다」 아들 중에도 쌍놈 아들이 있고 좋은 아들이 있습니다. 축복받은 아들이 있고, 축복을 못 받고 꺼떡거리면서 불효하는 아들도 있습니다. 아들이라고 다 같은 줄 알아요? 축복받을 수 있는 아들딸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지요? 그 하나의 길을 가야 합니다. 그 하나의 길이 제일 어려운 길입니다. 남이 밥을 먹을 때에 밥 한끼 안 먹는 것이 제일 어려운 거예요?
먹고 살아야 하는데 그 아들은 굶기가 일쑤입니다. 사람들은 놀고 먹으면서 살기를 바라는데 그 아들은 죽도록 일하기가 일쑤입니다. 사람들은 칭찬받고 살기를 바라는데 그 아들은 욕 얻어먹기가 일쑤입니다. 부모 때문에 칭찬받은 것이 아니라 욕을 먹었다면 그 아들은 부모 앞에 효자입니까, 불효자입니까? 부모 때문에 지지리 욕을 얻어먹었다면 그 아들이 효자예요, 불효자예요?「효자입니다」 효자입니다. 그러면 나라를 위해서 지지리 고생했으면 그 사람은 간신이예요, 충신이예요?「충신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지지리 고생했는데 하나님께서 '야, 이녀석아, 네가 못났기 때문에 고생했지. 너 같은 것은 필요없어' 이러시겠어요? 천운을 타려면 지지리 고생하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결론밖에 안 나와요. 최고의 결론은 그것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그 길을 가는 거예요. 지지리 고생하는 거라구요. 여러분, 지지리 고생하는 게 싫지요?
사람들이 서로 만나 가지고 붙드는 데도 '그 뭐 만났구만' 하면서 손을 붙들고 싶지 않아 가지고 붙들다 말다 하다가 할 수 없어 붙드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중에도 그런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 반면에 손을 붙들고 싶어서 붙드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손을 잡아채 가지고 목을 안고 붙드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부모는 어떻게 하기를 바랄까요? 그렇게 부모를 붙들면 부모가 '이 무슨 요사스러운 짓이야? 아이고 이거 미쳤구만'하면서 가만히 붙들어 주기를 바라겠어요, 80여 년 생애에 처음 해 입은 양단 치마 저고리가 어깨가 쭉 드러나게 다 찢어지더라도 그렇게 붙들기를 바라겠어요? 치마야 찢어지겠으면 찢어지고, 형편이 어떻게 되든지, 남이야 웃겠으면 웃고 말겠으면 말고…. 어떤 게 더 가치가 있느냐는 거예요. '아이고, 체면상 그럴 수 있어? 눈치를 봐야지, 눈치' 그런 부모도 있을 겁니다. 그런 것은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학교에서 학생들의 학습을 참관하라고 학부형을 오라고 하면, 자기 어머니의 얼굴이 좀 찌그러진 학생은 시무룩하여' 우리 어머니는 학교에 안 오면 좋겠다'고 할 수도 있는 거라구요. (웃음) 어머니가 딸을 만나 가지고 자기 얼굴을 생각하겠어요? 내가 얼굴이 이렇게 못생겼으니 내 딸 안 됐다' 그런 생각을 하는 부모가 있어요? 자기 얼굴이야 어떻게 생겼든지 딸만 좋다는 거라구요. 어머니는 그런 생각을 안 하고 그저 좋아서 웃는데 그 딸이 '아이고 창피해. 부모는 무슨 부모야' 하며 모른 척하고 그러면 그 부모가 기분이 좋겠어요, 나쁘겠어요?
그렇지만 누가 아무리 뭐 어떻다 하더라도 '엄마가 오셨구만' 하면서 그저 눈물을 흘려야 되는 거예요. 모르는 애들은 '아이고, 아무개 엄마가 저렇게 생겼구만, 우리 엄마는 저렇지는 않은데…' 할 거예요. 그렇지만 선생님이나 그 사정을 아는 사람은 그걸 보게 되면 '야!' 그런다는 것입니다. 그 옆에서 그렇게 해주는 아가씨들이, 총각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아이는 훌륭해지는 것입니다. 학교에서도 '우리 학교에 저런 학생이 있는 것이 학교의 자랑이다'고 한다는 거예요. 그렇겠어요, 안 그렇겠어요?' 아, 우리 학교에 저런 학생이 있으니 우리 학교가 안 되겠구만' 이러는 선생님들이 있겠어요? 학생의 그 행동을 아는 선생님은 '귀한지고 귀한지고' 하는 거예요. 그것은 일기에 적어 가지고 남겨 놓을 장면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통일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서대문 형무소에 들어가 있을 때에 고맙게 생각했던 것은 통일교회 교인들이 전부 선생님을 면회하겠다고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는 통일교회 교인들이 망할 패예요, 흥할 패예요? 남편이 그렇게 됐으면 형무소 앞에 가게 될 때에는 누가 알까봐 얼굴을 쓱 가리고 갈 판인데 내가 어디에 끌려가더라도 찾아와서 면회하려고 하는 거예요. 누가 '여기에 왜 왔어? 하면 '아, 통일교회 문선생님 면회하러 왔지요' 한다는 거예요. 서로가 먼저 면회하려고 싸움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 싸움을 했다는 이 패들이 대한민국에서 망해 죽을 패들입니까. 남아질 패들입니까? 내가 그런 말을 듣고….
또, 무슨 간수장이니 서장이니 하는 사람이 와 가지고 하는 말이 '통일교회 문 아무개라는 사람이 몹쓸 사람이라고 소문났지만 그런 사람이 아니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더니 한 달쯤 지난 다음에 와서는 '선생님' 하는 겁니다. 가만히 보니까 자기가 배우는 것이 많거든요. 선생님 때문에 야단하고 있는데, 그렇게 야단하는 패가 흥할 패들입니까?
요즘 대한민국에서 '부정 부패다. 도적패다' 하는데, 통일교회는 뭐라고 할까요? 도적패보다도 더한 뭐라 할까요? 강탈이라고 하겠어요. 파탄이라 하겠어요? 남들은 도둑질해 가지고 잘살려고 하는데 통일교회는 전부 다 살림살이를 때려부수고 나라를 살리자고 벗어부치고 나섰다는 것입니다. 발가벗고 춤춘다고 말하지만 춤추는 것이 아닙니다. 발가벗고 나섰다 이거예요. 그런데 망할 패냐 이거예요.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상봉의 기회를 만날 때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비단옷을 입고 식사 때에는 쌀밥에 고기를 먹고, 잠도 열두 시간 이상 72시간쯤, 한 3일쯤 자고,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집에서 어릴 때 부르던 '천년 만년 살고지고'를 부를 수 있는 그 때가 왔으니 이렇게 이렇게 만나야지 하면서 준비하며 살아가야 되겠어요? 그러다가는 그 때에 못 맞추는 것입니다. 늦어도 한 순간, 일 초가 아니라 한 시간, 세 시간이나 늦게 그 자리에 참석했다 할 때에 어떻게 되겠어요?
그러니 인류를 위해 시련의 길을 걸어온 사람들을 중심삼고 가야 합니다. 그저 눈 코 할 것 없이, 뭐랄까, 밀가루로 빚어 만든 떡 같은 꼬락서니로 고생하며 갔을 때 세상 사람들이 '저게 무슨 통일교회 패냐 망해라 망해라' 하겠지만 뜻을 위해서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부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잘먹고 잘입은 입장을 갖추어서 만날 것이냐. 피를 흘리면서 쓰러지는 그런 자리에서 만날 것이냐? 힘들게 가면서 그 때를 만났다 하게 되면 그 사람은 억천만세 천국사상을 이어받을 수 있고 그 전통을 길이길이 뒷받침할 수 있는 사상적인 주체자로서 칭송받을 수 있는 영웅이 될 것입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면 앞으로 새로운 천운을 따라 나타날 그 나라를 어떻게 맞을 것이냐? 살이 쪄 가지고 맞을 것이냐? 지지리 헐벗고 뼈만 앙상히 남아 가지고 기력이 없어 말 못하는 벙어리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그런 입장에서 맞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나타난 모양은 비참하지만 내정적인 사연은 천지를 다 녹여내고 남을 수 있는, 만민이 공인할 수 있는, 웃음거리의 세계를 일시에 울음의 세계로 돌려잡을 수 있는 능동적인 권한을 갖추지 않겠느냐? 그런 터전에 서는 것이 만민의 소원이 아니겠느냐? 보다 가치 있는 일이 아니겠느냐? 그래서 내가 아직까지 본부를 안 짓는 거예요.
지금 통일교회의 지구가 몇 개입니까? 세어 봤어요? 지금 몇 개예요?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지구만 여섯 개로군. 기분 나쁘게 말입니다. 6수는 지금까지 사탄수인데, 내가 앞서서 나가니 7수지요? 이렇게 생각하고서 탕감하자는 겁니다. 생각을 그렇게 하는 거라구요.
때를 똑똑히 알아야 됩니다. 상봉의 때를 어떻게 맞을 것이냐? 지극히 사랑하고 지극히 필요로 하며, 지극히 가치 있는 단 하나밖에 없는 그런 자리에서 맞아야 합니다. 사랑하기에, 내 육신 전부를 녹이기 위해 이렇게 상처를 입고 피폐된 신세가 되었더라도 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주인이 틀림없이 나를 아는 주인이라 할진대, 그 주인은 천년의 사연을 넘어 가지고 행복의 세계를 다짐하여 가지고 축복의 터전을 마련해 줄 것은 두말 할 바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상봉의 기회를 어떤 자리에서 맞을 것이냐 하는 문제가 이제 여러분에게 처한 문제일 것입니다.
며칠 전부터 순회사들 모임이 있는데, 어제 저녁 그들에게도 그런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이 하늘의 뜻 가운데 있어서 일생 동안 가는 길 앞에 자신이 맞아야 할 한 때가 있을 것이거늘, 그 한 때가 어느 자리에서 나타나는 줄 아느냐? 그 때가 빌어먹는 거지의 손길을 통해서 찾아올지도 모른다. 혹은, 최후의 운명이 가름되는 자리, 유언을 하는 그런 비운의 자리에서 찾아 올지 모른다. 혹은, 울고 있는 애기의 손길을 통해서, 애기의 모습을 통해서 찾아올지 모른다. 바라고 소원하던 그 때가 어느때에 올 것인가를 모르는 입장에 있더라도 그 기회를 맞기 위한 준비를 하여 어떤 환경에서라도 그 때를 맞을 수 있다는 마음 자세를 갖지 않으면 한 번밖에 없는 진정한 그 인연을 못 맞을 것이 아니냐? 비록 슬프고 억울하고 분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그런 자리에서도 한 번밖에 없는 때가 나에게 찾아올 수 있는 최후의 찬스를 놓친다면 나는 얼마나 불쌍하겠느냐?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은 그 때를 맞기 위해 매를 맞으면서도 참아 나왔고 죽음길을 가면서도 참아 나왔다고' 말입니다. 그 때가 올 것이어늘, 그런 마음을 갖고 가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 사람이 가는 길은 트일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바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시옵소서' 한 것은 그렇게 하는 것이 땅 위에 찾아 나왔던 최후의 아버지의 뜻과 만나고 아버지와 인연을 맺을 수 있는 하나의 절호의 찬스인 것으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자기의 뜻을 부정하고 아버지의 뜻 앞에 서려고 했던 일면이 있지 않았느냐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절호의 찬스가 어떤 때냐? 잠자는 시간이냐? 밥먹는 시간이냐? 노는 시간이냐? 모르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의 길도 달가이 맞아야 합니다. 기쁨의 길이라고 기뻐할 수만 없는 겁니다. 너무 기뻐하다가는 때를 놓칩니다. 그 기쁨 가운데 찾아오는 인연이 무엇인가를 찾아야 할 입장이기에 밤이나 낮이나 그걸 찾기 위해 지내온 게 아닙니까?
하나님은 6천년 동안 쉬지 않고 일하십니다. 쉬지 않고 일하시는 하나님도 당신의 뜻을 이어받으려고 쉬지 않고 그것을 바라고 찾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하실 것이 아니겠느냐? 그런 사람은 아까 말한 그런 입장에서 괴로와도 그때를 찾고, 기뻐도 그때를 찾고, 죽는 자리에서도 그때를 찾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아니고는 6천년 동안 쉬지 않고 일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 필요한 사람이 못 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우리가 지금까지 믿고 바라며 나가는 것은 하나님 앞에 너무나 불경스러운 입장에 있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여러분이 어떠한 입장에서 상봉의 기회를 맞을 것이냐? 이게 문제되는 거예요. 자기가 병신이 되더라도, 뜻을 위해서 병신이 되었다면 그것은 부끄러울 것이 없습니다. 팔을 하나 못 쓰는 병신이 되었다고 부끄러워할 것 없습니다. 자기의 일신을 가누지 못하는 병신이 되었더라도 부끄러울 것이 없습니다. 그 이상 더 바치고 싶은 마음, 생애를 다 바친다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는 영원히 남아지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여러분은 생각해야 됩니다.
그러면 앞서 말한 그런 주류에 어울려 가지고 대해로 들어가는 입장에 있는 이 시점에 있어서 여러분이 어떤 보조로써 그 운세와 화합하고 그 운세의 방향에 부합할 것이냐? 흐르는 그 물줄기 앞에 반대되거나 거기에 할 수 없이 끌려가는 사람이 될 것이냐?
그런 와중에서의 시련 고통은 복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동정을 구하고, 인류의 동정을 구하고, 역사의 동정을 구하고, 시대의 동정을 구한 다음 미래의 동정 위에서 출발을 할 수 있으면 거기서부터 세계를 찾아 나온 하나님의 소원이 '나'와 관계를 맺을 것이고, 혹은 통일교단과 관계를 맺을 것이 아니냐? 그렇게 나아가려는 자리는 기쁨의 자리가 아니요, 모든 사람이 바라보는 자리가 아니요, 모든 사람이 환영하는 자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선생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통일교회 간부들이 선생님을 반대하는 때가 올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죽이겠다고 하는 패도 나타날 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입장에 처하게 되면 어떻게 할 것이냐? 예수님도 그랬고, 역사적인 성인들도 그랬습니다. 악한 세상에서 씨를 받아 뿌리를 박고 있기에 별의별 일이 다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문제까지도 각오하고 가는 길이 선생님의 길이요, 통일교회의 주류의 행로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이 그러한 주류와 행로 앞에 어떠한 자세로 상봉하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상봉했으면 상봉의 인연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더 높은 곳으로 가야 됩니다. 개인으로 만났으면 가정으로 만나야 되고, 가정으로 만났으면 종족으로 만나야 됩니다. 선생님은 옛날에 이런 저런 어려운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부름과 구함을 받아 가지고 뜻을 중심삼고 나왔습니다. 가정을 중심삼고만 언제나 기쁘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종족을 중심삼고, 민족을 중심삼고, 세계를 중심삼고 기쁘게 상봉할 수 있는 인연을 거쳐 가야 될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이 그러한 입장에서 상봉의 기회를 몇 번 맞이했느냐, 그것이 개인적이냐, 가정적이냐, 민족적이냐, 국가적이냐, 세계적이냐 하는 것을 생각하면서 새로이 결의하고 내일의 소망을 바라보며 꿋꿋이 나가 주기를 바라면서 몇 말씀 드렸습니다.
아버님, 나는 누구일까, 나는 어디에 있을까, 나는 무엇을 찾을까 하는 문제를 두고 여기에 모인 당신의 자녀들이 어떤 흐름의 과정에서 걸어 나가고 있는가를 생각해 봐야 되겠습니다. 이때는 과연 절박한 때인 것을 느끼옵니다.
통일교회 교인들이 수고하던 1960년대를 회상하면서, 통일교회의 축복받은 가정들을 일선에 내세우고 다짐을 해야 하는 요 때가 지나게 되면, 통일교회 전체를 내몰아 가지고 민족의 해원성사를 할 때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느끼게 되옵니다. 이 나라가 망할 운명의 때가 오면 남자 여자뿐만이 아니라 아들딸 전체를 동원해서라도 이 나라를 구해야 할 전통적인 일면을 저희들이 남겨야 할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오늘날 통일교회는 비참한 과정을 지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기에 부딪쳐 오는 시련이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그것이 저희가 대해를 맞을 때에 영광과 찬양의 요건으로서 남아질 수 있을진대, 그 흐름은 하늘의 기쁨이요, 하늘의 자랑이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사옵니다. 저희 앞에 부딪치는 모든 것을 저희가 피해 돌아갈 것이 아니라 정면으로 부딪쳐 나감으로써, 전부가 당신의 마음과 당신의 사연 가운데서 잊혀져 버리고 당신의 생각 가운데서 흘러가 버리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마음 가운데에 영원히 남고 오래도록 기억될 수 있는 내용으로 남아지기 위해 가는 통일교회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오늘 아침 여기에 모인 당신의 자녀들을 지켜 주시옵소서. 저희들은 얼굴을 바라볼 때, 내 눈이 지금까지 무엇을 바라보고 나왔으며, 내 코가 무슨 냄새를 맡고, 내 귀가 무슨 소리를 듣고, 내 입이 무엇을 먹고, 내 얼굴이 무엇을 느꼈나를 다시 한 번 직시하면서 분석 비판해야 되겠습니다. 이 손발이 누구를 위해 허덕였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되겠습니다.
아버지와 상관이 없고 나라와 상관이 없게 될 때에는 하늘의 때와 그 나라의 때가 오더라도 나는 그때와 상관없는 자리에 서게 된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 개인을 잃어버리고 가정을 잃어버리더라도 나라와 세계를 위해 살아야 할 것이 도의 길인 것을 알아야 되겠사옵니다. 성인의 이름을 남긴 사람은 그 시대에 있어서 아버지와 세계를 위해 살기 위한 걸음을 자초해 간 사람들인 것을 생각해 볼 때, 그 이상의 자리를 다짐하고 그 이상의 길을 가야 할 통일신도들은 이제부터 가야 할 최후의 절호의 찬스를 놓치지 말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스승이 명령한다고 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뜻을 알았기 때문에 명령하지 않아도 내 아들딸과 더불어 일선에 서서 싸우다가 죽겠노라고, 자기 아들딸에게 그렇게 유언을 하면서 아버지 앞에 복을 빌고 아버지 앞에 사정을 통고하며 가는 부모가 있다면 그 후손은 망하지 않을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럴 수 있는 통일 가정이 몇이나 되며, 그럴 수 있는 통일의 무리가 얼마나 되는가를 생각해야 되겠사옵니다. 손을 저으며 어려운 길을 안 가겠다고 뒷걸음치는 사람은 많고, 자기를 희생하며 남모르는 가운데 수난 길을 먼저 자초해 가는 사람이 없는 민족과 단체는 끝날이 왔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버지시여! 오늘 통일교회를 굽어살펴 주시옵소서. 저 자신이 아버지 앞에 부족함이 있거든, 그 부족한 것을 식구들 앞에 남겨 주지 마옵소서. 저는 저희 선조로부터 남아진 빚이 있다면 그것을 제 일대에서 갚을 것을 결심했사옵니다. 선조로부터 천운을 이어받을 수 있는 대한민국이 아버지 앞에 반대되고, 아버지 앞에 모순되고, 아버지 앞에 상충된 인연이 있다면 이것을 탕감시켜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런 와중에서 희생을 각오하고, 한걸음 후퇴하는 일이 있더라도 탕감해서 가야만 하는 길이 통일교회가 가는 길이기에 이 현재의 입장을 보고 낙심할 것이 아니라 미래의 뜻을 중심삼고 나아가야 되겠습니다. 어떻게 사느냐 하는 문제가 전후를 가릴 수 있고 선악을 가릴 수 있는 판단의 기준이 된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지방에 널려서 싸우고 있는 당신의 어린 자녀들을 기억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오며, 더욱이 내일부터 출발하는 전국의 순회사들을 아버지께서 축복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그들은 당신의 피곤한 걸음을 대신하여 걷고, 당신의 고달픈 사연을 대신 전해 주고, 굶주리는 당신의 자녀들을 대신 지켜 줄 수 있고, 당신이 가시는 길 앞에 있는 태산준령을 넘고 그 길을 안내할 수 있는 길잡이가 되어야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사옵니다. 그들이 가는 길을 축복하여 주옵소서. 그들이 가는 곳에 당신이 현현하시어 당신이 기뻐하실 수 있는 사정을 통고하시고 찾아오는 생명의 인연을 연결시켜 가지고 하늘땅이 화합하고 천지가 기뻐할 수 있는 사연이 거기에서 부활될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 이 아침을 기억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지금 이 시간은 특별순회사들이 본부에서 역사적인 자리를 갖고 있는 줄 알고 있사오니, 이 시간에 상봉의 때를 이어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가진 것을 감사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첫 번째 만나는 사람이 누구일 것이며, 첫 번째로 기쁨을 전할 사람은 누구이겠사옵니까? 슬프고 딱한 사정을 남겨 줄 사람, 아버지 앞에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공분의 마음을 남겨 줄 사람은 누구이겠사옵니까? 천태만상의 사연을 연결시켜 줄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가는 그들의 걸음 걸음 앞에 원리의 불을 주시옵시고, 그들이 사연을 따라 아버지 앞에 위로의 대상이 되고 아버지 앞에 신의의 대상이 되어, 외로운 자리에 계시는 아버지를 위로해 드릴 수 있고, 기쁘신 아버지를 대신하여 책임질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게 하시옵소서.
아버지, 삼천리 반도에 새로운 봄절기를 심어 놓아야 할 사명이 통일교단 앞에 있사오니 이들을 축복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들의 가는 길을 살피시옵고 지켜 주시옵소서. 그들이 돌아오는 날, 금의환향하는 그 날을 맞이할 때 하늘이 기뻐하고 땅이 기뻐하고, 당신의 영광의 나라가 기뻐할 수 있는 터전이 마련되고, 소망의 천국이 이 남한 땅을 통하여 이뤄질 수 있는 기원이 마련되는 특별한 계기를 마련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여기에 서 있는 자식이 지금까지 50평생 당신의 뜻을 따라 나온다고 하였지만, 오늘 이 자리에 선 것이 부끄럽사옵니다. 내일의 갈 길이 아직까지 태산같이 남아 있는 것을 생각할 때에 오늘도 몸부림쳐야 되겠고, 내일도 몸부림쳐야 되겠고, 여생을 몸부림쳐야 되겠습니다. 그런 몸부림치는 자리를 남긴다 하더라도 이 자리를 남긴다는 그 자체를 서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남긴 그 자리를 상속받을 수 있는 사람이 없을까봐 서러워하는 것을 당신이 잘 알고 계시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그것이 서러운 것이 아니라, 축복의 길을 이어받아 가지고 그것을 전통으로 남겨 인류가 가는 길 앞에 하나의 등대와 소망의 터전이 되는 민족정기를 마련하지 못할까봐 염려하시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수난길에서 수난의 전통을 남기기 위하여 몸부림치던 과거지사가 현재의 슬픔으로 남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의 세계를 향하여 가는 가운데 어떻게든 새로운 상봉의 계기를 마련하고자 하는 것이 저희가 불철주야 바라는 소원인 것을 당신은 잘 알고 계시오니, 이 시간도 당신이 그 길로 한걸음 이끌어 주시옵고 보살펴 주시옵기를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그것은 나 개인의 편안함을 위한 것이 아니라 민족과 세계가 편한 길을 찾기 위한 것이니만큼 그것이 당신의 소원이요, 당신이 소원의 일념을 통하여 그러한 것을 바라실 것이오니, 저희가 이것을 바라는 것을 긍휼히 보시옵소서. 내일의 희망은 당신의 희망을 대신하고 오늘의 생활은 당신의 이상적인 터전을 대신할 수 있는 승리의 여건이 되기를 바라고 있는 불쌍한 무리를 기억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세계에 널려 있는 당신의 외로운 아들딸들을 지키시옵소서. 더욱이 이 대한민국을 중심삼고 지금 싸워 나가는 길을, 아버님, 지켜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오며, 전국에 널려 있는 당신의 자녀들도 기억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새로운 경종이 울려나는 새아침을 맞이하여, 새로운 소망의 세계를 제시하여 흑암세계에 있는 만민 앞에 광명의 등불을 비추어 줄 수 있는 통일의 제단이 되고, 통일의 무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통일가를 중심삼은 이 나라 이 민족이 되기를 바라는 뜻이 당신의 소원인줄을 아오니 그러할 수 있는 행로 앞에 어긋나지 않기를 지극한 정성으로 다짐하면서 전진할 줄 아는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놀라운 역사적인 시대에 있어서 상봉의 기회를 놓치는 불쌍하고 처절하고 처참한 무리가 되지 말게 하시옵기를 바라옵고, 지금 한 말씀을 저들이 마음 몸에 새겨서 생애의 노정기로 삼을 수 있게 축복하여 주옵길 간절히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