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1971년 6월 6일, 현충일이옵니다. 이 현충일에 지금까지 하늘의 길을 찾아가는 사람들은 언제나 슬픔에 사무쳐 나왔던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더욱이 이 아침은 이달 들어 처음 맞는 안식일이옵니다. 저희들이 승리의 한날을 작정하고 섭리의 뜻 앞에 새로운 기원을 다짐할 수 있는 이 아침이 되기를, 아버지여, 바라옵니다.
금후에 이루어지는 이 나라의 모든 정세와 세계의 정세를 아버지께서 살펴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이 달을 중심삼은 입장에서 새로운 체제와 새로운 방향을 갖추어야 할 중요한 과정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이 나라와 우리 교회가 뜻 앞에 있어서 당신이 소원하시는 터전을 물려받는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교회와 나라가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생각하게 될 때, 1971년 6월, 이 달을 새로운 방향에서 아버지의 뜻 앞에 충성할 것을 다짐하는 중요한 계기로 삼아야 되겠사옵니다.
복잡다단한 세계의 정세 속에서도 흘러가는 인생길에서 가장 근원된 문제가 무엇인가를 알 수 있도록 아버님께서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이들은 내일의 소망을 보장받을 수 있는 스스로의 입장을 찾아가는 불쌍한 무리이옵니다. 현재에 있어서 스스로 영광의 자세를 갖출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사옵니다. 암담한 미래를 앞에 두고 이 세계의 절망과 더불어 뒤넘이쳐야 할 운명길에 서 있는 인류를, 아버님이여, 불쌍히 보시옵소서.
하늘의 섭리와 사랑을 이 땅 위에 세워 놓으신 아버지, 당신의 선의 심정을 이어받을 수 있는 긍휼의 대상이 진정 이 땅에 있사옵니까? 그런 한 남자가 있거들랑 그를 가까이 하시옵고, 한 여자가 있거들랑 그를 세우시어 축복하시옵소서. 그런 가정이 있으면 당신이 마음으로 그 가정을 만세에 찬양해야 할 가정으로 세우고 싶어하시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 족속이 있으면 그 족속을 중심삼아 가지고 한 나라를 세우고자 하는 당신의 깊은 마음의 흐름이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 나라가 있으면 영원히 천지의 인연을 대신할 수 있는, 당신의 거룩한 위업을 상속받을 수 있는 국가로 세우려 하시는 뜻을 저희들이 알고 있사옵니다.
높고 귀하신 당신의 섭리와 사랑의 마음을 더듬는 무리가 이 땅 위에 그렇게도 없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수많은 교단과 수많은 신자들은 있다 하더라도 당신의 고통의 심정과는 너무나 먼 거리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저희들은, 당신의 외로운 심정을 더듬어 당신 앞에 축수를 드릴 적마다 당신의 역사적인 비극의 심정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현실의 곤고한 입장에서 인연맺을 수 있는 그 무엇을 찾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알고 있는 저희들은 몸부림치면서라도 성전을 지켜야 할 책임을 더더욱 느끼옵니다.
금후에 다가올 혼란의 와중을 근절해야 할 세계에 있어서 당신이 믿을 수 있는 아들딸, 인자가 있거들랑 불철주야 당신이 목적하는 세계를 이루어야 하고, 무엇보다도 그리움에 사무쳐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옵니다. 오늘날 수많은 교계와 신앙세계에서 그러한 아들딸을 찾아내고 싶어도, 자기 일신의 해방과 구원을 위하여 염려하는 무리는 있지만 이 세계와 당신의 서러움을 염려하면서 내일의 싸움을 책임지고 현실의 곤고한 입장을 스스로 책임지려 하는 무리가 없는 것을 아옵니다.
아버지께서 불쌍하신 분이니 아버지의 뜻을 따르려는 무리는 외로운 길을 가지 않을 수 없사옵고, 눈물과 가슴 막히는 정성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생각하오니, 여기에 모인 뭇 생명들을, 아버지, 지켜 주시옵소서. 수난길을 승리의 길로 이끌어 주시옵고, 뜻을 위한 싸움의 노정을 자기의 운명길로 알고 싸우고 있는 이들의 발걸음을 지켜 주옵소서.
현재 저희들은 너무나 부족하고 불충하고 미급하여 자기 자체를 폭로해야 할 자신의 모습임을 발견하게 되옵니다. 땅 위에 살고 있는 당신의 아들 딸들이 어떻게 살아야 된다는 것을 마음으로는 알고 있지만 실제 행동으로는 옮기지 못하고 있는 이 딱한 사정을 아버지께서 살펴 주시옵소서. 행동과 마음이 일치되고, 생활과 이념이 일치되고, 자신의 생애가 역사적인 섭리와 일치되어야 한다는 엄숙한 과제를 앞에 놓고 자신을 냉철히 비판해야 되겠사옵니다.
당신이 엮어 가야 할 운명의 도상에는 너무도 진한 외로움이 가중되어 있고, 슬픔과 고통의 검은 구름이 앞을 가로막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이것을 개척해야 할 인간들인데도 불구하고 그런 입장에 서지 못하고 있으니, 이제 저희가 불쌍하신 아버지를 위로하는 아들딸이 되어야겠습니다.
사람으로 말미암아 지금까지 당신이 슬퍼하심을 알고 있사옵고, 사람으로 말미암아 타락한 인연의 고통을 책임지신 아버지의 사정을 알고 있사옵니다. 타락으로 말미암아 고아와 같은 신세로 역사를 엮어 나온 인류를 바라보시는 아버지의 입장, 원리원칙에 어긋나는 입장에서 부모를 잃어버린 자식같이 헤매는 인류를 바라보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저희들은 통찰해야 되겠습니다. 하늘 아버지는 언제나 영광의 자리에 계시고 언제나 승리의 자리에서 만복을 주관하고 계시는 줄 알았사오나, 만복이 나타나기 전에 한의 주인이 되어 그것을 십자가로써 탕감하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계신다는 것을 저희들은 이제 알아야 되겠습니다.
불초한 모습들이 아버지의 존전에 부복하였사옵니다. 당신의 큰 은혜를 받고 있는 역사적인 소중한 실체이면서 하늘의 슬픔을 그냥 그대로 이어받은 자체들임을 생각하게 될 때, 자식으로서 부끄러움을 느끼고 용서와 긍휼의 마음이 깃들기를 바랄 수 없는 부족한 자신을 발견하게 되옵니다. 당신의 사랑이 있는 자리를 고대하는 마음이 간절하게 우러나야 되겠습니다. 저희의 몸이 아버지 앞에 있으면서 갖은 화살을 다 받더라도 그것을 감수하겠다고 스스로 다짐하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아침에 전국에 널려 있는 외로운 자녀들을, 아버지, 지켜 주시옵소서. 남다른 길을 알았기 때문에 남다른 어려움을 겪어야 되겠고, 남다른 심정을 체휼했기 때문에 남다른 고독을 느껴야 되겠고, 남다른 책임을 짊어졌기 때문에 남다른 싸움터에서 싸워야 되겠고, 남다른 수난길을 가야 할 각자의 책임을 알았기 때문에 그 책임과 더불어 쓰러져야 되겠습니다. 그리 하여 당신의 길을 따라가는 후사들이 그것을 생활적인 표준으로 삼고 스스로 다짐하게 할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여기에 모인 소수의 무리를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이들 가운데 아버지께서 찾아오실 수 있는 자녀, 복을 주고 싶은 자녀가 있사옵니까? 당신의 마음을 부여잡고 흠뻑 당신의 사랑의 품에 품기고자 하는 이들을 품으시어 당신의 사연을 통고시키는 거룩한 이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길, 아버지여,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통일교단이 지금까지 망하지 않고 당신 앞에 남아진 것은 아버지 외에는 그 누구의 공적도 아니라는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습니다. 슬프신 아버지를 위로하기 위해, 남보다 슬픈 자리에서 아버지를 염려해야 되겠습니다. 역사적인 슬픔의 행각을 거쳐오신 아버님의 슬픔을 막을 자가 없다는 것을 아는 저희들은 뜻을 염려하시는 아버지를 염려하는 마음을 가지고 나왔사옵니다. 이러한 저희들, 출발이 그러했으니 끝도 그래야 되겠습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고 하였기 때문에, 수난으로 심었으니 수난으로 결과를 거두어 들여야 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통일교단에 있어서 역사적인 71년, 이 기간을 통하여 일선에 나가 있는 어린 딸들을, 아버지,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하늘을 대해 눈물을 흘릴 적마다 스스로의 한을 가지고 이 시대의 사명을 짊어진 교단을 대하여 염려하는 무리가 있거든 용서하여 주시옵고,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여 스스로 몸부림치는 자가 있거든 부디 지켜 주시옵소서.
부디부디 시대적 사명을 감당하고, 이 나라 이 민족 위에 하늘의 운세가 찾아오는 데 있어서 하나의 교두보가 되고 하나의 교량이 되게 하시어서 하늘의 위업을 이 민족에게 상속시킬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불초한 모습들이오나 당신 앞에 엎드려 사죄받을 수 있는 당신의 아들딸의 인연을 잊어버리지 않는 무리가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의 몸과 마음이 아버지의 성전이 되게 하시옵고, 흘러가는 역사와 더불어 흘러가다가 갈기갈기 찢어져 방향을 잃어버리고 천방지축하는 무리가 되지 않고, 당신의 영원한 후사(後嗣)를 대신하여서 마음과 몸을 바쳐 승리와 행복의 결과를 거두어, 역사시대에 영원히 하나의 전통을 남길 수 있는 무리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영원히 남아지는 무리가 되길 바라시는 아버지의 마음 앞에 부끄러움이 없는 자신들이 되어야 하기에, 이 시간 불충한 몸들을 아버지 앞에 바쳐 드리오니 받아 주시옵소서.
스스로 자기 자신을 아버지 앞에 드러내어서 당신의 긍휼의 마음이 감돌아 영원한 당신의 존전에서 영원히 입증받을 수 있고 권고받을 수 있는 이 아침이 되게 허락하여 주옵길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남한 각지에 널려서 이곳을 바라보며 기도하는 무리를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이 본부가 얼마나 두려운 자리인가를 저희들은 알고 있습니다. 이곳을 그리는 그들 위에 천배 만배 당신의 사랑을 내려 주시옵고, 세계에 널려서 이 나라를 흠모하는 당신의 외로운 무리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아버지 앞에 호소하고 기도하고 있사오니 저희들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아버님, 저희들의 앞날을 개척하시기 위하여 희생을 극복하시고 오시는 아버지의 뜻을 저희들은 믿고 순응하고 따라가면서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야 할 것이 저희의 생활철학이어야 함을 알고 있사오니, 이 길을 가는 데 있어서 정성을 다하고 충성을 다하겠다고 다짐하는 무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아버지께서 전체를 맡아서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이 아침도 기억하여 주시옵길 바라오며, 참부모님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우리가 현재 처해 있는 시점은 과거와 미래가 연결되어 있는 시점입니다. 현재 개인을 두고 보아도 그러한 입장에 있고, 우리 나라 정세를 두고 보아도 그러한 입장에 있으며, 세계의 정세를 두고 보아도 역시 그러한 입장에 있습니다. 섭리적인 뜻을 실현해 나가시는 하나님을 중심삼고 볼 때 하나님도 역시 그런 입장에 계십니다.
개인, 가정, 종족, 민족, 국가, 세계, 혹은 천주적인 섭리를 운행하는 천운을 통해 살펴볼 때에도, 오늘의 입장은 반드시 과거를 입증하고 미래를 세울 수 있는 입장이 되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오늘보다 내일이 더 소망적일 수 있는 것이요, 현재보다도 미래가 더 행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에, 오늘의 우리 자신, 즉 현재 생을 영위하고 있는 우리 자신의 입장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오늘이 어떠냐에 따라서 과거가 빛을 발하느냐, 발하지 못하느냐 하는 문제가 결정되는 것이요, 오늘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보다 좋은 미래가 건설되느냐, 못 되느냐 하는 문제가 판가름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다 좋은 미래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현재가 과거보다 못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현재에서 승리를 하지 못하는 자는 역사에 남을 후사(後嗣)가 못 되는 것입니다. 현재에 승리를 거둘 수 없는 사람은 미래의 계승자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승리라는 것을 말하게 될 때에, 과거의 승리보다도 현재의 승리를 다짐하지 못하는 무리가 되어 가지고는 시대와 더불어 정리되어지고 말 것입니다. 현재에 승리를 갖추지 못하는 무리는 미래의 승리의 세계를 상속받을 수 없는 것이요, 그 세계를 이루는 하나의 모체가 될 수 없는 것 역시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 입장에서 보게 될 때 오늘 생명을 가지고 살고 있는 우리 개체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자리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현재를 무시하는 사람은 결과적으로 과거의 인연을 무시하는 자리에 서는 것이요, 현재를 중요시하지 않는 사람은 미래의 중요한 자리에 설 수 없는 것도 두말할 나위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야말로 우리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시점이요, 현재야말로 우리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결정적인 시점이라는 것을 항시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사람이 실패를 하게 되면, 과거에 실패한 결과를 놓고 성공을 재 다짐할 수 있는 한 시점은 중요한 기간이 됩니다. 그 기간은 오늘의 한 순간으로 말미암아 결정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중차대한 자리에 봉착해 있는 것이 현재 우리의 입장인 것을 망각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만일 오늘 실패를 하고, 혹은 오늘 가는 길에 있어서 한 발자국이 어긋나게 되면, 그가 아무리 과거에 빛나는 영광의 자리에 있었고 빛나는 승리를 얻었다 하더라도 미래에는 간난(艱難)한 운명에 부딪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것은 일상생활이나 역사적인 사실을 미루어 보아 잘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에 무책임한 자에게는 미래를 책임지울 수 없는 것입니다. 현재에서 자기 운명의 기준을 넘었으면 생애의 기준도 넘어야 합니다. 생애의 기준을 중심삼고 심각하지 않은 사람은 현재보다도 더 심각한 미래가 찾아오면 그 미래의 세계에서 남아질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심각하지 못한 사람은 미래에 남아질 수 없고 반드시 제거당한다는 것입니다. 현재의 복잡한 환경이 미래와 관계맺고 있기 때문에, 그 복잡한 환경을 책임지고 수습하여 극복하지 못하는 무리는 현재보다 더 복잡한 미래가 다가온다면 거기에서 남아질 수 없다는 것은 두말할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가 귀했더냐, 혹은 미래가 귀할 것이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에, 과거가 제아무리 귀하고 미래가 아무리 귀하다 하더라도, 또 그것들이 귀한 것을 아는 나 자신이 되었다 하더라도 과거와 미래를 현실의 운명에 연결시켜 귀한 가치를 드러내지 못한다면, 과거도 규탄을 받아야 되고 미래도 규탄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실이 실패나 성공의 결정적인 요인이 될 수 있는 귀중한 것임을 느껴야 됩니다.
현실에서 자신이 하는 말과 행동은 현실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과거와 미래를 증거할 수 있는 행동이요 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과거의 그릇됨을 현실에서 새로이 공포하는 말을 해야 되고, 미래에 그릇 되지 않음을 보증하고 입증시키는 행동을 해야 될 것입니다.
우리가 현실에서 말하고 행하는 모든 것이 현실의 것만으로 남아지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더 필요하다 할 수 있는 충분한 내용으로 남아지게 될 때에, 그 현실은 미래를 주관할 수 있는 것이요, 미래의 표준이 될 수 있는 것이요, 또한 과거의 빛을 발하게 하는 기점이 될 수 있는 것이요, 과거의 슬픈 역사가 있으면 그 슬픈 역사를 청산짓고 새로이 출발할 수 있는 희망의 기점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에, 현실을 얼마나 중시해야 되느냐 하는 것을 자연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살아 나가는 데 있어서 망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기의 일생을 불행하게 마치기를 바라는 사람은 더욱이 없습니다. 그러면 불행해지지 않고 망하지 않기를 바라는 입장에 있어서 그것이 어느 과정에서 관계를 맺고 결정되느냐? 이것은 과거도 아니요, 미래도 아니요, 현실입니다. 흥망성쇠의 동기와 관건이 되는 것은 현실입니다. 흥망성쇠는 과거나 미래에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비참하고도 냉정한 시간 과정에서 결판지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현실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미처 몰랐습니다.
그러기에 현실이라는 심각한 자리에서 져야 하는 책임은 현실에만 남아지는 책임이 아니라 미래에까지 남아지는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현실은 어제의 부족했던 것, 혹은 과거의 실패의 요인을 청산지을 수 있는 좋은 찬스가 된다는 것을 우리는 느끼지 않으면 안 됩니다.
흥망성쇠의 요인은 어디에 있느냐? 현실에 있다는 것입니다. 망할 수 있는 운명에 서 있다면 이것을 수습할 수 있는 길은 과거에 있는 것도 아니요, 미래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현실에서 이 길을 찾지 못한 사람은 미래에 가서 아무리 결심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 미래를 약속할 수 있는 자신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에 가장 귀한 것이 현실 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그런 현실적인 입장에서 중심 위치를 결정하여야 할 자리, 안팎의 내용을 좌우할 수 있는 중심의 자리에 있기 때문에 행복을 찾는 데 있어서 현실의 행복을 찾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행복이라는 것은 우연히 찾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일단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하루하루에서 슬픈 생활을 해 나가는 사람은 하루가 행복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행복할 수 있는 요인을 어디에서부터 세워야 되느냐? 물론 과거에서부터 세워 나와야 되겠지만, 아무리 과거에서부터 세워 나왔다 하더라도 그것을 빛낼 수 있는 현실 기반을 상실한 채 행복을 찾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또 미래의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으로서 현재는 이렇지만 미래는 이렇지 않기를 바라는 입장에 있을지라도, 현재에서 그것을 찾을 수 있는 동기를 잃어버린 자리에 서 가지고는 미래의 행복도 보증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과거에 행복했던 모든 여건을 청산짓고 미래의 행복을 출발시킬 수 있는 동기는 어디에 있느냐? 현실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현실은 냉엄하고도 무자비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현실에서 한마디 말을 잘못하면 그 말로 말미암아 자기 일생의 운명이 왔다갔다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행동을 잘못하면 그 행동이 흘러가 버리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터전을 파탄시키고 붕괴시키는 요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의 신앙생활이 오늘의 현실과 상관관계를 맺어 현실에서 자신을 빛나게 하지 못한다면 할진대는, 과거에 아무리 빛나는 신앙생활을 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오늘의 자신과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또 '현실의 나는 이렇지만 미래의 나는 이럴 것이다'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창조해 나갈 수 있는 터전을 갖추고 미래에 승리할 수 있는 요인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선한 천품을 가졌다고 해도, 내적인 기준에서 행복의 요인을 스스로 느낄 수 있는 터전을 잃어버린 사람은 미래의 행복도 보장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실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현실을 망각하는 사람은 과거를 부정하는 자리에 서는 것이요, 현실을 중요시하지 않는 사람은 미래의 중심의 자리를 부정하는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현실이야말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미래의 주인은 어디서부터 결정되느냐? 물론 과거로부터 출발해 나와야 되겠지만, 출발을 아무리 잘했고 어제까지 아무리 잘해 나왔다 하더라도 오늘의 현실에서 당당히 승리의 요인을 이어받을 수 있는 기쁨의 자리에 서지 않고, 승리의 현실을 갖지 않으면, 또 과거의 승리의 터전을 이어받지 않으면 절대로 미래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또한 과거보다 나은 현실의 자리, 과거를 빛낼 수 있는 현실의 자리를 갖지 못한다면 절대로 미래의 소망의 터전을 이어받을 수 있는 기준도 세울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에 현실이야말로 과거의 부활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오늘날 기독교에서는 부활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희생을 강조하고 매일 새롭게 되기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일에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소망하는 사람이 되면 되겠어요? 안 됩니다. 그 소망을 오늘의 현실 생활권 내에서 체휼하고, 즉 현실의 감정과 일체가 되게 하여 오늘의 생활무대에서 인연될 수 있는 요건을 만들어 나가야 됩니다. 이러한 실증적인 기반을 상실한 사람은 미래의 상속자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래의 주인이 될 수 있는 터전은 현실에서부터 마련해야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과연 현실의 나 자신이 미래를 상속받을 수 있는 확고부동한 자리에 서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현실이 과거를 부정시킬 수 있는 당당한 권위를 가진 주체의 자리에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에게 빛나는 과거가 있었다면 그 과거는 현재를 위해서 있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자신을 어떻게 발견하느냐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과거의 승자의 기쁨이 오늘의 패자의 서러움을 환영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의 패자, 혹은 오늘의 약자로서 신음하는 그런 고통은 미래가 받아 들일 수 없고 계승할 수 없는 요인 중의 주체인 것을 볼 때, 오늘 이 때야말로 중요시하지 않을 수 없는 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미래의 주인이 될 수 있는 요인의 주체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미래의 주인은 어디서 나올 것이냐? 오늘을 상실한 자리에서는 나올 수 없습니다. 우리가 속해 있는 현실의 사회를 바라볼 때, 부패하고 사망이 감도는 악한 세계라 하더라도, 이 악한 세계를 토대로 해서 미래의 세계에 감동을 주는 것입니다. 오늘 이 흑암세계의 권한을 생활권내에서 제거할 수 있는 자극, 그럴 수 있는 주체성을 발견하여 생활하는 환경에서 스스로 해내겠다고 하는 결심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미래에 보람 있는 길이 계승되는 것이지, 현재는 암담한 자리에 있으면서 미래에만 소망을 두고 아무리 큰 꿈을 꾸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현실 과정을 거쳐 미래가 판정되는 것이 틀림없기 때문에 그런 입장에 서 가지고는 미래를 계승받을 터전을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이라는 것이 얼마나 귀중한지 모릅니다.
과거가 귀중하냐, 오늘이 귀중하더냐, 미래가 귀중할 것이냐? 과거가 귀중한 것이 아니요, 미래가 귀중한 것도 아니요, 오늘이 귀중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슬픈 순간을 중심삼고, 고통, 불행, 혹은 행복을 중심삼고 몸부림치고 있는 현실이 가장 심각하고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현재에 있어서 고통받는 환경을 내 스스로 극복하고 고통받는 이 환경을 내 스스로 넘어서야 되겠다고 하며 몸부림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너무나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친구지간에 있어서나 사회활동하거나, 국가를 대하는 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친구를 중심삼고 자랑할 수 있는 자리, 오늘 사회의 한 일원으로서 사회 앞에 자랑할 수 있는 자리, 오늘 국가 앞에 당당히 자랑할 수 있는 자리에 선 사람을 중심삼고 시대는 발전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이 없고, 그러한 환경의 터전이 없어 가지고는 지금보다 나은 희망의 세계를 맞을 수 없는 것이요, 이 땅 위에서 재출발할 수 있는 기점도 찾지 못할 것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에, 오늘이 가장 귀하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기쁘다고 할 수 있는 현실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역사적 실패의 자리에서 후퇴할 수 있는 현실의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미래의 슬픈 고통이 우리 앞에 다가올 때에 그 고통을 피해 가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복귀섭리노정을 다시 한 번 회고해 보면, 우리 조상들이 지금까지 하늘 앞에 승리를 다짐해 나왔느냐, 혹은 실패의 요인을 자극시켜 가지고 하늘의 슬픔을 가중시켰느냐 하는 것을 너무나 잘 알 수 있습니다.
하늘 앞에 그렇게 충성하고 그렇게 수고하였던 노아 할아버지, 오직 뜻 대한 일념으로 슬픔을 잊고 자기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자리에 섰던 아브라함, 미래에 대한 소망을 품고 이스라엘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염려하며 애국심을 발휘하는 행동파로서 선두를 달렸던 모세, 혹은 생애 전체의 중심이 될 수 있는 귀중한 청춘시대까지 부정하고 광야에서 수도생활을 하던 세례 요한 등등의 사람들을 회고해 보고, 그들이 역사시대에 있어서 승리의 요인이 됐느냐 하는 것을 생각할 때에, 패자로서 슬픔의 요인을 남겼을뿐 승리의 터전을 공고하게 다지지 못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역사적인 사실을 미루어 볼 때에, 그들은 수십 년 혹은 일생을 걸고 수난의 길을 갔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결과가 나타났느냐?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를 계승할 수 있는 심각한 순간을 계속해서 갖지 못한 현실무대에서 그런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실패의 요인이 깃들어 저끄러지는 결과가 나타났다는 사실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에 우리는 역사적인 시대를 계승받은 현실의 입장에서 누구 보다도 심각한 자리에 서야 되겠습니다. 모세가 누구보다도 심각한 자리에서 민족을 위해서 정성들이던 마음, 미래에 이스라엘을 창건하여 소망하던 천국의 계승자가 되기를 바라던 모세의 마음 이상의 마음을 가지고, 미래의 국가의 운명을 염려하는 자리에서 현실을 어떻게 미래와 연결시키냐 하는 문제를 붙들고 몸부림쳐야 되겠습니다. 아브라함을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의 명령을 중심삼고 자기의 일체의 행복의 요건을 한꺼번에 도말해 버리는 행동을 단행했지만, 결국 실패의 요인을 남겨 역사적인 한의 씨를 뿌렸습니다. 그는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됐느냐? 제단에 제물을 드릴 때에 비둘기를 쪼개지 않은 지극히 작은 실수 때문입니다. 시간으로 말하면 촌음에 지나지 않고, 행동으로 말해도 지극히 간단한 행동이었습니다.
그 촌음의 순간에 그렇게 큰 실패를 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현실에 있어서는 아무것도 아닌 간단한 행동이었지만 역사 전체를 뒤넘이치게 하는 동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그렇게 될 줄은 미처 몰랐던 것입니다. 미처 모르는 사이에 흥망성쇠의 요인은 현실이라는 운명길을 중심삼고 뒤넘이쳐 나간 것입니다. 그런 과거의 고통스러운 실패의 요인을 분석하여볼 때, 과거의 고통 이상으로 고통스런 자리도 당당코 나갈 수 있는 자신을 발견하지 않고는 실패의 요인을 남겼던 역사를 수정할 수 없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은 가장 심각한 순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역사적으로 눈물을 흘렸던 자리, 상고시대에 조상들이 남긴 뜻을 알면 알수록, 그 전체를 대신하여 그 이상의 심각한 자리라도 찾아 가겠다고 다짐하는 자기 자신의 위치를 현재에서 어떻게 결정지을 것이냐 하는 문제를 생각해야 됩니다. 더욱이 미래에 있어서 행복을 계승하기 위해서는 현재 이상의 수난길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재 자기가 당하는 수난 이상의 수난을 기꺼이 맞을 수 있고 현재의 수난 길을 요리할 수 있는 주인공이 되지 않고는, 미래의 계승자가 될 수 없고 미래의 터전을 마련하는 주체적인 존재로 탄생할 수 없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를 자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과거가 아무리 좋았다 하더라도 현실이 과거의 조종을 받아 끌려가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자신이 전진할 수 있는 방향을 갖추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뒤로 돌아가서 과거의 조종을 받는 것입니다.
오늘날 통일교회 신앙을 하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는 뜻을 처음 알았을 때 기뻐하던 그 마음이 오늘의 자신과 상관없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옛날에 자기가 뜻을 알고는 이렇게 이렇게 움직였다며 옛날을 자랑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오늘은 어떠냐고 하면, 오늘은 이러이러하기 때문에 그렇지 못하나 어느 한때는 다시 그럴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그 어느 한때라는 것이 오늘을 넘어서서는 오지 않는 것입니다. 만일에 신앙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무자비한 개척자의 생활을 한 과거가 있다 할진대, 그런 개척생활에 있어서 미래에 자랑할 수 있는 조건이 있다면 오늘은 그 이상으로 무자비한 개척생활을 하겠다는 결단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 마음을 잃어 버린 사람은 미래를 계승받을 수 있는 주인이 못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미래에는 과거보다도 더 심각한 문제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개인을 복귀한 후에 가정을 복귀하는 것이 복귀섭리의 노정입니다. 개인 보다도 가정이 더 큰 터전이기에, 가정은 개인보다 크고 심각한 내용의 모체를 가지고 복귀해야 되는 것입니다. 가정보다도 종족의 복귀는 더 심각합니다. 종족을 복귀하기 위해서는 가정을 복귀하기 위해 거쳤던 수난보다 더 어려운 수난의 길을 거쳐야 합니다. 미래에 계승될 뜻을 맞는 데에는 더 어려운 내용이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또한, 국가를 복귀하는 데에는 민족을 복귀할 때보다도, 세계를 복귀하는 데에는 국가를 복귀할 때보다 더 큰 수고를 해야 할 심각한 내용이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게 된다면 과거가 공인되고 앞으로 미래가 환영해야 할 현재를 치게 될 때, 깨지는 현재의 자신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과거를 들어서 현재를 치게 될 때에 깨지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미래까지 들어서 치더라도 깨질 수 없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현재의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데 있어서 깨지지 않는다고 안심할 수 있어야 미래가 자신과 인연맺어지는 것이지, 만일에 깨진다고 하면 미래는 자신과 인연이 맺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건 틀림없습니다.
미래의 주인은 현실이 결정하는 것입니다. 미래의 주인은 미래에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현실에서 결정되어 가지고 미래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루 이틀에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일년, 혹은 일생을 거쳐 가지고 현실적 승리의 터전이 되고, 그럼으로 말미암아 그것이 승리의 역사로 남아지고 오늘의 승리가 과거의 승리보다도 빛날 수 있게 될 때에, 현재의 중심으로 추대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또 추대를 받는 게 현재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적으로 다짐하면 다짐할수록 거기에는 현실에서 감지할 수 없는 미지의 미래의 내용이 깃드는 것이요, 그래야만 미래의 주인으로 남아질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통일교회 교인 가운데에도 현실을 무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현실을 무시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러면 현실에 실패의 요인이 있다면, 그것은 어디서부터 결정되느냐? 예배시간과 기도시간에서부터 결정됩니다. '내가 하나님과 더불어 같이하겠다' 하는 자리에서부터 결정되는 것입니다. 정성을 들이면 높아질 수 있지만 정성을 들이지 않으면 평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수평선에 있으면 모르지만 거기에서 떨어지기 쉬운 것입니다.
이렇게 보게 될 때에 미래와 현실의 승리를 결정짓는 자리는 어떤 자리냐? 심각하게 정성들이는 자리입니다. 그러면 심각하지 않은 자리에서는 그것이 결정 안 되느냐? 천만에요. 물론 심각해 가지고 몸부림치는 자리에서도 실패의 요인이 결정될 수도 있겠지만 심각하지 않는 자리에서 그런 실패의 요인이 현실과 이마를 맞대어 가지고 전진과 후퇴의 운명을 결정짓게 되는 일이 더 많다는 것입니다. 하루하루의 생활에서 얼마나 심각하냐 하는 심각의 정도가 결정의 요인이 되는 것보다도 심각하지 않을 때에 자기의 운명이 뒤넘이치는 경우가 더 많은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말하면, 저기 땅 끝에서 하나의 선이 나를 찾아오고, 이 끝에서 현재의 나와 더불어 맞춰 나가는 선이 있다면 이것이 어느때에 마주칠 것이냐? 미래에 마주쳐 가지고는 관계가 맺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늘과는 하등의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언제 연결시킬 것이냐? 현실의 한 시점에서 그것이 연결될 수 있는 때를 가져야 됩니다.
그렇게 해서 맺어진 것이 하늘땅을 중심삼아 가지고 사탄 세력권내에서 제거당할 것이냐? 아닙니다. 제거돼서는 안 됩니다. 절대적이어야 됩니다. 아무리 천지가 동요하더라도 그것만은 동요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제일의 기준, 절대적인 기준을 현실에 입각한 자기 생애과정에서 반드시 결정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정되는 그 순간은 현실을 대표하는 것은 물론 역사를 대표할 수 있는 순간입니다. 그 순간은 미래의 요인이 될 수 있는 대표적인 기준을 결정지을 수 있는 공고한 자리가 아니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미래의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결정되는 때는 언제냐? 나 자신이 좋아서, 신이 나 가지고, 은혜에 사무쳐 있을 때일 것이냐? 보세요. 섭리의 때라는 것은 하나님을 진짜 사랑하는 자리에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은혜의 자리에는 하나님이 먼저 오시는 것이 아니예요. 왜? 타락한 이 세상은 하나님이 먼저 출발하신 것이 아니라 사탄이 먼저 출발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그 요인을 결정짓는 자리에는 어떻게 되겠느냐? 사탄이 먼저 참석할 수 있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해 놓으면 사람이 먹기 전에 파리가 날아드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을 방지하지 않고는 아무리 정성들인 음식이라도 더럽혀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파리를 제거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갖춰야 될 것이 아니겠어요? 그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러면 사탄은 어디에 있느냐? 어디에 있긴 어디 있어요, 세계에 있지요. 어느때에 있었냐? 과거에 있고 미래에 있느냐? 현실에 있습니다. 그러니 현실에서 사탄을 때려잡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사탄을 어떤 자리에서 때려잡아야 하느냐? 여러분은 이런 생각 안 해 봤지요? 현실, 즉 역사적인 과정에서, 습관화된 터전 위에서 '이렇게 이렇게 살다 이렇게 이렇게 가면 될 것 같은데 남달리 그럴 게 뭐 있느냐'이렇게 생각하는 자리에서는 절대로 사탄을 굴복시키고 승리할 수 없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6천년 동안 하나님을 유린하고, 수많은 우리 선조들을 유린한 사탄이 얼마나 간교하고 얼마나 음흉한가를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거기에 걸려 6천년 동안 수고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탄을 대비해 싸워 나오는 기독교 역사를 두고 볼 때, 예수와 성신이 영계에서 그렇게 싸워 나오지만 피를 흘려 대가를 치르지 않고는 퇴치할 수 없었던, 그렇게 악랄한 사탄이라는 사실을 여러분이 아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사탄과 언제 결판을 지을 것이냐? 과거에? 만일 과거에 결판을 지었다면 그것으로 끝날 것이냐? 안 끝납니다. 역사를 붙안고 섭리의 뜻과 더불어 대결해 나오는 사탄이기 때문에, 섭리를 중심삼고 역사의 운명을 완전히 결판지을 때까지는 남아지는 것입니다. 백년이면 백년의 일생 동안 그런 섭리권내에 포함되어 가지고 길을 가고 있는 우리가 아니겠어요? 그렇기 때문에 이 타락된 권내에서 승리했던 것이 자기 나름대로의 승리를 가진 것이라면 이 승리는 역사시대를 초월하여 남아져야 할 하나님의 섭리권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문제를 두고 볼 때에, 그야말로 최후의 승리, 역사적인 승리는 나 혼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사탄과 나의 삼각관계에서 내가 하나님을 대표해 가지고 사탄을 제거하겠다는 승리의 결정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언제 할 것이냐? 과거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과거에 승리를 했더라도…. 보세요. 예수님이 3대시험을 받아 승리했을 때에 사탄은 잠깐 떠난다고 했습니다. 민족을 동원해서 다시 올 것을 다짐하고 잠깐 떠난다고 했던 것입니다. 결국 민족을 대신해서 사탄이 나오게 될 때 3대시험에 승리한 예수님도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게 되었던 거예요. 예수님은 비록 이스라엘 나라에 의해 쫓겨 죽을지라도 다음에 그 후세들이 로마 제국을 중심삼고 다시 준비할 수 있는 터전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죽음의 길을 가면서도 공세를 취할 수 있는, 미래에 원수를 침공할 수 있는 무대를 양보하지 않기 위해서 몸부림쳐간 걸음이 바로 십자가의 수난길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최후의 운명을 바라보는 자리에서 온갖 정성을 다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느냐? 현실적인 죽음의 자리에서 사탄이 침공할 수 없는 절대적인 방어의 요건을 갖추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과 일심동체가 되어 침공의 여건을 제공하지 않기 위해 몸부림쳐 간 것이 십자가의 길입니다. 이것이 원수를 대해 복을 빌고 나왔던 심각한 자리가 아니겠어요? 역사적인 순간에 생명을 걸어 놓고 최후의 현실적 요인을 결정짓는 엄숙한 자리요, 심각한 자리가 십자가의 도상이었던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승리, 혹은 행복의 요인은 어디에서 오느냐? 여러분이 생각하는 그러한 기반에서는 절대로 오지 않습니다. 타락권내의 상습화된 인생살이에 있어서 누구나 그리는 행복의 요인을 중심삼고는 절대로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그런 자리가 찾아진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미래의 절대적인 승리의 터전으로 남아질 수 있다고 보장할 수 없습니다. 왜 그러냐? 그러한 자리는 사탄권내에 있는 슬픔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것을 부정해야 됩니다. 격파하라는 것입니다. 제압하라는 것입니다. 전부 극복하라는 것입니다. 참아야 돼요. 견뎌야 됩니다. 견딘다는 것은 후퇴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으면서 전진하는 것입니다. 그 요건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부정하는 자리에서 밀고 넘어가야 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현실적으로 복귀섭리를 실현시키는 하나님의 입장이 얼마나 심각하겠는가 하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여러분이 심각한 고통을 느끼며 책임을 지고 현재의 자신을 대하고 있느냐 하는 것, 하나님의 섭리와 더불어 얼마나 심각하냐 하는 것 등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가 제아무리 심각하더라도 절대로 깨지면 안 되는 것입니다. 심각한 것이, 결의한 그 내용이 어떠한 과거의 역사와 같으면 쳐야 됩니다. 과거에 아무리 비참하고 치열한 투쟁과정이 수천 번 수만 번 있다 하더라도 그 터전을 깨뜨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수만 번 그 일을 했던 것을 한꺼번에 퍼붓는 시련도상에 있더라도 내 정신은 변함이 없어야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므로 성공하겠다는 사람은 현실을 중요시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공부하는 데 있어서도 현실을 중심삼고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열심히 공부한다는 것은 현실의 여건을 환영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그렇잖아요? 현실의 여건을 부정하는 입장을 찾아 들어가지 않고는 성공할 수 있는 길도, 행복할 수 있는 길도 갈 수가 없습니다. 간단한 것입니다.
공부할 때도 전부 다 일등이예요? 천만에요. 낙제하는 사람도 있다는 거예요. 낙제한 사람은 낙제 안 한 사람보다 못한 것입니다. 학교에 들어가 낙제했다면, 그는 학교에 못 들어가 낙제를 모르는 사람보다 사실은 못한 것입니다. 부정적인 여건이 가로막고 있으면 그것을 넘어가야 됩니다. 그러려면 몇 배 몇십 배의 노력을 해야 합니다. 현실에서 공인을 받고 미래의 자기 위치를 결정하려면 몇 배의 수난길을 가야 됩니다. 현실에서 그러한 결과를 못 가져왔으면 현실을 납득시키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잘못한 것은 차라리 안 한 것보다 못하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에 문제는 어디에 있느냐? 학교에 갔다면 그 학교를 대표할 수 있는 일등을 해야 됩니다. 일등하기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머리가 좋더라도 '내 머리는 좋으니까…' 이러며 자신하는 사람은 어떻게 한번은 일등할는지 모르지만 노력하는 사람한테는 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노력은 뭐냐? 자기가 그 길을 개척하기 위해서 누구보다도 많은 수고를 하는 것입니다. 누구보다도 참고 견디는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성공의 요인이 결정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 생활과정에서는 패자의 서러움이 깃드는 것이 아니라 승자의 영광의 터전이 갖추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현실에서 잘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래를 계승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현재의 행락에 보조를 맞추는 사람이 아니요, 현재의 환희의 환경에 장단맞춰 춤추는 사람이 아닙니다. 미래의 가치를 현실권내에 세우기 위하여 현재의 환경을 극복하고 참고 견디며 무한히 희생하고 무한히 대가를 치르는 사람이 아니고는 미래의 상속자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한 개인의 성공을 두고 보더라도 마찬가지이며 국가를 두고 보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국가도 국민이 단결하면 살고 분열하면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단결하는 데는 무엇을 중심삼고 단결해야 하느냐? 나를 중심삼고 단결해야 하느냐? 아닙니다. 나라를 중심삼고 단결해야 됩니다. 나라를 성공시키기 위해서 단결해야 됩니다. 나라를 성공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나라의 제반 부패 요인을 제거해야 됩니다. 그것을 극복해야 됩니다.
그 부패의 요인을 극복할 수 있는 단결이 없게 될 때에 그 나라는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아요? 동고동락해야 해야 됩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 나가야만 국가에게는 희망적인 미래가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희망적인 미래의 세계는 어디서부터 시작되느냐? 지금부터입니다. 미래의 세계를 희망의 세계로 맞이하려면 미래의 세계를 붙안고 현실 과정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무리가 있어야 됩니다. 단결된 형태를 갖추어 가지고 세계적인 문제들을 극복하는 무리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미래의 세계는 누구의 세계가 되어야 하느냐? 사탄의 세계가 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세계가 되어야 돼요. 미래의 세계를 하나님의 세계로 만들려면 현재에 하나님의 뜻을 중심삼고 반대하는 사탄세계의 요인을 극복하는 무리가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의 세계를 위해 참고 견디는 무리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미래에 희망하는 세계가 올 것입니다. 미래의 세계를 하나님의 세계로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의 애국자를 두고 볼 때에도 누가 애국자 중의 애국자냐? 같은 입장에서도 고생을 더 많이 한 사람이 애국자 중의 애국자입니다. 효자를 두고 보더라도 누가 진정한 효자냐? 이런 입장에서 볼 때, 많은 사람 가운데 중심이 될 수 있는 사람은 환경적으로 갖추어진 면이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 반대로 상극된 면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는 효자 중의 효자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그러면 오늘날 통일교회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통일교회를 지도하고 있는 나에게 있어서도 통일교회를 어떻게 이끌고 갈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통일교회를 어떻게 이끌고 갈 것이냐? 현재에 있어서 춤추고 가는 것이 좋으냐? 현재에 춤을 추었으면 미래에는 그 이상의 춤을 춰야 됩니다. 현재에 기뻐하였으면 미래에는 더 기뻐할 수 있는 내용이 있어야 됩니다. 그럴 수 있는 자리를 발견했다면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다 할 때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이냐? 대중의 공인을 받아야 됩니다.
그러면 대중의 공인을 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잘먹고 잘살아서? 아닙니다. 대중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고 자기는 못먹고 못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통일교회 패들이 그렇게 살면 망하지 않습니다. 어느 누가 망하라고 아무리 발악을 하고, 목을 자르겠다고 아무리 별의별 수단 방법을 쓰더라도, 그래서 목을 잘라 놓아도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를 자르면 두 개가 나옵니다. 그렇지 않아요? 여러분, 나무의 종대를 잘라 놓으면 그 밑에서 가지가 여러 개 나오지요? 뿌리만 싱싱하다면 여러 개의 가지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통일교회가 승리의 터전을 갖추고 현재에서 승리한 내용을 전통적으로 미래에 상속시킬 수 있고, 미래를 인계받을 수 있기 위해서는 전체를 위해서 희생해야 되겠습니다. 과거의 우리 선조들도 그렇게 해 나온 사람이라야 승리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승리해 나오던 조상들이 실패한 이유는 무엇이냐? 공적인 입장에 섰다는 것을 망각하고 자유로운 행동을 했기 때문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게 될 때에다 망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통일교회에 들어온 사람들 가운데 스스로 고생했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선생님을 대하며 '내가 이렇게 이렇게 일을 했는데 그것을 몰라준다'고 하면서 눈물을 섬벅 섬벅 흘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눈물을 섬벅 섬벅 흘리는 건 좋아요. 그런데 그가 공적인 일을 염려하면서 섬벅섬벅 흘린다고 생각해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런 것은 공적인 뜻과는 관계가 없는 거예요.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됩니다. 그렇게 눈물을 섬벅 섬벅 흘리고 다님으로써 다른 사람이 비참하게 느껴서 '아! 그러냐' 하고 동정하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 공적인 것은 나중으로 미루고 사적인 것을 하면 망하는 것입니다. 망하지 말래도 망하는 거예요.
부부 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에게 사정을 하고 아무리 뭐라고 해도 들어주지 않던 일도, 가족을 걸고 들어가고 아벨을 중심삼고 나가는 입장에서, 가문을 두고 봐도 그럴 수 없고 과거의 인연을 보거나 미래의 인연을 봐도 그럴 수 없다고 하게 될 때는 남편도 옳은 말이라고 긍정할 것입니다. 누구나 그렇다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불평을 할지 모르지만 내심으로는 '그래 당신 말이 맞다. 체면상, 위신상 이럴 뿐이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다 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이고 자식이고 뭣이고 다 밉다'고 해보라는 거예요. 누가 동정하나. 그렇게 한 번 하면 틈이 벌어지고, 두 번 하면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공적인 문제를 중심삼고 눈물을 흘릴수록 한 번 하고 두 번 해도 그것은 멀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한 번 하면 다 못 한다고 뛰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남편이 그런 아내를 바라보며 '아, 고생하는구나. 나보다 낫구나' 하는 것입니다.
내가 어제 저녁에 정명환씨를 만났는데 그 양반이 자기 부인을 떡- 칭찬 하는 거예요. 여자로서 아주 멋진 여자라는 것입니다. 지금 나이가 40을 넘고 아들딸이 일곱이나 되는데 대학을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처녀 때에 못한 공부를 지금은 처녀들보다 더 잘하겠다고 하는 것을 보고 탄복했다는 거예요. 그렇지 않겠어요? 살림살이를 제쳐놓거나 남편을 등한시하지도 않고 할 일을 다하면서 학교에 다닌다는 거예요. 아주 만능이라는 거예요. 나도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자기 아내를 칭찬하는 것이 처음인지 모르지만 그거 굉장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 저 남자는 행복한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여자가 지금 공부해서 뭐 할 것이냐 했다는 거예요. 돈이 없나, 아들딸이 없나,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데 왜 공부하느냐고 했다는 거예요. 잠도 하루에 몇 시간 안 잔다나요. 저렇게 고생이 막심해 가지고 어떻게 사나 했는데 노력하는 걸 보니 희망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 희망은 뭐냐? 한국 여성으로서 미국에 가서 미국 대학의 교수가 되겠다고 한다는 거예요. 이런 얘기를 들을 때, 현실을 극복하는 데 있어서는 미래의 포부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가치 있는 것을 추구해 나가는 과정에서 현재의 환경은 극복되는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 둘이 싸우는 것은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출세하니까 아내가 업신여김받던 것을 복수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면 어느 남편이 동정을 하겠습니까? 그러나 남편의 길을 열어 주고 '앞으로 한국 여성의 권위를 세계에 자랑하자'는 관점에서, 그런 사상적 토대 위에서 그러면 남편이 비록 아내에게 말은 하지 않아도 귀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이런 원칙은 어디서부터 세워야 되느냐? 오늘 이 현실에서부터 세워야 합니다. 현실이 중요하니 현실에서 훈련해야 되는데 어떤 자리에서 훈련해야 되느냐? 지금 있는 자리보다 나은 자리에서? 그것은 누구나 다 바라는 것이지만 아무 가치도 없는 거예요. 거기에는 중심이 될 수 있는 내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디를 점령해야 되느냐? 참사랑만이 치리하는 치리권을 완전히 점령해야 됩니다. 그 참사랑의 치리권을 정복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첩첩 방위선을 거치고 수난을 극복하고 나서야 가능합니다. 또한, 그 수난을 감수할 수 있는 스스로의 입장이 결정된 현재의 터전을 갖지 않고는 달성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통일교회의 갈 길, 통일교회의 현재 입장을 두고 볼 때, 통일교회가 이 세계의 역사과정에서 미래의 주인으로 군림할 수 있는 자리는 어떤 자리냐? 개인을 위한 자리가 아닙니다. 개인의 자리보다 나은 자리입니다. 세계 30억 인류의 개개인보다 조금 나으면 개인적인 미래의 주인이 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개인적인 주인으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또 가정을 중심삼고 볼 때 조금 나으면 가정적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바라는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가정을 넘어서 종족, 종족을 넘어서 국가, 국가를 넘어서 세계적 주인으로 군림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두고 볼 때에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누구보다도 비참한 역사과정을 거쳐서 남아 가지고, 그 비참한 역사를 비참으로 소화시킬 것이 아니라 영광으로 소화시켜서 승리의 요인으로 결정지을 수 있는 확고부동한 현실적 승리의 터전을 마련하지 않고는 미래의 주인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정적인 요인이라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우리 통일교회 간부면 간부들을 보면서 '어느 한때에 어떤 사람이 될까?' 하고 생각합니다. 어려운 자리에 들어가게 되면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것을 생각합니다. 결정적인 사람은 좋은 자리에 가기를 원해도 한번 걸려 나갔다 하면 제일 골짜기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때 거기에서 탄력을 발휘해 가지고 뛰어오를 수 있어야 합니다. 올 때가 드디어 왔다고 생각하고 탄력을 발휘하여야 합니다. 핍박을 받으면 받을수록, 두드리면 두드릴수록 탄력은 발생하지요? 현실에 머물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야 이거 됐구나. 내가 직접 될 수 있는 최후의 찬스다'고 하며 밟고 올라서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점핑한다는 것입니다.
핍박을 받을 때에 '아이고!' 하고 주저앉으면 망하는 것입니다. 못 견디고 '아이고!' 하면 그만이예요. 여러분이 그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요즘 통일 교회 교인들 가운데 핍박을 받으면 '아이고! 못 견디겠다. 아이고! 야단났다'고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냥 '아이고!' 하는 것과 고개를 들고 이를 물고 '아이고 하나님!' 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전자는 망하는 것이요, 후자는 하나님이 무엇이든 들어주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든 들어준다구요.
오늘날 선생님의 입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선생님은 여러분들이 모르는 가운데 언제나 기수의 입장에서 미지의 세계를 개척해 나가야 됩니다. 지금도 개척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선생님은 편안하게 차를 타고 다닌다고 하는데, 외적으로는 점점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는 환경을 갖추어 나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내심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그 범위를 달리한 면에서 심각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 세계를 넘을 수 있는 내용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선생님을 보고 '선생님은 왜 저럴까? 우리 통일교회 교인들은 고생하고 있는데, 선생님이 고생하는 게 뭐 있나? 우리는 보리밥을 먹고 굶기도 하는데 선생님은 이밥에 고기를 먹고 살고 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극복해야 할 현실적 터전이 미래에 극복의 원인이 되기 위해서는 앞으로 미래에 다가올 시련 도상과 현재의 시련을 비교해 가지고 미래의 시련을 견디어 나갈 수 있는 현실의 터전을 남겨야 됩니다. 그러지 않으면 통일교회도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래의 시련을 스스로 깨고 나갈 수 있는 입장에 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선생님이 외로운 것입니다. 단판으로 하면 심각한 자리라구요. 여러분은 모를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과정을 거쳐가야 됩니다.
여러분도 신앙생활하는 데 닥치는 일이 많지요? 큰 책임자가 됐다고 언제나 웃을 수 있고, 언제나 하나님이 같이하는 줄 알아요? 천만에요. 최후의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은 후퇴하고 사탄이 기수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갈 길을 가는 데 있어서 최후의 그 순간에는 누가 결정짓느냐?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도 조심스럽게 비판하고 사탄도 비판하는 것입니다. 믿어야 할 하나님도 비판하고, 믿지 못할 사탄도 하나님의 입장에 세워 놓고 비판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비판해서 가려내야 되는데 이것이 쉬운 일이겠어요? 그런 일을 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런 과정을 거쳐 나가야 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통일교회를 한계점으로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통일교회가 국가를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국가를 중심삼고 움직일 때까지 우리는 참고 견뎌야 합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맨 밑창에서 공고한 터전을 닦고 점핑할 때까지 있을 것입니다. 그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내가 요즈음 어떤 말을 듣느냐 하면, 지방에 있는 지역장 지구장들이 서울에 왔다가 돌아가면 선생님 안녕하시냐고 나의 안부를 묻는 기관장들이 점점 많아진다는 거예요. 뭔가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달라지긴 뭐가 달라집니까? 외형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는데 기관장들이 문선생에 대한 관심이 많아져 가지고 선생님의 안부를 묻고 그런다는 것입니다. 그런 말이 많아진 것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통일교회가 점핑할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뛰려고 하면 환경적으로, 외형적으로 모든 조건이 전부 다 갖추어진다는 거예요. 즉 내적인 면에서는 높아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1차에 복받을 수 있는 때를 내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제1차에 복받을 수 있는 여건을 양보하고, 제2차에 복받을 수 있는 것도 양보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제3차는 양보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복귀역사입니다. 하나님도 제1차, 제2차를 사탄에게 양보했지요? 그러나 제3차만은 양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제3차는 어떠한 때냐? 전체의 운명을 결정짓는 때요, 완결하는 때입니다. 그렇게 돼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 나오셨기 때문에, 오늘날 여러분이 성공하기 위해서도 '이것도 네 것, 저것도 네 것'이라고 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1차, 제2차는 식구들에게 줘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통일교회 문선생도 오늘날 통일교회 간부들을 누구보다도 영광된 자리에 내세우기 위해 노력해 나왔습니다. 통일교회 교인들은 이것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한 사람을 대해 가지고 한 생명을 책임지고 밤을 새워 가면서 말해 주던 그 사람이, 수십, 수백, 수천의 무리가 앞에 등장했을 때 정성들여 가지고 자기의 모든 소신을 피력하고 싶은 마음이 없겠습니까? 그런 자리에는 될 수 있는 대로 식구들을 내세우려고 합니다. 제1차, 제2차까지는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 그런 작전을 하는 거예요.
어떤 때에는 선생님이 참 기가 막힌 일을 많이 당합니다. 자기를 위해서 내세웠는데도 불구하고 선생님을 이용하려고 하는 무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 보라는 거예요. 아무리 선생님을 이용하려고 뱃심을 부려도 못 이룰 것입니다. 이렇게 돌아가면 여기에 오는 것이요 이렇게 돌아가면 여기로 오는 것인데, 그것을 스톱시켜야 하는 문제에 부딪치게 됩니다. 그래서는 안 되겠지만 때가 되면 일시에 부딪치게 됩니다. 이용해 보라는 것입니다. 부딪쳐 봐야 옳고 그른 것을 판정할 수 있습니다. 그때까지 밀고 나가는 것입니다. 그때 이 과정을 지나가려면 피해가 많다는 것입니다. 참 재미있습니다. 재미가 있다는 거예요.
어떤 때에는 부장 등 간부층에서 선생님을 찾아와서 잘못하면 뭐 어떻고 어떻고 합니다. 하지만 선생님은 거기에 안 말려들어 갑니다. 통일교회 문선생은 그런 데에 말려들지 않아요. 관(觀)이 딱 서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의 입장에서 그 누구의 침범도 받지 않습니다. 누구도 침범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재의 입장을 잃어버리는 사나이가 되지 않겠다는 것이 선생님의 입장입니다. 현재는 무자비하다는 거예요. 가정생활에서나, 교회생활에서나 무자비하다는 거예요. 이런 가운데에서 현재의 입장을 잃지 않고 나가고자 하는 것이 선생님의 입장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내일의 주인은 어떤 모습이냐? 통일교회에서 바라는 내일의 주인은 어떤 자리에 서는 사람이냐? 대한민국에서 드러나는 자리에 선 사람이 아닙니다. 지금 대한민국의 박정희 대통령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걱정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번에도 일본이 친중공 정책을 펴는 데 대해 구보끼 협회장을 세워 가지고 단식투쟁을 하며 적극적인 반대를 하게 했습니다. 수백 명이 단식투쟁을 한 것입니다. 일본 국민들은 그것을 보고 세상 물정을 모르는 미친 것들이라고 했을 것입니다. 뭐 미욱한 녀석들이라는 평을 받아도 괜찮습니다. 약삭빠르고 눈치빠른 사람, 여기에 알랑거리고 저기에 알랑거리는 사람은 충신이 아닙니다. 칼을 뽑았으면 그 칼을 다시 집어넣지 않고 죽을 때까지 지니는 사람이 충신입니다. 통일교회가 승공활동을 시작했으면, 중공의 정세를 봐 가지고 싹 작전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에서 이적(異蹟)이 벌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선생님은 일본 승공연합에 명령했습니다. '단식하라, 죽어라'고 말입니다. 이 바람에 무슨 일이 벌어졌느냐 하면 대만 정부가 승공연합에 완전히 목이 매였습니다. 장개석 총통이 구보끼 협회장 앞에 완전히 걸려든 것입니다. 장개석 총통은 멀지 않아 망명해야 되는 운명에 놓여 있었는데 '그때 우리가 당신을 책임지겠다'고 하며 제반적인 문제를 제시하니까 거기에 완전히 걸려든 것입니다. 그리하여 20분만 만나려고 했는데 아내와 함께 와서 한 시간을 넘게 통사정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래 가지고 우리가 단식하는 것에 대해서 일본 정부는 냉정한데, 대만에서는 매스컴을 총동원하는 관심을 보였습니다. 반일운동을 하는 것입니다. 일본 정부가 친중공정책을 펴는 데 대해 반대하는 것은 대만 정부가 무엇보다도 바라는 것인데, 일본내에 그렇게 하는 단체가 있다는 것은 대만 정부에게는 메시아와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여건을 만들어 가지고 대만 정부에 공문을 보내고, 세계적인 이념과 사상을 만날 수 있는 길을 닦아 가는 것입니다. 일본 정부가 안 하니까 구보끼 협회장이 그렇게 하고 와서 보고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보끼가 그 나라에 이름난 사람들을 만나 가지고 아주 잘먹고 큰 대접을 받고 다녔다는 거예요. (웃음) 그렇게 내가 보고를 받고 있습니다. (웃음)
이렇게 해서 무엇을 할 것이냐? 재료를 전부 다 수집해 가지고 함정을 파는 것입니다. 구보끼는 와클(WACL)대회의 의장입니다. 이제 7월대회에서도 구보끼 의장을 강력히 밀어 주어야 됩니다. 반대하는 사람이 있으면 선전포고해 놓고 '꽝' 머리 꼭대기에 폭탄을 퍼붓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수십개 국의 전직 수상 혹은 현직 수상들을 만나 가지고 '우리는 한국을 위해서 이렇게 단식투쟁까지 하고 있소'라고 공격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와클대회에 온 사람들은 '아!' 하고 눈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야 할 미래의 세계적인 반공전선에 대한 자세를 제시했다. 보다 높은 데로 승화하기 위해서는 젊은이들이 생명을 내걸어 놓고 7일 금식투쟁을 했다. 반공전선을 강화시키기 위해서 개인이 사선을 넘는 것을 감수할 수 있는 사상적인 자세를 공고화해야 된다. 그래 가지고 세계적으로 젊은 층을 중심한 반공체제를 결성시켜야 된다. 이것이 지금까지 의장으로서의 와클대회에 대한 견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이 많은 사람으로는 안 되겠다는 거예요.
그런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이런 단체를 만들어 가지고 '나는 미래의 반공 전선에 대비하기 위하여 젊은이를 길러 가지고 이렇게 해왔다. 이러한 것을 마련하기 위해 준비한 것이 국제승공연합이다'하고 선전하는 것입니다. 또한 '총회에 참가한 여러분은 앞으로 이 단체를 기억하고 이들이 갈 수 있는 길을 후원해 주시길 바란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배후가 되셔서 세워진 단체의 의장된 책임을 하는 것입니다. 또 그래야만 위신이 세워지지 않겠습니까? 이래 가지고 꼭대기를 딛고 올라설 수 있는 재료를 갖추어 가지고 선두에서 퍼붓는 것입니다. 이때는 일본의 기시 전 수상도 찾아가야 됩니다. 실행위원장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한 방에서 서로 대하게 됨으로써 '아, 구보끼가, 일본 사람이 결국 세계의 모든 코장이들을 때려잡으려고 이렇게 치니 이 얼마나 시원한가!' 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계획된 것입니다. 그러니 안고 환영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러한 일을 해봐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의 입장이 얼마나 비참하냐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보고를 듣게 될 때 사흘, 나흘, 닷새, 엿새를 지나 일주일이 지났습니다. 일주일 동안 매일 공공단체에 다니며 선전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선전에 너무 치중하다 보니 대회엔 전혀 신경을 쓰지 못해요. 그래서 대회에 신경을 쓰라고 했습니다. 그 일을 하다가 다리를 다쳤는데도 세계를 위해서 하는 일이니 열심히 하라고 했습니다.
이번에 구보끼는 자기들끼리 이 대회를 해 가지고 선전 자료를 만들었습니다. 거기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받더라도 세계를 걸어 놓고 양심의 가책을 받고, 고민을 하더라도 세계를 걸어 놓고 고민을 하라는 것입니다. 일본이 문제가 안 됩니다. 세계로 갈 포부를 갖고 나가는 개개인이 되어야 할 텐데도 불구하고 '이거 안 되겠다' 하면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를 걸어 놓고 맹세할 수 있는 적극적인 통일신도들이 된다면 통일교회는 절대로 망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다르냐? 일본내에 정치적 측면에서 반공을 반대하는 무리가 아무리 세력이 있고 배포가 있어도 행동하지 못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행동을 해야 되는 거예요. 이번 대회 바람에 우리는 행동을 해 가지고 우리 편의 패가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자민당과 싸우는 것입니다. 지금 국제승공연합과 부딪쳐 가지고 겨루고 있지요. 일본에서 지금까지 반대하던 패들도 '일본에 있어서 이런 단체가 어디 있었느냐. 야! 대단하다. 우리 보다 낫지 않느냐? 대관절 저들이 누구를 위해서 일하느냐? 저 단체가 이 나라를 위하고 세계를 위해 움직이고 있으니 얼마나 가치 있는 단체냐? 하게 될 거예요. 그러니 망할 수 있는 자리에 있으면 선전 재료가 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볼 때에, 현재의 정세로 봐서 우리가 미욱하고 어리석은 자들이지만 우리의 실속을 두고 볼 때에는 거기에 성공의 터전이 깃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싸우고 나서 실패한 것 같지만 승리한 것입니다. 그러니 거기서부터 현재의 입장이 그런 과정을 거쳐 가지고 하늘의 섭리라든가, 국가의 운세라든가, 세계의 운세는 발전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발판으로 전진하는 것이 역사의 발전과정 입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원리를 선포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저명한 사람들에게 이것을 통고해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 오늘날 이 나라의 중요한 일, 국가의 금후가 걸린 선거 이후의 후유증을 어떻게 해결지을 것이냐? 새로운 내각을 편성해 가지고 어떤 입장을 어떻게 제시할 것이냐? 이것은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말일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누구나 다 이렇게 이렇게 해야 한다' 하는 말을 하고, 그런 사상을 가지고 희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통일교회는 지금 누구도 모르는 길을 가고 있습니다. 누구도 모르는 현재의 입장을 중심삼고 세계 전체를 좌우할 수 있는 선구자적인 사명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계에 이런 움직임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미래의 세계가 어디서부터 형성될 것인가 생각해 보세요. 아무리 좋은 철학사상이라 해도, 그 철학사상을 중심삼고 세계적인 조직을 이루어 실천하는 운동으로 승화 되지 않으면 그것은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또, 그것이 자기 일개국을 중심삼고 움직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일개국을 희생하더라도 세계의 행복을 위해 움직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는 지금까지 희생해 나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역사를 두고 보면 순교의 역사입니다. 그 순교를 시시한 꼬라비 신도들이 한 것이 아닙니다. 가장 중심이 되는, 머리가 되는 신도들이 순교를 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기독교는 세계를 상속받을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된 것입니다. 이건 자동적으로 되게 되어 있지요. 그러지 않았으면 하나로 남아질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생각해야 합니다.
통일교회도 이와 마찬가지의 입장이니 대한민국에서 제일 수난길을 가야 되고 세계에 있어서도 수난의 첨단을 가서, 그 수난을 극복하는 데 있어서 기수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 영광이 통일교회를 위해서가 아니라 세계의 것으로 옮겨지게 하기 위해, 현실적인 기반을 상실하는 자리, 아무리 비참한 자리라 해도 그 자리는 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현재에서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주인의 자리를 상속받을 수 있는 터전이 되면 망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이런 것을 두고 볼 때에 내일의 주인은 현실적 기반 무대에서, 공적인 입장에서, 수난을 받는 자리에서 결정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수난을 받는 동기는 무엇이냐? 세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그 대가와 결과를 현실에서 바라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미래에 남겨 주기 위해서, 현재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그러한 현재의 환경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미래의 주인이 설정된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앞으로 교회에서 움직이는 일에 보다 충실하길 바랍니다.
여러분 보세요. 1970년대에는 1960년대보다 더 비참한 명령을 해야 됩니다.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더 많을 거예요. 지금까지는 가정을 가진 부인들만 동원시켰습니다만 조금 넘어가면 주부뿐만 아니라 남편과 아들딸까지도 동원해야 됩니다. 아들딸이라고 그냥 갈 수 없습니다. 아들딸이 앞장서야 됩니다. 아들딸이 열 살밖에 안 됐으면 '지금 열 살이지만 1970년대 말쯤 되면 스무 살이 되니 활동할 수 있다. 어서 먹고 빨리 자라거라'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가정 사위기대를 동원해 가지고 만민을 위해 괴나리봇짐을 지고 피난민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전쟁이 나서 적에게 쫓겨 한 곳으로 몰려 가는 피난민 생활이 아니라, 하나님을 중심한 은혜의 생활을 하기 위해서 보따리를 싸 가지고 세계로 떠나는 피난민 형태가 벌어지는 날에는, 세계가 우리 앞에 점령당할 것입니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그러므로 통일교회에서 가정적 사위기대, 즉 아들딸 며느리까지 동원하지 않으면 끝장이 나지 않을 것이다 하는 것이 선생님의 생각입니다. 그래야 사위기대 복귀를 위한 탕감이 완결될 것이라고 하는 것이 원리적 견해입니다. 그래서 결국 이런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즘에 가만히 보면, 교회가 어려우니까 '선생님이야 책임을 완성한 세계적인 분이니 선생님의 어려움은 난 모르겠소. 우리 교회가 어려우니 도와 주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주 당당해요. 좋지 않은 풍조입니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효자라면 도와주겠다고 해도 꽁무니를 빼며 싫다고 할 텐데, 떡은 줄지 말지 한데 김칫국부터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늘이 동기가 되어야지 자기들이 동기가 되어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번에 어떤 지역장이 도와 달라고 찾아왔는데 남자가 참 딱하지요. 아이쿠 큰일났다고, 이제는 망했다고 왔어요. '그래서 망해라 이 녀석아!' 하고 보냈습니다. 누가 동기가 되었느냐는 것입니다. 주는 데도 원칙이 있는 거예요. 선생님이 피동적인 입장에서 달라면 주는 사람이 아닙니다. 내가 피동적인 입장에서 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 대신 주동적인 입장에서 심각하게 하는 사람이예요. 심각하다는 것입니다. 한때 해먹고 보따리를 짊어지고 후퇴하는, 임기응변해 가지고 한몫 보겠다는 사나이가 아니예요. 심각하다는 거예요. 선생님 이상 심각한 자리에서 하나님을 중심삼고 심각해 봤습니까? 자기 자식의 배를 째고 자기 아내의 배를 째서 제사지낼 각오가 되어 있느냐는 것입니다. 자기 어머니 아버지까지도 하늘 앞에 제사 드릴 수 있는 각오를 해 봤느냐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은 천태만상으로 그냥 남겨 놓고, 하지 못할 것을 하나님 앞에 간구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
선생님도 개인적으로 중요한 문제를 놓고는 기도하지 않습니다. 선생님이 공장 문제를 중심삼고 지금까지 한 5년 동안 정성들였는데, 그 정성들인 것은 틀림없이 이루어지는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바라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이렇게 되지 않으면 안 되기에 창조주 하나님 앞에 정성들인 것입니다. 내가 정성을 들이면 어떠한 기업주 이상의 철석같은 정성을 들이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다 하는 확고한 결론 밑에서 지금까지 정성들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금년에 와 가지고 다 맞아떨어졌습니다. 과정에서는 별의별 부작용도 많았습니다. 뭐가 어떻고 어떻다는 말도 많았어요.
여러분, '행차 뒤에 나발'이란 말이 있지요? 통일교회 무리는 행차하는 가운데에 나발을 불어야 할 텐데, 이미 행차한 후에 '아이쿠, 잘못했습니다' 하고 나발을 분다는 것입니다. (웃음) 생각해 보세요. 지금까지 선생님이 소수의 통일교회 무리를 이끌고 사방으로 망하는 운세권, 망하는 세계권내에 에워싸여 있었는데도 망하지 않고 이만큼 뚫고 나왔습니다. 사실은 여러분 개인의 간단한 생활과는 다릅니다. 언제나 심각합니다. 선생님은 원리적 조건에 걸릴 것 같으면 죽어도 안 합니다. 절대 안 한다구요. 천하가 다 반대해도 밀고 나갈 수 있는 안팎의 사정을 딱 감아 쥐고 밀고 나갑니다.
재미있는 것은 통일교회의 간부들 가운데는 멍텅구리가 많은데 외부에 있는 영통하는 사람들은 통일교회 간부들의 자리를 노리고 자꾸 선생님한테 접근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름까지 대면서 '지금 누구누구가 이런 일을 하고 있습니다'고 합니다. 세밀하다는 거예요. 앞으로는 그럴 때가 올 것입니다. 여러분도 문지기를 알지요? 앞으로는 총 들고 눈을 부릅뜨고 지키는 문지기는 필요없습니다. 눈 감고, 보지도 않고 다 아는 문지기가 생겨날 거예요. 들어올래야 들어올 수 없는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이녀석, 네 조상은 어떻고 어떻지' 하며 배경까지 꿰뚫어 본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남아져야 할 곳은 과거의 승리의 요인을 빛낼 수 있고 미래의 승리적 여건을 제시할 수 있으며 현실에 있어서 승리의 주인이 될 수 있는 결정적인 자리인 것입니다. 이 자리는 여러분이 망상하고 바라는 가상적인 자리가 아닙니다. 피가 흐르고 죽음이 뒤넘이치는 비참한 자리에서부터 이 자리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런 현실을 직시하고, 그런 현실의 있어서 건설자가 되어, 그런 현실에서 자기 스스로 정좌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가지고 하나님 앞에 축수를 드릴 수 있는, 거기에서부터 역사는 시작되는 것입니다. 미래에 그런 역사를 맞이하기 위한 것이 통일교회라는 것을 여러분은 잘 알아야 되겠습니다.
1971년도는 역사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해라는 것을 통일교인 전원이 알고 있는 줄 아옵니다. 아버지, 이 3년노정이 얼마나 중하다는 것을 아는 저희가 1972년까지를 한계점으로 볼 때에 1971년도가 더욱 귀하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옵니다.
아버님, 저희들은 내일의 주인이 어떠한 사람이냐 하는 문제를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그 사람은 오늘에 자랑하는 사람이 아니고, 오늘에 웃고 춤추는 사람이 아닙니다. 누구보다도 비장한 자리에서 남들이 잠든 깊은 밤에도 낮과 같이 이를 악물고 전력을 다해 싸워서 대낮의 승리를 다짐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저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인간들이 그러한 자리에 서지 못하면 아버님이라도 그와 같은 자리에서 책임하시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생각하옵니다. 효의 도리와 충의 도리를 배우고 있는 저희들은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밤이나 낮이나 생애 전체를 바쳐 가지고, 심각한 자리에서 자기 자신을 생축의 제물로 바치기 위하여 아버지 앞에 맹세하고 나선 길이오니, 아버지 앞에 잊을 수 없는 인연을 안고 가는 통일교회 무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이제 이들이 어슴푸레나마 마음으로 느껴서 알았을 줄 아옵니다.
과거에 아무리 자랑할 수 있는 날이 있었다 하더라도, 아무리 미래의 소망을 크게 가졌다 하더라도 현실에 있어서 아버지께서 얼굴을 돌이키게 될 때에는 모든 것이 허사가 된다는 것을 저희들은 잘 알아야 되겠습니다. 과거보다도 현실에 소망을 다짐할 수 있고 미래보다도 현실을 중요시할 수 있는 오늘의 이 자리가 얼마나 귀하다는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
내가 행하는 행동이 전진하는 모습이 되게 될 때, 그 앞에 누가 복병처럼 기다리고 있을 것인가를 두고 보면, 친구들이 기쁜 미소로 환영하며 맞아 주는 자리보다는 원수들이 총칼을 가지고 나를 습격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자리, 그 자리를 책임지고 그 자리를 홀로 해결하기 위한 길을 가야 되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행복하냐 할 때, 비참하고 심각한 자리에서 결정적인 생명을 아버지 앞에 내놓고 가는 그 사람이 행복한 자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버님을 위하는 입장에서 돌이켜 볼 때에, 그러한 사람이 아버지의 마음을 이끄는 자요, 아버지의 심정을 감화시키는 자인 것을 저희들이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통일교회를 사랑하시거든 통일교회 자체만을 사랑하지 마시옵소서. 통일교회를 사랑하기 전에 세계를 사랑하는 아버지가 되어 주시기를 바라옵니다. 이 세계를 사랑하시는 아버지가 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통일교회가 이 세계를 사랑하는 아들의 사명을 다하여 세계가 기쁨을 맞을 수 있도록 해야 되겠습니다. 하늘 앞에 제물의 책임을 다하지 않고는 세계를 대한 아버지의 기쁨이 소생될 수 없다는 역사적인 탕감노정을 아는 저희들은, 교단 전체를 아버지 앞에 바칠 그날을 바라보며 나가야 되겠습니다.
하나의 통일교단을 희생시키는 것이 아버지의 소원은 아니지만, 어떻게 하든지 타락의 운명을 거쳐 나가야 할 탕감노정의 대가를 교단을 걸고라도 치르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있기 때문에, 통일교단의 역사는 눈물의 역사 였고 고난의 역사였고 한숨의 역사로서 피어린 교차로에서 신음하는 역사였지만, 사탄이 물러가고 당신이 같이하셨기 때문에 한할 것이 없사옵니다.
일생에 천만 개의 흠을 남기는 한이 있을지라도 그 흠이 나의 생애에 탄식으로 나타날 것이 아니라 역사상에 영광의 무리로서 등장할 수 있는 바탕이 된다는 사실을 저희들은 아옵니다. 그런 아들이 나타남으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수고하신 역사적인 입장을 대변시킬 수 있고, 아버지와의 인연을 맺을 수 있는 아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사탄에게 끌려가는 무리가 아니라, 사탄이 굴복하고 아버지 앞에서 모셔 드리지 않을 수 없는 아들이 되었다고 칭찬하는 한날을 갖추어 드릴 수 있는 아들과 딸이 통일교단 가운데에서 많이 나타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 생애를 바쳐 투쟁해 온 결과로 오늘 이 자리까지 왔습니다. 때로는 아버지 앞에 몸부림을 치기도 하고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없는 부끄러움으로 가슴이 에이는 한을 품은 때도 많았습니다. 하오나 아버지의 한이 저희의 한보다 더 큰 것을 알게 될 때, 그 아버지를 위로해 드리는 아들이 되고 딸이 되어야 할 통일교단은 매를 맞고도 웃어야 되겠고 버림을 받고도 도리어 아버지를 위로해 드려야 하겠습니다.
버림받게 한 무리를 대해야 하는 아버지의 분한 마음을 풀어 드려야 할 입장에 있는 저희는 비참한 모습인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울고 나서도 웃어야 하고, 웃고 나서도 회개해야 하는 엇갈리는 생애노정을 거쳐가야 하는 비참한 운명길이 복귀의 길인 것을 생각할 때, 그 역사를 탕감하여야 할 통일교단의 사명이 남아 있음으로 말미암아 여기 있는 아들은 그런 생애를 피해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당신 앞에 나설 적마다 눈물 없이 아버지의 처지를 생각할 수 없고, 한을 품은 아버지이심을 알았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흘리지 못했던 눈물을 다 흘려 버리고 아버지께서 바라보시고 이 세계를 위해 울지 말라고 위로해 주실 수 있는 아들이 될 그때까지 환난길이 남아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 엄청난 뜻을 알았기 때문에 그날이 아직 오지 않았거든 그 책임을 아버지 앞에 지을 수 없사옵니다. 때문에 모든 십자가의 고난길을 스스로 넘어 가지고 당신 앞에 나아갈 통일교단의 앞날을 당신께서 긍휼히 보시는 것을 생각할 때, 이것도 황공한 일이옵니다.
부디부디 당신의 승리의 한 나라를 찾으시어서 당신이 수난길에서 당하신 원한들을 다 풀어놓고, 자랑하기에 부족함이 없고 사랑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승리의 아들과 딸을 거룩하신 품에 품으시옵소서. 천세만세 축복의 요건을 다 이루어 드리고 이제 다 이루었다고 할 수 있는 승리의 선포식이 있기를 바라는 것이 통일교단을 이끄는 이 자식의 소원인 동시에 당신의 소원인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런 와중에서 세상의 갖은 추악한 말,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이 저희 앞을 가로막더라도, 하나님이 죽었다고 하는 불효막심한 세계의 현상을 바라보시는 아버지를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몸을 가누어 가지고 당신 앞에 효성을 해야 할 무리는 저희들밖에 없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오니, 이 자리가 그야말로 심각한 자리요 그야말로 기가 막힌 자리인 것을 여기에 모인 이들이 뼈에 사무치도록 느끼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침에 뜨는 해를 바라보게 될 때, 여전히 그 햇빛을 소망하는 나 자신이 되었습니까? 당신을 바라볼 때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살지 못한 책임감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당신의 사랑권내에서 예수와 같이 장담하면서 살 수 있는 해방의 무리요, 영광된 세계의 무리가 되어야 한다는 입장에서 보게 될 때, 하늘을 대신하여 충성하는 무리가 되지 못한 것을 저희들은 미처 몰랐습니다.
'내일의 주인'이라는 이 말을 중심삼고 우리의 가슴 가슴에 무엇을 남겨 놓을 것이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저희 자신들이 비탄하기에 앞서 당신의 서러운 심정을 알게 해주시고, 저희들이 외로움을 느끼기에 앞서 당신의 불쌍함을 느끼게 해주시고, 또한 자신의 슬픔을 생각하기에 앞서 당신의 슬픔을 체휼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은 6월 6일, 이 6수는 사탄수라는 것을 저희들이 생각하게 될 때, 이수를 넘는 이날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내일 모레는 전국에 있는 목사들을 모아서 공청회를 갖게 되겠사오니, 이 모임이 통일교단에 있어서 인간을 맞는 기쁨이 아닌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7월까지, 아니 이달까지 기성교단을 대해 통일교회의 이 아들이 책임을 다함으로써 하나의 고비를 넘어야 되는 것을 당신은 잘 알고 계시옵니다.
기독교와 유대교가 지금까지 2천년이라는 역사과정을 거쳤습니다. 하지만 유대인 가운데에 기독교인은 10퍼센트도 안 된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 이러한 역사과정을 지켜 보시는 예수님도 아직 한을 풀지 못하고 있을 것을 알게 되옵니다. 그런데 통일교단은 수십 년 역사과정을 통하여 기성교회가 찾아올 수 있는 인연을 만들어 놓았다는 사실을 두고 볼 때 이는 역사적인 기준을 제시한 것이라고 생각되옵니다.
저희들을 불쌍히 보시는 아버지의 숨은 공로로 말미암아 영광의 한날이 저희 앞에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저희는 아버지 앞에 무릎을 펼 수가 없사옵고 고개도 들 수가 없사옵니다. 겸손히 승리의 한날을 내세우고 그 자리에 이끌림을 받아, 아버지께서 참된 아들의 모습, 참된 딸의 모습이라고 선포하고 선언할 수 있는 그날을 바라는 겸손한 아들딸들이 통일교회 식구들 가운데에 많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일선에 나가 싸우고 있는 당신의 어린 딸들을, 아버지,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마음이 닿는 한 아버지께서 그들 앞에 정성을 더하여 주시옵고, 그들의 아들딸과 그들의 가정을 지켜 주시옵소서. 기필코 망하지 않는 무리가 될 것을 알고 있습니다. 끝까지 참아서 남아지는 가정이 될 수 있게끔, 아버지, 축복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옵니다.
해외에 널리어 선교의 사명을 하며 이국(異國), 이민족(異民族) 앞에서 처참한 생활의 인연을 갖추면서도 스스로 아버지의 수고를 생각하고 아버지를 위로하고자 몸부림치는 그들의 행로에, 살아 계신 아버지를 입증시키고. 이들이 망하지 않을 무리인 것을 상기시킬 수 있는 인연을 나타내 주시옵길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내일의 주인이 이 자리에 있노라고 아버지께서 보장하고 저희들이 입증할 수 있는 무리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재삼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