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아버님, 안식일 이 아침에 당신의 거룩하심과 당신의 긍휼하심이 여기에 모인 당신의 자녀들 위에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하늘과 땅이 일체가 되어 저희의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고, 저희 형제들이 서로서로 아버지의 형상을 닳아 통일될 수 있는 사연이 여기에 같이 하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각자로서 있으되 각자를 위해 있는 자신이 아니라 전체를 위해 있는 자신임을 발견할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전국에 널려 있는 당신의 자녀들이 이 아침에 이곳을 우러러보면서 생사의 결정권을 다짐하고 있사옵거든, 그 자리에 당신의 거룩하심과 놀라 우신 은사가 같이하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대에 절박한 자기 자신의 생명 문제를 놓고 영원하신 당신의 자녀의 의리를 완전히 갖추어 경배드 리는, 아버지께서 자랑하시고 아버지께서 기억하시지 않을 수 없는 아들 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이 시대에 책임과 사명을 본부받고 일선에서 싸우고 있는 당신의 딸들과 자녀들 위에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이 민족이 금후에 당신이 원하시는 그 나라를 위하여 순응하면서 해야 할 책임이 방대하다는 것을 느끼고 하늘과 땅, 당신과 인간 사이의 거리가 얼마나 먼가 하는 것을 생각하면 할수록 이 거리를 메우고, 이 환경을 충당시켜야 할 책임을이 보잘것없는 통일의 무리가 하지 않고는 그 누구도 할 수 없다는 엄청난 사실을 느끼게 되옵니다.
하늘을 땅에 접근시키고 땅을 하늘에 접근시키기 위해서, 이것을 몸 마음 가운데로 연결시키기 위하여 밤낮으로 간곡한 심정을 붙안고 몸부림 치는 당신의 거룩한 자녀들이 있사올진대, 그 자리에 당신이 살아 계신 것을 입증하시옵고, 당신이 같이하시는 사실을 보이시사 선과 악이 이렇게 다르다는 것을 목격할 수 있도록 당신이 현현하시옵기를 간절히 바라 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 하늘을 위하여 그리움과 땅을 위하여 책임을 다짐하는 자녀들의 울부짖음이 기필코 헛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사오니, 그런 자리마다 아버지에서 찾아오시어서 당신이 얼마나 외로웠다는 것을 그들 앞에 증거해 주시옵고, 당신이 얼마나 참고 나왔다는 것을 그들 앞에 보여 주시옵 고, 당신은 선을 위하여 지금도 책임을 지고 있고 수난의 길을 극복하고 있다는 것을 증거시키시사, 당신의 마음 가운데 기억하지 않을 수 없는 아들이요 딸로서 맞이할 수 있는 은사의 시간을 부여하여 주시옵기를, 나의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의 마음 마음이 아버지 앞에 사무칠 수 있고 심정의 열도가 강해질수 있는 시간을 바라고 있는 불쌍한 저희들을, 아버지여, 굽어살피시옵소 서. 가을과 같고 겨울과 같은 마음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을 알고 있습니다. 화창한 생명의 인연을 자랑하는 봄볕을 맞을 수 있는 마음의 향기와 여름날을 맞이할 수 있는 마음의 즐거움을 이 시간 저희들에게 부여하여 주시 옵소서 .
당신이 보게 될 때 찾아오지 않을 수 없는 봄날의 향기를 풍기는 꽃이 되고, 여름날의 무성한 그 모습을 자랑할 수 있는 완전한 당신의 자녀의 미를 갖춤으로 말미암아 아버님이 저희를 놓고는 다른 무엇을 하실 수 없고, 저희와 더불어 이날을 즐거워하고, 저희와 더불어 운행하시고, 저희와 더불어 동행하실 수 있는 아버지가 되시옵기를 이 시간 간절히 바라고 있사옵니다. 하오니 분부하실 수 있는 당신의 사연을 여기에 나누시옵고, 찾아오시는 발걸음을 여기에 맞추시어서 이 시대의 사명을 감당하기에 누구보다도 간절한 마음을 갖는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다시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부복한 저희들이 아버지 앞에 간사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간교해 서는 안 되겠습니다. 당신이 보실 때 몽땅 품고 사랑하시지 않을 숱 없는 혈연적인 인연이 그 자체에서 움직일 수 있고, 사연을 통하여 얼크러질수 있는 아들이 되고 딸이 되기 위하여 부복한 모습들이 되게 허락하여주시옵소서.
아버지의 앞에 무릎 꿇고 엎드린 자기 스스로의 모습이 가증스러운 것을 절절히 느끼고, 죄악의 인연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인연을 끊지 못하고 해방의 은사권내에서 당신의 아들의 명예를 갖지 못한 불초자식들인 것을 다시 한 번 절감하면서, 아버지의 구원의 손길로 수난의 길을 참아 나오신 아버지의 은사 앞에 더 감사하고, 이 몸을 다시 아버지 앞에 생축의 제물로서 드리오니 부족한 것을 부족하다 마시고 받아 달라고 몸부림칠수 있는 간곡한 마음의 흐름이 저희 일신을 점령하게 하여 주시어서 그러한 마음으로 당신 앞에 부복한 무리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당신이 찾아오신 보람을 느끼면서 사연을 나눌 수 있는 무리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남한 각처에 널려서 싸우고 있는 당신의 어린 딸들을 이 시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그들이 가정을 뒤에 두고 아버지의 뜻을 중심삼고 일선에 나선 것은 이 나라 이 민족을 염려함이요, 세계 인류 앞에 세워야 할 아버 지의 뜻을 염려함임을 아시사 불쌍히 보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그들은 이 시간도 이곳을 향하여 마음을 조이며 하늘의 은사를 고대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할때. 이 자리에 있는 저희들이 부끄러운 모습을 가져서는 안 되겠습니다.
청파동에 있는 이 본부가 보기에는 초라한 곳이지만 하늘땅이 주시하고 수많은 생명의 인연이 갈구하고 있는 자리인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여기에 머무른 저희들은 어렵고 두려운 자리에 선 것을 스스로 느끼는 이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의 현현하심과 더불어 저희의 마음이 당신의 마음 앞에 어리고, 저희의 심정이, 당신의 성상 앞에 흠모의 심정이 사무칠 수 있게 해주시고, 아버님의 사랑의 마음과 아버님의 동정의 심정이 임하시어 저희 전체를 아버지 앞에 품겨 드릴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세계에 널려 있는 당신의 자녀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그들이 외로운 싸움터에서도 지치지 않고 하늘을 위하여 싸우는 곳곳마다 살아 계시는 아버지의 능력의 손길을 펴시어서, 당신의 승리의 인연을 증거하는 자리가 되게 하시옵고, 그들이 이 세계 인류 앞에 하늘의 생명의 인연을 가진 하늘의 기수로서 부끄러움이 없고, 당신이 자랑하기에. 당신의 사랑을 받기에 부끄러움이 없는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30억 인류의 생명을 이끌고 가는 외로운 무리들이지만 당신편에 서 있는 것을 입증시키시어서, 언제나 위로하고, 언제나 권고하고, 언제나 격려받을 수 있고, 또 격려하기에 주저하지 않는 그런 무리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자리에 친히 찾아오시어서 저희와 사연사연을 나누시옵고, 불충스러운 저희의 모습을 폭로하시어서 당신이 원하시는 마음과 원하시는 소원의 노정을 따라가기에 부족함이 없는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지금 서울을 위주하여 40일 특별 집회 기간을 갖고 있사오니, 이 기간에 당신이 저희들에게 나누어 주시고 인연짓기 위한 각별한 뜻을 세우시 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오며, 이 자리에 모인 자녀들 헛된 시간으로 맞지 말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옵니다. 전체를 친히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참부모님의 거룩하신 이름 받들어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이 땅 위에는 수많은 종교가 있습니다. 또, 그 종교를 중심삼고 신앙하는 사람이 많은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종교와 신앙하고 있는 사람들을 대해 가지고 하나님은 지금 섭리의 손길을 펴고 계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서 있는 이 자리는 이 시대를 대표한 하나의 축소체인 동시에 우리는 역사를 거처 오면서 하나님이 종교를 통하여, 혹은 신앙자들을 통하여 소망하시던 하나의 실체로 서 있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금후의 역사시대를 책임져야 할, 신앙계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후계자, 혹은 창건자라는 입장에 있는 울러 자신이라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오늘 우리가 처해 있는 이 자리는 심각한 자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떠한 일을 하는 데 있어서 그 일이 아름답고 영광되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자기가 하는 일이 그 민족 앞에 드러나기를 바라고, 세계면 세계 앞에 남아지기를 바라는 것은 우리 인간의 상정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들이 생명을 걸어 놓고 신앙하는 것을 두고 볼 때도 한낱 흘러가는 세파와 더불어 흘러가 버리기를 바라고 신앙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생애를 걸어 놓고 심각한 입장에서 신앙하면 할수록, 그문제가 중하면 중할수록 그것이 깊게, 넓게, 혹은 길이 남아지기를 누구나 원하는 바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 하나님이 우리를 대하여 바라보게 될 때에 심각한 하나님이시라면 그 누구보다도 심각한 관점에서 자기를 보아 주기를 원하는 것이 우리의 소원일 것입니다. 또 자기로 말미암아서, 자기가 연유되어서 세계에 그 무엇이 남아질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 신앙자로서 그 누구나 갖지 않을 수 없는 태도인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지금까지 역사시대에 수많은 종교를 중심삼은 종교인 가운데 '나'라는 존재는 한낱 지나가는 세상 가운데 그저 왔다 가는한 사람으로 살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남과 비교해서 좀 특별하게, 좀 다르게…. 하나님이 계시다면 나를 기억해 주시고 나와 관계를 맺어 주시기를 누구든지 바란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역사시대에 종교를 세워서 세계를 구원해 나오시면서 얼마나 심각하셨을 것인가 하는 문제를 중심삼고 볼 때, 내가 그 심각한 문제와 하나될 수 있는 자리, 심각한 자리에 얼마만큼 처해 보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원이 있으면 그 소원을 중심삼고 일체될 수 있는 기준에 서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또, 하나님이 우리를 중심삼고 악한 세계와 싸워 나가시는 그 싸움이 얼마나 심각하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하나님이 싸워 나가시는 길 앞에 내가 얼마나 협조하고 그 길을 따라가는 입장에서 나 자신이 얼마나 심각하게 이 싸움을 대신 책임질 것이냐 하는 문제도 생각해야 됩니다.
하나님은 지금뿐만 아니라 이와 같이 복귀섭리를 해 나오시는 동안 역사 과정에서 많은 희생의 대가를 치르면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희생의 대가를 치른 그 범위는 한 부분에 제한된 범위가 아니었습니다. 국가를 넘고 세계를 긍하여 이런 환경을 움직여 나오면서 희생의 대가를 치러 나온 것입니다. 우리가 기독교 역사만 두고 보더라도, 아담 가정으로부터 노아 가정, 아브라함 가정, 모세 가정, 사가랴 가정, 요셉 가정까지 4천년의 역사시대를 거쳐오는 과정에서 막대한 희생의 대가를 치러 나왔던 것입니다.
그러한 희생의 대가를 치러 나오는 데 있어서 역사적인 희생의 인연을 계대해 나오기 위해서는 역사시대의 선조들보다 더 무거운 십자가, 더 큰희생의 대가를 감수해야 합니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없어 가지고는 발전을 못 하고, 미래의 가치를 추구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기필코 더 크게 희생하기를 결의하는 무리가 없어 가지고는 이 세계를 발전하는 섭리로 추진시켜 나갈 수 없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과거보 다도 희생의 대가를 더 추구하고자 하는, 더 희생하고자 하는 무리를 찾아서 이 전쟁터를 개척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되는것입니다..
노아 할아버지는 120년 동안 싸워 나왔습니다. 120년이라는 기간을 생각할 때, 그것은 12일도 아니고 12년도 아닙니다. 120년이라는 기나긴 기간은 전체 생애에 해당하는 귀중한 기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노아에게 있어서 120년은 살다 남은 그런 기간이 아닙니다. 노아에게 있어서는 일생에서 가장 귀한 생의 토막을 갖추어 드릴 수 있는 기간이 아니겠느냐는것입니다.
그 기간에 수난길을 감수하며 120년을 하루같이 꾸준히 싸워 나온 노아 할아버지의 인내력과 성실성.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충실함은 그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자리에 서기까지 그 배후에시 얼마 만한 수고와 희생의 대가를 치렀겠습니까?
가정에서의 핍박도 있었을 것이고, 동네의 반발도 있었을 것이고, 혹은 친척들이 그를 부정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일도 비일비재했을 것입니다.
그런 환경을 극복함에 있어서 그에게 하루는 기쁨의 날이 아니라 도리어 슬픔의 날이 이럴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 하루가 슬픔의 날인 동시에 그하루를 극복하기 위해 매일매일 가중된 투쟁과 가중된 시련 가운데서 참는 시련도 컸을 것은 틀림없을 것입니다.
시일이 가면 갈수록 그런 시련이 감소하는 것이 아니라 가중된 환경의 시련이 노아 할아버지 일신 앞에 부딪쳐 왔을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 노아 할아버지야말로 역사상에 있어서 섭리의 뜻을 대해 나가는 하늘편 사람 중에 기억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볼 때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정든 고향 산천을 떠나갈 때 광포(狂暴)하고 떠난 것이 아닙니다. 제가 아무날 아무시에 어떠한 사명을 짊어지고 어떠한 곳으로 간다고 이웃, 친척에게 선포 하고 간 것이 아니라,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가운데 밤에 홀로 몸을 감추어 길을 떠나는 외로운 신세였던 것입니다. 그 고독한 일면은 아브라함 일신의 일면만이 아니요 그 외로운 자리는 하나님의 외로운 자리와 일치될 수 있는 자리였던 것입니다. 그런 기원을 갖지 않고 출발하였다면 하나님과 상관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 외로운 자리가 하나님이 처해 있는 외로운 자리요, 그 심각한 자리가 바로 하나님이 처해 있는 심각한 자리였습니다. 악을 분립시키고, 악을 제거시키고, 악을 단호히 처단할 수 있는 결의의 심정과 일치될 수 있는 태도와 행동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2천년의 하나님의 섭리역사의 전체를 통합할 수 있는 중심자로 세우지 않을 수 없었음을, 그런 내연이 있었음을 우리는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모세를 중심삼고 보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애급의 궁중에 들어가 바로의 딸,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서 사랑받는 자리에 선, 특별한 혜택을 받은 사람으로 우리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처해 있는 자리는 호화스러운 자리였지만 그는 마음으로 호화찬란한 바로 궁중이 자기 소원의 터전이 아니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 주위에 갖추어진 환경이 호화스러우면 호화스러울수록 그것은 그에게 자기가 찾고 있는 기쁨의 환경이 아니요, 기쁨의 자극이 되는 환경이 아니라, 도리어 자기 민족애를 촉구시킬 수 있는, 그런 자극을 받는 환경으로 삼았고, 자기 민족의 자주성을 고취시키고, 애국적 심정에 불타 오를 수 있는 하나의 터전으로 삼았던 모세임에 틀림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과 애급 사람이 싸우게 될 때, 이스라엘 사람의 편을 들어 애급 사람을 쳐죽였다는 사실은 돌변적인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마음 가운데는 이스라엘 민족이 해방되어 평화스러운 국민으로서 자주적인 국민으로서 살수 있기를 바라는 소망이 깃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모세가 애급에서 호화스러운 생활을 하는 과정에 있어서 그 호화로움과 영광의 터전이 크고 넓으면 넓을수록, 또 거기에 있는 가치의 내용이 가중 하면 가중할수록 그 이면에는 그것을 극복하고, 그것을 무시하고, 그것을 제거시킬 수 있는 애국적 심정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그러한 인연을 통하여 민족애의 한 발현으로 나타난 자리가 애급 사람을 쳐죽인 자리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애급 사람을 쳐죽이는 그 자리는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자리였느 냐? 아니었습니다. 하나님도 이스라엘 민족이 수백년 동안 애급 민족 앞에 고역을 당하는 것을 보게 될 때, 당장 그들을 쳐죽이고 싶은 마음이 폭발되는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언제나 그런 사람이 나타나 주길 바라시던 숨어 있던 하나님의 심정을 대표해서 모세가 애국적 이스라엘 민족의 대표자로 나타나 그런 심정적 출발을 가졌기 때문에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은 역사적인 민족의 새로운 출발을 가져오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을 두고 보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당대에는 메시아가 오기를 바라는 사람이 많았을 것입니다. 수많은 교법사나 제사장들도 메시 아가 오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을 것입니다. 혹자는 밤을 새워 가며 기도했을 것입니다. 혹은 생애를 투입해 가지고 그날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린 많은 무리 가운데서 하나님은 당신이 바라시 소원 앞에, 당신이 보내시는 그 아들이 오는 길 앞에 가까울 수 있는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을 찾았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 유대교인, 혹은 교법사들은 영광 가운데 주님이 오시기를 바랐지만 영광 가운데 올 수 있는 아들의 입장이 못 되었습니다. 그렇게 바라고 있는 그 무리들의 입장과 하나님의 입장과는 천양지판이었습니다. 판이한 방향으로 나타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찾아올 수있는 길은 영광스러운 자리가 아니라 반대로 비참한 자리라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하나님은 그 비참한길을 개척하는 사명을 짊어질 수 있는 무리 들을 찾으실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세례 요한이 나타날 그 당대에 이스라엘 민족이 섭리를 대하는 관(觀)과 세례 요한이 뜻을 대하는 관(觀)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었음을 우리는 알게 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 나가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면서 외로운 생활을 하였습니다.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꽃을 본다고 해도 외로운 가운데 사연을 통할 수 있는 상대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광야의 처량한 그 환경이 야말로 깊은 내면의 심정을 하나님과 관계맺을 수 있는 자극적인 그런 황량한 환경이었을 것입니다.
그 황량한 환경에서 고독이 사무쳐 들어오고 어려움이 부딪쳐 올 때, 그 고독과 어려움을 자기 일신의 고독과 어려움으로 여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고독과 하나님의 어려움을 동정할 수 있는 입장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평화롭고 자유스러운 환경에서 사는 사람이 아니라 고독한 자리에서 어려움을 물리치며 그 환경을 극복하면서 하나님이 바라시는 한때, 그날이 올 수 있는 길을 개척하는 선봉자의 길을 가는 세례 요한의 입장은 심각한 입장이 아닐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세례 요한은 그 시대의 어느 누구보다도, 어떠한 선지자, 어떠한 교법사보다도 하나님이 찾아오는 그 길, 그 도상에 가까운 인연을 갖출 수 있는 시대적인 대표자의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세례 요한을 찾아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아니었겠느냐.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메시아가 오시기를 간곡히 바라는 소원이 있다면 그 간곡히 바라는 소원의 마음은 자기 일신의 행복을 해결짓기 위해서 메시아로 모시려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을 대표하는 메시아로 모실 수 있는 준비된 마음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민족과 역사시대, 혹은 하나님의 섭리시대에 있어서 자랑이 되고 전통적 내적 인연을 세울 수 있는 대표자임에 틀림없 었기 때문에, 이런 세례 요한을 통해서 하나님은 계속적인 섭리의 뜻을 연결시켜 나가려고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선조들이 역사시대를 거치면서 수난길을 극복해 나온 공적을 알면 알수록, 우리는 그 선조들이 수고한 그 공적이 어느 한때에 결실을 봐야 될 것이 아니냐 하고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거에 왔다 갔던 선조들이 한 일들이 하나의 결실을 완전하게 하기 위한 비료가 되고 영양소가 되었을 뿐이지 그것이 결실 그 자체는 되지 못한 것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그 결실은 기필코 어느한 시대에 나타나야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결실로서 나타날 수 있는 자리는 어떤 자리일 것이냐?
예를 들어 나무는 그 나무가 겪어 온 수난의 모든 내용을 대표할 수 있는 결실을 맺어야 됩니다. 그 결실 자체가 그 수난의 내용보다 더 우위에 시지 않으면 그 결실은 중간에서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것을 극복할 수있는, 그 내적 인연 이상의 힘을 보유하지 않고서는 역사시대에 있어서 투입된 영양소에 의한 열매, 혹은 수난의 가치로서 찾고 있는 그 열매는 나타나지 못할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역사가 흘러감에 따라 섭리는 범위가 넓어져 나왔습니다. 역사가 흘러감에 따라 범위가 넓어지고 범위가 넓어짐에 따라 섭리의 뜻의 내용은 점점 가중된 복잡성을 지니고 나왔 다. 이런 섭리의 뜻을 미루어볼 때, 현시대에 처해 있는 무리 중에 결실로서 자처하고 결실이 되기 위해서 나서는 무리가 있다 하더라도 그 내용에 있어서 복잡함이 역사시대의 복잡함보다도 못해서는 완벽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사람은 못 될 것입니다.
복잡한 자리에서 더 복잡해야 되고 심각한 자리에서 더 심각해야 되겠습니다. 수난을 극복하는 자리에 있어서도, 어떠한 역사시대의 수난보다더 강한 수난길에서도 극복할 수 있는 그 자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건 왜냐? 과거에는 개인적 시대, 가정적 시대, 종족적 시대, 민족적 시대를 거쳐왔고, 지금은 세계시대와 천주시대를 향한 전환기인 것입니다. 그런 시점에 서 있는 것을 생각할 때, 이 시대는 어떠한 역사시대보다도 광대 하고, 그 골은 높고 그 심도에 있어서는 깊은 시대인데, 이 전체적 사연을 움직이고, 전체적 환경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그 내용에 있어서는 무엇 보다 심각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복잡한 내용을 피해갈 것이 아니라 여기에 보다 복잡성을 가지고 이것을 초월하고 극복해 나갈 수 있는 자체로 서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이 시대 앞에 역사적인 신앙의 결실체로서 나타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 우리가 서 있는 자리는 심각한 자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오늘날 여러분 자신들은 6천년의 역사적 열매라고할 수 있습니다. 지금이 그런 시대입니다. '우리가 아니면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리로 말미암아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통일교단을 통하여 아버지의 최후의 섭리는 끝을 맺어야 한다. 그 끝맺음의 결과가 어떻게 된 것이냐?' 하는 문제가 오늘 통일교단이 하나의 종교단체로서 선서해야 할 심각한 문제요, 통일교단의 일원으로서, 하나의 신앙인으로서 선서해야 할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를 대표한 개인, 그 자신은 심각해야 될 것입니다. 그러면 통일교회는 어떠해야 되느냐? 통일교회도 심각해야 될 것입니다. 또, 통일교회를 중심삼은 이 나라는 어떠해야 될 것이냐? 통일교회를 중심삼은 이 나라도 심각해야 될 것입니다. 통일교회를 중심삼은 이세계도 심각해야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 심각한 자리에서 세계가 통일교회를 인도할 것이냐? 그런 섭리의 때가 되었으면 하나님은 걱정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계가 통일교회를 지도할 수 있는 입장에 서면 하나님의 복귀섭리는 끝난 자리 라는 것입니다. 통일된 세계가 통일교회를 인도하는 자리가 되었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못한 것입니다. 세계가 통일교회를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통일교회가 세계를 인도해야 됩니다. 반대입니다. 이 나라가 통일교회를 지도하고 통일교회를 인도해 야 되는데도 불구하고, 통일교회가 이 나라를 인도하는 입장에 서 있다는 것입니다. 거꾸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나라가 종교를 이끌어 가고, 종교가 종교인을 이끌어 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기를 바라는데도 불구하고 그러지 못하고 있습니다. 통일교 회가 통일교인을 끌고 가야 되는데 그러지 못하고 통일교인이 통일교회를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이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통일교단이 6천년의 열매가 되기 전에 통일교인이 6천년의 열매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통일의 나라가 6천년의 열매가 되기 전에 통일교단이 열매가 되어야 되고, 통일교단이 열매가 되기 전에 통일교인이 열매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통일나라가 열매 맺히기 전에 통일나라를 위한 통일교회 신도가그 나라의 열매로 나타나야 되는 것입니다. 통일세계가 열매가 되어야 하는 것은 틀림없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통일나라가 열매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통일나라가 세계를 대표한 열매로서 나타나기 전에 통일교단이 열매가 되어야 합니다. 통일교단이 열매가 되기 전에 통일교회 교인이 세계 적인 열매로서 나타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 선 나, 그런 입장에 선 통일교회와 통일교인은 심각하다는 것입니다.
과거의 역사시대는 민족을 대표할 수 있는 그 한날을 찾기 위해 수천년을 걸어온 역사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위주한 역사를 보더라도 고 사실은 분명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수습할 수 있는 교단으로서 유대교를 세워 섭리해 나왔습니다. 유대교를 수습할 수 있는 입장에 선 유대교인으로서 당연한 걸음을 걸어온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통일교회 시대는 다릅니다.
오늘 통일교회 시대는 유대교 시대와는 그 깊이와 넓이에 있어서 다릅니다.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출발의 기원이 다르다는 것을 여러분 들은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민족적 수난길을 극복하면 될는지 모르지만, 유대교는 민족 앞에 저끄러지고 하나의 섭리 앞에 반대되는 것을 제거하면 될는지 모르지만, 오늘 통일교단과 통일교회 교인은 이스라엘 민족, 유대교와 다르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섭리를 종결지어야 할, 역사시대를 대신한 세계적 시대에 처해 있습니다.
그러니 심도에 있어서 얼마나 심각해야 될 것이냐. 역사노정에 왔다 갔던 어떠한 종교보다도 우위에 선 종교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넓이와 길이와 깊이에 있어선 당대의 어떠한 종교를 제창한 도주보다도 더 넓고 더길고 더 깊은 심각한 심도를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세계는 어디로 가느냐? 이것이 문제가 아닐 수없습니다. 오늘날 세계정세를 바라볼 때, 선진국가를 자처하는 그런 나라라 해도 국민에게 불신도를 가중시키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정세를 바라 보게 될 때 이 세계는 어디로 갈 것이냐? 이게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 세계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느냐? 이런 문제가 나옵니다.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하나님이 죽었다고 하는 사조가 공공연히 흐르고 있는 이 세계를 바라볼 때 '하나님은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시다. 틀림없이 살아 계시다. 역사적 부정의 여건을 일시에 제거시키고도 남을 수 있는 긍정적 인연을 갖고 있다' 할 수 있는 자신을 발견했느냐? 이게 문제입니다. 이방대한 세계적인 부정의 권을 긍정적 신념을 가지고 격파시키고 남을 수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지 않고는 세계를 이끌어 가야 할 통일교단은 갈 길이 막혀 버릴 것입니다. 세계를 부활권으로 이끌어 가야 할 통일교회 신자는 거기서 갈 길이 막힐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 볼때, 세계를 누가 책임을 질 것이냐? 이 책임을 하나님께서 일상 져 주시기를 바라는 것이 우리의 소윈이지만 실상 내용은 그렇게 안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책임을 지되 최후의 책임을 지고 나오신 하나님께서 그 책임을 인간에게 전환시키지 않고서는 결정적 승리를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노정의 원칙입니다.
이러한 원칙을 놓고 세계의 현상들을 바라볼 때 이 시대를 대신하여 책임질 수 있는 교단은 어떠한 교단이며, 그 교단을 대표할 사람은 어떤 사람일 것이냐? 그런 입장에서 세계 전체 문제를 책임지고 나가다가 '나 홀로 생축의 제물로서 사라지더라도 이 세계와 싸우겠다. 싸워 가지고 후퇴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를 극복시키고 말겠다'고 몸부림치는 교단이 있어야 되고, 그런 교단에 앞서 몸부림치는 개인이 있어야 될 것입니다. 이것은 당연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세계적인 인물이 되기를 바랍니다. 또, 자기가 어떤 종교를 믿고 있으면 그 종교가 세계적인 종교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요, 자기가 처해 있는 신앙의 터전이 세계적인 자리가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나 바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바라는 것이 크지만 그것이 발전 하고 크기 위해서는 바라고 있는 그 이상의 대가가 소모되어야 되고, 그힘의 소모가 가중되어져야만 그 대가의 결과가 나타날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대가는 무시하고 결과만을 찾으려 한다면, 그것은 욕심입니다. 그런 신앙은 허황된 신앙입니다.
이 세계가 우리를 이끌어 줄 수 있는 길은 없느냐? 없습니다. 세계가 우리를 이끌어 줄 수 있는 길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 세계의 환경을 이끌어 낼 수 있는 하늘을 중심한 사람이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먼저 그런 사람이 나오지 않고서는 우리를 이끌어 줄 수 있는 세계는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문제는 여러분 개인에게 있는 것입니다. 신앙의 심도라는 문제는 방대한 내용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것은 온 세계를 통합한 가운데….
여러분이 제주도를 가 보면 알겠지만, 제주도는 한라산을 중심으로 전지역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자기가 처해 있는 곳이 한라산 밑바닥이라 해도 그곳은 한라산 정상과 반드시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각도는 다르더라도 정상과 연결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평평한 것 같은데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그 높이가 가중되는 것입니다.
제주도가 한라산을 중심삼고 연결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세계는 한사람의 인격자를 중심삼아 가지고 연결되어 있습니다. 역사적인 모든 섭리의 뜻을 중심삼은 수고의 터전은 누구를 위해 있느냐? 세계를 위해 있기 전에 나 하나를 위해 있는 것입니다. 세계의 터전이 넓어지고 높아진 것은 그것이 쪽 올라가서 높아진 것이 아니라, 세계 전체를 수습해 가지고 하나의 높은 신앙의 인격을 구축하기 위해서 높아진 것입니다. 그런 정상에 서 있는 '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신앙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그 취하에 연결되어 있는 모든 사연이라는 것은 남의 사연이 아닙니다.
나와 직결되어 있는 사연입니다. 단계에 있어서는 나와 거리가 있을는지 모르지만 내용에 있어서는 직결된 사연이라는 것입니다. 단계에 있어서 거리가 있으니 나와 상관없다고 부정하는 입장에 서게 된다면 큰 산을 이룰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큰 인격자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큰 인격자가 될 수 없다고 할 때는 큰 뜻의 책임을 맡을 수 있는 사람이 못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될 때, 사는 생활이 비록 제한된 환경에서 살고, 자기 하나 누울 수 없는 좁은 자리에서 사는 생활이라 살지라도 그 한 사람을 통해서 세계가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입장의 정상의 자리에 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 자리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의 죽음 길을 자처해 간 자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음 앞에서 염려한 것은 자기가 죽어 없어지는 것을 염려한 것이 아니라, 자기는 죽더라도 그 인연을 남기고 가야겠다는 염려의 마음이 앞섰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4천년 역사를 섭리해 나오신 하나님의 사직(社稷)이 무너지느냐, 안 무너지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심각했던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이었던 것입니다.
자기 일신이 사라지는 것을 염려한 것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남겨진 전통의 노정이 나로 말미암아 손실이 돼서는 안 되겠다. 나로 말미암아 빛이 될 수 있는 결과를 가져 왔으면 가져 왔지 역사적인 하나의 한의 노정을 남겨서는 안 되겠다' 한 것입니다. 거기에 해방권을 만들고, 자유와 평등권을 만들고, 여기에 스스로 침의 원천을 자극시킬 수 있는 역사적인 그 무엇을 남기고 싶은 마음을 가졌으면 가졌지. 거기에 흠을 가져다 주고 거기에 손실을 가져다 주는 그런 놀음은 죽더라도 할 수 없다는 입장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길을 갔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구를 찾아 왔느냐? 그런 사람을 찾아왔던 것입니다.
역사적 가치의 내용을 종결지을 수 있는 순간이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하나님은 심각할 것이 아니냐…. 이것이 더 상처를 받아서는 안 되겠다는 심각한 마음, 그 상처를 남겨서는 안 되겠다는 간곡한 마음이 앞섰던 것입니다. 자기는 백, 천만한 상처를 입더라도 거기에 열만한 상처도 입혀 서는 안 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보다 백배 천배 염려를 하면 할수록 그건 하늘의 영광이 되는 것이요, 하늘의 자랑이 되는 것이요, 하늘의 역사적 승리의 터전이 된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예수님은 자기 일신을 가누어 가지고 생각할 수 없는 자리가 아니었겠느냐? 그것은 생각할 여지가 없는 자리가 아니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예수님이 '아바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하신 말씀 가운데는 공적인 입장에 선 당당한 그의 인격이 숨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아바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러 시나이까'라고 한 것은 버릴 수 없으신 아버지이신데도 불구하고…. 여기 에는 절대적인 그 무엇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 이루었다'고 하는 말씀의 의미가 성경 가운데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그의 내심을 중심삼고 볼 때, 그가 세상 앞에 말할 수 없는 간곡한 내적 결의를 다짐한 것을 두고 볼때, 그것은 '틀림없이 다 이루었다. 내가 소원하는 일념 앞에 있어서 넘을수 있는 고개는 다 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인 것입니다. 그 한마디의 말은 역사를 새로이 창건할 수 있는 승리의 표어와 마찬가지인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거기서부터 새로운 발전의 역사는 시작되었습니다. 그 발전의 역사의 동기는 무엇이냐? 예수의 그 철저한 사상적 터전이었던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 터전이 역사시대의 어려움을 극복하고도 남을 수있는 동기의 기원이 되었기 때문에 기독교는 죽음이 따르는 순교의 역사도 무한히 돌파하고, 현실에서 세계적인 터전을 넓힐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장본인이 가졌던 신념과 하나님을 위한 간곡한 심정적 심도가 거기에 깃들어 그것이 밑천이 됨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심어진 그 힘의 여력이 거기에 깃들어 있음으로 말미암아 그 결과는 세계의 끝날에 거둬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4천년 역사시대를 대신해서 누구보다도 하나님 앞에 진정한 의미에서 최고의 자리에 있는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분이 간 죽음길은 보통 사람의 죽음길과는 다른 것입니다. 자기 일신의 행복만이 아니라 자기가 속한 일개국의 행복뿐만 아니라, 만민과 더불어 과거 현재 미래의 역사시대의 인류의 행복을 위하여 가는 그의 심각함에는 그 누구도 따를수 없고, 하나님도 감탄하실 수밖에 없는 내용이 깃들어 있음에 틀림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미루어 엿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예수의 소원을 매듭짓고, 새로운 천국이념을 주도하는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하나님이 이 시대에 요구하는 뜻이라는 것을 생각 하게 될 때, 그러한 하나의 교차선, 그런 하나의 역사적 전환점상에 서있는 오늘의 통일교회, 통일 종교를 갖출 수 있는 통일교단, 통일교단을 대표할 수 있는 하나의 신앙자, 그 신앙자의 인격은…. 그 인격이야말로 예수의 전통적 역사적 심정을 부끄러움 없이 상속받았다고 할 수 있는 자리에까지 가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세계적인 수난 과정을 극복하고도 날올 수 있는, 승리의 한날을 찬양하고도 남을 수 있는 내적 결의와 더불어 다짐된 사람이 아니겠느냐. 이런 것을 두고볼 때 그자리에 선사람의 신앙의 심도라는 것은 은 역사를 대표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 하는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세계를 걸어 놓고 하나님 앞에 심각한 자리에서 기도해 봤느냐? '내가 동쪽으로 갈 때는 세계가 동쪽으로 움직이고 내가 서쪽으로 갈 때는 세계도 서쪽으로 움직인다. 내가 호흡하는 것은 세계 인류를 대표해서 호흡하는 것이고, 내가 먹고 사는 것은 인류를 대표해서 먹고 사는 것이다' 이러한 신념에 사무쳐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있기를 하나님은 지금까지 역사시대를 통해서 바라신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그런 사람이 있었느냐? 일년, 혹은 한때를 그렇게 산사람이 있었을는지 모르지만 십년을 매일같이, 혹은 노아와 같이 120년 동안 그런 심정을 중심삼고 역사적 전환점에서 전체의 천적인 사명을 대신하기 위한 승리적인 결실로서 남아지겠다고 몸부림친 무리가 있었느냐할 때, 이것은 심히 염려되는 문제가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통일교회를 자랑하는 사람들이 되겠습니까? 여러분이 통일교회를 자랑하는 사람들이 된다 하더라도 여러분은 통일교회의 승리의 날은 맞지 못할 것입니다. 통일교회가 자랑할 수 있는 통일교인이 되어야 하고이 세계가 자랑할 수 있는 통일교회, 통일교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나라와 이 세계가 통일교회만 자랑하는 그런 교단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 세계가 자랑하는 통일교단이 있기 전에 이 세계가 자랑하는 통일교회 교인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자랑하게 될 때 '야, 통일교회 잘한다' 하기를 바랄 것이냐? 그것은 여러분과 관계가 없습니다. '통일교회에 다니는 아무개를 자랑한다' 하실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를 중심삼고 볼 때도, 십자가의 죽음길을 간 예수는 이스라엘을 자랑하는 예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유대교를 자랑하는 예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유대교를 대표하고 이스라엘 나라를 대표한 자리에 섰던 것입니다. 그 예수는 유대교를 포함하고, 이스라엘을 포함하고, 유대교와 이스라엘의 미래를 포함하고도 남음이 있을 수 있는 정상에 서 가지고 그의 권위와 영향을 미치게 될 때, 전체가 그 영향권에 휩쓸려 들어갈 수 있는 주체적인 입장에 선 예수였던 것입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그럴 수 있는 통일교회 교인이 되어야 합니다. 통일교회 신앙자 가운데 그럴 수 있는 김 아무개면 김 아무개, 박 아무개면 박 아무개가 있어야 될 것이 아닌가? 그래서 역사를 탐구하는 것은 그보다 나을 수 있는 '나'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그 시대의 신앙자들을 감정하는 것은 그 시대적인 어떠한 신앙자보다 나은 신앙자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미래에도 이런 전통을 넘을 수 없다' 할 수 있는 최고의 기원을 마련하지 않고는 역사시대에 남아질 수 있는 최고의 무리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오늘날 세계를 중심삼고 볼 때 세계를 대한 하나님의 섭리 앞에 있어서 역사적인 종말시대가 나타나기 위해서는 역사적 출발을 볼 수 있는, 기원을 일으킬 수 있는 한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 사람은 역사시대를 넘고 살수 있는 심정적 동기를 유발시켜야 합니다. 그래야만 출발된 종교면 종교의 과정을 거쳐 역사의 승리점을 결정지을 수 있는 기초가 되는 것이지, 그것을 결하지 않고서는 그런 결과는 바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어떤 한 시대를 대표하여 기도하고, 그시대의 비운을 책임지고 하늘 앞에 몸부림치는 수고의 자리에 선 사람은 어떠한 종교면 종교의 도주로서 등장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시대를 극복하고 그 세계의 섭리적 관을 넘고 나설 수 있는, 그렇게 정성을 들이는 무리들이 아니고는 하나님의 역사 발전사에 남아질 수 있는 개인, 혹은 종교가 될 수 없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런 무리를 찾아나온 것을 우리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신앙의 심도'라는 주제로 말씀하고 있지만, 여러분의 신앙생활은 자기를 중심삼은 생활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내 일신을 위해 사는 생활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팔려가는 종의 몸보다 더한 신세입니다그 시대에 팔리는 몸이 되기 보다는 미래 세계와 전체 역사와 더불어 운명을 같이하기 위해 팔리는 몸이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역사를 위해서 수고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냐? 완전히 역사 앞에 있어서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인연을 가진 사람입니다. 자기의 생명이 남아 있는 것은 역사가 남아 있기 때문이요, 역사의 해결점을 결정하기 위해서 남아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어 가지고는, 그런 기원이 없어 가지고는 세계를 요리할 새로운 운동을 제시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도 그와 같은 내용을 갖지 않고는 지상을 중심삼고 역사할 수 없을 것이 아니겠느냐,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전체를 복귀시키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느냐? 부자집에 팔려온 종의 입장에서 주인을 위해 생애를 바쳐 충성함으로 말미암아 그주인 앞에 칭찬받은 생애를 남긴 사람이 있다면, 여러분은 그 사람이 수고한 것보다 못해서야 되겠습니까? 그 사람의 수고에 몇천만 배 더 가중한 수고를 해야 합니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부모 안에 효도를 하여 효자의 칭호를 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효자가 있다고 한다면, 그 효자가 부모에게 효도하는 그런 입장과 같을 것인가?
다른 것입니다. 역사를 대신해서 찾아온 길이요, 시대를 대표한 길이요, 미래의 출발의 기원이 되어야 할 그런 자리인 것을 생각할 때, 얼마나 효자 중의 효자가 나와야 되겠느냐. 이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여러분들이 이걸 잘 알아야 됩니다. 내가 언제 세계와 더불어 살아 봤느냐? 내가 언제 이 민족과 더불어 살아 봤느냐? 더 나아가서는 민족이 망하고 세계 역사도 변해왔지만 그 변하는 역사도 넘어 서고 민족의 망하는 운세도 넘어서서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 봤느냐?
그러면 망하는 운세를 가로막고 세워 놓으시려니 하나님은 얼마나 힘이 드시겠습니까? 그렇잖아요? 한 집이 망하는 것을 바로잡으려면 십 년 수고해도 어려운데. 이 천지가 망해 떨어지는 것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얼마나 큰 수고를 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이 6천년 동안 수고하셨는데도 바로잡지 못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그 틈바구니에서 지렛대 놀음을 누가 해야 되느냐? 그것은 하나님이 혼자 하셔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지렛대의 끝을 쥐고 지레질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 지렛대는 누가 되어야 하느냐? 하나님이 아닙니다.
원리를 두고 볼 때, 누가 되어야 한다고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 사람이 누구냐 하면 '나'입니다. 내가 지렛대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렛대가 되려면 찢기는 밑창에 들어가야 되는데 거기에 누가 들어가야 되느냐? 사람이 들어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세워 나오는 과정에서는 지렛대의 자리에 들어가기 위해서 찢겨 죽은 수많은 개인도 있었고, 수많은 가정도 있었고, 수많은 민족도 있었던 것입니다.
찢겨서 죽은 것을 다시 움직이게 하기 위해서는 찢겨 죽은 이상의 힘을 가질 수 있는 종교가 없어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또, 그 종교가 남아진 이상의 힘을 가진 종교인이 되지 않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 지렛대 끝, 희생의 첨단에 서 가지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가중된 힘, 밀어 제낄 수 있는 강도(强度)를 가진 힘의 모체가 되어야 하는것입니다. 이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렛대이기에 거꾸러지든 뒤집어지든 일그러지든 쩌그러지든 상관없다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신념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내심에 그런 결심을 얼마나 해보았어요?
6천년 동안 박혀 있던 큰 집채 같은 바윗돌을 들어 가지고 옮겨 놓았다. 구원했다 할 때는 하늘땅이 얼마나 환성을 지르며 기뻐하겠습니까?
그럴 게 아니예요? 이것이 언제 한번 구르는 날에는 천하는 나가떨어질 것입니다. 그런 어떠한 한계선을 중심삼고 하나님은 있는 힘을 다하여 틀려고 하는 방향이 있을 것이 아니냐? 그래 주기를 바라는 소원의 일념이 남아 있을 것이 아니냐? 저끄러진 이 세상, 이 세상이 타락했다는 것을 알게 될 때에, 그것을 굴러 넘기는 지렛대의 사영을 누가 할 것이냐?
'나는 구경하는 사람이 되겠다' 하는 사람은 쓸데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믿으실 수 있는 것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 가지고 하나님이 바라시는 소원의 세계를 어떻게 성취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믿지 못하시는 것까지 믿을 수 있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품지 못하는 욕망까지 가져야 되겠다. 하나님은 쉬십시오. 제가 하겠습니다' 하는 마음을 가지고 나가야 되겠습니다. 그런다고 하나님이 '경거망동하지 말아라. 에이 불충한 녀석'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을 위해서는 죽더 라도 내가 하겠습니다' 하고 나서는 지렛대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만일 지렛대를 쥐고 계시는 하나님이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이라면 말이 예요. 지렛대가 되겠다고 한 결심이 하나님보다 더 강한 입장에 서면 하나님께서 '그래. 한번 해보자'고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결심을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 바다를 유리덩이로 된 바다라고 생각해 보세요. 이 유리덩이 바다를 한꺼번에 움직일 수 있는 그런 놀음을 한다면, 맨 밑창에 있는 그 깊은 바닥을 잡아챈다면 바다는 떼굴떼굴 굴러갈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깊은 곳을 찾아가야 합니다. 신앙의 길도 마찬가지로 깊은 곳을 찾아가야 합니다. 신앙이란 말은 믿고 바라는 것입니다. 우러러보면서 믿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신앙은 무엇을 중심삼고 하느냐? 말씀을 중심삼고 하는 것입니다. 신앙하기 위해서는 먼저 말씀이 필요합니다. 말씀을 믿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말씀이 뭐냐?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계약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하면 이렇게 해준다 하는 계약입니다. 성경에서 가르쳐 주는 것이 뭐냐 하면 전부 다 계약입니다. 이렇게 하면 이렇게 해주마 하는 계약인 것입니다. 계약대로 이행하면 하늘은 흥하게 하고, 계약대로 이행 안 하면 하늘은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에 기록된 계약대로 전부 다 실천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계약한 그 내용이 아무나 항상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신앙이자는 말은 필요 없는 것입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나와 직접적 관계가 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적 관계에서 인연을 따라가는 길에 있어서 필요한 것입니다. 나와 하나되었는데 무슨 신앙이 필요하겠습니까? 살면 되지. 신앙이 필요한 것은 관계가 맺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중심삼고 관계를 맺어야 하느냐? 말씀을 중심삼고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통일교회 신앙을 한다. 통일교회를 믿는다는 말은 통일교회 말씀을 따라간다는 말입니다. 통일교회 말씀과 하나됐다는 말입니다. '잘 믿는다'는 말은 열심히 믿는다는 것입니다. '열심히 믿는다' 하는 말은 통일교회 교리대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통일교회에서 현재 이만한 신앙을 해 가지고 이만한 환경을 만들었다면 더 큰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는 더 큰 신앙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통일교회 말씀을 중심삼고 믿고 나가는 데 있어서 어느 정도 맡을 것이냐? 이것은 믿고 저것은 안 믿는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믿는 데 있어서는 몽땅 믿으라는 것입니다. 믿고 나서 '아이고, 난 됐다' 해서는 안 됩니다. 믿는 데 있어서는 배고픈 신앙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이것 가지고는 안 되겠는데 더 뭐 없나' 해야 합니다. '이것 먹고는 체해서 설사가 나서 죽겠는데...' 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먹고 나도 배가 고픈데 더 먹을 것이 없느냐'고 하며 입을 벌리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믿지 못할 말이 없어야 합니다. '1정도 가지고는 설사 안 한다. 배가 아프지 않다. 그것보다 몇백 배 되는 말을 흠뻑 집어 삼키고도 끄떡없이 소화시킬 수 있다' 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아직까지 머리 숙이고 무엇이 어떻고 어떻고 하고 따지는 사람은 멀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믿지 못할 것이 뭐가 있습니까? 저에게 한번 명령해 보십 시오' 하며 무엇이든지 믿겠다고 한다면 하나님이 '야 이녀석아, 이 녀석 안 되겠구만' '그러시겠어요? '내가 믿지 못할 것이 어디 있느냐?' 하시면서 없다고 해도 '아 그래도 있을 게 아니요? 하면서 하나님의 멱살을 잡고 매달리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싫어하겠어?
'이놈 자식아, 경망스럽고 불경한 자식아' 하시겠어요? 사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이 신나시겠어요. 안 신나시겠어요? 그런 사람을 불효 자식이라 하겠어요, 망할 자식이라 하겠어요? 그런 사람이 없어서 하나님이 걱정하시지 않느냐는 겁니다.
성경에도 보십시오.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요16 : 12)"는 구절이 있습니다. '내가 답답함이 얼마나 크냐' 하며 예수님이 탄식을 많이 했습니다. '이 세상 일을 말하 여도 믿지 못하는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고도 했습니다.
불신하는 사람들에 대해 탄식한 말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위해서 통일교회를 믿는 데 있어서 얼마만큼 믿을 거예요? 통일교회 문선생님이 믿지 못할 것이 무엇이 있느냐. 그것도 소화시킬 수 있다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것도 소화시켜서 영양소로 섭취해서 살이 되면 되는 것입니다. 뱀을 잡아 먹는다고 다 죽는 것이 아닙니다. 독사의 독을 먹었다고 죽는 것이 아닙니다. 먹어 가지고 소화시 키면 약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못 믿을 것이 무엇이냐 이것입니다. 그런 것을 한번 연구해 봤어요? 나에게 이것이 필요하고 이것은 필요없으니 버린다고 할 수 있어요?
여러분 누구에게나 뱃속에는 내장이 있습니다. 그리고 내장에는 비료가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내장 가운데 들어 있는 비료는 내게 필요 없으니 빼 버리고, 내장의 어느 부분은 잘라 버리고 내가 필요한 것만 갖고 있겠 다고 할 수 있어요? 모두가 필요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똥까지 들어 있는 것입니다. (웃음) 시시한 신앙을 갖지 말라는 것입니다. 시시한 신앙.
현재 통일교회 앞에 나타난 것도 요리하지 못하는데 앞으로 갈 통일교회를 창조해 낼 수 있겠어요?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못 믿을 것이 없다고 할 수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통일교회 진리 중에 못 믿을 것이 없다. 이만한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이걸 가지고 통일교회 신앙이 세계적이라고 할 수 있느냐?' 여러분은 이렇게 한번 해봤어요?
선생님 주의가 그래요. 믿지 못할 것까지 찾아다니면서 믿겠다고 하는 것이 통일교회 문선생의 주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20대에 한국의 훌륭하다는 목사들을 다 만나 보았습니다. 그래 가지고 당신이 믿지 못할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들어보니 시시하다는 것입니다. 내가 모두 비교 감정한 것입니다. 그 정도 가지고는 뭐…. 믿겠다고 생각하지 않고도 믿을 수 있어야 큰 믿음입니다.
그래서 내가 정성을 들이는 데 있어서는 끝없는 정성을 들이겠다고 한것입니다. 끝없는 정성은…. 나라도 한꺼번에 몽땅 잡아서 정성을 들여야 되는 것입니다. 나라를 제물로 해서 정성들일 수 있으면 거기에는 어머니 아버지도 다 들어가는 것입니다. 처자도 다 들어가는 것입니다. 나 홀로 남아서 아들딸 전부를 제물로 드릴 수 있는 그런 자리로 들어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의 심도에 있어서 누구도 따르지 못하는….
자기가 믿는데는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현재는 진리에 있어서, 둘째는 인격에 있어서…, 믿는데는 그렇잖아요? 통일교회를 지도하는 사탄이 있다 이거예요. 그러면 '진리에 있어서는 못 믿을 것이 없습니다. 그건 문제 없습니다. 다 믿으니, 선생님, 말씀해 보십시오. 믿지 못할 것이 있거든 말씀해 보십시오. 그것을 내가 삼켜서 피살을 만들겠습니다' 그럴 수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무엇을 믿어요? 종교를 믿어야 되는데 종교를 믿게 될 때는 그 종주를 따라야 합니다. 그 종교를 창설한 사람의 인격을 중심삼고 하나되어야 합니다. 창설한 사람이 하지 못하겠다는 것까지 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종교의 전통적 상속자가 되는 것입니다. 창설자가 하자 하는데 싫다고 하는 사람은 아직 거리가 있는 것이요, 그 인격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종교의 창설자가 하자고 한 것은 틀림없이 해야 합니다. 만일 창설자가 하자고 하기 전에 먼저 나서서 '내가 하겠습니다' 하는 사람이 있게 되면, 그 종교의 창설자는 자기가 죽기 전에 그에게 계대를 이어 놓고 가려고 할 것입니다. 창설자가 살아 있을 매 계대를 이어받을 수 있는 사람은 그 창설자가 하지 못하는 것까지 하겠다고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아이구, 통일교회 문선생 가는 길을 나는 못 따라가겠소' 해서는 안 됩니다. 하자고 하는 것은 다 하고 '더 해야지'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이구. 또 하는구만. 그걸 어떻게…. 이건 뭐 가면 갈수록 태산준령이구만. 선생님이야 미쳐서 그렇지, 나는 안 미치겠어' 하는 사람은 거기서 망하는 것입니다.
먼저 진리와 하나되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지도하는 사람과 하나되 어야 합니다. 어느 고개를 넘어가다가 지도자가 못 가겠다고 하면 그 지도자를 밀고 올라갈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밀어 주시기 때문에 하나님 편이 되는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걸 알아야 됩니다. 그 지도자가 지쳐서 못 올라간다 할 때. 지금까지 수고를 해왔는데 하나님이 그가 지쳐서 멀어지길 바라겠어요? 배후에서 누가 밀어 주기를 얼마나 바라시겠어요?
그러니 지도자가 못가게 될 때 그 지도자를 밀어 주는 입장에 서면 하나님편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 지도자가 못 간다고 해서 '어이구 어이구, 선생님도 봐라' 그런 사람은 망하는 것입니다. 뒤에서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통일교회가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중 작전을 하십니다. 밀어 주는 사람이 없는 경우에는 치는 사람을 만드는 것입니다. 가까운 사람을 원수 사탄에게 넘겨주어 그 사람으로 하여금 화살침으로 궁둥이를 찌르게 해서 화닥닥 정신차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웃음) 그렇게 생각해야 됩니다. 따라서 무슨 문제가 벌어졌다 하면 '아이쿠 감사합니다' 하고, '하나님이 나에게 강장제 주사를 놓아 주시는구나' 하고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하늘 작전은 그렇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만약에 내 집안 식구가 원수가 되면 동시에 친구 중의 친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두 패로 갈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믿었던 사람이 원수가 됨으로 말미암아 생각하지도 않았던 사람이 믿을 수 있는 자리로 올라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바꿔치면서 발전해 나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퀴가 구를 때는 정지하려는 것보다 뒤에서 미는 힘이 강하기 때문에 굴러가는 것입니다. 뒤에서 오는 힘이 강하기 때문에 굴러가는 것입니다. 뒤에서 오는 힘이 강하기 때문에 앞은 물러가고 뒷 것이 앞자리를 차지하면서 바퀴가 굴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굴러가는 것은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선생님을 대하여 어떻게 해야 할 것이냐? '선생님이야 팔자를 타고 나서 그렇지만 우리는 그런 팔자를 타고 나지 않았다'고할 수 있어요? 그런 법이 어디 있어요? 그 팔자를 다 이어받지 않고서는 살 팔자가 못 되는 것입니다. (웃음)
여러분은 그 심도에 있어서 선생님을 따라가지 말고 선생님보다 위에 계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고 선생님 이상이 되어야 합니다. 선생님 이상으로 하나님을 대할 때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는 시간이 자기 앞에 다가 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통일교회가 지금까지 움직여 나온 것은 그냥 허무하게 나온 것이 아닙니다. 지난 역사를 두고 볼 때 엄청난 역사가 있었고, 지금도 엄청난 역사가 연결되고 있는 것을 볼 때에 하나님이 같이 하심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나는 선생님이 만나지 못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시간이 가까우니 내가 더 잘 믿어 보겠다'고 해야 합니다. 그래 가지고 '선생님은 가만히 계십시오. 제가 하겠습니다' 하면서 서로 하겠다고 싸우게 되면 그 집단이 망하겠어요, 안 망하겠어 요? 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을 발판 삼아서 출세해 보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렇게 해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못 하게 하려고 파리를 끊고 손을 끊으려 한다면 죽일 녀석입니다. 발판으로 삼을 수있으면 발판을 삼으라는 것입니다.
'선생님, 이 대한민국을 복귀하고 세계를 복귀하기 위해서는 이런 정도의 희생은 할 수 있고 이런 배짱을 가진 사람이 있어야 될 것이 아니예 요? 선생님이 못 하시겠거든 저에게 시켜 주십시오'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어떤 기성축복 받은 가정인데 나이가 한 40이 넘은 사람입니다. 조용한 새벽인데 문을 두드려요. 그래서 문을 열어 주었더니 들어왔어요. 왜 왔느냐고 물으니 할 말이 있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고 했더니, 심각한 말이라는 것입니다. 말해 보라고 하니까 '제가 김일성의 목을 짤라 올 테니 보내 주십시오' 하는 것입니다. (웃음) 어떻게 하겠느냐고 하니까 어떻게 하는 것은 그때 가 봐야 알겠지만 하여튼 보내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은 그때 가 보아야 알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우선 가는 것이 문제이지 어떻게 하겠다는 것은 그때 가 봐야 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됐다 이 녀석아' 했습니다. 지금도 가끔 생각이 납니다. 내가 지금도 이북을 생각하고, 김일성을 생각할 때는 그 사람 얼굴이 번뜩 떠오릅니다. 요전에 내가 그에게 '지금도 가고 싶어요' 했더니 '예' 하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웃음) 그게 됐다는 겁니다. 진짜 그럴수 있는 때가 된다면 저 한번 해봐라' 하고 제 1호 특명. 밀명을 내릴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까지 죽지 말고 기다려 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김일성' 하면 그 얼굴이 퍼뜩 떠오릅니다.
만일 통일교회 교인 중에 '선생님, 제가 하나님과 한판 씨름을 하든가뭐 하나님께서 그것은 믿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도망칠 정도로 믿고 싶으니, 하나님을 좀 소개해 주십시오'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선생님의 마음 가운데는 '하나님' 하면 그 사람의 얼굴이 떠오를 것입니다. 생각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놀라서 도망갈 정도로 믿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 할 때에는 그 사람이 언제나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믿지 못할 것이 무엇인가? 1호는 무엇이고, 2호는 무엇이고, 3호는 무엇이고….' 이렇게 쭉 생각해 보라는 거라구요. 왜 그러냐? 사탄세 계를 요리하려면 사탄세계에서 믿을 수 있는 것 가지고는 안 됩니다. 사탄세계에서 믿지 못할 것을 가지고 요리해야 되는 것입니다. 뒤집으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아래서부터 뒤집어야 돼요, 위에서부터 뒤집어야 돼요? 위에서 뒤집는 것은 뒤집을 수 있다 해도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복귀는 아래서부터 해야 합니다. 아래서부터 올라가야 합니다. 위에서 부터 한다면 대통령에서부터 내려와야 합니다. 그렇게는 뒤집을 수 없습니다. 뒤집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뒤집으려면 밑창부터 뒤집어야 합니다.
그러니 지금까지 세상이 믿지 못하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 까지 믿지 못하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이런 등등의 문제가 신앙생활에 있을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 진리를 믿어야 됩니다. 그 인격을 믿고 실천해야 되는 것입니다. 따라 가야 되는 것입니다. 믿는 것만 가지고서는 안 됩니다. 이룰 수 없습니다.
통일교회 문선생이 술을 열 댓독 만들어 가지고, 서울 사람이 다 먹고 취해서 나가자빠질 정도로 술을 만들어서 한번 마셔 봤으면 좋겠다 할 때 통일교회 교인들 중에 남아질 사람이 몇 명이나 있겠어요? 탕감복귀 역사에서 술 먹은 사람을 해방하려면 그 놀음을 누가 하겠느냐 이거예요?
그렇잖아요? 술을 먹고 병이 나서 죽은 사람을 어떻게 탕감복귀하겠어요? (웃음) 그런 사람을 탕감복귀할 사람이 있어야 할 게 아니예요?
그렇기 때문에 내가 술 공장 주인도 되어야겠습니다. 도박장도 만들어야 되겠구만. 세계에서 제일 가는 도박장을 만들어야 되겠습니다. 그건 왜? 탕감복귀하기 위해서, 그것은 언제나 두는 도박장이 아닙니다. 일시 탕감복귀하기 위한 도박장입니다. 그런 도박장도 필요한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사실 탕감복귀는 그렇게 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총살한 과거역사를 탕감복귀하기 위해서는 수만 명을 한꺼번에 총살하는 일도 벌어질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수만발의 총알이 한꺼번에 나가는 총을 만들어서 일격에 전부 다 죽이지 않고서는 해원성사할 수 없다면 어떻게 하겠어요? 그런 일도 있을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있다는 것이 아니라구요. 처녀들은 '아이구, 말만 들어도 끔쩍해'라고 하겠지만 (웃음), 그런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 썩어진 세계를 새로운 세계로 만들기 위해서는 썩어진 것을 잘라 버려야 할 게 아닙니까? 잘라야 할 손가락을 놓고 '아이구. 이 손가락 이때 까지 나와 더불어 함께 했는데 자르다니, 나는 죽어도 못 자르겠다' 하면 죽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한번 잘라 보자' 하고 선뜻 잘라 놓고 울어야 되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탕감복귀라는 말을 알고 있는 통일교회 교인들 치고는 너무나 째째하다는 것입니다. 3천만 명쯤 잡아서 제사를 드려야 30억 인류를 살릴 수 있다면 3천만 명을 잡아 제사를 드리겠어요, 안 드리겠어요?
제사를 드려야 되겠어요, 안 드려야 되겠어요?「드려야 되겠습니다」'그것 어떻게 드리나? 안 돼지' 하면 되겠어요? '하나님, 3천만은 그만 두고 30만, 30만은 그만 두고 3만, 3만은 그만 두고 3천3천은 그만 두고 탕감조건이니까 3백 명, 3백은 그만두고 조금 더 양보해 가지고 3십명, 조금 더해 가지고 3명만 드리면 어떻겠소?'(웃음) 한다면 거 수작이 됐어요? 3천 명쯤 제물드려야 한다고 하면 '3천 명 가지고 되겠소? 3억 명을 제사 드리겠소' 하면 하나님은 '3천이면 돼. 그럴 필요 없다' 할 것입니다. 그러면 '3천 3십 3명이라도 드려야 될 게 아니 요?' 하면 '다 그만 둬라' 그러실 것입니다. '그러면 3천 3명이라도 해야 될 게 아닙니까' 하면, 그만두라고 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3천명에다 신발 세 켤레라도 갖다 놓고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한다면, 이런 식은 통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흥정합시다' 하는 식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웃음) 내가 탕감복귀의 역사를 알고 난 후에는 못할 일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어머니까지도 바쳐야 된다면 바치겠다고 결심한 사람입니다. 자식, 아내는 문제도 아닙니다. 역사시대에 있어서 어느 누구보다도 믿고 행동하는 데 있어서 일등이라고 하나님이 믿을 수 있어야 세계적인 놀음도 한번 시켜 보고, 하나 못 하나 구경이라도 할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여자들을 내세워 가지고 인민군들을 정복하겠다는 것이 선생님의 결심 입니다. 남자 인민군들을 여자들을 내세워서 때려잡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생님 주장입니다. 한번 할 것입니다. 그러면 희생이 얼마나 될 것이냐? 3배 이상 희생될 것입니다. 그러냐 대한민국의 여자 세 사람만 남겨 놓고 다 죽더라도 해야 됩니다. 알겠어요? 남자만 있으면 여자는 사오면 되는 것입니다. (웃음)
우리가 공기총을 만들어 보급했기 때문에 새들이 다 죽었다고 이야기들을 하는데 새가 죽어서 어쨌다는 겁니까? 돈 벌어서 일본에 가서 사오고, 이국에 가서 사오면 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에 있는 새보다 배나 더 좋은 종자를 사다가 만들어 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대한민국에 좋지 나쁠 것이 뭐냐는 것입니다. 나쁜 종자가 있는 것보다 더 좋은 종자를 사랑해 주면 대한민국이 이익이지 손해날 것이 무엇이냐….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열심히 믿겠다고 하던 유협회장을 보고 '저녀석을 제사를 드려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어요. 그러다 죽었지요? 그렇 다고 섭섭하게 생각했겠어요? '아이고, 왜 죽었어 왜 데려갔어. 하나님도 무심하시지' 하면서 눈물을 홀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제사 드리지 못한 것이 한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 그게 됐어요, 안 됐어요? 여러분들이 보기에는 잔인하지요? 그런 식입니다. 그렇 게도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뜻을 위해서는 못할 게 무엇이냐…. 그게 문선생 주의예요.
통일교회 말씀을 대해 못 믿을 것이 없습니다. 우선 믿고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했는데도 안 된다면 이의를 제기한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믿지도 않고 향하지도 않고 이러쿵저러쿵하면 입을 찢어 버려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통일교회 선생님이 행한 실적 앞에 치이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그래서 인격을 따라가라, 그 사람을 따라가 라는 것입니다. '나는 그것 못 하겠소' 한다면 실패입니다. 그 사람을 상대 안 하는 사람은 거기서 망하고 맙니다.
아직까지는 정상, 꼭대기를 못 가 봤으니 망하더라도 꼭대기에 가 보고서 망해야 되는 것입니다. 8부 능선에서 쓰러지면 사체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죽어 독수리 밥이 되더라도 꼭대기에 가서 죽겠다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저 높은 고개를 올라 정상을 정복했다는 역사를 남기고 죽어야 지, 못 가겠다고 하다 죽었다고 하면 안 간 것만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인격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러려면 가지 못할 길도 믿고 따라가야 합니다.
셋째는 무엇이냐?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누구보다도 사랑해야 합니다.
있는 정성을 다하고 나서도 아직까지 사랑이 미치지 못했으니 그것에 대해 한을 품어야 합니다. 내가 정성을 들인 심도가 아직까지 미치지 못한 깃에 대해 한을 품으라는 것입니다.
내가 한때, 1960년도에는 뜻을 위해서 사랑했고, 하늘을 위해서 사랑 했고, 민족을 위해서 사랑을 쏟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망하고 맙니다. 그러므로 더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를 위주한 사랑이 아닙니다 전체를 위한 사랑입니다. 전체를 위한 사랑이니 그에 대한 신앙을 통해서 자기를 개조해야 합니다. 자기 개인의 영탁을 위해서 믿는 신앙이 아니라 전체의 복락을 위해서 믿는 신앙이라야 하늘나라를 찾아갈 수 있고, 발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더 큰 소원의 터전을 이루어 갈 수 있는 종교가 되는 것이요, 인격이 되는 것이요,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큰 사랑의 마음을 갖고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개인을 위해서 희생하고, 가정을 위해서 희생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종족을 위해서 희생하고, 민족을 위해서 희생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통일교회는 짜여져 있습니다.
대한민국이 만일 하늘 뜻 앞에 세워지는 날에는 이 3천만 민족은….
3천리 반도에 외국으로 깃발을 들고 희생하러 가는 무리가 아침 저녁으로 북적거리고, 그들을 보내면서 부르는 전송의 노래가 각 항구 도시마다 우렁차게 되면 이 나라는 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당장은 처량하고 당장은 잿더미가 되는 것 같지만 이 나라는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통일교회가 되겠느냐 할 때 '된다' 할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하고, 그렇게 만들 수 있는 통일교회 선생님이 되겠느냐 할 때 '한다' 할 수 있는 선생님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선생님 자신이 선두에 설 것을 각오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보다도 사랑을 위해서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사랑하려고 하시기 때문에 공히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진리와 인격과 사랑. 이 세 가지가 문제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통일교회에서는 진리심판, 인격심판, 심정심판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걸 중심삼고 볼 때, 참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말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참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말대로 하는 사람이 아니고는 깨지는 것입니다. 말한 대로 실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말과 행동이 일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엇갈려서는 안 됩니다. 말과 행동의 일체, 그것은 무엇을 위한 것이냐? 그것은 사랑을 위한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사랑의 소재지는 자기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사랑의 소재지는 어디냐? 사랑의 소재지는 자기가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상대인 것입니다. 사랑은 자기를 위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부 지간에도 사랑을 받은 다음에 사랑한다는 사랑은 오래 못 갑니다. 사랑은 상대적 요건이 없으면 성립 안 되는 것입니다. 혼자서는 아무리 '백 살, 천 살까지 사랑한다' 하더라도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사랑의 동기는 자기가 아닙니다. 상대가 있기 때문에 애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사랑의 소재지는 내가 아니예요.
여자들, 시집 가는 것은 사랑을 받기 위해 가지…. 천만에요. 자기가 사람을 해야 합니다. 사랑의 길은 희생을 동반하는 것입니다. 왜? 상대가 주체이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상대의 사랑을 완전히 점령하기 위해서입니다. 상대가 완전히 나와 하나될 수 있고, 나에게 순응할 수 있는 터전을 만들어야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위해서 희생의 대가를 치러 나오는 사람 앞에는 사랑을 중심삼고 완전히 일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의 소재지는 자기가 아니라 상대인 것입니다. 제가 잘나서 아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지….' 하는 생각을 하면 안 됩니다. 그렇게 뻐기다가는 몇해 안 가서 깨져 나간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남자가 자기밖에 없나? 하게 되는것입니다. 옛날에는 잘나보였다 해도 자기가 잘났다고 자꾸 자기를 내세우면 '코가 왜 저렇게 생겼어' 이렇게 결점을 지적하게 마련입니다. (웃음) '아이구. 왜 저렇게 말이 많아, 겸손해야지.
그 말 듣기 싫다'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는 말이 다 싫어지게 됩니다. 거기서부터 파탄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위하는 데서부터 통일이 벌어지는 것이요, 위하는 데서 부터 천운이 함께하는 영원한 승리적 터전은 쌓아지는 것입니다.
통일교회에 처음 온 사람들 중에는 '통일교회 교인은 사랑을 크게 제일 말하고 있지만 막상 가 보면 냉랭하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게 냉랭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통일교회에 가 보면 그 무엇인지 모르게 맛이 있다. 뭐라고 말은 못하겠지만 멋진 데가 있다'라고 하는 말을 들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모든 사연을 중심삼고 통하지 않을 것이 없는 주체적 입장에 서야 합니다. 위함받기 위한 입장이 아니라 위할 수 있는 입장에 서야 합니다. 그렇게 위할 수 있는 입장만 되면 그 교회에 사랑이라는 명사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대하여 '야 이 자식아. 네가 뱃속에서 나을 때 얼마나 내 살덩이와 피를 빨아먹고 나왔어 ? 지금까지 파먹었는데도 뭐가 불만이 라고 또 꽥꽥거리는 거야, 이녀석아' 그래요? 그렇게 하는 것이 부모의 사랑이예요?(웃음) '오 그래. 주는 대로 잘 먹는구만. 더 주어야지' 하면서 자식을 자기의 가슴에 품고서 '어서 먹어라. 어서 먹어라' 하면서 빨대를 들이대고서 빨지 않는다고 걱정하고, 주지 못해 안타까와하는 것이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이게 귀한 거라고요. 그런 자리에서 어머니의 사랑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사랑받겠다고 날뛰다가는…. 받아 보라는 거예요.
끝이 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겠다고 해야 됩니다. 사랑하는 데는 희생이 동반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위대한 사랑이요, 절대적인 사랑인 것입니다. 따라서 사랑은 어디에 가서 열매 맺힐 것이냐? 세계가 나에게 들어와서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세계에 나가 열매 맺는 거예요. 세계에 나가서, 상대 세계에 가서 열매 맺기 때문에 나는 그 사랑의 열매를 위해 희생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도리요, 원칙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한 것인데, 누구에게 주셨어요? 만민 앞에 주겠습니다. 자식을 주고 자기 자신을 희생시키는 자리에까지 나가셨고, 세계를 위해서 연속적인 희생을 치러 나오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좋은 것이고 하나님이 절대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해야 됩니다. 그리고 만민을 사랑해야 합니다. 만민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원을 무한히 투입시키라는 것입니다. 인간을 무한히 투입시키라는 것입니다. 무한히 투입시키려니 통일교회는 무한한 부자가 되어야 하고, 무한한 발전을 해야 합니다. 그것은 통일교회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세계를 위해서, 하나님을 위해서, 영원한 천국을 만들기 위해시 투입하는 것입니다. 그때를 바라고 나가기 때문에 그때가 되지 않으면 하나님은 통일교회를 보고 기뻐하실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이루어 주고서야 기뻐하실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겠다고 날뛰면 날뛸 수록 점점 도와주지 않고서는 못 견디실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뜻은 빨리 이루어질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부모가 환갑을 맞아 잔치를 해드려야 할 입장에 두 아들이 있다고 합시다. 그 중에 형님은 극상으로 해드리겠다는 겁니다. 부모가 일생 동안 모아 둔 재산을 몽땅 팔고 자기 재산을 전부 다 팔고, 그것도 부족하여 자기 재산보다 몇 배의 빛을 져 가면서 잔치를 해드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동생은 어머닌 아버지는 환갑잔치를 그렇게 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 다고, 어머니 아버지가 돈을 번 것은 자식을 위해서 번 것이지 부모를 위해서 번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재산의 3분의 1쯤 가지고 환갑 잔치를 해도 효자가 될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팔고 빛지고 하겠다는 무식하고 미욱한 형님하고 팔지 말고 남기고 하자는 동생이 싸우는 것을 부모가 바라볼 때 작은 녀석은 장래성이 있거든 요? 그런데 부모는 누가 더 자기들을 위하는 자식이라고 생각하겠어요?
주먹구구식으로 빛을 지더라도 재산을 몽땅 팔아 한번 잔치하고 망해도 좋다는 아들과 장래를 생각하고 그럴 것 없이 그냥 조건만 세우고 넘어가 자는 아들 가운데서 누가 더 어머니 아버지를 위하는 아들이라고 생각하 겠어요? 다 팔아 치우고도 모자라서 빛이라도 지겠다고 하는 자식일 것입니다.
그 다음에 부모는 동생에게 '네 말도 맞다. 그런데 네가 그렇게 주장한 것은 진정 부모를 위해서 그런 것이냐? 네가 그렇게 아끼자는 것은 진짜 부모를 위해서 그런 것이냐, 아니면 앞으로 세간날 때 분깃을 더 많이 타기 위해서 하는 것이냐? 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 아들은 질문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질문을 받을 자리에 있는 아들과 질문받지 않고 동정받을 자리에 있는 아들 중에 누가 효자냐? 질문 받을 자리에 있는 아들은 효자가 아닙니다.
그 아들은 누구를 생각해서 그랬느냐? 자기를 먼저 생각하고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가 수고한 것을 생각하면 재산을 털어 바쳐 가지고 빛을 몇백 배 지더라도 그 수고를 보답할 수 없다는 입장에 선 그런 효성의 마음을 가진 장자라고 한다면 무엇을 질문하고 비교 비판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몽땅 인정하고 들어가야 되는 거라고요. 부모는 이 아들에게 몽땅 인계해 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둘째 아들이 앞으로 자기가 상속받을 수 있는 양을 남기겠다고 생각할 때는 빼앗아 가지고 하나도 주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이렇게 이렇게 해주면 통일교회에 이익이 되는데…'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안 되는 것입니다.
내가 이걸 잘 압니다. 남을 희생시키고 잘되겠다는 것은 하나님이 인정하 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남을 위해 내가 이렇게 이렇게 희생하겠다고 하게 될 때는…. 하고 나면 반드시 성과가 있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손해보는 입장에서, 언제나 마이너스되는 입장에서 하나님을 위해서 살 때, 그런 입장에서 이 민족을 위할 수 있는 제물이 드려지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 내가 플러스되는 입장에서 제물 드리겠다는 것은 제물 드리고 장사하겠다는 격인 것입니다. 자기를 희생해 가지고 뭇사람을 다 잘살게 하는 것이 제사 드리는 목적인데, 여러 사람을 희생시켜서 자기가 잘살겠다는 것은 망하는 것입니다.
이런 등등의 문제를 신앙의 심도를 중심삼고 볼 때 얼마나 믿었느냐 그거예요. 얼마만큼 믿겠느냐? 그리고 얼마나 행하겠느냐? 또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얼마나 위하겠느냐? 이런 문제가 앞으로 통일신도들에게는 불원한 장래에 넘어가야 할 고비로서 찾아 올 것입니다. 이런 시점에 놓여 있는 여러분은 '신앙의 심도'라는 문제를 중심삼고 다시금 생각하고 비판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자기에게 플러스되게 하기 위해서 가면 망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후퇴하여 결국은 망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명심해 주기를 바라고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아버지, 신앙의 길은 세상의 일과 같이 되어지지 않는 길인 것을 알았습니다. 아버님께서 심각한 입장에서 계시다는 것을, 한 순간 한 행동의 결과에 의해 천지가 오르락내리락하는 절박한 초점상에서 뜻을 섭리하시는 아버님의 입장이 얼마나 심각하다는 것을 저희들은 미처몰랐습니다.
아버님, 통일교단이 가야 할 길을 당신은 잘 알고 계십니다. 통일교회을 지도하고 있는 이 자식이 가야 할 길도 당신은 잘 알고 계십니다.
저도 제가 가야 할 길이 어떤 길인가를 이미 알고 출발했사옵니다. 이길을 걸어오는 도상에서 수많은 사람이 흘러갔습니다.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직시해 왔고 수많은 사람들을 대하면서 체험했기 때문에 사람은 어떻다는 것, 어느 나라 사람들은 어떻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사람은 이렇고 일본 사람은 이렇고, 또 다른 외국 사람은 이렇다는 것을 제가 느끼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하늘 사람은 대한민국 사람보다도, 일본 사람보다도, 혹은 외국 사람 그 누구보다도 변함이 없어야 된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하늘의 사람은 세계 어떠한 민족 앞에 내놓더라도 '옳소이다'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일본 사람만 추구하고 미국 사람만을 상대하는 신앙이 통일교회의 신앙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아버님 자체를 추구하고, 아버님 자체를 의지하고 나가는 길 앞에 있어서. 어떠한 민족이건, 과거의 그 누구든, 현재의 그 누구든 미래의 어떠한 사람이든 간에 아버님을 추구할 수 있는 동기의 내용을 가진 신앙태도를 갖지 않으면 안 되겠사옵고, 실천의 행적을 남기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그 노정은 눈물과 피의 대가, 사랑의 희생의 대가를 치러야 할 결실의 노정인 것을, 오늘날 국가와 민족을 넘어 세계적인 인연을 따라가야 할 행각의 노정인 것을, 저의들은 알긴 알았지만 그렇게 심각한 것이라는 것은 미처 몰랐습니다.
오늘 이 아침, '신앙의 심도'라는 말씀을 중심삼고 내가 어느 정도 깊은 자리에 서 있는지 다시 한 번 반성해 보아야 되겠습니다. 저희들이 과연 말씀에 사무쳐 뼛골이 우러날 수 있는 심정의 사연을 가지고 어느 한때 밤을 새워 가면서 '모든 인연을 저버리고 이것이 아니면 안 된다' 과 몸부림치며 깊고 깊은 심정의 자리에 서서 아버님을 추앙하고, 놀라우신 말씀에 감사의 심정을 갖고 아버지 앞에 나타난 때가 있었습니까? 스스로 과거를 반성하고 현재의 입장을 다짐해 가면서 스스로 부족한 자신을 재차 발견하고 새로운 자각을 촉구시킬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기를 바라면서 이런 말씀을 하였사옵니다.
하늘 길을 가는 데는 실체 대상을 가려 가야 하기 때문에 제물되는 노정을 가야 되겠습니다. 개인의 제물 노정을 가야 되겠습니다. 남자도 제물이 되어야 되겠고, 여자도 제물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남자 여자는 물론이고 그 아들딸도 재물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그 아들딸이 제물 되는 것도 물론이겠지만 그 아들딸을 중심삼고 연결되어 있는 씨족이 제물 되어야 하겠습니다. 씨족이 제물 된 후에는 민족이 제물 되어야 되겠고, 민족이 제물 된 후에는 국가가 제물 되어야겠사옵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천리의 한의 고개를 넘을 수 없다는 엄청난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 오늘날 통일교회 교인들은 너무나 천박한 자리에 있었사옵니다. 너무나 자기를 중심삼은 생각 가운데 사무쳐 있었던 것을 발견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침에 햇빛을 바라볼 때 이 나라에 오망의, 해방의 빛이 빛나는 새 아침을 만나야겠고, 밤이 찾아오면 이 밤이 사탄의 침범과 사탄의 참소의 조건을 남기는 밤의 권이 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마음으로 맞아야 되겠습니다. 아침에는 감사요, 저녁에는 아버님과 더불어 동감하며 생활할 수있는 환경을 갖지 못한 탄식권내에 있는 실체임을 발견하고, 이런 환경을 제거시키기 위해 몸부림치는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보여지는 만상은 평화와 행복을 노래할 수 있는 자유로운 모습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만물을 품고 사랑하기에 부족함이 없고, 내가 바라던 소원의 한 자리에 선 내 아들이요, 딸이라는 입장을 거느려 가지고 만물을 품고 사랑할 수 있는 그 자리에 서지 못한 자신을 바라보고 탄식해야 될 오늘날의 신앙자들인 것을 알아야 되겠사옵니다.
세상은 이미 악해져 버렸기 때문에 이런 세상에는 미련이 없어야 되겠습니다. 이 악한 세계를 넘고 가야 할 자신인 것을 알고, 악의 침범을 받올 수 있는 어려운 길에서도 믿음의 길을 가려 가기 위해 온갖 정성을 다드려 야 되겠습니다.
저희들이 가는 길 앞에 수난의 길이 있으면 이것을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직행하면서, 당하고 부딪치면서 가야 할 길임을 미처 몰랐습니다. 어느 누가 수난길을 가고 싶어하겠습니까 마는 당신의 사랑이 그립기 때문에 그 길을 가야 되는 것이요. 당신의 나라를 그리워하기 때문에 죽음길을 가야 되는 것이요, 혹은 쌓아 놓은 주검 무더기를 넘어갈 것을 각오한 걸음이기에 그날이 아직까지 오지 않은 것을 생각하면 할수록 감사의 눈물로써 내일을 아버지 앞에 봉헌하고 내일을 아버지 앞에 제물로 드리겠다고 몸부림치며 나가지 않으면 안 될 불효 막심한 타락의 후손이 저희들인 것을 미처 몰랐사옵니다.
옷깃을 여미고 당신이 소원하시는 그 나라를 추구하면서 죽음길 앞에 생명의 여로를 남기지 않고 아버지 앞에 몽땅 바치겠다는 간곡한 그리스 도의 십자가의 노정과 같은 노정을 한두 번이 아니라, 생애를 바쳐 매일같이 가겠다고 다짐하는 생활을 한다 해도 6천년 동안 수난의 길을 극복해 오신 아버지 앞에 서기에는 너무나 미급하고 너무나 불초한 모습임을 느끼옵니다. 그런 것을 느낄 적마다 저희들은 충성을 다하고 나서도 아버님 앞에 저주를 요구하고, 아버님 앞에 사랑을 다하고 나서도 불효의 요건을 찾아 나서야 할 운명이 타락의 운영인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그와 같은 신앙의 행각 노정에 있어서 의지할 수 있는 그 누가 없는 것을 느낄 적마다 아버님이 얼마나 고독했었고, 그 누구도 바랄 수 없는 상대적 여건을 갖지 못할 적마다 아버님이 얼마나 서러웠다는 것을 알고, 외로우신 아버님 앞에 상대의 실체가 되겠다고 몸부림칠 수 있는 아들이 되고 딸이 되기를 바라는 통일의 무리가 되게 하여 주시옵고, 그런 통일의 신앙을 하는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이 천리를 알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머리 숙인 이 자리가 당신의 슬픔을 복돋우는 자리가 되어서는 안 되겠사옵니다. 당신의 심정에서 흘러나오는 사랑의 파문이 저희의 마음을 휩쓸 수 있고 저희를 점령하고도 남을 수 있는 자리를 위해 모인 무리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당신의 사랑이 그리워 흐느끼는 울음 소리가 끊기는 제단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당신의 사랑이 파묻혀 가지고 당신을 천만번 이상 찬양하고 수난의 길을 극복하겠다고 믐부림치는 당신의 아들딸들을 접할 수 있는 자리, 당신의 아들딸들이 모일 수 있는 거룩한 장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여기 이 마루바닥이 '통일교회의 순수한 신앙길을 가려는 사람은 못다 흘린 눈물과 콧물을 흘려야 되겠다. 몸부림치지 않고서는 갈 수 없다'고 조소한다는 것을 알아 가지고 여기에서 눈물 흘리고 피땀 흘릴 수 있는 무리가 되겠다고 몸부림치는 통일의 무리가 되어야 되겠사옵니다. 이곳은 비록 초라하고, 그 누가 볼 때 비관할 수 있는 장소라 할지라도, 이곳을 통하여 역사상의 그 누가 기억하지 못하는 역사적 사연과 원한의 심정이 수습되고 하늘의 생명의 터전이 결정되었던 역사적인 장소인 것을 알게되옵니다.
천년 사연의 소원 앞에, 당신의 한의 심정 앞에 없어서는 안될 단 하나의 장소라는 것을 생각할 때, 고맙고 감사한 장소라고 찬양할 수 있는 기쁨의 마음이 여기에서부터 연결되고 아버지의 한이 여기서부터 해원성 사된다는 것을 깨닫고, 이 자리에 동참한 놀랍고 거룩한 자신을 발견할수 있는 무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당신이 찾아오시는 발걸음 앞에 기쁨의 미소와 함께 최후의 운명길을 가는 한이 있더라도 당신이 웃음 가운데 저희를 기억하시어 몽땅 당신의 아들딸이라고 하시면서 이 자리를 기억하실 수 있는 그런 인연을 남겨아할 통일교단인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지 ! 여기에 있는 당신의 자녀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이 자리에 서 있는 자식을 당신이 아직까지 사랑하시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외로운 때에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당신의 위로가 이 제단의 배후에 아직 까지 남아 있음을 압니다. 당신이 원하지 않는 세계 앞에 내세울 적마다 염려하는 무리가 많은 것을 생각할 때 당신은 기필코 이 통일제단과 같이 하고 있는 것을 저는 알고 있사옵니다. 여기에 부복한 당신의 자녀들을 기억하여 주시옵고 이들을 고이 기르시옵소서, 통일교단이 이들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통일교단의 앞날을 개척해야 하기 때문에 이들 개인 개인을 통일교회 이상 사랑해야 하는 입장에 계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과연 하나님은 불쌍한 분인 것을 알게 되옵니다.
이 날도 수난의 길, 이 날도 외로운 행각의 노정, 이 날도 처량한 그입장을 홀로 달래면서 가야 할 길, 아직도 남아 있는 그 길을 가기 위해 걸음을 계속하게 될 때, 따라가는 무리들이 당신의 주위를 옹위하여 내일의 천국이 보인다고 어려움을 극복하며 '아버님이여! 참고 넘으시옵소 서' 하고 간곡히 호소하는 무리가 많이 있는 자리에서 넘고 싶은 것이 아버지 사정인 것을 저희는 아옵니다. 저희가 미처 그와 같은 자리에 서지 못하였던 과거지사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절박한 사태 앞에 부족하고 불효불충하였던 사실을 다시 한 번 느끼면서 아버님의 거룩하심과 아버님의 승리의 결과를 그리워할 수 있는 마음으로 일치시켜 나가기 위해 모든 것을 저버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니다.
전국에 널려있는 자녀들을, 아버지,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저를 보아 기억해 주시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옵니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보고 당신이 찾고 계시는 세계를 보고 이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이들이 흘린 눈물과 피땀이 헛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수많은 사람이 다 흘러 가더라도 그 가운데 한 사람, 한 사람이 없으면 저 자신이라도 이 일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을 제가 느끼고 있는 것을 당신이 잘 알고 계시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망할 수 없는 통일교단, 책임하지 않을 수 없는 통일교 단. 끝까지 싸워 견디지 않으면 안 될 통일교단, 이 통일교단의 운명 길을 홀로 이끄시는 당신은 과연 불쌍하신 분이요. 당신의 뜻을 대하는 아들딸도 불쌍한 무리인 것을 아옵니다. 이 불쌍한 무리들의 행각의 종국이 비참해서는 안 될 것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시는 아버지 앞에, 저희의 그 마음만은 망하지 않는다는 여유를 지니고 효와 충의 도리를 다짐하는 모습이 되게 하시옵고, 당신의 긍휼의 마음과 자비의 마음이 에워싸고 감돌수 있는 이 자리가 되고 저희들의 신앙의 환경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니다.
세계에 널려 있는 당신의 자녀들을 기억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 아침에 신앙의 심도가 이들의 뼈살에 사무쳐 얼마나 믿었으며. 얼마나 행하였으며. 얼마나 사랑했으며, 또 미칠듯이 자기 몸을 십자가에 내놓기 위하여 얼마나 몸부림쳤는가를 반성할 수 있는 이 5월의 마지막 안식일이 되게 하시옵소서, 이제 6월 초하룻날이 찾아오고 있사오니 6월을 힘차게 넘어야 되겠사옵니다.
이 나라 이 민족이 가야 할 운명을 아버지께서 지켜 주시옵소서. 북괴의 김일성이가 60세를 중심삼고 남한을 노리고 있는 것을 생각할 때, 그가 60대를 넘지 말아야 된다는 원리원칙을 중심삼고 저희들이 그 이상의 정성을 가하여 이 나라 이 민족의 미래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지고 남을 수있고, 사명을 감당하는 무리가 되게 하여 주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부탁 드리고 원하옵니다.
오늘 하루, 당신이 이 제단과 전국에 널려 있는 통일의 자녀들에게 깊은 심정으로 위로와 권고와 지도와 사랑으로 같이하여 주시옵기를 재삼 부탁 드리옵니다. 모든 말씀 참부모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