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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리의 방향

일시: 1963.08.18 (일) 장소: 한국 전본부교회

​인간은 하루의 생활을 하는 데도 어떤 방향성을 갖고 생활하게 됩니다. 하루의 생활이 그러하거늘 일년도 그러할 것이고, 일년이 그러하거늘 우리의 생애의 목표, 일생이라는 생애의 목표도 그러할 것입니다.

​타락으로 하나님과 상치되는 방향의 길이 생겨나

우리 인생 개체 하나를 중심삼고 볼 때도 그런 방향은 필시 요구됩니다. 그런 개체 개체를 합한 가정이 그러하고, 가정을 합한 국가, 더 나아가서는 세계, 이 세계를 움직여 나오는 하나님까지 전부가 우리 개인과 마찬가지의 인연이 배후에 연관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연고로 내 개체가 그런 방향성을 갖고 나아가는 한 이 우주도 역시 그런 방향성을 갖고 나가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늘땅이 그런 방향성을 갖고 나가게 된다면 하늘땅을 지으신 하나님도 역시 그럴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렇다 할진대는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은 물론이요, 지은 만물이 그렇다 할진대는 거기에 속한 모든 개체와 어떤 실존체라도 역시 그런 운명에 놓여져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게 될 때, 제일 문제 되는 것은…. 오늘날 이 우주의 움직임은 필시 변할래야 변할 수 없고 움직일래야 움직일 수 없는 완전무결한 이념이면 이념에 의해…. 우리의 원리적인 명사를 빌어 말할 때 창조주가 있었다면 그 창조주가 천지를 창조할 때는 창조목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목적은 필시 선과 이상의 본체적인 내용을 거쳐갈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관점에서 보더라도 필시 하나의 영원을 중심삼아 가지고, 무한한 가치를 지녀 가지고 어느누구든지 행복의 요건으로서 충성을 할 수 있는 내용의 곳, 혹은 세계, 혹은 본향, 혹은 우리의 행복지, 이런 곳이 있을 것입니다. 없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가 그러하다면 본래 인간에게 타락이 없었고 선한 입장에 있었다 할진대, 그 선은 인간 것이 아니고 창조주로부터 시작한 것이므로 창조주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창조주가 본래 그런 선하신 목표의 방향을 향하여 나갔다면 타락이 없는 세계에서 지음 받은 피조만물 역시 선한 방향에서 행하고 생활했을 것입니다. 그 가치야말로 영원과 관계를 맺고 나갔을 것이 필연적인 사실입니다. 그런데 인간 세상에 원치 않는 '타락'이란 두 글자가 생김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원하고 천지가 원하고 창조주가 원하는 그 방향성과 일치되지 못한 한 방향이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타락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우로 간다고 하면 그 반대 방향으로 가는 것이요, 하나님이 앞으로 간다고 해도 반대 방향으로 가는 것이요, 하나님이 위로 간다 해도 반대 방향으로 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타락권 내의 모든 여건이 상치되는 입장에서 별다른 방향을 자인하고 나가고 있는 것이 타락한 세계요, 타락한 역사요, 타락한 지금까지의 이 우주사요, 타락한 인생행로의 타락한 생활 방향입니다. 이것이 타락한 우리들의 개인적인 감정에까지 머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필시 오늘날 이 역사가 크나큰 한 포부의 품에 품기어 어떤 절대자인 주인 앞에 금후의 어떤 목표의 세계를 향하여 은연중 이끌려 나간다 할진대는 오늘의 승리를 두고 그것이 어차피 어느 한때에는 방향이 정해져 나갈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것은 직선으로 가야 할 것이 곡선으로, 먼 거리의 곡선을 그리면서 가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이 곡선상에 내포된 수많은 방향의 갈림길과 방향성이 있어 가지고 오늘날 이 세계는 휘돌아 가고 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종대는 사방의 대표자

여러분들이 내 자체를 두고볼 때나 인간 하나를 두고보게 될 때, 인간에게는 반드시 욕망이 있습니다. 소원이 있어요. 어떠한 삼척동자를 붙들고, 그 말을 이해할수 있는 어린 아이를 붙들고 '야, 너 장래에 커서 좋은 사람 될래, 나쁜 사람 될래?' 하고 물어 보게 될 때, '좋은 사람이 되겠다!' 하는 것은 이치요 원칙입니다.

영리한 아이에게 '너, 좋은 사람 될래, 나쁜 사람 될래?' 하고 물어 보면 '그거 왜 물어 봐?' 하고 대번에 반문할 것입니다. 그것은 정한 이치입니다. 물어 볼 필요도 없을이만큼 명백한 대답의 기준이 서 있지 않느냐고, 이렇게까지 느끼는 어린 아이들도 있다는 것을 우리가 추측할 수 있을진대, 이것은 오늘날 장성한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생활을 하게 될 때 좋은 생활을 해야 되느냐' 하면, '아, 그건 물론이지' 하지만, '나쁜 생활을 해야 되느냐' 하면, '그건 나 싫어!' 한다는 것입니다. 좋고 좋고 좋은 것을 찾아갈 것이라는 것은 삼척동자는 물론, 어느 개인을 막론하고 마찬가지입니다. 천한 자, 귀한 자,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전부 다 거기에 도달하는 것은 정한 이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의 마음에서 그러한 것을 보게 될 때, 그런 것을 스스로 느끼고 있겠지만 여러분 자체에 보게 될 때는 자기 마음이 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내 마음의 방향과 딴 방향에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거예요. 그걸 볼 때에 하나님이 공평하고 공정한 입장에서 나로 하여금 직선상으로 연결시켰던, 하나의 뚜렷한 목표에 대응이 되었던 그 목표가 내 가슴 깊이, 마음속에 줄을 달고 있어요.

이 줄을 달고 마음은 끌고 있는데 몸뚱이가 갈림으로써…. 다시 말하면 이 큰 나무에 아무리 가지가 많다 하더라도 나무의 중심에 뻗쳐 있는 종대는 하나가 있는 거예요. 그 종대를 보게 된다면 이 곁가지의 종대 순이나 이 수직으로 올라가는 종대 순이나 모양은 마찬가지입니다. 모양은 마찬가지다 이거예요. 끄트머리에 싹 모아 놓으면 요것도 그것 같고 그것도 요것 같고 똑같다 이겁니다.

그렇지만 마찬가지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종대는 사방의 대표예요. '너는 어디에 있느냐?' 할 때 '나는 중앙에 있기 때문에 동쪽에도 있는 것이요, 남쪽에도 있는 것이요, 북쪽에도 있는 것이요, 서쪽에도 있는 것이요, 상에도 있는 것이요, 하에도 있는 것이다' 하는 것입니다. 종대가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면 네 가지는 어떻게 되느냐? 동서남북의 수많은 가지를 몰아 보면, 이 가지의 순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지만 네 가지는 무슨 가지냐? 나는 동서남북 가지가 아니다, 서쪽 한 방향에 처해 있는 순이나 동쪽 한 방향에 처해 있는 순같이 어느 일방성에 처해 있는 순으로서 전체를 대표할 수 있는 순이 못 된다 이거예요.

우리 인생이 소원하는 목표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우리 종대의 순이 될 수 있는 하나의 목표점은…. 그렇기 때문에 풀도 보면 순은 곧바로 올라갑니다. 여러분, 고구마 순도 가만히 보면, 이놈이 뻗어 가는 것이 땅이 좋아서 땅에다 뻗어 가지만 순은 땅에다 박는 것이 없어요. 고개를 반드시 들고 가거든요. 그것은 천지의 방향이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마음에 있어서 순이 될 수 있는 방향이 어디냐? 이것을 왈, 간단한 말로 역사의 순이라고도 말하는 것입니다. 역사의 순이요, 시대의 순이요, 미래의 순인데 이 순은 힘입니다. 그 힘은 무슨 힘이냐? 천지에 수많은 민족과 수많은 만물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전부 소망의 여건을 토대로 한 자연적인 위치에 서 있고, 자연적인 가치를 갖고 있습니다. 그 말이 무슨 말이냐? 동서남북 어느 방향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위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이런 경지에서 볼 때 그런 방향이 있어야 됩니다. 추측으로 미루어 보게 될 때, 그것은 논고를 필요치 않는 정의라고 우리는 답을 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동서남북에서 자라는 순이 있다 하더라도 그 순이 전부 다 그쪽을 향하는 것이 아닙니다. 끄트러미는 중심과 더불어 자기 위치의 방향을 통하여 수습되어야 되는 거라구요. 방향만은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역사적인 종말은 섭리적인 방향과 일치해야 돼

오늘날 우리 타락한 인간의 방향이 천태만상으로 갈라지는 것은 역사적인 현상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들의 본심만은 천심을 향한 방향성을 갖추고 있는 하나의 기준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기준이 귀하다는 것입니다. 이 기준을 달리하여 잘라 가지고 딴 곳에 심게 되는 날에는 내가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중심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오늘날 우주가 목적하는 최고의 기준 앞에 그 순의 생명력을 줄기차게 받을 수 있는 사회적인 환경, 생활적인 환경, 시간적인 환경, 공간적인 환경을 가졌다면 그걸 잘라다 심어도 어디에 가든지 그 나무 노릇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역사의 순은 하나님이 바라는 소망의 방향과 일치되어 있고, 역사의 소망의 내용과 일치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순에 환경의 진액이 협조할 수 있는 위치와 입장은 천태만상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심어 놓았다 해도 죽어 버린다 이거예요. 이러한 것들이 오늘날 세계적인 현상인 것입니다. 이러한 권내에 있는 것이 오늘날의 사람들입니다.

이것을 볼 때, 하나님은 어떻게 할 것이냐? 하나님은 이런 인간들에게 오늘날 역사의 순과 같은 하나의 목표를 향한 방향의 기준을 반드시 예고시켜 놓습니다. 그렇게 예고되어 있는 자리를 마련하면 하나님이 바라는 이 세상의 소원의 동산은 춘하추동 사방의 방향성을 갖고 있으되, 그 자체에 있어서는 언제나 봄도 될 수 있고 여름도 될 수 있는 내용을 갖춰야 됩니다.

그러면 인간들이 하늘에서 떨어진 역사를 몰아 가지고 시대적인 하나의 방향과 때의 운세와 더불어 일치될 수 있는 세계사를 꾸며 나온다, 일치될 수 있는 섭리사를 찾아 나온다 이거예요. 그러면 그때에 겨울이나 가을이나 여름이나 봄절기를 통해서 나간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것을 찾아가는 데는 직행으로 갈 수 없으면 환경을 통해 수습돼 나온다, 역사는 과거에 우리가 좋아하고 원치 않는 겨울절기와 같은 시기로부터 수습되어 쭉 나온다 이겁니다. 이래서 인생이 바라는 세계적인 사조와 우리의 마음이 고대하던 모든 요건들이 생활적인 터전 위에 자연적인 욕구로서 이것이 주의와 사상으로 나타날 수 있는 때가 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세계사적인 사조로 나타나고 있다는 거예요.

이래서 여기는 민주주의, 자유 평등을 부르짖는 것입니다. 네가 기쁘면 내가 기쁘다 이겁니다. 어느 특정한 자만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봄동산에 있는 종대도 기뻐하는 것이요, 사방에 있는 가지도 기뻐하는 것입니다. 기뻐하는 데는 어떻게 될 것이냐? 종대도 열매맺고 가지도 열매맺는다 이거예요. 공동, 평등의 내용의 가치를 중심삼아 가지고 자유와 행복의 이념과 통할 수 있는, 그 누구와 더불어 가치의 평등성을 지닐 수 있는 그때가 역사의 종말 시기요, 역사적인 모든 관으로 바라보는 필연성으로서 우리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겁니다. 그러한 요건을 세우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게 된다면, 창조주가 있다고 해도 그 창조주를 우리는 모릅니다. 창조주가 보는 관과 창조주가 보는 관의 방향이 틀렸겠느냐? 이 방향은 틀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지능 정도와 문명 정도 여하의 차이에 따라 가지고 역사를 배양해 나온다 이거예요, 배양.

그러면 역사를 배양해서 필할 것이냐? 역사적인 방향을 배양해 나옵니다. 역사적인 방향을 배양해 나오는데 맨 처음에는 조그마한 가지이니까 1년생 2년생, 이것이 좀더 성숙하기 전에는 씨를 못 맺어요. 지금까지의 역사가 아직까지 크나큰 하나의 결실을 맺을 수 있는 목적에 도달하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로 배양 시기의 방향 과정에서 못 뻗어 나온 다 이거예요. 그렇게 된 거라구요.

이것이 지금 때에 와 가지고는 전부 다 수습되어 두 갈래로 부딪쳐 가지고 하나의 세계가 되어야 합니다. 그 하나의 세계가 되어야 한다 하는 관점은 무엇이냐? 우리 개체를 두고 볼 때, 여러분에게는 욕망이 있습니다. 욕망이 있어요.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나만이 좋아해서는 그것은 무가치한 것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너도 좋아하고, 세계도 좋아하고, 하늘땅도 좋아하고, 하나님도 좋아해야 됩니다. 그래야 그게 절대적인 가치가 되는 거예요.

인간세상에서는 절대적인 그 기준을 상대적인 존재 앞에 세울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절대적인 하나님까지도 '야, 그것 좋다!'할 수 있는 기준에 가서 절대적인 기쁨과 행복의 요건을 지녀야 됩니다. 내가 가치가 있다는 것은 천지가 가치가 있다는 것이요, 하나님이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대우주의 방향의 기점이라는 것은, 그 가치라는 것은 나만이 좋아할 것이 아닙니다. 천지가 기뻐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과거의 우리의 선조들도 기뻐해야 하는 것이요, 지금 이 천지 가운데 있는 자들도 다 기뻐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안 돼 있어요. 그러므로 그런 세계를 만들어야 됩니다. 이러한 논리적인 변증으로서 우리가 추리하여 결론을 내린다면 필시 역사적인 종말은 하나의 세계가 되어야 된다 이거예요. 그러한 천국 시민이 되는 동시에 역사적인 방향은 섭리의 방향과 일치해야 됩니다. 그런 결론이 나옵니다.

소원성취와 목적성취는 하나

그러면, 여기에서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오늘날 타락한 우리 인간들이 여기에서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오늘날 우리들은 태어나서 보니 지금 때가 20세기 후반기에 있다 이거예요, 나서 보니. 오늘날 세계의 사조가 이렇게 돼 있고, 과학 문명이 발달해서 자유의 천지를 꿈꿀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이거예요. 그렇지만 몇천 년 전의 사조로 보게 되면 이것은 꿈나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대적인 현상과 시대적인 단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섭리적인 뜻 앞에….

이것을 오늘날 우리의 입장에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면, 여러분들이 그러한 관을 가지고 끌고 나왔던 하나님을 만나서, 혹은 그런 역사적인 전부를 묶을 수 있는 어떤 역사적인 대표자를 만나서 여러분이 배운 일도 없고 알지도 못 해 가지고 어떻게 하느냐 이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막연하게 알 수 있는 하나의 추측만이…. 남북을 향해 있는 지남철이 때와 환경은 변하더라도 그 방향은 변하지 않는 거와 마찬가지로 방향의 한 지침과 같은 본질성이 우리에게 개입되어 있나니, 그것이 여러분의 양심이예요, 양심. 순수한 양심이라구요. 사심을 빼놓은 양심이다 이겁니다.

그것은 천만 년의 거리에 있고 몇억만 년 세월의 거리에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축소해 가지고 불과 2미터 이내나, 혹은 조그마한 몇 센티미터 이내의 나침판이라도 침의 방향과 평형입니다. 이렇게 그은 줄과 이 줄과는 평형입니다. 그렇게 돼 있다구요. 그러한 방향을 취하는 것이 여러분의 양심이다 이거예요.

인심은 천심이라고 하는 거와 마찬가지로 양심에 호소하는 세계, 양심에 호소하던 그 목적을 달성하는 세계, 양심의 해방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자유 천지는 어디에 있을 것이냐? 이것이 섭리적인 견지에서 본 하나님이 지금까지 방향으로 찾아 나온 길이요, 또 섭리의 뜻을 대하는 역사인들과 지금의 우리 시대인들이 찾아가야 될 방향입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진정한 양심을 통하여 우러나오는 내 마음에도 양심의 욕망이 있다 이겁니다. 인간세계의 양심은 반드시 소망이 필요합니다. 거기에는 소망이 있어야 되고 어떤 결과가 있어야 됩니다. 그다음에는 사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횡적 관계예요. 횡적 관계다 이거예요. 하루하루 생활하는 데는 사정이 있어야 되고 그다음에는 심정이 필요합니다. 정적 관계.

그리하여 정적인 역사성을 초월해야 됩니다. 내 시대성을 초월해야 된다구요. 오늘만 이게 필요한 게 아니예요, 오늘만 이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거 왜? 국민 정신이 있어 가지고 국민성을 조성하는 것은 역사성을 초월해야 되고 시대성을 넘어가야 됩니다. 그런 민족으로서 그런 국민성을 가진 국민은 시대를 넘고 미래의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3대 조건을 다 이루면 소망이 있을 것이요, 사정이 있을 것이요, 횡적 관계가 있을 것입니다. 심정은 역사적 관계예요. 역사성을 넘어간다는 말입니다. 부모한테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고 공적인 이치 앞에 순종하는 이러한 모든 것이 하나다 이거예요.

그런 것을 다 존중하게 하기 위해서는 그건 사정 가지고 안 됩니다. 단지 심정세계예요. 심정세계가 있는 것입니다. 심정세계요, 사정세계요, 소원세계입니다. 이렇게 보면 틀림없다구요. 그러면 그 심정 세계에서 살고 싶은 그분이 누구냐? (녹음이 잠시 끊김)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심정이니 무슨 사정이니 우리의 소원이니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이 소위 많이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냐? 천지창조할 때 그러한 것을 창조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목적관을 성취시킬 수 있는 과정적인 인연을 맺기 위해서는 소원이나 소망이라는 것이 없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소원이 있었던 것입니다. 천지창조의 목적이 있는 거예요. 목적이 있는 거예요. 목적이 성취되었다는 것은 소원성취예요. 소원성취와 목적성취는 하나라구요.

사상적인 기반이 넓을수록 세계적인 희생을 동반해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소원성취하는 데는 반드시 사정이 있어야 된다구요. 사정을 통하려니 횡적 관계가 필요하다 이거예요. 나만 가지고 안 되니 여기에 아담 해와가 필요한 것이요, 천사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뭘할 것이냐? 기쁠수 있는 세계를 이루어야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 세계에 있다는 것입니다. 영원히 두고 두고 흘러갈 수 있고 영원히 두고 두고 기뻐할 수 있는 심정의 세계, 내적으로 느낀 감정적인 그 세계를 사모해야 될 생활적인 무대를 넘어 소원성취한 상대적인 목적의 세계에서 생활하게 될 때, 여기에서 3단계를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만족과 행복은 3단계를 넘어서야 돼요. 보라구요. 내 마음이 기뻐하려면 몸을 통해서 상대를 갖추고 난 후에야 기뻐하게 됩니다. 천지이치가 그렇게 되어 있다는 거예요. 천지원칙이 그렇게 되어 있다구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으로 보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창조하게 되는 데에는 심정적인 관이 없는 것이 아니요, 내재적인 사정의 관이 없는 것이 아니요, 내재적인 소원의 관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적인 실체를 거쳐 가지고 사정적인 세계를 다리 놓아 소원적인 세계를 거쳐 목적을 달성한 후에 심정·사정·소원이 일치한 3세계의 감정을 일시에 품에 안을 수 있고 행복과 만족과 기쁨을 노래할 수 있는 세계를 하나님 이 창조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심정세계만 추구할 수 있다면 하나님 혼자도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런데 왜 하필 피조세계를 지었느냐? 바로 이걸 느끼기 위해서입니다. 심정·사정·소원이 일치한 그 기쁨을 일시에 느낄 수 있는 그 세계를 위하여 천지창조를 했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그런 관점에서 보게 된다면,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가 있으면 창조주의 심정이 있고, 심정이 있으면 사정이 있고, 사정이 있다면 소원이 있어야 됩니다.

이렇게 볼 때 타락한 역사적인 면에 있어서는, 타락한 우리 인류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심정이 어떤지 하나님의 사정이 어떤지 하나님의 소원이 어떤지 몰라요, 몰라. 몰랐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심정을 소개하기 위한 것이, 이 사정을 소개하기 위한 것이, 이 소원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 지금까지의 복귀섭리다 이겁니다. 지금까지의 구원섭리다 이거예요. 다시 말하면 재창조역사다 이거예요. 아마 이것은 여러분들이 알고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말을 처음 듣더라도, 여러분이 듣기는 처음 듣지만 그런 세계가 있었다면 벌써 있었다는 걸 알아야 됩니다. 지금까지의 역사적인 이 거리는 먼 거리인데 나의 생애는 불과 백 년 미만입니다. 영원한 역사선 위에 일생이 백 년도 채 못 되는 것을 볼 때, 한 일 밀리미터나 될까요? 일 밀리미터도 못 돼요. 일 밀리미터도 못 돼요.

그런데 요것들이, 고것들이, 요것도 제멋대로 살겠다고 이 우주적인 방향의 의로운 큰 흐름 앞에 딱 꺼꿀잡이가 되어 가지고 우주를 향해 대항하고 있습니다. 하늘을 배반하는 거예요. 암만 콩튀듯 날뛰어도, 무슨 무슨 주의, 무슨 사상, 무슨 이상을 부르짖었댔자 그건 타당하지 않아요. 거꾸러진다는 것입니다.

이 선이 돌아갈 수 있는 커브는 아직까지 시작되지 않았어요. (판서하신 것을 가리키면서 말씀하심) 그렇지만 요 선이 돌아갈 커브는 많아요. 뒤넘이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는 동시성의 역사입니다. 그렇게 범위가 커진다구요. 그러면서 하나로 수습되는 거예요.

작은 놈들은 말이예요, 조그마한 놈들은 양심이 마음을 중심삼고 하루에도 몇 번씩 뒤넘이치느냐 말입니다. 하루에도 또 하고 또 하고 뒤넘이친다 이거예요. 이 운동을 해야 된다는 거예요. '이것이 점점 커 가면 커 갈수록 여기에 감겨 넘어가는 희생자가 많은 것을 알라!' 이것이 지금까지 투쟁사의 배후입니다. 제1차 전쟁과 제2차 전쟁을 중심삼아 가지고 각 민족의 역사 배후에 나타난 투쟁사의 희생의 제물들이예요. 그 주의사상의 발판이 크면 클수록, 그 사회의 사상적인 기반이 넓으면 넓을수록 거기에 동반한 희생이 세계적인 희생을 동반한다 이겁니다. 작으면 작을수록 거기에 비례해 희생됩니다. 개인이 걸었으면 개인적인 희생이 벌어져 넘어갑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역사적인 사조가 이렇게 크나큰 주의로 갈라져서 뒤넘이 칠 수 있는 희생의 자장이라고 할까, 이러한 환경이 몰아치고 있으니 여기에서 뒤넘이 쳐 가지고 내가 돌아가 꼬꾸라지는 날에는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흘러서 새로운 역사적인 제1방향의 기점을 밟고 나서는 사람은 그래도 남아지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역사는….

그러니 철썩같아요. 이 원칙은 변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그것은 여러분 선조가 나기 전부터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담 해와가 타락하기 전부터 있는 거예요. 천지창조 시작 때부터 있었던 것이 지금까지 없어진 적이 없어요. 존재하는 그 실존의 가치관이 시작될 때부터 그 가치관이 아직까지 결정되지 않은 지금 이때가 고비가 되는 기간입니다. 필요로 하는 기간으로 존재한다 말이예요.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그러면 하나님의 소원이 무엇이며 하나님의 사정이 무엇이며 하나님의 심정이 무엇이냐? 이런 문제를 볼 때 여러분도 그렇잖아요? 오늘날 정치적 정책이 뭐예요? 주권자의 소원과 사정과 심정을 통하는 것입니다. 딴 게 아니라구요.

심정에서 반응되면 사정을 통하여 가지고 사정적으로 소원성취하여 심정, 사정, 소원이 일치되는 기쁨과 행복을 갖고 '아, 과연 나는 지난날이 전부가 좋았다. 오, 과연 태초 천지창조는 선한 창조였고, 과연 하나님이 창조하던 과거가 전부 다 좋았다'할 수 있는 결론은 무엇이냐? 이 3요건이 합의점에 부딪쳐 가지고 성취될 그 순간에 전체 세계는 전부 다 경계 기준이 된다구요. 3점 이상을 넘어가야 영원히 돌아가는 거예요.

직선이라는 것은 1점이지만 3점에서부터 곡선이 벌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곡선은 반드시 3점에서부터 벌어집니다. 이 천지창조는 3점의 조화에서부터 벌어져 나간다 이거예요. 거기서부터 집요한, 미묘한 가치가 벌어져 나오는 것입니다.

지금의 세계는 미결세계

그러면, 오늘날 여러분 자신에게 필요한 신앙생활은 무엇이냐? 결론은 간단합니다. 신앙생활은 무엇이냐? 그것은 하나님의 소원과 접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사정과 접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심정과 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수많은 종교들 가운데는 사정 종교파가 더 많아야 돼요. 사정에도 누구의 사정이 더 좋으냐? 수많은 계급이 있거든요. 종파가 많다 이거예요. 또 심정과 소원이 각각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많은 민족들을 대신하여 수많은 종교의 명사를 얻어 가지고 수습하여 이 대역사적인 흐름과 더불어 연결시키기 위하여 하나의 방향성의 운세를 타고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부정할 수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에서 문제가 무엇이냐? 누가 하나님의 심정을 논하고, 누가 하나님의 소원을 논하고, 누가 하나님의 사정을 논할 것이냐? 과거에 그런 사람이 있었느냐? 문제가 크다는 것입니다. '내가 알기에는 누구 누구다'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느냐? 확실한 답변으로 '과연 내 가 그렇습니다' 할 때 아무리 당당한 자기의 기세라 하더라도 그러한 사정 앞에 할 수없이 무릎을 꿇고 '그렇습니다' 할 수 있는 내용을 지녔느냐? 아직까지 미정이예요. 미확정이예요, 미확정. 아직까지 미결이라구요, 미결. 결정이 안 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계 앞에 기독교가 참 고마운 것은 '이 세상 가운데는 심판이 있다' 하고 잘 때려 놓았다는 것입니다. 미결수들이 있으니까 심판 역사가 나오지요. 그걸 볼 때 필시 오늘날 우리들이 말하고 있는 관점의 내용과 방향의 내용이 틀림없다는 것을 여기서 부정할 수 없다 이겁니다. 미결이예요, 미결. 미정이라구요.

그러므로 하나님도 미결세계에서는 주인이 안 되겠다 이거예요. 또 이 땅 위에 크나큰 세계적인 내용을 지니고 왔던 어떤 도의 주인공이 있으면 그들은 반드시 현시의 주인이 되지 않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미래의 주인이 되겠다 이거예요. 그것이 재림사상이예요, 재림사상. 현시의 주인이 안 되겠다 이겁니다.

예수님도 만왕의 왕이라는 명사를 만들었는데 그게 무슨 만왕의 왕이예요, 무슨 만왕의 왕? 그것은 앞으로 끝날에 이 천지 앞에 심판 목적이 달성된 후 승리적인 그 터전에서 재림하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현재는 미결수예요. 미결수 감방에 있다구요. 여러분, 형무소 생활 해봤어요? 거기에는 궁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귀하지 않은 것이 없다구요.

재림이라는 명사가 나타나려면 인류가 고대하는 요건이 필요해

여기서 우선 여자들을 보면, 여자들의 머리카락 있잖아요? 여러분이 방에서 여자들의 머리카락이 떨어지면 재수없다 그러지요. '이게 뭐야, 재수없이…' 그런다구요. 어때요, 재수없다고 그러지요? 어때요, 누군가? 무슨 영인가? 얘! 은영인가? 「예」 그렇지만 형무소 감방에서는 머리카락이 필요하다 이거예요. 여자 머리카락 하나라도 필요하거든요. 형무소 생활을 많이 하게 되면 필요하지 않은 것이 없어요. 감옥살이 많이 한 사람일수록 요만한 헝겊 짜박지가 얼마나 귀하냐? 감옥살이 많이 한 사람의 보자기를 풀어 보면 별것 다 있거든요, 알록달록한 것이. 사람은 많이 갖고 싶은 거라구요. 분량은 작지만 갖고 있는 것은 중요하거든요. 그런 것이라도 갖고 있으면 그걸 자랑해야지요. 가진 것이 있어야 된다구요.

지금까지 역사적인 모든 내용을 해결지을 수 있는 어떤 종교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필시 이런 내용을 결정지을 수 있는 하나의 때가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하나의 때가 있음과 동시에 하나의 때를 지배할 수 있는 하나의 인물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하나의 인물은 세계와 더불어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분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기독교로 보면 재림사상입니다. 그러니까 기독교가 고맙다는 거예요. 내가 그런 견지에서 볼 때 고맙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재림이라는 명사가 필요한 것을 볼 때, 재림이라는 명사가 나타날 때는 필시 인류가 고대하는 전체적인 내용의 요건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있다면 하나님의 사정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의 심정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의 소원을 알 수 있고, 또 역사가 있으면 역사적인 심정과 사정과 소원이 다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시대면 이 시대에도 그런 내용이 있고, 미래면 미래가 필요로 하는 내용이 있을 것입니다.

이 전체의 3시대를 거쳐 나오면서 이 내용의 전체를 대표할 수 있는 어떤 원칙적인 방향의 여건을 지니고, 그 방향을 움직여 나오신 하나의 주인공이 있다면 그 주인공도 역시 이런 내용의 본체가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그 본체의 뜻과 내용과 사명을 상속받아 가지고 이 땅 위에 오는 사람이 있어야 되겠다 이겁니다. 하나님이 친히 나서서 그런 것을 가르쳐 주지 못할 때에는 반드시 이 땅 위의 인간들을 세워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느때에 가르쳐 주느냐? 맨 나중에 가르쳐 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을 세워서 역사의 방향을 잡아 나옵니다. 여기에 수많은 민족이 있으면 그 수많은 민족이 대결적인 방향도 갖고 있되, 그 민족들 가운데서 하나의 방향과 일치될 수 있는 한 개인이 필요하다 이거예요. 개인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알지 못하는 관점에 서 있기 때문에 믿음이라는, 신앙이란 명사를 세워 가지고, 여기에 미묘한 내용을 내포시켜 놓고 '맹목적으로 믿자. 아들딸들아 믿자. 하나님이 심판한다는데, 이러이러하니 하늘을 위해서 충성하는 사람들은 다 좋게 된다더라. 믿자!' 그러는 것은 무모한 신앙이예요. 그걸 그렇게 찾아간다구요. 그건 또 그렇게 해서 믿는 것입니다.

어떤 큰 집의 주인이 있다고 합시다. 그 주인이 자기 종들 앞에 뭘 나눠 주고 싶은 때에는, 자기가 정성들여 모은 재산이나 혹은 어떤 귀한 것을 갖고 있어서 그것을 나눠 줄 때에는 무조건 나눠 주고 싶지 않다 말이예요. 반드시 시험이라도 하고, 못 하겠으면 회유라도 한번 해 가지고 눈짓이라도 한번 해 가지고 어떡하든지 다 시험을 한 뒤 그것을 지나 가지고 자기가 사랑할 수 있는 정도의 모양이라도 갖춰 놓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것을 봐 가지고 주는 것입니다.

세상에 사람들도 그러하거늘 '믿어라!' 하는 신앙의 역사를 세워 가지고 몇천 년? 오늘날 4천 년이면 4천 년, 그 이상이면 이상 신앙의 역사를 세워 놓고 그 역사 가운데 믿으라는 신앙을 가지고 몇천 년 이상을 믿고 나갈 수 있는 사람이 있느냐? 그러지 않으면 하나님을 못 믿는 거예요. 하나님을 못 믿는 거라구요. 하나님 못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본다 이겁니다. 혹은 지금까지 몇천 년 신앙한 신앙자가 있느냐? 이걸 찾아 나온 것입니다.

이제는 우주사적인 신앙관념이 필요해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되어 나온지가 지금까지 4천 년입니다. '그 4천 년 믿음의 조상을 통해 믿으라는 신앙관념을 세웠는데 그 신앙관념을 통하여 전통적인 신앙의 생활을 대표할 수 있는 역사인의 실체가 있느냐?' 이렇게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역사적인 신앙은 어떠한 신앙이냐? 그 시대적인 신앙이 아니예요. 아브라함의 신앙을, 혹은 모세의 신앙을, 혹은 예수의 신앙을 본받아 가지고 이 시대 앞에 책임질 수 있는 그 신앙자, 그는 그 시대 앞에 아브라함을 대신하여 변명할 자요, 모세를 대신하여 변명할 자요, 메시아를 대신하여 그리스도 앞에 변명할 자다 이겁니다. 이렇게 될 때 그는 역사적인 신앙자입니다. 그런 걸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본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하나님은 오늘날 역사적인 신앙자를 찾는 동시에 역사적인 민족, 역사적인 주인, 역사적인 이상세계를 찾는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성경을 통하여 종교적인 이념 가운데에서 찾아진 것은 무엇이냐? 그것은 내용을 설명한 것이 아닙니다. 막연하나마 신앙관념을 세워 나온 것입니다. 그러면 몇천 년 동안 믿어야 되느냐? '6천 년 이상 숱한 비애의 곡절에 부딪치는 한이 있더라도 믿는다는 철석같은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 이럴 수 있는 신앙이어야 됩니다. 그 신앙이 있겠느냐 말이예요.

오늘도 그런 사람들이 필요한 때입니다. 신앙 관점에서 보게 될 때 하나님도 자그마치 그러한 사람을 찾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면 야곱은 가정적인 믿음의 조상입니다. 아브라함은 개인적인 믿음의 조상이요, 야곱은 가정적인 믿음의 조상이예요.

그것은 성경에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성경에 보면 틀림없이 그렇게 돼 있습니다. 야곱은 가정적인 믿음의 조상이예요. 그러므로 가정적인 믿음의 조상 앞에 있는 그 가정들은 절대복종하여 야곱만 믿으면 종대 순과 접할 수 있는 사방의 지엽적인 순이 된다 이거예요.

그러면 모세는 무엇이냐? 민족적인 믿음의 조상입니다. 그러므로 그 민족적인 믿음의 조상을 중심삼아 가지고 그가 주장하고 그가 믿고 있는 신앙관념에 절대복종하면 지엽적인 가지의 순과 사명은 이 민족적인 기준에서 뻗어갈 수 있다 이겁니다. 그래서 점점 커 나온다는 거예요. 개인적인 믿음의 순, 가정적인 믿음의 순, 민족적인 믿음의 순을 기반으로 하여 세계적인 민족 앞에 세계적인 어떤 주권을 중심삼고 섭리를 하시려니 선민사상이 나옵니다.

이 선민사상이 발생하는 데는 이스라엘 선민, 유대 백성입니다. 그것을 잘 알아야 돼요. 유대 백성을 기반으로 하여 개인적인 신앙이 역사적인 신앙관념의 뿌리에 젖어 있고, 가정적인 신앙관념의 뿌리에 젖어 있고, 민족적인 신앙관념의 뿌리에 젖어 있는 것입니다. 그 기반 위에 세계적인 신앙관념을 세우기 위해서 오신 분이 메시아입니다. 메시아예요. 세계적인 신앙관념을 이 천지간에 세우기 위해서 오신 분이 메시아다 이거예요.

그 메시아가 왔다가 가면서 재림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재림이 필요치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 것이냐? 그때에 천지의 대주재 되시는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는 하나님의 직계 아들이요, 독생자요, 하늘의 황태자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무지한 신앙관념이 있어서는 안 된다 이거예요.

왜 다시 오겠다고 했느냐? 하나님의 섭리적인 입장에서 본 심정과 하나님의 섭리적인 입장에서 본 사정과 하나님의 섭리적인 입장에서 본 이념…. 이것은 예수가 30여 년의 생애노정을 걸어갔지만 그 주 이념은 세계 무대를 넘어서 가지고 세계가 수습된 후에 말할 내용입니다. 민족이 수습되지 않은 그 시대에서는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하지 못하고 가슴에 품고 간 예수가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이러니 '다시 온다' 이렇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신앙 기반 위에 이제는 무엇을 요구하느냐? 우주사적인 신앙관념이 필요합니다. 예수가 구주는 구주인데 인간들만을 구제하는 것이 아니예요. 하늘땅을 구원하고 하나님도 구원해야 됩니다. 하나님을 구원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필요하기 때문에 예수를 보내 가지고 죽이면서도 참고 나오지요. 구주는 구주인데 무슨 구주? 인간 천지만물의 구주로서 구원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하나님까지도 기뻐할 수 있는 해방의 구주가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못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나님의 심정과 하나님의 사정과 하나님의 소원을 성취 못 했으니, 심정을 통할 수 없고 사정을 통할 수 없고 소원이 달성되지 못했으니 하나님도 고통 가운데 있을 수 있느냐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노릇 못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구요. 결론적으로 하나님노릇을 못 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이 망할 세상을 가만히 두고 보니 지지고 볶고 다 그랬다 이거예요.

그러므로 재림사상이 완결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적 사정과 하나님적 심정과 하나님적 소원이 이 천지 신앙관과 일치하여서 재출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인생이 갈 방향…. (녹음이 잠시 끊김) 우리 교회도 그런 문제에 들어가 가지고 선생님이 고생을 많이 한 것입니다.

가치를 지닌 종교의 터전 위에 사는 신앙자들을 길러내야

오늘날 어떠한 주의나 사상을 볼 때, 개인주의적인 관념과 자아주의적인 관념을 중심삼고 새 사조에 적응하여 나가는 사람은 이 사조가 영원히 남아 있지 않는 한 망하는 거예요. 망하는 것입니다. 종교인은 어느 역사가 지배하지 못했다는 결론이 성립됩니다.

그 신앙자 자신은 역사를 초월한 기준에서 비약도 그 기준이요, 종말점도 그 기준입니다. 역사적인 변천의 과정에서는 어떤 상대적인 요건을 요구하지 않는 그 기준이 성립되는 거예요. 그래 가지고 최후의 목표를 연결시킬 수 있는 기준에서 우리가 하나의 끝날을 가져야 됩니다. 그래야만 지금까지 믿고 나오는 신앙의 관점이 세워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대표적으로, 현실적으로 나타난 것이 기독교사상입니다. 그래서 선생님도 기독교를 중심삼고 나오는 거예요. 그렇지 않고, 딴 그 무엇이 있으면 내가 기독교 기준을 절대 세우지도 않았을 거예요.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때는 세계적인 신앙시대가 아닙니다. 천주적인 동시에 하나님의 내재적인 모든 사정과 심정과 소원을 완성시켜 지상의 곡절과 그 모든 것이 여기에 부합되지 않는 것을 심판해 버릴 신념을 가진 그런 사람, 그런 신앙인이 이 지상에 남아져야 합니다. 그래야만 끝날이 가까운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나오기 전에는 끝날이 오지 않아요.

오늘날 세계가 이렇게 수습되어 하나의 세계를 향해 넘어가는 이때에 수많은 주의를 다 수습하여야 합니다. 두 주의가 나왔으나 하나의 체제권은 치리되었습니다. 성경에도 말하기를 면양과 산양을 갈라서 두 패로 만든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그냥 그대로 들어맞는 환경이 되어 있는 것을 볼 때, 또 하나의 세계를 지배하고 주관할 수 있는 때가 온 것을 볼 때 끝날이 된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종교라는 명사를 가지고 세계 사조와 더불어 판가리 싸움을 하게 될때, 여기에서 이 세계 사조를 밟고 올라설 수 있는 신앙의 내용을 가지려면, 하나님이 반드시 세워 줄수 있는 내용의 기반을 가지려면, 지금까지 말한 그 3대 요건의 발판을 지니고 나타날 수 있는 새로운 이념적인 신앙과 종교관이 나오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은 동서고금의 어떤 역사전인 기간을 중심삼고도 무시할 수 없고, 전통적인 기준과 심정적인 기준을 중심삼고 변증해도 무시할 수 없고 그 나라의 역사적인 어떤 애국자나 충신에 대해서도 낱낱이 굴복시킬 수 있는 요건을 지녔다고 할 수 있는 가치를 지닌 그런 종교의 터전 위에 사는 신앙자들을 길러내야 합니다. 그러지 않는 한 앞으로의 종교는 세계 앞에 먹혀 버린다 이겁니다.

그러면 종교가 세계 앞에 어떻게 되었느냐? 로마가 기독교를 못 먹었어요. 이조시대에 아무리 기독교인을 학살했지만 못 먹었어요. 도리어 먹혀 나온다구요. 먹히는 것 같고 없어지는 것 같지만 맞고 빼앗아 나오는 것입니다. 비참한 전쟁과 아무리 지독한 학살이 있더라도 히틀러에 의한 6백만 이상의 학살 같은 것은 지엽적인 희생입니다.

외적으로는 민족적으로 희생하는 데 요것은 개인적인 희생이요, 가정적인 희생입니다. 그것밖에 안 됐다는 거예요. 그만한 희생은 큰일을 섭리해 나오는데 하나님의 뜻 앞에 있어서 용허하지 않을 수 없기에 그런 희생은 가는 길에서 이미 필연적인 요건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희생을 무릅쓰고 지금까지 나온 것입니다.

최후에는 어떻게 될 것이냐? 최후에는 종교가 어떤 주권에 먹힐 수 없어요. 앞으로는 하나의 세계를 주장하는 대통령에게까지도 하늘의 어떠한 종교 명사를 가진 사람들이 축복을 해주고 머리에 기름과 향수를 뿌려 가지고 대관식을 해줄 수 있는 시대가 와야 됩니다. 그러려면 그 종교는 점점 드러나야 됩니다.

외적 창조가 먼저요 내적 창조는 나중

이러한 이념의 발판을 거쳐 역사성을 대표하고 시대성을 대표하고 미래를 대표할 수 있는, 모든 인간이 구현해야 할 요건의 내용을 지닐 수 있는, 아까 말한 3대의 심정, 사정, 소원이 같이할 수 있는 그런 자리를 찾아 나가야 됩니다.

그렇게 되려면 그런 개인으로부터 가정, 민족, 국가, 세계를 거쳐 나가는 신앙의 대표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전통적인 신앙의 내용을 전부 다 평면적인 인연의 가치적인 내용으로 두고 볼 때, '야, 너는 아브라함 주고도 바꿀 수 없어. 모세를 주고도 바꿀 수 없어. 우주하고도 바꿀 수 없다. 그런 심정적인 자격자, 심정적인 신앙의 자세를 갖췄다' 라고 할 수 있는 종교적인 신앙의 대표자가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자그마치 세계적인 하나의 정상의 섭리의 뜻 앞에 있으면서 종교를 책임지고 지도한다는 사람은 사상주의자 앞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예요. 사상주의자들이 그들 앞에 머리 숙여야 됩니다. 하나님주의 앞에 누가 머리 들겠느냐 이거예요. 인간의 주의로서 이 세계 주의 앞에 머리 들 수 있겠느냐 이거예요.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 주의를 주장하는 그들이 인간의 어떤 사상과 주의 앞에 머리숙여 가지고 되겠느냐 이겁니다. 안 된다구요.

종교의 내용을 중심삼아 가지고 충효사상 이상의 체계적이요, 논리적이요, 실증적인 내용을 갖출 수 있는 신앙이론이 기본이 되어서 세계관적인 사상이념을 오늘날 이 역사 앞에 제시하지 못하면 하나님은 죽었어요, 죽었다구요. 하나님이 죽었으니 종교가 무슨 종교예요? 종교인들은 다 죽어야 돼요.

하나님이 죽지 않았다면 필시 그런 때가 올 것이다 이거예요. 그것은 역사를 봐서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것이 틀림없다 이거예요. 그것을 무엇을 봐서 알 수 있느냐? 역사를 봐서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보라구요, 우리가 천지창조의 이치를 가만 보게 될 때, 핵심을 먼저 만들어 놓고 상대를 만든 것이 아니예요. 핵심을 만들어 놓기 전에 상대적인 요건을 만들어 놓는 것입니다.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 흙을 먼저 만들어 놓고…. 외적인 것을 기반으로 하여 내적인 것을 세워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게 천지창조의 이치라는 거라구요. 현재 것보다 더 큰 것, 무가치한 데서 더 가치 있는 것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된다구요. 천지창조의 이치가 그렇다 이거예요. 오늘날 인간창조를 보게 될 때에도, 인간을 짓게 될 때에는 몸뚱이를 먼저 만들어 놓고 영을 만들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아까 '섭리적인 방향' 이라고 하는 제목을 붙였는데, 원래 6천 년 역사의 섭리의 방향을 두고 보게 될 때, 하나님께서 외적인 섭리와 내적인 섭리를 결정지어 가지고 나온 하나의 사건을 종교라고 했습니다.

아담가정을 두고 볼 때, 제물을 드리기 위한 준비는 외적 창조형입니다. 그리고 제물을 드리는 그 순간에는 내적 기준을 완결시켜 가지고 하나의 그 가정 가정에 있어서 완결시킬 승리적인 결정을 지어야 됩니다. 가인과 아벨은 내적 창조의 수습을 하였습니다. 가인과 아벨을 통해 협조해 가지고 하나님이 제물이라는 것을 개재시켜 놓고 내적인 가치를 결정해 나온 것입니다. 전부 다 내적 창조입니다.

노아의 가정을 두고 볼 때도 역시 120년 동안 외적인 환경에 살았고 40일 심판으로써 내적인 결정을 했습니다. 그리고 40일 심판한 그 과정에서 40일이 외적이라면 노아의 가정에서 한 역사의 내적 기준을 완결해 넘어가야 된다 이거예요.

이것은 아브라함도 역시 마찬가지다 이겁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지고 축복의 땅, 앞으로 소망의 하란세계로 내몰려 가지고 혹은 섭리의 뜻을 받들 수 있는 애급까지 갔다 와 가지고 그걸 한 후에 내적인 결정을 한 것입니다, 전부. 아브라함도 그랬고 야곱도 그랬다는 것입니다. 야곱이 21년 동안 내적 기준을 중심삼아 가지고 건너올 때에 얍복강에서 내적 결정을 했다는 거예요.

모세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세도 바로 궁중에서 40년, 그다음에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동안 외적 결정을 해 가지고 그다음에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어 나가는 내적 결정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도 외적인 33년 공생애노정 위에 내적 결정의 여건을 완결하려다가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부 다 외적 창조가 먼저요, 내적 창조는 나중입니다. 내적인 문제가 결정되기 전에 외적인 모든 문제를 사방성으로 갖추어 놓고 사방성의 종대 순과 같은 기준을 결정지음으로 말미암아 하나의 완전한 가치적인 기준을 그 환경에서 이루어 놓았습니다. 그 개인적, 가정적, 민족적, 세계적 혹은 천주적인 범위와 환경은 다를망정 섭리는 그렇게 해 나온 것이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끝날에는 하나님을 모시기 위한 대이동이 벌어져

보라구요. 그런 견지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보게 될 때…. 아담가정에서 아담가정을 두고 볼 때는 하나님을 대할 수 있느냐는 거예요. 대이동이 벌어지는 거라구요. 하나님을 모시게 될 때는 반드시 이동해서 합하는 거예요. 가인과 아벨도 마음대로 돌아다니다가 화합하는 거예요. 노아도 역시, 120년 동안 그 가족들이 마음대로 돌아다니다가도 방주에서는 합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마찬가지라는 거예요, 섭리의 뜻 앞에. 모세도 마찬가지란 말입니다.

합하게 할 수 있는 외적인 것과 주체, 주체와 상대될 수 있는 요인을 거쳐야 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과정에서는 대이동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동이 벌어지는 거라구요. 야곱가정을 보면 야곱이 집에서부터 하나님의 복귀의 가정으로서 하란 땅을 버리고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게 될 때는 이동이 벌어졌습니다. 또, 이스라엘 민족이 애급 땅에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때도 대이동이 벌어졌던 거라구요.

기독교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 위에 악한 로마의 세계를 중심삼아 가지고 새 에덴 땅을 복귀하기 위해서 온 기독교 신앙자들의 대이동을 시킨 것입니다. 그런데 이동을 시켜도 자기들이 안 따라가니까 핍박을 주는 거예요, 핍박을 주는 거라구요. 죽이고 사자밥이 되게 하고….

이건 왜 이렇게 하느냐? 개인적인 섭리의 사명을 두고 볼 때, 개인적으로 믿게 될 때는 그 환경적인 믿음의 조상 한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그때는 한 사람으로도 됩니다. 그러나 한 사람을 연결시켜서 전체성, 온 국제성을 갖출 수 있는 시대적 섭리를 하려니까 아브라함 한 사람만 붙들고 있어서는 안 되겠다 말입니다.

이럼으로 말미암아 점점점점 더 복잡한 사방의 핍박을 가해서 섭리역사를 책임져 나오는 우리의 선조들은 이것을 책임해 감당하지 않으면 안 되게끔 되었다 이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아브라함 때보다도 야곱 때가 더했고, 야곱 때보다도 모세때에 더했고, 모세 때에보다도 예수 때가 더했고, 예수 때보다도 재림 때에 더 대이동이 벌어진다 이겁니다.

민족적인 세계, 민족 관념에서 한 유대나라에 예수님이 유대교를 중심삼고 전파하려고 했지만, 전파하고 나서는 세계적인 종교이지 유대 교의 종교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세계적인 발판을 넓히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학살시켜 죽게 되니까 이스라엘에서 전부 다 도망가 가지고 빨리빨리 선포해서 세계적인 세례 요한이 필요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놓자 이거예요. 역사를 통해서 세계적인 아브라함이 필요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놓고, 세계적인 야곱이 필요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놓고, 세계적인 모세와 세계적인 세례 요한적인 사명을 역사를 통해서 하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한쪽을 치기 전에는 섭리의 뜻이 이루어질 수 없어

이런 관점에서 볼 때에 하나의 섭리의 때를 맞이하게 될 때는, 한 세계에 있어서 대이동을 하게 될 때는 반드시 한 세계를 치든가, 그렇지 않으면 이쪽의 축복받은 사람을 치든가 둘 중의 하나를 쳐야 된다 이거예요.

그 말이 무슨 말이냐? 야곱이 하란에 가 가지고 21년 동안 섭리의 뜻 앞에 수고를 하고 나오게 될 때 야곱을 축복하기 위해서는 라반을 쳐야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유대 민족이 400년 동안 고역당한 고역기간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치기 위해서는 애급의 세력을 강하게 해줘야 된다는 것입니다. 애급문명이 그때 발전한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를 흥하게 하려면 하나를 반드시 쳐야 되고, 하나를 치게 되면 하나는 흥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탄편을 치게 되면 하늘편에게 복을 줘야 되고, 하늘편을 치게 될 때는 사탄편에게 복을 줘야만 우세하게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새 출발을 할 적마다 어떻게 됐느냐? 하늘편이 우세했느냐, 사탄편이 우세했느냐? 새 출발을 할 적마다 사탄편이 우세했다 이거예요. 그걸 알아야 된다구요, 언제나.

야곱 때도 집에서 나오게 될 때 라반이 우세했습니다. 모세 때도 바로가 우세했고, 예수님 시대에도 역시 로마가 우세했습니다. 모든 세계적인 나라의 이념을 중심삼은 국가 체제가 끝날에 전세계에 우세할 수 있는 환경을 기반으로 하여 세제적인 종교의 종말시대가 오는 것입니다. 재림적인 사상적 기반을 통해 그런 종말시대가 오면 그때를 중심삼아 가지고 대혼란과 대투쟁적인 환경에서 대이동적인 현상이 벌어져야 된다 이겁니다. 이것이 섭리적인 견지로 본 역사성입니다.

그러면 앞으로 한국에 특별한 섭리가 있다 할진대, 그 섭리의 뜻을 받들 수 있는 종교인들은 어떻게 돼야 할 것이냐? 세계적인 사상을 가져야 되겠다 이거예요. '이 세상은 우리의 조국 땅이다'는 사상을 심어 놓아야 됩니다. 그리고 이 사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이 사상을 치기 전에 먼저 하늘의 백성이 맞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게 천륜입니다. 심판 때가 가깝게 되면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딸들을 치는 거라구요.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는 맞고 빼앗아 나오는 종교입니다.

종말에 있어서 세계성을 띤 이념을 품고 나오는 종교가 있다 할 때는 그 종교를 중심삼아 가지고 국가적인 반박으로부터 세계의 길을 열어 제낀다고 할 수 있는 환경에서 맞아라 이거예요. 맞으면서 낙망하지 않고 거기에서 소망을 노래하고, 거기에서 우리의 복지를 노래하고, 거기에서 우리의 가나안 땅을 추구하여 있는 성심성의를 다하여 죽음의 길도 마다 하지 않고, 천리길도 마다 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그래 가지고 가고 또 가고, 가고 또 가고 죽음의 고비가 있더라도 또 가야 되겠다고 해야 됩니다. 죽을 때에 자기의 후손을 바라보고 '나는 죽을망정 너는 들어가서 이뤄라. 네가 못 이루면 네 후손을 통해 이뤄라.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3대 하나님의 명사를 거쳐왔거늘 이 3대의 뜻을 연결하여, 3대 만에 뜻을 이룬 것을 우리가 전통으로 삼아 가지고 우리도 3대를 거쳐서 이런 뜻을 완결해야 되겠다'라고 해야 됩니다. 3대 수난 과정의 노정이 우리 앞에 있더라도 가야 되겠다는 신앙사상을 가진 종파와 신앙자들이 없는 한, 앞으로 세계적인 대이동이 벌어지고, 목표를 향해 세계를 중심삼아 가지고 섭리의 뜻이 성취되어야 할 때에 남아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대에서 여러분에게 '매를 맞자, 맞자, 맞자' 하는 거예요. 이리하여 '우리가 3년을 계획하여 그 3년을 뜻 앞에 세워 놓고 가자!' 하는 것입니다. 가는 데는 어디를 찾아가느냐? 바로의 궁중을 찾아가자 이겁니다. '바로의 궁중을 찾아가려면 어떻게 찾아가야 될 것이냐? 바로의 백성의 문전에 가 가지고 그들이 말 못 하게끔, 우리 말 앞에 순응할 수 있게끔 하자!' 이래 놓고 가자 이겁니다.

그래서 3년의 방향을 놓고 우리가 그 놀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외적인 데서부터 상부로 올라가는 모든 것은 이런 기준을 중심삼아 가지고…. 3년이 끝나면 그때 가 가지고 우리가 하나의 기준을 중심삼고 당당코 하나님의 뜻과 약속된 기준 앞에 틀림없이 이럴 때가 올 것을 믿고 가면 그 3년 전과 지금은 천양지판일 거예요.

하나님이 한쪽을 치기 전에는 섭리의 뜻이 이루어질 수 없으므로 우리는 먼저 맞자, 먼저 맞자 이거예요 아브라함도, 야곱도 흉년이 들어서 애급을 찾아간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냐? 심정적인 흉년이 들었을 때에 그 흉년든 민족을 구하기 위하여 대환난 가운데, 기근이 막심한 그런 심정세계 위에 구세주로 왔던 것입니다.

오늘날 이 세계적인 사조 앞에, 좌우로 여기에서 한 무대가 되어 그들이 총칼을 들고 나선 시련장으로서 고통을 받은 이 한반도는 여기에서 쓰러질 것이 아닙니다. 이 민족이 세계를 대표해서 먼저 맞았으므로 세계 역사 앞에서 섭리적으로 볼 때, 반드시 어떤 가까운 거리에 있지않나 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횡적인 내적 기준의 완결을 놓고 싸워 나온 3년 기간

그렇기 때문에 종교의 이념을 중심삼아 가지고 이 민족 가운데서 맞자 이거예요. 맞자 이겁니다. 그런데 종교를 책임져 가지고 지도하는 사람도 그를 따르는 사람을 또 때려라 이거예요. 예수님도 예수님의 제자들도 다 그렇다는 거예요. 유대교 교단에 고통을 줘 민족을 구하고 세계를 구하기 위해서는 내몰아야 할 사명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모세도 추위에 시달리고 기아에 쓰러져 가는 이스라엘 민족 60만 대중에게 더욱 채찍을 들고 몰아대야 할 사명이 있었는데, 몰아대지 못하다가 망했다는 거예요.

그것이 당장에는 비애의 길 같으나 지나고 나면 그 터전 위에 제2세는 반드시 하나님 앞에 한 승리의 터전을 마련하게끔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연고로 이런 천리의 운세 앞에 이런 천리의 작전 기간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여러분 앞에 선생님은 무자비하게 내몰아야 할 사명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면 내모는 데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이냐?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어서의 개인적인 섭리시대도 그랬고, 가정적인 섭리시대도 그랬고, 종족적·민족적·세계적인 섭리사가 그러했거늘, 오늘 전체 섭리의 뜻 앞에 내 개체를 세워 가지고 개인적인 신앙의 대표자, 가정적인 신앙의 대표자, 민족적인 신앙의 대표자 혹은 세계적인 신앙의 대표자의 길을 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자신과 신념과 책임을 질 수 있는 나라고 자부하지 않는 한 이 크나큰 역사성을 중심삼은 섭리의 뜻을 받드는 책임자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고통을 느끼는 것은 여러분 자체의 고통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적 고통이요, 혹은 노아, 혹은 모세, 혹은 메시아적인 고통이라는 거예요. 그런 인생을 사는 것이 무엇이냐? '하나님의 심정을 놓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하나님의 심정을 놓고 하나님의 원수를 갚겠다고 맹세하고 결의할 수 있고, 내 생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정을 위임해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들어 보자' 목적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입장에 있으니 그런 입장에 놓지 않고는 사정 일치의 자리를 찾을 수 없어요. (녹음이 잠시 꿉김) 그렇게 해 가지고 나갈 수 있는 횡적인 내적 기준을 완결지어야 할 이 사명적 책임을 놓고 생명을 걸고 달성하기 위해서 싸워 나온 것이 3년 기간이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1960년대는 3가정을 중심삼아 가지고 36가정과 72가정을 세운 것입니다. 36가정은 뭐냐? 종적인 역사적 대표자입니다. 그러면 72가정은 무엇이냐? 가인 아벨형입니다. 복귀역사는, 부모를 찾아 나가는 데 있어서 가인 아벨이 실수했기 때문에, 역사적인 모든 전체를 대표하는 36가정을 대표할 수 있는 가인 아벨을 중심삼은 수를 완결하자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횡적 기준 앞에 있어서나 종적 기준을 대신하여 횡적 기대를 만들어 가지고, 그 가인 아벨 기대를 만들어 가지고 그 가인 아벨 기대 위에 12사도를 중심삼은 12수를 중심삼아 가지고 횡적 기대를 넓혀 세계성을 기반으로 하여 벌어지는 것이 3년 기간의 우리의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이거 설명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려요.

오늘날 우리들이 고통을 받았기 때문에 이 민족도 고통을 받는 것이 아니냐 말이예요. 세계는 이 3년 기간에 대수라장이 벌어졌어요. 이제 금년이 지나면 수습단계로 넘어갑니다. 선생님이 말을 한 것이, 3년 지나가면….

공산당이 그때 다 그랬지만 별수 있나요? 하나님이 있는 세상에서는 별 수 없어요. 별수 없다 이거예요. 한 곳이 자리를 잡고 나오면 한 곳은 무너져야 된다 이거예요. 그거 두고보라구요. 내적인 면은 외적인 면의 상대이기 때문에, 외적인 것이 자리잡을 때는 내적인 것이, 내적인 것이 자리잡을 때는 외적인 것이 그 상대의 가치를 책임하지 못하면 무너지는 거예요. 무너지는 거라구요.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 말한 대로 다 돼 간단 말이예요. 민주주의도 한 블록 전부 다 되어 가고 공산주의도 한 블록 되는 것입니다. 종교도 그렇게 되어 가지고 전부 다 벌어지는 것입니다. 기독교를 위주로 해봐도 그런 형태로 벌어져 가지고 세계는 반드시 그렇게 벌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3년 기간은 여러분들이 모르지만 천적 부모 앞에…. 이제는 선생님이 일대에서 해야 할 일을 다했습니다. 이제는 죽어도 좋다구요. 죽어도 이젠 좋아요. 이제부터는 모험을 많이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선생님이 참 좋았다구요. 3년이 3일 기간이예요. 야곱에 대해 3일 기간이요, 모세에 대해 3일 기간이요, 예수의 3일 기간입니다. 3일 기간을 연장하여 역사적인 천주사적 기준을 중심삼아 가지고 3년 기간을 3수를 통해서 감쪽같이 우리는 이 민족이 모르는 가운데 자라 가지고 넘어섰다는 것입니다.

아벨에게는 가인을 이끌어 가야 하는 책임이 있어

이제는 우리에게 누가 뭐라고 못 합니다. 하나님이 보고 있어요. 하나님이 이젠 가만 안 두는 거예요. 선생님이 이제는 안심해요. 이제는 어디 가다가 죽어도 걱정 안 해요. 선생님이 모험을 참 좋아합니다.

이러한 섭리의 역사를 해 나가는데, 여러분 생각해 봐요. 하나님이 섭리하신 방향과 역사의 방향이 지금까지 틀어졌었는데 이것을 누가 조정해 줄 것이냐? 누가 조치를 해줄 것이냐? 이것을 조정해야 할 사람은 종교인들이예요, 종교인들. 사상가도 아닙니다. 주의를 주장하는 어떠한 망상가들도 아닙니다. 이것을 조정해 주고 결정해 줄 것은 종교예요, 종교.

그렇기 때문에 로마 교황이 말이지요, 이번에 저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가운데서 중간 역할을 많이 했는데 그게 일리가 있다는 거예요. 해야 된다 말입니다. 앞으로 우리 신도들은 그것을 해야 됩니다. 오늘날의 우리들은 종파적인 관념에 사로잡힌 신앙자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계적인 신앙자들이예요. 온 세계의 누구한테 묻더라도 도의 세계에서 답변할 것이 없어요. 답변을 못 할 거라구요. 수십 년 동안 도를 닦은 사람이라도 만나 보면 그래요. 우리 주먹 안에 다 들어옵니다.

또, 우리는 역사의 방향을 알아요. 그건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래서 오늘날 주의나 사상을 필요로 할 수 있는 세계적인 지도자, 우주적인 지도자가 있다면 그런 지도자를 필요로 할 때 그들이 어떤 사람들이냐? 하나님이 아들딸이 되어야 합니다. 이래야만 그렇게 된다 이거예요. 그러면 그러한 자리는 어떤 자리냐 이거예요. 언제나 이러한 목표를 향해서 나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길을 가는 데 있어서 이 현실이 문제된다면 어떻게 하겠어요? 여러분들은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과거에는 언제나 내가 책임을 못 하고 행동을 못 했지만 내 생각에는 나는 이러이러한 사람입니다. 아버지, 나는 이런 때에 책임 못 한 사람입니다' 하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못해도 어느때까지는 이것을 잊어서는 안 돼요. 잊어서는 안 된다구요. 무슨 공석에 나가더라도 '나는 이러한 사람입니다' 하고 자기를 소개해야 돼요. 그렇게 돼 있다 이겁니다.

여기에 있어서 우리 교회를 보면 가인과 아벨로 쭉 갈라져 있습니다. 그런데 아벨은 아벨로서 가인을 살려주기 위한 책임이 있고, 가인을 이끌어 나가기 위한 책임이 있습니다. 둘이 합해 가지고 하나의 부모를 모시기 위한 책임을 다해야 됩니다. 그렇게 나가야 되는 거라구요.

여러분이 현실 문제에 있어서 어떻게 해야 될 것이냐? 나하고 똑같아야 됩니다. 지금까지 선생님이 그랬습니다. 선생님은 영계의 상속자가 되기 위해서 개인적인 핍박으로부터 쭉 하늘땅의 핍박을 받아 온 거예요. 이래가지고 반대 간판이 붙은 사람이라는 거예요. 팔자에도 그렇게 타고난 모양이지요? 영계에서도 그랬고. 영계에 들어가서 수많은 담판 싸움을 해 가지고 이긴 것입니다.

상대적 가치를 지녔으면 반드시 주체적 내용과 일치해야

이제 우리 이념이 세계에 한번 문제 거리가 될 거예요. 공산주의와는 오래 안 가서 대결한다 말이예요. 틀림없이 그렇게 되게 돼 있어요. 지금까지 선생님 이 과거에는 어느 개인을 대해 가지고 말할 수 있는 때도 없었어요. 얼마나 발전했는지 모르겠다 이겁니다. 그때에는 뭐 신앙생활한다고 얘기를 못 했다 말이예요.

그러므로 하나님만이 알아주는 그런 입장이었어요. 개인적인 고충의 시대로부터 가정적인 고충의 시대를 거쳐오면서 얼마나 핍박을 당했느냐 말이예요. 원래 여기에 온 사람들이 어디 편이 되어서 왔어요? 전부 다 그런 유의한 종자들이예요. 이래 가지고 그 시대를 쭉 지나오다 보니까 이제 40고개입니다.

선생님이 그것을 두고 볼 때, 하나님을 두고 볼 때도 그렇습니다. 과거도 후회와 탄식이었고 현실도 후회와 탄식이다 이거예요. 그렇지만 탄식 해 나온 예수 앞에 과거와 현실은 그랬을망정 미래에는…. 미래를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 누구냐? 그렇기 때문에 더 큰 사람이 필요합니다. 세계가 크게 벌어져 나가기 때문에 더 클 수 있는 사람, 염려할 사람이 필요하다 이거예요

지금까지 선생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까지,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런 거예요. 과거에는 '몇대에는 이런 상황의 40고개를 넘고, 서 있는 고개를 넘어가 가지고 하나님에게 다 프로를 맞춰 놓고 그다음에는 민족을 기반으로 해서 싸워야 되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다음에는 단위가 종족에 대한 단위가 아니에요. 한국이면 한국의 단위지요. 단위가 달라진다 말이예요. 이렇게 해 가지고 이제부터 현실적인 근심과 걱정을 중심삼고 역사해 나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그런 관념이 없잖아요. 여러분들이 일을 해도 과거에는 우리 교회를 위해서 일한다고 했지요? '아, 나는 교회를 위해서, 교회의 무슨 일을 위해 봉사한다' 했는데 그게 아니라구요. 이제는 그게 아니다 이거예요. 이 나라를 위하여 봉사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삼천리반도를 찾아오기 위하여 얼마나 수고했던고? 삼천만 민족이 이렇게 비애의 노정을 거치면서 오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 민족이 오늘날 이렇게 도탄 중에 서 있습니다' 라고 하면서 나라를 사랑해야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거와 마찬가지로 나라를 사랑하고, 개인을 사랑하는 거와 마찬가지로 나라를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을 사랑하는 거와 마찬가지로 나라를 사랑하고, 우리의 식구를 사랑하는 거와 같이 이 나라 이 백성을 사랑하느냐 이거예요. 이렇게 나오면 한 단계 넘어간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설명 안 해주려고 합니다. 이제부터는….

죽든 살든 우리가 우리 교회를 자유의 간판 아래서, 거친 환경에서 말씀을 외쳤으니 얼마나 우리를 죽이려고 야단했어요? 이제 그때가 되어 온다 말이예요. 이 불쌍한 민족을 이끌고 세계무대 앞에 이 민족을 자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운동이 이제부터 남아진 운동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도 거기에 대해서 지금 준비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것을 준비하기 위해서 이 패들을 먼저 고생시켜야 되겠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가정을 끌어내라 이거예요, 가정을. 가정을 끌어내라 이겁니다. 축복해 줬는데도 나하고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되어서는 절대 안 된다는 거예요. 상대적인 가치를 지녔으면 반드시 주체적인 내용과 일치해야 됩니다. 그 결과는 난 몰라요. 결과는 설명 안 해준다 말이예요.

'내 가정은 역사상의 어떠한 가정이 이동한 것보다 더 이동해야 되겠다' 이거예요. 지금까지 살던 애급 땅, 지금까지 살던 지긋지긋하고 한 많은 그 땅에서 자유의 천지를 향해, 가나안 7족을 멸하고 하나님에게서 축복받은 새로운 이스라엘의 천지를 내 땅과 같이 취하기 위해 행군 명령이 떨어지게 될 때 가는 것이 대이동이다 이겁니다.

이 나라 이 민족을 중심삼고 본을 보여야 할 우리들

이 이동 운동을 세계적인 운동으로 제시해야 됩니다. '아무리 일등 미국이라도 미국은 나는 싫다. 아무리 초라한 오막살이 집이 있는 한국이라도 한국 가겠다'고 해야 됩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집이 있었어요? 판자집도 없었어요. 집이 있었느냐 말이예요. 원수들이 불태우고 남은 거기에 들어가서, 불타고 남은 그런 환경을 수습해서 살아야 된단 말이예요. 성전 있었어요?

바알신을 모시던 신자들을 수습해야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우리에게는 집이 없다는 말이예요, 집이 없어요. 우리 입장과 딱 마찬가지에요. 우리가 크나큰 섭리와 이념을 중심삼고 세계적인 가나안 복지를 향해 깃발을 들고 나선 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7족을 대항하여 나선 것과 딱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남루한 거지와 마찬가지입니다. 거지와 마찬가지예요. 먹을 것이 없어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었으니 얼마나 처량하냐 이거예요.

요단강을 건너가려면 자기의 노력을 투입해야 됩니다. 세계적인 가나안 7족을 향하여 외치며 민족적인 정기를 중심삼아 가지고 '이렇게 사는 것은 국가를 살리기 위한 것이다. 또, 내가 살아 나가는 데는 나라가 살아 나가는 것이요, 이 세계와 하나님의 섭리가 살아 나가는 것이다. 역사적인 우리의 선조들이 부활되어 나가는 것이다' 이런 신념을 갖고 나가야 돼요.

'내가 죽어서는 안 된다. 죽지 않고 살아 나가야 된다. 그래야 역사를 살리고 이 시대를 살리고 이 국가를 살리고 이 민족을 살린다'라는 신념 밑에서 세계는 우리의 손아귀에서 돌아간다는 자신을 갖고, 철석같은 기반을 갖고 나가야 됩니다. 그래야 여러분들이 이 삼천리 반도를 주관하여 세계를 움직이는 주인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지금까지 말한 거와 같이 앞으로 세계적 가나안 운동을 제시할 수 있는 때에 있어서는 대민족이동이 있어야 됩니다. 과거에 민족적인 대이동이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교파와 종파를 초월하고 민족 전통을 초월해 대이동 운동이 벌어져 한 곳으로 수습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의 종대 앞에 모든 순은 하나의 운세의 방향과 더불어 목표를 같이할 수 있는 기준에 서야 됩니다. 그렇게 될 때, 이 세계는 새로운 역사의 방향을 수습하여 하나의 목표를 세우고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 깨쳐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관점에서 넘어가야 할, 이러한 전환 기점에서 이것을 올바로 돌려야 할 우리의 책임이 얼마나 중요하냐 이거예요. 먹으나 자나깨나 편안해 가지고는 안 되겠다는 것을 알아야 돼요. 선생님도 그래요. 편안해 가지고는 안 됩니다. 바다에 나가서 고생을 하든가 무슨 고생을 하든가 해야 마음이…. 그것으로 때워 나가는 거예요.

섭리의 뜻이 그래요, 섭리의 뜻이. 그러니만큼 우리들이 이제부터는 이 나라 이 민족을 중심삼아 가지고 본을 보여야 되겠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그걸 수습해 가지고 그런 방향을 갖추지 않으면 이 민족을 살릴 수 없다고 내가 자신하고 있는 거예요. 민족이 그런 방향을 가지고 안 되고, 세계가 그런 방향을 가지고는 안 되겠다'라고 해야 됩니다.

이렇게 섭리적인 방향이 비로소 우리의 생활을 통하여 통일성으로 나타나 가지고 개인적인 역사적인 방향을 취해서 나가게 될 때, 역사는 우리와 더불어 인연됩니다. 그리고 역사적인 기반이 우리가 되면 그 역사는 우리로 말미암은 역사로서 상속받아 이 시대적인 가치를 영원한 시대적 가치의 기반으로 연결시키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소원하던 소망의 목표와 더불어 일치의 관점을 만들어 놓았다는, 자신을 중심삼아 가지고 결정지었다는 신념을 가진 자격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아들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섭리가 추구하는 목적

여러분은 지금까지 마음대로 살았어요. 마음대로 살았다 말입니다. 먹고 싶으면 먹고, 자고 싶으면 자고, 가고 싶으면 가고, 오고 싶으면 오고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그러면서 방향성을 따라 살았느냐? 방향성도 없었습니다. 언제든지 마음대로 치리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구요. 몇 마디로 무엇이든 속여 가지고, 뭐 소근소근해서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고였습니다.

오늘날 여러분들을 천지를 주고도 못 움직여야 합니다. 천지를 주고도 못 움직여야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천하를 주고도 못 움직여야 해요. 일편단심으로 누가? 천지와 하늘을 대신하고, 천정을 위주한 천적인 사정과 소원을 중심삼은 그 관념, 우리의 가치적인 내용을 중심삼고 볼 때 그걸 장악하지 못할 때는 자기가 어떻게 되느냐? 내 방향을 잘 잡아야 돼요. 태풍이 불어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 자리에서 살다 죽게 돼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인 전환시기에 처한 시기를 잘 따라가야 됩니다. 이제부터 선생님이 재차 여러분들에게 강조하는 것은 단결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민족적인 단결을 목표로 하여 세계적인 기반을 움직여 나갈 수 있는 운동을 전개하는 거예요. 이 민족이 안 될 때는 외국 사람들을 동원해서 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민족이 어디 끌려 오나 안 오나 보자 이겁니다. 어디 움직이는 녀석들이 안 움직이나 두고 보자 이거예요. 이래 가지고 전부 다 세계성을 띠고 움직여 나가면 그것이 한 고비 절반쯤 넘어가서 완전히 자리잡는 거라구요. 그다음부터는 완전히 자리잡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야만 여러분이 만민을 수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찰나에 있어서는 '우리가 뜻을 알고 선봉에 서서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개인적으로 보여 주고, 가정적으로 보여 주고, 민족적으로 보여 주고, 국가적으로 보여 주고, 종교적으로 보여 줘야 합니다. 그래 가지고 그와 같은 사상관념과 이념적인 통일성을 갖춰 가지고 하나의 방향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비로소 자동적인 환경에서 움이 터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그때가 멀지 않다고 보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이제 한 4년 동안 여러분들을 몰아다 앞에 세워 놓고 안 가면 채찍으로 갈기고 발길로 들이차서라도 가야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 60만 대중을 광야에서 가만히 두지 않고, 자기가 쓰러지면서라도 모가지를 자꾸자꾸 잘라서 한 10만쯤 잘라 버리더라도 가나안 땅을 향해 갔다면 어떻게 되었겠어요? 그럼 50만은 죽지 않았다구요.

그렇다고 선생님이 그런 일을 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이상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도 어디든 언제든지 심판할 거라구요. 이렇게 여러분들을 무한히 사랑하고 여러분들을 무한히 아끼느니만큼, 그 가치를 역사와 시대를 넘어서 가지고 영원한 가치로서 남겨 주려니 그런 내용의 기반 위에, 그런 실적의 조건이라도 만들어야 할 책임감을 느끼기 때문에 이렇게 강한 말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 입장에 선 것을 여러분들이 이해해야 됩니다. 알겠지요? 「예」

그럼으로 말미암아 여러분들은 지금까지 역사적인 섭리의 방향을 두고 찾아 나온 하나님 앞에 심정의 자리에 비로소 동참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정이 통할 수 있는 생활적인 환경의 발판 위에 소원의 일치점을 품고 나왔다는 기준이 내 생애의 종말시대에 찾아져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 사람에게 비로소 과거를 대표한 나요, 현실을 대표한 나요, 미래를 대표한 나라고 과거를 들어 칭찬하고, 현재를 들어 칭찬하고, 미래를 들어 칭찬하게 됩니다. 그럴 때에 비로소 나는 하나님의 섭리의 노정과 섭리의 방향 앞에 내 자신이 과거에 있었던 자와 마찬가지요, 내 자신이 현실에 있는 자와 마찬가지요, 내 자신이 미래에 있을 수 있는 자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자라고 해 가지고 비로소 방향이 일치될 수 있는 기준 앞에 축복을 해주어서 천주의 모든 것을 상속하겠다는 것이 섭리의 방향의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무슨 말인지? 「예」 알겠어요? 「예」 알겠지요? 「예」

그러면 그 자리까지 나가는 것이 편안해요, 어때요? 여러분이 편안해요, 어때요? 우리들은 고생해야 되겠어요. 아무래도 죽을 거 뭐, 여러분이 한 번 죽지, 두 번 죽나요? 예수도 고생 하나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겠어요? 알겠어요? 「예」

때를 중심삼은 승리자가 되어야

오늘 여기에 계시는 아주머니들, 가정에 돌아가 가지고 남편이 생활능력이 없다고 하여 불평하지 말라는 거예요. 지금 우리 일본 식구들은 다 먹을 것이 없어도, 쌀이 떨어졌어도 걱정 안 하거든요. 내가 그걸 볼 때 '대단하구나' 합니다. 나도 그래요, 나도 그렇다 말이예요. 쌀이 떨어져도 걱정 안 한다 말입니다. 여러분이나 나나 마찬가지예요. 종자가 다 그렇게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도 그렇게 나오는 거예요. 전부 다 굶어 죽는 법이 없어요. 보라구요, 멧돼지가 산에서 굶어 죽어요? 물고기가 바다에서 굶어 죽어요? 나는 개미 새끼들이 암만 흉년들어도 굶어 죽었다는 소리를 못 들었습니다. 사람들이 굶어 죽지요. 왜 굶어 죽어요? 못나서 굶어 죽어요.

선생님은 멧돼지 사냥도 다녀 보고 바다에 고기를 잡으러도 다녀 봤습니다. 선생님은 그런 거라구요. 먹을 것이 없으면 공기총이라도 메고, 그렇지 않으면 올가미를 만들어 가지고 산에 가자 이거예요. 왜 굶어 죽어요, 왜 굶어 죽느냐구요? 먹을 것이 수두룩한데. 얼마나 많아요? 바다에 가면 얼마나 고기가 많아요? 그렇잖아요? 절대 죽는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또 일주일씩 대개 다 금식했지요? 「예」 다 일주일 이상 금식했어요. 우리들은 30일이나 40일이라도 금식한다구요. 일본에 있는 식구들은 형제끼리 무난히 40일 금식을 돌파해 가지고 아주 뭐 세계적인 센세이션을 일으켜 가지고 문제가 된 적이 있다구요. 앞으로 이 민족이 굶어 죽는 사태가 벌어지게 되면 우리 신도들이 전부 모여 가지고 수천 명이 앉아서 한 20일, 한 30일, 한 40일씩 단식투쟁을 하는 거예요. 그래 가지고 한 사람도 죽지 않게 되어 우리들은 굶어 죽지 않는다는 선전을 하게 되면 백 퍼센트 효과가 나지요. (웃음)

그런데 죽기는 왜 죽어요? 안 죽어요. 먹을 것이 얼마나 많다구요. 먹을 것이 얼마나 많아요? 공기도 많고 물도 많다구요. 사람의 몸뚱이는 3분의 2가 물인데요 뭐 그거 뭐 풀도…. 흙에서 한과정을 거쳐 가지고 쌀이 된 거예요. 풀도 쌀 대신 먹을 수 있는 것입니다. 절대 걱정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성경에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고 걱정하라고 했어요? 하라고 했어요? 그 성경이 이루어져야지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먹는 것, 자는 것과는 관계 없어요. 선생님은 그래요. 먹는 것보다도 더 급하다구요. 밥이야 먹겠으면 먹고, 밥 한 그릇 먹으라고 한 것도 귀찮다 이 말이예요. 요전에도 집에서 무슨 반찬해 주려는데 나 그거 귀찮아요. 꽁보리밥도 좋다는 것입니다. (녹음이 끊김) *

<말씀 요지> 우주는 완전무결한 이념, 즉 선의 내용을 갖고 있습니다. 선은 창조주의 것입니다. 천지심(天地心)을 대할 역사심(歷史心)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의 세계는 몇천년 전과 비교해 보면 꿈같은 세계입니다. 영계는 심정이 표현화된 실체적 세계입니다. 마음이 기쁘려면 몸이 마음의 상대로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은 심정, 사정, 소원을 일치시키기 위해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러한 하나님의 심정, 사정, 소원을 모르고 타락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인간을 세워서 역사의 방향을 잡아 나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역사적인 신앙의 민족을 찾아오셨습니다.

세계적인 신앙을 중심한 주의를 세우기 위하여 오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주의의 입장에서 본 신앙이란 세계의 차원을 넘어서 할 수 있는 말입니다. 민족의 차원에서는 말할 수 없는 명사인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는 다시 와야 합니다. 천지신앙관이란 하나님의 심정, 사정, 소원과 일치된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심정과 사정과 소원을 아는 사람이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정과 사정과 소원을 중심한 이념과 신앙관이 나오지 않으면 안 됩니다. 종교를 책임진 사람은 어떠한 사상 앞에도 좌우될 수 없는 것입니다.

창조는 핵심을 먼저 만들어 놓고 합니다. 외적인 것은 내적인 것에 맞추어 들어가야 합니다.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이 합해져야 됩니다.

제물도 외적 제물과 내적 제물로 분류됩니다. 가인은 외적이고 아벨은 내적입니다. 노아는 외적인 40일 심판을 거친 후에 내적인 위치가 결정되었습니다. 야곱도 외적인 21년노정을 거친 후에 내적인 위치가 결정되었습니다. 섭리는 작은 것에서부터 큰 것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그러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애급에서 내몰 때에 하나님은 애급을 강퍅하게 하셨습니다. 새로운 섭리를 하실 때마다 하나님은 쳐서 복귀시키십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섭리를 위하여 미리 맞는 것이 상책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을 몰아내지 못했기에 사망한 것입니다. 그동안의 3년 기간은 모세가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으면서 바로 왕 앞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키는 기준을 세우는 것과 같은 기간입니다.

72가정은 가인 아벨형입니다. 횡적인 것입니다.

한 곳이 자리잡으면 한 곳은 무너집니다. 그러므로 공산세계는 무너져 나갈 것입니다.

과거의 선조들도 책임을 못했지만 여러분 또한 책임을 못한 사람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사는 것은 바로 민족, 국가, 역사가 사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