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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길을 보호하소서

일시: 1973.06.03 (일) 장소: 미국 뉴욕주 벨베디아수련소

​우리가 좋을 수 있는 것, 좋은 사람을 만나든가 좋은 일을 당하든가 하는 자리가 좋다고 하지만 그것이 좋을 수만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비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랑의 힘을 가지고 보호해 주는 자가 제일의 보호자

​세상으로 보게 되면, 어떤 사람이 공부를 해 가지고 무슨 시험, 국가고시 같은 시험을 치기 위해 노력했다 합시다. 시험을 쳐 가지고 합격 발표하는 그 순간이 좋은 순간만은 아니다 이거예요. 자기의 운명이 어떻게 좌우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세계에 없는 자기의 이상적인 상대를 만나 가지고 결혼하는 그 최고의 희망의 자리에서도 좋은 것만을 보장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면, 만사에 있어서 우리는 자신을 가질 수 있는 인간이 못 되는 것을 발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나는 요렇게 가야할 텐데, 요렇게 가기를 원하는데 이렇게 가야 할 일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자, 그걸 볼 때, 내가 사는 내 일생은 내 것이요, 내가 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하지만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길인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나'를 두고 자신을 가질 수 있느냐 없느냐? 이 문제를 두고 볼 때, 나 자신에게도 자신을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결국은 자신 없는 나 자신이 자신 없는 길을 가고 있지 않느냐? 이렇게 생각할 때 이것이 어떻게 되는 거냐? 여러분, 이러한 자리에서 매일매일 좋기를 바라고 희망을 더듬으면서 가는 것이 인생길입니다.

그러면 주위의 만사에 있어 좋을 수 있는 일이 많으냐, 도리어 불행할 수 있는 일이 많으냐 하는 걸 볼 때, 좋을 수 있는, 진정 좋을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은 많지 않다 이거예요.

자, 여기에서 안식할 수 있는 자리는 어디냐 하는 문제를 우리는 생각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나 혼자만 있어 가지고 안심이 되느냐 이거예요. 안심할 수 있는 자리는 나 혼자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나를 보호해 주고, 나를 옹호하는 그 무엇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안심시켜 줄 수 있는 그게 뭐냐 이거예요. 여러분의 부모들이 있으면 그 부모는 외적인 면에서는 안심시켜 줄 수 있는 울타리가 될는지 모르지만 생사문제와 같은 심각한 문제를 두고는 안심시켜 줄 수 있는 입장을 취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떤 친구도 그것은 책임질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떤 스승도 책임질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떤 국가의 힘 가지고도 책임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계 자체가, 세계가 동원해 가지고 그걸 책임지어 줄 수 있느냐 하면 책임질 수 없다 이거예요.

그러면 누가 책임을 져 주겠느냐? 책임져 줄 수 있는 무엇을 찾지 못한다면 여러분이 있는 자리는 행복한 자리, 안식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 불행한 자리가 아니냐 하는 결론을 확정지을 수 있는 거라구요. 그래서 오늘의 말씀 제목과 같이 '운명의 길을 지키시옵소서'라고 해야 할 필요성이 우리에게 있는 게 아니냐.

그러면 이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 문제라구요. 그러한 존재라는 것은 역사를 초월할 수 있는 존재여야 될 것입니다. 현재와 미래를 초월해야 됩니다. 결국은 시간성을 초월할 수 있는 분이 아니면 안 됩니다. 인간은 아무리 잘났다 하더라도 역사 가운데의 사람이요, 역사를 초월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냐.

그렇기 때문에 근본문제에 들어가게 되면…. 그러면 이러한 모든 운명을 가려 가지고 책임을 지고 운명의 길을 조정할 수 있는 그러한 분이 있다면 그분이 누구냐? 만일 인간세계에 그런 분이 없다 하게 되면 우리는 그런 분을 가상적으로라도 만들어 가지고 위안의 한 분으로 정해 놓고 위안의 기준으로라도 잡고 가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것이 인간이 아니냐.

만일 그런 분이 사실 있다면 얼마나 좋겠느냐 이거예요. 그분이 이미 있다면,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그분을 한번 만나고, 그분을 한번 찾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간절할 것이냐. 우리 주위 환경이 어려운 것을 느끼면 느낄수록, 모든 것이 불안한 환경이라는 것이 확실히 뼈살에 사무치면 사무칠수록 거기에 반대적인 입장에서 강요되는 문제는 그분을 만나고, 그분을 찾고 싶은 것이 아닐 것이냐.

여러분들이 지금까지 살아 왔지만 그러한 자리에서 신의 존재성을 확정짓기 위한 노력을 해봤느냐 하는 문제가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확실히 있고 그분과 나와의 관계가 어떤 관계인가를 확정짓기 전에는 내가 확실한 관념이라는 것을 가질 수 없는 것이 아니냐.

자 그러면, 그런 분이 있다면 우리는 그분이 나와 어떤 관계를 가진 자리에서 나를 대해 보호해 주기를 바라야 할 것이냐 하는 문제를 생각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 있어서도 제일의 보호자가 있다면 힘을 가지고 보호해 주는 것보다도, 물론 힘도 있어야 되겠지만, 사랑의 힘을 가지고 보호해 주는 그러한 보호자가 아닐 것이냐. 그 이상의 보호자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

이상적인 사랑을 중심삼고 기뻐하고 안식할 수 있는 자리는 어디냐

그리고 보호받는 데는 일시가 아니라, 그런 사랑을 중심삼고 영원히 보호받기를 바랄 것이 아니냐. 그러면, 사랑을 중심삼고 영원히 보호할 수 있는 조건들이 무엇 무엇이 되겠느냐? 그것은 여러분이 세상에서 제일 갖고 싶은 것,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와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여러분의 부모라구요, 부모.

나에게 제일 필요한 것은 부모가 아니냐. 그 다음에는 형제가 아니냐. 그 다음에는 부부가 아니냐. 그 다음에는 자녀가 아니냐 이거예요. 그 외의 것은 아무리 좋다 하더라도 다 왔다갔다한다 이거예요. 거기서 병이 나고, 거기서 틀어지면 세상의 외적인 전부가 거기에 좌우된다 이거예요. 아무리 세상이 좋은 날이요, 천지가 다 추구하는 날이라 하더라도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간다면 그날은 행복한 날이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돼요. 천하가 한꺼번에 다 좋다고 웃더라도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비참한 자리에 들어가게 될 때는 불행한 거라구요. 세상이 다 웃더라도, 천하가 한꺼번에 다 웃더라도…. 그렇지 않으냐구요.

그런 관점에서 볼 때, 내 이상적인 사랑을 중심삼고 기뻐할 수 있고 안식할 수 있는 자리가 최고의 행복의 자리가 아니냐. 그러면 운명의 길을 가는 일생의 노정에 있어서 찾아가는 길, 그 목적지가 어디겠느냐? 그런 안식의 자리가 아닐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부모를 중심삼아 가지고는 영원하지 못하다구요. 내가 영원히 믿을 수 없다구요. 형제를 중심삼고도 그렇고, 부부지간도 그렇고, 부자간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변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러기에 우리는 영원한, 그리고 이상적인 문제를 추구하지 않을 수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에게는 그런 영원한 부모가 필요하고, 영원한 부부가 필요하고, 영원한 자녀가 필요하고, 영원한 형제가 필요한데 그럴 수 있는 곳이 어디냐? 그러한 분을 만나 가지고 그러한 분으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안식의 곳이 어디냐? 세상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곳을 만나기 위해서는 영원한 그 무엇을 하나 만나야 된다구요. 영원한 형제를 하나 만나든가, 영원한 남자를 만나든가, 혹은 영원한 자녀를 만나든가, 영원한 부모를 만나든가 해야 합니다. 어느 하나라도 기점을 삼지 않고는 그것을 찾을 수 없는 것이 아니냐.

그런 사람을 한 사람이라도 만나면 그를 통해서 부부관계도 찾을 수 있는 것이요, 형제관계도 찾을 수 있는 것이요, 부자관계도 찾을 수 있는 거라구요. 그것이 인생이 가야 할 운명의 목적지라고 여기서 우리는 가정하지 않을 수 없고, 그 가정을 통해 가지고 그렇다고 결정을 지을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냐 이거예요. 그것을 바라 가지고 지금까지 인생은 역사를 남겨 왔다는 거라구요.

절대자가 계시다면 그분과 어떤 관계를 맺고 싶으냐

여러분이 '이상적이다. 이상적이다' 하는 말을 하게 될 때는 잠깐 있는 그것 가지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구요. 또 사랑을 빼 놓고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구요. 혼자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구요. 그렇기 때문에 이상적이라는 가운데는 보호의 환경이 있어야 됩니다. 그건 자동적인 말입니다. 보호할 수 있는 환경도 있어야 됩니다. 사랑도 있어야 됩니다. 그 다음에는 평화스러운 자리에 들어가서 안식할 수 있는 자리에 있어서 변하지 않아야 됩니다. 이러한 내용을 갖추지 않으면 이상적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 자체에 있어서 그럴 수 있느냐 이거예요. 여러분도 아무리 친한 사람이라도 그럴 수 있느냐 이거예요.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그건 변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절대자가 필요합니다. 절대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절대자라면 모든 것이 가능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절대자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인간이 찾아 나온 것은…. 그러한 이상경을 바라면서 더듬어 나오는 종교를 두고 볼 때, 종교는 무얼 하는 것이냐? 참된 형제의 인연을 찾아보자, 또 참된 부자의 인연을 찾아보자, 참된 상대적인 인연을 찾아보자는 이것밖에 없다구요. 그것 외에는 없다구요.

자,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그런 절대자가 있으면, 절대자 앞에 있어서 상대될 수 있는 사람을 우리가 대해 가지고 믿고 따라가고 싶으냐, 절대자와 직접적인 상관을 갖고 싶으냐? 여러분들은 어떤 거예요? 상대자? 상대자한테 주체가 필요하다구요. 가는 길은 종의 길이라도 결국은 주체를 바라기 때문에 신을 안 바라는 종교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는 전부 다 신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알긴 알았다는 거예요.

알긴 알았는데 그분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 제일 좋은 관계를 맺고 싶은 것이 인간의 욕망이 아니냐 이거예요. 그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로 부모로 모시고 싶다, 그 하나님을 내 주체로 모시고 싶다, 그 하나님을 내 친구로 갖고 싶다 이거예요. 그 하나님을 내 형님과 내 동생과 같이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느냐 이거예요.

이것은 절대적인 사랑이면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거예요. 왜? 사랑이 절대적이기 때문에 아버지가 아들의 자리에 가도 불평하지 않는다 이거예요. 남편이 아내의 자리에 가도 불평하지 않는다 이거예요. 그게 바꿔지더라도 불평하지 않고 좋아할 수 있는 것이 뭐냐? 그것은 아버지만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랑,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을 가지고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사랑을 최고의 이상적인 요인으로 삼고 있는 것이 아니냐. 사랑 앞에는 아무리 권력 있는 사람도 순응하게 마련입니다. 사랑 앞에는 아무리 지식이 있더라도 그 지식도 전부 굴복합니다. 안 그래요? 그걸 반대하고, 그걸 배척하고, 그걸 밟고 올라서겠다는 것은 없다 이거예요. 그 사랑을 지배하겠다는 사람 있어요? 사랑의 지배를 받겠다고 하지.

하나님의 사랑은 부모, 부부, 자녀의 사랑을 대표한 것

자,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도 사랑의 지배를 받고, 사람도 사랑의 지배를 받고, 모든 것이 사랑의 지배를 받을 수 있다는 이러한 내용을 알게될 때 위대한 사랑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무엇이냐? 하나님은 무슨 가치를 가졌느냐 할 때,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가치적인 관을 중심삼고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말은 적절한 말입니다. 여러분, 절대적이라는 말이 있지만, 그 절대적이라는 말을 존속 시킬 수 있는 내적인 동기 되는 것이 뭐냐 할 때, 그것은 아무리 봐도 사랑 외에는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있어 가지고야 절대적이라는 말도 지지시킬 수 있습니다. 완전한 사랑, 완전한 사랑을 중심삼고는 절대라는 그 자체도 거기에 따르기를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자, 그렇게 생각할 때, 사랑만 가지면 어디 가더라도 하나님과도 친구와 같이 지낼 수 있고, 아버지와 같이 지낼 수 있고,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부모 중의 부모입니다. 그렇습니다. 왜? 세상 모든 부모를 주관하고도 남을 수 있는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는 부부가 있다면 부부 중의 부부 이상의 사랑을 가진 하나님이 아니냐. 자녀 중의 자녀 이상의 사랑을 갖고 있는 분이 아니냐.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것이냐? 인간을 중심삼고 좋을 수 있는 자리에 관계 맺게 되려니 하나님의 사랑은 부모의 사랑이요, 부부의 사랑이요, 자녀의 사랑을 대표한 것입니다. 물론 거기에는 형제의 사랑도 들어가는 것이요, 이걸 확대시키면 국가라든가 세계의 사랑도 들어가는 것입니다. 요것이 요인이기 때문에 우리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은 부모의 사랑이요, 부부의 사랑이요, 자녀의 사랑이라는 말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최고의 멋진 말이 아니냐.

사랑의 힘은 모든 것을 지배할 수 있기에 운명길도 좌우할 수 있다

만일 이러한 사랑을 확실히 알았다 할진대는, 이 사랑의 힘 가지고는 모든 것을 지배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의 운명길도 좌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냐. 여러분들, 이렇게 꼬집으면 아픈 거라구요. 그러나 이 아픈 것의 몇십 배 이익이 오는 줄 알게 되면 이것이 뚝 떨어져도 능히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일이 있다면, 내가 안 하겠다 해도 전부 다 '해주소!' 이러게 돼 있다구요. 결국은 불행한 길도 자진해서 가겠다는 그말이라구요.

자, 아까 말한 거와 같이 믿을 수 없고 불안한 상황에 있어서 자기의 운명길을 갈 수 없는 이런 입장에 서 가지고 그러한 목적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을 중심삼고 가게 된다면 운명길을 바로잡을 수 있겠느냐, 없겠느냐 이거예요.

내가 가는 것이 틀림없이 그 주체를 위해 가고, 그 주체를 찾아가는 것임을 확신하고 나가게 되면 가는 길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그 어려운 길을 통해서 기쁨과 행복을 빨리 찾을 수 있고 빨리 만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알고 가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아무리 불행하더라도 불행이 그 사람을 지배할 수 있겠느냐.

자, 이걸 생각할 때 사랑의 길 아니고는 그 비참한 운명길을 극복해 갈 수 있는 길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모든 생활을 두고 비교해 가지고 결론지어도 타당한 결론이라는 것을 이제 알았다구요.

그렇다면 내가 만일 사랑의 길을 찾아가다가, 그러한 사랑의 주체를 중심삼고 찾아가는 길에서 불행히 죽었다고 생각합시다. 그렇게 되었다면 그것이 죽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을 때 '나는 사랑의 길을 찾아가다가 죽습니다'라고 생각할 거라구요. '내가 이 사랑으로 인해 죽기 때문에 이 사랑은 내 원수로다' 이렇게 생각 안 한다구요. 죽으면서도 죽음을 잊고라도 사랑을 품고 죽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품에서 죽는다고 생각하게 될 때는 그것은 불행한 죽음이 아닙니다.

그러면 죽음으로 말미암아 사랑이 깨진 것이냐? 아닙니다. 사랑의 주체인 하나님이 '너는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랑을 위해서 죽었구나' 하며 그 가치를 보다 나은 가치로 인정할 것이 아니냐 이거예요.

여러분이 만약에 하나님이라면, 자기를 위해서, 자기를 사랑하기 위해서, 서로 사랑해야 할 길을 위해서 죽은 사람을 만났을 때 어떨 것 같아요? 부부끼리라도, 남편을 위해서 죽은 아내를 남편이 만났다면 어떨 것 같아요? 혹 형제지간에 형이 동생을 위하고, 동생이 형을 위해서 죽었다 할 때, 그 죽었던 형과 동생이 만났다면 어떨 것 같아요? 살아서 만나 사랑하고 좋아하는 그것보다 덜 좋아하겠느냐, 더 좋아 하겠느냐? 죽지 않고 만나 가지고 사랑하던 것과 서로가 주기 위해 죽어 가지고 만났을 때의 사랑의 강도가 같을 수 있겠어요? 그것은 죽지 않고 만나서 사랑하는 차원을 초월할 수 있는 사랑이 아니겠느냐?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은 누구나가 찾아가야 할 길

그걸 볼 때, 성경을 보면 말이예요. 이율상반되는 내용이 많아요. '나를 믿어라. 나 사랑하라. 나를 위해서 죽어라.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 그게 대관절 뭐예요? 그게 뭐냐? 이런 사랑을 중심삼고 보다 차원 높은 사랑의 인연을 추구하는 데 있어서 필연적인 결론의 말이 아니냐 하는 것을 우리는 여기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선생님을 위해서, 선생님 때문에 죽었는데, 선생님이 그 사실을 알고 이 다음에 죽어 가지고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반갑겠어요?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사랑의 길을 찾아가는 길에 있어서 죽음이 문제가 되겠느냐? 죽음까지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죽음의 길을 찾아 간다고 해서 그것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차원 높은, 보다 가깝고 보다 영원할 수 있는, 보다 하나될 수 있는 사랑의 세계로 돌입하는 하나의 관문이 된다고 생각하게 될 때, 그 죽음이 무서운 것이냐? 그게 불행한 거예요? 「아닙니다」(웃으심) 그럼 한번 죽어 볼래요? 「예」 정말 그래요? 「예!」 그런 경지를 찾아가는 사람은 죽음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한 자리를 발견하고, 그러한 길을 확정지어 가는 사람은 불행하지 않습니다. 그럼 어떤 사람이예요? 불행하지 않으니까 어때요? 불행한 사람이예요? 「아닙니다」 행복한 사람이요? 「예」 행복한 사람이면 그 행복한 사람에게 동정 받아야 되겠어요, 동정해야 되겠어요? 그러니까 그 사람을 동정해 줘야 되는 건 틀림없는 거라구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러한 경지를 파악하고, 그러한 세계의 사랑의 기점에 서 가지고 자기가 죽는 자리에 있었지만 만민을 위해 축복할 수 있는 아량이 있었던 것이 아니냐. 여러분들도 그런 것을 알았으면 그럴 수 있겠지요? 이론적으로 우리는 가능하다는 것을 확정지을 수 있다구요. 가능하다! 가능하냐, 안 하냐 이거예요? 「가능합니다」 위대한 것을 우리는 알았다구요.

자, 통일교회 문선생님 지금까지 고생해 왔다구요. 불쌍한 사람이예요, 행복한 사람이예요? 「행복한 분입니다」 무엇이 행복한 사람이예요? 무엇이 행복한 사람이예요? 그 불행한 것을 극복할 수 있는 사랑을 모체로 하고 있기 때문에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걸 행복하다고 그러는 거예요. 그것이 없으면 비참한 것입니다.

가면 갈수록 동정받으려고 하는 것보다도 동정하려는 마음의 생활을 하게 되니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이 동정하지 않더라도 나는 동정해야 된다 하는 그 자리를 취하는 데 있어서 불평 불만이 있을 수 없다 이거예요.

그렇게 해야 참된 사랑을 찾겠으니, 참된 사랑의 맛을 알겠으니…. 동정해 주는 그 사랑의 길을 막는 것하고 그 사랑의 깊은 곳으로 못 가게 하는 것은 어디 가나 그 자신이 원치 않는 거라구요. 요전에 뭐 통일교회를 무슨 고생하는 교회라고 노래를 했었지요? 고통받는 교회라…. 그게 얼마나 비참해요. 그 말 들으면 비참한 거라구요.

그렇지만 사랑을 목표로 하는 데는 그것 이상 없습니다. 사랑을 목표로….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랑의 길을 찾아가는 우리에게는 불행도 행복으로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구요. 저거 사람이 많은데 문을 닫으면 돼요? 닫지 말라는데 왜 닫아요? 저 사람이? 자기 혼자만 생각하는 거예요? 춥더라도 참는 거예요. 다 사랑, 전체를 사랑하기 위해선 그것도 극복해야 된다구요.

자, 그럼 아까 말한 거와 같이, 오늘 제목이 뭐냐 하면 '운명의 길을 보호하소서'인데, 운명의 길을 보호할 수 있는 것이 뭐냐? 하나님이냐? 하나님도 사랑을 인연맺을 수 있는 그런 무엇이 없다면 보호하지 않는다구요. 하나님이 돈이 필요한가요?(웃음) 하나님이 권력이 필요한가요? 지식이 필요해요? 하나님이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단 한 가지 필요한 것은 사랑이 필요합니다, 사랑이. 그러니까 이 사랑의 길을 가지고 하나님을 조정할 수 있다는 특권이 우리에게 있다 이거예요. 그 특권을 가지고서 조정하면 운명의 길도 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냐? 왜? 하나님이 움직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진짜 사랑하려고 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내버려 두겠느냐 이거예요.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불행한 자리로 간다면 불행한 자리로써 끝날 것이냐? 그것이 그 불행한 자리를 좋게 만들 수 있는 조건으로서는 끝날는지 모르지만 불행한 것으로는 끝나지 않는다 이거예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길을 찾아가는 사람은 불행하다고 해도 행복이요, 행복하다고 하면 더 행복입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을 찾아가기 위해 불행의 세계의 파도를 헤치고 거슬러 가는 것을 볼 때 하나님이 얼마나 멋지게 생각하실 것이냐? 선생님은 그런 생각을 하고, 감옥에서 고문을 받고 매를 맞더라도 '때려라 이놈의 자식들아, 쳐라 이 자식들아, 그 수가 가해지면 가해질수록 하나님의 사랑이…' (녹음 상태 불량으로 일부 정리하지 못했음) 거 무슨 말인지 이해돼요? 그럼으로 말미암아 모든 생의 운명길을, 틀어지는 인생의 운명길을 우리는 비로소 바로잡을 수 있는 것입니다.

자, 그래서 단 하나, 우리가 필요로 할 수 있는 것이 뭐냐? 우리 인생길은 믿을 수 없는 길이요, 허황한 길이요, 불안한 길이요, 그 다음엔 죽음의 고리를 묶는, 비참한 죽음의 고비를 넘는 길이지만 이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고, 이것을 바로잡을 수 있고, 이것을 보호할 수 있는 하나의 길이 뭐냐 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 이외에는 없다 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사랑을 가지고만이 살고 죽는 모든 것을 하나님과 같이할 수 있는 것이요, 보다 가치적인 내용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이 길이야말로, 이러한 자리야말로 우리 인생 누구나가 찾아가야 할 길이 아니냐. 이해됐느냐구요? 「예」 그래 그렇게 살 거예요?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