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이상세계가 되지 못하고 있다는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원인의 세계가 아니라 결과의 세계인 것도 알고 있습니다. 출발을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출발을 해서 어디론가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과가 좋으면 그 원인과 과정도 좋게 되는 것이요, 과정이 좋으면 목적도 좋게 되는 것이요 출발도 좋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행복한 과정을 거치고 있느냐 하는 문제를 생각하게 될 때,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불행한 세계에 살고 있느냐 행복한 세계에 살고 있느냐 할 때, 행복한 세계보다는 불행한 세계에 더 가까이 살고 있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랑할 만한 세계에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부끄러움을 느껴야 할 세계에서 살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자리에 섰다는 사실을 두고 보게 될 때, 우리는 근본이 좋지 못한 데서부터 출발했다는 것을 긍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부끄러움이 어떠한 부끄러움이며, 그 그릇됨이 어떠한 그릇됨이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죄' 하게 될 때 죄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는 것입니다. 부끄러움에도 여러 가지 동기를 개재시킨 부끄러움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끄러운 세상에 살고 있고 죄악된 세상에 살고 있다면, 어떠한 종류의 부끄러움이요 어떠한 종류의 죄냐 하는 문제를 우리는 생각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형무소에 가 보게 되면, 형무소에 있어서 제일 부끄럽게 여기고 제일 안된 사람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냐 하면 살인 강도입니다. 그 다음에는 반역자입니다. 그 다음에는 무엇이냐 하는 문제를 우리는 생각지 않을 수 없다 이겁니다.
여기서는 사랑을 중심삼은 관계가 문제되는 것입니다. 즉, 원칙적인 사랑을 하지 아니하고 강간이라든가 강제적인 사랑을 했다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의 문제를 중심삼고 본다면 여기에는 반드시 사랑의 질서가 있는데, 그 질서를 뒤집어 놓은 사랑, 즉 자기 누나와 간통을 했다든가 혹은 자기 아줌마라든가 자기 어머니하고 이런 무슨 관계가 있었다면 그것은 말도 할 수 없는 부끄러움이 될 것입니다.
만일에 사랑 문제에 있어서 말예요, 거꾸로 된 이런 관계가 있다면 그것은 말도 못 한다는 거예요. 그것이 살인 강도보다도, 반역자보다도 더욱 멸시를 받는 것이 감옥생활인 것입니다. 감옥같은 데를 가 보면 확실히 그렇다는 것을 여러분이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불행하게 됐다 할 때. 왜 불행하게 됐느냐 하는 것이 문제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죄를 범했다든가 그렇지 않으면 부끄러운 자리에 섰기 때문입니다. 그 외에는 불행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원리를 배운 우리가 우리 인류 조상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될 때, 우리 인류 조상이 어떠한 죄를 지었으며 또 어떠한 부끄러운 자리에 있느냐 하는 것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해와를 두고보나 아담을 두고 보나 천사장을 두고 보나….
천사장은 해와를 죽였고 아담을 죽였습니다. 그 다음에 해와는 아담을 죽을 자리에 끌고 들어왔습니다. 그렇게 죄를 짓는 그런 계통이 시작되면서 뭘 했느냐 하면 불륜한 사랑의 관계를 맺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랑의 관계는 어떤 관계였느냐? 알아보자는 겁니다. 어떤사랑의 관계냐? 하나님으로부터 아담 해와 천사장 이런 순서로 되어야할 텐데, 천사장으로부터 해와 아담 하나님으로 거꾸로 되었다 이겁니다. 천사장의 입장에서 보면 아담 해와는 누구였느냐 하면 주인입니다. 그러므로 해와와 관계를 맺은 것은 주인의 부인을 겁탈한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런데 해와는 종과 관계맺은 것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아담을 끌어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영원한 아버지를 완전히 저버린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이라면 이런 입장에 처하게 될 때 어떻게 하겠느냐? 생각해 보라구요. 그것을 용서할 수 있다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하는 것을 우리는 규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렇게나 해도 좋다는 하나님이 아니다 이겁니다. 하나님이니까 절대적인 분이니까 할 때 그 절대는 나쁜 의미의, 부끄러운 의미의, 죄된의미의 절대가 아니라구요. 좋은 의미의 절대라구요.
누구든지 평을 하게 될 때 좋은 의미의 평으로 '다 이렇다' 하는 결론위에 설 수 있는, 순서적으로 보나 질서적으로 보나 모든 것이 엇바뀌지 않는 입장의 하나님이 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사람이 되었고 이러한 천사장이 되었고 만물은 그런 사람을 위해 지은 만물이 되었으니, 하나님은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나님은 전부다 잘라 버릴 수 없습니다. 원래 이들의 주인이 누구냐 하면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주인을 중심삼고 집안에서 죄가 저끄러진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부끄러운 입장에 섭니다. 하나님도 당연히 부끄러운 입장에 서지 않을 수 없고 죄된 입장에서 고통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집에서 여러분이 잘못하든가 여러분의 어머니가 잘못하든가, 또는 여러분의 형제들이 잘못했을 때, 그 가정의 아버지는 자랑을 합니까? 참을 생각하는 사람이면 자기 아들이 죄를 지어서 강도가 되어있는 게 좋겠습니까, 사랑문제에 걸려서 가정이 부끄러운 문제에 걸려 있는 게 좋겠습니까? 어떻게 생각겠습니까? 어떤 죄가 나을 것 같아요? 사랑문제에 걸린 죄, 즉 강간과 사람을 죽인 죄 중에서 어떤 것을 한 가지….여러분이 주인이라면 어떤 것은 차라리 이렇게 되었으면 좋을 뻔했고, 이것보다는 이렇게 하면 좋겠다고…. 물론 둘 다 나쁜 것이지마는 그중에서 하나를 더 나쁘게 본다면 어떤 것을 더 나쁘게 보겠어요? 사랑문제가 더 하다는 말이지요? 「예」 맞는 말이라구요.
그러한 입장에서 주인이 되었고, 또 그러한 아들을 가졌고, 그러한 종을 가지신 하나님은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어요? 여러분이 하나님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비참하겠어요? 그러한 입장에서 볼 때 우리가 하나님은 슬픈 하나님이라고 내리는 결론은 타당한 결론이라고 할 수 있는 거예요.
그 다음에는 우리는 죄된 하나님의 입장을 느끼고 알아야 돼요. 고통을 느끼는 하나님을 알아야 되는 거예요. 만약에 아들딸이 죄를 짓고서 부끄러움을 느낄 때는 그 아들딸만이 아니라 그들보다도 더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이 부모의 마음인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그렇다는 거예요.
여기 미국에서는 요즈음에 들어와서 남녀문제에 대해서 그렇게 문제시하지 않는 단계에 있을는지 모르지만, 동양으로 봐서는 용서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성경의 사상을 두고 보더라도 이것은 용서할 수 없는 사실이예요.
그러면 그러한 관점에서 생각할 때, 하나님이 그렇게 된 동기는 누구에게 있느냐? 결국은 천사장에게 있고, 종에게 있고, 사람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 아들딸이나, 혹은 종이 자신이 죄진 것을 알고, 나아가 '나야, 천번 만번 죽어도 마땅하고 부모 앞에 어떻게 얼굴 들고 용서를 받겠느냐? 나는 미리 없어져야 하고 망해야 하고 죽어 버려야 하는자다'라고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래도 불쌍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거예요. 그렇지만 지금까지 사탄은 참소를 해 나오고 있고, 또 인간은 지금까지 하나님을 배반해 나왔다 이거예요.
개인 개인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의 죄는 개인들이 해결해 버리고 말지마는 사랑관계에 있어서의 문제는 반드시 삼각관계가 벌어진다는 거라구요. 예를 들어, 세상에서도 자기 아들 죽인 사람을 용서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참 선한 사람이고 좋은 사람으로 볼 수 있지마는, 자기 여편네를 빼앗아 간 사람을 용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미친 녀석이나 마찬가지라고요. 지금 미국에서는 어떻게 생각해요? 차라리 자기가 죽어 버리는 것이 낫다는 거예요. 하나님과 사탄은 그런 관계라구요.
만일에 사탄이 해와 하나를 미워서 때려 죽였다고 합시다. 그랬을 때는 하나님은 해와를 또 지을 수 있다구요. 그러나 사랑관계가 얽혀 있기 때문에…. 사랑은 처음 것이 좋습니다. 처음 것이 순전하고 최고예요. 그런데 처음 것이 이렇게 됐다면 그것은 다시 만들 수 없다고요. 사랑을 통해서 죄를 지었으면 그 아들딸은 전부 다 용서받을 수 없는 자리에 들어가고 만다는 거예요.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 인간은 이렇게 엉클어졌다구요. 죄의 부끄러움에 엉클어져 가지고 하나되어 떨어진 거라구요.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을 대해가지고 '하나님, 당신은 아담 해와가 타락한 후에 얼마나 부끄러움을 느꼈소? 얼마나 죄책감을 느꼈소?'라고 묻는다면, 하나님은 말 못할 입장에 설 수밖에 없다는 거라고요. 여러분 같아도 대답하기가 힘들 거라구요. 만일 그렇게 묻는 사람이 있다면 눈물밖에 흘릴 수 없는 하나님이 아니겠느냐? 뭐 용서해 주고 뭐 이러고저러고 변명할 수 없는 슬픈 하나님이 아닐 수 없다는 거예요.
하나님을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이 우리 사람이예요. 이러한 사람들이 잘 살아야 되겠어요, 못 살아야 되겠어요? 얼마나 잘 살아야 합니까? 그런 하나님이 아버지라면, 그 아버지를 위로해 드리기 위해서는 내가 무슨 일이라도 해서 위로할 수 있는 길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야 하는 거예요. 그렇다고 해서 암만 울고불고 용서를 구하고, 암만 백번 죽는다 하더라도 바로잡을 수 있는 길이 있느냐? 바로잡을 수 없다구요. 그 아들딸은 하나님의 직계 아들딸의 입장에서 그렇게 됐다는 거예요. 죄가 없는 자리에서 그렇게 되었다구요.
그러면 오늘날의 우리들은 죄 없는 자리에서 살고 있어요? 「아니요」 아담 해와가 몇백 번 죽어서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것을 단행할 수 있다면 우리는 몇 번이나 그래야 돼요? 우리가 몇백 번 몇천 번, 몇만 번을 죽어서라도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 길을 택해야 되겠어요, 말아야 되겠어요?
여러분, 요즈음 미국으로 말하면 뭐 민주주의식이고 사람은 다 마찬가지인데 누구는 뭐 어떻고 어떻고, 자유인데, 부끄러움이 어디 있고 양심의 가책을 받을 게 어디 있느냐는 사상이 강하지요? 그래, 여러분들은 부끄러운 것을 생각해 봤어요? 생각을 해봤느냐구요. 여러분이 죄된 의식을 한번 가져 봤어요?
만약에 여러분들이 역적의 아들이라면 어떻게 하겠어요? 역적의 아들이라면 당당하겠어요? 또, 강도의 아들이라면 어떻게 하겠어요? 당당하겠어요? 그 다음에는 또 말할 수 없는, 짐승 같은, 치욕을 느끼는 불륜한 사랑관계를 갖고 있으면 당당하겠느냐 말이예요? 「아니요」 만약에 자기가 그런 죄를 졌다면, 그런 죄를 진 사람의 아들딸이라면, 그런 후손이라고 생각하게 된다면 얼굴을 들고 '아, 나에게는 자유가 필요하다'라고 말할 수 있느냐 이거예요. 또 '나는 이 자리에서 그냥 그대로 자리잡아야 되겠다'라고 할 수 있어요? 여러분 누구를 막론하고 그럴 수 없다는 대답은 당연한 거예요.
모든 사람들이 떳떳하고 자유롭기 전에 먼저 무엇을 해야 되느냐 하면 죽었다가 살아나야 되는 거예요. 용서를 받든가 거꾸로 뒤집어지든가, 청산하는 문제가 있어야 된다고요. 그래야 될 것 아니냐구요. 우리 세상법을 보더라도 그래야 될 것 아니냐구요.
아담 해와 천사는 어떻게 됐느냐? 이들은 역사적인 배반자라구요. 역사적인 살인자예요. 또한 역사적인 불륜한 사랑관계를 맺은 대표자라고요. 그 조상이 누구냐 하면, 사탄 마귀더라 이거예요. 아담 해와는 그와 연루자라구요, 연루자. 죄를 같이 지었으니 공범자라구요. 공범자가 우리조상이더라. 여러분은 그러한 조상의 후손이라는 겁니다.
여러분은 자신에게 더 가까와요. 하나님께 더 가까와요? 또, 여러분의 가정에 더 가까와요, 하나님께 더 가까워요? 「하나님께 더 가깝습니다」 말은 가깝다고 하지만 사실은 안 그래요. 가까와져 있지 않다구요. 생각이나 말뿐이지요.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여러분이 얼마나 가깝다고 느껴 본 적이 있느냐구요. 여러분이 외국에 가면 느껴지는 동포애만큼도 못 느껴 봤지요? 동포애만큼도 못 느껴 본 사람이 대다수라구요. 결국 하나님과는 멀다는 얘기예요. 하나님이 나 자신보다도 멀기 때문에 전부다 멀다는 거라구요.
그러면 이렇게 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먼 곳에 있으니 누구한테 가깝겠느냐? 그건 자연히 사탄한테 가까운 거라구요. 이렇게 된 이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먼 곳에 있으니까 누구한테 가깝느냐? 자연히 사탄편에 가까울 수밖에 없다구요. 인간들은 사탄으로부터 태어난 거예요. 사람들은 원칙적인 사랑을 좋아하느냐, 비법적인 사랑을 좋아하느냐? 원칙적인 법을 지키기를 좋아하느냐, 법을 안 지켰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느냐?
민주주의, 자유민주세계를 말해 가지고 '나에게 자유를 달라' 할 때, '원칙적인 사랑을 하겠다. 원칙적인 진리의 길을 가겠다. 원칙적으로 나라를 사랑하겠다' 하는 것이냐, '그저 마음대로 하겠다. 원칙이 뭐냐. 그저 되는대로…. 사랑도 마음대로 하고…. 뭐 법이 다 뭐냐. 내 마음대로다' 하는 것이냐? 어떤 것이냐?
지금 미국의 히피들, 대부분의 젊은 청년들 말이예요. 젊은 세대, 대학가의 똑똑한 젊은 사람이라면 전부 다 자유주의이고 낭만주의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들은 결국 무엇이냐? 불륜의 누더기 보따리요, 사랑에 대한 가치관에서는 무가치한 것들이라는 거예요. 그것은 지금까지 쌓아 놓은 법을 한꺼번에 다 흔들어 버리고 인류를 한꺼번에 흔들어 버린다구요. 그것이 자유예요? 그런 자유가 우리에게 필요해요? 그 자유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있어서 발전이냐, 파탄이냐? 발전이예요, 파탄이예요? 어떤 거예요? 「파탄이 옵니다」
그러면 지금 말한 자유, 지금 인간들이 찾고 있는 자유가 뭐냐? 이것을 알아야 되겠다구요. 그것은 파탄이요, 멸망시키기 위한 함정이예요. 근본적으로 우리는 부끄러운 것 중에서도 부끄러운 인간들인데, 또다시 용납받을 수 없는 부끄러운 놀음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 하나님께서는 제일 좋아하실 것이 아니라 제일 싫어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좋아하느냐? 원수가 제일 좋아한다 이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 새로운 말을 지어서 하라고하면 '이 자유는 사탄의 마약이다'라고 결론짓고 싶습니다. 내가 한 말이 어때요? 그 말이 그렇다고 생각해요?「예」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것을 파탄시키고 싶겠어요, 집어던지고 둬 두고 싶겠어요? 「구하고 싶어하십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좋아하는 녀석들을 구해 주려면 그냥 그 길로 가라고 해야 되겠나요, 반대로 끌어올려야 되겠나요? 「반대로 끌어올려야…」 반대로 끌어올려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안 오겠다면 하나님이 잡아당기는 것이 좋겠어요, 가만 놔두는 것이 좋겠어요? 「잡아당기는 것이 좋습니다」 또, 사랑하면 할수록 더 잡아당겨야 되겠어요, 가만 둬야 되겠어요?「잡아당겨야 됩니다」 만일에 잡아당기다가 팔이 하나 빠지더라도 붙들어서 잡아당겨야 되겠어요, 빠지면 안 되겠으니 놔 줘야 되겠어요? 「빠지더라도…」
성경에는 눈이 범죄하면 눈을 빼 버리고 손이 범죄하면 손을 떼 버리라고 했습니다. 그런 말을 했다구요. 자 그런 말씀을 하시는 하나님은 그 얼마나 죄에 대해서 심각한 입장이냐 하는 것을 여러분은 생각해 봤느냐 이거예요. '뭐, 그까짓 것 눈이 한번 범죄했으면 그냥 놔두면 되고 용서해 주면 될 텐데 왜 빼 버리라고' 하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완전한 것을 바라게 될 때는 그러지 않을 수 없다구요.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끌고 가려고 할 때 여러분은 울고불고 야단하는 사람이예요, '어서 가겠습니다' 하면서 원해서 가는 사람이예요? 어떤 거예요? 어떤 종류예요? 여러분은 울면서 할 수 없이 쫓아가는 사람이예요,
마지 못해서 가는 사람이예요, 기뻐서 가는 사람이예요? 어떤 거예요? 세 가지 중에서 어떤 거예요? 「기뻐서 갑니다」 안 가겠다고 눈물을 흘려요, 마지 못해서 끌려가요, '아, 내가 갈 곳은 여기야' 하며 기뻐서 가요? 이 셋 중에 어떤 거예요? '아, 그럼 가야지, 명령이 없어 못 간다' 이런 거예요?
그러면 통일교회 들어오기 전에는 어땠어요? 통일교회에 들어오기 전에는 어땠어요? 울었어요? 울지도 않고 억지로 따라가지도 못하고 이랬으니 이건 멍청이고 신경마비라는 거예요. 그런 사람은 사람 축에도 못 들어가지요? 울 줄도 모르고 억지로도 따라가지 못했으니 신경마비라구요, 신경마비.
그런 사람이 사람 취급을 받아야 되겠어요, 못 받아야 되겠어요? 그러한 우리였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우리가 통일교회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기어서라도 가야 되겠다' 할 때는 얼마만한 혁명이냐 이거예요? 요만큼이예요, 이마만큼이예요? (행동으로 표현하심) 이것은 역사에 없는 혁명이고, 세계가 돌아간 것보다 더 크게 돌아간 거예요. 이러한 사건이 여러분 자신에게서 벌어졌다는 것을 여러분이 몰랐다 이겁니다. 그것을 지금까지 확실히 몰랐다는 거예요. 여기에 들어와서도 그것을 모르고 있다는 거예요. 이제는 이것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다 이거예요. 그러한 내 프라이드(pride), 그러한 내 자주성을 가지고 서야 할 것이 우리의 자세입니다.
자, 그러면 여러분에게 학박사를 시켜 주고, 출세를 시켜 주고, 미국의 세네이터(senator;상원의원)를 만들어 줄 테니까 이것을 버리고 오라하면 갈래요? 「아니요」 말을 들어 보니까 '노우(no)'하지요. 여러분은 그러한 자부심을 가져야 돼요. 세계의 어떤 왕이나 세계의 어떠한 대통령의 권위와 바꿀 것이냐 하면 '바꿀 수 없다' 하면서 당당해야 되겠다구요. 또한 '이 시대뿐만 아니라 과거의 어떠한 영웅도, 예수도, 공자도, 석가도 나를 못 당한다. 나는 역사를 이기고 나서야 되겠다'고 하는 자신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또 '역사적인 부끄러움을 내가 제거시키고, 역사적인 죄를 바로잡을 수 있는 길이 있으면 그것을 해보고 싶다' 하는 생각을 해야만 이러한 자리에 들어올 수 있는 자격자라고 볼 수 있는 거라구요.
자, 그러면 이 부끄러움과 이 죄를 바로잡을 수 있는 길이 있느냐 할때, 있다면 얼마나 좋고 없다면 얼마나 비참하겠느냐 이거예요. 이제 여러분은 하나님을 알았다구요. 그런 하나님 앞에 우리 조상의 부끄러움을 알았고, 그런 조상이 역사를 통해서 부끄럽게 살아왔다는 것을 알았고, 오늘날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부끄러운 것을 알았다구요. 이것을 떠나가지고 하나님 앞에 자랑할 수 있는 것이 뭐가 있느냐 이거예요. 그렇다고 자랑할 수 있는 나 자신이냐? 그렇게 못 돼 있다구요. 그렇게도 부끄럽게 만들고 그렇게 죄된 수욕을 당하게 한 후손이요, 그러한 데서 자랐고 그러한 자리에 있었던 내가 하나님 앞에 나설 수 있는 자격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는 거예요. 그러한 나를 그분이 용서하고 그분이 좋아할 수 있고 그분이 요구하는 무엇이 있다면, 그분이 기뻐할 수 있고 그분이 부끄러움을 잊고, 죄된 것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나는 무엇이든지 하지 못할 것이 없다 하는 내 자신이 되어 있어요? 「예」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되느냐? 하나님이 나를 천번 만번 죽이더라도, 죽였다 살리고 살려 가지고는 더 고생시키고 또 죽였다가 또 살려서 더 비참하게 죽이고, 이렇게 천만 번을 되풀이해서 하나님의 마음이 풀릴수 있다면, 나는 그 길을 택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 이거예요. 세 번, 백번, 천 번, 만 번이라도 해서 할 수만 있다면 나는 그 길을 택할 수밖에 없다 하는 자각을 해야 됩니다. 그것밖에 없다는 거예요. 그 길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 가지고 하나님이 '오냐, 이 녀석아. 그래야지' 그럴 수 있어야 된다구요. 그런 일을 또 하고 또 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야 이제는 그만하자' 할 거예요. 그럴 때는 '아니예요. 나 같은 녀석은 더 죽어야 돼요. 더 해야 돼요. 당신의 한을 풀기 위해서는 더 비참해야 돼요'라고 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럴 수 있게 되면 하나님도 '야 이제 그만둬야겠다. 내가 너한테 졌다. 너 때문에 다 풀께. 다 용서해 주고, 다 잊어버릴께'라고 할 수 있는 고비가 있을 거라구요. '내가 사정을 풀고, 아담 해와가 파탄시킨 것도 다 풀고, 너 때문에 다 잊어버릴 테니까 제발 그만두자' 할 때까지 가야 할 거라구요. 그런 뭐가 있는데, 그것이 경계선이라구요, 경계선. 하나님과 엇갈릴 수 있는 그런 경계선을 넘어가야 되는 것을 여러분이 생각해야 된다구요. 엇갈리는 그 곳을 넘어가야지요?
그러면 넘어설 때 조금이라도 남기고 싶어요, 하나님이 '아이고 좋다' 할 수 있게 깨끗이 하고 넘어가고 싶어요? 「하나님이 좋다라고 하신…」 그러려면 하나님이 나를 죽였다가 부활시켰을 때 '아, 나는 이제 다 탕감했으니, 죽었다가 부활됐으니 천국에 들어가야 되겠소' 하는 생각을 해야 되겠어요, 안 해야 되겠어요? 「안 해야 되겠습니다」
이제는 여러분이 그것을 알았다구요. 그러므로 타락한 아담 해와가 하나님을 울렸고 하나님을 슬프고 고통스럽게 만들었기 때문에, 복귀해야 할 우리들이 하나님을 기쁘게 만들고 춤추게 만들기 위해서는 죽을 길을 찾아가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딱 나왔다구요.
보라구요. 하나님의 눈물은 하나님 자신에게 있고, 아들딸에게 있고, 후손 앞에까지 미쳐 오는 거라구요. 하나님의 슬픈 눈물은 말이예요. 그러면서 눈물의 역사는 떨어져 내려오는 거라구요. 인간이 하나님께 슬픔을 가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눈물이, 서러운 입장이 점점점 떨어져 내려간다는 거예요.
아담 해와가 타락했을 때 하나님은 눈물을 흘렸겠어요, 안 흘렸겠어요? 「흘렸습니다」 얼마나 눈물을 흘리셨겠어요?
그저 한번 흘렸겠어요? 생각할수록 기가 막히고, 생각할수록 슬프고…. 어땠을 것 같아요? 생각할수록 슬픔이 희미해지겠어요, 생각할수록 되살아나겠어요? 「되살아나셨을 거예요」 이렇게 후손들이 자꾸만 죄의 길을 가고 죄를 짓는 것을 볼 때, 하나님은 가슴에 창을 찌르는 것과 마찬가지였을 거예요.
그래, 슬픈 역사 얘기를 하게 되면 누가 제일 역사가 길고, 누가 제일 많겠느냐? 고통을 당했다면 누가 제일 많이 당했겠느냐? 그건 하나님이라구요. 하나님이 틀림없다고요. 하나님이 우리 때문에, 인간 때문에, 나 때문에 걸려 있으니 그것을 푸는 책임을 누가 져야 하겠느냐? 그러한 하나님을 기쁘게해 드리기 위해서는 아까 말한 대로 '나는 당신이 슬퍼한 이상의 슬픔과 비참을 당신을 위해서 당할 수 있는 자리에 서겠다'고 해야 됩니다. (녹음이 잠시 끊김)
자, 여러분, 자신을 위하는 사람이 여러분을 붙들면 좋아해요? 쳐 버리는 거라구요. 그렇지만 여러분을 위해서 매를 맞고, 여러분을 위해서 슬픔을 당하고, 여러분을 위해서 죽고, 여러분을 위해서 억울함을 당하더라도 '나는 당신을 위해 태어났다'고 하는 그런 사람이 여러분을 붙들면 어때요? 붙들어 주면 줄수록 좋아한다 이겁니다.
하나님에게는 '내 슬픔을 풀어 다오' 이것이 첫번째 소원입니다. 그리고 두번째는 '내 고통을 풀어 다오'입니다. 그러면 누가 그 소원을 풀어줄 것이냐? 하나님 자신은 못 푸는 것입니다. 그것은 상대적으로 저끄러진 것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풀래야 풀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 하나님 자신이 풀 수 있어요? 그러니 우리가 풀어 드려야 합니다. 그러니까 길은 딴 것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위해서 천 번이고 만 번이고 죽겠다는,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내가 희생하겠다는 그것밖에는 없다구요. 그러한 깊은 것을 중심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성경은 '하늘을 위해 우리의 생명을 바쳐라. 뜻을 위해 바쳐라. 뜻을 위해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하는 자는 죽는다'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 역설적인 말이 타당한 말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확실히 알야야 되겠습니다.
지금까지 신자들은 이 역사적인 전통의 내용이 이렇게 되어 있는 줄을 몰랐다구요. 이제 우리는 알았어요, 몰랐어요? 그렇기 때문에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중심삼은 심정문제입니다. 이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중심삼아 가지고 상대하는 문제가 최후의 길인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이 문제를 들고 나온 것이 통일교회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담 가정을 배울 때 아담 가정의 슬픔은 무엇이었더냐? 노아 가정의 슬픔이 무엇이었더냐? 노아 가정의 고통이 무엇이었더냐? 노아의 고통이 하나님의 고통을 대신했고, 노아의 슬픔이 하나님의 슬픔을 대신했고, 아브라함이 그러한 자리에 있었고, 모세가 그러한 자리에 있었고, 세례 요한이 그런 자리에 있었고, 예수님이 그러한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이 통일교회를 지도하는 선생님도 그러한 자리에 서서 가야된다는 그런 결론이 나온다구요. 그러므로 우리의 슬픔은, 통일교회의 슬픔은 내 슬픔이아니라 아담의 슬픔이요, 노아의 슬픔이요, 아브라함의 슬픔이요, 모세의 슬픔이요, 오시는 재림주님의 슬픔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슬픔은 뭐냐 하면 아담의 슬픔, 노아의 슬픔, 아브라함의 슬픔이 플러스돼 있는 것입니다. 점점 더 크게 돼 나왔다는 거예요. 즉 개인적인 슬픔에서부터 가정적 슬픔, 민족적 슬픔, 국가적 슬픔, 세계적 슬픔으로 자꾸 커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 있다구요.
당신의 마음에 묻혀 있는 슬픈 심정을 전부 다 내가 탕감해서,나로 말미암아 기쁠 수 있게 하고, 아담 가정에 대해서 기쁘지 못한 것을 보충하고, 노아, 아브라함, 모세, 예수시대를 거쳐서 지금까지의 슬픔을 전부 다 취소해 버리고, 나로 말미암아 그것을 그렇게 만들 수 있는 길이 있다면 나는 그 길을 가겠다고 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돼요. 이런 사람들이 전부 다 실패했기 때문에 나는 실패하지 않고, 이것을 실패한 하나님을 밀어 드려서 하나님의 한을 풀어 드리는 승리적 역사의 책임자가 되겠다는 신념을 가져야 됩니다.
'아담아, 너 왜 그랬니? 이렇게 했으면 될 것인데'라고 교육해야 되고, 또 '노아야, 너 왜 그렇게 했니? 이렇게 될 것인데'라고 교육해야 되고, '아브라함아, 왜 제물을 그렇게 바쳤니?'라고 교육을 해야 되고, '모세야, 너 왜 그렇게 석판을 깼니?'라고 교육을 해야 되고, '예수야 왜 요렇게 했니?'라고 교육할수 있는 책임자가 되어서 그들 이상의 자리에 도달하지 않으면 안 될 자신을 발견해야 된다구요. 그때, 자기 조상들이 실패해 가지고 슬펐던 그 몇백 배의 슬픔을 느끼면서 충고를 하고, 바로잡기 위해 몸부림치는 이러한 과정을 연결시키지 않고는 하나님의 역사적인 슬픔을 풀 길이 없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자, 그러면 여러분이 만약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하나님, 날 도와주소. 아이고, 내가 슬프니까 하나님, 나를 도와주소'라고 기도할 자신이 있어요? 기도할 수 없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보다도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위해서 바라고 구했던 것이 얼마나 더 컸던가 하는 것을 먼저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을 대하여 역사상의 그 어떠한 사람이 기도했던 것보다도, 우리가 기도하는 것보다도 더 많이 하나님이 우리를 대하여 지금까지 기도를 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돼요. 아까 말한 그러한 슬픔을 대신해서 풀어 드릴 수있는 아들딸이 나오기를 기도하고 계시다는 겁니다. 그것은 타락한 그날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냐.
그런데 복을 달라구요? 복을 받겠다구요? 그래 가지고 복을 받겠어요, 아니면 '하나님이여, 나를 고생시키고 나를 죽을 자리에 내보내시어 당신의 한을 푸소서' 하는 사람이 복받겠어요? 「어려운 자리에 있는 사람요」 이제 여러분은 알았다구요. 내가 고통스러운 길을 감으로 말미암아 하늘땅의 슬픔이 풀려 나간다는 이 기쁨을 맛본 사실을 발견해야 된다구요.
고통이 있을 때에는 하나님을 위로해 드리고 하나님께 '당신은 이런 자리에서 얼마나 고통스러웠습니까? 이제 저로 말미암아 기쁠 수 있는 마음을 회복할 수 있으면 하는 것이 저의 소원입니다'라고 기도하고 가야되는 것이 우리의 책임이라는 거예요. 알겠어요? 「예」
자, 이제 여러분이 이것을 알았기 때문에, 내가 호흡을 하며 사는 것은 하나님의 슬픔을 풀어 드리기 위해서라는 것을 느껴야 됩니다. 또, 나의 슬픔과 고통의 모든 감정도 하나님의 슬픔을 풀기 위한 것이라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이것을 주류로 삼아서 흘러가야 합니다. 내가 노래를 하든가, 표시를 하든가, 글을 쓰든가, 말을 하든가, 이 모든 것은 이것을 보태기 위해서하는 것이라는…. 이것을 위해서 살아야 되겠다, 가야 되겠다하는 신념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실패했고, 더군다나 퇴폐적이었던 우리 조상과는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가는 것을 우리의 길로 작정해야 겠습니다. '너를 찾음으로 말미암아 세계를 찾았고, 너를 찾음으로 말미암아 슬픔과 고통을 잃어버렸고, 너를 찾음으로 말미암아 해방이 벌어졌고, 너로 말미암아 기쁨과 사랑이 왔으며, 너로 말미암아 가정과 나라가 생겼으며, 너로 말미암아 기쁜 세계가 생길 수 있었다' 하는 그런 희망의 존재를 하나님도 바랄 것이 아니냐 이겁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너하고 말하고 싶고, 너하고 사정을 통하고 싶고, 내 것을 네게 주고 싶고, 또 네 것을 내가 받고 싶다' 하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여러분이 되지 않고는 안 된다는 거예요. 그리하여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고통과 슬픔과 아픔 속에서 해방되어 영광과 기쁨과 자유의 천국을, 둘이 같이 기뻐하면서 행진하여 둘이 같이 가정을 찾고, 둘이 같이 협력해서 나라와 세계를 찾을 수 있다면 그 이상 우리가 바랄 소원이 있겠느냐? 또 하나님도 그 이상 인간에게 바랄 것이 뭐가 있겠느냐? 그 이상 아무것도 없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첫째 문제는 세계를 해방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해방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이 원하는 가정을 해방시키고, 그 다음에는 하나님이 원하는 나라를 해방시키고, 그 다음에는 하나님이 원하는 세계를 해방시켜야 되는 것이 바로 우리들이 가야 할 길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부끄러움을 풀 수 있고, 인류가 부끄러움을 풀 수 있는 길은 이것밖에 없다는 것을 확실히 깨달아야 됩니다.
그런 것을 알고 그렇게 하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그런 사람이 비로소 역사에 나왔으면,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중심삼고 한 가정만 이루고 싶겠어요, 이 세계를 전부 다 찾고 싶었겠어요? 그런 사람을 중심삼고 한꺼번에 개인에서부터 가정, 세계를 전부 다 찾아 가지고 인간도 해방되고 하나님도 해방되어야 그 사람도 해방되는 거예요. 그래야 이분도 해방되는 거라구요. 그렇잖으면 이분은 해방이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셋이 전부 다 해방될 수 있는 것을 바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해방하고, 세계를 해방한 후에야 이 사람이 해방된다는 것입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하나님이 '야 내가 도와 줄께'라고 할 수 있는 동기가 세워진다는 겁니다. (녹음이 잠시 끊김)
인간들이 가담했다면 그것이 얼마나 영광된 것인가를 알아야 된다구요. 그런 자리에서는 우리 인류가 다시는 슬픈 놀음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꿈에도! 언제나! 그러한 중심 사명을 가지고 오시는 분이 누구냐 하면 바로 재림주님인 것입니다. 이분을 통하는 것이 인류의 슬픔과 하나님의 수치를 해방시킬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분도 혼자서는 안 됩니다. 세계가 필요하고 하나님이 필요하기 때문에 이 모두와 하나가 되어 가지고 모든 수치의 세계를 벗어내야 하는 거예요. 그런 곳으로 갈 수있는 길을 안내하는 것이 우리 교회입니다.
예를 들어 이 지구성이 그러한 가치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기에서 연결되고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치의 자리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자, 이제 여러분은 수치의 자식이 되겠어요, 아니면 영광의 자식이 되겠어요? 「영광의 자식요」 이것이 결론이라구요.
여러분은 부끄러운 길을 어떻다는 것을 알았고 영광의 길이 어떻다는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 이 다음에 영계에 가서 '선생님, 왜 그런 것을 나에게 안 가르쳐 주었어…'라고 참소하지 못할 자리에 여러분이 섰음을 알아야 됩니다. 이제는 여러분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예요. 여러분들은 선생님이 자기를 위해서 뭘 해주길 바란다구요. 그것이 옳은 생각이예요, 잘못된 생각이예요? 「잘못된 생각입니다」 내가 도와주겠다고 할 때에는 '우리 후손을 위해서 도와주소. 우리 몇천 대 후손을 위해서 도와주소'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됩니다. 똑똑히 알겠어요? 「예」
그렇기 때문에 나도 지금 바쁘다구요. 그러면 여러분도 바빠야 되겠어요, 안 바빠야 되겠어요? 「바빠야 되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도 바쁘게 되어 일은 자연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구요. 그러면 모든 것이 성취됩니다. 전부 다 이렇게 해야 돼요.
전부 다 서로가 먼저 한다고 해야 돼요. 그게 좋은 거예요. 서로가 경쟁해서 내가 먼저 간다고 해야 빨라지는 거라구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경쟁하는 거라구요. 그러니 경쟁해야 되겠어요, 안 해야 되겠어요? 「해야 합니다」 이제부터 하나님의 수치를 감소시킬 수 있다는 여기에 전부가 집중해야 된다는 거예요.
여러분이 원리를 배울 적에, 창조원리부터 타락론, 복귀원리를 배울 적에 그것인 남의 것이 아닙니다. 내 뼈살에 사무치는 입장에서 배워야 되는 거예요. 즉, 아담 가정을 배울 때에는 내가 아담이 되고, 노아를 배울 때에는 노아가 되고, 아브라함을 배울 때에는 아브라함이 되어야 합니다. 그들이 실체적인 부활체로서 실패했기 때문에, 여러분도 희생을 되풀이하는 아픔을 느끼고, 하나님의 슬픔을 느끼면서, 강의를 들을 줄 알아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도 지금은 가인 하나님 같은 입장이예요. 아담을 비롯해서 전부 다 그런 입장이라구요. 그러므로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도 아벨 하나님이 될 수 있게 해야 하는 것이요, 아벨 아담이 될 수 있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아담보다 나아야 합니다. 아담 가정에 있어서 아벨이 되고, 노아 가정에 있어서 아벨이 되고, 야곱 가정에 있어서도 아벨이 되고, 민족이나 통일교회에서도 아벨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전통을 지키는 데도 우리가 제일이어야 됩니다. 안 그래요?우리는 유대인보다도 전통을 더 존중해야 됩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보다도 더 생각해야 됩니다. 또한, 기독교인들이 전통을 세우는 것보다도 우리는 더 세워야 합니다. 그들보다 더 하나님을 사랑해야 됩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을 생각하는 데 있어서 최고가 됨으로 말미암아 수치스런 인간에서 완전히 해방 받을 수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아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