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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을 대하는 우리들

일시: 1972.08.13 (일) 장소: 한국 전본부교회

[기 도]

사랑하는 아버님, 이 아침은 이달에 있어서 두 번째 맞는 안식일 아침이옵니다. 이 아침이 복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날이 복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달과 이해가 당신의 뜻 앞에 자랑의 달이 되고 자랑의 해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불초한 저희들이 당신 존전에 무릎을 꿇고 부복하였사오니, 아버지여, 찾아오시어 저희들의 사정 일체를 살피시사, 당신의 마음으로 그리는 본연의 자아와 상봉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은 아버지를 진정 사모하고, 아버지께서는 저희들을 진정 사랑할 수 있는 인연이 여기에 나타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아버지, 저희들은 어린아이의 심정으로 당신의 거룩함과 소원을 그리면서, 일체를 아버지로부터 시작하고 아버지로 귀결되기를 바라서 이 시간 나왔사오니, 아버지여, 긍휼히 보시옵소서.

저희들 자의로서는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는 것이요, 선을 중심삼고도 끝맺을 수 없는 자신들인 것을 저희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저희들은 본래 선에서부터 시작한 것이 아니고, 타락의 후예로 시작했기 때문에 타락권내에 처한 자신들임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버지, 이 시간도 저희들은 뜻과 더불어 해방되기를 바라고 있사옵니다. 저희는 구속된 몸이요, 해방을 바라는 몸이기 때문에 자신들로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을 신앙생활을 통해 너무나 잘 알고 있사옵니다. 시작도 당신께서 하셔야겠고, 과정도 당신의 손길이 거치지 않으면 안 되겠으며, 결과 또한 당신의 보호 없이는 안 될 것을 생각할 때, 철부지한 저희들을 거느려야 하는 당신은 과연 불쌍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사옵니다. 당신께서 제시하시는 목적이 있거들랑 저희들은 이의 없이 그곳을 향하여 달음질쳐야 되겠습니다.

당신께서 오라 하는 곳이 있거들랑 저희들은 그야말로 부모의 부름에 반기며 달려가는 어린아이와 같이 일체를 잊어버리고 당신께 달려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아침 전국에 널려 있는 당신의 자녀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전세계에 널려 있는 당신의 외로운 무리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세계를 위하여 염려하는 사람이 없는 이 땅 위에 당신의 뜻을 따르고 당신의 일을 염려하는 무리가 불쌍한 저희들 소수의 무리인 것을 생각할 때, 이 크고 엄청난 세계복귀라는 과제를 앞에 놓고는 아무리 정성을 다하고 생명을 다짐하는 자리에 서더라도 미급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럴수록 당신의 승리를 갈구하는 마음만이 넘쳐 흘러야 되고, 가면 갈수록 부족함을 깨달아야 할 것이 하늘을 따라가는 자녀의 모습이옵니다.

당하는 일마다 당신의 뜻과 더불어 몸부림치며 몸과 마음을 제물삼지 않고는 그 일을 해결할 방도가 없다는 것을 잘 아는 저희 통일의 무리들을 이 시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이들은 하늘이 없게 될 때는 고아와 같은 무리이고, 하늘 부모를 몰랐다면 실로 비참한 무리이옵니다. 사랑하는 부모 앞에, 혹은 형제들 앞에, 환경에서 이해받지 못하는 일을 하는 것은 우리 개체의 욕망을 위한 것도 아니요, 우리 자신의 희망을 찾아가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미래의 소망과 만민의 행복을 위하여 간다는 이 원칙만은 변함이 없는 마음이오니 긍휼히 보시옵소서. 아버지께서 그러한 자리에서 참아 나오시며 정상에 머물러 계시는 분이었기 때문에 사정은 사정으로 통할 것을 아오니 부복한 이 어린 자녀들을 기억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시아의 일각에 있는 이 한국 땅을 바라보면서 내일의 소망의 세계를 다짐하며 가는 이들의 길이 비록 작고 미미한 것이지만, 역사는 작고 미미한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비참한 자리에서 새롭고 영광된 자리를 결의하고 거기에 있어서 선을 중심삼고 도약하는 날에는, 찬란하고 새로운, 역사의 빛이 발해지는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하오니 그 가는 길에 있어서 강하고 담대해야 되겠습니다. 하늘의 긍휼의 마음이 언제나 떠나지 마시옵소서. 내일의 승리의 나라를 건국할 수 있는 용사들로서의 자세를 갖추어 끝까지 싸워 나갈 수 있는 무리들이 되게 해주시옵기를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세계에 널려 있는 기동대 대원들, 아버지께서 축복해 주셔야 되겠습니다. 하늘의 권위와 하늘의 위신을 생각하여 역사에 없는 이러한 일을 시작한 것은, 오늘날 통일교회가 계획해 한 것이지만 통일교회의 어떠한 권위를 위해서 한 것이 아니옵니다. 당신의 슬펐던 한을 제거시키고, 당신의 억울하였던 원한을 풀기 위해 한 것이옵니다. 그러기 위해서 선두에 서서 달리는 이들을 당신께서는 밤이나 낮이나 지켜 주고 계시다는 것을 생각할 때 연약한 무리일지라도 그 연약한 자리에서 낙망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세상의 그 누가 배후에서, 전후에서 옹호해 주지 않더라도 당신이 선두에서 지도하고 있는 것을 늘쌍 마음으로 깨달을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때로는 그들의 마음을 통할 뿐만 아니라 영을 통하시어서 하늘의 내정을 살필 수 있도록 지도하여 주시는 당신이 계신 것을 잘 알게 하여 주시옵고, 늘쌍 당신과 더불어 시작하고 당신과 더불어 거두어 바칠 수 있는 움직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더우기 한국을 아버지께서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남북이 엇갈린 자리에서, 서로서로가 자체의 중심을 바라는 자리에서는 이 민족을 끌고 갈 수 없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인간은 제한된 몸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백년 이상 살 수 없는 인간인 것을 생각하게 될 때, 당신이 이 민족을 맡아 주셔야 되겠습니다. 그 누구도 이 나라를 구할 수 있는 자신을 가진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만이 여기에 중심이 되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들은 당신을 중심삼고 따라가고, 당신 앞에 효성의 도리를 다하겠습니다. 자기의 전체를 희생하면서도 감사할 수 있는, 민족적인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 위한 일이 이 민족 앞에 나타나지 않고는 안 된다는 것을 아는 통일교회는 지금까지 그 뜻을 바쳐 나왔습니다. 숱한 수난의 길 가운데서도 지치지 않고 지금까지 나왔습니다. 금후에 갈 길을 당신께 맡기오니 당신께서 맡아 주시옵소서.

이 길을 개척하는 데 있어서 그 누구도 지도자가 될 수 없고, 그 누구도 책임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인간은 인간 자체이기 때문에, 그 인간이 바로 하늘을 배반하였던 후예인 것을 알기에 당신만이 중심이 되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밤이나 낮이나 이 노정을 아버지께서 지켜 주시옵소서. 충효의 도리를 다하지 못한 원한을 풀 수 있는 저희들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아버지여, 이제 머지 않아 8.15가 다시 다가옵니다. 지루하였던 수십 년의 역사였습니다. 아침에 해가 뜨고 저녁에 해가 질 적마다 뜻을 염려하고, 뜻을 생각지 않는 날이 없는 저희들인 것을 아시는 아버지여, 그뜻이 이 나라에 이루어지고 이 세계에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 당신의 소원인 것을 알고 싸워 나왔던 이들의 소원의 종착점을 당신께서 기쁨으로 맞이하지 않고는 안 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혼란된 세계, 자신 없는 민족의 정상을 바라보게 될 때, 과연 아버지 앞에, 세계 앞에 불리운 선봉자로서, 기수로서 가야 할 방향을 정상적으로 가고 있는가를 다시 한 번 살피는 저희들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하늘이 없게 될 때는 질식하고 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아는 저희이기에 오늘 이 시간도 당신의 지도를 바라고 있사옵니다. 당신께서 인도하시는 길에 수난과 핍박이 가중되더라도 거기에는 안위와 평화와 자유가 깃드는 것을 생각할 때마다, 아버지, 저희의 마음이 안위를 느끼지 못하거들랑 회개해야 되겠습니다. 자유를 느끼지 못하거들랑 회개해야 되겠습니다.

일체를 당신 앞에 맡기고 당신의 지도를 따라 당신께서 원하시는 소원의 방향에 일치될 수 있는 자아를 발견하지 못하였거든 아버지여, 이 시간 다시 한 번 찾아오시어 저희를 해방의 자녀로 세워 주시옵소서. 자주장하는 자유의 권한을 가지고 만민 앞에 하늘의 아들딸의 모습임을 자랑할 수 있는 권위의 모습이 될 때까지 저희들은 몸부림치며라도 가야 되겠습니다. 쓰러지고 또 쓰러지더라도 또다시 일어나서 가지 않으면 안 되는 운명을 지닌 타락의 후예인 것을 저희들은 원망하면서 또 싸워 나가야 되겠습니다. 아버지, 모든 것이 당신의 뜻과 더불어 귀결되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사람이 아무리 슬픈 길을 피하려 해도 당신께 맡겨 주신 원한의 사명을 탕감하기 위해서는 슬픈 고비길을 책임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을 아옵니다. 아버지, 이 나라가 아버지 뜻 앞에 서지 못한 과거가 있으면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개인이 아버지 앞에 서지 못하는 것을 신앙생활을 통하여 여실히 느끼는 저희는 하나의 가정이 아버지 뜻 앞에 선다는 것이 정말 어렵다는 것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의 가정이 그렇게 어려울진대 하나의 민족이 당신의 뜻을 따라간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움을 느끼게 되옵니다. 이렇게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요인을 누가 제시할 것이냐 할 때, 아버지밖에 없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자유로이 제시할 수 있는 자주적인 입장에 선 것이 아니옵고, 그 제시는 우리 인간으로 말미암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습니다. 어떤 날 어떤 시간에 아버지께서 이러한 내적인 인연을 제시할 수 있는 나 스스로가 되었는가를 생각하게 될 때, 슬프고 비참하고 고독한 분은 당신인 것을 저희들은 다시 한 번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저희들은 아무 욕망도 없습니다. 저희들이 바라는 것은 단지 뜻과 더불어 당신의 사랑의 세계를 그릴 뿐입니다. 그렇게 슬펐던 아버지의 모습을 위로해 드리고 당신의 거룩한 품에 안겨서 기쁜 한날을 맞는 것이 저희의 소원 중의 소원이옵니다. 당신의 한스러운 복귀의 노정에서 당신의 사정을 털어 놓고 논의할 수 있고, 당신의 사연과 더불어 당신이 저희에게 간곡히 부탁할 수 있고, 당신의 뜻 앞에 기대가 될 수 있는 한날을 맞는 것이 저희의 소원인 것을 당신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 8월이 되면 저희들은 8.15를 생각하게 되옵니다. 대한민국 이 나라를 아버지께서 사랑해 주셔야 되겠습니다. 남북이 엇갈린 불쌍한 이 민족을 아버지께서 지켜 주셔야 되겠습니다. 당신이 아니면 안 될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저희 불쌍한 것들은 이번 특별한 기도 기간을 설정하고 아버지 앞에 기도를 드리고 있사오나 그 기도의 정성이 미급한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바라시는 기준 앞에 너무도 부족한 것을 알고 있지만, 몸부림이라도 치지 않을 수 없는 저희의 입장을 바라보시는 아버지께서는 또 참고 이것들을 끌고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사정이옵니다. 아버지, 당신의 해방과 당신의 승리와 당신의 영광과 당신의 안위의 날이 언제 어느 곳에서 이루어질 것인가를 생각해 볼 때, 그곳은 대한민국이 아닌가 생각되옵니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 대한민국을 찾아오신 당신이라 하더라도 이 나라, 이 땅에서 이루어지지 않으면 떠나셔야 하는 수밖에 없고, 그런 걸음이 되게 될 때는 이 나라 이 민족은 불쌍한 민족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또한 통일교회를 찾아오셨던 당신께서 이 자리에 영원한 안식처를 정하지 못하게 될 때는, 이 무리들은 불쌍한 무리가 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불쌍한 무리를 만들고 바라보는 아버지는 더더욱 비참한 아버지가 될 것이고, 고독한 아버지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더불어 생각하게 되옵니다.

그렇게도 믿겠다고 몸부림치고, 그렇게도 하늘 뜻을 위하여 가겠다고 몸부림치던 저희들이 하늘을 쫓아내고 몸부림쳐야 하는 그 정상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가를 아시는 아버님, 최후까지 참고 저희들과 함께 가시기를 원하는 당신을 생각할 적마다, 저희들은 다시 한 번 모든 것을 제거하고 모든 것을 바치면서 최후의 한날을 위하여 가기를 다짐하오니, 그러한 무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부족한 자신을 살펴보고 거룩하신 하늘 앞에 눈물 없이는 대할 수 없는 자신임을 발견하게 될 때 부끄럽게 생각하는 무리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저희와 같이 추한 것들을 찾아오시어 아들딸을 삼고자 하시는 당신 앞에 용서받을 수 없다고 몸부림칠 줄 아는 저희들의 마음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정상에서 저희는 당신께 바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한 저희들을 대하시는 것은 당신이 부끄러운 것이고, 그러한 저희들을 찾아오시는 것은 당신이 수치스러운 것이옵니다. 당신이 면목과 위신을 세울 수 없는 그 정경을 바라보면서 조롱하는 사탄이 있다는 것을 생각할 적마다, 저희들은 아무말 없이 눈물로써 당신을 모시고, 아무런 욕망 없이 저희 자신을 당신께 제물로 바치는 길밖에 당신께 접근할 수 있는 길이 없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무한하신 사랑과 은사의 손길이 떠나지 말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은 전국에 있는 당신의 어린 자녀들이 한 곳에 모여 수련회를 시작하는 날이기도 하오니 그곳에 아버지께서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저희들이 새로운 결의를 다짐하여 과거의 불충을 청산하고, 오늘의 진실 되지 못한 것을 다시 한 번 뉘우치면서 하늘의 사랑을 위하여, 하늘의 소망을 위하여, 하늘의 자주권을 위하여 거룩한 제물로 바쳐질 수 있는 무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금후의 일체를 당신께서 허락하신 뜻과 더불어 인도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님의 이름으로써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말 씀

여기에 모인 우리들은 통일교회 교인이라고 자처하는 무리들입니다. 통일이라는 방대한 명제는 단순히 어떠한 개인의 욕망, 혹은 뜻을 위해서 제시된 내용이 아닙니다.

전체를 위하는 데서 통일이 벌어진다

통일이라는 것은 지도를 받는 것이 아니라 지도하는, 새로운 방안을 모색하고 제시할 수 있는 길에서만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통일되지 못한 현재에 있어서 통일되기 위해서는 현재의 환경을 초월하여 또 다른 하나의 방안을 모색하여 제시해야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만이 통일이 가능한 것입니다.

자유스럽지 못한 자리에서 통일을 바라는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혹은 불안한 자리에서 통일을 바라는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자유스럽고 기뻐할 수 있는 자리에서 통일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 양심을 가진 우리 인간의 마음인 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열 사람이 모였다면 그 열 사람이 하나되기를 바라는 것이 각각 달라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런데 열 사람이면 열 사람의 의견이 각각 다릅니다. 혹은 백 사람이면 백 사람의 의견이 다 다른 것입니다. 천 사람이 모이면 천 사람…. 자유스러운 환경에서 자기를 중심삼고 주장하라고 하면 어느누구도 자기를 중심삼고 주장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혹은 대한민국 전체 3천만 국민을 두고 보더라도, 그 3천만 민족 개개인은 자기를 중심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생각하는 그 생각이 전체를 대신할 수 있는 생각으로 세워지기를 바라는 것은 인지상정임을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게 될 때에, 현재 한 나라, 한 국가가 그렇지만 오늘날 현시대, 세계의 인류를 두고 볼 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지만 그들도 역시 자기를 중심삼고 그 무엇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30억의 인류가 각양 각색의 자리에서 모두 자기를 중심삼고 모든 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데, 과연 이것이 전체에게 이익을 가져올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되는 것입니다. 그 바라는 것이 전체를 희생시키고 개인을 위하고자 하는 바람일 때는 아무리 그 자체가 훌륭하고, 아무리 최고의 자리에서 주장한다 하더라도 그 일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전체가 보다 나을 수 있는 뜻으로 받아들이는 길에서만이 하나의 길을 모색할 수 있는 것이요, 전체가 통일된 형태를 갖출 수 있는 길이 시작된다고 우리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자, 이렇게 볼 때, 역사적 시대에 왔다 갔던 수많은 사람들도 자기를 중심삼고 어떠한 크나큰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바라 나왔고 현재도 바라고 있는 것이 아니냐. 과거의 수많은 사람들이 보다 나은 통일된 세계를 마음으로 추구해 나왔지만 소원하였던 세계는 이뤄지지 않은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세계 가운데서, 그러한 역사 가운데서 그래도 좀 나은 사람, 그래도 후대 사람들이 그 사람이 주장하던 소원이면 소원, 사상이면 사상, 뜻이면 뜻을 이어받아야 되겠다고 하면서 우러르는 사람들이 성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성인들이 바라고 추구하던 그 뜻이 현세에서 이루어질 수 있겠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이것 역시 불가능에 가까운 것을 우리가 알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에도 그러한 소원의 뜻을 바라는 사람이 많았지만 그것을 이루지 못했고, 현재 살고 있는 수많은 인간 가운데서도 그것을 바라지 않는 사람이 없지만 그것이 가능하겠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이것 역시 불가능에 가깝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두고 볼 때, 과연 금후에 인류가 어떻게 될 것이냐 하는 문제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절망의 벽에 부딪친 인간의 소원

그러면 금후에 우리 인간들이 바라는 통일의 세계, 자유를 중심삼은 평화의 세계가 올 것이냐, 과거에도 그러했고 현재도 그렇다면 금후에 그러한 소원의 세계가 과연 올 것이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과거와 현재가 그렇기 때문에 미래에 있어서도 그러한 세계를 바랄 수 없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온 세계 인류가, 혹은 세계 정세가 이런 처지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크게 보면 이 세계에는 민주세계와 공산세계가 있지만 이 두 세계가 과연 인류가 바라는 하나의 통일된 세계, 온 인류가 마음으로 추구하는 하나의 세계를 모색할 수 있을 것이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이것 또한 불가능에 가깝다는 결론을 지을 수 있는 것입니다. 또 누가, 어디에서 이것을 시작할 것이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도 사람만 가지고는 불가능하지 않느냐, 사람만 가지고는 거기에 도달하기에 불가능한 것이 아니냐 하는 결론을 아니 내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격동하는 현세계 정세를 앞에 놓고 신앙자들은 신앙자의 본질을 재검토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혹은 정치면 정치인들은 자기의 인간적 가치를 중심삼고 본질을 분석 비판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경제인이나 문화인, 각계 각층에 있어서도 이 세계적인 정세를 앞에 놓고 재차 비판해 가지고 그 본질적인 요인이 추구하는 통일의 방안을 다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될 때가 되어진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게 될 때, 인간들로서 할 수 있는 생각은 다한 것이 아니냐? 인간으로서 갈 수 있는 최대의 한계점에 이미 도달한 것이 아니냐? 이러한 결론을 아니 내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결론을 내리고 인간 자체로 돌아와서 인간의 상을 바라볼 때, 여기에 소원을 가질 수 있겠느냐 할 때 거기에는 소원을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절망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절망의 와중에서 이것을 타개하기 위한 우리의 신념이라도, 자신이라도 갖고 있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우리의 지나온 역사를 두고 보거나 처해 있는 환경을 두고 보더라도, 내일의 소망을 다짐지어줄 수 있는 그 무엇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우리는 발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그러한 우리 인간 자체로서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린다면, 우리는 절망의 벽에 부딪칠 수밖에 없는 입장이 아니냐. 그렇다고 해서 돌아서 갈 수 있는 새로운 길이라도 찾았느냐? 그것 또한 없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이러한 자리에 서 있다 하게 될 때, 과연 내가 좋아하는 친구가 진정 내일의 좋은 친구가 될 수 있겠느냐, 내가 지금 살고 있는 행복한 환경이, 혹은 불행한 환경이 미래의 소원을 새로이 개척 시키고 새로이 계승시킬 수 있는 것이 될 수 있겠느냐 할 때, 거기에 자신(自信)을 가질 수 없는 자신(自身)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나요, 그러한 우리요, 그러한 인간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이 인류는 그야말로 비참한 것입니다.

오늘을 보장할 수 있는 터전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요, 내일을 계승시킬 수 있는 새로운 소망의 터전도 없는 자리에 선 걸 볼 때, 인류는 절망에 부딪친 것이 아니냐. 이렇게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을 우리는 이 사회적인 여러 여건을 통해서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만일 사람만이라면 이것이 희망을 가질 수 없는 것이지만, 사람 위에 또 다른 무엇이 있다 할 때는 어떻게 되겠느냐? 사람을 중심삼고 '그 사람이 선한 사람이냐, 악한 사람이냐' 하고 우리는 흔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좋은 사람이다 나쁜 사람이다, 혹은 좋은 친구다 나쁜 친구다, 한 가정에 있어서도 어머니 아버지를 두고 그 자식들이 우리 어머니 아버지는 좋은 어머니 아버지다 혹은 나쁜 어머니 아버지다, 이렇게 평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진정한 의미의 좋은 친구가 있었느냐, 진정한 의미의 좋은 부모가 있었느냐, 진정한 의미의 좋은 형제가 있었느냐? 그 좋다는 기준이 무엇이냐 하게 될 때, 이것 역시 막연하다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먹을 것을 주고, 자유스러운 환경의 여건을 허락한다고 해서 인간이 본성적으로 바라는 행복의 터전을 이어줄 수 있는 부모라고 볼 수 있느냐? 참다운 좋은 형제요, 참다운 좋은 친구요, 참다운 좋은 스승으로 볼 수 있겠느냐? 그렇지 못한 것입니다. 그 참이 무엇이냐? 이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인간을 중심삼고 볼 때, 인간이 바라는 욕망은 참만이 있으면 좋겠는데 참은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참된 자리에 서고 싶지만 참된 자리에 설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참된 자리는 어떤 자리냐? 그 자리에 서기를 바라고 있지만 그 참된 자리는 어떠한 자리라는 것을 모르고 있지 않느냐. 이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면 내가 참된 자리에 서지 못했다면 악한 자리에 서 있는 것이냐? 그렇다면 그 악의 궁극적인 한계점은 어떤 것이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이것도 막연하다는 것입니다.

선을 추구하는 입장에 선 두 종류의 사람

선악을 놓고 볼 때, 우리는 선한 사람이 되든가, 악한 사람이 되든가 그러한 포위권내에 있는 것입니다. 선한 사람이 되려고 몸부림치는데도 불구하고 번번이 선한 자리에 서지 못하고 악한 자신으로 귀결되는 자신을 두고 볼 때, 청년시대에도 그랬고 장년시대에도 그랬다면 노년시대 밖에 남지 않은 그 사람에게 있어서 새로운 결심을 다짐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있느냐? 자신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 젊은 사람이 참된 선한 사람이 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자신을 못 갖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앞서가는 사람도, 지도자도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그러한 입장에 처해서 선이라고 제창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이것은 역사적인 혁명의 과제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아무 소망도 갖지 못한 청년시대에 있어서 이것을 개척할 수 있겠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이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선의 한계점은 어디이며, 악의 한계점은 어디이냐? 사람은 악하지 않으면 선한 것입니다. 선한 자리에 서지 않으면 악한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그 귀결점은 반드시 이 둘인데, 우리들은 악한 자리를 원하지 않고 선한 자리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선한 자리를 찾아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모색 방안이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될 것이냐? 그렇다고 해서 모두 악한 자리로 가겠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이러한 와중에서 몸부림치는 것이 우리의 인생살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명은 귀한 것입니다. 자기의 일생은 가장 귀한 것입니다. 여기에 있어서 갈 길을 가리지 못하고 결정적인 주체성을 갖지 못한 채 우왕좌왕하는 것이 오늘날 인간들이 아니냐. 그러면 그 누가 언제 어떠한 자리에서, 인간이 가장 바라는 소원의 기점에 서 가지고 이것이 인간이 서야 할 결정적인 선의 자리라고 주장한 사람이 있었느냐? 그것도 믿음직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을 두고 볼 때, 자기 환경을 해결해 가지고 선의 방향을 추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 아니냐, 그 바라는 선과 나와는 상극된 거리, 무한에 가까운 거리에 있는 것이 아니냐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새로운 결의를 가지고 내일의 개척자의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자신을 어디서 발굴하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그럴 수 있는 요인이 없는 자리에서 신음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비참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가 그저 흘러가는 세월 따라 어영부영 인생살이를 하겠다는 사람이라면 모르지만, 피맺히는 심각한 자리에서 참을 추구하고 악을 제거시키기 위한 중심적인 자아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일대 모험을 하는 주체가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리에 서게 된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런 때가 많을 것입니다. 부모가 자기의 뜻을 반대하고, 친구가 자기의 뜻을 반대하고, 제일 사랑하는 처자가 자기의 뜻을 반대하더라도 굽히지 않고 이 뜻을 위해 간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위대한 사람입니다. 에워싸여 있는 환경의 여건을 자기 스스로 극복하고, 타개해 보겠다고 죽음을 각오하고 나서는 젊은이라면, 그는 위대한 젊은이입니다.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선에 도달하지 못하겠으면, 악의 본질이 어떤 것이냐 하는 것을 알아 가지고 악의 한계점을 격파해 버려야 합니다. 그리하여 악의 본질을 타개하는 자리에서 선에 도달하는 새로운 방안을 모색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사람보다는 낫다는 것입니다. 악의 포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악의 한계점에 서서 '악은 이런 것이다' 하고 제창해 가지고 선은 이렇게 가야 된다는 소망이라도 가지고 악을 대해 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사람보다는 낫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그는 악에 귀결되어 가는 것이 아니라 악을 타파해 버리고 제2차적인 선을 추구하는 입장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비록 현재 악한 입장에 처해 있더라도 그는 이것도 아닌 사람, 저것도 아닌 사람보다는 낫다는 것입니다.

그 반면에 선이 추구하는 한계점이 어디냐고 하면서 이것을 중심삼고 돌진하고 여기에 모든 것을 투입하고 여기서 생사를 걸어 놓고 이것을 타개하고 극복하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보다 훌륭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극단에 가서는 두 종류의 사람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선악의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방안

만일 인간만이 선과 악을 해결해야 할 책임을 졌다면, 그 인간은 얼마나 비참하겠느냐? 선과 악을 해결해야 할 책임이 인간에게만 있다면 그 인간은 과연 비참한 것입니다. 왜 그러냐? 역사 이래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깃발을 높이 들고 몸부림치며 달려들던 사람들은 다 쓰러지고 함정에 꺼꾸러졌습니다. 절망의 장벽에 부딪쳐 신음과 더불어 후회의 한을 남기는 인생살이를 하다 간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인간만이 선이면 선, 악이면 악을 해결지어야 한다면 그 인간은 비참한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우리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도대체 선이 무엇이냐? 도대체 악이 무엇이냐? 우리는 그 선과 악을 가려 잡지 못하면서도 선은 다 좋아합니다. 왜 좋아하느냐? 악은 다 싫어하는데 그 악은 왜 싫어하느냐? 상대적인 요인을 추구하기 전에 자기 자체에 있어서 그 비판 기준을 확립해야 되겠습니다. 이것이 보다 중요한 문제입니다.

결국은 내가 어떻게 되어 있느냐? 선을 향하여 갈 수 있는 자신이 되어 있느냐? 아니면 선의 파탄자가 되어 있느냐? 문제는 나에게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자기에게 귀결시키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결론지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나, 그러한 주체적 입장에 서 있는 나에게는 이러한 선을 해결 지을 수 있는 힘이 있느냐? 아무 힘이 없습니다. 그러면 그럴 수 있는 환경을 가졌느냐? 아무런 환경도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갈 것이냐? 자신을 가지고 1년, 10년, 일생이 아니라 몇 세기의 역사시대라도 뚫고 나갈 수 있는 어떤 확실한 목표라도 있느냐? 그것이 없게 될 때는 수천 년을 흘러 나온 역사를 새로운 선의 방향으로 전환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 아니냐.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되면 선이고 무엇이고 다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만일 이러한 것으로 신음하는 사람이 있어서 그 사람에게 선악의 책임을 지워 온 역사라면 이는 절망이요, 이는 최후가 될 것입니다. 또 그 사람만이 현시대를 책임져야 한다면 그는 비참한 운명에 부딪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또 다른 무엇이, 선과 악을 중심삼고 책임져 나올 수 있는 그 무엇이 있다면 인간 외에 또 다른 어떠한 것이 있다면, 그런 자리에서 선악을 해결할 수 있는 주체적인 입장에 선 어떠한 분이 있다면, 인간은 이 또 다른 분과 하나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 것입니다. 이것은 불가피한 것입니다. 만일 그런 자가 있고 그런 분이 있다면 그분과 하나되고 싶은 마음, 그분과 의논하고 싶은 마음, 그분과 같이하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간절하겠습니까?

그런데 환경에서 지극히 고립된 자아를 발견하고, 그 수습 방안을 찾을 수 없는 처지에서 신음하는 자신을 발견한다고 할 때, 그 자리에서, 나만이 이런 것이 아니라 인간 외에 또 다른 어떤 분도 역시 이러한 자리에서 신음하고 계시다면 그분과 어느 정도로 하나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안 그래요? 외로운 사람은 외로운 사람의 사정을 잘 아는 것입니다. 밥을 굶어 봐야 배고픈 것을 아는 것이고 가난해 봐야 가난한 살림살이의 사정을 아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비참한 자리에서 선악의 자주적인 판단자로서 나서기를 바라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인간 자신을 중심삼고는 아무리 찾아보아도 가망성이 없는데 그 책임을 질 수 있는 무엇이 있다 하게 되면, 이것은 희소식 중의 희소식일 것입니다. 인류역사에 다시 없는 최대의 복음의 소식이 아닐 수 없을 것이 아니냐.

그러면 나는 얼마만큼 그와 더불어 하나되기를 바라고 있느냐? 환경에 부딪치는 모든 요인이 극에 달하면 달할수록 그것이 자신을 어떠한 주체로부터 격리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극한 힘이 강할수록 그분에게 접근할 수 있는 소망의 여건이 될 것이 아니냐. 그러한 길에서만이 새로운 인간 삶의 선한 길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길 외에는 찾을 수 없다 하는 것이 우리의 결론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면, 선한 그 무엇…. 이건 신이라도 좋고, 아무것이라도 좋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책임질 수 있는 분, 내가 의논할 수 있고 내가 거기에 하나될 수 있는 분이 있다면, 그분은 역사시대의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는 내용을 지녔을 것입니다. 나는 몇십 년, 혹은 일세기 미만의 생애를 가진 권내에서 신음하면서 이런 결정을 내렸다고 했을 때, 주체적인 그 무엇이 있다면 그는 역사시대를 그와 같은 관점에서 나왔을 것이고, 이 시대를 그와 같은 관점에서 고찰해 가지고 거기에 대한 모색 방안을 갖고 주장해 나오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나보다 나을 수 있는 선이면 선의 판단력을 가지고 있을 것이 아니냐 할 때, 우리는 그렇다고 대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에는 인간 자체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또 다른 우리 인간 이상의 그 무엇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신앙이 출발한 것이 아니냐. 보다 본성적인 출발은 이러한 자리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냐.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뜻은 절대자의 뜻이어야 한다

'뜻을 대하는 우리들'이라는 제목…. 그 뜻은 악의 뜻이냐 선의 뜻이냐, 그 뜻이 역사권내에 사로잡힌 뜻이냐 아니면 역사를 극복하고 초월해 가지고 새로운 역사시대로 이끌고 갈 수 있는 뜻이냐 할 때, 그 뜻은 역사 권내에 포함되는 뜻이 아니라, 역사시대를 선도적인 입장에서 주도할 수 있는 뜻입니다. 또 이 시대의 어떠한 사상에 포괄된 사상이 아니라 이것을 초월해 가지고 끌고 갈 수 있는, 거느리고 갈 수 있는 뜻이어야 될 것입니다. 그것은 두말할 바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 인간이 절대적인 소원을 추구하는 것에 비해 가지고 그 절대적인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여기에 절대자가 있다면 그 소원을 추구하는 마음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 절대자를 필요로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재 살고 있는 인간상이 아니냐.

그러한 분이 있다면 그분을 대해서 '선에 대한 말을 해보시오, 선을 위해 갈 수 있는 길이 있으면 가 보시오. 당신 홀로 못 가겠다고 하면, 내가 상대가 되어 가 드리겠습니다. 친구가 되어 드릴 테니 가 봅시다'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만일 그런 분이 있어서, 그분이 이렇게 이렇게 하고 싶고, 이렇게 이렇게 가고 싶고 이렇게 이렇게 만들고 싶어도 그분 혼자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분이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어서 그분과 함께 보조를 맞추어갈 수 있는 내가 될 수 있겠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나는 이렇게 가기를 바라는데 그분의 생각은 다를 것이 아니냐. 나는 이렇게 사는 것이 전통이요, 관습으로 알고 있는데 그분은 반대로 살라고 모는 것입니다. 같을 수 없습니다. 같아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민주세계가 금후에 어디로 갈 것이냐 하는 것이 심각한 문제입니다. 공산세계도 역시 마찬가지지만 민주세계는 어디로 갈 것이냐 하는 문제를 두고 생각할 때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들 자체만으로서 이렇게 가야 된다는 것은 안 되는 것입니다. 이미 다 실험해 가지고 끝난, 파장을 바라보는 세계가 아니냐. 그걸 여실히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면 통일방안, 요즈음 남북 통일을 위해 7.4공동성명이 나온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엇갈린 생각입니다. 하나되어 가지고도 통일되기가 힘들 텐데 둘이 엇갈린 입장에서 통일을 어떻게 할 것이냐? 문제가 큰 것입니다. 오늘날 사상이 대립된, 엇갈린 사조권내에 살고 있는 우리들, 통일이라는 것은 인간들끼리는 안 되는 겁니다. 그것은 이미 실험으로 다 끝난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통일교회가 말하는 뜻이라는 말이 무슨 말이냐? 통일교회가 주장하는 뜻이란 무엇을 말하느냐? 그것은 여기에 서 있는 문 아무개의 뜻이 아닙니다. 통일교회 구성 요원들이 편성해서 제시한 뜻도 아닙니다. 그러한 뜻은 미급한 뜻입니다. 불가능이라는 귀결점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는 운명의 뜻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통일교회 교인들의 뜻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여기에 서 있는 문 아무개의 뜻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론입니다.

예수는 십자가상에서, 생사의 기로에 서 가지고 '아바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내 뜻대로 마옵시고 당신의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예수는 주체적인 그분이 누구라는 것을 확실히 알았던 것입니다. 죽음의 기로에서 '내 뜻대로 마시옵고, 당신의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그것은 역사시대에 포괄된 뜻이 아니라, 역사시대를 극복시킬 수 있는 자주적인 뜻이 아니냐. 그 뜻의 관념 가운데서, 중심의 자리에 서서 자기 개인적인 소행을 자유로운 천지에서 이룰 수 있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 것이냐? 그 뜻과 일치된 개인적인 자유의 해방권이 이루어지고, 가정적이요 민족적인 해방권이 벌어졌다면 어떻게 되었을 것이냐? 그것은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으로 남아져 있습니다. 이렇게 돼 있어요.

'내 뜻대로 마시옵고, 당신의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한 그 뜻은, 죽는 것만이 아니지 않느냐 이겁니다. 거기에는 개인의 역사적 해방의 내용도 있었을 것이고, 가정의 역사적 해방의 내용도 있었을 것이고, 국가, 세계, 전인류의 역사적 해방을 제시할 수 있는 모색 방안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 뜻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을 절대시하는 자리의 뜻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선을 대해서 절대적으로 책임질 수 있는 어떠한 주체자가 있으면 그 주체자에게 귀일되고 귀의할 수 있는 자리에서 부르짖은 뜻이 아니냐. 그것은 여기에 나와 더불어 있는 것이 아니라 나와는 격리된, 새로운 차원에 있는 것이 아니냐. 그것은 그럴 것입니다. 그 뜻, 그 뜻이 문제인 것입니다.

심정을 통할 수 있는 뜻이 통일교회가 바라는 뜻

그러한 어떠한 신이 있다면, 그 신은 우리 인간들끼리도 행복하도록 해주고 싶은 사상을 가진 주체자일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면 그는 어떠한 자리에 행복하게 해주고 싶을 것이냐? 절대적인 선의 주체로 계시는, 우리 인간 외에 또 다른, 악을 대비해 가지고 선의 주권, 혹은 선의 세계를 바라는 분이 있다 할진대는, 그분은 우리 인간 앞에 어떠한 자리에 선한 세계를 이루어 나올 것이냐? 우리 인간 앞에 어떠한 행복의 선을 소개해 나올 것이냐? 이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분이 선의 나라를 이룰 수 있는 말은, 행동은, 생활은, 혹은 제도는 어떤 것이냐?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확실하고도 틀림없는 내용을 가졌기 때문에 그래도 수천 년, 수만 년의 인류역사를 통해 악을 대비해 싸워 나오신 주체가 아니냐. 안 그래요? 하루 살림살이하다가 치워 버릴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있기 때문에, 틀림이 없기 때문에, 결정적이요 확정적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그렇게 나왔을 것이 아니냐. 확정적인 선의 주체자로서 개인을 중심삼은 생활관은 어떻게 될 것이고, 가정, 민족, 국가, 세계관이 어떻게 될 것이냐? 그것은 우리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생활이 어려우니, 생활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절대적인 선을 추구하지만 그것은 문제 외의 문제도 되지 않습니다.

어떠한 절대자가 있다면, 그 절대자가 돈이 필요하겠습니까? 성경을 보게 되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던 때 금이 필요했어요? 자기가 지은 피조물의 가치, 제2차적인 가치를 절대시하는 생활 재료로서의 돈은 우리에게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혹은 하나님에게도 필요 없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그러면 그것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내가 없으면 안 되고, 네가 없어도 안 되는 것'으로 결론이 내려집니다. 그것은 사랑으로 귀결되는 것입니다, 사랑. 새로운 사랑을 중심삼은 가치관의 확립이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선악의 분기점에서 선의 경계선을 극복하고 넘어서지 못하는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 악의 한계점을 타파하지 못하는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 돈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정서적인 문제입니다.

종교에서 제일 중요시하는 것이 무엇이냐? 돈을 중요시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인간 자체를 최대 한계점의 가치로 추구하기를 원치 않는 것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잘났다 하더라도 종교에 들어오게 되면, 그 인간은 그날서부터 폭락입니다. 주가가 폭락되는 것입니다. 그 가치를 인정해 주지 않습니다. 부정의 요인으로 제시하고 나서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수천 년 동안 인류들이 고심한 최대의 문제의 해결 방안은 어디서 시작될 것이냐? 인간끼리는 안 됩니다. 인본주의 사상 가지고는 안 됩니다. 그 원칙이 틀린 것입니다. 새로운 신본주의를 발견해야 합니다. 새로운 사고의 신본주의를 발견해야 합니다. 그 내용은 지금까지의 역사에 물들은 신에 대한 인식이 아니라, 색다른 차원에서의 신에 대한 인정입니다. 그 인식을 어떻게 할 것이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인 하나님을 존중시하는 종교관은 탈피해야 됩니다. 시대적인 신앙의 중심으로 서 있는 신은 부정해야 됩니다. 신이 없다고 부정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 환경적인 여건을 부정하라는 것입니다. 그 관(觀)이 틀렸다는 것입니다. 그 관(觀)이 맞았더라면, 오늘날의 종교가 이렇게 낙후된 현실의 결과를 가져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관이 달라져야 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통일교회는 하나님의 심정을 들고 나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차원에서 하나님의 사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정을 들어 보자는 것입니다. 슬픈 사람을 보게 되면 슬픔이 감돌기는 하지만, 그 사람의 엉클어진 사연에 동참하게 될 때 그와 나는 하나될 수 있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절대적인 선의 주체되시는 어떠한 분이 있다면, 그분의 사정을 들어 봐야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 사정 말고, 인간 심정 말고 그분의 사정이 어떻더냐 들어 보자, 그분의 사정이 그렇기 때문에 그분의 심정은 어떻더냐, 그 심정을 파헤쳐 보자 하는 것이 통일교회인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 통일교회가 서 있는 자리는 차원 높은 자리라는 것을 우리는 자각해야 되겠습니다. 역사적 내연을 계승한 자리, 시대적인 환경의 여건을 수습한 자리가 아니라 이것을 초월한 경지입니다. 자기 자체만의 입장이 아닙니다. 또 다른 주체를 흠모하는 자리의 심정을 추구해 나오자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그 심정을 통할 수 있는 뜻, 이 뜻이 바로 통일교회가 바라는 뜻입니다. 그 뜻을 통해서 흘러나오는 사연은 다른 것입니다. 달라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통일교회는 엇갈리는 역사적인 길을 걸어 나오고 있습니다.

선한 세계를 만드는 책임과 수습의 주체와 방안

오늘날 우리들은 투쟁의 역사를 부정하고 나왔습니다. 안 그래요? 우리는 선과 악에 있어서 악을 타파하고 악을 때리기보다는, 그 악을 초월한 초연한 자리에서의 선의 주체성을 가려 나왔다는 것입니다. 악한 사탄이 있다면, 그 사탄은 차원 높은 초월된 자리에 선 절대적인 선을 추구하는 하늘을 얼마나 배반하였던고? 얼마나 항거하였던고? 얼마나 하늘을 부정하였던고? 하지만 하늘은 상대도 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오늘날 국회의원이 선거시에 유세하듯이 선전할 수 있는 입장에 선다면 세계가 어떻게 될 것이냐? 이 세계는 문제 될 것입니다. 그러면 왜 못 그러느냐? 절대적이고 지고한 선의 자리에, 초연한 자리에 서 있기 때문에 악과는 동참도 안 한다는 겁니다. 상관도 안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실 수 있는 그분은 초연한 자리의 선을 중심삼은 주체일 것입니다. 아무리 몇천 년 동안 항거하더라도 그 항거에 의해 자기의 내적 동요나 방향 변경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려면 해봐라, 네가 할 수 있는 악의 세력이 크면 얼마나 크겠느냐, 끝까지 해보아라 하는 것입니다. 그 악을 부정하고 타협 방안을 제시하는 하늘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오늘날 우리들처럼 남북이 서로 자기 주장을 중심삼은 엇갈린 입장에서는 타협이라는 것은 있을 수 있지만, 초연한 자리에, 주체로서만 설 수 있는 권위의 선의 자리에 선 하늘이 있다면 이는 상관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타협이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타협 이전의 초연한 자리입니다. 절대적인 권위의 자리입니다. 절대적인 권위의 자리는 타협이나 악의 상대 요건을 중심삼고 이러고 저러고 할 수 있는 자리가 못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결론을 짓고 보면 문제가 무엇이냐? 하나님이 있다면 우리 인간을 어떻게 구할 것이냐? 그것이 문제입니다. 타협 방안도 없고, 모색 방안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뜻의 길은 하나님이 지금까지 선두에 서서 개척해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조종은 하고 책임은 지는데…. 책임은 선한 세계를 만들려는 그분이 져야 합니다. 악한 세계를 소화시켜서 선한 세계를 만들려니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를 세워 가지고 인간 구원역사를 하는 것입니다.

역사는 수습 역사인데 그 수습의 역사를 누가 하느냐? 수습의 방안은 하늘이 제시하고 책임집니다. 그러면 수습은 누가 하느냐? 그 방안을 중심삼고 그것을 실제로 대행하는 것은 누구냐?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천사들이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천사를 통해 가지고 해서 끝나는 날에는 그 다음에는 하나님이 할 수 있느냐? 천사를 내세워 그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끝나고 난 후에는 인간을 내세워서 하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무슨 말인지? 그때서야 비로소 사람을 내세워서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그 방안을 가지고 악을 지배할 수 있어야지 그 악에 지배받는 사람이 돼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악에게 지배받는 사람을 하나님이 지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건 당연한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악을 지배할 수 있는 사람, 그러한 세계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인간들이 바라는 이상세계일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그것이 오늘날 통일교회의 술어로 말하면 지상천국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모색 방안의 대행자로서 그 하나님 대신 전권의 책임을 지자, 인간 대표로서 그러한 사명을 해야 되겠다고 하는 운동이 오늘날 이 세계에 있어야 합니다. 역사 과정에 있어서 그런 섭리의 방향, 그런 뜻의 방향을 취해 왔다면 영계가 협조할 수 있는 터전을 통해 가지고 인간이 협조를 완결해야만 절대적인 선의 세계가 도래할 것입니다.

주체되는 하늘의 심정적 내면을 중심삼은 관을 제시하고 나가자

그러면 그런 인간이 있느냐? 그러한 인간은 없기 때문에 초연한 뜻을 바라는 하나님은 인류의 대표형을 보낸다는 예고가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각 종교에 있어서의 재림사상이 아니겠느냐. 그래서 절대적인 선의 주체와 인간을 대표할 수 있는 그 어떠한 사람이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모색 방안에 최대의 노력을 해야 될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환경적으로, 가정적으로, 국가적으로, 세계적으로 아무리 반대를 하더라도 그 운동을…. 그 반대를 받는다고 해서 그것이 좌절되어서는 안 됩니다. 반대를 받으면 그것을 뚫고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왜 그러냐? 악이 선을 치고 난 후에, 그것이 좋은 것이냐, 나쁜 것이냐 하는 판단은 절대적인 선의 주체가 하시기 때문입니다.

피해를 입히지 않으면 문제가 안 되지만 피해를 입히는 날에는 문제가 되는 겁니다. 그러한 뜻을 따라가는 무리가 있게 될 때, 무리가 피해를 입기 전까지 하늘은 가만히 있지만, 피해를 입는 날에는 거기에 역사시대로부터 시정 방안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통일교회에서 말하는 탕감복귀라는 것입니다.

탕감이라는 것은 이 시대만이 아니라 역사시대를 거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담의 죄가 지금에 와서 문제가 되고, 노아의 방주, 아브라 함의 제물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모세의 반석 2타가 문제 되는 것입니다.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이 문제되는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러한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에게는 종교가 문제가 되고 세계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종교권내에 나라도 있고, 세계권내에 나라도 있지만, 하나님이 바라는 선의 주체적인 입장에 선 종교를 중심삼은 나라가 있느냐? 그러한 나라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나라가 있다면 그야말로 그 나라는 이상적인 나라입니다.

이렇게 모순되고 상충된 현재 인류역사의 종말에는 새로운 방면에 있어서의 통일적인 방안이, 그런 종교를 중심삼은 나라, 그러한 뜻을 중심삼은 세계관이 나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정이 아니라고요. 주체 되는 하늘의 심정적 내면을 중심삼은 그러한 관(觀)을 제시하고 나가자, 또 바라고 나가자는 겁니다. 안 되거든 거기에 도달할 수 있는 안간힘과 몸부림을 쳐야 되겠다고 하는 운동이 세계의 어느 한 곳에서라도 벌어져야 됩니다. 그러지 않고는 인류는 절망의 길로 가는 일방통행이 아니냐.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대한민국을 중심삼고 볼 때, 이 나라가 어떻게 될 것이냐? 사람끼리는 안 되는 것입니다. 천운을 타야 하는데. 그 천운을 어떻게 탈 것이냐? 어떻게 하면 하늘이 찾아오는 최고의 선의 역사의 방향과 일치될 수 있는 자리에 서느냐? 오늘날 서로 엇갈린 사상을 가지고 있는 민주사회와 공산사회는 어떠한 자리에 서 있느냐? 자기들 주체관을 중심삼은 자리에 서 있습니다. 그것은 허락되지 않을 것입니다. 끝에 가서는 자기들이 뜻하지 않는 결과에 부딪치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통일교회는 그러한 절대적이고 차원 높은 자리에 있는, 악을 대해 선의 입장에서 책임질 수 있는 주체자, 우리 인간 외에 또 다른 절대적인 자리에 선 그 주체자의 사정뿐만이 아니라 심정 내면을 어떻게 우리가 체득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여러분, 이남이면 이남에도 충신이 있고, 이북이면 이북에도 충신이 있습니다. 공산세계면 공산세계의 충신이 있고, 민주세계면 민주세계의 충신이 있습니다. 그 세계를 위해서 생명을 걸고 그 세계의 주권자와 하나되고자 하는 마음이 있게 되면 충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그러면 고차적인 선의 주체자 안에 남아질 수 있는 진정한 의미의 충신이 있느냐? 혹은 그분과 제일 가까운 자리에서 '그분은 주체요, 나는 대상'이라고 하며 그와 내가 하나될 수 있느냐? 하나된다면 어떤 자리에서 하나될 것이냐?

인간의 욕망을 두고 보면, 인간은 최고의 것을 원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못생긴 사람이라도 최고의 것을 원하는 것입니다. 세계 밑에 있어서의 최고를 원하는 사람은 없다구요. 세계 위에서의 최고를 원하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여러분들도 전부 다 세계를 내 세계로 만들고 싶어하는 욕망은 다 갖고 있는 것입니다. 세계권내에서 지배받는 나로 출세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고 성공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구요. 세계를 지배하는 자리에 있어서의, 자주적인 입장에 있어서의 희망과 욕망을 갖는 것입니다. 그것은, 누구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세계를 내 것 만든 후에는 어떻게 할 것이냐?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세계 외에 또 다른 주체가 있으면, 그 주체를 내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내 것 만드는 데는 무엇을 중심삼고 내 것 만들 것이냐? 그것이 절대적이고, 제일 귀한 것이라면 자기의 사랑을 중심삼고 내 것 만들려고 합니다. 안 그래요?

여자들로 말하면, 대한민국에서 제일 크고 좋은 다이아몬드 반지가 있다면, 사실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것을 중심삼아서 자기의 사랑과 더불어 관계를 맺으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물건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려고 하고,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받아야 좋아하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그렇지요?

세계에서 자기가 제일이 되려는 욕망이 이루어질 때, 그 욕망을 달성한 가치를 어떠한 자리에서 인정받고 싶으냐?' 잘 싸웠소'라고 치사하고 헤어질 수 있는 자리에서 잘 싸웠다고 치사를 받고 싶어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세계와 하나될 수 있는 가치를 중심삼고 볼 때,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싶어하는 것이 인간의 욕망이라구요.

통일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루는 곳

이러한 문제를 두고 볼 때, 우리는 그런 차원 높은 자리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냐.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을 문제삼고 있는데, 하나님의 사정도 꿈나라인데 우리는 하나님의 심정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 통일교회 교인들은 벌 줄 수 없을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있는데 그런 생각이라도 들고 나오고, 그런 생각이라도 하겠다고 몸부림친다면 하나님은 우리 통일교회 교인들을 벌 줄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나라가 뭐라고 하든, 이 세계가 뭐라고 하든, 악한 세계가 아무리 원수시하더라도 통일교회는 남아질 것입니다. 그분이 없다면 일시에 사라질지 모르지만…. 통일교회는 '때려 봐라, 쳐 봐라, 통일교회가 없어지나. 반대해 봐라, 통일교회가 없어지나!' 하는 것입니다. 국가적으로도 반대하지 못하는 때에 우리는 세계적 기반을 닦아 놓았습니다. 세계적으로 반대하지 못하는 이때에 우리는 영계의 기반을 닦아 놓았습니다. 이것은 꿈 같은 이야기인 것입니다. 영계의 기반을 닦았다구요. 통일교회는 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역사시대에 선포하신 뜻을 가진 주체자가 있었으면 그 사랑을 어디에서 이룰 것이냐? 그래도 하나님의 사랑의 길을 가겠다고 허덕이는 무리를 통해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틀림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안 이상 틀림없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그분이 원하는 것과 통하느냐, 내가 생활하는 것이 그분의 생활과 통하느냐? 문제가 그렇게 돼요. 뜻을 대하는 우리들이기에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예요. 내 사정이 귀하냐, 그의 사정이 귀하냐? 내 심정의 차원이 높으냐, 그의 심정의 차원이 높으냐? 그것은 물어 볼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역사시대의 인연을 초월하지 못한 인간입니다. 역사적 사정의 관계를 벗어날 수 없는 인간입니다. 인연과 관계의 세계를, 인과원칙의 세계를 벗어나는 인생임을 자처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 있어서 우리가 비애를 느끼는 자아를 발견하고 극복의 대안을 추구하는 그 무엇을 가지고 신음한다면, 그 모색 방안이라는 것은 자기 자체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악을 대해 염려하는 새로운 주체가 있다면, 이것은 말할 수 없는 희소식이 아니겠느냐? 그러한 분이 계시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분을 위해서 얼마나 정성을 드려야 될 것이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청춘 남녀들이 첫사랑의 불길에 사로잡히게 되면 생사를 개의치 않고 그 사랑을 향해 돌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만일에 이러한 사랑의 길이 있다면 그 사랑의 길은 얼마나 강할 것이냐? 칼이나 어떠한 권위로도 막을 수 없을 것이 아니냐. 천년 만년 이 땅 위의 인간들의 권위를 종합해 가지고도 막을 수 없을 것이 아니냐. 그 길을 위해서 내가 미치고, 그 길을 위해서 내 전체를 희생해도 좋다고 할 수 있는 결의를 가진 무리가 있다면, 그 무리는 위대한 무리일 것입니다. 안 그래요?

거기에 미친 사람이 있으면, 그것은 역사적인 대사건입니다. 그 결과로서 역사에 없는 기적을 이루어 놓을 것입니다. 역사에 없는 방향 전환을 시킬 것입니다. 360도 악으로 돌았으면 360도 이상의 선으로 갈 수 있는 힘이 여기에만 있는 것입니다. 사랑의 길에만이 있는 것입니다. 지식의 길은 전후좌우 사방이 맞지 않으면 막히게 됩니다. 사랑의 길을 체휼하고 가는 길은 맹목(盲目) 중의 최고의 맹목적이요, 돌진 중의 돌진인 것입니다. 위험을 모르는 진행성을 가진 것이 사랑이라는 겁니다. 그러한 자리에서 천지애를 그리워하면서 자기 일신 전부를 저버리고 생사지경을 자유로이 넘나들 수 있는 무리가 있다면, 역사는 여기에서부터 소원을 이룰 수 있고, 새로운 방안을 모색할 수 있다는 가망성이라도 둘 수 있을 것이 아니냐.

축복가정이 본래의 전통적 이념과 어느 정도 일치되어 있느냐

이러한 의미에서 여기 있는 통일교회의 문선생은 공적인 이름을 갖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선생님이라는 칭호를 붙이는 것입니다.

이 문이라는 사람, '너는 무엇을 위해 가느냐? 너는 무엇을 위해 사느냐? 누구를 위해 사느냐?' 할 때, 그 무엇을 위해 산다는 그 무엇이라는 것이 자기 자신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자기를 위해 살고자 하는 사람은 사랑의 길을 못 찾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부모가 자식을 키울 때 젖먹이 때부터 '네가 이 다음에 커서 철이 들게 되면, 내가 너를 키워 준 것을 알아야 돼' 하고 교육하는 부모가 있다면 그 부모는 미친 부모라구요. 그렇게 하려면 소 새끼를 키워서 일을 시켜 먹는 것이 낫습니다. 자기 자식에게 내가 이렇게 사랑해 주었으니 너는 이 이상으로 해 달라고 하는 부모는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희생하는 것입니다. 주고 또 줘도 부족함을 느끼고, 또 줘도 주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거예요. 가치의 궁극을 영속적으로 자극시킬 수 있는, 미래의 소망을 계속적으로 보충해 줄 수 있는 길이 사랑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그러한 현장에서 주체 앞에 상대적 관념이 벌어지게 되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다 되는 것입니다. 그 이상 바라지 않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둘의 웃음 꽃이 피어나고, 새로운 세계가 연결되는 것입니다. 좋은 사람, 좋은 친구, 좋은 살림, 좋은 환경이 왜 좋으냐? 웃고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여러분은 통일교회를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내가 대한민국의 한 국민으로서 나라를 사랑하는 데는 어떻게 사랑해야 하느냐? 이 나라를 대통령에게만 맡길 것이 아닙니다. 대통령의 발판이 될 수 있는 대통령 이상의 충신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 충신은 자기의 욕망을 중심삼고 출세나 꿈꾸는 그러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한 사람은 충신이 못 됩니다. 현재 그 나라의 안일을 추구하는 백성 말고, 현재의 안일을 해결하려는 주체자로서의 대통령 말고 역사시대의 안일을, 역사 이후의 안일의 세계를 추구하는 백성이요, 해결지을 수 있는 주체자로서의 대통령이 있어야 그 나라가 새롭고 차원 높은 미래의 역사시대에 연결될 수 있는 길을 가질 것이 아니냐. 그런 의미의 충을 다짐하고, 그런 의미의 효를 다짐하며 가기 때문에 우리는 이해를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보라구요. 죽도록 일을 하고 오해받기 일쑤라는 것입니다.

선은 강한 것이고 당당한 것입니다. 빛나는 선한 자리에 섰고, 그렇게 살아왔다는 신념을 가진 사람들은 무서운 사람입니다. 그 나라의 권위와 그 나라의 칼이 감히 그들을 제거시키지 못합니다. 그러한 신념을 갖고 나가는 패가 통일교회 패인 것입니다. '너는 무엇을 남길 것이냐? 너는 무엇을 남길 것이냐? 네가 악을 위해 태어나지 않고 선을 위해 태어났다면 너는 일생을 살고 난 후에 선하였더냐, 악하였더냐? 그 종합적인 결산적인 결론이 뭐냐?' 할 때 악하였다면 그것은 비참한 것입니다. 선하였다 하게 되면 그것은 자랑입니다.

어디에서 그것이 결정되느냐? 그것은 공중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선과 악은 현재에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역사와 미래의 해결점은 현재에서부터입니다. 선을 추구하는 데 있어서, '아, 오늘은 잘못했지만 내일은 그러지 않겠다' 이런 변명은 필요 없는 것입니다. 오늘이 문제입니다. 대한민국을 사랑하는데 그 누구보다 사랑하느냐? 그것이 문제입니다. 내가 아내를 사랑하는데 있어서 지금까지 흘러가는 역사시대의 인연을 따르는 입장의 남편으로서 아내를 사랑했느냐, 그런 아버지로서 자식을 사랑했느냐, 그런 형제로서 사랑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내용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는 가정 형성의 방법도 달라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축복가정이 지금 문제가 되어 있습니다.

축복가정이 무엇이냐? 36가정이 무엇이냐? 이건 공산주의에도 없는 조직이 아니냐. 세계적으로 문제 될 것입니다. 그런데 미스터 문이 제시한 본래의 전통적 이념과 거기에 처해 있는 현재의 자체들과는 어느 정도 일치되어 있느냐? 이것이 일치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차원이 달라지게 될 때는 재차의 혁명이 있어야 됩니다. 재차의 몸부림이 있어야 됩니다. 그러지 않으면 거기에는 청산이라는 자제가 남게 될 것입니다. 역사시대의 종말적인 심판 외에 통일교회 자체내의 심판이 있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그런 말이 성립되는 거예요.

통일교회의 움직임은 세계를 위한 것

우리는 이러한 관점에서 새로운 차원의 입장, 우리로서의 주체가 아니라 또 다른 고차원적인 주체로서의 입장에 선 가정관을 그려 나오는 무리가 되어야 됩니다. 개인이 추구하는 인생 가치관이 다른 것입니다. 국가관이 다른 것입니다. 악주권을 초월해 가지고 차원 높은 하나님의 선주권을 중심삼고 나가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기성교회에서는 통일 교회를 정당조직이라고 모략하고 있습니다. 그런 시시한 말은 그만두라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정당을 조직한다면 선전하고 나섰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공석에 얼굴을 나타내지 않고 비운의 사나이로 몰리며 나온 것은, 그런 것을 하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세계가 문제인 것입니다. 어차피 지금까지 그들이 자랑하던 주권시대는 역사와 더불어 영속적인 주권 기반으로 남아지지 못합니다. 그들의 역사는 변질되고 발전해야 할 운명에 처해 있는 주권 역사입니다. 선생님은 이것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후퇴적인 입장에 서서 꿈꾸고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세계가 문제라구요. 세계를 문제시해 가지고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통일교회가 가는 길입니다.

진정한 의미의 남편으로서 아내를 어떻게 사랑하느냐? 다르다구요. 나라를 어떻게 보느냐? 다르다구요.

예수님의 관(觀)은 어떠했느냐? 4천년 역사 동안 메시아가 오기를 그렇게 고대했던 그 뜻, 그 뜻을 이루기 위해 30여 평생 동안 몸부림치다 비운의 종국을 바라보면서 '내 뜻대로 마시옵고 당신의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최후의 절규를 하는 그 입장은 얼마나 비참했겠습니까? 자, 예수님이 그러기 위해서 왔어요? 다 잃어버리고 죽으려고 이 땅에 왔습니까? 아닙니다. 거기에는 인간 세상의 역사적 사정이라든가 모든 것이 엇갈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같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엇갈려 가는 것입니다. 벌써 안 되겠기 때문에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미 돌아섰다구요. 타고 넘지 않으면 돌아서는 길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돌아섰다는 것입니다. 돌아서니까 돌아서지 말라고 아우성치는 것입니다. '아이고, 내 아내, 내 부모, 내 아들딸' 하며 야단하다가는 다 망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나선 것이 통일교회의 무리입니다. 여러분들, 부모한테 배척받았지요? 세상에 아무리 미욱한 사람도 그렇게 만드는 것은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욕을 먹고 이일을 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길이 없으니까 이 놀음 하는 것이 아니겠어요? 불원한 장래에 통일교회의 움직임이 세계화될 때가 올 것입니다.

만일에 우리가 가만히 있으면 그것은 영계에서 다 하게 되어 있다구요. 영계에서. 우리 통일교회 여러분들은 영계가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지요? 「예」 증거를 많이 받았다구요. 이것이 또 증거를 너무 많이 받다 보니 습관화가 되었구만. 습관화되더라도 자기가 질적인 요인을 갖추어 가지고 그 습관의 주체적 입장에서 습관화되면 괜찮은데, 질이고 무엇이고 관례적인 습관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뭐 영계에서는 통일교회를 증거하니 수많은 영통인들의 증거를 들었다고요. 그것이 관례적으로 되어 버렸다구요. 이것은 위험한 것입니다. 관례는 통하지 않습니다. 의례적으로 출입하는 것은 통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그걸 알아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때야말로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시던 그 기도가 여러분의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 이상의 기도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아바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시옵고 당신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하며 죽어 가던 예수님 말고, '내 뜻 말고 당신의 뜻대로 하겠사오니 이제 명령하시옵소서' 할 수 있는 또 다른 주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영계가 이 땅 위에 천사를 시켜서 일하던 역사가 사람을 시켜서 일할 수 있는 역사로 옮겨질 수 있는 것이 아니냐. 그리하여 그러한 사람들이 악주권의 세계 앞에 하나님을 중심삼고 주도적인 입장에서 선의 터전을 세계화시키게 될 때, 그것이 우리가 바라는 선주권의 세계가 아니냐. 안 그래요? 이것은 대한민국을 중심삼고 시시하게 주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의 사상은 인류와 영원히 공존할 수 있는 뜻

그러면 역사시대에 있어서 뜻을 진정으로 대하던 분이 누구냐? 하나님, 그 다음은 예수입니다. 아무리 봐도 예수밖에 없다구요. 그렇지 않아요? 당장에 죽을 운명에 처해서도 도망가려 하지 않고 오히려 목을 들이대면서 '나는 죽겠습니다' 하는 입장에서, 내 뜻대로 마시옵고, 당신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한 사나이는 역사시대에 예수 이외에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뜻을 대함에 있어서 역사적인 대표자는 누구냐 할때,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예수입니다.

그러면 예수는 무엇을 바라는 자리에서 생명을 내놓았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자기가 바라는 뜻을 중심삼은 것이 아니라 하늘이 바라는 뜻을 중심삼은 세계관이었습니다. 그러한 세계가 나타나면 이 땅 위의 독재자와 같이 그것을 마음대로 밟아 치우고, 자기 일신의 야욕을 충족시키고자 하는 패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한 세계가 되면 어떨 것이냐? 달라질 것입니다. 그것은 출발도 선이요 끝도 선인 것입니다. 그 선은 지금까지 인간이 요구해 오던 애매한 선이 아니라 그 출발에서부터 결론에 이르기까지 확정적인 선일 것입니다. 그런 선을 향하는 생애 노정이, 역사시대가 거기에서 출현될 것이 아니냐. 그 역사시대를 우리는 모르고 있습니다. 못 봤다는 겁니다. 여러분, 보았습니까? 그러한 의미에서 뜻을 대하는 역사시대를 두고 보면, 4대 성인이 있었지만 그 성인 가운데 그래도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나는 독생자다. 나는 신랑이요 너희는 신부다. 하나님은 내 아버지다'라고 정서적인 면에서 주장한 분은 예수입니다. 그 이상 주장한 사람은 없습니다.

이러한 것을 볼 때, 절대적인 선의 주체적인 입장에 설 수 있는, 역사 시대에 뜻을 대하는 입장에 있어서 대표적인 사람이 그 누구일 것이냐? 아무리 찾아봐도 예수 외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사상을 남기고 간 그의 사상을 이어받은 기독교 문화가 세계적인 문화로서 발전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예수와 같은 사상을 전부 가지면 기독교가 망할 수 있느냐? 안 망한다는 겁니다.

예수의 사상은 어떠한 사상이냐? 나는 너를 위해서 죽는다, 나는 인류를 위해서 죽는다, 뜻을 위해 죽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뜻은 무엇이냐? 인류를 이탈한 뜻이 아니라 인류와 영원히 공존할 수 있는 뜻입니다. 뜻의 선두에 서서 죽었기 때문에 인류 앞에 죽음길을 교시하자, 인류 앞에 효성의 길을 교시하자, 인류 앞에 충성의 길을 교시하자, 전부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인류 앞에 보람된 가치의 길을 소개하자는 거예요. 거기에서 보람된 가치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전부 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그러한 사상을 가진 종교가 있습니까? 기독교? 어떤 책임자가 하는 말이 '요즈음 목사들은 사기꾼으로 인정하고 대해 줘야 된다. 목사는 사기꾼으로 결정해 놓고 시작해야 된다'고 하는 거예요. 이런 말을 듣고 나는 기가 막혔습니다. 야, 목사가 그럴 수 있느냐? 하나님은 열매가 되라고 했는데 추풍 낙엽이 되어 버렸습니다. 소도 거기에는 똥싸기를 꺼려 하는 잎이 되어 버렸습니다. 기가 막힌 말이라구요. 사기꾼으로 인정하고 대해야 된다면 그것은 다 된 것이지, 거기에 더 이상 바랄 것이 있어요? 거기에 예수의 전통적 사상이 남아요, 안 남아요?

통일교회는 하늘의 심정을 위로하기 위한 종교

뜻이 무엇이냐? 뜻은 내가 사는 길이요, 가정이 사는 길이요, 국가가 사는 길이요, 세계가 사는 길이요, 인류가 사는 길입니다. 여기에서 인류하게 되면 역사적인 의미의 인류예요. 과거 현재 미래를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하나님도 재미를 보며 살 수 있는 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슬프시다면 세상이 재미있을 게 뭐예요?

어제 저녁까지는 뺨을 대고 '내 아들아, 내 딸아' 하며 사랑해 주었지만, 지금 화가 잔뜩 나 있는 상태인데 그 아들딸이 와서 '엄마, 아빠' 하며 '요 시간도 틀림없이 나를 사랑해 줘요' 하면서 어제같이 사랑해 주기를 바란다면, '그래 해주마' 하며 사랑해 줄 수 있습니까? 갑자기 그럴 수 있어요? 인간 자체도 그렇게 되기가 힘들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나기 전부터 아버지의 기분이 좋아야만, 좋게 될 수 있는 상대가 나와야만 좋은 것입니다. 안 그래요? 그러면 만나기 전에는 기분이 나빴는데 좋은 상대가 나오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을 탕감하는 과정이 있다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기분 나쁘게 한 패가 그 아들딸보다 더 가까운 패일 때에는 그 아들딸이 아무리 위로하더라도 위로가 안 되는 겁니다. 안 그래요? 그렇지만 그 위로하는 패가 기분 나쁘게 한 패 이상이 되게 될 때는 한꺼번에 다 쓸어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심정 세계의 승리적이고 보람된 길입니다. 이것이 있기에 우리는 구원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타락한 인간의 후손으로 태어났습니다. 타락한 인간 조상 아담 해와의 핏줄을 받은 우리 인간은 용서받을 수 없는 패지만, 타락 전 아담 해와 이상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는 길을 가지고서 '하나님, 그 슬픔은 다 잊어 버리소서' 하게 될 때 '어 어' 할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이하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심정 세계의 원칙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차원의 뜻이 우리 통일교회에는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통일교회이기 때문에 타락 이전의 사람으로 돌아가자는 구체적인 내용이 문제되는 것이예요. 안 그래요? 자, 그런데 하나님은 지금까지 슬퍼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 같아요? 슬퍼하고 계십니다. 그 슬픔을 무엇으로 위안할 것이냐? '하나님 제가 있으니 슬픔을 위로받으소서' 해가지고 되겠습니까? 안 됩니다. 그 이상의 사랑의 심정을 지녀 가지고 '아버지여, 당신은 이러이러한 슬픔을 가지신 아버지이기에 그 사정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며 눈물을 쑥쑥 흘리면 그것으로 통한다는 거예요. 알겠어요? 변명이 필요 없습니다. 백과사전이 필요 없다구요. 성경 66권이 필요 없다구요 그래서 성경은 천국은 무불능통한 자리에서 온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에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다'고 되어 있습니다. 알겠어요? 역사는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통일교회를 책임지고 있는 이 사람도 하나님의 심정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으로서, 인간이 타락하던 그 순간 슬픔을 느꼈던 하나님의 마음을 붙들고 더욱 슬퍼할 수 있는 나를 어떻게 발견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보다 더 비참한 슬픔을 가지고 몸부림치며 '당신이 이럴 수 있느냐'고 할 수 있는 나의 심정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노아면 노아 할아버지가 120년 동안 수난길을 통하여 배를 지었던 그 수고가 한 순간의 실수로 말미암아 역사의 오점으로 남아질 수 있느냐, 그것이 그럴 수 있느냐 하며 노아 할아버지 이상 슬퍼할 수 있는 내가 되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국경을 초월하여 수많은 나라를 넘나드는 집시의 무리를 끌고 다니는 행각의 노정을 걸었지만 그 가운데, 그 수난의 역사 가운데 하늘의 위안이 있어서 축복해 주었는데, 그 모든 축복이 깨지는 그 자리를 볼 때, 아브라함이 그럴 수 있느냐 하는 심정, 그를 대하던 아버지의 가슴이 얼마나 아팠는가 하는 것을 알아 가지고 그 이상 몸부림칠 수 있는 자기 발견이 문제인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예수를 중심삼고 볼 때도 예수의 30년 생애의 삶이 그것으로 끝날 것이었더냐, 그것을 대하는 하나님은 얼마나 슬펐겠느냐 하며 그 슬픔 이상의 슬픔을 내가 어떻게 발견하느냐?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하늘은 그것을 원할 거라구요. 자기의 죄지은 사연을 중심삼고 이러고 저러고 하는 회개가 아닙니다. 보다 차원 높은 입장에서 새로운 자극적인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몸부림에서부터 하늘도 출발하고, 인생도 해결이 벌어질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심정을 부르짖고 나오는 것이 통일교회입니다.

하나님 이상으로 눈물을 흘려 보자

나라를 위해서 얼마나 눈물을 흘렸느냐? 하나님의 슬픔을 대해서 얼마나 눈물을 흘렸느냐? 어떠한 가정에 있어서 아들이 있다면 그 중에 맏아들이 부모를 대해서 가슴 아프게 할 때, 나이 어린 동생이라도 그것을 바라보고 그 형으로 인해 슬퍼하는 부모 앞에서 흐느껴 울면서 '어머니 아버지, 형을 때리기 전에 저를 때려 주시고, 형을 욕하기 전에 저도 그럴 수 있으니 그렇게 되지 말라고 저에게 채찍질해 주십시오' 하는 아들이 있다면, 부모는 거기에서부터 아픈 마음을 풀 수 있는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방향을 돌릴 수 있는 새로운 길이 나오지, 그 이하에서는 나올 수 없을 것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이런 것을 볼 때, 하나님의 소원 성취가 어디서부터 시작될 것이냐? 일이 아닙니다. 돈이 아닙니다. 나라가 아닙니다. 심정입니다, 심정.

아담 해와가 에덴 동산에서 쫓겨날 때 하나님이 얼마나 슬펐겠느냐, 그 이상 슬퍼할 수 있는 내가 되자는 거예요. 쫓아낸 하나님이 극복할 수 없는 경지의 슬픔이 있었을 텐데도 불구하고, 극복할 수 없는 그 슬픔을 가지고 아들을 사랑할 수 있는 하나님이 되게 왜 자극을 못 시켰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결국 무엇이냐 하면, 아담 이상 내가 눈물을 흘려 봤느냐는 겁니다. 아담을 대하던 하나님 이상으로 눈물을 흘려 보자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날 타락한 인류에게 있어서 새로운 복음의 길이요, 새로운 부활의 길이요, 새로운 소망의 출발의 길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 그러므로 아담 이상으로 울어 보자는 거예요. 누구를 위하여 우느냐? 자기를 위해서 우는 것 말고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 울라고 할 수 있는 입장이 못 되어 있습니다. 뜻을 위하여 울라고 하는 입장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심각한 자리에 선 예수와 제자되는 베드로, 요한, 야고보는 그 종자가 달랐다는 겁니다. 편안히 잠잘 수 있는 제자와 생명을 내놓고 몸부림쳐야 하는 예수는 입장이 달랐다는 것입니다. 심정이 달랐다는 거예요. 밤을 새운 모습은 비슷했지만 내용이 달랐습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의 뜻을 대하는 내가 되어야겠고, 아담 해와를 중심삼고 그러한 심정을 느껴야 되겠습니다. 120년 동안 수난길에서도 하늘을 위한 노력을 계속적으로 가중하던 노아의 인격을 바라면서 그 이상 더 어려운 자리에 들어갈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그 노아 할아버지가 '이제 그만 하소' 할 수 있는 자리, 하나님까지도 '야, 너 이제 그만 해도 된다' 할 수 있는 자리까지 가야 되겠습니다. 그러더라도 내가 가야 할 길이 남아 있다면, 뭐 이런 하나님이 있느냐고 하면서 뿌리치고 가는 사람이 있다 할 때, 하나님이 심판할 것이냐? 심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부모가 그렇지 않아요? 사랑하는 효자가 가는 길을 막고 '이 자식아, 이제 그만 해도 된다' 할 때, '어머니 아버지, 저는 이렇게 해야만 됩니다, 이것을 위해 태어났고 이것을 위해 죽어야 됩니다' 하면서, 효의 길을 막는 부모를 밀어 제치고 간다고 해서 불효되는 이치는 없는 것입니다.

충신도 마찬가지입니다. 군왕이 가지 말라고 하더라도 군왕에게 항거 하면서, 군왕을 밀어 제치고 죽음을 각오하고 군왕을 위해 간다고 해서 역적이 될 수 없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모든 법세계를 초월하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심판이니, 무슨 법률을 통해 치리하는 세계를 초월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세계가 심정의 세계입니다.

여러분이 하는 기도와 선생님이 하는 기도는 다릅니다. 달라요. '아버지' 하는 그 말은 같지만 그 내용은 다르다구요.

통일교회가 나라를 사랑했다는 것은 역사의 판결 기준이 될 것이다

자, 뜻을 대하는 우리들, 우리는 같은 운명길에 섰습니다. 욕도 먹어 보았습니다. 동료간에 불신도 당해 보았습니다. 부모의 불신도 받아 보았습니다. 스승의 반대도 받아 보았습니다. 나라의 반대도 받아 보았습니다. 나라의 반대뿐만이 아닙니다. 여기 서 있는 사람은 대한민국뿐만이 아니라, 일본에 가면 일본 나라가 미워하는 것입니다. 미국에 가면 미국 나라가 나를 미워하고 영국에 가면 영국 나라가 미워하는 거라구요. 독일 가면 독일 나라가 미워하는 겁니다. 내 나라에 오면 내 나라까지 미워합니다. 그렇다고 원망하지 않습니다. 미워해 가지고 살 길이 있다면 오죽이나 좋겠습니까? 망하라고 하는 사람은 망하지 않고, 망하라고 한 사람이 망하는 것입니다. 그런 무서운 놀음이 역사에 일어나는 것을, 엇바뀌는 결과가 되는 것을 선생님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주를 못 하는 것입니다.

탕감시대, 가인 아벨을 중심삼은 탕감시대가 아직 남아 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통일교회를 고생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탕감시대가 지나가면 통일교회는 어떻게 될 것이냐? 그걸 생각해 보십시오. 탕감시대를 지내고도 남을 수 있는 복받침과 사무침을 느껴야 되겠습니다. 하늘에 대한 사랑의 심정에 사무쳐야 되겠습니다. 그렇게 가서 그것이 어느 한계점을 넘게 될 때는 악이면 악이 최대의 권한까지 행사할 수 있는 한계선이 있을 것이고, 선이 선으로서 관리할 수 있는 한계점이 있을 것입니다. 이 한계점만 넘어서는 날에는 통일교회는 고생하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통일교회를 핍박할래야 핍박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핍박하다가는….

선과 악은 영원히 남겨지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에 가서는 반드시 어느 하나로 귀결되는 판결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가 나라를 사랑한다, 사랑했다는 것은 역사의 판결 기준이 될 것입니다. 어떻게 사랑했느냐? 그것은 통일사상과 더불어 길이 남아질 것입니다. 통일교회 사람들 모가지를 다 잘라서 하나도 남지 않게 만들더라도 세계에 퍼지는 통일교회의 책은 남아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이 문제다. 사탄들은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생각할 때, 지금 뜻을 대하는 사람들이 예수 시대에 뜻을 대하던 그 이상의 자리에 서지 않고는 예수님께서 다시 오겠다고 한 약속의 세계가 올 수 있겠느냐? 다시 찾아오겠다고 하던 예수님이 못 오는 것이 아니냐. 그건 이론적인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시대보다 나을 수 있는 때가 있어야 될 겁니다. 예수의 제자 이상의 제자들이 자신의 생사지경을 초월하여 하늘을 사랑하기에 미쳐야 합니다. 밤낮 없이 지새워 가면서 가는 길이 바쁘다고 재촉하는 입장에서 '예수님, 기도보다 더 바쁜 일이 있는데 여기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할 것이 뭐 있습니까? 갑시다. 밤새워 기도하는 것보다 더 바쁜 일이 있는데 이럴 수 있소?' 하며 기도하는 예수를 끌고 나서는 제자가 있었다면 예수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안 그래요?

통일교회 여러분, 말로는 '선생님'이라는 말을 잘합니다. 저 분은 우리를 위해서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잠자는 시간이라도 '가야 할 길이 남아 있는데, 선생님이 잘 수 있소? 하며 깨워 가는 제자, 선생님이 가지 않겠다고 하면, 발을 꺼꾸로 끌고라도 갈 수 있는 제자가 있다면, 여기에 불평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미스터 문이 아닙니다. 따라서 그런 사람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가자' 하는데 눈치를 보며 적당히 하려는 사람, 선생님은 싫습니다. 여기면 여기고, 저기면 저기지 중간은 싫습니다. 이것이 선생님의 생활관(生活觀)입니다. 생애를 그러한 표준에서 싸워 나온 것입니다. 선생님의 눈은 돌지 않았습니다. 선생님 생각은 그릇되지 않았습니다. 천하가 뭐라고 하더라도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아무리 세계가 반대를 하더라도 졸장부는 안 될 것입니다.

이러한 운동이 대한민국에서부터 세계로 뻗어 나가야 합니다. 지금 일본이라든가 구라파의 움직임을 두고 볼 때…. 주체국인 한국에 있는, 소위 청파동을 출입하는 식구들은 상을 받아도 먼저 받아야 되고, 심판을 받아도 먼저 받아야 될 것입니다. 틀림없이 그럴 것입니다. 우리가 주체국으로서 책임을 어떻게 하느냐 하는 문제가 심각한 것입니다.

예수시대에 뜻을 대하던 그 한 분의 역사가…. 오늘날 끝날에 있어서 통일교단을 중심삼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던 예수 이상의 심정을 가지고 '당신의 슬픔을 알았다'고 하며 결의할 수 있는 무리가 세 사람뿐만이 아니라 천만 인이 되고, 이곳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국가로 연결되게 될 때는, 그 무리를 통해서 하늘의 뜻이 시작될 것이 아니냐. 그것은 틀림없습니다.

뜻을 위해 위신, 체면 없이 보람있게 살자

여러분은 자신을 위해서는 땀을 많이 흘렸습니다. 자신의 어려움을 중심삼고는 눈물을 많이 흘렸다는 것입니다. 선이라는 것은 자기를 중심삼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희생시키는 데서부터 선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 등등을 볼 때, 선의 역사를 창건하는 하늘은 희생을 시켜 가지고 세계를 구원해 나온 것입니다. 그것이 역사입니다. 이것은 복귀원리를 공부한 사람은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엄연히 역사가 그렇게 되어 있고, 또 선생님도 지금까지 일대를 그러한 표준 밑에서 싸워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뜻이 문제입니다. 뜻이 어려움을 당할 것을 생각하면 자기의 존재 가치고, 위신이고, 체면이고 없는 것입니다. 똥구덩이에 거꾸로 박혀도 좋다는 것입니다. 그 위신이라는 것은 죽은 다음에는 똥개도 핥지 않는다구요. 하늘나라의 똥개도 핥지 않는다구요. 하나님의 위신이 엉망으로 되어 있는데, 어머니 아버지의 위신이 엉망으로 되어 있는데, 효자의 명분을 갖겠다고 얼굴을 내밀 수 있습니까? 충신이 자기 위신을 차려요? 위신 찾고 체면 찾는 패들은 멀었다구요.

자, 통일교회 문선생에 대해 까놓고 얘기해 봅시다. 내가 위신을 찾으려면 누구보다도 예민한 사람입니다. 눈치가 빠르다구요. 사리 판단에 예민하다구요. 그런데 왜 지금까지 누더기를 뒤집어쓰고서 비참한 사나이 노릇을 하느냐? 밥이 그리워서 이래요? 뭐 딴 것이 그리워서 그래요? 그것은 나 자신, 내 손으로 다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머리내기를 해도 누구에게 지지 않는다구요. 무슨 내기를 해도 누구에게 지지 않는다구요. 백방으로 소질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거 해서 뭘 하느냐는 겁니다. 그걸 다 타진해 보고 돌아선 길이라구요. 이 길밖에 없기 때문에 이 놀음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보람있게 살자 이거예요.

보람있게 살자는 것이 욕먹고 사는 거예요? 선생님이 어디를 가게 되면, '저 사람이 통일교회 문 아무개라지?' 뭐 별의별 말을 다 합니다. '그거 허우대는 잘났구만,상통은 그래 보이지 않는데' 이러며 뭐 어쩌고 어쩌고…. 그것은 선생님의 뼈가 녹더라도 잊지 못합니다, 잊지 못해요. 선생님은 무골충이 아니라구요. 이 통일교회 패들, 뼈 없는 사내, 아낙네들이 많다구요.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 그런 사람들은 오다가다 다 망해 죽는 것입니다.

이 일을 시작할 때는 개인적인 반대를 각오했고, 부모에게 몰릴 것을 각오했고, 처자 앞에 반대받고, 친지 앞에 고립될 것을 각오했고, 나라 앞에, 세계 앞에 몰릴 것을 각오했습니다. 각오하지 않았을 것 같아요? 몇백 번, 몇만 번 각오한 사나이입니다. 갈 길이 정해져 있다구요. 여러분들은 가지 못하더라도 나는 이렇게 간다 하는 것이 정해져 있다구요.

그러면 선생님이 가는 세계, 선생님이 가는 심정의 세계, 하늘나라가 있으면 그 하늘나라의 유업을 받고 싶습니까? 그것은 여러분의 입장에서는 안 됩니다. 뜻을 대하던 예수의 전통적 사상을 중심삼고 사랑의 심정을 거치는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계승되지 않는 것이 아니냐 하는 것을 두고 볼 때, 선생님도 그 운명길에서 허덕이고 있는 사람이요, 여러분은 더 허덕여야 될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통일교회 선생님이 필요한 것입니다. 일본 사람도 그렇고, 독일 사람도 그렇고, 미국 사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번에 교수단들이 한 60여 명 일본을 다녀왔다는 보고를 어제 들었는데, 전부 다 눈물을 흘리며 통곡을 했다는 말을 들었어요. 그거 왜 그랬느냐고 했더니 창피했다는 겁니다. 부끄러웠다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나온 통일교회가 일본에 와서 이러고 있는데…' 그것뿐인 줄 알아요? 세상에서 부끄러운 것이야 가릴 수 있지만, 영계에 들어가서 부끄러운 것은 어떻게 할 것이냐? 영원한 부끄러움은 어떻게 할 것이냐? 세상을 중심삼고 하는 말이 아니라구요. `

인생살이는 영계에 다이얼을 조절하는 삶

보라구요. 여러분이 죽게 된다면…. 아무리 세상에서 뭐 일국의 대통령을 했던 사람이 죽었다고 합시다. 자, 영계에 들어갈 때 누구 친구가 있습니까? 뭐 죽어지면 연기가 사라지는 것처럼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라면 모르지만, 통일교회 원리 말씀대로 영계가 있고, 영인체가 있다고 할 때는 어떻게 되겠어요? 영계는 미지의 세계인 것입니다. 역사시대의 미지의 세계입니다. 거기에 대한 경험이 있습니까? 혼자 가는 것입니다.

사망의 세계와 생명의 세계, 악한 주권자와 선한 주권자의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구요. 그 교차로에 서서 악을 제거시키고 선한 곳으로 간다고 주장할 수 있는 배포가 있느냐? 있어요, 없어요? 소위 통일교회 교인이라고 하는, 나는 부장이고 나는 누구누구인데 하는 사람들, 있어요, 없어요? 이게 철모르고 잠자겠다고…. 잠이 와요? 그 세계가 없으면 몰라요. 없다면 문선생도 이 놀음 안 한다구요. 대한민국에서 이만 하게 만들었으면 내가 누구 못지않은 일인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 놀음 안 한다구요. 그 미지의 세계에 안내자가 있었느냐? 동서남북 방향도 모르는 것입니다. 미개척 세계에 혼자 가는 것입니다. 사방을 바라보니 뚝 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마중 나온 패들이라고 사탄의 군대가 와서, '차렷? 하면, 그거 기분 좋겠지요? 생각해 봐요. 그렇게 되어 있다구요. 그렇지 않다면 통일교회 문선생이라는 사람이 나오지를 않았습니다.

자, 이렇게 해서 가는 데서부터, 안내되는 순간에서부터 가중되는 슬픔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그 가중되는 상충의 역사, 가중되는 곡절의 비운의 역사가 한꺼풀 벗어지는 날에는 영원히 포위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알겠습니까, 무슨 말인지? 그것은 지금부터 조정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라디오를 조정할 때 안테나에서 합니까? 난데없는 조그마한 다이얼로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인생살이는 다이얼을 조정하는 삶입니다. 잘 맞추는 날에는 직행하는 것이요, 못 맞추는 날에는 영속적인 후퇴일 것입니다. 그때의 비참함은…. 그때는 눈물을 흘릴 것입니다. '아이고, 나 이럴 줄 몰랐소' 그것이 여기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관련이 안 되겠나 생각해 봐요. 기가 막히겠어요, 안 막히겠어요?

그렇지만 땅 위에서 다이얼을 잘 맞추고 직행하는 삶을 살다가 죽는 날에는 역사적인 성인들이 나와서 우리를 환영할 것입니다. 공자도 나올 것이고, 예수도 나올 것이고, 석가모니도 나와서 깃발을 들고 하늘의 공신이라고 풍악을 울리며 환영할 것 아니냐. 이런 것 생각해 봤어요?

영계가 반가이 맞아 줄 수 있는 길을 가자

어떠한 길을 가겠습니까? 땅 위에서는 초라하고 이름 없는 생애를 마치고 갔다 하더라도 저나라에 있어서 그럴 수 있는 그날을 맞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불행한 사람입니까? 선생님은 이것을 알기 때문에 오로지 그 길을 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땅 위의 무슨 권위와 무슨 자랑이 있다 해도…. 보라구요. 지금까지 이름나고 소문나게 한 것은 전부 선생님이 제시한 것입니다. 사장도 만들어 주고 대부흥 강사도 만들어 주었습니다.

선생님이 대한민국에서 공석에 나서는 것을 보았습니까? 여러분들은 새벽 미명에 이렇게 와 가지고 선생님을 만나서 말씀을 듣곤 하지만, 내가 공석에 나타나려고 하지 않는다구요. 세상에서는 출세하려면 전부 자기 선전하지요? 요전에 어느 기관에서 하는 말이 통일교회는 왜 선전할 줄 모르느냐고 합니다. 통일교회는 선전해 가지고 출발한 교회가 아닙니다. 제사를 지낸 후에 그 제사가 잘 되었느냐 못 되었느냐 하는 것을 문제시하지, 제사 드리는 과정에서는 왈가왈부하지 않는 것입니다. 통일교회는 선전하지 않습니다. 선전하지 않는다고 해서 통일교회가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망할 것 같으면 선생님이 벌써 보따리 쌌습니다. 알겠어요? 여러분보다 생각이 더 많은 사람이라구요.

머리의 크기를 보더라도 여러분이 따를 수 없는 큰 사이즈라구요. 또 얼굴을 보세요 눈을 보니 허술하게 생겼습니까? 큰 귀를 보니 누구의 말을 듣게 생겼습니까? 남의 말은 내가 실험해 보기 전에는 안 믿는 사람입니다. 똑똑한 사람이지요. 지독한 사람입니다.

어렸을 적에 어머니 아버지가 사랑한다고 무엇을 주면 그것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런 것을 주는 것이 사랑인가. 내가 찾고 있는 사랑은 그런 사랑이 아니다' 그런 거예요. 사고방식이 달랐던 아이였습니다.

자, 왜 이러느냐? 미지의 세계, 영계가 반가이 맞아 줄 수 있는 길을 가기 위한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아요? 반가운 사람이 온다 하게 되면 십리길도 마다하지 않고 나가지요? 국경까지 가 가지고 발끝은 이쪽에 있지만 몸뚱이는 다 넘어가서 맞는 것입니다. 그래요, 안 그래요?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나라의 군족들이 국경선까지 나와서 발은 이쪽에 있지만 몸뚱이로 얼른 오라고 맞이해 줄 수 있는 놀음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 거기에서 환영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그것이 불행한 것이예요? 그것을 바라고 나가는 것입니다. 세상은 뜬구름 같고, 나그네와 마찬가지라구요.

보라구요. 미욱한 사람들은 죽을병에 한 번 걸려 봐야 된다구요. 심장이 똑딱똑딱하다가 뚝- 딱- 하게 되면 '아이고, 나 죽는다!' 하며 눈이 뒤집어져 가지고 심각해집니다. 그때는 해결 방안이 없습니다. 그때는 통일교회 교인도 '아이고, 선생님?´ 하고 부르게 되어 있다구요. 그렇게 심각한 것을 죽기 전에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내가 가는 데는 어떠한 사람으로 가느냐? 성현들은 외면하고, 악한 사탄의 대열이 와서 거꾸로 끌고 가면 갈수록 비운에 부딪치는 사람이 아니라, 가면 갈수록 영광의 자리에, 아버지 앞에, 본향 땅에 돌아간다 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 가야 하는 것입니다. '금의 환향'이라는 말이 있지요? 고향을 떠날 때 비참하게 떠났으면 금의 환향하는 시간은 더욱 영광의 시간이 될 것입니다. 알겠어요? 그 생애가 비참하면 비참할수록 그 시간이 절망의 시간이 아니라 자랑의 시간이요 영광의 시간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원칙적인 기준을 중심삼고 하나님의 뜻대로 해야

이렇게 역사시대를 두고 볼 때에, 뜻, 하나님의 뜻, 그 하나님의 뜻만 가지고 뜻이 이루어져요? 하나님의 뜻이자 누구의 뜻? 내 뜻. 예수님의 뜻이자 하나님의 뜻이 되었더라면 예수님은 죽지 않았다는 거예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뜻과 예수님의 뜻이, 예수님의 선 자리가 달랐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구의 대표냐? 하나님을 대신한 사람이요, 인간을 대표한 사람입니다. 인간을 찾아왔는데, 가정, 종족, 민족, 국가를 찾아왔는데 그 국가, 종족, 가정, 개인을 다 잃어버리고 나니 예수는 얼마나 슬펐겠습니까? 자기가 본래 서야 할 자리에서 볼 때에는 하나님과 예수, 하나님과 아들의 입장이 엇갈렸다 이것입니다. 알겠어요? 하나님의 뜻대로 하자니 인간의 뜻에 위배되고, 인간의 뜻대로 하자니 하나님의 뜻에 위배되니 중간 입장에서 몸부림치다 간 것이 예수의 생애가 아니냐.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통일교회의 뜻대로 하자니 세상의 방해가 많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자니 인간의 방해가 많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뜻대로 하면 방해는 무슨 방해예요? 때는 다르지만 그와 연결된, 시차적으로 맞먹는, 상대적 내용으로 맞먹는 때가 우리 통일교회가 바라는 때가 아니냐 하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뜻을 대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내가 자랑하고 싶은 나라, 내가 자랑하고 싶은 세계, 예수가 자랑하고 싶은 나라, 예수가 자랑하고 싶은 세계가 어디 있느냐? 우리는 그것을 목표로 삼고, 자랑할 수 있는 내 자신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터전을 남기자는 것입니다. 생명을 버릴 것을 각오하고 또 타락한 이상의 심정을 갖추어 가지고 역대 선지자들의 이상의 심정을 가지고 이 길을 남겨 놓고 가자 하는 것이 통일교회를 믿는 신앙자들이 아니냐. 이렇게 보는 겁니다.

자, 그런 입장에서 여러분이 그런 자세에 도달해야 되겠습니다.

나라를 위해서, 식구를 위해서, 형제들을 위해서 얼마나 눈물을 흘려 보았느냐, 진짜 사랑해 보았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러한 문제를 중심삼고 통일교회는 심정적인 역사를 추구해 나가니만큼 역사시대의 예수의 심정보다 낮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중심삼고 더 높아야 됩니다. 지금 이때는 예수님이 오실 수 있는 소망의 때인 만큼 환경적으로 고차적인 내용을 갖춘 확고한 터전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가야 할 것이 통일교회를 믿는 신자들의 생활 태도가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러한 기준과 오늘날 우리 자신들을 비교 비판해야 되겠습니다. 오늘 현재가 문제되니 이제라도 늦지 않습니다. 내일을 위해서 새로운 출발을 해야 되겠습니다.

보라구요. 이스라엘 민족이 4천년 동안 메시아 오기를 고대했는데 와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했지요? 세례 요한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도 회개해야 되겠습니다. 나라를 위해서 충성하지 못한 것을 회개하고, 뜻을 대해서 충성하지 못한 것을 회개하고, 인류를 사랑하지 못한 것을 회개해야 됩니다. 그리하여 하나에서부터 전세계적으로 회개를 해 놓으라구요. 회개해서 손해보는 수가 있습니까? 안 그래요? 회개해 가지고 손해 볼 수가 있겠느냐 말입니다. 마찬가지 이치입니다. 여러분들도 원칙적인 기준을 중심삼고 회개해야 됩니다. 그래야 천국이 올 것입니다. 회개를 해 가지고 하나님을 움직여야 됩니다. 여기서부터 통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