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1972년 7월 30일, 7월 들어 마지막으로 맞이하는 안식일 아침이옵니다. 이 한 달도 보호하심 가운데서 보내게 된 것을 감사드립니다.
아버지, 이 아침 여기에 모인 자녀들과 전국에 널리어 이곳을 바라보며 마음을 다하여 정성을 들이는 자녀들 위에 당신의 무한하신 사랑과 자비가 같이하시옵소서. 그들도 당신이 소원하시는 영광의 세계에, 당신의 마음 가운데 기억되는 무리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한국을 중심삼고 연결되어 있는 수많은 나라 위에 이 시간 일률적인 은사를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바라옵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하늘을 위하고 하늘을 모시는 그 자리에 있어서 부족한 것을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겸손해야 될 것을 마음으로부터는 헤아리지만 환경적 습관에 젖어 있기 때문에, 하늘을 위하여 하늘이 바라는 알뜰한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역사시대를 거쳐오면서 우리 선조들이 아버님을 염려시킨 것이 얼마나 많았사옵니까? 그런 것을 알면서도 저희들이 그와 같은 길을 번번이 반복해 가고 있는 것을 아버지께서 아시고 저희들도 알고 있습니다.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이 자리에 부복한 이 무리들을 아버지께서 긍휼히 보시옵소서. 저희는 하늘을 위해 나선 무리이옵니다. 통일교회가 이 땅 위에 나타나서 이 자리에 올 때까지는 많은 수난길을 거쳐왔습니다. 그 누구도 염려하지 못하는 하늘의 염려를 받는 자리에서 지금까지 나온 것을 생각하게 될 때, 더더욱 하늘이 앞날에도 수고의 인연을 벗을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할수록, 저희들은 마음과 몸으로 정성을 다 바쳐서 하늘의 보람 있는 희망의 대상이 되고, 땅 위의 진실된 자녀들로서 아버님이 자랑할 수 있고, 아버님의 사랑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자녀들이 되어야 되겠사옵니다. 이 시간, 온전한 하나의 모습으로 아버지께서 받아 주시옵길 바라옵니다.
아버지, 금후의 한국의 운명을 당신께서 맡으시옵소서. 금후의 세계가 가야 할 당신의 뜻의 노정을 가리시사 당신의 소원대로 성취하시옵기를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이 아침도 무한하신 사랑으로 자비를 허락해 주옵소서. 따뜻한 아버지의 보호하심과 긍휼의 은사로 저희 주위와 저희 생활권내를 보살펴 주시고 지도하여 주시옵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만만세에 은사와 사랑이 길이길이 같이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님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이 피조세계는 하나님의 한 대상으로 되어 있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만물을 짓게 된 것은 하나님의 소원성취를 위해서였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행복이나 만족, 혹은 즐거움이라는 것은 혼자서는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전능하신 분이시라 하더라도 그분 혼자서는 행복이나 만족을 느낄 수 없는 것이요, 기쁨을 느낄 수 없는 것입니다. 기쁨이나 행복이라는 것은 상대적인 관계에서만 성립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고 받는 자리에서만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게 될 때, 하나님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절대자로서 혼자 있어 가지고 기뻐한다면 그것은 정상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 생활을 통해 미루어 보더라도 그렇듯이 하나님도 기쁨의 자극을 느끼기 위해서는 반드시 상대적 기준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그에게 주었으면 그도 나에게 돌려주는, 즉 주고받는 데서 모든 인연과 관계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인연이 있어 가지고 관계가 맺어지고, 그 관계를 통해서 색다른 진전이 이루어지고, 거기에서 비로소 사람은 만족을 느끼고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게 될 때, 하나님이 지으신 이 피조세계는 하나님의 사랑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그 최고의 이상이 무엇이냐? 물론 보고 좋아하는 것도 있겠고 같이 살고 싶은 무엇도 있겠지만, 그 최고의 목적은 무엇이냐? 사랑을 중심삼자는 것입니다. 보되 사랑을 통해서 보는 것이요, 살되 사랑을 중심삼고 사는 것입니다. 사랑의 자극과 사랑의 만족을 친히 대상을 통해서 인연짓기 위해서 만물을 지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만물지중에 가장 귀한 것이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 가운데 최고의 걸작품이 인간입니다. 그런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지어졌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사랑의 주체 되시는 하나님이 계신다면, 그 주체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상대가 있어야 됩니다. 그 상대는 인간 외에 또 다른 존재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상대, 그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자격자가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물을 담으려면, 얼마만한 양의 물을 담으려면 그만한 양의 물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있어야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무한한 사랑을 갖고 계신다면, 그 무한하신 사랑을 담을 수 있는…. 또 무한히 줄 수 있는 사랑을 갖고 계시다면 그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상대가 있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적인 사랑을 가지신 하나님 앞에 상대적인 입장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은 그 절대적인 사랑을 받고도 남음이 있는 입장에서 지어졌다고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한하고 지고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인간에게 임하게 될때 모순되고 상충되는 자리에서 주고받는 입장에 서게끔 하나님은 인간을 짓지 않았다고 보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영원히 그 깊은 사랑까지라도 무한히 받고, 또 무한히 돌려줄 수 있는 상대적인 존재라야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 인간도 그러한 사랑의 주체 되시는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의 상대적인 입장에 서게 될 때 비로소 무한한 사랑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행복한 자리라는 것은 혼자서 기뻐해 가지고는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둘이 다 기뻐해야 됩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거기에 관여되어 있고 관계되어 있는 환경까지 기쁨의 환경에 사로잡히게 될 때, 그 전체는 행복한 환경으로 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행복한 환경이 연결되어 인간을 중심삼고 하나님이 지은 온 피조세계가 일원화되는 자리에서 이상세계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높은 자리나 낮은 자리나 결국 같은 사랑의 인연 가운데 있게 되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태양을 보게 될 때, 태양 빛을 받고 있는 상대세계는 밝은 것과 마찬가지로, 밝은 세계의 입장이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은 세계임에 틀림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세계가 하나님이 이상하셨던 지상천국이요, 이 천국을 연결시킨 것이 천상천국이라는 것을 우리는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관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그 오관은 우리만이 관계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감각기관을 통해서 보다 차원 높은 하나님의 사랑이 깃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오관을 통해서 그 하나님의 사랑과 횡적인 면에서, 혹은 종적인 면에서 반드시 관계를 맺게끔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그 오관을 중심삼고 살고 있는 우리의 일체는 그 오관을 통해서 자기만 관계맺게끔 지어진 것이 아니라, 주체되시는 하나님과 더불어 관계맺게 지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일체가 느끼는 모든 직감, 혹은 직관까지도 나만을 중심삼은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그 이념을 이어받고 관계를 맺어 가지고 서로서로가 행복할 수 있는 내적 인연을 지니고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주체와 대상 관계에 있어서 언제나 문제되는 것은 주는 것이 있으면 돌려주는 것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일방적인 것이 되어 가지고는 관계가 계속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주고받아야만 되는 것입니다. 주고받는 데 있어서 그것이 넓고, 혹은 굵으면 굵을수록 그것은 행복의 척도를 잴 수 있는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니냐. 그러면 잘 주고 잘 받는 시간이 오래되면 오래될수록 점점점점 차원을 높여 갈 수 있는 내용을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도 사귐에 있어서, 서로서로 알 때부터 그 기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거기는 생활적인 면도 통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정서적인 문제까지도 연결되는 것입니다. 내가 살고 있는 입장, 전폭적인 분야가 그 관계되어 있는 상대와 더불어 일체적인 자리를 갖추기를 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크고 넓고 높을수록 그는 내 앞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친구면 친구일 것이고, 혹은 가정이면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기간이 오래면 오래일수록 나쁜 것이 아니라 좋은 결과로 남아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일시에 중단되는 것보다도 무한히 확대해 가지고 무한한 행복의 경지까지 연결시키기를 바라는 것이 인간 생활에 있어서의 관계인 것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인연을 연결시켜 가지고…. 그렇기 때문에 자기 자신에게 좋은 것이 있으면 그것이 일시적으로 좋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좋은 것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또한 가정이 잘되면 일시적으로 잘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히 잘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 부모가 잘되었으면 자녀도 역시 잘되기를 바라는 것이요, 그 후손도 그러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그것이 연결되어 가지고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그 나라를 중심삼고 볼 때 자기가 살고 있는 나라는 행복한 나라가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 행복이 일시적인 행복이 아니라 영원히 지속되는 행복이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연결되어 가지고 세계로, 이것이 유형세계 뿐만이 아니라 무형세계, 영원한 세계에까지 연결된다는 것을 우리는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기쁨은 나만의 기쁨이 아니라 상대와 더불어 기뻐할 수 있는 기쁨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존재세계에 있어서 상대적 인연을 갖지 않은 것은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천운이 있다면 그 천운은 상대적 인연을 옹호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존재세계의 철칙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공식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공식에 부합되지 않으면 그 비중에 해당하는 우주적인 반대의 힘이 작용하는 것입니다. 열만한 상대를 갖추었다면 거기에 열만한 천운이 옹호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그것을 중심삼아 가지고 모든 인연을 통해 운행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존재하는 상대세계의 원칙으로 되어 있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 원칙에 반대가 되든가 결함이 생기게 될 때는, 천운은 그 분량만큼 반대적인 입장에서 몰아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말하면, 남자 여자가 사랑을 중심삼고 하나가 될 때 그것을 진정한 의미의 부부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상적인 부부라고 보는 것입니다. 또한 부자관계에 있어서,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기에 마음을 다하고 그 사랑을 받는 자식이 기쁨의 대상이 될 때에 그 부자관계는 이상적인 관계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렇듯 사랑을 중심삼고 남자 여자를 두고 보면 그 남자 여자가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될 때, 비로소 그 남자와 여자는 하나님 앞에 있어서 기쁨의 대상이 될 수 있는 부부가 되는 것입니다. 완전히 사랑을 중심삼고 주고받게 되면 이상적인 부부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는 우주의 힘이 그들을 보호하고 옹호하지만 여기에 그 사랑이 결여되게 될 때는 반드시 결여된 분량만큼 반대로 몰아 내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끼리 살다가 그 중 한 사람이 죽게 되면 왜 슬프냐는 것입니다. 왜 가슴이 아프고, 자기가 지탱하지 못할 만큼의 고통이 느껴지느냐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가 고통을 느끼려고 해서 느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연적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자신이 거기에 무슨 슬픈 동기나 요인을 가지고 마음속으로 그리워하거나 동경하거나, 혹은 스스로 어떠한 자극적인 무엇을 추구하지 않더라도 자연적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게 왜 그렇게 느껴지느냐? 이 우주의 원칙이 완전한 사랑을 중심삼고 하나되는 것을 옹호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이탈되게 되면 반작용으로 몰아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주의 공법의 불합격자가 되는 것입니다. 불합격자는 우주공법 이념권내에 있어서 다 같은 자리에서 존속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자연히 그 원칙을 옹호하기 위해서 반대적인 작용으로 몰아내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완전한 이상적 기준을 성립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슬픔이라는 것은 나에게 우주의 힘이 작용을 할 때 느껴지는 것입니다.
부자지간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식과 부모가 완전히 사랑을 주고받고, 부부면 부부도 사랑을 중심삼고 완전히 서로 주고받는 자리에서 이상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봅니다. 이렇게 볼 때 남자 자체를 두고 볼 때 남자가 존재하는 것은 남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여자를 위해 서입니다. 마찬가지로 여자도 남자를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남자가 남자만 위해 있다고 하면 곤란합니다. 자기를 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됩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데 있어서는 '부모는 이래야 된다'고 하는, 어떠한 고착된 형태를 가지고 자기를 주장하는 자리에서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주장하지 않는, 자기를 부정하는, 즉 자기가 없는 자리에서 자식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부모는 부모의 권한을 가지고 언제나 당당한 자리에서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권한을 망각한 자리에서, 그 이상의 자리에서까지 자식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랑을 가지고 자식 앞에 임하는 것이 부모가 아니냐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사랑이 있다는 것은 부모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식을 위해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라는 것은 부모의 사랑이라고 해서 부모만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상대를 위해 있는 것입니다. 자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식이 부모를 사랑한다 할 때 그 사랑은 자식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부모를 위해 있는 것입니다. 결국 사랑이라는 말은 자기를 중심삼고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자기 이상 존중하는 데에서 성립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을 위해 태어났다는 그 자체는 상대를 위해 태어났다는 것과 통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사랑의 이상의 자리를 추구하는 자리에서 보게 될 때, 내가 태어난 것은 무엇 때문이냐 할 때, 사랑을 위해 태어났다면 그는 사랑을 위해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태어난 것이 목적이 아니고 사랑하기 위해서 태어난 것입니다. 그건 무슨 말이냐 하면 주체적 존재로서의 목적을 완성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상대적 이념을 완성하기 위해서 존재해야 된다는 결론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 인간들이 그러한 하나님의 창조이상을 중심삼고 하나님의 사랑을 완전히 받은 적이 있느냐? 이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인 동시에 절대자이십니다. 그러면, 절대자가 지니고 있는 권한과 더불어 절대자가 지니고 있는 속성을 찾으려 할 적에 그가 가진 모든 전폭적인 권한, 전폭적인 가치, 대상을 추구하는 전폭적인 사랑, 이런 것을 인간에게 완전히 주어본 적이 있느냐?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만일 그랬다면 완전히 사랑을 주고받는 그 자리에서는 완전히 하나가 되는 거예요. 둘이 아니고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 하게 되면 남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남녀가 하나되어 가지고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되는 데는 그 모양을 중심삼고 하나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양을 중심삼고 하나되어, 즉 남자의 모양과 여자의 모양이 뒤범벅이 되어,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된다는 것은 이상을 중심삼고 하나되는 것을 말합니다. 부부일신이라고 하는 것은 이상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이상이란 뭐냐? 행복이라는 것이다! 행복은 뭐냐? 기쁨의 길이다! 이렇게 볼 때, 그 이상 실현은 사랑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된다는 것은 사랑을 중심삼고 일치되는 것을 말하지, 그 상대권을 중심삼고 일치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흔히 원리를 이야기하면서 하나님의 이상의 일체라는 말을 합니다. 이상의 일체라는 말이 무슨 말이냐? 그것은 얼굴이 다른 남자 여자를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잘나고 못난, 그런 미모를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상 일체라는 것은 그 이상의 것이 없는 사랑을 중심삼고 하나된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볼 때, 절대자인 하나님이 완전히 기쁠 수 있는 자리에서 상대적인 인간을 대해, 하나님에게 있어서 우리 인간이 둘도 없는 상대자라면 그 상대를 사랑해 본 적이 있었느냐?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이런 원칙을 두고 볼 때 사랑받은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타락이라는 것은 탈락을 말합니다. 이것은 미완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미급을 말하는 것이 아니더냐. 정상적인 기준에서 어떤 이상적인 완성을 이룬 그 자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이 결여된 자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냐.
이런 입장에서 볼 때, 완전하신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 하나님이 완전하지 못한 것을 바라보게 될 때, '아이구! 사랑하고 싶다' 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겠느냐? 작가가 작품을 만드는 데 있어서 작가가 구상한 것은 100퍼센트 완전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바라는 그것이 90 퍼센트밖에 안되었다 할 때, 거기에는 10 퍼센트의 미련이 남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더해야만 완성한 기준에서 '아이고 기쁘다' 할 수 있는, 그야말로 내 행복이 극할 수 있는, 만족할 수 있는 자리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90 퍼센트 완성을 했다면 90 퍼센트에 해당하는 사랑을 할 수 있지만 100 퍼센트의 사랑은 못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게 될 때 99 퍼센트까지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다음엔 100 퍼센트 사랑하기를 바랄 것이 아니냐?
최고의 자리, 인간 완성을 중심삼은 그 자리에서, 완전한 주체가 그 이상은 아무것도 없다 하는 자리에서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이 있느냐? 주체로서 그러한 사람을 맞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볼 때, 타락을 공인하는 그런 세계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본래 그렇게 사랑하고 싶은 소원을 가지셨지만, 그런 소원을 이룰 수 없는 환경을 바라보는 하나님은 기쁨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100이 되기를 바라는데 90이 되었다 할 때는 기쁘지 않은 것입니다. 여러분이 학교 다닐 때 이런 생각 했을 겁니다. '나는 시험을 치게 되면 틀림없이 100점 맞는다. 맹세코 100점 맞는다. 맹세코 100점 맞는다. 이것이 나의 이상이다' 하고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열심히 공부했는데 100점을 못 맞았다, 99점, 혹은 99.999점을 맞았다, 그렇게 되면 그걸 자랑할 수 있어요? 100점과 같은 레벨이지만 손을 들고 자랑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절대자면 절대자일수록 그것은 절대적이 돼야 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이 이 상대이상을 가지고 우리 인간을 대해서 그야말로 좋아서, 만면에 희색을 띠고, 자기 자신을 망각할 수 있는 최대의 사랑을 중심삼고 '이 자리야말로, 이 길이야말로 나의 행복이다. 천지 만물을 창조한 그것이 이 사람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빛나는 것이다. 기분 좋다' 할 수 있는 이상적인 인간이 있었느냐? 하나님으로서 인간을 사랑해 보실 수 있었느냐? 그럴 수 없었습니다. 왜 그러냐?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틀림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타락하지 않고 완성한 자리에서 하나님의 그러한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본연의 인간의 모습이라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왔겠느냐? 우리의 눈을 바라보게 될 때, 세계적으로 유명한 시인이 그 심정으로 최고의 절정을 다해서 표시한 그 도수, 극의 자리를 넘어설 수 있는 미의 상징체로서 사랑할 수 있는 모습이 아니었겠느냐? 그럴 게 아니예요?
그러면 자기의 내심의 기억이 살체로 나타난 그 모습, 자기의 내정의 모든 그리움이 자극적인 미모로 나타날 수 있는 그 모습을 갖게 될 때, 하나님은 그 모습을 보고 얼마나 찬양할 수 있었겠느냐는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한 가지 가지고도 자기 사랑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요, 자기 기쁨의 대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사랑하는 사람끼리 주고받는 물건이라는 것은 죽을 때까지 일생에 잊을 수 없는 기념물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손수건 하나라도 천만금을 준다고 해도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눈이면 눈을 볼 때, 이는 내 전체의 창조이념을 걸고 맹세하면서 사랑의 마음을 표시하고, 기쁨의 표시를 해도 끝이 없을 것이 아니냐? 그럴 것이 아니예요? 코를 보나 귀를 보나 얼굴을 보나, 뒤를 보나 앞을 보나, 전신의 어떠한 부분을 보더라도, 손끝 하나까지도 그것은 나쁘지 않을 것이 아니냐?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찬양할 수 있는 존재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사랑권내에 품겨 가지고, 그 사랑에 동화되어 가지고 '사랑이 어떻더냐? 할 때, '이렇게 행복한 것이다'라고 증거할 수 있는 실체대상으로서 사지백체는 나타날 것이 아니냐?
그런 자리에 선 인간에게 불행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손을 바라보고 기뻐하시면 그 기쁨을 내가 느낄 수 있으니 이 손은 아름다운 손일 것이 틀림없습니다. 또한, 내 일신을 거울에 비추어 보게 될 때, 거울에 비치는 자기의 몸은 하나님이 완전히 취해 가지고, 하나님 앞에 백퍼센트의 합격품으로 등장해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을 자극하는 요소로서 지금도 자극하는 것이요, 영원히 자극시킬 수 있는 소망적인 지체라고 생각하게 될 때 그것을 바라보는 나는 어떻겠느냐? 그런 자기 자신을 보고 얼마나 만족하겠느냐? 그럴 수 있다구요. 여러분. 안 그래요? 남편이 아내를 사랑할 때, 아내는 그 얼굴을 보고 '사랑하는 남편이 사랑하는 얼굴이지' 하는 것을 느끼면, 그 얼굴에 대한 존귀성과 그 미모에 대한 가치성은 배가되는 것과 마찬가지 입장인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의 이상인 사랑의 실체가 이 우주 창조 이후에 나타났다면 그 얼마나 이상적이겠느냐? 오늘날 인간이 쓴 시편이나 아가서에서 사랑을 찬양하고 있지만, 하나님이 기쁨의 심정을 다해 가지고 하나님이 시편과 같은 노래를 부르고 아가서와 같은 사랑의 기록을 남겼으면 그 얼마나 멋졌겠어요? 그것이 인간에 있어서 사랑의 표준이 되고, 사랑이 움직이는 정서생활의 전통이 되고 역사가 되었으면, 오늘날의 인간이 불행할 수 있었겠어요?
이런 입장에서 보게 될 때에, '하늘이 주관하는 세계' 그 세계는 어떠한 권력을 가졌다고 해서, 전능한 능력을 가졌다고 해서 권력을 행사하는 세계가 아닙니다. 권력은 사랑을 보다 강하게, 보다 빛나게, 보다 폭넓게. 보다 높게 뒷받침해 주구 밀어 주는 힘으로 작용은 할 수 있을망정…. 뭐라 할까 위하라는 건 있을 수 있겠지만…. 이 권력은 사랑이 가는 길 앞에 있어서 그 모든 것이 즐거움이 되도록 도와주고 즐거움의 뒷받침이 될 수 있는 힘이 될 뿐입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이 가지신 절대적인 모든 권한이 깃들어 있고, 혹은 영원성이라든가 무한성이라는 게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길을 제한시키고 브레이크 걸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보다 입체적인 자극으로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가지고 일체화시키기 위한 자극적인 요소가 될 뿐이지 방해 작용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자리에서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 얼마나 행복할것이냐?
그러한 관점에서 역사적으로 우리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 혹은 우리 인간조상 가운데 남자 여자를 두고 볼 때, 남자 대표로 그러한 사랑을 받은 사람이 있다면 그 남자는 자랑할 만합니다. 또, 남자는 그런 사랑을 못 받았지만 여자로서 그러한 사랑을 받은 대표자가 있다면 그 여자는 자랑할 만합니다. 이렇게 볼 때, 그 사랑은 일시적인 사랑이 아니라 영원한 사랑일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타락한 이 세상에서도 사랑하는 사람끼리 서로 사랑하면서 맹세했던 그 약속을 중심삼고 일생을 고독한 자리에 살더라도 그것을 극복하고 내심 그 사랑을 추구하면서 그 사랑의 내정적인 심정의 인연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게 될 때, 타락하지 않은 본연의 세계, 완성한 이상적인 세계에 있어서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느껴지는 자극은 일시적이 아니라 영원한 것입니다. 그 사랑의 자극은 영원한 것이기 때문에 그 사랑의 시작은 전통이 되었을 것이고, 그 전통은 역사를 한 방향으로 끌고 나갈 수 있는 힘의 주체가 되었을 것이 아니냐.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 있느냐?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 오늘날 우리 신앙자들이 바라는 최고의 소망은 무엇이 되어야 하느냐? 고차적인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어떠한 권력이 아니예요. 지식도 아니예요. 물론 진리도 추구해야 되지만, 진리라는 것은 근본 문제가 아니라는 거예요. 사랑이 있은 후에야 진리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행복한 다음에 지식이 필요하지 불행한데 지식이 있으면 뭘해요? 불행한데 권력이 있으면 뭘해요? 불행한데 돈이 있으면 뭘해요? 사랑하는 사람이 당장 죽게 되었는데 돈이 있으면 뭘해요?
이렇게 볼 때, 전부 다 무엇이 필요하다 무엇이 필요하다 해도 근본문제에 들어가 완전히 자기가 이상하는 사랑을 남겨 놓은 후에, 사랑을 제일 조건으로 세워 놓은 후에 부가적인 조건이 필요한 것입니다. 권력 이니 지식이니 돈이니 하는 것은 다 부가적인 조건입니다.
또, 사는 것도 그래요. 사람이 살아서 뭘해요? 동물과 같이 살아서 뭘해요?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이 가는 길은 죽어서도 따라가고 싶은 것이 아니냐, 그러므로 살고 싶다, 먹고 싶다, 갖고 싶다, 뭐 하고 싶다 하는 것이 천만가지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사랑을 갖고 난 후에 필요한 것이지, 사랑을 잃어버리게 되면 그건 다 필요 없는 것이 아니냐? 안 그래요? 사랑을 잃어버리고 난 후에는 낙심하지 않습니까? 안 그래요?
이렇게 생각하게 될 때,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냐? 하나님은 사랑의 주체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의 주체라면, 그분은 우리 인간보다 높아야 할 것이 아니냐? 우리 인간이 그러니까 우리 인간보다 더할 것이 아니냐. 더한 것도 절대적입니다. 절대적으로 더합니다.
이렇게 볼 때, 그분이 그리워하는 사람, 그분이 보고 싶어하는 사람, 그분이 미치도록 사랑하는 사람은 어떠한 사람일까? 여러분이 생각해 보라구요. 그분이 사랑하는 주체가 되고, 그분의 사랑을 받는 내가 될 때 나를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지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절대적인 사랑만이 나의 동기가 되고 나의 과정이 되고 결과가 될 뿐이지, 그 외의 일체는 누구든지, 어디든지 따라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인간을 중심삼은 모델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모델의 남자가 있어야 되고 여자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원칙을 두고 볼 때, 타락이라는 말은 지극히 비참한 것입니다. 뭐가 어떻게 됐든지간에 다 그만두고 타락이라는 그 말 자체가, 미급하고 미완성했다는 그 말 자체가, 목적성사를 하지 못했다는 그 말 자체가 비참한 것입니다. 누구에게 비참한 것이냐? 우리 인간 앞에 비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비참한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 일반 신앙자들은 하나님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요.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요, 절대적인 하나님이라고 찬양은 할 줄 알고 그로 말미암아 행복을 구하기를 바라고는 있는데, 과연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에게 행복을 줄 수 있는 하나님이 되었느냐?
여러분은 불행하게 되면 짜증이 나지요? 짜증이 나요, 안 나요? 짜증 나지 말라고 하더라도 나는 것입니다. 손도 짜증을 내고, 눈도 짜증을 내고, 사지백체가 짜증을 낸다구요. 몸도 그렇지만 마음도 그렇습니다.
이렇게 볼 때, 최고의 이상적인 상대권을 상실해 버린 하나님 앞에 온갖 죄의 누더기를 쓰고 찾아가 가지고 '아버지 하나님이여! 내 죄를 맡아 주시옵소서. 하나님, 나는 이러이러한 죄를 지었습니다. 내 죄를 맡아 주시옵소서' 할 때, '오냐' 할 수밖에 없는 하나님이라면 그 하나님은 얼마나 불쌍하겠어요? 얼마나 비참한 하나님이겠습니까? 그거 행복하겠어요?
지금 죽을 지경에 놓여 있는 사람에게, '여보, 나도 이렇게 죽을 지경에 있는데, 이왕지사 당신도 죽게 되었으니 내 죽을 것도 맡아 주소' 하면 '그럽시다' 할 사람 있어요? 그저 고통스러운 자리에서 죽어가고 있는데 친구들이 '여보게 임자는 나하고 둘도 없는 친구가 아닌가. 그러니 이왕이면 고생은 되겠지만 내 고통까지 맡아 주소' 할 때, '오냐, 당신 말대로 하소' 그래요? 친구고 뭐고 다 벼락이 난다고요. '예이, 원수놈아! 네가 내 친구야? 한다는 거라구요. 이 녀석도 아니고 '이놈아' 한다는 거예요. 거꾸로 쥐어박고 다리를 꺾고 싶을 것입니다. 그렇지요?
그런데도 오늘날 인간들은 번번이 잘못하고 나서는 '하나님, 나 이렇게 됐습니다'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그런 사람하고 죽자살자고 할 수 있는 인연이 되어 있나요? 이런 것을 생각하게 될 때 기도하기가 두려운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한다면 기도하겠다고 머리를 숙이고 하나님을 부르다가도 자라가 모가지를 내밀다가 위험을 느껴가지고 다시 집어 넣는 것과 같은 처지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될 게 아녜요? 이런 모든 근본 문제를 파헤쳐 생각하게 될 때, 우리가 얼마나 오류를 범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타락의 역사시대를 지내오는 동안 어느 한때 하나님의 해방을 부르짖고, 그러한 사랑의 이상을 중심삼고 절대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배양시킬 수 있는 운동을 한 사람이 있었습니까? 예수님 같은 양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바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라고 기도했습니다. 그거 비참한 것이 아닙니까? 어찌하여 내 뜻이 생겨 났느냐는 것입니다. 내 뜻이 따로 있었다 이겁니다. 하나님과 완전히 화합해 가지고 하나되어 있었다면 그 뜻은…. 바른발이 가면 왼발도 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내 뜻이 없다, 둘이 같은 뜻이다, 그렇게 되어야 할 텐데 왜 내 뜻이 있게 되었느냐? 이것이 비참한 것이 아니냐? 비참한 것입니다. 안 그래요?
부처끼리 살면서 부인의 뜻, 남편의 뜻 해 가지고 아내가 남편에게 '당신의 뜻도 있지만 내 뜻도 있소. 당신의 뜻은 크고 내 뜻은 작지만 요만큼이라도 내 뜻이 있소' 하게 되면 남편이 진정 기쁘겠느냐? 그렇지 않다는 거라구요. 남편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아내라면 남편을 대해 '당신의 뜻이 내 뜻입니다'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남편이 '옳소' 해야 아주 개운하게 기쁜 것입니다. 그런데 '당신의 뜻은 아흔 아홉이지만 내 뜻은 하나입니다. 당신의 아흔 아홉 개의 뜻은 잃더라도 내 뜻 하나는 줄 수 없소' 한다면, 그 하나의 뜻은 아흔 아홉의 뜻보다 더 크고 백보다 더 무서운 뜻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심각한 문제가 우리 신앙노정에 있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내 뜻이 왜 생겨났느냐? 예수님은 타락한 세계를 구원해야 할 책임이 있는 분으로서 인간의 사정과 하나님의 사정이 다른 것을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에서 여실히 증거한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메시아로서 인간을 구원해 주어야 할 대표자이니만큼 하나님의 뜻을 위주하여 하나되어야 될 입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악한 세상을 쓸어 버린다면 언제나 하나될 수 있지만 이것을 붙들고는 하나될 수 없는 비통한 자리에서 있는 입장임을 직고하는 말씀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따르자니 인간을 버려야 되겠고, 인간을 존중시하려니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게 되는 자리에서 예수님은 그러한 비참한 기도를 올린 것이 아니냐? 그 자체가 어찌할 수 없는 인간의 고통의 와중에서 신음하고 있는 사실을 직고한 것이 아니냐? 그게 그렇다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여러분도 마찬가지라고요. 뜻의 길을 가려면 그렇지요? 뜻의 길을 가려면 세상이 붙들고 잡아당깁니다. 그와 마찬가지예요. 뜻의 길을 가려니 남과 달라야 된다는 거예요. 모든 일체가 다르다구요. 일체가 다른 걸음을 한걸음 한걸음 전진하는 거라구요. 그런데 전진했다가 급히 돌아와 가지고 수습해야 합니다. 돌아오는 시간이 짧아야지 길게 될 때는 나간 것보다 더 후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달려갔다가 벼락같이 와서 수습해 가지고 본연의 자리에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있다가는 이 신앙길을 못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비참해요? 행복한게 아닙니다.
통일교회 신도들도 비참하다는 거라구요. 뜻을 알고 났으면 그 자리에서 플러스될 수 있는 행복의 여건이 사방으로 연결되었으면 좋겠는데 그렇지는 않고, 거기에 있다가는 양심의 가책을 받게 되니 이게 죽을 지경 이라구요. 뜻을 몰랐다면 그런 것은 생각지도 않을 텐데 말이예요. 주위를 가만히 바라보니 식구들은 다 뛰고 있다구요. 같이 출발했는데 나 혼자 처져 가지고 있으니 마음까지 편하지 않다구요. 그래서 지금 여러분은 '아이구! 내가 통일교회 원리를 듣지 않고, 선생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오죽이나 좋았겠나' 하는 고통 가운데 있다구요. 여러분의 입장은 예수님의 입장과 마찬가지입니다. '오호라 나는 괴로운 사람이로다'라고 직고하던 바울의 신세와 마찬가지라구요.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려면 인간세계를 포기해야 되겠고, 인간세계를 붙들려면 하늘세계를 포기해야 되겠으니, 이 두 세계를 조정하는 배우 노릇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두 얼굴의 배우가 되어야 된다 이겁니다. 그것이 인간세계를 중심삼으면 이는 꺼꿀잡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갔다가는 복달불나게 다시 돌아와 수습해 놓고 가야만 정상적인 신앙길을 조금이라도 발전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입장에서 볼 때,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주관하는 하나의 사람, 최초의 사람, '내 이상이 이루어졌다'고 기뻐 가지고 자랑으로 만우주 앞에 선포하면서 '이 기쁨에 동화될지어다. 이 기쁨에 찬양할지어다. 이 기쁨과 더불어 영원할지어다' 할 수 있는 사람이 나와 가지고 그 사람 앞에 만물이 주관받게 된다면, 이 세계의 모든 만물도 하나님의 사랑의 전통을 받아 그와 더불어 기쁨을 자극시켜 줄 수 있는 상대적인 물건들이 되는 것이 아니냐? 만물을 바라보는 거기에는 불행의 요건이 있을 수 없을 것이 아니냐? 다시 말하면,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자기의 손을 사랑받기 전보다 몇천만 배의 가치 있는 것으로 인정하면서 그것을 보고 즐길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사랑을 중심삼고 차원 높은 자리에서 찬양할 수 있고, 감상할 수 있는 만물이 되었을 것이 아니냐. 이렇게 볼 때, 로마서 8장 22절 이하에 '만물이 탄식한다'는 바울의 말은 참 당연한 말입니다. 참된 말입니다. 만물의 탄식 뿐만이 아닙니다. 인간도 이런 이상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비통한 탄식을 지닌 인간이 아니냐? 틀림없습니다. 인간뿐만이 아니라 하나님까지도, 성신까지도 이 탄식의 권내를 벗어나기를 바라고 지금까지 탄식한다는 것을 볼 때 그 말은 온당한 말입니다.
수많은 종을 거느린 부잣집 주인이 슬픈 아침을 맞고 슬퍼하게 되면 그 종들도 슬픔에 사로잡히는 것이 아니냐. 그렇지요? 일체가 그 권내에 포괄되어 버리고 마는 것을 우리가 상습적인 생활 주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이상적인 기준에서 만물을 지었던 하나님이 그의 이상 실현을 불가능하게 하는, 이 타락이란 원한의 터전을 대하게 될때, 느꼈던 충격과 상심이 어떠했겠느냐? 효자의 한마디 반항의 말은 불효자의 천 마디 반항의 말보다 더 아픈 것이 아니냐? 그렇죠?
그렇게 생각할 때, 하나님은 불쌍한 분이 아니냐? 그렇기 때문에 이 불쌍하신 분을 내가 어떻게 위로해 드려야 하느냐 하는 문제가 신앙자로서 우리가 최고의 지조로 삼아야 할 문제입니다. 내가 그분에게 사랑을 받기 전에, 사랑을 요구하기 전에 내가 그분을 어떻게 위로할 것이냐? 그분의 사랑의 길을 찾아 나가는 데 있어서 어떻게 찾을 것이냐? 이러한 문제를 두고 볼 때, '나는 이러한 사랑을 중심삼고 어떻게 살아야 된다.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 된다' 하는 것을 우리는 고찰할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 인간에게 한이 있다면, 남자로 태어나서 독신생활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여자로 태어나서 독신생활하는 것이 한이 아닙니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인간이 하나님을 빼놓고 자기들 끼리끼리 아무리 부부의 행복을 노래하고 살았다 하더라도, 본연의 주체 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이상을 중심삼고 볼 때는 불합격자입니다. 두 사람이 하나되어 가지고 하나님의 이상적인 사랑을 완성시킬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 부부가 손을 잡고 합해 가지고 가야 되겠지만, 만약 두 사람이 손을 잡고 합해 가지고도 완성시킬 수 있는 길이 없다 할 때는 남편이 먼저 가든지, 아내가 먼저 가든지 서로 먼저 달려가라고 권고해야 할 입장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아, 당신하고 나하고 둘이 같이 갑시다. 죽더라도 같이 가다가 죽읍시다' 그런 말을 하는 것은 망조입니다, 망조. 더 이상 합심할 수 없기 때문에 피난길을 가야 하는 것입니다. 피난길을 한 번 가보라구요. 바쁘다구요.
선생님은 6,25때 피난길을 맨 나중에 떠났는데, 인민군들은 30리 밖에서 뒤쫓아 오고…. 한 발자국이 얼마나 다급한지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입니다.
그 둘이, 부처끼리 하나되어 가지고 혼자 가는 것과 같이 그 길을 찾을 수 있다면 별문제이지만, 그럴 수 없는 입장에서 너나 나나 둘 중의한 사람이 빨리 가 가지고 찾아야 한다면 '어서 내 앞에 가소. 나를 버리고 가소' 해야 합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래야 될 것 아니예요? 또 다른 사랑의 길이, 둘이 찾아갈 수 있는 이상적인 경지가 있다면 모르지만…. 경주장에서 한 선수를 붙들고 '우리 여기서 죽더라도 같이 죽자'고 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구요. '나를 버리고 어서 그것을 찾아가소. 남자를 버리고 찾아가소. 여자를 버리고 찾아가소' 이런 말을 해야 되는것입니다.
그런 내용을 가진, 그런 사랑의 이상을 가진 하늘이 역사시대에 종교를 낼 때. 어찌하여 독신생활을 강조했느냐? 둘이 붙들고 이것을 주파해 낼 수 있다면 둘이 사랑하라고 가르쳐 주는 것이 정당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래 가지고는 안 되겠기 때문에 '둘 중의 한 사람이라도 살려야 되겠다'는 입장에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 인류 역사의 배후와 신앙의 터전 가운데 있기 때문에, 둘중에 한 사람이라도 달려가서 그 길에 도달하기를 바라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남자 여자 가운데서 누가 먼저 그 자리에 도달하기를 바라겠느냐? 남자가 주체이기 때문에 주체인 남자가 먼저 그 자리에 도달하기를 바랄 것 아니예요? 그러므로 그 주체가 먼저 도달하기 위해서는 대상인 여자를 가려 가야 되는 것입니다. 여자의 모든 것을 품고 그 자리에 오라고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정이 있기 때문에, 도의 길에 있어서는 독신생활을 강조하면서 그 길로 내몰았던 사연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독신생활을 하는 자리에 있어서, 즉 횡적인 상대를 저버리고 종적인 이상세계를 찾아 나가는 그 자리에 있어서, 꿈에라도 자기 상대를 생각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자리에서 출발하여 끝까지 일생을 바쳐 주파해 낸 신앙자가 있었느냐?
그것을 바라신 하나님의 원칙적인 심정을 두고 볼 때,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만을 사랑하기를 바라신 분임에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길을 가라고 명령한 것은 아무리 고독한 신앙길을 간다 하더라도 인간이 하나님과 더불어 상관하고 관계를 맺게 하기 위해서인데도 불구하고 인간은 횡적인 면에서 자기를 중심삼고 관계되어 있는 정서적인 문제에 얽매어 가지고 허덕이는 때가 얼마나 많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길이 얼마나 비참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생각하게 될 때,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 제자가 와서 '선생님이여,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와서 만나자고 합니다' 하니, 예수님은 '내 모친과 내 동생이 누구냐. 오직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만이 내 모친이요. 내 동생이다'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심각한 경지의 말은 무엇을 두고 한 말이냐? 하나님의 사랑의 이상적인 주체 앞에 이상적인 상대로서, 하나님이 사랑하고 싶은 본래의 이상의 남자의 길을 가려 하는 예수에게 있어서는 부모와 동생이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방해가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 끼리끼리의 정을 중심삼고 '여기서 같이 살자' 하는 어머니와 '형님, 우리를 버리고 어딜 갑니까? 우리와 같이 있습시다' 하는 동생은 하나님의 사랑길을 찾아가는 데 있어서는, 뜻길을 가는 데 있어서는 방해가 된다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간곡한 심정을 가지고 말했을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시간이 없기 때문에 간추려 말하자구요.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이 진정한 의미에서 남자를 사랑해 봤느냐? 하나님은 아직까지 진정한 의미에서 남자를 사랑해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예수님을 어느 정도 사랑해 봤느냐? 예수님 자신은 이땅에서 완전히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갔느냐? 남자로서 다 못 받고 갔습니다. 못 받고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인 것이 하나님의 사랑 이상이예요? 예수님의 사지백체를 바라보면서 그야말로 내 사랑 중의 사랑이라며 이상적인 하나님을 중심삼은 기쁨을 노래할 수 있고, 사랑의 노래를 할 수 있는 대상으로서 내 사랑이라고 하며, '너와 나는 영원히 그 무엇이 침범할 수 없는 절대적인 자리에 섰노라. 여기에 순응하지 않은 자는 용서할 수 없다. 몽땅 내 사랑이다'라고 할 수 있는 자리에서 사랑을 받고 갔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런 사랑을 받고 갔다고 생각해요?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못에 땅땅 박혀 피를 흘리고 신음하면서 '아바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했습니다. '아바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 말이 예수가 목적을 이루었다는 말이예요? 그 말은 '당신의 소원은, 그러한 이상적인 기준 앞에 내가 절대적인 사랑의 대상으로서 기뻐하기를 바란 것이요, 기쁘게 되어야 할 것이 내 사명인데도 불구하고, 내가 오늘 이와 같은 자리에 선 것을 보게 될 때 당신은 어찌하여 본래의 입장과는 다른 입장에서 나를 맞아 주는 당신이 되었습니까' 하는 말이라구요.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은 역사시대에 있어서 하나님이 구상하는 이상적인 남성, 완성한 남성으로서 완전히 갖출 수 있는 하나의 상대권을 이루어 몽땅 사랑할 수 있는 권을 못 가진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사랑한 그 남성을 맞이했다면 어떻게 하셨겠는가? 하나님이 몽땅 사랑하는 여성을 보내 그 남성과 맺어 줄 것이 아니냐? 물론 그럴 것입니다. 그렇게 고대하던 하나의 남성의 사랑을 다 이루었으면 '남성의 사랑은 이런 것이다' 하는 전통을 여성으로 하여금 이어받게 해 가지고 그 전통 앞에 일치될 수 있는 여성을 맞게 해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부부를 이루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남자는 오른팔이요, 여자는 왼팔로서 손에 손을 잡고 '남자와 여자의 사랑은 이런 모습이다. 부부의 사랑은 이런 모습이다. 너와 나와 하나된 것과 마찬가지로…. 너희들 입장도 나와 너희들 사이와 같은 입장이 아니냐. 이것이 남녀를 중심삼은 이상적인 부부의 사랑의 기원이다. 원칙이다. 전통의 출발이다'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런 남자와 여자를 몽땅 품고 하나님이 이상적으로 사랑할 수 있고, 사랑에 취해서 다 주더라도 이것만이 내 전부라고 할 수 있는 사랑을 해봤느냐 하는 것입니다. 해봤다고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역사는 하나의 남성을 찾아 나오는 것입니다.
그 남성이 메시아이기 때문에 이 땅 위에는 메시아 사상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고맙게도 이 땅 위에 종교라는 것이 있고, 그 종교에는 재림사상이 있어서 끝날에는 인간의 모델이 될 수 있는 하나의 남성이 나온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이 인류의 한의 역사 가운데서 희망으로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 소망의 주인이 군림하게 될 때, 무엇을 가지고 와야 되느냐? 그분은 돈을 가지고 오시는 분이 아닙니다. 권력을 가지고 오시는 분이 아닙니다. 지식을 가지고 오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모두 부수적인 조건입니다. 그분은 무엇보다도 고귀한 하나님의 사랑을 완성시킬 수 있는 하나의 남성의 대표로 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실체로 오시는 것입니다. 오직 그분만이 완성을 추구할 수 있고, 오직 그분만이 완성을 결정지을 수 있는 주체적 대신자로 오시는 것입니다. 인류역사상에 그런 사람이 있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역사는 그 하나의 남성을 찾아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교의 귀결점으로 되어 있는 재림사상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무엇을 추구하실 것이냐? 돈도 아니요, 지식도 아니요, 권력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런 것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단 하나 주체 되시는 하나님은 사랑을 필요로 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의 대상이 없는 세계는 암흑 같은 세상이 아니냐. 사막과 같은 세상이요. 빙하와 같은 세상인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을 하나님은 원치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망의 세계와 같은 세계를 넘어서 희망의 세계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까지의 섭리역사인 것입니다.
그러면, 그분이 이 땅에 오신다면, 그분에게 배우고 그분에게 전통으로 이어받아야 할 것이 무엇이냐? 돈이 아니예요. 권력도 아니예요. 어떠한 수완이 아니예요. 어떠한 지식이 아니예요. 숨어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발굴하느냐가 문제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입체성을 다하게 될 때, 하나님이 바라시는 상대적 가치를 추구할 수 있는 입장에 서게 될 때,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기쁨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어야만 내가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기쁜데 하나님은 슬퍼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죄를 회개했을 때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하지요? 기뻐하시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복귀의 길을 닦을 수 있는 다리가 놓여지기 때문입니다. 이상이 이루어져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구요. 일차적인 소원은 그 터전이기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지만 이차적인 소원은 그 터전이 아니라 그 터전 위에 길이길이 남아질 수 있는 사랑의 이상인 것입니다. 그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통일교회 여러분은 무엇을 그리워해야 하느냐? 하나님이 주관하고 싶으신 이상적인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은 어떠한 사랑이냐? 부모의 사랑, 부부의 사랑, 자녀의 사랑을 몽땅 한꺼번에 합한 것입니다. 그것이 실감이 안 나면….
원리를 배운 사람들은 알겠지만,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출발한 것이 아닙니다. 누구의 사랑을 받고 출발했느냐 하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원수 되는 사탄의 사랑을 받고 출발한 것입니다. 사탄은 어떤 존재냐? 아담보다도 아래예요. 물론 하나님보다 아래요. 아담의 아들보다도 아래에 있는 존재입니다. 다시 말하면, 종의 사랑의 기원을 갖고 출발한 것이 오늘날 타락한 인류세계인 것입니다. 알겠어요, 무슨 말인지? 종의 종의…. 지금까지 인간들의 정서적인 기반, 그 기대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 사탄의 사랑입니다.
사탄이란 뭐냐? 천사장입니다. 그 천사장의 사랑을 급으로 말하면 소생밖에 안 된다구요. 천사장적 사랑을 소생이라 하면 아담적 사랑은 장성적 사랑이고, 하나님적 사랑은 완성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생, 장성. 완성을 거쳐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그런데 타락한 인간은 사탄의 사랑권내에서 태어나 그것을 터전으로 죽자살자 하고 나가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사탄의 사랑은 무엇을 부정하고 나오느냐? 인간의 자리를 부정하고 나옵니다. 아담 해와의 자리를 부정하고, 하나님의 자리를 부정하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탄권 세계의 역사적인 전통을 이어받아 가지고 출발한 역사이기 때문에 인류의 역사를 두고 볼 때, 인간은 인간의 가치를 부정하는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인간의 가치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도 모르는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본래 절대적인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되었다면, 사랑이 어떻다는 설명이 필요없다구요. 총각 처녀들한테 '사랑이란 이런 것이다'고 설명한다 해서 그들이 알아요? 고아에게 내가 부모의 사랑을 받아 보니 어떻더라 하고 아무리 몇천 번 설명한다 해도 그들이 알 수 있어요? 부모의 사랑이 어떻다 하는 것은 자식을 낳아 봐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전에는 모르는 것입니다. 그저 그렇다더라 한다고 아는 거예요. '더라'가 '그렇다 '와 일치돼요? '그렇다더라' 하는 것은 '그렇다'와 극과 극도 될 수 있다구요. 반대도 될 수 있다는 거라구요. 진정한 의미에서 '사랑이 이렇다' 하는 그 사랑은….
인간은 하나님을 중심삼고 이상적인 사랑권내, 즉 본연의 자리에서 출발한 것이 아닙니다. 천사장급 사랑의 자리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이에 대한 이론을 세워 가지고 결론을 낸다 하더라도 인간을 이렇게 만든 동기는 천사장급 사랑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천사장급 사랑도 생명을 버릴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도 부모는 자식을 위해 목숨까지 버리는 것을 많이 보잖아요? 그런데 그보다 차원 높은 본연의 인간의 가치를 당당히 알고, 주체 되시는 하나님을 알고 당당히 사랑했다 하는 자리에서 하나님이 있다 없다 하는 말이 성립돼요? 하나님이 있다 없다…. 그런 걸 논하는 무골충 같고 덜된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보고도 하나님이 없다고 할 수 있어요? 주체와 대상이 서로 사랑을 받아 봤는데, 사랑이란 이렇다 하는 것을 느껴 봤는데, 내 세포의 신경 자극이 그 이상 최고의 자극을 느낄 수 없는 자리에서 사랑을 받아 봤는데, 그래도 없다고 할 수 있어요? 의식 기관이 그 무엇보다 강한 의식을 느껴 봤는데 그것을 부정할 무엇이 있어요? 그런 무엇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있다 없다 하는 그런 생각도 할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여러분은 호흡을 하고 있지만 그 회수를 세어요? 여기 가슴에서 망치로 두들기듯 두들기고 있는데 그 북소리를 들어요? 파리가 머리카락을 살짝만 해도 아는데, 여기에서 망치로 두들기는 것같이 두들기고 있는데 자극이 없어요. 그거 이상하지요? 파리가 슬쩍 지나가는 것은 알면서도 망치로 심장을 두들기는 것은 모르는 거 보라구요. 여러분이 청진기로 들어 보면 쿵딱쿵딱 한다구요. 그렇게 뛰는 힘의 자극으로 보면 그것은 파리가 살짝 지나가는 것보다 몇십 배 몇백 배 강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알지 못하고 파리가 스쳐가는 것은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게 조화통이라구요.
여러분이 그 뚝딱뚝딱하는 맥박 소리를 세었다가는 모두 신경병에 걸릴 것입니다. 하나 둘 셋 넷…. 이렇게 세어 보라구. 셀 수 있어요? 하루, 어떤 때는 일주일, 열흘, 한 달 동안 심장이 움직이는 것을 생각이나 해봤어요? 만일 그것을 상대적으로 보았다간 큰일날 거라구요. 보라구요. 아! 이것이 오늘은 이렇게 가다가 내일은 살짝 이렇게 가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날에는 죽는다구요. 그러니 모르기를 잘한 거예요. 그것을 상대적으로 봤다간 큰일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몸에 있는 신경기관 같은 것이 안 보이기를 잘했지, 거미줄 같은 신경이 있어 가지고 그것이 작용하는 것을 보고 산다고 생각해 봐요. 이렇게 복잡다단한 것이 아이쿠…. 이것은 기계로 말하면 최고의 정밀기계라구. 수억 개가 되는 부속품이 있는데, 이것이 고장 안 난다고 볼 수 있어요? 이렇게 볼 때, 그거 다 안 보이길 잘했지, 그것이 보였으면 큰일날 거라구요. 심장이 뛰는 것을 모르길 잘했지, 알면 큰일난다구요.
그것은 왜 모르느냐? 너무나 가깝기 때문입니다. 내 생명이 있는 그이상에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그것이 내가 존속하는 생명 감각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벽이 되어 있어서 영화 스크린과 같이 반사되어야만 비쳐지는데, 그것을 타고 넘어가 있기 때문에, 그 벽을 돌아가서야 느끼게 되어 있기 때문에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도 너무 가깝기 때문에 안 보이는 거예요. 눈도 가까이 있기 때문에 안 보입니다. 그래서 가까와도 안보이고 멀어도 안 보이지요? 세상만사가 다 그렇게 되어 있다구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 더불어 사랑을 느낀 사람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이 있고 없고 하는 것이 문제 안 된다구요. 안 그렇겠어요? 그런 세계가 있다구요.
그러면 천사장급 사랑 가지고도 죽자살자하는데, 이것이 아담급 사랑 이라면 어느 정도이겠느냐? 아담적 사랑은 어느 만큼일 것이냐? 물이 펄펄 끓는데 찬물을 갖다 퍼붓거나 얼음을 팍 집어 넣으면 어때요? 소리가 나요, 안 나요? 팍 소리가 납니다. 한번 해보세요. 아이고 더운데 찬물 들어오니 좋다 하는 거라구요. 폭발되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그 사랑에도 수백조 개가 되는 세포가 한꺼번에 달려온다구요. 알겠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을 접했으면 어떻게 될 것이냐? 머리카락도 춤추고 세포도 춤춘다는 거예요. 그렇다구요. 백 퍼센트 그 사랑에 취하면 나가자빠지는 것이 아니라, 천년 만년 살고지고가 되는 거라구요. 누가 깨려고 하면 깨지 말라고 하는 거예요. 요지경 판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신선 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것을 모른다는 말이 있지요? 그만큼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고차적인 사랑에 취할 수 있는 길이 있을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사람은 취해서 살아야 합니다. 취해서 사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예술가들은 예술에 취해 삽니다. 문학을 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구상하는 책을 쓴다든가, 어떤 명작에 취해 사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사지백체는 입체적인 하나님의 이상적인 사랑에 취해 가지고 그분만 따라다녀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외적으로 파이프를 대 가지고 술 먹고 취하자, 아편 먹고 취하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아편보다 못해요? 하나님의 사랑이 술보다 못해요? 하나님의 사랑이 꿀단지만 못해요? 사탄 세계의 똥개 같은 것을 사랑이라고 해 가지고 그것 가지고도 죽느니 사느니 하고, 사랑이 영원하니 어떠니 수작하는데, 생각해 보라구요.
하나님의 사랑을 느낀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누가 춤을 가르쳐 주기 전에 자동적으로 율동적으로 춤을 추게 되어 있는 거예요. 버튼만 누르면…. 주파만 맞추면 무인 비행기가 이리 오자면 싹 오는 거와 마찬가 지로 거기서 놀아나는 대로 놀아나는 것이지, 자기가 뭐 '나 싫소' 하면서 떨어지게 안 되어 있다구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있다 없다 하는 그런 생각 하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이 있다 없다는 걸 논하는 것은 미치광이 짓이지요, 비정상적이라구요. 남편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나 남편 없어. 남편의 사랑이 뭐야' 하는 것과 같아요.
그러면 하나님의 소원이 뭐냐? 임자네들이 아들딸을 수두룩하게 낳아 가지고 좋다고 춤추는 거예요? 그 아들딸을 보고 좋다고 춤을 추었다면 그건 사탄세계의 춤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릇된 사랑에 의해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릇된 사랑을 청산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예수님도 '누구보다 나를 더 사랑하지 않으면 나에게 합당치 못하다'고 표준을 세워 놓은 것입니다. 2천년 전 예수님이 '네 어미나 아비나 처자나 누구보다 나를 더 사랑하지 않는 자는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제자가 못 된다고 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했습니다.
지금까지 역사시대에 있어서는 인간은 나 하나만 잘되려고 했습니다. 그러면 다 망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구원받는 비결이 뭐냐 하면 '나도 불쌍한 사람이지만, 불쌍한 나를 대하시는 하나님은 얼마나 불쌍합니까? 그 불쌍한 하나님은 나와 같이 불쌍한 사람이 사는 세계를 구하지 않으면 안 될 하나님이시요 나는 이왕지사 죄를 지어 망할 몸, 세계 사람들의 죄를 대신하여 나를 잡아죽이고 그들을 용서해 줄 수 있다면 용서해 주시옵소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길밖에 없다는 거예요. 이것이 종교의 길, 십자가의 길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의 짐을 내가 대신 지고, 하나님의 수고의 길을 내가 감소시키는 길 외에는 내가 하늘을 찾아갈 수 있는 길이 없기 때문에, 예수님은 자기를 희생시키는 자리에, 원수의 복을 비는 자리에 대표적으로 섰던 것입니다. 불신하는 세상에 선의 사상을 남기는 길은 그 길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서적 분야에 있어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재차 발굴해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내 소성에 있어서 그런 요소가 없느냐? 요소가 풍부하게 있습니다. 지남철을 보게 되면, 이런 판자 위에 철가루를 놓고 지남철을 대고 그 위로 쭉 끌고 가면 판자 위의 철가루가 쭉 따라옵니다. '이놈아, 오지마 오지마' 해도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걸 높이 떼게 되면 점점 약해지는 겁니다. 점점 높아지면, 아물아물하게 되는 거예요. 우리 인간도 이렇다구요. 6천년 동안 떨어져 있는 거라구요. 성경의 6천년은 몇 십만년이 될 수도 있다구요. 인간의 역사를 8천만년이라는 말도 있지만….
하나님은 지남철과 같고 인간은 철분과 같은데 하나님이 이렇게 왔다 갔다하면 요 끄트머리가 하나님을 따라 움직입니다. 알겠어요? 그래도 여러분의 선조가 선한 사람은 꼭대기가 좀 많이 움직인다구요. 그 비중에 따라서 선조가 더 선한 선조면 밑창까지 움직입니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안테나와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에게는 그런 소성이 있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그런 소성을 발굴해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벗겨 버려야 합니다. 무엇을 벗겨 버려야 되느냐? 전통이니 습관이니 역사니 문화니 사상이니 배경이니 하는 껍질을 벗겨 버려야 됩니다. 이 누더기 껍질이 붙어 있다구요. 그러니 눈으로 보려거든 떼버려라 이거예요. 먹자, 그러면 떼버려라 이거예요. 냄새 맡으려고 하면 떼버려라 이거예요. 맛을 보려거든 떼어버려라 이거예요. 다 부정해야 합니다. 다 부정하면 다 없어집니다. 그래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에 취해서 아버지를 부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째까닥 달라붙는다는 거예요. 말하자면 그렇다는 거예요.
그래야 지금까지의 종교의 명분이 서지요. 없는 하나님을 그렇게 찾았어요? 그렇다면 종교는 인간세계에 있어서 용납할 수 없는…. 이것을 무엇이라고 할까? 기만, 기만이라구.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심전(心田)계발이라는 말이 있다구요. 심전, 마음 밭을 계발하라는 것입니다. 돌짝 밭이 많고, 가시덩굴이 많고, 바윗돌이 많고, 골짜기가 많고, 험산준령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이것을 평지로 만들라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무엇이더냐? 마음속에 그리는 것이 사랑인데, 그것이 사랑인지 뭔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제일 빠른 길이 사랑의 길입니다. 제일 빠른 길이 사랑의 길이예요.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그것을 발전시켜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걸 알아야 돼요.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언제나 신앙자들이 주의해야 될 것은, 신앙자에게는 반드시 가르쳐 주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암시나 혹은 몽시나 계시나 묵시를 통해서 가르쳐 주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암시라는 것은 상관없는 데서, 즉 여기서 파리가 날아갔는데 거기에서 무엇이 연상돼 가지고 깨닫게 되는 거예요. 혹은, 어떤 사람을 척 만났는데 자기가 무엇을 느낄 수 있는 거예요. 이런 것들을 중심삼고 발전시켜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 내가 떨어져 있다 하는 관념을 갖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본래부터 나와 하나다, 하나다' 하는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걸음 가면 하나님과 몇 걸음 떨어지느냐 하는 생각을 해야 됩니다. 얼마만큼 떨어져 있느냐? 내가 다섯 걸음을 가면 하나님은 몇 발자국 떨어져 따라오느냐? 이렇게 생각하라는 거예요. 하나님은 틀림없이 따라온다는 거예요. 자기가 태어날 때 열 발자국의 거리를 갖고 태어났으면 하나님은 항상 열 발자국 뒤에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그 사이를 점점 가깝게 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뭐, 하나님이 올 수 없다구요. 내가 하나님을 찾아가야 됩니다. 거꾸로 가는 거예요. 그래야 될 것이 아니예요? 그래서 신앙길은 거꾸로 가는 것입니다. 거꾸로 가는 거라구요.
뭐, 여편네 사랑하고 남편 사랑하고 자식들을 품고 가는 길이 아니라구요. 거꾸로 가려니 세상과 다르다는 거예요, 그 법이. 입산수도 하려면 세상과 멀어지는 거예요.
잘나나 못나나 인간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인데 어찌하여 하나님을 따라갈 수 없느냐?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나보다 하나님이 조금 앞서 가는 거예요. 이렇게 돼 있다구요.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하신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아무리 사악한 세상이라도 내 발걸음보다 내 아버지의 발걸음이 앞서야 되는 것이지 내가 앞서서는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손을 들더라도 나보다 하나님을 중심삼고 간절하게 들어야 됩니다. 뭐든지 그렇게 살아야 됩니다. 또, 내가 보는 것도 내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아요? 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주체의 요건 앞에 일치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대상의 인연이 성립될 수 있는 기본 원칙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주체와 대상이 일치하게 될 때, 사랑의 인연은 성립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생활 감정에 있어서 하나님의 감정과 공감된 감정을 어떻게 느끼느냐 하는 것이 문제인 거예요. 내가 그래요. 혼자 있으면 '아버님' 하고 나도 모르게 부르게 되는 거라구. 그러면 '오냐' 하는 느낌을 받아요. 일체되면 그렇게 되는 거라구요. 아무도 없는 것 같지만 누가 나를 주관하고, 지도하고 있다구요 그런 생활권내에 들어간 사람이라면 하나님이 있다 없다 하는 것이 문제가 돼요? 어려움에 부딪히면 반드시 나를 옹호해 주고 그곳으로 인도하고 있는 것을 아는 자리에서 하나님을 저버리고 갈 수 있어요?
그러므로 표면화된 생활 감정을 내가 어떻게 발굴하느냐가 문제입니다. 혼자가 아니라구요. 모든 만사를 그렇게 생활을 해야 됩니다.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을 대할 때 아버지의 반기는 얼굴과 같이 대하고, 아버지가 내 전체에 그늘진 것을 밝혀 준다고 생각하라는 거예요. 광명한 그 모습을 보고 아버지를 모시고 기뻐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자연을 바라보고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소성을 전부 대응적으로 자극시킬 수 있는 생활, 자연을 필연적인 요건으로 느껴 나와 상관을 짓고, 하나님에게까지 연결시킬 수 있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아요?
옛말에 '천, 지, 인'이라고 했지요. 천 지 인, 즉 하늘과 땅과 사람이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종으로도 연결되어 있지만 횡으로도 연결돼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것들과 일체화할 수 있는 감정적 생활이 필요 하다구요. 그렇게 되면 여러분이 그런 경지에 들어가게 됩니다. 즉, 자기의 손을 보고도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 겁니다. 자기가 자기를 안고 춤추고 싶은 세계가 있다는 거예요. 알겠어요? 거기에는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보다 고차원적인 인간의 가치의 기준이, 절대적인 하나님의 사랑과 일치될 수 있는 주관권이 우리 인간 앞에 본성으로 부여된 기준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계발하면 누구나 다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수난의 길이 고통이 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쓰러져서 생명이 경각에 달하는 입장에 서더라도, 그 자리에 들어감으로 말미암아 아버지의 사랑이, 아버지의 동정이 나에게 가중되어 들어오는 것을 느끼기 때문에 그 자리는 외로운 자리가 아니라구요. 또, 그런 자리에 들어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수고의 길을 내가 대신 가면서 효의 자리, 충의 자리에서 책임을 다할 수 있고, 하나님의 안식을 위해서 내가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그 이상 행복이 어디 있겠어요? 그렇지 않아요?
남편을 위해서 수고하는 아내의 손은 영광의 상징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굳어진 손을 바라보게 될 때 그것이 불행이 아닙니다. 남편을 위해서 충을 다한 손이라는 거예요. 남편을 위해서 열을 다한 손이 라는 거예요. 그런 아내의 손은 불행한 손이 아닙니다. 그것은 위대한 손입니다. 그것은 도리어 전통에 빛날 수 있는 역사적인 기원으로 남아지는 것이 아니냐.
이런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주관하는 세계를 바라고 있는데, 그런 세계가 되려면 하나님이 주관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됩니다. 무엇으로 주관하느냐? 사랑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그것과 얼마만한 거리에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예요. 그것을 어떻게 실현시킬 수 있느냐? 실현시킬 수 있다는 거라구요. 그런 경지에서 여러분이 병자를 붙들고 기도를 하면 병이 낫는 거예요. 그 어머니 아버지 이상의 아픈 마음을 느껴야 돼요. 그런가 안 그런가 두고 보라구요.
죽어 가는 자식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마음 이상의 마음을 갖고 부르짖으면 하나님은 같이하십니다. 사랑의 이상을 들고 나오는 상대적인 요구에 대해서는 언제나 시간과 장소를 초월해 가지고 상대해줘야 할 주체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러한 심정적인 경지에 들어가 붙들고 기도하게 되면 안 이루어지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예」아내면 아내가 병석에 누워 신음하는 것을 바라보는 남편의 그 애절한 심정 이상의 심정을 내가 어떻게 체휼하느냐? 문제가 그거예요. 내가 그를 붙들고 눈물을 흘리고 그 사람의 생명 이상의 자극을 가지고 사랑의 마음으로 위할 수 있는 동기가 어떻게 벌어지느냐는 것입니다. 그것만 되는 날에는 말 한마디에 병도 나을 수 있는 거예요. 그것은 기적이 아니라구요. 그와 같은 사랑의 인연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도 천지를 창조하게 되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문제는 거기에 있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나라면 나라를 사랑하는 데 있어서, 나라의 운명을 놓고 그 나라의 역사적인 모든 충신들이 아파하는 그 이상으로 염려하는 마음을 가지고 나라를 위하여 기도하게 되면, 그 사람의 기도는 그 나라의 국운을 좌우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이렇듯 사랑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은 이루어지고, 사랑으로 말미암아 보다 고차적인 진전이 성립된다는 결론이 나온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오늘날 종교인들은 이 세상의 비종교인들이 갖지 못한 새로운 입체적인 감정의 세계를 가진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것이기에 생명을 버리더라도 그 절개와 전통을 남기고 가려고 하는 것이 순교의 길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 점점 이상의 때가 다가오고, 우리의 목전에 세계의 관문이 열려 들어오는 이때에 있어서, 하나님이 맞고 싶은 무리는 어떠한 무리냐? 여러분과 같이 오늘의 현실에 고착된 생활을 중심삼고 신음하는 무리가 아니라, 이것을 해방하고 개방시키는 새로운 기수가 되어, 새로운 선포와 새로운 선언을 할 수 있고, 하나님의 사랑의 대를 이을 수 있는 자녀들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은 두말할 바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러한 우리들을 만나게 될 때, 비로소 사랑 어린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사랑 어린 손으로 우리를 안아 주고, 사랑 어린 마음으로 우리와 함께 사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24시간 우리와 같이 살 수 있는 그 세계를 이루어 그 세계에서 살고 죽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이 타고난 생애의 목적이 아니겠느냐?
여러분들은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자신이 하나님께서 사랑 하실 수 있는 그런 아들딸이 못 되면 '아버지, 그러한 사람을 만나게 해주시옵소서. 당신이 사랑하는 것을 한 번 보고 싶습니다. 내 눈은 당신의 사랑 한 번 받을 수 없는 눈이 되었을망정, 당신이 사랑하는 아들을 보고 싶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그런 사람이 있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그런 사람이 없거든 '내가 천만 배의 수난의 길을 가더라도 나 같은 사람을 통해서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면 나를 세워 주시옵소서. 가고 싶습니다' 할 수 있는 아들딸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 가지고 '평화로운 하나님을 내가 보고 싶다. 종족이면 종족을 치리하는 하나님을 만나고 싶다. 나라를 다스리는 하나님을 만나고 싶다. 천하를 주관하는 하나님을 만나고 싶다. 하나님의 주관권내에서 부족함이 없는, 그야말로 이상이요, 만족이요, 행복의 최고의 절정에서 살 수 있는 세계, 하나님이 사랑으로 주관하는 그 세계를 보고 싶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세계를 볼 수 없겠거든, 나 자신이 보게 해야 되겠다고 하며 그 책임이라도 하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되면, 천신만고 수고의 길에서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런 사람이라면 하나님은 그래도 지옥은 면하게 하여 천국 아닌 제 2 차적인 세계에라도 데려다 줄 것이 아니냐? 이것은 틀림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런 사람이 못 되거든 그런 사람을 보기라도 해야 합니다. 볼 수도 없으면, 하나님은 누구보다 불쌍한 분이기 때문에 나라도 그 길이 어떠한 역경의 길이라도 그 길을 가겠다는, 어떤 조건이라도 세우겠다는 신념을 갖고 가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라면 그는 그래도 하늘편에 속한 사람이 아니냐? 그런 일이 벌어질 때 거기서 하늘의 주관권, 하늘의 이상권이 연결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두말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은 그러한 사람에게 복주고 사랑할 것이 아니냐 이거예요.
예수님의 30여 년의 생애를 두고 볼 때,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아들로 왔지만, 사랑을 못 받고 십자가에 달리셨는데 그 모습을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보고 싶지도 않다고 하셨던 하나님의 원한의 그 모든 구렁텅이를 내 생애에서 메워 주고, 그 이상의 아들을 갖고 사랑할 수 있는 아버지를 보고 싶다고 해야 됩니다. 예수님이 죽지 않고 신부를 맞아 가정을 이루어 사는 것을 보고 싶다, 그렇지만 못 보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위해 살아야 되겠다, 예수님이 왕과 제사장이 되어 이스라엘 나라와 유대교를 치리하면서 사는 것을 보고 싶다, 그렇지만 그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위해서 살아야 되겠다, 그것을 보는 것이 내 일생의 소원이다, 지상천국, 사랑의 세계를 이루어 내 기쁜 세계를 보라고 자랑하고, 모든 동물이나 미물까지도 하나님을 존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할 수 있는 그러한 주관주, 만물의 주인공을 보고 싶다고 해야 될 것입니다. 그럴 수 없는 입장이지만 그것을 소망으로 삼고 보고 싶어서 몸부림치며 살아가는 것이 신앙길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할 것이냐? 여러분, 이것이 말뿐이 아닌 것입니다. 선생님이 뜻을 가려 나올 때 제일 심각한 것이 무엇이었느냐 하면 '우주 주관 바라기 전에 자아 주관 완성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제일의 표제였습니다. 우주 주관은 누구나 다 하고 싶지만 자아 주관은 못하는 것이 아니냐? 자아 주관은 무엇을 중심삼고 하느냐? 내 욕망을 중심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어떻게 자아 주관을 완성하느냐? 생명을 여의는 한이 있더라도 그 기준을 중심삼아 가지고 일대에 격전을 하여 나는 패자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둘째 번은 무엇이냐? 하나님이 주관하는 세상을 그리워하기 때문에, 당신을 통해서 당신이 하는 것을 보고 싶소…. 그 생활입니다. 의논하고, 의논하고 살아가는 거라구요. 무슨 사건을 대하게 될 때 '나는 이렇게 생각하지만, 공의의 하나님은 이렇게 할 것이다' 하며 그 하나님의 답변과 결론을 따라서 사는 것입니다. 통일적 주관권의 이념을 실천하자 하는것입니다.
세째 번은 무엇이냐? 책을 중히 여기지 말고 사람을 중히 여기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생님의 생활의 3대 목표입니다. 나는 지혜를 원치 않고, 나는 지식을 원치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느끼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이 3대 요건인 것입니다.
이걸 이루기 위해서 나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믿고 가겠소, 배드로의 신앙이 문제가 아니요, 솔로몬의 지혜를 추구하는 그런 모든 것이 문제가 아니다, 무지하더라도 좋다, 절대적인 신앙이다, 사탄이 내 앞에 와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전하면 사탄의 그 말을 하나님의 말씀화시켜야 된다. 이런 신앙을 표방해 나오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믿지 못할 것이 없다, 누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믿어야 되는 것이다, 그런 신앙 자세를 갖고 나오다 보니 통일교회의 책임자가 되었습니다.
교단의 규탄을 받았고 대중이 부정하는 길을 내가 걸어왔지만 하나님은 부정 안 했습니다. 태양빛은 몇 만 볼트짜리 억천만 개의 전기불보다도 밝은 것이 아니냐? 태양이 나오면 억천만 개의 전기불은 다 빛을 잃는 것입니다.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지…. 여러분이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그것을 어떻게 생활화시키고 실천화시키느냐? 그것이 그리워 자기도 모르게 혼자말로 '난 이렇게 삽니다' 이렇게 중얼거리며 보고를 할 수 있는 경지로 들어가야 합니다. 아버지가 보고 싶어서 몸부림치면 볼 수 있다구요. 그러한 인연이 인간에게서 벌어지기 전에는 하나님이 주관하는 세계는 현현하지 않습니다. 그 세계는 사랑의 터전을 통해서 지었기 때문에 그 인연을 거치지 않고는 하나님과 연결될 수 없는 것이요, 하나님의 주관권이 성립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그것을 표준으로 해 가지고 바라고 나온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재림이라는 말이 얼마나 고마운 말인지 모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 기독교의 지도자들은 '뭐 예수야 재림하시든지 마시든지 나는…' 그럽니다. 우리 통일교회 교인들은 그래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들은 기성교회 교인들 앞에 비할 수 없는 신앙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직접 체험을 하고 있다 이거예요.
선생님은 여러분을 영적으로 전부 다 지도하고 있습니다. 이게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통일교회의 비밀입니다. 일본 식구들에게 이번에 쭉 물어 보니까 체험했다는 사람이 90 퍼센트 이상 이더라구요. 이것은 통일교회의 위대한 힘이라구요. 이건 설명아 필요 없다 이거예요. 이러한 것이 공간 세계를 초월해 가지고 가능한 자리에 있다구요. 그러므로 하나님이 사랑하고, 보고 싶어 하는 그 사람의 생활, 그 사람이 가는 길, 그 사람이 원하는 그곳을 나도 보고 싶다고 거기에 취해 가지고 거기에 미쳐 가는 사람은 대번에 통해 버리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대번에 통해 버리는 거라구요.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는 다릅니다.
통일교회에서 제시하는 얘기에 순응하지 않아 보라구요. 고통이 오는 거라구요. 아무리 혼자 바위틈에 숨어 있어도 양심이 편안치가 않다구요. 그러니 시늉이라도 하면서 따라가야 합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느냐?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이 세계가 하나님의 주관권내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이 나라가 하나님의 사랑권내에 품기기 위해서는…. 우리가 눈물길을 닦자는 것입니다. 고속도로를 닦자는 거라구요, 경부고속도로를 내는 데에도 77명의 희생자가 나지 않았어요?
내가 고맙게 생각하는 것은 통일교회가 하나님권으로 천로역정을 닦아 나가는 데 있어서 얼마나 희생되었겠느냐는 것입니다. 나 자신도 아직까지 희생되지 않았는데, 고생이야 좀 했지…. 생명을 바치고 나서야 참다운 효자가 나오고, 생명을 바치고 나서야 충신이 나오는 거라구요. 아무리 7,80년 고생을 했더라도 생명을 바친 젊은 충신보다는 못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그러한 희생이 없었기에 하나님이 배가의 희생을 치렀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이 자는 시간에 하나님은 복닥불나는 싸움을 하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손에 손을 잡고 군과 군을 연락하고, 면과 면을 연락하고, 마을과 마을, 가정과 가정. 개개인에게 연락해 가지고, 서울에서부터 삼천리 반도를 연결시켜 하나님의 손길을 붙들고 모실 수 있는 이상적인 이 주관권을 확대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세계를 복귀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러한 입장에서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냐?
오늘날 여러분은 혼자가 아닙니다. 이런 것을 알고 지금 이때가 얼마나 긴급한 때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 민족이 가려 가야 할 수많은 싸움이 남아 있는 것을 생각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부여안고 기도해야 되고, 민족을 사랑해야 되고, 세계를 사랑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소개해 주고, 하나님의 주관권의 환경을, 하나님의 사랑의 인연을 맺어 주고 발전시키는 데 있어서만이 하나님이 주관할 수 있는 이 세계가 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고, 그렇게 생활해 나가기를 바라서 말씀드렸습니다.
아버님, 당신의 사랑 앞에는 지극히 어리석은 대상이옵니다. 여기 서 있는 이 자식도 일면 보면 무지한 것 같고 어리석은 것 같이 살아왔습니다.
세상에 이목구비를 갖고 살면서도 자신을 치다꺼리 못 하고, 당신만을 위하여 모든 것을 잊으며 싸워 나왔습니다. 과연 그 길이 쉬운 길이 아닌 것을 생각하게 될 때, 그 길을 가라는 당신의 마음은 얼마나 아팠습니까? 이런 자리에 세워야 되는 당신의 심정은 얼마나 비통했습니까?
그 하나의 심정만이 전폭적인 생명의 원동력이 됨으로 말미암아 오늘날까지 죽지 않고 이 자리에 서서 어린 자녀들을 대할 수 있게 된 것이 옵니다. 이것은 당신의 노고와 수고의 공적인 터전에서만이 가능한 것임을 절실히 느낍니다.
아버지,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세워 놓고 약속이 컸던 것을 생각하게 될 때, 황공합니다. 그렇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이들을 붙들고자 하시는 아버지가 불쌍하옵니다. 그렇게 찾을 민족이 없어서 대한민국의 이 불쌍한 한민족을 찾아왔다는 것이 불쌍합니다.
세계에는 이 나라보다도 잘난 나라가 많이 있습니다. 세계에는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데 있어서 우리보다도 월등한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당신의 사랑 앞에는 먼 것을 알았습니다.
철부지하고 순진한 자식이 부모만을 그리워하며 우는 모습을 바라 볼 때, 일면 어리석다고 평은 하지만 뼛골에서 우러나오는 내정을 가지고 목을 안고 통곡하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인 것을 생각하게 될 때, 내가 그럴 수 있었던 때가 얼마나 많았던가를 느끼게 됩니다.
세상이 뭐라고 해도 당신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까지 싸워 나왔습니다. 나라가 뭐라고 하더라도 당신의 영광을 가릴까봐 조심조심 가고 있는 길입니다. 그 누구는 통일교회 책임자는 행복하겠다고 말하겠지만, 사랑의 길은 고달픈 길이었습니다. 효도의 길은 가고 나서는 자랑하는 것이 아닌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충신이 가는 길이란 다하고 나서 부끄러움을 느끼는 길임을 알았습니다.
아버지, 통일교회의 문이라는 사람이 얼굴을 들고 자랑하는 그날이 있기를 바란다면 당신이 먼저 그럴 수 있는 날이 있고 나서야 그러고 싶은 것이 저의 마음인 것을 당신은 잘 알고 있습니다. 가고 또 가고, 달려가고 또 달려가야 되겠습니다. 밤에도 가야 되겠고, 낮에도 가야 되겠습니다. 피곤해도 가야 되겠고, 지쳐 쓰러지더라도 가야 되겠습니다. 죽을 자리자서도 죽을 수 없는 미련을 남긴 운명을 지니고 살아가야 할 이 길이 보다 행복한 길인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이날까지 싸워 나온 것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아버지, 세계를 주관하고 싶은 것, 이것이 당신의 소원인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 세계를 위해서는 자기의 혈족도 제물 삼아야 되겠습니다. 그 세계를 이루기 위해서는 통일교회의 사랑하는 무리들을 희생시키지 않으면 아니 될, 억울한 길을 가야 되겠습니다. 하늘이 주관하는 세계를 이루기 위해서는 수많은 종교인들을 희생시켜서라도 가야 할 길인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하늘의 세계를 이루기 위해서는, 대한민국이면 대한민국을 희생시켜서라도 세계를 구해야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통일교회는 지상의 권력을 잡기 위해서 꿈을 꾸고 있다는 말들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옵니다. 저희들은 당신의 사랑의 나라를 그리워하는 무리이옵니다. 세상에 미련을 갖고 있지 않은 무리들인 것을 당신은 알고 있습니다.
삼천만 민중이 당신의 사랑 앞에 결속되게 될 때, 김일성이는 문제가 아닙니다. 공산당이 문제가 아닙니다. 신이 없다는, 이런 비원리적이요, 비진리적인 그 사상이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천만 마디의 말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가지고 있는 체험이 문제인 것을 그 누가 뭐라 해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자기를 사랑하고 있는 어머니를 부정할 수 있는 논리는 없는 것이요, 사랑하고 있는 아내를 부정할 수 있는 논리는 없는 것이요, 사랑하고 있는 자식을 부정시킬 수 있는 논리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아버님의 집에 거할 수 있는 아들이 되고, 딸이 되고, 주인이 되는 것이 문제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럴 수 있는 자녀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아침, 여기에 온 당신의 아들딸들이 이제 7월을 보냅니다. 8월을 맞게 될 때는 당신의 소망의 때가 어서 가까이 오게 하시옵소서. 비운의 역사를 해결하여야 할 남북한의 이 민족이 아버님의 광명한 사랑의 빛을 바라볼 수 있는 날이 어서 속히 오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것을 위하여 저희들은 또 가야 되겠습니다. 남한 땅의 핍박길을 가려 나오기 위해서 지금까지 피땀을 흘려 나왔지만, 북한 땅의 핍박의 길을 가려 나가기 위해서 또 싸워 가야 되겠습니다. 이제야말로 통일교회 신도들은 나라를 넘고 가기 위한 결의를 하지 않고는 통일교회의 일원으로 남아질 수 없는 때가 다가온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버지! 생사를 결정지어 놓고 하늘을 사랑하기 위해 그것을 넘어설 줄 아는 당신의 무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7월을 보내고, 맞이해야 할 8월은 해방이라느니 광복이라느니 이런 것을 자랑할 수 있는 달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일제 식민지로부터의 제 1 차 해방, 남북이 가로막힌 것을 헐어야 할 제 2 차 해방, 세계가 가로막힌 것을 헐어야 향 제 3 차 해방을 꿈꾸고 나가는 것이 통일교회가 가는 길인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이 3 차 세계 해방을 이루어 당신이 승리 주권자가 되고, 사랑의 주도자가 되는 그날을 보지 않고는 죽어서는 안 될, 한을 품고 있는 무리가 통일의 무리이옵니다.
아버지여, 저희들은 당신과 같이 이러한 사정이 있사오니 당신께서 인도하시고 같이하시기를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그러한 무리로 시작하고, 그러한 무리로 남아지고, 그러한 무리로 끝을 맺게 허락하여 주옵길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니다.
만만사의 사랑과 당신의 긍휼이 길이길이 보잘것없는 저희들의 머리 위에, 생활 위에, 생애 위에 같이하옵길 간절히 부탁하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