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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리의 십자로

일시: 1972.07.09 (일) 장소: 한국 전본부교회

​[기 도]

아버님, 오늘은 1972년 7월 9일, 이달을 맞이하여 두번째 맞는 거룩한 안식일이옵니다. 이 아침에 당신의 무한하신 사랑과 자비와 긍휼과 보호가 불쌍한 이 민족과 이 세계 위에 같이하시옵소서.

주인이 없는 이 천지에 아버지께서 주인이 되셔야 되겠습니다. 금후에 가야 할 이 나라의 운명을 책임지고 지도할 수 있는 중심도 당신이 되셔야 되겠습니다. 저희의 가정이나 개개인이 바라고 나가는 소원의 중심도 아버지가 되셔야 되겠습니다. 세계에서도 필요로 하고, 나라에서도 필요로 하고, 가정에서도 필요로 하고, 개인도 필요로 하는 것이 온 천지를 지으신 주인 되시는 당신이요, 아버지이신 것을 저희들은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당신은 무한한 능력을 가지신 분이요, 시간과 공간세계의 어떠한 제재를 받지 않으시는 전능하신 분인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습니다. 당신으로 말미암아 지어지지 않은 것이 없고, 당신은 모든 것의 원인의 내용을 갖추신 주체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당신의 인연을 따라서 존재한다는 것을 저희가 알고 있사옵고, 존재하는 것은 주체이신 당신 앞에 상대적 목적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이 없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 자리에 선 개인이요, 가정이요, 국가요, 세계가 되어야 하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먼저, 당신을 주체로 하고 저희 자신들을 영원한 대상의 실체로 세워 주체와 대상이 분립될 수 없는 하나의 통일된 모습을 갖추어야 되는 것이, 저희 개인의 인생 행로의 소원이요 바라는 정착점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날을 모색하기 위하여 역사는 동원되어 왔고, 그러한 자체를 형성하기 위하여 개개인에 있어서 생활과 생애의 노정이 설정되어 있는 것을 언제나 언제나 망각하기 쉬운 저희들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자리에 서 있는 인간들이기 때문에, 자기 자체를 새로운 입장으로 형성하는 데에 자기만으로 될 수 없는 인간들 앞에, 아버지는 역사시대를 거쳐오면서 수많은 선지선열과 예언자를 통하여 당신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을 예고하신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습니다.

어디를 가더라도 아버지를 모시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수많은 종교는 다 가르쳐 주었습니다. 인간이 아버지와 일치가 되고 아버지와 더불어 존속하지 않으면 당신의 영광의 세계에 남아질 수 없다는 것을 수많은 종교는 가르치면서, 그러기를 바라면서 역사시대에 공헌해 온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와 같이 공헌해 오던 수많은 종교의 목적은 본연의 자아의 가치를 찾아 본연의 주체 앞에 불변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는 개인적 완성의 모습을 그렸던 것임을 저희 자체는 회상하면서, 저희 자신에게서 이와 같은 가치를 추구하게 될 때에 자신이 부족한 것을 자탄해야 할 우리 인간인 것을 다시 한번 발견해야 되겠습니다.

아버지, 이 아침에 소수의 무리가 당신의 존전에 나왔습니다. 당신은 주체이시니 저희는 대상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당신은 주인이시니 저희들은 주인의 지시를 받는 추종자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당신은 어버이시니 저희는 자녀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당신이 주도적인 능력과 모든 생명의 원천이시기 때문에, 당신을 통하는 길만이 저희에게 있어서는 보람 있는 생애의 행로가 되는 것을 알고 그렇게 가기를 바라고 이 자리에 나왔사옵니다.

햇빛이 비치면, 모든 존재가 그 햇빛을 통해 생명의 틔움을 바라 가지고 그와 더불어 일치하려는 것을 저희들이 바라보게 될 때에, 미물도 하나의 중심을 향해서 그와 같이 행하는 그 현상을 저희 자신들이 바라보게 될 때, 그와 같은 자리에서 당신은 저희 생명의 주체 되시는 아버지요 저희의 갈 길과 방향을 밝혀 주시는 아버지임을 알고, 당신과 일체가 되고 당신과 하나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생명의 길이 막힌다는 것을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호흡하는 것도 그 가치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요, 저희의 직감과 직관도 보다 입체적인 분야에 있어서 그 가치를 적응시키기 위한 것으로 당신과의 인연을 갖추게끔 부여해 주신 당신의 은사의 조건들인 것을 저희들은 미처 몰랐습니다. 내가 보고 느끼는 것이 나를 위해서 보고 느끼는 줄 알았사오나, 그것이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아버지, 여기에 부복한 저희 자신들. 무엇을 위해 이 자리에 나왔습니까? 누구를 만나기 위해 나온 자리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의 모습을 깨치고 당신과의 인연을 두터이하기 위해서 나온 자리인 것을 저희들은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내 마음 깊이 갈구하는 소원의 일념을 당신 앞에 내놓고, 저는 이러한 자식이요 이러한 길을 가는 모습인데 당신이 원하시는 방향과 바라시는 소원과는 어떠한 차이가 있느냐고 하면서, 그 차이를 알아 가지고 그 간격을 좁혀 일치점을 추구하기 위해 나온 무리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당신이 기뻐하실 때 저희들도 기뻐하고, 당신이 슬퍼하실 때 저희들도 슬퍼하며, 당신이 바빠하실 때 저희들도 바빠하는 그런 부자의 인연을 저희들이 가졌다는 것을 자각하고 나서게 될 때에, 잃어버린 어버이를 찾은 기쁨, 어버이의 소유를 찾은 기쁨, 그리고 그 어버이가 세우려는 나라와 세계를 찾은 기쁨을 진정 맞아들일 수 있게 되고, 당신 앞에 있어서 환영받고 당신의 집에 있어서 환영받고 당신의 나라와 당신의 세계에 있어서 환영받을 수 있는 진정한 아들딸이 될 수 있사옵니다.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 저희의 소원이 아닐 수 없사옵고, 그 소원이 당신의 소원이 아닐 수 없사옵니다. 아들의 소원과 어버이의 소원이 일치될 수 있는 점은 그 자리밖에 없사옵니다.

개인에서 만나고, 가정에서 만나고, 나라에서 만나고, 세계에서 만나서 일치화할 수 있는 부자의 인연을 가진 어버이는 행복한 어버이인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자식을 가진 그 어버이는 행복한 어버이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또, 이와 같이 지도를 해주는 어버이를 가진 자식들은 행복한 자식들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을 찾지 못하게 될 때에는 나는 어디에 머물 것이며, 내 가정은 어디에 머물 것이며, 내 나라는 어디에 머물 것이며, 이 세계는 어디에 머물러야 하겠사옵니까? 그 자리는 당신의 품을 떠나서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죽으나 사나 당신의 품에 머물 수 있는 개인이 되고 가정이 되고 나라가 되고 세계가 되기를 바라옵니다. 이것은 당신의 소원인 동시에 자녀의 소원인 것을 생각하게 될 때, 내 기거하는 목적도 여기에 귀결되게 하고, 생애 모든 전체를 이 무대에서 해소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옵니다.

아버지, 어느 한때에 그럴 수 있는 아들을 맞고, 어느 한때에 그럴 수 있는 딸을 맞아 가지고 세계 앞에, 나라 앞에, 가정 앞에, 만민 앞에 '이 아들을 본받으라. 이 딸을 본받으라'고 자랑하고 품어 보았습니까? 그럴수 있는 참사람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이걸 보게 될 때에 저희들은 죽으나 사나 그런 경지를 찾아 나가야 되겠습니다. 그것을 위해 저희는 모였습니다.

아버지, 저희는 소망의 나라를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소망의 세계를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소망의 나라는 소망의 가정이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요, 소망의 가정은 소망의 개인들이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그 소망의 개인이라는 것은 자기 자신을 중심삼고 자랑할 수 있는 자리에 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중심삼고 자랑할 수 있는 자리에 서야 할 것이옵니다. 천지에 그러한 사람이 없는 것을 아시는 아버지는 이 땅을 바라볼 적마다 질식된 슬픈 마음에 가중된 자극을 받아 얼굴을 붉히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인 것을 생각할 때에, 이 땅에 서실 수 있는 자리가 없는 당신은 불쌍한 분이신 것을 저희가 알았습니다.

아버지, 당신이 저희의 문전에 찾아와 가지고 문을 두드리기 전에, 저희가 아버지를 만나기를 그리워하고 흠모하는 아들딸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저희의 집에 찾아오셔서 뵙게 되거든 떠나지 말라고, 영원히 영원히 같이 살자고, 오늘뿐만 아니라 천년 만년 살고 지자고 마음으로 붙들고 환경으로 붙들고 생활로 붙들고 행동으로 붙들 수 있는 아들딸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그 가정을 중심삼고 살 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에서 살자고, 제가 자랑할 수 있고 당신이 바라고 있는 나라가 이런 나라가 아니냐고, 이 나라에서 살자고 할 수 있는 그런 나라를 가져야 되겠습니다. 그 나라뿐만 아니라 당신이 바라는 세계는 이런 세계이기 때문에, 이런 세계에서 같이 살자고 당신이 떠나지 마옵기를 바라며, 세계와 나라와 가정과 자기 개인을 대신하여 아버지를 간곡히 붙들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 할진대는 천년 한을 풀어 놓고, 만인에게 줄 행복의 짐을 다 풀어 놓고 그와 더불어 천년 만년 살고 지고, 사랑의 모든 것을 나눠 주고 싶은 것이 당신의 소원인 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그럴 수 있는 자리를 그리워하는 무리가 불쌍한 자리에서 최후의 싸움을 바라보고 있는 저희 통일의 무리가 되어야 된다는 것을 이 시간 다시 한번 자각해야 되겠습니다.

아버지, 전국에 널려 있는 어린 자녀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은 남다른 십자가를 등에 지고 달리고 있는 무리이옵니다. 남이 모르는 서글픈 눈물을 흠뻑 머금고 나가는 무리이옵니다. 그 누구에게 말하고 싶은 사연이 많지만 먼저 당신의 사연을 풀지 못한 것을 알기에, 효의 도리와 충의 도리를 따라가야 할 길이 남아 있기 때문에, 당신의 사연을 일신에서 짊어지고 가정에서 짊어지고 나라에서 짊어지고 세계에서 짊어질 수 있는 무리를 이루어 보겠다고 몸부림치는 가련하고 불쌍한 무리가 통일의 무리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책임을 수행하겠다고 허둥지둥 수난길, 핍박의 길을 개의치 않고 당신을 향하여 따라 나온 무리인 것을 기억하시옵소서.

당신에게 슬픔이 있거들랑 이들을 책함으로써 더 나아질 수 있고 슬픈 마음을 풀 수 있다면, 그 책함받기를 바라는 통일의 무리가 되어야 되겠고, 당신의 저주와 원망이 오늘날 이 세계를 향하여 있거들랑 그 저주와 원망을 풀어 드리고 위로해 드릴 수 있는 무리는 저희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저희는 저희 자신을 위해서 사는 무리가 되어 가지고는 당신을 위로할 수 없다는 것을 안 무리이기 때문에, 저희들이 태어난 것도 당신을 위해 태어난 것이요, 사는 것도 당신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아버지, 저희들이 부르는 '아버지'라는 명사는 다릅니다. 저희들이 모시고 있는 '하나님'이라는 그 명사는 다릅니다. 저희들이 바라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내용도 다릅니다. 높고 거룩하신 당신의 현현의 한날을 대해 저희 개인이 맞이할 수 있는 그 기쁨을 천하와 더불어 갖출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 저희의 소원이요, 당신을 기쁜 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가정의 인연을 천지와 더불어 맺기를 바라는 것이 저희의 소원이요, 당신의 기쁨의 영광을 나라와 더불어, 만국과 더불어 맞기를 바라는 것이 저희의 소원이요, 이 세계가 당신을 기쁨으로 맞을 수 있기를, 영계와 육계가 통일된 자리에서 맞기를 바라는 것이 저희의 소원입니다.

맞되 그 누구를 높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당신은 당신대로 우리는 우리대로 따로따로가 아니라 하나가 되어 오직 사랑으로 엮어진 둘이자 하나인 통일된 형태를 갖추어 전체의 요인이 될 수 있는 심정 어린 자리를 바라는 것이 통일사상이 주장하는 심정의 세계관인 것을 알고 있는 저희들, 그 자리를 바라보면서 이 시간 개체의 미숙한 것을 제거하고 새로운 전진과 발전을 추구하기 위한 생활을 다짐하기 위해서 아버지 앞에 나왔사오니, 긍휼히 보아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전국에 널려 있는 당신의 자녀들, 이곳을 향하여 마음을 조아리며 아버지 앞에 축수를 드리고 있는 무리가 많을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본부에 살고 있는 무리는 빚지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빚지는 사람은 부끄러운 사람이옵니다. 빚지는 사람은 그 누구에게도 변명할 수 없는 것이요, 그 누구에게도 자랑할 수 없는 것이요, 그 누구에게도 줄 수 없는 것임을 저희들은 알고 있습니다. 본부에 있는 저희들. 혹은 서울에 있는 식구들은 전국의 식구들 앞에 빚을 지워야 되겠습니다. 주어야만 되겠습니다. 한국에 있는 통일의 무리들은 세계에 널려 있는 통일의 무리들 앞에 빚을 져서는 안 되겠습니다. 줄 수 있어야만 되겠습니다. 원천(源泉)이 있으면 그 원천을 통하여서 제한된 그릇의 물은 넘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언제나 주는 것이 계속되기 때문에 언제나 새로운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럴 수 있는 이 본부가 돼야 되겠습니다.

당신이 이 자리를 지키시옵소서. 이 자리의 주인은 그 누구도 아니옵니다. 당신만이 주인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당신이 현현하시는 곳에 새로운 것이 조성되는 것이요, 새로운 발전적인 동기가 싹트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부디 찾아오셔서 개개인을 붙드시옵소서. 당신은 주체 되시고 능력의 원인이시니, 개체 되는 상대적인 요소를 흡수하셔서 당신의 성상 형상으로 빚어질 수 있는, 그러한 인연이 맺어지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남아진 이날을 복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남아진 이달과 이해가 귀중한 것을 저희들은 알았습니다. 7월 초하루를 중심삼고 이제 남은 6개월이 얼마나 귀중하다는 것을 알았고, 이 나라가 가야 할 길도 그런 운명에 놓여 있으며, 이 세계가 가야 할 가름길도 그러한 기간에 놓여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남한 백성을, 아버지, 지키시옵소서. 북한 백성을, 아버지여, 긍휼히 보시옵소서. 당신이 걸어오신 경륜의 방향에 일치될 수 있는 무리가 되어 천륜을 시봉할 수 있는 민족이 되고, 당신의 거룩한 은사를 대할 수 있는 백성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나라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저희들이 특별히 기도하고 있는 이 기간에, 아버지의 긍휼과 지도가 이 민족과 이 세계 위에서 떠나지 마시옵시기를 재삼 부탁드리옵니다. 온전히 어린아이의 심정으로 당신의 품에 품기는 것만을 소원의 일념으로 가지고 이 자리에 참석한, 거룩한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님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말 씀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섭리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물건도 섭리에 의해서, 다시 말하면 어떠한 주체가 있어 가지고 그 주체의 치리함을 받아 가지고 그 치리 하에서 존속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섭리라는 말을 생각하게 될 때는, 절대적인 주체를 긍정하고서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원인과 결과, 주체와 대상이 완전히 하나되는 데에 행복이

온 피조세계를 두고 보나 혹은 역사적인 우리 인간들을 두고 보나 그것들은 결과물임에 틀림없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결과물입니다. 결과가 나타나기 위해서는 원인에 의해 과정을 통해야 됩니다. 그것을 벗어나서는 결과는 형성될 수 없는 것입니다. 결과가 보다 차원 높은 원인에 속해 있게 될 때에, 그 결과는 보다 가치 있는 목적을 추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높은 차원에 처해 있는 원인이 결과를 대해 엇갈린 자리의 방향을 취해 가지고는 원인이 추구하는 결과를 맞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그 원인이 추구하는 결과를 향해서 일치된 방향을 취해야 되는데, 거기에서 이탈하게 될 때에는 그 결과는 원인에 부합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결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인과 결과에 있어서는 과정이 있고, 그 과정에는 반드시 단 하나의 방향만이 있을 수 있지 두방향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게 될 때에, 오늘날 우리 인간들은 원인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완전한 원인의 존재라면, 그 자체는 완전한 결과를 즉석에서 차지할 수 있어야만 될 것입니다. 그래야만 완전한 원인과 완전한 결과가 즉석에서 하나로 통일되게 되고, 거기에서 완전한 기쁨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완전한 기쁨이라는 것은 어느 한 편에 치우쳐 가지고는 형성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만나 가지고 말하는 데 있어서 '갑'이라는 사람이 말하는 그 말에 '을'이라는 사람이 완전히 하나되게 될 때에, 말하는 사람도 기쁜 것이요 듣는 사람도 기쁜 것입니다. 행복이라는 것도 혼자만의 자리에서는 형성될 수 없는 것입니다. 반드시 원인과 결과, 혹은 주체와 대상이 완전히 하나되는 데에만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모든 존재의 원인과 결과를 두고 볼 때에, 존재하는 것에는 원인을 연결시킬 수 있는 방향이 있는 것이요, 결과를 향하는 방향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인간 자체를 두고볼 때 우리 인간 자체가 완전한 결과의 자리에 있다면, 이 인간에게는 원인에게로 돌아가려는 소원밖에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 자체를 두고 보면, 완전한 결과의 자리에 처해 있다고 볼 수 없습니다. 나 개인을 두고 볼 때에, 내가 만일 어떠한 절대적인 원인자가 있어서 그 원인자 앞에 완전한 결과자로서 언제나 일치될 수 있는 자리에 있다면, 나는 원인자가 추구하는 완전한 대상임에 틀림없다고 하는 자리에 있다면, 나는 인간으로서 최고의 결과의 자리에 선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 섰다면, 그 개인은 이 만유의 어떠한 인간을 대표해도 부끄럽지 않은 존재인 것입니다.

또, 그러한 결과적 존재로서, 어떠한 가정이 나오면 그 가정은 역사시대, 어떠한 시대를 통하든지 부끄럽지 않은 가정일 것입니다. 그러한 가정들이 연결되어 가지고 이루어진 나라가 있으면 그 나라는 하나님이, 절대자가 추구하는 원인적이고 이상적인 나라에 적합한 나라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나라가 있다면, 그 나라는 거기에서 새로운 무엇을 추구하는 것보다도 원인자와 하나됨으로써 행복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혹은, 그러한 세계가 있으면 그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세계가 아무리 복잡다단한 입장에 있다 하더라도 과연 절대적인 원인이 바라는 결과에 선 세계가 된다 할진대는, 그 세계가 미래를 통하여 또 다른 결과의 존재세계를 바랄 것이 아니라 거기서 끝을 맺는 것입니다. 결과로서 완성된 존재이기 때문에, 완성된 존재는 원인인 주체를 다시 이어받을 수 있는 자리에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세계적인 결과의 자리에 선 그 세계는 비로소 세계적인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원인을 이어받고 과정을 흡수한 결실

눈이면 눈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에서 보는 각도가 치우치게 될때에는, 새로운 것이 아니라 반드시 별다른 각도의 시각을 우리가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손발이나 몸 전부가 하나의 형태로서 상대적 여건을 갖추어 가지고 나타나는 데에는 부작용을 느끼지 않지만, 그것이 결여되게 될 때에는 결여된 이상의 부작용을 느끼게 되는 것을 우리가 평시 생활 가운데에서 느껴서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생각하게 될 때에, 혼자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결론을 지을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결과가 훌륭하더라도, 그 결과가 결과를 위한 목적에서 되어진 것이어서는 안 되고 원인이 추구하는 대로 되어진 것이어야 합니다. 원인이 추구하는 과정에서 이탈된 결과의 목적체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원인과 일치되어 가지고 과정과 방향이 일치된 그자리에 있어서 비로소 완결, 완성의 결과가 되는 것이고, 그렇게 되게 될때 원인을 이어받는 것이요, 과정을 흡수한 완전한 결실이 벌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한 나무의 열매를 두고 말해 본다면, 그 하나의 열매가 완전한 열매라고 할 때에, 십년 자란 나무에서 거두어진 열매는 십년 동안의 그 나무의 운명의 모든 것을 이어받은 것입니다. 그것은 거두어진 결과이지만 그 거두어진 결과 자체로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나무가 겪어 온 인연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년이면 일년 동안, 즉 춘하추동의 풍상, 변동기의 모든 자극이라든가 모든 소성의 느낌이 그 열매에 완전히 투입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열매는 십년 세월을 지낸 나무의 결실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매는 그 원인 되는 나무, 십년 세월을 지낸 나무의 인연을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일년이면 일년을 중심삼아 가지고 잎이 나서 꽃이 피고 열매가 될 때까지 그 지향성을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걸 전부 다 흡수해 가지고 십년을 자란 나무가 어떠한 과에 속한 나무로서 완전한 나무라면 그 나무의 열매는 완전한 것입니다. 만일에 그 나무가 부족하다면 부족한 만큼 거기에 해당하는 열매가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미루어 볼 때에,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가 아니예요? 우리 한개인을 보면 하나의 나뭇잎과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 나뭇잎은 나뭇잎 만으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나뭇잎이 태양빛을 받아 가지고 탄소동화작용을 하는 것은, 그 나뭇잎 자체의 삶의 목적을 가려 가기 위해서도 하지만, 나무전체의 목적을 따라서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이럼으로써 나뭇잎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예요?

이렇게 볼 때,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나 자신을 두고 보면, 부모가 있는 것이요, 그 부모 위에는 또 부모가 있는 것이요, 쭉 역사시대를 거쳐 조상을 따라 올라가게 되면 맨 종지조상까지 올라갈 것입니다. 그 조상을 중심삼아 가지고 어떠한 절대자가 출발을 보았다면, 절대자의 경륜 앞에서 '사람은 이래야 된다. 이러저러한 것이 완전한 사람이다'라고 해 가지고 결과적인 하나의 남성이면 남성, 여성이면 여성이 출발을 볼 것이 아닙니까?

남성과 여성을 두고 보면, 그 남성은 남성으로 말미암아 태어난 것이 아니요, 여성은 여성으로 말미암아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횡적 관계를 두고 보면, 이들은 주체와 대상의 관계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남자도 남자를 위한 것이 아니고 여자도 여자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서로서로를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여성이 그와 같은 모습으로 태어난 것은 여성을 위한 것이 아니요, 남성이 그와 같은 모습으로 태어난 것은 남성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보게 될 때에, 본래 태어나게 될 때 남성을 위해 태어나지 않은 것이 남성이요, 여성을 위해서 태어나지 않은 것이 여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성이 가진 목적은 어디서 이루어지느냐? 여성만으로서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피합니다. 남성과 더불어, 그렇지 않으면 남성을 통하든가 하는 데에서만이 이루어집니다. 거기에 남자의 기쁨이 있는 것이요, 여자의 기쁨이 있는 것이 아니예요? 이것은 두말할 바 없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의 존속요건과 작용원칙

오늘날 이 자연계를 바라보면, 자연계의 모든 존재에는 우리 원리의 술어를 빌어 말하면 성상이 있고 형상이 있습니다. 성상과 형상은 내적 외적인데, 외적인 것은 무엇 때문에 있느냐? 내적인 것을 위해 있는 것입니다. 내적인 것은 무엇을 위해 있느냐? 내적인 것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외적인 것을 위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있는 것은 현재의 입장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보다 나은 것을 위해 있는 것입니다. 보다 나은 것이 되는 데는 그냥 그 자리에서 될 수 없습니다. 반드시 어떤 과정을 거쳐 가지고 이루어집니다.

이렇게 보게 될 때에, 우리 인간의 행복이 인류시조 아담과 해와의 시대에서부터 시작됐으면 그들만의 행복으로 있을 것이냐? 그 둘만의 행복으로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완전히 하나되었다면, 둘이 공동적인 목적을 합한 체(體)로 하나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되어 그것이 하나의 체(體)라면 또 다른 상대를 가리어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모든 역사는 이렇게 발전되는 것입니다. 혼자서는 발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상이라는 것은 혼자서는 이룰 수 없습니다. 상대적 관념이 입체적인 구성을 갖추어 가지고 얼마나 원만하게 이루느냐 하는 여하에 따라 가지고 그것이 이상이 되느냐, 못 되느냐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도 원만한 사람을 바라는 것입니다. 원만한 사람이란 일방성의 사람이 아닙니다. 사방성을 갖추어 가지고 사방성의 비교기준이 될 수 있는 사람이라야 원만한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예요?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 또 다른 중심 존재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사물의 세계도 그와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연계를 바라보면, 독자적인 입장으로 존속하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반드시 상대성을 갖고 상대를 위해 존재하고 존속합니다. 미물의 동물도 혹은 광물세계의 원소까지도 반드시 상대적인 관계를 추구해야 힘이 생기고 작용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존재하려면 힘이 있어야 된다는 것은 누구나 공인하고 있습니다. '존재하려면 반드시 힘이 있어야 된다. 운동을 해야 된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 우주의 구성은 힘으로 말미암아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힘 자체는 어떻게 형성되느냐? 힘은 작용을 통하지 않고는 발생할 수 없습니다. 작용하려면 어떻게 되어야 되느냐? 독자적으로 작용할 수 있느냐? 독자적으로 작용하는 것은 없습니다. 이것은 과학세계에 있어서, 더우기나 화학 실험실에서는 그런 것을 확실히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실험하는 당사자가 어떠한 원소와 원소를 통해 무슨 작용을 일으키려고 아무리 힘을 가해 가지고 노심초사해 봐도 인간의 힘 가지고는 작용하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수 없는 원소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왜 그러냐? 상대적 여건이 설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이 어떠한 힘을 가중시키더라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 원소를 구성하고 있는 이상의 힘을 가중시킬 수 있는 또 다른 힘이 설정된 기반에서는 작용하지만, 그 원소의 힘이 존속하는 것을 인정한 자리에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상대적 여건이 이루어지지 않게 될 때에는 아무리 작용을 시키려고 해도 안 됩니다.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상대적 여건이 설정 되는 데 있어서는 작용시키지 않아도 자연적으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지 말라고 해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연의 법칙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근본문제에 들어가서 보면, 존재하는 모든 것은 주체와 대상의 요건이 없어 가지고는 존속할 수 없는 것이요, 주체와 대상이 작용을 하는 데에 있어서 손해나기 위해서 작용한다는 우주의 원칙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작용하는 데 있어서 손해나기 위해서 작용하는 것은 없습니다. 장사하는 데 있어서 손해나기 위해서 장사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여러분이 오늘 아침 일찌감치 통일교회에 손해보기 위해서 찾아왔다면 그 사람은 돈 사람입니다. 그는 정상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무엇인가 이익되는 데서 작용하는 것은 천법입니다. 이것이 우주의 공리입니다.

주체와 대상이 보다 나은 차원에 도달할 수 있는 데서 발전한다

이 공리를 인정하게 되면 진화론이 문제가 될 것입니다. 또, 우리가 이 공리를 세워 가지고 나가게 될 때에는, 오늘날 소위 공산주의 철학으로서 세계적인 문제가 되어 있는 변증법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상충된 자리에서, 둘이 서로 모순된 자리에서 대립물이 서로 투쟁해 가지고 발전한다는 것은 천리원칙에 부합되지 않는 말입니다.

여러분, 역학에 있어서 힘이라는 것을 볼 때, 들어오는 힘과 나가는 힘이 같은 법이 없습니다. 어떤 작용을 했을 때는, 들어오는 힘보다 나가는 힘이 반드시 작은 것입니다. 입력 이퀄 출력이 될 수 없습니다. 입력보다도 출력이 작은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아메바가 작용을 해 가지고 더 큰 물건으로 어떻게 나오느냐? 이것이 문제가 됩니다. 어떻게 나올 수 있느냐? 나올 수 있으려면 두 가지 요인이 필요합니다. 아메바 자체가 자체보다 큰 것을 창조할 수 있는 주체적인 창조의 능력을 가졌느냐? 그것이 없다면 다른 데에서 힘을 끌어들일 수 있는 유도력을 가졌느냐? 이 두 가지 요인이 필요합니다. 이 두 가지 요인이 없다면 발전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 발전은 어디서 형성되느냐? 상대적인 여건의 환경이 갖추어져 가지고 서로서로가 보다 플러스될 수 있는, 마이너스도 플러스도 플러스될 수 있는, 두 자체가 보다 나은 차원에 도달할 수 있는 데에서만이 발전이 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통일교회에서 제창하는 논리입니다.

존재의 기원 문제를 놓고 볼 때, 존재가 있기 위해서는 운동을 해야 됩니다. 운동을 하려면 힘이 있어야 됩니다. 힘은 어디서 나오느냐? 혼자로서는 힘이 나오는 법이 없습니다. 주체와 대상 관계가 있어야 됩니다. 존재하려면 작용이 필요한 것이요, 작용하려면 반드시 주체와 대상이 있어야 됩니다. 주체와 대상이 없어 가지고는 작용할 수 없습니다.

국가면 국가간에 친교를 하겠다고 하는 것에 있어서도, 서로서로 보다 나을 수 있는 공동적인 목적을 추구하는데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공산세계와 민주세계가 격렬한 투쟁을 해 나오다가, 근세에 와 가지고 화해의 무드가 벌어져 나가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두 세계가 보다 나을 수 있는 목적관을 설정해 가지고 출발한다면 틀림없이 두 세계는 통일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관이 없어요.

여기에서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보다 플러스될 수 있는 내용을 확보해 가지고 마이너스될 수 있는 미급한, 미완성 분야를 충당시키고도 여력을 갖추게 하여 자기를 따라올 수 있는 새로운 목적 형태를 제시하면 세계는 하나될 것입니다. 하나됩니다. 모든 존재물은 보다 나은 것을 추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 보다 나은 것을 추구해 가지고 작용할 수 있게 되어 있느냐? 최고의 절대자가 있다면, 최고의 절대자 주체 앞에 상대적인 전체성을 부여하려니 그런 창조관으로 짓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존재하기 전에 힘이 있어야 됩니다. 힘이 있으려면 작용을 해야 됩니다. 작용하는 데에는 혼자 하는 법은 없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아무도 없는데 내가 혼자 말한다면 나는 미친 사람이라구요. 아무리 큰소리를 하고, 아무리 무엇을 한댔자 그것은 미친 짓이라구요. 아무리 세계적으로 훌륭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 사람이 혼자 있게 되면 그는 두말할 것도 없이 불쌍한 사람입니다. 안 그래요? 아내가 없고, 가정이 없다면 불쌍한 사람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나라가 없게 될 때에는, 그는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것은 왜 그러냐? 보다 가치적인 환경의 터전을 못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개인으로서도 그렇고, 가정을 두고 봐도 그렇고, 나라를 두고 봐도 그렇고, 세계를 두고 봐도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쌍한 민족은 어떠한 민족이냐? 세계를 위해서 공헌하지 못하는 민족입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세계에 공헌하면 왜 불쌍하지 않으냐? 세계에 공헌함으로써 세계의 원인 되시는 절대적인 주체와 하나되고, 세계적인 결과의 세계를 총합해 가지고 주체를 선봉에 서서 맞을 수 있고, 그 민족을 통해서 행복의 길이 트이기 때문에, 행복을 맞을 수 있는 선두에 서기 때문에 보다 행복한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여러분, 기록을 가진 사람이 행복하다고 하지요? 아폴로 11호를 타고 달에 갔다 온 사람들은 역사시대의 누구보다도 행복한 것입니다. 그 다음에 12호, 13호…. 여러분은 생각이나 해요?

하나의 기원에서 시작한 결과의 세계는 필연적으로 하나

이런 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오늘날 우리들은 존재물임에 틀림없습니다. 여러분이 존재물임이 틀림없는 한, 여러분은 상대적 관념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체와 대상 관계에 있어서 종적 주체와 횡적 주체가 있어야 됩니다. 이래야 이상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행복이라든가 이상이라는 것은 보다 나은 결과적인 존재가 형성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적인 존재라는 것은, 개인도 결과적인 존재요 가정도 가정으로서 결과적인 존재입니다. 혹은 사회면 사회로서, 그 나라면 나라로서 결과적인 존재입니다. 그 결과가 추구하는 것이 두세계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세계는 하나가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만일에 두 세계를 추구하는 주체가 있다면 그 주체는 머리가 둘이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주체는 절대적인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원인적인 주체가 두 결과를 추구한다면 그것은 절대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절대적이란 단 하나입니다. 완전한 기원이라는 것은 둘이 아닙니다. 하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기원에서 시작한 결과의 세계는 필연적으로 하나여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불가피한 것입니다.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날 역사시대를 거쳐온 인류를 한번 바라볼 때에, 이 인류라는 것은 현시대에서 태어난 산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적인 산물입니다. 우리 선조들이 그렇게 걸어왔기 때문에, 그것을 이어받은 것입니다.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초월이라는 것을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계승적입니다. 방향을 새로이 설정할 수 없습니다. 인연된 방향 밑에서 그것을 추종하는 방향은 인정하되 새로이 설정된 방향은 인정할 수 없습니다. 왜냐? 원인이 추구하는 방향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인간을 두고 볼 때에, 인간은 원인이 추구하는 본래의 주체 앞에 상대적 가치를 지닐 수 있는 개인적인 출발을 했느냐? 했다면 행복이 어떻다 하는 것을 체험한 조상이 있을 것입니다. 남자면 남자 혼자서 행복을 느껴 가지고 '나만 행복한 사람이다'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 행복이라는 것은 그 개인에게 한한 행복이 아닙니다. 그 개인은 전체를 대표하기 때문에, 전체의 원인이 되는 주체의 행복을 대신한 상대적 존재이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께 기쁨을 미칠 수 있는 행복의 요인을 반응시킨 주체임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기뻐했으면 주체 되시는 그분도 기뻐하셨을 것입니다. 내가 춤을 췄으면 그 주체도 춤을 췄을 것입니다. 그러한 개인은 '인생에서 이러한 것이 행복이다' 하는 것을 느끼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한 남성이 있었으면 그 남성과 더불어 산 여성이 있었을 것입니다. 여성도 '이런 것이 행복이다'라고 하는 것을 느끼며 살았을 것이 아니예요?

이러한 남자 여자가 우리 본래의 조상이었다면 행복한 터전 위에 사랑을 중심한 가정을 형성했을 것이 아니냐. 그런 가정에서 태어난 아들딸이 있었을 것이 아니냐. 그 아들딸은 어머니 아버지의 행복을 그냥 그대로 이어받을 수 있는, '이것이 인생의 행복이다'라는 전통을 제창할 수 있는 역사적인 무엇이 있었을 것이 아니냐. 있을 성싶지 않아요?

아버지가 어머니를 사랑하는 자리는 천도의 원칙과 일치된, 원칙에 귀일된 그런 자리입니다. 원인이자 결과를 반영시키는, 결과이자 원인을 반영시키는 최고의 가치 추구를 다짐하는 자리입니다, 그리고 보다 나은 내일의 소망을 추구할 수 있는, 가중적인 목적을 그릴 수 있는 자리입니다. 그런 자리가 행복된 자리가 아니겠어요? 그 행복된 자리는 전부 다 끌어당기는 그런 자리가 아닙니다. 행복이 찾아올 때에는 주고 싶은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도 그렇지 않아요? 진짜 좋으면 덮어놓고 주고 싶고, 덜 좋게 될 때에는 방향을 갖추어 가지고…. 이렇게 볼 때에, 우리 인류 시조가 참다운 행복을 그려 가지고 살았으면 그것이 역사적인 전통으로 남았을 것이 아니예요?

천지의 패턴으로서의 개인의 원형이 있어야

그랬다면 참다운 부부의 도리는 어떠해야 되느냐? 그것은 이미 귀결되어 출발했을 것입니다. 참다운 부모는 어떠해야 할 것이냐? 그것도 이미 설정되었을 것이 아니예요? 참다운 자녀의 도리는 무엇이더냐? 그것은 이미 보여지고 알려진 것이 아니냐? 안 그래요? 그래 가지고 그 자식들은 횡적으로 친척관계에 있어서 '이렇게 사는 것이 전통을 통한, 원인이 추구하는 방향에 일치된 결과적인 종족이다' 할 것입니다.

그 종족을 통해서 수 없이 확대되어 가지고 구성된, 절대적인 원인을 통한 결과적인 나라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 나라가 귀결점에 서야 됩니다. 이렇게 된 세계는 주체와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상응, 상화(相和)할 수 있으며, 보다 고차적인 목적을 서로 자극시킬 수 있는 현실적인 기반을 가지려고 할 것이 아니예요? 거기에 비로소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자, 그럴 수 있는 인간들이 있어요? 그럴 수 있는 인간들이 없습니다.

단적으로 결론을 지으면 천지의 패턴으로서의 개인 타이프(type), 그 원형이 있어야 됩니다. 여러분 형(型)이라는 것, 모형이라는 것이 있지요? 요즘 시대는 오토메이션(automation)시대이기 때문에 철형(鐵型)이 있으면 그걸 놓고 한 번만 작동하게 되면 딸가닥딸가닥하면서 같은 모양이 찍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한 형이 있지요? 몇만 개 몇백만 개라도 찍어낼 수 있는 형(型), 그 형이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사람입니다. 이게 있어야 됩니다. 그런 어떤 주체가 있어야 됩니다.

방향에 있어서도 동서남북에 따라서, 360도에 따라서 방향이 다르고 각도와 위치가 다른 입장에 어떠한 타이프가 되어야 된다고 하는 그런 무엇이 있었을 것이 아니예요? 인간으로서 절대적인 원인이 추구하고 그 원인이 추구해 나가는 방향과 일치될 수 있는 결과가 되어야 되고, 그 결과에 있어서는 원인을 내재시키고 또다시 자기로부터의 제2의 방향을 설정할 수 있어야만 씨가 될 게 아녜요? 봄에 씨를 뿌려 가지고 가을에 거두어들여, 다시 찾아오는 새로운 봄날을 맞아 가지고 씨를 뿌리게 될 때에, 첫번 뿌렸던 봄날의 씨 그 자체를 대신할 수 있어야만 완전한 씨가 되는 것이 아니냐.

그러면 인간에게 있어서 싹이 나고 열매 맺히는 것이 어떤 것이냐 할때에,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이 우리 인간이 싹이 나고 열매 맺는 것이지' 그렇게 생각해요? 열매맺는다는 것은 우리 인간의 이상입니다. 가을이 되어 가지고 거두게 되면 벼는 벼끼리 전부 다 한섬에 들어가지, 벼가 '아이고, 나는 강냉이 섬에, 수수 섬에, 팥 섬에, 콩 섬에 들어가겠다'고 해요? 그것은 주인이 가르는 대로 한섬에 들어가게 마련입니다. 콩은 콩끼리, 팥은 팥끼리 한섬에 몰아넣는 것입니다. 이렇게 오늘날 역사 시대를 바라보면, 지금 때는 가을절기입니다. 인류역사가 수확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앙상한 가지만 남습니다. 그 가지도 혹독한 바람이 불면 꺾여질 것입니다. 그러면 뿌리만 남을 것이 아니냐, 그런 때가 왔습니다.

절대권적 방향을 갖고 있는 데서 절대적인 통일권이 벌어진다

그래서 인류는 전부 다 어디로 갈 것이냐? 내가 찾고 있는 이상세계는 어디로 갔느냐? 인류는 절망하고 있습니다. 어디로 갈 것이냐? 내가 찾던 이상세계는 어디로 갔느냐? 민주세계면 민주세계 자체를 두고 보면, 민주세계가 찾고 있는 이상향이라는 것은 오늘날 현시점을 초월시킬 수 있는 아무런 주체성을 갖고 있지 못하고 상대성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공산주의도 공산주의 자체로서 세계 제패를 꿈꾸고 나왔지만, 이제는 도리어 분쟁하고 있는 현시점을 우리가 직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예요? 그것은 통일의 형태를 갖출 수 없습니다. 분열에 분열을 촉구하여 개인 공산주의화 단계까지 내려갈 것입니다.

오늘날 민주세계가 추구해 나오는 결실이 무엇이냐? 오늘날 자유 민주 세계의 결실이 무엇이냐? 개인주의 사상입니다. 여러분, 미국에 가 보면 말이예요. 히피족들이 있어요. 여러분, 버클리 대학교를 가 보라구요. 그게 대학이예요? 한번 휘발유를 뿌리고 불살라 버렸으면 하는 생각이 납니다. 그들은 나쁘다고 안 그럽니다. 그들은 좋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나쁘다구요. 원칙에 서 있지 않습니다. 절대적이면 절대적으로 거기에 흡수될 수 있는 요건을 갖추어 가지고 일치된 절대권, 단 하나의 방향을 갖고 있는 데에서 절대적인 통일권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방종입니다. 방종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들 앞에 나라가 있느냐? 나라가 없습니다. 그들 앞에 가정이 있느냐? 가정이 없습니다. 스승이 있느냐? 스승이 없습니다. 동물성을 중심삼고 너와 내가 같다는 거예요. 질서가 없습니다. '질서가 뭐야? 먼저 난 것이 나중 될 수 있고, 나중 난 것이 먼저 될 수 있지. 애비가 뭐야? 에미가 뭐야? 이러면서 여건을 따져 가지고, 동물성을 가지고 별의별 짓을 다 하고 있습니다. 듣기에 할머니하고 같이 산다는 말을 내가 들었습니다. 그것은 동물, 동물이 그러는 거예요. 이건 천도도 없고, 인륜도덕도 없고, 나라나 그 모든 것이 없습니다. 개인주의화 되어 가지고 극단적인 육(肉)의 만족을 취하려는 방종적인 현실권내에서 별의별 짓을 다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지막입니다. 거기에서 무슨 이상적인 인간이 나오겠어요? 그것은 망하는 것입니다. 안 망하게 되면 통일교회의 문 아무개라도 망하게 만들 것입니다.

오늘날의 이때는 어떤 때냐? 현재의 문명을 보면, 인류의 문명은 온대 문명입니다. 옛날의 열대문명을 거쳐 가지고 지금은 온대문명권내에서 가을을 맞이할 때가 왔습니다. 여기에서는 북쪽의 찬바람이 불어오는 것입니다. 한대문명이 세계를 휩쓰는 시대에 오지 않았어요? 그러면 인간세계에 있어서 진정한 봄날, 우리 통일교회 술어로 말하면. 원화문명(圓和文明)을 맞게 되는 거예요. 봄절기 문명권이 있었느냐? 있었다고 봐요?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상이 무섭다구요.

오늘날 인간의 가치가 이렇게 추락될 줄은 몰랐다는 거예요. 자, 병이 났는데 이것을 낫게 하는 데에는 병이 난 결과를 치료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아이고, 손가락이 썩었는데 손가락을 잘라 버리면 되느냐? 그러면 안 됩니다. 염통에서 이상이 생겨 가지고 손가락이 썩어 들어가고 있는데 손가락을 잘라 봤자 또 썩습니다. 그러니까 뿌리를 빼기 위해 염통의 잘못된 부분을 갈라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 있습니다. 씨는 씨인데 올바른 씨가 아니라 쭉정이와 같다면, 그런 씨를 원하겠어요?

인류가 바라고 원인자가 바라는 세계의 패턴

이렇게 볼 때 이러한 형, 개인적으로 이러한 형, 어떤 섭리적인 주체가 있으면 그 주체가 와서 보고 '사람은 이래야 된다'고 할 수 있는 형이 있어야 됩니다. 사람 가운데에는 남자와 여자가 있습니다. (판서하심) 이것이 남자라면 이것은 여자예요. 이 둘이 합해 가지고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자와 여자가 되어야 할 이러한 형이 있어야 됩니다. 즉. 두 사람이 합해 가지고 가정을 바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정에 대한 어떠한 패턴(pattern)이 있어야 됩니다. 세계적 완성권을 만드는 데 있어서 한 가정은 세계를 구성하는 부속품입니다. 그 부속품은 어떠해야 된다는 패턴이 있어야 됩니다. 패턴이 있어요? 여러분이 살고 있는 가정에 있어서, '아! 천륜대도를 대신 집행할 수 있는 대표적 가정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요? 어림도 없습니다. 없는 것이 아니예요? 그 다음에 종족이면 종족도 마찬가지예요. 국가면 국가에 있어서 '천륜이 바라는 국가는 이래야 된다'고 하는 어떠한 패턴이 있어요?

오늘날 공산주의 국가도 자기들이 패턴이라고 하고, 민주세계 국가도 자기들이 패턴이라고 합니다. 패턴이 둘이 있을 수 있어요? 둘이 있는 데에서는 싸우는 거예요. 싸운다구요. 어차피 해결되어야 할 중차대한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이 근본문제를 처리하지 않고는 해결이 안 돼요. 남북이 무슨 선언을 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근본문제, 즉 들춰 가지고 해결 해야 할 중차대한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공산세계가 철학을 근거로 하고 출발했기 때문에 철학적인 투쟁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결과에서 암만 했댔자 안 되는 것입니다. 원인과 결과를 타진해 가지고 그 과정이 올바른 형태를 갖추어 방향이 일치되게끔 가려 놓지 않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가 아니예요?

그러면 오늘날 세계를 중심삼고 볼 때, '이것은 인류가 바라고 섭리의 주체 되는 원인자가 바라는 세계의 패턴이다'라고 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있느냐? 없습니다. 없지만 인간은 그래라 하는 것입니다. 보다 고차적인 것을, 보다 통일적인 것을 찾아 나가는 거라구요. 그것은 그래야 되는 거예요. 하나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하나에서 출발한 것은 아무리 뻗어 나가고 아무리 많아진다고 하더라도 나중에는 하나로 귀결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마치 나무의 열매와 똑같습니다. 하나에서 출발해 가지고 가지가 나고 잎이 많이 났지만 여기에서 하나의 귀결점은 또 다른 열매를 맺기 위해서…. 모든 잎, 가지 등에서 흡수될 수 있는 모든 요소를 집약시킨 결정체가 열매가 아니예요? 그렇지요? 역사는 그렇게 발전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 시조로부터 퍼져 갔다가 또 다른 씨를 찾으려니 엇갈리는 입장에서 두 사조가 나왔습니다. 왜 둘이 나왔느냐? 하나는 그릇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나무에 열매가 있으면, 열매에 있어서는 완전한 열매와 완전치 못한 열매가 있게 되는데, 가을에 와 가지고 그 정체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완전한 열매는 주인을 위하는 열매인 것이요, 완전치 못한 열매는 주인에게 반항하는 열매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신이 없다고 주장하는 주의와 신이 있다고 주장하는 주의가 나온 것입니다. 안 그래요? '신이 죽었다. 신이 없다' 그러면 인간은 어디서 나왔어요? 원숭이한테서 나왔어요? 자연과학을 가르치는 대학 교수가 교단에 서서 인간은 원숭이로부터 나왔다고 설명하였다고 합시다. 학생이 '선생님, 오늘 강의를 잘 들었습니다. 선생님의 할아버지는 원숭이지요?'라고 하면 '아. 그렇고 말고'라고 대답할 사람이 있어요? '예끼 이놈!' 한다는 거예요. 여러분의 조상이 원숭이 같아요? 이것은 영계니 뭐니 아무것도 모르는 무식장이들이라구요. 앞으로 이런 것들을 전부 다 재차 교육해야 됩니다. 영계가 엄연히 있다구요.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에, 오늘날 인간의 패턴을 어디서 구할 것이냐? 개인의 패턴이 어디 있느냐? 가정의 패턴이 어디 있느냐? 국가의 패턴이 어디 있느냐? 세계의 패턴이 어디 있느냐? 공산주의가 그것을 대행할 수 있느냐? 민주주의가 그것을 대행할 수 있느냐? 대한민국이 그것을 대행할 수 있느냐? 어떠한 종파가 그것을 대행할 수 있겠느냐? 어떠한 가정이 그것을 이어받을 수 있는 가정이 되기 위해서 지금 나가고 있느냐? 아니라구요. 아니예요.

인간은 '아니'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아니라는 결론을 지을 수 밖에 없습니다. 부정적인 출발을 했으니 부정적인 결정을 함으로써 청산해야 됩니다. 요즈음엔 전부 다 부정하지 않아요? 실존철학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극복하는 데는 현실을 부정함으로써…. 현실을 부정하지 않으면 여기에서 승리하든가 초월할 수 있는 길은 없는 것입니다. 승리할 수 있는 방안은 없다구요. 방안을 아무리 모색해도 목적을 모르니까 모색할 길이 없다구요. 그러니까 부정을 해 가지고 극복해 보려고 몸부림치는 것이 현실이 아니냐. 그러나 불가능합니다.

부정하지 못하면 긍정을 발견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 부정의 기원을 또다시 부정하라. 인간이 부정으로 출발했기 때문에 이것을 부정해서 긍정적인 자아를 재발견하라고 제창하고 나온 것이 종교가 출현하게 된 동기입니다. 종교는 그런 사명을 갖고 있더라는 거예요. 예수님이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라고 했는데, 이것은 역리적인 논법입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 전부 다 반대의 말을 했다구요. 예수를 믿으면 산다고 해야 할 텐데,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은 곧 부정하지 못하는 사람은 긍정을 발견할 수 없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완전한 종교는 완전한 부정을….

여러분, 참선도 그렇지 않아요? 참선이 무엇이냐 하면 '양심이, 마음이 무엇이더냐? 이런 문제에 자기 긍정이라는 기준을 놓고서 자기의 관을 초월해 가지고 우주가 공인할 수 있는 경지를 추구하는 데에서 새로운 자아를 발견하자고 하는 것입니다. 뭐 도의 길이나 모든 것이 그렇게 되어 나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느냐? 우리는 십자로에 서 있습니다. 이 현실적인 세계를 직시하게 될 때에, 나는 어디에서 있느냐? 불합격품이 합격품이 되겠다는 싸움의 판국에 내가 서 있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내가 불합격품의 권을 부정해 버리고 합격품이 될 수 있는 길을 어떻게 모색하느냐? 여기에는 새로운 우주적인 혁명이 제시되어야 됩니다. 개인적인 혁명이 아니예요. 개인으로서 우주적인 혁명을 누가 제창할 것인가? 그럴 때가 왔어요, 그럴 때가.

오늘날 개인주의 사상이 어떻게 되었느냐? 모든 혁명을 한다고 했지만 환경을 초월한 것이 아니요. 극복한 것이 아닙니다. 밀려 나가면서, 차원이 떨어지면서 낙후해 가는 자리에서 혁명을 해 나온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망해 들어가는 것입니다. 차원이 낮은, 망해 들어가는 혁명 형태를 거치고 있는 것입니다. 세계가 어디에 있고, 나라가 어디에 있으며, 부모가 어디에 있느냐? 부모도 밥을 먹어야 좋아하고, 나도 맛있는 것을 먹어야 되고…. 동물들은 맛있는 것이 있게 되면 에미 애비끼리도 싸우는데, 사람이 무엇이 다르냐? 우선 먹는 것이 지혜로운 것이다. 그저 재빠른 것이 이기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것을 들이치는 거라구요.

사람은 하나님을 절대시하지 않고는 돌아갈 길이 없다

이런 것을 생각하게 될 때, 그러면 내가 설 자리는 어떤 곳이냐? 이것이 문제라구요. 내가 설 자리는 어디일 것이냐? 섭리적인 십자로권에 서 있는 것입니다. 왼쪽으로 가는 길도 있고 오른쪽으로 가는 길도 있습니다. 안 그래요? 왼쪽이나 오른쪽 중에서 오른쪽으로 가라. 그렇지 않아요? 왼쪽으로 가면 좌익세계요, 오른쪽으로 가면 우익세계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오늘날 공산세계와 민주세계라는 것은 십자가 상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중심삼고 오른편 강도와 왼편 강도에 의해. 왼편 강도는 '하나님이 어디 있어? 예수가 뭐야? 다른 사람들은 살려주었으면서 너는 왜 못 살려?' 이렇게 비난했습니다. 인류역사에 그런 것을 뿌렸기 때문에….

미국이 기독교문화권의 나라입니다. 미국이 오른편 강도가 되어야 될텐데, 하나님 앞에 죽음을 각오하고 예수님 대신 생명을 걸고 하나님의 방파제가 되고 예수님의 사상으로 지탱해 가지고 몸부림쳐야 할 것인데도 불구하고, 지금 허리가 부러져 가지고 똥을 싸고 뭉개고 있다는 거라구요. 역사는 심은 대로 거두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십자로를 보라구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될때에 바라바라는 사람이 있었어요. 바라바는 누구냐 하면 그 당시에 있어서 폭동을 일으킨 반동분자라구요. 요즘 공산당들이 말하는 반동분자와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바라바는 예수님 때문에 살아났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살아난 사람이라구요. 그 다음에 예수님이 있어요. 이렇게 네 인물이 등장했다는 거예요. 그렇게 심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진리라면 그 진리의 형태로 세상을 거둘 수 있는 가을을 만들어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민주세계와 공산세계는 오른편 강도와 왼편 강도와 같고, 지금 아랍권(회회교권)은 바라바권입니다. 회회교권은 칼을 가지고 나서고 있는데, 그것은 종교의 원리원칙적인 이념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왼손에는 코란경, 오른손에는 칼을 들고 나서야 된다고 하는 거예요. 그것이 뭐냐? 바라바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살아서 지배하려던 무대까지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아랍권 전체가, 아브라함의 후손인 열두 지파가 축복 받은 그 땅이 전부 다 회회교권에 말려들어간 거예요.

이제 남은 것이 무엇이냐? 다시 오시는 예수권입니다. 이렇게 색다른 형태의 십자로가 생겨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그렇게 되어 있다구요. 세계적으로 보면 그렇게 되어 있다구요. 그와 마찬가지로 여러분 개인을 두고 보면, 오늘날 세계적으로 어떻게 되어 있느냐? 내가 우익이냐, 좌익이냐? '내가 자기냐?'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자기라는 것은 '하나님이고 뭣이고 없고 자기만이다' 이렇게 되어 있다구요. 그러한 바람에 휘몰리는 개인과 같이 가정도 좌익 가정이냐, 즉 왼쪽 가정이냐, 오른쪽 가정이냐, 자기만의 가정이냐는 것입니다. 자기만의 가정은 하나님이고 뭣이고 없는 회색분자, 내가 이익 보면 된다는 가정입니다. 여기에 색다른 것이 무엇이냐 하면 예수만을 붙드는 무리들입니다. 그런 때가 왔기 때문에, 재림시대가 되어 온다는 것을 우리가 섭리관적인 입장에서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만을 위하여 예수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던 것과 같은 것을 재차 맞이할 때입니다. 십자가로 갔으니 십자가로 와야 됩니다. 울음으로 갔으니 울음으로 와야 됩니다.

오늘날 참다운 인간은 어디에 있느냐?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이렇게 예수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자기 일신을 다 부정하는 자리, 생사의 기로에 서 가지고 하나님을 붙들고 늘어질 수 있는 자리에 섰기에 오직 삶의 한 역사적인 방향이 설정된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 세상도 그렇게 해야 됩니다. '끝날에는 밀실에 들어가서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기도하라'고 한 것이 그거라고요. '내 뜻대로 마옵소서, 내뜻대로 마옵소서' 해야 됩니다.

오늘날 우익도 좌익도 전부 다 인간의 뜻입니다. 오늘날 양심주의나, 뭐 나만 중심삼아 가지고 살면 된다고 하는 것은 전부 다 인간주의예요. 다 인본주의예요. 인본주의의 출현은 인간의 타락 때문이예요. 신본주의를 위주로 한 인본주의의 형성은 인정할 수 있지만, 신본주의를 부정한 인본주의의 형성이 타락이 아니었어요?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인본주의를 부정하고 신본주의의 긍정에서부터 인본주의의 긍정을 재차 추구 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하나님을 붙들고 하나님을 절대시하지 않고는 돌아갈 길이 없다는 결론을 지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는 죽음길을 가더라도 천도를 따라가야 된다고 하는 것을 인류역사의 전폭적인 사실을 두고 보여 준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개인도 마찬가지라구요. 혼란된 환경을 이어 가지고 '내 이익만 한데 모으면 된다' 이러면 망하는 것입니다, 그런 놈은 망하는 거예요. 또, 자기 당파의 이익을 꿈꾸는 것들도 망합니다. 망하게 마련이라구요. 그렇지만 자기 생명을 버리면서라도 하나님을 위해서 끝까지 변호하고, 또한 자기가 살아 있는 것, 단체가 건재한 것. 나라가 있는 것은 그 중심을 위하여 천도를 위하여 있다고 옹호하고 나설 수 있다면, 그러한 개인이나 단체나 민족과 국가는 산다고 봅니다. 지금 때가 그런 때라구요.

반공교육 강화는 이론투쟁으로

오늘날 우리가 생활하는 데 있어서 도덕관을 중심삼고 보더라도 '내가 지금 선하다. 내가 선하겠다'고 한다면 선 악이 있습니다. 오른쪽은 선한 것이고, 왼쪽은 악한 것이라구요. 그 다음에는 뭐냐? 선도 아니요 악도 아닌 것이 있다구요.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 선이면 뭐 어떻고 악이면 뭐 어때? 그런 것 생각하고 있을 게 뭐야? 적당히 살지' 이런 것이 있다구요. 안 그래요?

오늘날 공산세계와 민주세계가 있고, 그리고 회색주의가 있습니다. 회색주의는 눈치 봐 가지고 살짝 넘어서고, 이것은 여기도 못 믿고 저기도 못 믿고 왔다갔다하고,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습니다. 안 그래요? 그런 회색분자들, 눈을 깜빡깜빡하면서 살짝 넘어서고 들락날락하다가 잘못하면 모가지가 달아나는 거라구요. 그런 녀석들이 있어요. 차든지 덥든지 해야 되는 거라구요. 알겠어요? 미지근하다가는 전부 다 쓰레기통에 들어가게 됩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예요. 여러분도 선하냐, 악하냐, 그 다음에는 미지근하냐…. 이런 입장에 있습니다. 그렇지요? 이것은 절대적인 선이 아니냐? 이렇게 공판할 수 있느냐? 너도 안 되었고, 너도 안 되었고, 너도 부족하다. 이렇게 판단할 수 있는 절대권을 가졌느냐? 그런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4대 십자로가 형성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은, 우리의 현실, 자아의 생활환경을 통해서 내릴 수 있는 자연적인 결론이 아니냐.

그러면 여러분은 어디 있어요? 통일교회는 적극파입니다. 아마 일본에 있어서 '통일교회는 우익보다 더 우익이다. 통일교회는 초우익이다' 그래요. 이거 잘 붙였습니다. 기분이 나쁘지만…. 그 초(超)자를 갖다 붙인 것이 속된 말 같지만, 초우익이면 좋지요. 우리는 초우익이예요, 초우익. 그러면 초좌익은 무엇이냐? 그것이 일본에 있어서의 조총련이라구요.

그래, 초우익과 초좌익이 붙어 보자 이거예요. 네가 죽느냐, 내가 죽느냐? 우리는 이미 죽음을 무릅쓰고 공산당과 싸우고 있습니다. 박 대통령이 선언을 했지만 반공교육을 강화해야 됩니다. 지금까지의, 먼 자리에 서 가지고 얼씬 못하는 자리에서의 반공이 아니라구요. 주먹으로 싸울 때가 아니고 이제는 눈과 눈을 맞대고 콧등과 콧등을 맞대고 말로 싸울 때가 왔다는 거예요. 이론 투쟁을 해야 된다구요. 그것을 지금까지 해 나온 것이 통일교회의 승공연합입니다. 어제도 구보끼 일본 협회장이 왔다 갔지만 지금까지 해 나왔습니다.

내가 이번에 3차 세계순회하면서 일본에 들러 말한 것이 무엇이냐? 공산당과 공개토론하자는 것입니다. '공개토론을 하자. 우리가 공산당하고 이론 투쟁할 테니 텔레비젼 방송국은 중계하라. 신문은 보도해라' 그랬어요. 그러면 얼마나 좋겠어요? 이렇게 공개선언한 거라구요. '나와라' 이러니 꽁무니를 빼는 거라구요. 은좌(銀座)거리는 토요일 오후부터 주일 오후 여섯 시까지 차량 통행이 금지됩니다. 그래 토요일 오후에, 혹은 일요일에 가게 되면 사람이 꽉찼다구요. 거기 십자로에다가 간판을 붙이고, 또 신문에 '아무날 몇시에 은좌 아무 거리에서 공산당 책임자하고 공개 토론한다. 아무개 누구도 나올 것이다' 이런 광고를 붙이고 그 일을 대대적으로 전국적으로 하는 거예요. 그들이 꽁무니 빼는 날에는 들이치는 거라구요. 지금 이 싸움을 하고 있다구요. 그러니까 공산당들이 우리에게 하는 말이 '우리는 몇십만밖에 안 되는 조그만 공산당이 아니냐? 우리를 보고 그러지만 말고, 자민당한테 그래라' 지금 이러고 있습니다. 못살게 그러지 말라는 거예요. (웃음)

공산당 앞에 야당이 나왔습니다. 지금까지 공산당 50년 역사에 있어서 야당이 없었습니다. 독주, 안 된다는 거예요. 브레이크를 건다는 거예요. 그 브레이크가 얼마나 큰지, 혼자 돌아가는 것을 돌아가지 못하게 찌그러지도록 브레이크를 걸자는 거예요. 이것이 우리 통일교회예요. 초우익 이라구요. 알겠어요? 겉보기에는 나약한 칼이지만 그 껍데기만 벗겨지는 날에는 어떤 강철보다도 강합니다. 그래요, 안 그래요? 우리 젊은 사람들, 그래? 「예」 얼빠져 가지고 여기 앉아 있어서는 안 되겠다구요.

예수님의 십자로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바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나에게서 지나가게 하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당신의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 기도를 잘했어요, 못했어요? 잘했다고 봐요. 못했다고 봐요?「못했습니다」 왜 못했어요? '아, 당신의 뜻은 그만두고 내 뜻대로 하옵소서' 이래야 돼요? '당신의 뜻이자 내 뜻이요. 내 뜻이자 당신의 뜻이옵니다' 이런 기도를 하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왜 그런 기도를 하게 되었느냐? 예수님이 바라시던 제자의 어떤 패턴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를 따르는 교인의 패턴은 이래야 된다고 하는 것이 있었을 것입니다. 있었을 거 아니예요? 약속한 메시아를 보내게 되면 유대교는 메시아를 맞을 때 이렇게 해야 된다고 하는 패턴이 있었을 거라구요. 그런데 거기에 합격된 유대교가 못 되었고, 거기에 합격된 이스라엘 나라가 못 되지 않았느냐. 그래서 예수는 마음으로 제 2 이스라엘 나라와 유대교를 그릴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음으로 그리던 유대교와 마음으로 그리던 이스라엘 나라가 안팎으로 완전히 하나되었으면, 어떻게 되었겠느냐? 하나님은 이스라엘 나라를 위해서, 유대교를 위해서 수천년 전에 메시아를 보내 준다고 약속하셨는데, 그런 약속을 받은 그 백성과 교회가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 되었더라면, 예수님이 그런 기도를 하셨겠어요? '당신의 뜻이 내 뜻이요, 내 뜻이 당신의 뜻이옵니다. 나에게는 당신이 세운 교회를 잘 이끌어야 할 책임이 있고, 당신이 세운 나라를 나는 잘 다스려야 할 것이 아닙니까?' 이렇게 기도했어야 합니다. 그랬어야 할 텐데도 불구하고 나라와 교회가 하나님이 지도하시려던 입장과는 어긋나 있었기 때문에, 나라를 취하고 교회를 취하려니 하나님과 배치되고, 하나님을 따라가려니 나라와 교회에게 배치되는 가운데에서, 예수님은 교회를 버리고 이스라엘 나라를 버리더라도 하나님을 따라가지 않을 수 없는 입장에 섰기 때문에, 그런 기도를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아니예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불쌍한 분입니다. 안 그래요?

예수님은 죽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예요. 졸장부로서 무력하게 쓰러지려고 오신 예수님이 아니예요. 이스라엘을 동원하고 지금의 아랍권 일대,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축복받은 열두 지파의 그 아랍권 민족을 동원해 가지고, 강대한 로마제국에 대항하고 나서기에 부족함이 없는 환경이 자연적으로 되어 있어야 했습니다. 그때에 로마의 모든 정치 풍토는 약화 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예요? 빌라도가 분봉왕으로서 다스리는 조그마한 이스라엘 나라에서 민란이 날 것을 두려워한 것을 보게 되면, 얼마나 행정력이 미급했는가 하는 사실을 한눈에 알 수 있지 않느냐 이거예요. 여러분이 그것을 알아야 된다구요.

하나님이 찾고 있던 이스라엘 나라는 어떠해야 됐느냐? 하나님이 찾고 있던 유대교는 어떠해야 됐느냐? 예수님이 볼 때에 교회는 이래야 되고 나라는 이래야 되는데, 이러한 나라와 교회는 어디에 있느냐? 없었습니다. 배치되었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반대를 받으신 것이 아니예요? 이스라엘 나라와 유대교가 예수의 뜻대로 했고, 하나님의 뜻대로 했으면 누가 예수를 반대하고 누가 죽여요? 빌라도는 살려주려고 했는데, '바라바는 살려주고, 예수를 죽이자. 예수를 십자가에 달자'고 누가 했어요? 유대 민족이 했어요. 빌라도의 아내까지도 꿈을 꿔 가지고 빌라도에게 예수님에게 손대지 말라고 권고한 것을 보면, 예수님은 죽게 안 돼 있는 거라구요.

그것을 보면 예수님은 어떠한 입장에 섰었느냐? 그야말로 십자로에 섰었습니다. 섭리의 나라와 섭리의 교회를 등에 지고 세상 나라와 세상 교회 앞에 접근하게 될 때, 예수는 그야말로 십자로에 섰었습니다. 그렇지요? 십자로에 섰었습니다. 그런데 오른편 교회와 오른편 나라는 본래 예수가 추구해 온, 소망했던 교회와 나라인데도 불구하고 왼편 교회가 생겼고 왼편 나라가 생겼습니다. 이것이 예수에게 배치되는 일이 아니예요? 이것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예수가 희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예수가 재차, 이 땅 위에 회생(回生)될 때까지 유대 나라는 땅에서 머리를 들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은 2천년 역사노정을 거치면서 수많은 민족의 총칼 앞에, 혹은 말발굽 아래에 밟혀 희생의 제물이 되었던 것이 아니냐. 1948년을 중심삼아 가지고 비로소 유엔의 협조를 받아 가지고 독립을 했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 아니냐, 예수를 반대하던 이스라엘, 로마제국보다도 더 큰 세계적인 반대권을 가지고 고고(孤孤)한 신세에서 독립을 했지만, 이제 헤쳐 나가야 할 길에 있어서 철옹성 같은 원수의 터전들이 남아 있는 것이 아니냐. 아랍권을 어떻게 극복하며, 어떻게 공산권을 극복할 것이냐 하는 것이 이제 이스라엘 민족이 해결해 가야 할 문제가 아니냐. 그것은 민주세계의 공동 운명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완전한 씨와 옥토

자, 그렇게 볼 때에,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옛날에는 '예수 믿는 사람' 하면 높이 봤습니다. 혹은 종교를 믿는 사람을 높이 봤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에 있어서는 점점 그것이 떨어져 가고 있습니다. 요사이 과학이 발달된 이때에 있어서, 모든 것이 분과 제도로 되어 있기 때문에 세부적인 원칙을 따라 가지고 하나의 분과 속에 수많은 사람들이 규합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초월해 가지고는 인간의 가치 추구를 인정할 수 없다. 물질적 상대세계를 맞은 이때에 있어서 종교가 뭐 필요하냐?' 이런 때에 들어왔다구요. '종교가 필요없다. 종교가 바라는 이상이 뭐 필요하냐? 종교가 바라는 인격, 종교가 바라는 가정, 종교가 바라는 국가관 세계관이 필요없다' 이렇게 돼 있다구요.

자, 이러한 세계 앞에 하나님이 있어 가지고 섭리를 추진시켜 나오신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하실 것이예요? 절대적인 종교를 위주할 것이 아니예요? 절대적인 하나님을 위주한 사상을 위주할 것이 아니냐. 그러면 오늘날 이 역사적인 종말시대에 있어서, 물질문명이 극단에 처해 있는 현시대에 있어서 여기에 남아질 것은 무엇이냐? 하나님이 있어서 세계가 떨어지는 낙엽이 되지 않기를 바라신다면, 여기에 무엇이 있어야 할 것이 아니예요? 세상에 반대되는 것, 하나님이 제시하는 절대적인 종교, 절대적인 국가관, 절대적인 사상관을 갖고 나오는 그러한 무엇이 있어야될 것이 아니예요? 이래서 또 다른 새로운 십자가의 형성이 이 땅 위에 벌어질 것이 아니냐. 마찬가지라구요. 그것은 그래야 돼요.

그러면 끝날은 어느때가 끝날이냐? 여기가 출발이라면 여기가 끝날입니다. 끝날은 끝이 아닙니다. 새로운 차원을 거쳐 나가게 되면 새로운 출발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심어진 밭에 따라서 씨의 결실은 달라지는 것이 아니예요? 돌짝밭에 뿌리느냐, 옥토에 뿌리느냐 하는 문제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악한 사람한테 뿌리느냐, 선한 사람한테 뿌리느냐 하는 문제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수확된 결실을 가지고 돌짝 밭과 가시덩굴 밭에 뿌리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옥토에 뿌리기를 원할 것이 아니예요? 옥토가 무엇이냐? 옥토로 준비한 것이 무엇이냐? 오늘날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이 옥토로 설정해 가지고 준비한 것이 종교가 아니예요?

그러면 옥토라고 주장하는 종교가 진짜 옥토가 되어 있느냐? 옥토라는 것은 어떠해야 되느냐? 흙이라는 것은 어떠해야 되느냐? 씨를 위해서만 있어야 됩니다. 씨가 필요한 요소를 흡수하게 될 때에, 백의 요소를 흡수할 수 있다면 백의 요소를 갖추어 그 상대적 진액을 씨 전체에 보급할 수 있어야만 완전한 옥토가 되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그럴 수 있는 종교가 있느냐?

그 완전한 씨와 같은 것이 무엇이냐? 기독교에서는 재림주가 이 땅 위에 온다고 했습니다. 메시아 사상을 중심삼고 볼 때, 그가 오면 옥토를 향해서 올 것이 아니예요. 그러면 옥토가 될 수 있는 교회가 있느냐? 옥토라는 것은 자기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씨를 위해서 있습니다. 씨를 위해 있는데 씨가 백만큼의 필요한 요소의 흡수력을 가졌으면 천, 만의 요소를 갖추어 가질수록 그것은 옥토인 것입니다.

이런 옥토가 될 수 있는 종교가 있느냐? 나라가 있느냐? 기독교가 있느냐? 전부 다 돌짝밭이요, 전부 다 가시덩굴밭입니다. 옥토라는 것은 자기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통일교회에 이런 때가 온 것입니다. 하나님과 갈라졌으면 끝날에 심판을 받든가, 칭찬을 받든가 또다시 만날 날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틀림없습니다. 자식이 부모 앞에 불효해 가지고 나갔다면 다시 만나 가지고 한번 담판을 하고서야 인연을 끊든가 안 끊든가, 갈라지든가, 정을 끊든가 하는 일이 벌어지지요? 불효했다고 해서, 뛰쳐 나갔다고 해서 부모가 '에이, 이놈의 자식! 나갔으니까 나하고 관계없어!' 하고 관계를 끊어 버리는 부모는 없습니다. 나갔으면 다시 돌아와 만날 날을 기다리고, 돌아올 때에는 옛날에 그랬던 것을 다시 한 번 회상해 가지고 자기 스스로 자책하고 회개하는 자리에서 본연의 효의 모습을 갖고 나타나기를 바라고, 또 그런 자리에서 자식을 맞기를 바라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자식은 그럴 수 있는 요인을 지녀야 할 것이 아니예요? 그런데 돌아와 가지고도 회개하지 못하고 '뭐야!' 할 때에는 잘라 버리는 거라구요.

종교의 터전과 끝날의 인간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에 주체 되시는, 원인 되시는 그분이 인류의 아버지라면, 부모의 자리에 계시다면 그 부모는 인류를 대해 다시 만날 날을 고대하실 것이 아니예요? 만나는 데에는 보따리를 싸 가지고 올 것이 아니냐? 효자로 오게 되면 더 좋은 것을 주겠다고 보따리를 다 싸 가지고 오실 것이 아니냐?

만일에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게 되면 여기에 배가되는 심판을 받게 될것입니다. 그러한 역사적 종말시대가 와야 하기 때문에, 끝날이 와야 되는 것입니다. 끝날은 무엇이냐? 심판하는 부모를 맞든가 칭찬하는 환영의 부모를 맞든가 이 둘 중의 한 부모를 맞을 수 있는 날이 끝날입니다. 안 그래요?

인간이 그것을 준비해야 하겠기 때문에, 인간이 심판받아 가지고 쫓겨 나는 무리가 되어서는 안 되겠기 때문에, 인간에게 그것을 교육해 가지고 그러지 말라고 하기 위해 종교의 터전을 넓혀 온 것입니다. 그러한 인간이 회개해 가지고 하나님을 절대시하고, 절대적으로 원인을 주체로 삼을 수 있는 모습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 하나님의 본의가 아니겠어요? 이것이 섭리의 중심사상이 아니겠느냐. 이것은 두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때에 가서 '나는 어떻게 어떻게 돼서 그렇게 됐습니다. 내가 이렇게 본래대로 돌아와 가지고 부모를 찾아오려고 했는데, 내가 쫓겨나 가지고 그냥 오려니 면목이 없어서 체면상 위신상 돈이라도 모아서 예물을 사 가지고 오려다가, 지금 이렇게 왔습니다' 이런 변명은 필요없습니다, 거기에는 예물이 필요치 않습니다. 사무친 마음에서 터져 나오는 회심 (悔心)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만이 통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마 4:17)"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해방하라 천국이 가까왔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다'는 이 말은 인류의 공동적인 표어인 것입니다. 불효했기 때문에, 자기의 주장대로 했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주장을 따른 자기의 주장은 성립되는데, 부모를 제쳐 놓고 자기 주장을 했던 것이 아니예요? 불충이 무엇이냐? 군왕을 내놓고 자기를 주장한 것이 불충입니다. 불효가 무엇 이냐? 부모를 내놓고 자기를 주장한 것이 불효입니다. 그렇게 되어 있다구요. 그래서 종교는 무엇을 가르쳐 주었느냐? '하나님 앞에 절대 순종하라' 이것을 가르쳐 준 것입니다.

이제 두 갈래 길이 오는 거라구요. 다시 말하면, 오늘날 이 세계, 혼탁된 이 땅 위에 있어서 인간들로서 인륜도덕을 논의하면서 국가관, 세계관을 바라고 있지만 이것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여기에 색다른 무엇이 있어서, 하나님이 제시하는 새로운 천도를 밝혀 가지고 모든 인류가 하나의 공동적인 패턴의 원칙을 갖춘 새로운 세계 형태로 접근해야 될 것이 아니예요? 그때를 말하게 되면, 끝날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끝날은 어떠할 것이냐? 옥토가 된 거기에 순응할 수 있는 사람이 와야 합니다. 잃어버렸던 자식을 만나러 오는 그 부모가 지금까지의 모든 것을 다시 찾아서 다 보따리를 싸 가지고 올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거기에는 완전한 개인도 있을 것이요, 완전한 가정도 있을 것이요, 완전한 나라도 있을 것이요, 완전한 세계도 있을 것이요, 그뿐만 아니라 천상천하를 통일할 수 있는 충만한 사랑의 내용이 깃들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차지하게 될 때에는 그 누구보다도 그것을 몽땅 붙안고 어버이의 가슴에 품겨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자리는 '내가 뼈라면 너희는 살이다'고 뼈살이 하나될 수 있는 공감된 자리요, 희열의 눈물로써 하나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더냐.

종교에 재림사상이 있는 이유

그러면 끝날을 맞이하는 우리 성도들의 입장은 어떠해야 되느냐? '나는 그 사람이 그립다. 그 가정이 그립고, 그 나라가 그립고, 그 세계가 그립다' 이러면서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리고 '하나님이시여! 오시옵소서' 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어떠할 것이냐? 만일에 오시는 날에는 나는 이렇게 정성을 다할 것이다. 개인으로서 땅 위에서 하고 싶었던 모든 일을 내가 다 해봤지만 이것에 미칠 수 없겠기 때문에, 그 이상 할것이다. 한 남성으로서 한 여성을 맞이했으면 가정은 이런 가정을 만들 것이고, 나라는 이런 나라를 만들 것이다. 어버이 되신 하나님이 바라시는, 즉 원인이 바라는 세계를 만들 것이다. 그러나 주체의 염원대로 이루어질 것이 없으면 거기에 상대적인 형태라도 갖추겠다'고 준비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당신이 찾는 아들이 이렇지요? 당신이 찾는 가정이 이렇지요? 당신이 찾는 나라가 이렇지요? 당신이 찾는 세계가 이렇지 않습니까? 하면서 그것을 실현해 드려 가지고, 그것을 보시고 감동하실 수 있는 어버이를 맞고 싶다는 사람이 있게 될 때에, 하나님이 여기에 찾아와 가지고 몽땅 품고 사랑하실 수 있는 길이 생겨날 것이 아니냐. 이렇게 돼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심판을 받게 됩니다. 만일 하나님이 심판하시게 되면 반대하는 녀석이든 무엇이든 몽땅 잘라 버릴 거라구요. 안 그래요? 내가 하나님이라도 그럴 거라구요. '이놈의 자식들 같으니라구. 씨알머리도 없이 몽땅 잘라 버릴 거야. 그렇게 속을 썩이더니 찾아와 가지고 그 꼴이야? 이 녀석아! 네 이놈! 배은망덕한 놈!' 하며…. 그렇지만 '아버지, 그를 살려주소서. 나를 용서하셨으니, 불효하던 내 자신을 용서하셨거든, 나를 용서하시는 마음을 가지셨거든 나와 그와의 차이가 얼마나 있습니까? 그를 대신해 나를 쳐 주십시오' 이렇게 그 아버지의 손을 붙들고 울어 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아들이 있다면, 하나님이 사랑을 가지고 심판받을 사람도 용서해 주시고 싶은 그런 인연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망할 수밖에 없는 이 세상에서 살아갈 길은 그 길밖에 없는 것이 아니예요?

이와 같이 예수님도 십자가상에서 망할 수밖에 없는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와 연결된 세계를 바라보고 '당신이 나를 용서하시거든 내가 죽더라도 이들을 용서하시고, 나를 보내 주시려거든 처음에 온 이스라엘 나라에 다시 보내 주시옵소서' 이랬어요. 죽어 가면서도 원수를 위해서 복을 빌어 준 것이라고요. '나를 용서해 주신 하나님, 당신의 사랑이 있거든 나를 통하여서 그들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이런 진언의 이념이 오늘날 세계 구원의 길이 연장된 동기가 되지 않았어요? 그걸 알아야 돼요.

그러니 개인을 대표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고, 가정을 대표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고, 민족을 대표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고, 나라를 대표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고, 세계를 대표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사람이 열 사람 있더라도 안 되고, 한 사람을 통해야 됩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인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절대적인 하나님이 절대적인 한 개인을 통하여서 출발하셔야 할 것이 원칙이 아니예요? 그런데 인간 세상에는 그런 사람이 없기 때문에 다시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세계적으로 재각성을 촉구해야 할 통일교회

그래서 종교에 재림사상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와 가지고 심판의 공약을 제시하는 데에는 망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개인이 가정과 더불어 칭찬을 받고, 종족과 민족을 걸어 칭찬을 받고, 국가와 세계를 걸어 칭찬을 받고, 하늘땅을 대신하여 칭찬을 받고 나서거든, 하나님이 반대하는 무리를 치려고 할 때에 '나를 용서하시거든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할 수 있는, 어떤 국가를 대표한 하늘편의, 종교를 대표한 하늘편의, 세계를 대표한 하늘편의, 개인을 대표한 하늘편의 간증자와 변호하는 사람이 있어야만, 망할 수밖에 없는 개인이 살아날 것이고, 가정이 살아날 것이고, 나라가 살아날 것이고, 세계가 살아날 것이 아니예요. 오늘날 그럴 수 있는 종교가 있고, 그럴 수 있는 신앙을 가진 종교인들이 있느냐? 없습니다. 없으니 망하기 십상이라는 거예요.

이런 판국에 있어서 오늘날 이것을 보강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고 있는 곳이 소위 통일교회입니다. 무엇을 통하여 통일하자는 것이냐? 힘으로, 무력으로 통일하자는 것이 아니라 심정을 가지고 통일하자는 것입니다. 개인의 심정을 찾아 흐느껴 나오시는 아버지의 심정의 골수를 헤쳐 가지고 '당신이 만나고 싶었던 아들이요, 딸이 아닙니까? 회개한 아들이 아닙니까? 그 아들과 딸이 만나가지고 가정을 만들어서 당신만을 위하는 하나의 남편이 되고, 아내가 될 수 있는 가정이 아닙니까?' 하고, 여기에 철석같은 반석의 터전을 이어 가지고 '이것만이 하나님이 행차의 요인으로 삼을 수 있는 터전이 아닙니까? 틀림없습니다' 이래야 됩니다. 그런 가정이 필요한 것이 아니예요? 그러한 종족이 필요할 것이 아니예요?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는 색다른 결혼 방법을 취해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새로운 종족 편성입니다. 새로운 국가를 바라는 것이요, 새로운 세계를 바라는 것입니다. 영계의 해방을 제창해 나오는 거라구요. 이것이 통일사상이 가는 길입니다.

우주 종말시대에 있어서 우리는 모든 것을 교체해 버려야 됩니다. 제계의 주도권을 갖고 있던 미국으로서의 권위를 자랑하라' 이렇게 내가 미국에 가서 별의별 소리를 하며 미국을 들이쳤다구요. '미국은 망한다. 망하게 돼 있다. 망하지 않으려면 이렇게 하라' 그러한 세계적인 재각성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는 사명을 어디서 해야 되느냐? 오늘날 통일교회에서 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개인의 이익을 찾아가는 날에는 통일교회에도 끝날이 오는 거라구요. 그것이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것입니다. 민족주의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자기 민족을 초월해 가지고 세계 인류를 위해서 민족을 희생시킬 수 있는 통치가가 있거든, 그런 전통을 가진 통치가가 있다면 그는 세계를 지배할 것입니다. 대한민국에 나라가 없고 역사가 없다고 한하지 말라는 거예요. 만약 30세기에 가서 이 민족이 개척하고 이 백성을 주도했던 사상을 세계 인류가 받들 수 있는 때가 되면, 대한민국은 그때에 비로소 꽃필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섭리의 십자로에 선 우리는 나를 스스로 오른편으로 완전히 갈라내야 되겠습니다.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나라와 새로운 개인을 갈라내야 되겠습니다. 내 개인은 하늘을 위하여 나라를 위하여 서 있는 것입니다. 나라와 하늘이 내 개인을 위해서 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라는 세계를 대신해서 서 있는 거예요. 알겠어요? 그것을 알아야 된다구요. 물론 나라는 백성을 위해 있지만 백성만을 위해 섰다가는 망하는 거라구요. 그 나라는 세계를 위해서, 세계 정세의 첨단과 보조를 맞추어 가지고 백성을 위할 수 있는 길을 가야 됩니다. 나라는 세계를 위하여 있는 거예요. 세계를 위할 수 있는 데에서 백성을 위해야 그 백성이 세계를 이어받을 수 있는 백성이 되지, 세계를 집어 던지고 나라를 위하려다가는 세계는 남아지더라도 나라는 망하는 거라구요. 이것을 알아야 된다구요.

그렇기 때문에 개인주의 시대에서 가정주의 시대, 가정주의 시대에서 종족주의 시대, 민족주의 시대, 국가주의 시대를 거쳐 지금은 세계주의 시대입니다. 이렇게 거치면서 세계주의 시대도 지나고, 결국 나중에는 세계주의 가지고는 망하는 거라구요. 혼자로서는 안 되는 거라구요. 그러면 맨 나중 세계주의의 끝에는 무슨 시대가 오느냐 하면 하나님주의 시대입니다. 이렇게 귀결되어 돌아가는 거라구요.

사랑을 통해 체휼적인 생활을 해야 하나님의 심정을 안다

그러면 통일교회주의는 무슨 주의냐? 하나님주의입니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하나님주의. 그 관을 통한 개인은 어디에 내놓아도 심정이 통합니다. 관념적인 하나님을 모시는 것이 아니라 생활적인 하나님을 모시자는 거예요. 통일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심정을 논한다는 거예요.

오늘날,'신학(神學)'하면, 신학은 신을 배우는 것입니다. 배워 가지고 아는 것으로는 심정을 모릅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알아야 돼요. 알아 가지고는 심정을 모른다구요. '통일교회 문선생이 저 사람이구먼. 눈은 어떻게 생기고, 코는 어떻게 생기고, 뭐가 어떻게 생기고, 내가 보니까 저렇게 생겼구나' 이렇게 봐 가지고 아는 것으로는 나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사람과 살아 봐야 합니다. 알겠어요?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살아 보면 그 가외의 것은 다 드러나는 거예요. 그렇지요?「예」 살아 봐야 돼요. 사는 데에는 맹목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잘살아야 돼요. 잘살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사랑을 걸고 살아야 됩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사랑으로 살아야 돼요. 사랑을 통해 체휼적인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슬퍼하실 때에 내가 슬픔을 느끼는 것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실 때에 자기도 모르게 기뻐지는 거라구요. 효자는 어떻게 하는 것이 효자냐? 천만리 떨어져 있다 하더라도 부모의 사랑은 언제나 그 효자의 곁에 있는 거예요. 알겠어요? 하나님의 편재성에 있어서, 하나님은 어디에 있느냐? 지식적인 내용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이라는 것, 개성진리체라는 것은 그것으로 원인 동기가 끝나가지고 그런 형태, 즉 또다시 제 2대상을 상대세계에서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극과 극을 넘어서 편재를 타당하게, 가능하게 하는 것이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 자식을 향한 부모의 마음이 아니예요? 그렇지요? 사랑을 통하는 그 길에 있어서 부모는 무소부재입니다. 어디나 있지 않은 데가 없다구요. 그것은 사랑만이 가능합니다. 사랑만이 그 아들을 완전히 지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전능한 권한은 거기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고, 알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과 같이 살자는 거예요. 하나님이 인간을 교육해 가지고 뭘하시고 싶었던 것이냐? 교육해 가지고 머리만 크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알려 줘 가지고, 가르침을 받았으면 행하라는 거예요. 같이 살라는 거예요. 살면서 뭘하자는 것이냐? 울자는 것이냐. 좋아하자는 것이냐? 좋아하자는 거예요. 좋아하려니 사랑하자는 거라구요. 우리는 이러한 자리를 향하여 나가고 있다는거예요.

그러면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편재성을 어떻게 느끼느냐? 공기를 하나님의 입김과 같이 느껴라, 태풍이 불어오거든 그것을 하나님의 콧김과 같이 느끼라는 거예요. 흐르는 물이 있거든 그것을 하나님이 이 세계를 위해서 수난길을 극복해 나오시면서 흘리신 땀과 같이 느끼라는 거예요. 태양을 바라보거든 그 태양이 이 우주 전체의 생명의 요인을 상징하였음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을 태양에서 배우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하는 데 있어서 하나의 교본이요 교재로 전개시킨 것, 사랑하는 아들딸을 기쁘게 하기 위한 교재로 새워 놓은 것이 자연이 아니예요. 그렇다는 거라구요. 나뭇잎을 보고 자기 아들딸같이 여기고 혼자 중얼거릴 수 있는 사람이 있거든 그는 성인에 가까운 거예요. 알겠어요? 미친 사람이 아니라구요.

행복이 어디에 있더냐? 지식에 있는 것이라면 그 지식을 찾아가라구요. 행복이 어디에 있더냐? 사랑에 있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믿음과 소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진대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다'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무한한 편재성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무한한 존속성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무한한 가능성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무한한 생명력이 거기에서 설정되는 것입니다. 큰 희망을 가지고 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시간적 거리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과정을 거쳐 나가기 위해서는, 그 과정이 보다 큰 차원에 있어서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날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시간을 따라가서 보다 전진적인 자극이 추구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 자극을 어디서 받느냐? 지식에서? 어림도 없다는 거라구요. 지식은 그것을 '그렇다'고 결론을 내면 다 끝나는 거라구요. 오직 사랑에서만이….

주체적인 사랑은 중심을 잃고 취할 수 있는 것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우주를 대표한 아들을 생각하라는 거예요. 밥을 먹더라도, 혼자 있더라도 하나님이 보이더냐? 안 보여요. 그것을 어떻게 실감하느냐? 이 우주의 만물은 하나님의 모든 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상징적으로 그려 놓은 거예요. 화폭과 마찬가지예요. 그것을 바라보고 취해 가지고 좋아하고…. 그렇지 않아요?

자기가 그린 작품을 중심삼아 가지고 밤이나 낮이나 취해 가지고 바라 보고 눈물을 흘리며 감탄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것을 그린 화가가 그걸 보고 기분 나빠하겠어요? '이 녀석이 울긴 왜 울어? 그래요? 그런 사람이 있으면 데리고 와서 안방에다 모시고 '왜 그랬소' 하면서, 사연을 얘기하게 할 것이 아니예요? '아이고 좋아, 아이고 그리워, 아이고 같이 있고 싶어' 한다고 해서 미쳤다고 하겠어요? 여러분이 하나님을 몰라도, 하나님이 만 우주에 꽉차 있는 편재성을 지식적인 주체로 계시는 것보다도 사랑으로 계시기 때문에 '내가 어떻게 사랑의 동감권을 각 분야에서, 민족을 넘고 세계를 통해서 체휼할 수 있느냐? 하는 자리에서 하나님은 재인식되는 거라구요. 재발견되는 거라구요.

이래서, 하나님의 사랑에 입각한 자리에 내가 서 있다 하는 신념을 갖고 나올 때, 그 사랑은 개인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주체적인 사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에게 주고 나서 '야, 너에게 줬다' 이렇게 머리에 기억해 가지고 '이만큼 주었으니…' 이런 장삿속 사랑이 아닙니다. '내가 백만큼 줬으니 너는 나에게 백 하나만큼 줘야 한다' 이렇게 바라고 주는 것이 아닙니다. 주면서 부끄러워하는 거라구요. 주고 나서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부모는 사랑하는 자식에게 아무리 좋은 옷을 해주었더라도 '이 땅에 수많은 왕자, 왕녀들이 왔다 갔던 것이 아니냐? 내 아들이 그 왕자들보다 못하더냐? 내 딸이 그 왕녀들보다 못하더냐? 이러면서 그 이상 사랑하고 싶은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자리에서 해준 옷을 생각하게 될 때에, 세계의 그 누구보다도, 세계의 어떠한 아들보다도 더 사랑하고 싶은 부모의 마음은 더 좋은 옷을 해주기 위해서 눈물이 앞선 자리에 있기 때문에, 그런 부모에게는 아들이 아무리 파고들어가도 끝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 비로소 취하는 사랑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끝이 있으면 취하지 않는 거라구요. 한 바퀴를 돌면 취해지지 않습니다. 몇바퀴를 돌아갈 때에 중심을 잃어버리며 취해지는 거라구요. 취하는 사랑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고 잊어버릴 수 있는 사랑, 즉 주고서 내가 주었다고 수첩에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주고 나서 받겠다는 마음이 아니라 주고 나서 상대가 감사하는 데 있어서 받지 않아도 받은 것보다 더 좋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주는 사람도 미안해하고, 받는 사람도 미안해하게 될 때, 그 사랑만은 영원히 남는 것입니다. '아이고, 내 기분이다' 해 놓고, 그 다음에는 '없어' 이러면 안 됩니다. 둘이 주고받고 나서도 그 사랑은 없어지지 않아야 돼요. 이런 이상적인 부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내가 남편을 사랑하고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고 나서 '아, 당신이 나보다 더 사랑해 주시오' 한다면, 그것은 파괴될 수 있는 사랑이라구요. 사랑하고도 '내가 아직도 부족합니다. 내가 아직까지 미급합니다' 이렇게 사랑한 것이 한 터전이 되어 가지고, 그것이 장본이 되어 가지고 거기에서 알곡이 거둬질 수 있는, 밑천이 남아질 수 있는 사랑을 해야 됩니다. 그래야 이상적인 가정이 되어 나라를 찾고 다 찾게 되는 거예요. 알겠어요? 「예」

하나님이 이상하는 패턴을 중심삼고 참된 남자 여자가 상봉해야

지금은 어떤 때냐? 끝날입니다. 그런데 이 패턴의 개인, 가정, 종족, 민족, 국가가 역사시대 어느때에 대표해서 나타난 적이 있었느냐?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배반한 인간 앞에 있어서, 지금까지 인간역사는 무엇을 해 나왔느냐? 완전한 남성 하나를 찾아 나왔습니다. 그러나 찾지 못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돼요. 종교가 나와 가지고 무엇을 했느냐? 하나님이 패턴으로 그리던 이상형의 하나의 남자를 다시 찾으려고 했습니다. 그 표준을 따라 가지고 그 표준 앞에 일체되는 대상의 실체를 그려 보기 위해서 수많은 종교의 교주들이 노력했지만, 그것은 아직까지 형성되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재림사상이 있는 것입니다. 남자 하나를 못 찾았다구요.

그러므로 남자를 못 찾은 권내에서는 부처(夫妻)가 성립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독신생활을 하라고 한 거예요. 참된 개인이 없으니 나라가 필요 없는 것입니다. 참된 나라는 참된 개인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입니다. 가정도 필요 없는 것입니다. 참된 남자로부터, 참된 여자로부터…. 먼저 있어야 할 것이 참된 남자와 참된 여자가 아니예요? 역사시대에 아직까지 참된 남자와 참된 여자의 패턴을 못 찾아 놓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고맙게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독생자라는 이름을 갖고 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 순수한 전통을 이어받아 가지고 거기에 상충적인 내용을 지닌 아들이 아니라 본질적인 사랑에 화할 수 있는 역사시대의 하나의 남성적 대표자로, 신랑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신부를 맞이함으로써 비로소 인간세계 앞에 남자 여자가 하나님이 이상하는 패턴을 중심삼고 상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가 바라는 재림사상입니다.

이 가정이 벌어지기 전에는 아무리 세계에 가정이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안중에는 없는 것입니다. 패턴을 찾으라는 거예요. 그런 가정에서의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도리가 오늘날 인륜도덕의 원칙이 될 것이 아니냐. 부모, 부부, 자녀의 인연, 하나님이 그리는, 오늘날 통일교회에서 말하는 사위기대 원칙에 입각한 이상적인 본연의 형태의 기준을 어떻게 결정짓느냐 하는 것입니다. 세계를 걸어 놓고 통일, 평화를 꿈꾸는 데에는 이런 기본 문제가 남아 있으니, 이것을 결정짓지 않고는 통일세계는 올 수 없는 것입니다. 기본 문제에 있어서의 개인적 남성 패턴과 여성 패턴을 중심삼고 가정적 패턴을 형성하는 데서부터 통일의 세계는 이루어진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그럴 수 있는 때가 언제든지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패턴을 중심삼고 볼 때, 예수는 그러한 개인적 패턴, 가정적 패턴을 이룰 수 있는 대표자로 오신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중심삼고 '그대가 이루고 싶었던 가정을 이루어 보소서' 하던 이상적인 패턴을 이루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못 이루었던 것이 아니예요? 왜 그러냐? 옥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가정적 패턴뿐만 아니라 종족적 패턴을 이루었을 것이 아니예요? 예수님에게는 섭리에 입각한 패턴이 있었을 것이고, 거기에서 민족적 패턴이 나왔을 것이고, 국가적 패턴이 나왔을 것이고, 그 국가를 중심삼고 세계적 패턴이 형성되었을 것입니다. 그랬더라면 이 역사시대에는 그 패턴 형태의 규격을 따라 가지고 새로운 민족, 새로운 세계가 형성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못 이루었기 때문에, 재차 그러한 패턴을 이루어야 하기 때문에 하나의 남성(예수님)을 대신해서 다시 세계에 찾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이때가 끝날입니다.

이것이 역사 이래 예수님 때에 이루었어야 할 것인데, 다시 이때에 와 가지고 개인과 가정과 종족과 민족과 국가와 세계가 그 패턴으로 평면적인 무대에서 다 연결된다면, 개인에서 가정, 가정에서 종족, 종족에서 민족, 민족에서 국가, 국가에서 세계까지 한꺼번에 그 패턴을 통과해 넘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때가 끝날입니다.

끝날에 승리적 십자로를 거쳐야 이상세계가 실현된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때에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섭리상에 있어서 개인적 십자로를 통과해서 가정적 십자로를 통과해야 됩니다. 혹은 종족적, 민족적, 국가적 십자로를 통과해야 됩니다. 또 세계적 십자로를 통과해야 됩니다. 통과하는 데에는 여러분 자신 가지고는 안 됩니다. 안 된다는 거예요. 패턴을 따라 가지고 거기에 일치될 수 있는 데서만이…. 이것이 한꺼번에, 개인을 넘고 나면 가정이 기다리고, 가정을 넘고 나면 종족이 기다리고…. 이런 때가 오기 때문에, 악한 세계의 인륜도덕 형태를 그냥 둬서는 안 되겠기 때문에 다 쪼개 놓은 것입니다. 나라 나라도 조각조각이 나고, 종족 종족끼리 싸움이 벌어지고, 가정 가정끼리 싸움이 벌어지고, 남편은 아내를 못 믿고 아내는 남편을 못 믿고, 자식은 부모를 못 믿고 이렇게 전부 다 깨져 나가 가지고 서로 삿대질하는 때가 끝날입니다.

자, 이것이 나쁜 징조 같지만, 여기에 모색 발안이 있으면, 좋을 수 있는 하나의 방안만 있으면 새로이 재편성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이 가능한 무대를 형성한 것이 오늘날 혼란된 끝날입니다. 따라서 끝날이 되면 될수록 혼란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자식이 부모를 몰라보고 부모가 자식을 몰라보고, 남편이 아내를 몰라보고 아내가 남편을 몰라보고, 제자가 스승을 몰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나라와 백성이 다 갈래갈래 갈라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서도 다 포기한 것이 아니라고요. 그러면서도 '아이고, 세계가 하나될 수 있는 것이 없는데…' 이렇게 되거든 하나님이 난데없는 데에서 새로운 운동을 벌이게 해 가지고 그러한 목적을 대행시킬 수 있는 놀음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사랑의 하나님이지, 아무것도 준비 없이 깨뜨려 놓기만 하면 하나님은 망령된 하나님이라구요. 세상을 사랑했다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통일교회는 개인적 십자로를 올바로 넘어가고, 가정적 십자로, 종족적 십자로, 민족적 십자로, 국가적 십자로, 세계적 십자로를 통과해야 되겠습니다. 아까 말한 것과 마찬가지로 승리적 십자로를 거쳐 가지고, 한편이 원수의 나라라면 그것을 때려부수는, 심판해 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저희를 긍휼히 보시거든 저들도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해야 됩니다. 그래야 가인 아벨의 싸움의 역사는 통일 기준이 형성됨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통일의 귀일점에 돌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가인과 아벨이 싸워 가지고 피흘린 역사인데, 피 흘리지 않고는 못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그러한 개인이 필요하고, 그러한 가정, 그러한 종족, 나라, 세계가 필요합니다. 그러한 세계가 없기 때문에, 그것을 찾자고 하는 것이 통일사상입니다. 아시겠어요? 우리는 개인의 십자로에 서 있지만 국가의 십자로에 서 있고, 국가의 십자로에 서 있을 뿐만 아니라 세계의 십자로에 서 있으며, 세계의 십자로에 서 있을 뿐만 아니라 천지의, 영계와 육계의 십자로에 서서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대신적인, 원인 앞에 있어서 원인이 추구하는 결과적인 실체를 이루기 위해서, 보다 전체의 가치를 대신할 수 있는 중심의 자리를 결정하기 위해서 가고 있는 무리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이 길을 가고 나면 하나님은 여러분의 아버지가 되는 것이요, 세계가 아버지의 것이기 때문에 세계 또한 여러분의 것이 되는 것이요, 하나님의 가정과 하나님의 나라는 여러분의 가정과 여러분의 나라이기 때문에 아무리 못난 여러분이지만 만군의 여호와요 만왕의 왕이신 그분의 아들 딸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늘나라에 기억될 수 있는 공주가 될 수 있는 것이요 왕자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예요? 그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첫째부활입니다.

우리는 십자로를 어떻게 넘느냐? 자기 아내를 붙들고 자기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아내를 붙들었으면 나라를 생각해야 되고, 나라를 붙들었으면 세계를 생각해야 되며, 세계를 붙들었으면 하늘땅을 생각해야 됩니다. 이것을 단계적으로, 정상적으로 거침없는 행로를 거치고 나서게 되면 모든 원수들이 기다리는 십자로는 사라져 버리고, 평탄한 대로로 들어가 해방의 자유화가 형성되게 되고, 천지에 평화의 왕국, 하나님이 바라시는 이상세계는 실현될 것입니다.

이런 것을 여러분이 알고, 거기에 매진하여 그 일로를 따라 복종해 나가는 것이 우리의 갈 길이라는 것을 단단히 알아야 되겠어요? 아시겠지요?「예」

​기 도

​오늘 이 자리에까지 죽지 않고 남아져 1972년 7월을 맞았습니다.

다 잃어버리고 고독한 자리에서 다시 찾으시기 위해 나선 아버지는 불쌍하신 아버지이옵니다. 성경에 보면 이 세상의 임금이 사탄이라고 하였습니다. 있을 수 없는 말을 듣고도, 저희는 자책하지 못했고, 충격을 받지 못했습니다. 저희 앞에는 개인의 성벽이 가로막혀 있고, 그 개인을 넘고 나면 또 가정이 성벽이 되어 있는 것이요, 가정을 넘고 나면 씨족이 성벽이 되어 있는 것이요, 씨족을 넘고 나면 민족이 성벽이 되어 있는 것이요, 민족을 넘고 나면 국가가 성벽이 되어 있는 것이요, 국가를 넘고 나면 세계가 성벽이 되어 있는, 그런 포위망 속에 서 있는 자신들임을 몰랐습니다.

아버지, 이 엄청난 역사적인 구속의 자리를 그 누가 해방시켜 주겠습니까? 오직 당신만이 이 일을 책임져 주신 것을 감사하옵니다, 지루한 인류역사의 배후를 더듬으면서 낙후한 인간들을 수습하시어 종교의 문을 개방하시기에 얼마나 애쓰셨습니까? 아버지여, 오늘날 그것의 결과를 추구하는 이 종말시대에 있어서, 통일교단은 이 땅 위에 나타난 그날부터 찬서리 모진 비바람에 부딪혔지만 가냘픈 생명을 깊은 뿌리에 지녀 놓고 죽지 않고 남아졌사옵니다. 통일의 무리를, 아버지, 키워 오시기에 얼마나 수고하셨습니까?

이것을 볼 때, 통일교회를 대하시는 아버지는 불쌍한 아버지이신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외로우신 아버지이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눈물이 넘쳐 있는 아버지인 것을 저는 알았습니다. 이 길을 책임지고 나오는 자, 몰림받으면서 이 길을 개척해 나오는 자가 외로운 자이기 때문에, 그 외로운 자의 뒤를 따르는 사람도 외로운 자이옵니다. 이 외로운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 복귀의 운명길이기 때문에, 부모가 그렇기 때문에 자식도 그렇고 그런 것이요, 끝까지 그러한 운명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오늘날 통일노정에 있어서의 섭리길인 것을 아는 이 불쌍한 무리를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오늘날 저희들은 자신을 생각하기에 급급하였습니다. 자기가 있어야만 세계가 있는 줄 알았고, 자기가 아니면 안 될 줄 알았지만, 아니올시다. 당신이 있어야만 세계가 있는 것이요, 당신이 있어야만 내가 있게 되는 것을 저희는 알았습니다. 당신을 위하는 길에 있어서 아직까지 힘을 다하지 못한 자리에 있기 때문에, 미급한 자신을 발견하기에 급급한 자리에 서 있는 것이 통일교회의 무리이옵니다. 금후에 이들의 갈길을 아버지 앞에 맡기오니 맡으시옵소서.

외로운 때에 낙망할 때에 주저하고 지쳐 배반길을 찾아 나서는 무리가 있습니까? 아버지여, 그들을 지켜 주시옵소서. 여기에 서 있는 자식이 이 길을 오면서 외로울 때에, 지도해 주시던 아버지의 음성을 제가 들었고, 당신의 간곡한 사연을 제가 알았기 때문에 오늘까지 싸워 왔습니다.

이제 금후에 이 나라가 혼란된 와중을 거쳐서 선의의 싸움에서 승리를 다짐하여야 할 때가 이 민족의 운명으로 남아 있사옵니다. 그런 때에 통일교회는 아버지를 붙들고 늘어질 수밖에 없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가 기도했듯이 세계에 널려 있는 통일교회 교단에서 '제 뜻대로 마시옵고, 저희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할 수 있는 무리가 많다는 것을 생각하오니, 감사하옵니다.

아버지, 당신을 위하여 있는 통일교회가 돼야 되겠습니다. 이 나라 이 민족만을 위해서 있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 누구, 지도자를 위한 단체도 아니옵니다. 여기에는 오직 당신만이 계셔야만 되겠습니다. 당신의 눈물이 흘려진 것은 세계를 찾으시기 위한 것임을 알았기 때문에, 저희는 그 눈물의 뿌리와 같고, 그 진액과 같이 눈물을 흘리는 무리가 되지 않으면 안 되겠사옵니다. 말로만 불쌍하신 아버님이 아니오라 사실 불쌍하신 아버님임을 알았습니다. 말로만이 아니라 살아서 싸우고 현실에서 생활무대를 개척하시는 아버지가 비참하시기에, 저희들은 그 비참한 길을 아니 갈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부모 앞에 효하려는 자식이 있거든, 부모가 굶을 때 자식도 굶어야 되고, 부모가 눈물지을 때 자식도 눈물지어야 되는 것이 천도인 것을 저희는 아옵니다. 아버지가 눈물지을 때 저희도 눈물지어야 되겠고, 아버지가 한숨 짓는 수난길을 극복하셨거든 저희도 그것을 참고 극복해야만 되겠습니다.

모진 비난 비소를 받으시고 참아 나오신 아버지의 전통길을 바라볼 때에, 입이 있어도 말할 줄 모르는 통일교회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주먹을 가지고 싸울 수 있는 힘이 있어도 싸우지 못하는 통일교회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그것은 아버지를 사랑하고 아버지의 전통을 존중하기 때문이옵니다. 통일교회를 대해 망하라는 무리가 많았지만 망하지 않은 것은 기적이 아니라 당신이 그렇게 싸웠기 때문이옵니다.

당신은 맞고 빼앗아 나오는 작전을 해 나오시는 것을 저희는 알고 있습니다. 악은 치고 빼앗겼지만 당신은 맞고 빼앗아 나오는 선의 작전을 하셨기 때문에, 통일교회는 맞고 빼앗아 나오는 전통을 이어받았고, 맞는 자리에서 망하는 것이 아니라 발전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 무리이옵니다. 끝까지 참아, 최후의 승리를 다짐할 수 있는 자리에 아버님과 사탄과 인간, 이 셋이 연하여 십자로가 형성될 때에 사탄을 분립시키고 하늘편이 되어 가지고 사탄까지도 해방시키겠다는 통일교회의 무리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오늘 이 아침에 '섭리의 십자로'라는 제목으로 말했습니다. 내 말 한마디가 그런 자리에 서 있는 것이요, 내 하나의 눈총이 그런 자리에 서 있는 것이요, 내 하나의 손길이 그러한 자리에 서 있는 것이요, 내 하나의 행동이 그런 자리에 서 있는 것을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예수가 그려 가던 가정과 나라와 세계를 전통으로 이어받아 가지고, 그것을 실천 성사하기 위하여, 승리적 세계관을 앞에 놓고 저희들이 용진하기를 다짐하는 이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니다.

오늘이 복되고, 이달과 이해가 복되게 하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1970년대가 당신의 승리의 권한을 작정할 수 있는 때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재삼 부탁하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님의 이름으로써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