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아버님, 오늘은 1972년 6월 25일, 이날은 이 민족에게 있어서 잊을 수 없는, 역사적인 슬픔을 자아냈던 하루인 것을 저희들이 알고 있습니다. 스물 두 돌을 맞는 이날 위에 당신이 자비와 사랑으로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의 경륜 앞에 크나큰 사명을 짊어졌던 이 민족이었으나 당신의 뜻을 망각하고 그 경륜 앞에 하여야 할 책임을 못 하게 될 때는 하늘의 슬픔을 자아내게 했사옵니다. 이처럼 하늘의 슬픔을 자아내는 민족이나 개인이나 혹은 어떠한 존재라도, 탕감의 법도를 거쳐가야 된다는 역사적인 엄연한 사실을 저희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날부터 수난의 역로를 더듬어서 22년 동안을 거쳐온 이 민족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지금까지 채찍을 가하면서라도 역사적인 탕감의 노정을 다 넘고 그 양이 찰 때까지 기다려 주신 아버지의 은사 앞에 감사를 드립니다.
아버지, 이 땅 위에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으나 당신의 마음과 일치 하는 사람이 그렇게도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에, 아버지, 역사적으로 수고하신 당신의 공적의 터전이 승리의 한날을 맞이해야 할 텐데도 불구하고 슬픔을 맞았다는 사실을 저희들을 알게 되옵니다. 민족을 대신하여 아버지 앞에 깊은 지성소를 찾아 드려 아버지의 마음을 위로하고 당신의 옷깃을 붙들고 이 민족의 비참하였던 과거를 기억하면서, 다시는 이 민족이 하늘 앞에 어긋나는 길을 가지 않게끔 지도받으려고 간구할 수 있는 무리가 통일식구들이 되어야 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다짐하고 느끼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저희들은 그날 이후부터 수십여 년 동안 이 민족의 비참함과 더불어 외로운 자리에서 하늘의 뜻을 세우려고, 수많은 역경의 노정에 있어서 당신이 원하시던 곡절의 사정을 이 땅 위에 남기기 위하여, 혹은 그 심정을 이어받기 위해서 어린 자녀들이 산지사방하여 슬픔의 길을 개척했다는 역사적 사실들을 미루어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떤 때는 외로운 자리에서, 어떤 때는 고통의 자리에서, 어떤 때는 굶주린 자리에서, 어떤 때는 나그네의 신세를 면치 못하는 자리에서 하늘을 생명시하고 하늘이 원하시는 그것을 소원하면서, 하늘이 머물 수 있는 그곳을 본향 땅같이 생각하며 광야의 노정을 더듬어 온 불쌍한 자녀들을 당신이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뜻을 위하여 맹세했던 사람은 많았고 뜻의 길을 따라 나온 사람들도 많았사오나, 거기에 도착한 사람은 소수의 무리만이 남아 있는 것을 너무나 많이 보았고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 이제 이 자리에 모인 어린 자녀들을 다시 한 번 불러 모으시옵소서. 이제 자기의 마음이 머물러 있는 자리가 어디인가를 다시 한 번 느껴야 되겠습니다. 원리원칙을 통하지 않는 자리에서는 하늘이 현현할 수도 없고 동역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저희들은, 하늘과 더불어 같이할 수 있는 자신이 못 된다는 것을 알고 이 시간 모두 머리를 숙여 무릎을 꿇고 아버지 앞에 부복하였사오니, 당신의 능력의 손길이 저희의 마음 위에 희생하시옵소서, 다시 새로운 역사적인 인연을 바라봄과 동시에 당신의 뜻 앞에 일치될 수 있는, 당신의 직접적인 생명의 주도하에 있을 수 있는 자기 자신을 그리워하면서 부복한 이 자녀들을 긍휼히 보아 주시옵시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여, 이날을 기억하고 슬퍼하는 당신의 자녀들이 있거든 6.25의 비참상을 느낌과 동시에 하늘의 뜻을 대해 나아가는 최후의 심판날을 연상하면서, 이것을 막아내야 하는 것이 통일교회의 사명인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민족의 비참뿐만 아니라, 금후의 세계의 비참이 오늘날 인류 앞에 찾아오고 있다는 사실을 저희들은 잘 알아야 되겠습니다. 과거에 슬펐던 일을 체험한 이 통일의 무리와 하늘의 뜻을 대신한 이 민족이 아버지께서 불러 주신 새로운 백성과 민족을 대신하여서 이 세계 인류의 해방을 준비할 수 있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고 당신의 백성들이 되기를 바라고 있사옵니다. 그것이 수십년 동안 통일의 신도들이 싸워 나오면서 갈구하고 간구하는 것임을 아시는 아버님이여, 이 세계를 아버지께서 가로막으시어서 당신의 품에 품길 수 있는 그날과 그 길을 개척하여 주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일이 사탄권내에 침범을 당하였다면, 이 노정 위에서 하늘을 대신하여 희생의 피와 땀과 눈물을 치르지 않으면 이것이 방비될 수 없다는 사실을 저희들은 알고 있습니다. 이 시간도 세계 각국에 널려서 하늘의 생명의 깃발을 드높이 흔들고, 핍박받는 도상에서 외로운 싸움을 계속하고 있는 통일의 자녀들을 기억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수많은 사람들 앞에 혹은 수많은 나라 가운데에 불쌍한 무리들을 모아 놓으신 것도 당신이었사옵니다. 이렇게 불쌍한 자리에 머무르며 불쌍한 출발과 더불어 불쌍한 과정을 거치게 함은 불쌍한 목적을 향하는 자리에 두기 위한 당신의 뜻이 아닌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습니다. 착한 일을 시작한 것도 당신이었기 때문에, 그 일의 성사도 당신의 손과 당신의 경륜을 거치지 않고는 안 된다는 것을 아는 저희들은 죽든지 살든지 뜻의 길에서 자기 생애를 봉헌해야 되겠사옵니다. 당신의 뜻을 중심삼아 가지고 모든 것을 일체화시키는 데 있어서 무엇이든 서슴지 않고 나설 줄 아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세계에 없는, 새로운 역사적인 기동대가 출발하였사옵니다. 세계통일 십자군이라는 명칭을 들고 하늘의 새로운 생명의 깃발을 들고 나섰사오 니, 그들이 나타나는 곳곳마다, 아버지,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이 현현해 주셔야만 되겠습니다. 이들이 가는 길 앞에 있어서는 낙망이 있을수 없는 것이요 승리만이 있을 것을 알고 있지만, 당신이 믿고 가는 길과 일치할 수 있는 방향으로 가지 않고는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간다는 것을 알게 되오니, 아버지여, 그들의 방향을 지키시옵고, 그들이 목적하는 바를 당신의 목적과 일치시키시옵소서, 늘쌍 같이 동행하시고 동참하시어서 유종의 미를 거두시옵소서, 당신의 존엄하신 실존을 자랑하고 영광 가운데 품어서 인도하시던 당신의 아들딸들이 권위를 드러내야 할 것이 당신의 요구요. 저희에게 명령하신 당신의 뜻인 줄 알고 있사오니, 부디 그들이 나타나는 곳곳마다 당신이 같이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한국을 위주로 하여 연결되어 있는 수많은 나라들을 아버지,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 이곳을 그리워하면서 머리를 조아리고 아버지 앞에 기도하는 곳곳마다 당신이 친히 같이하여 주옵고, 진정한 당신의 마음을 그리워하면서 당신의 뜻을 염려하는 자녀들 위에 풍성하신 당신의 사랑이 같이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흘러가는 세월 가운데서, 덧없는 인생의 행로를 걸으면서, 자기 자신을 놓고 한탄하는, 것보다도 슬펐던 하늘의 뜻을 한탄하는 것이 얼마나 고귀하고 얼마나 가치 있는가를 아는 무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출발하였사오니 끝을 봐야 할 길인 것을 잘 알고 있는 자녀들 위에 무한하신 사랑의 가호의 손길을 더하여 주시옵고, 생명의 인연이 두터움을 증거하시 어서 당신이 기뻐할 수 있는 뜻만을 거두고 대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들려 오는 모든 소식들을 아버지 앞에 부복한 저희들이 들은 적마다 당신이 같이하시고 보호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흑자는 이 시간에도 아버지의 뜻을 중심삼고 생명을 각오하고 싸우고 있습니다. 저원수의 땅, 공산권내에서도 통일의 자녀들은 이 시간 싸우고 있는 것을 제가 알고 있습니다. 그들 위에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극복하고 최후의 전선을 향하여 나아가며 하늘을 지키고 증거 하는 거기에 당신이 가호의 손길로 같이하여 주옵소서, 원수의 핍박이 가중하면 가중할수록 당신의 가호도 배가하시어서 승리의 실적을 드러내고 아버지가 경륜하시는 곳곳마다 당신의 품에 품길 수 있게 하여 주옵 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1972년이 복되어야 되겠습니다. 이해를 아버지께서 뜻 있는 해로 세우셨사옵고 이 민족과 이 세계 앞에 새로운 분기선을 조성하셨사오니, 하늘의 승리의 깃발을 드높이고 만국의 해방의 권한을 자랑하여야 할 때가 다가온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모든 것을 아버지의 뜻만을 위하고 아버지를 위하는 데에 바칠 수 있는 저희 자신들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절박한 자기 생명의 기로를 앞에 놓고 아버지 안에 담판 기도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바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시옵고 당신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하고 간곡히 기도하면서 자기 일신의 모든 소신을 다 저버리고, 자기 존재의식까지 초월하여 생명의 길을 염려하던 그의 마음과 그의 사정과 그의 행로를 따라갈 수 있는 무리들이 돼야 된다는 것을 통일의 자녀들은 자각할 수 있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이 시간 부복한 소수의 무리를 당신이 모으실 때는 뜻이 있어서 모으신 줄 아오니, 이 자리에 엎드린 이들이 지나가는 걸음걸이로 여기에 참석하지 말게 하여 주옵소서, 아버지, 당신의 깊으신 심정을 체휼하게 하시옵고, 당신과 더불어 담판하고 당신과 더불어 행하고 당신과 더불어 새로운 결의와 작정을 하기 위한 이 시간이 되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뜻 있는 이날 6.25의 슬픔의 뜻을 제거해 버리고 기쁨의 뜻을 새로이 약속받아 가지고 하늘을 향하여 새로이 총진군할 수 있는 이날이 되어야만 되겠습니다. 악한 무리가 선의 삼팔선을 넘어 가지고 진군한 거와 마찬가지로 선한 무리가 세계적 삼팔선을 넘어 가지고 진군할 수 있는 새로운 용사들이 여기에 모인 당신의 자녀들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자각하고 체휼하는 이 시간이 되어야만 오늘 이 6,25가 의의 있는 날이 되는 줄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 이날을 기념하고 혹은 이날을 대하여 민족적인 원한을 품고 있는 당신의 자녀들과 백성들이 있거들랑 그것을 지나가는 일로 느껴서는 안 되겠습니다.
악은 언제나 선이 약하게 될 때 공격하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고, 아버지 앞에 멀리 서게 될 때는 언제나 치우침을 받고, 언제나 멸시를 받고, 언제나 제거당하는 운명을 모면하지 못한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언제나 아버지가 지키는 가운데 아버지와 더불어 있을 수 있는 선의 기반을 넓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끼는 이 시간이 되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니다.
남한 각지에 있는 당신의 자녀들과 세계에 널려 있는 당신의 자녀들이 멀리서 이곳을 바라보고 눈물지으면서 다시 만날 날을 고대하고 있사오니, 그들의 마음 위에 당신의 풍부하신 사랑과 자비의 손길이 떠나지 마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니다.
모든 것을 당신이 뜻하시는 대로 이루시옵고 지도하여 주옵소서, 오늘이 당신의 뜻 앞에 역사적인 새로운 뜻과 더불어 출발하는 날이 되게 하여 주시옵고, 영계에 있는 수많은 영인들과 땅 위에서 통일의 문을 통과하기를 바라며 당신 앞에 이름을 갖고 있는 수많은 자들 위에 당신이 무한한 축복과 사랑으로 길이길이 같이하여 주옵기를 부탁하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님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제목이 좀 깁니다. '신에 대한 체휼과 우리의 자각' 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신과의 관계를 벗어나서는 그 생활이 성립되지 않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 하나님과 우리, 또는 내가 얼마만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느냐, 혹은 생활과정에서 그 관계를 가지는 것은 물론이지만 그 생활을 통해서 일생이라는 생애노정을 어떻게 연결시켜 나가느냐 하는 문제가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만일 타락권내에 있는 인간들을 구하려 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 하나님은 24시간이면 24시간을 언제나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안간들에 대해서 무관심할 수 없다는 것을 먼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 땅 위의 타락한 세계에 있어서도 사랑하는 자녀들을 가진 부모가 있다면, 그 부모도 자식에 대해서는 24시간, 자기가 눈을 뜨고 의식이 있는 한 언제나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식을 생각하는 이상의 어려운 일이 있게 될 때는 모르지만, 그렇지 않는 한 언제나 자식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타락한 세계에 있어서도 부모의 심정인 것을 우리는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심정을 미루어서 보게 될 때에, 타락하지 않은 본연의 세계의 주체로 계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 하나님은 오늘날 인류를 자기의 자녀로서 바라보고 있는 한 그 자녀들에 대해서 무관심할 수 없다는 것은 더할 나위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연한 사실인 것입니다. 24시간 우리를 위해서 염려하고 계신 하늘이 있다. 그것이 말뿐이 아니고 사실이라는 것을 느끼는 사람이 있으면, 그는 하늘과 먼 자리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스스로 느낄 것입니다.
내가 가나 오나 어떠한 행로에 서 있더라도, 혹은 어떠한 환경에 처해 있더라도 그 자리에는 나만 있지 않다. 하늘이 같이 있다. 내가 보고 느끼는 전부, 혹은 환경에 있는 모든 것을 인식하는 것은 나만이 인식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보는 시선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요구하는 그런 동감의 시선이 여기에 곁들여 있고 내가 내미는 손길에는 하늘의 동정의 손길이 깃들어 있다는 이러한 입장에 서 있는 것을 우리는 망각하기 쉬운 것입니다. 보고 느끼고 감각하는 모든 것은 하늘과 주체 대상 관계에 있어서 일체적인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실지로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악한 자리에 나갈래야 나갈 순 없을 것입니다. 딴 일을 할래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하늘은 우리 인간을 대해 가지고 그렇게 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하늘을 대하고 있는 우리 인간들이 하늘과 더불어 같이하려고 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 여러분의 생활을 분석하면 분석할수록 불효밖에 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없는 것입니다.
참되신 부모의 심정을 갖고 찾아오신 그 하나님이 아버지적 사랑을 가지신 주체되신 분이라고 생각하게 될 때에,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위해서 염려하고 그분이 염려할까봐 내 생활을 절제하고, 혹은 그분이 고통을 느낄까봐 내 환경을 정리하면서 수시로 하늘을 위주하고 내 환경적인 모든 것을 상대적 여건으로 일치화시키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느냐? 그런 노력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혼자 있지만 혼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러한 자리에 있어 가지고 하늘이 동정하고 하늘이 보게 될 때'내가 너를 지킨 보람을 느낀다' 할진대는, 하늘이 그러한 사람을 대해 가지고…. 그가 피해를 입든가 혹은 가해를 당할 수 있는 환경에 있게 된다면 그 자리는 하늘이 가해를 당하는 자리요 하늘의 슬픔이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자리이기 때문에, 그 환경이 악한 환경이면 악한 환경일수록 악이 승리하게 하는 것보다도 선하신 하늘 앞에 굴복하도록, 그렇게 타개시켜 나가기 마련인 것은 두말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그러한 생활적인 터전이나 어떠한 근거지를 여러분의 생활 이면에 혹은 생활 표면에서 확정짓지 않고서는 하늘을 체휼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입니다.
여러분, '사랑' 하게 되면 이것은 막연한 말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혼자, 말로서는 이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이라는 말을 아무리 설명해 보았자 부모를 갖지 못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도달할 수 없는 경지인 것입니다. 혹은, 부부의 사랑을 아무리 설명해 보아야 혼자 살고 있는 사람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 부모의 사랑이 어떻게 크다고 해도 자녀를 낳아 가지고 자녀를 길러 보지 않은, 이러한 체험을 갖지 못한 사람에게는 그것은 도달할 수 없는 경지인 것입니다.
결국은 자기가 느낄 수 있는 주체나 대상권내에 있어서, 그와 나와의 행동적인 일치점을 갖출 수 있는 데 있어서, 그가 좋아하는 것을 내가 좋아할 수 있고 그의 바램이 내 바램이 될 수 있고 그의 일체가 내 일체로 연결될 수 있는 그 자리에 있어서 그 상대를 대한 사랑의 느낌을 느끼는 것이 우리의 일상생활인 것을 생각하게 될 때, '하나님' 하게 되면 막연하다 이겁니다. 그 막연한 하나님이 나와 더불어 어떠한 환경에서 일치점을 느끼느냐, 출발점을 제시할 것이냐?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기도시간에만 그러한 인연을 맺을 수 있다고 하게 되면, 그 기도시간 이상의 환경을 내 생활권내에 연결시킬 수 있는 노력을 하지 않고 신과 동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체휼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인간을 보게 될 때, 하나님하면 높은 감을 느끼지만, 우리 아버지와 나, 이런 관계…. 하나님은 어떠한 하나님이냐 하면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자식이다. 나는 아들이다. 아들 인데 둘도 없는 아들이다. 하나님은 그 아들의 아버지인데 세계의 수많은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아버지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내정적인 면을,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에서 어떻게 내심으로 그 폭을 넓히고 그 권을 넓힐 수 있느냐 하는 문제, 그것이 생각뿐만이 아니라 실천생활에 있어서, 실천환경에 있어서, 그것을 어떻게 적응시키느냐 하는 문제를 다루게 될 때는, '내가 사랑하는 아버님이 바라는 심정적 요구, 즉 사랑의 아버지께서 요구하고 있는 것이 이것이 아니냐,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렇게 실천해야 한다'고 해야 되는 것입니다. 실천하는 그 하루의 생활도, 혹은 한달의 생활도 물론이지만 일생의 생활을 그렇게 보고, 자기 혼자 보고하고 자기 혼자 느낄 수 있는 생활을 하는 여기에서 비로소 체휼이라는 것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막연히 기도나 할 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대개 신령한 체험이 있는 사람들의 폐단이 무엇이냐?기도라든가 집회할 때는 그런 것을 느끼지만 생활면에 있어서의 동화된 체휼권, 또는 동화시킬 수 있는 체휼권에 대해서는 망각하는 것을 우리는 왕왕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내가 기도를 하나 안 하나 그 환경에 있어서 하늘이 같이 역사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자아를 어떻게 확인하고 확정짓느냐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에 대한 체휼이 우리의 생명의 요인이 된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이 있다. 하나님이 있다' 하는 것은 말뿐만이 아니라구요. 원리를 통해서 주체와 대상 관계를 중심삼고 볼 때에 하나님은 불가피적으로 있어야 된다는 입장이 아니라, 하나님은 내가 있기 전에 있었던 것이 아니냐, 내가 생각하기 전에 있었던 것이 아니냐, 내 모든 감각, 나의 일체를 주관하는 하늘이 아니냐 하는 입장인 것입니다. 그것을 인식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인식하고 아는 것이 원칙이 아니예요?알고 인식하는 것이 원칙이 아니라 인식하고 알도록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추우면 춥다 하는 것을 알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추우면 추운 것을 느껴 가지고 아는 것이 아니냐, 이와 마찬가지로 신이 계시다면 신이 계신 것을 여러분이 느껴야 되겠습니다. 세포로 느껴야 되겠습니다. 그 경지가 문제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체휼적 입장을 어떻게 우리가 확정짓느냐 하는 문제, 이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떠한 환경에서 인식되느냐 할 때, 여러분들은 신비스러운 기도 가운데서, 기도시간에만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예요? 하기야 대다수의 사람은 자기가 정성들이는 그 시간에 그러한 인연이 맺어지는 것입니다. 물론 그래요. 우리가 상습화된 죄악권내에 이런 생활권을 갖고 있기 때문에, 선과는 먼 거리에 있기 때문에, 모든 정성을 들여 가지고 몸과 마음이 통일될 수 있는 그 선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접촉점이 가까워지는 것은 틀림없는 것이지만 그것이 정상적이냐?우리 생활면에 있어서 그것이 정상적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듣고 말하는 이 모든 것도 평면적이 아니라 입체적이어야 됩니다. 내가 '여보' 하면 '여보' 하는 데 있어서도 그 울려지는 음파의 전달로서만이 아니라 그 이면에는 반드시 심정적 내정이 하늘과 더불어 가중되어 있다는 입장에서 말을 하고, 듣는 데 있어서도 역시 그런 면을 들을 수 있는 이러한 체휼적인 입장이 무엇보다도 귀한 것이 아니예요?
이러한 생활을 여러분이 하게 된다면, 날아가는 새소리도 우연이 아닙니다. 불어오는 바람소리도 우연이 아닙니다. 아침에 솟아오르는 태양빛도 자기에게는 무한한 그 무엇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환경적 터전 위에서 이것을 어떻게 자기가 체휼하느냐, 내가 몸으로 어떻게 느끼고 체험을 하느냐, 그것을 어떻게 느끼느냐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종교는 생각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닙니다. 종교라는 것은 체휼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종교의 인식이라는 것은 어떠한 관념적인 지식적 논리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이요 실제적인 체험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체험을 갖지 못하는 신앙은 장구한 신앙이 될 수 없고, 체험을 갖지 못한 신앙의 자리는 자신을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자신을 가졌다 하더라도 환경이 어그러지게 될 때는 그 자신도 치우침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외로울 때에 그 외로움이 나만의 외로움이냐? 외로왔던 하늘이 있기 때문에 하늘과 더불어 외로워 할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된다면, 내가 외롭기 전에 먼저 하늘이 외로워 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면, 이는 불행한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기쁠 때도 나만이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과 더불어 기뻐하는 것입니다. 내가 기뻐하기 전에 먼저 하늘이 기뻐하는 것입니다. 나는 평면적으로 기뻐하지만, 하나님은 입체적인 입장에 서 가지고 기쁨을 느끼시며 기뻐하는 나를 보시고 나에게 동조해 주고, 나의 노래에, 혹은 나의 춤에 가중된 자극으로 나를 권고하신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환경으로 하늘이 나를 품어 줄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되면 그 얼마나 행복할 것이냐? 그런 자리를 체험한 사람이 있다면 그 체험된 순간이라는 것은 영원히 잊어 버릴래야 잊어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어디를 가나 그 느낌은 나를 지배하고 있는 거라구요. 산에 가나 들에 가나 집에 가나 도시에 가나 직장에 가나 혼자 밀실에 있으나 어떠한 곳을 막론하고, 자기가 기뻤던 느낌의 그 모든 인연이라는 것은 언제나 자기 마음과 자기 생활목표 가운데서 자기 생활 환경을 수습하면서 내일로 끌고 가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혼자 있어도 생각하는 것은 뭐냐하면 기뻤던 그때를 재현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혹은 외롭고 슬펐던 때에 하나님이 나에게 강하고 담대하라고 권고했었다면, 그런 자리에서 새로운 결의와 새로운 각오를 할 수 있는 마음을 재현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입장을 친히 느끼고 그런 환경에서 자기 신앙생활을 유지해 나가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불행한 사람이 아니라 행복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가 당하고 있는 환경과 생활하고 있는 무대가 아무리 비참하고 처참하더라도 그는 불행한 사람이 아닙니다. 고독하고 처참한 환경이 그 사람 에게 고독하고 처참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고독은 미래에 가중된 희망을 촉구시키고, 그 처참함은 현재뿐만이 아니라 미래에 새로운 소망을 촉구시키는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비로소 신앙의 가치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환경에서, 비로소 나만이 아니라는 그런 경지에서 자기 스스로가 '나는 이런 사람이다. 하나님이 계시다. 그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과 나와는 하나다' 하는 자각된 입장에 서서 자기의 모든 소신을 한 목적에 결정적으로 집중시켜 가지고 나서게 될 때에, 거기에는 새로운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새로운 결과가 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체휼적인 자리에 있어서 자기의 새로운 자각을 어떻게 확정짓느냐?폭풍우가 불어오는 그런 환경의 첨단의 자리에 섰다 하더라도 밀려날 수 없다는 자각, 어떠한 어려운 사선이 내 앞을 가로막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자각을 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 하나님은 모든 악을 심판하는 공의의 주인공이시며 선에 대해서는 절대적인 보호의 권한, 악에 대해서는 절대적인 심판의 권한을 갖고 계신다. 그런데 나는 선한 입장에 서 있기 때문에 악을 제거 시킬 수 있는 주체적인 편이 아니냐?이렇게 자각하는 입장에서 비로소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는 길이 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호수아와 갈렙을 대신 세워 소수의 무리를 이끌어 가나안 복지를 찾으라고 명령하셨던 하나님은, 첫째로 무슨 명령을 했느냐 하면, 강하고 담대하라고 했습니다. 강하고 담대하라는 것은 그저 막연한 자리에서 강하고 담대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하늘이 같이하니 강하고 담대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같이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어려움을 대비해 가지고 배후에서 배수진을 치고 여러분을 찾아오고 있고 여러분과 동반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고통이 가중될수록 그 고통은 여러분을 망하게 하기 위한 고통이 아니라 여러분의 가치를 타진하기 위한 고통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보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어려움에 부딪히게 하는 것은 그 어려움으로 말미암아 그에게 피해를 입히고 마이너스가 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악한 사탄세계 앞에, 악한 역사시대의 인류 앞에, 실패의 원칙을 따라오던 인류 앞에, 또 실패의 원칙을 제시하는 사탄 앞에 그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제시하기 위한 하나의 조건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 수난길을 극복함으로 말미암아 역사는 거기에 머리를 숙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려운 환경을 타개하고 나서게 될 때, 그 환경에 처해 있던 인류는 새로운 소망의 인물로 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일들을, 하나님에 대한 체휼적 감정을 얼마만큼 자기 생활주변에 유도해 가지고 실현화시키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 실현화시키는 사실들이 자기를 중심삼고 표현화할 때, 자기뿐만이 아니라 자기 생활주변에 새로운 자각권을 형성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완전한 주체가 있으면 완전한 대상은 생겨나는 것이 천지이치라는 것을 여러분은 원리를 통해서 배우고 있는 것입니다. 완전한 것이 나오게 되면 주체 형성은 자연히 벌어지는 것입니다. 왜냐? 불완전한 권내일수록 완전한 것이 나오게 되면 그 완전을 추구해 가지고 거기에 가라 말라 하지 않아도 반드시 따라가게 마련인 것입니다.
어떻게 따라가느냐? 인간에게는 욕망이 있습니다. 욕망에 의해 못난 사람이든지 잘난 사람이든지 쉽게 좋아질 수 있는 길이 있다면 누구든지 따라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쉽게 좋아질 수 있는 그런 주체를 만나게 되면 본심은 아는 것입니다.
그건 세상에서도 그렇잖아요? 여러분들이 길을 가다가 엇갈려 가는 사람을 척 보더라도 공연히 마음이 끌리는 사람이 있다구요. 어떤 사람을 보게 되면 달라는 것이 없는데도 미운 사람이 있습니다. 달라는 것도 없는데 보기만 해도 기분 나쁘다구요. 이것은 그 선조로부터 자기와는 상충적인 인연이 맺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 후손이면 반드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마음은 지남철과 같습니다. 지남철 가루같이 생겨나는 거예요. 알겠어요? 하나님이 절대적인 지남철의 주체라면 인간은 작은 지남철 가루와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 가지고 인간은 끌려가는 것입니다. '나는 끌려간다'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길을 나서게 될 때나 혹은 시장에 갈 때 '오늘 시장 가는데 어떤 사람을 만날 것이냐' 할 때는, 자기라는 관념을 벗어나 가지고 그와 같은 관념을 가지고 가라는 것입니다. '나는 조그마한 지남철인데 하나님이 역사하시고 있다면 반드시 하나님과 주고받고 있을 것이다. 주고받고 있기 때문에 강한 지남석의 작용을 할 것이 아니냐? 그래서 내가 그 근처로 가게 되면 내 마음에 끌리는 것이 있을 것이 아니냐? 그러면서 그리로 찾아가는 거라구요. 그런 생활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상점을 가더라도 자기 마음이 끌리는 데에 가서 물건을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자의적이거나 고의적이거나 간에 이러한 생활습관을 키워 나가야 합니다.
아이들이 말을 배우게 될 때에, 말을 배우는 그 아들이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 그래요? 아버지라는 말을 모르고 '아버지' 할 때 그 아들이 아버지를 아느냐 이거예요? 그것은 습관화되다 보니까 '아! 이렇게 되게 되면 이것이 아버지구나!' 한다는 거예요. 아이들이 말을 배우는 것을 보게 되면 참 신기하다는 것입니다. 그 추상명사 같은 것도 전부 다 어떻게 알아서 납득하게 되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을 설명해 가지고 알려 주려면 백과사전이 모두 동원되어야 할 텐데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없이 그런 말들을 잘 배워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바로 그래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될 게 아니예요? 그러려면 여러분은 생활면에서 세부적인 분야를 많이 대해 나가야 된다구요. 안 그래요? 많이 대하면 자연적 습관성에 의해서 알게 마련입니다. 설명에 앞서 자연히 자기 해명권이 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여러분은 언제나 '나는 조그만 지남철과 같은 철분이다'라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내 마음은 어디로 가야 하느냐? 여러분, 아침에 일어나게 되면 그냥 그대로 일어나서 어제 살던 그 사람, 김 아무개면 김 아무개, 박 아무개면 박 아무개, 내가 어제 밤에 잤기 때문에 자고 일어나는 나는 어제 그 사람이 틀림없다.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주체에 대해서 요구하는 전부가 종합적인 면이라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에게 있어서는 어머니 이외에는 바라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딴 욕망의 대상이 없다는 거예요. 어머니면 어머니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일체의 모든 생명이, 감각기관이라든가 의식기관이 전부 다 어머니에게 동원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젖을 먹고 나서도 어머니, 젖을 먹기 위해서도 어머니, 어머니 외에는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어린아이의 심정을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여러분이 혼자 잘 때도 어머니 품에 품겨서, 아버지 품에 안겨서 잠을 자는 것과 같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는 거라구요. 그렇게 된다는 거예요.
여러분이 그런 생활을 하게 되면, 자고 일어나서 자기가 자기 손을 쓱보아도 손이 빛나는 것을 느낀다는 거예요. '나는 내가 아니다' 하고 느끼는 그런 경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깊은 품에 품겨서 무한한 사랑권내에 잠길 수 있는 그런 권이 있다는 거라구요.
'하나님이 전부 다 해줘야 내가 믿지, 그렇게 해주지 않으면 뭐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나'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늘이 전부 해주는 법이 아니라는 거예요. 인간은 타락했기 때문에 인간이 찾아가야 할 복귀의 행로가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복귀 행로의 거리는 무엇으로 접근시킬 수 있느냐? 행동으로서 접근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구요. 마음으로 접근시키는 거예요. 마음밖에 없는 것입니다. 행동으로 하려면 육천년을 닦아 나오는 놀음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뛰어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마음은 본성을 통해서 직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음은 무엇보다도 빠르고 무엇보다도 가깝게 여기에 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음의 길 외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 마음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화하고 마음으로 기뻐하고 마음으로 거기에 대할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들은 자기가 주체로 모시고 살고 있는 그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사랑하는 분의 모든 것은 귀하게 느껴질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모든 것이 수습되는 거예요. 사랑하는 사람의 손수건 하나 가지고 일생을 고독한 자리에서 생활하더라도 그 환경을 극복할 수 있는 주도적인 힘이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 세상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을 자기도 사랑한다는 거예요. 사랑하려고 한다는 겁니다. 사랑하려고 하는 그 사람을 내가 파탄시킬 수 있느냐? 그를 협조해야 할 것이 아니예요?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을 내가 멸시할 수 있느냐? 환영해야 될 것이 아니예요?
여기에서 모든 것이 이어지고 모든 것이 발전의 동기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오늘날 신앙하는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으면서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모른다는 것은 뭐냐? 그런 생활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 할 때 그 아버지는 뼛골에서 뼛골이 울려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뼛골이 울려 나와 골수가 반응을 느낄 수 있는 자리에 계시는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그 아버지는 세상 아버지와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르는 그 아버지는 얼마나 수고했느냐는 것입니다. 수천년 동안 인류를 찾아 헤매면서 수고한 것은 누구 때문이냐? 결국은 나 하나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전세계를 동원하고 역사를 동원하고 우주를 동원해 가지고 지금 활동하고 있는 것은 사랑하는 아들딸 하나 찾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그것은 특정한 예수님만이 가는 길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보낸 것은 중보자로 보냈기 때문에 길을 개척시키기 위한 선봉자로 보냈을 뿐이지, 그 근본 사랑의 주체로 보낸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랑의 길을 개척해 가지고 만민을 그 사랑에 동참시키기 위한 공동적인 목적을 개방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지, 예수님의 자의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자다가도 '아버지' 할 수 있고, 혼잣말로도 '아버지' 할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사람들이 자기 상대를 그리워하는 그 이상의 그리움이 복받쳐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밥 먹는 것을 잊어버리고 잠자는 것을 잊어버리면서 그 생활 이면에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가져 가지고 '아버지' 하게 되면, 아버지가 없는데도 아버지 손이 잡혀진다구요. 그런 일이 있다구요. 꿈 같은 사실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하면 아버지 품에 안긴다구요. 이러한 표현적 권에 있어서 체휼적 감정을 어떻게 체득하느냐 하는 것은 신앙생활에서 무엇보다도 귀하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그러한 체휼의 감도, 느끼는 그 도수, 그 양의 여하가 그 사람의 신앙 기준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랑의 심정을 가졌다면 어디에 옮겨 가서 '내 이것을 해야 된다' 하게 될 때는, '하늘이여, 같이해 주시옵소서' 하기 전에 벌써 하나님은 같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여러분이 느끼게 될 때는 '고마우신 하나님'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인간 대해 가지고 믿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인간들이 서로가 서로를 대해 가지고 의논하고 하는 그 신의라는 것은 말로서 '그렇지, 틀림없지' 하고 다짐해야 그렇다고 할 수 있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신의라는 것은 '그렇지' 하고 다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짐할 필요도 없다는 것입니다. 뭐 벌써 그럴 수 있는 이상의 자리에 선 하늘의 신의는 이미 그 결정적인 자리를 잡고 모든 문제에 임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야! 나는 행복한 사람이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되는 거라구요.
결국,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외면적인 환경과 현재 자기의 입장을 화합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면적인 그 생활 이면을 중심삼아 가지고 하늘과 나와의 관계, 부자관계의 심정을 체득하고, 그와 나와는 하나라는 심정을 체득해 가지고 그것을 비로소 내면으로부터 외면화시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전체 앞에 적응할 수 있는 사람이면 그 사람은 하늘의 아들이요 딸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은 틀림없이 천국생할을 대행하는 사람이 될 것이 아니냐 하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통일교회 교인들이 지금까지 영적으로 체험한 것은 너무나 아까운 것이 많다는 것입니다. 시시한 여러분들, 시시한 여러분들이라구요.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진주를 돼지한테 던지지 말라고 그랬다구요. 여러분들은 돼지라구요. 너무 큰 것을 줬다는 것입니다. 너무 큰 것을 체험시켰다 이것입니다. 너무 좋은 것을 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받는 사람이 돼먹지 않았으니 좋은 것을 알아야지요?그저 그런 것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공을 안 들이고 받았기 때문에 싸구려로 알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공을 들이지는 않았지만 그 배후에서 하늘과 역사 이래 수많은 선조들이 공을 들인 터전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터전을 통해서 전달되는 과정에 있어서 수많은 희생의 대가가 치러졌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멋대로 행동하는 사람이 많다는 거예요. '이게 통일교회가 가는 길이다. 나 같은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통일교회다. 나는 그래도 그중에서는 이렇게 살았다' 하는 이런 비정상적인 생각을 정상적인 것으로 아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 자신들이 아무리 공인하고 입증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동감하지 않고 공인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가담하시지 않으면 그것은 공(空)이라구요. 하등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을 하고 나서 돌아설 때는, '아버지, 오늘의 일이 어떻게 됐습니까?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내가 나를 중심삼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빚을 지는 놀음을 했느냐, 내가 하나님 앞에 빚을 탕감하는 놀음을 했느냐?빚을 지는 일을 했다면 그 일을 끝내고 돌아설 적에는 눈물이 사무칠 수 있는 자기를 발견할 줄 알아야 정상적인 사람입니다.
어떤 일을 끝내고 돌아설 때 '아버지 감사합니다' 하는 마음이 없거들랑 얼굴을 들 수 없고 그 자체를 떠날 수 없어서, 눈물을 머금고 돌아와서도 회개하는 생활을 계속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하늘생활을 하지 못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통적 신앙생활이라고 봐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맹탕이구만, 맹탕, 그저 똥개들이 나가 싸우듯이…. 이런 패들이 많다는 거라구요. 여러분이 기도할 때와 선생님이 기도할 때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하고 기도할 때, 그 아버지라는 말에도 천태만상의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란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뭐가 다르냐? 거쳐온 길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시로도(素人)가 전문가를 보게 되면 말입니다. 시로도가 전문가를 보게 되면 전문가가 전문가 같지 않다구요.
여러분 글씨 쓰는 것, 즉 서도(書道) 같은 것을 봐도 말입니다. 국민학생들이 만일에 하늘 천(天) 자를 쓴다면 말이요. 잼대로 재 가지고 딱딱 이렇게 쓰는 것입니다. 이렇게 써 놓으면 명필 같은데, 어떤 것이 잘 쓰였나 할 때, 시로도는 그것이 최고로 잘 썼다고 하겠지만 전문가의 눈에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전문가는 다르다는 거예요. 아무렇게나 썼는데 아무렇게나 쓴 그것이 땅 위에 전체의 표준 앞에 딱 들어맞는다구요. 그게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생활에 자신을 갖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신을 갖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효의 길 앞에서 자신을 갖는 사람이 있다면 효는 거기서 끝나는 것입니다. 충의 길 앞에 자신을 갖고 자기를 인식하는 자는 거기서부터 내려가는 것입니다. 자기 혼자 있어 가지고 자신을 갖는다는 것은 죽은 것과 같은 놀음입니다. 하나님이 같이해 가지고 자신을 가지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같이하고 있으니 거기에는 자신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자동적으로 자신을 갖게 마련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공적인 단에 서게 될 때, 그 마음은 형장에 나가는 심정과 똑같을 거예요. 그것은 공판장에서 판사의 준엄한 판결을 바라는 그런 순간에 선 사나이와 같은 심정일 것입니다. 즉, 제물이라는 것입니다. 수많은 생명을 이 시간에 내가 책임을 지고 있다는 거예요. 한마디 잘하면 살릴 수도 있는 것이요. 한마디 잘못하면 죽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의사가 주사를 잘못 놓으면 그 생명을 희생시키는 거와 마찬가지 입장입니다. 제일 무서운 자리라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는 하늘이 같이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면 갈수록 고개를 들 것이 아니라 가면 갈수록 얼굴을 숙여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는 아무렇게나 지내 왔는데 하늘은 안팎을 가려 가지고 자기를 지키고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불효막심한 자아를 회상하는 그때에 있어서는 하나님이 고마운 것을 느끼는 이런 일들이 많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불효막심한 수치스러움, 그 책임 못한, 그 무어라고 할까, 불쾌감을 느끼는 일은 죽어도 할 수없다는 마음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여러분이 느껴 가지고 자기 생활은 이래야 된다는 것이 공식화된 형태로 나타나 그것이 자기 생활을 통해서 전개되어야 됩니다. 그리하여 그 생활이 하나님과 더불어 일치될 수 있고 동화될 수 있는 환경으로 나타날 수 있는 체휼권이 벌어지게 될 때, 그러한 사람과 같이 있게 된다면, 그 사람 곁에 가면 갈수록 떠나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는 거예요. 딴 세계는 사망권인데 이 세계는 하늘권이기 때문에 괜히 가까이 가고 싶다는 거예요. 괜히가 아니라 사실이 그렇지요. 몸뚱이가 모르기 때문에 괜히라는 말이 나오지만, 본심은 알기 때문에 사실이 그렇다는 거예요. 거기에 자꾸 가고 싶다구요. 같이 있고 싶다구요. 이것은 수학공식보다도 더 틀림없는 공식과 같이 여러분들의 생활에 반영된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에 대한 체휼,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다' 해서는 어림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같이하는 입장에서 '하나님은 역사를 초월하신 분이 아니냐?시대를 초월하신 분이 아니냐?하는 것을 느끼면서, 내가 무엇을 들었다 할 때는 이것은 현재가 아니라구요. 현재 뿐으로 끝나지 않는다구요. 여기에는 반드시 역사성이 있다구요.
이것이 여기 올 때까지는 어떠한 길로 왔느냐? 그래서 여기서는 물질에 대한 가치관도 공인해야 됩니다. 거기에는 이럴 수 있는 과정에 있어서 인연되었던 사람도, 제작자도 들어가는 것이예요. 이것 하나도 역사적인 물건이라는 거라구요. 그렇기 때문에 자기를 생각하게 될 때는 나를 위하여 하늘의 공이 얼마나 컸던 것이냐 하는 걸 느껴야 됩니다. 그러면 내가 이렇게 시시하게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렇게나 가치없게 거동을 할 수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생활은 고의적으로라도 그렇게 해 나가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가고 싶어하는 마음을 알지 않습니까? 이 마음만은 틀림없습니다. 내가 하늘과 더불어 살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지 않습니까? 틀림없지 않습니까?'하는 마음이 그 누가 부정하더라도 부정할 수 없는 틀림없는 마음인 한, 그 사람은 하늘과 더불어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건 공식이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깊고 얕은 차이, 높고 낮은 차이, 넓고 좁은 차이는 있을는지 모르지만 그 범위에 있어서 접하고 있는 건 사실입니다.
그 무엇을 중심삼고 보더라도 가까우면 열의가 있는 것이요. 멀면 그 비례적인 입장의 열의를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을 중심삼고 볼 때도 같은 입장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이 공식적인 원칙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나' 하게 되면 하나님을 중심삼고 내가 동쪽에 서 있느냐, 서쪽에 서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궁금하면 기도해 보라구요. 내가 어느 방향을 맞춰야 기도가 잘 되는지 아는 거라구요. 그것은 전파와 마찬가지라구요. 안테나를 전파의 방향과 맞추게 되면 잘 통하는 거와 마찬가지로 기도해 보면 안다구요.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이 없다. 있다 하는 말이 필요한 게 아니라구요. 밥을 먹으려고 숟갈을 들게 될 때도 자동적으로, 오늘 내가 이 밥을 대하는 것은….
우리 사람이라는 것은 자기 혼자만이 아니예요. 사람이란 어떤 존재냐? 사람이라는 것은 나 혼자가 아니라구요. 우주의 공동적인 인연을 종합해 가지고 결실체로 나타난 것이 인간이 아니예요? 이런 인간에게는 만물의 종합상이 다 들어가 있는 것이요. 우리의 선조로부터 이어받은, 수많은 선조들의 모든 소성(素性)들이 전부 다 투입된 거라구요.
김 아무개 하면 그 아무개 하나가 아니라구요. 그에게는 식물, 광물, 동물, 모든 만물의 형태가 다 들어가 있다구요. 얼굴은 지금 자기 얼굴같이 느끼고 있지만 그 얼굴이 될 때까지는 수만년의 역사를 거쳐왔다구요. 수만년에 걸쳐서 선조들의 피를 이어받아 가지고 그렇게 생겨난 거라구요. 그것은 기적적인 실체라구요.
그뿐만이 아니라 그 배후에는 하늘의 인연이 따라왔기 때문에 그가 남아졌다는 것입니다. 하늘의 인연을 두고 볼 때 무한한 곡절의 인연을 거쳐 가지고 오늘날의 자기를 이루어 왔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만물의 모든 관계적 존재가 투입되고 투영된 실체가 자기라는 것입니다. '나'라 하게 될 때 나라는 것은 오늘날 여러분이 제한된 입장에서, 상습화된 자기 입장에서의 '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공동목적을 대신할 수 있는 주체적인 입장에서 자아의 자각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그렇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혼자 움직인다고 해서 혼자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고요. 우주 출동이라구요. 역사 출동을 하고 있다구요. 그런 의식으로 자기를 실현하게 될 때, 이는 위대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비록 제한된 이 땅에서 말하지만 그 말은 세계를 향해서 선포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그런 존재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부모의 얼굴을 닮지 않은 어린 사람들은 옛날 선조를 닮은 것입니다. 자기 머리칼이나 세포 한 부분에 자기 몇천 대 선조의 분자가 전부 다 투입돼 있다는 것입니다. 우주가 움직여 가지고 나 하나 조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역사가 움직여 가지고 나 하나를 형성하고 있다는 거라구요. 그런 실감을…. 그것은 결실인 것입니다.
'그 결실이 빛나는 결실로서 나타나라, 영광된 결실로 현현해라, 꽃이 피고 향기가 풍길 수 있는 내 자신이 돼야 될 것이 아니냐? 열매가 맺혀야 될 것이 아니냐? 이런 인연을 맺고 나와 가지고 그 인연의 주체가 누구냐 할 때, 사람이 아니라 하늘이라는 것입니다. 하늘은 거기에 있어서 우주적인 자아를 발견하고 체휼적인 심정을 논의하고 나서는 자를 푸대접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늘이 그런 자를 푸대접했다가는 존속할 수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각권내에 서서 신에 대한 체휼을 느끼는 사람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믿는다는 것은 자각된 자리에서 믿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이 '밥' 하게 되면 무엇이 중요하냐? 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구요. 선후관계가 꺼꾸로 된 것은 악이 되는 것입니다. 타락이 뭐냐? 선후 관계가 꺼꾸로 된 것입니다. 위가 아래가 되고 아래가 위가 됐다구요. 먼저 되어야 할 것이 나중 되고 나중 되어야 할 것이 먼저 됐다구요. 상대가 돼야 할 것이 주체가 되고 주체가 돼야 할 것이 상대가 됐다구요. 선후관계가 엇갈린 거라구요.
그렇기 때문에 어떤 것이 주체냐 할 때 '하늘 것이 주체다' 하는 절대적인 관념이 필요합니다. 무엇이 주체라구요? 「하늘 것이요」 하늘 것이 주체입니다. '나' 하게 되면 내가 주체가 아니라구요. 나는 하늘 앞에 대상으로서 선 '나'입니다. 그 대상으로서 나라는 것은 주체의 요건 앞에 일치화되지 못하게 될 때는 대상의 가치는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원리관이라구요. 내 눈도 주체로서의 눈이 아니고 무엇으로서의 눈이라구요? 입은? 팔다리는? 내 전체는? 대상으로서의 나입니다. 주체가 없게될 때는 생명이 없다구요. 그렇지 않아요?
여자에게 있어서 남편이 없게 될 때는,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암만 있다고 하더라도 없는 것입니다. 인심 좋은 동네에 들어가 산다고 하더라도 혼자 살게 되면 누구든지 다 와서 건드린다구요. 그게 자동적인 원칙이라고요. 그렇기 때문에 쥐 못 잡는 고양이와 마찬가지로 벌이 못 하는 남편이라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구요. 여러분의 주체는 누구라구요? 하늘이라구요. 여러분은 하늘을 위해 있는 것입니다.
효의 길이 어떤 길이냐?자기의 주체의식이 발발하게 될 때는 효자의 길은 깨져 나가는 것입니다. '어머니 아버지는 뭐야? 어머니 아버지면 어머니 아버지지' 이렇게 될 때는 또 다른 주체의식이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어머니 아버지면 어머니 아버지지 뭐야?그 늙은이 뭐 날 낳아 뒀으면 낳아 뒀지 뭐야? 내가 낳아 달라고 해서 낳아 뒀나 자기들이 좋아서 낳았지' 이렇게 되면 마지막이라구요. 그건 둘 다 깨져 나가는 것입니다. 효라는 것은 주체의식을 갖지 않는 것입니다. '나는 대상이 다' 이렇게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충이라는 것도 그래요. 충의 길도 그렇다는 거예요. 충신이 '군왕이면 군왕이지, 뭐가 내가 공부해서 아는 데는 군왕보다 더 많이 알지, 그의 눈과 내 눈이 뭐가 달라, 같이 달려 있는데…. 그 몸뚱이와 내가 무엇이 달라? 마찬가지가 아니야? 그 몸뚱이보다 내가 더 나으면 나았지…' 이렇게 되면 충신의 길은 다 깨져 나가는 거라구요. 주체와 대상의 관계가 엇갈리게 될 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나라의 중심인 군왕은 어떤 분이냐? 군왕은 역사를 이어받은 그 나라 민족을 대신해서 공동적인 책임을 진 책임자요. 전체를 대표한 자입니다. 그리고 전체 앞에 선 나는 그 몇분의 일에 해당하는 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럼 부모는 뭐냐? 자기 혈족이나 씨족을 중심삼아 가지고 이 씨족이 올바로 서느냐 못 서느냐 하는 이런 중요한 책임을 짊어진 중심존재입니다. 그 부모 앞에 화가 있게 되면 자기에게 화가 있는 것과 같기 때문에, 그분이 완전하고 피해를 받지 않고 그분이 보다 빛나기 위해서는 주체를 주체로 모시고 대상은 대상으로서 순응해 나가야 합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그 관계가 살이 찌고 자라는 것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게 될 전, 그 주체를 위하는 것이 결국은 자기를 위하는 것입니다. 주체를 끝까지 위하다 보면 결국은 자기에게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주체까지도 점령할 수 있는 놀음이라는 거예요.
효의 길이니, 충의 길이니 하는 그것이 뭐냐? 주체를 대해 가지고 완전히 점령하겠다는 놀음입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신앙생활도 그와 마찬가지라구요. 오늘날 통일교회 교인들 중에 누가 한번 '내가 주체지' 하는 말만 한마디 들어도 발끈해 가지고 피를 보고야 '헤헤 그래야 싸다' 하는 사람이 있다면, 볼장 다 본 거라구요. 그런 사람은 통일교회 나오지 말라구요. 나오지 말아요. 암만 나온다고 해도 안 통해요. 그런 사람은 천국가겠다고 나오기는 하겠지만 못 갑니다. 천국이라는 것은 그렇게 안 되어 있다구요. 주체와 대상 관계에 있어서의 순응의 법도를 따라 가지고 원리원칙에 화합할 수 있는 길을 가게 돼 있는 것이지, 자기가 또 다른 주체가 되어 가지고 뭐 이러고저러고 하게 안 되어있습니다.
여러분이 항상 신에 대한 체휼을 어떻게 해야 되느냐? 체휼하는 데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나는 대상이다' 하는 것입니다. 대상인데 '좋을 때만 대상이지 나쁠 때는 대상이 아니다'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좋을 때만 대상이고 나쁠 때는 대상이 아닌 법이 있어요? 남편이 죽을 자리에 들어가면 여편네도 죽을 운명에 부딪치는 거라구요. 그 남편이 죽을 자리에 들어갔는데 '어, 너 죽을 자리에 잘 들어갔다. 나 보따리 싼다' 하는 여편네는 망할 년이라구요. 남편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내가 죽을 자리에 들어갔는데 '어, 잘 죽었다. 내가 장가 한 번 더 가겠구만' 하는 남편은 쌍녀석이라구요.
그렇기 때문에 위하는 대상이나 위하는 주체는 망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그걸 알아야 돼요. 알겠어요? 위하는 대상이나 위하는 주체는 망하지 않습니다. 위하고 있는 주체가 있으면 위하는 한 대상이 없더라도 그 대상은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대상이 위하고 있는데 그 주체가 나타나지 않더라도 끝까지 가면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그렇게 되어 있다구요. 여러분은 이것을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며칠 하다가 그만두지 말라구요. '내가 시작했으니 죽을 때까지, 내 일대에 안 되거들랑 몇 대에 가서라도 할 것이다' 해야 하는 거예요. 되는 거라구요. 몇 대를 기다리면 기다릴수록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건 하나님이 세계적인 축복을 해주려고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끈기 있는 족속이니까 네 후손한테 가서, 한 10대고 20대고 기다렸다가 이 세계적인 역사적인 축복을 너의 족속에게 해 줘야겠다' 하늘은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 그러려면 하루 기다려서 축복을 소원성취할래요. 일년 기다려서 소원성취할래요? 이렇게 물어 보게 되면 대답은 잘합니다. 어떻게 할래요? 하루? 그건 조그마한, 파리만한 것입니다. 그건 누구든지 보더라도 대수롭지 않은 축복이라구요. 그렇기 때문에 끝까지 견디는 자가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구원이라는 것은 보통 구원이 아니라구요. 그건 최고를 두고 하는 말이라구요. 끝까지라는 것은 몇백년 몇천년도 될 수있는 거라구요.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는 지금까지 2천년 동안 희생해 나온 것입니다.
'온다 온다 하던 예수는 왜 그렇게 안 오나? 그 예수가 사기꾼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을 만큼 기다렸는데, 얼마나 기다리다 죽고 얼마나 희생을 당했는데 왜 안 와요?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지치고 지치고 다 지쳐 떨어져 가지고 맨 나중에 한 사람만 남을 때까지 하늘은 기다릴 것입니다.
왜? 일등상을 주려니 그러는 것입니다. 일등상은 맨 나중에 둘이 있어 가지고는 못 주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하나만 남아야 된다구요. 그런 생각을 하고 가는 신앙자의 생활이라는 것은 누가 뭐 알아주고 안 알아주고가 문제가 아닙니다. 통일교회 사람들이 '선생님, 내가 이렇게 이렇게 했는데…' 하고 알아주라고 변명을 하고 그러는 것은 내 구미에 맞지 않는다구요. 자기 변명을 하느라고 입술을 이러고 있으면 '허, 저녀석 하늘을 잘못 알았구만' 하는 것입니다. 변명이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통일교회 문선생이 변명하려면 변명할 게 참 많다구요. 내가 통일교회 교인들 앞에 하소연하려면 하소연할 게 많다구요. 그러나 변명할 필요가 없다구요. 한 곳에서만 알아주면 되는 거라구요. 안 그래요?
사랑하는 아내는 남편이 알아주면 그만이라구요. 아들이야 몰라주면 어때요. 뭐 알아 달라고 눈을 바로 떡 떠 가지고 조금 손해볼까봐 그저뭐 궁둥이가 땅에 붙지 못하고 달랑거리는 거 보면, 그런 패는 통일교회 이용해 먹으러 들어온 패라구요.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이 사람을 보게 되면 '아하, 저 사람은 몇년짜리다. 내가 한 대 후려갈기면 영락없이 떨어질 패다' 그렇게 생각할 때가 많아요. 그렇지만 세상에 있으니까 모든 계층적인 발전, 질서라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그것도 필요하다는 거예요. 나무를 보게 된다면 지금 벌레 먹은 나무들이 있다구요. 그 잎파리가 한 절반 벌레먹은 나무를 보고 '아이고 나 벌레먹는 나무 잎파리 싫어' 하면서 그것을 전부 따 버리면 그 나무는 죽어 버린다고요. 새봄이 될 때까지, 벌레 안 먹을 수 있는 그날을 바라 가지고 기다려야 됩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구요. 그것이 선생님의 심정이라구요. 여러분들을 대해 가지고….
여러분을 백 퍼센트 믿지 않는다구요. 또, 여러분이 선생님을 백 퍼센트 믿으라는 것이 아니라구요. 믿겠으면 믿고 말겠으면 말라구요. 그렇지만 여러분을 대하고 가르치는 것은 올바로 가르쳐 준다는 것입니다. 그건 틀림없습니다. 영계에 가서도 선생님을 참소 못할 것입니다. '너한테 이렇게 가르쳐 뒀니, 안 가르쳐 뒀니? 하면 그 입으로 '예, 가르쳐 줬습니다'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안 했니? 하면 어떡하겠어요? 내가 책임 추궁받을 수 있는 놀음은 안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지금까지 여러분을 지도하는 거라구요.
주체나 대상 관계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주체를 위하든가 대상을 위하는 사람은 망하지 않습니다. 주체와 대상이 없으면 모르지만 있으면 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절대적으로 위했는데 망할 수 있는 자리에 간다 하는 일이 벌어진다면, 하나님은 창조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만들어서라도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만들어서라도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신앙자들에게 있어서는 뭐 걱정을 하고, 눈이 사팔뜨기가 되어 가지고 이용하려고 날뛰고…. 그 사람들은 오래지 않아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변명하기에 입이 나불거리는 그런 사람들은 오래가지 않는다구요.
언제나 여러분이 생각할 때는 '하늘은 주체다' 하고 생각해야 됩니다. '내 눈의 주체는 하늘이다. 그러니 내가 보게 될 때 혼자 보지 말고 주체를 위해 봐야지' 그래야 된다구요.
남편이 아내를 대하나 아내가 남편을 대하나 '당신이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오? 했을 때, '사랑하는데 요 눈 하나만 내놓고 그 외에 전부를 진정으로 사랑하오' 그러면 좋아해요? 한 눈만 내놓고 그 외에는 '진정 사랑하오' 하면…. 이 한 눈이 문제라구요. 요게 문제라구요. 그러면 좋다는 사람 있어요?
그래 주체와 대상 관계의 이러한 인연을 틀림없이 알았다 할진대는, 전폭적으로 모든 것이 주체를 위하는 것이 되어야 된다구요. 보는 것도 그렇고, 듣는 것도 그렇고, 또 먹는 것도 그렇습니다. 밥을 먹을 때도 '아이 맛있다. 아이 맛있다' 이렇게 먹는 건 자기를 위해서 먹는 것이지만, 주체를 위해서 먹으면 '참 고맙기도 하지' 그러는 것입니다. '이러한 환경에 나를 데려다 놔 뒀기 때문에 오늘 이와 같은 자리에서 밥을 먹는구나' 하게 되면 혼자 먹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체를 위해 먹는 것입니다. 잠을 자는 것도 그렇다구요. '아이구, 내가 잘나서 이렇게 이런 자리에서 잠을 자지' 그러는 것이 아니라구요. '아, 하늘이 이끌어 가지고 망하는 운명으로서 끝을 보더라도 한이 없던 내가 오늘날 이렇게 된 것은, 그 망할 수 있는 운명을 막기 위해서 하늘이 몇 번이라도 수고한 공이 있기 때문이다. 참 감사하지' 그래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체를 위한 대상의 자리는 불평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불평이 있을 수 있어요? 불평은 망동(妄動)입니다. 파탄이예요. 그렇기 때문에 신앙길은 불평을 불허한다구요. 무엇을 불허해요?응? 불평을 불허한다구요. 그렇기 때문에 감사만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걸 알아야 됩니다.
하늘은 언제나 주체로 계시기 때문에 주체와 더불어 상관된 운명을 가지고 그를 이탈하는 생활의 법도, 생활의 형태는 있을 수 없다구요. 그러 니가 보고를 하라구요. 어디 혼자 있더라도 혼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 쓱 가서 앉더라도 앞뒤로 하늘이 와서 같이 앉는 것을 느낀다구요. 그래 가지고 뭘 감상을 하게 된다면 마음으로 그것을 느낀다구요. 아,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경치를 바라보시고 어떻게 느낄 것인가? 서울시를 바라보실 때는 어떻게 느낄 것인가? 그 역사, 그 세계가 그렇다면 거기에 반드시 관계를 맺고 들어온다구요. 이러한 문제 등등을 중심삼아 가지고 언제나 여러분이 하늘이 주체라는 것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지 않고는 체휼적인 신앙권내에 못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천리라는 것은 순서를 올바로 지키는 데서 성립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체와 대상 관계에서, 하늘은 절대적인 주체다 하는 입장에 서야 합니다. 그 주체를 무시하는 사람은 대상이 못 됩니다. 나는 절대적인 주체 앞에 절대적인 대상이 되려니 절대적으로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은, 가정에 들어가 사랑하는 것까지도 전부 대상과 주체 입장에 서 가지고 하늘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일체가 그런 것입니다. 그런 가정은 망하지 않습니다.
주체와 대상이 잘 주고 잘 받으면 무엇이 벌어진다구요? 벌어지긴 벌어지는데 잘 주고 잘 받았느냐, 잘못 받았느냐 하는 비례에 따라 가지고 결과가 벌어지는 거라구요. 그래서 통일교회에서 내가 축복해 준 축복가 정들 대해 가지고 '너희들의 생김새는 마음대로 생겼지만 너희들의 심성 여하에 따라 가지고 하늘의 복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생겨나느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부모에게서 태어난 자식이 있다면 그 자식을 봐 가지고 부모를 알 수 있습니다. 얼마만큼 신앙에 관심을 가져 가지고 하늘이 여기에 동조할 수 있고 하늘이 같이 동요할 수 있는 환경적 여건을 지녀 왔느냐 하는 것이 자기 아들딸을 통해서 증거될 것입니다. 무서운 놀음 입니다. 무서운 놀음이라구요.
자, 여러분, 하나님에 대한 체휼이 필요하지요?하고 싶지요? 그래서 자기 혼자 나서지 말라는 것입니다. 무슨 문제를 대하게 될 때…. 선생님이 어릴 때 수양하는 하나의 표제가 그거였습니다. 모든 일은 문의와 더불어 결정해라, 하늘과 더불어 문의해 가지고 결정하라는 것입니다. 만사를 문의하고 결정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절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편지를 쓰더라도 이것이 주체와 대상 관계에 어긋나지 않는 입장에 서 가지고 써야 합니다. 우리 통일교회 교인들, 더욱이나 처녀 총각들은 그래야 됩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 그저 이 험악한 세상의 풍조에 따라 가지고 돼먹지 않은 패들이 있다는 거라구요. 편지 한 장이라도 마음 대로 못 쓰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그런 생활을 해보라요. 자기 생각 같아서는 오늘은 안 될것 같고 좋지 않은 것 같은데 난데없는 일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잘 가려 가지고 여러분의 생활의 궤도로 삼고 살아야 합니다. 나는 어떠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요. 벌써 안다구요. 이렇게도 살아 보았고 저렇게도 살아 보았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이 지방 순회를 가게 될 때는 말입니다. 여기서는 어디로 갈 것이라고 얘기해 놓고는, 전화를 하고는 난데없이 딴 데로 가 버린다구요. 그것은 전파나 마찬가지라고요. 유도탄과 마찬가지라고요. 유도탄은 끌어 들일 수 있는 무슨 쇠덩이만 있으면 끌려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런 작용이 벌어진다구요. 그렇기 때문에 천국에 보내 달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천국에 가고 안 가는 것은 통일교회 문선생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구요. 알겠어요? 가고 안 가는 것은 누구에게 달려 있다구요? 여러분에게 달려 있다구요.
체휼신앙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요건이 뭐냐? 주체와 대상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주체다' 하면서,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내가 심각하면 심각할수록 하나님은 내 일을 망각할 수 없다. 방관할 수없다. 여기에 같이 계신다 하는 것을 느껴야 됩니다. 그러므로 기도에 앞서 가지고 감사할 수 있는 생활형태가 벌어지게 될 때, 거기는 하늘이 같이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맨 처음엔 느껴지지 않지만 어느 단계에 들어서면 느껴지게 되는 것입니다.
겨울과 봄날을 중심삼고 본다면, 겨울과 봄이 언제 바꿔어졌는지 알아요? 겨울이 끝나면 봄이 시작되는데 언제까지 겨울이고 언제부터 봄이다 하는 것을 아는 사람이 있어요? 그걸 느끼는 사람이 있어요? 마찬가지입니다. 언제가 경계선인지 모르기 때문에 언제나 '이렇게 되는 것이다. 틀림없이 겨울이 지나가면 봄이 오는 것이다' 하고 알고 있을 뿐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여러분도 '틀림없이 이렇게 되는 것이다' 하고 알고 있어야 됩니다. 알고 있어야 '아, 그렇게 됐다' 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면 내가 어느 단계에 들어왔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주체와 대상 관계를 생활적인 면에서 철저화 시키라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교회에서 '이렇게 하자, 나라를 위해서 하자' 하게 될 때, 나라를 위해서 하자는 것은 뭐냐? 그 말은 하늘이 나라에 역사하는 데 동참하자는 말입니다. 알겠어요?
우리 나라에 제3해방이 필요한 이때에 있어서 나라를 해방시키기 위한 하늘의 소원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소원도 그것이 아니예요? 우리의 소원이지요? 주체인 하늘도 그 소원을 갖고 있고 내 소원도 그러니만큼 이것을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나라를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해방되게 하기 위해서는 별의별 놀음이라도 해야 된다구요. 생명을 바쳐야 된다면 생명이라도 바쳐야 되는 것입니다. 이런데도 불구하고 '주체는 주체지만 나는 달라' 하는 요것들은 사탄들이라구요. 어디 그렇게 가보라구요. 통일교회 문선생의 말이 맞는 한 그래 가지고는 멀지 않은 것입니다. 두고 보라구요.
여러분, 통일교회에 회사가 있으면 회사에서도 그렇다구요. 회사의 책임진 사람들이 뜻을 위해서 충성을 다하고도 부족함을 느껴야 할 텐데도 불구하고, 교회 사업체에도 발을 들여 놓고 자기 사업도 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말로를 두고 보라구요. 잘되는 녀석이 있으면 내 손가락을 잘라 버리라구요. 그렇게 해서 잘될 것 같으면 통일교회 문선생이 벌써 했다구요. 두 다리 걸쳐 가지고 되나 보라구요. 이 다음에 자기 자식들의 다리가 찢겨지게 된다구요. 그것은 자기에서부터 나타나는 것입니다. 몽땅 다해도 부족한데 그걸 갈라 곁다리 짓을 하고 있어요? 그런 일을 내가 보고도 말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가만히 두고 보는 거라구요. 테스트 케이스라고요. '이렇게 되는 것이다' 하고 알아들을 만큼 얘기를 해주고 두고 보는 것입니다. 그 공법은 지금까지 내가 신앙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틀림없더라는 것입니다. 나중에는 벗어날래야 벗어날 수 없고 헤어날래야 헤어날 수 없는 불쌍한 처지에서 손을 들어 가지고 다시 구원해 달라고 하늘에 호소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것이 자기 위신 이상 저끄러졌을 때는 하늘은 구원의 손을 펼 수 없는 것입니다. 무서운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통일교회 문선생은 그걸 알기 때문에 그저 몰리고 쫓기더라도 이 길을 가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기성교회라든가 세상으로부터 수많은 핍박을 받아 왔기 때문에 한이 많은 사람입니다. 세상으로 말하게 된다면 뭐 선생님의 성격이 원만한 성격이 아니예요. 한번 한다 하게 되면 다리가 부러지든 골통이 깨어지든 하는 거라구요. 지극히 권위의식이 강한 사람이라구요. 자기 체면이 강한 사람이라구요. 위신에 손실되는 일은 아무리 죽인다 해도 못 하는 것입니다. 그런 성격이 있다구요.
우리 애들을 봐도 그렇다구요. 한번 고집 세우게 되면 의례히 아버지가 책망할 줄 알면서도 토라져 가지고 버티고 있는 것을 볼 때 '야! 어쩌면 저렇게 닮나' 하는 생각이 든다구요. 닮았다구요. 그렇지만 이치에 타당하게 될 때는 어느새 그랬느냐는 식으로 획 돌아간다구요. 선생님에게 그런 성격이 있다구요. 이치에 맞게 될 때는 권위고 위신이고 없다구요. 거기는 언제 그랬던고 하고 수평으로 돌아갑니다. 그런 무엇이 있다구요. 지금까지 그러한 입장에 서 가지고…. 내가 별의별…. 원수로 여긴 다면 용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어렸을 때는 우리 동네에서 그래도 체격도 그만하고 날쌨다구요. 지금은 뚱뚱하지만 어릴 때는 우물우물하는 굼벵이와는 달랐다구요. 내 자랑이 아니라, 사실이 그랬기 때문에 얘기하는 거예요. 내가 있는 동네에서는 말이예요. 동네 10리 안팎에서는 나하고 씨름해서 이긴 녀석이 하나도 없었다구요. 그런데 한 녀석이 나타났습니다. 아, 이 녀석은 나이가 나보다 세살 위에다가 키도 나보다 컸습니다. 이 녀석을 때려 눕혀야 할 텐데 이거 힘으로 보나 나이로 보나 안 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한번 씨름을 했는데 졌다구요. 세 번 해 가지고 두 번 졌다구요. 그래도 그건 진 것이라구요. 그 다음부터는 밥도 안 먹고 밤이고 낮이고 없다구요.
그래, 우리 뜰 아래 아카시아 나무가 있었는데…. 아카시아 나무가 참 질깁니다. 여러분 중에 시골서 자란 사람은 알겠지만, 그 아카시아 나무의 껍데기를 봄철에 쭉 벗겨 놓으면 휘청휘청하는 것이 꺾으면 안 꺾어 집니다. 이렇게 굵은 아카시아 나무는 맨 처음엔 휠래야 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껍데기를 벗겨 가지고 매일 씨름이라구요. 밤새도록…. 이래 가지고 석달 이내에 그놈을 때려 잡았습니다. 그러고야 잠을 잤습니다. 그런 성격이라구요. 그걸 보면 하나님도 계산을 잘했다고 봅니다. 그런 지독한 패를 잡아 세웠기 때문에 지금까지 싸워 나오는 것입니다. 통일교회 문선생은 질기다고요. 가죽처럼 질기다면 아주 질기고 악착같다면 아주 악착같다구요.
그래서 왜정 때부터 왜놈들파 싸워 나온 것입니다. '쳐라! 이 자식아, 내가 정의를 중심삼고 선서하고 맹세했던 내 입으로 불어? 쳐라 이 자식아' 하는 거예요. 그때에 한 형사가 있었는데, 아주 뭐 서울에서 이름난 녀석으로 자기 손에 들어가면 굴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 하는 형사였습니다. 그래도 선생님은 '쳐라 이 자식아! 네가 뭐하는 녀석이냐?나는 보통 녀석들과 다르다. 이 녀석아, 책상다리가 네 개씩 꺾여져 달아나도 끄덕없다. 쳐라 이 자식아' 하는 거예요. 선생님의 생각은 다르다는 거라구요. '내가 정의의 입장에서 싸우는 이 고역의 7배 이상을 너희들 후손 대해 가지고 세계의 악을 대해 칠 수 있는 좋은 재료를 수습하게 되니까, 쳐라 이 자식아' 했던 것입니다. 생각이 다르다는 거예요. 그런 놀음을 해 나왔다구요.
대한민국도 지금 그렇다구요. 통일교회에 대해 반대하라는 것입니다. 통일교회 문선생이라는 사람이 뭐 반대한다고 후퇴할 사람이 아닙니다. 앞으로는 그렇다는 거예요. 통일교회를 믿든가, 도망을 가든가, 죽든가, 세 가지 중의 하나를 해야 된다구요. 아직까지 때가 안 돼서 그렇지만 그때를 내가 만들고 있다구요. 이런 싸움을 지금까지 해 나왔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내 명령이면 무슨 짓이든지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다구요. 복수를 하려면 당장에 복수할 수 있다구요. 그렇지만 신앙의 길은 복수로써 통하지 않습니다. 맞고 빼앗아 나오는 작전이기 때문에 그저….기성교회가 왜 저렇게 됐느냐? 통일교회를 치다가 저렇게 됐습니다. 목사들이 왜 밥목사 됐느냐? 통일교회 문선생 반대하다가 그렇게 됐다구요. 통일교회는 맞지만 망하지 않습니다. 치면 칠수록 치는 그 매, 채찍을 통해서 그들의 복이 전부 흘러 나온다는 것입니다. 배상금이 자꾸 가중되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여러분들과 나를 비교해 볼 때, 여러분은 입을 벌려야 되고 나는…. 경주할 때 과자 달아 놓고 하는 경주가 있지요?딱 그 격이라구요. 나는 과자 만들어서 달아 가지고 이래야 됩니다. (행동으로 표현하심) 내가 들면 고개를 들어야 되고 내가 낮추면 고개를 낮추어야 되는 이런 때가 불원한 장래에 올 것입니다. 거기에 필요한 돈은 하나님이 문선생한테 안 갖다 주면 안 된다 하는 것이 선생님의 신념입니다.
내가 필요하다고 할 때는 선생님의 생각이 공중에 올라가는 거예요. 그러면 그 일은 되는 거라구요. 아무리 여러분들이 뭐 중구난방으로 떠든다 하더라도 '그건 되는 것이다' 하면 되는 거라구요.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과는 좀 다르다구요. 그러니까 잔소리들 말라구요. 선생님 말씀 들어 가지고 손해 안 본다 그 말이라구요. 알겠어요?무슨 말인지 알겠어 요? 「예」
끝까지 가지 못하면 손해입니다. 이건 아침부터 왜 잠자리를 까느냐 이것입니다. 안 그래요? 도적놈들이 안방에 박혀 있는데 거기서 잠자리 깔고 사랑하는 '사람 기다려요? 그것은 망할 짓입니다. 자기 사랑하는 남편을 원수의 칼침에 맞게 할 여자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도적한테 빼앗기는 사람이라는 거예요. 알겠어요? 볼장 다 보고 나서 지치고 떨어져 가지고 늘어진 후에 살짝 딴 방에 가 가지고 자기 사랑하는 사람 만나려고 하는 것이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한다구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세상이야 떠들든 말든, 떠들다 지쳐서 떨어지는 거라구요. 이제는 통일교회 반대하다 다 지쳐서 떨어져 있다구요. 뭐 신문에 떠들겠으면 떠들고 반대하겠으면 하라는 것입니다. 뭐 암만 했댔자 통일교회 문선생은 끄떡없다구요. 신문기자들도 뭐 내 한번 만나 보지 않았다구요. 이번에 김포공항에 도착할 때도 좀 만나자고 했지만 만나긴 뭘 만나요. 만날 시간이 없다고 하면, 아, 그러냐고 합니다. 그게 전통이 돼 있다구요.
자, 그러한 입장에서 나오지만, 내가 악착같다면 악착같고 원수를 대하여 복수하려면 누구보다도 무서운 복수를 했을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이렇게 못난이 놀음을 할 수 있어요?욕을 먹고도 가만히 있고, 별의별 천대를 받고도 가만히 있고…. 요즘도 그렇다구요. 지금 우리 통일교회가 쓰는 경비는 통일교회를 위해서만 쓰지 않는다구요. 뭐 무슨 대학교수를 일본에서 초청해 오느니 하는 데…. 전부 나라를 위해서 쓰는 것입니다. 앞으로는 국회의원들까지도 그런 놀음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왜? 자민당 국회의원들 모아 가지고 아시아의 국회의원들을 규합하기 위해서는 그 놀음 먼저 해야 될 것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나라가 못 하는 것을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이 나라를 위한 충의 길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요즘에 와서는 일본 정부에서 우리 통일교회에 대해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대하고 있어요. 지금부터 10여년 전에 선생님이 밀선에 태워 가지고 선교사를 보냈다구요. 대한민국 법치국가에 소속한 하나의 국민의 입장에 서 가지고 법을 어겨 가면서 그런 놀음을 시킨 거라구요. 왜 그러느냐?법이 문제가 아니라구요. 국가 운명은 법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천운이라는 것은 인간들이 제정한 헌법을 넘어선 자리에서 찾아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천운을 알기 때문에, 거기에 대비할 수 있는 놀음을 하려니 항상 죽음이 엇갈리고 고통이 엇갈리고 핍박이 엇갈리는 것이 아니예요?따라 가려면 무슨 핍박이 없겠느냐는 겁니다. 남 좋은 대로 한다면 무슨 핍박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때는 상충이라구요. 가로막을 때는 가로막는 거라구요. 그래 통일교회 교인들은 이런 길을 가는 거라구요.
통일교회의 어떤 녀석들은 '아, 통일교회 말씀은 좋은데 힘들어서 못가겠다' 합니다. 그런 녀석들은 오지 말라구요. 오면 정면으로 풋볼을 차버리듯 차 버리고 싶은 것이 선생님의 마음이라구요. 그런 사람은 나라를 이용해 먹을 녀석이요. 통일교회를 이용해 먹을 녀석이라구요. 그런 패는 오지 말라구요. 그런 사람들이 통일교회 오지 않더라도 조금만 지나 보라구요. 사람 사태가 난다구요. 그런 패들이 거지떼같이 오지 않아도 한마디 말만 하면 천리를 향해 달릴 수 있는, 천리마 노릇을 할 수있는 사람들이 무진장 온다는 것입니다. 내가 혼자 남더라도 그렇게 될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러고 있는 거라구요. 여러분도 그렇다는 거예요. 여기 남아 있는 여러분들도…. 여러분 자신으로서 모든 것을 충당할 수 있는 사명을 감당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건 잘못이라구요. 그런 의미에서는 아직까지 선생님을 따라가야 하는 거라구요.
그런 수난길을 극복해 나온 것은 무엇 때문이냐? 대한민국이 하늘 앞에 진 빛이 큰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늘은 망해 쓰러질 이 민족인 데도 불구하고 수천년 동안 그 운세를 고이 간직했다가 이 민족에게 주기 위하여 찾아온 것이 아니냐? 그것을 이어받기 위해서 수천년 역사시대의 수난길에서 이슬같이 사라진 많은 애혼들이 있지 않느냐?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동정해 줄 수 있는 행군의 대열을 갖추어 가지고 그들이 환송할 수 있는 승리적 결과를 갖추게 될 때에 천지가 기뻐할 수 있는 한날이 있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 한쪽은 고생하고 한쪽은 그냥 그대로 아무 보수도 아무 공도 없는데 그냥 갖다 주면 하늘이 참소받는 것입니다. 그럴 수는 없기에 끝까지 여러분들을 고생시켜 나가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어디 몇 명이나 남는가 보자 이거예요. 젊은 사람들은 다 흘러가 버리는 겁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아니더라도 하늘의 뜻을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 영계가 동원될 것입니다. 지금 영계가 동원되고 있다고요. 이런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역사를 창건하는 사람들입니다. 시대를 혁신하는 사람들입니다. 미래의 보증자가 되어야 됩니다. 현실의 신념의 확증자가 되어야 됩니다. 실천의 주체성을 갖추어 가지고 민족 앞에, 세계 앞에 당당히 나서야 할 무리가 우리들이 아니었더냐? 그런데도 불구하고 누더기 보따리를 들고 허위적거리면서 가는 이런 것들을 보게 되면 에이-. 그래서 이젠 내가 말도 하고 싶지 않다구요.
앞으로는 선생님이 여러분을 자주 안 만나 줄 거라고요. 내가 할 책임은 다했습니다. 여러분에게 할 책임을 다했다구요. 어느 면으로 보더라도 내 책임은 다했다구요. 그래서, 이제 그런 때가 다가온 동시에 여러분들이 알아야 할 것은 하늘에 대한 체휼을 다시 한 번 재현시켜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는 여러분이 세계적으로 갈 수 있는 길은 없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럼 이것을 어디서부터 출발하느냐? '나는 절대적인 주체인 하늘을 위해 있는 것이다. 내 감정 일체, 내 존재의식 전체가 그로 말미암지 않고는 있을 수 없다'는 신념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하신 예수님도 그 기준을 중심삼고 가신 분이 아니예요? 여러분들의 뜻 가지고는 안 통한다구요.
어떤 사람들은 볼 때, '통일교회 들어가서 그저, 적당히 하지 적당히….' 그건 사기꾼들이라구요. 적당히 가도 된다면, 통일교회 문선생이 적당히 갔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이번에 3차 세계노정에 있어서도 심각했다구요. 따라다니는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나는 심각했다구요. '하나님, 역사시대에 당신이 선봉에 서야 할 텐데, 동양에 불쌍한 한민족을 대표한 한 사나이가 선두에 섰습니다'. 그건 역사적인 순간이라구요.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모르지만 그러한 시점을 중심삼아 가지고 국가의 운세라든가 세계의 운세는 하나의 정상의 고개를 넘어 가지고 새로운 방향을 갖추어서 하늘이 갈 길을 가려 주는 것입니다. 그건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신앙길에 있어서는 그러한 생활이 연속되는 거라구요.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게 될 때에 선두에 선 모세가 얼마나 심각했겠느냐?자기가 한 발자국 잘못하면 60만 대군이 쓰러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심각한 자리라구요. 통일교회 문선생이라는 사람도 몸은 하나지만, 가야할 공적인 길을 가려가야 할 이런 대표적인 자리에 섰다 할진대는 한 발자국이 무서운 것입니다. 자나깨나 그것을 위해서…. 그렇기 때문에 역사는 그런 면을 통해서 수습되어진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얼마나 여러분이 긴장해 봤느냐? 얼마나 나라를 사랑해 보았느냐? 얼마나 세계를 위해 봤느냐는 것입니다. 자, 보따리 헤쳐 놓고 알아보자구요. 요즈음에 와서 느껴지는 것은 한국에 있는 통일교회 교인들에 대해서 자꾸 마음이 날아간다구요. 지나간다구요. 이건 좋지 않은 현상입니다.
선생님은 무심한 사람이 아니라구요. 자기 이익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아니라구요. 이랬다가는 대한민국의 운세가 좋지 않기 때문에 내가 피눈 물을 흘리는 한이 있더라도, 보따리를 싸 가지고 뒤넘이치더라도 이걸 붙안고 최후의 결판을 봐야 할 인연이 여기에 남아 있을 텐데…. 그런 인연이 희박해져 가지고 하늘은 자꾸 넘어가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심상치 않은 징조입니다.
여러분들, 여기 간부들 각성해야 되겠다구요. 여러분이 밥을 먹고 사는 그 자리가 무서운 자리라구요. 여러분의 아들딸들이 책보를 들고 드나드는 것을 볼 때 무서운 자리라구요. 빚을 지고 있느냐, 빚을 지우고 있느냐 하는 것을 언제나 올바로 깨달아야 됩니다. 빚을 지는 자리는 동정하지 않는다구요. 동정을 안 해주는 것입니다. 빚을 지우는 자리를 동정하는 것입니다.
통일산업이나 무슨 회사나 전부 다 마찬가지입니다. 한푼의 돈이라는 것은 무서운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그가 '단체가 이만하면 차가 필요한데, 아무개 차를 사 주소' 할 때, '오냐, 사 주지, 그렇지' 했습니다. 차 타고 다니는 것이 자랑이예요?차 타고 다니는 것이 뭐냐?차타고 다니는 것이 좋을는지 모르지만 그 이면에 드는 경비는 어디서 나오느냐? 거기에 비례하는 자기의 심적 태도가 문제라고요. 빚지는 자리가 아니냐는 겁니다. 빚을 지는 자리이니까 문제라구요. 빚지는 자리에서는 하늘도 동정하지 않는다구요.
그래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렇다구요. 자기에 대해서는 생각을 안 한다구요. 여기 어머니도 잘 알지만 내가 양복이 어떻게 됐다고 뭐 주름이 어떻게 됐다고 이걸 바로잡겠다고 이러는 사람이 아니라구요. 충신은 옷 잘 입었다고 충신이 되는 것이 아니요. 잘산다고 충신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옷 잘 입었다고 효자가 아닙니다. 차라리 못 입고 못 먹고 하는 데서 역사가 움직일 수 없는 심정의 방어선이 설정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필요하다구요.
여러분이 요즈음에 활동할 때는 대번에 '본부에서 도와줘야지' 하는데, 이 사상은 거지사상이라구요. 빚지는 사상이라구요. 그래서 선생님 자신은 지금까지 일생 동안 빚지려고 하지 않았다구요. 내가 은덕을 입었으면 갚아야지, 그것을 갚지 않고는 밥을 못 먹는 사람이라구요. 신세를 지려고 태어난 사람이 아니라고요. 여러분도 이런 생활을 철저히 해야 됩니다. 그것은 왜?그 집안의 위신이 서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위신이 서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하늘의 전통의 위신이 서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을 위하고 주체를 위하는 마음이 사무치게 될 때는, 그 주체가 현실적으로 나타날 수 없는 주체이기 때문에 그것을 상대적인 세계에서 이렇게 해야 될 것이 틀림없는 것입니다. 이게 신앙생활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어디 가든지 환영받는 거라구요. 손해를 입히는 사람은 어디 가든지 배척받고 이익을 끼치는 사람은 환영받는다구요.
그래, 통일교회가 지금까지 그렇다구요. 그렇게 못된 통일교회인 줄 알고 세상을 망치는 통일교회인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다고 하는 입장에 들어갔습니다. 왜냐? 세상에 대해서 우리가 손해를 입힌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제반 문제, 주체와 대상 관계의 정상적인 실현 여하를 어떻게 적응시키느냐 하는 문제를 중심삼아 가지고 여러분들이 노력해야 되겠습니다. 그러지 않고는 체휼이라는 것은 안 오는 거예요.
글을 쓰더라도 혼자서 그냥 쓰는 것보다도 '이 글은 누구를 위해서 쓴다. 사랑하는 하늘 아버님을 위해서 쓴다. 사랑하는 식구들을 위해서 쓴다' 할 때에 얼마나 의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미래의 나라의 뒷받침을 위해서 내가 글을 쓰는 것이 아니냐? 내가 밤을 새우면서 일을 하더라도 그날 아침을 내가 깨서 맞기 위한 소원의 마음을 가졌던 것이며, 오늘 이 시간 이 저녁에 밤을 새움으로 말미암아 소원성취할 수 있는 한 순간, 내가 조건이라도 세울 수 있는 한날이 되지 않느냐'고 생각할 때, 밤을 새우는 날이 피곤한 날이 아니라 소망을 촉구시킬 수 있는 자극적인 시간으로서 맞아들일 수 있다고요.
그렇게 될 때 하나님도 사람과 마찬가지라구요. 하나님이 진짜 그렇다면 말이요. 하나님을 위해 공적인 입장에 서 가지고 피곤해서 쓰러지는 사람이 있다면 하늘이 그걸 모른다고 하겠어요? 그렇기 때문에 효자는 부모를 울리는 것이요. 충신은 군왕을 울리는 것입니다. 열녀는 남편을 울리는 것입니다. 힘으로 힘을 내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난날을 바라볼 때에, 자동적으로 완전히 포위되어 가지고 자기의 모든 사연을 직고할 수 있는 능동적인 힘을 가진 것이 효의 길이요. 충의 길이 아니었더냐? 여러분이 이걸 알아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는 효자를 보고는 숨은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천 가지를 주고도 부족한 것을 느끼고, 주면서도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이 부모의 마음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주고 자랑하는 마음이 아니라 주고도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 부모의 마음을 알아야 돼요. 그 마음 앞에는 무엇이든지 안줄 수 없는 분이기 때문에 다 주고 나서도 자랑 못 하고 더 주고 싶어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인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런 부모를 주체로 모시게 된다면 그는 불행한 사람이 아니라구요.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생활면에서 아버님을, 하늘을 눈물짓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일대에 있어서 하늘이 나와 더불어 통곡한 사실이 있다 할 때, 그런 사람은 망하지 않습니다. 효자를 앞에 놓고 효자 때문에 눈물 흘리는 부모는 불행한 부모가 아니예요. 행복한 부모입니다. 그 눈물은 슬픔의 눈물이 아니라 소망의 눈물이요. 희열의 눈물이요. 감사의 눈물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복귀노정에 있어서 눈물지어 나왔던 하늘 앞에 그럴 수 있는 아들의 모습을 가지고, 그럴 수 있는 충신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다면, 그 이상의 영광이 어디 있겠느냐? 이것을 바라보고 직선적인 노정을 추구해 가자 하는 것이 오늘날 통일교회의 전통적 사상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어요.
여러분, 지금 그렇지 않아요? 현재 우리 나라가 위급한 입장에 있습니다. 금후의 대한민국이 어떻게 될 것이냐?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구요. 요즈음에 선생님이 생각하는 것은 이 나라를 위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 나라를 위해서 눈물을 많이 흘렸다구요. 어떤 애국자에 못지 않게 피눈물을 흘려 왔다구요. '아버지, 내가 일해 나오던 이 나라를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고…. 보라구요. 지금 삼면이 딱 포위되어 있다구요. 그런 입장에서 영감으로 오는 대답이 뭐냐 하면, '네가 해야 될 게 아니냐,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이 책임져야 할 것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이번에 세계를 순방하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엉망진창이 되어 가지고 걸레 짜박지같이 된 세계 정상을 바라보면서 '아버지, 이 세계를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하니, '아는 자가 해야 될 것이 아니냐'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통일교회 사상으로 볼 때 나라를 위하는 것이 충의 길이냐, 세계를 위하는 것이 충의 길이냐? 하늘을 중심삼고 볼 때 하늘은 만국의 대왕이 아니시냐? 세계를 위하는 것이 충의 길이라는 거예요. 그러므로 비참하고 불쌍한 대한민국에 있는 통일교회 교인들을 희생시키더 라도 세계를 살리기 위해 깃발을 들고 나서야 될 것이 아니겠어요? 그것이 선생님의 생각입니다.
그러면 대한민국에 대해서 내가 책임 다했느냐? 요즘에는 그것을 생각 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에 대해서 나로서 할 책임을 다했느냐? 지금 두 가지 못 했습니다. 그건 여러분에게 말하지 않겠어요. 두 가지 못했다구요. 그건 간단한 문제입니다. 하루에 끝날 문제입니다. 그 외에는 내가 책임을 다했습니다. 민족을 통해 보더라도 나는 부끄럽지 않다는 거예요. 어떠한 충신 열사들을 대해 보더라도 나는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하늘 대해서도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또한 그대가 가는 길에 대해서는 틀림없이 그렇다 하는 하늘의 공증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건 뭐 미스터 문 개인의 결정이 아니라구요.
그러면 세계를 위해서 볼 때는?이제부터 출발이라구요. 이제부터 세계의 대열에서 행보를 갖출 수 있는 통일교회 무리가 이 국내에는 얼마나 될 것이냐? 이걸 볼 때에, 새끼들을 생각하고 다른 걸 생각하는 사람들은 다 후진(後進)밖에 못 될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국가적으로 신에 대한 체휼을 하고 새로운 자각을 해서 세계를 새로이 각성시킬 수 있는 운동을 하기 위한 것이 통일교회가 수난길을 극복해 나온 노정이 아니었느냐? 그렇기 때문에 지금에 와서는 여러분들이 지쳐 가지고 '하늘이 언제 나와 더불어 있었더냐' 하는 식으로 얼굴을 보게 되면 다 수심이 가득 찼다구요. 다시 무슨 큰일을 하자고 할 것 같으면 이게 전부 다….
일은 이제부터입니다. 이제부터라고요. 신에 대한 체휼과 우리의 자각이라는 것은 때가 가까와 오면 가까와 올수록 작아지는 것이 아니라 커집니다. 그렇게 되면 하는 일이 간단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 어렵고 더 복잡해집니다. 여러분, 공장도 정밀하고 큰 기계를 만드는 공장은 가다리 (가닥)가 많아서 복잡합니다. 단순하지 않습니다. 단순하기를 바라는 것은 어리석은 판단이라구요. 우리 통일교회가 하는 것이 많다구요.
그러니만큼 자기가 처한 부서에서 새로운 자각권(自覺圈)을 확대시켜 가지고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하늘이 보증할 수 있는 사람들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아니면 안 된다는 자각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아니면 안 된다는 자각을 가진 그 사람으로서, 자기만의 자각이 아니라 하늘을 주체로 모신 입장에서 자각을 해 가지고 체휼적인 환경권과 생활권과 시대 적인 권한을 갖추어야 됩니다. 그리하여 여러분들이 새로운 목적의식에 불타 나가는 데 있어서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지는 것을 여러분이 명심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은 내가 없으면 안 된다는 이런 자각보다도 그러한 체휼의 환경을 여러분이 갖추지 않으면 안 됩니다. 체휼해야 됩니다. 느껴야 된다구요. 내가 안 하면 이렇게 된다는 것을 느껴야 됩니다. 그러려면 먼 자리에 있어서는 안 돼요. 언제나 주체와 대상 관계에서 접해 가지고, 보고 듣고 먹고 자고 하는 일체의 생활은 나 혼자 하지 않고 주체와 더불어 주체의 목적을 위해서 하는 것이다 하는 것을 표면화시켜 가지고 느껴야 됩니다.
이러한 것을 느끼는 자리에서, 하늘이 같이하는 자리에서 새로운 자각을 해 가지고 세계로 나서게 될 때, 비로소 거기서 하늘의 뜻은 이루어진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기를 바라서 말씀드렸습니다.
아버님, 불쌍한 통일교회라고 생각하게 될 때에는, 통일교회의 주체 되시는 당신은 더더욱 불쌍하신 분인 것을 느끼게 되옵니다.
아버지, 철모르던 그 시절에 당신이 찾아와 사명을 분부하시던 그날부터, 엇갈린 인생행로에서 때로는 동쪽으로, 때로는, 서쪽으로, 남쪽으로, 북쪽으로 밀려다니던 그런 입장을 바라보시던 당신의 마음이 얼마나 분통하셨는가를 잘 아는 아들은 여기 있습니다.
오늘까지 죽지 않고 남아지게 하신 은덕을 감사드립니다. 수난노정에 있어서 하늘 대해서 원망할 수 있는 역사를 갖지 않은 것이, 오늘날 하늘 앞에 남아질 수 있는 동기가 된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 지금까지 싸워 왔지만, 이제 또 가야 되겠습니다. 갈 길이 아직까지 남아 있습니다. 지금까지 천대받고 왔지만 민족을 넘어 세계 앞에 맺힌 하늘의 원한을 풀기 위해 가야 할 길이 있기 때문에 또 가야 되겠습니다.
아버지, 불쌍한 대한민국을 그래도 망하지 않는 자리에 둔 것은 이 민족이 잘나서 그런 것이 아니라, 남모르는 가운데 눈물을 흘리고 몸부림을 치고 피어린 투쟁의 행각의 노정을 당신과 더불어 싸워 나온 무리들이 있기 때문인 줄 아옵니다. 그러한 무리들이 있기 때문에 오늘날 이 민족이 남아진 것을 그 누구도 모르지만 저희들은 진실로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은 6.25날이옵니다. 이날을 맞이함으로 말미암아 제가 느꼈고 아버지 앞에 결의한 그것이 다시 새삼스럽게 생각되옵니다. 삼팔선을 넘으면서 한 발은 북쪽에 한 발은 남쪽에 놓고 아버지 앞에 기도한 것을 저는 아직까지 잊을 수가 없사옵니다. 제가 맹세한 것은 기필코 성사해야 될 것이고, 당신에게는 이것을 이루게 하여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밤이나 낮이나, 불철주야 이 목적을 향해서, 지름길을 가리기 위해 지금까지 생애를 바쳐 투쟁해 왔사옵니다.
아버지, 이제 당신 앞에는 슬픔의 길을 거쳐갈 수 있는 때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당신이 모아 놓은 무리들은 비록 남루한 옷을 입었고 모습은 초라하더라도 그 마음으로는 당신만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당신을 위하여 생명과 재산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는 여력을 가진 무리가 몇 명이라도 있는 것을 제가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 그들을 불쌍히 보시옵소서, 그들을 봐서 이 나라 이 민족을 용서하여 주옵길 간절히 바라옵니다.
세계에 널려 있는 30억의 인류를 위하여 아버지께서는 얼마나 수고해 오셨습니까? 이 인류를 지킬 분이 누구며, 그 밤을 지킬 수 있는 파수꾼이 누구이옵니까? 아버지밖에 없사옵니다. 오늘날 통일교회는 세계를 대표할 수 있는 파수꾼을 길러 내야 할 사명을 짊어졌기 때문에, 세계를 향하여 몸부림치면서 지금까지 이 놀음을 해왔습니다.
이제, 수많은 민족의 기동대들이 아버지 앞에 나섰사옵니다. 이들은 그나라와 그 민족을 대신한 파수꾼들이오니, 아버지께서 지키시사 살아 계신 하늘을 증거해 주셔야 되겠습니다. 아버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당신의 영광의 존전에 자기 전체를 바치어 출동하는 그 행렬을, 아버지, 지키시옵소서, 당신을 위하여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당신을 위하여 희생하고자 하는 터전은 영광의 승리가 거쳐왔던 것을 잘 알고 있는 그들이옵니다. 아버지, 그들에게 갈 길을 똑똑히 지시하시어 그 길 앞에 충효의 도리를 다짐하는 그들이 되게 하여 주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은 6.25의 날, 이 민족을 아버지께서 다시 한 번 기억하시옵소서, 채찍을 들어 치던 그날이 있으면, 눈물과 더불어 품을 수 있는 그날이 있기를 바라는 것이 자비의 주인공 되시는 당신의 마음이 아니었사옵니 까? 이 민족을 품어 주시옵소서. 한 많은 민족, 이 민족은 길거리에 무참 하게 쓰러져서는 안 될 민족이었지만, 뜻을 알지 못하는 자리에 있으므로 그런 운명을 거친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이제는 뜻을 알 수 있는 환경적 여건의 때가 왔사오니, 아버지여, 수많은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준비한 자들을 불러 모으시어서 최후의 결정적인 승리를 마감할 수 있게끔 역사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그리하여 민족적인 자각을 할 수 있는 이 민족이 되고 이 국민이 되게 하여 주시옵고, 남북이 갈라져 있는 이 처참상을 잘 아는 저희들이 되어 통일된 민족으로서 당신이 만방에 자랑할 수 있는 백성이 되고, 만국이 추앙할 수 있는 백성이 되게 하여 주옵길 간절히 바라옵고원하옵니다.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리는 모든 것이 헛것으로 돌아가지 말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오며, 금후의 세계의 행로는 당신이 원하시는 계획대로 이루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승리의 날, 자유의 날, 영광의 날, 당신의 자녀들은 환희 환송을 갖추어 가지고 만국의 승리를 축하하고, 당신은 이들을 내세워서 사랑하고 칭찬하지 않을 수 없는 기쁨의 그날이 어서 속히 오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나이다.
일선에 나가 있는 어린 딸들을 기억하여 주옵고 선두에 서 가지고 이시간도 싸우고 있는 철모르는 그들 위에 같이하여 주옵길 간절히 바라옵니다. 같은 운명의 줄을 붙들고 세계에 널려서 싸우고 있는 전체 통일의 역군들을 아버지께서 주도 주관하시어서 승리의 곳으로, 해방의 곳으로, 자유의 천국으로 이끄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오늘은 거룩한 날이었사오니, 이날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수많은 백성 위에 같은 영광이 깃들게 하여 주옵고, 수많은 종교에 있어서 그 이념을 가지고 죽음을 각오하고 희생하며 하늘을 추구하는 무리들 위에 당신이 무한하신 가호로 같이하시옵소서, 이 뜻을 위하여 희생의 대가를 치르고간 영계에 있는 수많은 영인들 위에 새로운 이날을 위하여 축복의 은사를 가중시켜 주시옵고, 지상에 탕감 해원의 뜻을 이루게끔 허락하여 주시는 날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 이 시간에 주신 말씀과 더불어 이날에 연상된 추억을 길이길이 그 마음 몸에 간직하여 생명의 기로로 삼을 수 있게끔, 아버지, 그 마음을 묶어 주시옵기를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님의 성호 받들어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