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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망의 분기점

일시: 1971.03.21 (일) 장소: 한국 전본부교회

[기 도]

사랑하는 아버님, 당신이 거하실 수 있는 나라가 이 땅에 어디 있으며, 당신이 거느릴 수 있는 민족이 이 인류 가운데 어디 있느냐고 묻게 될 때, 당신께선 아직까지 그러한 나라와 그러한 민족을 만나지도 못하고 거느리지도 못한 것을 저희들은 아옵니다.

나라가 있기 전에 먼저 민족이 있어야 되고, 민족이 있기 전에 종족이 있어야 된다는 것을, 종족을 편성하기 위해서는 가정이, 가정이 있기 위해서는 내 개인이 완성기준에 미달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원리를 통하여 알고 있습니다.

나라 없는 당신의 자녀들이 이 땅 위에 얼마나 있는가를 생각하게 될 때, 아버님을 대하여 아버지라 부르고 있는 사람은 땅 위에 많아도, 당신이 그리워하고 소망하는 그 나라와 백성을 찾기 위해서 자각을 하고, 애쓰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땅 위에 아버지의 나라가 없고 민족이 없고 씨족이 없고 가정이 없더라도, 그 나라를 대신하고 민족을 대신하고 씨족을 대신하고 가정을 대신할 수 있고, 당신의 마음속에 있는 모든 것을 대신 이어받을 수 있는 사랑하는 아들딸이 있다 하게 될 때에는, 그 수가 하나 둘 증가함에 따라, 당신이 소원하시는 나라는 아득한 꿈의 나라인 것 같지만 그런 아들 딸로 말미암아, 그런 개인이 연결됨으로써 당신의 마음 앞에는 소망의 나라가 시작되고, 소망의 민족과 소망의 생활적인 터전이 전개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영광의 자리에 설 수 있는 아들이 되고 딸이 되겠다고 이 시간 다시 한 번 다짐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는 수천 년의 역사과정을 거쳐 오시면서 어느 한날 사랑하는 자녀를 그리워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는 것을 알고, 그 자녀들을 영원무궁토록 당신의 영광의 나라의 백성으로 존속시키고 싶은 마음이 사랑하고 싶은 마음과 더불어 같이했다는 것을 저희들이 알게 될 때, 오늘날 보잘것없는 저희 자신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의 마음이 끊임없다는 것을 느끼게 되옵니다. 그런 것을 느낄수록 아버지께서는 이 몸과 이 마음을 통해서 그 나라와 그 백성을 찾고 계신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내가 아버지 앞에 목숨을 바친 것은 그 나라에 대한 충신의 도리를 다하기 위한 것이옵고, 소망의 백성을 편성하여 원수에게 농락받는 슬픔의 환경을 청산해 버리고 당신이 영광의 아버지로서 이 땅에 현현하실 수 있는 그날을 위하여 찾아온 것이오니, 이것을 실제로 느낄 줄 아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어야 되겠사옵니다. 그러하오니, 아버지, 여기에 모인 당신의 자녀들을 굽어 살피시옵소서.

이제 저희들은 저희 개체 개체의 마음이 어디에 처하여 있는가 하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당신이 이 자리에 찾아오실 때 찾아오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찾아오셨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무거운 마음을 갖고 찾아 오셨습니까? 저희의 부족한 것을 책하시고 내일의 소망을 다짐하게 하는 아버지의 발걸음이 이 자리에 머물러 주셔야 되겠사옵니다.

저희들은 선하지 않으면 악한 자리에 서는 것이요, 흥하는 무리가 되지 않으면 망하는 무리가 되는 것과 같은 그런 경계전에 처하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중간 입장에는 처할 수 없다는 것을 저희들이 알고 있사오니, 좌든지 우든지 결정하여 한 기준에 서서 스스로 전부를 정비하여 아버지의 뜻 앞에 바쳐 드리지 않으면 안 되는 자신임을 발견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무릎 꿇은 이 자리를 굽어살피시옵소서. 이 시간 이 자리에 참석한 스스로의 몸과 마음이 어디에 머물러 있는가를 알고, 하늘과 더불어 관계를 맺어 나오기까지 그 인연이 얼마나 비참한 사연 가운데 맺어져 있는가를 상기할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라 부르는 그 감정이 아버지와 나와의 관계에 어떠한 근거를 두고 느끼는 것인가를 다시 한 번 느껴야 되겠사옵니다. 아버지 것이 내 것이요, 아버지 일이 내 일이요, 아버지의 행함이 나의 행함이라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이 자리에 참석한 당신의 아들딸이 있거든, 아버지, 흠뻑 품으시어 사랑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그렇지 못한 마음을 가졌다면 그 마음을 제거시키시옵소서. 당신의 엄격하신 그 법을 통하여 스스로 다짐하고 스스로 아버지 앞에 회개할 수 있는 마음이 되게, 아버님, 이끌어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아침, 여기에 모인 당신의 자녀들이 바라고 나온 모든 소원은 당신을 향한 가없는 마음이요, 당신을 뵙기 위한 마음이옵니다. 그 일편단심의 마음을 가지고 나온 이 자리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 자리에 모인 소수의 무리를 아버지 앞에 묶어 바치오니 당신께서 이 전체를 품으시옵소서. 새로운 나라와 새로운 민족을 향하여 제 2차의 전진을 다짐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대견스러운 아들딸로서, 당신이 자랑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아들딸로서 세워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오늘은 거룩한 날이오니 여기에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전국에 널려 있는 자녀들이 이곳을 향하여 기도하고 있사오니, 그 곳곳마다 부디 당신의 사랑의 손길이 떠나지 마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금후의 이 나라와 이 민족을 지켜 주시옵소서. 사방에 에워싸여있는 원수들의 움직임을 바라보는 저희들은 외로운 고아와 같은 입장이지만 겸손히 흰옷을 입고 아버지 앞에 회개해야 되겠습니다. 선조들이 하늘 앞에 지은 죄상을 저희들이 대신 회개하여, 현재 이 나라 이 민족의 불쌍함을 저희들이 책임지고, 아버지 앞에서 소망을 세워 갈 줄 아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어야 되겠사오니, 이 나라를 지켜 주시옵시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무리 원수가 많다 하더라도 당신의 사랑권내에 있게 될 때에는 침범할 자가 없다는 것을 저희들이 알아야 되겠사옵니다. 외적으로는 이렇게 위로받을 곳이 없사오나 당신의 내정적인 심정을 통하면 위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이 민족이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니다.

이와 같은 처지에 있는 저희들은 단결해야 되겠습니다. 저희들은 하나의 목적을 향하여 총진군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알고 있사오니, 부족한 자신을 연마하여 내일의 희망이 되는 아들딸로서 바쳐 드려야 되겠사옵니다.

오늘이 문제가 아니라 내일을 위할 수 있는 아들딸이 되지 않고는 이 나라 이 민족을 당신이 기뻐할 수 있는 나라와 민족으로 창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옵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인 당신의 아들딸들만이라도 아버지 뜻 앞에 바쳐 드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아들딸들로 삼아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날 통일의 기치를 들고 세계에 널려서 활동하고 있는 당신의 자녀들을, 아버지,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소수의 무리들이 아버지의 뜻을 바라보고 싸우고 있는 곳곳마다 아버지께서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엄연하신 실존의 모습으로 나타나시옵소서. 살아 계신 아버님임을 증거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내일의 소망을 갖고 가는 그들의 길은 고독이 스며드는 자리요, 외로움과 서러움이 동반하는 자리이나 그들은 결코 망하지 않게 하실 줄 알고 있사오니 지켜 주시옵소서.

개척자의 책임을 완수하여 완비된 그 모습으로서 아버지 앞에 승리의 영광을 바쳐 드릴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시길,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 이 하루가 저희들에게 복된 날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새로운 아들딸의 인연을 맺을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고 원하옵니다.

이 시간 당신 앞에 부복한 자녀들의 마음 마음을 장중에 온전히 넣으시고, 마음 깊이 투시하는 생명력을 가지고 주관하시옵소서. 그리하여 최후의 한날을 위하여 부끄러움이 없는 아들딸로서 키워 주시옵고, 이끌어 주시옵길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이 한 시간을 당신 앞에 맡겼사오니, 친히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참부모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말 씀

여러분들은 이미 뜻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소원은 뜻을 위해 있어야 될 것이며, 우리의 매일매일의 생활은 뜻을 가려 가는 생활이 되어야 될 것입니다. 이것은 뜻길을 가는 사람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의무라고 보는 것입니다.

절대자의 소원

통일교회가 지금까지 싸워 나온 역사가 있었다면 그 역사는 어느 특정한 개인을 위한 싸움의 역사로 남아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 역사가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도 그것이 하늘땅을 대신할 수 있고 인류가 바라는 단 하나의 뜻을 중심삼고 어느누구라도 이 뜻과 더불어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대적인 뜻과 더불어 가야만 통일교회 역사는 빛날 것입니다.

오늘날 통일교회가 어떤 특정한 민족만을 위해 뜻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인류역사가 소망하였고, 현 시대에 살고 있는 만민이 바라고 있고, 나아가 미래의 후손이 추구할 수 있는 그런 단 하나밖에 없는 뜻을 중심삼고 나간다면, 통일교회는 결코 이 시대의 환경과 더불어 흘러 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통일교회가 미래세계에 있어서 행복의 기수가 되고, 새로운 역사를 창건하는 용사로서 나타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는 통일교회가 지닌 바의 소신이 인류가 바라는 뜻과 더불어 일치되는 자리에 설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이것을 중심으로 통일교회가 역사적으로 빛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가 결정된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이 뜻이라는 것은 인류만이 바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 인류를 지배해 나오는 역사적인 주인이 있다면 그 주인이 바라는 뜻이 아닐 수 없는 것이요, 현재의 역사를 지배하고 있는 어떤 절대자가 있으면 그 절대자가 바라는 뜻이 아닐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과정을 중심삼고 볼 때도 시대의 변천과 함께 흘러가는 인간의 군상은 우리가 볼 수 있을지 모르지만, 뜻을 중심삼고 볼 때는, 뜻과 더불어 가는 사람은 배후에서 절대자가 뒷받침이 되어 시대적인 중심으로 완연히 서 있다 할진대는 그 사람은 결코 망할 수 있는 입장에 서지 않을 것입니다.

절대자의 소원은 세계에 선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그것에 반대되는 모든 여건을 제거하여 승리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미루어 볼 때, 그 뜻과 더불어 가는 사람의 과정이 아무리 험하고 비참하더라도 그것은 하나의 과정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 그것이 전체를 대신할 수 있는 하나의 결정적인 모습이라고는 볼 수 없는 것입니다.

뜻길을 가는 사람은 아무리 비참한 환경에 떨어졌다 하더라도 오히려 그것이 자기에게 발전할 수 있는 하나의 자극이 되고 장차 소원의 터전을 넓힐 수 있는 하나의 기반이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어떠한 슬픔의 고비가 있다 해서 그것이 미래의 뜻을 방지시키고 뜻이 가는 길을 무너뜨리는 동기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오늘날 섭리역사노정을 보게 될 때 거기에는 굴곡이 많았던 것을 알고 있습니다. 어느 시대에는 발전했고, 어느 시대에는 후퇴했으며, 어떤 때는 올라가는 반면에 어떤 때는 내려갔던 사실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지금까지 역사가 그런 과정을 거쳐왔고 우리도 일생을 통하여 역시 그런 과정을 거쳐 갈 것입니다. 우리가 뜻을 중심삼고 하루하루의 생활을 두고 보더라도 신념을 스스로 다짐하는 강한 면이 있는가 하면, 그 반대의 입장에 서는 경우가 있음을 느낄 것입니다.

여기에서 올라가는 그때를 기뻐만 해서도 안 될 것이요, 내려가는 때에는 서러워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려가는 때가 있다면 거기서 내일의 희망을 다짐할 수 있는 하나의 안식기간으로 이것을 소화하고 흡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런 생활이념을 가진다면 아무리 저조한 입장에 있다 하더라도 자신을 더 저조한 자리에 끌어내리는 것이 아니라 내일을 위하여 다짐할 수 있는 하나의 밑거름으로서 하나의 터전으로서 그것을 흡수할 것입니다. 이런 놀음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될 것입니다.

밤이 있으면 낮이 있는 것입니다. 밤은 낮을 빛나게 하기 위한 준비의 기간이요, 휴식의 기간이요, 재차 연마하는 기간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미루어 보게 될 때, 수난의 과정에는 굴곡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발전할 수 있는 사람

그러면 망하지 않는 자리에 서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어느 위치에서 올라갈 수 있는 자리에 있을 때 내려갈 수도 있다는 것을 망각해 버린다면, 내려가는 입장에 서게 되면 올라갈 수 있는 길을 잃어버린 사람이 되기 때문에 내일의 소망을 향해 다시 출발할 수 있는 기틀을 잃어버리는 자리가 됩니다. 그런 자리에 서게 되면 거기에서 정지상태가 벌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정지상태가 벌어지면 자기 스스로 발전할 수 있는 길도 막혀 버리는 것입니다.

만약 막혀진 그 자리가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자리가 될 때 그는 거기에서 제거당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천리 법도 앞에 당연한 이치라는 것을 우리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내려가는 때가 되어 그 환경에 둘러싸이게 되더라도 낙심할 것이 아니라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그 내적 환경의 어려움에 부딪칠수록 우리의 내심은 뜻을 집약시켜 핵심적인 기준을 마음에 품고 소신을 가지고 외적 환경을 대하여 밀고 나갈 수 있는 끈기 있는 자신을 갖추어 나가야 합니다. 그런 기간이 1년, 10년, 혹은 일생 동안 계속된다 하더라도 끈기 있는 내적 마음을 가지고 밀고 나가는 그런 터전이 남아 있다 할진대는, 어느때라도 그 터전을 중심삼고 다시 뜻길을 향하여 출발할 수 있는 길이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렇지 못하고 외로움과 어려움과 시련에 부딪치게 될 때, 그 환경적인 여건에 휩쓸려 들어가서 뜻을 망각하고 뜻을 저버리고, 지금까지 걸어왔던 뜻 생활의 모든 것을 새로이 비판하면서 포기하는 입장에 서면, 거기에서 뜻에 대한 길이 끝을 맺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인들은 뜻길을 가는 데 있어서 망한다는 관념, 혹은 뜻길을 떠난다는 그런 생각을 절대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뜻을 대하게 될 때는 최고의 때가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보다 심령이 높은 사람이 있다면 그가 먼저 뜻을 대할 수 있는 때가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말하면, 안테나가 높으면 높을수록 먼 곳에서 발생하는 전파를 잘 받아들일 수 있는 거와 마찬가지로 심령이 높은 사람일수록 누구보다도 먼저 새로운 뜻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보다도 먼저 뜻을 알았더라도 먼저 안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뜻을 먼저 안 만큼 그 뜻을 중심삼고 얼마만큼 오랫동안 가치 있게 지니고 나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 뜻을 중심삼고 나가는 데 있어서 자신의 생활에 굴곡이 있다고 하여 내려갈 때는 그 뜻을 저버리고 내려가고, 올라갈 때는 다시 그 뜻을 품고 나가겠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올라갈 수 있는 때가 되었다 하더라도 내려갈 때에 뜻을 품고 나간 동기가 없으면 그때를 자기의 때로 맞아들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들어 보면, 춘하추동 이 사계절이 돌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봄이 지나가면 여름이 오는 것이요, 여름이 지나가면 가을이 오는 것이요, 가을이 지나가면 겨울이 오는 것이요, 겨울이 지나가면 다시 봄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때 생명을 지닌 씨라든가 생명을 지닌 풀이라면 다시 봄을 맞이하게 될 때에 그들은 지나간 봄보다도 크고 굵어진 자태로서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는 겁니다. 이와 같이 뜻길을 가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가을이 되었다 하여 완전히 죽어지는 입장에 서게 되면 그것으로써 끝나는 것입니다. 그 자체가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것입니다.

가을이 되어 외적으로 앙상한 가지만 남게 되었다 하더라도 그런 환경에 지배받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의 내심에 집약된 생명력을 스스로 지녀 가지고 외적인 환경을 극복할 수 있는 준비태세를 갖추었다면 그 나무는 다시 봄이 될 때 그 생명력으로 천지 앞에 새롭게 드러난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살아날 때는 작년보다 작아지는 것이 아니라 더 커진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새로운 하나의 연륜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하나의 까풀이 생겨서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확고한 방비의 기반이 닦아집니다. 이것은 우리가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련이라는 것은 인생행로에 있어서, 혹은 뜻길을 가는데 있어서는 반드시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행복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태어나는 그날부터 죽는 그날까지 행복한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반드시 굴곡이 있다는 것입니다.

흥하는 자리와 망하는 자리

그러면 여기에서 흥망의 분기점에 대해서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것은 무엇이냐? 망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 망하느냐? 망하는 사람은 선이면 선, 흥할 수 있는 길이면 그 길을 중심삼고 가다가 시련과 고통에 부딪치게 될 때 그것을 완전히 포기해 버리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그것으로 끝장이 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그것을 귀한 것으로 알고 소원으로 삼고 목표로 삼고 나가는 과정에 있어서 어떠한 시련과 고통에 부딪치더라도,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내정적인 집약점을 결집시켜 가지고 그 터 위에 출발을 다짐할 수 있는 스스로의 준비태세를 갖춘 사람 앞에는 망하는 길은 없을 것입니다.

선이 가는 길 앞에는 때가 되면 반드시 힘이 가중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한 길입니다. 선한 사람은 언제나 낙망하는 자리에 있지 않습니다. 한 고비를 돌아오면 반드시 재봉춘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때를 맞이 하면 하늘이 다시 선을 이끌어 주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슬프고 어렵고 고통스러운 때가 있다 하더라도 하늘이 가는 길, 뜻이 가는 길, 선이 가는 길은 반드시 재생할 수 있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찾아와서 나를 이끌어 간다는 사실을 언제나 명심해야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방심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를 위해서는 아무리 괴롭고 외롭더라도 마음을 모아 준비하고 그날이 어느 때에 올 것이냐 하고 바라는 마음이 간절해야 합니다. 아무리 낮은 자리에 있다 할지라도 그때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나가게 되면 반드시 그 선의 때를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오늘날 신비스런 체험을 해본 사람에 있어서나 우리 일상 생활에서 체험을 해볼 수 있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소망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자기가 사지에 들어가더라도 뜻을 대한 마음, 혹은 선을 대한 그 마음을 중심삼고 나가야 합니다. 만일 죽어서 희생되는 한이 있더라도 그렇게 나아간다면 그는 희생될지라도 그가 품은 뜻은 남아진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역사과정에 왔다 간 성인현철들은 세계에서 반목질시하는 불우한 환경에 몰리게 될 때, 그 어려운 환경 속에서 자기의 소신을 전부 포기해 버린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어려운 환경이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그 환경에 대비하여 내심에 집약된 마음을 가지고 내일의 소망이 이 시대에 오지 않으면 미래시대에 다시 온다는 확실한 신념을 가지고 나갔던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역사가 지나감에 따라서 역사에 위인이나 성인으로 등장했던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어려운 환경으로 내려가더라도 자포자기하는 자리에는 서지 말아야 합니다. 자포자기하는 자리에 서지 말라는 것입니다. 선은 영원한 것입니다. 선은 기필코 발전하는데 일방적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내려갔다 올라갔다 하면서 발전하는 것입니다. 한 고개를 넘으면 평지를 만나는 것이요, 평지를 지나면 또 새로운 고개가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전부가 올라갔다 내려갔다, 주고받으면서 발전해 나간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이런 모양으로 발전해 나간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되겠습니다. 직행하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생활에 있어서 상하관계나 좌우로 치우치는 관계가 있다 하더라도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환경이 치우치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내심으로 뜻을 대하는 마음이 변하지 않아야 하며, '내가 대하는 뜻은 기필코 이루어질 것이다. 내가 가는 뜻 앞에는 반드시 시련이 올 것이다' 하는 마음을 가지고 가야 합니다. 그러니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그 어려움에 대비해야 하고, 몰리면 몰릴수록 그 몰림에 비례하여 내심적으로 그 자리를 양보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 어려운 환경을 다시 한번 밀어낼 수 있는 때가 오게 되면 여러분은 새로운 출발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될 것입니다.

그러면 망할 수 있는 자리는 어떤 자리인가? 선을 중심삼고 나가다가 자포자기하는 자리입니다. 선의 길을 완전히 끊고 돌아서는 자리입니다. 그런 사람은 망하는 것입니다.

망하지 않는 자리는 어떤 자리인가? 아무리 어렵더라도 내가 행해 자온 것은 선이요 지금까지 살아나온 것도 참된 것임에 틀림없다고 자신하고 가는 자리입니다. 현재 부정하는 환경을 만나더라도 과거의 역사적인 실증을 품고 '내가 한 그것만은 틀림없이 참이다' 하는 신념을 중심삼고 나가야 합니다. 그렇게 나갈 때는 그 스스로 느끼지 못한 기쁨이라든가 스스로 느끼지 못한 행복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 것을 느끼던 때를 중심삼고 그 인연을 잃어버리지 않는 자리에서 정성을 들이며, 스스로 때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나가게 되면 반드시 봄이 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앞에 그런 굴곡의 때가 오기 전에 그것을 임의적으로 방지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우리의 신앙생활이나 우리의 일생 행로가 그런 굴곡을 따라서 발전하고 전진되어 나가는데, 그때가 오기 전에 임의적으로 방지할 수 있는 길이 없겠는가 할 때, 이것을 방지할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고심하는 자리에서 지금까지 내심의 인연을 중심삼았던 그것을 버리지 않고 극복하는 인연을 갖고 나가면 그때를 맞이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스스로 어려운 환경에 부딪치게 될 때에 그것을 넘어갈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무슨 방법일 것이냐? 동역자나 동지가 있어야 하며, 스승으로부터 지도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망하는 자리를 피해 갈 수 있는 길

나는 이러이러한 문제로 절벽에 부딪쳤으니,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이냐? 개인적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사람은 자기보다도 신앙면에 있어서 높은 사람, 자기보다도 위에 있는 사람을 찾아가서 솔직히 터놓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나는 나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를 따라 가는 사람으로 있겠다' 해야 합니다. 그가 우로 가라 하면 우로 가고, 좌로 가라 하면 좌로 가는 것입니다. 또 올라가라 하면 올라가고 내려가라 하면 내려가는 것입니다. '나를 위하는 것이 아니라 지도하는 사람을 대신하여 있겠다'하게 되면 그 환경을 피해 나갈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생활에 있어서 동지가 필요한 것입니다. 동지가 없는 사람은 외로운 사람입니다. 동지가 있으면 서로 보충하고 보호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럼으로 말미암아 환경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길도 생기는 것입니다. 만약에 동지가 없으면 독단적으로 다 해결해야 되는데, 그것은 전후관계를 혼자서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자기로서는 심히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굴곡에 부딪치게 될 때는 반드시 동지나 스승을 찾아가서 내 전체를 그 앞에 맡기고, 생명까지도 위탁할 수 있는 입장에서 완전히 그의 대신자로서 가게 될 때는 굴곡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외로울 때라든가 슬플 때, 혹은 고독할 때는 내가 대신자로서 갈 수 있는 사람을 찾는다든가 그 길을 해결해 나가기 위해서, 경서를 읽는다든가 유명한 사람의 설교를 듣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되는 것입니다.

어려운 길을 피해 가기 위해서 이처럼 지도자를 앞세우고 길을 가야 하는 것은 물론이지만, 그 다음으로 망하지 알고 피해갈 수 있는 길은 어떤 길이냐? 열만한 어려움에 부딪치게 될 때에 그 열만한 어려움을 중심삼고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열만큼의 어려움을 걱정하지 말고 백만큼의 어려움을 찾아서 돌진해 나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열만큼의 시련을 감수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이상 백만큼의 시련도 받고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문제를 점핑해서 뛰어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반작용과 같은 작용이 일어나게 됩니다. 열만큼의 힘을 가지고 가면 설 수 있는데 백만큼의 힘을 가지고 가서 부딪치면 거기에는 반작용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높은 데서 뛰어 내리면 그 높이에 비례하여 반작용 하는 힘이 있는 거와 같은 현상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심정에 타격을 받고 그 자리에서 낙심하고 자포자기했다가는 망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당한 문제보다도 더 큰 문제를 자진해서 맞이할 수 있는 행동을 제시하면 하나님은 그를 버리지 않습니다. 내가 응당히 운명적으로 가야 할 길인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중심삼고 참을 위하여 더 희생적인 자리로 나서게 될 때, 하나님이 붙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심령생활에 있어서 고갈을 느끼게 될 때, 이를 수습하는 방법은 지도자를 찾아가서 허심탄회하게 자기 자신의 모든 문제를 제시하고, 그의 대신자로 따라가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 다음의 한 방법은 자기가 가고 있는 자리 이상의 비참한 자리를 스스로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가 오늘날 통일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기준이 어떠한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저 교회나 왔다갔다했는지, 아니면 가족들로부터 시련을 받으면서 신앙생활을 했는지, 남편이라든가 아내, 혹은 자녀를 통하여 시련을 받은 것이 1년, 2년, 3년, 4년…, 계속됐다고 합시다. 여기에서 뜻이 가는 길이 이런지 저런지, 희미해질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완충지대와 같은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 자리, 그 자체, 그 모양, 그 꼴 가지고는 그곳을 헤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냥 그대로는 헤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곳을 헤어나기 위해서는 첫째로 뜻을 위한 간절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옛날에 뜻을 위하는 간절한 마음을 가졌었으면 그 마음을 다시 연장해 가지고 시련이 아무리 극하다 하더라도 그 환경에 마음을 절대 주지말고 누룩이 될 수 있는 씨를 남겨 놓으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 마음을 잃어버리는 날에는 수습할 도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후퇴하는 자리를 수습하려면

이러한 방법으로도 해결되지 않을 때는 자기의 생명을 책임질 수 있는 지도자, 혹은 스승을 찾자가서 직고하라는 것입니다. 가리지 말고 솔직이 얘기하라는 것입니다. 의논하는 데 있어서 내게 유리한 것은 말하고 내게 유리하지 않는 것은 말할 수 없다 해서는 안 됩니다. 솔직이 털어놓으라는 것입니다. '당신이 내 대신이 되어 주소. 내 것을 맡아 이끌어 주시오' 이렇게 솔직이 직고하고 그가 지도하는 대로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내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대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 길밖에 없는 것입니다.

만일에 그래도 안 되면 단행해 나가는 것입니다. 현재 있는 십자가 이상의 길을 자진해서 가라는 것입니다. 전도를 하다 타격받은 심정을 후방에 돌아와서 수습하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절대 수습이 안 됩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뜻을 위하여 일선에 나갔다가 하늘의 허락 없이 후퇴했다는 마음은 언제나 자기의 환경을 사로잡는 것입니다. 전도하러 나갔다가 자기가 심정에 타격을 받고 돌아왔다면, 그것을 수습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일까요? 다시 전도 나가야 되겠다 하는 그 마음을 유지해서 다시 가야 합니다.

그렇게 전도하러 나갔지만 수습할 도리가 없으면 어떻게 하느냐? 그 다음에는 전도 나가서 후퇴하지 않았던 사람에게 문의해 보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일선에서 전도하다가 후퇴하여 돌아왔으면, 후퇴하지 않은 사람에게 '당신은 어떻게 싸웠느냐? 나를 인도해 주시오'라고 해야 합니다. 이때의 문제는 간단합니다. 이렇게 이렇게 싸우라고 지시해 줄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에 절대 순종해야 됩니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해서는 답이 안 나옵니다. 그러니 자기를 부정해야 답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강하면 강할수록 수습할 수 있는 길이 가까와진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수습하는 방법은 무엇이냐? 갑이라는 지역이면 지역, 지구면 지구, 구역이면 구역으로 전도를 나갔는데 거기서 반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보다 더 악착같이 반대하는 사람, 몇 배 더 포악하고 악착같이 반대하는 사람을 자진해서 찾아가라는 것입니다. 그 방법 외에는 없습니다.

그러면 제일 지혜로운 방법이 있다면 무슨 방법이냐? 사람이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시련이 없을 수 없습니다. 어두운 밤과 같은 것이 반드시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방지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것이냐, 그러한 시련 굴곡이 오는 것을 피해갈 수 있는 방법이 없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 그럴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떤 방법이냐?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여 사는 방법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대신하여 사는 방법은 무엇이냐?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어떤 수난에 부딪쳤을 때 거기에서 벗어나려면, 내 스스로의 내심적인 신앙심을 품고 나가야 되겠고, 다음에는 지도자의 지도를 받아야 되며, 그 다음에는 그 이상의 십자가의 길도 자진해서 가야 됩니다.

그러면 그런 굴곡이 찾아오는 것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길은 없을 것이냐? 길이 있다면 단 하나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위해서 사는 길입니다.

열 사람이 있으면 그 열 사람을 위해서 사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자기 소견을 갖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 열 사람의 소견을 따라가는 사람인 것입니다. 따라가는 사람에게는 핍박이 없는 것입니다. 따라가는 사람은 치지 않습니다. 만약 열 사람을 위해서 희생을 했으면 열 사람이 다 걸리기 전에는 안 걸리는 것입니다.

남을 위해서 살면 망하는 법이 없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거느리고 3년 공생애노정에서 준비한 것이 무엇이냐? 예수님 자신이 위함을 받는 생활이 아니라 제자들을 위하는 생활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 열두 제자는 특별한 형(型)입니다. 인류역사 과정에 있어서 수많은 인류를 대표하는 특별한 열두 형인 것입니다. 이들은 그 시대에 있는 사람들이지만 시대를 넘어 종적 역사시대의 인류 전체를 대표할 수 있는 표준형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열두 제자를 세워서 3년 동안 모심의 생활을 했다는 것입니다. 3년 동안 모심의 생활은 어떤 것이냐? 씨를 뿌려서 나오는 싹을 가꾸는 생활입니다. 자기를 위하는 생활이 아니라 남을 위하는 생활입니다.

그렇게 위하던 제자들이 꺾여 나가게 되면 예수님은 낙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열두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나가게 될 때, 예수님은 자기 스스로 결단을 내려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자기를 주장하면서 하나님 앞에 십자가를 놓고 담판기도를 올렸던 것입니다.

그 전에는 어떻게 했느냐 하면, 세 제자를 위해 기도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기도하던 내용은 무엇이었을 것이냐? 먼저 이스라엘 나라의 미래의 흥망문제에 대한 기도였을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자기를 3년 동안 따르며 정성들여 나오던 그 제자들을 위해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세 제자를 위해 기도한 것은 여기에 대표되는 세 제자들이, 예수님과 같이 밤을 새우며 기도하는 세 제자들이 뜻을 중심삼고 망하는 자리에 들어가지 말기를 기도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자신을 위하여 기도한 것이 아니라 나라를 위하여 기도했고, 나라의 대표자격인 세 제자를 위해 눈물 흘리며 기도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다 틀어지게 될때, 십자가는 결정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책임으로서 십자가의 담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을 위해 사는 사람, 즉 열 사람을 위해 살았으면 아홉 사람이 반대하더라도 한 사람은 자기편을 들어줍니다. 열 사람 중 반이 자기를 반대하더라도 반은 자기를 편들어 준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울타리가 되어 준다는 것입니다. 내가 침략받는 일이 있으면 나를 보호해 줄 책임이 있는 것이요, 내가 대신 수고를 해주었으면 그것을 책임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 위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위하는 사람은 굴곡이 있다 하더라도 한꺼번에 푹 내려가지는 않는 것입니다.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사람이 있지만 그 가운데는 올라가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올라가는 사람을 붙들고 내가 그를 위하고 동조하게 되면 흑암의 때를 방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종교생활에 있어서 '온유 겸손하고 남을 위하여 희생하라' 하는 말은 내가 침범받지 않고 굴곡을 벗어나서 언제나 발전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해 주신 지극한 사랑의 도리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을 위해 살다가 망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동네에 자기는 일전한푼없는 불쌍한 처지에 있으면서도 동네 전체 사람들에게 은덕을 배푸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 사람의 하루하루 생활이 비참하다는 것은 동네 사람들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 비참한 사람이 만약에 외부로부터 더 비참한 침해를 받게 될 때는 동네 사람들은 단결하여 그 비참을 막아 준다는 것입니다. 인정을 중심삼은 우리의 생활권에서도 그런 일들이 벌어지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인간을 깨우쳐 오신 하나님

그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그런 사람은 외부로부터 침해를 받아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환경이 보호육성해 주고 선을 중심삼고 바라보는 소망이 되는 것이요, 남겨줄 수 있는 하나의 터전이 되는 겁니다. 이것은 스스로 다 알기 때문에 그런 마음이 발동하여 그 사람을 보호해 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남을 위해 사는 사람은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망하려고 해도 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왜 망하지 않느냐? 그것은 아버지와 같은 생활권에 동참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가는 길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전지전능한 하나님 자신도 인간을 대하여 '너희들은 나를 위하고 내게 절대 복종 하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반대인 것입니다. 인간들이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깨우쳐 주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길을 갈 줄 모르니 가르쳐 주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가르쳐 주고 지도하는 것이 쉬운 일일까요?

여러분은 자기 자식 하나 교육시키는 것도 힘들지요? 그 자식은 자기의 피살을 이어받은 아들딸입니다.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면 마음이 통하여 같이 눈물 흘릴 수 있는 아들딸입니다. 아버지가 눈물 흘리고 슬퍼하면 같이 슬퍼할 수 있는 마음이 자연적으로 동할 수 있는 아들딸인데도 불구하고 그들을 지도하고 육성하려면 지극히 어렵지 않습니까? 그것을 볼 때, 오늘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의 아들딸이 아니라구요. 하나님이 아무리 울어도 본체만체 합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슬퍼해도 본체만체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사탄의 혈육을 받고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슬퍼하는 것을 보고 찬양합니다. 망하는 것을 보면 좋아하며 웃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인간을 놓고 지도하고 개척의 방향을 가르쳐 주려니 얼마나 수고로우실 것이냐? 그러나 하나에서부터 백, 천, 만까지 위하시는 마음,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이 하나님에게 없었더라면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섭리역사를 붙들고 나오실 수 있었겠느냐는 것입니다.

오늘날까지 섭리역사를 이끌고 나오시는 하나님의 그 사연과 입장은 어떤 것이냐 하면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내가 아니면 그들은 망한다. 망하는 것이 본연의 인간에게 부여된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는 나로 말미암지 않으면 망한다'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는 당신이 절대 필요하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이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 지금까지 역사과정에서 수난길을 개의치 않고 개척해 나오셨고, 수많은 인류를 교육해 나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입장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남을 위하여 희생봉사하는 생활을 하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자는 것입니다. 애국자가 있다면 그 애국자는 민족이 압박을 당하고 고통을 당하는 것에 대하여 불쌍한 마음에 사무쳐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 그 백성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직결 하는 겁니다. 그 백성의 서러움을 자신의 서러움으로 대신하는 겁니다. 이런 마음이 없어 가지고는 그 나라에 남아질 수 있는 애국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남을 위해 희생하고 남을 위해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에도 '지극히 작은 소자에게 행한 것이 곧 나에게 행한 것이다' 또 '이웃 사랑하기를 내 몸과 같이 하라.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했습니다.

진정한 사랑

오늘날 통일교인들은 '나라를 사랑하고 뜻을 사랑하자' 하고 말은 잘합니다. 나라를 사랑하기 전에 개인을 사랑하라, 나라를 미칠듯이 사랑하려면 개인을 미칠듯이 사랑해 보라는 것입니다. 나라를 위하기 전에 개인을 위하라는 것입니다. 나라의 선은 큰 선이기 때문에 큰 선을 찾기 전에 개인적인 작은 선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개인과 개인의 선을 합하여 큰 선으로 규합하기 전에는 나라의 선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는 개인입니다.

여러분은 통일교회에 나오면서 그 누구를 얼마나 사랑해 보았습니까? 이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들이 몇 년, 몇십 년 동안을 교회에 다니면서 자신의 마음깊이 사무친 사랑을 가지고 아버지가 동조하는 심정의 자리에 서서 사람들을 얼마나 사랑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가 그대들이 저나라에 가서 하나님의 사랑을 얼마나 받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을 결정짓는 것입니다.

한 생명을 위해서 며칠 동안이나 금식을 해보았으며, 그 생명을 위해 몇 달 동안이나 피땀을 흘려 보았느냐? 문제는 거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말이야 '하나님을 사랑한다. 나라를 사랑한다'고 합니다. 그것이 나하고 무슨 관계가 있느냐 이겁니다. 그런 말은 공중에 뜬 말입니다. 사랑은 자기를 중심삼은 입장에서 하게 되면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을 대신하여 그 사람의 입장을 옹호하고, 그 사람의 입장을 받들면서, 그 사람의 입장을 세우는 데서 비로소 사랑이란 말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사랑하는 사람에게 '야 이놈아 ! 너는 내 종이다'라고 말합니까? 그를 누구보다도 높여 주고 누구보다도 위해 주고, 그로 말미암아 있고자 하는 자리에서 사랑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 나를 중심삼고 '너는 내가 하라는 대로 해라' 하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어린 아기를 사랑하는 부모의 사랑은 순결한 사랑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를 대하여 전체를 아는 부모가 아기보다 더 모른다 하는 자리에서 그 아기를 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열 사람을 위해 산 사람이 있다면, 그 열 사람이 복받게 될 때 그 복은 자기 복이 되는 것입니다. 동네의 옆집에서 잔치를 하게 될 때, 그 동네에서 가난하게 살면서 심부름하는 사람은 그 옆집의 잔치가 자기 잔치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기쁨의 터전이 되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열 사람이 복을 받게 되면, 열 사람을 위하던 그 사람은 복을 못 받는다 하더라도 복의 그림자는 맛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혜택받는 것이 있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을 위해 사는 사상, 이 사상이 무서운 사상입니다. 선은 전체를 위하고 전체의 중심이 됩니다. 전체를 위해 가지고 하나의 사랑으로 묶고자 하는 자리는 전체의 중심이 결정되는 자리이기에 선이 임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를 위해서 피땀을 흘리면 잠을 푹 자도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남을 위해서 피땀을 흘리면 가뿐히 잘 수 있습니다. 입체적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내가 나쁜 사람이 아니구나, 하나님이 계시다면 나를 버릴 수 없겠지' 하는 것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 나를 중심삼고 좋다 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오늘은 좋았다. 배부르다' 하면 거기서부터는 배고픔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서 좋았다고 하면 끝장이 나지만 남을 위해서 좋을 수 있는 길은 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악의 근성과 선의 본성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는 어두움이 찾아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어두움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위해서 살라? 위해서 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새벽기도 나와서 열심히 기도하는데 새벽기도를 못 나와도 좋으니 기도하는 그 시간에 신앙의 동지를 위하여 세 가정의 문전에서 기도하고 오라는 것입니다. 일 분이라도 좋습니다. 이것이 새벽기도를 몇 시간 하는 것보다 낫습니다. 그것이 복받는 것입니다. 이런 사상이 없으면 세계를 하나로 만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신앙길은 보다 높고, 보다 귀한 자리만 가려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오늘날 신앙생활을 하는 데는 막연하나마 이런 내용을 중심삼고 희생봉사 하라고 강조해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반드시 흑암이 오는데 희생봉사는 그 흑암을 방비하기 위한 자연적인 교두보요 하나의 요새적인 작용을 하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이러한 도리를 가르쳐 준 것으로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왜 흑암을 막는 길이 되느냐? 사탄의 본질과 반대되기 때문입니다. 악의 본질과 반대되기 때문입니다.

악의 본질은 어떤 것이냐? 자기를 위하라는 것입니다. 열 사람이 있다면 열 사람 전부를 자기의 발 아래 몰아넣고 이용하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한때는 따르겠지만 조금만 지나면 다 도망간다는 거예요. 도망갈 때는 그냥 가지 않습니다. 빼앗아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전부 훑어 가지고 가니까 망하는 겁니다. 떨어져 나갈 때는 전부 다 떼어 가니까 망하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을 위해서 사는 사람은 올 때마다 가져다 주고 싶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그렇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흥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흥망의 분기점을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에서 가장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심령이 어두울 때가 있더라도 자기를 중심삼고 '아버지, 나를 불쌍히 여기시어 내 어둠을 제거해 주시옵소서' 하는 기도는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도리어 남을 위해 봉사하라는 것입니다. 통일교인 가운데서 누가 제일 불쌍한가를 찾아보고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나보다 더 불쌍하구나 하는 마음으로 그를 위해서 눈물을 흘리면 어두웠던 심령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이런 조정 방법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결국 남을 위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동조하실 수 있고, 하나님이 지금 진행하고 있는 작전의 행보와 더불어 그 방향에 맞추어 같은 형태의 입장을 취할 수 있는 자리는 남을 위하는 자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을 위해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두고 볼 때, 한의학에서 사상(四象)이 있다는 것과 같이 양질 (陽質)의 사람과 음질(陰質)의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의 체질에는 동 서 남 북과 같은 것이 있고 또 중간 성질의 사람도 있습니다. 전부 다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저 사람 싫어' 하는데 어떤 사람은 '저 사람 좋아'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 사람을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나는데, 다른 사람은 보기만 해도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못난 여자들도 시집가고 못난 남자들도 장가간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 사람 싫다고 하지만 그것이 일방적이지 전체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그 사람을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사람이라는 것은 자기의 생각과 같이 전부 다 일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방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서로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방성을 중심삼고 위하는 자리에 있어야 됩니다.

예수님도 열두 제자를 중심삼고 위하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 위하는데 있어서 바깥에서 위할 것인가, 안에서 위할 것인가?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바깥에서 위하는 자가 될 것인가, 안에서 위하는 자가 될 것인가? 말하자면 사랑받으면서 위할 것인가, 사랑하면서 위할 것인가? 그를 긍휼히 여기면서 위할 것인가, 그에게 사랑받으면서 위할 것인가? 이것이 문제입니다. 긍휼히 여기면서 위할 것인가, 사랑받으면서 위할 것인가? 그런데 사랑받으면서 위하는 법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받으면서 위하는 것은 종입니다. 사랑받으면서 위한다는 말이 있습니까? 모양은 위하는 것 같지만 위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어떤 자리에서 위해야 하는가

그러므로 사람을 위할 때는 바깥에서 위할 것이냐, 안에서 위할 것이냐 이것이 다릅니다. 신앙생활을 하려면 바깥에서 하지 말고 안에서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중심삼고 너희를 위하는 것은, 내 좋은 것을 너희에게 나누어 주고 싶어서 그런다는 것입니다. 나쁜 것이 있으면 가려주고 슬플 때에는 위로해 준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들보다 더 수고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바로잡아 주는 겁니다. 이것이 부모인 것입니다. 부모는 자식을 위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위하는 것은 바깥에서 위하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위해 주는 것입니다. 그 자식들이 어려울 때 위해 주어야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높은 자리, 중심된 자리에 있으면서 위해 준다는 사실이 귀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인된 입장에서 통일교회 교인들을 사랑하는 겁니다. 하나님을 대신하는 자리에서 '내 손을 거치지 않으면 저 사람은 죽는다. 비틀비틀거리는 것을 보면 그냥 내쫓아 버리고 싶지만 쫓아 버리면 멸망하기 때문에 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귀한 것이 그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위하지 않아도 될 입장에 있는 그분이 위했기 때문에 거기에서 부모의 마음이 나오고 하나님의 마음이 싹트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이 아닙니다. 자기를 위한 마음이 아니라는 겁니다. 차원이 높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여러분이 생각해 봐야합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나오는 자리는 하나님이 움직이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을 대신해서 세계 인류의 중심에 서서 수많은 사람을 위해 주고 복을 빌어 주면서 만인이 좋을 수 있는 일을 해주기 때문에 만민이 그를 좋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을 대하다 보니 겨울이 되더라도 내 앞에는 춘 하 추 3시절에 해당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아무리 낙심한 자리에서도 그 사람만 보면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그렇다는 겁니다. 외아들을 잃은 부모가 있다면 그는 동네에서 누구의 위로를 받아도 위로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때는 김삿갓처럼 보따리를 싸 짊어지고 삼천리 반도를 여행하는 것이 제일 빠릅니다. 여행을 하면서 이 사람 사정, 저 사람 사정을 들어 보면 자기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나보다 더한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나는 돈이라도 있어서 삼천리 반도를 여행이라도 하지만, 나보다 더 비참하게 망해 가지고 쪼그라져 있는 사람을 보게 되면 자신의 슬픔을 위로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겨울철과 같은 때를 맞이했다 하더라도 봄이나 여름, 그리고 가을과 같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위안이 된다는 것입니다.

통일교회 전체를 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통일교회에 먼저 들어왔다는 사람들이 오히려 축 늘어져 가지고 '뜻이고 뭣이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새로 들어온 사람들은 '저거, 저거 좀 봐라. 선배들이 저러고 있다'고 합니다. 씨를 뿌리면 떡잎이 나옵니다. 통일교회에 처음 온 사람들은 떡잎입니다. 배추가 크려면 떡잎이 커야 되지요? 그렇잖아요? 마찬가지로 통일교회 자체가 크려면 그런 떡잎들이 많이 생겨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떡잎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보고 '나는 저 사람들 보니 못 믿겠다' 하면 그것은 떡잎보다도 더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중심이 되어 떡잎을 만들겠다' 하는 마음을 가지고 전체를 대신해서 나서야 합니다. 그렇게 나서게 될 때 그 사람은 떡잎과 같이 고충을 받는다 해도 그것이 문제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문제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한 면에서는 새싹이 돋아난다는 것입니다. 통일교회가 한 면을 보면 정지되어 있는 것 같지만, 다른 한 면에서는 여전히 새싹이 돋아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곳은 봄절기가 되는 것입니다. 새싹이 돋아나는 그 봄절기를 찾아갈 줄 알고, 거기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사람은 망하지 않습니다. 그것과 더불어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치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흑암권을 타개해 나가려면

통일교회 문선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식구들이 없어 쓸쓸할 때는 산에도 간다는 것입니다. 또 마음이 컬컬하면 옛날에 뜻을 위하여 걸어 나오던 때에 받았던 핍박과 오늘의 핍박을 비교하는 것입니다. 옛날의 고충과 오늘의 고충을 비교한다는 것입니다. 옛날과 비교하면 오늘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왜 아무것도 아닌 것 때문에 내가 기력이 빠져 있나? 그것은 자기 자신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자신 때문에 기력이 빠져 있다는 결론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자기를 수정해야 됩니다. 이런 등등의 문제를 맞이해서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에서 가려갈 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흑암이 오게 될 때는 반드시 뜻에 대한 마음의 씨, 즉 누룩을 잃어버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과거에 자신이 뜻을 위해 정성들였던 그 마음을 가지고 한번 때가 되면 틀림없이 뿌려서 멋지게 거두리라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준비하는 마음, 그것을 위해서 흑암을 뚫고 나가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면 뜻이 떠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흑암이 오게 될 때 어떻게 할 것인가? 자기 혼자는 힘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니 상대를 찾아 의논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의 동반자나 스승이 없으면 어떻게 할 것이냐? 자녀들에게 교훈을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세 제자의 경우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예수님이 외로울 때 눈물을 흘리게 되면 그들이 함께 눈물을 흘려 준다는 것입니다. 자기 혼자도 아니고 세 사람이 같이 눈물 흘리게 되면 안 됐거든? 그러면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회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그런 상대적인 동지가 필요하든가, 스승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언제나 명심해야 됩니다.

그 다음에는 내가 열만큼의 핍박을 받아 흑암이 왔으면, 백만큼의 핍박이 있는 자리에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모험을 단행하라는 것입니다. 열만한 수난의 자리에 있을 때 하나님이 나에게서 떠났다면 백만한 수난의 자리에 들어가면 하나님은 나를 다시 붙들어 준다는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불효자식이 집을 나가게 되면 부모는 '그 자식의 행실이 그러니까, 버릇이 그러니까 나갔다 다시 돌아오겠지' 하며 무심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자식이 죽으러 간다 할 때, '저 이제 나가면 틀림없이 죽어요'할 때, 그 부모는 그 자식이 나가는 길을 막아요. 안 막아요? 막지요? '아이구! 이 녀석아? 하면서 못 나가게 막으며 붙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열만한 핍박으로 말미암아 흑암에 들어갔다면 백만한 시련을 향해 죽든지 살든지간에 생명을 걸고 당당하게 나가면 회복되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여러분에게 흑암이 오는 것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방법이 없겠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그것은 간단합니다. 남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열 사람을 위하고 백 사람을 위해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해야 축복을 받고,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겠다는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가기 때문에 나도 그렇게 가야 될 것이 아니냐 하는 마음을 중심삼고 꾸준히 정성들이는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일생을 살다 맨손으로 영계에 간다 하더라도, 그에게 도움을 받은 열 사람이 천국에 갔을 때는 그를 지옥의 밑창에 있게 놔 둘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열 사람이 합동하여 하나님 앞에 '그는 우리들의 생명의 중심이요, 생명의 은인이요, 부모와 같은 분이기 때문에 그분을 우리보다 더 영광된 자리에 모셔야 되겠습니다' 하고 축수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영광이 내 영광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망하지 않는 사람이 되려면

이러한 길을 가는 통일교인이라면, 통일교회는 망하더라도 그 사람은 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가다가 전부 떨어져 나가고 한 사람이 남더라도 그 한 사람을 위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그 한 사람과 의논하고, 그 한 사람을 위해서 희생하고 그 한 사람과 더불어 관계를 맺고 나가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나가야 합니다. 그런 마음을 갖고 나가면 어떻게 되느냐? 통일교회가 망하더라도 남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망한 것을 전부 치다꺼리하고 다 처리하고 나가면 망한다고 해서 다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남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맨 나중에 가는 사람은 망한 그루터기를 자기 것으로 만들어 가지고 간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망했더라도 아직 돈이 남았다면 그것을 상속해서 가는 것입니다. 그런다고 해서 그 누구도 반대는 하지 못합니다. 가져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무서운 사람입니다. 그러나 중간에서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는 사람은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습니다. 끝까지 참고 견디는 사람은 복받는 것입니다. 망하는 자리에서도 복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피난을 가더라도 장사 밑천을 가져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망하지 않는 방법이 있다면 무엇이냐? 통일교회 문선생이 망할 사람이라면 통일교회 문선생보다 더 충성하라는 것입니다. 나의 사상보다도 더 선한 공적인 사상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통일교회 문선생이 만들어 놓은 모든 공적이 그 사람을 통해서 끝을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선을 위하는 마음이 절대적이라면 하나님도 '너만은 쓸 만하다' 하시면서 더 좋은 길로 안내한다는 것입니다. 나쁜 길로 안내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전체를 위해서 움직이는 사람은 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자기만을 중심삼고 나가게 될 때는 고독이 찾아올 것이요, 멸망이 찾아올 것입니다. 그러나 싸우더라도 남을 위해서 희생봉사하면 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희생봉사하면 반드시 흥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통일교회는 나라를 찾을 때까지 이런 작전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극히 지혜로운 작전입니다.

우리에게 무엇이 있는가

선생님이 근간에 아주머니들 지방에 나가 있는 경기도 일대와 경남 일대를 순회했습니다. 그곳에 가서 아주머니들을 만나면 눈물을 줄줄 흘립니다. '눈물 병이라도 났는지 어쩌자고 그렇게 눈물을 흘리냐'고 해도 우는 겁니다. 본부에서는 매일 아침에 보게 되더라도 인사도 안 하던 아주머니들이 반갑다고 우는 것입니다. 어머니를 보고 반갑다며 목을 끌어안고 우는 것처럼 그렇게 운다는 것입니다. 본부에서 매일같이 대하더라도 본체만체하고 치마꼬리 휘두르며 돌아서 가더니 무슨 야단이냐는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걸 볼 때, 하나님을 위하여 그렇게 기쁘게 반길 수 있는 그 시간 이라는 것은 금 주고도, 돈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알고 청춘시대, 장년시대, 노년시대를 거쳐 죽을 지경에까지 그런 마음으로 가게 된다면 틀림없이 죽어서도 나쁜 곳에 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주머니들이 임지에서 고생하는 것을 보면, 그 고생은 내가 시킨 것 같은데 나 보고 불평하고 '통일교회 문선생이 무엇인데 고생시키느냐'고 주먹을 휘두르며 불평하는 사람이 없이 눈물을 줄줄 흘리는 것입니다. 자기를 고생시킨 장본인인데도 불구하고 갈까봐 그저 가지 말라고 그럽니다. 그게 이상하다는 것입니다. 그걸 볼 때 그래도 내가 몹쓸 노릇은 하지 않는 거구나 하는 걸 느꼈습니다.

이 뒤끝은 내가 망하고 우리가 망하더라도 이 나라는 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망하더라도 이 나라는 남아진다는 것입니다. 망하겠어요? 눈물로 엮어진 통일교회의 전통만은 이 민족을 울릴 것이고, 세계인류를 녹여낼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는 믿기 힘들다고…. '아이고 통일교회의 말씀은 좋은데 통일교회를 믿는 것은 싫어. 통일교회 교인들이 하는 놀음은 나는 싫어' 하는 자식들은 망할 자식들입니다. 그런 자식 들은 망할 자식들인 것입니다.

여러분! 선생님이 지금까지 나오면서 언제 먹고 놀면서 살자고 하는 말 들어 봤어요? 언제 잘 먹고 잘 놀고 잘살자고 하는 말을 들어 봤느냐는 것입니다. 보세요. 잘살면 뭘 합니까? 감옥입니다. 잘 놀면 뭘 합니까? 보리밥 먹고 콩밥 먹게 됩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나라가 있어요? 우리에게 민족이 있고, 내 어머니 아버지가 있고, 내 친척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는 억만년 동안 고아가 아니냐는 것입니다. 나라 없는 백성은 불쌍한 사람입니다. 부모 없는 자식은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러한 무리들이 처량한 신세를 망각하고 행복의 콧노래를 부를 수 있겠느냐 이겁니다.

우리는 잃어버린 부모를 찾고 나라를 찾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잃어버린 나라와 부모를 찾아 가지고 '어느 나라에 지지 않는 내 나라를 가졌고, 모든 면에서 지지 않는 내 부모를 가졌다'고 자랑하면서 활개를 펴고 장단에 맞추어 춤을 추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편에서는 아무것도 없는 병신자식이 되고 고독단신인 고아가 되어 슬픔의 꼬리를 물고 들어가는 춤을 춰서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거기에서는 기쁨과 행복의 희열이 넘칠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그런 입장에서 밥을 잘 먹고 옷을 잘 입고 잘살면 뭘 합니까? 그것은 죄와 마찬가지입니다. 쫓기는 무리입니다. 피난민과 마찬가지의 신세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깨깨 피난살이를 해야 합니다.

피난살이를 하더라도 이 길이 마지막이 되도록 노력하고 후손에게는 피난길을 가지 않게끔 하겠다고 다짐하면서 간다면 그 피난살이가 복이 될 수 있고, 이 민족에게 새로운 길을 개방할 수 있는 기원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길만이 우리가 망하지 않고 갈 수 있는 길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며 선생님이 지금까지 여러분을 지도하고 나온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나라가 없습니다. 남북한이 갈라져 두동강이 나 있습니다. 북한 땅에 자리잡은 원수를 우리의 능력과 정성으로써 몰아내야 되겠습니다 남한에서의 부패상을 우리의 힘으로 제거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악의 소굴을 폭파시켜 버려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선전하며 가는 것이 아닙니다. 해가 아침에 떠오를 때 '나는 떠 오른다'고 선포하고 떠오릅니까? 해가 저녁에 질 때 '나는 지겠다'고 선포하고 집니까? 소란스럽지 않다는 것입니다. 시간은 자연스럽게 가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천지조화와 흥망성쇠는 엇갈려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우리는 자연스러운 입장에서 소리없이 올라가는 것입니다. 소리없이 하는 것입니다. 소리는 우리가 내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부산스러운 녀석들이 소란스럽게 만들어 놨다는 것입니다. 통일교회가 세상을 소란스럽게 만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온유겸손히 희생봉사하라

우리는 이렇게 못난 놀음을 하고 있습니다. 병신 놀음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병신이 아니며 못난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우리들이 자리를 잡고 판국을 가려 가지고, 사방의 모든 권위를 가지고 위세 당당하게 나타나게 될 때는 온 천지가 우리 앞에 머리를 숙이는 겁니다. 그럴 수 있는 날을 바라보고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특권적인 주권을 위해, 특권적인 세계의 행복의 이념을 위해서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런 과정은 개인에게 있어서 당연한 것이요, 단체에 있어서도 당연한 것이요, 앞으로 통일나라에서도 당연한 것입니다.

대한민국이 하나님이 바라는 통일된 나라가 된다면, 대한민국 자체가 세계 인류를 위해서 그렇게 된다면, 세계의 국가들은 자기 나라를 버리더라도 대한민국을 맞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세계는 대한민국으로부터 주관받고 싶어하고 대한민국은 세계 인류를 주관하고 지도할 수 있는 우수한 민족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당연한 이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계와 더불어 흥할 것이요, 세계와 더불어 발전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되었다 할 수 있는 자리란 어떤 자리인가? 그 자리는 종의 자리가 아니라 중심의 자리인 것입니다. 그 중심의 자리에 서면 세계가 자연히 받들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을 위해서 봉사하는 사람은 맨 끝에 서는 것이 아니라, 자연히 전체가 위하는 중심으로 결정 된다는 것입니다. 전체의 중심이 되면 모든 전체를 책임지고 주관하는 입장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자연적인 환경에서 만민이 서로 융합할 수 있는 생활적인 터전을 넓혀 나가려니 온유겸손히 희생봉사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길을 가게 되면 절대 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기 도

​사랑하는 아버님, 아버님은 불쌍한 분이신 것을 다시 한번 느끼옵니다. 인류를 대한 복귀섭리의 노정의 어두운 그늘 아래서 걸어 나오신 아버지의 역사인 것을 생각하게 될 때, 당신께서는 어느 한날 기쁨의 날을 맞이하여 당신의 영광된 모습을 만민 앞에 보여 주신 때가 있었사옵니까?

그러한 것을 모두 잃어버리신 채 슬픈 모습이 만민에게 보일까봐 감추고 감추셔서 나타내지 않으려고 하시는 아버지의 심정을 알게 될 때에, 과연 부모의 마음을 지니신 아버지인 것을 저희들은 느끼게 되옵니다. 이땅 위의 타락한 인간의 부모도 사랑하는 귀한 아들딸 앞에는 자기의 추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자식을 피합니다. 그러면서도 눈물을 머금고 그아들딸에게 복이 있기를 천만 번 기도하는 마음이 있는 것을 알게 되옵니다.

타락한 인간 세상에서도 그렇다는 것을 알게 될 때, 본연의 아버지 되시는 당신께서는 어떠할까를 생각하게 되옵니다. 아버지께서 저희들을 바라보실 때 찾고 있는 내일의 소망의 아들딸이 되지 못한 것을 바라보시면서도 당신이 시들고, 당신이 망하고, 당신이 상처를 입고, 당신이 남루한 옷을 입는 자리에 설지라도 아들을 위해서는 개의치 않으셨사옵고, 아들이 영광의 한날을 맞이하게 되더라도 아버지께서는 안방에 들어가 자신의 정체를 나타내고 싶어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저희들을 이처럼 사랑하시고 역사과정을 통해 지켜 주신 천주의 대주재이신 아버지가 계신 것을 알았사옵니다. 저희들은 그 아버지 앞에 진정 감사를 드려야 되겠습니다.

아버님, 당신의 거룩하신 마음을 저희 마음에도 어리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당신께서 참고 나오신 끈기 있고 강직한 인내력을 저희의 마음에 반영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사탄의 세력이 팽팽한 험상궂은 이 세상에 선이 가냘픈 신세로 서게 될때, 사방에서 몰아치는 악의 세력권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 세력권에 몰리고 세력권에 쫓겨 슬픔의 눈물과 더불어 사라져 간 우리의 선조가 얼마나 많았사옵니까? 뿐만 아니라 그 위세에 눌려 가지고 죽음길을 자처해 갔던 사람도 많은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스스로 생명을 아버지 앞에 바치고 싶은 마음으로 간 사람이 많지는 않지만 아버지의 슬픔을 동정하여 그 길을 자청해서 간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길을 안 갈래야 안 갈 수 없는 운명길로 알고 생명을 걸고 나가는 그 길에서, 반기를 든 원수의 총칼 앞에 쓰러져 가면서도 당신의 사랑을 위해서 간 사람도 있고, 당신의 마음을 조이던 수많은 사람들도 있었던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들이 눈물을 흘리고 피를 흘릴 때마다 당신도 눈물과 피가 엉기어졌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되옵니다. 그러기에 아버지께서는 어느 한날 쉴 사이가 있었으며, 어느 한때 소망의 아들이라고 바라보며 당신의 사정을 말씀한 때가 있었사옵니까? 그런 것을 생각하게 될 때, 그런 아버지의 아들이 되고 딸이 되겠다는 것이 무서울 정도로 불쌍하신 아버지인 것을 저희들은 알아야겠사옵니다.

그런 것을 느낄 적마다 아버지 앞에 효성을 다할 수 있는 세계적인 아들딸이 어느 시대에 나올 것이냐를 역사과정에서 염원하시던 그 염원의 역사는 지나가고, 오늘날 광명한 새아침의 여명이 당도하여 하늘의 뜻을 알 수 있는 이 시점을 맞게 하여 주신 것을 진실로 감사드리옵니다.

핍박받고 나오는 통일교회 무리들, 외나무 다리와 같은 외로운 길을 걷고 있는 통일교회의 발걸음을 지켜보시는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졸였는가를 저희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피눈물이 엉겨 있는 사연을 가지고 내가 바라는 소망의 아들이 되어 달라고 간곡히 고대하고 간곡히 부탁하는 아버지가 계신 것을 몰랐다면 모르지만, 그런 아버지가 계신 것을 알았다 할진대는 내가 찢기고 어려움을 당하고 억울함을 당하더라도 아버지의 한의 고비를 이어받아 아버지 앞에 기억될 수 있고, 아버지 앞에 서러움의 눈물 한 방울이라도 그치게 하려는 내가 있음에 감사한다는 위로와 말을 남기고 죽겠다는 그런 마음을 지닌 통일의 자녀들이 있다면, 당신의 후대 하신 사랑으로 그들과 같이하여 주시옵고 그들의 생명에 같이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들은 어린아이와 같아야 되겠사옵니다. 어린아이가 배고플 때는 어머니의 젖을 사모하듯이 저희들도 그렇게 아버지를 사모해야 되겠사옵니다. 생명줄이 없으면 이 땅 위에서 살 수 없는 고독한 무리의 인생인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신의 생명력이 없이는 살 수 없기 때문에, 앞을 바라보며 내일의 소망을 위해 싸워 나가는 통일의 역군들을 굽어살피시옵소서 .

통일교회의 문 아무개를 보고 굽어살피지 마옵시고, 불쌍한 대한민국을 위하여 굽어살피시옵소서. 미래에 아버님 앞에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는 이 민족의 운명이 될까봐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진 통일 역군들의 마음을 보고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그들이 거리 거리를, 혹은 마을 마을을 찾아 한걸음 한걸음 옮기는 행보는 당신의 슬픔과 당신의 사연이 엇갈리는 걸음인 것을 아시고 당신께서 친히 붙들어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그들이 수고하고 싸우는 것은 당신이 원하시는 나라를 위한 것이요, 당신이 원하시는 백성을 위한 것이요, 당신과 더불어 함께하기 위한 것이요, 당신 앞에 영광의 한날을 건설하기 위한 것이옵니다. 그런 그들을 아버지께서 몰라주시면 누가 알아주겠사옵니까? 밤을 새워 가면서 몸부림치는 당신의 아들딸이 있으면 거기를 찾아 주시옵고, 자기의 신세를 망각하고 남의 형제를 부등켜안고 눈물짓는 당신의 외로운 아들딸이 있거든 거기에 같이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제가 그런 날을 거쳐올 때마다 위로해 주신 아버지이신 것을 잘 알고 있사옵니다. 오늘까지 남아진 것도 당신의 위로의 힘이요, 당신이 함께 해주신 은사 때문임을 뼈저리게 잘 알고 있사옵니다. 하오니 그들이 외로운 눈물을 짓기 전에 당신이 외로운 눈물을 머금더라도 그들을 찾아가지 않으면 안 될 사정임을 알고 있사옵니다.

민족을 붙들고 당신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몸부림치는 자리마다 소망의 모습이라고 기쁘신 심정으로 대하고 싶어하시는 간곡한 마음을 가지고 계시는 아버지이심을 알고, 그런 아버지의 사정과 동반할 수 있는 심정의 인연을 가지고 산다는 사실이 얼마나 복되다는 것을 스스로 느낄 줄 아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가 나가는 데 있어서 흥망의 분기점이 어떠하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아야 되겠사옵니다. 신앙길에 있어서 원수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 원수인 것을 저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 여기에 모인 당신의 아들딸들, 3월을 중심삼고 저희들이 행하여야 할 모든 일들을 앞에 놓고 있사오니, 계획하고 있는 일들을 아버지께서 아시옵소서. 그것은 오로지 아버지의 나라를 위한 당신의 뜻을 살핀 연고였사옵고, 남한 각지에 아낙네들을 배치한 것도 당신의 나라의 슬픔을 가로막기 위함이옵니다.

그런 소수의 무리를 바라볼 때마다 당신의 북받치는 서러움이 이 민족 앞에 남아질 수밖에 없는 것을 알고 있으며 당신의 아들딸이 있는 한 이나라는 이들이 지킬 것이요, 이 나라는 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남이 가지 않은 이 길을 가는 저희들을 지켜 주시옵고, 저희들이 갈 길을 살펴 주시옵소서.

당신의 후대하신 마음과 당신의 눈물이 있기 때문에 그로 말미암아 망하지 않는 이 민족을 만들고 망하지 않는 나라의 국민들로 만들기 위해 나가 싸우고 있사오니, 그 자리가 소망의 천국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 슬픔의 눈물을 머금고 당부하시는 내용을 남기기 위한 것임을 알게 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1971년 3월도 후반기를 맞이했습니다. 이렇게 덧없이 흘러가는 역사의 흐름 가운데, 한번 가면 다시 찾아 세울 수 없는 뜻의 길은 지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 저희들의 생애가 다하기 전에 온갖 정성을 다 퍼부어 민족과 인류에게 해방의 한 날을 제시하지 않으면 안 될 통일 교회의 사명을 해야 할 무리들을, 아버지, 긍휼히 보시옵소서.

남북이 분단된 처참한 민족상을 당신이 굽어살피시옵소서. 이스라엘과 유대 나라가 10지파와 2지파로 갈라져 역사적인 한의 원수가 되었던 것을 저희들이 알고 있사옵니다. 그것은 하늘의 도리를 따르지 않은 연고요, 하늘을 위해 가는 길을 가려서 가지 못한 연고였음을 알고 저희들은 당신의 뜻 앞에 그와 같은 배신의 길을 가지 않고 충효의 도리를 다하고 갈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망해서는 안 되는 것이 당신이 소원하시는 뜻인 줄 알고 있사오니, 아버지여, 이 자리에 같이하여 주시옵고, 이 나라에 같이하여 주시옵고, 이 세계에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의 뜻을 위해 제물의 길을 가고 있는 당신의 아들딸 위에도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부탁드리옵니다.

남기신 당신의 뜻의 승리를 보잘것없는 저희들의 수고의 공적으로 말미암아 하루라도 빨리 당신 앞에 이루어 드릴 수 있는 날이 오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니다.

이 시간 저희들의 마음과 몸을 맡으시옵소서. 온유겸손하고 순결한 마음이 되어 당신의 부름 앞에 백 퍼센트 스며들 수 있는 마음의 방향을 가지고, 본성의 심정을 가지고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요, 나는 아버지의 딸이다'라고 내가 말하기 전에 내 마음이 말하고 내 몸이 거기에 스스로 응할 수 있는 당신의 귀염을 받고 사랑을 받고 보호를 받는 아들딸이 되어 남아질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니다.

오늘 이 하루를 당신 앞에 맡기오니 친히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일본에서 온 젊은이들이 여기 있사오니 받아 주시고 이끌어 주시옵소서. 일본과 미국과 독일을 중심삼고 금후에 해야 할 천적인 경륜의 뜻 앞에 충성의 길을 다짐할 수 있는 걸음걸이가 되게 하시옵소서.

국가를 넘어 세계를 움직여야 할 뜻 앞에 아버지께서 친히 임지하시어서 실천의 장을 개척하는 데에 협력하고 동사하여 주옵길 재삼 부탁드리옵니다.

남아진 날들이 기쁨을 촉구하는 날들이 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옵길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