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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책임

일시: 1972.06.01 (목) 장소: 한국 전본부교회

[기 도]

사랑하는 아버님, 오늘은 1972년 6월 1일, 이해를 맞이해서 여섯번째 맞는 달의 첫날이옵니다. 이 아침 위에 당신이 자비와 긍휼과 사랑으로 같이하시옵소서.

전국에 널려 있는 어린 자녀들이 새로운 달을 맞이할 적마다 성지에 집합하여 이달이 복되기를 축원하는 이 아침을 아버지께서 허락하신 가운데 맞고 있을 줄 알고 있사옵니다. 그들이 머무는 곳곳마다 당신의 가호가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더우기 오늘 이 아침은 어린, 젊은 기동대원들이 새로이 출발하는 날입니다. 역사적인 사명을 앞에 놓고 판가리를 지어야 할 사명이 보잘것 없는 이 통일의 무리들 위에 짊어지워져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에, 아버님께서 역사시대에 참고 나오시던 모든 소원의 한 표준이 오늘날 자신들과 더불어 성취되어야 된다는 엄청난 사명이 있는 것을 절감하면서, 삼천리 반도를 향하여 힘차게 진군하도록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높고 귀하신 그 뜻이 낮고 천한 이 땅 위의 이 무리들에게 연결시켜질 때까지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당신의 수난길이 엇갈려 있었다는 것을 저희들은 미처 몰랐습니다. 개인을 찾기 위한 오랜 역사의 노정 속에 당신의 슬픔이 얼마나 컸으며, 가정을 세워 놓고 당신이 소원하시는 종족과 민족과 나라를 그려 오는 싸움의 길이 얼마나 고달펐겠는가를, 아버지여, 수십여 년의 통일의 통해서 너무나도 절감하고 있사옵니다. 그러한 저희들은 가다 말고 하늘을 원망하는 무리가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어떠한 일이 있든지 최후의 정상을 넘어서서 '하늘이여 영광되옵소서. 하늘이여, 당신의 권위를 세워 만피조세계를 주관하시옵소서'라고 할 수 있어야 되겠사옵니다.

아버지여, 저희들은 당신이 소원하시던 본래의 뜻을 성취하시어 해원 성사할 수 있는 그날이 오기를 진심으로 진심으로 바라고 있나이다.

인간은 타락의 권내에 살고 있기 때문에 언제나 연약하고 습관화되기 쉽고 상습적인 생활이 되기 쉬운 것을 잘 아시는 아버지여, 믿어야 할 인간인데도 본연의 뜻을 앞에 놓고 믿을 수 없는 인간을 가려 나와야 하는 그 고달픔이 얼마나 처참하고 불쌍하다는 것을 저희들은 생각케 되옵니다. 믿을 수 없는 인간을 믿어야 되고, 안심할 수 없는 인간들 앞에 맡기고 바라보시는 아버지시여, 직접 개재할 수 없는 복귀의 행각의 노정을 원리에 입각해서 처리해 나오시는 아버지시여, 그렇게 고달프고 그렇게 비참하였던, 하늘의 입장과 뜻을 대하는 사람의 입장을 저희들은 다시 한 번 생각하옵니다.

역사에서 패자의 서러움을 맛보게 하고 하늘에 한을 안겨 주었던 그러한 무리들을 저희들은 다시 회상하면서, 이 시대에서만은 맡겨진 당신의 사명과 바라시는 당신의 소망앞에 일치되지 않는 자리에 서지 않겠노라고 몸부림치는 무리들이 이 땅 위에 있다고 한다면, 그들은 보잘것없는 통일의 무리인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 1960년도부터 지금까지 엮어 오다 1972년을 맞이하였습니다. 만 12년을 지내고 13년을 맞이한 이 해 위에 당신의 새로운 역사의 인연이 연결되어야 할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이것이 21년 기간을 통하여 역사적인 정상을 다시 가려야 할 탕감복귀노정인 것을 생각할 때에 오늘날 종적인 면을 횡적으로 전개시켜 탕감복귀하여야 할 역사적인 엄숙한 숙명의 과제를 짊어지고 있는 무리가 세계에 널려 있는 보잘것없는 외로운 통일의 무리인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들을 일깨우시고 저희를 불러 인도하시는 아버지의 고달픈 사정을 저희들이 생각해 볼 때에, 인간은 하늘을 동정하지도 못한 것을 아옵니다. 하늘을 위해 충정의 절개를 가지고 최후의 전선을 지켜서 하늘 앞에 안위의 안식처를 마련해 드리겠다며 몸부림치는 무리, 생명을 잃는 자리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타개해 갈 수 있는 무리가 많지 못한 것을 저희들이 생각하게 될 때, 언제나 자기 자신권내에서 주관받는 것이요, 자기 자신으로 말미암아 구속되어 버리는 것이 타락한 인간들의 상례인 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아버지여, 저희들만은 예외적인 본향의 무리로서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나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희는 남이 가는 길을 이미 배척하고 나섰고, 남이 바라는 소원을 저버리고 이미 돌아선 자리에서 새로운 소원을 품고 나왔습니다. 엇갈리는 수난길을 보람 있는 생명의 길로 이어받은 그날부터 엄숙한 싸움의 길을 더듬어 나오던 이들이옵니다.

그 과정에 있어서 혹자는 약하게 되고 혹자는 주저하며, 하늘 앞에 슬픔을 남기고 떨어지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혹자는 하늘을 시험하는 자리에서 한 해, 다음 해 자기의 귀한 청춘시대를 걸어 놓고 기다리는가 하면, 혹자 중에는 자기의 모든 정성을 다 바쳐 가지고 하늘을 위하여 미칠듯이 몸부림치는 충효의 아들딸들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아버님이여, 여러 군상이 있다 할지라도 그 사람들을 믿지 마시옵소서. 당신의 사랑의 마음 앞에 위로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은 많은 무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한 생명이라도 간곡히 아버지의 마음을 부여안고 자녀의 모습을 다짐하면서 당신의 심정을 자기 아픈 가슴 이상의 심정으로써 대치하여 가지고, 천만 수난길을 홀로 책임지고 맞아야 할 채찍을 달갑게 맞기 위하여 머리를 숙이고 몸을 구부려 나서는 모습이 하나라도 있다 할진대, 거기는 하늘의 소원이 깃들 수 있고, 하늘이 소망을 다시 추구할 수 있는 자리가 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여기에 모인 어린 자녀들이 그럴 수 있는, 전통적 절개를 지킬 수 있는 하늘의 효자 효녀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나라 없는 저희들은 아무리 부모의 사랑을 받고 아무리 부모 앞에 효성을 다한다 하더라도, 그 자리에 악당의 손길이 펴지게 될 때는 파탄될 수밖에 없는 비참한 섭리의 운세권에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옵니다. 하오니 부모 앞에 효의 도리를 따라 나라를 맞이하여야 할 사명이 저희 들에게 있다는 것을 저희들이 자나깨나 잊지 말게 허락하여 주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 원수의 주권과 나라를 바라볼 때, 원수의 무리들이 그 쇠한 모습을 가지고 하늘이 없다고 울부짖는 이런 세계적인 정상을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저희는 손에 손을 잡고 다짐하면서 최후의 일격을 가하기 위해 온갖 힘을 집중시켜 가지고, 전진에 전진을 하라고 호령할 수 있는 무리가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을 사랑하시어 힘써 나오신 아버지시여, 이 나라를 버리지 마시옵소서. 저희들만으로 이 나라를 구할 수 있다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습니다. 하늘이 협조하여 주고 하늘과 더불어 일치되어야만 에덴의 이름을 복귀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아버지여, 이 나라의 운명을 당신이 책임져 주셔야 되겠습니다.

6월 초하루를 맞을 적마다 저희들은 지금으로부터 22년 전에 있었던 6.25동란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그때에, 이 나라 이 민족이 처참하였던 모든 것은 이 민족이 하늘을 배반하고 하늘의 뜻을 따르지 못하였기 때문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인간은 언제나 부족하고 뜻을 헤아리지 못하는 무지의 소치로 하늘을 슬프게 한 그 보응의 결과가 이 나라의 탕감의 증상으로 나타나게 되어 비참하고 눈물어린 역사의 날을 남기게 된 것을 알고 있습니다.

슬펐던 과거의 수난길에서 수많은 백성이 상해를 입어야 했던 것은 하늘 앞에 잘못하였던 과거를 청산짓게 하기 위한 아버지의 채찍질이었음을 아옵니다. 그러나 아버지, 그것은 온 세계를 대표해서 하늘 앞에 제단을 쌓아 올려야 할 기독교가 책임 못한 때문인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습니다. 이런 자리에서 저희들이 홀로 다짐하며 나오던 외로운 이 길을 수습하시옵소서.

이제 저희들이 가인적인 제단 앞에 아벨적인 제단을 쌓아 올렸사오니 여기에 주인은 아버지가 되시옵소서. 여기에 아버지의 간곡한 심정에 불타는 마음을 연결하시옵소서. 최후의 싸움터를 정비할 수 있는 하늘 정병의 모습을 아버지께서 고대하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저희가 하늘의 병사가 되고 군관이 되게 하시어서, 최후의 전선을 직시하며 원수가 패망의 슬픔을 맞는 그날을 위해서 전진에 전진을 가하여야 할 역사적인 사명이 저희 앞에 촉구된다는 것을 확실히 깨닫는 무리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아버지, 이러한 세계사적인 사명의 촉구에 의해 세계적으로 이루어 놓은 기동대를 아버지께서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미국에 있는 당신의 어린 아들딸들, 혹은 영국에 있는 아들딸들, 독일에 있는 아들딸들, 일본에 있는 아들딸들, 이제 의의 길을 떠나고 있는 당신의 이 어린 자녀들을, 아버지, 지키시옵소서. 이들이 밝아 오는 조국의 광명한 새아침을 마음으로 그리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패운의 슬픔 가운데 쓰러져 가는 역사적인 사탄의 운명과 악의 옛 도성을 바라보며 하늘의 영광의 존전을 찬양할수 있는 승리의 성벽을 쌓고, 영광의 개선가를 온 천주와 아버지 앞에 드높이 봉헌해 드릴 수 있는 그날이 어서 속히 오게 허락하여 주옵길,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6월 초하루를 맞이하였사오니 이제 이 한 달을 맡아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이달에 복잡한 사건들이 있다 할지라도 하늘의 뜻을 중심삼고 주류적인 원칙에 의해서 이것을 수습할 수 있는 이달이 되게 허락하여 주옵고, 하늘의 최대의 염원을 이 나라로부터 아버지 앞에 바쳐 드릴수 있는, 기억되는 이달이 되게 허락하여 주옵소서.

1972년을 중심삼고 보면 6월은 이제 정상을 넘어서는, 7월을 향하는 경계선이기도 한 일련의 최후의 달인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전반기에 있어서 마지막 달을 맞는 첫날 이 아침에 아버지, 복을 빌어 주시옵소서. 여기에 저희들 소수의 무리가 참석하였사옵나이다. 혹자들은 성지에 참석한 어린 자녀들도 있을 줄 알고 있습니다. 뜻을 위하여 미칠듯이 시간을 점령하고 끝날이 되면 모이기를 힘쓰라고 하였사옵니다. 모이기를 꺼려하는 무리들은 반드시 떨어지기 쉽사오니, 뒤에 따라오기 힘든 그런 길을 가고 있는 저희들이 이 시대에 있어서 일치단결하여 시대적 사명이 촉구하는 바의 자극을 느끼면서 모이기에 힘쓰는 자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하늘의 길에는 많은 사람이 출발하였지마는 최후의 골인은 소수의 무리가 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통일교회의 운세에 따라 가지고 출발한 저희들이 그 운세의 인연을 받아서 천천만 성도들과 천추의 역사노정에 빛날 수 있는 승리의 기점을 차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되옵니다. 그 무리는 많은 무리가 아니고 소수의 무리라고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끝까지 견디는 자라야만 아버지의 축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아옵니다. 하오니 먼저는 여기에 서 있는 아들로부터, 이 뜻을 따르고 있는 수많은 형제자매들까지 끝까지 참고 남아지는 무리가 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흘러가는 세월 앞에 뒤따라 흘러가는 무리가 되어서는 안 되겠고, 환경에 에워싸여 거기에 품겨 밀려 나가는 무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저희가 알고 있사오니, 저희 스스로 하늘과 더불어 보조를 맞추고 어떠한 난관이 부딪쳐 오더라도 전면적으로 직행해 나가는 하늘의 용사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이 삼천리 반도를 지켜 주셔야 되겠습니다. 남한의 삼천만 민중이 일치가 되어서 하늘을 추앙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러기 위해서는 봉화를 드높이 들어 어둠에 있는 무리들을 깨우쳐야 할 사명이 저희 앞에 있사오니, 아버지,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이달부터 시작하는 기동대들 위에 불을 붙여 주시옵고, 생명의 불자국을 그 마음으로 튕기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혁명으로 나타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말씀으로 이것을 선포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 말씀이 아버지의 직접적인 창조의 능력의 말씀이 되시게 하시옵소서. 듣는 귀를 깨우치고 그 마음의 본성을 일깨워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하늘 제단 앞에 자기도 모르는 눈물과 더불어 속죄의 제물로서 봉헌할 수 있는 인연들이 횡적으로 벌어지게 허락하여 주옵길,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전해지는 소식들을 듣고, 보고되어지는 내용들을 접할 적마다 당신이 같이하고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게 되옵니다. 아버지, 과거에도 그랬듯이 지금도 그렇게 해주시기를 바라옵고, 지금도 그러하듯이 금후에도 당신이 놀랍게 역사하여 주셔야 되겠습니다. 아버지, 축복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이 한 달을 아버지 앞에 바쳐 드리오니, 부디 이달이 아버지 앞에 자랑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악한 무리들을 밟고 선한 무리들이 승리하는 달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아버지께서 아담 해와를 짓던 6일을 탕감할 수 있는 달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 소원이오니, 부디 이달이 승리의 달이 될 수 있게끔 인도하여 주시옵시기를 재삼 부탁드리옵니다.

아버지, 전체를 아버지의 뜻 가운데서 맡아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참부모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말 씀

타락한 인류를 대한 하나님의 섭리는 인류시조가 타락한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그 섭리의 노정이 귀결되어 하나의 종착점을 이루기를 바라는 것이 하나님이 바라고 나오시는 입장이요,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나오던 우리 선대 조상들이 고대하던 입장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또, 이것은 선을 추구하는 수많은 사람들한테 고대되어 나오던 입장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민족을 통하여서 그것이 하나의 개인으로부터 가정, 종족, 민족, 국가기준까지 고대되어 나오던 입장인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소망의 터전이 되어야 할 민족 앞에 하늘은 이것을 총체적으로 결산짓기 위해서 보내신 분이 있었으니, 그분이 누구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아무도 몰랐던 예수의 처지와 내정(內情)

예수 그리스도의 입장, 그 입장은 예수 그리스도 개인만을 중심삼은 입장이 아니었습니다. 그 자리는 그 시대의 이스라엘 민족을 대표한 개인적인 자리임과 동시에 그 시대에 있어서의 가정, 종족, 민족, 국가를 대표한 자리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그 시대 전체를 대표한 이스라엘에 대한 축복의 중심이 됨과 동시에 만복의 출발점이 될 수 있었던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입장이었음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또한 그분의 자리는 당시의 이스라엘 민족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이스라엘을 남겨 오던 전체 소원의 입장을 대표한 자리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역사가 연결되는 미래의 세계에 언제나 중심의 한 터전으로 남아져 가지고 그 중심과 더불어 일치되는 자리를 연결시키지 않고는 하나님이 임재할 수 없는 중심적인 자리도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렇듯 예수가 소망하던 것은 로마를 정복하고 세계를 하나님의 뜻 앞에 봉헌하기를 바라던 것이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십자가라는 것은 예수 자신이 상상할 수도 없었던 뜻이라는 것을 우리는 원리를 통하여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듯 소망하던 그 예수의 뜻이 그 민족과 더불어 혹은 유대교와 더불어 하나되어 가지고 이루어져야 할 텐데도 불구하고, 도리어 이것이 서로 엇갈린 자리에서 유대교는 유대교대로, 이스라엘 민족은 이스라엘 민족대로, 예수는 예수대로 나뉘어짐으로 말미암아 비참한 결과가 초래되었다는 것을 오늘날 그 어떠한 신자들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그것을 하나님만이 알았고, 예수님 이외에는 아는 사람이 없었던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사연을 중심삼고 볼 때, 예수를 사랑하고 예수를 길러 준 마리아면 마리아, 부모면 부모, 형제면 형제들이 그 예수의 슬픔을, 예수를 중심삼고 관계되어 있는 그 내적인 슬픔을 알고 있었느냐? 잘 몰랐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있었지만, 예수가 품고 있는 내정(內情)의 뜻을 알고 길을 닦아 주며, 그가 당할 수난의 길이 있으면 먼저 그 수난의 길을 가려가며 그 수난을 방지해 주려고 한 부모였느냐 하면 그러한 부모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또, 그런 형제가 있었느냐? 그러한 형제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교회나 혹은 나라가 있었느냐? 그러한 교회도 나라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모마저 그런 입장에 서지 못했기 때문에 그 외에는 일체의 누구도 예수의 입장을 지켜 줄 수 있는, 그가 당하여야 할 수난길과 해결해야 할 어려운 길을 책임지고 대신해 줄 사람은 그 누구도 없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를 따르고 있던 베드로, 요한, 야고보, 이 수제자들마저도, 즉 지상에 제1차적인 소망의 터전을 희망하면서 3년 동안 온갖 정성을 다 기울여 길러 나오고 인도해 나오던 제자들마저도 예수를 배반하는 입장에 섰다는 사실을 두고 볼 때, 인간세상에서는 예수가 당하고 예수가 느끼고 있는 그 내정을 안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는 결론을 지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나라에 예수를 보낼 때, 죽기를 바라고 보내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는 하나님께서 4천년 동안 준비한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와 더불어 하늘이 기뻐할 수 있는 자리에서 통일적인 무리를 갖추어 가지고, 온 세계를 대표하여 승리의 환성과 더불어 하늘의 개선가를 봉헌해 드려야 할 입장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맞아야 할 백성을 잃어버리고, 교회와 가정과 형제를 잃어버리고, 더더욱 이나 제2의 소망으로 세웠던 제자들마저 전부 다 잃어버리고, 생각지 않은 십자가의 운명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예수를 바라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비참했겠는가 하는 것을 여기서 우리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죽음길을 가는 예수 앞에 그 누구도 그의 사정을 알아줄 수 없는 입장이었는데, 하늘이 있다면 하늘은 예수의 사정을 알아줄 수 있는 입장이었느냐 할 때,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죽는다는 것에 대해서도 하늘이 그 사정을 알아줄 수 있는 입장이 못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그런 자리에 서게끔 보낸 것이 아니라 그런 죽음의 길을 당해서는 안 되는 입장에서 보내셨던 것입니다. 그런 예수가 반대의 결과로 나타나는 그런 면을 대하는 하늘은 진심으로 예수를 맞아줄 수 있는 자리에 설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의 최후의 울부짖음인 '아바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하는 이 말씀에는 지극히 비참한 내용이 숨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 마음에 스며드는 고통, 그 고통과 더불어 북받쳐 오르는 한의 사무침은 자기 부모에게 미쳐질 것이고, 자기의 친척과 이스라엘 교단과 이스라엘 나라에 미쳐짐과 동시에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던 로마제국에 미쳐질 수 있는 것이 되었지만, 그것을 전부 자기 스스로 제압해 버리고 잊어버려야 할 예수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늘 앞에 책임 못 하고 가는데 대하여 부끄러움과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버리시는 하늘의 마음을 도리어 동정을 하면서, 버리지 않을 수 없는 아버지의 내정까지 생각하며 하늘 앞에 버림받는 자신을 다시 한 번 반성해야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늘이 자기를 생각해 주는 일면을 느낀 예수는 자기를 버릴 수밖에 없었던 하늘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하늘이 자기를 버릴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지만, 즉 형제들과 이스라엘 교단과 이스라엘 나라와, 로마제국으로부터 버림받을 수밖에 없는 자기의 입장을 그래도 하늘이 기억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아는 예수는, 그 환경에서 그 누구보다도 고통스러운 입장이 아닐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입장에서 자기 하나를 중심삼고 해결될 문제가 사방으로 엇갈려 있었기 때문에, 하늘의 동정을 바라기보다는 도리어 하늘의 마음을 위로해 드리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있었습니다. 그런 예수는 누구보다도 고독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의 한을 풀어 드려야 할 책임이 통일교회에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 이 통일교회와 예수…. 역사적인 기독교는 따로 없는 것입니다. 통일교회와 예수님, 예수님과 우리 개인 개인들을 비교해 볼 때, 시대적인 사명으로 보아 우리 자신들은 어떠한 책임을 가졌느냐? 뜻을 다 이루지 못하고 간 예수의 한을 풀어 주어야 할 책임이 오늘날 통일교회에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예수의 입장을 해원성사해 드려야 할 책임을 하지 못하겠거든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 앞에서 알아주지 못하던 그 마음이라도 해원성사 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 자체의 입장은 못 되더라도 제자의 입장에는 서야 될 것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혹은 제자의 입장이 못 되거들랑 지금까지 믿어 나오던 기독교인들 이상의 자리에는 서야 할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여러분 자신을 중심삼고 돌아보게 될 때, 그 당시 고독한 자리에 섰던 예수, 지극히 절망적인 입장에 섰던 예수와 그의 한을 해원성사해 드려야 할 우리 입장을 두고 볼 때, 예수의 자리를 탕감해 드릴 수 있는 내가 되어 있느냐? 아니면 제자의 입장에서 탕감해 드릴 수 있는 어떠한 자세라도 되어 있느냐? 그렇지 않으면 유대교의 한 교인으로서 예수의 입장을 해원성사해 드릴 수 있는 입장이라도 되어 있느냐? 아니면 이스라엘 나라의 한 백성으로서 예수의 입장을 이해해 주고 예수가 소원성취하는 데 있어서의 책임을 질 수 있는 우리가 되어 있느냐?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 대관절 우리의 책임은 어떠한 자리에서 해결지어야 할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예수의 입장을 내가 대신 해원성사해 드리겠다'고 하는 마음을 가질는지 모르지만 그럴 수 있는 자리에 서기 위해서는 예수 이상의 자리에 들어가지 않고는 해원성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슬픈 사람이 있다 할 때, 즉 아들이 죽어서 스르르 눈물을 흘리는 사럼이 있다고 하면 그 사람을 위로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어떠한 사람이겠느냐? 아들딸이 죽지 않고 다 살아 있고, 그 아들딸을 사랑해 주고 있는 사람은 그 사람을 위로해 줄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지금 한 아들이 죽어서 눈물 흘리고 있는 어머니가 있으면, 그 어머니를 위로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들 둘, 셋을 한꺼번에 잃은 입장에서 슬픔을 느끼는 부모라야 되는 것입니다. 그 부모 앞에서 아들 하나 잃어버리고 슬퍼하는 부모는 위로받을 수 있는 길이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들 하나 잃어 버리고 슬퍼하는 그 부모 이상으로 남편까지 죽거나 일가족이 몰살하여 홀로 남은 여인이 있다면 그 여인은 당당히 그를 위로해 줄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아들 하나 잃어버리고 슬퍼하지만 나는 둘을 잃지 않았소! 나는 셋을 잃지 않았소! 그뿐 아니라 사랑하는 남편까지 잃어버리고서도 이렇게 살아 나가고 있는데 뭘 그러우?' 할 때에 '당신은 알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고 항의할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를 위로해 줄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은 그 이상의 슬픔과 비통을 당한 사람이어야 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를 위로해 줄 수 없는 것이 오늘날 이 세상에 있어서 상례로 되어 있는 것을 우리가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를 위로해 드릴 수 있는 시대적인 탕감의 역군이 되겠다 하는 생각을 가진 우리라 할진대는 오늘날 여러분이 자식을 가지고 모든 것을 이끌어 가는 환경에서 '당신은 이렇게 슬펐으니 내 슬픈 것을 풀어 주시옵소서' 하고 아무리 기도해도 통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밖에 결론지을 수 없는 것이 사실이 아니냐?

그러면, 여러분들은 예수님의 입장을 해원성사해 드리고 싶은 마음이 있느냐? 그렇지 않으면 열두 제자 중의 한 사람, 베드로면 베드로, 야고보면 야고보의 입장을 탕감 해원성사해 주고 싶은 마음이 있느냐? 혹은 마리아 요셉과 같은 입장, 그의 친척이나 그 시대의 교인 한 사람, 백성의 한 사람으로서 해원성사해 줄 수 있는 입장에 있느냐? 그 중에 어느 급에 처해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라구요. 이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통일교회가 해야 할 책임은 무엇이냐? '아! 예수가 남겨 놓은 일을 해야지 ! 그가 소원하던 것은 개인복귀요, 가정복귀요, 종족복귀요, 민족복귀요, 국가복귀요, 세계복귀이니 그 소원 일체를 내가 탕감 해원성사해 드리면 좋겠지' 하고 생각하는 것은 응당 너나할것없이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의 내적인 슬픔을 풀어 줄 수 있는 터전을 닦기 전에는 아무리 개인복귀를 했다 하더라도 그 개인복귀로는 그 대상을 통해서 그의 내적인 슬픔을 풀 길이 없는 것입니다. 또, 아무리 가정을 외적으로 갖추었다 하더라도 그의 내적인 슬픔에 동참해 가지고 그 이상의 비참함을 체휼하지 않은 사람은 그의 한을 풀 길이 없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 이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내적 사정을 체휼할 수 있어야

그러면 오늘날 우리 뜻을 중심삼고 볼 때, 지금의 때는 어떤 때냐? 지금은 종족으로부터 민족을 이끌어 가지고 넘어가야 할 때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그 당시에 있어서 유대교 앞에 몰리던 입장을 다시 탕감하여 가인적인 유대교 일당을 대하여 아벨적인 예수의 일파가 하나되어 가지고, 가인 아벨로서 탕감복귀할 수 있는 시대적인 자리를 이어받은 때가 오늘의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3년노정을 중심삼고 통일교회와 기성교회가 예수의 일파와 유대교가 합하는 역사적인 사명을 재현시킨 자리로 연결시키고자 하는 것이 현재 통일교회가 이어받은 책임을 짊어진 자리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생각해야 할 것은 무엇이냐? 현재의 통일교회의 아벨적인 입장을 고수하는 것도 좋고, 기성교회와 인연맺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좋겠지만 여기에서 문제되는 것은 내적인, 심정적인 기준을 가지고 유대교를 대하던 예수님의 비장한 심정과 그들의 반박을 받던 고충된 심정을 어떻게 여러분이 다시 재현해 가지고 체휼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보다도 전체, 근본 탕감을 해드리는 데 있어서 중요한 것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께서 오늘날 이러한 시대적 환경에 서서 유대교와 예수의 일파가 탕감복귀되기를 바란다면, 예수를 위주해 가지고 그것이 재현되기를 바라지 예수를 남겨 놓은 주위에서부터 재현되기를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현재 우리들의 책임이라는 것은 심각한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반대하는 유대교를 대해 가지고 '화 있을진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여…' 하고 7화(禍)의 저주를 퍼붓던 예수의 사정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던 때와 엇갈린 결과에 처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여러분들도 이러한 자리에 선 것이 아니냐? '화 있을진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라고 저주의 말을 퍼부을 수 있는 자리에 선 예수의 입장이라는 것은, 마음 세계에 있어서 그 누구도 그려 갈 수 없는 갖은 수난길을 극복해 나온 자리에 서 가지고, 다만 예수 홀로 하늘을 위해 있고 하늘을 위해 나오는 그 터전을 완전히 이어받아야 할 유대교가 반대의 입장에서 하늘의 터전의 중심인 자기 자신을 여지없이 몰아내게 될 때에 하늘의 슬픔이 사무치는 것을 느끼는 자리였습니다. 그러한 예수가 자신의 슬픔 때문에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슬픔을 염려하는 입장에서 7화(禍)를 퍼부은 것은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늘을 염려하고 하늘을 사랑하는 의미에서 '화 있을진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라고 한 말은 하나님을 옹호하기 위해 간곡한 심정을 가지고 효성의 도리를 다 하고자 하는 예수에게 있어서는 당연히 있을 수 있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그 자리는 하나님의 뜻이 남아질 수 있는 자리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정지되는 과정에서는 그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뜻이 정지되는 마당에서 당한 십자가의 최후에 있어서 '화 있을진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라고 했다면 모든 것을 다 끊어 버리는 것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뜻이 남아지는 자리가 아니라고요. 뜻이 결단을 봐야 할 입장에서 예수가 '내가 천만번 죽더라도 뜻을 남겨야 할 것이 나의 책임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을 감안하게 될 때 '아바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호소하지 않을 수 없었던 불쌍한 처지의 예수였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된다구요.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예수보다 나은 자리에 서 있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보다도 외적인 면에서는 나은 자리에 선 우리가 진정한 의미에서도 예수를 능가할 수 있겠느냐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볼 때, 예수를 능가할 수 있는 자격이 못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가 그 당시 이스라엘 나라를 중심삼고 편답하던, 즉 전도 노정에 나섰다 할 때, 그 전도노정 이상을 내가 더듬어 와야 할 책임이 있지 않느냐? 그 전도길에 있어서 예수님이 하늘을 위하여 밤잠을 자지 못하고 제자들을 키워 나가던 그런 간절한 심정을 가지고 갔으면 내가 그런 하나의 터전을 넓히기 위해서 예수 이상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밤을 새울 수 있는 내 생애로 이어받아야 될 것이 아니냐? 이런 놀음을 여러분이 자체에서 재현할 수 있도록 다시 일깨우지 않고는, 그런 운동을 하지 않고는 그때 당시 수난과 고통 가운데서 개척자의 선봉에 서 가지고 나가던 예수의 내적 사정을 해원성사해 드릴 수 있는 제자, 혹은 그누구보다도 가까이 설 수 있는 사람이 못 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그것을 해원성사해 드려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뜻을 대해 누구보다도 심각했던 예수님의 내적 심정

자, 그런데 우리는 그때의 그런 자리를 갖지 못했습니다. 외적으로 볼 때 그 이상의 자리를 갖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그 내적 심정이 해원성사될 수 있겠느냐?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리 자유스러운 환경에 있다 하더라도 자진하여 그 이상의 자리를 찾아 나가려는 기간이라도 설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나는 이렇게 가기를 원한다, 나는 이 표준을 넘기 위한 이런 소원이 있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움직이는 것이 예수가 남겼던 내적인 슬픔의 심정을 해원성사해 드릴 수 있는 외적 환경, 그 이상의 자리가 되어 있지 않다 하더라도, 내적인 마음으로 그리는 추모의 심정에 있어서 혹은 사모의 심정, 흠모의 심정에 있어서는 거기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이라도 찾아야 될 것이 아니냐 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문제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때 시대에 있어서 예루살렘 성전을 바라보며 화가 있을 것을 예고하던 예수의 심정, 배반해 나가는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를 바라보면서 슬퍼했던 예수의 그 심정을 여러분들도 같은 처지의 자리, 같은 입장에서 느껴야 할 것입니다. 혹은, 로마제국의 지배 하에서 핍박받는 이스라엘 민족의 서러운 입장을 그 누구보다도 절감하고, 저 원수들을 몰아내야 할 개척자 혹은 선각자의 입장에서, 애국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그 시선은 또한 얼마나 심각했겠는가 하는 것을 느껴야 할 것입니다. 이 밤이 그럴 수 있는 시간이 된다면 밤을 새우는 것은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오늘 저녁에 그런 일이 있을 것이라면 아침, 점심 때를 잊어버리고 그 저녁을 당장 끌어다가 맞이하고 싶은 마음이 언제나 앞설 것이 아니냐? 뜻을 대하는 마음이 간절했기 때문에 뜻에 위배되는 마음에 대해서는 촌시라도 용서할 수 없는 마음을 가지고 때가 오면 깨끗이 정리 정비하겠다고, 역사에 악의 흔적을 뿌리도 남지 않게 제거하겠다고 얼마나 내적으로 다짐했을 것이냐? 가중되는 핍박의 길, 어지러운 환경을 대하는 예수의 3년 공생애는 그렇게 내적으로 다짐하며 사무치는 아픔의 심정을 품고 지내던 때가 아니었을 것이냐? 그 심정을 몽땅 토로하며 인자가 바라는 때는 왔다고, 또 이제 당신이 슬퍼할 수 있는 내정적 사연을 전부 제거시켜 버렸다고, 또 이날이 당신이 원하는 날이요, 이때가 바로 제가 바라던 때라고 자랑할 수 있는 그 자리를 얼마나 그리워하고 얼마나 내적으로 다짐했겠는가 하는 문제를 우리가 생각해 보게 될 때, 그것은 여러분들 보통사람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어려운 문제라는 것입니다.

밥을 먹으나, 자나깨나 그 마음에 있어서 당신의 소원, 그가 짊어진 책임적인 분야를 촌시라도 밀쳐 버리고 잊어버린 때가 있었겠느냐는 것입니다. 혹, 그리운 사람이 인사를 하게 되면, 그리운 자리에서, 반겨 주는 자리에서 인사를 받는 것이 소원이 아니라, 그리워하고 반겨 주는 이 자리가 한날을 차지하고 뜻을 이룬 자리에서 반겨 주고 그리워하는 자리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기쁨이 있으면 모든 조건을 걸고서라도 전부 다밝혀 놓고 싶은 마음을 내적으로 다짐해 가며 나왔던 생활이 아니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혹은 슬픔이 있다면 그 슬픔을 이어받을 수 있는 그 누가 없거든 나에게 남아지더라도, 소망의 그 나라에는 이 슬픔을 남겨서는 안 되겠다는 마음을 다짐하는 생활이 아니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한 생활적인 철학을, 생활적인 주체사상을 갖고 나가는 예수였기 때문에 자기 일신은 십자가에 달려 쓰러지는 자리에서도, 자기는 망하더라도 당신이 소원하는 나라에는 피해를 입혀서는 안 되겠다는 입장에 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단 하나의 길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모든 것이 두절된 환경에서 바라보게 될 때, 소원하던 나라를 돌아서서 찾을 수 있는 길도 없거니와 앞으로 나가더라도 찾을 수 있는 길도 없기 때문에 원수를 대해서 소원의 나라를 다시 심어 놓아야 되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했던 예수였습니다. '나는 죽더라도 그 소망의 나라는 남겨야겠다'는 일념만은 간절했기 때문에, 그 원수의 배후를 통해서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생각한 예수는 거기에서 눈물을 머금고 다시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 쓰라림은 그러한 자리에 선 사람 외에는 모를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성사하려면 내적인 입장에 서야

그러한 모든 내정적인 해원성사를 해드리지 않으면 그때 하늘에 맺혔던, 예수에게 맺혔던, 혹은 하나님과 그 아들되는 예수님 사이에 맺혔던, 즉 부자관계의 심정 가운데 맺혔던 그 사연이 언제 풀려 나갈 것이냐? 심각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 심정에 슬픔이 맺히게 된 것은 예수 개인의 실패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예수의 실패도 실패지만 그때에 잃어버린 이스라엘 민족과 세계사적 인연을 걸어 놓고 맺혀진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슬픔이요 예수의 슬픔으로 맺혀진 이것을 터쳐 내지 않고는 하나님의 뜻을 성사할 수 없는 것이요. 예수의 소원을 재현시켜서 땅 위에 지상천국을 성사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를 두고 볼 때, 이렇게 맺혀진 그 내정적 사연을 타파해 버릴 수 있는 길을 모색하고 가야 할 것이 통일교회 교인들이 가야 할 길이요, 통일교회가 해야 할 책임이 아니겠느냐? 여러분이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예수는 만나고 싶었던 교단과 치리하고 싶었던 그 나라를 얼마나 소원했겠는가, 얼마나 그리워했겠는가, 얼마나 사랑하고 싶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 나라를 맞이할 수 있는 때가 됐다면, 천 번을 죽더라도 그 한 나라를 갖기 위해서 서슴지 않고 나설 수 있는 결의가 되어 있다면 그 자리가 예수님의 자리가 아니겠느냐? 또, 이 한때를 이루기 위해서는 천만인을 희생시켜서라도 예수를 남겨 놓고 그 뜻을 이루어 주고 싶은 것이 하나님의 소원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를 생각하게 될 때에 그런 때를 다시 재현시켜 지상에 나타내야 할 것이 예수가 세워 놓은 기독교의 사명, 즉 지금까지 수많은 피의 대가를 치러 가지고 남겨 놓은 기독교의 사명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을 여러분이 생각해야 됩니다.

이렇게 역사적인 숙명적 과제와 천륜적인 내정적 사정을 해결지어 가지고, 엉클어진 이것이 하나의 평지, 하나의 자연스러운 환경으로 하늘의 기쁜 마음으로 연결되고 하늘의 자랑만으로 연결될 수 있는 내정이 되고 사정이 되어 엉크러질 수 있다면, 거기서 비로소 하늘이 기뻐하고 기독교가 기뻐하고 예수가 기뻐할 수 있는 터전이 될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그러지 않고는 하늘이 기뻐할 수 없는 것이요, 예수와 역사적 기독교의 순교자들이 기뻐할 수 있는 자리가 못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생각하게 될 때, 오늘날은 통일교회 교인들이 다시 각성해야 할 때가 아니냐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소위 오래되었다는 무리들 가운데 현재의 입장 그 자체를 가지고 짜증내고 싶으면 마음대로 짜증내는 사람이 있는 것은 통일교회의 본질에 위배되는 입장인 것입니다. 자기 개인적인 사정을 가지고 전체의 뜻인 양, 전체의 사정인 양 적용하려는 무리가 많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다 흘러가 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러면 어떠한 사람만 남을 것이냐? 외적인 나라를 위해서 흠모하고 나서는 자보다도, 외적인 출세를 그리워하여 통일교회에 인연맺고자 하는 무리보다도 오직 이 슬펐던 내정을 붙들고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고독의 자리를 더듬으며 탐지해 나가는 것을 생활의 전체 임무로 느끼고, 책임으로 느끼는 사람입니다. 만일 그런 길을 오늘도 계속해 나가는 사람이 있다 할진댄, 그는 앞으로 올 이상의 새로운 승리적 개인의 터전으로부터 국가적, 세계적 해방의 터전을 이어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하늘 앞에 외적인 입장에 설 수 있는 사람은 될는지 모르지만, 내적인 입장에 설 수 있는 사람은 못 되는 것입니다.

24시간 마음을 뜻 앞에 모으는 정성으로 행동해야

이러한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우리의 책임' 하게 되면 여러분은 어떠한 자리에 서서 책임을 추구해야 되느냐?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하루 24시간의 생활을 했다 할 때 그 생활이 어디로 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저 그렇게 해 가지고 어제와 오늘이 차이가 없고, 한 달과 두 달을 지낸 생활이 차이가 없다 할 때는 외적으로 흘러가기가 일쑤인데 그러한 습관성과 폐단성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말하면, 본부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는…. 본부라는 이 자리에 오기 위해서는 모든 지방에서 가려 가지고 와야 할 것입니다. 자신이 본부면 본부에서 같이 살고 있다면 자기가 어떠한 책임을 지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 않아요? 자기의 책임은 중요시하면사도 본부의 입장은 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구요. 자기의 개인적인 위신이 상실되는 것은 도도히 옹호하려고 하면서 본부교회의 위신이 상실되는 것은 망각하는 이러한 퇴폐적인 무리가 많다는 거예요. 여기서부터 우리는 다시 한 번 정비해야 될 것입니다.

보라구요. 수요일 저녁이면 말예요. 통일교회 교인들을 나는 믿지 않아요. 믿을 수 없더라 이거예요. 숱한 말을 했고 숱한 맹세를 시켰지만…. 이러한 무리들을 바라보게 될 때. 외국 사람들을 데려다가 이들을 들이 쳐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여러분, 하늘의 감정에는 먼 사람을 통해서 하늘의 슬픔이 접어드는 것이 아닙니다. 눈앞에서 어른거리는 무리들로 말미암아 직접적인 생활 감정이 좌우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가까이 나타난다는 것은 지극히 무서운 것입니다. 가까이 서 있다는 것은 지극히 무서운 것이라구요. 따라서 하루 24시간 그 마음은 하늘 뜻 앞에 조금이라도 오점을 남기지 않는가 염려해 가지고, 한 발자국, 한 거동, 일체에 자기의 온 정성을 기울여 가지고 행동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런 생각은 뒤로 두고 언제나 자기가 나타나는 거라구요. 이것은 하늘이 요구하는 본질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여기 젊은 사람들은, 우리 할머니들이 기도하고 하는 것을…. 물론 기도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할머니들이 기도를 하고 예배를 드리는 데 마지못해서…. 기도하는 것은 밥먹는 일과 같습니다. 신앙자의 기도생활은 밥먹는 것과 같습니다. 밥을 안 먹으면 배고프지요? 그와 마찬가지라구요. 그 누구에게도 형용할 수 없는 굶주림을 느끼는 것과 같은 그 무엇이 있어야 됩니다. 사람만 대해 가지고는 자기의 희망을 찾을 수 없는, 숨막힐 것 같은, 질식할 것 같은 환경을 느낄 수 있는 생활이 신앙생활이라는 것입니다. 선생님 자신도 그런 거라구요.

여러분이 이런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하고, 진정 이 나라가 어떻게 될 것이냐 하는 염려의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의 눈과 같은 시선으로 이 나라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유대교와 같은 입장에 선 기성교회를 바라보면서 저들이 어떻게 될 것이냐? 틀림없이 통일교회 식구들이 가던 걸음을 재차 걸어오지 않을 것이냐? 우리가 먹을 것을 먹지 못하며 수난길을 가면서 밥을 얻어먹는 놀음을 했고, 나중에는 개밥을 먹으면서까지 뜻을 위해 쫓던 비참한 생애를 남긴 역사가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간 것은 통일교회가 원해서 간 것이 아니라 기성교회가 반대함으로 말미암아 간 것이기 때문에 반대한 책임자들은 그 자리에 가는 것입니다. 만일에 그 자리를 안 가는 사람이 있다면 반드시 그 아들딸에게서 피해를 입는 것입니다.

내정적 안식의 터전을 확보시켜야

수택리에서 목사 공청회를 할 적마다 선생님이 느끼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불쌍한 것이 목사구나 하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밥목사라는 거예요, 밥목사. 그와 마찬가지로 요즈음의 통일교회 교인들이 통일교회에 처해 있는 것은 밥을 먹기 위해서가 아니냐, 밥식구가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거예요. 밥식구. 갈 데가 없어서 여기에 붙어 있는 무리들은 앞으로 선생님이 그냥 두지 않을 것입니다. 하늘은 나가는 그런 사람들을 달가와하지 않습니다.

나무의 잎은 일년 동안 아무리 그 줄기와 열매에 이익 되는 놀음을 했을지라도 가을이 되면 떨어지게 마련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바라보는 통일교회는 여러분이 생각하는 통일 교회와 다릅니다.

여러분들을 볼 때, 저와 같은 무리를 위해서 내가 일생동안 이 길에 정성을 투입했던가, 저 같은 할아버지면 할아버지, 할머니면 할머니, 젊은이면 젊은이의 무리를 찾기 위해서 내가 저들을 만나 왔던가 하는, 후회의 일면을 자극시키는 불쌍하고도 퇴폐적인 무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연한이 길면 길수록 자랑할 수밖에 없고 불러 의논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되어야지, 찾아와 가지고 의논하려고 할 때 힘이 없는 모습을 보이는 그러한 무리가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10년 20년이 흐르더라도 서로 서로가 찾아오기를 바라고, 서로서로가 존중시하고, 서로서로가 그리움이 남아질 수 있는 자리에서 만나는 그러한 무리를 바라는 것이지, 만나 가지고 자기 개인들 사정만 늘어놓는 그 따위 무리들은 만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책임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제일 주의해야 할 것은 습관화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저 그렇게 교회에 나가는 거라고, 내가 어제도 교회에 이렇게 나왔으니 그것으로 됐고 오늘도 이렇게 나가니 그것으로 되었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습관화된 거라구요. '하늘이야 슬프든 말든 내가 뭐 아나? 내가 믿는 통일교회는 이런 것이다' 이렇게 자기가 알고 있는 것만을 통일교회의 전부로 아는 무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배후에 수많은 사연이 엇갈린 입장에서 뒤넘이쳐 가고 있는 하늘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뒤넘이치는 하늘이 언제나 그것을 앞에 내세워 가지고 해결하려는 표준 밑에서 전진하며 따라가게 되어 있지, 그것을 다 잊어버리고 내가 앞장서게 안 되어 있는 거라구요.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의, 우리의 책임이라는 것은 내정적 안식의 터전을 어떻게 확보시키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바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피하게 하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 뜻대로 하시옵소서' 하며 간절한 기도를 하던 예수까지도 '아바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는 절망적인 일면을 남겼습니다. 그 절망적인 입장을 오늘날 우리가 재현해 나감으로써 '야야, 이제는 그만큼 노력했으면 되지 않겠느냐'고 말려 줄 수 있는 그런 자리를….

그것이 이루어져야만 비로소 하나님이 슬펐던 역사를 잊고 '이제야 됐다! 이제야 내 뜻이 이루어졌구나! 이제야 그토록 불쌍하게 죽었던 예수의 소원이 성사되지 않았느냐'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 그것을 그냥 남겨 놓고서 뜻이 이루어졌다고, 해원성사되었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입장까지 못 가서는 쳐박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의 책임은 어디서부터 해야 되느냐

우리의 책임이라는 것은 어디서부터 해야 되느냐? 외적인 것부터 하는 것이 아니고 내적인 것부터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외적인 인격 체제를 우리의 책임이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내적 인격을 단장해야만…. 외적으로 보이기 위해서 움직이는 것은 다 일소해 버리고 내적으로 숨어서, 그 누구도 모르게 가슴이 메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끼면서 전체가 동정할 수 있는 환경에서 잠들고 깨며, 그 자리를 적셔 가는 생활을 하는 무리가 먼저 되어야 될 것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집에 들어가서 제멋대로 살다가 나타나 가지고는…. 그런 가증스러운 무리가 많지요? 그렇기 때문에 외적인 책임이 문제가 아닙니다. 외적인 책임은 전부 다 흘러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통일교회는 예수의 내적인 심정을 해원성사하고 하나님의 내적인 심정을 해원성사해야 됩니다. 이것이 이 시대에 있어서 예수가 무엇보다도 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아픈 심정을 남겨 주었던, 불효된 죽음길을 갔던 예수가 오늘 이 시대에 있어서 우리로 말미암아 해원성사해 드리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가 후원해 주고, 하늘이 후원해 주고, 사도들이 후원해 주고, 기독교가 후원해 주고, 역사적인 선조들이 후원을 해줘야만 될 것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 지금까지 그렇게 생활해 나와 가지고 후원을 해줄 것 같아요? 어림도 없다구요. 미급한 자리에서 된 듯한 무리는 망하는 것입니다. 가지도 못하고 중간에서 썩어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돼요.

그러기에 때가 가까와 오면 올수록, 끝날이 되면 될수록 두렵게 알고 해야 될 것은 밀실에 들어가 기도하라는 거예요. 진실된 자리에서 해야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진실된 자리. 밤이 되어 여러분이 밤하늘을 바라볼 때 그 별은 어젯날의 별과 다르다는 거예요. 너는 나에게 소원의 별로써 나타나고 내일의 소원을 촉구하는 빛으로 비추어 주느냐…. 깊은 심정의 인연 가운데서 모든 사연을 포괄해 가지고, 하늘을 향한 깊은 동정의 마음이 어려 가지고 하늘을 위로해 드리는 마음이 자기도 모르게 눈물과 더불어 그 환경을 에워쌀 수 있는 그런 자리에 들어가서 그 자신이 아들로서 하늘을 아버지라 불러야 됩니다.

여러분,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 제자들을 뒤에 두고 홀로 외로운 자리에, 정숙한 자리에 가 가지고 기도 시간을 찾아 나섰던 예수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따르던 5천여 무리를 다 뒤에 두고 홀로 하늘 앞에 기도 드린 예수…. 5천여 무리는 하늘을 위로해 주고 싶어서 나타난 무리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늘 앞에 자기 내정적인 심정으로, 하늘 앞에 5천여 무리를 맞는 이상의 기쁨으로 나타날 수 있는 아들의 모습을 어떻게 대신하느냐는 것이 언제나 문제였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된다는 거예요. 통일교회 문선생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하는 표준은 무엇이냐? 내 갈 길, 내 갈 길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됩니다. 내가 갈 길, 내가 서 있는 자리는 이래야 된다고 하는…. 이래야 된다고 하는 그것이 뭐 잘먹고 잘살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심정적 기준 앞에 있어서 빚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선 이러한 내적인 책임을 다하는 데서 외적인 책임이 정리되는 것이지 내적인 책임을 못 하는 데서 외적인 책임이 정리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표준을 놓고 볼 때, 예수님과 예수님 제자들의 입장이 달랐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최고로 절정의 자리에서 긴장해 가지고 마음을 졸이고 있는데 제자들은 내적인 면에서 천리 만리라는 거예요.

6천년의 심정을 이어받아 뜻을 이루어야 할 책임을 지고 있는 우리

이런 문제를 중심삼고, 오늘이 6월 초하루인데, 2차 7년노정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남은 이 3년간을 중심삼고 여러분들이 무엇을 해야 되니나? 예수의 해원성사를 해야 됩니다. 이 3년 기간은 예수님 해원성사의 기간이요, 하나님 해원성사의 기간입니다. 십자가에 내가던 예수, 유대교를 잊어버렸던 예수, 이스라엘 나라를 잊어버렸던 예수의 슬픔을 해원성사하기 위한 이 기간과 맞먹는 것이 2차 7년노정이라구요. 그러므로 그것을 이 땅 위에서 이 민족과 수많은 기독교를 중심삼고 재현해 가지고 예수의 책임을 해원성사해 드려야 할 이번 기간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어디서부터 출발해야 되느냐? 외적인 것이 되었더라도 내적으로 성립되지 않으면, 외적인 것도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이게 제일 문제가 크다는 거예요.

불원한 장래에 사람들이 많이 올 텐데 여러분들의 그런 생활 모습 가지고는 안 된다는 거예요. 본부에 있는 할머니들도 다 안 된다는 거예요. 여러분들 가만 안 둔다고요. 나이 많은 사람들 전부 다 아주 안 돼먹었다구요. 들어와 가지고 본(本)이 되지 못하면 스스로 물러가야 됩니다. 자기가 본부에서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면 스스로 물러가야 된다구요, 쫓겨나지 말고 그 누구든지 맛있는 거나 먹으면 '헤헤' 하고 좋은 거나 있으면 '헤헤' 하고…. 주둥이나 끌고 다니면서 좋은 것이나 얻어먹겠다고 하고, 몸뚱이를 끌고 다니면서 대접이나 받겠다고 하면 망해요. 내가 그러한 무리를 만나기 위해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36가정이면 36가정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36가정의 권위를 알아달라고 생각하는 무리가 있다면 이것은 36가정 전체 책임이라는 거예요. 눈물을 흘려도 누구보다 많이 흘리고, 노력을 해도 누구보다 많이 해야 됩니다.

지금 통일교회를 위해서 진정으로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몇이나 되느냐? 남자 녀석들 가운데는 찾아볼 수 없을 것이 아니냐? 선생님이 지금 어떠한 입장에서 뒤넘이쳐 가고 있는지 생각하는 녀석이 없다고요. 뭐, 그것을 알아달라고 하는 것도 아니라구요. 문제는 어디에 있느냐? 지금은 때가 때이니만큼 안팎으로 정비할 때가 아니냐는 겁니다.

이러한 것을 알아 가지고 본부에 있는 선생님으로부터 새로운…. 여러분은 지방에 나가 활동하는 기동대와 전도대원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구요. 일년 열두 달이 가도 '전도대원 나가면 뭐 하느냐? 하며 어떻게 되어 가는지 교회가 발전하는지, 전도대원들이 굶는지 사는지 관심이 없습니다. 관심이 없는 데서는 뜻의 성사는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생명을 잃어버린 이상의 관심을 갖고 출발하는 것이 종교의 길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를 두고 볼 때, 여러분들이 협회장에서부터 다시 새로운 출발을 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책임이라는 것은 무슨 사무를 보거나 직장에서 자기 책임을 정해서 하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라고요. 그 책임이라는 것은 6천년의 심정을 이어받아 가지고 뜻을 이루어야 할 책임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된다구요. 내적인 사연을 해결하는 자리에서, 그런 기반 밑에서 나는 나홀로 있지 않다고 하는 사고방식을 갖고 나가야 되겠어요. 더우기 6월 초하루, 이달에 있어서는 그러한 문제들을 청산짓고, 이 1972년도에 있어서 6수를 넘어 가지고 7수를 맞이해야 될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를 생각하게 될 때, 우리의 책임은 어디서부터냐? 내정적 심정에서부터입니다. 여기가 아담이 타락할 때의 슬픔의 자리, 예수가 십자가에 돌아갈 때의 슬픔의 자리라는 것입니다. 이 2대 슬픔이 하나님의 심정에 못박는 슬픔이 되었습니다. 그 이후의 무슨 기독교에 있어서 순교니 하는 것은 이것에 비하면 문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후손된 우리들이 이것을 탕감하여 해원성사해 드리지 않고는 해방의 터전이 나에게 있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라고요. 그런 것을 여러분이 알고 그런 면에 주력해 가지고, 앞으로 협회장으로부터 전체 책임자들은 기도 시간을 중요시해야 되겠습니다. 이렇게 내정적 심정문제를 보다 중요시하고, 또 교회가 그런 면에서 더욱 박차를 가해 나가기를 바라면서 말씀드렸습니다.

​기 도

​아버지, 통일교회는 일반 교회와 다릅니다. 통일교회에서 흘리는 눈물은 일반 교인들이 죄를 회개하고 자기 개인이 구원받기 위해 흘리는 눈물과는 다릅니다. 통일교회 교인으로서 흘리는 눈물은 예수님과 하나님의 심정을 부여안고 위로해 드리는 눈물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통일교회가 책임해야 할 분야가 이것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버님. 여기에 서 있는 이 자식도 뜻을 따라 나오면서 지금까지 싸워 왔습니다. 당신의 심정을 위로할 수 있는 그때를 바라보면서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 못하고, 분풀이하고 싶은 일을 다 하지 못하고 가슴에 꽁꽁 싸 두고 나오고 있는 것을 당신은 알고 있사옵니다. 스스로 회개하는 자리에서 '너는 이러한 슬픈 사연을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해원성사 하지 않고는 죽을래야 죽을 수 없는 운명을 가진 자가 아니냐' 하고 다짐하며 지금까지 걸어 나온 것을 아버지께서는 아십니다.

이제 반세기의 생애를 넘기고 이제부터 남은 여생을 통하여 달려가야 할 길이 남아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때로는 청춘시대와는 달리 피곤함을 느낄 적마다 자신도 모르게, 이런 자리를 차지해 하늘을 위로해 드린다고는 하나 이런 연령에 하늘에 효의 도리를 다 끝내지 못한 것이 얼마나 원통한가 하는 것을 느끼고 있는 불쌍한 사나이인 것을 당신은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라 부르는 말의 내용에는 천만 사연이 있고 천태만상의 차이가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스승을 바라보고 기뻐하는 통일교회 교인이 있거들랑 평면적으로 나타난 기쁨으로 연결된 그것만으로서 남아질 것이 아니라, 배후에 연결시키어서 역사적 사연이, 거쳐온 곡절이 스승과 자기의 사연을 통하여서 풀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스승을 통하여서 그런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 마음들이 그런 것을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선생을 바라보고는 좋아하는 사람이 많지만 뜻을 바라보고 좋아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아버지여, 선생은 뜻을 위해 태어난 것을 내가 알고 있는데 이들은 뜻의 길을 가기를 원치 않사옵니다. 선생만을 원하는 자리 가지고는 아무것도 안 되는 것입니다. 섭리를 알고 난 후에는 선생과 더불어 뜻의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옵니다. 이것이 통일교회와 인연을 맺은 저희들의 운명길인 것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자기가 엮어 온 역사적인 사연을 미처 몰랐고, 역사적인 탕감의 내용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선생과 절대적으로 하나되어야만 혜택의 인연으로 그의 가지로서, 잎으로서, 생명을 지닐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만 되겠사옵니다. 천부의 시대적 혜택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그 자리를 염원하기 때문에 그러는 것인 것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자기가 반겨 맞는 그 자리, 자기가 간곡한 사연을 생각하고 있는 그 자리가 하늘의 마음과 일치된 자리가 못 되면 스스로 자기가 나타나 가지고 말할 수 없는 죄책감을 느껴야 할 통일의 무리인데도 불구하고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을 느낄 적마다, 아버지여, 나만이라도 아버지 앞에 그래야 된다고 하는 것을 지금까지 생애를 통해 다짐해 왔습니다.

아버지여, 1972년 6월 초하루를 맞으면서 이달이 아담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잃어버렸던 6수를 탕감할 수 있는 달이 되기를 바라옵니다. 그러한 달이 되기 위해서 온갖 정성을 다하고 이달을 의의 있게 보내고 싶은 마음 간절하옵니다.

아버지여, 저희들은 아담이 타락하던 그 슬픔을 상기하여야 되겠고, 예수가 십자가 도상에서 못박힘을 받아 피를 홀리고 쓰러져 운명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비참해 하던 부모의 심정을 동정해야 되겠습니다. 자식들이 잘못하여 죽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그것을 보고 극복해야 할 아버님이 얼마나 불쌍한가 하는 것을 저희들이 알고, 천년을 하루같이 눈물로써 위로해 드리지 못하는 자신을 대해 슬퍼할 줄 아는 무리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무리가 통일교회의 평신도가 되어야 할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러는 자가 희귀하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여기가 하늘의 일대 심판이 가해져야 할 입장을 피하지 못할 자리라는 것을 저희들은 더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버지, 이 무리를 이렇게 이끈 것은 이런 자리에 머물러 있게 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교회가 무엇을 하든 자기들만으로 이루어야 된다는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하늘과는 반드시 엇갈릴 것이고, 하늘과는 반드시 분열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끝까지 참아 나가는 자리, 끝까지 동참하는 자리에서 승리의 날이 초면 기뻐 찬양하며 환성을 지를 수 있는 사람보다도 그날을 맞게 될 때, 엎드려 땅에 얼굴을 대고 얼굴을 들지 못하며 통곡을 하는 무리를 하늘이 더 찾고 있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 내가 바라던 그날이 지금 왔다'고 할 수 있는 무리보다도, 그날을 맞게 될 때, 하늘 앞에 하늘의 수고를 치하드리고 그토록 하늘이 그리던 날을 늦게 맞이하게 된 것을 민망하게 생각하며, 눈물로써 하늘을 위로해 주기 위해 얼굴을 드는 그런 무리가 되어야 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끼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러지 않고는 예수의 한과 하늘 아버지의 한을 풀어 드릴 수 없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당신이 원하시는 나라를 저희들도 그리워하고 있사옵니다. 당신이 원하고 당신이 찾고자 하는 백성과 그 땅을 저희들은 미친듯이 그리워하고 있사옵니다. 밥을 먹지 못하고 주린 자리에 들어가더라도, 혹은 영어의 몸이 되더라도 이 마음을 빼갈 수 없는 사연이 남아 있기 때문에 오늘의 통일교회가 남아진 줄 알고 있사옵니다. 숱한 곡절의 세월을 지내 가는 가운데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릴 수 있지만 당신이 원하시는 소원의 나라와 그 소원의 이념만은 잊어버릴 수 없사옵고, 당신의 마음 앞에 맺혀진 원한만은 잊어버릴 수 없사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 그 원한을 풀고 당신의 뜻인 소원의 나라를 찾기 위한 것이 저희의 필생의 삶이요, 밥을 먹기 전에 다시 한 번 부끄러운 자신을 수습하고, 길을 나서기 전에 혹 하늘이 같이하지 않을까봐 두려워하며 자신을 수습해 가야 할 것이 통일교회 교인으로서 가야 할 정상적인 생활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 이제 이 6월을 아버지께서 지키시옵소서. 저희들의 걸음은 이미 생명을 각오하고 나선 걸음이옵니다. 더우기 일본에 있는 당신의 어린 아들딸들을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치열해 가는 싸움의 대기선이 벌어져 나오고 있사옵니다. 하늘이여 여기에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약자의 모습으로 나타난 통일의 무리가 패자의 서러움으로 귀결될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옵니다. 아버지, 그들을 지켜 주시옵소서.

더우기 이번 기동대가 이 아들의 위신과 체면을 세우게 하시옵소서. 지켜 주셔야 되겠사옵니다. 아버지를 믿고 아버지의 뜻을 알았기 때문에 이런 일을 가려 나왔사옵니다. 이것이 만일에 당신이 소원하는 대로 되지 않게 될 때는 당신의 위신은 물론이고 이 아들의 위신과 통일교회의 위신도 서지 않을 것이옵니다. 당신이 염려하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 아들도 염려하고 움직이고 있사오니, 아버지,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포위망을 뚫고 나가 하나의 개방도로를 개척하지 않으면 안 될 사명을 저희가 붙잡고 있사오니, 저희가 머무는 곳곳마다 마음으로 다짐하던 내정을 아시는 아버지여. 이제 저희들을 믿으시옵소서. 저희들은 기필코 이길을 완수해 내야 되겠습니다. 만일에 그들이 못 하게 될 때는 우리 한국에, 뜻을 위하여 있는 무리들이라도 또다시 나서야 되겠습니다.

세계의 책임자들이라도 규합하여 다시 정비해 가지고 이 일을 재출발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알고 있사오니, 아버지여, 부디 지키시어 이 일을 성사하시옵기를 바라옵니다.

만일에 이 한국에 통일교회가 없게 될 때는, 만일에 통일교회에 이 아들이 없게 될 때는, 만약에 아버님이 여기에 계시지 않게 될 때는, 이 무리는 쑥밭밖에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여! 대한민국의 통일교회가 기세를 떨칠 수 있는 이 기회를 놓치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통일교회에 있어서 책임을 진 제가 아버지 앞에 책임하는 데에 지칠 줄 모르는 기백이 넘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가고 오는 세월 앞에 빛되는 자랑의 한날을 세워 놓고 승리와 영광을 아버지 앞에 돌려드리고 가야 할 필생의 사명을 잘 알고 있사옵니다.

지금까지 이끌어 주신 아버지, 그 배후는 숱한 피의 대가와 수난의 대가로 엮어진 것이었습니다. 이 대가의 터전 위에 부름 받은 통일교회 무리들은 이것이 자기들로 말미암아, 자기들이 받을 수 있는 복으로 받았 다고 생각했다가는 큰 화를 받는다는 것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 자리는 지극히 두려운 자리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역사적인 참소의 조건이 깃드는 자리이기 때문에 하루하루의 생활에서의 승패의 절정이 자기의 생명을 노리고 건너가고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깨닫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본부를 아버지께서 사랑하시옵소서. 본부를 위해 기도하는 무리들은 여기에 사는 그 누구를 위해 기도한 것이 아니라 하늘을 위해 기도한 것이었사오니, 그들을 동정하시어서 최후의 승리의 한날까지 남아지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오늘 하루로부터 이 한 달을 향해 힘차게 출발할 것을 아버지 앞에 약속하면서, 내내 우리의 책임인 내적 책임을 강화하고 외적 책임분야를 정비해 갈 줄 아는 무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전체를 뜻과 더불어 승리하기를 바라면서, 참부모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