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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하나님과 하나의 세계종교 8

일시: 1972.03.20 (월) 장소: 영국 런던 후렌즈미팅하우스

​오늘 저녁, 이 자리에 참석하여 주신 신사 숙녀 여러분께 먼저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서구문명의 기수로서 많은 공헌을 하였고, 현세계에 있어서 관용과 정의에 입각한 국민적 긍지를 가진 영국 국민께 감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입장에서 나를 본다면 나는 벙어리와 같은 입장이고, 내 입장에서 여러분을 보면 여러분은 귀머거리와 같은 입장입니다. 이러한 두 장벽을 헤쳐 가지고 서로 말할 수 있는 사람으로, 혹은 들을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사람이 여기에 서서 통역하는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역이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여러분이 아시고 많은 협조를 해주시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여러분이 보다시피 저는 동양 사람입니다. 그리고 한국 사람입니다. 한국 하면 여러분들은 영국 군인들이 한국동란 때에 참전하여 많은 희생자를 낸 사실을 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수년 전부터 오늘과 같은 이런 공석에서 여러분을 만나고 싶었는데, 그것이 오늘 이와 같이 이루어진데 대하여 먼저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여러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저녁, 여러분과 같이 생각해 보고자 하는 말씀의 제목은 '하나의 하나님과 하나의 세계종교'입니다. 이런 방대한 제목을 가지고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이런 제목으로 얘기하다 보면 시간 관계상 자연히 비약이 없을 수 없으니, 여러분이 양해하시고 들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존재하는가

지금 세계정세를 바라보게 될 때, 과연 어떠한 주의 사상이나 국가가 금후의 이 세계를 책임지고 올바른 하나의 세계로 인도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지극히 생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이미 이 세계는 인간의 힘으로서는 올바로 치료할 수 없는 한계점에 도래했습니다. 그런데 만일에 하나님이 계시다면, 하나님께서는 이 세계의 모든 분야를 잘 아시기 때문에 이 세계를 책임져 주시고 올바른 세계로 인도해 주실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이 계시다면 어떠한 개인이나 어떠한 국가의 국민이나 혹은 세계도 그 하나님을 따르지 않을 수가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계에는 하나님이 계시는지 안 계시는지를 확실히 알고 있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확실히 계시다면, 그분은 금후의 세계에 대한 문제라든가 현세계에 대한 문제를 누구보다도 잘 아시는 절대적인 분이실 것이므로, 또한 그분은 책임지고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의 주인이실 것이므로, 그분만이 이 세계를 올바로 지도할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잠깐 말씀드리고 지나갑시다.

오늘날 우리는 이 우주가 존재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크게는 태양계에서부터 작게는 지구의 지극히 작은 원자까지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존재하기 위해서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무엇이든지 힘이 없어 가지고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힘이 있기 전에 있어야 할 조건이 뭐냐 하면 작용입니다. 작용을 하지 않고는 힘이 존속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작용을 하는 데 있어서 혼자서는 작용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반드시 주체와 대상이 있는 사이에서만 작용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작용의 원칙

여러분이 아무것도 없는데 손을 올렸다내렸다하게 되면, 어느누구나 여러분을 보고 이상한 사람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고무줄에 조그만 물건이 매달려서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잡기 위해 손을 올렸다내렸다하게 되면, 그때는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할 것입니다. 만일 영국의 수상이신 히이드(Edward Heath)씨가 아무도 없는 광장에 서서 껄껄 웃으면서 큰소리로 웅변을 한다면, 아무리 수상이라고 해도 그분은 이상한 사람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조그만 컵을 하나라도 들고 그것을 보면서 강당이 떠나갈 듯이 큰소리로 고함을 치고 외친다면, 그때는 정상적인 사람인 것입니다.

만일 그보다 더 높고 절대적인 하나님께서 아무런 상대도 없는데 기뻐하고 춤을 추신다면, 그 하나님도 역시 정상적인 하나님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지극히 작은 그 무엇을 들고 그것을 바라보시며 웃고 춤을 추신다면 그때는 정상적인 하나님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가 얼마나 귀중한가 하는 것을, 상대의 가치가 얼마나 귀중하다는 것을 여기서 우리는 확실히 알고 넘어가야 되겠습니다.

주체와 대상이 작용을 하는 데 있어서는 서로 손해나는 작용은 절대로 안 하는 것입니다. 만일 손해나는 데도 작용한다는 원칙이 있다면 이 우주는 형성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체와 대상이 작용하는 데는 주체에게 있어서나 대상에게 있어서나 서로 이익 될 수 있기를 바라고 작용을 하기 때문에 우주가 형성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오늘 저녁 여기에 참석하신 여러분들이 미스터 문이라는 사람을 찾아와 만나서 손해났다 할 때는, 이 자리에 다시 오라고 해도 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여기에 참석하신 여러분들은 무엇인가 이익될 수 있는 것이 있을 성싶어서 온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 이익될 수 있는 분야가 크면 클수록 영구히 계속될 수 있는 작용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여기 런던의 피카딜리 서커스(Piccadilly Circus)에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나가는데, 어떤 한 사람이 '내가 매일같이 피카딜리 서커스에 나가는데 매일 10전씩 손해보기 위해서 나간다'고 한다면 그는 미친 사람인 것입니다. 거기에 나갈 때는 반드시 자기에게 이익될 수 있는, 플러스될 수 있는 무슨 요건이 있을 성싶기에, 그것을 바라고 나가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사업을 하는 사업가들이 서로 합할 수 있는 것도 그 사업의 목적이 두 사람이면 두 사람이 합해 가지고 서로에게 이익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데에서만 이 그 작용이 성립되고, 주체와 대상의 관계가 맺어지는 것입니다. 젊은 처녀 총각들이 서로 좋아하는 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좋아하려면 서로서로에게 이익 될 수 있는 무엇인가를 보장하는 내용이 제시되어야만 관계가 맺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학교면 학교의 화학 실험실에서 어떤 원소들로 하여금 작용을 일으키게 하려고 아무리 힘을 가하더라도 작용을 하지 않는 원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힘을 가하지 않더라도 어떤 원소는 자기들끼리 작용해 가지고 서로 합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원소들까지도 작용했다가 자기가 손해나겠으면 작용을 안 하는 것입니다. 손해나는 장사는 아무리 강제로 하게 해도 안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둘이 서로 이익될 수 있는 상대적인 요건을 갖추게 될 때는 가만히 놔 둬도 합하게 되는 것입니다. 광물세계에서부터 식물세계, 동물세계, 인간사회의 제반 상황에까지 이런 원칙을 중심삼고 작용한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주체와 대상관계가 있어 가지고 작용을 하고, 작용을 함으로 말미암아 힘이 생기고, 힘이 생김으로 말미암아 존재는 존속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최고의 대상

만일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 하나님도 주체적인 입장에 계시기 때문에 대상적인 존재를 필요로 하시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절대적인 분이 대상을 필요로 하신다면 이 우주 가운데에서 과연 어떤 것을 대상으로 삼으시겠느냐 하는 것을 생각해 볼 때, 그것은 광물도 아니요 식물도 아닙니다. 동물 가운데 최고의 기준에 서 있는 우리 인간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을 두고 보면 우리 인간은 이 우주 가운데 최고의 걸작품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절대적인 하나님 앞에 있어서 상대적 가치를 지니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창조하신 것을 한 작가에 비유해서 말해 봅시다. 어떤 작가가 자신이 구상한 작품을 만드는 데 있어서 자신이 구상했던 것 이상의 작품이 되었다면, 그 작가는 그 작품을 영원히 보존하고 싶어할 것입니다. 아무리 비상사태가 벌어지더라도 그것만은 보관하고 자랑하고 싶어할 것입니다.

만일 자기가 만든 작품이 주인의 사정을 알고 주인의 상대가 되어 이야기를 하고 혹은 기뻐할 수 있는 대상적인 입장에 선다면, 주인이 그 얼마나 기뻐하겠어요? 그러므로 하나님이 작가와 같은 입장에서 이 세상을 지으셨다면, 그 가운데 최고의 걸작품인 인간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도록 지으셨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그 작품이 하나님을 좋아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섭섭하게 생각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 작품이 하나님께서 생각지 않는 행동을 한다고 해도 하나님은 그 행동을 이상하게 생각하시기보다 오히려 재미있고 신기하게 생각하실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계셔 가지고 인간을 지으셨다면 하나님과 인간이 상충될 수 있는 입장에 서게끔 지으시지 않았다고 보는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을 소유하고 싶어해

절대적인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 하나님이 창조주로서 창조물을 만드신 목적과 창조물인 우리 인간이 바라는 목적이 서로 어긋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지으실 때, 하나님과 하나될 수 있고 하나님과 연결될 수 있는 그 무엇을 바라고 나가게끔 지으시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은 그 목적을 중심삼고 인간과 하나될 수 있는 길을 향하여 찾아 나오시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참석한 여러분들 가운데 세계에서 제일 훌륭하신 분이 있다면, 여러분은 그분을 스승으로 모시든가 아니면 그보다 더 가까운 자리인 그분의 아들딸이 되고 싶을 것입니다. 또, 세계적인 성인이 있다면, 그분을 자기가 모시고 싶어하고 그분의 아들딸이 되고 싶어하는 것도 두말할 바 없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높은 절대적인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 하나님을 소유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는 그 하나님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작용할 수 있게끔 내몰아 주고 끌어 주는 힘이 없어 가지고는 거기에 도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의 마음, 양심작용인 것입니다. 우리의 욕망인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어느누구를 막론하고 이 우주를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합니다. 이 우주를 지배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전세계 인류가 자기의 지배 밑에서 주관받기를 바라는 것이 인간의 욕망인 것입니다.

만일 인간이 하나님을 소유할 수 있는 입장에 선다면, 하나님이 지으신 물건과 하나님이 갖고 있는 권한을 소유할 수 있고, 하나님이 행사하는 모든 일에 동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욕망, 그 최고의 목적점은 하나님을 점령하고야 말겠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세계를 점령했다 하더라도 세계를 지배하는 그보다 더 높은 분이 있으면 그분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욕망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가능성이 없는 데에서 우리 양심이 그런 작용을 한다면, 조금 전에 말한 주체와 대상관계를 맺지 않으면 작용하지 않는다는 이런 논리는 그릇된 논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도 우리 인간세상을 통해서 하나되려고 하시고, 우리 인간도 하나님을 중심삼고 하나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서로 손해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거기에 주체와 대상에게 플러스될 수 있는 그 무엇이 있기 때문에 작용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양심작용이라는 것은 자고로 인간이 생겨난 그날부터 언제나 이 세계를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체가 있어 가지고 대상적인 관계가 이루어지게 될 때, 두 사람이 보다 이익될 수 있는 환경을 갖추게 될 때. 반드시 양심은 작용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양심은 밤이나 낮이나 일생을 통해서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체와 대상의 관계가 없게 될 때는 양심이 작용을 안 한다는 원칙을 두고 볼 때, 우리 인간이 반드시 양심작용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아 양심의 주체 되는 그 무엇이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영원히 소유하려면

그러면 인간과 하나님이 주체와 대상관계에 있어서 합하고자 하는, 서로서로 하나되고자 하는 공동목적의 자리가 어떤 자리냐 하는 가치적인 내용을 우리 생각해 봅시다. 도대체 인간들은 하나님 앞에 어떤 관계의 자리에 처하게끔 만들어졌느냐 하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욕망을 보게 되면, 최고의 것을 전부 다 갖고 싶어합니다. 하나님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점령했다 하더라도, 만일에 그 하나님 속에 한 가지라도 남아진 것이 있다면 그 나머지까지도 점령하지 않고는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인 것입니다.

결국 하나밖에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점령하게 될 때, 비로소 그 하나님은 영원히 내 하나님이 되는 것이요, 하나님의 소유는 영원히 나의 소유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점령하지 못하게 될 때는, 아무리 지금 당장 하나님을 모시고 있다 하더라도 그 하나님을 영원히 소유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주체 되시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있어서 사랑을 중심삼고 서로 점령하고 점령당할 수 있는 자리가 어떤 자리냐? 이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중심삼고 인간이 제자의 입장에서 사랑받는 자리냐 하면 아닌 것입니다. 혹은 하나님에게 딸이 있고 아들이 있다면 하나님의 사위가 되고 며느리가 되는 자리가 최고의 목적이냐 하면 그것도 아닌 것입니다. 인간은 그보다도 한걸음 더 들어가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딸이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 이외의 자리는 원치 않는 것입니다. 이런 관계가 맺어질 수 있는 자리가 바로 하나님과 인간의 부자관계의 자리인 것입니다.

인간을 중심삼고 인간이 찾아가야 할 자리, 이 우주의 궁극적인 진리문제를 놓고 누구보다도 고심한 사람이 있다면 여기 있는 이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신비스러운 경지에 들어가서 인간이 찾아야 할 우주의 최고의 진리가 무엇이냐 하는 것을 타진하였을 때, 그때 얻은 답이 무엇이냐 하면 방금 말한 부자의 관계라는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를 낳아 준 세상 부모와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낳아 준 부모와의 관계는 타락권내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타락하지 않고 하나님과 인간이 하나될 수 있는 본연의 자리, 그 자리에서 맺어진 하나님과 인간의 부자의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만일 인간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 하면 그 아버지의 것은 모두 아들에게 상속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부모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일생 동안 수고해서 돈을 벌어 가지고 집을 짓고 재물을 만들어 놓은 것을 보고, 어린 아들딸들이 '이건 우리집이야, 전부 다 우리 것이야' 한다고 해서 자식에게 '요 녀석아, 내가 이 집을 마련하기 위해 수고할 때 네가 보기나 했느냐? 하고 책망하는 부모는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런 자녀를 보고 '야 이 녀석 이거 기특한데' 하며 칭찬을 합니다. 그 아이가 어리면 어릴수록 더 귀엽게 보이는 것이요, 더 큰 소망을 갖고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지내 봐서 알겠지만 어머니 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 좋은 것과 귀한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을 것입니다.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타락한 우리 인간도 이렇거늘, 타락하지 않은 본연의 인간이 아버지라고 하는 그분, 하나님이야 두말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지은 우주는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우리 아버지라고, 내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 속에 있는 하나밖에 없는 사랑, 절대적인 그 사랑도 내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 사랑.

만일에 아들의 자리에 서 가지고 부모에게 '어머니 아버지가 갖고 계시는 사랑은 내 사랑이 아니고 남의 집 아들의 사랑입니다' 한다면, 그 부모는 기분이 나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영원히 자기 사랑이라고 주장하는 아들일수록 하나님은 그 아들을 미워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기 아들딸이 자기보다 훌륭하게 되는 것을 기분 나빠하는 부모가 있어요? 부모는 잘났는데 그 부모에게서 태어난 애기를 가만히 보니까 못났어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아기가 어머니 아버지보다 더 잘생겼소' 하면 그 부모는 좋아하는 것입니다.

자, 이러한 입장을 두고 볼 때에, 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실 때 무가치하게 지으시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고 좋아하실 것인가 슬퍼하실 것인가를 모르게 짓지 않으셨다는 거라구요. 만일 그렇게 지으셨다면 하나님은 이상한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인 분이기에 무엇이든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모르고 지으셨다면 그 하나님은 잘못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인 분이기 때문에 우리 인간을 지으실 때도 절대적인 상대로 지으신 거예요. 인간의 가치가 그만큼 될 수 있으면 얼마나 멋지겠어요?

인간이 도달해야 할 소망의 자리

하나밖에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영원히 내 사랑으로 만들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점령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우리 인간은 자기의 생명을 내놓고 일생을 투입해서라도 점령하려고 아니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거기까지 가야 할 인생길이 우리 인간에게 남아 있는 것을 아는 양심은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착하고 좋은 사람, 훌륭한 사람이 되어 세계를 지도하고 온 우주 앞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이 되라고 밤낮 재촉하는 것입니다. 혁명을 하려고 해도 이 세계를 지배하겠다고, 이 세계를 자기 것으로 만들겠다고, 이 세계보다 더 큰 것이 있으면 그것도 점령하겠다고 하는 이 양심작용은 혁명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만일 양심이 없으면 악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고통도 안 받을 것입니다. 이 양심이 있어 가지고 밤이나 낮이나 남 모르는 가운데 악한 행동을 하게 되면 '야 이놈' 하고 반드시 채찍질하는 거라구요. 양심작용은 악한 행동에 대해서는 언제나 공격적이라구요. 그러므로 우리는 악이 혁명을 하지 못하는 이유를 이 양심작용을 보고 증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이 악만 없다면 우리 인간은 얼마든지 빨리, 얼마든지 급하게 그 목적지를 향해서 갈 수 있다는 거예요.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이 고귀한 양심을 중심삼고 찾아가는 본연의 가치의 자리가 하나님의 아들딸이 될 수 있는 자리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위대하고 엄청난 인간의 욕망을 채워 줄 수 있는 자리는 그 자리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딸의 자리, 이것이 우리 인간이 도달해야 할 소망의 자리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자기 아버지가 되고 자기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더라도 아버지는 위에 있고 자기는 아래에 있는 것 같은, 상하관계와 같은 그런 기분이 든다는 것입니다. 그때에 우리 인간은 어떤 생각을 하느냐? '아버지, 아버지가 앉으신 그 자리를 나에게 한번 주세요. 나도 아버지의 자리에 앉고 싶어요.' 하는 욕망이 우리 인간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제 이놈, 안 된다' 하게 되면 다 깨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럴 수 없다구요.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그런 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어서 그래라, 어서 그래라' 하시면서 그 자리까지도 우리 인간에게 부여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 자리까지 인간에게 주고 하나님은 우리 마음에 임재하시어 우리의 마음을 성전으로 삼고 계시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예수를 믿고 구원받았다 하는 사람들의 소원이 무엇이냐 하면, 고린도전서 3장 16절에 나온 바와 같이 '하나님의 성전'이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성전이 되겠다고 하는 거예요.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성전에 임하시어 우리 몸뚱이와 하나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주체와 대상이 횡적으로 하나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성경에 보면 '아담이 모든 만물을 일컫는 바 그것이 이름으로 되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하나님은 아담에게 '모든 것을 주관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아담이 어떻게 알아서 이 우주 만물을 주관하겠어요? 그러나 하나님이 아담의 마음에 임재해 가지고 하나되면 하나님이 아시는 것을 아담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과 인간이 사랑의 인연으로 딱 하나되면 그것을 누가 갈라 놓을 수 있겠어요? 만일 그것을 갈라 놓을 수 있다면 이상이니 목적이니 희망이니 하는 것은 다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사랑하는 아들을 대하여 그와 같이 고귀한 자리, 하나님이 처해 있는 동등한 자리까지도 주고 싶어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은 여러분이 여러분의 아들딸과의 관계를 중심삼고 생각해 보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아들이 부모보다 높은 자리에 서서 부모를 대해 이래라 저래라 한다고 해도 부모는 그것이 기분 나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 인간은 절대적인 하나님과 동등한 자리에 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우리 인간이 절대적인 하나님과 동등한 자리에 설 수 있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많은 것 같지 않습니다.

아버지라면 자식에게 좋은 것을 다 주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그러한 자리까지 부여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인간이 아들의 자리를 점령하고 하나님과 동등한 자리까지 점령했는데, 하나님을 가만히 보니까 하나님은 절대적인 하나님으로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고, 동시에 이 우주를 지배할 수 있는 걸작품인 사람을 창조하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그 창조의 능력까지도 날 주소'라고 아니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볼 때, 여러분이 아버지라면 어떻게 하겠어요? 그것도 안 된다고 할 수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그것까지도 우리 인간에게 주고 싶어하시는 것입니다.

사랑의 힘

여러분, 콩을 보면 말이예요. 콩을 보면 두 조각이 하나의 껍질에 쌓여 있습니다. 이것은 열매이기 때문에 결과적인 물체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어떻게 생겼느냐 하는 것이 궁금할 것입니다. 창세기 1장 27절을 보면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했는데 일남일녀를 창조했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귀납적으로 보면 하나님 가운데는 한 남성과 한 여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되어 가지고 하나의 주체로 나타난 분이 하나님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성품을 닳아 난 것이 아담 해와인 것입니다.

여러분, 콩 껍질을 벗겨 보면 거기에는 두 조각이 있습니다. 그 둘 사이에 두 잎사귀가 있는데 거기에서부터 줄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두 조각 가운데서 한 쪽만 없어져도 전부 다 죽어 버립니다. 어느 한쪽이 없어져도 생명이 존속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실체로서 아담 해와를 지으셨기 때문에 그 자체가 하나님의 형상을 닮지 않고서는 창조의 능력을 행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체와 대상인 남자와 여자가 사랑을 중심삼고 횡적으로 완전히 하나되게 될 때, 본연의 주체 앞에 완전한 대상이 됨으로 말미암아 거기에서 창조의 능력인 생명의 부활이 생겨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의 힘이라는 것은 통일의 힘인 것입니다. 생명을 창조하는 창조의 힘이라는 것입니다. 완전한 남자와 여자가 하나되는 사랑관계를 중심삼고 주체 되시는 하나님과 하나될 수 있는 사랑의 인연이 맺어지기 때문에, 거기에서부터 생명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겨 나는 것이 오늘날 인간들이 사랑하는 자녀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창조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에게도 인간을 창조해 내는 권한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아담 해와를 지으시고 나서 얼마나 기뻐하셨으며, 아담에게 앞으로 천지 만물을 주관하도록 하는 권한을 주고 얼마나 사랑하셨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가지도 유업으로 우리에게 느낄 수 있게 한 것이 자녀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여러분들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을 완전히 받아 선민이 되어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완전히 맺어진 부부가 되어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아들딸을 낳아 본 사람이 있습니까? 그렇게 태어난 사람이 있다면 그들에게는 원죄가 없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지옥의 공포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아들딸이 태어난 가정에는 구주가 필요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집을 지을 때에 쓰레기통을 먼저 만들어 놓고 집을 짓는 사람이 있어요?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살다가 보니 쓰레기가 나오고 그러니까 할 수 없이 쓰레기통을 만드는 거예요. 마찬가지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쓰레기통과 같은 지옥을 먼저 만들어 놓으셨겠어요? 그럴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종교니 기도니 신앙이니 뭣이니 하는 것은 전부 다 타락했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조금 전에 말한 4대 요건,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하나님과 동등할 수 있고, 하나님의 창조위업을 계승하고 하나님같이 창조해 가지고 만족을 느낄 수 있는 이런 4대 요건을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몽땅 부여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인간의 가치가 하나님의 가치보다 못할 것이 없다는 거예요. 그러나 우리는 인간이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이 네 가지 요건 가운데 어떠한 것도 바랄 수 없었고 생각 하지도 못했던 것입니다.

여기 미스터 문이 여러분을 만나 가지고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은 나 자신의 머리로 생각해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알았고 하나님에 대해서 깊이 파고들어가 보니 그런 내용이 있기에 그것을 여러분 앞에 밝혀 말하는 것뿐입니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창조의 패턴, 창조목적으로 찾아 나가는 하나의 모형의 기준을 하나님도 바라시는 것이요 인간도 바라기 때문에, 인간이 그 모형의 기준에 일치할 수 있는 점을 찾아 나가야만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차지한 후에는 그 이상의 것이 없습니다. 인간은 그것을 알기 때문에 그 이상의 것은 요구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어 가지고는 이상이니 행복이니 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어떤 인물이 있다 하더라도 그 인물이 혼자 살게 된다면 그걸 뭐라고 그래요? 고독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 아무리 부처(夫妻)끼리 재미있게 산다 하더라도 그 부처끼리만 가지고는 안 되는 거예요. 아들딸이 없어서는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훌륭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하더라도 부모가 없어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을 충만히 받고 부부의 사랑을 충만히 주고받은 사람이라야 그 아래에서 자기의 아들딸을 충만히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행복의 기틀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절대적인 하나님과 인간을 완전히 통일시킬 수 있는 것은 사랑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자리는 권한을 주장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높아도 좋고 낮아도 좋은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유명한 사람, 예를 들어 영국의 수상이면 수상이 있다고 합시다. 그분에게는 조그마한 아들이 하나 있는데, 그분이 그 아들을 대해 가지고 '야, 나는 영국 수상이니까, 영국 국민이 나를 높이 대하는 것과 같이 너도 나를 존경하지 않으면 안 돼'라고 말을 하겠어요? 그렇게 자식을 대하는 부모가 있어요? 부모는 자기 위신이고 뭣이고 다 없애더라도, 자식을 위해서 무엇이든지 그저 끌어안고 봉사하고 희생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것이자 상대의 것

여기서 우리가 하나의 결론을 내려야 될 것은, 오늘날 인간들은 사랑이라는 것을 전부 다 자기 것으로만 알고 있기 때문에 폐단을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자기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먼저는 하나님의 것이요. 그 다음에는 상대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가 없으면 사랑이고 뭣이고 아무것도 없는 겁니다. 우리 인간은 그런 고귀한 사랑이 자기에게서부터 생겨난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상대를 통해 가지고 찾아온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아무리 미남 미녀가 있다 하더라도 혼자서는 사랑의 관계를 맺을 수가 없다는 거예요. 상대를 하늘같이, 땅같이 무엇보다도 고귀하게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자리에서 찾아오는 사랑을 맞는 데서만이 행복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 절대적인 사랑, 자기 스스로 완성을 이룰 수 있고 모든 행복의 기틀을 이룰 수 있는 그 사랑, 그 사랑은 상대를 통해서 오기 때문에, 그 사랑을 이어받기 위해서는 당당해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겸손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어제 저녁에 나는 BBC텔레비젼 방송국에 가 봤습니다. 거기에서 결혼문제에 대하여 논의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부부관계가 자기를 중심삼고 되어지는 것같이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젊은 녀석은 열도 좋고 스물도 좋고 여자를 그렇게 데리고 살면 좋겠다고 말하는가 하면, 또 여자를 서로 정해 놓고 산다는 것은 욕심이니 네 여자, 내 여자 할것 없이 전부 다 바꿔 가면서 살자고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나중에는 어머니를 데리고 살아도 되고 할머니를 데리고 살아도 된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억천 가지 말로 표현합니다. 타락한 인간세상에서도 사랑을 말하게 될 때, 형용사를 갖다 붙일 때에는 제일 좋은 것을 갖다 붙입니다. 영원한 사랑, 불변의 사랑, 유일의 사랑, 절대적인 사랑…. 왜 거기에다 그런 말을 갖다 붙여요?

자유결혼이 좋다고 한다면 내가 한 가지 묻겠어요. 어머니가 둘이고 아버지가 넷이라면 좋겠어요? 그것을 환영하는 젊은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거예요. 우리가 본성적으로 볼 때도, 자기가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을 누가 손을 대고 끌고 가면 좋아요? 여기에서 여러분이 이걸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질서를 바로잡아야 할 때

오늘날 기독교 문화권의 원수는 공산주의인 것입니다. 공산주의는 종교집단을 가리켜 아편이라고 합니다. 서구문명의 사상적인 지주가 무엇이냐 하면 기독교 사상이고, 그 기독교 사상의 근원은 어디에 있느냐 하면 가정에 있다는 것을 그들은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정만 파탄시키면 서구의 문명권은 자연히 자기들의 밥이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들은 10대의 청소년을 노리고 있는 것을 알아야 된다구요. 그들은 이들에게 퇴폐적인 자유사상을 불어넣는 것입니다. 구세대와 신세대를 이간시키는 것입니다. 청년 남녀들이 위험한 아편 주사를 맞고, 엘 에스 디(LSD)를 먹고, 자유사랑을 하여 혼란이 벌어지는 것은 여러분이 경각하지 않으면 안 될 중요한 문제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빼낼 수 없는 절대적인 중심, 행복의 여건이나 이상의 여건이 될 수 있는 사랑을 누구든지 아무렇게나 할 수 있다면 되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만일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었다면 하나님은 절대적인 하나님이 아닙니다. 절대적인 하나님께서 두 개의 사랑길을 취할 수가 있어요? 없다는 거예요. 한 개밖에 취할 수 없다는 거예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는 순수한 혈통을 남기고 싶지, 개 돼지와 같이 아무렇게나 혈통을 남기고 싶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금후의 세계에 있어서 사랑의 질서를 바로잡지 못하게 된다면 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시는 것이 음란이예요, 음란. 소돔과 고모라도 그래서 망한 것입니다. 이제 이런 실정에서 기독교 사상을 가지고 이것을 막을 수 있는 때는 이미 지나가고 있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여기 서 있는 미스터 문이 지금까지 말한 그런 고귀한 인간의 가치가 있는 자리, 절대적인 가정을 중심삼은 부모의 사랑, 부부의 사랑, 자녀의 사랑을 이루어 하나님과 완전히 일치할 수 있는 사랑의 자리를 모색하시는 하나님이시라면 이러한 잡동사니의 사랑을 바라시겠어요? 그런 사랑은 안중에도 없다는 거예요.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 하나님은 반드시 절대적인 사랑을 바라실 것이라고 여러분은 생각할 것입니다. 또, 우리 인간들도 그런 사랑을 최고의 희망으로 삼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주체와 대상의 관계를 통해 우리의 양심이 계속적으로 이런 작용을 하는 것을 보니까, 손해나는 작용은 안 한다는 원칙, 또 주체가 없으면 작용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두고 볼 때, 하나님이 있을 성싶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거 나는 모르겠소' 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위해서 참고로 한마디 더 하고 넘어갑시다.

신비의 왕궁으로 된 인체를 보면 신을 부정 못할 것이다

여러분, 우리 몸을 한번 생각해 보자구요. 우리 몸 가운데 제일 중요한 부분은 머리 부분입니다. 머리를 자세히 살펴보면, 가짓수는 네 가지이고 구멍은 일곱 개입니다. 다시 말해서 눈이 둘, 귀가 둘, 콧구멍이 둘, 입이 하나, 이렇게 모두 일곱입니다. 가만히 보면 사람이 생겨나는 데는 그냥 생겨나지 않고 하나님을 닳아서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눈은 하나님을 상징하는 것이요, 코는 사람을 상징하는 것이요, 입은 만물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상징적으로 볼 때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태어날 때는 눈이 먼저 생겨나는 거예요. 인간에게 있어서 제일 앞장선 것이 뭐냐 하면 코라는 거예요. 이 모든 만물 지중에 제일 선두로 서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인간을 상징했다는 것입니다. 또, 입은 만물을 섭취해 가지고 만물과 직접적인 생명이 연결되는, 몸을 기르는 그런 관계로 갖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계를 보면 3단계로 되어 있습니다. 귀는 동서남북, 사방을 통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목에서 머리가 왔다갔다하는 것은 코 때문이 아닙니다. 눈 때문에 왔다 갔다하는 거예요. 이것은 무엇을 상징하느냐?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우주가 움직인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손도 세 마디로 되어 있지요? 그리고 팔도 세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 몸 전체를 두고 보더라도 머리 부분과 몸통 부분 그리고 다리 부분, 이렇게 세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복중에 있는 애기들은 손을 대개 이렇게 쥐고 자랍니다. 아까 말한 하나님은 이성, 즉 두 성품을 가졌다고 말씀드렸듯이 이 엄지는 하나님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주의 중심인 하나님을 상징하는 거예요. 또 이 네 손가락은 동서남북을 상징하고 춘하추동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네 손가락의 세 마디는 열두 달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강조할 때 주먹을 쥐고 흔드는 것은 우주를 대표해서 흔든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주먹을 쥐고 치게 될 때는 온 우주를 대표해서 치겠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체는 창조하신 주인의 본성과 대응적인 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인간을 소우주라고 하는 것입니다. 비록 작지만 인체의 구조에는 이 우주만상의 모든 것이 다 들어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심장의 구조를 보면 뿌리와 마찬가지이고, 폐의 구조를 보면 나뭇잎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인체구조는 나무의 줄거리가 들어가 있는 거와 마찬가지라는 거예요. 이와 같이 우리 인체는 이 우주만상을 대표한 소우주라는 것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눈도 3단계로 되어 있어요. 코도 두 개의 구멍으로 들어가 안쪽으로 가면 하나로 되므로 3단계로 볼 수 있습니다. 전부 다 3수로 연결되어 있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멋대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이런 이야기는 그만 하고 제자리로 돌아가서 얘기합시다. 여러분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라고 참고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 그건 모르겠소 하는 사람이 있기에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우리 눈을 한번 가만히 봐요. 눈을 가만히 볼 때, '이 눈이 어디서 생겨났어'라고 묻게 되면,'어디는 어디야, 어머니 아버지한테서 생겨났지'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면 어머니 아버지 눈은 어디서 생겨났어요? 할아버지 할머니한테서, 또 할아버지는?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그렇게 맨 종지조상의 눈까지 가는 거예요.

하나님이 지었든지 낳았든지간에 눈이 있습니다. 우리가 태어날 때, 어머니 배 안에서든가 혹은 하나님이 만들어 주었든가 이 눈이 생겨났는데, 이 땅 위에 태어나면서 이 눈이 태양계가 있다는 것을 알았겠어요, 몰랐겠어요? 눈이 알았겠어요? 몰랐을 것입니다. 몰랐다구요. 눈이 알 수가 없다구요. 눈 자체는 알 수가 없다구요.

그런데 눈이 깜박깜박거리는 것은 태양의 복사열에 의해서 눈동자의 수분이 증발되기 때문에 그것을 막아 주기 위해서입니다. 눈의 수분이 증발되면 큰일나는 거예요. 눈에 30분만 수분이 없다면 눈동자가 빨개져 가지고 큰 사고가 벌어진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수분의 증발을 방지하기 위해서 눈을 깜박깜박해 가지고 물을 뿌려 놓는다는 것입니다. 이제 왜 눈이 깜박깜박하는지 알았어요?

그 다음에는 눈썹이라는 스크린을 만들어 왔는데 이 눈썹이 공중에 먼지가 있다는 것을 알았겠어요, 몰랐겠어요? 몰랐을 거예요. 그런데 이 눈썹이 이렇게 쭉 되어 있지요? 벌써 인간이 서서 다닐 것을 알았다구요. 그리고 이 눈썹이 이렇게 도랑을 만들어 놓았다구요. 싹 잘 되어 있다구요. 여기에 땀이 흘러내릴 때, 눈썹이 이렇게 방지하지 않으면 눈에 땀이 전부 흘러들어가게 되어 사고가 나겠으니까 그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눈에 땀이 흘러들어가면 문제가 생긴다는 것을 눈썹이 미리 알았겠어요?

여러분, 코가 왜 이렇게 생겼어요? 여기선 넓다가 여기에서는 이렇게 좁아지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큰일난다는 거예요. 호스로 집어 넣는 것같이 여기에 모든 것이 다 들어간다구요. 아래가 넓은 것은 오물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래를 넓혀 놓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아래가 넓어진 거라구요. 그뿐만 아니라 여기에 도랑을 쳐 왔습니다. 도랑 없는 사람 있어요? 땀이 흐르면 이렇게 가라고 만들어 왔다는 거예요. 자. 이 도랑이 땀이 흘러내릴 것을 미리 알고 이렇게 됐어요? 또, 공기에 먼지가 있는 것을 알고 털이 나 있어요.

또, 귀도 거꾸로 달렸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벌써 앞으로 말하고 앞으로 들을 것을 알았다구요. 뒤로 들을 것이 아니라 앞으로 들을 것을 알았다구요. 그리고 큰 산맥 작은 산맥이 화음이 되어 사고날 것을 다 알고 방지하게끔 돼 있다구요. 자, 이 모두가 모르고 이렇게 생겨났겠어요?

우리 인체는 신비의 왕궁입니다. 신비의 왕궁이라구요. 여기에는 수백 만의 의학박사가 들어가 있는 거예요. 우주에서 제일가는 의학박사 주식 회사보다도 크다는 거예요. 소위 무슨 의학박사라는 사람들은 전부 다 실험실이라는 조그만 자리에서 결과적인 것만 가지고 이러쿵저러쿵하는 데, 큰소리치게 되어 있지 않다구요. 그들은 '환경에 적당히 적응하기 위해서 이렇게 태어났다'고 하는데, 그게 다 모르고 태어난 거예요? 이 몸뚱이는 천문학적이요 방대한 감각적 내용이 질서정연하게 되어 있고, 상충이 없고 모순 대립이 없는 신비의 왕궁입니다. 그런 이 몸뚱이가 자기 멋대로 될 수 있어요? 될 수 있다고 하는 말은 엉터리라구요.

여러분, 하나님이 없다고 해도 좋다는 겁니다. 그렇지만 누군가 알아도 완전히 알고, 멋지게 알고, 신나게 아는 분이 있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다 아는 분이 없다고 하겠어요? 그분의 이름이야 어떻더라도 좋다는 겁니다. 철사든 무슨 꽃이든 돌멩이든 손수건이든 그분의 이름은 아무래도 좋다는 거예요. 이름이 문제가 아니예요. 사실이 문제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영어로는 갓(God)이고 한국어로는 하나님, 즉 한 분의 주인이라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나라마다 그분을 부르는 이름이 다 틀리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보라구요. 여기에 의학박사라든가 과학의 전문가라든가 혹은 수학박사 되시는 분이 왔다고 합시다. '내 이론은 틀림없다'고 주장하는 훌륭한 박사님이 있다고 합시다. 그 박사님 가운데 일년이 시작되는 정월 초하룻날에 '언제는 아무개 아무개를 만나고, 또 몇 월 몇 일까지 이렇게 이렇게 해 가지고 섣달 그믐날까지 완성할 것이다'라고 자기의 일년 계획을 세워서 그 계획대로 행하는 사람이 얼마나 돼요? 그렇게 했다는 사람이 있어요? 그것이 바로 사람이라구요. 그런 것도 하지 못하면서 뭐 이러쿵저러쿵하고 있으니 다 틀려 먹었다는 거예요.

인간 자체는 그런 일도 하지 못하는데 이 자연이 그냥 그대로 그렇게 될 수 있겠어요? 진화니 무슨 변증법이니 하는데, 그것도 진화 형태에 맞게끔 하나님이 지으셨으면 하나님이 지으신 것이 되는 거라구요. 그리고 여러분, 진화하는 데 목적이 없이 진화할 수 있어요? 이리로도 가고 저리로도 갈 수 있어요? 또, 이 집이 진화해서 이렇게 되어졌다고 하면 믿겠어요? 이 집은 설계에 의해서 만들어진 거라구요.

진화하려면 목적관이 없어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낮은 물건이 높은 물건이 되려면 그럴 수 있는 제3의 힘이 횡적으로 투입돼야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목적관만 인정하면 변증법은 깨져 나가는 거라구요. 이것이 금후에 기독교인들이 해야 할 중대한 책임의 일면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계셔야 되는 것입니다. 아니 절대적으로 계시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

그러한 절대적인 하나님이 지으신 목적이 둘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하나님이 지으신 목적은 절대적으로 하나여야 되는 거라구요. 목적이 둘이 되어 이랬다저랬다하면 하나님이 이상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절대적인 하나님이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인간을 지으셨다면 인간은 어느누구를 막론하고 하나의 목적을 향하여 직행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의 목적 외에 다른 것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 자체를 두고 보면, 두 개의 상반된 목적을 향해서 움직이는 자신임을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가 이리로 가려고 하면 하나는 저리로 가려고 한다는 거예요.

제가 미국에 들렀을 때, 미국의 저명한 신학자를 만나 봤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우주에는 본래 하나님 외에 반대되는 신이 있었다'고 주장 하는 거에요. 여러분, 그러한 또 다른 신이 있었다면, 6천년 동안 하나님을 골탕먹이고 인류를 유린해 오던 사탄 마귀, 그 악한 신을 이길 수 있어요? 없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이원론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두 목적이 있다는 것이 타당한 말이 되겠지만 그럴 수는 없다는 거예요.

만일 인간이 완성해 가지고 타락했다면 천국에 가서도 완성한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인간은 완성하기 전에 고장이 나서 잘못된 것입니다, 사과로 말하면 다 익어서 주인이 따 가지고 창고에 넣어 관리하기 전에, 나무에 달렸을 때 바람이 불었든가 해서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익기 전에 떨어졌다면, 완성하기 전에 사고가 나거나 잘못되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다시 구할 수도 있고 다시 만들 수도 있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인간은 완성을 바라보고 나가는 과정에서 타락했다고 봐야 되는 것입니다.

주체와 대상 관계가 아니라 하나의 주체 앞에 또 다른 주체가 나타났기 때문에 상반되는 거예요. 사람을 중심삼고 볼 때, 하나님도 사람이 필요하고 악한 사탄, 악신도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에 두 주인이 근거지로 삼고자 하는 것이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이렇게 된 것은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선물(善物)이 악물(惡物)이 됐다는 거예요.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선한 분이시기 때문에 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 악신은 절대적으로 악하기 때문에 선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람은 때로는 선할 수도 있고 때로는 악할 수도 있기 때문에,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이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사탄도 망칠 수 있고 하나님도 망칠 수 있는, 사탄도 못 믿고 하나님도 못 믿을 입장에 선 것이 인간이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근거지인 양심은 천국의 처소요, 사탄의 근거지인 몸뚱이는 지옥의 처소가 되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양심과 몸뚱이가 국경선이 되어 있다는 거예요. 그 경계선에서 총소리가 들려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러분 양심의 소리요 양심과 몸이 싸우는 소리인 것입니다. 이 전쟁을 제거하기 전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는 것이요, 하늘나라에도 갈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그러한 터전을 갖지 않고는 천국이니 이상세계니 하는 것은 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내일과 모레에 걸쳐서 이야기할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약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종교는 타락한 인간의 수리공장

결국은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에 이렇게 됐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타락한 아들딸을 보고 부모 되시는 하나님은 그냥 가만히 계실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이 고장난 라디오 같이 되었기 때문에, 이것을 다시 고치기 위해서는 수리공장을 만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인류역사 과정에 있어서 인간을 구하기 위한 수리공장을 만드신 흔적이 있으면 하나님이 없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수리공장이 뭐냐 하면 종교인 것입니다. 종교는 문화와 역사적 배경이 다르고 종족과 씨족관계의 차이에 따라 다른 것을 전세계적으로 규합해 가지고, 눈 만들고 코 만들고 손 만들고 발 만드는 공장을 점점 넓혀 나가서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몰아 들어와야 되는 것입니다.

영국에서 유명한 토인비의 이론을 참고로 한다면, 그는 모든 문명은 종교로부터 시작됐다고 논하고 있습니다. 21개 내지 26개 문명 가운데서 고차적인 문명이 저급한 문명을 점점점 흡수해 가지고 지금에 와서는 전세계가 4대 종교 문화권내에 처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기독교 문화권, 유불선의 극동 문화권, 힌두교 문화권, 회회교 문화권입니다.

여러분, 종교가 역사시대에 많은 집정자들로부터 탄압을 받았고 많은 희생을 당하며 나왔지만, 그 종교가 갖고 있는 사상은 몇천년 전 그 사상 그대로를 유지하면서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집정자 혹은 주권자들이 망해 갔지만 종교는 그 틈에 있으면서도 발전해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4대 종교 문화권도 앞으로 더 고차적인 종교의 형태가 나오면 흡수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수리공장으로 만드신 것이 종교라면, 종교의 가르침이라는 것은 어떤 것이어야 되느냐? 몸과 마음이 싸우고 있는 인간을 대해서 하나님편에 가까운 마음을 중심삼고 그 반대되는 몸뚱이를 옹호하라고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몸뚱이를 치라고 가르쳐 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떤 종교든지 육을 치라고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몸뚱이는 높아지려 하고 자기를 중심삼고 생각하기 때문에, 참된 종교의 가르침은 이 몸을 죽이고, 이 몸을 누르고 남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하며 반대적으로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몸하고 마음하고 비슷비슷해서 싸움을 하니까 이 마음은 그냥 두고 몸을 약하게 해 가지고 끌고 가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교의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그 경계선을 넘어서 가지고 그것을 어느 기간을 통해서 습관화되게끔 해 가지고 그것을 좋다 하는 자리까지 만들자는 것이 신앙생활이라는 것입니다.

몸뚱이를 치라고 가르쳐 주지 않는 종교는 세계적인 종교가 못 되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종교의 중심교리는 첫째가 몸을 치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 둘째는 뭐냐? 몸뚱이만 치라고 하니까 그것이 힘이 들기 때문에 하늘은 또 다른 하나의 방법을 생각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몸뚱이와 마음은 1대 1이거나 혹은 3대 3과 같이 비슷비슷하니까 왔다갔다하면서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같은 자리에 두고 마음에다가 한 3배의 힘을 집어 넣는다는 거예요. 그러면 마음이 생각하는 대로 몸뚱이를 끌고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고장난 사람을 고치는 두 가지의 치료법이라는 거예요.

여러분 보라구요, 종교의 대표자 가운데 그 시대에 있어서 고생을 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고, 수도하기 위해서 육신을 치지 않은 종주가 어디 있습니까? 없다는 것입니다. 세계4대 성인이라 하게 되면 예수, 공자, 석가, 그리고 회회교의 마호메트를 꼽습니다. 이 사람들을 가만히 보면, 전부 다 자기 주장이 없던 사람들이라구요. 그러니 여러분은 이상하다고 할 것입니다. 이들은 자기를 주장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주장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에 와 가지고는 4대성인이 전부 다 교주가 돼있고 종주가 돼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 의사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 신의 뜻을 바라 가지고 죽어갔습니다. 공자님도 그 시대에는 이웃집 개라는 소문까지 났었습니다. 예수님은 반역자로 몰려서 십자가에 죽어갔습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한 것을 보면, '아버지시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피하게 하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세상적으로 보게 되면 그게 졸장부지 뭐예요? 약자라구요, 약자. 또 석가모니도 궁전에서 살지, 뭣 때문에 그런 것을 전부 다 버리고 미친 녀석처럼 나갔습니까? 그들은 전부 다 자기 주장을 하지 않고 신의 주장을 하고, 자기 도리를 세우지 않고 신의 도리를 세우기 위해 세상에 당당히 큰소리치다 죽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성인이 되었다구요. 그들은 사는 것도 하나님을 위해 살았고, 죽는 것도 하나님을 위해, 신을 위해 죽었습니다.

기독교가 중심종교

자, 그러면 여기에서 문제되는 것이 무엇이냐? 종교가 이렇게 많은데 이 가운데서 대관절 어느 것이 제일 중심적인 종교냐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주장하고, 어떤 사람은 저렇게 주장하고, 뭐 인도 사람은 그렇게 주장하고, 중국 사람은 저렇게 주장하고, 또 유대 사람은 이렇게 주장하고, 아랍 사람은 저렇게 주장하고, 모두 자기 편한 대로 주장합니다. 그러니 따라가야 할 게 뭐예요? 우리는 대관절 어느 종교가 신을 중심삼고 볼 때 가장 중심적인 종교냐 하는 것을 가려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제 끝날이 되면, 이 4대 종교문화권이라는 수리공장을 하나로 만들어야 됩니다. 하나로 만들어야 된다구요. 그런 입장에서 볼 때, 오늘날 통일교회라는 이름도 나올 성 싶다는 거예요.

그러므로 많은 종교 가운데 어느 종교가 제일이냐를 하나님편에서 고른다면 어느 종교를 골라내느냐가 문제되는 것입니다. 유교에서는 '선을 행하면 복을 받고 악을 행하면 화를 입는다, 즉 착한 자는 복을 받고 착하지 못한 자는 화를 받는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라는 인격적 신에 대해서는 불확실합니다. 또 불교를 두고 보면, 영계가 있고 신이 있다고는 얘기하지만 그 신보다도 신성을 중심삼은 법을 중요시하고 있습니다. 석가 역시 하나님이 인격적인 신으로 계신다는 것을 확실히 강조하지 못했습니다. 그 다음에 회회교를 두고 보면 한 손에는 코란을, 한 손에는 칼을 들고 나오고 있습니다, 이것은 신앙의 본질로 볼 때 조금 어긋난 자리에 있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자, 그러면 기독교는 어떠냐 하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종교 가운데 제일가는 종교를 가리는 데 있어서 그냥 주먹구구식으로는 가릴 수 없는 거예요. 종교는 이래야 된다는 패턴이 있어야 됩니다. 패턴을 중심삼고 제일 되는 종교를 가려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처음에 말한 바와 같이 인간의 욕망을 중심삼고 볼 때,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의 관계에 있어서 인간이 최고의 축복의 자리인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하나님과 동등한 자리에 서고, 하나님의 창조의 위업을 이어 받고,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기뻐하시던 그 마음을 상속받는다는 이 네 가지가 절대적인 요건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내용을 중심삼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가르쳐 주고, 하나님과 하나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하나님의 뜻을 중심삼고 이상적인 가정을 이루어 하나님의 아들딸을 낳아야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종교가 있다면 그 종교는 최후의 종교가 아닐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볼 때, 첫째는 뭐냐? 예수님은 '나는 하나님의 독생자'라고 주장했습니다. 역사상에 있어서 이렇게 확실히 적중시켜 가지고 절대적인 자리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강조하고 나선 사람은 예수님밖에 없었습니다. 독생자라는 것은 하나님의 첫번째 사랑을 독차지할 수 있다는 것을 설파한 것입니다.

그 다음에 두번째로 예수님은 무엇을 강조했느냐? 요한복음 14장을 보면 '나는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은 내 안에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나를 본 사람은 하나님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두번째는 하나님과 하나될 수 있는 일체적인 관을 설파한 것입니다.

그 다음 세번째는 뭐냐 하면 예수님 자신은 남자라는 것입니다. 남자 인데 참된 남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단 하나의 남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으로서 환전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불신한 유대민족

자, 예수님이 그런 남자로 태어났는데 죽여야 되겠어요? 만일 예수님이 죽지 않았으면, 유대교와 이스라엘 나라가 완전히 하나되어 가지고 받들었으면, 예수님은 틀림없이 유대 나라의 왕이 되었을 것입니다. 대제사장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랬으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호 밑에서 하나의 주권자가 되어 가지고 아무리 강대한 로마제국이라도 타파해 버렸을 것입니다. 십자가에 돌아간 예수님은 4백년 후에 그토록 세계의 주도적인 권세를 가졌던 로마제국을 정복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죽지 않았더라면 40년 이내에 로마제국을 해치울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런 주권자가 되었더라면 하나님께서 '야, 예수야! 그만하면 됐다'라고 하시며 혼자 있으라 하시겠어요? 하나님께서는 틀림없이 예수님 앞에 신부를 마련해 주시고 싶은 마음이 있으셨을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은 혹은 기독교의 목사라든가 교회 간부들이 이 이야기를 들으면, '아니, 그럴 수가 있나, 거룩한 주님이 장가를 가다니.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주권자가 되었더라면, 유대교는 없어지고 유대교와 지금의 기독교가 합한 새로운 형태의 기독교가 생겨났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다면 오늘날 구교와 신교의 싸움이 있을 수 있겠어요? 수백개의 교파가 서로서로 교권주의를 내세워 가지고 싸울 수가 없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없더라도 그의 후손들이 기독교를 책임지고 하나의 기독교의 세계관을 가지고 이 문명사회에 공헌했을 것은 틀림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아들딸이 있고 예수님의 족속이 있으면 하나님이 얼마나 그들을 사랑하시겠어요? 하나님 아들의 아들딸은 하나님의 손자 손녀가 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이들이 악한 사탄세계에 침해받지 않게끔 절대적으로 보호하신다는 것입니다. 악한 세계에서 이스라엘 선민이 하나님을 믿게 될 때도 보호해 주시던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의 직계 아들딸이 태어났는데 보호하시지 않을 수 있어요? 이렇게 보게 될 때, 예수님이 죽지 않았으면 세계는 오늘날과 같이 이렇게 안 되었을 것이다 하는 것을 여러분이 알 것입니다.

유대교와 이스라엘 민족이 완전히 하나되어서 예수님을 받들었다면, 예수님은 죽지 않고 하나님이 찾으시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부를 맞이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신부를 찾아 맞이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루어야 할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어간 예수님은 그것이 하나님 앞에 찾아 세워야 할 중요한 사명인 것을 알았기 때문에, 죽으면서도 '나는 신랑이니, 신부를 찾기 위해서 다시 오겠다'고 약속하고 간 것입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3차에 걸쳐 기도했다는 것을 여러분은 성경을 봐서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 14:36)"라고 기도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눈물겨운 3차 기도의 내용을 오늘날 신학자라든가 혹은 기성교회 목사들이 해석하기를 '예수도 육을 가졌기 때문에 고통을 생각한 나머지 그러한 기도를 올렸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베드로도 예수님을 완전히 몰랐을 때는 예수님을 배반했지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알고 난 후에는 자진해서 거꾸로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베드로도 그랬는데, 만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나 가지고 죽기 위해서 오신 메시아라면, 죽을 줄 알고 있었을 텐데도 불구하고 안 죽겠다고 했다면 메시아로서의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으려면 구세주가 인도하는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 길을 따라가지 않고는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피를 흘리며 돌아가셨으니,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길을 따라가는 사람도 십자가의 길을 통하지 않고는 구원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자신이 피를 흘리게 되면 역사시대의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피를 흘리지 않고는 구원받을 수 없기 때문에, 그토록 간곡하게 3차에 걸쳐 기도를 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야 할 입장에 있기 때문에 피를 흘리지 않고는 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피를 흘리는 자리에는 하나님이 같이하셨지만, 피를 흘리지 않는 자리에는 하나님이 같이하시지 않은 것이 기독교의 역사인 것입니다.

구주라면, 역사시대에 있어서 그런 비참사가 생겨날 것을 아시는 구주라면, 하나님 앞에 그러한 간곡한 기도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예수님은 한번 가면 다시 올 수 없는 길로 떠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새로운 부모를 중심삼은 세계종교가 출현해야 할 때

묵시록에 보면 끝날에는 주님이 신부를 맞으러 이 땅에 오신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어린양잔치라는 것은 역사 이래 처음으로 하나의 신랑과 하나의 신부가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부부를 이루는 잔칫날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류의 시조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종지 조상은 선한 부모가 아니라 악한 부모가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구상하신 자리, 우리 인류의 조상이 타락하지 않고 이루어야 했던 본연의 부모의 자리, 참되고 선한 부모의 자리는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고 이루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계 22:13)"고 말씀하신 곳이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이루려 하시던 목적을 못 이루고 타락했기 때문에 묵시록에 가서 마치게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은 어떠한 분으로 왔느냐? 아담이 타락했기 때문에 타락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에 일치될 수 있는 완성한 아담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5장 45절에 보면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라고 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을 둘째번 아담으로 지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부여할 수 있는 참된 아들의 자리, 부부의 자리, 부모의 자리를 결정짓지 않고는 하나님이 계획하신 가정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이 지상에 나타나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계에는 수많은 종교가 있지만 그 가운데서 기독교만이 4대요건을 중심삼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하나님과 한 몸이 되고,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서로 신랑 신부를 맞아 새로운 가정을 구상하는 이념을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런 이념을 갖고 오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중심삼은 기독교는 세계적인 종교가 아니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새로운 부모를 중심삼은 이상적인 종교시대, 수많은 종교를 규합해 가지고 하나님을 중심삼은 가정과, 하나님을 중심삼은 씨족, 민족, 세계를 구상하는 새로운 종교시대가 옴으로 말미암아 거기에서부터 하나의 하나님과 하나의 세계종교의 출발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중심삼은 새로운 참부모를 중심삼고 새로운 문화와 새로운 생활이 벌어지게 될 때, 이 지상에 사는 그 생활 자체가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직접주관권내의 지상천국의 생활이요, 또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살다가 영원한 천상천국으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에 모인 여러분들 가운데 이러한 한날을 위해서 특별히 신앙생활을 하는 기독교 신자가 있으면, 이 한날을 위해서 하나님이 준비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 한날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여기에 대비하여 각자의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하나의 하나님과 하나의 세계종교'라는 내용을 가지고 여러분에게 말씀드렸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