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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진과 정지

일시: 1971.02.21 (일) 장소: 한국 전본부교회

[기 도]

아버지, 저희들이 하루하루의 보람있는 생활권내에서 아버지를 찬양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내일의 소망을 중심삼고 아버지를 위로할 수 있는 기쁨의 실체로서 당신 앞에 부복하는 뜻 깊은 길을 가는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자리에 부복한 저희들, 아버지 앞에 비록 부족한 모습이오나 당신께서 저희 개개인의 마음을 지키시사 참자녀의 모습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기뻐할 수 있는 모습이 어떤 모습이며, 악의 조건으로 남아질 수 있는 모습이 어떤 모습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당신께서 원하시는 모습이 되고자 하는 마음에 사무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저희들은 언제나 당신을 그리워하고 있사옵니다. 하오니 저희들을 당신의 사랑으로 품으시어서 당신이 기뻐하실 수 있는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의 마음 가운데 당신의 뜻 가운데 당신의 사랑 가운데 잊혀지지 않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아침, 남한 땅에 널려 있는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 위에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이곳을 향하여 부복하고 마음과 몸을 다하여 당신께 기도하는 그들 위에 거룩하신 사랑과 자비의 손길이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쉬지 않고 하늘을 위하여 기도하는 당신의 자녀들 위에 무한하신 사랑과 긍휼이 같이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아버님, 저희들의 모든 사정을 맡아 주시옵소서.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뜻을 맞이하는 저희들, 아버지를 사모하는 심정으로 하늘의 길을 가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시여 ! 남과 북으로 갈라져 처참한 상태에 있는 이 땅의 사정을 아시오니, 당신께서 이 나라의 운명을 맡아 주시옵소서. 가인 아벨의 탕감 복귀원칙을 생각할 때 오늘날 아벨의 입장은 누구이며 가인의 입장이 누구인 것을 아옵니다. 또한 아벨의 입장인 저희들이 해야 할 책임이 얼마나 막중한가 하는 것을 아옵니다. 저희들이 아버지를 부르기 전에 먼저 가인을 찾아서 아버지 앞에 굴복시켜야만 아버지 앞에 효의 도리를 다하게 된다는 엄청난 사실을 생각할 때, 저희들은 감히 뜻 앞에 설 수 없는 부족한 모습들임을 느끼게 되옵니다. 그러나 뜻 앞에 지체할 수 없는 저희들은 내일의 소망을 품고 싸움터로 나가겠사오니, 아버지 앞에 가인을 굴복 시키는 승리의 한날을 어서 이를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언제나 같은 생활, 습관화되기 쉬운 환경 가운데에서도 하늘을 기억하고 하늘을 흠모하면서 전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와 더불어 승리의 약속을 다짐하며 하루하루의 가중된 생활 노정 전체를 아버지 앞에 봉헌할 수 있는 당신의 사랑스런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한국에 있는 당신의 자녀들을 기억하여 주시옵고, 세계 각처에 널려 아시아의 일국인 이곳 한국을 향하여 머리를 조아리며, 외로운 자리에서 몸부림치고 어려운 환경으로부터 짓밟힘을 받으면서도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아버지 앞에 외로운 사정을 호소하며 타개해 나가는 당신의 자녀들을 위로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그러한 자리에서 일해 나온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한 외로운 싸움터를 타개해 나가지 않으면 하늘의 뜻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오니 외로운 그 자녀들을 지켜 주시옵고, 복을 빌어 주시옵소서.

아버지, 넓고 높으신 당신의 성상 앞에 지극히 낮고 천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당신의 긍휼과 자비의 손길을 간곡히 바라는 자녀들이 되도록 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옵고 원하옵니다.

능력의 주체이신 아버지시여, 생명의 원동력이 되시는 아버지시여, 사랑과 심정의 근본이 되시는 아버지시여, 저희들은 당신 앞에 하나의 실체로서, 하나의 가지와 잎과 같은 입장에서 일체를 당신에게 맡기고, 당신이 슬퍼하시면 저희도 슬퍼해야 되겠사옵고, 당신이 기뻐하시면 저희도 기뻐해야 되겠사옵고, 당신이 바쁘게 일하시면 저희도 바쁘게 일해야 되겠사 옵니다. 이런 면에서 당신과 더불어 모든 생활환경을 접해 나가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의 성상 앞에 저희들의 모습을 드러내 놓았을 때, 과연 저희들이 아버지께서 바라시던 모습으로서,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며 대하실 수 있고 아버지께서 친히 찾아오셔서 속삭임으로 갈 길을 분부해 주실 수 있는 아들딸이 되어 있는가를 생각하게 되옵니다. 저희들이 그런 아들딸이 되기 위해서는 아버지 앞에 누구보다 더 효성의 도리와 충성의 도리를 해야 되겠고, 생명까지도 아버지 앞에 바칠 수 있어야 되겠사옵니다.

저희들이 아버지의 아들된 인연을 갖지 못하게 될 때에는 생활무대에서 뜻 앞에 남아질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오니, 목석 같은 저희들의 마음을 녹이시어 당신의 마음을 닮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사정과 저희의 사정이 만나 저희들이 당신께로 흡수될 수 있는 인연이 이루어지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흘러가는 세월과 더불어 덧없이 자기 생애를 탄식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남겨서는 안 되겠사옵고, 소망과 더불어 힘찬 내일을 다짐하는 아버지의 아들로서의 권위를 갖고 기쁨의 한날, 즐거움의 한날, 자랑스러운 한날을 맞이해야 되겠사옵니다. 그러나 아직 그러한 날들을 갖지 못한 아들 딸들이 오니 얼마나 불쌍하옵니까.

뜻을 안 저희들은 아버지의 능하심을 알고 놀라우심을 체득하면서 내일의 승리자로서, 오늘의 건설자로서, 역사의 승리자로서 당당하고 권위 있는 자리에 서야 된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기에 언제나 스스로를 놓고 탄식하는, 자신을 내세울 수 없는 불쌍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겠다고 스스로 다짐할 줄 아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저희들의 마음이 당신께서 기뻐하실 수 있는 모습을 갖추게 하여 주시옵고, 저희들의 몸이 당신께서 원하시는 모습을 갖추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의 몸은 승리의 산제단이 되고, 저희의 마음은 승리의 산 제물이 되어 당신 앞에 영원히 바쳐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당신께서 찾고 싶었던 제물이 이것이요, 만나고 싶었던 소원의 실체가 이것이라고 우주 만상 앞에 저희들을 내세워 자랑하기에 부끄럽지 않은 아들 딸의 모습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당신께서는 그러한 아들딸의 모습을 얼마나 그리워하셨습니까? 이것을 저희들은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아버지, 겸손히 엎드린 저희 불쌍한 모습들을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오늘 특별히 이들의 마음 가운데 찾아오시어서 허락하실 수 있는 뜻과 약속하신 은사를 내려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하늘의 인연권을 벗어나서는 살 수 없는 불쌍한 인간이기 때문에, 당신과의 인연을 모든 것의 동기로 삼고 또 그것으로 말미암아 당신과 화합할 수 있는 기쁨의 자리에서 살 수 있다면, 하루를 살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인간으로서 더 이상 바랄 게 없다는 것을 느끼는 귀한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새로운 한날을 맞이하기 위해 당신 앞에 즐거움을 가져다 드리고, 소망을 가져다 드리고, 기쁨을 가져다 드리고, 승리를 가져다 드리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되어야 되겠사옵니다. 그리하여 남북은 물론이요, 세계에 널려 있는 원수들을 굴복시켜 아버지의 뜻 앞에 부복시키기 위한 총진군의 대열에 부족한 자신의 모습을 가다듬어 앞장설 수 있는 거룩한 당신의 무리가 되어야 되겠사옵니다.

현실의 고착된 생활환경에 사로잡혀 오늘 하루에 탄식을 남겨 가지로 내일의 소망을 잊어버리고 하늘을 원망하고 하늘을 불신하는 불쌍한 무리가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고, 영원한 해방을 받고 당신의 사랑에 이끌려서 사망의 세계를 아니 헤쳐 나갈래야 아니 헤쳐 나갈 수 없는, 힘있고 보람있는 아들딸의 모습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의 칭찬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모습이 되기를 마음으로 동경하고 몸으로 그리워하며 나아가길 원하오니, 당신께서 친히 여기에 부활의 권한을 일으켜 주시옵고, 이들로 하여금 영광의 터전 위에서 새로운 재출발의 도약을 하도록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아침, 당신의 이름을 부르며 모인 곳곳마다, 당신의 뜻을 위하여 모인 곳곳마다 아버지께서 무한하신 사랑으로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악한 세계에 물들지 않고 분별된 몸을 갖추어서 거룩한 날을 찬양할 수 있는 무리로 세워 주시옵고, 성별시켜 주시옵기를 간절히 원하옵니다. 친히 당신의 품안에 품으시어서 영광의 자녀로서의 인연을 맺을 수 있는 오늘 이한 날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낳아진 모든 전체를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님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말 씀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자기 자신을 중심삼고 바라는 목적 앞에 한 걸음 다가 가느냐 그렇지 않으면 후퇴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전진의 일로를 걸어온 하나님의 복귀섭리

자기 자신이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맞이하기 위해 보다 가치적인 무엇을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그리고 추구하는 그 내용이 크면 클수록, 그만큼 전진할 수 있는 도수를 배가시키겠다는 마음을 갖지 않고는 그 추구하는 목적을 성취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만일 그러한 목적을 중심삼고 나아가야 할 입장인데도 불구하고 나아가지 못하고 정지되는 한때를 맞게 된다면 후퇴라는 일로를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는 일상 생활권내에서 흔히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한 친구를 만나 대화를 나누는 데 있어서, 어제 주고받은 말보다도 오늘 나눈 말 가운데 스스로의 마음을 새로이 다짐할 수 있는 격려의 말과 보다 가치적인 내용의 말이 있었다면, 거기에서는 반드시 내적으로 전진을 결의할 수 있는 것이요. 그 결의와 더불어 생활무대에 있어서 스스로의 환경을 가일보 전진시킬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의 대화 내용이 어제보다 도리어 낙심을 가져다 주는 내용이었다면 후퇴할 수밖에 없는 내적 사연이 남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는 두 사람의 사이가 멀어지게 되는 것은 물론이요, 자기 자신도 대화하지 않은 것만 못한 결과적인 입장에 떨어진다는 것을 우리는 일상 생활을 통해서 잘 느끼는 바입니다.

한 나라의 운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떠한 나라를 중심삼고 보더라도 그 나라가 전진하고 있느냐, 정지상태의 길을 가고 있느냐, 아니면 후퇴 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오늘날의 세계를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의 세계를 보면 두 진영이 서로 대치된 사상적 체계를 갖추어 가지고 서로가 모습을 달리하여 싸우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두 진영 가운데 어느 진영이 승리를 거둘 것이며, 어느 진영을 중심삼고 세계가 수습되어 나갈 것이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이 대치된 두 진영 자체가 스스로를 중심삼고 보다 전진하고 있느냐, 정지하고 있느냐, 아니면 후퇴하고 있느냐 하는 문제를 우리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어느 한 진영 이라도 정지하는 입장에 서게 된다면, 거기에서 다시 전진한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것입니다. 더우기 후퇴하였다고 할진대는 정지한 것보다도 더 나쁜 결과에 부딪치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주의나 사상이든지 전진의 일로를 거듭하여 최후에는 세계의 온인류가 거기에 하나가 되고 또한 하나된 인류가 그것을 일대에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후손에까지 연결되는 전통으로 남기게 될 때, 그것은 역사가 흘러감에 따라 더욱더 빛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입체적인 내용을 갖고 있는 주의 주장이나 사상의 체계는 발전의 일로를 아니 갈래야 아니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발전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역사과정에서 조금씩 발전해 온 모든 여건들을 그냥 소모시킬 것이 아니라 그것을 생명의 기틀로 하여 거기에서 새로운 가지와 잎이 날 수 있도록 어떠한 보탬을 가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전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볼 때, 하나님께서는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한 입장에서 지금까지 섭리를 발전시켜 나오고 있는 것이며, 과거보다도 진일보한 전진의 일로를 현재 취해 나가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걸어 나오는 데 있어서는 어느 정도까지 전진하여 나왔지만 이제부터 나아가야 할 미래를 앞에 놓고 여기에서 계속 전진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을 생각할 때, 더 이상 전진할 수 없다고 하게 될 때에는 거기에서부터 정지상태가 벌어지게 되는 것이고, 또 그러면 거기에는 반드시 후퇴의 일로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계속해서 전진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 문제

사람은 누구나 실패하는 것을 원치 않고 성공하는 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마음으로 몸으로 성공할 날을 바라고 추구하지만, 실패는 어느누구도 바라지 않습니다. 환경 자체도 그것을 원치 않고 있지만 우리의 일상 생활 가운데는 성공보다 실패의 도수가 더 많이 감돌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더우기 우리들은 오늘날 일상 생활에서 그것을 체휼하고 절감하는 입장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후퇴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원수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타개해 버리고 후퇴는 나와 상관없다는 절대적인 입장을 고수해야 될 것이 소망을 갖고, 내일의 희망을 갖고 나가는 사람들의 필연적인 요건이 아닐 수 없음을 우리는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에 있어서 승리의 기점을 가졌다고 그것을 자랑할 것이 아니라, 내일에 있을 수도 있는 정지와 후퇴를 생각하고 오늘의 승리를 분석 비판할 줄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오늘 어떠한 승리를 거두었다 하더라도 그 승리를 놓고 기뻐할 수만은 없는 입장이 오늘날 보다 나아지기를 바라고 전진해 나가는 사람들의 입장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의 승리가 있다면 그 승리는 내일의 새로운 기반이 되어야 하며, 오늘의 진일보한 터전이 있다면 그것은 일보 전진한 것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내일의 생활적인 터전이 되고 사상적인 요건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늘 어떠한 승리를 거두었다면 그것을 터전으로 하여 보다 넓은 의미의 내일을 개척할 수 있는 하나의 모체, 하나의 동기로 소화시킬 수 있는 자체의 능력이나 자주력을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지 못한다면 현재에 아무리 승리를 하고 전진적인 노정을 가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으로는 희망하는 바를 성사시킬 수 없으며, 보다 큰 목적을 달성시키기 힘들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과정을 거쳐 가면서 나갔다 들어왔다 하는 순간들을 연결시켜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이라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현재라는 것이 얼마나 귀한가를 알아야 되겠습니다.

기쁨은 전진하는 가운데 느낄 수 있는 것

오늘날 우리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계속적으로 호흡을 해야 됩니다. 또한 거기에 상응하여 영양을 보급해야 됩니다. 이와 같이 보급된 영양소가 우리 몸의 순환기를 통하여 서로 주고받는 데 있어서 어제와 차이가 있다고 한다면 우리 몸의 컨디션은 좋지 않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상적인 신체 리듬과 보조를 같이해 가지고 어제보다 오늘에 조금이라도 영양을 더 보급해 주면 우리 몸은 자연히 건강해지는 것입니다. 거기에서부터 새로운 전진의 터전이 넓혀져 나가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되는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하는 데에 있어서도 반드시 영양제와 같은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또한 정상적으로 호흡을 하는 것과 같은 생활태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즉 '나는 이렇게 해 나가야 되겠다'는 독자 적인 신앙 기준을 중심삼고 호흡하듯이 신앙노정을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호흡하는 것과 같이 생명력을 보급할 수 있는 정상적인 기준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에 상응해 가지고 영양을 보급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영양제를 어떻게 보급하느냐, 정상적인 신앙 기준 앞에 정상적인 영양제를 보급할 수 있는 보급로를 어떻게 보강하느냐 하는 것이 전방에서나 후방에서나, 전후 좌우 사방에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어제보다 오늘, 이 시간보다 다음 시간에 어떻게 하면 보다 낫고 보다 가치 있는 영양을 보급시키느냐 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생활에서 기쁨이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전진하고 발전을 하는 데서만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그런 내용을 보강받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을 언제나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사람이 일을 하는 데 있어서도 그 일을 하기 전보다 하고 난 후가 더 나빴다고 한다면, 거기에서는 반드시 타격을 받는 것입니다. 나쁘다고 하는 것은 일로 후퇴했다는 것이요, 좋다고 하는 것은 일보 전진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입장에서 볼 때,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 인간들은 죄악된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생활하는 전분야에 있어서 오늘 하루의 생활은 기뻤다고 할 수 있는 결과를 남기기는 지극히 어려운 것임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현실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가 중요

열 사람을 대했으면 그 열 사람을 대하는 가운데 과연 몇 사람이 나에게 희망을 가져다 주겠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할 때, 열 사람이 전부 나에게 플러스적인 결과보다는 마이너스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자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마이너스적인 결과를 어떻게 보강할 것이냐? 그것을 보강할 수 있는 길이 없다 할진대 우리가 나가서 활동하는 환경에서는 우리의 신앙생활이나 환경적으로 우리의 나아가는 길에 전진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없고, 도리어 후퇴의 일로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주지해야 할 것은 내가 과거에 어떻게 어떻게 해나왔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오늘 이 시간부터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내가 처해 있는 현실적인 문제를 중심삼고 어떻게 처리해 나가느냐 하는 것이 지극히 중요하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마음에 원치 않는 사람을 대하게 될 때에는 어떻게 대할 것이며, 또 대하고 난 후에 나타난 결과를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문제들을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슬프고 외로운 자리에 있을지라도 더이상 내려가지 않고 더 이상 타격받지 않는다는 금을 그어 놓고 그 이상은 넘어가지 않는 대인관계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직장이면 직장에서 일을 할 때에도 일하는 자신이 어떠한 입장에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 직장에서 자기가 일보 전진할 것인지 후퇴할 것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처해 있는 직장을 중심삼고 그 직장 자체가 내게 있어서 내일의 소망의 터전을 다짐할 수 있고, 오늘에 있어서도 없어서는 안 될 관계로 남아질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일과 나 사이에 맺어진 관계가 나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필요적절한 내용으로 남아지지 못하고 그저 안심이 되었다고 하는 내용으로 남아지게 된다면, 그것은 정지도 아닌 후퇴의 일보를 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현재의 입장이 여러분의 생사문제를 좌우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목적이 뚜렷하고 동기가 좋아야 전진해

직장에서 펜대를 쥐고 글자 한 자를 쓰는 데 있어서도 누구를 위하여 쓰고 있는가 하는 그 목적관이 뚜렷해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나 자신을 위하여 사는 것보다 하늘의 뜻과 더불어 관계를 맺고 하늘의 뜻을 위하여 사는 것이 더 효과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살아가는 것이 나의 것으로 결과되는 것보다 하늘 것으로 결과지어져서 하늘이 기뻐해야만 우리 자신도 기쁠 것입니다. 어디까지든지 내가 주체가 아니라 하늘이 주체이기 때문에 반드시 하늘이 기뻐할 수 있는 내용을 세워야만 상대적 입장에 있는 우리가 기쁨을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연적인 원칙인 것입니다.

모든 일의 동기는 자기와 더불어 관계되어 있지만 그 결과는 자기 자체를 중심삼은 것이 아니라 더 큰 목적을 중심삼고 그 목적에 플러스되는 요건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루 하루 일을 하며 생활을 하는 가운데 그런 요소를 얼마만큼 남기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제보다 오늘에 있어서 또 오늘보다는 내일에 있어서 더 높이 더 많이 그런 요소들이 쌓이고 쌓여 그것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희망의 도수도 그만큼 높아지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전도를 할 때도 그렇다는 겁니다. 어제 전도할 때의 마음과 오늘 전도할 때의 마음이 출발할 때부터 달라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과거에는 이러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나섰지만 오늘은 새로운 마음을 갖고 해야 되겠다는 각오로. 출발동기부터 그렇게 다른 각오로 나섰다면 틀림없이 좋은 결과를 가져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지 못하고 옛날 보다 더 낮은 입장에서, 어제보다 못한 마음으로 출발을 하게 되면 반드시 후퇴의 일로를 걷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환경 속에서 계속적으로 일을 하면 할수록 거기에는 파경을 자초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그것이 일방적이 아니라 사방적으로 그런 후퇴의 감정을 일으켜 간다면, 아무리 목적이 크고 아무리 스스로 굳게 다짐을 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정지상태로서, 움직일래야 움직일 수 없는 완전히 고착된 입장을 우리는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전진하게 하거나 후퇴하게 하는 것은 자기 자신

우리가 전진과 정지라는 문제를 두고 볼 때 이것을 누가 자극시키느냐가 문제 되는 것입니다. 어떠한 외적인 환경이 나로 하여금 전진하게 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또한 어떠한 외적인 사연이 나를 후퇴하게 하는 것도 절대 아닙니다. 나를 전진하게 하고 혹은 후퇴하게 하는 모체는 누구냐? 어떤 상대적인 여건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나 자신이 문제입니다. 내가 상대했던 어떤 사람이 나빴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자기 자신이 후퇴하는 것도 자기 때문이요, 전진하는 것도 자기 때문이라는 것을 언제나 느껴야 됩니다. 자기 자신을 전진 하게 하고 혹은 후퇴하게 하는 모체가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문제가 상대로 인해 생기는 문제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기와 상관없이 생기는 문제로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생기는 모든 문제는 반드시 자기와 상관이 있기 때문에 생긴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런 문제들로 말미암아 나의 생애에 있어서 보람있는 가치를 결정짓느냐, 또는 그렇지 못한 결실을 맺느냐 하는 것도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러한 문제들을 청산하기 위한 하나의 해결방법을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여러분은 어디까지나 자기가 주체적인 입장에 서 가지고 대하는 모든 문제와 관계를 맺어 가지고 그것을 처리하여 반드시 승리의 결과로서 거두어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에 있어서 이러한 태도와 입장을 취하지 않고는 그 생활이 아무리 훌륭하다고 하더라도 거기에서는 피동적인 결과밖에 거둘 수 없는 것입니다. 피동적인 결과를 가지고는 또한 직접적인 승리를 거둘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분명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누구로 인해서 후퇴했고 또한 나는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됐다는 말들을 해서는 안 됩니다.

슬픔도 기쁨으로 소화하라

더 큰 결실을 거두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기에 대응되는 부정적인 환경을 먼저 거쳐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왜냐? 타락한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은혜가 오기 전에는 반드시 사탄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시련 기간이 지나고 나면 반드시 은혜의 날이 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역사를 보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슬픈 일이 닥쳤다고 해서 슬퍼만 할 것이 아닙니다. 슬픔으로 출발했다고 해서 슬픔으로 끝을 맺는다고 한다면 그 사람의 인생 행로에는 슬픔이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나 시작은 슬픔으로 시작했으나 끝을 기쁨으로 잘 수습했다면 거기서부터 기쁨은 출발되는 것입니다. 또 아무리 큰 슬픔이 찾아오더라도 출발때부터 그 슬픔을 기쁨으로 소화시켜 나가게 된다면, 그 사람은 과거의 슬픔과 현실의 슬픔을 승리로 결실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쁜 마음으로 환경을 대하게 될 때 역사적인 소망의 터전이 거기에 결실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앞에 다가오는 슬픔의 노정을 슬픔으로 대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출발은 슬픔으로 했지만 결과가 기쁨을 맺게될 때에는, 내일은 기쁨의 출발을 우리 자체 앞에 가져올 수 있는 것이요, 출발서부터 기쁜 마음을 가지고 최후까지 간다면 우리는 과거 현재 미래에 기쁨을 연결시킬 수 있는 중심적인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리에 서게되면 하나님이 간섭하시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과거의 승리만을 생각하는 분이 아니요, 미래의 승리만을 다짐하는 분도 아닙니다. 과거의 승리를 오늘의 현실에 대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미래의 승리의 터전을 현실에서 마련하려 하시기 때문에 여러분은 그 현실 환경을 슬픔 속으로 몰아 넣지 말라는 것입니다. 출발서부터 기뻐하고 좋아하는 입장에 서 가지고 결과까지 기쁨으로 소화시킬 수 있는 입장으로 나아간다면, 그 과정에 아무리 큰 슬픔이 부딪쳐 오더라도 그것을 기쁨과 은사로 소화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관계되었던 입체적인 범위, 즉 영계와 자기를 중심삼은 과거 현재 미래가 하늘 앞에 승리의 결과로 거두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생각해 볼 때, 그러한 고비가 많으면 많을수록 빛나는 전진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어려운 고비를 지나고 나면 내가 어떻게 그것을 넘었는지 자기 스스로 생각하게 되고, 또 지나간 그날이 언제나 자기에게 있어서 하나의 새로운 동기가 되고 격려의 재료가 되어 소망찬 내일의 공고한 터전이 되는 사실을 우리는 신앙생활을 통해서 자주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은 자신이 전진하고 후퇴하는 이 모든 인연은 상대적인 여건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인 자신으로 말미암아 되어 진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도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안 될 처지에 섰을 때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 :39)”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거기에서 중심은 하나님이었습니다. 즉, 예수님은 자기를 중심삼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중심삼고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길을 가느냐? 하나님은 슬픔의 길에서부터 기쁨의 길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슬픔의 날로부터 출발했기 때문에 복귀노정에 있어서 언제나 슬픔의 노정을 먼저 거쳐야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입장을 여러분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악과 선이 투쟁하는 데 있어서는 어느쪽이 손해를 보아야 되느냐? 악이 손해를 보는 것이 아니라 선이 손해를 봐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손해를 보고 출발한 행로가 선의 행로이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은 손해를 보는 입장이기 때문에 언제나 슬픈 역사를 거치시고 나서 그것을 청산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슬픔을 제거하면서 내일의 기쁨의 한때를 바라며 나가는 것이 하늘의 복귀섭리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결과에 있어서 기쁨의 결과를 가져오지 못하고 출발할 때보다도 더 큰 슬픔으로 나타났다면, 그 슬픔의 결과를 가져오게 한 사람은 거기에서 꺾어져 다시는 일어설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그것이 복귀섭리노정에 있어서 뜻을 대해 나오는 책임자들이 거쳐온 역사과정인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슬픈 하나님을 위로해 드리려면

하나님은 기쁨으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슬픔으로 출발했기 때문에, 그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는 것은 슬픔의 날을 맞이하기 위하여 오시는 것이 아니라 기쁨의 날을 맞이하기 위하여 오시는 것이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이 슬픈 입장에서 출발하여 슬픈 결과를 맺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하나님을 목전에서 전면적으로 배반하고 추방하는 결과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슬픔으로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기쁨으로 맞을 수 있는 마음의 자세를 갖추어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마음 자세를 갖춘다 할진대, 슬픔으로 출발하여 인간을 찾아오시는 하나님이었더라도 우리를 대하시는 순간 슬픔을 잊고 기쁨의 결과를 세울 수 있는 입장이 될 것이고, 또 그렇게 되면 그 기쁨의 기준이 상승함으로 말미암아 여기에서 복귀가 되는 것입니다. 기쁜 마음을 갖고 대하는 그 자리에 창조적이고 새로운 전진의 역사가 출발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기반을 닦아 넓히고 그러한 환경을 마련하려는 사람을 중심삼고 섭리의 터전을 넓히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복귀섭리를 승리로 결과지으시려는 하나님의 불가피한 욕구요, 요구가 아닐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뜻길을 가는 데 있어서 '내가 외롭기 때문에 하늘이여, 나에게 복을 주소서. 내가 어려운 길을 가고 있으니 하늘이여, 이 길을 막고 나를 쉬운 길로 인도하소서' 하고 기원해 나왔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어느 누구보다도 더 어려운 입장에서 이 시간에도 나보다 더 큰 고통을 당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도리어 하나님께 '당신의 어려움을 나에게 분담시켜 주시옵소서'라고 하며 그 크신 하나님의 고통을 위로하는 입장에 서야 되겠습니다.

어떤 어머니에게 사랑하는 아들이 있었는데 그 아들이 죽었다면 그 어머니는 말할 수 없이 슬퍼할 것입니다. 그럴 때 그 어머니의 마음은 그 이상의 슬픔을 느껴 보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 어머니가 맛본 슬픔보다 못한 슬픔을 겪은 사람이 그 어머니를 위로한다면 그 어머니는 위로받을 수 없지만 자기 이상의 고통을 당한 사람이 위로하면서 '나도 이런 일을 당해 보았다. 이럴 때는 이렇게 하면 손해만 보니까 이렇게 이렇게 하라'고 할 때에 그 어머니는 거기에서 자기의 슬픈 마음을 수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어머니의 다른 아들이 어머니보다 더 슬퍼하면서 '내가 어머니의 슬픔을 대신할 수 있다면 어떠한 어려움도 극복 하겠다'고 하며 나선다면 그 어머니는 그 아들로 말미암아 새로운 소망을 가지고 도리어 그 아들을 위로하는 입장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그러한 입장에서 슬픔을 당한다고 한다면 우리가 하나님이 당하시는 슬픔이 얼마나 크겠느냐 하면서 하나님을 생각하며 눈물짓고 하나님께 너무 슬퍼하지 마시라고 권고할 수 있는 입장에 서야 합니다. 자기의 형편은 제쳐 두고 하나님을 위로할 수 있는 입장에 서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은 슬픈 자리에서도 도리어 우리를 위로하실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고생하는 자리에 서 가지고 '내가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하며 있는 정성을 다하고 핍박과 괴로움을 당하는 것을 자기의 사명으로 알고 그것을 극복해 나가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은 거기에서 위로를 받으실 것이며, 당신의 모든 사연을 털어놓으시고 그와 함께하려 하실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 인간의 심정세계 즉, 정적인 세계를 미루어 보아서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는 뜻길을 가는 데 있어서 언제나 슬픈 하나님을 어떻게 위로해 드릴 것이냐 하는 것을 생각하며, 하나님을 위로해 드리기 위해 하나님보다 더 수고하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그렇게 되면 도리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로하시는 입장에 서게 될 것이고, 또 우리를 위로하시는 입장에 선 하나님은 슬픔을 잊으시고 기쁜 마음을 가지고 우리를 대하시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슬픔을 알았기에 하나님의 슬픔을 대신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안타까와하며 간접적으로나마 위로할 수 있는 입장에 서면, 하나님은 그러한 우리의 모습을 보시고 오히려 우리를 위로하시는 자리에 서실 것입니다. 그러한 자리에 섬으로 말미암아 그 순간은 바로 하나님께서 슬픔을 넘어설 수 있는, 슬픔을 잊을 수 있는 한 순간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두고 볼 때 신앙생활에 있어서 그러한 태도가 얼마나 귀중한가 하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시간이란 것은 자랑하는 시간이 아니라 제물을 드리는 시간이란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이시여, 당신께 슬픔이 있으면 그 슬픔을 나로 인해 탕감하시옵소서. 그뿐만 아니라 우리 교회의 모든 슬픔까지도 나로 인하여 탕감하여 주시옵소서' 하면서 제물되기를 다짐하고 그런 입장을 찾아 나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아무리 멀리하려 하더라도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그가 원치 않아도 하나님은 반드시 그 사람을 중심삼고 인연을 맺으려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을 통해서만 전진할 수 있는 것이 하늘의 역사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터전을 갖고 나서는 사람을 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전진의 일로를 가기 위해서는 슬픈 하나님을 위로할 수 있는 자리에 서야 합니다. 슬픈 하나님을 위로하기 위해서는 슬픈 입장에 있어서는 안 됩니다. 슬픈 입장에서는 슬픈 하나님을 위로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불평하는 마음이나 불만스런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뜻을 위해서라면 천만번 죽더라도 감사할 수 있고, 천만번 다시 회생하더라도 또다시 하늘의 뜻을 위해 죽을 수 있다면 소원이 없겠다는 마음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은 자기 일대(一代)에 있어서 수십 혹은 수백 사람을 대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돌아보며 나는 하나님을 위로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 살았다고 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죽어도 죽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게 개인적인 싸움터에서만 싸울 것이 아니라 그런 마음을 가지고 범위를 넓혀서 가정적인 싸움터에서 싸워 나가야 됩니다. 내 개인이 과거에 그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가정을 붙안고 싸웠으면 또다시 종족을 붙안고 싸우고, 그 다음엔 민족을, 국가를, 세계를 붙안고 싸워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탕감의 단계를 넓혀 나가면 우리가 전진할 수 있는 분야는 점점 사방으로 그 범위를 넓혀 나갈 수 있는 것이요, 그로 인해 우리는 계속 발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뜻을 대하는 데 있어서 과거보다도 오늘이, 오늘보다 내일이 가면 갈수록 점점 그 목표가 감소되는 자리에 서 있다면, 그 자리는 틀림없이 정지하는 자리를 넘어 후퇴하는 자리인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후퇴하는 사람은 하나님도 싫어해

후퇴하는 사람은 세상 사람들도 싫어하지만 하나님도 싫어합니다. 후퇴 하는 사람의 뒤에는 반드시 사탄이 따라와 가지고 그 사람의 전진을 백방으로 막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은 후퇴의 일로를 걷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일보 후퇴하는 사람은 선한 입장이 아니라 악한 사탄의 입장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는 시대가 중요합니다. 자기가 아무리 신앙 생활을 당당히 하고 뜻길을 힘차게 나가며 개인적인 섭리시대에 승리했다 하더라도, 그 시대가 가정적인 섭리시대권내로 일단계 전진해서 가정적인 책임을 짊어져야 할때는 다시 거기에 맞추어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시대에 승리한 결과를 가지고 가정적인 섭리시대에까지 승리로 밀고 나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과거의 신앙생활과 현재의 신앙생활을 두고 볼 때 그 모양이 같고 영역이 같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보다 전진된 시대권내에 있어서는 자기 자신도 전진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개인적인 사명만을 하던 때와 같은 입장에 서 있다면 이는 전진하는 것이 아니라 후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뜻의 길을 가는 사람들은 불평불만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몸을 굽혀 큰 죄를 진 죄인과 같은 입장, 제물의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한스러운 복귀의 노정입니다. 이렇게 한스러운 복귀노정의 탕감은 오늘의 어떤 순간에 완료되는 것이 아니요, 내일 완료되는 것이 아닙니다. 현실, 바로 오늘 이 시간을 중심삼고 완결지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현실을 무의미하게 보낼 수 없는 것입니다. 현실이야말로 죽느냐 사느냐 하는, 나의 생사를 판결짓는 기로요, 분기점으로서 항상 나의 생명을 노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리가 현실인 것을 여러분은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현실에서 패자가 되어 가지고는 미래에 있어서도 승자가 될 수 없습니다. 또 현실에서 패자의 서러움을 맛본 사람은 그것을 과거의 승리의 결과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에 우리의 원수 중의 원수가 나타나기도 하는 것이요, 행복 중의 행복이 뒤넘이치기도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어떻게 하면 이 원수를 때려잡고 행복의 요인을 모색할수 있느냐 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인 것입니다. 만일 자기도 모르게 한 고비. 두 고비. 세 고비 후퇴의 길로 떨어져 나갔다고 하게 될 때에는 이것을 다시 전진의 길로 되돌리려면 얼마나 힘이 드는지 모릅니다. 또 자기의 마음에 금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고 그것을 회복하려 할때에는 몸부림을 쳐도 혼자서는 힘이 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길을 가는 데 있어서 자기가 사랑할 수 있는 아들이나 지도자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복인지 모릅니다. 그럴 때에 만일 자기 주장이나 주관을 내세웠다가는 영영 갈 길이 막혀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가 사랑하는 아들이나 딸이 있으면 그에게 자신의 모든 사연을 털어놓고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며 또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의논을 해야 됩니다. 또 스승이 있다면 그 스승에게 모든 사연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스승님은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상의를 해야 됩니다. 이렇듯 상하 관계에서 문제를 수습할 수 있는 제2의 대상을 찾아 나서야지 자기 혼자 서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후퇴하는 입장에서는 어떻게 가일보 전진할 수 있는 동기를 찾을 것이냐? 자기 자체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제3의 대상을 통하여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가 필요한 것이요, 스승이 필요한 것이요, 사랑하는 아들딸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여러분은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이러한 사람이 없을 때에는 하늘과 담판을 지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미 타격받아 가지고 후퇴한 자리에서 담판을 지으려 할 때에는, 과거에 전진 하던 때보다 몇배의 어려움이 뒤따른다는 것입니다. 몇배의 정성을 들여도 수습할 수 없는 것이 우리 신앙길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알라

이와 같이 촌각을 다투어 가며 싸우는 생활을 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한 시간이 얼마나 무섭다는 것을 잘 알 것입니다. 어느 누가 턱 나타나서 말씀을 해도 그 말씀 한마디가 나를 때려 잡느냐, 아니면 나를 가일보 전진시킬 수 있는 동기가 되느냐 하는 것을 벌써 마음으로 안다는 것입니다. 기쁠 수 있는 대상인지 아니면 슬플 수 있는 대상인지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오늘날 신앙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러한 생활을 하는 데는 그저 아무렇게나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중심삼고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자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타격을 받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충격되는 말을 듣더라도 타격을 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설령 타격받을 수 있는 일이 생겨 자기가 억울한 입장에 서게 되어도 그것은 나를 망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흥하게 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해야 됩니다. 그러한 일이 생기면 생길수록 미래의 때가, 내 때가 가까이 온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환경을 넘기 위해 겸손한 마음으로 온갖 정성을 다 들여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빌라도의 법정에서 예수님에게 유대인의 왕이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당당코 변명할 수 있는 내용이 충분히 있었지만 자신이 지금 서 있는 자리가 어떠한 자리라는 것을 알고, 또 어떠한 변명을 해도 그 자리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에 변명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거기에서 입을 잘못 열었다가는 하늘을 불신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하늘의 종족을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인가 하는 것을 냉정하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주위환경에서의 반대가 강하면 강할수록 하늘의 종족은 거기에 비례해서 커지는 짓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뜻을 중심삼고 역사적인 전통을 세우는 데 필요적절한 내용의 말을 남겼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빌라도 법정에서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는 물음에 그렇다고 대답한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한 내용은 역사적인 승리를 결정짓고 시대적인 중심을 결정지으며, 미래의 방향을 제시한 내용인 것입니다. 그러한 자리에서 책임하지 못했다 할진대는 예수 그리스도가 세우고자 했던 정상적인 복음의 터전은 닦아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언제나 생각해야 할 것은 이 시간, 오늘 이 시간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외롭고 불쌍하신 분인가

어떠한 지도자가 되었으면 단 위에 서서 수많은 대중 앞에 말씀을 전하는 그 시간은 심각한 시간입니다. 지도자가 단에 서서 말씀을 전할 때는 어떻게 뭇 사람에게 생명의 인연을 가해 가지고 하늘과 연결시켜 주느냐 하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이 지도자의 책임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자기가 후퇴했는지, 아니면 일보 전진했는지를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후퇴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가려 놓지 않고 그대로 있으면 그것을 다시 수습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도자의 가는 길이 얼마나 심각하고 처량한 길인가 하는 것은, 자기가 그런 생활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는 것입니다.

지도자는 개개인의 생명을 책임져야 하는 입장인 동시에 모든 일의 첨단에 서야 하는 개척자의 입장인 것입니다. 가냘픈 자리에 있는 사람에게는 생명의 보호자요, 지도자라는 것입니다. 오늘의 터전보다도 내일의 상대적인 터전을 언제나 비교하는 불쌍한 입장에 서 있는 것이 지도자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우리 인간의 지도자가 그렇거늘 하물며 이 우주를 책임져 나가시는 하나님의 입장은 어떻겠습니까? 미래에 대한 것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의 입장이지만 동시에 인간들의 아버지의 입장에서 땅 위의 사람과 서로 상응적으로 모든 것을 가려 가지고 결정해 나가지 않으면 전진할 수 없는 하나님의 입장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땅 위의 한 사람을 찾아 나오시는 그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초조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은 지도자의 생활이 얼마나 고독하고 외로운가 하는 것을 느낌으로써 하나님께서도 외롭고 불쌍하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타락은 언제 오느냐? 타락은 지난날에 왔던 것이 아닙니다. 어느 한 순간, 바로 오늘 이 시간에 나를 걸고 넘어가는 조그만 문제가 나의 생사를 결판지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타락은 노도와 같이 한꺼번에 밀려들어 오는 것이 아닙니다. 어떠한 동기로부터 시작되어 조그만 틈 사이로 알게 모르게 스며들어와 전진의 길이 파탄되어 가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무서운 일이 과거가 아닌 오늘 이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늘과 사탄이 함께 사활을 걸고 노려보는 자리가 현실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만일 현실에 있어서 가일보 전진하지 못하고 후퇴 하는 입장에 서게 될 때에는 친구고, 자식이고, 이웃이고, 가족이고 전부다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터전을 어떻게 해서든지 올바르게 닦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협조하실 수 있는 내용

하나님의 장녀가 되려면 교회를 누가 맡아야 됩니까? 지구장이 맡아야 됩니까? 또 하나님의 장남이 되려면 지구장이 맡아야 돼요? 서로가 맡겠다고 싸워야 되는 것입니다. 어려운 일은 내가 먼저 하겠다는 마음, 죽을 자리에는 내가 먼저 가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도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하늘은 반드시 선하면 올라가게 하는 것이요, 악하면 내려가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올라가고 내려가는 움직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노정에서는 수평선을 기준으로 해서 선한 것을 중심삼고 점점 나아가느냐 하는 것이 지극히 중요한 문제인 것입니다.

교회에 출석하게 될 때에도 내가 과연 누구를 대하러 가느냐, 또 무엇을 하러 가느냐 하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일보 전진하기 위해서 나간다, 또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서 나간다고 할 때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이냐? 어제보다 더 가치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태도부터 달라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벽부터 일하라는 것입니다. 교회를 오는 데 있어서도 그냥 간다는 마음으로 오지 말아야 하고, 잡담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일편단심 한 곳에 지성을 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전차를 타거나 택시를 타거나 해서 교회로 오는 도중에는 오고 가는 많은 사람들을 쳐다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그들의 나타난 모든 형상들을 그냥 지나칠 것이 아니라, 그것을 분별하고 감정해서 자기의 가는 길 앞에 플러스 될 수 있는 재료와 영양소로 흡수할 수 있는 놀음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길을 가다 보면 별의별 사람을 다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이 자기 앞에 보여지는 것은 무언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런 모습들을 볼 때에는 어떤 설교자의 설교에서보다도 더 많은 느낌과 깨달음을 받아야 됩니다. 그런 것들은 모두 자기의 갈 길을 보여 주는 것임을 알아야 됩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은 뜻을 위해서 저렇게 전심전력을 다해 보았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됩니다. 그런 것들을 볼 때에는 그 한 시간을 중심삼고 가일보 전진할 수 있는 재료로서, 자신을 비약시킬 수 있는 상대적인 재료로서 받아들이기에 급급해야 됩니다.

여러분이 처음으로 단 위에 서게 될 때, 그 단에 서기까지에는 졸이는 마음을 느꼈을 것입니다. 또 어떤 때는 지긋지긋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니 그 자리가 공적인 자리일 때는 그 배후에 계시는 하나님은 얼마나 마음을 졸이시겠는가를 생각해야 됩니다. 하나님은 얼마나 마음을 졸이시 겠는가를 생각하고 자기의 부족함이 느껴지면 느껴질수록 하나님의 안타 까와하시는 심정에 접하려고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비참하고 불쌍한 입장에 계시는 하나님을 느끼게 될 때에는 그 자리에 있는 청중을 사로잡을수 있는 것입니다. 그 자리가 아무리 크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동정하고, 하나님을 중심삼고 슬픔이나 감격된 마음을 폭발시키는 내용을 설교할 때는 청중을 사로잡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버려두고 자기 혼자 해보겠다고 한다면 그가 지구장의 자리에 앉아 있다 해도 쉽사리 넘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언제나 하나님을 중심삼고 하나님이 협조하실 수 있는 내용을 갖고 살아야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기도할 때 '아버지' 하는 것은 이미 어떤 한 개인, 즉 김 아무개나 박 아무개의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김 아무개나 작 아무개에게 공적인 섭리노정에 왔다 간 수많은 선조들이 최후에 성취하고자 했던 그 목적을 중심삼고, 그들이 맞이하려 했던 결정적인 순간을 통해서 졸이는 마음을 가지고 기도를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바라심이고 요청인 것입니다. 그리므로 여러분은 '어떻게 하면 그러한 아버지 앞에 공인받는 사람이 되어 사명을 다할 수 있을 것이냐' 하는 것을 늘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고 하늘을 대신할 수 있는 본연의 입장에서 기도를 해야 됩니다. 그러면 그 기도는 자신의 입을 통해서 나온 것이지만 자신의 기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자신이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기가 감동되지 않고는 절대로 상대를 감동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전진하는 신앙자의 생활 태도

오늘날 우리가 처해 있는 현재라는 것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를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여러분이 전진이냐 정지냐 이거예요. 정지해서는 안 됩니다. 정지는 절대로 원하지 않습니다. 정지라는 것은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급경사를 올라갈 때는 잠시라도 정지 하게 되면 여지없이 굴러떨어지는 것입니다. 신앙길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언제나 이런 것을 생각하고 긴장해 있어야 합니다. 급경사를 올라갈 때 한걸음 한걸음 올라가는 그 걸음은 천륜을 대신할 수 있는 가장 귀한 것입니다. 한걸음 올라서기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칠부능선, 팔부능선, 구부능선을 넘어 정상을 향해 갈 때는 다른 무엇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일편단심 정상만을 향하여 올라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일단 정상에 올라서면 세상은 모두 자기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시야에 들어 오는 모든 존재물들도 자기의 품에 품겨져 있는 것이요, 눈 앞에 전개되는 모든 존재물들도 주체인 자기 앞에 상대적인 인연을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기 앞에 희열의 대상, 영광의 대상으로서 기쁘게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느끼는 자리, 생애 가운데에서 그러한 기쁨을 하나님과 더불어 나누고 그러한 승리를 체휼하는 자리에는 하나님이 같이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시간, 그런 때를 많이 갖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같이하지 않을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역사적인 일대를 중심삼아 가지고 내가 100이 라는 기준을 가진 사람인데 200이라는 기준을 갖추었다 하게 되면 그 사람은 아무리 타락된 길을 간다 해도 200을 갖춘 그 기준이 항상 그를 지켜 줄 것입니다. 어려운 자리를 찾아가서 어려운 일을 하려 하면 벌써 그것이 될 것인지 안 될 것인지 그의 마음과 영, 즉 그의 속사람이 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생명체가 되기 전에 그 생명체는 어디에서 자랍니까? 그 생명체는 공중에서 자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에서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영형체와 생령체도 공중에서 자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속에서 자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생령체의 감각, 생명체의 감각, 혹은 영형체가 감지하는 그 무엇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것을 제대로 삼아서 뜻길을 걸어가는 데에 있어서 자신이 전진하고 있는지 후퇴하고 있는지를 가릴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가리지 못하면 여러분은 정지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정지하는 무리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들은 새로 들어온 사람들 앞에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생활과 그러한 신앙태도가 습관화되고 전통화하면 새로운 뜻 앞에 크게 써야 할 사람들이 들어왔어도 그들 앞에 본이 되지 못하고 자극을 주지 못하게 됩니다. 먼저 들어온 사람들이 생활면에서나 신앙면에서 새로 들어온 사람들 앞에 본이 되어서 그 기반을 닦아야 할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러지 못했을 때는 큰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현실에서 싸워야 합니다. 전진하기 위해서는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감각, 즉 오관을 통하여 자기가 전진하고 있는지 후퇴하고 있는지를 감지해야 됩니다. 오관을 통하여 들어오는 그 감각의 일체는 자신이 어떤 일을 하든 그것이 전진할 수 있는 일인지 후퇴할 수 있는 일인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 기준이 되는 것은 제물된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제물된 생활을 해야 되는 거예요. 그러므로 신앙을 하는 우리들이 언제나 즐겁고 기쁜 날만 맞이해 가지고는 자기 자신을 자랑할 수 있는 기백이라든가, 자랑할 수 있는 입장을 갖출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왜냐? 개인적인 복귀단계를 넘으면 가정적인 복귀단계가 기다리고 있고, 가정적인 복귀단계를 지나고 나면 종족적인 복귀단계가 기다리고 있고, 그것을 넘으면 국가적인 복귀단계, 세계적인 복귀단계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늘 앞에 자신의 생애를 바칠 수 있어야 합니다. 과거보다도 다가오는 미래에 더 가중된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합니다. 제물된 입장에서 자기의 생애 전체를 겸손히 바칠 수 있는 생활태도야말로 신앙노정에서 보다 단계를 높여서 전진할 수 있는 하나의 동기가 되는 것입니다. 만일 그런 생활태도를 갖지 않고는 후퇴의 일로를 거듭 갈수밖에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절대 교만하지 말고 남을 위해 희생하라

오늘이 얼마나 귀하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원수도 오늘의 원수가 제일 무서운 것입니다. 과거의 원수가 무서운 것이 아니고 내일에 다가오는 원수가 무서운 것이 아닙니다. 오늘 대하고 있는 원수가 무섭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서로가 서로를 심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서로가 서로의 심판대상임을 알고 그러한 심판도상에서 서로 협력해서 발전할 수 있는 동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사망의 한계점과 생명의 한계점이 오늘 이 현실의 초점을 중심삼고 뒤넘이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생명적인 것과 인연을 맺느냐 아니면 사망적인 것과 인연을 맺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늘과 인연을 맺고 나가느냐, 아니면 실탄과 인연을 맺고 나가느냐 하는 문제가 현실적인 터전에서 결정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때 현실 이상 무서운 것이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그런 것이 생활화된 사람은 어떤 것을 봐도 그것이 사탄적인 것인지 하늘적인 것인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만약 하늘이 원치 않는 것이라면 무자비하게 잘라 버리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조금도 주저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은 겉으로는 떵떵거리지만 실상은 반대적인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자기가 왜 그런 일을 하는지를 모릅니다. 알 턱이 없지요. 하늘의 섭리를 근본적으로 휘저어 버릴 수 있는 행동을 하고서도 자기가 왜 그러는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개인적인 영광이라든가 영화를 다 집어던지고 십자가에 달려'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하던 예수님과 같은 입장에 서야 됩니다. 자기를 포기할 수 있는 동기를 가짐으로 말미암아, 자기를 던져 버림으로 말미암아 하늘이 동정할 수 있는 기준을 세우라는 것입니다. 그 길밖에 없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이란 그러한 바탕 위에서, 그러한 공식노정을 거쳐야만 수습될 수 있고 또 그렇게 수습된 기반 위에 하늘의 소원이 닿아 전진의 기원을 다시 마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오늘의 현실이 얼마나 무섭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침에 오늘은 무슨 일을 할 것인가를 생각할 때가 있지요? 자신이 생각하는 일이 어떤 일이든지간에 현실생활에서 해결지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루도 마음놓고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한마디만 들어도 그 사람이 말하려는 내용이 슬픈 것인지 기쁜 것인지 대번에 알 수 있습니다. 누가 보고하러 들어서면 척 보자마자 마음이 아는 것입니다. 슬픈 소식이면 찬바람이 휙 지나갑니다. 그것이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정상적인 내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반응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럴 게 아니예요?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기쁜 소식도 그렇습니다. 그것도 보고를 듣자마자 대번에 알 수 있습니다. 반응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오늘의 현실 싸움에서 지게 되면 전진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반드시 후퇴의 일로를 걷게 된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래도 신앙길에서 정지되는 시간은 길지 않습니다. 정지되기 시작하는 것은 포화상태가 다가온다는 것을 말합니다. 포화상태라는 것은 내가 나로서 이 이상의 일을 할 수 없다는 패를 말하고, 또한 내 힘이 이 이상 영향을 미칠 수 없다고 하는 때를 말합니다. 그러한 때에 정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상속을 해줘야 합니다. 이삭이 야곱에게 상속해 주던 것처럼 상속해 줄 준비를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앞에 나타나는 것은 모두 대번에 말아먹을 생각만 했지요? 이름도 없는 말석에서 자기의 모든 것을 전부 다 남에게 양보해 주면서 그들을 축복해 주고 빈손으로 돌아서는 손님과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귀한 것들을 가지고 어느 집에 들어가고 모든 것을 나눠주고 나가는 길손과 같은 마음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하늘이 보실 때 동정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자기 소유의 분량까지도 전부 다 나눠주는 사람은 하늘이 동정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운명적으로 타고난 복의 기준이 있기 때문에 다 나눠주고 없는 것 같아도 하늘은 그 사람에게 일시에 그보다 많은 복을 내려주는 것입니다.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나눠주면 그 이상으로 보충받는 거예요. 결국 주는 것은 밑지는 장사가 아니라 이(利)가 남는 장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포화상태가 되거든 모든 것을 나눠줄 준비를 하라는 것입니다. 나눠줄 때에도 어떤 것은 남겨 두고 나눠주어서는 안 됩니다. 자기가 갖고 있는 귀한 것을 모두 나눠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여러분을 동정하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취해야 할 복의 양을 다시 채워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결국 손해보는 것이 아니라 이(利)를 보는 입장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 교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남을 위해 희생하라는 것입니다.

​기 도

​사랑하는 아버님, 통일교회가 현재 처해 있는 자리가 당신 앞에 기억될 수 있는 자리이옵니까? 정지냐, 전진이냐, 후퇴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오늘 우리 통일교회가 발전해 나가는 과정에는 아니 거칠래야 아니 거칠 수 없는 숙명적인 일들이 전개되고 있사옵니다. 사생결단을 하지 않고는 안 될 일들이 전개되고 있사옵니다.

아버지, 지금까지 보잘것없는 이 교회를 보살펴 주시고, 보잘것없는 이자식을 보호해 주신 것 잘 알고 있사옵니다. 부족한 저를 세우시기에 아버지께서는 얼마나 수고하셨는가를 저희들이 기억할 수 있도록 하옵소서.

오늘날 맡겨진 이 엄청난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를 생각하면 생각 할수록 인간은 너무도 약하다는 것을 알게 되옵니다. 그러나 인간이 약하기 때문에 그런 인간에게 기대하시는 아버지의 자비와 긍휼의 손길이 항상 저희 곁에서 떠나지 않는다는 것을 저희들은 아옵니다.

저희가 찾아가는 이 길은 망하기 위한 길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자랑하실 수 있는 길이요, 아버지의 보람있는 협조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길이 라는 것을 저희들은 지금까지 이 길을 개척해 나오면서 깨달아 알고 있습니다.

또다른 주체의 인연을 가지고 나오는 무리들이 얼마나 무섭다는 것을 저희들은 아옵니다. 하오니 밤이나 낮이나 아버지에서 동하시면 저희도 동하고 아버지께서 정하시면 저희도 정해야 되겠사옵니다. 저희가 그런 상대적인 입장을 절대시하지 않으면 당신의 승리의 터전이 이 지상에 닦아질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이 길이 과연 힘든 길 이라는 것을 알게 되옵니다.

아버지, 저희는 기뻐하더라도 자신을 중심삼고 기뻐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 자신을 중심삼고 기뻐하는 것을 느끼는 때가 많사옵니다. 아버지를 중심삼고 기뻐해야 할 것인데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저희들은 현실무대를 통하여 느껴지는 감정의 지배를 받고 있사옵니다. 이렇게 죄인된 자신을 저희가 기도 시간에 별도로 느끼면서 회개의 시간을 갖는 것보다도 생활과정에서 언제나 스스로 회개하는 마음을 갖고 살아가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어야 하겠사옵니다.

저희들이 호흡을 하면서 숨이 가쁘고 몸이 피로하다는 것을 느끼는 것은 과거의 일도 아니요, 미래의 일도 아닌 현재의 일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현재를 지탱시킬 수 있는 동기는 현재의 나의 태도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자기 스스로 높은 가치의 무엇을 가졌다고 자랑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전부 다 하늘 앞에 바쳐 드리고 만민 앞에 나누어 주기 위하여 몸부림친다면 절대로 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그런 자리에서는 전진하지 않을래야 전진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저희들은 또한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지, 여기에 모인 자녀들로 하여금 당신을 사랑하기 전에 먼저 당신의 동정의 마음이 떠날 수 없는 그런 생활태도와 신앙태도를 갖추고 나갈 수 있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저희들은 타락한 인간의 후손이 아니옵니까? 그 떨어진 개인 가정 종족 민족 국가를 복귀시키기 위해 6천년 동안 엄청난 수고를 하셨던 당신의 그 노정을 일시에 횡적으로 탕감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사옵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천만사를 엮어 오신 아버지의 비참한 심정이 저희들의 생활노정에 결부되어 있고, 누구와도 사정을 통할 수 없는 외로움이 저희들의 생활과 연결되어 있는 것을 절감하여야 되겠사옵니다.

아버지께서 안 계시면 저희들 자신도 있을 수 없는 것이옵니다. 아버지께서 존재하시기 때문에 저희가 존재가치를 느낄 수 있는 것이요, 아버지의 내면의 심정이 저희들의 마음속으로 흘러 들어오기 때문에 저희들이 아버지의 소망을 위하여 내일을 다짐할 수 있는 것이옵니다. 이러한 것을 생각할 때마다 하늘을 망각할 수 없고 하늘과 더불어 살아가지 않을 수 없는 저희들의 운명길임을 느끼게 되옵니다. 이러한 운명길을 스스로 느낄 줄 아는 아들딸이 있을진대 그는 절대 망하지 않을 것임은 지금까지의 역사로 보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 것입니다.

아무것도 갖추지 않은 자리에 있어서의 자기 자신의 불쌍하고 초췌한 모습을 바라보게 될 때 옷깃을 여미고 몸을 수그려 아버지 앞에 엎드리기에도 부족한 모습임을 깨닫게 되어 눈물이 앞을 가리옵니다. 저희가 아버지를 대해 부를 때 아버지라는 말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기가 막히게 엉클어진 순간 순간을 생활에서 체휼하는 당신의 아들이 되고 딸이 되어야 되겠사옵니다.

아버지, 정지는 싫사옵고, 오직 전진만을 요구하옵니다. 정지와 더불어 후퇴하는 운명이 아버지의 뜻 앞에 절대 있어서는 안 되겠사옵니다. 내일의 슬픔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자진해서 슬픔의 길을 가겠다고 몸부림 치는 자리에 서야 되겠사옵니다. 그러한 자리에서만이 내일의 승리와 전진의 일보가 시작될 수 있다는 사실을 저희들이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외로울 때 그 외로움이 나를 중심한 것이라면, 하늘을 향하여 자기 형체를 나타낼 수 없는 부끄러운 자신임을 깨달아야 되겠사옵니다. 그리하여 저희들은 세상의 외로움을 대표하는 하늘의 대신자로 서야 되겠사옵니다. 그리하여 악을 대해서는 당당하지만, 하늘을 대해서는 겸손하고 경건한 모습을 갖추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 주변 전체에, 아버지의 무한한 동정의 심정과 긍휼의 마음이 하늘로부터 퍼부어져 저희의 마음속 깊이 흐르고 심정 깊이 인연되어진 것을 느끼옵니다. 고마우신 아버지, 놀라우신 아버지, 그렇게 저희를 협조하지 않을 수 없는 사연을 품고 오신 불쌍하신 아버지를 생각하게 될 때 눈물이 앞을 가리옵니다. 하오니 아버지의 위로가 저희에게 있는 것을 깨닫는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깊고 깊으신 당신의 분부의 음성을 받은 그 마음 가운데 당신께서 찾아 오시어서 머물러 주시옵소서. 뼛골이 울렁이고 뼈살에 사무치는 당신의 분부와 명령을 받고 내심으로 결심하고 다짐할 수 있는 자리를 바라는 당신의 자녀들이 많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복잡한 환경은 생명길에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생명길은 홀로 가야 할 외롭고 고독한 길이라는 것을 아옵니다. 또한 아버지와 아들이 인연을 맺고 다짐한 것을 미래의 소망의 표준으로 삼지 않으면 생명의 분위기는 재현되지 않는다는 것을 저희가 아옵니다.

이러한 저희들을 긍휼히 보시기에 아버지, 얼마나 마음 아프셨고 얼마나 서러움을 당하셨사옵니까? 이제 더 이상은 긍휼의 마음을 갖고 저희를 대할 수 없는 아버지이신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저희가 면전에서 아버지를 추방한 일이 얼마나 많았는가를 느끼게 되옵니다. 이제 앞으로는 이와 같은 불효막심한 아들딸이 되지 않겠다고, 스스로 현실에 있어서 생명과 위로의 대상이 되겠다고 몸부림치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 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는 눈물을 흘려도 민족을 대신하여 흘려야 되겠습니다. 민족의 눈물을 대신하고 세계의 눈물을 대신하는 자리에서 아버지를 위로하고 아버지의 뜻을 염려해야 되겠습니다. 그렇게 되었다고 할진대는 만민은 그길을 박차고 넘어갈 수 없기에 그런 눈물을 흘린 자와 같이 가고 싶어할 것이요, 친구가 되고 싶어할 것이요, 의논하고 싶어할 것이라는 것을 저희들이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금후에 통일제단이 나아갈 길을 당신께서 맡아 주시옵소서. 여기에는 그 누구도 스승이 아니옵니다. 어린아이처럼 당신의 행보를 한걸음 한걸음 따라가면서 보조를 맞춰야 되기에 주위를 바라볼 수 없는 것이 지금까지 통일교회가 걸어온 길이요, 또한 금후에 통일교회가 가야 할 길이옵니다. 내부에 미쳐지는 혹독한 시련과 환경의 큰 파도가 저희에게 밀려오더라도, 평온한 그 수평선 기준 이하에 들어가 넘치는 물결에 휩쓸리더라도 저희는 자기의 위치를 잃어버리지 않고 아버지의 깊으신 품에 품겨 아버지를 모시고 위로할 수 있는 터전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되겠사옵니다. 이러한 것이 저희들의 사명이라는 것을 올바로 느끼는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전진이 좋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한걸음 전진하기 위해서는 피눈물을 흘려야 하는 뒤넘이치는 투쟁의 노정과 비참한 제물의 노정을 거쳐야 한다는 사실을 저희들이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통일교회를 사랑한다면 그 배후에 말할 수 없는 피어린 투쟁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아버님과 선조와 스승들 앞에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자랑할 조건이 있으면 그것을 아버지 앞에 겸손히 돌려드리고 만민의 것으로 돌려드리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현재 스스로의 입장을 아버지와 연결시키기 위해 직접 당신께 노크할 줄 아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오늘 여기에 참석한 자녀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하루를 기쁨의 날로서, 승리의 날로서 바쳐 드릴 수 있게 하여 주시옵고, 이해가 거룩한 해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저희들의 생애도 거룩한 생애가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그리하여 저희들을 통하여 섭리하시는 당신의 역사가 거룩한 결과가 되기를 바라옵니다. 이민족과 이 세계가 아버지 앞에 기억되고 당신의 뜻과 사명을 책임질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올 때에, 모든 말씀 참부모님의 성호 받들어 간절히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