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요지>선생님의 일생 모토는 하나님의 대변인 이었다. 오늘부터 여러분은 천적인 대변인이 돼 주기를 부탁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대역자(代役者)가 되라. 또 하나님의 대신존재가 되라.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대사자(代死者)가 되어 주기를 바란다.
이 돌은 주시는 선생님과 받는 여러분과 함께 삼위적(三位的)인 조건물 이 되도록 마음 깊이 기념하고 간직하라. 이 돌의 이름은 순석(巡石)이다.
이제부터는 선생님이 하는 일에 대하여 비판도 하지 말고 불평도 하지말라(식구들은 이를 환호로써 약속하였다). 선생님 가까이 있는 사람들은 일생 동안 죽을 때까지 마음을 놓지 못한다. 여러분들이 행한 지금까지의 모든 것은 다 잊어버려라. 그리고 지금부터는 조심해야겠다.
아버지의 심정을 대해서는 약자(弱者) 중의 약자가 되어야 한다. 지내놓고 보니 하늘의 일은 거의가 울음의 여행 이었다 *
* 이 말씀 요지는 <성화> 제25호에 제목 없이 요약되어 실린 말씀을 옮긴 것임.
우리의 당면 목표는 원리무장, 인격훈련, 심정훈련입니다. 이제부터 우리의 생활과 활동은 지구(地區)의 삼위기대를 중심으로 해야 합니다. 지구의 삼위기대가 중심이고 그밖의 다른 사업기관은 전부 이를 위한 보조기관입니다.
심판에는 말씀심판, 인격심판, 심정심판의 세 가지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말씀으로 원리무장 단계를 넘어 인격훈련 단계로 들어가는 때에 있습니다.
인격자가 되기 위해서는 조직적 훈련이 필요합니다. 집단적인 가정생활(아파트 같은 곳에서)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즉 전체적인 이념이나 제도를 통할 수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그런 관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삼위기대 단위의 속회(屬會)는 각자의 사는 집을 순회하면서(윤번으로) 하는 것이 좋습니다. 횡적인 관계는 속회를 통해서 다지도록 하십시오. 새로 온 사람들은 조장, 반장들이 인도하여 각 지구(地區)에 배치, 편입시키도록 하기 바랍니다.
얼마 있으면 교회 우승기도 만들려고 합니다. 하늘이 기뻐하시는 것은 일선에서 싸워 실적을 올리는 것입니다. 앞으로 반(班) 단위로 속회를 보도록 하기 바랍니다. 좀더 발전하면 삼위기대 중심으로 하고, 이것이 12인으로 확대되면 또 갈라야 합니다. 연락은 자기를 중심으로 하여 위로 3단계, 아래로 3단계, 7수 형태를 취해야 합니다.
앞으로는 어떤 사건에 대해 판결을 하는 데 있어서도 그 환경적인 한계권 내에서 해결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삼위기대건(三位基臺件)이면 반(班), 조(組), 지구(地區)까지의 권내에서 해결합니다. 본부에서도 지구, 조, 반까지 관할하게 되는 것입니다.
될 수 있는 대로 삼위기대는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도록 하여 상부(上部)의 신세를 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상부에 해를 가하면 하늘의 슬픔이요, 사탄에 해를 가하면 하늘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본부의 사람들은 일선 식구들과 심정적으로 일치되어야 합니다. 앞으로는 선생님의 말을 듣듯이 지구장이나 조장 반장의 말도 절대적으로 들어야 합니다. 앞으로는 본부에서 순회 전도사를 파견하여 보살피도록 할 것입니다.
모든 민족이나 국가에 있어서도 일선장병과 후방의 국민들이 심정을 합하여 힘을 쏟으면 반드시 번영합니다. 조(組)까지는 명령을 대기할 수 있는 파수자(把守者)가 있어야 합니다. 누구에게 잘 보이겠다고 하는 관념을 버려야 합니다. 되든 안 되든 자기 실력대로 충성을 다하기 바랍니다. 삼위기대 내에서 모일지라도 3인만이 모여서는 안 됩니다. 급속한 시일 내에 12인이 모이도록 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경북지구에서 간행된 <기수(旗手)>지에 실린 것을 정리한 것임. 이 날은 제1회 부모의 날에 해당하는데, 사실 이 날을 부모의 날 이라고 선포하지는 않으셨고 굳이 표현하자면 외적으로 천모축복인계식(天母祝福引繼式)인데, 새벽 4시에 거행되었다. 이 날은 하루 종일 식구들이 모두 축하잔치의 분위기 속에서 지냈다.
<말씀 요지> 생명문제와 영생의 노정은 원리원칙적이고 또 매우 복잡하다. 은행에 예금해 둔 돈을 다시 찾는 데도 수속이 있고 절차가 까다로운데, 하물며 이미 죽은 생명을 다시 찾는 영생노정은 얼마나 복잡하겠는가? 여러분은 그 절차를 다 모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 어려우니 순종의 도리를 다 하는 것이 제일 귀하고 현명한 방법이다.
자연의 이치도 봄에는 새잎이 무성하게 나오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런데 거기에서 필요하고 중요한 것은 잎이 아니라 그 잎을 나오게 하는 줄기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기독교에 있어서도 생명과 같은 줄기를 자르면 망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복귀역사는 참부모를 세우기 위한 역사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가인 아벨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하늘은 내적으로 참부모를 복귀하기 위해 섭리해 나오셨다. 어느 누구든지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한 근본섭리(중심줄기)에 대적(對敵)하거나 방해하면 그는 천도(天道) 앞에 버림
받게 되고 결국 망할 수밖에 없다.
세상에서 모든 여건이 조성된 환경에서 자신을 갖고 일을 추진해도 실패하는 경우가 많은데, 하물며 천적인 일을 하는데 어찌 자신할 수 있겠는가? 그저 막연히 천당 간다고 하는 신앙, 무조건 구원을 받았다고 확신을 하는 신앙, 생각이 깊지 않은 신앙은 잘못된 것이다. 그러니 1분 1초도 방심하지 말고 험하고 어렵고 좁은 생명길을 아버지와 인연 맺으면서 가야하는 것이 신앙의 길이다.
사람에게는 심문(心門; 마음의 문)이 있는 것같이 천성(天城)에도 통하는 문이 있다. 그러기에 천적인 일을 하는 데 있어서도 때를 놓치지 말고그 문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때는 어느 자리에서 아버지를 불러야 하는가, 어떤 마음을 갖고 아버지를 찾아 나가야 하는가, 아버지의 어떤 마음부터 상속받아야 되겠는가를 연구하고 기도할 때이다.
하나님은 사랑의 본체이시며 공평하시다. 아무리 악한 자라도 세 번 이상 그 마음을 통해서 갈 길을 인도해 주신다. 인간의 본성은 하늘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감화로 생명의 길을 찾아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게 된다. 일생 동안 최소한 세 번 이상 하늘이 찾아오게 되는데, 이 기회를 놓치면 하늘과 인연을 맺을 길이 끊어져 버리게 된다.
하나님의 크나큰 유업을 상속받을 우리는 젖 먹을 때와 자랄 때와 자란후의 사명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아버지가 언제까지나 키워줄수는 없는 것이다. 스스로 깨닫고 자라서 아버지의 일을 분담해야 한다.
빨리 자라서 아버지의 일을 해야 되지 않겠는가!
충효열(忠孝烈)은 가르쳐 주어서 행하는 것이 아니다. 심정이 우러나서 자동적으로 행해야 한다. 또한 남으로부터 듣거나 배우거나 끌려서 하늘앞에 지성(至誠)을 들이는 것보다 심정이 우러나서 스스로 정성을 들여야 하는 것이다.
이 시간 저희의 마음에 체휼되는 대로 아버지의 본연의 심정과 화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저희 자신이 어떠한 위치에 있는가 스스로 살필 줄 알게 하여 주시옵고, 자랑하고 싶고, 보이고 싶고, 귀하게 생각되던 나 자신이 어떠한 위치에 있는지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과거와 현재를 거쳐 미래를 향해 가는 역사노정에서나 천지 운세의 법도권 내에서나 심정세계에서 어떠한 위치에 자리를 잡고 보이고 싶은 내가 되었으며, 자랑하고 싶은 내가 되었으며, 자신의 가치를 주장하고 싶은 내가 되어 있는가를 이 시간 스스로 더듬어 살피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가 걸어온 인생행로는 자리를 잡지 못한 인생행로인 것을 저희들은 뼈 살에 사무치도록 느꼈습니다. 이 한 시간 깊은 심정으로도 머물 곳이 어디인지 알지 못해 방황하는 자신임을 부정할 수 없사옵니다. 그러한 자신을 붙들고 안식의 한 날을 꿈꾸는 자는 인생행로에서 패자(敗者)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도 저희는 이미 느꼈사옵니다. 서러워하는 ‘나’는 살기를 고대하여 서러워하는 것이옵고, 애달파하는 ‘나’는 갈 길을 몰라 애달파하는 것이오며, 방황하는 ‘나’는 목적하는 한 곳을 가기 위해서 방황하는 것임을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의 손은 사망의 권세를 쳐부수고 이겨낼 수 있는 아무런 무엇도 잡지 못하였사옵고, 저희의 마음은 하늘땅이 깨져 나가는 한이 있다 해도 움직일 수 없는 중심을 세우지 못하였사옵니다.
천상천하의 만물만상은 천리의 법도를 벗어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 철칙이온데, 저희들은 엄연히 존재하시는 하늘에 소속되지 못한 한스러운 모습들이오니, 이러한 자신을 바라보며 탄식이라도 할 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내세워 자랑하고 싶어하는 나는 허황된 존재이옵고, 무엇과 비교하여 판단하는 그 나는 천적인 위치에서 볼 때에 심판받을 자리에 가까이 있는 존재임을 느낄 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님께서는 자기의 위치를 찾지 못하고 자기의 가치를 알지 못하고 자기의 갈 방향을 알지 못한 채 헤매고 있는 인생들의 서글픔을 해원해 주셔야 할 책임이 있기에, 만민이 머물러야 할 안식의 동산, 만천하 앞에 자랑할 수 있는 가치 있는 곳, 이곳이 곧 내가 찾던 목적의 곳이요, 영원한 생명의 곳이라고 만인간이 쌍수를 들어 환영하며 달려갈 수 있는 그 곳을 찾으시기 위하여 오늘도 수고하고 계신 것을 이 소자는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이 일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지금까지 수고하셨고 이 한 시대에도 수고하시며 미래에도 염려하실 것임을 저희들이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무슨 면목으로 아버지를 뵈오리이까? 무엇으로 아버지를 모시리까? 무엇으로 아버지를 고대하오리이까? 무엇으로 아버지의 말씀 듣기를 원하오리이까? 그것을 모르는 저희들이옵니다.
타락으로 인해 흙덩이만도 못한 천한 모습이 된 저희들이오니, 자기의 존재의식을 생각지 않고 소유하고 있는 자신의 주관이나 자신의 어떠한 의식도 허락지 않은 이 시간이 되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자기의 관념을 초월하고 자기의 의식을 초월하여 당신의 장중(掌中)에 쥐어진 흙과 같이 되어, 당신의 마음대로 빚어질 수 있고 당신의 뜻대로 응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다시 아버지의 주관권 내에 속하여 생명의 맥박이 뛸 수 있도록 재창조의 손길을 가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님은 말씀으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다고 했사오니, 죽었던 몸들을 아버지의 말씀으로 다시 소생시키시어서 환희에 취해 천지 만상 앞에 그 가치를 노래할 수 있는 심정적인 해방이 이 시간에 이루어지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마음속 깊이 깊이에 아버지의 기쁨과 영광이 폭발되어 환희에 찬 자유의 모습을 이 시간 저희의 몸 마음으로 체휼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은 그 이상의 아무것도 요구치 않사오니 오로지 이 한 뜻, 이 한 사정, 이 한 일만이 저희의 심정에 사무쳐지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제 아버지, 말씀을 하고자 나타났사온데 무슨 말씀을 하오리까? 지난날에도 많은 말씀을 하였습니다. 말을 할 수 없는 환경에서도 말씀을 해야 할 때가 많았던 것을 당신은 아시오니, 이 시간은 그런 시간이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마음으로 흠모하고 마음으로 기뻐하며, 당신의 애달픔이 저희의 애달픔이 되고, 당신의 사정이 저희의 사정이 되고, 당신의 슬픔이 저희의 슬픔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심정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아버지의 영광의 자리에 뛰어 나갈 수 있는 이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나이다.
이제 전하고자 하는 모든 것을 아버지께서 맡아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주는 자의 마음이나 받는 자의 마음이 하나로 화하게 하시어 자아의 모든 의식을 초월하고 시간적인 관념을 초월하여 친히 움직이시는 아버지의 그 움직임을 저희들이 체휼할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깊은 아버님의 심정의 그늘에 자기도 모르게 우거할 수 있는 이 한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고, 그런 체험을 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나이다.
이날 축복의 은사를 바라는 수많은 인류 위에 축복하여 주시옵고, 수많은 제단 위에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더욱이나 외로운 싸움터에서 싸우다 지친 몸을 끌고 아버지의 존전에 나와 무릎을 꿇고 때와 시기를 고대하며 호소하고 있는 당신의 숨은 아들딸들 위에도 축복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나이다.
같은 은사의 뜻을 세우시려는 아버지시오니, 이 시간 같은 승리의 모습으로서 영광의 은사를 대할 수 있도록 축복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올 때에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말 씀> 이 시간 여러분 앞에 드리려 하는 말씀의 제목은 ‘너희는 누구의 아들딸인가’입니다. ‘너희는 누구의 아들딸인가, 누구의 자녀인가’라는 제목을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타락의 인연으로 인하여 인간은 사망의 그늘 아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마음은, 또 우리의 몸은 음침한 이 사망의 환경을 개척하여 광명하고 선한 그 세계를 향하여 가야 할 위치에 처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알고 보니 나 하나를 걸어 놓고 선과 악이 대립되어 우로 혹은 좌로 방황하게 하는 그 환경을 우리는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선할 수 있고 악할 수 있는 것은 우리를 선한 곳으로 이끄는 선한 그 무엇과 악한 곳으로 이끄는 악한 그 무엇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우리 육안(肉眼)으로는 보이지 않는 무형세계(無形世界)가 있는데, 그 세계에서는 인간을 걸어 놓고 선한 하나님과 악한 악신이 싸우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에서도 선과 악은 우리가 모르는 가운데 우리 한 개체를 걸어 놓고 서로 끌고 끌려 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라는 이 존재를 세워 놓고 천상에서도 좌로 우로, 지상에서도 좌로 우로 노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환경에 처해 있다는 것을 먼저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의 어떠한 자리에 태어났느냐? 위로는 하늘을 대할 수 있고 아래로는 세상을 대할 수 있는 자리에 태어났습니다. 이러한 나는 지금 어떠한 곳을 향하여 달리고 있는가? 이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확실히는 모르나 선과 악의 두 화살이 내 심중을 찌르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생활에서 체험하였을 것입니다.
비록 내 몸은 작은 모습이로되 여기에는 위로는 하늘을 중심삼고 선과 악의 근거지가 되어 있고, 아래로는 이 땅을 중심삼고 선과 악의 근거지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여러분 자신은 어떠한 위치에 태어났으며, 어떠한 위치에 있으며, 또한 누구의 아들딸인가를 해명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부모가 선하다면 그 자식도 선할 것입니다. 그런데 나 자신이 선하지 못하고 악한 위치에서 살고 있는 것은 우리의 선조가 악한 위치에서 우리를 낳은 연고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좋든 싫든 간에 그런 위치에서 태어난 우리는 그런 나 자신을 해명하는 것도 중대한 문제이지만 그 보다도 먼저 나는 누구의 아들딸인가 하는 것을 해명하는 것이 더 중대한 문제입니다.
그런 나의 근원은 어디서부터냐? 나는 나 자신에서부터 출발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넘어 부모에서부터 출발한 것입니다. 거기서 더 근원을 따져 올라가면 선조와 선조들을 거쳐 최후에는 누가 나오게 되느뇨? 여기에서 인류의 시조가 나온다면 그를 붙들고 그 시조와 자신이 무슨 관계가 있는지를 해명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누구의 아들딸인고? 인간들은 3대 부모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몸을 양육해 주는 것은 땅입니다. 우리 몸에 필요한 요소를 제공해 주는 땅, 이 땅이 우리의 부모입니다. 그런데 이 땅이 인간의 부모인 것을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 다음에는 우리를 낳아 준 부모가 있습니다. 이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몸적인 부모는 땅이요, 마음적인 부모는 우리를 낳아 준 부모인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이 두 부모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부모를 넘어 이념적인 가치의 모습, 절대적이요 영원무궁하신 한 분의 부모가 있나니, 그 부모를 인정하지 않고 해명하지 못한다 할진대 인간은 탄식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전인류는 흘러가는 역사노정에서 그러한 부모를 해명하는 어느 한 순간, 한 때, 한 시기를 갖지 않는 한 안식의 동산을 차지할 수 없다고 나는 단정합니다.
우리에게는 심정적인 부모가 있나니 그 부모는 땅과 더불어 망해 가는 부모가 아니라 땅의 역사와 인류의 역사를 뒤흔들어 지배하고도 남을 수 있는 부모입니다. 그 부모가 바로 천상의 부모, 즉 우리를 창조하신 부모입니다. 인간에게는 이렇게 3대 부모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 인간들은 자기를 낳아 준 부모만이 부모인 줄 알고 있으나 아닙니다. 여러분 몸뚱이의 원천은 흙덩이예요. 여러분은 낳아 준 부모의 아들딸로 태어났지만 낳아 준 부모만을 닮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그 부모를 넘어 새롭고 더 큰 무엇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동기와 인연이 없이는 천적인 결과가 있을 수 없는 것이 철칙이라 할진대 절대적인 가치의 모습을 그리워하는 것은 그러한 부모가 있기 때문임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참다운 인간이라 할 수 있는 인간은 어떠한 인간일 것이냐? 땅을 대하여 심정이 통할 수 있는 인간이어야 할 것입니다. 자기를 낳아준 부모가 땅이라 할진대 인류는 그 부모와 함께 심정적으로 위하여 살 줄 아는 사람이라야 된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하늘을 알고 천상의 부모의 뜻을 염려하며 그 뜻이 바라는 선의 목적지를 향하여 오늘도 내일도 싸워 나가는 사람, 그 어떠한 절대적인 인연을 해명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참다운 인생행로를 가고 있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앞으로 남아질 수 있는 민족,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민족은 어떠한 민족일 것이냐? 단정을 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땅을 대하여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듯 사랑하는 민족입니다. 그런 민족은 망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런 민족은 나라가 적에게 침범을 받게 될 때 적을 대하여 싸울 수 있는 힘이 생겨납니다. 자기 자신보다 민족을 붙들고 인류를 붙들고 사랑할 줄 아는 민족은 망하는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까지 싸움은 땅 빼앗기 싸움이요, 어떠한 주의를 세워 인간을 포섭하기 위한 싸움이었습니다. 그러나 도인들이 해야 할 남은 한 분야가 있거늘 그것이 무엇이뇨? 하늘이 동조할 수 있는 기대(基臺)를 만드는 것입니다. 하늘을 사랑치 않고는 못 사는 민족, 그러한 주의 혹은 사상이 땅 위에 나타난다면 천지의 운세는 그들을 위하여 움직여 나갈 것입니다.
지상천국에서 살 수 있는 인간은 어떠한 인간이뇨? 하늘을 자기의 부모와 같이 사랑할 줄 아는 사람, 인류를 자기의 부모와 같이 사랑할 줄 아는 사람, 땅을 자기의 부모와 같이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것을 자기 생활과 생애의 이념으로 세워 사는 사람일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자기도 모르게 산수가 좋은 곳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왜입니까? 그것은 나도 알 수 없는 그 무엇이 깊이 인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자연을 대하는 순간 무언가 느껴지고 자기를 회상하며 깊은 심정의 경지에 잠기게 되는 것도 본래의 인연이 재인식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만일에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던들 풀 한 포기를 붙들고도 눈물을 흘릴 수 있고, 사랑하는 애인이나 사랑하는 친구와 같이 느낄 수 있고, 창조주가 그 풀을 지으실 때 즐거워하시던 그 묘미를 체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인간이 되었다 할진대 타락하고 낙망하고 슬퍼하는 삶을 살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예술은 인생의 깊은 심정의 골짜기를 개척하고 개척하여 무엇을 제시하고자 했던고? 내적인 세계의 미를 상대적으로 느껴 그 본연의 가치를 백 퍼센트 외적으로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예술의 목적이 거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보이는 자연을 품고 기뻐한 적이 있었습니까? 산수의 아름다움에 취하여 ‘인간이여, 이것을 보소서. 하늘이여, 당신의 창조의 묘미가 놀랍소이다.’라고 해본 적이 있었습니까? 없었다 할진대 여러분은 절망권 내에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의 심정을 토로하였습니다. 인간이 타락함으로써 탄식이 생겼는데, 그 탄식은 인간에게서 그친 것이 아니라 천상과 지상의 온 피조만물에게 미쳐졌다고. 옳은 말씀입니다. 사람에게는 욕심이 많지만 그것은 욕심이 아닙니다. 자연심입니다. 욕심이 아니라 자연의 소망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한정적인 지역에 갇혀 있으니 이것을 터뜨리고 나아가자는 것은 자연적인 발로입니다.
인생의 욕망은 이 세계를 정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땅덩이를 소유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억천만 인간과 더불어 화합하고 전체의 가치를 의논하며 주체 되는 창조주가 있다면 그 창조주와 더불어 상대적인 가치를 노래하고 그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인간의 마음은 달립니다. 우리의 심정과 우리의 마음은 어떠한 곳을 향하여 달리고 있습니다. 나에게 온 천주를 품고 싶은 욕망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본궤도에서 이탈하였기에 그것을 대하지 못하고 취하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근본원칙에 따라 취할 수 있는 한때가 있기에 우리의 마음은 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신을 다시 한번 반성하여 보게 될 때에, 여러분은 무엇을 느끼고 있습니까? 우리의 마음에서는 두 갈래의 싸움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오늘 행복을 느꼈다 할지라도 그 행복을 내일도 모래도 생애 내내 지속할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내가 오늘 사랑하는 사람을 붙들고 행복을 노래할 수 있다 할지라도 그 사람을 중심삼고 영원히 행복을 노래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주의나 가치적인 그 무엇도 존재세계 앞에 영원히 자랑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한 자신인 것을 여러분 이 시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이 몸은 어디로 가려고 하는고? 이 마음은 어디로 가려고 하는고? 이 심정은 어디로 가려고 하는고? 문제는 이것입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있어야 할 자리를 갖지 못하고 태어났습니다. 안식할 수 있는 환경을 갖지 못하고 태어났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싸움의 환경에 떨어진 존재로 태어났습니다. 누가 저끄러 놓았는지도 모르고, 누가 엉클어 놓았는지도 모르는 환경에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러한 문제들을 하나 하나 해결하기 위해서 인륜도덕이니 도의 길이니 하는 것들이 나왔고, 이것을 넘고 넘어 나중에는 이 땅 위의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리고 하늘을 찾아 나서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가려야 갈 수 없는 환경에 고착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습관이, 우리가 태어나 살아오면서 형성된 생활적인 관념이나 인식이 우리를 묶어놓고 있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알 수 없는 어떤 죄악상이 우리를 얽매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여러분은 누구의 아들딸이뇨? 여러분이 악한 세계의 아들딸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악한 세계의 아들딸이에요. 선을 그리는 마음은 있으되 선한 입장에 처하지 못하고 악한 입장에서 탄식하고 있으니, 결론적으로 악한 세계의 아들딸인 것입니다. 기독교는 이를 결론지어 말하기를 타락한 인간이라고 합니다, 타락한 인간. 타락이라는 두 글자에 걸린 인생이니, 타락의 혈통을 벗어나지 못하는 죄악된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떠나야 합니다. 자기가 처한 환경을 정비하고 가야만 합니다. 어떻게? 몸이 반대하면 몸을 치고 가야 됩니다. 마음이 반대하면 마음을 치고 가야 됩니다. 심정이 그 길을 가로막으면 이 심정을 쳐부수고라도 가야만 된다는 것입니다. 이 길을 개척하는 길이 도의 길입니다. 도의 길은 버리고 가는 길, 박차고 가는 길,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가야 하는 길입니다.
그렇게 수천년 동안 찾으면서 가야 된다고 하였지만 간 자가 없고 승리했다는 자가 없으니 어이할 것인고? 지금까지 역사노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탄식의 혈통을 벗어나려고, 죄악된 자녀의 이름을 끊고 선한 자녀의 이름을 가지려고 뛰쳐나왔지만, 아직까지 다 갔다 하는 승리의 모습은 없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천국이 있고 지옥이 있다 할진대 그 천국과 지옥은 내 마음에 있습니다. 중사(重死)와 중생(重生)의 갈림길에 서 있는 우리, 우리를 중심삼고 선과 악이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종말시대에 찾아오는 세계적인 공포에 떨고 있지만, 참다운 인생을 그리워하고 참다운 본향의 목적지를 찾아가고자 하는 사람이라 할진대 외적으로 나타난 그 공포가 문제가 아니라 자기의 심중에서 선악이 싸우고 있는 것이 더 무섭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기에서 패자가 되면 영원히 악한 부모의 혈육을 벗어나지 못하니 사망세계의 자식이 되는 것이요, 승리하여 하늘이 공인할 수 있는 부모의 혈육을 받은 자녀의 입장에 서게 되면 땅의 역사를 초월한 천적인 가치의 세계에 남아질 자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마음을 붙들고 싸워야 합니다. 그 싸움은 상대적인 어떠한 존재가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심중에서부터 해결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천국이 어디 있느냐고 제자들이 물었을 때 ‘천국은 네 마음에 있다.’고 대답하셨습니다. 아무리 양심적인 사람, 아무리 선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마음이 온 우주와 더불어 그 부모를 노래할 수 있는 생활이 생애 내내 계속되지 않는다 할진대 그는 끊김받는 자요 막혀지는 자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가야 할 우리입니다. 내가 싫어도 역사는 그곳을 향하여 가고 있고 내가 안 가려 해도 이 세계는 그곳을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어떠한 민족이 세계의 운세를 배반하면 그 민족을 쳐서라도 하늘은 내몰 것입니다. 어떠한 개인이 그 운세의 방향을 가로막고 안 가겠다고 하면 그를 쳐 갈겨서라도 대우주의 목적지를 향하여 움직일 것입니다. 우리는 그곳을 향하여 가야만 됩니다.
우리는 흔히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우리나라를 대표하여 어떠한 국제경기에 나가게 될 때 그를 가리켜 대한의 아들딸이라고 말합니다. 더 나아가서 국가 내의 어떠한 단체를 대표하고 어떠한 종족을 대표하는 사람을 가리켜서 그 단체나 종족의 아들딸이라고 합니다. 또한 가정에 들어가면 그 부모의 아들딸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아들딸이란 명사는 광범위하게 쓰이고 있습니다. 그러면 참다운 아들딸이 가야 할 인생행로는 어떠한 행로일 것인가? 우리는 하늘이 공인할 수 있는 아들딸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 아들딸의 기준도 이 땅 위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안 나와 있습니다. 그것은 확언할 수 있어요. 하늘이 공인하는 국가의 아들딸이라고 할 수 있는 기준도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런 기준이 있어요? 없습니다. 천지가 생겨난 이후 하늘이 공인하는 일가, 종족, 민족의 아들딸이라고 할 수 있는 계율도 무엇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하늘의 아들딸이 되었습니까? 못 되었습니다. 하늘을 배반하기 일쑤였고 시대 시대에 있어서 하늘 앞에 역적의 행로를 걷기를 일삼던 그 민족, 보내신 메시아를 잡아죽인 그 민족은 하늘의 아들딸이 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오냐, 너희는 세계를 대표한 내 아들딸이다.’ 하시며 사랑할 수 있는 위치에 서지도 못하였고, 선민으로 국가를 세워 그 국가를 대신한 하늘의 아들딸이라고 할 수 있는 위치에 서지도 못했습니다. 종족을 대신한 하늘의 아들딸이라고 할 수 있는 그 무엇도 없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가정을 중심삼고도 하늘의 아들딸이라 할 수 있는 처지가 못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었다고 하는 사람 손들어 보십시오. 문제입니다.
이렇게 생각하게 될 때 하늘은 불쌍한 하늘입니다. 하늘이 심정으로 소원하던 것이 무엇이었겠습니까? 타락하지 않은 본연의 인간, 타락하지 않은 우리의 선조를 세계적인 아들딸로 세우는 것이었을 겁니다. 세계를 통치할 수 있고, 국가의 주권을 대신할 수 있는 아들딸로 세우기를 꿈꾸었을 것이 틀림없고, 종족이나 어떠한 가정의 아들딸로 세우기를 꿈꾸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하늘이 세우려던 그 기준이 다 끊김으로 말미암아 인생은 허덕이게 되었고 고통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철석같은 악마의 철창을 박차고 해방의 한 날을 맞이하여 하늘이 인정하실 수 있는 부모를 찾아 효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할 때 기가 막히다면 이 이상 기가 막힌 일이 없는 것입니다. 하늘은 지금까지 6천년 동안 수고하셨고 말할 수 없는 희생의 제단을 엮어오셨는데, 그러한 기준을 가질 수 있는 위치에 계시지 못하다니 이게 무슨 말입니까? 통탄하여야 할 우리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모여들었습니다. 핍박의 길을 개의치 않고 몰려왔습니다. 우리는 찾아왔습니다. 슬픔의 골짜기를 개의치 않고 찾아왔습니다. 무엇 때문에? 악한 세상의 아들딸을 벗어나 참다운 선의 아들딸이 되기 위하여 찾아왔습니다.
역사노정에 왔다 간 우리의 선조들이 환경을 정리하고 목적지를 향하여 나선 것은 ‘가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행동이요 실천이었더란 말입니다.
보십시오. 노아 할아버지는 어떠하였습니까? 환경적으로 몰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120년 동안 온갖 정열과 자기의 모든 재산을 투입하여 방주를 지었습니다. 성심성의를 다하여 일하면서 시간이 있을 때마다 120년 후에 물로 심판받을 것을 외쳤던 것입니다. 120년 동안 외쳤지만 한 사람의 동지도 찾지 못한 노아였습니다. 수많은 군중은 그를 조롱했습니다. 청청한 하늘을 바라보며 비웃고, 길거리에서 탄식하는 노아를 바라보고 비웃었습니다. 그렇게 비웃음을 당하고 몰리던 노아였습니다. 세상만사의 모든 인연을 다 끊어 놓고 하늘이 허락하시는 새 나라의 가족으로, 새 나라의 부모로, 새 나라의 혈족으로 등장하기를 원하였던 노아였습니다. 이것이 하늘이 바라는 충절의 기준입니다. 그런데 믿고 천당이나 가겠다고요? 그렇게는 안 됩니다.
아브라함은 어떠했습니까? 갈대아우르를 떠나 황무지인 광야로 가라고 하는 하늘의 음성 앞에 주저치 않고 행복하게 살던 정든 고향산천과 가장집물(家藏什物) 일체를 다 버리고 나섰습니다. 그런 걸음을 걸으신 분이 우리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입니다. 또 모세를 보십시오. 모든 것을 다 버리고 60만 대중을 끌고 황무지로 내몰았습니다. 거기에서 그도 역시 몰림받았습니다. 지금까지의 역사노정에서 선을 주장해 나온 성현 현철들은 일단 세상에서 내몰렸습니다. 몰리고 나서야만이 뜻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몰리고 몰려야 됩니다. 그리하여 찾아가야 할 목적지, 하나님을 위주로 한 부모의 위치까지 나가야 됩니다.
오늘 봉독한 말씀 가운데 우리는 하나님의 양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예수를 믿으니 천당 가고 교회에 다니니 하나님의 아들딸이라고 자위하고 자신하는 무리들이 있으나,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딸은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창세 전부터 종말까지의 하나님의 심정이 내 뼛골에 녹아들어 하나님께 슬픔이 있다면 생명으로 그 슬픔을 느낄 수 있고, 기쁨이 있다면 생명으로 그 기쁨을 느낄 수 있어야, 즉 하나님의 모든 감정을 통할 수 있어야 하나님의 아들딸로 결정되는 것이지, 그러기 전에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양자가 되는 데도 아버지라 부르기만 해 가지고 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늘의 아들딸이 되려면 하늘의 혈통을 받아 심정적으로 아버지라 할 수 있는 자리에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전의 여러분은 종과 마찬가지입니다. 참부모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혈통이 다르니 양자예요. ‘이것이 우리의 부모인 줄 알았더니 원수로구나!’ 하는 자각을 주어 혈통이 다른 이 원수와 인연을 끊고 나가도록 하는 것이 구원섭리입니다.
역사는 몰리는 사람들로 말미암아 이루어져 나왔습니다. 지금까지 세계를 이끌어 나오고 주의나 사상을 제창해 나온 사람들은 모두 몰림받았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개인이 종족에게 몰리면서 새로운 무엇을 느끼고 천지의 대부모의 심정을 따라 나가기 위해 허덕인 것이 역사노정입니다. 역사를 관찰하는 사람, 즉 사가(史家)가 있다 할진대 그런 관점에서 역사를 관찰해야 되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천륜의 심정을 기반으로 역사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모를진대, 이는 세계적인 사가(史家)가 못 됩니다. 역사는 보이지 않는 심정적인 그 무엇, 즉 대천주를 창조한 심정적인 이념 밑에서 흘러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뚜렷한 목적 아래 움직여 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씨족으로부터 부족을 거쳐 민족, 국가, 나아가서 동맹국을 거쳐 연합국을 형성해 나오고 있습니다. 이제 때가 가까웠습니다. 세계적인 문호를 개방할 수 있는 때가 점점점점 우리의 목전에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러면 앞으로 어떠한 기준이 나와야 될 것이뇨? 천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시니, 그의 아들이요 딸의 위치에 서서 이 세계는 내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하나의 황태자가 등단해야 합니다. 이것을 천지는 바라고 있습니다.
인간은 타락과 더불어 무엇을 잃어버렸느뇨? 땅을 잃어버렸습니다. 땅을 잃어버린 인간이 되었습니다. 이 땅은 이 민족 저 민족의 주의와 사조에 휩쓸려 이리 짓밟히고 저리 짓밟히는 주인 없는 땅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이 세계 인류도 주인 없는 인류가 돼 버렸습니다. 어떠한 때에는 이러한 주의가 휩쓸고 또 어떤 때에는 저러한 사조가 휩쓰는 주인 없는 인류가 되었고 더 나아가서는 천지도 주인 없는 천지가 돼 버렸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인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부모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6천년 동안 피로 물들었던 땅아, 밟힘 받던 인류야, 이 땅과 인류로 말미암아 탄식하던 하늘이여 하며 울게 될 때, 천상이 울고 인류가 울고 땅이 울 수 있는 심정적인 세계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창조주가 있다면 기필코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안 되면 하나님은 없는 것입니다. 부모가 그리워 찾아 나선 걸음이니 그 부모를 만나지 못하는 한 머물러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역사는 지나갑니다. 몇 세기 동안 어떠한 민족을 택해 품고 나오다가도 놓아 버립니다. 지금은 세계적으로 민주와 공산 2대 진영이 대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최후의 부모의 역할을 할 것 같지만 아닙니다. 싸우고 있는 이들은 진짜 부모일 수 없습니다. 가짜입니다. 심정을 중심삼고는 두 주인공이 있을 수 없습니다. 심정을 중심삼고 노래하는 데 있어서는 하나입니다. 부모의 심정을 점령할 수 있는 용자가 땅 위에 어디 있습니까? 어떤 대왕, 권세 잡은 대마왕이 있다 하여도 그것을 침범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대하여 ‘너희는 내 아들딸이다.’ 할 수 있고, 여러분은 그분을 대하여 ‘당신은 나의 아버지입니다.’ 할 수 있는 심정적인 세계가 반드시 종말시대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심정적으로, 그리고 생활적으로 그런 기준에 접하여 사는 사람들이 있다 할진대 그들은 승리할 것입니다. 그들을 점령할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오늘도 가야 합니다. 그렇잖아요, 여러분들? 타락한 부모는 갖고 있으되 타락하지 않은 부모는 갖지 못한 인간입니다. 아무리 우쭐대고, 아무리 잘나고 뭐 어떻고 어떻다고 했댔자 타락한 조상의 후손입니다. 타락의 종족이란 말입니다. 그 악의 요소가 깊이 뿌리박혀서 선조로부터 흘러나와 여러분 일신에까지 배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몸이 하자는 대로, 좋다는 대로 다 해서 기쁨을 얻는 것이 하늘이 바라는 일일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부정해야 합니다. 눈으로 보는 것도 부정, 듣는 것도 부정, 먹는 것도 부정, 자는 것도 부정해야 합니다. 도의 길은 그런 길입니다. 인정하지 않습니다. 소유 관념을 일체 용인하지 않습니다. 내가 누구의 아들딸이라는 관념까지 끊어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나를 낳아준 부모도 하늘이 인정할 수 있는 참다운 부모가 아니니 끊어야 됩니다. 처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는 말하기를, ‘누구보다 나를 더 사랑하지 않는 자는 내 제자가 못 된다.’고 했습니다. 도는 여기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참다운 도는 심정적인 소유 관념까지 부정합니다. 심정적으로 높은 종교는 옥중과 같은 생활을 하는 종교입니다. 인간의 심정적인 소유권까지 부정해요. 그러니 그 외의 것은 문제도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부정해야 합니다. 천번 만번 부정해야 합니다. 이놈의 눈, 이놈의 귀, 이놈의 배통, 이놈의 심정을 모조리 부정해야 됩니다. ‘하나님이시여! 당신이 살아 계시다면 저를 때려서라도 자신을 완전히 부정하게 하소서’ 해야 합니다. 이것이 도인의 생활입니다. 때리고 나서 칠 것이 없을 때에 일으켜 옮겨 놓기 위한 것이 심판의 목적입니다.
그러면 혈통적으로 엮어져 있는 심정적인 인연을 어떻게 청산할 것인가? 이것이 하늘의 고충 중에서 최대의 고충일 것입니다. 사정은 쉽게 해결할 수 있으되 심정은 생사를 걸어 놓고야 해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정은 상대적인 가치의 조건을 세워서 해결지을 수 있으되 심정문제는 절대적인 내 생명을 걸어 놓고야 해결지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도의 길은 죽음을 걸어 놓고 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출발해야 할 운명에 놓여 있습니다. 6천년 동안 수고하신 하나님 앞에 우리는 ‘애달픈 심정으로 인류를 찾아오신 아버지, 황공망극하옵니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6천년이란 기나긴 세월을 하루같이 자식을 찾기 위해 허덕이시며 종종걸음 치신 하나님, 애달픈 심정을 갖고 통곡하시며 인류의 뒤를 따라 나오신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사람이 되어야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습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이 6천년 동안 수고하셨는데 아직까지 당신의 품에 품고 영원무궁토록 사랑할 수 있는 아들딸이 없다니 이 어이 탄식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이것이 마음에 느껴집니까? 여러분의 가정에 하나님이 들어오셔서 ‘오냐, 나를 대접해라. 오냐, 네 집에서 잠을 자겠다.’ 하실 수 있게 되어 있습니까? 못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깃들 수 있는 사람을 가지지 못하셨고 집도 지니지 못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에 있잖아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말입니다. 성전은 곧 집을 말합니다. 집을 찾는 하나님입니다. 교단이라는 것은 집을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집은 무얼 하기 위한 것입니까? 아들을 찾기 위한 것입니다. 집을 찾아야 아들딸을 찾겠기에 집을 찾아 들어가는 것입니다. 결국은 아들딸을 찾자는 것입니다.
나는 한때 이런 기도를 하였습니다. ‘아버지! 대우주의 운세가 살아 있을진대, 그 깊은 당신의 부모의 정을 제가 알 만하오니 당신이 원하시는 소원의 아들딸로, 한 가정에서 당신과 더불어 즐길 수 있는 아들로 딸로 삼아 주시옵소서.’ 하고 말입니다. 여러분, 이런 기도를 해봤습니까? 6천년 동안 아들딸을 그리워하시던 아버지께서 ‘오냐, 내 아들딸아.’ 하시며 그 순간 위신을 잊어버리고 울어야 좋을지 기뻐해야 좋을지를 몰라 몸부림치며 붙안고 즐거워하시는 그 아버지를 여러분은 모셔 보았습니까? 못 모셔봤지요?
우리에게는 가야 할 길이 남아 있습니다. 가정의 부모를 찾아야 할 사명이 있는 동시에 종족의 부모를 찾아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동시에 민족의 부모를 찾아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나라의 부모를 찾아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계의 부모를 찾고 하늘땅의 부모를 찾아야 할 사명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민족을 위해 자기의 생명을 버릴 각오를 하고 나선 충신은 자기의 부모를 부정하고 자기의 처자를 부정하기를 서슴지 않습니다. 지금의 때는 국가주의시대를 지나고 있습니다. 이제는 민족을 단위로 한 국가주의시대를 넘어 세계를 중심삼은 새 부모를 모셔야 합니다. 지금 때는 세계주의시대로 흘러 들어가고 있습니다. 민족적인 부모를 넘어 세계적인 부모를 모셔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충신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효자 효녀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열녀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결국에는 어떠한 부모를 모셔야 될 것이뇨? 세계의 부모를 넘어 하늘땅을 창조한 창조주를 부모로 모셔야 됩니다. 우리 인간은 그런 부모를 모실 수 있는 자리까지 가야 합니다. 그 길은 한의 노정입니다. 허덕이며 넘어야 할 한스러운 고개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은 구원섭리를 하는 데 있어서 먼저 세계의 부모를 보내지 않았습니다. 국가의 부모를 보내지 않았습니다. 민족의 부모를 보내지 않았습니다. 어떠한 종교의 부모로 보내지 않았습니다. 한 개인의 부모의 위치로부터 출발시키셨습니다. 한 집을 단위로 하여 출발시키셨습니다. 한 집을 단위로 하여 깃들기 위한 안식의 보금자리를 하나님은 찾으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찾아 나온 것이 아벨의 제단이요, 노아의 가정이었으나, 그것이 깨어짐으로 말미암아 1600년 동안의 수고의 흔적이 간데없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400년을 수고한 후에 아브라함가정을 중심삼고 다시 찾으려 하셨으나 아브라함이 제물 실수를 하여 또 깨져 버렸습니다. 그리하여 이삭을 거쳐 3대째인 야곱 때에 이르러서야 가정이라는 목표를 세우고 섭리해 나오실 수 있었습니다. 성경을 똑똑히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이 땅 위에 택한 민족을 위하여 야곱의 나라를 축복하고 싶으셨지만 그러지 못하고 야곱의 집을 축복하셨습니다. 거느릴 수 있는 야곱의 한 집을 찾으셨을 뿐입니다. 한스러운 역사였어요. 믿음의 조상이 무엇입니까? 새로운 믿음의 뿌리란 말입니다. 야곱의 집을 중심삼고 번식시켜 민족을 만들고 국가를 세우려 하였던 것인데 끝내 그 뜻도 이루지 못했습니다.
가정의 축복을 받았던 야곱의 후손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광야에서 쓰러졌습니다. 애급에서 고역받던 무리를 모세가 이끌고 나올 때에 광야에서 쓰러질 줄을 어찌 알았던고? 모세는 민족의 부모의 입장에 세워졌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그런 모세와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겠다. 내 아버지 가는 곳에 내 어이 안 갈소냐?’ 하는 심정으로 행동을 같이 했던들 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종족의 부모를 넘어 민족의 부모로 세워진 모세의 기반은 간 곳 없이 깨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종족적인 부모의 혈통을 계승하여 세워진 자들이 수많은 선지자들이었습니다. 그러한 기반 위에 부모가 오시거늘 어떤 부모가 오시느냐? 국가의 부모를 넘어 세계의 부모요, 더 나아가 하늘땅의 부모로 오십니다. 이것이 구주사상, 메시아사상입니다. 똑똑히 알아야 돼요. 그러면 메시아가 오시는 목적은 무엇이냐? 악의 국가와 그 주권을 깨뜨려 버리고 하나님이 세상을 장중에 넣어 통치할 수 있는 선의 주권을 세워 가지고 참부모의 위치를 결정지어 놓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는 만인간 앞에 왔다 갔습니다. 무엇으로? 가정적인 부모형(型)으로 야곱을 세우고, 민족적인 부모형으로 모세를 세우고, 그 위에 예수를 세계적인 부모형으로 이스라엘 민족 앞에 보내셨던 것입니다. 부모가 되려면 원수의 세계에 들어가 싸워 승리해야 합니다. 그래서 야곱이 하란에 있는 라반의 가정에 가서 싸웠습니다. 모세도 원수세계인 바로 궁중에 들어가 싸웠습니다. 싸워서 승리해야 부모로서의 위치를 결정지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도 이 땅에 와서 모세 때의 애급 땅과 같은 이 세상에서 싸워 가지고 세계적인 부모의 기준을 찾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죽어 버렸습니다. 실패하고 간 것입니다. 실패하고 갔기 때문에 다시 와야 된다는 거예요. 세계적인 부모를 세우려 했던 것이 실패하게 되었으니 가정적인 부모, 민족적인 부모도 다 깨졌습니다.
4천년 공사(功事)와 천지의 법도를 세워 찾아 나오던 부모의 기준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영적으로 그 부모를 연결시켜야 됩니다. 그래서 예수는 신랑 신부라는 말을 한 것입니다. 성신이 무엇인 줄 알아요? 어머니신이에요. 오늘날 기독교에서는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성신, 성신 하는데 성신은 어머니신입니다. 예수는 아들 신이고 하나님은 아버지 신입니다. 아버지 앞에 아들딸이 참부모가 못 되고 타락하였으니, 예수는 참부모로 와서 여러분을 다시 낳아 주려 했던 것입니다.
중생(重生)이 무엇입니까? 다시 나는 것입니다. 다시 나는 것은 죽었기 때문에 다시 나는 것 아닙니까? 성신인 어머니의 뱃속에서 다시 나와야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를 아버지로 모시고 성신을 어머니로 모셔서 이 부모의 사랑을 중심삼고 어머니 뱃속에 다시 잉태되어 태어나는 역사가 구원역사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것을 영육을 통해 지상에서 완결지어야 할 것이었는데, 그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가 재림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여기에서 말하는 사람의 말이 아닙니다. 거짓말 같으면 기도해 보란 말입니다.
세계 27억 인류는 찾아 나왔습니다. 찾고 찾아왔습니다. 허덕이고 허덕여왔습니다. 무엇 때문에? 잃어버린 세계의 부모를 모시기 위하여. 이것이 심정적인 안식처를 찾아 들어가는 최후의 문입니다. 세계적인 부모가 되라고 축복해 주었던 아담 해와가 세계적인 부모가 못 되고 하나님을 잃어버렸으니, 참다운 세계적인 부모가 생겨나는 그날에는 하나님을 상봉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상봉하는 그때에는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심판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늘이 우리를 세워 놓고 오라 하시는 목적은 무엇이뇨? 천지의 대주재가 소망하시는 귀결점은 무엇이뇨? 참부모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 부모와 한번 혈연적인 인연을 맺으면 하나님을 부정하려야 부정할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의 실존세계를 꿈에도 부정할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 속에 아버지가 계시고 내 생활에 아버지가 계시는 권내로 들어가게 됩니다. 심정적인 그 세계로 옮겨 주는 부모를 만나게 하기 위해서 하늘이 우리를 오라 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무슨 도(道)니 하나님의 섭리니 해도 최후의 목적은 부모를 모시는 것입니다. 사랑이 있다면 그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래가지고 결국에는 하나님이 부모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부모를 잃은 인간, 고아와 같은 인간, 과부와 같은 인간이라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부모로 모실 수 있는 세계를 향하여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곳이 인생의 최후의 목적지입니다.
우리에게는 어차피 넘어야 할 삼팔선이 가로놓여 있습니다. ‘넘어야 할 입장에 처해 있거든 넘자! 가야 되겠다. 가자!’ 할 수 있는 무리가 이 땅 위에 나와야 합니다. ‘넘자! 세계를 위해서 나선 걸음이니 가정이 반대해도 넘자! 사회와 국가가 반대해도 넘자! 이 세계의 주의가 반대해도 넘자!’ 할 수 있는 그 기준이 되어 있습니까? 못 되어 있다면 패잔병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떠한 이념에 젖어 있습니까? 아직까지 ‘내 아들딸, 내 아들딸’ 하고 있습니까? 그런 것은 다 지나갑니다. 모든 인류가 다 그러한 기준을 넘어가야 합니다. 지금은 세계적으로 부모가 자식을 죽이고, 자식이 부모를 죽이고, 처자를 죽이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왜? 다 끊어야 되기 때문입니다. 천지의 운세는 몰아칩니다. 인간적인 정을 전부 다 믿을 수 없게 몰아넣는 것입니다. 하늘은 깨뜨려 버리기 위해 내모는 것이 아니 라 깨뜨리지 않으면 수습이 안 되겠기에 내모는 것입니다. 역사는 그렇게 나왔습니다.
민주주의가 제국주의를 깨뜨려 버렸습니다. 보십시오. 악당들이 주권을 갖고 있으면 온 세상이 악당의 세계가 되겠으니, 혁명을 일으켜 가지고 깨뜨려서 민주주의를 세우고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딸들을 대통령으로 세워 거꾸로 뒤집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이래 가지고 무엇을 하려는 것이뇨? 여러분, 이러한 세상에서 찾아야 할 것은 무엇이뇨? 하늘이 찾아 세우고자 하는 부모의 존재, 충신의 존재, 열녀의 존재를 찾아야 합니다. 그런 민족이 있다면 그 민족은 세계를 지배할 것입니다. 지배한다는 것입니다. 이치가 그렇지 않아요?
우리는 단결해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각오해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먼저 하늘이 세워 주시는 세계의 부모 앞에 나서야 되겠습니다. 이것을 실현하기 위해 나온 이념이 통일이념입니다. 사정으로 통일하지 말고 심정으로 통일하자, 부모의 심정을 본받아 너도 나도 형제가 되어 사랑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부모를 따라갈 수 있는 표본의 인격은 어떠한 것이뇨? 누구를 터전 삼아 부모의 그 심정을 증거할 것이뇨? 여기에서 예수님을 봅시다. 그는 이 땅을 소유하고 주관해야 할 위치에 있었지만 배반당했습니다. 선민으로 세운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를 배반했습니다. 사랑하는 열두 제자, 나중에는 세 제자까지 예수를 배반했습니다. 그래서 땅 위의 소망은 다 끊겼습니다. 땅에 와서 이루려 했던 소원은 다 깨져 버렸습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한 가지 붙들고 간 것은 부모의 심정입니다. ‘아버지여, 당신이 찾아 세우려는 세계적인 부모의 심정만은 제가 붙들고 가겠나이다. 몸이 창에 찔리고 못에 박혀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한이 있다 할지라도 당신이 찾으시는 부모의 절개만은 제가 갖고 가겠습니다’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 심정을 가진 예수였기에 사망의 구렁텅이로 휩쓸려 들어가는 이스라엘 민족 일지라도 복을 빌어 주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영적인 부모의 위치를 세우고 가신 예수였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예수님의 영적인 자녀입니다. 예수는 육신은 때려 잡히고 영적으로만 이룬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오시는 주님은 육신까지 이루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제 이 몸은 하나님이 인정할 수 있는 부모의 피 살을 이어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인연이 찾아질 때까지 한스런 노정에서 탄식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부모가 그립기 때문에 그 부모가 올 날을 위해 세계는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의 주인공, 하나의 부모, 하나의 세계가 하나님께서 오늘날 까지 6천년 동안 수고하신 열매며 바라시는 목표물입니다. 여기에 그 부모를 대신하여 설 수 있는 심정적인 후계자가 나와야 됩니다, 심정적인 후계자. 말만 하는 후계자 말고, 모양만 같은 후계자 말고, 좋아만 하는 후계자 말고 부모의 슬픔과 고통을 자기의 소유로 삼아 아버지 대신 고통하고 아버지 대신 슬퍼하면서 심정적으로 하늘 앞에 충효의 도리를 세우려고 허덕이는 후계자 말입니다. 그런 무리만이 하늘 앞에 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아무리 능통하다 해도 소용없습니다. 아무리 수십년 믿어 보았자 소용없다는 것입니다. 심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분을 모시고 싶어하는 절대적인 심정의 기반 위에서 그분을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한 마음을 어느 누가 빼앗을 수 있겠습니까? 자식? 자식이 문제가 안 됩니다. 처자? 처자도 문제가 안 됩니다. 자기의 형제 부모도 문제가 안 됩니다. 어떠한 영광이나 권세도 문제가 안 됩니다. 일편단심으로 ‘제가 소유할 것은 당신뿐이며, 제 인식과 관념의 전체는 당신의 인식과 관념이옵니다.’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늘은 그런 심정적인 자녀를 찾아 나온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이제 이만큼 들었으면 ‘옳지, 세계는 그런 뜻을 이루기 위해 나가는구나.’ 하는 깨달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되돌아와서 여러분 자신을 놓고 논해 봅시다. 여러분은 어떠한 인생을 살고 있습니까? 하늘은 끊기를 바라는데 나는 붙들고 울고 있다면 그건 욕심입니다. 하늘은 내몰고 있는데 나는 안 가겠다고 하면 망합니다. 망해요. 망한다 말입니다. 두고 봐요, 안 망하나. 피압박 민족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이 민족, 불쌍한 처지에 있는 우리 한국 백성이 살길은 단 하나 심정적인 주인과 인연을 맺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벌거숭이가 되었습니다. 다 빼앗겼습니다. 부모, 처자도 잃어버렸습니다. 남북이 갈라져 내가 갖고 있는 모든 것들, 우리들이 갖고 있는 모든 것들이 다 파탄되었습니다. 인연과 관계가 다 깨져 나갔습니다. 자식이 누구인지 부모가 누구인지 형제 친척이 누구인지 몰라보게 되었습니다. 이왕지사 우리는 이런 환경에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역사를 청산하여 새로운 면으로 인계시키는 천적인 섭리가 있다는 것을 알진대, 먹을 것이 없다고 탄식하지 맙시다. 모습이 초라하다고 탄식하지 맙시다. 단 한 가지 살길이 있나니 그것은 심정이 불타올라서 하늘이 세우신 부모의 인연을 찾아 나가는 무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무리가 된다 할진대 이 민족은 세계를 지배할 것입니다.
심정적인 인연을 노래하고 하나님을 위로하며 한스러운 자기의 위치를 잊어버리고 ‘하나님이시여, 이러한 자리에 선 것도 감사하옵니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늘이 잊어버리지 않으시고 불쌍한 자리에 있는 나를 이런 자리에 세워 주신 것은 목적하는 세계와 인연 맺도록 하기 위한 뜻이 있기 때문임을 알았다 할진대 그저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은 세계적으로 볼 때 불쌍한 민족입니다. 두 사조의 틈에 끼여서 몰리고 찢기고 유린당하는 민족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늘이 무심하게 불쌍한 자리에 몰아넣은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 끌어내어 새로운 역사를 엮어 나가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떠한 주의도 비참한 환경을 무대로 해서 출발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 처참한 환경을 벗어나지 않으면 새로운 역사를 이룰 수 없다는 것입니다. 풍습과 제도와 권위로 천적인 심정을 잃어버리고 퇴폐한 이스라엘과 유대교의 형식화된 교단을 발판으로 해서 예수의 새로운 심정의 역사는 폭발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이런 환경에 처해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움직인다는 것을 알았다 할진대 부모가 없다고 탄식하지 말고 내 환경에 무엇이 없다고 탄식하지 맙시다. 대신 새로운 이념의 부모를 내 부모로 삼고, 심정적인 이념을 내 소유로 하고 내 이념으로 삼도록 합시다. 그러한 기독교도들이 생겨난다 할진대 그런 무리들로 말미암아 세계는 정복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누구의 아들딸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딸이라는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을 본받아야 합니다. 천적인 위신과 천적인 체면을 상실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여기에 배치되는 모든 것을 우리가 밟고 쳐 갈기면서 행진의 일로를 걸어가 주기를 하늘은 바라실 것입니다.
변치 않는 사랑의 부모라는 이름이 어찌하여 이 땅의 인간 앞에서 사라져 버렸습니까? 한에 한을 품고 유린당하던 고비 고비의 역사적인 모든 슬픔이 지긋지긋 하오이다.
당신도 그런 고비에서 눈물지으시면서 ‘오늘 이런 고비를 넘었구나. 내일은 저런 고비를 넘어야 되겠다. 이 해는 이런 고비를 넘고 이후에는 저런 고비를 넘어야 되겠다.’고 하시며, 생애노정의 전부를 갈라놓고, 때와 시기의 고비 고비를 넘으시려는 계획이 있었다는 것을 인간들은 몰랐습니다.
예수님의 30년 준비노정은 요셉가정에서 목수로 대패질을 하고 까뀌질을 하시던 때가 있었는가 하면, 사기가 충천하여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나선 때도 있었사옵고, 사망의 그늘 아래 잠들어 있는 이스라엘 민족을 향하여 유대 교단을 향하여 외식하는 자들이라 하시며 날카로운 저주의 말을 퍼부었던 때도 있었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그런 전부가 우연지사가 아니라 땅의 인연을 벗어나기 위한 필연적인 생애의 규칙에 의하여 행하신 것임을 알았사옵니다. 땅 위에 오셔서 세계적인 부모의 위치를 결정짓지 못하고 품을 수 있는 하나의 참다운 자녀를 세워 놓지 못하고 가신 그 한도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시게 될 때에 참다운 효자 효녀가 동행해야 할 것인데, 오른편 강도가 웬 말이며 왼편 강도가 웬 말입니까? 효자 효녀를 갖지 못한 예수의 생애가 처량하였음도 알고 있사옵니다. 예수님을 이 땅 위에 보내신 하나님은 그 앞에 하나의 아들, 효자를 세워 주고 싶었사온데 예수를 부모로 모셔야 할 이 땅 위의 인간들은 예수 앞에 효자 효녀가 못 된 것이 탄식임을 저희들이 알았사옵니다. 이제 이와 같은 한 맺힌 역사적인 슬픔을 해원해 드려야 할 책임이 저희들에게 있다는 것도 오늘 들어서 알았사옵니다.
지금까지 저희들은 사망의 그늘에서 죄악의 자손으로서 살아 나왔습니다. 이곳이 저희가 머물 위치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으로 지음받던 그 자리,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나타난 그날부터 본연의 부모의 자격을 갖추고 살아야 했던 그 자리가 저희들이 머물 위치임을 알았사옵니다. 그 부모의 자리까지 찾아 나가기 위해서는 가정을 거치고, 민족을 거치고, 국가를 거치고, 세계를 거쳐 나가야 된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그리하여 세계적인 최후의 종말시대에 가서는 하나님의 아들딸로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천상천하의 승리적인 한 부모와 인연을 맺어 가지고 모든 원수의 무리를 부모의 심정적인 기준으로 심판해야 할 때가 온다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그 한 날을 위하여 저희들의 마음을 반성하고 정비하여 승리의 나팔을 불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잠들어 있는 이 민족 앞에, 잠들어 있는 이 인류 앞에, 탄식하고 있는 수많은 당신의 아들딸들 앞에 새로운 경종을 울려 각성시켜야 할 책임이 저희에게 있사옵니다. 그뿐만 아니라 참다운 부모의 심정과 혈육적인 정에 화하여 형제의 인연을 노래하고, 가정적인 인연을 노래하고, 민족적인 인연을 노래하고, 그 기대(基臺) 위에서 세계적인 인연을 노래하고, 천적인 인연을 노래하여 최후에는 하나님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부모의 인연을 세웠노라 할 수 있는 천지가 되어야 할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그래야만 이 땅을 대하여 섭리하시는 모든 일이 해결될 것을 저희들이 배워서 알았 사오니, 그 목적을 위하여 오늘도 싸우고 내일도 싸울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이끌어 주시옵고, 이 시간부터 과거를 부정하고 현실을 부정하며 새로운 자아를 세워서 내일의 생활을 가치 있게 하기 위하여 나설 수 있는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말씀을 듣고 마는 자들이 되지 말고, 느끼고 마는 자들이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자신을 살려준 이 말씀이 심판날에 참소의 조건이 될 줄 알고 있사오니, 그 조건에 걸리지 않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나타날 영광의 한 때를 위하여 준비하는 저희들이옵고 각오한 몸들이오니, 심정으로 나타내어 아버지를 높일 수 있고 한 중심에 화하여 생활을 개척하고 빛낼 수 있는 아들딸들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축복하여 주시옵고, 그 한 자리에서 사탄 앞에 주인의 행세를 할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그리하여 찾으시려는 심정의 동산을 복귀하여 세계 인류가 하나의 대가족을 이룬 형제로서 아버지를 부모로 모시고 살 수 있는 자유천지에서 하늘이 기뻐하고 만민이 기뻐하며 살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나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로부터 시작하여 부모, 민족, 세계, 천주의 기준까지 나아가야 할 것을 저희들이 알았사오니, 이제부터 새로운 각오와 결심으로 총진군할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면서,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저희들은 뜻을 이루기 위하여 수고하신 아버지 앞에 면목이 없음을 이 시간 다시 한번 아뢰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아버지께서 경영하시는 섭리는 영광의 섭리가 되고, 선의 동산에서 즐거워하는 아들딸을 바라보고 환희하며 즐기는 생활을 하셨어야 할 것이었는데, 생각지도 않았던 타락으로 말미암아 아버지의 섭리는 기쁨의 섭리가 되지 못하고 슬픔과 고통과 탄식의 섭리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섭리를 엮어 나오시지 않으면 안 되었던 아버지! 그러한 섭리의 동기가 되고 원인이 되었던 저희 부족한 모습들은, 이 시간 아버지 앞에 역사적인 죄상을 회개하지 않을 수 없사오며, 시대적인 죄상을 회개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또한 영원한 평화의 세계를 그리며 섭리하시는 아버지께서 그토록 바라시는 미래의 그 세계를 위하여 머리 숙여 회개한 기준 위에서 복을 빌지 않으면 안 될 섭리의 뜻이 남아 있는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님과 우리, 우리와 만물, 아버지와 만물과의 관계에서 볼 때 어느 것 하나 아버지의 사랑의 심정을 벗어나서 지음받은 것이 없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지와 영원한 부자의 인연으로 심정을 통할 수 있는 그 관계가 타락한 그날부터 깨져 버리고 하늘은 하늘대로, 인간은 인간대로, 만물은 만물대로 갈 목적지를 잃어버린 채 지금까지 탄식권 내에 머물러 있다는 것도 저희들이 알고 있사옵니다.
사랑하는 아버님! 당신께서는 타락의 한과 타락의 탈을 벗지 못하고 불쌍한 운명의 길에서 허덕이는 저희의 사정을 잘 아시고 오늘의 복을 허락하시기 위해 수천년의 역사를 준비해 나오셨습니다. 그러나 저희의 모습을 돌아볼 때, 당신 앞에 허락받아야 할 것이 있는 동시에 축복의 기준을 세워야 할 책임이 큰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제 하늘과 인간 사이에 갈리어졌던 모든 심정적인 인연을 다시 찾아야 할 때가 되었사옵고, 인간 끼리끼리 맺혀져 하늘을 노래할 수 있는 심정의 인연이 깨어진 것을 다시 맺지 않으면 안 될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뿐만 아니라 영원한 인연권 내에서 화동의 조건물이요 승리의 조건물로서, 이념적인 생활의 재료로서 만물을 취하여 화동의 만상을 이루어야 했는데, 그 만물을 잃어버린 것을 탄식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긍휼의 아버님, 심정의 인연을 찾아 헤매는 무리는 많사오나 아버지의 심정이 어떠하다는 것을 아는 무리는 적사옵니다. 아버지의 심정을 알지 못하고 흑암 세계에서 허덕이며 복귀의 길을 가고 있는 이 인류를 다시 품어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님, 이날은 거룩한 날이옵니다. 한스러운 운명의 길을 피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남기신 발자취를 따라 나가려는 각오와 결심을 갖고 이 자리에 모인 당신의 아들딸을 이 시간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승리의 한 때를 약속하신 아버지의 뜻을 바라보고 저희가 가진 모든 것을 다 아버지 앞에 제물로 바치기를 맹세한 몸들이오니, 그 뜻의 목표를 향하여 전진의 일보를 내디디어 승리의 개가를 부르고, 아버지의 영광을 높일 때까지 굴할 줄 모르고 패배할 줄 모르는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거룩한 날, 만민 위에 축복하여 주시옵고, 하늘이 찾아 나오신 그 인연을 오늘 곳곳의 수많은 군중, 수많은 민족, 수많은 무리에게 연결시켜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끊어진 인연을 다시 잇기 위하여 복귀의 한을 풀고 싶으신 것이 삼위신의 심정인 것을 아오니, 그 심정의 토대 위에 복귀의 완결을 지으시옵소서. 그리하여 저희들이 일신(一身)으로부터 저희의 가족 민족 국가 세계 천지의 만상에까지 심정적인 인연이 맺어지기를 저희들은 고대하여, 불충 부족한 모습을 개의치 않고 아버지 앞에 머리 숙였사옵니다. 그러기에 아버지 앞에 눈물의 기도를 드리지 않을 수 없는 저희들이오니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 이 날을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인류는 심정을 잃어버림으로써 가야 할 목적지를 알지 못하고 있사옵니다. 그 인류 가운데 불쌍한 자리에 처하여 있는 삼천만 민중이 있사옵니다. 그러나 그 민중 가운데 당신의 선하심을 찬송하는 수많은 교단이 있사오며, 애절한 심정을 기울여 숨은 제단을 쌓고 땅을 치며 통곡하는 당신의 아들딸이 있사오니, 버리지 마시옵소서.
아버님, 아버지의 역사는 죄 있는 인간을 버리시려는 것이 아니라 다시 찾아서 본연의 인간으로서 회복하시려는 복귀역사임을 알았사옵고, 잃어버린 창조이념을 다시 찾아 세워 재창조하시기 위하여 지금까지 사망세계를 붙들고 나오시는 아버지이심을 알았사옵니다. 이와 같을진대 오늘 아버지의 이념과 아버지의 심정을 만민에게 연결시키기 위하여 간곡히 호소하는 아들딸들이 있사오면, 같은 은사를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더욱이나 외로운 자리에서 모진 핍박의 역풍(逆風)을 받으면서도 한줄기 생명의 빛, 체휼한 한줄기 심정의 인연을 노래하며 이 시간도 각지(各地)에 널리어 무릎을 꿇고 호소하는 무리들이 있는 것을 당신이 아시오니, 같이 축복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오늘 저희들이 모이게 된 동기를 아버지 아시옵고, 저희들이 성심을 다 기울여 아버지의 심정의 세계에 좀더 가까이 나아가고자 하는 것을 당신은 아시옵니다. 정열에 사무친 저희의 마음이 기필코 아버지를 모시고야 말겠다는 신념과 더불어 정성을 기울이는 이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고, 아버지를 대하고 싶은 간절한 저희의 마음이 아버지와 인연을 맺어 아버지의 아들딸로 축복을 받고야 말겠다는 신념을 가지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날 만민 위에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존전이 그리워 외로운 모습들이 모여와서 무릎을 꿇었사오니, 버리지 마시옵고 품어 주시옵소서. 사탄이 일체 틈타지 않는 시간 되게 하여 주시옵고, 하늘의 보좌와 더불어 천천만 성도와 천군천사들이, 흘러 들어오는 심정의 인연을 노래하는 이 모임 위에 친히 같이하시고 움직이시어, 이 청중을 아버지의 장중에 넣으시고 뜻대로 주관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 모든 것을 승리의 기준에서 인연 맺어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올 때에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였사옵나이다. 아멘.
아버지! 이 자리에 섰사옵고, 모였사오니 맡아 주시옵소서. 불쌍한 이 삼천만 민족을 하늘은 이 민족이 모르는 가운데 지켜 오시고 사랑해 오셨다는 것을 저희들이 알고 있사옵니다. 하늘은 황폐한 삼천리반도를 품으시고 새로운 역사의 아침을 맞이할 수 있는 생명의 한 모습이 나타나기를 바라면서 나오셨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외로운 입장에 처해 있는 이 민족을 긍휼히 보시옵소서. 주변 환경으로부터 시달림을 당하며 처참한 모습이 된 이 삼천리 반도를 긍휼히 보시옵소서. 당신이 사랑하던 민족이요, 긍휼히 품었던 이 반도인 것을 저희들이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지, 이 삼천만 민중을 다시 사랑하여 주시옵고, 이 삼천리 동산을 다시 사랑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 아버지의 존전에 나와 머리 숙인 무리는 소수이오나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아버지의 심정을 그리워하지 않을 자가 어디 있겠사오며, 선한 목적의 동산을 마음으로 그리지 않을 자가 어디 있사오리까?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은 오늘도 갈 길을 몰라서 허덕이고 있사옵니다. 자신의 가치를 잃어버린 채 갈 길을 몰라 허덕이고 있는 불쌍한 무리들을, 아버지, 오늘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은 어느 누가 잘나서 부르시는 것이 아니었사옵니다. 심정을 품고 기르신 아버님을 알고 그 심정이 그리워서 눈물짓는 아들딸이 있으면 아버님께서는 당신의 사정과 처신과 위신과 체면을 잊어버린 채 바쁜 걸음을 멈추시고 그들의 손을 붙들고 격려해 나오신 것이, 지금까지 아버지께서 거쳐오신 복귀역사의 일로(一路)인 것을 알고 있사옵나이다.
긍휼이 많으신 아버지, 불쌍한 인류의 앞길을 지켜 주시옵고, 생명의 고갈을 당하고 있는 불쌍한 이 민족을 지켜 주시옵소서. 더욱이나 하늘을 부르면서 아버지의 심정의 동산을 그리워하는 수많은 성도들이 있사오니, 그들을 지켜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그 가운데는 남이 모르는 심혈을 다 기울여 아버지의 제단 앞에 눈물을 뿌리며, 먹을 것을 먹지 못하고, 입을 것을 입지 못하고, 자기의 위신과 체면을 망각한 채, 그 옛날에 당신의 아들딸들이 간 전통의 노정을 밟기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허덕이는 무리들도 있는 것을 아오니 그들 위에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생명과 생명을 연결하여 아버지를 모실 수 있는 기쁨의 한 날을 그리워하기를 6천년! 타락한 인간도 그날을 그리워하거든 하물며 본연의 심정을 품고 나오시는 아버님이야 어떠하시겠는가를 저희들이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는 그 어떠한 것도 소유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심판의 과정을 거쳐 나가야 할 땅 위의 어떠한 권세도 요구치 않습니다. 남겨진 당신의 피어린 발자국을 지키고 싶사옵고, 쓰러졌던 골짜기에 당신이 기뻐하실 수 있는 하나의 초석이라도 남겨 놓고 싶은 것이 저희의 마음이오니, 남기신 그 뜻 앞에 몸둘 바 몰라 머리 숙이고 눈물과 더불어 걸어갈 줄 아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 오늘 이와 같은 자리로 이끌어 주신 아버지 앞에 감사를 드립니다. 아니 가려야 아니 갈 수 없는 이 길에 당신의 인연이 있는 것을 알게 된 그날부터 오라 하시는 당신의 간절한 음성이 있음을 알았사옵니다. 사무친 애달픈 심정을 통하여 나오는 당신의 피맺힌 울부짖음을 들은 그날부터 걸어 나온 저희들의 걸음을 지켜 주신 것을 감사드리옵니다. 걸어 나오는 과정 가운데 험한 길이 있을 때에는 당신만이 저희들의 위안이 되어 주셨사옵고, 당신이 남기신 전통의 일면이라도 더럽힐까봐 염려하며 나온 저희들의 발걸음을 지켜 주신 은사를 더욱 감사드리옵니다.
외로운 길의 최선두에 서서 개척하셔야 하는 당신의 사정을 저희들은 알았사옵니다. 슬픔의 자리에서 슬픔을 머금으면서도 외로운 자들을 위로해야 하는 당신의 심정을 알았사옵니다. 고통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사탄의 수중에서 허덕이는 한스러운 무리들이 당신에게 십자가를 가하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이들을 버리시지 못하는 당신의 애달픈 심정을 저희들은 알았사옵니다.
이제 당신의 음성을 들은 저희들, 당신의 심정을 체휼한 저희들, 무엇을 주저하오리까? 무엇을 두려워하오리까? 이 몸이 제물 되어 당신의 존전을 영광되게 하는 것이 저희의 소원이옵고, 그래야만 저희의 모든 한을 풀 수 있다는 것을 당신은 아시오니 긍휼히 보아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나이다.
이날 여기에 모인 당신의 아들딸들은 외로운 길을 걸어왔습니다. 슬픈길을 걸어왔습니다. 하늘만이 아시는 한 길, 하늘과 맺어진 그 인연, 하늘과 통할 수 있는 저희의 심정을 당신은 아시옵니다. 오늘 저희들의 이 모임은 하루 이틀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6천년 피의 인연을 통하여 이루어진 한 장면이라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탕감의 역사는 그 피의 값을 요구하는데, 죽음의 피가 아닌 생명이 약동하는 산 영광의 피를 요구한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이 날을 맞이하는 슬픈 이 한 마음을 아시고, 분한 이 심정도 아시고, 억울하신 당신의 심정을 대신한 저희의 이 심정도 아시는 아버지, 이러한 자리에서 당신을 따르고 있는 무리들도 불쌍한 자들이옵니다. 당신이 가라 하시는 그 길에서 저희들은 배척도 받아 보았사옵고, 매도 맞아 보았사옵고, 철창에도 들어가 보았사오나 그 무엇도 아버지와 맺은 생명의 인연을 끊을 수 없다는 철석같은 마음, 아버지를 위하는 일편단심의 이 한 심정만은 천추에 길이 남기고도 남음이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오늘 여기에 모인 당신의 아들딸들, 달려온 걸음이오니 갈 곳밖에 모르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고, 달리는 발걸음이오니 죽더라도 달리다가 쓰러져 죽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슬픈 일이 있으면 아버지와 더불어 기도하였고, 아버지께서 복을 빌어 주던 이 자리가 변하여 사탄이 기뻐하고 장단을 칠 수 있는 인연이 맺어지는 자리가 될까봐 두렵사옵니다. 삼위신이 세우신 지조와 절개를 저희들이 본받고 유업으로 받아, 오늘에 세우시려는 천적인 심정의 주춧돌을 놓을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저희들 앞에 맡겨진 사명이 귀중한 줄 아옵니다. 가고 가고 또 가도 아버지 앞에 불충과 불효, 미급과 미완성의 자리에 처해 있는 자신을 자탄해야 할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오늘 이 자리에 모였사오니, 크신 사랑의 손길을 펴 주시옵고, 당신의 애달픈 심정을 터쳐 놓으시어서 ‘내가 너희를 위해 이렇게 살아왔고, 너희들을 찾기 위하여 이렇게 나왔다.’고 통사정을 할 수 있는 이 한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하늘이 원하시고 하늘이 바라보시며 하늘이 찾으시는 자는 많이 아는 자가 아니요, 그저 뜻 없이 따라가는 자도 아니요, 아버지의 심정을 붙들고 몸둘 바를 알지 못하고 눈물짓는 자인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심정으로부터 맺혀진 한은 심정을 통하지 않으면 풀 길이 없다는 것을 배운 저희들, 이 시간 아버지를 내 아버지로 모셔 놓고 외로움과 슬픔에 젖은 아버지의 한의 심정을 저희들이 인계 받고 아버님을 위로해 드리고 모실 줄 아는 당신의 아들딸들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날 수많은 인류 위에 축복하여 주시옵고 삼천만 민중 위에도 축복하여주시옵소서. 더욱이나 외로운 자리에서 찬 서리를 맞아가며 먹지 못하고 입지 못하면서도 아버지 앞에 충절을 세우기 위하여 슬픈 눈물을 뿌리는 당신의 아들딸들도 이 시간 많을 줄 아옵니다. 슬픈 일이옵니다. 그들 각자의 마음 마음을 붙들고 위로하여 주시옵고, 기쁨의 날을 고대하는 그들 앞에 영광과 승리의 표적이 이 시간 나타나게 역사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오늘 모인 당신의 아들딸들의 모습을 거룩타 인정하시옵고, 사탄이 일체 틈타지 못하는 이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사랑의 인(印)을 치시어서 영원히 아버지의 아들딸로, 아버지의 소유로 결정될 수 있는 인연이 이 시간 각자의 심정 심정에 연결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기쁨의 새로운 역사가, 재창조의 환희가 이들 앞에, 이들의 마음속에 충만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옵나이다.
남아진 시간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하늘에 있는 모든 식구들과 땅에 있는 참다운 아들딸 위에도 영광의 약속과 더불어 기쁨의 은사가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바라면서,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였사옵니다. 아멘.
아버님, 저희의 심정이 어떠한 위치에 있는가 살피게 하여 주시옵소서. 자기의 가치를 높이 찬양하고 싶었던 나, 이제 나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그 자체를 다시 분석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과거를 거쳐서 현실에서 생활하다가 오늘 이 자리에 머문 내 자신이 어떠한 위치에 처하여 있는지 오늘의 나의 가치를 결정짓지 못할진대 과거의 나와 이 시간의 내가 별다른 차이가 없다는 것을 저희들이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 저희의 마음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가 다시 살피게 하여 주시옵소서. 방향도 없이 떠도는 마음이 되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목적도 없이 자기의 위치를 망각하여 허덕이는 마음이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천지가 변할지언정 자신의 말씀은 일점 일획도 변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하고 있는 그 자체도 변할 수 없는 것을 저희들이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께서 말씀을 전하신 것은 그 말씀을 붙들고 좋아하는 자를 만들기 위함이 아니라 그 몸과 그 심정을 붙들고 좋아하는 자를 만들기 위한 것이었음을 아는 저희들이라 할진대 아버지, 저희의 마음이 당신의 뜻을 대하든가 당신의 심정을 대할 때, 어떠한 위치에서 그 목적하는 바의 가치와 상대적인 관계의 인연을 가지고 오늘의 생활을 개척할 수 있는 모습이 되어 있는가가 문제인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지! 이 마음이 자신이 머물 수 있는 위치를 잃어버린 것이 탄식이요, 자기의 가치를 전세계와 온 천주와 더불어 논위할 수 있는 자격을 상실한 것이 탄식임을 알고 있사옵니다. 본래의 인간은 자기의 갈 방향을 갖추어 천상의 대주재와 관계를 맺은 자유의 환경에서 그의 가치와 높고 선하심을 노래해야 하고, 아버지의 심정을 통하여 아버지와 더불어 화하고 즐거워해야 할 인간임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잃어버린 본연의 위치를 다시 찾기 위해 헤매는 인류, 잃어버린 본연의 가치를 다시 찾기 위해 오늘도 고심하고 있는 인류이옵니다. 심정을 걸어 놓고 마음과 몸이 화하여 기뻐할 수 있는 목적의 동산에서 주인과 더불어 영원히 노래하는 것이 저희들의 소원이옵니다. 그 동산을 향하여 발걸음을 옮겨 놓는 그날부터 어떠한 어려움과 슬픔이 닥치더라도 그 모든 것을 획득하는 그날까지 주저할 줄 모르는 당신의 아들딸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그와 동시에 아버지를 대한 일편단심의 심정만은, 송죽처럼 언제나 변함없이 끓어올라 천상 혹은 지상의 전존재세계를 움직여 내고도 남음이 있는 불변의 충신의 가치로 단장시켜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창조주가 있다 할진대 그러한 모습을 그리워하실 것임을 저희의 추리로도 알 수 있사오매, 당신 역시 그것이 소원임을 알고 있사옵니다. 그런 기준에서 아버지와 인연 맺고, 타락한 세상 험악한 죄악의 세상을 짓밟기에 부족함이 없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몸, 상처 입은 몸이지만 아버지 앞에 내어 놓습니다. 수습할 수 없는 이 마음, 거리에서 방황하는 것과 같은 이 마음도 내어 놓습니다. 생명의 안식처를 찾지 못하여 허덕이던 과거의 그릇된 모든 것을 다 내어놓습니다. 주체적인 실존자요, 영존자이신 당신의 은사를 바라고 나온 저희들이오니 생명과 사랑의 아버지 앞에 경배드릴 수 있는 이 시간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나이다.
저희들의 모든 것은 저희 것이 아니옵니다. 모두 당신께 바쳤사오니 당신의 장중에 넣으시어서 몸이 옳지 못하거든 쳐서라도 성별해 주시옵고, 마음이 옳지 못하거든 꺾어서라도, 아버지의 심정과 인연 맺을 수 있도록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그런 인연을 세우는 데 있어서 분부하실 말씀이 많을 줄 알고 있사오니 말씀하여 주시옵고, 권고하여 주시옵고, 충고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무슨 말씀을 하오리까. 아직까지 저희 앞에 토로하실 당신의 한이 많은 것을 알고 마음 졸이고 있사오니, 아버지,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몸 앞에 마음을, 마음 앞에 심정을, 심정 앞에 천륜을 모셔야 할 것을 저희가 알고 있사옵니다. 이 시간 아버지의 애달픔과 아버지께서 염려하시는 그 심정을 토로하여 주시옵소서. 지금까지 느끼지 못한 심정적인 혁명이 이 시간에 이루어져 천상의 인연을 배반하였던 것을 회개하는 무리가 많이 나오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전하는 자의 마음과 받는 자의 마음이 갈라지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당신이 운행하시는 그 전체적인 분위기에 휩쓸리고, 존재의식은 운행하시는 아버지의 의식에 사로잡혀 심정과 더불어 체휼할 수 있는 기쁨의 약속을 허락해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옵고 원하옵니다.
남한 각지에서 이 시간 외로운 무리들이 무릎을 꿇고 머리 숙여 기도하고 있사오니, 아버지께서 같이하여 주시옵고, 더더구나 이 시간 이 자리를 그리며 눈물짓는 식구들이 있사오니 그들 위에도 같이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살고 있는 사정과 형편에 얽매여 당신이 소원하시는 뜻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그들의 마음은 얼마나 섧겠사옵니까? 크나큰 은사로 이 시간 그들을 위로해 주시옵고, 붙들어 주시옵고, 품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나이다.
남아진 시간을 맡기오니 삼위신이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저나라 영계에 있는 뭇 영인들과 심정을 기울여 아버지의 이념을 그리워하는 선한 자들을 같은 식구의 심정권에서 축복하여 주시옵고, 인연을 맺는 이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면서,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말 씀> 여러분 자신들이나 여기에 서 있는 이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무엇에 의지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자기보다 더 높고 가치 있는 그 무엇과 인연 맺고자 하고, 자기보다 더 높은 가치적인 그 무엇을 그리워하는 것은 누구나 다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만일에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우리 자신들이 그리워할 것은 무엇이었을 것인가? 그것은 단지 하나님의 심정뿐일 것입니다. 타락하지 않은 인간이 하나님과 가까이하고, 하나님과 인연을 맺고 싶어한다 할진대 그것은 하늘이 갖고 있는 어떠한 물건을 얻으려 함도 아니요, 하늘이 알고 있는 어떠한 지식을 얻으려 함도 아니요, 하늘이 지니고 있는 어떠한 권한을 얻으려 함도 아니라 하나님 속에 깊이 잠겨 있는 심정을 소유하려 함일 것입니다. 그것만이 그들의 가치의 표준이 될 것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마음을 가진 인간이라면 누구나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타락한 땅에 살고 있는 우리들도 그 어떠한 것보다도 심정의 가치를 노래할 수 있는 안식의 터전을 그리며 허덕이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심정의 기준을 찾아 헤매야 할 인간이라는 것을 먼저 여러분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한 시간이면 한 시간, 하루면 하루, 몇십년이면 몇십년의 생애노정을 거치는 그 과정에 있어서, 그 심정이 깊고 넓고 높은 사람일수록 행복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갖춘 것이 풍부하고 모양이 늠름하다 할지라도 그런 기준을 갖지 못한 자는 불행한 자라는 것을 여러분들이 잘 아는 바입니다. 타락한 인간도 그렇거늘 타락하지 않은 본연의 인간도 그러했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기억하여야 되겠습니다.
인간 타락의 응보로 받게 된 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하나님의 심정세계와 끊어지고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동산에서 추방당하고, 하나님이 지으신 전체의 세계를 내 것으로 소유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의 슬픔인 것입니다.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지음받은 온 만물에게 슬픔이 왔다 할진대 그것은 참다운 인연을 가지고 사랑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사람을 대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천상(天上)의 영인(靈人)들도 하나님의 심정과 인연을 맺지 못하여 하나님의 무궁무진한 사랑의 손길로 품을 수 있는 아들딸이 되지 못한 인류, 즉 타락의 혈족을 바라보고 탄식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심정의 기준을 찾아 헤매야 할 타락한 인간들은 불쌍한 처지에서 허덕이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똑똑히 기억해야 되겠습니다.
마음의 안식처, 더 나아가 심정의 안식처를 찾기 위하여서는 자기의 소유나 자기의 의식 관념 전부를 포기하고라도 하나님의 심정만을 소유하여야 된다는 것을 타락한 세계의 우리가 항상 느끼는 바입니다. 타락하지 않은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만일 어느 누가 하나님의 사랑을 가졌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존재 세계를 전부 다 준다 해도 그 사랑 하나와 바꿀 수 없을 것이며, 천상천하의 어떠한 권한을 다 준다고 해도 그 사랑 하나와 바꿀 수 없을 것입니다.
타락 전이나 타락 후나 궁극의 목적은 심정의 안식동산을 찾는 것입니다. 심정의 동산을 찾아서 대하면 대할수록 새롭고, 대하면 대할수록 행복스럽고, 대하면 대할수록 자유롭고, 대하면 대할수록 그 가치와 그 위치와 그 영광의 한계를 측정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누리는 사람은 최대의 행복자일 것입니다. 만일에 이 땅 위에 그런 사람이 있다 할진대는 어떠한 인간도 그를 배반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이 땅 위에 있다 할진대 모든 사람은 그를 붙들기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허덕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소유해 놓고 하나님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을 맺은 사람, 그런 완성한 사람이 있다 할진대 천상의 어떠한 존재라도 그를 붙들려고 노력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에 이런 인연이 갈래갈래 찢어져 버렸습니다. 그런 연고로 그 인연을 다시 맺기 위해서 섭리해 나오시는 것이 구원섭리입니다. 왜 구원이라는 낱말이 생기게 되었으며, 그 구원은 왜 해야 되느뇨? 본래의 자리에서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이 세계는 그 무엇인지 모르게 새로운 이념에 의해 구원받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왜? 이념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이 땅 위의 모든 인간들은 그 무엇인지 모르게 어떠한 위치를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왜? 머물러야 할 위치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연구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뇨? 알 수 없는 성경이기에 알기 위해서 허덕이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며 구원의 길을 가고 있는 목적은 무엇이뇨? 나를 모르는 인간이 되었기 때문에 나를 알기 위해서입니다. 나를 존중시하며 새로운 이념을 알려고 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세계를 알 수 없는 인간이 되었기 때문에 세계를 알기 위해서입니다.
자기의 욕망을 이루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해명했다 할지라도 그가 모르는 바가 있나니, 그것은 절대자입니다. 세계를 움직이는 어떠한 이념적인 주체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세계를 넘어 무한한 실존세계 전체를 꿰뚫어 그와의 인연을 맺기 전에는 안식할 줄 모르는 것이 심정의 세계입니다. 우리는 세계를 모르고 있고, 무한한 영계를 모르고 있고, 하늘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것이 다 타락의 보응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들 앞에 말씀드리려는 제목은 ‘심정의 해원을 완성하려는 복귀역사’입니다. ‘심정의 해원을 완성하려는 복귀역사’라는 제목을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중에는 10년 혹은 20년, 더 나아가서는 일생 동안 하늘을 숭배하며 도의 길을 찾아 나온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러한 어려운 길을 가는 원인은 어디에 있느뇨? 여러분 자신이 잘못해서가 아닙니다. 여러분 자신이 잘못한 것보다도 우리의 선조에게 잘못이 있고, 그 선조를 거슬러 올라가게 되면 근본적으로 잘못한 장본인이 있나니 그들이 타락한 인류의 조상인 아담 해와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선조 아담 해와는 하나님의 사랑의 품에서 자라났고, 하나님의 지성지대(至聖至大)하신 사랑의 심정 밑에서 키움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자라는 모습이 귀엽고 사는 환경이 자유스러웠다 할지라도 그들이 지니지 못한 것이 있었나니 그것이 무엇이었느뇨? 허락하여 주신 만물이 없었던 것도 아니요, 심부름꾼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아담 해와가 하나님의 아들딸이 될 수 있는 심정의 인연을 맺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한이에요.
하나님이 무한한 창조의 이념과 더불어 즐길 수 있는 소망의 세계를 세우시고, 아담 해와로 말미암아 천하만상이 자유자재로 주관되는 모습을 보고 기뻐하시고자 했던 것은 그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외적인 어떠한 조건이 귀해서가 아니라 당신의 심혈이 그들에게 침투되어 있고, 당신의 뼈 살이 잠재해 있고,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심정의 흐름이 아담 해와에게 향하고 있었던 연고로, 아담 해와에게 온 천지 만물을 허락하였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나 아담 해와는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늘을 저버렸습니다. 만물을 저버린 것도 아니요, 축복해 주신 것을 저버린 것도 아니요, 저버려서는 안 될 하나의 원칙을 저버렸나니 그것이 무엇이뇨? 하나님과 심정의 인연을 맺을 수 있는 기반입니다. 심정의 기반을 저버렸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타락입니다.
심정의 모든 가치를 노래하기 위하여 지으셨던 아담 해와, 그 아담 해와를 지어 놓으시고 기쁨과 소망의 심정으로 자라는 그들을 보고 즐거워하시던 하나님, 따먹지 말라는 엄중한 계명을 세워 놓으시고 때를 바라보며 참아 나오시던 하나님의 소망의 심정이 얼마나 간절하였는가를 아담 해와는 몰랐습니다. 자신들을 대해 얼마나 고대하시고 얼마나 쓰다듬어 주고 싶어 하시는지를 이들은 몰랐다는 것입니다. 움직이는 그 모습을 귀여워해 주고, 쓰다듬어 주고, 안아 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셨지만 하나님은 세우신 법도의 한 기준을 완성할 때까지는 기간을 두고 따먹지 말라는 조건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아담 해와가 이러한 하나님의 심정을 알았던들 타락의 인연을 맺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심정을 유린하고 천사장과 관계를 맺어 버림으로써 하늘세계 앞에 용서받지 못하고 추방당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타락한 조상, 타락한 부모인 아담 해와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은 아담 해와를 바라볼 적마다 소망의 심정이 불타올랐고, 그들을 볼 적마다 그들이 자아완성하여 행복한 생활을 할 것을 생각하시며 행복의 감정이 불타올랐고, 하나님이 지으신 천지 만물을 그들 자신이 지은 것처럼 주관하고, 즐거워하며 쓰다듬어 줄 것을 바라셨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소망의 심정은 아담 해와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다 끊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선조가 저끄러 놓은 죄상 중에 용납받지 못할 크나큰 죄상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을 그냥 내버려둘 수 없습니다. 왜? 본래 인간을 지으실 때 영원의 기준인 원리적인 법도에 의하여 지으신 연고로 그 기준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타락한 아담 해와를 저버리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였으나, 그들을 저버리게 되면 6일간 지으신 전피조세계의 원칙을 저버리는 동시에 영원의 기준까지 저버리지 않으면 안 될 입장이 되고, 영원의 주체이신 하나님의 실존까지 침해당할 수밖에 없는 입장에 서기 때문에 이를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아담 해와를 다시 한번 구원하는 섭리를 시작하신 것입니다.
영원한 원칙을 세워 놓고 그 기대(基臺) 위에 영원의 주체자로서 군림하여 생명체를 주관하고자 하셨던 그 심정의 발판을 인간조상이 타락했다고 해서 끊어버릴 수 없었기에, 그 기준을 바라보시면서 타락한 인간을 끌고 끌어서 본연의 심정기준까지 끌어올리려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의 역사입니다.
도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이뇨? 절대자가 있다 할진대 그 절대자가 대할 수 있는 하나의 신앙자, 즉 심정의 관계에서 승리하였다는 하나의 모습을 하늘이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세우지 않으면 실패입니다. 오늘날 이 땅의 타락한 후손들도 그런 하나의 존재를 하늘과 인연 맺게 하지 못하면 실패라는 것입니다. 구원이 완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찾아오셨습니다. 지으신 만물이 그리워서 찾아오신 것이 아닙니다. 천상의 행복의 보좌가 그리워서 찾아오신 것이 아닙니다. 아담 해와가 타락한 그날, 그때부터 하나님은 심정의 뒷골목을 외로이 걸으시며 6천년 역사를 거쳐 오늘 이 시간까지 여러분의 뒤를 묵묵히 따라오고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이 인류가 가야 할 방향은 사망의 세계, 사망의 함정, 생지옥인 이 땅에서 목적도 모르고 방향도 모르는 채 걷고 있는 발걸음을 돌이키는 것입니다. 구원! 구원이라 함은 다시 구한다는 것입니다. 구하기 위해서는 구해주는 구주가 필요하니 이 땅 위에 구주라는 명사가 생겨난 것입니다.
구주는 인간들이 사망세계에서 그냥 그대로 살도록 방치해 두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구주는 필요 없습니다. 구주는 이 세계를 저버리고, 이 세계를 청산하고, 오늘의 고착된 환경을 청산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주를 찾는 목적은 어디에 있느뇨? 구주를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주를 보내신 장본인이신 하나님과 심정의 인연을 맺기 위해서입니다. 그 인연이 맺어질 때까지 돌진해야 할 운명에 처해 있는 것이 타락한 인류요, 타락한 부모의 후손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인간은 지식에 굶주리고 있습니다. 혹은 명예욕을 채우지 못해 굶주리고 있습니다. 배고픔과 헐벗음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굶주리고 있는 조건이 많을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이기에 응당히 굶주림에 허덕여야 합니다. 조상이 저끄린 죄상의 보응으로 인간이 굶주림에 허덕이는 것은 당연하지만 인간을 구하여야 할 하늘도 굶주려 나왔다는 것입니다. 무엇에 굶주려 나왔느뇨? 심정에 굶주려 나온 하늘임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자유의 동산에서 품을 수 있는 아담 해와는 어디 갔느뇨? 엿새 동안 만물을 지으시고 소망으로 기다리시던 아담 해와는 어디 갔느뇨? 지어 놓고 ‘어서 자라거라, 자라서 축복해준 대로 만민의 참부모가 되어 내가 지은 만물을 너희들이 지은 것과 같은 심정으로 사랑하거라.’ 하시며 바라보신 행복의 심정, 또 그들의 후손과 온 천하만상이 하나님과 화하여 화동의 꽃동산을 이루기를 바라신 소망의 심정, 이런 심정을 잃어버린 채 하늘은 허덕여 나오고 계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 땅 위에 구주가 필요하다 할진대 어떠한 구주가 필요하겠습니까? 우리에게 지식을 갖다 주는 구주는 필요 없습니다. 명예나 권세를 부여해 주고 당대에 성공하게 해주고, 배를 만족시켜 주는 구주도 필요 없습니다. 하늘이 진정 인간을 사랑한다 할진대 우리 인간 앞에 어떤 구주를 보내주실 것이뇨? 심정의 구주입니다, 심정의 구주. 이것이 인류의 소망의 목표입니다. 하늘은 이 땅 위의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환경을 수습하고 갖은 방법으로 가르쳐 나왔습니다.
그러면 심정은 어떠한 자리에서 논해야 될 것이뇨? 깨끗하고 거룩한 자리에서 논해야 됩니다. 심정은 거리나 시장에서 논할 것이 아닙니다. 원수들을 다 제거시켜 안식의 환경을 만들어 놓고 성별된 지역에서 논해야 됩니다. 하늘과 역사적인 인연이 맺어지고 시대적인 인연과 미래적인 인연이 맺어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놓은 연후에야 심정의 인연을 맺는 것이 하늘의 복귀섭리라는 것입니다. 구원역사입니다. 하늘이 지금까지 6천년 동안 수고해 나오신 목적은 무엇이뇨? 심정의 안식의 동산을 이루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구원섭리를 해 오시는 하늘 앞에 머리 숙여 감사드려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택해 놓고 심정을 통할 수 있는 개인을 찾아 헤매셨습니다. 그리하여 타락한 혈족 가운데 하나님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하나의 조상을 찾아 세우셨으니 그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입니다.
그는 여러분이 지금까지 믿고 있는 것과 같은 이름만의 믿음의 조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존재는 어떤 존재뇨? 하나님은 심정의 주체이시기 때문에 그 심정을 대할 수 있는 개인, 심정을 걸어 놓고는 어떠한 일도 의논할 수 있는 존재를 하나님께서는 찾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존재가 바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하늘과의 심정의 인연을 세상의 그 어떤 이념보다도 철저히 느꼈던 것입니다. 자기의 자녀보다도, 자기의 친척보다도,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산보다도, 자기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지식보다도 더 중요시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늘을 대하여 느끼는 심정적인 인연은 그 무엇으로도 끊으려야 끊을 수 없고, 바꾸려야 바꿀 수 없는 하나의 기준이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꿈에 나타나 갈대아우르를 떠나라고 명령하셨을 때 쉽사리 가정 기물을 꾸려 사랑하는 부모와 형제 친척을 다 버리고 외로운 광야로 나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러한 심정적인 기반을 갖추었기에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는 것을 모르는 신앙자는 망합니다.
이렇게 하늘은 2천년 동안 수고하여 비로소 심정을 통할 수 있는 하나의 대상을 세우심으로써 심정의 기준을 찾으신 것입니다. 심정복귀를 해야 할 하나님의 입장이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 가운데 개인을 찾아 세우고, 개인을 찾은 후에는 가정을 찾아 세우고, 가정을 찾은 후에는 국가, 민족, 세계를 찾기까지 하늘은 섭리역사를 중단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기에 왔습니다. 무슨 인연인지 모르지만 여기에 와서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다 할진대 듣는 여러분은 자신의 심정이 어디에 처해 있는가 하는 것을 반성해야 되겠습니다.
심정의 기준을 갖추어 가지고 하나님과 결정적인 인연을 맺은 자가 있다면 그는 영원한 승리자입니다. 가정을 배경으로 하여 승리했다면 그가 정권 내에 있어서 영원한 승리자입니다. 국가를 대신하여 승리했다면 그 국가권 내에 있어서 최고의 승리자입니다. 세계를 대신한 기준을 갖고 승리했다면 세계적인 승리자입니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역사는 내적으로는 수습하여 올라가고, 외적으로는 깨뜨려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이 죄악된 세상이 망합니다. 외적으로는 깨뜨려 나가는 역사요, 내적으로는 수습해 올라가는 역사라는 것입니다. 반대가 된다는 말입니다. 왜? 복귀역사는 타락한 세상과 하늘 편을 합해 가지고는 섭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갈라놓으려니 한편으로는 깨뜨리고 한편으로는 수습하는 역사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본래 아담 해와가 타락하지 않았다면 우리의 참조상이요, 이 땅 위에 있어서 하나님을 대신한 대표자입니다. 아담 해와가 타락하지 않았다면 온 세계는 아담 해와주의의 세계란 말입니다. 아담 해와는 누구의 것이냐?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니 이 세계는 하나님주의의 세계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럴 게 아니겠어요? 일개 민족도 자기의 역사를 중심삼아 가지고 풍습과 시대적인 사회환경을 이루어 놓거든, 만일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담 해와가 타락하지 않았다면 이 세계는 아담주의의 세계가 되었을 것입니다. 동시에 절대 집권자이신 하나님주의의 세계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랬으면 싸움도 없고, 분열도 없고, 주권쟁탈 역사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탄세상을 깨치고 이루시고자 했던 본래대로의 세계를 세우시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래서 사탄세계를 수습해 나오신 것입니다. 씨족으로부터 부족, 부족으로부터 민족, 민족으로부터 국가의 형태를 거쳐 나오면서 거기에 주권자가 나옵니다. 그런데 그 주권자를 그냥 두어서는 안 되겠기에 깨뜨리는 것입니다. 하늘 편 사람들을 세워 가지고 깨뜨려 나온 것입니다. 그래야 한 곳에서 수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그런 싸움을 해 나오신 것입니다.
그 주권자가 하늘의 반대편, 즉 땅 위의 영원한 집권자가 되면 천국을 찾아 나가는데 방해자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어떠한 주권자 앞에 나타날 적마다 반대를 받지 않은 때가 없습니다. 원수입니다. 기독교를 세워 이것을 때려부순다는 것입니다.
로마가 아무리 철옹성 같은 강국이었지만 기독교가 들어가서 그 로마를 무너뜨리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군주사회를 거쳐 민주사회로 넘어갔습니다. 왜? 깨뜨려 놓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세계가 집권자나 독재자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면 하늘이 복귀역사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깨뜨려 나가는 것입니다. 깨뜨려 가지고 군주시대를 거쳐 민주시대로 넘어왔습니다. 상류계급부터 출세하여 중류계급이 출세했고, 이제는 노동자, 농민까지 출세할 수 있는 때에 왔습니다. 내리몹니다. 이제는 형제의 인연, 부자의 인연, 부부의 인연까지 다 깨져 갑니다. 아버지가 자식을 때려죽이고, 자식이 부모를 때려죽이는 천지가 되는 때, 그 때가 끝날인 줄 알란 말입니다. 오늘날 민주세계는 각성해야 됩니다.
외적으로 깨뜨리는 천지 운세에 따라 하나님의 일선과 사탄의 일선은 같다는 것입니다. 일의 내용도 일선은 같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지금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선진국가들은 각성해야 됩니다. 가던 걸음을 돌이켜야 됩니다. 돌이키는 데는 어떠한 지식을 중심삼고 돌이킬 것이 아니요, 어떠한 재물을 갖고 돌이킬 것이 아니요, 심정을 갖고 돌이켜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망합니다, 망해요. 허덕이고 헤매다가는 나중에 큰 세계의 이념 앞에 자폭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세계를 자기 것으로 가진다 하더라도 그 외적인 환경이 내적인 심정을 점령해 들어오는 고독한 입장을 내적으로 수습하지 못한다면 파멸해 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은 내적으로 수습해 들어오는 섭리를 해 오고 계신 것입니다.
하늘은 이런 목표 밑에 일찍이 하늘이 사랑할 수 있는 개인 아브라함을 택했고, 아브라함이 실수함으로 말미암아 야곱을 세웠습니다. 그를 중심삼고 가정을 복귀하여 승리했다는 조건을 세움으로써 주신 이름이 이스라엘 이었던 것입니다. 그 뒤 모세 때에 와서 이스라엘 60만 대중으로 하여금 가나안 복귀노정을 거치게 하시고 나중에는 예수를 보내주셨습니다. 그 민족의 기반 위에 예수를 세우심으로써 천적인 복귀섭리의 줄기는 오늘의 여러분에게까지 뻗쳐 나온 것입니다.
야곱은 가정 대표자로 일대에서 가정복귀를 완성하였고, 모세는 민족의 대표자로서 애급에서 60만 대중을 구해내었습니다. 세계적인 애급으로부터 세계적인 가나안 땅으로 구해낼 메시아는 이 땅에 오셨더랬습니다. 민족 복귀를 완성한 이스라엘의 기반 위에 승리적인 군왕으로 군림하여 세계를 정복하기 위해 오셨던 분이 예수였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가 죽으러 왔다구요?
하나님은 세우신 예수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간 그날부터 만왕의 왕, 메시아의 재림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런 주인공이 오시는 데는 무엇을 갖고 오시느냐? 인간의 소망, 역사의 소망, 시대의 소망, 온 천주의 소망인 심정의 복지를 가지고 찾아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늘은 우리에게 권고하셨습니다. 어떠한 지식을 가지라고 권고하지 않았습니다. 어떠한 권세를 누리라고 권고하지 않았습니다. 죽든지 살든지 신부의 절개를 가지고 단장하라고 권고하셨습니다, 신부의 절개를. 그건 왜? 세계의 인류가 최후의 종단선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심정적인 주인 앞에 심정적인 상대의 가치를 갖춘 신부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신부의 자격을 갖추기 전에는 그 선을 넘지 못하기 때문에 제일 좋은 선물로써 복된 약속을 해 놓으신 것입니다.
끝날이 되어 오니 세계는 두 갈래로 갈라졌습니다. 그렇잖아요? 두 갈래로 갈라져 접선되고 있습니다. 접선은 일선에서 됩니다. 지금까지는 함께 나오다가 이제는 맞섰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함께 나왔습니다. 지금까지는 하늘 편이 사탄 편과 어깨를 겨누고 나왔지만 언제까지나 사탄과 어깨를 겨누고 나와서는 안 되겠기에 맞서는 것입니다. 이러한 투쟁역사가 1차대전, 2차대전으로 전개되었고, 3차대전형으로 전개되어 나오는 것입니다. 이제는 판가리를 지어야 되기 때문에 맞서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를 딱 맞세워 놓았습니다. 하나는 유심(唯心)이요 하나는 유물(唯物), 하나는 영적이요 하나는 물질적입니다.
그러면 앞으로의 세계는 어떠한 세계가 될 것인가? 공산주의를 삼켜 버릴 수 있는 심정적인 이념세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세계가 어떤 세계뇨? 천주주의 세계입니다. 이것은 여기에서 말하는 사람의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제창하는 말이요, 예수가 고대하는 말입니다. 예수주의는 무엇이뇨? 예수는 어떤 분으로 오시느뇨? 타락하지 않은 부모가 이 땅 위에 없으니, 아담 해와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참된 부모를 잃어버렸으니 그 잃어버린 부모를 다시 세우는데, 그분이 참부모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이제 오시는 그 부모를 모시기 위해 그 부모의 약속을 중심삼고 가던 걸음을 전부 돌이켜야 합니다. 다 버리고 가야 됩니다. 버림받는 길을 찾아가는 것이 신앙의 길입니다.
성경을 연구하고 또 연구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주님 예수님은 어떠했으며, 이스라엘 민족의 구주인 모세는 어떠했으며, 가정적 구주인 야곱은 어떠했으며, 개인적 구주인 아브라함은 어떠하였는가? 노아는 어떻게 되었으며 아담 해와는 어떻게 되었는가를 알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이 곧 머리를 싸매고 헤매는 도의 길입니다.
인생의 근본문제가 어디에서 해결되는지 아십니까? 오늘날의 과학문명을 통하여 이루어진 이 세계관을 잘 설명하는 데서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실증적인 논리를 세우고 실증적인 가치를 논하는 데서 인생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원점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것을 찾으려면 잃어버린 곳에 가야 찾으니 그곳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돌아가는 데는 성경 말씀만을 통하여서 돌아가서는 안 됩니다. 성경 말씀의 내막에 숨겨져 있는 골수의 심정을 통하여 돌아가야 됩니다. 이것이 도인들이 찾아 가야 할 길입니다.
2천년 전에 왔다 가신 예수의 심정을 통해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그 예수는 어떠한 예수뇨? 4복음에 말씀하신 그 예수로는 너무나 부족합니다. 너무나 미진하고 부족합니다. 말씀을 하시던 예수의 배후, 말하고 싶어도 나타내지 못했던 그 심정을 알아야 합니다. 혈혈단신 혼자서라도 로마를 정복하려는 심정을 품고 바라보던 예수의 가슴에는 사무친 원한의 심정이, 퍼붓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는 못 했습니다. 한마디도 못 했습니다.
예수가 아무리 못났다고 해도, 열두 제자 혹은 몇천 명의 무리를 끌고 다니면서 사회의 반역자로, 시대의 반역자로 몰려야 하는 처량한 예수가 아닙니다. 만일 예수가 세계적인 반역자로 몰리는 자리에 갔던들, 온 세계가 동원하여 예수를 죽이려고 하는 자리에 나갔던들 예수는 안 죽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가 뒷골목을 걸으면서, 이 골목에서 쫓기면 저 골목으로 피해 다니던 처지에서 그 말씀에 예수님의 이념과 심정이 온전히 다 토로되어 있어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것 가지고는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이해할 수 있으되 말하고 싶어도 말 못하신 예수의 은밀한 심정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심정을 알기 위해 세상아 잘 있거라 하며 성경의 말씀과 더불어 복귀노정을 더듬어 올라가야 할 운명에 처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밤새워 읽고 있습니다. 또 밤을 새워 기도합니다. 그 길을 올바로 가기 위해서 토굴생활도 하고 먹을 것을 먹지 못하고 입을 것을 입지 못하면서 지금까지 방황해 나왔지만, 골수에 접어 넣어 가지고 홀로 품고 가신 그 님의 심정을 누가 알았습니까? 원수들 앞에 천주의 이념과 심정을 토로 할 수 없었던 예수의 심정을 오늘날 전세계의 믿는 신도들은 꿈에도 생각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는 복귀섭리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서 예수를 지나, 선지자를 지나, 아브라함을 지나, 노아를 지나 아담에 이르러 그 아담의 타락한 내력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됩니다. 그리고 우주 창조의 시발부터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해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어디에서부터 출발했는지도 모르는 채 가고 있고, 가야 할 목적지가 어디인지도 모르는 채 가고 있는 처량한 모습들입니다. 오늘날 이 세계는 광야입니다. 황무지입니다. 이런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허덕이던 것과 마찬가지로 세계 인류는 광야와 같은 천지에서 헤매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갈 길을 못 찾아 헤매고 있을 때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그들의 갈 방향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60만 대중이 단결하여 죽으나 사나 모세를 심정적인 주체로서 모시고 나갈 때는 그들의 가는 길이 만사형통하였으나, 그 심정의 인연에서 벗어나게 될 때는 멸망하였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역사가 증명합니다.
전세계 기독교가 세계적인 광야노정에 머물러 있는 이때, 기독교인들은 무엇을 해야 될 것이뇨? ‘세계적인 지도자여, 오시옵소서. 세계적인 선각자여, 오시옵소서. 진리가 없어 황무지와 같은 이 동산 위에 민족을 사랑하고 당신의 아들딸을 지켜줄 수 있는 참된 주인이 없사오니, 이 땅 위에 모세와 같은 지도자를 보내 주시옵소서.’ 하며 애달파하며 기도하는 무리가 나와야 되겠습니다.
교회는 어떠한 목사의 교회가 아닙니다. 어떠한 당회의 교회도 아닙니다. 어떤 노회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 교회도 아닙니다. 교회는 내 교회요, 주님의 교회입니다. 심정이 엉클어져 있는 교회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내 뼈 살을 가르는 한이 있을망정 교회와 나와의 인연은 가를 수 없다고 하는 무리가 이 천지간에 나타나지 않으면 기독교는 망합니다. 망해요. 망하나 안 망하나 두고 보란 말입니다.
심정적인 복귀의 노정을 거치는 데는 어떻게 거치느냐? 거꿀잡이입니다. 외적으로는 종단세계를 향하여 나가고, 내적으로는 한 곬을 타고 거꾸로 올라간단 말입니다. 사탄 편에도 사탄의 아들딸, 부족, 민족, 국가가 있으니 하늘 편에서도 하나님의 아들딸, 하나님의 부족, 하나님의 민족, 국가를 세워야 합니다. 그래서 하늘 편 민족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세우셨습니다. 오늘날 전세계 기독교인들은 제2이스라엘 민족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제1이스라엘 민족은 오신 예수를 배척하고 죽임으로 말미암아 망했는데, 제2이스라엘인 전세계 기독교인들도 제3이스라엘의 통치자로 오시는 주님을 또다시 추방하면 망하고 맙니다.
역사는 돌아간다고 하였습니다. 나선형으로 돌아간다고 하였습니다. 형태에 있어서 작고 큼의 차이가 있을 뿐 역사는 반복하면서 그 무대를 넓혀 세계의 기준까지 딱 갖다 맞추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사회에서 세계적인 사회로 전개시켜 가지고 해결지어야 되기 때문에 예수님 당시의 시대상이 오늘날 다시 전개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때의 모양, 그 시대의 환경과 같은 환경으로 접근해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외적으로 그렇게 해 놓고 하늘은 개인을 세워서 이것을 수습하는 것입니다. 둘이 싸우고 있으니 그것을 수습하려면 이것 같지도 않고 저것 같지도 않은 하나의 새로운 무엇으로서 이 세계를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세계는 투쟁으로 망해 버릴 것입니다. 하늘이 있다 할진대 그러한 일을 할 수 있는 하나의 기준을 세워야 할 것입니다.
역사는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지식을 통하여 외적으로 행복의 기초를 닦게 하였고, 종교와 윤리와 도덕을 세워 사회적인 질서의 기준을 갖추게 하였지만, 인간끼리 연락될 수 있는 심정적인 질서는 세우지 못했습니다. 그걸 알아야 합니다. 심정적인 질서를 세우지 못했어요. 하나님이 있다 할 진대 그 하나님은 이제 무엇을 해야 될 것이뇨? 외적인 환경은 갖추어졌으니, 인간 앞에 외적으로 허락되었던 축복의 기준은 복귀되었으니 이제 세계적으로 심정적인 인연이 갖추어진 형태가 나타나야 됩니다. 그래서 심정적인 인연을 중심삼은 세계를 갖추기 위해 오시는 분이 재림주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세계는 지식혁명을 해 나왔고 사회조직 혁명을 해 나왔습니다. 그러면서 양심의 기준을 넘어서 심정의 혁명까지 일으키려 합니다. 심정혁명을 완결지으려면 우리가 타락으로 잃어버렸던 하나님과 타락하지 않은 참부모님을 모셔 놓고 참아들딸이 돼야 됩니다. 하나님, 참부모, 참아들딸, 이 삼자가 잃어버렸던 한 기준을 중심삼고 상봉할 수 있어야 심정혁명이 완결됩니다. 그럴 수 있는 때가 끝날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똑똑히 알아야 됩니다, 똑똑히.
그러기에 복귀를 하는 데 있어서는 개인으로부터 가정, 민족을 복귀해 나왔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세워 가지고 예수님을 만왕의 왕으로 보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세계는 예수를 만왕의 왕으로 세우고 그의 이념 앞에 복귀되어져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싸움만 하면 되겠어요? 그런 후에는 옛날에 왔다갔던 선지자들의 모든 심정적인 내용을 전파시켜 심정적인 인연을 연결지어 놓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가 오기 전 영계에 간 모든 사람들은 제1이스라엘입니다. 예수가 와서 세우려 한 것은 타락하지 않은 본연의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승리한 이스라엘 세계를 하나님의 법도에 따라 통치할 수 있는 주권자를 세워 승리한 이스라엘이 제2이스라엘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죽임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민족은 제2이스라엘이 되지 못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가 오기 전까지의 영계가 제1이스라엘이요,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 민족이 제2이스라엘이요, 예수의 주권을 통해서 이루어질 선하고 참되고 영원히 믿을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딸이 제3이스라엘입니다. 예수는 제3이스라엘의 조상으로 오셨습니다. 그런 예수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영적 구원의 표준만 세우게 되었으니, 오늘날 다시 전세계의 인류를 이끌어 가지고 제2이스라엘의 기준까지 다시 끌고 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재림이라는 명사를 걸어 놓고 제3이스라엘을 소망으로 하여 나가야 한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기에 끝날에는 내적으로 이러한 환경을 만들어 놓고 오시는 주님은 영계를 제1이스라엘로 삼고, 이 세계의 인류를 제2이스라엘로 삼아, 이 땅에 참부모로 나타나 가지고 승리적인 아들딸, 하나님이 사랑할 수 있는 아들딸을 만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실 수 있는 아들딸이 나타나기 전에는 제3이스라엘이 이 땅 위에 세워질 수 없습니다. 제3이스라엘이 이 땅에 세워지지 않는 한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복귀는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외적으로 그런 형태를 갖추어 놓았기 때문에 오늘날 영계를 통하는 신령한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예수는 영적 신랑이었기 때문에 영적으로 믿어 나오고, 영계의 지배를 받으며 영적인 기준을 중심삼고 영계 제일주의로 나왔지만, 이제 끝날이 되어 넘어가는 때에 처한 우리 인간들, 다시 말해 제2이스라엘이 되는 이 땅이 영계를 지배하여야 됩니다.
그리고 앞으로 오시는 주를 모실 수 있으려면 그 몸을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결하며 흠이 없는 자가 되어 주와 인연을 맺어야 합니다. 신랑 되신 주님이 사랑할 수 있는 신부의 자격을 갖추어 어린양 잔치에 참예해야 합니다. 그 식이 끝난 후에 참부모로 등장하시는 주님과 사랑의 인연을 거치어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제3이스라엘이 못 됩니다.
그러기에 지금까지의 부모는 부모 같아도 부모가 아닙니다. 처자 같아도 처자가 아닙니다. 자녀 같아도 자녀가 아닙니다. 내가 사랑하는 그 누구보다도 하늘을 더 사랑하겠다는 간절한 마음이 없고, 그런 자리에 나갈 수 없다면 심판받습니다. 자기 아들딸 혹은 처자, 혹은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갈 길을 못 가는 사람들은 심판받아요.
복귀섭리는 천리원칙에 따라서 합니다. 심정적인 기준을 복귀해 나가는 것이 해원의 원칙입니다. 천지를 대신할 수 있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가지고, 타락으로 말미암은 죄의 관념이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이 기뻐하면서 품고 사랑할 수 있는 아들딸이 없는 것이 한입니다. 오늘날 이 천지에 그런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이제 주님이 와 가지고 그런 사람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주님이 구름 타고 와요? 기독교인들은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무리를 깨우치기 위해 나온 것이 통일교회입니다.
인간은 참부모를 잃어버렸으니 그 참부모를 잃어버린 경로를 따라 복귀해 나가야 됩니다. 나는 그리워합니다. 여러분도 그리워해야 되겠습니다. 참부모의 사랑의 심정이 어떠한지, 참부부의 사랑이 어떠한지, 참자녀의 사랑의 인연이 어떤 것인지 우리는 모릅니다. 몰라요. 성경을 보십시오. 과부나 고아와 같은 인간이라 하였습니다. 세상 인간들은 부모가 있어도 고아입니다. 남편이 있어도 과부입니다. 본연의 원칙을 두고 볼 때 그런 입장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 기준, 심정적인 하나의 발판을 향해 전진하는 역사이기에 우리는 손을 들고 하늘을 향해서 외칩시다. 우리는 마음을 모두어 엎드려 통곡해야 되겠습니다. 무엇을 가지고? 하나님! ‘당신이 이상으로 삼고 세우시려던 참부모의 사랑의 심정이 어떤 것입니까? 참부부의 정리가 어떤 것입니까? 참형제의 인연은 어떤 것입니까?’라고.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하늘은 그런 기준을 이루어 놓기 위해서 심정적인 복귀역사를 해 나오십니다. 아담 해와는 타락의 모체였기 때문에 그들을 통해서는 복귀역사를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가인과 아벨을 세워서 역사하셨습니다. 부모가 깨졌으니 자식을 통해서 역사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원통한 일이 어디 있느냐 말입니다. 구원이란 명사가 필요 없어야 할 그들 앞에 구원이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가인과 아벨을 세워 놓고 부모의 실수를 탕감하여 하늘이 축복할 수 있는 가정을 이루기를 바랐지만, 그들도 실패하여 부모도 하늘 앞에 원수요 자식도 원수가 되었습니다. 하늘이 인정할 수 없는 자식, 하늘이 인정할 수 없는 부모가 되어 버렸으니 거꿀잡이로 찾아 들어가야 되는 것입니다. 거꿀잡이로 자식을 세워 놓고 거기에 부모를 보내시겠다는 겁니다. 이게 복귀섭리입니다.
아담 해와는 망한 부모가 되었을망정 가인이 동생을 죽이지 않았던들 가인과 아벨은 참부모의 기준을 세울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 기준을 세우기 위하여 가인과 아벨을 세웠는데, 가인이 아벨을 죽임으로써 그것이 깨졌습니다. 그래서 1600년이 흘렀습니다.
그리하여 1600년의 천신만고 끝에 아담가정에서 잃어버린 여덟 식구와 같은 형(型)을 근근이 찾아 세운 것이 노아가정입니다. 여기서 노아 할아버지 한 사람만 승리했으면 됐지 그 아들이 무슨 관계가 있느냐 할지 모르지만, 부자(父子)의 인연을 종결짓지 못하면 완전히 승리할 수 없습니다. 부모가 있고 자식이 있어야만 천지원칙의 승리적인 기준이 세워지는 것입니다. 노아를 세워 이루어 놓은 것이 노아의 아들 함의 실수로 말미암아 원통하게도 깨졌고, 아브라함을 세워 기준을 세우려 했으나 아브라함이 제물 실수를 함으로 말미암아 또 원통하게 깨졌습니다. 그리하여 야곱을 새워서 에서와 싸우게 해 나온 것입니다. 외적으로는 규모를 넓혀 나오면서 내적으로는 점점 좁혀 들어가는 거예요. 혈통복귀를 해 나온 걸 볼 때 그렇습니다.
아담 해와 때는 가인과 아벨을 나누어 가지고 가인을 굴복시키는 놀음입니다. 사탄이 먼저 출발하였으니 맏아들은 사탄 편이고, 둘째아들은 하늘 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보면 장자는 전부 다 쳤습니다. 장자는 사탄 편이에요. 그래서 장자인 가인을 아벨 앞에 굴복시켜 승리적인 부모의 기준을 다시 회복하려 했는데, 그 기대가 깨어지니 1600년 동안 천신만고의 수고를 한 기대 위에 노아가정을 세워 잃어버린 아담가정의 여덟 식구의 형을 복귀하려 하였으나, 노아와 그 아들딸들이 하나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또 깨졌던 것입니다. 아벨은 동생으로서 형인 가인의 축복을 빼앗아 하늘 앞에 돌려야 했습니다. 먼저 출발한 사탄세계를 빼앗아 돌려야 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당시에 하나님은 인간을 대하는 데 있어서 직접 대하실 수 없기 때문에 제물을 통하여 대하였습니다. 제물은 아들을 대신한 것이요, 자기의 소원을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아들도 들어가 있고 물질도 들어가 있고 세계도 들어가 있단 말입니다. 그러니 타락한 인간은 제물 앞에 머리 숙여 절대 복종해야만 사탄을 떼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제물을 드리는데 실수함으로 말미암아 상징적인 부자의 인연을 못 맞추었기 때문에 또 깨졌습니다.
그러나 아담 이래 2천년 동안 천신만고 수고한 기대 위에 다시 택해 세운 야곱은 에서의 장자기업을 빼앗았습니다. 아버지를 속여 가지고 형의 축복을 빼앗은 야곱을 축복해 주는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하겠지만, 그것이 원칙입니다. 천리원칙입니다. 거꿀잡이로 뒤집어 놓는 것입니다. 왜 그래야 되는지는 여러분이 복귀원리를 통해서 다 아는 사실입니다.
아담가정에서는 형제를 낳아 가지고 복귀하려 했습니다. 점점 근본으로 들어갑니다. 그 다음에는 쌍태로써 복귀하려 했습니다. 야곱과 에서는 쌍둥이였읍니다. 쌍둥이를 낳아 가지고 복귀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점점 근본으로 올라가 복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걸 알아야 합니다. 근본복귀를 완결지어야 하나님의 해원이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사탄의 혈통권 내에서 낳아 가지고 해원하려니 심각하다는 것입니다.
2천년 동안 수고하여 리브가의 몸을 통해 에서와 야곱이 쌍둥이로 태어납니다. 쌍둥이로 나와 가지고 동생이 형을 지배해야 됩니다. 빼앗아야 된다는 말입니다. 야곱이 하나님의 축복을 차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원칙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쌍태로서 낳은 날도 같고 연령도 같은 그런 자리에서 빼앗아 넘겨야 합니다.
그 다음 유다 때에 들어와서 유다는 다말을 통하여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습니다. 아담 때에 형제를 낳아 복귀하려던 것을 야곱이 쌍둥이로 태어나서 승리하였으니 여기서부터는 복중복귀(腹中復歸)를 하게 됩니다, 복중 복귀. 태중(胎中)에서 싸워 승리하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태중에서 복귀할 수 있는 승리의 기준을 세워 베레스가 나왔습니다. 끝날 이 기준이 세계적으로 맞아들어 갑니다. 먼저 나온 맏아들 세라의 손을 홍실로 처맸는데, 이것은 앞으로 세계에 공산주의가 나온다는 것을 예시(豫示)한 것입니다. 그러나 잠깐입니다. 세라가 형 노릇을 하려고 하였지만 동생 베레스가 밀치고 나왔던 것처럼 공산주의도 굴복당해야 됩니다. 깨져야 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천지를 복귀하기 위한 원칙 기준을 섭리역사상의 선조들은 상징적으로나 형상적으로 이루어 놓은 것을 알았고, 그것을 다시 실체적으로 탕감복귀해야 한다는 것을 여러분은 배웠습니다. 이제 세계적인 범위에서 이를 완결지어야 하고 실체적으로 완결지어야 할 때가 왔기 때문에 먼저 나오려고 한 세라의 손에 홍실을 처맸던 것처럼 공산 세력이 이 땅 위에서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나오는 것입니다. 축복받을 수 있는 승리적인 아들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앞장서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승리한 아들이 나타나면 이들은 망합니다. 원칙이 그렇게 돼 있기 때문에 실체적인 승리의 기반, 기독교를 배경으로 한 하나의 혈족적인 심정의 기준이 세워지는 날에는 이 세계는 깨져 나간다는 겁니다. 원칙이 그렇게 돼 있으니 혈통적 복중복귀 형인 베레스와 세라의 싸움이 세계적으로 벌어져 있습니다.
그 다음에 또 더 근본으로 들어가 보면 신랑 신부입니다. 예수는 그때를 바라보고 역사합니다. 신랑 신부 없이 복중에 잉태할 수 있습니까? 복중복귀 다음은 신랑 신부 복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인 종말시기에 외적으로 수습해 나오면서 신랑 신부를 세워 혈통적인 기준을 완결지어 놓아야 복귀역사는 완결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안 되었기 때문에 이 땅 위에 인간들이 아무리 많다 할지라도 내 아들이라 내 딸이라 못해 본 하나님입니다. 참부모의 기준이 완결된 후에라야 내 아들이라 내 딸이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참부모가 이 땅 위에 세워진 후에야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천리원칙이 그렇습니다. 복귀니까 그래야 될 것 아닙니까?
예수는 누구이며, 재림주는 누구이며, 어린양 잔치는 무엇 때문에 있느냐? 참부모를 복귀하기 위한 것입니다. 에덴의 아담 해와가 비극적인 결혼 행위를 하여 타락함으로, 천하만상을 대신한 본연의 부모로서 너희는 영원한 승리자요 참부모라고 손을 들어 축복하는 선포식을 해보지 못한 것이 하나님의 한입니다. 그러니 되돌아가서 맞추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외적인 사탄에게 승리했다는 조건을 세워 가지고 원칙에 맞추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사탄이 굴복할 리 만무하다는 것입니다. 역사를 두고 하늘과 대결하여 나오던 사탄은 복귀의 근본을 해결짓지 않으면 절대 굴복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기에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주님이 오신다고 하였는데 그 주님 앞에 나가려면, 아담가정에서 가인과 아벨을 싸우게 하셨던 하나님의 심정을 알아야 됩니다. 그래야 될 것 아닙니까? 하나님의 심정의 동반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걸 좁혀 가지고 쌍태에서 태어난 에서와 야곱을 세우신 후 21년 동안 야곱을 품고 애달파하시던 하나님의 심정, 비법적(非法的)인 것 같은 축복의 기준을 세워서 장자의 기업을 빼앗게 하신 하나님의 심정을 알아야 됩니다. 그 다음에는 유다가 자기 며느리 다말의 몸을 통하여 비법적으로 잉태한 아들 베레스와 세라로 하여금 복중에서 싸우게 하여 사탄의 괴수를 물러가게 하셔야 했던 하나님의 심정을 알아야 됩니다. 알아야 돼요. 모르면 절대 심정적인 혈족의 인연을 맺기 위한 천주복귀역사와 여러분은 하등의 관계가 없게 됩니다. 왜 뱃속에서부터 싸워야 되느냐는 말입니다. 이런 것을 알아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 다음에는 이것이 전부 다 세계적으로 벌어집니다. 오늘날은 이 싸움이 끝나는 역사적인 전람회시대입니다. 6천년 구원역사, 복귀역사의 전람회시대입니다. 보십시오. 앞으로는 여러분이 이해하지 못할 영통인들이 많이 나옵니다. 벌거벗고 춤추고 다니는 사람도 많이 나옵니다. 두고 보십시오. 이해하지 못할 사람이 많이 나옵니다. 별의별 사람이 다 나올 거예요. 그러나 흉보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그들보다 더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흉보는 사람이 더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래도 그들은 영적인 세계와 어떠한 인연을 맺어 가지고 심정 기준 앞에 세상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자기의 위신과 체면을 잊어버리고 행동할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미치광이라고 흉보던 녀석들이 미치광이에게 머리 숙일 때가 옵니다.
이제 우리들 자신 가운데 베레스와 세라와 같은 것이 있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있습니까? 없습니까? 몸이 세라와 같고 마음이 베레스와 같거늘 마음으로 몸을 치고 다시 나야 됩니다. 그것을 못하면 안 됩니다. 그것을 못하면 참부모의 기준을 개인적으로 못 넘어간다는 것입니다. 한꺼번에 낳아야 될 때입니다. 복중복귀를 거친 아들딸 앞에 주님은 신랑 신부로 오신다는 말입니다. 그 터전을 기반으로 하여 복귀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근본복귀를 해야 되니까 쌍태복귀에서 복중복귀를 거쳐 신랑 신부의 문을 통해야 됩니다. 신랑 신부의 문을 통하지 않고 어린애를 낳을 수 있습니까? 그러니 신랑 신부를 세워야 된다는 것입니다.
신랑 신부의 축복 예식이 이 땅 위에 벌어져서 하늘땅이 공인할 수 있는 부모의 기준을 완결하여 그 부모로부터 축복을 받은 아들딸이 되어야 합니다. 그 부모로부터 하늘의 복귀역사는 이러이러했다는 가르침을 받아 가지고 그것을 체휼하여 마음이 몸을 주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수 없다 할진대 여러분은 하늘과 상관없습니다. 오시는 주님은 6천년 동안 사탄의 피에 젖은 이 몸뚱이를 무자비하게 잡아치울 수 있는 권한의 말씀, 진리의 말씀을 갖고 오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준을 완결짓지 못하면 상관이 없습니다. 보란 말입니다. 여기서 말한 사람이 거짓말했나. 복귀의 원칙이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이것도 되고 싶고 저것도 되고 싶어하지만 그래서는 안 됩니다. 가인적인 요소, 에서적인 요소, 비법적인 원한이 내 일신에 내재해 있기 때문에 6천년 판가리 싸움이 벌어지게 됩니다. 그러기에 세계적인 공포는 내 공포요, 이 나라의 공포는 내 공포요, 이 가정의 공포는 내 공포요, 저 영계의 공포도 내 공포로 엄습돼 온다는 겁니다. 안 그래요? 이것이 한 물결로 굽이치는 때는 끝날입니다. 똑똑히들 아십시오. 믿어지지 않거든 기도해 보십시오. 여기서 땀을 흘리며 말하는 사람의 말이 거짓말인가.
여러분의 생사문제가 경각에 놓여 있습니다. 사망이냐 생명이냐를 심정을 기준으로 해서 결정지어야 할 어마어마한 때가 찾아오고 있습니다. 이것을 알기 때문에 안타깝습니다. 이 심정을 어떻게 토로할 것인가? 기운이 부족합니다. 뼈 살이 움직이는 사람이라 할진대 다 알아야 합니다. 그럴게 아닙니까? 여러분, 회사 같은 데서 연말에 총결산을 하게 되면 일년간의 무슨 부, 무슨 과, 무슨 계 등 모든 부서의 계산이 딱 맞아 떨어져야 되잖아요? 그 때는 사원 전부가 공동으로 책임지는 것입니다. 한 가지가 걸리면 모두가 미해결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때는 역사적인 총결산 시기이니 개인의 문제가 세계의 문제요, 세계의 문제가 개인의 문제입니다. 또한 이 나라의 문제가 세계의 문제요, 내 가정의 문제가 세계의 문제이며, 세계의 문제는 이 나라와 내 가정의 문제입니다. 그러니 내 개인의 문제가 세계의 문제인 동시에 하나님의 문제입니다.
여기에서 총결산하여 어떠한 계획적인 프로에, 하늘이 소모한 심정적인 기준에 맞추어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아담가정에서 소모된 것은 무엇이며, 노아가정에서 소모된 것은 무엇이며, 야곱시대에 소모된 것은 무엇이냐? 모세시대, 예수시대에 소모된 것은 무엇이며, 지금까지 6천년 동안 소모된 것은 무엇이냐? 소모된 심정적인 기준을 총결산하여 여러분이 거기에 마이너스되면 쫓겨납니다. 플러스되어야 해요. 그래서 ‘여기 있소이다. 한 푼의 이익을 아버지 앞에 가져왔사오니 부족하나마 받으시옵소서.’ 해야 됩니다. 신부 단장이란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돈 가지고, 재산 가지고, 명예 가지고 신부 단장하는 줄 알아요? 천만에요.
하나님은 부모의 심정을 가졌으되, 인간세상이 생겨난 후 한번도 자식을 품고 사랑하지 못하신 것을 아는 연고로 도의 세계에서는 독신생활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천지를 대표할 수 있는 부모가 아직까지 생겨나지 못해서 가정을 이루지 못한 한이 천상에 남아 있는데, 타락한 자식들이 부모가 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인들이 독신생활을 하는 거예요. 원인이 거기에 있습니다. 순서가 거꿀잡이로 되면 타락입니다. 주객이 전도되면 깨져요.
하늘은 고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이 막힌 것이 아닙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인간을 품고 통곡하고 싶지 않고 가르쳐 주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가르쳐 주고 싶고 얼마나 슬퍼했는지 압니까? 천륜을 대표할 수 있는, 창조원칙을 통과한 참부모가 나오지 않는 한, 참부모의 피 살과 더불어 심정의 인연을 맺은 아들딸이 없는 한 축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기준이 성립 안 되면 세상은 그냥 그대로 싸움이 계속되고 만다는 말입니다. 여기 서 있는 사람도 오늘 이러한 이념을 위해서 외치는 것입니다.
타락한 후손이 소원해야 할 것이 무엇이뇨? 아들딸 많이 보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아들딸 있다고 자랑하지 마십시오. 부모, 처자가 있다고 자랑하지 마십시오. 한하고 탄식해야 될 것은 무엇이뇨? 하늘이 세우고자 하시는 참부모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곡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시어 손을 들어 축복해 주셨으나 하늘땅에 공인될 수 있는 심정적인 부모가 못된 것이 타락입니다. 그 부모의 품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 있는 심정적인 인연을 노래하는 형제를 못 가진 것이 타락입니다. 그 부모의 품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 있는 심정적인 인연을 노래하는 형제를 못 가진 것이 타락입니다. 형제의 인연을 지나 사회와 국가와 세계를 못 이룬 것이 타락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기에서 모든 설명을 구체적으로 세밀하게 해주고 싶지만, 시간관계상 더 상세하게 말씀드리지 못해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근본복귀를 해 나가야 할 것은 분명히 알아야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람은 그것을 알았습니다.
내가 옥중에 들어가 있을 때 부모가 찾아와서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고 ‘당신과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고 말했습니다. 실제 그런 말을 했습니다. 천상의 인연의 길이 이런 것임을 내가 알거늘, 이 길을 가는데 도움이 못 되고 방해가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 부모는 내가 무얼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처자도 그런 입장에 있으면 가라 이겁니다. 세상에서 욕을 먹는 한이 있더라도 그런 형제가 못 되면 가라는 거예요. 욕을 하든 누가 뭐라 하든 어떻게 되든 할 수 없습니다. 통일신도들은 이러한 것을 심정적으로 지니고 가야 할 운명이 있다고 나는 단정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여기에 들어와 가지고 그런 인연의 기준을 훌쩍 넘어서 ‘할렐루야 감사합니다. 그렇구말구요.’ 하며 자기 부모보다도 처보다도 자식보다도 하늘을 더 사랑할 수 있고, 참부모의 심정에 인연될 수 있다면 여러분은 절대로 심판 안 받습니다. 절대 안 받아요. 지금까지 기성교회에서 믿고 나오던 모든 신앙자들은 문제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를 알아야 됩니다. 사무를 처리하려면 그 사무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를 알아야 됩니다. 통곡해야 할 때는 왔습니다.
여기에 몰려온 여러분, 여기 있는 이 사람은 자식의 손목을 잡고 ‘너는 내 아들이다.’ 하며 한번도 심정적으로 대해 주지 못했습니다. 남의 손에서 자라는 것입니다. 아버지라고 어디 갈 때 따라가겠다고 해도 ‘안 돼’ 합니다. 삼자의 입장에서 대합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나 자신이 부모의 심정을 총결산하여 하늘 앞에 공인 받을 수 있기 전에는 자식이라고 심정적으로 대해 주면 범죄이기 때문입니다. 처자라고 심정적으로 대하면 범죄예요. 부모라고 심정적으로 대하면 범죄란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부모나 처자나 형제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지 않으면 나의 제자가 못 된다고 말입니다. 이것은 내 말이 아닙니다. 알고 보니 진짜 그렇게 돼 있습니다.
여러분! 여기에서 말하는 사람이 못난 사람이 아닙니다. 아무리 똑똑하다는 사람과도 맞설 수 있는 내용이 있다는 말입니다. 욕을 먹으면서도 가는 것은 내용이 있기 때문입니다. 철석같은 내용이 있단 말입니다. 철석같은 내용이 있기에 27억이 우는 사자와 같이 떠들어도 일신을 투신하여 싸우는 것입니다. 그런 각오를 한 지 오래 되었습니다. 왜? 하늘이 몰아치는 그 길이 가야 할 길임을 알았기에. ‘친구여 가거라. 사랑하는 부모여 가거라. 처자여 가거라. 내 몸뚱이여 가거라. 다 가거라. 다 가거라.’ 하며 남은 것은 일편단심, ‘그대가 울 때 내가 울고, 그대가 슬퍼할 때 내가 슬퍼하고, 그대가 고통받을 때 내가 고통받고, 그대가 몰릴 때 내가 몰리고, 그대가 밟힐 때 내가 밟히겠다.’는 것뿐입니다. 그것뿐입니다.
이런 심정에 사무쳐 ‘아버지!’ 하고 울부짖는 아들딸이 있다면, 하나님이 이들에게 심판의 불을 내릴 수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허무하고 믿을 수 없는 이 천지에서 누굴 믿습니까? 부모가 영원한 부모가 아닌 것을 알았고, 처자도 영원한 처자가 아닌 것을 알았고, 형제도 영원한 형제가 아닌 것을 알았고, 살고 있는 이 세계가 하나님을 모시고 살 수 있는 영원한 세계가 아니요, 하나님께서 ‘너희는 내 백성이고 내 아들딸이라’고 할 수 있는 그 세계가 아닌 것을 알았으니 가야 되겠습니다.
나는 그리워했습니다. 본연의 부모를 모시는 그 시간을 그리워했습니다. 본연의 형제를 모실 수 있는 그 날은 통곡하겠습니다. 그 날은 벅찬 날입니다. 그 벅찬 마음은 1년으로도 그칠 수 없고 10년으로도 그칠 수 없을 것입니다. 복을 주어도 손을 내밀 수 없는 인간을 바라보고 안타까워하시는 하늘의 심정을 알았기에 이런 놀음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남이 아니라 하는 길, 몰림받는 길을 왜 걸어왔습니까? 여러분들은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목적이 없는 사람이 불쌍한 자리에 처해지면 원망할 것이로되, 소망이 있고 새날에 대한 목적이 뚜렷하여 생명적인 절개를 노래 할 수 있고, 심정적으로 행복을 노래할 수 있다 할진대 여러분은 죽어도 승리자입니다.
우리는 예수의 한이 무엇인지 알아야 됩니다. 예수님이 이 땅 위에 부모로 오셨으나 부모가 못 되고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 2천년 동안 복귀의 한을 밟고 밟으면서 서글픔의 자리를 피치 못하고 역사의 발자취를 따라 나오신 처량한 하나님이 되었고, 처량한 예수, 처량한 성신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본연의 아버지이시며, 예수는 우리의 몸뚱이의 아버지이며, 성신은 우리의 몸뚱이의 어머니입니다. 삼위일체가 어떻다구요? 모두가 다 허황된 패들입니다. 참이 거짓 같고 거짓이 참같이 놀아나는 이 세상, 해부를 한번 해 봐야 되겠습니다. 참된 자여! 그대는 나타날 때가 있을 것이니 시궁창에서 밟힌다 해도 그 가치는 드러나리라. 그러니 우리는 참고 이를 악물고 철석같이 단결하여 그의 위신과 체면을 상실치 않고, 실존적인 위치와 그 가치에 있어서 영원하고 존엄하신 모양을 본받아 향기를 풍길 수 있는 아들딸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심정적인 부모가 결정되는 날 세계는 움직여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영계는 그 앞에 제1이스라엘로 탄생할 것이고, 전세계 기독교인은 제2이스라엘로 탄생할 것입니다. 이제 그 심정적인 부모를 통하여 축복받은 무리가 제3이스라엘로서 천지에 나타나게 되면, 하나님은 그들을 품고 ‘할렐루야 아멘. 복귀의 해원이 성취되었노라. 심정의 한이 풀렸노라. 6천년 동안 네 모습을 자랑하며 늠름하고 당당하던 사탄아, 나와 봐라.’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심정의 주권자가 땅 위에 생겨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식이 부모의 위업을 받게 될 때 나이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늠름하고 자신 있게 받을 수 있는 것은 어느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심정의 인연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자식이라야 부모의 유업을 받을 수 있거늘 천지의 대경륜을 세우시어 복귀의 해원을 바라고 계시는 하나님 앞에 이 하늘땅을 주관할 수 있고, 세계를 내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아들딸이 되려면, 여러분,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성경을 잘 안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몰라도 좋습니다. 무식하고 거지같아도 좋습니다. 얼굴이 못생겼어도, 옷이 남루해도 좋습니다. 때 낀 손으로 음식을 먹어도 좋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부르는 음성이 부들부들 떨리고 손을 내놓기도 황공하여, 그 마음이 아버지의 심정과 뒤넘이치며 넘어갈 수 있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아들딸이 될 수 있습니다. 이 기준을 세우기 전에는 절대로 천국 못 갑니다.
땅 위에 부모가 생겨나서 땅에서 풀어야만 하늘에서도 풀리고 땅에서 매이면 하늘에서도 매인다는 것입니다. 좀더 구체적이고 세밀한 것을 알려면 여기에 와서 말씀을 들으십시오. 거짓말 아닙니다. 땅에서 몸뚱이(실체) 를 잃어버렸으니 그 몸뚱이를 땅에서 찾아야 됩니다. 그러니 참부모, 즉 주님이 육신을 쓰고 와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이걸 반대하는 사람들은 돌입니다. 머리가 굳은 사람입니다. 당연한 얘기입니다. 6천년 동안 이 땅에 왔다 갔던 그 어떠한 선조도 이것을 몰랐습니다.
누가 우리의 조상입니까? 떨어져 내려왔으니 거꿀잡이입니다. 타락한 차원에서 보면 선조들이 조상이지만 하늘적으로 보면 나중에 나온 사람이 조상이 됩니다. 나중에 나오는 사람이 조상이에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계적인 부모가 나오고, 세계적인 가정이 나오고, 세계적인 주권이 나올 때인 것입니다. 이놈의 세상은 다 넘어가야 된단 말입니다. 그렇다고 망해서야 되겠습니까? 나도 그것 때문에 기도하는 사람 중의 한 사람입니다.
여러분들은 이제 마음이 어디로 달리느냐를 알았습니다. 마음이 어디로 달립니까? 심정적인 기준을 갖추어서 부모의 심정을 통한 자가 있다면 그는 땅 위에 있으되 그에게는 영계를 총지휘할 수 있는 권한이 있습니다. 그런가 안 그런가 통해 보십시오. 영계는 제1이스라엘입니다. 그것은 타락 전의 천사세계에 맞먹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타락하기 직전의 천사세계와 같은 모양으로 영적 복귀를 했기 때문에 낙원권 내에 머물러 있는 영인들은 천사와 맞먹습니다. 이 원칙을 알기 때문에 오늘 여기서 말하는 사람도 영계와 수많은 싸움을 했습니다. 싸워 승리한 기준을 세우게 되면 영계에 가 있는 수많은 영인들을 땅 위에서 조종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집니다. 천상에 있는 천사를 지배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되어야만 사탄이 도망갑니다. 사탄이 도망을 가요.
뱃속에는 별의별 것 다 집어넣고, 골통에도 별의별 것 다 잡아 넣고는 ‘오! 주의 이름으로’ 하며 암만 외쳐 보십시오. 그게 되는가? 안 됩니다. 심정적인 기준이 서기 전에는 안 됩니다. 자기 마음대로 문서장을 만들어 하나님 앞에 가서 내가 당신의 아들이요, 혹은 딸이요 하면 통할 것 같습니까? 천만부당합니다. 내가 알고 믿기에는, 아버지를 부르는 게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심정의 기준을 갖고 영계의 모든 것을 부릴 수 있고 명령하여 움직이게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게 되면 사탄이 도망갑니다. 그런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심정적인 주도권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원칙입니다.
그런 아들딸이 이 땅 위에 태어나면 땅 위에 있는 전세계 기독교인, 즉 제2이스라엘은 지배당합니다. 그런 날에야 통일의 역사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지배받는다는 거예요. 아무리 찧고 까불고 별의별 짓을 다 해보라는 거예요. 결국에는 자기가 패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통쾌할 것 아닙니까? 그래야 진정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능력으로 승패를 결정하는 분이라면 그런 하나님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말입니다. 그런 하나님이라면 복귀섭리하는 데 6천년까지 걸리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이 동할 때 동하고 정할 때 정하며, 하나님이 슬퍼하실 때 슬퍼할 수 있는 아들딸, 하나님이 울면 하염없이 울 수 있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자기 체면을 생각지 않고 춤을 출 수 있는 아들딸이 되어야 합니다. 아까 기도할 때 송 장로가 허허 웃었는데, 그것을 처음 본 사람들은 우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웃은 사람이 오히려 우스운 사람입니다.
심정의 해원을 완결짓기 위한 복귀역사는 여러분을 기점으로 하여 시작되는 것입니다. 심정의 복귀는 천상도 아니요, 세계도 아니요, 여러분의 심중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어마어마합니까? 천상세계가 아닙니다. 이 세계도 아닙니다. 여러분의 마음입니다. 심정의 해원을 완성한 자리는, 개체는 전체의 가치를 그리워하고 전체는 개체의 가치를 노래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예수님도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심정적인 기준을 중심삼고는 그 가치가 작더라도 시간과 공간과 거리의 한계를 넘어서서 전체의 가치와 늠름히 견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머리카락 하나를 억천만금의 다이아몬드보다 더 좋아합니다. 그래요, 안 그래요? 그런 기준을 가진 자는 하늘의 소유입니다. 그런 인연을 가진 자 앞에서는 암만 가지 말라 해도 사탄이 도망 안 갈 수 없습니다. 천륜의 법도가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심정이 인연된 아들딸이 나타나 그 아들딸에 의해 빚어진 가정, 그 아들딸에 의해 빚어진 나라, 그 아들딸에 의해 빚어진 세계가 되어 우리 아버지가 만왕의 왕이 되고 영원무궁토록 주권자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그분의 아들딸이 되어야 합니다. 심정의 아들딸, 역사적인 아들딸이 되어야 해요. 심정은 천년 전이나 만년 후나 마찬가지예요.
6천년 동안 종종걸음을 치며 산과 험한 골짜기를 개의치 않고 허덕여 나오신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의 한이 우리 대(代)에서 풀어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을 풀려면 먼저 역사적인 심정을 알아 가지고 참부모와 참부부와 참형제의 심정을 가지고 아버지를 붙들 수 있어야 합니다. 그 기쁨은 천상의 기쁨이 아니라 지상의 내 몸이 노래할 수 있는 기쁨, 체휼적인 기쁨입니다. 내 일신의 가치가 우주적인 가치가 되어 ‘나를 따르라’ 하면 ‘오냐, 내 너를 따라가마. 내 너를 찬양하마.’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기준에 설 수 있는 아들딸이 생겨나야만 천지 만물을 지어 놓고 축복해 주신 하나님의 소원이 성사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타락한 인간을 다시 찾기 위한 하나님의 한스러운 심정이 해원되는 것이며, 비로소 사랑하는 아들딸을 품에 품고 사랑할 수 있는 자유 동산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제1관문은 참부모입니다. ‘잠들어 있는 인류여, 깨어라!’ 하고 외쳐야 할 때는 왔습니다. 6천년 전에 잃어버렸던 참부모가 이 땅에 다시 오십니다. 하늘은 그 부모를 보내 주시기 위해, 사랑하는 아들을 선물로 보내 주시기 위해 그토록 애를 쓰신 것입니다. 그 부모를 보내 주시기 위해 사탄의 철망을 뚫고 지옥 밑창을 뚫어 나가고, 선두에서 피를 흘리고 매를 맞고 업신여김을 당하시며 절통해 하시고 통곡하며 나오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6천년 동안 심정에 굶주린 대주재요, 대왕으로서 지금까지 허덕여 나오신 하나님이심을 똑똑히 알아야겠습니다.
그 하나님을 위로해 드려야 되겠습니다. 그 하나님은 세상만사를 한꺼번에 다 심판해 버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셨으나, 당신의 목적이 있고 당신의 소원과 소망이 이 땅 위에 있는 연고로 그것을 바라보며 참고 또 참고 또 참아 나오신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그런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러야 합니다. 이름만의 하나님이 아닌 심정의 하나님을 아버지라 불러야 돼요. 그리하여 우리의 혈족 아닌 혈족, 부모 아닌 부모, 형제 아닌 형제들이 세계적으로 동원되어 하늘의 절개를 세울 수 있고, 하늘의 심정과 인연을 맺어 동서고금을 넘고, 민족과 국가를 넘어 천상의 심정을 중심삼고 움직일 수 있는 새로운 주의가 이 땅 위에 나와야 됩니다. 그것이 안 나오면 세계는 깨져 나갑니다.
오늘 여기서 외치는 사람도 그 사실을 알았기에 이러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몰라 가지고는 여러분은 전부 망합니다. 삼천만 민중, 혹은 세계 27억의 인구 가운데에 그것을 알고 행하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나오면 세계는 그 사람에 의해 제패당합니다. 세계는 그 사람의 세계, 그 사람의 민족이 될 것입니다. 세계는 그러한 무리가 주관할 수 있는 세계가 될 것임에 틀림없다고 단정을 내릴 수 있습니다.
가고 오신 슬픔의 사정이 아무리 많다 할지라도 그것을 붙들고 우는 것으로 역사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울 줄은 모를지라도 심정적으로 아버지를 위하여 나서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아버지의 뜻을 인계 받고 아버지 앞에 세워진다는 것을 말하였습니다.
이들이 오늘 들은 말씀을 통하여 가슴 깊이 새로운 환희를 맛보고 심정의 놀라운 체험을 하여서, ‘인간의 가치가 이것이구나, 성경의 뜻이 이렇구나, 세계의 인연이 이렇게 된 것이구나, 하늘의 심정의 내용이 이것이구나.’ 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말씀의 중심도 이것이요, 인간의 목적도 이것이요, 세계의 목적도 이것이요, 하나님의 목적도 이것이라 하였사올진대, 이 기준을 가지면 하나님도 상봉할 것이요, 세계 인류도 상봉할 것이요, 민족도 상봉할 것이요, 형제도 상봉할 것이요, 부모도 상봉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버지, 오늘 저희들이 어떠한 자리에 있습니까? 듣고 보니 애달픈 사실입니다. 이것을 체휼하지 못하는 자는 안타까울 것입니다. 생명을 걸고 이 길을 달려가서 아버지의 심정을 체휼하지 않으면 사랑의 세계가 내 앞을 가로막는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탄식의 한이 저희 개체를 휩쓸고 세계를 휩쓸고 있는 이 때에, 부디 심정의 기준만은 천리원칙과 함께 불변의 중심으로 갖추어 세상을 비웃고, 사탄세계의 권한을 비웃으면서 하늘과 더불어 즐길 수 있는, 천국의 심정 기준을 완성한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오늘 이 같은 자리에서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것도 40생애 노정에서 마지막입니다. 이 한 시간을 계기로 하여 내일은 광명의 한 날이 저희 앞에 허락되기를 간절히 원하올 때에,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성염(聖鹽)은 누룩과 같습니다. 물건을 샀을 때에 성별(聖別)하고, 바깥 생활을 하다가 집으로 들어올 때도 울타리에서(대문에서) 성별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성별한 것은 사탄세계에 내어주지 말아야 합니다. 불가피할 때는 왼손으로 주어야 합니다.
성별은 ‘성부, 성자, 성신과 참부모와 나의 이름으로 성별하나이다.’라고 하면서 성염을 십자(남북 동서의 순서)로 뿌립니다.
성별한 부동산 등을 처분해야 할 때는 반(班), 조(組), 지구(地區)의 단계를 통하여 허락을 받고 처분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우리 식구들이 성별해 들어가는 땅으로 모든 땅을 점점 점령해 나가야 합니다. *
(성염이란 본디 흰 소금이다. 만물을 새롭게 하고 하늘의 것으로 분별(聖別)해내는 조건물이다. 성염은 서기 1960년 4월 11일(음 3월 16일)부터 쓰기 시작하였다. 성별 대상물 위에 성염을 십자로 뿌림으로써 성별한다. 이것은 식용으로는 쓰지 않고 오직 성별에만 쓰이며, 앞으로 길이 후대 식구들에게 분배하여 같은 뜻으로 쓰게 한다. 다 쓰고 없어질 형편에 이르면 새로이 단위량의 7 배수에 성염의 「본밑」을 쏟아 섞고 마음으로 기도하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길이 보충하여 그 구실을 연장할 수 있는 것이다.)
전도사(인도자)는 그 지방의 제사장입니다. 잠을 못 자면서도 복을 빌어 주어야 합니다. 뭇 사람을 살려 주기 위해서 제물(祭物)을 다루어야 하니 정성들이는 수고를 하여야 합니다. 제사에는 실체(인도자)와 주인(하나님)이 하나(一體 일체) 되어야 응답이 있습니다.
교인(식구)이 제물이 아니고 자기(인도자)가 제물입니다.
앞으로는 지식적인 지도가 아닌 조직적인 지도를 해야 합니다.
식구는 살(肉)이요 인도자는 뼈입니다. 뼈는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살이 잘 감싸줘야 합니다.
전도지에서는 자기의 뼈 살이 녹아나는 감성을 지녀야 합니다. ‘아버지! 내가 이렇게 부족합니다. 그래도 내가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니 안타깝습니다.’ 하는 기도와 심정으로 단(壇) 위에 나서서 설교하도록 하십시오. 자기를 중심삼지 말고 부모와 천지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통첩문을 들고 나선 하나님의 정병이라 생각해야 합니다.
선생님은 설교하기 전에 설교를 위해서 기도하는 시간보다도 식구를 위해 기도하는 시간을 많이 갖습니다. ‘아버지! 이들을 이끌어 올려야 되겠는데 어떻게 합니까? 이것입니까, 저것입니까?’ 하고 정성을 모은 다음 마음의 명령대로 설교합니다.
심정을 떠나서는 생명이 없습니다. 심정의 골짜기 길은 고통스럽고 처참한 길입니다. 스승을 요구하되 지식의 스승을 요구하지 말고 심정의 스승을 요구해야 합니다. 심정의 골짜기는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눈물이요, 자기는 없어집니다.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목적과 뜻은 커지고 나는 작아집니다. 작아지는 나와 커지는 뜻을 대한 심정만 있으면 만사는 해결이 됩니다.
섭리의 종착점에 가까워올수록 자기를 높이지 말고 자만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무한히 낮아진 자리에서 더 크고 높고 위대한 뜻을 황공한 마음으로 대하는 심정을 가져야 합니다.
절대로 낙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상대적인 어떤 대상이 나에게 낙망을 줄 수는 없습니다. 절망이나 낙망은 다 주체적(主體的)인 자기에게 있습니다.
자기 앞에 펼쳐지는 어떤 현상이나 사실이 문제가 아니고 그것을 대하는 자기 자신의 마음가짐이 문제입니다. 예컨대, 밥 한 그릇을 놓고도 바라보는 자의 마음이 부자의 마음이냐 극빈자의 마음이냐에 따라 그 밥이 다르게 작용하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여러분을 대하는 데는 일의 성공이나 실패의 문제로써가 아니고 그 심정적인 동기가 어떠하냐로 대합니다. 즉 자기 중심이냐 하나님 중심이냐가 중요합니다. 심정적 기준에서 하나님이 세운 것과 같으면 문제는 다 해결됩니다.
어떠한 상대를 사모하기 전에 참부모를 사랑하고 형제와 동포를 사랑했다는 조건이 서야 하나님이 대하실 수 있는 기준이 서게 됩니다. 이 기준만 있으면 죽어도 싹이 납니다.
기쁨과 슬픔의 감정을 누구와 동반하여 느낍니까? 모든 감성을 심정을 걸어 놓고 아버지와 더불어 천륜과 더불어 느끼면 하나님이 감탄하십니다. 하늘과 스승을 감탄시키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말씀과 더불어 실체를 대하고, 실체와 더불어 심정을 대할 수 있으니 가장 행복한 자입니다.
타락으로 말씀과 인격(실체)과 심정을 다 잃어버렸기 때문에 오늘날까지의 역사를 통하여 말씀을 세워 나오시면서 실체를 세우기 위한 준비를 했던 것입니다. 말씀과 실체와 심정의 인연을 동시에 맺을 수 있는 환경권 내에 있는 자가 가장 복된 자인 것입니다.
오늘의 이와 같은 성례식(聖禮式 3가정 축복)은 하나님의 소망이요 이상이었습니다.
아담 해와가 성숙하면 이루어 주시려던 성례식인 것입니다. 창조이상의 심정 중에 있었던 것으로 실로 역사적인 일입니다. 이러한 식전은 창조 이후 처음 벌어진 것임을 절감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 때의 세 제자는 그 스승과 생사를 같이했어야 했습니다. 이제부터는 여러분들의 몸이 여러분들의 몸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제물의 입장이라는 심정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1남과 1녀는 무형이신 하나님의 실체대상으로 나타난 아들딸입니다. 남자는 하나님의 플러스(+) 성품을, 여자는 하나님의 마이너스(-) 성품을 대신한 실체대상입니다. 창조이념은 양성(兩性)의 중화체(中和體)로 계신 하나님의 성상(性相)을 이성(二性)으로 분립했다가 다시 하나님의 본성상(本性相)을 닮은 모습으로 합성일체화(合性一體化)하는 것입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는 각각 하나님의 일성(一性)을 닮아 나왔습니다. 따라서 이들 1남 1녀의 결합은 하나님의 플러스(+) 성품과 마이너스(-) 성품이 하나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닮은 중화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인간의 두 사람, 즉 부부는 하나님의 전체를 표상하는 결합체입니다.
남자는 하나님의 플러스(+) 성품을 대신함으로써 참아버지의 분신이 되고, 여자는 하나님의 마이너스(-) 성품을 대신함으로써 참어머니의 분신이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각각 하나님의 대신자이기도 합니다. 사랑으로 하나 되는 것은 천주(天宙)를 품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우주적인 상봉입니다.
남편은 많은 남성을 대표하여 나타난 존재인즉 남편인 동시에 아버지의 대신이요 오빠의 대신이며, 아내는 많은 여성을 대표하였은즉 부인인 동시에 어머니를 대신하며 동시에 누나를 대신하고 있는 것이니, 서로 사랑하고 존중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은 2천년 전 예수님이 무덤에서 부활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하나님의 복귀역사는 부활을 이루는 것이 목적인데, 그 부활의 목적권 내에는 전피조세계가 다 해당됩니다. 곧 위로는 하늘, 아래로는 땅과 인류 모두가 이 권내(圈內)에 들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부활이라는 명사는 없었을 것입니다. 참다운 인간이라면 하늘땅을 대하여 면목이 없는 자신임을 느껴야 합니다.
부활의 길은 타락한 인류라면 누구나 가야 할 길입니다. 부활의 해결점은 하늘 보좌에 있는 것도 아니요, 영계에 있는 것도 아니요, 어떠한 도주(道主)나 어떠한 경서(經書)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또한 오늘날의 기독교 자체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복귀섭리입니다. 우리 인류는 타락으로 인하여 창조목적을 완성치 못했으니 부활의 과정을 통하여 재창조되어야 합니다.
오늘 여기에 모인 우리들은 부활의 날을 고대해야 합니다. 땅을 통하여 하늘(靈界)을 부활시켜야 합니다. 우리는 부활의 근거지가 천상(天上)인 줄 알지만 아닙니다. 이 땅입니다. 이 땅이 중심입니다. 부활의 근거지도 해결점도 이 땅에 있습니다. 이 땅에서 부활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천상의 부활, 인간의 부활, 만물의 부활, 지옥 인간의 부활도 한낱 명사에 그치고 맙니다. 그러므로 땅에서 먼저 부활한 사람이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영계(靈界)에는 지옥과 중간영계와 낙원과 천국이 있는데, 지금까지 하늘 앞에 충성했던 사람들은 다 낙원에 가 있습니다. 예수님도 낙원에 가 계십니다. 부활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있어서 간접 목적지는 영계요, 직접 목적지는 땅입니다. 영계는 부활시켜야 할 곳이요 땅은 부활해야 할 곳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땅에서 ‘나는 부활했다. 부활의 목적을 종결지었다.’ 할 수 있어야만 천상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땅에 그런 이가 나타난다면 지상의 모든 것은 움직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수많은 선지선열들도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날을 소망으로 삼고 고대하여 왔는데, 그날이 곧 부활의 목적이 이루어지는 날입니다.
천상은 지상의 것을 수습하는 생활을 하는 곳입니다. 이후에는 무엇을 중심삼고 수습할 것이뇨? 예수의 인격을 중심삼고 세계를 수습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의 말씀으로 수습하는 시대도 지나가고, 희생하라 봉사하라 하는 시대도 지나갑니다.
타락세계에서 하는 행동은 결과적으로 고통과 슬픔을 남기게 되는데, 우리는 이것을 넘어 예수와 더불어 자유롭게 사랑의 심정을 노래하는 세계가 땅에 이루어지도록 해야 합니다. 지상에서 부활의 성업을 승리적으로 종결짓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의 심정을 계승하여 실천함으로써 하나님을 해방시켜 드려야 합니다. 행복과 희망과 자유와 이상의 원천이신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 있는 심정을 통과해야 됩니다.
기독교인들은 이제까지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면서 신앙해 나왔습니다. 지긋지긋할 정도로 생각해 나왔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달리게 함으로써 하나님께 고통과 통분의 심정을 가중시켜 드렸습니다. 십자가에 고난 당하던 때의 예수보다 오히려 요셉가정에서 나무를 깎던 시절의 예수가 더 순수하고 희망적이었습니다. 그런고로 십자가에는 비극의 곡절이 서려 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고난 당하는 주가 주님이 오셨던 전체 목적인 줄 알지만, 고난 없이 하늘 앞에 효성을 다하는 예수가 되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예수의 순수한 복음전파는 그 출발이 좋았습니다. 그런 예수를 받아들였더라면 성경에 예수님이 책망하신 내용이 없었을 것입니다. ‘스승이여, 나를 보고 그런 책망 마옵소서.’라고 하는 개인이나 집단의 움직임이 있었다면, 오늘날 이렇지는 않을 거예요.
우리는 가시관을 쓰신 주, 창에 찔려 피를 흘리신 주가 주님의 전부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고통을 받지 않은 예수를 백 퍼센트 믿었다면 그것은 십자가의 고통을 받은 예수를 믿는 것보다 얼마나 더 귀했겠습니까? 하늘은 그것을 요구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에게는 가는 곳마다 사탄의 화살이 있었고, 절망으로 인해 찢긴 자리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예수가 부활하기까지 하나님이 겪으신 고통은 예수의 고통보다 훨씬 더 컸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순수한 부활의 심정을 요구하신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어떤 찔림도 받지 않은 모습을 만나기를 소원하신다는 거예요. 그러나 사탄에게서 태어난 우리에게는 사탄의 화살에 찔린 자국이 있으니, 그것을 보셔야 하는 아버지는 원한과 고통에 사무쳐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지 않은 예수의 모습을 그리워하고 노래하며 부활절을 맞이해야 되겠습니다. 예수는 이런 것을 보고 더 좋아하십니다. 또 역사도 바라고 있습니다. 하늘은 ‘참아라. 참고 희생하라. 몸은 비록 찢기고 죽게 되더라도 심정세계에만은 상처를 받지 말고 흠을 남기지 말라.’고 하십니다.
역설적이지만 하늘은 이렇듯 마음과 몸이 사탄의 침범을 받지 않은 존재를 바라고 나오셨기 때문에 젊을 때나 늙을 때나 어느 한 때라도 그 마음에 상처를 입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항상 곱고, 귀하고, 밝고, 깨끗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선지선열들은 몸 마음으로는 무한히 슬퍼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심정으로 슬퍼한 사람이 없습니다. 심정세계의 슬픔은 아직 미개척 분야입니다. 우리는 이 분야를 개척해야 할 선봉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몸의 호소, 마음의 재촉, 심정의 재촉, 이 세 관문을 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역사를 돌이킬 수 있는 역사적인 선봉자로서 하늘의 부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뿐이 아닙니다. 심정의 문을 개방해야만 신랑이 나타나고, 하나님도 자유로이 행차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첫째도 심정, 둘째도 심정입니다.
우리는 어차피 심정의 문을 통과해야 됩니다. 심정의 문을 통과했다는 조건을 세우지 않고는 부활할 수 없습니다. 예수도 심정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첫 번째도 심정이요 천 번째도 만 번째도 심정입니다. 이 심정의 문을 열어야 천국 문이 열립니다. 천국 문이 열리는 날, 그 몸과 마음, 심정에 상처를 받지 않은 사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몸과 마음과 심정에 상처를 받지 않고 예수가 해야 할 일을 대신하는 사람이 예수의 형제입니다. 예수를 대하여 형이라 오빠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특권 중의 특권입니다.
과거의 역사는 외적인 땅과 재물을 빼앗는 싸움의 역사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내적인 사람과 주의를 빼앗는 시대입니다. 이 내적인 싸움이 아직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천국 문이 꽉 닫혀 있는 것입니다. 완전한 것이 나와야 이 싸움이 해결될 것이며 천국 문도 열릴 것입니다. 그것이 곧 심정의 개방입니다. 그러므로 하늘땅 전체가 심정 분야에 있어서 자유개방을 해야 합니다. 하늘땅은 이 시간도 심정의 인연을 맺기 위해 탄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만상을 심정의 인연으로 지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풀 한 포기에도 심정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그 인연이 끊어졌습니다. 만일 천상의 심정의 인연과 지상의 심정의 인연을 연결시킬 수 있는 자가 있다면, 그는 하늘땅의 무엇이든지 해결할 수 있습니다.
역사는 재창조역사입니다. 재창조역사는 사람 하나를 찾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지금까지는 사람의 몸과 같은 땅을 빼앗는 물질 중심한 전쟁을 해왔고, 공간과 같은 마음을 빼앗는 주의(主義; ideology)를 중심한 전쟁을 해왔습니다. 앞으로는 영계(靈界)에 해당하는 심정을 빼앗는 심정 중심한 전쟁이 벌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심정을 개방시켜 하늘을 찾아야 할 역사적 과중에 놓여 있습니다.
여기에 식구라는 명목하(名目下)에 모인 여러분들은 부활을 완성할 목적으로 모였는데, 여러분은 몸 빼앗기 싸움에서 해방받았습니까? 사상 빼앗기 싸움에서 해방받았습니까? 못 받았다면 여러분은 부활이 안 된 것입니다. 여러분이 부활되려면 부활의 내용을 구비해야 합니다. 몸적인 부활을 거쳐 심적인 부활을 일으키면 타락 이전, 즉 태초의 가치적인 미(美)를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상에서 이루어지면 천상도, 지상도, 만물도 다 해결됩니다.
하늘의 중심을 대해서 전후 사방으로 당기는 힘이 폭발되는 것 같은 느낌이 없다면, 아직 심정적 부활이 안 된 것입니다. 어떤 고통 가운데 있더라도 그 고통을 능가할 수 있는 더 강한 심정의 충격이 없다면, 첫째 부활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마음과 몸이 하늘과 땅, 시간과 공간을 한꺼번에 느껴 새로운 무엇이 폭발되고, 지옥 밑창의 고통도 넘을 수 있는 강한 심정의 작용이 있어야 첫째 부활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당면하고 있는 복귀노정의 주된 목적은 재림주님을 상봉하는 것입니다. 재림주님의 사명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심정을 복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심정을 점령해 오시는 그분을 대해서 일대 부활의 역사를 일으키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땅 위에 그대로 연결시키기 위해서 오시는 분이 바로 재림주이십니다. 그 분은 땅 위에 사는 사람을 찾아오십니다. 여기에 모인 우리는 수많은 인류 가운데서 뽑아낸 무리입니다.
영계에는 수많은 영인들이 있습니다. 존재하는 어떤 것도 하나님의 심정의 인연을 거치지 않고 지어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이 땅만이 아니라 천상의 수억만의 영인들까지 구원하려고 하십니다. 우리를 중심으로 하여 세계를 움직이려 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복귀하시려는 하나님의 심정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정성을 기울여 지으신 아담 해와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심정은 죽었습니다. 이 심정을 부활시키기 위해 지금까지 6천년이 흘렀습니다. 하늘과 땅을 맡기려 했던 아들딸이 죽었으니 그들을 다시 살려야 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죽은 자식이 다시 살아나기를 고대하고 계십니다. 심정 기준을 갖춘 완전한 아담 해와를 찾아 세워 전세계를 한꺼번에 복귀하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제 전세계는 통일된 하나의 이념을 세워야 합니다. 모든 재료는 준비되어 있으니 우리가 수고만 하면 됩니다. 우리의 몸뚱이만 움직이면 됩니다. 자유로운 환경에서 창조 당시의 천사와 같이 시키는 대로 심부름만 하면 됩니다. 자기의 가진 것을 다 바쳐 드리면 됩니다. 그리하여 첫째는 몸이 부활되어야 하고, 둘째는 마음이 부활되어야 하고, 셋째는 심정이 부활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부활되기 위해서는 그 몸이 찢기고 찢겨도 쓰러지지 않고 승리의 기준을 세워 하나님과 심정의 인연을 맺어야 합니다. ‘하나님이시여! 지금까지 종적인 역사가 이랬으니 제가 횡적으로 이렇게 하겠나이다.’ 할 수 있는 사람은 많겠지만 하나님의 심정을 담는 보자기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처하여 있는 동안 하늘이 원치 않는 곳으로 가게 되는 때도 많습니다. 그런 길을 거치더라도 심정의 관문까지는 나아가야 합니다. 풀 한 포기를 보고도, 날아다니는 새 한 마리를 보고도 심정이 폭발되어야 부활완성 단계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길을 걷거나 밥을 먹거나 그 무엇을 하든지 간에 그것보다 앞서는 심정이 있어야 합니다. 하늘은 그것을 바라는데 우리가 그렇지 못하니 슬퍼하시는 것입니다. 심정에 느껴지는 것이 있거든 그것을 꽉 붙들고 바라보십시오. 놔라 해도 놓을 수 없다는 마음이 강하면 천국으로 향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이면 문제가 없습니다.
심정이 선생님보다 강하면 어디를 가도 괜찮습니다. 여러분은 눈만 뜨면 복귀섭리를 생각해야 하고, 하늘의 목적을 현실에서 찾아 세우는 가치적인 사람이 되어 부활의 날을 이루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선생님도 눈만 뜨면 그 생각입니다.
오늘 이 부활절에 우리의 심정이 문제입니다. 하늘이 바라시는 대로 현실에서 가치적인 맛을 내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부활을 완결하였다는 사람이 하늘에도 땅에도 없었는데, 이 불쌍한 민족이 사는 한반도에서부터 부활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머리 숙여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이 기준을 이룬 사람이 있다면, 그는 억천만금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갖고 있는 자입니다. 심정의 주도권을 쥐고 오시는 아버지 앞에 기쁨과 행복과 즐거움을 돌려드리는 아들이고 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의 심정세계에 접붙여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요, 주님은 우리의 신랑입니다. 하늘은 우리에게 그리움과 하나님주의와 충성을 알게 해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부자의 심정, 부부의 심정, 군신의 심정을 갖고 주의를 통일시켜 나가야 되겠습니다. 그 아버지의 이름 밑에서는 서로 용서 못할 것이 없고 곡절이 맺힐 수 없습니다. 신랑의 이름으로는 양보 못할 것이 없습니다. 한 임금 밑에 충성하는데 하나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심정부활의 총결론입니다.
40평생 이러한 말 한 번 하기를 소원했는데, 오늘 이렇게 하게 됐으니 이것을 듣는 여러분은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하고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이 시간도, 아버님, 당신의 심정과 영원한 인연을 맺고 축복을 받아야 할 운명에 놓여 있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여기에 몰려왔사옵니다.
저희들은 아버님이 누구이신가를 알았사옵고, 아버님의 심정이 어떻다는 것을 윤곽이나마 알았사옵고 아버님의 애달픈 심정의 부분 부분을 체휼하였사옵니다. 그러나 전체의 뜻을 품으신 아버지의 그 심정을 몰랐고, 전체의 관을 몰랐고, 전체적인 체휼을 저희들은 하지 못했사옵기에, 부분적으로 즐기는 입장에는 섰으나 전체적으로 즐길 수 있는 입장에는 서지 못했사옵니다. 이러한 저희를 두고 하늘이 얼마나 슬퍼하시는가 하는 것을 이 시간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손을 들어 축복하시려는 마음이 간절하면 간절할수록 자녀들이 성숙하여 심정의 동반자가 되어 주기를 아버님께서는 얼마나 고대해 오셨사옵니까? 그러나 역사노정에는 당신의 심정을 중심한 승리자로서 사탄세계 앞에 자랑할 수 있는 하나의 모습이 없었음을 저희들이 아옵니다.
그러한 모습이 저희의 그리움의 표준이요, 저희가 바라는 소원의 표준임을 당신도 아시옵니다. 모든 것을 잊고, 모든 것을 버리고, 모든 것을 빼앗길지언정 그 한 모습만이 저희의 전소유로서, 저희의 전생명을 대신할 수 있는 것으로서 높이고 그리며 나온 당신의 아들딸들이었사오니, 이제 좁은 마음을 열고 흩어진 심정을 수습하여 당신의 제단 앞에 드릴 수 있는 심정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당신의 인정을 받을 수 있으며, 당신이 찾으시려던 본연의 대상자로서, 당신이 품고 싶어하셨던 자녀로서 그 마음과 더불어 즐기시면서 품으실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게 해 주시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것이 저희들이 지금까지 바라온 소망이요, 목적이며, 또 이 뜻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복귀의 노정인 것을 저희들이 아오니, 오늘도 내일도 이 표준을 향하여 나아가 싸우게 해 주시고, 싸워도 싸워도 싸움이 끝나지 않으면 또 싸울 각오를 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지쳐 있거나 또 지치는 한이 있더라도, 딛고 일어서야 할 운명에 처하여 있는 저희들인 것을 확실히 아옵니다.
아버님께서는 언제나 사랑의 손길로 저희의 뒤를 보살펴 주시고 품어 주시는데 저희 자신을 놓고 생각하게 될 때는 서럽기 짝이 없사옵니다. 저희의 선두에 아버님께서 서시지 못하고 사탄이 서 왔던 것을 아옵고, 아버님께서는 저희의 뒤를 따라오시면서 저희들의 처량한 모습, 상처 입은 모습을 보시고 눈물지으시며 오늘날까지 역사노정을 지켜 주신 것을 저희들은 아옵니다.
이제 돌아서서 사탄을 원망하고, 아버지를 품고 자기의 사정과 역사적인 사정을 다 알 수 있는 아들딸이 되기를 바라며 여기에 모였사오니, 이 시간 약속하여 주시옵고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이 심정을 통하여 저희에게 훈계하시고 싶었던 것을 이 시간 훈계하여 주시옵고, 권고하고 싶으신 말씀을 내려 주시옵소서. 멀지 않은 종말시대의 성도로서의 자격을 갖추는데 도움이 될 수 있게, 아버지, 복빌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한스러운 복귀의 한 고비를 넘고 아버지의 영광의 그 한 날을 그리워하는 당신의 아들딸들에게, 약속하신 주권을 세워 길이길이 기쁨과 영광이 가득찰 수 있게끔 승리의 방패를 내려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시간, 여기에 참석하지 못한 식구들과 사방에 널려 있는 당신의 아들 딸들도 같은 은사의 손길로 품어 주시옵고, 그들에게도 축복을 내려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옵니다. 남아진 시간을 아버님 홀로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말 씀> 타락 이전 우리 조상들은 만물의 주인공으로서 자격을 부여 받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만물을 주관하라.’는 축복을 받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축복이 옛날 우리 조상 앞에 내려졌는데도 오늘날까지 이 땅에는 하나님의 그 축복대로 온 하늘땅을 주관한 자가 없었습니다. 만일 그 축복이 이루어졌다면 이 세계는 탄식의 세계가 되지 않았을 것이요, 고통의 세계가 되지 않았을 것이요, 인류는 한의 세계에서 허덕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축복이 이루어지지 않은 연고로 오늘날까지 인간들은 비참한 역사노정을 허덕여 나왔습니다. 어떤 역사를 살펴보아도 거기에는 슬픔과 고통의 사연이 깃들어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를 엮어 왔다는 것을 우리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인류역사는 하나님의 축복을 이루어 나온 과정이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견지에서 생각할 때, 사람은 복된 자리를 잃어버리고 복되지 못한 자리로 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상식적으로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입니다. 여기에 모인 여러분들도 복된 자리가 아니라 복되지 못한 자리에 처하여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행복한 자리에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불행한 자리에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평화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의 세계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도리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존재의식(存在意識)에 있어서 생애의 가치를 존중시하면 할수록 무엇과 인연 맺고자 하느냐? 기쁨의 요소, 행복과 자유의 요소, 무한한 해방의 요소와 인연을 맺고자 합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실제생활에 있어서나 양심생활에 있어서 잘 체험한 사실, 거부할 수 없는 사실 중의 사실일 것입니다.
역사적인 성현들과 많은 도주(道主)들도 이것을 개척하기 위하여 싸워 나왔지만 이러한 참이상의 요소와 더불어 즐길 수 있는 절대적인 기준을 찾지 못했습니다. 이와 같이 아직까지 이런 기준을 찾아 세우지 못한 우리는 비애와 탄식의 생활을 계속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연한 사실입니다.
이것이 천지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의 창조목적이 아니고, 인간을 세워 놓고 모든 피조만물을 주관하며 살도록 축복해 주셨던 목적이 아님을 여러분이 느껴야 됩니다. 목적하지 아니한 세계가 이루어졌으므로 되어야 할 세계가 되지 못하였고, 인류역사는 그 본연의 세계를 다시 회복하려는 구원의 역사가 되었습니다.
인간들에게 구원이란 명사가 필요하다는 것은 인간들이 정상적인 상태에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본연의 상태에 있지 못한 것을 다시 본연의 상태로 돌이키는 것이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어떠한 무엇으로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바라시는 목표 밑에서 막연하지만 어떤 목적의 세계를 바라보며 나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바라시는 목표와 우리 인간이 바라는 목표가 우리의 심정 기준에서 완결되어 기뻐하며 송영을 드릴 수 있는 한 장면이 이 천지간에 벌어진다면, 그때부터 인류세계는 행복의 세계가 시작될 것입니다.
그때가 언제일 것인가? 그런 곳이 어디일 것인가? 그런 세계가 언제나 이루어질 것인가? 인간은 그러한 때와 곳을 향하여 수시로 자기들도 모르는 싸움을 계속해 나왔습니다. 우리는 그런 선조들의 슬픈 후손들입니다. 반면 하늘은 잃어버린 사람을 재창조해 나오시고, 잃어버린 세계를 회복하는 역사를 해 나오셨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사랑스럽게 품에 품으시고 소망의 심정을 기울여 오늘이야 내일이야 하며 바라보시던 우리의 참조상, 죄를 모르던 그들과 더불어 꿈을 꾸고 그들과 더불어 창조이념을 이룰 날을 그리시던 하나님의 심정, 그 심정은 오늘날 인간세계에서 간 곳 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심정과 이념과 세계관은 우리들이 꿈에도 헤아려 볼 수 없는 놀라운 심정이요, 놀라운 이념이요, 놀라운 세계관이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러한 이념적인 심정의 세계와는 하등의 인연이 없는 것 같은 입장, 그 세계는 영원히 가버린 것 같은 입장에 놓여진 채 허덕이는 인간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타락하기 전의 아담 해와를 세워 놓고 축복하시던 그 축복을 다시 회복하기 위하여 오늘날까지 인류역사를 붙안고 뒤넘이쳐 나오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인류역사는 사람들끼리만 움직여 온 역사가 아닙니다. 우리 인간들이 어떤 목표를 가지고, 어떤 계획 아래에서 끌고 나온 역사가 아닙니다. 시기와 시기, 시대와 시대, 세기와 세기를 거쳐오면서 많은 혁명도 있었지만, 그 혁명이념에 의해 몇십 년 혹은 몇백 년에 이루어진 세계는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것은 인류역사가 인간이 꾼 꿈에 의해 되어지는 역사가 아니요, 인간의 어떠한 창조적인 계획 밑에서 되어지는 역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류역사는 대천륜의 목표와 계획 밑에서 하나의 이념적인 목적지를 향하여 나아가는 역사입니다. 이렇게 인류역사에는 고난의 역사 과정을 거쳐 자연적인 형태의 세계를 전개시키고자 하시는 하늘의 프로그램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역사에 이런 프로그램이 없다 할진대 하나님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타락하지 않은 아담 해와를 축복하시던 하나님의 축복의 손길을 그리워할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이 타락하지 않은 아담 해와를 세워 놓고 손을 들어 축복하셨다 할진대 축복하시던 하나님의 그 손길은 어디로 갔을 것인가! 축복하시던 그 축복의 권한은 어디로 갔을 것인가? 축복이라 함은 즐겁고 행복스러운 인연의 조건일 것인데, 그 조건을 중심삼고 바라보시던 세계이념은 어디로 갔는가! 다 가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은 인간 위주한 이 세계를 수습하여 먼 시각의 세계를 가까운 시각의 세계로, 먼 감각의 세계를 직접적인 감각의 세계로 끌어 들이시는 것입니다. 외적인 세계를 내적인 심정의 세계와 결부시켜서, ‘나’라는 하나의 존재가치와 전체 가치의 인연을 노래할 수 있는 세계로 연결시키기 위한 목적 밑에서 역사는 돌고 굽이치면서 이 세계를 이루어 나왔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얼핏 보기에는 목적 없이 흐르는 역사 같지만 지나고 보면 어떤 목적의식 밑에서 하나 하나의 일들이 처리되어 나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을 볼 때에 전역사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떠한 목적의식, 절대적인 플랜(plan)에 의해 움직이는 역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창조주의 대이념을 중심삼은 프로그램에 따라 개척자의 사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선지선열들, 성현 현철들이 먼저 이 사명을 계승하여 분담하여 왔습니다. 이와 같이 그러한 대목적의 세계를 이루기 위하여 인류가 동원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늘도 동원되어 나온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최대의 소망이 무엇일 것인가? 하나님이 기쁨으로서 당신의 심정 전체를 걸어 놓고 축복하실 수 있는 그 소망은 무엇일 것인가? 이것이 문제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최대의 소망은 무엇인가? 오늘 여러분과 더불어 생각해 보고자 하는 문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아침에 눈을 뜨고 자연을 바라보면 그 자연이 은은하게 내 본성과 인연되어 새로운 이상의 감정을 싹트게 합니다. 그러나 인간 세상은 바라보면 볼수록 절망과 슬픔의 감정을 돋우어 준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잘 알 것입니다. 본래 타락하지 않은 본연의 인간들이 사는 세상이라 하면, 인간의 가치는 그렇게 바라보는 이로 하여금 슬픔을 느끼게 할 정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떤 풀 한 포기나 꽃 한 송이, 나무 한 그루와 같은 정도의 가치로 지어진 인간이 아닌 것입니다. 피조만물의 그 무엇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고귀한 인간이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치의 모습으로서 천상을 대신하여 나서야 할 인간이었습니다. 그런데 대천주 앞에 설 수 있는 위치를 잃어버리고 가치를 잃어버린 그날부터 인간은 여지없이 슬픔을 가해 주는 제물이 되고, 고통의 다리를 놓아 주는 초석이 되었다는 사실을 이 시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오늘 이 시간 여러분은 어떠한 모습으로 창조의 대이념을 갖고 계신 창조주 앞에 나아갈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대인관계에 있어서 여러분이 슬픔과 고통의 상징으로 나타나는 모습이라 할진대 여러분은 전체의 이념을 세우시려는 하늘 앞에도 물론 슬픔과 고통의 대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기쁨과 즐거움의 상징으로 나타날 수 있다 할진대 여기에서부터 소망의 세계는 연결될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오늘 자신이 어떠한 위치에 있는가 스스로 판단하고 그 위치를 결정하여 내가 머무는 곳곳마다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고, 내가 움직이는 곳곳마다 사람들이 나를 따르고, 나로 말미암아 그 무엇이 남아져서 전체 앞에 자랑할 수 있는 내용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지 못한다 할 진대 여러분은 인간세계에서나 천상의 이념세계에서나 용납받을 수 없는 죄인이 될 것입니다.
문제는 자신에게 있습니다. 나라가 나쁘다고 원망할 것이 아니요, 사회가 부패했다고 원망할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제2차적인 문제입니다. 문제는 ‘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하늘이 구원섭리를 하시는 데는 개인을 떠나서 가정의 섭리를 하실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브라함 개인을 중심삼고 아브라함의 가정을 구하려 하였고, 야곱이란 개인을 중심삼고 야곱가정을 구하려 하였고, 모세라는 개인을 중심삼고 이스라엘 민족을 구하려 하였고, 예수라는 개인을 세워놓고 세계를 구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세계를 구하기 위한 예수, 민족을 구하기 위한 모세, 가정을 구하기 위한 야곱과 아브라함, 이들 모두는 여러분 때문에 그런 길을 갔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끝날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끝날이란 어떠한 때냐? 전세계를 관할하시는 하나님을 상봉하는 시간이 가까운 때를 말합니다. 전세계의 통치권을 갖고 오시는 만왕의 왕이신 주 앞에 가까이 갈 수 있는 때를 말합니다.
그러면 그때를 맞이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떠한 사람이어야 하느냐? 옛날의 아브라함을 대신할 수 있고, 야곱을 대신할 수 있고, 모세를 대신할 수 있고, 예수를 대신할 수 있고, 더 나아가서 세계를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세계가 필요로 하는 그 한 사람, 예수가 필요로 하는 그 한 사람, 하나님이 필요로 하는 그 한 사람, 사회가 필요로 하는 그 한 사람, 가정이 필요로 하는 그 한 사람, 우리들 개체 개체가 필요로 하는 그 한 사람의 모습을 세울 수 있을 때 그때부터 세계는 수습되어 나갈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나라에서 살고 있지만 나라 아닌 나라에서 살고 있습니다. 사회에서 살고 있지만 사회 아닌 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가정에서 살고 있지만 가정 아닌 가정에서 살고 있습니다. 예수는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땅에 온 것은 화평케 하러 온 것이 아니라 분쟁을 일으키러 왔노라고. 창조주의 이념 밑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부정적인 땅이 되었으니 여기에 혁명을 일으키기 위해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전세계에 널려 있는 기독교인들은 세계의 혁명군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이런 인식을 하지 못하고 있으니 공산주의의 침략하에서 허덕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출발의 기원은 어디인가? 우리는 어디서부터 출발하였던고?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품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슬픈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는 자리에서 출발하였습니다. 그런 인간이니 고통을 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억울함을 당해야 하고, 죽임을 당해야 하고, 통곡하고 절망하는 자리에 처해야 됩니다.
도의 길은 고통을 응당시하고 나아가는 길이요, 낙망의 길을 정당화시켜 가는 길이요, 절망의 자리에서 소망을 세워 나아가는 길입니다. 왜? 인간은 배역자이기 때문에 배역의 씨를 뿌린 모든 것을 탕감해야 되는 것입니다. 보응을 받아야 될 인간이니 당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원칙에서 보면, 앞으로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민족은 어떠한 민족일 것이냐 하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앞으로는 슬픔을 달갑게 받는 민족, 고통을 달갑게 당하는 민족, 억울함을 응당한 것처럼 받는 민족, 그러면서도 하늘을 붙드는 민족이 세계를 지배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고이래로 선의 길을 따라 나온 사람들은 마음으로는 기쁨과 행복의 세계를 소망하였으되 실제 생활은 고통의 길을 걷는 생활이었습니다. ‘고통아 오너라. 너에게 내가 소망을 빼앗길소냐! 슬픔아 오너라. 네가 나의 희락(喜樂)을 막아낼소냐! 죽음아 오너라. 승리의 한 날, 영광의 한 날을 바라는 이념의 세계관을 내가 빼앗길소냐!’ 하는 각오 밑에서 걸어 나온 길이 성현 현철들의 길이요, 오늘날까지 기독교의 역사인 것을 우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원수들에게 당하는 손의 고통, 원수들에게 당하는 발의 고통, 원수들에게 당하는 옆구리의 고통을 예수님은 당연하게 받으셨습니다. 역사는 이러한 예수님과 같은 무리를 통하여 수습되어 나오는 것입니다.
하늘은 어찌하여 인간들을 그러한 환경에 세워 놓고 역사하실 수밖에 없는가? 그것은 세계가 이미 사탄권 내에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사탄입니다. 그래서 하늘은 선두에 서서 인류를 지도해 나오지 못하셨습니다. 오늘날까지 뒤에서 역사해 나오시는 것입니다.
끝날이 되면 악은 막혀 버리는 것이 원칙입니다. 이 역사가 세계적인 무대를 향하여 출발하였으므로 그 끝도 세계적인 무대에서 이루어집니다. 악은 구르는 것으로 시작하였으니 끝날까지 굴러 나오는 것입니다. 6천년 동안 그렇게 굴러 나왔습니다. 그러나 악은 가다가 반드시 끊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왜? 악의 궤도는 정상적인 궤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느 한때 반드시 탈선한다는 것입니다. 그 때가 언제이냐? 끝날입니다. 끝날에는 끊긴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하늘은 이 악의 세계를 정면으로 막으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렇게 굴러 나오는 악의 세계 밑에서 낙오자를 수습해 나오셨습니다. 이것이 하늘의 역사입니다. 슬픈 일입니다. 온 천지를 사탄에게 다 빼앗긴 하늘은 싱싱하고 늠름한 자들을 수습하는 것이 아니라 악을 향하여 달음질 하는 사망세계의 권세의 뒤에서 절망하여 떨어지는 낙오자들을 수습해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종교의 사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낙오되거나, 큰 절망에 빠져 있거나, 실패를 하거나, 그 무엇에 충격을 받아 의지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대다수의 사람들은 도의 길을 찾아듭니다. 슬픈 일이 있다 할진대 이 이상 슬픈 일이 없습니다.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으면 하늘은 당신의 직계 자녀를 통하여 이 세계를 자유로이 주관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하여 사탄이 이 세계를 주관하게 된 그날부터 하늘은 낙오자를 붙들고 사정하는 입장이 된 것입니다. 원통합니다, 원통해요. 그러기에 믿는 사람들은 못난 사람들이라고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식하고 무력하고 아무것도 분별하지 못하는 이들이 하늘을 믿어서 고임돌이 되어 나오고 있습니다. 구렁텅이에 돌을 집어넣고 또 집어넣고, 메우고 또 메워 그것이 쌓여서 그 구렁텅이가 평탄해질 때까지 이 땅의 수많은 낙오자들이 도의 세계에서 제물 되어 나왔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늘은 세상의 낙오자들을 수습하여 이 땅의 어느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개인을 세우시기 위하여 무한히 애쓰셨습니다. 이렇게 하여 세운 사람이 아브라함이요, 야곱이요, 모세요, 예수라는 것입니다. 야곱은 가정을, 모세는 민족을, 예수는 세계를 수습하는 대표자라는 것입니다.
개인을 세워 가정을 수습하고, 사회와 국가, 세계를 수습해야 하기 때문에 그 대표자로 보내심을 받은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이 왔다 간 그날부터 오늘날까지 기독교는 예수님이 다시 온다는 재림사상을 품고 나왔습니다. 그러면 앞으로 이 땅에 다시 오시는 주님은 어떠한 사명을 갖고 오실 것이냐? 세계를 수습하는 대표자의 사명을 갖고 오실 것입니다. 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가 대결하고 있는 이 판국에서 보더라도 이를 수습할 수 있는 새로운 이념을 가진 하나의 인격자가 이 땅 위에 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은 못난 사람으로부터 다리를 놓아 어깨와 어깨를 연결시키고, 몸과 몸을 연결시켜 이 천지의 어느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하나의 이념적인 대표자를 내세우기 위해 역사해 오신 것입니다.
과거에는 할머니들이 많이 동원되어 정성을 들였습니다. 또 부녀자들이 많은 정성을 들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오늘날까지의 종교는 부녀자들의 종교였습니다. 남성들의 종교가 아니었습니다. 가냘픈 여성들이 슬픔에 사무친 심정으로 정성을 들여 쌓고 쌓은 토대 위에서 오늘날과 같은 세계적인 종교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이것이 점점 전체 사회에 전파되어 세계를 움직일 수 있는 민주 진영을 건설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끝날은 어떠한 때냐? 이 세계를 수습해야 할 때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계를 수습할 수 있는 축복받은 대표자, 축복받은 무리가 나오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의 독생자’라 하셨고, ‘나는 신랑이요, 너희는 신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대로 ‘너는 하늘땅을 대신한 나의 신부다’라고 인정받은 사람은 이 땅에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오늘날 전세계에 널려 있는 수많은 기독교 신자들, 모두가 자칭 신부라고 호언장담하고 있지만, 하늘이 ‘너는 틀림없이 하늘땅을 대표 한 신부다.’라고 공인한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는 있으나 하나님으로부터 ‘너는 진정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다. 혹은 딸이다.’라는 축복을 받은 자는 한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왕의 왕’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만 주의 주’ 라고, 혹은 ‘절대자의 주체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분 앞에 충신이라고 축복받은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늘의 충신이 나오지 않았고, 하늘의 효자가 나오지 않았으며, 하늘의 열녀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어떤 절대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이 있어서 하늘이 그를 하늘땅을 통치할 수 있는 자리에 세워 축복을 해주고 싶다 할진대 그는 최고의 자리에 나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려면 그는 그 나라의 최고의 충신이라는 이름을 가져야 할 것이고, 그 나라의 최고의 효자라는 이름을 가져야 할 것이며, 신앙자들을 신부라고 하였으니 그 나라의 최고의 열녀라는 칭호를 가져야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6천년 동안 복귀섭리를 해나오셨지만 ‘너는 하늘땅이 생겨난 그날부터 오늘날까지의 역사에서 둘도 없는 나의 충신이다.’ 하고 축복해 준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창세 이후 오늘까지의 역사에서 너는 내 앞에 진정한 효자다.’ 하고 축복해 준 사람이 없고, 열녀라고 축복해 준 사람이 없다는 거예요.
왜 그런가? 하늘이 내세울 수 있는 국가가 있어야 충신이 있지요? 하늘이 내세울 수 있는 참부모가 있어야 효자가 있지요? 하늘이 내세울 수 있는 참신랑이 있어야 신부가 있지요? 이 땅의 국가들은 하늘이 내세울 수 있는 주권을 가진 나라가 못 되었고, 이 땅의 가정들은 하늘이 영원히 사랑하고 지켜줄 수 있는 참부모를 가진 가정이 못 되었고, 이 땅의 사람들은 하늘이 영원히 믿어줄 수 있는 참신랑 신부가 못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창조주는 창세 이후 오늘까지 이 땅 위에 사는 인간들 가운데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딸’이라고 내세운 사람이, ‘너는 천상천하를 대신한 효자’라고 내세운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너는 내 앞에 충신’이라고 내세운 사람이 없고, 열녀라고 내세운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많은 재물을 가진 자가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에게 자기가 가진 재물을 지켜 줄 수 있고 자기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효자가 있다면 그는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얼마나 대견하고 얼마나 안심이 되겠습니까?
하나님도 그러하실 터인데, 대천주를 지으시고 축복했던 아담이 타락했기 때문에 그날부터 하나님께서는 무한히 슬픔을 품고 나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주관하셔야 할 온 하늘땅이 원수가 주관하는 세계가 되었고, 이 땅의 가정들은 원수를 받드는 원수의 아들딸로 이루어진 가정이 되었습니다. 원수의 효자 충신은 있을망정 하늘의 효자 충신은 없습니다. 원수의 세계에서 원수의 뜻을 받드는 열녀는 있을망정 하늘의 뜻을 받드는 열녀는 한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을 뒤집어 놓아야겠기에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외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셨습니다. ‘당신이 요구하시는 충신이 되게 하시옵소서! 당신이 소망하시는 참효자가 되게 하시옵소서! 당신이 그리워하시는 참신부가 되게 하시옵소서!’라고. 이것이 세계를 수습하기 위해 오셨던 하늘의 왕자이신 예수님의 소원이었다는 것입니다.
타락한 우리는 그리워합니다. 무엇을 그리워하느뇨? 하늘이 인정하는 충신이 될 수 있는 그 나라를 그리워하는 거예요. 무엇을 그리워하느뇨? 참부모를 모셔 놓고 효자가 될 수 있는 그 세계를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참신랑 신부가 되어 하늘의 품에 안길 수 있는 본연의 그 세계를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바라는 최대의 목표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아무리 타오르는 정열에 사무쳐 나라에 충성을 다했더라도 하늘은 그것을 그냥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아무리 극진히 자기 부모에게 효도를 했더라도 하늘은 그것을 그냥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 충성 그 효도가 어떠한 조건은 될 수 있지만 하늘이 전폭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충성과 효도는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 아무리 열녀가 많았을지라도, 그들이 어떠한 조건은 세웠을지 모르지만 하늘이 전폭적으로 축복할 수 있는 하늘의 열녀는 못 된다는 것입니다. 슬픈 일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흐름을 알기에 나는 한때 이렇게 기도한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충성 기준 위에 설 수 있는 충신, 하늘나라를 대신할 수 있는 충신을 이 땅 위에 보내 주시옵소서.’라고. 이렇게 말하면 이단자라고 하겠지만 예수님도 하늘나라의 완전한 충신은 되지 못하였습니다. 왜 못되었느냐? 하늘나라의 진정한 충신이라면 세계적으로 사탄과 싸워 승리해야 됩니다. 원수를 완전히 굴복시켜 완전히 물리치고, 슬픈 주인을 기쁨의 자리로 모셔 놓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늘의 완전한 충신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싸우다가 쓰러졌습니다. 충신의 절개와 지조를 세우려 한 대우주의 목적을 다 이루지 못하고 남기고 갔습니다. 그러기에 다시 와야 됩니다. 이 땅을, 하나님을 참부모로 모시고 효도하는 자유천지로 만들어야 했는데 그 일을 다 못하였기 때문에 참효자가 못된 것입니다. 그러니 다시 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말씀으로는 했지만 실체로는 못 이루고 갔습니다. 나는 신랑이라고 외치기는 하였지만, 실체를 갖춘 참다운 신랑이 못 되었으니 다시 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축복을 받았지만 실체적인 권한은 행사하지 못하고 가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슬픔입니다.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이 손을 들어 아담 해와를 축복하실 때에 하나님은 그들의 아버지로서 마음으로 무엇을 소망하셨을 것인가? ‘오! 너희는 내가 지은 대천주를 품고 나를 왕으로 모시고 충신이 돼 달라.’고 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마음이었다는 거예요. 그러므로 아담 해와는 이 천지간에 충신의 지조를 세우고, 그것을 억천만년 전통으로 남겨야 했습니다. 아담 해와가 하나님을 참아버지로 모신 참다운 효자 효녀가 되었던들 그들이 하나님 앞에 세운 충효지절(忠孝之節)은 전통이 되었을 것이고, 이 땅의 역사는 하나님과 아담 해와의 연결된 심정을 중심삼고 이어져 내려왔을 것입니다. 그러면 악이 주관 못 합니다. 하나님의 심정의 세계를 악이 주관할 수 있다면 복귀역사, 구원역사는 절대 불가능합니다.
어느 누가 무엇으로 사랑하는 자식을 ‘내 자식이 아니다.’ 하고 거부하게 만들 수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담 해와가 하나님을 참부모로 모시고, 효자 효녀로서 하나님과 심정의 인연을 맺었던들, 오늘날 이 땅은 절대 이렇게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담 해와가 충신지절(忠臣之節)을 잃어버렸고 효자 효녀의 지조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인간들은 거꿀잡이로 신랑 신부라는 명사를 걸어 복귀해 나오는 것입니다.
원래 신랑이 되려면 먼저 충신지절을 세워 나라를 사랑하는 충신이 되고, 부모를 사랑하는 효자가 된 후에야 하나의 남자로서 신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타락했으니 거꿀잡이로 하는 것입니다. 복귀노정이 이렇게 거꿀잡이 노정이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 신자들은 신랑 신부라는 명사에 도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신랑 신부가 되려는 목적은 어디에 있느냐? 하나님을 참부모로 모시는 데 있습니다. 신랑 신부의 사랑만 가지고는 안 돼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야 됩니다. 가정적인 하나님 말고 대천주를 주관하는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것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 가정에서도 그렇지 않아요? 부모와의 정의 인연을 기반으로 하여, 한 부부의 사랑을 기반으로 하여 한 주권자의 인정을 받는 것이 인간들의 생활윤리입니다. 철칙이 그래요. 나라 없이 가정이 있을 수 없고, 가정 없이 부부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전세계 인류는 신랑 신부라는 명사 앞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하늘이여! 주님은 신랑으로 오신다는데, 신랑보다는 나를 다시 낳아줄 수 있는 참부모를 보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신랑 신부의 사랑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나는 효자 효녀로서 아버지를 모시겠나이다.’ 할 수 있는 기준을 세워야 됩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을 만군의 여호와로, 만왕의 왕으로 모실 수 있는 충신의 무대를 만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까지 수많은 기독교 신자들은 기도를 하였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구원은 무슨 구원? 지옥가지 말게 해 달라는 구원입니까? 지옥이 무서워서 예수를 믿어요? 구원의 목적은 신랑 신부로서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신랑 신부로서 만나가지고 하나님 앞에 효자 효녀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의 목적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효자 효녀가 된 후에라야 충신이 될 수 있습니다. 세상에도 그렇잖아요? 불효하는 자식이 충신 될 수 있어요? 효자 효녀가 된 후에야 하나님 앞에, 또는 군왕 앞에 충신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기독교의 사상처럼 신랑 신부만으로서 그칠 것이 아 니라 신랑 신부가 만난 후 둘이 합하여 하나님 앞에 충성해야 됩니다. 그리고 ‘효자 효녀의 인정을 받게 해주시옵소서.’ 하고 주님을 붙들고 기도해야 됩니다.
이 땅의 탄식이 무엇인가? 하늘이 충신이라고 인정할 수 있는 천적인 주권의 나라가 못 된 것입니다.
하늘이 공인할 수 있는, 타락의 혈통을 벗어난 본연의 아담 해와가 없기 때문에 참부모를 잃어버렸습니다. 심정적으로 우리를 지켜줄 참부모를 잃어버렸으니 사탄이 우리를 유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고아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신랑 신부가 되었다 할지라도, 그들이 참부모로부터 효자 효녀라는 축복을 받고 난 후에라야 비로소 영원한 신랑 신부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예수를 믿고 저나라에 가 있는 수많은 성도들이 있지만, 예수를 신랑으로 모신 성도가 없습니다. 왜 그런가? 먼저 효자 효녀로서 참부모와의 인연을 맺고 난 후에야 신랑 신부가 되기 때문입니다. 원칙이 그래요. 그래서 아무리 신랑 신부의 인연을 맺었다 할지라도 참부모의 인연을 맺지 못하면 보류예요, 보류. 영계의 천사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앞으로 이 땅 위에 오시는 주는 어떠한 사명을 완결짓기 위해 오셔야 하느냐? 물론 신랑의 자격을 완결짓기 위해 오셔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참부모의 내용을 완결지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늘땅 앞에 참부모라는 인정을 받아야 하고, 하나님 앞에 참효자 효녀라는 인정을 받아야 됩니다. 그러한 효자 효녀로서 등장하는 대표적인 잔치가 바로 어린양 혼인잔치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천지가 생겨난 후 처음으로 인간이 하나님 앞에 효자가 되고 효녀가 되어 신랑 신부로 등장하는 날, 하나님께서 ‘땅 위의 갖은 역경 가운데서도 하늘의 심정을 찾아오기에, 하늘 부모를 찾아오기에 얼마나 수고했느냐?’고 하시며 무형의 하나님 대신 실체를 갖춘 참부모로 축복해 주는 잔치가 어린양 잔치입니다. 참신부의 약속과 이념을 갖춘 기준과 참효자 효녀의 기준 위에 세워 식을 올리는 것이 어린양 잔치라는 것입니다. 이 축복을 받은 그날부터 참부모가 되는 것입니다. 무형의 하나님을 대신한 유형의 실체를 쓴 인류의 참부모가 되는 거예요.
인간은 원래 타락하지 않았으면 선한 세계에서 잘 자라다가 하나님의 사랑의 축복을 받아 가지고 하나님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자녀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타락으로 인해 그 인연이 끊어졌습니다. 그래서 거꿀잡이로 신부의 과정을 거쳐서 자녀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너희는 내 심정을 대신할 수 있는 효자 효녀다.’ 하실 수 있는 심정의 인연을 완결지어야 되는 것입니다. 심정이 통하지 않는 데 효자 효녀가 될 수 있어요? 하나님의 심정이 어떠한 줄을 알고, 하나님이 어떠한 노정을 허덕여 오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창조이념 앞에 내 세울 수 있는 본연의 아담 해와의 형태를 갖추어야만 됩니다. 어린양 잔치는 그 형태를 갖추는 식입니다.
오늘날 기독교 신도들은 바로 알아야 되겠습니다. 어린양 잔치는 무엇이뇨? 인간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최대의 소망인 신랑 신부의 약속 과정을 거쳐 하나님 앞에 참효자 참효녀의 축복을 받아서 참효자 효녀가 되고, 이 땅의 만인간의 대표자로 세움받고, 효자 효녀의 조상이 되는 잔치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할 수 있는 참효자 효녀로서, 인류의 참부모로서 등장하는 그 의식이 어린양 잔치라는 것입니다. 이 잔치가 벌어지면 가정적인 기준이 세워집니다. 새로운 가정의 기준이 세워진 다음에는 하늘의 주권을 중심삼은 국가와 세계의 기준이 세워져야 됩니다. 그래야 비로소 하늘 앞에 충신의 도를 세워 나갈 수 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모시는 생활입니다. 종교가 아닙니다. 모시는 생활입니다. 임금님을 모시는 것과 같이 하나님을 모시는 것입니다. 그때가 지상천국시대입니다.
우리는 있는 정성을 다 기울여 바라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심정은 어디로 기울어져 있는가? 성경 66권의 최종 밑바닥은 무엇인가? 심정입니다. 심정, 심정이에요. 그 심정이 머물 수 있는 중심은 무엇일 것인가? 천지가 생겨난 후 처음으로 나타나는 신부, 하늘 열녀의 자리입니다. 열녀의 절개를 갖추고 나서는 것, 이것은 첫 단계입니다.
여러분, 6천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왔다 갔습니다. 그 가운데는 남편을 위하여 지성을 다한 사람도 있을 것이며, 신랑을 위하여 별의별 노릇 다 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늘의 열녀의 입장에는 나가지 못하였습니다. 다 사탄세계의 열녀들이었어요. 선과 악이 부딪쳐 싸우는 어느 한 시대의 선한 입장을 대신한 열녀의 기준은 세웠을지 모르지만, 전체 이념세계에서 하나님의 심정이 완전히 통할 수 있는 입장에서 하늘의 열녀로 왔다 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세계적인 열녀를 선출하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갔으니 그것이 ‘나는 신랑이요 너희는 신부’라는 말씀입니다. 세계적인 열녀, 세계적인 열녀를 찾아 세우려 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땅 위에서는 신랑을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바치면 열녀라 합니다. 목숨을 바치는 것, 다 거기에 결부되어 있습니다. 효자도 부모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사람을 말하고, 충신도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나 하늘의 기준은 영원한 생명을 걸어 놓고 충성하고 효도하는 것입니다. 이 고깃덩어리는 죽는 겁니다. 영원한 생명을 걸어놓고, 그것을 몽땅 아버지 것으로, 신랑 것으로, 부모 것으로 드릴 수 있는 자리에서만 천적인 열녀의 기준이 성립됩니다. 내 생명이 움직이고 느끼는 전체를 다 기울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도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다하는 기준은 무엇이냐? 세계의 어떤 충신보다도, 어떤 효자 효녀보다도, 어떤 열녀보다도 더 나아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위신이 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제까지 사탄세계에도 충신 열녀가 그렇게 많았는데, 그 사탄세계의 충신 열녀의 기준과 같은 기준을 세운 사람을 하늘이 충신 열녀로 세우면 하나님의 위신이 서지 않는다는 겁니다. 하물며 사탄세계의 충신 열녀보다 못한 사람을 하늘의 충신으로 열녀로 세우겠어요?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도 그 누구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역사적인 그 누구보다도, 옛날 그 어떤 선조보다도, 그 시대의 어떤 훌륭한 사람보다도, 그 누구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라 하셨던 것입니다. 이 누구라는 것은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적인 환경 속의 사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라는 말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그 누구보다도 더 사랑하라는 말인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정성을 다 기울이는 신부가 오늘날 전세계 기독교 신자 가운데서 나와야 됩니다.
기도를 해도 옛날의 그 어느 누구보다 더 많이 해야 되고, 정성을 들여도 그 어느 누구보다 더 많이 들여야 됩니다. 정성을 많이 들인 열녀, 6천년 동안 열녀의 전람회가 있다 할진대 거기에 있는 모든 열녀가 머리 숙일 수 있는 권위를 가져야 됩니다. 영계에 있는 열녀에게서마저도 ‘당신이 정성을 들이는 신부의 절개를 천추에 길이 찬양할 것이오.’ 하는 말을 들어야 합니다. 또 그런 공인을 받아야 됩니다. 그러한 신부라야 하늘이 사탄세계 앞에 세워 자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처럼 그냥 믿으면 천당 가는 줄 알고, 예배당에 가서 찬송이나 부르고 연보(捐補)나 조금 하며 왔다갔다하면, 또 목사 장로만 되면 다 되는 줄 알지만 천만부당한 일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바로는 그렇지 않아요.
그러면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한다는, 그러한 한계는 어디일 것인가? 지금까지 왔다 간 수많은 열녀들이 말없이 높여 줄 수 있는 그런 충성어린 신부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표준입니다. 만일 신랑 되신 예수 앞에 그런 진정한 신부가 나왔던들 이 세계에 벌써 하늘의 뜻이 다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오늘날까지 끌어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일에 그러한 분이 나온다 할진대 세상에 아무리 악이 성해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의 심정을 통하여 들어오는 선의 강도가 그 악의 강도보다 몇 배 이상 강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악한 세상이라도 괜찮습니다. 그런 심정의 기반에 흘러 들어오는, 선을 지향하는 힘은 사탄세계의 악 같은 것은 문제도 되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오늘날까지 인간세계에는 하나님의 심정과 더불어 무한한 선의 지향력을 폭발시켜 줄 수 있는 원천이 생겨나지 않았기 때문에 신랑 되신 예수는 이 땅 위에 오시지 못한 것입니다. 만일 그러한 신부가 이 땅 위에 나타나면 예수님은 하늘 보좌를 내버리고 땅으로 뛰쳐 내려오고 싶어하실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2천년 동안 영계에서 기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 심정을 통한 힘, 즉 악에 대한 공포의 마음이 아닌 심정을 통하여 우러나는 선을 중심삼은 강렬한 힘, 강한 천적인 힘이 오늘날 인류세계에 일면으로라도 들어온다 할진대 세계는 그 앞에 정복될 것입니다. 그래야만 악을 갈라 세우고, 악을 소화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악을 소화시킬 수 있는 선, 악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서 악을 삼켜버릴 수 있는 선, 심정적으로 폭발되어 우러나는 천적인 선의 역사가 벌어져야 됩니다. 이러한 역사를 전개시킬 수 있는 시기가 인간이 바라온 재림 이후의 시기입니다.
부부의 심정은 상대적인 것입니다. 부모의 심정을 줄기에 비유한다면 부부의 심정은 잎과 같고, 충신의 심정은 뿌리와 같습니다. 이것이 모두 한 생명권에서 움직여야만 하나의 완성체를 갖출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귀노정을 거쳐 나가는 이 마당에 우리가 신랑 되신 예수님을 사모하는 데 있어서 상대적인 심정만으로 사모해서는 안 됩니다. 줄기를 거쳐서 뿌리까지 연결돼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도 개인적인 상대를 갖춘 후 가정을 이루어 세계와 연결해야 됩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뿌리와 같은 것이 하나님의 심정이요, 그 하나님을 향하여 정성을 기울이고 충성을 다하는 것이나 부모를 대해 충성을 다하는 것은 줄기를 이루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래야 완전히 연결되는 것입니다. 상대적인 심정은 잎과 마찬가지입니다. 은혜를 받는 것은 한때입니다, 한때예요. 여러분, 그런가 안 그런가 보세요. 은혜 받았다고 좋아하고, 뭐 어떻고 저떻고 하다가는 얼마 안 가서 떨어져 버립니다. 줄기가 못 돼요.
만일 이 땅 위에 신랑 신부의 심정을 지니고 참부모 앞에 참아들딸의 심정을 연결시킨 자가 있었다 할진대 오늘날 이 땅은 이렇게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세계에서는 한번 은혜를 받으면 그만입니다. 그 심정에 한번 접하면 암만 떼어버리려 해도 떼어버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를 만난 후에 바울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했지요. ‘우리 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누가 나를 끊으리요? 적신이나 칼이나 기근이랴’고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끝날인 이때에 있어서는 여러분들 자신이 문제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여러분 자신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생사의 의식을 잊어버리고, 죽고 사는 것을 문제시하지 않고 달음질칠 수 있는 사무친 심정이 여러분에게 있느냐? 이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그러한 길을 가는데 하물며 하늘 길을 가는 여러분에게 그러한 마음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이 그런 마음에 사무쳐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기독교인들도 ‘오, 주여!’ 하다가 주님이 나타났다 하면 목이 부러지고 다리가 부러진다 해도 그것을 개의치 않고 주님을 향하여 달려가려 하는데, 여러분에게도 이런 사무친 심정이 있느냐? 이것만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잘 아는 것도, 무슨 학 박사가 되는 것도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만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 기준을 거치기 전에는 참효자가 될 수 없고, 참효녀가 될 수 없고, 참충신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효자 효녀라는 말이 있고, 충성한 남자를 충신이라고 하는 말은 있는데 충성한 여자는 뭐라고 할까 하고 말입니다. 충성한 여자를 가리키는 마땅한 말이 없어요. 열녀라는 말은 있지만…. 효자 효녀란 말이 있다면 앞으로 ‘충남(忠男)’이란 말과 ‘충녀(忠女)’라는 말이 있어야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또 왜 열녀만 있고 ‘열남(烈男)’은 없느냐는 것입니다. 하늘이 바라는 것은 충신뿐만이 아닙니다. 하늘은 충신 된 남자를 바라시는 동시에 충신 된 여자도 바라십니다. 여기에서 효자 효녀가 중심입니다. 이 효자 효녀가 하늘을 향하는 첫 발판입니다. 신랑 신부는 두 번째 단계입니다. 동양에 삼강오륜이 있는데 이것은 복귀섭리의 뜻에 제일 가까운 거리에 있습니다.
그러면 앞으로 하나님이 축복하시고 하나님이 사랑하실 수 있는 나라는 어떤 나라일 것이냐? 열녀만 사는 나라가 아닙니다. 열남도 사는 나라인 것입니다. 세상에 그런 모순된 일이 어디 있어요? 열녀만 되라는 법이 어디 있어요? 열남도 되어야 합니다. 앞으로는 남자의 절개를 존중히 여기는 때가 옵니다. 남자도 절개를 지켜야 돼요.
대창조의 원칙이 이렇게 혼란되게 안 되어 있습니다. 남자를 플러스라 하면 그 플러스는 절대적인 것입니다. 절대적이라서 열남이라는 명사가 없다면 잘 된 일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절대적인 열남으로서 2천년 동안 하나님 앞에 절개를 지켜 나오셨습니다. 그러니 2천년 동안 절개를 지켜 나온 그 심정 앞에 설 수 있는 열녀의 심정도 역시 마찬가지여야 됩니다.
오늘날 이 땅 위에는 하나님이 축복하여 주실 수 있는 열녀도 없고, 열남도 없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다시 오셔야 됩니다. 하늘이 축복해 주실 수 있는 효자 효녀가 없습니다. 이는 어린양 잔치가 끝나야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지요. 또 하나님이 축복해 줄 수 있는 충신 충녀가 없습니다. 예수가 주권을 잡는 세계가 되어야 됩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하나님이 바라시는 최고의 소망입니다.
이런 소망대로 되어져서 하나님이 참다운 효자 효녀, 참다운 충신 열녀들을 세워 놓고 그들 앞에 6천년 동안 심정적으로 엉클어진 모든 원한과 모든 회포를 다 풀어 놓고 ‘얘들아, 내 원수를 갚아다오.’ 할 수 있는 그 시간이 하나님의 뜻이 완결될 수 있는 시간입니다. 그 시간부터 심판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의 공인을 받은 충신이 아니고는 그 앞에서 사탄이 심판을 받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늘의 공인을 받은 효자 효녀가 아니고서는 사탄을 심판할 수 없고, 하늘의 공인을 받은 열남 열녀가 아니고는 사탄을 심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한다고? 말은 좋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더불어’라는 말에는 6천년의 곡절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역사와 더불어 나오셨습니다. 예수님도 2천년 동안 이 역사와 더불어 나오셨습니다. 그 심정에는 피의 곡절이 사무쳐 있어요.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심정이 통하지 않는 신부는 쓸데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들은 궐기해 나섰습니다. 남이 아니라 하는 길을 나선 목적이 어디 있습니까? 정성을 다 기울여 하나님의 해원을 성사해 드리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기도합니다. ‘이 땅 위에 하늘의 충신이 없사오니 충신이 되게 하시옵소서. 효자가 없사오니 효자가 되게 하시옵소서. 열남이 없사오니 열남이 되게 하시옵소서.’라고. 하나님도 통쾌해 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효자가 되고 충신이 되고 열녀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될 것이뇨? 하나님의 심정을 알지 않으면 안 됩니다. 심정을 알기 전에는 안 됩니다.
예수는 끝날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날과 그때는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 때에나 알 수 있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알고 넘어가야 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모든 심정에 대한 문제를 알 수 있겠나 하는 마음 가지고 백날 기도해 보십시오. 백날 천날 기도해 보라구요. 죽어서 천당 가나. 절대로 갈 수 없습니다. 내 말이 거짓말인가 죽어 보란 말입니다. 별의별 정성을 다 들여 보십시오. 하나님은 행차하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상으로부터 하늘세계를 움직여 낼 수 있는, 심정을 통할 수 있는 한 장의 편지가 날아드는 날에는 하나님이 행차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심정을 배반한 타락한 후손입니다. 여러분, 우리조상이 무엇을 배반한 줄 알아요? 따먹지 말라는 선악과 하나 따먹은 것인 줄 아세요? 천만에요. 심정을 배반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배반했어요. 문제는 거기에 있습니다. 무슨 심정을 배반했느냐? 창조이상의 심정, 소망의 심정을 배반한 것입니다.
여러분, 은혜를 받는 목적이 어디에 있는 줄 압니까? 은혜 속에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하나님의 심정이 체휼되더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배우지 않고도 심정으로 해명할 수 있는 자리에 들어가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그 목적은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효자 효녀니 열녀니 충신이니 하는 사람들 가운데 얼렁뚱땅 적당히 하고도 된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목이 달아나고 생명이 끊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부모를 위한 심정을 안 놓겠다고 한 사람들입니다. 하늘 앞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기에 오늘날 우리들은 궐기해 나섰습니다. 여러분은 욕먹는 이 스승을 따라 나섰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이 지상의 원수 앞에서 희생이 되고 죽더라도 하늘의 충신의 절개를 남기는 것입니다. 효자의 절개를 남기고 싶은 것입니다. 열녀의 절개를 남기고 싶은 것입니다. 만일 이 기준에 서서 ‘하나님이시여! 당신은 나의 아버지시요, 당신은 나의 주인이시요, 당신은 나의 신랑이십니다’ 하고 심정적으로 나서는 자가 있다 할진대 이를 심판할 자가 없고, 이를 주관할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요전 부활 주일날 ‘심정 부활의 날’을 선포한 것을 여러분이 잘 알고 있습니다. 성경은 잘 몰라도 됩니다. 아버지 어머니에 대하여 무슨 설명이 필요합니까? 그러나 설명보다도 더 앞서는 심정, 어떤 설명도 거부할 수 있는 심정은 있어야 됩니다.
그러한 심정의 엉클어짐이 하늘과 더불어 인연되지 않는다 할진대 여러분들은 심판대를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앞으로 오시는 주님을 만날 때 그러한 마음의 작용, 제지하려야 제지할 수 없이 폭발되어 우러나오는 이런 마음의 느낌을 못 느낀다 할진대 심판의 고개를 못 넘어갑니다. 절대 못 넘어가요.
하나님께서 인간 타락 이후 6천년 동안 이 역사를 끌고 나오시는 최후의 목적은 무엇이냐? 하늘땅을 걸어 놓고 축복해 줄 수 있는 아들딸을 찾는 것이요, 충신을 찾는 것이요, 열녀를 찾는 것입니다. 이 역사는 땅 위의 어느 한 지역을 중심삼고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심정을 통하여 하늘 대신 선포하는 말에 천상이 움직일 것입니다. 그 말이 참다운 양심을 가진 사람들의 마음에 전파되면 그들의 마음이 격동할 것이요, 그 움직임이 이 땅 위에 벌어지는 날에는 사탄세계는 붕괴될 것입니다.
오늘날 이런 목표 밑에서 세계를 향하여, 천지를 향하여 봉화를 든 여러분들,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라는 어마어마한 간판을 내건 이상 이 한 시대에 쓰러져서는 절대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심정을 꿰뚫어 가지고, 개인을 통하고, 가정을 통하고, 사회를 통하고, 세계를 통하여 천주로 갈 수 있는 내용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러지 못할진대 간판을 떼어버려야 됩니다. 여기서 외치는 사람도 그런 놀음은 안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여러분이 따르고 있는, 여기 선 이 선생은 일생의 목표를 이 길을 돌파하는 데 두고 있습니다. 물론 나 혼자라도 돌파해야 되지만 몇 사람과 더불어 돌파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늘 앞에 각오하고 나선 걸음이니 구경꾼 모양으로 믿으려는 사람은 오지 마십시오. 생사지경을 각오해야 합니다. 나는 이미 그러한 고비를 몇 번이나 넘었습니다. 여러분,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나는 보이지 않은 무형세계에서 투전판의 도박꾼처럼 생명을 걸어 놓고 뒤넘이치는 싸움을 수없이 했습니다. 사탄이 이 땅을 침범한 그날부터 싸움이 전개되었으니, 우리는 영적 세계의 싸움에서부터 육적 세계의 싸움까지 수습하겠다는 책임감을 가져야 하고, 또 수습할 수 있는 내용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절대 수습이 안 됩니다.
여러분, 기도할 때 혹 사탄들이 와서 참소하면 심정적인 참아들딸이 기도하는데 이게 웬 말이냐? 하고 호통을 치십시오. 그러면 물러갈 것입니다. 거짓인가 사실인가 해보십시오.
우리의 목표는 신랑 신부의 문을 헤치고 들어가 효자 효녀가 되자는 것입니다. 효자 효녀의 문을 헤치고 들어가 충신이 되자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싸워야 되겠습니다. 원수를 갚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이 용납할 수 없는 원수가 지상을 유린하고 있으니 우리가 지상을 정복해야 되겠습니다. 그렇다고 칼이나 총을 가지고 싸우자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를 가지고 가는 곳곳마다 심정을 갈망하는 사람은 넘어올 것입니다. 하늘을 위하여 충신이 되고 싶고, 하늘을 위하여 효자 효녀가 되고 싶고, 하늘을 위하여 열녀가 되고 싶어하는 마음을 가진 자는 불어나게 될 것입니다. 불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혈족을 초월하고 동서양을 초월하여 틀림없이 불어날 것입니다. 자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전세계를 대하여 싸워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사랑과 영원한 생명의 내재적인 주체로 계시니 여러분이 그 사랑에 접하고, 그 심정에 사무쳐 있을 때에는 어디 가서 부흥회도 얼마든지 인도할 수 있습니다. 준비가 필요치 않아요. 자식을 사랑하는 진정한 참부모라면 자식에게 권고할 말은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 사망의 자리에 들어간 자식을 구하겠다는 심정에 사무친 부모라 할진대 그 자식에게 권고할 말은 얼마든지 있다는 것입니다. 또 그 마음을 아는 자식이라면 부모가 한마디만 해도 다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많은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꿰어 연결시킬 수 있는 것은 말씀이 아니라 심정입니다. 나는 알파요 오메가라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아요? 성경이 알파와 오메가로 되어 있어요? 창세기에서부터 요한계시록까지 66권의 한 장 한 장이 전부 다 다른데 알파와 오메가가 될 수 있느냐 말예요. 그것은 심정을 걸어 놓고 하는 말입니다. 심정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냥 그대로 영존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생명의 근본입니다.
우리는 이 심정을 품고 신랑 신부의 자리를 거쳐 효자 효녀의 자리, 충신 충녀의 자리까지 나아가야만 됩니다. 그러한 자리에 들어가게 되면 천상천하 어디를 가든지 그 사람은 굶어 죽는 법이 없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이렇게 한푼 없이 살고 있지만 밥 굶어 본 적이 없습니다. 몰려서 옥중에 들어가 있을 때에도 어떤 사람을 시켜서라도 밥을 갖다 주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 있는 힘을 다 기울이고 피땀 흘리며 기도하고 나서 ‘아이고 아버지, 오늘 내가 은혜 되는 기도를 하였습니다.’ 하는 마음을 가지면 안 됩니다. 정성을 다하고 나서도 ‘나 이제 이만하면 되겠지.’ 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갈수록 은혜가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언제나 죄인된 자기 자신을 회고하고 역사적인 범죄상을 느끼는 그런 입장에 서야 됩니다. 자기가 잘났다고 뻗대는 사람은 선한 심정을 갖고 나오는 사람, 진정한 심정을 갖고 나오는 사람 앞에 머리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있는 정성을 다 들이고 충성의 심정을 갖고 나오는 사람 앞에는 하나님도 머리 숙이신다는 것입니다. 참효자 앞에는 부모도 머리 숙인다는 것입니다. 참신부 앞에는 신랑도 머리 숙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믿고 뭐 이랬으니’ 하며 뻗대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자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탄세계에 대해서는 당당할 자신이 있습니다. 우리 통일신도들은 소망으로 쌓은 제단 앞에 제사를 드리고 나서도 부족했음을 깨닫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런 자세가 하늘 백성이 취할 자세입니다. 정성을 다 들이고 나서도 ‘아이고, 이런 것은 이렇게 했으면 좋았을 걸’ 하는 뉘우침과 깨달음이 없는 사람은 거기서 밀려납니다. 깊은 하나님의 심정의 세계는 못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정의 문을 열고 천상천하의 모든 보화를 움직여 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뉘우침과 깨달음이 있는 아들딸이 이 땅 위에 나타나기를 고대하십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계신다면 그럴 것인가 안 그럴 것인가 하고 말입니다.
6천년 동안 찾아 나오신 하나님의 최고의 목적이 어디에 있느뇨? 하늘 주권의 나라를 세운 후 그 백성을 대하여 충신의 도리를 가르쳐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늘나라에 가 보세요. 이런 사람이 충신이니 이렇게 가라고 가르쳐 주는 어떤 무엇이 없습니다. 이렇게 이렇게 하면 틀림없이 하늘의 충신이 된다고 가르쳐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늘이 세우고자 하시는 나라는 이러이러한 나라이니 원수들은 이렇게 굴복시켜야 된다고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충신의 교훈을 받았어요? 받지 못했어요. 하나님의 가정은 이래야 되니 하나님을 대신할 참부모를 모시는 참효자 효녀가 되려면 이렇게 해야 된다는 효자 효녀의 교훈을 받았어요? 못 받았습니다. 더 나아가서 ‘너는 이러이러해야 내 사랑하는 신부라고 하늘땅 앞에 선포할 수 있다’ 하는 신랑 신부의 교훈을 받았습니까? 못 받았습니다. 성경이 이런 것 가르쳐 줍니까?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가야 할 길이 이러한 길일진대 생사를 개의치 않고 이런 길을 타파해야 합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생의 운명이라 할진대 우리는 어이 해야 할 것인가? 희희낙락하며 오늘을 즐길 수 없습니다. 그럴 수 있는 인생이 못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즐거워하며 오늘 한 시간을 보내 버리면 우리의 후손들이 주먹을 부르쥐고 땅을 치며 심판대를 두려워하고 탄식할 것입니다. 그것이 염려되거든 오늘 한 시간의 편안한 자리를 피하여 천상의 심정이 어디에 있는가 하고 그것을 알기 위해 허덕여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2천년 동안 믿고 왔던 역사가 세워준 훌륭한 예수 말고, 요셉가정에서 목수의 아들로 자라던 예수의 심정, 3년 공생애노정에서 바리새교인들에게 핍박받던 예수의 심정, 이스라엘 민족에게 몰리던 예수의 심정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예수의 그 심정을 아십니까? 예수를 팔아먹은 작자는 3년 동안 예수를 따라다니던 제자들이었습니다. 같이 먹고 살고 했으면서도 스승을 팔아먹은 배반의 사도가 된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하고, 배반당한 예수의 심정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전세계의 기독교는 혁명이 문제가 아닙니다. 뒤집어엎어야 됩니다. 근본적으로 뒤집어엎어야 돼요. 인륜으로 안 되면 천륜을 의지해서라도 뒤엎어야 됩니다. 그리하여 정상적인 궤도에 올려놓지 않으면 안 될 어마어마한 시기에 우리는 당도해 있습니다.
쫓기던 예수의 심정, 베다니에서 배가 고파 헤매다가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던(막 11:12) 예수의 심정,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눅 12:50)고 탄식하시던 예수의 심정, ‘아버지여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나에게서 피하게 하시옵소서.’ 하시던 예수의 심정을, 여러분 압니까? 벙실벙실 웃으면서 그런 말을 하신 줄 압니까? 천만에요. 눈물을 삭이면서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4천년 수고하여 보낸 예수를 대하여 시험이 웬 말입니까? 시험하던 그들에게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하시던 예수님의 심정을 압니까? 알아요? 알 것도 같지만 도무지 모를 내용으로 움직인 예수의 생애를 여러분은 이해하겠습니까? 막달라 마리아가 총각인 예수의 발에다 향유를 붓고 머리로 씻어 주었는데, 그거 공인한 사람 손들어 보세요. ‘오, 할렐루야 아멘.’ 하며 칭찬한 사람 손 들어 봐요. 복통할 예수의 생애였습니다.
역사를 거쳐오면서 추앙을 받으시는 예수로만 알았지, 밟히고 쫓김 당하던 예수, 십자가상에서 못 박히던 예수, 민족의 반역자로 몰림을 받던 예수의 심정은 몰랐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민족의 반역자요, 교단과 사회질서의 파괴자요, 광란자라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안 그랬어요? 그러면 여러분은 ‘어찌하여 당신은 그렇게 오셨다가 그렇게 가셨습니까?’ ‘내가 차라리 예수가 걸쳤던 옷이라도 되었던들, 그가 혼자 하시는 말씀 한마디라도 들을 수 있었을 걸’ 하는 생각이라도 해 보았습니까? 아니면 ‘예수가 쉴 수 있는 방석이라도 되었던들 피곤한 예수의 내적 심정을 느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라도 해보셨어요?
막대기만도 못하고, 풀 한 포기만도 못하고, 바위돌만도 못한 베드로, 요한, 야고보, 열두 제자들, 할 짓 다 하다가 죽여 놓고 뭐 이러고 저러고…. 나는 영계에 가더라도 바울이나 베드로를 대해서 선생이라고 못 할 것 같습니다. 만나면 ‘왜 예수를 십자가에 달리시게 했는가?’ 하고 따지면서 멱살을 잡고 싶은 심정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여러분들은 오해할 것입니다. 뭐 이왕에 이단이란 말을 듣고 있으니 좋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사실대로 흐르고, 하늘은 정의의 법도대로 이끌어 나오시는 것입니다.
여기에 모인 여러분들, 바람에 흔들리는 예수꾼이란 말은 듣지 말자는 것입니다. 하늘은 세례 요한을 보고 탄식하셨습니다. 예수도 “너희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마 11:17) ‘30년을 광야에서 메뚜기와 석청으로 준비한 꼬락서니가 그 꼴이냐.’ 하시며 탄식하셨습니다.
우리는 말할 수 없는 죄인들입니다. 하늘땅을 눈물로 채우고 회개해도 다 회개할 도리가 없는, 용서받을 길을 찾으려야 찾을 수 없는 죄인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죄인들에게 용서받을 길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복귀의 심정을 가지신 하나님의 구원섭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걸 아시고 이제부터 옛날의 아담한테 배척을 받던 하나님을 붙들고 울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은 타락한 아담가정을 바라보고 통분해 하시던 하나님을 향해 ‘내 아버지여! 어디 계십니까?’ 하며 울어보았습니까? 1600년을 거쳐 노아를 세우시고 그로 하여금 있는 정성, 있는 수고를 다하여 방주를 짓게 하셨지만 함의 실수로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한 채 한없이 슬퍼하신 그 하나님을 붙들고 여러분, 울어 보았어요? 바로 궁중에서 모세를 찾아 세우신 후 택한 이스라엘 백성을 수습하여 홍해를 건너게 하고 광야까지 끌고 나오게 했지만, 불신하는 그 백성들을 이끌어 내기 위하여 갖은 수모를 당하시던 하나님의 심정을 알아보았어요? 천신만고 끝에 축복의 땅 가나안으로 들여보내려 하셨으나 모세까지 쓰러지는 것을 바라보시던 하나님의 심정을 알아보셨어요? 나아가 4천년 동안 수많은 선지선 열들을 통하여 보내 주마고 약속한, 역사적인 소망의 주체요, 섭리적인 목적체인 메시아를 이 땅에 보냈는데 잡아죽였어요. 그렇게 죽임을 당하는 예수를 바라보시던 하나님의 심정을 알아보았어요?
심정을 통해야 갈 수 있는 곳이 천국입니다. 예수도 낙원에 가 있습니다. 낙원이 뭔지 압니까? 대합실입니다. 천국 열차를 기다리는 대합실이에요. 땅 위에서 심정문제를 완결짓는 것이 이 땅에 온 예수의 책임이었는데, 그 책임을 완결짓지 못하고 갔으니 다시 와서 그 책임을 완결지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낙원 문을 철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 문을 열어 놓아야 사탄세계가 굴복됩니다.
지상에서 마음의 천국을 완성하지 못한 자가 천상의 천국을 이룰 수 없습니다. 지상에서 심정적인 영원한 안식의 복지를 찾지 못한 사람이 천상의 영원한 복지를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심정적인 안식의 복지를 찾았어요? 여러분은 다 그 복지를 찾지 못한 채 고아와 같이 허덕이는 무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정을 걸어 놓고 볼 때 여러분의 심정은 위치가 없습니다. 위치가 없으니 가치도 없는 것입니다. 가치 없는 존재 앞에 세계가 어떻게 인연이 되겠습니까?
그러니 참다운 열남 열녀로서, 참다운 효자 효녀로서, 참다운 충남 충녀로서 하늘의 심정을 대신하여 생애의 이념을 즐길 수 있는 무리가 나와 그들이 이 땅에 선의 아들딸을 번식해야 됩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 해와를 축복해 준 것이 사탄세계에서 죄악의 자식들을 번식하라는 것이었습니까? 아니었습니다. 충신의 절개, 효자 효녀의 절개, 열녀의 절개를 가진 아들딸을 번식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태어나는 제2의 충신과 효자 효녀를 하나님은 그리워하십니다. 그런 아들딸이 나오지 않으면 이 땅은 영원히 사탄의 것이 됩니다.
그러면 왜 사탄세계의 아들딸은 하나님이 영원한 내 아들딸이라고 입증할 수 없느냐? 심정적인 인연이 완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정이 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고 은혜를 받아 주 앞에 기도할 때에 내가 몸 안에 있는지 몸 밖에 있는지 모르겠다는 느낌이 있어야 됩니다. 그 자리에서 영원히 비켜나고 싶지 않은 심정의 세계를 체험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품에 안기면 아버지와 같고 어머니와 같은 느낌을 느껴야 됩니다.
충신 충녀라면 하나님이 위신을 잊어버리고 그의 목을 안고 통곡할 수 있는 자리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생사지경에서 승리하여 사탄세계를 굴복시키고 하나님의 승리의 발판을 닦아 나오는 충신이 있다면, 하나님이 그에 대해서 ‘나는 왕이고 너는 신하인데’ 하는 감정을 가지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위신을 잊어버리고 그의 손을 잡고 기쁨의 눈물로 통곡하시며 ‘천상천하의 온 만상이 네 것이다. 네가 기뻐하면 나도 기뻐할 것이다.’ 하며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이럴 수 있는 아들딸이 이 땅 위에 나와야만 천지가 뒤집힐 것입니다. 그런 곳이 이 땅 위에 생겨난다 할진대 그곳은 앞으로 세계의 중심지가 될 것이요, 그런 민족이 나온다 할진대 그 민족은 앞으로 세계를 지배할 것입니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하늘은 그런 민족을 먼저 슬픔의 자리에 몰아넣습니다. 고통의 자리에 몰아넣습니다. 역사적인 역경의 자리에 틀어넣는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고통의 보따리를 다 짊어지고 찾아오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계적인 고통이 우거하는 그 자리는 하나님의 고통의 짐 보따리를 풀어 청산할 자리요, 새로운 터전을 개척할 자리일 것입니다.
오늘날 한민족을 세계적으로 제일 불쌍한 민족이라고 하지만, 나는 한민족에게 제일의 소망을 걸고 있습니다. 민주세계와 공산세계가 대치하고 있지만 이 민족은 불쌍한 민족이 아닙니다. 몇 해만 두고 보세요. 한민족은 절대 불쌍한 민족이 아니에요. 천적인 움직임이 있다 할진대 이 민족은 삽니다. 역사는 이 민족의 역사요, 세계는 이 민족의 세계가 되고 말 것입니다. 이것은 내 말이 아닙니다. 알고 보니 그렇게 돼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역사의 뒤를 따라오시는 하나님의 해원성사는 슬픔의 뒷골목에서부터 이루어 나왔습니다. 거기에서부터 기쁨의 터전이 세워져 나왔고 발판이 닦여져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은 지금 세계에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현재 전세계 기독교계의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통일교회가 세계적인 문제로 대두될 것입니다. 자랑이 아닙니다. 두고 보십시오. 기도하는 사람은 알 것입니다. 영통한 사람은 증거합니다. 안 하면 천상법에 걸립니다.
그러니만큼 여기에 모인 여러분들도 앞으로 단단히 각오해야 됩니다. 이러다 말면 안 됩니다. 우리 앞에 어떠한 핍박이 있어도 문제시하지 않겠다는 신념을 가져야 됩니다. 단지 하나, 우리가 쓰러지는 한이 있다 해도 천적으로 세우고자 하는 충효의 전통은 세워야 합니다. 충남 충녀의 전통, 열남 열녀의 전통, 효자 효녀의 전통만 세워 놓으면 통일교회는 사명을 다하는 것입니다.
전통을 세우는 데도 이렇게 이렇게 하면 이렇게 된다고 해명할 수 있는 전통, 이럴 수도 있다가 아니라 ‘이렇다’ 하는 공식적인 전통을 세워야 되는 것입니다. 심정이 그리워 헤매는 인류는 어차피 이 전통의 문을 거쳐야 됩니다. 아무리 배반하고 반대하더라도 이 문을 안 거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람은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또 그렇게 실천하고 있습니다. 여기 모인 여러분도 그렇다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인정할 수 없거든 모두 가십시오. 거짓말이라고 생각되면 가란 말입니다. 방해가 됩니다.
우리는 눈물을 흘려야 하겠습니다. 그 심정이 체휼되지 않거든 눈물을 흘려야 되겠습니다. 그 심정이 체휼되지 않으면 밤을 새워 기도를 해야 되겠습니다. 금식을 해 가면서라도 기도를 해야 되겠습니다. 그런 심정을 가진 자만이 최후의 승리를 거둘 것이요, 최후의 심판에서 남아질 것입니다. 그런 여러분이 된다 할진대 하나님은 여러분을 통하여 안식의 자리를 닦을 것이요, 세계는 여러분에 의해 움직일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느끼고 알았다 할진대 여러분은 이제 28억 인류 앞에 할 말이 있어야 됩니다.
이제 하늘의 충신이 되려면 하늘의 원수를 갚아야 됩니다. 효자가 되려면 부모의 원수를 두고는 될 수 없으니 원수를 없애야 됩니다. 열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원수를 갚는 날까지 영원한 생명을 걸고 각오하고 나가지 않으면, 싸우지 않으면 여러분은 타락의 한스러운 고개를 넘을 수 없습니다. 이 고개를 넘어야만 비로소 하나님이 모든 슬픈 심정을 풀어 놓으시고 여러분에게 6천년 동안 고대하던 충신아, 효자야, 열녀야 하시며 쌍수를 들어 축복해 주실 것이며, 삼위신은 안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심정 기준이 해결되기 전에는 안식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알고 오늘 이 땅 위에 있는 여러분 한 자체가 얼마나 귀하다는 것을 이 저녁 느끼기 바랍니다.
아버지, 아버지라고 부르기에 황공한 저희들임을 알았사옵니다. 아버지도 여러 종류의 아버지가 있습니다. 남의 아버지도 있고, 의붓아버지도 있고, 원수의 아버지도 있사옵니다. 저희들은 이러한 아버지를 원치 않사옵고 참아버지를 원하옵니다.
그 아버지의 심정을 통할 수 있다 할진대 많은 기도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아옵니다. ‘아버지!’ 하면 그것이 전부요, 그것이 모두의 심정이 통할 수 있는 것을 아옵니다. 그 자리에서는 감사하는 마음과 황공한 마음에 어리어 온 만물을 기쁨과 서글픔의 교차점에서 붙안고 바라보고 위로할 수 있음도 알았사옵니다. ‘아버지’라는 말이 이렇게 놀라운 명사인 것을 알았사옵니다. 하오나 아버지! 이름만 부르는 아들딸들이 되지 말고 심정적으로 체휼한 아버지를 붙드는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가 무슨 인연이 있기에 여기에 모여 이렇게 말을 하고 말을 듣게 되었습니까? 복귀의 한스러운 노정에서 허덕이던 발자취를 멈추지 못한 연고로 저희들은 오늘도 이 자리에 모여 이런 말을 듣고 있사옵니다. 이것은 저희들이 소원해서 된 것이 아니라 배후에서 무한히 수고하신 하늘의 노력으로 말미암아 되어졌음을 저희들이 잊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저희의 마음은 스스로의 창조적인 의식에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피동적인 입장에서 움직이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저희가 이렇게 움직이지 않으면 편안하지 못한 것은, 저희가 이런 자리에 있게 된 것은 편안하지 못한 자리를 피하게 하시기 위해 하늘이 고통 가운데서도 저희에게 사랑의 손길을 가해 주셨기 때문임을 알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 여기에 모인 당신의 아들딸들은 이미 각오하였습니다. 저희들의 붉은 심정을 아버지 앞에 다 바치고 어떤 보수나 보응을 고대하지 않고 충절만을 갖추어 아버지께 모든 것을 드리고 싶은 마음을 갖기 위하여 모였사오니, 이 마음을 당신이 취하시어 만천하에 자랑하시고 당신 마음대로 하시옵소서. 할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저녁 이 자리에 참석하지 못한 사람도 있사옵고, 외로운 자리에서 눈물지으며 호소하는 당신의 아들딸도 많사옵니다. 그들은 당신이 붙들어 주시지 않으면 불쌍한 자들이오니 친히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끝날에 남기신 슬픔의 발자국을 메우고, 아버지께서 심정을 붙들고 위로해 주실 수 있는 기쁨의 동반자가 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나이다.
모든 것을 맡기오니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드린 말씀이 이들의 생명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축복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면서,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허락하신 이 시간 위에 아버님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하늘과 땅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생사의 결판을 지으려 하는 이때이니, 아버님,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심정의 중심을 잃어버린 인간이옵고, 마음의 중심을 잃어버린 인간이옵고, 몸의 중심을 잃어버린 인간이옵고, 생활과 사회와 국가와 세계와 천륜의 중심을 잃어버린 인간이옵니다. 아버님, 이와 같이 한스러운 자신들인 것을 이 시간 느끼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도 살기 위해 허덕이고 있는 인간들이 얼마나 불쌍합니까? 그 무엇을 쥐었다고 자랑하고 있으나 그것도 잃어버려야 할 것이요, 자기 개체의 권한을 노래하고 영광을 자랑하고 있으나 그것도 잃어버려야 할 것입니다. 인간은 마음으로는 자기의 가치가 무한히 크다는 것을 수긍하지만 자기의 참된 가치를 잃어버린 자리에서 그 가치를 그리워하며 살아야 하는 처참한 자리에 놓여 있습니다. 이러한 저희인 것을 아버님은 너무나 잘 아십니다.
잃어버린 것을 찾기 위해 아버님도 수고하셨사옵고, 저희들도 수고하였습니다. 잃어버린 말씀이 그리워서 허덕여 나왔사오나 저희들은 그 말씀을 찾지 못하였사옵니다. 잃어버린 사람을 찾기 위하여 허덕였사오나 그 사람을 찾지 못하였사옵니다. 그 한 사람을 찾지 못하였기 때문에, 하나의 몸과 하나의 마음과 하나의 심정의 기준을 찾지 못하였습니다. 그런고로 당신과 더불어 살 수 있는 하나의 가정을 찾지 못하였사옵고, 그런 가정을 찾지 못한 연고로 그런 사회와 국가와 세계는 간 곳이 없고, 당신의 서러움을 재촉하기만 하는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아버님, 어찌 이것을 통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나의 아버님, 얼마나 서러우셨습니까? 나의 아버님, 얼마나 슬프셨습니까? 나의 아버님, 얼마나 통탄스러우셨습니까? 불초한 저희들, 당신의 염려의 일편(一片)을 제하고, 슬픔을 제하고 기쁨을 보태 드리기 위하여 모여야 할 것이온데, 이 날도 오히려 아버님께 슬픔을 가해 드리는 처참한 자리에 있사옵니다.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은 사랑이요 영광과 인내의 표상이라 하였사옵니다. 땅 위의 좋은 명사, 나쁜 명사를 다 짊어진 당신임을 알기에 저희는 슬퍼도 당신이요, 좋아도 당신이요, 어려워도 당신이요, 기뻐도 당신이었사옵니다. 그와 같은 자리에서 친구가 되고 부모가 되어 주어야 할 아버님의 서러움을 아는 사람이 이 땅 위에 없습니다. 아버지의 그 서러움을 아는 참다운 효자가 없사옵고, 참다운 효녀가 없사옵니다.
슬픈 일이 있다 할진대 이 이상 더 슬픈 일이 없는 것을 깨닫고, 통탄할 일이 있다 할진대 이 이상 더 통탄할 사실이 없는 것을 깨달은 저희들, 이제 당신의 슬픔의 친구가 되기 위하여 모였사옵고, 당신의 외로운 심정을 붙들고 같이 눈물 흘리며 같이 고통을 당하기 위해 모였사오니, 이 시간 찾아 주시옵소서.
누구를 바라보고 모였사옵니까? 아버지! 어떠한 사람을 바라보고 모인 자들이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고, 누가 그리워서 모인 자들이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이 그리워서 찾아온 걸음이었사옵고, 당신과 친하고 싶은 마음, 하늘 보좌 앞에 가까이 가고 싶은 마음, 단지 그 마음 하나를 가지고 왔사옵고, 그리움의 터전이기에 이 자리에 발걸음을 옮기었사오니, 여기에 축복하여 주시옵고, 같이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제 무슨 말씀을 하오리까? 이날 이때까지 많은 말씀을 하였사옵나이다. 거기에 대한 책임은 제가 져야 할 것을 알고 있사오니 아버님, 여기에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하늘의 때가 가까워 오매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에 서 있는 것을 이 땅 위의 사람들은 모르고 있사옵니다. 여기에 모인 당신의 아들딸들은 진정 이러한 사실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말씀과 더불어 살고, 말씀과 더불어 실천하고, 말씀과 더불어 화하여 전체적인 생명의 기준을 세울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시간 저희들이 모인 것은 세상의 그 무엇을 위하여 모인 것이 아니옵니다. 아버지의 영광의 나라를 가깝게 하기 위하여 있는 정성을 다하고 충성을 다하려고 모였사옵고, 슬픔의 고개를 넘어오신 아버지께 위로를 드리기 위하여 모였사오니, 이 시간 다시 빚지는 자녀의 입장에 서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를 위하여 기쁨의 얼굴로 ‘나의 아버지’라 부를 수 있고, 마음과 몸을 합하여 간절한 심정으로 ‘나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하늘의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것만이 아버지의 소원이요, 이것만이 아버지의 뜻인 것을 알았사오니 아버지, 이 시간이 은사의 한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를 만나 슬픔의 눈물을 거두고 기쁨에 넘쳐 감사와 영광을 노래할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분부하신 말씀을 대신하고 천지만물을 대신하여 맹세의 실체로 나설 수 있는 각오와 결심을 할 수 있는 이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주시는 은사와 허락하신 말씀으로 말미암아 아버지 앞에 가까이 가려는 간절한 마음만이 이 시간 각자의 심중에 소생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릴 때,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말 씀> 오늘은 ‘행복한 무리들’이란 제목을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땅 위에서 말하는 ‘행복한 자’는 보통 ‘다른 사람이 갖지 못한 것을 가진 자’를 가리킵니다. 또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갖지 못한 기쁨을 가진 자’를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도 ‘하늘땅의 어떠한 존재나 피조물 앞에 자랑하고 싶은 그 무엇을 가진 자’라면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인간들은 행복하게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여기에 찾아온 것도 지금 살고 있는 이상의 행복을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해 일상의 생활적인 행복을 넘어서 마음과 심정의 세계와 인연을 맺기 위해서 찾아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타가 공인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오늘보다도 내일, 내일보다도 모레, 올해보다도 내년, 한 생애를 넘어 영원히 행복하기를 고대하는 것이 이 땅에 태어나서 살다가 가는 우리 인간의 욕구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다 할진대 그 하나님은 피조물이 어떠하길 바라셨을 것인고? 하나님이 계신 곳에 그 지음받은 것들도 같이 있기를 바라시고, 하나님이 기뻐하면 그 지음받은 것도 역시 같이 행복하기를 바라셨습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모든 피조물을 지었다고 우리는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인연인지 알지 못하나 이 땅 위에 태어났습니다. 이러한 우리를 종교의 명사를 빌어 말하면, ‘지음받은 우리’라고 간단히 말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피조물이라면 이를 창조하신 절대자가 있어야 할 것이니, 그를 일컬어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과 그 하나님으로부터 지음을 받은 우리 인간은 도대체 어떤 관계가 있기에 오늘날의 인간들이 이렇게 되어 있는가? 하나님이 불완전하게 우리를 지으신 것인가, 아니면 지으신 하나님이 불완전하신 것인가?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는 곡절이 현 인간들에게 내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고지선(至高至善)한 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고지선’이라는 말을 하려면 거기에 우리 생애의 이상적인 모든 요소가 다 내포되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마음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지정의(知情意)의 감정을 충만히 충당시킬 수 있는 내용이 갖추어져 있어야 된다고 우리는 단정 지을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절대적인 주체자요, 절대목적의 중심으로 계실 수 있고 나아가서는 실체로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인간이 지고지선의 존재, 최고의 절대의 기준에 계신 존재와 인연되지 못하는 어떤 조건이 개재되었는데 그 조건을 악이라고 하고, 그 조건이 생긴 것을 타락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천지 만물 중에 목적 없이 존재하는 것은 없습니다. 아무리 미물(微物)인 세균 하나라도 어떤 목적을 위해 그 생을 영위하게끔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부모의 혈육을 받아 태어난 그 시간부터 자신은 모른다 할지라도 나를 살려 주고 나를 가르쳐 온 대천륜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재료로서 존재해 나왔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인식하여야 되겠습니다.
어떠한 목적을 위한 재료, 이 재료와 어떠한 목적의 실체와 하나될 수 있는 때가 온다면, 그때에 비로소 재료로서 백 퍼센트의 가치를 발휘할 것이고, 그때에 비로소 재료로서 자기의 요구조건과 자기의 목적하는 바를 충족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에게도 그런 때가 와야 비로소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은 마음을 헤쳐 놓고, 심정을 헤쳐 놓고 생활의 어떠한 분야를 세부적으로 분석해 볼 때, 행복이란 명사는 있을망정 자신이 행복하다고 자랑할 그 무엇을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행복하다고 스스로 자랑할 그 무엇을 갖지 못했을 뿐더러 남이 행복하게 볼 수 있는 귀한 그 무엇도 갖지 못하고 있는 우리입니다.
하나님께서 대우주의 목적을 세우시고 피조만물을 지으셨을 텐데, 지음 받은 인간이 그 목적을 달성한 뒤에도 슬픔이 다시 연속된다면 나는 그런 창조 싫습니다. 고통이 개재되는 창조목적 달성이라면 모두 싫어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창조목적이 이루어진 후에 비록 슬픈 일과 고통스런 일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을 슬픔과 고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기쁨을 자극시킬 수 있는 재료가 되고 생명을 형성할 수 있는 하나의 요소는 될 수 있을지언정 생명을 지배하고 행복한 기쁨을 유린하는 요소는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 처한 사람이 이 땅 위에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을 생각해 보게 될 때,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은 전부 불행하다고 결론을 지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위치에 세워진 자신들인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우리들이 무엇을 갖고 있는 것 같지만 실상은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자신을 자랑하고 있으되 자신을 자랑할 아무것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내 생명이 있다 하여도 그 생명이 대우주의 이념, 혹은 대우주의 행복 세계 앞에 어떤 재료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갖춘 인격과 내가 갖춘 이념과 내가 자랑할 그 무엇을 갖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들이 대우주의 이념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기 때문에 우리들은 불행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다 잃어버렸습니다. 천지간에 자기 자신을 세울 수 없는 무가치한 존재들입니다. 그러기에 행복을 찾아 나아가는 우리의 소망의 끝은 무엇이냐?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선(善) 같은 것은 있으되 최고의 선은 없습니다. 사랑 같은 것은 있으되 최고의 사랑은 없습니다. 참 같은 것은 있으되 최고의 참은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최고의 참을 가지고 있다면 어느 곳 어떤 환경에 머물더라도 우리를 환영하고 우리를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것을 보게 될 때 내가 선할 수 있는 요소는 갖고 있으되 선의 본체가 되어 있지 못하고, 내가 행복할 수 있는 요소는 갖고 있으되 진정으로 행복한 나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잃어버렸습니다. 무엇을 중심삼고 볼 때 다 잃어버렸느냐? 영원한 최고의 행복을 중심삼고 볼 때 다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보십시오. 창조주, 즉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응당히 알아야 할 피조물들이 모르고 있습니다. 창조주의 지정의를 부여받고 태어난 인간이라면 그 창조주와 정을 통하고, 뜻을 통하고, 마음을 통해야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무엇을 중심삼고 인연되어 있습니까? 이 고깃덩이? 아닙니다. 만일에 이 고깃덩이가 행복의 주체이신 하나님과 인연되어 있다면 이 고깃덩이는 만족스러워해야 할 것인데 만족스러워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음도 만족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심정도 만족해하지 않습니다. 다 잃어버렸습니다. 이런 입장에서 볼 때 인간은 알맹이를 다 잃어버리고 빈 껍데기를 갖고 허덕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채울 것인가 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애써온 사람들이 도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요, 성현 현철들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인간이 무엇을 잃어버렸느뇨? 맨 처음에 하나님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것이 우리가 잃어버린 것 중에서 가장 큰 사건입니다. 이 천지를 찾아오신 주인이 있는데 인간이 그 주인을 잃어버렸다면 인간은 그 시간부터 그 주인 앞에 역적이 됩니다. 인간은 심정 깊은 인연 될 수 있는 본연의 주인을 모셔야 할 텐데 그분을 잃어버렸습니다. 잃어버림으로 말미암아 모시지 못하는 것은 천륜 앞에 용납받지 못할 역적이 되는 행위입니다.
여러분의 마음, 여러분의 세포, 여러분의 감정 어딘가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압니까? 모릅니다. 관념적으로는 인식할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심정적으로 하나님을 인식하여서 하나님은 여기에 계시다고 할 수 있는,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내재(內在)하신다고 할 수 있는 내용을 갖춘 자리에 여러분은 서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이 땅 위에 슬픈 일이 있다 할진대 슬픈 일 중에서도 무엇이 제일 슬픈 일이냐? 하나님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또 무엇이 제일 괴로운 일이냐?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도 못 만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매를 맞고 천대를 받는 것이 제일 괴로운 것이 아닙니다. 그립고 보고 싶고 만나고 싶은 그 분을 마음대로 못 만나는 것이 괴로움인 것입니다. 슬픔도 그것이요, 고통도 그것이요, 억울함도 그것입니다. 만날 수 있는 인연 가운데 있는데 못 만나는 것 이상 더 원통한 것이 없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생애노정에서 체험했을 것입니다.
이제까지 인간들이 슬펐다, 고통을 받았다, 억울한 역사노정을 걸어왔다고 하지만, 그것들은 인간에게 슬픔을 주고 고통을 주고 억울함을 맛보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본체를 잃어버리고, 주인을 잃어버린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슬픔과 고통과 억울함을 상속받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면 고통과 슬픔의 유래는 어디에 있는가? 역사적인 유래 말고 원리적인 유래는 어디 있는고? 따지고 보면 하나님을 잃어버린 데에 원인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자신은 잘 모르지만 내 마음 깊은 곳에는 인간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창조의 손길이 인연되어 있습니다. 그 인연이 내 육체를 넘고, 환경을 넘어서 어떤 전체적인 목표를 향하여 우리를 수습해 나오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에는 사람들이 흩어지고 분열되었는데, 이제는 점점점점 마음이 기쁠 수 있는 한 곳으로 지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계도 하나의 이념세계로 수습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 하나의 이념세계가 올 때에는 마음이 자리를 잡게 됩니다. 마음이 자리를 잡는 동시에 마음이 ‘무한히 기쁘다’고 외치는 소리가 여러분 속에서 폭발되어 올라와 이 만천하에 울려 퍼지게 됩니다. 그렇게 되는 날에는 아무리 철창에 갇히어 영어(囹圄)의 몸이 되고 고통의 자리에 있다 할지라도 나는 행복하다고 하는 함성이 터져 나오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일이 역사노정에 나타나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종교는 고통을 즐겨 받으라고 말합니다. 어느 종교나 그렇습니다. 슬픔을 달게 받으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마음의 세계를 들고 나옵니다. 모든 것을 그 마음의 세계에 굴복시켜 나왔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모든 것을 수습하고 수습하여 본연의 마음세계를 향하여 정면으로 돌진해야 하는 때가 끝날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늘을 중심삼고 둘이 합하여 하나되어야 하는 때가 끝날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행복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우리가 행복한 사람이 되려면 먼저 어떻게 해야 되느뇨? 잃어버린 것을 찾아야 됩니다. 제일 먼저 하나님을 찾아야 됩니다. 잃어버렸던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그 자리가 있다면 여러분은 모든 것을 희생하고도 그곳을 향해 달음질쳐 가야 됩니다.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잃어버린 동시에 또 무엇을 잃어버렸느뇨? 하나님의 소망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소망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지으신 후 거기에 만물의 주재(主宰)로 아담 해와를 세워놓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이 모든 만물을 주관하라.’고 축복하였는데, 인간이 이 축복을 성취하는 것이 하나님의 소망이었습니다. 인간이 이 축복(하나님의 소원)을 성취하는 날에는 하나님은 아담 해와의 아버지가 되고, 아담 해와는 그의 아들딸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딸, 이것은 가공적(架空的)인 명사가 아닙니다. 이것이 가공적인 명사라면 기독교의 모든 것은 거짓말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린 아담 해와를 지어 놓으시고 그들이 장성하여 온 천지 만물을 주관하기를 바라셨습니다. 말로 주관하기를 바라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심정을 중심한 사랑으로써 주관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담이 해와를 자기의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하며 사랑하는 심정을 가지고 해와를 대하기를 바라셨습니다. 또 해와가 아담을 오빠로만 여기는 철모르는 누이로서 아담을 섬기는 것을 바라시지 않고, 이는 신랑 중의 신랑이요 아버지를 대신한 몸 중의 몸이라고 하며 아담을 심정적으로 모시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그러한 소망의 한 때를 바라시던 하나님은 아담 해와가 그런 소망의 자리에서 ‘아담은 나의 영원한 남편이요, 해와는 나의 영원한 신부입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소원임을 알았나이다.’ 할 수 있는 참다운 하나님의 사랑을 이룬 아버지 어머니로서 이 대자연을 주관하게 하기 위하여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만물도 그렇게 주관받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로마서 8장에 사람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탄식이 생겼고, 인간의 탄식이 생겼고, 만물의 탄식이 생겼다고 했습니다. 사람 때문에…. 모든 만물은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을 통할 수 있는 참부모가 된 아담 해와의 손길에 의해 주관받기를 소망하게끔 지어졌는데, 아담 해와가 그런 자리에 나가지 못하고 떨어졌습니다. 이것이 타락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이 천지에 수많은 사람이 살고 있으되 뼛골이 녹아나는 간곡한 심정을 가지고 하나님을 대해 ‘아버지’ 하고 부르는 사람이 있느냐 하면,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그렇게 생각한 사람 있어요? 없다는 것입니다.
타락 전의 아담 해와 이상의 자리에 나아가서, ‘하나님! 당신의 심정이 이렇지 않사옵니까? 당신의 소원하신 심정이 이러이러하시지요?’ 하는 자리에서 하나님을 대하여 아버지라 부른 사람이 이 땅 위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어요?
하나님은 바라셨다는 것입니다. 아담 해와가 하나님의 소망인 축복을 이루어서 하나님 앞에 나와 ‘아버지여! 나의 아버지여!’ 할 수 있는 참다운 인류의 조상이 되기를 바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참다운 인류의 조상을 못 만나봤습니다. 그 후손 가운데에서도 그런 사람을 못 만나봤습니다. 없어요.
오늘날 믿는 사람들이 부르는 아버지는 명사적인 아버지, 이름만의 아버지일 뿐입니다. 심정을 통하여 뼛골이 녹아나는 자리에서 부르는 아버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아버지를 부르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찾아오셨습니다. 인간들에게 당신의 위치를 밝히는 동시에 당신의 가치와 인간과의 관계를 밝혀 나오셨습니다. 그래가지고 인간이 당신과 부자의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타락한 인간들 앞에 통고시키기 위하여 싸워 오신 것이 6천년 역사라는 것입니다. 딴 것 아닙니다.
여러분, 의의 면류관이니 무슨 면류관이니 하는데, 나는 그거 원치 않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타락하기 전의 아담 해와의 자리에서, 심정적으로 간절히 고대하시던 하나님의 소원을 성취해 드린 자리에서 하나님을 대하여 ‘나의 아버지!’ 하고 불러보는 것입니다. 그 자리가 인생이 바랄 최고의 자리라는 것입니다. 그런 심정의 자리는 역사노정을 찾아봐도 없습니다. 성경 66권을 암만 뒤져봐도 없습니다. 성경은 타락 이후의 기록이니 그럴 게 아니에요? 여러분, 이치적으로 생각해 보란 말입니다.
그러면 타락 이전에 있었던 심정의 동산은 어디 갔는고? 타락 이전의 높은 위치에서 하나님과 즐기고 기뻐할 수 있는 인연의 세계는 어디 갔는고? 이것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아담 해와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너희는 나의 영원한 아들딸이다’ 하는 인정을 받고, 천사장까지도 아담 해와 앞에 굴복하여 온 만상이 그의 명령에 순응하는 자리, 만천하를 주관하라고 당당히 내세울 수 있는 자리에서 타락한 것이 아닙니다. 천사장한테 끌려 다니는 자리에서 타락했습니다. 주인의 아들로서 아들의 위치와 아들의 권한을 갖추지 못한 자리에서 타락했습니다.
사탄이 무엇이뇨? 타락한 천사장입니다. 오늘날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수많은 인류는 사탄의 장중(掌中)에 쥐어져 있기에 어느 곳에 가든지 그 뒤에는 사탄이 따라다니고 언제나 사탄에게 시험받아야 하는 입장에 놓여 있습니다. 한스러운 일입니다. 그러기에 이놈의 세상을 밟아치우고, 이놈의 세상을 도말(塗抹)해 버리고, 사탄을 지배하고 명령할 수 있는, 더 나아가서는 천사장에게까지도 명령할 수 있는 본연의 아들딸을 하나님께서 찾으려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중심 뜻입니다. 그런데 이런 뜻도 모르면서,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요? 구원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것은 만우주의 대주재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아버지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 아버지는 우리가 육신을 쓰고 사는 백여 년의 짧은 기간 동안만 부를 그런 아버지가 아닙니다. 영원무궁토록 부를 아버지입니다. 영원히 그가 기뻐하면 같이 기뻐하고 그가 슬퍼하면 같이 슬퍼해야 합니다. 그것이 땅 위에서 결판지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땅 위에서 사는 동안 하나님께서 기뻐할 수 있는 자리에서 도의 길, 신앙의 길을 지켜간 사람이 가는 곳이 천국이요, 하나님이 슬퍼하는 자리에서 살던 사람이 가는 곳이 지옥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이 슬퍼하는 자리에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곡절이 타락으로 말미암아 생겨났습니다.
우리는 다 잃어버린 인생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대주재이신 하나님, 즉 우리의 영원한 아버지를 잃어버렸습니다. 그 다음엔 생애의 아버지를 잃어버렸습니다. 우리에게는 아버지가 둘입니다. 하나님 아버지하고 여러분을 낳아준 아버지하고. 이 두 아버지는 다릅니다. 무엇이 다르냐? 나를 지으신 아버지는 영원한 아버지요, 나를 낳아준 아버지는 생애의 아버지, 땅 위의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잃어버린 동시에 땅 위의 아버지를 잃어버렸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잃어버린 것은 무엇이며, 아버지를 잃어버린 것은 무엇인가? 아버지를 다 갖고 있는데 저 사람이 무슨 아버지를 잃어버렸다고 큰소리치느냐?’ 하겠지만 보세요. 타락하지 않은 아담 해와는 누구뇨? 인류의 참조상입니다. 참아버지 참어머니입니다. 몸을 쓴 인류의 참부모입니다. 그런데 그 아담 해와가 타락했기 때문에 인류가 사탄의 자손이 된 것입니다.
만일 아담 해와가 타락하지 않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자리에 들어가 하나님이 임재할 수 있는 집이 되었다면, 오늘날 인간들은 아버지를 가진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랬다면 예수를 믿지 않고도 다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종교도 필요 없습니다. 왜 필요 없느냐? 본연의 아버지와의 심정적인 인연에 의해 태어난 아들딸은 땅 위의 그 무엇이 빼앗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하나님의 심정과 더불어 일체가 된 참부모를 통하여 태어난 아들딸, 심정으로 ‘아버지!’ 하며 달려갈 수 있는 그 아들딸을 대해서는 사탄의 사랑은 물론 그 무슨 사랑을 가지고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충신의 마음을 무엇으로 돌릴소냐? 효자 효녀의 마음을 무엇으로 돌릴 소냐? 열녀의 마음을 무엇으로 돌릴소냐? 이와 같이 그 무엇으로도 돌릴 수 없는 자리에 들어가야만 천륜 앞에 내세울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아담 해와가 타락하지 않고 본연의 하나님의 심정을 통하여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가운데 선남선녀로서 성례식을 치르고 인류의 참부모가 되었다면, 만물은 아담 해와와 화동하면서 즐거이 그 가정에 필요한 물건이 되려고 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아담과 해와가 행복을 노래할 수 있고, 하나님을 영원한 아버지로 모실 수 있는 인류의 참부모가 되고, 인류의 표본적인 참부부가 되고, 하나님 앞에는 참다운 자녀가 되었던들, 어느 누구도 그들을 빼앗아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인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심정의 주인도 하나요 사랑의 주인도 하나입니다. 그런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잃어버린 동시에 아버지를 잃어버렸고, 참부모를 잃어버렸습니다. 나는 한때 ‘아버지여, 내 육신이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왜 우리 아버지는 나한테 구주가 못 됩니까? 나를 낳아준 부모인데 어찌하여 구주가 못 됩니까?’ 하고 기도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 부모(참부모)를 가진 인간이 이 땅 위에 있다면, 그는 예수를 믿지 않고 구원을 받지 않아도 행복할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 기도를 해 보았습니까? 본래는 그래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타락했기 때문에 구주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된 세상이라면 그 세상은 행복의 세상입니다. 그 세상은 천국이라는 겁니다. 알고 보니 이런 역사적인 곡절이 그 옛날 우리 조상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인류는 허덕이고 있습니다. 오늘날 인류는 하나님을 잃어버린 자들이요, 하나님과의 부자의 인연을 잃어버린 자들인 동시에 자신에게는 참다운 육신을 갖춘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는 자들입니다. 그런 부모가 있어요, 여기 있는 사람들? 하나님이 공인할 수 있는 참다운 영과 육을 가진 부모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예수가 누구인지 아세요? 그는 후아담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45절을 보세요. 예수를 후아담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후해와가 있어야 할 텐데 후해와는 누구입니까? 기독교에선 성신을 상징적으로 말해 왔는데 성신이 바로 어머니신입니다. 후해와입니다. 인류의 어머니인 해와가 타락했기 때문에 후해와로 어머니신인 성신을 보내신 것입니다. 구멍이 뚫렸으면 뚫어진 그 구멍을 때워야 하고, 잃어버린 것이 있으면 잃어버린 곳에 가서 찾아야 하듯이, 해와로 말미암아 이 땅 위의 인간들이 전부 다 사망세계에 들어갔으니, 성신이 와서 다시 해산하는 수고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여인은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했습니다(딤전 2:15). 이것은 오늘날 땅에 사는 부인들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해와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해와가 타락하지 않고 인류의 참조상이 되었다면 이 땅 위에 선한 아들딸을 낳았을 텐데 타락하여 사탄의 자식을 낳았으니, 해와가 다시 해산하지 않으면 인간들은 구원을 못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신이 이 사명을 짊어지고 오늘날 만인류를 붙들고 해산하는 수고를 다하고 있습니다. 그 해산이 다 끝나야만 해와가 구원되고, 성신의 사명이 끝나는 것입니다. 알고 보니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되어 있을 것이다가 아니라 그렇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못 믿겠거든 담판기도를 해 보십시오.
부활이 무엇이뇨? 다시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었기 때문에 다시 살아야 하는 거예요. 중생은 무엇이뇨?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는 인류의 아버지요 신랑이며, 성신은 인류의 어머니요 신부입니다. 인간들이 신부의 인연을 받아 가지고 신랑 되신 예수님을 사모하여 예수님 없이는 못살고 성신 없이는 못 산다고 하게 될 때, 예수와 성신이 영적인 면에서 상봉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의 씨가 다시 인간에게 주입되게 되면 중생이 되는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을 통하지 않고 아들딸 낳는 법이 천지의 이치 가운데 있습니까? 없습니다. 구멍이 생겼으면 땜질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갖다 맞추어야 합니다. 그러한 일을 하기 위해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냈습니다.
아담이 아버지로서의 책임을 못 했기 때문에 그 사명을 수행키 위해 실체를 쓰고 아버지로 오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는 구주이신 동시에 인간의 아버지이십니다. 실체의 참아버지입니다. 인간들이 잃어버린 그 참아버지를 다시 세워 놓아야만 천지 이치의 원칙적인 궤도를 타고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늘은 절대적인 원리원칙을 중심삼고 법도를 세우고 그 법도를 통할 수 있는 기준을 갖추어야만 모든 일을 해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땅 위에서 살고 있으되 참부모를 잃어버렸습니다. 여러분은 참부모가 없단 말입니다. 보세요, 성경에도 고아와 과부 같은 너희들이라고 했습니다. 어머니가 없습니까? 부모가 없습니까? 신랑이 없습니까? 다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랬느뇨? 하나님의 창조이념으로 볼 때 참부모와 인연을 못 맺었으니 고아입니다. 부모를 잃어버렸으니 고아지요. 왜 과부입니까? 참다운 신랑 되신 예수님과 인연을 못 맺었으니 과부입니다. 여러분, 문제를 수습하려면 그 원인에서부터 수습해야 됩니다. 세상일도 그래요. 끄트머리에서 암만 해봐야 수습이 안 됩니다. 모든 종교의 근원을 밝히려면 맨 꼭대기, 아담 해와에서부터 출발해야 됩니다. 여기서부터 종교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신학은 망합니다. 하늘의 역적이 됩니다. 그 신학은 하늘의 역적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준비하고 갖추었다 할지라도 하늘 앞에 심판 받는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에 있는 아담 해와의 곡절부터 풀어야 됩니다. 타락 전 아담 해와를 대하시던 하나님의 심정과 타락하는 아담 해와를 대하시던 하나님의 심정, 타락 이후의 하나님의 심정이 얼마나 애달팠는가 하는 심정의 관문을 여러분이 통과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추측으로 나온 말이 아닙니다. 사실입니다.
어떤 병이 났으면 그 병의 근원부터 고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병을 고칠 수 없습니다. 그 근원을 바로잡아 놓으면 모든 것은 자연히 수습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도 그렇습니다. 근원되는 중심존재가 잘못하면 다 망합니다. 아무리 백성이 훌륭하더라도 그가 잘못하면 다 망해요. 그와 같은 울타리 안에 있는 것은 다 망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중심이 문제입니다.
성경의 중심은 예수가 아닙니다. 여러분, 그걸 알아야 됩니다. 성경은 타락한 이후의 기록이에요. 예수가 중심이 된 것은 아담 해와가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타락하지 않았다면 예수가 중심이 아닙니다. 아담이 중심입니다. 이것을 똑똑히 아십시오. 타락했기 때문에 구주니 기도니 종교니 하는 것이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원래는 하나님을 아느니 모르느니 무신론이니 유신론이니 하는 논란이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못나고 미흡하다 할지라도 자신의 피조물을 대해 ‘야!’ 하면 그 피조물이 ‘예!’ 할 수 있게끔 지었을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무슨 하나님입니까?
여러분! 종교는 넘어서야 할 시기가 옵니다. 세계를 넘어서야 할 시기가 옵니다. 더 나아가서는 역사관, 사회관과 자기 위주의 심정관을 넘어서야 할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내 아들딸만 아들딸입니까? 내 가정만 가정입니까? 내 나라만 나라입니까? 그렇다고 해보세요, 어떻게 되는가. 떨어지나 안 떨어지나 보세요.
여러분, 때는 이미 세계적인 이념시대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세계주의시대, 이 때는 내 생활 감정을 넘어서고, 내 인생관을 넘어서고, 내가 갖고 있는 세계관을 넘어서 천주관(天宙觀)을 가지고 하나님을 대해야 할 때입니다. 아무리 효자라 해도 부모가 거느리는 가정이나 환경을 잘 수습하지 못하고 싸움만 하면서 ‘아버지’ 하게 되면 그 부모가 좋아하겠어요?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모든 것을 수습할 수 있는 충성된 자리에 들어가서, 심정적인 기준을 통과한 후 ‘아버지!’ 해야 하나님께서 ‘오냐’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땅 위에 인간으로서 이 땅의 어떠한 사랑, 어떠한 이념, 어떠한 그 무엇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아버지라 불러도 하나님은 ‘오냐!’ 하실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이 세상은 심판받아야 합니다.
끝날이 다가오는 이때, 참다운 행복을 바라고 나가는 이때에 우리는 오늘의 것을 향하여 나갈 것이 아니라 오늘의 것을 넘어 내일의 것을 향하여 나아가야 되겠습니다. 오늘의 것을 부정할 수 있는 동시에 내일의 것에 대한 가치관이 철두철미하게 자신의 심중 깊이 뿌리박힌 자가 있다 할진대 그는 소망의 사람입니다. 역사와 더불어 이 땅이 망할 때, 하나님은 그 사람을 빼내어 명령하실 것입니다.
오늘의 그 무엇을 붙들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지금 이때는 바야흐로 생사의 결판을 지으려 하는 때입니다. 비록 내가 죽는다 할지라도 찾을 것은 찾고 가질 것은 가져야 되겠습니다. 자랑할 것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그렇다면 죽어도 한이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찾을 것을 찾았습니까? 가질 것을 가졌습니까? 자랑할 것을 가졌습니까? 못 가졌으니 불쌍한 사람입니다. 불행한 사람이에요.
머무르고 있는 오늘의 환경에서 행복의 터전을 꿈꾸어 보세요. ‘아이고, 나 살려주오.’ 할 때가 옵니다. 보따리 싸 가지고 죽자 살자 하는 놀음이 벌어집니다. 요즈음 여러분 잘 보잖아요?
하늘은 우리를 향하여 부르짖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늘은 역사의 복판에 서서 ‘너희들은 나에게 오라’고 하시지는 않습니다. 어떤 일개의 국가나 민족권 내로 들어오라고 하시지도 않습니다. 하나의 사람에게로 가라고 하십니다. 그 사람은 어떠한 사람인가? 태초에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시던 그 인연과 관계를 아는 심정의 주인공입니다. 그 사람에게 가라고 하십니다.
오늘날 수많은 도(道)가 있지만, 심정을 통과할 수 있는 하나의 도가 역사노정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도가 기필코 나타나야 됩니다. 만일 그것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안 계신 것입니다. 인간이 지켜야 할 사회적인 윤리와 도덕을 가르쳐 주는 도도 있고, 무한한 영계를 가르쳐주는 도도 있지만, 윤리도덕과 무형세계에 대한 가르침을 통합하여 하나의 심정의 골자 위에 올려놓는 종교가 있어야 됩니다. 그런 종교를 찾아보니 기독교더란 말입니다. 기독교는 심정의 종교입니다. 인간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잃어버렸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라는 것을 모르게 되었습니다. 실체를 갖춘 참부모를 잃어버렸는데, 기독교는 그 참부모를 소개해 줄 수 있는 종교입니다.
참부모가 깨어지니 하나님이 인정할 수 있는 참부부가 안 나왔습니다. 여러분이 부부를 이뤄 알뜰살뜰하게 살고 있지만, 하나님의 영원한 천국에 같이 갈 수 있는 그런 부부예요? 천만부당합니다. 믿는 사람들은 세상의 부부들이 주님 오실 때에는 다 갈라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에도 있고, 영적인 세계에 대한 체험이 있는 사람은 대번에 압니다. 이 땅에서 아무리 재미있게 살던 부부일지라도 남편 갈 곳이 따로 있고 부인 갈 곳이 따로 있습니다. 원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타락했기에 그렇습니다. 만약 이런 것이 하나님의 본래의 창조이념이라면 항의를 해야 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대하여 축복받은 참다운 부부로서 땅에서부터 영원한 세계까지 영원히 당신을 모셔주기를 바라고 계신데, 하나님이 공인할 수 있는 참부모가 이 땅 위에 나오지 않았고, 그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공인 받은 부부가 이 땅 위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남 일녀를 지어놓으시고 이렇게 살라고 했겠어요?
오늘날 도의 기준은 독신생활입니다. 왜 독신생활인지 알아요? 아직까지 원칙적인 기준에 도달한 주인공이 나타나 참부모로서 행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념에 의한 참부모가 아직까지 세워지지 않았는데 그 후손 될 자들이 가정을 이루어 살 수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고차적인 종교일수록 독신생활을 강조합니다.
우리 인류의 조상은 사랑하는 아들의 입장에는 섰지만 천지 만물을 유업으로 상속받을 수 있는 아들의 자리에는 못 나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당신 대신 만우주를 주관할 수 있는 영원한 하나의 참다운 주인공을 세우시어 그를 중심삼고 사랑의 인연을 맺으려 하셨습니다. 일남 일녀가 성숙하여 그들이 만물과 화동하는 웃음이 터져 나올 때 그 심정의 터전 위에 하나님은 그들과 인연을 맺으려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인연을 이루지 못하였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한스러운 역사가 계속된 것입니다.
인류역사는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아 나아가는 복귀역사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하나님의 아들딸이라는 명사를 거쳐 자라고 또 자라서 참된 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영(靈)의 아버지뿐만 아니라 육(肉)의 아버지와 인연을 맺어 하나님은 영원한 내 아버지라 할 수 있어야 됩니다. 예수는 신랑인 동시에 참아버지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도 잃어버렸고, 참부모도 잃어버렸고, 참부부도 잃어버렸고, 참자녀도 되지 못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놓고 하나님이라고도 했고, 참부모라고도 했고, 신랑이라고도 했고, 자녀라고도 했습니다. 그것은 한 목표에다가 역사적으로 잃어버린 심정적인 모든 것을 전부 싸매 가지고 한꺼번에 땜질하자는 것입니다. 그것이 복귀섭리입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인간, 참부모를 잃어버린 인간, 참부부의 인연을 잃어버린 인간, 참자녀의 인연을 잃어버린 인간, 이 인간이 바랄 것은 무엇이뇨? 먼저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다시 낳음을 받아야 됩니다. 여러분은 다시 낳음을 받았습니까? 다시 낳음을 못 받은 자는 전부가 의붓자식입니다. 여러분은 중생의 체험을 해야 됩니다. ‘내가 예수와 성신을 잃고는 못 산다, 내 몸과 피 살이 그의 일부분이다.’ 하는 자리에 나가야 됩니다. 그래서 참다운 자녀의 인연을 맺어 양육받고, 성신의 감동과 더불어 성신의 도움을 받아서 성신이 신랑 되신 예수를 대해서 사모하는 것과 같은 감정으로 화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준비하고, 앞으로 주님이 오실 한때를 바라보면서 처녀와 같은 몸으로 단장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무엇이 제일 귀합니까? 무슨 보물입니까? 둘이 지배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것은 기쁜 것이 못 됩니다. 행복하다고 할 수 없어요. 둘이 소유하고 있는 그 자리에 행복이라는 명사는 없습니다. 천지간에 제일 귀한 분이 하나님입니다. 행복한 사람은 어떤 사람이뇨? 아까 말한 바와 같이 제일 귀한 것을 갖고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면 이 천지간에 제일 귀한 것은 무엇이뇨? 모든 존재물 전부가 자기의 생명을 주고라도 갖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런 귀한 것을 여러분은 가져 보았습니까? 여러분, 금은보화가 귀해요? 자기의 생명을 주고라도 갖고 싶어요? 아닙니다. 그러나 모든 피조물이 자기의 생명을 주고라도 갖고 싶어하는 분이 있으니 그분이 바로 하나님입니다. 여러분이 그런 가치의 하나님을 알면 하나님의 아들딸 되는 것은 문제없습니다. 천상천하에 어떤 귀한 것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다 지음받은 상대적 존재로되 하나님만은 주체적인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을 내 것 삼을 수 있다는 이 한 사실, 얼마나 감격적인 일입니까? 하나님이 내 것이야, 내 것.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분을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아들이 되고 딸이 되고 형제가 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대하여 독생자라고 했습니다. 지금까지 이 땅 위에 수많은 인간이 왔다 갔지만 너만은 내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사실을 놓고 볼 때, 예수는 최대의 성공자였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독생자라는, 아들이라는 명분을 받았습니다. 심정을 헤치고 들어가면 그는 참다운 효자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과거부터 어떻게 나오신 아버지라는 것을 알았고, 오늘의 자기를 대하여 어떠한 심정을 갖고 계신 아버지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또 그 아버지가 자기를 세워 어떠한 축복을 해주시고자 하는가도 알았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는 구주이십니다. 무슨 구주? 하나님 아버지를 찾아주는 구주, 참부모를 찾아 주는 구주, 참부부를 찾아 주는 구주, 참자녀를 찾아 주는 구주입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은 예수를 생명만 구원해 주시는 구주로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근본적으로 깨뜨려 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는 잃어버린 하나님을 찾아 가지고 오신 분이요, 잃어버린 참부모로 오신 분이요, 참부부의 신랑으로 오신 분이요, 하나님 앞에 참다운 효자로 오신 분입니다. 여러분이 믿는 예수는 그런 분이에요.
그 예수를 진정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요, 참부모를 사랑하는 자요, 참부부가 될 수 있는 자요, 참자녀가 될 수 있는 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를 친구라고까지 하였습니다. 문제가 그렇게 돼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앞으로 만천하에 널려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메시아여, 어서 오시옵소서.’ 하고 울부짖을 때가 올 것입니다. 바라고 의지하는 주권도 믿을 수 없고, 믿고 있는 종교도 믿을 수 없고, 어떠한 학문이나 철학도 믿을 수 없다고 할 때가 올 것입니다. 왜? 심정으로 시작된 인간이요, 심정을 거쳐서 심정으로 종결되는 인간이기에 그렇습니다. 인간의 기원은 말이 아닙니다. 심정을 기원으로 한 인간이니 심정의 인연을 거쳐 심정으로 종결을 지어야 합니다. 그래야 만물로부터 ‘오! 할렐루야’ 하는 송영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송영의 가치를 백 퍼센트 구비하려면 심정의 인연을 벗어나서는 안 됩니다.
역사는 처리의 역사입니다. 어떠한 국가, 어떠한 주권을 본으로 세워서 나가다가 그 국가나 주권이 떨어지면 처리하여 그보다 더 본이 되고 좋은 새로운 국가를 세워 나옵니다. 그렇게 국가나 주권은 처리할 수 있지만 심정은 처리할 수 없습니다. 생활과 사정은 처리할 수 있어도 심정은 처리할 수 없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사정은 처리할 수 있으되 심정은 처리할 수 없어요. 이 심정문제를 처리할 수 있는 하나의 주인공이 인류의 역사노정 위에 나타나지 않는 한 이 세계에 평화의 때는 오지 않습니다. 행복의 세계는 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심정의 세계를 찾아 나오시는 것입니다.
그런 천적인 심정의 세계가 오는 날에는 인간적인 모든 윤리도덕은 종말을 고하게 됩니다. 그때에는 모든 것이 깨어집니다. 헌것이 깨져야 새것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세계는 말할 수 없이 혼란해집니다. 윤리 도덕관이 깨져 나갑니다. 부모가 자식을 죽이고, 자식이 부모를 죽이고, 부부가 서로 칼질을 합니다. 다 깨집니다.
이같이 깨뜨리는 일로 천지가 종결된다 할진대 여러분은 미리 그런 자리를 찾아가서 죽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뜻있는 사람들은 자살 구멍을 찾아 들어갑니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나는 기도합니다. ‘아버지, 자살 구멍을 찾아 들어가려는 사람들을 보내 주시옵소서.’라고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역사적인 종말을 예감한 사람입니다. ‘아무리 육신은 좋다 해도 마음이 즐겁지 않구나. 아무리 행동은 즐거워도 마음은 안식하지 못하는구나!’ 이런 느낌이 있는 사람은 선각자입니다. 심정의 세계가 온다는 것을 미리 알고 환경을 수습해 나가는 선각자입니다.
안식의 터전은 마음이 아니라고 하는 자리가 아니요, 사정과 형편으로 하여금 일시 휴식하게 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심정이 영원무궁토록 떠나고 싶지 않은 자리입니다. ‘욕을 먹어도 좋고 매를 맞아도 좋고 그 무엇이 내 생애를 빼앗아 가도 좋다.’고 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천적인 심정의 인연을 끊은 인간이 생명이 있는 인간일소냐! 이것을 안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놓고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마 26:39)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의 원은 심정의 원입니다. ‘심정의 뜻대로 하시옵소서.’라는 뜻입니다.
오늘날 전세계 인류는 찾고 있습니다.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어느 한때 기필코 해결지어야 할 문제를 앞에 놓고 허덕이고 있습니다. 그 문제가 무엇이냐? 밥 잘 먹는 일이 아니요, 주권을 잘 세워서 빛나는 문화를 창조하고 즐거워하는 일도 아닙니다. 그것은 동서양의 문제가 아닙니다. 피부의 빛깔의 문제가 아닙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는 것은 원칙입니다. 그러나 그 이상의 마음을 갖게 하는 일이 이 땅 위에 벌어질 수 있는 이념이 나온다 할진대 평화와 행복의 세계, 천국은 자연히 올 것입니다. 그런 일을 영영 못 한다면 하나님도 인류의 역적입니다. 왜? 무엇을 하지 말라, 무엇을 버리라고만 하셨지 평화와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하는 하나님이라면, 그 하나님 믿을 수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최대의 선물을 준비했기에 네가 아무리 좋다고 하는 것이나 받고자 하는 것이 있더라도 다 잊고 오직 한 가지만 고대하는 것입니다. 그런 무엇이 있기 때문에 ‘무엇을 하지 말라, 버리라.’ 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마운 것입니다. 알고 보니 고맙다는 것입니다. 오랜 역사노정에서 사도들이 수고해 왔지만, 수고하여 무엇을 얻으면 또 잃어버리고 눈물지어야 할 것을 아시기에 다 버리고 한때만을 소망하며 참고 고대해 나오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정신입니다.
여러분은 이제 이 문밖을 나가면 가정을 찾아갈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나의 어머니, 영원히 당신의 품을 떠나고 싶지 않습니다. 죽어도 영원히 어머니와 같이 있고 싶습니다. 천국이 딴 곳이 아니라 어머니와 같이 살 수 있는 곳이 천국입니다.’ 할 수 있는 부모를 가졌습니까? 딴 데가 천국이 아닙니다. 남편이 있는 곳에 그 아내가 있고 싶고, 그 남편이 지옥에 가 있다 할지라도 그 남편을 바라보고 아내가 즐거워할 수 있다면 그곳이 천국입니다. 여러분, 이것 생각해 보았어요?
천국이 어떤 곳입니까? 천국은 굶고 앉아 있어도 좋고 뺨을 맞아도 좋은 곳입니다. 너와 나와의 인연은 누구도 끊을 수 없어. 네가 가면 내가 가고, 내가 오면 네가 오는 곳, 그런 인연에서 서로가 같이 있고 싶은 곳입니다. 그런 형제를 여러분 가져 봤어요? 천국에 갈 수 있는 사람은 그런 내용과 재료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영계에 가보니까 그래요. 한번 주님을 따라가 보면 여러분들도 ‘나 땅에 안 가겠습니다. 아이고, 지긋지긋해요’라고 할 것입니다. 부모고 무엇이고 다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늘 것이 귀하기에 땅의 것을 버리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입니다. 공의란 절차가 올바른 것을 말합니다. 그렇잖아요? 한 곳에서만 통하는 것이 아니라 사방으로 통한다는 것입니다. 온 천하가 하나님을 좋아하고 만인간이 주님을 좋아하여, 그 하나님과 주님을 놓고 나도 좋아하는 동시에 여러분도 좋아해야 합니다. ‘너도 그 좋으신 주님의 아들, 나도 그 좋으신 주님의 아들이다.’ 할 때에는 용서하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기독교인들을 만나야 됩니다. 주님의 이름을 걸어 놓고는 원수가 다 녹아져 버립니다. 주님의 이름을 걸어 놓고는 형제 아닌 사람이 형제 이상 단결할 수 있고, 주님의 이름을 걸어 놓고는 식구 아닌 사람이 식구 이상 단결할 수 있습니다. 이 땅 위에서 그러한 느낌을 갖지 못하는 자들, 그러한 내적인 체휼을 하지 못하는 자들은 새 나라의 행복한 시대에 못 들어갑니다.
여러분은 무한히 행복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남이 알지 못하는 많은 학문을 터득하는 것이 행복인 줄 아십니까? 아닙니다. 땅 위의 어떤 보물을 많이 가진 것이 행복인 줄 아십니까? 아닙니다. 어떤 권세를 가진 것이 행복인 줄 아십니까? 아닙니다. 그런 것 갖고도 천륜의 인정을 받지 못하는 자리에 서면 망하는 것입니다.
제일 귀한 것이 무엇이뇨? 만우주의 대주재이시며 주인공이신 하나님의 심정적인 아들딸이 되는 것입니다. 그 이상 더 바랄 것이 있겠어요? 그 하나님을 아버지로 삼은 아들이 있다 할진대 이 천지가 그의 것이 됩니다. 인간들 마음속 깊이 그런 인연이 남아 있기에, 네가 제일 소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이 세상을 마음대로 주관하고 이 세계를 자기 땅과 같이 유람하는 것이 소원이라고 대답합니다. 그것이 대다수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그것이 본래의 마음입니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타락하여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것을 찾기 위해서 허덕이고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참아들딸이 되십시오. 그러면 그 아버지의 것은 아들딸인 여러분의 것이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한 위대한 선물, 그러한 심정적인 선물을 내리려고 하늘은 6천년 동안 수고하시는 것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그런 아버지를 여러분은 몇 번이나 배반했습니까? ‘야, 아무개야’ 하고 피를 토하면서 울부짖으시던 그 아버지를 얼마나 배반했습니까? ‘나는 몰라’ 하고 배반한 그 사람이 불쌍하게 되어야지, 하나님이 불쌍해져도 된다는 말입니까? 불쌍한 하나님입니다. 불쌍한 우리 아버지입니다. 그런 아버지가 내 마음의 아버지입니다. 원통하고 분하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심정의 모든 아픔과 슬픔을 잊어버리시고 나를 붙안고 통곡할 수 있는 아버지를 만나고 싶고, ‘오냐, 내 아들딸아.’ 하시며 긴 한숨과 더불어 소망의 웃음을 띄는 아버지를 만나고 싶다는 효자 효녀가 이 땅에 있어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 무엇 하러 몰려왔습니까? 구원받기 위하여? 아닙니다. 그런 아들딸이 되려면 기성교회에 가십시오. 피의 곡절이 여기서부터 벌어졌으니, 우리는 그 자리를 통과하여 본연의 인연된 아들딸, 타락으로 말미암아 저끄러진 한의 심정을 풀기 위하여 6천년 동안 수고하신 아버지의 심정을 붙안고 지금까지의 역사노정을 거꾸로 제쳐 버리고, 아버지의 알파와 오메가의 심정을 상속받을 수 있는 아들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 땅 위에 그런 아들딸이 나와야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알았습니다. 행복한 사람이란 하나님이 바라시고 소원하시는 제일 귀한 것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자라는 것을. 그 귀한 것이 무엇이냐? 하나님을 아버지로 삼고, 하나님의 독생자를 아버지로 삼고, 하나님의 독생녀를 어머니로 삼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독생자는 아버지인 동시에 시대적으로 보면 신랑격입니다. 또 하나님 대신 죄악의 인간들을 구원해야 할 입장에 서 있다고 보면 아들격입니다. 그분은 역사상의 모든 존재가 소망하던 분이요 섭리적인 전체의 목적을 이룰 소망의 중심입니다. 그분을 찾기 위하여 하나님은 6천년 동안 비통한 역사를 걸어왔고, 지금까지 왔다 간 수많은 우리의 선조와 성도들도 전부 그 한 분을 찾기 위하여 애썼습니다. 그런 귀한 분, 한 분밖에 없는 분을 여러분이 모실 수 있다면 얼마나 복되겠습니까? 그 귀한 분이 여러분의 것이 된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그 이상 행복한 일이 없습니다. 그러한 일이 이뤄진다면 돈이 문제가 아닙니다. 몸뚱이가 문제가 아닙니다. 삼천리반도가 문제가 아닙니다. 세계 땅덩어리가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 귀한 것을 여러분이 알았습니까? 모르거든 알아야 됩니다.
귀한 것을 알려면 귀한 그 내용을 알아야 됩니다. 가짜가 많기 때문입니다. 다이아몬드도 귀하기 때문에 가짜가 많습니다. 가짜가 많기 때문에 귀한 것을 감별할 수 있는 전문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전에는 안 됩니다. 가짜가 많기 때문에 끝날에는 적그리스도를 주의하라고 했습니다. 참 것이 거짓 것 같고 거짓 것이 참 것 같습니다. 서로가 다 잘났다고 하고 서로가 다 옳다고 하니, 어떤 것을 믿어야 되겠습니까? 그러기에 하나님과 담판해야 됩니다. 오늘 이 끝날에 있어서 우리들은 역사와 더불어 흘러가는 인간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골통이 깨지는 한이 있더라도 세계문제를 걸고 ‘하나님, 이게 어떻게 된 판국입니까?’ 하고 담판하여 해결지어야 합니다.
그것을 해결지으려면 천신만고의 고통의 길을 걸어야 될 것입니다. 이 땅 위에서 인간들이 잘 믿기 위해 고생하던 그 죽음의 고비도 늠름히 걸어갈 수 있어야 됩니다. 거기에서는 슬픔의 곡절도 많이 당하게 될 것입니다. 당하고 당하여도 내 생명이 문제가 아니라는 각오 밑에서 천신만고 끝에 그 문제를 해결하게 될 때에 그 가치가 귀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그런 귀한 것을 찾기 위하여 무엇을 해보았습니까? 생명을 한번 걸어봤습니까?
옛날의 사도들은 귀한 것을 다리놓기 위하여 목베임을 당하며 죽어갔습니다. 귀한 것을 친히 찾아 가져야 할 끝날의 성도인 여러분은 무엇을 해 봤습니까? 무엇을 해봤습니까, 무엇을? 어느 누가 때리려고 하면 눈을 부릅뜨고 안 맞으려 하고, 그저 싸우려고만 하고, 한마디 억울한 말만 들어도 잠을 못 자고 보복하려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늘은 천 번 맞고도 돌아서서 염려해 주십니다. 만 번 배척받고, 만사에 비운의 곡절이 깃드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을 잊어버리고, 고통의 역사를 잊어버리고, 창조 당시에 아담 해와를 지어 놓으시고 바라보시던 소망의 심정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하여 애써 나오시는 하나님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타락으로 한이 생겨났지만 이 한을 잊어버리고, 본연의 아들딸로 축복해 주어 내일의 행복의 동산에서 즐거워하시겠다는 심정을 잊지 않고 여러분을 찾아오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야 피를 흘리시건 말건 땀을 흘리시건 말건 불쌍한 자리에 계시건 말건 나만 편안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나는 그런 기도 안 합니다. 안 해요. ‘아버지, 이 몸이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제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하는 기도도 안 해요. ‘아버지, 역사적으로 지은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도 그 죄인 중의 하나요 이 나라 이 민족의 일원입니다. 그러니 이 나라 이 민족의 죄를 먼저 용서하여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옳은 기도예요. 어른을 알아봐야 사리에 맞지 않습니까? 전통을 인정해야 사리에 맞지 않습니까?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하나님은 무한한 사랑이라 하셨으니 내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하나님께서 이 무거운 짐보따리 다 짊어지시고 나를 천국 보내 주십시오.’ 하고 있습니다. 통탄할 일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믿으라’ 하신 데에는 복잡하고 큰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세계를 걸어 놓고 우주를 걸어 놓고 믿으라는 것입니다. 우리들 생명 천만 개 이상의 가치로써 믿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과거에는 나를 살려 주는 예수로 믿었습니다. 우리는 그런 예수를 믿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는 세계를 살려 주기 위한 분이요, 하늘땅을 해방시키기 위한 분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우리는 그런 예수를 믿고, 그 예수의 제자가 되고, 그 예수의 백성이 되고, 그 예수의 아들딸이 되고, 그 예수의 신부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는 찾아오셨습니다. 처음에는 개인적으로 찾아오셨습니다. 돌아가신 그날부터 예수의 이름을 세울 수 없는 환경에서 방황하다가 죽음을 당하는 사도와 성도들 개개인을 찾아오셨습니다. 이렇게 예수께서 개인을 찾아오시던 시대를 거치고, 가정을 찾아오시던 시대를 거치고, 사회를 찾아오시던 시대를 거치고, 교회를 찾아오시던 시대를 거쳐서, 이제 기독교사상을 위주한 하나의 국가를 찾아오시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전세계가 민주라는 이름을 걸고 기독정신, 기독교 이념권 내에서 움직일 수 있는 시대가 되었으니, 앞으로는 예수께서 세계를 찾아오시는 시대, 세계적인 구주 시대가 올 것입니다.
앞으로는 자기 개인만의 구원을 받으려고 예수를 믿으면 예수를 맞이할 수 없습니다. 절대로 맞이할 수 없습니다. 맞이할 수 있는가 보세요. 예수가 다른 일을 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과 땅을 통치하러 오시는 것입니다. 끝날에 오시는 예수는 천주적인 예수입니다. 끝날은 하늘과 땅 어디에서도 자랑할 수 있는 아들딸을 구하기 위하여 예수가 오시는 시대입니다.
여러분, 이 땅에서 잘 믿다가 죽어 낙원에 가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해 가서 ‘하나님, 이들은 땅 위에서 잘 믿어 낙원까지 온 아들딸이니 사랑해 주십시오.’라고 못 한다는 것입니다. 낙원권 내에서는 자랑할지 몰라도 하늘 보좌를 중심삼은 전체적인 천주 이념권 내에서는 자랑할 수 없습니다. 앞으로 오시는 예수의 시대에는 예수가 친히 하늘 보좌에 가서, ‘아버지시여, 당신이 자랑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는 아들이오니 온 천주와 하늘땅을 대해서 대승리자라고 축복해 주시옵소서.’ 할 수 있는 아들 딸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가 소망하는 목표요, 하나님이 소망하는 목표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에서는 목사가 되면 제일인 줄 알지만, 아닙니다. 목사 이상의 국가적인 주님을 대할 줄 알아야 됩니다. 한 교회나 사회단체를 움직이려면 국가적인 예수의 심정을 체득해야 됩니다. 기독교 전체를 대표할 수 있는 지도자가 되려면 세계적으로 찾아오시는 예수를 맞아야 됩니다. 그렇지 못하고 옛날 그 방식 그대로 하니 기독교는 깨져 나가는 것입니다.
앞으로 주님이 오신다면 그는 하늘과 땅을 주관할 수 있는 주인공인 동시에 하나님의 심정을 주관할 수 있는 아들이 되어야 합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하늘땅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정까지 주관할 수 있는 자격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격자가 다시 오시는 주님이십니다. 예수는 그런 주인공으로 다시 오신다는 것을 똑똑히 아십시오. 그래야만 하나님이 마음놓고 ‘그래 이 세상 모든 만사를 네가 맡아라.’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부터는 하나님께서 안식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치가 그럴 게 아니에요? 땅 위에서 안식할 수 있는 기준을 종결짓지 못한다면, 역사의 최종적인 안식의 터전은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와 하나님을 해방시켜 드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어마어마한 말입니다. 여기 처음 온 사람은 거 이단자의 말이라고 할 것입니다. 좋습니다. 예수를 왜 해방시켜 드려야 되느냐? 예수는 낙원에서 아직도 기도하고 계시니 그 기도를 그치게 해드려야 됩니다. 하나님을 왜 해방시켜 드려야 되느냐?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피땀을 흘리고 탄식하시는 하나님이 되었으니 해방시켜 드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들딸을 못 찾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들딸을 못 찾았기 때문에….
무엇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천지가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창조이념을 품고, 전체의 이상을 세워 놓고 아들딸을 축복해 주셨는데, 우리의 참다운 조상들을 중심삼고 안식할 수 있는 하나의 기준이 종결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역사에는 천륜의 축이 놓여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에 이러한 축이 놓여지는 날에는 세상은 혼돈하면 혼돈할수록 더 빨리 선의 목적지를 향하여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싸움이 벌어지고 복잡하여 뭐가 안 되는 것 같지만 여기에 세계가 동원됩니다. 두고 보십시오. 내부로는 깨지는 것 같지만 세계가 찾아들어옵니다. 더 단결된다는 거예요. 뜻이 있는 사람은 이때 생각을 잘 해야 됩니다.
천운이 어디로 흐르느냐? 천운이 흐르는 방향으로 움직이다 죽은 자는 충신이 되지 않은 자가 없습니다. 천운이 흐르는 방향과 반대로 움직인 자는 역적 안 된 자가 없습니다. 섭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충신은 공의(公義)와 전체를 위해서 죽는 자요, 역적은 자기를 위해서 죽는 자입니다. 그것이 다릅니다. 우리는 전체를 위해 죽어야 됩니다.
사람은 귀한 것을 가졌으면 갖고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기뻐해야 됩니다. 주신 분과 더불어 기뻐해야 됩니다. 그래야 주신 분도 기뻐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이 더 있으면 더 주고 싶다고 할 수 있을 만큼 기뻐해야 됩니다. 이건 몇 억 원짜리를 주었는데 몇 십만 원짜리만큼만 기뻐한다면 그것을 빼앗아 갑니다. 귀한 것을 받았으면 그만큼 기뻐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런 마음이 넘쳐흐르는 자는 행복한 자입니다.
이 기쁨은 순간적인 기쁨이 아닙니다. 이런 것을 찾아 헤매는 사람, 그런 양심을 가진 사람에게는 주고도 또 주고 싶은 것입니다. 자랑하고도 또 자랑하고 싶은 것입니다. ‘야! 참 좋구나, 야! 참 귀하구나.’ 하는 사람에게는 세상에서 진정 귀하다는 것까지 잃으면서도 다 주고 싶은 것입니다. 여러분, 그 귀한 것을 받게 될 때 이런 마음이 넘쳐흘러 ‘야, 이제 고통도 문제없구나. 이 기쁨을 누가 빼앗아 갈소냐?’ 하며 기뻐한다면 그 기쁨은 개인만의 기쁨이 아닙니다. 만민의 것입니다. 자랑하고 싶고, 주고 싶고, 받는 것을 볼 때 자기가 갖고 있을 때보다 더 기뻐할 수 있는 마음이 넘쳐흐르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런 원칙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인간은 귀한 것이 있으면 내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내 것이니 누구도 노터치(no touch)다.’라고 하는 사람은 천륜의 배반자입니다. 천지의 운세는 그런 방향으로 나가는 자를 치게 됩니다.
그러기에 선하라고 했습니다. 선은 무한히 귀한 것입니다. 귀한 것을 가졌으면 기뻐해야 하고 그 다음엔 기쁜 마음으로 주어야 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의 독생자를 잃으시고도 더 주겠다고 하시고, 자기의 어려움을 잊어버리면서 주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심정입니다. 하나님을 소유해야 할 여러분, 행복의 내용과 요소를 갖추려면 ‘이런 귀한 것을 내가 가졌구나.’ 하고 기뻐해야 하고, ‘온 천주가 찾고 그러한 것을 내가 가졌구나. 그분을 내 것으로 삼았구나!’ 하고 감사해야 됩니다.
그런데 내 것으로 삼았으나 빼앗길 공포와 위협을 느끼고 있다면, 여러분은 아직 그것을 갖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하나님을 소유했다면 아무도 빼앗아 가지 못합니다. 왜? 내 몸과 일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본래 하나님은 본체(本體)요 나는 지체(肢體)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말씀하기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요 15:5)고 하셨습니다. 한 나무이기 때문에 그가 살아 있는 한 나도 살아 있고, 그가 기뻐하면 나도 기뻐하고, 그가 영원히 주고 싶으면 나도 영원히 주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아무리 귀한 것을 가지고 기뻐하고 자랑하고 영광을 돌려드리고 싶되, 빼앗길 공포의 자리에 있는 한 그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천국은 네 마음속에 있다고 하셨고,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요 14:20)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철통같은 심정의 유대를 이루어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같은 심정의 주머니를 쓰는 것과 같아서 하나님이 뛰쳐나오려고 하면 다 뛰쳐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온 세계가 그렇게 되는 날에는 못 빼앗아 갑니다.
역사노정을 면밀히 관찰해 보면, 구약시대는 물질을 제물로 드리는 시대요, 신약시대는 몸과 마음을 제물로 드리는 시대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몸을 대신한 분이요 마음을 대신한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상상대입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은 성신이 은혜를 준다고 알았지요? 성신은 몸 제물을 드리는 분입니다. 이 몸 제물이 완결되면 신랑 되신 예수가 마음 제물을 겸해서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합한 자리에서 심정 문제가 나옵니다. 그렇지요? 과거에는 물질을 제물로 드렸습니다. 지금 기독교는 성신과 예수를 중심삼고 몸과 마음을 제물로 드리는 종교입니다. 그러기에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막 12:30)고 했습니다. 이렇게 뜻의 성사는 상대적입니다. 그렇잖아요?
이제 앞으로는 어떻게 되느냐? 물질의 제물시대, 몸과 마음의 제물시대가 가고 최후에는 심정의 제물시대가 옵니다. 주님이 그리워서 못 살겠다 하는 시대입니다. 주님이 그리워서 못 살겠다는 마음으로, 그가 죽는 자리에 가면 나도 그 자리에 갈 수 있는 심정이 있어야 됩니다. 심정의 제물시대를 통과해야만 됩니다. 왜?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심정의 인연을 배반하여 마음과 몸을 잃어버리고 세상만사를 잃어버렸으니, 그것을 다 한 몸에 지녀서 탕감복귀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역사노정을 거쳐 나오고 있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잃어버린 최후의 행복의 요소를 찾는 데 있어서는 그분과 심정의 일체를 이루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심정이 하나가 되면, 역사적인 거리가 문제가 아니요, 시대적인 거리가 문제가 아니요, 평면적인 거리가 문제가 아닙니다. 어디에 갈지라도 항상 그 마음속에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심정적으로 하늘과 내가 한몸이 돼야 합니다. 하늘이 슬퍼하면 나도 슬퍼지고, 하늘이 기뻐하면 나도 기뻐질 수 있는 동참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땅에서 동참자가 되는 동시에 천국 가면 거기서도 동참자가 되어야 합니다. 행복의 동참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가 슬퍼하면 나도 슬퍼하고, 기뻐하면 나도 기뻐하고, 괴로워하면 나도 괴로워하는 동참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기준을 거쳐 가지고 나중에는 무한히 주고 싶고, 무한히 자랑하고 싶어야 됩니다. 그렇게 되면 나를 중심삼고 만물과 상대적인 관계를 맺고, 만물과 정을 통함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은 하늘과 관계됩니다.
하늘과 마음, 마음과 몸, 몸과 만물, 즉 삼대상(三對象)을 갖추게 됩니다. 이렇게 되어야 땅 위에서 사탄을 지배하고 천리원칙을 통과한 승리의 아들딸로 설 수 있습니다. 그런 자라야 하나님의 분체(分體)입니다. 남자라면 참아버지의 분체요, 여자라면 참어머니의 분체입니다. 이러한 인연을 누가 끊을소냐? 억천만 사탄이 와도 못 끊습니다. 어느 누가 ‘너는 아무개 아들이야. 그 사람은 네 어머니가 아니야.’ 하며 아무리 때리고 찌르고 죽여도 그 인연은 안 끊어집니다.
그 이상의 고통이 있어도 하나님과 일체적인 관계, 부자의 인연을 맺어야 합니다. 그런 확실하고 실증적인 내용, 체험적인 사실을 갖춘 자만이 끝날 새 시대의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반드시 공의의 심판 과정을 넘어갈 수 있을 것이며, 사랑을 중심삼은 평화의 세계에서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버님, 불초한 이 자식이 당신과 만나기 위하여 허덕이는 발걸음을 멈추고 외로이 눈물을 지을 적마다 품어 주시며 권고하시던 그 심정을 무엇으로 소개해야 될는지 표현할 말이 없음을 애달파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심정을 잃어버렸던 불쌍한 자녀들이 그 심정을 찾아 헤매게 되고, 그것을 찾기 위하여 눈물지을 수 있다 할진대 모르는 자들보다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알았사오니 부디 그와 같은 자리에 저희들을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이 몸이 저의 것이 아님을 알았사옵고, 이 몸은 자신을 위해 살지 말아야 하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심정이 머물러 있는 땅인 것을 알았사옵고, 심정이 머물러 있는 인류인 것을 알았사옵고, 심정이 머물러 있는 천륜인 것을 알았사옵니다. 심정을 벗어나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없으며 모든 존재가 심정권 내에 들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무친 심정으로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울부짖는 소리가 오늘 불쌍한 삼천만 민중 가운데 많이 나타나게 해주시옵소서. 해골과 같은 이 삼천리반도 골짝 골짝에서 울부짖는 아들딸의 음성이 들릴 적마다 땅은 망해 가는 것 같사오나, 새로운 소망은 봄빛을 받아 자라난다는 것을 아옵니다. 이것이 제가 바라던 소망이었고 이것을 위하여 오늘 이 자리에 서서 외쳤사옵니다.
여기에 모인 당신의 아들딸들, 잃어버렸던 인간이었습니다. 불쌍하고 불쌍한 인간이었습니다. 자랑하다 보니 나 자신이 고아인 것을 알았사옵고, 자랑하다 보니 나 자신이 과부인 것을 알았사옵고, 자랑하다 보니 적군에게 포로가 된 것같이 모든 것을 다 빼앗긴 것을 알았사옵니다. 좋아한 것도 탄식할 일이었고, 춤춘 것도 탄식할 일이었고, 기뻐한 것도 탄식할 일이었습니다. 이제야 아버지께서 그리워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았고, 그 아버지의 소원이 무엇인지를 알았고, 그 아버지의 심정이 어떻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있다는 사실이 고맙사옵고, 참자녀를 참자녀라 부를 수 있다는 사실이 고맙사옵니다.
6천년 전에 잃어버린 줄 알았더니 역사노정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아 인류를 찾기 위하여 수고하시는 그 아버지의 모습을 바라보게 될 때, 하나님도 그 모습을 체(體)로 삼아 만우주의 영원한 아버지로 세울 날을 고대하신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만우주를 주관할 수 있는 창조의 이념이 그 한 때를 계기로 하여 종결될 것을 알았사오니, 무지했던 과거를 용납하여 주시옵고, 비참하고도 처량하였던 선조들의 한을 이 시대의 저희를 보시고 해원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이 땅 위의 수많은 백성들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늘의 한 맺힌 울부짖음 소리를 듣고도 통곡할 줄 모르고, 땅을 치며 눈물을 흘리지 못하는 그들입니다. 당신의 아들딸이요 신부라고 자처하는 이들 가운데도 하늘이 슬퍼할 때 춤을 추는 자들이 많았사옵고, 하늘이 통곡할 때 자기를 중심삼고 살아가는 자들이 많았사옵니다. 아버지의 맺힌 한을 저희들을 통하여 푸시옵고, 탄식의 원한을 저희들을 통하여 푸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민족의 운명도 끝날에 당도하였사옵고, 세계의 운명도 새로운 무엇을 향하여 뛰어넘어야 할 최종시기에 당도한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이 민족은 잠들어 있사옵고 세계의 청년남녀들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허덕이고 있사오니, 이들에게 무엇인가 남길 수 있는 것을 가진 자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날을 그냥 지내는 저희들이 되지 말게 하시옵고, 애달픈 심정을 붙안고 영원한 세계를 위하여 이날을 지낼 수 있는 저희들이 되고, 친구의 입장에서 아버지를 위로하여 아버지를 찬양할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 수많은 교단들이 싸우고 있는 것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한 혈육을 물려받은 형제자매보다 더 가까운 입장이요 아버지의 재물을 같이 나누어야 할 운명인 것을 저희들 알고 있사오니, 그들 위에 축복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들을 위하여 매를 맞고, 복을 빌어 주고, 그들에게 하늘의 위로의 손길을 가하게 할 수 있는 아들딸이 여기에 있다 할진대 세워 주시옵소서. 뭇 생명을 대신하여 매를 맞고 가신 예수인 것을 알았사옵고, 이스라엘의 반대를 받아 홀로 민족의 반역자요, 교단의 이단자로서 갈보리산상에서 피 흘리시던 예수의 외로움을 알았사옵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서글픈 눈물을 흘리시던 그 심정을 알았사옵니다. 그와 더불어 친구가 되고 ‘그 대신 내가 싸워 나가리니, 주여, 그것을 내게 맡기시옵소서.’ 할 수 있는 하나의 제자를 만나지 못한 예수가 얼마나 분통하고 통분하였겠습니까?
저희들은 예수의 죽음을 대신하지 못하고, 그의 아픔을 위로하지 못한 타락한 혈족이옵니다. 그의 피 흘리는 손길을 보고 통쾌해 하고, 가시 면류관을 쓰고 하늘땅의 복을 빌며 눈물 흘리시던 그를 대하여 손가락질하던 선조를 가진 저희들, 그들의 후손이 된 것이 억울하고 분통하오니 저희들은 그런 자들이 되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천륜의 움직임을 알지 못하는 무지한 자들에게 그저 온유하고 겸손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무지하나 온유하고 겸손한 자들이 역사적인 범죄의 탕감 과정을 거쳐 나온 것을 알고 있사옵고, 아버지의 승리의 길도 그런 자들이 닦았음을 알고 있사옵니다. 그들이 정의를 위해서는 생명을 내놓고 나설 수 있었던 것을 아옵니다. 그런 무리가 이 삼천만 민중 가운데 나타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들이 세계 30억 인류 앞에 나타나는 날에는 하늘이 그들에게 행운을 약속하실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오늘 느낀 모든 심정이 하늘과 일체가 된다면 제가 지닌 바를 그 무엇이 빼앗을 수 있겠습니까? 억천만 천사들도, 억천만 사탄세계의 그 무엇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아버지 심정이 저희의 심정이요, 아버지의 분함을 저희의 분함으로 여겨 아버지의 동하고 정하심에 따라 저희들도 동하고 정할 줄 아는, 일체 이상 심정을 통과한 당신의 아들딸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바라며 이 시간 말씀드렸사오니, 행복 된 아들딸 되기를 저는 부탁하고 원하옵니다.
이들이 귀한 것을 찾았습니까? 무한히 자랑하고 무한히 기뻐하면서 다시는 빼앗기지 않는 영원한 승리의 은사와 축복을 내려 주시옵소서. 이 시간의 약속과 더불어 영원히 하늘땅 앞에 세움 받는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오며,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니다. 아멘.
이 삼천리반도, 삼천만 민족 위에 당신의 축복이 충만하게 되기를 아버님은 얼마나 고대하시옵니까? 그러나 삼천리반도가 아버지의 품 안에 있지 못하고, 삼천만 민족이 아버님과 상관없는 자리에 있사오며, 그리고 교단들이 있지만 그 교단들도 아버지와 인연이 먼 자리에 있사옵니다. 이 삼천리강산에 당신이 발붙일 곳은 어디이며, 당신을 환영할 수 있는 참다운 아들딸은 몇 사람이나 있사옵니까?
이런 것을 보고 이 땅이 탄식하고 있사오며, 삼천만 민족을 대해 영계의 선한 영들이 부르짖는 처량한 울분의 소리가 천지를 진동시키고 있습니다. 땅이 땅답지 못하고 사람이 사람답게 되지 못한 연고로 탄식의 소리와 원한의 소리를 내게 된 것을 저희들이 아옵니다. 이 탄식의 소리와 원한의 소리를 들으시는 하늘이 이 민족을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안 될 때이오나, 이 민족이 하늘이 이끄실 수 없는 처지에 있는 것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보잘것없는 저희들이 몰리고 쫓김받던 무리로서 여기에 엎드렸사옵니다. 남이 알지 못하는 하나의 목적지를 향하여 나서는 길에는 가시 자국이 남게 되고 상처가 있게 될 줄 아옵니다. 그러나 이것을 개의치 않고 넘어가야 할 저희들인 것을 아시는 아버님, 저희들이 이 길을 가기 위해서는 철두철미한 각오와 맹세와 결심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늘과의 참다운 심정적인 관계가 이 자리에서 맺어지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아오니, 아버지, 당신의 손길로 친히 저희들을 붙들어 주시옵고, 아버지의 양팔로 저희들을 당신의 사랑의 품에 품어 주시옵소서. 얼마나 고대하시고 소원하셨던 일이었습니까? 이제 그 심정을 가히 짐작할 수 있사옵고, 그 애달픔을 가히 짐작할 수 있사옵니다.
아버지라 부를 수 없는 불초한 이 모습들, 수많은 선지들이 쌓아온 피의 제단으로 인해 속죄 받을 수 있게 된 놀라운 은사를 받고도 감사할 줄 모르는 과거의 생활을 다시 한번 뉘우치면서, 실적을 갖고 아버지 앞에 드릴 수 있어야 할 터인데 빈손 들고 나온 것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세상의 그 무엇을 요구하는 아버지가 아니시기에, 간절한 마음 간절한 심정만을 아버지 앞에 드리옵니다. 아버지의 얼굴이 그립고 보고 싶어 눈물짓는 그 모습을 아버지께 드리고 싶어 나왔사옵고, 상처 입으신 아버지의 손길을 붙들고 눈물 뿌리고 싶고 또 그 손길이 그리워 나왔사옵니다. 그 마음과 몸의 상처가 심하심에도 개의치 않으시고 잃어버린 자녀를 찾기 위하여 방황하시는 아버지의 수심에 잠기신 모습, 초췌한 그 모습을 붙들기 위해 저희들은 나왔사옵니다. 이런 마음에 어리어 아버지라 부르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여기에 모였다 할진대 아버지께서 그러한 때 저를 불러 주시고 저를 찾아 주신 것과 같이 이들도 그러한 자리에 처하게 될 때 버리지 않으실 것을 아옵니다.
아버님! 가라 하신 길이 서글픈 길이 아니었사옵고, 가고 보면 황공한 은사의 길이었사옵니다. 죽으라 하시며 내몰던 길도 죽이기 위해 예비한 길이 아닌 것을 알았사옵나이다. 그 내면의 곡절을 알게 될 때, 저희가 무엇을 더 바라겠사옵니까? 이것이 다 저희를 위해 먼저 수고하신 아버지의 수고의 증거를 보여 주시기 위한 역사임을 알았사옵니다. 저희들이 그런 느낌을 체휼하고 감격의 눈물을 지을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신 것만도 감사 하옵니다.
이제, 이들이 그 무엇을 찾기 위하여 여기에 왔사옵니까? 그 무엇을 보기 위하여 여기에 왔사오며, 그 무슨 인연을 맺기 위하여 여기에 왔사옵니까? 보여 줄 것은 눈물과 애달픈 사정밖에 없사옵고, 인연 맺을 것은 안타까운 것밖에 없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그래도 이 인연이 아니면, 이 사정이 아니면 저희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사탄의 제물로 사라져 탄식하게 될까 염려하여 나온 무리이오니, 이 시간 붙들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당신이 붙들고 눈물지으실 수 있는 자녀가 있고 ‘아무개야’라고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아들딸이 있다 할진대 여기서부터 하늘의 역사는 삼천만을 이끌 것이요, 잠들어 있는 세계 인류의 심정을 움직여 하늘 앞으로 향하게 하는 기원이 될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여기에서 젊은이의 가슴 가슴이 불타올라 서로 손에 손을 맞잡고 ‘아무개야 뜻을 위해 가자’ 하고 외치는 움직임이 있다 할진대 삼천만에게는 살 길이 열릴 것이요, 사망의 동산에 생명의 군대가 와서 함께 싸워줄 것입니다.
저희들은 그러한 무리가 그리워 모였사옵고, 그러한 길을 가기 위해 싸워 나왔사오며, 그런 자리에서 승리의 제단을 세워 아버지와 더불어 만우주 앞에 보이기 위하여 나왔사오니, 처음 각오한 이 마음 변하지 않게 하여 주시옵고, 작정하여 드리고자 하는 이 일편단심, 이 절개를 굽히지 않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각오한 그 충절을 천륜이 변하지 않는 한 변치 않고 간직하는 당신의 아들딸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제가 여기 섰사옵니다. 모인 무리들 앞에 무엇을 전하오리까. 이들은 사망세계에서 한스러운 환경을 타개하여 승리의 개가를 부르겠다는 소망을 갖고 허덕이오나, 사람의 힘만 가지고는 되지 않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사오니, 당신께서 이 일을 책임져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저희의 몸이 저희의 몸이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고, 저희의 마음이 어떤 주관이나 과거의 어떤 인습적인 관념하에서 움직이지 말게 하시옵소서. 어린아이와 같이, 당신의 손길에 붙들린 진흙과 같이 빚고 싶으신 아버지의 뜻대로 빚어져, 당신이 원하시는 형상으로 나타날 수 있도록 자기의 마음 몸 다 드러내 놓는 어린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무슨 말을 하오리까. 이미 많은 말씀을 했사옵니다. 그 말씀을 아버지 책임져 주시옵소서. 분부해야 할 책임이 있는 연고로 또 나섰사오니 이들 앞에 권고하시고 싶으신 것을 권고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전하는 자의 마음과 받는 자의 마음이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시옵고, 말에 귀를 기울여 움직이는 저희들이 되지 말고, 하늘의 심정과 움직임에 동하는 저희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 외로운 심정을 아버지 앞에 묶어 놓고 숨은 제단을 쌓으면서 호소하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이 천지간에 많은 줄 아오니, 그들에게도 천적인 은사와 영광의 때가 가까워 온 것을 느끼고 체휼할 수 있게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것을 맡기오니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말 씀> 오늘은 봉독한 말씀을 중심삼고 ‘하나님의 사랑과 더불어 사는 자가 되자’라는 제목으로 여러분 앞에 말씀드리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사랑과 같이 사는 자가 되자’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하늘을 찾아 나아가는 길에서 죽어갔습니다. 지금까지의 기독교 역사는 순교의 피로 물든 역사인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어떤 생명이라도 쓰러질 적마다 울부짖으며 찾는 분은 온전한 사랑을 지닌 하나님뿐이었습니다.
인간이 타락한 그날부터 슬픔의 역사는 시작되었습니다. 그러기에 그 역사를 거쳐가는 인간들은 슬픔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고, 고통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고, 있는 힘을 다해 싸워도 안 될 때는 자기의 피를 뿌리면서 싸워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지금까지 하나님의 아들 딸들도 슬픔에 대해 항거했고 고통에 대해 항거했으나, 그것으로 끝나지 않으므로 나중에는 피를 뿌리고 생명을 바치면서까지 항거해 나온 것을 우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한 목적은 어디 있느뇨?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하는 데 있습니다. 쓰러진 그 터전 위에 하나님의 사랑의 꽃을 피우기 위하여 그들은 쓰러져 갔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가 골고다에서 피를 뿌리며 30여 년의 생애를 마친 것도 하나님의 사랑을 남기기 위함이었고, 또 피를 뿌린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뿌리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우리들은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렇게 뿌려진 하나님의 사랑이 퍼지고 퍼져, 세계가 이 땅 전체가 사랑을 중심한 승리의 터전이 되어야 할 것이었는데, 그렇게 되지 못했으니 탄식할 일입니다. 그러한 땅이 되지 않는 한, 또 다시 성자가 죽음을 당하고 성도들이 눈물을 흘리며 피를 뿌려야 한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둬야 되리라고 봅니다.
본래 하나님이 천지 만물을 어떤 놀이거리로 지으신 것이 아닙니다. 어떤 취미로 지으신 것이 아닙니다. 어떤 목적도 방향도 없이, 어떤 이념적인 내용도 없이 그저 지으신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크나큰 목적과 대우주의 이념을 두고 지으셨습니다. 그래서 지극히 작은 미물(微物)에서부터 어마어마하게 큰 우주에 이르기까지 모든 존재물에는 하나님의 심정을 통한 이념이 깃들어 있는 것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이념을 두고 지으신 목적은 무엇일 것이뇨?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은 이념의 세계, 즉 사랑과 더불어 통하고, 사랑과 더불어 즐기고, 사랑과 더불어 살고, 사랑과 더불어 죽는 세계를 목적하신 것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잠에서 깨어 눈을 뜨면 눈앞에 펼쳐진 만상(萬象)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보이는 그 만상을 통하여 무엇인지 모를 간접적인 인상을 받고 그 반응되는 감각으로 생활에서의 감각을 높여 가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지극히 작은 미물이라도 반드시 우리와 인연되어 있고 관계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무시해도 그 미물은 그날 그날 천륜의 이념에 따라 존재의 가치를 드러내며 인간과 더불어 인연 맺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우리는 모르고 살아왔습니다.
그것은 왜 그러뇨? 지극히 작은 존재물에서부터 만물을 주관할 수 있는 만물의 영장이라 하는 인간에 이르기까지 그 존재 목적을 중심삼고 보면, 다 하나님의 대우주의 이념을 통할 수 있는 사랑의 이념권 내에 들어 있는 연고입니다. 그래서 작은 것은 대우주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있어서 큰 분야를 맡고 있는 것에 흡수되어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주는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작은 것은 큰 것에 흡수되어 그것의 재료가 되고, 한 요소가 되어 대이념을 중심하고 하나의 목적을 향하게 됩니다. 역사는 이렇게 진전되어 나오는 것이고, 존재세계는 천륜이란 원칙의 궤도에 따라 하나의 목적을 위해 움직여 나온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만물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이제 상대적으로만 헤아릴 것이 아니라 주관적으로 자신을 중심삼고 볼 때에 여러분 자신은 어떻게 되어 있어요? 여러분 자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생활하는 데 있어서 백 퍼센트 활용하지 않는 신체의 지극히 작은 부분이 있다 할진대 그것도 생의 목적을 위해 떼려야 뗄 수 없는 공동이념권 내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지극히 작은 손가락 하나도 대우주의 그 무엇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세포 하나도 역시 대우주의 이념 밑에서 사명적인 일편을 지니고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존재세계를 법칙적으로 헤아려 공식화하고 이것으로 지식의 일부를 이루어 놓은 것이 과학입니다. 과학이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가 자신의 피부를 만지면 체온이 있고 물론 촉감도 있지만, 그 외에 느껴지는 다른 무엇이 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주의 이념은 우리의 생활을 수습해 나가면서 우리가 반대 방향으로 가려 할 때에는 우주의 목적과 일치하는 방향으로 가라고 합니다. 이런 충고를 받고 사는 자신임에 틀림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그러기에 큰 물건이든지 작은 물건이든지 어떤 물건이라 할지라도 그것들은 전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대이념권 내에 있습니다. 또 그것들을 하나님은 사랑을 중심삼고 지으셨습니다. 그렇게 지은 대우주는 하나님이 바라보시는 최고로 희락을 느끼실 수 있는 평화의 세계가 되어야 합니다. 그 목적이 이루어져 하나님께서 ‘나는 행복하다’ 하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목적을 종결짓기 위하여 이 대우주권 내에 하나님의 이념이 있는 동시에 사랑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 인간들은 지금 탄식하고 슬퍼하고 고통스러워하며, 죽느니 사느니 야단법석입니다. 그건 무엇 때문이뇨? 타락한 연고입니다. 자기가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자기가 어떤 위치에 처해 있는지를 모르고 자기가 가야 할 방향과 가야 할 목적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어떤 고통과 슬픔, 그리고 어떠한 어려움이 닥칠지라도 대우주의 이념권 내에 있는 자신의 위치가 그만한 어려움에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아는 자는 그 고통의 고개를 넘어갈 것입니다. 또 이만한 고통을 참지 못할 내가 아니요, 이만한 죽음의 고개와 바꿔버려야 하는 나의 생명이 아니라고 느끼는 자가 있다 할진대 그는 인생행로에 있어서 성공한 자입니다. ‘어떠한 핍박과 죽음의 고개가 닥쳐와도 내가 가는 방향을 바꿀 수 없다. 나의 가치는 땅 위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다’ 하는 자는 땅 위에 있어도 하늘의 사람입니다. 땅에서 죽더라도 그는 하늘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의 중심이 하나님의 사랑이라 할진대 그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자랑할 수 있는 가치를 지닌 사람, 그런 위치에서 사랑을 영원토록 주창하며 사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 사람은 인생행로에 있어서 최고의 성공자입니다. 땅 위에서 못 할 것이 없습니다. 아무것을 해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그곳을 향하여 인간은 움직여 나가고 있습니다. 한 분을 중심삼고 이 땅 위에 그러한 자리가 잡히지 않는 한 세계는 수습될 수 없습니다. 그러한 이념과 그러한 가치와 그러한 위치와 그러한 방향을 가진 사람이 있다 할진대 사망의 권한도 그를 지배할 수 없고, 어떤 주의나 사상이 아무리 팽창하더라도 그 주의나 사상이 그를 삼켜 버릴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게 하기 위하여 하늘은 종교를 세우시고, 무슨 도니 양심이니 선이니 하는 것들을 세워 찾아 나오셨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6천년 동안 하나님께서 수고하신 터전 위에 세워진 기독교가 오늘날 그런 자리에서 있느냐?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그런 자리에 서 있느냐? 그렇지 못합니다. 이 일을 종결짓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업이 성취되지 않거늘, 여러분은 이 하나님의 사업을 성취시키는 데 있어서 어느 한 부분이라도 맡으려고 했습니까? 전체 섭리의 뜻을 완결짓는 데 있어서 하나의 조그만 분야라도 책임지려고 했습니까? 여러분 자신에게 반문해 보십시오.
그러면 타락인간이 어떻게 해야 이 대우주 이념권 내에 잠겨 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세계를 찾아 들어갈 것이뇨? 이것이 문제입니다. 어떻게 해야 찾아 들어갈 것이뇨?
그 방법은 간단합니다. 어떤 시인이 자연을 보고 시를 한 귀절 썼다고 할 때, 독자가 그 한 구절의 시 속에서 시인이 바라보던 자연환경을 그릴 수 있으며, 그 시인의 감정까지도 공감할 수 있다면 그를 위대한 시인이라고 합니다. 또 어떤 화가가 찍어 놓은 점 하나에서 그 작가의 사람됨과 심정과 감정의 세계와 그의 이념을 헤아릴 수 있다 할진대 그 작품은 훌륭한 작품이 될 것입니다. 평면적으로 보이는 어떤 상(像)이 문제가 아니라, 그 형상 가운데 숨겨져 복잡한 우주관이 담겨 있는 내적인 상(相)이 모든 가치의 기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천하만상을 무심코 바라보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대창조 이념세계의 존재물들은 모두 하나의 사랑을 목적으로 하여 움직이기 때문에, 지극히 미미한 존재라 할지라도 거기에는 하나님의 온 정력이 깃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피조세계를 엿새 동안에 지으셨지만 그 하나 하나의 존재물, 예를 들면 첫째 날이나 둘째 날에 지음받은 존재물에도 엿새 이후에 벌어질 대우주의 창조이념이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어느 것이든 하나님의 심정을 뿌리로 하여 지어지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고 단정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옛날의 유명한 사람들이 남긴 유물을 소중히 여깁니다. 그들이 지니고 살던 골동품을 소중히 여깁니다. 그러나 지금 여러분의 눈앞에 모래알이 떨어져 있다 할 때, 그 모래알 하나에도 하나님의 심정이 인연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것은 어떤 귀한 사람이나 훌륭한 사람보다 더 높은 창조주의 손길을 거쳐서 생긴 심정의 결실체입니다. 이러한 가치적인 존재물인 것을 알고, 모래알 하나라도 우주와 같이 귀하게 여기는 자가 있다면 그는 틀림없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모든 만물이 그렇게 인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연이란 것은 지극히 작은 데서부터 맺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개체도 4백억 개나 되는 세포로 인연되어 있는 생명체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한 창조이념세계, 즉 대우주의 모든 존재물은 어느 것 하나도 하나님의 심정 밖에서 생겨난 것이 없습니다. 이런 것을 느끼는 시인은 위대한 시인일 것입니다.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 천주적인 심정을 느껴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시인이 있다면 그는 우주적인 시인일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런 것에 대해 너무나 무시하고 무관심했습니다. 우리 주위에 우리도 모르게 벌어져 있는 천하만상이 하나님의 사랑과 더불어 존재하는 것들이란 사실을 몰랐습니다.
신령한 경지에 들어가 보면 조그만 모래 한 알에도 우주의 이치가 들어 있고, 하나의 원자에도 무궁무진한 우주의 조화가 들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잘 알 수는 없지만 어떤 복합적인 힘을 통하여 나타난 결과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분자를 지나 원자, 원자를 지나 소립자…. 이런 것들이 무의식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의식과 목적을 갖추고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을 거쳐 나온 것이요, 반드시 하나님과 심정적인 관계를 맺고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철두철미하게 알아야 되겠습니다.
도인은 어떤 사람이뇨? 풀 한 포기를 붙들고도 ‘하나님!’ 할 수 있는 심정으로 자기의 가치와 동등하게 그 가치를 인식할 수 있는 사람이 최고의 도인일 것입니다. 그렇게 그 가치를 노래할 수 있는 사람이 최고의 예술가일 것입니다. 각양각색으로 존재하는 천지 만상을 보고 하나님의 각양각색의 사랑과 심정의 묘미를 발견하고, 그것들과 친구가 되어서 더불어 즐길 수 있는 감정을 가진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는 만우주를 대표할 수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만물의 영장입니다. 그런데 먹을 것밖에 모르는 사람이 만물의 영장이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피조세계를 지으실 때 거기에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지어 놓고는 보기에 선한지라 하셨습니다. 기쁨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기쁨이 무엇입니까? 어떤 목적을 이루었을 때 느끼는 것입니다. 지으신 만물에 하나님의 목적의식이 내재되어 있기에 창조된 만물을 놓고 하나님은 기쁨을 느끼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복귀의 세계는 어떠한 세계이뇨? 한마디로 말한다면 삼라만상의 개체 개체를 보면서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심정적인 인연을 입체적으로 갖춘 사람들이 사는 세계입니다. 하늘이 보시는 인격의 가치는 거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옛날에 성 프란체스코 같은 양반이 동물을 보고, 혹은 새를 보고 설교했다는 말도 거짓말이 아닙니다. 꿈같은 이야기입니다만 꿈이 아니고 사실입니다.
오늘날 인간들은 한스러운 복귀의 고개를 넘어 새로운 천지의 주인공이 되고 싶어합니다. 우리는 더더욱 그러한 사람이 되고 싶어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한 사람이 되려면 우리에게 속한 일체는 우리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자기의식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내 소유관념이 있어서도 안 됩니다. 내가 주체적인 입장에서 어떤 상대물을 취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나는 반응하는 개성체, 즉 어떤 주체의 재료가 되는 상대체는 될 수 있지만, 하나의 주체로서 상대체를 가져선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이는 만물도 내 것이 아닙니다. 내게 속한 일체도 내 것이 아닙니다. ‘나’라고 주장하는 나도 내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찾으려면 나를 부정해야 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렇습니다. 나를 부정하라. 왜? 타락의 존재의식이 남아 있고 타락의 소유관념이 남아 있는 그대로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일체를 부정해야 됩니다. 나는 내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나는 누구의 것이뇨? 나는 나라의 것이요, 세계의 것이며, 천주(天宙)의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나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인간들은 반드시 이런 관계를 완결지어야 합니다. 인간은 지음받을 때부터 그런 인연을 가지고 있었으나 타락으로 말미암아 그 관계의 통로가 막혔습니다. 막힌 이것을 다시 개방하기 위해서는 나를 부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길을 개방시키기 위한 것이 6천년 동안 수고하신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씨족에서 부족, 민족, 국가를 거쳐 오늘날 민주와 공산 진영을 끌고 나오시는 목적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민족은 민족을 넘어 세계를 붙드는 민족입니다. 오늘날 미국이 민주 진영을 움직이고 세계를 지도하려면 자기들의 개체적인 국가이념을 가지고 움직여선 안 됩니다. 민주주의를 중심삼고 일개 국가의 차원을 넘어야 민주 진영을 리드(lead)할 수 있을 것이요, 세계를 지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들을 대하여 모든 것을 부정하라 하십니다. 이것은 인간을 대우주의 이념권 내로 몰아넣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연고로 도의 길에서는 일체 부정입니다. 부정이에요. 일체 용납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여기 서서 말하는 이 사람의 말이 아니라 성경에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의 이념과 주의를 부정하고, 가정적인 환경을 부정하고 개체를 부정하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마음을 부정하고 심정까지 부정하라고 가르칩니다.
왜 그러뇨? 그 목적이 무엇이뇨? 하나님께서는 타락하지 않은 것만을 사랑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타락의 요소와 인연을 맺은 것은 일체 용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타락하지 않은 본래의 세계로 옮기기 위해서 부정하라 하신 것입니다.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으면 온 천하가 우리 것이요, 하나님도 우리 것입니다. 그런데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소유할 수 있는 자격을 잃어버렸으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버려야 합니다. ‘보이는 세계도 우리의 세계가 아니요, 지어진 모든 만물도 우리 것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면서 하나님께로 돌려드려야 합니다. 그런 입장에서 다시 하나님과 인연을 맺고 거듭난 후 모든 만물을 주관하는 위치에 세우려는 것이 구원의 목적입니다.
이런 노정을 거쳐 나가야 할 우리에게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심정입니다. 내 심정 기준을 어디에 세울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내가 보고 듣고 기뻐하는 일체가 내 것이 아니라 사탄권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끌어다가 하늘권 내로 옮겨 놓기 위해 타락한 인간들은 오늘날까지 허덕여 나온 것입니다. 이것이 역사의 목적이요, 하늘의 섭리의 목적이요, 창조의 목적입니다.
여러분, 마음의 문을 열고 다시 한번 타락하지 않은 본연의 세계를 회상해 봅시다. 본래 하나님과 아담 해와는 부자의 관계였습니다, 부자의 관계. 그런데 아담 해와는 그것을 모르고 타락했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이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 해와를 만물의 주인공으로 세우시고 소망하시던 목표가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의 감정이 스며들고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의 창조의 감정이 스며들기를 바라셨습니다. 여러분, 사춘기에 접어들면 만물을 대할 때에 신비감을 느끼지요? 그래요, 안 그래요? 여러분도 정열이 최고조로 불타오를 때 시를 쓰면 놀라운 시를 쓸 수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대우주의 심정을 지닌 인간으로 완성하는 것을 목표로 설정하시고 인간을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그 목표대로 성숙하기를 고대하고 고대하셨습니다. 때를 기다리신 것입니다. 그들이 성숙하면 할수록 남자가 여자를, 여자가 남자를 대할 때 각각 서로를 대우주 전체의 실체로 감각하기를 바라셨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감정세계에 하나님도 들어가고 만물도 들어갈 수 있는 정도까지 인간이 성숙하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아담 해와가 만일 그러한 자리에 들어간 부부로서 하나님과 심정적으로 화하고 만우주와 심정적으로 화하여서, 하나님으로부터 ‘너희들을 지음으로써 모든 소망의 목적이 완결되었다.’ 하는 말씀을 들을 수 있었던들, 오늘날 이 천지는 이 꼴이 안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신비스러운 경지, 도의 길을 찾아 들어가면 그런 감정이 스며드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매일 호흡하는 공기 속에서도, 뛰는 맥박에서도 천주의 감정이 넘쳐흐르는 것을 느끼면서 자기의 손을 보고도 웃을 수 있고 무한한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멋진 사람입니다. 이렇게 멋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만일 아담 해와가 타락하지 않고 그런 경지에 갔다면 만물과 하늘과 더불어 얼마나 아름답게 살았겠습니까? 아담 해와가 타락할 때에 그런 사실을 알았느냐? 몰랐습니다. 그러니 그들의 후손으로 태어난 우리도 그것을 알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기도하라, 도(道)의 길을 가라, 모든 것을 부정하고 나서라, 나서서 올라오라.’ 하시는 것입니다. 어디까지 올라가야 되느냐? 아담 해와가 타락하기 이전의 지점까지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인간 세계에 요구하는 도(道)의 표준입니다.
여러분들은 본연의 세계와 본연의 인간과 심정을 그리워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마음이 그렇습니까? ‘하나님!’ 하고 부르는 순간, 하나님과 더불어 화하여 사랑할 수 있고, 설명을 듣지 않고도 그 존재가치를 백 퍼센트 인정할 수 있는 세계가 심정의 세계요, 사랑의 세계입니다. 설명이 필요한 세계는 이치의 세계입니다. 오늘날 이 세계는 새로운 이치를 논위(論謂)하고 철학을 세워 나오지만, 심정을 가진 인간은 절대 지배하지 못합니다.
최후에는 어떤 이치로써 해명할 수 있는 심정 말고, 어떤 이치로써 해명할 수 없는 무한한 사랑의 심정세계, 설명은 못 하지만 절대적인 것을 찾아야 됩니다. 어떤 논리로써 해명할 수 있는 것이라면 인간도 창조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해명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해명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있습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생명을 해명할 수 있어요? 여러분의 양심을 해명할 수 있어요? 천적인 무한한 우주의 감정과 화할 수 있는 경지에 들어갔다면, 그런 인간이 되었다면, 오늘날 인간은 이렇게 살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늘날과 같은 20세기 문명의 과학세계는 벌써 옛날에 다 이루어졌다는 거예요. 몇천 년 전에 다 되었다는 거예요. 현하 20세기의 문명은 4백년 걸려 이룬 문명입니다. 문예부흥 이후의 문명이에요.
오늘날 우리들은 탄식하고 허덕이며 죽느니 사느니 야단법석입니다. 그런 길을 거쳐 마땅합니다. 그러다가 인간이 결국에 가서 나서는 길이 도의 길입니다. 세상에 믿을 것 없고 의지할 것 없어서 가는 길이 도의 길입니다. 도의 길을 가는 사람들은 어떤 의미에서 인생행로의 낙오자들입니다. 사회생활에서 낙오되고 버림받은 무리들이에요, 버림받은 무리. 버림받은 무리지만 버림받은 무리들에 의해 역사는 지금까지 수습되어 나왔습니다. 현 문명 또한 배척받은 무리들로 말미암아 발전되어 나온 것입니다.
이것은 왜 그러뇨? 여기에는 어떤 이유가 내재(內在)되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좀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자기의 가치를 알고 자기를 중심삼은 가정과 사회와 국가, 세계, 천주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을 아버지라 할 수 없겠어요? 그러나 현재와 같은 입장에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껄렁껄렁한 아버지예요? 그런 하나님 되려고 지금까지 싸워 나왔겠어요? 여러분 좀 생각해 보란 말이에요.
부모가 사랑하는 아들딸에게 줄 손수건을 만든다면, 어떻게 만듭니까? 심정에 어리어, 사랑하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만들 것입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손수건, 자기의 사랑을 대신하고 자기의 심정을 대신하는 이 손수건이 사랑하는 아들딸의 손으로 옮겨질 때 나의 사랑과 심정도 옮겨지겠지 하는 생각을 하며 정성을 다해 지어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아들딸이 대수롭지 않게 받았다고 해 봐요. 그들을 아들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천지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가 사랑하는 자녀에게 지어준 손수건 정도의 문제가 아닙니다. 영원불변의 가치를 지닌 실존물로서, 당시뿐만 아니라 후손만대에까지 영원히 당신의 심정의 인연을 노래할 수 있는 존재물로 하나님은 이 만물을 지으셨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꽃을 보며 무슨 요소로 되어 있는가 하며 성분을 따지고 분석하는 사람보다 꽃을 보며 웃고 즐기는 사람을 더 귀하게 보십니다. 과학은 분석하는 것이지만 예술은 무엇에 대해 보고 느낀 감정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느낌이에요. 그러기에 예술은 과학보다 앞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산이나 들에 가서 풀 한 포기를 보았을 때, ‘아, 이것은 무슨 풀인데 무슨 씨로 생겨났고 무슨 원소가 부합되어 이렇게 되었다.’ 하는 것과 ‘야, 아름답구나.’ 하고 감탄하며 심정으로 대하는 것 중 어느 것이 귀하겠어요? 심정을 갖고 대할 때는 1대 1로 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체를 대하는 것이 됩니다. 분석적으로 대하는 것과 비할 바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과 더불어 사는 사람, 하나님의 사랑과 같이 사는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입니다. 하늘을 주관할 수 있고 땅을 주관할 수 있는 온 천주의 주인공입니다. 이렇게 놀라운 것이 인간입니다. 만일 그런 아들딸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훌륭하게 되었다고 저주하시겠어요? 저주하시겠느냐 말이에요. 그 이상 더 좋아하실 수 있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의 손으로 만든 것이 여러분을 대해 아버지, 혹은 주인님이라고 부르며 웃고 즐거워하며 좋아한다면, 여러분은 그것을 보고 ‘야 이 녀석아! 벼락 맞을 녀석아’ 하겠습니까? 아닐 것입니다. 그 이상 더 좋은 것이 없을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 놓인 인간이기에 만물의 영장입니다. 그러면 인간이 만물의 영장으로 결정될 수 있는 본질적인 내용은 무엇이뇨? 사랑입니다, 사랑. 인간은 이 사랑의 감정을 무한세계까지 인연 지을 수 있는 중심 위치에 있기 때문에 만물의 영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더불어 산다고 하였으니, 이제 여러분의 생활 목표는 어떠해야 하는가? 사랑의 심정을 갖고 모심의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런 마음으로 이러한 손수건을 대해 경배해도 우상 숭배가 아닙니다. 우상 숭배가 아니에요. 사랑의 심정을 가지고 머리 숙이는데 그 무엇이 지배할 수 있겠습니까? 자기의 영광을 초월하여 심정으로 경배드리면 사탄이 더 그러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천주의 심정을 통해 나가는 데는 우상이 없는 것입니다.
불교인들이 돌로 부처님을 만들어 불공을 드린다고 비난을 하지만, 하늘 앞에 심정만 통하면 하늘도 칠 수 없다는 거예요. 그런 입장에만 서면 불교 믿는 사람도 천국 갑니다. 아무리 우상 숭배를 한다 하지만 천국 간다는 것입니다. 천상의 법도를 그리워하는 사무친 마음이 없기에 지옥 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오관(五官)을 통하여 보고 듣고 대하는 일체는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를 두고 있음을 알아야 됩니다. 그런 심정세계에 들어가서는 이 시계를 보고 ‘하나님!’ 해도 죄가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 기도를 하기 위해서 산중에 들어가고, 뭐 새벽기도를 하고 철야 기도를 하는 것보다도 풀 한 포기를 보고도 그것을 지으신 아버지의 손길, 지으실 때 기뻐하셨을 아버지의 그 심정이 그리워서 눈물짓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는 천주의 대주재이신 하나님의 아들딸임에 틀림없습니다. 만점 받을 수 있는 자격자입니다.
여러분, 알고 싶지 않아요? 하나님이 천지 만물을 지으실 때 어떠한 심정으로 지으셨는지 생각해 보았어요? 바위를 보고 ‘바위야 너는 하나님의 심정과 어떤 내적 이념을 가지고 이 천지에 태어났니?’ 풀 한 포기를 보고 도 ‘너는 어떤 내적인 인연을 가지고 태어났니?’ 해 보았습니까? ‘하나님의 심정을 만물을 통하여 알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는데, 너를 보고도 이렇게 무감각하니 이런 나를 저주하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감각이 예민한 사람을 보고 이상주의자니 뭐니 하며 돌았다고 합니다. 육감을 갖고 느끼는 세계 이상의 세계를 느끼는 사람을 보고 돌았다고 합니다. 돌아도 목적을 위해서 돌면 됩니다. 여러분, 춤추는 것은 도는 것 아닙니까? 춤추는 것을 보고는 좋다 하지요. 도는 것이라면 그 이상 도는 것이 어디 있어요? 그러나 기쁠 수 있는 환경을 중심삼고 돌면 좋다는 겁니다. 돌았다는 비난을 받으며 쫓겨도 좋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노래할 수 있고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낼 수 있다면 어떠해도 좋다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어느 정도 알 만큼 알았습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본연의 기준을 되찾아서 새로운 이념의 천국에 들어가 살려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냐 하는 것도 알았습니다. 지어진 모든 만물은 하나님과 사랑의 인연을 맺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아버지의 그림자와 같이 느낄 줄 알아야 됩니다. 사실 만물은 아버지 심정의 그림자와 같은 것입니다. 아버지가 있는 정력을 다 기울여 지으신 것이요, 아버지의 손길을 거쳐 지어진 것이니, 아버지의 대신자와 같이 귀하고 가치 있게 여기고 사랑해 주기를 만물은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타락 이후 오늘날까지 어느 누구도 그렇게 대해 주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탄식을 안 할 수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 만물이 탄식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깃들어 있는 자연을 바라보고 ‘세상의 왕, 혹은 어떤 유명한 사람이 갖고 있는 훌륭하다는 물건에 비할소냐? 골동품에 비할소냐? 어떤 유명한 부인이 입고 있는 호화로운 옷에 비할소냐?’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는 자연세계 앞에 자신도 모르는 죄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의 생명체를 볼 때, ‘인간이 만든 어떤 물건에 비할소냐,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보다 훌륭하겠는가’ 하며, 하나님의 심정을 기울여 지으신 만물을 붙들고 무엇보다도 귀하게 느끼는 자가 있다 할진대 이는 틀림없이 하늘의 아들딸일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기도가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과 같이 사는 사람입니다. 하늘이 인간을 그러한 자리까지 내모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보십시오. 인간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의 것은 무엇이든지 좋아하고 귀여워합니다. 그렇잖아요? 그러면서도 제일 사랑해야 할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은 귀여워할 줄 모릅니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딸이 돼요?
탄식하는 만물의 한을 해원해 주어야 할 책임을 진 여러분은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에서도 6천년 전 그것들을 지으실 때의 하나님의 심정과 창조의 손길을 체휼해야 됩니다. 그런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통일교회 식구들은 길을 가다가 풀 한 포기를 보고도 눈물을 지을 수 있어야 됩니다. 나무 한 그루를 붙들고도 울 수 있어야 됩니다. ‘주인을 잃어버렸으니 얼마나 외로웠느냐?’ 하면서 말입니다. 한번 그래 보세요. 여기서 말하는 이 사람은 많이 울어 보았습니다. 바위를 붙들고도 울어 보고, 바람이 부는 것을 보고도 울어 보았습니다. 왜 그래야 되는지 이제 말씀을 들었으니 이해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가치 있는 만물이,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한 인연을 맺은 귀한 만물이, 오늘날 어떠한 왕궁에서 뭐 국보니 보물이니 하며 귀하게 여기는 물건만큼의 취급도 받지 못하는 서글픔을 나는 알아 줘야지, 나만은 알아주어야지.’ 하면서 나왔습니다. ‘이 땅에 사는 30억 인류가 전부 몰라주어도 나는 알아줘야지.’ 하는 마음을 여러분들이 가진다면, 이 민족은 앞으로 30억 인류를 지배할 수 있는 새로운 민족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관념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어느 누가 만물을 놓고, 대대로 내려오는 자기 가문의 보물보다, 세상에서 제일 귀한 보석이라 하는 다이아몬드보다 귀하게 여겨 붙들고 놓지 않으려 합니까? 그런 사람이 어디 있어요? 하나님은 당신께서 지으신 것을 심정적으로 알아주고 그것을 붙들고 눈물짓는 사람을 보고 ‘오냐’ 하십니다. 그렇게 하시겠는가 안 하시겠는가 생각해 보란 말이에요. 신령한 경지에 들어가면 갈수록 그런 감정이 풍부해지는 것입니다. 도통(道通)이란 그런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심정을 통해서 보면 모든 것은 하나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는 동시에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 있는 주인공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남자든 여자든 가정에 들어가서는 그 가정을 움직일 수 있는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또 그 가정은 사회를 움직일 수 있는 주인이 되어야 하고, 그 사회는 국가를 움직일 수 있는 주인이 되어야 하고, 그 국가는 세계를 움직일 수 있는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은 사람이 만든 물건이 백 퍼센트의 가치를 발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의 손길을 거쳐 지어진 순수한 이 풀 한 포기를 무엇보다도 가치 있게 느낄 수 있는 세계가 되기를 나는 바라고 있습니다. 어떠한 향기보다도 공기의 맛이 더 좋습니다. 내가 야목에 가서도 얘기했지만, 사람이 공기의 맛을 알고 햇빛의 맛을 알고 물의 맛을 알면 병나는 법이 없습니다. 이런 심정으로 살면 누구나 건강체가 될 것입니다.
만물은 하나님의 심정에서 우러나온 것이요, 심정과 더불어 영원한 존재의 가치를 노래할 수 있도록 지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밥 한술을 먹을 때도 ‘감사합니다. 황공합니다. 타락의 후손 앞에 이것이 웬 일입니까?’ 해 보십시오. 그래 보란 말이에요. 뭐 맛이 있다 없다, 잘 입었다 못 입었다, 뭐 좋다 나쁘다, 지위가 높다 낮다 해서는 안 됩니다.
하늘의 심정권 내에 들어가 있는 사람은 달라면 무한히 줄 수 있고, 놀자면 무한히 놀아 줄 수 있고, 가자면 무한히 가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원수가 왼 뺨을 때리면 바른 뺨을 내대고, 겉옷을 달라면 속옷까지 주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그런 견지에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과 같은 입장에서 한 말이 아닙니다. ‘잃은 것 같지만 나는 부자다, 없는 것 같지만 나는 부자다.’ 하는 우주관적인 심정을 여러분이 가져야 되겠습니다.
이런 것을 알았으니 이제 천적인 이념세계를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각자의 생활환경에서 하늘과 인연 맺어야 할 입장에 있는 우리들의 생활 목표는 ‘하나님의 사랑과 더불어 살자, 하나님의 심정과 동반하여 사는 자가 되자.’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이런 생활의 진리를 알면 최고의 시인이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복잡한 도시생활보다도 바닷가나 산으로 나가는 것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인간들은 좋은 경치를 찾아가고 그곳을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런 남자와 여자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결혼을 하면 어떤 아들 딸이 나오겠습니까? 그런 심정의 아들딸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조상 아담 해와를 지어 놓으시고 무엇을 바라셨는가? 그들이 서로 사모하여 심정적인 인연을 맺어 가지고 만물을 대신한 아담 해와, 하나님을 대신한 아담 해와, 천상천하를 대신한 아담 해와로서 성장하기를 바라셨습니다. 아담 해와가 우주 전체 이상의 가치를 완성한 모습으로 기뻐하며 하나님 앞에 나서면, 하나님은 그들을 축복하시어 결혼시키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러지 못했기에 오늘날까지도 도(道)의 길을 가는 사람은 독신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천리(天理)의 원칙을 세우지 못했기 때문에 도의 세계는 혼자 가야 했습니다. 오늘날까지 상대적인 관계는 원수였습니다. 예수님도 가정을 이루지 못하시고 ‘나는 신랑이요, 너희는 신부다.’라는 말씀만 남기고 가셨습니다.
이제 신부가 되어 하나님을 대신해서 오실 예수를 신랑으로 맞아야 할 여러분은 어떤 신부가 지녀야 할 내적인 심정적 가치를 갖추며, 어디서부터 심정의 문제를 수습할 것인가? 기도만 하면 되느냐? 안 됩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안 됩니다. 안 돼요. 생활에서부터 하나님의 수고하신 흔적을 더듬어 찾아가는, 하나님의 심정의 동반자가 되어야만 합니다.
그렇게 되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은 지금까지 있었던 역사적인 고통을 당하도록 한번 들이칩니다. 전세계에 있는 사탄이 몰려드는 자리에 내어 놓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탄을 대해 ‘네가 창조의 목적을 대신할 수 있는 심정의 인연을 세운 나를 지배해!’ 하고 대항할 수 있으면 물러갑니다.
예수께서 왜 지금까지 사탄의 시험을 받는 줄 알아요? 예수는 하늘나라에 가셔서도 사탄과 싸우고 계십니다. 그리고 다시 오시기 위해서 사탄과 싸워야 된다고 말했습니다. 왜 그런 줄 알아요? 땅 위에서 만물과 인간을 한 품에 사랑할 수 있는 기준을 세우지 못하고 가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탄이 침범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앞으로 새 시대의 사람들은 농사를 짓더라도 풀 한 포기를 자기 부인이나 아들딸과 같이 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천지는 생명의 요소로 충만하게 되고, 심정이 향하는 곳에 생명이 따르게 되며, 사랑이 움직이는 곳에는 자연히 생명이 뻗어 나가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농사를 짓는 사람이 있다면, 비료를 안 주어도 농사가 잘 될 때가 올 것입니다. 호미에 패인 흙덩이로부터 손에 쥐어지는 곡식의 한 잎사귀까지도 눈물에 어리어 친구와 같이 대하고 귀여워하고 잘 자라거라 하는 마음 가지고 농사짓는 사람이 있어요? 앞으로 새 나라 새 시대의 사람들은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천주에 있는 모든 생명의 움직임이 왕성하게 되기 때문에 거기에는 인간의 힘으로 지어진 물건은 필요 없게 됩니다. 그럴 때가 올 것입니다.
여러분, 그 적절한 예로 야목의 우리 식구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김을 맬 때마다 찬송을 부르는데 남은 세 번 맬 때 한 번밖에 안 맨답니다. 그런데 가을에 가 보면 풀이 수북한데도 남이 세 번 맨 것 이상의 수확이 나온답니다. 그 지방에서는 아주 흥미 있는 얘깃거리랍니다. 그렇다는 겁니다.
한 나라에 쇠운(衰運)이 들려면 그 나라의 만물에서부터 쇠운이 듭니다. 한 집안에 쇠운이 드는가 안 드는가 하는 것은 그 집의 아들딸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심정의 양, 심정에 어리고 느껴지는 양이 점점 작아지는 집은 얼마 안 갑니다. ‘아, 몇 대 못 가겠구나.’ 하는 감이 옵니다.
그러면 앞으로 복받을 수 있는 민족은 어떠한 민족이뇨? 심정의 인연을 생활의 감정으로 삼는 민족입니다. 그 민족은 세계를 지배할 것입니다. 한국이 그렇습니다. 나는 이거 하나 보고 소망을 겁니다. 심정, 대우주의 이념과 관계를 맺어 가지고 눈물짓는 날에는 이 민족은 세계를 지배하는 민족이 될 것입니다. 이치가 그렇다는 거예요. 그러니 여러분들, 이제는 잘 알아야 되겠습니다. 풀 한 포기라도 심정으로 대하고 친구 삼을 수 있는 아량이 있어야 됩니다.
오늘날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비록 죄악의 후손들이지만 옛날 타락하기 전에는, 본연의 하나님의 손길을 통하여 지음받을 당시에는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할 수 있는 아들딸이었습니다. 그런데 타락으로 요 모양 요 꼴이 되었으니 분하고 원통합니다. 이런 심정을 붙들고 우는 사람은 반드시 역사적인 인물이 될 것입니다. 예수도 그런 심정을 갖고 오셨습니다. 당대에는 몰리고 쫓기고 죽임을 당한다 할지라도 세상에 남아질 수 있는 것은 심정의 터전이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은 반드시 역사적인 인물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만물이 불쌍하고 만민이 불쌍하고 하늘이 불쌍하다는 것을 느껴야 합니다. ‘만물이여! 6천년 기나긴 세월 동안 주인을 잃어버리고 얼마나 슬퍼했느냐? 인간들이여! 본연의 삶을 위한 안식의 터전을 잃어버리고 얼마나 슬퍼했는가? 하늘이시여! 심정의 인연을 중심삼고 만물을 주관하라고 지으신 아들딸을 잃어버리고 얼마나 슬퍼하셨습니까? 불쌍한 하늘이시여! 불쌍한 만물이여! 불쌍한 만민이여!’ 하는 심정으로 호소하게 될 때 사탄은 물러가게 됩니다.
예수가 어떠한 심정으로 사탄을 굴복시킨 줄 아십니까? 하나님은 불쌍하시다, 만민도 불쌍하고 만물도 불쌍하다고 하는 심정입니다. ‘아들딸을 잃어버린 하나님이 얼마나 불쌍하겠으며, 주인을 잃어버린 만물이 얼마나 불쌍하겠으며, 자기의 가치와 목적과 위치를 잃어버린 인간이 얼마나 불쌍하겠는가!’ 하는 폭발되는 심정이 있었기에 사탄이 물러갔던 것입니다. 사탄은 무슨 말을 듣고는 물러가지 않습니다.
예수는 세 번째 시험에서, ‘나에게 경배하라’고 하는 사탄에 대해 ‘주 너희 하나님께 경배하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무슨 말씀인 줄 압니까? 그것은 말이 아니라 심정입니다. ‘이놈아, 너는 천륜의 심정을 배신한 배역자야, 그러나 나는 이런 심정기준에 서서 하나님께 경배한다. 심정을 다하여 드리는 이 경배를 받으실 분은 하나님 한 분뿐이시다. 너도 그러지 않겠느냐?’ 하는 뜻입니다. 그런 심정 앞에는 사탄세계가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걸 모르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찾아야 되겠습니다. 걸음을 옮겨 찾아야 되겠습니다. 이 대우주권 내에 숨겨져 있는 사랑의 심정을. 이 심정이 자리를 잡는 날에는 만물도 안식할 것이요, 하늘도 안식할 것입니다. 그러한 심정을 어디서부터 찾을 것이뇨? 여러분의 일상생활에서부터 찾아야 합니다. 거기에는 모든 것이 구비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좋은 구경을 갔다 오는 사람이 죽을상이 되어 집에 돌아옵니까? 벙실벙실 웃으며 옵니다. 그럴 거 아니에요? 여러분이 그런 심정을 갖고 생활한다면 아무리 피곤한 일을 한다 할지라도 피곤하지 않을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많은 사람들은 이와 같은 일을 붙들고 슬퍼했지만, 오냐, 나는 이와 같은 일을 얼마나 그리워했더냐.’ 하면서 일을 하면 하나도 싫증이 안 납니다. 그러기에 왜 ‘음악가는 음악적으로 살다가 예술적으로 죽는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인간은 그렇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에 모인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과 더불어, 하나님의 심정과 더불어 사는 사람이 되기 위해 모였습니다. 여러분, 저는 그래요. 오늘은 좀 좋은 옷을 입었지만 허술한 옷을 입고도 훌륭하다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 잘 갑니다. 그런데 그게 문제가 아니에요. 먹고 입고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도리어 외적인 형태는 아무리 잘 갖추었다 할지라도 속이 썩은 자는 사람 취급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마 23:13) 하며 막 퍼부은 것입니다.
하늘의 심정을 움직여 낼 수 있는 내용을 갖춘 사람은 어디를 가도, 물가에 가거나 산에 가거나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어느 곳에 가든지 친구가 있습니다. 저는 그런 생활을 좀 해봤습니다마는, 찬 바위 위에 누워 잠자는 일이 생기더라도 ‘오냐!’ 해야 합니다. 노동판에 가서 가마니를 둘러메었다고 해서 옛날에는 어땠는데 오늘은 이렇게 되었다고 하며 낙심을 해서는 안 됩니다. ‘이와 같은 내 심정은 아무도 못 빼앗아 간다.’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땅 위의 악하다는 요소, 슬프다는 요소, 어떠한 사탄의 요소를 가지고도 노터치(no-touch)입니다. 건드릴 수 없어요. 그런 사람은 틀림없이 천국 백성이 됩니다. 못되면 여기서 말하는 이 사람한테 와서 항의하십시오.
오늘날 우리들은 그런 심정을 찾아 헤매는 개척의 선봉자로 섰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어떠한 세계입니까? 타락한 세계입니다. 그래서 반대의 역사가 벌어집니다. 한 발자국 나가면 찌릅니다. 두 발자국 나가도 찌릅니다. 우리는 이 찔림의 자리를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이 인생행로입니다. 타락권 내에 있는 한 우리는 이 심정을 중심삼고 어떠한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그것을 넘어서 승리했다는 기준을 세워야 합니다. 그런 자라야만 민족 앞에 설 수 있고, 세계 앞에 설 수 있고, 또 천주 앞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철칙입니다. 그러한 기준을 넘어서기 전에는 안 돼요. 뭐, 빨갛게 바르고 반질반질하게 해 가지고 돌아 다녀도 안 돼. 좋은 것 먹고 고운 것 입어도 안 돼. 안 된다는 거예요.
자신은 먹지 못하고도 먹은 사람을 구하고 싶은 마음, 자신은 입지 못하면서도 입은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자신은 집이 없으면서도 고루거각(高樓巨閣)에 사는 사람을 보고 눈물지을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가야 승리했다는 기준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천국을 가려는 사람들이여! 지옥을 정복한 후에야 천국 갈 수 있다는 것을 알지어다’ 원칙이 그래요. 지옥 가는 길은 어떤 길이뇨? 세속적인 만족을 찾아가는 길이요, 천국 가는 길은 어떤 길이뇨? 세상이 즐기지 않는 곳을 찾아가는 길입니다. 간단합니다. 지옥 가기를 원한다면 이 세상의 행복한 자리를 찾아가십시오. 천국 가기를 원하거든 이 세상의 불행한 자리를 찾으십시오. 역사적인 위인들은 전부 다 그 시대로부터 배척받던 분들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타락한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을 다시 한번 분하게 여겨야 됩니다. ‘하나님, 제가 왜 타락한 아담 해와의 아들딸로 태어났습니까? 어찌하여 내가 타락의 후손으로 태어났습니까? 만일 하나님이 저를 인간의 조상으로 지으셨더라면 저는 아담같이 타락하지 않았을 것이요, 해와 같이 타락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하오니, 하나님이여, 타락하기 전 아담 해와의 심정을 저에게 허락하실 수 없겠습니까? 아담 해와를 소망의 심정으로 바라보시던 내용이 있다 할진대 그 심정의 내용을 저에게 나타내 주실 수 없겠습니까?’ 하는 기도를 해야 됩니다. 땅 위에서, 타락의 후손 중에서 이러한 기도를 하는 사람이 나와야 됩니다. 성경에도 그냥 주신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문을 두드려야 열어 주고, 찾아야 찾아진다고 했습니다. 예수는 그런 기도를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오셔서 먼저 땅을 주관하는 만왕의 왕이 되려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슬픈 자의 왕이 되려 하셨고, 우는 자의 왕이 되고 고통받고 죽어가는 자의 왕이 되려 하시고, 지상에서 사탄세계를 정복하기 위한 개척의 길에 나섰던 것입니다. 오늘날 신자들은 예수를 보고 하나님의 독생자요, 우리의 신랑이라고들 말하지만 그것은 모두 결과적인 명사입니다.
예수의 신부가 되려는 사람들은 예수의 심정을 본받아야 합니다. 예수는 심정의 승리자가 되신 분이요, 심정을 갖고 슬픈 자의 왕이 되기 위하여 우신 분이요, 고통받는 자의 왕이 되기 위하여 고통을 받으신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심정을 갖고 죽는 자의 왕이 되기 위하여 죽으셨기 때문에 그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심정적인 인연을 맺지 않으면 구원과 하등의 관계가 없습니다. 천당이 다 뭡니까? 지옥이 더 가까울 것입니다. 천지의 이치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싸우기 위해서 살고 있습니다. 일편단심 이 대우주에 심정세계를 다시 세우려는 것이 구원역사이니, 그 구원역사의 노정에서 내가 어느 정도의 재료가 될 수 있겠느냐 하는 것만 생각해야 합니다. 이 만물을 재료로 삼고 인류를 재료로 삼아, 영계의 천천만 성도를 재료로 삼아야 되는데 내가 움직이면 만물이 어느 정도 움직이고, 인류가 어느 정도 움직이고, 천상의 천천만 성도가 어느 정도까지 움직이느냐, 내가 땅 위에서 부르짖는 것이 이 우주에 어느 범위까지 심정의 반응을 불러일으키느냐에 따라 천상에서 나의 가치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예수가 죽는 순간의 슬픔은 하늘에 반영되었고 만우주에 반영되었습니다. 때문에 예수는 구주입니다. 어떤 구주입니까? 심정의 구주입니다, 심정의 구주.
이런 경지에서 여러분은 만물을 대하여, ‘면목이 없구나. 본연의 인간조상과 더불어 하나님의 심정을 노래하면서 영원히 그 품에 안겨 살기를 얼마나 고대했느냐? 고대하던 일차적인 소망은 깨져 버리고 한스러운 타락의 후손을 맞이하여 지금까지 탄식권 내에서 다시 제2의 인간조상을 맞기 위한 역사노정을 거쳐오기에 얼마나 수고했느냐?’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기쁨의 세계에 있어야 할 것인데, 인간으로 말미암아 슬픈 세계, 탄식권 내에 있게 된 만물을 바라보며, 그 가운데에 무궁무진한 슬픔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는 자라야 하나님의 심정의 동반자가 될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기쁨의 세계에 있어야 할 것인데, 인간으로 말미암아 슬픈 세계, 탄식권 내에 있게 된 만물을 바라보며, 그 가운데에 무궁무진한 슬픔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는 자라야 하나님의 심정의 동반자가 될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랑할 게 뭐 있어요? 없어요. 그러므로 예수는 ‘교만하지 말라,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하셨습니다. 왜 이런 말을 하셨습니까? 지금까지의 모든 곡절을 한꺼번에 탕감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역설적인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알았습니다. 구원섭리가 웬 말입니까? 내게 구원이라는 말이 웬 말입니까? 구원이라는 말이 필요 없어야 할 것인데, 이 구원이라는 말이 있다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구원이란 말은 슬픈 명사입니다. 내게 구주란 말이 웬 말입니까? 구주 없던 에덴동산의 아담 해와는 어디 갔습니까? 본연의 아담 해와도 구주가 필요했습니까? 예수가 필요했느냔 말이에요? 타락했기 때문에 구주가 필요한 것입니다. 타락하지 않았으면 기도니 종교니 도덕이니 수양이니 무슨 세계관이니 하는 것 다 필요 없습니다. 타락하지 않았으면 아담주의가 세계주의요 하나님주의입니다.
타락하여 다 망쳐 놓은 것을 꿰매고 또 꿰매어서 하늘 앞에 내세우려는 것이 복귀노정입니다. 그런데도 뻔뻔스럽게 ‘나는 이만큼 했으면 됐지.’ 하고 배통 내미는 사람들은 한대 갈겨 주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범죄자 중의 범죄자입니다. 하늘 앞에 배반자로서 용서받을 수 없는 자리에 있으면서 자랑을 하고 다녀요? 심정의 세계에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말할 수 없이 기가 막힙니다. 눈물밖에 나올 것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남편이 죽으면 그 부인은 한없이 울지 않습니까? 우는 그 순간에는 옛날 어렸을 적의 일에서부터 모든 것이 생각납니다. 사랑의 감정을 통하여 북받쳐 나오는 서러움은 어렸을 적에 어머니에게 욕먹던 생각까지 나게 합니다. 그러므로 남편이나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서 많이 울어본 적이 있는 여인이 먼저 회개의 자리로 나아갑니다. 남편을 잃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통곡하는 그 자리는 하늘 편에 가까운 자리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사랑하는 아들딸을 잃어버린 후 타락한 인간들을 붙들고 6천년 동안 통곡하며 나오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6천년 동안을. ‘너희들은 타락하였지만 나는 영광 받겠다.’ 하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런 하나님이라면 우리와 상관이 없습니다. 내가 아는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 하나밖에 없는 딸을 잃어버리고 6천년 동안 허덕이며 찾아 나오신 걸음이 지금까지의 하나님의 구원섭리 역사입니다.
이 아들딸이 찾아지기 전에는 천지에 만물이 꽉 들어찬다 해도 하나님은 자랑할 수 없습니다. 왜? 만물은 그 아들딸을 위해 지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지어 주신 만물을 수습해야 되겠고, 우리와 더불어 살아야 할 세계 인류를 끌고 가야 되겠고, 우리를 지도하시는 하늘을 모셔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이런 하나님인 것을 알면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아담 해와가 타락하는 순간에 가슴 아파하신 하나님의 심정을 생각하면 몇십년을 통곡해도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기도할 때 그런 것을 느껴야 됩니다. 아버지의 심정은 이러했는데 아담 해와가 그 심정을 모르고 타락할 때 마음 아파하시던 심정을 느껴야 하고, 그들을 구하기 위해 1600년 만에 노아를 세워 120년 동안 수고하게 하셨으나, 그의 아들 함이 타락한 입장에 서는 것을 바라보셔야 했던 그 심정을 느껴야 된다는 것입니다.
아담으로부터 노아, 아브라함, 모세, 예수시대를 지나 지금까지의 아버지의 심정을 알고 체휼하는 자리에 들어가면 여러분이 형편없음을 느낄 것입니다. 자기 존재의 가치를 도외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제 ‘나는 백번 죽어도 당연하고 천번 망해도 당연합니다.’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하늘은 ‘너를 대신하여 망할 자리에 들어가 주고 죽을 자리에 들어가 주겠다.’고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아버지를 닮아야 합니다.
예수는 그런 자리에서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피하게 하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 자리는 아버지와 아들이 체면을 생각지 않고 붙들고 눈물짓는 자리입니다. 찾아오시던 아버지와 찾아가던 아들이 상봉하여 서로를 염려하면서 붙들고 우는 자리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가까운 자리가 어떤 자리인 줄 알고 있습니까? 회개의 자리입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무슨 죄 무슨 죄를 지었으니 용서해 달라고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심정을 몰랐던 것을 회개하면 다 용서 받을 수 있습니다.
자식이 부모의 돈을 다 써버리고, 별의별 짓을 다하고 다니는 것보다 더 큰 죄는 자기를 사랑하는 아버지의 심정을 상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 이상 더 큰 죄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 이까짓 것이야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아버지의 심정에 상처를 입힌 이 죄를 어떻게 용서받겠습니까?’ 하고 눈물짓는 자식이 있다면, 그 아버지는 ‘오냐 오냐’ 하며 용서해 줄 것입니다. 그렇다는 것입니다. 타락한 부모도 그렇듯이 하나님도 그러하십니다.
사람들은 교회에 나가서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는데, 회개하오니 용서해 주십시오.’ 하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보다도 ‘천륜의 원칙을 파괴하고 하늘과 인간의 인연을 유린하고 인간과 만물의 인연을 파괴한 죄, 심정 문제에서 지은 죄를 용납해 주시옵소서.’ 해야 됩니다. 그렇게 회개함으로써 용납받고 승리하여 아버지의 인정을 받는다 할진대 만사는 다 해결되는 것입니다. 하늘은 그런 회개자를 찾아 나오십니다. 알아보니까 그래요, 알아보니 그렇더란 말입니다.
심정을 통한 사람에게는 세상의 모든 물건이 자기 것도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심정을 통한 사람은 세상의 어떤 물건을 가져오고 가져가도 아버지에게는 죄가 되지 않습니다. 앞으로 천국 세계에서는 이웃집에 가서 말없이 먹고 싶은 것 좀 먹었다고 해서 그것이 죄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심정적으로 연결이 돼 있기 때문입니다.
심정을 유린한 죄 이상 큰 죄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제 오늘날 우리들은 하나님의 사랑의 심정을 헤아려 보면서, 우리들은 하나님의 심정을 유린한 죄인이요, 만물의 심정을 거부한 죄인이요, 심정의 세계를 이루지 못하게 한 방해꾼이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것을 여러분이 알고 심정을 걸어 놓고 회개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슬픔의 자리를 벗어나서 ‘하나님, 이제는 그만 슬퍼하시고 그만 우시옵소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슬픈 자리에 계신 하나님을 기쁜 자리로 옮겨드려야 합니다. 그러한 자리에서 서로 웃고 기뻐하며 사는 곳이 지상천국이요, 그런 아들딸이 사는 곳이 우리들의 본향이요, 타락하지 않은 아담 해와가 살던 본연의 세계입니다.
그런 세계에 들어가려면 천주의 이념과 심정의 인연을 찾아야 하고, 하나님의 창조이상의 심정과 타락 직후의 심정과 복귀의 심정과 소망의 심정을 알고, 하나님과 더불어 살기 위해 애써야 합니다. 그 하나님의 심정과 더불어 싸우고, 그 심정과 더불어 회개하고, 그 심정과 더불어 죽는 자가 있다 할진대 그는 죽어도 산 자요 잃어버려도 얻은 자입니다. 나중에는 이 세계 전부가 그의 품에 안겨 그의 것이 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똑똑히 알아주기 바랍니다.
아버님, 저희들은 가치를 몰랐던 인간이요, 존재위치를 몰랐던 인간이요, 이상세계의 방향을 찾지 못하였던 인간이옵니다. 천적인 가치와 천적인 인연도 모르던 저희들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타락의 보응인 것을 이제 알았사옵니다.
아버지, 여기에 모인 당신의 아들딸들, 소망하는 새 나라의 새 역군으로서 살아야 할 생활적인 기준이 무엇이냐 할 때, 아버지께서 사랑으로 지으신 만물을 다시 짓는다는 마음으로 아버지의 창조의 심정을 느끼는 영광의 아들딸이 되는 것이요, 그런 심정의 인연을 그 개체만이 아니라 전체 앞에 인연지어 노래할 수 있는 화동의 주체가 되는 것임을 아옵니다. 이러한 가치와 위치를 회복하는 데 있어 어떠한 방해가 있다 할지라도 물러서지 않고 단연코 넘어설 수 있는 각오와 결의를 다지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 저희들은 아버님의 사랑이 그리웠사옵니다. 저희들은 아버지의 품에서 지어진 만물을 품고 사랑하고 싶었사옵니다. 그러나 그럴 수 있는 인연이 이미 마련되어 있었다는 것을 저희들은 몰랐사옵니다.
이제 ‘하나의 물건이 귀하도다. 하나의 존재의 가치가 영원하도다.’ 하면서 내 생명의 요소와 관련되어 있는 것을 노래할 줄 알며, 그 가치를 하늘과 땅과 만물과 더불어 심정을 통하여 느끼면서 살 줄 아는 주인공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만물과 더불어 당신의 슬픈 심정을 위로해 드리고 기쁨의 심정을 갖춤으로써 슬픔의 세계에서 기쁨의 세계로 옮김을 받아, 아버지께서 슬픈 과거지사를 잊어버리고 영원무궁토록 나와 더불어 살자고 할 수 있는, 아버지의 축복을 받는 최후의 승리자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저희의 모든 것을 맡겼사오니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심정과 더불어 생활하고, 아버지의 사랑과 더불어 생활하고, 하나의 물질이나 하나의 존재물에도 감사하며 자기의 본질적인 세계를 재개척하는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오며,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니다. 아멘.
지금부터 2천년 전, 택해 놓으신 이스라엘을 품기 위하여 오셨던 그리스도의 성상을 저희들이 다시 한번 회상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모습은 하늘에 대한 염려로 가득 찼사오나 그 누구도 그를 바라보며 염려해 주지 않았사옵나이다. 아버지의 뜻 하나만을 위하여 30여 년의 생애를 기울였고 그것만을 생애의 표준으로 삼고 나가셨으나, 그 심정을 알고 ‘당신은 수고하셔야 할 분이 아닙니다.’ 하고 위로해 드리고 안식시켜 드린 자가 아무도 없었사옵니다.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이 고을에서 저 고을로 쫓겨 다니시던 예수의 심정, 먹지 못하고 입지 못하시면서도 지친 다리를 끌고 한스러움을 풀기 위하여 감람산 기슭을 거니시던 그 처량한 심정을 저희들도 몰랐사옵니다. ‘주’라고 하는 말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해보았으나 진정한 주의 모습을 알지 못했던 저희였음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독생자라는 말은 귀가 닳도록 들었사오나, 독생자의 처참한 사정은 들어본 적이 없었사옵니다. 하늘이 영광의 구원섭리를 만민에게 무조건 허락한다는 엄청난 말은 많이 들었사오나, 아버지를 따라 나가던 믿음의 왕자인 예수의 모습에 대해서 저희들은 몰랐사옵니다.
아버지, 이제 저희들은 누구를 본받겠습니까? 어떠한 교단의 지도자를 본받을 것도 아니었고, 어떠한 교회의 지도자를 본받을 것도 아니었사옵니다. 그들은 믿을 수 있는 자가 못 됨을 알았사옵니다. 저희들은 믿다가 낙망도 많이 해 보았고, 힘을 다하여 정성을 기울였으나 그 정성마저 유린당한 저희들이었습니다.
이제 마음을 헤쳐 놓고 의지할 것은 교회도 아니고, 어떠한 교회의 지도자도 아니고, 교단도 아니고, 이 땅 위의 어떠한 정치적인 지도자도 아닌 것을 알았사옵니다. 역사에 숨어 있고 시대에 몰리고 있는, 깊은 심정을 지니신 주의 성상을 모시는 것만이 이 시대의 신앙자가 해야 할 일임을 저희들은 느끼고 있사옵니다.
어느 한 날 그와 같은 동지를 하늘이 그리워하지 않은 때가 있었사오며, 어느 한 날 그러한 동지가 핍박받게 될 때 하늘이 그의 편이 되지 않은 때가 있었사옵니까? 쓰러지는 자리에서는 같이 쓰러지셨사옵고, 한탄하면서 싸우는 자리에서는 같이 싸우신 역사적인 사실을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기에 그런 자리에서도 주라고 부를 수 있는 외로운 모습이 도리어 그립사옵니다. 이와 같이 의지할 바 없이 한스러운 이 땅을 저버리고 아버님만을 붙들려는 심정의 동지가 되기 위해 애쓰는 무리를 아버님께서는 몹시도 그리워하신다는 사실을 저희들이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 오늘 이들 앞에 섰사온데 무슨 말씀을 하오리까? 오라 하시는 당신의 음성을 듣고 가야 할 책임을 느낄 적마다 부족한 자신임을 아버지 앞에 아뢰지 않을 수 없사옵고, 사망의 물결을 막아야 할 적마다 아버지의 권고를 듣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이제 여기에 나온 아들딸들, 이들은 누구를 따라가는 자가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먼저 자기의 마음을 통하여 느껴지는 천적인 심정에 끌리어 갈 줄 아는 자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진정한 자, 진실한 자에게는 지도자가 필요치 않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천륜은 내 양심과 더불어 영원한 스승으로 계신 것을 알았사옵고, 영원한 주인공으로 계신 것을 알았사옵고, 영원한 신랑으로 계신 것을 알았사옵니다. 가까이 있는 하늘이 부여하신 본연의 그 자체, 당신을 높이는 내 본연의 자체를 찾기에 급급해야 할 자신인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상대적인 세계에 그 무엇이 있는 것이 아니었사옵니다. 그러기에 예수도 천국이 네 마음에 있다 하시며, 내가 너희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있기를 고대하신 것을 아옵니다. 이 마음을 넓히시옵소서. 이 몸을 낮추시옵소서. 넓히고 낮추어야 할 저희의 마음과 몸인 것을 알았사옵니다. 이 한 가슴에 한을 품었다 할진대 이것도 잊어버리고 넓혀야 할 것을 알았사옵고, 원수를 대하여 미움이 싹틀 때에도 마음을 넓혀 잊어버려야 할 것을 알았사옵니다.
수고하고도 보수를 바라지 않고 몰아치는 억울한 자리에 처할지라도 복을 빌어 주어야 할 노정인 것을 알았사옵니다. 하늘이 왜 이런 길을 가라고 하시는가도 알았사옵니다. 하늘이 이렇게 가셨기 때문이요, 그래서 이렇게 오라고 하시는 것이 원칙인 것을 알았사옵니다.
예수는 만왕의 왕으로 이 땅 위에 오셨사오나 만주의 주 되신 모습을 낮추시어 죄인의 발을 씻어 주셨사옵고, 죽음의 무리를 위하여 피를 흘리셨사옵니다. 이제 저희들, 숭고한 그 인격 앞에 머리 숙이고 감격하여 말을 잃은 채 한없이 흐느껴 울 줄 아는 아들딸이라도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런 무리가 필요한 것을 알았사옵니다. 말 많은 세상에서 당신의 사람을 찾는 일은 많았사오나, 말로써 아버지 앞에 인연된 적은 없었던 것을 알았사옵니다. 오로지 심정만으로 되어질 것을 저희들이 알고 있사오니 여기에 모인 당신의 아들딸들, 이제 자기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립고 보고 싶은 그 마음은 아버지 속에 있게 하여 주시옵고, 애달픈 그 심정은 저희의 가슴 깊이 숨겨져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아버지의 마음속에 기억되는 자, 예수와 성신의 마음속에 기억되는 자, 선한 일을 위하여 죽어간 선지선열들의 마음속에 기억되는 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로지 심정을 대신할 수 있는 이 시대의 증거의 아들딸들이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어려운 길, 험한 고비를 다 지내고 당신 앞에 무릎을 꿇은 아들딸들이오니, 이 시간 축복하여 주시옵고 분부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많은 말씀을 하였사온데, 이제 또 무슨 말씀을 하오리까. 친히 맡아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전하는 자의 마음이나 대하는 자의 마음이 하나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하늘이 동하면 동하고 정하면 정하여 심정적인 인연을 맺고 돌아갈 수 있는 아들딸들이 되고, 심정적인 인연을 그 마음에 옮겨 주고 기뻐하실 수 있는 아버지가 되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시간 같은 심정으로 머리 숙인 수많은 형제들 위에도 같이하여 주시옵기를 부탁드리면서,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말 씀> 오늘 여러분과 같이 생각하려고 하는 제목은 ‘찾아오시는 아버지’입니다. ‘찾아오시는 아버지’라는 제목을 가지고 잠깐 동안 생각해 보겠습니다.
여러분이 살고 있는 이 세계는 영원히 행복을 노래하면서 살 수 있는 세계가 못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사회나 가정, 더 좁혀서 내 한 자신을 두고 볼 때도 내 몸과 마음에 탄식이 남아 있는 것을 우리들은 여실히 체험하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때로는 내 생명에 위협을 느끼고, 내 생활에 위협을 느끼면서 이리도 저리도 움직일 수 없는 환경 가운데 사로잡힐 때가 많은 것을 우리들은 항시 체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환경에 처해 있을지라도 우리의 마음 한 모퉁이에서는 이러한 나를 거부하기 위해 희망을 잃지 않고 싸우고 있는 것을 여러분은 또한 여실히 체험하였을 것입니다.
기뻐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어떠한 그 무엇을 향하여 나아가라고 수시로 몸을 재촉하는데도 몸이 그런 자리에 나아가지 못하고 그런 걸음을 걷지 못한다면, 이 이상 더 불행한 일이 없을 것이며, 이 이상 더 마음을 배반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싸움이 하루 이틀이 아니고 생애를 지나고 역사를 거쳐도 끝날 줄 모르고 계속되어 나가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오늘의 내 한 자신을 어떻게 해결지어야 될 것인가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내가 이 문제를 맡아 해결지어 만민 앞에 공인될 수 있는 승리적인 기준을 세웠다 할진대 나로부터 새로운 역사, 나로부터 새로운 시대, 나로부터 새로운 행복과 새로운 기쁨이 시작될 것입니다. 모든 것은 나에서부터 해결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의무가 땅 위에 살고 있는 우리 각자에게 지워져 있다는 것을 먼저 알아 둬야 되겠습니다.
만일에 어떠한 목적지를 향하여 가라고 사람들의 마음을 재촉하고 충격을 가하는 절대자 하나님이 계신다 할진대 그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무엇일 것인고?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문제만을 해결하려 하지만 하나님은 여러분을 넘고 이 세계를 넘어, 지으신 피조세계와 천상천하의 모든 문제를 해결지으려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통을 느끼고 한을 느끼며 살고 있으나, 우리는 그것을 주위에 있는 친구에게나 형제에게나 혹은 처자에게 원망도 하고 분풀이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상대자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상대를 가져 보지 못한 채 크나큰 슬픔과 고통을 품고 계시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껴야 되겠습니다.
자신의 고통을 모면하기 위해 싸워 나가는 인간의 모습과 세계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하여 싸워 나오시는 하나님의 모습에는 천양지차가 있습니다. 내 가슴에 터질 듯한 근심이 있고 수심이 있고 고통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개인적인 고통입니다. 그 고통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고통에 비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본래 하나님께서 인간을 이러한 모습으로 지으셨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지으실 때 이렇게 슬픔과 고통권 내로 쓸어넣기 위해서 지으셨겠습니까? 아닙니다. 본래는 기쁨을 느끼도록 지으셨습니다. 기쁜 마음, 즐거운 심정을 갖춘 모습이 되도록 지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만물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눈에는 기쁨이 어려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 땅을 바라보게 될 때 하나님께서 기쁜 마음으로 만물을 바라보실 수 있게 되어 있습니까? 더 나아가서는 기쁜 심정으로 인간을 바라보실 수 있게 되어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5일간 만물을 지으신 후 6일째 되는 날 기쁜 심정으로 인간을 지으셨습니다. 자신의 형상을 본떠 지으신 우리 인류의 조상은 지극히 아름다운 존재요, 지극히 귀한 존재요, 지극히 자랑스러운 존재요, 지극히 기쁜 존재요, 지극히 영광스러운 존재요, 지극히 사랑하고 싶은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가슴 깊은 곳, 혹은 여러분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세포를 하나 하나 헤쳐 보게 될 때, 거기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수 있고, 하나님께서 즐거워하실 수 있고, 하나님께서 만물 앞에 축복하실 수 있는 그 무엇이 있습니까?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쁨을 더하고 기쁨의 자극을 연속시키기 위하여 만물을 지으셨습니다. 순간적인 기쁨을 느끼기 위해 지으신 것이 아니라, 피조물을 대할 적마다 가슴 깊이 스며들어오는 기쁨의 자극과 행복을 느끼시기 위해서 최고의 심정을 기울여 지으셨던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심정 전체의 총합체로서, 만우주 전체의 창조의 심정을 대신할 수 있는 기쁨의 대상체로서 지었던 인간이 깨져 버린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지었던 창조세계는 한과 슬픔의 세계로 변하고 말았고, 기쁨과 소망의 실체였던 아담 해와는 에덴동산에서 추방을 당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추방당한 무리이니 응당 고통을 받아야지요. 응당 슬픔을 당해야 됩니다. 천륜을 저버린 배도자의 보응으로 슬픔과 고통을 당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배반하고 나온 우리에게 찾아갈 수 있는 기쁨의 목적지와 모든 슬픔을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이 있어야 되겠습니다. 이것을 찾아 헤매는 것이 오늘날까지의 인류, 여러분과 나입니다.
우리는 기쁨을 노래할 수 있는 본래의 세계, 본래의 목적지를 찾아야 합니다. 또 내 주위에 엉클어져 있는 흑암의 모든 고통을 헤쳐 놓을 수 있는 방법을 알아야 됩니다. 그 목적지를 찾지 못했고, 그 어둠과 흑암의 탄식을 제거시키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에 수천년 역사를 거쳐 나오는 동안 인류는 탄식과 절망과 고통 속에서 허덕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인간들이 겪고 있는 고통이면 고통, 슬픔이면 슬픔, 흑암 권세면 흑암 권세의 한계가 어디까지일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죽음의 고비까지입니다, 죽음의 고비까지.
이제 우리는 그러한 목적지를 향하여 나아가는 데 있어서 고통의 관문이 우리 앞을 가로막는다 할지라도, 죽음을 개의치 않고 이를 밀어 터치고 나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은 어떠한 시대적인 소망이나 역사적인 소망을 찾아 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생명을 걸고 대들기 전에는 하나님은 움직여 주지 않습니다. 그런 입장에 있는 인간인 것을 우리는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입장에 놓여진 인간을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버리지 못하시고 다시 붙들어 행복만이 있는 그 세계로 되돌아가게 하시려고 수고해 오셨습니다. 그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 구원의 목적입니다. 천당은 제2차적인 문제입니다. 땅 위에서는 비록 고통 가운데 살지라도 그 고통을 삼켜 기쁨으로 소화시킬 수 있어야 천당 간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한 자는 절대 천국 못갑니다. 못 간다는 거예요.
믿으면 천당 가요? 그렇다면 봅시다. 4천년 동안 뜻을 중심삼고 성별시켜 놓았던 이스라엘 민족, 그들이 오죽 잘 믿었습니까? 아브라함 이후 모세를 거쳐 예수가 오기 전까지의 2천년 동안 그들은 모세가 세워 놓은 율법을 오죽 잘 지켰습니까? 그렇게 잘 믿고 나온 무리가 믿음의 왕자로 오신 예수를 배반할 줄이야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대제사장들을 거룩하게 단장하고 속죄소에 들어갈 때의 모습은 하나님을 대신한 듯하였고 믿음의 실체인 듯하였으나, 그런 자들이 예수 앞에 원수가 되었던 것입니다. 모를 일입니다.
그토록 잘 믿었던 이스라엘 민족은 어디로 갔습니까? 그들의 신앙의 절개가 지금 땅 위에서 예수를 믿고 있는 신도들의 신앙의 절개보다 높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구원의 기준은 얼마나 믿느냐 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고 난 후의 마음이 어떻게 되어 있느냐 하는 데에 있습니다. 마음에는 강도의 심보를 품고, 도적의 심보를 품고, 살인자의 심보를 품고도 믿으면 천당 간다구요? 구원은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서부터 구원하는 것이뇨? 구원은 밑창에서부터 하는 것입니다. 근본에서부터 하는 것입니다. 그 근본은 마음입니다. 그래서 마음에서부터 구원이 시작 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을 인격자로 만들기 위하여 지도하는 스승이 있다 할진대 그 스승은 먼저 제자의 마음을 점령해야 됩니다. 그래서 그 마음이 발전할 수 있는 방향으로 이끌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전에는 그 제자를 인격자로 만들 수 없습니다. 완전한 인격을 갖추어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을 왜 구원하시려 하는고? 구원시켜서 무엇을 하실 것인고? 구원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기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지으시던 본연의 기쁨을 다시 회복하기 위해서 구원섭리를 해 오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우리 자신의 마음에서부터 구원받아야 됩니다, 마음에서부터.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를 붙안고 나오시면서, 마음의 행로를 지키고 마음의 행로를 보호하고 마음의 행로를 이끌어 가면서 인간의 마음을 격동시켜 나오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하나님은 6천년 동안, 지어 놓으신 만물을 보시고 실망하고 울기만 하셨느냐? 아닙니다.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시며 운명하신 예수도 가신 그날부터 쉬고만 계신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고 계십니다. 뭘 다 이루었어요? 기도라는 것은 목적의 완성을 위해서만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3년 공생애노정에서 열두 사도를 이끌고 다니실 때, 그 사도들에게 마음으로 원한 것이 무엇이었느뇨? 그 고깃덩이가 따라다니는 것을 원치 않았다는 겁니다. 그 마음, 예수가 그들 안에 들어가 있을 수 있는 마음을 원했습니다. 예수를 모시려면 그 마음이 예수의 집이 되어야 합니다. 그들의 마음이 예수의 집이 되었다면 예수는 돌아가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수고하실 일이 있으면 ‘주여, 제가 대신 수고하겠나이다,’ 예수께서 고통받으실 일이 있으면 ‘제가 대신 고통받겠나이다,’ 예수께서 슬퍼하실 일이 있으면 ‘제가 대신 슬퍼하겠나이다’ 할 수 있어야 됩니다. 왜? 그분은 모심을 받아야 할 분이요 우리는 섬겨야 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상하의 절차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꾸로 되었습니다. 3년 공생애노정에서 예수의 제자들은 자신들이 높아지려고 했습니다. 주님보다도 높아지려고 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무한히 높은 자리에 있었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는 자기가 살아 있었다는 거예요. 거기에 예수가 살아 있어야 되는데 그렇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심적 기준 위에서 예수와 인연을 맺고, 영원한 승리의 토대 위에서 나는 영원히 영원히, 천지가 없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하늘땅을 점령하였노라고 선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 그런 것이 있습니까? 오히려 이 땅 위에 와서 30여 년의 생애를 살다 가신 예수를 저버렸습니다. 그리하여 사탄이 다시 주인 행세를 하는 환경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예수가 왔다 간 이후 2천년 역사가 흘렀지만 하나님은 아직까지 ‘이건 영원히 내 것이야. 어떠한 사탄의 괴수도 이것을 점령할 수 없어.’ 하실 수 있는, 온 피조만물과 하늘땅 앞에 천주의 실권을 행사할 수 있는 해결점을 찾지 못하셨습니다. 어디 찾았다고 보는 사람 있으면 손들어 보십시오.
사람의 마음의 문을 열고 그 마음에 안주하고, 거기에 하늘의 모든 심정을 옮겨 놓고, 그 마음을 통하여 땅에 대한 모든 것을 계획하시는 것이 소원인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아직까지 그러한 마음을 가진 인격자를 만나지 못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네 마음에 천국이 있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무형천국을 그리워하기 전에 유형천국을 건설하라! 무형천국을 소망하기 전에 유형천국, 즉 실체천국을 완성하라! 이것이 예수가 주장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셨는데, 그것이 집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마음 둘 곳이 없다는 뜻입니다. 마음으로 맺어지고, 마음으로 즐거워하고, 마음으로 기뻐하고, 마음으로 위로하고, 마음으로 동정할 수 있는 터전을 못 가졌던 예수였습니다. 만일에 그러한 사람이 있었다 할진대 예수는 불쌍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십자가에 죽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불쌍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아니 그런 사람이 있었다면 죽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땅 위에 살고 있는 수많은 도인들을 통하여 마음의 궁전을 개척하려고 하신 것이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마음의 궁전을 개척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지금까지 찾아 나오고 계십니다. 사망세계인 이 땅을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찾아오셨습니다. 아버지는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떠한 사람을 찾아오셨는고? 빌라도와 같은 권세를 가진 자를 찾아오시지 않았습니다. 기세가 늠름하고 세도가 당당한 제사장 교법사를 찾아오시지 않았습니다. 가슴을 내밀고 얼굴을 쳐드는 자를 찾아오시지 않았습니다. 죄가 없어도 죄인과 같은 마음, 먹을 것이 있어도 먹지 않고 입을 것이 있어도 입지 않고 살 곳이 있어도 자기가 살 수 없다는 마음을 갖고, ‘민족의 죄를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세계 인류의 사망권을 열어 주시옵소서. 민족의 고통을 제해 주시옵소서.’ 하는 자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배반한 민족을 벌주고 책망하며 욕하는 사람을 찾아오신 것이 아니라 그 반대의 입장에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눈물짓는 무리를 찾아오셨습니다.
이러한 곡절로 하나님과 세상이 상반되어 있기 때문에 세상이 기뻐하는 자리는 하나님이 슬퍼하는 자리이고, 하나님이 슬퍼하는 자리는 세상이 기뻐하는 자리입니다. 유대나라의 역사를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세상과 더불어 기뻐할 때는 하나님이 슬퍼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찾고 찾으시면서 허덕여 나오셨습니다. 왕자의 권한을 가지고 이 땅에 찾아오신 것이 아닙니다. 땅 위의 가장 낮은 자리서부터 찾아오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복귀역사를 잘 알아야 됩니다. 구약시대는 어떠한 시대냐? 종을 시켜서 역사하시던 시대입니다. 천사, 즉 천적인 종을 시켜서 역사하시던 시대입니다. 신약시대는 어떠한 시대이냐? 종의 시대를 지나서 구약시대보다 한 단계 올라간 시대입니다. 신약시대는 하나님께서 4천년 동안 수고하시고 종들이 터를 닦아서 아들을 보호할 수 있는 환경을 개척해 놓고 아들을 보내 역사하신 시대입니다. 이렇게 자꾸 올라가는 것입니다.
종은 어떠한 종들이었습니까? 충성을 다하는 종들, 하나님을 모시기 위해 그 시대에 몰리던 종들이었습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옛날 선지자들 중 택한 이스라엘 백성 앞에 환영받던 사람이 누구 있었습니까? 이렇게 종들 중에서도 몰리는 종들을 통하여 4천년 동안 수고하신 후에 아들을 보냈더란 말입니다.
그 아들은 이 땅 위에 와서 무엇을 했느뇨? 영광을 받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처럼 자기를 중심삼은 기쁨이나 만족을 소망하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아들로 오신 예수님은 누구를 찾아가셨습니까? 빌라도의 법정에 가셔서 빌라도와 어깨를 겨루고 천지의 대도를 밝히는 공론을 해보았습니까? 못 해봤습니다. 대제사장들과 무릎을 맞대고 의논하고, ‘야! 이 녀석아, 너는 하늘이 4천년 동안 수고하여 택해 세운 이스라엘의 절개를 유린한 자다.’ 하고 항의해 봤습니까? 못해봤습니다. 어느 마을에 들어가서 이스라엘 민족을 모아놓고 ‘너희들은 나와 더불어 영원히 같이 살자.’고 해봤습니까? 못 해봤습니다. ‘하나님이 4천년 동안 수고하여 너희들을 택해 세우신 것은 나 때문이니, 나를 위해 충성을 다하고 모셔라.’ 하고 말해 봤습니까? 못 해봤습니다. 하늘의 독생자, 하늘의 황태자로 추대받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떨어질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위신과 환경적인 모든 것이 그렇게 떨어질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시고 좋아서 ‘오! 잘한다.’고 하셨겠습니까? 아닙니다. 아니에요.
이 땅 위에 오신 예수는 4천년 동안 종들이 법도를 따라 천상을 대신하여 충절을 세운 것을 아셨기 때문에 그들 앞에 자기의 위신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고난을 당하고 몰리는 처참한 환경에 처하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요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인연만은 버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4천년 동안 아들을 찾아오시던 하나님의 심정을 아셨기에 죽더라도 하늘 앞에 효자가 되겠다고 하시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리하여 예수는 종들이 세워 놓은 절개를 생각하면서 아들의 입장에서 아들의 절개를 세우셨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십자가상에서도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마 26:39)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내 몸이 나의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나는 알파요 오메가라고 하셨으니 그분을 대신하여 가야 할 곳이 그곳이요, 나는 그분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니 그분에 의거한 생활을 해야 하고, 그분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길을 걸어가야 한다.’고 각오한 예수였습니다. 그러기에 어떠한 어려움이 있다 할지라도 본연의 아버지의 심정 앞에 역사적인 불효의 죄명을 남기지 않기 위하여 그 모든 어려움을 넘고 넘어 아들의 도리를 다 지켜 나왔던 것입니다.
여러분, 성신이 무엇입니까? 성신은 어머니신입니다. 그리고 성신은 하나님 앞에서 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서 이 땅 위에 나타나신 분이 예수와 성신입니다. 그러면 예수와 성신은 무엇을 했습니까? ‘당신의 아들은 나요, 당신의 딸은 성신입니다. 당신의 뜻은 땅을 찾는 것이요, 나를 찾는 것이요, 성신을 찾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 당신의 뜻은 우리에게 있고 우리의 뜻은 이 땅에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을 책임지고 있습니다.’ 할 수 있었기에, 예수가 온 그날부터 하나님의 일이 예수와 성신에게로 옮겨졌습니다. 이래 가지고 땅 위에 죄를 짓는 민족이 있으면 그들을 대신하여 예수와 성신은 아들딸 된 입장에서 하나님에게 속죄제를 드려온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찾아 나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끝날이 오면 재림주가 오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오시는 주님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실 것인고? 종의 시대가 지나고 아들의 시대가 지나갔으므로 앞으로 오시는 주님은 아버지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영광으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영광으로 오셔서 무엇을 하실 것이뇨? 인간 개체 개체에게 아버지의 마음을 불어넣으실 것입니다. 아들의 마음이 아닙니다. 예수의 마음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마음인 것입니다.
예수가 이 땅에 신랑으로 오셔서 신부를 맞이한 다음엔 무엇을 하셔야 했는가? 하나님 앞에 가서 축복을 받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만민을 품에 품어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축복을 받아야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입장에 있었으니 예수와 성신은 만민을 품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축복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 축복을 받으려면 이 땅에 아버지의 역사적인 기준을 세워 놓아야 됩니다. 그래서 앞으로 오시는 재림주는 아버지의 역사를 일으키러 오시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역사를 일으켜 가지고 타락한 우리 인간의 마음에 아버지의 마음을 불어넣고, 아버지의 성상을 재창조시키실 것입니다. 창세기 1장 27절을 보면 “하나님이 자기의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 고 했습니다. 예수의 형상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형상입니다.
구원의 최고의 목적은 어디에 있느냐? 아버지의 형상과 아버지의 성상을 이루어 놓는 데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수고를 해 오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렇게 수고의 복귀노정을 거쳐 나오시는 하나님의 사정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땅 위에 살고 있는 우리 불쌍한 인간들, 응당 천만번 죽어 마땅한 인간들을 찾아오시기를 지금까지 그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들은 예수와 같은 완전한 인격자가 못 되어 있습니다. 이 땅 위에는 천태만상의 인간들이 살고 있습니다. 종교도 천태만상입니다. 그러니 아버지께서 대하는 형상도 천태만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역사를 회고해 보게 될 때 아버지께서는 어떠한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오셨을 것인가를 생각해야 됩니다. 보잘것없는 나 하나를 찾기 위하여 6천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수고하셨습니다. 만일에 찾아오신 아버지의 뜻을 내가 완결하지 못하고 영계에 가면 하나님은 또 다시 안타까운 심정으로 나를 대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영원한 심정의 인연으로 출발한 인간이기에, 하나님의 심정과 인간의 심정이 한 자리에서 만나 함께 기뻐할 수 있는 순간을 갖추어 가지고 그것이 전체의 가치에 적용될 수 있는 기준을 넘기 전에는 하나님은 언제나 슬프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입장의 아버지께서 지금도 이 땅에 있는 인간들을 찾아오고 계십니다. 오늘 여러분이 여기 와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이 시간에도 아버지는 찾아오고 계십니다. 저 사망의 물결치는 죽음의 장소에도 아버지께서는 찾아가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하나님은 그런 입장에 서지 않으면 안 되었는고? 본래 인간과 하나님은 아버지와 아들딸의 관계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지으신 후에 최고의 정력을 다 기울여 인간을 지으셨습니다. 심정이 있다 할진대 그 심정을 백 퍼센트 다하고, 마음이 있다 할진대 그 마음을 다하고, 몸이 있다 할진대 그 몸을 다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성경에도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왜 아담 해와를 이토록 귀한 존재로 지으셨겠습니까? 심부름시키기 위하여? 아닙니다. 심부름시키기 위해서는 천사를 지으셨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위하여 지으셨겠습니까? 아들딸 만들기 위하여 지으셨습니다. ‘나는 아버지요 너희들은 내 아들딸이니, 너희가 슬프면 내가 슬프고 너희가 기쁘면 나도 기쁘다.’ 할 수 있는 관계로 지으신 것입니다. 여기 자식을 가진 부모들은 알 것입니다. 아무리 자식이 불효하고 살인범이 되어 철창에 갇힌 몸이 되었다 할지라도 그 부모의 마음은 철창을 넘어서 그 자식을 향해 움직이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도 그렇거늘 하물며 본연의 천심 그 자체로 계시는 하나님에게 있어서랴! 어떠한 고통도 이 마음을 제거시킬 수 없습니다. 어떠한 슬픔도 이 마음을 제거시킬 수 없습니다. 어떠한 비통함도 분함도 이 마음을 없앨 수 없습니다. 이런 인연이 있기에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들을 저버리지 못하고 붙들고 나오시는 것입니다.
알고 보니 그런 아버지였습니다. 여러분들은 그러한 아버지 앞에 아들의 사명을 다해 보았습니까? 딸의 사명을 다해 보았습니까? 우리는 이러한 것을 생각조차 못했던 패악한 무리였다는 것을 반성하며 스스로 탄식해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누구를 원망할 수 없습니다. 당장 눈앞에 피를 맺히게 한 철천지원수가 있다 할지라도 원망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암만 억울한 입장에 있다 해도 원망을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만일 내가 원수를 갚는 것을 천도가 공인할 수 있다면 이 세상의 인류는 다 죽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원수를 갚지 말라고 했습니다. 왜?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 수 없기 때문에….
자식 된 입장에 있는 인간이 부모 되시는 하나님에 대해 근본적으로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인간과의 본연의 인연, 심정적으로 엉클어진 이 정리(情理)를 누가 끊을 수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을 구하기 위한 구원의 역사도 사랑을 가지고 합니다, 사랑. 믿음도 아니요 소망도 아니요 사랑입니다. 맨 나중에 남는 것은 사랑입니다. 그래서 6천년 동안 수고하신 아버지라고 붙들고 울 수 있는 아들딸이 있다 할진대 사탄이 못 끌어갑니다. 내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아들딸이 있다 할진대 사탄이 아무리 원수라 할지라도 그 부모의 자식임을 누가 부정하겠습니까? 못합니다.
아버지 된 입장에 계시는 하나님이 아버지 노릇을 해봤습니까? 못 해봤습니다. ‘내 사랑하는 아담아, 내 사랑하는 해와야, 너는 내 아들이고 너는 내 딸이로구나. 천지가 변할지언정 내가 너를 사랑하고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것을 누가 부정할소냐?’ 할 수 있는 자리를 바라고 고대하였는데, 그 때를 맞지 못한 채 인간이 타락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다시 복귀하자는 것입니다. 다시 찾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역사와 더불어 우는 민족을 붙들고 나오셨습니다. 하늘을 위하여 우는 민족을 붙들고 나오셨습니다. 하늘을 위하여 몰리는 민족을 붙들고 나오셨습니다. 하늘을 위하여 저주 받고, 하늘을 위하여 죽임당하는 무리를 붙들고 나오신 것입니다.
인간의 사정은 인간보다 하나님께서 더 잘 아십니다. 그러기에 인간의 죄를 용서해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죄의 원인과 결과를 너무도 잘 아시기에 죄를 용서해 주고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뿐만 아니라 범죄시 인간의 심정이 어떠했다는 것까지 아시기에 하늘은 죄를 기억하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기준을 가지고 찾아 나오시되 맨 끝에서부터 찾아 나오십니다. 타락한 자식들이 몰림을 당하게 되었을 때에는 그 선두가 되셨습니다. 바로 궁중에서 쫓겨난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 앞에 선 것도 모세가 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서신 것입니다. 모세만 운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는 모세보다 더 우셨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하나님은 괴나리봇짐을 짊어진 김삿갓과 같다고 말입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짊어진 짐을 풀 곳이 없어 이스라엘 민족한테 풀려고 했는데 그 민족이 배반함으로 말미암아 다시 그 보따리를 짊어지고 세계를 유랑하시는 신세가 되셨던 것입니다.
그 사무치는 마음과 그 끓어오르는 심정을 누가 알았더냐? 사람이야 잘났든 못났든 괜찮다는 겁니다. 알든 모르든, 유무식(有無識)이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주는 효자 효녀가 누구일 것이며, 하나님을 모셔줄 가정이 어디 있을 것이며, 하나님을 모셔줄 민족이 어디 있을 것인가? 이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지구는 넓고, 그 위에 살고 있는 인류는 많아도 처참한 유랑객이 되신 아버지를 붙들고 눈물지어 주는 자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식을 만들려면 내가 네 아버지이고 내가 이렇게 이렇게 수고했다고 다 가르쳐 주어야 하니 참으로 원통한 사실입니다.
본래 하나님은 만우주를 주관하시는 분이요, 무한한 사랑으로 자식 앞에 나타나셔야 할 분입니다. 그런데 자식을 가져 보지 못한 채 슬프고 처량한 모습으로 허덕이는 아버지가 되셨으니, 얼마나 불쌍하냔 말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 보신 말씀과 같이 지극히 작은 고아 하나가 불쌍한 모습으로 자기 앞을 지나갈 때, ‘저기 아버지가 가시는구나.’ 하며 그를 붙들고 눈물짓는 자는 아버지를 모시는 자입니다. 또 남루한 옷을 입고 지나가는 걸인이 있을 때, 자기를 찾아오시는 아버지로 알고 ‘저와 같이 아버지도 가시는구나’ 하며 눈물짓는 자도 아버지를 모시는 자입니다. 지나가던 행인을 대접하는 것이 아버지를 대접하는 것이라는 원칙이 거기서 나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진정한 효자가 되느뇨? 아버지의 사정을 체휼해야 됩니다. 지난날 아버지께서 겪으신 사정을 다 알아야 됩니다. 우리의 아버지는 어떠한 아버지입니까? 사랑하는 아들딸이 사형장에 나가면 교수대 앞에서 눈물지으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죄인이 아니지만 죄인보다 먼저 눈물을 지으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지극히 선한 아버지시로되, 이 땅 위의 불행한 사람이 가는 자리에 동참하지 않은 적이 없는 아버지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버지가 그러한 자리를 찾아가시는 이유는 인간과 부자의 인연을 가진 연고입니다. 여러분들이 기도할 때 편안한 자리에서 기도를 하면 은혜를 못 받습니다. 아버지의 모습을 회상하면서 그 아버지를 대신할 수 있는 실제의 노정을 걸어야 됩니다.
예수께서 민족 앞에 몰리고 배반당하는 입장에 설 때에, 고요한 산곡을 찾아 들어가서 무슨 기도를 한 줄 아십니까? ‘아버지여, 나에게 복을 주시어서 편안히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는 기도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몰리고 쫓길 적마다 ‘아버지, 원통하옵니다. 당신은 역사노정에서 얼마나 이런 길을 가셨습니까?’ 하는 기도를 하셨습니다. ‘내가 흘리는 이 눈물은 아버지를 대신한 눈물이로구나!’ 하는 기도를 하셨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목자, 진정한 아들딸이라 할진대 그는 자기가 입은 옷이 남루하고 자기의 몸에 상처를 입었을지언정 자기의 모습과 자기의 상처를 잊고 그 이상 처량한 길을 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며, 아버지의 심정과 더불어 엉클어져 눈물을 흘릴 것입니다. 그런 자라야만 하늘나라에 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신앙자라면 말없는 산봉우리를 보고서도 울 줄 알아야 됩니다. 왜? 저 산을 바라보고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던 당시를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눈물의 흔적을 남기시지 않은 피조물이 없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좋은 풍경을 대할 때마다 여러분들은 아버지를 부르며 눈물지을 수 있어야 합니다. 왜? 아버지께서는 6천년이란 기나긴 세월을 지내시면서 아들딸한테 몰림받고 우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상상으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사실입니다.
여러분의 손이 여러분 자신의 몸의 일부분일지라도 그것을 잊어버린 채 그 손을 붙들고 울 수 있는 경지에 들어가기 전에는 아버지를 체험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왼손은 사랑하는 아들의 손이요, 바른손은 사랑하는 아버지의 손이다.’ 하는 감정에 사로잡혀 자기가 자기의 손을 붙들어 주면서 ‘아버지!’ ‘아들아!’ 하는 경지에서 몸부림을 치는 자 외에는 천국에 못 들어갑니다.
여러분, 기도할 때는 그러한 경지까지 가야 됩니다. 여러분은 그런 경지에 들어가 보았습니까?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고 자기도 모르게 몇 시간씩 울다 보면 하늘이 그렇게 우신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 경지를 넘어가서 ‘아버지!’ 하면 실감이 납니다.
아버지란 명사는 많습니다. 내 아버지도 있고, 남의 아버지도 있고, 나쁜 아버지도 있고, 좋은 아버지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버지도 있고 사랑하지 않는 아버지도 있을 것입니다. 나에게 이익을 보려고 하는 아버지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를 대하여 우는 아버지가 계시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음의 고비를 넘어오시면서도 이 인간들을 붙들고 나오셨습니다. 사망세계에서 썩어 들어가는 몸뚱이를 헤치고 그 마음에다 자기의 마음을, 자기의 심정을, 자기의 모든 전부를 옮겨 주고, 그 다음에 축복을 해주고 싶어하시는 아버지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들은 그런 역사 과정을 거쳐 나오신 아버지를 기필코 모셔야 할 터인데 어떠한 자리에 모시겠습니까? 여러분, 모실 장소를 준비했습니까? 그곳이 어디입니까? 모실 장소를 준비하라고 예비했던 이스라엘 민족은 어디 있는고? 하나님을 모실 곳이 여러분들이 살고 있는 집입니까? 여러분이 살고 있는 나라입니까? 아니에요. 왜? 이 땅 어디도 믿을 수 없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안식할 수 없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선 내 마음을 중심삼고 내가 영원불변의 모습이 되어 내 마음 깊이 아버지를 모셔야 되겠습니다. 먼저 마음의 중심에 아버지를 모신 후에 그 아버지를 중심한 새로운 가정을 이루고, 아버지의 사회, 아버지의 가정, 아버지의 내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나라가 그렇게 되었습니까? 이 세계가 그렇게 되었습니까? 오늘날 이 땅에서 하늘을 잘 믿는다는 어떤 나라가 그렇게 되었습니까? 못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여러분들은 아버지를 어디에 모실 것이뇨? 각자의 마음 깊은 곳입니다. 만일에 내 마음 깊이 아버지를 모셨다 하면 그 다음엔 어떻게 해야 될 것이뇨? 아버지를 위로해 드려야 합니다. 위로해 드리는 데는 어떠한 마음을 갖고 위로해 드려야 되느뇨? 수고하신 아버지이심을 알고, 나를 만나기 위해 6천년 동안 찾아오셨던 아버지이심을 알고 위로해 드려야 됩니다. 세상의 어떤 비극영화의 주인공보다도 더 비극적인 분으로 찾아오신 것을 알고, 그 아버지를 모셔야 됩니다.
보십시오. 아담가정에서부터 찾아오셨던 아버지의 모습을. 아버지께서는 가인과 아벨을 세워 놓고 천륜의 대역사를 종결짓고자 하셨으나 가인이 아벨을 쳐 죽였습니다. 아벨이 죽는 것을 보시고 하나님의 심정이 어떠하셨겠습니까? 이는 곧 하나님이 맞으신 것입니다. 노아 때는 함의 실수로 말미암아 그랬고, 모세 때는 이스라엘 민족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그랬고, 예수 때도 이스라엘 민족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그랬습니다.
타락 이후 지금까지 인류는 비극의 역사를 엮어 나왔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비극입니다. 희극이 없어요. 오늘날 우리들은 비극의 프로그램이 연속되어 온 역사, 비극의 참상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 비극의 장면에서 누가 쓰러지고 누가 통곡했는가? 하나님입니다. 수많은 선지자들이 하나님 대신 쓰러졌고, 수많은 성도들이 하나님 대신 쓰러졌습니다. 이것이 모두 누구 때문인고? ‘나’ 때문입니다. 만일 이러한 영화를 본다 할진대 통곡 안 할 자가 없을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선조들은 만민의 아버지로 이 땅을 찾아오신 예수를 잡아죽였습니다. 우리는 살인강도보다 더한 악당들의 후손인 것입니다. 예수는 후아담으로 오셨습니다. 첫 아담이 타락했으니 다시 완성한 아담격으로, 인류의 참아버지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첫 아담이 거짓아버지가 되었으니 후아담이 참아버지로 오셔서 만민을 다시 낳아 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다시 살려 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이니 구원이니 하는 것입니다.
그런 분으로 오신 예수를 잡아죽였으니 우리는 살인강도들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생각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오! 아버지 저에게는 양심적으로 가책될 일이 없습니다’ 하는 수작은 그만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아버지를 죽인 살인강도란 말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목석같은 죄인이라 할지라도 자기가 아버지를 죽인 것을 알면 그 순간에는 통곡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민의 구원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아버지만 죽인 것이 아니라 아들도, 종도, 하나님의 모든 사람을 때려잡은 황마적 같은 자들입니다. 우리는 이런 것을 느끼고 회개해야 됩니다. 저는 옥중에 있을 때 사형수들과 여러 번 같이 있어 보았습니다. 만일에 그들이 고통을 벗어나 살 수 있는 길이 있다면 무슨 짓이든지 다 합니다. 자기가 살길이라면 천 사람 만 사람도 죽인다는 것입니다. 그런 세계가 있어요. 그런 것을 바라볼 적마다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역사적으로 헤아려 볼 때 응당 지옥에 가야 마땅한 죄를 범한 인간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인간들을 구하겠다고 교수대에 나가신 하나님의 황태자 예수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존귀한 분을 반역자로 몰아 잡아죽였으니 용서받을 수 있겠습니까? 심정적으로 볼 때 우리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들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죄인 중에 내가 제일가는 죄인이라는 자각을 하는 자리에 서야만 하나님의 심정, 예수의 심정을 조금이라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범죄자들입니다. 찾아오신 아버지를 환영하지 못하고 박대하였습니다. 창을 들고 옆구리를 찔렀고, 가시 면류관을 머리에 씌웠고, 십자가에 못을 박았어요. 알고 보니 그분은 우리의 아버지였습니다. 그 아버지를 죽인 죄를 뉘우치는 것이 기독교의 도리입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심정을 가지고 회개하여 하나님의 재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가 이 땅 위에 왔다가 죽임당한 일을 인간적인 입장에서 보면 얼마나 분합니까? 우리는 그 분함을 잊게 해드려야 합니다. 그 분함을 잊게 해 드릴 수 있는 것은 심정뿐입니다. 믿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심정 외에는 없어요.
‘너 하나를 찾기 위하여 죽음의 길도 개의치 않았으니, 너 하나가 찾아지는 날에는 천만사의 고통도 잊을 수 있다. 너 하나를 찾아온 길이니 너 하나를 찾는 날에는 몇 번의 고비, 몇 번의 억울한 고비도 잊을 수 있다.’ 하시는 아버지, 얼마나 사무친 심정이기에 그 모든 것을 잊을 수 있다 하시겠습니까?
이에 여러분은 황공하여 눈물지을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 심정이 얼마나 간절하시기에 잊을 수 없는 범죄의 사실을 잊어 주겠다 하시는가를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아들딸을 만나는 것이 하늘의 소망입니다. 그런 아들딸을 찾아가는 것이 지금까지의 구원섭리의 목적입니다.
이제 아버지 앞에 나아가야 할 우리들은 ‘아버지!’라는 한마디의 말을 하면서도 몸 둘 곳을 몰라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에서도 죄를 짓고는 그러하거늘, 하물며 하늘 앞에 무수한 죄의 역사를 가진 우리들에 있어서랴. 이제 여러분은 심정 하나를 붙들고 ‘당신의 슬픔은 저의 슬픔이요 당신의 기쁨이 저의 기쁨이오니, 당신이 슬퍼하면 저도 슬퍼하고 당신이 웃으시면 저도 웃겠소이다. 당신이 동하면 저도 동하고 당신이 정하면 저도 정하겠소이다.’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 하나밖에는 없습니다. 아무리 잘 믿고 아무리 성경에 능통하다 할지라도 안 됩니다. 사무친 그 심정, 그 하나의 마음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아들딸이 이 땅에 나타나지 않는다 할진대 하나님께서는 찾아오시던 발걸음을 어느 한 곳에 멈추고 6천년간 유랑하신 보따리를 풀어놓으실 수 없습니다. 집이야 크든 작든 상관없습니다. 앉으실 자리야 바위덩이라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마음에서부터 심정의 인연이 맺어지는데, 그 인연을 맺어주시기 위해 아버지는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수많은 신도가 땅 위에 있지만 그 가운데 아버지를 모시기 위하여 준비한 사람이 있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은 몰리고 몰리고 또 몰리고, 허덕이고 허덕이고 또 허덕이다가 여기에 왔습니다. 그러한 여러분들이 이제 알아야 할 것이 무엇이뇨? 나는 여러분이 성경을 많이 보는 것만을 바라지 않습니다. 기도를 많이 하고 뭐 어떻고 어떻고 하는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아버지라면 눈물이 앞서고 우중이라도 개의치 않고 아버지의 행랑보따리를 말없이 벗겨서 대신 지고 갈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만일 아버지가 거지가 되어 왔더라도 서슴없이 모든 것을 대신 짊어지고 그 앞에 엎드릴 수 있는 아들딸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런 아들딸이라면 주가 이 땅 위에 와서 하늘의 영광으로 들리어 만민을 통치할 수 있는 만왕의 왕좌에 올라가게 될 때에 결코 모른다 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쌍한 자리에서 천국의 심정을 갖고 그분을 모실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언제나 선생님이 이야기하는 것이지만 악한 사람이나 선한 사람이나 별 차이 없습니다. 선하다고 해서 얼마나 더 선하겠습니까?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종이 한 장의 차이만도 못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27억 인류를 하나님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아무도 원망할 수가 없게 됩니다. 아무리 자기의 원수라 하더라도 원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심정을 갖고 찾아오시는 아버지를 만난 후 그 아버지께서 가시는 길을 따라가고, 그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같이 해야 됩니다. 이런 아들딸이 되어 주기를 아버지는 고대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만났으니 이젠 보따리를 다 풀어놓게 해야 합니다. 이젠 죄수가 아닙니다. 아버지의 어려운 일을 도맡아 하고 ‘어디로 가시겠나이까? 아버지, 제가 앞장서리이다.’ 하며 그 길을 먼저 걷겠다고 다투어 나설 수 있는 아들딸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아들딸을 고대하시는 것입니다.
만일 그런 아들딸이 이 천지간에 있다 할진대 하나님은 그들이 있는 곳에 축복을 다 퍼부어 주실 것입니다. 그런 아들딸이 모인 집단이 있다 할진대 세계의 모든 교단 위에 내렸던 은혜를 다 끌어다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끝날에는 없는 자의 것을 빼앗아다가 있는 자에게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런 다음에 이제까지의 역사노정에 있어서 못된 자들을 심판하십니다. 누구를 세워서 심판할 것이뇨? 당신의 아들을 세워서 심판하십니다. 내 아들은 이러이러했다는 조건을 세워 가지고 그 기준에 의해서 심판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버지를 모실 수 있고, 아버지가 자랑할 수 있는 아들딸이 세계 인류 앞에 나타나야 합니다. 그래야만 아들딸을 기준해서 심판하실 수 있습니다. 주먹구구로 심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승리의 영광을 대할 수 있는 아들딸들을 세워서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처참한 길을 가시는 아버지를 쳤으니, 아버지를 배반했으니, 아버지를 모른다 했으니 그 아버지도 응당 그렇게 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 겪고 난 다음에 심판을 하시기 때문에 그 심판은 공의의 심판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한한 영광의 보좌에 앉아서 심판하시는 줄 아십니까?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겪어 보신다는 겁니다. 그러기에 인간의 사정을 누구보다도 많이 아시는 하나님이요, 인간의 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은 이처럼 계급의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자기가 처한 자리에 찾아오시는 아버지를 모시고 위안해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땅 위에서 아버지를 모신 기쁨을 심정적으로, 또 몸으로 느낄 수 있는 환경을 갖지 않으면 땅 위에 주님이 오실 때 심판을 피할 도리가 없습니다. 이런 기준까지 여러분은 나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나온 여러분들은 어떠한 자리에서 주를 모셔 보았습니까? 거지같은 자리에서도 모셔 보았습니까? 그런 자리에서도 ‘아이구, 아버지께서 이런 자리에 나타나시다니 황공하옵니다.’ 하며 몸 둘 곳을 모르고, 얼굴을 못 들며, 추한 모습을 보여 드리기 민망스러워 거동을 못하는 아들딸이 있다 할진대 하늘은 그를 붙들고 통곡하시며 내 아들아 내 딸아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그래 보았습니까?
통일교회는 영광스러운 자리, 좋은 자리에서 은혜 받으려 하는 단체가 아닙니다. 그런 자리에서 은혜 받으려는 무리들과 싸우기 위해 나온 것입니다.
우리는 가야 되겠습니다. 어디를 향하여 가야 되느뇨? 모진 광풍이 몰아치는 곳을 향하여 가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가지 않으면 아버지가 고생을 하며 오셔야 하니, 우리가 그 곳을 개척하기 위해 나서야 되는 것입니다. 죽음과 모진 싸움이 벌어지는 전쟁터일지라도 우리가 찾아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버지께서 찾아오셔야 하니 우리가 죽고 찢기는 한이 있더라도 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그 곳을 향하여 가야 되겠습니다. 보금자리에서 아버지를 모실 것이 아닙니다. 편안한 자리가 아니라 고통스러운 자리로 찾아오시는 아버지이신 것을 알고 그 아버지를 모실 줄 아는 아들딸, 그 아버지의 고통의 짐을 전부 짊어지고 그 아버지의 고난의 길을 전부 다 책임지고 나설 줄 아는 아들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수는 지극히 적다 하더라도 걱정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무리를 통하여 움직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외면하시려야 외면하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세계 가운데 그 분야에 자신 있다 하는 민족이 있다면 그 민족은 세계를 지배할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천상을 지배할 것이요, 천군천사까지 심판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질 것입니다. 그러한 영광의 선물을 가지고 아버지께서 오신다니 황공한 일입니다.
민족을 초월하고, 국경을 초월하고, 동서를 초월하여 아버지를 부르며 모든 것을 책임질 수 있는 아들딸이 이 땅 위에 많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 천지는 하늘나라가 될 수 없습니다.
세계는 그곳을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지난날 동서의 모든 사조는 이 민족과 하등의 관계가 없었지만, 점점 이 민족의 일로 부각돼 들어오고 있습니다. 이것을 이번의 정상회담을 통해서도 여러분은 잘 느꼈을 것입니다. 우리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는 민족이지만 그들이 가슴을 떨면 우리도 떨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나를 향하여 세계는 다가오고 있습니다. 알고 보면 이 세계는 나 대신 심판의 제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여러분은 모든 것을 책임지고 밟고 올라설 수 있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권세의 주인공이 아니라 심정의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누구보다도 눈물이 많고 누구보다도 동정심이 많은 심정의 주인공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인류가 최후로 바라는 것은 도(道)가 아닙니다. 도를 원하고 있지만 도가 궁극적인 대상은 아닙니다. 어떤 주권도 아닙니다. 인간은 무엇보다도 행복을 제일로 원하지 않습니까?
오늘날 전인류가 어떠한 주의를 내세우고, 세계가 모두 그 주의권 내(主義圈內)로 들어간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러면 과연 전부 편안하고 행복스럽겠습니까? 자유를 위하여, 행복을 위하여 싸운다고 하지만, 그들이 진정으로 행복과 자유를 위해 싸우고 있는가? 그렇지 못함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극소수의 무리는 자유스럽고 행복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진정한 행복과 자유의 개념으로 보면 가상적인 것들입니다.
심정, 생명의 원천인 심정, 이 심정이 천정과 더불어 즐길 수 있으며, 하나님이 동하면 내가 동하고 하나님이 정하면 나도 정하고 하나님과 같이 바라보고 듣고 있다는 느낌을 갖고 이 세계를 대할 수 있는 아들딸이 되었다 할진대 그들은 최대의 행복자입니다. 이 시대에는 그러한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것을 원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고난 가운데에서 수고하신 아버지를 모시기 위하여 허덕여 왔으나 이제부터는 ‘영광 가운데 오시는 아버지를 누구보다 잘 모시는 효자가 되겠나이다.’ 하는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어려운 환경에서 아버지를 모시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행복의 동산이 열리고 아버지께서 창조주의 권한을 가지고 천지 만상 앞에 나타나시게 될 때에도 모실 수 있어야 합니다. 창조본연의 선의 세계,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운 그 세계에서도 효자 효녀가 되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효자 효녀는 오늘날 이 시대에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고통스러울 때뿐만이 아니라 기쁠 때에도 그러해야 합니다. 영광의 때가 되었다 하더라도 ‘내가 춤을 춤으로써 아버지께서 기뻐하신다면 얼마든지 춤을 추어서 위로해 드리겠다. 내가 노래를 부름으로써 아버지께서 즐거워하신다면 얼마든지 노래를 불러서 즐겁게 해드리겠다.’ 할 수 있어야 됩니다. 마음이라도 그렇게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슬픈 자리로 내몰아야, 그런 길을 걸어가게 해야 빠르겠기에 그런 길을 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아버지를 모시고 한 고개를 넘고 난 후에는 아버지께서 천하만상 온 피조만물 앞에 ‘이는 내 아들이요 내 딸이다.’ 하고 자랑할 수 있는 아들딸의 기상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런 기상을 갖추고, 영광의 보좌에 앉으신 아버지 앞에 효자 효녀의 충절을 다하고 나서, 모든 피조세계가 머리 숙일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런 마음을 가졌다면 누가 밉게 볼 수 있겠습니까? 고난의 자리에서 아버지를 모시려 하지 않고 처음부터 그런 마음을 갖고 있으니 사탄이 참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과정을 거치고 나면 교만해도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인정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뒤에 두고 자기만 올라가겠다고 하니 다 거꾸러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난의 아버지부터 모셔 가지고 영광의 아버지를 모셔야 합니다. 고난의 아버지를 모셨다고 해서 아버지를 다 모신 것이 아닙니다. 절대로 다 모신 것이 아닙니다. 불쌍한 내가 말없이 슬픔의 길을 걸으며,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심정으로 ‘아버지!’ 하고 부른다 해도 그것은 아버지를 눈물짓게 하는 하나의 계기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자리에서만 아버지를 모실 것이 아니라 영광의 자리에서도 아버지를 모셔야 합니다. 아들의 자격을 모두 갖추어 영광의 자리에서 영원히 아버지를 모실 수 있는 그런 자리까지 우리는 가야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고생의 자리에서부터 영광의 자리까지 동참할 수 있는 아들딸을 찾고 계십니다. 그럴 게 아니겠어요?
이러한 입장에서 볼 때, 전세계에 우리 한민족과 같이 불쌍한 민족은 없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절대 낙망하지 마십시오. 이렇듯 불우하고 어려운 처지에 있다 할지라도 여기에 하나님께서 찾아오신다면 어느 누구보다도 가까운 자리에서 아버지를 모실 수 있을 것입니다.
심정이 두텁다면 그 심정의 터로 해서 이 어려운 환경을 참고 넘어 이 자리를 찾아오시는 아버지를 위안해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천상에 갔을 때에 제일 영광된 자리에서 아버지를 제일 가까이 모실 수 있는 자격자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 낙심하지 마십시오.
세상이야 뒤끓든, 사회야 변하든 천심을 향한 일편단심만은 변하지 않아야 합니다. 비록 내 몸이 찢기고 쓰러지는 한이 있다 할지라도 아버지를 모시겠다는 그 약속만은 결코 변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런 자리에서도 ‘내가 영광의 때, 영광의 한 날을 맞이하면 아버지를 이렇게 이렇게 해드리겠습니다.’ 하는 기백을 가져야 되겠다는 말입니다. 그 나라에 가면 내가 영광을 받고 모심을 받겠다는 것보다도 ‘그때에 나는 이렇게 하겠습니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식 된 입장에서 아버지를 생각하는 작은 무엇이라도 있어야 6천년의 한을 제거시킬 수 있고 자랑스러운 소망의 한 자체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똑똑히 아십시오.
오시는 아버지를 잘 모시어 영광의 아버지로 높여 드리고 아버지 대신 사탄을 향하여 ‘야! 이놈아’ 하면 사탄이 도망칠 수 있는 자리까지 나아가야 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버지, 저희들의 어려움 때문에 무한히 눈물을 흘렸던 것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어려울 때는 이를 갈며 가슴을 쥐어뜯곤 하였습니다. 이것이 아버님 앞에 얼마나 용납받을 수 없는 처신이었던가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이런 일은 하늘의 슬픔을 잊은 배반자에게나 있을 법한 일로 하늘의 슬픔을 아는 무리에게는 꿈에도 당치않은 일인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슬퍼도 기뻐하고, 어려워도 기뻐하고, 죽더라도 감사하는 것만이 아버지 앞에 조금이라도 자기의 책임을 하는 것이며, 찾아오시는 아버지의 형상 앞에 부끄러움을 피할 수 있는 것임을 알았사옵니다.
이제 저희들이 어떠한 자리에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이옵니다. 저희들이 어느 한때에 찾아오신 아버지를 맞이하였고, 굶주린 아버지를 잡숫게 하였으며, 목마른 아버지를 마시게 하였으며, 헐벗은 아버지를 입게 하였으며, 어려우신 아버지를 찾아보았으며, 병든 아버지를 방문하였습니까? 그런 자리가 언제나 아버지를 모실 수 있는 자리라 하셨사옵니다. 황공하옵니다. 당신은 지극히 작은 자에게 행한 것이 곧 당신께 행한 것이라 하셨사옵니다.
아버님, 저희 자신만으로는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저희 개체 외에도 전체가 필요하다는 것을 저희들이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는 전체의 제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사옵고, 대(大)를 위하여 소(小)를 희생하는 것이 역사적인 철칙인 것을 알았사옵니다. 더욱이나 천적인 섭리의 뜻을 세우기 위해서는 큰 희생을 치러야 하는 것을 알았사오니, 자신의 슬픔을 억누르고 아버지의 슬픔을 더 염려하며, 자신의 걱정을 억누르고 아버지의 걱정을 더 염려하며, 자신의 억울함을 억누르고 아버지의 억울함을 더 염려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런 아들딸이 된다 할진대 하늘의 심정이 같이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자신의 고통이 있을 때 당신을 저버리던 저희였고, 자신의 슬픔이 있을 때 당신 앞에 아뢰던 저희였고, 자신의 억울함이 있을 때 이 억울함을 맡아 달라고 당신 앞에 호소하던 저희였습니다. 이것은 효자의 도리가 아니고 충신 열녀의 도리가 아닌 것을 알았사옵니다. 저희가 슬픈 자리, 죽음의 자리에 처하는 일이 있더라도 당신이 억울함을 당하고 계신다면 그 억울함을 짊어지려고 하는 모습들이 되지 않으면 안 될 저희들인 것을 알았사옵고, 저희가 땅 위에서 서기 힘든 어려운 자리에 서 있다 하더라도 당신이 그런 자리에 계시다면 그 자리에 계시지 않게 해드려야 할 저희들인 것을 알았사옵니다.
아버님, 이제 더 무슨 말을 하오리까? 이 시간, 마음으로 당신을 대신하는 아들이 되고 딸이 되겠다고 맹세하는 사람이 한 사람만 있어도 좋겠사옵니다. 그렇지 못한다면 이제까지 외친 것이 무슨 소용이 있사오리까?
아버지! 이들의 마음 문을 여시어서 당신이 임하시옵고, 복귀노정에서 맺힌 당신의 한을 푸시옵고, 저희들이 마음으로 아버지를 모시는 기쁨과 영광이 이 세계 온 천지의 만물에게까지 미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날을 아버지께서 무한히 고대하신다는 것을 알았사오니, 저희들도 그날을 위하여 싸우고 또 싸우며, 울고 또 울며 나아가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를 모시는 영광의 제단까지 ‘나는 이렇게 아버지 앞에 충성하겠습니다.’ 하는 마음의 기준을 세워 달려 나갈 줄 아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나이다.
이 시간 모든 말씀을 아버지의 것으로 친히 맡아 주관하여 주시옵고, 저희의 생명을 당신 것으로 하여 주시옵고, 당신이 친히 주관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면서, 모든 것을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이제 저희들은 어린애의 마음을 갖고, 또 배고픈 사람이 밥을 그리워하는 것 같은 간절한 심정을 가지고 이 자리에 모였사옵니다. 아버지의 품속이 그립사옵고, 아버지의 사랑에 흐뭇이 잠길 수 있는 한 시간이 그립사옵니다.
저희는 지금까지 많은 말씀을 들었습니다. 단에서 열렬히 외치는 수많은 사람들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또 마음의 클클함을 풀기 위하여 여러 방면으로 찾아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저희들의 생명을 의탁할 수 있는 것이 되지 못하고, 저희의 생명 전체가 영원히 거할 수 있는 안식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때가 변함에 따라 마음이 휩쓸리기 쉬웠던 저희들은, 시대가 변천함에 따라 새로운 무엇을 찾기 위하여 이리저리로 방황하는 유랑아나 고아와 같은 불쌍한 모습이었던 것을, 아버지, 기억하옵니다.
저희는 세상의 그 무엇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옵니다. 이 시간 자신의 잘난 무엇을 자랑하고 싶은 것도 아닙니다. 오직 당신 앞에서 아들 된 심정에 사로잡혀 일신의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자리가 그립사옵고, 그런 자리에서 ‘내 아들아, 딸아’ 하시며 품어 주시는 아버지의 그 품이 그립사옵니다. 그런 곳을 찾아 헤매는 인생의 행로를 아버지의 무릎 앞으로 옮겨지게 할 수 있는 그 한 날을 고대하고 있사옵니다.
오늘 여기에 모인 저희들, 믿는 생활도 많이 해보았사옵고, 기도도 많이 해보았사옵고, 신앙훈련도 많이 받았사오나, 그것보다도 산 제물이 되었느냐 하는 사실이 더 문제인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살아 계신 아버지의 생명이 저희의 마음을 휩쓸고 몸을 휩쓸어 승리의 모습으로 나아가게 한다는 놀라운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 그것이 저희의 몸에 체휼되어야만 살 것이요, 저희의 마음에 체휼되어야만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저희들은 이것을 요구하고 있사오니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이제 제가 무슨 말을 하오리까. 많은 말을 해보았습니다만 인간의 그 무엇을 가지고는 영원한 생명의 인연을 빚어낼 수 없는 것을 알기에, 저는 주저하며 나섰습니다. 아버지, 친히 나타나시옵소서. 전하고 싶은 아버지의 심정이 전하는 자의 심정과 화하고 듣는 자의 심정과 화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은 아버지의 피 살과 같이 움직여지는 그 자리가 그리워 찾아왔사오니,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이젠 전하는 자의 마음과 받는 자의 마음이 하나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탄은 간격을 노리어 역사한다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가 부모의 품을 그리워하는 간절한 심정으로써 아버지의 품에 안길 줄 아는 저희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성경 말씀에서 본 것과 같이 그 옛날 바울이 애달프게 외치던 그 심정을 그리워하고, 그를 따르던 초대교회 신도들의 모습을 그리워하면서, 아버지의 심정의 세계로 달음질칠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니다.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말 씀> 여러분과 함께 생각하려는 제목은 ‘하나되시려는 아버지’입니다. ‘하나되시려는 아버지’ 이런 제목을 가지고 잠깐 말씀드리겠습니다.
땅 위에 살고 있는 수많은 인간은 자기 스스로를 믿고, 자기 자신의 가치를 만천하에 자랑하기에 부족하다는 것을 다 잘 알고 있습니다. 자신을 믿지 못하는 자리에서 믿을 수 있는 다른 무엇을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나 자신의 가치를 망각한 채 다른 곳에 나와 인연될 수 있는 무엇이 없는가 하고 찾아 헤매는 우리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백 퍼센트 믿을 수 있고, 자기의 가치를 만천하에 떳떳이 자랑할 수 있는 동시에 만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 앞에 가서 ‘당신이 찾고 있는 가치가 이것인 줄 아오니 받으시옵소서.’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 이는 인생의 최고의 성공자가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역사상에 위인이나 성현 현철들이 많이 왔다 갔지만, 자기를 믿고 자기의 가치를 만천하 앞에 공개하며, ‘나처럼 이렇게 사시오.’ 하고 자신 있게 외치고 간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선한 목적, 더 큰 목적을 향하여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내가 즐기고 있는 현실의 생활환경을 무시하고라도 마음은 그곳을 향해 달려가려고 하는 것을 여러분이 체휼할 것입니다. 또 여러분은 여러분이 머물러 있는 그 환경이 영원한 안식처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스스로의 양심의 작용을 통하여 잘 알 것입니다. 이 양심은 머물러 있는 이 자리가 기쁜 자리가 못 되기에 나로 하여금 가라고 촉구하며, 어떤 목적과 가치에 미급되어 있는 나 자신을 폭로시키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는 생활 가운데서 절절히 느끼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마음이 어떤 목적지를 향하여 가라고 명령했을 때 몸이 가지 못한다면, 이는 선악의 싸움에 있어서 패배자요, 하늘이나 인간 세상에서 끊기는 자가 됩니다. 반면에 이 명령에 따라 행동하고 자신의 환경을 밟고 넘어서는 자는 그래도 역사상에서 무엇인가를 공헌할 수 있는 사람이요, 전체를 섭리하시는 하늘 앞에 무엇인가를 남기고 갈 수 있는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가라고 촉구하는 이 마음은 시간이 지나도 변할 줄 모르고 환경이 변해도 변할 줄 모릅니다. 그러나 안식의 터전을 갖추어 만천하 앞에 너는 안식의 왕자라고 자랑할 수 있겠느냐고 누군가 묻게 될 때, 어느 누구나 그렇지 못하다고 대답하면서 탄식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하늘의 동기로 하여 지음받은 인간의 운명이었던고? 아닙니다. 그러기에 우리 인류는 더 높은 양심의 추구를 따라 나가기 위해 시대와 세기를 거치면서 싸움의 역사노정을 거듭해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해결짓지 못한 채 지금도 목적의 세계를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루의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하루의 일과를 반성하게 될 때에 마음으로 흐뭇이 웃으면서 ‘하늘이여, 땅이여, 만민이여, 저의 이 기쁜 심정을 본받으시옵소서.’ 할 수 있습니까? 본래 우리의 마음은 그런 자리에 있기를 바라지만 오늘 우리가 그런 자리에 있지 못하니, 이것이 탄식이요 불행이요 원망스러움인 것입니다. 마음은 내 생명과 전체적인 문제를 해결하기를 고대하고 있으나, 내적인 어떠한 내용의 조건도 해결되지 않은 몸을 그래도 끌고 생의 운명을 거쳐 나가고 있는 처량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이 이런 입장에 있기 때문에 어떤 큰 목적을 향하여 가라는 재촉과 자극을 받을 때마다 몸은 여기에 항거합니다. 이렇게 항거하게 하는 그 무엇을 대하여 대결할 수 있는 자신의 입장을 밝혀 거기서부터 그에 대한 문제를 해결해 나가지 않는다 할진대 인생의 모든 문제는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이 어찌하여 이렇게 되었던고? 인간이 스스로 선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선한 목적을 향하여 나아가는 과정에서 타락하여, 악을 동기로 하여 시작했기에 그 악을 박차고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길을 가야 하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우리는 그런 길을 만들어 놓은 타락된 조상의 혈육을 받고 태어난 후손인 것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제아무리 잘나고 만천하에 자기의 영광을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역시 타락의 혈통을 물려받은 후손이요, 타락할 수밖에 없는 종족임에 틀림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나이기에 이 이상 부끄러운 일이 없고 이 이상 체면을 세울 수 없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나인 것을 절절히 느끼고 나 자신을 무자비하게 칠 때, 거기서부터 새로운 심적 혁명은 싹트는 것입니다. 하늘은 그런 자를 찾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본래부터 인간이 그런 자체가 되었다면 인간들에게 무심한 하나님으로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본래부터 그런 자체가 되었다면, 역사노정에서 많은 생명들이 피를 뿌리고 갔다면 선의 목적을 추구해 나오시는 선한 하나님이라는 것을 밝히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는 거예요.
우리가 탄식권 내에 들어 있지만 선을 지향할 수 있는 동기를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우주를 창조한 절대자가 있을진대, 그 절대자는 우리가 자나 깨나 먹으나 쉬나 어느 한 순간도 쉼 없이, 우리의 마음과 양심을 통하여 그 곳을 향하여 나아가도록 재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양심적인 것은 가치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환경이 아무리 만족스럽다 할지라도 마음에 무엇인가 클클함이 있고 슬픔이 스며드는 것을 느끼는 순간은 본연의 움직임이 재촉하는 순간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 것을 느끼고 자기 자신을 해결하기 위하여 허덕이고 허덕이며 찾아 나아가는 것이 종교의 길입니다.
종교의 길을 가는 사람들은 그 시대의 선두에 선 사람들이 아닙니다. 어떤 사조의 유행에 미련을 가진 사람들이 아닙니다. 어떠한 사조를 혁명하기 위하여 그 첨단에 선 용사들도 아닙니다. 그 사람들은 시대의 흐름에 뒤떨어지고 시대가 흘러가는 방향을 거부하고 돌아서는 사람들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기에 지금까지 종교인들이 사회와 격리하고 정치와 격리하고 생활 이념과 격리하라고 권고해 나온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용단을 내려 이 사회환경이나 생활환경을 떠나는 사람들, 또 거기에서 심정적인 상충과 비애를 느껴 그것을 부정하고 돌아서서 나아가는 사람들이 도의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도인은 어떠한 자뇨? 호화찬란한 영광의 자리에 머물러 있다 할지라도 그 자리에서 눈물지을 수 있는 자입니다. 도를 아는 자의 심정은 어떤 것이냐? 아무리 늠름한 권세를 갖고 온 천하를 움직일 수 있는 환경에 처해 있다 할지라도 그 깊은 심정에서 남모르는 눈물을 지을 수 있는 심정입니다. 어떤 사회나 단체를 막론하고 그런 심정을 지니지 않는 사람은 진정한 도인이나 종교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주를 따라가는 신도라 할진대 자기가 어떠한 영광의 자리에 처해 있다 할지라도 그 자리를 최고의 만족과 안식의 터전으로 삼아 기쁨을 느낄 것이 아니라, 그 자리를 거치고 나서며 남모르는 눈물을 지을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런 자라야 도의 길을 가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길을 가야 할 사람들이 못 감으로 말미암아 종교가 몰리고 쫓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왜 그러뇨? 죄악의 자리를 떠나서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야 할 운명에 처한 인간이요, 바로 가지 못하고 반대로 돌아가야 할 운명에 처한 인간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왜 돌아가야 할 운명에 처하게 되었는고?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타락으로 떨어져 굴러 내려가는 세상이 되었으니 반대로 찾아 올라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역사를 존중할 줄 아는 민족은 자국의 국민성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역사적인 심정을 기준으로 하여 단결된 민족은 그 이상의 심정을 가진 주의가 아니고는 그 무엇으로도 굴복시킬 수 없습니다. 역사를 숭상하고 절개를 지켜 나온 성인 현철 혹은 충신들이 있다 할진대 그 이상의 심정을 갖춘 자가 아니고는 그들을 굴복시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시대가 악하면 그 악한 것을 끊고 난 후에야 다른 어떤 기준에 접붙일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가 사회발전 과정에서 항시 보는 일입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고? 역대 충신의 기준을 넘고 효자 열녀의 기준을 넘어야 합니다. 또 그것을 넘고 나서도 가야할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현세와 동떨어진 환경을 제시하지만 그것은 지금 이 세계에서 미래의 세계로 우리를 넘겨주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프로그램입니다. 충신 중의 충신이요 효자 중의 효자를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비록 땅 위에서는 버림을 받고 배척을 받는다 할지라도 그들이 주관하고 그들이 누릴 수 있는 한 때가 온다고 했거늘, 그것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주님이 이 땅 위에 다시 오셔서 건설하실 지상천국 세계입니다.
세상에는 가정을 위하여 충성하는 사람도 있고, 사회를 위하여 충성하는 사람도 있고, 국가를 위하여 충성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국가를 위하여 충성한 사람은 국가이념을 후대에 남기는 데 있어서 하나의 전통의 조건을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땅과 이 세계의 모든 것은 어차피 한번 심판대에 서야 됩니다. 이것을 넘기 위해서는 일개 민족을 위한 충신 말고, 일개 부모를 위한 효자 말고, 만천하 왕 중의 왕이요, 주인 중의 주인이요, 만유(萬有)의 아버지인 하나님 앞에 충신이 되고 효자가 되라고 종교에서는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이 종교의 도리입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하나님은 믿는 사람들을 향해 이 세상을 버리라고 하셨느뇨? 이 세상은 어차피 지나갈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심정을 갖고 계신 하나님이기에, 비록 이 시대에는 버림을 받더라도 미래에는 효자요 충신으로서 그 가치를 높이 찬양받을 수 있는 무리가 기독교적으로 보면 산양과 면양 가운데 면양에 해당하는 무리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세상의 기준을 넘어가야 되겠습니다. 그 이념을 향하여 충성을 다하고, 그 이념을 향하여 달음질치겠다고 나선 자들이 도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도인들은 앞으로 그런 세계로 달려가는 데 있어서 선봉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망합니다. 망해요. 아무리 뭐가 어떻고 어떻다 해도 망합니다. 오늘날 세계는 이러한 운명에 처해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개개인으로 출발하였지만 전체의 세계를 붙들어서 그 개인과 세계가 연결되어 처음이자 끝이 될 수 있는 세계가 되어야 합니다. 즉 여러분의 본 양심이 이루기를 바라는 것을 대하여, 이 세계가 ‘과연 그렇구나’ 할 수 있는 자리까지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힘은 목적을 향하여 움직이는 것입니다. 자연계를 보더라도 목적 없이 움직이는 존재물은 없습니다. 지극히 작은 화학작용만 하더라도 목적을 위하여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양심의 힘이 목적 없이 움직이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양심에도 반드시 목적이 있습니다.
내 마음이 양심의 주인공과 함께 즐거워할 수 있고, 안식할 수 있고, 춤출 수 있는 영광된 환경, 이것이 인간이 찾아가는 천국입니다. 천국이 어떤 지역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못 하는 사람은 천국에 갖다 놓아도 도망갑니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은 6천년이란 기나긴 세월을 떨어져 나간 인간들을 붙들고 나오고 계십니다. 사람들 같았으면 벌써 천만번 죽여 버리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죽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휘발유를 끼얹고 흔적도 없이 불살라 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인간을 찾아오셨습니다. 그 찾아오시는 목적은 무엇이뇨? 죄인 된 인간과 하나되는 것입니다. 지극히 선한 입장에서 지극히 악한 자를 대하여 ‘심정으로 마음으로 몸으로 환경으로 이념으로 하나가 되어 주려무나.’ 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정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정이 어떠한가를 알아야 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만물을 죽 지어 놓고 잘못했다고 해서 덮어놓고 벌만 주고 심판만 하는 하나님이라면 필요 없습니다. 그런 하나님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은 여기서부터 해결해 나가야 합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은 어떠한 하나님이냐? 죄에 대한 심판만 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심판하기에 앞서 간절한 심정을 지닌 분입니다. 만일 그렇지 못한 입장에서 하나님이 심판한다면 항의한다는 겁니다. 죄만 심판하는 하나님이라면 항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항의하지 못합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를 천만 배 넘고 넘을 수 있는 심정을 지니고 심판하시기 때문에 인간은 심판을 받아도 항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관념적으로 알고 있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님을 찾되, 의식(儀式)의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말씀의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관계의 하나님을 찾았어요. 그러나 동기의 하나님은 몰랐습니다. 성경 말씀을 보고 타락 이후에 나타난 관계의 하나님은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선조들을 어떻게 대했고 타락한 후손은 어떻게 대했다 하는 것은 알았습니다. 그러나 타락하는 것을 막지 못한 하나님의 사정을 몰랐습니다. 하나님께서 타락한 아담 해와를 쫓아낼 수밖에 없었던 동기를 몰랐습니다. 동기를 모르니 해결지을 수가 없습니다. 세상 일도 그래요. 어떤 문제가 있다 할 때 그 동기부터 알아 가지고 해결지어야 후환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 66권을 다 능통해도 성경 가운데 숨어 있는 동기의 하나님과 과정의 하나님과 결과의 하나님을 모르면 소용이 없습니다. 과정의 하나님은 역사노정에 나타나 있기 때문에 알 수 있을 것입니다. 4천년 동안 천신만고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끌고 나오면서 메시아의 발판을 세우기 위하여 얼마나 애썼습니까? 그것은 가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과정의 하나님을 안다 하더라도 확실히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동기를 모르니 확실히 안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과의 하나님은 어떨 것이냐? 어떻게 심판할 것이냐? 여러분이 지금 하나님의 심정이 어떤지도 모르면서 기뻐하겠다구요? 안 됩니다. 동기 없는 결과는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은 동기를 거치고 과정을 거쳐서 결과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연과학의 현상입니다. 인간이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에요. 천리 원칙이 그렇게 되어 있고 하나님의 법도가 그렇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돌연변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없다는 거예요. 질서적입니다. 동기를 중심삼고 원리 원칙적인 과정을 거쳐서 실체적인 목적체가 형성되는 세계가 창조이념세계입니다. 여러분, 성공하는 사람들이 마음의 굳은 각오 없이 성공합디까? 마음의 동기를 중심삼고 환경을 개척하고 변함없이 그것을 밀고 나가야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우리 일개인이 성공하는 데도 그렇거늘 대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목적을 이루시는데 그렇지 않겠습니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역사적인 하나님 말고 창조적인 하나님을 찾아보았습니까? 이 시대에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 말고 창조의 동기를 가졌던 하나님, 심판받아야 할 세계를 놓고 섭리하는 하나님 말고, 심판한 후에 모든 인류를 품고 영광 가운데 만민과 더불어 기쁨과 행복으로 사셔야 할 하나님을 알았습니까? 몰랐습니다. 한 사람이 성공하는 데 있어서도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떠나서는 안 됩니다. 과거도 천리원칙과 그 원천이 같아야만 그것이 역사적인 전통으로 세워지고, 또 그 사람의 행적을 역사와 더불어 미래까지 자랑할 수 있지, 그 동기에서 탈선할 때는 어느 시기에 가서 심판을 받습니다. 그러기에 오늘날 우리들이 알아야 할 것은 무엇이뇨? 동기의 하나님입니다.
그러면 그 동기의 하나님을 어떻게 알아야 되겠느뇨? 타락한 입장에 머물러 있는 우리를 하나님은 어떻게 대해 나오셨느뇨? 하나님은 역사 과정에서 타락되어 있는 우리를 동기의 심정을 가지고 대해 주셨고, 미래의 심정을 가지고 대해 주셨습니다. 땅 위에 살고 있는 인간들은 하나님을 몰랐으나 하나님은 인간들을 저버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6천년이 지난 지금까지 인간들은 하나님을 모르고 있으나 하나님은 창조 당시부터 인간을 아들딸로 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천리법도를 세웠기에, 이 피조세계를 깨뜨려 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깨진 이것을 다시 붙이고자 하는 것이 구원섭리입니다. 구멍이 뚫어지고 깨어진 것을 때워야 된단 말입니다. 때우는 데는 동기로부터 과정을 거쳐 목적하던 바의 완결체로서 인연을 맺어 때워야 됩니다. 그러기 전에는 온 우주 피조만상 앞에 완성품이라 내세울 수 없습니다. 이치가 그렇잖아요?
우리는 재인식해야 되겠습니다. 재각성해야 되겠습니다. 더욱이나 청년들은 단단한 결심을 해야 되겠습니다. 역사노정에서 우리는 싸워서 승리해야 되겠습니다. 종교의 길을 가고 있는 여러분은 무엇인가에 이용당하고 있구나 하고 느껴 보았습니까? 여기서 외치는 사람은 그것을 절절히 느껴 보았습니다. 내가 오늘 하나님에게 이용당하고 있느냐? 인간에게 이용당하고 있느냐? 교파에게 이용당하고 있느냐? 역사 앞에 이용당하고 있느냐? 세워진 어떠한 신학체계에 이용당하고 있느냐? 어느 것이냐? 해명해야 됩니다. 이것을 해명해 놓은 책자를 나는 못 보았습니다. 이것을 해명하기 위하여 울부짖는 어떠한 학자도 못 만났습니다.
이 민족은 세상적으로는 세계 앞에 내세울 수 있는 소망의 조건이 하나도 없는 처량하고 불쌍한 민족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세계가 몰각(沒覺)된 자리에서 잠들어 있는 이때에 우리 민족은 재각성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역사를 재감정하고, 시대를 재감정하고, 신앙을 재감정하여 하나님을 찾아 나가야 되겠습니다.
사람이나 어떠한 기관이나 교파에게 이용당하는 사람은 망할 수 있으되 하나님에게 이용당하는 사람은 망하지 않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인간세계의 어떤 욕망을 걸고 나오는 것에 이용당하면 망하지만, 세상에서 몰리고 땅에서 배척받아도 하늘에게 이용당하면 망하는 것 같아도 망하지 않습니다. 뜻있는 청년들이라면 어느 것을 취할 것인가 냉철히 생각해야 됩니다. 그러므로 어느 한 때에는 자기의 아버지, 어머니, 형제도 비판해 봐야 될 것입니다. 그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예수님 이후에 움직여 나오신 하나님을 알기는 간단합니다. 예수님은 4천년 하나님의 심정을 통하여 왔습니다. 여러분, 그걸 알아야 돼요. 예수를 보내게 될 때 예수와 더불어 오시던 하나님, 예수는 갔을망정 예수의 십자가와 같이 계시던 그 하나님, 인간은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을망정 그 인간을 버리시지 못하고 후손까지도 붙들고 나오시는 하나님을 여러분은 생각해 봤어요? 이것을 해명할 수 있는 그 무엇을 갖추지 않는다 할진 대 여러분은 신부 될 꿈도 꾸지 마십시오.
우리는 말씀의 예수를 알았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람의 말도 무조건 믿으라는 게 아닙니다. 이치에 타당하고 마음에 혁신적이고 극단적인 무엇이 닿아, 지금의 나를 깨뜨려 버리고 새로운 무엇을 건설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거든 그것을 잡고 믿으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그런 경지를 통과해야 됩니다.
여러분, 우리는 빚진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들을 붙들고 무한한 노력을 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상상할 수 없는 무한한 노력을 하셨습니다. 거기에 보답하려면 27억 인류를 한꺼번에 제물로 드려도 갚을 수 없습니다. 심정에 못을 박히면서도 수고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 하나님은 무지한 인간들을 대해 섭리해 나오심에 있어서 동기와 과정과 목적을 가지고 대해 주셨습니다. 대해 주시는 데는 네거리의 교통순경처럼 ‘이리 가라, 저리 가라.’ 하는 식이 아닙니다.
성경 가운데 하나님이 의인을 대하여 명령하신 내용의 말씀이 있는데, 하나님은 그 일의 몇 천배의 과정을 지내시고 나서 명령하신 것입니다. 내게는 그런 것을 알고 차마 성경을 보지 못한 적이 있었습니다. 눈물이 앞을 가려 볼 수가 없었습니다. 인간을 대하여 이렇게 하라 하실 때 편안한 자리에서 그렇게 하라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자리를 몇 백번 통과했기 때문에 그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한번쯤 해보고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몇 백번 몇 천번 해보고 나서 하라는 것입니다. 사탄과 싸움에서 이기면 이러이러한 것을 보장하겠다는 기준을 세워 놓고 나서야 비로소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대하여 하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에 죽으라 한 것도 하나님이 죽음의 고충을 거치고 난 후에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는 주인공이 되었기 때문에 그러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입장에서, 만인이 고통 가운데 있는데도 영광이나 받고 보좌에 앉아서 호령하는 하나님이라면 사탄이 참소합니다. 사탄이 참소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심정적인 애달픔이 사탄세계의 모든 것보다 강하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천리 원칙과 영원한 심정을 가졌기에 사탄이 참소 못하는 것입니다. 원리는 깨뜨리지 못합니다. 불가침입니다. 하나님은 원리적인 심정으로 타락한 인간을 오늘날까지 품고 나오셨다는 것입니다. 아시겠지요?
하나님은 누구신가? 또 타락한 종족은 누구인가? 그 하나님은 타락한 종족의 아버지라는 거예요. 만유의 아버지라고 했습니다. 이 아버지는 한을 가진 아버지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지어 감옥에 끌려가는 아들의 뒤를 따라오는 아버지가 되었다는 거예요. 자유로운 하나님으로 알고 있지만 그 마음에는 어찌하려야 어찌할 수 없는 쇠고랑이 채워져 있습니다. 오랜 세월을 하루와 같이 아들의 죽음과 아들의 쓰라림을 염려하는 마음으로 따라 나오신 하나님인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원망스럽습니다. 어찌하여 당신은 타락한 조상의 아버지가 되셨습니까? 당신이 불쌍합니다.’ 하고 기도해야 됩니다. 자식된 마음이 복받쳐 올라 이렇게 호소하는 아들딸이 있다 할진대 하나님은 그를 붙들고 통곡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쁨 가운데서 우리를 만나고자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철창에 갇히어 찢기고 꺾인 아버지를 붙들고 ‘아버지, 얼마나 고생하셨습니까? 당신이 내 아버지 되신 것이 원망스럽습니다.’ 하고 통곡하는 아들딸을 찾아 헤매시는 것입니다. 그런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멋대로 가고 시대는 흘러가도 하나님 아버지가 자식을 대하는 일편단심은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습니다. 사태가 복잡하고 환경이 복잡할수록 하나님은 더 걱정하시는 것입니다. 6천년 전에는 우리의 선조 개인을 대해서 애달파하셨으나, 세계 인류가 사망의 늪에서 허덕이는 이때에 있어서는 제일 처량한 심정을 갖고 애달파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기에 여러분은 어찌할 수 없는 죄인입니다. 불효막심한 것들입니다.
한 나라의 군왕을 반대하면 역적이라고 하였고, 한 부모를 반대하면 불효자라고 하였는데, 만주(萬主)의 주(主)요 온 우주의 아버지를 대하여 우리는 몇 번의 역적이 되었던고! 몇 번의 불효자가 되었던고! 각자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기에 도의 길을 가면 갈수록 옷을 벗어 치우고 그래도 부족하면 칼로 몸을 찢고, 목을 교수대에 내어 놓아도 부족하다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대하여 빚진 아들이 가져야 할 심정이라는 것입니다.
예수가 그랬습니다. 딴 사람을 본받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는 만민 앞에 나타날 때는 늠름한 모습이었지만 홀로 있을 때는 역사적인 깊은 눈물을 흘리신 분입니다. 슬픈 눈물을 흘리신 주인공입니다. 눈물 흘리는데도 왕자입니다. 성경에는 그런 내용이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그의 마음을 누가 알았습니까? 안 사람이 없었습니다. 내가 오늘 통일교회 신도들에게 원하는 것은 성경에 나타난 예수 말고, 삼위신으로 지칭된 하나님 말고 그 이전 동기의 하나님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예수를 알게 됩니다.
예수는 자기 스스로 기쁨의 자리를 피했습니다. 스스로 자기의 집을 박차고 나갔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좋아서가 아닙니다. 아버지를 대하여 울고 싶어도 울 수 없는 환경이요, 아버지를 알아드리고 싶어도 알아드릴 수 없는 환경이었기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싫어서 예수가 산중 적적한 곳으로 가서 기도한 줄 알아요? 아닙니다. 예수는 이스라엘 민족을 붙안고 하나님의 심정을 토로하며 같이 울고 싶은 심정에 사무쳐 있었습니다. 그런데 알아주는 자가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선조의 혈육을 받았다 할진대 이 세포 하나까지에도 저끄러진 죄상이 걸려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자신이 뭐 어떻고 어떻다 해도 그렇게 안 되어 있습니다. 가면 갈수록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는, 아버지 앞에 얼굴을 들 수 없는 역사적인 죄인입니다.
하나님은 심정을 갖고 우리들을 찾아오셨습니다. 심정을 갖고 찾아오셨어요. 여러분, 나는 네 아버지이고 너는 내 아들이 틀림없다는 심정을 갖고 찾아오셨습니다. 그 다음에 사정을 갖고 찾아오셨습니다. 죄인 된 자를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정을 갖고 찾아오셨습니다. 그 다음엔 소망을 갖고 찾아오셨습니다. 이것을 왈 믿음, 소망, 사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가 나와 있습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 인내와 자비와 양선, 충성과 온유와 절제, 이 아홉 가지 열매의 골자는 무엇이냐? 사랑과 인내와 충성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다 들춰보면 뜻을 두고 인간을 찾아오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슨 뜻? 죄인을 구하여 아들을 만들어 가지고 그 아들에게 하늘땅을 주겠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소망을 가지고 찾아오십니다. 아담 해와를 지어 놓으시고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주관하라고 축복하였습니다. 그런데 주관해 봤어요?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주관해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다시 그 자리에 세우시려는 것입니다. 그런 소망을 갖고 찾아오셨고, 그런 사정을 갖고 찾아오셨습니다.
인간이 죄를 지었다고 해서 ‘야, 이놈아, 왜 죄를 지었느냐?’라고만 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죄지은 사정을 잘 아시는 하나님입니다. 당신의 사정은 생각지 않고 인간의 사정을 알아주려는 하나님입니다. 슬픈 자에게는 슬픈 사정을 갖고 찾아오셨고, 고통받는 자에게는 고통의 사정을 갖고 찾아오셨고, 억울하고 분통한 자에게는 억울하고 분통한 사정을 갖고 찾아오 셨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어느 정도 사정을 통해 보았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생활환경 가운데도 그렇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심정을 갖고 찾아오셨습니다. 너는 나를 배반해도 나는 네 아버지라는 마음이 있기에 6천년이란 기나긴 세월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최후의 목적은 무엇이뇨? 너자 나요, 나자 너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시기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요 14:20) 하셨습니다. 목적은 하나되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하나되느냐? 심정으로 하나되고 사정으로 하나되고 소망으로 하나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하여 하나님은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땅 위에는 현재 30억에 가까운 수많은 인간들이 살고 있으되 하나님의 사정을 아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압니까? 하나님의 소원이 무엇인지 알아요? 믿고 천당 가는 것이 소원이에요? 천만부당한 생각입니다. 여기서 외치는 사람은 그런 하나님은 안 믿습니다. 죄악에 썩어진 몸뚱이를 천당 보내는 그런 하나님을 믿어요? 그렇다면 모순된 하나님입니다. 죄지은 사람을 용서하여 천당 보내요? 그런 천리원칙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지금까지 천당에 간 사람은 없습니다. 다 낙원밖에는 못 가 있습니다.
하나된 자와 행복하게 살고 하나된 자와 더불어 영원무궁토록 천상천하를 움직이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하나된 자를 찾으시는 것입니다. 아무리 설교를 잘하고 무엇을 어떻게 한다고 해도 하나님과 하나되지 않으면 모두가 가짜입니다, 가짜. 사실대로 행하는 사람들이 가짜들보다 못하게 보일 때가 많습니다. 배우들을 보세요. 전부 가짜지만 사실보다 더 잘 해냅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성경이 필요치 않습니다. 그분의 사정과 내 사정이 하나되고, 그분의 마음이 향하는 곳으로 내 마음도 향하고, 그분이 품은 심정을 내가 품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된 사람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상의 싸움은 인간끼리 하나되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과 하나되기 위한 싸움입니다. 역사노정에서 수없이 비참한 혈투극을 빚어 나왔지만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찾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오시기 위한 싸움이라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됩니다.
앞으로 하나님께서 공의의 심판주로 나타나시게 될 때, 그 하나님은 어떻게 하실 것이냐? 나는 너를 위하여 심정을 다했는데 너는 나를 위해 얼마나 심정을 다했느냐? ‘나는 너의 사정을 다 알아주었는데 너는 내 사정을 얼마나 알았느냐? 나는 너를 위하여 죽자 살자 했는데 너는 내 뜻을 얼마나 생각했느냐?’ 하실 것입니다. 이것으로 문제를 해결짓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에 이러이러한 고기를 먹지 말라고 했는데 한 조각 먹었으니 지옥 간다 하는 식으로 안 되어 있습니다. 심정의 세계는 법도를 초월합니다.
우리가 공의의 심판대 앞에 서면 사탄이 참소합니다. 법정에 한번 가보세요. 세상 법정에도 판사가 있고, 검사가 있고, 변호사가 있고, 죄수가 있습니다. 공의의 심판대도 그와 같은 모양입니다. 검사와 같은 사탄이 여러분을 참소합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의 변호사입니다. 여러분이 과거에 어떤 일을 했든 그것을 변명해 주기 위해 땀을 흘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워낙 6천년의 죄악사를 가져온 인간이기에 변명하려야 변명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편이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저끄른 죄상이 너무나 큽니다. 사탄한테 걸릴 조건뿐이니 어떻게 할 것이냐? 이것을 청산해 주기 위한 한 사람이 나와 주기를 아버지는 고대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저나라에 가서 그걸 놓고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이까짓 땅에서 몇몇이 쓰러지는 것을 걱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천륜의 대도(大道)를 세우는 것을 걱정하시는 주님입니다. 여러분 하나쯤 지옥 간다고 해서 하나님이 망해요? 아닙니다. 구원은 개인의 것이요 천륜의 대도는 만인간의 것이니 한 사람을 희생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대도는 세워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기도하고 계시는 거예요.
여러분, 성경을 볼 때 혹은 기도할 때는 이렇게 하십시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며, 하나님의 사정이 무엇이며, 하나님의 심정이 무엇이냐를 알아가지고 하나님이 제일 슬펐던 하나를 붙들고 일생 동안 울어 보십시오. 그러면 천당 갑니다. 다른 무엇이 어떻고 어떻고 해도 다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이 제일 억울한 것은 무엇입니까? 제일 슬픈 것은 무엇입니까? 제일 기쁜 것은 무엇입니까? 성경을 보니 기쁜 일이 없습니다. 슬픔뿐입니다. 배척받고 몰림받았으니 기쁜 때가 있었겠습니까? 아버지의 일 가운데 제일 슬펐던 것이 무엇인가? 문제는 거기 있어요. 이것을 해결하면 되는 것입니다. 친구도 상대방의 슬픔을 알아 가지고 심정을 통해야만 진짜 친구입니다. 효자는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입장에서는 효자가 될 수 없습니다. 충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이 6천년 동안 걸어 나온 골수가 어떤지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은 심정과 사정과 소망을 품고 인간을 대해 권고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심정을 백 퍼센트 알았고, 사정을 백 퍼센트 알았고, 소망을 백 퍼센트 알았지만 말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정입니다. 왜 할 수 없었느냐? 그것을 말해 버리면 사탄이 먼저 알아듣기 때문입니다. 어떤 부자가 아직 미숙한 어린아이요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아들에게 ‘무슨 보물이 여기 있고 무슨 보물은 저기 있다’고 하면서, 주인을 배반한 종이나 원수가 있는 데서 그가 상속해 준다면 그들이 아들이 가지도록 가만두겠어요? 사탄이 그런 입장입니다. 하나님이 다 말해 주면 하나님의 아들딸이 하기 전에 사탄이 먼저 알고 다 해 버린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나님은 타락한 세상과 떨어져 있습니다. 이 땅은 누가 지배하고 있느냐? 사탄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공중 권세를 잡은 사탄이 땅까지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땅 위에는 원수가 많습니다. 하나님이 아들딸에게 명령한 일을 아들딸이 하기 전에 원수들이 알아 가지고 먼저 해버린 후 그것을 가지고 요구하면 들어줘야 되는 것입니다. 공의의 법도를 가졌기에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원수가 했더라도 그것이 하라는 명령에 부합되면 인정해 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비사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비사로 되어 있어요. 억울하고 분합니다. 성경의 난문제를 붙들고 ‘아버지여, 어찌하여 이렇게 되었습니까?’ 하고 기도하게 될 때 여기서 말하는 사람은 그런 것을 느꼈습니다. ‘아버지여, 당신은 어찌하여 만민을 구원해야 할 아버지가 되셨습니까?’ 하고 호소하면, 하나님은 ‘네 사정보다 더 딱한 나의 사정이 있노라.’ 하십니다.
이런 것을 알게 될 때 여러분은 뻔뻔합니다. 믿기만 하면 천당 간다고요? 뻔뻔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되시려는 아버지를 모신 적이 있습니까? 아버지와 하나되기 위하여 싸운 적이 있습니까? 한번도 없습니다. 한번도 없다 해도 여러분은 반박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은 우리와 하나되기 위해 얼마나 수고하셨던고? 여러분은 이걸 알아야 되겠습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뜻으로 하나되라고 권고하셨습니다. 그러면 4천년 동안 준비한 너희 이스라엘 민족은 세계를 지배할 것이라는 소망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축복하시기를 ‘네 후손이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알같이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소망을 갖고 찾아오셨습니다. 그 다음에 예수시대에는 사정을 갖고 찾아오셨습니다. 구약시대에는 나라가 없는 이스라엘 민족 앞에 세계의 중심, 즉 제사장왕국이 된다는 소망을 주셨습니다. 소망을 갖고 나가는 이들 앞에 하나님은 또 사정을 갖고 찾아오셨습니다. 사정은 누가 갖고 왔느냐? 예수가 갖고 오셨습니다. 여러분의 사정을 변호해 주러 오신 것입니다. 사정을 변호하는 일이 끝나면 무엇을 하느냐? 심정을 규합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재림주님이 오시는 것입니다. 그 표준은 사랑입니다. 맨 나중은 사랑입니다.
그러면 우리 자신들은 어떤 입장에 있느뇨? 심정과 사정과 소망, 이 모든 것을 아는 자리에 있느냐? 모르는 자리에 있습니다. 백판 천치입니다. 아무것도 모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들을 위해 이렇게 고생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이 하나님을 우리는 지금까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심정을 갖고 하나에서부터 세계까지 전역사를 이끌고 나오시어 맨 나중에는 아버지로서 전체를 사랑할 수 있는 때를 만들어 놓기 위해 애쓰시는 것입니다.
구약시대는 종을 보내서 소망을 품게 하고, 신약시대는 아들을 보내서 사정을 통하게 하셨습니다. 앞으로 다시 오시는 주님은 아버지의 심정을 갖고 오십니다. 아버지의 영광으로 오신다고 했습니다. 아버지의 영광으로 오셔서 심정의 기준을 세우게 될 때는 끝날입니다. 심정의 조건을 지상(地上)과 천상(天上)에까지 세운 다음에는 그것을 만우주 앞에 공포해야 됩니다. 너는 나의 영원불변의 아들딸이라는 식을 해야 됩니다. 이것이 어린양 잔치입니다.
여러분, 끝날은 어떻게 해야 되느냐? 기독교에서는 소망을 품고 인내하라고 했습니다. 참지 못하면 천상의 대도(大道)를 깨뜨릴까 봐 참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나 스테판 혹은 12사도를 보세요. 찢기고 별의별 짓을 다 당했지만 참았습니다. 소망의 한 날을 바라보며 참았습니다. 그 사람들이 우리의 선조였습니다. 소망을 갖고 참아라. 내일을 걸고 놓고 참아라. 사정을 알려면 충성을 다하라. 너를 위하여 주께서 이렇게 죽었으니 죽도록 충성하라. 이것이 기독교정신입니다. 충성이 무엇입니까? 충(忠)자는 중심의 마음입니다. 가운데 중(中)자에 마음 심(心)자이고, 성(誠)자는 말씀을 이루었다는 뜻입니다. 하늘 앞에는 변명이란 것이 없습니다. 죽으라면 죽어야 됩니다. 솜을 한짐 지고 불에 들어가라면 들어가야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라, 충성하라, 간절하라.’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정과 사정과 소망을 연결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아직 소망의 때가 안 왔습니다. 내 심정의 임자가 안 왔습니다. 나의 사정을 알아줄 자가 안 왔습니다. 그 시대가, 그분이 안 왔으니, 올 그때까지 예수와 성신은 눈물지으면서 ‘아버님, 참는 아들딸을 긍휼히 보시옵소서. 충성하는 아들딸을 기억하시옵소서. 심정을 기울여 사모하는 아들딸을 기억하시옵소서.’ 하고 기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인연을 역사적으로 수습할 때까지 심정의 짐을 지고 나오는 것이 예수와 성신입니다.
그리하여 세계적인 때가 오면 하나되기 위한 역사를 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야곱의 가정, 모세의 민족, 예수의 세계, 온 천주까지 하나 만들기 위한 역사를 해 나오시는 것입니다. 이 피조세계를 하나 만드시기 위하여 찾아오시는 하나님이기에 역사도 하나의 세계를 향하여 흐르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런 역사적인 견지에서 오늘날을 이구동성으로 끝날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까딱 잘못하면 금방 전멸할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늘이 있습니다. 판결은 선과 악, 최고의 둘이 서로 상반되어서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건 역사적인 싸움입니다. 보십시오. 역사를 들추어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담 해와가 타락한 후 가인 아벨을 세워 타락한 아담 해와의 가정을 수습하려 했습니다.
수습하는 데는 어떻게 하느뇨?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랑을 통한 심정, 사랑을 통한 사정, 사랑을 통한 이념이라는 겁니다. 즉 심정을 통한 사랑이요, 심정을 통한 사정이요, 심정을 통한 이념입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아담 해와 대신 가인 아벨을 찾았던 것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사랑하라는 겁니다. 접붙이라는 거예요. 여기서부터 접붙이는 놀음이 벌어졌습니다. 여기서 하나로 귀결되었어야 할 텐데 가인이 아벨을 돌로 쳐 죽였습니다. 전쟁역사는 여기서 시작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역사는 선한 사람들이 악한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역사였습니다. 악이 먼저 선을 치는 역사였습니다. 보편적으로 두 사람이 서로 잘났다고 주장할 때 먼저 주장한 사람이 나쁜 사람입니다. 80퍼센트는 그렇습니다. 선이 먼저 악을 치는 법이 없습니다. 한국 역사를 봐도 간신이 충신을 쳤지 충신이 간신을 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싸움은 어디에서부터 벌어졌느뇨? 아담가정에서부터 벌어졌습니다. 가인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려면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벨한테 접붙여야 했습니다. 절대 복종해라 그겁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배반한 사탄을 굴복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온 우주를 주관하라는 축복을 해주었지만 인간이 타락하여 핏줄이 다른 두 인연이 생겼기에 이 법도를 따라 세계는 두 각도로 벌어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사랑할 수 있는 개인을 찾아 세운 것이 아브라함입니다. 아벨을 세웠더라면 좋았을 것이나 아벨이 죽었기 때문에 그 대(代)를 이어서 하나님이 사랑할 수 있는 완전한 실체로서 한 사람을 찾아 세운 것이 심정과 사정과 소망을 대신할 수 있었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입니다. 만천하의 인류는 하나님이 제일 사랑하는 아브라함한테 전부 복종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 앞에 굴복하면 구원받고 그렇지 않으면 지옥 간다 그겁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세워 놓고 아브라함 가정부터 아브라함과 하나되라는 것입니다. 하나 안 되면 원수입니다.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으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 했는데, 안 받는 사람은 전부 원수인 것입니다.
모세 시대에는 모세의 말에 절대 복종해야 됩니다. 잘났든 못났든 모세에게 모두 접붙여야 되는 것입니다. 접붙이려면 심정이 같아야 되고, 사정이 같아야 되고, 본질적인 소망이 같아야 됩니다. 모세가 죽자 하면 죽겠다는 마음, 살자 하면 살겠다는 마음, 무엇을 하자 하면 하겠다는 마음, 또는 그런 심정을 가지고 사정을 거쳐 소망의 터전까지 뻗어 나갔다면 망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에게 반기를 들었던 이스라엘 민족은 어떻게 되었던고?
4천년 동안 수고하여 택한 이스라엘 민족 앞에 예수가 오셨습니다. 예수는 국가와 민족을 하나님 앞에 심정으로써 접붙이려고 오셨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소망적인 기준까지는 접붙여 놓았으니 사정을 통해 가지고 하나님의 심정 깊숙이 접붙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정도 못 통하고 갔습니다.
인간은 타락하여 딴 피를 받았으니 돌감람나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골수와 같이 응할 수 있고 화할 수 있고, 너는 나의 피 살이라고 할 수 있는, 직계의 인연을 맺은 하나의 아들이 나와야 합니다. 그러면 그 아들을 세워 놓고 모든 인류는 그 앞에 무조건 복종해야 되는 것입니다. 참감람나무에게 접붙이려면 돌감람나무는 베임을 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온전한 나무가 되려면 세 가지 이상이 있어야 됩니다. 그런 입장의 예수님을 중심삼은 세 제자, 그 중 어느 누가 못나서 그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아닙니다. 때를 보아 심정 깊은 하늘의 비극을 얘기하려고 했으나 그들이 감당하지 못할까봐 얘기를 못 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요 16:12) 고 하셨습니다. 불쌍한 예수입니다. 하나님의 생명,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전체이념을 세 제자를 통해 나타내려고 했는데 그들이 감당치 못했습니다.
그러기에 이스라엘 민족은 주권이 없는 민족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잡아죽인 죄 때문입니다. 만일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님을 만왕의 왕으로 모시고 절대 순종하였다면 세계는 벌써 하나님이 정복했을 것입니다. 모세의 후계자가 가나안 칠족을 쳐서 항복시킨 것과 같이 정복했을 것입니다. 문제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다면 2천년 동안 택한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를 믿는 후대 기독교인들이 학살을 당했겠습니까? 천만부당한 일입니다. 예수를 죽였으니 보응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내 선조의 죄가 3, 4대까지 간다고 했으니 다 보응을 받아야 됩니다. 그것을 4천년 이내에 탕감해야 됩니다. 모세도 애급에서 4대 만에 나왔습니다. 모든 것은 천지의 법도를 중심삼고 움직여 나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를 거쳐 지금까지 나왔지만 심정적으로 사정적으로 소망적으로 하나님과 접붙인 사람이 이 땅 위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아버지는 역사를 걸어 놓고 대번에 아들로 대할 수 없습니다. 왜? 타락하여 떨어져 나갔기 때문입니다. 본래 창조이념에 하나님이 싸워야 된다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은 그런 이념은 세우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종들을 시켜서 싸우게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타락하여 종의 자리에 떨어졌으니 거기에서 싸워 이기면 사정을 통할 수 있는 아들의 입장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역사해 나오십니다. 꺾어서 접을 붙여야 되는데, 이 심정을 접붙이기 위한 것이 재림 역사입니다. ‘주여 오시옵소서’ 하는 간절한 심정이 천상과 지상을 꿰뚫어야 됩니다. 이러한 마음이 있어야 하늘 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한때를 향하여 하나님은 지금까지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끝날은 어떤 때뇨? 하늘이 6천년 동안 정력을 기울여온 이 땅을 향하여 일격을 가하는 때입니다. 최대의 정성을 들여야 할 때입니다. 아들과 종이 합하는 때입니다. 아들과 종이 같은 자리에서 싸우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아버지까지 합세합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종이 한꺼번에 나오는 그때가 끝날입니다. 아버지도 나왔고 아들도 나왔고 종도 나왔으니 천국 살림을 차려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본래 아담 해와를 자녀로서, 천사장을 종으로서 지었습니다. 아버지를 중심삼고 아들딸과 종이 평면적으로 벌어질 수 있는 세계적인 완결의 때를 향하여 하늘은 지금까지 찾아 나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끝날에는 ‘나는 아브라함이다.’ 하는 사람도 나옵니다. 여러분이 파고다 공원 같은 데 가서 살펴보십시오. 거기서 무슨 말을 하는가? 다 동기가 있는 말입니다. ‘나는 바울이다, 나는 예수다, 나는 하나님이다, 나는 무엇이다.’ 하고 외치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건 왜 그러냐? 종과 아들과 아버지가 상봉할 수 있는 세기말적인 때, 총 청산할 때이기 때문입니다. 잎사귀와 가지와 줄기가 한꺼번에 접붙여져서 살아나야 된단 말입니다. 줄기인 아버지, 가지인 아들, 잎사귀인 종이 한꺼번에 나타납니다. 세계의 사조는 그렇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심정을 중심삼고 접붙인 사람들을 이 세상의 주인공으로 세워 주기 위한 것이 끝날의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오늘날 세계를 맡을 자는 공산주의자도 아니요 민주주의자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정과 사정과 소원에 일치하여 접붙여 살아남는 무리들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골자입니다. 역사의 최후의 종착지는 그런 것으로 나타나야 됩니다.
오늘날까지는 도인들이 밟혔습니다. 한때는 상류계급이 출세했고 군벌시대에는 중류계급이 출세했습니다. 지금 때는 노동자와 농민의 때입니다. 회사 같은 데도 노조가 있어서 노동자들이 행세하고 있습니다. 다 출세하고 다 성공해 봤지만 도의 길을 가는 사람은 지지리 못나서 상류계급 사람에게나 중류계급 사람에게나 하류계급 사람에게나 그저 예수쟁이라고 몰림만 받아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정과 사정과 소망에 접붙인 아들딸이 있게 되면 여기에서 사라지지 않고 이들이 하늘과 땅을 지배할 것입니다. 도인들이 지배할 수 있는 때가 올 것입니다. 그래야 공평한 하나님입니다. 그 한때를 바라보며 하나님은 긴 세월을 준비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시려는가? 종을 세우고, 아들딸을 세워 아버지로서 그들을 품에 품고 지난날을 생각하며 역사적인 눈물을 흘리시고, 벅찬 소망의 마음, 애달픈 사정의 마음, 처량한 심정을 다 풀어놓으시려는 것입니다. 아들을 품고 딸을 품고 종을 세우는 그 순간 비로소 역사를 돌아보고 허허 웃으실 수 있는 하나님의 모습을 우리는 그리워해야 되겠습니다.
사탄아 네 권세가 어디 있느뇨? 악당들아 네 권한이 어디 있느뇨? 공의의 심판주 앞에서 물러갈지어다. 6천년 동안 하나되기 위하여 수고하신 하나님을 끝날에는 한번 알아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6천년 만에 한번이라도 알아달라는 하나님이십니다. ‘당신은 저의 아버지요, 저는 당신의 아들딸이 옵니다. 이렇게 수고하신 아버지, 황공망극하옵니다. 저를 위해서 이렇게 수고하신 것을 아옵니다. 옛날에 돌아가신 선조들, 아브라함과 모세와 예수님이 수고하신 것도 저 때문이옵니다.’ 하며 눈물지을 수 있고 몸둘 바를 몰라하는 과정을 거쳐야 됩니다.
‘저에게는 심정의 주인공을 모실 수 있는 심정이 없습니다. 그것이 그립소이다. 사정을 가지고 있는 그 주인의 사정을 모르니 어찌하면 좋습니까? 당신은 이것을 좋아하십니까? 당신이 좋아할 것을 가져왔습니다.’ 이렇게 해 보았습니까? ‘아버지, 이것을 드리고 싶습니다. 아버지, 이것 잡수십시오.’ 하는 마음이 어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뜻이 한국 백성을 구하려는 것입니까? 그것이 소원입니까? 그러면 제가 죽더라도, 먹을 것을 먹지 못하더라도 이 민족을 구해서 아버지 앞에 바치겠습니다.’ 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세계 인류뿐만 아니라 천상에 가 있는 수천만의 영인(靈人)들까지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는 참아도 무한히 참아야 되겠고, 사정을 품어도 무한히 품어야 되겠고, 심정을 가져도 무한히 애달픈 심정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심정을 다하고 마음을 다하고 몸을 다하면서 이 세계를 향하여 갈 수 있는 여러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이렇게 찾아오셨다는 것을 알게 될 때 눈물지으며 죄책감과 황공망극하다는 마음에 사무쳐야 심판의 고개를 넘어갈 수 있습니다.
회개로 시작한 기독교지만 최고의 죄인입니다. 사정을 몰랐고 뜻을 몰랐고 심정을 몰랐던 죄를 회개해야 됩니다. 승리의 그 한 날을 위해서 6천년 동안 하나되기 위해 싸워 나오신 아버지와 아들딸의 인연을 맺고 혹은 종의 인연을 맺을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6천년 동안 쌓아온 섭리역사를 이제는 내 대신 너희들이 맡아라. 모든 것을 한꺼번에 청산해 버려라. 목을 자르겠으면 자르고 배를 째겠으면 째라.’ 하십니다. 하나님이 쳐야 할 것을 우리들이 대신 치고 모든 것을 대신해서 청산하라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심판입니다.
심정을 준비하는 기독교인, 사정을 해결하기 위해 나아가는 성도들, 한 날의 소망을 만천하에 공개해야 하는 기독교입니다. 이제는 심정을 다하고 사정을 다하고 뜻을 다해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무엇이 있어야 하나되기 위해 찾아오신 아버지 앞에 나아가서 아들의 인정을 받고 딸의 인정을 받고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무리 정열을 퍼부어도 저희들은 아버지의 심정을 몰랐사옵니다. 하늘의 사정이 이렇다 해도 그 사정을 몰랐습니다. 하늘의 소망이 이렇다 해도 그 소망을 몰랐습니다. 황공망극하옵니다.
무지한 아들딸들을 6천년 동안 찾아오신 당신을 저희들은 얼마나 배반하였습니까? 몇 해 동안 찾아보았습니까? 몇 해 동안 추구해 나왔습니까? 몇 해 동안 아버지의 상하신 심정에 묻혀 보았습니까? 하나되시려는 아버지 앞에 머리 들 수 없는 불초한 저희들이옵니다.
아버지, 이제는 아버지의 피와 저희의 피가 하나되어야 되겠습니다. 뜻과 사정과 심정이 같은 자리에서 저희 몸과 아버지의 몸이, 저희 마음과 아버지의 마음이, 저희의 심정과 아버지의 심정이 피 살을 동원하여 하나 되어야 할 엄청난 과정에 저희들이 서 있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오늘 여기에 모인 당신의 아들딸들, 다 잊고 가더라도 천륜의 대도가 이렇게 움직여 나오고 있다는 것만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큰 울음 끝에 6천년의 기쁨을 노래할 수 있는 무리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남모르는 가운데 욕을 먹고 몰림을 받고 억울함을 당하던 저희들, 그런 날을 위하여 준비한 하늘 앞에, 그 심정 앞에, 그 사정 앞에, 그 소망 앞에 천만번 죽어 마땅하옵고, 천만번 찢김을 당해도 마땅한 것을 느끼면서 감사할 줄 아는 아들딸 되기를 바라옵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소원인 것을 알았사옵니다.
외쳐 보니 힘이 부족하옵니다. 아버지의 심정을 그 무엇으로 표시하겠습니까? 한이 없는 아버지의 억울함을 저희들이 시시각각으로 느끼고 미래를 바라보고 참아 나가는 저희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슬프다면 이 땅에서 저희들보다 슬픈 자가 없다는 것을 하늘도 아시옵니다. 억울한 일생인 것도 알고 계십니다. 외롭다는 것도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당신이 남기신 길임을 알았기에 눈물의 길도, 철창이 가로놓인 길도, 죽음의 길도, 모험의 길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되겠사옵니다. 부디 이 땅에 그런 조건을 갖춘 자들이 많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것이 당신의 소망이요, 저의 소원이오니 쓰러지더라도 이런 아들딸을 만들어 쓰러지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니다.
남기신 섭리의 뜻, 우리들의 사정과 우리들의 심정이 아버지의 것으로서 풀려질 수 있는 날이 어서 속히 오기를 간절히 부탁하올 때,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기 도> 아버지, 분부하시던 당신의 음성이 그립습니다. 최고의 선을 향해 가라 하시던 비장한 그 음성이 이 시간 저희의 마음을 다시 움직이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가 남기신 핍박의 길, 고통의 길, 환난의 길, 골고다의 산정을 넘어 역사적인 비운의 길을 가라고 권고하시던 애달픈 당신의 사정이 그립습니다. 아버지! 마음대로 자랐고, 마음대로 살았고, 멋대로 되어 있는 저희들을 모으시사 지극히 높으신 주의 성상을 닮으라고 하옵시는 황공한 은사에 머리를 숙이오니,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본질이나 성품을 다 분석해 보아도 당신 앞에 내어 놓을 아무런 무엇이 없는, 죄악에 가득찬 저희들을 불러모으시고 한량없는 축복의 은사를 베푸신 당신께 이 시간 감사드리옵나이다. 다만 간절한 믿음과 심정 하나만을 요구하시는 아버지의 애달픈 그 사정과 심정을 저희들이 체휼하고 실증하게 해 주시옵소서.
아버지, 이제 저희들이 모였사오니 긍휼히 보시옵소서. 저희들은 어떠한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이미 많은 말을 들었고 많은 사람을 보았습니다. 많은 사람을 대하여 보았고 은혜스럽다는 자리도 찾아가 보았지만, 저희 자신과 관계 맺지 못한 채 다 지나가 버렸습니다. 은혜는 은혜대로 지나가 버렸고, 사람들은 사람대로 지나가 버려 남은 것은 혼자 밖에 없는 역사적인 고아와 같은 저희입니다. 때문에 저희는 새로운 봄바람이 불어오기를 바라고 있사옵니다. 아버지께서도 그와 같은 은사를 허락하실 수 있기를 얼마나 고대하고 계시옵나이까? 저희들, 갈급하고 조급한 마음과 직고하는 심정을 갖고 아버지의 성상 앞에 모이는 무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저희가 무슨 말을 하오리까. 말하기 전에 마음속에 자신도 알 수 없는 사무친 감격이 체휼되게 하여 주시옵고,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뭉클하여져서 눈물 흘리며 통곡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늘이 움직여 주지 않으면 그런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고, 천만 마디의 말보다도 한 가지 체험이 더 귀한 것을 아옵니다.
지금 이때의 사람들은 어느 누구의 말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많이 듣고 많이 속았기에 어떠한 말이라도 비판하는 마음을 가지고 대하는 것이 오늘날의 성도요, 끝날의 사람들이옵니다.
비판하려야 비판할 수 없고 어찌하려야 어찌할 수 없는, 마음에 움직이는 그 하나만이 최대의 권한이요, 최대의 방패인 것을 아옵니다. 당신께서는 이러한 은사로써 저희들을 울리셨사옵고, 저희들을 회개시켰사옵고, 저희들을 굴복시켰던 것을 아옵니다. 오늘 당신의 무릎 아래에 있지 못하고 먼 거리에 있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있사옵니까?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는 멀다 할지라도 당신이 보시기에는 종이 한 장 차이도 안 되는 것을 저희들은 아옵니다.
당신으로부터 창조되지 않은 물건이 어디 있사오며, 당신이 생명의 권한을 갖고 움직이게 될 때에 부활되지 않는 존재가 어디 있사옵니까? 해골 떼와 같은 저희들을 다시 부활의 생명체가 되게 하여 주시옵고, 더더욱 하나의 심정을 통하여 연결시켜 주시옵소서.
이것이 천륜의 최대의 목적인 것을 말씀을 통하여서 알았사옵니다. 이래도 하나요, 저래도 하나인 것을 말씀을 통하여서 알았사옵니다. 하나의 심정의 동기를 갖추고 천상의 제단을 지키는 무리를 예수께서 얼마나 고대하였던가를 저희들은 알았사옵니다.
이제 부족한 모습들이 아버지 앞에 나왔사오니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인간이 배워서 안다 한들 얼마나 알며, 자랑할 무엇을 스스로 갖추었다 한들 천상에 내세울 것이 얼마나 있겠사옵니까? 아무것도 없음을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지! 이제 말씀을 나누는 시간이오니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조금 전에 봉독한 말씀은 2천년 전 예수께서 이 땅 위에서 30여 년을 사셨을 때 땅 위에 머물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느끼시고, 제자들을 모아 놓고 기도로 부탁하신 말씀인 줄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지! 이들이 역사적으로 먼 거리를 두고 있지만, 그 때의 예수의 성상을 애달픈 심정으로 대할 줄 아는 무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변명보다는 사실, 사실보다는 심정의 체휼이 저희가 죽은 후에 수거될 것이요, 남아질 것임을 알고 있사오니 역사적인 주인공이 되어야 할 저희들 위에 친히 현현하여 주시옵소서.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많은 말을 원치 아니 하오니 당신의 뜻대로 하여 주시옵고, 말씀을 받는 자의 마음이나 전하는 자의 마음에 간격이 없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늘이 동하면 저희의 마음이 동하고, 하늘이 정하면 저희의 마음 또한 정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직 하늘과 화(和)하고 동(動)해서 승리적인 하나의 실체로서 바쳐지기를 바라옵나이다.
남아진 시간을 맡기오니 일체를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지방에 있는 식구들에게도 같은 축복의 은사를 내려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오며,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말 씀> 여러분들과 잠깐 생각하려는 말씀의 제목은 ‘예수님은 모든 것을 남기고 가셨다’입니다. ‘모든 것을 남기고 가신 예수님’, 이런 내용을 가지고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이 땅 위에서 아무리 큰 성공을 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에게는 또다른 소망이 남아 있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왜 그러냐? 하늘땅의 모든 근본 진리를 정하고, 하늘땅을 지으신 절대자 되시는 주인공이 있다 할진대 그 주인공까지 움직일 수 있는 기준을 완결지었다고 할 수 있는 어떠한 성현 현철도, 또한 다른 어떠한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즉 어떤 성공을 했다고 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새로운 무엇을 소망하고 있다는 사실로 미루어서 그렇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역사노정에서 시대 시대마다 그 시대의 사람들을 지도할 수 있는 지도자가 반드시 필요하였습니다. 그런데 시대 시대, 혹은 세기 세기마다 지도자를 보내시어 경륜하시는 섭리의 목표를 이루어 나가야 할 책임이 있는 하나님인데도 불구하고 그러한 지도자를 보내지 않는다면, 그 하나님을 대해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니 인간을 대해 섭리하시는 하나님이니 하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날까지 역사노정에서 내가 이러이러한 사람이 되고 이러이러한 성공을 하였다고 자신 있게 말하고 간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성공을 하여 자기 일대에 명성을 떨치고 싶은 마음을 갖지 않은 자가 없었겠지만, 자기가 생각하고 계획했던 대로 이루고 간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나마 역사 노정에서 새로운 혁명의 깃발을 들고 그 시대를 이끈 인물들 가운데에는, 그 시대의 환경에 휩쓸리고 그 시대의 사조에 힘입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세기적인 사명을 이루고 간 사람이 많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런 견지에서, 아무리 확고한 자신과 신념을 가지고 목적을 달성하겠다고 행동을 개시하는 사람이 있다 하여도, 우리는 그것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임을 단언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운명이나 인생행로는 스스로 개척해 나가는 것만이 아니라, 어떤 크나큰 흐름과 함께 화하여 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흘러 나가는 역사요, 이런 입장에서 자신의 해결점을 찾기 위하여 허덕이는 우리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세계가 어떠한 곳을 향하여 움직이고 있으며, 어느 한 때를 향하여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존재물은 그러한 한 때와 한 장소, 하나의 환경을 소망으로 하여 나아가고 있고, 이 때와 이 환경을 수습하여 인류역사의 목적을 종결지을 수 있는 그 무엇을 그리워하며 나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보편적인 상식을 갖춘 사람이라면 누구나 헤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은 어떠한 때이며 사회는 어떠한 환경이냐? 그리고 이 때와 환경을 누가 지배해서 이끌어 갈 것이냐? 민주와 공산이 대결하고 있는 이 때는 어떠한 때와 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것이냐? 또 때와 환경을 조성해 가지고 어떠한 지도자를 맞자는 것이냐? 이것이 현대 인텔리 계급에 있는 지성인들이 고민해야 할 중대한 문제거리입니다.
어차피 그러한 과정을 필연적으로 거쳐가야 할 역사노정입니다. 왜 그러뇨? 이것은 인간들은 알지 못하지만 하나의 목적관을 세워 가지고 역사를 움직이는 주인공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그런 주인공이 없다면 이 역사는 소망하는 한 때와 환경을 향하여, 그리고 이념의 중심을 향하여 흐를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민족 감정이 저마다 달랐고, 역사적인 배경도 달랐고, 생활의 형태까지도 전부 달랐습니다. 그러나 역사가 흐름에 따라 인류는 이런 것을 초월해서 종래에 가지고 있던 완고한 기반을 깨뜨려 버리고, 시대적인 모든 조직을 혁명하는 어떠한 사조에 휩쓸려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외적으로 인간의 역사를 이어 나왔지만 그 배후에 어떠한 절대적인 존재의 목적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인간은 자기도 모르게 절대적인 목적관에 이끌려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입장에 처해 있는 우리들입니다.
오늘날 인류는 그러한 한 때를 찾아 나아가고 있습니다. 또 평화의 환경을 찾아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을 찾아 세운 후에는 인류의 영원한 심정 세계로 이끌 수 있는 하나의 주인공을 찾아야 합니다. 그것을 향하여 역사가 흘러 나간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실제로 역사는 그렇게 흐르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피조세계가 왜 그렇게 되어 있는고? 이 땅의 도인들이나 위인들은 대부분 이 세계를 수중에 넣고 한 때를 맞아 주도하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들은 일개 부류나 일개 민족, 국한된 범위에서만 실천했을 뿐, 세계적인 입장에서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계신다 할진대 이러한 대목적은 반드시 성취되어야 합니다. 만일 세계적인 대목적을 성취할 수 있는 때가 오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 것입니다. 때를 움직이고 환경을 움직여서 한 사람으로 하여금 천륜을 중심삼고 전인류를 통치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지 못한다 할진대 하나님이 창조한 이 세계는 불완전한 상태에 머물고 말 것입니다. 창조의 이념이니 무엇이니 하는 것도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또 인간을 두고 만물의 영장이니 모든 만물의 주관자니 하는 말도 전부 허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최후에는 그러한 한 분을 세워서 역사를 처리하고, 시대를 처리하고, 환경을 정리하고, 인격을 다시 갖출 수 있게 하는 때가 필시 와야만 됩니다.
이런 견지에서 관찰해 보면 어떤 종교나 주의가 세계적인 것이 될 수 있는지 없는지 대번에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기독교는 특출한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태어나고 보니 한국 백성으로 태어났습니다. 한국 백성으로 태어난 것을 극히 불행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 하나의 목적과 하나의 때와 하나의 환경을 찾아 세우려는 하나님이 있는 한 어디에 있으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내가 한국에 태어났다고 탄식할 필요가 없습니다. 한국의 상황이 자기의 마음과 생활 감정에 맞지 않는다고 탄식할 것 없습니다. 한국에 지도자가 없다고 탄식할 것 없습니다. 다만 염려할 것은 한 때를 맞이하게 될 때, 그 때를 대할 수 있는 내가 되어 있는가 하는 것 입니다. 또한 그런 환경을 맞이하게 될 때에 그 환경에 화할 수 있는 내가 되어 있느냐, 세계적인 어떠한 새로운 주인공이 나타날 때 그 분과 심정이 통할 수 있는 내가 되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문제인 것입니다.
앞으로 역사는 씨족주의를 넘고 민족주의를 넘고 국가주의를 넘고, 어떠한 주의나 사조를 넘어서 심정의 귀일점을 향하여 흘러갈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도 그럴 것입니다. 종족이 다르고 혈족이 다를망정 심정은 마찬 가지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이 부모를 따르는 마음, 부부가 서로 사랑하는 마음, 형제지간에 서로 위하는 마음은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마음은 역사적인 어떠한 것으로도 혁명을 못했던 것입니다. 수천년 역사 과정을 거쳐왔지만 원칙적인 이 기준만은 영원히 본체를 향하여 달음질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최후에 남아질 수 있는 역사적인 하나의 주의가 있다 할진대 어떠한 주의일 것인고? 그것은 부모 이상의 심정을 가지고 만민을 대할 수 있는 주의일 것입니다. 이러한 심정을 가진 주의가 나오면 세계는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청춘 남녀가 서로 사모하는 힘보다 더 강한 심정이 이 땅 위의 어느 한 곳에서라도 나오면 세계는 통일되는 것입니다. 죽음의 자리에서 쓰러져 가는 사랑하는 형제를 보고 사선을 넘어서라도 구하고 싶어하는 심정 이상의 심정이, 이 세계적인 사조 앞에 등장한다면 세계통일은 문제없는 것입니다. 그 외의 어떠한 학설이나 어떠한 주의, 어떠한 인격으로도 안 됩니다.
그러기에 종교라는 명사를 가진 어떠한 단체, 어떠한 교파를 분석해 볼 때, 심정을 무시한 종교는 역사노정에 남아지지 않았습니다. 기독교는 창조주를 대하여, 절대자를 대하여 아버지라 하고, 만민을 대하여서는 예수를 맞이할 신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과연 이 땅 위에 아버지의 사랑이 있고 신부의 사랑이 있느냐? 없습니다. 이것이 등장하는 날에는 세계는 통일됩니다. 죄악의 역사는 그것으로만 종결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찌하여 역사노정에서 당신의 이름을 부르고 나오는 수많은 사람들을 악당들 앞에 희생시키고 학살시키면서 섭리해 나오셨는가? 그 이유는 무엇이뇨? 그것은 사랑할 수 있는 환경이 못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결론은 그거예요. 무엇 때문에 이렇게 고생시키느뇨? 사랑할 수 있는 형편이 못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신랑이라 했지만 신부로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없고, 하나님이 아버지라 했지만 아들딸로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그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된 자, 하나님의 딸 된 자, 하나님의 가정에 식구 된 자, 하나님의 복을 받을 자가 이 땅 위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이 땅 위에 등장해야 합니다.
발전소에서 생산되는 전기는 전선만 이어지면 몇 천리까지도 전달되는 것입니다. 발전이 되려면 주고받아야 됩니다. 플러스(+)와 마이너스(-) 전기가 서로 주고받아야 불이 켜지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도 새로운 이념을 중심삼고 서로 주고받을 수 있는 심정적인 기준을 세워야 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한입니다.
아무리 억만 장자라도 자기가 지극히 사랑할 수 있는 자가 한 사람도 없다면 소유한 모든 물건이 아무 가치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을 사탄 앞에 넘겨준 것은 사랑하는 아들딸을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이 땅 위에 어떠한 것을 갖고 오셨던 것인고? 심정적인 주의와 이념을 갖고 이 땅 위에 오셨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구주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구주가 못 돼요. 설혹 구주가 되더라도 외적인 물건을 구할 수 있는 구주는 될지 모르나, 심정을 기반으로 하여 생명을 연결시켜 나가는 구주는 못 됩니다. 진정한 구주는 심정적인 내용을 갖춘 분이라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주가 그런 입장에 있는 분임을 느껴야만 됩니다.
오늘의 현실을 넘어서 우리 인류의 선조시대를 다시 한번 회상해 봅시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의 때, 하나의 환경, 하나의 중심존재를 고대하는 것은 우리가 타락한 후손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타락이라는 명사를 접하기 전, 즉 우리의 선조 아담 해와가 타락하기 전에 하나님이 세운 한 때를 이루었다면 어떻겠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어느 한 때에 이러이러한 환경을 이루고 이러이러한 지도자를 세워 놓겠다는 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타락하지 않은 아담 해와가 하나님의 축복을 이루어 가지고 만 우주를 지배할 수 있는 한 때를 맞이했던들 이렇게 많은 희생을 치르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한 때를 맞이하여 만물을 지휘하고 창조된 환경 전체가 그 호령에 움직일 수 있었던들, 오늘 여러분에게 탄식이란 말이 있겠습니까? 이것은 다 타락의 보응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우리 인류의 조상 아담 해와가 하나님께서 세운 하나의 환경과 때를 맞아 지배할 수 있는 대표자가 되었다면, 오늘의 이 세계는 아담주의의 세계가 되었을 것입니다. 심정을 중심으로 너와 내가 한 형제라 할 수 있는 하나의 심정세계가 되었을 것입니다.
인간조상에 의해 타락이라는 두 글자가 만들어진 그날부터 인간은 뚝 떨어졌습니다. 얼마만큼 떨어졌느냐? 국물도 없을 만큼 떨어졌습니다. 속을 보아도 죽었고 겉을 보아도 다 죽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더 이상 뒤적거릴 수 없을 정도로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에게 약을 주고 주사를 놓아서 다시 살리자는 것입니다. 구원이 무어냐? 떨어져 죽은 걸 다시 살리는 것입니다. 약을 주든지 주사를 놓든지, 냉수를 붓든지, 어떻게 해서든지 다시 살려 놓자는 것입니다. 이게 구원섭리입니다. 그러면 살려 가지고 어떻게 할 것이뇨? 한 때를 하나님과, 한 환경을 하나님과, 주도적인 행사를 하나님과 더불어 할 수 있게 하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섭리를 하시지 않는다면 인류는 불쌍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좀더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사실들을 여러분들이 여기에 와서 공부하면 알게 됩니다.
본래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한 때로부터 영원한 때를 허락하셨고, 하나의 환경으로부터 영원한 승리의 환경까지 허락하셨으며, 하나의 책임적인 권한에서 영원한 책임적인 권한까지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이것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시려는 때를 잃어버렸고, 하나님이 갖추어 주시고자 했던 환경을 잃어버렸고, 하나님이 세워주신 만물을 주관할 수 있는 권한을 잃어버렸습니다. 이것을 다시 찾아 나온 것이 지금까지의 인류역사입니다.
그런데 이 타락한 인간들을 누가 이끌고 있느냐? 원수가 이끌고 있습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아들딸임에도 불구하고 원수가 반대 방향으로 이끌어 나가고 있습니다. 이처럼 반대 방향으로 끌려가는 이들의 양심을 움직여 가지 못하도록 지금까지 6천년 동안 수고해 나오신 분이 하나님이요, 이 땅에 왔다 간 성현 현철이요, 생명적인 섭리의 기반을 닦기 위해 애쓴 선조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인류는 때를 잃어버리고 환경을 잃어버리고 만물을 주관할 주인공의 입장을 상실한 채, 의지할 곳 없이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물이 흐르면 흐르는 대로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면서 떠도는 부평초처럼 지금까지 방황하여 나왔습니다.
이제 방황을 끝내고 어디로 가야 할 것이뇨? 하나님께서 본래 아담 해와에게 베풀어 주신 그 축복을 찾아 나가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기쁨으로 ‘오냐! 네 것이다.’ 하고 축복해 주실 수 있는 그 환경을 찾아 나가야 됩니다. 그 다음엔 거기에서 ‘너는 내 아들딸인 천상천하의 모든 것을 주관하라.’는 권한을 상속받아야 합니다. 그러한 자리를 향하여 세계 인류는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 땅 위의 어떤 사람이 아무리 갖춘 지식이 많고 수완이 좋고 모든 일을 자기의 뜻대로 할 수 있는 배후의 조건을 완비하고 있다 할지라도, 때를 못 맞추고 환경을 못 갖추면 뜻한 바를 이룰 수 없습니다. 이런 견지에서 보게 될 때에 지금 때는 어떠한 때이냐? 전세계가 하나를 향하여 나아가는 때입니다. 이 세계는 어떠한 하나의 환경을 그리며 나아가고 있습니다.
인간은 본래 타락하지 않고 때와 환경을 갖추어 하나님의 축복을 이룬 참조상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못 되고 타락한 조상이 되었으니 만민 앞에 타락하지 아니한 선의 조상이 등장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하늘에 가 있는 영인들에게도 아버지요,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아버지가 될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러한 분을 기독교에서는 재림 예수라고 합니다. 이런 사실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어린양 잔치가 무엇이냐? 그분이 아버지로 오셔서 어머니를 세우는 잔치입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바로 그것입니다. 기독교의 중심은 예수요, 예수의 중심은 사랑입니다. 성경의 중심도 사랑입니다. 사랑의 중심은 신랑 신부요, 신랑 신부의 중심은 어린양 잔치입니다. 그러면 어린양 잔치의 중심 뜻은 무엇이뇨? 본래 하나님이 허락한 때와 환경을 갖추어 가지고 하늘과 땅을 상속받을 수 있는 참다운 인간조상으로서 축복받는 것입니다. 아담 해와가 이것을 이루지 못했으니 다시 회복하여 맞춰야 하는 것입니다.
세계 인류는 인간조상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타락한 부모와 타락한 형제와 타락한 부부의 정을 끊지 못한 채 허덕이며 나오고 있습니다. 만일 인간이 타락하지 않은 참부모와 정적인 인연을 맺었던들, 형제가 형제를 미워할 수 없고 사람이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라는 한 뿌리에서 나온 혈육이기 때문에 조그마한 잎사귀와 같은 부분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전체 나무와의 인연을 떠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원통하고 분한 것이 무엇이뇨? 우리가 의붓자식이 된 것입니다. 양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양자와 친자는 다릅니다.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우리는 하늘을 대하여, 주를 대하여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양자가 되기를 고대한다.’고 했습니다. 양자는 피가 다릅니다. 피가 달라요. 그렇기에 하나님의 뜻은 역사적인 종말시대에 타락의 인연을 청산해 버리고 새로운 한 때와 새로운 환경을 맞아 재창조목적을 이루자는 것입니다. 그 창조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때와 환경이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그 때와 환경을 지배할 수 있는 주인공이 없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최대의 정력을 기울여 천신만고 끝에 그러한 주인공을 지으셨는데 바로 우리의 조상입니다. 하나님은 일찍이 아담을 그런 조상이 되게 지으셨습니다. 그러나 아담이 그런 주인공이 못 되었습니다. 이것이 타락입니다. 타락하여 그 자격을 잃어버리고 고향(환경)을 잃어버렸으니 다시 찾아 세워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6천년 동안 돌고비 길을 걸으시면서 천신만고 저 밑창의 거지 떼와 같은 무리부터 끌어올리는 섭리를 하시는 것입니다. 죽으면 응당히 지옥에 가야 할 무리들을 먼저 찾아오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종들을 보내어 사탄 편에 있는 사람들을 당신의 종으로 택해 세운 시대가 구약시대요, 아들을 보내어 사탄세계에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아들의 인연을 맺게 한 시대가 신약시대요, 마지막에 부모의 자격을 갖춘 참다운 아들딸을 세워서 축복하는 시대가 앞으로 오게 되는 재림주 시대입니다.
여러분, 천당을 가겠다구요? 그런 말 하지 마십시오. 주님의 축복을 받았습니까? 주님의 축복을 받지 못하면 천당 못 갑니다. 못 가요. 이것은 여기서 말하는 사람의 말이 아닙니다. 천리 원칙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아담 해와에게 때와 환경을 허락했던 하나님께서는 비록 인간이 잘못하여 타락했지만 끝날을 대비하여 한 때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끝날을 대비하여 하나의 환경을 개척해 나오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감사해야 됩니다.
하나에 제일 가까운 것은 둘입니다. 이제까지는 두 사조가 서로 싸우면서 그 무엇을 향하여 흘러 나왔습니다. 이제 하나의 때가 가까웠으니 끝날입니다. 세계는 동서가 서로 통하고 민족을 초월하여 하나의 이념의 세계, 하나의 심정적인 인연의 판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심정주의를 부르짖는 시대가 됩니다. 세계주의가 아닙니다. 인간주의를 지나서 심정주의입니다.
때를 잃어버린 인간이기에 하나님은 구원역사를 하시는 것입니다. 구원 역사는 재창조의 역사입니다. 깨졌으니 다시 만들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아담 해와가 타락하지 않았으면 한 뿌리로 연결되었을 것인데, 타락하여 수많은 죄악의 곡절을 가진 사람을 번식하였으니, 이 번식된 인간들을 한 뿌리에 접붙이자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돌감람나무와 참감람나무의 비유와 포도나무의 비유처럼 접붙이자는 것입니다. 이렇게 접붙일 줄기로 이 땅 위에 오신 분이 예수입니다. 역사는 그렇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는 환경을 갖추어야 할 때, 세계 만민이 끝날이라고 할 수 있을 때, 세계가 하나되어야 할 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세계주의니 무슨 시대니 하는 말이 대두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이러한 것을 준비해 나오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때를 만들기 위해 6천년 동안 수고해 나오시며, 어느 때라도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믿는 무리가 있다면 그런 때와 환경을 개척하고 그런 주인공을 보내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여서 그들로 하여금 악한 세상과 접하지 말고 내 말을 따르라 하셨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택하신 후 2천년 동안 수고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세워 놓고 거기에 주인공으로 보내신 분이 누구냐 하면 메시아 예수입니다. 구주예요.
그러면 예수는 어떠한 사명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느뇨?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인간에게 허락하셨던 본연의 때를 가지고 오셨습니다. 또 무엇을 지배하기 위하여 오셨느뇨? 타락하지 않은 아들딸들로 이루어진 모든 국가와 민족을 지배할 만왕의 왕으로 오셨던 것입니다. 말로만이 아니라 온 천지를 그 장중에 넣고 지배하기 위하여 오셨던 것입니다. 이를 준비하는 데 하나님께서는 4천년 동안 수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 위에 나타나 철이 들면서부터 바리새교인이나 사두개교인이나 제사장들을 대하여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에 그들이 ‘예.’ 하고 따라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됐어요?
택한 이스라엘 민족은 2천년 동안 그렇게 고대하던 메시아가 왔으니 그 메시아를 중심으로 하여 철석같이 단결해야 했습니다. 그가 동으로 가면 동으로 가고, 서로 가면 서로 가고, 사지가 떨어져도 같이 떨어지고, 목을 매도 같이 목을 매어야 했습니다. 그러기 위하여 4천년 동안 준비하던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약속하였던 한 때를 맞이한 그 민족은 그 주인공을 어떻게 대했습니까? ‘야, 네가 뭐냐’ 이런 식으로 대했습니다. 하늘의 때를 맞추어 30년의 준비 기간을 거친 예수는 심중으로 필시 이때가 민족을 구할 때라고 생각하시고 하나님이 허락한 때를 붙들고 나왔지만, 4천년 동안 수고하여 택한, 땅 위의 이스라엘 민족은 그러한 하늘의 때를 몰랐습니다. 누가 알았습니까? 아무도 몰랐습니다. 때를 몰랐던 이스라엘 민족이니 지옥 가야 합니다. 당연히 심판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의 원수가 되었습니다.
환경을 준비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4천년 동안 수많은 선지자를 보내서 그들로 하여금 피 흘리고 찢기게 하면서 닦아 놓으신 선의 공적을 두둔 했어야 할 이스라엘 민족, 때를 갖고 오신 주인공을 두둔했어야 할 이스라엘 민족, 오신 주인공 앞에 환경의 터전이 되어야 할 이스라엘 민족이 오히려 예수님을 배반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으니, 세계 도처에서 죽도록 고생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는 천적인 때를 맞추기 위해 심정적으로 준비 했고 그 환경을 그리워하면서 밤낮으로 애썼으나, 그가 준비한 때를 알아주고 맞이하기 위해 나타난 무리가 어디 있었습니까? 예수가 찾아 나섰던, 예수의 환경이 되어야 했던 성전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오히려 예수를 보고 바알신에 접했다고 했습니다. 그런 유대교가 아직까지 지상에 남아 있다니 원통합니다. 하나님은 4천년 동안 많은 수고를 하시어 굳게 굳게 약속하신 메시아를 보내셨는데 그렇게 박대할 줄이야! 예수는 하늘의 입장에서 볼 때 하늘의 때를 가지고 온 분이요, 하늘의 배경을 갖춘 분이요, 하늘의 주권을 가진 왕자요, 하늘의 황태자입니다. 하늘의 배경을 갖추고 지상을 치리하기 위하여 오신 예수를 맞이해야 할 이스라엘 민족, 때를 맞아 환경을 갖추어야 할 이스라엘 민족은 오히려 예수가 세우시려는 때를 무너뜨리고 환경을 개척하려는 것을 가로막기에 급급하였습니다. 이런 죄를 저지른 우리 선조들입니다.
예수가 죽으러 왔어요? 그렇다면 예수를 보내는 데에 왜 4천년이나 걸렸습니까? 왜 선한 선조를 죽여 가면서 그런 일을 하느냐는 거예요. 예수는 할 수 없으니 패배의 장군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서 비밀리에 제자들을 찾아 하늘의 뜻을 이루어 달라고 부탁하고 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출발점입니다. 예수는 패배의 장군입니다. 땅 위에 왔다가 때를 잃어버린 패자요, 환경을 잃어버린 패자입니다. 때를 이루고 환경을 개척해야 할 사명이 있는 예수 앞에 죽음이 웬 말입니까?
그 때를 소망하면서, 그 환경을 소망하면서 그 때와 그 환경을 이루어 달라고 맡긴 사명을 이루기 위하여 나온 것이 사도 이후의 기독교사입니다. 똑똑히 알아야 됩니다. 똑똑히. 예수는 다 남기고 갔습니다. 만일에 예수가 이 땅 위에서 때를 맞이하고 환경을 맞이하여 황태자로 등장했다면 천지는 모두 그의 수하에서 치리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가 그렇게 되었습니까? 못 되었습니다.
예수는 만우주를 통치하여야 할 우리 인간의 참조상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는 아담 이후 4천년이 지난 후에 이 땅에 오신 역사적인 조상입니다. 잃어버린 것을 거꿀잡이로 찾아 세우니 참조상인 것입니다. 제1아담이 실패해서 타락한 조상이 되었으니, 제2아담으로 오신 예수는 천상과 지상의 모든 법을 한 장중에 넣고 때와 환경을 정리한 후 하늘 주권국가를 세워 이 땅 위의 백성들을 지휘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되었던들 오늘날 우리는 타락된 세상에서 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했습니까? 못 했어요.
그러기에 예수는 가시면서 다시 올 터이니 참고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복받고 편안히 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하였습니다. 이 길을 가는 데에는 집안 식구가 원수라고 하였습니다. 생명을 얻고자 하는 자는 잃고 잃고자 하는 자는 얻는다고 하였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역사의 뒤안길에서 몰림뱅이로 지내온 무리였습니다. 역사의 뒷골목에서 은밀히 약속해 나온 무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무리들을 수습하여 제2이스라엘을 만들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에는 제2이스라엘의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기독교인들이 이루어야 할 사명은 무엇이뇨? 주가 이 땅 위에 오셔서 때를 잃어버렸으니 때를 찾아야 됩니다. 우리의 선조들 이스라엘 민족이 때를 잃어버렸으니 때를 찾아야 됩니다. 환경을 잃어버렸으니 환경을 찾아야 됩니다. 때와 환경을 갖추어 가지고 ‘주인공이여, 어서 오시옵소서.’ 하는 간절한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이것이 끝날의 성도들이 해야 할 중요한 문제입니다.
예수는 갔습니다. 어떻게 갔느뇨? 사명을 갖고 왔다가 모든 것을 남기고 갔습니다. 남기고 갔어요. 예수가 찾고자 했던 그 때를 남겼고, 예수가 보고자 했던 그 환경을 남겼고, 예수가 행사하고자 했던 그 주권을 남기고 갔다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이래도 하나되고 저래도 하나되라. 때가 이르면 너희에게 비유로 말하지 아니하고 밝히 이르리라.’ 하셨습니다. 예수는 때를 말하지 못하였습니다. 왜? 원수 앞에서 자기가 만왕의 왕 으로 왔다고 말하면 로마제국의 식민지로 있는 이스라엘이 배겨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때가 임박했다는 것을 느꼈으나 때를 말하지 못하였고, 환경을 닦기 위해 싸워야 할 것이었으나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메시아를 바라던 무리들이 해야 할 행동입니까?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제1이스라엘이 세계적인 사명의 발판을 깨뜨림으로 말미암아 예수가 때를 남기고 가신 지 2천년이 지난 오늘날에야 그분이 소망으로 남기신 때가 찾아왔습니다. 그러면 제2이스라엘의 입장에 있는 세계 기독교 신자들은 어떻게 해야 될 것인고? 알아야 합니다. 다시 오시는 예수는 옛날의 유대교를 찾아오지 않습니다. 그럴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유대교는 원수입니다. 그들이 예수를 잡아죽였잖아요?
여러분들, 예수의 심정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때를 찾으려고 얼마나 애를 썼습니까? 요셉과 마리아의 가정에서 자랄 때에도 몇 번씩이나 천륜의 모든 것을 말하고 싶었다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동정녀로 잉태하여 예수를 낳은 후 기르며 젖을 먹일 때에는 그래도 하나님의 아들로 알았고 하나님이 택한 귀공자인 줄 알았지만, 날이 가면 갈수록 그 마음이 퇴색되어 예수를 보통 아이와 같이 대했습니다. 예수는 요셉가정에서 먹을 것을 먹지 못하고 입을 것을 입지 못하면서 심정의 왕자로서 일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 깊이에는 때를 그리워하는 심정이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는 하나님이 허락한 한 때를 위하여 준비하고, 하나님이 허락한 한 환경을 위하여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또는 인격적인 분야에 있어서나 갖출 바의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자기 스스로 하나님, 혹은 만민 앞에 나타날 수 있는 때를 고대했던 것입니다. 그랬겠나 안 그랬겠나 생각해 보십시오. 열두 살 때에 부모 몰래 성전을 찾아간 예수였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많은 사람들 앞에 증거해야 할 그의 형제들까지도 희롱하고 조롱했습니다.
예수는 오늘날 사람들이 생각하는 대로의 가상적인 역사형의 인격자가 아닙니다. 성경에도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병자의 친구요, 죄인과 세리의 친구라고 하였는데,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왜 그랬겠느냐 이겁니다. 그걸 생각할 때 여러분은 통곡해야 되겠습니다. 예수가 어찌하여 죄인과 세리의 친구가 되셨겠는가? 그들의 친구가 되고 싶었던 예수가 아니었습니다. 어찌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사장들이 자기 앞에 나와서 무릎 꿇고 ‘당신은 만왕의 왕이요, 우리의 지도자입니다.’ 하고 머리를 숙이며 경배해 주기를 얼마나 고대했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손가락질했습니다. 모세의 율법을 유린하고 성전을 더럽히는 자라고 욕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죄인의 친구가 되고 세리의 친구가 된 것입니다. 4천년 동안 이루어 놓은 제단이 무너지고 말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 당시의 제사장은 대심판 때에 첫 번째로 불리어 심판받아야 될 것입니다. 그렇겠어요, 안 그렇겠어요?
지금까지 사람들은 예수를 맹목적으로 믿었어요, 맹목적으로. ‘예수가 우리를 위해 죽었으니 우리는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 하고. 간단하고 쉽게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복음의 말씀을 전할 때, 먹지 못하고 입지 못했습니다. 오죽했으면 무화과나무 열매를 따먹으려다 무화과나무를 저주했겠습니까? 편안하고 태평스럽고 배가 불렀던 예수가 아닙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신세가 이렇게 폭락될 줄이야….
본래 예수는 예루살렘 성 앞에서 빌라도와 가야바의 머리를 밟고 ‘이놈들아’ 하고 외치고 싶었습니다. 그러자면 이스라엘이 단결하여 죽이려 할 때 폭동이라도 일으킬 수 있어야 했습니다. ‘바라바를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예수를 놓아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면서 벌벌 떨던 빌라도 앞에 이스라엘 제사장 전부가 예수를 중심삼고 하나가 되었다면, 60만 명을 이끌어 나온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권능의 채찍을 주어 역사하게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 앞에도 하나님의 역사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때를 잃어버린 예수였습니다. 또한 환경을 잃어버린 예수였습니다. 있을 곳이 없어서 이 집 저 집을 전전하며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과부의 집을 찾아다녔습니다. 오늘날같이 자연스러운 때 그랬던 것이 아니라 2천년 전에 그랬단 말입니다. 여인이 300데나리온이나 되는 항유를 예수의 발에 붓고 머리카락으로 씻어 주었습니다. 그런 일을 용납할 수 있겠습니까? 어림도 없다는 거예요. 예수님은 얼마나 안타까웠겠습니까? 그런 자리에까지 쫓겨난 예수의 심정이 어떠했겠느냐는 것입니다.
‘4천년 역사가 유린되어 들어가는구나. 여기가 하나님께서 수고하시고 수많은 선지자들이 피를 흘리며 닦아 놓은 역사적인 터전이 무너지는 자리로구나.’ 하는 것을 생각할 때에 저주를 하고 싶은 마음이 사무쳤으나 입을 봉한 예수였습니다. 저주를 하면 4천년 동안 수고하였던 하나님의 수고가 끊어져 나가기 때문에 자기를 위하여 준비해 온 터전이 무너져도 자기가 책임지겠다고 입을 다무셨습니다. 예수는 슬프고 어려울 때마다 홀로 감람산을 헤매며 기도하셨고 겟세마네 동산을 헤매며 기도하셨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이 해야 할 일입니까?
예수께서는 인간의 행복을 기약할 수 있는 새로운 인생관과 세계관과 우주관을 그 시대에 철석같이 세워 놓고 가야 했는데, 그렇게 했습니까? 예수의 인격관이 어떠하다고 뚜렷이 말할 수 있어요? 막연합니다. 내가 이러이러한 이념을 갖고 와서 이 땅을 지배했다고 해보았습니까? 때와 환경을 정리하여 이러이러하게 지배했다고 해보았습니까? 못 해보았습니다. 패배자로 사라져간 예수입니다.
예수는 이 땅 위에 오셔서 3년 동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 중 한 가지도 이루지 못했습니다. 3년 동안 끌고 다니던 제자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나중에는 다 불신했어요. 3년 동안 있는 정성을 다하고 피 살을 깎고 희로애락을 같이하면서 길러 놓은 제자가 그 꼴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선생님대로 가고 제자는 제자대로 가는 식이었습니다. 결국 예수는 다 남겨놓고 갔습니다.
예수는 저 세상에 가서도 이 땅을 바라보면서 ‘이 사적인 종말에, 내가 대하고 싶었던 하나의 사람아 나타나라, 하나의 가정아 나타나라, 하나의 사회야 나타나라, 하나의 교회야 나타나라, 하나의 민족아 나타나라, 하나의 주의야 나타나라.’ 하고 기도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하늘에서나마 목적을 이루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를 중심삼은 이 이념은 민주 진영을 조성하였습니다. 이것은 그 반대되는 외적인 유물론과 싸우고 있습니다. 어떻게 될 것인지 궁금하지요, 여러분들?
이제 우리들은 세계의 운명과 생사의 결판을 걸어 놓고 슬퍼하기보다는 예수가 역사적으로 남기고 가신 그 때를 몸에 지녀야 되겠습니다. 여러분, 그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예수는 ‘때가 이르려니와 지금이 그 때’라고 했습니다. 즉 바라는 때와 이루는 때가 있었는데, 이루는 때가 바라는 때로 남아졌다는 것입니다. 바라는 때의 끝이 되었으나 지금이 그때라고 말하지 못한 예수의 심적인 고충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도 그때와 같아요. ‘때가 이르려니와 지금이 그 때’라고 말한 ‘그 때’가 바로 지금입니다. 이것은 모순된 말이 아닙니다. 예수가 남기고 가신 말씀을 이루는 때입니다. 지금의 때는 마음의 때, 하늘의 때입니다. 이루는 때는 이 세상에 이르는 때를 말합니다. 이것이 한 박자에 맞아 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는 마음속에 때를 품고 왔으나 마음에 품고 온 때를 펼쳐 놓을 데가 없어서 갖고 가셨습니다. 그 마음의 때가 오기를 기도하고 고대하는데 그날이 바로 재림의 날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여기에 모인 여러분들, 마음의 때를 위해 준비해야 됩니다. 신랑 되신 주님의 마음을 알아야 됩니다. 주님의 심정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나 성경을 아무리 봐도 주님의 심정이 어떠하신지 모릅니다. 아무리 성경에 능통하다 하더라도 모릅니다. 마음이 문제입니다. 마음이 간절해야 합니다. 예수는 ‘네가 내 안에 있고 내가 네 안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예수가 여러분을 찾아오게 될 때, 여러분의 마음의 문을 열고 찾아오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마음의 때를 맞이해야 됩니다. 그리고 마음의 성전을 이루어야 됩니다. 마음의 때와 마음의 성전을 갖춘 완성된 인간들로 이루어진 성전에 주인이 와서 주인노릇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재림사상이에요. 여러분들, 문제는 거기에 있습니다.
그러면 마음의 때를 맞이하기 위하여 여러분은 어떻게 해야 될 것이뇨? 예수께서 여러분의 형제를 넘어, 민족을 넘어, 세계를 넘어 새로운 세계를 그리워하듯이 여러분도 그리워해야 합니다. 예수가 오시는 때에 내 마음은 개인적으로 예수와 성신이 언제나 찾아올 수 있는 터전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님이 나를 찾아왔다가는 다시 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신 주님을 대해 ‘한번 오시면 가시지 못합니다.’ 할 수 있는 세계적인 터전이 되어 있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세계적인 터전을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믿는 마음이 간절해야 합니다. 예수의 이름을 놓고는 세상의 물질이 문제가 아니요, 자기의 명예가 문제가 아니라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알겠어요? 예수의 이름을 놓고는 통하지 못할 곳이 없다는 심정적인 입장에 들어가야 됩니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보세요. 목사끼리 으르렁대고 물어뜯고, 장로와 교직자들은 서로 싸우고, 형제는 형제끼리 다투고 있습니다. 이래서 되겠어요? 예수는 오래지 않아 가야 할 입장에 계실 때에 제자들을 불러 놓고 하나되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들을 그리워하는 것과 같이, 너희들도 나를 그리워하고 너희들 끼리끼리도 그리워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는 때와 환경을 남기고 가셨습니다. 환경 가운데 제자들을 남기고 가셨습니다. 예수님이 살아 생전에 말해주지 못하던 제자들 말고, 털어놓고 말해줄 수 있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가셨습니다. 그런 교회를 보지 못하고 간 동시에 그런 사회와 국가와 세계를 세워 놓지 못하고 가셨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떠한 권내에서 예수를 맞을 수 있는 무리가 되겠습니까? 개인적으로 찾아오시는 주님을 만나겠습니까? 가정적으로 찾아오시는 주님을 만나겠습니까? 사회적으로 찾아오시는 주님을 만나겠습니까? 국가적이요, 세계적으로 찾아오시는 주님을 만나겠습니까? 여러분은 어느 분야의 주님을 만나려고 하십니까?
여러분, 주님이 하늘에서 구름 타고 풍악을 울리며 오실 줄 알아요? 절대 안 그렇습니다. 그것을 똑똑히 알려면 여기에 와요. 절대 안 그렇다는 것을 설명해 주겠습니다. 그런 망상 믿지 말란 말입니다. 지금 기독교는 우리 통일교회를 이단시하고 있습니다. 좋습니다. 이단이든 삼단이든 한 번 부딪쳐 싸워 보잔 말입니다, 누가 깨지나. 자신이 있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있기 때문에.
그러면 세계적인 때를 맞이하기 위하여 오시는 주님, 세계적인 환경을 지배하기 위하여 오시는 그 주님을 맞으려면 여러분은 어떤 자격자가 되어야 하느뇨? ‘주님, 어서 이리로 오시옵소서.’ 하면 ‘오냐’ 할 수 있고, ‘당신이 계실만한 집이 여기 있사옵니다.’ 할 수 있는 자신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까? 예? 되어 있어요? ‘주여, 당신이 이 땅 위에 이루시려던 때와 환경을 개인으로부터 백성 전체에 이르기까지 남기고 가셨는데, 이제 당신이 머무를 수 있는 개인과 백성이 여기 있사옵니다.’ 하고 주님 앞에 소개할 수 있습니까? 그런 말을 어떻게 하겠나 하겠지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지도하던 제사장들 중에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당신이 거느려야 할 것이 여기 있소이다.’ 하고 말한 사람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다. 예수를 살려두면 전부 다 예수 앞으로 넘어가겠으니 눈이 뒤집혀 가지고 예수를 그냥 놔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앞에 모든 것을 소개해 줄 수 있어야 했습니다. 소개하는 동시에 넘길 수 있어야 했습니다. ‘주여, 이 집도, 이 사회도, 이 교회도, 이 세계도 내 것이 아니오니 당신의 것으로 취하옵소서.’라고 했어야 합니다.
보십시오. 교파 간에 치열하게 투쟁하고 있습니다. 각 교회마다 때를 달리하고 있습니다. 각 교회마다 환경을 달리하고 있습니다. 각 교회마다 오실 주에 대한 관점이 다릅니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가 오시겠어요? 오다가도 도로 갈 것입니다. 어디에 오실 수 있습니까? 교파마다 때가 다르고, 환경이 다르고, 지도이념이 다릅니다. 그것이 예수의 교회입니까? 그것이 예수가 머물 성전입니까? 예수를 따르는 자들을 위해 준비한 교회가 그러니 문제는 큰 것입니다. 그러기에 끝날에는 누구의 말도 듣지 말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와서 말하는 사람의 말도 믿지 말란 말입니다. 아무리 피땀을 흘리며 이야기해도 듣지 말란 말입니다. 어느 것이 거짓인지 참인지 모릅니다. 자기 부모도 못 믿고 형제도 못 믿는데 누굴 믿는단 말입니까?
지금의 때는 마음 심판에서부터 스스로 승리해야 됩니다. 마음 심판, 마음으로 심판해서 그릇된 것이면 끊어 버려야 됩니다. 마음은 압니다. 모든 면에 있어서 마음 심판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안 되면 끝날에는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밀실에 들어가 기도해서 담판지어야 됩니다. 교파도 많고 잘났다는 사람도 많은데 무엇이 끝날에 하나님이 준비하신 것입니까? 어느 것이 주께서 임할 수 있는 환경의 터전입니까? 어떤 것이 주의 이념세계를 건설할 수 있는 백성입니까? 기도해 봤습니까? 괜히 죽을 구덩이인지 아닌지도 모르고 입을 벌리고 허덕이며 야단들입니다. 어느 그물에 싸여 있는 줄 알아요?
한국에 있는 42개 교파 가운데 41개 교파는 적그리스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마음의 때를 이루어 줄 수 있는 교회, 마음이 안식할 수 있는 곳을 찾아가야 됩니다. 하나님과 동생동사(同生同死)할 수 있고 동고동락(同苦同樂)할 수 있는 예배당을 찾아가야 됩니다. 여기에 그런 것이 없으면 다 보따리를 싸 가지고 나가십시오. 여기서는 막지 않습니다. 다 가란 말이에요. 마음 문을 열어 놓고 마음의 때가 이루어지는 곳이 여기로구나! 아버지를 모실 수 있는 마음의 환경이 여기로구나! 여기만이 아버지의 심정을 중심삼고 하나될 수 있는 곳이로구나. 할 수 있는 곳을 찾아가야 됩니다.
그러면 이러한 때와 환경과 기준을 만들어 놓고 무얼 하자는 것이냐? 세계를 통일하자는 것입니다. 끝날에는 통일이 됩니다. 꼭 우리 통일교회가 통일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통일하든 세계는 하나의 이념을 향하여, 하나의 때를 향하여, 하나의 환경을 향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의 지도자와 하나의 환경을 향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의 지도자와 하나되어야 합니다.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만일에 교파가 하나될 수 있는 환경이 못 되어 있으면 하나로 만들 수 있는 때의 개척자가 나와야 됩니다, 때의 개척자가. 지금의 때는 단단히 정신차려야 할 때라고 강조하는 무리가 어느 교파에서든지 나와야 됩니다. 때에 대해 강조하는 무리가. 지금은 수많은 사람들이 끝날이라고 합니다. 때문에 지금 기독교에서는 혼란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때의 증거자가 나옵니다. 환경의 증거자가 나옵니다. ‘아, 내가 제일이다.’ 하는 지도자들, 대표자들이 나옵니다. 서로가 주님이라고 야단입니다. 그런 무리가 쏟아져 나옵니다. 그런 무리가 서로 부딪치고 또 부딪치게 되는데, 거기에서 남아져야 합니다. 기성교파들이 그냥 그대로 남아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새로운 역사는 새것에서부터 벌어져 연결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제 청년 남녀들이 각 교파를 헤쳐야 됩니다. 안 헤치면 하나님이 들이칩니다. 그러니 자기들끼리 싸우게 됩니다. 안 싸울 수 있어요? 하늘이 헤치게 한다는 거예요. 때가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헤쳐라! 가까운 데서부터 헤쳐라.’ 싸움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교파에서부터 벌어집니다. 하나님이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벌어집니다. 그러기에 기성교회도 싸움이 벌어지지 않았어요? 그뿐이 아니에요. 어떻게 되고 있느냐 하면 목사들과 청년들이 싸웁니다. 지금 때는 청년들이 개방되어야 할 때입니다. 천지 운세는 청년들의 가슴 가슴을 움직여서 과거의 탈을 벗고 새로운 이념세계로 넘어가게끔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당회의 교회가 아닙니다. 우리의 교회입니다, 우리의 교회. 그런 때가 옵니다. 그런가 안 그런가 두고 보십시오.
교회가 하나에서 둘로 갈라지고 둘에서 넷으로 갈라지고, 이렇게 세 번만 갈라지게 되면 하나님은 떠납니다. 천리 원칙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가정적으로 모입니다. 은혜 있는 사람은 가정적으로 모입니다. 교회에 안 갑니다. 가정에 엎드려 기도합니다. 그렇게 되나 안 되나 두고 보세요. 교단에서 외치다가 옛날 제사장의 입장에 서기 쉬운 때입니다.
그런 만큼 오늘 우리들은 마음의 문을 열고, 몸의 문을 열고, 생활의 문을 열고, 국가의 문을 열고, 주의의 문까지도 열어야 합니다. 그 문은 나로부터 세계까지 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세계를 찾아오시는 주님이 개인까지 찾아오실 수 있는 인연을 조성하는 교회가 나와야 됩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세계에 온 주님이 수시로 자신을 찾아오실 수 있도록 완전히 개방된 길을 닦아 놓는 무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여러분이 주님을 만날 거예요. 그러면 어떠한 문까지 열어야 되느냐? 심정의 문까지 열어야 됩니다. 여러분, 심정이 뭔지 알아요? 주님이 제일 좋아하는 것을 놓고 같이 좋아하며 거기에 박자를 맞추고, 주님이 요구하는 것에 응해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 심정의 문까지 열어야 합니다.
이러한 것을 생각해 보게 될 때, 지금 하늘에 계시는 주님의 사정이 얼마나 안타깝겠습니까? 땅을 바라보고 계시는 주님의 사정이 얼마나 안타깝겠습니까? 이 땅에 그런 사람 있어요? 오늘날 기독교가 제2이스라엘의 형태를 갖추었으나, 그 가운데 하나님의 축복과 상속권을 받을 수 있는 택함 받은 사람은 없습니다. 한국 백성이 아무리 불쌍한 처지에 있더라도 예수가 손을 들어 축복해 줄 수 있는 무리가 된다면, 이 국가는 세계를 지배하게 될 것입니다. 또 하나님이 축복을 안 해줘도 세계의 어느 국가보다 충성을 다하면 하늘이 주지 않으려던 복도 빼앗아 올 수 있습니다. 천국은 힘쓰는 자가 빼앗는다고 하였습니다. 미국의 하나님? 무슨 선진국가의 하나님? 그게 아닙니다.
우리는 심혈을 기울여 이제까지 인류가 들이지 못한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그것이 내 일대에 안 되면 2대, 3대, 몇 대를 걸려서라도 충성하겠다, 세계적인 충성의 종족이 되겠다고 생각해야 됩니다. 그런 사람들이 많다면 그 민족은 구원받습니다. 그렇겠어요, 안 그렇겠어요? 예?
오늘 여러분은 통일교회라는 이름 아래 모였습니다. 우리가 심정세계를 개방합시다. 주의나 사상 모든 것을 전부 열어 놓읍시다. 열어 놓고 찾아봅시다. 찾아볼 때에, 내 마음이 있을 수 있는 곳이요, 내 마음이 안식할 수 있는 터전이요, 틀림없이 하나님의 아들딸이 될 수 있다고 생각되는 곳을 발견하거든 목이 잘라져도 그 곳에 가십시오. 그 곳은 마지막 곳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통일교회에 와서 그런 인연이 뼈 살에 스며들지 않거든 다 가십시오. 다 가란 말이에요.
그러한 무리가 되기 위해서, 그러한 인연을 맺기 위해서 이 시대의 갖은 모략과 핍박을 받으면서도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여기서 말하는 사람이 자기만 못한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인생행로에서 그 누구보다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모진 바람에도 시달려 보았습니다. 안타까운 심정으로 싸워도 보았습니다. 이래 봐도 저래 봐도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겠기에 이 놀음을 하고 있단 말입니다. 지나가는 말꼬리로 비소하고 농락하는 말에 좌우되는 그런 놀음이 아닙니다.
여러분, 예수는 모든 것을 남기고 가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의 때를 내 일신에서 거두어 드립시다. 예수의 환경을 내 일신의 환경에서 수습하여 바칩시다. 더 나아가 예수가 베드로에게 자기의 모든 권한을 상속하여 주고 싶었던 그 이상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아들딸이 됩시다. 그러면 우리로 말미암아 천국의 문은 열릴 것입니다. 나아가 때를 맞지 못한 기독교는 우리로 말미암아 때를 맞을 수 있고,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환경을 이루지 못한 기독교가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환경을 이룰 수 있고, 하나님은 선포하지 못한 것을 우리로 말미암아 선포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성을 다하고 돌아보지 맙시다. 정성을 다하고 뒤돌아보지 맙시다. 예수는 그랬습니다. 33년의 생애를 살고 멀지 않은 죽음을 바라보며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던 예수는, 자기의 생애를 돌아보고 싶었지만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아바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마 26:39) 하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예수는 과거를 헤아려 보는 자를 나무랐습니다. 여러분들도 있는 정성을 다 들였으면 그것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한하지 마십시오. 나는 누가 알아줄까봐 걱정이에요. 알아줄까봐 걱정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충성을 다하라고 하였거늘, 피를 흘리고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고 탄식하지 마십시오. 오실 주 앞에 내 충성의 절개를 세우고 높여 드리기 위하여 쓰러지는 무리가 있다면 주님은 눈물을 머금고 오셔서 세워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를 얼마만큼 사랑하였으며, 예수가 그리워하고 고대하던 그때를 얼마만큼 흠모하였으며, 예수가 개척하던 그 환경을 이 시대에 개척해 보겠다고 얼마만큼 애써 봤습니까? 여러분,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만일에 하늘의 축복을 받았으면 그것은 내 것이 아닙니다. 만민을 위하여 축복을 해준 것입니다. 나에게 복을 주고 나에게 축복을 해준 것은 만백성을 살려 주기 위해서라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 입장에서 여러분이 심정을 열고 마음을 열고 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 데는 피부의 색깔이 문제가 아닙니다. 동서양의 어느 민족, 종족이 문제가 아닙니다. 혈색이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까지의 환경적, 감정적, 관념적인 일체를 넘어서서 모든 것을 잊고 예수가 소망하던 사랑의 심정과 예수가 요구하던 생활적인 감정을 가져야 됩니다. 그래야만 여러분이 세계적으로 오시는 주님을 대할 수 있습니다. 오시는 주님은 세계적인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바야흐로 때는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찾아오는 이 천지 운세의 때를 수습할 수 있는 무리를 하늘은 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때를 수습하는 무리가 됩시다. 또 우리는 그 환경을 건설하는 무리가 됩시다. 그리하여 그 앞에 충신이 될 수 있고 효자 효녀가 될 수 있는 무리가 되어야겠습니다. 모든 것을 그대로 바쳐드릴 수 있는 무리가 된다면 남기고 가신 주님이 찾아오실 때 그런 사람을 외면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찾아오실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이것을 똑똑히 아시기 바랍니다.
아버지, 당신은 발걸음을 멈추고 삼천리반도를 얼마나 서글픈 모습으로 바라보고 계시나이까? 당신의 심정을 통하여 나오는 눈물이 이 강산에 뿌려졌고, 당신이 심혈을 통해 흘리시는 피땀의 노고는 이 동산의 민족과 인연되어 있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지, 한 때를 그리워하시던 주님, 한 환경을 개척하기 위하여 세계를 이끌고 나오며 기도하시던 주님을 하늘의 주권자로서, 천상의 축복을 받고 만민에게 축복을 해줄 수 있는 주인공으로 세우기에 얼마나 수고하셨습니까?
아버님, 모든 면에서 뒤떨어진 이 민족을 택해 주심에 황공하옵니다. 이제 지나가야 할 복잡하고 혼란한 끝날의 환경이 되었사오니, 때를 결정지을 수 있고, 환경의 안식처를 해결지어 줄 수 있는 하나의 성전이 있어야 되겠사옵니다.
그 때와 환경을 개척한 기쁨으로 세계의 사조를 넘어 천상의 인연을 노래할 수 있고, 하늘과 직접적인 관계가 맺어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가 아버지를 대하여 아버지라 할 수 있고, 아버지께서 저희를 대하여 아들딸이라 할 수 있으며, 저희가 주를 대하여 신랑이라 할 수 있고, 주께서 저희를 대하여 신부라 할 수 있는 내적 생활의 인연이 저희의 몸 마음에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이제 알았사옵니다.
잃어버린 그 때와 잃어버린 그 주인공을 찾아 주기 위하여 당신은 천신만고의 수고를 하시면서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셨사옵니다. 저희가 동으로 갈 때 먼저 동으로 가셔서 저희들을 인도하셨고, 또 저희가 북으로 가면 먼저 앞에 가셔서 저희를 바르게 안내하시던 아버지, 얼마나 수고가 많았사옵나이까? 저희들은 그러한 사실을 알지도 못하고 지금까지 저희 멋대로 살면서 이렇게 살다 가는 것이 인간의 갈 길을 다 가는 것인 줄 알았사옵니다. 그런 허황된 저희였음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남모르는 가운데 저희들을 불러주신 아버지시여! 이제 저희들에게 역사적인 심정을 감히 헤아릴 줄 알게 하여 주셨고, 시대적인 심정을 알게 해 주셨사오며, 미래적인 심정을 저희들이 헤아릴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신 그 은사 앞에 감사드리옵니다. 이제 아는 만큼의 실적을 갖추고, 하늘 용사로서의 갖출 바를 다 갖추어서 남기신 싸움에서 지치지 않고 한 날의 가치를 천상에 자랑할 수 있는 자격자들이 되고, 아버지 앞에 충성을 다하는 무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있는 정성을 다 바치면서도 자기를 잊어버리고, 수고의 피땀을 흘리면서도 피땀 흘리는 무리들을 위하여 복을 빌 수 있는 마음을 지닌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 스테판도 자기를 돌로 쳐 죽이는 원수의 무리들을 위하여 복을 빌었고, 예수도 자기를 죽이는 무리들을 위하여 복을 빌었사옵거든, 오늘 저희들도 있는 정성을 다 기울여 민족과 인류를 위하여 피땀을 흘리고,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아버님께서 남기신 충절의 전통이 일신을 통해 이루어지기를 간곡히 바라는 무리가 되어야겠습니다. 그러한 무리가 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무리 피땀을 흘리고 외친다 해도 심히 부족한 저희임을 알았사옵니다. 저희의 마음에 사무치는 모든 것은 본질적으로 천상의 인연을 갖추고 있는 줄 알고 있사오니, 본질적인 문제를 통하여 그 마음에 복받쳐 오르는 감격이 지금까지의 생애노정을 돌이키게 하여, 새로운 방향으로 힘있게 용진할 수 있고 출발할 수 있는 모습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남기신 사명을 염려하시는 아버지, 저희도 승리할 때까지 마음 졸이며 싸우려 하오니, 힘과 힘, 인연과 인연을 두텁게 하여 주시옵소서. 간절히 부탁드리오며, 모든 것 주님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아버님, 아버님께서는 간곡한 마음으로 하늘을 찾아 나서는 자에게는 시간과 처지를 개의치 아니하시고 언제든지 길잡이가 되어 주셨사옵니다. 저희들의 울타리가 되시어서 모진 원수들의 화살을 홀로 받으시며 지금까지 역사해 나오신 것을 저희들은 아옵니다. 아버님, 오늘까지 살아남아서 이 자리에 참석하게 해주신 은사에 먼저 감사드리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땅 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사옵니다. 스스로 잘났다는 사람도 많사옵니다. 그 가운데서 만물보다 못한 저희들을 불러 세우시어 인연 맺을 수 없는 자리에서 인연 맺어 주시고, 형편이 닿지 않는 자리에서도 긍휼의 손길을 펴 주셨사옵니다. 저희들을 인도하시기에 저희보다 더 수고하신 아버지이신 것을 저희들은 진실로 아옵니다.
이제 저희의 마음에 기쁨이 있다 할진대 그 기쁨은 아버지 것으로 돌리고 슬픔이 있으면 아버지 앞에 돌리지 않고 저희의 것으로서 책임지고 청산할 수 있는 참된 아들딸이 되기를 저희들은 바라고 있사옵니다.
지금까지 한스러운 6천년의 기나긴 역사를 홀로 책임지시고, 버려 마땅한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버리지 아니하신 채 앞장서서 싸우시며, 홀로 십자가를 지시고 저희 인간들의 생명문제를 책임져 나오신 아버지, 그 과정에서 저희들의 슬픔보다 아버지의 슬픔은 더 크고 저희들의 실망보다 아버지의 실망은 더 컸사오나, 세우신 부자의 인연이라는 천리의 원칙이 남아 있는 연고로 인간을 두고 돌아서려야 돌아설 수 없는 너무나 한스럽고 애달픈 심정을 지니신 아버지이신 것을 저희들은 미처 몰랐사옵니다.
그러한 심정을 지니시고, 쓰러진 자가 있으면 그 자리에 찾아가셔서 쓰러진 자들을 붙들어 일으키셔야 하는 아버지의 사정과, 핍박받는 자들이 있으면 그 자리에 찾아가셔서 핍박받는 자들을 구해 내시지 않으면 안 되는 서글픈 아버지의 입장을 저희는 몰랐사옵니다. 이제 저희들, 그런 아버지를 모신 아들딸임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가는 길에 어떠한 어려움이 닥치고 저희가 어떠한 불쌍한 처지에 놓인다 할지라도 거기서 낙망하는 자들이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고, 천성의 한 뜻을 세우기 위하여 싸움을 각오하고 나가게 될 때에 어떠한 핍박의 화살이 날아온다 할지라도 낙망하지 않는 하늘의 용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나이다.
당신은 그런 아들딸을 얼마나 고대하셨사오며 그런 아들딸을 맞기 위하여 사탄과 싸운 날이 얼마나 많았사옵니까? 그러나 아버님께서는 역사노정에서 그러한 아들딸을 만나지 못하신 채 탄식에 탄식을, 한에 한을 거듭해 나오셨사옵니다. 이날까지 지치는 것도 개의치 않으시고 또다시 인간들을 붙들고 나오시는 아버지의 심정 앞에 저희들은 모든 정열을 기울여 아버지를 위안해 드리고, 아버지의 어려움을 도맡아 싸움터로 나설 수 있는 아들 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성경 말씀을 보았사오니 2천년 전에 외로이 왔다 가신 예수의 사정이 어떠했던가를 저희들이 살피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는 이 땅 위의 인간들을 구하기 위해서 자기 전체를 제물로 드리고 쓰러지는 한이 있다 할지라도 염려의 마음을 가지셨사옵고, 그 모진 어려움도 달게 받으셨사옵고, 외로운 자리도 즐겨 가셨사옵니다. 그런 예수님의 외로운 모습을 이 시간 저희들이 동정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께서는 개인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싸우신 것이 아니라, 죄인 된 뭇 중생을 구하는 동시에 사망권 내에 있는 이 세계를 하늘세계, 즉 광명의 세계로 이끌어 내시겠다는 천적인 사명을 짊어지고 싸우신 것을 저희들은 알았사옵니다.
그 당시 예수님의 전체 생활환경은 어느 것 하나 기쁜 것이 없었사옵나이다. 가는 곳곳마다 핍박이 있었고 가는 곳곳마다 억울함이 앞을 가로막았사오나 그는 탄식하지 않았사옵니다. 낙망할 자리에 처해도 결코 낙망하지 않았사옵니다.
소망의 세계를 위하여, 미래의 천국을 위하여, 아버지의 경륜을 바라보며 참아 나오신 그 뜻을 저희들은 아옵니다. 이제 여기 모인 아들딸들, 비록 2천년이라는 역사적인 거리는 있사오나 심정적으로는 2천년 전 예수의 심정과 통할 수 있고, 하늘의 천적인 책임을 짊어진 입장에서 아버지를 대할 줄 아는 아들딸이 되어야 되겠사옵니다.
그리하여 아버지의 외로운 심정을 붙안고 이 땅 위의 인류를 대신하여 아버지를 위로해 드리고, 이 민족과 이 세계 인류 앞에 호소하여 그들을 아버지와 인연 맺게 해줄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 저희들 이렇게 모였사오니 이 한 시간 친히 같이하여 주시고 저희의 마음과 몸을 당신 홀로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지금까지 저희가 갖고 있는 주의와 관념 일체를 다 내어놓고 어린아이의 심정으로 돌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빚으시는 아버지의 손에 쥐어진 진흙과 같이 아버지의 뜻대로 빚어질 수 있는 모습이 되고 아버지의 뜻 앞에 온전히 바쳐질 수 있는 모습이 되어 이 시간 은사에 잠길 수 있는 저희들 되게 인도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 이 시간 말씀을 전하고자 하오니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전하는 자의 마음과 대하는 자의 마음에 간격이 없게 하여 주시옵소서. 어린 아이가 부모를 그리워하는 심정과 같이 아버지의 모습을 바라보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당신의 뜻 앞에 부복하였사오니, 저희가 은사를 받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축복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나이다.
이 시간 남한 각지에서 무릎을 모으고 외로이 아버지 앞에 호소하는 식구들을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그들이 져야 할 책임이 얼마나 막중한가를 염려하며 부복한 그 자리에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그들이 맡고 있는 제단을 아버지 친히 붙들어 주시옵고, 영광의 품에 품어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나이다.
이 시간 모든 것을 맡기오니 친히 주관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오며,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말 씀> 여러분들과 같이 생각하고자 하는 말씀의 제목은 ‘세계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맞아야 할 한국’입니다. ‘세계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맞아야 할 한국’, 이러한 제목을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여기에 모인 여러분들은 마음으로나 몸으로나 더 나아가서는 환경적으로나 새로우면서도 크나큰 그 무엇을 맞이하고 싶어할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를 막론하고 마찬가지입니다. 생명이 끝나지 않는 한 새로운 무엇을, 더 귀한 무엇을, 더 가치 있는 무엇을, 더 높은 무엇을, 더 빛나는 무엇을 고대하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또 앞으로도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개인이 그러하듯이 개인이 모여서 된 민족도 그러하고, 국가도 그러하고, 세계도 그러하고, 이 세계를 넘어온 천주를 창조하신 하나님까지도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러하시기 때문에 존재세계의 모든 피조물도 더 높고, 더 귀하고, 더 빛나고, 더 영광스러운 그 무엇을 고대하며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생활을 통하여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만물이나 인간, 혹은 유형세계나 무형세계나 궁극적으로 무엇을 맞이하는 것이 제일 기쁠 것인고? 그것은 잃었던 자기의 사랑하는 사람을 찾는 것도 아니요, 죽어간 부모가 다시 살아오는 것도 아니요, 잃어버린 주권을 다시 찾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고대하고 가장 귀한 것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일 것인고? 하나님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이 이상 더 큰 기쁨과 이 이상 더 큰 영광과 이 이상 더 큰 소망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 마음이 민족을 넘고, 세계를 넘고, 온 피조세계를 넘어 쉴 새 없이 허덕이는 목적은 무엇이냐? 허덕이지 않을 수 있는 마음의 위치를 잡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위치는 인간 자신만으로는 잡을 수 없습니다. 이 세계에 살고 있는 인간들만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 천주를 창조하신 절대적인 주인공이 있다면 그 주인공을 맞이하고 나서야 비로소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땅 위에 살고 있는 모든 존재물들의 최대의 소망은 무엇일 것인고? 어떠한 주의나 주권하에 머무는 것도 아니요, 어떠한 성현 현철들의 지혜 밑에 처하는 것도 아닙니다.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주인공, 즉 절대자 하나님의 무릎 앞에 모이는 것이 최대의 소망이요 최대의 목적이라고 봅니다.
그러기에 오늘날 인간들이 요구하는 이념은 인간적인 것이 아닌 좀더 고차적인 이념, 지선(至善)을 중심삼은 이념,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을 중심한 이념으로까지 뻗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그러하거든 우리의 민족 정신도 그러하여야 되고, 세계의 문명도 그러한 목표를 향하여 움직여 나가야 됩니다. 그렇지 않다 할진대 절대적인 주인공을 위주로 한 이 세계라고 볼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의 역사노정에서 수많은 인간들이 그런 절대적인 가치의 세계를 추구해 나왔지만 ‘이것이 만인이 다같이 향유(享有)할 수 있는 바로 그 세계다.’ 하고 주장한 자는 없었습니다. 이러한 미해결의 상태에서 해결의 한 날을 보기 위하여 역사를 끌고 나가는 이 세계는 달리고 있습니다. 민족을 이루고 있는 백성들도 달리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천륜을 세워 나가는 하나님도, 인간도, 피조세계도 그곳을 향하여 총행군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도 이 세계를 찾아오시고 인간들도 하나님을 찾아가는 과정에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잘났다고 하는 사람일지라도, 만우주의 피조물을 대신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었다 할지라도 그 역시 마음으로 의지하고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바라는 최고의 중심은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을 찾는 것이 오늘날과 같은 시기에 있어서 절실히 요구되는 중요한 일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은 인류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찾아오고 계십니다. 인류도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않고 찾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찾아가고 있는 인류는 어느 한때 그 하나님을 맞이할 것이냐? 맞이한다면 어떤 사람이 먼저 맞이할 것이며, 어떠한 백성이 먼저 맞이할 것이냐? 궁금합니다. 어떠한 주의나 어떠한 사회, 혹은 어떠한 종교를 통하여 찾아오신다 할진대 어떠한 형태를 거쳐서 찾아오실 것인가? 하나님과 인간이 상봉하는 최후의 시간은 언제일 것인가? 이것이 궁금한 문제입니다.
또 하나님을 맞이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떠한 사람이며 그의 심정은 어떠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은 세기말적인 이 시대, 이구동성으로 끝날이라고 하는 이 때에 있어서 중요한 문제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틀림없이 세계를 찾아오시는데 어떠한 모양으로 찾아오실 것인가? 하나님은 우리의 생활 전체의 분야에 걸쳐 찾아오십니다. 지금까지 4천년 원한의 역사를 지닌 한국을 중심삼고 본다면 4천년 동안 찾아오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만나지는 못했지만 찾아오고 계시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찾아오셨어도 사람들이 그 하나님을 알지 못했기에 모른 것이지 어느 한때도 찾아오시지 않은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사회계층을 막론하고 찾아오시는 하나님이심을 우리들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떠한 분야, 어떠한 계층을 막론하고 찾아오고 계시기에 상하고저(上下高低)를 막론하고 인간의 마음은 그 한 곳을 향하여 움직여 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각 분야를 찾아오시되, 거기에 중심적인 한 곳이 있으니 그 곳이 바로 인간의 양심입니다. 인간의 양심을 중심삼아 찾아오시는 목적은 그 한 개체만을 찾기 위한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한 개체를 통하여 전세계를 찾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세계적인 차원에서 양심가(良心家)들을 격동시켜 세계적인 이념을 향하여 내모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명 분야에 있어서 책임을 지고 나오는 것이 종교라는 것입니다.
오늘날까지의 인류역사를 회고해 볼 때에, 어떠한 문명도 그 근본지주(支柱)는 정신입니다. 시대 시대를 넘고 세기 세기를 지나면서 역사 속에서 중심을 잃지 않고 연면히 이어 나오는 정신적인 지주의 입장에 있는 것이 무어냐 하면, 종교라는 것입니다. 어떠한 주의나 사상이 아닙니다. 불교를 보십시오. 유교를 보십시오. 기독교를 보십시오. 이들은 모두 시대는 변해 그 창설자의 정신을 이어받아, 변하지 않고 끝날에 이룰 목적세계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인류를 수습하여 하나의 목적세계와 연결시키는 동시에 우리의 양심의 방향을 향도하고 그에 따라 사회 환경을 개척하면서 범위를 넓혀 나오고 있는 것이 종교입니다. 그러기에 이러한 종교를 통해서 세계는 움직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섭리에 의해 종말시대에는 인간과 하나님이 상봉하여 인간도 기뻐하고 하나님도 기뻐할 수 있는 한 날이 와야 합니다. 동서양은 물론 어떠한 인종의 차이도 넘어선 입장에서 그 양심과 심정이 변치 않는 인간들이 하나님과 함께 기뻐할 수 있는 때가 기필코 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 할진대 싸움의 역사는 종결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늘은 종교를 세워 시대적인 사조를 거슬러가게 하면서 한 목적지를 향하도록 지도해 나오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는 반면 인간 개개인의 마음을 수습하여 그런 방향으로 접선시키기 위해 역사해 오셨습니다. 지금까지 하늘이 그런 섭리를 해오셨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 할진대 인간들은 역사적인 빚을 진 존재들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계를 찾아오십니다. 동시에 인간들을 찾아오고 계십니다. 이렇게 찾아오시는 우리에게는 마음과 몸이 있고, 영과 육, 즉 속사람과 겉사람이 있습니다. 여기서 이 속사람이 무한히 즐길 수 있는 이념의 세계가 완성되어야 겉사람이 무한히 즐길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늘은 양심을 기준으로 속사람을 창조하시고, 이 속사람이 완성되는 날에 겉세계가 창조목적을 달성할 수 있게끔 만드셨습니다. 그리하여 그 속사람의 인격의 가치를 중심삼고 천주적인 이념의 세계에서 생활할 수 있는 인격자를 세우려 한 것이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만일 속사람이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완전하고 모든 사람들이 보기에도 완전하다 할 수 있는 사람, 즉 하나님도 즐길 수 있고 만민도 동할 수 있는 안팎이 겸비된 사람이 나타나서 그가 좋아하는 이념이 하나님이 좋아하는 이념이요, 온 인류도 기뻐하는 이념이 된다 할진대 그 사람은 하나님이 찾고자 하시는 한 사람일 것이며, 인류가 맞이해야 할 최후의 한 사람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절대자 되시는 창조주가 존재하는 한, 이 세계를 수습하고자 하시는 그 절대자와 더불어 이 세계를 가치적인 세계로 완결 지을 수 있는 인격자가 지상에 출현해야 한다는 것은 필연적인 결론입니다. 그러기에 그러한 한 사람, 그러한 가치적인 한 존재를 인간세계에서는 세워야 하고, 하늘세계에서는 맞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견지에서 어느 도(道)를 막론하고 최후에는 재림을 논위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은 예수의 재림을 말하고 있고, 불교에서도 역시 재림사상을 설법하고 있고, 유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는 지금까지의 도주들이 세운 종교이념을 총완결하여 하나님의 심정세계로 연결시킬 수 있는 새로운 무엇이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그런 섭리를 하셔야 하고, 하나님을 맞는 것이 목적인 인류도 인류를 대표한 하나의 인격자를 세워 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상봉하는 것을 최후의 목적으로 세우고 지금까지 수많은 도를 세워 나오셨는데, 그 도주는 어떤 사람을 택하셨는가? 개인주의적인 사상을 가진 사람을 택하시지 않았습니다. 일개 민족을 중심삼은 사람은 택하시지 않았습니다. 일개 국가를 중심삼은 사람을 택하시지 않았습니다. 세계를 중심삼은 사람을 택하셨습니다. 무대가 세계임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인도에서 발상된 불교를 보더라도 그 이념은 세계적인 이념입니다. 세계적인 관점을 가지고 현실적인 생활 무대를 넘어서서 초자연적인 세계의 이념까지 내포한 종교라야 끝날까지 남아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견지에서 하늘이 섭리하신다는 것을 알았으니, 이제 우리는 그런 관점에서 기성종교들을 다시 한번 헤아려 보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세운 종교를 위주하여 이 세계를 수습해 나간다 할진대 그 중심종교는 동서양을 망라하여 문화사조를 움직이고 사상과 문명에 공헌할 수 있는 내용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종교가 세계의 문화사에 공헌을 하였는가? 또 그 공헌이 인류 전체에 미치는 것인가, 지역적인 범위에 그치는 것인가 하는 것을 우리는 판단해 보아야 합니다.
지역적인 범위에서 가치를 발휘한 종교는 그 지역을 통솔하여 더 큰 이념의 종교에 연결시키기 위한 중간적인 사명을 하는 종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거에는 수많은 종교의 형태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수습되고 수습되어 지금 형태를 갖추고 남아진 것으로서 기독교와 불교와 유교와 회교를 꼽을 수 있습니다.
세계를 기필코 한 목적의 세계로 몰아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할진대 하나님은 반드시 세계적인 이념을 내포하고 현실의 생활 무대를 여기에 융합시킬 수 있는 도(道)를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내적인 면에서 세계적인 이념을 추구하는 동시에 현실의 생활에 있어서 시대적인 문화를 융합시킬 수 있는 내용을 갖춘 도라야만 끝날까지 남아질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예측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견지에서 볼 때 불교도 일면에 치우치고 있습니다. 유교도 일면에 치우치고 있습니다. 불교는 영적인 면으로 치우쳐 인간이 처한 현실과의 관계를 멀리하고 있으며, 유교는 하늘, 즉 영계의 내용을 모른채 삼강오륜을 중심삼고 인륜적인 분야에 치우치고 있습니다.
이 두 면을 화합한 실제적인 종교, 즉 아무리 역사가 변천하고,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때마다 혁명적인 변천이 잇따르고 환경의 변화가 있다 하더라도 생활적인 감정을 그 시대와 더불어 융합시킬 수 있는 종교는 끝날까지 존속할 것입니다. 그런 견지에서 오늘날 기독교가 명실공히 세계적인 종교의 위치에 있습니다.
그러면 하늘은 이러한 종교의 형태를 갖추어서 어떻게 할 것인가? 하나님께서 그러한 목적의 세계를 향하여 섭리하신다면 이 종교의 흐름은 한 곳을 향해 집중적으로 흘러 나가야 됩니다. 어느 한 곳을 향하여 흘러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출발지는 다르되 도달하는 목적지는 한곳이라야 합니다. 흥해도 그곳을 향하여, 쇠해도 그곳을 향하여 움직여 나가지 않으면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종교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지구상에는 수많은 국가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지금까지의 역사 노정에서 인류 앞에 공헌한 국가도 많지만, 그 국가의 주권이 종교적인 이념 밑에서 움직여 가지고 오랜 역사를 지닌 나라는 어떤 나라일 것이냐? 한 종교의 이념을 중심삼고 역사를 거쳐 나온 국가는 많지만, 수많은 종교가 들어와서 그 이념의 국가의 주권을 좌우하는 국민들의 생활 전체를 움직였던 역사를 가진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개괄적으로 한국의 종교를 살펴보면 신라시대로부터 고려시대까지는 불교가 들어와서 일대의 성황을 이루었습니다. 그 시대의 국민은 물론이요, 사조와 주권까지 좌우했습니다. 종교의 기원지가 어디이든지 창설자가 누구이든지 간에 종교문화를 꽃피운 나라가 한국입니다. 불교가 인도에서 발상했지만 중국을 거쳐서 한국에 들어와 가지고 국가와 주권을 움직여 판가리 싸움을 하였습니다. 또 그 이후 조선시대에는 유교가 들어와 나라의 주권을 지배하고 사회제도를 편성하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근대에는 기독교가 들어온 지 80여 년의 역사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 시대를 움직여 나가고 있습니다.
세계의 흐름을 볼 때, 극동문화와 서구문화는 기필코 그러한 하나의 기점을 중심삼고 융합해야 합니다. 그것이 천륜의 목적입니다. 그러기에 극동에서는 일본의 제국주의가 나와 가지고 명치(明治) 45년, 대정(大正) 15년, 소화(昭和) 20년, 모두 80여 년의 역사를 거친 다음 그 제국주의는 망했습니다. 일본이 제국주의국가로 등장하였을 때, 여기에 공포를 느낀 중국이나 소련(帝政러시아)은 한국을 놓고 싸웠습니다.
청일전쟁이 일어난 동기가 어디에 있었느냐? 일본이 극동에서 융성해감에 따라 그 세력 무대를 넓히기 위해 한국을 대륙침략의 발판으로 삼으려는 데 있었습니다. 한국을 놓고 자기들의 욕망을 채우고자 벌인 싸움이 청일전쟁입니다. 또한 노일전쟁입니다. 그리하여 일본은 결국 한국을 수중에 넣고 36년간을 지배했던 것입니다.
제국주의국가인 일본과 청국과 러시아가 한국을 삼켜 자기들의 수중에 넣으려 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일본이 한국을 손에 넣은 것 같았지만 손을 떼고 갔습니다. 그리하여 이 나라는 새로운 해방의 날을 맞이하였고 오늘날에 와서는 또 민주와 공산이 대결하는 무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러한 정세에 있는 이 민족은 공산주의가 어떻다는 것도 알았고, 민주주의가 어떻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공산주의도 민족을 삼켜 버리지 못합니다. 공산주의가 어떻다 하는 것을 그 끝을 보아 다 알고, 민주주의가 어떻다 하는 것도 그 끝을 보아 다 알고 있습니다. 다 보았습니다.
시대적인 사조에 입각하여 볼 때에 오늘의 이 한국, 이 삼천리반도를 점령하여 영원한 복지의 무대로 만들 수 있는 주의는 무엇일 것인고? 또한 외적인 분야만이 아니라 내적인 분야에 있어서도 종교심이 강한 이 삼천만 민족을 사로잡을 수 있는 종교는 어떤 종교일 것인고?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형편에 봉착해 있습니다.
한국 백성은 석가모니를 보지 못했고, 공자도 보지 못했고, 예수 그리스도도 보지 못했지만, 그들이 주장한 종교의 밑바닥을 다 구경했습니다. 세계적인 대종교를 주장하던 도주들은 보지 못했지만 그 도의 밑창은 다 보았습니다. 다 보고 나니 그것들은 이 민족 앞에 환영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배반당하고 돌아서야 할 것들임을 우리는 알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 불교, 유교, 기독교가 형태를 갖추고 지금까지 남아 있으되 불교는 불교대로, 유교는 유교대로, 기독교는 기독교대로 싸우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도(道)들이 최후에는 어떠한 해결점을 지어 놓고 이 민족의 운명과 동반할 것인가? 이것을 우리들은 새로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사조적으로 보더라도 한국은 세계문명의 전시장이 되었습니다. 이 한국은 수많은 민족을 대해 보았습니다. 미국을 위주로 한 유엔기구에 가담한 수많은 종족들을 대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주장하는 어떠한 주의나 이념도 이 민족에게는 맞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런 한국이 남북으로 갈라져 북쪽은 공산주의가 점령했습니다. 그 북쪽은 공산 진영의 초점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남쪽은 민주 진영의 초점이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민족이 공산주의에 절대적으로 기여하는 것도 아니요, 민주주의에 절대적으로 기여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러한 형편에 처해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종교를 세워 모든 역사를 수습하기 위한 섭리를 해 나오신다 할진대 오늘날까지 한국 백성을 대하여 해 나오신 섭리는 실패였느냐 하는 문제에 부딪치게 됩니다. 불교도, 유교도, 기독교도 한국에서 완전한 발판을 갖지 못하고 돌아섰다고 해서 한국 백성을 중심삼은 하나님의 섭리가 실패로 끝난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어찌하여 지금까지 이 민족으로 하여금 종교이념을 중심삼고 그 문화적인 한계를 달리하며 살아 나오게 하셨던고? 궁금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민족은 현대의 문명세계에 공헌한 이념적인 무엇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종족적으로 어떤 특별한 무엇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세계를 찾아오시는 하나님 앞에 한국이 등장하기를 하나님이 바라신다 할진대 이 한국의 운명은 장차 어떻게 될 것인고? 이것이 우리 청년 남녀들이 염려해야 될 문제입니다.
우리 백성들은 석가모니가 세운 교리, 공자가 세운 교리, 예수가 세운 교리의 밑바닥을 다 들여다보았지만 그것들은 이 민족에게 맞지 않아 다 지나갔습니다. 아까 봉독한 성경 말씀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도(道)만을 주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최후에는 도(道)보다도 사람을 주시려는 것입니다. 결론은 그것입니다.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의 인류는 종교라는 형태를 가질 것이 아니라 종교의 도주를 가져야 할 때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도주를 가질 수 있는 이념과 사상이 이 지구상에 나타나지 않는 한 하나님의 역사는 실패입니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머물 곳은 어떠한 예배당이 아닙니다. 기독교가 아닙니다. 불교도 아닙니다. 유교도 아닙니다. 최후에는 하나님이 사랑하실 수 있는 아들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주셨으니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 민족 앞에 외치고 싶은 것은 ‘불교를 믿으라, 유교를 믿으라.’ 혹은 ‘기독교를 믿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보다는 ‘석가모니를 가져라, 공자를 가져라, 예수를 가져라.’는 것입니다. 천륜이 이렇게 나온다 할진대 앞으로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민족은 어떠한 민족일 것인고? 그 민족은 종교를 갖는 민족이 아니라 종교의 도주를 갖는 민족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겠습니까?
이렇게 볼 때에 불교의 일색만을 갖고는 안 됩니다. 유교의 일색만을 갖고도 안 됩니다. 기독교의 일색만 갖고도 안 됩니다. 이제는 세계적인 대도주(大道主) 세 분이 서로 상봉하여 공동의 목표 아래 하나의 세계를 이룰 것을 결의한, 하나님께서 공인하실 수 있는 그런 이념적인 내용을 갖춘 주의와 종교가 나와야 합니다. 그러기에 나는 바라고 있습니다.
하늘의 일은 알파와 오메가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고 하였거늘, 도를 창시한 주인공이 끝된 나중에 나타나서 처음과 나중을 맞추어 가지고 우리의 심정, 우리의 생활, 우리의 사회, 우리의 세계에 생명의 가치를 천상 앞에 나타내지 않는 한, 도(道)의 목적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오늘날 전세계에 널려 있는 수많은 기독교인들은 교회를 믿을 것이 아니라 그 도주를 믿어야 합니다. 교를 가질 것이 아니라 도주의 최고의 속성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날 한국에도 백만 이상의 기독교 신도들이 있지만 성경을 나름대로 해석하여 장로교니 무슨 교니 하며 갈라져 있습니다. 통일교도 그 중의 한 교파 모양으로 되어 있지만 어떠한 교회가 문제가 아닙니다. 모두가 간판을 버리고 예수를 가지려는 운동을 해야 됩니다.
각 종교가 그러한 실체현현(實體顯現)을 완결시키도록 세계의 이념은 움직여 나가고 역사는 흘러 나가고 있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는 도를 대표할 수 있는 하나의 주인공, 전세계의 이념을 대표할 수 있는 하나의 주인공, 하늘이 세운 하나의 주인공을 상봉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문제는 예수를 가졌느냐 하는 것입니다. 알파적인 도(道)로 세웠으니 오메가적인 도로 거두어들여야 합니다. 나는 알파요 오메가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면, 역사의 종결과 더불어 어느 한 때에 한 개체를 대해 ‘너는 알파도 되고 오메가도 된다.’ 할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한국은 지극히 작은 나라입니다. 어느 큰 나라의 한 주(州)보다도 더 작은 나라입니다. 이런 작은 나라가 극동에서 4천년이라는 기나긴 역사를 거쳐온 것만 해도 신기합니다. 그러면서 어떤 종교든지 다 냄새를 맡았습니다. 어느 사조의 냄새도 다 맡아보았지만 이제는 모두 싫다 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무슨 주의도 싫고, 무슨 정당도 싫고, 무슨 종교도 다 싫다 하는 때가 되었습니다. 오늘의 세계 인류가 이런 입장에 있다 할진대 이런 인류를 하늘은 하나의 목적지를 향하여 나아갈 수 있도록 최후의 수습을 해야 할 섭리가 있는 연고로 그럴 수 있는 한 지역이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다 싫다고 집어 던질 수 있는 나라가 나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이 땅 위에 현현하신다면 이 나라를 어떻게 다스리실 것인가? 이 세계를 어떻게 다스리실 것인가를 여러분은 생각해 보았습니까? 하나님께서 이 땅 위에 나타나시어 세운 도(道)라 할진대 그 도를 불교에서도 틀렸다, 기독교에서도 틀렸다, 또 누가 틀렸다고 해서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여러 종교를 세워 섭리해 나오시는 것은 모든 것을 최후에 나오는 하나에 연결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각 종교의 역사를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역사적인 내용을 모두 절단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인연은 갖고 있으되 형태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도 그냥 그대로 나가 봐야 안 됩니다. 그러니 싸워야 합니다. 그냥 그대로 두어 가지고 이 나라에 새것이 나올 수 있겠습니까? 불교도 그렇고 유교도 그렇습니다. 각 교단이 다 싸워야 합니다. 나중에는 여러분들이 교직자가 사람을 죽였다는 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는 설명은 시간이 없어서 못하겠습니다.
그러한 섭리를 하시는 하늘 앞에, 그리고 세계 앞에 극동에서도 지극히 작은 이 삼천리반도가 역사적인 하나의 초점이 되어 있습니다. 세계를 암흑의 세계로 몰아넣느냐, 광명의 세계로 옮겨 놓느냐 하는 기로의 촛대가 되어 있습니다. 이 한국이 불을 켜는 날에는 세계가 밝아지고, 꺼지는 날에는 세계가 암흑천지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극동에서 선교를 하여 성공을 했다 할 수 있는 나라는 한국입니다. 중국도 아니요, 일본도 아니요, 다른 어떠한 나라도 아닌 한국입니다. 한국 기독교의 운명에 따라 세계 기독교 전체의 운명도 좌우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입장에 있는 오늘날 우리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되겠습니다. 특히 우리 젊은이들은 똑똑히 정신을 차려야 되겠습니다. 어떤 교권자의 농락을 받지 말자는 것입니다. 어떤 주권자의 농락도 받지 말자는 것입니다. 그런 시대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앞으로 이 세계를 하나의 목적의 세계로 수습하시려 한다 할 진대 그것은 공산주의로도 아니요 민주주의로도 아닙니다. 기독교로도 아니고 지금까지의 도(道)의 형태로도 아닙니다. 그 내용을 가졌다고 할 수는 있겠지만 그 형태로는 아닙니다. 만약 기독교로 수습한다 할진대 기독교는 불교나 유교 또는 수많은 종교를 포섭할 수 있는 내용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도 된다면 역사노정에서 기독교만 남겨 두고 다른 종교는 모조리 없애 버리지 왜 심판 때까지 미루어 두었겠습니까?
이러한 시대에 처해 있는 우리들은 굶고 앉아 있을망정 단단히 정신을 차리고 주시해야 합니다. 눈을 똑바로 뜨고 바라봐야 합니다. 바라보는 데는 현실만을 보지 말고 오랜 역사를 거쳐 우리가 지금까지 흘러 내려오게 된 근원과 동기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선한 것은 무엇이고 악한 것은 무엇이뇨? 선한 것을 간단히 말하면 처음과 나중이 같은 것입니다. 선한 것은 처음과 나중이 같습니다. 억천만 년이 가더라도 같은 것이 선입니다. 진리가 그렇습니다. 한번 출발하면 억천만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고 같아야 합니다.
반면에 악한 것은 변하는 것입니다. 민주주의건 어떠한 주의건, 혹은 어떠한 사조나 종교가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은 안 됩니다. 심정세계에서 변천과 발전이 없는 한 절대로 변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외적인 생활환경은 아무리 변해도 심정의 세계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지금까지는 심정세계에 발전이 없습니다. 인간은 인연과 동기가 연결된 사정을 중심삼고 심정에 엉클어져 있기 때문에, 내가 이 나라의 백성이면 애국심을 갖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부모를 가졌으면 그 부모를 심정적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세계가 그냥 그대로 이렇게 나간다면 하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끝날에 가서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이뇨? 종교도 의식적인 종교가 아닙니다. 그저 교회나 왔다갔다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또 물질에 좌우되는 종교여서도 안 됩니다. 돈이나 갖다 주면 기도를 해주고 염불이나 해주는 그런 종교여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이 잘났다고 해서 이러고 저러고 하지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도(道)로서 갖추어야 할 최후의 것은 무엇이뇨? 심정입니다, 심정.
세계가 종단(終端)으로 치닫는 이 시대에 우리 한국 백성도 맨 끝에 와 있습니다. 더 가지려야 가질 수 없고, 더 바라보려야 바라볼 수 없는 끝에 와 있습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환경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최후에는 종교의 탈을 쓰고 또는 어떠한 이념이나 주의의 탈을 쓰고는 하나님 앞에 나타날 수 없습니다. 어떤 주의를 가지고는 못나타납니다. 어떠한 종교의 이름만 가지고는 못 나타나요. 무엇을 가지고 나타나야 되느냐? 심정을 갖고 나타나야 됩니다. 자기가 믿는 도주(道主) 이상의 사무친 심정을 갖고 하나님을 대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끝날에 있을 도의 심판입니다. 하나님이 도를 심판하게 될 때, ‘네가 몇 년 믿었느냐? 교회를 몇 개나 세우고, 법당을 몇 개나 세웠느냐?’고 하시지 않습니다. 몇 천 개든, 몇 만 개든 그것은 문제가 안 됩니다. 최후의 문제는 심정입니다.
천상의 독생자인 예수께서 만민을 구하기 위해 이 땅에 와서 도를 펴시던 애달픈 심정, 만민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죽어가면서도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시던 심정, 그런 심정을 가진 교인이 되어야 합니다. ‘도를 믿어 복을 받고 내 아들딸이 잘 살게 해야 되겠다.’ 하는 그러한 도가 아닙니다.
끝날에 처한 우리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되겠습니다. 믿을 자가 누구입니까? 없습니다. 바라볼 자가 누구입니까? 없습니다. 소망을 가질 만한 아무것도 없습니다. 믿을 만한 종교도 없고, 소망을 가질 주의나 사상도 없습니다. 이러한 때에 더욱이나 우리 한국 백성은 세계의 수많은 민족보다 더 믿을 것이 없는 입장에 놓여 있습니다. 이것이 현실적으로 보이는 한국의 실정입니다.
현실의 모든 사정과 환경, 정세를 보게 될 때에 한국은 딱한 사정에 처해 있으며 악조건 가운데 처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하늘의 크나큰 섭리가 있습니다. 이때 하늘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끊어 버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민족은 이제 단결해야 되겠습니다. 단결하는 데는 세상에 있는 어떤 종교를 중심삼고 단결할 때는 지나갔습니다. 어떠한 사회단체를 중심삼고 단결할 때도 지나갔습니다. 다 지나갔습니다. 공산주의도 아니요, 민주주의도 아니요, 어떠한 교파도 아닙니다. 세계적이요, 천주적인 새로운 이념이 이 땅 위에 나타나기를 바라면서 이 민족은 단결해야 하겠습니다.
한국에는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사상이 있는데, 정도령 사상이 그것입니다. 그런 것을 볼 때 고맙다는 것입니다. 당장은 망해 들어가고 당장은 죽어가는 자리에 있더라도 앞으로 한국은 이렇게 된다 하는 사상이 흐르고 있는 것을 볼 때, 고맙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입장에 처해 있는 오늘날의 한국 백성들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이뇨? 최후에 하나님 앞에 나타나야 할 것은 무엇이뇨? 옛날 도주들의 인격과 대등할 수 있는 가치와 기준을 갖추어야 합니다. 수십년 동안 도를 닦아 도주가 된 그 가치를 갖출 수 없다면 심정만이라도 갖추어야 합니다. 나는 죽더라도 도를 붙안고 억조창생을 구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하늘이여, 이 인류를 구해 주시옵소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의 환경을 무시해 버리고 설산에 들어가 도를 닦던 석가모니나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던 예수와 같은 심정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이 민족이 살길은 어떠한 교파나 주의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옛날 망해 들어가던 이스라엘 민족 앞에 예수가 전세계를 품고 나타났던 것처럼 이 땅에 그러한 인격자가 나타나야 합니다. 비록 이 민족이 가진 것이 없다 할지라도, 그런 인격자를 세워서 세계적인 무대를 닦으려 하시는 하늘임을 알고, 이 말세에 어떠한 도주 이상의 심정을 갖추어서, ‘하나님이여, 오시옵소서.’라고 할 수 있는 민족이 된다면 이 민족은 사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여러분은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려야 됩니다. 부모를 잃어버리고 처자도 잃어버리고 형제도 잃어버리는 입장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 가지고 혼란통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나라는 잘 되었습니다. 남북으로 갈라져서 사랑하는 처자와 부모를 다 잃어버렸습니다. 어찌된 일인지는 모르지만 자연적으로 잃어버리지 않을 수 없는 환경으로 몰아내어 이런 불쌍한 운명에 봉착하게 되었습니다. 세계 앞에 이 민족을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 할진대 이 민족에게는 분명히 큰 사명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왜 그러뇨?
예수는 말하였습니다.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마 10:37-38)고. 이스라엘 민족과 같이 이 민족도 자꾸 사랑할 수 있는 환경을 갖게 되니 하나님은 이것을 다 끊어 버리고 자연적으로 ‘하나님이여 살려 주시옵소서.’ 하는 입장에 이 민족을 두신 것입니다.
이 민족 가운데 세계를 인도할 수 있는 어떠한 주의를 가진 대정치가나 위대한 과학자, 위대한 종교가가 지금 당장은 없어 문제가 된다 하더라도, 세계 인류가 잠을 자고 있는 이 때에 이 민족은 깨어서 심정적으로 합하여 하늘을 붙들고 옛날 도주들이 천상으로부터 도를 받고 나오던 그 이상의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이여, 이 민족을 살려 주시옵소서!’ 하여야 합니다. 이러한 무리, 이러한 사람이 나온다면 그 사람들로 말미암아 이 민족은 살 것입니다. 그렇다 할진대 하나님께서는 오늘날까지의 도의 세계에 가르쳐 주지 않은 새로운 진리를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그럴 것 아니겠습니까? 지금까지 땅 위에 보내지 못하신 하늘의 선지자를 보내 주실 것입니다.
오늘날 이 때에는 별의별 사람이 다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이다’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내가 우주의 어머니야, 여호와의 부인이야, 혹은 내가 예수야, 내가 공자야’ 하는 사람이 많이 나옵니다. 파고다 공원에 가보십시오. 많이 있습니다. 그거 왜 그러는지 여러분 모르지요? 아무도 모릅니다. 세상이 왜 그렇게 되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나와야 됩니다. 가짜가 나오면 진짜가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요? 천지의 이치는 상대적인 원칙을 벗어나서는 존재하지도 움직이지도 않습니다. 때문에 가짜가 나오면 진짜가 나옵니다. 이단이라는 명사, 적그리스도라는 명사가 나온 것은 진짜가 나온다는 말입니다.
종교계에 혼란이 벌어지고 있는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도 이단으로 취급 받고 있고 여기에서 외치는 이 사람도 이단의 괴수로 취급받고 있습니다. 좋습니다. 최후에 남아질 것은 무엇이뇨? 어떤 도주가 주창한 교리나 경서가 아닙니다. 자선을 행하고, 사랑을 행하고, 또 무얼 하고 무얼 하는 때는 지나갔습니다. 이제는 교리를 많이 아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 이 때는 ‘네 속에 무엇이 있느냐? 내놓아라.’ 할 때에 내놓을 수 있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심정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래 가지고 하나님을 대하여 ‘이 끝날에 세계를 수습하고자 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이 어떠하십니까?’ 하며, 그 아버지께서 한국 백성을 위하여 통곡하시면 나도 그들을 위해 통곡하고, 공산국가를 위하여 통곡하시면 나도 그걸 위해 통곡하고, 민주 진영을 위하여 통곡하시면 나도 그걸 위해 통곡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있습니까?
통일교인이라고 해서 오늘 여기에 모인 여러분, 나는 여러분을 어떠한 교리에 능통하여 모든 사람들을 설득시키고 굴복시키는 사람으로 만들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 빼앗기고, 다 잃어버리고, 배척받는 자가 되더라도 그 자리에서 ‘하나님,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할 수 있는 그런 마음의 주인공으로 만들려는 것입니다.
백만장자가 자기의 유산을 넘겨줄 때에도, 무슨 대학의 학박사로서 능력만 있는 아들보다 일자무식이지만 심정으로 자나깨나 아버지를 염려하는 그런 아들에게 유업을 넘겨주지 않습니까?
오늘 이 나라는 누가 지배하느냐? 애국자가 지배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잘못하면 이 나라는 망하게 됩니다. 누가 이 세계를 지배해야 되느냐? 하나님의 아들딸이 지배해야 합니다. 참다운 선을 이루기 위해 자기의 생명을 뛰어넘어 세계를 사랑할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딸이, 도의 심정을 통한 아들딸이 지배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사람들이 밟히는 세계이니 망해야지요. 심판이 있어야지요. 없다면 내가 호소할 겁니다. 하나님께 항거라도 할 겁니다. 우리 통일교인들은 그러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무엇이 없다고 한스러워할 것이 아닙니다. 이 민족이 가진 것이 없다고 한스러워하지 말자 이겁니다. 역사를 보십시오. 갈릴리 해변가에서 몰리고 천대받는 어부들이나 데리고 다니던 예수라는 존재가 로마를 정복하고 20세기의 문명을 움직이는 인격자가 될 줄 누가 알았습니까? 그는 어부의 친구였지만 그 마음에는 세계의 심정이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천지의 심정이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어떤 원수라도 점령할 수 없는 절대적인 심정의 기준이 서 있었기 때문에, 세계는 그의 심정의 기준을 중심삼고 수습되어 나왔던 것입니다. 그의 심정은 인간의 심정이 아니라 천정(天情)이에요. 천정을 중심삼고 수습되어 나오는 역사이기에 그래도 그의 주의, 그의 이념이 지금까지 남아져서 명실공히 세계를 움직이는 기독교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가진 것이 없다고, 아는 것이 없다고, 불쌍한 거지 모양이 됐다고 한스러워하지 맙시다. 옛날에 도를 따라나오던 우리의 선조들 중에는 옷 잘입은 사람이 없습니다. 잘 먹은 사람이 없어요. 고루거각(高樓巨閣)에서 흥청대며 잘 먹고 잘 살던 사람이 없었습니다. 몰리고 쫓기면서도 시간만 있으면 바위에 머리를 박고 하나님을 불렀습니다. 편안히 살 수가 없어 토굴로 들어가서 하나님을 붙들고 외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세계를 지배해왔던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 한국 백성들은 무엇을 붙들어야 하겠습니까? 민주주의도 아니고, 공산주의도 아니고, 기성종교도 아니고, 어떠한 이념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붙들어야 합니다. 역사 속에 살아 계시고 세계의 심정을 갖고 허덕이는 하나님이시라 할진대 그러한 심정을 가진 아들딸을 찾으심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그렇다 할진대 우리 한국 백성들은 그런 입장에 제일 놓여지기 쉬운 환경에 처해 있습니다. 부모가 있습니까? 자식이 있습니까? 이북에서 온 사람들은 더욱이나 땅이 있습니까? 집이 있습니까? 우리가 지금 이런 처지에 있는 것입니다.
저는 한때 피난민들이 와서 교회를 세우는 것을 보고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심정에 사무쳐 울부짖는 마음을 갖고 하늘과 연결되어 나와야 할 텐데, 그러지 않고 외적인 사조와 결탁을 해 가지고 움직이는 데 급급하더니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이 세계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이 계신다 할진대 그 하나님은 지정의(知情意)를 갖춘 하나님이심에 틀림없습니다. 왜? 인간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인륜을 중심삼은 지정의가 아니라 천륜을 중심삼은 지정의입니다.
어떠한 도의 교리를 보더라도 출세하라고 한 것은 없습니다. 못 먹고 못 입고 희생하고 봉사하라고 했습니다. 밟히라고 했습니다. 밟혀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도의 기준에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민족이 이 민족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과 담판해야 합니다. 담판해야 할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실존주의니 뭐니 하는데 부지런히 찾아보십시오. 현실의 모든 문제들을 해결해 보란 말입니다. 어떻게 되나. 나중에는 절망과 고독에 부딪치게 되고, 개인주의적인 인간밖에 되지 않습니다. 역사의 변천과 더불어 다시 변하게 됩니다. 그러니 하나님이니 무엇이니 할 것 없이 현실의 조류에 따라 흘러 나가 보십시오, 어떻게 되나. 자기네 주장대로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민족은 지금까지 수천년의 역사를 거쳐오는 동안 갖가지 도를 중심삼고 나아온 민족이기 때문에 도를 중심삼은 민족성을 잠재적으로 지니고 있습니다. 이 민족처럼 신앙심이 강한 민족이 없습니다. 외롭고 불쌍한 처지에 놓여지게 되면 곧 점쟁이한테 가서 물어 봅니다. 요즘에도 그래요. 상하를 막론하고 그러한 심정이 농후한 이 민족은 무엇엔가 귀의하며 살아야 할 민족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러한 종교들이 이 민족 앞에 거부당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민족적인 종교가 나와야 된다는 말입니다. 민족적인 종교가 나와야 할 때가 왔고, 민족적인 주의가 나와야 할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그 주의는 공산주의나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심정입니다, 심정. 이 민족은 이제 ‘하나님! 당신의 목적은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완성된 하나의 인격체를 찾는 것이 아닙니까? 이 인류 가운데 하늘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람을 세우는 것이 아닙니까?’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민족은 세상적인 인연과는 먼 입장에 있으니 하늘과 제일 가까운 거리에 있는 것입니다. 허리띠를 졸라매고 머리를 싸매고 기도해야 합니다. 성경에는 밥을 잘 먹고 배가 요만큼 불러 가지고 기도하란 말이 없습니다. 뭐라고 했습니까? 금식을 할 때는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밀실에 들어가서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그거 좋은 말씀입니다. 이 성경 말씀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 말씀을 이루는 데 있어서 딴 민족은 안 하더라도 한국 민족은 해야 합니다. 이제 할 일은 그것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견지에서 그 무엇이 나와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심정을 압니까? 자기 부모의 심정을 모르니 불효를 하지요. 자기의 부모가 자기를 얼마나 심정적으로 사랑하고 어느만큼 애지중지 길렀는지를 진정 아는 아들이라 할진대 불효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렇게 처량하고 보잘것없는 위치에 있는 이 민족이지만 하나님의 심정을 제일 깊이 통할 수 있으니 기도해야 됩니다. 머리를 동여매고 ‘하나님, 어찌하여 이 민족은 이렇게 되고 이 세계는 이렇게 되었습니까?’ 라고 물어봐야 합니다. 기도 제목이야 많지요. 한국을 찾아오신 하나님께서 불쌍한 하나님이 되시기 위하여 찾아오셨겠습니까? 아닙니다. 아니에요.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입고 잘 믿는 것 같고 좋은 자리에 선 것 같은 사람들도 죽어서 영계에 가 보면 형편없는 곳에 가 있습니다. 여기에 처음 온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 하면 안 믿을지 모르지만, 세상에서 내로라하던 사람들이 영계에 가 보면 형편없는 데 가 있습니다.
천국은 심정의 세계입니다. 교리의 천국이 아니요, 교파의 천국이 아니요, 심정의 천국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 위에 백성과 교인을 찾고자 하시는 것은 무엇 때문이뇨? 아들딸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어떠한 아들딸을 만들기 위해서? 인간들을 몰아내십니다. ‘내 마음이 이렇구나’ 하시면서 그 심정을 토로할 수 있는 아들딸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작전법은 지금까지 그렇습니다. 어느 민족을 빼앗아 오려면 하나님이 가서 먼저 그 가치만큼 맞으십니다. 세상의 작전법과는 다릅니다. 도인의 작전법은 열만큼의 가치를 찾으려면 열만큼의 것을 희생합니다. 그게 더 이익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희생해서 천년 후에 찾게 되면 그때에는 선의 무대가 세계적으로 넓어질 것이니 천년 후에 찾는 것이 지금 찾는 것보다 더 이익이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됩니까?
하나님의 역사는 시대와 더불어 세계적으로 넓혀져 나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 무대가 좁은 천년 전에 선한 사람을 희생시키면 천년 후에 가서는 그 몇 배로 다시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한 사람들을 희생시킵니다. 2천년 전의 예수님도 그래서 희생시킨 것입니다. 하나님은 끝날에 가서 수많은 사람들을 한꺼번에 찾기 위해서 선한 사람들을 많이 희생시키셨습니다. 수많은 백성들을 희생시켰으니, 사탄이 빼앗아 갔으니 한꺼번에 빼앗아 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맨 나중에 찾으려 하시는 이유는 무엇이냐? 몇 천 년 전에 잘 살고 잘 입고 잘 해보았댔자 하나님의 백성밖엔 못 됩니다. 종 아니면 백성밖에 못 돼요. 종의 종을 불러 역사하던 시대가 구약시대입니다. 종이 역사하던 시대예요. 선지자들 말입니다.
그 다음에는 인간들을 종에서 아들권 내로 끌어올리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예수께서 독생자로 오셨던 것입니다. 종시대의 열 사람을 희생시켜서 아들시대에 열 아들 찾는 일이라면 할 만한 일이지요.
하나님은 잔인한 분입니다. 천년, 만년 후를 바라보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많은 희생도 개의치 않으십니다. 그러기에 기독교는 어느 국가에 들어가든지 그 교인들이 많이 희생당했습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시는 마지막 심판대 앞에 떳떳이 나타날 수 있는 아들딸이 그리웠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작전이 그렇다 할진대 그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여러분 자신들도 그렇게 움직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러셨습니다. ‘아바 아버지시여, 할 수만 있으면 나에게서 이 잔을 면케 하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그걸 아는 예수님이셨으니 그렇게 기도하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도를 통하여 살아 나오다가 도를 잃어버리고 민족을 잃어버리고 교회를 잃어버리더라도, 하나님은 잃어버리지 말자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겠습니까? 종파를 잃어버려도 좋습니다. 도주도, 나중에는 예수를 잃어버려도 괜찮습니다. 뭐 석가모니, 공자를 잃어버려도 괜찮습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구하시는 것은 무엇을 하기 위해서인가? 신부를 세워 하나님 앞에 가서 축복받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 신부가 필요합니다. 신부가 없으면 축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천리 원칙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도 신부를 찾아서 하나님으로부터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딸이라’고 하는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오늘날에는 ‘아, 나는 주님의 신부가 되어야지.’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러한 때 우리는 우리가 최후에 교파를 잃어버리더라도, 그 어느 누구에게 배척받더라도 하나님만은 배반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은. 오늘날 이 한국사회에서는 예수님의 성가(聲價)가 떨어졌습니다. 예수님의 권위가 폭락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폭락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떨어졌을지언정 예수님 그 자신은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예수님이 밟히는 때입니다. 그러다가 심판하게 됩니다. 선한 사람이 못난 자리를 거쳐 가지고 심판합니다. 심판은 새로이 출발하는 때이니 그러기 위해서는 언제나 밟히기 마련입니다.
교회에 들락날락하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어떠한 목사의 말도 겉으로만 듣지 말라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말하는 이 젊은 사람의 말도 귓등으로 듣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이 부인할 수 없는 그 무엇을 체휼하며 들으라는 것입니다.
최후에는 여러분이 어떤 말을 듣고 맹세를 했댔자 그건 흘러갑니다. 누구를 보고 ‘야! 좋구나. 나도 그렇게 해야겠다.’고 맹세했댔자 그것도 다 흘러갑니다. 최후에는 마음을 통하여 심정으로 맹세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공 못해요. 세상에서도 그렇습니다. 보고 듣고 나서는 ‘누가 설교를 잘하더라’, ‘뭐 어떻더라’ 하는 것은 다 지나갑니다.
우리의 심정이 어떤가가 중요합니다. 요즈음 기독교인들을 보면 딱 앉아가지고서는 ‘아무개 목사는 이렇게 설교하는데 저 사람은 저렇게 하는구나.’ 하며 전부 비판만 하고 있습니다. 전부 다 재판관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 가지고 은혜 받을 것 같아요? 은혜란 무한히 침투하는 것입니다. 은혜란 끝이 없이 흘러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걸 알아야 됩니다. 그런데 불화(不和)를 일으키면 거기에 은혜가 있겠습니까? 설교야 잘하든 못하든 그 자리에 들어가면 자기의 심정의 문을 열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나가는 바람결에서도 본연의 깊은 마음을 일으킬 수 있으면, 그것이 은혜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여러분, 여기서 외치는 이 사람이 강조하지만 예배드리는 그 시간은 원수와 일격전을 하는 것보다 더 심각한 자리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을 찾아나가 모시는 자리에 예복을 안 입고 참석할 수 있습니까? 겉모양의 예복이 아닙니다. 심정의 예복입니다. 이렇게 모인 여러분들의 모습이 불쌍하다 해도 그 마음에서 말씀과 더불어, 찬송과 더불어 감격된 심정이 흘러 나온다면 하늘은 여러분들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추방될 때 눈물을 흘리며 쫓겨났지만, 여러분은 눈물을 흘리되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웃는 얼굴로 하나님을 상봉해야 됩니다. 슬픔의 눈물도 흘려보지 못한 자가 기쁨의 눈물부터 흘리면 안 됩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잃지 말아야 되겠습니다. 내 눈으로 찾은 하나님은 잃지 말아야 되겠습니다. 내 귀로 들은 그 하나님, 내 촉감을 통해 느껴진 하나님을 잃어버리지 말아야 되겠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내 심정으로 스며들어오는 그 하나님을 잃어버리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이것은 누구도 간섭을 하지 못합니다. 어떤 위대한 사람이나 권세가도 심정으로 들어오는 하나님을 떼어 놓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심정으로 사무쳐 들어오는 그 하나님을 모십니다.
아까 말한 바와 같이 모든 존재물들은 보다 좋은 그 무엇을 찾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어떤 훌륭한 스승이 아닙니다. 그 스승은 세상과 더불어 지나가 버리고 말 스승입니다. 지금의 어떠한 주의나 사상, 공산주의나 민주주의를 넘지 못하고 다 지나가 버립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 하나의 이념을 향하여 움직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하나의 통일적인 기준은 학리적(學理的)인 기준도 아니고, 조직적인 기준도 아니고, 세력적인 기준도 아닌 심정적인 기준입니다.
천만인이 대하는 그 하나님은 자기 부모보다도,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보다도, 자기의 어떠한 사업보다도, 이 땅 위에서 귀하다는 어떠한 것보다도, 이 나라를 주고도 이 세계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분입니다.
그 하나님을 아는 심정을 가진 사람만 이 세계에 나타나면, 세계는 하나님의 이념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통일천하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표준으로 움직이십니다. 심정! 심정의 귀일점을 향하여 찾아오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은 바로 우리의 참아버지입니다. 참아버지예요.
오늘날 인간들은 말뿐인 아버지는 알았지만 내용적인 아버지는 몰랐습니다. 슬퍼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말은 했지만 체휼하지 못했고 안타까운 하나님이라 했지만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효자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의 심정을 알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정경을 보고 자기의 생사지경을 넘어서서 ‘주여, 웬 일이십니까?’ 하며 눈물을 흘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주님의 제자입니다. 이놈의 열두 제자들! 베드로니 뭐니 하던 사람들! 배반자들입니다. 배반자, 배반자들이에요.
저는 한때 베드로에게 항의를 한 적이 있습니다. 뭐냐 이겁니다. 뭐 훌륭하다고? 훌륭하긴 뭐가 훌륭합니까? 예수님이 죽기 전에 믿음을 갖고 죽음의 고개를 넘어간 베드로라면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럴 수 있는 아들딸들이 이 땅 위에 많이 나오기를 바라십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이 분하신 하나님, 성나신 하나님, 매를 드신 하나님, 통곡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알고 하나님께서 슬퍼하시면 같이 슬퍼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라면 이 땅을 대하여 경륜하시는 하나님의 모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떠한 사조가 망하게 되고 어떤 것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다 안다는 것입니다. 모르겠어요? 그런 사람들이 오늘날 이 땅에 많이 나와야 합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나 수많은 도인들은 도통한다고 합니다. 도통은 뭐하는 것이냐? 지금까지 인간 세상에 나타나지 않고, 인간들이 심정을 갖고 있으되 그 심정 세계에서 발견할 수 없는 감추어진 하나님의 심정을 찾아 헤매는 자들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고전 13:13) 하였지만 참사랑은 아직 나오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헤아려 볼 때에 하나님과 제일 가까운 데에 있는 우리이니 먼저 하나님을 위하여 이 시대에서 몰리는 자들이 되어야겠습니다. 몰려야 됩니다. 이단자, 괴수로 몰려야 합니다. 참을 위해 몰리다가 철창에 갇힌 영어의 몸이 되더라도, 그런 자리에서 엎드려 ‘주여’ 하는 사람에게는 천정(天情)이 녹아든다는 것입니다. 천정이 녹아져요. 철창이 하늘의 심정을 막아요?
여러분들은 여기에 아무런 감정도 없이 와서 앉아 있지만, 오늘 이 자리에 움직임이 있기까지는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거치지 않았다면 깨져야 됩니다. 이 사람 저 사람, 죽을 사람을 끌어다가 모아놓고 ‘이것이 하나님의 심정인데 느껴집니까? 알겠습니까?’ 하면, ‘예.’ 할 수 있게끔 만들 수 있는 도(道)가 끝날에 나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불교도 기독교도 다 가도 좋습니다.
하나님을 차지할 수 있는 움직임이 한국에서 나오기가 가장 쉽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이왕 한번 해보려면 어리석은 자같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람은 최고로 어리석은 자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볼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어리석게 알고 있습니다. 천만부당한 사실입니다. 그 심정의 기준을 찾기 위해서는 어떠한 곳에도 갑니다. 옥중에 있다면 옥중에도 가고, 토굴에 있다면 토굴에도 가고, 빈민굴에 있다면 빈민굴에도 갑니다. 세기의 난관이 있는 곳이라도 거기에서 하나님의 심정을 찾을 수 있다면 그곳에 가겠다고 할 수 있는 배포를 가진 통일신도를 만들고자 하는 것이 여기서 외치는 사람의 배포입니다. 편안한 자리서 그것을 즐기면서 웃고 살 수 있는 사람이 하나님을 모실 수 있어요? 그런 사람은 십자가를 지고 뒤넘이치는 자리에서는 하나님의 친구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20세기 문명의 첨단에 선 오늘의 세계 인류는 공동 운명의 자리에서 인간이 이루어 놓은 문명 앞에 공포를 느끼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들은 무엇을 찾아야 할 것인가? 주의도 종파도 전부 다 잃어버려도 좋습니다. 하나님 한 분을 찾아가야 됩니다. 하나님을 점령하는 데는 무엇을 갖고 점령해야 하는가? 사정도 물질도 어떠한 교파도 아닌 심정입니다. 심정을 갖고 점령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으되, 만우주를 움직일 수 있고 하나님을 움직일 수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한국 땅에 나타난다면, 이 한국은 앞으로 하나님의 심정의 세계에서 주도권을 쥐고 만천하 인류 앞에, 혹은 저 천상세계 앞에 호령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필시 그런 때가 오리라고 자신합니다. 이런 한국이 될 것입니다.
요즈음 보면 부모가 자식을 죽이고, 자식이 부모를 죽이고, 부인이 사랑하던 남편을 칼로 찔러 죽이고, 장로가 사람을 죽입니다. 이런 시대에 ‘다 가라, 부모도 나에겐 상관없다. 다 지나가라.’ 하며 부모 이상, 사랑하는 자식 이상, 이 세계의 어떠한 주의 이상의 다른 가치적인 것을 가진 사람,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빼앗기고 나서도 감사하며 눈물 흘릴 수 있는 그런 사람, 그러한 이념을 가진 사람이라면 수습 못 할 것이 없습니다. 싸움이 든 수백억짜리 금전 문제든 수습 안 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절대자의 권세를 갖추고 절대자의 심정의 권한을 갖춘 하나의 주인공으로서 이 땅에서 행세하기 위한 것이 인간을 대한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원컨대 그러한 섭리가 한국 땅을 통하여 이 세계 앞에 나타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버님이 거치신 길고 긴 그 노정에서 핏자국이 어려 있음을 알았사옵니다. 그러고도 탄식과 서러움이 앞길을 막을 적마다, 통곡하시는 아버님의 형상을 볼 적마다 외로우신 아버님의 아들 된 것을 원망하기도 했사오니,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역사노정에서 많은 수고를 한 자가 있다 할진대 그분은 우리의 어떠한 선조가 아니요, 어떠한 애국자도 아니요, 이 세계의 문명을 위하여 공헌한 과학자도 아니옵니다. 우주 전체가 동원하여 영광을 드리고 찬양하여야 할 그분은 어떠한 도주(道主)도 아니요, 어떠한 지배자도 아니오라 홀로 수고하시는 아버님이신 것을 알았사옵니다.
이제 당신의 이름을 만방에 떨치어 만민이 찬양하고 심정을 다하여 그리워할 수 있도록 해야 되겠사옵니다. 역사상에서 수고하신 아버지요, 역사적인 고통을 받으신 아버지요, 피눈물의 제단이 연속되는 노정을 서슴지 않고 걸어오신 아버지인 것을 알았사오니, 그 아버지를 무한히 높이고 그 아버지를 무한히 찬양하는 소리가 이 민족을 통하여 울려 퍼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민족은 아버지를 배반하였사오나 아버지는 이 민족을 배반하지 아니하셨사옵고, 세계는 아버지를 배반하였사오나 아버지는 세계를 배반하지 아니하셨고, 수많은 역사는 아버지를 거부하였사오나 아버지는 그 역사를 거부하지 아니하셨사오니, 온 천하에 그런 아버지를 자랑하고, 온 천하에 그런 아버지의 심정을 자랑할 수 있는 때가 어서 오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는 수고하셨사오나 당신을 대신하여 땅 위의 악한 세계와 싸울 수 있는 하늘의 정병은 갖지 못하셨사옵니다. 아버지의 뜻을 위하여, 아버지의 이념을 위하여 아버지의 심정을 갖고 싸워줄 수 있는 백성을 갖지 못하셨사옵고, 아들딸을 갖지 못하셨사오니 얼마나 안타까우시옵니까?
어떠한 주의와 어떠한 사상을 위하여 죽은 자들은 있었으나 하늘을 위하여 간곡한 심정을 갖고 희생한 자를 찾지 못한 아버지이셨사옵니다. 오늘 여기에 모인 당신의 아들딸들, 한국 백성으로 태어난 것을 원망하는 자들이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보다 나은 환경이 되었사오니 여기에 심정을 기울여 세계적인 생명을 염려하시던 옛날 예수님의 심정과 수많은 도주의 심정을 넘어서서 아버지와 인연 맺을 수 있는 아들딸이, 여기에 나온 사람들 가운데 많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제 저희가 세계를 찾아오시는 아버지를 모셔야 할 입장에 있는 한국, 역사적인 위치에 있는 한국임을 알고, 심정으로 각오하고 결심하여 당신이 자랑할 수 있는 늠름한 아들딸의 기세와 모습을 어둠과 혼돈 가운데서라도 스스로 갖출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때에 자랑할 수 있는 모습이 되기 위해 준비하는 아들딸들이 많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옵나이다.
남아진 전체의 시간 위에도 아버지의 생명의 권한이 떠나지 마옵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리며,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아버지, 오늘도 저희들은 여기에 부복하였사옵니다. 저희들은 이 자리에 설 적마다 나는 누구를 위하여 서 있는 것이냐고 스스로 반문하지 않을 수 없사옵나이다. 아버지를 위하고 인류를 위하고 이 민족을 위하고, 수많은 교단과 수많은 당신의 아들딸들을 책임질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하늘 아닌 다른 무엇이 저희를 지배하는 시간이 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그립사옵니다. 은밀한 자리에서 약속하시던 아버지의 음성이 그립사옵고, 저희를 사랑하사 참고 견디며 가라고 권고하시던 아버지의 충고의 말씀이 그립사옵니다. 사람은 누구나 새로운 자극, 더 강한 자극을 받고 움직일 수 있는 새로운 환경을 그리워하며 살아가고 있사옵니다. 그러기에 인간은 역사를 창조해 나왔사오며, 개인의 인연을 넓혀 사회를 개척하고 나아가 민족을 형성하고 국가와 세계를 세워 나왔사옵니다.
인간들이 이렇듯 더 높은 이상을 추구하고 새로운 기쁨을 맛보기 위해 나왔다는 것을 생각할 때, 인간을 지으신 아버지는 더욱 그러하실 것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인간을 지으신 아버지는 더욱 그러하실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옵니다.
인간이 슬퍼하며 눈물 흘릴 때 아버님도 눈물 흘리셨사옵고, 인간이 한숨지을 때 아버님께서도 한숨 지으셨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참다운 선을 위하여 죽음도 개의치 않고 생명을 바쳐 달음질치는 자들에게는 어두움과 원수의 모든 방해를 물리치고 새로운 부활의 역사를 일으켜 주신 것을 저희들은 잘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님, 이 민족은 굶주린 민족이었사옵고, 의지할 곳 없는 민족이었사옵고, 소망이 없는 민족이었사옵고, 자랑할 것이 없는 민족이었사옵니다. 어느 것 하나에 의지할 적마다 이 민족은 그것에 사로잡혔고 그것에 유린 당해 나왔사옵니다. 그런 까닭에 이 민족을 대하시는 아버님의 슬픔이 컸던 것을 저희들은 부인할 수 없사옵니다.
이 민족의 역사를 살펴볼 때, 다른 민족들의 침략으로 수많은 곡절이 얽히고 설켰사옵고, 그때마다 백성들은 찢기고 유린당하고 몰리고 처참한 자리에 처했었던 것을 당신은 아시옵니다.
여기에 이 민족의 피 살을 받은 저희들이 모였사옵니다. 저희들이 이 민족의 한을 풀기 위해 하늘 앞에 호소할 때는 되었사옵니다. 이 민족이 처참한 지경에 놓여 생사의 기로에서 우왕좌왕하고 있는 이 판국에 중심이 될 자가 누구이겠사옵니까?
저희들은 인간의 그 무엇을 믿기를 원치 않사옵니다. 그 무엇도 의지하고자 하지 않사옵니다. 이 마음 중심에서 우러나는, 하늘을 중심삼고 폭발 되는 그것이 민족을 지도하는 한 날이 오기를 저희가 몰리고 쫓기면서도 호소했던 사실을 아버지께서는 아실 것이옵니다. 이날도 그러한 인연을 맺기 위해 여기에 섰사옵니다.
여기에 모인 당신의 아들딸들이 그 마음으로 무엇을 찾고 있사옵니까? 자랑할 것이 있사옵니까? 세상의 지식을 갖추었사옵니까? 세상 영광된 무엇을 가졌사옵니까? 그러나 인간적으로 갖춘 모든 것은 인간과 더불어 사라질 것이오며, 아버지와 인연 맺을 수 없다는 것을 저희들은 명백히 알았사옵니다. 하늘을 대해 솟구쳐 오르는 심정과 충절을 다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은 어떠한 철학이 준 충격에 의해 우러나는 것이 아니옵고, 인류역사가 준 충격에 의해 우러나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사옵니다.
오늘날의 종교는 그 무엇을 가지고도 부활의 은사를 찬양하고, 하늘을 향해 울부짖던 옛날 초대교회 신도들의 충천되었던 심정을 충격시키지 못한다는 사실을 저희들은 잘 알고 있사옵니다. 믿고 바라고 나오다가 피를 흘리기도 하며 낙망도 하던 저희들이, 이제 모든 것을 벗어버리고 어린아이와 같이 벌거숭이 몸으로 아버지 앞에 나왔사옵니다. 많은 학식은 저희의 마음을 복잡하게 하였사옵고, 많은 주의(主義) 역시 저희의 생활환경을 처참하게 만들었사옵니다. 알고 보니 저희에게 스승이 있었다 할진대 오직 양심과 그 양심에 충격해 들어오는 천륜의 어떠한 경고밖에 없었사옵니다.
이제 해방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때가 되었사옵고, 새로운 심정의 봉화를 올리고 행군의 나팔을 불지 않으면 안 될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알았사오니, 아버지, 뜻있는 청년들을 모으시옵소서. 피눈물을 흘리며 이 민족을 위하여 울부짖는 당신의 아들딸들을 모으시옵소서.
저희들은 어떠한 주의를 좇아 호소하는 무리가 아니옵니다. 그보다는 저희가 먼저 죽음으로써 거름이 되어 이 민족 위에 새로운 싹으로 돋아날 수 있기를 고대하고 있사옵니다. 그러한 저희들이 되겠노라고 당신 앞에 맹세하옵니다. 하오니 아버지, 말하기 전에 먼저 당신의 심정을 체휼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고, 당신만이 간절한 마음으로 저희의 가슴을 점령하시고, 저희의 심장을 녹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초자연적인 인식으로 자신을 재 감정하고, 자기의 존재 위치를 확정지어 새로운 부활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를 당신은 얼마나 그리워하였사옵니까?
아버님께서 바라고 바라시던 소망의 한 때가 가까운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나이다. 이제 여기에 모인 당신의 아들딸들, 어린애의 심정으로 돌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인간이 그 무엇을 안다 하더라도 그것이 천상의 것과는 비교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당신의 품에 안기는 그 순간의 만족함이 있어야 시간관념을 초월하여 영원히 기뻐할 수 있고, 시간관념을 초월하여 영원히 감사할 수 있고, 영원히 행복을 노래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그런 세계, 아버지께서 바라시던 창조이상세계가 이 땅 위에 이루어져야 할 것 또한 알고 있사옵니다.
오늘 저희는 사회에서 빚어지는 곡절로 인해 상처를 받고 있사오나 이것을 메우고 시간을 초월할 수 있는 영원한 자유와 행복과 평화의 세계를 고대하고 있사오니, 그러한 세계와 인연되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런 세계로 이끌어 주시는 아버지이신 것을 알고 있사오며, 그런 세계를 만들기 위해 모든 희생을 각오하고 나서야 할 저희들인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하오니 이것을 위하여 나서는 걸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축복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게 인도하여 주시옵고, 아버지의 자녀 된 명분을 세우기에 부족함이 없는 모습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 이 도성을 긍휼히 보시옵고, 이 민족을 긍휼히 보시옵고, 이 인류를 긍휼히 보시옵소서.
이제 저희들에게는 사망의 물결치는 환경을 헤쳐 나갈 수 있는 생명선이 필요하옵니다. 그 생명선을 타고 구원받은 은사를 노래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고, 승리의 개가가 이 천지에 울려 퍼질 수 있는 날이 어서 속히 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 무슨 말씀을 하오리까? 허락하신 뜻을 받들고 나섰사오니 전하고자 하시는 당신의 소원과 뜻을 나타내시옵소서. 전하는 자의 마음이나 받는 자의 마음이 하나되게 하여 주시옵고, 이제까지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것과 인연을 맺을 수 있으며, 새로운 그 무엇을 갖고 돌아갈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올 때,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말 씀> 오늘 여러분과 같이 생각하려고 하는 말씀의 제목은 ‘모든 존재 의 목적의식과 하나의 세계’입니다. ‘모든 존재의 목적의식과 하나의 세계,’ 이러한 제목을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 개개인은 많은 존재물 가운데 하나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존재하게 된 데에는 어떤 동기가 있는 것입니다. 그 동기는 나와 비교해 볼 때 어떤 면으로 보든 나 이상의 절대적인 것이요, 힘의 원천이어야 한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작은 풀 한 포기에도 그 배후에는 그 이상의 힘이 있으며, 생물체로서 존재하게 하는 절대적인 원천이 있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 인간, 즉 내 한 개체를 보더라도 생리적인 현상이 있고 감정과 심정의 작용이 있습니다. 이런 것을 볼 때 그러한 현상을 있게 하는 작용을 일으키며 심정을 유발시키는 동기적인 그 무엇이 반드시 우리의 배후에 있다고 추론할 수 있습니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은 자기의 존재가치도 모르면서 자기를 그저 높게만 평가하려고 합니다. 땅 위에 아무리 지식을 많이 갖춘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외적인 것을 가지고는 생명 이상의 가치를 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정치, 경제, 문화, 종교 또는 다른 어떤 면에 있어서 최고라고 만천하에 자랑할 수 있는 존재라 할지라도, 모체로부터 태어나면서 받은 생명의 가치 이상의 그 무엇을 가졌다고는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인 것입니다. 이런 견지에서 볼 때, 오늘날 이 세계가 과연 진실한 세계이며 이상세계인가 하는 문제가 대두됩니다.
인간은 무엇보다 귀한 생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생명을 움직이고 이 생명에 충격을 주는 힘의 대상체로 살지 않는 한, 우리는 그 힘의 상대적 세계인 이 세계에서 안식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인간은 내 생명 이상의 절대적인 생명체와 인연을 맺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필연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뜻을 세워 놓고 섭리해 오시는 분에게 절대자니 하나님이니 하는 명사를 부여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종말시기인 이때를 살아가는 사람은 지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고민이 크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그 고민이 자신의 생명력을 지배하여 생명이 안식할 수 있는 복지를 개척할 수 없게 한다는 것 또한 누구나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있어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절대자로 말미암은 생명의 안식처입니다. 이를 너나할것없이 요구하고 있는 것이고, 민족을 넘고 동서의 문화를 넘어 모든 사람이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견지에서 우리는 절대자와 인연 맺을 수 있는 그 무엇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많은 지식을 갖추고 인격수양을 한 자일수록, 의식을 통하여 인식하는 감각이 예민한 자일수록, 자기가 알고 있는 전문 분야만으로는 생명의 안식처를 개척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인간임을 알아야 합니다. 고민으로 출발하여 고민으로 종결짓게 된 인생노정이니 자랑할 무엇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러한 문제를 해결해 주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다 할진대 이 세계는 망할 것입니다.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어떠한 주의가 땅 위에 나오지 않는 한, 인류는 후퇴할 수 없고 전진할 수도 없는 절망 상태에 놓이게 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절실히 느껴야 되겠습니다.
인간은 이러한 사실을 몰랐지만, 예로부터 지금까지 인간을 통해 하나의 생명의 문을 온 천지간에 개방하기 위하여 수고해 나오신 분이 계시나니, 그분이 바로 절대자 하나님이십니다. 이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생명의 복지를 건설해 주실 주인공, 절대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이 이러한 신의 실존을 인정하고 그 해결 방법을 찾아 나오는 것이 종교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종교는 관념적인 것을 붙들고 허덕여 왔습니다. 때문에 이 관념적인 종교의 형태를 어떻게 생명적인 종교의 형태로 전환시킬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종교가들은 이 문제에 최대의 정열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이 문제는 천상에 절대자가 있다면 그 절대자에게서 직접 해답을 얻어야 할 중대한 문제인 것입니다.
창조주가 계셔서 그로 말미암아 지음받은 피조물이라 할진대 그 피조물에게는 반드시 어떤 목적을 달성코자 하는 목적의식이나 목적성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라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의 미물도 그것을 지은 주인공이 있다 할진대 그 미물에게도 반드시 주인공으로부터 부여받은 목적의식 내지 목적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 자체가 갖고 있는 목적의식이나 목적성보다도 그것을 지으신 절대자가 부여해 준 목적의식이나 목적성이 선재(先在)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모든 존재물은 절대자의 어떤 목적의식에 의해 지어졌다는 것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배운 것이 많고 안목이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목적의식이 더 강해지는 것입니다. 나아가 가지고 있는 권한이 커지면 커질수록 목적의식도 커지는 것입니다. 어떤 주권을 세운 주권자가 있다 할 때, 그가 그 주권을 중심삼고 목적하는 바의 가치를 크게 느끼면 느낄수록 더 새롭고 넓은 범위의 것을 이루고 싶어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기에 우리 인간은 개인에서부터 가정을 넘어 사회, 국가, 세계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이런 문제 때문에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6천년이라는 역사노정을 거쳐오면서 인간이 소망한 세계가 이러한 세계로 종결될 것이냐? 그렇다면 너무 허무한 것입니다. 이것을 넘어 완전무결한 세계는 없을 것인가, 종교를 초월하고 동서의 차이를 넘어서고 더 나아가서는 하늘땅이 하나의 생명체에 접붙여져 가지고 움직일 수 있는, 목적의식이 실현된 세계는 없을 것인가 하고 머리가 좀 깨인 사람이면 누구나 생각할 것입니다. 그럴 때가 왔습니다.
우리들이 살면서 느끼는 감각의 일체는, 우리가 어떠한 목적의 세계로 향하여 나가도록 내몰고 있는 것입니다. 그 목적의 세계를 내가 다 알 수는 없지만 오관을 통해 느껴지는 감각은 더 큰 목적의 세계로 향하여 나아가도록 나를 내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내모는 데는 무엇을 기준으로 내모는 것인가? 인간은 이념과 의식을 통하여 인식된 관념을 세워 생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전체의 목적의식에서 느껴 들어오는 감각과 생명을 기반으로 내모는 것입니다.
여러분, 의식이 무엇입니까? 의식은 쉽게 말하면, 실제로 우리가 체험할 수 있는 일체의 경험이나 현상입니다. 심리학자들은 말하기를 의식에는 경험이 내포되어 있고 표상이 내포되어 있고 감정이 내포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오관을 통하여 체험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의식을 통하여 절대목적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절대적인 목적의식으로 생명을 지배할 수는 없습니다. 철학이나 심리학이 이 문제를 풀 수 있는가? 불가능합니다. 모든 학문은 이 문제에 봉착해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몸은 비록 작지만 이 마음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 무한한 세계로 뻗어나갑니다. 그런데 이 마음이 생활 속에서 세계적인 어떠한 목적의식과 연결되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탈선하고 맙니다. 악의 구렁텅이로 휩쓸려 들어가 절망 상태에 빠져 버릴 거예요.
인간에게는 환경을 수습할 수 있는 양심이 있습니다. 또 그 양심을 수습해 주는 윤리와 도덕이 있습니다. 이 윤리와 도덕은 더 높은 이념과 연결되어 있어서 인간은 그 이념을 기반으로 하여 더 높은 것을 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인류는 생명적인 문제에는 손도 못 대고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해결하겠습니까?
하나님이 계신다 할진대 그 하나님은 모든 존재하는 것의 목적과 가치를 세워 놓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려면 한 존재를 세워서 생명적 기준을 완결짓고, 목적의식을 지닌 모든 존재가 하나님의 생명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해방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그날이 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날이 오지 않는 한, 인류에게는 참다운 해방이 있을 수 없고, 참다운 자유의 생활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종교는 생명을 주창해 오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목적의식을 분석해 보면 두 가지의 방향이 있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는 몸이 먹고살기 위한 생활적인 방향이요, 둘째는 그것을 넘어서 양심을 기반으로 하여 움직이는 생명적인 방향입니다. 오늘날 어느 철학가도 이 둘 사이의 경계선을 넘지 못하고 있습니다.
종교인들은 생명적인 방향에 중점을 두고 세상 사람들은 몸적인 방향, 외적인 방향에 중점을 두고 목적의식을 향하여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방향을 취하여 나오는 것이 지금까지의 현상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어느 때에 규합시킬 것이냐? 하나님께서는 도의 길을 걸어오는 사람, 심령이 갈급하여 모든 정성을 다하며 하늘을 따라 나오는 충성된 아들딸들을 어떤 방향으로 인도하셨습니까? 잘 먹고 잘 사는 방향으로 인도하시지 않았습니다.
타락한 그날부터 인간이 다시 목적의 세계를 향하여 전진해야 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이 세계를 내적인 의식을 기반으로 하여 다시 세우기 위해서는 무한한 투쟁과 무한한 고충을 거쳐야 된다는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시기에, 그래서 결국에 가서는 생명을 기반으로 한 세계를 세워야 한다는 것을 아시고, 인간에 대한 사랑의 심정을 가지신 하나님이시기에 인간으로 하여금 이 세계를 부정하게 하고 이 세계의 나아갈 길을 개척하게 하지 않을 수 없고, 또 그런 방향으로 인도하시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하나님은 인류를 수습하기 위해 종교를 세워 나오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종교를 따라 나가는 사람들은 외적인 일체를 부정해온 것입니다. 외적이고 환경적인 모든 인연과 사정으로 엉클어져 있는 모든 것을 버리고, 나아가 심정문제까지 넘어 혈혈단신 생명의 목적지를 향하여 달려 나가라고 충고해 내려온 것이 지금까지의 종교의 발자취입니다.
그러기에 인간들의 목적의식은 하나의 세계, 하나의 귀결점을 찾아나가는 것이고, 하나님도 그렇게 섭리하고 계심에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 목적하는 실체의 가치를 이루게 해서 만천하 앞에 자랑할 수 있는 하나의 존재로 세우고 싶어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이 가야 할 길이 바로 이 길인데, 이 길로 가라 하시는 하나님이 얼마나 고마운가를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막연한 목적의식이 아닙니다. 막연하더라도, 주위의 환경에서 십자가의 고통이 가해지고 어떠한 핍박이 있다 할지라도 마음에 느껴지는 의식 관념을 중심삼고 정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 인간이 이러한 생명적인 내용을 다 갖추고 복지의 내용을 갖추어 생명에 충격을 주는 이념을 가졌다면 그 이상 바랄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 목적을 향하여 나아가는 인간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들이 도달해야 할 귀일점은 어디뇨? 의식이나 관념을 넘어서 자유로이 느낄 수 있는 새로운 세계일 것입니다. 절대자가 있다 할진대 절대자의 창조이념이 있을 것이요, 창조이념이 있다 할진대 그 이념이 추구하는 목적의 세계가 있을 것입니다. 창조주라면 목적하는 바의 그 세계의 바탕이 될 수 있는 가치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치를 찾아 나오는 하늘임에 틀림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또한 먹는 것도 그 목적 때문에 먹고사는 것도 그것 때문에 살아야 합니다.
그 목적의식과 생활적인 관념과 가치적인 인연을 맺는 데 있어서, 하늘 앞에 책임을 하는 데 있어서 양심은 우리에게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이런 위치에 있는 인간이라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됩니다. 이러한 입장에 놓여 있는 인간입니다. 그 목적의식은 인류를 움직이고 천륜을 움직여 역사를 수습하고 관념을 바꾸어 나가면서 이념적인 종족을 선택하여 그 목적지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입장에 계시는가를 알아봅시다. 하나님은 목적의식을 통하여 보고 듣고 말하고 느끼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지정의(知情意)가 있는 것같이 하나님에게도 지정의가 있습니다.
그러면 지정의의 본체가 되시는 하나님은 어떠한 목적의식을 갖고 계시는가? 창조하고 나서부터 목적의식을 가진 것이 아니라 창조 전부터 목적의식을 가지시고 창조하셨음에 틀림없습니다. 만일 그런 분이 아니라 할진 대 역사를 수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인식으로는 느낄 수 없는 힘이 역사의 배후에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께 그런 인연이 없다면 역사와 모든 인류를 목적하는 세계로 인도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타락하였을망정 타락하지 않은 인간에게 부여하여야 할 세계적인 목적의식을 뼈저리게 느끼고 계시는 것입니다.
목적의식을 넘어서 이루어지는 세계는 자유의 세계요, 무한한 행복의 세계요, 평화의 세계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목적의식을 넘어 심정의 세계까지 생각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세워 놓고 만물을 주관하라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만물뿐만이 아니라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존재물을 인간이 주관하게끔 지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창조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거예요. 하나님께서 옛날에 아담에게 가르쳐 주고 싶었던 주의가 무엇인지 여러분 아십니까? 하나님이 뜻하시는 목적을 이룰 수 있는 창조이상세계의 주의를 가르쳐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가르쳐 주지 못했습니다. 그런 주의가 안 나왔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시지만 땅은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이 땅은 알고 계시는 하나님을 배반하기를 일삼았습니다. 그러니 이 땅은 심판을 받아야 됩니다. 세계의 문화사를 좀 안다 하고 자기의 주의 관념을 세워 이만하면 사회에서 똑똑한 사람으로 행세할 수 있겠지 하며 자랑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에게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소원하시던 것이 무엇이오?’ 또 ‘아담을 통하여 하나님은 어떠한 가치를 세우고자 하셨겠소?’ 하면 ‘모르겠습니다.’ 할 것입니다.
인류는 원초적인 목적을 잃어버렸고 이념을 잃어버렸습니다. 창조이념의 목적과 하나님과 인간이 더불어 살아야 할 하나의 세계를 잃어버렸습니다.
그 세계는 어디로 갔는고? 인류는 꿈에도 그 세계를 그리워하고 생시(生時)에도 그 세계를 그리워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생명은 오늘도 쉬지 않고 그 세계를 향하여 가려 하지만, 이 생명의 힘이 부족합니다. 그러기에 선을 나타내기 위해 인류의 대표로 왔던 모든 도인, 혹은 수많은 성도와 성현들이 악한 땅을 그 세계로 끌고 가려다 전부 죽어갔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생명의 원천으로, 그 자체를 목적의식으로 체휼하고 체험했기 때문에 죽음의 고비도 넘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인류 앞에 다리를 놓아 나온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말하기를 하늘이 있고 땅이 있고 신과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세계는 이 천지신인(天地神人)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들은 각각 다릅니다. 하늘과 땅, 신과 사람이 따로따로 갈라져 있습니다. 천지는 하늘과 땅으로, 신인은 신과 인간으로 각각 떨어져 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수습해야 합니다.
우리는 땅을 떠나 살 수 없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양심과 보다 높은 천륜을 떠나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양심은 천(天)을 대신하고 몸은 지(地)를 대신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천지를 화합할 수 있는 하나의 가치를 지닌 존재, 절대자가 있다 할진대 그 절대자와 심정적인 인연을 맺을 수 있는 대표적 존재로 세워진 것이 인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땅을 대신한 몸과 하늘을 대신한 마음과 하나님을 대신한 심정이 규합하는 날에는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입니다.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만약 인간의 몸과 마음, 하나님과 인간을 심정적으로 일체가 되게 할 수 있다면 세계통일뿐만이 아니라 천지통일도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입니다. 인간의 생각이 이렇거늘, 하물며 창조이념을 세워 이 천지를 창조하신 분의 생각이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럴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하나님은 이 천지와 인간과 어떠한 관계를 맺기 위해 천지만상(天地萬象)을 지으셨을 것이뇨? 인간은 이것에 대한 결론을 내려야 합니다. 만일에 이 문제에 대해, ‘천지신인(天地神人)은 일체요, 심정적으로 통일해야 한다.’는 최후의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승리의 용자가 있다 할 진대 그의 몸은 하나님의 몸일 것이요 그의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일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가 ‘나는 하나님과 일체다.’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심정을 기반으로 하여 모든 존재물을 지으셨기에, 하나님의 심정을 벗어난 만물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는 하나님과의 심정의 귀일점을 찾아 그 자리를 닦아 놓기 위하여 이 땅 위에 와서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독생자다.’라고 했습니다. 메시아! 덮어놓고 메시아라구요? 무조건 메시아가 아닙니다. 역사상에 수많은 위인들, 혹은 선지들이 왔다갔지만, 어느 누가 그런 말을 했습니까? 어느 누가 자신은 신랑이라 하고 인간을 신부라 하고 자녀라 하였습니까? 여기에 뜻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떠한 주의나 사상을 중심삼은 사회제도에 의한 가정 말고, 하나님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가정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자녀가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백성과 인류는 어디 있습니까? 목적의식을 통하여 영원한 행복을 노래하며 생명을 걸어 놓고 즐길 수 있는 사람은 어디 있습니까?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응당 구원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목적을 세워 놓고 인간에게 생명을 주셨다 할진대 그 생명을 그냥 그대로 두려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생명의 내용을 더 깊이 파고 들어가게 되면 심정이 나옵니다. 심정은 사랑입니다. 생명이자 사랑입니다. 그러기에 생명을 주창하고 사랑을 주창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오늘날까지 바라시는 것은, 당신이 생명의 주체요 사랑의 주체로서 당신의 목적의식 아래 참생명체가 된 인간과 더불어 사랑의 이상세계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세계가 아직까지 이루어지지 못한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역사는 절대적인 생명 기준 앞에 모든 것을 귀결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절대적인 창조목적과 절대적인 목적의식을 통하여 하나님과 하나되어야 합니다. 하나되는 데는 이념적으로 접해야 되고, 나아가서는 생명적으로 접해야 됩니다. 생명적으로 접한 후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가 ‘나는 생명이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는 무엇을 남기고 갔느뇨? 사랑을 남기고 갔습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하였습니다. 그것은 무슨 말이뇨? 목적하는 세계에 당도하려면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을 한 번이라도 받은 사람이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가요? 하나님을 반대해요? 그럴 수 없다는 거예요. 인간도 끼리끼리 한 번 사랑한 사람은 죽어도 못 잊거늘, 하물며 목적의식의 세계를 넘어갈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체휼한 사람이 이 땅의 그 무엇에 항복하겠습니까? 예수가 원수를 대해 축복할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자, 그러면 우리의 마음의 문을 열고 바라봅시다. 감정과 감촉은 목적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나의 모든 움직임이 그 목적의 세계를 향하여 전진하고 있습니다. 내 개인이 그러하고 가정이 그러하고 사회가 그러하고 세계가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세계가 그냥 그대로 그 목적의 세계로 넘어갈 수 있겠습니까? 그냥 그대로 넘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니 천지개벽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땅 위에 있는 어떠한 종교의 경서(經書)를 보더라도 마지막에는 천지개벽이 결론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천지개벽이에요.
여러분, 사람들은 눈으로 보는 모든 것을 좋아합니다. 높은 용상에 앉아 있는 황제나 거지를 막론하고 사람이면 모두가 생명적인 물건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그 인식의 수준이 높고 낮음에 따라 좋아하는 정도가 다를 뿐이지 좋아하는 그 자체는 누구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보는 것도 하나로 귀일되고 듣는 것도 하나로 귀일되게 하기 위해 나온 것이 예술과 문화입니다.
훌륭한 화가의 그림을 볼 때, 그 그림을 통하여 무엇을 볼 수 있어야 되느냐? 세계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세계적인 화가가 될 수 있습니다. 듣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번 듣고 싫증나는 음악은 명곡이 아닙니다. 성이 났을 때나 슬플 때나, 고통받을 때나 희희낙락할 때나 다 좋다고 할 수 있어야 명곡입니다. 즉 시간을 초월하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시대를 초월하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도 부정 못합니다.
오관을 통하여 들어오는 모든 느낌은 사람이라면 다 마찬가지입니다. 동양인이나 서양인이나, 문명인이나 미개인이나 사람이라면 모두가 마찬가지입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 본질을 분석하여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관을 통하여 모든 것을 감각하도록 인간을 창조하였다 할 진대 인간이 감각을 통하여 느낀 행복이 일시적인 것으로 끝나게 된다면, 그 하나님은 이상적인 창조주가 아닐 것입니다. 시간적인 창조주요, 한계적인 창조주일 것입니다.
현실적으로는 어렵다 하더라도 추상적인 관념에서 생각해 볼 때 하나님이 창조하신 천지만물이라면 미개인이나 문명인을 막론하고 사람이면 누구나 한 번 보더라도 영원히 체휼될 수 있는 내용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듣는 것에서나 느끼는 것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야 이상적인 하나님이요, 절대자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그런 입장에서 생각해 볼 때, 인간에게는 오관을 통하여 들어오는 의식과 인식을 넘어서 직관적인 양심을 통하여 들어오는 것이 있습니다. 칸트도 분명히 그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인간이 그 세계를 포착하여 그 세계의 문을 열고 거기서 직감적인 그 무엇을, 영감적인 그 무엇을 체휼하였다 할 진대 한번 본 것은 꿈에서도 잊지 않을 것입니다. 한번 본 것이 천년 만년을 간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신비주의자들은 자기가 본 영적인 세계의 일편을 주장하는 데에 죽을지 살지 모르고 생명을 바쳐 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음악도 한번 들으면 그 감정이 영원해야 합니다. 한번 빠져들면 마지막인 것처럼 취해야 됩니다. 최고의 이상주의라는 것은 인간을 그렇게 취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시간을 초월하고 생활환경을 넘어서 세계적인 감정의 세계까지도 넘어서야 합니다. 이것이 이상주의자들이 거쳐가야 할 노정인 것입니다.
인간이 천지신인(天地神人)을 합성한 존재로서 모든 것을 감정하고 체휼하며 감별할 수 있게끔 지었다면, 하나님은 멋진 창조주인 것입니다. 거기에서 도통(道通)이라는 말이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하늘을, 인간을, 또 땅을 어디로 총집결시키느냐? 목적의식을 통하여 하나의 세계로 집결시키는 것입니다. 무엇을 가지고? 우리의 의식이나 관념을 지배할 수 있는 생명적인 내용을 가지고 하십니다. 그러면 이 생명적인 내용을 어떻게 내적인 의식관념과 접촉시키느냐 하는 것이 문제인데, 여기에 필요한 것이 사랑입니다.
이 땅 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부르짖다 갔지만, 목적의식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사랑을 체휼한 자는 없습니다. 이것을 체휼하고 제일 가까운 거리에서 인간에게 그 사랑을 자각할 수 있도록 충격을 주려 하신 분이 신랑으로 오셨던 예수입니다. 하늘을 대신한 예수는 하나님을 소유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하늘땅을 지배하시는 하나님이 예수에게 들어가셨으니, 예수는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사람, 세계를 뒤넘이치게 할 수 있는 실존체였던 것입니다. 예수의 이념, 이것은 곧 하나님의 이념이요, 인간의 이념입니다. 이것이 나라는 한 존재에서 귀결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생명적인 기준, 즉 사랑을 세워 가지고 오늘날까지 인류를 대하여 나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들은 어떠한 입장에 있으며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우리는 목적의 세계를 바라보며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 목적의 세계로 우리 인간을 몰아넣기 때문입니다. 목적의식을 통한 생명과 사랑의 인연을 갖춘 하나님의 아들딸이 등장한다면 목적의 세계는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세계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는 무슨 세계가 올 것인가? 천지와 신인이 일치된 세계가 올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심정에서 우러나오고 그 심정의 귀일점을 통하여 인연을 세워 나가고 수습하는 세계가 오는 것입니다. 심정적인 인연의 세계가 올 것입니다. 창조주는 아버지요, 인간들은 아들딸이라는 부자의 인연을 맺는 세계가 올 것입니다.
천지가 생겨난 그날부터 하나님은 그런 세계를 소망하셨지만 인간의 타락으로 그런 세계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 예수가 사랑의 인연을 맺고, 예수와 성신이 사랑의 인연을 맺어서 사탄세계를 멸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도 그러한 승리적인 기준이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예수와 성신이 하신 일은 여러분을 살려주는 일이었습니다. 생명을 부활시키는 것입니다. 부활의 목적을 달성해야 사랑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6천년 전 하나님은 아담 해와를 지으시고 그러한 세계를 이룰 날을 얼마나 그리워하고 얼마나 고대하셨겠습니까?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말을 타고 다닐 정도의 장성한 사람으로 지었을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자연의 법도에 의해 창조한 것입니다.
인간조상, 아담과 해와에게서 태어난 가인과 아벨은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심고 태어난 아들딸이 아닙니다. 아담과 해와는 하나님의 채찍에 몰려 쫓겨난 우리의 조상입니다. 그런 우리의 조상이라는 것입니다. 원래 아담과 해와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랑하는 아담아, 사랑하는 해와야, 내가 너희를 만우주의 창조목적의 세계, 사랑의 동산을 건설하기 위해 지었으니 너희는 평화의 왕이요 행복의 왕이다’ 하는 축복을 받아야 했습니다. 이 땅 위에 다른 어떠한 존재도 왕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조상만이 왕이 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아담이 천추만대 영원무궁토록 지상의 왕이요 천상의 왕으로 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천지가 생겨난 이후에, 신과 사람의 인연이 생겨난 이후에 비로소 왕의 이름을 붙일 수 있었던 분이 누구냐 하면, 바로 우리의 조상 아담이라는 것입니다.
그 왕은 곧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사랑입니다. 만약 아담 해와가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사랑을 기반으로 한 인간의 조상이 되었던들, 왕이지 뭐겠어요? 그렇게 되었으면 우리는 모든 존재세계 앞에 왕자로 탄생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아담 해와에게 만물을 주관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해 주셨습니다. 그 목적은 무엇이겠습니까? 아담을 하나님의 심정과 하나님의 생명과 영원토록 동반할 수 있는 황태자로서 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 해와를 황후로 등극시키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조상인 아담 해와를 대해 원망해야 되겠습니다. ‘6천년 동안 쌓여온 하나님의 분함은 칼을 들어 그들의 목을 쳐도 풀릴 수 없겠다.’ 하며, 과거 조상들의 천륜을 배반한 사실을 오늘의 생활에서 크게 느끼고 격분하는 자가 있다 할진대 하늘은 그를 축복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아야 합니다. 인간과 천지의 창조 이후 하늘의 왕자가 오지 않았기에, 그 왕자를 등극시키려는 것이 재림사상입니다, 재림사상. 믿으면 천당 간다는 것은 막연한 신앙입니다. 그렇게 주먹구구식으로 신앙할 때는 지나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목적의식을 통하여 세상을 수습해 나오고 있으며 인간을 그 목적의 세계로 몰아내기 위해 지금까지 역사해 나오셨습니다. 왜? 목적을 이룰 때가 남아 있기 때문에 역사를 몰아오시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많은 희생자가 있었습니다. 인간을 치며 역사해 오시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민족을 세웠다가는 칩니다. 그렇게 들이치며 역사하셔야 된다는 것입니다. 가야 할 노정은 직선이로되 가고 있는 길은 꼬불꼬불합니다. 꼬불꼬불하게 가고 있어요. 그러니 들이쳐서 개인을 움직이고 가정을 움직이고 사회를 움직이고 국가를 움직이고 세계를 움직여 나오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의 사조는 두 개로 갈라져 있습니다. 좌우(左右), 유심(唯心)과 유물(唯物)로 갈라져 있는데 이들은 어느 한 날 서로 부딪치게 될 것입니다. 부딪치는데 기쁨으로 부딪치느냐 공포로 부딪치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공포로 부딪치는 날에는 전세계는 사망이요, 기쁨으로 부딪치는 날에는 전세계는 행복입니다. 위협과 공포로써 하나를 만들고자 하면 끝이 있으되, 평화와 기쁨의 내용으로 하나를 만들고자 하면 영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기로에 놓여 있는 현실입니다. 더욱이나 이런 현실에서 최고의 제물된 입장에 있는 것이 한반도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예수를 믿는 기독교인들입니다. 그러니 기독교인들이 불쌍합니다. 그런데 오늘의 한국 기독교는 떨어졌습니다. 그들보다 더 불쌍한 사람들이 여러분들입니다. 제일 불쌍한 사람들이 바로 여러분들인 것입니다. 떨어진 기독교인들에게조차 배척을 받는 여러분입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맙시다. 시간을 넘고 시대성을 넘어서 보고 듣고 느껴 낙망하지 맙시다. 문제는 여기에 있는 거예요. 시간 관념권 내에서 느끼는 만족은 얼마 안 갑니다. 쉽게 해명할 수는 없지만 초월적인 그 무엇을 체휼합시다.
세상의 그 무엇도 나의 의식관념을 제거시키지 못한다는 기준을 갖고 하늘을 기반으로 자기의 가치를 하나님의 목적의식과 결부시키는 하늘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는 데는 개인이나 가정, 혹은 사회나 국가나 세계에 어떻게 천적인 심정을 결부시키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이 잠을 자는 동안에도 그런 내용을 인간에게 충격시키십니다. 해결해야 할 심정적이고 생명적인 내용을 갖고 인간을 찾아오십니다. 그래야 될 게 아니에요? 맹목적인 신앙을 하는 사람들은 깜짝 놀랄 것입니다. 어이쿠 할 것입니다.
나는 의식세계를 넘어선 창조목적의 세계를 원합니다. 풀 한 포기를 보더라도 거기에서 무궁무진한 평화의 감정을 느낄 수 있고, 그 존재가치를 찬양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보는 것도 그러하고 느끼는 것도 그러하여 인간이 비록 작은 존재로되 ‘한 개체가 움직일 때마다 천지가 움직이고, 하나님의 심정이 움직이고 영원한 생명이 움직이니 놀랍소이다.’ 하는 피조만물로부터의 찬양을 받을 수 있는 그 자리까지 가야 합니다. 인간이 가야 할 곳이 그런 곳입니다. 존재목적의 가치와 그 의식이 하나된 세계, 우리들이 느끼는 감각은 누구나 다 마찬가지일진대, 우리의 생명을 통하여 양심을 넘어 심정의 세계로 흘러 들어오는 영원한 생명의 감촉은 인간적인 그 무엇을 가지고도 주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조나 풍습여하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감정을 폭발시켜 만인간에게 접촉시켜 준다 할진대 세계는 통일이 될 것입니다. 천주가 통일되는 것입니다. 말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재림예수는 실제로 이러한 내용을 가지고 오십니다. 그래야 주님으로 맞을 수 있지요. 생각을 하려면 그렇게 해야 됩니다. 또 사실이 그렇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 사람이 괜히 해보는 추상적인 말이 아닙니다.
이러한 목적의식은 나를 추궁하고 있습니다. 마음의 세계는 자유와 해방을 요구하는데 환경은 그렇지 않으니 ‘이게 웬 일입니까?’ 하고 호소한다는 거예요. 그렇지요? 양심의 깊은 곳에서는 자유와 해방, 통일과 귀일, 무한한 행복을 노래할 수 있기를 고대하고 있는데, 살고 있는 생활환경은 어떠합니까? 공포와 위협이 나를 결박하고 있습니다. 그래요, 안 그래요? 수천 년 동안이나 이렇듯 결박당하면서도 오늘날까지 온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이제 하나님의 때가 가까웠거늘, 이 결박을 풀고 하나의 목적의식을 통하여 만우주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생명적인 존재, 하나님도 어쩔 수 없이 심정적인 인연을 맺고 그가 지옥으로 가면 지옥에까지 따라 가실 수 있는 존재가 나타나야 합니다. 그러한 심정적인 귀일점을 갖춘 분이 이 땅 위에 나타나지 않으면, 하늘과 땅은 망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아야 되겠어요.
여기에서 외치는 이 사람은 지금까지 이 민족 앞에 반대를 받았으나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어림없습니다. 두고 보자 이겁니다. 한 날을 바라보고 이를 악물고 나가는 것입니다. 입이 있음에도 말하지 않고 눈이 있음에도 보지 않고 귀가 있음에도 듣지 않고 모든 것을 참고 나가는 것입니다. 분한 일이 있어도 세상과 싸우지 않고 하나님을 붙들었습니다. 거기에서 반응이 없다면 보따리를 싸 짊어지는 거예요. 반응이 있으면 10년, 혹은 20년이 걸려도 가야 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세계는 심정주의 세계가 될 것입니다. 그 세계가 이루어지는 때가 이 땅 위에 평화의 왕권을 갖고 하늘 왕자가 등장하는 시기입니다. 이 때가 바로 재림시기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여러분은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이 세운 생명, 심정의 왕자가 등장할 그 때, 여러분은 그를 모시고 따라 그와 부자의 인연을 맺고, 가족의 인연을 맺고, 백성의 인연을 맺어 세계를 재건설해야 합니다. 이것이 목적의 세계, 지상천국의 이념입니다. 맹목적으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들은 이 나라를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어디를 가든 목적의식이 강해야 됩니다. 하나님을 대하여 ‘당신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선 아버지로소이다.’ 할 수 있는 충격을 받아야 되겠습니다. 하늘은 그것을 요구하십니다.
주먹을 움켜쥐면 천지가 움직일 수 있는 생명의 원천이 연결된 힘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목적의 세계를 찾아 나가고 있습니다. 생활적인 것과 영원한 생명적인 것을 위해서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여러분, 이 땅 위에서 자기의 목적이 다 이루어지면 무엇이 문제가 됩니까? 생사 문제입니다. 세계를 통일할 수 있고 세계를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는 권한을 가졌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영생에 관한 문제가 대두됩니다.
하나님이 역사를 초월하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분이라면 우리도 초월적인 생명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당신과 인연된 어떠한 무엇을 땅 위에 세워야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랑의 하나님이 되지, 그러지 않고서 사랑의 하나님은 무슨 사랑의 하나님입니까?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무한한 생명을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양심적으로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과 인연을 맺지 못했고 양심의 혁명도 못했고 생명의 혁명도 못했습니다. 자식이 죽는 것을 보며 좋아하는 부모는 없습니다. 그러기에 자신은 타락한 이 세계에서 타락의 혈통을 이어받아 타락의 피가 흐르고 죽음의 자리에 처하더라도 자식들은 기뻐 뛰며 그 자리를 넘어가 주기를 바라는 부모가 있다면 그는 틀림없이 천국 갈 것입니다.
예수가 그러한 분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간섭 못하십니다. 예수가 온 것은 여러분 때문입니다. 여러분 때문이에요. 예수가 온 목적도 ‘나’ 때문이요,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지으신 것도 ‘나’ 때문입니다.
모든 환경을 수습하고 시간성을 넘어서 행복할 수 있는 인간이 된다면, 천지가 생겨난 이후에 처음으로 하나님이 인정할 수 있는 아들딸이 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어떠한 아들딸을 택하실 것 같습니까? 어떠한 사람을 사랑하실 것 같습니까? 만일 방금 말한 것과 같은 아들 딸이 있다면, 틀림없이 그를 택하실 것입니다.
그러기에 모든 존재물은 반드시 이 타락의 세계를 넘어야 하는 것입니다. 공포가 엄습해 들어오고 환경이 어지러운 이 세계를 마음의 기반을 잡아 수습하고 자유롭게 개방시켜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1945년 이후 20년 내에 세계는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비약적인 발전을 할 것입니다. 그 세계는 경제력을 갖고 지배할 수 없습니다. 정치력을 갖고도 지배 못 합니다. 기성종교도 지배할 수 없습니다. 지금의 문화나 역사로도 지배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자꾸 새로운 세계로 넘어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그런 때에 들어와 있습니다. 급속도로 흘러가고 있는 역사적인 사조는 반드시 어느 한때 돌아서야 됩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그냥 흘러간다면 지옥행입니다. 반드시 돌아서야 합니다.
돌아서는 데는 무엇을 축으로 하여 돌아서야 되느냐? 하나님의 심정과 생명을 축으로 하여 돌아서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명력과 더불어 화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는 ‘누구보다 더 나를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 그 말은 예수 자신을 사랑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려는 인간에게 다리를 놓아주는 중보자로 오신 예수였기에 그런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여러분은 자기가 어떤 전문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자랑할 만한 무엇을 했다 해도 큰소리치지 마십시오. 나는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다가 최후에 승리자가 되어 하늘 앞에 나서는 날 이 세계는 어떠한 세계가 될 것이뇨? 영원한 생명과 더불어 사랑의 심정만이 있는 안식의 세계가 될 것입니다.
오늘날까지의 세계는 공포를 내재하고 공포를 동반한 이 세계의 인식과 관념 위에서 허덕여 나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세우려 한 세계가 이루어지는 날에는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사랑의 인연을 노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세계에서는 민족과 국가가 문제되지 않습니다. 형제 아닌 형제, 부모 아닌 부모, 즉 모든 백성들이 하나의 생명체로 연결되어 하나님의 사랑과 더불어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조화라는 것은 주고받는 데서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상대적 관계에서 조화의 묘미는 벌어지는 거예요. 그러기에 하늘의 생명과 땅의 생명, 하늘의 사랑과 땅의 사랑이 서로 주고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거기서 벌어지는 것은 무엇이뇨? 그것은 이제까지의 역사상에 나타나지 아니한, 창세 이후 처음으로 있게 되는 개벽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세계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세계는 어떠한 세계입니까? 한번 보면 영원하고 한번 들으면 영원한 세계입니다. 오관을 통하여 한번 느끼게 되면 전체가 하나되고 마는, 그러한 느낌이 충만한 세계입니다. 또 내재된 감정이 자동적으로 폭발되어 몸을 움직이고 생활분야까지 움직일 수 있는 영원하고 근본적인 세계입니다. 그러니 우리 인간은 그러한 세계를 이룰 수 있는 내용을 갖추어야만 되겠습니다. 그런 세계를 창조해야 하나님도 멋있는 하나님입니다. 여러분이 믿고 있는 하나님이 그런 하나님이라면 믿을 만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계가 되어야 하겠기에 하나님께서는 양면의 세계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상대적입니다. 눈도 플러스(+) 마이너스(-)로 되어 있습니다. 전부 그렇습니다. 마음은 하늘과 하나되고, 몸은 땅과 하나되어 하나님의 진리를 소유하고, 하나님의 인격을 닮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사랑을 통하고 체휼할 수 있는 세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소망의 세계가 그런 세계입니다. 거기는 일단 가기만 하면 영원히 떠나고 싶지 않은 곳입니다. 아무리 문을 크게 열어 놓아도 나가고 싶지 않습니다. 나갈 수 없어요. 사실이 그래요. 한번 듣고 나면 모든 세포가 움직입니다. 망상이 아닙니다. 한번 느끼면 그 느낌은 영원히 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후서에 내가 몸 안에 있는지 몸 밖에 있는지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일편입니다.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이 세계를 수습하여 그러한 소망의 세계를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내재적인 심정세계와 실질적인 외형세계를 하나로 느끼어 만물을 호령하게 될 때, 비로소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손길을 거친 만물이 그런 주인을 만나지 못했기에 로마서에서 바울은 ‘만물도 탄식한다’고 했습니다. 당연히 탄식할 일입니다. 하늘세계의 내용을 체휼하고 실체세계의 사정과 환경을 수습하여 그 내재적인 무한한 세계와 한번 인연을 맺으면 그 인연은 아무도 끊지 못합니다. 세상의 사랑도 끊을 자가 없는데 그 세계의 인연은 더욱 끊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죽고 사는 게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한 세계와 연락될 수 있는 백성이 나와야만 됩니다. 그러한 백성이 나와야 우주사적인 가치를 넘어서고, 우주사적인 위치를 넘어서고, 우주사적인 목적 관념을 초월한 실체로서 인정받게 될 때에야 비로소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천국에 가면 어떻겠어요? ‘너는 미국 사람이요, 나는 한국 사람이다.’ 하는 관념이 있겠어요? 심정으로 ‘하나님! 아버지!’ 하면 전부가 하나입니다.
그러기에 모든 존재는 이러한 목적의식의 관념을 중심으로 타락한 입장에서 재창조라는 과정을 거쳐가고 있는 것입니다. 재창조입니다. 깨어졌으니 다시 만들어야지요. 아무리 잘나도 깨진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깨진 뚝배기보다도 못하다는 말입니다. 하늘은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깨졌다는 거예요. 타락한 아담 해와의 모양을 그대로 닮은 것이 여러분이니 별 수 있습니까? 깨졌으니 두드려 가지고 다시 만들어야 합니다. 온유 겸손하라 하면서 다 버리고 죽게 해 가지고 다시 빚어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재창조입니다. 무엇 가지고 만드느냐? 심정을 가지고 만듭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영원히 임재하실 수 있는 심정의 세계를 세워서 이 우주가 심정을 노래하며 심정 앞에 전부 기울어질 수 있도록 만들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를 두고 볼 때, 우리가 종말적인 이 세계를 넘어서 새로운 세계를 향하여 나아가는 과정적인 입장에 있다 할진대 우리는 남을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비판하려면 진리를 중심삼고 인격적으로 비판해야 합니다. 내 마음을 움직이고 심정을 폭발시킬 수 있는 것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가서 이 문제를 항의할 수 있는 청년 남녀들이 이 무지한 한국에서 나온다면, 이 민족은 그들을 중심삼고 세계를 지배할 날이 멀지않을 것이라고 나는 장담합니다. 심정이 귀하다는 것은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백성은 그 나라의 통치자 앞에 한 마음으로 귀일되어야 합니다. 마음뿐만 아니라 심정이 귀일되어야 효자, 열녀, 충신이 되는 것입니다. 즉 심정이 일치되어야 ‘충’ 자가 들어가고 ‘효’ 자가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요, 안 그래요? 그렇기 때문에 이제 각 교파를 초월할 수 있고, 각 종파를 넘어설 수 있고, 민족 관념을 넘어설 수 있고, 지금까지의 사정이나 인정적인 모든 관념을 넘어설 수 있는 일대의 변혁이 천상과 지상에서 벌어져야 됩니다.
하나의 주인공을 중심삼고 그런 세계가 세워질 때, 하늘과 땅, 인간과 하나님이 함께 행복의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춤을 춥니다. 이러한 세계가 되어야 오늘 말씀의 제목인 ‘모든 존재의 목적의식과 하나의 세계’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목적의식적인 감정을 수습한 후 종교적인 인연을 통해 하나의 새로운 사조를 준비해 나오신 것입니다. 이제는 정적인 기반을 움직여 인간들을 난국에 빠뜨려 더 이상 살 길이 없게 만들어 하나님을 향하여 울부짖도록 해놓고, 그 해결점을 마련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 때가 반드시 오리라고 봅니다.
그러니 현실의 시간적인 감정을 천적인 감정이나 의식에 어떻게 연결시키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이 말세에 처한 우리들이 해결해야 할 중요한 문제인 것입니다.
이것은 천신만고의 노력을 다 해서라도 해결해야 합니다. 믿는 신도들은 전세계적으로 동원되어 교파를 초월하고 민족을 초월하고 국가를 초월하여 이것을 찾아 헤매는 무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움직임이 벌어져야, 그런 사람이 나와야 이 세계는 빨리 수습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버님, 이 길이 험하다 할지라도, 목적의 세계는 평화의 왕궁임을 알았사옵니다. 이 길이 험하고 오늘의 고충과 충격이 아무리 크다 할 지라도, 민족과 세계를 망하게 하는 그 충격이나 타격만큼 크지 못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탄식하는 저희 일신이 해방되기 전에 민족을 넘고 세계를 넘어 영계와 예수님과 성신, 하나님이 해방받아야 된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았사옵고, 그분들을 해방시켜 드려야 할 책임이 저희들에게 있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아버지께서는 당신 때문에 수고하는 것이 아니었고, 삼위신이 삼위신 자신들 때문에 수고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이념으로 세웠던 목적의식을 통과하여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사랑을 중심삼고 행복과 자유와 평화를 노래할 수 있는 신의 세계를 이루기 위해 수고하였다는 사실을 알았사옵니다. 인간을 중심삼고 지상천국과 천상천국을 건설하여 그 속에서 노래하며 기쁘게 살기 위해 목적의 세계를 창조하셨다는 사실도 저희들은 윤곽적으로나마 들었사옵니다.
저희의 존재의식은 어디로 향하고 있습니까? 생활감정은 어디로 움직이고 있사옵니까? 저희 한 자체를 수습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천륜뿐이라는 사실을 알았사옵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자기의 가치를 논하고 주위 환경을 수습하고, 세계를 수습하는 한때를 갖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그리고 그러한 날이 타락한 인간이 살고 있는 이 땅 위에 임하고 있다는 것을 저희들이 느끼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런 모든 것을 저희 자신을 중심삼고 해결짓지 않으면 안 될 역사적이고 천주사적인 중요한 시대에 처하여 있는 저희들임을 망각하는 무리가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때가 오기에 당신은 끝날이 되면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라고 하셨습니다.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밀실에 들어가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과연 옳습니다. 지금의 때는 누구의 말을 들을 때가 아니라, 자기의 마음으로 느끼고 체험하여 영원하신 하나님과 직접적인 인연을 맺고 하늘의 가치와 연결지어야 할 때이오니, 새로운 세계의 이념과 더불어 움직일 수 있는 무리가 이 땅에 많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옵니다.
오늘 내려진 말씀을 듣고 이들이 느낀 바가 있사옵고 새로이 각오한 바가 있사올진대, 그 생명이 영원토록 아버지 앞에 설 수 있도록 아버지께서 함께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니다.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였사옵니다. 아멘.
이날을 아버지의 심정세계를 생각할 수 있는 한 날로 세워주시옵소서.
지금은 복귀섭리노정으로 볼 때 40고개를 넘어야 할 원한의 때이옵니다. 더욱이나 이 달은 이 민족이 잊지 못할 6월이옵니다. 오늘이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 부활하신 날로부터 66일이 되는 날인 것을 생각할 때, 이 한 날을 저희들이 아버지 앞에 고이 바쳐 드리고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모셔 드리며, 있는 정성을 다 기울여 아버지 앞에 경배드려야 함을 느끼게 됩니다. 하오니 아버지,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이 날은 이 달의 셋째 주일이옵고, 21수를 대신한 기억해야 할 날이오니 복귀섭리노정에 있어서 아버지의 뜻과 심정을 통할 수 있는 날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불충스럽고 부족한 몸들이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었사오니 저희 자신들이 아버지 보시기에 부끄러운 모습임을 깨달을 수 있게 하여 주시옵고, 아버지의 영광의 은사를 대할 수 있는 심정조차도 준비되지 못한 것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땅을 대하여 슬퍼하신 지 6천년, 그동안 아버지께서 사탄의 참소 조건을 막지 못하여 서러워하시면서도 슬픔의 역사를 엮어 나오신 것은 아버지 당신을 위함도 아니었사옵고, 선조들을 위함도 아니었사옵고, 이 끝날 하늘의 모습들을 찾기 위한 것이었음을, 오늘날 저희들을 위한 것이었음을 아옵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아버님, 저희들은 감히 당신 앞에 나설 수가 없사옵니다. 섭리역사노정에서 수고하신 서글픈 아버지를 감히 대할 수가 없사옵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오라하심에 왔사옵고, 불러 주시고 세워 주심에 이렇듯 감히 이 자리에 섰사오니, 오라 하신 그 말씀이 원한이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고, 불러 세우신 그 뜻이 원한이 되지 않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뜻을 위해서는 많은 무리가 필요하지만 아버지의 심정을 통하지 못하는 무리는 필요치 않다는 것을 아옵니다. 아버지의 심정 속에 깊이 기억된 자가 많지 않다는 것 또한 알고 있사옵니다.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계시고 아버지 안에 저희가 있어 아버지와 저희들이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생명의 인연에 엉클어지는 이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소수의 무리가 모였사옵니다. 저희의 몸 마음을 주관하여 주시옵고, 저희들의 머리 머리, 심정 심정을 연결시키어 아버지 것 아닌 것이 없게 하여 주시오며, 심정을 통하여 주관하고자 하시는 아버지의 그 간곡한 심정으로 저희를 직접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심정의 인연을 맺지 못하고는 아버지 앞에 설 수 없음을 알고 있사오니 오늘 저희들 모든 것을 버릴지라도 아버지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간곡한 마음만은 고이 간직하여, 이것을 천적인 것이라 자랑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기를 원하옵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는 심정의 소유자가 슬프고 외로운 것처럼 보이지만,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 나가는 데 있어서는 심정의 소유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이 시간 저희들 아버지 앞에 엎드렸사오니 긍휼히 여기시어 아버지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은사의 분위기로 이끌어 주시옵소서.
억천만 사탄들이 이 시간도 저희를 조건 삼아 하늘 앞에 참소하고 있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간곡한 마음만이 그 모든 것을 막을 수 있고 제거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아오니 이 시간 모인 저희들에게서 아버지의 손길을 거두지 말아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오며, 천천만 성도와 천군천사가 옹위하는 가운데 아버님의 새로운 기쁨의 은사를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민족을 대신하여 모이는 수많은 교단 위에도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외로운 심령을 붙안고 숨은 제단을 쌓아 하늘의 때를 염려하며 기도하는 당신의 아들들도 많을 줄 아오니 머리 숙여 호소하는 곳곳마다 아버지의 손길을 펴 주시옵소서.
천상에서 원한을 품고 유리하고 있는 수많은 영인들이 이 땅 위에 탕감의 기틀을 닦고자 하는 것을 저희들이 알게 하여 주시옵고, 이 천지를 화동하게 하는 중심 역사를 저희들이 종결짓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러한 전체의 사명을 저희들이 절실히 느껴 이 한 시간, 아버지 앞에 경배드릴 수 있게 축복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이 시간 참석하지 못할 식구들도 있사오니 그들도 일률적인 은사로써 주관하여 주시옵고, 사랑의 품에 품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오며, 남한 각지에 널린 외로운 식구들 심정 심정이 통할 수 있게 하나의 심정으로 묶어 주시옵기를 간절히 원하옵나이다.
첫 시간부터 끝 시간까지 사탄이 틈타지 말게 주관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오며,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였사옵나이다. 아멘.
찾아 나온 길이 아무리 험하다 할지라도 인간이 가다 남긴 길이니 인간이 책임지고 가야 할 길임을 아옵니다. 슬픈 심정을 남기고 가신 십자가의 노정이 이 땅 위에 남아 있는 이상 저희들은 슬픈 심정을 품고 싸움을 거듭하며 골고다 산정을 향하여 달려가지 않으면 안 될 처참한 운명에 놓여 있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님은 저희들을 버릴 수 없고 저희들은 아버지를 붙들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고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 당신과 인간인 저희들의 인연을 무시할 수 없기에 저희들이 아버지 대신 수고하지 않으면 안 되겠사옵니다. 하온데 도리어 당신 앞에 자신의 슬픈 사정을 아뢰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있는 저희들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슬픈 사정을 인간 앞에 털어놓을 수 있는 한 날이 어서 와야 할 텐데 그날이 오지 않아 인간을 대한 슬픈 사정을 홀로 끌어안고 계시는 당신의 심정을 저희들은 아옵니다. 원컨대 아버님, 당신의 그 슬픈 사정을 털어놓을 수 있는 대상으로 저희들을 불러 주시옵소서.
심정 심정을 털어놓아 저희들이 당신의 자식임을 알고 당신이 아버지임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있고 아버지께서 저희를 자식이라 부를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한 영광의 한 날이 오기를 하늘은 6천년 동안 고대해 오셨사옵고, 저희 선조들도 그 한 날을 위해 수천년 동안 싸워 나왔음을 아옵니다. 진정 뼈와 살에 사무치도록 나의 아버지를 불러 보지 못하였사옵고 심정과 뼈 살이 녹아지는 자리에서 아버지를 자랑할 수 있는 마음도 가져 보지 못하였사옵니다.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땅에는 수많은 사람이 살고 있으되 아버지의 심정을 헤아리는 자는 없사옵고, 하늘에 수많은 놀라운 일이 있다 하나 하늘을 중심삼고 놀라운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을 아옵니다. 역사에 남아지고 기억될 일이라 할진대 아버지께서 움직이시지 않은 것이 없다는 것을 저희들은 아옵니다. 역사노정을 회고해 볼 때 슬픔으로 얼룩진 노정이었사옵고, 저희의 선조들이 유린되고 지극히 고된 십자가 고개에서 쓰러진 처참한 역사였다는 것을 아옵니다. 이러한 입장에서도 저희들을 대신하여 사탄과 싸우시는 아버지를 체휼할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하늘을 본향이라 부르고 있사오나, 아버지의 심정을 아는 자는 없사옵고 아버지와 영원한 인연을 맺은 자도 없사옵니다. 하오니 저희들이 아버지의 심정을 통하여 아버지와 영원한 인연을 맺어 당신께 생명의 기쁨을 돌려드릴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영원한 이념의 실체로서 아버지 앞에 자랑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고, 심정의 주체로서 아버지를 대신하여 자극적인 충격을 일으킬 수 있는 아들 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오늘 여기에 모인 당신의 아들딸들을 굽어 살피시옵고, 그 마음과 몸을 장중에 쥐시옵고 사망의 권한과 생명의 권한을 갈라 세워 주시옵소서. 저희의 마음에 아버지께서 원치 않으시는 악의 요소가 있사올진대 아버지시여, 제거하여 주시옵소서. 생명의 권능으로 나타나시어 저희의 모든 것을 성별시켜 주시옵고, 본연의 마음을 일으켜 아버지의 심성과 본질에 화할 수 있는 기쁨의 시간으로 인도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감히 아버지 앞에 설 수 없는 부족한 몸들이오나 긍휼의 아버지, 사랑의 아버지 앞에 엎드렸사오니 긍휼의 은사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상처받은 손 들을 아버지 앞에 벌리고 있사오니 품어 주시옵소서. 상처입은 몸들이오나 아버지 앞에 생축의 제물로 바치고자 하오니 받아 주시옵소서. 아버지, 사탄의 참소 조건에 걸리는 자들이 되지 말고 아버지께서 친히 대할 수 있는 성별된 모습들로서 다시 빚어질 수 있는 당신의 아들딸들 되게 인도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시간, 아버지, 굽어 살피시옵고 저희들의 심정 심정이 화하여 아버지의 품을 닮게 하여 주시옵고, 저희의 사정 사정이 아버지의 복귀의 소망을 중심삼고 서로 엉클어져 사탄을 대하여 싸우고자 결심하는 이 시간 되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앞에 경배드리는 시간이오니 사탄이 틈타지 말게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님, 불쌍한 삼천만 민족 위에 일률적인 은사를 베풀어 주시옵고, 이 민족을 대신하여 모이는 수많은 교단 위에도 같은 은사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당신의 뜻을 중심삼고 하나로 화할 수 있는 기쁨의 날이 어서 속히 임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외로운 심정을 품고 아버지의 뜻과 아버지의 심정과 아버지의 사정을 알기 위해 토굴이나 혹은 외로운 곳에서 호소하는 아들딸들이 있사올진대, 그들에게까지도 일률적인 은사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이 시간 모든 것을 아버지 앞에 맡겼사오니 저희의 일체가 아버지와 인연되지 않는 것이 없게 하여 주시옵고, 저희의 몸 가운데 아버지의 사정과 인연되지 않은 부분이 없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것을 아버지 뜻대로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사탄의 계교에 빠져 아버지께 서러움을 드리는 아들딸들이 되지 말게 주관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오늘 전국에서 행해지는 모든 행사에도 아버지께서 친히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간절히 부탁드리며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였사옵나이다. 아멘.
이 시간 성경 말씀을 대하니 당시의 장면을 연상하게 됩니다. 죄 없는 예수님께서 하늘이 보내신 사명을 지닌 몸으로 빌라도 법정에 나타나신 슬픈 장면을, 역사는 이미 지나갔으나 심정으로 다시 회상하여, 그때의 예수의 마음과 몸을 붙들고 눈물지을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하늘을 품고 땅에 대한 구원섭리의 뜻을 품고 30여 년의 생애를 사신 예수가 자신을 구주로 대해주는 한 사람을 찾지 못하고, 구주로 모셔 주는 한 가정을 찾지 못하고, 구주로 따르는 한 민족을 거느리지 못한 채, 한스러운 운명의 날을 맞아야 했던 역사적인 서러움의 날을 회상하게 되옵니다.
저희들은 예수의 심정을 통할 수 있고 예수의 사정을 통할 수 있으며 예수의 소원을 알 수 있어, 그를 대신하여 눈물지을 수 있고 그를 대신하여 공분의 마음에 사무치는 모습들이 되지 않으면 안 되겠사옵니다.
원치 아니한 때에 십자가의 길을 가셔야 했고, 때 아닌 때에 사명을 종결지어야 했던 예수였기에, 할 말도 다 못 하고 심정에 세운 비장한 각오와 결심의 행사도 하지 못한 채 한을 남기고, 또 안고 가셨사온데 그 심정을 아는 자가 어디 있사옵니까?
아버님이시여! 하늘을 우러러 보는 예수의 눈에는 만민을 대한 서글픈 눈물이 고였었고, 죽음을 앞에 둔 그의 초초한 형상은 인류를 대신한 모습이었음을, 오늘날 저희들도 뼈에 사무치게 알지 못하거니와 그 당시의 사람들 가운데도 그토록 처절한 고난을 당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안 자가 없었사옵니다.
제사장 가야바를 위시하여 전체 이스라엘 교단은 예수를 빌라도 법정에 넘겼사옵니다. 새로운 복음의 말씀을 가지고 새로운 생명과 복된 이념과 사랑의 실체로 나타난 예수였사온데, 그 예수를 붙들고 ‘나에게 생명을 나눠 주시옵고, 우리 민족 앞에 새로운 이념을 세워 주시옵고, 고난을 당한 우리에게 생명의 원천을 옮겨 주시옵소서.’라고 호소한 생명이 없는 것을 바라보실 때 예수를 보내신 하나님도 예수도 한없이 슬펐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예수를 알고 모셔야 할 민족이 오히려 그를 반대하고 죽음의 길로 내몰기 위해 날뛰었으니 뜻을 품고 온 예수는 얼마나 불쌍하였사옵니까?
하늘의 심정을 통하고 예수의 심정을 통해야 할 민족인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예수께서 민족을 염려해야 했고, 원수에게 끌려가는 예수의 슬픔도 모르고 원수의 장중에서 놀고 있는, 사망권에 있는 민족을 바라보고 ‘아바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하신 예수의 심정을 저희들이 더듬어 느낄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십자가라 하면 저희들은 이름만으로만 알았습니다. 예수가 간 골고다 산정이 예수에게 있어서는 지옥이요 죽음의 형장이었던 것을 저희들은 알지 못하였습니다. 하오니 이제는 저희들이 십자가를 생각할 때, 예수의 몸이 찢기는 아픔보다 4천년 동안 쌓여온 하나님의 한의 심정이 찢기는 서글픔이 얼마나 컸던가를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가 십자가에서 살이 찢겨 피를 흘린 것이 서러움이 아니라, 심정을 짜내야 했던 것이 더 서러운 일이었음을 알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여기에 모인 무리 가운데 진정한 당신의 아들딸이 있사옵니까? 예수가 흘린 피를 무시하고 하늘의 복을 받기를 바라는 자가 있사옵니까? 예수의 심정을 밟고 하늘의 뜻을 대하고자 하는 자가 있사옵니까?
울고 울고 또 울어도 한이 풀릴 수 없는 슬픔의 한 날을 기억하고, 예수의 죽음에 대해 끝도 없이 통곡할 수 있는 무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삼천만 민중이 새로운 이념을 흠모하여 우는 민족은 되나 하늘을 위해서 눈물 흘릴 줄 모르는 민족이 될까봐 두렵사옵고, 수많은 교단이 예수의 심정에서 흘러 나오는 눈물의 인연을 거절할까봐 두렵사옵니다.
몰림받는 자리에서 제단을 쌓고 아버지를 부르는 불쌍한 저희들을, 아버지, 긍휼히 보아 주시옵소서. 저희들은 가진 것도 없고 자랑할 아무것도 없사옵니다. 오로지 뜻 대한 심정을 품고 아버지의 마음을 대신하여, 예수의 죽음을 대신하여, 예수의 십자가의 고통을 대신하여, 이 민족을 대표하여 울 줄 아는 저희들이 되지 않으면 안 되겠사옵니다.
아버님, 나라를 붙들고 우는 백성은 그 나라를 사랑하는 무리이옵니다. 분열된 교계를 붙들고 우는 참다운 청년 남녀가 고대되고 있사옵니다. 골고다 산정에 생명을 내놓는 한이 있더라도 ‘하늘이여, 민족이여, 세계여, 인류여 남겨진 심정을 길이길이 받들라.’고 호소하시던 예수의 심적인 친구가 되게 이끌어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의 심정을 통한 자라 할진대 아버지의 깊은 심정을 살필 수 있고, ‘아버지여, 나를 제물삼아 이 땅 위에 심판의 조건을 세워 주시옵소서.’ 하시던 예수의 사정을 알 것이옵니다.
오늘 모인 당신의 아들딸들, 마음은 어디에 머물러 있으며, 몸은 어디에 있는가를 스스로 명시하고 슬픈 역사의 흐름에 있어서 나는 어떤 입장에서 움직이고 있고, 어떤 감정과 사정을 갖고 있는가 스스로 살필 수 있게 하 여 주시옵소서.
슬픈 역사를 되풀이하여 아버님을 반역하는 자들이 되지 말고, 타락으로 말미암아 아버님의 심정에 슬픔이 생겼사오니 당신을 붙들고, 당신과 더불어 슬퍼할 줄 아는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슬픔이 끝나지 않는다 할진대 아버지께서 영광의 시간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고, 아버지의 심중에 사무친 원한과 슬픔을 해원하지 못할진대 천국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슬픈 역사를 다 지나가게 하고 역사의 고비 고비에 널린 슬픈 사정들을 털어 버릴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식구들이 가슴을 헤쳐 놓고 사정 사정을 아버님과 연결시키지 않으면 선의 동산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시간 모였사오니 친히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으로 이들을 권고하고자 하오니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인간의 내용을 갖고 말하지 말게 하여 주시옵고 전하는 자의 마음과 받는 자의 마음이, 전하는 자의 심정과 받는 자의 심정이 공히 아버지의 심정을 통할 수 있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부족한 저희들이 아버지 앞에 황공함을 느끼면서 눈물을 흘릴 수 있고 아버지를 붙들고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시간도 몰리고 지친 식구들이 외로이 무릎을 꿇고 하늘을 향하여 기도하고 있는 줄 아오니 그들의 친구가 되어 주시옵고 그들의 보호자가 되어 주시옵고 그들을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그 마음 그 심정 위에, 아버님, 같이하여 주시옵고, 아버지께서 대해 주시고 보호해 주심을 느낄 수 있는 시간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나이다.
모든 것을 맡기었사오니 뜻대로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였사옵나이다. 아멘.
여러분께 말씀드리고자 하는 제목은 ‘오셨다 가시는 예수’입니다. ‘오셨다가 가신 예수’가 아니라 ‘오셨다 가시는 예수’라는 제목을 가지고 잠시 동안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복귀역사라고 우리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는 역사, 타락으로 말미암아 잃어버렸던 인간을 하나님이 섭리로써 다시 찾는다는 것입니다. 타락이 없었던들 구원섭리도 필요 없을 것이고, 구주라는 명사도 필요 없을 것이고, 절대자인 하나님을 대하여 대상적인 입장에서 해야 할 신앙이라는 것도 필요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신앙이니 구원이니 더 나아가서는 구주니 하는 것들을 필요로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본연의 자체를 잃어 버렸기에 그것을 다시 회복해야 할 조건에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4천년의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세워 주어도 믿지 못하고, 이끌어도 방향을 잡지 못하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선지자들을 통하여 민족의 지도자요, 인류의 구주인 메시아를 보내 주마고 통고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 땅을 떠난 그날부터, 애급 고역이 그들 앞에 있고 광야에서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메시아가 온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민족을 찾고 국가를 세워 그 국가를 통치하실 수 있는 한 날이 오기를 바라고 나왔던 사실을 우리들은 역사를 통하여 잘 아는 바입니다.
이렇게 인도함을 받던 이스라엘 민족, 유대나라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죽으라 하면 죽음의 길을, 어려움이 닥치면 어려움의 길을 가야 할 입장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민이라고 하여도 그들 역시 타락의 후손인 연고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심정과 일치된 입장에 서지 못하였습니다. 우리들은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지요.
하나님이 찾으시는 것은 무엇이뇨? 그냥 외적으로 민족의 형태만 갖춘 민족을 고대하는 것이 아니고 외적인 형태만 갖춘 국가를 고대하는 것도 아닙니다. 민족이 있으면 그 민족을 움직일 수 있고, 국가와 주권이 있으면 그 국가의 주권을 움직일 수 있는, 심정으로 연결된 하나의 주권과 하나의 민족과 하나의 백성을 하나님은 고대하시는 것입니다.
선민이라면 그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고, 자신들을 어떤 목적을 위해 세우셨는지를 분명히 알았어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어떠한 고난에 부딪치고 어떤 환난이 닥쳐도 그것을 밀고 나가야 했습니다. 이런 것이 당시의 이스라엘 민족이 취해야 할 태도였으며 하늘을 대하는 심적 기준이었습니다.
그러나 선민임을 자랑하던 이스라엘 민족은 역사노정에서 하늘 앞에 많은 죄를 졌습니다. 물론 그 시대에 대한 범죄보다도 그 시대를 움직이고 있는 하나님의 심정에 대한 범죄가 컸다는 것을 우리들은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인간을 복귀하는 데는 무엇부터 복귀해야 할 것인고? 소원도 소원이거니와 사정, 더 나아가서 심정을 복귀해야 할 것입니다. 끊으려야 끊을 수 없고 나누려야 나눌 수 없는 심정의 세계를 복귀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은 지금까지 그 한 날을 바라보면서 역사의 고비 고비마다 배후에서 심정의 터전을 넓히기 위해서 수고하셨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오늘날 우리들은 알지 않으면 안 될 것이요, 이것을 몰랐던 선조들에 대하여서는 공분의 심정을 품고 항의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우리가 여러 가지 사정에 엉클어진 생활환경에서 산다 할지라도 그것은 결국 다 지나가고 마는 것입니다. 아무리 땅 위에서 행복한 생을 살았다고 자신의 영락(榮樂)을 노래하는 자가 있다 해도 그것은 다 지나가 버리고 말아요. 그렇지만 일생 동안 어떤 사명을 붙들고 살아간 사람이라면 그에게는 남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사정이 아니라 사정을 지배할 수 있는 심정입니다. 이 심정이 역사를 지배하고 민족정신을 고취시켜 나오며 사상을 연결시켜 나온다는 사실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제 끝날에 하나님이 찾고자 하는 것이 심정적인 기준이라 할진대 ‘심정의 참된 주인이 되시옵소서.’ 할 수 있는 참다운 아들이 있어야 됩니다. 그런 아들의 모습을 대하여 ‘내 사랑하는 아들아’ 할 수 있는 날이 오지 않는다 할진대, 심정을 중심삼은, 천상과 지상을 대표한 아들과 딸이 세워지지 않는다 할진대 예수가 오셨던 것도 헛것이요, 6천년 동안 섭리하신 하나님의 섭리도 헛것이요, 인간을 위하여 행복의 이념을 세워 놓았던 사실도 헛것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을 보아 예수는 인간을 위해 오신 것이 아니요, 천태만상의 고난의 길을 가기 위하여 오시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늘의 황태자요 만민의 구주요 온 피조세계의 주인공으로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한 분으로, 하나님이 자랑할 수 있고, 만민의 심정을 대신한 분으로 만민이 추앙할 수 있으며, 만물의 심정을 대신한 분으로 만물이 노래할 메시아, 구주로 보내셨던 것입니다.
예수의 생활환경은 하늘의 심정을 중심삼고 노래할 수 있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와 반대였습니다. 예수는 그런 환경에서도 하늘과 땅을 대신하여 만민 앞에 나서야 할 자신의 사무친 심정이 어그러질까봐 분해도 분한 표시를 못했습니다. 슬퍼도 슬픈 표시를 못하고 억울해도 억울한 표시를 못했습니다. 예수에게 자비심이 많아서, 긍휼의 마음이 많아서, 용납의 마음이 많아서 말하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만민을 총합한 실체로서 천상으로부터 지상에 온 예수는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버리면 죄악된 세상에 조건이 잡힐 것이고, 움직이고 싶은 대로 움직여 버리면 사탄의 참소 조건에 걸릴 것이기에 그랬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하시는 예수의 심정과 주인으로 세워 놓은 예수가 백성을 대하는 심정과 만우주를 대하는 심정, 이러한 심정 문제에 어떤 흠이 될 수 있는 조건이 남아질까봐 염려하는 마음이 컸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원수까지 사랑하라 하였고 원수를 대하여 복을 빌어 줄 수 있는 아량을 가진 분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의 역사가 사랑만을 중심삼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도 사랑을 중심삼고 자비와 은사만으로 대해 주시지 않는다는 것을 미리 알려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심판날이 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심판날은 언제인가? 우리의 사정을 호소할 수 있는 날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위하여 얼마만큼 수고하셨고, 얼마만한 곡절을 가지셨고, 우리를 찾기 위하여 얼마만큼 참으시고 수고하셨던가를 깨달아, 간곡한 심정으로 통곡해야 할 날이 심판날입니다.
오늘날 기독교 신자들의 신앙관으로는 심판날이 자기들의 사정을 노래할 수 있는 날인 줄 알지만 아닙니다. 주를 상봉할 수 있고 즐거운 마음으로 하늘 앞에 경배할 수 있는 날인 줄 알지만 아닙니다. 그것들은 다 지나갑니다. 바울이 말하기를 “믿음과 소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고전 13:13) 하였거늘, 천상과 인연되어진 자, 심정에 화하여 하늘을 우러러볼 줄 알고 그 심정에 동하여 예수를 붙드는 자를 예수도 고대할 것이고 하늘도 고대할 것입니다. 그런 자를 찾아 세우는 날이 6천년 종말시대에 있을 심판의 날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을 대하여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나는 너희의 아버지이고 너희는 나의 아들’이라고. 또 예수는 말씀하시기를 ‘나는 너희의 신랑이요, 너희는 나의 신부’라 하였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너희는 나의 친구’라 하였습니다. ‘네 피 살을 다 뿌리면서 원수를 위해 복을 빌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말씀들은 무엇을 근거로 하신 것인고? 천상에 사무친 천적인 심정을 대하는 예수에게는 민족을 붙들고 그 민족을 대신하여 하지 않으면 안 될 책임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기쁘고 행복스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슬프고 원통스럽고 분한 것을 책임져야 했던 것입니다. 분한 역사를 대신하여 홀로 싸우겠다는 심정이 앞섰기에 배반한 민족을 붙들고 기도하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자신을 몰아내는 모든 반역자들을 위해 변명하던 예수의 심정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역사는 그냥 지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2천년 전의 예수를 회고해 볼 때, 그는 한낱 청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당시의 어떤 제사장이나 교법사나 서기관들의 눈에 띄려야 띌 수 없는 미미한 존재였습니다. 그는 많이 배우지도 못했습니다. 그는 목수의 아들이었고 그의 형제들도 그가 메시아인지 몰랐습니다.
그와 같은 입장에서 볼 때 그는 세례 요한만도 못하고, 규례를 지키는 데 있어서는 유대교인만도 못하고, 행동하는 데 있어서는 교법사만도 못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예수가 어떻게 만민의 메시아가 될 수 있었으며, 만우주의 구주가 될 수 있었는가? 외모가 훌륭해서 그런 것이 아니요, 그의 배경과 권세가 당당해서 그런 것이 아니요, 그를 옹위하는 대중이 있어서 그런 것도 아닙니다. 단 하나의 조건이 있었으니, 그것은 그가 천륜에 흐르는 골수의 심정을 통하였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역사상의 모든 인류가 그를 메시아라고 추앙할 수 있는 하나의 조건이 되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되 십자가에 달려 죽어간 예수를 믿었습니다. 피 흘리고 죽어간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러나 정적인 세계에는 사망이 없습니다. 정적인 세계에서는 역사를 초월합니다. 정적인 심정세계에서는 시공을 초월합니다. 하늘의 심정이 동할 때 천지가 움직여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은 창조의 원칙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되 십자가의 심정을 믿을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는 성도를 그리워해야 되겠습니다. 십자가의 심정을 전해 주는 하나의 교직자가 필요한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엉클어진 사정과 소망에 관한 문제들은 하나님이 천만번 용서하고 지나갈 수 있으되 심정문제에 들어가서는 절대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십자가를 믿고 천정과 인연 맺기 위하여 나섰다 할진대 예수의 서러운 사정을 붙들고 울어야 되겠습니다. 울고 싶어도 울지 못한 예수의 심정, 분하고 통분한 자리에서도 원수를 위하여 기도해야 했던 그 심정, 만우주의 주인공으로 오셨다가 만상을 버리고 가면서 다 이루었다고 하신 예수의 심정을 알아야 합니다.
66권의 성경 말씀 가운데에서 역사적으로 흘러나온 하나님의 심정을 제거시킨다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말씀의 가치는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4천년의 복귀섭리를 붙안고 왔던 예수는 슬픈 사람이었습니다. 왜? 가정이 없어서가 아니요, 부모나 친척이 없어서가 아니요, 민족과 나라가 없어서가 아니었습니다. 땅 위에 심정의 인연을 맺지 못했기 때문에 불쌍하다는 거예요.
그런 경지에 들어가 예수의 사정을 더듬어 보면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 곳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눅 9:58)하신 그 마음을 가히 헤아릴 수 있습니다. 동분서주하며 발걸음을 재촉하였으나 어느 한 곳에서도 자신의 심정을 털어놓을 수 있는 안위의 한 시간을 갖지 못한 예수였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들, 믿으라 하는 권고의 말도 좋고 믿는다 하는 것도 좋지만 하나님의 심정을 염려하는 신앙생활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우리는 어디를 거쳐가야 될 것인가? 예수가 왔다 간 후 6천년 역사의 종단 시기에 처해 있는 여러분, 이제 심정 문제에 있어서 천정을 대신하여 하늘을 붙들고 여러분을 변명해 줄 수 있는 친구를 가졌습니까? 그리고 예수는 자신이 신랑이고 여러분이 신부라 하였는데 과연 사지(死地)에 나가서도 변명할 수 있는 신랑 신부의 인연이 맺어져 있습니까?
여러분들은 신앙을 통하여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고 있고 아버지라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의 심정이 여러분의 마음에 있고 그 아버지의 감정이 여러분의 마음에 느껴집니까? 이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가 왔다 간 후 2천년이 지났고, 아담 이후 6천년의 역사가 흘렀는데 하나님으로부터 선조로부터 예수로부터 이 시대를 거쳐 영원히 계속될 아버지의 심정을 가로맡아 ‘아버지, 제가 아버지의 심정을 대신하였으니 어느 누구도 저를 무시할 수 없습니다.’ 할 수 있는 아들딸이 땅 위에 나타나지 않는다 할진대 복귀섭리과정에서 하나님이 세우신 종적인 인연들은 모두 무효로 돌아간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볼 때 예수가 제일 분하고 억울하고 슬펐던 때는 언제였는가, 제일 어려운 때는 언제였는가를 알아 그것을 붙들고 그 심정에 동하여 우는 자가 되어야겠습니다. 그런 자가 있다 할진대 그는 지옥 갈 수 없습니다. 성경 66권의 말씀은 다 몰라도 그것은 배워야 됩니다.
나타낼 수 없는 우주적인 심정을 지녔던 예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만민의 구세주인 예수의 심정을 통하였다 할진대 그의 슬픈 사정과 어려운 사정과 고통스러운 사정에 눈물지을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오른편 강도는 죽음을 앞에 둔 예수의 심정을 알아주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는 그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하는 긍휼의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이는 마음적인 면에서 예수의 고난에 동참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기독교 신자는 무한히 슬퍼할 줄 알아야 합니다. 왜? 예수가 아직까지 기쁜 날을 보지 못하셨고, 하나님도 아직 기쁜 날을 보지 못하셨기 때문입니다. 슬프고 억울하고 분하고 고통스러운 역사노정을 거쳐 나온 하나님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역사를 청산하고 해원성사하여 기쁨의 한 날, 영광의 한 날을 세워야 되겠습니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 허덕이는 무리들은 가는 곳곳마다 눈물이 앞서는 것입니다. 그렇게 눈물이 앞서고 자기의 사정을 넘어 마음이 하늘을 향하여 움직이는 자가 되어야만 하늘 앞에 가까운 신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는 2천년 전에 이 땅 위에 유대교를 찾아오셨습니다. 택한 백성 앞에 약속한 대로 뜻을 이루기 위해 오셨던 것입니다. 무엇을 갖고 오셨던가? 그 당시 이스라엘 민족 앞에 무엇을 가르쳐 주고 싶어했던가? 인간이 타락한 그날부터 자신이 올 때까지의 역사적인 하나님의 심정을 가르쳐 주고 싶어하셨습니다. 역사적인 심정이 이러이러하기에 이러이러해야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심정의 인연을 맺어 소망하는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미래적인 심정을 현실 생활권 내로 끌어들여와 하나님 대신 하나님이 바라는 동산을 건설하기 위하여 오셨던 예수입니다.
이렇게 예수는 우리 선조들 앞에 나타났습니다. 천상의 심정을 대신하여 애절한 마음을 갖고 민족을 품기 위해 오셨던 것입니다. 그러한 심정을 유업으로 상속해 주기 위하여 오셨어요. 예수는 이렇게 오셨다가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제대로 입지도 못하고 살다 가셨습니다.
우리의 뜻은 천적인 목표 밑에서 나왔습니다. 부족할지라도 온 인류와 천적인 연결을 가지고 있습니다. 크다면 이보다 큰 것이 없습니다. 존재와 가치, 위치, 그리고 이 모습은 역사가 그리워해 나온 것입니다.
나는 누구의 것인가? 타락한 역사노정 가운데서 살아야 할 내가 아닙니다. 타락세계의 이용물로 존재하는 내가 아닙니다. 나는 타락세계에 처하여 있으되 이 세계의 것이 아니라 새 시대의 것입니다. 또 이것을 위하여 수고해 내려오시는 아버지의 것입니다. 나는 아버지의 것, 새 시대의 것, 새 나라의 것입니다. 이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늘은 나를 대하여 요구하고 계십니다. 새 세계를 건설하라는 것입니다. 이미 저끄러진 사건들을 해결하라는 책임을 부여하셨습니다.
그러면 나는 어떠한 입장에 있는가? 내 한 개체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입니다. 인류의 것이요, 세계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인 까닭입니다.
부족한 민족이요, 부족한 우리들이지만 부르심을 받았다는 황공한 심정을 가져야 합니다. 국가, 민족을 위해서 자진해 간 사람들도 허락받지 못하였는데, 우리들을 불러서 아들로 삼아 주셨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감사한 마음과 황공한 심정을 가져야 합니다.
선생님은 나만이라도 하늘을 위하여 탄식하는 자가 되겠다고 하면서 나왔습니다. 하늘은 이런 선의 한 존재를 찾아 나오셨습니다.
나는 누구의 대신인가? 내 위에는 부모가 있고, 주위에는 관계되어 있는 환경이 있습니다. 나는 하늘과 땅을 대신하여 왔습니다. 여러분은 아버지를 대신하고 새로운 시대의 이념을 대신해야 합니다. 선생님은 여러분의 생명과 이념, 또 하늘을 대신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아버지의 것이 되고, 새로운 시대의 것이 되고, 또 이를 대신해야 합니다. 또한 작게는 이 기관을 대신하고 선생님을 대신해야 합니다. 그 다음은 눈물의 보따리를 지고 피의 제물을 지고 하나님을 짊어져야 됩니다. 슬픔과 고통을 짊어지고 나서야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눈물과 피와 실체를 대신한 ‘나’이니 일거일동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입장에 처한 나는 이제 누구를 위하여, 무엇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 것인가? 하나님을 위하여, 새로운 시대를 위하여, 내 어깨에 짊어진 피와 슬픔의 아버지를 해원해 드리기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원수를 대하여 죽이기보다 생포하여 굴복시켜야 합니다. 마음으로나 몸으로나 환경으로나 그의 생활을 정복해야 합니다. 무력으로서가 아니라 마음을 통하여 자연적인 굴복을 시켜야 합니다.
적의 모든 깊고 깊은 것까지 알아야 합니다. 슬픔과 고통과 기쁨을 아는 정탐꾼의 노정을 걸어야 합니다. 이것을 잘 아는 사람은 사탄세계가 멸망할 날을 측정할 수 있습니다.
하늘은 지금도 쉬지 않고 우리를 대하여 경고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승리의 인격자가 되기를 고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부족한 ‘나’지만 배후에는 큰 인연이 얽히어져 있습니다. 아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사회적인 체험이 문제가 아닙니다. 먼 거리의 것이로되 심정적으로 마음에 느끼면 됩니다.
스스로 부족을 느끼기 전에는 모든 피조물이 부족한 것이 없듯이 여러분도 부족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어떤 존재물도 개체적인 입장에서는 각각 부족함이 없습니다. 여러분도 부족이나 불완전, 혹은 미완성의 부분을 밟고 올라가야 합니다.
부모의 사랑에 차이가 없듯이 생명의 요소에도 차이가 없습니다. 병신 자식이 부모를 그리워한다고 해서 부모가 그를 미워하지 않습니다. 부족함을 느끼면서도 부족하지 않다는 입장을 취하면 더 귀한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는 일, 뜻을 다하는 일, 정성을 다하는 일이 중요한 것입니다. 자나깨나 이것을 하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끝날에 그러한 자들을 세워 사탄 앞에 우리 아들딸들은 이러했다는 자랑을 하시고 싶은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수비전을 해왔으나 금년부터는 그런 입장을 취할 수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대신 존재로 세울 수 있는 자가 없었고, 아버지 대신 싸울 자가 없었기 때문에 수비전을 해 나왔는데, 이제는 그것을 돌려 돌격 명령을 내려야 할 때가 온 것입니다.
이 명령을 하는 데에는 심정 문제가 중요합니다. 천지가 없어지더라도 아버지와의 관계는 변할 수 없다는 심정을 가지고 이 싸움을 다 끝내어 아버지의 영광의 아들딸이 되어야겠습니다.
아버지의 것을 받고, 아버지의 것을 갖고 사탄과 싸워야 합니다. 수련생 여러분들도 아버지의 심정적 위업을 상속받아야 합니다.
아버지의 만물, 싸움의 위업을 맡고 나가야 합니다. 아버지의 싸움을 대신 해야 합니다. 맡길 사람이 없었기에 지금까지 사탄의 참소를 받아 왔으나 우리 시대에 있어서는 이 사탄을 용납할 수 없다고 해야 합니다.
이러한 각오를 가지고 나가면 어떠한 고비도 능히 넘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야만 선서대로 천적인 체면을 세울 수 있게 됩니다.
식구들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오늘 새벽에 학자 어머니를 불러다 놓고 말을 했듯이, 앞으로 이 큰 뜻을 이루어 나가는 데 있어서 뜻 앞에 어느 기준을 세워 넘어가게 된다면 거기에는 물론 자녀의 명분을 가진 사람도 있겠고, 또, 하늘이 책임을 지워서 세워야 할 이런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움 받은 그 사람들에게는 세상에서 낳은 부모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늘은 그 부모를 부모로 보려고 안 한다는 것입니다. 이 새로운 천적인 뜻을 세워 나가는 데는 냉정합니다. 말하자면 역사상에 없는 심적 기준을 갖고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그 세움 받은 사람의 가까운 사람이나 부모들이 있으면 통일교회를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를 막론하고 앞으로 찾아와 가지고 자기 아들딸이니, 뭐 인척이니 하는 것을 용허치 않겠습니다. 뒷문으로 출입하는 것을 허락지 않겠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오늘 홍순애씨를 불러 가지고 앞으로 비장한 각오를 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부터는 학자하고 하등의 관계가 없는 인연으로 살겠다고 자기 자신이 맹세했습니다. 앞으로 선생님도 그런 방향으로 추진시킬지 모르겠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먼저 학자 어머니부터 그런 자리에 세워야 앞으로 후대에 조건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3년 동안 어떠한 일을 시킬지 모르니 각오하라고 약속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어떠한 뜻을 세우기 위해서는 그런 일도 충분히 할 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식구 되는 여러분들도 홍순애씨에 대해서 세상적인 감정을 갖고 누구의 어머니라는 인상을 가져서는 안 되겠습니다. 지금 하늘적으로 보면 말이예요, 어머니의 기준을 하늘이 허락지 않습니다. 하늘이 그런 입장에 서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감정을 갖고 앞으로 대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런 기준을 확실히 잡아 놓아야만 앞으로 후대에 있어서 뒷문 출입하는 사람들에게도 본이 된다는 것입니다. 순애씨도 그런 것을 각오해야 되겠어요. 알겠어요? 「예」
지금까지 신앙의 길을 찾아오기 위해서 고생도 했지만 고생한 모든 전부가 뜻 하나를 위해서 한 것이니, 앞으로 뜻을 이루는 이 마당에 있어서 어떠한 역경에 부딪치더라도 감사하는 심정을 갖고 하늘이 바라는 그 기준을 넘어서는 데 노력해야 되겠어요. 아시겠어요? 「예」 앞으로 무엇을 시켜도 고맙게 움직이겠다고 약속했으니까 그렇게 나가길 바라요. 선생님 말씀하는 거 여러분 이해하겠어요? 「예」
지방에서 온 사람들 손들어 봐요. 내려요. 누구 연락도 받지 않고, 여기 본부교회의 연락을 받지 않고 기도 가운데나 혹은 마음이 움직여 가지고 안 올 수 없어서 온 사람 몇 사람 되나 일어서 봐요. 연락도 안 했는데 뭐하러 다 왔어요? 통일교회 패들은 참 골치예요. 뭐 조금만 하려면 또 자꾸 모여들고…. 여기 통일교인 아닌 사람 일어서 봐요. 「처음 믿기 시작해서 두 주일이나 세 주일, 한 달 그렇게 되는 사람 없어요? (어느 간부식구)」 「며칠 됐어요?」 「한 달 됐습니다 (어느 남자식구)」 「한달? 어디서 왔나?」 「성북동에서요」 「성북동?」 「예」 「1지구?」 「지금은 1반입니다」 「또 그 뒤에 사람!」 「두 주일 됐습니다」 「두 주일? 어느 지구에 있나?」 (대답함)
아까도 내가 잠깐 얘기했지만, 이 복귀의 노정이라는 것은 참 어려운 노정입니다. 그 내용의 구체적인 설명은 여러분에게 하지 않습니다. 하면 여러분이 걸립니다. 하여튼 하나님이 6천 년 동안 허덕이던 그런 길이예요. 이러한 사명을 알고 책임을 지고 나선 그날부터 선생님은 딴 생각이 없었어요. 뭐 먹고 입고, 그런 생각이 없었습니다.
여기 모인 여러분들은 하늘의 심정이라는 걸 잘 알아야 됩니다. 때로는 형용할 수 없는, 어느 누구를 붙들고 이야기도 할 수 없고 사정도 할 수 없고, 어떻게 할 수 없는 이런 고비가 말할 수 없이 많다는 것입니다. 요전에 박찬규 간증하지 않았어요? 칼을 들어 가슴을 쨀 만한 그러한…. 안 그럴 수 없는 이런 고비가 많다는 것입니다. 뜻을 알고 보니 행할 수 없는 환경이요, 이해할 수 없는 길이요, 해명할 수 없는 이런 사실이 많다는 것입니다.
이 뜻을 선생님이 책임지고 나선 그날부터 지금까지 단 십 분을 잊어버린 적이 없습니다. 기다리는 소망의 심정을 갖고, 1년이 아니라 10년, 10년 가서 끝이 안 나면 20년, 20년 가서 끝이 안 나거든 30년, 만일에 내가 일생을 바쳐서 죽는 순간이 되게 되면 자식을 세워서 이런 사명을 전적으로 인계해 줘 가지고 대를 이어서라도 이 일을 하늘 앞에 어떠한 조건을 세워 가지고 성취해야 되겠다는 이런 결심을 갖고 나온 거예요.
그런 가운데 여러가지 복잡한 과정도 거쳐왔습니다. 오늘 되어진 이 한 사실(가약식)도 여러분이 보기에는 간단한 것 같을 것입니다. 하나의 어떤 식으로 보게 되면 불과 몇십 분에 지나지 않는 이런 시간적인 과정에서 되어진 일이로되 천적으로 보게 되면 6천 년의 굽이치는 곡절이 여기에 다 깃든 것입니다. 그렇게 알고 앞으로 여러분들이 이 뜻 하나를 세우기 위해서 선생님의 마음을 다시 본받아 이것을 위업으로 삼아 나가야 돼요. 이 큰 뜻을 여러분이 협력해서 이루어 나가지 않으면 안 될 거예요.
하나님의 역사는 복귀역사인데 복귀역사는 어떠한 복귀를 요구하느냐? 완전복귀를 요구합니다, 완전복귀. 완전복귀를 요구해요. 내가 엊그제도 얘기했지만, 아담 시대에서는 형제를 두고 복귀하려고 했고, 에서 시대에서는 쌍둥이로 복귀하려고 했고, 베레스와 세라 때는 태중에서 하려고 했고, 그 기준을 거쳤으니 그 기준을 중심삼아 가지고 그다음에는 신랑 신부를 중심삼고 해야 돼요. 신랑 신부를 거쳐 나가야 됩니다. 거쳐나가는 데는 어떻게 나가야 되느냐? 옛날 아담 해와가 타락하기 직전 그 시대 그 모양대로, 일대일의 조건적인…. 여러분들은 조그마한 조건으로서 많은 것을 탕감할 수 있는 이런 노정을 가지만 전체적으로 책임진 입장에서는 일대일로 탕감을 해야 됩니다. 반드시 그런 굽이치는 입장에서 그런 조건을 밟고 넘어가야 된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과거에 선생님이 이 길을 나설 때 기성교회에서, 혹은 한국 백성이 받들었던들 이런 고생을 안 했을 것입니다. 선생님이 스물 여섯 살 때 이 길을 나섰는 데 그때에 뜻을 받들었으면 그때에 어머니를 다 택했을 것입니다. 택하는 데는 여자들이 없어서 택하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택할 수 있는 그 단계까지 나오기에는 6천 년의 역사적인 곡절을 다 해결지어 나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리를 놓아 이것을 해결지어 가지고 사탄의 조건을 벗어난 후에라야만 되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나오다 보니 청춘시대는 다 지나갔습니다. 40고개를 넘게 된 거예요. 40고개를 넘게 되었다고 해도 원칙적인 기준을 무시할 수 없기에 나이 어린 어머니를 택한 것입니다. 20세 전이 아니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 세상적으로 보면 서러울 때가 많아요. 나이 많아 가지고 큰일을 앞에 놓고 나이 어린 사람을 데리고 앞으로 의논해 나가야 할 것을 생각하면 일면 서러운 면도 있다고 봐요.
그렇다고 해서 그럴 수만도 없어요. 이미 때를 맞아 가지고 이런 일을 이룰 수 있는 여기에서는 체면이고 뭐고 없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무슨 말을 듣든 뭐가 어떻든간에 그것을 문제시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그렇게 아시고, 복귀시대에 있어서 나이 어린 어머니를 택한 것을 이해하시고 앞으로 많이 협조해 줘야 되겠어요. 그리고 여러분이 나가서 자랑삼아 이야기하지 말고 여러분이나 알고 계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이렇게 하고 앞으로 이런 확정적인 한날이 또 있을 거예요. 그때는 여러분에게 떡도 해서 나누어 주고 그러려고 합니다. 그것이 지난 후면 여기 지금 효원씨나 그 외의 몇 사람을 잔치해 주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될 수 있으면 이달에, 3월달에 우리들이 생각을 결정해서 움직여 나가야 되리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렇게 알고 여러분들이 마음으로 많이 기도해 주기를 바랍니다. 요전에 여러분에게 무얼 하라고 한 것도 그때에 필요할지 모르겠어요. 그러니까 그렇게 알고 여러분의 형편이 되는 대로 기도하는 가운데서 준비하고 나가면 좋으리라고 생각해요. 아시겠어요? 「예」
자, 오늘은 기쁘게 이렇게 지내자구요, 예배도 그만두고. (장시간 동안 식구들의 간증과 노래가 있음) 이 시간은 남한 각지에서 예배볼 시간인데 기도 한번 하자구요.
사망에 눌리어 신음하는 역사 위에 그칠 사이 없이 탄식하였던 인생들을 이끄시기에 얼마나 수고가 많았습니까? 실수가 컸던 것을 생각하는 인생들의 모습이 회개가 커야 할 것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인류의 시조 아담 해와의 실수를 회복하기 위하여 6천 년 기나긴 세월 동안 수만 번 세워져 당신의 심혈을 안기어 보냈던 하늘의 역군들이, 반역하기를 일삼았고 배척과 저주와 원망하기를 일삼았던 것을 저희들은 역력히 알고 있습니다. 오늘의 그와 같은 후손된 저희들의 배반의 고개도 넘으시옵고, 곡절의 심정도 제재하시옵고, 슬픔의 눈물도 금하시어 어려운 고비고비를, 어려운 고개고개를 찾아오신 아버지 앞에 마음 헤쳐 놓고 감사할 줄 아는 아들딸이 되어야 되겠사옵니다.
이제 저희의 심정에 솟구쳐 오르는 간절한 마음을 갖고 힘없는 손길을 하늘 높이 들고 아버지를 부르던 간곡한 소원의 심정을 이제 이룰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보고, 듣고, 같이 살고 싶고, 떠나고 싶지 않은 하늘의 심정을 가진 통일의 무리들임을 당신이 아실 것이옵니다. 그 무리들은 세상적으로 인연이 되어진 것이 아니오라 천정을 받고 태어난 인간이기에 그 조국의 본향을 찾아오고 있는 연고로, 심정에 느껴지는 이 한 피살의 움직임이, 울려 나오는 맥박의 고동이 천년의 심정을 대신할 수 있는 순간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 이 시간에도 남한 각지에 외로이 널리어 불쌍한 자리에서 고생하는 외로운 식구들이 많은 것을 아옵니다. 하늘이 모른다 할 때는 저희같이 불쌍한 자가 없다는 것을 알았사옵고, 아버지의 심정을 체휼하지 못하였던들 저희와 같이 슬픈 자가 없는 것을 아옵니다. 외롭고 슬픈 그런 장면마다, 하늘을 향하여 울부짖는 곳마다, 아버지여, 같이 하시옵소서. 울부짖는 소리는 사막과 같은 이 삼천리반도를 향하여 메아리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부디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그들도 같은 마음, 그들도 같은 혈육이옵니다. 아버지를 생각하는 마음 그 누구에게 차이가 있사오리까. 하늘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누구에게 차이가 있사오리까. 그들을 같이 축복하여 주옵고, 온전히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천적인 인연을 잃지 않게 하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하늘이 원하는 그 길은 평탄한 길이 아닌 것을 이미 알았사옵고, 아버지가 가시는 그 발걸음은 말없는 걸음이오되 진정으로 한탄의 말을 하고 계신 것을 다시 알았사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머리 숙여 호소하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당신이 남기신 십자가의 고난의 길을 대신 맡고, 하늘 앞에 맡겨진 사명을 인계받아 모처럼 역사노정에서 수고하신 아버지 앞에 다시 한을 넘겨 주는 일이 없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겠다고 저희들 이 시간 맹세하게 하여 주시옵고, 이 시간 다시 한 번 새로이 각오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 슬픔의 시간이 아니오라 복받쳐 오르는 간절한 심정에 어린 이 마음을 억제할 수 없어 기쁨에 겨워 울부짖으면서 호소하지 않을 수 없는 시간이오니, 아버지, 40평생을 이끄시던 아버지의 수고의 노고를 이 시간 푸시옵소서. 누구보다도 당신이 외로운 것을 내가 알았사옵고 어느 누구보다도 당신의 억울함을 내가 알았사오옵기에, 참부모의 이름을 앞세워 나온 모든 것이 하늘을 위한 것임을 당신이 아시기 바라옵니다. 여기에 있는 당신의 뜻을 염려하는 당신의 아들딸도 이제 뜻을 이루기 위해서 이제 남은 여생을 다 바쳐, 죽든지 살든지 하늘 앞에 한 점의 흠을 남기는 아들딸이 되지 말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가면 갈수록 외로운 길이 아버지가 가는 길이었사옵고, 알고 나서 또 다시 걱정해야 할 그런 걸음을 걷는 것이 아버지의 걸음인 것을 알았사옵니다. 아버님, 6천 년 동안 찾고 찾은 그 날을 찾으시옵고, 이 날을 역사에 세우시어 아버지의 새로운 기업을 온 천주 앞에 세우는 날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아버지, 때와 시기를 작정하면 그 시기를 넘기지 않는 아버지의 작전 역사인 것을 알았사옵니다. 저희는 이 자리에서 하늘을 대하여 마음 놓고 사무치는 슬픔의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 앞에 감사의 말을 드리는 입장에 있사오나 아직까지 흑암권세에 사로잡혀 있는 삼천만 민족이 있사옵고, 사망권 내에서 갈 바를 알지 못하는 28억의 생명이 있사오니 그들을 저희들이 책임져야 되겠습니다. 저희들이 힘이 부족하면 힘을 주시옵고, 능력이 부족하면 능력을 주시옵소서.
이 한날을 승리의 날로 세우시고 천상의 지음받은 모든 피조만상 위에 나타나시어서 찾으려 하였던 해원의 조건을 완비하게 하여 주옵소서. 사탄세계 앞에 승리의 결산을 할 수 있는 이 시간인 것을 감사하옵니다. 저희들은 승리의 개가를 사탄은 패배의 슬픔을 맛보는, 저희의 생활과 그들의 생활이 바꿔치는 이 한 시점이 된 것을 알고 있사오니, 하늘이여, 승리의 개가를 올리시옵시고, 땅이여, 환희의 보답을 아버지 앞에 드리시옵소서. 영광 영광 무한한 영광! 천지가 합하여 기쁨으로 화할 수 있는 이 시간인 것을 알고 있사오니, 길이길이 후대 만세까지 이 기쁨의 시간을, 아버지, 거두지 마시옵시고, 사탄세계를 향하여 진군 진군하여 아버지의 자녀로서 어서 속히 복귀의 용자로 서기 위해 있는 심혈을 다 기울이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고, 맹세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각자의 마음 기준과 각자의 가려진 소명을 중심삼고 하늘 앞에 이 시간 맹세를 시키시옵소서. 떠오르는 새 생명의 역사의 불길 앞에 복바쳐 오르는 회개와 우리의 통탄 앞에 아버지가 현현하심으로 말미암아, 기쁨과 후회가 합하여 아버지의 영광을 더 높고 깊고 넓게 소화할 수 있는 이 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날 세우신 딸을 받으시옵고, 승리의 월계관을 씌우시어서 한스러웠던 한을 풀 수 있는 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남한 각지에서 참석하지 않은 식구들이 많사오나 같은 은사로 보호해 주실 줄 알고 있사오니, 아버지, 길이길이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이날로부터 이 승리의 영광만이 아버지 앞에 있으시옵고, 식구들의 모든 나아가는 길 위에 아버님이 같이하옵기를 간절히 바라올 때에, 보내신 바의 이름으로써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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