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의 됨됨이가 과연 아버지 앞에 드려질 수 있는지 염려하지 않을 수 없사옵고, 허락하신 아버지의 은사를 받을 수 있는 마음과 몸이 되어 있는지 저희들 스스로를 굽어 살펴볼 때, 민망한 마음으로 머리 숙이지 않을 수 없사오니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지금까지 자기 자신의 갈 길을 헤아릴 줄 아는 자를 버리신 적이 없는 아버지요, 슬픔의 자리에서도 자기를 뉘우치면서 살겠다고 발버둥치는 어떠한 개인이나 민족을 버리지 않으시는 아버지이심을 저희들은 아옵니다. 아버지, 비록 저희의 마음과 몸은 아버지와 먼 거리에 있사오나, 아버지께서는 저희의 마음속에 계시기를 고대하시는 줄 알고 있사옵니다. 저희의 몸을 직접 주관하실 수 있는 한 날을 바라시는 아버지의 마음이 크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고, 심정과 마음을 통하여 저희와 인연 맺기를 고대해 오셨던 역사적인 아버지요, 시대적인 아버지요, 미래에도 저희들을 버리실 수 없는 창조의 인연을 가지신 아버지이신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그런 입장에 놓여 있는 저희들이옵고, 그러한 저희를 대하셔야 할 아버지이옵니다. 이 인연은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기에 아버님께서는 슬퍼도 괴로워도 분하여도 이것들을 붙안고 뒤넘이치며 역사노정을 거쳐오셨다는 것을 저희들이 알고 있사옵니다. 이 시간 다시 한번 저희들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 앞에 감히 설 자가 누가 있사오며, 아버지 앞에 설 수 있노라고 자신할 자가 누가 있사옵니까? 가면 갈수록, 알면 알수록 살을 에이는 듯한 하늘의 슬픔을 느끼지 않을 자가 없을 줄 알고 있사옵니다. 감히 얼굴을 들 수 없고, 감히 몸 둘 바를 모르게 하는 황공한 아버지의 성상이 계시고 아버지의 심정이 있사오며, 아버지의 수고의 흔적이 있다는 것을 아는 자가 없었사온데, 저희들이 그와 같은 사실을 알 수 있게 키워 주심을 감사하옵니다.
가르침을 받아 알았사옵고, 배워서 알았사옵니다. 이것은 누구로 말미암은 것이었사옵니까? 저희들이 잘나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었사옵고, 저희가 갖출 바를 갖추어서 그렇게 된 것도 아니었사옵니다. 역사적으로 선을 흠모하던 수많은 선조들이 하늘과 맺은 인연이 저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저희들에게 미쳐져 그렇게 되었음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오늘의 저희는 오늘의 저희만이 아닌 것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그 인연을 존중할 줄 알고 그 인연과 더불어 즐길 줄 아는 사람이 되고, 그 인연을 배반하는 자가 되지 말게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그 인연 가운데 스며들어 심중으로 그 인연을 노래하고 아버지를 드러내어 아버지 앞에 영광을 돌릴 줄 아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님, 저희의 마음이 어떠한 위치에 있습니까? 저희의 몸은 무엇을 기다리고 있고, 무엇에 의하여 움직이고 있고, 어디에 처하기를 바라는가 스스로 생각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고요한 가운데에서 아버님은 이 시간도 생명의 가치를 느끼도록 재촉하고 계신다는 것을 저희들이 마음으로 느끼게 하여 주시옵고, 인간들이 자신의 생명만을 붙들고 허덕이는 비참사(悲慘事) 때문에 그를 바라보며 슬퍼하실 수밖에 없는 아버지이심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의 심정이나 마음의 세계를 지배하시는 아버지, 친히 오시어서 이 시간 저희들 전체를 본성적으로 지배하여 주시옵고, 본질적으로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본성의 사람, 본질의 사람과 선을 대하여 즐거워하며 선의 말씀에 화하는 사람이 되어 마음으로 몸으로 아버지와 화할 수 있는 자리에 서게 하여 주시옵고, 저희에게 새로운 말씀을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제 여기에 아버지의 말씀을 나타내고자 하오나 무슨 말씀을 하오리까? 이미 많은 말씀을 하셨사옵니다만 말씀의 가치를 찾아야 할 사명을 오늘 이 시점에 저희들의 마음과 몸을 통하여 알리고자 하시는 것을 알게 될 때, 부족한 것 이루 말할 수 없사옵니다. 그러나 다시 살아야 할 인간이옵기에 같은 말이라도 해서 다시 권고함을 받아야 할 저희들인 것을 알게 되옵니다. 아버지와 끊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생명의 말씀을 받아야 할 저희들, 염치불고한 마음과 부족한 마음 갖고 아버지 앞에 엎드렸사오니, 전하고자 하는 마음과 받고자 하는 마음이 하나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잘난 사람이 어디 있고 못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심정을 통하여서는 하나인 것을 알고 있사오니, 하늘의 심정에 동하고 정할 수 있으며 화하고 응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아버지의 영광만이 저희 전체의 생명 앞에 나타나시옵고, 아버지의 생명의 은사가 저희의 심중 깊이깊이 스며들게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저희의 마음과 심정을 움직여 주시어서 영원한 생애노정을 개척하고, 복귀의 한을 풀려는 새로운 각오와 결심이 저희의 심중으로부터 폭발되는 이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고 원하옵나이다.
이 시간 남한 각지에 널려 있는 외로운 식구들이 민족을 위해 간곡히 기도하고 있을 줄 알고 있사오니, 아버님께서 그들의 친구가 되시옵고, 그들 앞에 은사의 주체가 되시옵소서. 친히 주관하여 주시옵고, 눈물을 흘린다 할진대 아버지를 대신하여 흘릴 수 있고, 한스러운 일이 있다 할진대 먼저 아버지의 한을 생각할 수 있고, 수고를 한다 할진대 아버지를 대신해 수고하여 이 민족 앞에 새로운 피 살의 터전을 세우고도 남을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하늘의 은사를 대할 수 있는 축복의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시간 머리 숙인 억조창생 위에도 생명의 권한을 허락해 주시옵고, 천상에 있는 수많은 당신의 아들딸들도 저희와 화합하여 승리적인 영광의 한 터전을 세우는 데 협조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올 때,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말 씀> 오늘 잠깐 생각하려는 제목은 ‘선물인 줄 아는 우리가 되자’입니다. ‘선물인 줄 아는 우리가 되자’ 이러한 제목을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자기를 몹시 중요하게 여깁니다. 살아도 자기를 중심삼고 살려 하고, 모든 세상이 자기를 중심삼고 되어졌으면 하고 항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제일가는 위치에 있고 싶어하는 것이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만큼 자신이 귀하다면 말할 수 없이 귀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는 인간 자신의 귀한 가치를 알고 자신은 세계를 주고도 바꿀 수 없다고 피력했습니다. 하나님도 우리들 자신이 무한한 가치를 갖추었을 때는 우리의 한 개체를 하나님의 성전으로 만들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생애노정에서 허덕이며 신앙생활을 하는 목적이 어디 있느냐? 내 자체는 전체의 가치와 연하려는 목적관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는 것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나를 두고 보게 될 때 위로는 하늘이 있고 아래로는 땅이 있습니다. 좌우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 가족 그리고 종족이 있고, 전후로는 선조와 후손이 있습니다. 이렇게 상하 전후 좌우를 볼 때, 나라는 존재는 엄연한 인연권 내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느끼며 살아왔지만 이 시간 우리는 그것을 다시 한번 느껴야 되겠습니다.
위를 바라보나 아래를 바라보나 전후를 바라보나 좌우를 바라보나 그 모든 것이 나와 인연되어 있습니다. 또한 이 인연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생명을 가지고 가는 생애노정, 즉 일생 동안의 인연인 것입니다. 아니 더 나아가서는 역사 이래 지금까지 인연되어 왔고, 오늘의 나를 지나서 천추만대의 후손까지 인연되어야 할 그러한 인연의 제단 위에 올라가 있는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야 될 것입니다.
이러한 내가 깨어지는 날에는 나를 중심삼은 하늘의 인연이 깨어질 것이고, 땅의 인연이 깨어질 것이고, 세계 혹은 종족과 가정의 모든 인연이 깨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두고 하늘과 땅을 대신한 소우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은 하늘을 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내 몸은 땅덩이를 차지하고 싶어합니다. 또한 나는 천지의 그 무엇으로도 막아낼 수 없는 주권자, 대표자의 심정에 의해 움직이고자 합니다. 이러한 나, 이러한 인연을 가진 우리를 깊이 해부해 들어가면 무한히 가치 있는 존재요, 무한히 큰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우리는 왜 태어났느냐? 목적 없이 태어나지는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아침에 일어나 무심코 떠먹는 밥 한술도 목적 없이 먹혀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루의 생활을 영위하고 활동하는 것도 그런 심각한 견지에서 보게 되면 중차대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내 개체를 중심삼고 봐도 그렇거든, 위로는 하늘이 있고 아래로는 땅이 있고 세상만사가 있는데, 그 모든 것이 어떤 목적과 이념을 가지고 움직이지 않는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 모든 움직임은 우리 인간 즉, 내 자체를 걸어놓고 판가리를 하고 있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 자신들은 하늘땅, 전세계 앞에 판가리 할 수 있는 대표적인 제물의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여러분이 제물로서의 책임을 다하면 하늘과 땅이 선의 권내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열어줄 것이로되, 만일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날에는 하늘땅 앞에 배반자의 입장에 서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심정을 느끼고 나타나 책임을 지고 움직였던 사람들이 역사적인 인물임에 틀림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이 땅 위에 보내심을 입었습니다. 부모의 혈육을 통하여 태어났습니다. 이러한 나라는 자체는 천지가 옹호하여 하나의 승리의 모습으로 세우기 위해 이 땅 위에 보낸 지극히 숭고한 선물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천주적인 견지에서 종족을 대표하든가 민족을 대표하든가 국가를 대표하든가 간에 하늘의 선물로 보내심을 입은 자가 바로 여러분 자신이라는 것을 생각하여 보십시오.
내 몸, 내 마음, 내 이념, 내 심정, 이 모든 것이 내 것에서부터 시작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나 한 자체를 파고 들어가면 선조가 연결돼 나오게 되고 이 인연을 파고 들어가면 오늘날까지의 인류역사가 딸려 나옵니다. 이 인연에 이끌려 들어가 뒤넘이치는 입장에 있는 나 자신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자신을 소홀히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나 자신은 내 것 같으면서도 내 것이 아닙니다. 이 민족 앞에는 민족을 위하여 보내진 선물이요, 가정 앞에는 가정을 위하여 보내진 선물이요, 부부에 있어서는 상대를 위하여 보내진 선물이요, 하늘땅, 전세계에 있어서는 각기 그것들을 위해 보내진 하나의 선물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개인에 있어서 자신을 보십시오. 사람들은 말하기를 마음은 하늘을 상징하고 몸은 땅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오늘 하늘과 땅, 이 천주는 무엇을 중심삼고 움직일 것이뇨? 이념입니다. 그 이념은 생활하는 데 있어서의 관(觀)입니다. 이 생활관은 나를 중심한 생활관이 아니라 하늘땅을 중심한 생활권이어야 되는 것입니다. 즉 하늘땅을 중심한 생활이어야만 된다는 것입니다.
본래의 내 한 개체는 하늘땅을 대신하여 빚어졌음을 알아야 됩니다. 나는 무의미하게 걷고, 무의미하게 움직이고 있으되, 나 하나를 빚어내기 위해서 하늘땅 전체가 동원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우리에게는 부모가 셋이 있습니다. 첫째는 이 땅이 우리의 부모입니다. 몸뚱이를 빚어 주고 낳아서 기를 수 있는 터전이 땅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라면 나라, 세계면 세계가 땅을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에는 나의 육신을 낳아준 부모가 있습니다. 또 그 다음에는 내 마음의 부모가 있습니다, 내 마음의 부모. 이 세 부모를 망각해서는 안 될 인간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내 몸은 땅을 상징하고 내 마음은 하늘을 상징하거늘, 이 마음과 몸은 어떻게 되어야 하느냐? 영원히 일체를 이루어 서로 품고 나가야 됩니다. 마음은 주체요 몸은 대상이며, 하늘은 주체요 땅은 대상이니, 하늘과 땅이 서로 품고 화하여 나아가야 되는 것이 창조의 원칙입니다.
천지를 창조한 창조주가 있다 할진대 그 창조주는 만상을 왜 지었을 것인고? 그냥 동떨어지게 내버려두고 구경이나 하려고 지은 것이 아닙니다. 그 지으신 만상을 상대적인 입장에 놓고 함께 영원히 주고받으며 화하기 위하여, 영원히 움직이기 위하여 지으신 세계인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하늘과 땅에 의해 빚어진 몸과 마음이 영원히 품고 즐길 수 있는 그 하나의 모습은 어디 있을 것인가를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리 똑똑하고 아무리 어떠한 권한을 갖추었다고 자랑하는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그 몸과 마음이 상충된 경지에 있다 할진대 이는 창조이념으로 부여된 천적인 선물을 유린한 자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는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는 내 안에 있고 나는 아버지 안에 있으며 나는 너희 안에 있고 너희는 내 안에 있다.’고. 이것은 무엇을 중심하고 그렇게 될 수 있느냐? 몸을 중심하고 그렇게 될 수 있느냐? 아닙니다. 그러면 이념을 중심하고 그렇게 될 수 있느냐? 아니에요. 우리의 마음과 심정의 세계를 중심하고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 말씀하시기를 ‘천국은 네 마음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마음 세계는 무한의 인연을 노래하고, 우리의 심정은 무한한 감미와 무한한 충족을 자랑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연고로 오늘의 우리들은 하늘땅을 대신하여 보내심을 입은 귀한 선물입니다. 귀한 선물이 자신임을 여러분은 생각해 보았습니까? 선물 된 자신을 생각해 보았습니까?
무슨 종교도 좋고, 무슨 이념도 좋고, 무슨 주의도 좋지만 그 목적이 어디 있느냐를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천지를 대신하여 선물로 보내진 자신의 가치를 생각해 보았습니까? 하늘이 즐겨 받고 땅이 즐겨 받을 수 있는 모습이 되기 위해서 보내심을 입었다는 것을, 자신은 그러한 모습이 되기 위해 허덕이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생각해 봤습니까?
우리의 마음은 천성을 따르라고 명령하고 몸은 이 땅을 대하여 투쟁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두 갈래의 상충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마음과 몸은 역사적인 최종 단계에서 하나로 화합해야 되는데 화합할 수 있는 무엇이 없다 할진대 종교니 창조주니 무슨 이상이니 하는 것, 다 소용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 땅 위에 선물로 보내어진 우리야말로 귀하다면 무한히 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선물된 자신을 무시한 자는 천륜의 법도 앞에 설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람은 땅과 하늘에 화하게 되어 있습니다. 인륜은 천륜에 화하게 되어 있습니다. 주체 앞에 대상, 혹은 주체 앞에 객체는 반드시 화하게 되어 있습니다. 객체는 대상의 입장이기 때문에 주체를 향한 방향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 연고로 우리는 왜인지는 모르면서도 양심을 중심삼고 생활하려 합니다. 양심의 명령을 벗어나서 살려고 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천륜 따로 있고 인륜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과 몸이 화하여 움직이면 천륜과 인륜이 화하여 통일성을 갖출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륜이 있고 천륜이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인간들이 천륜에 따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시 천륜에 따르는 생활을 하기 위해 허덕이는 것이 타락한 세상의 인간들의 생활 실상입니다.
여러분은 어쩌다가 이 땅 위에 선물로 보내졌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개인을 이 땅 위에 선물로 보내신 목적이 무엇이뇨? 개인을 세운 목적은 어디 있느뇨? 개인을 세워 무엇을 하고자 하시느뇨? 개인을 세워 상대를 품게 하여 부부를 이루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면 부부를 세워서는 무엇을 할 것이뇨? 자녀를 품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것이 가정입니다. 가정을 세워서는 무엇을 할 것이뇨? 종족을 품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종족을 세워서는 무엇을 할 것이뇨? 씨족, 부족, 더 나아가서는 민족을 품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민족을 세워서는 무엇을 할 것이뇨? 국가를 품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국가를 세워서는 무엇을 할 것이뇨? 세계를 품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세계를 세워서는 무엇을 할 것이뇨? 여기에 오늘의 역사가 걸려 있습니다.
인간을 이 땅 위에 선물로 보냈는데 그 선물은 개인에서 그쳐서는 안 됩니다. 몸은 비록 하나의 몸이로되 마음의 세계, 심정의 세계는 무한한 천주를 품고 노래하며 살고 싶어합니다. 창조주가 있다 할진대 어떻게 우리를 지배할 것인고? 심정의 세계를 통하고 이념의 세계를 통하여 지배합니다. 거기에서 우리를 향하여 ‘오라, 오라, 오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양심을 통해 재촉해 들어오는 것입니다. 양심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힘의 작용입니다.
개인은 개인을 귀하게 생각해야 됩니다. 개인을 귀하게 여길 줄 아는 사람은 반드시 가정을 귀하게 여길 줄도 알아야 됩니다. 가정을 귀하게 여기는 것에서 그쳐서는 안 됩니다.
원시시대는 가정단위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가정단위시대는 지나갑니다. 넘어가야 합니다. 왜? 우리 인간은 천주를 품음으로써 천주적인 선물의 입장을 완결짓고 선물 된 인연의 가치를 노래해야 할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연고로 역사는 발전해 나옵니다. 자기 끼리끼리 사랑하고, 자기 가정만 사랑하는 시대는 지나가고 가정을 넘어 씨족, 씨족을 넘어 부족, 부족을 넘어 민족으로 가는 것입니다. 민족에 그치는 것만도 아닙니다. 다음엔 국가를 일으켜야 하는데 그 국가에만 머물러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국가를 넘어서 세계 형태까지 나아가야 됩니다. 이제 남아진 것은 무엇이냐? 우리를 이 땅 위에 보내신 목적은 내 마음과 몸이 세계를 품고 세계와 화할 수 있기를 바라고 보내신 것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늘은 아담 해와를 창조해 놓고 축복하셨습니다. 아담에게는 해와가 있었고 해와에게는 아담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둘이로되 하나를 표준한 하늘의 선물이었습니다. 그래서 둘이 하나가 되어 온 피조만물을 주관하라고 하늘은 축복하셨습니다. 해와는 몸의 상징이요 땅의 상징이며, 아담은 마음의 상징이요 하늘의 상징이니 거기에는 전체가 들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 둘은 어떻게 되어야 할 것이뇨?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 일체입니다. 이것이 천지의 원칙입니다.
몸은 둘이로되 하나, 일체라고 했습니다. 둘이 일체가 되어 가지고 무엇을 하라 하셨느냐? 만우주를 주관하라고 하셨습니다. 주관하라 하신 목적은 무엇이냐? 만상과 관계를 맺기 위함입니다. 창조주는 개인의 창조주가 아니라 온 천주의 창조주이기 때문에 온 천주와 인연을 맺으려고 인간에게 만물을 주관할 수 있는 권한까지 허락하셨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역사는 인간이 온 세계를 주관할 수 있는 기준을 향해 흘러가고 있습니다. 몸 마음이 화하듯이 이 세계는 마음과 화하고 몸과 화할 수 있는 세계를 향하여 뒤넘이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때는 바야흐로 끝날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이구동성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세계적인 교단이나 어떠한 주의 사상으로도 해결하기 어려운 시대가 왔습니다. 오늘날까지 인간 앞에 제시된 주의 주장으로는 우리의 마음의 세계를 포괄할 수 없고, 심정의 세계를 안식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철학도, 종교도, 과학도 스스로 항복하여야 할 단계에 들어와 있음을 여러분이 알아야 하겠습니다.
여기서 알아야 할 문제는 무엇이뇨? 그것은 이 세계는 무엇을 품어야 하느냐? 무엇을 품어야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마음세계를 넘어서, 천주를 넘어서 무한한 것을 품어야 합니다. 이 세계가 품고 있는 이상의 그 무엇을 품고 그것의 가치를 노래하는 것이 지상의 어떠한 것보다 귀하다는 것을 느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이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개인을 세운 것은 가정을 품게 하기 위하여, 가정을 세운 것은 사회를 품게 하기 위하여, 사회를 세운 것은 국가를, 국가는 세계를 품게 하기 위하여 세운 것입니다. 과거에도 주의나 주장이 많았지만 세계를 위한 것이 세계적인 주의가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주의를 갖고 나섰다 할진대 세계를 품을 수 있는 발판을 세움으로써 그 주의는 세계로 뻗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씨족적인 관념은 다 깨져 나갑니다. 민족적인 관념도 다 깨집니다. 이것은 창조이념이 그렇게 안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은 세계주의시대입니다. 두 진영이 대결하여 세계를 나누는 때입니다. 이것이 싸움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어느 것이 마음을 상징하고 어느 것이 몸을 상징한다는 내용의 기준을 세워 놓고 해결하지 않는 한 이 세계는 혼란이 벌어져 자멸의 길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면 창조원칙으로 보게 될 때, 세기말적인 종단(終端)에 서 있는 현재의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이냐? 창조이념이 이렇다 할진대, 이 우주를 품고도 남을 수 있는 절대자 하나님이 있다 할진대 인간이 하나님도 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을 품을 수 있는 경지까지 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네 안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그렇지만 하나님이 여러분의 몸뚱이 안에 들어가 있겠어요? 마음의 세계는 무한대입니다. 심정의 세계도 무한합니다. 마음이 그러한 본질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중심삼고 움직일 수 있고, 또 같이 계실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그렇잖아요? 그렇게 되지 않았다면 어떠한 사람이 이 세계를 자유자재로 지배할 수 있게 되었다 하더라도 그 마음이 소망하는 기준을 채울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무한한 세계와 천륜을 벗어나 가지고는 심정으로 노래하게 하고 그 마음을 안식시킬 수 있는 것이 땅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작용을 하고 그런 느낌을 일으킬 수 있는 주체가 있다면 그 주체와 관계를 맺기 전에는 이런 소망은 해결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늘 앞에 황공해 해야 합니다. 지지리 못나고 저주받아 마땅한 타락의 후손을 여기까지 끌고 나오신 하늘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말씀의 저자 요한은 우리 인간을 대해 이미 죽었다고 말했습니다.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계 3:1)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산 것 같으나 사망권에서 고통을 당하며 신음하고 있는 인간입니다. 이러한 인간을 수습하여 어떠하든지간에 세계의 형태까지 끌고 나왔습니다. 수많은 주의를 통해서 끌고 나왔습니다. 개인보다도 민족을 사랑하는 주의는 민족을 움직였고, 민족보다 국가를 사랑하는 주의는 국가를 움직였고, 국가보다 세계를 사랑하는 주의가 나와서 세계를 움직였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세계만이 아니라 하늘땅을 사랑할 수 있는 주의, 그런 주의가 나오면 이 하늘땅을 점령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수많은 투쟁역사를 거쳐서 불쌍한 인류를 끌고 나와 오늘날 이런 세계를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오늘날 이 땅은 세계형이 되었는데 정말 하나님의 마음을 닮은 세계가 있느냐? 몸의 형태, 즉 외적인 면은 모두 갖추어졌는데, 이 몸이 땅을 상징하였다면 끝날에 하나님의 마음과 연락할 수 있는 하나의 터전이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오늘 이 시대에 세계적으로 나타나는 모든 현상들은 천륜에 의해 움직이는 역사노정의 선물인 것을 우리들은 잘 모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많은 혁명 과정에서 자기의 주관을 갖고 그것들을 반대하였다면 그들은 천륜의 역적이라는 것입니다. 오늘의 이 시대는 새로운 시대로 넘어가려 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이 시대를 새로운 마음의 세계로 끌어가려 할 때,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반기를 들면 그들도 정죄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 앞에 유대교가 그러했고 예수 앞에 이스라엘 민족이 그러했습니다.
이제 세계주의시대가 지나가고 새로운 천주주의 이념시대가 찾아 들어올 때에 쌍수를 들고 환영하며 그 시대의 중심 앞에 전체가 굴복하지 못하면 모두 깨집니다. 이것이 왈 대심판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도탄 중에서도 자기의 역사적인 관념과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모세 앞에 머리 숙이고 하늘이 같이하시는 모세를 붙들고 나갈 때는 앞에 가로막힌 홍해도 무난히 건널 수 있었고, 바로 밑에서의 역경과 고통스런 환경도 무난히 넘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세와 갈라지게 되자 60만 대중은 광야에서 다 쓰러졌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역사를 지배해 나오는 것은 무엇이뇨? 그때 당시의 사람들을 이끌어 가는 사조나 주의가 아닙니다. 더 높은 곳을 향하여 이끌어 주는 마음인 것입니다. 그 더 높은 곳이 어디냐?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역사는 최후에 하나님의 마음과 연락될 수 있는 길을 닦아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를 지배해 나오는 것은 그 시대의 어떠한 주권이나 조직이나 기관이 아니라 그 조직을 이끌 수 있는 높은 이념입니다. 그 이념에 사무치고 그 이념에 단결되어 나갈 때 그 나라는 흥하였고 그렇지 않을 때는 망했습니다.
그러한 이념을 세우시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그 이념을 중심삼고 세계적인 형태로 내몰아 끝날까지 이끌어 나왔다면, 이제 이 세계에는 어떠한 형태가 나와야 될 것이뇨? 이 역사의 마음이 될 수 있는 천적인 내용이 인류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 할진대 하나님의 사랑이니 뭐니 하는 말은 다 거짓말이 됩니다. 세계사에 종교를 세워 나오는 것도 그것 때문입니다. 새로운 무엇이 나와야 한다는 거예요.
노아 할아버지는 가정적인 시대에 새로운 그 무엇을 바라보며 하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날을 그리워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축복하실 때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번성하게 될 것이라.’ 하는 소망의 한 조건을 세워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바로의 압제하에서 뛰쳐나올 때에는 가나안 복지를 선물로 주시마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를 이 땅에 보내실 때에는 무엇을 그리워하게 했겠습니까? 소망의 실체인 메시아를 고대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가신 이후 2천년 동안은 무엇을 소망하게 하셨느뇨? 새로운 한 날, 끝날을 소망해 나오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소망의 기준을 잃어버리는 민족은 꺾어집니다.
우리의 몸은 천적으로 부여된 하나의 선물인데 타락으로 말미암아 아직까지 선물 될 수 있는 몸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또한 우리는 완전히 마음의 본향을 못 찾았습니다. 하늘과 더불어 땅과 더불어 즐길 수 있는 영원한 본향을 못 찾았습니다. 몸의 본향과 마음의 본향을 찾아서 심정을 중심 삼고 하늘과 더불어 살 수 있는 생활의 본향을 못 찾았습니다.
인류역사는 재창조역사라 했고, 사람 하나를 완성시키기 위해 움직인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외적인 면으로 몸의 본향을 세계 무대에 올려 놓기 위하여 이끌어 나왔습니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마음의 본향입니다, 마음의 본향. 이 세계가 아무리 외적으로 천국형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마음의 본향을 갖추지 못하면 인간은 불행합니다. 20세기 문명이 제아무리 고도로 발달되었다고 자랑하며 인류 앞에 공헌했노라고 큰소리친다 해도 인간이 편안한 잠을 이룰 수 있고 모든 것을 잊어버릴 수 있는 마음의 안식처를 부여하지 못하는 한 이 역사는 어느 한때 깨져 나가고 말 것입니다.
인간은 타락하였다고 합니다. 타락이 죽은 것이라 한다면 인간이 타락했으니 세계도 죽었습니다. 세계가 죽은 입장에 있기 때문에 인류는 그로 인한 고통을 겪어 나오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죽음 가운데서 부활하려니 고통을 겪어 나온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부활의 고통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마음을 먼저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몸을 먼저 창조하셨습니다. 그런 고로 우리가 부활하는데도 먼저 외적인 세계부터 갖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원리에서 배워서 알겠지만 이 외적인 세계에 있어서도 선의 형태와 악의 형태가 있는데, 그것이 오늘날의 두 진영입니다. 이것이 상충하고 최후의 격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어차피 이것은 하나를 중심삼고 움직여야 되는데 그렇게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될 것이뇨? 외적인 몸과 더불어 즐길 수 있는 하나의 이념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없다 할진대 인류역사는 비참하게 될 것입니다.
인류는 아직까지도 몸의 본향을 못 찾았습니다. 우리의 몸이 공포를 느끼는 세계에 놓여 있는 것을 볼 때, 몸의 본향을 찾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위험하고 아무리 어려운 입장에 있다 할지라도 자식이 부모의 품에 안겼을 때는 공포를 느끼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몸의 본향이 찾아졌다 할진대 현실 생활에서 마음으로나 몸으로 기쁨을 느껴야 할 터인데 이 땅 위에서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공포에 사로잡혀 들어가고 있습니다.
하늘은 인간을 망하게 하기 위해서 세계에 있는 모든 것을 지으신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독약이 든 선물처럼 만물을 지으신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부활되는 과정을 기필코 거쳐야 하는 것이 타락한 인간들의 운명입니다. 역사적인 죄의 보따리가 우리에게 있으니 이것을 청산해야 할 최종단계, 이 죄의 보따리를 청산해 버리고 새로운 세계를 향해 넘어가야 할 시대에 봉착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이 몸이 다시 태어나서 안식할 수 있어야 됩니다. 이 고개를 지나가야 됩니다. 오늘날 세계는 이 고개에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해산의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부모의 품에 안기기 위해서, 몸의 안식처, 몸의 복지를 찾기 위해서입니다.
몸은 땅을 상징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몸이 안식하고 살 수 있는 복지를 향하여 가고자 한다면 다시 태어나는 고통을 겪어야 합니다. 그러니 시간이 가면 갈수록 점점 불안과 공포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고개를 넘고 나면 기쁨이 있습니다. 그렇잖아요? 임신한 부인들이 해산의 기한이 가까워질수록 고통이 점점 더해갑니다만 그 고통을 넘고 나면 그 고통에 반(伴)하는 기쁨이 있듯이 그러한 고비가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늘은 인간을 지어 놓고 축복하시기를 ‘내 몸은 땅을 지배할 것이요 네 마음은 하늘을 지배할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창조원리를 배웠지요? 우리의 몸은 땅을 지배하고 우리의 마음은 하늘을 지배해야 할 것입니다.
인간의 욕망 중에 최고의 욕망이 무엇이뇨? 요놈의 땅덩어리? 아닙니다. 땅은 이 몸으로 지배할 수 있는 동시에 마음으로는 영계를 지배하고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까지도 내 것 만들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야 여러분이 편안해요. 최고의 것을 여러분의 것으로 만드는 그날까지 안심해서는 안 돼요. 그렇지 않으면 성경 말씀은 다 헛것입니다. 헛것이에요.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신 목적은 무엇이뇨? 그것은 인간에게 지극히 좋은 선물로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흙덩어리로 빚어진 이 몸, 그 이상의 선물이 어디 있겠어요? 이 몸뚱이에 영생할 수 있는 생명을 불어넣어 준 것 이상 큰 선물이 어디에 있겠어요?
하나님은 자신의 마음이 깃들 수 있는 터전을 세우기 위해 6천년 동안 피 흘리는 투쟁의 역사를 거쳐왔습니다. 지금까지 인간을 붙들고 희생에 희생과 고통에 고통을 겪어 오시면서 천륜의 책임자로서, 천정(天情)의 책임자로서 불러 세우고 택해 세운 무리들이 종교인입니다.
어차피 한 때는 가고 새로운 한 때가 올 것이거늘 해산할 수 있는 한 때, 몸의 세계가 안식할 수 있는 때가 반드시 올 것입니다. 그때 새로운 마음의 기반을 닦기 위한 내용을 가르쳐 주는 것이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이것입니다. 오늘날 사탄이 뒤넘이쳐 들어오는 것은 땅 위에 안식의 세계가 오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언젠가 한번은 선물의 가치를 판정받을 때가 올 것입니다. 하늘이 세우고자 하시는 역사적인 몸, 하늘이 찾아 세우고자 하시는 천주적인 마음이 되었는가 하고 절대적인 기준으로 재어 볼 때가 올 것인데, 그 때가 심판날입니다. 그 때가 심판날이에요.
몸은 만물을 지배하라고 했으니 이 몸뚱이는 만물 앞에 어엿이 나타날 수 있어야 합니다. 만물이 그 몸뚱이를 보고 ‘옳소이다. 내 주인이오.’ 하며 숭배할 수 있는 몸뚱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고로 인류역사는 창조주가 축복하신 주관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흘러나왔습니다.
과거에 인간이 세계를 몰랐을 때는 세계가 무한히 멀었지만 문명이 발달됨에 따라 오늘날 세계는 하나의 생활권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계주의와 더불어 살아야 합니다. 그 터전 위에 우리의 마음과 몸이 세계주의의 인연을 넘어서 천주와 인연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늘은 그럴 수 있는 한날을 바라면서 나오셨습니다. 그것을 접촉시키기 위하여 인간 대표로 오시는 분이 메시아입니다. 허무맹랑하게 되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섭리는 질서적인 법도와 내용을 가지고 기준을 세워서 해 나오고 있어요.
오늘 우리 자신은 한 민족 속의 개인이요, 한 가정 속의 개인입니다. 그렇지만 ‘나’라는 한 존재는 우주사적인 책임을 지고 있고, ‘나’라는 한 존재는 하늘땅 앞에 보내진 최대의 선물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여러분 자신의 몸을 귀하게 여길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내 몸은 6천년 동안 하늘땅이 총동원하여 찾으려 한 귀한 몸이구나, 귀한 역사적인 선물이구나.’ 하며 머리 숙일 줄 아는 사람은 틀림없이 하늘의 아들 딸들이 될 것입니다. 틀림없이 천국 갑니다.
내 몸뚱이 하나를 완결시키기 위하여 하나님은 역사에 피비린내 나는 자국을 남기셨습니다. 눈물의 길, 피 흘리는 길, 고통의 길, 억울한 길을 걸어오신 것은 나 하나를 선물로 세우려 하신 것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여 세워진 내 한 몸인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내 자신이 은혜를 배반한 입장이 되지 않았나 살펴보고 천주의 이념을 위하여 움직여야 할 하늘의 선물인 내 모습은 어떤 자리에 있는지 알아봐야 되겠습니다. 그 몸이 미급하고 부족하다 할진대 스스로 머리 숙일 줄 알아야 됩니다. 그런 사람,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틀림없이 하나님의 아들딸이 됩니다. 그런 사람은 틀림없이 천국 가요.
그런 것을 느끼고, 또 자기 가정에서 부부끼리 혹은 자녀를 대할 때도 이런 입장에 서고 자신이 그런 이념을 위하여 보내진 선물이며, 만상을 대할 때도 역시 대우주의 선물의 목적을 완결시키기 위하여 보내진 자신임을 느끼는 사람, 그 사람에게 양심은 빼놓고 그런 관념만 서 있더라도 그는 우주적인 인간이 안 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몸은 역사적이요, 우주사적인 선물인 것을 알아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몸을 가지고 자기 마음대로 하다 보니 위로는 하늘, 아래로는 땅, 전후 좌우에 있는 전부를 유린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런 녀석들을 천국에 보내주겠습니까? 당장에 지옥에 집어넣지. 그렇지 않겠어요?
이제는 알았습니다, 처음에는 몰랐을지라도. 이 몸은 하나님이 엿새 동안 창조하신 피조물 가운데 최고의 정력과 솜씨와 최고의 심혈을 기울여 만드신 실체인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이것을 바라보시며 세계를 꿈꾸고, 이것을 통해서 세계를 치리하고자 하신 하나님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귀한 선물인 몸을 인간은 잃어버렸습니다. 이 몸, 이 자체를 회복하려 하셨기에 예수는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막 8:36) 하신 것입니다. 선물 된 자신을 유린하고, 선물 된 자신을 배반하는 자는 망합니다. 개인이 그러하면 개인이 망하고, 가정이 그러하면 가정이 망하고, 국가가 그러하면 국가가 망하고, 세계가 그러하면 세계가 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종말인 오늘날 혼란된 사조는 우리의 주위를 휩쓸어 들어오고 있으나, 여기에서 깨져 나가지 않고 천륜 앞에 선물 된 내 몸의 가치를 노래할 수 있는 늠름한 모습은 없겠느냐? ‘하늘이 6천년 동안 이 땅을 대해 하나의 사람을 고대하셨다면, 내 몸은 아버지가 주신 선물이오니 이 몸을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할 때, ‘오냐.’ 하는 대답을 들을 수 있는 그런 몸은 없겠느냐? 이것이 오늘날 신부의 이념을 찾아 나가는 기독교의 최고 목표입니다.
성신은 예수가 가심으로 말미암아 땅에 왔습니다. 예수는 신랑이기 때문에 하늘에서, 성신은 신부의 신이기 때문에 땅에서 활동하십니다. 신부의 신이 강림하여 2천년 동안 허덕이며 하는 일이 무엇이뇨? 선물 될 수 있는 몸이 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선물이 완성될 수 있는 제단을 쌓으려는 것이 성신제단, 즉 2천년 기독교사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종결되기 전에는 신랑은 올 수 없습니다.
그러면 신랑은 어떠한 분으로 올 것이뇨? 마음의 복지 건설, 심정의 복지 건설의 주인공으로 오십니다. 마음의 복지, 마음의 안식처, 심정의 안식처를 품고 대우주관을 갖고 오시는 분이 주님이에요. 그래야 역사적인 주님이 됩니다. 그래야 역사적인 하나님이 되고, 그래야 우리도 역사적인 승리의 아들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옛날의 그 꼴 그 모양으로 있으면 되긴 뭣이 돼요?
하늘은 사망의 꼬리를 물고 사망권으로 들어가는 인류 전체를 붙들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나 그럴 수 없기에 한 사람을 붙들기 위해 수고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타락 이후 1,600년 만에 찾아 세운 것이 노아 할아버지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망할 인간들은 하늘이 있는지 없는지 알지 못해요. 그러나 하늘은 이런 인간들과 심정의 인연을 맺으시고 그것을 소망으로 하시고 몸뚱이를 쳐서 굴복시키는 일을 해오셨습니다. 그 뜻에 우리는 절대 복종해야 합니다. 복종하는 데는 어떠한 복종을 해야 되느냐? 세계사적인 이념을 대신하여 출발하는 개체에게는 세계사적인 고통을 준다는 것을 알고 거기에 감사해야 합니다. 끝날의 심판을 면하고자 하는 자들은 오늘 이 순간에 심판을 넘어갈 수 있는 고통을 겪어야만 됩니다.
하늘은 세계사적인 내용을 가지고 섭리하시는 연고로 우리 선조들이 천적인 사명을 갖고 나타나게 될 때, 형태는 작고 고통의 시간은 짧지만 거기에는 세계사적인 고통의 내용을 내재시켜 가지고 모든 조건을 다 걸어 놓고 역사해 나오셨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아의 가정을 풀면 성경 66권이 다 풀립니다.
아담의 가정을 풀면 이 세계사가 다 풀립니다. 왜? 비록 개인이로되 그들에게는 세계적인 내용을 상징적으로 내포시키고 역사의 모든 책임을 지웠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도 그렇고 유대민족도 그렇습니다.
끝날에는 기필코 마음의 본향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하늘이 허락한 선물을 받을 수 있는 때가 틀림없이 올 것입니다. 그 때를 맞이해서 그것을 받을 수 있는 준비를 하기 위하여 6천년 동안 개인으로부터 가정 씨족 민족 국가 형태를 거쳐 가지고 지금 세계 형태까지 나왔다는 것을 여러분은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것은 오늘 여기서 말하는 사람이 지나가는 말로서 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이 그렇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역대의 신앙 선조들이 세운 전통을 존중해야 합니다. 하늘의 혈통을 존중해야 합니다. 그럴 때가 왔습니다.
노아 할아버지가 120년 동안 하늘을 위하여 충성한 그 정신, 아브라함이 갈대아우르를 떠나 이방의 황무지를 돌아다니던 그 정신, 야곱이 가나안 땅을 버리고 애급으로 들어가던 그 정신, 이스라엘 민족이 원수의 땅 애급을 버리고 광야를 거쳐 가나안 땅을 향하여 총진군하던 그 정신,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이스라엘 민족을 수습하여 새로운 가나안복지, 새로운 에덴복지를 향하여 달리려던 그 정신은 어디로 갔습니까? 여러분은 전통을 통하여 이러한 정신을 계승해야 되겠습니다.
노아 할아버지는 주위로부터 핍박을 받고 억울함을 당할 적마다 심중으로는 무엇을 소망했느뇨? 하나님이 축복하실 한 날을 소망했습니다. 분하면 분할수록 하나님이 약속하신 심판의 한 날을 바라보고 참고 또 참았습니다. 아브라함도 그러했고, 모세도 그러했습니다.
바로 궁중에서 공주의 아들로 자라던 모세는 개인적으로 무엇 하나 부러울 것이 없는 행복스런 환경에서도 심중으로는 ‘이곳은 내가 있을 곳이 아니고 내가 살 곳도 아니다! 내가 누릴 복지가 아니다. 하늘이 축복하신 이스라엘 민족이 살 곳도 아니다.’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가나안 칠족이 점령한 그 땅을 바로 궁중에서 40년 동안 눈을 감으나 뜨나 그리면서 아버지, 우리 택한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을 주관하라 하신 약속을 이루게 하여 주시옵소서.라는 숨은 기도를 하였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이렇듯 애급에서 고역받는 60만 대중 이상 불타는 마음이 사무쳐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은 모세를 지도자로 세웠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를 어린양과 같은 모습으로 알고 있으나 본래의 모습은 그것이 아닙니다. 내가 알고 있는 예수는 그런 예수가 아닙니다. 무한한 천주적인 기준을 갖고 있었으나 어린양과 같이 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에 어린양이 되셨던 것입니다. 하늘의 황태자요, 만민의 구세주로서 피조만물을 대하여 호령할 수 있는 위신과 권한이 있었으나 그 당시는 그럴 수 있는 때가 아니었습니다. 그야말로 난시(亂時)요 사탄이 준동(蠢動)하는 때였습니다. 그러니 거지와 같은 불쌍한 신세가 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그 예수를 배우고 있습니다.
만일 예수가 선조로부터 4천년 동안 전통적으로 고대해 온 소망의 한 날을 이루어 당시에 실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면, 오늘날 이 세계는 벌써 선한 세계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 권한을 한 번도 행사해 보지 못한 채 한을 품고 가셨습니다. 예수가 하늘로부터 선물로 받은 것이 무엇이뇨? 원수들과 대결하여 원수들을 머리 숙이게 하고 항복시키는 것입니다. 딴 것이 아닙니다. 예수에게 하늘이 주신 선물이 있다 할진대 그것은 새로운 동산, 새로운 가나안 땅의 건설을 반대하는 원수를 박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보다 더 귀한 선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이 하늘이 예수 앞에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었는데, 예수는 그 선물을 받아 감당하지 못하고 갔습니다.
하늘은 우리의 마음과 인연 맺고자 선물을 주시는 것입니다. 천지에는 아직까지 마음의 복지가 없어서 불안합니다. 가는 곳곳마다 마음이 침범을 받는 불안한 상태입니다. 그렇잖아요? 외적으로 불안한 세계, 이런 세계가 청산되어야 내적으로도 안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몸으로 공포가 들어오는 한이 있다 할지라도 마음으로는 천국을 노래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끝날에 남아질 것입니다.
6천년 동안 우리의 선조들은 선물을 받아왔습니다. 선물의 목적은 무엇이뇨? 천주 제단에 드릴 수 있는, 하늘땅이 노래할 수 있는 선물로서 최대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 선물의 열매를 보고, 탄식하던 만물도 기쁨으로 노래하고 원한이 사무친 하늘도 환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자신이 그렇게 되어야 해요. 그래야 하나님의 아들딸입니다. 천국? 내가 알고 있는 천국은 다릅니다.
하늘은 외적으로는 사탄과 인간과 뒤넘이치는 싸움을 전개시키고 내적으로는 사람의 마음과 하나님이 뒤넘이치는 안팎의 섭리를 하십니다. 알겠어요? 외적으로는 타락한 천사장이 인간의 몸뚱이와 뒤넘이치고 있고 내적으로는 하나님이 인간의 마음을 중심삼고 뒤넘이칩니다. 이렇게 마음을 조종하여 외적인 세계를 조종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늘이 원하는 끝날이 오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될 것이냐? 마음의 기준이 잡힐 수 있는 환경이 지상에 나타나기 전에는 그러한 끝날이 올 수 없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주님이 이 땅 위에 오셔서 마음이 쉴 수 있는, 안식의 터전이라 할 수 있는 무리가 나타나기 전에는 안 된다는 거예요.
오늘날 우리의 마음과 몸은 하나님과 사탄의 침범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몸과 마음이 하나님 쪽으로 한꺼번에 기울어지면 하나님의 싸움은 끝납니다. 사탄이 지배하겠다 할 수 없습니다. 끝난다는 것입니다. 또 우리 몸을 중심삼고 몸이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으면 그 싸움도 끝납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을 구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두 싸움의 교차점에 있는 우리입니다. 이것을 안다 할진대 여러분들, 이 몸을 활동무대로 삼고 있는 사탄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몸은 사탄을 향하여 달리고 마음은 하늘을 향하여 달리고 있습니다. 이제 이 외적인 세계를 마음의 권한을 갖고 쳐서 굴복시키고 나아가서 사탄을 굴복시키는 승리자가 나타나야 합니다. 그 승리의 권한을 갖고 오신 분이 예수입니다. 그렇다고 여러분, 언제나 예수만 믿고 살겠습니까? 언제까지나 주님만 모시고 살겠습니까? 예수를 믿는 동시에 예수가 하던 일을 해야지요.
하늘은 역사노정을 거쳐오는 동안 우리의 선조와 더불어 슬픔과 고통과 억울함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면서 4천년을 경과한 후 역사적인 종말시대인 제2종말시대에-노아 때가 제1종말시대라면 예수 때는 제2종말시대입니다 -하늘의 심정과 하늘의 마음을 갖고 오셨던 분이 누구냐 하면 예수입니다. 하나님이 4천년의 선물로 보내 주신 인간 대표, 천성이나 땅을 대신하여 최고의 권한을 갖고 오셨던 분이 예수입니다. 이런 예수를 쫓아버렸으니 다시 오셔야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주여! 오시옵소서.’ 하는 겁니다.
이제는 몸의 복지를 넘어서 마음의 복지를 찾아야 할 때가 왔습니다, 마음의 복지. 아무리 내적인 공포가 밀려들고 험한 사망의 물결이 휩쓸려 들어온다 할지라도 그것을 늠름히 넘어설 수 있는 자, 마음의 복지를 가진 자, 이는 천국 백성입니다. 사망의 물결이 휩쓸지라도 그것을 웃으면서 넘어갔던 과거의 순교열사들은 하늘 백성입니다.
수많은 배반자를 앞에 놓고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던 예수, 불쌍하고 처참한 죽음을 당하면서도 도리어 늠름하게 원수를 위하여 기도하시던 예수의 그 모습은 사나이다운 기백을 지닌 모습이었습니다. 그의 몸은 비록 유린당하여 죽었을망정 마음 세계의 복지를 세워 놓고 가셨습니다. 마음 세계의 복지는 유린당할 수 없기에 예수의 몸이 부활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완전한 플러스(+)가 있으면 완전한 마이너스(-)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 때 부활의 권한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시는 재림주를 고대하는 것도 좋습니다. 그렇지만 그것보다도 자신의 몸이 완전한 마이너스가 되어야 합니다. 완전한 마이너스가 있으면 완전한 플러스는 찾아오는 거예요.
생전에 주님을 신랑과 같이 모시지 못하고, 스스로 신부와 같이 살지 못하고 죽는 사람은 천국 못 갑니다. 개인적인 천국도, 가정적인 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도 살아생전에 개인적인 인격의 예수, 가정적인 인격의 예수, 종족적인 인격의 예수, 사회적인 인격의 예수, 국가적인 인격의 예수, 세계적인 인격의 예수, 이렇게 나가야 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가 한번에 덜커덕 세계적인 인격의 예수로 된 줄 알고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으면 죽지 않아요. 개인적인 인격의 예수로부터 가정적인 인격의 예수, 민족적인 인격의 예수, 이스라엘 나라, 즉 국가적인 예수,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가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와 같이 다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죽을 수밖에 더 있겠어요?
오늘날 우리 믿는 성도들은 30평생 민족을 위했던 예수의 인격, 민족적인 인격을 가지셨던 예수를 모실 줄 알아야 됩니다. 또 여러분이 민족적인 인격을 갖추어 신랑 되신 예수를 모시는 승리적인 발판을 세워야만 참다운 크리스천입니다. 그래야만 세계적인 인격의 예수로 오실 주님이 품어줄 수 있는 것입니다.
국가를 세운 것은 세계를 품게 하기 위함이요, 세계를 세운 것은 하늘땅을 품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하였습니다. 2천년 전에 이상적인 실체로서 우리들이 바라는 몸과 마음의 안식의 기준을 세워 놓아야 했던 분을 쫓아 버린 것 이상 큰 범죄가 없습니다. 이 슬픔을 무엇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예수는 2천년 전 우리의 몸의 안식처, 마음의 안식처, 더 나아가서 신랑 신부의 이념을 세우셨으며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 하시며 사랑이라는 명사를 남기셨습니다. 몸의 안식처와 마음의 안식처가 세워진 후에는 하늘땅을 품는 동시에 하나님을 품을 수 있는 사랑까지 선물로 주려 하셨으나 그 일은 다 깨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다시 돌아가 허덕이고 있습니다.
예수가 죽고 난 후 예수를 위하여 세웠던 유대교는 어디 갔으며 이스라엘 민족은 어디 갔는고? 옛날의 제사장과 바리새교인은 어디 갔는고? 그들은 예수의 대원수입니다. 예수를 위하여 4천년 동안 준비한 발판은 산산이 부서져 나갔습니다. 예수가 발을 들여놓을 수 있는 교회가 있었으며 예수가 몸을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느냐?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4천년 동안 개인적인 선물을 보냈고 민족적인 선물을 보냈으며, 국가 혹은 교단적인 선물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전체를 지배할 수 있는 예수, 천적인 선물인 예수를 품지 못하고 배반함으로 말미암아 비참하게 되었습니다. 영광과 축복의 날을 고대해 나온 택함받은 선민이 고통에 고통을 당하고, 유리(流離)에 유리를 하며 나온 것이 오늘날까지의 이스라엘 역사입니다. 이것은 예수를 죽인 죄의 대가입니다.
그래도 축복을 해 주셨기 때문에 밟히고 억울함을 당하면서도 세계 앞에 나서게 된 것입니다. 영광으로 나서야 할 민족이 서글픈 고난의 역사를 거쳐 나오는 것은 예수를 죽인 죄 때문이라는 거예요.
역사를 변증해 보아도 부정할 수 없는 내용인데도 불구하고 예수가 죽으러 왔다고 믿어요? 그렇게 안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몸을 가다듬어 역사적인 범죄를 회개할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브라함이나 모세는 잘못을 저질렀어도 회개하면 다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심부름꾼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아들을 죽인 민족을 어떻게 할 것 같아요?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여러분이 아들딸을 사랑하는 기준과 하나님이 예수를 사랑하는 기준을 생각할 때 어떤 것이 높을 것 같아요?
예수가 죽을 때 세 시간 동안 하늘땅이 캄캄했습니다. 그럴 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4천년 역사 동안 수고해 나오신 모든 공적이 순식간에 깨져 버리고 사랑하는 아들은 사탄의 올가미에 말려 십자가에 달리는 그 순간, 하나님이 ‘오호, 구원역사 완성하는구나, 오호 승리했구나.’ 하셨겠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참을 수 없는 비통함을 느끼셨을 것입니다. 이러한 하늘의 심정을 알고 예수는 죽어갔습니다. 우리들은 이러한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과거 아브라함이나 우리의 선조들에게 저지른 잘못은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선조들이 메시아를 십자가에 매달아 피 흘리게 한 죄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인고? 하늘의 몸이요 승리적인 성전이 되고 ‘나는 네 안에 있고 너는 내 안에 있으며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있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인류를 대표하여 몸이 안식할 수 있는 복지가 되고 마음이 안식할 수 있는 터전이 되어야 할 그 예수, 천주를 동원하여 하늘을 중심삼고 승리의 터전을 닦으려 하신 그 예수를 죽인 역사적인 죄는 어떻게 할 것인고?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하고 예수를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2천년 역사가 지난 오늘 우리는 다시 허덕이면서 마음과 심정세계의 선물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 선물을 받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이제 앞으로의 세계에 있어서의 과제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과거에 하나님께서 해 오셨던 일을 알아야 됩니다. 왜 이렇게 나왔는가를 알아야 됩니다. 또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알아야 됩니다. 나아가서는 미래에 하나님께서 하시려는 일을 알아야 됩니다. 즉 때를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밤인지 낮인지, 아침인지 저녁인지를 잘 분간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보십시오. 여러분, 지금은 역사적으로 볼 때 가을절기입니다. 지금의 20세기는 가을절기의 문명시대입니다. 과거의 고대문명시대는 여름절기, 열대권 문명시대였으며, 오늘날은 가을절기, 온대권 문명시대입니다. 가을절기 문명시대가 지나면, 겨울절기 한대권적인 문명시대가 다가올 것이며, 그 후에는 삼동(三冬)을 지나 봄절기 문명시대가 오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새 시대입니다.
인간이 타락한 이후 봄절기 문명시대를 못 맞았습니다. 마음이 즐기고 몸이 즐기고, 하늘을 노래하고, 땅을 노래하고, 하늘땅의 움직이는 모든 것이 하늘을 즐겁게 할 수 있는 그 세계를 못 맞았다는 것입니다. 그 세계를 맞으려면 여러분들이 역사적인 하나님을 알아야 됩니다. 역사적인 하나님을 아는 동시에 시대적인 하나님을 알고 미래적인 하나님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전체의 가치를 결정짓기 위한 하나의 선물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이제 우리는 마음의 복지를 이룰 수 있는 한 중심을 세우고, 심정의 복지를 이룰 수 있는 한 중심을 세워서 심정과 마음과 몸이 통할 수 있는 하나의 기준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몸과 마음이 하나된 후에는 세계를 품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이 시대에는 세계주의보다 더 큰 천주주의 이념이 나와야 됩니다. 하나님주의가 나와야 돼요. 그리하여 인간이 이 땅에서 생활하는 데 있어서 그 하나님주의를 중심삼고 몸과 마음이 하늘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확고한 기준을 세우지 않는다면 우리는 행복하게 살 수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생활권 내에서 그 이념을 중심삼고 마음과 몸이 안식하고 즐길 수 있는 동시에 그 이념을 통하여 역사적인 하나님의 심정, 시대적인 하나님의 심정, 미래적인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세계 앞에 우주사적인 마지막 선물로서 서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선물의 최후의 목적은 무엇이뇨? 그것은 땅을 지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계를 기반으로 하여 무한한 세계를 품고 나중에는 하나님을 품는 것입니다. 이것이 최후의 목적입니다. 하나님을 품는 것, 하나님을 내 것 만드는 것입니다. 이러한 목적 밑에서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대하여 복귀섭리를 해 오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 앞에 마음세계의 모든 것, 심정세계의 모든 것을 주고 나중에는 하나님 자신까지도 주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늘이 인간에게 주실 큰 선물이요, 이제부터 우리에게 주실 남아진 선물입니다. 역사적이요, 시대적이요, 미래적인 하나님을 알기 전에는 그 선물을 못 받습니다. 하나님은 자신까지 인류 앞에 주겠다는 것입니다. 아들을 주셨고 나중에는 하나님 자신이 오셔서 인간과 더불어 살겠다는 것입니다. ‘네가 나요 내가 너이며, 내가 네 아버지요, 네가 내 아들 내 딸이다.’ 하는 자리에서 살겠다는 것입니다. 마음의 복지에서 사랑을 중심삼고 하나님을 모시고 살 수 있는 것이 인간으로서 받을 수 있는 최대의 선물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그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하늘은 지금까지 무한히 애써 나오시는 것입니다.
개인으로 볼 때, 몸은 땅을 대신한 선물이요, 마음은 하늘을 대신한 선물이요, 이념은 온 우주를 품을 수 있는 선물입니다. 이것만도 황공하온데 나중에는 하나님 자신까지도 여러분에게 선물로 주겠다 하시는 이 고마운 뜻 앞에 여러분이 설 수 있는 자격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버님, 저희들이 말씀을 들었사옵니다. 저희 자신들이 이렇게 어마어마한 선물이라는 것을 몰랐사옵고, 고귀한 전체 가치의 인연을 위하여 시간 시간 생활을 절제시키고 마음을 명령하던 것이 그러한 선물을 주시기 위함인 것을 몰랐사옵니다.
불의의 입장에 설 때에도 마음이 몸 앞에 찾아주는 선물을 고이고이 받들 줄 아는 저희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또 마음을 끄는 이념을 고이 받들 줄 아는 사람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심정이 나의 이념과 나의 마음과 나의 몸에 통하여 하나님이 자신을 선물로 주시고자 할 때, 부끄럼 없이 나설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런 입체적인 인연에 의하여 저희들이 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생활적인 모든 부분에서 선과 악을 분립하여 악을 청산하고 선의 실적을 세우기 위한 싸움의 노정에 있는 저희들임을 알았사옵니다. 이제 역사가 지나 남아진 새로운 천주시대에 아버님을 선물로 받고, 아버님의 사랑과 아버님의 이념과 아버님의 마음을 선물로 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선물을 알아 모시는 하늘의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고, 아버지께서 축복하여 주시고, 자랑하여 주시옵소서. 만천하의 책임과 유업을 맡기시기에 부족함이 없는 아들딸들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빌면서,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우리는 부모의 심정을 가지고 땅이나 만민을 대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 해와를 대하시는 것처럼 아담 해와도 그 심정 앞에 고마워할 줄 알았더라면, 하나님은 그 위에 새로운 것을 더해 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그것을 중단하시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을 복귀하기 위하여 오늘까지 6천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나오신 것입니다. 비극의 실마리가 자녀들 때문이라기보다 사탄 때문이라고 간주하시어, 억울하고 슬픈 조건은 사탄에게 돌리고 기쁜 조건만을 가지고 자녀를 대해 나오셨습니다.
하나님은 무형의 마음이 소망하는 것을 실체적으로 이루어 나오십니다. 우리는 죽고 죽고 또 죽어서라도 하나님이 소망하시던 뜻을 성사시켜야 되겠습니다.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하나님의 슬픔을 제거할 수가 없습니다.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여러분을 이 기준까지 끌어올리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얼마나 수고하셨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버지를 위하여 불리움받았고 또 태어났다는 것을 절감해야 합니다.
우리 시조가 천사장과 가까웠고 아버지와 가깝지 못했던 것이 타락의 원인이었습니다. 복귀를 하는 것도 어떤 민족이나 인류를 위해서라기보다 아버지를 위해서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따라서 어떠한 난경(難境)에서도 감사하면서 민족이나 국가를 위해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은 되지 못해도 국가의 충신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어려움과 분함과 억울함에 부딪치더라도 아버지의 역사를 회상하여 ‘당연합니다. 감사합니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에게 손을 들어 축복하실 것입니다. 섭리의 뜻 앞에는 무한한 고통, 무한한 슬픔, 무한한 십자가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부족함에 몸둘 바 몰라 하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부디 앞으로는 자기 자신 때문에 탄식하는 사람은 되지 맙시다. 우리는 사탄의 반기(反旗)를 피하거나 그 앞에 지쳐 떨어져서는 안 됩니다.
최후의 문제는 ‘아버지와 나’입니다. 아버지의 해원성사가 어떻게 되는 것인지를 안다면, 우리에게는 어떠한 변명도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심정으로 전도해야만 참다운 아들딸을 찾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아버지의 심정을 알고 해원성사하는 일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영광의 자리도 그 무엇도 다 떠나서 ‘어떠한 일도, 전도도 제가 하겠습니다. 이제 아버지의 십자가를 저에게 맡겨 주시옵소서.’라고 할 수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마지막 고개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부모에 대한 사랑의 심정을 가져야 합니다. 아버지만이 소망의 전체요 가치의 전체라는 것을 알고 받들어야 합니다. 나아가 ‘내가 아버지의 아들이 되다니.’ 하고 황공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죽음에서 일으키신 하나님의 사랑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아버지께서는 6천년 동안 수고하시며 슬픔과 상처를 입으셨는데, 내가 수고하고 상처를 입고 슬픔을 당한들 어찌 아버지의 그것에 비할 수 있겠는가.’ 하는 심정을 갖고 있으면 사탄이 끌어낼 수 없습니다.
자식을 잃고 슬퍼하신 하나님을 생각한다면, 불쌍한 인류를 붙잡고 통곡할 수 있어야 하며 역사적인 슬픔을 당해 오신 하나님을 붙잡고 통곡할 줄 알아야 됩니다. 비록 나 개인은 전체 인구의 27억 분의 1에 해당되지만 하나님의 뜻에 동참한다는 심정을 지녀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부모의 사랑만 받을 것이 아니라 부모의 대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잠들어 있는 순간에도 아버지는 어디에선가 수고하고 계십니다. 불쌍한 사람을 볼 때, 자기의 입장에서 대하지 말고 그에게도 그를 끔찍이 사랑하는 부인 혹은 남편, 부모와 자녀, 또는 형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그런 입장에서 대해야 합니다. 부모에게 십자가가 있다면 심정적인 십자가 이상의 십자가가 없습니다. 길을 지나가다 딱한 사정을 가진 마을 사람을 볼 때, 또는 민족이 딱한 형편에 직면하였을 때, 아버지를 대신하여 ‘염려 마십시오. 제가 있지 않습니까.’ 하는 심정으로 살아간다면, 그는 하늘의 친구요 형제요 아들딸일 것입니다. 부모는 언제나 심정적인 십자가를 지고 가시며, 제물 된 십자가의 길을 걷고 계십니다.
노아보다 모세보다 예수님보다 더 수고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어느 개인, 어느 민족, 또는 선생님보다 더 수고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 시대에 제물의 입장에 계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아버지가 그러하시니 나도 제물의 길을 걸어야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버지 앞에 서는 길은 그것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느 나라 어느 기관을 대하더라도 ‘이것은 아버지의 것이니 곧 내 것이다. 거기서 수고하는 이는 아버지 일을 하는 것이니 곧 내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일터에서 수고하는 농부를 보면 주머니 돈이라도 털어 주며 위로할 줄 알아야 되고, 또 ‘내 아들딸이 저기서 일하고 있구나.’ 하며 그들에게 복 빌어 줄 수 있어야 아버지의 아들딸이 될 수 있습니다.
풀 한 포기를 보아도 ‘아버지를 위해서 자랐구나.’ 하고 눈물을 흘릴 수 있어야 합니다. 제3이스라엘 사람은 그러한 심정으로 움직이고 어디를 가나 ‘내 땅이요 내 일이다.’ 하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앞으로 선생님이 지향하는 것은 부모의 심정을 지니고 아버지 대신 주인 노릇 할 수 있는 여러분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 땅의 청년 남녀들에게 바라는 것은 이것이니, 다른 무엇보다도 아버지를 소유한 자가 되어야겠습니다. 내 마음이 이렇거든 아버지의 심정은 어떠하겠는가를 생각할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높고 크게 바라보시는 아버지, 또한 선생님도 여러분을 그렇게 바라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십자가와 제물의 입장을 감수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전도하고 공부하고 일하는 사람은 망할 수 없습니다. 맨 밑창의 제물 되기를 자처하십시오. 제물은 곡절이 있을 때 기도드립니다. 그 자리는 편안한 자리가 아닙니다.
제물의 입장에 서면 좋다 나쁘다 하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만 여러분들은 어디를 가나 그 지역의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제물은 죽여도 항의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머리 숙인 제물은 산 권한을 가지고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걸어오셨고, 선생님이, 그리고 통일교회 교인들이 그렇게 걸어오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자기 자신의 길과 제물 되는 길이 있습니다. 자신의 길을 가는 동안은 전도가 안 됩니다. 그러나 제물의 길을 3년 이상 6년까지 가게 되면 누구든지 그 앞에 굴복 안 할 수 없습니다. 나는 부잣집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입장에서 모든 일에 대처하십시오. 그러한 심정으로 복귀의 고개를 넘으면 하나님은 모든 것을 맡겨 주실 것입니다.
아버님, 아버지를 흠모하는 저희들이 아버지를 뵈옵고, 아버지를 모시고 아버지와 더불어 의논할 수 있기를 고대하여 부족함을 무릅쓰고 모였사오니, 버려두지 마시옵소서.
아버지시여! 저희의 마음과 더불어 화하시옵고 저희의 몸과 더불어 인연을 맺으시옵소서. 아버님의 간곡한 심정의 흐름이 아버님의 것으로만 머물지 말게 하여 주시옵고, 실존하시는 그 자체의 생명의 흐름이 저희들 마음 속 깊이 스며들 수 있는 이 시간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천천만 성도를 지휘하시는 아버지의 성상을 바라보면서 무한하신 아버지의 사랑의 품에 안길 수 있고, 그리움에 잠길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자연의 포근한 보금자리에 있음을 하늘 앞에 감사드릴 수 있고 스스로 머리 숙인 그 마음과 몸으로 아버지를 부를 수 있는 이 한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 저희는 싸움의 노정에서 저희를 불러 주시고 염려하시며 찾아주시는 아버지이시기 전에 고요한 가운데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아니 느끼려야 아니 느낄 수 없고 아니 생각하려야 아니 생각할 수 없는 아버지이심을 알고 있사옵고, 아버지께서 저희를 아들이라 부를 수 있으며 저희 또한 아버지를 내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인연이 저희의 생애에서 기필코 맺어져야 할 것을 알고 있사옵나이다.
저희들 어느 한 날 은밀한 가운데 아버지와 의논해 본 적이 있었습니까? 어느 한 날 아버지의 은은하신 음성과 아버지의 영광에 취하여 저희 자신이 몸 안에 있는지 몸 밖에 있는지 모르고 머리를 숙여 아버지 앞에 경배 드린 때가 있었습니까? 신앙노정에는 그러한 시간이 반드시 필요한 것을 저희들은 알았사옵니다. 또 그러한 시간을 저희에게 부여하시기 위하여 아버지께서 오늘까지 수고하신 것도 알았사오니, 이제 이 몸과 마음이 자연의 아버지를 즐겨 모실 수 있고, 본성의 아버지를 즐겨 모실 수 있고, 본질의 아버지를 즐겨 모실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어떤 조건을 걸어 놓고 대하시는 아버지가 아니라, 마음의 흐름에 따라 같이 흐르고 마음의 움직임에 따라 같이 움직이시는 아버지이시기에, 본연의 느낌, 본연의 감정에 화하고 동하는 것만이 저희가 생명을 가지고 이 땅에 살 동안 가져야 할 소망이요 이념이라는 것을 알고 있사옵나이다.
보이지 않는 데에서 모든 것을 경영하시며 실적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애쓰시는 아버지시요, 없는 듯하나 실존하시는 아버지시요, 저희와 관계가 없는 듯하나 저희의 마음을 주관하고 계시는 아버지시요, 무한한 세계를 관할하시는 아버지이심을 저희들은 알았사옵나이다.
그 관할권 내, 그 주관권 내의 움직임에 화(和)하고 정(靜)하고 동(動)할 수 있는 본연의 모습을 그리워하오니, 아버지시여, 저희를 버려두지 마시옵소서. 마음의 문이 닫힌 자가 있사옵거든 그 문을 열어 주시옵고, 사망의 그늘에 사로잡혀서 심적으로나 육신적으로 고통당하는 사람이 있사옵거든 그들도 역시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인연을 찾아 인연을 존중하여 여기에 모였사오니, 이 한 시간이 헛된 시간이 되지 말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그 누구를 위하여, 그 무엇을 찾기 위하여 발걸음을 움직여 오늘 이 자리에 왔사옵니까? 아버지, 버려두지 마시옵고 실존하시는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진정한 마음이 없다고 할진대 천상의 아버지가 되시고 실존의 아버지가 되시는 당신 앞에 부끄러운 자가 되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아버지를 생각하고 아버지를 바라보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아버지의 은사권 내에 스며들고, 아버지의 은사에 사로잡힐 수 있는 시간이 여기 모인 당신의 아들딸들에게 절대 필요하오니, 아버님, 긍휼의 역사로 나타나시옵고, 능(能)의 권한으로 저희들을 충족시켜 주시사, 아버님께서 남기신 복귀의 한을 품은 저희의 심정을 해원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사망의 권한을 비웃을 수 있고, 그를 대해 자랑할 네 권한이 무엇이냐고 자신 있게 주장하고 나설 수 있으며, 모든 사람 앞에 하늘의 영광을 바라보라고 할 수 있고, 하늘을 자랑할 수 있는 승리의 모습, 아버지의 영광을 노래할 수 있는 늠름한 아들딸이 되도록 인도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하늘이 있고 땅이 있으매 이와 더불어 인간이 존재해야 할 것을 알고 있사옵고, 사망의 물결이 휩쓸어 들어오고 공포의 물결이 휩쓸어 들어오더라도 하늘땅은 영원히 남아질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이 공포의 세계를 넘어서서 기쁨의 세계에 동참할 수 있는 아들딸들이 되게 인도하여 주시옵고, 그 이념의 세계를 개척하는 데 선봉자들이 되게 인도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오늘 저희들의 마음이 각각 다를지라도, 사정 사정이 각각 다를지라도, 처해 있는 환경과 내적인 관습, 혹은 심중에 갖고 있는 주관(主觀)과 주의 관념이 각각 다를지라도, 본연의 심정세계에 화하려는 마음만은 같아서 악한 사람이나 선한 사람이나 거기에 화할 수 있다는 것을 아오니, 이 시간 그럴 수 있게 저희를 이끌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모든 것을 아버지 앞에 털어놓고 무아(無我)의 심정으로 본연의 심정을 찾아서 아버지를 모실 수 있고, 말씀을 통하여 자신을 다시 새롭게 빚어낼 수 있는 은사의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전하는 자의 마음이나 받는 자의 마음이 둘이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어두운 악의 조건들이 간격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저희의 마음과 몸이 아버지의 심정에 화하고 아버지의 움직임에 화하여 평화의 심정, 사랑의 심정, 고귀한 이념의 심정에 사로잡힐 수 있게 역사하여 주시옵고, 새로운 각오와 새로운 생명을 일으킬 수 있는 이 한 시간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며,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말 씀> 오늘 말씀드리려 하는 제목은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살 것인가’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 목적이 있습니다. 땅도 그렇고 하늘도 그렇습니다. 그러한 하늘이 있고 땅이 있고 그 땅과 하늘을 대표하는 우리 인간이 있습니다. 우리들은 알지 못하나 하늘은 큰 목적을 갖고 있을 것이고, 땅도 역시 큰 목적을 갖고 있을 것입니다. 이 하늘과 땅이 처한 위치와 입장은 다를망정 그 목적은 같아야 됩니다. 왜 그러냐? 하늘은 주체요 땅은 대상이며, 하늘은 창조주요 땅은 창조함을 받은 피조물인 연고입니다. 이렇듯 이 땅이 절대자에 의해 생겨난 피조물인 한, 하늘과 땅은 절대자의 목적권 내에서 같은 운명에 처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늘과 땅이 그러하거든 하늘과 땅을 대신하여 나타난 인간은 어떠할 것이냐? 인간이 하늘도 부정할 수 없고 땅도 부정할 수 없는 입장에 있다 할진대 하늘이나 땅도 인간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하늘과 땅이 인간과 함께 어떤 크나큰 목적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은 하늘을 상징하고 몸은 땅을 상징한다고 말합니다. 몸은 땅의 것을 찾으려 하고 마음은 하늘 것을 찾으려 합니다. 나라는 자체는 마음만도 아니요 몸만도 아닙니다. 마음과 몸을 합하여야만 나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나’는 무엇을 상징하느냐? 하나님을 상징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비록 미비하고 불비하고 미완성 단계에 있다고 할망정 마음과 몸이 합하여 이루어진 여러분 개체는 어떠한 목적권 내(目的圈內)에 머물러야 될 것인가 하면 하나님과 더불어 있어야 합니다. 하늘을 주체로 모시고 나는 그의 상대가 되어, 실존하시는 하나님을 상징하는 실존체로서 그 분과 더불어 존속(存續)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돼 가지고 하늘땅을 품고 움직여 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수 있는 때, 그럴 수 있는 곳을 이루는 것이 인간 최고의 목적일 것입니다. 기필코 그렇게 돼야 합니다. 그래서 하늘과 땅은 인간을 내세우는 놀음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무엇 때문에 일해 오셨는가? 하늘 때문이 아닙니다. 땅 때문도 아닙니다. 인간 때문입니다. 오직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즉 여러분 자신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일을 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연유도 모르는 가운데에서 살고 있지만, 내 한 자체가 사는데는 하늘의 뭇 영인들이 동원되고 땅이 동원되고 하나님까지 동원되어 일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사실을 아십니까?
내가 지극히 미미한 존재라 할지라도 이 우주를 대표하여 나가는 생의 노정에 있어서는 하늘의 뭇 영인들이 나를 위하여 움직이고, 땅이 나를 위하여 움직이고,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일하신다는 이 엄연한 사실 앞에 속된 우리 인간은 머리 숙여 ‘황공하옵니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양심적인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붙들고 그런 길을 걸어나온 것이 역사노정에 왔다갔던 종교인들의 걸음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을 비롯하여 피조세계의 모든 것은, 오늘의 내 일신이 어떤 목적을 이루어 승리할 수 있는 하나의 인격자가 되도록 하기 위하여 총동원되어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사람들이 이 천지간에 살아야 될 텐데, 그러지 못하고 있습니다. 타락한 인간들은 이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 나는 이제 누구를 위하여 살고, 무엇을 위하여 살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걸 생각할 때 나 자신을 문제로 삼아 나는 지금 무엇을 위하여 살고 있는가 하고 반성해 봐야 됩니다. 여러분 자신은 지금까지 무엇을 위하여 살았습니까? 땅을 위하여 살았습니까? 하늘을 위하여 살았습니까? 지상에서 창조주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온전히 살았다고 자신하는 사람은 오늘날까지의 역사노정에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것은 어찌된 연고이냐? 종교적으로 보나 무엇으로 보나 인간이 타락하였기 때문입니다. 타락했기 때문에 인간은 선하게 살 수 있는 본연의 이념 동산을 떠나게 되었고, 전체를 위하여 살 수 있는 환경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마음은 그렇게 살고 싶어하되 몸이 그렇게 되지 못하는 것이 이 땅에 살고 있는 타락한 인간이 처한 형편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입장에 처하여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본래 고차적인 이념의 세계에서 살아야 할 인간이지만, 그런 자리에서 떨어짐으로 말미암아 존귀해야 할 인간은 말할 수 없이 형편없는 자리에서 허덕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더 잘 살고 싶은 감정을 느낄 것입니다. 좀더 잘 살고 싶고, 좀더 크고, 좀더 넓고, 좀더 높고, 좀더 무한한 가치를 느끼며 살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살고 싶은 마음은 있으되 정작 그렇게 살 수 있는 생활적인 내용, 생애의 이념이라든가 그런 목적을 향해 움직여 나갈 수 있는 내용이 없는 것입니다. 산다고는 하지만, 여러분이 당당하게 자신을 가지고 ‘하늘이여, 땅이여, 하나님이여, 협조하시옵소서.’ 할 수 있습니까? 그러한 여러분이 못 되어 있습니다.
나 자신은 창조본연의 삶의 내용을 모르고, 하늘의 뭇 영인과 땅의 피조 만물과 창조주 하나님 앞에 자신을 가지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존재는 못 되어 있지만 하늘의 뭇 영인은 이 시간에도 여러분을 위하여, 땅도 역시 여러분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일하고 계십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그런 하늘이 있고 땅이 있고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모르는 채 그 세계를 그리워하면서 허덕이는 방황의 역사노정을 걸어왔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더욱이나 여기에 나온 청년 남녀들은 오늘을 기점으로 내가 무엇을 위하여 사는가 하는 것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때가 왔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너는 무엇을 위하여 살았는고?’ 할 때 여러분은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여러분 가운데 ‘나는 가정을 위하여 살았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살았다. 나는 나라를 위하여 살았다. 나는 주의를 위하여 살았다. 나는 학문을 위하여 살았다.’ 하고 자신 있게 대답할 사람이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 그것들은 누구를 위하여 있는 것인가 하고 묻는다면, 자기를 위하여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나라는 누구를 위하여 있을 것인고? 그 나라 자체만을 위하여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왜? 대우주의 목적권 내에 들어가 있는 국가요, 민족이요,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어떠한 것이라 할지라도 존재하는 것은 그 자체만을 위하여 존재하게 되어 있지 않다는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본래 이것들은 본연의 심정을 기반으로 하여 존재하게 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오늘날 인간들의 관념은 자신을 위주로 하고 있습니다. 자기 위주한 가정과 국가와 이 세계에서 모든 것을 종결짓고자 하는 그 관념은 틀려먹었습니다. 가정을 위하여 산다 해도 가정을 위해 사는 것만이 목적의 전부가 아닙니다. 사는 것, 좋습니다. 위하여 사는 것, 또한 좋습니다. 그러나 위하고 있는 그 환경 자체가 위함을 받을 수 있는 궁극적인 것이 아님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자리를 넘어 더 높은 곳을 그리워하는 것은 자연적인 현상입니다. 천륜은 이와 같이 자연적인 현상으로 여러분을 격려하고 더 높은 곳을 향하여 가라고 오늘 이 시간도 여러분의 마음을 재촉하고 있습니다. 있는 지성을 다하여 자식을 사랑하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어디서부터 비롯되었겠습니까? 내 일신(一身)의 사지백체(四肢百體)는 내 한 몸이 동기가 되어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깊이깊이 캐고 들어가면 역대의 선조로부터 나왔고, 더 들어가면 그 선조들의 기원이 되는 어떤 주인으로부터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느끼는 이런 감정은 역사적인 감정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바라는 이런 소망 역시 역사적인 소망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무슨 주의를 논위(論謂)하고 있지만, 그 주의는 이 시대에 비로소 나타난 주의가 아닙니다. 우리의 선조들이 알지 못하고 말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마음은 본연의 심정세계, 즉 오늘의 세계 이상 가는 세계를 그리워해왔습니다.
이제 역사와 더불어 소망하던 그 심정세계의 이념이 나타날 때가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무엇을 위하여 정력을 기울이는 데 있어서는 자세를 가다듬고 다시 한번 생각해야 됩니다. 내가 나 중심하고 위하는 것은 참된 목적이 될 수 없어요. 그것을 위하여 나의 전체를 투입하고 생명을 기울여서 희생할 만한 가치의 것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자동적으로 헤아려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무심코 옮겨놓는 발걸음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나는 누구를 위하여 가고 있고, 누구를 위하여 움직이고 있고, 또 내가 위하는 그것은 어디 가서 가치를 나타낼 것인고? 그 움직임에서 내 한 자체가 만족을 느끼고 기쁨을 느꼈다고 해서 그것으로 만우주 앞에 자랑할 수 있는 사명을 종결지을 수 있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다시 생각해야 할 때가 되었다는 거예요.
정신을 가다듬지 못할 정도로 내 마음을 기울이고 나의 모든 심혈을 기울여 그것을 위하여 움직인다 할지라도 내 자체가 그 움직임의 주동자는 못되어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이 누구를 사랑하고 누구를 위하여 움직인다고 할 때, 그 마음을 창조하는 참된 주체가 자신인 것 같아 보입니까? 그 주체적인 마음은 나에게 있는 것 같지만 나를 지나가고, 나에게 없는 것 같지만 나에게 통하여 오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은 여러분을 매개로 하여 인연될 수 있는 환경에서 벌어지는 현상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은 자신이 그 주체자가 못 되고, 그 어떤 내용을 종결지을 입장도 못 된다는 것을 생활환경에서 느낄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몸과 마음이 있습니다. 부모로부터 받은 몸, 땅으로부터 몸의 요소가 되는 물질을 공급받아 체(體)를 갖추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마음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몸과 마음을 불변한 심정의 기대 위에 세우고 싶어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요 타락한 인간을 대하여 섭리하시는 목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마음이 좋고 편하다 할지라도 그 마음은 심정의 집에 들어가 쉬지를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몸도 역시 그렇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현실의 자신을 놓고 볼 때, 이러한 사실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인간의 몸이 머무를 수 있는 장소, 마음이 머무를 수 있는 장소, 심정이 머무를 수 있는 장소는 필시 있을 것입니다. 인간들은 그러한 장소를 찾아 가는 과정에서 허덕이고 있습니다.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나는 생애노정을 가게 되었고, 출발한 자체를 돌이킬 수 없는 자리에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에서 내가 무엇을 그리워하고 누구를 위하여 산다는 것이 삶의 참된 목적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한, 우리는 남아진 생(生)을 살아 나감에 있어서도 한스러운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인식해야 되겠습니다.
이런 것을 알고, 지금까지 살아온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되겠습니다. 이 세상에는 봇짐을 지고 가는 나그네와 같이, 생애노정에서 갈 곳도 모르고 방향도 모르는 채 허덕이며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여기에 참석한 여러분도 자신을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되겠습니다. 이런 처지에서는 내가 아무리 누구를 위하여 산다 할지라도, 그 위함은 천륜의 목적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는 것이 됩니다.
역사는 혁명의 연속입니다. 개인을 존중시하는 때, 가정을 존중시하는 때, 씨족을 존중시하는 때, 민족을 존중시하는 때, 국가를 존중시하는 때, 세계를 존중시하는 때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역사는 혁명의 과정을 거쳐서 목적의 세계를 향하여 나아가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주의가 나왔고, 수많은 종족들이 자기 종족을 위주한 주의 또는 자기 씨족을 중심삼고 주장한 이념도 많았지만, 그것들은 다 지나가 버렸습니다. 이제 세계에 남아 있는 것은 2대 사조입니다. 목적은 하나인데 이념이 둘이라는 것은 하나에 가까워 왔다는 것을 말하고, 그래서 오늘날을 끝날이라 하는 것입니다.
역사의 흐름은 목적의 세계를 개척할 수 있는 환경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목적의 때가 오게 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이냐? 부딪쳐야 됩니다. 부딪쳐서 깨지든지 합하든지 해야 됩니다. 여기서 깨지는 존재들을 모아서 처치하는 곳이 지옥이요, 깨지지 않는 존재들을 모아 놓는 곳이 천국입니다. 목적관에 의해 하늘과 땅, 천국과 지옥이 갈라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역사의 흐름이나 시대의 사조를 보더라도 숨가쁜 시대에 당도하였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누구를 위하여 살 것이며, 무엇을 위하여 살 것인가? 가정을 위하여 사는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선진국가를 보십시오. 전부 갈라집니다. 개인주의예요. 부모가 어디 있으며 처자가 어디 있습니까? 믿고 살 수 있는 모든 것이 깨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세계 사조에 흔들리며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생활환경에서 나는 누구를 위하여 사는가? 가정을 위하여 사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세계 사조는 가정에서 안락을 누리고 행복을 노래하며 살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민족이 그러하고 국가가 그러하고 이 세계가 그러합니다. 목적의 세계를 향하여 흘러나오는 역사이기에 세계 자체가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고 각기 그 자체를 위해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역사가 여실히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대의 사람들은 어떤 새로운 목적관, 혹은 대목적(大目的)에 자신이 화할 수 있는 하나의 그 무엇을 그리 워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견지에서 여러분은 어떻게 살았습니까? 가정의 울타리 안에서 내 아들딸밖에 모르고, 내 것밖에 모르고 살다가 대우주의 목적이 달성되는 그 날 거기에 참석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무엇을 위해 산 것은 자기의 안락과 자기의 환경과 자기의 가정을 위하여 산 것이지, 대목적을 위해 산 것은 못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뒤넘이치는 것입니다. 누가 여러분을 대하여 ‘너는 누구를 위하여 살았느냐?’고 할 때 ‘나는 누구를 위하여 살았노라.’고 입증할 수 있는 내용을 갖지 못했다면 분하고 억울해 해야 할 것입니다.
과거는 그렇다 치고, 오늘 이 시간은 누구를 위하여 무엇을 위하여 살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세상에서 제일 좋다는 것을 중심삼고 이러 이러하게 산다.’고 자랑할 사람이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산다고 해서 대우주의 목적을 향하여 흐르는 양심의 세계를 자기의 생활 속에 잡아넣어 가지고 평안한 삶을 살 수 있느냐 하면 그렇지 못합니다. 그래가지고는 무한한 세계에 못 가요.
즐기며 살고자 하는 마음의 움직임은 여러분이 때와 시간을 잊어버리는 한이 있어도 잊어버림이 없이 그 목적을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 속에 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식구와 종족과 세계와 하늘땅을 품을 수 있는 자신이 있습니까? 오늘날 무슨 주의니 무슨 주의니 하지만, 그 주의권 내(主義圈內)에 하나님을 품을 수 있는 자신을 가진 주의가 있느냐? 천륜을 품을 수 있는 주의가 있느냐? 없습니다.
여러분에게는 마음이 있는데 그 마음은 무엇을 품으려 하는가? 세계를 품고, 하늘땅을 품고, 나중에는 하나님까지 품으려고 합니다. 그것이 마음이 가진 목적입니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은 네 마음에 있다.’고. 더 나아가서 ‘나는 네 안에 있고 너는 내 안에 있고, 아버지도 네 안에 있고 너도 아버지 안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여러분은 여러분이 갖고 있는 이념이나 여러분이 살고 있는 생활환경 속에 이웃 사람을 얼마나 동참시킬 수 있으며, 이 민족을 얼마나 잡아넣을 수 있으며, 이 세계를 얼마만큼 잡아넣을 수 있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은 큰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자기 마음속에 자기 몸 하나를 잡아넣지 못하는 타락한 인간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마음은 그 속에 하늘땅을 품고 하나님까지도 품어 가지고 안식시켜 드리려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러분은 그 마음을 중심삼고 자기의 몸 하나를 정복하지 못하고 허덕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뭐 어떻고 어떻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참다운 예술가 혹은 참다운 종교인들이 노래를 부른다면 어떤 노래를 부르겠습니까? 마음세계에 하나님을 모시고 하늘땅을 동참시킨 가운데 인류를 잡아넣고 품을 수 있는 노래를 부를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만일 그런 사람이 있다면 하늘이 벌을 주겠어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몇이나 있습니까? 없습니다. ‘너는 누구를 위하여, 무엇을 위하여 살았느냐?’ 하는 절대자의 물음에 ‘나는 이러이러하게 살았습니다.’ 하고 대답하여 ‘오냐. 그것이 내가 바라던 최고의 목적이다.’ 하는 칭찬을 받은 사람이 역사 이래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잘났다 하는 사람도 사조에 이끌림을 당하고, 아무리 정성들인 가정이라 해도 사조가 한번 휩쓸어 버리면 깨져 나갑니다. 나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랑하는 가정도 혁명의 불길에 부딪치면 깨져 나가요. 내가 원하던 사회도 깨져 나갑니다. 내가 온 정성을 들이고 충성을 한 국가도 깨져 나갑니다. 이 어이된 일입니까?
위하여 사는 생활 속에서도 즐거울 수 없는 것은 우리가 타락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위하는 그것은 목적 자체가 아니라 목적을 향해 나가는 과정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그것을 전부로 알고 가다가는 막힙니다. 가다가 대사조(大思潮) 앞에 항복하게 됩니다.
그러나 천륜은 살아 있습니다. 밤이나 낮이나 살아 있습니다. 내 의식을 초월하여 살아 있습니다. 그런 연고로 살아 있는 이 천륜을 따르고자 하는 마음, 그런 정신만 들어오면 나를 인도하려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살아 있는 이 천륜을 얼마나 배반하였습니까? 여러분은 배반자인 것을 알아야 됩니다. 무엇이 어떻고 어떻다고 주장한다 할지라도 배반하는 입장에 처해 있음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나’라는 일신을 두고 볼 때, 몸이 있고 마음이 있고 심정이 있습니다. 몸은 이 땅을 대신하고 마음은 하늘을 대신한다고 하는데, 심정은 무엇을 대신할 것인가? 천륜을 대신합니다. 그런 고로 이 심정은 이념을 지배합니다. 또한 하나님을 지배합니다. 아무리 창조주요 절대자라 할지라도 심정적으로 ‘아버지!’ 하고 부르면 ‘오냐.’ 하고 대답하십니다. 그렇게 주고받고 화하고 즐기며 살아야 우리 인생의 최후의 목적이 달성될 것입니다.
자신이 무엇을 위해 살았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을 그 시대에는 훌륭하다고 할지 모르지만 역사적 혹은 천주적인 면에서 볼 때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어느 한때에 맞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라는 자체가 지금까지 무엇을 위하여 살아왔는가를 해명하여야 됩니다. 역사적인 위인들은 당시의 가정을 새로운 분야에서 해명하고, 그 사회를 새로운 분야에서 해명하고, 그 시대를 새로운 분야에서 해명한 사람들입니다.
해명하는 데 있어서는 마음을 기울여야 합니다. 여러분이 무슨 사업을 하든가 어떠한 공부를 하든가 혹은 무슨 일을 하든가간에 전력을 기울여서 마음이 무한히 솟구치는 자리에서 일하지 않으면 실패합니다. 그런 자리에서 자연적으로 마음이 기울어지고 그 마음 앞에 몸이 자연히 기울어지고 거기에 심정이 자연히 기울어져서 일을 하면 틀림없이 성공할 것입니다. 역대에 수많은 선지선열들이 왔다 갔지만 인생행로에서 완전히 성공하였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 중도에서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몸이 기울어질 수 있고 마음이 기울어질 수 있고 심정이 기울어질 수 있는 상대는 어디 있으며, 가정은 어디 있으며, 사회는 어디 있으며, 국가는 어디 있으며, 그런 세계와 하늘땅과 하나님은 어디 있느뇨? 이런 문제들을 아직 해명하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을 우리는 인생행로에서 어떻게 찾아 나갈 것인가? 정신이 있고 생각이 있는 청년 남녀라면 밤잠을 못 잘 것입니다. 심각한 문제예요, 심각한 문제. 그런 연고로 나를 들어 자랑할 수 없습니다. 머리를 싸매고 찾고 또 찾아야 합니다. 남이야 어떻게 되든 내 갈 길이 바쁜 것입니다. 넘어야 할 태산준령이 있거늘 그것을 못 넘는 무리는 패배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청년 남녀가 있다 할진대 그들은 무엇을 위하여 살고 있는가? 하늘이 있고 땅이 있고 하나님이 계시다 할진대 그것들은 무엇을 위하여 존재하는가? 하나님은 인간을 위하여 계시다 하였거늘, 인간을 위하여 움직이는 사실이 어찌하여 우리의 환경에서 감촉되지 않는가? 우리는 이런 문제를 해명지어야 하고 인간을 위하여 역사적으로, 시대적으로, 미래적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런 하늘을 발견하고, 그런 땅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왕자의 모습으로 나타나서 ‘하나님, 얼마나 수고하셨습니까? 소망하시던 당신의 아들이옵니다.’ 할 수 있고, 하늘땅 앞에 주인의 모습으로 등장하여 아버지를 붙들고 심정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그날이 하늘이 바라는 날이요 인간이 바라는 날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종교에서 재림이니 재현이니 하는 명사를 부르짖는 원인이 여기에 있습니다.
나 자신의 일생이라는 것은 심각한 것입니다. 한 번 지나고 나면 다시 태어나 수습하고 보충할 수 없습니다. 지나간 생애노정은 보충할 길이 없습니다. 아무리 훌륭하고 잘난 사람이라 할지라도 지난날의 생을 다시 수습하고 고칠 수는 없습니다. 한번 보내면 그만입니다. 한번 지나가고 나면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그 생애를 여러분은 누구를 위하여 살았습니까? 무엇을 위하여 살았습니까? 자신을 위한 것은 위함이 아닙니다. 나 자신은 그 권내에서 살고 있는 몸입니다.
어떠한 존재물도 목적이 없이 움직이면 지옥행입니다. 동기를 잃어버리고는 도저히 목적지에 갈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 동기와 목적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가? 인간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생활권 내에서 목적도 잃어버리고 동기도 잃어버린 존재가 되었습니다. 목적도 잃어버리고 동기도 잃어버린 채 과정적인 생활에서 뒤넘이치는 인간은 어디에 머무를 것인고?
이러한 인간이니, 아무리 잘나고 잘산다 해도 휩쓸려 버릴 것입니다. 목적과 동기를 가진 어떤 개인 혹은 어떠한 종교인이 나타났다면, 그는 아무리 자기가 잘났다 하는 자라 할지라도 무자비하게 휩쓸어 버릴 수 있습니다. 그런 존재는 개인을 휩쓸 수 있고 종족도 휩쓸 수 있고 민족도 세계도 휩쓸어 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동기와 목적을 잃어버린 인간들이니 휩쓸어 버려도 천법에 걸리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사를 더듬어 보면, 그들이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동기와 목적을 붙들고 나왔던들 다른 민족이 침범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축복의 기준을 잃어버렸으니 선민은 무슨 선민이에요? 그렇게 되니 그것을 조건으로 다른 민족들이 삼켜 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인간 대 인간도 그렇거늘, 인간을 움직여 나오시는 하나님 대 인간은 어떻겠습니까? 하늘과 사탄이 있다 할진대 하나님에 대한 인간들의 목적관이 뚜렷하지 못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확고하지 못한 터전에서는 사탄이 공격하면 하나님은 빼앗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운명에서 허덕이고 있는 인간인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철학이나 종교는 그러한 것들에 대한 근본적인 관계를 탐지해야 될 것입니다. 또한 목적을 탐지해야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철학이나 종교는 사조와 더불어 제창하고 주창하다가 사조와 더불어 망해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시대와 더불어 주장하고 주의와 더불어 주장하다가는 다 망해 버렸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날 이 시대에 와서는 두 주의가 남아 있는데, 이것이 한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습니다. 그런 때가 끝날이라 하였습니다. 그 목적의 때가 가까워옴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그 목적이 무엇인지를 해명할 수 있는 내용이 없습니다. 동기도 목적도 없이 방황하고 허덕이는 데서 입는 피해는 말할 수 없이 큽니다. 옛날에는 가정적인 피해요 사회적인 피해요 일개 국가적인 피해에 그쳤지만 이제는 세계적인 피해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그 세계적인 피해는 여러분 일신에 돌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기의 기준을 가지고 무엇을 위한다 하는 입장에서 자신이 옳은 줄 알고 그렇게 주장하고 살았으나 세계적인 현상은 여러분 일신을 겨누어 들어옵니다.
과거에는 미국이나 영국 혹은 서양의 여러 국가들이 나와 하등의 관계가 없었지만 오늘날에는 그들의 생활 감정이 우리의 주위에까지 미쳐지고 있습니다. 그들의 고충이 우리의 고충이요, 그들의 어려움이 우리의 어려움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환경을 보고 이 세계의 모든 현상이 내 한 일신을 걸고 뒤넘이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환경에서 청년 남녀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이냐? 동기와 목적을 한 손에 붙들고 나가야 합니다. 이것을 해결해야 할 것이 소위 세계적인 종교의 사명입니다.
마음의 동기와 목적, 심정의 동기와 목적이 내 일신에서 뒤넘이치고 있지만, 역사의 모든 슬픔을 잊어버리고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환희의 모습으로 대우주를 지으신 절대자 앞에 나타나서 ‘얼마나 고충당하시고 얼마나 많은 상처를 입으셨습니까?’ 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그러한 늠름한 모습이 나타나기를 하나님께서는 고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우리 한민족은 불쌍합니다. 우리는 여기도 믿을 수 없고 저기도 믿을 수 없는 불쌍한 민족입니다.
오늘날의 여러분이 과거에 무엇을 위하여 살았는데, 위해 주던 그것이 오히려 나를 배반할 때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것으로부터 이미 배반을 당한 우리입니다. 그러나 ‘오냐. 그럴 줄 알았다.’ 할 수 있는 배포라도 가져야겠습니다.
거리를 활보하는 청년을 볼 때 붙들고 하고 싶은 말은 이것입니다. ‘이 녀석아, 너는 누구를 위하여 움직이고 있느냐? 하늘땅을 위하여 움직여야 할 몸을 가지고, 창조주의 전체 목적을 위하여 애써야 할 실체를 가지고 무엇을 위하여 움직이고 있느냐?’고. 그런 인간들은 몇 푼에 놀아나는 싸구려 인생들입니다. 뜻이 있는 우리는 그와 같은 인간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여러분! 지금의 한국 실정을 보면 다 갈라져 버렸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죽이고 자식이 부모를 때려죽이고 지배자가 피지배자를 중상모략 하여 죽음의 자리로 내몰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나는 누구를 믿고 누구를 위하여 살아야 하는가? 허무감에 부딪치게 됩니다. 외적인 생활마저도 구비되어 있지 않고, 어디를 가도 한숨짓는 모습입니다. 그래도 죽지 못하고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입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허덕이면서도 살고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무슨 건더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죽음이 임박하여 일생을 돌아볼 때에 무슨 건더기가 있겠느뇨? ‘아, 내가 태어나서 산 것은 이것 때문이다.’ 할 수 있는 무엇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과거도 그렇고 현재도 그렇거늘, 미래도 그러할 것입니다. 그럴 바엔 차라리 땅에 오지 않았던 것이 나았을 것입니다. 젊은 여러분일수록 이러한 우리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제1목적이 아니라 제2의 목적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라시고 역사가 바라는 제1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인간에게는 하나님을 중심한 이념이 있어야 됩니다. 마음만 있으면 될 줄 알지만 아닙니다. 마음은 자신을 선도해 주는 책임은 질 수 있으나 자신을 지도할 수는 없습니다. 내적인 책임은 질 수 있으되 지도적인 책임은 못져요. 마음이 여러분을 잡고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할 수 있습니까? 못합니다. 보호적이기 때문에 주도적인 지도는 못하고 있어요.
그러면 이 마음을 지도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을 중심한 이념입니다. 그 이념은 이상주의입니다. 이 주의가 실현된 이상세계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 있고, 하늘땅이 기뻐서 춤을 출 수 있고, 본심을 가진 인간이 환희의 춤을 무한히 출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한 세계관을 가지고 하늘을 바라본 때가 있었고, 땅을 바라본 때가 있었고, 인류를 바라본 때가 있었습니까? 없었으면 지금까지 선을 지향해 나오는 천륜 앞에, 모든 공신(功臣)들 앞에 죄인입니다.
예수님은 원인과 동기와 목적관이 확실한 분이었습니다. 다른 것은 몰랐다는 거예요. 예수는 오직 하나님을 붙들고, 하늘도 붙들고, 땅을 붙들고 뒤넘이치다 가셨습니다. 그는 인간들이 가지는 것은 다 잃어버렸습니다. 그는 인간들이 가지는 것은 전부 박탈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인간들이 알지 못하는 원인과 동기의 세계를 소유하였고 목적의 세계를 소유하였습니다. 그 시대에 권한을 가지고 움직이던 사람들에 의해 그는 억울하게 죽었으나 그의 세계관은 인류역사와 더불어 남아질 것입니다. 그의 이념은 오늘날까지 인류역사를 이끌어 나오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예수님은 요셉의 가정에서 심한 상처를 받고 자랐습니다마는 그것은 과정이었습니다. 예수님에게 가정이 어디 있었어요? 예수님은 가정이 최후의 목적지가 아님을 아셨습니다. 그 사회 역시 최후의 목적지가 아닌 것을 아셨습니다. 그런 예수였습니다.
그러기에 유대교단을 향하여 예수님이 나서게 될 때 ‘야, 이 녀석아, 가지 말라.’고 하는 유대교인들을 대하여 ‘아니다. 너희들이 반대해도 나는 가야 되겠다.’ 하셨고, 더 나아가서 이스라엘 민족이 동원하여 민족의 반역자로 몰아내며 가지 말라 하여도 ‘아니다. 나는 가야 되겠다.’ 하셨던 예수였습니다. 그는 무엇을 위해 살았습니까? 생명을 걸고 가지 말라 하여도 ‘땅에 있는 생명들을 위하여 나는 가겠다.’ 하시며 죽으신 목적이 어디 있느뇨? 동기와 목적을 세워야 했기에 예수께서는 과정적인 세계의 모든 것을 박차고 늠름히 넘어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는 구주입니다. 그는 땅 위의 어떠한 환경에서도 하늘의 이념과 함께 했고 밥을 먹어도 이념과 더불어 먹었습니다. 밥을 먹으면서도 ‘아버지! 하늘이 즐거워하실 수 있는 행복의 이념세계가 이루어질 날이 언제이겠습니까?’ 하는 간절한 마음을 가지셨습니다. 예수는 그렇게 살았던 것입니다. 분하고 억울한 일이 있을지라도 ‘아버지! 역사적인 이념을 인간 앞에 부여하시기 위하여 얼마나 수고하셨습니까? 저희를 아버지의 슬픔에 동참할 수 있는 자리에 세워 주시니 황공하옵니다. 천주의 대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홀로 책임지시고 애쓰시는 아버지의 심정을 마음으로라도 느낄 수 있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하신 예수였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동기와 목적을 잃어버린 채 허덕이는 인간들이 아니라 동기와 목적을 소유한 사람이 나오기를 하늘은 얼마나 기다리시겠습니까? 이러한 것을 모르는 인간에게 동기와 목적을 가르쳐 주셔야 할 책임이 있는 연고로, 하늘은 인간을 버리지 못하시고 붙들고 나오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늘의 고충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하늘은 어찌하여 사망의 환경에서 사탄의 제물이 되어 나가는 인류를 마음대로 처리하지 못하시는고? 하늘의 그 애달픈 심정을 아는 자가 있다 할진대 그는 치열한 마음의 투쟁을 한 사람이며, 외적으로도 역사 이래 최대의 투쟁을 한 사람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께서는 약자같이 쓰러지셨으나 그 마음의 세계는 역사가 시작된 이후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심정세계에 가까웠고, 자기를 반대하던 세계, 즉 원수 사탄을 대하여 누구보다도 치열한 투쟁을 하다가 쓰러지셨기 때문에 그것을 조건으로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부활입니다.
예수는 말씀하셨습니다. 그 나라와 그 의를 위하여 살라고. 그런데 그렇게 말씀하신 예수님이 문제가 아니라 그 동기와 목적이 문제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똑똑히 알아야 됩니다. 예수님도 그 동기와 목적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가셨을망정 그의 이념과 목적은 남아진 것입니다. 인간이 천륜 앞에 생명을 갖고 태어난 이상 필시 무엇을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슬픔을 당하고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그 나라와 그 의를 높이기 위하여 산 사람은 망하는 법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떠한 환경에서 무엇을 위하여 살고 있습니까? 자기를 위한 생각을 하십니까? 자기를 위하는 시대는 지나갑니다. 어떤 주권을 자랑하고 있습니까? 그 주권도 세계 사조 앞에는 압도당할 것입니다. 그 세계 사조 또한 목적의 주체인 하늘이 나타날 때에는 지나가고 말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적인 운명입니다. 타락한 인간들의 행로가 그런 행로였기 때문에 하늘은 인간들 앞에 제창하셨습니다. ‘하늘을 위하여 살라.’고. 이것은 복음 중의 복음이요, 소식 중의 가장 귀한 소식입니다. 모든 것은 다 지나가도 천상을 지배하는 주체는 남아질 것을 아시는 하늘, 실존의 그 자체는 영원불변하고 영원히 존재할 것을 아시는 하늘은 그 주체적인 내용을 표방하여 믿으라 했고 모시라고 했습니다. 제단에 올라 허덕이고 있는 무리가 양심 세계에서 안락을 취하지 못하고 종교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하겠습니다.
역대의 수많은 사람들이 세계를 지배했으나 양심적인 사람이나 종교인들은 지배하지 못했습니다. 앞으로는 이런 때가 옵니다. 어떠한 정치가나 침략자가 있다 할진대 그는 세계적인 종교를 한꺼번에 몰아넣고 지배할 수 있는 배포가 없으면 안 될 것입니다. 인도를 보십시오. 영국이 정치적으로 수백년 동안 지배하였지만 그 민족의 종교적 뿌리는 돌이킬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 그런 것들은 어느 때에 가서 해명될 것인가? 하나의 대목적이 이루어지는 그날입니다. 역사는 그날을 향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종교가 없는 민족은 망합니다. 역사를 볼 때 하늘의 정치를 무시하고 하늘의 정책을 무시하면서 개인을 존중한 자들은 깨져 나갔습니다. 지금이 그런 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역사노정에서 훌륭한 사람들이 있다 할진대 그들이 무엇을 위하여 살았는가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자기가 숭배하고 존경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무엇을 위해 사는가를 생각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섬기는 나라가 있다 할진대 그 나라는 무엇을 위해 움직이고 있는가, 그 세계는 무엇을 위하여 움직이고 있는가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세계사조가 목적의 세계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음이 틀림없다는 것을 아는 한, 우리는 그 목적의 세계와 우리가 어느 정도 차이가 있는가를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그 차이에 비례하여 천륜 앞에 반역자적인 것도 비례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자고이래로 도의 길을 가는 사람은 세상에서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여기도 믿지 못하고 저기도 믿지 못하고 어디에서도 안주하지 못한 채 민족의 천대를 받고 밟히면서도 연명해 나왔습니다. 이러한 도인들을 버린다면 하늘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느 한 때 해결되기를 고대하시면서 하늘은 인간 앞에 ‘하늘을 믿으라, 하늘을 섬기라.’ 하셨습니다. 하늘을 믿는 마음, 하늘을 섬기는 마음은 어떠한 혁명적인 주의도 점령하지 못합니다.
역사상에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학살당하였지만 기독교는 남아 있습니다. 왜?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을 점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외적인 세계는 지배할 수 있지만 마음세계는 지배할 수 없고, 더구나 마음세계를 넘어선 심정세계는 지배할 수 없습니다. 마음세계와 심정세계는 환경을 초월해서 존속하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그런 이념을 갖고 나온 기독교는 명실공히 세계적인 종교가 된 것입니다.
그런 고로 뜻을 품은 우리들은 역사노정에 어떠한 위인이나 어떠한 사람보다도 혁명적인 사람들입니다. 마음세계와 심정의 세계는 죄악이 지배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최고의 주인이신 하나님만이 지배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도 알고 여러분도 압니다. 통일교회 신도 여러분, 나는 심각합니다. 역사노정에서 밟히고 또 밟히는 한이 있더라도 그 마음과 심정의 세계를 어느 누구에게도 유린당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나는 그 한 사람을 붙들고 가겠습니다. 거기에는 새로운 역사가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수천의 군중에게 빵을 나누어 줄 때 그들은 기쁜 마음으로 환영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나 혹은 십자가를 지실 때는 세 제자마저도 제 갈 곳으로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예수님대로 제자는 제자대로 갈라진 그것이 한스럽다는 것입니다. 예수와 더불어 비참한 자리를 늠름히 넘어가지 못하고 사탄에게 마음이 지배당한 제자들이었습니다. 이것이 제자들을 대하던 예수의 한스러운 사정이고 분한 일입니다.
여러분! 우리들은 새로운 이념을 갖고 나섰습니다. 새로운 동기와 새로운 목표를 가지고 새로운 목적지를 향해 행군하는 대열에 섰습니다. 여러분이 그 길을 가는 데 있어서는 역사적인 충돌도 있을 것이요, 시대적인 사정에 엉클어지기도 할 것입니다. 그런 고통의 길을 거쳐 나가는 과정에서 이탈되거나 심정의 세계를 유린당하는 사람이 되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필시 승리의 한 날은 올 것이요, 해방의 한 날은 올 것입니다. 마음으로 그리고 심정으로 고대하는 그 해방의 날은 인류가 공(共)히 바라는 소망의 날입니다. 몸이 즐길 수 있고 마음이 즐길 수 있으며 심정이 안식할 수 있는 행복의 동산이 이루어지는 그날이 우리가 소망하는 날이라는 것입니다.
그날에는 우리가 주체가 되어 즐기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자를 주체로 모셔 놓고 환희하며 그 분과 화하여 그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요, 내 기쁨이 그의 기쁨이요 하늘땅의 기쁨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한 날을 바라보고 나가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 어떠한 무엇도 그를 지배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사랑하는 부모가 배반해도, 피 살을 에는 듯한 심정으로 기다리던 민족 전부가 반대해도, 밤을 새워 가며 기도해 준 유대교단이 반대해도, 굶주릴까 봐 자신의 피 살을 떼어 먹인 제자들까지 배반하는 자리에서도, 그들을 배반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무엇 때문이었는가? 하늘을 대하시던 예수께서는 어떠한 어려운 환경이 휩쓸고 세계를 잃더라도 심정 세계만은 배반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그 심정의 세계를 점령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 가신 길이 십자가의 길입니다. 몸으로는 하늘을 시봉하는 왕자가 못 되었지만 심정의 세계에서는 하늘을 시봉하는 왕자로서 책임을 다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한이 무엇인가? 하늘을 위할 수 있는 생활환경을 갖지 못한 것입니다. 이 한을 풀기 위하여 오시는 분이 재림주입니다. 그의 마음과 심정으로는 즐거워하고 하늘을 대하여 감사했으나, 그를 중심삼은 실체적인 가정, 실체적인 교회, 실체적인 국가, 실체적인 세계가 없었으니 다시 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찾는 것이 구세주의 목표라 할진대 다시 오시는 구세주를 맞이해야 할 끝날의 성도들은 어떻게 해야 되느뇨? 마음과 심정으로는 그런 이념을 찾았으되 몸으로는 그런 생활을 못하였으니, 끝날의 성도들은 몸까지도 그런 환경에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노정을 거쳐오면서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고 언론의 자유를 허락해 나왔던 것입니다.
하늘은 심정적인 모든 사실을 마음대로 말할 수 없고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역사적인 서러움을 품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늘은 죄를 만들어 놓은 인간들을 자기들끼리 싸우도록 내모셨습니다. 이 싸움을 수습할 수 있는 하늘의 새로운 이념과 대책을 갖고 오시는 분이 끝날에 오실 재림주입니다.
그러므로 끝날에 처해 있는 여러분들은 심정의 목적이 실체의 목적으로 화하여 심정의 아버지요, 마음의 아버지요, 몸의 아버지이신 그 아버지와 더불어 즐길 수 있는 한 사람을 찾기 위하여, 하늘이 동원되고 땅이 동원되고 수많은 선지선열들이 동원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오늘까지 희생하며 나오신 것도 그런 한 분을 찾기 위함이었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오늘날이 끝날이라는 것을 아는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은 어디에 머물러 있고 여러분의 심정은 어디에 머물러 있으며, 여러분의 몸은 어디에서 허덕이고 있습니까? 과거는 어떠하였으며 오늘은 어떻고 앞으로는 어떠할 것입니까? ‘이것은 이렇다.’고 확실하게 해명을 지어서 천상과 지상과 하나님 앞에 인정받을 수 있는 내용을 갖추지 않는 한 심판을 피하지 못합니다.
한스러운 타락 이후 역사는 슬픔이 연속되는 지긋지긋한 투쟁역사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역사노정에서 동기와 목적의 세계를 그리워하고, 쓰러지면서도 하늘을 부르고, 몰리면서도 하늘을 부르고, 죽어가면서도 하늘을 증거한 선조들의 궁극의 목적은 무엇이었느뇨? 동기와 목적의 세계를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이렇듯 해원성사의 날을 고대하면서 죽어간 선조들이 많기에 우리의 몸에는 하늘을 위하여 투쟁한 역사적인 선지선열들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그 피가 여러분의 마음에 물들어 있고 심정에 물들어 있는 것을 알고 여러분은 거기에 보답해야 되겠습니다. 나아가 하나님에게까지도 보답해 드릴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되었다면 그 사람은 자신을 무엇과도 바꿀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40일 금식 후 사탄이 나타나서 떡을 주마 세계를 주마 하여도 싫다 하셨습니다. 어떠한 사람이 무엇을 준다 해도 싫다 하고 나선 걸음이었기에 사탄이 지상의 모든 것을 다 준다 해도 거절하였던 것입니다. 과연 메시아의 자격을 갖추었다고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상의 그 무엇을 주어도 다 싫다 하신 예수님,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차지할 수 있었지만 이 세상은 하나님 한 분을 위하여 있다고 하신 예수님, 사나이다운 기백과 소망에 불타오르는 정열을 지니신 예수님이었기에, 하늘이 ‘안 돼.’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통일교회의 신도라고 자처하는 여러분들, 용맹스러운 기백을 갖고 하늘을 위하여 멋지게 싸우겠다는 각오를 했다면 그것을 그 무엇과도 바꾸지 말아야 됩니다. 인간이 좋다 하는 무엇을 준다 해도 ‘아니야.’, 어떠한 주권을 준다 해도 ‘아니야.’, 죽이더라도 ‘아니야.’ 하고, 오로지 하나님의 뜻대로 할 때만 ‘오냐.’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에서 끝이 안 나면 열까지, 열에서 끝이 안 나면 천까지 가서라도 사탄의 아성을 뚫어야 할 타락한 인간들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이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통일교회를 찾아 들어온 것은 고맙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요구와 욕망은 들어온 그날부터 버려야 합니다. 여러분이 가진 욕망이나 요구는 다 매장해 버린 후에 이 일을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섭리적으로 보아도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그렇게 하셨고, 수많은 선지들이 원수들의 창에 피를 흘리면서도 이를 악물고 하늘을 향하여 부르짖었거늘, 여러분은 그 분들의 그 음성을 들을 줄 알아야 됩니다. ‘아버지! 원한을 푸시옵소서.’ 하던 그 분들의 결심이 여러분의 마음에 사무쳐야 됩니다.
하늘의 황태자인 예수께서 이 땅에서 이슬과 같이 사라진 그 사실이 행복하게 노래할 수 있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만민이 환희의 음성으로 노래하고 천지가 동원되어 그의 영광을 높여 드려야 할 것이었는데, 그것을 저끄렸고 하늘을 배반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슬픔의 눈물을 흘리며 ‘황공하옵니다.’ 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기독교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역사적인 모든 비운을 넘어서 우리가 소망의 한 날을 이루기를 바라시는 하늘과 예수님이 계심을 알고 자신을 지켜야 하겠습니다. 하늘이 계심을 믿고 나는 하늘을 위하여 살고 하늘을 위하여 죽겠다는 마음에 사무쳐야 하겠습니다. 불타는 그 마음이 민족관념을 깨뜨리고, 사조를 깨뜨릴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람도 젊습니다마는 한때를 소망하는 사무친 이 심정은 어떠한 적의 손으로도, 어떠한 곡절로도 빼앗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에서 바라보면 우리는 불쌍한 무리입니다. 그러나 흑암권세 하에서 하늘의 슬픈 심정을 대신하여 일할 수 있고, 그 마음이 어떻다고 말할 수 있는 입장에 선 것을 황공하고 고맙게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을 무엇과 바꿀 수 있을 소냐? 역사적인 하나님의 길에 동참할 수 있고, 시대적인 하나님의 길에 동참할 수 있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는 미래적인 하나님의 길에 동참할 수 있는데 무엇과 바꿀소냐? 새로운 이념을 돕는 이 일을 무엇과 바꿀소냐?’ 하며 나선 것이 우리들이 가는 걸음입니다.
이 노정에는 지칠 일도 많을 것입니다. 낙망할 일도 많을 것입니다. 이를 악물고 불변의 신념을 가지고 하늘땅 앞에 맹세해야만 갈 수 있는 길입니다. 인간은 약합니다. 위해 주는 사람이 약하게 되기 쉬운 세상입니다. 그러나 이 길을 가야 되는 인간이기에 예수께서도 이 길을 가면서 하늘과 인연을 맺기 위하여 밤새워 기도하신 것입니다.
아직까지 싸움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몸의 세계에 혼란이 벌어지면 벌어질수록 마음의 세계, 심정의 세계는 강철 같은 표준을 갖고 하늘의 동기와 목적의 세계를 기다려야 합니다. 그 세계를 기다리시는 아버지를 알고 심정세계의 생활감정을 가진 모습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래야만 누구를 위할 줄 모르고 사는 이 세상을 수습할 수 있고, 저끄러진 역사를 수습할 수 있고, 어떠한 소망도 없는 미래를 바로 세울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똑똑히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하늘과 땅과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봅시다. 하늘은 땅을 위하여, 땅은 하늘을 위하여, 하늘땅은 사람을 위하여, 하늘땅에 사는 사람은 하나님을 위하여 있어야 합니다. 사위일체(四位一體)된 심정의 세계에서 즐겁게 살고자 하는 것이 우리의 소망이요, 그런 곳을 찾아가는 우리의 걸음이 돼야 한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아버지여! 청춘시대가 지나가는 것이 서글프다 하오나 아버지를 향하여 타오르는 우주사적인 정열을 갖지 못한 것을 한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아버님, 피 살의 인연이 역사와 더불어 시대와 더불어 있고, 미래에도 연결되어 나가는 어마어마한 순간에 제물로 나타난 저희임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지금까지 무엇을 위해 살았사옵니까? 과거나 현재는 어떠하였으며 미래는 어떻게 되겠사옵니까? 이것이 간단한 문제가 아님을 이들이 오늘 말씀을 들어 알았을 줄 아옵니다.
목적을 찾아가야 할 인간이요, 목적을 이루어야 할 이때이옵니다. 아버지께서는 그 목적을 성취하여 인간을 사랑하셔야 할 아버지이시지, 저희만을 위하여야 할 아버지가 아니옵니다. 그러나 저희가 슬픔을 당하면 같이 슬퍼하시고, 저희가 통분해하면 같이 통분해하시고, 몇 천년의 역사적인 슬픔에 시대적인 슬픔을 가하여 느끼시며 미래의 슬픔도 감당하셔야 할 입장에 계신 아버지이심을 아옵니다. 아버님! 얼마나 수고하셨사옵니까? 얼마나 그리워하셨사옵고 얼마나 참으셨사오며 얼마나 지치셨사옵나이까? 자신이 비록 상처를 입고 험한 자리에 있을지라도 그것을 잊어버리고 아버님의 수고 앞에 자기도 모르게 눈물 흘려야 할 인간이온데, 타락한 인간들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사옵니다.
아버님, 이들을 그런 자리까지 어떻게 끌어올려야 할 것인가가 문제이옵니다. 저희의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모든 것이 밟히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을 위하여 일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면 저희의 마음이 기울어지고 몸도 허덕이며 가고 싶어하는, 심정이 머물고 싶어하는 그 곳을 갈 때가 올 것입니다. 그 곳을 저희의 마음이 가려야 갈 수 없고 몸이 가려야 갈 수 없고 심정이 가려야 갈 수 없는 것은 아버지를 모르는 연고이옵니다. 역사적인 아버지요, 시대적인 아버지요, 미래적인 아버지이심을 아는 자가 있다 할진대 몸이 천만번 찢긴들 어이 안 가겠사오며, 마음에 억 천만번 슬픔을 당한들 어이 안 가겠사옵니까? 이러한 것을 느낄 줄 아는 참다운 효자 효녀의 정열을 가진 아들딸들을 아버지께서 고대하신다는 것을 오늘 여기에 모인 당신의 아들딸들이 알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오늘 이 교단, 이 교회를 따르는 이들은 슬픈 자리에 있사옵니다. 외로운 자의 길을 따르는 이들은 외로운 행로, 처참한 행로를 가야 하고, 눈물을 지어야 할 처지와 환경에 있음을 아옵니다. 이때는 기쁘게 살 수 있는 때가 아니고, 희희낙락 춤추며 살 때가 아닌 것을 아오니, 저희의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기쁨과 행복이 잘려버릴지라도 동기와 목적의 세계를 부둥켜안고 몸부림칠 줄 아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 뜻대로 하시옵소서.’ 하시던 예수와 같은 고난의 주인공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나이다.
가야 할 길은 멀고 끝날은 가까워오니, 바쁜 마음 금할 바 없사옵니다. 무지한 인간들은 알지 못해도 하늘은 가야 한다는 것을 저희들이 알게 하여 주시옵고, 사망세계를 개척해야 할 사명이 저희들에게 남아 있는 것을 뼈 살에 사무치도록 느끼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그 목적을 위하여 사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잠들어 있는 이 민족을 깨우시옵고, 비참한 사망세계에서 허덕이고 있는 인류를 깨우치시옵고, 방황하는 이들을 위하여 천상에 있는 억천만 영인들이 동원되어 있음을 알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나이다.
하늘을 품고 땅을 품고 아버지의 심정을 품은 마음으로 아버지를 위로해 드릴 수 있는 하나의 왕자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라시는 아버지의 심정을 부족하나마 알았사옵니다. 아버님을 받들고 모실 수 있는 한 사람을 내세워서 그러한 형태라도 갖추어야 할 책임이 저희에게 있음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일을 위하여 동원된 저희이오니, 하늘을 대한 일편단심의 충절로써 하늘을 높이 찬양하는 자리에서 쓰러지고, 하늘을 위한 비료가 되고, 재료가 되고, 하늘의 도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나이다.
모든 것을 맡아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저희의 생애와 전체 소망을 아버지께 위탁하고 아버지를 따라 나갈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오며,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이날 저희들은 다시 아버님의 긍휼을 바라며 여기에 무릎을 꿇었사오나 하늘 앞에 잘난 것 없는 부족한 모습들이오니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원컨대 이 한 시간 저희들이 자신의 생명을 중심삼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있어서 하늘 앞에 인정받을 수 있는 승리의 조건을 세울 수 있도록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 친히 저희 안에 계시어 저희를 아버지 것이라고 믿을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여기에 모인 각자의 심정과 사정은 각각 다를지라도 같은 이념을 향하여 가야 할 운명임을 알고 있사옵니다. 과거와 현재의 형편은 다를지라도 하늘을 대하고 있는 처지만은 같은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사망의 선을 넘어 본연의 생명의 세계를 찾아가야 할 저희인 연고로 여기는 잘난 자도 없고, 아버지 앞에 자랑할 수 있는 자도 없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아직까지 승리의 터전을 갖추지 못한 부족한 저희들은 아버지의 긍휼을 바라오니, 이 시간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 2천년 전 이 땅 위에 오셨던 예수님은 가슴을 헤쳐놓고 자신의 제자들을 사랑하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하고 가셨습니다. 그 누구를 대하여도 아버지의 심정을 샅샅이 풀어놓지 못하셨고, 천적인 사정을 풀어놓지 못하고 가신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감당치 못하리라고 염려하신 예수님의 심정을 저희들이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늘을 우러르고 그 나라의 영광을 바라는 마음이 저희에게 있다 할진대 그것보다 중요한 문제는 예수의 마음을 소유하는 것이요, 예수의 몸을 대신하여 나서는 것입니다.
슬픔이 있다 할진대 하늘의 마음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것이요, 하늘의 몸을 대신하여 악한 세상과 싸울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것임을 저희들이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님, 오늘 이 시간까지는 저희의 몸과 마음이 아버지를 모르고 지내왔사오나 그래 가지고는 뜻을 이룰 수 없사오니, 아버지, 저희의 마음을 근본적으로 굴복시키시옵소서. 저희의 몸을 쳐서라도 저희의 마음이 천성과 화합하게 하여 주시옵고, 본연의 심정을 갖고 오셨던 예수의 마음을 닮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본연의 심정 앞에 숙여질 수 있고 한스러운 십자가의 길을 넘어가시던 예수님과 같이 저희들도 모든 것을 버리고 하늘을 따라갈 수 있게 인도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의 마음이 하늘을 위한다고 해 왔사옵고 저희의 몸이 하늘을 받든 다고 해 왔사오나, 진정코 아버님이 사랑하실 수 있고 아버님이 붙들고 같이 살 수 있는 시간을 얼마나 가졌는가 생각하게 될 때에, 부족한 저희들임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아버님의 원한을 저희들이 마음 깊이 체휼하여 죄악의 쇠사슬을 끊고 승리의 모습으로 아버지 앞에 영광을 돌려 드릴 수 있는 당신의 아들딸들로 소생시켜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역사가 쇠퇴하고 시대는 망해 들어간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가지고 사람의 마음을 통하여 생의 문제를 해결하도록 훈계해 나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이러한 본심을 대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는 천심을 갖추고 천륜의 뜻을 인계 받아 인류에게 생명의 터전을 남겨야 되는 줄 알고 있사옵니다. 지금까지 느낀 어떤 관념이나 주의, 혹은 자기를 중심삼은 것들이나 어떠한 무엇에 고착된 기준을 갖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모든 것 내놓으니 아버지 뜻대로 하시옵소서.
아버지, 이제 무슨 말씀을 하오리까? 많은 말씀을 하였사옵니다. 이들도 많은 말씀을 들었사옵고, 알기도 많이 알고 있습니다. 이들은 하늘의 깊은 데까지 체험하고 있사옵니다. 이제 이들이 간곡히 고대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최후의 판가리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만이 문제이오니, 이 시간 승리의 아들딸들이 되게 인도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전하는 자의 마음이나 받는 자의 마음에 간격이 없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늘이 동하면 저희도 동하고, 하늘이 정하면 저희도 정하고, 하늘이 슬퍼하면 저희도 슬퍼하여 본연의 심정에 이를 수 있는 이 한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외로운 심정을 붙안고 기도하는 아들딸에게 같이하여 주시옵고, 일률적인 은사로써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것 맡기오니 끝까지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말 씀> 우리는 각각 다른 사정을 가졌습니다. 또 서로 형편이 다르고 서로 다른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각자 각자는 자기를 더 존중시 하며 과거를 수습하고 현재를 개척해 나가고 있습니다. 나라고 하는 존재는 과거와 현재, 나아가서는 미래에 새로운 무엇의 중심이 되기 위한 의도 밑에서 움직인다는 것을 여러분은 지금까지의 생애노정에서 잘 체험했을 줄 믿습니다.
나를 존중시하는 마음이 높으면 높을수록 더 높은 단계인 사회를 바라보게 되고, 국가를 바라보게 되고, 나아가서는 세계를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나를 높이고자 하는 마음이 크면 클수록 범위를 넓혀 가지고 그 가치를 세우기 위해 허덕이게 되고, 또 지금까지 허덕여 나왔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눈을 뜨고 바라보면 만물이 있고, 국가가 있고, 사회가 있고, 형제와 친척이 있습니다. 여기에 나의 가치를 확정지어 부분에서 전체까지 그 인연의 중심이 되고자 할진대 나를 맞이하고자 하는 천지가 있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은 잘 모르지만 나를 맞이하고자 하는 이 민족, 이 나라가 있고, 더 나아가서는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흔히 나를 중심삼고 이 나라가 맞아주기를 원하고, 이 세계가 맞아주기를 원하고, 하늘땅이 맞아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것이 하늘을 배반한 타락의 후손, 천륜을 배반한 배반자의 후손들이 가는 방향인 것입니다. 그러나 천륜은 그와 반대로 되어 있습니다.
역사노정에 왔다 갔던 모든 성현들은 그 시대를 위하여 살고 간 것이 아니라 올 시대를 위해서 살고 갔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부정하지 못합니다. 어떤 철인이나 어떤 도주(道主)도 그 시대만을 위하여 산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무슨 계획이나 소망이나 이념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좋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이 지니고 있는 그것을 전체 앞에 나타내려는 욕망을 가지고 움직인다 할지라도 그것이 실상 그대로 될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 소망이나 이념을 내가 책임지고 해결하고 이루어야 합니다. 그곳이 여러분이 머물러야 할 곳이요, 인연지어야 할 곳이요, 바라보아야 할 곳입니다. 소망의 동산은 이러한 곳인데 그 소망과 이념은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것이 내 것이라 생각하고 움직이는 자는 역사가 세우지 않을 것입니다. 내 것이라고 싸우는 자는 어느 한 때에 탄식하며 쓰러질 것입니다.
민족을 위하여 뜻을 품은 자, 민족과 더불어 뜻을 이룬 자는 그 민족이 망할 때 같이 망할 것입니다. 또 어떤 사조나 주의를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자기의 이념이 성사되고 그 시대가 되었다고 즐거워할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천륜의 새로운 무엇이 나타날 때는 그것 앞에 꺾임을 당합니다. 이것이 역사의 형태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노정을 걸어왔고, 또 걸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환경에 처해 있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이냐? 놀라운 그 무엇을 제시하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천륜의 모든 것을 품고 즐길 수 있는 그 무엇, 자신을 실증시킬 수 있는 그 무엇을 못 가졌다 할진대 큰소리 할 수 없다는 것을 먼저 알아두어야 되겠습니다. 그것은 운명적이라 할까, 서글픈 입장이라 할까 그렇게 되어 내려온 것입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되어 내려오느냐? 지금까지 이 땅 위의 존재물은 목적의 자리에 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 땅 위에 존재하는 모든 것과 천지가 합세하여 그의 가치가 옳다고 인정을 한 사람, 또 인정을 받은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존재물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존재물을 지은 주인공도 역사 이래 오늘날까지 이를 자기 것이라고 해 본 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타락으로 창조주 자신이 지어 놓은 만물도 자기 것으로 취급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만물이 탄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인간 자신도 탄식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탄식함은 물론이려니와 만물이 탄식하고 더 나아가서는 창조의 주인공까지도, 즉 선의 주체로 계시는 그 본체까지도 슬퍼하고 계시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슬픔을 품은 땅이요, 슬픔을 품지 않을 수 없는 인간이요, 슬픈 심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하늘입니다. 이러한 슬픔의 자리에서 계획한 그 계획이 천상을 뚫고 올라가 하늘을 기쁘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인간이 하늘에게 드릴 기쁨의 동기를 일으킬 수 있는 예물을 갖지 못한다 할진대 슬픔의 역사는 계속될 것입니다.
아직까지 이념의 주체 되시는 하나님을 찾지 못하였기 때문에 역사상의 어떤 주의나 이념도 인류는 이러한 노정을 가야 한다고, 이렇게 가야 한다고 못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인류는 하나님을 찾는 그날까지 허덕이며 가는 것입니다. 아무리 훌륭하다 할지라도, 아무리 어떻다 할지라도 그날까지 인간은 돌고 돌고 또 돌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은 막연히 제시하시기를 사람은 자기를 위하여 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려고 하지 말고 민족을 위하여, 국가를 위하여, 인류를 위하여 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조가 달라짐에 따라 지금 시대에 와서는 이 땅을 위하여 살라고 하는 인륜도덕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써 완결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무엇이 나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선을 가르쳐 나오는 지도자 혹은 양심가들은 천륜과 인연을 맺기 위한 도를 인간 앞에 제시하여 나왔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바라보고 나왔습니다. 그 하나님을 향하는 데 있어서는 권력과 일체의 모든 것을 끊고 나왔던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정신이며 모든 도의 정신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도의 길을 가는 사람은 인생행로에 있어서 낙오자와 같이 걸어왔습니다. 짓밟히고 몰리고 쫓기면서 20세기까지 나왔습니다.
그렇게 몰리어 온 이들에게 하늘은 해방의 한 날, 기쁨의 한때를 안겨주지 못한 채 인간은 지금도 그날을 향해 가는 과정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왜 그러냐? 하늘이 이 땅 위에서 만물을 대하고, 이 땅의 역사를 대하고, 미래를 대하고, 천상을 대하여 내 것이라 할 수 있는 하나의 사람을 아직까지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하나의 사람을 중심삼고 세계를 내 것이라 할 수 있고, 그 사람을 중심삼고 영계를 내 것이라 할 수 있고, 그 사람을 중심삼고 이 땅과 모든 만물을 내 것이라 할 수 있는 하나님이 못 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아무리 훌륭한 자라 할지라도 그 이념이 바라는 최고의 목적지에 못 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그 이념의 목적과 가치적인 인연을 못 맺고 있습니다. 그 목적이 이루어지는 날이 인간이 기뻐할 수 있는 날인 것입니다.
그러면 그 목적과 가치를 이루는 존재는 어떠한 존재인가?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이 영원하신 것처럼 전체의 중심으로서 땅 위에 설 수 있는 존재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존재가 역사 이래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많은 선조들과 오늘의 우리까지 그런 존재를 찾아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들 조건을 세워 놓고 자신을 다시 한번 비판하여 보십시오. 최고의 선의 주체자인 하늘이 있다 할진대 그 선의 주체자가 여러분이 좋다고 하는 물건을 보고 ‘오! 참 좋구나.’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아버지!’ 하고 부르면 ‘오냐! 사랑스런 아들딸아. 이는 진실로 사랑하는 내 아들딸이다.’ 라고 할 수 있는 입장이 못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땅 위의 인간이 아무리 호화찬란한 자리에서 자랑한다 해도 ‘오냐, 참 좋구나.’ 할 수 있는 그런 인연을 한번도 맺지 못한 하나님이신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인간들이 바라고 있는 선, 평화, 자유, 그 모두가 하늘이 영원히 즐길 수 있는 선이요, 평화요, 자유냐고 따져 들어간다면 여러분이 계획하고 있는 것, 여러분이 누리고 있는 평화도 어느 한 때는 유린당해야 한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 연고로 좋다 하는 어떤 이념이 있다 하더라도 그 이념이 정작 하늘로부터 온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시대를 대표하는 이념은 지나갑니다. 한 세기를 대표하는 주의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천륜적인 것은 남아집니다. 그렇게 천륜은 돌고 있습니다. 세계를 움직인 어떤 위대한 혁명가가 있다 할지라도 그는 그 시대와 더불어 가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면 태양계를 비롯한 대우주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하늘이 그 이념과 더불어 움직일 수 있고, 그 이념과 더불어 전체를 품을 수 있는 한때는 언제일 것인가? 그런 때가 기필코 와야 할 것입니다. 인간도 그런 때를 소원하고 있고 하늘도 그런 때를 소원하고 계십니다. 그런 때를 맞이해야 할 인간인 연고로 하늘은 법을 세워 지도해 나오시는 것이요, 그러한 한때를 약속하셨던 것입니다. 그 한때가 끝날이요, 심판의 날입니다.
그 때에는 내가 가지고 있는 선의 이념도 흘러갈 것이고, 내가 살고 있는 환경도 유린당할 것입니다. 오늘 내가 지니고 있는 관념과 모든 것은 천상에서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입장인 연고로 도의 세계는 현실을 부정하고 나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뜻을 품은 자들 중에 세상과 더불어 향락을 누리면서 그 뜻을 이루려고 했던 자가 없습니다. 그들은 가정에서 몰리고, 국가에서 몰리고, 사회에서 몰리고, 당대의 사조에서 몰리고, 나중에는 그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 의하여 죽음의 자리에까지 몰렸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이슬같이 사라져 갔으나 그들이 살고, 그들이 지키고, 그들이 주장하던 천륜은 남아졌습니다. 그 천륜이 역사를 수습해 나온 연고로 시대가 지나간 후에도 그 사람들을 존중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입으로 말하고 머리로 생각할 수 있는 사랑을 선(善) 그 자체로 땅 위에 세워 놓았지만 그들이 선하지 못한 입장으로 떨어졌기 때문에 오히려 슬프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에덴동산에 지어 놓고 말씀하시기를, 지극히 선한지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몸이 현재 선합니까? 선을 향하여 움직이고자 하는 여러분의 그 마음조차 선하지 못한 입장에 떨어졌습니다. 이념을 중심삼고 이루어진 가정이 선합니까? 아닙니다. 가정을 중심삼고 이루어진 국가, 국가를 중심삼고 이루어진 세계가 선합니까? 그렇지 못합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잘 압니다. 바라던 우주를 개척해야 할 내 자신은 어떻게 해 나가야 되느냐? 이것은 심히 크고 중대한 문제입니다. 뜻이 있는 사람은 생명을 걸고 이 문제와 싸워야 됩니다.
인간들이 이 땅에 자기 이름을 남기고 그 무엇인가 절대적인 가치와 인연을 맺으려고 하는 목적은 무엇이뇨? 우리는 내 것을 찾고 있습니다. 내가 즐기며 살 수 있는 세계, 내가 안식할 수 있는 나라, 내가 모든 것을 잊고 노래할 수 있는 그날을 고대하고 있는데, ‘나의 모습은 왜 이런고?’ 하며 한탄할 수밖에 없는 입장입니다. 우리는 대우주와 더불어 가치적인 것을 노래하고 싶고, 역경을 걷어내고 즐기고 싶어합니다. 그 이념이 이루어질 때가 올 것이냐 아니면 이러다 말 것이냐 하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소망과 이념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그 가치가 환경적으로 높아지기를 바라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망하기를 바라는 개인이 어디 있어요? 어떤 가정, 어떤 사회, 어떤 국가가 망하기를 바라겠어요? 망하는 국가가 있다면, 천성을 향하여 ‘하나님이여! 이 국가를 구해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하지 않을 민족이 어디 있어요? 땅을 치며 호소하는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하늘이 그것을 시인해 주지 못하는 것은 왜입니까? 하늘이 인정할 수 있는 땅이 못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 앞에 정성을 들이면 내가 망하고 싶어도 망하지 않는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세계와 하늘땅을 위하여 존재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늘땅에 하나님의 이념이 이루어지는 그 한때를 표준으로 역사해 나오시기 때문에 개인이나 민족에게 곡절이 있다 하더라도 그 곡절을 시인하지 않고 넘고 넘어 오늘의 세계적인 기준까지 나오셨습니다.
이제 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가 대결하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하나님이여! 우리를 제물로 삼아주시옵소서.’ 하고 부르짖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양심을 가진 사람은 ‘이 뜻을 이루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며 그 무엇을 소망합니다. 어느 한 때에 가서는 그 뜻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계획하는 어떠한 계획, 인간이 구상하는 어떠한 구상, 그 모든 것을 능가하여 자기의 페이스(pace)를 잃지 않고 늠름히 처리해 나오신다고 봅니다.
그러면 오늘 이 땅 위에 있는 주의가 천성을 통했느냐가 문제입니다. 이 세계에 하늘과 땅을 품을 수 있는 무엇이 나온다 할진대 하늘과 땅이 통하고 하늘과 땅과 우리의 마음이 결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전체의 가치와 전체의 뜻을 연결할 수 있고 마음에 일대 혁명을 일으킬 수 있는 내용은 무엇인가? 우리는 지금까지의 역사노정에서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러한 처지에 있는 오늘날 이 시대의 청년 남녀들은 총궐기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은 능력이 있으면서도 어찌하여 악하게 돌아가는 이 땅을 바라보고만 계시는가? 여기에는 곡절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창조원리에서 배워 알고 있지만 자기가 짓지 않은 것은 주관할 수 없고 자기가 지었더라도 이상적인 완성의 기준을 세우기 전에는 직접 간섭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세계를 인간들끼리 해결하려고 하지만 ‘인간끼리는 안 되겠사오니, 하늘이여 구해 주시옵소서!’ 하는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공산주의가 무엇이 어떻고 어떻고 하면서 하늘이 없다고 해 왔지만 억만년을 그렇게 해 보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자기들 뜻대로 될 줄 알지만 그렇게 안 됩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안 되겠사오니, 하늘이여! 구해 주시옵소서.’ 할 수밖에 없는 역사적인 한 때가 기필코 온다는 것입니다. 그런 때가 오기 때문에 국가적인 형태가 그렇게 되고, 민족적인 형태가 그렇게 되고, 가정적인 형태가 그렇게 되고, 개인적인 형태가 그렇게 됩니다.
어떠한 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도 살다 보면 슬픔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잘 믿고, 아무리 무엇이 어떻다 해도 내세울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세상이 여러분의 목전에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앞으로 오는 세계, ‘하늘이여, 들어 주시옵소서!’ 하는 때를 우리는 결코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때는 언제일 것인가? 개인적으로 교단적으로 또 국가적으로 고통을 받는 세계가 점점 눈앞에 다가오고 있습니다. ‘하늘이여, 우리를 도와주시옵소서.’ 하는 그때는 이미 늦습니다.
하늘이 있다 할진대 이 역사를 새로운 방향으로 몰고, 물질의 첨단에서 있는 인류를 내몰아 다 갈라놓을 것입니다. 보십시오.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는 세상입니다. 자기 가정도 믿지 못하는 세상입니다. 개인주의의 첨단에 서 있는 것입니다. 외적인 환경은 좋은 듯하나 내 한 자체를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그런 환경에서 부딪치며 돌아 나가려니 막막합니다. 그러한 때에 봉착하리라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의 자유가 없습니다. 이것이 선인 줄 알지만 선한 것이 아닙니다. 안식의 터전이 못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아, 이것이 행복의 자리로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또 내 심정을 알 수 없습니다. 옛날 성도들이 죽음을 앞두고 탄식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 하늘이여, 나를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하는 때가 올 것입니다. 그러한 한 때가 있을 것입니다. 세계는 그런 때를 맞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늦습니다. 내가 아무리 가고 싶지만 못 가게 될 때가 옵니다. 응당 내가 해야 할 것이지만 할 수 없는 때가 올 것입니다. 그때는 이미 늦습니다.
왜 그러냐? 하늘은 인간이 생겨나기 전부터 계셨고, 인간이 생겨난 그날부터 인간과 인연을 맺지 않은 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악한 사람은 악한 사람으로 하여금 처단하게 했고 악한 민족은 악한 민족으로 하여금 처단하게 했습니다. 인류가 생겨난 이후 지금까지 하나님이 인연을 맺지 않은 때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일대 거사를 하게 될 때는 인연을 부정하거나 인연을 무시하고선 절대 일을 하시지 않습니다. 한낱 타락한 인간들도 새로운 무엇을 할 때엔 과거의 인연을 존중시하여 그것을 청산하고 움직이거든, 하물며 인간과 깊은 인연을 맺고 그 인연의 주체로 계시는 하나님이 인간을 무시하고 일을 하시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선조를 통하여 시대마다 수많은 사람을 제물로 희생시켜 나왔습니다. 인간은 인연을 배반할지언정 하늘은 인연을 조건으로 하여 선지들을 그 시대 앞에 내세웠습니다. 몰아내고 죽이면 또 내세워 놓고 하는 일을 해 오셨습니다. 그러면서 개인으로부터 가정을 거치고 민족을 거쳐 세계까지 나왔습니다. 세계적인 끝날이 가까이 오면 가까이 올수록 하늘과 최대의 인연을 맺어야 할 때가 가까이 오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면 그러한 때가 올 때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천적인 인연이 어떤 것이냐 하는 것을 더듬어 살필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것이 되고 내가 세계의 것이 되고,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뻐하고 나로 말미암아 세계가 기뻐하고, 내가 기뻐하고 하늘이 기뻐함으로 말미암아 온 천지가 화답하는 그 기쁨, 그것이 목적입니다. 여러분의 목적이 그렇잖아요?
야망을 품은 사람은 세계를 자기 수중에 넣고 뒤흔들고 싶어합니다. 어떤 훌륭한 정치가가 있다면 그를 붙들고 욕망이 무엇이냐 할 때, 이 세계를 마음대로 흔들어서 세계가 내 수중에서 움직이고, 하나님이 놀아나고, 하늘땅 전부가 움직이면 좋겠다고 할 것입니다. 이런 욕망을 실현한 사람이 아직까지는 없지만 앞으로 나올 것입니다. 생각으로는 그렇게 될지 모르지만 세계를 수중에 넣고 마음대로 한 사람은 아직 없습니다. 세계는 마음으로 지배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귀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마음의 세계는 지배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하늘이 기뻐하고, 피조세계 전체가 기뻐할 수 있는 무엇이 되고 싶어합니다. 외적인 면에 있어서는 그런 욕망을 이루었다 해도 마음의 세계는 지배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물질문명의 첨단에 서 있는 오늘날에도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해 주지 못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래서 종교를 세워서 인간의 내적인 것을 수습하여 나왔고 과학을 세워 외적인 것을 수습하여 나온 것입니다. 이렇게 종교와 철학과 과학이 각 분야로 갈라져 나왔으나 어느 한때 상봉해야 되는 것입니다. 상봉하기 위해서는 주인을 놓고 해야 됩니다. 그렇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위대한 철학자가 나왔다 할진대 하늘과 땅을 대신하여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어야 될 것이고, 어떠한 과학자가 나왔다 할 진대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지 못하고 계시는 것을 과학적으로 설명해야 될 것이고, 종교가가 있다 할진대 심정적으로 하늘땅을 움직이는 동시에 저 영계까지 움직여야 될 것입니다. 이것을 실증해서 옳다 할 수 있는 그때가 되면 세상은 다 통하는 것입니다. 그럴 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계시다 할진대 그의 이념은 무엇인가? 지금까지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인간들의 욕망은 무엇인가? 이 세계를 자기 수중에 넣고 자기 마음대로 해 보고 싶고, 자유천지를 여행이나 하면서 멋지게 살았으면 하는 것이 땅 위에 사는 대다수 인간들의 이상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자리에 서 보세요. 마음은 더 높은 다른 무엇을 또 바라게 될 것입니다.
인간이 생활하고 있는 이 세상을 부정할 수 없고 심적인 기준을 부정할 수 없는 연고로 역사노정에서 종교가 많은 공헌을 해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아시겠어요? 그런 까닭에 최후에 가서는 나를 중심삼고 종교와 철학과 과학이 하나님과 상봉하여 ‘우리가 한 목적이었고 한 가지의 존재였구나.’ 하며 손을 붙들고 울 수 있는 한 날이 땅 위에 와야만 된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과 몸 그리고 심정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형제요 하나님의 아들딸이라는 사실을 느낄 수 있는 그 한 때를 맞이하게 될 때, 그것을 기반으로 하여 인간 세상에는 최대의 안식의 동산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게 될 때, 여러분, 천륜이 있다 해도 인간이 없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종교가 있다 해도 인간이 없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세계주의가 있다 해도 인간이 없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인간의 목적이 무엇이뇨? 내 가치를 인정받는 것입니다. 인정을 받는 데는 세계로부터 인정받는 것만도 아니요, 하늘땅으로부터만도 아닙니다. 하나님한테까지 인정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무엇으로 인정을 받아야 하는가?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써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최대의 소망입니다.
우리가 최대의 가치라고 생각하는 그것이 가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 앞에 사랑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그 하나의 모습을 우리의 마음은 그리워하기 때문에 그렇게 되기 전에는 아무런 무엇도 소용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은 인간을 사랑해 오신 것입니다. 어느 누가 이 땅을 주관한다 해도 나중에는 하나님의 소망권 내로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최후에는 하나님을 상봉하여 그 심정에 들어가서 ‘오 하나님 아버지시여! 하나님과 나는 뗄 수 없는 부자의 관계입니다.’라고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천국을 찾는 그날까지 인간은 허덕이고 방황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오늘날 유물론자들은 난관에 봉착했습니다. 이념이나 의식만 가지고는 세계를 뒤집어 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세계를 움직이는 데는 의식만이 아니라 마음의 혁명을 해야 합니다. 나아가서 하늘의 심정을 통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것이 인생이 가는 목적지입니다. 그래서 하늘을 찾는 그날까지 허덕여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도를 찾는다 할진대 어떠한 도를 찾을 것인가? 논리적인 도와 양심적인 도를 지나서 심정적인 도를 찾아야 합니다. 기독교가 이것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고, ‘아버지는 내 안에 있고 나는 아버지 안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목적입니다. 천지 만물을 주관해 나오시는 그 아버지 앞에 아들딸이라고 인정을 받아서 천상천하에 그 이름이 공인되는 그것이 인생이 바라는 최고의 목적입니다. 그것이 인류의 목적이에요.
그러면 그날을 어떻게 찾아가야 하는가? 내 개인적으로는 찾아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왜?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전지전능하신 사랑의 하나님이 어찌하여 유구한 역사노정에서 사랑의 심정으로 나타나지 못하셨느냐? 여러분, 원리에서 재창조역사를 배웠을 것입니다. 원래대로 찾아오십니다. 잃어버렸으니 잃어버린 대로 다시 찾아야 됩니다.
우리 인간을 소우주라고 하였습니다. 몸은 땅을 상징하고, 마음은 이념을 상징하고, 영은 하늘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인간을 찾아 나오기 위한 지금까지의 투쟁사는 몸을 상징하는 땅을 빼앗는 싸움이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마음을 상징하는 사상을 빼앗는 놀음이었습니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무엇인가? 심정을 빼앗는 역사입니다. 이것이 종교전쟁입니다. 여러분, 똑똑히 알아야 됩니다. 그렇게 되나 안 되나 두고 보십시오.
이렇게 해서 심정의 기준이 자리잡히면 마음의 세계와 물질의 세계는 자동적으로 해결됩니다. 사랑의 심정을 가진 부모는 마음이 자식에게 있기 때문에 만물을 사랑하게 된다는 거예요. 알아들을 수 있습니까? 암만 주어서는 안 된다고 해도 마음이 주게 된단 말이에요. 암만 아까운 것도 아들을 위해서는 팔아치웁니다. ‘아들놈 제치고 나 먹고살아야지.’ 하지 않습니다. 그 기준이 우리 인간 각자의 심정에 사무쳐서 사랑의 심정으로 이 세계를 바라볼 수 있게 된다면 온 만물은 머리 숙인다는 것입니다. 부모를 잃어버리고 부모의 사랑을 모르던 사람이 부모의 품에 안겨 부모의 사랑을 알게 되는 그 자리에 갈 때에 머리 숙이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만물도 인간과 공동체적인 운명으로 그 목적을 향하여 같이 뒤넘이치며 나왔습니다.
여기에 모인 여러분들도 사정이 다르고 인연이 다르다 할지라도 그 목적을 두고는 같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인간의 최후의 목적은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 곱다라니 서서 ‘오, 그대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요, 그대의 가정은 내가 사랑하는 가정이로구나, 그대가 갖고 있는 물건은 내가 사랑하는 물건이로구나, 그대가 살고 있는 땅은 내가 사랑해야 할 땅이로구나, 그대가 바라보고 있는 천상천하는 내가 사랑해야 할 천상천하로구나.’ 하는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해결되는 날에야 하나님도 안식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날까지 인간들은 몰랐습니다. 하늘에 빚진 것을 몰랐습니다. 여러분은 이 땅에 태어나 몇십년을 사는 동안 진정으로 감사한 적이 얼마나 있었습니까? 있었어요? ‘아버지 어머니, 감사합니다. 이 나라여, 감사합니다. 이 시간이여, 감사합니다. 이 세계를 움직이는 하늘이여, 감사합니다’라고 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렇게 하지 못한다 할진대 하나님은 불쌍한 하나님이 됩니다. 이렇게 대줘도 알지 못하는 인간들입니다. 알지 못하는 것은 그래도 괜찮지만, 하늘을 비판하고 천륜을 비판하는 무리요 이러한 역사노정을 거쳐온 인간입니다.
우리는 빚진 자입니다. 어떠한 빚을 졌느뇨? 어떤 물질의 빚, 땅의 빚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찢어내고 녹여낸 마음의 빚을 졌습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심정의 빚을 진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인간들은 이것을 알지 못하고 예수 믿고 천국 가겠다고 합니다. ‘오 하나님이여, 내 슬픔을 모두 받아 주시옵소서.’ 합니다. 염치가 없습니다. 하늘은 염치가 있어서 기도하지 않은 사람을 천마디 기도한 사람보다도 더욱 귀하게 여길 것입니다. 그러한 심정이 느껴져야 됩니다.
하늘은 끝날에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무엇을 하시려고 오시는가? 인간의 역사적인 모든 빚을 청산하려고 오시는 것입니다. 청산의 대가로 무엇을 원하시는가? 금은보화가 아닙니다. 썩어질 이 몸뚱이도 아닙니다. 영원불멸할 영, 즉 속사람을 중심삼은 영원한 나를 찾아오고 계시다는 것을 여러분은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영원한 영적인 존재는 물론이려니와 더 나아가서는 타락된 이 몸까지 청산하여 다시 축복해 가지고 이를 붙들고 ‘오냐, 내 사랑하는 아들딸이구나.’ 할 수 있는 때를 바라고 지금까지 나오셨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바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것을 이루기 위하여, 혹은 하나님의 것이 되기 위하여 우리 신앙자들은 믿고 나왔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를 어디서 만나려고 하시는가? 성경에 몸이 성전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지음을 받은 인간이 만물을 주관하라는 축복을 이룬 자리에서 만나고자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함으로 이 땅은 다 깨져 버렸습니다. 땅이 다 깨어져 나갔는데 어디서 만나요? 내가 하나님 같아도 그럴 것입니다.
이 몸뚱이는 하나님께서 있는 정성을 다 들여 흙덩이와 같은 것을 수습하여 영원한 이념의 생명체, 즉 영인체가 자랄 수 있도록 만드셨습니다. 예술품도 이 이상의 예술품이 없습니다. 그냥 하나님이 ‘야, 일어나라.’고 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최대의 정력을 기울여서 만드신 이 몸뚱이입니다. 거기에 영인체를 불어넣어 하나의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유무형세계에서 영원히 존재할 수 있는 그런 형상을 만들어 축복해 주셨는데 타락해 버린 것입니다. 아담 해와가 만물을 주관하라는 축복을 이루어 만물이 그 사랑의 심정 앞에 머리 숙일 수 있기를 바라셨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입장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만물을 파괴했으니 그 하나님이 실패의 하나님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인간을 찾아오십니다. 찾아오셨다가 실패하고, 또 찾아오셨다가 못 만나고, 또 찾아오셨다가 때를 잃어버리곤 했던 슬픈 사실을 여러분들은 알고 있습니다. 개인을 찾아왔다가 개인을 잃어버리고 가정을 소망으로 역사해 나왔습니다.
역사는 흘러가는 것이 원칙이기에 하나님께서 개인을 잃어버리고 가정적인 섭리를 하시기 위하여 얼마나 수고하셨겠습니까? 그리하여 가정을 세워 축복해 주려고 하셨는데 이것도 깨어지니 가정을 버리고 민족을 세워 역사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 민족도 망해 버리니 국가를 세웠습니다. 그 국가가 망하면 세계를 세워야 되는데 지금까지 어느 한때, 어느 것도 하나님께서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입장이 못 된 것을 알아야 됩니다.
이스라엘 민족 앞에 예수를 보내어 세계를 세우려 하셨지만, 그들이 예수를 죽임으로써 그 나라도 망하고 세계도 혼란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천상과 지상을 연결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오시는 분이 재림주입니다. 인간이 타락하였지만 만물을 주관하라는 축복을 받았기 때문에 외적으로는 온 세계가 사람의 주관 내에서 움직이는 형태를 갖춰 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몸으로만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영(靈)도 있으니 이 마음과 영을 지배할 수 있는 하나의 주인공이 있어야 합니다. 그가 우리가 모실 수 있는 이념의 주인공입니다.
외적으로 아무리 잘 되어 있어도 이념이 없으면 망해 버립니다. 외적인 것에 이념이 연결되어야 합니다. 마음이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기준으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세계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하나님이 계시다 할진대 그러한 작전을 하실 게 아니에요? 망상이나 공상으로 얼렁뚱땅하게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의 미립자라도 분석해 보면 무질서하게 돼 있지 않습니다. 전통을 갖추지 않은 것이 어디 있고 원인과 내용과 목적을 벗어난 것이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죄악된 우리를 누가 찾아오십니까? 나를 낳아준 아버지가 아니라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대우주의 주체 되시는 아버지가 찾아오십니다. 이것을 알고 ‘황공하옵니다.’ 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그날부터 정상적인 신앙의 길을 출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예수를 잘 믿고, 신․구약을 능통했다 하더라도 찾아오신 그분께 ‘불초한 이 자식을 찾기 위하여 얼마나 수고하셨습니까?’ 하는 마음이 어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찾아오셨던 아버지 앞에 아브라함이 실수했고, 민족적으로 찾아오셨던 아버지를 이스라엘 민족이 배반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오늘날 다시 세계적으로 찾아오시는 주님을 어떻게 대할 것이냐?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오시는 주님 앞에, ‘당신은 내 소원을 아시니 성취해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는 사람, 하나님이야 어찌 됐든 나만 편하면 됐지 하는 심보를 가진 사람은 하늘 앞에 절도범이요 강도입니다. 하나님의 기쁨을 다 빼앗아 놓고도 이러한 신앙을 하는 오늘날의 신앙자들이니, 이것이야말로 예수를 잃은 신앙자들이요 지옥의 권세를 지닌 자들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생명이 있는 무리가 못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우리는 어떠한 무리가 되어야 되겠습니까? 그것은 간단합니다. 오시는 아버지 앞에 눈물을 머금고 ‘황공하옵니다.’ 할 수 있는 무리들이 되는 것입니다. 내게 좋은 것이 있으면 ‘아버님, 받으시옵소서. 역사노정에서 슬퍼하신 선조의 슬픔을 대신하겠나이다.’ 내 몸에 좋은 조건이 있다 할진대 ‘이 조건을 아버지께 드리오니 받으시옵소서. 내 일생의 무엇도 이 민족의 무엇도 아버지께 드리오니 받으시옵소서.’ 하며 나설 수 있는 사람, 믿을 수 있는 무리, 믿을 수 있는 민족이 있다 할진대 하나님께서 그러한 가운데 안 오실 수 없습니다. 세상의 부모도 잘났던 못났던 부모의 심정을 통하고 부모의 서글픔을 먼저 알고 서글퍼하는 아들딸이 있다 할진대 그 앞에서 부모는 뼛골이 녹아나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은 불쌍한 민족입니다. 죽음의 바다가 이 민족을 밟고 넘어서고 있는 이 때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역사의 발자취와 더불어 오신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고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남이야 미치광이라 하든 무엇이라 하든 아버지를 모실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런 심정이 사무쳐야 되겠습니다. 나는 없다는 기준을 세우고 아버지 앞에 황공하다는 마음으로 무릎을 꿇고 눈물로 준비하는 그러한 민족은 앞으로 틀림없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얼마나 그리워했던고? 동산에 자라나는 풀 한 포기를 볼 때도 ‘풀아! 너는 어느 한 날에 내 사랑을 받는 아들의 물건이 되어서 그 아들의 사랑을 받겠나?’ 하셨을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의 부모들도 사랑하는 아들이 죽어서 그 아들을 다시 사랑할 수 없게 되면 아들이 살아서 가지고 있던 모든 물건을 바라볼 때마다 그 부모는 얼마나 슬퍼합니까? 죽은 인간을 다시 살리기 위한 것이 복귀노정이요, 부활노정이요, 재창조의 노정입니다.
하늘은 이 땅을 얼마나 그리워했던고? 풀 한 포기를 보고도 ‘오 풀아, 네게는 하늘의 눈물 자국이 남아 있구나.’ 땅을 바라보아도 ‘성도들의 피눈물이 감돌고 있는 땅이요, 피의 고개를 넘어서 그리워하는 하나님의 심정이 어려 있는 땅이구나.’ 하는 마음,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이 그리워하는 만물, 하나님이 그리워하는 사람을 그리워하기에 억제할 수 없는 폭발적인 심정을 가진 사람이 있다 할진대 이는 하나님의 아들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하늘은 그런 사람을 세워서 세계를 살려 나갈 것입니다.
6천년 역사노정을 거쳐오는 동안 독신자(篤信者)를 붙들고 나오신 불쌍한 하나님이심을 느끼는 우리가 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친구가 될 것입니다. 친구 중에 제일 가까운 친구는 어떠한 친구인가? 그의 심중에 깊이 박힌 불쌍한 사정과 억울하고 가엾고 외로운 사정을 알아주는 사람이 친구 중의 친구입니다. 여기에 더하여 인간은 하나님의 자식이라 하였으니 자식이라 함은 외로운 사정을 알아주는 것을 넘어서 그 부모의 죽을 자리까지도 인계 받는 후계자가 되는 것입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하나님은 불쌍한 분이십니다. 최대의 이념과 이상을 세워 놓고 만물을 지으셨으나 아직까지 창조목적을 이루지 못한 채 탄식의 심정으로 계시는 분이십니다. 인간 세계에서 제일 불쌍한 것이 무엇이뇨? 타락한 우리의 조상이 아니요, 형장에서 억울하게 죽은 사람도 아닙니다. 역사상의 어떠한 참사에서 희생된 사람도 아닙니다. 망해버린 국가도 아닙니다. 굽이치는 애달픈 하늘의 심정을 품고 걸어 나온 자들이 제일 불쌍합니다.
세상 사람들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와 단 몇 개월만이라도 살고 싶어하고 또 그 사람을 위해서는 죽음도 개의치 않습니다. 우리의 아버지는 어떠하겠습니까? 하나님은 6천년 동안 우리를 찾기 위해 가시밭길도 개의치 아니하시고, 세상의 이목도 개의치 아니하시고, 목 베임을 당하는 것도 개의치 아니하시고, 개인으로부터 가정 사회 민족 국가 세계에 이르기까지 희생해 오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하나님을 찾는 아들딸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환희의 날이 이 천지에 나타나기를 얼마나 고대하셨겠습니까? 하나님을 알고 아버지라 부르는 하나의 아들딸을 얼마나 고대하셨겠습니까? 여러분 그런 아들딸이 되겠다는 마음이 없는 사람은 여기에 오지 마십시오.
예수님이 가신 길은 하늘을 찾아 최대한으로 모신 길이었습니다. 자신이 슬픔을 당할 때 도리어 하나님을 위로해 드린 자식이었습니다. 세상에서 몰리던 예수는 과거 선조들에게 몰림당하시던 하나님은 얼마나 슬프셨겠는가를 생각했습니다. 예수는 대하던 가정으로부터 쫓겨날 때 ‘하나님은 얼마나 슬프셨습니까? 그 심정을 조금이나마 알겠습니다.’ 민족 앞에 쫓김을 받고 12사도와 70문도에게 배반당하던 예수는 ‘나를 믿고 따르던 이들 이상 하늘을 믿고 따르던 과거의 선지자들이 하늘을 배반할 때의 그 심정을 감히 알겠습니다. 그리고 뜻을 품고 죽음의 자리에서도 절개를 지켰던 선조들의 심정을 알겠습니다.’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믿는 성도들 중에서 예수의 친구가 되고 예수의 상대가 될 사람이 있겠는가 보세요. 하나님은 땅을 대하여 6천년 동안 수고하셨지만 수고의 대가를 못 받으셨습니다. 만물을 그리워했고, 인간을 그리워했고, 인간에게 축복해 주기를 원하셨고, 사랑하는 아들을 품고 사랑하고 싶으셨지만, 어느 한 날 그래 보지 못하신 하나님인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기 위하여 태어났습니까? 과거엔 몰라서 못했지만 이제 알았으니 모든 것을 거두어 하나님 것으로 만들어 드려야 합니다. ‘모든 것은 아버지의 것입니다.’라고 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런 후에 자기를 찾는 운동에 들어가야 합니다. 하늘의 위신을 대신한 아버지의 아들딸이라 할진대 천만번 죽는 한이 있더라도 원한에 사무친 아버지의 심정을 다시 유린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목적은 무엇인가? 또 인류의 목적은 무엇인가? 선의 주권을 세워서 만민을 통치하고, 개인의 가치를 만우주의 가치보다도 더 귀하게 여길 수도 있는 세계를 건설하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세계가 못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 것이 하나도 없는 이 땅에 살고 있습니다. 세상천지가 아무리 넓다 하여도 하나님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니 이 땅 위에는 믿을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땅 한 평이라도 있다면 그곳에 들어가는 사람은 살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땅 한 평조차 없습니다. 만물이 아무리 풍부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것이 되어 있지 못하니 어찌할 것인가?
우리들이 이를 악물고 전도하는 목적은 하나님의 아들딸, 하나님의 물건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만물을 하나님의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세계를 움직여야 할 오늘날의 기독교가 이런 하늘의 최고의 이념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여 축복하셨는데 이스라엘 민족은 이것을 피하다가 망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갔으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만물을 할례해야 됩니다. 3년 간 모든 땅을 경작하지 말고 만물을 할례 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만물 할례기간, 성별기간입니다. 여러분들 성경을 봐서 알잖아요? 사탄세계에서 유린당한 땅을 다 청산하기 위하여 소금을 뿌리고 했던 것 말입니다.
하늘 것으로 만들려던 가나안 땅은 어디에 갔으며, 그 가나안 땅에 살아야 할 이스라엘 민족은 어디 갔느뇨? 때를 잃어버린 이스라엘 민족은 세계를 유리하게 되었습니다. 당연합니다.
국가의 3대 요소는 무엇입니까? 주권과 영토와 국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주권이 있어요? 하나님 땅이 있어요? 하나님의 사람이 있어요? 없습니다.
이제 만왕의 왕이요, 만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이렇게 슬퍼하시는 것을 알았으니 우리는 아버지를 모시기 위하여 가지고 있는 소유물을 아버지 것으로 단단히 보존해야 됩니다. 통일용사들은 그것을 사탄한테 빼앗기지 않겠다는 마음과 절개를 가져야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물건을 성별시켜서 아버지 것으로 취급하여야 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그렇게 한 사람이 있습니까? ‘아버지, 비록 내가 작지만 이 역사, 이 세계를 대신하여 최후의 제물로 써 주십시오.’ 이러한 마음으로 우리에게 속한 모든 것을 아버지 것으로 세워 놓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한 자라야 아버지가 찾아오시고 주가 찾아오시는 날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비록 사탄세계에 산다 할지라도 하늘에 대한 절개와 지조는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기르고 있는 아들딸을 아버지의 자식으로 여겨 왔습니까? 더 나아가서 나와 내 상대가 아버지 것이라고 생각해 보았습니까? 내 부모, 내 선조, 내 민족, 내 나라를 그렇게 생각해 보았습니까? 무지한 이 땅 위의 인간들은 하늘이 이러한 표준을 향하여 움직인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조용히 생각해 보세요. 거짓말인가, 사실인가? 알고 보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심장에서 젊은 피가 솟구쳐서 생명이 약동하는 청년이 있다 할진대 역사의 원한을 풀어야 할 것입니다. 끝날에는 이 세계를 아버지의 것으로, 이 만물을 아버지의 것으로, 하늘과 땅을 아버지의 선주권 내에 속하게 할 수 있는 어떠한 민족주의 혹은 세계주의, 천주주의가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저에게 힘을 주시옵소서. 당신의 원한을 제가 풀어 드리겠사오니 저에게 힘을 주시옵소서.’ 하며 6천년의 한스러운 역사를 짊어지고 이 천주를 아버지의 것으로 세우기 위하여 기도하는 아들딸이 있다 할진대 ‘야, 이놈아, 너 벌 받는다.’고 하겠어요? 그러므로 민족을 초월하고 국경을 초월하여 세계에 널린 27억 인류를 아버지의 백성으로 세우기 위하여 뼛골이 녹아지는 날까지 싸워야 합니다. 수많은 사탄들까지도 아버지에게 자 연 굴복하는 날까지, 우리는 싸워야 합니다. 그러한 아들딸이 되기 위하여 우리는 여기에 모였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슬픔을 해원하기 위하여 부름 받았습니다. 아버지의 목적 세계를 이루기 위하여 우리는 태어났습니다. 아버지께서 자랑할 수 있는 내 가치를 세우기 위하여 태어났습니다. 한스러운 이 민족의 일원으로 태어난 것이 불쌍할지 모르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하늘로부터 축복받을 수 있는 입장에 섰다면 나와 이 민족은 세계를 지배할 것입니다. 이 땅은 아버지의 땅이요, 하늘의 눈물이 어리어 있는 땅입니다. 이 백성에게는 하늘의 눈물이 어리어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의 불쌍한 처지와 환경을 잊어버리고, 자기 일신에 부딪쳐 오는 고통을 잊어버리고 대표적인 제단이 되고 선봉자의 책임을 다하는 하늘의 용사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속한 모든 것을 아버지 것으로 인계하여 ‘저희의 모든 것이 아버지의 것이옵고 제게 있는 아들도 아버지의 아들이오니 아버지,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하는 움직임이 지상에 나타날 것입니다. 모든 것을 아버지 것으로 찾아드려야 할 책임이 우리들에게 있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귀히 여기는 그 몸뚱이는 원래 아버지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어 있는지 자문해 보세요. 이놈의 고깃덩이는 하늘의 성도들을 잡아먹던 고깃덩이요, 하나님의 손에 피를 흘리게 했던 고깃덩이요, 역사의 쓴 뿌리가 박혀 있는 고깃덩이입니다. 더 나아가서 영혼으로부터 마음, 몸, 생활환경, 사회, 세계까지 모두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물어보세요. 여러분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자랑하지 마세요. 그러므로 이제 우리의 외적인 것 전부가, 내 일신의 전부가, 이념의 전부가 아버지 것이 되어야만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부르짖고 있는 이 자유가 아버지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인간들이 부르짖는 행복도 아버지 것이 아닙니다. 성경 말씀을 부르짖는 교회도 아버지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심판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청산해야 된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섭리하는 최고의 목표는 그것입니다. 그래야만 이치가 맞지 않습니까?
이제 내 발걸음도 아버지의 것이요, 내 몸뚱이도 아버지의 것이요, 내게 속한 모든 것이 아버지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느 때 어디서든 아버지가 쓰시고자 할 때 돌려드릴 수 있는 보관자가 되어야 합니다. 아직 주인이 오지 않았으니까 주인이 올 때까지 우리는 보관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민주주의가 하늘 앞에 서려면 보관하는 입장에 서야 합니다. 그래서 때가 오면 다 나누어 주어야 됩니다. 안 나누어 주면 망합니다. 망해요.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목적관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자기 가치를 노래할 수 있어야 하고, 하나님의 사랑이 내 한 자체의 마음을 통하여, 몸을 통하여, 생활을 통하여 뒤넘이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예수님은 ‘천국은 네 마음속에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의 천국에서부터 실체천국, 실체천국에서부터 이상천국이 전개되어야 합니다.
아버님! 저희들이 하늘의 심정을 잃어버리거든 저희들을 한 많은 이 땅 위에서 거두어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천정을 배반하는 족속이 되거든 저희들을 이 땅 위에서 거두어 주시옵소서. 억천만 번 죽는 한이 있다 할지라도 하늘의 뜻을 유린하는 자가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은 예수의 심정이 어떠하다는 것을 가히 짐작하였사옵고, 성신의 심정이 어떠하다는 것을 알았사오며, 아버지의 심정이 어떠하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한 많은 아버지, 한 많은 예수와 성신, 한 많은 천지, 이를 붙들고 울 자가 어디에 있사오며, 이를 붙들고 피의 제단을 쌓을 자가 어디에 있사옵니까? 이 민족 가운데 이러한 심정을 품고 하늘을 향하여 호소하는 아들딸들이 많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 여기에 모인 자들은 당신이 오라고 하기에 몰려왔사옵니다. 높고 깊은 당신의 뜻은 어디에 있사옵니까? 당신이 말씀하신 대로 아버지의 것이 되기 위하여 왔사옵니다. 말씀에 의한 아버지 것이 아니라 사랑에 의한 아버지 것이 되기 위해 왔사오니, 영원히 함께하여 주시옵소서. 그 심정을 통할 수 있는 기준에서 내 모든 것을 아버지의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아버지의 목적과 이념을 즐겨하면서 아버지를 위로할 수 있는 아들딸이 되기 위하여 나왔사오니, 아버지, 그러한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시간 참석한 아들딸들 보람 있는 삶의 가치를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말씀으로 생명의 원천을 움직여 그를 혁신하고 심정의 세계를 폭발시켜 승리의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고, 재창조의 역사를 일으켜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모든 것을 감사드리면서,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니다. 아멘.
이 시간 저희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무리가 되어지기를 바라옵나이다. 아무리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고 자칭 아들딸이라 하여도 아버지의 마음속에 기억되지 않는다 할진대 아버지의 아들딸이 될 수 없는 것을 저희들이 아옵니다.
아버님, 기나긴 세월 동안 진정으로 하늘을 바라볼 줄 아는 아들딸이 얼마나 있었사오며, 당신이 진정코 ‘내 아들이다.’ ‘내 딸이다.’ 하실 수 있는 아들딸이 얼마나 있었사옵니까? 억울하신 아버지, 외로우신 아버지를 부르는 저희들의 마음도 슬프고 외롭게 하여 주시옵고, 한없는 서글픔에 잠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사정을 저희의 사정으로 느끼고, 아버지의 처지를 저희의 처지로 알며, 아버지의 슬픔을 저희의 슬픔으로, 아버지의 분함과 고통을 저희의 분함과 고통으로 느끼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은 하늘의 크신 은사를 수없이 받았사옵니다. 하늘은 슬픈 자리에서도 저희에게 은사를 주셨사오나 저희들은 그 은사를 받고 기뻐하기만 하였사옵니다. 자기를 중심삼고 영광을 바랐던 과거의 모든 것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하늘이 저희에게 은사를 주심은 하늘의 슬픔을 나눠 주시기 위함이옵고 하늘의 고난을 대신 맡기시기 위함이오며, 하늘의 슬픔을 품고 십자가를 지고 하늘대신 싸우라 하심이온데, 이 땅 위의 저희들은 이것을 모르고 있사옵니다.
하늘의 축복을 받은 자가 있다 할진대 그가 축복받기 전에 혈투전을 치르는 고난의 역사가 있었음을 저희들이 잊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하늘의 축복을 받은 가정이 있다 할진대 그 가정이 축복받기 전에 하늘의 슬픔과 더불어 고통과 억울함과 통탄의 역사가 있었음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개인과 가정이 그러하거니와 민족과 국가 역시 그러하다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아버지시여, 이날 이 삼천리강산의 삼천만 민족을 긍휼히 보시옵소서. 이 민족이 축복받은 민족이 되어 있사옵니까? 축복받은 민족이라 한다면 하늘이 겪으신 고난과 슬픔과 역경의 노정을 거친 당신의 숨은 아들딸들이 많을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한 역사노정에서 하늘을 위하여 싸워 나간 자들이 있다 할진대 그들은 혈통이 다르고 이념이 다르다 해도 선을 지향하는 데 있어서는 부모요, 형제요, 식구인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 한많은 6천년 복귀역사노정 가운데 뜻을 품고 왔다간 선지들이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면서도 하늘의 귀한 뜻을 품고 갔던 선지선열들이 많은 줄 알고 있사오니, 저희들도 자신의 슬픔보다 하늘의 슬픔을 크게 느낄 줄 아는 선한 무리가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생명을 내놓고 하늘을 향하여 달음질치며, 죽음의 고개를 거듭하며 넘어간 뭇사람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을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고, 패악한 이 민족 가운데 의지할 바 없는 당신의 아들딸들을 통해 안식의 한 날을 세우고자 하시는 아버지가 계신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여기에 모인 저희들은 누구를 위하여 모인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하여 모였사옵니다. 저희들이 누구를 위하여 이념을 갖고 있사옵니까? 하늘을 위한 것도 아니요, 민족을 위한 것도 아니요, 자신을 위한 것임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민족이 불신하는 것은 저희 자신들이 불신한 연고이옵고, 불신하는 환경이 된 것도 저희 자신들이 불신한 연고라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책임질 바의 모든 것을 스스로 책임져야 할 때이오니, 어렵고 힘든 일도 스스로 책임질 줄 알며 스스로 청산할 줄 아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이들이 여기에 모였사오니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 하늘의 은사를 바라고 지성소에 분향을 하던 대제사장들의 심정을 저희들이 느껴서, 아버지의 염려의 심정을 알고 분부하시는 아버지의 말씀에 고이 따르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나타내시는 말씀을 듣는 가운데 아버지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지금 때는 늦은 가을이옵니다. 이러한 시기를 맞아 세계를 바라보니 6천 년의 종말시기, 즉 추수시기를 지나 겨울 절기가 가까운 것을 알게 되옵니다. 이러한 시기에 아버지, 저희의 마음이 낙엽처럼 떨어지지 말게 하여 주시옵고, 심정이 쓸쓸하지 말게, 얼어붙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추우면 추울수록, 때가 변하면 변할수록 저희는 승리의 모습이 되고 아버지의 영광을 노래할 수 있어야만 되겠사옵니다. 그래야만 새로운 봄날을 노래할 수 있는 자격자, 새로운 봄동산을 주관할 수 있는 자격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아오니 아버지, 그와 같은 모습으로 이 시간 저희들을 대하여 주시옵고 저희를 믿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지금까지 허락하신 은사 앞에 감사드리옵니다. 지금까지 저희에게 주신 말씀은 너무도 많사온데, 그 말씀을 전한 자는 전하고 나서 빚을 지게 되고, 받은 자들은 받고 나서 빚을 지게 된 것을 알았사옵니다. 아버님, 서로가 하늘 앞에 면목이 없사오니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그러나 살아야 할 인간이기에 새로운 말씀을 요구치 않을 수 없사오니 아버지, 이 시간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전하는 자의 마음이나 받는 자의 마음이 둘이 되지 말게 역사하여 주시옵고, 심정으로 느낄 줄 아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 심정을 통하여 아버지와 인연 맺을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은 저희와 영원히 영원히 같이 살아야 할 아버지시옵고, 여기에 모인 이들은 서로 영원히 영원히 같이 살아야 할 하늘의 식구임을 느낄 수 있고, 그 심정을 통할 수 있게 인도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날도 외로운 자리에서 간곡한 심정으로 호소하는 수많은 아들딸들이 있사오니 그들 위에 같이하여 주시옵고, 같은 은사로써 보호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오며,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말 씀> 오늘 여러분 앞에 말씀드리려 하는 제목은 ‘아버님이 같이 계시고 싶은 곳’입니다. ‘아버님이 같이 계시고 싶은 곳’ 이러한 제목을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마음이 그리워하고 소망하는 한 곳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그 한 곳을 간곡하게 그리워하고 소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타락한 우리 인간도 이렇거늘 세계와 인간을 지으시고 뜻을 세워 경륜하시는 하나님도 그리워하시고 소망하시는 그 무엇이 있음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무엇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 자신을 위하고 인류를 위해서 역사를 섭리해 오셨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어 놓으신 후 심중으로 그 무엇을 소망하시고 그리워하셨다 할진대 누구를 그리워하고 소망하셨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 자신도 아니요, 땅 위의 어떠한 물건도 아니요, 오로지 인간을 그리워하고 소망해 나오셨다는 것을 우리들은 이 시간 다시 한번 느껴야만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 때문에 슬퍼하시고, 인간 때문에 고통당하시고, 인간에게 배반당하시면서도 인간을 붙들고 나오시는 원인은 무엇인가? 그리워해야 할 인간이요, 소망해야 할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서 역사노정에서 슬픈 고비 고비에 부딪치시고 싸움의 역사를 엮어 나오셨다는 것을 느껴야 됩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워하시고 우리를 대하여 소망을 갖고 싸워 나오시게 되었는고?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인간을 사모하고 그리워하는 입장에 서서 역사를 통해 싸워 나오시지 않으면 안 되었는고? 타락 때문입니다. 타락 때문이에요. 만일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그리워하는 인간과 더불어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에 대한 소망을 이루어 인간과 더불어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한 연고로 하나님은 인류를 대하여 그리움을 품고 소망을 품고 지금까지 싸워 나오시는 것입니다. 소망하고 그리워하는 인류인 연고로 개인을 거쳐, 가정 민족 국가 세계를 거쳐 지금까지 싸워 나오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개인을 지극히 그리워하고 가정을 그리워하고 민족, 국가, 더 나아가서는 이 세계 전체를 그리워하신 분임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인류에 대한 그리움과 소망을 가지시고 우리의 선조들에게 슬픔이 있을 때마다 그 슬픔을 당신께서 책임지시고 그들에게 슬픔 대신 새로운 소망을 주기 위하여 수고해 나오신 하나님이심을 우리들은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만일 땅 위에 그러한 친구가 있다 할진대 그 이상 귀한 친구가 없을 것이요, 그러한 부모나 형제, 그러한 누가 있다 할진대 그 이상 높여 주어야 할 분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와 같은 분이 계시다는 것을 생애노정의 어느 한 때, 어느 한 시기에 느껴 ‘나를 그리워하시는 하늘이여, 우리의 가정을 그리워하시는 하늘이시여, 우리의 사회, 국가, 민족을 그리워하시는 하늘이시여,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그리워하시는 하늘이시여’ 하며 하늘을 위로해 본 적이 있습니까? 슬픔과 그리움의 심정을 품고 싸워 나오신 하나님을 알아 드린 사람이 역사노정에 얼마나 있었습니까? 그러한 가정은 얼마나 있었으며, 그러한 민족과 국가는 얼마나 있었습니까? 없었다고 단정 지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리운 마음은 인간이 타락하기 전부터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 해와를 지어 놓으시고 소망의 인격자가 되기를 지극히 그리워하셨는데, 그 아담 해와가 타락해 버린 것입니다. 타락 전부터 품어오신 그리운 심정, 타락 전부터 품어오신 소망의 심정을 인류의 조상 아담 해와가 배반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마음에는 슬픔이 사무치게 된 것입니다. 그러한 그리움과 소망의 심정을 갖고 인류를 찾아올 적마다 우리의 선조들은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환영하지 못하고 배반했던 역사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아담가정에 대해 하나님은 슬픔의 심정, 분함의 심정을 억제하며 그리운 마음을 다시 찾기 위하여 가인과 아벨을 세우셨으나 그 소망을 이루어 주지 못하고 그들은 도리어 하나님께 슬픔만 가한 사실을 여러분은 생각해야 합니다. 그 후 1600년이란 세월을 지나 다시 노아를 세우셨으니 결과는 마찬가지가 되었습니다. 거기서 또 400년을 지나 아브라함을 세우셨으니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워하던 한 사람을 만나 심정을 나누고자 하셨으나 아브라함 역시 하나님이 품으신 그리움의 심정을 온전히 반겨주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3대를 거치면서 수천년 동안 품어오신 그리움의 심정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야곱가정을 세우셨으나 그 가정을 놓고도 뜻을 완전히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세워 놓으시고도 이러한 그리움의 심정을 터놓고 얘기할 수 없고 가르칠 수도 없고 지배할 수도 없는 자리에서 그들의 뒤를 따라오셔야만 했던 하나님의 사정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리워하시던 하나의 민족의 형태를 땅 위에 세워 놓으시고 그 민족이 도탄에 빠질 때마다 하늘은 그리워하는 마음만큼 거기에 비례하여 고충을 느끼시고 슬퍼하셨으며 어려움을 당하셨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 됩니다. 이렇게 이끌어 나온 민족, 모세를 따르던 이스라엘 민족이 그리움의 심정을 알지 못하게 될 때에 광야에서 그 민족을 쳐버릴 수밖에 없었던 하나님의 심정을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개인에서부터 가정을 거쳐 민족을 찾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그리움의 심정은 때가 가까워옴에 따라 커감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인 아브라함시대보다 하늘과 더 가까워야 할 가정적인 야곱시대는 그러지 못하였습니다. 가정을 지나 민족적인 모세시대에는 가정적인 시대보다 하늘 앞에 더 가까이 갔어야 될 터인데, 그러지 못하고 오히려 가정적인 시대가 하늘과 더 가까웠고, 가정적인 시대보다는 개인적인 시대가 더 하늘과 가까웠습니다. 종말에 가까워질수록 세계에 널려 있는 인류는 하나님의 그리워하시는 심정 기준에 가까이 가야 할 것인데 반비례로 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할 때, 우리들은 하늘의 슬픔이 우리들에 의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환경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을 알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우리가 역사를 더듬어 보면, 어느 때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말씀을 붙들고 살다 간 사람은 하늘의 심정을 대신한 선의 사람을 그리워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하늘은 오랜 역사노정을 거쳐오는 동안 그리움의 심정을 우리의 마음에 심어주고 역사에 심어주고 세계에 심어주기 위하여 싸워 나오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대하는 물건 하나에도 하나님의 그리움이 젖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우리가 대하는 식구에게도 역사적인 하나님의 그리움이 스며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나라 이 세계에도 하나님의 그리움이 스며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눈을 들어 하나님이 지으신 만상을 바라볼 때, 그 만상이 하늘의 간절한 그리움의 대상이라는 것을 느껴야 됩니다. 만물도 그러하거니와 만물의 영장인 인간은 어떻겠습니까? 비록 악한 모습이지만 하늘은 반드시 한 기준을 놓고 그리워해 오셨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느끼게 될 때, 하늘 앞에 진정으로 감사드려야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떠한 곳에 계시고 싶어하시는가? 하늘은 어떠한 곳에 계시고자 하시는가? 그리운 자가 사는 곳에 계시고 싶어하십니다. 하늘은 이 땅을 중심삼고 6천년이라는 기나긴 세월 동안 섭리해 나오셨습니다. 그러한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하늘 보좌에 계시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사는 이 땅 위에 살아 보고 싶어하시는 것은 당연한 이치일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살고 싶어하시는 이 땅은 지금까지 하나님이 사실 수 있는 환경이 못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실 수 있는 가정과 나라와 세계가 못 되어 있어요. 세계도 그만두고, 국가 민족도 그만두고, 가정도 그만 두고 나 하나라도 하나님이 계실 수 있는 자리에 처해 있느냐고 묻게 될 때 그렇지 못한 우리들입니다.
하늘이 지금까지 싸워 나오시는 목적은 무엇이뇨? 그리운 사람들을 모아 놓고 손을 붙들고 사랑할 수 있는 한 날을 맞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목적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디에 계실 것이뇨? 예수님은 이 땅 위에 오셔서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네 안에 있다고 하셨고, 천국을 소개하실 때도 네 마음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네 마음에 있다고.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입니다.
하나님의 슬픔은 어디 있느뇨? 물론 세계에도 있고 나라에도 있고 민족이나 가정에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서러움은 ‘나’에게 스며있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렇거늘 하늘의 기쁨은 어디에 있어야 되겠습니까? ‘나’에게 있어야 됩니다. 내가 어떤 하나의 기준이 되어 있지 못하는 한, 하나님이 그리워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네가 아니면 내가 살 수 없다.’ 하실 수 있는 우리, 즉 그러한 내가 되지 않는 한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는 시작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그리워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목적이 무엇이뇨? 하나의 주인공을 중심삼고 가정을 이루고 사회, 국가, 세계를 이루어 지상에 천국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목적입니다. 그런데 이 세계에는 하나님이 그리워할 수 있는 기준이 하나도 잡혀 있지 않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타락 전의 인간을 대하여 하나님의 소망은 그리움의 심정을 통하여 살 수 있는 개인과 가정과 더불어 민족과 세계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그와 같은 세계가 못 되었습니다. 그런고로 하나님은 이 세계를 타락 전의 세계로 다시 복귀하시기 위하여 그리움의 심정을 품고, 슬프고 고통스러운 십자가 노정을 허덕이시며 인류를 붙들고 뒤넘이쳐 나오신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여러분 자신, 즉 ‘나’를 그리워하신다는 사실을 압니까? 그리움의 고개를 넘어 ‘나’를 붙들고 사시고자 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요? 이것을 모르면 안 될 것입니다. ‘내가 하늘을 안다.’ ‘내가 예수님을 안다.’ ‘내가 성신을 안다.’ 하는 것보다 하늘이, 예수님이, 성신이 ‘내가 너를 안다. 네가 아니면 안 된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땅 위에 있습니까?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6천년 동안 섭리하신 뜻은 그런 사람을 세우기 위한 것이요, 그런 사람이 사는 가정, 그런 사람들이 모인 교회, 그런 사람들이 통치하는 국가를 세우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중심삼고 온 세계가 하늘 앞에 송영드려 주기를 바라십니다. 그러한 세계를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목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나라도, 그러한 백성도, 그러한 가정도, 그러한 개인도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리운 백성, 그리운 민족, 그리운 가정을 찾고 그 다음에는 하늘땅을 움직여 나가는 데 책임질 수 있는 하나의 주인공을 찾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역사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 주인공으로 오시는 분이 재림주입니다.
그 주인공은 어떠한 존재일 것인고? 하나님의 그리움을 해원해 드리기 위해 오시는 분이요, 그 분은 이 땅과 하늘 전체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둘도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가고 싶은 곳이 있다 할진대 그런 분이 계시는 곳일 것입니다. 그곳은 ‘나’를 사랑해 줄 수 있는 분이 계시는 곳입니다. 어떠한 곡절도 넘고 죽음까지도 넘어서 ‘나’를 사랑해 줄 수 있는 분이 계시는 곳입니다. 그러면 그곳에는 누가 계시느뇨? 부모가 계십니다. ‘나’를 책임지고, 나를 그리워하며 죽음도 개의치 않고 ‘나’를 찾기 위해 애쓰시는 분이 부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부모가 계시는 곳을 그리워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다음으로 그리운 곳은 어디뇨? 서로 진정으로 사랑하는 부부가 머무는 곳입니다. 다음은 자녀가 있는 곳이며 그 다음에는 형제가 있는 곳입니다. 결국 인간이 그리워하는 곳은 부모를 중심삼고 부부, 자녀, 형제가 있는 곳, 즉 식구가 있는 곳입니다.
고향 산천을 왜 그리워하느뇨? 어느 때나 자기의 심정을 풀어 놓고 쉬게 해 줄 수 있는 터전이기 때문입니다. 자식의 입장에 있는 자만이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리움이란 지역과 거리를 초월하는 것이어서 자식이 그리워하는 이상으로 부모도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부부끼리도 마찬가지이며 형제들끼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그리워하는 곳은 어디뇨? 마음의 그리움을 노래할 수 있으며 서로를 간절히 생각할 수 있는 곳, 그리운 식구들이 있는 곳입니다.
타락한 인간도 그런 곳을 그리워하거늘 하나님이 그리워하시는 곳은 어떤 곳인고? 하늘의 주권이 세워져서 그 주권을 중심삼고 나라를 이루고 거기에 하늘을 대표할 수 있는 백성과 가정과 개인이 있는 곳, 즉 하나님이 같이 사실 수 있는 하늘 식구가 있는 곳입니다. 인간은 심정을 중심삼고 서로 위해주고 서로 높여주는 곳에 있고 싶어합니다. 우리가 있고 싶어하는 그곳은 가정입니다. 하나님을 닮아난 인간, 하나님의 모양대로 생겨난 인간이거늘, 그러한 마음이 어디서 나왔겠습니까? 하늘로부터 받은 마음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그렇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그러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하나님이 이 땅에 메시아로 보내신 하나의 주인공이 있다 할진대 그는 어떠한 존재일 것이뇨? 하나님이 그리워하시는 것이 하늘 가정이기에 가정을 대표하고 가정을 수습할 수 있는 주인공이십니다. 그러한 책임을 짊어지기 위하여 오셨던 분이 예수입니다. 그분은 이 땅에 오셔서 ‘나는 하나님의 독생자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수많은 성현 현철들이 왔다 갔고 수많은 인류가 왔다 갔으나, 하나님의 그리움의 심정, 그리움의 마음을 갖고 나타난 사랑의 아들이 없었는데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고 하나님이 그리워하실 수 있는 존재다.’ 하는 자부심을 갖고 말씀하셨던 분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를 보내신 목적은 이 땅에 하나님이 그리워하시는 하나의 하늘 가정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그 예수님을 중심하지 않고는 하늘의 식구가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철칙이에요. 하늘 가정은 예수님 한 분을 중심삼고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구원받고 천국 가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구원보다 더한 하나님의 식구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식구. 예수님이 이 땅에 복음을 선포한 목적이 무엇이뇨?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늘의 신부를 택해 세워 가지고 하늘 가정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가정을 이루면 그 가정을 중심삼은 민족, 그 민족을 중심삼은 국가, 그 국가를 중심삼은 세계를 이루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떠한 존재였느뇨? 그는 4천년 동안 하나님이 그리워하던 하나님의 독생자로 오신 분이었습니다. 그리워하던 실체를 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기쁘셨겠습니까? 그가 마구간에서 탄생하던 그날, 하늘의 천군천사도 그를 환영하며 송영을 드렸습니다. 이방의 동방박사들도 그에게 경배하고 예물을 드렸으며 양치는 목자도 그에게 경배했습니다. 이는 왜? 예수께서 누우신 자리가 비록 말구유였지만 4천년 만에 비로소 하나님이 사랑하실 수 있는 아들이었기에 그들이 그렇게 예수님을 대했던 것입니다.
어린 아기 예수를 그들이 그같이 대해 주는 것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은 기쁘셨으나 자라는 예수를 대하는 요셉가정을 바라볼 때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아기 예수 앞에 경배하며 예물을 드리던 동방박사와 같은 정성으로 마리아와 요셉가정도 예수를 대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소망이 이루어질 그 한 날을 고대하시면서 예수가 자라면 자랄수록 그 자라는 모습을 바라보시며 예수님을 더 그리워하시고 더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나 태어난 그때에는 하늘도, 땅 위의 사람도 예수를 환영하였지만 자랄 때는 그러한 자리에서 자라지 못했습니다. 4천년 동안 그리워하시다가 비로소 보내신 아들을 어려운 자리에 눕게 하고, 외로운 자리에 눕게 하셔야 했던 하늘의 심정을 우리들은 알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예수는 성령으로 잉태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요셉에게는 의붓자식이지요. 그래서 요셉의 아들인 동생들까지도 예수를 비웃었습니다. 또 요셉도 마리아도 예수님의 뜻을 알아주지 못했습니다. 예수를 잉태할 때는 천사의 명령을 받들어 ‘주의 계집종이오니 뜻대로 하시옵소서.’ 라고 하였지만, 예수를 낳아 놓고는 품에 품고 젖을 먹일 때와 자랄 때 대하는 것이 차이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예수에게는 헤아릴 수 없는 슬픔이 있었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아들로서 땅 위에 온 예수는 하나님이 그리워하시는 것을 해원해 드려야 할 책임을 느꼈고 자기 하나를 처참한 자리에 놓아두고 그리워하시는 하늘 앞에 머리를 들 수 없는 민망함을 느꼈다는 거예요.
4천년 동안 택해서 이끌어 온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를 알아보지 못한 것이 하나님의 슬픔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그리워하고 또 주님을 그리워하던 이스라엘 민족이 그리워해야 할 예수를 그리워할 줄 모르는 민족이 된 것이 무엇보다도 하늘의 무한한 슬픔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리워하시는 예수를 하나님을 믿는다는 유대 백성이 반대하고 나설 때에 하나님의 억울함은 말할 수 없이 컸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어요?
예수님은 수심과 곡절에 싸여 자랐습니다. 왜? 남들과는 생활 감정이 다르고 세계관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옮겨 놓는 발걸음, 세계를 보는 척도가 달랐어요. 요셉가정에서 사는 그는 어느 한 날 큰 웃음 웃으며 기뻐해 보지 못했습니다. 왜? 그는 세계나 부모, 그리고 가정이란 것이 어떠해야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가 살고 있는 요셉가정이 이상적인 가정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그리워하시는 것은 하늘 가정임을 아신 예수, 그러한 가정을 이루어야 할 사명과 책임을 지고 왔던 예수는 죽는 한이 있어도 그 사명을 감당하고 가겠다는 철석같은 심정을 가지고 있었기에, 부모가 배반해도, 민족이 배반해도, 세워 놓은 유대교가 배반해도 변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워하시는 하나님 앞에 그리움의 심정을 갖고 가야 할 입장이었기에 예수는 환경이 변하고 가는 길이 막혀도 죽음을 무릅쓰고 그 길을 가셨습니다. 십자가의 보혈을 믿는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 순간의 예수님의 심정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은 30여 년을 살다가 원치 않는 생애의 종말을 짓는 그 시간에도 아버지를 보고 싶은 마음이 앞섰습니다. 보고 싶은 그 아버지, 사랑하는 마음이 앞섰기에 죽음의 고개를 넘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들이라 세워 놓으시고 그리워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예수 자신을 세워 놓으신 목적이 하늘 가정을 찾기 위함이요, 하늘 민족과 하늘 국가와 하늘 세계를 이루기 위함임을 아셨기에, 십자가를 지고서도 ‘아버지여! 저들을 버리지 마시옵소서.’라고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반대하는 유대인들이 원수지만 자신을 세워 놓고 하늘이 소망하시는 것은 이 세계요 이 인류임을 아셨고, 그리워하고 다시 그리워해야 할 이 땅인 것을 아셨기에, 자기가 죽은 후 다시 하늘이 그리워해야 할 이 세계인 것을 아셨고, 예수는 하늘을 붙안고 ‘아버지시여, 저들의 죄를 용납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땅에 예수를 보내신 목적은 땅에서 예수를 중심삼고 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땅에서는 예수 자신을 배척하고 죽음의 자리에 내모니 하나님의 소원을 성취해 드리지 못하고 가는 예수는 다시 오겠다는 말씀을 안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겨 놓으셨습니다. 기독교는 그 언약을 믿으며 오늘날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다시 오시는 주님은 누구를 모시고 오실 것이뇨? 혼자 오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버지의 영광으로 오신다고 하였거늘, 혼자 오실 수 없는 것입니다. 아들만으로서 오실 수 없어요. 아버지를 모시고 와야 할 주님이심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께서 ‘나는 신랑이고 너희는 신부’라 하였거늘, 우리는 하늘 부모를 모시고 신랑 신부를 이루어야만 됩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사랑으로 끝나는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신랑으로 모시는 목적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기 위함입니다.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아버지께서 인간을 지어 놓으시고 축복하시기를 ‘내가 거할 수 있는 집’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거하실 수 있는 집이 되어야 해요.
하나님이 계시고 싶고 예수께서 계시고 싶은 곳은 하늘 보좌가 아닙니다. 예수님도 기도를 하신다고 했습니다. 기도하는 곳은 안식의 자리, 보금자리가 아니에요. 기도를 하는 이유는 아직까지 청산해야 할 조건이 남아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도 그러한 기도를 받아 주셔야 할 입장입니다. 왜? 아직까지 하나님의 그리움의 심정을 청산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움을 풀기 위하여 땅 위에 보내신 예수가 사명을 다 하지 못하였고 하나님이 그리워하시는 실체를 땅 위에 세우지 못한 연고로 그것을 해결지을 때까지 하늘은 기도를 받아 주셔야 하고 예수는 기도를 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2천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이 지났습니다.
여러분, 냉정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계시고 싶어하시는 곳, 하나님은 그만두고 예수님이 계시고 싶어하시는 곳, 예수님은 그만두고 성신이 계시고 싶어하시는 곳, 성신은 그만두고 이 땅 위의 잘 믿는 성도들이 있고 싶어하는 곳이라도 여러분은 마련해 놓았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곳에 계시기 위하여 6천년 동안 그 한 곳을 그리워하시고 소망하시며 싸워 나오셨습니다.
세계를 움직이는 사람이 되려면 누구보다도 세계적인 이념을 그리워해야 됩니다. 어떤 국가를 지배하는 참다운 주인공이 되려면 어떠한 민족보다도, 어떠한 백성보다도 더 그리워하고 더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식구를 그리워하는 사람에게는 그 가족의 전부가 딸려 들어가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이 어찌하여 하나님에게 매달리느뇨? 하나님께서 인간을 그리워하는 인연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그리워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그리움은 어디에서 생겼느뇨? 인간이 타락한데서 생겼습니다. 이 그리움이 풀리기 위해서는 그리움의 내용을 청산지을 수 있는 어떠한 기준이 땅 위에 세워져야 됩니다. 그러기에 이 기준을 세우시기 위하여 오시는 분이 재림주입니다. 그 재림주께서 오시는 때가 재림의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6천년 동안 그리워하시던 아들딸을 찾아 놓고 ‘너희가 하나의 가정을 이루었구나. 이제 내가 너희들과 더불어 영원히 살 수 있겠다’ 하실 수 있는 하나의 기준을 땅 위에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 곳에 가 보았습니까? 못 가 보았으니 그런 세계를 이루기 위하여 정성을 기울여 준비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이 그리워하시는 곳은 타락한 세상의 가정이 아니라 우주적인 이념과 가치를 가진 가정입니다. 우주적인 가정, 그 가정은 우주적인 참부모가 사시는 가정입니다. 우주적인 신랑 신부가 사는 가정이요, 우주적인 아들딸이 사는 가정입니다. 우주적인 형제가 사는 가정이에요.
우리들의 마음은 하나님을 모시고 주를 모시고 살 수 있는 한 곳을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나도 그러하거니와 예수님도 그러하고 하나님도 그러합니다. 역사노정에서 인간을 붙들고 허덕여 나오신 하나님도 우리와 같습니다. 같은 운명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목적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그러한 하나님적인 우주관을 중심삼고 생을 개척하시기 위하여 말씀하신 것이 복음입니다. 예수님이 오셨던 목적과 복음의 말씀을 내놓으신 목적은 무엇이뇨? 하늘 식구들이 삼위신을 모시고 즐겁게 살 수 있는 하늘 가정을 이 땅 위에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 고로 예수님은 만민의 구주입니다, 구주. 무슨 구주냐? 사모하고 그리워하고 사랑해 주고 싶어하는 마음을 가진 구주라는 거예요.
나를 낳아 준 부모는 나만 사랑할 줄 알지 옆에 있는 사람은 사랑할 줄 모릅니다. 부부도 자기들끼리만 서로 품고 좋아하지 만민 앞에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 앞에 그 영광을 돌려 드릴 생각은 하지도 않습니다. 또 자기 자식만 사랑합니다. 그것은 본래 하나님의 창조목적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부모를 사랑하되 온 세계 인류를 대신하여 우리 부모를 사랑한다는 관(觀)이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 여러분의 부모를 하나님이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부부가 서로 사랑하되 하늘땅에 있는 모든 남성과 여성을 대신하여 하나님을 중심삼고 사랑해야 됩니다. 자녀를 사랑하되 일대(一代)의 인연을 넓혀서 우주적으로, 평면적이 아니라 입체적으로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누구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가정을 이루어 살고 있는 인간들은 이런 사랑의 관(觀)을 망각해 버렸지만, 예수님은 그런 우주적인 심정을 품고 인류를 사랑해 오셨기 때문에 구주라는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이 그리워하시는 식구를 찾아 나섰을 때, 그의 모친과 동생들이 찾아오자 ‘내 모친과 내 형제는 아버지 뜻대로 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또 그 모친을 대하여 ‘여인이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하셨습니다. 응당히 그럴 수 있는 입장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소망하시는 하나의 가정도 이루지 못한 인간들, 하늘의 뜻도 이루지 못한 인간들, 하나님의 자식이 되고 하늘의 백성이 되어야 할 인간들이 자기들끼리 좋아할 수 있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도인들은 독신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리워하시는 가정을 찾지 못했는데 즐거워할 수 있습니까? 그러기에 높은 기준을 가진 도(道)는 독신 생활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왜? 천륜 앞에 면목을 세울 수 없는 인간들이기 때문입니다. 내 한 자체가 하늘 앞에 역사적으로 저끄린 죄상만 해도 용납받을 수 없는데, 그런 내가 하늘이 소망하시는 가정 형태를 이룬다고 하니 하늘은 이를 용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순서가 거꾸로 된 때문입니다.
하늘이 진정으로 그리워하시는 가정을 이루어야 할 사명을 책임지고 오셨던 예수가 그 사명을 완전히 종결지어 가정을 이룬 후에 우리는 그의 아들딸이 되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이루고자 하셨던 가정은 어떤 가정일 것인가? 여러분이 살고 있는 그런 가정이 아닙니다. 절대로 아니에요. 알아보니까 그렇지 않아요. 여러분이 하늘 앞에 갈 때는 동서 사방으로 다 갈라집니다. 죽어서 갈 때에 ‘이 사람은 내 아내인데, 아버지, 데리고 왔습니다.’ 할 수 있습니까? ‘저기 우리 아들딸이 있는데, 제가 천당 가면 같이 보내 주십시오.’ 할 수 있어요? 없습니다. 당당히 ‘아버지여, 혈통적인 인연이 있는 이들을 하늘을 대신하여 사랑할 자신이 있습니다.’ 하는 아들딸, 혹은 남자나 여자를 하늘은 만나본 적이 없다는 거예요. 그것이 하나님의 한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하늘 가정을 찾아 헤매시던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런 견지에서 예수님께서는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마 8:20) 하신 것입니다. 그를 아무리 편안하고 좋은 곳에 모신다 해도 그곳은 하늘이 그리워하시는 곳과는 천양지차라는 것입니다. 거리에 누워 잠을 잘지라도 거기에 하늘이 함께 하신다면, 예수님에게는 그곳이 보금자리였던 것입니다.
4천년 동안 준비한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께서 땅 위에 오셔서 하나님이 같이하실 수 있는 가정을 이루게 될 때 그 가정을 중심삼고 단결하였으면 틀림없이 제사장 국가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늘의 혈족으로서, 하늘의 가정으로서 이 세상을 통치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가 죽으니 하늘의 혈족이 끊기게 된 것입니다. 그 예수께서 최후에 남긴 것은 신랑 신부라는 명사입니다. 신랑 신부, 참부부. 참부부인 동시에 참부모의 입장에서 하나님이 최초의 아담 해와에게 허락하신 본연의 기준을 4천년 만에 다시 세워서 이루어야 할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 뜻을 종결짓지 못하였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허덕이고 있는 것입니다.
인륜은 부모를 사랑하고 부부끼리 사랑하고 자녀를 사랑하라고 가르칩니다. 여러분은 누구 때문에 부모를 사랑해야 하는가 생각해 봤어요? 누구 때문에 부부끼리 사랑해야 하며 누구 때문에 자녀를 사랑해야 하는가를 생각해 봤어요?
사랑하는 것을 책임져 주시는 주인공을 잃어버린 인간입니다. 하나님은 무한한 사랑을 말씀하셨습니다. 최후에 남아질 것은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워하는 목적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누구 때문에 사랑합니까? 하나님 때문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사랑해야 합니다. 자기 때문에 사랑하는 자, 죽어 보십시오, 어디로 가는지.
여러분이 자식을 낳아서 젖을 먹이며 귀엽다고 하지만, 누구 때문에 귀여워합니까? 그것은 하늘땅을 대신하여 귀여워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나라 이 세계 때문에, 하나님 때문에 귀여워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따른 천륜의 운세는 세계를 넘어 천지를 포용하기 위하여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인연을 통해 태어난 아들딸을 나 때문에 사랑한다면 그것은 용납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식을 품고 젖을 먹이는 아주머니들, 하늘땅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딸을 품는다는 사무친 심정으로 자기 아들딸을 품어야 됩니다.
하나님이 소망하시는 에덴에서 살 수 있는 아들딸은 우주성을 갖춘 아들딸이어야 됩니다. 만물을 주관하라 하셨으니 주관자로서의 자격을 가진 존재라야만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인간들은 자기 아들딸을 낳아 가르치는 목적을 자기 가정이 잘 되는 데 두었습니다. 거꾸로 됐어요. 오늘날은 거꿀잡이 시대예요. 하늘이 좋고, 세계가 좋고, 나라가 좋고, 사회가 좋고 난 후에 내가 좋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래의 원칙인데 타락해서 거꾸로 되었어요. 나부터 좋고 다음에 우리 집이 좋고 그 다음에 우리 사회가 좋도록 하자는 주장입니다. 거꾸로 하고 있다는 거예요.
하늘은 그런 관점으로 이 땅을 바라보시기 때문에 그런 인간들을 들이쳐 가지고 거꿀잡이 시대를 종결지어 나가는 것입니다. ‘복귀의 길은 치는 길이다. 네 몸뚱아리를 쳐라.’ 하십니다. 기독교는 그러한 도의 길을 가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도 핍박을 당하고, 가정적으로 핍박당하고, 민족적으로 핍박당하고, 세계적으로 핍박을 당하는 노정을 거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오늘날 기독교는 명실공히 세계적인 종교가 되었습니다.
인간들은 인륜을 세워 자기의 일가를 중심삼고 부모 앞에 효도하며 부부끼리 위하고 자녀를 사랑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천륜은 그보다 범위가 넓습니다. 인륜은 자기를 중심삼고 가르치지만 천륜은 하늘을 중심삼고 가르칩니다. 사랑을 하되 하나님같이 사랑하라 합니다. ‘내(하늘)가 그리움의 주인공이요, 내가 그리워하는 이 땅이요, 이 세계이니 이 모두를 품고도 남을 수 있는 심정을 갖고 사랑하라.’ 합니다. 그것이 천륜이에요. 천륜의 귀착점은 그곳입니다. 인륜의 귀착점은 일개 가정이지만 천륜의 귀착점은 끝날에 나타날 우주적인 가정입니다. 그런 가정을 기필코 이루어야 될 것입니다. 그러한 가정에서 높여 주는 인격자는 개인적인 인격자가 아닙니다. 하늘이 높여 줄 수 있는 인격자예요. 그런 날이 와야만 천지의 한이 풀릴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의 역사적인 비극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좋아하며 살고 있는 그 가정이 역사적인 비극을 낳은 터전입니다. 가정은 역사를 망칠 수도 있는 터전인 반면 역사를 거울삼아 뜻을 이룰 수 있는 터전이기도 합니다. 역사의 흥망이 여러분의 가정의 정적인 기반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기에서 가정은 두 갈래로 갈라져 왔습니다. 인륜 앞에 선한 가정과 그렇지 못한 가정으로 갈라져 나왔습니다. 도(道)는 이 중간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 도는 아직까지 이 땅에 완전히 발을 딛지 못한 채 나오고 있습니다. 남의 집 곁방살이 하는 것과 같아요. 그러니 하나님도 마음대로 주관 못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30여 년을 사셨지만 곁방살이 하다 가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역사적인 한(恨)을 알아 가지고 그 한을 풀어 드리고, 예수님을 죽인 유대 백성의 죄를 탕감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천륜이 품고자 하는 정(情)의 발판은 어떠한 곳이뇨? 천적인 가정입니다. 인륜이 품고자 하는 정의 발판은 인간적인 가정입니다. 인륜은 천륜에 의해 움직여야 되기 때문에 예수님이 가정을 무시하였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여러분도 가정을 무시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원칙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정에서 자녀를 기르되 그 자녀들이 내 가정을 중심삼고 나를 사랑해 주는 아들딸이 되리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통일교회 식구라면, 아기에게 젖을 먹일 때에도 그 아기가 하늘과 땅을 위하라고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 아들딸의 인연을 캐 들어가 보면 타락 전 아담 해와를 창조하시고자 계획하시던 하나님의 심정까지 연결됩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낳은 아들딸들은 역사적인 재창조를 대신할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아들딸들을 품고 그저 내 아들이요 내 딸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왜 아들딸을 중요시하는지 알아요? 자기의 정력을 다 기울이고 죽음의 길을 넘으면서도 왜 그토록 사랑하고 싶은지 알아요? 그만큼 위대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늘땅을 대신하여 나타난 존재이기 때문이에요. 이렇게 볼 때 과연 하늘이 살고 싶어하시는 곳, 하늘이 그리워하시는 곳은 어디겠습니까? 하늘은 바로 이러한 아들딸과 더불어 살 수 있는 가정을 그리워해 나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런 가정을 이루기 위하여 지금까지 2천년 동안 사탄과의 혈투전을 그치지 않고 계속해 나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소망의 나라, 이러한 소망의 주인공, 이러한 소망의 곳을 그리워하는 우리라 할진대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이뇨? 이제는 민족을 중심한 시대가 지나고 하나의 세계를 지향하는 시대가 우리 눈앞에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 때에 하나님이 붙안고 즐기실 수 있는 발판이 어디 있느뇨? 하나님이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딸이다. 나는 너와 더불어 살겠다’ 하실 수 있는 사람이 땅 위에 기필코 나와야만 됩니다. 그러지 않는다면 하늘이고 뭐고 없습니다. 그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그런 아들딸이 나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아들딸이 되어야 하는데, 내 아들딸 내 어머니 내 아버지 하다가는 어림도 없습니다. 어림없다는 거예요. 아직까지 내 아버지 어머니, 내 아들딸 하는 혈족의 기준을 넘어설 수 없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이 소망하고 이루려 하시는 하늘 가정과는 인연이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의 그런 가정 환경에서 살다가 천당 갈 줄 알아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러면 모두 천당 보내줘야 되게요? 지금은 우리가 욕을 먹고 핍박을 받고 있을망정, 싸우다가 쓰러지는 한이 있을망정 단 한가지 품어야 할 절개가 있으니, 그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같이 계시고 싶고 하나님이 그리워하시는 아들딸로서 갖출 바의 절개입니다.
그러니 우리 통일교회 식구들은 자식을 기를 때도 그 자식을 높여줄 줄 알아야 됩니다. 부모라고 해서 이놈의 자식 뭐 어떻고 어떻고 하게 안 되어 있다는 거예요. 그렇게 안 되어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에게 소망이 있다 할진대 그 소망은 그들을 통하여 계승되는 거예요. 자식을 통하든가, 부부를 통하든가, 부모를 통하든가 어떠한 길을 통해서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남아 있는 소망이 하늘이 세워 줄 소망이라 할진대 그것은 천륜(天倫)의 길을 통해서만 연락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이 같지 않은 자들과는 의논도 하고 싶지 않고 무슨 일도 같이 하고 싶지 않지요? 영원한 생활적인 이념, 영원한 이상적인 사상이 있다 할진대 하나님이 경륜하는 세계입니다. 그 세계에 그저 ‘예수만 믿으면 가겠지.’ 하고 살면 들어갈 것 같아요? 절대 안 됩니다.
여기에 모인 여러분들, 이제 한이 있다 할진대 하늘 앞에 충성해야 되겠습니다. 지금까지 함께 살아온 남편이나 아내, 즉 부부는 어떠한 존재냐? 하늘땅을 대신한 제물입니다. 종적으로 하늘과 땅을 접선시키기 위한 대표적인 존재요, 횡적으로는 역사가 생긴 이후 지금까지의 여성을 대표한 존재요, 남성을 대표한 존재입니다. 이런 것 느껴 봤어요? 하늘과 땅이 접하고 전인류가 화합할 수 있는 제단입니다. 언젠가 선생님이 여성을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이 가정의 사랑은 창조 전부터 영원무궁토록 전체가 지켜야 할 기준입니다. 그런데 이 기준으로 번식된 아들딸이 이 땅 위에 없다는 거예요. 그런 기준에서 하나님이 ‘오냐, 너는 진정한 내 아들이요, 내 딸이다.’ 하고 인정한 사람이 있어요? 없다는 거예요. 없기 때문에 다시 처음부터 찾아야 됩니다. 부모가 있다 할진대 그 부모는 이 땅 위의 수많은 부모를 대신한 부모입니다. 그 부모는 자기 자식만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 가정을 넘어 세계에 있는 남의 자식도 한꺼번에 품을 수 있는 마음을 갖고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도의 생활은 무엇이뇨? 앞으로 하나님 앞에 세워질 수 있는, 하늘 가정에서 살 수 있는 자격자는 어떤 사람일 것이뇨? 우주적인 인격자입니다. 다른 것은 그만두고 심정문제에 들어가서 심정으로 부모를 모실 수 있는 자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하늘땅을 대신한 참부모를 모셔 봤어요? 우리의 부모는 하늘이 공인하고 땅이 공인하고 천정이 공인하는 참부모입니다. 하나님도 천사들도 이 땅의 피조만물도 ‘옳소이다.’ 하는 참부모입니다. 지금은 참부모로서 공인을 받고 나타나신 분을 모셔야 할 때입니다. 그런 분이 누구였느냐 하면 예수님이었습니다. 또한 오시는 주님입니다, 오시는 주님.
그러면 예수는 어떤 분이신가? 에덴동산에서 아담 해와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참부모가 되지 못하고 거짓 부모가 되어 거짓 자손을 낳았으니, 이를 다시 복귀하기 위한 참부모로 오셨던 분입니다. 아담 해와는 참부모가 못된 동시에 참부부도 못되었고 참부부가 못되었으니 참자녀도 못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완전히 믿고 예수와 하나가 되면 참자녀 복귀, 참부부 복귀, 참부모 복귀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제일 사랑하라 한 것입니다. 여러분들, 그걸 알아야 됩니다.
타락한 인간이 이제 거쳐 나가야 할 길은 어떤 길인가? 이 한스러운 역사를 박차고 ‘할렐루야, 아멘.’ 하며 승리의 용자로서 나타나 천적인 부모를 모시는 자리를 거쳐가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천주적인 신랑 신부의 기준을 노래하는 자리를 거치고, 그 다음에는 천주적인 자녀를 사랑하는 자리를 거쳐 나가야 됩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이 거쳐가야 할 3대의 길입니다. 국경이 문제가 아닙니다. 동서양이 문제가 아닙니다. 심정을 가진 사람이라 할진대 그런 부모 앞에 전부 머리 숙이고, 그런 부부를 대하여 전부가 축복하고, 그런 자녀 앞에 전체가 머리 숙이고 위해 줄 것입니다. 그러한 때가 와야 됩니다. 그런 곳이 어떤 곳이냐? 앞으로 오실 주님이 계시는 곳입니다. 그러한 무리가 갈 곳이 앞으로의 하늘 보좌입니다. 14만 4천 무리가 무엇인지 알아요? 그러한 무리입니다.
이러한 견지에서 기독교 신도들을 한번 해부해 보십시오. 여러분, 자기 부모 이상으로 남의 부모를 사랑할 줄 알아야 됩니다. 자기 아들딸 이상으로 남의 아들딸을 사랑할 줄 알아야 돼요. 왜? 하나님이 그러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만 사랑하는 분이에요?
하늘을 그리워하고 하늘을 위하여 모인 식구라 할진대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다는 느낌이 있어야 됩니다. 그의 슬픔을 내 슬픔으로 그의 어려움을 내 어려움으로 느껴야 합니다. 이러한 감정이 땅 위에 살고 있는 타락한 인간에게 솟구쳐야 합니다. 자기의 민족을 넘고, 국가를 넘고 모든 것을 넘어설 수 있는 감정이 이 지상의 인간들에게 솟구치지 않는 한 평화의 동산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또 그런 평화의 동산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계시다 할진대 그 하나님은 실패한 분이에요. 나아가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다고까지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땅 위의 인간도 그리워하는 것을 찾아 헤매거늘, 사랑의 하나님이야 어떻겠습니까? 지금까지 무한한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인간을 놓지 못하시는 하늘의 곡절은 무엇이뇨? 그토록 인간을 그리워하시는 원인은 무엇이뇨? 같이 살기 위함입니다. 같이 살고자 하는 목적은 무엇이뇨? 사랑하기 위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은혜의 자리에 들어가면 자식을 부모와 같이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신령한 자리에 들어가면 무엇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오늘날 인간들은 하나님을 준엄하신 하나님, 엄위(嚴威)하신 하나님으로 알고 있지만 천만에요. 여러분이 자식을 대할 때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우러나지요? 그 마음이 누가 준 마음인지 알아요? 하나님이 주신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그렇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인간이 타락한 후 지금까지 6천년의 역사가 흘렀지만 하나님이 같이 살 수 있는, 하나님이 사랑하실 수 있는 사람을 한 사람도 찾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아직까지 만나지 못했다는 거예요. 여러분은 자식을 사랑해 봤지요? 가정을 중심삼고 살아 봤지요? 그러나 그 가정은 타락한 가정입니다. 아무리 잘나고 아무리 뭐라 해도 심판대 앞에서는 축복해 줄 수 없는 가정이라는 거예요. 그러니 우리는 축복받을 수 있는 가정을 만들어야 됩니다. 내가 그런 사람이 못 되었으니 그러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고, 그러한 가정을 만들어야 하겠고, 그러한 사회를, 그러한 세계를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전세계의 기독교인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은 하지 않고 자기 교파, 자기 교회만 찾고 있습니다. 그래 가지고 될 것 같아요?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한 사람, 어떠한 민족도 품고 형제 아닌 형제를 형제로 여기고 부모 아닌 부모를 땅 위의 어떤 무엇보다도 귀하게 여길 줄 아는 존재가 되지 않는 한, 하늘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성경에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첫째 되는 계명이라.” (마 22:37)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는 기준은 어떤 기준입니까? 세상의 인간들이 하는 찌꺼기 사랑을 하늘이 원하시겠습니까? 하늘이 그런 자리에 들어올 것 같아요? 천만부당합니다. 다하는 정도가 어느 정도냐? 27억 인류를 품고 그들에게 있는 것을 전부 다 나눠주고도 부족함을 느껴야 합니다. ‘내가 요만큼 했으니 다했다.’ 할 수 없어요. 몸뚱이로는 그럴 수 없으니 심정으로 전체를 대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심정은 하늘땅을 대신 할 수 있고 전체를 대신할 수 있습니다. 그렇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최고의 심정 하나를 내놓으면 아버지도 우리에게 다했다는 인정을 해주십니다.
그러면 그 심정 기준은 어느 정도여야 하느냐? 자기 아들딸을 사랑하는 그 기준 이하, 부부끼리 사랑하는 그 기준 이하, 자기 부모에게 효도하는 그 기준 이하, 땅 위의 어떤 존재에게 흐르는 정적인 심정기준 이하의 기준을 가지고는 하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그 기준 이상이어야 합니다. 인간이 그런 기준을 가지고 하늘 앞에 섰다면 벌써 하나님의 나라는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이 땅 위의 사람을 사랑하는 심정 기준 이하로는 안 되기 때문에 예수님은 ‘누구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땅 위의 누구를 사랑하는 이상의 심정 기준을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도(道)를 위하여 자식을 버리고, 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나중에는 자기의 목숨까지 버리면서도 ‘황공합니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이상의 심정기준을 가져야 돼요.
예수님은 이러한 의미에서 그런 말씀을 하였던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욕먹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으며 핍박받고 몰리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러나 그가 느낀 세계가 민족보다 더 중요하고, 핍박받으면서도 가야 할 세계였기 때문에 예수는 그 길을 갔던 것입니다. 그런 심정을 품고 나가는 예수에게는 친구가 없었습니다. 있었다면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었어요. 수많은 성현들이 왔다 갔지만 그 경지에 도달한 사람은 예수님뿐이었습니다. 그는 역사 이래 처음으로 심정세계와 인연을 맺은 책임자로 나타났기 때문에 예수는 심정을 중심삼고 보아도 메시아였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하나님을 어떻게 대할 것입니까? 하나님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셨습니다. 다했습니다. 보십시오. 천만번 죽어 마땅할 죄악의 무리 앞에 하늘은 수많은 선지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그들을 다 죽여 버렸습니다. 그들이 죽을 때 하늘의 심정이 어떠하셨겠습니까? 죽는 그들보다 몇 천만 배의 고통을 느끼시고 하늘에 있는 천천만 성도들과 함께 통곡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처참한 역사의 해골곳이 역사노정을 더럽혔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와 같이 선한 무리가 쓰러질 때마다 하나님은 눈물의 고개를 넘으셔야 했던 것 또한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이 정도로 남아지게 된 것이 이 땅에서 기도하는 자들이 있어서가 아니에요. 절대 아닙니다. 오늘날 이 국가가 이만한 형태를 갖추고 있는 것이 이 시대에 사는 사람들이 잘나서 그런 줄 알아요? 아닙니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하늘 앞에 비료가 되어간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오늘날 이 꼴이나마 남아진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여러분은 다하는 심정을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대하여 할 바를 다하셨다는 것입니다. 다하셨다는 거예요. 보십시오, 얼마나 안타까워하셨나. 모세를 세워 놓고 섭리해 나오시기에 얼마나 안타까워하셨습니까? 돼먹지 못한 이스라엘 민족을 거느리고 나오시기에 얼마나 애쓰셨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인사도 없이 배반해 버렸습니다. 보고도 없이 배반해 버렸어요. 의논도 없이 배반해 버린 선조들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겠습니다. 인간과 의논할 수도 없고 인간의 보고도 받을 수 없는 입장에 있는 하늘은 얼마나 슬프겠습니까? 그러면서도 인간을 놓으실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부모의 입장이요, 인간을 지으신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신 수고 앞에 여러분이 그 대가를 치를 수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없어요. 여러분의 몸을 제물삼아 불사른다 해도 그 대가를 치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까지의 섭리노정에서 수많은 선조들이 제물이 되었지만 이루지 못한 것을 볼 때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의 심정을 품은 어떠한 존재가 필히 인간 앞에 나타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우리들은 절박하게 느껴야 됩니다. 그러한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될 것이냐? 하나님은 인간 앞에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뜻을 다해 나오셨는데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이뇨? 머리 숙여 아버님을 생각할 때 가슴이 미어지고 눈물이 앞을 가리는 심정 하나만 있으면 됩니다. ‘아버지의 명령이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는 심정을 가진 자가 되어야만 그리워 찾아오시는 하나님 앞에 얼굴을 들고 바라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도 자기의 아들딸이 죽어가면 정신을 잃어버리는 사람이 많지요. 하늘이 그런 과정을 지내오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이 그리워서 자기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하늘을 향해 나갈 수 있고, 하늘이 그리워 허덕이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는 망하지 않을 거예요. 절대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리워해도 만날 수 없는 때입니다. 왜? 약속의 날이 오기 전에 심판날이 올 것이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날을 고대하시면서 인류를 붙들고 섭리하시는 것입니다. 하늘은 이와 같이 6천년 기나긴 세월 동안 섭리해 오셨으나 아직까지 그리워하시는 인간을 붙들고 생활에 보신 적이 없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딸이고 또 저희에게 복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 항상 같이해 주시니 감사합니다.’라고 하지만 천만부당한 말입니다. 하나님은 역사 이래 그리워하는 아들딸을 모아놓고 살아 보신 적이 없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그 마음에 곡절을 품으시고도 아들딸을 찾아 가지고 그 아들딸을 중심삼고 천지 만물이 기뻐 움직일 수 있는 그 한 때를 바라보시면서 참고 나오신 것이 하나님의 6천년 섭리 역사라는 것입니다, 6천년 섭리역사.
여러분, 기도해 보십시오. 기도를 하면 할수록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아버지 앞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슬픔과 통곡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단계를 넘어 아버지를 생각만 해도 춤이 나올 수 있어야 할 텐데, 아직 그렇게 못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아직까지 하나님이 그리워해야 할 역사적인 조건에 걸려 있고, 시대적인 조건에 걸려 있습니다. 그러니 소망의 조건을 갖지 못한 여러분은 이제 하늘과 나 사이의 그리움의 조건을 청산지어야 할 때가 온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이냐? 하늘의 식구로서 입적될 수 있는 날을 그리워해야 됩니다. 그리워하는 데는 여러분 한 사람만 그리워해 가지고는 안 됩니다. 전세계 인류가 그리워해야 합니다. 전세계 인류가 그리워해야 합니다, 전세계 인류가.
여기 모인 여러분들, 여러분 자신이 귀한 이상 다른 사람도 귀합니다. 여러분은 어떠한 인연이 있어서 서로 만나게 된 거예요. 그 인연은 자기를 중심삼은 인연이 아닙니다. 어떤 인연에 의해 만난 우리들은 오늘 여기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 인연을 넓히고 넓혀 세계까지 연결시켜서 하나님께서 그리워하시는 것을 이루어 드리고, 하나님께서 이 세계와 더불어 살 수 있는 기준까지 연결시켜야 됩니다. 그러한 책임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런 연고로 여러분은 자신을 위해 살면 안 됩니다. 지금은 세계를 위하여 살 때요, 하나님을 위하여 살 때인 것입니다. 자신을 위하여 살 때가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소원하시는 것은 잃어버린 에덴의 참가정입니다. 그 참가정에 세워질 수 있는 참부모, 참부모 앞에 세움받을 수 있는 참부부, 참부부가 사랑할 수 있는 참자녀가 있는 가정이 하나님이 계시고 싶어하시는 하늘 가정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이런 가정이 나타나면, 그때에는 예수도 형제와 같이 즐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가정이 나타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곳을 향하여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각자는 민족을 위하여, 세계를 위하여, 하늘을 위하여, 하늘의 심정을 대하여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했느냐, 이것이 제일 큰 문제입니다. 하늘은 그러셨습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이상, 자기를 사랑하는 이상 하늘을 위하는 사람은 천국에 간다고 말입니다. 거기서 무엇을 보여 주고자 하셨는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어 놓으시고 느끼신 감정을 2차적으로 인간이 실체적인 자극을 받아 ‘오! 지으신 아버지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구나.’ 하고 인식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우주적인 사랑을 위하여 태어났지 개인적인 사랑을 위해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좋아하는 것에는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을 개입시키고, 좋아하는 것에는 어떻게 해서든지 세계를 개입시켜야 합니다. 여러분이 출세를 하려 하는 것도 자기에게 세계를 개입시키기 위함이요, 자기에게 하나님을 개입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안 그래요? 우리의 가정에 세계를 개입시키고 하나님이 좋다 하실 수 있으면 그 이상 더 바랄 것이 있겠어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너와 같이 살겠다.’ 하신다면 최대의 승리를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아버지이고 나는 그 아버지의 아들딸이 되면 천주(天宙)가 다 내 것이 되는 거지 별 것 있어요? 그것이 인간의 최고 욕망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심정적인 세계의 인연을 거쳐야 됩니다. 그러지 않고는 절대 안 돼요. 하나님은 그러한 목적 아래 6천년 동안 인류를 바라보시며 ‘언제나 참인간이 될 것인고, 언제나 하늘의 식구가 될 것인고, 언제나 하늘 민족이 되고 언제나 하늘 세계를 이룰 것인고?’ 하시며 그리워해 오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기독교를 기반으로 하여 온 인류와 더불어 살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라신 것이 지금까지 싸워 나오신 목적이요, 그것이 하나님께서 역사해 오신 목적이라는 것을 우리는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길가에 쓰러진 한 거지의 사체(死體)를 보고 그 거지에게도 과거에는 그를 낳아 사랑하던 부모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어떠한 인연 가운데서 누구의 사모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혹은 자녀의 입장에서 그리움의 대상이 되기도 했을 것이라는 느낌을 갖고 그를 바라볼 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가는 곳곳마다, 머무는 곳곳마다, 대하는 곳곳마다 그런 심정을 갖고 움직인다 할진대 그러한 심정으로 엉클어진 세계가 하나님이 계실 수 있는 곳임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자기를 중심삼고 안다 하는 입장에 서지 말고 무엇이든지 하늘과의 인연을 중심삼고 안다 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아들딸들이 되게 인도하여 주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님이 계시고 싶어하시는 곳은 심정으로 얽히어서 형제 아닌 형제를 형제 이상으로 사랑하는 곳이요, 부모 아닌 부모를 모셔 놓고 부모 이상의 효성을 하는 곳이요, 책임자 아닌 책임자를 모셔 놓고 어느 누구보다도 존중하는 곳이라는 것을 저희들이 알고 있사오니, 그러한 표준 밑에서 생활하고 행동하며 그런 이념에 불타 목적지를 향하여 개척의 용자로서, 싸움의 대표자로서 오늘도 내일도 쉬임 없이 나갈 수 있는 하늘의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저희들이 알았사오니 아버지의 아들딸이 되겠다는 심정을 가지고, 누구에게도 지지 않겠다는 마음을 가져 민족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고 세계를 사랑하고, 세계를 위하여 일하고 있는 하늘의 성삼위신과 그 이하 천천만 성도, 천군천사까지 사랑하는 마음이 불타게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그들과 더불어 노래하고 그들과 더불어 응할 수 있고 화할 수 있는 하늘의 아들딸들을 아버지께서는 심히도 그리워하신다는 것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 이들이 마음으로 느낀 것이 있사올진대 그런 표준 밑에서 하늘과 인연 맺게 하여 주시옵고, 이 땅 위에 그런 승리의 한 발판을 세우기 위하여 모든 것을 심각하게 분석하여 나설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그것을 위해 노력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모든 것을 맡아 주시옵소서.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오늘 여러분 앞에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모든 존재물은 아버지를 모시기 위하여 존재한다’입니다. ‘모든 존재물은 아버지를 모시기 위하여 존재한다’ 이러한 제목을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하늘이 있는 것을 알고 땅이 있는 것을 압니다. 하늘과 땅이 있는 가운데 나라는 존재가 있고 인류가 있습니다.
그러면 하늘과 땅과 나의 근본이 무엇이냐? 이 문제를 추구하게 될 때, 아직까지 이 문제를 완전하게 해결하지 못한 채 인류는 허덕여 나오고 있습니다.
만일 하늘과 땅과 나의 주인이 될 수 있는 하나님이 계시다 할진대 현재 그 하나님은 하늘과 땅과 나와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계시느냐? 이것이 인생에 있어서 해결되어야 할 중대한 문제입니다. 또한 그 주인이 내 마음과 내 몸, 그리고 내 심정과는 어떻게 관계되어 있느냐? 이러한 나를 중심 삼고 연(緣)하여 있는 이 세계와 만물과는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느냐? 이것이 모든 종교와 철학이 찾아 나아가는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우리는 천지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또한 그분이 에덴동산에 우리의 선조들을 지어 놓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우리의 선조들은 하늘과 영원하고 유일하고 변하지 않아야 할 어떤 인연을 가졌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영원하고 유일하고 불변한 어떤 인연을 중심삼고 지어졌음이 틀림없다면, 어찌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모르는 입장에 있게 되었느뇨? 이것을 생각해 볼 때 인간이 타락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만물의 주인공으로 인간을 세워 놓으시고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을 맺었다면, 인간의 무엇과 인연을 맺었을 것인가? 심정과 인연 맺었을 것입니다. 이상적인 본질과 인연 맺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불변하고 유일하고 영원한 생명과, 불변하고 유일하고 영원한 심정을 터치(touch)할 수 있는 오직 하나의 주인은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상식적으로도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인류 앞에는 영원한 어떤 이념이 남아 있고, 찾아 헤매는 불변의 그 무엇이 남아 있고, 유일한 가치를 얻지 못한 그 무엇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 인간을 지으신 영원하고 불변하고 유일한 그 본체(本體)가 주체의 입장에서 우리와 영원한 관계가 이루어졌던들, 하늘이 고통을 받으면 우리도 고통을 느낄 것입니다. 하늘이 기뻐하면 우리도 기뻐할 것이고, 하늘이 행복하면 우리도 행복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렇게 되어 있지 못한 것은 타락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무엇을 하기 위해서, 어떤 형태를 만들기 위해서 타락한 인류를 붙들고 지금까지 수고해 나오시는가? 그것은 창조주로서 인류의 조상에게 축복하여 주었던 기준, 심정적인 세계에 있어서, 생명적인 세계에 있어서, 이상적인 본질에 있어서 영원하고 유일하고 불변한 그 기준에 맞추어 놓기 위해서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그러한 섭리를 하지 않는다 할진대 하나님은 사랑이니 무엇이니 하고 논(論)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류의 조상 아담 해와에게 이 모든 만물을 주관하라고 축복하셨습니다. 주관하는 데는 어떤 자리에서 주관해야 되느냐? 생명이 불안하고 환경이 불안하고 심정이 불안한 자리에서 주관하는 것이 아니라 심정과 생명 전체가 안식할 수 있는 자리에서 주관해야 합니다. 오늘날 이 땅 위의 모든 것이 인간에게 주관받고 있지만, 본래 주관받아야 할 자리에서 주관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한 때 청산해야 할 세계라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조상 아담 해와를 지어 놓고 주인이 되라 하셨습니다. 무슨 주인? 사랑의 주인이 되라, 생명의 주인이 되라, 이념의 주인이 되라, 권한의 주인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조상이 사랑과 생명과 이념과 권한, 이것을 하나님과 인간조상이 동거(同居)하는 자리에서 성취하였던들, 오늘날 인류는 이 같은 한탄스런 세상에서 살고 있지 않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과 나와는 어떠한 관계인가? 사랑의 주인이요, 생명의 주인이요, 이념의 주인이요, 권한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나는 어떤 관계였느냐? 어떠한 입장이었느냐? 부자(父子)의 관계였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사랑합니다. 사랑하는데 막연하게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떠한 심정을 가지고 사랑하느냐? 유일하고 불변하고 영원하신 부모의 심정을 가지고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타락한 우리 인류가 하늘을 수천만 번 배반했을지라도 하늘은 꾸준히 붙들고 나오고 있습니다. 타락한 우리 인간에게도 죽음을 개의치 않고 자식을 사랑하는 심정이 있는데, 그 심정은 어디서부터 나왔을 것인고? 천적인 심정을 중심삼은 하늘로 말미암아 지음받은 인간이기에 그런 심정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인간의 타락이 무엇이뇨? 사랑을 잃어버린 것이요, 생명을 잃어버린 것이요, 이념을 잃어버린 것이요, 주권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섭리는 무엇이뇨? 인간으로 하여금 이 땅을 주관하게 하기 위한 주권회복 운동입니다. 그 다음에는 잃어버린 이념을 회복하기 위한 운동이요, 생명을 회복하기 위한 운동이요, 사랑을 회복하기 위한 운동입니다. 타락한 우리는 복귀의 한을 품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담 해와가 타락한 그날부터 역사는 무엇을 향하여 달음질치고 있느뇨? 아버지를 찾기 위하여 달음질치고 있습니다. 딴 게 아니에요.
인류는 무엇 때문에 역사 과정에서 허덕이고 있고, 곡절의 길을 걸어 나왔느뇨? 참다운 사랑의 아버지, 참다운 생명의 아버지, 참다운 이념의 아버지, 참다운 권한의 아버지를 아는 한 때를 소망하고 그와 인연 맺기 위해 허덕여 나왔습니다. 그것이 허덕여 나온 목적입니다.
과거의 선지들이나 성현 현철들이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피땀을 흘렸다면, 우리도 그렇게 해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아버지 대신 존재로서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아버지의 생명을 받고 아버지의 이념과 아버지의 권한을 받아야 할 존재인데, 사탄으로 말미암아 그것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탄을 쳐부수고, 하나님이 인간에게 허락한 자유의 이상을 회복하고, 자유의 생명을 회복하여 사랑에 취해 살 수 있는 그곳을 찾아가는 것이 섭리노정인 것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게 되지 못한 인간을 그러한 곳으로 끌어올려야 됩니다. 복귀시켜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심정적으로 끌어올려 놓고 창조의 법도에 의하여 수습해 나옵니다. 재창조의 역사 과정을 거쳐 나온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인간들 앞에 제물, 즉 만물을 중심삼고 관계 맺어 나오고, 그 다음에는 말씀을 세워서 아들을 중심삼고 관계 맺어 나왔습니다. 다시 말하면 구약시대는 제물과 더불어 아버지를 향하여 가던 시대요, 신약시대는 아들과 더불어 아버지를 찾아 나가는 시대였습니다. 앞으로 끝날은 어떤 때냐? 아버지가 오는 때요, 아버지를 만나는 때입니다. 잃어버렸던 역사적인 아버지를 찾는 날입니다. 인생의 목표는 이것입니다. 이러한 목표를 향해 가는 역사노정에서 하늘을 근심하게 하고 하늘을 서럽게 한 우리들임을 알아야겠습니다.
아버지를 찾아 나가는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이뇨? 역사적인 아버지를 찾기 위하여 다리를 놓아 나오는데, 어떠한 과정을 거치었느냐? 과거 구약시대는 심부름꾼시대요, 신약시대는 아들이 와서 양자 만드는 기간이었습니다. 거꾸로 올라갑니다. 구약시대에 있어서 아브라함은 심부름꾼이었습니다. 즉 그 시대는 하늘의 천사들을 보내어 역사하시었고, 신약시대는 아들을 보내어 역사하시었고, 앞으로의 성약시대는 아버지 자신이 오셔서 역사하시고 아들딸을 사랑하는 시대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늘을 대신하고 역사를 대신하여 천적인 책임을 지고 나섰습니다. 역사적인 아버지를 상봉할 수 있는 그 터를 이루어 놓았습니다. 아브라함의 그 정신은 언제까지 끌고 나가야 되었느냐 하면,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였습니다. 아브라함이 헌제(獻祭)에서 실수하니 야곱에게까지 연장되었고, 그 다음 민족의 지도자로 모세를 세웠습니다. 아브라함 일대(一代)에 책임을 다 못했으나 아브라함에게 세워 놓은 천적인 기준은 예수님까지 연결되었던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들 앞에 선지자를 보내 가지고 이것을 끌어올리려다가 실패하고, 또 실패하고 그러면서도 시대에 따라 개인에서 가정으로, 가정에서 민족으로, 민족에서 국가를 중심삼고 주권을 회복하여 세계를 움직일 수 있는 그때까지 섭리하시는 것입니다. 아들딸 복귀보다도 주권복귀를 먼저 해야 합니다.
아브라함 이후 2천년 동안 민족을 거느려 나오면서 하늘은 무한히 수고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을 세우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중심삼고 무엇을 해야 할 것인고? 싸워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믿게 해서 편안하게 해 주자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어 뭘 해야 할 것이뇨? 사탄세계와 싸워서 결판지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사탄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사탄을 굴복시켜 가지고 아담 해와에게 만물을 주관하라고 하신 그 축복을 이루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목표한 것이 그것입니다. 축복을 이루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목표한 그 첫째가 이스라엘 민족을 규합하고 유대교를 규합하여 대로마 제국과 싸우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싸움이 끝난 다음이라야 천국 이상을 줄 수 있고, 천국 생명을 줄 수 있고, 천국 사랑을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천적인 사랑과 천적인 생명과 천적인 이념을 신봉할 수 있는 땅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하늘은 주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싸움을 전개해 나왔습니다.
역사의 관점에서 볼 때 끝날이 가까워오고 있습니다. 어떻게 끝날이 가까워온다고 할 수 있느냐? 하나의 주의가 가까워오니 끝날입니다. 하나의 이념을 중심삼고 천적인 주권을 회복할 수 있는 때가 눈앞에 가까워 옵니다. 주권을 회복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이냐? 천적인 사랑과 천적인 생명과 천적인 이념을 회복하기 전에는 천적인 주권을 회복할 수 없습니다.
이구동성으로 지금의 때는 끝날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역사도 종교도 철학도 인간의 근본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전세계 인류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냐? 영원한 이상과 이념의 주체가 필요합니다. 또한 이것을 해결하려면 무엇에서부터 출발해야 되느냐? 하나님의 사랑에서부터, 하나님의 생명과 하나님의 이념을 통한 후에라야만 주권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역사는 거꿀잡이입니다. 그 주권은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아들딸에게 주는 것입니다. 생명이 있는 아들딸, 영원한 하나님의 창조이념을 즐기며 노래할 수 있는 아들딸을 세워 놓고 그 주권을 맡기기 위한 것이 역사의 흐름이요 목적입니다.
이러한 환경에서 우리가 염려해야 할 것이 무엇이뇨? 이러한 원칙 밑에서 섭리한다 할진대는 무엇이 문제뇨? 이 세상 것 가지고는 도저히 처리가 안 됩니다. 처리할 수 있는 완전한 것은 불변의 하나님의 사랑이요, 불변의 하나님의 생명이요, 불변의 하나님의 이념입니다. 이것이 있어야 불변의 주권은 회복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똑똑히 알아야겠습니다.
진정한 종교인들이나 도의 길을 가는 사람들은 지금까지 한번도 출세를 못해 봤습니다. 밟히고 유린당하고 몰리고 쫓기고 고통을 받아 왔습니다. 하늘에 가까운 아들딸들은 역사적인 수난의 길을 걸어 나왔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십시오. 순교의 역사입니다. 왜 그러냐? 이 세상을 하나님의 사랑권 내로 복귀시키기 위해서 주권을 찾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뇨? 사탄세계로부터 맞는 자입니다. 다시 말해서 어떠한 지역을 차지하려면 반드시 그 지역에 해당하는 만큼 맞고서야 찾아올 수 있습니다. 하늘 작전법이 그래요. 맞고 빼앗아 오는 것입니다. 인류역사를 두고 볼 때 뜻을 품고 왔던 선지선열들이 그 시대에 환영받았습니까? 못 받았어요. 죽은 후에 뭐 어떻고 어떻고 했습니다. 맞는 그가 그 시대를 책임질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함부로 대해 나온 우리 선조들이었습니다.
이제 종말시대를 맞이한 전세계 인류는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종래의 수많은 선지선열들은 무엇을 하였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을 대하여 그는 영원한 아버지요, 불변의 아버지요, 유일의 아버지라고 느껴야 되겠습니다.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 한 하나님의 아들딸이 될 수 없습니다.
아버지의 심정,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생명력, 태산이 가로막아도 뚫고 나올 수 있는 억제할 수 없는 생명력, 세상에 어떠한 주의, 사상이 많다 하더라도 인간은 그 심정과 생명력을 지녀야 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똑똑하고 잘난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소유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 위에 어떤 분으로 오셨느냐? 실체의 하나님으로 오셨습니다. 실체의 하나님, 실체의 아버지로 오셨다는 말입니다. 아버지도 실체의 아버지가 계시는 동시에 무형의 아버지가 계십니다. 우리 사랑과 마찬가지입니다. 몸이 있는 동시에 마음이 있습니다. 무형의 하나님의 모양을 닮아 실체를 쓰고 오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내 마음의 실체가 몸인 것과 같습니다.
이 땅 위의 인간에게는 두 개의 ‘나’가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은 하나가 아니에요. 둘입니다. 나는 마음의 나와 몸의 나로 되어 있습니다. 천주(天宙)를 대신한 내가 그런 것을 볼 때 우리의 아버지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실체의 아버지와 무형의 아버지, 이 둘을 하나로서 사랑해야 할 인류이기 때문에 인류는 참아버지를 찾아 나가는 것입니다. 그 아버지를 찾아 나아가는 데는 참심부름꾼, 즉 참종에서 참양자, 참양자에서 참아들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계에서 책임진 이들은 자신을 하나님의 종이라고 합니다. 인간의 본래의 자리는 거기에서 머물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좋은 말이 아닙니다. 그런 말 하는 사람들 그만 따라 다니십시오.
예수님은 어떠한 분으로 오셨느뇨? 하나님의 아들로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오셨으니 하나님 대신자요, 인류의 참아버지입니다.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참아버지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참아버지 대신 존재로 오신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버지를 잃어버렸습니다. 아무리 잘났다고 할지라도 타락한 후손임에 틀림없기 때문에 본연의 참아버지를 잃어버린 자입니다. 고아입니다. 의지할 곳이 없어 허덕이고 발버둥치는 고아입니다. 마음세계에 있어서는 고아와 같으니 허덕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본향의 아버지, 그 아버지가 계시는 곳은 내 마음의 본향이요, 안식처입니다. 아버지가 계시는 그곳은 영원한 안식의 자리입니다. 그 아버지와 내가 부자의 인연이 맺어진 입장에서 아버지 집에 와 있다고 하면 아버지가 나가라고 하겠어요?
여러분이 세상의 어떠한 환경에 접하더라도 마음은 그곳을 벗어나려고 하는데, 어디로 가야 합니까? 부모의 품으로, 아버지에게로 가야 합니다. 내 마음은 무엇을 바라고 쉴 새 없이 나오고 있느뇨? 아버지를 모시기 바라면서 나옵니다. 여러분의 선조들은 여러분의 이러한 마음을 통하여 최후의 결판을 지어야 할 때를 재촉해 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을 중심삼고 몸까지도 아버지를 부를 수 있어야 됩니다. 이는 내 마음의 아버지요, 몸의 아버지요, 하늘땅을 대신한 역사적인 아버지가 틀림없구나 하는 입장에서 아버지라 부르면서, 6천년 동안 돌고 돌면서 응어리진 원통함과 복받치는 한을 터쳐내는 통곡의 장면이 있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아버지로 오신 예수를 잡아 죽여놓고 죽으러 오셨다고? 기독교의 문제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다른 종교는 아버지가 오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모실 수 있는 아들딸을 세우기 위해 협조하는 종교입니다. 심부름꾼 종교가 많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종교가 있으되 기독교는 아버지적 종교요, 부모의 종교이기 때문에 사랑을 말했습니다.
아버지로서 사랑을 해야 할 텐데 와 가지고 대번에 ‘너는 내 아들이요, 딸이라.’고 하면서 사랑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왜? 복귀해야 할 일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한입니다. 그 한은 역사적인 한이요, 시대적인 한입니다. 또 우리가 잘못하면 미래적인 한으로 남아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무엇부터 해결해야 했느냐? 역사적인 한부터 해결해야 했습니다.
예수님 자신은 하늘의 몸을 대신하여 왔지만, 그 마음은 아버지와 하나 되기 위해서 싸웠습니다. 마음의 아버지, 무형의 아버지와 하나되기 위해서 싸웠어요. 그렇지만 몸을 쓰고 나타나 이 땅을 주관해야 할 책임을 완결짓지 못하셨으므로 예수님은 지금도 이념을 세우고 세계를 주관하기 위하여 싸워 나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겠습니다.
예수님이 살아생전 싸워 완결지어야 할 것인데 완결짓지 못함으로 인하여 영계(靈界)에 가서도 2천년 동안이나 싸워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싸움이 끝나는 그때 가서는 무엇을 할 것이뇨? 불변의 사랑, 불변의 생명, 불변의 이념을 가지고 우리를 찾아와 안식의 보금자리를 허락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재림천국입니다. 뭐 재림이 어떻다고들 하지만 목적은 여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땅 위에 와 가지고 ‘너는 과연 아버지의 생명을 가진 자로구나, 너는 과연 아버지의 이념을 가진 자로구나, 너는 아버지의 사랑을 가진 자로구나, 오, 나의 아들딸아.’ 하시며 품고 사랑해 봤습니까? 못해 봤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 헤매던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한 예수님을 바라보고 ‘오, 주여!’ 할 때 ‘너와 나는 아직까지 거리가 남아 있는 것을 모르느냐? 민족에게 다시 권고해야겠구나.’라고 하신 곡절이 어디 있느뇨? 하늘의 실체로서 하늘대신 품고 사랑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늘 주권을 대신할 자요, 하늘의 이념과 하늘의 생명을 대신할 자이지만 그런 자리에는 못 갔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그런 자리에 서지 못하였습니다. 왜? 만물을 주관하라던 권한을 땅 위에서 가지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 위에 왔다 갔으되 한을 남기고 갔습니다. 한은 무슨 한? 역사적인 한, 시대적인 한, 미래적인 한을 우리에게 남기고 갔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이 골고다 산정에 끌려가 십자가에 죽음으로써 모든 것을 다 이룬 줄 알지만, 가야 할 길이 남아 있습니다. 죽어서도 가야할 길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죽지 않고는 왜 넘을 수 없었던고? 역사를 대신하고 시대를 대신할 수 있는 기반을 못 가졌기 때문입니다.
4천년 역사를 가진 유대교와 택해 세운 이스라엘 민족이 불신했습니다. 과거와 현재가 없이는 미래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과거의 심정, 시대적인 심정, 미래적인 심정을 해원하지 못하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다시 넘어야 할 예수의 입장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영계에 가서까지도 기도한다는 거예요. 마음이 편안해서 기도해요? 갈 길이 남아 있기 때문에 기도합니다. 아담 해와가 잃어버린 본연의 주권을 회복하고 불변의 사랑과 불변의 생명과 불변의 이념을 갖추지 못하였기 때문에, 예수는 그 목표를 이루는 한때를 고대하며 2천년 동안 싸워 나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을 알고 있습니다. 그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역사를 대신했던 예수님, 시대를 대신했던 예수님, 미래를 대신했던 예수님임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는 이러한 예수님에 대한 내용은 안 나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되 역사적인 하나님, 시대적인 하나님, 미래적인 하나님을 믿어야 되겠습니다. 그런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왔다 가신 이후 2천년 역사가 지났지만 역사적인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누구뇨? 시간을 연하여 역사를 만들어 왔지만 역사적인 하나님을 믿고 그 하나님을 위로할 자가 없습니다. 시대적인 하나님의 심정을 알고 위로할 자가 없고 미래적인 하나님의 심정을 알고 위로할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 오셔서 ‘나는 역사적인 하나님의 심정을 위로하기 위하여 왔다.’고 해명하고 싶었으나 그러한 해명을 하지 못했습니다. 역사적인 하나님의 심정을 해명하여 현실에 나타내야 되는데, 그것을 나타낼 수 있는 환경이 못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역사적인 하나님의 심정을 알았지만 구약을 믿고 있는 유대교인들에게 가르쳐 주지 못하고 가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이요, 시대적이요, 미래적인 예수님을 믿고, 더 나아가서는 역사적인 하나님의 심정, 시대적인 하나님의 심정, 미래적인 하나님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자가 땅 위에 재차 나타나지 않는다면 이 땅은 멸망할 것입니다.
오늘날의 외적인 주권 형태를 회복하기 위해서도 6천년이 걸렸거든,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이념을 찾아 세우기 위한 싸움이 몇천년 걸릴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생명을 찾기 위한 싸움이 몇천년 걸릴지 모르고 심정을 찾기 위한 싸움이 몇천년 걸릴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맙게도 예수님이 이 땅 위에 오셔서 최고의 문제를 해결해 주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과 인연을 맺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타락한 인간은 거꿀잡이로 올라가야 됩니다. 떨어졌으니 거꿀잡이로 올라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못 받고 타락의 혈통을 받아 떨어져 버렸으니 거꿀잡이로 올라가야 되는 것입니다. 복귀는 반대의 경로를 밟아갑니다.
여러분이 처음 은혜를 받으면 어떠합니까? 복중에 있던 어린애가 세상에 나오는 것과 마찬가지로 미지의 세계가 보이고 광명한 새 천지를 보게 되니 기뻐합니다. 그런 역사를 지난 후에는 예수를 신랑으로 삼아야 됩니다. 예수님이 보고 싶고 그리워서 눈물을 흘릴 수 있어야 됩니다.
구약시대를 통하여 약속을 해 놓았기 때문에 예수님이 이 땅 위에 오셨습니다. 무엇을 가지고? 사랑을 가지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외아들로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로 오셔서 이 온 세상을 마음대로 주관하셔야 했는데 그렇게 못하고 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신세가 이렇게 되었습니다. 독생자의 권한이 어디 있습니까? 독생자의 권한을 가지고도 행사해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아들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뇨? 신랑 신부를 갖추어 가지고 ‘아버지 축복해 주시옵소서.’ 할 수 있어야 됩니다. 에덴동산의 타락하지 않은 아담 해와의 입장에서 완성한 기준, 하늘이 기쁨으로 너는 내 아들딸이라고 축복할 수 있는 그 기준을 복귀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실 수 있는 자리에 못 갔다는 거예요. 처음 온 사람은 이해가 잘 안 갈 거예요. 아버지의 직접적인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자리에 못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왜? 신랑 신부를 갖추고 나타나야만 하나님을 대할 수 있게끔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때를 바라보고 2천년 동안 기도하고 계십니다. 무슨 기도를 하시느뇨? ‘하늘이 나와 더불어 축복해 줄 수 있는 신부를 세워 주소서.’ 하는 기도를 하신다는 거예요.
신랑 신부를 세워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이뇨? 그 신랑 신부가 하나님을 ‘아버지여’ 하고 부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신랑의 아버지도 되고 신부의 아버지도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신랑으로 나타났으나 신부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신부가 나타나야 됩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7절에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신부의 말씀이 나와야 된다는 뜻입니다.
이 땅 위의 인간들은 신랑 되신 예수를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신부와 함께 아버지를 모시지 못하였기 때문에 필시 그럴 수 있는 신부가 나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신랑과 신부가 합하여 둘이 머리를 숙이고 ‘아버님, 잃어버린 아들딸 대신 찾아진 모습이오니 축복해 주시옵소서.’라고 해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말 들었어요?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는데,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만난 후 그 다음의 목적은 무엇이뇨? 예수님 붙들고 잘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예수님을 만난 후에는 그와 더불어 아버지의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다 해줄 줄 알아요? 예수님은 지금까지 사랑의 권한을 행사해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랑 신부의 권한은 끝날의 것으로 남아 있기 때문에 그 조건을 갖추기 전에는 신랑 신부로서 하나님 앞에 사랑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신랑 신부라 불릴 수 있는 사람이 아직까지 인간 사회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다 아버지를 못 모신 자식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양자인지 심부름꾼인지 종인지 알아요? 종이라도 그 주인이 슬퍼하면 눈물을 흘립니다. 양자라도 양부모가 억울하고 분한 일이 있으면 같이 울 것입니다. 신랑 신부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이 어떠한 입장인지 알지 못하고, 하나님이 슬퍼하시는지 기뻐하시는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천만부당한 일입니다. 심정을 통해야 됩니다.
역사를 지배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뇨? 어떤 진리가 아닙니다. 어떤 사상이 아니에요. 심정입니다. 역사의 배후에는 하늘의 6천년 심정이 들어 있습니다. 이것이 이 땅 위에 실체와 더불어, 말씀과 더불어 나타날 때는 역사적인 모든 문제는 해결될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럴 게 아니에요?
예수님을 믿는 목적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로 모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와서 신랑 신부의 과정을 거쳐 가지고 무엇을 해야 합니까? 잃어버렸던 참부모를 복귀해야 합니다. 인류의 참아버지 노릇을 해야 됩니다. 거꿀잡이로 갖다 맞추어야 합니다. 복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복귀.
예수님도 하나님을 모시는 데 있어서는 신부와 더불어 모셔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똑똑히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영계에 가셔서 아버지를 모시고 같이 살고 의논하는 입장에 서지 못하고 지금까지 기도한다고 했습니다. 이 기도의 담을 헐어 버리고 영원한 천국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하나의 천국 가정에서 안식하려면 예수님은 신부를 갖추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천적인 사명을 종결지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섭리의 뜻과 사정은 통할 수 있었으되 영원한 생명을 통할 수 있는 사랑은 통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섭리의 뜻과 사정은 통할 수 있었으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경지에는 못 들어갔습니다. 왜? 심정을 통하려면 신랑 신부가 결정돼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그 분야는 모른다고 했습니다. 모를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나님을 영원한 생명을 중심삼고, 사랑을 중심삼고, 이념을 중심삼고 아버지로 모시지 못하였습니다. 사실이 그렇잖아요. 여러분, 그런 관점에서 성경을 자세히 보세요. 신랑 신부를 갖추지 못하면 영계에서도 빠집니다. 이 사람의 말이 그럴 것 같다가 아니라 그렇다는 것입니다. 사실이 그래요.
우리는 예수님과 하나님에게 맺혀진 한을 풀어드려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6천년 동안 하늘땅에 곡절을 사무치게 한 것이 우리의 선조들이요, 우리들이니, 끝날의 우리들은 이것을 해원해 드리기 위해서 나서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이 하늘과 땅은 내 것이야.’ 할 수 있는 무엇을 가져야 합니다.
아무리 사탄 장군이 와서 아니라고 우겨도 ‘이러이러하기 때문에 하늘땅은 내 것이야.’ 하고 증명할 수 있는 자료를 가져야 됩니다. 이것을 갖지 못하는 한 하늘의 주권시대가 올 수 없습니다.
지금의 때는 세계적인 때입니다. 하나의 세계를 지향해 나가고 있는데, ‘하늘땅은 영원히 내 것이야.’ 하고 주장할 수 있는 자가 나와야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주장을 가지고 오시는 분이 재림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를 모셔야 됩니다.
그러면 그 재림 예수님을 만나 가지고는 무엇을 할 것이뇨? 이 하늘땅만 내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사랑과 아버지의 생명과 아버지의 이념이 내 것이야.’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생명과 하나님의 이념이 내 것이 된 후에라야만 세계는 자리잡고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예수 믿습니다.’ 한다고 해서 6천년 동안 하나님과 예수님을 대하여 싸우던 사탄이 부들부들 떨면서 도망갈 것 같아요? 천만부당한 생각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대해 싸우고 있는 사탄이 여러분이 예수 믿는다고 해서 도망갈 것 같습니까? 예수님의 심정을 통하고 하나님의 심정을 통해야 도망간다는 것입니다. 암만 예수를 믿는다고 해도 소용없습니다.
이 하늘땅은 내 것이라는 신념을 일으켜 줄 수 있는 그 무엇이 없다 할진대는 또 가야 됩니다. 통일교회에 없으면 또 찾아야 돼요. 어떤 교단에서 그런 신념을 일으켜 주지 못하고 확실한 기준을 세워 주지 못하는 한 그 교단 혹은 그런 자리를 박차고 넘어가야 됩니다. 원칙이 그렇습니다. 하늘땅을 ‘내 것이야’ 할 수 있는 내용을 가진 하늘의 아들딸들이 있어야만 이 세상이 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참소하던 사탄, 아브라함을 유린하던 사탄, 모세를 중심삼은 60만 대중을 몰살시킨 사탄, 예수 이후 지금까지 기독교인들을 학살시킨 사탄을 하나님 앞에 끌고 가서 심판을 해야 됩니다. 사탄한테 끌려가 하나님 앞에 심판받지 말고 사탄을 끌어다가 ‘하나님, 왜 이 사탄을 지금까지 살려 놓았습니까? 이놈을 인류역사에서 뽑아 버립시다.’ 하는 아들딸이 나오면 하나님은 통곡하면서 ‘오냐, 내 아들딸아.’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선조들이 사탄에게 참소받아 가지고 유린당하고 학살의 제물이 되어 나온 한을 풀어야 하는 것이 기독교 신도요, 도의 길을 가는 사람이라 할진대 그들은 이 사탄의 정체를 해명하여야 되고, 역사적인 하나님의 심정과 시대적인 하나님의 심정, 미래를 걱정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눈물 흘리시며 ‘오! 내 아들딸아.’ 할 수 있어야만 이 세상은 돌아간다는 거예요.
그런 입장에서 ‘세상은 내 것이다, 우리 것이다.’ 할 수 있는 무리가 어디 있느뇨? 사람이 언제 한번 하늘땅을 주관해 보았어요? 끝날이 가까워 하나의 세계를 지향하니, 아담 해와에게 축복했던 그 뜻을 실현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둘이 싸웁니다. 이는 최고의 시대가 왔기 때문입니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지어 넘어가야 할 때가 앞으로 올 새 시대입니다. 그때는 싸움이 없는 시대입니다.
그러면 이 하늘땅도 내 것이고, 이 모든 산천도 내 것이기 때문에 풀 한 포기도 내 것으로 사랑할 줄 알아야 됩니다. 나무 한 그루도 사랑할 줄 알아야 되고, 흙 한 줌을 대하여도 얼마나 슬퍼했느냐고 하며 사랑할 줄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얼마나 불쌍합니까? 또 이 인류는 얼마나 불쌍합니까? 하늘땅의 모든 존재를 규합시켜 가지고 온 천주를 대신하여 하나님을 위로해 드릴 수 있는 자가 아니고는 예수님이 찾고 있는 신부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하늘땅만이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생명, 하나님의 이념까지도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자리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야만 이 땅을 찾기 위하여 수많은 고생을 했던 하나님의 마음을 살필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나오면 이 땅의 주인을 복귀하기 위하여 이념에 굶주리고, 심정에 굶주리고 생명에 상처를 입은 하나님도 기뻐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을 잃어버렸으니 한 사람을 찾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새로운 주의가 여러 사람이 종합해서 나온 것입니까? 역사가 그래요? 여러 사람이 합동으로 ‘우리 이러이러한 주의를 만들자.’ 해 가지고 세운 주장이 역사를 지배한 적이 있어요? 새로운 주의는 한 사람에서부터 출발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소원은 무엇이뇨? 에덴에 우리의 조상을 만물의 주인으로 세우고, 하나의 심정, 하나의 사랑, 하나의 이념과 하나의 생명을 갖춘 하나님의 불변의 대상으로 세우려 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창조목적인 것을 여러분이 알고 있습니다.
그런 한 분을 택하게 되니 독생자입니다. 독생자는 둘이 있을 수 없어요. 우리 인류의 조상이 그런 하나의 대상이 못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을 갈래갈래 찢어 놓았던 것입니다. 이것을 다 수습하고 이것을 종합해 가지고 ‘아버지, 역사적인 아버지의 모든 심정을 다 알았고 내가 이러한 위치에 섰습니다.’ 할 수 있는 아버지의 대신 존재가 나와야 합니다. 잃어버릴 때도 하나에서부터였으니 찾을 때도 하나로부터 찾는 것입니다. 이것이 역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끝날에 처해 있는 우리들은 이런 관점에서 세계를 관찰하고 역사의 흐름을 관찰해야 됩니다. 역사를 보면, 과거는 국가주의시대요, 땅주의 시대였습니다. 일개 국가나 민족이 국토를 중심삼고 싸운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시대는 사상주의 시대입니다. 앞으로는 심정주의 시대입니다. 역사는 그렇게 진전되고 있어요.
복귀의 역사이기 때문에 과거에는 땅 빼앗기, 즉 몸 빼앗기 싸움을 했고, 지금은 마음 빼앗기 위한 싸움의 시대이고 사상주의 시대와 정신주의 시대입니다. 그 다음에는 마음과 몸이 하나되어 한꺼번에 부딪칠 수 있는 심정주의 시대입니다. 역사는 그 시대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도를 믿는 사람들은 아직까지 세계적인 운동에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국가가 동원되고 모든 사상, 주의가 동원되어 직접 세계를 움직이고 있으되 아직까지 도의 세계 사람들은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도의 세계 사람들이 등장할 때가 오나니 그때 하나님의 심정을 붙들고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심정을 붙들고 운행할 때가 와요. 마음은 왔다갔다하지요? 마음은 왔다갔다하기 때문에 좌우주의입니다. 그러나 심정은 둘이 아니고 하나입니다. 그 하나의 심정을 상대로 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이니 사랑을 다리 놓지 않고는 하나님에게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연결시키기 위한 사람이 도인이요, 도인 중에서도 예수님이란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나는 독생자요, 신랑이요, 너희는 신부,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신 뜻이 다른 데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내 마음이 왔다 갔다 하는 모순권 내에서 빠져 나가려야 나갈 수 없고 움직이려야 움직일 수 없는 처지에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를 대신하여 시대를 대신하여 미래를 대신하여 사탄을 참소할 수 있는 검사(檢事)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한을 푸시옵소서’ 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찾아 나온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존재.
온 피조만물이 바라는 것은 이러한 주인이 나오면 그 주인을 중심삼고 하나님과 종적인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그 종적인 관계를 중심삼고 하나님의 생명이 연결되고, 하나님의 이념이 연결되고, 하나님의 사랑이 연결된 천적인 통일우주가 되면 사탄이 주관하던 세계는 끝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심정의 안식처를 갖고, 하나님과 더불어 생명의 안식처를 갖고, 하나님과 더불어 이념의 안식처를 갖고 하나님을 위해서 권한을 행사해야 할 피조물인 연고로 모든 만물은 그날을 향하여 움직여 나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존재물은 하나님을 모시기 위하여 달려 나왔다는 것입니다.
과거로부터 달려 나온 그것을 이어받아 가지고 달리는 어떠한 선지자가 있으면 박수를 치면서 잘 달려 주기를 고대하고 있는 것이 영계(靈界)입니다. 과거에 아브라함이 다 뛰었느냐?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뛰다가 남은 부분을 우리 자신이 뛰어야 합니다. 아버지를 향해 뛰어야 합니다. 뛰는 데는 원수들에 의해 쓰러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잖아요, 여러분? 그런 놀음이에요.
더 나아가 이것을 이어받은 사람에게 잘 뛰라고 박수를 쳐야 할 것입니다. 영계에 가 있는 수많은 선한 사람들은 그곳을 간절히 바라고 있고, 여러분의 마음도 그곳을 향해서 움직이기 때문에 ‘선의 세계가 오면 얼마나 좋을고.’ 하는 마음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4천년 동안 달려오다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뛰었습니다. 뛰는데 그 백성들이 ‘잘 뛰시오, 잘 뛰시오.’ 했습니까? 영계에 있는 수많은 선지들은 ‘잘 뛰시오.’ 하고 권하고 있는데, 지상에 있는 택한 선민들이 창을 들고서 달리고 있는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그래 놓고도 잘 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죽으러 왔다고요?
그리하여 쓰러진 예수님은 자기 대신 성신을 보내 가지고 ‘내 대신 달려주소.’ 하는 것입니다. 역대의 선지선열들과 하나님도 ‘성신이 책임을 지고 달려 주소.’ 합니다. 언제까지? 아버지 만날 때까지. 달리는 성신의 뒤를 바라보면서 한탄하고 있는 예수입니다.
만반의 준비를 다하여 무한히 달릴 수 있는 하늘의 아들딸들이 나와야 할 때가 끝날입니다. 여러분은 성신의 그 음성을 붙들고 목표를 향해 달릴 수 있는 신념이 서 있느냐,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어때요? ‘아버지, 어떤 일이 있더라도 달려가겠습니다.’ 해야 합니다. 알고 보니 이 판국이라는 것입니다. 이 길을 나선 사람이 뭐 바라볼 것이 있어요? 다리가 부러지든지 어떻든 간에 그 기준을 향하여 달려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연결 지어 가지고 역사적인 뜀뛰기노정을 종결짓는 것이 하늘땅의 소원입니다.
기독교가 2천년 동안 수고한 것은 고마운 일인데, 기독교를 대신하여 성신을 대신하여 뛸 자는 어디 있느뇨? 성신이 불쌍하잖아요? 예수를 대신하여 뛸 자는 어디 있느뇨? 하나님 대신하여 뛸 자는 어디 있느뇨? 그러한 자가 나왔다 할진대 하나님이 ‘야, 이놈아, 이 망령된 자식아.’라고 하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신 대신, 예수님 대신 뛰어 주고, 역사와 시대와 미래를 대신하여 뜀뛰기해 줄 수 있는 하늘의 정병이 나오기를 하나님이 얼마나 고대하고 계시는가를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최후의 종착점을 향하여 달려야 할 무리들입니다. 한국 백성이 비록 천하고 불쌍한 자리에 있을망정, 하늘의 심정을 통하고 하늘을 대신하여 달려 나오는 예수와 성신의 심정을 받들고 일선에 나서서 달린다 할 진대 그로 말미암아 세계를 지배할 수 있을 것입니다. 틀림없습니다.
많고 적고가 문제가 아닙니다. 구경하는 사람이 문제가 아니에요. 경기장에 구경하는 수억만 군중이 있어도 그걸 안 봐요. 자기편에서 달리고 있는 그 한 사람만 바라본다는 거예요.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영계에서 구경하는 수많은 사람들보다도 땅 위에서 달리는 한 사람을 바라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구경꾼이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여러분, 구경꾼 같은 신자가 많습니다. 그것은 다 흩어져요. 안식처와 관계없고 복이나 상과 하등의 관계가 없습니다. 한 분을 위하여 심정을 기울이고 마음 졸이고 피 살이 약동하는 그러한 무리를 찾으십니다. 하늘은 그가 기뻐하면 같이 기뻐합니다. 세상에서도 그렇잖아요?
역사의 흐름에 있어서 종교적인 올림픽 대회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진리나 말씀은 얼마든지 하늘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마음속에 진리가 없어서 걱정하는 줄 알아요? 진리는 무궁무진해요. 하나의 실체(實體)가 없어서 걱정이에요. 하나님의 심정을 가진 하나의 실체가 나와 ‘아버지’ 할 때 ‘오냐, 내 아들딸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역사의 한(恨)을 대신하여 슬퍼하고 새 나라의 출발을 기뻐하며 ‘아버지 수고하셨습니다.’ 할 때 ‘오냐. 수고하였구나.’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지상에 나타나지 않는 한 이 땅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양심적이요, 도를 믿는 사람들이 이런 무리를 옹호하고 협력합니까? 원수의 편에서는 그런 무리를 총검으로 찌르려고 할 것이고, 어떤 사람이라도 거꾸러뜨리려고 할 것입니다. 서글프고 외로운 하늘의 경주에 이 지상에서는 한 사람밖에 안 뛰었습니다. 사탄의 경주에는 수억만 군중이 달렸으되 하늘 경주에 달린 사람은 한 사람이었습니다, 한 사람. 동지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발길에 차이고 쓰러지는 경주마당에서 한 사람이 달렸습니다. 이것을 바라보는 영계는 분해하고 원통해 했습니다. 땅 위에 사무친 이 한을 풀고 원수들의 모진 화살을 받아가면서도 이 길을 달리어 하나님을 중심삼고 골인할 수 있는 하나의 주인공이 나와야 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본연의 사랑, 하나님의 본연의 생명, 하나님의 본연의 이념, 하나님의 본연의 주권이 이 지상에 자리를 잡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 땅을 내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까? 생각하지 못했다면 여러분은 하늘의 역적입니다. 이 땅은 민주주의의 것도 아니요, 공산주의의 것도 아닙니다. 내 것입니다. 내 아버지 것이에요.
세계 인류의 마음은 행복의 동산을 향해 움직여 나가고 있습니다. 그 마음은 사랑을 중심삼고 안식하고, 생명을 중심삼고 안식하고, 이념을 중심 삼고 안식하고, 주권을 중심삼고 안식하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지금 그런 것을 중심삼고 안식해요? 어느 때, 어느 누가 그것을 빼앗아 갈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내 생명을 어느 누가 빼앗아갈지 모르기 때문에 기도해야 하고…. 우리는 그렇게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잘났다고 해도 권한에 대한 공포, 이념에 대한 공포, 생명에 대한 공포, 심정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타락의 선물입니다. 이것을 걷어치우고 하늘의 심정과 생명과 이념을 중심삼은 주권시대가 올 것입니다. 그 시대가 오기 전에 우리는 이 시대에 그런 기준을 갖추어야 되겠습니다. 그래야만 그 시대를 맞을 수 있지, 준비하지 않고 맞을 수 있겠어요? 하나님이 준비해 놓았다고 해서 맞을 것 같습니까?
이제 끝날이 되어 오매, 그런 무리가 땅 위의 어느 한 곳에라도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사람도 그런 것을 알았기 때문에 욕을 먹고 쫓김을 받고 별의별 일을 다 겪으면서도 나오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극히 불쌍한 자들입니다. 그러기에 때로는 ‘분함을 참고 나가라, 하나님이 분하다. 억울함을 당해라.’ 합니다. 입이 있어도 말을 못 해요. 말할 수 있는 입이 없고 마음이 없어서 그러는 게 아니에요. 기필코 한 때가 옵니다. 이 땅과 이 주의를, 이 생명과 심정을 처리할 때가 있거늘, ‘아버님 그 한 날까지 참아 주시옵소서.’ 하고 하늘을 억제시켜 나가는 아들딸들이 땅 위에 많이 나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끝날에 모여야만 하늘땅이 비로소 하나님 모시고 안식의 자리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어찌 하오리까? 불신의 땅을 위하여 얼마나 수고하셨습니까? 불신의 땅을 향하여 얼마나 한탄하셨으며, 배반의 종족을 대할 때마다 얼마나 억울하셨습니까? 감히 알 만하나이다.
하늘의 깊은 성상(性相)을 바라보지 못하는 저희들이 밟히고 피눈물이 어리는 행로를 걸을지언정 한스러울 것이 어디 있겠나이까?
죄라면 아버지를 안 죄였고, 남모르는 가운데 아버지와 인연되어 있다는 것이 죄일 것입니다. 하늘이 좋다 하는 길이기에 낙심할 수도 없는 것이요, 분히 여길 수도 없는 사정임을, 아버지, 잘 아옵니다. 역사노정이 그러하였다는 사실을 알기에 감사하옵니다. 역사적인 아버지가 그렇다는 것을 알려 주시니 감사하옵니다. 시대적인 아버지가 이렇다는 것을 알게 되니 감사하옵니다. 미래를 위하여 염려하신 아버지에 대해 감사하옵니다.
아버지를 모시기 위한 역사의 노정이옵고, 아버지를 모시기 위한 피조만물임을 인간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아버지를 모셔 놓고, 유일한 아버지의 사랑과 더불어, 불변한 아버지의 사랑과 더불어 영원한 아버지의 생명과 이념과 주권을 노래할 수 있는 한 날이 천지간에 오기를 얼마나 고대하였습니까?
저도 이 길을 알았기에 이 길을 가고 있사온데, 이 길을 가는 자의 뒤를 따르고 있는 이들은 불쌍한 자들이옵니다. 이러한 저희들을 누가 위안하여 주며, 누가 권고하여 주겠습니까? 주위 사람 중에 저희들의 편이 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외롭다면 저희와 같이 외로운 자가 어디 있으며, 하늘이 없고 아버지가 없다면 저희와 같이 억울한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말할 것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고, 분하여도 분한 것을 표시 못하는 하늘의 심정을 알고, 오늘 이때까지 나온 저희들을 때와 시기는 무시하고 영원히 버려두지 않을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오늘 이 길을 가는 사람들 가운데 지친 자기 있사옵니까? 조금 남은 때를 힘차게 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허덕이는 자가 있사옵니까? 멀지 않은 장래에 아버지의 음성이 들려옴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은 과거에 아버지 앞에 너무나 불충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붙들고 울다가 죽은들 어찌 한이 되겠습니까? 뜻을 위해 밟히고 피와 살을 에이고 피눈물을 흘린다 할지라도 어찌 분함이 있겠습니까? 이미 작정한 몸이었사오니 아버지 뜻을 이룬다 할진대는 못 할 일이 어디 있사오며, 못 갈 길이 어디 있겠습니까?
오늘 여기에 모인 당신의 아들딸들, 이 하나의 소원 성취를 위하여 죽든지 살든지 그 자신을 제물로 바치겠다 하고, 아버지께 생명을 돌려드리겠나이다 하는 하늘의 참다운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가짜들이 많습니다. 참것이 없는 이 땅에 참다운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남겨 놓은 십자가의 고개를 넘기에 힘이 부족하거든 아버지를 앞에 세우고 달음질칠 수 있는 하늘의 정병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은 갈 길을 이미 알았사옵고, 하늘의 참사랑과 생명과 이념과 주권이 저희를 위하여 오고 간 것을 알았사옵니다. 그것을 향한 길이 인류가 사는 길이요, 역사적인 우리의 선조들이 간 길이요, 시대적인 우리의 동지들이 가야 할 길이요, 미래의 우리의 후손들이 가야 할 길이옵니다. 그 길을 가는 것이 복의 원천이라 할진대 사탄 대하여 늠름하고 자신 있게 진군할 줄 아는 아버지의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올 때,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아버님! 저희들을 긍휼히 보시옵소서. 역사노정에 아버님이 원하시는 한 사람이 필요했던 것을 알았사옵고, 한 가정이 필요했던 것도 알았사오며, 한 민족, 한 국가, 한 세계를 목표로 아버님께서는 친히 섭리해 나오신다는 것을 알았사옵나이다. 그러나 이 땅 위에는 아버지의 영원한 사랑을 통할 수 있는 참다운 한 사람이 없사옵고, 가정도 없사오며, 민족도, 국가도, 세계도 없사옵나이다.
이런 것들을 찾기 위하여 지금까지 섭리해 나오신 아버님의 수고 앞에 이 땅은 소원하시던 환경의 터전이 되지 못하고 실적을 갖춘 인류가 못된 것을 생각할 때, 진정 저희들은 아버지 앞에 얼굴을 들 수 없는 죄악의 후예인 것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사옵나이다.
원하옵건대 이 몸 마음이 당신께서 바라시는 한 아들딸로 세워지는 그 날이 심히도 그립사옵고, 하나의 가정을 찾으시려는 아버지 앞에 그와 같은 자리에 나아가기를 심히도 원하옵나이다. 저희가 이러하거든 아버지의 마음은 얼마나 더 간절하시겠사옵니까?
아버님께서는 지금까지 바라시는 한 존재가 없는 가운데서 6천년이라는 기나긴 세월 동안 하늘 앞에 염려를 남긴 이 인류를 다시 찾기 위하여 싸워 나오셨사옵니다. 억천만년이 걸리는 한이 있다 할지라도 참다운 아들딸을 찾기 위해 허덕이셔야 할 아버지이심을 알게 될 때, 하늘 앞에 너무나 불충했던 저희들임을 직고(直告)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아버지, 이런 저희들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땅 위에는 수많은 인류가 살고 있사오나 당신의 아들이라 할 수 있는 자가 누구이며, 당신의 딸이라고 할 수 있는 자가 누구이옵니까? 당신의 아들딸을 위하여 지었다 할 수 있는 만물이 있사옵니까? 억울하신 아버지, 몰리고 몰리는 슬프고 외로운 자리에 계신 아버지를 저희들만이라도 알아 드릴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여기에 나온 것은 땅 위의 어떤 영광을 바라고 나온 것이 아니라, 슬프신 아버지의 아들딸이 되기 위함이옵고, 억울한 하늘 가정의 식구가 되기 위함이옵니다. 그런 연고로 저희의 가는 길이 슬프고 억울하고 외로운 길이며, 훼방받는 길, 몰림받는 길이라 할지라도, 아버지께서 역사 노정을 그렇게 오셨기에, 이런 길은 아버지의 아들딸이 되기 위한 입장에 있는 저희들로서는 응당 가야 할 복귀노정인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먼저는 아버지의 것으로 드릴 수 있는 한 날, 저희에게 속한 일체를 아버지 것으로 드릴 수 있는 한 날, 저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아버지의 세계로 바뀔 수 있는 한 날을 심히도 그리워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고, 그 한 날까지 저희의 모든 것을 희생하여서라도, 싸우고 또 싸워서라도, 쓰러지고 또 쓰러지더라도 싸움의 대열에 서서 아버지와 더불어 참으며 싸워 나갈 줄 아는 아들딸들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날 무슨 말씀을 하오리까? 아버님, 저희 자체들로서는 아버지 앞에 드릴 아무것도 없사옵니다. 아버지를 바라볼 수 있는 그 무엇도 준비하지 못한 염치없는 저희들이오나 저희들의 주위에 원수들이 있는 연고로, 이를 깨물고라도 아버지를 부르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있사오니, 아버지 긍휼히 보시옵소서. 이 한 날 아버지시여, 새로운 말씀을 허락하여 주시옵고 권고의 말씀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이 한 날에 허락하신 은사를 붙들고 하늘의 아들딸의 위신을 세우고, 체면을 세울 줄 아는 저희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더욱이 갈 바를 알지 못하고 허덕이는 수많은 인류를 축복하여 주시옵고, 불쌍한 민족을 축복하여 주시옵고, 불쌍한 교단을 축복하여 주시옵고, 몰림의 길에서 쫓기고 있는 외로운 식구들을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심정을 통하여 아버지의 영광을 노래할 수 있으며, 아버지의 사정을 통하여 사탄과의 싸움터에 나설 수 있는 아들딸이 이 천지간에 많이 나타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늘도 이 일을 위하여 쉬지 않고 협조하신다는 것을 아오니, 하늘땅이 보조를 맞추어 승리함으로 말미암아 복귀의 한 날을 맞이하여 새 천지를 세울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바라오며, 남아진 모든 것을 주관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제 말씀을 전하고자 하오니 친히 주관하여 주시옵고, 전하는 자의 모든 것과 받는 자의 모든 것이 아버지의 심정을 통하여 얼크러지게 하여 주시옵고, 어떠한 주의 주장, 어떠한 관념, 자기의 어떠한 의식을 중심삼고 하늘 앞에 서지 말게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어린 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본심이 우러나는 심정으로 아버지의 현현하심을 노래하고 나타나시는 아버지를 환영할 수 있는 화동의 심정터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릴 때, 주님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이 시간에는 ‘모든 것은 선악의 싸움터를 넘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모든 만물은 선악의 싸움터를 넘어서야 한다’ 이러한 제목을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들은 타락한 조상의 후손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타락했다는 말을 인정한다면, 자기 자신이 어떤 영광의 조건이나 가치적인 무슨 조건을 갖고 있다 하여도 그것 역시 타락권 내에 속한 것임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 자신들이 마음으로 혹은 몸으로 느끼는 행복감, 혹은 희망에 넘치는 소망을 갖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 역시 타락권 내의 소망이요, 타락권 내의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생활을 영위해 나가는 우리들 자체도 역시 타락권 내에 머물러 있는 자체인 것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생명이 이러하고 우리의 이념과 행복의 요소가 이러한 입장에 처해 있기에, 이 환경에서 그냥 그대로 있어 가지고는 타락의 한을 벗어 버렸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냥 이대로의 나 자체를 가지고 행복한 세계 혹은 이상세계의 나라고 자처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인간은 너나할 것 없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방황하고 또 방황하면서 역사를 엮어 나오고 있습니다. 때로는 이렇게 몰리고 때로는 저렇게 몰리고, 이렇게 찢기고 저렇게 밟히면서 피로 물들이는 처참한 역사노정을 거쳐오는 것입니다.
이렇게나마 걸어 나오는 인류의 행로, 혹은 역사의 이 흐름은 어디로 가기 위해 이렇게 흘러가는고? 한마디로 타락으로 말미암은 이 한스러운 역사와 세계를 넘어서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행복스럽게 살고 있다고 자부해도 타락권 내에 살고 있습니다. 본래의 생명은 그렇게 살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런 고로 이 세계에 살고 있는 인간이나 피조만물도 ‘어떻게 하면 이 세계를 넘어설 수 있을 것인고?’ 하며 이 고통권 내에서 목숨을 걸고 애쓰면서 뒤넘이쳐 나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인 것을 우리들은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인간에게 행복이 있고 어떤 이상이 있고 참다운 생명의 기쁨이 있다 할진대 그것은 언제 이루어질 것인고? 오늘날의 이 타락권 내의 행복이나 이상, 혹은 기쁨이 아니라 타락권을 밟고 올라서서 ‘나는 과연 하늘과 땅 앞에 자신할 수 있는 생명, 영원한 생명을 얻었으며, 영원한 행복의 동산, 영원한 이상동산에 섰다.’ 할 수 있는 그 한 날을 맞은 후에야 참된 행복, 참된 이상세계가 시작된다고 우리는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타락의 구렁텅이를 메우고 밟고 넘어가야 할 운명에 놓여 있는 인간이기에, 여러분의 마음은 이 시간도 달리고 있습니다. 이 시간 여러분의 가정도 달리고 있고 이 민족도 달리고 있으며,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와 천주까지도 달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디를 향하여 달리고 있는가? 한스러운 타락권을 박차고 넘어서기 위하여 달리고 있는 우리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다 할진대 하나님의 목적은 무엇이며, 선이 있다 할진대 선의 목적은 무엇이뇨? 역사상의 선한 사람들이 이 땅에 와서 희생을 당하고 간 목적이 무엇이뇨? 달리고 있는 이 인류가 이 고개를 빨리 넘게 하기 위한 것임을 우리들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인간에게 그 고개를 넘게 하려니 하나님께서는 선한 개인을 보내서 선한 환경을 개척하게 하시고, 선한 이념을 세워 선한 국가 형태를 갖추어서 선한 세계로 이끄시는 섭리를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의 세계는 최후로 하나의 판결을 짓고 넘어가야 할 운명에 처해 있습니다. 세계가 그러하고, 이 나라가 그러하고, 우리의 가정이 그러하며, 우리들 자신이 그러합니다. 또한 이와 더불어 하늘도 다시 넘어가야 할 운명에 있는 때인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넘어가는 데는 어떻게 넘어갈 것인고? 웃고 넘어갈 수는 없습니다. 얼크러진 끈을 끊고야 넘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한꺼번에 넘어갈 수 없습니다. 한 사람씩 넘어가야 돼요. 그렇게 넘어선 자체들이 모여 무리를 이루어서 하나의 가정을, 하나의 민족을, 하나의 국가 형태를, 하나의 세계를 세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이 결론입니다.
여기에 나온 여러분들, 자신에게 자랑할 그 무엇이 있습니까? 생명을 걸고 싸울 그 무엇을 갖고 있습니까? 모두 타락권 내의 것일진대 자랑할 자신의 가치가 크면 클수록 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매인 것이 크면 클수록 크게 걸리는 입장에 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도의 길을 가는 사람들은 다 끊어 버리고 가는 것입니다. 그들의 목적이 나라를 구하고 세계를 구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어찌하여 개인을 끊어 버리고 국가를 끊어 버리고 세계를 끊어 버리고 가는가? 이것이 도의 길을 가는 사람들의 모순된 행로입니다. 그들은 넘어가야 할 한때가 있는 것을 알기에, 단지 그 목적을 위해 가는 것입니다.
넘어가는 데는 치고 넘어가야 합니다. 왜? 이 세상은 청산되어야 할 세상이기 때문에 선한 입장에서 쳐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도의 길은 치고 가는 길입니다.
끝날은 우리의 목전에 다가오고 있습니다. 최후의 심판의 한 날이 다가오고 있거늘, 그 한 순간을 맞아야 할 우리들은 어떤 입장에 서야 될 것인고? 인간 세상에서 자랑하는 사랑, 자랑하는 생명, 자랑하는 이념을 대하여 당당히 비웃고 나설 수 없다 할진대 새로운 승리의 용자로서 사탄의 권세를 박차고 넘어설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됩니다. 역사는 그곳을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것을 넘어가야 되고 우리의 가정도 넘어가야 되고 이 사회, 나라, 이 세계, 천상에 있는 수많은 영인(靈人)들까지도 넘어가야 됩니다. 세상만이 넘어가는 것이 아니고 세상이 넘어가는 동시에 하나님도 넘어가야 되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을 대하여 섭리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고통을 당하면 같이 고통스러워하시고, 인간이 억울함을 당하면 같이 억울해 하십니다. 처지와 입장은 다를지라도 내적 심정은 같은 연고로 하늘도 넘어가야 하고 땅도 넘어가야 됩니다. 이러한 운명에 처해 있는 인류와 하늘이 이것을 넘기 위하여 합동작전으로 허덕여 나오는 것이 오늘날 우리의 신앙노정입니다. 합동작전을 펴기 위한 터전이 오늘날의 종교입니다. 그러니 오늘날의 종교인들은 이 작전에서 승리하여야 할 책임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담이 타락한 이후 이 끝날까지는 어떠한 기간이뇨? 이 기간은 우리가 바라는 기간이 아닙니다. 이 기간을 빨리빨리 단축시키고 해결지어야 합니다. 쓸데없는 기간이에요. 그러기에 양심을 가진 자는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참을 바라는 자는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이러한 세상이 어서어서 지나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 흑암의 세상, 공포에 휩쓸려 고난 가운데서 허덕이는 이 세상이 어서 지나가기를 27억 인류는 너나할 것 없이 고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류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하늘도 그렇습니다. 하늘도 고대하고 인류도 고대하고 있기 때문에, 이 세계를 청산하고 넘어가게 하는 것이 도(道)입니다. 빨리 이기고 넘어가게 하는 것이 오늘날 종교가 해야 할 일이며, 여기에 방해되는 무엇이 있다 할진대 종교인은 이것을 공격하고 무찌르는 일을 단행해야만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오관(五官)을 통하여 이 세계의 만상(萬象)을 바라보고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현상을 바라보기도 하는데, 그 보이는 만물을 바라볼 때 우리는 무엇을 느껴야 될 것이뇨? 어떤 존재든 선악의 싸움터라는 것을 느껴야 됩니다. 선과 악의 싸움의 노정을 거쳐야 되는 것을 느껴야 돼요.
하나님은 이 땅과 하늘을 찾기를 원하되 이 땅은 그냥 그대로 찾을 수 없습니다. 왜? 일대 청산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땅의 인류는 하나님 앞으로 한꺼번에 상속되고 싶되 그냥 그대로는 되지 않습니다. 왜? 더럽혀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청산해야 됩니다. 이 땅에서 자라고 있는 풀 한 포기도 선악의 싸움터였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여러분이 입고 있는 옷 한 벌에도 역사적인 선악의 싸움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보고 듣고 느껴지는 모든 것, 또 이 땅의 조그마한 물건 하나까지도 하나님과 사탄이 대결하는 그날부터 선악의 싸움터에서 소유가 좌우되게 되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제물을 통하여 물질을 걸어 놓고 싸우셨습니다. 그 물질은 만물을 대신한 것입니다. 만물이 싸움터가 되는 날부터 하나님께서는 그 만물을 붙들고 사탄의 참소를 받지 않을 한 날을 소원하셨으나, 아직까지 그날을 맞지 못하셨습니다. 그 다음에 사람을 싸움터로 세우셨는데, 그 대표자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였습니다. 예수를 걸어 놓고 하나님은 사탄과 싸우셨던 것입니다. 거기에서 승리하여 예수를 하늘 편으로 이끄실 때에 하나님은 사탄의 참소를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렇듯 만물로부터 오늘날까지 왔다간 인류 전체는 선악의 싸움터에서 좌우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 몸도 그러하고 우리의 마음도 그러하며 우리의 심정도 그렇습니다. 지금 아무리 좋은 무엇을 가졌다 할지라도 거기에는 사탄이 참소할 수 있는 조건이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몸과 마음이 아무리 귀하다 해도 그것은 아직까지 사탄이 참소할 수 있는 싸움터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기에 철두철미한 관(觀)을 세워 놓고 눈에 보이는 만상에는 지금 이 시간에는 선악의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잡는 하나의 물건에도 선악의 싸움의 조건이 있어서 지금 이 시간에도 싸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소원이 무엇일 것인고? 지으신 피조만물 전부가 이러한 싸움의 조건에 걸려 있으니, 이러한 전체를 넘겨 놓고 사탄이 참소하지 못하고 돌아서는 한 날을 보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싸워 나오신 목적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아직까지 그날을 보지 못하셨습니다.
여러분은 땅 위에서 하늘을 대신한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책임을 짊어진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인고? 선악의 조건에 걸려 있는 만물을 끌어다가 사탄의 요소를 몰아내고 하나님 앞에 돌려놓아야 합니다. 인간 복귀를 하기 전에 만물 복귀부터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지으시기에 앞서 먼저 만물을 지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내 한 자체가 나서기 전에 내게 있는 전부를 사탄 앞에 내놓고 싸워 승리하여, 취한 만물을 하나님 앞에 세워 놓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는 물질을 갖고 싸워 나오고 있습니다.
오늘날 도를 믿고 기독교를 위주로 한 모든 민주 진영은 사탄과 싸워 이 세계의 모든 경제력을 하늘 편으로 돌려놓아야 합니다. 원칙이 그렇습니다. 하늘 편으로 돌려놓아야 해요. 그러지 못하면 사탄에게 들이 맞습니다. 사탄에게 끌려갑니다. 그러면 경제력을 하늘 편으로 돌려놓고는 무얼 할 것이냐? 선한 사람에게 분배해야 되는 것입니다.
물질을 하나님 편으로 돌려놓으려면 사탄이 관계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끊어 놓아야 됩니다. 그런 다음에는 내 몸을 돌려야 하는데, 이 몸은 마음을 위주로 하여야만 돌릴 수 있습니다. 이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 가지고 본연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기준에 서지 않으면 몸을 돌려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사탄이 몸을 붙들고 있기 때문에, 마음을 중심삼고 이 몸을 돌려놓을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지금 사람들은 이념을 중심삼고 사람을 빼앗기 위한 싸움, 몸뚱이를 빼앗기 위한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이념은 정신을 상징하는 것이요, 마음의 세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온 세계를 품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이런 마음, 즉 이념을 중심삼고 사람 빼앗기 싸움을 하고 있어요.
이러한 때 우리가 사탄으로부터 몸을 빼앗아 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이뇨? 사탄이 갖지 못한 이념을 갖고 나타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변하는 과정에서는 어디까지나 사탄이 침범할 수 있습니다. 변화 발전하여 다른 형태를 갖추려 하는 것은 변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사탄이 간섭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변해 나가는 과정에서는 어떠한 것도 사탄의 침범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날 사회에서 어떠한 선악의 기준을 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선악의 기준은 각 국가나 민족마다 다릅니다. 그래서 이 선악의 기준은 영원히 변치 않는 주권시대를 맞이하기 위해 자꾸 변해 가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인간이 사탄세계에 있는 몸을 빼앗아 하늘 앞에 드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변하려야 변할 수 없고 동요되려야 동요될 수 없는 영원한 하나의 이념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악한 세계에 그 이념을 세워 놓고 사람을 빼앗아 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세계에는 변할 수 없는 하나의 이념이 없습니다. 그런 고로 변할 수 있는 마음의 바탕을, 움직이는 이 마음을 변할 수 없는 이념에 접붙이기 전에는 이 몸뚱이가 돌려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 이 몸뚱이를 사탄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탄이 침범하는 자리는 변할 가능성이 있는 자리입니다. 변할 수 있는 자리에 사탄이 침범할 조건이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양심이 사모하는 이념이 하늘땅이 변해도 변할 수 없는 이념이라면 마음은 돌아갑니다. 마음은 돌아가요.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인류가 물질을 하늘 편으로 끌어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민주 진영에 변할 수 없는 이념이 있어서, 세계가 그 이념을 중심삼고 돌아가야 가능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몸뚱이도 하늘 앞에 찾아질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인류는 물질을 걸어 놓고 싸워왔습니다. 몸뚱이를 걸어 놓고는 하늘땅을 대신한 양심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싸웠습니다. 그런데 다음에는 변하지 않는 마음을 중심삼고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심정을 소유해야 최후의 결판이 납니다.
물질을 찾고 몸을 찾고 마음을 찾고 그 다음에 심정을 찾아야 이 땅은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잘났다고 해도 그러한 조건에 틀림없이 걸려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주의가 나와 있다 해도, 인간들이 그 주의를 중심삼고 죽음의 자리를 체휼할 수 있고 마음 세계까지 좌우하는 이념도 지배할 수 없는, 심정이 응결된 한 장소를 갖춰 놓지 않는 한 싸움은 끝나지 않습니다. 선악의 싸움은 끝나지 않아요. 또한 우리가 사탄으로부터 물질을 빼앗아 하나님 앞에 돌려드리고, 몸을 빼앗아 돌려드리고 마음을 빼앗아 돌려드려야 하는데, 이 마음을 돌려드리기 위해서는 아무리 변하지 않는 이념이 있다 해도 그저 좋아해서만은 안 됩니다. 그 이념 깊이 스며있는 심정문제에 들어가 심정이 통하는 자리에 서야 하나님이자 나요 나자 하나님이요, 하나님의 것이자 내 것이요 내 것이자 하나님의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심정을 연결시킬 때에 지금까지 드려온 물질 몸 마음 전부가 하나로 통일되어 하나님 앞에 최고의 것으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제물을 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원수를 갖고 있습니다. 여러분 앞에 보이는 물질이 원수요, 여러분의 몸이 원수입니다. 이것들이 사탄의 제물이 될 수 있는 조건이에요. 죄가 무엇입니까? 사탄이 침범할 수 있는 조건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왔다 갔다 하는 것도 원수입니다. 한 번 선이면 선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악한 자리에 들어간 사람은 마음이 자꾸 돌아섭니다. 가야 할 텐데 가야 할 텐데 하면서도 하루에 몇 번씩 변해요.
선과 악의 구별은 단번에 할 수 있습니다. 악한 자리에 있으면 마음이 자꾸 그 자리를 떠나려고 합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변하는 것은 악이에요. 변하지 않는 것이 선입니다. 변하는 세계에서 그래도 덜 변하는 것이 하늘 앞에 가까운 것입니다. 그러니 변하는 이 마음, 이 원수를 물리쳐야 됩니다. 변할 수 있는 이념이 나오면 그 이념도 쳐부숴야 됩니다.
어떠한 종족을 중심삼고, 어떠한 민족을 중심삼고, 어떠한 종교를 중심 삼고 나왔든지 그것이 본연의 양심과 심정을 규합하여 나온 천륜, 혹은 자연의 궤도에 의해 변하지 않는 형태로 움직일 수 있는 그때에야 비로소 인류는 이상세계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물질이 원수입니다. 이 몸뚱이가 원수요, 이 마음이 원수요, 이 심정이 원수입니다. 왜 자식이 부모를 좋아하는가? 자식을 대하는 부모의 마음이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죽어도 변하지 않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입니다. 하늘을 왜 좋아하느냐? 어떠한 곡절에도 하늘은 변하지 않기에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변하지 않는 것은 최고로서 나타납니다. 보물도 그렇지 않아요? 그러니 변할 수 없는 것, 변하지 않는 자체가 나타나야 됩니다.
여러분이 갖고 있는 모든 것은 원수세계의 이용도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도인들은 물질을 치고, 몸뚱이를 치고, 자기의 욕망을 치고, 자기의 심정을 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면서도 어느 한 때에 더 큰 선한 물건, 더 큰 선한 몸뚱이, 더 큰 선한 양심, 더 큰 선한 심정을 찾아야겠다는 목적이 있기 때문에 도인들은 그것을 향해 달려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탕감복귀역사라고 합니다.
그러면 최후의 날, 끝날이라고 하는 이때에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이뇨? 청산할 곳으로 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질아, 내 앞에 나타나 네 권한을 자랑해 보아라, 나하고 싸우자.’ 하며 일시에 쳐버릴 수 있는 자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몸을 복귀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몸이 머물 수 있어요. 이 몸뚱이가 하늘땅이 변해도 변할 수 없는 이념에 사무쳐 마음 앞에 굴복할 수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의 심정과 인류가 가진 근본적인 심정이 통할 수 있는 변치 않는 심정의 한 핵심이 벌어져야 사탄은 보따리를 싸 가지고 갑니다. 보따리를 싸 가지고 간다는 것입니다.
사실 지금 정적인 출발지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본연의 심정은 하늘에 있고 혈통은 사탄 것이기 때문에, 이 사탄의 혈통을 끊기 위해 하늘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어디 가서 귀결될 것인가? 심정에 들어가서 귀결됩니다. 이념이 최고로 추구하는 목적은 무엇이뇨? 이념을 세운 목적이 무엇이뇨?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오늘날 전세계에 널려 있는 양심을 가진 사람이나 신앙을 하는 사람들이 걸어 나가야 할 최후의 판가리 길입니다.
이런 견지에서 하나님을 바라볼 때 하나님은 가련합니다. 6천년 동안 싸워 나왔지만 오늘날 하나님의 심정을 넘어설 수 있는 한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불쌍하십니다. 6천년 동안 한 몸뚱이를 찾아 나오셨으나 하나님의 심정을 넘어선 몸뚱이가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은 불쌍해요. 이념을 세우기 위하여 수고하셨지만 하나님의 심정을 중심삼은 이념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이 세계가 요모양 요꼴입니다.
이념과 우리 몸뚱이와 만물이 하나님의 심정에 접붙여져 가지고 정리되는 그 순간에 본연의 위치는 결정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물질을 바라볼 때, ‘역사적인 수많은 선한 사람들의 피를 농락한 이 물질아.’ 하며 원통한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자신의 몸뚱이를 바라볼 때는 ‘하늘의 신음을 자아낸 이 몸뚱이야!’, 마음의 움직임을 살펴볼 때는 ‘하나님의 심정을 외면한 마음아!’ 하는 한스러움을 느껴야 됩니다. 지금이 그래야 할 때입니다. 이럴 수 있는 곳이 하나님의 최후의 목적지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이런 것을 우리가 인정한다 할진대 어떤 이념권 내에 들어간다고 할 때에는 물질도 문제될 수 없고 죽는 것도 문제될 수 없다고 하는 이념권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한 이념이 참이념인 것입니다. 어떠한 이상주의가 있다 할진대 그 주의를 위해서라면 ‘물질이 문제가 아니요, 억천만 금은보화가 문제가 아니다. 이 몸뚱이 하나 죽는 것쯤은 문제도 안 된다.’고 할 수 있는 주의라야 합니다.
그 이념 때문에 죽는다고 해서 억울해 하고 분해할 것이 아니라 기뻐하면서 ‘당연히 그래야지.’ 할 수 있는 이념, 이러한 이념이 이 땅 위에 나와야 해요. 기독교가 놀라운 것은 그 때문입니다. 그들이 예수를 붙든 순간에는 오직 예수뿐입니다. 아무것도 개의치 않습니다. 예수를 붙들고 가는 길에서는 죽음도 개의치 않습니다. 문제없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세워 놓으신 이상은 양심의 이념입니다. 이제는 이 양심의 이념을 넘어서 심정의 기준을 세워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나는 신랑이요, 너희는 신부라.’ 하시고 양심의 다리를 놓아 가지고 심정의 세계까지 연결시키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끝날은 어떤 때이뇨? 하나님의 아들 예수와 인간의 심정이 연결되는 때입니다. 그러니 온 세계 인류는 예수의 심정에 접붙여져야 됩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께서 ‘너희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나는 너희의 신랑이요 너희는 나의 신부다.’ 하실 수 있습니다. 왜 그런가? 신부를 찾는 때에는 그것이 세계의 그 어떤 것보다 낫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이념은 세계를 품기 위한 것이로되 심정은 하나님과 전체를 품기 위한 것입니다. 이념이라는 것은 대상세계를 품기 위한 것이요 심정은 주체와 대상을 품는 것입니다. 그러니 심정세계에서 비로소 통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오늘날 우리는 도를 종결짓고 넘어가야 됩니다. 역사의 흐름을 보아 논리적인 추리를 하여 보면 반드시 그래야 되는데, 그러한 입장에서 전체를 대표하여 나타난 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는 세계적인 종교입니다. 그러나 이 기독교에 한 단계 다시 혁명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기독교가 양심적인 이념의 기준에서만 허덕인다면 망합니다. 깨져 나가요. 기독교가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심정을 표방하고 움직이지 못하면 오늘날 민주 진영이 갈 길을 잃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통일교회는 그러한 면을 지향해 나가는 것입니다.
심정을 통하는 자리에서는 하나님 앞에 전체가 자녀요, 전체가 신랑 신부요, 전체가 형제자매입니다. 그러한 권 내에 들어가게 될 때 우리는 식구라는 명사를 세울 수 있습니다. 그러한 한 식구에게는 억천만금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가치가 있음을 알아야 되겠고, 또 그 가치를 귀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의 어떠한 주의나 금은보화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가치로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가치를 아는 사람이 그리워서 도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러한 가치를 알고 그리워하며 살 수 있는 동산을 만들기 위해 수고해 오셨는데 이것이 6천년 복귀역사입니다.
우리는 탄식하여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하늘을 대하여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주고 싶어하신 만물을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 주고 싶어하신 몸을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 주고 싶어하신 마음을 주시옵소서, 아버지만을 대할 수 있는 심정을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를 하는데, 생각해 보면 아버지께서는 주셨는데 우리가 잃어버리고 또 잃어버려 왔습니다. 이것이 타락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선의 물질을 회복해야 되겠고, 선의 이념을 회복해야 되겠고, 선의 심정을 회복해야 되겠습니다. 이것이 인류가 해야 할 최후의 일인 것입니다. 역사는 선의 물질, 선의 이념, 선의 심정이 있는 곳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수많은 민족이 찢기고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민족을 넘고 국가를 넘어서 그곳으로 흘러갑니다.
현세를 바라보면 두 이념이 부딪치고 있는데, 여기에서 하나가 깨지는 날에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이 물질이 내 것이다. 이 세계, 인류가 내 것이다. 이 이념이 내 것이다. 이 심정이 내 것이다.’ 할 수 있는 주인공이 나와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을 자기 것으로 차지할 수 있는 자격자, 인류를 농락하던 사탄, 우리의 양심과 우리의 몸과 우리의 물질을 농락하던 사탄을 대하여 ‘이놈’ 하고 호령하며 심판할 수 있는 사람이 나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어떠한 사람이냐? 기독교에서 말하는 재림시대에 심판의 자리를 피할 수 있는 사람이요, 첫째부활에 참여하는 영광을 차지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배짱들 있어요? 여기서의 배짱은 주먹 가지고 말하는 배짱이 아닙니다. 역사와 더불어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하는 섭리노정에서 사탄이 참소하는 모든 조건을 걷어차고 나설 수 있는 권한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땅 위에서 ‘사탄을 대해 모든 물질을 내놔라.’ 할 수 있는 아들딸이 나오기를 6천년 동안 고대하고 계십니다. ‘미래세계는 우리 것이야, 내 것이야.’ 할 수 있는 무리가 나와야 합니다. 이것은 어떤 인간의 욕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만물을 지은 것은 ‘이것은 내 것이다.’ 할 수 있는 관(觀)이 선 참아들딸을 위해서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우주관이 있어야 합니다. 생활관이 필요한 동시에 우주관이 필요합니다. 세계관이 필요해요. 이 세계관은 무엇이냐? ‘이 세계가 내 세계다.’ 하는 관입니다. 본래의 인간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인간들은 전부 세계주의자들입니다. 못나나 잘나나 모두 ‘내 세계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 세계라고 주장할 수 있는 조건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못 찾지, 그 조건을 갖고 천상에 가서 호소하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이 하늘땅을 내 것이라 할 수 있는 그 주의가 여러분이 가져야 할 주의입니다.
그 다음에는 이 세계에 널려 있는 모든 인류는 한 형제라는 관(觀)이 있어야 합니다. 한 형제라는 관이 있어야 해요. 그래야 하나님이 아버지 노릇을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형제, 이 형제라는 관념을 가지고 ‘이 땅 위의 이념은 우리 집의 이념이야, 우리의 심정은 부모의 심정이야’ 할 수 있으면 세계는 하나됩니다. 종족을 초월하여 하나됩니다. 이러한 세계를 세우지 못하면 어떠한 정치, 어떤 이념도 다 소용없습니다. 끝날인 이때에 모두 깨져 나갑니다.
오늘날 미국이 아무리 경제력을 자랑하고 있지만, 보십시오. 그들이 보따리 싸가지고 전인류에게 나누어 줘야 합니다. 천운이 그렇게 움직여 나가는 것을 그 사람들은 모르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미국이 그거 안 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 대신 창고에 있는 것을 나누어 줘야 된단 말입니다. 그러한 마음 갖지 않고는 욕먹습니다. 미국이 지금 그래요.
이러한 견지에서 오늘날 우리들이 세상을 바라볼 때 이 세상은 둘로 갈라져서 진행돼 나오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날은 어떠한 양상을 나타내고 있는가? 인간 세상에서 귀하다는 가정기준이 깨뜨려져 나가고 있는데, 선진국가들이 더욱 심합니다. 먼저 들이 맞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부모를 압니까, 형제를 압니까, 부부를 압니까, 자식을 압니까? 다 깨뜨려 놓는다는 말입니다. 천운이 그렇게 나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그냥 붙들고는 못 떠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을 볼 때 세상은 끝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이 세상이 망해버리고 말 것인가? 아닙니다. 여기에서 새로운 과정을 거쳐 수습하는 한 곳이 나와야 됩니다. 그래야 생존할 수 있습니다. 그 세계는 물질을 넘고 종족을 넘고 오색인종을 초월하여 ‘내 것인 동시에 네 것이다.’ 하는 세계입니다. 이러한 이념의 움직임이 벌어져야만 세계는 한 곳으로 수습되어 들어갑니다. 그러한 세계에서 우리는 한형제요, 한아버지를 중심삼은 부자의 관계를 이룰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그러한 관계에서 하나님 것이자 내 것이요, 내 것이자 하나님 것이요, 하나님의 기뻐하심이 내 기쁨이 될 수 있는 때가 이 지상에 벌어지기 전에는, 물질에 대한 싸움도, 몸뚱이의 싸움도, 주의의 싸움도, 허덕이는 심정의 싸움도 해결지을 수 없습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다시 한번 과거를 돌아보십시오. 우리가 무엇을 중심삼고 살아 나왔는가? 그것이 물질이라면 물질이 맞는 날에는 맞을 준비를 해야 됩니다. 그것이 이 몸뚱이라면 이 몸뚱이가 배척받는 날 배척받아야 됩니다. 우리가 이 땅 위의 어떠한 이념을 갖고 있다 할진대 그 이념이 꺾이는 날 우리도 꺾여야 됩니다. 일본을 보십시오. 제국주의가 꺾이고 나니 전부가 꺾였습니다. 오늘날 인간에게 있어서 사랑이 꺾이는 때에는 모든 것이 다 꺾이고, 다 잃어버리고 허덕이는 인간이 되고 맙니다.
불쌍한 사람이 누구냐 하면,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내 것’을 갖지 못하고 허덕이는 사람입니다. 본래 사람들은 온 천주를 ‘내 것’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만물도 잃어버리고 이 땅도 잃어버려, 그것들을 내 것이라 할 수 있고, 심정세계나 그 이념도 ‘내 것’이라 할 수 있는 위치를 잃어버린 사람이 불쌍한 사람인 것입니다. 거지들은 왜 불쌍한가? 자기가 의지할 곳 없고 자기 것을 남길 수 없기 때문에 불쌍합니다.
오늘날 우리 인간들은 어떠한 욕망을 품고 운명적인 복귀의 길을 가고 있느뇨? 모든 것을 내 것 만들기 위하여 가고 있습니다. ‘이 천지가 내 것이야. 이 하늘땅에 있는 인류가 나의 형제야, 땅 위의 이념이 바로 내 이념이야, 어떤 주권자나 기업주의 것이 아니라 내 것이야.’ 그 다음에는 ‘하나님도 내 것이야.’ 할 수 있는 자리로 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욕망은 어디까지 가야 그칠 것이뇨? 하나님도 내 것인데 하나님만 붙들고 무 엇 할 것이냐? 하나님 심중의 사랑도 ‘내 것이야’ 할 수 있는 자리까지 가야 모든 것이 끝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아세요? 말도 그럴 듯하지만 사실도 그렇습니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 될 수 있는 권한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어서 오십시오.’ 할 때 ‘오냐, 가마.’ 하시며 오실 수 있도록, 하나님을 불러낼 수 있는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정을 내 것이라 하게 되면 가능합니다. ‘하나님 갑시다.’ 할 때 ‘오냐, 가자.’ 할 수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여러분 그렇잖아요. 심정이 하나되어 서로 그리워할 때는 오지 말라고 해도 따라옵니다. 하나님께서도 인간을 그러한 표준에서 대하시고 찾아 나오십니다. ‘땅 위에 살고 있는 인간들아, 수천년 전부터 허덕인 이 한을 너희들이 풀어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내 심정 전체를 너희가 차지하여 만물의 주인 될 수 있는 모습이 될 때, 나에게 맺힌 한을 모두 잊을 수 있겠다.’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성경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내가 너희 안에 있다.’는 말씀은 무슨 뜻인가? 인간의 욕망이라는 것은 이 땅 덩어리를 마음대로 해 봐도 만족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날 후루시초프니 아이젠하워 대통령이니 하는 사람들이 이 세상을 자기들 무릎 아래 두고 ‘야, 너희들 이것 하여라.’ 할 때 ‘예, 하겠습니다.’ 하게끔 만들어 놓았다면 편안할 것 같아요? 편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최후에 하나님께서 ‘잘 싸웠다. 이렇게 해라.’ 하셔야만 기뻐하게끔 지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왕자가 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거기에서 만사는 해결됩니다. 우리가 그 자리에 들어가 6천 년 한스러운 하늘을 대해 ‘아버지’ 하고 부르는 한마디에 하나님의 6천년 간 맺혔던 모든 한이 다 풀려 나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기독교는 새로운 차원으로 비약하게 됩니다. 2천년 전에 오셨던 예수께서 ‘너희는 물질을 붙들고 싸워라 몸을 붙들고 싸워라.’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나를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나 예수의 신부 된 것을 믿으라’ 하신 것은 고마운 일입니다. ‘정적인 심정의 인연을 맺고 있으라’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찾아오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또한 하나님도 인류를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데 있어서 어떻게 하는 사람이 선한 사람인가? 큰 것을 생각하며 가는 사람입니다. 애국자라면 자기의 가정을 버리고 자기 몸뚱이를 희생하더라도 삼천만 민족을 생각해야 합니다. 삼천만 민족을 자기 몸뚱이나 자기에게 속한 무엇보다도 더 생각하는 사람이 애국자요 충신입니다. 심정적으로 그렇게 생각해야 돼요. 충신 열녀 효자 효녀가 전부 이 코스를 거쳐야 됩니다.
최후에 이 모든 사탄세계의 조건까지도 청산할 수 있는 하나의 기준이 무엇이냐? 어떤 잘난 사람도 아니요 인격자도 아닙니다. 어떠한 권세를 가진 주권자도 그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도 꼼짝 못하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지닌 사람이 전체의 중심이요 전시대사(全時代史)의 중심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오늘날 우리는 적으나 적은 삼천만 민족이라고 한하지 맙시다. 백만 신도에 지나지 않는 기독교인을 가졌다고 한하지 맙시다. 세계에 수많은 기독교인이 있고 하늘을 사랑하는 사람이 많은데 통일교인은 많지 않다고 한하지 맙시다.
하늘이 바라는 역사적인 심정을 가지고 모든 사탄의 요소들을 처단할 수 있는 인격자가 먼저 되어야 됩니다. 그리하여 심판의 기준을 세워 놓고 그것 외에는 용서할 수 없다고 나서는 자가 되어야만 6천년 동안 싸워 오신 하나님 대신 이 땅 위의 일을 처리하는 대표자로 세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 잃어 보셨습니다. 만물도 잃어 보셨고 사랑하는 아들딸도 잃어 보셨고 애달픈 사랑의 심정도 밟혀 보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러셨거늘, 인간이 어찌 그런 길을 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여기서는 누가 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쳐야 됩니다. ‘하늘을 배반한 이 몸 버려도 싸다.’ 하며 과감하게 끊을 수 있는 존재라야만 원수권 내에 인연되어진 모든 한스러운 것을 밟고 넘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못하는 사람은 주님을 맞이하느니 어쩌느니 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람의 말이 틀리지 않습니다. 사실이 그렇단 말입니다.
그러한 심정을 갖고 나서는 사람들에게는 마음과 몸뚱이와 물질이 자동적으로 따라 들어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심정을 가진 나라가 있고 민족이 있다 할진대 세계의 물질은 모두 그들로 말미암아 요리됩니다. 세계의 인류는 그들로 말미암아 좌우되고 세계의 주의도 그들로 말미암아 판결될 것이며, 세계의 사랑도 그들로 말미암아 좌우됩니다. 사실이 그렇다면 한번 해볼 만하지요? 여기에 서서 말하는 사람도 그런 것을 알기 때문에 이런 놀음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방법에 들어가서는 어떻게 할 것이냐? 이것이 우리들의 할 일입니다. 우리는 사탄의 조건물에 놀아나던 자신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지갑에 수천만 원의 큰 돈을 넣고 있더라도, 이것이 사탄이 따라다닐 수 있는 미끼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단결해야 됩니다. 단결해야 돼요.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아들딸의 손을 거쳐 모든 것이 나타나기를 소원하실 것입니다. 내 생각엔 그래요.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그럴 것 같다 이겁니다. 오해하면 안 돼요. 사탄한테 농락받는 만물을 노아의 방주를 통하여 하나님이 사랑하실 수 있는 성별된 물질로 번식시키고자 하신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었을 거예요.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의 것으로서 하나님의 정(情)을 통할 수 있는 물질을 만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정이 통할 수 있는 만물의 기반을 만들어 놓아야 해요. 타락한 사람의 탄식이 무엇입니까? 만물의 탄식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정적인 감정을 느낄 수 없는 단계에 처해 있는 연고로 탄식하는 것입니다. 이 몸뚱이가 지금 사탄세계에 처해 있는 연고로 하나님의 정적인 느낌에 따라 움직이지 못하고 있어요. 마음도 그렇고 전부 다 그래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이런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음식을 먹으라고 갖다 주어도 함부로 먹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모르지요? 거기에는 반드시 어떤 이유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만물 할례를 하였고 몸의 할례를 하였고 마음의 할례를 하였습니다. 물질의 할례, 몸의 할례, 마음의 할례를 했는데, 나는 거기다가 심정의 할례까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인간 세상의 사랑이 다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찾아 나가는 데에 필요한 것을 용단을 가지고 실행할 수 없으면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절대 못 만나요. 아들딸이니 무어니 무어니 하는 것까지도 자기 손으로 끊어 버리고 움직일 수 있어야만 그 뒤에 하나님의 사랑이 연결되어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여러분의 마음이 그렇게 움직이는 곳이 있으면 가서 붙들어야 합니다. 목을 빼내도 떨어져서는 안 됩니다. 떨어지면 자기만 희생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필히 그런 각오를 가지고 움직여야 됩니다. 끝날인 이때, 이 시대에 그러한 움직임이 이 지구상에, 세계상에 나타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이것을 모방한 움직임이 나타나기 전에 하나님을 중심삼고, 이념을 중심삼고 식구라는 명사를 세워야 됩니다. 통일교회의 식구라는 말이 거기서 나온 것입니다. 알겠어요? 여기에서 물질을 가지고 식구의 위신을 농락하면 안 됩니다. 자기 일개 가정의 어떤 사정을 중심삼고 우리 식구의 인연을 유린하는 사람은 불합격자요, 어떠한 이념이나 사상관념, 어떠한 신앙관념을 중심삼고 우리 이념을 재는 사람도 불합격자입니다. 어떠한 정적인 감정을 중심삼고 실천하기를 주저하는 사람도 불합격자입니다. 이 말이 맞나 안 맞나 보십시오.
타락한 이후 우리 인간에게는 한스러운 운명의 길이 있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사랑하는 식구를 만나기 위해서는 수천만금을 일조일석에 다 날려버린다 하더라도 ‘너를 만나니 얼마나 좋으냐.’ 하는 이런 마음을 가져 야 됩니다. 이 몸뚱이가 시달리고 고통을 당하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사랑하는 형제 하나를 찾기 위하여서는 어떤 곳이라도 개의치 않고 가야지.’ 하는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이러한 이념을 품고, 예수와 같이 땅 위에서 뜻을 성취하지 못하고 가는 한이 있어도 이 이념만을 위해서 가겠다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의 사랑을 접하게 됩니다.
이념을 중심삼고 물질을 버리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몸뚱이를 차지할 수 있는 권한을 얻고, 몸뚱이를 차지할 수 있는 이념이라도 땅을 중심삼은 이념이라면 버리고 가는 사람은 하나님의 심정이 기다립니다. 이처럼 한단계 한단계 연결되어 올라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으로 이 땅에 오셨다가 이념도 버리고 목숨까지도 다 버리고 가셨으나 그 위에 심정이 있음을 아셨기에 하나님을 대하여 ‘아버지’ 하고 부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이제 판결을 지어야 되겠습니다. 내가 어떠한 자리에 서 있으며, 나는 어떠한 존재이며, 얼마만한 가치적인 자리에 설 것이냐? 자명한 사실입니다. 여러분 자신들이 이 길을 가는 데 있어서 어떤 세상의 물질을 놓고 주저한다든가 혹은 자기 가정이나 자기의 국가적인 입장에서 주저한다든가 지금까지의 주의나 이념, 혹은 신앙적인 관념 때문에 주저한다든가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서 사랑문제, 즉 정적인 문제까지도 자신 있게 이겨 나가야 합니다. 멋지게 넘어설 수 있는 충격적인 것을 끝날에는 반드시 찾아야 합니다. 그러지 못하면 못 넘어갑니다. 사실이 그래요.
역사의 흐름은 불의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도(道)는 양심을 통해 선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선은 명령하기를 ‘네 몸을 희생하고 너의 모든 것을 남에게 주어라, 머리 숙여 남을 받들라, 민족을 받들고 세계 인류를 받들고 하나님을 받들라, 그리고 네 몸을 하나님께 맡기라.’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맨 나중에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하나님의 사랑을 네게 주겠다는 것입니다. 선이 목적 없이 명령을 하겠어요? 그렇게 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네게 주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자, 이것을 느끼는 자가 되어야겠습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반기를 들고 나선다 해도 하나님의 사랑은 침범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세계는 침범할 자리가 없습니다. 사탄세계는 침범할 수 있으나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은 곳은 침범할 수 없습니다. 그 곳이 마지막이요, 영원이요 변치 않는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기준 위에서 출발할 수 있는 참다운 아들딸, 참다운 가정, 참다운 사회, 참다운 세계, 참다운 세계의 만물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온 세계는 선악의 싸움터를 넘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자리에 못 나간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되느냐? 우리가 보는데도 선과 악이 싸우고, 듣는 데도 먹는 데도 말하는 데도 움직이는데도 전부 선악이 대립하여 싸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악을 가려서 ‘나는 이렇게 가야 된다.’ 하나님의 심정에 입각하여, 하나님의 변치 않는 이념을 통하여 볼 때, ‘이렇게 가야 된다.’는 관(觀)을 세워야 됩니다. 그런 우주관을 세워서 심정을 통하여 좌우를 헤치고 갈 수 있게 될 때 여러분은 그 싸움터를 넘어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하나님의 사랑이 사무친 십자가를 받들고 가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여러분, 고향을 찾아가는 사람이 부모와 싸우러 간다면 좋겠어요? 부모의 사랑이 그리워 가는 사람은 희열이 넘치고 소망이 넘칩니다. 예수가 십자가상에서 누구를 원망하고 안타까워하며 갔어요? 아버지의 사랑의 품으로 가는 자리이니 예수는 원수를 대하여 복을 빌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은 이러한 자리를 되찾아가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타락한 인류는 복귀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러한 조건들을 청산해야 하는데 그럴 수 있는 자신이 되어 있는지 자문자답 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소원은 무엇이냐? 우리 인간이 아버지께서 염려하지 않는 자리에서 아버지 것으로서 귀히 여길 수 있는 물질을 만들고, 아버님께서 사랑할 수 있는 몸뚱이를 만들고, 아버님께서 사랑할 수 있는 이념을 가지는 것입니다. 물질을 복귀하고 몸뚱이를 복귀하고 이념을 복귀하여 하늘 앞에 나서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취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류는 이념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나는 신랑이요 너희는 신부라는 이념을 중심삼고 생사지경을 넘어설 수 있었으니, 그분과 같이 모든 것을 버리고 죽음의 고개를 넘어설 각오를 한 자가 있으면, 그 앞에 주님은 사랑의 주인공으로 나타나실 것입니다.
끝날에는 그 곳이 그립고 또 그립고, 보고 싶고 또 보고 싶으며, 가고 싶고 또 가고 싶어해야 됩니다. 억천만금이 있다 해도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 땅 위에서 아무리 부귀영화를 누린다 해도 그것을 박차고 털고 나설 수 있도록 이끌어내는 교단을 오늘날 인류는 맞아야만 됩니다. 만약 통일교회가 그 노정을 못 가면 또 다른 데서라도 가야 됩니다. 여기가 마지막이 아닙니다. 보따리 싸 가지고 또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인간들이 자신을 농락하는 물질의 권한을 비웃을 수 있고, 자신을 치려 하는 육체적인 모든 조건을 비웃을 수 있으며, 자신을 얽어매려 하는 모든 조건을 심정 앞에 굴복시키는 한 자체가 되지 않으면 이 고개를 못 넘습니다. 넘지 못해요. 절대로 못 넘습니다. ‘나는 누구 때문에 교회에 간다, 나는 내 사랑하는 아들딸 때문에 교회에 간다, 혹은 사랑하는 남편 때문에 아내 때문에 교회에 간다.’ 하는 자들은 다 못 넘어갑니다. 누구 때문에 가느냐 하면 하나님 때문에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내 것으로 소유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내 사랑으로 찾기 위하여 교회에 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는 절개를 지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앞에 축복을 받는 과정을 거치고 나면 그 다음에는 무사태평입니다. 그때는 이 천지에 사탄이 꽉 찬다 해도 그런 사람은 지배할 수 없습니다. 그럴 때가 옵니다. 외적으로 그런 시대가 오면 거기에 내적으로 맞추어야 할 시대가 반드시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날 우리들은 이제 한스럽던 과거를 다시 한번 비웃고 이 시대를 박차고 하나님께서 사랑하실 수 있는 땅 덩어리, 하나님께서 품고 사랑하실 수 있는 만물, 하나님께서 사랑하실 수 있는 형제자매, 하나님의 사랑을 노래하는 아들딸을 품을 수 있는 그 한 곳을 향하여 달려가야 됩니다. 그곳까지 우리가 가지 않는 한 이 땅의 비참한 역사는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이 싸움의 세계가 어서 지나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인류는 이 싸움의 세계가 지나가고 평화의 세계, 사랑의 세계, 선의 세계가 오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 하나의 세계가 지향하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니 그 때가 눈앞에 다가오는 이 때, 우리가 이념적인 모든 것을 일대에 청산하고 내적 준비를 갖추어서 넘어설 수 있는 자가 되지 않으면 심판주이신 하나님의 아들로 설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심판 때가 오기 전에 심판을 받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자격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심판 때가 되면 하나님 대신 행사를 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축복의 기준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가는 길은 그런 길입니다. 하나님을 우리 것 만들고, 하나님의 심정을 우리의 심정으로 하여 이 땅과 우주를 우리 것으로 만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하늘땅의 심정을 배신하였으니, 먹을 것을 잊어버리고 어느 때 어느 곳에서도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책임지고 나설 수 있는 심정에 사무친 사람이 되어야만 이 모든 한스러운 선악의 싸움터를 넘어설 수 있습니다. 그런 자가 이 한스러운 싸움터를 먼저 넘을 수 있는 자격자가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 역사의 흐름이 어떻다는 것을 저희들은 몰랐습니다. 아버지와 저희가 이러한 곡절의 길을 걸어오는 데 있어서 아버지의 수고가 컸음을 알게 되었사옵니다. 아벨이 제물 준비를 할 때, 아벨 자신이 준비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친히 하셨사옵고, 노아가 120년 동안 배척받으면서도 참아 나온 것 또한 노아 자신이 참은 것이 아니라 인간 대신 아버지께서 참아 나오셨음을 알았사옵나이다.
아브라함 이후 예수님께서 왔다 가신 것도 이 일을 종결짓기 위함이었음을 알았사옵나이다. 이 땅에 오셨던 예수님은 불쌍한 분이었사옵니다. 그분은 진정 하늘의 심정을 통하는 자리에 있었으나 땅 위에서 하나의 동지를 만나지 못하였사옵고, 하나의 신부를 그리워하셨사오나 만나지 못하셨음을 알았사옵나이다. 그분은 이 땅이 그립고 이 땅의 만물과 만민이 그리웠으나, 만물을 대하여 ‘너희들이 그리워 찾아왔노라.’고 말할 수 없는 입장이었고, 만민을 위해 찾아오셨으나 만민을 대하여 ‘너희가 그리워 찾아왔노라.’ 하고 심정을 털어놓지 못하셨사옵니다.
이토록 서글픈 한을 남기고 가신 예수님의 노정을 걸어온 수많은 성도들은 예수님과 같이 이 땅에 피를 뿌리며 한스럽게 살다가 이슬처럼 사라진 것을 저희들이 알고 있사옵니다. 끝날에 처한 저희들은 어떠한 입장에 있사옵나이까? 마음을 헤치고 심정에 사무쳐 6천년의 한을 놓고 통곡하여야 할 저희들이오나, 하늘을 배반하기를 일삼았사옵고 변하기를 일삼았던 저희들이옵나이다.
그러나 변치 않는 심정, 변치 않는 모습으로 사랑하는 아들딸을 그리워하며 눈물지으시는 아버지인 것을 알았사옵나이다. 배척하는 무리들의 뒤를 따라오시면서 눈물지으시고 갖은 매를 맞으신 하늘의 사정을 알았사오니, 이제 저희들은 이 길을 가겠노라고 맹세하옵나이다. 모든 것을 빼앗기고 잃어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가겠사옵니다. 피 살을 뿌리며 길거리에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가야 되겠습니다. 이것은 저희를 위함이 아니옵고 아버지를 위함이옵나이다. 저희를 위한 욕망이 아니라 대우주의 주인이신 당신의 영광을 위함이옵니다. 아버지께서 이렇게 싸워 나오셨고 아버지를 대하는 도인들도 이렇게 싸워 나왔거늘, 여기에 모인 저희들이 무엇을 자랑하겠사옵나이까? 썩어질 어떤 물건을 붙들고 귀히 여기겠사옵나이까? 그것들로 말미암아 아버지의 한을 가중시키는 자리에 서지 말게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저희가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아버님을 위하는 마음과 아버님을 사랑하고 싶은 마음과 아버님을 그리워하는 마음이오니,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그 마음을 붙들고 허덕이고, 아버지를 위로해 드릴 수 있는 간절한 심정만이 저희에게 사무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저희의 가는 길이 아버지께서 따르시지 않을 수 없는 길이 되게 하여 주시옵고, 아버지께서 가시는 길을 저희의 피 살이 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가겠다는 심정을 지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런 자리에서 아버지를 중심삼고 서로 식구라 하는 모임을 갖출 수 있는 교회를 얼마나 그리워하셨사옵나이까? 아버지, 그러한 민족을 얼마나 그리워하셨으며, 그러한 세계의 인류가 되어 주기를 얼마나 고대하셨사옵나이까? 그러나 아직까지 서글픈 장벽 앞에서 한줄기의 소망도 갖지 못한 땅 위의 인간을 대해 한을 품고 계시는 아버지의 사정을 저희가 아오니, 불효막심하였던 선조들을 용납하여 주시옵고, 미비하고 불충스러웠던 사실들을 용납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그렇게도 사랑하고자 하신 아버지시옵고, 그렇게도 영광의 자리에 세우고자 하신 아버지이심을 몰랐사옵나이다. 이제 알았사오니 남아진 모든 것을 스스로 청산하여 승리의 모습을 갖출 수 있게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변할 수 있는 것을 가지고는 하늘의 뜻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알았사옵나이다. 하늘은 저희가 마음으로 몸으로 심정으로 변치 않는 기준을 세우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여기에서 외치고 싶은 저 자신도 그날을 고대하고, 그런 모습을 고대하옵니다. 이제 저희들이 그 길을 가야겠사온데, 가야 할 그 길이 핍박의 길이요, 슬픔의 길이요, 억울한 길인 것을 알았사옵니다. 그 길을 따라가는 저희들이 변하고 나서 탄식하고, 저버리고 나서 원망하게 되는 것을 알았사오니, 백번 천번 만번을 죽더라도 변할 줄 모르는 심정을 갖추어 쓰러질지라도 아버지의 손을 붙들고 쓰러질 수 있고, 아버지의 한을 붙들고 사라질 수 있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그렇지 않는 한 선악의 싸움터를 넘어설 수 없다는 것을 알았사옵나이다.
이제 저희 앞에 원수가 남아 있다면 그것이 아버지를 향한 저희의 심정을 가로막는 물질입니까? 몸뚱이입니까? 땅 위의 어떠한 욕망입니까? 아버지를 향한 저희의 심정을 가로막는 것은 어떤 것이든 일체를 용납치 않는 저희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를 향해 일편단심 불타는 충절의 마음은 천지가 사라지는 한이 있더라도 남아진다는 것을, 또 이것이 천추에 영원히 빛날 아버지의 영광의 터전임을 알고, 이것을 중심삼고 아버지와 인연 맺고 영광의 모습으로 나타나 만물을 품고 만민을 품고 하늘을 높이고 하늘을 자랑하고 하늘을 위할 수 있는 자들이 되기를 아버지께서는 지금까지 고대하고 계시는 것을 아옵니다.
그러나 땅은 그것을 원치 않고 있사옵나이다. 땅은 그것을 반대하고 훼방하고, 일편단심의 충절과 선한 절개의 마음을 빼앗는 자가 있다 할지라도, 죽음의 산이 가로막히는 한이 있다 할지라도 이 땅에서 신념을 갖고 오늘도 내일도 손길을 연하여 서로 붙들고 넘고 넘어갈 수 있는 동지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형제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옵나이다.
이날 외로운 심정을 품고 하늘을 위하여 눈물짓는 당신의 사랑하는 식구들이 많은 것을 알고 있사옵나이다. 당신의 뒤를 따라 나선 그들은 불쌍한 자들이오니 아버지께서 위로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나이다. 한 많은 이 땅을 대하시는 하늘의 심정에는 막을 수 없을 정도의 한이 사무쳐 있는 것을 알고 있사옵나이다.
이러한 것을 거두어 지고 가야 할 길이요 책임을 지고 가야 할 길인 것을 알고 아버님의 심정세계에 가까이 서서 아버님을 위안해 드릴 수 있으며, 영광의 자리에 서서 아버지를 위로해 드릴 수 있는 한 날이 오는 것은 땅이 변할지라도 변할 수 없는 사실인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하오니 그날까지 오늘도 내일도, 1년도 10년도 피 살이 썩어 땅에 들어갈지라도 ‘한을 남긴 이 땅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할 수 있는 천주적인 투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고, 아버지의 충신 효자 열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일을 위하여 지금까지 외쳤사옵고,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지금까지 싸웠사오니, 이들이 자신들의 목적으로 세우고 자진하여 싸움을 맡아 승리하여 하늘의 영광을 높이고 하늘을 대할 수 있는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모든 것을 맡아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부터 새로운 각오를 가지지 않으면 안 될 것을 느끼게 하여 주시옵고, 심판의 날이 오기 전에 먼저 심판할 수 있는 자체가 되어야 한다는 이 한 사실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심판을 하는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앞을 가로막는 것이 있음을 각자가 알고, 그것을 스스로 해결지을 수 있는 신념을 갖고 ‘아버지 됐습니까, 안 됐습니까?’ 하고 당당하게 물을 수 있는 아들딸들이 되게 인도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릴 때, 모든 말씀 주님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아버님, 싸움은 이미 벌어졌사옵고 그 싸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나이다. 타락의 보응이 이렇게도 심절히 역사상에 왔다 갔던 선조의 뼈 살을 연하여 오늘날 저희의 마음에 미쳐지고 있음을 알겠나이다. 이 몸과 마음, 피와 살이 동할 적마다 하늘이 저희를 그리워하시는 모든 사실이 여실히 느껴지옵니다.
오늘날 저희들이 겪고 있는 것과 같은 이런 몸 마음의 싸움을 놓고 바울도 탄식하였사옵고, 예수님도 이런 싸움을 하고 있는 땅 위의 인간들을 위하여 싸워야 할 노정을 남겨 놓고 탄식하고 있사오며, 하나님 역시 인간을 복귀시키시고자 억만 사탄을 대하여 싸워 나오시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그 과정은 전쟁의 연속이요, 생사가 뒤넘이치는 고통의 연속이요, 피흘리는 제단의 연결인 것을 아옵는데 아버님, 오늘 저희들은 어떠한 위치에 있사옵니까?
지금까지 인간들은 선의 싸움을 하시는 하늘의 심정을 떠나 악의 싸움권 내에서 이용당해 왔사옵고, 오늘도 그런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하늘의 슬픔을 자아내는 대상이 되어 있는 것을 알게 되옵니다. 그러니 역사적인 싸움의 동기가 지난날의 선조가 아니라 오늘의 저희임을 알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 숙여 회개할 수 있는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런 자리에서 역사적인 아버지의 심정을 대하여 눈물지을 줄 아는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고, 역사를 이끌어 오신 아버지를 대하여 ‘나의 아버지 얼마나 수고하셨습니까?’ 하며 위로해 드릴 줄 아는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역사를 떠난 현실이 있을 수 없는 것같이 인연의 역사를 거쳐야 할 현실인 연고로 이 땅 위에도 시대적인 슬픔이 있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늘의 심정이 이 시대의 슬픔의 싸움터에 남아 있는 것을 알고 무한히 슬퍼할 줄 아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고, 하늘을 위한 갈급한 마음으로 현실의 싸움터에서 상처를 입고 계시는 하늘을 위로할 줄 아는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께서는 거듭 소망의 심정을 품으시고, 미래의 세계를 향하여 새로운 계획과 새로운 결심을 가지고 몇 번이나 인간을 대하여 권고하셨으며, 지금 이 시간도 불쌍한 자들을 세워 놓고 내일의 소망을 품고 계시옵니까? 그러나 미래의 심정을 아는 자가 이 땅 위에 없사옵니다. 역사적인 아버지, 시대적인 아버지는 감히 알 수 있었사오나 미래를 통하시는 그 아버지를 알 수 없는 것이 한이옵니다. 싸움은 해야 할 터인데 갈 방향을 알지 못하고 있는 이 땅 위의 인류이옵니다. 그 싸움터에서 승패를 가름하는 한판을 겨루어야 할 때는 가까워오는데, 패배를 거듭하고 있는 하늘의 백성들이오나 이들을 붙들고 최후의 결전지를 향해 진군하라고 명령할 수 있는 아들딸들이 이 천지간에, 이 민족 앞에 나타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오늘 저희들이 모인 이 자리는 편안한 자리가 아니라 골고다의 길이 연하여 있는 자리임을 알았사옵니다. 또한 저희들이 가야 할 길은 핍박의 길이요 눈물의 길인 것도 알았사옵니다. 이처럼 외로운 길을 걸어온 저희들은 마음으로 아버지를 알았사옵고, 심정으로 아버지를 느꼈사오며, 생활에서 아버님의 증거적인 사실을 보았습니다. 이러한 저희들이 이제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알았사오니, 아는 자의 슬픔이 하늘을 대신하여 새겨지게 될 때 그 슬픔은 땅 위의 어떤 사람의 슬픔보다 큰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고, 또 아는 자의 책임이 땅 위의 어떠한 사람의 책임보다 더 크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부족한 모습들을 세우시어 크나큰 경륜을 이루려 하시는 하늘 앞에 머리 숙여 자기를 반성하고 하늘만을 의지하고 그리워하는 모습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러한 자들만이 아버지께서 지휘하시는 싸움터에서 패배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아버지의 싸움터에서 싸우다 쓰러지는 한이 있다 할지라도 감사의 눈물을 흘릴 수 있는 효자 효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고, 충신 열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 여기에 나온 저희들은 세상의 영광을 바라고 나온 것이 아니옵니다. 아버지께서 가라 하신 이 길이 험한 길인 줄 아오나 아버님이 가신 길인 것을 알기에 저희들도 이 길을 가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지금 처하여 있는 자리가 편안치 못한 자리이오나 아버님의 보좌가 그러한 자리임을 아는 저희들이기에 이런 자리를 피할 수 없는 운명에 처해 있음을 아오니, 오늘도 내일도 감사의 마음을 길러 나가며 때를 고대하고 준비하는 아들딸들이 되게 인도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저희들이 사도 바울의 말씀을 보았습니다. 민족의 반역자로 몰리던 나사렛 예수, 십자가에서 피 흘리며 쓰러지신 예수, 어느 누구 하나 그의 편이 되어 변명해 주지 않던 외로운 예수를 따르며 증거하던 스테판을 죽이는 것을 찬성하던 바울이었지만, 예수를 알고 난 그날부터 바울은 자기의 영광도, 자기의 지위도, 자기의 처지도, 자기가 바라보던 민족도 다 버렸습니다. 그런 후 그는 새로운 결심을 갖고 주의 뜻을 위해 험한 길을 자청하여 찾아들었고, 수많은 싸움의 노정에서 하늘 앞에 충절을 다했던 역사적인 사실을 알았사옵니다. 바울이 걸었던 그러한 길이 오늘 저희들의 목전에 다시 전개되어 있사옵고, 하늘을 대신하여 싸우던 그 싸움이 저희 앞에 벌어졌사오니, 그 모든 것을 상속받아 아버님이 보시기에 늠름하고, 아버님이 보시기에 자랑스럽고, 아버님이 보시기에 멋진 아들딸들이 되게 인도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제가 무슨 말을 하오리까? 아버님이시여, 지금까지 많은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아버지의 심정이 어떻다는 것도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기뻐하실 수 있는, 아버지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아들딸이 몇 명이나 되옵니까? 한 생명이라도 있사올진대 많은 무리를 보고 말씀하지 마시옵고, 그를 중심삼고 아버지의 은사를 연결시켜 주시옵고, 그로 말미암은 은사를 이 시간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전하는 자의 마음과 받는 자의 마음이 하나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늘과 땅이 움직이는 그 시간에 저희의 마음과 몸도 움직여야 되고, 하늘과 땅이 움직이는 그 자리에서 저희들 전체가 움직여야 됨을 알고 있사오니, 아버지, 하늘과 땅을 대신하여 움직일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에도 수많은 교단들은 싸움터에서 갈 길을 모르고 허덕이고 있사오며, 수많은 백성들이 도탄 중에서 탄식하고 있사오니, 그들 위에 승리의 영광을 나타내 주시옵소서. 더욱이나 이 시간 외로운 자리에서 처참한 모습으로 아버지 앞에 심정을 기울이고 눈물짓는 아들딸이 있다 할진대, 그들 위에도 같은 은사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하늘이 주고자 하시는 은사는 이 천지에 남아 있사오니, 마음으로 높여 주고 마음으로 위하고 마음으로 돕는 저희 식구들을 아버지의 심정세계 가까이에 길이길이 세워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나이다. 모든 것 맡기오니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말 씀> ‘우리만이라도 아버지와 함께 있자’ 이러한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개개인으로 말한다면 ‘나만이라도 아버지와 함께 있자’ 이러한 제목이 되겠습니다.
여기에 나온 여러분들은 역사적인 곡절의 노정을 거쳐서 이 자리까지 찾아왔습니다. 종족이 다르고 부모가 다르지만 각자의 부모를 중심삼고 더듬어 올라가면 인류역사 6천년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아는 바입니다. 그러므로 ‘나’라는 한 존재, 여기에 있는 우리들은 전체의 역사를 대신한 존재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마음으로 몸으로 느끼는 감정도 우리들 자신만의 감정이 아닐 것입니다. 그 감정을 들추고 또 들추어서 거슬러 올라가면 오랜 역사에 연하여 있는 것임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각자의 형편이 다르고 사정이 다르고 심정이 다르니만큼, 우리들의 모습도 각양각색이라는 사실을 우리들은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천 사람이 모이면 천 사람이 다르고, 만 사람 혹은 이 세계에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 마음과 그 사정들이 각각 다르다는 것 또한 우리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과연 하늘이 있다면 이와 같이 사정이 다르고 심정이 다른 세계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큰 문제입니다. 자기 자신의 문제 하나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일생을 걸어 놓고 허덕였지만 해결하지 못한 역사적인 실증을 잘 알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자신도 모르는 어떠한 인연적인 세계에 살면서 그 인연을 이끌어 좋은 목적지에 가기를 원하고 있는 우리들, 사정이 다르고 심정이 다르고 처지가 다른 환경에 있는 우리들을 하늘이 계셔서 선의 목적지까지 이끌려고 하신다면, 무한한 수고를 하시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먼저 자신을 두고 생각하고 또 인류를 두고 생각해야 합니다. 한 개인을 참된 선의 모습으로 이 땅 위에 찾아 세우기 위해서는 전생애를 바쳐 개척한다 해도 힘들다는 것을 우리들은 잘 아는데 하물며 역사상의 전체 인류를 하나의 선의 목적세계로 옮기려 하시는 하늘의 수고의 큼을 무엇으로 다 형용할 수 있겠습니까? 형용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를 비롯하여 땅 위에 사는 모든 인간들은 알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슬프고 한스러운 자리에서 하늘과 땅을 원망하고 저주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한스러운 나와 한스러운 인류를 끌고 나가시는 하늘의 한을 생각한 사람이 이 땅 위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수천년 기나긴 역사노정에서 이리 끌고 저리 끌어 하나의 목적세계로 몰아내시며 수고해 나오시는 하늘이야말로 어떠한 불쌍한 민족에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불쌍한 자리에 계심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은 어떠한 사람을 찾으실 것인고? 많은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을 찾으십니다. 이 세계의 인류를 목적의 세계로 이끌기 위해 자기의 슬픔과 어려움을 잊어버리고 하늘을 대하여 ‘황공하옵니다. 천만번 죽는 한이 있다 할지라도 아버지의 수고에 가담하여 싸우다가 사라지게 하시옵소서. 천만 번 배반당할지라도 아버지의 한을 풀어드리기 위해 싸우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는 역사적인 인물로 남아질 것입니다.
하늘이 세계 인류를 그런 방향으로 이끄시기에, 그 같은 심정을 갖고 민족을 대신하여 움직이는 자가 있다면 그를 민족을 대표한 충신이라 하며, 부모 앞에 그런 마음을 갖고 움직이는 자를 효자라 하는 것입니다. 땅 위에 그런 사람이 있긴 하였으나 우주적인 대위업을 성취시키기 위하여 움직이시는 하늘 앞에 효자 효녀, 또는 충신 열녀가 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과연 있습니까?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리, 이러한 생활권 내에서 허덕이는 나요, 우리인 것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우리는 현세와 연(連)하여 있습니다. 이 현세를 바라볼 때, 우리는 하늘에 동조하는 사람이 없는 것을 알게 됩니다. 더욱이 물질문명이 최고도로 발달된 이 땅 위의 세계 인류는 알면 알수록 하늘을 부인하려 듭니다. 그러니 이 세계에서 하늘을 생각하는 참다운 아들딸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님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늘을 배반하고 몰아세워도 하늘은 그러한 인간을 버릴 수 없는 입장입니다. 인간들에게 배척받는 한이 있더라도 다시 앞서서 싸워줘야 할 하늘인 것을 이 시대의 사람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인류가 새로운 방향에서 하나의 소망을 가진다 할진대 무엇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지금은 모든 것이 끝을 바라보는 때입니다. 종교나 철학, 혹은 과학이 세계 인류를 행복의 파라다이스(paradise)로 안내해줄 줄 알지만 불가능이라는 세 글자에 가로막혀 있습니다. 만일에 하늘이 있다면 반드시 가로막아야 합니다. 진정 이 인류를 하나님이 하나의 목적세계로 이끌고자 하신다면 반드시 인류가 나가는 길은 막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역사적인 종말에 처한 이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고, 무엇을 느끼며, 무엇을 가져야 할 것인가? 문제는 여기에 걸려 있습니다. 무엇을 가질 것인고? 어떤 사상가들은 세계를 갖겠다고 야단들이며, 어떤 종파주의자들은 그 종주(宗主)가 되겠다고 야단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질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현세의 모든 것은 우리가 목적하는 소유물이 아닙니다. 목적한 것을 가지려면 현재 가진 것을 다 잃어버려야 합니다. 이런 시기를 만들어 놓으시고 하늘은 우리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우리의 처지가 그렇다는 것을 알고, ‘우리만이라도 아버님과 함께 있자’는 제목으로 돌아와서 다시 한번 생각해 봅시다. 이러한 때에 이러한 처지에 있는 오늘날 우리 개개인들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되겠습니까? 하늘과 함께 있고 싶어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세계가 끝날에 처하여 갈팡질팡하며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있는 이때에 우리는 하늘과 같이 있어야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한히 행복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하늘의 입장을 다시 한번 생각해 봅시다. 천지 만물을 지어 놓으시고 에덴의 모든 것을 맡기기 위하여 우리의 선조 아담 해와를 지으셨습니다. 그러니 아담 해와는 지음받은 그 순간부터 하나님과 같이 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을 중심삼고 하나님과 같이 있어야 할 아담 해와였습니다. 또 하나님을 중심삼고 아담을 의지하여야 할 만물이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는 이념권 내에서 영원히 동고동락(同苦同樂)하여야 할 인간이 어찌하여 같이 있을 수 없게 되었는가? 타락하였기 때문인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 조상 아담 해와를 지으시고 어떠한 기준에 두고 싶어하셨는가? 하나님께서 본연의 인간을 지으신 목적은 인간을 슬픔 가운데, 고통 가운데, 불행 가운데 두고자 하신 것이 절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터로, 하나님의 마음의 자리로,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으로 지으셨습니다. 아담 해와는 하나님의 일터요, 마음의 집이요, 사랑의 대상이었다는 것입니다. 선하신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의 세계 또한 선한 연고로 아담 해와가 움직이던 그 생활환경도 선해야만 되었습니다. 그것이 창조 당시 하나님의 목적이요, 이념이었습니다. 그런데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하나님의 일터가 되지 못하고 마음의 집이 되지 못하고 사랑의 대상이 되지 못한 것입니다.
모든 만상과 화동(和動)하여 기쁨과 영광, 자유와 행복의 동산, 하나님이 축복해 주신 무한한 기쁨의 세계, 무한한 행복의 동산에서 살아야 할 인간이었는데 아직까지 행복과 기쁨이라는 명사를 어느 누구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하나님은 인간이 느끼지 못하는 슬픔을 느끼셨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만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행복스럽다 해도 그것은 사탄 세계의 행복입니다. 하나님이 찾아 세우고자 하시는 것은 영원한 참인 연고로 그 세계에서 그리는 사랑, 그 세계에서 누릴 수 있는 자유와 행복은 영원무궁토록 하나님의 것이요, 우리 인간의 것이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그런 감정도 잃어버렸으며 그런 사정도 모르는 연고로 타락한 사실을 두고 슬퍼했을지 모르지만, 하늘은 타락한 인간을 놓고 인간이 느끼지 못하는 행복을 잃어버린 슬픔을 느끼셨습니다. 자유와 평화를 잃어버린 억울함을 품은 하늘이에요. 분하다면 이 이상 더 분한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 그러한 하늘은 인간이 타락한 그날부터 어떻게 되었던가? 영광과 행복과 이념의 생활이 변하여 고통과 슬픔의 생활로 들어가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었습니다. 거기에서 비애의 역사는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인간의 타락 이후 하나님이 하신 일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어떠한 입장에 계시는가? 안식하셔야 할 하나님이 안식하지 못하시고, 잃어버린 인류를 다시 찾기 위해 이 땅 위의 인류를 붙들고 나오는 입장에 계십니다. 하나님의 일은 영광을 높일 수 있는 일이요 인간을 사랑할 수 있는 일이요 인간과 더불어 행복스럽게 살아야 할 것이었는데, 싸우는 것이 하나님의 일로 변했다는 것입니다.
하늘의 슬픔이 무엇이뇨? 본래 하나님의 일은 행복과 자유와 평화가 깃든 자리에서 온 피조물이 화동하여 창조하신 하나님의 솜씨를 찬양하고 즐기는 것을 보며 사는 것이었는데,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싸우는 입장으로 떨어진 것이 슬픔입니다. 기쁨과 만족과 이상의 자리에 계셔야 할 하나님이 슬픔과 불행을 느끼고 낙망할 수밖에 없는 자리로 떨어지게 됐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과 함께 있어야 할 우리입니다. 타락한 인류 앞에 하나님은 싸우는 입장에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나는 원합니다. 아버님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행복한 자리에 있을 수 없는 운명이요, 역사적인 하나님은 싸움의 하나님이심을 알았사오니, 그런 하나님의 일터에 있기를 원합니다.’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그런 일터에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머물러야 할 곳은 행복스런 자리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환경이 좋지 않은 자리도 아닙니다. 역사노정에 있어서 이 인류를 붙들고 나오시는 하나님의 싸움터입니다. 하나님의 전쟁터에 있지 않는 자는 하나님과 같이 있는 자가 아닙니다. 타락한 인간의 한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한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일터에 있지 못한 것입니다. 자유의 일터를 잃어버리고 불행의 일터에 계시는 하늘은 자유의 일터를 찾기 전에 불행의 일터에서 책임을 다해야 자유의 일터가 벌어질 수 있다고 하십니다.
전세계의 타락한 인류는 소망의 한 날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를 믿는 기독교인들은 재림의 한 날, 심판의 한 날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날이 자유의 일터가 벌어지는 날이요, 자유의 일터에서 아버지를 모시고 즐길 수 있는 날입니다. 그런 날을 맞이하려면 인류는 먼저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싸움터에서 승리의 개가를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는 한 그 한 날을 맞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땅 위의 인류 가운데 하나님을 믿는 자가 있다 할진대 그의 소원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일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기를 소원하는 자는 먼저 하나님의 일터에 함께 있어야 합니다. 그러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과 더불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선한 사람은 반드시 승리해 나옵니다. 역사를 보면 개인으로부터 가정을 거쳐 민족을 거쳐 세계까지 나오는 데 있어 선이 악을 청산해 나왔습니다. 역사적인 실증을 보아 우리는 이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참된 선은 둘이 없을 것이기에 하나의 목적세계로 움직여 나가는 것은 필연적입니다. 그러기에 지금까지의 역사노정에서 우리의 양심, 우리의 마음은 ‘선하라’고 제창해 왔습니다. 선한 데서 그칠 것이 아니라 ‘선을 중심 삼고 악과 싸우라.’고 합니다.
한 국가를 중심삼고 보더라도 충신이 있다 할진대 그 충신은 어느 때 나옵니까? 그리고 효자는 어느 때 나오며, 열녀는 어느 때 나옵니까? 민족이 존망(存亡)의 기로(岐路)에 놓였을 때, 가정 사정이 어려울 때 나옵니다. 민족이나 가정의 생사를 좌우하는 판가리 싸움터에서 승리의 개가를 부를 수 있는 자를 세워 충신이라 하고 효자 열녀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고로 역사적인 인물은 싸움터를 거치지 않은 존재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찾아보십시오, 있는지.
그러면 어찌하여 역사적인 인물들은 이처럼 싸움의 고비를 거쳐야만 되었는고? 대우주의 목적을 지향하는 하늘이 싸움터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고로 자기를 넘어 더 큰 선을 위하여 싸워 나가는 사람들은 반드시 세움을 받습니다. 그러기에 하늘은 우리 인간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싸우고 싸우라고. 사랑하는 아들딸들에게 평화롭고 행복스럽게 살라고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먼저는 ‘네 마음을 중심삼고 몸을 정복시켜라.’ 하신 것입니다. 그 후에는 ‘가정과 민족, 세계까지, 더 나아가서는 무형세계(無形世界)에까지 나아가서 사탄과 싸워라.’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늘의 가르침이고 역사의 방향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싸움의 역사노정에서 허덕여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터는 어떠한 곳인가? 천국 가기 위해 꿈꾸며 즐기는 자리가 아닙니다. 여러분,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 민족을 위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민족이 추구하는 이념을 위하여 사는 자와 더불어 싸우는 자입니다. 그런 자는 꺾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하늘이 계시기에 남아집니다. 이것은 철칙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하늘은 사랑하는 기독교인들을 세워 놓고, 믿는 자들을 세워 놓고 ‘너희들은 세상 나라와 더불어 싸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싸움의 역사를 해 나오시면서 왜 싸우지 못하게 하셨는가? 하늘은 최고의 목적을 중심삼고 섭리하시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싸움을 책임지시던 하나님이 자신을 대신하여 싸움노정에 내세운 자는 제일 불쌍한 신자들이었습니다. 싸우지 말라 하셨어도 그토록 치열한 고난과 역경의 노정을 걸어왔거늘, 싸우라 했다면 오늘날까지의 개인으로부터 가정 사회 국가 세계까지 이르는 그 전체의 치열한 싸움을 도맡아 해야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은 자신이 사랑하는 자들은 일정한 곳에 따로 모아 놓고, 세계의 나머지 사람들을 동원하시어 보다 선한 민족과 보다 악한 민족으로 나누고 서로 싸우게 하여, 보다 선한 민족이 승리하게 해 나오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최후의 승리의 결판을 내야 할 그때에 가서 한 번만 싸우게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작전법이에요.
이러한 하늘의 원칙을 모르던 과거에는 하늘을 원망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은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시어 세계에서 승패의 판국이 기울어진 그 한때에 가서 사랑하는 자들을 내세워 싸우게 하려 하십니다. 그 한 날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심판날이라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참았습니다. 우리는 내일의 소망을 바라보고 하나님이 뜻하시는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참아 나왔습니다. 그렇지만 한때가 오는데, 그때를 위하여 준비하는 자가 나오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이 하늘이 제시한 요구조건입니다. 우리를 이와 같은 자리에 세워 놓고 싸우게 하시는 일면, 역사노정의 곡절을 거쳐서 오늘날과 같은 2대주의 세계를 이루기까지의 수고를 생각하게 될 때, 이것은 어떤 일개 민족이나 일개 국가가 수고해서 되어진 것 같지만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미국과 같은 나라가 수고해서 된 것 같지만 절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주의와 이념을 제창한 어떠한 민족, 국가, 사상가 이상 가는 입장에서 수고하시면서 싸움을 도맡아 나오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알았습니다. 우리를 이런 자리에 세워 놓으시고 어떤 충신열사보다 외로운 자리에서, 역사노정의 배후에서 싸움을 홀로 책임지고 뒤넘이쳐 나오시는 하나님이 그리워서 ‘나는 아버지의 일터에 있고 싶소이다.’ 하며 하나님의 일터에 나서고 싶어하는 하늘의 아들딸들이 몇 명이나 됩니까? 여러분, 하나님과 함께 있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죽어도 같이 있어야 할 우리이기에 끝날이 오기 전 한 때만이라도 아버지의 싸움터에 가담하였다는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만나야 할 아버지는 6천년 동안 싸움에 지치신 아버지이십니다. 그 아버지의 아들딸이 되겠다는 우리가 역사적인 체면을 살리기 위해서는 최후의 한 날, 그 한때에 사탄을 박멸하고 모든 원한을 해원하기 위해 세계 앞에 싸움의 용자로 나설 수 있는 하늘의 정병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터를 지켜줄 수 있는 정병, 하나님 대신 사탄과 싸울 수 있는 정병, 하나님 대신 온 인류를 복귀시킬 수 있는 아들딸을 하늘은 찾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책임 없는 생활을 해 나왔습니다. 오늘 이렇게 살다가도 내일은 달리 변경할 수 있는 그런 생활을 했습니다. 역사도 그런 방향으로 흘러 나왔습니다. 시대 시대를 거치면서 혁명을 해 왔습니다. 이렇게 저렇게 몰아왔습니다. 과정에서는 그와 같이 이래도 저래도 통했지만 마지막 한때에 가서는 그것이 통하지 않습니다.
마지막 싸움의 날이 오거늘, 그날은 어떠한 날일 것인가?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나 싸움이 벌어지는 때인 것입니다. 그때에 하늘 앞에 설 수 있는 자는 하늘의 일을 도맡아 하겠다는 심정을 가진 사람입니다. 여기서 싸움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싸우되, 패배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일을 맡아 하나님 아버지, 이것이 당신의 소원이었지요? 해야 합니다. 마지막 싸움만은 하나님께 맡기면 안 된다는 겁니다. 우리 인간이 아무리 영광되고 잘났다 해도 인간 때문에 싸움이 일어났고, 그런 우리 인간을 목적지까지 끌어주시기 위하여 하늘이 지금까지 수고해 나오셨으니, 그 싸움을 책임질 수 있는 아들딸이 되어야만 하늘의 유업을 상속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 신자들은 끝날이 오면 영광받을 줄 알고, 그때는 자유천지, 천국이 될 줄 알지만 그것은 싸움을 이긴 후에, 심판이 끝난 후에 찾아지는 것입니다. 싸움의 과정을 거쳐야 할 하늘의 곡절이 있는데, 오셨던 예수님도 그 싸움터에서 완전한 승리를 하지 못하고 가셨으며, 하나님도 그 싸움터에서 인간의 배반으로 인하여 실패를 거듭해 오셨습니다. 이런 역사노정에서 모든 것을 하늘이 해줄 줄 알고 기다리고만 있으면 저나라에 가서 영광받을 것 같아요? 영광은 무슨 영광? 어림없는 일입니다. 알고 보면 마지막 한번의 싸움에서 6천년 동안의 억울함을 풀 수 있는 싸움의 용자를 찾으시는 것입니다.
심판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을 통해서, 6천년 동안 한이 맺힌 심정을 통해서 합니다. 심판이 뭡니까? 싸움을 말합니다, 싸움. 그렇기 때문에 끝날에는 7년 대환난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6천년 역사를 지나 안식의 날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6천년 동안 준비한 하늘의 정병은 기치를 높이 들고 7년 대환난 시기의 싸움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기독교인들이 왜 몰렸는지 알아요? 선을 향하여 나가는 사람들은 언제나 몰립니다. 하늘의 아들딸이 무능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때가 안 되었으니 기다려라 기다려라.’ 하며 6천년이 지났으니, 여러분의 마음에 사무친 분함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러니 싸우러 나가야 된다는 겁니다. 싸우러 나가는 데 있어서는 6천년 동안 맺힌 한스러운 하나님의 마음을 더듬어 살피고, 이 시대의 분통한 사실들을 용납할 수 없다는 의분심이 어느 정도 불타고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역사적인 싸움이라 하였거늘 여러분이 그와 함께 있기를 원한다 할진대 하나님의 일터에서 선봉자로 서서 역사적인 원한과 시대적인 원한과 미래적인 한까지 풀기 위하여 가로막는 모든 것을 물리치고 행군할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인간의 체면을 세울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가정을 희생시키고 민족을 희생시키고 국가를 망하게 해서라도 선한 것을 세워 나왔지만, 이제 마지막 싸움엔 우리가 가담하여야 합니다. 그리하여 사탄세계를 정복해야 합니다. 그 싸움의 시기는 멀지 않다는 것입니다. 거기서 이겨야 돼요. 그 싸움에서 이기지 못하면 오늘날까지 싸우다 죽은 충신들 앞에 얼굴도 들 수 없습니다. ‘네가 이 땅에서 공헌한 것이 무엇이냐?’라고 반문하면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하늘 앞에 설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날 전세계 기독교인들이 동원되어 하나님의 심정을 통하는 세기말적인 십자군이 결성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이 땅을 농락하는 자들을 용납하지 않고 칠 수 있는 움직임이 나와야만 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지상의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싸우시는데 그 싸움을 책임지고 나서는 민족이나 국가가 있다 할진대 그 민족이나 국가에게 벌을 주겠습니까? 이스라엘 민족도 가나안 칠족을 치라 할 때 치지 못했기 때문에 벌을 받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워합시다. 하나님의 일터에 서기를 간절히 고대합시다. 하나님의 일을 책임지고자 합시다. 마지막 싸움터에서 일선장병이 되어 복귀해 오시는 하나님의 일을 책임진 주인으로서 싸워 이기면, 하늘의 영광이 여러분의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기 전에는 아무것도 안 됩니다. 여러분 자신이 행복이니 뭐니 하는 것 모두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땅에는 타락 이후부터 사랑하는 아들딸을 찾으려 하시는 하나님과 그것을 막는 사탄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는데, 하나님은 최후의 승패를 결정짓는 싸움터에서 인간이 역사적인 모든 원한을 풀고 승리의 영광을 갖추어 나타나기를 고대하시는 것입니다. 역사의 종말, 땅 위의 전쟁과 투쟁의 역사노정에서 종말시대를 고대하시는 하나님의 소원은 무엇이뇨? 여러분을 세워서 6천년의 원한을 갚는 것입니다. 승리의 군대로서 하늘 앞에 세워질 수 있고 또 설 수 있는 무리를 하나님은 찾아 나오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러한 무리가 되지 못한다 할진대 여러분은 하나님의 일터에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터는 땅만이 아닙니다. 하늘과 땅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그 하늘과 땅의 싸움이 오늘날의 전쟁이라는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싸움의 자리에서 책임을 지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6천년 동안 싸워 나온 싸움의 역사를 대신했다는 영광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승리하면 6천년 역사의 최후의 승리를 얻게 되고, 역사상의 싸움에서 희생당한 수많은 선한 무리들은 우리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되어 천상의 높은 자리에 있을 수 있게 됩니다. 거꿀잡이예요.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일터에 함께 있어야 하며, 동시에 하나님의 마음에 같이 있어야 되겠습니다. 하늘의 일터에서 기억되는 사람이 되는 동시에 하나님의 마음속에 기억되는 여러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창조 전부터 타락 이후 6천년 역사노정에도 있었고, 오늘 이 시대에도 있으며 미래에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온 세계에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하뇨? 온 세계를 품고자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내려가기를 원치 않습니다. 안 그래요? 내려가기를 원치 않아요. 왜? 하나님의 마음을 본으로 지은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마음은 크고 넓기를 고대합니다. 이 땅만이 아니라 온 피조물까지,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까지도 품으려 합니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므로 오늘날 이런 싸움을 책임지는 데는 하나님의 마음과 더불어 있지 않으면 승리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 싸움터에 섰다 할지라도 나만을 위해 싸우고 자기 민족만을 위해 싸운다면, 전체의 싸움에서 승리한 영광의 자리에 갈 수 없는 것입니다. 싸우는 데는 하나님의 마음속에 기억되는 자리에서 싸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움직이는 가운데서 싸워야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한 마음이냐? 온 우주를 품고자 하시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싸움의 자리에, 혹은 고통의 자리에 들어가는 것도 우주를 품기 위함이어야지 나 하나가 승리하기 위함이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은 비록 싸움에서 쓰러지는 한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계시는 한 이 우주가 내 품에 안길 날이 기필코 있으리라.’는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그런 마음을 품고 하늘을 위하여 싸우는 자는 천국주의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찾아 나오고 있습니다. 마음의 세계, 이념의 세계를. 그 이념이 나로 말미암아 움직일 수 있는 그 자리를 말입니다. 이념을 세워 움직여 나오는 중심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인간이 그 이념의 세계를 움직이는 중심에 서고자 하는 목적은 하나님의 마음속에 있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오늘날까지 세계는 주의를 찾아 나왔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날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로 갈라졌으니, 이제 통일주의 천주주의를 거쳐 천주 그 자체를 보고 좋아하는 세계가 되어야 합니다. 무슨 논리를 통해서 나온 주의를 보고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땅을 보면 마음이 그저 좋아지는 자리까지 나아가야 된다는 겁니다. 여러분, 그런 자리까지 나아가야 해요. 종교의 목적도 그 자리입니다. 뭘 보고 듣고 좋아하는 게 아닙니다. 하늘땅을 바라보고 좋아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주의라는 것은 지팡이입니다. 싸움의 대상이 남아 있는 동안 필요한 것입니다. 하늘땅을 바라보고 좋아할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사는 세계 또는 하늘땅이 주의의 최고 목적이에요.
주의라는 논리적인 것 말고 하늘땅을 보고 즐길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한 논리적인 주의권 내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지으신 만물 가운데에 있습니다. 지으신 만물 가운데에 있어요. 아무리 미물의 풀 한 포기라 해도 하나님의 마음은 거기 있습니다. 여러분이 주장하는 주의 주장은 사라지고 주의를 부르짖던 사람은 죽어도, 만물은 하나님의 마음속에 남아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선조들은 싸우면서도 주의나 이념세계를 차지하지 못했지만 초목들은 싸우지 않고도 주의세계에 가담할 수 있습니다. 왜? 타락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인간은 안 됩니다. 싸워서 승리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 속에도 있는 것입니다. 하늘땅 어디를 가든지 거기에 하나님의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은 계시지 않은 곳이 없다, 즉 무소부재(無所不在)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속에 있기를 원할진대 여러분이 바라보는 물건 가운데 하나님의 마음이 있으니 그 물건을 내 것으로, 천지의 모든 존재물을 내 것으로 품고자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하늘의 마음입니다. 최고의 도(道)를 통한 사람이 있다 할진대 하나님의 마음에 소유된 사람입니다. 나는 새 한 마리나 향기를 풍기는 꽃 한 송이를 보고도 마음으로 영원히 노래할 수 있는 경지에 들어간 사람은 마음이 만물 가운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 가운데에 있는 것 입니다. 그것은 어떠한 시간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함께 있기를 고대합니다. 누구와 함께 있고자 하는가? 여러분의 가정입니까? 나라입니까? 이 땅 덩어리입니까?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은 이 민족을 넘고, 이 세계를 넘고, 피조만물을 넘어 하나님과 같이 있고 싶어합니다. 하나님까지도 내 것이라 할 수 있는 자리까지 가기를 이 마음은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런 마음을 가진 자는 하나님과 같이 있는 자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진 자는 비록 오늘에 살고 있지만 6천년 전의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과 같이 있는 자이기 때문에 역사노정의 모든 것은 그로 말미암아 다 승리의 조건으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마음기준을 세우지 못하게 하기 위해 사탄은 역사노정을 통해 치열한 싸움을 벌여 나왔지만, 오늘날 그런 천주적인 심정을 가진 자 앞에서는 사탄이 쟁취했던 모든 것도 승리적인 것으로 나타나지 못하고 패자의 입장에서 항복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버님의 마음을 가진 자나 아버님의 마음속에 있는 것을 상속받고자 하는 자는 역사노정의 어떠한 자도 그를 지배하지 못했습니다. 고통스러운 자리에도 하나님의 마음이 있는 것을 알고 그런 자리를 기뻐하며 가고, 만물 하나를 보더라도 귀중히 여기며, 어떠한 어려운 곡절에 부딪쳐도 거기에 하나님의 마음이 있는 것을 느끼는 사람은 하나님이 절대 모른다 하지 않으십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속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주의, 그런 이념이 천국의 이념입니다. 마음의 이념, 하늘의 이념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싸우되, 하나님의 마음을 중심삼고 싸워야 합니다. 어떠한 고통과 역경에 처해도 그 가운데서 기쁨을 느끼고 만물이 소원하는 해방을 위하여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러한 각오를 하고 나선다 할진대 하나님의 마음을 점령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점령한다면, 하나님의 이념세계도 점령할 수 있습니다. 이 땅 위에서 혹 뜻을 이루지 못하고 간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마음을 점령한다면, 그 이념세계가 이루어지는 날 동반할 수 있는 가치를 부여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똑똑히 알아야 합니다.
지금 이 시대는 어떠한 세계적인 이념, 혹은 우주적인 이념이 필요할 때입니다. 그러니 싸우는 데 있어서 자기를 위해 싸워서는 안 됩니다. 하늘과 땅과 만물 모두를 위해 싸워야 합니다. 그들이 모두 탄식권 내에 있으며, 인간의 마음 터전에서 지내고자 하는 만물까지도 탄식하고 있으니, 이 탄식권에서 인류와 만물을 해방하는 해방군으로 나서서 싸워 이겨야 합니다. 그래야 최후의 싸움에서 승리자가 됩니다. 그것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그렇게 되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일터에 같이 있는 자요, 하나님의 마음속에 기억되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일터와 하나님의 마음, 이 둘 중 어느 한 곳에라도 있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의 자리에 참석할 수 없습니다.
최후의 목적이 그런 이념에서 즐기는 것이 될는지 모르지만, 그 목적을 찾아 나가서는 어떻게 할 것이뇨? 그 목적의 세계를 지배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자로 설 수 있을 것입니다. 아까 말한 바와 같이 우리의 몸은 하나님의 일터요,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이 임재할 수 있는 터전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몸과 마음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최고 목적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곳에서 하나님과 같이 있기를 바라는고? 싸움의 세계가 아닙니다. 싸움이 끝난 후에 나타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고로 아직까지 인류 앞에 천적인 사랑은 부여되지 않았습니다. 목적의 세계를 찾아 나가는 싸움의 역사는 부여되었고 이념은 부여되었으나, 하나님의 영원불변의 사랑의 세계는 부여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신랑이라 하고 인류를 신부라 하여 그날을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탄식의 조건이 남아 있는 자리에서 사랑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창조목적이 그렇게 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탄이 참소하는 자리에서 ‘오! 너희는 내 아들딸이다.’라고 하게끔 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6천년 동안 고이고이 간직한 하나님의 사랑, 이것은 인류와 종교의 최고의 목표요 인간이 간절히 소망하는 심정의 본향이지만, 아직까지 인류 앞에 부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부여받기 위해서 고대하는 것이 오늘날 주님을 만나 가지고 신랑 신부의 자리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린양 잔치예요.
이제 우리들은 원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일터에 같이 있고 하나님의 마음 가운데 있는 동시에 하나님 가정의 식구로서 사랑을 중심삼고 살 수 있기를 원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을 중심삼고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고 나는 하나님을 사랑한다.’ 할 수 있는 자리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지정의(知情意)를 겸비(兼備)하신 분이라 할진대 심정이 있을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6천년의 쓰라린 심정을 잊어버리고 환희의 심정으로 즐거워하며 사랑할 수 있는 한 사람을 고대하시고 싸워 나오십니다. 하나님이 무슨 이상을 걸어 놓고 싸운다면 하나님 자격이 없습니다.
이 세계가 아무리 이상세계가 되었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사막입니다. 그건 이상세계가 아니에요. 하나님은 인류의 마음을 고쳐서 하나님의 사랑의 자리까지 동참시키고자 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목적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이제 여러분은 이 싸움에서 최후의 승리를 거두어 하나님의 사랑권 내에까지 나아가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하나님의 심정에, 하나님의 그 사랑의 마음에 있지 않는 한 천국은 여러분의 것이 될 수 없고 하나님도 여러분의 아버지가 될 수 없습니다. 또 예수와 성신도 여러분과 하등의 관계가 없게 돼요. 예수를 신랑이라 하고 우리를 신부라 하였거늘, 우리는 그 자리까지 나아가야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심정을 느끼며 이 싸움에서 만물을 품고 싶어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모든 고통을 참고 어떠한 역경도 참고 나가는 것은, 거기에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붙들고 나설 때 하나님은 내 것이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는 겁니다. 또 그 사랑을 중심삼고 여러분은 하나님의 것이 됩니다. 이리하여 인간을 중심삼은 사랑의 인연이 맺어지지 않는 한 하나님은 역사적인 한을 풀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럴 게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갖은 곡절을 거치시면서도 싸워 나오시는 목적은 무엇인가? 잃어버린 아들딸을 찾아 세워 사탄 앞에 자랑하기 위해서입니다. 천사장 누시엘이 인간 앞에 자연굴복하여 그들의 심부름을 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인간이 천사장 누시엘에게 유린당하는 입장에 처해 있으니, 하나님은 그러한 인간들이 하나님의 사랑에 접하는 순간 사탄 마귀의 대장인 누시엘도 손을 들어 ‘영원한 승리의 왕자로다.’ 하면서 인간에게 머리 숙여 항복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하시는 것입니다.
본래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 속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 앞에 그러한 입장까지 부여하시고 싶었는데 아직까지 그러한 입장에 처한 아들딸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오늘날 세계가 갈 방향을 찾지 못하는 이 천지간에 하나님의 마음속에 기억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류를 이끌 수 있는 어떤 주의나 이념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고로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는 동시에 하나님의 싸움을 책임질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슬픔입니다.
타락한 인류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심정을 품고,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하나님의 일을 책임질 수 있는 자를 하나님이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거꿀잡이입니다. 과거에는 물질을 제물로 하여 찾아 나오셨고 그 다음엔 아들을 제물로 하여 찾아 나오셨으나 그 다음엔 사랑을 통하여 찾아오십니다. 그때는 제물이 아닙니다. 그때는 마주 붙들고 우는 것입니다. 우리는 감사하며 눈물 흘릴 수 있는 그 시간을 맞아야 된다는 겁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우리 조상 아담을 대하실 때도 심정을 6천년 후로 제쳐 놓고 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걸 알아야 합니다. 가인과 아벨로 하여금 제물을 드리게 한 때에도 심정을 제쳐 놓은 후에 드리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노아 때로부터 모세 때, 예수 때를 거쳐 지금까지 하나님은 맺힌 심정을 앞에 내놓고, 그 마음을 앞에 내놓고 맨 뒤에서 싸워 나오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리워하십니다. 마음의 세계를, 또 심정의 세계를 그리워하십니다. 그래서 그 심정을, 그 마음을 앞에 내놓고 인류를 대해 나오시는 것입니다. 하늘은 이렇게 아무도 알지 못하는 때에 심정을 앞에 놓고, 마음을 앞에 놓고 나오셨으나 인간은 그것을 몰랐습니다.
그러면 인간이 하늘의 한을 해원하는 날은 어떠한 날이냐? 우리가 ‘하나님이시여, 이 전쟁 마당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습니다. 전쟁 마당에서 하나님이 저희를 사랑해 주신 것을 알았습니다.’ 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붙들고 싸움터에서 원수를 굴복시켜 승리하는 날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모습이 나타나기를 고대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나타나지 않으면 사탄이 조롱합니다. 하나님이 6천년 동안 마음과 심정을 다 기울인 이 싸움판에서 승리할 수 없어요. ‘하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나오지 않았는데 당신이 어떻게 승리할 수 있습니까?’ 하고 사탄이 참소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 기울이시고 심정을 다해 나오시는 하나님은 이와 같이 인류역사의 전쟁노정 위에서 엉클어지고 유린당해 나오셨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에게 사정할 수 없고 가르쳐 줄 수도 없는 사정에 처한 하나님의 곡절을 어느 한 날 땅 위의 인간들이 알아야만 영계의 싸움이 지상에서 종결되는 것입니다. 만일 그러한 하늘의 작전을 모르고 땅도 하늘 것이요 심정도 하늘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땅이 어떻게 하늘과 연결될 수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 자신은 모르지만 인간의 심정과 마음이 변하지 않는 기준에 서 있기 때문에 그 변하지 않는 심정과 마음을 중심삼고 싸움터에 나서서 승리하는 자가 있다 할진대 그는 하나님이 이기지 못한 싸움에서 이겼다는 영광을 얻을 것이며, 하나님은 그에게 ‘내게 있는 하늘과 땅의 모든 것, 내 사랑, 내 모든 것까지도 네게 주겠다.’ 하실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소원이요 인간들의 소원입니다. 그날을 맞이하게 될 때 우리에게는 영원한 행복이 옵니다. 그날에야 비로소 영원한 자유와 영원한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사랑에는 두 주인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인간만이 점령할 수 있는 기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사랑을 중심 삼고 자유의 노래를 부르는 자에게는 억천만 사탄도 참소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있어야 합니다. 원래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셨습니다. 우리의 마음과 같이 계셨습니다. 또한 우리의 심정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러나 인류는 하나님의 일터에서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심정을 배반했습니다. 그러나 하늘은 그러한 인간의 후손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심정을 알아줄 날을 고대하시며 무지한 인간들을 끌고 끌어갈 길을 찾게 하기 위해 몰아내고 계십니다.
이런 것을 알았을진대, 우리가 대천지를 바라볼 때도 먼저 지금까지 역사노정에서 유린당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불러 일으켜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역사노정에서 유린당하신 하나님의 심정을 불러 일으켜야 되겠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한스런 싸움의 노정에서 우리 선조들이 믿지 못하고 뜻을 감당하지 못하여 실패한 원한을 불러 일으켜 우리 일신이 책임지고 나서서 ‘하나님, 저의 전체를 내세워서 사탄과 싸워 승리하겠나이다.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마음에 있어서, 하나님의 심정에 있어서 유린당한 모든 것을 저로 말미암아 탕감하시옵소서.’ 하게 될 때 우리는 비록 역사적인 종말기에 세워졌을지언정 역사 전체와 시대 전체를 대표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몇 천년 전 아담보다도, 노아보다도, 아브라함이나 모세보다도, 그리고 예수보다도 더한 승리의 모습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몰리고 몰려 이 자리에 나온 여러분, 무엇하러 왔습니까? 우리에게 단 하나 소원이 있다 할진대 그것은 아버님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세계는 바야흐로 혼란한 가운데 방향을 잃어버리고 중심까지 잃어버린 판국에 우리만이라도 하나님의 일터에, 하나님의 마음에, 하나님의 심정에 같이 있고자 하여 이 자리에 찾아온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느낄 수 있고, 그러한 각오를 할 수 있고, 그런 심정으로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자리를 찾는 인간이 되어 있다 할진대 더 무엇을 생각하겠습니까? 그것이 인생에 있어서 마지막 자리라는 것입니다. 그 자리는 하나님도 슬픔의 눈물을 거두시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실 수 있는 장소요, 인류역사에서 흘려온 비애의 눈물을 거두시고 환희의 눈물, 승리의 눈물, 영광의 눈물을 떨어뜨릴 수 있는 자리입니다.
여러분과 내가 그러한 자리를 그리워하며, 한스러운 눈물 말고 환희와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아버지의 심정과 아버지의 마음을 노래할 수 있는 승리의 아들딸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내가 승리했으니 아버님은 내 것이야! 사탄이 관여할 수 없어. 아버지의 사랑도 내 것이야! 사탄도 방해할 수 없어. 아버지의 일도 나의 일이야! 사탄도 꼼짝 못해.’ 할 수 있는 자가 되어야만, 천지에 싸움이 끝나고 행복의 문이 열릴 것이며 자유와 평화의 동산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라 하신 한스러운 복귀의 노정이 슬픈 노정임을 알았사옵고, 심정에 사무친 눈물을 그칠 수 없는 눈물의 경지임을 알았사옵니다. 핍박과 외로움에 몰리어 몸 둘 곳이 없는 처참한 자리에서도 자기를 변명할 수 없는 인간임을 알았사옵니다.
슬픈 역사, 슬픈 아버지의 심정, 슬픈 아버지의 마음을 통할 수 있는 역사적인 기쁨의 한 날은 언제나 오겠나이까? 그날이 오기까지에는 많은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니오라 한 사람, 즉 나로부터 그리고 여기에 모인 이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세계는 깊은 잠 가운데 파묻혀 있사오며 사망의 물결에 휩쓸리고 있사옵니다. 그것을 보는 저희들이 밤이 새든 날이 가든 개의치 않고, 먹거나 굶거나 개의치 않고, 어려운 환경이나 염치에 개의치 않고, 그러한 세계를 위하여 오늘도 내일도 하늘의 정열을 퍼붓는 투사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정병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우리만이라도 이 길을 사수하지 않으면 안 되겠사오니, 적탄이 비오듯 쏟아지는 싸움터에서 몸부림치다 쓰러지는 한이 있다 할지라도, 그 정열로 마음을 세워 하늘과 인연 맺고 나갈 수 있는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고, 오늘 이 자리에 모인 당신의 아들딸들만이라도, 우리만이라도 아버지와 함께 있고 싶어하는 간절한 마음을 갖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들이 6천년 동안 아버님과 더불어 싸워 나온 아담의 모습을 갖춘 싸움의 대표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고, 아버님의 마음과 아버님의 심정을 통하여 하늘과 인연을 맺고 ‘하늘이 내 것이야, 아버지가 내 것이야, 천지의 모든 것이 다 내 것이야.’ 하며 ‘아버지, 기뻐하십시오.’ 하고 위로할 수 있고, 스스로도 기뻐할 수 있는 그 한자리까지 저희들을 이끌어 주시옵소서.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저희들은 그러한 자리에 있고 싶어하오니 그 자리까지 이끌어 주시옵소서. 그 자리까지 나아가는 과정이 어렵다 할지라도 그 나아가는 과정에서 쓰러지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승리의 한 날이 기필코 있을 것이오니 그날을 바라보고 변치 않는 영광의 세계, 심정의 세계를 향하여 가는 그 목적과 이념권 내로 자기를 흡수시킬 줄 아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민족과 세계를 책임지고 그 자리까지 끌고 갈 줄 아는 아버지의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옵소서. 이러한 자는 역사적인 아버님, 시대적인 아버님, 미래적인 아버님과 더불어 있을 수 있는 아들딸임을 알고 있사오니, 그런 마음을 가지고 싸움에 있어서 승리자가 되게 허락하여 주옵소서. 아버지,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나이다. 영원한 아버지, 축복의 손길을 거두지 마시옵소서.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였사옵나이다. 아멘.
사랑하는 제자들을 앞에 놓고 기필코 가야 할 골고다의 심정을 심중에 생각하면서 남겨진 제자들을 염려하시던 예수님이었음을 저희들이 알고 있사옵니다.
오셔서 영광의 길이 아닌 고난의 길을 가셔야 했던 예수님은 불쌍한 분이셨습니다. 30여 평생 어느 누가 그의 마음의 친구가 되었으며, 어느 누가 심정을 나누었으며, 어느 누가 그의 손길을 붙들고 통사정할 수 있었습니까? 한 사람도 없었사옵니다. 과연 예수님은 불쌍한 분이었습니다.
악한 권내에 사로잡혀 허덕이고 있는 땅 위의 만민을 구하기 위해서 오셨던 구주의 길이 서글픈 길이었다는 것을 여기 모인 저희들은 잘 알고 있사옵니다. 죽기 위해 오셨던 주님이 아니었음을 알았사옵고, 그 분을 모시지 못한 것이 한임을 아버지, 저희들이 알았사옵니다. 한분을 세워서 영광의 터전을 넓히시기 위하여 하늘은 4천년을 수고하셨사옵니다. 수많은 선지들이 이 노정에서 피땀을 흘리고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는 천대의 길을 거쳐오면서도 한 날을 소망하였던 것은, 메시아를 모시기 위해서였사옵고, 그와 더불어 사탄 앞에 승리적인 하늘의 권세를 갖추고 만민을 굴복시켜 아버지의 아들딸의 영광을 찬송하기 위한 것이었사옵니다.
이러한 목적을 가지고 예수는 이 땅에 오셨다 가셨지만, 인류는 아직까지 그런 한 날을 맞아 보지 못한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기에 다시 와야 할 사명을 남기고 가시는 예수님의 심정이 무한히 슬펐음을 알게 되옵니다. 저희들이 가진 것이 없고 친구가 없을지라도 그의 심정을 소유하게 허락하여 주시고 그의 친구로서 걸을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신다면, 이 이상 저희가 요구할 것이 없고 더 바랄 것이 없는 것을 아버님은 아시고 계실 줄 아옵니다.
아버님! 여기에 모인 당신의 아들딸들, 이제 자신이 누구의 제자였으며, 누구의 자녀였으며, 어느 나라의 백성인가 하는 것을 자문자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천성을 위하여 수고하신 예수의 성상을 바라보면서 그가 남기신 말씀을 통하여, 심정을 통하여, 생명의 움직임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비판할 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어둠의 세력이 가해져 흐르는 역사를 붙안고 안타까워하시는 하늘의 심정이, 피 살이 저희의 마음 몸에 접하여 있는 것을 몰랐사옵니다. 아버님이시여! 이제 당신의 그 심정을 알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수고의 발자취가 연하여 내려오는 역사적인 심정에 저희들이 접하여 붙들고 통회라도 하고, 붙들고 사정이라도 하고, 역사적인 모든 죄상을 폭로시키어 사죄할 줄 아는 속죄의 대표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저희에게 겸손한 마음이 부족한 것을 알았사옵고, 지극히 충성스럽게 아버지 앞에 드려야 할 제물이 되지 못한 저희들임을 알았사옵니다. 부족한 것들을 사랑하시는 아버지시여, 아버지 앞에서 완전한 자가 어디 있겠사옵니까? 타락한 연고로 부족한 인간인 것을 아시는 아버님, 저희는 부족한 그대로 나왔습니다. 저희가 무슨 생각을 갖고 있습니까? 사람마다 심중 심중, 사정 사정이 다르고 심정 심정이 다르니만큼, 자기의 형편과 자기의 사정에 얽매이고 자기의 관념과 주의에 이끌리어 하늘 앞에 닿을 수 없는 저희들임을 알고 있사오니, 아버님, 이 전체를 수습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아버지의 심정 앞에 머리 숙여 아버지께로 귀의할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 불쌍한 자들이옵니다. 이제 있는 그대로 나왔사오니 붙들어 주시옵소서. 당신이 붙들어 주시지 않으면 저희는 어디로 가겠습니까? 당신이 권고하시면 어디든지 가야 할 운명에 놓여 있는 인간이옵니다. 필시 가지 않으면 안 되는 입장에 처해 있는 자신인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나 누구를 믿고 갈 길도 아니고 누구의 말을 듣고 움직일 것도 아니옵니다. 내 마음과 내 심정의 흐름에 따라 홀로 본향을 향하여 가야 될 끝날 성도들의 길이요, 역사노정에서 선지들이 간 길임을 저희들이 알고 있사오니, 내 심정을 중심삼고 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뜻과 아버지의 심정에 어리어 그 심정을 그리워하고 그 마음을 본받게 하여 주시옵고, 그 행동을 나의 행동으로 옮기기 위한 싸움의 노정에서 지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남기신 싸움에서 승리의 표적을 세우시려는 섭리의 유업을 인계받아 부디 부디 영광의 자리에 설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날을 축복하여 주시옵고,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아버님, 말씀을 대하고자 하오니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도 사람의 말은 많이 들었사옵고 사람의 모든 사정은 알고 있사오나, 하나님의 심정을 통하여 나타난 말씀과 하나님의 간곡한 사정은 몰랐사옵니다.
이제 저희의 마음 몸이 다시 한번 재창조의 영광을 받아야 하겠사옵니다. 이것이 신앙자의 하루 하루의 표적인 것을 아오니 저희의 마음 몸이 저희의 것이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어떠한 말에 의하여 움직이는 자들이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고, 말보다는 심정이 저희의 마음에 어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긍휼의 마음이 이 청중의 마음 몸 위에 임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하늘 앞에 머리 숙여야 할 인간이고 피조만물인 것을 아옵니다. 당신이 좌정(坐定)하시는 이 시간이라 할진대 존엄하신 아버지의 영광의 은사에 저희의 생명이 인연 맺게 해 주시옵소서. 천상과 지상의 모든 만상을 총괄하여 아버지의 영광을 자랑하고 만민 앞에 증거할 수 있는 승리의 사실을 전개시킬 것을 알고 있사오니, 아버지, 친히 운행하여 주시옵고, 지켜 주시옵고, 보호하여 주시옵고, 나타나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사탄은 간격을 노리고 있사오니, 받는 자의 마음이나 전하는 자의 마음이 둘이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의 마음에 어떠한 관념, 어떠한 주의, 어떠한 비판적인 조건을 갖고는 하늘 앞에 설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스스로가 아버지의 심정과 사정에 화하고 엉켜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의 말씀을 통하여 아버지의 사정이 저희의 사정이 되고 아버지의 심정이 저희의 심정이 되고, 아버지의 동정맥과 더불어 저희의 맥박이 움직일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시간 모이는 곳곳마다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더욱이나 남한 각지에 널려 허덕이는 외로운 식구들, 이 시간 같은 은사의 손길로 주관하여 주시옵길,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올 때,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말 씀> 여러분들과 같이 생각하려 하는 제목은 ‘가야할 우리들’ 입니다. ‘가야할 우리들’ 이러한 제목을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우리는 알든 모르든 어느 곳을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내가 움직이는 시간에도 가고 있는 것이요, 쉬고 있는 시간에도 가고 있는 것입니다. 비단 나뿐이 아니고 이 민족, 혹은 이 세계, 더 나아가 하늘과 땅까지도 어떠한 곳을 향하여 지금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 일생을 거친 후에 나는 어떠한 곳으로 갈 것인가? 이것이 인간들이 해결해야 할 중요한 문제입니다. 종교도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철학도 역사도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동원돼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자신도 이런 운세에 사로잡혀 이끌려 가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차피 가야 할 나 자신이라 할진대 이 몸은 어디로 가려고 하느냐? 이 마음은 어디로 가려고 하느냐? 또 이 생명은 어디를 향하여 기울어지고 있으며, 내 심정은 어디로 가려고 하는가, 내 소원 혹은 소망과 이념은 어디로 가려고 하는가?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어차피 가야 할 운명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다 죽는 날 이 몸은 흙에 묻힘으로써 끝날 것입니다. 그러면 몸이 묻히는 그날 이 마음도, 이 생명도, 이 심정도, 이 이념도, 혹은 소원까지도 같이 묻혀 버리고 말 것인가? 사라져 버리고 말 것인가? 여기에 확실한 내용과 확실한 해결점과 확실한 목적관을 세워 놓지 않는 한, 이는 불행한 사람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는 걸음을 붙잡아 놓고, 움직이는 마음과 기울어지는 심정을 막아 놓고 ‘너는 어디로 가느냐?’ 이것을 물어 보고,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싸워 나오는 사람들이 성현 현철이요, 혹은 수많은 도주(道主)들이라는 것을 우리들은 알게 됩니다. 그들이 그것을 해결하기 위하여 나왔지만 이날까지 ‘내 몸은 이러한 곳으로 갔으며 내 마음과 내 심정, 내 생명과 내 이념은 이런 곳을 향하여 달렸노라. 그러니 온 천하에 있는 모든 만민, 혹은 천지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물은 이곳으로 가라.’고 자신 있게 명령한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봉독한 본문 내용은 예수님이 가시면서 자신은 이러한 곳을 가거니와 남아 있는 제자들도 그 길을 따라와야 할 것을 염려하시며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가 가는 이 길을 너희도 와야 되고 또 너희들이 있는 이 세상을 내가 버릴 수 없다는 인연의 심정을 품고 가시는 예수와 그 제자들 사이에 빚어졌던 사실들은, 어차피 가야 할 우리의 인생노정에 있어서 큰 문제를 제시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에게는 낳아준 부모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가족이 있습니다. 또 여러분의 자녀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가정에 엉클어져 있는 부모나 처자를 중심삼고 볼 때에 심정으로 고대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 아들이 잘 되었으면, 우리 남편이 잘 되었으면, 우리 아내가 잘 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를 둘러싸고 있는 주위의 제일 가까운 사람들이고 대하는 소원으로 돼 있습니다. 좀더 선하고, 좀더 가치 있고, 좀더 높고, 좀더 크고, 좀더 영광스럽기를 나를 중심삼고 심정으로 엉클어져 있는 무리들은 고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에 인생이 끝남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것이 허사가 된다 할진대 나를 위해주던 그분들의 마음은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슬픈 요소가 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주위도 그렇거니와 나 자신으로 돌아와서 생각해 보게 될 때, 내 마음도 좀더 높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좀더 선하기를 원하고 있고, 좀더 넓기를 바라고 있고, 좀더 가치가 있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입니다. 과거나 현실의 사람, 여러분이나 나나 누구를 막론하고 좀더 높은 선과 인연 맺기를 바랍니다. 높게는 하늘과, 넓게는 세계와, 그 자체는 만민과 더불어 인연 맺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 개인만이 아니라 과거의 사람도 그러하였고 미래의 사람도 그러할 것임에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미루어 보게 될 때, 오늘 어차피 가야할 인생에서 움직이고 있는 이 생명은 어디를 향하여 갈 것인고? 높고 넓은 이 천지를 상대로 하여 내 마음과 몸은 움직이고 인연을 맺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난 존재라 할진대 역사를 막론하고 시대를 막론하고 이런 느낌을 안 느끼는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이 쓰러짐으로 마지막이요, 이 생명이 끊어짐으로 마지막인 줄 알고 있는데,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될 것이냐? 여기에서 인간이 최후의 막을 내린다면, 내 마음이 높아지기 원하고 하늘과 땅과 인연 맺고자 하는 모든 것, 내 스스로 가진 관념에서가 아니라 생각지 않으려야 않을 수없는 환경에 의해 천지의 자연적인 현상과 같이 내 마음 속에 스며드는 모든 것은 허무로 돌아갈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부정하려야 부정할 수 없는 바람이 내 마음을 지배하고 내 몸을 감돌고 있거든, 이러한 느낌과 감정과 심정이 있다는 것은 기필코 가야 할 목적의 세계가 있기 때문임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런 대목적을 위해 존재하고, 대목적을 향하여 오늘도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어떤 학설이나 무슨 주의를 통해서가 아니라 내 마음에서 스스로 느끼고 있습니다.
인생은 내 개체로 시작하여 내 개체로 끝나지 못하는 것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개체를 세운 것은 전체를 위해서입니다. 내 마음이 높고, 내 마음이 행복되고, 내 마음이 하늘땅 앞에 인연 맺기를 바라는 것은 개체에서 시작하여 개체에서 종결짓기 위한 것이 아니요, 나로부터 시작하여 높게는 하늘, 넓게는 땅과 같이, 그 자체는 만민과 더불어 기뻐하고 더불어 행복하고 더불어 살기 위함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들은 무엇인지 모르고, 전후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고, 시작과 끝이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고 있지만, 이 대우주 이념은 시작과 끝이 있어서 그것은 공동목적을 위하여 역사를 몰고 지금까지 나오고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우리는 그런 권내(圈內)에서 일생을 걸어 놓고 허덕이는 인간들입니다.
그러면 땅과 사람만을 위하여 달리는 나냐?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일에 어떠한 권세를 가지고 세계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고, 이 땅을 상하 좌우로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 사람의 심중에는 더 높고, 더 큰 이념적인 감정이 스며들지 않는 것이냐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세계를 보면,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이나 소련의 후루시초프에 의해 좌우되고 있습니다. 전인류가 좌우되고 있습니다. 이 둘 중 한 사람이 없어지고 어떠한 한 주의가 이 세계를 움직이는 시대가 되어서 그 주의를 가진 책임자가 그 시대를 움직이고 27억의 인류를 움직이고, 이 땅덩어리를 좌우하는 입장에 섰다 할지라도, 그 역시 더 높은 것을 바라는 이념적인 감정은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이상적인, 혹은 이념적인 마음의 문제가 이 인류와 땅만으로 해결될 것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인류와 이 땅을 기반으로 하여 여기에 무엇이 들어와야 하느냐? 하늘입니다. 하늘이 들어와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역사가 이런 방향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만일에 이 역사를 지배하는 하늘이 있다 할진대 그 하늘이 바라는 것은 무엇이겠느뇨? 인류를 하나로 만드는 것입니다. 고통스러운 인류역사를 지나고 지나고 지나 가지고, 싸움의 역사를 거쳐 가지고 인류를 하나의 움직임으로 몰아넣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늘은 몰아낸 그 인간과 더불어 관계를 맺어야만 됩니다.
그렇게 우리가 하늘과 관계를 맺는다면, 비로소 우리의 마음이 이 땅을 보나 하늘을 보나 고맙고 감사한 심정으로 채워질 것입니다. 그런 한 때가 오기 전에는 평화니 뭣이니 없습니다.
하늘이 있고 인간과 하늘 사이에 인연이 있는 한, 인간은 자기 멋대로 살 수 없습니다. 인간이 지금까지 하늘과 인연을 맺지 않고 자기 멋대로 걸어 나온 것 같지만 어떤 힘이 마음을 재촉하여 하나의 목적세계를 향하도록 하여 나오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실증되는 사실입니다.
하늘은 여기에 어떤 작전을 세워 나왔느냐? 하늘과 접선할 수 있는, 하늘과 연락 지을 수 있는 하나의 움직임을 지상에 전개시켜 나왔던 것입니다. 이것이 종교입니다. 종교는 역사와 더불어 싸워 나왔고 역사와 더불어 몰려 나왔으나 역사 위에 서지는 못했습니다. 주의 위에도 못 섰습니다. 그러면 종교가 오직 취급해 나온 분야는 무엇인가? 우리의 양심 이상의 분야를 취급해 나왔습니다.
역사노정에서 종교가 이 땅과 더불어 싸워 나왔지만 승리의 때는 가져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필코 하늘과 땅에 어떠한 인연이 성립되는 시간이 올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 시간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끝날이라는 것입니다. 혹은 재림의 날이라고 말합니다. 그때에 종교인들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이뇨? 하늘과 땅과 인연 맺을 수 있는 중간 존재들로서 세계를 대하여 하늘과 땅을 대하여 사명을 해야 될 것입니다. 그날이 기독교 신도들이 바라는 재림의 날입니다.
우리 인간의 마음에 흘러 들어오는 이러한 감정은 대우주의 어떤 목적을 가진 이념을 중심삼고 들어옵니다. 그러기에 아니 느끼려야 아니 느낄 수 없는 자극적인 충격을 내 양심은 받고 있습니다. 인간이 그렇다 할진대 인간을 지으시고 역사를 지배해 나오시는 하나님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늘을 찾아 올라가야 되고 하늘은 인간을 찾아 내려와야 되기 때문에 우리가 가야 할 길은 하늘을 찾아가는 것이요, 하늘 또한 우리 인간을 찾아 내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가고 오는 이 길에서 상봉하는 그 순간이 역사적인 종말시기요, 천적인 출발시기임에 틀림없습니다. 또 창조주의 창조이념이 인간세계에 이루어지는 시간일 것이고, 인간이 찾아 나오던 이상적인 그러한 시간이 시작되는 때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하늘은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이념의 주체요, 신의 주체요, 최고의 사랑의 주체요, 생명의 주체요, 내 모든 전체의 주체시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인간이 거하고 싶어하는 곳은 어디인가? 주체 되는 하늘과 상대 되는 인간이 인연을 맺고 땅에서 살기를 원합니다. 내 몸이 움직이는 것을 하늘이 알아주고, 내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하늘이 알아주고, 혹은 이 땅에서 움직이는 내 생명과 내 심정, 내 이념 전부를 무한한 하늘이 알아주면서 같이 움직여 주는 한 날이 온다 할진대 인간은 거기에서 비로소 행복을 느낄 것입니다.
역사적인 위인이나 현철(賢哲)들은 그 시대에 핍박을 받고 몰리다 사라져 버리는 자리에 처하면서도 그 길을 갔습니다. 죽음의 길인 줄 알면서도 갔습니다. 가는 데는 혼자 간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을 통하여 스며드는 대우주의 이념과 더불어 갔다는 것입니다. 불쌍하게 사라졌던 선한 존재들은 홀로 간 것이 아닙니다. 이 인간 세상에서 보면 홀로 가는 것 같지만, 대우주의 운세와 더불어 이 대우주를 경영하는 천적인 이념과 더불어 간 것입니다. 그러한 이들의 생애는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은 필히 어느 한 때에 역사적인 인물로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선한 사람은 어떠한 사람이냐? 앞으로 천적인 소망의 시대가 올 때에 남아질 수 있는 무리는 어떠한 무리일 것이냐? 그 이념과 더불어 사는 사람입니다. 몸은 비록 땅에 있을망정 그 마음과 그 이념은 무한한 목적세계를 향하고 땅 위에서 실적을 남기고 가는 사람입니다. 이 땅 위에서 살지만 땅의 역사관을 벗어나 목적하는 이념세계와 인연을 맺는 자리에서 쓰러지는 사람은, 역사가 점점 발전하여 그 목적의 때가 오면 세계적인 존재가 됩니다. 지금 우리가 믿고 있는 예수님이 그런 분입니다. 그 외 분들은 말하지 않아도 여러분들이 잘 알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한 분을 붙들고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예수님은 민족의 반역자로 몰렸습니다. 또 교단으로부터 이단자로 몰렸습니다. 그 사회로부터 광란자(狂亂者)로 몰렸습니다. 여지없이 몰려 버렸습니다. 그 시대에서는 오늘날 여러분들이 믿고 있는 그런 예수로 대접받지 못했습니다. 몰리고 쫓기던 예수, 핍박받고 억울한 자리에서 참고 있던 예수, 더 나아가서는 십자가의 사선(死線)까지 나아가던 그 예수는 그 시대에서는 처량한 예수요, 불쌍한 예수요, 응당 그렇게 되어야 할 예수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홀로 가지 않았습니다. 그런 자리에서 주체이신 하늘과 더불어 갔습니다. 그러기에 그 예수를 역사노정에서 유린할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끝날에 처해 있는 우리들은 어떠한 느낌을 가져야 되느냐? 역사적인 무리들의 친구가 되어야겠다는 것입니다. 사망세계에서 죽음으로 종결을 짓고 마땅히 쓰러져야 할 무리들의 친구가 아니라 그 시대의 배척을 받고 민족과 국가의 배척을 받았을망정 역사를 경영하는 천적인 심정을 붙들고 나오던 그런 무리들의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선조를 숭배하고 선한 사람을 숭배하고 혹은 충신 열녀를 숭배하는 원인이 거기 있다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씨족사회였으나 씨족에서 부족으로, 부족에서 민족으로, 혹은 국가로, 세계로 벌어져 나오는 것입니다. 이처럼 역사와 더불어 작은 것에서부터 큰 것으로 넓혀 나온다는 겁니다. 민족을 책임지고 싸웠던 선한 사람은 민족을 대표할 수 있는 사람이요, 국가를 책임지고 싸운 선한 사람은 국가를 대표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제 이것을 지나서 세계를 위하여 싸울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일개 국가에 치우쳐 싸울 때가 아니라 지금 때는 주의와 사상을 중심삼고 싸울 때라는 것입니다.
이것으로써 우리의 모든 싸움이 종결될 것이냐? 아니올시다. 이제 하나의 싸움이 남아 있나니 전세계에 있는 수많은 종교인들과 비종교인의 싸움입니다. 이들이 격렬하게 싸울 때가 기필코 옵니다. 역사노정에서 아무리 국가나 어떠한 무엇이 종교를 탄압하고 압박했을망정 그 종교는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역사의 변천에 따라 움직이지 않고 직선으로 나왔습니다. 기독교의 가는 길을 막았지만 기독교는 이것을 넘고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소망하는 것은 무엇이냐? 땅이 소망의 전부가 아닙니다. 땅 위의 인간들이 바라고 있는 현실의 무대가 목적이 아닙니다. 그것을 멋지게 박차고 내일의 한 날을 소망하여 나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어차피 그러한 세계를 향하여 가야 할 우리, 이 사조의 흐름을 따라가야 할 우리는 어떠한 관점에서 바라봐야 되겠느냐? 내 마음과 내 심정, 내 몸과 내 생명이 이 현실의 무대를 박차고 하늘을 향하여 솟구쳐 오를 수 있는 신념을 가진 종교인, 그런 사람은 기필코 새 시대에 남아지는 무리가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제 전세계에 널려 있는 모든 종교인들은 어떤 하나의 교단과 단합하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때가 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마음이 그리워하는 방향을 찾아왔습니다. 그러기에 역사노정에서 종교는 위대한 공헌을 해 나왔습니다. 어떤 민족이 종교를 붙들고 거족적으로 단결하고 그것을 위하여 나간다 할 때 어떤 권세 있는 자가 그 민족을 집어 삼킨다 해도 소화를 못 시킵니다. 절대 못 시킵니다.
여러분, 유태인을 보십시오. 세계를 유리고객 하였을 망정 어떤 주의나 사상도 그들을 삼키지 못했습니다. 왜? 그들은 소망의 한 날을 고대하고 있고, 내일의 희망의 한 날을 품고 선민권을 자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도 같은 나라도 영국이 3백여 년 동안 그 민족을 지배했으나 그 민족에 흐르고 있는 종교의 혼은 지배하지 못했습니다. 어차피 한 때를 맞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세계에는 수많은 종교가 널려 있고 인류의 3분의 2에 가까운 사람이 종교적인 관념을 가지고 있는데 그들이 본래부터 하늘땅에 이렇게 처참한 모습을 하고 있게 되어 있느냐? 하늘이 이렇게 소망도 없고 무용지물 같고 약자 중의 약자와 같은 모양으로 만들었겠습니까? 절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나아가야 할 때니까 그렇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전세계에 널려 있는 종교인들은 너나할 것 없이 절대의 이념을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생명의 이념과 접할 수 있는 한 때를 찾아 나가는 운명에 처해 있는 연고로 어떠한 주권, 어떠한 국가이념을 아직까지 세워 놓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그 주권과 국가이념을 종교인들이 가졌다면 깨집니다. 아직은 그런 것을 하늘이 부여할 수 없는 때입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올 끝날은 어떠한 때냐? 절대의 이념을 동경해 나오면서 역사노정에서 밟혀 나오던 사람들이 세워질 수 있는 때입니다. 그렇게 됩니다. 기필코 그런 시대가 오고야 맙니다.
그러면 이구동성으로 말세라고 하는 이때에 여러분은 어떻게 할 것이냐? 이 땅의 것으로써 세계가 해결될 것인가? 도저히 안 됩니다. 여기에 하늘이 개입해야 됩니다. 그러면 하늘을 개입시키는 사명을 해야 할 사람이 누구냐? 종교인들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어디로 가야 할 것이냐? 사선(死線)을 넘어서라도 가야 할 곳은 어디인가? 하나님을 찾아 그 하나님을 모셔 놓고 마음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날, 내 마음 세계에서 ‘이 이상의 소원이 없습니다.’ 할 수 있는 한때를 맞이해야 됩니다. 그것을 위하여 우리들은 어려움을 참고 억울함을 참고 분함을 참으면서 이 세계를 넘어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계를 넘어갈 자신이 못되어 있는 한, 세계와 더불어 사라질 것입니다.
이때가 역사적인 종말이라고 말하는데 과연 그렇습니다. 이제 이 세계는 어떠한 세력을 가지고, 혹은 국력을 가지고, 혹은 어떠한 정책을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렇게 하겠다 해도 마음이 달음질쳐 버린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심정을 본받은 상대인 연고로, 하나님의 심정이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이 인류 앞에 계속 움직이는 한, 우리의 마음도 그 목적과 연결짓는 순간까지 작용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앙의 길을 가고 있는 여러분 자신들이 가야 할 곳이 어디냐? 우리가 가야 할 곳은 대한민국도 아닙니다. 이 자유세계도 아닙니다. 이 민족과 이 나라, 혹은 이 자유세계를 발판으로 하여 한 걸음 더 올라서야 합니다. 딛고 올라서는 그 순간 하나님이 소망하고 역사가 지향해 오던 세계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늘을 중심삼고 이 세계와 내 일신이 인연 맺게 되는 그 순간에는 우리의 심적 작용도 그곳에 정착할 것입니다.
목적 없이 작용하고 목적 없이 이루어지는 현상이 없습니다. 동기와 결과의 과정에서 반드시 보이는 것이 작용과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내 스스로 부정할 수 없는 강력한 느낌이 내 마음에 있는 것은 나를 목적체와 인연 맺게 하기 위한 동기적인 내용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작용을 일으키는 것은 전체의 목적을 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를 중심삼고 그 목적이 종결되는 그날은 하늘의 소원이 성취되는 날이요, 인간의 소원이 성취되는 날일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종교인들은 가야 합니다. 아니 가려야 아니 갈 수 없는 한 곳, 이 땅을 버리고라도 넘어서야 할 한 곳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 마음에, 나는 하나님의 몸과 같은 입장, 둘이 아닌 하나로 접하는 그 순간은 우리 인생의 최고 목적을 성취하는 때입니다.
하늘은 생명의 주체요 이념의 주체요 사랑의 주체이며, 우리의 마음과 몸의 주체입니다. 그러기에 내가 하늘과 접촉되는 순간에는 내 몸이 내 몸이 아닙니다. 내 마음이 내 마음이 아니며, 내 심정이 내 심정이 아닙니다. 내 이념이 내 이념이 아닌 것입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을 대신한 몸이 되기 때문에 만물의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내 마음이 하나님과 같은 마음이 되기 때문에 내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을 대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때에 비로소 내 생명은 만우주를 움직일 수 있는 생명의 권한을 가지는 것입니다. 내 심정은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하여 나타날 수 있고, 내 이념이자 아버지의 이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비로소 우리의 심적인 소원의 모든 목적은 종결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는 물론이고 우리도 가야 하는데, 어떻게 갈 것인가? 내 몸이 쓰러지는 한이 있다 할지라도 소망의 심정을 품고 역사와 더불어 가야 되겠습니다. 아직까지 그런 한때가 되지 않았다면 그러한 소망을 품고 남은 시간을 채우며 넘어서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예수님도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가 2천년 전 이 땅에 오셨을 때 전부가 반대했고 전부가 몰아냈지만, 아버지와 인연 맺은 심정은 몰아낼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 마음을 몰아낼 수 없고 그 생명을 몰아낼 수 없고 그 이념을 몰아 낼 수 없었기에 역사는 거기에 굴복돼 들어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 예수가 다시 오는 때는 언제이냐? 역사적인 종말시대에 그런 때는 반드시 올 것입니다. 기필코 그러한 때가 올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이 사회에서 살고 있지만 여러분의 몸은 어디론가 달리고 있습니다. 내 마음도 달리고 있고 내 심정도 달리고 있습니다. 즉 마음으로 소망하는 어떠한 큰 이념을 향하여 달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마음을 고이고이 모시고 마음이 정착할 수 있는 한 곳이 어디냐고 호소해 봤습니까? 어떠한 한 곳을 향하여 달리고 있는 이 몸과 이 마음과 이 생명과 이 심정이 쉴 수 있는 한 곳이 어디인가를 한번 생각해 보았습니까? 만약에 그런 자리에 있지 못할진대 여러분은 인간 역사와 더불어 그 주의와 더불어 멸망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어떠한 주의나 사상에 지배받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무엇을 원하느냐? 심정의 지배를 받으려고 합니다. 우리의 몸도 심정이 있는 곳에서 안식하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어떠한 주의나 사상이 나왔다 할지라도 안식할 수 있는 심정적인 내용을 갖추지 못하는 한 불안과 공포는 더해 갈 것입니다. 우리의 심정을 움직일 수 있고 ‘영원히 영원히 내가 여기에 머물고 싶소이다.’ 할 수 있는 것이 인류 앞에 나타나야 됩니다. 그래야 그것을 중심 삼고 세계는 해결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계시다 할진대 그 하나님은 어떠한 곳으로 오실 것이냐? 기필코 인류가 바라고 있는 심정의 터전 위에 나타나 가지고 인연 맺고자 하실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에서는 사랑을 말합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했습니다. 심정이 안식할 수 있는 동산, 이것이 우리가 살 수 있는 본향의 동산입니다. 어떤 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는 행복하다.’고 주장한다 할지라도 그건 관념적인 행복일 뿐입니다. 환경에 따라 변하는 행복입니다. 그 무슨 제도가 생활하는 데 있어서 외적으로 좀 낫게 해준다고 해서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그것에 굴복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근본적으로 인간은 어떠한 제도에 붙들려 있지 않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최후의 문제는 무엇이냐? 심정과 이념이 통할 수 있는 그 한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최상의 분과 동등한 자리에서 온 만상을 바라보는 그 순간 비로소 우리의 마음과 심정에서 작용해 오던 모든 요구조건이 정착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관념을 통한 안식의 동산이 우리의 진정한 소망이 아닙니다. 심정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안식의 동산이어야 합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겠다고 생각하고 사랑해요? 인식을 넘어서 이미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을 알기 이전, 인식보다 먼저 있는 것이 심정입니다. 그러기에 앞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자는 마음의 안식을 얻은 자가 아니라 심정의 안식을 얻은 자입니다. 여기에서 죄악의 역사는 비로소 스톱합니다. 하나님도 여기에서 비로소 쉬실 수 있다는 겁니다. 우리의 심정 밑에 이념적인 초석을 놓고 있는 것이 하늘의 역사입니다. 그것이 바로 놓여지지 않는 한 우리의 마음은 요동할 것입니다.
끝날을 바라보고 있는 이 때, 우리 신앙자가 하나님의 온전한 아들딸이 되고 하나님의 심정을 가진 자가 되었다 할진대 아무리 폭풍우가 불어오고 세계가 한꺼번에 사라지는 한이 있어도, 그 심정의 보금자리를 농락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전세계 인류가 그런 자리에 있느냐?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의도 가고 모든 것이 다 지나갑니다.
우리들은 지금까지 이런 이념의 세계를 향하여 흘러 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이런 이념을 세워서 우리의 심정과 더불어 인연 맺으려는 하늘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그런 심정을 중심삼고 맺어진 부자지인연(父子之因緣)이 이 역사노정에 한 번이라도 있었느냐? 없었습니다. 그런 심정을 중심삼고 하나님과 인간이 대우주에 정착하여 더불어 살 수 있는 발판이 있느냐?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은 사탄의 제물이 되었고, 심정의 주인공을 맞지 못한 인류는 지금까지 비원리적인 심정 앞에 유린당하여 왔습니다. 이제 한 분밖에 없는 하나님의 심정과 나의 심정이 하나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내 마음과 아버지의 마음이 하나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30여 년의 생애노정을 거치면서 말씀과 주의를 우리에게 남기고 갔습니다. ‘이렇게 믿고 이러이러한 것을 지켜라.’ 했지만 영원히 안착(安着)할 수 있는 심정의 내용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성경 66권에 외적인 안식, 환경적인 안식의 터전은 이러이러하면 된다고 가르쳐 주었지만 심정적인 기반은 이러이러해야 된다고 하는 것이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성경 66권 중에 하나님의 심정을 소개하는 구절이 어디 있느뇨? 성경을 많이 보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하나님의 심정을 통하려면, 성경에 슬픈 구절이 어디 있느냐, 하나님에게 있는 제일 슬픈 것이 무엇이냐를 찾아야 됩니다. 성경 66권을 무불통지(無不通知)했다 해도 뽐내지 마십시오. 통달하는 것 좋습니다. 그러나 성경 66권 가운데서 하나님의 슬픈 심정을 통할 수 있는 구절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 가운데 그런 구절은 많지 않습니다. 단 한두 구절에 불과합니다.
여러분, 그렇잖아요? 사랑하는 두 남녀가 사랑하는 심정을 보여줄 때 수많은 말로 이러구 저러구 한다고 해서 그것으로 심정을 다 나타낼 수 있느냐? 아닙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이 타락한 연고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다는 것을 모릅니다. 그 맛을 못 봤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맛 본 사람 있어요? 이럴 것이다 하는 정도밖에는 모르는 거예요. 예수의 사랑을 완전히 맛본 사람이 없고, 성신의 사랑을 완전히 맛본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한 예수를 붙잡으려 했지만 붙들지 말라고 했습니다. 자격자가 못 된다는 것입니다. 그를 붙들고자 하는 자는 심정의 맛을 본 자, 세계를 대신하고 하늘땅을 대신한 아버지의 마음을 통한 자라야만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2천년 동안 예수를 믿고 성경을 붙들고 나온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정을 붙들었습니까? 예수의 심정을 붙들었으며, 성신의 심정을 붙들었습니까? 어림도 없습니다. 예수의 말씀은 붙들 수 있고 예수의 모양은 볼 수 있고 대할 수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품은 심정은 대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최후의 결판을 지어야 할 싸움이 있다 할진대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외적인 이 세계의 싸움이 아닙니다. 내 마음의 싸움입니다. 우주적인 어떠한 감정이 나를 격동시키게 될 때 격동을 당하는 이 심정이 영원히 정착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서는 ‘하나님!’ 하면 ‘오냐!’ 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인연을 맺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타락하여 떨어져 나간 인간을 외적으로 수습해 왔습니다. 그래서 구약시대는 종의 마음을, 신약시대는 아들의 마음을, 앞으로 재림시대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야 됩니다. 거꿀잡이로 찾아 들어옵니다. 세계도 이것을 중심으로 세우고, 만물도 이것을 중심으로 세우고, 인류도 이것을 중심으로 세워 심판을 합니다.
왜 심판을 하느냐? 심정이 통할 수 없는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말이 통하지 않아 심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꾸로 올라갑니다. ‘종의 마음을 닮아라, 종과 같은 입장이 되어라.’ 하는 것이 구약시대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종들을 세워서 역사했습니다. 그리하여 그 대표적인 사명을 짊어진 사람과 죽더라도 같이 죽고 살더라도 같이 살라는 것입니다. 원래는 하나님이 보낸 그 대표자가 죽기 전에 백성이 먼저 죽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돼 있는 거예요. 맞는 데는 몸뚱이가 먼저 맞지 마음이 먼저 맞습니까? 백성을 대표하여 나타나는 책임자는 뼈요, 백성은 살과 같습니다. 살이 먼저 맞아야 할 역사노정에 뼈가 먼저 맞았으니 꺾여졌다는 것입니다.
종의 마음, 종의 심정을 통하는 구약시대를 거쳐서 다리 놓아 가지고 신약시대를 맞이하게 했고 그 다음 신약시대에는 아들딸을 보내 가지고 그 아들딸의 마음을 닮으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접붙여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와 성신이 누구예요? 하나님의 아들딸입니다. 그 아들딸을 기반으로 하여 아버지의 마음과 아버지의 심정을 접붙여야 됩니다. 그래야 최후의 승리자가 됩니다.
아들의 마음을 접붙인 예수라 할지라도 사탄이 그에게 항거합니다. 2천 년 동안 사탄은 성신을 대하여도 싸워 나왔습니다. 그러나 싸움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네가 아버지의 마음을 아느냐?’ ‘모릅니다.’ 예수도 모른다 그랬죠? 끝날에 어떻게 될 것을 천사도 아들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모르는 입장에 있으니 시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지금도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있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지금까지 2천년 동안 싸워온 것은 하나님의 참심정을 갖기 위해서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전체를 상속 받아야만 우주를 주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무엇을 상속 받아야 하느냐? 6천년 동안 숨겨졌던 하나님의 심정을 상속 받아야만 근본적으로 사탄이 머리를 숙이는 겁니다. 그러한 때가 기필코 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와 성신으로 모든 것이 해결될 줄 알지만 아닙니다. 아들의 마음은 아들의 마음이요, 성신의 마음은 성신의 마음입니다. 아들의 심정은 아들의 심정이기에 아버지 심정과 아들 심정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끝날 우리들이 총진격하는 목표, 억만 사탄을 무찌르고 행군하는 이 목표는 예수와 성신을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와 성신은 지금까지 만나 왔습니다. 예수와 성신을 만난 그것을 터로 하여 하나님의 심정을 상속 받을 수 있는 그때까지 역사는 흘러나갑니다. 그런 한 기준이 지상에 정착해야만 만민은 비로소 영원한 안식의 자리에 들어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스러운 무리들입니다. 한스러운 인류입니다 우리들은 지금까지 어떠한 나라의 백성도 돼 봤습니다. 어떠한 가정의 부모도 돼 봤습니다. 자녀도 돼 봤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하나님의 심정을 중심삼은 하나님의 백성이 돼 본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되려고는 하였지만 정작 하나님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하나님의 직계의 아들딸은 없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자유로 출입할 수 있는 하늘의 가정이 없는 이 땅이 돼 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한이 무엇이냐? 하나님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사람, 하나님이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인간을 대하여 뼛골에서 흘러나오는 사랑의 심정을 기울여 가지고 ‘내 아들아, 내 딸아.’ 하며 붙안고 사랑 한번 못해 본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사랑을 해 보았다고 생각해요? 심정의 타격을 받고 심정의 찢김을 받고 나오는 그 하나님이 여러분이 찾아야 할 아버지입니다.
탄식하여야 할 때가 왔습니다. 이 세상은 무한히 비웃고 무한히 미워해야 할 세상입니다. 왜? 하나님의 심정에 못을 박고 피눈물을 짜내게 했던 이 땅이기 때문에. 그러나 하늘은 이 세계가 아버지의 세계로 돌아오기를 바라고 6천년 동안 수고하셨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가야만 되겠습니다. 아니 가려야 아니 갈 수 없는 최후의 운명의 동산을 향하여 달음질치는 인류요 우리들은 하나님의 심정의 동산을 통과 하여야 할 운명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심정을 기반으로 하는 부자지인연(父子之因錄)을 맺어 가지고 자식을 사랑할 수 있는 천적인 가정을 못 가져 봤습니다. 그런 천적인 사회를 못 가져 봤습니다. 천적인 국가를 못 가져 봤습니다. 천적인 왕으로서의 영광을 이 땅 위에서 못 가져 봤습니다. 그렇잖아요? 타락 이후 6천 년 동안 인간이 살아 나온 지상의 이 나라는 원래의 인간이 살아야 할 나라가 아닙니다. 이는 어차피 한번 뒤넘이쳐서 지나가야 할 나라입니다. 어떠한 사상이나 어떠한 주의도 다 지나가야 됩니다. 이렇게 지나가야 할 것을 붙들고 생명을 걸어 나온 우리의 선조였으며 과거의 우리였던 것이 사실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가운데 되어진 것이 아닙니다. 슬픔 가운데서 되어졌습니다. 선조들은 세상의 그 나라를 위하여 걸인도 되었고, 그 나라를 위하여 봉사도 하였습니다. 또 그 나라를 위하여 선지들이 죽기도 했습니다.
역사노정에는 두 가지의 흐름이 나타나 있습니다. 세상 나라를 위하여 죽은 사람, 즉 세상 나라의 영광을 위하여 죽은 사람이 있습니다. 반면 보이지 않는 미래의 것,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한 미래의 것을 위하여 어떠한 상대적인 조건을 세우려야 세울 수 없는 때에 죽어간 사람도 있습니다. 이들 중 뒤에 말한 사람들은 도를 위하여, 종교를 위하여 죽어갔지, 어떠한 주권을 이 땅 위에 세워 놓고 그 나라를 위해 죽은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불쌍한 우리 선조들입니다. 죽어갔으되 자기 나라를 갖지 못한 백성으로서 간 것입니다.
예수가 그러하였습니다. 만왕의 왕으로서 이 땅의 나라를 지배하지 못한 예수였습니다. 억울하게 죽어갔다는 것입니다. 묻힐 수 있는 자기의 나라에서 죽었다면 한이 없겠다는 것입니다. 사탄 나라에 잡혀 와서 죽는 예수는 슬펐다는 겁니다. 사탄 나라에서 쓰러지던 사도들도 슬펐다는 겁니다. 사탄 나라에서 싸우다가 쓰러진 우리의 선조들도 슬펐다는 겁니다.
우리의 선조들이 나라가 없고 국적이 없으면서도 죽어갔고 유리고객했던 것은 이 기독교를 세우기 위함이요, 각 종교를 세우기 위함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싸워 나온 선조임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불쌍하다면 이 이상 불쌍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만왕의 군왕으로 오셨던 예수가 자기 땅을 한 조각도 갖지 못했고, 하나의 군대를 갖지 못했습니다. 생사를 같이 할 제자도 갖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예수의 한인 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고 혹은 도를 따르던 역대의 수많은 무리들은 억울한 죄인들로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 한을 푸는 그날이 심판날입니다. 공의의 하늘이 있다 할진대 기필코 세계적인 구원의 한때가 와야 될 것입니다. 그때가 안 온다 할진대 하늘은 없는 것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들은 원해야 되겠습니다. 이 나라에 적을 두고, 이 나라에 세금을 바치고, 이 나라를 위하여 피땀을 흘리며 우리는 살고 있으되, 예수가 바라고 성신이 바라고 하늘이 동경하는 나라는 이 천지간에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그 나라를 위하여 정성을 다하고 단 백 원의 세금이라도 바쳤으면, 단 한 시간이라도 봉사를 했으면 한이 없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한스럽습니다. 망할 이 나라를 위하고 망할 이 땅을 위해 나온 인류, 실속도 없는 생활을 붙들고 허덕이고 있는 인류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폭로시켜 인류의 가는 길을 막고 ‘너희의 모든 정성을 하늘 것으로 돌려야 하지 않겠느냐?’ 하며 나서야 하는 것이 도의 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책임일 것입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은 십일조를 바쳤습니다. 그들은 그 나라를 섬겼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 이스라엘 민족을 세운 목적이 어디 있느냐? 하나님이 계획하신 대로 치리(治理)할 수 있는 하나의 아들딸을 만들기 위해서, 그 아들딸이 사는 곳을 하나님의 땅으로 만들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으로 그 민족을 치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어느 한 때에 하나님을 중심삼고 ‘이 땅은 영원히 내 땅이니 사탄은 오지 못한다.’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싸워 나온 것이었는데 다 유린당했습니다.
오늘날 전세계의 기독교인들, 혹은 도인들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선의 주권이 악의 주권을 제거시키는 한 날이 틀림없이 올 것입니다. 그러니 이 새 날, 새 시대에 있어서 우리는 장비를 갖추어 하늘땅을 책임지고 6천 년의 인류의 원수들을 향하여 싸움의 봉기를 들고 나서는 하늘의 정병이 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역사 이래 어떤 훌륭한 장군도 지배하지 못하고, 정신적으로나 이념적으로, 혹은 심정적으로나 사탄이 운운(云云)할 수 없는 병기로 무장된 천적인 군대가 돼야 합니다.
하나님의 싸움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들은 싸움의 용사로 불리움 받았습니다. 싸우는 데는 무기를 들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이 뼈 살을 제물로 하여 싸워야 합니다. 실탄으로 하여 싸워야 합니다. 인간이 만든 어떠한 포탄을 갖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대 창조주가 만든 이 실탄을 가지고 싸워야 합니다. 기독교인들이 가는 곳곳마다 그 실탄은 터지곤 하였습니다. 그것을 기반으로 하여 민족이 굴복당하였고 오늘날 전세계가 예수의 이름 앞에 머리를 숙이게 되었습니다.
이런 처지에 있는데 오늘날 우리 기독교인들은 서로 싸울 때가 아닙니다. 이제는 예수님의 심정을 대신하고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하고, 내 아버지의 심정에 끌려 뼈 살이 녹아져 들어가 나는 아버지의 소유요, 아버지의 것이라고 자처할 수 있는 아버지의 상속자가 돼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길이 가로막혀 있으니 책임지고 싸워 이를 정복할 수 있는 하늘 군대가 필요합니다. 반드시 이런 면에서 어떠한 정치가도 나와야 됩니다.
만일에 지금 공산주의와 민주주의가 싸워 민주주의가 승리한다면 공산주의는 어디로 갈 것이냐? 이들은 반드시 아랍 진영으로 들어갑니다. 회회교권으로 들어갑니다. 절대 기독교로 안 넘어옵니다. 왜? 자기들의 주의를 정복한 민주 진영이 기독교 사상권 내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필코 아랍 진영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이 시대에 있어서 우리의 원수는 사탄이요, 사탄의 원수는 종교요, 종교의 원수는 사탄입니다. 전세계 종교인들은 동원해라, 모든 종교의 원수는 무슨 주의다 하는 것이 나와야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싸움이 앞으로 어느 기간까지고 계속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통일교인은 어떠한 교파를 넘어가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가야 되겠습니다. 가는 데는 천적인 인연을 기반으로 하여 가야 되겠습니다. 망해버릴 이 역사를 넘고, 싸워서 깨뜨려야 할 이 사조를 넘어 영원불변한 하나님의 심정의 동산으로 가야 되겠습니다.
앞으로 하늘 앞에 효자라고 칭찬받을 수 있는 사람은 신학박사가 아닙니다. 성경의 문자를 다 외웠다고 해서 그것으로 축복받을 수 없습니다. 심정을 가지고 심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자들이 기필코 찾아 나가야 할 것이 무어냐? 심정입니다. ‘야! 이 심정은 하나님의 심정이로구나!’ 하는 자신감을 줄 수 있는 이념이나 주의 혹은 사상이 나와야 합니다. 세상의 어떤 영광, 세상의 어떤 권세, 세상의 그 무엇이 있다 할지라도 이 심정 앞에서는 꼼짝 못합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찾아가야 됩니다.
이름으로서의 예수는 알기 쉬운 것입니다. 보이던 예수, 말씀하시던 예수는 알기 쉬운 것입니다. 그러나 말하지 않는 예수를 알아야 하고 보이지 않는 예수를 알아야 됩니다. 예수는 2천년 동안 보이지 않았습니다. 보여졌던 예수는 알기 쉬운 것입니다. 아무리 예수가 보이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것은 좀 낫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6천년 동안 한번도 하나님을 보지 못했고 한번도 그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였습니다. 우리는 나타나지 않은 하나님, 보여지지 않은 하나님, 그 하나님의 심정을 알아야 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기뻐합니다.
예수를 보낸 것은 예수만 잘 살라고 보낸 것이 아닙니다. 하늘의 심정에 사무친 곡절을 풀기 위하여 보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였습니다. 내 뜻과 아버지 뜻은 다릅니다. 예수는 이 땅을 사랑해야 할 심정이요, 우리들은 예수의 사랑을 받아야 할 심정입니다. 하나님의 심정은 ‘예수야! 이겨라, 너희들이 합하여 내 앞에 심정을 돌려라.’ 하는 심정이란 말입니다. 우리는 그걸 모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종말에 있어서 심정의 인연을 갈래갈래 다 찢어 놓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믿지 못하고 부부끼리도 믿지 못하게 해 놓았습니다. 전부 다 믿지 못하도록 휘저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그것들을 붙들고 안식하던 인간들이 손을 들고 말았습니다. 여기에 필요한 것은 물질도 아니요 권세도 아니요 어떠한 주의도 아니요 자기 자신도 아닙니다. 단 하나 심정입니다. 그 하나입니다.
그럼 이제 여러분들은 가야 되겠습니다. 죽더라도 가야 되겠습니다. 배척받더라도 가야 되겠습니다. 이단자의 괴수로 몰리더라도 가야 되겠습니다. 예수도 갔습니다, 어느 곳을 향하여? 하나님의 심정이 깃들 수 있는 그곳을 향하여 갔습니다. 두고 보십시오. 그런 사람들을 몰아냈다간 최고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는 몰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출발하였거늘, 하나님이 깃들 수 있는 심정의 동산을 향하여 가야 되겠습니다. 그 심정을 붙들고 외치며 그 심정을 통하여 즐거워할 수 있는 곳이 천국입니다. 그 천국을 향하여 우리는 가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심정을 가진 자가 있다 할진대 그러한 심정을 붙들고 ‘아버지여, 이 심정으로 대할 수 있는 가정을 나에게 주시옵소서, 이런 심정으로 대할 수 있는 민족을 주시옵소서, 이런 심정으로 대할 수 있는 국가를 주시옵소서, 이런 백성과 아들딸이 합하여 아버님을 모실 수 있고 아버님이 천주의 대주재가 되시옵소서.’ 해야 합니다. 이게 우리의 소원입니다. 우리의 갈 곳은 이곳입니다. 이것이 이루어지는 길이라 할진대 백번 천번 죽어 사라진다 하더라도 문제가 아닙니다. 6천년 동안 하나님은 그런 한 날을 고대하여 나왔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선한 사람은 밟히고 찢기고 억울하게 살았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없단 말입니까? 오늘날 이 세상은 사탄이 권세를 잡고 있으니 응당히 천대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맞고 빼앗아 나오는 싸움을 해 나왔습니다. 역사노정에서 맞는 사람이 승리했습니다. 1차대전도 맞는 쪽이 승리했고, 2차대전도 그랬고 3차대전도 그럴 것입니다. 때린 쪽이 패망합니다. 뜻을 품고 맞는 사람은 하나님이 책임을 지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도 분한 마음이 사무쳤으나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 뜻대로 하시옵소서.’ 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입는 옷가지 하나도 하나님의 통치권 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먹고 있는 밥도 하나님의 지배권 내에서 자란, 하나님이 바라는 소망의 나라, 기쁨의 심정이 통하는 그 땅에서 자란 곡식이 아닙니다. 여기에 한을 품을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내가 걷는 이 한 길도 한스럽다, 버려진 나뭇가지 하나를 대해도 한스럽구나.’ 하는 것을 느껴야 됩니다. 자라고 있는 풀 한 포기에도, 한 조각의 땅에도, 하나의 민족에도, 이 세계에도 하나님의 6천년 한스런 심정이 어려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야 되겠습니다. 어떻게 갈 것이냐? 만물도 아버지 것으로서 가지고 가야 되며 만인류도 아버지 것으로 가지고 가야 되겠습니다. 만천하의 모든 것을 가지고 가서 ‘아버지여! 받으시옵소서.’ 할 수 있는 아들딸을 하나님은 그리워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 세계의 주권도 아버지의 주권으로 가지고 가야 합니다. 아무리 지금의 사조가 세계를 어떻게 한다 해도 안 됩니다. 다른 무엇이 나와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 몸은 무한히 높고 넓어 하나님까지도 내 것, 땅도 내 것, 인류도 내 형제이기를 원합니다. 이러한 마음을 여러분 부정할 수 있습니까? 역사상의 어떠한 사람도 세계를 제패하려 했습니다. 이 땅과 이 세계를 내 주의와 내 손아귀에 넣자는 것입니다. 모르긴 하지만 이런 심정의 움직임에 따라 역사적인 목적을 향해 움직이는 운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이라는 것을 자인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거기에 들어가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높고 높은 마음과 높고 높은 그 심정 앞에 ‘아무렇게 살던 나 자신이 황공망극하옵니다.’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심정을 아는 날에는 ‘이 심정은 이 세계를 주고도 바꿀 수 없나이다. 내 몸이 억천만 번 제물되더라도 바꿀 수 없나이다. 이 심정은 27억 인류를 전부 다 주고도 바꿀 수 없나이다.’ 하고 감사하고 나서 사는 곳이 지상천국입니다.
우리는 가야 되겠습니다. 이 세계를 평면적으로 갈 것이 아니라 입체적으로 심정을 통하여 가야 됩니다. 땅에는 없습니다. 성경을 통하여 갈 것이 아니라 성경을 세우신 하나님 아버지의 심정을 통하여 가야 됩니다. 어느 교파를 통하여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교파를 세워 나오신 하나님의 심정을 통해야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역사를 통하여 가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세우신 하나님 아버지의 심정을 통하여 가야 합니다. 시대를 통하여 가는 것이 아니라 시대를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통하여 가야 합니다. 미래를 세우기 위한 하나님의 심정을 통하여 가야 됩니다.
이미 말했거니와 역사적인 아버지의 심정을 알아야 됩니다. 시대적인 아버지의 심정을 알아야 됩니다. 미래적인 아버지의 심정을 알아야 됩니다. 그 심정의 목적이 무엇이냐? 전부 다 아버지의 것으로서 봉헌하는 것입니다. 그날이 끝날입니다. 모든 권세를 아버지 앞에 드리는 그날이 끝날입니다. 드리기 전에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드리는 데는 먼저 나부터 드려야 됩니다. 이 몸은 어디로 갈 것이냐? 이 마음은 어디로 갈 것이냐? 내 심정과 소원은 어디로 갈 것이냐? 내 몸뚱이도 아버지의 것, 내 마음도 아버지의 것, 내 심정도 아버지의 것이라 할 수 있는 자리에 서야 합니다. 내가 먹는 것도 아버지를 위해 먹고, 눕는 데도 아버지 땅이니 깨끗하게 하고 눕고, 움직이는 것도 아버지를 위해 움직여야 합니다. 일평생을 내가 동(東)으로 가면 아버지도 동으로 가고, 서(西)로 가면 아버지도 서로 갈 수 있는 생활을 한 사람이라면 그는 틀림없이 하늘의 아들입니다.
하나님은 6천년 동안 땅을 내려다보면서 자신의 생활과 같은 생활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일생을 같이 해주고 싶어하신다는 것입니다. 자식이 어렵기 전에 먼저 어려움을 당하고 슬프기 전에 먼저 슬픔을 당하고자 하는 것이 아버지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먹을 때 ‘아버지 드시옵소서.’, 입을 때 ‘아버지 입으시옵소서.’ 하면서,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을 아버지와 같이 하면서 아버지의 심정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 하나님은 그를 지옥에 못 보냅니다.
이제 우리가 가는 데는 생활을 무시하고는 갈 수 없으니 우리는 생활권 내에서부터 내가 울면 아버지도 울고, 내가 억울하면 아버지도 억울하고, 내가 기뻐하면 아버지도 기뻐하고, 내가 외로워하면 아버지도 외로워할 수 있는 길을 가야 되겠습니다. 그런 길을 가는 사람은 하늘의 유업을 상속 받을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하나님의 심정을 모르는 이 세상을 바라볼 때 눈물없이 볼 수 없고, 인류를 바라볼 때에 통곡하지 않을 수 없고, 아버지의 뜻을 알고 나면 죽음을 각오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아들딸들이 나와 가지고 형제가 되고, 형제의 인연을 넘어서서 교회가 되고, 교회의 인연을 넘어서서 주님을 모셔야 됩니다. 형제를 찾고 교회를 이루고 민족을 세우고 국가를 이루어 세계를 정복하여야 할 것이 앞으로 도인들이 갈 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런 목적을 향하여 가야 되겠습니다. 여기에는 내 생명도, 내 재산도, 지금까지의 어떠한 주의 사상도, 어떠한 심정도 문제가 아닙니다. 일편단심으로 끝까지 가야 하겠습니다. 내 몸에 아버지의 심정이 솟구쳐 가지고 온 우주와 바꿀 수 없는 그런 가치를 느껴야 합니다. 그리하여 ‘나는 승리하였소이다, 행복합니다, 감사합니다.’ 할 때, 하나님께서 ‘오냐! 내 아들딸아.’ 하실 것입니다. 그때까지 여러분은 가야 할 운명에 놓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직까지 도(道)가 목적하던 세계는 오지 않았음을 알고 있사옵니다. 본연의 동산을 잃어버린 그날부터 지금까지 아버지께서 피어린 역사노정을 거쳐오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과정을 거쳐 본연의 세계를 건설하여야 할 순간에 처해 있는 오늘날 저희들, 어디로 가야 할 나 자신인가를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성경에 있는 모든 말씀도 귀하고 예수도 귀하지만 예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하나의 참다운 신부가 귀하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나 그것이 종착점이 아니라 신랑 신부로 나타나서 아버지의 심정 앞에 모든 것을 털어놓고 ‘나에게 축복해 주시옵소서.’ 할 수 있는 자리까지 나아가야 하는 것이 저희의 소원의 동산인 줄 알고 있사옵니다.
오늘날 저희들은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그런 이념과 그런 심정을 가지고 오늘도 싸우고 내일도 싸우는 개척의 용사로서 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알았사옵니다. 그런 고로 저희들은 피와 살을 연한 형제 중의 형제요, 지체 중의 지체로서 이 목적을 향하여 가야 되겠습니다. 승리의 한 날이 올 때까지 참아서 남아지는 무리가 되고, 싸워서 남아지는 무리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저희들, 그곳을 향하여 달음질치는 데 본이 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새로운 각오와 새로운 결심을 하고, 그 목적을 향하여 충신이 되고 열녀가 되고, 효자와 효녀들이 될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는 기쁨을 맞을 수 있는 승리자, 사망의 권세를 이긴 자, 땅 위의 싸움의 노정에서 승리한 자로서 아버지 앞에 자랑하고, 아버지를 모시고 살 수 있는 그곳까지 달리고 또 달리며 싸우고 또 싸워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줄 아옵니다. 하오니 끝까지 이 일을 위해 싸워 승리하게 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니다. 모든 것을 맡아 주관하여 주심에 감사하면서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였사옵나이다. 아멘.
금년에는 여러분이 지금까지 없었던 최대의 것을 이뤄야 합니다. 금년을 여러분의 생애노정 중에서 하늘 앞에 바칠 수 있는 최대의 실적을 남기는 해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말씀을 경홀(經忽)히 여김으로써 다음에 후회를 하는 일이 없도록 하여야 합니다. 어느 면에서든지 자기가 할 수 있는 최대의 노력을 하여야 합니다.
각자는 생애에 있어서 무엇이든지 뜻 앞에 남김으로써 면목을 세워야 하거니와, 특별히 금년에는 자기의 사명 분야에서 최대의 실적을 남기도록 해야 합니다. 무엇이든지 좋습니다. 그런 실적을 남겨야 하늘이 잊을 수 없는 자가 됩니다. 하늘은 언제나 그런 충성을 바치는 가운데서도 부족함을 느끼는 자라야만 들어서 쓰십니다.
이제부터 잘못하게 되는 것은 모두 처벌의 재료가 됩니다. 특히 말에 조심해야 합니다. 자기 중심한 생각을 허락지 않습니다. 각별히 정성을 다하고 성심을 기울여 올해가 여러분 생애 중 최대의 실적을 남기는 해가 되도록 힘쓰기 바랍니다.
<말 씀> 부인들이 하늘의 발판이 돼 나왔어요. 그런 이유 때문에 예수를 신봉하는 부인들이 지금까지 신앙생활 하는 과정에서 많이 희생돼 나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늘에 가까이 접근해 들어가는 최후의 순간까지 부인들이 개척해 나왔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부인의 종교입니다. 남자들은 천사장과 마찬가지입니다. 남자들은 부인들을 몽둥이질해 나왔지만 결과적으로 따라 나왔던 것입니다.
전세계 기독교인들을 비율로 따져 보더라도 5분의 3 이상이 부인들입니다. 그 부인들이 지금까지 천적인 사명을 수행해 나온다는 것입니다. 하늘도 부인들을 상대로 많은 역사를 해 나왔습니다. 역사하는 데도 똑똑하고 잘난 부인을 세워서 한 것이 아니라 제일 밑창에서부터, 거지판에서부터 복귀역사를 시작해 나왔습니다. 불쌍한 여성들로부터 시작하여 다리를 놓고, 그 사람들이 사명을 다하면 또 시기 시기마다 다른 사람을 세워 점점 다리를 놓아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최후에는 여성을 대표해서 세계적으로 내세워도 손색없는 최고의 어머니가 될 수 있는 그런 자리까지, 끝에서부터 끝까지 복귀섭리를 해 나오신다는 것입니다. 여자들은 이런 노정을 거쳐 나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천적인 섭리의 원칙으로 돼 있습니다. 그런 고로 여러분은 몰랐지만 전세계에 널려 있는 부인들을 통하여 이러한 역사를 전개시켜 나왔던 것입니다.
이런 섭리적인 내용이 있기 때문에 새로운 사명을 띠고 나온 교파, 즉 특별한 교파는 여자가 사명을 띠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 교파는 새로운 시대의 특이한 사명의 발판을 닦기 위해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이 한국 강토를 중심삼고 어떠한 천적인 섭리가 있다 할진대 이 강토에서 내적 사명을 하는 운동이 시작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중 외적 사명은 남자들이 책임을 져야 하지만 내적 사명은 여자들이 책임을 져야 됩니다. 내적 사명은 여자들이 하고 외적 사명은 남자들이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타락한 형을 보면 해와가 아담을 주관했기 때문에 복귀노정에서는 부인이 아담을 대신하여 내적 사명을 책임져 나오고, 아담이 해와의 주관을 받은 연고로 남자들은 복귀노정에서 외적 사명을 담당하여 타락할 무렵의 기준을 찾아 들어가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한국 교단에서는 신령한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한국 기독교 역사가 근 80년이 되었는데, 지금부터 한 60년 전부터 신령역사가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해방되는 해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리고 해방 직후에 전국적으로 ‘성신 강림 40주년 부흥회’를 한 달간인가 40일간인가 했지요. 그것 기억나요? 지금부터 50년 내지 근 60여 년 전부터 교계를 중심삼고 이렇게 신령역사의 기반이 닦여져 나왔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것이 좌우로 갈라지고 내적으로 외적으로 갈라져 나오면서 신령역사가 전개되었습니다. 거기서 특별히 신령한 기도를 하는 부인들에게는 예수님이 직접 나타나서 지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한 40년 전,「저, 정 장로(鄭錫天장로) 어머니가 입신(入神)하여 계시받은 것이 지금부터 몇 년 전인가? 그러니까 37년 전이지?」그러니 은혜받게 된 동기는 40년 전부터 그러한 역사가 있었습니다. 천적인 여성을 대표하고 한국의 여성을 대표해서 하늘과 연락하는 사명을 하는 분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나타나기는 한 분이 나타났지만 하늘은 그 한 사람을 세우기 위해서 세 사람을 세워 놓고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시대에 그런 사명을 띠고 세 여성이 한국 강산을 중심으로 역사해 나왔던 것입니다. 그 여성들을 중심삼고 은혜에 접할 수 있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지요. 그러한 사람들을 수습하여 가지고 하나의 인물을 세워서 새 시대, 즉 재림시대의 새로운 역사를 예고해 나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의 미지의 사실을 해명한다는 것입니다. 해명하는 데는 타락 문제라든가, 예수님이 이 땅에 구주로 오신 목적 등, 성경에서 제일 미지의 골자가 되는 문제들의 윤곽을 해명해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은 거기에 물 붓듯 성령의 불을 내려서 규합 운동을 해 나옵니다. 그 운동을 할 때에 지혜가 있었으면 깨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신령한 집단 가운데는 하늘이 ‘춤춰라’ 하면 그저 춤추는 집단이 있었다는 거예요. 에덴동산에서 벌거벗고 살았으니, 사실이 그러니 그런 명령을 한다는 것입니다. ‘너 벌거벗고 춤춰라.’고 한다는 거예요. 하늘의 명령이라고 하니 안 출 수 있어요? 방문을 꼭꼭 닫아 놓고 혼자 춤추는 것은 괜찮겠지만, 수백 명이 엎드려서 기도하다가 춤춰라 하면 어떻게 하겠어요? 더러는 벌거벗고 춤을 추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소문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신령한 은혜를 받아 직접적으로 역사하는 과정에서는 반드시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데, 그런 명령을 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명령을 지혜롭게 소화하고 처신해야 됩니다.
왜 그런 명령을 하시는가 하는 것을 해명하는 천적인 조건을 세워야 합니다. 그것은 사탄을 굴복시키기 위한 하나의 작전이었는데, 그것을 알지 못하고 곧이곧대로 움직이다가 많은 성도들은 거기서 깨져 나갔습니다. 천적으로 지도하는 하늘의 원칙적인 내용을 알지 못하고 움직인 결과 지금까지 신령한 집단이 좋지 못한 결과를 낳고 꺾여져 나갔다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한 40년 전에 특별한 은사를 받아 가지고 역사를 한 집단이 있었는데 그것이 철산(평안북도 소재)의 새주 파입니다, 새주 파. 새 주(主)란 새 주인을 말하는데, 이는 부인을 보고 주님이라고 한 것입니다. 왜 그랬느냐? 그래도 된다는 겁니다. 부부, 즉 신랑 신부는 일체입니다. 창조이념으로 볼 때, 부부는 한 몸이 되게 지었기 때문에 일체이념을 중심삼고 역사하는 것입니다. 신랑 신부의 자리는 창조이념이 이루어진 자리이기 때문에 그 최고의 기준을 중심삼고 가르쳐 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랑 신부라고 가르쳐 주고, 주의 아내라고 가르쳐 줍니다. 한 몸이라고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너자 나요, 나자 너’라고, ‘네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다.’고 한 것입니다. 한 몸이라는 말입니다.
하늘은 종적이고 땅은 횡적입니다. 종적인 존재가 땅 위에 내려와 있으면 주님은 남자가 되는 겁니다. 남자인 주님은 곧 하늘이요 땅은 부인인데, 부부는 한 몸이니 땅에서 주님이라 하는 자가 있는 것입니다. 알겠지요? 그래서 부인인데도 주님이라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걸 이해하셔야 됩니다.
이런 역사를 해 나오는 데 있어서 그의 아들딸이 잘 받들어 주면 실패하지 않습니다. 그런 천적인 책임을 지고 사명을 하는 부인을 그 직계의 아들딸이 받들지 않으면 며느리가 받들어야 됩니다. 그 어머니가 죽으라면 죽고 벌거벗고 춤추라면 춰야 됩니다. 사실 어머니가 춤추라 하면 셋이 붙들고 벌거벗고 춤춰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어머니를 중심삼고 셋이 하나되어 하늘의 명령에 복종하고 순종하여야 된다는 뜻입니다. 자부(子婦)든 아들이든 딸이든 모두가 하나되어 가지고 하늘 뜻을 받든다면 꺾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알아보니 철산의 새주 파를 이끌던 이의 아들이 여기 있는 정 장로입니다. 그리고 그 딸은 정석온(鄭錫溫) 씨예요. 뜻은 직계로 흘러 나오기 때문에 아들을 중심삼고 며느리에게 뜻이 있는 겁니다. 그런 걸 어머니가 이야기하지 않았는지 모르지만, 천적인 흐름이 그렇습니다. 그러니 아들과 며느리가 지성을 다해서 어머니보다 더 충성했다면 절대 안 꺾였다는 겁니다. 그런데 책임을 못했다고 봅니다. (정 장로에게 ‘못했지요?’ 하고 물어보시니 정 장로 ‘예.’ 하고 대답함) 그렇게 되면 반드시 그 며느리나 아들을 칩니다. 하나가 제물이 돼야 해요. (정 장로에게 그런 일이 있었느냐고 묻자 부인이 죽었다고 대답함) 며느리가 먼저 죽었습니다. 며느리가 먼저 죽고 그 다음엔 어머니까지 죽었어요. 하늘은 그렇게 역사하십니다. 그래도 정 장로가 살아남은 것은 아담을 복귀해야 할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남아 있는 것입니다. 아담은 칠 수가 없습니다. 아담의 역사가 있기 때문에 남아 있는 거예요. 이런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어요.
그들이 책임하지 못하면 그들의 사명은 그들을 지성으로 모시던 신도에게로 넘어갑니다. 정 씨 가문의 천적(天的)인 공적이 크기에 하늘은 그들을 사랑하시고 은사를 주셨는데도 불구하고 그 아들딸들이 그 뜻을 받들지 못하면 그를 따르던 신도가 인계 받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몽땅 넘어가게 됩니다. 정 씨네 집은 문서장도 없어진단 말입니다. 그것이 일대(一代)에서 안 되면 삼대(三代)까지 가게 됩니다. 그래서 그 사명을 인계 받은 사람이 누구냐 하면 그 어머니를 지성껏 모시던 한 부인이었습니다. 그가 허씨 부인입니다.
그 부인은 생활의 전부를 주님을 중심삼고 해 나왔습니다. 그렇게 되면 하늘은 맨 처음에 죄를 벗는 방법을 가르쳐 주고, 그 다음엔 생활하는 방식을 가르쳐 주고, 또 그 다음엔 주님이 오신 뒤에 자녀를 기르는 방식을 가르쳐 줍니다. 순서가 그렇습니다. 그 허 씨 부인은 주님을 모시고 생활할 수 있는 법도와 전체적인 규례를 세워 가지고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그 것은 해방되기 한 7년 전부터 준비가 됐어야 합니다. (선생님께서 정석천 장로에게 모친이 언제 죽었느냐고 물으시자 해방되기 직전이라 대답함) 원래는 해방되기 7년 전부터 그러한 준비를 해 가지고 나왔어야 합니다. 허 씨 부인은 해방 전부터 그런 준비를 했어야 돼요. (허 씨가 언제부터 그런 준비를 했느냐 물으시자 해방되기 3년 전부터라고 대답함) 원칙은 7년 전부터 그런 준비를 해왔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한국의 해방을 중심삼고 재림이념이 출발하게 돼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7년 전부터 준비를 하여 역사해 내려왔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것을 인계 받아 가지고 새로운 역사를 해 나가야 합니다. 그때는 한 단계 떨어집니다. 자기가 주님이라고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신부라 하며 주님을 낳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복중을 통하여 주님이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복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이 마리아적 사명입니다. 첫 번(김 씨)은 해와적 사명이요, 그 다음(허 씨)은 마리아적 사명이에요.
마리아적 사명이니 허씨 부인은 예수를 낳아 가지고 기르는 체험을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서 지내던 모든 것을 체험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30여 년을 지내시다가 이 땅 위에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가셨으니 그 모든 한을 풀기 위한 일체의 준비, 탕감적인 일체의 준비를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허 씨 부인은 옷도 만들고 다 준비했던 겁니다. 그러면서 주님이 한국에 오실 것이고 아기로 태어나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생활해야 한다는 것을 전부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한 역사는 절대 없어지지 않습니다. 앞으로는 선생님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저기 있는 정 장로의 어머니가 한 사명과 허 씨 부인의 사명에 대한 모든 것, 지금까지 이단이라고 밟히고 사탄에게 유린당하던 그 모든 것을 선생님이 전부 다 드러내어 천적인 역사로 남겨 줘야 됩니다.
허 씨 부인은 주님이 오시면 모실 생활적인 모든 준비를 했어요. 또 예수님이 이 땅 위에 오셔서 33년 동안 살다가 뜻을 못 이루고 원치 않는 십자가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그것을 복귀하기 위한 모든 준비를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오시는 주님은 한국 사람으로 오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분의 키는 얼마나 크고 체격은 어떠하다는 것까지 계시 받아서 옷가지에서부터 침구에 이르기까지 일체를 준비했습니다. 원래 그런 것 다 준비해야 됩니다. 그것을 준비한 자가 땅 위에 없을진대 주님을 보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옛날 이스라엘 민족이 주님이 누우실 방 한 칸 준비 못하여 예수님은 말구유에 눕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한을 가진 하늘이기에 하나님은 택한 사람을 세우셔서 생활적인 모든 것, 즉 입으실 옷, 계실 방, 가정기물 일체를 준비시키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 문화생활을 하는 동서양의 어느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최고의 수준으로 모든 것을 준비시키신다는 말입니다. 예수님 당시 120문도가 그것을 못한 한을 남겼으니 세계적인 사명을 지고 오실 주님의 무대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못해도 1,200명 이상의 교인들이 동원돼야 합니다. (선생님께서 복중교 교인이 모두 몇 명이었느냐고 묻자 청중석에서 한 사람이 300명이라고 대답함) 원래는 1,200명 이상이 동원되어서 그 준비를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교파를 중심삼고 움직여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한국이 아담형의 국가로 복귀돼야 합니다. 일본은 해와국가요, 한국은 아담국가입니다. 아담이 해와에게 주관 받았으므로 아담국가가 돼야 하는 이 나라는 그 방식대로 일본에게 36년간 지배받았습니다. 원래는 40년 고난 기간입니다. 한국이라는 국가가 40년 만에 나왔다는 말입니다. 일제 치하 36년에다가 군정시대 4년 하여 40년 고난 기간을 거쳐 가지고 한국은 해방과 더불어 복귀된 아담형의 국가로 나타났습니다. 그리하여 해방되자마자 재림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천적으로 볼 때 한 부인이 소생역사의 사명을 했고 또 한 부인이 중간적인 책임을 했으니, 새로운 것이 나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노아가 비둘기를 내보낼 때 제1차, 2차는 같은 비둘기였지만 3차에는 다른 비둘기를 내보냈습니다. 1차대전, 2차대전은 나라를 중심삼고 벌어졌지만 3차 대전은 다른 것을 중심삼고 벌어집니다. 이것은 곧 직계 계통이 책임 못하면 그것 대신 반드시 일시적으로 탕감조건을 세워 가지고 한꺼번에 넘어 간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해방의 종소리와 더불어 그런 사명을 하는 사람이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성으로서 그런 사람이 나와야 합니다. 3대에 걸쳐서 해야 합니다. 그러니 허 씨 부인 외에 그러한 사명을 한 부인이 또 한 사람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그렇게 내려옵니다.
선생님은 일찍이 이러한 천적인 사명이 있는 것을 알고 해방 직후부터 그 일을 책임지고 나섰습니다. 그 전에는 친구들도 선생님이 뭘 하는지 몰랐습니다. 그저 신앙생활 잘하는 한 청년으로 알았지요. 선생님과 같이 있던 동생들도 몰랐습니다. 부모도 모르고 그 누구도 몰랐어요. 그런 가운데 나는 해방의 종소리와 더불어 새로운 길을 나서게 된 것입니다.
부인도 그러하지만 남자 편에서도 그러한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남자들도 그 할머니와 대비하여 신령역사를 해야 했어요. 남자는 동쪽이고 부인은 서쪽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쪽인 철산에서는 부인들이 신령역사를 했고, 동쪽인 원산을 중심삼고 남자들의 신령의 역사가 벌어졌어요. 거기서 황국주, 이용도, 백남주 등이 신령역사를 했어요. 그때 이러한 외적인 형태를 기반으로 한 신령역사를 책임을 지고 나온 분이 이용도 목사입니다. 그는 한국 교계에서 신령한 역사를 하다가 이단으로 몰려 서른 세 살 때에 죽었습니다. 그분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으니 그분의 대(代)를 이은 한 분이 있어야 됩니다. 그 3대를 거쳐 반드시 그런 한 분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책임을 진 한 분이 있는데, 그건 여러분에게 이야기하지 않겠어요.
그러면 선생님은 어떻게 해야 되느냐? 그분들을 만나야 됩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해방 직후에 신령한 사람을 만나려고 했던 것입니다. 제일 믿지 못할 말을 하는 사람을 만나야 하는 겁니다. 어떠한 사람을 만나야 하느냐? 자기가 주님이라고 하는 사람을 만나야 되고, 나는 주님의 일등 신부라고 하는 사람을 만나야 되고, 더 나아가서는 나는 여호와의 부인이라고 하는 사람을 만나야 합니다. 선생님이 그런 신령한 사람을 찾기 위해서 한국의 교계를 들춰봤으나 없었어요.
그런데 구원선(救援船)이라고 하는 신앙단체에 김예근이라는 분이 있는 데, 그이는 타락문제에 들어가 가지고 원칙적인 것은 모르지만 실과를 따먹은 것이 타락이 아니라는 정도는 알아요. 그 외에는 몰라요. 그래서 그 분을 만났어요. 천적인 사명을 인계 받은 그 남자는 세례 요한적 사명을 띤 사람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 앞에서 사탄을 막아주어야 할 자입니다. 세례 요한이란 존재는 타락한 아담이 되살아난 존재, 즉 사탄의 지배를 받아 떨어졌던 것이 다시 부활한 형태, 사탄을 굴복시켜야 할 아담형이란 말입니다. 세례 요한은 그런 아담, 살아난 아담이란 말입니다. 사탄을 굴복시켜야 할 아담 형입니다. 세례 요한이 사탄에게 이긴 것을 상속 받은 예수는 사탄의 침범, 사탄의 시험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예수는 그런 자리에서 축복을 받고 사탄의 참소를 받지 않는 자리에서 뜻을 이루려 했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이 책임을 감당치 못하니, 세례 요한이 꺾어지니, 사탄이 예수 앞에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되니, 예수는 세례 요한 대신 옛날 아담을 꺾은 그 사탄과 역사적인 대결을 하기 위해 나선 것이 40일 금식기간의 싸움입니다. 알겠어요?
선생님은 스무 살을 넘으면서부터 그런 분을 만나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어떠한 길을 통해서라도 한 번은 만나야 할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당장에 만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해방의 종소리와 더불어 그분을 만났습니다. 그랬더니 세례 요한이 예수에게 축복해 준 것처럼 그분도 선생님에게 축복을 다 해주었어요. 자기가 상상할 수 없는 말로 축복해 주었습니다.
그때는 선생님은 아무것도 모르는 식구 모양으로 그를 찾아갔습니다. 세례를 받으러 세례 요한을 찾아갔던 예수와 마찬가지로. 그리하여 그의 모든 기반을 그대로 인계 받아야 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봉사자로서 인정받는 수고의 과정을 거쳐야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6개월 동안 있었습니다. 6개월 있는 동안 눈물도 많이 흘렸습니다. 여기 있는 우리 식구 가운데 아는 사람이 있을지 몰라요. 그를 따르던 수제자 전부를 선생님에게 인계해야 할 천적인 사명이 그에게 있었던 연고로 선생님은 내적으로 모모한 인사들 앞에 그런 말을 했고, 또 나 자신이 직접 말하지 않더라도 하늘이 그들에게 문 선생을 따르라고 명령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모시고 있는 선생이 이러이러한 분인데 하늘이 우리의 선생을 버리고 아무것도 아닌 저 문 선생을 따라가라니 웬 말이냐.’ 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번 가르쳐 주었습니다. 기간을 두고 역사를 하였으나 그래도 그들이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이젠 축복을 받았으니 그 기준을 가지고 신령한 역사를 하는 부인을 찾아야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여호와의 부인이다. 누구든지 나한테 굴복해야 구원받는다.’ 하는 부인을 찾았습니다. 그 부인은 부활한 해와이자 타락 직후의 해와를 대신한 역사를 하고 있기 때문에 두 쪽의 역사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한때는 하나님도 들어와 역사하시고 또 한때는 사탄도 들어와 역사하는 완충형(緩衝形)의 실체입니다. 그런 부인을 만나서 실체로 대결하여 꺾어 놓아야 된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런 부인이 있는가 하고 각방(各方)으로 수소문하여 만날 수 있는 길을 터 가지고 그 부인을 만났습니다. 남이 믿지 않고 남이 알지 못하는 말을 하는 부인을 찾다가 만나니 참 기뻤습니다. 그 부인은 선생님보다 나이가 더 많았습니다. 어머니와 같은 사명을 해야 했던 분이었어요. 복귀역사가 그래요. 선생님은 평양으로 가서 그분을 만나 정성을 다해 모셨지요. 그런 선생님인데 여러분들이 선생님을 안 모시면 천법에 걸립니다. 천적인 사명을 짊어지고 하늘의 프로그램이 어떻게 돌아가서 어떻게 귀결 된다는 것을 다 알고 있던 선생님은 아무것도 모르는 삼척동자 모양으로 그 할머니가 죽을 때까지 정성껏 모셨습니다. 그 할머니의 속옷까지 다 빨아 주었어요. 선생님이 평양에 가 있을 때 모신 그 할머니는 철딱서니가 없어서 이랬다저랬다 했습니다. 좋은 것이 있으면 전부 다 가져오라는 거예요. 그건 그렇게 돼 있어요. 탕감복귀시대이기 때문에 앞으로의 만물복귀를 흉내 낸단 말입니다.
선생님은 그런 사람을 하나님같이 모셨습니다. 그곳에 모이는 식구들은 그 할머니가 상대해 주지 않으니까 선생님을 보고 모였습니다. 그렇지만 선생님은 그 할머니를 지성껏 모셨습니다. 왜 모시느냐? 하늘 것은 하늘 것으로, 사탄 것은 사탄 것으로 갈라놓아야 되기 때문입니다. 거기에서 갈라놓지 않으면 복귀의 기준을 세울 수 없기에 절대 복종하고 모신 것입니다. 여러분, 하늘이 사탄을 잡기 위해서 어떻게 해 오셨는지 압니까? 사탄에게 복종하면서 잡아 나오셨습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해왔어요. 그걸 알아야 돼요. 18개월 이상, 21개월 이상 이런 기간을 정해 놓고 순종기간을 거쳐 나가야 합니다. 그러면 그만큼 축복해 줍니다.
그 할머니에게는 두 가지가 역사하는데, 반드시 사탄이 먼저 역사합니다. 하늘이 먼저 나타나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갔을 때, 원수시 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벌써 그럴 줄 알고 있었기에 상관치 않았습니다. 끝까지 머리를 숙였습니다. 밟고 책망하더라도 세 번 이상 순종하면 사탄이 밟지 못합니다. 오히려 사실을 증거해 줘야 합니다. 그때에 빼앗아야 합니다. 천대를 받으면서도 순종하고 모시면 하늘의 끄트머리 천사장으로 축복해 줍니다. 그러면 ‘옳지 되는구나.’ 하고 올라갑니다. 탕감복귀 원칙대로 무엇 무엇 해가지고 단계적으로 올라갑니다. 그러다 보면 나중에 이 사람은 천상천하의 누구라고 증거해 줍니다. 거기서부터는 쥐어박는 것입니다. ‘섬겨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자 그 할머니는 하루아침에 이게 웬 말이냐? 하는 것입니다.(장내 박수)
그 할머니는 앞으로 하늘이 축복하실 자녀가 자기 아들딸인 줄 알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 할머니는 아들딸의 수도 많았습니다. 아담부터 노아 때까지 10대형, 원래 가정적인 출발을 하려면 그 10대형을 갖추어야 됩니다. 열 아들딸이 있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 할머니는 그렇기 때문에 하늘은 자기의 열 아들딸을 제일 사랑한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보기에도 지긋지긋해요. 그러나 그 할머니가 축복을 해줄 때까지는 그 할머니의 아들딸까지도 모셔야 합니다. 그걸 참고 어머니같이 모셔야 됩니다. 그래서 ‘할머니 말씀하시는 것이 옳고말고요. 그 아들딸이 하나님이 지극히 사랑하시는 아들딸이고말고요.’ 하며 나갔던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나중에 가서 축복받은 후에는 ‘나는 누구요, 그대는 누구이니 복귀의 한을 풀려 하는 하늘의 뜻 앞에 굴복하시오.’ 하고 말했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고 자기 마음대로 오라 가라 할 수 있던 젊은 청년이 그러고 나서니 이게 웬일입니까? ‘나는 여호와의 부인인데’ 하던 판국인데 굴복해야 하니 기가 막혔겠지요. 거기에서 그 할머니가 순종했다면 선생님도 고생하지 않습니다. 순종해야 되는데 그것이 힘든 거예요. 거기서 천 명이면 천 명 다 꺾여져 나갑니다. 굴복하지 않고 반대한 그 시간부터 그 할머니는 정신이 돌아버렸습니다. 하늘의 복은 다 빼앗고 사탄은 사탄대로 딱 갈라진 거예요. 그래 가지고 갈라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고 나니 하늘의 강도라는 명패가 붙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젠 안팎의 축복기준을 가졌으니 어디 가도 싸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 기준이 되기까지 안팎의 영적인 시험은 말할 수 없었습니다. 어떠한 시험까지 있었느냐 하면 40일의 시험기간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영계의 모든 영인들이 전부 그 할머니 편이 돼 가지고 몰아칩니다. 예수님까지도 선생님한테 와서 빌면서 ‘그 할머니는 여호와의 부인이요, 하나님이 사랑하는 딸이니 제발 모셔야 된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선생님은 천리의 원칙을 가지고 그들과 싸웠습니다. 선생님은 혼자 40일간 지금까지 왔다 갔던 수많은 영계의 도인들, 예수와 하나님까지 전부가 동원된 전 영계와 싸웠습니다. 싸움판의 천지로 만들 수 없기에 하늘은 40일의 기간이 차면 비로소 판정을 내려주셔야 된다는 겁니다. 천리의 원칙, 이것 아니면 하늘땅이 망하는 겁니다. 선생님이 찾아 나온 이 길은 틀림없습니다. 선생님은 최후의 판가리 싸움에서 승리했다는 판결을 받았습니다. 예수 이하 수많은 영인들이 역적으로 몰고 반대하던 문(文)이라는 사람의 주장이 복귀의 한을 푸는 원칙이요, 천륜의 비결 중의 비결이란 판결을 받아 가지고 승리의 기준을 세운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선생님은 그런 판결을 받기 위해서 예수님하고도 싸웠고 하나님하고도 싸웠습니다. 이래 가지고 통일교회가 나온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똑똑히 알아야 돼요.
이런 원칙적인 기준하에 역사적인 귀결을 지어서 천지의 모든 기준을 종결지어야 할 책임이 있었던 연고로 선생님은 이런 내용을 어느 누구한테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 할머니한테도 이야기 못했고 식구들한테도 이야기 못했습니다. 그런 역사를 해 나왔습니다. 또 이것을 전개시키기 위한 복잡한 내용도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27살에 평양에 가서 지금 말한 이런 역사를 거쳐 가지고 이 길을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나오는 데는 여러분에게 말하지 못하는 내적인 고충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았습니다. 그것은 여기 있는 가까운 식구들도 모릅니다. 식구들이 보기엔 선생님이 편안한 것같이 보일지 모릅니다. 여러분들은 자기 마음대로 말할 수 있고 자기들 사정을 다 하늘 앞에 고할 수 있지만, 선생님은 이러고저러고 할 수 없는 비밀의 내용을 갖고 지금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선생님을 모릅니다. 여러분이 선생님에 대해 아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잘 몰라요. 모르는 것이 많기 때문에 여러분이 선생님 앞에 머리 숙이는 거예요.
양심의 기준이 어느 기준을 넘어선 사람은 알지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세계의 수많은 영통한 사람들, 이 세상에서 이 뜻을 증거하지 않으면 천법에 걸립니다. 목이 걸려요. 영계에 가 있는 예수도 통하는 사람 있으면 이 뜻을 증거하라고 그럽니다. 이제 여러분은 세계적으로 신령한 사람을 많이 볼 것입니다. 그리고 수천 수만의 군중을 거느리고 있는 사람도 많이 볼 거예요. 여러분에게는 그들과 모든 사람들에게 이 뜻을 하루빨리 연락해 주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보세요. 1년이 흐르면 천적으로 어떻게 됩니까? 하늘은 이렇게 보고 있어요. 인간의 사망률이 1년 평균 1백 명에 한 사람이라 합시다. 그러면 3천만 명이면 1년에 저나라, 영계로 가는 사람이 30만 명이라는 말입니다. 28억이면 2천8백만입니다. 그렇지요? 2천8백만 명이란 사람이 지상을 떠나 어디로 갑니까? 천상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지옥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하늘은 이렇게 계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조급하고 얼마나 안타까우시겠습니까?
복귀역사를 중심삼고 볼 때, 기성교회가 해방 직후에 뜻을 받들고 나선 이 젊은이의 뒤를 따랐던들 한국은 이렇게 불쌍하게 안 되었을 것입니다. 그랬더라면 삼팔선이 가로막히지 않았을 거예요. 삼팔선이 가로막히지 않았던들 국제정세는 이렇게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소련은 벌써 없어졌을 것입니다. 1951년 4월에 트루먼 대통령이 맥아더 장군을 해임시키고부터 한국은 밀리기 시작했습니다. 만일 그때 맥아더 장군의 말대로 했더라면 그 해 9월에 한국은 소만국경(蘇滿國境)에 가서 싸웠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일본이 받을 축복을 한국이 전부 받는다는 것입니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살 수 있는 나라가 된단 말입니다. 그런데 우여곡절 끝에 지금처럼 복잡한 세계가 되었습니다.
앞으로 세계정세는 우리의 움직임과 대비되어 나갑니다. 세계정세가 아무리 크고 변한다 해도 우리의 움직임과 대비되어 나가요. 여러분은 거기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모를 거예요. 복귀역사는 그렇게 돼 나갑니다. 그러니 이 시대에 사는 여러분은 어떠한 사명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고 각성해야 되겠습니다. 40년 전부터 한국에 운세를 끌어오기 위하여 뜻을 받들어 나오던 세례 요한적인 사명을 띤 남자들 혹은 여성들, 근 60년 전부터 하늘의 축복을 받아서 복귀적인 신부의 사명을 해오던 사람들이 선생님을 만나야 한다는 것을 여러분이 명심해야 되겠습니다.
남자든 여자든 여러분은 나와 해결해야 할 것이 남아 있습니다. 지금도 남아 있어요. 그러니 정면으로 들어오는 사탄의 역사를 여러분이 막아 버려야지 선생님에게까지 넘겨서는 안 됩니다. 남자나 여자나 마찬가지입니다. 생사결단을 해서라도 여러분이 막아야 해요. 하나님의 6천년 소원은 복귀의 사명을 지고 오시는 아담을 승리한 아담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즉 실패한 아담을 승리한 아담으로 만들어 놓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백번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일생에 있어서 사탄을 굴복시켜 승리의 결판을 짓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가정에 있어서는 가정적인 아담이요, 사회에 있어서는 사회적인 아담이요, 국가에 있어서는 국가적인 아담입니다. 각자의 분야에서 사탄을 굴복시켜야 할 아담적인 입장이요, 해와적인 입장이라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사탄을 굴복시키고 승리한 자라야만 하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다는 거예요. 성혼식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원칙이 그럴 게 아니겠어요? 사탄을 굴복시키지 못한 자가 어떻게 하늘의 축복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복귀역사의 줄거리입니다.
이런 말을 지금 여러분에게 처음 하지만 선생님은 이러한 역사적인 인연을 갖고 여러분을 대해 나왔습니다. 여러분이 모르는 가운데 여러분에 대해 많은 기대를 가졌지만 여러분한테 많이 속고 속은 선생님인 걸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있는 힘을 다하여 사탄을 굴복시키는 선봉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40수를 중심삼고 아담이 실수한 것과 세례 요한이 실수한 것, 그리고 예수님이 이루지 못한 일을 안팎으로 종결시켜야 할, 소생 장성을 거쳐 완성적인 기준을 넘어서야 할 이때는 참으로 긴장된 시간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개인적인 사탄아 오너라, 가정적인 사탄아 오너라, 사회적인 사탄아 오너라, 국가적인 사탄아 오너라, 세계적인 사탄아 오너라.’ 하며 싸워야 합니다. 여러분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선생님이 그렇게 싸웠으니 여러분도 그런 길을 가야 합니다. 가는 데는 선생님같이 40평생이 아닙니다. 잠깐입니다. 잠깐이에요.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주위의 모든 것을 수습하여 그 싸움판에 나갈 장비를 갖춰야 됩니다. 또 싸워서 승리한 기준을 세워야 합니다. 선생님에게는 그러한 사람을 모아서 천적인, 새로운 이상적인 가정을 만들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선생님이 여러분의 일을 해주었지만 이젠 여러분의 일은 여러분 자신이 해야 됩니다. 하늘이 협조하지 않아도 여러분의 일은 여러분 자신이 할 수 있어야 되고, 여러분의 일뿐만 아니라 여러분 자손의 일까지도 책임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복귀역사는 전개되어 나갈 수 있습니다. 알겠어요? 그렇게 해야 됩니다.
내적으로 이런 역사를 해 나가면서 외적으로는 거기에 맞추기 위한 증거적인 역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적으로 3수가 횡적으로 벌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배웠지요? 종적 역사가 횡적으로 벌어지는 것입니다. 종적인 수가 횡적으로 벌어지니 3대 여성이 필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 시대에 선생님을 증거하는 3대 여성과 3대 남성이 반드시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노아 때의 여덟 식구와 같은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렇게 맞춰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형태가 가정적인 형태를 거쳐 세계적인 형태로 벌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일시에 횡적으로 세계형에 맞추기 위하여 하늘은 준비하고 계십니다. 국가적으로도 그렇고 세계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세계적으로 7천 명 이상의 신령한 사람이 나와 가지고 ‘내가 주님이다.’ 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예수 믿는 사람만이 아닙니다. 3대 종교의 이념권 내에 있는 사람들은 전부 다 그 속에 들어갑니다. 지금 때는 도의 혼란시대입니다. 자기가 제일이라고 하는 사람이 세계적으로 7천 명 이상이 있습니다.
이것이 외적인 세계 형태인데 내적인 형태에 있어서는 이 한국에 못해도 그런 천적인 사명을 가진 사람이 70명 이상 있어야 됩니다. 70명 이상의 사람이 나오기 위해서 3수를 중심삼고 삼칠은 이십일(3x7=21), 21수 형태로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외적인 복귀역사에 다리 놓기 위한 것 인데, 중심을 무시하고 자기들이 중심이라고 한다면 그들은 전부 다 적그리스도입니다. 적그리스도란 말입니다.
이것을 대표하여 나타난 것이 세 중심인물입니다. 나 장로니 박 장로니 하는 이런 사람들 말입니다. 그런데 다 깨지고 있습니다. 그들이 책임 못하면 책임자를 잘라 버립니다. 그래 가지고 교인들을 전부 돌린단 말입니다. 또 교회가 삼분됩니다. 하나에서 둘로 갈라지고 둘에서 또 갈라지고 그러다 보면 삼천만은 가정단위로 분산됩니다. 복귀는 부모시대, 부부시대, 자녀의 시대를 거쳐 복귀하는 것이므로 3천만은 모두 가정단위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앞으로의 교회는 전부 가정 형태로 분산됩니다. 두고 보세요. 그렇게 되나 안 되나. 그렇게 되면 끝날입니다.
이 시간 저희들은 하늘을 대하고 있사옵니다. 지금 저희들은 하늘의 뜻을 받들었던 세례 요한도 이해하지 못한 예수님의 역사적인 심정을 체휼하기 위하여 성경 말씀을 봉독하였사옵니다. 저희가 앉은 이 자리는 감옥에 갇힌 후에 예수님을 염려하고 예수님을 위해 기도하고 예수님을 위해 모든 정성을 들여야 했던 세례 요한을 대신한 자리임을 느끼게 하여 주시옵소서.
세례 요한이 예수와 반대의 입장에 선 것이 하늘의 슬픔이요, 예수님의 억울함이었다는 것을 저희들은 배워 알았나이다. 하늘과 땅이 굽이쳐 돌아가는 순간에 엘리야의 사명을 대신해야 했던 세례 요한이 책임을 다하지 못할 때 지극히 불쌍한 모습이 되었던 것을 아는 동시에, 이 시대에 있어서 세례 요한의 사명을 대신해야 할 책임이 여기에 모여 앉은 저희들에게 있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사옵니다.
이제 저희들은 보고 느끼는 모든 것을 저희 한 자체를 중심삼고 보거나 느끼지 말아야겠습니다. 세례 요한이 자기를 중심삼고 느끼고 보게 되었을 때 사망의 친구가 되었다는 사실을 저희들이 이 시간 느끼게 하여 주시옵소서.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중심삼고 보고 느낄 줄 알았던들 하늘의 반역자는 되지 않았을 것이고, 4천년 원한의 역사도 종결을 지어 놓았을 것입니다. 기쁜 가운데 주님을 모시고 영광의 날을 맞이했을 것이요, 영광의 역사를 이루었을 것이며, 영광의 민족을 건설하였을 것이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을 중심삼은 전체 교단과 민족이 책임을 다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역사적인 슬픔을 초래하였던 이 한 사실이 얼마나 비통한 것인지를, 저희들이 알게 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 소수의 무리가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었사옵니다. 저희들은 이 시대에 새로운 말씀의 봉화를 들고 나서야 할 자들이옵고, 세례 요한을 대신해야 할 사명이 저희의 어깨 위에, 이 한 몸과 마음 위에 짊어지워져 있다는 사실을 너나할 것 없이 뼈 살에 사무치도록 느끼게 하여 주시옵소서. 역사적인 심정을 유린한 세례 요한의 후계자가 되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역사상에 원통하고 분한 족적을 남긴 배반의 선조를 가졌던 것을 분하게 여기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앞에 충효를 다하여야 할 저희들, 새로이 심정을 가다듬어 아버지를 위안해 드리고 아버지의 심정 속에 들어가 아버지의 한을 풀어 드림으로써, 하늘의 심정이 어떻다는 것을 밝히고 그 터전을 넓히는 사명을 다하는 승리의 세례 요한 격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저희들을 긍휼히 보시옵소서. 이 한 시간은 수천년의 역사를 경과하여 역사적인 거리를 둔 시간이오나, 심정을 중심삼고는 아버지께서 함께 하실 수 있고 아버지의 아들딸이 될 수 있사오니, 그리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심정이 통하는 자리는 아버지가 놓을 수 없는 자리임을 알고 있사오니, 저희의 사정과 아버지의 사정이 엉클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는 역사적인 아버지인 동시에 실제 나의 아버지요, 내 생활 가운데 계시는 아버지이며, 내 이념과 내 생애에서 뗄 수 없는 아버지시옵니다. 이 시간 저희들의 마음과 몸을 화하여 그런 아버지로서 대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고, 친히 그런 아버지로서 나타나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인연을 더 두텁게 하기 위하여 말씀을 나누는 이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그러기 위해서 이제 저희가 지금까지 지니고 있던 모든 것을 포기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자기가 지니고 있는 재산이나 직위, 혹은 명예나 자랑할 무엇이 있다 할지라도 그 모든 것은 하늘 앞에 승리적인 조건으로서 바쳐질 것이 못 되오니, 그것들을 거부하고 참다운 미의 마음을 갖추고 참다운 선(善)의 심정을 갖추어 아버지를 모실 수 있는 이 한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참다운 미와 사랑에 화하여 아버지의 본성과 심정을 저희들이 다시 한번 느끼고 그 마음 앞에 머리 숙이어 그 마음을 중심삼고 아버지께 영광 돌리고 새로운 말씀을 받을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잠들어 있는 이 민족을 긍휼히 보시옵소서. 외롭고 지치는 자리에서도 참고 싸워 나가는 사랑하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있사오니 그들 위에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더욱이나 숨은 제단을 쌓으면서 때를 알지 못하여 염려하는 마음을 품고 하늘 앞에 호소하는 아들딸들도 많은 줄 알고 있사오니, 그런 아들딸들을 동원하시어 아버지의 승리의 한 날, 영광의 한 날, 사탄을 심판할 수 있는 그 한 날을 어서 속히 맞이하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이 시간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고, 전하고자 하는 말씀에도 아버지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사람을 통한 말씀은 저희들이 많이 들었습니다. 사람과 인연되어진 말씀은 많이 들었사오나 그런 말씀을 원치 아니하고 있사오니, 아버지, 친히 나타나시옵소서.
생명도 아버지로 말미암은 것이요, 참다운 진리의 말씀도 아버지로 말미암은 것이요, 영광의 은사도 아버지로 말미암은 것이오니, 아버지를 중심 삼지 않은 일체는 용납하지 마시옵고, 아버지로 말미암은 전체의 은사만으로 저희의 몸 마음과 전체의 분위기를 조정하시옵고, 사탄이 틈타는 시간이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전하는 자의 마음과 받는 자의 마음이 한 심정에 어리어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심정에 응하지 못하는 자가 있사올진대 스스로 죄인 된 것을 뉘우칠 수 있는 마음을 허락하시옵소서. 이 시간 일체를 아버지 당신이 주관하시옵고, 아버지께서 친히 품을 수 있는 승리와 영광의 아들딸로 인정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남아진 시간도 아버지 친히 주관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올 때, 주의 이름으로 기도 하였사옵니다. 아멘.
<말 씀> 오늘 여러분들 앞에 말씀드리려 하는 제목은 ‘하늘의 심정을 누가 알았는고’입니다. ‘하늘의 심정을 누가 알았는고’ 이러한 제목을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만물을 짓기 전에 이미 하나님에게는 창조하고자 하시는 심정이 있었습니다. 그 심정은 창조이상(創造理想)으로서 그것을 실현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창조의 계획을 세우시고 만물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소원은 그의 심정이 통할 수 있는 창조이상의 세계, 창조이상의 사람, 창조이상의 만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이상의 세계, 이상의 사람, 이상의 만물이 못 되어 있는 것이 하나님의 한(恨)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느뇨? 여러분이 알다시피 타락한 연고입니다. 영원무궁토록 하나님의 심정을 중심삼고 창조이념과 더불어 움직여야 할 창조물은 선의 기원을 찾지 못한 채 오늘날까지 하늘과 인간, 하늘과 피조물로 각각 동떨어져서 움직여 나왔습니다. 본래에는 하나님의 손길을 거쳐난 인연을 갖고 있고, 하나님의 심정의 대상으로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을 갖고 있는 만물과 인간이로되, 오늘날엔 하나님의 손길이 우리의 몸에도 만물에도 머물 수 없고, 하나님의 심정 또한 만물에도 우리 일신에도 머물 수 없습니다. 이러한 통탄스러운 일이 있게 된 것은 타락의 결과라는 것을 우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타락한 인간을 보는 그날부터 하나님은 타락한 세계를 보지 않으면 안 되었고, 타락한 인간을 대하는 그날부터 하나님께서 고대하시던 창조이상 세계는 마음속 깊이 숨어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상이 있으되 그 이상을 실현할 수 없고, 만물을 대할 적마다 그 이상을 이루고 싶은 마음은 움직였으되 그 이상의 마음을 표현할 수 없는 하늘이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이로되 하나님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사랑해야 할 자녀로되 하나님이 사랑할 수 있는 자녀가 못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이 땅을 바라보는 하늘은 기쁨의 하늘이 아니었습니다. 슬픔 중의 슬픔을 느껴야 하는 하늘이요, 고통 중의 고통을 느껴야 하는 하늘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은 본래 인간으로 하여금 당신의 직계 자녀라는 명분을 갖추게끔 지었던 인연을 포기할 수 없어서, 다시 찾는 역사, 즉 구원역사, 재창조역사를 시작했습니다. 잃어버린 자를 다시 찾기 위한 역사노정에서 하나님은 많은 슬픔을 겪어 나오셨는데, 그 슬픈 마음을 동정해 주는 한 사람이 없었던 하나님의 입장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하늘은 슬픈 심정을 품고 타락한 인류의 뒤를 따라 나왔습니다. 앞에 서지 못하고 뒤를 따라 나왔습니다. 사형수의 부모가 형장에 나가는 아들의 뒤를 따라 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사망의 손길에 끌려가는 인류, 우주적인 사형수와 같은 인류의 뒤를 따라 나왔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마음대로 주관하고 사랑하고도 남음이 있어야 할 그 인류를, 사탄의 장중(掌中)에 내어놓고 사탄 앞에 유린당하고 찢김받는 제물의 입장에 내놓게 될 적마다 무한한 고통을 느꼈습니다. 개인을 그런 입장에 내놓을 땐 개인적인 십자가의 고통을 느끼지 않으면 안 되었고, 가정이나 민족, 혹은 국가를 그런 입장에 내놓을 때는 거기에 상응되는 십자가의 고통을 느끼지 않으면 안 되었던 하늘이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염두에 두어야만 되겠습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하나님이 이러한 사정에 놓여지게 되었는고? 인간이 타락한 연고입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시뇨? 인류의 참조상입니다. 나와는 떼려야 뗄 수 없고 내 본질 전체와 인연되어져 있는 아버지이십니다. 그 아버지가 이런 사정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인간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하늘은 인간들이 이런 입장을 파괴해 버리고 다시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그 한 날이 오기를 바라고 또 바라며 나오고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늘의 뜻을 알고 하늘을 찾기 위하여 하늘이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 도의 길을 개척해 나온 사람들도 그 한 날을 고대하여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날은 아버지께서 고대하시는 한 날이요, 아들딸도 고대하는 한 날입니다. 그날은 잃어버렸던 아들이 사망의 사슬을 끊고 해방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와 아버지를 부를 수 있는 날입니다. 본연의 동산에서 지음을 받았던 그 본연의 참다운 아들딸로서, 본연의 심정으로 그리던 아버지를 부를 수 있는 날입니다. 그 한 날이 인류가 소원하고 하나님이 소원하는 날인 것을 여러분은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마음을 갖고 하늘은 역사노정을 대해 나왔습니다. 죄인 중의 죄인된 인간을 대할 적에도 그러한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고, 죽어가는 아들딸을 대하는 자리에서도 그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또 그러한 것을 탄식하며 선의 방향을 찾아 헤매어 나온 수많은 도인들이 움직이는 자리에서도 하나님은 떠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의 죄인에서부터 선을 향하고 의에 불타 울부짖는 그 한 생명에까지 어떠한 환경, 어떠한 시대를 막론하고 하늘은 같은 심정을 갖고 대해 나왔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게 선한 하나님이요,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인 연고로 인간이 죄 가운데 사로잡혀 있더라도 ‘내 아들이야, 딸이야.’ 하는 감정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 감정이 없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을 대할 때에 하늘은 무한한 고통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악한 아들딸을 바라보고 고통을 느끼는 하나님은, 선을 찾아 나가는 아들딸이 있다 할진대 그들에게 내 고통을 풀어달라고 요구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인 것입니다. 이것이 하늘의 심정입니다. 그런 연고로 선을 지향하여 도의 길을 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죄인을 붙들고 쓰러져 간 사실을 우리들은 역사노정을 통해서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하늘은 그러한 작전을 지시해 나오시는고? 하늘은 죽어가는 아들딸에 대해서도 아들딸이라는 감정을 잊어버릴 수 없는 연고로, 좀 선한 아들딸을 동원하여 그들을 구하고 싶고 도와주고 싶어서입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그렇기에 하늘은 6천년이란 기나긴 세월을 죄인들을 위해서, 악한 무리를 구하기 위하여 선한 아들딸들을 죽음의 자리에 몰아넣기를 개의치 아니하셨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누구입니까? 우리의 아버지입니다. 우리의 아버지는 어떠한 분입니까? 하나님은 부모이신지라 사망의 굴레에 사로잡혀 있는 아들딸들을 바라보게 될 때에 그들을 구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따르는 아들딸들을 희생시키기를 개의치 않고 역사를 이끌어 나오셨음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 마음이 섭리역사를 이끌어 나오는 본심입니다.
그런데 아담 이후 지금까지 6천년의 역사가 지나갔지만 죄악에 물들어 있는 인류가 어느 한때 이런 아버지를 불러봤으며, 어느 한때 이러한 일을 하고 계시는 아버지라 여기고 감사해봤습니까? 그런 자가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거예요.
어찌하여 하늘은 아담가정을 대할 때 무한히도 슬픈 심정으로 대했습니까? 아벨을 대하는 마음과 가인을 대하는 마음에 어찌 차이가 있었겠습니까? 본심에서 우러나는 그 심정에 있어서는 그도 저도 모두 아들딸의 입장이었으되 차별의 심정을 갖고 대해야 하는 것이 하늘의 사정이었습니다. 그렇게 서글픈 자리에 계신 하늘이신데 아벨의 제물은 받고 자신의 제물은 받지 않았다고 가인이 아벨을 쳐죽인 것은 하나님을 친 것보다 더 분한 사실이었습니다.
이리하여 인류의 역사는 하나님의 심정과 인연을 맺지 못하고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참다운 심정 앞에 반기를 들고 배반과 원망과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한 것이 가인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심정을 대했던 심정의 역사는 끊어지고 배반의 역사가 대(代)를 이어 이루어진 세계가 오늘날의 이 천지임을 우리들은 알아야 됩니다.
배반으로 인하여 타락의 심정을 조성하였던 가인의 역사를 우리는 무한히 통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부자의 인연을 맺어서 하나님의 심정의 역사가 전개되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하고 배반의 심정, 반역의 심정이 대를 이어 나온 연고로 인류 역사노정에 있어서 하나님의 심정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할 수 있는 아들딸이 지상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거예요.
우리는 한(恨)해야 되겠습니다. 자신의 몸에서 뛰고 있는 심장의 고동 소리를 듣게 될 때 우리는 한해야 되겠습니다. 그 맥박은 어디서부터 출발하여 나왔는고? 가인의 심장에서부터입니다. 가인의 심장의 소리가 지금 여러분의 몸 속에서 울리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가인의 피와 인연되어 선과 상반되기를 즐겨하는 입장에 처해 있고, 사탄의 피가 뛰고 있는 자신임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늘이 지금까지 한탄하는 원인이 어디 있는가? 심정의 기원을 같이 해가지고 하늘과 더불어 생활하고, 더불어 만물을 주관해야 할 인간이요 직계 자녀의 입장에 있어야 할 인간인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할 수 없는 입장에 섰다는 것입니다. 그 반면 사탄과 동행하고 사탄을 중심삼고 생활하고, 사탄을 중심삼고 세계를 주관하고 있습니다. 이 세계는 악을 중심삼고 악의 사정을 통하고 악의 심정과 결탁하여 이루어진 세계이지, 선을 중심 삼고 선의 사정을 통하고 선의 심정과 결탁하여 이루어진 세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을 지향하고 양심이 맑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세상이 싫다는 느낌을 갖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내 본 마음과 배치(背馳)되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이러니 하늘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역사노정을 통하여 도를 세워 인류를 끌고 당기면서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기독교입니다.
우리 인류가 느끼고 보고 감각하는 일체의 것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닙니다. 인식을 철저히 해야 됩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누구로 말미암은 것이냐? 사탄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됩니까?
인류는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느뇨? 당장 좋아하고 기뻐하는 모든 것이 선의 하나님, 우리의 아버지를 기원으로 하여 되어진 것이 아니라 사탄의 무대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알고, 그 즐거운 장면을 박차고 기쁜 장면을 박차고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한 운명에 놓여 있기 때문에 도(道)라는 것은 사탄의 무대에서 떠나라고 합니다. 내가 살고 있는 이 가정에서 떠나고, 내가 살고 있는 이 사회에서 떠나고,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에서 떠나라 합니다. 떠나서는 어디로 갈 것인고? 새로운 곳입니다. 사탄과 인연 되어 움직이는 이 세계 말고 하나님과 인연되어 움직이는 그 세계입니다. 거기가 인간이 바라는 본연의 세계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까지 멋대로 살았습니다. 지금까지는 ‘이것이 좋고 저것이 나쁘다.’ 하며 좋고 나쁜 것을 가리며 살았으나, 여러분이 좋다고 하는 그 모든 것은 하늘을 기원으로 하지 않았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것은 도리어 하나님을 슬프게 할 수 있는 재료입니다. 이것을 원수시하여 치고 나가는 자가 되기 전에는 본연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이러한 아들딸을 세우려는 하늘과 철옹성같이 그것을 막아 나오는 사탄과의 싸움이 지금까지의 역사노정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누워서 잠을 자는 그 가정이 자기가 머무를 가정이 아닌 것을 알아야 됩니다. 자신이 움직이고 있는 이 사회가 우리가 바라는 사회가 아닌 것을 알아야 되고, 두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이 지구가 우리가 이상하는 지구가 아닌 것을 알아야 됩니다. 이 피조세계가 내 것이 못 되어 있다는 걸 알아야 됩니다. ‘내 것이로되 원수의 것이 되어 있구나. 본래는 내 것이었던 것을 원수에게 빼앗겼구나.’ 하는 심정에 사무쳐 통탄하며 울부짖는 무리가 지구상에 쏟아져 나와야 됩니다.
이러한 무리가 나오기 전에는 역사의 한은 풀릴 길이 없는 것이요, 역사의 한을 풀기 전에는 소망과 사랑과 이상을 이룰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심정과 인연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를 대심판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분을 풀고 난 후에 바라던 심정의 세계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상천국입니다.
보십시오. 가인만 하나님을 배반한 것이 아닙니다. 하늘은 가인 이후 1600년 만에 노아를 세우고 수고하시기를 개의치 않았습니다. 하늘을 대해 나오던 노아도 하늘 뜻을 받들어 수고하는 것을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노아를 알았으나 노아는 하나님의 진정한 심정을 몰랐습니다. 하나님은 아벨과 가인을 알았으나, 아벨과 가인이 하나님의 심정을 몰랐던 것처럼 노아도 하나님의 심정을 몰랐습니다. 또 그 당시의 사람들도 하나님을 위하는 노아의 심정을 몰랐습니다.
여러분은 이걸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은 노아를 잘 알았습니다. 잘 알고서 노아가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한을 풀어주면 그때에 기쁨의 아들로 대해 주기 위한 뜻을 품고 노아를 바라보던 하나님이었습니다. 복이 있다면 이 이상의 복이 어디 있겠어요? 축복이 있다면 이 이상의 축복이 어디 있겠어요? 영광이 있다면 이 이상의 영광이 어디 있겠어요? 하늘은 이러한 심정으로 노아를 바라보고 있었으나 따르는 노아는 그러한 하나님의 심정을 몰랐다는 거예요.
복귀섭리 노정에서 하나님은 이런 일들을 거듭해서 겪어 나오셨습니다. 여러분, 모르면서도 따라 나온 노아가 얼마나 불쌍합니까? 몰라주는 입장에서도 노아를 붙들고 나오신 하나님은 또 얼마나 불쌍합니까? 모르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살겠다고 허덕인 노아였습니다. 하늘은 그런 노아가 자신의 심정을 알아주기를 바라 나왔지만 노아는 그 사정을 몰랐습니다. 모르는 노아의 심정도 불안했거니와 하나님의 심정은 더욱 불안했다는 것입니다. 노아도 하나님을 몰랐지만 노아와 같이 움직이는 노아의 식구도 노아를 몰랐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모르는 아들딸들을 붙들고 나오느라 그 고충이 얼마나 컸겠는가를 우리는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노아가 120년 동안 수고한 후에 하나님은 물심판을 했는데, 그 후에 남아진 것이 노아의 여덟 식구였습니다. 거기에서 하늘은 무엇을 고대했습니까? 타락하지 않은 하늘의 식구로서, 하늘의 가정으로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즐기기를 고대했던 것인데, 노아 자신이 그것을 똑똑히 몰랐습니다. 자신은 본연의 아담의 자격을 복귀해야 할 입장이고, 아담가정으로 말미암아 맺혀진 한을 탕감복귀해야 할 입장으로 불려진 자신의 여덟 식구라는 것을 노아 자신이 몰랐습니다. 노아가 모르는 동시에 노아의 아들딸도 몰랐습니다. 함도 노아를 몰라주었습니다. 분하고 슬픈 일은 무엇이뇨? 남이 알아주지 못하는 것은 참을 수 있는 일이로되, 죽으면 같이 죽고, 기뻐하면 같이 기뻐하고, 슬퍼하면 같이 슬퍼해야 할 식구가 몰라주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늘의 슬픔이었습니다.
이것 때문에 하늘의 역사는 연장되었습니다. 세상 사람이 몰라주어서 연장된 것이 아닙니다. 알아줘야 할 무리가 알아주지 못하였기 때문에 하늘의 역사는 슬픔이 가해져 내려왔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노아 앞에 함이 그랬고, 모세 앞에 민족이 그랬고, 예수 앞에 사도가 그랬습니다. 역사는 이렇게 내려왔습니다. 알아주기를 바라서 불러 모아 기르고 먹이던 그 무리가 몰라주었기 때문에 하늘의 뜻은 깨지고 찢기면서 내려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불러 놓고 갈대아우르를 떠나라 할 때 아브라함은 하늘의 부르심에 응하여 떠났습니다. 고향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왜? 거기는 아브라함이 살 세상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원망받아야 할 세상, 저주받아야 할 세상입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부모와 친척들이 살고 있는 땅이지만, 그 땅은 하늘의 사람이 살 땅이 아닌지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외로운 황무지인 광야로 몰아냈습니다. ‘갈대아우르를 떠나라.’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오늘 여러분이 듣고 있는 내용을 모르는 입장에서 이 죄악 세상을 박차고 무조건 출발했습니다. 하나님께 제물을 드릴 때도 내용도 모르고 제물을 드렸습니다. 이삭을 잡아 죽이라 했을 때도 그 명령의 의미도 모르고 무조건 순종했습니다. 이렇게 모르는 입장에서 하늘의 뜻을 받들어 나온 우리 선조들의 역사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책임을 진 사람들은 모르면서도 하늘을 받들고 위하고 중요시해 나왔습니다. 이것을 아는 가정은 많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삭을 지나 야곱시대에 와서 야곱이 열두 아들을 데리고 라반의 집에서 돌아온 목적이 무엇이냐? 그 일대(一代)에 천적인 가정의 기반을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늘의 축복을 그리워하여 자기 형을 속이는 놀음까지 하였던 야곱이었으나 그의 아들딸들은 이러한 아버지를 알아주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야곱이 사랑하는 요셉과 베냐민을 시기 질투 하였습니다. 이것이 기원이 되고 조건이 되어 이스라엘 12지파가 열 지파의 편과 두 지파의 편으로 갈라지는 동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역사노정에서 하늘을 받드는 책임자는 하늘의 뜻이 귀한 것을 알고 거기에 따라 움직여 나왔으나, 그 책임자를 알아줘야 할 식구가 알아주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역사를 망쳐 놓았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담 해와와 그 자녀를 복귀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을 아담의 아들이 배반할 줄이야! 노아를 통하여 이루려던 뜻을 그의 아들 함이 배반할 줄이야! 야곱을 통하여 이루려던 뜻을 야곱의 아들이 배반할 줄이야! 사탄세계에 있는 자들이 배반하고 몰라주는 것은 당연하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을 따르는 지도자 밑에, 혹은 부모 밑에 있는 자녀들이 따르지 못하였기 때문에 닦아 놓은 선조의 공적이 유린당해 내려왔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우리는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원수가 어디 있는고? 문 밖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네 집안 식구가 원수라고. 그 말씀을 믿지 못하는 자, 배반하는 자, 하늘과 상관없는 위치에서 행동하는 자가 원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모르고 따르는 노아, 아브라함, 야곱과 같은 선조들을 이끌어 나오셨습니다. 하늘은 모르는 자들을 세워 놓고 간곡한 사정을 알아주기를 바랐습니다. 어찌하여 이러한 선조들을 지도자로 세우셨던고? 여러분은 원리를 배워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우리의 선조들은 물랐다는 것입니다. 모르면서 따라 나왔어도 하늘은 뜻 앞에 배반될 때는 그들을 쳤습니다. 용서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야곱시대를 지나 모세시대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모세를 세워놓고 그를 장차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려 하셨던 하늘의 심정을 모세 자신도 몰랐다는 것입니다. 바로 궁중, 원수의 궁중에 보내어 호화찬란한 환경에서 자라게 한 이유를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민족 정신을 잃어버리지 않은 모세는 자신 앞에 호화찬란한 영광이 겹겹이 가로놓이면 놓일수록 그곳이 자신이 살 세상이 아니라는 신념이 쌓여 갔습니다. 아브라함도 그런 신념 밑에서 하늘 앞에 섰고, 노아도 그랬고 야곱도 그랬습니다. 모세도 그런 입장이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호화찬란한 바로 궁중이라 하더라도 원수의 궁중이라는 마음이 철석같았던 것입니다. 40평생을 바로 궁중에서 살았던 모세는 어느 한 날도 행복한 날이 없었습니다. 자기의 민족이 비탄 중에 있는 것을 바라보게 될 때에, 죽는 한이 있더라도, 찢기는 한이 있더라도, 공포가 가해지더라도 민족을 구하고 싶고 민족을 동정한 나머지 민족을 위하여 죽겠다는 심정이 앞섰기에 이스라엘 민족을 향하여 뛰어들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모세의 절개를 누가 알았습니까? 이스라엘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모세인 줄을 그때 이스라엘 민족 중 누가 알았습니까? 만일 그때 이스라엘 민족이 그러한 지조를 갖추고 하늘을 옹호하고 선민을 구하려는 심정을 갖고 있는 모세와 하나되었다면, 하늘의 역사는 연장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 앞에 나타나 새로운 신념의 말씀, 새로운 취지를 말할 때 배반하기를 일삼던 이스라엘 민족이었습니다. 이 무리들이 서로 싸우는 걸 바라보게 될 때, 모세의 의협심은 불탔습니다. 서로 단결하여 원수와 싸워야 할 입장인데 이를 모르고 동족끼리 서로 싸우니, 그것을 본 그의 심정은 안타까웠다는 것입니다. 한창 민족애에 불타 있을 때에 원수의 나라 애급 사람과 동족인 이스라엘 사람이 싸우는 것을 본 모세는 애급인을 그 자리에서 때려 죽였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그때 모세의 편이 되어 하나로 단결하였으면 하나님의 섭리는 그때 시작됐을 것입니다. 40년 연장이 없었을 것입니다. 민족을 동반하고 가야 할 모세는 민족의 배반으로 미디안 광야 40년이라는 연장의 길을 걷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궁중에서 갖은 고역을 당하면서 이스라엘 민족을 빼앗아 광야로 이끌어 나오는 모세와 그를 따라 나오는 이스라엘 민족은 다 불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제는 어떠한 주권, 어떠한 가치, 어떠한 사회적 배경이 목적이 아니요, 어떠한 환경이나 어떠한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목적입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곳이 어디입니까? 하나님이 원하는 땅이 어디입니까? 하나님도 가고 싶고 인류도 가고 싶은 곳이 어디입니까? 그곳이 목적지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민족이 단결하여 ‘하나님이 원하는 곳이 어디입니까?’ 하며 모세의 뒤를 따라 생사를 개의치 않고 가나안 땅으로 달려갔다면 그들은 광야에서 쓰러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이끄심에 따라 나오는 모세를 대하는 하늘은 어느 한 순간 쉴 사이 없이, 비록 모세가 잠들어 있는 순간이라 할지라도 마음 졸이면서 민족을 바라보았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어떻게 될지 모르는 자리에 모세를 몰아넣고 인도했던 하늘의 심정도 애달팠지만 애달픈 자리에 있는 그 모세를 이스라엘 민족이 몰라주니 그것이 더욱 분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민족은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심판은 이런 장면에서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모세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의 후계자가 가나안 복귀의 뜻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모세도 그러하였지만 더 나아가 예수님 기대를 회상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무엇 때문에 이 땅에 오셨습니까?
4천년 역사노정에 왔다 갔던 신앙의 선조들은 모르는 가운데 하나님을 믿고 나왔고, 모르는 가운데 하늘을 소망하고 따라 나왔었지만, 예수님은 불쌍한 이스라엘 선민 앞에 하늘의 심정을 통고하기 위해 몰리면서도 이끌어 나오신 분입니다. 이 4천년 동안 모르는 자들을 인도하시던 하늘의 심정은 얼마나 분하고 안타까웠겠습니까? 하늘은 이 심정을 붙안고 아무것도 모르는 이스라엘 민족 앞에 메시아가 온다고 수천년 동안 준비시켜 나왔습니다. 그가 오는 날에야 하늘의 심정을 알 수 있다고 하나님의 내적 심정을 예고시켰기에, 이스라엘 민족은 모르는 가운데 메시아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런 민족들이 메시아를 부정했습니다. 만일에 메시아를 바라지 않았던 이스라엘 민족이었다면 심판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모르는 그들을 인도하시던 고충을 털어놓고 나는 누구이며 너희들은 누구라는 사정을 나누고 싶었습니다. 그 사정을 나누기 위하여 4천년 만에 하늘의 보내심을 입은 메시아가 예수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역사는 밝혀지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심정은 밝혀지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세계는 전개되나니, 만일 그때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님 앞에 귀의하여 예수님이 죽으면 같이 죽고 살면 같이 살 수 있는 단결된 민족이 되었던들, 오늘날 이 세계는 원자탄으로 인한 공포에서 허덕이는 세상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무엇을 갖고 오셨느뇨? 새로운 선포를 하기 위해 말씀을 갖고 오셨습니다. 새로운 선포의 내용은 무엇인가? ‘나는 너희의 아버지다.’ 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너희들은 내 백성이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선포할 내용을 갖고 오셨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좋다는 명사를 다 허락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죄인 되었던 인간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고, 죄인 되었던 인간이 하나님의 아들딸이 될 수 있고, 죄인 되었던 인간이 하나님의 신부가 될 수 있고, 죄인 되었던 인간이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다는 것 이상 더 좋은 소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갖고 오신 복음의 중심 내용은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선포하러 오셨습니다. 4천년 동안 한을 붙안고 슬퍼하셨던 하나님의 애달픈 그 심정을 선포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몰렸습니다. 풀이 자라고 있는 벳새다의 들에서 5천여 무리를 모아 놓고 먹을 것이 없어 하나님 앞에 애원의 기도를 올리는 예수가 되었습니다. 준비한 성전은 수없이 있었으되, 그곳이 안식의 처소가 되지 못해 몸 둘 곳이 없었던 예수였습니다.
공연이 베풀어지는 궁전의 제단에서 하나님을 부르면서 의논해야 할 예수님이 감람산 뒷 골짜기에서 호소하는 예수님이 되다니, 이게 웬 말입니까? 4천년 동안 준비한 예루살렘 성전은 누굴 위한 것이었습니까? 하나님의 사정을 통고하고 심정의 인연을 선포하는 그 주인공을 맞기 위하여 준비한 예루살렘 성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 앞에서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편안한 자리에서 하늘의 모든 사정을 선포해야 할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이 웬 말입니까? 그것까지는 그래도 좋다는 것입니다. 나중에는 십자가의 길, 골고다의 길이라니, 이게 웬 말입니까?
그는 믿는 자를 그리워했습니다. 유대 백성을 찾았습니다. 믿는 자를 찾고 믿어줄 자를 찾고 알아줄 자를 찾았으나, 믿는 자도 못 찾았고 믿어주는 자도 못 찾았고 알아주는 자도 찾지 못하였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사랑할 자를 찾았으나 그 또한 찾지 못했기에 예수님께서는 할 수 없이 십자가를 지고 이 땅 위에서 추방당하는 서러운 몸이 되셨습니다.
억울한 하늘의 심정을 선포하기 위하여 오셨던 예수님, 하늘이 약속하셨던 천적인 복을 주기 위하여 오셨던 예수님, 택한 이스라엘, 수고한 이스라엘, 억울하였던 이스라엘의 모든 소원을 성취시키고 세계 앞에 자랑할 수 있는 제사장 국가를 이루기 위해 오셨던 예수님을 몰아냈기 때문에 오늘날 이스라엘 민족은 저렇게 처참하게 되었습니다. 다 예수님 죽인 죄의 대가(代價)입니다. 당연히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오셨던 예수님은 어떠한 분이신가? 그는 무형의 아버지를 대신한 실체의 아버지였습니다, 실체의 아버지. 그는 우리의 아버지입니다. 죽어서도 우리의 아버지, 살아서도 우리의 아버지입니다. 생애를 바쳐 모셔야 할 아버지요, 영생의 나라에서도 모셔야 할 아버지입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는 아들딸을 만나 가지고 한번도 아들이라고 불러 보지 못하고 한번도 딸이라고 불러 보지 못한 채, 아들한테 몰리고 딸한테 몰리다 나중에는 창에 찔려 죽어갔습니다. 비통한 일 중에 이 이상 더 비통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예수님은 이 땅 위에 오셔서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요 16:12)고 하셨던 깃입니다. 이는 아버지로서 자녀에게 할 말을 못다 하셨다는 것이요, 신랑으로서 신부에게 할 말을 못다 하셨다는 것이요, 만왕의 왕으로서 하고 싶은 말을 못다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로마의 법에 걸리지 않는 정도의 말밖에 못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하고 싶었던 말일까요? 아닙니다. 아니에요. 원수의 땅에서 예수님이 자신의 심정을 다 털어놓았으면 당장에 용서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사탄이 주관하는 이 세계에 있어서는 반동분자요, 반역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늘은 지극히 조그맣지만 그러한 사정을 예고할 수 있는 하나의 국가 형태를 갖추어 놓고 그러한 말을 해야 할 예수님을 보내신 것입니다.
제사장과 서기관, 이스라엘 민족 전부가 하나로 단결하여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한 말씀도 새지 않게끔 해서 실천하였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중심삼은 이상세계는 시작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환경을 갖지 못하였습니다. 제사장과 서기관은 가는 곳곳마다 예수님의 원수가 되었습니다. 잡아먹으려고 했습니다. 그런 판국이니 예수님은 내가 누구며 너희는 누구라는 말도 못하고 가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하늘은 4천년 동안 수고하신 당신의 사정을 알리기 위하여 사정을 풀어 놓고 손에 손을 붙들고 ‘아버지!’ ‘내 아들딸아!’ 할 수 있는 한 날을 보기 위하여 예수님을 보내셨건만, 보낸 그것이 한이 된 채 기독교 2천년 역사를 이루어 나온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오늘날 타락한 인간들 중에서 선을 바라보고 양심이 지향하는 방향을 따라가려고 허덕이는 사람들은 무엇을 원해야 할 것인고? ‘하나님이 있사옵거든, 하나님이여, 당신의 사정을 알려 주시옵소서.’ 해야 합니다. 선조들이 외로운 길을 가고 죽음의 길을 가고, 피흘리는 길을 개의치 않고 간 것은 무엇 때문이뇨? 하나님의 사정이 그리웠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정을 알았으면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고? 하나님의 심정을 알아야 됩니다. 아까 말한 부자의 심정입니다. 그것을 알아야만 하나님이 내 아버지이고 나는 아버지의 아들딸이 될 수 있습니다. 천지가 무너지는 한이 있더라도 이것만은 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해결되어야 비로소 소원하신 그 기준이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 순간 천지는 역전(逆轉)하던 것이 정상적으로 회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수 있는 때가 끝날입니다.
이렇게 모르는 인류, 모르는 선조들을 지도해 나온 것이 하나님의 슬픔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알 수 있는 사람이 나오기를 기다렸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이 그것을 알고 그것을 알려주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오셔서 새로운 선포를 하셔야 했습니다. 무엇을 선포하느냐? 천국건설의 청사진을 선포하셨을 것입니다. 인간이 잃어버린 에덴동산을 사탄이 소유하고 있으니 그 사탄을 쳐부수고 새로운 본연의 동산을 건설할 수 있는 내용을 선포하셨을 것입니다. 그 선포문이 여기 성경에는 안 나와 있습니다. 다 지워 버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2천년 역사 노정은 갈팡질팡하는 역사인 것입니다.
이 세계를 이끌어 갈 주인은 누구인고? 민주주의도 아니고 공산주의도 아닙니다. 똑똑히 알아야 됩니다. 이 세계의 주인이 누구냐 하면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만왕의 왕입니다. 그 분이 주관할 수 있는 세계이기 때문에 사망세계에 머물러 있는 수많은 인류는 ‘오시옵소서, 메시아여.’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분이 다시 오시면 무얼 할 것인가? 아담 이후 6천년 동안 쌓였던 하나님의 분한 마음과 한스러운 마음을 샅샅이 드러내고, 선조의 한을 밝혀 줄 것이며, 따르고 받들어야 할 인물들이 배반하던 것을 밝혀, 저끄러진 곡절을 남긴 과거의 흠의 역사노정을 다시 반복하는 일이 없게끔 하실 것입니다. 그것을 하기 위하여, 그것을 선포하기 위하여 오시는 분이 주님이라는 것입니다. 그 분은 사탄을 규명하여 심판대에 올려놓고, 인류를 규명하여 심판할 수 있는 원칙을 세워 놓고, 그 다음에 천국의 법도를 선포하실 것입니다. 내가 찾는 아들딸은 이러한 아들딸, 내가 찾는 그 아들딸이 살 가정은 이러한 가정, 내가 건설할 사회는 이러한 사회, 내가 이루어야 할 나라는 이러한 나라라고 선포하고 그 통치권 내에 세계를 끌어들여 하늘땅이 하나로 화할 수 있는 터전을 만들어 놓은 연후에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실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믿고 있는 성경 말씀, 6천년의 섭리를 지탱시켜 나온 성경 말씀이 있다 할지라도 이것은 원수의 나라에서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마음놓고 하신 말씀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천국에서 통할 수 있는 이상적인 말은 사탄이 참소를 하니까 주저하는 입장에서 한 말입니다. ‘참소하는 네 권한이 무엇이며 네가 참소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며 사탄을 밟아치우고 승리적인 기반 위에서 한 말은 한마디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도들은 이 성경을 믿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고 성경을 배우는 목적은 성경 구절을 외우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의 행적을 아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잘하든 못하든, 예수가 왜 왔다가 갔던, 그런 것은 모를지라도 성경 가운데 숨겨져 있는, 성경을 통하여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라 하면 하나님도 ‘너는 내 딸이요, 내 아들이라.’ 할 수 있는 심정의 자리에 서고, 원수도 어떠한 누구도 이걸 참견할 수 없다는 각오와 신념으로 하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성경의 완성자입니다. 그렇게 되면 성경을 한 구절도 모른다 해도 좋습니다.
그런 심정의 자리까지 나아가려면 우리는 알아야 됩니다. 우리 아버지는 이러한 이념을 갖고 인간을 지으셨고, 타락한 인간 때문에 이렇게 수고하셨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면서부터 지금까지 2천년 동안 이러한 역사적인 심정을 가지고 오셨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런 하나님임을 알고 그 하나님은 시대적인 나를 중심삼고 그 무엇을 이루기 위해 심정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역사를 붙들고 나오시는 동안 아버지는 우리의 선조에게 심부름을 시킬 때 종으로서 심부름시켰지 아들로서 심부름시켜 본 일이 없었습니다. 종으로서 싸우게 하고 백성으로서 원수를 갚게 했지 아들로 세워서 원수를 못 갚아 봤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을 세워 원수를 갚는 날이 심판날입니다.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무엇을 알아야 되느냐? 하나님의 사정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 사정을 알고선 무얼 해야 하느냐? 하나님의 심정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알고선 무엇을 해야 하느냐? 그 다음엔 내 아버지라고 해야 합니다. 내 아버지, 우리의 아버지.
우리가 이렇게 배우고 듣고 모심의 생활을 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6천년 동안 인류가 허덕여 나온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성경에 흐르고 있는 하나님의 사정을 알고, 하나님의 심정을 알기 위해서입니다. 민족이나 국가는 말할 것도 없고 개개인을 부모의 심정을 갖고 대하고, 상처를 당하고 유린을 당하고 배척을 받고 찢기며 나오신 그 하나님이 내 아버지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였습니다. 골고다에 오르기 전 이미 쓰러질 것을 아시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을 새워 기도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마 26 :39)라고. 이것은 ‘당신이 나를 보내심은 아버지의 기준을 세우기 위함이요, 내가 땅에 태어남은 아들의 기준을 세우기 위한 것이거늘, 아버지를 증거해야 될 입장에서 이렇게 꺾일 수 없습니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심정임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천지가 무너지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아버지가 보내준 예수요, 아들의 기준을 갖추어야 할 예수였기 때문에, 천상을 대하여, 아버지를 대하여 그 뜻을 배반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들로 왔다가 아들로 갔습니다. 아들로 갔다가 아들로 부활했습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아들로 혹은 딸로 태어났으며, 하나님의 아들로 혹은 딸로 살았습니까? 회개하여야 되겠습니다. 어떤 집 아들로 태어났으면 죽어도 그 집 아들이요, 살아도 그 집 아들입니다. 어떤 집 딸로 태어났으면 죽어도 그 집 딸이요, 살아도 그 집 딸입니다. 그 인연을 누가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찾고 계십니다. 천상의 법도를 세워 놓고 부르짖고 계십니다. 나면서부터 내 아들이라고 할 만한 무리를 찾고 계시다는 거예요. 사는 동안도 내 아들이라고 할 수 있는 아들을 찾고 계십니다. 아들뿐이 아닙니다. 나면서부터 내 딸이라고 할 수 있는 딸, 사는 동안도 내 딸이라고 할 수 있는 딸, 죽을 때에도 내 아들딸이라고 할 수 있는 아들딸을 찾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들로서 왔다가 아들로서 죽었으되, 딸로서 왔다가 딸로서 죽은 이는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신부를 찾아 헤매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늘의 심정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들로 났다가 죽어간 예수님 앞에 설 신부를 못 찾았으니 딸로 태어나 딸로 죽을 수 있는 신부를 찾아 ‘오, 내 아들딸아.’ 하시며 본연의 동산에서 아담 해와를 지어놓고 손을 들어 축복하시던 그 기쁨의 심정을 하나님은 다시 찾고자 하신다는 것입니다. 한의 심정을 탕감하여 없애버리고 선의 심정을 연결시켜 상속시킬 수 있는 아들딸이 있어야 합니다. 이 아들딸은 사탄세계의 공포 분위기 가운데에 있어서는 안 될 것이요, 사탄이 참소해서는 안 될 아들딸입니다.
천지간 어디를 가든지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아들딸을 갖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이자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하여 전세계 기독교인들을 세워 그 한 날을 예비시키고 그 한 날을 예고시켜 나오고 있음을 여러분은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전세계의 기독교인들은 이스라엘의 이러한 배반의 역사를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원수로 몰아냈기에 그런 불쌍한 역사를 걸어온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 역사가 민족 층을 지나 오늘날 세계적인 층으로 등장했는데, 그것이 기독교인인 것입니다. 그럼 이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해야 되느뇨? 형제지간에 싸움을 하면 망합니다. 때문에 교파와 교파가 싸우는 걸 바라보고 그들을 방망이로 내리치고, 무지한 양떼를 사망으로 이끄는 무리와 싸울 수 있는, 하늘을 대신하여 싸울 수 있는 용자가 나타나기를 하나님은 바라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농락하고 하늘을 배반한 모든 제사장과 서기관, 바리새교인들이 그 직책을 다 벗어버리고 이스라엘 민족을 예수님 앞에 굴복시켰던들 하나님은 뜻을 세울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역사가 이렇게 피에 엉클어지고 서글픔으로 이어져 나왔다는 걸 아는 우리들은 단결해야 됩니다, 단결. 너도 단결, 나도 단결. 동서양을 막론하고 국가 민족을 막론하고 모두 단결해야 되겠습니다. 이것이 뜻을 품은 사람들이 명심해야 할 하나의 표어일 것입니다. 단결하는 데는 생활통일이요, 행동통일이요, 이념통일이요, 심정통일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흑인이 문제가 아니고 백인이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의 핏줄기가 동하고 있는 사람, 심정에 북받쳐 아버지를 부르고 싶어하는 사람은 모두 단결해야 됩니다. 이러한 운동을 전세계의 기독교인들 앞에 선포해야 할 시기가 가까워 온다는 걸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늘은 이렇게 해 주길 바랄 것입니다. 전세계 기독교인이 망한 이스라엘대신 제2이스라엘로 세계에 등장하여 원수들과 싸우기를 바라십니다. 그런 날이 올 것이거늘 그날이 예수 재림날이요, 그 싸움을 책임지고 오는 분이 재림 예수입니다.
인간이 모르는 가운데서 인도하시던 하나님은 6천년 동안 홀로 수고하여 오늘날 전세계를 기독교권 내로 몰아넣으시고 알 수 있는 일과 알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걸 바라볼 때에 우리는 황공한 마음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누구를 위하여? 무지한 백성이요, 뭐라 말할 수 없는 한스런 이 무리들을 위하여 하늘은 이렇게 수고하셨습니다. 여러분은 황공한 마음으로 바라볼 줄 알아야 됩니다.
이제 남은 것은 무엇이냐? 선조들도 몰랐던 하나님의 심정을 우리가 알아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누가 알았더냐? 하나님의 심정을 누가 알았더냐! 하나님의 심정을 누가 알았더냐? 선민권을 자랑하고 4천년 섭리의 곡절을 붙들고 나왔던 이스라엘 민족이 알았더냐? 2천년 동안 예수님을 믿고 간 기독교인들, 혹은 이 시대의 전세계 기독교인들이 알았더냐? 몰랐습니다.
하늘은 찾고 계십니다. 누구를?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 천지가 변할지라도 결코 변하지 않는 심정을 가진, 아버지와 아들딸의 인연을 맺을 수 있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전세계의 기독교인들이 다 모른다 할지라도 알아주는 아들딸이 한 사람이라도 나온다면 문제는 수습된다는 것입니다. 선조들도 하나님의 심정을 몰랐습니다. 거슬러 올라가 볼 때 노아도 그러했고, 아브라함도 그러했고, 야곱과 모세도 그러했습니다. 모두가 모르는 가운데서 환경을 개척하다 갔기 때문에 알려주기 위하여 예수님은 오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또 오셔야 됩니다.
여기 모인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누구인 줄 알았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인 것을 알았습니까? 여러분의 몸 마음은 사탄세계에 엉클어져 있는데, 이것을 해탈하여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아들딸의 위신을 갖추었습니까?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늘은 요구하고 계십니다. 나면서 아들 될 수 있는 아들, 나면서 딸 될 수 있는 딸을 바라고 계십니다. 그 아들딸이 여러분을 통하여 나오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에게는 나면서 아들 될 수 있는 아들을, 나면서 딸 될 수 있는 딸을 하늘 앞에 갖추어 드릴 책임이 있습니다. 이러한 책임을 감당하는 자는 역사적인 해원을 성취할 수 있는 자요, 하나님의 직계 자녀라는 명분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자입니다.
나는 말하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이것을 알려주기 위하여 오신 그 역사가 어떻게 되어 있는 역사인지. 피에 젖은 역사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눈물이 수천만 번 뿌려졌다가 말려진 말씀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내가 서 있는 이 땅을 찾기 위하여, 이 인류를 찾기 위하여 그랬던 것입니다. 이 인류의 등에는 선조의 핏자국이 어려 있습니다. 이 인류의 이마 혹은 옷자락에는 선조의 피눈물이 어려 있습니다. 이것을 볼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선조들은 당연히 눈물 흘리며 죽어야 마땅하나, 나면서도 하나님의 아들이요, 살면서도 하나님의 아들이요, 죽었다가 부활해서도 하나님의 아들이었던 그 아들의 눈물과 핏자국이 여러분의 몸에 물들어 있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가르쳐 주기를 원하였던 예수의 심정을 이 시대에 사는 우리가 알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면 그 영광을 무엇으로 보답할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알려주기 위하여 6천년 동안 수고하셨고, 예수님을 보냈고, 선조들을 희생시켰거늘, 무의미하고 무가치하고 무감각한 만 인류들을 모아놓고 알려주는 그 한마디 말은 수천만의 선한 사람들이 목이 메고 피를 흘린 제단의 말씀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배웠습니다. 우리는 안다고 자인하고 있습니다. 알았으니 선포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알려주시는 그 한마디의 말씀에는 사형장에서 사라지는 수천 수만의 선한 사람들에게 알려줄 수 없었던 하나님의 곡절이 묻혀 있는 걸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창조원리부터 복귀원리까지 전체의 말씀을 받게 될 때, 그 말씀의 한마디 한마디에는 피눈물이 엉겨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것을 찾기 위해 수고한 사람은 제쳐 놓고라도 역대 선조들의 피눈물과 한숨이 절절히 얼크러져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찾기 위하여 어떠한 길도 감수하고 나온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가 걸은 노정에는 한마디 말씀을 찾기 위해서도 피눈물 나는 사연이 깃들어 있고, 저주와 원망이 넘치는 걸음을 개의치 않고 걸어왔다는 걸 알아야 됩니다. 그 한마디 말씀 밑에는 피눈물이 고여 있고, 죽음의 신음 소리가 나를 재촉하고 있음을 느끼는 자라야 역사적인 하나님의 심정을 알 수 있고, 역사적인 하나님의 사정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이 소원하며 찾던 아들의 면목을 갖출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6천년 후에 태어난 아들이라 해도 심정을 중심삼고는 6천년 전의 나일 수 있고, 심정을 중심삼고는 4천 년 전의 나일 수 있고, 심정을 중심삼고는 2천년 전의 예수님과 같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말씀을 통과해야 됩니다. 말씀을 지나는 데 있어서는 핏줄기가 뻗쳐 있고 눈물의 길이 가로막혀 있습니다. 그것을 개의치 않고 나가야 되겠습니다. 그 말씀을 지나 실체를 모셔야 되거늘, 상처를 입고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는 지경에 있는 실체를 맞을 수 있는 비장한 각오를 여러분은 가져야 됩니다. 이 말씀을 갖고 나선 마당에 하늘의 배반자라고 하며 좋지 않은 낙인을 찍는다 할지라도, 혹은 배반을 받아 이슬같이 사라지는 한이 있다 할지라도 ‘나는 핏줄기가 어린 그 말씀과 더불어 죽겠나이다.’라고 할 수 있는 절개를 가진 사람들이 되어야겠습니다.
복귀라 하였는데 무엇을 복귀할 것인고? 말씀을 잃어버린 것이 타락이니 말씀을 찾아야 됩니다. 말씀을 찾은 후에는 무얼 해야 될 것이뇨? 말씀을 찾은 후에는 실체를 복귀해야 됩니다. 실체를 모시려면 사정이 통하여야 됩니다. 사정이 통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뇨? 심정이 연결되어야 됩니다.
지금까지의 구원섭리역사는 말씀을 통과하는 역사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는 진리의 말씀을 찾아 헤매었습니다. 진리를 찾은 후에는 실체를 통과하여야 됩니다. 이 실체를 통과하지 못한 한이 남아 있는 연고로 이 땅 위에 실체의 주인공인 한 분이 오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재림사상이라는 것입니다. 실체 통과의 은사를 입은 후에는 무얼 할 것인고? 신부 단장하여 신랑 신부의 인연을 맺고 심정의 문을 통과해 나가야만 하나님의 상속자가 될 수 있습니다. 말씀 가지고는 상속을 못 받습니다. 몸뚱이만 가지고는 상속 못 받습니다. 실체가 말씀의 화신이 되어 하나님의 심정을 통과했다는 합격증을 받아야만 천상천하의 대주재 되시는 하나님의 아들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똑똑히 들었습니다. 우리는 똑똑히 배웠습니다. 말씀이 줄기차게 뻗쳐 있는 곳에 생명이 약동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말씀이 내 몸을 스쳐 지나갈 때에 환희와 해방의 느낌이 밀려드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그 말씀의 뒤에는 피눈물의 자국이 있는 것을 알고 서글픈 음성을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걸 알고 또 그렇게 가는 한이 있더라도 감사하고 황공한 마음이 앞서는 자라야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아들딸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6천년 동안 인간은 너무도 하나님의 심정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하늘이 기뻐할 수 있는 한 때가 있다 할진대 그 때는 어떠한 때냐? 심정으로 하늘을 소개할 수 있는 때일 것입니다. 선한 사람을 통하여 사망세계의 인간을 살려주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알고, 그 심정을 해원하기 위하여 하나님 대신 살려주는 책임을 지고 싸우며 하나님의 심정을 선포하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 하늘은 모든 것을 아끼지 아니하고 그 사람 앞에 넘겨주신다는 것입니다. 아끼지 아니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가집시다. 우리는 자랑합시다. 우리는 남깁시다. 무얼? 우리의 명예를 남기기 위한 것이 아니요, 우리의 가문을 자랑하기 위한 것이 아니요, 우리의 무엇을 세우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단 하나 우리가 자랑할 것은 무엇이뇨? 하나님의 심정입니다. 그 다음에 자랑할 것은 무엇이냐?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요, 나는 하나님의 아들딸이라는 것입니다. 개인이 그러하고 가정이 그러하고 민족이 그러하고 세계가 그러하고 천상천하가 그러할 때 하나님의 소원은 성취될 것이요, 하나님의 한은 풀어질 것이요, 하나님의 천지창조 이념은 완성될 것입니다.
이런 책임이 여러분 각자에게 있는 것을 아시고, 하나님의 심정을 몰랐거든 여러분이 살아 있는 동안에 알아야 합니다. 나면서부터 혹은 살면서 하나님의 사랑의 심정을 알아드리다가 참다운 아들딸들로 말없이 사라질 줄 아는 여러분이 되면 여러분에겐 천당이 문제가 아닙니다. 천상의 황국(皇國)에서 하늘의 귀족이 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우리는 가겠나이다. 우리는 자랑하겠나이다. 우리는 넘겠나이다. 우리는 이 뜻을 품고 쓰러지겠나이다.
반대자가 아무리 많다 할지라도, ‘우리는 아버지의 아들딸이고 아버지는 우리의 아버지인 것을, 심정적으로 결속된 나와 아버지의 관계를 어느 누가 유린할소냐? 이 절개만을 자부하고 싶습니다. 이 절개만을 천추에 남기고 싶습니다.’라고 할 수 있는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알려주신 은사를 황공하옵니다. 무지했지만 순종했던 선조들 앞에 면목이 없사옵고 순교자들 앞에 황공하옵니다. 또한 돌아가신 독생자 예수 앞에 황공하옵니다. 보잘것없고 자격 없는 저희에게 감당키 어려운 은사를 주셨사온데, 황공해하지 못하고 감사의 눈물을 흘리지 못하는 것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알았사옵니다. 살아서 아버지의 아들 되어야 함을 알았사옵고, 죽기 전에 아버지의 사랑을 높이 찬양해야 함을 알았사옵니다. 하오니 한을 남기지 말고 한번이라도 그러한 아들딸이 되어 아버지를 모셔 보고 죽을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것이 저희의 소원이요 아버님의 소원인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고, 아버님의 원수를 갚는 일이요, 사탄을 박멸하는 일이라는 걸 알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하늘의 뜻을 망치는 것은 역대의 선지들이 아니라 선지를 모시고 있는 식구와 따르는 무리였음을 알았습니다. 하늘의 뜻을 막는 자들은 그 뜻을 책임진 자가 아니라 뜻을 대하고 있는 집안 식구인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죽든지 살든지 개인적인 사정을 넘어서서 먼저 하늘을 세워놓고 그 다음에 싸우겠으면 싸우고 또 다른 무엇을 하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하늘의 주권을 세울 때까지 참고 희생하고 양보하며 쓰러지면서도 이 뜻이 성취되는 한 날을 위하여 목이 메는 한이 있더라도 기도하면서 싸워 나가는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니다.
세계 앞에 맡겨진 책임을 저희들이 단결하여 감당하고도 남음이 있도록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였사옵나이다. 아멘.
아버지, 오늘 아버지의 심정동산에서 저희들의 몸이 움직이고, 마음이 움직이고, 모든 생각이 움직이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의 심정은 무한한 사랑의 심정인 것을 저희들은 알았습니다. 아버님의 심정은 무한히 슬픈 심정이옵고, 무한한 상처를 입고 있다는 것도 저희들은 알았습니다.
아버님은 이 시간에도 그리워해야 할 처지에 계신 것을 알았습니다. 아버님은 이 시간에도 원수들의 참소의 조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계신 것을 알았습니다. 아버님은 아직까지 원수와의 싸움에서 승패를 결정짓지 못하시고 승리와 영광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 없는, 그런 분이신 것을 알았습니다.
한없이 슬프신 아버님, 한없이 수고하신 아버님, 지금도 한없이 마음을 졸이시는 아버님, 그 아버님이 창조주이시고, 그 아버님이 온 만상의 주인공이시라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고, 아버님이 당하시는 그 한없는 슬픔이 저희 가슴에 스며들게 하여 주시옵고, 한없는 분함과 원통함이 저희의 심중에 흘러들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것을 체휼한 자, 몸 둘 곳을 몰라 자기 몸을 가누지 못할 슬픔에 잠기게 하여 주시옵고, 그 마음을 수습할 수 없어 하늘인지 땅인지 모르는 채 통곡하는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6천년이나 슬픔의 제단이 연속된 데에는 선조들의 잘못이 있어서인 줄 아옵니다만, 오늘날 저희들이 또 책임 못하여 슬픔을 후대에 넘겨줄까봐 두렵사옵니다. 오늘 저희가 저희 일대(一代)에서 비운의 역사를 막고 하늘의 심정을 여기서부터 수습하여 새로운 기쁨의 심정으로 바꿔 놓아야 할 책임이 저희들에게 있다는 것을 배웠사오니, 이 시간 머리 숙인 저희들, 아버지의 심정의 동반자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사람 같은 사람은 많사옵니다. 그런데 땅 위에 무엇이 없어서 하늘이 슬퍼하시는가 하면, 당신의 심정을 통할 수 있고, 당신의 뼈 살이 녹아질 수 있으며, 당신의 사랑을 그리워할 수 있는 아들딸이 없어서인 줄 알고 있사옵니다. 하늘은 그러한 아들딸들을 찾고 계시다는 것을 저희들이 알았사오니, 이제 정성을 다하고 이 몸 마음을 다 드려 그 심정 앞에 부족함이 없다 할 수 있는, 인정받는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저희들은 하늘이 어떠한 물질을 주는 것을 원치 아니하옵고, 사정을 알아주는 것을 원치 아니하옵고, 은혜를 주는 것을 원치 아니하옵니다. 그보다는 은혜를 주신 후에 연락(宴樂)하고자 하시는 아버지의 그 내정(內情)을 저희들이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슬펐던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있으며, 고통의 아버지를 위로할 수 있는 아들이 되고 딸이 되기를 바라옵니다.
이것을 목표로 하여 저희들은 험한 길도 개의치 아니하고, 몰리는 길도 개의치 아니하고, 핍박과 조롱의 화살이 이 한 몸에 휩쓸어 온다 할지라도 아버지를 향한 일편단심의 심정만을 가져야 하겠사오며, 이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하늘을 향하여 더 가까이 갈 수 있고, 그것을 내적인 충고로서 소화시킬 수 있는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날 부족한 모습들이 모였사온데, 아버님, 여기에 찾아왔다가 도리어 염려하며 돌아가는 모습들이 되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산 제물을 드리라고 수천년 동안 수많은 당신의 아들딸에게 가르쳐 주셨사오나 아버지께서 받으실 수 있는 진정한 산 제물이 없었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오늘 불초한 저희들이 모였사오니 긍휼히 보시옵소서.
불초한 저희들만이라도 역사를 대신하고 시대를 대신하고 미래를 대신한 하나의 산 제물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이 여기에 찾아오셔서 슬펐던 사실을 의논할 수 있으며, 괴로웠던 사실을 말할 수 있으며, 소망의 사실을 말할 수 있는 이 한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님이시여, 이 시간 천상에 있는 수많은 성도들에게 축복하여 주시옵고, 지상에 널려 아버지의 뜻을 염려하며 호소하는 자들 위에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더욱이 새로운 말씀을 붙들고, 새로운 심정을 갖고 어두운 세상에 나가 싸우고 있는 당신의 혈족들이 있사오니, 이 시간 그들을 붙들어 위안하여 주시옵고, 그들의 아픔을 친히 당신의 심정으로 덮어 주시옵소서. 외로운 자리에서 상처받는 일 없이 아버지의 심정과 인연 맺어 어떠한 고통과 어떠한 죽음의 장벽도 녹여낼 수 있는 하늘의 심정을 가진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같은 인연 가운데 세우셨고, 같은 목표 밑에서 같은 뜻을 위해 싸우고 있사오니, 아버지께서 옹위하시어 승리의 그 날까지 이끌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시간에도 민족을 위하여 엎드린 아들딸들이 많을 줄 알고 있사오니, 어느 곳에 있든지 그들을 축복하여 주시옵고, 수많은 인류 위에도 축복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드리는 이 한 시간 위에 아버지의 긍휼의 손길이 떠나지 마옵소서.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였사옵나이다. 아멘.
오라 하시는 아버지의 음성을 듣고 죄악의 성품을 가진 저희들은 황공한 마음을 갖고 아버지의 성상을 대하기 위해 나왔습니다. 아버님께서 저희를 불러주신 것은 사망의 세계에서 분별시키고자 하심인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거룩하신 성상을 대하게 될 때 저희들도 거룩한 영광의 모습으로 다시 빚어 주시옵고, 저희들을 축복하시어 영원한 새로운 동산을 유업으로 주시려는 아버지의 놀라우신 사랑에 몸 굽혀 감사드릴 줄 아는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지나온 6천년은 한스러운 날들인 것을 알았습니다. 이제껏 왔다 갔던 수많은 사람들은 참아버지의 모습이 어떠하며, 참아버지의 음성이 어떠하며, 참아버지의 심정이 어떠하다는 것을 안 사람이 없었사옵니다. 헤아릴 수 없는 은사로써 불초한 저희들을 모으시기에 얼마나 수고하셨사옵니까? 오늘 이 자리까지 이끌어내시기에 얼마나 고생을 하셨사옵니까? 얼마나 외로운 심정을 느끼셨으며, 얼마나 치욕을 당하셨으며, 얼마나 맞으셨으며, 얼마나 피눈물을 뿌리셨사옵나이까?
오늘 저희가 아버지 앞에 감사하는 이 마음도 저희 것이 아니옵니다. 이 한 몸에 하늘땅을 움직일 수 있는 생명의 약동이 있다 할진대 이것도 저희 것이 아니옵니다. 소망에 잠겨 ‘아버지 감사합니다. 그 뜻, 그 영광 놀랍소이다.’ 하며 그리는 마음이 있을지라도 저희 것이 아니옵니다.
하나에서부터 천천만사가 나를 중심삼고 이루어졌고 나를 위하여 되어진 것이었으나, 타락한 이후부터는 자기를 중심하였으되 이것이 자기 것이 아닌 것을 알았사옵니다. 그리하여 하늘이 저희를 다시 찾아 준 것이요, 저희 자신들이 다시 하늘 것으로서 세워져야 할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아버님! 진정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아들을 얼마나 그리워 하셨사오며,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딸들을 얼마나 그리워하셨사옵니까? 이 시간 저희들은 아무것도 갖고 나오지 아니하였습니다. 세상에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저희의 영광은 이미 이 땅 위에서 사라져 버렸고 저희의 욕망도 이 땅 위에서 이미 사라져 버렸사옵니다. 저희가 땅 위에서 바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사옵기에 저희들이 가진 소망과 욕망이 있다 할진대 당신 뿐이었사옵고, 마음으로 그리는 것이 있다 할진대 참다운 아버지의 아들딸이 되는 것밖에는 없사온데, 아버지, 모인 이들이 당신께서 역사적으로 그리워하시며 찾아 나오신 아들딸의 모습이 될 수 있겠습니까?
저희들은 아버지 앞에 서기에는 부족함이 많을 것을 알고 있사오나, 약속의 말씀을 의지하여 아버지 앞에 아뢰지 않을 수 없사오니, 이 시간, 저희들이 저지른 과거의 모든 죄악의 행실을 회개시키시옵고, 타락의 속성을 제거시켜 주시옵소서. 자신도 모르게 자연적으로 몸 마음이 움직여 아버님을 대하여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결과적인 입장에서 동기적인 본연의 생명을 느껴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은 몰림받는 무리였습니다. 누구 하나 저희를 대하여 변명해 주지 않는 외로운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외로워하고 낙망할 때에 아버지는 불러 주셨사옵고, 기진맥진하여 쓰러져 있을 때에 아버지께서 저희들을 일으켜 주신 것을 아옵니다. 지성을 다하여 만드신 인간들에게서 찾고자 하시는 충절을 저희들이 지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절개를 지닌 아들에게 찾아가 주시옵소서. 하늘 앞에 세울 때 사탄까지도 참소할 수 없는 자랑스런 아들을 찾으시옵소서.
이것이 요구였고 이것이 소원인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오니, 이 시간 이 자리에 나온 저희들이 복을 받기 위해 나온 자가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언제나 아버지의 주실 복만을 그리워하는 자가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고, 언제나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도 그 사랑을 잊어버리는 자가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은사를 받고서 배반하고 배역(背逆)하는 자가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이날부터는 아버지가 은사를 주기 위해 얼마나 수고하셨는가를 아는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이 주시는 은사에 대하여 돌려 드리는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고, 사랑을 돌려드리는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탄세계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기뻐할 수 있는 충절이 사무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6천년 동안 아버지께서 주어왔고 뿌려왔던 그 모든 것에 대하여 대가의 결실을 돌려드리는 이 경배가 되게 하여 주시옵고, 식구들이 되게 인도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님! 이 시간 모였사오니 분부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이 시간 아버지의 무릎 앞에 모였사오니 저희를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 저희가 가졌던 것을 다 내어놓았사오니, 선과 악을 구별하여 주시옵소서. 이 땅 위에 자기가 선한 자라고 하며 아버지 앞에 나설 자가 어디 있사옵니까? 깊고 깊은 그 사랑의 성상 앞에 설 적마다, 아버지 약속이 있을 것을 바라면서 아뢰고 있사오니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 무슨 말을 하오리까? 모든 것을 당신이 책임져 주시옵소서.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아버지의 영광이 나타나시옵소서. 전하는 자의 마음이나 받는 자의 마음이 하나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심정세계는 많은 말이 필요치 않고 논리와 이론이 필요치 않은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그런 것은 그 자체에서 자연히 알게 되고, 그 자체에서 해답을 얻고, 그 자체에서 스스로 해명을 받을 수 있는 은사의 자리임을 아오니, 아버지의 실존에서부터 시작하여 우리의 가치가 무엇이며 만상과의 인연은 어떻게 되어 있는가 하는 모든 것을 이 시간 저희들이 느끼고, 그러한 자리에서 아버지와 더불어 움직일 수 있는 이 한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외로운 식구들이 사방에 널리어서 이 시간도 머리 숙이고 눈물지으며 기도하고 있사오니, 그들을 긍휼히 보시옵소서. 먹을 것을 먹지 못하고 입을 것을 입지 못하고 싸우고 있고, 조롱과 핍박을 받으면서도 아버지의 옷자락을 붙들고 있는 아들딸들이 있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이 시간 같은 은사로 보호하여 주시옵기를 나의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날을 영광으로 받아 주시옵고 기쁨으로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말 씀> 이 시간 잠깐 드리려 하는 말씀의 제목은 ‘새로운 날’입니다. ‘새로운 날’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잠깐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지으시던 그 순간은 새로운 순간이었습니다. 지어지는 만물도 새로운 만물이었습니다. 짓는 순간도 그러하거니와 지어진 물건도 새로운 것인 동시에 새것을 대하고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도 새로운 마음이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새로운 만물을 지어 놓은 그 에덴, 새로운 만물과 더불어 영원복락을 향유해야 할 주인공 아담 해와, 그 아담 해와를 세워놓고 새로운 심정적인 이념을 품고 바라보시던 하나님, 그 하나님에게는 어느 한 순간 어느 한 시간 귀하지 않은 때가 없었을 것입니다. 아담 해와가 거동하는 그 한 순간 순간은 말할 수 없이 심각한 순간이요, 말할 수 없이 귀한 인연의 시간이었다는 것을 우리들은 이 시간 다시 회상해 보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자라나고 있는 아담 해와는 날이 감에 따라 이지와 지능이 밝아져 하나님의 본성을 대신하기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지음받는 새로운 세계를 대하여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해서 볼 수 있으며, 들을 수 있으며, 만질 수 있는 자격자임에 틀림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 해와를 바라보시면서 그들의 움직임이 하나님 자신의 움직임이고, 그들이 하는 말은 하나님 자신의 말이 되고, 또한 그들이 듣고 보고 느끼는 모든 것이 하나님 자신이 듣고 보고 느끼는 것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한 관계와 인연권 내에 있는 아담 해와는 하나님이 심중으로 그리던, 하나님의 전체를 대신한 존재였음에 틀림없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아담 해와를 위하여 지으신 만물을 품고 계시는 하나님은 아담 해와를 세워 놓고 어떠한 한 날을 고대하고 그리워하셨던고? 여섯째 날까지 만물 지으시기를 다 필하셨으나 아담 해와를 완성된 모습으로 창조하지 않으신 데에는 필시 아담 해와와 하나님 사이에는 무엇이 남아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지어 놓은 상태의 아담과 해와도 아니요, 그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그 기간도 아니요, 아담 해와를 통하여 찾아 이루고자 하시는 한 날이었음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 한 날을 맞이하는 그 순간 하나님도 기뻐하실 것이며, 아담 해와도 기뻐할 것이며, 만물도 기뻐할 것이기에 만물도 그날을 고대하고 인간도 그날을 고대하고 하나님도 그날을 고대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 날이야말로 만상(萬象)이 즐거워할 수 있는 날이요, 그날이야말로 하나님이 창조역사를 끝내 놓고 기뻐하실 수 있고 최고의 웃음을 웃을 수 있는 날이요, 최고의 춤을 출 수 있는 날이요, 천지가 생겨난 이후에 비로소 최고의 자유와 행복에 잠기어 만상이 뒤넘이치면서 화동(和動)하는 날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한 날, 그러한 한 시간, 그러한 한 순간은 하나님의 심중에 소망의 날과 소망의 시간과 소원의 순간으로 묻힌 채 오늘날까지 미완(未完)의 이상(理想)으로 남아져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억울한 자리에 처하여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되었는고? 타락이라는 슬픈 한 장면이 벌어짐으로 말미암아 이렇게 된 것임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타락! 이 타락이라는 것이 새로운 만물도 하늘이 세운 법도에서 끊어냈고, 새로운 사람도 하나님의 법도에서 끊어놓고, 새로운 천지도 그 법도에서 끊어놓고, 새로운 하나님의 이념도 끊어놓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슬프고 또 슬프게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타락의 인연을 맺고 나온 역사, 타락의 혈통을 받고 있는 나입니다. 이것을 본연의 새로운 동산의 아담으로, 새로운 동산의 만물로, 새로운 동산의 하나님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고? 이것이 하나님의 고충이요, 인류의 고충이요, 역사의 고충이요, 만물의 고충임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이 타락한 인류를 버릴 수 없는 인연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잘 알고 있습니다. 영원한 이념을 중심삼고 인간을 지은 원리적인 내용이 있는 연고로 하나님은 타락한 인류를 버리려야 버리지 못한 채 이 날 이 시간까지 붙들고 나오십니다.
사람들은 흔히 말하기를,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 합니다. 모든 만물은 인간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이 세계도 인간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인간이 새로운 무엇을 갖고 있다고 자랑하더라도, 제아무리 인간적인 권한을 자랑한다 하더라도 이는 타락세계의 종의 신세를 면치 못한 자리에 있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타락인간은 하나님이 지으신 새로운 이념의 세계와 새로운 이념의 동산과 새로운 이념의 심정을 가진 사람과, 그 만물과는 하등의 인연이나 하등의 관계가 없다는 것을 우리는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기에 타락한 인간들은 싸움의 역사를 거쳐오고 있습니다. 고통스럽고 슬픈 생활 속에서 허덕이면서 소망과 소원, 이념과 이상을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그 소원이 무엇이며, 그 이상이 무엇이뇨? 그 목표가 무엇이뇨? 그것은 다른 게 아니라 새로운 한 날뿐입니다. 새로운 한 날뿐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타락한 인간이 새로운 한 날을 맞이해야 되겠고, 이 만물이 새로운 한 시간을 가져야 되겠고, 이 천지가 새로운 한 날을 맞이한 가운데 하나님을 모시고 새로운 날을 즐길 수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역사노정에 수많은 선지성현과 의인들이 왔다 갔지만, ‘나는 새 날을 맞았고, 새로운 하늘의 뜻을 세웠고, 새로운 한 날을 틀림없이 세웠노라’고 부르짖고 간 사람은 없었습니다. 예수님도 새로운 날을 소망하시면서 죽어 갔습니다. 하나님도 우리에게 약속하시기를, 끝날이 온다고 하셨습니다. 내 마음의 움직임을 볼 때도 오늘의 나를 거부하고 새로운 한 날의 나를 찾아 헤맨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타락한 인류는 새로운 날을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타락의 혈통을 가진 오늘의 우리들도 새로운 한 생을 찾아, 새로운 한 시간을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자기도 모르는 그 무엇이 우리의 감성을 움직여 오늘 이 시간도 나를 그런 방향으로 재촉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 새로운 한 날이 천지간에 이루어지면 하나님은 우리의 것, 세계는 우리의 것, 인류는 우리의 것, 만물은 우리의 것입니다. 하나님을 통하여 인연되어진 천상천하의 모든 피조물은 나의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그 한 날을 맞을 수 있는 세계적인 이념을 찾아 허덕이고 있습니다. 세계를 지배하고 세계를 주관하고자 하여 이념을 품고 그 주의를 주장하여 나오는 사람이라면 그 이념을 거부하고 그 심적인 요구를 거부하는 자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성현군자 성인 현철들이 우리보다 앞서 이러한 소망을 가지고 이 길을 개척하였습니다.
그 뒤를 따라가는 우리들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러한 한 날, 하나님이 나의 것, 세계가 나의 것, 인류가 나의 것, 존재하는 일체가 나의 것이 되는 한 시간을 그리워하며 고대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역사적인 한 시간, 역사적인 한 날, 새로운 한 날을 세우기 위하여 지금까지 싸움에 싸움을 계속해 나오고 계시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의 목전에서 싸우고 계시는 아버지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은 역사노정에서 싸워오셨고 오늘 이 시간에도 우리 앞에서 새로운 한 날의 개척자로서 싸우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새로운 한 날을 고대하며 나오셨습니다. 새로운 날을 세우기 위해 싸워 나오고 계십니다. 인간들이 싸워서 승리한다 해도 타락인간의 승리가 되니 뭐합니까? 타락한 인간을 시켜 건설해서 뭐합니까? 그렇기 때문에 타락과 하등의 관계가 없는 하나님이 타락한 인간 앞에서 싸워 나오시며 타락하지 않았다는 승리의 기준을 세워 타락하지 아니한 혈족을 남기시기 위해 수고해 오셨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시대 시대가 지남에 따라 개인을 지나고 가정을 지나고 민족, 혹은 부족을 지나고 국가를 지나서 세계까지 나왔습니다.
인간들은 자신이 선두에서 싸우는 줄 알고 있지만 그것이 아닙니다. 타락한 인간만으로써 싸워 가지고는 이상이니 이념이니 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한 날이 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시는 하나님은 지금까지 6천 년이란 기나긴 세월을 거치면서 우리의 선조보다도 먼저 개척해 나오셨습니다. 우리 선조가 움직이기 전에, 우리 선조가 개척하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개척자가 되셨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개척자가 되어 수고하신 터전 위에 사람을 세워 싸우게 해 나온 역사인 것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역사상에 큰 전쟁이 몇 번이나 있었습니까? 그 큰 전쟁이 벌어지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큰 전쟁을 하시고, 그 전쟁에서 승리한 발판 위에 인간들을 세워 전쟁을 하게 하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육신을 가진 우리 인간들은 육(肉)만의 사람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종교인들은 악신(惡神)이 있는 동시에 선신(善神)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선한 하나님이 계시고 악한 사탄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사탄은 인류를 지배하였습니다. 사탄은 인류를 자기의 소유물로 하였습니다. 사탄은 우리의 혈통까지, 우리의 심정까지 유린하여 자기와 인연 맺고 말았습니다.
이리하여 사람에게 지배받아야 할 이 세계는 사탄이 지배하는 세계가 되었고, 사람으로 말미암아 빚어져야 할 이 세계의 역사는 사탄으로 말미암아 빚어진 역사가 되었기에 모든 것이 사탄과 인연되어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인간들은 이것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역사의 기원은 어떠한 민족도 아니요, 어떠한 부족이나 씨족도 아니요, 개인이 제창한 어떠한 주의나 사조도 아닙니다. 이 역사는 단 하나 선한 하나님이 개척자가 되어 악한 사탄세계를 대하여 싸워 나온 투쟁사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에 연유하여 역사는 선과 악이 대립하면서 엉클어져 나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올바로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하늘의 소원은 무엇이뇨? 잃어버린 에덴을 다시 찾는 것입니다. 하늘의 소망은 무엇이뇨? 지으신 동산이 사망의 공포를 느끼지 않고 원수의 침략을 받지 않는 안식의 동산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늘이 싸우면서 찾아 나오는 소망의 목적지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역사는 하나의 세계를 향하여 가고 있고, 하나의 이념세계를 지향해 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에는 주의와 사상이 나와서 움직여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써 세계는 끝나지 않습니다. 움직이고 있는 주의와 사상이 새로운 주의 같고 새로운 사상 같으되 이것은 타락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주의요 사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의 마음이 움직이고 있으되 그것은 악의 혈통에 인연되어 움직이는 마음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들의 심정이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주의와 사상은 어디에다 근거를 두어야 될 것이뇨? 생활적인 감정을 영원한 이념과 접속시켜 줄 수 있는 정적인 것을 기반으로 해야 됩니다. 그러지 못한 주의와 사상은 어느 한때 슬픔과 더불어 사라져 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늘은 인간의 마음과 인간의 심정을 혁명하기 위하여 인류역사를 움직여 나왔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의 인간들을 찾아오시는 데는 어떻게 찾아오셨느냐? 인간 심정의 중심을 향하여 공격전을 개시해 나왔습니다. 사탄에게 지배당하고 사탄에게 점령되어 있는 이 인간들을 사탄세계와 끊어놓고, 악의 본성을 폐하여 본성적으로 악을 싫어하고, 선을 좋아할 수 있는 그 심정 기준을 이루기 위하여 하늘은 개척해 나오셨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지금까지의 도의 관념은 심정적인 기준에 못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 도의 주의와 사상은 양심적인 기준까지는 이룰 수 있을는지 모르되 역사적인 심정, 민족적인 심정, 천륜적인 심정, 뼛골로 흐르는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심정, 부부끼리 사랑하는 심정, 형제끼리 사랑하는 심정…, 이런 심정문제를 완전히 해결짓지 못하고 있는 것을 여러분은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 심정의 기준이 잡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인류는 싸우는 것입니다. 이 심정의 기준이 잡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형제 사이에 분열이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탄은 무엇 때문에 6천년 동안 싸워 나왔느뇨? 우리의 심정을 서로 점령하기 위하여 싸워 나오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이 심정기준은 어느 때 잡혀질 것이뇨? 이 세계의 종말과 더불어 사탄세계가 송두리째 점령당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타락한 인간을 찾아 나오시며 세우려 하시는 새로운 날인 것을 알아야 됩니다. 타락한 인간들의 심정세계를 점령해 나오던 무리를 걸어 놓고 하늘이 심정적으로 점령했다고 외칠 수 있는 그 한 시간, 그 한 날이 인간들이 찾아가는 날이요, 하나님이 그 한 날을 인간 앞에 소개해 주기 위하여 싸움의 용자로서, 전체를 책임진 개척자로서 우리의 선조 때부터 지금까지 세상을 끌고 나왔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수고가 끝나는 시간은 언제이뇨? 하나님의 싸움이 끝나는 시간은 언제이뇨? 하나님의 심정은 하나입니다. 자식이 부모를,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그 심정은 하나입니다. 누가 점령할 수 없는 심정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고, 하나님의 자녀가 그렇다 할 수 있는 그 한 날이 하나님이 찾고 계시는 새로운 날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타락한 인간도 부모 된 자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은 둘이 아닙니다. 이는 절대 중의 절대입니다. 그것은 존재의식을 넘어서 존재할 수 있고 움직일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만우주의 어떠한 원동력이나 어떠한 존재물의 주관권 내에서 머물지 않고 초월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이념을 초월합니다. 인격적인 가치를 초월합니다. 이 기준은 하나님의 가치까지도 초월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기준이 이루어지는 날에는 악을 대하여 심판주의 입장에 있던 하나님도 심판주가 아니다 하는 자리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도의 기준을 세우고, 양심의 도리를 세우고, 인간 세계에 윤리를 세워 이 한 목표를 바라보게 하고 있습니다. 이 사탄세계는 주의의 싸움, 혹은 혁명적인 사조를 개척하면서 나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의 역사는 변천의 역사요, 우리의 생활의 역사, 우리의 싸움의 역사는 변천해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심정은 알파이자 오메가입니다. 처음이자 나중입니다. 참이라는 것은 시작과 끝이 같은 것입니다. 처음에 크다가 나중에 작아지는 것은 거짓입니다. 시작보다는 나중에 커가는 것이 선한 것입니다. 선은 망하는 법이 없기 때문에 작은 것에서부터 큰 것으로, 즉 작은 선에서부터 하나님과 같이 큰 선으로까지 발전해 나오는 것임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악은 컸다가 작아지는 것입니다. 악은 큰 이 한 천지를 가졌으되 점점점점 빼앗겨 나오고 있습니다. 악의 역사는 잃어버리는 역사요 선의 역사는 찾아지는 역사입니다. 이런 원칙을 볼 때, 하나님이 주관하는 어떠한 도(道)나 어떠한 종교가 있다 할진대 그것은 날이 가면 갈수록 확대되어 나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날이 가면 갈수록 주의와 사상을 휩쓸어 하나의 세계를 향하여 나아갈 것임에 틀림없다는 결론을 지을 수 있습니다.
이런 원칙 밑에서 판단할 때, 오늘날 기독교는 세계적인 종교가 되어 있고 기독교인들은 세계의 사조를 움직이는 사람들이 되어 있어요? 선은 선한 것으로서 나왔으되 선의 목적지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선은 선 될 수 있는 역사는 거쳐왔으되, 선의 가치가 이렇고 선은 이것이다, 아버지가 찾으시는 선은 이것이다, 영원한 선의 주체가 지녀야 할 것은 이것이다 하는 것을 명시해 주지 못했습니다. 예수는 이것에 대해 끝날에는 신랑 신부가 상봉해야 한다고 상징적으로 말했습니다.
우리는 최고의 선을 지향해 나왔습니다. 행동에도 선이요, 말씀에도 선이요, 생활에도 선이요, 내 관념과 주의 전체가 선이 되기를 바라고 나왔으나 나는 바라고 있습니다. 주의로만 주장하는 선이 물러가고 행동으로만 자랑하는 선도 물러가기를. 그것을 넘고 넘어 하나님의 사랑을 지향하는 선이 인류가 찾아 나아가는 최후의 종착점이요, 그 선이 하나님이 선의 환경을 개척해 나오신 최후의 종착점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선의 중심이 이러하기에 예수는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를 대하여 효도하고, 누구를 사랑해야 할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자기를 사랑하라고 하지 않았어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첫째 되는 계명이라.” (마 22 :37)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원칙적인 내용을 갖지 못한 종교는 어느 한 때 굴복당합니다. 이런 내용을 갖지 못한 주의와 사상도 굴복당하고 말 것입니다. 세계는 이런 종말적인 무대에 봉착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계시다 할진대 하나님도 지정의(知情意)를 내포한 주인공을 찾습니다. 지와 의는 상대적이로되 정은 절대적입니다. 세상에 아무리 훌륭한 인격을 갖춘 자, 명망이 높은 자가 있다 할지라도 심정적인 면에 있어서 어느 한 기준에 이르지 못했다면 불행한 자입니다. 이걸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라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찾고 계십니다. 인류도 바라보고 또 찾고 있는 그 기준은 하나님과 같은 점입니다. 그 기준은 갈라졌던 인간과 하나님이 상봉할 수 있는 점입니다. 하나님이 심정동산에서 비로소 안식할 수 있는 위치를 잡는 그 점입니다. 그 점은 과연 무엇이냐? 새로운 아들딸을 세워놓고 영원히 영원히 사랑할 내 아들 내 딸이라 할 수 있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마음, 하나님의 뼛골에 흐르는 그 마음은 어느 누가 점령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악한 사탄 권세가 있다 할지라도 주인이 둘이 될 수 없는 그 이치를 여러분은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수많은 기독교를 대신하여 기도한 때가 있었습니다. ‘하나님, 아무리 명색을 갖춘 기독교인들이 많고 영화로운 환경을 자랑하는 교회당과 교파가 많다 할지라도 나는 그런 것을 원치 않습니다.’ 하고. 하나님도 그런 것을 원치 않으심을 알았기에 그런 기도를 한 것입니다. 하늘은 찾고 계시되 어떠한 교회당을 찾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는 자기 아들이 청년일 때는 아들을 빙자하여 다른 젊은이를 사랑합니다. 사랑하지만 젊은이 전체를 직접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누구를 연유하여 누구로 말미암아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들이라는 존재를 근거로 하여 사랑의 인연을 맺어 나간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도 인간들을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랑해 나오셨습니다. 사랑하는 데는 역사적으로 사랑했고, 혹은 사회적으로 사랑했고, 혹은 가정적으로 사랑했습니다. 보호해 주고 사탄을 분별시키면서 사랑해 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랑해 오셨지만 인간을 대하여 ‘너는 내 아들이요, 내 딸이다.’ 하시며 붙안고 사랑하시지는 못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은 복귀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복귀역사라고 하였습니다. 복귀역사이니만큼 근원에서부터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올라가는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해 나왔습니다. 자녀로 사랑해야 할 인간인데 타락한 연고로 종과 같이 사랑한 때가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백성과 같이 사랑한 때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역사입니다. 종과 같이, 백성과 같이 사랑했으니 아들과 같이 딸과 같이 사랑할 수 있는 한 날을 찾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역사입니다.
예수와 성신은 왔었습니다. 누구로 왔던고? 예수는 사랑할 수 있는 아들이요, 성신은 사랑할 수 있는 딸로서 왔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이것을 잘 모릅니다. 성신이 뭡니까? 성신은 어머니신입니다. 어머니신이 성신입니다. 예수는 아들이요 성신은 딸, 이것이 인간의 표본입니다. 인간은 예수와 성신을 표본삼아 이들과 인연을 맺음으로써 하늘의 아들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늘의 아들딸이 된다는 거예요.
내가 아들딸이 된다니 고마운 일입니다. ‘고맙습니다.’ 하고 하나님께 몇 번이고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아들딸로 인정을 받는 것은 좋지만 하나님의 한이 남아 있는 것을 나는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저 아들딸로 축복해 줄 수 있는 아들딸보다도 품에 품고 애지중지하며 사랑할 수 있는 아들딸들을 찾고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만물을 대해서 자랑할 수 있는 아들딸보다도 품에 품고 뺨을 대고 입을 맞추며 사랑할 수 있는 아들딸, 애지중지할 수 있는 아들딸, 뼛골에 사무친 심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아들딸을 찾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세우시어 신랑과 신부라는 목표 밑에서 인류를 끌어들이려 했습니다. 그러기에 부활한 예수를 막달라 마리아가 붙잡으려 할 때 막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찾고 있는 날이 멀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소원하시는 아들딸은 어린양 잔칫날에 신랑 신부로 축복해 주고 그날부터 품고 사랑할 수 있는 아들딸이었습니다. 그런데 역사상의 어느 누구도 6천년 전부터 오늘 이때까지 아버지의 품에 품고 혈육처럼 심정으로 기를 수 있는 아들딸이 못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넘어야 할 고개는 어떠한 고개뇨? 주를 만나기 위한 세계적인 골고다입니다. 주를 만나기 위한 세계적인 골고다를 넘어야 합니다. 그 고개를 넘어 부활권 내에 들어가서는 주를 어떻게 대할 것이뇨? ‘당신은 역사적인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당신은 시대적인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당신은 미래적인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인정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하여 예수가 역사적인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알았습니다. 이 예수는 타락하기 전 선한 모습으로 하나님의 품 가운데서 자라난 아담과 같이 타락의 한을 잊어버린 자리에서 품고 키운 아들이 되어야 했는데, 그런 예수가 되었습니까? 못 되었습니다. 한스러운 4천년 역사를 붙들고 그 역사적인 서러운 장면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될 싸움의 책임자로 일생을 다 보내신 분이 예수였습니다.
하늘은 고대하고 있습니다. 예수가 신부를 맞이하는 그 한 날로 하나님의 해원이 끝날 줄 알고 있는데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또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나는 한 때 이것을 알고 무한히 슬펐습니다. 역사적인 싸움의 무대에 하나의 구세주로 예수를 보냈지, 구세주가 필요 없었던 선의 동산, 타락의 인연이 없는 동산의 왕자로서 보내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서 말입니다. 타락하지 아니한 세계, 사탄의 참소와 사탄의 비난을 받지 않는 선의 동산, 사탄의 비난, 비소, 사탄의 참소를 받지 아니하고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왕자로서는 태어나지 않은 것을 알고서 말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이런 사정을 꿈에도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만 맞이하면 단 줄 압니까? 아닙니다. 예수를 만나 가지고는 뭘 해야 할 것이뇨? 예수를 만나 가지고는 하나님의 사랑을 노래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은 무엇을 그리워하시느뇨? 타락으로 인한 한에서 벗어나서 안식할 수 있는 자유의 새 천지를 맞이해서 모든 시름을 잊고 사랑할 수 있는, 어릴 때부터 품고 사랑할 수 있는 그런 아들딸을 그리워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이 땅에 왔다 갔지만, 이런 아들딸이 이 땅 위에 있었느냐? 없었습니다. 만일 이런 아들딸이 이 땅 위에 있는데 하나님이 그를 죽이면 하나님도 참소 받습니다. 그런 아들딸을 죽일 자는 없다는 거예요. 예수를 하나님이 죽음의 자리에 내놓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은 그가 그러한 아들딸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를 구세주로 대하지 않는 타락한 세계에서 싸움의 왕자, 메시아의 기준을 가졌던 것입니다. 만일에 사탄의 침범을 받지 않는 영원한 선의 동산에서 하나님이 품고 사랑할 수 있는 아들딸이 있는데, 그를 사탄세계에 내놓아 죽게 했다면 천리 원칙은 근본부터 다 깨져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가 인류 앞에 나타내지 않은 분야가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나는 이 분야가 밝혀지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소원도 의당 그래야 논리적으로 맞는 것입니다. 타락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예수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예수가 필요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가 필요한 입장에서 구원받는다면 그 자리는 양자의 자리입니다, 양자. 로마서에 양자 되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직계의 자녀가 아닌 양자인 것입니다.
예수님도 신랑 신부를 갖추게 되면 하나님 품에 안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안기는 데는 그럴 수 있는 조건을 갖추어야 됩니다. 만일 예수가 승리해서 신랑 신부를 갖추어 가지고 지상천국을 이루고 하나님이 사랑할 수 있는 아들딸을 가졌다면, 즉 에덴동산에서의 타락하지 않은 기준에서 아들딸을 가졌다면 어떻게 되었을 것이냐? 그거 생각해 봤어요? 오늘 처음 나온 사람은 ‘아 그것은 이단의 말이다. ’할 것입니다. 좋습니다. 그 기준을 향하여 우리는 넘어가야 되겠습니다. 나는 여러분 대해서 이것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내가 기도하는 목표가 있다면 그것입니다. 그런 것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한 날을 사모하고 있습니다. 한 시간을 찾기 위하여 싸우고 있습니다. 이 목표를 향하여 수십년 외로운 길을 걸어왔고 이 목적을 향하여 핍박의 길도 걸었으며, 이 한 날을 성취시키기 위하여 연속되는 시련의 자리에 들어가는 것도 주저하지 않고 나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목표를 향해 가야만 합니다.
제1이스라엘은 망해 버렸으니, 예수를 위주한 기독교가 제2이스라엘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제2이스라엘의 백성입니다. 기독교는 제2이스라엘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제2이스라엘이 책임을 못하니 ‘주를 모시고 살 수 있는 제3이스라엘을, 하나님이 품고 사랑할 수 있는 아들딸을 이 땅 위에 보내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해야 됩니다. 기도할 건 그것밖에 없습니다. 내 아들딸에게 복주시고, 내 나라를 사랑해 주시고, 이 세계가 어떻고 하는 기도는 하지 마십시오. 이 세계는 다 망할 거예요. 한번 심판대 앞에 서야만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도 찾고 계십니다. 인간도 찾고 있습니다. 여러분이나 나나 그리워하며 찾아야 할 한 곳이 어디뇨? 내가 정성을 기울여야 할 정성의 근원지가 어디뇨? 정성을 들여야 할 왕궁이 어디뇨? 정성을 들이는 데는 예수를 통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타락하기 전 아담의 심정을 대신하여, 타락하지 않은 아들딸이 하나님 앞에 정성들이는 그 기준까지 가야 합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류가 가야 할 최후의 목적지입니다.
우리는 충성을 하되 예수보다 더 충성해야 됩니다. 예수는 죄악을 대하여 싸우고 사탄을 대하여 싸우는 데 있어서 한 면으로는 칼을 들어 원수와 싸우고 또 다른 면으로는 하나님을 위로하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싸우지 않는 입장, 즉 싸움을 다 끝내 가지고 불안과 공포를 느끼지 않는 평화와 자유의 환경에서, 자유 천지에서 하나님 앞에 충성을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모습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도 이것을 향하여 2천년 동안 싸워 나왔습니다. 성신도 이것을 향하여 그 날을 소망하며 싸워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한 시간, 그 한 날을 향하여 가야 하는 것입니다. 가는 데는 죽어서 말고 살아서 갈 수 있으면 얼마나 영광이겠습니까?
그 한 날은 심정이 얼크러질 수 있는 순간이요, 하나님이 기뻐서 통곡할 수 있는 시간이요, 하나님의 기쁨과 하나님의 슬픔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시간입니다. 지금까지 6천년 동안 쌓인 하나님의 슬픔의 보따리를 다 터버리는 시간입니다. 그 순간은 역사적으로 제일 슬픈 순간이 될 것입니다. 역사와 더불어 하나님은 온갖 슬픈 노정을 걸어왔으나 그 순간에는 역사의 모든 슬픔을 한번에 울어 치웁니다. 동시에 그 순간부터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는 순간입니다. 그날은 희비극이 교차되는 순간입니다. 이것을 상징하여 인간세계에 반영되어 나타나는데, 하나님의 슬픔을 인계 받은 종자, 하나님의 기쁨을 인계 받은 종자로 갈라집니다. 그것이 심판입니다, 심판. 하나님이 지금까지 인간을 붙들고 슬퍼하시던 역사는 종결되고, 인간 대하여 소망하시던 기쁨의 날은 시작됩니다. 하나님 속에 체휼된 슬픔은 악한 종자에게 넘겨주고, 선한 마음과 기뻐할 수 있는 기쁨의 울음은 선한 종자한테 넘겨주는 것입니다.
세계는 심정을 두고 갈라질 날이 올 것입니다. 이것이 하늘이 인간 앞에 세우는 심판날입니다. 이날의 심판을 피하기 위하여 선지선열들이 선의 싸움을 한 피어린 역사노정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것을 고이고 이것을 높이고 이것을 세우기 위하여 싸워 나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날은 다가오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자는 시간에도 다가오고 있고, 싸우는 순간에도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 무엇을 생각하는 시간에도 다가오고 있으며, 여러분이 자식을 품고 사랑하는 그 순간에도 다가오고 있습니다. 어느 한 순간, 어느 한 찰나를 멈추지 않고 우리의 마음을 향하여 육박해 들어오고 있습니다. 우리의 생활에 침범해 들어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세계를 향하여 공격하고 있습니다. 이 한 날을 마음에서부터 생활에서 가정에서 사회에서 국가에서 세계에서 쌍수를 들어 환영할 수 있는 하나의 왕자가 없습니다. 하늘은 그런 자를 찾고 계십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어떠한 생활관을 갖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어떠한 주의를 갖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어떠한 세계관을 갖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가져야 할 세계관은 그것이 아닙니다. 하늘은 새로운 이념에 불타는 세계관, 그 이념을 중심삼은 사회관, 그 이념을 중심삼은 가정관을 갖고 그 이념을 중심삼은 인격자가 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내 일신에서부터 그러한 인격을 갖추어 가정·사회·국가·세계의 문을 열고 ‘하나님, 오시옵소서.’ 할 수 있는 자가 된다 할진대 심판대를 넘어갑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시겠어요?
예수가 주장하던 주의가 이렇고 하나님이 찾고 계시는 것이 이겁니다. 그런 세계관입니다. 그러한 인격을 갖추어 ‘아버지여, 내가 사망세계의 문을 여니 오시옵소서. 이 사망의 사회의 문을 여니, 아버지여, 오시옵소서. 사망의 가정의 문을 여니, 아버지여, 오시옵소서. 사망의 실체의 문을 여니, 오시옵소서.’ 할 수 있는 하나의 왕자를 하나님은 찾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땅 위에서 그런 사람 만나 봤습니까? 왔다 가신 예수가 이런 일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말하였습니다.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라야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라 했습니다. 집안 식구도 그렇지 못할 때는 원수라고 했습니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는 철두철미한 분이었습니다. ‘내 손에 못을 박은들 나는 안 죽는다. 못을 박는다고 죽어지는 내가 아니다.’ 했습니다. 죽지 않는 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렇게 철두철미한 우주관을 기반으로 한 세계 이념을 갖추어 가지고 사망의 환경에 있을망정 ‘하늘이여, 이 세계의 문을 열었사옵고, 이 민족과 이 사회의 문도 열었사오니, 오시옵소서.’ 하면 하나님께서도 ‘오냐.’ 하시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망의 물결이 진동하는 이 때 내 마음의 문을 열고, 가정의 문을 열고, 사회와 국가와 세계의 문을 열어 가지고 ‘아버님, 오시옵소서.’ 할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심판날이 오기 전에 심판을 넘어설 아들딸이 나와야 됩니다. 그런 존재가 나와야만 세상이 망하지 않지, 안 나오면 다 망한다는 겁니다.
인간들은 인생관을 갖고 있습니다. 세계관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천주관(天宙觀)을 갖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인간은 이론적인 것만 가지고는 안락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인간은 이론만 가지고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걸 알아야 합니다. 천주관을 가지면 말하지 않아도 대하면 다 통한다는 겁니다.
오늘날 인간 앞에 네가 누구고 내가 누구라고 말하지 않아도 세상에서 제일 가까운 형제나 부모와 같이 누구보다도 가까울 수 있는, 심정이 자극 될 수 있는 그 무엇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나오면 형제를 버리고 그리로 가고, 부모를 버리고 그리로 가고, 국가를 버리고 그리로 가고, 세계를 버리고 그리로 갑니다. 그것은 논리적인 한계의 인격, 구상하고 상상해서 되어진 인격이 아닙니다. 자연적이요 자동적이면서 천륜을 통할 수 있는 인격입니다. 천정(天情)이 움직여 인정적(人情的)인 모든 것을 자동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 심정적인 인격이 이 땅 위에 나오면, 세계는 가만히 내버려 두어도 통일됩니다. 하늘은 이런 한 날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런 자극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겠느뇨? 타락하지 않았을 때 하나님이 품고 사랑하시던 그런 아들딸이 이 땅 위에 나와야 합니다. 사탄을 궤멸시켜 가지고 사탄의 참소나 악의 침범이 없는, 공포와 불안을 느끼지 않는 행복의 동산에서, 그 자리는 영원무궁토록 태평이요, 영원무궁토록 자유스러운, 어디를 가서 어떻게 품고 사랑하고 어떻게 하든 누가 어떻다고 할 수 없는 자유천지의 동산에서 하나님이 품고 사랑할 수 있는 아들딸이 나타나야 합니다. 그러면 이 세계는 순식간에 통일이 될 것입니다. 나는 그러한 것을 생각할 때마다 ‘아버지, 얼마나 그리웠습니까?’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그리워하는 마음은 창세 전부터 아버지께서 그리워하던 마음입니다. 안 그래요? 아담 해와를 낳기 전부터 고대하던 마음, 만물을 짓기 전부터 있던 마음입니다. 그 심정을 채우기 위하여 천지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한히 불쌍한 분입니다. 죄악의 자식을 품고, 사랑하는 아들이라 할 수밖에 없는 거북한 입장에 있는 하나님, 죄악된 아들딸들이 살고 있는 이 땅 위에 오셔서 찢기고 상처를 받고 몰리는 하나님인 것을 여러분은 생각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심정은 찢기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통곡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심정에는 갈기갈기 찢겨진 상처가 있습니다. 민족이 쓰러지고 새로운 민족이 이루어지는 그때마다, 역사의 어느 한 페이지도 제외됨이 없이 하나님의 심정의 곡절이 스며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역사노정에 있어서 그러한 심정을 가지고 나오셨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그런 전통적인 심정을 가진 하나님과 심정적으로 결탁되어야 됩니다. 그러려면 무한히 슬펐던 하나님을 알고 무한히 고통스러웠던 하나님을 알아야 됩니다. 무한히 분하고 억울했던 하나님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누구 때문에 하나님이 이러시는고? 인류 때문에, 우리 때문에, 이 세계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땅 위에 사는 우리들은 하나님의 한을 풀어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슬픔과 고통이 끝나지 않는 한 슬픔의 역사를 붙들고 나아가야 할 하나님임을 알았으면 ‘아버님이여, 당신의 슬픔을 제게 지워 주시옵소서.’ 할 수 있는 아들딸이 되어야 합니다. 안 주려 하시면 빼앗아 가지고라도 져야 합니다. 빼앗아서라도 하나님의 슬픔을 지는 아들딸 이 되어야 합니다. 아버님의 고통이 내 고통이요, 아버님의 억울함이 내 억울함이라고 할 수 있는 아들딸이 이 땅 위에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아들딸이 몇 명이나 됩니까? 예수를 믿고 천당 가겠다고? 예수를 믿고 편안하겠다고? 그런 사람은 하늘의 역적입니다. 할 것 다 해야 천당 가는 겁니다. 할 것 다 해야 복 받는 겁니다. 해야 할 일을 하지도 않고 천당 가려 하고 복 받으려 해? 그런 사람은 강도입니다. 이걸 알아야 합니다.
이제 여러분은 하나님의 슬픔을 인계 받는 왕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는 그런 왕자였습니다. 죽음을 홀로 인계 맡은 왕자였기에 구세주가 되었습니다. 죽음으로 쓰러졌지만 부활의 권한으로 살아났으니 사망권을 지배할 수 있는 왕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는 숨은 눈물을 많이 흘렸습니다. 여러분, 성경에는 이것이 몇 번밖에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나의 눈물, 피, 감정, 여기에는 예수의 모든 오관의 감정이 어리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와 더불어 울어본 자, 예수와 더불어 고통받은 자, 예수와 더불어 간장을 녹여본 자, 그런 자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통일교회를 찾아왔지만 과거의 그런 습관적인 신앙 갖고는 안 됩니다. 통일교회 신앙은 그런 신앙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사탄이 제일 무서워하는 자는 어떠한 자뇨? 영과 육을 합하여 하나님이 지신 십자가를 대신 지겠다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받겠다는 사람은 사탄이 우습게 알아요. ‘하나님, 제가 당신의 십자가를 지겠나이다.’ 하는 자를 사탄이 제일 무서워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제가 억울함을 당하지요.’ 하게 될 때 사탄은 도망간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끝날 성도에게는 반드시 환난이 옵니다. 하나님이 참아 나오신 고비고비의 곡절을 비롯하여 억울함과 배반과 배척과 몰림과 죽음과 역사상의 피어린 모든 흔적이 여러분을 휩쓸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에 대한 일편단심,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 뜻대로 하시옵소서.’ 하는 이 심정을 누가 지배하겠습니까? 아버지와 나와의 심정적인 인연을 누가 끊겠습니까? 사탄의 권세요? 어림도 없습니다. 사망의 권한도 어림없습니다. 이 심정을 무엇이 지배할소냐! 이것을 찾아가는 노정에서 어떠한 어려움도 참고 넘어갈 수 있는 기준을 가진 자라야만이 최후의 심판대를 넘어설 수 있습니다. 그런 자라야만이 하나님이 찾고 있고 인류가 찾고 있는 새로운 한 날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합니다.
사랑과 절대적인 선은 영원합니다. 처음과 끝이 같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에게서 은혜받고 기뻐 춤을 추며 맹세를 해 놓고 어느 순간에 변하는 자는 사탄 편입니다. 우리는 ‘아버지와 더불어 심정적으로 결탁된 이 마음을 누가 점령할소냐, 사탄세계의 사망 권한아 오너라, 사탄세계의 피의 곡절아 오너라, 사탄세계의 그 무엇 다 오너라, 세기말적인 공포나 7년 대환란 전부 다 한꺼번에 몰아쳐오라. 난 점령당하지 않는다. 그런 것 가지고 날 점령하지 못한다.’ 할 수 있는 기준, 심정적으로 아버지를 부를 수 있는 승리의 기틀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래 가지고 ‘사탄세계에서 이러한 뜻을 위하여 싸워 오신 아버지시여! 이 사망세계에서 어느 한 날 이러한 아들딸을 만나 위로받으셨습니까? 위로받지 못하신 하나님이시여! 오늘 제가 위로해 드리겠습니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자는 새로운 시대, 새로운 날에 하나님의 아들딸이 될 수 있고, 세계를 유업으로 받을 수 있는 당당한 자격자라는 것을 여러분은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지나간 인생행로는 슬펐습니다. 성인 현철도 다 지나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들의 주장도 다 지나가 버리고 그들의 세력과 권세도 다 지나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오직 사망과 생명의 권세뿐입니다. 사망의 권세를 비웃는 자가 이 땅에 많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사망의 권세를 비웃는 자만이 생명의 권세를 소유할 수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사망과 생명을 판가리 하는 순간이 역사선상에서 벌어질 것이며, 사회에서 벌어질 것이며, 가정에서 벌어질 것이며, 내 자체에서 벌어질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벌어지고 창조 이후 대전쟁이 벌어지는 때가 심판 때인 것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이 땅 위의 믿는 신자들은 심판날에는 불이 하늘로부터 내려 이 땅을 살라버릴 것으로 알고 있으나 그렇지 않은 것을 아옵니다. 사망과 생명의 판가름은 이 세계의 사조를 걸어 놓고 한다는 것을, 교회나 가정이나 이념이나 곡절에 엉클어진 세계의 실전상이 다 거기에서 판가리 난다는 것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사망을 갈라 치우고 생명의 권한을 갖고 나오는 자에게만 새로운 날, 새로운 시대, 새로운 세계, 새로운 천주를 바라 볼 수 있는 약속이 있음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말씀드렸듯이 새로운 한 날을 위하여 저희들은 불리움을 받았사옵니다. 오늘 살고 있는 나의 모든 것은 다 지나가야 될 것입니다. 부모도 지나갑니다. 처자도 지나갑니다. 내가 갖고 있는 명예와 권세, 내가 갖고 있는 일체와 귀하다는 모든 것도 지나가 버립니다. 지나가고 남아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사망의 권세 앞에 시달리고 또 시달려도 남아질 것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인연되어 있는 심정의 덩어리임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것이 남아지는 곳에는 또 전인류가 살 수 있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내가 쓰러져도 그것은 남아 있는 것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 사망이 깊이 뿌리박은 이 천지 위에 생명의 뿌리를 깊이 박으사, 자르고 잘라도 무한히 나올 수 있는 터전이 어서 이루어지게 허락하여 주옵소서.
아버님, 이것을 위하여 저희들은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것을 위하여 핍박을 받습니다. 아버지의 발자취를 따라 나가는 심정적인 노정 위에 있어서 어느 형제가 귀하지 않겠사옵니까? 멀고 가까운 거리의 차이는 있을망정, 아버지를 대하고자 하는 심정은 역사와 더불어, 시대와 더불어, 미래와 더불어 움직이는 이념적인 충동인 것을 아옵니다. 오늘 저희들이 세계적인 심정의 기준에서 울지 못할진대 국가적인 심정의 기준에서 울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국가의 기준에서도 울지 못할진대 이 사회와 이 민족과 가정적인 기준에서 울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가정적인 기준에서도 울지 못할진대 내 기준에서라도 울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래야만 하늘 권속의 일원으로서 세워질 수 있다는 것을 저희들이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예수는 불쌍한 분이었습니다. 그는 사탄 대한 싸움의 왕자요, 심판의 왕자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아버님이여, 끝날 심판을 하시어 신랑 신부의 이름을 찾아 세우신 그 다음에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저희들이 알았사오니, 타락이 없는 본연의 에덴동산에서 품고 사랑할 수 있었던 아들딸로 설 수 있는 이념을 저희들에게 주시옵소서.
이런 사실을 알려 주신 것만 해도, 아버지, 감사하옵니다. 남이 모르는 가운데 이런 심정을 그리워하고, 남이 흘리지 않는 눈물을 먼저 흘릴 수 있으며, 남이 생각하지 않는 일을 먼저 생각할 수 있는 자리에 세워 주셨으니, 그 자리에는 못 갔을망정 이 어이 감사하지 않겠사옵니까?
저희의 마음이 아버지 것이요, 저희의 몸이 아버지의 것일진대, 저희들이 사는 나라가 아버지의 것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이 세계가 아버지의 것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 세계는 아버지가 창조하신 피조세계의 한 분야임을 아오니, 아버지의 것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오늘 이들의 몸과 마음이 약동하여 새로운 한 날을 심정적으로 그리워할 수 있고 ‘사탄세계의 고난아 나타나거라. 네 자랑할 것이 무엇이냐? 사망의 실권아 나타나거라, 네가 자랑할 것이 무엇이냐?’ 하며 그들과 이별하고 아버지와 하나되어 환희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한 시간을 이들 앞에 허락하여 주시옵고, 기필코 그날을 맞도록 아버지, 붙들어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아버님의 양자가 아닌 친아들로서 아버지의 영원한 사랑의 품에 안기어서 하늘땅을 유업으로 받은 후, 그것을 다시 하나님의 것으로 돌려드릴 수 있는 기쁨의 자극적인 존재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올 때,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아버님, 이 시간 저희들 아버지 존전에 섰사옵니다. 영광스런 당신 앞에 저희 자신을 드러내었사오니 미비한 것을 폭로시키시어 당신의 빛 가운데 사로잡히는 이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고, 영광의 당신을 대하여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영광스런 은사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인간이 부르는 아버지 가운데는 여러 가지 형태의 아버지가 있겠사오나, 저희들은 심혈이 동하는 마음과 심정에 어리어 ‘아버지!’ 하고 부를 수 있기를 원하옵니다. 저희들은 어떤 이름을 부르기보다도 앞서 심정의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의 이름을 부를 줄 아는 자들이 되기를 바라나이다. 그런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늘이 생겨나고 땅이 생겨나고 인간이 생겨난 이래 그 하늘과 땅과 인간을 대신해서 하나님께서 사랑하고 싶으신 진정한 아들딸이 없었던 것을 저희들은 알았사옵니다.
본연의 만물과 즐기고 화동하여 화할 수 있는 주인공이었던 아담 해와는 본연의 참사람이요, 인류의 참부모였사옵니다. 그런 아들딸이 아버지의 손을 쓰다듬어 주고 얼굴을 만져 주는 한 시간을 얼마나 그리워하셨사옵니까?
아버님께서는 저희의 손을 지극히 거룩하게 지으셨사옵고, 저희의 몸을 지극히 선하게 지으셨사오나, 한스러운 타락의 근성이 저희를 사로잡은 그 날부터 저희의 손은 사탄으로 말미암아 상처를 입고 있사옵니다. 저희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고 있사옵나이다. 역사적인 선조들의 부족함 때문에 온몸에 한스러운 상처를 입고 있사오니, 아버님, 이러한 것들을 품으시고 본연의 참사랑을 그리시는 아버지 앞에 비록 보여드릴 수 없는 불충한 모습이라 할지라도, 저희를 그리워하며 찾아오시는 아버지의 애달픈 심정을 염려하고 대성통곡할 줄 아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상처를 입지 않았던 본연의 손을 그리워하고 상처를 입지 않았던 본연의 몸을 그리워하고 죄에 물들지 않았던 본래의 마음을 그리워하며, 사탄과 인연되지 않았던 본연의 심정을 그리워할 줄 아는 저희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께서 지으신 그대로의 참다운 사람이 이 땅 위에 없사옵니다. 아버님, 얼마나 원통하시옵니까? 상처입은 저희들을 보시고 서러워하시는 아버님 앞에 몸 둘 곳을 몰라 하는 자식들이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이 시간 저희들이 깨달을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여기에 모인 저희들은 심정으로 우러나는 본연의 사람을 보기 위하여 나왔사옵고, 심정 가운데 피어오르는 당신의 심정이 그리워서 왔사오니, 그러한 목적을 찾을 수 있는 이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 황공하옵나이다. 어린것들을 세우시고 염려하시며 외로운 길을 개척하시기에 얼마나 수고하셨사옵니까? 아버지, 이 날도 이와 같은 일을 계속하시는 아버지의 사정을 알고 통곡치 않으면 안 될 입장에 있는 것이 항공하옵나이다.
아버님, 저희들이 과거에 충성하지 못한 것을 뉘우치게 하여 주시옵고, 아버님 앞에 설 수 없는 흠이 많은 자신임을 통탄하고 이 한 시간 새로운 심정으로 아버지 품에 안길 수 있게 하여 주시옵고, 아버지께서 그리워하시는 소원의 한 모습으로 설 수 없는 자신임을 마음으로라도 슬퍼할 줄 아는 아들딸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시간 수많은 사람들이 당신의 성호(聖號)를 찬송하고 있사오며, 당신의 아들딸들이 외로운 자리에서 눈물을 뿌리며 외로운 형제를 생각하고 염려하며 호소하고 있사오니, 그들을 같은 사랑으로 품어 주시옵고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제가 무슨 말씀을 전하오리까? 이미 말씀도 많이 하였사옵니다. 이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나 알기만 하는 자가 되지 말고 아는 것을 지나 화(和)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옵고, 일체의 정(情)에 잠기어서 아버지의 사랑 가운데서 아버지께서 지으신 만물을 품고 영원히 송영드릴 수 있는 승리의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의 마음과 받는 자의 마음이 온전히 하나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탄은 간격이 있는 자리에서 운행한다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지금까지 갖고 있던 일체의 주의 주장과, 알고 있는 지식의 일체를 아버지 앞에 다 내어 놓고 본연의 심정으로 돌아가, 하늘의 움직임에 화하고 아버지의 명령대로 움직여서, 본연의 성체(聖體)를 기준 삼아 다시 빚어질 수 있는 이 한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나이다.
모든 것을 아버지의 장중(掌中)에 쥐시옵고 사탄이 틈타지 말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성삼위신이 승리의 방패로서 영광의 터전을 갖추어 주시옵기를 부탁드리며,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니다. 아멘.
<말 씀> 오늘은 ‘하늘은 심정으로 모시는 자의 것’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천국이라는 곳은 심정을 통하지 않고는 갈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고 있을 것입니다. 천국은 전체를 주관할 수 있는 본연의 나라요, 본성의 나라라는 것입니다. 그 나라는 어떠한 사정을 가지고는 소유할 수 없습니다. 깊이 스며드는 심정의 인연을 갖추어야만 소유할 수 있는 나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는 궁극적으로 사정을 통하는 교회가 아니요 심정을 통하는 교회입니다. 사정의 인연을 넘어서 심정을 노래할 수 있는 기반을 닦는 데에 땅을 대하여 섭리하시는 하늘의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타락이 무엇이뇨? 하나님의 사정을 논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심정을 논하지 못하는 것이 타락입니다. 타락한 인간을 찾아오시는 하나님은 잃어버린 아들딸을 대할 수 있는 심정은 갖고 있으되 그 심정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없기에 그 사람들을 찾아 세우는 역사를 하시는데, 그것이 구원역사요, 그 사람들을 찾아 세우기 위하여 보내심을 입은 자가 구주라는 것을 여러분은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천국을 소망하기 전에 하나님의 심정을 바라야 되겠고, 또 하나님의 심정을 바라기 전에 내 한 자신은 어떻게 살아 나가야 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 자신은 먼저 모시는 심정을 갖지 않으면 안 됩니다. 높고 귀한 것을 대하여는 머리를 숙이고 그리워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우리 인간은 타락했을망정 높고 귀한 하늘의 심정을 대하여 모시고 싶어하는 것이 우리 지음 받은 인간의 본연의 심정입니다. 그런 고로 심정을 통할 수 있는 모심의 생활을 해보지 못한 자는 천국과 하등의 인연이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모시기 위해서는 모실 수 있는 준비가 필요합니다. 그 준비의 과정을 거친 후에는 모시는 생활이 필요합니다. 모시기 위한 준비의 과정을 거치고 모심의 생활을 거친 후에야 가는 곳이 천국입니다. 심정으로 모셨던 자가 가는 곳이 천국이에요. 모실 수 있는 준비와 모시는 생활을 찬양하며 높이 드러내는 세계가 천국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들은 이러한 목적의 세계를 향하여 가는 과정을 거쳐야 할 운명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타락의 혈통을 받고 난 그날부터 오늘날까지 전세계 인류가 심정을 다하여 하늘을 모셨던 한 날이 있는가? 없습니다. 타락하지 않았던 우리 조상 아담 해와는 창조이념을 통하여 자랐으되, 심정의 인연을 세워 놓고 하나님을 모셔본 시간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한이 무엇인가? 심정을 중심삼고 하나님을 모셔야 할 인간이 모실 수 없는 자리에 떨어진 것이요, 심정을 중심삼고 모심을 받아야 할 하나님께서 모심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믿는 자가 없는 것이 한이 아니요, 하나님을 아는 자가 없는 것이 한이 아닙니다. 심정을 통하여 하나님을 모시고 심정을 통하여 하나님을 대할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것이 하늘과 땅의 한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타락한 인간들은 찾아 나아가고 있습니다. 무엇을 찾아 나아가고 있느뇨? 하늘을 찾아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무친 기쁨을 느끼어 이곳이 내가 영원히 살 수 있는 하늘이요, 내 심정이 영원히 머물 수 있는 땅이요, 나의 생활 무대라고 자랑할 수 있는 하늘과 땅을 찾은 사람이 역사 노정에 있습니까?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구세주 예수도 이 땅 위에 오셔서 심정을 통할 수 있는 환경에서 하나님을 모셔보지 못했습니다. 모든 만물은 하나님의 아들딸들이 심정의 기쁨을 느끼며 화하여 들어가는 자리에서 주인과 더불어 심정의 인연을 갖추기 위하여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그런 자리에서 인연을 맺지 못했습니다. 그러한 이 땅 위에 심정을 통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하여 오셨던 메시아도 심정의 터전을 갖추어 놓고 하늘을 모시는 생활을 해보지 못하고 가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는 말씀하시기를 자신은 신랑이요 우리를 대해서는 신부라 하였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아버지요 우리는 자녀라 하였습니다. 심정의 인연의 터전은 무엇인가? 부자의 인연이요 부부의 인연입니다. 또 이것을 기반으로 해서 맺어지는 형제의 인연, 동포의 인연입니다. 이렇게 벌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천지만물을 지으신 하나님 앞에 세계 인류는 어떠한 존재를 내세워야 될 것인가? 복귀섭리를 해 나오시는 하나님은 이 땅 위에 어떠한 사람을 세워야 될 것인가? 심정의 인연을 갖추어 횡적으로는 세계를 통하고 종적으로는 하나님을 통할 수 있고, 횡적으로는 현실을 통하고 종적으로는 과거와 미래를 통할 수 있는 심정의 터전을 이루어 놓고 그 가운데 참다운 아들딸, 참다운 신랑 신부를 세워야 됩니다. 그런 고로 하늘은 심정이 연결된 자리에서 하나님을 모시는 하나의 아들딸, 하나의 가정을 그리워하신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는 끝날이 기쁜 날인 동시에 슬픈 날이 될 것이라고 예고하였습니다. 심정이 통하는 사람은 기쁨의 선물을 받는 날이요, 심정이 통하지 않는 사람은 슬픔의 선물을 받아야 할 날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는 오시는데 신랑으로 오신다고 했습니다. 어린양 잔치는 신랑 신부가 상봉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그 한 날을 위하여 시작하였습니다. 섭리의 뜻을 따르는 신도들 또한 이 한 날을 바라보고 싸워 나오고 있습니다. 섭리의 목적, 섭리의 뜻을 따라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단 하나의 목적은 무엇인가? 신랑 신부의 인연이 이루어지는 그 한때, 하늘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만물 사이에 끊어졌던 인연이 하나님의 심정을 대할 수 있는 아들딸을 중심삼고 다시 맺어지는 그 한 순간을 맞이하기 위함임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모시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누구를 모시기를 바라느뇨? 오시는 주를 모시고, 나아가 그 주가 모시는 아버지를 모시고 살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우리 인류의 소망입니다. 구원이라는 것도 이 기준을 통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기에 지금까지의 역사는 주님을 모시게 될 그 한 날을 위하여 준비하는 역사였습니다. 오시는 주님을 그리워하는 것도 모실 수 있는 내용을 알기 위한 준비요, 그리워하시는 하늘의 뜻을 알아 드리고 그 분과 더불어 생활할 수 있는 그날을 위한 준비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기독교는 지금까지 2천년 동안 준비하여 나왔습니다. 신부로서 모심의 생활을 할 수 있는 준비를 해 나왔습니다. 그러면 준비를 하되 어떠한 준비를 해야 되느뇨? 말씀의 준비도 아니요 믿음의 준비도 아니요 생활의 준비도 아닙니다.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준비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신부를 그리워하며 2천년 동안 찾아오시는 신랑의 심정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나 하나를 신부로 맞이하시기 위한 하늘의 그리움, 나 하나를 세워 신부로 만들기 위한 하늘의 수고와 사무침이 얼마나 컸던가를 여러분, 느껴 보았습니까? 겉보기에는 초췌하고 미미한 존재일지라도 하늘은 사모하고 그리워하신다는 것입니다. 가식이 아니라 진정으로, 형식이 아니라 진정으로, 어떠한 방식이 아닌 진정한 심정을 가지고 우리를 그리워하며 나오신다는 거예요. 그러기에 오늘날까지 섭리역사노정은 그리움의 심정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신랑을 모시기 위한 준비를 하기 전에 하늘은 몇천 번 몇만 번 그 준비를 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준비하기 전에 먼저 하늘이 우리를 위하여 준비하셨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신랑을 맞이하고자 하는 여러분은 사무치는 마음으로 준비하는 자신인지를 스스로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그리운 주님, 심정에 사무치도록 그리운 주님을 모실 수 있는 그 한 날을 위하여 준비하는 우리의 태도, 오늘날 기독교 신자들의 태도는 어떠해야 될 것인가를 여러분은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주님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면 간절할수록, 하늘을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의 심정이 가해 오면 가해 올수록, 여러분은 앞을 바라보고 오시는 주를 맞이하기 위해 소망하기보다는, 뒤를 돌아보고 오시기 위하여 싸우시고 우리를 준비시켜 나오시는 주를 위하여 울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나 하나를 찾아 세우기 위하여 수고하고 허덕여 나오시기를 6천년, 사탄과 싸우시기를 6천년, 흠 없고 선하신 하늘이 흉악한 사탄의 참소를 받기를 6천년, 흠 없고 선하신 그 몸에 사탄의 화살을 맞기를 6천년, 어느 시대 어느 세기에도 하늘이 슬픔을 당하지 않은 날이 없습니다. 이러한 슬픔의 심정을 품고 품어 나오시면서도, 하늘은 아무것도 아닌 우리를 심정에 화할 수 있는 모심의 용사로 세우시기 위하여 찾고 그리워하신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느껴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하늘 앞에 나서기 위해 여러분이 준비한 예물이 무엇입니까? 6천년 동안 섭리해 가지고 남아진 기독교 신자들이 준비한 예물이 무엇입니까? 무엇을 갖추었습니까? 하늘은 고대하고 계십니다. 세상에 어떤 값진 금은보화나 진주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심정, 심정, 심정에 어리어 모든 것을 품고 사랑하며 하늘과 더불어 생활하는 사람을 요구하신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 심정에 어리어 준비하는 자신이 되었다 할진대 여러분의 눈과 귀와 입과 몸은 어떠해야 될 것인가? 심정을 통하여 보고, 심정을 통하여 듣고, 심정을 통하여 말하고, 심정을 통하여 행동해야 할 것입니다. 심정을 통한 인연을 갖고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심정을 통할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주님과 더불어 보면서 모실 수 있는 그 한때, 심정을 통할 수 있는 귀를 가지고 주와 더불어 즐길 수 있는 그 한때, 심정을 통하여 말하고 심정을 통하여 행동하면서 살 수 있는 그 한때를 그리워하며 하늘은 6천년 동안 찾아 나오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눈과 여러분의 귀와 여러분의 입과 여러분의 몸이 하늘과 심정의 인연을 갖고 있습니까? 이 눈은 보되 심정으로 인연되어서 만물을 보아야 되고, 이 귀는 듣되 심정에 인연되어서 부르짖는 음성을 들을 줄 알아야 되고, 이 입은 심정이 통할 수 있는 말을 해야 되고, 이 몸은 심정이 통할 수 있는 생활을 해야 될 터인데, 아직까지 모심의 자리로 넘어가기 전 준비 과정에 있는 우리들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이 갖춘 심정적인 준비는 어느 정도일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늘은 원하고 계십니다. 심정이 통할 수 있는 하나의 손길에 만물이 어루만져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심정이 통할 수 있는 자녀로 말미암아 모든 아들딸이 안겨지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심정이 통할 수 있는 신부들에 의해 하나님의 주권이 이루어지기를 고대하고 계십니다. 심정이 통할 수 있는 아들딸들 앞에 이 세계가 주관되어지기를 고대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생각해 보았습니까? 생각하면 할수록 어마어마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소원이 내 일신만이 아니라 세계와 천주까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에 나는 주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임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 마음도 아버지의 것이요, 내 심정도 아버지의 것이요, 나의 의식과 직관과 감각기관 일체까지도 아버지의 것이요, 내가 느끼고 의식하는 전체가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아버지의 것이라는 관(觀)이 결정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지 않는 한, 심정을 통하여 움직이는 하늘을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것을 생각할 때 여러분, 우리는 그리워해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찾아 헤매야 되겠습니다. 우리들은 이런 사실을 알고 전력을 다하여 하늘의 소원을 이루어드리기 위하여 호소해야 되겠습니다. 죽음의 길이 아무리 무섭다 하더라도 비웃고 넘어설 수 있는 강렬한 심정을 앞놓아 나가며 신념을 갖고 극복해 나갈 줄 아는 자체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사망의 고비를 넘을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서 나왔던고? 그 힘의 중심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단 하나 심정뿐이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4천년 동안 준비해 온 심정의 역사를 인계 받은 예수는 30여 년의 생애 동안 ‘한 많은 4천년 역사야 가거라,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소망의 한 날이여 오라.’고 심중으로 심중으로 부르짖으며 살았습니다. 그는 또한 찾아 헤매었습니다. 4천년 동안 심정을 다하여 준비한 신부를 찾아 헤매었습니다.
이스라엘 선민을 택해 세우신 하늘의 슬픔은 무엇이었던가? 교단이 없는 것이 아니요, 바리새교인과 사두개교인이 없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불쌍한 예수를 위하여 4천년 동안 준비한 신부는 어디 갔는가? 없었습니다. 없었어요. 인류의 역사적인 슬픔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에게는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신부가 없었어요. 땀을 흘려도 그 땀을 닦을 손수건 하나 만들어 줄 신부가 없어서 아무렇게나 만들어진 손수건으로 땀을 닦았고, 입는 옷도 예수가 누구인지 알지도 못하는 사탄세계의 사람들이 지은 옷을 입었으며, 밥을 먹되 사탄세계의 성별되지 않은 부인들이 지어 준 밥을 먹고 살았습니다. 거처할 곳도 없었어요. 원통한 일입니다. 분한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선민을 세워 준비시켰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던고? 메시아, 즉 신랑 되시는 예수가 오시게 될 때, 신부로 세우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그런고로 하나의 손수건도 한술의 밥도 한 벌의 옷도 한 간의 방도 한 그릇의 물도 모두 심정을 통하지 않고는 예수 앞에 나타날 수 없는 것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는 그러한 자리에 한 시간도 있어 보지 못한 채 이 땅 위에서 죽어가셨습니다. 서럽다 할진대 이 이상 서러운 일이 어디에 있으며, 통분한 일이 있다 할진대 이 이상 통분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4천년 역사가 저끄러진 기준이 어디에서부터인가?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예수의 참다운 신부가 없는 데서부터 저끄러진 역사가 벌어졌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나는 한때 이런 기도를 해 봤습니다. ‘저는 예수가 이 땅에 오실 때에 그분을 제가 모시고 사탄세계의 어느 누구도 걷지 않은 길을 걷고 싶습니다.’ 하는 기도를 했어요. 사탄세계 사람들의 손으로 만든 것 말고 심정이 어리어서 씨를 뿌리고 거두어서 만든 옷가지, 심정의 준비를 갖추어서 만든 한 벌의 옷을 이 땅 위의 어느 누가 해주었습니까? 못 해주었어요. 그래가지고 복 받겠어요?
예수가 주라 할진대 4천년 준비시킨 주라 할진대 유대나라의 성전은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성전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 성전은 예수의 것이요, 그 민족 또한 예수의 것이요, 그 백성도 예수의 것입니다. 교회의 무슨 제사장, 서기관 할 것 없이 다 예수의 것이에요. 그런데 그들이 예수의 원수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원통한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여러분이 모시고 있는 예수의 행로에 이러한 곡절이 있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셨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심정의 상대를 그리워하며 한을 남긴 채 하늘땅의 인연을 붙들고 죽어가면서도 기도하던 예수의 마음을 누가 알았던가? 아무도 몰랐습니다. 억울한 곡절을 품은 채 죽음의 고개를 넘어서 부활하였으나 그 곡절을 알아주는 자 없었습니다. 알아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떻게 풀겠어요? 풀려야 풀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인간을 대하여 맺혀진 곡절을 인간이 알아주지 못하니 풀려야 풀 수 없었어요. 그런 심정을 갖고 부활하셨기에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한 예수 앞에 나타나서 ‘주여!’ 하며 붙들려 할 때 ‘만지지 말라.’ 하시며 막으셨습니다.
예수가 그렇게 가신 뒤 2천년이 경과한 오늘까지 그의 사정을 아는 사람이 누구이며, 변화산상에서의 그의 심정을 아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여러분, 참목자와 거짓목자를 무엇으로 판별하겠습니까? 심정이 사무쳐 하늘의 심정을 꿰뚫고, 심정이 사무쳐 천륜의 심정을 꿰뚫을 수 있는 내용을 갖지 않은 자는 참목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분산되어 싸우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점점 희미해져 가고 있습니다. 왜 그러는가? 심정이 희미해진 연고입니다. 사람이 못나고 시시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잘났든 못났든 유식하고 무식하고를 막론하고 갖추어야 할 바의 심정을 갖추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주님은 심정의 행로를 걸어가셨고 이제 오실 때에도 심정의 행로를 따라 걸어오신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오시는 주를 모시기 위한 준비과정에서 6천년 동안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수많은 인류는 무슨 길을 닦아야 되는가? 아무리 억천만금을 쌓아 놓아도 하늘은 그것을 가질 수 없습니다. 아무리 호화찬란한 문화를 이루어 놓았다 할지라도 하늘은 그것을 그대로 취하실 수 없습니다. 인간들이 어떤 금력을 갖추어서 ‘그것이 하늘 것이다.’ 해도 하늘은 그것을 취하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늘은 무엇부터 갖고자 하시는가? 하늘은 어떠한 물건부터 가지려 하지 않으십니다. 하늘이 갖고자 하시는 것은 심정입니다. 심정이 주도적인 권한이요, 심판의 기준이요, 생명의 원천이라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하늘은 무엇을 찾기 위하여 찾아 헤매시고 허덕여 나오시는가? 돈을 찾기 위하여? 사람을 찾기 위하여? 천만의 말씀입니다. 준비된 심정의 소유자를 찾기 위하여, 심정을 통하여 모시기 위한 준비를 하는 자를 찾기 위하여 하늘은 6천년 동안 허덕여 나오신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신부가 뭐예요? 신부는 신랑을 위하여, 신랑이 생각하는 일체를 구비한 하나의 완전한 대상으로 나타날 수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 신부는 실체로서의 몸과 마음이 있어야 되고 거기에 대응하는 환경이 마련돼 있어야 합니다. 그런 고로 신부는 자기에게 속한 것도 자기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자기 것이로되 마음대로 처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그러한 노정에 있는 기독교의 사상은 신랑 신부의 사상을 말해 줍니다. 신랑을 모시기 위해 준비하는 처녀와 같이, 있는 정성을 다하고 또 그 몸에 사무친 정열이 피와 더불어 끓어오를 때에 비로소 그의 신부가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첫 번째요 마지막 것으로서 품어질 수 있는 자리를 찾아 나아가는 것이 신부가 가는 길입니다.
그 심정 앞에는 신부의 모든 것이 지배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심정을 내놓고 나아가는 데는 자기의 소유도 자기 것이 아닙니다. 그 자리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자기가 존중히 여기고 자기가 귀하게 여기는 만큼 준비를 해야 합니다. 한때, 한시간이라도 그 분을 모시기 위하여 만반의 준비가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날 믿고 있는 전세계 기독교인은 각성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심정을 통하여 모시기 위한 준비 과정에 있는 신부들로서 유대교인들은 무엇을 준비했던고? 만일 예수님 당시에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이러한 심정을 알아 준비한 자가 있었다면, 예수를 말구유에 누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알고 보니 분하고 원통한 일입니다. 구세주가 30평생의 목수 생활이 웬 말입니까? 하늘의 아들이라고 증거하던 동방박사는 어디 가고, 세례 요한 가정은 어디 갔으며, 안나는 어디 가고, 마리아와 요셉은 어디 갔기에, 하늘의 아들 예수가 거지 중의 왕거지가 되었단 말입니까? 그 한 분을 위하여, 그 한 분의 안식처를 위하여, 그 한 분의 평화를 위하여 피를 흘리는 자리에 나가는 한이 있다 해도 그것을 책임지도록 그들을 택해 세워놓고 아들을 보내셨으나 어느 누구도 그러한 하늘의 뜻을 이행하지 못했습니다. 증거는 해 놓고 다 자기 멋대로 가 버렸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하던 바가 아니었습니다.
만일에 동방박사가 예수님을 모셨더라면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당신은 귀한 몸이니 당신의 생활적인 것 일체를 내가 책임지겠나이다, 땅 위의 슬픈 모든 것은 내가 책임지겠나이다, 돈이 없어 염려되면 그것을 내가 책임지겠고, 입을 것이 없어 염려되면 그것도 내가 책임지겠고,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내가 책임지겠나이다.’ 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없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도 예수를 의심했고 예수의 동생들도 비웃었습니다. 형님을 보고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라고 하며 동생들까지 비웃었던 것입니다.(요 7:3-5) 이게 웬 말입니까?
여기에 모인 여러분, 우리는 예수시대를 생각하며 울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니 예수를 땅에 보내기 전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리며 수고하신 하나님을 생각하며 울어야 되겠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타락하는 아담 해와를 바라보시면서도 그 고통을 참으시던 하나님, 타락하는 아담 해와를 바라보시고 안타까워하시던 하나님의 심정을 생각하며 울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계를 창조하시느라 수고하시던 시대로부터 아담 해와가 타락한 이후 4천년 동안 슬픈 고비 고비, 예수님의 30여 평생의 슬픈 고비 고비, 예수님 이후 성신이 강림하여 가야 했던 2천년간의 슬픈 고비 고비를 대신하여 눈물지으면서 ‘선조들의 불충을 용납하여 주시옵고, 선조들의 부족함을 용납하여 주시옵고, 선조들의 죄악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라고 할 수 있는 모습, ‘우리 선조들은 오신 분을 그렇게 대접하였지만 저는 절대 그렇게 대접하지 않겠나이다.’ 하며 먹을 것을 먹지 않고 입을 것을 입지 않으면서 자기 일신의 어떠한 손해와 피해를 개의치 않고 허덕이는 하나의 모습, 하나의 무리가 땅 위에 나타나기를 나는 바라고 있습니다.
이러한 자가 있다 할진대 하나님이 붙들고 통곡하실 것입니다. 예수도 붙들고 통곡할 것입니다. 성신도 붙들고 통곡할 것입니다. 삼위신(三位神)은 물론이거니와 지금까지 왔다 갔던 역대의 선지선열들도 그를 붙들고 통곡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땅 위에 눈물로 증거받을 수 있는 자가 있는가?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이 눈물로써 증거할 수 있는 하늘의 심정을 대신한 모습을 갖춘 자가 있는가? 하나님이, 예수가, 혹은 성신이 심정의 준비를 갖춘 자라고 눈물로써 증거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역사적인 선조들이 ‘우리들도 하지 못한 일을 그대들이 해 주었다.’ 하며 눈물지을 만큼 준비한 사람이 있는가? 없다 할진대 망해야 됩니다. 망해야 돼요. 기필코 망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역사를 지배하는 것은 어떠한 문화가 아닙니다. 어떠한 사상도 아닙니다. 사상을 움직이시는 하늘과 더불어 움직일 수 있는 심정의 기준이 서지 않는 한, 역사는 방향을 갖추어 나갈 수 없습니다. 인간들은 이것을 몰랐습니다.
최후에 인류 앞에 남아질 것은 어떠한 문명도 아니요, 어떤 형식적인 종교 단체도 아니요, 자기의 주관적인 어떤 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심정을 통할 수 있는 것만이 남아지는 것입니다.
심정이란 만우주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이론에 앞서 그러한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인격의 주인공이 이 땅 위에 나와야 이 땅은 수습될 것입니다. 그런 사명자로 오시는 분이 재림주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어느 한때 눈물어린 심정으로 손수건 하나라도 만들어 봤습니까? 여기 있는 부인들, 만들어 보았어요? 바늘을 잡고는 ‘이 바늘이 진정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성도의 손길을 거쳤으면 좋겠구나. 원통하다.’ 하며 ‘아버지여, 저에게 바늘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이 있다면 저의 손으로 정성어린 바늘을 만들어서 손수건을 지었으면 좋겠사오나 그렇지 못하오니 만들어진 바늘로 심정을 다하여 손수건을 만들겠사옵니다. 받아 주시옵소서.’ 하고 그 바늘귀에 실을 꿰어서 한 폭의 천에 한 땀 한 땀 떠갈 때, 심정이 어린 가운데 ‘이 바늘의 움직임에 역사적인 부인들의 원한이 풀어지게 해 주시옵고, 신랑 되신 예수의 그리움이 해원되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해봤어요?
세상에서 백 년도 같이 못 사는 자기 신랑을 위해서는 별 일을 다 했을 것입니다. 별의별 일을 다 해봤을 거예요. 사랑하니 뭐 어쩌니 하면서 말입니다. 웃을 일이 아닙니다. 그러면 신부로서 준비하는 자는 어떤 자입니까? 그가 처해 있는 환경은 비록 제한된 환경이요 그 몸은 비록 한 개체라 할지라도, 그가 머물러 있는 환경은 세계가 연하여 있고 하늘땅이 연하여 있으며, 그가 서 있는 곳은 하나님을 대신한 자리이며 예수를 대신한 자리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런 심정에 어리어 ‘주가 오실 때에 저는 드릴 것이 없사옵니다. 가진 물질이 없사옵니다. 준비한 아무것도 없는 이 불초한 몸은 심정에 어린 이 한 조각의 손수건이라도 주 되신 신랑 앞에 드리고 싶사옵니다.’라고 한다면, 하늘은 하늘땅의 좋다는 것을 다 갖다 주는 것보다 더 기뻐하신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사람을 하늘은 찾고 계십니다.
신부는 어떠한 신부여야 하는가? 호화찬란한 주의 영광을 바라는 신부가 아니요, 주로 말미암아 천국 가겠다는 신부도 아니요, ‘내가 지옥에서 선의 발판이 될 터이니 나를 발판삼아 이 땅에서 천국의 심정을 갖고 사시옵소서.’ 하는 신부, 그리한 신부가 필요합니다. 이렇게 볼 때 전세계 기독교인들은 지옥 가야 됩니다. 천당은 무슨 천당, 지옥에 가야 된다는 거예요.
여러분들, 우리는 예물을 바쳐야 되겠습니다. 마구간에서 탄생하신 처참한 예수 앞에도 점장이었던 동방박사 세 사람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거늘, 여러분은 오시는 신랑 앞에 드릴 무슨 예물을 갖추었습니까? ‘아버지여! 저에게는 아무것도 없사옵니다. 드리고 싶은 마음 간절하오나, 바치고 싶은 마음 간절하오나 아무것도 없사옵니다. 하오니 제가 먹는 한술의 밥이라도 제가 먹기 전에 먼저 드시옵소서. 한 벌의 초라한 옷이라도 제가 입기 전에 먼저 입으시옵소서. 움막집일망정 제가 거하기 전에 먼저 거하시옵소서.’라고 할 수 있는 심정만을 하늘은 필요로 하십니다. 그러한 심정으로 바라보는 물질은 억천만금의 가치를 대신할 수 있고, 그 심정으로 그리워하는 세계는 본연의 세계를 대신할 수 있고, 그 심정으로 그리워할 때 주님은 그 자리에 나타나실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나는 지금까지 수십년 동안 예수를 믿었으니 남들이 다 지옥 가도 나는 응당히 천당 가고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자처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있다면, 그러기 전에 그는 먼저 슬퍼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심정을 모른 것을 슬퍼해야 됩니다. 심정을 통하여야만 모실 수 있는 주님이 이 땅 위에 오신다 해도 그 주님이 머무를 수 있는 환경을 갖추지 못한 것을 슬퍼해야 됩니다. 주님 앞에 드릴 하나의 물질을 갖지 못한 것을 슬퍼해야 됩니다. 보이는 만상 전체가 슬픔의 상징물이 되어 바라보고 슬퍼하지 않을 물건이 없는 것이로되, 우리는 그런 입장에 있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염려하는 마음이 앞놓아간다 할진대 주는 그것을 바라보시고 그 심정 앞에 세계를 잃어버리고 땅을 잃어버리는 한이 있다 할지라도, 너만은 잃을 수 없다고 하시며 찾아 주신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 사람은 하늘이 뒤집어진다 할지라도 너만은 사탄세계에 둘 수 없다 하시며 찾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주의 재림이 2천년이나 연장 된 것은 역사노정에 그런 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마음으로 울어야 되겠습니다. 심정으로 울어야 되겠습니다. 뒤를 돌아보아도 눈물이요, 앞을 보아도 눈물이요, 좌우를 바라보아도 눈물이요, 상하를 바라보아도 눈물입니다. 죄 된 자신을 위하여 수고하신 하나님을 생각하며 자기가 몸 안에 있는지 몸 밖에 있는지 모를 정도로 자기의 존재의식을 잊어버린 자리에서 먹는 것을 잊고, 입는 것도 잊고, 위신과 처지를 잊어버리고 하늘 앞에 황공히 엎드려 통곡하는 시간이 있어야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신부의 노정에 들어서는 첫 단계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마음에 사무치고 그러한 심정에 어우러져 신앙의 충격을 받지 못하는 자는 오시는 주님과 하등의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돌아보고 눈물지을 수 있는 길을 가야 되겠습니다. 이 땅의 구주요 하늘의 황태자이신 예수, 만왕의 왕 되시는 예수는 이 땅 위에 오셔서 그러한 길을 가셨습니다. 4천년 동안 준비한 신부의 터전은 어디 갔던고? 신부와 더불어 행복의 노래를 부르며 만우주를 화동(和動)시켜 하늘의 영광을 노래하여야 할 예수가 고통스러운 십자가를 지고 죽어가는 것을 보고 한탄하던 하늘의 억울함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는 그 길을 가면서 먹을 것을 먹지 못하고 입을 것을 입지 못하였으며, 의붓자식으로서 형제로부터도 경칭을 받지 못하고, 이웃 친척에게까지도 손가락질을 받았습니다. 감정이 같았고 좋은 생활환경을 그리워하는 심정은 같았기 때문에 그의 슬픔은 누구보다 컸고 고통 또한 누구보다 많이 느꼈습니다. 교회로부터 몰리고 제사장들로부터 몰림을 받은 예수가 감람산 기슭을 거닐 적마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렇듯 초초한 예수였음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30평생의 생애노정을 걸으시던 예수의 초초한 모습에 비하면 여러분의 환경은 너무나 훌륭합니다. 여러분은 너무나 많은 것이 갖추어져 있어요. 여러분은 억울하면 그 억울함을 표시할 수 있고 기쁘면 그 기쁨을 그대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식과 외식을 모르던 예수는 분한 일이 있어도 그 분함을 토로하지 못하고 억울한 사정을 한 번도 표시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슬픔 중의 슬픔이었습니다. 어느 한 때 기쁜 표정을 해 보았느냐? 못해 봤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밥을 먹을 때도 신랑 대신 먹어야 됩니다. 부모가 사랑하는 자식을 타지(他地)에 보내 놓고 한술의 밥을 먹기 전에 먼저 자식을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러분은 한술의 밥을 놓고도 ‘주여, 이러한 식탁을 대해 보셨습니까?’ 할 수 있고, 한벌의 옷을 입을 때에도 ‘주여, 이런 옷을 입어 보셨습니까?’할 수 있으며, 어떤 즐거운 자리를 갖게 될 때에도 ‘주여, 이런 자리를 가져 보셨습니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모시려는 신랑은 그런 환경을 가져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신부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주님의 생활적인 감정에 화하여 두터운 심정의 인연을 가질 각오를 해야 됩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런 사람 앞에는 어떤 지도자가 필요 없습니다. 어떠한 목자가 필요 없습니다. 성경도 문제가 아닙니다. 성경은 편지예요. 심정적인 인격자를 기르기 위하여 남겨 놓은 편지라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심정이 기울어지는 자리에서 한 가지 물건을 보고도 주님을 생각하면서 눈물이 어릴 수 있는 마음을 갖고, 그 물건을 쥐기 전에 ‘주여!’, 밥을 먹기 전에도 ‘주여!’, 옷을 입기 전에도 ‘주여!’, 자리에 눕기 전에도 ‘주여!’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신부가 있다 할진대 신랑은 그 신부를 찾아 줄 것입니다.
천국은 어떤 곳이냐? 준비한 것을 가지고 자랑하는 곳이요, 모시는 생활을 한 것을 자랑하는 곳입니다. 그러면 그 천국은 어떠한 자가 가는 곳인가? 주를 믿고 복받기 위하여 복을 앞세워 나가는 자가 가는 곳이냐? 아니에요. 천국은 모시기 위하여 심정적으로 준비하는 생활을 한 자들이 가는 곳입니다. 준비하는 기간에 죽는다 해도 모심의 생활을 남기고 기쁘게 갈 수 있는 자가 가는 곳이에요. 거기에 부활이 있는 것입니다.
모시기 위한 준비를 한 후에는 모심의 생활을 해야 됩니다. 준비하는 목적은 모시기 위한 것입니다. 모심의 생활을 하기 위함입니다. 모심의 생활은 어떻게 할 것인가? 여러분 환경을 더듬어 살펴보십시오. 생활의 내막은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어떻게 생활할 것이냐 하는 것이 이제 우리들이 모시는 생활 가운데 생각해야 할 중대한 문제입니다.
주를 대할 때는 이렇게 대해야겠다 하는 준비를 해야 됩니다. 주를 모시는 준비의 생활을 해야 돼요. 모시는 데는 저 천상에 가서 모시는 것이 아니라 이 땅 위에서 모시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주님 모셔 보았어요? 주님의 얼굴은 어떠하며, 주님의 몸은 어떠하며, 주님의 코는 어떠하며, 주님의 웃으시는 눈은 어떠하며, 주님의 음성은 어떠하며, 말씀하시는 주님의 입은 어떠하며, 주님의 손과 모든 태도는 어떠한지 아세요?
심정이 앞놓아 가는 곳에는 사람을 끌어들일 수 있는 조화의 법도가 있는 것입니다. 자식을 그리워하는 부모의 심정은 거리와 공간을 초월하여 자식의 처지가 어떻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연 현상인데 초자연적으로 일어나요. 심정에 사무치면 그렇게 돼요. 그러한 심정은 우주를 포괄하고도 남습니다. 그러한 심정으로는 예수도 끌어올 수 있어요. 그런 심정에 사무치게 되면 관계가 없는 주님 같지만 관계되어 있는 형태로 나타나고, 인연이 없는 것 같은 주님이 인연을 갖추고 나타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주를 만나게 될 때에 주가 어떻게 할 것인지 알 수 있지 않겠어요? 그러니 준비하고 갖추어서 모심의 생활은 이렇게 저렇게 한다는 것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신랑이 신부를 찾아 나오기 위한 편지체로 쓰인 성경 말씀에는 암호가 많습니다. 왜 암호로 말씀했는가? 심정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누구나 다 풀지 못합니다. 못 풀어요. 신랑 신부만이 풀 수 있습니다. 심정을 통하여 모실 수 있는 준비를 한 자만이 풀 수 있지, 그렇지 않은 사람은 못 풀게 돼 있어요. 여기에 있는 암호의 정체가 무엇이뇨? 신랑이 올 수 있는 문을 여는 비결인데, 그 비결은 무엇인가? 심정입니다. 부모의 심정은 어린 아기를 품고 젖을 먹일 때나 그 자식의 머리가 세어서 백발이 되었을 때나 같습니다. 그 심정에는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들은 성경에 숨어 있는 모든 심정의 근원을 파헤쳐야 되겠습니다. 알아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데는 학박사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암만 해석해도 학설은 지나가고 지나갑니다. 심정은 논리로써 지배할 수 없습니다. 이론으로도 체휼할 수 없어요. 체계로써 방향을 잡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심정은 천륜과 더불어 자연과 더불어 흘러나가는 것입니다.
성경이란 배우지 않고도 알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심정의 흐름과 느낌을 갖고 해석하기 전에는 알 수 없습니다. 학박사가 주장하는 현대의 신학 사조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심정의 세계는 지나가는 법이 없습니다. 이것을 왈 알파와 오메가, 즉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합니다.
심정에는 지나갈 수 있는 조건이 없다는 것입니다. 심정이 있는 곳은 주님도 지나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도 지나갈 수 없습니다. 성신도 지나갈 수 없어요. 역사적인 철인(哲人)도 지나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심정적 인연을 갖춘 민족일수록 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망하지 않는 거예요. 민족 정신이 나라를 위하는 심정의 선(線)에 가까이 스며들어갈수록 그 나라는 망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분립되고 분산되는 때에는 천륜이 지나가니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일편단심의 동기가 되는 것은 심정입니다. 일편단심, 그것은 결과입니다. 일편단심이란 명사를 세우기 전에 심정, 이 심정을 지닌 자라 할진대 그는 하늘과 떨어진 지상에 있을망정 천국에 있는 것입니다. 불행한 자리에 처하여 있을망정 행복한 자리에 있는 것임을 여러분이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이런 심정을 갖추어가는 과정에 있다 할진대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여러분이 아브라함 앞에 나타날 때 아브라함아, 너는 이러이러 했구나 할 수 있는 자격자가 되어야 합니다. 본인은 저나라의 아브라함에게 직접 명령도 합니다. 모세에게 명령도 합니다. 12사도에게 명령도 합니다. 심정세계에서 반응된다 할진대 지금부터 4천년 전의 아브라함을 그 심정 세계에 몰아넣고 명령할 수 있습니다. 모세도 그렇고 사도들 역시 마찬가지라는 거예요.
사도가 아무리 훌륭하다 해도 그들은 심부름꾼입니다. 사도를 대하여 신부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와 신부, 누가 더 높은가? 신부가 높습니다. 사도가 신부 앞에 머리를 숙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역사상의 사도 바울! 물론 훌륭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그 사도 바울에게까지도 ‘오냐!’ 할 수 있는 신부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하나의 인격자가 나와야 됩니다. 땅 위에서 과거에 왔다갔던 사람들을 대하여 명령할 수 있고, 땅 위에서 심정의 인연을 가진 자를 지배할 수 있고, 미래에 심정의 인연을 세울 수 있는 자격자라면 당당히 신부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지상에서 이러한 크리스천, 이러한 하나님의 아들딸을 만나야 되겠습니다.
아브라함의 심정을 말하면 아브라함의 심정을 느낄 수 있고, 모세의 심정을 말하면 모세의 심정을 알 수 있고, 예수의 심정을 말하면 예수의 심정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의 심정을 말하면 시대적인 하나님의 심정을 반영하여 느낄 줄 아는 하나의 모습이 이 땅 위에 나타나지 않는 한, 주님의 재림은 불가능합니다. 불가능해요.
주님이 이 땅에 오시는 목적은 무엇인가? 지상에 천국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천국은 어떠한 곳인가? 모시기 위한 준비에 합격한 자와 모시는 생활에 합격한 자가 가는 곳이거늘, 모심을 위한 준비와 모심의 생활을 만우주에 영원히 자랑할 수 있는 세계가 천국입니다.
천국 가서는 무엇을 하는지 알아요? 그저 놀고 다니는 곳인 줄 알아요. 천만에요. 놀고 다니려면 놀고 다닐 수 있는 과거의 준비적 조건과 생활적인 조건이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이건 뭐 아무것도 안 하고 복 달라고 기도만 합니다. 신령한 사람들이 가다가 힘들어하는 주된 원인이 거기에 있습니다. 아무리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 사람도 7년을 넘기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무조건 복달라고 하는 게 참된 신앙이 아니에요.
여러분이 그러한 자리에 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오늘날 이 땅 위에 있는 27억 인류는 6천년 동안 내려온 아담의 후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는 이 27억의 인류를 붙들고 통곡할 수 있는 마음의 기준이 잡혀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은 그 세계와 절대 인연 지을 수 없습니다.
불쌍한 거지를 보고 가슴이 아파 견디지 못하고, 옷을 입지 못한 사람을 보면 자기가 잘 입고는 못 견디고, 못 먹는 것을 보면 자기도 못 먹고, 자기 일신은 어떤 편한 자리에 있을 수 없는 마음을 여러분은 가져야 합니다.
현재 인류의 심정은 6천년 역사의 반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대적인 의분을 품고 마음을 앞놓아 통곡하는 생활 과정을 거친 자만이 역사적인 심정을 대할 수 있는 동기를 찾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자세히 안 나타나 있지만 예수는 이스라엘 민족을 보고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불쌍한 이스라엘 민족, 그 중에서도 고통을 받고 있는 이들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그것을 조건으로 하여 세계 만민까지 불쌍히 여기신 예수였습니다. 하늘은 그런 자를 세워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모세도 원수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보다 사탄권 내에 있는 이스라엘 민족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강했기 때문에 원수 앞에 맞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을 편들어 애급인을 쳐 죽였던 것입니다. 미워서 때린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사랑하는 마음이 앞섰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사랑하는 마음이 애급을 미워하는 마음보다 앞선 기준에서 쳤기 때문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하늘을 사랑하는 마음이 앞서서 어떤 행동을 한다 할진대 하늘은 그것을 죄로 정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을 죽였다 해도 심정을 앞세웠다면 그것은 천법에 걸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탄도 참소할 수 없어요.
애급에서 가나안 복지로의 복귀노정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40년 유리고객(流離孤客)하다가 남아진 무리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될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가나안 7족을 다 죽이라 하셨습니다. 소탕하라 하셨어요. 그런 하나님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모시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여 하나님 앞에 나가는 길을 막고 반대하는 무리를 들이쳤으면 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심판할 수 있는 자격자는 그러한 자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자를 고대하십니다.
끝날이 온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지금을 끝날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끝날에 남아질 수 있는 무리, 심판할 수 있는 무리는 어떤 무리이뇨? 당연히 심정의 주인공입니다.
하늘의 원수요, 6천년 우리의 선조들을 유린해 온 사탄, 그들을 대해 하나님은 얼마나 분하고 얼마나 억울하셨겠습니까? 복받쳐 오르는 사무친 심정을 중심삼고, ‘용서할 수 없다.’ 하며 칠 때에 사탄도 ‘옳소이다.’ 합니다. 그런 심정을 갖지 못한 자는 공의의 법도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우리가 몰림의 자리에서도 붙들고 가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가정에서 핍박을 받고, 형제에게 몰림을 당하고, 나라에서 쫓김을 받더라도 잊지 말아야 할 하나는 심정입니다. 역사가 몰라봤던 심정, 시대가 몰라봤던 심정, 땅이 몰라봤던 심정이 하늘의 심정인 것입니다. 그 심정이 세워지는 날 하늘과 세상은 갈라질 것입니다. 그 심정을 붙들고 기뻐하는 날 세상에 슬픔과 고통은 끝날 것입니다. 그 심정을 붙들고 ‘아버지여! 아들아!’ 할 수 있는 날, 그 심정을 붙들고 ‘신랑이여! 신부여!’ 할 수 있는 그날엔 세상에 천국 문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영생복락의 세계가 건설된다는 것을 우리는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천국이라는 곳은 심정을 통하여 모시는 자들이 들어가는 곳이요, 심정을 중심삼은 모심의 생활을 통하여 사탄을 치고 넘어서는 자가 들어가는 곳이라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말씀을 듣고 나니 눈이 물커지도록 울 수 있는 마음이 그립사옵니다. 하늘은 자기의 의식과 감정을 잊어버리고, 또 바울처럼 몸 안에 있는지 몸 밖에 있는지 모른 채 자기의 위치를 잊어버린 자리에서 역사를 붙들고 시대를 붙들고 통곡할 수 있는 애절한 자를 찾고 계신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3천만 민족을 지배할 자는 호화찬란한 고래등같은 집에서 향락하는 사람, 자기의 명망과 권세를 자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밟히는 자의 눈물의 친구, 억울한 자의 눈물의 친구, 원통한 자의 눈물의 친구, 형형색색의 환경에서 눈물로 품어 줄 수 있는 친구라야 함을 알게 하여 주시옵고, 그러한 분을 통하여 천지운세나 인류역사는 전환되고 새로운 역사는 인계되어 내려와 하나의 기준에 연결된다는 것을, 아버님, 이 시간 저희들이 새로이 느끼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가 어느 한때 민족을 위하여 울어봤습니까? 어느 한때 형제를 붙들고 통곡하여 봤으며, 더욱이 어느 한때 아버님의 사랑하는 아들딸이 고통 받는 것을 보고 통곡하여 봤습니까? 그럴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세상은 불쌍한 세상이요, 괴로운 세상, 눈물어린 세상이옵니다. 하나님이 눈물을 흘리시거늘 이 땅 위에 사는 저희가 어찌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있겠사오며, 하나님이 눈물의 길을 가고 계시온데 성도가 어찌 안일한 생활을 하겠나이까?
눈물 흘리는 성도, 눈물어린 가슴을 조이며 사는 성도, 그들의 모습에는 무궁한 아버님의 생명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심정과 연결하여 하늘의 무리가 되고 하늘을 위하여 투쟁해야 할 때가 왔다는 것을 저희들이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한 무리가 예루살렘 성전 외로운 다락방에 있었다 할진대 예수는 죽지 않았을 것이요, 그러한 사람이 4천년 동안 준비한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단 한 사람만 있었더라도, 예수는 만민 앞에 몰리지 않고 개인적인 환경에서부터 남모르게 가정적인 기준을 건설할 수 있었을 것이옵니다. 그러나 그러한 무리가 없었기 때문에 가정에서 몰림을 받던 예수가 되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에게 몰리고 형제들에게 몰림을 받던 예수께서 ‘나의 모친과 나의 형제는 아버지의 뜻대로 사는 자’라고 하시던 심정을 감히 알 만하옵나이다.
심정이 상속되는 세계를 향하여 나아가는 저희들, 이제는 주와 더불어 생활하며 느끼고 즐길 수 있는 한 날을 그리워하오니, 약속의 하늘이시여! 사랑의 하늘이시여! 기쁨의 하늘이시여! 이끌어 주시옵소서. 과거에 그러하셨으니 오늘도 그러하실 것을 저희가 아옵나이다.
외로운 길을 걷는 무리들을 그러한 자리로 인도하시는 아버지인 것을 저도 알고 이들도 알고 있사오니, 하늘을 아는 저희들이 아버님을 모시고 하늘을 높이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정성을 다하는 마음,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해도 부족한 마음, 아버님을 사랑하고 사랑해도 부족한 마음으로 몸으로 머리 숙일 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한 아들딸을 하늘은 그리워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고, 또 그러한 인연을 가져야 할 것을 알았사오니, 오늘 여기에 참석한 당신의 아들딸들, 오늘부터 과거의 못된 것을 탄식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고, 갖출 바의 준비를 갖추지 못했다 할지라도, 마음으로 보충할 수 있는 하나의 길이 남아 있으니 그 길을 통하여 천상을 소유할 수 있으며, 주를 모실 수 있으며,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있으며, 아버지의 위업을 상속 받는 늠름한 모습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의 허락의 조건이 될 수 있는 마음을 획득하고, 모든 것을 희생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 마음만은 갖고 나가지 않으면 최후의 고개를 넘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나이다.
이날의 모든 것을 아버지, 받아 주시옵소서. 천국은 심정으로 모시는 자의 것, 심정으로 모셨던 자의 것임을 말씀을 듣고 알았사오니, 역사는 피 어려 있고 시대는 잠들어 있다는 것을 알아, 잠든 시대를 깨우고 역사의 사실을 가려 새로운 생명의 부활을 일으킬 수 있는 전세계 기독교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날의 모든 것을 맡아 주관하여 주심을 감사드리며,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하늘의 명령을 받은 제사장들이 지성소에 들어가 속죄의 분향을 올릴 적마다 하늘은 은밀하게 대해 주신 것을 저희들이 알았습니다. 아버지! 이 시간 이 자리에 모인 저희들은 지성소 앞에 모인 무리와 같다는 것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생애노정에서 더럽혀진 바가 있사올진대, 지성소에서 드리는 제사장의 분향으로 말미암아 속죄의 은사를 받았듯이, 아버지, 저희들도 정성을 다 기울여 성전 혹은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내 개체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느끼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성막의 휘장이 갈라진 그날부터 아버지는 저희들에게 지성소에 들어가 아버지 앞에 분향할 수 있는 제사장의 직분을 허락하였사온데, 오늘 저희들은 아버지 앞에 드릴 수 있는 간절한 마음이라도 가지고 있나이까? 아버지 보시기에 외식적(外飾的)인 무리가 되지 말고, 진정코 간곡한 마음으로 속죄의 은사를 받고 생명의 부활을 받기 원하여 모인 무리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님, 저희의 손길을 붙들기를 얼마나 고대하셨사오며, 저희의 추한 몸을 안기 위해 얼마나 수고하셨사옵니까? 그 손길이 상처를 입어도 그것을 잊어버리셨고, 그 몸이 창을 받아도 그것을 잊어버리셨고, 피흘리는 역사노정을 거쳐오셨지만 그것도 잊어버리셨사옵니다. 예수는 불쌍한 저희들의 손을 붙들고, 저희들의 몸을 안고 ‘아버지여, 이들을 축복하시옵소서.’라고 얼마나 기도하셨나이까? 또 아버님은 저희 한 자체를 세워 축복할 수 있고 하늘의 이름을 걸어 줄 수 있는 한 날을 얼마나 고대하셨사옵나이까?
오늘 불초한 것들이 아버지 앞에 모였사오니 이 민족을 대신하여 모인 모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수많은 교단을 대신하여 아버지의 심정과 인연을 맺고 노래할 수 있으며, 그로 말미암아 죽었던 생명들이 깨어나 아버지 앞에 환희하며 영광을 찬양할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여기에 엎드린 당신의 아들딸들은 이미 하늘로부터 주신 바의 말씀을 많이 들었습니다. 허락하신 바의 은사도 많이 받았습니다. 누가 아니라 하여도 부정할 수 없는 과거의 증거와 오늘의 증거도 갖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저희 자신이 어떤 조건을 세움으로 말미암아 되어진 것이 아니라, 저희를 위하여 저희가 모르는 가운데 하늘이 피어린 수고의 노정을 걸었던 연고로 되어진 것임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은사는 한번 잃어버리면 찾을 수 없고 한번 잃어버리면 체험할 수 없는 은사인 것을 아오니, 이날부터 심정적으로 아버지와 좀더 가까워지고 일체적인 자리에서 아버지를 체휼할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님, 이 시간 무슨 말씀을 하오리까?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많은 말씀을 주셨거든, 말씀의 실적을 갖추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 말씀을 두렵게 생각하고 있는 당신의 아들딸이옵니다. 그러나 불초하여 그 책임을 잊어버리고, 듣고도 또 잊어버리는 저희들이기에 하늘이 직접 운행하시어서 말씀을 통하여 저희의 몸 마음이 재창조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나이다.
하늘의 심정이 저희의 심정이 되고, 하늘의 움직임이 저희의 움직임이 되고, 하늘의 간절함이 저희의 간절함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허락하신 말씀으로 다시 인연을 맺어 나갈 수 있게 하시며, 천상과 인간이 관계를 맺어 하나된 가운데에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승리의 제단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저희 개체들을 승리의 조건물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탄세계의 모든 것을 제거시키기에 부족함이 없는 은사와 약속이 세워지는 이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날 지방에 널리어 외로운 제단을 쌓아 놓고 호소하는 당신의 아들딸들을 품어 주시옵소서. 더욱이 끝날의 한 때를 위하여 숨은 제단을 쌓아 놓고도 방향을 알지 못하여 허덕이는 자들이 있사올진대, 하늘이시여, 섭리의 손길을 펴시어서 그들이 갈 곳을 가르쳐 주시옵고, 그들이 머물 곳을 밝히 일러 주시옵소서.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허락하신 바의 복이 여기에 친히 같이하게 하여 주시옵기를 바라면서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말 씀> 오늘 말씀드리려 하는 제목은 ‘나의 이름이 무엇이냐’ ‘우리의 이름이 무엇이냐’입니다. 개인으로 말하면 ‘나의 이름은 무엇이냐’가 되겠고, 전체를 두고 말하면 ‘우리의 이름은 무엇이냐’가 되겠습니다. 오늘은 이러한 제목을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땅 위에는 많은 사람이 살고 있으며 또 많은 존재물로 꽉 차 있습니다. 그런데 어떠한 사람이나 어떠한 존재물이나 이름을 갖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 여러분 각자에게도 이름이 있습니다. 우리뿐만이 아닙니다. 모든 것에는 다 이름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시조를 지어 놓으시고 이름을 아담이라 하셨고 또 해와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아담과 해와를 만물의 주인공으로 축복해 주신 후 아담에게 모든 만물의 이름을 지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 2장에 기록된 바와 같이 아담이 일컫는 대로 그 이름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아담이 지어 주는 그 이름은 어떤 이름이냐 하면, 영원한 이름이요, 둘이 있을 수 없는 이름입니다. 역사가 변하고 시대가 변하더라도 절대로 변할 수 없는 이름입니다. 그와 같은 이름으로 남아져야 할 사람들이고 만물인데, 오늘날 이 땅 위에 존재하고 있는 만물의 이름은 가지각색입니다. 또 땅 위에 살고 있는 사람 사람도 모두 가지각색의 인연을 거친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류의 조상인 아담 해와를 세워 놓고 모든 만물을 주관하라고 축복하신 그날부터 하나님은 아담이 만물에게 지어준 그 이름이 영원히 남아지기를 바랐고, 하나님이 친히 이름을 지으신 우리의 조상 아담 해와도, 하나님이 잊으려야 잊을 수 없고 아니 보려야 아니 볼 수 없는, 인류의 참조상이 되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자리에 서지 못한 우리 인간은 하늘을 잊어버리게 되었고, 만물은 그의 이름을 잊어버리고 그 위치를 잊어버린 채 역사노정에서 허덕이며 나오고 있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되었느뇨?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여기에 모인 여러분 자신들도 이름을 갖고 있지만 그 이름은 타락한 후에 지어진 서글픈 이름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 고로 오늘 이 땅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만물의 이름도 타락하기 전 아담이 친히 불러서 지어 주었던 그 이름이 아니라 타락으로 말미암아 더럽혀진 이름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러한 사실을 무한히 슬퍼해야 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14장에 보면 ‘어린양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라고 하였습니다. 타락한 인류, 타락권에 있는 만물은 본연의 자리로 복귀되어 하나님으로부터 다시 명령을 받아 지어진 새로운 이름을 받기를 심히도 고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갖고 있는 이름, 그 이름은 제거해 버려야 됩니다. 하나님이 영원히 기억하고 선의 세계에서 영원히 자랑할 수 있는 그 이름, 그 이름은 주께서 친히 지어 주셔야 되고 아버지께서 지어 주셔야 됩니다. 타락한 인간들은 이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하늘 앞에 실체로서 영광의 자리에 설 수 없습니다. 우리는 역사노정을 살펴보게 될 때, 선한 세계의 이름을 가질 수 있는 민족과 악한 세계의 이름을 가질 수 있는 민족, 이런 두 갈래의 형태로 빚어져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름이라 할진대 이것은 그 개체나 실체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말할 때, 그를 대해서 절대자라고도 하고 혹은 최고의 원인자라고도 말합니다. 또는 최고의 지성을 갖춘 분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양심의 명령에 따라 살려고 하는 사람이나 도(道)의 길을 가려는 사람이, 선을 중심삼고 소망하며 추구하는 행복이나 이상과 같은 것들은 모두 인간이 소유하고 찾아 이루어야 할 것인데, 그것들이 대상적인 명사 혹은 형상적인 명사에 머물러 있음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은 예수가 곧 진리요 생명이요 길이라는 말이 아닙니까? 이런 것은 예수의 이름과 이퀄(equal; 동등)이라는 것입니다.
성경 66권의 말씀은 하늘이 우리에게 무엇을 바라서 하신 말씀이뇨? 참다운 하나의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 참다운 하나의 사람을 찾기 위해서 허락하신 말씀이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말씀을 따라 나가고 말씀을 지켜 나가는 목적은 어디에 있느뇨? 우리도 예수님처럼 길이요 진리요 생명체를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이루어서는 무엇을 할 것이뇨? 예수의 신부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자의 최고의 목적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끝날에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노릇한다고 했던 것입니다. 상대적인 관계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이 기도할 때에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실체 예수보다도 그의 이름을 먼저 찾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만나기 전에 예수 이름으로 된 인(印)을 맞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귀노정에 있어서 아니 거치려야 아니 거칠 수 없는 필연적인 운명인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반면 이 세상에는 사탄으로 말미암은 이름이 있습니다. 마귀를 사탄이라고 하고 사탄을 악이라고 합니다. 악에는 시기, 질투 등 여러 가지 속성(屬性)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악의 속성이 사탄의 대명사(代名詞)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렇게 모든 존재물은 하나님과 더불어 있을 수 있는 이름을 가지게 되느냐 사탄과 더불어 있을 수 있는 이름을 가지게 되느냐 하는 기로에 서 있습니다.
우리는 타락하였을망정 하늘의 복귀섭리의 혜택을 받아 복귀의 노정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복귀하는 데는 무엇을 복귀하는 것인고? 잃어버린 본연의 아담을 회복하는 것이고 잃어버린 본연의 해와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6천년 기나긴 역사는 무엇이뇨? 하나님이 창조하셨던 잃어버린 인류의 참조상인 아담과 해와를 다시 찾는 역사입니다. 인류의 참다운 조상이 될 수 있는 아담과 해와를 찾아 세우는 것이 어린양 잔치요, 그것이 이루어지는 때가 재림이상시대입니다. 6천년 역사는 타락하여 쓰러진 아담 해와를 다시 세워 나오는 역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죽은 아담 말고, 쓰러진 아담 말고, 사탄이 침범하던 아담 말고, 6천년 전 하나님 앞에서 사랑을 받던 그 아담 해와의 입장, 죽지 않고 살아남아야 할 아담 해와와 같이 되어야 하는 것이 오늘날 성도들의 입장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하나를 붙들고 나오는 데는 하나님의 6천년 역사가 연결돼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여러분의 한 생명이 우주보다 더 크다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이 붙들고 끌고 나오려는 이런 남자는, 창세 된 그날부터 타락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노정에서 어느 한 때에도 끊어지지 않고 연속되어 내려와서 살아남은, 아담형을 대신한 존재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역사는 죽은 역사가 아닙니다. 역사는 돌고 돕니다. 그 형이 크고 작은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개인적으로 그런 형(型)을 거치고, 더 크게는 가정적으로 그런 형을 거친 다음 민족적으로, 국가적으로, 세계적으로 범위를 확대하여 거쳐 나가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모양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기에 사망의 세계를 청산하고 새로운 은사의 세계를 넘어가야 하고, 심판의 고개를 넘어 부활의 권을 찾아 들어가야 할 우리들은 어떠한 입장에 서 있어야 되느냐? 타락하지 아니하였던 아담 해와의 입장에 서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라는 존재는 6천년의 기나긴 역사노정을 거쳐오면서 하늘의 서글픔의 대상이 되어 지금까지 아니 끌려 나오려야 아니 끌려 나올 수 없는 입장에서 하늘의 섭리 앞에 끌려 나왔습니다. 여러분 하나를 놓고 보더라도 여러분 자신에게는 아담으로부터 시작하여 노아, 아브라함 등 역대 선지의 피어린 혈통이 인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이러한 민족을 붙들고 나오는 하나님의 피어린 심정이 인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들이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러기에 여러분 자신들은 이제 어떻게 해야 되느냐? 역사를 더듬어 보아서 역사노정의 저끄러진 모든 것을 청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제 새로운 부활의 은사를 받을 수 있는 자리에 나가기 위해서는 새로운 이념과 새로운 권한을 부여받아야 되는데, 그 새로운 이념을 받기 위해서는 새로운 이념을 주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될 수 있는 자리에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되려면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되느뇨? 하나님은 아담 해와를 지어 놓고 소망스런 마음과 기쁜 마음으로 그들을 바라보았지만 타락한 그날부터는 절망과 탄식과 한스러운 마음으로 바라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되느뇨? 내 마음으로는 하나님이 바라보셨던 선한 아담 해와를 그리워해야 되겠고, 내 몸으로는 하나님의 슬픔을 느끼고 절망의 자리에 서서 허덕이시던 하나님을 그리워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이름을 가지고 있는 여러분이라 할진대 여러분 자신은 옛날의 아담을 대신한 입장이요, 더 나아가서는 옛날의 가인과 아벨을 대신한 입장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들은 아담을 대신한 존재인 동시에 가인과 아벨을 대신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은 어떠한 존재였느뇨? 하늘을 불신하였던 불신의 조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아담의 이름을 갖고 있는 동시에 불신의 이름이 첨부되어 있는 것입니다. 타락한 우리는 하늘 편적인 이름이 아니라 사탄이 침범할 수 있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불신의 조상으로부터 태어난 우리인 연고로, 아담의 이름과 더불어 불신의 이름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복귀의 고비가 아담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자신들은 불신의 이름을 심판하고 하나님이 소망하시던 아담의 이름을 남겨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에게는 불신했던 요소가 남아 있습니다.
천지창조의 이념을 중심삼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여하고자 했던 은사의 전체를 우리는 아직까지 다 모르고 있습니다. 미지의 내용으로 남아 있는 영원한 세계를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실체로 나타나 말씀하셨던 그 말씀도 믿지 못하였던 인간이니, 나타나지 않고 무형세계에서 하시는 말씀과 사실을 믿으려야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 있는 아담의 이름은 남기고 타락으로 말미암아 저끄러진 불신의 이름은 여러분 자신에게서 제거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믿지 못하여 타락한 아담 해와의 가정에서 하나님은 가인과 아벨을 세워 복귀섭리를 하셨습니다. 여러분, 역사노정에 나타났던 모든 추태는 여러분 자신들이 부린 추태임을 느껴야 됩니다. 우리 선조가 저끄러 놓은 불신의 이름도 여러분의 것이고, 가인과 아벨이 제물드릴 때 가인이 아벨을 죽인 살인의 이름도 여러분의 이름입니다. 우리가 하늘 앞에 서기 위해서는 역사적인 죄상을 내가 책임져 청산하고 나서지 않으면 역사적인 하나님을 위로해 드릴 수 없고, 역사적인 심정을 갖고 회개하기를 바라시는 그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 자신이 지금 갖고 있는 그 이름 위에 하나님이 그려오신 본연의 아담의 이름만을 세워 놓고, 그 외의 모든 더러운 이름은 제거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불신의 이름이 씌워져 있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여 살인자의 이름이 붙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러분 자신에게도 살인자의 후예란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형무소에 가게 되면 자기의 이름과 더불어 살인자나 강도라는 이름이 붙게 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여러분에게도 자신의 이름 외에 가인이 아벨을 죽였던 살인의 죄명(罪名)이 붙어 있다는 것입니다. 살인한 것이 옛날의 가인만이 아니라 오늘의 나에게도 계승되어 있습니다. 불신한 것이 옛날의 아담이 아니라 오늘의 나입니다. 이걸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 아담 이후 1600년 만에 노아 때가 있었습니다. 노아는 믿음의 절개를 세우기 위하여 120년 동안 충성을 다하였습니다. 노아의 일을 진정으로 협조하지 못했던 노아의 식구들도 노아의 믿음의 혜택으로 축복받을 수 있는 자리에 공짜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함이 하늘 앞에 부끄러운 모습이 되었습니다. 성경 역사에 혹은 타락 이후의 구원섭리노정에 하늘이 기뻐하지 않는 모든 것은 우리의 것, 여러분의 것으로 남아집니다. 내 것이 됩니다. 1600년 동안 수고하여 노아를 세우고 물로 세상을 심판하고 난 후 남아진 노아의 여덟 식구야말로 하나님의 소망의 식구였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함이 벌거벗은 노아를 보고 부끄러워함으로 말미암아 하늘 앞에 부끄러운 족속이 된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여러분 자신들도 하늘 앞에 얼굴을 들 수 없는 부끄러운 이름이 붙어 있는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노아 이후 400년이 지나 아브라함시대에 와 가지고 3대 제물을 바치는 데 있어서 소와 양은 쪼갰으나 비둘기는 쪼개지 않았습니다. 쪼개는 것은 성별(聖別)하는 것입니다. 성별해야 할, 갈라야 할 비둘기인데도 불구하고 가르지 않았기 때문에, 성별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제물은 실수로 돌아갔던 것입니다. 이렇게 가르지 못하고, 성별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불결이란 명사가 여러분에게 붙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또 모세를 중심삼고 보더라도 모세는 혈기로써 반석을 두 번 쳤습니다. 물론 민족이 잘못해서 쳤다고 하지만 그는 여러분의 선조이기 때문에 여러분 자신들이 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모세의 혈기는 하나님의 뜻을 배반하고 사탄의 뜻을 이루어 준 것입니다. 그러기에 모세가 혈기로써 반석을 두 번 쳐서 생긴 이 죄악도 여러분 자신의 이름으로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모세를 따라 나오던 이스라엘 민족은 모세를 배반하였습니다. 불신은 물론이거니와 배반하였습니다. 배반하고 하늘을 향해 저주하였습니다. 그 불신과 배반, 그리고 저주의 이름이 누구에게 붙여졌느뇨? 후대의 우리에게 붙여져 있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에 보면, 스물 한 가지의 죄악상이 나타나 있습니다. 여러분, 이 죄악의 모든 명사는 이 세상의 명사가 아닙니다. 여러분 자신에게 짊어지워져 있는 이름인 것을 알아야 됩니다. 29절부터 보십시오. 모든 불의와 악덕과 탐심과 포악과 시기와 살인과 분쟁과 기만과 무자비함과 말을 지어내는 것과 음행하는 것과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것과 능욕하는 것과 교만한 것과 자랑하는 것과 악을 도모하는 것과 부모를 거역하는 것과 어리석은 것과 배반하는 것과 무정한 것과 긍휼히 여기지 않는 것, 이러한 것이 있습니다. 이렇게 하늘에 배치되는 전체의 명사는 역대 선조들로 말미암아 만들어져서 지금까지 연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최후에 가서는 이 모든 명사를 어떻게 해야 되느냐? 책임을 지고 그 모든 명사를 청산해야 됩니다. 이러한 사명이 여러분에게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기에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아버지여, 이 죄인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합니다. 죄는 무슨 죄? 아담의 죄로부터 가인의 죄, 함의 죄, 아브라함이 실수한 죄, 모세가 실수한 죄, 이스라엘 민족이 실수한 죄, 예수를 십자가에 죽인 죄, 그 이후 수많은 민족들이 예수를 배반한 전체의 죄악의 명사가 여러분 일신에 지워져 있는 것을 느껴야 되는 것입니다. 역사노정에서 수많은 신도들이 자칭 죄인이라고 자복하였지만 역사를 걸어 놓고 죄인이라고 자복한 사람은 없 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끝날에 승리의 한 중심을 세워 가지고 심판의 행사를 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런 길을 가고자 할진대 역사노정에서 이렇게 되었던 모든 죄악의 이름을 가진 것들을 심판할 수 있어야 됩니다. 죄악을 재촉시켜 나왔고, 죄의 이름을 우리의 핏줄기에 혹은 우리의 생활에 붙였던 사탄을 심판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들은 끝날이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우리 자신을 우주적인 죄인으로 세워 놓고 이것을 굴복 시킬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런 자만이 심판의 고개를 넘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의 죄악상을 바라보게 될 때 그 죄가 그 사람들의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것입니다. 명동의 일가족 살인사건 같은 것도 그 사람만의 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에게도 그러한 살인을 범한 사실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들은 나타났고 여러분은 나타나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러면 신앙은 무엇을 요구하고 있느뇨? 회개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회개. 회개는 어떠한 회개냐? 역사적인 회개와 시대적인 회개입니다. 하늘은 역사적인 회개를 바라고 있고 시대적인 회개를 바라고 계십니다. 그런 것을 알고 ‘과거의 모든 죄도 내 죄요, 이 시대에 머물러 있는 모든 죄도 내 죄이오니, 아버지,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러한 기도를 하는 사람이어야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한때 여러분 자신들이 살인강도라고 생각해 봤습니까? 혹은 내 자신이 강도나 절도범이라고 느껴봤습니까? 하늘 앞에 용납받을 수 없는 추악한 모든 죄의 명찰을 내 몸에 걸고 있는 것을 느끼고 회개해 봤습니까? 이 자신이 미워져 가지고 자신 속에 있는 죄악의 요소를 굴복시키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고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하늘 앞에 사죄해 봤습니까? 그러지 못하였을진대 하늘 앞에 설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는 4천년 역사의 모든 죄악을 그 몸에 지고, 시대적인 모든 죄악을 그 몸에 지고 십자가의 노정을 갔습니다. 예수가 오셨다 가신 이후 2천년이 지난 오늘 끝날에 있는 우리는 6천년 역사의 모든 죄악을 이 한몸에 지고 담판해야 하고 하늘 앞에 속죄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속죄의 은사, 해방의 은사를 받아야 합니다. 하늘과 땅이 기뻐할 수 있는 기준을 세우지 못하는 한 심판의 고개를 넘을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죄인 중에도 부모를 죽인 죄인입니다. 사탄세계에서 나를 낳아준 부모가 아니라 영원히 부모로 모시어야 할 예수를 죽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누구입니까? 아담이 타락함으로 참부모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이를 복귀하기 위한 아담형 인물, 즉 제2아담이었습니다. 참부모로서 인류를 품기 위해 오셨던 분을 우리들이 잡아 죽였습니다.
옛날의 이스라엘 민족만이 그를 잡아죽인 것이 아닙니다. 가룟 유다만이 판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자신도 관련돼 있는 것입니다. 빌라도가, 혹은 제사장들이 공모하여 죽인 것만이 아닙니다. 로마 병정들만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른 것이 아닙니다. 가시 면류관을 씌운 것 그 모두가 그들만이 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관계돼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 처참한 환경에 있던 예수는 누구뇨? 여러분의 참아버지였습니다. 육계(肉界)에서도 아버지로 모셔야 하고, 영계(靈界)에 가서도 영원히 아버지로 모셔야 할 참아버지를 여러분 자신들이 죽인 것입니다. 가시 면류관을 씌운 것이 로마 병정만이 아니요, 못 박은 것이 로마 병정만이 아니요, 창으로 찌른 것이 로마 병정만이 아닙니다. 여러분 자신입니다. 여러분 자신이에요.
인류는 6천년의 죄악의 역사를 안고 살아 나왔습니다. 지금도 그러한 죄를 지으며 살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6천년의 죄악이 종합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회개해야 됩니다. 6천년의 죄악사 전체를 걸어 놓고 회개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참다운 선의 주체요, 참부모이신 예수를 쳤으니, 우리는 그 부모의 명령을 받아 죄악을 탕감복귀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될 게 아니에요? 내가 참부모를 쳐 죽여 죄를 저질렀으니, 우리들은 참부모의 말씀으로 죄의 요소를 뿌리뽑아야 됩니다. 아담가정으로부터 오늘 이 시대의 나에 이르기까지 모든 죄악의 원천을 없앨 수 있는 자라야만 예수의 신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회개해야 됩니다. 내 한 몸에는 거짓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으니, 이 거짓이란 이름을 떼어버리기 위하여 회개해야 됩니다. 혹은 시기라는 이름이 붙어 있고, 교만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고 혈기라는 이름이 붙어 있으니, 이 이름들을 떼어버리기 위하여 회개해야 됩니다. 또 내 마음에는 남을 미워하고 죽이고 싶은 살인적인 요소가 있으니, 이것을 떼어버리기 위하여 회개해야 됩니다.
바울은 스테판을 죽이는 데 가담하였고 기독교인들을 잡기 위해 다메섹에 파송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다메섹에 가는 도중 예수를 만나 회개했습니다. 우리들이 죽여 버린 예수가 메시아였음을 알았습니다. 죽이는 데에 자신이 찬동했던 스테판이 예수가 사랑하는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때 그는 스테판을 죽인 것을 회개하기보다 민족이 예수를 죽인 것을 회개했습니다. 민족을 세우기 위하여 4천년 동안 수고하신 하나님을 염려하면서 민족의 잘못을 회개했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난 후 아라비아로 가서 3년 동안 기도의 생활을 했습니다. 그 기간은 기뻐서 혹은 즐거워서 하늘을 노래하던 기간이 아닙니다. 슬프고 슬퍼 눈물을 흘린 기간이었습니다. 그 기간은 ‘예수를 죽였던 모든 죄는 내가 짊어지게 하시옵고, 이 한 일신으로 예수를 죽인 모든 죄를 탕감하게 하시옵소서.’ 하는 복받쳐 오르는 심정으로 하늘 앞에 크나큰 회개를 한 기간이었습니다. 이러한 기간이 있었기에 죽음의 자리도, 어떠한 환경도 개의치 않고 예수의 이름을 갖고 나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울이 바울로서 나타날 수 있는 힘은 어디서부터 출발되었던고? 죄인임을 느끼고부터였습니다. 4천년 역사 전체를 회상해 보게 될 때 자신이 죄인의 대표자인 것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죄인이 하늘의 긍휼의 손길에 붙들리다니….’ 하는 감격의 한 때를 맞게 된 것입니다.
큰 죄인임을 느끼는 자가 큰 은사에 접하게 될 때 하늘땅은 뒤집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지금까지의 이스라엘 역사를 새로운 복음의 역사로 전환시켰던 것입니다. 그 원동력은 어디서 나왔느냐? 죄악 된 자기를 치고 죄악을 회개한 데서 나왔습니다. 그러한 노정을 거쳐 승리하여 사울은 하나님이 지어준 본연의 이름을 받아 바울이 되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끝날에 처해 있는 여러분에게 어떠한 이름을 갖고 있느냐고 하늘은 물을 것입니다. 네 이름은 무슨 이름이냐? 타락하기 전의 아담이더냐? 120년 동안 하늘을 위해 충성했던 노아더냐? 하늘의 뜻을 좇아 갈대아우르를 떠났던 아브라함이더냐? 혹은 80년 생애를 민족을 사랑하고 택한 백성을 구하기 위하여 염려의 심정을 가지고 살았던 모세더냐?
여러분, 여러분에게 무슨 이름이 지어져 있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하늘은 바라고 계십니다. 악의 요소가 침범하기 전의 그 이름을 거쳐 최후에는 예수의 이름까지 가지기를 바라십니다. 여러분이 십자가에 돌아가시던 예수 말고 십자가를 심판할 수 있는 예수의 이름을 차지하지 않으면 신부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시여, 옛날 타락 전 아담 해와가 머물던 그 자리에 나를 옮겨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해 봤습니까? ‘타락하기 전의 아담 해와의 심정이 그립소이다. 하나님을 자유롭게 대하고 하나님도 자유롭게 대해 주시던 그 아담 해와의 환경이 그립소이다. 뜻을 받들어 충성을 다해 제물을 드리던 아벨의 마음이 그립소이다. 혹은 노아의 심정이 그립소이다. 아브라함의 심정이 그립소이다. 모세의 심정이 그립소이다. 더 나아가서는 예수의 심정이 그립소이다.’라고 해 보았습니까?
역사노정에서 우리의 선조들이 악과 싸우던 마음, 하늘을 위하던 그 마음을 갖고 지금까지 더럽혀진 이름을 모두 청산하려는 신념, 청산해 버리기 위한 회개의 눈물이 없이는 예수의 이름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혈기가 남아 있으면 여러분의 이름은 혈기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시기가 남아 있으면 여러분의 이름은 시기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타날 때는 그런 이름이 남아진다는 것입니다. 아무개 아무개 하는 이름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런 죄악의 요소를 벗어나 성신의 아홉 가지 열매(갈 6:22-23), 즉 사랑과 희락과 화평, 인내와 자비와 양선, 충성과 온유와 절제를 우리의 이름으로 부여받아야 됩니다. 이 열매는 무엇이냐 하면, 죄와 인연되지 아니한 본연의 아담 해와의 심정을 갖추고 난 이후에 가져야 할 이름입니다. 여러분의 이름은 하늘이 바라는 이름이 아니라는 거예요. 하늘은 김 아무개 뭐 누구누구 하는 이름을 원치 않습니다. 하늘이 바라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 여러분의 이름이 사랑이기를 바라십니다. 화평이기를 바라십니다. 성신의 아홉 가지 열매의 이름을 여러분 자신들이 갖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내세울 수 있는 이름이 무엇이냐? 하늘은 이것을 물을 것입니다.
우리는 고대해야 되겠습니다. 죄악세계에서 더럽혀진 모든 이름을 회개로써 충성으로써 희생으로써 청산하고 성신의 아홉 가지 열매를 지니고 십자가의 고개를 넘어가 부활하신 예수와 만나야 됩니다. 여러분은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인내와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중 어떤 이름을 갖고 있습니까? 아홉 가지 중 하나의 명사를 하늘 앞에 내놓고 이것이 내 이름이라고 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어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한 이름을 갖추어 가지고 나 자신이 그렇다고 인정받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세 사람 이상이 증거해야 됩니다. 가지고 있는 이름과 더불어 ‘그 사람은 과연 하늘의 아들딸이야. 그는 온유한 사람이야. 자비로운 사람이야. 화동하는 사람이야.’라고 세 사람 이상으로부터 증거를 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성도의 증거를 받지 않고는 성부 성자 성신의 증거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의 신앙노정에 있어서, 하늘은 내가 너를 사랑하고 너를 알아준다고 하면서도 내보내는 것입니다. 하늘의 인정만 받아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땅에서 세 사람 이상의 인정을 받아야 됩니다. 인정은 어떠한 입장에서 인정을 받아야 되느냐? 부모의 입장에서 사랑하는 자녀와 같은 사람, 죽더라도 같이 죽고 살더라도 같이 살겠다는 입장에 선 아들, 혹은 딸 세 사람 이상이 그의 이름을 증거할 수 있는 자격자가 되어야만, 하늘은 그의 이름과 더불어 천적인 이름을 부여해 준다는 것을 여러분은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자신을 회고해 보게 될 때, 여러분은 어떠한 이름을 갖고 있습니까? 사랑의 이름보다는 시기와 질투의 이름을 갖고 있진 않습니까? 화평의 이름보다는 불만과 불평의 이름을 갖고 있지는 않습니까? 어떠한 이름을 갖고 있는지 스스로 살펴 하늘 앞에 내세울 수 있는 이름을 가져야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으니 우리는 그러한 길을 통하지 않으면 진리의 주인공이 될 수 없고, 생명의 주인공이 될 수 없고, 사랑의 주인공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 이름 위에 하늘이 부여한 말씀의 이름을 가지고 길을 대신하든가 진리를 대신하든가 생명을 대신하든가 사랑을 대신하든가 그 중의 어느 한 면을 대신해야 됩니다. 그렇게 하지 못한다 할진대 이는 예수와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우리들은 회개의 생활을 해 나왔습니다. 회개해 나왔는데 무엇을 회개했습니까? 형제지간에 잘못한 것은 지극히 적은 것입니다. 그것보다도 나 자신은 역사적으로 죄악의 피를 거쳐온 후손이요, 무지무지하고 어마어마한 죄인이요 죄수라는 것을 느끼고 회개해야 됩니다. 그리하여 하늘의 긍휼의 손길에 품겨야 된다는 것입니다.
회개를 하고 나서는 속죄의 은사로 하늘로부터 너는 내 아들이요 내 딸이라고 하는 표적을 받아야 됩니다. 표적을 받아야 돼요. 그 표적을 받지 않는 한 여러분의 이름은 영원한 하늘나라에 남아질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천적인 것과 배치되는 모든 것을 심판하기 위하여 노력해야 되겠습니다.
원수가 따로 없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원수입니다. 땅을 중심삼고 소망하는 모든 것은 원수입니다. 땅의 무엇을 갖고 싶고, 무엇을 알고 싶고, 무엇과 관계 맺고 싶다 하는 모든 것은 다 쳐서 때려잡아야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다 풀어놓아야 됩니다.
세상 것보다는 하늘 것을 소망하고 그리워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사탄의 이름을 다시 받지 않기 위하여 한날 한날을 하늘과 더불어 사는 사람이라야 하늘의 이름을 가진 자요, 주님을 모실 수 있는 자라는 것을 여러분이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살아남아야 할 아담 해와인 것을 알았사옵니다. 옛날 아벨이나 노아 혹은 모세나 역대의 모든 선조들은 잃어버린 아담 하나를 다시 빚어 만들기 위한 재료들이었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또 저희들에게는 역사적인 하나님의 투쟁역사를 청산해야 할 사명이 남아 있는 것을 알았사옵고, 하나님이 아담으로부터 6천년의 역사노정을 거쳐오는 동안 사탄과 피어린 투쟁을 하던 그 싸움에 동참하여 살아남은 모습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이제 알았사옵니다.
저희가 과연 아담을 붙들고 변론할 수 있습니까? 함을 붙들고 변론하며 심판할 수 있습니까? 혹은 성별하지 못하여 사탄의 참소를 받고 빼앗긴 아브라함의 제단을 탈환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습니까? 모세가 반석을 두 번 침으로 말미암아 광야에서 쓰러진 이스라엘의 60만 대중을 빼앗을 수 있는 권한을 가졌습니까? 십자가노정을 승리한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민족을 심판할 수 있고 시대를 심판할 수 있는 어떠한 중심을 갖고 있사옵니까?
끝날에 처해 있는 저희들은 예수의 심정을 품고, 역사노정에서 사탄과 싸워 나오던 하늘과 삼위신을 대신한 실체로서 총심판을 할 수 있는 승리적인 자리에 서 있습니까? 역사노정에서 사탄이 우리의 선조를 참소하던 전체의 조건을 내 일신이 청산하고 회개하여 속죄의 은사를 받은 증거가 없다 할진대 그런 자리에 서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전 시대의 응어리진 모든 죄악상을 바라보게 될 때, 그것은 그들의 죄가 아니라 내 죄라 여기고 눈물을 흘리며, 그들 대신 회개하여 아버지 앞에 인정받는 자가 있다 할진대 그는 새 시대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저희들이 알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그러기에 선지라는 이름을 갖고 왔던 모든 사람들은 선조들의 잘못을 통탄하지 않은 자가 없었고, 시대의 부패상을 통탄하고 눈물로 회개하지 않은 자가 없었던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또 한 고비를 넘어가는 이 시대에 있어서 저희들은 역사적인 죄악과 시대적인 죄악을 걸고 하늘 앞에 담판지어 속죄의 은사를 부여받음으로써 사탄을 심판할 수 있는 자들이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알았사옵니다. 이제 저희가 하늘의 이름을 갖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사탄과 싸워 이겨 골고다 산정에서 부활하신 영광의 주님 앞에 신부의 이름을 갖추고 나타날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것이 하늘의 소망이요, 이런 한 날을 세우기 위하여 6천년 동안 하나님이 사탄과 싸워 나오신 것을 알았사옵니다. 저희의 일신이 선한 소망의 실체, 사탄의 침범을 받지 않은 본연의 아담 해와의 모습으로서 아버지의 사랑의 품에 안겨 영광의 세계를 노래할 수 있고, 아버지의 아들딸이라는 이름까지 가질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여기는 성화청년회 창립 5주년을 기념하는 자리인데, 이제 5년이 넘는다는 것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창조 5일째를 지나고 인간 창조의 6일째로 접어드는 순간에 해당한다 하겠다.
청년들은 옥동자(玉童子)와 옥동녀(玉童女)에 해당하는 기간에 있는 것이다.
성화청년회의 성화라는 글자를 살펴보면, 성(成)은 완성(完成)을 의미하고 화(和)는 화동(和動)을 의미한다. 따라서 서로 화(和)해서 완성해 간다는 뜻이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첫째, 여러분은 말씀의 과정을 통과해야 된다. 둘째는 인격적으로 하나님이 의논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충절(忠節)의 대표인 예수님의 인격을 본받아야 한다. 일일이 의논하지 않고도 심정적(사랑)으로 통해야만 한다.
그리고 여러분은 무엇보다도 화동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전후 상한 좌우로 화할 수 있는 인격체가 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축복의 실체(實體)가 되는 것이 표준이다. 예수님도 청년시절에 뜻의 일선에서 일을 하셨다. 30세 전후의 청년시절은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시기에 해당하는 것이다.
선생님의 젊음에 여러분의 젊은 열정을 가담(플러스)시켜가지고 일해야만 한다. 재창조 위업에 가담해 가지고 영광의 조건을 갖출 수 있는 것은 이 한 때밖에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만 한다. 우리는 철두철미하게 무엇을 느끼어야 하느냐? 첫째 '나는 너희들과 같지 않다'는 심정이 갖추어져야 한다. 너희는 해내지 못하느냐? 나는 할 수 있다! 이런 정신을 항상 갖추고 있어야 한다.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나는 너희와 같지 않다. 역사적으로도 시대적으로도 평면적으로도 어디를 보아서도 그렇다'고 할 수 있어야 한다. 모든 어려운 일에는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심이 있어야 한다. 여러분의 그 움직임이 사탄세계의 성화(걱정)거리가 되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
아버지! 저희들은 남루한 옷을 입고 추한 모습으로 본래의 자기 집을 찾아 안방에 들어온 탕자와 같사옵니다.
아버님께서 잃어버린 아들딸을 그리워하신 것이 6천년이었사옵고, 저희도 6천년을 사탄에게 유린당하여 왔사옵니다. 아들딸을 찾기 위해 허덕이신 아버지의 안타까운 심정을 저희가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양이야 추하든, 얼굴이야 어떻든 아버지를 알아보는 아들딸을 원하셨사오나, 아들딸이면서도 아버지를 알지 못하는 자들을 붙들고 서글픈 역사 노정을 걸어오신 아버지 앞에 저희들이 무슨 말을 하오리까? 이제 저희는 이 땅 위에서 그 무엇을 원치 않사옵고, 아버지를 아버지로 알아볼 수 있는 그 한 가지가 저희의 소원이옵니다.
아버님, 지금 성경 말씀을 보았사옵니다. 그러나 그런 말씀을 하신 예수님의 간곡한 사정을 그 누가 알았사오며, 서글픈 심정을 그 누가 알았사오며, 한스러운 심정을 그 누가 알았사옵니까? 그 예수는 만민의 구주요 만민의 참아버지였으며, 만민을 구하기 위한 싸움의 대표자요, 사탄의 조롱을 받은 대표자였고, 또한 십자가를 지고 가신 한스러움의 왕자요. 고난과 핍박 중에서도 눈물을 머금고 하늘을 위로하던 고통의 왕자였음을 저희들은 몰랐사옵나이다.
여기에 참여한 당신의 아들딸들, 어떠한 인연에 의해서인지 모르나 이 마을 저 마을, 이 골짝 저 골짝, 이 골목 저 골목을 지나다 만나게 되어 여기에 모였사옵나이다. 아버지! 이제 이들을 붙들어 주시옵소서. 하시고 싶은 말씀을 하실 수 있는 마음의 터전을 이루어 주시옵소서.
아버님, 저희는 세상에서 많은 말씀을 들었사옵니다. 배우고 배워서 많이 알고 있사옵니다. 말도 누구 못지않게 할 줄 압니다. 그러나 아버지를 애타게 그리워하는 마음이 없사옵니다.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이 자리에 선 저희는 그 무엇을 자랑하기를 원치 않사오니, 아버지, 잊으려야 잊을 수 없고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심정의 인연을 이 시간, 맺을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것은 하늘의 소원인 동시에 저희들의 소원이옵니다. 이것이 이루어진다 할진대 천만의 믿는 무리들이 필요치 않사옵니다.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 숙여 흐느껴 우는 것이 무엇보다 귀한 것임을 저희들이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눈물겨운 역사 과정을 거쳐온 아버지를 통곡하면서 위로해 드려야 할 저희들임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를 모시고 싶사옵고, 아버지를 대하고 싶사옵니다. 아버지께서 남기신 슬픔과 고난의 길을 저희에게 다 맡기시고, 골고다의 험한 그 길을 다 맡겨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 평탄한 길을 가실 수 있도록 이 몸이 길이 되고, 이 몸이 발판이 되겠습니다.’라고 할 수 있는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 이제 당신의 아들딸들이 모였사오니, 이 시간이 헛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죽었던 자가 다시 살아나는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절망 가운데 있던 자가 소망을 가질 수 있고, 사망세계의 속박에서 허덕이던 자들이 자유의 해방을 맞이하는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심정의 중심을 잃고 아버지를 알지 못하던 자들이 다시 그 중심을 세워서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제 아버님의 말씀을 전하고자 하오니 뜻대로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전하는 자의 마음과 받는 자의 마음이 하나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어린 아이와 같은 마음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는 저희의 것이 아니오라 당신 것이오며, 저희에게 속한 모든 것도 저희의 것이 아니오라 당신께 속한 것이오니 당신께 돌려드릴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늘이 움직이는 대로 저희가 움직여서 하늘이 동하면 저희도 동하고, 하늘이 정하면 저희도 정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한스러운 모든 것을 청산하고 아버지의 생명권 내에서 그 영광을 노래하고 기뻐할 수 있도록 축복하여 주시옵고, 은사로써 품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모든 것을 아버지께 맡기오니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 외로운 식구들이 아버지 앞에 호소하고 있는 줄 알고 있사오니,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였사옵나이다. 아멘.
<말 씀> 여러분께 드리려 하는 말씀의 제목은 ‘아버지 나는 무엇을 하였나요’입니다. ‘아버지 나는 무엇을 하였나요’ 이러한 제목을 가지고 잠깐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여기에 모인 우리들 모두가 불완전한 사람이며 죄악의 굴레에 속하여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 환경에서 살고 있는 여러분이요, 그런 환경에서 무엇인가를 찾고 있는 여러분입니다. 사람은 무엇을 항상 요구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목구비와 사지백체를 갖추고 있는 한 쉼 없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무엇인가를 찾고 있으며 항상 무엇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도 여러분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여러분 개체에만 한한 것이 아닙니다. 넓게는 이 세계도 그러하고 이 땅도 이 우주도 모두 그러합니다. 창조주가 계시고 어떤 신이 있다 할진대 그도 무엇인가를 하고 있고 무엇인가를 고대하고 있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개인과 가정, 나아가서 사회와 국가, 세계, 천주까지 어떠한 인연과 동기 밑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살고 있는 나요 여러분입니다. 자기의 생애를 생애답게 영위한다고 하며 살아 나온 우리입니다. 사방에 자기를 자랑하고 싶은 마음을 갖고 살아 나온 우리입니다.
그럼 오늘이 있는 반면에 지난날이 있고, 오늘이 있는 동시에 내일이 있다는 것을 아는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너는 무엇을 하였느냐?’ 하고 누군가 묻게 될 때 ‘나는 이것을 하였나이다. 당신이 고대하는 것이 이것이었기에, 나는 과거에도 이것을 위하여 살았고 현재도 이것을 위하여 살고 있으며 미래에도 이것을 위하여 살고자 하나이다.’ 하고 자신 있게, 자랑스럽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과거에도 그런 사람은 없었고 현재도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러한 사람이 있었다면 세계는 이렇게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늘이 우리와 이렇게 무심한 관계를 가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비록 작은 한 개체라 할지라도 전체를 대신하고, 우주를 대신하여 답변을 할 수 있는 승리의 모습이 이 땅 위에 나타났다 할진대 우리는 이같이 한스러운 생활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슴속을 헤치고 헤쳐 보아도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한스러운 곡절이 연속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밖을 보게 될 때도 그렇습니다. 천지가 그런 환경에 놓여 있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자기의 일신을 수습하여 대우주 앞에 나아가야 하는 것이 타락한 인간의 서글프고 고통스러운 생애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슬픔과 고통을 크게 느끼고 울고 있는 자가 어디 있는가? 그런 자를 찾는 것이 하늘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은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는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인가 하고 있습니다. 가야 하고, 해야 할 운명에 놓여 있는 이 일신은 어디에 머물러 있습니까? 행복한 가정에서 쉬고 있습니까? 국가의 어떠한 영광스런 자리에 여러분의 몸을 앉혀 놓고 있습니까? 그곳이 우리가 머물 정착지가 아닙니다. 그러기에 마음은 달리라고 재촉합니다. 머무는 곳곳마다 부딪쳐 오는 충격이 있게 됩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생명의 안식처, 살길을 찾아 방황하는 것이 우리의 신세요, 우리의 모습입니다.
여러분은 삼자의 입장에서 자신을 비판해 본 때가 있었습니까? 그러한 모습을 비판도 해 보고, 부둥켜안고 울어도 보고, 몸부림도 쳐 본 입장에서 이래서는 안 된다는 그 무엇을 찾아 세워 가지고 ‘하늘이여! 땅이여! 이런 것이 없습니까?’ 하고 외쳐본 때가 있었습니까? 없었다 할진대 여러분들은 불쌍한 자리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될 것입니다. 그러한 환경에서 전후 좌우를 헤아리지 못하고 뒤넘이치는 생활을 연속하고 있는 여러분임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환경인 동시에 지난날의 환경이었으며 또한 내일의 환경으로도 연장되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슬프고 슬픈 입장에 여러분이 처해 있음을 깨달은 적이 있습니까? 지긋지긋한 과거였고 오늘도 지긋지긋한 생애이며 내일도 그러할 이 생애를 어이할 것인가? 몸부림을 치고 또 쳐도 해결지을 수 없는 운명에 놓여 있는 우리들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환경에 처해 있기에 자신도 모르게 ‘나를 구해 주시옵소서.’ 하는 것입니다. 과거를 부정하고 현실을 부정하고 미래를 부정하고 모든 것을 부정하면서 새로운 그 무엇을 찾고자 허덕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종교인들이 가는 길입니다. 종교는 여기에서부터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러한 길을 걸으셨고 성현군자들 가운데서도 그런 길을 걷지 않은 분이 없습니다. 더욱이나 끝날에 처한 우리는 역사의 슬픔을 해결해야 할 자리에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역사의 배후에서 천적인 심정을 연결시켜 주는 무엇이 없다 할진대 우리는 절망일 것입니다.
붙들고 싶어도 붙들지 못하고 해결해 주고 싶어도 해결하지 못하는 비운의 역사노정이, 도(道)라는 표본을 중심삼고 밟히고 찢기고 피흘리는 혈투극을 전개시켜 나오는 하늘의 복귀섭리 노정이라는 것입니다. 과거로부터 지금까지의 한스러운 복귀섭리를 내일에까지 연장시키지 않기 위해서는 이제 우리가 발판이 되어야 합니다. 하늘은 이 시간 여러분들이 이 역사를 해결해 주기를 고대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과거의 잘못은 과거의 잘못이요 지금의 잘못은 지금의 잘못이로되 내일의 소망을 가져야 할 우리들입니다. 우리는 그 비운의 역사를 하늘을 발판으로 하여 넘어서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엉클어진 일들을 우리의 생애에서 해결지어야 되고, 이 역사노정에서 해결지어야 됩니다. 천지의 창조주가 경영하시는 나라를 통하여, 세계를 통하여, 천륜을 통하여 천정을 통하여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만일 우리가 그러한 것을 알고 하늘을 바라보고 세계를 바라보고 인류를 바라보게 되면 부르짖을 것입니다. 자기의 있는 정열을 다 기울여 외칠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는 먹는 것이 문제가 아니요, 입는 것이 문제가 아니요, 몰아치는 핍박과 환난이 문제가 아닙니다. 인간의 심중 심중에 남아지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기에 자고(自古) 이래로 선을 지향하던 사람들은 그 뜻을 받들어야 할 사람들한테 배척을 받지 않은 자가 없었습니다. 그 걸음이 바로 하늘이 걸으신 걸음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역사를 붙들고 오늘날까지 전쟁사를 엮어 나오신 하늘은, 앞에서는 공격을 해 나오셨지만 그 배후에서는 하루 한 시간도 마음놓지 못한 채 쓰러지는 인류를 바라보고 우셨고, 절망에 휩쓸려 탄식하고 있는 인간을 바라보고 서러워하셨습니다. 인류는 그분을 붙들고 서러워하고 울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 분이 있다 할진대 우리는 그분 앞에서 울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분 앞에서 울고 난 후에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그분이 원하시는 일이 있다 할진대 천만 번 죽는 한이 있다 할지라도 그 일을 하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일망정 그것은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역사노정을 거쳐오신 하늘을 위해 무엇을 하였습니까? ‘나는 무엇을 하였나요?’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이러한 하늘의 입장과 내정(內情)을 안다 할진대 ‘나는 아버지 앞에 할 말이 없습니다. 아버지, 나는 무엇을 하였나요? 아버지, 나는 무엇을 하였나요?’ 하고 통탄해야 합니다. 한스러운 이 6천년의 역사노정에서 불신을 일삼고, 무지몽매했던 우리의 선조들을 붙들고 나오시던 아버지, 새로운 한 날을 세우고 새로운 하나의 모습을 만들기 위하여 6천년을 한결같은 심정으로 나오신 그 아버지를 위해 나는 무엇을 하였나요? 이 손은 무엇을 하였으며, 이 발은 무엇을 하였으며, 이 눈과 이 입은 무엇을 하였습니까? 이 사지백체와 이 모든 감각은 무엇을 하였습니까? 여러분! 이제 이 시간부터는 그런 입장에 서서 아버지를 다시 바라보고 그런 입장에 서서 자신을 다시 분석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지난날의 역사는 나 하나를 찾기 위한 것이었고 나 하나를 세우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내가 하늘 앞에 서는 날이 역사를 하늘 앞에 세우는 날이요, 천지를 하늘 앞에 세우는 날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이런 일을 해 나오셨는데도 우리는 아무것도 몰랐던 것입니다. 이 시간 여러분의 마음에는 어떤 느낌이 있습니까? 마음과는 인연 맺은 것 같고 사정은 느낄 것 같지만 심정을 알지 못하는 자리에서 허덕이고 있는 자기 자신임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사실을 부정한다 할진대 여러분은 하늘을 배반하는 배역자(背逆者)임에 틀림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느껴야 되겠습니다.
내가 있기 전에 선조가 있었고 선조가 있기 전에 하나님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있었기에 선조가 있었고 선조가 있었기에 내가 있다는 말입니다. 또 내 심정이 있기 전에 선조의 심정이 있었고 선조의 심정이 있기 전에 하나님의 심정이 있었으며, 내 인격이 있기 전에 선조의 인격이 있었고 선조의 인격이 있기 전에 하나님의 인격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그 무엇이 있기 전에 선조의 그 무엇이 있었고 하늘의 그 무엇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여러분은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자기 자랑을 즐겨하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 과거의 피어린 충신열사들을 돌아보아야 될 것입니다. 자기의 그 무엇을 호언장담하며 자랑하는 자가 있다 할진대 현실의 불쌍한 자리에서 선을 찾기 위하여 몰리고 있는 분들을 붙잡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몰리면서도 악한 세상을 이끄시며 사탄과 싸우고 계신 하나님을 붙들어야 된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과거의 선한 사람을 붙드는 동시에 현실의 선한 사람을 붙들어야 합니다. 악한 사탄과 싸우고 있는 하늘을 붙들고, 역사적인 심정과 시대적인 심정을 가지고 뒤넘이쳐 나아가 승리의 한 점을 이루어 놓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각오를 해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그런 자리에서 하나님을 본받아야 되겠고, 참선조를 본받아야 되겠습니다.
선한 아버지, 선을 위하여 몰림을 당하고 죽음의 길도 개의치 않던 그 아버지였고, 선을 위하여 죽음과 모욕을 개의치 않던 선조들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선조들이 부르짖던 그 선은 지금 어디 갔습니까? 하나님은 한을 품고 계십니다. 선조들은 울부짖고 있습니다. 그 울부짖음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지상을 대하여 울부짖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을 대하여 울부짖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닫힌 마음의 문을 열고 한없이 깊은 곳에서 울려 나오는 참조상의 울부짖음을 들어 보았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을 부르는 하늘의 한없이 서글픈 음성을 들어 보았습니까? 잃어버린 아들을 찾아 헤매는 하늘의 서글픈 사정을 알아보았습니까? 우리들은 몰랐습니다. 지난날의 선한 선조들을 동정하며 울 수 있는 그 한 날을 그리워해야 할 우리요, 선조와 더불어 앞장서서 피어린 노정을 걸어 나오시던 아버지임을 알아야 할 우리 입니다. 그 아버지 앞에, 그 선조들 앞에 여러분은 무엇을 하였나요? 해야 할 일은 남아 있는데 했다 하는 과거를 갖지 못하였고, 해야 한다는 것조차 잃어버린 우리 자신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안일한 자리에서 스스로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며 살 수 있어요? 아닙니다. 여러분은 다시 마음과 몸을 가다듬어 나의 뒤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선한 선조들이 있는 것을 느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이 평탄한 길을 걸어오신 것이 아니요, 선조가 평탄한 길을 걸어온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죽음과 핍박과 고통, 더 나아가서는 피와 땀이 연속된 끈을 내 뒤에 달고 있는 것을 여러분은 느껴 보았습니까? 여러분을 움직일 수 없게 단단히 얽매어 놓고 이 시간도 부단히 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잡혀 있기에 곁길로 가려 해도 갈 수 없는 내 몸이 되었음을 느껴 보았습니까? 아니 가려야 아니 갈 수 없는 나라는 것을 느껴 보았습니까?
이런 것을 느껴 본 사람은 하나님과 선한 선조의 후손이 될 수 있습니다. 선을 위하여 피어린 노정을 붙들고 나오던 그들이 남기고 간 전통을 상속 받을 수 있는 후손임에 틀림없는 것입니다. 대답하고 싶지 않아도 대답이 나오고, 움직이고 싶지 않아도 움직여지니 어찌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악한 세상을 움직여 나오시는 하늘의 역사인 것입니다. 여러분 앞에서 아버지께서 움직이시고 선조의 혼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들의 정기를 받고 태어난 여러분이기에 그 뒤를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의 느낌은 내 개인의 느낌보다 강하며, 그들의 맥박은 내 개인의 맥박보다 강합니다. 강하니 나를 끕니다. 아니 가려야 아니 갈 수 없는 피어린 그 길, 한스런 그 길을 자기 생애의 노정으로 삼고 갈 수 있는 무리가 이 땅 위에 나와야 됩니다. 그런 무리가 나오지 않는다 할진대 이 땅은 영원한 심판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여러분들은 한없이 외로운 길을 거치고 거쳐, 오지 못할 곳으로 생각되던 이 자리에 모여왔습니다. 아니 가려야 아니 갈 수 없고, 아니 생각하려야 아니 생각할 수 없고,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이 인연은 누구로 말미암아 된 것입니까? 여러분은 그것을 압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 사람도 그것을 압니다. 어느 누가 몰림의 자리에 나서고 싶겠습니까? 어느 누가 눈물짓는 외롭고 험한 길을 자진하여 가겠습니까? 그런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역사는 그렇게 움직여 나왔습니다. 그런 노정을 거쳐 선의 터전을 넓혀 나오는 천적인 움직임에 인연되어 있기에, 자기도 모르게 아니 가려야 아니 갈 수 없는 운명에 부딪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자가 있다 할진대 낙심하지 마십시오.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천만사의 고통은 훗날의 영광이 될 것입니다. 피어린 곡절에 사무친 일신이 되어 이 땅 위에 서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의 심정 깊은 곳에서는 ‘아무개야! 너 괴로워하지 말라. 내가 있다는 것을 너는 알지 않느냐?’ 하는 위로의 음성이 들릴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본향의 근거지요, 마음의 안식의 터전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의 아버지는 어찌하여 마음의 밑바닥에서 울부짖는 아버지가 되었습니까?’ 하며 한없이 통곡하고 분해하며, 한없는 억울함을 느끼는 아들딸들이 많이 나와야 됩니다. 그래야만 하늘의 해원의 역사가 시작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아버지가 영광의 아버지인 줄 알았더니 아니었습니다. 우리들이 모시고 있는, 오셔야 할 주님이 영광으로 오실 줄 알았는데 아닙니다. 가장 밑바닥에 깔리어서 이 시간에도 눈물을 흘리고 고통을 받으며 사탄에게 끌려가고 있는 사랑하는 아들딸의 뒤를 따르고 계시는 아버지입니다. 부모의 심정을 갖고 뒤를 따르고 있는 그분을 돌아보고 눈물 흘린 자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하늘임을 몰랐으나 하늘은 몇천 만 번 여러분을 대신하였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였습니까? 나는 무엇을 하였나요? 황공하고 망극한 일입니다. 우리 자신들은 역도(逆徒)의 선봉자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에덴에서 애지중지 기르시며 부탁하시던 그 음성을 우리는 여지없이 유린하였습니다. 믿고 또 믿고 품으시며 사랑하고 싶어하시던 그 아버지를 그렇게도 생각 없이 배반한 우리였습니다. 그런 인간들을 찾기 위하여 복귀의 조건을 세우고 사탄과 판가리 싸움을 해오신 아버지셨습니다. 아벨 제단과 가인 제단을 분리하실 때 아버님의 마음은 얼마나 슬펐겠습니까? 그런데 아벨은 사라지고 가인만이 남았으니, 우리는 가인 제단을 이어 나온 후손인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가인 제단의 동참자입니다.
하늘은 이 한을 풀기 위하여 선조들을 세우시어 불쌍한 생활을 거치게 하셨습니다. 1600년 만에 노아를 찾으셨는데, 그분은 불쌍한 분이었습니다. 시대를 역행하는 천적인 사명을 맡은 노아였습니다. 노아에게는 친구도 없었습니다. 동지도 없었습니다. 부인도 사정을 통할 만한 부인이 못되었고, 자식도 의논을 할 수 있는 자식이 못 되었습니다. 그런 자리에서 명령하신 하늘의 음성을 붙들고 참으며 120년 동안 싸웠습니다. 한에 한이 가해진다 할지라도 그 약속에 대한 절개를 지킨 노아였습니다. 40일 홍수심판이 지난 후 하늘의 소원을 성취하여야 할 함이 그 뜻을 알지 못하고 불신의 행동을 저질렀습니다. 우리는 가인의 제단에 동참하고 함의 제단에 동참한 무리입니다.
하늘은 천지의 대성업을 완결짓기 위하여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불러놓고 심정을 기울여 명령하였지만, 하늘의 뜻에 맞게 3제물을 드리지 못하고 실수했던 아브라함이었습니다. 그런 아브라함의 입장을 넘었다고 할 자가 있습니까? 바로에게서 끌어낸 60만 대중, 새로운 천지인 가나안 땅을 향하여 활기차게 나오던 그 이스라엘 민족이 하늘을 배반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배반한 그 무리들을 붙들고 애달픈 심정에 북받쳐 본의 아니게 반석을 두 번 치던 모세였습니다. 그런 모세의 입장을 넘어섰다고 할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그뿐입니까? 4대 선지, 12소선지 등 하늘의 뜻을 받들었던 수많은 선지들의 발을 괴어 주었고, 그들을 품어 주었고, 그들의 울타리가 되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배반한 선조들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선조의 피를 받은 후손이 여러분이 아니라고 누가 장담하겠습니까?
그래도 하늘은 이 불쌍한 민족을 구해 주시기 위하여 4천년을 하루같이 고대하시다가 사탄을 무찌르고 승리의 개가를 부르기 위하여 메시아로서 예수를 이스라엘 민족에게 보내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은 이도 여지없이 배반해 버렸습니다.
우리는 역사적인 예수를 존중하고 있습니다. 역사의 위인인 예수를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것을 원치 않습니다. 우리는 그 시대에 천민이었던 예수를 믿어야 되겠습니다. 몰리고 손가락질 받던 예수, 제사장들이 바알세불을 힘입은 자라고 하던 그 예수를 믿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 길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밖에 아무것도 얻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 (마 21:18-19)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저주하실 수밖에 없었던 예수님의 심정을 알아야 됩니다.
영광스러운 예수를 믿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리나 고통스러운 예수님, 몰리시던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없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시면서도 원수를 대하여 ‘아버지, 저들의 죄를 용서하소서.’ 하시며 복을 빌던 예수님, 아버지의 심정과 뜻을 염려하신 그 예수를 믿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오늘 여기에 무엇 하러 왔습니까? 여기는 불쌍한 예수꾼이 되기 위한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이 사람은 여러분을 몰리던 예수님의 친구로 만들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한 길을 가라고 가르쳐 주어야 할 불쌍한 자리에 서 있는 이 사람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저는 이 민족을 대하여 울부짖은 때가 있었습니다. 하늘을 대하여 원망한 때도 있었습니다. 죄인이 있다 할진대 나 이상 큰 죄인이 없다고 울부짖어도 보았습니다. 남이 모르는 것을 알고 남이 느끼지 못한 것을 느끼고 보니, 기뻐하는 자리에서 가슴을 쳐야 했고 춤추는 자리에서 통곡을 해야 했습니다. 나는 시대적인 죄인인 것을 느껴 보았습니다. 시대적인 배반자인 것을 느껴 보았습니다. 하늘이 이런 나를 필요로 하기에 한결같이 그 길을 걸어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엉클어진 심정이 나를 이끌고 있고 붙들고 있기에 오늘 이런 놀음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때로 책망도 하였습니다. 또한 여러분을 붙들고 통곡도 했고 권고도 했습니다. 그럴 적마다 개인으로서 여러분을 대하지 않았습니다. ‘옛날에 아담을 대하시던 아버지여, 이 시간 나타나시옵소서. 가인을 대하시던 아버지여, 이 시간 나타나시옵소서. 함을 대하시던 아버지여, 나타나시옵소서. 아브라함을 대하시던 아버지여, 모세를 대하시던 아버지여, 예수님을 대하시던 아버지여, 나타나시옵소서.’ 하며 대했습니다. 세상만사를 다 잊더라도 이 일만은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나는 무엇을 하였나요? 나는 무엇을 하였나요? 돌아보기가 부끄러운 자신인 것을 느껴 보았습니까? 눈을 들어 산천초목을 바라보기에 부끄러운 자신인 것을 깨달은 적이 있습니까? 사망에 허덕이는 이 민족을 바라보고 몸 둘 바를 몰라 통곡하고 이들을 대신하여 내가 제물이 되겠다고 허덕여 보았습니까? 그러지 못하였을진대 하늘의 심정은 여러분에게서 떠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배워야 되겠습니다.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가져야 되겠습니다. 모든 것을 내 것으로 삼아야 되겠습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과 심정이 하늘 것이 되는 동시에 역사적인 것이 되어야겠고 시대적인 것이 되어야겠고 미래적인 것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런 우리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게 해봤습니까? 세상이야 어떻게 하든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싶었던 마음을 남기고 가셨습니다. 그 심정을 넘어서서 아버지를 부를 수 있는 자리에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더불어 앞을 바라보고, 아버지와 더불어 뒤를 바라보고 아버지와 더불어 주위를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나라는 존재 의식을 가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는 아버지의 것으로서 사로잡힌 지가 오래 되었습니다. 나는 아버지와 인연된 지가 오래 되었습니다. 그것은 십 년도 아니요, 백년도 아니요, 천년도 아니요, 6천년도 아닙니다. 창세 전부터, 창조의 대계획, 즉 창조이념을 세우던 그때부터 나는 아버지 앞에 붙들린 바 되었습니다. 여러분, 그런 것을 느껴 보았습니까?
나는 아버지의 친구가 되고 싶고 효자가 되고 싶습니다. 천사와 의논하지 않고 하나님의 그리고 그리던 아들이 되고 싶습니다. 아담이 타락하지 않고 아버지와 더불어 의논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타락함으로 슬픔이 생기게 되었으니, 여러분은 ‘나는 아버지와 더불어 슬퍼하고 싶어요. 6천년 동안 슬퍼하신 아버지와 더불어 슬퍼하고 싶습니다.’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은 그런 마음을 가져 보았습니까? 수많은 선조들이 왔다 갔으나 그런 마음을 가졌던 선조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에는 천적인 곡절이, 비통한 사실이 숨겨져 있습니다. 아담은 어떻게 되었으며, 가인과 아벨은 어떻게 되었는가? 또 노아의 가정, 아브라함의 가정, 모세의 가정은 어떻게 되었으며, 요셉가정을 중심한 예수님의 생애는 어떻게 되었는가?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여러분의 피 살이 아버지의 피 살과 하나가 되어, 아버지가 동하면 내가 동하고 아버지가 정하면 내가 정하고 아버지가 기뻐하면 내가 기뻐하고 아버지가 슬퍼하면 내가 슬퍼할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식구 가운데는 그런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생각지도 않는 통곡이 나오고, 생각지도 않는 눈물이 한없이 쏟아지는 것을 체험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그런 아버지와 인연이 된 것입니다. 그런 심정을 갖고 성경을 보아야 압니다. 창세기를 볼 때는 자신이 아담이 되고 해와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서서 축복받던 그 아담 해와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성경을 바로 알게 됩니다.
무슨 학설, 무슨 이념 다 지나가 버립니다. 심정의 세계는 논리적으로 해명될 수 없는 세계입니다. 논리적인 법칙 밑에서 움직이는 하나님이 아니기에 하나님을 절대자라고 합니다. 성경 말씀의 구절 구절에는 절대자의 심정이 얽혀 있습니다. 논리적인 것을 몇천만 배 초월하여 계시는 심정의 아버지시라는 것입니다.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분입니다. 이런 경지에 들어가 하나님과 부자의 인연을 맺고 그 심정을 느낄 수 있는 자리에 들어가야 창세기 1장, 2장이 풀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전에는 모릅니다.
하나님은 역사를 이끌어 오셨고, 오늘 이 시간에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치열한 싸움을 전개하시며 사랑하는 아들딸을 보호하고 계십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자고로 선의 종족을 염려하시며 축복의 방향을 돌리지 않고 오늘의 나를 내일의 상속자로 세우기 위해 수고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역사적인 하나님이요, 시대적인 하나님이요, 미래적인 하나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을 대하여 진정한 아버지라 할 수 있는 자리에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보십시오. 생애에 아무런 무엇을 세워놓지 못하고 하늘 앞에 섰을 때 ‘너는 무엇을 하였느냐?’고 묻게 된다면, 무어라고 대답하겠습니까?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는 우리입니다. 이런 우리를 붙들고 오늘날까지 모를 말씀을 갖고 찾아오신 하늘이었습니다. 이렇게 무지한 무리에게 알 수 있는 내용을 가지고 찾아오셔야 할 하늘인데도 불구하고 모르는 내용을 가지고 찾아오셨던 하늘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비유와 상징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망의 쇠사슬에 매어 있는 사랑하는 아들딸을 친히 풀어줘야 할 하늘인데도 불구하고 직접 풀어줄 수 없는 사정이 있기에, 푸는 비결을 눈짓으로 가르쳐 주시며 찾아 오셨던 하늘이십니다. 성경은 생명과 사망을 가르는 찰나에는 그 기준을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하늘은 그것을 직접 가르쳐 주지 못하시기에 눈짓으로 가르쳐 주셨음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 성경이면 다 된다고 생각하지요? 어느 정도는 됩니다. 그러나 하늘은 사탄 앞에 기필코 승리의 왕자를 세우고자 하십니다. 심정을 통하여 교시하여 가지고, 심정을 통하여 사탄을 굴복시킬 수 있는 왕자를 만들고 싶어하신다는 것입니다. 가르쳐 줄 수 없는 자리에서 타락하여 사탄에게 붙들렸기 때문에, 그 사탄을 끊고 나오는 방법도 가르쳐 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암호로써 가르쳐 주는 과정이 신앙노정입니다.
여러분은 몰랐습니다. 무지한 인간들을 찾아오는 데 있어서 알 수 있는 내용을 갖고 찾아오지 못하고, 묵시로써 모를 내용을 갖고 찾아 나온 것이 하나님의 입장인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올바른 마음으로 하늘을 바라보아 그 배후에 숨겨진 뜻을 알아야 합니다. 내 몸은 이리로 가려 했지만 하늘은 저리 가라 하는 것이 신앙의 노정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이 세계는 싸움터입니다. 평상시에는 마라톤 선수에게 달리는 비법을 가르쳐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최후의 시합을 할 때에는 가르쳐 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늘도 승리의 왕자를 찾아 나오는 데 있어서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전부 다 가르쳐 줄 수 없는 것입니다. 무지한 우리 인간을 대하여 알 수 없는 시늉을 하면서 가라고 재촉했던 하늘의 심정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자고 있는 그 시간에 하늘이 여러분을 몇 번이나 찾아오셨는지 알아요? 나 한 사람을 찾아 세우기 위하여 몇백 번, 몇천 번을 시늉으로 혹은 음성으로, 비유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몰랐습니다. 6천년 동안이나 몰랐어요. 이제 우리는 그러한 아버지를 알아야 되겠습니다. 나 한 자체를 찾기 위하여 하늘이 이렇게 이렇게 수고하셨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도 자식들을 길러 봤지요? 사랑하는 자식이 원수의 품에서 처참하게 유린당하고 있는 것을 보는 부모의 심정은 어떠할 것 같아요? 기가 막힐 것입니다. 자식을 대한 여러분의 심정이 그러하다면 그 심정은 어디서 나왔겠습니까? 출처 없이 나올 수 있겠어요? 하나님이 그러하시다는 것입니다. 타락한 부모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하나님께서는 어떠하시겠습니까?
그러기에 여러분, 우리 아버지를 알아야 되겠습니다. 어떠한 아버지냐? 역사노정에서 제일 비참하게 걸어오신 아버지이심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역사노정에 있었던 어떠한 참사 이상의 참사를 당해 나오신 아버지이심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슬픔과 고통과 절망과 죽음의 울타리에서 허덕이는 자식을 바라볼 때 ‘너희들 잘하는구나.’ 하는 하늘이 아니었습니다. 슬픔에 사무친 자식을 구하기 위해 더 슬픈 자리에 계셨으며, 고통의 자리에서 신음하는 자식을 구하기 위해 더 고통스런 입장에 계셨던 아버지셨습니다. 또한 죽음으로 사라지는 그 아들을 구하기 위해 죽음의 자리도 개의치 않은 아버지이신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이제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길을 가다 허리가 굽은 불쌍한 노인을 보게 되면 ‘내 아버지도 저런 모양으로 찾아오셨겠구나.’ 하는 생각을 해야 됩니다. 또 부르튼 노동자의 손을 보게 될 때도 ‘아들을 찾으려는 내 아버지는 저 이상의 모양을 하셨겠구나.’ 불쌍한 거지를 보게 될 때도 ‘이 거지는 거지가 아니라 내 아버지구나.’ 하며 머리 숙일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아시겠어요? 보잘것없고 가련한 인생이라도 거기에는 하나님의 심정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알고, 그가 내 아버지라는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고 자기의 처지와 자기의 위신을 초월하여 행동할 수 있어야만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봉독한 성경 가운데도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供饋)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마 25 :37-40)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앞서 말씀드린 그 경지에 도달해야만 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심정이 통하면 원수가 없습니다. 빈부귀천도 없습니다. 천한 길을 거쳐 찾아오신 아버지 앞에 내 위신과 체면을 잊어버리고 머리 숙여 흐느껴 울 수 있는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이 땅 위의 어느 곳을 가더라도 하나님의 아들딸입니다.
알고 보니 예수님의 생애가 이러했습니다. 이 말은 추상적인 말이 아닙니다. 사실적인 말입니다. 비단 이 사회에서 살고 있는 불쌍한 사람들만이 아니라 국가나 민족 앞에 역도(逆徒)로 몰려 철창에 갇히거나 교수대에서 이슬같이 사라지는 사형수를 대해서도 하늘은 그러한 입장에서 대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하늘과 끊어질 수 없는 천적인 인연이 있기에, 자신이 당하는 고통도 자신의 고통이 아님을 알아야 됩니다. 하늘은 이런 길을 거쳐오십니다. 나는 한때 사형수와 함께 감옥에 있은 적이 있습니다. 나는 그때 그를 붙들고 한없이 울었습니다. 내 아버지께서는 이런 아들딸을 붙들고 이 시간도 통곡하고 계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습니다. 그런 마음을 억제하려야 억제할 수 없어 폭발시키는 사람, 그런 심정을 가진 사람이 천성의 길을 가는 아들딸입니다.
이 길은 죽음의 길입니다. 이 길을 가려면 하늘을 배반하는 무리와 생명을 각오하고서라도 싸워야 합니다. 그런 심정의 소유자가 교회에 한두 명만 있더라도 나는 그 편이 되겠다고 나선 사람이 몰리고 있는 통일교인입니다. 통일교회를 이끌고 가는 나도 몰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은 이 시간도 그들과 더불어 눈물짓고 있습니다. 이런 자를 배반한 자는 아버지를 배반한 자요, 아버지를 배반한 자니 용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살아 있는 사탄입니다. 그들이 하늘의 최후의 판결을 받을 날, 저주받을 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알았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찾아야 되겠고 붙들어야 되겠습니다. 눈을 들어 산을 볼 때나, 마을을 볼 때나, 도시를 볼 때나 우리는 역사노정을 걸어오신 아버지의 모습을 찾아야 되겠습니다. 슬픔의 길, 골고다의 길을 개의치 않고 싸움의 일로를 거쳐 나오신 그 아버지를 우리가 모셔야 되겠습니다. ‘죽더라도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요, 어떠한 고통을 당하더라도 그분은 나의 아버지, 천정으로 맺어진 이 인연을 누가 끊을소냐!’ 하며 이 길을 나서는 무리가 되어야 합니다. 하늘은 이런 무리를 찾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이 이 삼천만 민족을 짊어지고 나가야 할 젊은 청년 남녀들의 가슴에서 폭발되게 되면 이 민족은 삽니다. 그렇게 되면 어떠한 민족도 이 민족을 지배하지 못할 것입니다. 국가의 정책이나, 또한 야망을 가진 어떤 개인이나 이념이나 주의도 꼼짝하지 못합니다.
뒷골목을 걸을 적마다 앞길을 염려하시어 자기의 위신도 잃어버린 채 우리의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애달파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여러분은 상상이라도 해 보았습니까? 이렇게 나오시기를 하루 이틀도 아닌 6천년이었다는 것입니다. 백년도 채 못 되는 인간의 일평생도 고해라 하거늘, 6천년 동안이나 고해의 노정을 걸어오신 아버지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해 볼 때, 나는 무엇을 하였나요? 돌이켜 보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다시 한번 새로운 각오를 해야 되겠습니다. 아버지는 나만의 아버지인 줄 알지만, 아닙니다. 온 만민의 아버지입니다. 원수까지도 아들 삼기 위하여 싸워 나오신 아버지입니다. 그런 아버지입니다, 그런 아버지. 그런 아버지를 대해 그저 ‘아버지!’ 하니 참으로 뻔뻔스럽습니다. 얼굴을 들 수 없는 거예요. 저는 그런 것을 많이 느낍니다. 나를 보고 선생이라고 해서 여러분들이 인사를 하지만 그것 받기 꺼려합니다. 진실을 유린할까봐 입니다. 진실을 유린하는 자는 천벌을 받습니다. 그런 자는 이 시간에도 움직이고 계시는 하나님을 밟는 자요, 역사적인 하나님을 밟는 자입니다. 미래의 소망을 유린하는 자인 것입니다. 우리는 가면 갈수록, 가면 갈수록 더 황공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 살았다면 몇 해를 살았어요? 믿었다면 몇 해를 믿었어요? 하늘은 6천년 동안이나 배반자들을 붙들고 나오셨고 믿지 못할 자들을 믿어 주시려 하셨습니다. 믿지 못할 자들을 믿을 수 있는 자들 이상으로 믿어 주려고 하신 하늘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믿었어요? 불과 몇 년, 몇 년 믿어 가지고 아버지와 비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이것을 보충할 것이냐? 심정으로 보충해야 됩니다. ‘생명을 갖고 세상에 나온 그날부터 지금까지 그리워한 자가 있다 할진대 아버지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자가 있다 할진대 아버지밖에 없습니다.’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버지와 같은 심정을 가지고 있다 할진대 자식이 문제가 아니요, 처자가 문제가 아니요, 부모가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과거에는 그러한 심정을 가진 아들의 입장에 서지 못했지만, 이제라도 그러한 심정을 가지고 역사적인 심정을 붙들고 나오신 아버지 앞에 ‘아버지’ 하면 ‘오냐, 내 아들아.’ 하시며 심정을 기울여 붙들어 주실 수 있는 관계를 가져야 될 것입니다. 그런 여러분은 역사적인 아버지의 아들딸들이요, 시대적인 아버지의 아들딸들인 것입니다.
하늘은 여러분을 대해 원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아버지의 심정을 알고 ‘나를 위하여 이렇게 수고하신 것을 알았으니, 아버지와 더불어 죽든지 살든지 하겠습니다.’ 한다면, 아버지께서는 여러분이 지금까지 한 모든 잘못을 잊어버리십니다. 지금까지 이루어 놓은 것이 없다 하더라도 품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같이 아무 공적이 없는 인간들을 응당 가인과 같이 저주받아야 할 입장에 놓아야 할 것이요, 함과 같은 입장에 응당 놓아야 할 것이요, 쓰러진 모세와 같은 자리에 놓아야 할 것이요, 이스라엘 민족과 같이 심판을 받는 자리에 세워야 할 것이로되, 하늘은 그런 여러분들을 불러다가 타락하지 않은 본연의 아담과 같은 입장, 아니 그 이상의 자리에 놓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제물을 드리던 가인 아벨 이상의 자리에 놓으시겠다는 것이요, 120년 동안 수고하여 목적을 성사한 노아 이상의 자리에 놓으시겠다는 것입니다. 60만 대중을 이끌고 하나님의 뜻을 세웠던 모세 이상의 자리, 가나안 복지에서 하나님을 즐겁게 모셨던 그 백성 이상의 자리에 놓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셨다 가신 후 사도들이 바라는 소망의 자리 이상의 자리에 우리를 놓으시겠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성경에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한다고 하였는데, 그 왕의 이름까지 우리에게 부여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황공한 예물과 은사를 가지고 찾아오시는 하늘인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찾아오시는 데는 어떠한 길로 오시느냐? 인류의 심정의 밭으로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하늘은 6천년 전부터 그렇게 찾아오고 계십니다. 아담가정에서부터 노아를 거쳐, 또 아브라함과 이스라엘 민족을 거쳐 찾아오셨습니다. 예수께서 오셨다 가신 후 민족을 넘고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찾아오고 계십니다.
무슨 예물을 갖고 찾아오시느냐? 인류의 메시아요, 하늘의 독생자요, 하늘의 황태자인 예수님의 신부가 될 수 있는 영광을 우리에게 허락하시기 위해 찾아오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같은 입장이 될 수 있는 영광스런 왕관을 부여하기 위해 찾아오신다는 것입니다.
오시는 데는 세계를 다 거치며 찾아오십니다. 우리는 몰랐지만 한국도 몇 번이나 지나가셨을 것입니다. 개인으로부터 가정 사회 국가 세계를 찾아오신다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기준, 사회적인 기준, 국가적인 기준, 세계적인 기준으로 찾아오신 것이 6천년입니다. 이렇게 떠나온 걸음을 돌이킬 수 없는 슬픈 하나님의 노정입니다.
이런 노정에서도 아들딸을 찾아 선물을 주고 가셔야 할 하나님, 그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자 어디에 있습니까? 예물을 품고 찾아오신 그분을 모신 자가 있습니까? 오늘 여러분이 여기에 모여온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예물을 바라고 모여온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이냐? 이것을 찾아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한국에도 찾아왔거늘 찾아보라 이겁니다. 잘난 사람에게서도 찾아보고 못난 사람에게서도 찾아보고 거지에게서도 찾아보고 죽은 이들에게서도 찾아봐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지금 때를 끝날이라 합니다. 찾아오시는 아버지를 모실 때가 다 됐다는 것입니다. 찾아오시는 데는 주먹구구식으로 찾아오시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마 7:7)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찾았다 하는 자리에서 또 찾아야 되겠습니다.
주님이 오실 때 세상은 면양과 산양으로 갈라진다고 하였습니다.(마 25:21-33) 이와 같이 세계는 이미 2대 진영으로 갈라져 있습니다. 여러분 개인으로부터 가정, 사회, 국가, 세계에 이르기까지 갈라져 있다는 것입니다. 부정 못하지요? 우리는 마음의 친구를 찾아야 되겠습니다. 심정의 친구를 찾아야 되겠습니다. 만약 27억의 세상 사람을 모두 친구로 만드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27억과 더불어 살 수 있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 친구의 입장에서 27억 인류를 대하여 무엇을 하자 할 때, 그들이 모두 움직이면 그는 27억 인류를 대표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겠어요?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를 찾는 것입니다. ‘네 마음엔 맞지만 내 마음엔 안 맞으니 나는 싫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아버지를 찾으려면 그러면 안 됩니다.
여러분! 이 한 교회도 27억 인류의 축소체입니다. 그러니 이 사람이 마음으로 찾고 있는 아버지도 내가 찾아야 되고 저 사람이 마음으로 소원하는 그 아버지도 내가 찾아야 됩니다. 그 사람의 마음을 내가 찾을 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아버지를 찾기 전에 먼저 상대방의 마음을 찾아 가질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앞으로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이념은 무슨 이념이냐? 그것은 상대방의 마음을 빼앗아 가질 수 있는 이념입니다. 그러한 이념시대가 지상천국의 시대입니다. 주님은 그러한 일을 하기 위해서 오십니다. 내 마음과 내 심정을 몽땅 빼앗기고도 감사할 수 있는 곳이 천국입니다.
세계가 하나에서 가인과 아벨형 두 쪽으로 갈라졌으니, 한쪽은 떼어버려야 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내 마음에서도 벌어지니, 선을 지향하는 양심은 내 것이다 하는 입장이 되어야 됩니다. 가정을 두고 볼 때도 더 선한 사람이 내 형제, 사회나 국가를 두고 볼 때도 그런 사람이 우리의 식구, 우리의 종족, 우리의 것, 우리의 동포라는 감정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국경을 넘어 이것을 찾을 줄 아는 사람이 되지 않고는 세계를 거쳐 넘어 오시는 그 아버지를 모시지 못하고 그분이 갖고 오시는 예물도 차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십니까? 만민의 의논의 상대자요, 만민의 보호자요, 만민의 비밀을 맡아 가지고 지켜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은 심중으로 의논하고 싶은 그분을 만나야 됩니다. 진정으로 애달픈 그 마음을 전부 털어놓고 의논하고 싶은 그분을 만나야 됩니다. 그러한 친구를 가져야 됩니다. 자기의 생명의 고충도 잊어버리고 보호해 주는 친구, 네 마음의 모든 비밀을 맡아 주마 할 수 있는 동지를 이 땅 위에서 찾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 사람 가졌어요?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땅을 대하여 이러한 아들딸을 찾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오시는 아버지를 모시고자 한다면 일방적으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6천년 동안 걸어 나오신 것은 그와 같은 모습들을 세계에 남기기 위해서입니다. 하늘이 목적하는 세계에 그들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두드리면서 오시는 아버지였기에 이 사람의 마음을 수습하고 저 사람의 마음을 수습하여 연결시키는 일을 해 나오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세계를 하나로 움직일 수 있는 이념을 가지고 오시는 분이 재림주라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찾아야 되겠습니다. 오시는 아버지를 찾아야 되겠고 여러분의 마음 가운데 와 계시는 아버지를 찾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도 내가 네 안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진정한 마음으로 그분을 모실 줄 알고, 그분과 부자의 관계를 맺어, 내가 죽더라도 그 인연을 끊을 수 없다는 사람은 하늘의 예물을 많이 받는 은사의 자리에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화평하게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 했습니다. 이 사람도 좋고 저 사람도 좋고 사방으로 좋은 인연을 맺을 수 있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천국에 갈 수 있는 결정은 어디서 하느냐? 내가 기도하고 뭐 어떻게 해서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끼리끼리 결정하는 것입니다. 천국도 우리 끼리끼리, 지옥도 우리 끼리끼리 결정하는 것입니다. 심판이 다른 데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무엇을 할 것인가? 우는 자의 어머니가 되고, 고통받는 자의 아버지가 되고, 슬픈 자의 어버이가 되어야 합니다. 하늘이 이 마음을 갖고 나오셨으니, 여러분들도 생명의 어떠한 느낌이나 아버지의 심정을 체휼한 바가 있거든, 이 민족을 위하여 우는 무리가 되고, 동정하는 무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을 친구로 모셔서 아버지를 대신하여 위로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런 사람은 아버지의 역사적인 복을 받을 자요, 하늘이 축복할 수 있으며, 또 그런 사람에겐 허락한 축복을 넘겨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희의 잘나고 못난 것이 아버지 보시기에는 종이 한 장의 차이도 없는 것을 저희가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심정을 가진 세상의 부모도 못난 자식을 더 불쌍히 여기거든 천정을 가진 하늘이야 더욱 그러하다는 것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보편적으로 볼 때 불쌍한 자를 동정하는 사람이 하늘에 가까운 사람이요, 몰리는 자를 위하여 복을 빌어 주는 사람이 하늘에 가까운 사람인 것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새로운 역사는 몰리는 무리를 통하여 이루어져 나오고 있는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습니다.
마음의 예물을 받고 이것을 번식시키기 위하여 허덕인 자들은 하나님의 많은 축복을 받았사옵니다. 금 다섯 달란트 받은 자도 그러하였고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러하였으나,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그러하지 못하여 저주받은 것을 저희들은 성경을 통해 보았사옵니다.
아버지, 제게만 금이 있는 것이 아니옵고 어느 곳에든지 있다는 것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어느 누구에게나 묻혀 있는 아버지의 그 심정은 억천만금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귀한 것임을 아오니, 저희는 아버지의 심정을 점령하는 주인공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생명줄에 연결되어 ‘너는 승리하였노라.’는 하늘의 축복을 받아야만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승리의 영광권 내에서 호산나를 부를 수 있다는 사실을 저희는 알았사옵니다. 지난날의 부족함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행치 못한 저희였으나 심정적으로 하늘과 하나되는 자가 있다 할진대 그는 본연의 동산을 차지할 수 있고 천적인 전권을 상속할 수 있으며, 하늘의 예물을 받을 수 있음을 알았사옵니다.
이제 준비하는 데는 나 한 자체의 기도에서 멈출 것이 아니라 머물고 있는 환경에서 형제와 형제 사이에 엉클어진 그 마음을 굴복시켜야겠습니다. 하늘의 심정이 나에게서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는 인연을 맺을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하늘과 생사를 같이하고자 하는 무리들에게 하늘이 같이한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아버지께서 그러한 역사노정을 거쳐오셨고 심정의 인연을 세워 종적으로 역사해 오셨다 할진대 저희들이 횡적으로 심정의 인연을 세워 아버지를 찬양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 드린 말씀이 이들의 생명의 부활에 도움이 되고, 흑암의 세계에서 선과 악을 분별하고, 하늘을 향해 늠름하게 나아갈 수 있는 용자의 모습과 인격을 갖추는 데 도움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올 때, 주의 이름으로써 기도하였사옵나이다. 아멘.
오늘 여기는 성화청년회 창립 5주년을 기념하는 자리인데, 이제 5년이 넘는다는 것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창조 5일째를 지나고 인간 창조의 6일째로 접어드는 순간에 해당한다 하겠습니다.
청년들은 옥동자와 옥동녀에 해당하는 기간에 있는 것입니다. 성화청년회의 성화라는 글자를 살펴보면, 성(成)은 완성(完成)을 의미하고 화(和)는 화동(和動)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서로 화(和)해서 완성해 간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분은 말씀의 과정을 통과해야 됩니다. 인격적으로 하나님이 의논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충절의 대표인 예수님의 인격을 본받아야 합니다. 일일이 의논하지 않고도 심정적(사랑)으로 통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무엇보다도 화동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전후 상하 좌우로 화할 수 있는 인격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축복의 실체가 되는 것이 표준입니다. 예수님도 청년시절에 뜻의 일선에서 일을 하셨습니다. 30세 전후의 청년시절은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시기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선생님의 젊음에 여러분의 젊은 열정을 가담(플러스)시켜 가지고 일해야만 합니다. 재창조 위업에 가담해 가지고 영광의 조건을 갖출 수 있는 것은 이 한때밖에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철두철미하게 무엇을 느끼어야 하느냐? ‘나는 너희들과 같지 않다’는 심정이 갖추어져야 합니다. ‘너희는 해내지 못하느냐? 나는 할 수 있다!’ 이런 정신을 항상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나는 너희와 같지 않다. 역사적으로도 시대적으로도 평면적으로도 어디를 보아서도 그렇다.’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어려운 일에는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심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그 움직임이 사탄세계의 성화(걱정)거리가 되게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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