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5:11-32

<기 도(Ⅰ)>

사망에서 허덕이던 저희들이 아버님이 그리워 이날 다시 모였사옵니다. 이제 저희의 마음이 아버지의 마음에 머물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저희의 몸 마음이 아버지의 것으로 움직일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께서는 무한한 수고를 개의치 아니하시고 시대 시대와 세기 세기를 거쳐오면서 우리 선조들과 동반하시기에 얼마나 애쓰셨사오며, 선조들의 가는 길을 개척해 주시기에 얼마나 수고로우셨사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희의 선조들은 하늘의 수고의 공적을 유린하였사옵고, 염려의 심정을 품게 한 면목없는 모습들이었음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선조들이 저끄른 죄상이 천추의 한으로 남은 것을 알았사옵고, 한스러운 타락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6천년 동안 수많은 인류를 도탄 중에 몰아넣은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님의 심정을 배반하고 서럽게 했던 역사적인 선조들의 저끄러진 마음을 저희들이 다시 상속받을까봐 두렵사옵니다. 타락으로 말미암은 한의 고개를 넘어야 하고 선조들이 남긴 한을 밟고 올라서지 않으면 안 될 끝날에 처해 있는 저희들이오니, 이제 저희의 마음이 아버지의 마음에 사로잡히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저희의 몸이 아버지의 몸을 대신할 수 있는 영광의 한 시간을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누가 아버지의 심정에 화하여 눈물 흘리며 호소할 자가 있사오며, 아버지의 사정을 대신하여 싸울 자가 있사오리까?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은 많사옵고 움직이고 있는 인류의 형태는 많은 모양을 갖추고 있사오되, 아버지의 가슴에 품고 있는 사정과 심정을 놓고 의논의 상대가 될 수 있는 한 곳과 한 지역과 한 사람이 없어 슬픔과 탄식의 역사를 거듭해 오시는 아버지이신 것을 알고 있는 자가 적사옵니다. 이런 서글프고 분통한 아버지의 내적 심정을 저희들이 알고 있사오니, 오늘 마음을 풀어 놓고 사정을 털어놓고 모든 것을 아버지 것으로 접붙일 수 있는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저희의 일체를 용납치 않는 이 한 시간이 되옵고, 오로지 아버지와 접붙인 자리에서 즐길 수 있는 모습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이 시간 충심으로 아버지 앞에 호소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이날 불초한 모습들이 천정을 흠모하며 무릎을 연하였사옵니다. 저희의 불쌍한 사정을 아시는 나의 아버지, 처참한 환경에서 동반하여 싸워주신 아버지, 오늘 저희 마음을 모두어 아버지 앞에 부복하였사오니 받아 주시옵소서. 저희는 아버님 것이 되지 않으면 안 되고 아버지 앞에 주관 당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알고서 저희의 정성과 심정을 다 들여 당신을 모시기 위하여 다년간 수고의 행로도 개의치 않고 나왔사옵고, 어렵고 한스러운 고빗길도 참고 넘어왔사옵니다.

이러한 길을 참아 나온 것은 아버지와의 인연의 역사를 남기기 위함이었사옵니다. 오늘 이 자리까지 나온 저희들, 아버지께서는 찾는 자를 무시하지 아니하셨고, 원수를 배척하지 않으셨사옵고, 구하는 자를 친구의 입장에 세우시기 위하여 수고하신 것을 알았사옵니다. 아버님, 오늘 저희들은 마음을 다하여 구하고 싶사옵고, 정성을 다하여 찾고 싶사옵고, 모든 것을 다 드려 아버지와 인연 맺고 싶사오니 아버님, 긍휼히 보시옵소서. 구하는 바의 뜻을 이루어 주시옵고, 찾는 바의 뜻을 이루어 주시옵고, 문을 두드리는 사정을 들으시어서 이루어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제 부족한 저희들이 아버지 앞에 고대하는 것이 있다 할진대는 아버지의 마음과 더불어 즐길 수 있는 한 시간을 갖는 것이옵니다. 그것이 저희의 전체 요구요, 저희의 전재산이며, 저희의 전생명인 것을 알고 있사오니 아버님, 이 시간 모인 당신의 아들딸들을 긍휼히 보아 주시옵소서.

아버님, 저희들이 가야 할 생명의 일로를 세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날까지 어려운 가운데서도 저희를 견디게 하셨사옵고, 핍박 중에도 참게 하였사오며, 쓰러지는 자리에서도 한을 남기지 않게 하기 위하여 역사하시며 붙들어 주시기에 수고하신 아버지이신 줄 아옵니다. 오늘 자기의 정성과 심정을 다시 한번 아버지 앞에 바치기 위하여 모인 당신의 아들딸들이 많사오니 아버지, 이들의 마음에 친히 운행하여 주셔야 되겠사옵니다. 이제 이들의 심정 위에 아버지께서 다시 운행해 주셔야 되겠고, 이들의 생명에 하늘의 생명이 접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심정에 사무친 원한을 품고 이제 원수를 대하여 싸워 나가지 않으면 안 될 끝날의 사명을 해야 할 때가 되었사오니, 아버지시여, 당신의 힘을 나타내 주시옵고, 생명의 권한을 가지고 나타나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아버지의 원한을 풀어 드리고자 할진대 사랑의 원칙을 갖추어 나아가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생명의 주체 앞에 나서서 원수를 맞아 싸울 수 있는 용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복귀된 동산에서 이 땅 위의 뭇 생명들이 그러한 자신을 바라보고 살아 나갈 수 있는 생명의 조건을 갖춘 자녀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오늘날까지 믿노라 하였던 자신의 신앙을 회개할 수 있는 마음, 자신이 움직인 것을 놓고 반성하고 회개할 수 있는 마음, 자신이 바라보던 소망을 놓고 뉘우칠 수 있는 마음, 스스로가 찾고 있던 내적 심정을 비웃을 수 있는 마음을 갖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부정하고 아버지 것으로 전부를 인연 맺고 아버지를 부를 수 있는 영광의 자리로 저희를 인도하여 주시옵기를 나의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님, 삼천리반도를 긍휼히 보시옵소서. 이 땅은 시대를 거쳐오면서 수많은 민족 앞에 유린당한 땅이요, 원수들에게 밟히던 땅이었사옵니다. 이 땅의 삼천만 민족은 피어린 역사의 한을 품고 있음을 저희들이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지, 이 민족의 심정 위에 당신의 심정이 연하게 하여 주시옵고, 이 민족의 사정 위에 당신의 사정이 연하게 하여 주시옵고, 이 민족이 소망하는 것이 당신이 소망하는 것과 연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옵소서. 저희로 하여금 한스러운 과거를 원망하는 자리에 머물지 말게 하여 주시옵고, 저희들 앞에 다가오는 하늘의 때를 맞기 위하여 염려하여 호소할 수 있는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님이시여, 남겨진 천적인 역사가 있사와 수많은 민족을 대신하여 이 민족을 찾아오신 아버님의 발걸음이 탄식과 서러움으로 인해 돌려지는 날이 없게 하여 주셔서, 슬픔의 한을 남기는 이 땅이 되지 말고, 그러한 이 민족이 되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잠들어 있는 27억 인류는 아버지께서 각자의 마음에 등불을 켜서 행복을 가져올 수 있는 한때를 준비하고 있음을 알지 못하고 있사옵니다. 이 인류를 깨우쳐야 할 사명이 저희에게 있사옵고, 인류의 복잡한 사정을 타개하여 새로운 이상천국을 건설해야 할 사명이, 복지 건설의 사명이 저희에게 있음을 알고 있사옵니다. 오늘의 이 불초불비하고 부족한 모습들이 무릎을 꿇고 황공하고 죄송한 마음에 어리어 있사오니, 이 시간 호소하는 심정을 통하여 천상의 놀라우신 은사를 내려 주시옵소서. 아버님이 현현하셔서 그러한 심정이 아닌 것은 일체 제거시키고 저희들의 모든 것을 아버지의 것으로 인연을 맺어 아버지께서 저희를 대하여 당신의 후계자라고 인정할 수 있는 이 시간 되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님, 서울에 남아 있는 식구들과 지방에서 모여든 식구들이 아버지 앞에 새로운 제단을 쌓고자 하여 모였사오니, 당신의 어린 아들딸들 긍휼히 보시옵소서. 권고하고 위로할 말씀이 많사오나 말하지 못하는 사정을 알게 하소서. 슬플 때도 하늘의 뜻을 위하여, 외로울 때도 이 한 뜻을 위하여, 핍박받을 때도 이 한 뜻을 위하여, 낙심할 때도 이 한 뜻을 위하여 이리 쫓기고 저리 몰리는 서러운 심정을 아버지 앞에 아뢸 수밖에 없는 사정을 가진 아들딸들이 이 자리에 모였사옵니다.

이날 마음을 털어놓고 아버님과 의논하고, 모든 사정을 아버님 앞에 털어놓고 타협할 수 있게 하옵소서. 어려웠던 사정을 아버지 앞에 다 풀어 놓고 아버님이 기뻐하실 수 있는 모습이 되어 ‘내 죽더라도 이 길을 위하여 하나의 깨끗한 제물이 되리다.’ 하고 다시 맹세할 수 있는 이 시간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말로써만 하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정성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줄 아옵니다. 뜻에 사무쳐 하늘을 위하여 노래할 줄 아는 그 마음이 그립사옵고, 모든 것 다 잊어버리고 하늘을 위하여 정신없이 허덕이는 그 모습이 그립사옵니다. 그와 같은 그리움의 심정을 가지고 아버님의 영광을 노래할 수 있는 한 때와 한 자리가 있다 할진대 황공한 심정으로 머리 숙이고자 하오니, 저희들의 이 간절한 뜻과 간절한 심정을 아시어 이 시간 찾아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어떤 길을 지나가 보지 않은 사람은 그 길을 알 수 없고, 체험하지 않은 자의 말씀은 생명이 없음을 알고 있사옵니다. 오늘날 이 민족을 불쌍한 자리에 몰아넣는 것도 아버지의 불쌍한 사정을 알게 함이었음을 저희들은 아옵니다. 외로운 자리에 계시고 상심한 자리에 계실 수밖에 없는 아버지의 사정을 알고 있사오며, 저희를 핍박의 자리에 내놓을 수밖에 없는 아버지의 원통하고 통분한 사정을 알고 있사옵니다.

오늘 저희의 마음이 아버지의 것이 되게 아버지께서 저희의 마음에 찾아와 주시옵소서. 저희의 심정에 아버지를 모시고 아버지와 더불어 울 수 있는 하나의 모습들이 되기 원하여 이 자리까지 나왔사옵니다. 과거가 후회되는 것은 아버지를 안 연고요, 과거의 일이 원통하게 느껴지는 것도 아버지를 안 연고였사옵고, 저희에게 상심함이 있는 것도 하늘을 안 연고였사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이래도 저희를 취해야 하고 저래도 저희를 용납해야 하는 입장에 계시고, 저희는 복귀의 한을 남긴 그 역사를 원망해야 할 입장에 처해 있사옵니다. 이러한 자신임을 깨달아 오늘도 내일도 허덕임의 생활에서 그칠 줄 모르고 하늘만을 붙들고 나갈 수 있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께서는 그러한 저희의 사정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신 줄 아오니, 이 한 날 모든 것을 잊고 다시 자신의 마음을 묶어 아버지 존전에 바쳐 드리는 생축의 제물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날 지방에 널리어 엎드려 호소하는 당신의 아들딸들의 마음에 새로운 생명의 선물을 내려 주시옵고 그들을 황무지와 같은 곳에 보내어 생명의 등불을 켜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빛과 영광의 등불로 나타날 수 있는 경배의 한 시간으로 받아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각기 사정이 다를지라도 아버님의 역사로써 같은 사정을 갖게 하여 주시옵고, 심정이 다를지라도 아버지의 역사로써 같은 심정을 갖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 이 한 시간 운행하시어서 아버지 것 외에 모든 것을 제거하여 주시옵고, 삼위신이 기뻐하는 한 시간으로 갖추어 드릴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기 도(Ⅱ)>

아버님, 저희가 아뢰기 전에 저희의 심정을 아시옵니다. 이 한 시간만은 아버지께서 친히 임재하시는 시간인 줄 알고 있사옵니다. 하늘이 저희의 모든 것을 주목하고 있는 시간인 것을 저희들이 느끼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수고로운 역사 과정을 거치신 아버님, 오늘 저희 목전에 나타나시어서 새로운 말씀으로 단장시켜 주시옵소서. 새로운 심정으로 저희들을 대하여 주시옵소서. 불충스러운 모든 것을 일소해 버리고 어린애와 같은 마음으로 저희의 모든 것을 이 한 시간 아버지 존전에 드리고자 하옵니다. 세상에서 물든 일체의 의식이나 주의나 관념을 아버지 앞에 내어 놓고 어린애와 같은 마음,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지니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 빚으시는 대로 다시 빚어질 수 있는 겸손한 마음을 갖추어 아버지 앞에 드리고자 하오니 받아 주시옵소서. 삼위신이 운행하여 주시옵소서.

사탄적인 요소를 갖추어 가지고 하늘 앞에 반대적인 요소로 남아질 것은, 아버지, 일체 용납치 마시옵소서. 승리의 방패를 갖추어, 사탄이 침범하는 이 시간이 되지 말게 하옵소서.

천군천사 옹위하는 가운데 환희의 심정으로 이 한 시간 경배드리는 이 자리가 전체의 생명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하나의 복의 기관적인 제단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니다.

모든 것 맡기었사옵니다. 저희의 가진 모든 주의와 심정을 아버지 앞에 털어놓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저희의 모든 것이 아버지 것으로 바꾸어질 수 있는 이 한 시간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였사옵니다. 아멘.

<기 도(Ⅲ)>

이 시간 고개 숙인 당신의 아들딸들, 긍휼히 보시옵소서. 여기에서 누가 지도자가 되며, 누가 하늘의 말씀을 대행하오리까? 이들은 아버님 외에 어느 누구도 나타나는 것을 원치 않고 있사오니, 아버님께서 친히 나타나시옵소서. 심정을 통하여 하늘을 체험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아니 느끼려야 아니 느낄 수 없는 아버지의 사정을 체휼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앞에 회개하지 않으려야 회개하지 않을 수 없는 심정을 지니게 아버님께서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사람 사람끼리 모이는 곳은 풀려다가 도리어 엉클어지는 일이 벌어지지만, 하늘을 중심삼고 모이는 곳은 마음에 응어리졌던 것이 풀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사옵니다. 이제 죄악의 종족으로 말미암아 엉클어졌던 모든 것이 근본적으로 풀어질 수 있는 탕감의 역사, 회개의 역사, 감동의 역사로 말미암아 저희 자신을 반성하고, 과거를 뉘우치며 새로운 날을 동경할 수 있는 사무친 마음을 일으켜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그 마음을 붙들어 자아를 다시 한번 회개할 수 있는 재창조의 역사가 일어나게 아버지, 이 시간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제 말씀을 전하고자 하오니 이 시간 모인 전체 위에 아버지의 사랑과 보호의 손길을 펴 주시옵소서. 전하는 자의 마음이나 받는 자의 마음이 심정의 귀일점에서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오늘날 저희들은 몸만의 행복을 고대하지 않사옵고 마음에만 취하여 사는 것도 원치 않사오며, 오직 심정을 걸어 놓고 영원히 살 수 있는 동산을 원하옵니다. 생활 가운데에서도 심정적인 인연의 한 조건이 각자의 심중 심중으로부터 폭발되어 심정 깊이 내재할 수 있는 인연이 맺어질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시여,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 지금까지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딸들에게 전하여 준 말씀도 많사옵니다. 이 말씀을 중심삼고 규합하여 책임과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저희가 나아가야 할 길이오니 아버지, 함께하여 주시옵고 그 나아가는 길이 막히지 말게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아버님의 내적인 심정에 합당한 결실을 거두어들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면 받은 바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하늘 앞에 후회를 남기는 아들딸들이 되지 않을까 두려움을 느끼는 자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날은 거룩한 날이오니 만민 위에 축복의 은사를 내려 주시옵소서. 뜻을 대신하여 심정을 붙안고 하늘 앞에 호소하며 숨은 제단을 쌓고 기도하는 아들딸들이 많은 것을 알고 있사오니 그들에게도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천상의 외로운 심정을 품고 허덕이고 있는 무리, 탕감적인 해원의 한 날을 바라고 있는 영계의 수많은 영인까지라도 저희와 관련이 있사오니 아버지시여, 그들의 일도 저희로 말미암아 좋은 결과로 나타나게 허락하여 주옵소서.

삼위신이 저희를 에워싸고 바라보며 고대하는 그 심정의 기준에 저희들이 부족하여 그 양을 채우지 못한 채 아버지를 부르지 말게 인도하여 주옵소서. 제 양이 충족된 자리에서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기쁨의 모습들로서 이 시간 세워 주시옵소서. 그런 은사를 갖지 못하였을진대는 어린애와 같이 온유 겸손히 아버지의 긍휼과 자비의 심정을 끌어당기는 아들딸이 될 수 있도록 이 한시간 이끌어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니다.

이날 지방에 널려 있는 식구들도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수많은 생명들이 하늘의 때를 염려하여 호소하고 있사오니 그들 앞에도 생명의 은사를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올 때에,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니다. 아멘.

<말 씀>

여러분들과 같이 생각해 보려는 말씀의 제목은 ‘본향을 찾아가는 인생길’입니다. ‘본향을 찾아가는 인생길’ 이러한 제목을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러한 내용이 되겠습니다.

본향을 찾아가는 도상(途上)에 있는 인류

지금 이 세계의 인류는 평화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자유를 누리는 개인이 되어, 자유의 사회, 자유의 나라, 자유의 세계에서 살기를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바라고 있습니다.

내 마음에 평화가 없고, 내 마음에 자유가 없고서는 진정한 행복은 있을 수 없습니다. 참다운 인생길을 걷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참다운 평화 속에서 참다운 자유를 구가하며 참다운 행복을 누리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자신과 참다운 인생길을 걷고자 하는 이런 이념적인 조건을 비교해 볼 때 어떠한 입장에 있습니까? 여기에 상충적이냐 그렇지 않으면 상응적이냐를 분명히 밝혀야 할 때가 끝날이 되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오늘날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이구동성으로 이 세계는 평화의 세계가 못 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유를 부르짖고 있으나 심정에서 우러나 살 수 있는 자유스러운 환경이 못 되어 있음을 시인하고 있습니다. 그런 연고로 우리 인간은 이념적으로 고대하는 행복의 자아가 못 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나라는 것을, 이러한 우리라는 것을, 이러한 사회라는 것을, 이러한 세계라는 것을, 이렇게 걸어온 역사노정이라는 것을, 이렇게 걷고 있는 현실이라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이것을 인정한다 할진대 우리 자체는 내가 즐거워할 수 있는 본향의 세계에서 살지 못하고 있는 것이요, 내가 행복을 구가할 수 있는 본향의 동산에서 살고 있지 못하면, 내가 생각하는 대로 움직이고 주관할 수 있는 본연의 세계에서 살고 있지 못하다는 말에 어느 누구도 반박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행복을 고대해야 되고 그러면서도 평화와 자유를 고대해야 하는, 우리의 심적인 움직임이 자기를 재촉하고 있고, 환경을 재촉하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생활권 내(生活圈內)에서 잘 느낄 것입니다.

이렇게 내적으로 보나 외적으로 보나 우리 인류가 바라는 본향의 세계가 이뤄지지 않았고 인류가 그 세계에서 살지 못하고 있는 연고로, 오늘날 우리 인류는 본향을 찾아가는 길거리에서 허덕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처지에 있는 인류라는 것을 우리는 밝히 알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그러기에 잘난 사람도 본향을 찾기에 허덕이고 있고 못난 사람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양을 갖추었다고 하는 존재는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본향 길을 찾아 헤매는 역사적인 사조권 내(思潮圈內)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이 시간 느껴야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본향을 찾아가는 인생길’ 이러한 제목을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본향으로 가는 길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지금까지 이 땅 위에 성현 혹은 현철들이 나와서 인생의 갈 길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렇게 가라’ 혹은 ‘이러한 주의에서 살라’ 하면서 어떤 방향성을 세워 주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철학이 지향하는 방향성도 있겠고, 어떤 주권자가 내세운 이념을 통한 길도 있겠고, 혹은 사회적인 윤리관을 통해서 가는 길도 있겠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외적인 세계를 끌어내어 여기에 영원한 이념을 연결시키려 하는 종교적인 방향성도 있겠습니다. 크게 보면 그러하겠고 작게는 ‘개인을 중심하고는 이렇게 가야 되고, 가정은 이렇게 가야 되고, 대인관계에서는 이렇게 해야 된다’ 하는 방향성도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전체적이고 우주적인 이념이 지향하는 행복의 한때를 대비해서 움직이는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자리에 서지 못한다 할진대 그 모든 것은 천륜을 해명해 가지고 하늘의 뜻을 완전하게 세우는 그날에 가서는 반드시 천륜에 걸리는 입장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종교가 가는 길, 윤리를 중심삼고 가는 길, 혹은 철학이 지향하는 진리의 길에서 행복의 세계를 소개할 수 있는 평화와 자유를 어떻게 찾아야 되겠는가? 사람의 심정은 누구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수천 년 전에 가졌던 심정이나 억천만 년 후에 나타나는 심정은 같습니다. 심정의 세계는 발전이 없는 거예요.

같은 기반에서 움직이는 심정을 이끌어내어 행복의 동산을 이룰 수 있는 세계,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사회적인 기준, 행복감을 맛볼 수 있는 종교적인 의식, 이러한 것이 이 땅 위에는 없을 것인고? 만일에 없다고 단정 한다면 하나님은 어디로 가 계실 것인가? 그렇게 되면 그 하나님은 인류와 더불어 계실 수 없다는 결론이 내려질 것입니다.

그러면 인류를 붙들고 섭리하고 윤리와 도덕을 세워 선을 지향케 하는 천륜이 있다 할진대 하늘은 기필코 우리와 관계되고 인연되어진 모든 것을 해명하여 주는 것은 물론이며, 나아가 남녀 누구를 막론하고 이것을 심정적으로 긍정할 수 있는 한 날이 올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화하고 동하면서 이 행복이 우리의 행복이요, 이 평화가 우리의 평화요, 이 자유가 우리들의 자유라고 소리 높여 말할 수 있는 한때가 나타나야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 할진대 하나님도 어떤 위대한 사상가도 우리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이 알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분석하게 될 때 안팎으로 분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회의 실정을 헤아려보게 될 때에도 나타나는 사회의 조직이 있고 겉으로 나타나지 않은 계획된 조직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모든 것이 안팎으로 전개되어 나간다는 것입니다.

사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외적인 사정을 가지고 사는 동시에 내적인 사정을 가지고 사는 연고로 서로 안팎의 사정을 통하고, 같은 입장에서 마음과 마음이 통하여 행복을 노래할 수 있는 그 환경이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또 그 환경을 찾아 헤매는 것이 우리의 인생행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날까지 역사 과정에서 수많은 성현 현철들이 왔다 갔지만 자기의 인생행로를 노래하면서 승리적인 하나의 표어를 세워 ‘만민이여! 이렇게 가라’ 하고 호소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또 ‘나를 의지하고 내 심정과 더불어 내 사랑과 더불어 너는 이렇게 살라.’고 말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사랑을 말하였으나 사랑을 중심한 행복관, 사랑을 중심한 평화관, 사랑을 중심한 자유이념에 대해서는 해명을 못하고 가셨습니다. ‘나를 따라오라, 나를 믿으라, 나를 바라보고 오라.’고 하셨지만 자기의 심정을 털어놓고 ‘내 심정과 동하여 천정(天情)을 중심하고 노래하며 살자.’고는 못해 보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대적으로 수많은 선각자가 역사상에 왔다 갔을지라도 심정을 중심하고 행복을 누릴 수 있는 내용을 소개하지 못했고, 하늘의 심정과 통하는 자유와 평화의 세계관을 중심삼고 세계를 화동시킬 수 있는 기쁨의 내용을 소개하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류가 고대하는 곳은 어디일 것이뇨?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마찬가지입니다. 본향의 세계, 즉 그곳에 간 후에는 영원히 돌아오고 싶지 않은 세계, 보고 또 보아도 싫지 않은 세계, 한번 느낀 감촉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세계, 웃음이 있다 할진대는 영원히 웃을 수 있는 세계, 그 세계에서 한 주인을 찾았다면 그 주인을 영원히 놓칠 수 없다 하는 세계, 그런 한 곳이 있어야만 합니다.

본향을 그리워해야 하는 우리의 현실

그런 곳이 심정을 가지고 있는 인간 개개인이 살 수 있는 곳이요, 그러한 본향이 인류역사의 종말시대에 소개되어야 할 곳입니다. 그렇지 못할진대 오늘날 이 세계는 수습하려 해도 수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을 소개할 수 있는 어떤 이념이나 주의를 논리적인 견지에서 세우지 않을 수 없는 때가 다가온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영원히 살 수 있는 본향의 세계, 본향의 땅, 본향의 형제, 본향의 가족, 본향의 친척, 본향의 동산이 그립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여러분들 중에서 ‘나는 그런 본향을 찾았노라.’고 장담할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필연적으로 그 본향을 찾아가야 할 운명에 놓여 있는 존재들인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 구주로 오시어 ‘나를 따라오라.’ 하시며 그 길을 제시해 놓았지만, ‘나와 더불어 살자.’ 할 수 있는 본향의 동산을 이루어 놓고 살다 가지는 못하셨습니다. 하나님도 인류를 끌고 나오시지만 오늘날 이 자리에서 ‘나와 더불어 살자.’ 는 말씀을 못 하시고 ‘우리들이 바라는 본향의 동산에 가서 살자.’고 말씀 하시며 이러한 섭리를 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랬고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이 그랬듯이, 땅 위에 살고 있는 오늘날 여러분 자체 자체도 마찬가지의 운명에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본향을 바라면서 허덕이며 걷고 있는 여러분, 그날을 맞아 즐거워해 본 사람이 있습니까? 그날을 맞이해서 나는 행복하다고 노래한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아직까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날을 즐기셨느냐? 하나님도 그렇지 못합니다. 그러면 그날을 맞게 해주는 어떤 주의가 있느냐? 그것도 없습니다. 하늘도 즐기지 못했다는 거예요. 천지의 내용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천지 운세를 이탈하여 살 수 없는 양심을 가진 인간은 공통적인 목표와 이념 밑에서 방향을 찾아가는 과정의 심정을 체휼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여러분들도 가면 갈수록 행복의 마음은 간절하나 행복 그 자체는 여러분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자유와 평화와 행복을 마음으로 간절히 고대하며 발버둥쳐서 그 목적지에 당도해 온 것 같은데도 불구하고 실제로 그것은 잡으려야 잡을 수 없는 먼 거리에서, 아득한 내용으로서 여러분의 마음세계를 비추어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은 어차피 가야 할 과정적인 현상을 밟고 올라서 가지고 행복의 본향을 노래할 수 있는 개체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런 다음에 만우주를 대해 나와 더불어 화동하고 나와 더불어 노래하며, 나와 더불어 행복하자 할 수 있는 그 한 날을 맞아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역사의 목적이요, 어떤 종교가 있다 할진대 그 종교의 목적입니다. 또 창조주가 있다 할진대 그 창조주도 역시 그러한 목표 밑에서 인간을 내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섭리권 내를 벗어나지 못한 인간들인 고로 어떤 개인이라 할지라도 그 역시 마찬가지의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다 같은 인생길을 가고 있는 이 마당에, 여러분, 잘났다고 자랑하지 마십시오. 그 환경이 좋다고 자랑하지 마십시오. 그 가진 세력이 당당하다고 자랑하지 마십시오. 그것 가지고 인생의 갈 길을 해결하지 못합니다. 본향의 세계를 해결하지 못해요. 왜 그러냐? 오늘날 인류가 지향하는 그 방향성은 인간으로 말미암아 되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것으로 해결되게 되어 있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하늘이 이런 입장에서 섭리를 해 오셨다 할진대 도리적인 면이나 진리적인 면에서만 우리에게 방향을 가르쳐 주었던 것이지 심정적인 면을 중심삼고 우리의 갈 방향을 가르쳐 주지는 못하였습니다. 심정적인 면에서, 실생활에서 실감할 수 있는 행복과, 생활하면서 피부로 느낄 수 있는 평화와 자유를 가르쳐 주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 연고로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으로 하여금 이러한 것들을 아득한 소망의 한 초점으로서 바라보게 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운명을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인 연고로 우리에게는 잘나나 못나나 슬프나 기쁘나 하루의 생활에서의 자유는 있을는지 모르고, 일년의 생활에서 감정의 자유는 있을는지 모르고, 또 일생에 있어서 생활적인 감정의 자유는 있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자기를 중심삼고 흐르고 있는 역사적인 심정과 생활과 이념과 관(觀)에 있어서는 마찬가지입니다. 하늘은 그렇게 볼 것이며 또 그렇게 보아야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이루지 못한 것

그렇기 때문에 이 사람을 보아도 불쌍하고 저 사람을 보아도 불쌍한 것입니다. 이 불쌍한 인류를 가로막고 불쌍한 자신들임을 가르쳐 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 때가 왔습니다. 네 자신의 불쌍함을 탄식하라, 불쌍한 자체를 보고 울어야 하겠다, 하늘땅을 붙들고 울어야 하겠다, 내가 가는 발자취의 종단은 어떻게 될 것이뇨? 변천하는 환경의 결과가 어떠한 내용을 내포해 가지고 목적지에 도달할 것인가? 이런 문제를 해명해 주며 네 자신을 놓고 근심하라 할 수 있는 한 사람의 지도자가 나와야 할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역사시대에 어떤 혁명적인 새로운 문화를 창조해 나오는 과정에 있어서, 시대를 거치고 세기를 거쳐오면서 새로운 이념, 새로운 목표, 새로운 행복, 새로운 자유, 새롭다는 그 무엇을 가지고 나온 많은 사람들은 그 시대를 가로막고 불쌍한 자아를 해명해 주기 위하여 수고해 왔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당대에 영향을 미친 사명자요, 특정한 시기나 시대에 필요한 사명자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는 새로운 세계적인 주의의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이 세계 인류를 가로맡아 가지고 세계 인류의 본이 되어야 할 너희들이거늘, 너희가 갈 곳을 알지 못하고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음을 슬퍼하라고 할 수 있는 어떤 무엇이 나와야만 되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2천년 전에 오셔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때 택한 선민이라고 자랑하던 유대 백성들이 4천년이란 기나긴 역사노정에서 수많은 선지자들의 은덕을 받들어 왔으면서도 고대했던 그 메시아가 나타난 것은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보내 놓고서야 그가 메시아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서러운 입장에 놓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구주라고 하는데 그는 당시의 인류 앞에 어떠한 구주가 되어야 했느뇨? ‘너희들의 슬픔을 내가 맡아 주마.’ 할 수 있는, 자신 있는 구주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8)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맙고 감사한 말씀입니다. 그 한마디는 인류를 위한 위대한 선각자의 말씀이었습니다.

애달픈 심정을 가지고 초조한 모습으로 자기 자신을 해명하기 위해 노력하는 청년 남녀가 있어 그 한마디의 말씀을 듣는다면, 손을 번쩍 들고 그 앞에 나갈 것입니다. 그리하여 ‘2천년 전에 오셔서 말씀하고 가신 예수님 고맙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말씀을 주신 하나님, 고맙습니다.’ 하게 될 것이며, 이 정신과 사조를 통하여 흘러나온 말씀을 대해서 고맙게 생각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이 세계를 맡을 수 있고, 이 민족을 맡을 수 있으며, 심정문제를 맡아 가지고 그 심정의 짐을 풀어 줄 수 있는 하나의 주인공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이 있기에 예수님은 다시 온다는 말씀을 남기고 가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어 이루지 못한 것이 무엇이뇨? 인류의 모든 십자가의 짐을 도맡아 주기 위하여 오셨으나 인류의 심정적인 짐은 도맡아 주지 못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오늘날 전세계 인류는 심정적인 짐을 예수님 앞에 다시 맡기기 위하여 그날을 고대하면서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하고 주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인 비참한 환경에 처한 내 자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 또는 흘러가는 역사를 가로막고 너희의 슬픈 사정을 알라, 너희의 불쌍함을 알라, 너희의 애달픔을 알라, 너희는 이러이러해라 할 수 있는 어떠한 무엇이 나와야 할 때가 왔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알 수 없는 인생행로를 걷고 있기 때문에 가다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공포가 내재한 세계권 내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가는 길의 목적지가 어디이뇨? 그 가는 길이 이러이러하다고 해명할 수 없는 생애노정을 걷고 있습니다. 무턱대고 끌려 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다가 바위에 부딪치느냐 절벽에 떨어지느냐 하는 것을 알고 넘어가야 합니다. 여러분이 그러한 자리에 서게 되면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속이 뒤집힐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40평생, 혹은 70, 80년의 생애노정을 걸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서 나는 행복을 찾았고 행복하다고 자랑하는 사람은 있을지 몰라도 이런 인생길을 돌파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모두가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찾아야 할 분

그러므로 이제 우리들은 자기의 이 불쌍한 사정을 연결시켜서 세계와 통할 수 있는 불쌍한 사정을 가진 분을 찾아야 되겠습니다. 또 자기에게 어떤 외로움이 있다 할진대 그 외로움이 세계와 더불어 연결될 뿐만 아니라 무엇인지 모르게 갑갑하고 클클함이 내 한 마음에 사무쳐 있다면 이 고달픈 심정이 이 세계와 더불어 연결될 수 있는 때로 찾아 들어가고 있으므로, 그 모든 것을 해명해 줄 수 있는 분, 즉 나의 불행과 나의 불쌍함과 나의 고독과 나의 한스러움을 맡아 줄 수 있는 분을 찾아야 되겠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내가 고대하는 그 이상의 세계를 소개해 줄 수 있는 분, 행복과 평화와 자유의 세계에서 영원히 느끼고 싶었던 심정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분, 그 심정이 영원성과 연관하여 존재세계의 어떠한 것과도 버젓이 행복을 일으킬 수 있는 그런 동기의 주체로서의 한 분을 만났다 할진대 그는 인생행로에 있어서 성공자일 것입니다.

슬픈 세상에서 그런 한시간을 느끼게 하고 체험할 수 있는 예수님이어야 되고 하나님이어야 된다는 것을, 나는 믿고, 알고 있습니다. 오늘날 여러분은 안다 하는 생각을 가지고 걷고 있는 발자취를 거두어 어차피 거쳐야 할 한때를 넘어설 수 있는 비법을 가르쳐 주는 분을 찾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가 처한 사정을 거치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소망의 기준을 넘어서 사정을 통하고 심정을 수습할 수 있는 동시에 내용적인 면에서 그런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하나님이라야 안심하고 믿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그러한 심정의 이념을 갖추고 걸어가야 고달픈 인생행로에서 서러움에 부딪쳐도 그런 심정의 세계에서 느껴진 감정을 막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치고 때려도 더 강해지고 하늘을 배반하지 않을 수 있는 그 무엇, 심정의 인연으로 느껴지는 그 무엇이 있다 할진대 이는 지옥 밑창에 몰아넣을지라도 점령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한 곳이 기필코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대하여 섭리하시는 방향은 그 한 곳, 본연의 동산입니다.

그래서 역사를 지배하는 하나님의 섭리는 수많은 곡절의 노정을 거쳐서 그 한 기준을 세우게 되었고, 이것을 따라가야 하는 인간들도 역시 수많은 고통의 과정을 거쳐 가지고서야 그 한 기준 앞에 설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존재세계에 있어서 모든 존재물이 지향해야 할 하나의 기점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노정을 가야 하는 우리는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본향이라 하면 여러분들은 무엇을 연상합니까? 본향에는 반드시 자기가 사랑하는 부모가 있고, 사랑하는 마을이 있고, 사랑하는 집이 있고, 사랑하는 형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고향을 떠나 멀리 외국에 가 있게 되면, 그 본향의 범위는 넓어져서 조국, 즉 나라까지 본향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또 우주나 혹은 천주란 견지에서 보면, 이 세계가 나의 본향이 됩니다. 이렇게 바라보는 범위가 크면 클수록 그 본향의 범위도 비례적으로 커간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여러 가지 생활 과정에서 잘 느낄 것입니다.

우리들이 바라는 본향

그러면 우리들이 바라는 본향은 어떤 곳이뇨? 여러분이 어느 어느 곳이 내 고향이라고 하는 것처럼 그런 곳이 아닙니다. 본향, 마음의 본향, 그곳은 마음이 즐길 수 있는 내 심정의 안식처, 심정세계의 보금자리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찾아 나오시는 것을 두고 구원섭리를 해 나오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나를 찾아 주고 인류를 찾아 준다 하면 나는 하나님께 ‘사정적인 조건보다도 심정적인 조건으로서 저를 찾아 주시옵소서.’라고 말하겠습니다. 그것은 왜냐? 사정은 천태만상이 될 수 있으되 심정은 오로지 하나의 조건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고로 이것이 참다운 신앙관을 찾아 나가는 사람의 모습이 아닐 건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천국은 어디 있느뇨? 네 마음속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자기의 진정한 본향은 어디에 있느뇨? 생활에 있는 것이 아니고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천국은 마음과 인연 맺을 수 있는 역사적인 배경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마음으로 그 본향을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느끼는 감정과 더불어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인연이 엉클어져 있기 때문에 그 본향이 그리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행로에 있어서 본연의 마음과 인연 맺어질 수 있는 본향의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아니 되겠고, 본향의 동산을 느끼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한 곳,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 아닌, 역사가 바라고 있는 참다운 행복의 동산은 이런 곳이라고 소개할 수 있고, 참다운 평화와 참다운 자유를 소개할 수 있는 그 본향에는 누가 계실 것인고? 생각해 보세요. 그 본향에는 누가 계실 것인가? 높고 크고 존엄하신 하나님이 그곳에 계실 것입니다. 또 우리가 고대하던 주님이 그 곳에 계실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성신이 그 곳에 계실 것이며 역대 섭리사에 왔다 갔던 수많은 공신들이 그 곳에 계실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어요? 또 세계의 어느 누구와도 비길 수 없는 충신이 그 곳에 계실 것이며, 세계의 어느 누구와도 비길 수 없는 효자 효녀 열녀들이 그 곳에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마음의 인연을 넓혀서 이념적인 것을 느끼지 못한다 할진대 여러분은 그 세계와 인연 맺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타락의 인생길을 걷고 있는 불쌍한 인간들에게 수많은 성현들은 삼강오륜 등 인륜을 가르쳤고, 모세는 십계명을 소개하였으며, 나아가 수많은 도인들도 그런 일면을 개척하기 위하여 수고해 왔음에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인류가 본향길을 가는 데 있어서 심전(心田; 마음 밭)을 계발할 수 있는 사명을 지니지 못한 도주(道主), 그런 종교, 그런 윤리, 그런 이념은 이 우주상에서 물러가게 될 것입니다. 물러가지 않겠다고 해도 하나님이 물리치십니다.

여러분은 본향을 그리워하며 그 본향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들이 하나의 실체를 갖추어 아득한 피안의 본향을 바라보며 가고 있다 할진대 여러분은 그 노정의 어느 지점에든지간에 있을 것입니다. 지옥에서부터 천국 끝까지의 그 길은 어떤 길이뇨? 본향을 찾아가는 노정입니다. 본향을 찾아가는 길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 중에 나이가 70, 80살이 되어 노숙해 가는 사람이 있다면, 자기 자체를 바라보게 될 때, 나는 본향의 동산과 얼마만큼의 거리에 있느냐 하는 것이 염려 중의 염려요, 근심 중의 근심일 것입니다. 그러면 본향은 어떠한 곳이뇨? 그 곳을 찾아온 자를 대하여 환희의 팔을 벌리고 맞아주는 그런 곳을 말합니다. 그 곳이 그립습니다.

여러분이 본향을 찾아가는 노정에서는 억울한 사정, 비통한 일, 혹은 분하여 참을 수 없는 입장에 서는 일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본향을 찾기 위하여 나선 몸이기에 그러한 사정은 필히 있어야 할 것으로 아는 사람이라면, 그 길에서 돌아설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선조들이 세워 놓은 역사적인 모든 위훈(偉勳)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며, 우리의 인생길을 개척해 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도주들의 공적을 무시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가야 되겠습니다. 나이가 들어서 기력이 쇠하기 전에 가야 할, 인생의 행로를 개척해야 할 우리입니다. 여기에 변하지 않는 늠름한 모습을 갖출 수 있는 심정과 마음의 중심을 가졌느냐, 이것이 오늘날 여러분 자체를 걸어 놓고 문답해야 할 중심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예수님도 이것을 지적하여 ‘천국은 네 마음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본향을 찾아가는 자가 가져야 할 태도

본향, 그곳에는 그리운 부모가 계시고, 그리운 형제가 있고, 그리운 산천이 있습니다. 우리가 본향을 그리워하여 찾아간다면 기뻐하지 않을 존재물이 하나도 없는 곳입니다. 그곳을 찾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면 ‘오늘 내 생활이 처량하구나.’ ‘오늘날 내 생활 행로가 비참하구나.’ 하는 것이 느껴질 것입니다. 그러나 본향을 찾아가는 노정이니 여기에 억울함이 있고 분함이 있고 눈물을 지으며 생사를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 있다 할지라도, 본향을 생각하는 그 마음을 잊고 쓰러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의 길임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모든 성현들이 본향을 찾아가는 길에서 마음과 이념의 세계를 방황하였습니다. 그들은 그 세계를 찾기 위하여 먼저 인간적인 사정도 다 저버리고 인간 세상에서 정으로 인연되었던 모든 환경까지도 다 끊어 버리고 허덕였습니다. 우리의 선조들은 제해 놓고라도 하늘을 대신하여 걸었던 선지 성현들, 또한 이를 수습하여 본향을 찾는 것을 하나의 목표로 세우고 해결지으러 오셨던 메시아인 예수도 이 길을 가기 위해 허덕였습니다.

반대를 받아 밀려나던 예수님이 아니었습니다. 반대와 핍박이 무서워서 고요한 산천을 찾아가서 기도의 시간을 가진 예수님이 아니었습니다. 로마의 압정이 두려워서, 십자가의 길이 두려워서 가야 할 인생길에서 돌아서고자 했던 예수님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필히 가야 할 인생의 행로에서 어떠한 입장하에서도 가야 했고, 어떠한 불쌍한 처지에서도 가야겠다고 각오했던 분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본향의 심정을 느끼고 본향의 사정을 아신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본향이 환영할 수 있는 주인공으로서의 행사를 대신해야 할 메시아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본향이 그리워지면 그리워질수록, 그 마음세계에서 본향의 세계가 가깝다고 느끼면 느낄수록 비참한 심정을 감수하여 나갔음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만일에 어떤 원수가 있고 사탄이 있다 할진대 이 길을 찾아가는 노정에 최후의 격전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향길을 찾아가야 할 세계적인 새로운 이념세계에 당도한 민주 진영 앞에는 원치 않는 원수의 창검이 가로막을 것입니다. 이것이 막을지라도 민주 진영은 천지 운세의 방향에 맞춰 용감히 넘어가야만 됩니다.

그러므로 이제 민주진영은 세계적인 용단을 내려야 되겠습니다. 일개 국가도 용단을 내려야 되겠고, 민족, 사회의 어떤 기구뿐만 아니라 일개인도 용단을 내려야겠습니다. 그리하여 본향길을 가는 데 있어서 자신을 가질 수 있는 모습을 갖추어야 되겠습니다. 하늘도 이런 사람을 요구하고 그런 가정, 그런 사회, 그런 국가, 그런 세계를 요구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우리가 바라고 있는 재림의 한 날이 온다고 합시다. 이상 하는 한 날이 온다고 합시다. 그 날은 어떠한 날일 것이뇨? 지치고 밀려 상처받은 다리를 끌고 천정(天情)을 찾기 위해 본향길을 허덕이며 찾아오는 그 모습을 보고 하늘은 어떻게 대해 줄 것인고?

여러분, 생각해 보았어요? 나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불쌍한 아버지가 웃으실 수 있는 그 한 시간이 보고 싶습니다. 내가 사모하고 붙들고 싶었던 그 심정을 아시고 나를 붙들고 울어 주는 아버지를 만나고 싶습니다. 그럴 때 그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인생길을 가기에 어느 누구보다도 비참한 환경에서 상처를 입고 억울함을 당하고 분함을 당하는 사람, 그것이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위하고 본향을 찾기 위하여 그러한 길을 걸어 나오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 하늘은 그 사람을 붙들고 통곡할 것입니다.

취해서 살게 되어 있는 사람의 본질

우리는 본향을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어차피 가야 할 운명의 노정, 가지 않으면 안 될 과정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자기 자신이 똑똑하고 잘났다고 장담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만민이여! 온 천주여! 내 말에 호응하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이 인생행로에서 본향을 찾아가는 발걸음을 어디로 돌려야 하겠느뇨? 참다운 사랑의 부모가 계시고, 참다운 사랑의 정적인 보금자리가 있는 곳입니다. 그곳이 우리가 머물 곳이요, 우리가 안식할 곳입니다. 또한 그곳이 행복과 희망이 넘치는 평화의 세계요, 자유의 동산일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곳을 사모하는 마음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땅에 대한 분개의 마음이 커질 것입니다. 땅을 대하여 깨끗이 살아야 되겠다 할 것입니다. 과거의 역사적인 인물은 다 그렇게 산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날 세상에서도 잃어버린 부모를 찾기 위해서는 천리길도 멀지 않다 하고 달려가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는 만리길도 마다 않고 찾아가는 사람이 있거든, 본향의 동산을 찾아가는 여러분이 그만도 못하다면 반성하십시오. 여러분이 어느 한 때, 어느 한 시간, 생애의 어느 한 기간에서 본향길을 찾아 헤맨 적이 있습니까? 그런 데에 무책임한 여러분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런 길에서 책임을 질 수 있고 그 길에 책임적인 생활의 한 부분을 남길 수 있어야 본향의 역사를 재창조하고, 본향의 섭리의 뜻을 세워 나오는 천륜 앞에 면목을 세우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간 선조들은 역사적인 인물이 될 수 있었고, 그렇게 간 도인들이 종교를 형성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들도 본향의 부모를 그리워하고, 본향의 산천을 그리워하고, 본향의 가정을 그리워하고, 본향의 세계를 그리워해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때가 왔다는 거예요.

오늘날 공산주의자들은 유물사관을 중심삼고 세계적인 본향을 꿈꾸고 있지마는 그것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외적인 사정이 통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라 내적인 심정이 통할 수 있는 세계에서 만난 사람은 그 사람이 흑인이든 백인이든 황인이든 영원히 보내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 세계의 사람을 만나고 그런 자리의 사람을 찾았다 할진대 먹는 것을 초월하고 입는 것을 초월하여 취해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이상주의가 있다 할진대 그 주의를 통하여, 어떤 사상이 있다 할진대 그 사상을 통하여 어느 정도 취해서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을 만들었느냐를 봐 가지고 그 주의나 사상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위대한 점은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 심정을 털어놓고 통곡할 수 있는 감정이 우러나오는 데 있습니다. 이 감정이 역사 노정에 있어서 기독교의 형태를 변경시켜 나왔습니다. 기독교가 변혁의 단계에 들어가려면 심정을 통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또 그가 변치 않는 가운데 움직일 수 있는 감정, 즉 기독주의가 있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상가가 하나의 사상에 취하여 자기의 생활 감정을 지배할 수 있고, 또 순간을 넘고 시간을 넘어 영원을 표준하고 움직일 수 있는 감정, 즉 기독주의가 있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상가가 하나의 사상에 취하여 자기의 생활 감정을 지배할 수 있고, 또 순간을 넘고 시간을 넘어 영원을 표준하고 움직일 수 있는 것을 찾았다면, 그는 행복한 자일 것입니다. 이는 천지 역사관에 있어서 합격자요, 천륜을 움직이는 천정관(天情觀)에 있어서 합격자일 것 입니다.

사람의 본질을 해부해 보면 취해 살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적인 어떤 대학자가 있다 할진대 ‘오! 내가 이렇게 공부하여 이런 학자가 되겠다’ 하는 사람은 그렇게 못 됩니다. 못 돼요. 자기도 모르게 취해서 열심히 하다 보면 세계적인 대가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돼야 합니다. 취하는 감정을 통하지 않고는 오늘날 기성의 내용 이상의 어떤 법칙이나 공식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참된 지도자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라 할진대 그는 어떤 주인공이었느냐? 인간의 사정에 취한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심정과 역사적인 심정과 시대적인 심정과 미래적인 심정에 취하여 그 하나에만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에만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쫓기든, 몰리든, 죽이든 ‘아버지여, 뜻대로 하시옵소서.’ 했던 것입니다. 이런 태연스러운 사람이 있어야 됩니다. 이런 사람은 기성관념, 혹은 그 시대의 이성적인 관념으로 바라볼 때는 미친 사람입니다, 미친 사람이에요.

인간이 찾고, 그리워하고, 만나고 싶어하는 것이 무엇이뇨? 심정으로 느낄 수 있는 세계, 그러한 행복, 그러한 평화, 그러한 자유를 소개해 주는 지도자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날 인생길을 가고 있는 우리에게 그러한 심정을 가지고 그러한 방향성을 가리켜 주는 지도자가 있다 할진대 그는 참지도자일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러한 심정을 가지고 인생길을 가는 사람이 땅 위에 있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땅과 하늘, 우리의 이념과 현실은 상충된 면을 지향해 나가고 있습니다. 마음과 몸은 언제나 싸움의 대상이 되어 투쟁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세계적인 이상세계를 찾아 나오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는 땅 위에 형성되어 있는 마음세계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는 것입니다. 역사를 거쳐 나오는 노정에 있어서 그는 편안한 생활을 해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떤 위인들을 보십시오. 다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영계에 계시는 예수님도 불쌍한 분입니다. 영계에 가 계시되 땅을 붙들고 ‘아버지시여, 땅의 인간들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시는 불쌍한 분입니다. 어찌하여 예수님이 영광을 돌려드리는 분이 못되고 기도하는 분이 되셨는고? 땅 위에서 가야 할 인생길을 다 가지 못하고 다시 오셔야 할 운명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낙원에 가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놓고 자기 혼자 심정적으로는 취해 보았지만 인류와 더불어 취해 보지 못함이 한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오시는 그날은 무엇이 다르뇨? 뜻을 중심삼고 인류가 자기의 심정과 더불어 하늘 대하여 취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것이 다릅니다. 이것을 찾아 헤매고 있는 것이 예수님의 사정임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여러분이 마음세계에 있어서 그런 면을 찾아보았습니까? ‘나는 공부를 많이 했고 나는 아는 것이 많아! 이만하면 어디 가든지 막힐 것이 없고, 선생이라는 소리를 듣고 혹은 스승의 위신을 세울 수 있다.’고 자인할 사람이 있을는지 모르지만 큰소리하지 마십시오.

또 여러분 가운데 ‘나는 배운 것이 없고 무식하고 형편없는 모습’이라고 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인생행로에 있어서는 다 마찬가지입니다. 잘나고 못난 것이 없습니다.

왜 그러냐? 인간이 심정을 기반으로 하여 움직이는 것은 다 같습니다. 대통령이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나 일개 노동자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은 다 같습니다. 오히려 말단에 있는 사람이 처자를 사랑하는 마음이 더 강하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들은 자신에 대하여 부족하게 생각하는 마음이 더 강합니다. 그 자식이나 아내를 대하여 부모의 사명을 못하니 미안하고, 남편의 사명을 못하니 미안하다는 마음이라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로라하는 사람은 ‘내 할 것 다하고 있는데….’ 합니다.

심정적으로 볼 때 어느 것이 더 높겠습니까? 오히려 말단에 있는 사람들이 더 높을 수 있는 입장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생행로에 있어서 자랑하지 마십시오.

그런 면에서 여러분은 그 인연과 더불어, 본연의 심정과 더불어 취하여서 ‘감사합니다’ 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항상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왜 항상 기도하라고 하셨습니까? 옆길로 가게 될까봐 그러신 것입니다. 낮이나 밤이나 뜻길을 자신 있게 왕래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기도가 필요 없습니다. 기도가 필요 없어요.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 기도하고 감람산을 찾아가 외로운 심정을 하늘 앞에 호소한 것은 무엇 때문이뇨? 그가 이 땅에 오시어 보내신 바의 심정을 중심삼고 인류와 더불어 동하면서 서로 기쁨을 주고받을 수 있었던들 겟세마네 동산을 찾아가 하늘 앞에 호소했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웬 말이에요?

하늘 편에 가까운 사람

본향을 찾아가는 인생행로에 있어서 자신을 가진 자가 있습니까? 자신을 갖고 심정적으로 취해 갈 줄 아는 자가 있으면 나와 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심판이요, 하나님이 있다면 심판날에 이런 사람을 호출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인생행로에서 자신을 갖고 취해서 간 사람은 역사가 옹호해 줍니다. 예수님도 자신을 갖고 하나님의 뜻에 취해 살다가 십자가를 지고 갔습니다. 민족적으로도 그 민족의 운명과 가야 할 방향을 알고 자신이 그 책임을 다하기에 취해서 죽음의 길을 불사하고 넘어간 사람들을 충신이요, 열사라 하였습니다. 역사의 흐름이 이런 움직임을 통해서 흐른다는 것을 부정하지 못할진대 천정을 찾아 나가는 노정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본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누가 막을 수 있습니까? 내 마음에서 그리워하는 심정이 우러나는 것을 누가 막을 수 있습니까? 아무리 지식이 많고 갖춘 것이 많아서 기세가 당당하다 할지라도 마음에서 마음으로 새로운 무엇을 지향하는 이 마음을 거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이상적인 감정을 내포할 수 없습니다. 그런 것을 간절히 고대하고 그런 감정에 취해서 말을 해야만 오늘날 어떤 주의, 어떤 사상이라도 이끌 수 있지, 그렇지 못한 사람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류 앞에 지도자가 있다면, 그는 어떤 사람일 것인고? 인생행로에 있어서 자신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 자신은 인간 앞에서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도, 피조만상 앞에서도 자신을 가지고 자체를 세워 하나님의 심정에 취해서 나가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 심정에 취한 사람이 있다 할진대 누구든지 그 앞에 가서 기대어 쉬고 싶어할 것입니다. 그런 내용을 갖춘 인격자가 있다 할진대 누구든지 숭배하고 싶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본연의 심정의 발로는 그런 길을 통해야 할 운명에 있는 것을 감지하기 때문에 그 길이 필히 가야 할 노정임을 알고 마음은 언제나 그것을 지향하여 움직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낙심하지 마십시오. 또한 자랑하지 마십시오.

같은 인생행로에서 처참한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불쌍한 사정을 알고, 우리의 동족이 인생행로에서 쓰러지는 것을 보고 통곡하는 사람은 하늘편에 가까운 사람입니다. 형제들이 인생행로에서 낙오자가 되는 것을 볼 때에 ‘너는 언제 올 것이냐’ 하며 마음 졸이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는 심정의 지도자일 것입니다. 오늘날 교인들은 그러한 지도자를, 양들은 그러한 목자를 요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인간을 대하여 울었습니다. ‘나에게로 오라.’ 하시며 눈물지었습니다. 예루살렘을 대하여 탄식하며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눅 13:34) 하시며 자신의 서글픈 심정을 토로하셨습니다.

인생노정의 성공자

오늘날 이 민족을 품고자 하는 청년 남녀가 있습니까? 민족이 나아갈 길을 개척하여 어떠한 목적지에 접근시켜 주고자 하는 사명을 갖고 그에 대한 책임을 느끼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는 이 민족이 허덕이는 실상을 바라보고, 예수님이 하늘 대하여 호소하며 흘린 눈물이 그 민족을 받들어 오늘날까지 역사적인 인연을 연결시켜 나왔다는 사실을 알고 예수님과 같이 이 민족을 위하여 하늘 대해 호소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역사적인 사조도 그러하거니와 앞으로의 민족의 전망도 그러합니다. 천리적인 한때를 바라보고 있는 인류인 것을 부정하지 못한다 할진대 그런 과정에서 허덕이고 있는 우리라는 것을 알아야겠습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나가는 인생행로에서 자신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그 자신과 더불어 소망의 본향을 그리워하는 심정에 사무쳐 달음질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산아 가리어라, 바다야 가로막아라, 원수야 나타나라, 내 갈 길을 누가 막겠느냐?’ 할 것입니다. 핍박의 바람이 불어와도 한때일 것이며, 시험의 화살이 날아와도 한때일 것이며, 죽음의 공포가 엄습해 와도 한때일 것으로 알고, 그 한때를 넘기 위해 달리는 사람, 더 큰 한때를 찾기 위하여 자기의 작은 생애의 한 때를 잊고 뛰어 나갈 줄 아는 사람이라 할진대 그는 인생노정에 있어서 성공자입니다. 그럴 거 아니에요?

아까 말한 바와 마찬가지로 여러분의 걷는 모습을 보고 아버지가 우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왜 하나님께서 얼굴을 돌리셨는가 하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좋아서 돌이키신 것이 아닙니다. 죽음의 길을 찾아 나오면서도 본향의 뜻을 생각하는 예수의 심정, 본향의 부모를 염려하며 효성을 다하지 못할까봐 두려워하는 그 심정, 그것을 대하는 하늘이 뼛골이 녹아나는 순간이었기에 얼굴을 돌리셨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럴 거 아니에요?

그런 예수, 그의 심정의 귀일점이 천지를 통할 수 있는 기준에 섰기 때문에 사망선을 헤치고 부활하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런 심정이 동하지 않고는 사망의 세계를 박차고 승리의 개가를 부를 수 없고 승리의 왕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그런 분을 모셔야겠다고 생각할진대 우리는 허덕여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감정, 그러한 심정에 연하여 취할 수 있는 일편의 생활내용을 갖지 못하였다 할진대 우리는 허덕여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역사노정의 수많은 선조들도 허덕였고, 역사를 지배해 나온 하나님도 허덕여 나왔거늘, 우리가 어찌 움직이지 않을 수 있으리오.

그런 길을 개척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마 7: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편안한 자리에서 모든 것이 갖춰질 수 있는 하늘의 섭리라면 그런 말이 쓸데없을 것 아니에요?

고달픈 인생길을 가다 보니, 자기 딴에는 목표가 바른 길인 줄 알고 걸었는데 반대의 걸음을 걸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늘의 서러움이라는 것입니다. 부모가 바라는 방향은 이러한 것인데 탕자의 모습이 되어 반대 방향으로 가 가지고 유린당하는 모습을 바라보아야 하는 부모의 심정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한 자식의 모습을 보고 있는 부모가 있다 할진대 그 부모는 통곡할 것입니다.

인간을 바른 길로 돌려잡기 위한 하나님의 수고

오늘날 역사의 흐름 속에서 인간을 중심삼고 나아가는 방향, 인간들이 가고 있는 방향은 하늘이 지향하는 방향이 아니라 그 반대 방향입니다. 그래서 하늘은 이러한 인간들을 돌려잡기 위해 이들이 가는 길을 가로막은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노아를 세워 가정적인 기준을 세우고 가정의 올바른 이념을 찾으려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늘은 인류를 전멸시키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그릇된 모든 것을 가로막고 하늘이 지향하는 방향으로 노아가정을 이끌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함의 실수로 그 가정을 찾지 못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어떠했습니까? 본향을 찾기 위해 이끌어낸 노아도 불쌍하였거니와 고국산천 갈대아 우르를 떠나 축복의 땅인 가나안을 찾기 위하여 헤매던 아브라함도 불쌍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야곱, 모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본연의 민족을 회복하기 위하여 모세를 애급에서 광야의 황무지로 내몰던 하나님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모세의 생활보다도 더 심절하고 더 분하고 더 통곡에 사무쳐 이스라엘 민족을 애급에서 몰아내신 하나님의 심정을 아무도 몰랐습니다. 어느 누가 그런 하나님의 심정을 알았습니까? 그리고 민족을 지도하던 모세가 하나님의 심정에 취하여 변하지 않고 나갔던들 반석을 두 번 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하늘의 심정을 통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그의 일신이 오히려 민족의 갈 길을 막았던 원통한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본연의 가정을 찾기 위하여 하늘이 몰아냈던 노아도 그러했고, 축복의 땅을 세우기 위하여 몰아냈던 아브라함도 그러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향 땅을 그리워하던 야곱은 어떠했습니까? 애급에서 죽음이 가까워졌을 때 자기의 뼈를 고향에 묻어 달라고 유언하였습니다. 고향 땅이 얼마나 그리웠으면 그랬겠어요? 자기가 죽게 되더라도 원수의 땅에는 그 시체가 썩어 흘러내리는 물까지도 남겨 놓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선민의 긍지, 선민의 감정을 소중하게 느꼈던 야곱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다시 모세를 보십시오. 본연의 민족을 찾기 위하여 모세를 몰아냈던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그로 말미암아 민족을 거느리고 살고 싶으셨겠는가? 그러나 그 뜻을 모세는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온 인류에게 본향의 가정을 찾고 산천을 찾아 그 땅에 민족을 세우고 국가를 세워 세계를 회복하게 하려는 하나님의 뜻을, 세움 받은 사람들이 받들지 못하고 실패해 나온다 할지라도 그 뜻은 뜻대로 더 큰 범위를 갖추는 조건적인 인연을 맺어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본연의 민족을 찾으려 했던 하나님의 뜻은 연장되더라도 하늘은 이것을 수습하고 본연의 국가를 세우기 위하여 메시아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 메시아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민족을 중심삼고 하나님이 주도하실 수 있는 국가 형태를 갖추어 천적인 주권을 이 땅 위에 세워 드리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겠습니까? 그런데 민족의 책임자로 오셨던 예수님을 이스라엘 민족은 어떻게 대했습니까? 그를 중심삼고 하나의 본연의 국가를 건설하고 사탄들을 향해 행군하는 천군이 되어야 하고, 하늘의 정병이 되어야 할 이스라엘 민족이 어떠했습니까?

예수님의 죽음은 생이별입니다. 생이별이에요.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선조, 신앙의 선조들은 무엇이 잘났다고 자랑할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죽였던 것은 선민의 도리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가야 했던 길은 그런 길이 아닙니다. 생이별의 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유대 백성들이 예수님과 심정적인 통합을 이루었더라면

이 땅 위에는 예수의 생죽음의 한이 남아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의 죽음을 통해 지금까지 인간을 심정적인 이념으로 대해 나오신다는 것입니다. 유대 백성들이 세계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한 때를 바라보는 심정적인 연고입니다. 이러한 유대 백성들이 천적인 목표를 바라보고 나오는 사람들을 움직여 심정적 통합을 이루었더라면, 그로부터 이 땅 위에 하나의 우주관적인 내용을 갖추고 인간의 심정에 충격을 일으킬 수 있는 어떤 주의가 나왔을 것이요, 그렇게 되면 유대 백성들을 통한 하나의 세계는 반드시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여 이루려던 그 본향의 나라는 어디 갔느뇨? 어디 갔어요? 그 민족이 살 수 있는 가나안 땅은 어디 갔느뇨? 그 본향은 어느 갔는고? 아브라함이 축복받고 하늘 앞에 제사 지내던 그 땅, 그 성전은 어디 갔는고? 하나님이 직접 주관할 수 있었던 아담, 택하였던 노아와 방주 안에 있었던 그의 가족은 어디 갔는고? 우리들이 살 하늘의 안식처 될 수 있는 그 본향의 세계는 없습니다, 없어요. 그러기에 성경에도 고아와 같고 과부와 같은 우리라고 하였습니다.

김삿갓 같은 사람은 방랑객이 되어 삼천리강산을 유리고객하면서도 훌륭했어요. 훌륭했다는 거예요. 그러므로 여러분도 인생행로에 있어서 그 가는 모습이 처량할지라도 우주를 노래할 수 있는 감정이 하늘과 더불어, 만물 만상과 더불어, 그 흐르는 심정이 천정과 더불어 짝할 수 있는 인격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내가 그런 사람을 만났더라면 거지 깡통을 들고 다니는 한이 있더라도 지성을 다해 그를 모셨을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서러움의 역사를 되풀이하였고, 스스로 매고 때리고 자멸하는 입장을 거듭하여 왔습니다. 노아 때에도 그러하였고, 아브라함, 모세, 예수님 때에도 그러하였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역사의 종말시대에 있어서 인간의 운명을 해결하고 인간이 자기의 사명을 완수하고 생명의 길을 개척해 나가야 된다는 것을 경고하고 있는 이 때, 하나님은 어떠한 곳으로 인류를 몰아낼 것인고? 예수님 시대에는 본향의 나라를 찾기 위하여 인류를 몰아내었으나 이제부터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본향의 세계를 위하여 몰아내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찾아야 할 본향의 세계, 그 세계를 세우고 지배하기 위하여 만왕의 왕이 온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우리들이 고대하는 주님입니다. 인생행로에서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본향의 나라를 찾기 위해 끌리고 끌려 죽는 자가 있다면 그 나라가 세워질 때 충신이요 공신으로서 남아질 것이며, 하늘의 세움을 받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렇기에 과거에 바울도 자기의 모든 사회적인 권위를 저버리고 혈혈단신으로 처참한 죽음의 길까지 갔던 것입니다. 그는 한때가 올 것을 자신 있게 알았기에 그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 한때가 올 것을 자신 있게 알았기에 그럴 수 있었고, 하나님께서도 그런 한때가 올 것을 자신 있게 아시기에 오늘날 이런 섭리를 해 나오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런 길을 가야 할 인생이라는 것을 아는 여러분은 자신 있게 이 길을 가야 합니다. 자신 있습니까? 자신 있어요?

본연의 이상동산

우리가 가야 할 곳이 노아가 찾던 본향의 가정이요, 아브라함이 찾던 본향의 땅이요, 모세가 찾던 본향의 민족이요, 예수님이 찾던 본향의 나라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이루어 나오고 있는 것도 본향의 세계이거늘, 여러분은 그 세계와 여러분의 감정이 동할 수 있는 인연을 맺고 있습니까? 그렇지 못하다 할진대 여러분에게는 인류역사의 낙오자의 인을 받을 날이 올 것입니다.

우리는 본향의 세계가 그립습니다. 노아의 방주도 그립습니다. 오늘날 세계의 2대 진영은 암초에 부딪칠 순간에 당도하고 있고, 생사의 판결을 지어야 할 어려운 국면에 봉착하고 있습니다. 선악의 출발이 하나의 기점을 통하여 되어졌다는 것을 우리는 원리를 통하여 배우고 있습니다. 선악이 하나님을 놓고 시발되었으니 그 해결도 하나님을 놓고 되어야 하는 것이 철칙입니다. 잃어버린 것을 찾으려면 잃어버린 곳에 가서 찾아야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본연의 동산은 이상동산입니다. 유무상통하는 세계였고 형제의 감정이 만우주 어느 곳에든지 통할 수 있는 세계였습니다. 오늘날과 같이 민족적인 감정, 혹은 국가의 어떤 주권적 차이를 가지고 논의할 수 있는 이상과 주의의 세계가 아닙니다. 민족의 차별, 혹은 국가의 주권 등 그러한 모든 것을 넘어서서 논의하는 세계, 인간의 경제적인 사정이라든가 문화라든가 하는 조건의 차이를 가지고 논의하는 것이 아니라 심정을 가지고 논의하는 세계였습니다.

어떤 가정에 형님이 있고 동생이 있는데, 그 형님은 대통령이요 동생은 노동자라고 한다면, 형님이 동생에게 ‘야 이 녀석아, 너는 노동자니 우리집에 들어와서 노동이나 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참다운 형님이라 할진대 그 동생이 자기와 같지 못한 것을 한하면서, 높여 주고 싶은 심정이 동하는 것이 참다운 형님의 마음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가정적인 이념, 본향의 집을 그리워하시기 때문에 만 인류도 그러한 본향집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이것이 우리가 기필코 가야 할 운명의 역사적인 해명점이요, 인간적인 해명점이요, 섭리적인 해명점이라 할진대 그 관점과 기준은 나와 어떤 차이가 있는가? 이 차이가 크다면 우리는 대성통곡을 해야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불쌍한 저를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저는 아무것도 몰랐사옵니다. 역사의 흐름을 몰랐고, 역사가 지향하는 섭리의 방향과 목적을 몰랐고, 인생행로가 엉클어져 있음을 몰랐습니다. 혹은 선지선열, 역대 선조들의 고충과 역사적인 그 내적 심정을 몰랐습니다. 또 우리가 믿고 있는 예수님의 가신 길도 몰랐습니다. 하나님이 나오신 길도 몰랐습니다. 몰랐던 죄를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안다고 하는 입장에서도 용서받을 수 없는데 몰랐사오니 더욱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해야 합니다. 인간은 무조건 그래야 합니다, 무조건. 그래서 종교에서는 ‘교만은 원수라.’고 하였습니다. ‘교만하지 말라. 네가 나오지 말라, 네가 네가 원수다.’ 하였습니다. 왜냐? 나는 그와 같이 빚진 자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심정으로 가만히 눈을 들어 자신을 다시 바라보니 끔찍한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 역사적인 심정을 갖고 하늘과 더불어 무엇인가 느끼는 감정에 접하게 될 때 끔찍한 것을 느낍니다. 역사적인 비애, 비운의 장막들이 막혀 있는 것을 바라볼 때 몸이 진저리쳐진다는 것입니다.

그런 고비 고비를 참고 나오시는 아버지요, 그런 고비 고비에 부딪치어 죽어가면서도 그 나라 그 세계가 그리워, 그 세계의 자유를 찾기 위하여, 행복을 찾기 위하여, 평화를 찾기 위하여 싸워 나왔던 선지선열들인 것입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됩니다. 오늘의 나, 오늘의 우리, 오늘의 통일교회가 반대받는 것쯤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도 가야 할 이 길을 개척해야 되겠다는 확고한 신념 밑에서 ‘핍박이야 올 테면 와라.’ 하는 배포를 가져야겠습니다. 예수께서도 가룟 유다 일당 앞에 나타나게 될 때 늠름한 모습으로 나감으로써 이 모습에 그 일당은 머리를 숙였던 것입니다. ‘올 테면 와라.’ 하는 일면을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것도 심정으로는 왕래할 수 있습니다. 그렇잖아요? 어떤 악당이 있어서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을 막으려 하더라도 막을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어떤 의식적인 영감에 의해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자동적인, 자연적인 감정에서 느낄 수 있는 자리가 있다 할진대 여기에는 사탄이 아무리 침범하려 해도 침범하지 못합니다. 훼방했다가는 사탄이 큰일 난다는 거예요. 사탄이 녹아난다는 거예요. 인생행로에서 그러한 감정을 느끼는 사람이 천국 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못다 하신 말씀

우리는 본향을 찾아가는 인생행로에서 허덕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 14:6)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한 가지 더 첨부해야 할 말씀은 ‘나는 사랑이요’라는 것입니다. 이 말을 예수님은 빼놓았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하나님이여, 나는 사랑이요 진리요 길이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고 할 수 있는 자신을 가진 사람, 하늘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사람이 나왔다 할진대 그를 두고 ‘야, 이 녀석아 너는 이 땅에서 하늘을 배반한 자다.’ 하며 심판대에 올려놓지는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아들딸들이 땅 위에 많이 나오기를 고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을 높이 보는 것도 그것 때문입니다.

우리 통일교회 신자들은 인생행로에서 거친 파도 속을 더듬어 살피고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면서 하늘을 찾고 찾아 헤매다가 오늘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는 내 몸을 맡길 수 있는 곳, 내 마음을 맡길 수 있는 곳, 내 심정을 맡길 수 있는 곳이 있어야 합니다. 본연의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만물의 주인공이라 할진대 만물은 그를 대해 어떻게 생각할 것인고? 모든 만물은 아담을 대해 ‘어서 내 주인이 돼 주시옵소서.’라고 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기에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 하나님!’ 하는가? 하나님은 모든 것이 ‘내 주인 돼 주시옵소서.’ 할 수 있는 입장에 계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이상적인 주관을 받을 수 있어요?

오늘날 인류는 ‘저의 모든 것을 당신에게 드리고자 하오니 하나님이시여, 주인이 돼 주시옵소서.’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수 있는 역사, 그럴 수 있는 섭리, 그럴 수 있는 내용의 인격을 세웠다 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나아가 여러분이 그런 분을 땅 위에서 만났다면 ‘내 몸을, 내 마음을, 내 심정을 당신이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내 주인이 되어 주시옵소서.’ 해야 만물도 그를 고대하던 주인으로 모시려는 마음이 일어날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존재가 되어야겠다는 것입니다.

있고 싶고 살고 싶고 가고 싶은 곳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의 여러분이 진리를 통해 가지고 몸이 그렇게 되고 마음이 그렇게 되고 심정이 그렇게 되면 세상이 아무리 반대하여도 이 진리가 세계를 지배할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 진리는 세계를 지배하고도 남을 거예요.

이제 여러분이 있고 싶은 곳, 살고 싶은 곳, 가고 싶은 곳이 있다면 그런 곳이 본연의 자리일 것입니다. 그곳에 있는 식구와 식구들은 형제입니다. 안 보면 보고 싶고, 상처를 입고 있으면 그 상처를 붙들고 울어 줄 수 있는 마음이 우러나야 합니다. 여러분이 그래야 됩니다. 우리 식구 중 누가 상처를 받게 되면 가슴이 메어 울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해요.

우리의 본향집은 어떠한 곳이뇨? 아버지께서 나를 붙들고 울어 줄 수 있는 곳입니다. 주님께서도 같이 우실 수 있는 자리입니다. 심정의 인연을 한 부분도 빼지 않고 동반자의 입장, 친구의 입장에서, 혹은 신랑의 입장에서 대해 주시려는 하늘이라는 말씀, 고맙고 황송한 말씀입니다.

불초한 것을 모시고 주님이 울어 주시다니, 아버지께서 그러시다니 황공합니다. 그로 말미암아 내 인생행로에서 상처받은 모든 일체를 잊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려야 할 수 없이 큰 아버지의 사랑을 노래하는 감정이 앞서야 합니다. 그래야만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여러분, 학기초에 처음으로 타향에 온 학생들은 학기말이 되면 고향이 그리워질 것입니다. 그 마음이 순수하고 본연의 심정이라면, 자기가 갖은 고생을 다하고 고향에 돌아가서 어머니와 형제들의 손을 붙들고 눈물지으면서 자기의 지나온 사정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밤을 새워 가며 털어놓을 수 있는 그 자리, 그 마을, 그 산천을 그릴 수 있을 것입니다.

복귀의 한을 풀지 못한 우리, 우리에게 인생행로를 걷는 과정에 있어서 ‘오, 주여! 아버지여! 하는 순간에 온 천지만물이 기쁜 가운데에 옳소이다, 할렐루야!’ 하고 환호를 할 수 있는 순간이 있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 분에게는 그런 순간이 있어야만 됩니다. 있어야만 되는 거예요. 그것이 없다 할진대 하늘이 서러운 입장에, 불쌍한 자리에 놓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 행복한 자는 붙들고 울어 줄 수 있는 사람을 많이 가진 사람입니다. 자식이 좋다는 것은 무엇이뇨? 부모가 어려울 때, 부모가 눈물지을 때 같이 울어 주기 때문에 좋다는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또 부모가 기뻐할 때 같이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슬픔도 같이하고 기쁨도 같이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 자는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친구 중심삼고 자랑하지 마십시오. 나를 위하여 죽을 때 울어 주고 슬플 때 같이 울어 주기 힘듭니다. 그럴 수 있는 분은 부모입니다. 하늘은 그런 분이십니다.

우리의 나아갈 도의 이념을 책임진 지도자, 혹은 교단적인 책임자가 있다 할진대 그는 양들을 위하여 울어줄 줄 알고 통곡하며 불쌍한 마음을 가질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양들이 자기들의 모든 사정을 그 지도자 앞에 털어놓고 그로 말미암아 희로애락의 감정이 풍부해질 때 그 사람들은 참된 목자를 만난 행복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늘이기 때문에 좋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인생행로에서 고달픈 몸으로 승리적인 하나의 내용을 가지고 나타나게 될 때, 역사적인 모든 성현 현철 그리고 하늘이 환희하면서 맞아줄 수 있는 한 날이 온다는 것을 알고, 그 날을 영광스럽게 맞을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그날을 감사히 여기고, 그날에 자신들의 모든 허물을 잊어버릴 수 있고, 그날에 고대하던 소원을 다 이룰 수 있기를 바라고 나가야겠습니다. 그렇게 가는 사람이 오늘날 도의 길을 가는 사람들임을 여러분은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기 도>

아버님, 오라 하신 길이 어렵지 않은 줄 알고 나섰더니 어렵다는 것을 알았사옵고, 기쁨의 길인 줄 알았는데 가다 보니 눈물의 고비 고비임을 알았사옵니다.

아버님, 저희에게 슬픔이 있다 할진대 아버지를 붙들고 슬퍼하고 싶습니다. 인간들을 붙들고 슬퍼하다가는 낙망하기 쉬운 사실을 알았사옵고, 사람을 믿고 나가다가는 상처받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변치 않는 분은 아버님이었사옵니다. 아버님을 붙들고 울던 시간이 얼마나 행복스런 시간이었기에 예수님도 아버님을 붙들고 우시기 위한 길을 찾았겠습니까?

오늘 여기에 모인 통일의 식구는 교파가 문제가 아니옵고 어떤 형태가 문제가 아니옵니다. 아버님을 붙들고 올 줄 아는 사람들, 인생행로가 서글프고 외롭기에 인류 앞에 예수를 세워 먼저 이 길을 개척하게 하신 아버지의 심정을 알고 아버지를 위해 울어줄 줄 아는 참다운 아들이 되기를, 딸이 되기를 원하고 있사옵니다.

저희가 서럽다 하기 전에 먼저 모진 매를 맞으며, 모진 핍박을 받으며, 모든 억울함을 당하는 하늘이 계신 것을 알았을진대 어찌 하늘 앞에 자기를 변명할 수 있겠사옵니까? 하늘 앞에는 자기를 중심하고 슬퍼할 조건이 없다는 것을 알았사오니, 오늘 여기에 처한 당신의 아들딸들,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본향을 찾아가는 행로가 불쌍한 것이요, 비운이요, 불행하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아버님, 저희가 자신을 붙들고 울기 전에 아버님이 먼저 우셨고, 저희가 맞기 전에 아버님이 먼저 맞으신 것을 알았사옵고, 저희가 당하기 전에 아버님이 당하신 것을 알았사옵고, 저희가 아프기 전에 아버지께서 먼저 아프신 것을 알았사옵고, 저희가 쓰러지기 전에 아버님이 먼저 쓰러지셨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이것을 알고 하늘을 향해 말없이 가고 또 가고도 부족한 자신인 것을 발견하면서 하늘 앞에 머리 숙여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아들딸들을 하늘은 얼마나 고대하였사옵니까?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저희의 심정에 그런 감정이 동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이 나라를 대할 때, 세계를 대할 때, 하늘을 대할 때 그런 감정이 동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한 감정이 동해야만 개인으로부터 전체 세계적인 이념권까지 자신 있는 믿음을 가졌다 할 수 있으며, 자신의 이념을 세우기 위한 최고의 심정을 가진 하늘의 입장이 될 것을 알고 있사오니, 이와 같은 환경의 길을 개척해 나갈 수 있도록 저희의 마음을 일으켜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옵니다.

오늘 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가야 할 인생행로에서 서글퍼했던 자신을 비판하고, 행복에 취해 살 수 있고, 또 나의 한 몸을 하늘과 인연맺음을 높이 평가하면서 머리 숙여 아버지의 영광을 드높일 수 있는 자녀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니다.

모든 것을 맡기었사오니, 이들의 생명과 이들의 전체 생활, 이들이 지닌 모든 이념에 이르기까지 아버님의 심정에 어긋남이 없도록 주장하여 주시옵고 주관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올 때,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요한복음 14:1-19

<기 도>

아버님! 30여 년의 생애를 통해, 이스라엘의 선민 됨을 자랑하는 유대 백성을 대해야 했던 예수의 마음에는 그 민족에게 평화와 자유를 실현시켜 주려 했던 심정이 사라지게 되었던 것을 저희들이 어렴풋이나마 회상하지 않을 수 없사옵나이다. 4천년 동안 한 아들을 보내기 위하여 수고하신 아버지의 고역의 역사는 이스라엘 민족과 더불어 이루어 나왔사옵고, 흘리신 피땀의 흔적은 이스라엘 민족사에 스며 있사옵니다. 그렇게 고역을 당하시고 피땀을 흘리셨건만 그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이 하늘과 관계를 맺을 수 없었던 것이 무한히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사옵나이다.

오늘날 저희들은 과거 역사상에 왔다 갔던 예수님은 알고 믿고 있사오나 그 당시 이스라엘 민족에게 몰리고 쫓기시던 처참한 예수, 이 마을에서 쫓기면 저 마을로, 이 고을에서 쫓기면 저 고을로 방황하던 그 예수와 그의 심정을 알고 믿는 자는 없사옵니다. 하늘의 심정을 대신하여 나타나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아는 자는 역사상에서 찾아볼 수 없사옵니다.

메시아를 고대하던 이스라엘 민족이 메시아를 맞이할 소망을 품고 수천 년 동안 참으면서 싸워 나왔고, 메시아가 어느 때에 오실 것인가 하며 고대해 나왔었으나 정작 그 소망의 표적이 나타났을 때에는 자기들의 사정과 자기들이 처한 환경에 치우친 나머지 하늘의 심정을 알지 못한 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던 것을 저희들은 상기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이러한 한탄스러웠던 역사가 있었던 것을 상기하여 오늘 저희들에게 아버님의 마음 속에 사무쳐 있는 원한을 풀어 드려야 할 책임이 있다 할진대 오신 예수님을 몰라봤던 이스라엘의 죄상을 저희들이 대신 감당하여 풀어 드릴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를 슬프게 하였던 이스라엘의 실수를 책임지고 대신 회개할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은 슬픈 30여 년의 생애를 보냈사옵니다. 더욱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3년 공생애가 있었으나 누가 그의 심정을 알았사오며, 누가 그의 사정을 알았사옵니까?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희로애락을 같이하고 슬플 때 같이 슬퍼하고 외로울 때 같이 외로워하며 스승이라고 모시던 제자들도 몰랐습니다. 스승이 죽음의 길을 갈 것을 염려하여 간곡한 심정으로 하늘을 붙들고 호소해야 할 제자들이 도리어 예수님이 누구인가 하고 반문하는 처지에 있었으니, 3년 공사(功事)가 허사였음을 느끼신 예수님의 심정, 슬픔이 있다 할진대 이 이상의 슬픔이 어디 있으며, 복통할 일이 있다 할진대 이 이상 복통할 일이 어디 있었겠사옵니까?

권능을 행하신 예수님을 숭상하고 모실 줄 아는 크리스천은 있사오나 밟히고 밀리던 예수님의 그 발자취를 붙들고 살고자 하는 크리스천은 없사옵니다. 아버님, 불쌍하신 예수님의 심정을 붙들고 나설 수 있는 아들딸들이 이 만민 가운데 많이 나오기를 저희들은 피눈물로 호소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살아 계시어 역사의 배후를 조종하시는 아버지, 저희에게 은은히 갈 바를 가르쳐 주심을 아옵니다. 아버지시여, 과거의 예수님을 그리워하는 저희들이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고, 시대적인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하여 허덕일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저희들, 아버지 앞으로 가야 했던 예수님의 심정을 동정하고 그 심정 앞에 머리 숙일 수 있게 하여 주시옵고, 예수님이 기뻐하시고 소원하시던 그 무엇이 있사올진대, 그것을 이루어 드릴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2천년 전 인류의 생명 문제를 해결해야 했던 예수님의 심정에 사무칠 수 있고, 그의 심정과 관계 맺을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게 인도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사망의 세계에서 외로운 심정을 품고 허덕이다 모인 당신의 아들딸들, 이제 앉은 그 자리에서 뉘우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그 위에 아버지께서 생명의 채찍을 가해 주시어서 과거의 모든 그릇된 것을 부정하고 하늘과 새로운 인연을 맺을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 인간에게 말씀하시고 싶은 심정이 얼마나 간절하옵니까? 인간을 찾아 놓고 기뻐하시기를 얼마나 바라셨사옵니까? 이 한시간 마음 문을 열고 몸의 모든 감촉을 새롭게 하여, 아버지의 세계의 모든 사실을 체휼하고 아버지의 심정을 동경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선의 뜻에 잠기어 아버지를 부를 수 있고, 말씀으로 다시 빚어지고 재창조함을 받을 수 있는 기쁨의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나의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님! 이 한 시간이 헛되지 말게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말씀을 하고자 하오니 말씀을 전하는 자와 받는 자 사이에 간격이 없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슬픈 심정을 느낄 때 같이 느끼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아버지 앞에 황공한 심정을 느낄 때에도 같이 느끼게 하여 주시옵고, 모인 사람은 여럿이오나 이들이 하나가 되어 하나의 제단, 하나의 산 제물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날도 인류를 대신하여 모이는 수많은 제단 위에 축복하여 주시옵고, 불쌍한 처지에서 간곡히 호소하는 당신의 숨은 아들딸들이 있다 할진대 그들의 깊은 심정의 의논자가 되시옵고, 은사의 인연을 그들과 더불어 맺으시어 그들을 생명의 해결점까지 나아갈 수 있게 인도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남아진 시간도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것 아버지 앞에 맡기오니 사탄이 틈타는 시간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니다. 아멘.

<말 씀> 오늘 여러분과 같이 생각하려는 말씀의 제목은 ‘아버지와 나’입 니다. 이것을 더 크게 말하면 ‘아버지와 우리’ ‘하나님과 인간’이 되겠습니다. ‘아버지와 나’ 이러한 제목을 가지고 잠깐 동안 말씀드리겠습니다.

세상에 슬픈 일이 있다면 자식이 사랑하는 부모를 잃어버린 이상 슬픈 일이 없을 것입니다. 또 부모가 사랑하는 자식을 잃어버린 이상 더 슬픈 일이 없을 것입니다.

타락인간의 문제점

기독교에서 인간은 타락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현 사회를 보거나 추궁하여 해명해 볼 때 시인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어떤 죄악 된 근원으로 말미암아 오늘날과 같은 결과의 사회를 이루어 놓았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어떤 곡절이 원인이 되어 가지고 오늘의 결과적인 사회가 되었고, 그 결과적인 역사노정 위에 내가 서 있으며, 그 결과적인 내 자체로 말미암아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고민 중에 제일 큰 고민은 무엇이겠는가? 잃어버리지 않아야 할 부모를 잃어버림으로 말미암아 하는 고민, 잃어버린 부모를 찾기 위해서 하는 고민, 이 이상 더 큰 고민이 없을 것입니다. 또한 응당 가져야 할 부모를 갖지 못한 자리에서 하게 되는 고민, 응당 자녀를 가져야 할 자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식을 갖지 못하는 고민, 그 이상 큰 고민이 없다고 생각 할 수 있습니다.

타락했다 하지만 여기에는 인간과 하늘이 개재되어 있습니다. 또 여기에는 어떠한 이념과 일치되지 못한 내가 개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수긍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간이 타락했다는 것을 시인하고 들어가게 될 때, 타락은 상대적인 관계를 맺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내가 선하지 못한 것을 느끼면 선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요, 또 더 높아지기를 바라는 것은 더 높아 질 수 있는 그 무엇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게 하나에서부터 전체까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어떠한 사정에 의해 엉클어진 사건은 많을 수 있으되 심정에 엉클어져 있는 문제는 단 한 가지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부모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인간이 부모를 잃어버리고 하나님이 자녀를 잃어버림으로 끊겨진 인연을 다시 찾아야 할 것입니다. 잃어버렸던 인연을 다시 맺고, 잃어버렸던 기쁨을 다시 찾고, 잃어버렸던 행복을 다시 찾아야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들이 해결해야 할 중요한 문제일 것입니다.

그러면 죄악된 역사임을 인정하는 우리, 죄악의 세상에서 살고 있음을 인정하는 우리, 자기의 마음과 몸의 싸움으로 고민하고 있는 우리, 이 모든 것은 무엇으로 해결될 것인가? 그것은 훌륭한 체계를 갖춘 어떤 철학으로도 해결할 수 없고, 어떠한 이념이나 혹은 관념적인 신앙으로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단 하나 심정을 걸어 놓고 해결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 심정의 세계는 전과 후가 없고, 높고 낮음이 없으며 시작이자 끝이요, 끝이자 시작이라 할 수 있는 곳입니다. 그 심정으로만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먼저 염두에 두어야 되겠습니다.

인간의 슬픔이 무엇입니까? 타락으로 인하여 에덴에서 참된 주인을 잃어버린 것이 슬픔이요, 천지만물을 지으신 그 이념과 더불어, 그 지으신 심정과 더불어, 그 지으신 생명력과 더불어 화하여 노래할 수 있고 영원한 행복을 생활권에 끌어들여 생활할 수 있는 그 인연을 잃어버린 것이 슬픔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는 어떤 분이신가? 우리의 몸 마음의 주인임은 물론이요, 우리의 이념이나 우리의 감정세계의 주체격, 주인격에 설 수 있는 분이며, 더 나아가서는 우리의 심정의 주인이요 주체 되시는 분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우리의 의식이나 인정에 의해서 관념적으로 필요한 것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런 주인을 잃어버린 것이 슬픔입니다.

비단 주인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은 어떤 격위(格位)에 계시는가 하면, 인간의 아버지로 계십니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어 놓고 주인으로만 계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로 계십니다. 나는 너희의 아버지요 너희는 내 아들딸이라 하는 인연을 해명하고, 그러한 관계에서 행복을 노래하고자 하십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생활의 중심이요, 이념의 중심이며,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대하여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아버지 앞에 아들딸의 모습으로 서야 할 인간이 타락하여 불쌍한 신세로 살고 있습니다. 인간을 아들딸이라 부르고자 하시는 그 아버지는 어떠한 처지이며, 아들로 서야 할 인간의 모습은 어떠한 모양을 하고 있느냐? 아버지라 부를 수 있고 아들이라 부를 수 있는 환경과 처지가 되어 있지 못합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불러도 ‘오냐, 아들아.’ 할 수 없고, 아버지가 아들을 불러도 ‘예, 아버지.’ 하고 대답할 수 없는 곡절의 권내에 떨어져 있는 이것이 타락입니다. 이 한스러운 명사를 걷어치우기 위해 내려온 것이 역사노정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 한스러운 명사를 밟아치우고 이것을 없애기 위하여 싸워 나오는 것이 그분의 일일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게 될 때, 아버지라고 부르기는 쉽지만 실체적인 아버지로서 체휼하기는 어려우며, 인식적으로는 그 아버지를 감촉할 수 있으되 실체적으로 나를 대하고 계신 아버지를 모시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은 어인 연고이뇨? 타락한 연고입니다. 타락하였기에 이러한 입장에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환경에서 허덕이고 있는 우리요, 이러한 자리에서 그래도 죽지 않고 살겠다고 싸우고 있는 나인 것을 시인하게 될 때 나와 그 아버지와의 간격이 어찌나 먼지 모르겠다고 느껴질 것입니다.

우리는 이 거리를 메워 줄 수 있는 어떠한 지도자가 이 땅 위에 나타나기를 고대해야 할 것입니다. 이 거리를 메워 평탄한 길을 닦아 줄 수 있는 세계적인 지도자가 나타나기를 고대하여야 될 것입니다. 그 지도자는 내 몸의 지도자만이 아니요, 내 마음의 지도자만이 아니요, 내 심정의 지도자여야 할 것입니다. 그는 시기에 따라 변하는 지도자가 아니요 혁명적인 내용만을 내포한 지도자가 아닌 영원 절대적인 지도자여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그러한 지도자를 생각도 해 보지 못하였다 할진대 오늘 이 시간, 자기를 반성하고 관념에만 사로잡힌 자아를 비판하여야 됩니다. 자기가 머물러 있는 위치를 알아서 다시 자아의 가치를 평해야 되겠고, 천지의 대운세 앞에 자신이 어떠한 입장에 섰는가 비판해 보아야 되겠습니다.

타락한 인간에게 고마운 일이 있다 할진대 잃어버린 아버지를 소개해 주는 것 이상 고마운 일이 없을 것이요, 하늘에게 기쁜 일이 있다 할진대 잃어버린 자식을 찾는 것 이상 기쁜 일이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인연을 다시 맺어 줄 수 있는 한 사람이 나왔다면 이는 하나님의 역사적인 수고를 풀어 드릴 수 있는 한 분일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이 고대해야 할 것

인류를 망하게 하려는 것이 하늘의 뜻이 아니라 그들에게 살 길을 찾아 주어야 할 책임을 지고 하늘이 섭리의 뜻을 세워 나온다 할진대 하늘이 바라고 인류가 바라는 부자(父子)의 인연을 회복해 줄 수 있는 주인공이 기필코 나와야만 된다는 것입니다. 역사를 헤아려 볼 때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타락세계에서 허덕이는 우리는 죄악 된 자체를 비판하고 이를 분히 여겨야 하며, 타락 당시의 일을 분히 여겨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고대할 것이 무엇이냐? 잃어버린 본연의 부모입니다. 잃어버린 본연의 주인공, 잃어버린 본연의 아버지를 찾아야겠다는 마음이 사무친 사람에게는 회생의 외길이 열릴 것입니다. 그런 자가, 그런 무리가, 그런 움직임이 이 땅 위에 있다 할진대 자식을 찾아 헤매는 하늘은 그런 무리를 통하여 움직여 나갈 것이며, 부자의 인연을 맺기 위해 애쓰시는 하늘은 그런 자를 붙들고 사정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수천년의 역사노정을 거쳐오면서 ‘그 누가 그렇다.’ 하는 사실을 만민으로부터 듣지 못하였다 할진대 만민을 원망해야 될 것이요, 역사노정에서 성현들이 이런 사실을 소개해 주지 못하였다 할진대 역사상의 성현들을 원망해야 할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뜻을 이루겠다고 나선 성인의 말씀 가운데서 그러한 내용을 찾지 못하였다 할진대 하나님이 없다고 부정해도 좋을 것입니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섭리하시는 하나님은 우리 인간 안에 거하시고 우리 인간이 하나님 안에 있기를 고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를 대하여 ‘나는 하나님의 독생자요, 너희는 나의 형제’라고 하셨습니다. 또 ‘내가 가는 것은 내 뜻대로 가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의 뜻대로 가는 것이다. 내가 바라는 나라는 내 나라가 아니고 아버지의 나라다. 내가 찾는 사람은 내 사람이 아니고 아버지의 사람이다. 내가 살고 싶은 곳은 내 가정이 아니고 아버지의 가정이다. 내가 자랑할 수 있는 나라는 내 나라가 아니고 아버지의 나라다.’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하늘은 아버지요 땅은 어머니’라 하셨고, 인류를 대하여 ‘나는 신랑이요 너희는 신부’라 하셨습니다.

이런 고마운 명제가 천륜 가운데 남아져 있어야만 하늘이 계시다는 것을 긍정하겠고, 그런 내용을 갖춘 그 무엇이 있어야 그 길을 찾아갈 수 있겠기에 종교를 세워 인간들을 그런 방향으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이러한 견지에서 부자의 인연을 소개하고 부부의 인연을 소개하고 형제의 인연을 소개하는 내용을 갖춘 종교가 최후의 종교일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기독교의 원칙은 여기에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못합니다. 이것을 황공하게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역사상에 성현들이 아무리 많이 왔다 갔어도 그들은 하늘을 관념적이고 막연하게 소개하였을 뿐 하늘을 실존적으로 체휼할 수 있는 내용을 소개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유대민족이 비웃는 자리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하여 아버지라 부르셨고, 또 핍박이 가중해 들어와도 그 핍박을 이겨내며 하늘을 염려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일찍이 그 누구도 체험하지 못하였고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자아를 갖고 그 누구도 깨닫지 못하던 우주관과 인생관을 해명하는 자리에 엄연하게 서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사정적인 내용으로써 해명한 것이 아니라 심정적인 내용으로 해명했습니다. 또 그 자신이 그것을 해명한 실체의 모습으로 나타났기에 그는 메시아였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하늘이 보내시지 않은 사람 가운데 그런 사람이 나타났다 해도 메시아로 인정해야 될 것이에요. 천륜의 역사는 그렇게 움직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이 보내신 분입니다. 그는 오셔서 죄악 밑에서 움직이신 것이 아니라 역사상의 죄악과 타락으로 말미암은 모든 원한을 해원할 수 있을 때까지, 아버지의 심정이 남아 있는 곳에서부터 그 심정의 움직임이 끝난 곳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도맡아 해결지을 수 있는 하나의 주체로서 땅 위에 오셨기에 그런 입장에서 예수님은 하늘과의 사랑을 땅 위에 연결해 놓으려 하였던 것입니다. 나는 신랑이라 하셨고 너희는 신부라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들은 자녀의 명분을 갖추고, 신랑 신부의 심정을 지녀야 되겠고, 나중에는 그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시던 그 자리까지 나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다시 찾아 세워야 할 아버지와 나의 관계

전세계 기독교인들은 주님을 신랑이라 부르고 있고 자신들은 그 앞에 당당히 나타날 수 있는 신부라고 자인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려면 간단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사정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일편단심의 심정을 지녀야 가능합니다. 그리고 그 심정은 자기 자신의 심정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6천년 동안 섭리해 나오시던 그 역사적인 심정과 이 현실을 거쳐 미래까지 거쳐 나갈 수 있는 심정이어야 합니다. 이런 심정을 지닌 신부가 되어 하늘을 위하여 움직이고 주체의 가치를 인정하면서 ‘오! 신랑 되신 주여!’ 하여야만 거기에 하늘이 응해 주시리라 봅니다.

우리는 남기신 말씀은 귀중히 여기고 있습니다. 하신 말씀은 귀중히 여기고 있으되 말씀을 지키고 행하는 사람은 귀중히 여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약속되었던, 바라고 있던 메시아는 귀중하게 여길 줄 알았으되 말씀의 실체로 나타나신 그분을 귀중하게 여기지 못했던 것이 역사적인 서러움입니다. 말씀을 들어보면 그럴듯한데 인간을 보면 보통 사람하고 같기 때문에 그랬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곡절을 다시 한번 생각하면서 우리 자체들의 한스러운 입장을 해명하고 찾아 세워야 할 부자의 인연을 해명하지 않는 한 우리에게는 무슨 소망이니, 무슨 천국이니, 무슨 이상세계니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거예요. 없다는 것입니다.

죄악의 혈통을 받은 우리, 죄악역사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우리, 죄악권 내에 속하여 생활하면서 그 환경을 넘어설 수 없는 우리, 이러한 우리인데 아버지와 나의 관계를 어떻게 해명할 것이냐? 이것은 우리가 노력한다 해도 할 수 없기에 심정을 걸어 놓고 믿으라 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가 전한 복음입니다. 무슨 조건을 걸어 놓고 믿으라고 한 것이 아니라 심정을 통해서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성경 66권의 모든 말씀을 능통하는 것보다도 66권을 통하여 나타내시려던 아버지의 심정, 타락으로 말미암은 원한을 해명하려는 내용보다도 타락시키지 않고 살고자 하셨던 아버지의 심정, 아버지를 잃음으로 말미암아 이렇게 되었으니 다시 이루려 하시는 그 심정, 타락된 인류를 구하여 그렇지 않은 입장에 세우고자 하시는 그 심정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문제일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대하여 아버지라 하고 자신은 그 아들딸이 되고 싶다 할진대 이 거리를 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은 우리 인간에게 죽도록 성경 말씀만 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도 죽도록 내 말씀만 들으라 하신 것이 아니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3년 공생애노정 동안 많은 말씀을 하고 가셨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자신이 한 말을 붙들고 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실체를 붙들고 염려해 주기를 고대하셨습니다.

심정의 세계에는 차이가 없기에 지극히 선하고 높으신 하나님이지만 그 분을 대하여 감히 아버지라 할 수 있다는 것이에요. 부자의 인연에 사무친 심정으로 ‘아버지!’ 하고 붙들게 될 때에 그 아버지가 ‘네 손은 딴 손이다. 네 몸은 딴 몸이다. 네 마음은 딴 마음이다.’ 하실 수 없다는 거예요. 심정적으로 일체의 입장에 들어간다 할진대 우리는 아버지의 연장체입니다. 연장체요 아버지의 분신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우리의 몸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던 내용과 우리가 아버지라고 부르는 그 내용의 귀일점을 어떻게 이루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나아가 그 내용이 같은가 다른가가 문제가 아니라 심정의 귀일점을 이루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렇다 할진대 예수님께서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요 14:20) 하신 말씀이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심정의 세계는 시간을 초월합니다. 공간을 초월합니다. 여기에는 혁명이라는 명사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2천년 전에 가신 예수님을 오늘의 예수님으로 모실 수 있고 오늘의 나와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인연을 무엇으로 맺을 수 있느냐? 말씀만으로 안 됩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셨다는 관념적인 인식을 갖고는 안 됩니다. 심정으로만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심정세계

이러한 견지에서 헤아리게 될 때, 땅의 인간을 위해 왔던 예수님은 무한히 슬픈 분이었습니다. 하늘을 대신하여 오셨던 예수는 무한히 슬픈 분이었습니다. 그의 눈물은 인간의 슬픔을 대신한 눈물이요, 그의 서러움은 하늘의 서러움을 대신한 서러움이었음을 어느 누구도 몰랐습니다. 그의 3년 공생애노정에서 겪은 고난은 인간을 위한 고난이요, 하늘을 위한 고난이었음을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의 죽음은 인류를 대신한 죽음이요, 하늘의 심정에 남겨진 피어린 자국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아무도 몰랐습니다.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하늘을 향해 기도하실 때 “아바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마 26:39)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모든 사정을 초월하신 기도였습니다. 인간 속세의 일체를 초월한 자리에서 하신 기도였습니다. 나는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는 내 것이오매, 내 서러움이 아버지의 서러움이라 생각하신 예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죽음이 억울한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더 수고하시고 더 아파하시고 더 억울해 하신다는 일체적인 감정을 느끼셨고, 하늘에게는 그렇게 고통을 받으면서도 인간을 붙들고 만민을 구하여야 할 뜻이 있다는 것을 아셨기에 그 길을 늠름히 넘어설 수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온 인류를 찾기 위한 뜻을 중심삼고 예수의 심정과 하나님의 심정이 통하였기에 그 뜻을 세우려고 예수님께서는 죽어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다고 하기는 쉽지만 그 내용에 들어가 심정을 통하는 자리까지 갈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만일에 하나님이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사람을 찾으시지 않는다 할진대 참다운 사랑이라는 것도 없어야 할 것입니다.

아버지라 부르시던 예수의 음성, 불쌍한 자녀들을 대하여 외치셨던 예수의 말씀, 그 말씀의 전부가 하나님의 심정에서 우러나서 예수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어늘, 여러분은 성경 말씀을 볼 때에 눈앞에 계신 듯이, ‘주님!’ 하고 그를 붙들고 싶은 심정을 느껴 봤습니까? 더 나아가서는 ‘아버지, 저는 아버지의 것입니다. 몸도 아버지 것이요, 마음도 아버지 것이요, 내 사무친 심정도 아버지 것입니다. 아버지 것 외에 제 것이라고는 일체 없습니다.’라고 할 수 있는 심정을 통해 보았습니까? 못 통해 봤으면 자녀의 입장에 서지 못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잠을 잊고 밤을 새워 기도하실 때에도 아버지가 같이하심을 알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30여 년의 생애를 거쳐 나가는 동안 그 생활 속에 핍박이 몰려오고 어려운 십자가가 가로놓이는 자리에 설지라도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심정을 가지고 사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탄이 침범하지 못했다는 거예요.

심정의 세계는 둘로 나뉘어져 머물 수 없습니다. 사정의 세계에는 많은 수가 움직일 수 있으되 심정의 세계에는 둘이 있을 수 없습니다. 4천년 역사의 심정을 받들어 나가는 자리에는 부자의 인연 외에는 일체 내놓을 수 없습니다. 거기에 어떤 다른 논거를 세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한마디 말씀은 아버지의 말씀이요, 예수님의 요구는 아버지의 요구로 나타날 수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예수님의 제일 귀중한 것

오늘날 여러분들이 교회엘 나가고 신앙생활을 한다고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 수십년의 신앙생활을 하여 신앙적인 인격을 갖추었다고 즐거워하는 사람보다도 말씀은 모를지라도 심정이 통하고 하늘땅 앞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저나라에 가면 도리어 더 높은 위치에 있게 된다는 것을 저는 느끼고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늘 가는 길은 다 잃어버리고 가는 길입니다. 세상의 일체를 잃어버리고 가는 거예요. 죄악 된 세상도, 죄악 된 내 몸도, 그 무엇도 다 버려야 합니다. 단지 남길 것이 무엇이뇨? 하늘 대하여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심정입니다. 그 심정을 지녀야 신랑 되신 주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천주(天宙)를 감돌고도 남을 수 있는 우주관입니다. 오늘 날 무슨 주의를 중심삼은 무슨 관이니 하는 것은 다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심정을 가진 분이셨기에 하나님이 임재하셨다는 거예요. 우리에게도 그것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가진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옷이라고는 몸에 걸치고 다니는 단벌뿐이었습니다. 가진 것이 있었다면 지팡이가 고작이었을 것이에요. 그러나 가진 것이 있었다 하더라도 결국은 무엇이 제일 귀중했겠느뇨? 온 우주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것이 있다 할진대 그것은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간곡한 심정이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전체 가치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인류의 보금자리는 어디인가

바울은 말씀도 다 지나간다고 했습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잃어버린 아버지를 찾기 위해 역사의 고비 고비를 거쳐오면서 슬픔과 억울한 상처를 입고 나온 인간을 사랑해 오신 아버지의 간곡한 심정, 좌우에서 몰려오는 핍박이 심하고 원수들의 화살이 자기를 노리는 이러한 환경이 중첩하면 중첩할수록 바울은 그것을 극복하기를 간곡히 바라시는 아버지의 사랑의 심정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하였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함이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롬 8:35)고 했습니다. 그 말이 옳습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의 말씀과 생애의 모든 것을 유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심정을 갖고 계셨던 예수님을 마음대로 하실 수 있었기에 죽은 예수를 부활시킬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역사의 인연도 그러한 고비에서 새로이 사회를 혁명해 나왔거늘 천륜의 인연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악에 물든 한스러운 역사를 삼킬 수 있는 것은 심정만이 가능합니다.

그러기에 오늘날의 역사는 예수님의 이념권 내로 굽어 들어가고 있습니다. 이것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 현세의 역사를 넘어서 이상적인 새로운 세계에 남아질 수 있는 어떠한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는 하나님을 대하여 ‘아버지’라 할 수 있는 심정을 가진 자일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을 대하여 신랑이요 형님이라 할 수 있는 자일 것입니다. 예수께서 친히 너희는 나의 친구라 하셨고 형제라고 말씀하셨거늘, 우리는 그럴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역사적인 종말에 인류 앞에 주어질 선물이 있다 할진대 그것은 딴 것이 아닙니다. 27억 온 인류가 하나님을 대하여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고, 아버지의 역사적인 인격을 심정적으로 해명할 뿐만 아니라 그 감촉을 느껴 자기 자체를 해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 할진대 이 인류는 새로운 세계를 맞을 것입니다.

인간들의 심정은 다 하늘 것입니다. 예수님은 복음의 말씀을 갖고 나타 나셔서 ‘너희들은 누구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고, ‘나는 신랑이요 너희는 신부라.’ 하셨습니다. 이런 모순된 말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고마운 말씀입니다. 한스러운 복귀노정을 걸어가야 할 인간 앞에 하나님을 대하여 아버지라 하시고 또 우리를 신부라 하셨으니 이러면 일이 다 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은 나면서부터 이러한 심정을 갖고 살았고, 이러한 심정으로 말씀하셨고, 이러한 심정을 갖고 수십년 동안 사탄과 대결하셨던 것입니다.

진정한 부모와 자식의 관계

인류의 보금자리는 사정이 통하는 세계가 아닙니다. 심정이 통하는 세계입니다. 국경도 초월하여 마음에 스며드는 느낌이 ‘오냐, 그렇구나.’ 할 수 있는 심정의 세계입니다. 오늘날 인간이 그러한 심정세계의 느낌을 가지고 역사적인 사정을 초월하지 못한다 할진대 하나님의 통일이념은 이룰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을 보내신 것도 헛수고가 됩니다, 헛수고. 신부니 아버지니 하는 것도 전부 다 공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심정이 사무치게 될 때는 민족이 문제가 아니요, 지상의 어떤 주의가 문제가 아닙니다. 사무친 심정을 가지고 있다면, 이러한 것을 넘고 넘고 또 넘고, 버리고 버리고 또 버리고도 기뻐할 수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역사의 종말에는 그것을 물려받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천국은 네 마음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무한한 천국이 내 마음에 있다는 것, 그것은 천국이 내 심정에서부터 연락된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늘을 대하는 데 있어서는 심정의 연결 없이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아버지이고 우리가 자식이라 할진대는 그 몸과 내 몸은 한 몸입니다. 아버지의 피 살과 내 피 살은 일체예요, 일체. 세상에서도 그렇잖아요? 부모가 왜 자식을 사랑합니까? 자기 몸의 연장체이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라 하려면 핏줄이 같아야 됩니다. 핏줄이 연결되어 있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심정 면에서 하나님과 예수와는 일체였습니다. 하나님의 동맥이 움직일 때 예수의 동맥도 움직이고, 하나님의 맥박이 뛸 때 예수의 맥박도 뛰고, 정할 때 정했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그리고 부모가 자식을 대해서 ‘내가 너를 사랑한다.’ 하고 사랑하는 사람 있어요? 또 자식이 부모를 대해서 ‘제가 부모를 사랑하고 사모합니다.’ 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요? 피가 통해서 자동적으로 그렇게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 세계는 어떠한 논리적인 조건을 해탈한 세계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우리는 타락한 인간이기 때문에 양자라고 했습니다, 양자. 여러분 큰소리치지 마십시오. 타락한 인간은 양자라고 하였습니다, 양자. 양자는 혈통이 다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양자의 혈통을 청산하고 아버지의 심정으로부터 연유된 혈통을 고스란히 이어받아서 그 심정을 이어받은 아들, 사랑하고 싶지 않아도 자연히 사랑할 수 있는 그런 아들을 고대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아도 아버지가 나를 사랑할 수 있고, 사모한다고 말하지 않고도 아버지를 사모할 수 있고, 내가 아버지를 위해 싸운다고 말하지 않아도 아버지를 위해 싸울 수 있는 심정이 동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심정이 동하지 않는 것이 타락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면에서 달랐습니다. ‘아버지!’ 하면 슬픔에 잠긴 아버지도 ‘오냐’ 하셨던 거예요. ‘아버지!’ 하는 그 한마디에 아버지께서는 수억천만인의 기도의 세계를 넘어선 심정을 느끼셨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오냐’ 하는 이것은 슬픈 역사를 초월한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중심삼은 자연적인 인연입니다. 그 무엇이 어떻게 하려야 어떻게 할 수 없고, 어떤 것으로도 부정하려야 부정할 수 없고, 어떤 조건으로도 이것을 막아내려야 막아낼 수 없는 자리입니다. 그런 자리에 들어가 봤습니까?

여러분이 그런 자리에 들어가게 되면 세포까지 동하게 됩니다. 저 젊은 사람이 정신없는 소리한다고 할는지 모르지만 누가 무어라 해도 좋습니다. 사랑의 심정, 사랑의 감촉은 온 실존세계의 본질이고 전체를 종합한 맛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이 그립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 여러분이 들어가서 기도한다 할진대 밥이 문제가 아닙니다. 자신이 밥을 먹었는지 잠을 잤는지 그런 인식을 초월하게 됩니다. 인간이 육신을 쓰고 인식하는 것보다 몇 천만 배 능가하는 내적인 감정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 사랑의 세계입니다. 그럴 게 아니에요? 예수님이 핍박받다가 피곤한 다리를 끌고 감람산에 들어가 하늘 대해 고요히 기도하시던 그 시간은 다른 사람이 모르는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아버지라고 부르짖는 그 순간은 자기 일신의 전부가 심정세계에 동화되어 들어가는 순간이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도 잊어버릴 수 있는 심정적인 내용을 갖추었기에 원수를 대하여 복을 빌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심정에 화하여, 그런 심정에 동하여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고 아들이라고 사랑할 수 있는 자리가 이 세계에 나타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내용을 가지고 오셨으나 심정세계의 생활내용을 해명해 주지 못하고 가셨습니다. 그 사정은 소개하였지만 심정의 내용을 소개하지 못하였기에 다시 와야 된다는 거예요.

하나님을 대하여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심정의 귀일점을 찾아 들어가려면 내 몸이 아버지의 몸이 되어야 합니다. 내 피가 아버지의 피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입장에 서게 될 때 여러분은 성전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성전이 되면 그 마음 몸은 자기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것입니다. 여러분의 기원이 자기가 아닙니다. 아버지로부터 시작되었으니 아버지에게서 끝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자체는 여러분 것이 아니라 아버지 것입니다.

여러분의 피 살이 아버지의 피 살을 대신한 심정의 자리에 들어가게 되면 하늘이 슬퍼하실 때 여러분은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여기 처음 온 사람들, 그런 자리가 어디 있겠느냐 하겠지만 있단 말입니다. 심정의 세계는 모든 실존의 가치를 몇 천만 배 능가한 세계입니다. 우리가 이 세계와 관계를 맺게 될 때는 인식을 초월하게 됩니다.

아버지의 친아들딸이 된 후에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여러분이 그런 자리에 들어가려면 먼저 혈통적으로 같아야 합니다. 자신의 피 살이 아버지의 피 살과 같다고 느껴져야 됩니다. 아버지의 친아들딸이 되었다 할진대 그 다음에는 뜻을 같이해야 됩니다, 뜻. 그 뜻이 무엇이냐? 타락한 세계를 복귀하는 것입니다. 즉 인류의 죄악사를 청산한 본연의 실체, 선한 실체가 아버지의 품에 안기어 살 수 있는 세계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은 아버지의 피 살을 이어받아야 되고, 우리의 마음은 아버지의 나라를 이루려는 뜻을 품어야 됩니다. 또 생활에서는 아버지의 심정을 느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버지의 아들로 설 수 없다는 거예요. 그렇잖아요?

아버지가 슬퍼하면 자식도 슬퍼하고, 아버지가 괴로워하면 자식도 괴로워해야 하고, 부모가 어려운 생활을 하면 자식도 어려운 생활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참다운 효자라 할진대 부모의 뜻을 받들어서 움직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버지의 피 살을 통한 인연을 가져야 되겠고, 뜻을 통한 인연을 가져야 되겠고, 거기에 생활을 연한 심정을 갖추고 나야 하늘 대하여 아버지라 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늘은 이런 내용을 인간에게 접붙이기 위하여 지금까지 수고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늘은 이러한 인연을 성사시키기 위하여 인간들이 생각지도 않는 가운데 많은 수고를 하셨다는 것을 여러분이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양자의 입장에 있는 우리들을 심정이 통할 수 있는 친아들딸의 자리까지 끌어올리기 위하여 하늘은 무한히 애쓰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억울함이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억울함과는 비교할 수 없고, 우리에게 슬픔이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슬픔과는 비교할 수 없으며, 우리에게 분함이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분함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또한 우리가 어떤 상처를 입었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입은 상처와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이상 역사적인 억울함을 체휼해 나오셨고, 우리 이상 슬픈 심정을 지니고 역사와 더불어 슬퍼해 나오셨으며, 우리 분함의 몇 천만 배 더한 분함을 품고 나오셨습니다. 또한 우리보다 더한 상처를 입으신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을 대해 사탄이 참소할 수 없었던 이유

예수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아셨는데 그 아버지를 어떤 아버지로 알았느냐? 가시면류관을 쓰고 있을 때 하나님이 자기보다 몇 천만 배 고통스런 가시면류관을 쓰고 계심을 느꼈고, 십자가에 못박히게 될 때도 하나님이 자신보다 몇 천만 배 고통을 당하고 계심을 알았습니다. 심장에 창이 들어오더라도 예수님은 하나님이 자기 이상 고통스런 자리에서 자식을 위하여 수고하는 아버지이신 줄 알았기에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한을 남길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고통을 당하며 갈지라도 인류 앞에 한을 남기지 않겠노라고 결심하셨습니다. 원수를 대해 말할 수 없는 통분과 원한을 가질 수 있는 자리로되 하늘의 참으심을 생각하게 될 때 그럴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한스러운 인류를 구하기 위한 예수였기 때문에 자신의 죽음과 고통을 이겨야 했습니다. 그런 예수여야만 구주가 된다는 것입니다. 생명을 잃어버린 인간이었기에 생명을 잃더라도, 모든 욕망을 다 포기하고서도 하늘을 원망하지 않는 입장에 들어가야 합니다. 예수는 그런 입장에 들어갔기에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한 생명의 구주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렇게 원망의 마음을 갖지 않은 예수, 분하다는 마음을 갖지 않은 예수, 역사적인 한에 의해 지배당하지 않은 예수였기에 사탄이 참소할 수 없었습니다. 사탄은 어떤 존재냐? 역사적인 한을 제시하여 참소하는 존재요 사정적인 것에 사로잡히게 될 때에 못 간다 하고 막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사탄이 예수님을 참소하지 못한 것은 이 타락한 세계의 원한, 천주의 원한까지도 그에게는 걸릴 수 있는 조건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조건을 갖고 하나님께 항의하던 사탄도 쌍수를 들고 항복하였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은 가식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죽어 사라지는 것보다도 인류가 영원한 죽음에 빠지는 것을 염려하며 눈물짓는 사람을 참소한다면, 사탄은 그 본체가 파괴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사탄이 주관하지 못합니다. 오로지 하나님만이 주관하신다는 것입니다. 믿음과 소망권 내는 사탄이 얼마든지 참소할 수 있으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일편단심의 간곡한 마음권 내는 사탄이 손톱만큼도 점령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탄의 모든 인연을 넘어선 세계가 천국이기 때문에 천국은 사탄과 인연이 없는 세계임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께서 부르던 그 아버지를 오늘 우리는 그의 공로에 의지하여 ‘아버지여’ ‘주여’ 하면서 부르고 있습니다. 황공한 일입니다. 오늘도 죄악권 내에서 허덕이고 한스러운 생활의 일편을 붙들고 눈물짓는 우리입니다. 오늘의 사회와 이 세계를 바라보게 될 때 흘러가는 사조는 역사적인 한을 품고 뒤넘이치고 있고 공포에 싸여 있습니다. 이런 세계 속에서 내 감정을 점령 하고 있는 것은 무엇이뇨? 공포입니다. 내 생활을 휩쓸고 있는 것은 무엇이뇨? 말할 수 없이 파탄된 의리입니다. 더욱 하늘은 새로운 세계를 세우고 싶고 참된 의를 세우고 싶은데, 그것들을 세울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늘은 오늘도 변함없이 그러한 사람을 찾아 헤매고 계심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섭리로 본 한민족의 입장과 그 살 길

삼천만 민족은 하나님을 모른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이 민족의 역사와 같이하셨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의의 심정을 품고 충신의 의리를 세우기 위하여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하늘이 기억할 수 있는 어떤 충신이 있었다 할진대 하늘은 그의 발자취와 그의 심정 또는 그 민족 위에 왕래하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의 나는 빚진 사람입니다. 이 민족은 빚진 민족 중에 빚진 민족입니다. 불쌍한 사람을 구하려는 하늘이요, 타락한 자식을 붙들고 통곡하시는 부모의 심정을 가진 하늘이라 할진대 잘 사는 민족보다도 못사는 민족을 바라볼 때 더욱 불쌍히 여기실 것입니다.

우리 민족은 다른 민족 앞에 자랑할 무엇이 없습니다. 가질 것을 갖지 못하였습니다. 다 빼앗겨 버렸고 다 잃어버렸습니다. 여기에서 다시 우리가 무엇을 가질 수 있다 할진대 나는 원합니다. ‘피 끓는 청년 남녀들이 갈 길을 몰라 방황하는 마음에 예수께서 하늘 대하여 아버지라 부르던 불타는 심정을 일으켜 주시옵소서.’라고. 이들이 그렇게 된다면 이 민족을 다른 어느 민족이 지배할 수 없을 것입니다.

불쌍히 보는 아버지의 심정, 불쌍히 느끼는 아버지의 그 심정 앞에 ‘아버지! 나는 이랬습니다.’ 하고 나서는 아들딸이 많다 할진대 버림받아야 할 이 세계와 파탄될 수밖에 없는 주의와 사상을 새롭게 할 것입니다. 그러한 청년남녀, 그러한 클럽, 그러한 민족이 있다면, 그들은 세계를 지배할 것입니다. 유대민족 가운데 예수님이 오셨던 시대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로마의 압정하에서 신앙적인 사조가 혼란되고 민족의 정기가 다 파탄되었으며 거기에 딸린 모든 것이 흔들렸습니다. 하늘은 그렇게 슬픔이 사무친 때에 예수를 보내셨던 것입니다.

원망스럽고 한스러운 사실은, 어찌하여 민주와 공산 2대 진영이 대결하는 초점으로, 제물로 한국이 등장했느냐는 것입니다. 슬픈 사실입니다. 우리에게는 친구가 없습니다. 민주와 공산 진영이 모두 우리 민족을 제물 삼아 대치하고 있습니다. 복된 나라를 건설해야 할 이 민족이 슬픔의 민족으로 위험과 모험의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확실히 알아야 될 것은 이 환경을 이루어 나오고 민족을 뒷받침해 나온 천륜이 있다 할진대 그 천륜과 합할 수 있는 아들딸이 되어야 합니다. 그 하늘과 관계를 성립시킬 수 있는 무엇이 나온다 할진대 이 민족은 살아납니다.

외적으로 가진 것이 없었던 예수가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사정의 세계와 소망의 세계를 소개하고 오늘날 세계를 예수주의권 내로 몰아넣고 있거늘, 천적인 심정을 통할 수 있는 내용을 가진 어떠한 것이 나타났다 할진대 마음과 심정세계를 찾아 헤매는 인간들이 아니 굴하려야 아니 굴할 수 없고 아니 접하려야 아니 접할 수 없는 최고의 절대적인 하나의 기준이 될 것입니다. 오늘날 이 한민족은 신앙적인 혼란기에 있습니다. 인격을 자랑할 수 없는 환경에 처해 있고, 생활 속에서는 공포를 느끼고 있으며, 모든 사조가 휩쓸려 우리 민족을 송두리째 밀어내고 있는 이 때 우리는 무엇을 붙들고 안식할 수 있겠습니까?

한민족의 나아갈 길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셨으나 처참한 30여 년의 생애와 슬픔과 고난의 3년 공생애노정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그 무엇이 가로막는다 할지라도 그것을 제거시키고도 남을 수 있었던 늠름한 기세, 불타오르는 심정에 사무쳐 당시의 이스라엘 민족을 몽땅 복귀한다 해도 부족타 할 수 있었던 그런 기세의 용자였습니다. 그런 용자가 오늘 이 시대에 필요합니다. 그 민족이 예수를 곤경에 몰아넣을 적마다 내모는 그들과 싸우는 것보다 도리어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 잠을 이루지 못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시던 예수님이었습니다. 그 여유의 인격, 존경할 만합니다.

예수님도 그 국가와 민족의 핍박에 부딪치게 될 때는 홀로 고요한 곳을 찾아 천상을 향하여 아버지를 부르며 호소하여 그런 고개를 넘으셨으니, 이 민족의 살 길도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심정이 있어야 합니다. 먹는 것도 잊어버리고, 입는 것도 잊어버리고, 인간적인 모든 조건도 다 무시해 버리고 ‘아버지, 저는 아버지의 아들, 아버지의 딸’이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아들딸이 있다면 민족이 밟히고 모든 것이 제물이 될지라도 심정의 세계에 있어서는 어느 민족보다도 하늘 앞에 가까운 민족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나쁘게 대할 수 있겠어요? 그렇지 않아요? 어떤 부모라도 심정을 갖고 대해 주는 자식,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연하는 심정을 갖고 움직이는 자식 앞에서는 오금을 못 쓰는 것입니다. 인간도 그렇거든 하나님이야 말할 것도 없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속성을 지니지 않은 인간이 어디 있어요? 하나님이 그렇기 때문에 인간도 그런 것입니다.

불쌍한 처지에 있는 이 민족이 살길을 찾아, 하나님의 심정을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그런 자리에서도 ‘아버지여, 감사합니다.’ 할 수 있어야 됩니다. 자유로운 처지에서 하늘을 원망하는 민족과 어려운 처지에서도 하늘을 대하여 ‘감사합니다’ 하며 눈물짓는 민족과는 천지 차이일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과 우리들은 부자지간, 오늘 우리들이 아무리 고생하고 아무리 어렵다 하여도 어떤 핍박을 당하고 어떤 어려운 환경이 나를 막더라도 6천년 동안 그런 것을 겪어 오신 아버지의 성상과는 비할 바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뜻을 위해 일을 하다가 상처를 입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바라보며 우는 자가 되지 말고 나보다 더한 상처를 입고 계신 아버지를 위로해 드려야겠습니다. 자신의 상처를 잊으시고 상처입은 나를 찾아오셔서 눈물지으시는 아버지입니다. 황공하고 망극한 일입니다.

이제 우리들은 무언가 해야 되겠습니다. 이 민족의 민족정신이 희박해져 가고 있습니다. 이 민족은 천륜 앞에 무엇을 내놓을 것인고? 오늘 이 세계, 이 시대에 제시할 아무런 내용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오늘날까지 건드리지 못한 것은 무엇이냐? 하나님의 심정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심정의 세계를 깊숙이 느낄 자는 어떤 자뇨? 어려운 자리에 동참하는 자입니다. 어려운 자리에서 참으면서 아버지를 부르는 자입니다. 역사적인 슬픔을 안고 오신 아버지를 가까이 대할 수 있는 조건을 가져야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는 것입니다. 알고 보면 우리 민족은 서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늘이 안 계시다면 한스러울 것이로되 하늘이 계시다 할진대 한스러울 것이 없습니다. 6천년 역사노정에서 가장 불쌍한 이 민족이로되 그 마음으로는 하늘을 생각하였다 할진대 어느 민족보다도 아버지에게 뼈에 사무치는 자극을 일으켰을 것입니다. 이 민족에게 부자의 인연을 세울 수 있는 움직임이 있다 할진대 이로 말미암아 새로운 세계는 전개될 것입니다. 하늘이 우리 앞에 그런 길을 철석같이 약속해 놓으셨고, 예수도 그 내용을 우리에게 훈계하는 것이 최고의 목적이라 할진대 우리 민족을 무시하고 어디로, 어디로 가겠습니까? 우리들은 이런 신념을 갖고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우주보다 더 큰 한 생명

하나님은 미국만의 하나님도 아니요, 영국만의 하나님도 아닙니다. 민주 진영만의 하나님도 아닙니다. 우주의 하나님이요, 우리의 하나님이요, 내 하나님입니다.

하늘은 역사적인 아버지의 심정세계에 동참하여 그 가치를 노래할 수 있는 신도, 그런 신부들이 그립다는 것입니다. 그럴 게 아니에요? 그런 자는 억천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땅을 주고도 살 수 없고 하늘을 주고도 바꿀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도 그런 한 생명은 우주보다도 크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고맙고 황공하게도 하늘은 부자의 인연에 대한 말씀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셨는데, 나는 어느 정도까지 아버지를 모셨느냐, 어느 정도의 효자가 되었느냐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효자로, 국가와 민족적으로는 충신의 기개를 갖고 하늘을 대해야 합니다. 그렇잖아요? 동양의 삼강오륜 같은 것이 다 일리가 있다는 거예요. 그것을 가르쳐 주기 위함입니다. 하늘에 대한 충효도 같은 것입니다. 마찬가집니다. 부모에게 효도하지 못하는 자는 하늘 앞에 효자가 될 수 없습니다. 나라에 대한 충신의 절개를 갖지 못한 자는 도저히 하늘 앞에 충신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늘 앞에도 이 세계나 마찬가지입니다. 심정의 세계도 내용이 달랐다 뿐이지 마찬가지입니다.

통일교인 여러분! 우리들은 교파가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의 간판이 문제가 아닙니다. 이 성전이나 집이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이 문제입니다. 그저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심정을 품은 사람이 문제입니다. 세계에 27억의 인간이 있다 할지라도 여러분의 심정을 끄는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는 거예요. 그렇잖아요?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도 천상의 모든 것을 움직이고 대우주와 피조세계 전체를 움직이고 계신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그 첫째는 무엇이뇨? 많은 사람보다도 자기의 심정을 다 주고 나서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잠들 수 있는 그런 한 사람을 바라십니다. 그럴 게 아니에요? 많은 사람보다도 그런 한 사람, 그런 한 사람을 꿈꾸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4천년 만에 보내신 분이 예수였습니다. 이제 6천년 역사를 경과하여 그 예수를 대신한 사람을 보내기 위한 것이 재림이상입니다.

찾고 헤매시던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아버지라 부르짖을 수 있는 아들딸은 어디 갔는고? 그런 아들딸을 찾는 날이 소원의 날이요, 해원의 날입니다. 그날을 종교의 명사를 빌려 말한다면 어린양 잔칫날이라고 합니다.

끝날의 참다운 기독신자

그러면 참다운 기독신자는 어떠한 자이냐? 즐거워서 춤을 추는 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염려하여 기도하는 자일 것입니다. 자기를 염려하여 기도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염려하여 기도하는 자입니다. 내가 신부 되지 못할까봐 염려하는 자가 아니라 신랑이신 예수님께서 기뻐하지 못하실 까봐 염려하는 자입니다. ‘나를 천당에 보내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하는 것보다도 ‘아버지시여, 당신의 한을 푸시옵소서.’하고 기도하는 자입니다. 천상에서 내 가치를 인정해 달라는 것이 아니고 ‘내가 지금 죽어도 아버지의 가치가 지상에서 인정되게 하시옵소서.’ 하는 자입니다.

오늘, 믿고 있는 신앙관을 뒤집어야 됩니다. 근본적으로 뒤집어야 합니다. 내가 믿고 천당 가겠다고? 천당 가서 뭘 할 거야? 도둑질 또 할 거야? 그것은 하늘의 본질을 잃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주고자 하는 것이 본질로 되어 있습니다. 사랑의 본질이 그러한 것임을 타락한 속성도 느낄 줄 압니다. 받기 위하여 허덕이는 무리에게는 사망의 구덩이가 기다리고 있고, 주기 위하여 애쓰는 무리에게는 생명의 부활권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30여년의 생애 동안 주기 위하여 애쓰다 가신 분이 예수였습니다. 3년 공생애 기간 동안 주기 위해 애쓰시다가 최후에는 자기의 몸까지 주고 가신 예수였습니다. 주기 위하여, 잃기 위하여 허덕이던 왕자가 메시아였음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의 뒤를 따르는 우리들, 오늘의 생활에서 아버지의 한을 해원해 드리기 위하여 얼마나 제물 되었는가를 반성해 보아야 되겠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는 천국이나 지옥의 관념이 없는 사람일 것입니다. ‘지옥 간들 어떠며 천국 간들 어떠리.’ 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하늘이 부활시키게 될 때 사탄도 ‘옳소이다.’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역사적인 생명의 기준이 세워진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통일성도들인 여러분이 슬픔에 사무친 아버지를 위로해 드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이냐 하면, 성경 말씀도 필요합니다. 스승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이 어떤 스승을 바라보고 나가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 스승을 중보삼아 아버지의 심정과 연결지을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민족을 위하여 기도한다 할진대 심정적으로 호소하는 여러분들이 되고, 하늘의 심정을 소개하기 위해 애쓰고, 제물 될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된다면, 하늘은 여러분을 버려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늘을 생각해 볼 때, 하늘은 만물의 주인공이로되 그 주인공의 행사를 한 번 해 보셨습니까? 사랑의 주체로되 인간을 대하여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해 보셨습니까? 못 해 보셨습니다.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 자유로운 입장에서도 인간을 대하여 ‘너는 내 것’이라 하며 마음대로 취해 보지 못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또 하나님은 땅 위에 인류가 많이 살고 있으되, 혹은 4천년 동안 준비한 이스라엘 민족이 있었으되 그들을 한 번도 당신의 아들딸, 혹은 사탄을 물리칠 수 있는 용자로 세워 보지 못하셨습니다.

오늘날 민주 진영에 예수를 믿고 있는 기독신도들이 많지만 하늘은 그들을 사탄 대한 총진격 명령을 할 수 있는 총사령관으로 세워 보지 못하셨고, 예수를 세워 천사세계를 명령하게 하여 지상과의 관계를 맺으려 하셨으나 그러지 못하신 것입니다. 땅 위에 인간들에게 신부의 이념을 주고 신부를 찾아 헤매었으나 신부라고 사탄 앞에 자랑할 수 있는 한 사람을 만나지 못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한 하나님 앞에 우리들은 너무나 죄송합니다.

세상에서 통일교회의 아무개는 이단자의 괴수라고 하고 있는데, 좋습니다. ‘원컨대 이단자를 해명하여 그대들이 복받으소서.’ 하는 마음뿐입니다. 변명도 해명도 원치 않습니다. 그것을 갖고 싸울 때가 아닙니다. 내가 살기에 바쁜 때요, 내가 아버지 앞에 인정을 받는 단계까지 어떻게 가느냐가 급급한 때입니다.

여러분들, 우리는 똑같이 불쌍한 자들입니다. 죽어도 같이 죽겠다고 아버지를 부르며 맹세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눈물지으면서 아버지를 부르던 때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민족을 대신하여 이런 입장에 서야 했고, 한스러운 때도 있었을망정, 아버지께서 남기신 길이니 가야 합니다. 이 역사적인 서글픔을 느낀다면 고맙고 황공한 것입니다. 선조들의 피눈물의 흔적을 느낄 수 있고 그 서글픈 골짜기를 편답하는 데에 동참한다는 것은 황공한 일입니다. 이 몸이 찢기든 처참하든 어디 가서 쓰러지든 한스러울 것이 없는 우리입니다. 이런 심정의 길을 다시 찾아 나서야 할 끝날의 기독 신자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단이란 말을 들어도 좋고 어떤 누명을 써도 좋습니다. 그것이 천국이념을 해명하는 나에게 아무런 장애의 요소가 못 됩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심정을 나누고, 심정에 동화되어 무릎을 꿇고, 심정으로 말씀하며 심정으로 울 수 있는 그런 모임이 있다면, 하늘은 기필코 역사와 더불어 그 모임의 무리를 이끌고 나가실 것이라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예수님을 대한 막달라 마리아의 믿음

한낱 창녀에 지나지 않는 막달라 마리아가 무릎을 꿇고 3백 데나리온이나 되는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그의 머리털로 발을 씻는 것을 보고 가룟 유다가 책망할 때, 예수님은 마리아를 옹호하였습니다. 사리를 통하는 마리아가 아니었습니다. 죽어야 할 예수님의 심정을 염려하였고, 애석하고 통분한 하나님의 심정의 일편이 마리아에게 나타났기에 예수님은 복음의 말씀이 전파되는 곳마다 그 이름이 남아질 것을 예시하셨던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붙들려 했으나 부활한 자체를 오손(汚損)시킬까봐 염려하여 막으셨던 예수님입니다. 자신을 맞이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아버지를 맞이하여 기뻐하고, 자신을 대하여 기뻐하기 전에 아버지를 대하여 기뻐하고, 인류가 다시 회생할 수 있는 소망이 있다는 것을 놓고 기뻐하고 난 후에 자신을 대해 기뻐하고 맞이해 주기를 바라는 심정을 가졌기에 그녀를 막았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억울한 심정을 품고 왔다 갔던 초초한 예수가 오늘날 우리들이 믿는 예수인 것이 서글픈 일입니다. 서글픈 일이에요.

오늘날 우리는 전세계 기독교인들에게 이것을 알려줘야 합니다. 역사가 높여 준 예수의 명사를 부르며 자기의 신앙을 자랑하는 사람 말고, 역사에 밟히고 역사에 밀려 나가면서도 예수를 자랑할 수 있는, 갈보리 산정에서 그를 찾아 헤매던 여인과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모른 다 하고 제 갈 길을 찾아서 돌아섰던 열두 제자보다 오히려 막달라 마리아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아들딸이 되려면

여러분, 예수를 믿으면서 하나님을 울려 본 사실이 있습니까? 예수님을 울려본 때가 있었습니까? ‘오냐, 내가 갔던 길을 네가 오기에 얼마나 허덕였느냐?’ ‘오냐, 서러운 나를 찾아오기에 네가 얼마나 허덕였느냐, 아무개야?’ 하고 붙드시며 통곡하시던 아버지를 붙들고 몸부림치고, 아무개야 하고 우시던 예수님의 손길을 붙든 적이 있었습니까? 없다 할진대 큰소리 말라구요. 큰소리치지 말란 말입니다.

도리어 조롱받고 배척받던 사람들이 천국세계의 왕자가 될 것입니다. 천국세계의 공주들이 될 것이에요. 다 잃어버리더라도 아버지의 뜻과 아버지의 심정을 그리워해야 되겠습니다. 그것을 그리며 생활을 해명하고 교회를 해명하고 사회를 해명하는 여러분이 된다 할진대 아무리 여러분이 지옥엘 가겠다 해도 하나님은 여러분을 지옥에 보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늘이 끌어갑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이 ‘아버지와 나’라고 했으나 감히 아버지라는 명사를 부르는 것조차 황공한 일입니다. 우리들은 아버지라는 말조차 하는 것이 황공스러운 한때가 있어야 됩니다. ‘아버지, 감히 저 같은 것이 어떻게 아버지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는 마음을 지녀야 된단 말입니다. 다른 말이 필요 없습니다. 마음과 몸이 동하여 사무친 심정으로 ‘아버님’ 하게 될 때 거기에서 우주의 소유권이 결정되어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하늘은 그런 통일신도들을 고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들! 젊은 스승의 뒤를 따르는 것도 좋으나 다 지나갈 것입니다. 내가 죽는 한이 있고 사라지는 한이 있더라도 여러분한테 남겨 주고 싶은 것은, 민족을 넘고 인류를 넘고 세계를 넘어서 하늘의 심정을 붙들고 통곡할 수 있는 모습이 되라는 것입니다. 저는 그 모습을 고대하면서 죽고 싶습니다. 이런 모습에서 천주와 지옥권까지 관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진다는 것을 여러분이 아셔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들은 아버지를 자랑해야 되겠습니다. 어떠한 아버지? 역사적인 수고를 하신 아버지, 이 아버지를 소개할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버지를 자랑해야 되겠습니다. 이 시대를 붙들고 싸우시던 아버지를 소개할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들을 고대했고 싸워야 했던 아버지를 소개해야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알려주는데 심정을 발판으로 하지 않으면 망상과 망동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아버지를 높여야 되겠습니다. 심정을 통하여 역사적인 아버지를, 심정을 통하여 시대적인 아버지를, 심정을 통하여 미래적인 아버지를 높여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아버지! 아버지의 뜻이 이렇지 않습니까? 아버지의 뜻이 저의 뜻입니다. 핏줄을 잊지 못하는 부모와 마찬가지로 저희를 찾아오신 아버지, 그 아버지는 저의 아버지입니다.’라고 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하늘은 6천년 동안 나와 더불어 살기를 고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앞에 원수 사탄이 웬 말이냐? ‘이놈 사탄아, 너는 이 천지간에 발붙일 곳이 없다.’ 하고 호령할 수 있는 심정의 주인공, ‘사탄아, 악의 세력아! 내 아버지의 모습을 보아라.’ 하며 호령할 때에 사탄이 머리를 숙이고 ‘옳소이다. 영원무궁토록 그대가 말하는 것이 옳소이다.’ 하고 인정받을 수 있고 하늘의 사랑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주인공, 하늘은 그런 신부가 그립다는 것입니다. 그럴 게 아녜요?

예수님의 육신은 죽음을 당했으되 심정은 죽임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몸은 사탄의 침범을 받았으되 심정의 세계는 침범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하늘은 신부라는 명사를 주시고 심정세계의 충절을 갖춘 신부를 찾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러한 신부의 마음으로 아버지를 부를 수 있고 주를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역대 선지자들이 이러한 뜻을 세우기 위해 수고하였고, 직계의 아들딸로 세우기 위해서, 부자의 인연을 맺기 위해서 하늘땅이 수고하신 것에 대해 감사해야 되겠습니다. 나아가 선조들 앞에, 수많은 영인들 앞에, 사탄 앞에 미안하다는 인사를 하고 이 땅을 지킬 수 있는 주인공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아들딸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아들딸로부터 ‘아버지’라는 말을 듣고 싶어 하십니다. 여러분도 그렇지 않아요? 하나님이 진정으로 사랑하시는 아들딸이 있다 할진대 그런 아들딸을 대해서 육신의 아버지가 ‘아무개야, 너는 내 아들딸이다.’ 하면 하나님은 싫어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럴 게 아니에요? 어느 어느 나라 사람이라는 말도 듣기 싫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내 아들딸이요 내 나라 백성이야. 한국 백성이니 미국 백성이니 하는 말도 듣기 싫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하늘나라의 이념을 품고 계신 아버지 앞에는 가소로운 말이라는 것입니다. 하늘은 그러한 자리에서 우리를 찾고 계십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나와 더불어, 가정과 더불어, 사회와 더불어, 국가와 더불어, 세계와 더불어 살지 못한 그 아버지께서 이제는 거꿀잡이로 세계로부터 오늘의 나까지 찾아오시기에 얼마나 수고하셨겠는가? 찾아오셔서는 나를 데리고 가야만 되는 것입니다. 찾아오시기에도 힘들거니와 끌고 가시기에도 힘드십니다. 주님은 역사적인 종말까지 몰아넣어 가지고 데려가시기 위해 오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똑똑히 알고, 나는 이 나라의 내가 아니요, 내 가정은 이 나라의 가정이 아니요, 이 사회와 나라, 피조세계는 타락세계의 것이 아님을 표방하셨던 예수님의 심정을 통하여 설 수 있는 신랑 신부, 하나님을 대하여 자랑할 수 있는 아들딸이 되기를 부탁드립니다.

​요한복음 10:1-18

<기 도>

허락하신 말씀을 저희들이 봉독하였사옵니다.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은 사망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자기 자체를 내세워 우주 앞에 자랑하기에 분망하고 있는 실상을 저희들은 보고 있사옵니다.

이와 같은 세상에서 과연 자기를 자랑할 수 있는가, 자기 가치를 높이 평가할 수 있는가? 심정을 더듬어 묵묵히 헤아려 볼 때 거짓된 입장에 처해 있는 자신들인 것을 부인할 수 없게 되옵니다.

아버님! 오늘 저희들의 마음이 무엇을 그리고 있사오며, 무엇을 향하여 높이려 하고 있사옵니까? 이제 내 마음이 내 것 되지 못하고 내 몸이 내 것 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때이옵고, 자기 자체를 세워 자랑할 수 없는 비참한 처지에 놓여 있는 것을 인식해야 할 때가 되었사옵니다.

나의 마음과 몸의 가치에 대한 최후의 결정은 내가 지을 수 없고, 나타난 현상의 과정을 거쳐 목적지까지 나 자신을 이끌어 갈 수 없는 비참한 자아임을 이 시간 느낄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에게 생명이 있다 할진대 그것은 저희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옵고, 어떤 이념이 있어서 저희 마음을 선의 방향으로 이끌어 준다 할진대 그도 역시 저희 것이 아닌 그 무엇에 연유되어 있다는 사실을 느끼는 이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 오늘날은 자신들을 세워 변명하기에 급급했던 모습을 멸시할 수 있는 마음을 찾아야 할 때이옵니다. 자기 자체를 드러내어 높이고자 하던 자만심을 무시하고 짓밟아 버릴 줄 알고, 자아를 정복할 줄 아는 하나의 승리자가 하늘땅과 세계와 인류와 사회와 내 가정 내 자신이 찾고 있는 모습인 것을 저희들이 이 시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은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고 하였사옵니다.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고 하였고, ‘높고자 하는 자는 낮아지고 낮아지고자 하는 자는 높아진다.’고 하였사옵니다.

이 말씀의 내용을 알게 될 때, 타락의 선조를 가지고 있고 타락역사의 인연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오늘의 우리 개체, 이 개체는 버리고 버리고 또 버려야 할 운명에 놓여 있는 것을 알게 되옵니다.

그런 연고로 오늘날 저희의 생애노정은 처참한 노정이요, 생활 환경은 복잡하여 저희는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없는 혼돈 상태에서 살고 있사옵니다. 이와 같은 땅에 하나의 생명의 길을 개척해 주시기 위하여 하늘은 애썼사옵고, 인류 앞에 하나의 참다운 사람의 모습과 참다운 이념과 천주의 참모습을 소개하기 위하여 수많은 선지들이 이 땅 위에 왔다 갔던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그 중에서도 만민의 메시아로서 이 땅 위에 나타나 십자가상에서 초개같이 사라지면서도 만민을 위하여 복을 빌 수 있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존엄하신 그 형상과 그로부터 흘러나온 그 심정, 사무친 그의 이념을 그리워해야 할 때가 왔사옵니다.

자신을 멸시하여야 할 이 때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높여 만물 만상을 멸시하고, 자신을 세워 하늘을 멸시한 것을 용납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들이 참다운 마음, 참다운 선을 향하여 움직이고자 한다면 하늘땅 앞에 빚진 자이고, 인류 역사노정에서 말할 수 없이 험상스런 상처를 입은 죄악의 종족임을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저희에게는 아버지를 찾아 헤맬 수 있는 마음, 본연의 자아를 찾아 헤맬 수 있는 충절, 그것만이 필요하오니, 아버지, 그것을 지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이 살아 나온 생애노정이 처참한 눈물의 길이었음을 저희들은 부인할 수 없사오며, 지내온 역사의 모든 페이지 페이지도 피어린 혈투전으로 엮어졌음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그리하여 저희들은 자신을 세워 역사적인 그 무엇을 해명하지 못하고, 시대적으로 자랑할 그 무엇을 갖지 못한 우주사적인 낙오자의 입장인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그러기에 참다운 지도자, 참다운 생명과 참다운 심정을 가진 지도자가 필요하여, 하늘이 인간 앞에 보내신 분이 구주요 메시아라고 저희들은 믿고 있습니다.

하오나 저희들이 메시아인 그 분 앞에 나아가기 위하여 그에 합당한 지조와 충절과 심정을 지녔는가, 이 시간 스스로 더듬어 살피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늘은 메시아를 맞이하는 데 있어서 인간이 최고의 정열과 최고의 충성과 최고의 성심을 다 기울일 것을 고대하시는 것을 알고 있사옵고, 사탄과 짝하지 않는 최고의 지성과 붉은 심정을 요구하시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이제 저희가 그런 자리에 나가 있지 못하더라도 그 자리를 그리워하는 마음이라도 가지고 무릎을 꿇고 속죄의 은사를 바랄 수 있는 겸손한 어린 아들딸들이 되게 인도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허락하신 말씀을 무엇으로 대하오리까? 아버님,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는 지금까지 많은 말씀도 들었사옵고, 많은 걸음도 걸었사옵고, 갖가지 형편에 처하여 움직여도 보았사오나, 아직까지 아버지 앞에 드릴 아무것도 갖추지 못한 채 빈손 들고 아버지 앞에 나타난 저희들이옵니다. 아버지, 쫓아내지 마시옵고 긍휼히 보시옵소서. 저희의 마음과 몸 전체를 비워서, 아버님만이 주관할 수 있고, 아버님 은사만으로 채울 수 있는 이 한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나이다.

전하는 자의 마음이나 받는 자의 마음이 하나되게 하여 주시옵고, 그 심정들이 하나로 화하여 아버님의 심정을 통할 수 있으며 아버님의 은사를 직접 받을 수 있는 이 한 시간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말 씀> 이 시대는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문명시대이고, 또 어떠한 사상 관념이나 주의도 그 무엇에 귀의하지 않으면 안 될 최종시대입니다. 이러한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잘 알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현실에서 살고 있는 우리 자신들은 어떠한가? 뚜렷하게 자랑할 그 무엇도 갖지 못하고 있고, 그렇다고 어떠한 것을 세워 만민에게 가라고 권고할 뚜렷한 무엇 한 가지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이 그렇기에 과거에도 그러했을 것이고, 지금이 그렇기에 미래에도 그럴까봐 염려해야 되는 여러분들인 것을 인식해 주기 바랍니다.

참을 찾아 나온 인간

인간은 타락이라는 명사를 남긴 이후, 알 수 없는 곡절의 노정을 거쳐왔습니다. 시대 시대에 따라 여러 가지 모양으로 변하는 곡절의 역사 과정을 피하지 못한 채 오늘날까지 인간들은 이끌려 왔습니다. 그런데 이런 역사 과정을 거쳐오면서 인간들이 해결하려 하고 찾고 있는 내 몸과 마음, 그리고 내가 가지고 있는 이념과 심정까지도 ‘이것이 바로 내가 찾던 것이로구나.’ 할 수 있는 그 하나의 기점은 아직까지 찾지 못한 채 살아 나왔습니다. 수많은 우리의 선조들도 그렇게 나왔고, 오늘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수많은 인류도 참된 그 무엇을 찾고 있는데, 그 참이 무엇인지 해명하지 못한 채 헤매고 있습니다.

그러한 하나의 기점을 해결하기 위하여 우리의 선조들은 피눈물의 길도 개의치 않고, 죽음의 고개도 개의치 않고, 추방당하고 몰리는 불쌍한 자리도 개의치 않고 허덕이며 나왔으나, 자신들이 바라보는 목적지, 심중으로 찾던 안식처는 아직까지 인류가 살고 있는 이 지상에, 그리고 지상을 섭리 하시는 천륜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 앞에 말씀드리려 하는 제목은 ‘인간은 참을 찾아 헤매는 탐험가’입니다. 이런 내용을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에게 심정이 있다 할진대 과거에나 지금이나 앞으로도 그 심정이 사무치게 바라는 것은 참의 주체가 되는 실존체가 해명되는 일일 것입니다. 이것을 종교라는 명사를 빌어 말한다면, ‘하나님이 계시다.’ 하는 것입니다. 이런 확신이 있으면 내가 그 하나님을 모시고 내 몸과 내 생활, 내 생명, 혹은 내 심정에 인연되어 있는 모든 것을 해명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들, 그 중에서도 종교인들이 바라는 최고의 목표일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죽더라도 참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요, 영원한 생명을 찾으려 할 때에도 참에 귀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부정하려야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과거 역사에 왔다 갔던 사람들도 이 목적을 향하여 움직였고, 오늘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이 목적을 향하여 움직이고 있고, 미래의 사람들도 이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움직일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다고 할진대 하나님께서는 인간으로 하여금 참된 주인공을 대하여 노래할 수 있고, 그 주인공과 더불어 즐거워하면서 살 수 있으며, 그와 더불어 화락하면서 심정에 취해서 살고 싶으실 것입니다. 그런 한 날이 온다 할진대 같은 마음, 같은 심정, 같은 생명의 움직임을 갖고 있는 그 자체나 그 실체에 대해서 ‘나는 원치 않는다.’고 하면서 부정적인 입장에 설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또 민족과 주의와 사조를 넘어서서 어느 누가 참에 귀의하여 이 참과 더불어 살며, 이 참과 더불어 행하며, 이 참과 더불어 죽음의 고개를 넘어설 수 있는 자신을 가졌다 할진대 그 사람이야말로 인류역사가 바라던 참의 실체일 것이며 시대가 바라는 참의 증거적 실체요, 미래가 바라는 참의 근원적인 실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참된 실체를 찾아 인류는 헤매 나왔습니다.

오늘날 이 땅 위에 27억의 인류가 살고 있지만 그 참의 실체를 찾아 그와 더불어 산 사람, 그와 더불어 싸운 사람, 그와 더불어 즐긴 사람이 있는가 하고 묻는다면, 있는 것 같지만 그 대답은 막연합니다. 어떠한 철학 논리를 들추어 봐도, 어떠한 종교의 경서를 들추어 봐도 명확한 해답을 얻기가 어렵습니다. 내 몸을 통하고, 마음을 통하고, 심정을 통하고, 모든 이념을 다 동원해 보아도 나를 새로이 일으킬 수 있는 참을 찾아서 거기에 화하였다고 자인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이런 것이 다 공론이냐 혹은 망상이냐?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인류가 해명해야 할 최후의 문제인 것입니다. 해명되어야 할 참과 해명해 나아가야 할 내 자체와의 관계는 ‘그가 나요, 내가 그다.’ 할 수 있는 입장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참이 하늘이라 할진대 그 하늘은 나와 같이, 나는 하늘과 같이 화할 수 있어야 하고, 예수가 참이라 할진대 그 예수와 나, 나와 예수는 하나로 화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는 우리의 감정적인 모든 것, 인식적인 모든 것까지도 같이 움직일 수 있어야 합니다. 참의 감촉이라 할까 촉감이라 할까, 그런 것이 내 개체에서부터 창조적인 존재세계, 즉 만물은 물론이거니와 전세계의 인간에게까지 느껴져, 같이 움직이고 감촉하면 온 우주와 더불어 노래할 수 있는 자체, 그러한 자체가 천국에 살 수 있는 인간의 모습이 아닐까, 혹은 하늘이 찾고 있는 참다운 아들딸의 모습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타락인간과 예수

타락의 한을 가진 인류, 타락된 혈통의 인연을 벗어나지 못한 우리, 타락한 선조의 후예인 내 자체요 우리요 인류임을 공인하는 입장에서 본다면, 타락이 무엇이냐? 떨어진 것입니다. 마음속에서 바라는 이념의 요소와 대치되는 경지에 머무르는 것이 타락입니다.

싫은 것을 피하고 좋은 것, 슬픈 것을 피하고 기쁜 것, 어려운 것을 피하고 행복스러운 것을 바라는 인간들이, 타락했기 때문에 슬픔과 고통과 어려움을 피하려야 피할 수 없게 되었고, 역사와 더불어 엉클어지고 엉클어지고 엉클어져 오늘의 나까지 얽매어 놓고 있습니다.

이런 한스러운 처지에 있는 나와 여러분에게 참다운 마음에 따라 움직이는 제2의 나의 모습이 있다 할진대 그 모습을 불러세워 나를 냉정히 비판해야 할 한 시간이 온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상에 왔다 갔던 수많은 선지선열들은 이 역사와 그 실체에 대하여, 미래의 역사에 대하여 호소했습니다. 그래서 네 마음을 넓게 가져라, ‘네 마음의 바른 목적인 선을 지향하여라, 본성의 마음에 응할 수 있는 몸을 가지는 동시에 그런 행동을 하여라.’ 하고 권고해 왔습니다.

또 예수는 말하기를 ‘천국은 네 마음에 있다.’ 하였습니다. ‘그 마음으로 하늘의 심정을 통해라, 그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인격을 갖추어라, 그리하면 천국의 중심을 대신한 신랑이 올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날의 우리들은 여기에 문제가 있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런 문제에 부딪치게 될 때에 뚜렷한 양심의 기준을 가지고 자기의 몸을 주관할 수 있는 하나의 용자가 없었음을, 천륜과 천정에 동하여 나는 물론 인간의 모든 심정을 주관할 수 있는 용자가 없었음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는 ‘천국은 네 마음에 있다.’ 하였습니다. 천국을 가려면 ‘먼저 나 예수를 사랑하라.’ 하였습니다. 그 다음에는 ‘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하였습니다. 그 다음에는 ‘갖고 있는 것을 다 버리라.’ 했습니다. ‘살고자 하는 자는 죽고 죽고자 하는 자는 산다.’ 하였습니다. ‘갖고 자 하는 자는 잃어버리고 잃어버리고자 하는 자는 갖는다.’ 하였고, ‘높아지고자 하는 자는 낮아지고 낮아지고자 하는 자는 높아진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런 역설적인 내용을 가지고 오셨던 구주는 무슨 목적으로 이런 말씀을 하셨을 것인가, 이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마음과 몸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 마음이 마음 된 자리에서 있지 못하고, 몸이 몸 된 자리에 서 있지 못하고, 내 심정이 심정된 자리에 서 있지 못하는 것이 한탄스런 일입니다.

우리의 선조들은 이 땅에 와서 양심의 기준을 세워 이 몸, 즉 육신(肉身)을 정복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인류역사가 6천년이란 기나긴 세월을 경과하였으나 아직까지 어느 누구 한 사람 마음을 중심삼고 몸을 완전히 정복하였다는 그 하나의 승리의 기준을 세우지 못했습니다. 이 한스러움을 누가 책임질 것인가? 천정에 사무친 심정을 통해 마음이 몸을 지배하고 나설 수 있는 확고한 중심을 갖지 못한 것을 어떻게 할 것이냐? 천륜의 심정을 가진 하늘이 있다 할진대 어떻게 인간의 마음을 정복하여 영원히 하늘의 심정 앞에 둘 것이냐? 이것이 해결해야 할 중요한 문제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신랑이요 너희는 신부라.’ 하셨습니다. 신부가 될 수 있는 심정의 기준은 인습에 젖은 땅 위의 양심기준도 아니요 시대 변천에 따라 변하는 양심기준도 아닙니다. 땅 위의 인륜 도덕에 화하고 그것을 입증하는 양심기준도 아닙니다. 또 땅 위의 인간들이 알고 있는 그런 신부를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신랑이라 하는 이 한 분의 용자 앞에 신부의 모습으로 나설 수 있는 사람은 어떠한 모습일 것인가? 신랑의 심정을 사모하고 체휼한 자는 영원한 양심기준을 세울 수 있고, 영원한 몸의 기준을 세울 수 있는 하나의 방향성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러지 못한다 할진대 예수는 인류의 참다운 신랑의 자리에 설 수 없다는 것을 우리들은 생각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의 목표와 인간의 양상

역사의 흐름에 따라 인류문화는 발전해 왔고 발전해 나온 그 문화는 20세기의 이 문화세계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몸과 마음의 문제, 우리의 심정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아무런 내용도 갖추지 못했습니다. 내적 외적으로 복잡한 환경과 복잡한 조직 형태가 나타났으나, 그 모든 것이 내 마음에 들고 심정을 통할 수 있어서, 하나에 전체가 응함과 동시에 전체가 거기에 화할 수 있으며, 하늘땅이 영원히 즐길 수 있는 심적 기준이 되지 못하고 하늘땅이 한데 얼크러질 수 있는 심정의 기준이 되지 못했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의 이 시대는 마음이 지향하는 방향, 심정이 찾고 있는 방향과는 판이한 방향으로 흘러 나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입장에 서 있는 내 한 자체는 이제 외적으로는 끝에 도달하였고 내적으로는 말할 수 없이 공허한데, 나를 세울 수 있는 중심은 어디 있을 것인가? 이것을 찾아 오늘날의 인류는 허덕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람은 마음과 이념이 상통할 수 있는 심정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런 연고로 마음을 주관할 수 있는 심정과 외적인 생활을 주관할 수 있는 육(肉)과 실제 생활을 조정할 수 있는 어떠한 기준을 세우지 않는 한 인류는 어느 시대에나 허덕이는 입장을 피치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신다 할진대 하나님이 목표하는 세계는 어떤 세계인가? 현재 우리가 보는 이러한 문화의 세계가 아니요, 문명의 세계가 아닙니다. 문명을 바른 방향으로 지도할 수 있는 마음의 기준, 심정의 기준을 세우는 것이 하늘이 원하는 중심되는 뜻이요, 우리 선조들이 후대 만민 앞에 세우고자 했던 기준의 세계인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될 것입니다. 그런 것을 아시는 예수님은 환경이 복잡할 적마다 환경에 뛰어 들어가 수습하려 하지 않고 이런 환경을 피하여 갔습니다. 피하여 가는 데에 부딪치는 모든 것은 즐길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밤중에 깊은 수림 속을, 혹은 깊은 산골짝을 더듬어 들어가는 이런 생활을 했던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세계를 찾아 나섰던 탐험가

예수님이 이 땅 위에 오셔서 보이는 세계의 그 무엇을 찾기 위하여 싸우신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계의 좋은 것을 보이는 세계에 옮겨 놓기 위하여 싸우신 용자인 것을 그 시대 사람들은 몰랐습니다.

예수님이 기도한 자리는 세상의 어느 누구도 찾지 않은 자리였습니다. 또 예수님은 만민이 생각지 않는 순간에 기도하고 호소하셨습니다. 그가 더듬어 들어가는 노정은 온 인류가 공통적으로 해결해야 할 노정인 동시에 하늘과 사탄, 선과 악이 접선되어 부딪치는 접경지대를 찾아 들어가는 노정이었던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하던 그 자리는 편안한 자리가 아니요 하나님과 사탄이 접선할 수 있는 접경지대였으며, 그런 자리에서 기도하던 순간은 인간에게 고통이 있고, 슬픔이 있고, 어려움이 있고, 죽음이 있다 하더라도 그 슬픔과 어려움과 고통과 죽음의 경지를 밟고 넘어서기 위하여 그 경계선을 찾아 들어가는 순간이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경지를 찾아가는 예수에게는 하나의 심정이 통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 천상과 지상의 어떠한 것이 그의 모든 것을 휩쓴다 할지라도 ‘내 마음에 통하고 있는 이 심정만은 불가침이다.’ 하는 기준이 서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탄과 섭리적인 조건을 중심삼고 싸우는 과정에서 사탄을 쳐부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잘나서가 아니에요. 천상을 대한 사무친 심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천상에서 벌어지는 사탄과의 싸움에 있어서도 그의 사무친 심정 앞에는 사탄도 손을 들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이었기에 만인류가 흠모하는 심정의 주인공, 신랑의 자격을 갖춘 자가 되는 것입니다.

나는 알기를, 예수는 땅 위의 어떤 것을 찾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라고 알고 있습니다. 이 땅은 타락한 세상입니다. 어차피 한 고개를 넘어서야 할 세상이요, 어느 한 때에 해결지어야 할 세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해결지어 버려야 할 시대와 세계, 그 자체들이 문제가 아닙니다. 해결지을 수 있는 그 세계, 그 자체가 문제인 것입니다. 해결해 버린 심정이 문제가 아니라 해결할 수 있는 심정이 문제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러한 내용을 아시고 그러한 길을 개척하기 위하여 오셨던 분입니다. 해결지어야 할 이념의 세계에서 인간을 대표하여 혈혈단신 탐험의 용자로서 나타나셨던 분이 예수였음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 예수께서 성경에 말씀하지 못한 것, 그의 심정 깊이 뿌리박혀 있는, 스스로 만민의 구주라 할 수 있는, 하늘과 땅을 걸어 넣고 사탄과의 싸움 노정에서 해결지을 수 있는 그 무엇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사탄세계에서 어떤 하나의 승리의 중심을 세울 수 없었고, 또 하늘이 사탄세계에 승리의 뜻을 세울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새로운 세계를 찾아 나선 모험가요 탐험가였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세상의 어떠한 사정과 이념보다 강한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의 세계를 찾아서 모험의 자리에 뛰어든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모험의 표적으로 세워 놓은 최고의 기준

세상에는 남이 탐승(探勝)하지 못한 어떠한 명승지가 있어 그 지역을 탐험하기 위하여 나선 모험가는 많지만, 그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예수가 모험의 표적으로 세워 놓은 최고의 기준은 무엇인가? 심정문제입니다, 심정문제. 심정문제라는 거예요.

기독교가 오늘날 세계적인 움직임에 공헌할 수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하면 죽음의 고개를 넘은 순교의 역사적인 배경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까지도 참이 있다면 생명을 걸어 놓고 사무친 심정으로 그것을 붙들고 나설 사람들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은 이들을 이끌고 심정적인 목적의 세계를 세우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무엇이 있었기에 예수를 보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의 사람들이 갈보리산상에서 초초하게 돌아가신 예수님이 세계를 이끌 수 있는 입장에 있다는 것을 꿈에라도 생각했겠어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찾아 헤매야 할 인간입니다. 우리에게는 오늘도 내일도 일생을 바쳐 어떠한 어려움, 어떠한 모험의 함정이 있다 할지라도 내 몸을 던지면서라도 찾아가야 할 길이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탄의 싸움이 역사를 연결시켜 나온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원리를 배워서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 싸움을 해결하고 ‘하나님!’ 하고 부르는 본연의 아들은 어디 있는가? 심정에 사무쳐 ‘내 아버지!’ 하고 부르는 그 아들에 대하여 하나님이 ‘내 아들아!’ 할 수 있는 그 세계를 인간은 보지도 못하고 찾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나타나서 ‘나는 독생자’라 말씀하셨고, 성경에는 예수님에 대하여 독생자의 영광이라고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또 예수님은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신랑으로 모시라.’고 했고, ‘너희는 나의 신부’라고, 또 ‘나의 형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세우고자 하시는 것

천상에서 인간 세상을 섭리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할진대, 참의 역사만을 지도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할진대 그 하나님의 목적은 무엇일 것인가? 성경책이 아닙니다. 이 성경책이야 종국에는 구원섭리가 완결되면 타락한 세상과 더불어 없어질 것입니다.

성경을 믿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이걸 넘어서서 하나님을 대한 붉은 심정이 타올라, 6천년 동안 수고하신 아버지를 알고, 이 시대에 수고하시는 아버지를 알며, 앞으로도 수고하셔야 할 아버지를 알아서, 그 아버지를 부르는 하나의 아들이 이것보다 귀하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럴 수 있는 하나의 딸이 이것보다 귀하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를 바라보시고 기뻐하시지는 못할망정, 기뻐할 수 있는 하나의 표적이 있다 할진대 그것은 예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어요?

우리는 참을 찾고 있습니다. 참을 찾고 있는 나, 참을 찾고 있는 우리, 참을 찾고 있는 가정, 참을 찾고 있는 사회요 세계입니다. 그렇다면 이 우주가 찾고 있는 궁극적인 참의 주체가 누구인가? 하나님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세우고자 하시는 참의 내용은 무엇이냐? 인간이 갖지 못한 참다운 부모, 인간이 갖지 못한 참다운 부부, 인간이 갖지 못한 참다운 자녀, 인간이 갖지 못한 참다운 형제, 참다운 민족, 참다운 국가, 참다운 세계, 참다운 하늘땅, 참다운 온 천주가 하나님이 찾고 있는 참의 내용일 거예요. 그럴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땅을 대해 섭리하시는데 무엇을 바라시는 것이뇨? 참다운 만물이 되기를, 온 세계 인류가 참다운 백성이 되기를 바라실 거예요. 더 나아가서는 그 백성이 참다운 충신이 되기를 바라시고, 참다운 부부와 참다운 부모가 되기를 바라실 것입니다.

참된 만물, 참된 백성, 참된 충신, 참된 효자 효녀, 참된 부부, 참된 부모가 나타난 후에야 하나님은 땅에 실체로 나타나고 싶어하실 것입니다.

참의 실체가 하나님이라 할진대 하나님은 반드시 참을 바라고 있는 인간과 어느 한 때 인연을 맺기를 바라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모든 존재가 머리 숙여 ‘옳소이다. 영원히 나의 주인이 되어 주시옵소서.’ 할 수 있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몸으로도 바라고 마음으로도 바라고 심정으로도 바라는 그 실체를 상봉하는 날이, 선을 찾아 참을 찾아 헤매던 인류역사가 종결되는 날이요, 참을 찾아 헤매고 참을 찾아 세우기 위해 섭리해 나오신 하나님의 소원이 성취되는 날인 것입니다.

하늘은 그러한 날을, 그러한 곳을, 그러한 한 때를 찾아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죄악된 이 땅, 죄악된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나, 죄악된 지상에 살고 있는 가정, 사회, 국가, 이 모두가 역시 그러한 한 날, 한 곳을 찾아 나오고 있습니다.

만일에 예수님이 하나님의 염원과 인류의 소원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명을 가지고 왔다 할진대 그의 심중 깊은 곳에 있는 우주적인 선의 이념을 소개해 달라고 하는 제자가 한 사람도 없었던 것은 한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못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요 3:12) 하고 한탄하신 예수님이었습니다.

참의 말씀을 갖고 온 참의 실체로서 참의 행동을 해야 할 예수님이었지만, 그 당대에 참의 실체로 인정받지 못하고, 참의 말씀을 다하지 못하고, 참의 행동을 다하지 못하고 가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필요한 것은 성경 상에 나타난 예수님만이 아닙니다. 참된 개인은 이러하고 참의 가정은 이러한 것이며, 참의 사회, 참의 국가는 이러한 것이고, 하나님과 상봉하는 세계는 이러한 것이며, 그 복지는 이러한 곳이라고 해명해 주고 우리를 그런 방향으로 인도해 주는 실체가 필요한 것입니다. 심중 깊이 사모하던 참을 해명해 주어야 할 것이 인류를 찾아오신 구세주의 사명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사명의 내용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십자가 고개를 넘어가신 예수를 안 사람이 누구인가?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없기 때문에 천국에 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은 사람은 모두 낙원에 가 있습니다. 낙원은 천국 가는 대합실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생각하게 될 때 오늘날까지 참을 찾아 나아가는 노정은 6천년 동안이나 계속되었으나 해결나지 않았습니다. 6천년을 걸려서도 끝이 나지 않았으니 오늘 내가 느끼고 깨달은 심정을 가지고 내일부터 다시 시작하는 생활노정에서도 끝이 나지 않겠느냐? 끝날 가능성이 없거든 분한 마음, 아버지의 뜻을 품고 하늘을 향하여 호소할 수 있는 마음이라도 가져야 합니다.

그러한 것을 꿈도 안 꾸는데 어찌 하늘의 백성이 되겠습니까? 어찌 하늘의 충신 열녀가 되며, 어떻게 하늘의 효자 효녀가 되겠습니까?

복귀섭리의 방법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복귀섭리라고 알고 있습니다. 복귀섭리는 무엇이냐? 잃어버린 것을 회복하는 운동입니다.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는 놀음입니다. 지었던 사람이 깨져 나갔으니 말씀을 통해 재창조하는 놀음입니다.

재창조되어야 할 인간입니다. 몸을 통할 수 있는 말씀도 잃어버렸고, 마음을 통할 수 있는 말씀도 잃어버렸고, 심정과 더불어 영원히 즐길 수 있는 말씀도 잃어버린 타락한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는 말씀, 곧 진리를 찾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진리는 말씀이라고 하였습니다. 진리는 조직을 이끌어 가는 원칙인 동시에 천륜의 근본입니다. 그러기에 세계는 지금까지 진리를 찾아 나왔습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참된 말씀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참된 말씀이 없으니 참된 생명의 실체가 없습니다. 참된 생명의 실체가 없으니 참다운 사랑의 실체가 없습니다. 참다운 사랑의 실체가 없으니 참다운 우주, 참다운 하늘땅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우리들을 때립니다, 때려요. 이놈들 다 못쓰겠다는 것입니다.

하늘은 세상을 정복해 나오고 있습니다. 하늘은 개인을 정복하기 위해 애쓰셨습니다. 하늘은 하나의 가정을 정복하기 위하여 애쓰셨습니다. 민족을 정복하고, 국가를 정복하고, 세계를 정복하기 위하여 지금도 싸우고 계신 것입니다. 보십시오. 노아 할아버지는 자기 일신을 정복하고 가정을 정복하기 위하여 120년 동안 싸웠습니다.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럴 게 아니에요?

노아는 하나님으로부터 120년 후에 이 지상을 심판하겠다는 명령을 받은 그날부터 120년 동안을 매일 매일 싸웠습니다. 일 년이 아닙니다. 119년 뒤에 심판하겠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큰 뜻을 품고 대하려는 사람에게 하늘은 한 번 약속하신다는 것입니다, 한 번. 하늘의 명령을 받으면 그에 대해 충절의 심정을 변치 아니하고, 가정의 핍박, 사회의 핍박, 혹은 개인의 육신을 통하여 들어오는 정욕, 모든 욕망, 즉 식욕, 수면욕 등의 욕망을 정복할 수 있는 승리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늘은 모른다 하십니다.

하늘은 역사노정을 거쳐오면서 개인을 정복하고, 가정을 정복하고, 사회, 국가, 세계를 정복해 나왔습니다. 정복은 무엇이냐? 때려 치는 것입니다. 이러니 역사가 전쟁사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의 이 시대는 6천년 역사의 종말시기입니다. 이때 하늘은 모든 것을 하늘 앞에 세워 놓고, 하늘 앞에 귀일시켜 놓고, 자기로부터 전체를 정복 할 수 있는 권한을 갖춘 승리자를 찾고 있습니다.

과거에 왔다 갔던 우리의 선조들은 자기 일신을 정복하기 위한 모험을 하였고, 어떠한 어려운 길, 어떠한 개척자의 길도 개의치 않고 갔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27억 인류가 살고 있는 20세기의 이 땅은 옛날 선조들이 살던 환경과는 다릅니다. 그 시대는 개인을 대한 섭리시대요, 가정을 대한 섭리시대요, 민족을 대한 섭리시대요, 국가를 대한 섭리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세계를 넘어 천주를 대하여 섭리하는 시대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에게 어떠한 모험이 있다 할진대 6천년 역사를 대신하여 나 이상 모험할 자가 없다 할 수 있는 각오를 가져야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때에 자신을 붙들고 우는 자는 하늘 가정을 건설하지 못할 것이요, 가정을 붙들고 우는 자는 하늘 사회를 건설하지 못할 것이요, 사회를 붙들고 우는 자는 하늘 국가를 건설하지 못할 것이요, 국가를 붙들고 우는 자는 하늘 세계를 건설하지 못할 것이요, 세계를 붙들고 우는 자는 하늘 천주를 건설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나는 개인이로되 세계를 끌어들일 수 있는 심정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역사적인 인정권을 해명할 수 있는 하나의 승리적인 실체를 갖추겠다고 장담하고 나서고, 그런 신념을 갖고 실천하는 것은 모험이에요, 모험. 여러분이 조금 더 신비스러운 경지에 들어가 보면, 그 세계는 모험으로 펼쳐져 있습니다. 개인을 넘어서 한 단계 넓은 단계로 가려면 반드시 모험을 해야 됩니다. 목을 내어놓고 죽느냐 사느냐 하는 판가리 싸움을 해야 합니다.

노아, 아브라함, 모세, 예수님을 중심한 하늘의 섭리

보십시오. 노아는 가정의 기준을 세우기 위하여 자신의 몸을 쳤습니다. 몸을 정복하기 위하여 치기를 120년 동안 했습니다. 비난과 조소, 별의별 억울한 환경에 처했던 것입니다. 그럴 것 아니에요?

그럴 때마다 노아는 자신을 향해 ‘참자, 하늘이 약속하여 나를 이끌고 있는데, 하늘이 세워 주신 심적 기준을 대해 내가 변할소냐?’ 하며 자신의 몸을 쳐서 모든 어려움을 정복해 나갔습니다.

그러면서 노아 가정이 세상적인 모든 조건을 쳐 버리고 민족을 흠모하여 나왔던들 하나님의 뜻은 그때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노아 가정이 가정적인 모든 곡절을 쳐 버리고 노아의 심적 기준을 붙들고 민족을 바라보고 나갔던들, 그 민족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노아 가정은 가정적인 뜻을 세우지 못하고 깨져 나갔습니다. 그러나 뜻을 이루기 위한 섭리는 계속 진행되어 나왔습니다. 개인이 깨졌다고 개인을 붙들고 있을 수 없는 천륜의 때입니다. 가정이 깨졌다고 해서, 가정이 세워지지 않았다고 해서, 천륜이 움직여 나가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개인은 깨져도 천륜은 움직여 나가는 것입니다.

이처럼 개인이 깨져 나갔어도 가정의 때가 오기 때문에 하나님은 가정을 세우는 섭리를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개인에다 가정까지 섭리하는 일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또 그 가정이 깨어진다고 해서 섭리의 때는 지체할 수 없습니다. 이 섭리의 때는 사회를 복귀하기 위해 움직여 나아가고, 나아가 환경을 넓혀 민족적인 범위로 넓혀 나왔습니다.

노아 개인과 그 가정을 잃어버린 하나님은 4백년이 지난 후에 다시 아브라함을 세워 역사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을 세워서 노아가 겪은 그 이상의 환경적인 조건을 갖춰야 했습니다. 그래서 할례를 통해 이방 사람까지 끌어넣는 섭리를 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까지도 잃어버린 하늘은, 4백년 후에 다시 모세를 세워 역사하셨습니다. 민족적인 시대가 다가오매 이스라엘 민족을 애급에 몰아넣고는 연단했습니다. 연단은 때리는 것입니다. 때리는 것은 무엇입니까? 합치기 위한 작전입니다. 하나 만들기 위한 작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 ‘너희들이 살고 있는 땅은 원수의 땅이요, 너희들이 대하고 있는 바로 궁중은 원수의 궁중이요, 애급 사람은 철천지원수다.’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살아야 할 곳은 전부가 ‘옳소이다.’ 할 수 있는 한 곳이어야 하기 때문에 하늘은 그 한 곳에 들어 갈 수 있는 한때를 바라보면서 이스라엘 민족을 몰아냈습니다. 그리고 그 시기가 민족적인 입장에서 섭리해야 할 때였기에 민족을 대표한 모세를 모험의 선봉자로 세웠던 것입니다. 이 모험의 선봉자 모세는 미지의 가나안 땅을 향하여 가는 탐험가 중에 최고의 탐험가요 정탐가 중에 최고의 정탐 가였습니다. 탐험가 중에 최고의 탐험의 용자로 나타났던 모세였습니다.

그렇게 나타난 모세가 바로 궁중의 방해를 박차고 이스라엘 민족을 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는 길은 평탄한 길이 아니었습니다. 미지의 노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앞길에 어떠한 어려움이 가로막혀도 ‘막힐 테면 막혀라. 하나님이 선조 때부터 약속한 땅 가나안을 찾기 위해 품은 이 마음이 변할소냐?’ 하는 철석같은 심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비록 바로의 땅에서 살고 있으되 가나안 땅에서의 행복을 노래할 수 있는 심정이 갖추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이루어지는 날까지 백절불굴, 하나의 심정을 갖고 전진의 일로를 개척해 나간 모세였습니다.

그리하여 60만 대중을 거느리고 가나안을 향해 출발했으나 광야 40년 노정에서 그들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와 같이 모험을 할 줄 알았던들 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약속의 땅을 찾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이 생활에서 느껴지는 인식이나 감정보다 더 강했던들, 이스라엘 민족은 광야에서 쓰러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아이고, 배가 고프구나. 아이고, 우리는 죽는구나.’ 하고 아우성을 쳤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역사적인 어떠한 위인이나 선각자들은 세상을 즐거움이나 세상의 만족을 얻으려 한 것이 아니라 더 높은 이념을 향하여, 약속된 한 곳을 목적지로 하여 모든 것을 극복하고 나서는 탐험가적인 기질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모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앞을 향하여 달음질치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 앞에 홍해가 웬 말이며, 광야에서 아말렉 족속의 공격이 웬 말입니까? 40년을 유리고객 하는 동안에 바로의 속박에서 풀려 나온 장정들은 중도에 모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모세가 가나안 땅을 탐지하기 위해서 12지파를 대신한 12사람을 정탐하러 보냈더니 그들이 돌아와 보고할 때 10인은 ‘우리는 그들을 당치 못하겠습니다.’ 하고 말했으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 시대에 똑똑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더 똑똑한 사람이에요. 미욱한 고집쟁이, 죽을지 살지 모르는 모험가 기질이 왕성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우리를 지금까지 인도한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 바로의 마술을 물리친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 우리를 가로막고 넘실대던 홍해를 갈라 건너게 해 준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 광야에서 굶주리고 허덕일 때 메추리와 만나를 내려 먹이고 보호한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 하며, 반기를 든 민족 앞에 당당히 나서서 맞선 것입니다. 그것이 복귀의 노정을 찾아 헤매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나아갈 길을 열어 줄 수 있었던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역사노정이 전부 다 이런 노정입니다. 이리하여 민족시대를 거친 이스라엘에게는 국가시대가 왔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왔지만 그때는 이미 국가적인 시대이기에 국가를 걸어 놓고 싸워야 했던 것입니다. 국가를 걸어 놓고 싸워야 할 그때에 하나님의 심정은 얼마나 착잡하셨겠는가? 국가의 형태도 갖추어야 되고, 가정의 형태도 갖추어야 하고, 개인의 형태도 갖추어야 했습니다. 국가의 형태는 갖추었으나 실질적인 내용에 있어서는 하늘이 바라는 완전 승리의 발판이 되지 못했었습니다. 이런 곡절을 품고 역사해 나오신 하나님의 심정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은 허덕이셨습니다. 개인을 찾기 위해 허덕이셨으나 개인을 잃어버렸고, 가정을 찾기 위해 허덕여 오셨으나 하나님은 가정도 잃어버렸습니다. 축복한 유대국가도 이스라엘 민족도 다 잃어버렸습니다.

이를 계승하여 세계적인 패배자의 왕자인 양 오셨던 예수는 세계적인 복귀의 원한을 맡기 위한 대표자였습니다. 그런고로 그가 나타난 곳은 이스라엘 땅이었고 움직인 지역은 갈릴리 해변가와 예루살렘성 근처 몇몇 도성에 지나지 않았으나, 그의 언행은 하나님의 뜻을 대신하고 역사를 대신하고 세계를 대신하였던 것입니다.

그런 길을 허덕이다 가신 예수 이후 2천년 역사를 경과한 오늘날은 지상에서 승리적인 하나의 중심을 세워 이스라엘 국가를 회복해야 합니다. 이러한 뜻의 세계적인 기준에 맞추기 위하여 나온 것이 예수 이후 2천년 역사, 곧 성신의 2천년 역사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는 끝날입니다, 끝날. 그 끝날은 하늘이 바라시는 개인을 완성시켜야 할 끝날이요, 가정을 완성시켜야 할 끝날이요, 민족을 완성시켜야 할 끝날이요, 국가를 완성시켜야 할 끝날이요, 세계를 완성시켜야 할 끝날이요, 나아가서는 천주를 완성시켜야 할 끝날입니다. 이러한 대사업을 끌어 나오신 하늘의 심정을 오늘날 인류는 모르고 있습니다.

끝날에 하나님이 찾고자 하시는 것

하늘이 6천년을 허덕이시며 찾아 나와 역사의 종말시대에 인류를 하나의 이념권 내로 몰아내어 주관할 수 있는 형식은 갖추어져 있으나, 실질적이요 내용적인 면에 있어서 이 인류가 하늘이 간섭할 수 없는 입장에 있으니, 이것을 어찌할 것인가?

내가 이 시대를 향하여 외치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하늘이 찾으시는 역사적인 개인이 어디 있느뇨? 하늘이 찾으시는 노아가정을 대신한 가정은 어디 있느뇨? 하늘이 품고 사랑한 민족, 애급에서 고역받던 그 민족을 대신한 민족은 어디 있느뇨? 이 땅에 만왕의 왕으로 오신 독생자의 품에서 사랑받고자 하던 그 백성은 어디 갔느뇨? 살아생전 손에 손을 붙들고 마음과 마음을 나누면서 심정으로 노래할 수 있는 그 하나의 기준이 없어지고 사라졌으니, 한스럽다면 이 이상 한스러울 일이 없을 것입니다.

하늘은 찾을 것입니다. 참의 하나님이요, 참의 내용을 지니신 분이 하나님이라 할진대 그 하나님은 무엇을 찾을 것인가? 참의 실체, 참의 가정, 참의 사회, 참의 국가, 참의 세계를 찾으실 것입니다. 참의 주권을 통하여 천상과 지상이 하나의 심정으로 움직일 수 있는 그 세계를 찾으실 것입니다. 그럴 게 아니에요?

일을 벌여 놓았으니 하늘은 어차피 개인으로부터 가정, 민족, 세계 전체, 즉 지금까지의 인류의 어떤 민족적인 혈통의 인연이나 국민적 전통이나 주의 주장 혹은 사상 전체를 끊어 버리고 하나의 이념, 하나의 심정세계를 이루실 거예요. 이런 견지에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세계는 어떠한 세계인가? 그 세계는 참의 세계, 참의 부모가 있는 세계인 것입니다.

인간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타락한 혈통의 부모는 가졌으나, 하나님이 영원히 사랑할 수 있는 본연의 참부모는 갖지 못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잘났다고 자랑하고 큰소리치더라도 여러분은 타락한 부모의 종족입니다. 거짓의 낙인이 찍힌 종족이에요. 그러니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참다운 부모라고 손을 들어 축복하시고, 지어진 만상이 노래할 수 있는 본연의 부모는 어디 갔는고?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역사의 과정에서 사라진 것이 아니라 역사의 시초에서 사라진 것입니다. 이 한을 누가 풀어줄 것인가? 이것을 생각해 보면 분명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본연의 부모, 그 부모는 어떠한 분인가? 영원무궁토록 계시는 하나님과 ‘아버지!’ 하고 부르면 ‘오냐, 아들딸아.’ 하고 문답할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자녀로 살 수 있는 그 참부모가 없어졌습니다. 그러니 인류는 참부모를 찾아야 됩니다.

우리가 사는 이 땅이 우리가 이상하던 땅이 아니요, 우리가 사는 이 환경에는 하늘의 이념과 인연 지어질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통일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통일교회라는 이름이 문제가 아닙니다. 통일의 심정을 갖춘 우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간판이 문제가 아니라 내용이 문제요, 또 내용만이 문제가 아니라 사실 자체가 문제입니다. 여러분에게 참을 찾아 헤매는 양심의 움직임이 있다 할진대 참에 호소하는 표어를 이런 관점에서 세워 놓아야 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하나님이 바라시는 내용은 무엇인가 생각해야 합니다.

참의 부모, 참의 부부, 참의 자녀, 참의 충신, 참의 백성, 참의 만물, 참의 주권, 참의 우주가 참이신 하나님이 동하시면 동하고 정하시면 정할 수 있는 그날, 그 모든 것을 한꺼번에 결산지어 맞추는 그날이 타락세계의 끝 날입니다.

여러분이 재림날을 기다리는데 재림 때에 뭐 천변지이가 생기고 큰 변화가 생겨서 우리가 공중으로 올라가는 줄 압니까? 그런 망상, 허무맹랑한 생각은 하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나도 과거에는 그렇게 알고 있었어요. 그러한 사람들과는 싸워야 해요.

그때는 어떠한 때인가? 엉클어진 곡절을 풀고 비운의 역사를 탕감하여, 개인으로부터 가정, 사회, 민족, 국가, 세계가 통할 수 있는 때입니다. 개인을 세워서 종적으로 인연 맺어 나오던 것을 횡적으로 인연 맺는 때입니다. 그래서 본연의 개체가 되어서 본연의 가정을 이루고, 본연의 사회, 국가, 세계를 건설할 수 있는 때입니다. 그리고 본연의 세계에서 살 수 있는 ‘나,’ 그 ‘나’를 찾는 것이 인류가 참을 찾아 나온 목표라는 것입니다.

재림 때는 어떤 때이며 지금은 어떤 때인가

그러면 그 ‘나’는 어떠한 ‘나’냐? 눈을 뜨면 하나님과 상봉하는 것이요, 눈을 뜨면 참부모와 상봉하게 되고, 참자녀, 참백성, 참충신과 상봉하게 된다는 거예요. 그 ‘나’ 앞에는 참하늘땅, 즉 신천 신지가 펼쳐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프로그램을 한 날을 계기로 하여 일시에 맞춰 종결지으려는 것이 하늘의 경륜임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주의와 사상의 외적인 형은 그럴듯하지만 내용이 없습니다. 인간은 6천년이란 기나긴 세월 동안 참을 찾아오고 또 찾아왔는데, 참다운 개인의 입장에서 싸우던 분들은 지나가고, 참다운 가정, 참다운 민족, 참다운 국가, 참다운 주의도 다 지나가 버렸습니다. 다 지나가 버렸어요. 그러니 오늘 끝날에 서 있는 우리가 그것들을 다시 맞이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것들을 다시 맞아야 할 운명에 있는 지금은 어떠한 때인가? 눈을 뜨고 보면 개인과 가정이 통하고, 가정과 사회가 통하고, 사회와 국가가 통하고, 국가와 세계가 통하고, 하늘과 땅이 통할 수 있는 때입니다. 이름뿐인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하여 ‘아버지!’ 하고 부를 수 있는 경지, 그곳이 선이 지향하는 최고의 목적지라 할진대 여러분들 그곳에 이르렀다고 자신할 수 있는 사람 있으면 손 들어 보십시오. 현실을 바라보면 심각합니다. 6천년 종말시대는 당도하였으나 나의 처지는 6천년 떨어져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섭리를 대하고 있는 모양은 갖추었으나 내용에 들어가서는 6천년을 돌고도 비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제 보십시오. 시일이 가면 갈수록 여러분의 가슴은 점점 답답해질 것입니다. ‘허전해서 못 살겠다, 허전해서 못 살겠어.’ 할 때가 올 것입니다. 돈이 많고 갖춘 것이 많아도 어딘지 모르게 허전하다는 것입니다. 또 여러분 개체에서 싸움이 벌어집니다. 마음은 6천년 전으로 뛰어가려 하고 몸은 6천년이 지난 지금에 얽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을 알고 성경에서는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만날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열어 주리라.’고 말하였습니다.

환경이 새로워지는 오늘날, 우리는 심정에 사무쳐 들어오는 이 싸움의 고충을 해결할 수 있는 어떠한 주의 주장이 없다 하더라도 이것을 박차고 나설 수 있는 신념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그러지 않고는 비약하는 새로운 세계에 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지금 때는 어떠한 때인가? 개인을 혁명하고, 가정을 혁명하고, 사회를 혁명하고, 국가를 혁명하고, 세계를 혁명할 수 있는 신념을 가져야 할 때입니다.

어떠한 모진 화살이 날아와도, 죽음의 십자가가 덮쳐 와도 늠름히 밀고 나갈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과 나는 부자지관계(父子之關係)로 얽혀진 사무친 심정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대해 사무친 심정으로 ‘아버지!’ 한다면 여기에는 하나님도 사탄도 머리 숙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그런 심정이 없었다면 메시아로서의 자격자가 못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신부가 되려면 그러한 심정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 경지에 들어가려면 모험을 해야 합니다.

지금은 바쁜 때입니다. 모험을 할 때입니다. 예수님은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 ‘높아지고자 하는 자는 낮아지고 낮아지고자 하는 자는 높아진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끝날에 다 이루어질 것입니다.

끝날의 성도들이 지녀야 할 신앙자세

이제 여러분이 가정적인 차원에서 행복감을 느끼고 거기에만 만족해 보십시오. 그 가정과 국가와 그 제도는 전부 다 깨져 나갑니다. 그렇지 않아 요? 왜정(倭政)때 다 겪어봤지요?

오늘날 복귀섭리시대에 살고 있는 전세계 인류는 참을 찾아 헤매는 탐험가들이 되어야 합니다. 탐험가가 되어야 해요.

마음으로 기도하고 모든 면에서 계율을 세워 하늘을 향해 부르짖은 기도는 어서 이루어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도하는 사람들, 같은 기도를 몇십년 했댔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진정한 사랑의 심정을 갖고 약속할 수 있는 자리에서 기도 드려야 합니다. 한번 기도하고 삼사 십년 기다릴 수 있는 간절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삼사십년 지나서도 잊어버리지 않는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기도하고 기다려 보십시오. 이루어집니다. 많은 기도가 필요 없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 있어서는 남이 못 하는 것을 하기 위해 찾아 해야 됩니다.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오늘날 이것을 찾는 데는 과학 서적과 같이 모든 내용이 갖추어져 있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전문가가 없습니다. 여기에 관해 성경에는 요한계시록에 나타나 있습니다. 요한은 영적인 세계에 있어서 남이 개척하지 못한 세계를 개척하였고, 남이 느끼지 못하는 모험적인 경지에서 새로운 세계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렇지만 거기에는 갈 수 있는 노정의 내용은 없습니다. 노정기(路程記)는 없어요. 이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다시 한번 마음을 가다듬어 진리를 지향해야 합니다. 생명이 움직이고, 생명을 통할 수 있는 심정이 사무쳐 뜻을 붙안고 우는 자가 있다 할진대 지금까지 믿던 것을 부정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믿던 것 가지고는 안 됩니다. 지금까지 즐기던 생명을 부정하고, 지금까지 느끼던 심정을 부정하고, 지금까지 바라던 이념을 부정할 수 있는 더 큰 무엇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무엇이 있기는 있는데, 틀림없이 있는데, 여러분이 그것을 찾으려면 평상시와 같은 태도를 가지고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잘났다고 자랑하는 신사양반들이라 할지라도 그 자리를 버리고 맨 끝, 낮은 자리에 가서 승리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늘이 찾아온 길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천상의 모든 주권과 지상의 모든 주권을 찾기 위해 생명과 부활의 권한을 갖고 땅에 나타나셨으나, 악의 세상에서 이것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반대의 길부터 걸으셨던 것입니다, 반대의 길부터. 예수님은 죽어 가는 생명을 볼 때에 그 죽은 실체를 놓고 염려하지 않았습니다. 영혼을 보고 염려했습니다. 그는 민족을 바라볼 때에 그 민족의 처참한 것을 보고 불쌍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반대예요, 반대.

여러분도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겠다고? 천국을 가겠다고? 천국 가겠으면 가 봐요. 예수 믿고 천당 가자는 말에 따라 다니는 사람은 천당 못 갑니다. 공짜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천국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네 몸이 성전이라고 했어요. 성전 됐어요? 예수님은 개체 성전, 환경 성전, 만물 성전까지 바라셨던 것입니다. 우리 몸에 하늘이 임재하시고 우리의 가정과 사회와 온 만물에까지 하늘이 임재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어떠했습니까? 하늘의 보좌에 앉으실 분이 죄인의 친구가 됐습니다. 죄인의 친구였어요, 죄인의 친구. 성경에 그렇게 되어 있지요? 먹기를 즐기고 마시기를 즐기고 무엇을 탐하고 뭐 어떻고 하는 말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의인을 구하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구하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웠으면 그랬겠어요?

오늘날 기독교가 해야 할 일은 고통이 따르는 일을 어떻게 소화해 내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늘의 심정을 끌어들여 ‘아버지여! 예수님이 십자가의 고통을 늠름히 넘고 죽음의 고통을 늠름히 넘어서 불쌍한 만민을 위하여 복을 빌 수 있었던 것처럼 저희들도 그런 입장에서 예수님이 가졌던 마음을 가지게 해 주시옵소서.’ 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는 것, 문제는 그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심정적인 개척자가 되셨습니다. 오늘날 심정에 사무쳐서 앞질러 나아가는 사람, 사망권의 공포를 제압하고 남을 수 있는 모습이 필요합니다.

오늘날 교회 교회가 갈라지는 원인은 무엇입니까? 목사는 목사의 위신을, 신자들은 자기들의 위신을 세워 권한을 행사하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남기신 도리는 봉사의 도리입니다. 인간들에게 있어서 제일 가깝고도 제일 어려운 모험의 길이란 바로 그 길입니다. 어떤 태산을 정복하는 자는 세상의 모험가일지 몰라도 심령세계의 모험가는 아닙니다. 인간의 마음에 고통이 사무치게 될 때 그 고통을 이겨 낼 수 있는 모험가가 하늘이 원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예수님의 대신자는 어떠한 자인가

하늘의 왕자로서 땅 위에 죄인 된 몸으로 나타나는 것 이상의 모험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것은 우주가 만류하는 길이었지만 예수님은 그 길을 갔습니다. 그 길은 다 가기를 꺼리는 길이었지만 그 길을 가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어떤 참다운 진리가 있다 할진대 우리는 그것을 찾아야 되겠습니다. 하나의 마음과 하나의 심정을 중심삼고 있어야 할 이 한 몸이, 지금까지 역사적인 것에 고착되어 있었다면 이것을 끊고 마음과 더불어 그 진리에 끌려 들어갈 수 있는 말씀을 찾아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시간의 한계성을 초월한, 무한한 세계에서 느껴 들어오는 간절한 심정을 가지고 땅 위의 어떠한 수고와 고통과 죽음의 공포까지도 제압하고 남아질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개인의 길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어떤 고통이나 욕망의 일체를 거부하고 당당히 갈 수 있어야 합니다. 개인의 길에서 승리한 자는 개인적인 싸움에서 승리했듯이 가정에 대해서 그러하고 민족, 혹은 국가, 세계를 대해서 그러하다 할진대 이는 세계적인 문제에 있어서의 승리한 자입니다.

하늘이 예수를 세워 축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러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길은 개척하는 길이었습니다. 개척하는 데는 어려운 길부터 하는 것입니다. 좋고 기쁜 데서부터 아니고 어려운 데서부터입니다. 거꾸로 해 나가는 것입니다.

참을 찾아 헤매는 우리들을 대하여 하나님은 역사노정을 거쳐오시면서 개인, 가정, 사회, 국가, 세계형을 찾아 나오고 있습니다.

이것을 다시 수습하기 위하여 오늘날 우리는 이 끝날, 말단의 자리에 들어가 하나님의 독생자인 예수님이, 하늘의 황태자인 예수님이 죄인의 친구가 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심정을 품고 죄인들을 붙들고 싸울 수 있는 용사가 돼야 합니다. 그런 자리에서 자기 위신과 체면을 다 버리고 하늘 앞에 늠름하게 나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만이 잃어버린 자신을 찾는 동시에 잃어버린 개인을 찾아 주는 예수님의 대신자일 것입니다. 또 그런 심정을 품고 가정을 붙들고 싸우는 자라야 예수님의 대신자일 것이요, 나아가 사회, 민족, 국가, 세계를 위해 싸우는 자라야 예수님의 대신자일 것입니다.

아무리 높은 자리에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나와 같은 자리에 옮겨 주기 위한 것이다.’ 하며 높은 자리를 양보하고 내려서서 그들을 우러러 모실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모험적인 기질이 있어야만 대천지 변혁이 찾아오는 이 때에 어느 한 조건이라도 붙들고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보면 눈은 높아 가지고 하늘땅을 다 쥐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잃어버린 ‘자기’는 찾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찾고자 하는 소망의 가정이면 가정, 민족이면 민족, 국가면 국가의 내용과 목적에 부합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다면 알아줄 수 있지만, 목적과 이념만 컸지 실제 내용이 없다면 알아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대해 아브라함이 ‘옳소이다,’ 노아가 ‘옳소이다,’ 모세가 ‘옳소이다,’ 예수가 ‘옳소이다’ 하나님께서 ‘옳다’ 할 수 있는 기준을 찾아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이 살아가면서 가치를 찾는 생활방법 가지고는 안 됩니다. 자기를 죽여야 됩니다. 먼저 자기를 때려잡아야 되겠습니다. 자기를 때려잡는 백정이 되어야겠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하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지금까지 6천년 동안 이 땅을 대하여 섭리하시면서 자신의 위신을 세워 본 적이 한 번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참아들딸을 찾기 위해 나선 걸음이기에 그 아들딸을 만나기 전에는 위신도 세우지 않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예수도 오랫동안 수고하셨으나 찾아야 할 신부를 찾기 전에는 죄인을 대해서도 머리 숙이셨습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오른편 강도에게 ‘너는 오늘 나와 더불어 낙원에 간다.’고 하신 것은 그것의 한 예입니다.

이제 우리는 최후의 모험을 해야 되겠습니다. 역사적인 모험을 해야 되겠습니다.

참을 찾아 나선 모든 탐험가들 앞에 승리자의 인을 받는 우리가 되기 위해서는 역사적인 슬픔과 고충도 달게 받고, 시대적인 슬픔과 고충도 달게 받고, 하나님, 참부모, 참부부, 참자녀, 참형제, 참백성, 참나라, 참하늘 땅 앞에 나설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사무친 심정이 무너지지 않아야만 그 나라의 백성으로 남아질 수 있고, 그 나라의 충신, 열녀, 혹은 효자 효녀의 위치를 차지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모험 중의 모험

그러면 모험 중의 모험은 어떤 것인가? 사무친 심정을 가지고 하늘을 대신하여 불쌍한 사람을 위해 울어 주는 것입니다. 태평함을 바라던 마음이 복잡하고 어려운 사명을 받았다 하더라도 그 책임을 다하겠다는 각오와, 전체가 반대하더라도 하늘이 지향하는 기준을 향해 죽음도 개의치 않고 나서겠다는 사무친 심정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세상만사는 모험을 통하여 개척해 왔지만 하나님의 심정세계에서 모험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렇게 살라 했으면 그렇게 살아 보십시오. 예수가 이렇게 하라 했으면 한번 그렇게 해 보십시오. 그 말이 거짓말인가 사실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뚫고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심정문제를 걸어 놓은 모험보다 더 큰 모험이 없습니다. 이 모험을 통하여 하늘과 인연맺는 것, 이 이상 새롭고 기쁜 것이 없다는 것을 여러분이 아시고, 심정세계에 있어서의 탐험가들이 되기 바랍니다.

<기 도>

예수는 삼십년 동안 늘 갈릴리 해변가를 거닐면서 불쌍한 어부들을 보고 마음속으로 얼마나 동정하였사옵니까? 불쌍한 촌락을 바라볼 때에 얼마나 동정하였사옵니까? 혹은 유대교회와 즐비한 교단들을 바라볼 때에 얼마나 염려하였사옵니까?

예루살렘 성전에서 쫓겨난 이후 이 마을 저 마을로 떠돌아다니다 나중에는 바닷가까지 가서 심정적인 하나의 참제자를 찾기 위하여 헤매던 불쌍한 예수였음을 알았습니다.

세상의 모험 중에 큰 모험이 무슨 모험인가 했더니, 자기 앞에 놓인 목적물, 대상물을 찾는 것이 아니라 나를 정복하는 것, 나를 완전히 지배하는 것, 나를 굴복시키는 것이요, 그 이상 큰 모험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심정세계를 찾아 들어가 하나를 굴복시키는 날에는 온 천주가 찾아온다는 것을 아셨기에 예수님은 배척받는 길도 감사히 가셨고, 못 박히는 자리도 개의치 않으셨사옵니다. 조롱해도 감사하며 민족을 위로하셨고, 핏방울이 떨어지는 몸은 아프고 그 마음은 통분하지만, 섭리하여 나오시는 아버지의 심정이 민족에게 미쳐 있는 것을 바라보시고 아버지를 높이고 자기를 거부하는 심정에 사무치셨으니, 4천년 인연의 심정을 무시하고 그 터전을 밟을까 봐 염려하는 마음으로 복을 빌던 예수의 심중을 가히 알 만하옵니다.

인간들은 외계의 모든 것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모험의 노정과 정탐의 노정도 개의치 않고 탐험 행로에서 허덕이고는 있사오나, 내적인 심정을 걸어 놓고 나 하나를 정복하기 위한 탐험은 하지 않고 있사옵니다. 그 탐험의 고개 고개는 땅 위의 어떠한 험악한 산악보다도, 저 대양보다도, 맹수들이 사는 곳보다도 더 험하고 더 크고 더 무서운 경지라는 것을 저희들이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도의 길을 가는 수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남아 있을 때 실패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잃어버리고 자기로부터 승리한 역사적인 주인이 됨으로써 부활의 영광을 갖게 된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잃어버려야 할 이 세계, 잃어버려야 할 나, 잃어버려야 할 원한의 역사 노정이오니, 내 몸을 붙들고 싸울 수 있고 내 마음을 붙들고 싸울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6천년의 하늘의 심정을 붙들고 싸울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에게 어엿이 복을 빌어줄 수 있는 승리자의 모습이 되는 것이 인간의 역사적인 소망이요, 시대적인 소망이요, 미래적인 요구인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한 모습이 되어야 할 것이 하나님이 아니고 예수도 아니며 바로 자신인 것을 알고 또 자신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고 이 땅, 온 존재세계 전체의 참 중심인 것을 헤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참을 찾는 일도 나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는 이 땅에서 30여 년의 생애를 살다가 자기를 잃어버리고 다시 살아 부활의 기쁨을 느꼈사오니, 저희도 자신을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아 기쁨을 느끼게 하여 주시옵소서. 죽은 후에 부활한 기쁨을 체득하지 않는다 할진대 찾아오는 복락의 동산은 나와 인연이 없다는 것을 저희들이 알고 있사오니, 땅과 더불어 사는 자신을 매장하여 버리고 다시 하늘과 더불어 살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저희는 혁명을 해야 되겠사옵니다. 새로운 세계를 찾아내야 되겠사옵니다. 모험이 필요하옵고 탐정적인 기질이 필요하옵니다. 아버님! 자기를 생각하는 자는 이 대열에 참여하지 못할 것이요, 지금까지의 환경적인 조건을 붙들고 매달리는 자는 그 환경을 개척하지 못할 것이요, 지금까지의 주의와 사상에 얽매인 자는 이 세계의 이념에 가담하여 하늘이 기뻐하는 세계적인 지도자의 역할을 못할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저희들은 개체로부터 가정을 거쳐 천주에 이르기까지 이념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자가 되어 어떠한 분야에 보내도 감사하고, 어떠한 제물이 된다 하더라도 감사하며, 어떤 모험도 각오하고 나설 수 있는 하늘의 모험의 왕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전체를 책임질 수 있고 하늘이 믿고 맡길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며, 모든 말씀 사랑하는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로마서 8:12-27

<기 도>

아버지, 오늘 이 시간 모아 놓으신 저희들에게 많은 말씀이 필요치 않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저희에게는 오로지 아버님의 품에 무한히 안기고 싶은 심정이 필요한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한 가운데 뼛골에서 은연히 솟구쳐 오르는 흠모의 심정과 더불어 아버지께서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하고 불러주시는 그 한마디만이 저희들의 모든 것을 채워 줄 수 있사옵고, 또 그럴 수 있는 자리가 해원의 목적이 이루어지는 자리인 것을 저희들이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지여, 저희가 천성을 대하게 될 때 심정에 사무쳐서 몸 둘 곳을 모르는 자들이 되게 해 주시옵고, 흠모의 마음이 충천하여 모든 의식을 초탈해서 아버지 품에 안길 수 있는 자리를 고대하고 있는 저희들임을 아시오매, 이 시간 저희에게 그런 은사를 허락하여 주시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저희들이 말씀을 받아 하늘을 아는 자들이 되지 말고 심정을 통하여 하늘을 아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말씀으로 말미암아 구원받고자 하는 저희들이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고, 심정을 통하여 아버지 앞에 구원받아 생명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먼저 아버지께서 얼마나 수고하시고 고통당하셨는가를 아버지의 모습을 바라보며 아는 저희들이 되어 머리 숙이고 위로해 드릴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길,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저희의 가진 것이 있다 할진대는 그것이 저희 것이 되게 하여 주옵고, 자랑할 무엇이 있다 할진대는 그것이 저희의 자랑의 조건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생애의 목표가 있다 할진대 심정으로 생애의 목표를 추구하게 하여 주시옵고, 생활의 내용을 갖춰야 한다면 하나의 심정만이 저희들 생활의 내용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많은 사람이 아버지 앞에 나왔사오니 이들이 누구를 위해 머물러 있으며, 무엇을 위해 움직이고 있으며, 어떤 곳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는가를 스스로 찾게 하여 주시옵소서. ‘너는 내 것이다.’ 할 수 있는 주인도 갖지 못한 불쌍한 자들이옵니다. ‘너는 영원히 나의 심정과 더불어 있을 자다’라고 인정을 받을 자가 있다 할진대는 그 이상 행복한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님, 영원하신 생명과 영원하신 이념과 영원하신 사랑의 심정을 가지고 찾아 주시는 아버지께서는 저희의 심중에 같이 계시며, 아버지 것이 내 것이요 내 것이 아버지 것으로서 둘이 아닌 하나의 이념을 중심삼고 노래하며 즐거워할 수 있는 아들딸의 모습을 그리워하시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저희들도 아버지를 모셔 놓고 아버지 앞에 모든 영광의 요소를 찾아드리고 난 후 환희하며 만천하에 자랑할 수 있는 시간이 도래하기를 고대하고 있사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이런 모든 것을 아시오니, 마음과 마음을 연결시켜서 과거 천상의 모든 것과 지상의 모든 것을 움직여내어 심정세계에 모두 화하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영광의 자극을 일으킬 수 있는 충격과 기쁨의 경지에서 저희들이 각오하고 결심할 수 있는 이 한시간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제 말씀을 전하고자 하옵니다. 말씀의 내용만 전하기를 원치 않사오니, 아버지의 심정을 전하게 하여 주시옵고, 아버지의 내정을 살필 수 있고 스스로를 찾을 수 있는 이 시간의 말씀으로 나타나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전하는 자의 마음과 받는 자의 마음에 간격을 만드는 것이 사탄의 작용임을 알고 있사오니, 하나의 마음에 화하여, 하나의 심정에 화하여, 서로 서로가 아버지를 모실 수 있는 이 시간 되게 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부탁드리올 때,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말 씀> 오늘은 여러분 앞에 ‘끝날에 남아질 아버지의 참아들딸’이란 제목을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참아들딸이 되려면

지금까지의 인류 가운데에는 제아무리 권세가 많고, 제아무리 인격이 고매하고, 제아무리 영광스런 것을 갖춘 사람이 있었다 할지라도, 자기 자신을 세워 ‘나는 하나님의 참아들이요 참딸이다.’ 하고 자랑하며 나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참아들딸이 되려면 참부모를 가져야 되고, 참가정의 인연을 통하여야 되고, 참형제와 연결된 어떠한 내용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아들의 환경, 아들의 위치, 혹은 딸의 환경, 딸의 위치에 설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셔서 인류를 대하여 어떠한 섭리를 해 나오신다 할진대 이 하나님이 섭리해 오시면서 바라는 최고의 목적이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너는 내 참아들이요 참딸이다.’ 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 세우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참아들딸과 영원한 심정을 통하고 존재세계의 모든 인연을 통할 수 있는 입장에서 ‘아버지’요 ‘아들딸’이라는 한마디를 할 수 있는 날을 가지는 것이 하나님의 최고의 목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한 날을 고대하고 계시다는 것을 우리들이 몰라서는 안 될 것입니다.

창조주라 하고, 만우주의 근본이라 하고, 모든 존재세계의 주체가 되는 하나의 중심이 있다 할진대 그 중심이 바라는 이상세계는 이 땅 위의 존재세계가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세계는 천상에 있는 어떠한 이념의 세계도 아니요 그렇다고 외적인 세계도 아닐 것입니다. 그 세계는 심정의 인연을 중심삼고 움직여 낼 수 있는 정적인 흐름 앞에 전체를 걸어 놓고 아들이요 딸이라 불리어질 수 있는 세계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무리 훌륭한 분이요 창조주요 절대자라 할지라도, 그 역시 그런 내용을 갖춘 사람을 소망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역사는 참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참된 사람, 참된 국가, 참된 세계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도 참된 존재가 되고자 하는 의식을 가지고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러면 참된 인연 가운데 표준이 되는 인연이 무엇이냐?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맺어진 부자의 인연입니다. 이 인연에서 비롯된 심정은 어떠한 존재의 권한에 의해서도 굽혀질 수 없는 영원하고 불변하고 유일한 것입니다. 또 이 심정의 권한은 절대적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권한을 가지고 나타나게 될 때 모든 존재물은 그 존재 앞에 머리 숙일 수밖에 없을 것이며, 이 심정의 권한을 가지고 움직이게 될 때에 만천하는 따라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주의 철칙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 할진대 우리들이 바라는 진정한 목적을 이룰 수 없을 것이며, 하나의 절대적인 인연을 맺을 수 없다는 결론이 내려집니다.

그런 연고로 아무리 높고 크신 하나님이라 하더라도 그 하나님이 ‘내 사랑하는 참아들아, 딸아.’ 할 수 있는 한 날을 가지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슬픔입니다. 이 이상 슬퍼할 일이 없는 것입니다. 또한 하늘의 인연을 통하여 지음받은 인간이라 할진대 그러한 하나의 사람, 그러한 하나의 아들딸을 땅으로부터 내세우지 못한 것이 최대의 슬픔입니다. 이것이 인류의 슬픔 중의 슬픔인 것입니다.

만일에 하나님이 내 아들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참아들딸이 있어 그들을 부르시면서 6천년간 해왔던 수고를 잊어버릴 수 있고, 지난날의 모든 곡절을 잊어버릴 수 있는 순간이 이 땅 위에 온다 할진대 거기서부터 하늘의 해원성사가 벌어질 것입니다. 인류는 그 때에 비로소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행복의 노래를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때가 오리라는 것을 우리는 예상해야 합니다.

인류와 천륜 앞에 끝날이 있다 할진대 그 끝날은 어떠한 날이 되어야 하겠는가? 그날은 하나님이 인간을 대하여 ‘너는 영원히 부정하려야 부정할 수 없는 나의 참아들딸이다. 내 아들아 내 딸아 이제야 원한을 다 풀었노라.’ 할 수 있는, 마음 턱 놓고 안위할 수 있으며 마음 턱 놓고 즐길 수 있는 날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아들딸이 이 땅 위에 나타나는 그날, 그 때가 와야 하나님의 새로운 이념세계는 시작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러한 아들딸은 나오지 않았고 참아들딸의 인연을 결정지을 수 있는 한때를 세우지 못하였습니다. 참아들이라고, 딸이라고 내세울 수 있는 한 존재가 나타나지 않은 것입니다. 이런 한 존재가 나타나지 않는 한, 하나님의 뜻과 인류의 소망은 완결지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참아들딸을 찾기 위한 하나님의 수고와 종교의 사명

오늘날 우리는 타락한 후손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세상의 그 누가 제아무리 훌륭하다 할지라도, 어떠한 전통을 자랑하고 어떠한 역사적인 면에서 자기의 공헌한 것을 자랑한다 할지라도, 그 모두가 타락한 후손의 자랑일 뿐입니다. 또 자기가 갖춘 바 형세나 모습이 늠름하고 이 세상에서 하늘을 꿰뚫을 수 있는 권한을 가졌다 할지라도 그 역시 타락한 후손의 권한인 것입니다. 인간이 이러한 역경과 하늘이 허락해 줄 수 없는 환경에 처해 있는 연고로 인간 세상은 하늘과 상치(相馳)되고 반대되는 죄악 세상입니다. 죄악된 인간, 죄악된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너나없이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참아들딸의 모습은 지선지고(至善至高)한 모습인데, 지상에 살고 있는 우리의 모습은 지극히 악하고 지극히 누추한 모습이 되어 있으니, 이 간격을 어떻게 타파할 것인가? 이것을 타파하기 위한 것이 하나님의 구원역사입니다. 하나님은 이 간격을 메우고 연결시키기 위하여 6천년이란 기나긴 세월을 통하여 수고해 오셨고, 인간들은 아나 모르나 역사의 배후에서 피어린 혈투전을 계속해 나오신 것이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런 역사적인 하늘의 수고를 무엇으로 보답할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천상을 바라보기에 민망해 하고 황공하게 여기며 자기 스스로를 뉘우치는 사람이 없습니다.

오늘날 종교라는 명사를 세워서, 혹은 종교의 내용을 갖춘 지도자를 세워서 인류 앞에 예고하고 권고하는 것은 무엇이뇨? 생의 노정을 통하여 하나님이 섭리하신 역사적인 내용을 앎과 동시에 나의 감성을 통하여 하늘의 심정과 인연을 맺어 나가라고 우리에게 교시하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이 종교입니다.

그러나 심정 심정을 통하여 뻗어 나오는 인연을 무시해 버리거나 잊어버리고, 오늘에 나타난 사실에만 집착하기 쉬운 것이 종교인의 입장이었습니다. 종교의 중대한 과업은 타락의 인연을 벗어나 심정의 세계에 입각하여 하늘이 지금까지 인류를 붙들고 나오시며 슬픔과 고통을 당했던 역사와 더불어 동반할 수 있는 심정, 역사적인 고통과 더불어 싸울 수 있는 심정을 가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종교는 지금까지 그러한 내용을 갖춘 입장에서 인류역사를 보충하고 인류의 심정을 연결시키는 일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기에 하늘은 참아들딸을 찾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하면 간절할수록, 사무친 마음을 갖고 시대와 세기를 거쳐오면서 참아들딸을 그리워하며 인류를 대하여 지금까지 수고하고 계십니다.

하늘은 이 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개인을 세우시고 가정을 세우시고, 민족과 국가를 세우시고, 세계적인 주도이념을 세워 놓고 섭리해 오셨습니다. 하늘은 이 한 목적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그토록 수고하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목적을 책임지고 달성해야 할 하늘이 택해 세운 이스라엘 민족은 어디론지 가 버렸습니다. 바로 궁중에서 끌어낸 이스라엘 60만 대중이 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120년 동안 수고하여 세웠던 노아가정도 그랬고, 아벨의 제단도 역시 간데없이 다 사라지고 말았던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이렇듯 역사를 알고 하나님의 섭리적인 뜻을 알면 알수록 하나님의 슬픔은 말할 수 없이 크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념은 개인으로부터 참다운 아들딸을 중심삼은 가정으로, 민족으로, 국가로, 세계로, 천주로 나아가야 할 것인데, 이것이 하나님의 심정에 사무친 이념인데도 불구하고 땅 위에는 ‘나는 영원한 아버지의 심중을 통할 수 있는 참다운 아들이외다.’ 할 수 있는 존재가 없습니다. ‘나는 아버지의 심정과 더불어 마음을 위로하고 그 마음의 곡절을 해원할 수 있는 영원한 딸이외다.’ 할 수 있는 하나의 존재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 아들딸을 중심삼고 하나님을 모시고 살 수 있는 그런 가정도 없었거니와 그러한 민족도 없었고 국가도 없었고 세계도 없었습니다.

끝날과 재림주

하나님이 지향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참을 통할 수 있는 자녀로부터 가정, 민족, 국가, 세계, 천주까지를 인연지어 연결시켜야 할 사명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복귀의 사명입니다. 이런 사명의 길을 가는 것이 구원의 역사요, 섭리의 뜻이요, 천륜의 목적임을 우리는 알아야겠습니다.

우리들은 이때를 끝날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끝날은 어떠한 때냐? 참다운 아들딸이 나타나 온 천하를 천리법도에 따라 치리(治理)할 수 있는 때입니다. 그 아들딸이 나타나 역사적인 원한을 청산해 버리고, 슬픔과 고통의 역사를 종결짓고 기쁨과 행복을 노래할 수 있는 한 날, 이러한 분수령의 때, 분수령을 이루는 날이 바로 끝날인 것입니다.

그러면 끝날에 누가 온다고 하였습니까? 성경은 밝히 말하였습니다. 주가 오신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주는 누구시뇨? 재림예수입니다. 재림예수는 어떤 분일 것이뇨? 그는 만천하의 역사를 동원하여 하나님이 수고하신 끝에 찾아질, 하나님께서 ‘너는 영원무궁토록 내 마음 속에, 내 몸 속에, 내 지은 세계 속에 살 수 있는 아들이다.’ 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분이 오시는 주님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르쳐 주고 가셨습니다. 나는 신랑이요 너희는 신부라고. 그것은 아들 될 수 있는 주인의 현현과 더불어 딸이 될 수 있는 신부의 모습이 땅 위에 나타나야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 가지고 아들과 딸이 상봉하고, 찾아 나오시던 하나님과 아들딸이 상봉하게 됩니다. 그 순간에 있어서 참아들딸의 입장은 제한된 입장이 아니고 한계적인 입장이 아닙니다. 그날은 그 아들딸과 인연되어 있는 세계가 한꺼번에 동원하여 하늘을 찬양할 수 있는 인연이 맺어지는 날인 것입니다.

인류와 더불어 참아 나오시고, 인류와 더불어 슬퍼하시며, 인류와 더불어 싸워 나오신 하나님 앞에, 인류가 고개 숙여 기도할 것이 무엇이뇨? ‘하늘이 세우고자 하는 참된 아들이 나타나게 하시옵소서.’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참된 아들은 어떠한 분인가? 그는 참된 아들인 동시에 참된 신랑의 자격을 갖추어 참된 신부를 찾고 참된 인류의 부모가 되어야 할 분입니다.

그러기에 역사적으로 인간들을 이끌어 그 참된 아들딸과 접붙이기 위해 섭리해 나오시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섭리역사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 가운데 ‘너희는 양자의 영(靈)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는다.’ 했고,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양자 되기를 고대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땅 위에 살고 있는 사람이 제아무리 잘 믿는다고 할지라도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하늘 앞에 양자밖에 안 됩니다. 하늘의 아들이 있다 할진대 그 아들은 어떠한 형태로 나타날 것인고? 아들 아닌 사람이 있고 양자가 있고 참아들이 있습니다. 세상에도 그렇지 않아요? 내 아들이 아닌 남의 아들이 있고, 아들이 없을 때 대신 다리 놓을 양자가 있고 참아들이 있습니다. 천지 이치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이 땅은 선악이 교차하고 충돌하는 혼란이 벌어져 참도 참이 아닌 것 같고 참 아닌 것이 참인 것같이 엉클어져 있습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하늘은 참다운 아들을 찾고 딸을 찾기 위한 이념을 갖고, 또 그런 심정을 갖고 인간을 대하며 역사노정을 거쳐오시는데도 불구하고, 이 땅 위에 참다운 아들딸이 누구입니까? 인간들은 모릅니다. 아무도 모를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은 인간세계의 아들 아닌 자들을 양자의 모양으로 수습하여 이들을 다시 직계의 자녀로 종결지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늘의 구원 섭리역사입니다.

아들의 인연이라는 것은 혈통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자기의 혈통이 직접 연해 있든가, 자기의 아버지나 선조의 혈통이 연해 있든가 어떠한 혈통적인 조건을 가진 입장에서만이 아들딸의 명사를 세울 수 있습니다. 세상의 이치가 그렇습니다. 하늘이 이치도 마찬가지입니다.

인류의 시조인 아담 해와가 창조된 그날부터 하나님의 심정이 그들의 뼛골로 흘러 하나의 귀결점을 세우고, 그 이념의 전부도 아담 해와에게 화하였던들, 우리는 하나님의 직계 혈통의 인연을 통할 수 있는 자녀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원치 않는 다른 혈통과 인연된 것입니다. 그런고로 오늘날 우리들이 아무리 잘났다 해도 혈통이 다르니 양자입니다, 양자. 아무리 섭리의 뜻을 위하여 지성을 다해도, 남의 자식을 끌어다가 잇는다 해도, 양자의 혈통을 이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복음을 세워 지금까지 섭리해온 신약 구원섭리의 내용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 양자를 세워서 내 참아들딸이라고 할 수 있는가? 없습니다. 세상일도 그렇습니다. 어떤 고통과 억울함을 당한 사람이 심정에 어린 말씀을 한다 할지라도 그 심정을 통하는 입장에 서지 못한 사람은 ‘그럴 것이다.’ 하는 정도밖에 모를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그렇겠지.’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렇긴 무얼 그래?’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것을 체험하여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어떠한 인연권에 있는 사람은 말하는 사람의 심정에 슬픔이 스며들 때 그 말을 듣고도 심정에 슬픔이 스며드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그래야만 같은 입장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인류의 소원과 주님이 다시 오시는 목적

오늘날 인류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나님 앞에 양자라는 명사를 제거시켜 버리고 직계의 참아들딸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류가 바라고 역사가 지향하는 최고의 목적이요, 섭리의 뜻을 세워 나오는 하나님의 중심목적입니다. 그렇게 되어야만 구원의 목적이 달성되고 구원섭리가 종결된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훌륭하신 하나님, 사랑의 본체요, 사랑의 중심 되시는 그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양자의 입장에서 사랑하신다면 우리는 그런 사랑 원치 않습니다. 골수의 심정이 스며들 수 있는 사랑의 실체인 아들딸이 요구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땅에서 제아무리 도의 생활을 하고 제아무리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다 해도 그 아버지의 내용은 여러 가지입니다. 아들 아닌 입장에서 아버지라 부르는 사람도 있을 것이요, 혹은 양자의 입장에서 아버지라 부르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최후에 남아질 수 있는, 하늘이 요구하는 최고의 목적은 무엇이뇨? 양자의 이름이 아니라 양자의 위치를 넘어선 직계의 참아들딸을 고대하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에 예수가 양자의 인연을 복귀해 준다 하였다 해서 그 이념 세계에서 만족한다 하더라도 그 구원은 완전한 구원이 아닐 것입니다. 지금까지 예수를 믿고 간 수많은 성도들이 저나라에 갔으되 그들은 낙원, 즉 천국 가는 대합실에서 기다리고 있더란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가 다시 오겠다고 말씀하신 목적은 우리들에게 양자가 아니라 직계의 인연을 맺어주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심정으로 얼크러질 수 있는 아들딸, 교훈을 통하여서나 명령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나타난 모습을 바라보고 움직일 수 있고 인연을 맺을 수 있는 아들딸을 고대하는 것입니다.

그런 연고로 역사적인 노정에 왔다가 간 성현 현철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향하여 아버지라 할 수 있고, 하나님은 그 사람에 대하여 너는 나의 아들이라 할 수 있는 내용을 갖추지 못했다면 그들은 미완성품입니다. 이것을 똑똑히 알아야 돼요.

기독교가 갖고 있는 유일한 점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는 하나님을 대하여 ‘내 아버지’라 했고 ‘나는 그 독생자’라 하였습니다. 천주의 근본, 천륜의 근본을 꿰뚫어 심정세계를 점령할 수 있는 하나의 표준을 세우고 실체를 갖춘 예수였던 것입니다. 이런 내용을 보아 우리는 예수가 만민의 메시아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메시아, 구주가 무엇입니까? 사망권에 머물러 있는 인간들을 살려낼 수 있는 표본이 되는 인물입니다. 그러기에 기독교만이 가진 사랑의 조건이라면 그것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내 아버지다.’ 할 수 있는 인연이 맺어지면, 하나님이 아무리 높고 선의 주체자요 절대자라 할지라도 그 하나님은 내 아버지인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것은 내 것이 되고 나는 하나님의 것이 됩니다. 이렇게 되는 것이 인간이 바라는 소망의 최고 기준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최고의 사랑의 기준을 표방하고 인간을 대하여 나왔다 할지라도 그 사랑의 목적지가 되는 자리까지 인간을 인도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은 거짓된 분일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하나님은 자신의 욕망과 자신의 욕심을 충족하기 위한 섭리를 해왔지, 인간의 이념과 전체의 이념을 세우기 위한 섭리를 하지 않았다는 결론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은 참아들딸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참아들딸들을 찾아 나오시는 이유

성서 66권을 통해 보면 이 내용에 해당하는 바울의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혈통적으로 죄와 인연이 없는 입장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양자의 유업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예수께서 오신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를 보내신 바의 목적은 인간들이 하나님의 참다운 아들 예수와 인연을 맺게 하고 그들을 예수에게 접붙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에도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들 아닌 사탄세계의 인간들을 양자의 인연을 거쳐 직계 아들의 수속까지 해주려 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는 이 땅 위에 와서 직계의 자녀 될 수 있는 수속 방법을 가르쳐 주지 못하고 양자 될 수 있는 내용만을 설명하고 갔던 것입니다.

우리는 왜 오시는 주를 고대하느뇨? 온 천하의 인류는 어찌하여 예수의 재림날을 고대하느뇨? 제아무리 잘났다 해도 양자의 입장밖에 되지 못하는 인간 앞에 직계의 자녀가 될 수 있는 심정적인 인연을 세워 놓고 그 수속 방법을 가르쳐 주어야 할 사명을 갖고 오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만천하의 인간들이 그날을 고대할 것이 아니겠어요? 우리는 그러한 사명을 갖고 왔다 가신 예수를 알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오시는 재림의 날을 고대하며 나아가는 우리들, 신부라는 대상적인 명사 밑에 움직여 나가며 그 목적을 찾아 헤매는 우리에게 재림의 날은 어떠한 날인가? 하늘이 6천년 동안 수고하신 것을 다 털어놓고, 하늘이 슬퍼하신 6천년의 슬픔을 다 잊어버리고, 고통당하신 것을 다 잊어버릴 수 있는 날입니다. 찾아진 아들의 모습을 바라볼 때에 슬픔도 간데없고, 고통도 간데 없고, 억울함도 간데없이 ‘오냐, 내 아들아.’ 할 수 있는 환희의 한 날입니다. 그날은 천상이 고대하던 날이요, 지상의 인류들이 오랜 역사노정을 통하여 고대해 나오던 날인 것입니다.

즉 양자의 한을 벗어나 직계의 자녀로서 내 아버지의 천국을 내 천국이요, 내 아버지의 주관하는 세계를 내가 주관할 수 있는 세계라 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나타나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 축복하셨던 타락하기 전 아담 해와 같이 참다운 동산의 주인으로서, 만물의 영장으로서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온 만물을 주관한다 해도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어떤 내용이 없다면 만물도 주관받지 않으려 합니다. 참다운 아들딸이라 할진대 역사적인 원한을 청산할 수 있는 입장에 선 아들딸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이렇게 말했어요. ‘피조물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한다.’고. 참아들딸이라고 인정을 받지 않고 나타나는 사람이라 할진대 만물도 그런 사람을 원치 않는다는 거예요. 그런고로 하늘의 원한을 해원하는 역사노정을 오늘날 우리들은 거쳐 나가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입장에 있는가

이러한 섭리노정을 거쳐 이구동성으로 끝날이라고 말하고 있는 이 때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이것이 큰 문제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살펴보십시오. 여러분이 어떠한 입장에 있습니까? 진정 하늘의 심정과 인연이 맺어져 아버지가 동하면 같이 동하고, 아버지가 정하면 같이 정하고, 아버지가 슬퍼하면 같이 슬퍼하고, 아버지가 기뻐하면 같이 기뻐할 수 있는가? 체(體)는 다를지라도 내용에 들어가 심정세계에서는 통할 수 있는 입장에 있는가? 인연되는 관계에 있는가?

갖추고 있는 외적 환경이 아무리 호화찬란하다 할지라도 심정에 어긋난다면 이것은 사라져 버릴, 불사를 감밖에 못 된다는 거예요. 세상도 그래요. 사랑하는 아들딸이 갖고 있는 물건이 아무리 귀한 것이라 해도 그 아들딸이 죽어 버리면 불사를 감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심정의 인연을 통한 참아들딸이 되는 것이 천륜이 바라는 최고의 목적이요 인륜이 지향하는 최고의 목적이라 할진대 여러분은 지금 어떠한 단계에 있는지 냉정한 입장에서 비판해 보십시오. 어차피 우리들은 참아들딸이 되어야 할 해원의 역사를 중심삼고 돌아가고 있습니다. 안 가려야 안 갈 수 없는 천지의 운세권 내에 우리가 처해 있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이 과정을 거쳐 나가는데 어떻게 해명하여 들어갈 것이냐? 돌아가는 방편은 별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중심삼고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자신의 심정이 어떠냐 하는 것을 놓고 삼자적 입장에서 냉정하게 비판해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할 때입니다.

천륜이 지향하는 방향이 그렇고 아버지께서 소원하시는 날이 그렇다 할 진대 오늘날 여러분 자신은 어떠한 경지에 있습니까? 심정이 통하는 참아들딸의 경지에 있으면 기도가 필요 없습니다. ‘아버지’ 하고 부르기만 하면 피 살이 움직이는 듯한 충격에 가슴이 메이고, 아버지의 심정이 내 마음에 스며들 수 있는 직계의 아들딸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던들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한 타락의 한을 풀 수 있을 것이요, 죄악세계의 타락된 행동은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역사와 더불어 슬퍼하신 하나님의 심정을 알고 하나님을 고통스럽게 했던 지긋지긋한 죄악의 인연을 벗어나려고 수고한 내 자신을 생각만 해도 나는 소름이 끼칠 지경인데 여러분은 어떠한 느낌을 느껴 보았습니까? 자신이 비판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이런 심정적인 인연을 갖고 찾아 헤매는 하나님 앞에 아들이라는 명사를 갖출 수 있는 입장에 어느 정도 가까이 있습니까? 심정적으로 인연이 있는지 없는지 모른다면 그런 사람은 아들이 아닙니다. 그래도 양자가 될 수 있는 자격자는, 아버지 되는 사람의 고통의 내용은 모르지만 그 말을 들을 때 어느 정도 알 수는 있어야 됩니다. 심정적으로 체휼은 못 해도, 심정적으로 그렇다고 긍정할 수 있는 입장에는 못 들어가더라도 그 말에 대해 ‘그렇습니다.’ 할 수 있는 정도까지는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자리에 나갔습니까?

예수는 이 땅 위에 인류의 참아버지로, 하나님의 참된 아들로 오셨다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4천년 동안 땅의 인간을 대해 나오며 가지신 하나의 결심을 갖고 왔을 거예요. 그의 사지백체는 4천년 역사노정에서 하늘이 인간을 통해 세우고자 하신, 참다운 아들을 그리워하며 찾아 헤매신 부분 부분의 실체를 대신하여 나타난 존재일 것입니다. 그런고로 그의 눈은 4천년 동안 바라보신 하나님의 눈의 대신이요, 그의 귀는 4천년 동안 하나님이 들으신 귀의 대신이요, 그의 입은 하나님이 4천년 동안 얘기해 오신 입의 대신일 것이요, 그의 감정도 그렇고 몸도 그럴 것입니다. 그는 역사적인 실체요, 역사적인 결실체였던 거예요. 그러기에 예수님도 말씀하시기를 ‘율법을 완전케 하러 왔다.’고 했습니다. 그 목적은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냐

예수는 유대나라와 유대민족을 바라보고 유대교단을 바라볼 때, 4천년 동안 하나님의 사랑권 내에 있었던 나라요 민족이요 교단이었지만 ‘하나님이 품고 사랑할 수 없는 나라요 민족이요 교단이 되었구나.’ 하고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들은 4천년 동안 하늘의 인연의 역사를 거쳐왔으나 그 4천년 역사의 주인으로 오신 예수를 몰라보았습니다.

이게 웬 말입니까? 그때 사람들은 그것을 몰랐습니다, 몰랐어요. 4천년 역사노정의 종말시대에 살고 있던 이스라엘 민족은 4천년 전 타락 직전의 아담 해와의 하나님의 사랑권 내에서 품어 나오던 한 부분이요 분자와 같다는 것을 느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복귀섭리라고 한다면 복귀라는 것은 잃어버린 것을 찾는 것인데, 하나님은 무엇을 찾아 나오시는 것인가? 잃어버린 아들딸을 찾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아담을 찾고 잃어버린 해와를 찾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오늘 여기에 나와 있지만 끝날에 처한 여러분 자신들에게는 6천년 동안 죽지 않고 사탄과 대결해 싸워 나오다 남아질 조상, 즉 타락의 인연을 걷어치우고 승리의 권한을 갖추어 아버지 앞에 자랑하고 나설 수 있는 조상이 필요한 것입니다. 선한 조상이 돼야 할 아담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죽은 아담이 되어 버렸으니, 하나님은 타락하지 않은 실체를 찾기 위해 아담으로부터 6천년 동안 수고하시면서 그 실체를 소망하며 찾아 나온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에서 알고 있는 예수는 ‘어떻구 어떻구 어떻다….’ 내용이 많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니 그렇게 안 돼 있어요. 우리는 그러한 내용을 박차고 강한 각오를 갖고 나선 것입니다. 참과 거짓이 있는데 또 참 같은 것과 거짓 같은 것도 있어요.

하나님이 세우시려는 참아들

오늘날 우리들이 예수를 바로 알고 모시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뇨? 에덴동산에서 아담 해와가 타락하여 하나님 품에서 자라지 못하게 된 후 사탄과 대적하여 싸워 나온 지 4천년 만에야 비로소 유대나라 앞에 나타난 예수였음을 이스라엘 민족이 몰랐다는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민족이 그 예수 앞에 굴복했다면,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끌고 나올 때 실패한 것도 승리요, 노아가정이 실수한 것도 승리요, 아브라함이 제물 실수한 것도 승리이며, 아벨이 죽은 것도 승리로 귀결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는 이러한 실체였습니다. 역사적인 산 실체예요. 섭리하시면서 찾으시던 4천년 전의 산 실체. 아담은 죽었으나 그를 세워 나오시던 아버지의 심정은 죽지 않았기에 그것은 산 실체입니다.

끝날에는 많은 인간들이 자신을 중심삼고 ‘나는 우주의 중심이다 ’하는 식의 종교관을 갖고 나옵니다. 그런데 4천년을 거쳐 6천년을 역사해 오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목적은 무엇인가?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는 거예요. 아담이 실수했기 때문에 대신 보내신 예수는 어떤 분이냐? 제2아담입니다. 예수님을 놓고 하나님이니 뭐니 하고 있으나 그게 아니에요. 성경에도 예수를 후아담이라 했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찾으시는 내 아들이라 할 수 있는 참된 아들은 제3아담입니다. 제3아담의 수속이 끝나 참아들의 입장에 서기 전에는 어느 누가 아무리 무슨 신부라 무슨 양자라 해도 안 됩니다. 예수도 아들의 영광을 갖고 이 땅 위에 왔지만 아들의 행세를 다 못 했습니다. 행세를 하려면 하늘의 수속을 마쳐야 합니다. 그러려면 아들만 가지고 안 됩니다. 신부를 갖추어야만 수속이 끝납니다.

에덴동산에서 무엇을 잃어버렸어요? 아담과 해와를 잃어버렸습니다. 그 아담과 해와는 인류의 참조상이 될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인류의 참조상을 잃어버렸으니 참조상을 복귀해야 합니다.

예수는 아버지 격입니다. 인류의 참아버지 격이에요. 그리고 성신은 어머니 신입니다. 인류의 참어머니예요. 이와 같이 참아버지 참어머니를 영적으로 세워 놓고 이를 실체 형상으로 이 땅 위에 나타내려는 것이 재림의 목적입니다.

인류 앞에 참다운 아들딸이 나타나는 때가 끝날이거늘, 그 때는 어떠한 때인가? 참조상을 잃어버림으로 타락한 후손이 되고 참부모와 혈통적인 인연을 맺지 못했으니, 반대의 경로를 통해서 에덴동산에서 잃어버린 아들딸을 찾는 때입니다. 거꿀잡이 역사, 복귀역사로서 인연을 맺어 그들을 양자로 승진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여러분, 만약 이 말을 듣고 틀린다고 생각하거든 영계에 가서 항의하십시오. ‘아무 때 아무 아무개가 이렇게 말했는데 그 말이 맞소, 틀리오?’ 하고 물어보면 틀림이 없다고 할 것입니다.

망상적이고 공상적인 신앙을 하는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관념적인 신을 믿고 그 이념 밑에서 사는 시대도 지나가고 있습니다. 뼈와 살이 심정에 부합되는 기준을 갖고 아버지라 할 수 있고, 그 아버지의 6천년 역사하신 심정을 오늘 내 심정에 귀일시켜 그 심정적 기준을 통한 입장에서 하나님과 부자의 관계를 자랑할 수 있는 자리에 서야 합니다.

하늘을 찾아 나가는 인류, 혹은 목적의 세계를 찾아 나가는 인류는 이런 길을 가야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동양에서는 삼강오륜을 세웠던 것입니다. 천적인 마음을 다하고, 충신이 되라, 열녀가 되라 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동양에서는 무엇으로 보든 내적인 사조를 갖추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서양은 외적입니다. 외적으로 돌아 들어옵니다. 두고 보십시오.

양자들이 출세하는 때는 지금까지의 20세기 문명이고, 앞으로 참아들딸이 출세하는 때는 이상세계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럴 거 아니겠어요? 옛날에는 남의 자식들이 잘 살던 때였고, 오늘날은 예수의 이념을 중심삼고 민주 진영을 중심한 양자들이 잘 사는 때이며, 이 시대를 넘어 참 아들딸이 잘 사는 때가 크리스천들이 바라는 재림시대요 이상시대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자리에 남아질 수 있는 참아들딸이 되어서 하나님이 찾으시는 한때, 한 시간에 참아들딸의 명분을 갖고 나타나려면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나는 수십년을 잘 믿었습니다.’ 하며 배를 쑥 내미는 소인배는 안됩니다. ‘아, 나는 아무 교회 목사요, 아무 교회 지도자요, 나로 말미암아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을 알게 되었고 그를 따라가게 되었는데….’ 어쩌구 저쩌구 하지만, 예수의 이름을 중심삼고 기쁨의 요소를 찾아 나서는 사람들은 전부 안 됩니다. 왜 그러느냐? 하나님은 오늘날까지 6천 년의 기나긴 세월을 섭리해 나오시면서 하루 한 시간도 기쁨의 날을 보지 못하셨기 때문입니다. 참아들딸을 찾아 헤매는 아버지가 아들딸도 찾지 못하고 무슨 기쁨이 있다는 말입니까?

역사를 지나오면서 인류는 기쁨의 시간을 갖고 향락한 사람들이 많았을지 모르지만, 어떤 집권자들은 자기의 권력을 중심삼고 하나님 대신 영광을 누렸을는지 모르지만, 4천년, 6천년 역사를 허덕이고 허덕이면서 참아들딸이 그리워 찾아 헤매시는 하나님께서는 그런 시간이 없었습니다. 영광을 누리고 기쁨을 누려야 할 하나님은 아직도 그런 한 시간을 갖지 못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처지와 예수의 생애

하나님은 슬픔의 주인공이요 고통의 주인공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모실 아버지는 기쁨과 영광을 누리고 싶은 마음은 갖고 있으되 그런 내용을 가지고 기뻐하거나 영광을 누려보지 못한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대신 무엇을 가졌느뇨? 타락의 한과 더불어 슬픔과 고통의 내용을 지니신 슬픔의 하나님이요, 고통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래요, 안 그래요?

오늘날 우리는 천국이 행복의 동산인 줄 알고 있지만 결코 그렇지 못합니다. 가 보십시오. 아무리 기쁜 내용이 있는가 하고 샅샅이 뒤져 봐도 그렇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세상을 다스릴 권세를 가지고 영광을 누리고 행복을 노래할 수 있는 내용만을 가져야 할 하나님에게 기쁨과 영광과 선의 결실, 이상의 요소는 다 없어지고 슬픔과 고통만이 남아 있습니다. 이것이 원통하다는 거예요. 슬프고 슬픈 일 중에도 이 이상 슬픈 일이 천지간에 없을 것입니다. 이 원통함에 사무쳐 ‘아버님’ 하고 뼈 살이 에인 듯이 몸 둘 곳을 모르고 몸부림치는 사람은 하늘에 가까운 아들딸일 것입니다.

예수는 이 땅 위에 만왕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하늘로부터 지도자의 권한을 인정받고 땅에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태어난 그날부터 그에게는 기쁨의 한 시간이 없었습니다. 땅의 인류를 위하여, 만민을 구하실 구세주로 나타났으나 그의 몸에는 영광이 오지 않았습니다. 영광이 오기 전에 고통의 세계를 가야 했고 슬픔의 길을 걸어야 했던 예수였습니다.

왜 그런가? 4천년 역사를 탕감해야 할 예수였기 때문입니다. 만왕의 왕이 되려면 먼저 슬픔의 왕자로 합격해야 되고 고통의 왕자로 합격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천상의 슬픔을 통하여 거쳐 간 수많은 영인들을 위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30여 년의 생애에서 3년 공생애노정을 거쳐 가신 예수의 행로는 슬픈 행로였습니다. 눈물을 흘리되 4천년 역사노정에서 선조들이 흘린 눈물의 골짜기를 헤매었습니다. 4천년 역사노정에서 피어린 죽음의 고개 고개를 넘으면서 하늘을 향하여 울부짖고 갔던 사람들의 뒤를 고스란히 인계받아 수고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가신 길이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이 사랑의 왕자요, 행복의 왕자요, 영광의 왕자인 줄로 알았으나, 고통의 왕자요 슬픔의 왕자라는 것입니다.

끝날의 심판 내용

끝날 심판의 한때는 올 것입니다. 심판의 한 날이 오거늘, 그날 하늘은 무슨 내용을 갖고 나타날 것인고? 나는 이런 영광과 이런 행복의 요소를 갖고 있는데 너희는 왜 이런 행복과 이런 영광의 요소를 갖추지 못했느냐 하고 묻지 않습니다. 심판의 내용은 6천년 동안 싸워 나오신 슬픈 인류의 역사와 슬픈 하나님의 역사, 고통스러운 인류의 역사와 고통스러운 하나님의 역사를 아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역사노정에 하나님이 역사하신 손자국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하늘 앞에 아들의 영광을 갖추어서고자 하는 자, 딸의 소망을 갖추어 서고자 하는 자에게 너는 이 역사와 더불어 얼마나 슬퍼했으며, 이 역사와 더불어 얼마나 고통을 당하였는가 하고 하늘은 물을 것입니다. 그때 ‘없습니다.’ 하는 사람은 아들의 영광을 갖추지 못할 것입니다.

보십시오. 예수의 손과 발에는 못 자국이 있습니다. 예수의 머리에는 가시관이 씌워져 있고, 예수의 심장에는 창 자국이 남아 있습니다. 예수는 죽었으되 슬픔의 왕자요 고통의 왕자로 합격되어 하나님의 한을 청산하기 위해 죽음의 고개를 넘어가야 된다는 것을 오늘날 기독신자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심정에 있어서 합격자였으니 심정의 지도적인 권한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구주는 무슨 구주예요? 몸뚱이 구주? 아닙니다. 뼈에 사무쳐 그립고 또 그립고, 보고 싶고 또 보고 싶은, 영원히 같이 살고 싶은 심정의 구주인 것입니다. 심정에 사무칠 수 있는 내용을 갖고 그 심정을 붙들고 하나님의 슬픔을 밀어내고 역사적인 하나님의 고통을 이 인간세계에서 밀어낼 수 있는 심적 기준, 일편단심의 심정에서 예수는 구주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런 내용을 갖고 다시 한번 헤아려 봅시다. 끝날은 다가오고 있습니다. 끝날은 기필코 오고야 말 것인데, 이 끝날에 하늘은 무엇을 가지고 심판행사를 벌이겠습니까? 똑똑히 아십시오.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믿고 있는 분이나 믿으려 하는 여러분들은 똑똑히 알아야겠습니다. 그 끝날에 하나님은 기쁨의 내용으로 웃으면서 나타나지 못할 것입니다. 주님도 그럴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오 주여!’ 하며 붙들려 할 때 붙들지 말라 하시는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슬픈 예수의 심정을 통하고, 고통 당한 예수의 심정을 통하여 천륜의 고통과 슬픔의 노정을 통하고 난 후에야 예수를 붙들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단단히 알아야겠습니다.

여러분 자신들이 슬픈 눈물을 흘리고 고통당하는 경지에 들어가 아버지를 부를 수 있게 될 때 아버지의 성상을 한번 바라보십시오. 아버지의 눈은 6천년 동안 눈물이 그치지 않은 눈입니다. 아버지의 귀는 6천년 동안 모든 원수들의 조롱과 비난과 비소를 끊임없이 받은 귀입니다. 아버지의 입은 6천년 동안 하시고 싶은 말씀도 못 했거니와 굶주린 인류와 더불어 굶주림에 허덕이신 입입니다. 아버지의 손길은 피눈물이 어려 있고, 피 땀이 어려 있는 손길임을 우리는 알아야겠습니다. 아버지의 발걸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죽음의 골고다의 험산준령을 몇 백번 몇 천만번 넘은 발걸음입니다. 아버지의 몸은 상처를 입고 억울하게 매 맞은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면 이 아버지는 누구 때문에 그랬겠는가? 불쌍한 인류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을 생각할 때에 우리는 황공망극한 마음을 가져야겠습니다. ‘나 같은 죄인은 천만번 죽어도 아버지의 서러움을 막아낼 수 없으며, 나 같은 죄인은 천만번 죽어도 아버지의 눈물을 씻어드릴 수 없습니다’ 응당 이런 마음에 사무쳐 아버지라고 불러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게 불러본 적이 있습니까? 없다 할진대 회개, 회개해야 합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한 뜻

우리는 심판의 한 날을 두려움의 날이라 믿고 그날을 피하려 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나타나서 ‘온 천하에서 누구보다 나를 더 사랑하라.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고 선포했습니다. 이것이 철칙의 제1조입니다. 성경 내용 중의 내용이요, 복음의 중심 중의 중심입니다. 역사의 슬픔을 내 슬픔으로, 역사의 고통을 내 고통으로 하여 역사와 더불어 살았다 할 수 있는 실체가 되어야만, 역사와 더불어 싸워 나온 예수와 역사와 더불어 섭리해 나오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수 있습니다.

오늘날 믿고 있는 많은 사람들은 심판 날에 주님이 오셔서 만반의 준비를 하여 영광의 세계에서 공중 혼인잔치를 벌이고, 자기를 참석시켜 줄 것이라 믿고 있지만, 가소로운 놀음입니다. 만일에 그렇게 안 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런 사람은 또 하나님을 원망하고 예수님이 오셔도 반대할 것입니다.

아버지 앞에 놓인 우리는 역사적인 죄상 앞에 유린을 당한 혈통을 받은 후손입니다. 그러기에 천만번 유린을 당해도 역사와 더불어 슬퍼하시는 하나님의 수고와 하나님의 슬픔 앞에 황공해 해야 합니다. 그러나 구원섭리 하시는 아버님의 뜻이 있기에, 찾아 주신다는 그 한 인연으로 말미암아 ‘될 수만 있으면, 할 수만 있다면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할 수밖에 없습니다. 천당? 만일에 그런 심정을 버리고도 천당을 간다면 천당은 아무나 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천당은 그렇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심판대에 나서야 할 오늘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무한한 슬픔 가운데 계심을 선포해야 하고, 하나님께서 이러이러한 역사의 경로를 거쳐오신다는 것을 선포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슬픔과 예수의 슬픔은 무엇인가? 참이요 옳은 입장에 계시면서도 거짓이요 가장된 것으로 꾸며져서 유린당하는 것입니다. 이 이상의 슬픔이 없을 것입니다. 예수의 고통은 무엇이었는가? 친아들딸을 찾아가는 길을 막고, 사랑하는 신부를 찾아가는 길을 막고 유린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이상의 고통은 없을 것입니다. 아들딸을 찾아 가는 길, 아들딸을 만나는 길은 갈보리산상을 넘어야 할 길이기에 이 땅에는 예수시대의 골고다가 남아 있는 동시에 끝날 세계적인 골고다의 길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은 하늘의 영광을 대신해 오시는 주의 영광을 바라보는 것을 재림이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자신은 죽어 부활하신 예수를 그냥 만날 생각 마십시오. 죽어 부활하신 예수가 나타나기 전에 여러분 자신들이 살아서 세계적인 골고다의 고개를 넘을 줄 알아야 합니다. 세계적인 골고다를 넘을 줄 알아야 돼요. 세계적인 골고다에 마음과 피 살, 나아가 생사를 걸어 놓고, 죽느냐 사느냐 하는 기로에서 ‘아버지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해야 합니다. 그래서 끝날에는 7년 대환난이 있다고 했습니다. 거기에서 끝까지 견디는 자가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주의 신부로서 환희로운 주의 동산에 참여할 수 있는 자는 6천년 역사 노정에서 고통을 대하여 싸워 이긴 승리의 왕자이며, 슬픔의 심정을 품는 데 있어서도 인류를 대표한 슬픔의 왕자라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런 사람을 신부로 맞이하고자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 은사의 길을 가는 데는 절대적으로 행복의 요소를 부정합니다. 왜 그러는가? 하나님은 기뻐해 보지 못하신 분이십니다. 지으신 피조물에게도 주인 행세를 해보지 못하셨고, 축복을 하여 하나의 가정을 중심삼고 즐겨 보려 하셨던 아담 해와마저 사탄에게 빼앗겨 버렸습니다. 그러니 하늘땅에 탄식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직접적인 주관하에 있어야 할 모든 것이 사탄 주관 하에 들어가고, 아들딸은 물론 만물까지 유린당하는 것을 바라보시던 하나님의 슬픔 이상의 슬픔이 어디 있겠어요? 그래도 슬프다는 말 한마디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 품은 마음 그대로, 역사와 더불어 또 다시 슬픔을 거듭해 오셔야 했던 하늘임을, 여러분! 생각해 보셨습니까?

통일신도들의 갈 길

통일신도 여러분은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2천년 동안 혹은 6천년 동안 예수나 하나님이 귀로 듣던 그런 음성을 들 수 있다면 감사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눈앞에 민족을 바라보고 눈물짓고, 세계 인류를 바라볼 때 ‘이 어찌할 것인고’ 하며 가슴을 치고 눈물 흘릴 수 있는 입장에 있거든 고맙게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이 먹을 것을 못 먹고, 먹으면서도 목이 메이고 말하고 싶은 사정이 많아도 차라리 다물 수 있는 입을 가졌다면 그 입은 복된 입일 것입니다. 여러분, 손이 있어 싸울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으되 사탄과 더불어 혈투전을 못하는 분함을 느끼고 있습니까? 감사하십시오. 뻗어 나오는 사탄 세력 앞에 용맹스런 발자국을 디딜 수 있으되 이것을 가다듬고 한 날을 기다리는 서글픈 심정이 있습니까? 감사해야 합니다.

하늘은 먼 데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은 멀다 할 때 가까이 계시고, 가깝다 할 때 멀리 계십니다. 역사노정에서도 하늘 앞에 가까이 있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멀리 떨어져 있었고, 멀다고 송구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가까이 머물렀던 것입니다.

고통이 가중된다고 한하지 말고, 핍박받는 환경에 부딪친다고 한하지 말고, ‘아버님의 심정에 어린 슬픔을 내게 주시옵소서. 아버님의 심정에 사무쳐 엉클어진 고통을 내게 걸머지워 주시옵소서. 사탄의 참소와 사탄의 유린을 받는 일이 있다 할진대 그 참소를 내 한 몸에 지니고 역사적인 슬픔의 전부를 탕감하고 고통의 전부를 탕감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아버지를 부르며 눈물어린 심정과 눈물어린 손길로 몸부림치는 아들딸이 있다 할진대 그는 아버지가 붙들 것입니다. 틀림없습니다.

우리는 영광을 바라고 있지 않습니다. 영광이 있다 할진대 그것은 아버지의 것입니다. 우리의 것이 있다면 고통과 슬픔뿐입니다. 그 고통과 슬픔을 생명의 요소로 소화시킬 수 있는 마음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오냐, 내 아들아 내 딸아.’ 하고 끌어주어도 바라보기에 민망해 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여러분들이 된다 할진대 심판의 한 날, 슬픈 역사와 고통의 역사 앞에 선언하는 그날에 여러분이 무릎을 꿇고 머리를 못 들망정 하늘의 손길은 여러분 앞에 머물 것입니다.

우리는 슬픔 가운데서 천국을 그리워하고, 고통의 생활 가운데서 천국을 그리워하고, 슬픈 역사 가운데서 슬픈 주님을 맞이하여 위로하고, 고통의 역사 가운데서 고통의 주님을 맞아 위로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렇게 슬픔을 체휼하고 고통을 받는 가운데서도, 가중되는 슬픔이 있다 할지라도 그 자리에 하나님을 모셔 놓고 위로할 수 있는 자가 있다 할진대 아무리 영광을 돌리고 위로한 자라도 그 사람을 당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표준입니다. 통일신도들의 갈 길은 이 길입니다.

몰리고, 천대받고, 외롭고, 한없이 서러운 자리에서도 슬픔의 하나님을 모셔놓고 그 고통을 억제하고 그 슬픈 마음을 억제하면서 아버지를 위로하고 아버지의 고통을 다시 짊어지겠다고 하는 자들이 끝날의 심판대에서 남아질 무리인 것입니다.

여기에 많은 사람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많은 무리가 필요치 않습니다. 슬픔과 고통을 느끼고, 밥을 거르면서도 아버지시여, 저만 이런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 인류가 이런 자리에 있습니다. 저보다 불쌍한 자리에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며 또 다시 인류의 슬픔을 자기가 책임지고자 하는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가 간 길이 그런 길이었습니다.

여러분, 하늘은 참다운 아들딸들을 찾아 나왔습니다. 아버지의 손을 붙들고 ‘그 손길은 지난날의 내 손길과 방불하구나.’, 아버지의 모습을 바라보고 ‘지난날 내 모습과 방불하구나. 아버지의 심정과 안타까움도 지난날 내 심정과 안타까움에 방불하구나.’ 하는 자리에서 ‘아버지’ 하고 부르는 그 한 마디는, 역사의 모든 비운을 제거시킬 수 있고 행복의 결정적인 조건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오늘날 우리 식구들, 크리스천들, 혹은 세계 만천하의 성도들은 알아야만 됩니다.

오늘 여기에 참석한 여러분들은 어떠한 사정과 어떠한 내용의 심정을 가지고 참석하였는지 모르나, 지금 그 마음에 느껴지는 느낌이 있다 할진 대 그 느낌은 거짓이 아닙니다. ‘옳지! 그래야 되겠다.’ 하는 느낌이 있어서, 그것과 더불어 일생을 각오하고, 그것과 더불어 결심하고, 그것과 더불어 싸우고, 그것과 더불어 쓰러지는 자가 있다 할진대 그는 다가오는 심판 날에 품어 주고자 하는 아버지의 참아들딸이 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고린도전서 9:14-27

<기 도>

아버지, 이 날은 수많은 당신의 아들딸들이 양의 무리를 모아 놓고 남기신 섭리의 뜻을 받들어 분부의 말씀을 나누는 시간인 줄 알고 있사옵니다. 그들의 마음 몸 위에 같은 은사로 움직여 주시옵소서. 저희들도 그 중의 한 모습으로 아버지 존전에 모였사오니, 아버지, 서 있는 모습을 긍휼히 보시옵고 앉은 모습을 측은히 보시옵소서.

이제 저희에게 나를 중심삼은 어떠한 주의 주장이나 자신이 느끼고 있는 의식적인 관념이 있다 할진대 이 모두를 제거시켜 주시옵소서. 다시 창조함을 받아야 할 운명에 처해 있는 저희들이옵고, 복귀의 한을 벗지 못한 저희들이옵기에 당당하게 하늘 앞에 주장할 수 있는 그 무엇을 가졌다 할지라도 그것이 아버지 앞에 아무런 이념적 조건도 대상도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저희가 아무리 하늘 앞에 자기를 변명하며 자기의 어려움을 내세운다 할지라도 아버지의 무한하신 선과 수고 앞에는 비교할 수 없는 처량하고 불쌍한 모습들인 것을 알고 있사옵나이다.

이제 나는 스스로 내가 된 것이 아니옵고 내가 나 아님을 알았사올진대, 내가 나 될 수 있게 한 본연의 그 자체를 그리워하며 본연의 마음속에 내가 스며들고, 본연의 그 주인공 앞에 머리 숙일 수 있는 이 한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만우주의 절대적인 주인공이 있다는 것을 마음은 알고 있사옵니다. 또 그것이 저희의 행동 일체를 제재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될 때, 이것은 무목적적 인연 가운데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목적에 의해 제한된 환경의 노정을 거쳐 나가야 할 운명에 처한 자체들인 것을 마음으로 느낄 줄 아는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아버님의 영광스러운 보좌를 마음으로 그리며 아버지의 무릎 앞에 모였사온데, 이들의 마음이 어디로 흘러가며, 이들의 마음이 어디를 향하여 움직이는지 모르고 있사오니, 아버지, 원컨대 본연의 나 자신이 하늘과 더불어 즐길 수 있는 방향으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저희의 부끄러운 얼굴과 부끄러운 시선일지라도 아버지의 심정이 그리워 아버지를 바라볼 수 있으며, 그도 민망하여 ‘아버지!’ 하고 부족한 손길이라도 내밀면 그 손길을 아버지께서 붙들어 주시겠다는 약속의 한 시간이 되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저희들은 경배를 하더라도 아버지의 심정을 붙들고 경배하고 싶사옵고, 아버님과 인연을 맺고 싶사오며, 그 이외 일체의 것은 원치 아니하옵니다. 하늘나라의 금은보화와 같은 찬란하고 영광스런 조건이 구비되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을 원치 아니하옵고, 오로지 아버지의 심정을 붙들고 아버님과 동거할 수 있는 그 하나의 약속, 그 하나의 생활적인 사실만을 원하옵니다.

그러한 것들이 영원히 영원히 자랑할 수 있는 영광의 표적이 되기를 바라면서 저희들 아버지 앞에 엎드렸사오니, 이날 저희들에게 부족한 무엇이 있다 할지라도 아버지,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세우고자 하시는 심정을 세우시어서 아버님과 저희와 끊을 수 없는 부자의 인연을 맺어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많은 사람이 아버지를 부르고는 있사오나, 아버지의 사정과 아버지의 심정을 모르고 있사옵니다. 저희는 그런 아들딸들이 되기를 원치 아니하옵니다. 아들 가운데는 아들 같은 이도 있고 양자도 있고 참아들도 있다 하였사오매, 저희들은 아들 같은 이도 원치 아니하옵고 양자도 원치 아니하옵니다. 아버지 심중에서 영원히 영원히 사라질 수 없고, 그 뼈 살이 아버지와 영원히 인연 맺어진 사실을 거부할 수 없고, 아버지와 영원히 영원히 동거할 수 있는, 직계 혈통인 친아들딸, 피 살을 이어받은 친아들딸이 되기를 원하옵니다.

그러한 아들딸이 되기 위해서는 아버지가 당한 고통이 저희들의 고통이요, 아버지의 슬픔이 저희들의 슬픔이요, 아버님의 억울함이 저희들의 억울함이요, 아버님이 쌓아 올려야 할 책임을 저희들이 감당해야 할 책임으로 느껴야 될 줄 아오니, 그러한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 이제 섰사온대 무슨 말을 전하오리까? 아버님의 아들딸이 되고자 하지만, 이 시간 아버지께서 당신의 심정을 체휼케 하시고 저희와 인연 맺고자 하시는 사실을 저희들이 느끼지 못한다 할진대 아무리 말씀이 놀랍다 할지라도 아버지와 저희와는 인연이 맺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옵니다. 하오니 아버지의 심정을 연할 수 있고, 아버지의 마음을 통할 수 있으며, 아버지의 몸을 붙들 수 있는 체휼적인 한 시간이 되게 이 시간을 맡아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제 전하는 자의 마음이 아버지의 마음에 어리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듣는 자의 마음이 아버지의 심정에 반응되어, 주고받는 영광의 한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 자체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다시 빚어 만들어질 수 있고, 본성의 자체를 찾아 아버지의 취하심에 따라 움직일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아버지의 본연의 성상을 그리워할 수 있는 자율적인 역사가 이 시간 벌어지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나의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날 외로운 식구들이 지방에 널리어 모진 핍박의 화살을 받아 가면서도 하늘을 향하여 호소하고 있사오니, 그들을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이런 길로 몰아내심도 아버지의 뜻이 있어서이며, 이 길은 아니 가려야 아니 갈 수 없는 최후의 운명의 길인 것을 아옵니다. 저희들이 각오한 결심과 저희들이 움직이는 모든 행동이 승리의 조건이 되고 아버지 앞에 제물로 바쳐질 수 있는 모습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고, 아버지의 약속권 내에서 살 수 있는 아들딸들로 빚어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옵니다. 이 시간 사탄이 틈타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말 씀> 고린도전서 9장 24절에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 얻은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중심삼고 ‘하나님의 경주장에 선 인간들’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잠깐 동안 여러분 앞에 말씀 드리겠습니다.

인간은 복귀섭리의 경주장에 나선 경주자

수많은 역대 선지자들도 그랬거니와 현재 살고 있는 인간들도 그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어떠한 목표를 향하여 인생행로를 달리고 있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어떠한 목표, 막연하나마 어떠한 목표를 앞에 놓고 그 생활하는 형태도 여러 모양으로 전개되어 나왔고, 또 민족이나 역사의 형태도 여러 모양으로 전개되어 나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이 인연도 없이 결과로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어떠한 인연 밑에서 현실에 부합되어 어떤 목적을 향하여 움직여 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 될 것입니다. 만일 그런 인연과 그런 목적을 중심삼고 움직이지 않는다면 하나님이니 무엇이니 하는 그 존재도 세울 수 가 없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계시다 할진대 하나님은 타락한 인류를 대하여 인연을 맺고자 하실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목적을 향하여 가는 우리는 그 인연권 내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선의 인연을 맺지 못하고 사탄과 악의 인연을 맺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악의 인연을 가지고 있는 우리 인간을 버리시려는 것이 아니라 찾으려 하십니다. 다시 찾기 위해서 하나님과 우리가 인류 역사노정을 붙들고 뒤넘이쳐 내려오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역사의 방향은 그러한 목적을 이루는 한때를 향하여 움직여 나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여러분들은 생활을 통하여 자기의 양심기준을 중심삼고 그 목적지를 향하여 달리고 있는 한 경주자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 땅 위에 왔다 갔던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복귀섭리의 경주장에 섰던 인간이었음을 우리들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타락된 인류를 놓고 여러 모양으로 섭리해 나오고 계십니다. 민족이 다르면 민족이 다른 대로, 주의 사상이 다르면 주의 사상이 다른 대로, 전통이 다르면 다른 대로 하늘은 역사의 배후에서 여러 가지로 조정해 나오고 계십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정하신 하나의 목적이 이루어지는 때, 어떠한 경기를 한다면 그 경기의 막이 내려지는 그 순간까지, 우리 인간과 더불어 악을 멸하기 위해 싸워 나가고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누구를 막론하고 이런 경주자의 입장에 선 자체인 것을 자인할 진대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 하는 문제에 봉착하게 될 것입니다. 하늘이 수고하시어 세워진 내 자신인 것을 알고, 이런 경주 마당에 서서 달려야 한다는 것을 안다 할진대 하늘은 우리 인간을 대하여 어떠한 훈련을 시켜 이 경주장에서 달리게 할 것이며, 나는 어떠한 시련과 어떠한 노정을 거쳐서 그 목적지까지 달려갈 것인가? 이것이 너나없이 공통적으로 해결해야 할 중요한 문제일 것입니다.

과거에 왔다 갔던 선지선열 가운데는 그 경기 프로그램의 한 부분을 맡아서 어떤 표준을 세우고 간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러한 선지선열들은 최후의 막이 내려지는 그 순간까지의 경기 전체, 즉 하늘의 전체 섭리를 다 거쳐간 것이 아니라 어떤 한 부분 부분을 맡아서 종결지었고, 또 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복귀의 경주장을 만들어 놓았으니, 여기에 들어선 우리들은 자기의 생명을 걸고 생애노정을 거쳐 달리고 있는 내 자신, 달려야 할 내 자신, 달리지 않으면 안 될 내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이 땅을 바라보면 주의 사상도 많거니와, 종교 세계를 바라보면 종파도 많고 교파도 많습니다. 민족이 다름에 따라 그 민족에 의한 주의, 혹은 그 민족을 위하여 나온 종교 등 여러 모양으로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런 주의나 그런 종교는 하나님의 섭리 프로그램 권내의 전체 내용을 갖춘 주의가 되어야 했고 종교가 되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못 되었던 것입니다. 어느 한 민족에 해당하는 주의, 어느 한 민족에 해당하는 종교, 또는 어느 한 시대에 해당하는 주의, 어느 한 시대에 해당하는 종교 형태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경주장에서 어느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 어떤 한 부분의 사명을 담당한 주의와 종교들이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경주의 형태와 상급 주는 날

우리가 경주장에 가 보면 100미터 경기도 있고 200미터, 혹은 5,000미터, 10,000미터 경기도 있고, 최후에는 마라톤 경기까지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복귀섭리를 하시는 하나님의 경기장에 나선 몸인데, 어떠한 경기를 책임지고 행하여 이 우주사 앞에 설 수 있겠는가, 이것이 문제입니다. 각자의 가치, 혹은 각자의 인격이 차이가 있을지라도 어떤 분야를 정하여 그 경기 종목에 있어서 책임을 다함으로써 하늘이 원하는 기준을 세워 주기를 하늘은 고대하고 계심이 틀림없습니다. 여러분들은 그러한 경기장에 나선 몸이니 생명을 다해 달려 나가야 합니다. 생애노정을 가는 동안 나는 어떠한 경기에서 무엇이 되어 하늘 앞에 서야 할 것인가를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이 6천년 동안 섭리를 해 나왔지만 전체적으로 바라볼 때 아직까지 하나님의 모든 경기 종목들이 다 끝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달리고 내일도 달려야 됩니다. 이 경기가 끝나면 하나님께서 온 세계 인류, 더 나아가서 과거에 왔다 갔던 수많은 인간들과 앞으로 경기가 끝날 때까지의 수많은 인간들에게 이 경기의 분야 분야에 따라 상급을 주실 것입니다. 상급 주는 한 날이 무슨 날이냐? 기독교의 명사를 빌린다면 심판날입니다. 심판날은 상급 주는 날이라는 겁니다. 오늘날 시대적인 명사를 빌린다면 끝날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여러분 자신에 돌아와서 여러분은 하나의 경기 종목에서 상을 받을 수 있는 승리적인 기준을 세웠느냐가 문제일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 자신들이 반성해야 될 문제입니다. 달리는 데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경기장에 들어가 정상적인 코스를 달려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경기장을 내놓고 자기 멋대로 달리는 사람도 많을 것이요, 또 경기장에 들어와서 정상적인 코스를 달리기는 하되 갖춘 역량이 부족하여 중간에 쓰러지는 사람도 있을 것이요, 끝까지 달리기는 하였으되, 상급을 받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상급 받는 사람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우리들은 이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6천년 동안 섭리해 나오셨으나 아직까지 경기자들에게 친히 상급을 주지 못한 입장에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세계 인류 앞에 나타나셔서 지금까지 달려나온 수많은 경기자들에게 그 경기 종목에 따라 상급을 줄 수 있는 그 한 날을 영계의 영인들도 바라고 있고 지상의 우리들도 바라고 있습니다. 이 날이 끝날입니다. 이런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경주자가 갖춰야 할 자세

이렇게 달려가야 할 우리 자신입니다. 그러면 어차피 가야 할 바에는 어떻게 가야 될 것이냐? 경기장에 나서는 자로서의 준비가 필요한 것입니다, 준비. 준비는 무슨 준비? 내적 준비와 외적 준비가 필요한 것입니다. 내적으로는 내가 어떤 목표를 향하여 달려간다는 신념이 있어야 될 것입니다. 이러이러한 명령하에 이러이러한 코스를 달려야 할 나인데, 그 코스에 장애물이 있으면 그 장애물에 대처해 나갈 수 있는 신념이 있어야 되겠고, 또 그 신념을 중심삼고 실제로 올바른 목표를 향하여 달릴 수 있는 내적인 준비가 필요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심신을 연단함으로써 하나의 목표를 향하여 달리는 데 있어서 최후의 목적지까지 가기 전에는 쓰러지지 않을 것이며, 누구한테도 지지 않겠다는 신념, 최후의 승리자로 서기 위한 신념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또 최후의 목적지까지 달려가는 데 있어서 내 몸이 어떤 장애물에 부딪치더라도 이것을 밀고 달려 나갈 수 있다는 신념이 서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땅 위에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으되, 과연 경주장의 경주자의 입장에 서 가지고 어떤 목적지를 향하여 달릴 태세를 갖춘 자가 얼마나 됩니까? 말뿐이 아니라 실제로 그런 역사의 움직임에 휘감겨 나가고 있는 자신임을 부정하지 못할진대 여러분 자신은 그러한 욕망 밑에서 목적지를 향하여 달릴 수 있는 경주자의 태세를 갖춘 자체가 되어 있습니까? 지금까지 여러분은 그렇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인간은 어느 분야에든가 소속되어 살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가 머물 수 있는 위치와 처지를 갖지 못한 사람은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 어떤 목적을 향해 어떤 코스를 달려 나간다는 관(觀)이 서 있지 않은 사람은 불쌍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거의가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여기에 필요한 것은, 나는 이러한 목표 밑에서 이런 각오로 마음과 몸을 연단하여 달음질쳐야겠다는, 수많은 원수들과 싸워 이겨야 되겠다는 스스로의 내적인 준비와 외적인 준비를 하는 한때가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모인 사람들 가운데 그런 준비의 한때를 갖지 못한 자가 있을진대 자기 자신을 살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 내적인 준비를 해야 할 것인가? 그것은 자기 개인을 위한 준비를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렇잖아요? 국가를 대표하는 어떤 마라톤 선수가 있다고 합시다. 그가 달리게 될 때, 최후의 우승을 하여 그 영광을 자기가 지니기 위해 달리는 것보다도 내 배후에는 나를 낳아준 민족이 있고 세계 앞에 국가의 위신을 세워야 되겠다는 신념으로 달린 다면, 그는 어떤 어려움이라도 이기고 나갈 수 있는 여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개체의 영광과 자기 개체의 목표만을 위해서 달린다면, 괴로움에 부딪치게 되면 거기에서 쉽게 포기하고 말 것입니다.

우리가 신념을 갖는 데 있어서 그것이 자기를 위주한 신념이어서는 안됩니다. 민족을 위주한 신념, 세계를 위주한 신념, 더 나아가서 하늘과 땅을 위주한 신념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이 천지간에 있는 피조만물 전체의 승패가 나에게 달려 있다는 신념을 갖고 달린다면,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다시 일어나서 달릴 수 있는 여유가 생길 것입니다. 자기를 중심삼고 나가다가는 지금까지 지탱해 온 어려움 이상의 어려움에 부딪치게 될 때는 쓰러지고 말 것입니다. 자기를 중심삼고 바랐던 소망 이상의 어려움이 휩쓸려 들어올 때에는 꺾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심신을 단련시키는 일과 하늘과 땅을 대하여 어떤 사명적인 하나의 목표 밑에서 내가 달리고 있다는 신념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막연하나마 하나님을 위해, 선을 위해 살고 있습니다. 선은 제한된 환경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선은 한정된 것이 아니에요. 제한되고 한정된 한계선을 넘어서 존재하는 것이 선입니다. 그러기에 인간들은 막연하나마 그런 표준 밑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경주장에서 승리자가 되려면

그러나 오늘 우리들은 막연해서는 안 됩니다. 나는 어떤 경기 종목에서 기필코 어느 등수에 들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신념을 가져야겠습니다. 이런 신념을 가지고 출발선에 나서서 달릴 수 있는 여러분이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과거에 왔다 갔던 성현들은 우리 인간 앞에 어떤 사업 분야를 가르쳐 준 것이 아닙니다. 무슨 사업으로 성공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 준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의 갈 길, 마음의 갈길, 정신의 갈 길, 우리의 생명이 움직여 나갈 길을 지시하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우리의 사상이 움직일 수 있는 길, 우리의 생명이 움직일 수 있는 길, 이 길은 내 개체의 길만이 아닙니다. 천추만대를 걸어 놓고, 혹은 역사를 걸어 놓고, 어느 시대든지 공식적이요 공통적인 길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길에서 싸워 승리할 수 있는 하늘의 백성을 그리워해야 되겠습니다.

그것이 자기를 중심삼은 것이 아니라 할진대 그 목적이 이뤄지는 날 나로 말미암아 하늘땅이 같이 즐거워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민족을 대표하여 나선 경주자가 우승할 때는 민족 전부가 우승한 것이 됩니다. 그 경기 종목은 적더라도 그 가치의 영광은 전체에 미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여러분들에게는 이런 내적인 신념을 가질 수 있는, 가치적인 표준 밑에서 그 가치적인 목표를 이루기 위하여 자기 자체의 가치적인 신념을 단련할 수 있는 한 날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까지 여러분들은 그런 것을 느끼지도 생각지도 않았습니다.

우리는 어차피 달리고 있으니, 패자가 되든지 승자가 되든지 할 것입니다. 승자가 되기 위해서는 비결이 있어야 합니다. 내적으로는 이기겠다는 신념과 목표를 향한 불변의 심정을 가져야 하고, 외적 준비로는 달리기에 간편하게 하는 것입니다. 경기장에 나가는 사람은 될 수 있으면 간단하고 단순해야 합니다. 내 마음의 방향으로 내 몸이 어느 때든지 움직여 줄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 연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경주장은 내 목표를 향하여 자유롭게 달릴 수 있게끔 되어 있지 않습니다. 달리는 이 경주 마당에는 수많은 장애물이 놓여 있습니다. 그 장애의 고비 고비는 우리의 선조들이 패배하여 쓰러진 장면 장면인 것입니다. 아무리 자기 자신을 자랑하고 자기의 결심을 자랑하고 나서는 어떤 위인이라도 그 장애물에 걸려 쓰러졌습니다. 우리의 앞길에는 우리의 선조들 이 장애물에 걸려 쓰러진 고비 고비가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간단하게, 될 수 있으면 심정이 움직일 때 그 몸이 따라 움직일 수 있도록 간단하게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할 수 있도록 몸을 스스로 연단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연단하려면 편안한 자리에서 안 됩니다. 연단이라는 것은 들이침을 받는 자리에서 되어집니다. 이러한 내적 준비의 수련을 거듭하기 위해서는 내적으로 들이칠지라도 이것을 쳐부수고 나갈 수 있는 내 몸이 필요한 것입니다. 내적 결심도 변할 수 없거니와 이 몸에 뒤넘이치는 시련이 부딪쳐 온 다 할지라도 거기에 져서는 안 됩니다.

그렇기에 도의 길을 가는 사람을 대하여 하늘은 ‘다 버리고 나를 따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그물을 깁고 있는 베드로를 부를 때, ‘다 버리고 나를 따르’라고 했습니다. 도의 길을 찾기 위하여 산중 수도하는 것도 다 일리가 있습니다. 다 일리가 있어요. 그러므로 우리는 내적 각오 밑에 거기에 대비되는 외적인 각오, 청산조건을 구비해 놓고 어떤 것에 부딪쳐도 나간다는 자신, 맨 밑창에 떨어져도 심신을 지탱할 수 있는 자신을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달릴 수도 없고 경주 마당에 나설 수도 없습니다. 우리들은 이런 경주 마당에서 하나의 종목을 택해 달려야 할 하나의 경주자이니, 목표를 이루기 위하여 변치 않는 신념을 갖고 연단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신앙자의 태도, 달리는 자의 태도, 도의 길을 가는 자의 태도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자나 깨나 그 목표를 정복하기 위한 결의에 불타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에 나온 사람들 가운데는 막연하게 예수를 믿으면 천당 간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천당이 어떻게 되어 있어요? 어떠한 종목을 통과한 그룹 그룹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막연하게 나는 예수를 믿고 천당 간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하늘이 협조해 주는 분야도 있지만, 여러분 자신들이 갖추어야 할 분야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경주자로서 준비할 바는 내적 준비와 외적 준비를 갖추어야 되겠습니다. 그 다음에 경주자로서 알아야 할 것은 달려야 할 코스에 대하여 분명히 아는 것입니다. 어딜 가면 어떤 무엇이 있고, 또 어디에는 무엇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됩니다. 또 그 다음에 알아야 할 것은 옛날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 코스를 달렸으나 실패했던 코스라는 것입니다. 달렸다고 다 우승한 것이 아니라 달리다가 그만둔 코스라는 것도 알아야 되겠습니다.

달음질하는 자가 알아야 할 것

도의 길이 그렇습니다. 역사가 생겨난 이후 도의 길을 간 어떠한 사람이라도, 그 도의 명예를 걸고 하나님 앞에 나선 사람이라 해도 하나님께서는 ‘네가 최후의 승리자’라고 하며 상급을 주지 못했다는 거예요. 지금도 달리고 있는 과정에 있습니다. 우리가 달리는 목표는 하나님이 주관하는 전체 경주의 목표인 우주성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종목이 작다 하더라도 우주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 그때까지 지속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100미터 경기 종목에서 한때에 우승한 자가 있다면 그것으로써 그를 우승자라 할 수 없다는 겁니다. 우승한 그 가치와 영광을 끝날 까지 지탱해 나가야 된다는 겁니다.

달리는 마당에 서 있는 우리들은, 이 달리는 코스의 고비 고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쓰러진 사정도 알아야 됩니다. 어떤 때는 어떻게 쓰러졌으며 어떻게 싸우다가 어떻게 꺾어져 나갔다는 것을 알아야만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 인간들은 막연하게 목적지를 향하여 달렸었는데, 오늘날 이 시대의 우리들은 막연한 목표 밑에서 달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달릴 바에는 그 코스에 대한 모든 내용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섭리의 코스를 달리기 위해서는 복귀의 코스를 거쳐 가야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보세요. 하늘을 찾아가는 노정에서 경주자로 나선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 출발은 어디서부터 할 것인가? 아담가정에서부터 출발해야 됩니다. 인간이 출발한 기점은 어디서부터냐? 아담가정에서부터입니다. 거기서부터 달려 나왔습니다. 거기서부터 하나님과 인류가 동반하여 6천년 동안 달려 오늘 이 시간까지 왔습니다. 그러나 아직 그 경기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달리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떻게 해야 되느냐? 선조로부터 달려 나오던 모든 전통적인 정신을 가져야 됩니다. 어디에 소속되어 있는가를 알아야 됩니다. 그럴 게 아녜요? 무슨 경기를 하고 어디에 소속되어 어떤 놀음을 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나는 무슨 경기 종목에 참여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또 과거 어느 누구 누구가 기록을 냈다는 것도 알아야 되고, 어느 누구 누구가 어떻게 실패했다는 것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악조건 혹은 선의 조건을 알아 가지고 그 악조건에 걸릴 수 있는 모든 것에 대비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행로에는 수많은 원수들이 장애물을 놓고 가로막고 있습니다. 보이는 장애물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장애물을 놓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역사상의 수많은 선지자들이 쓰러진 고개입니다. 이렇게 수많은 고비 고비와 고개 고개가 있으니 여기에 대한 상식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날 우리들은 역사를 알아야 됩니다. 과거를 알고 현재를 알고 미래를 알아야 됩니다. 이것이 경주자가 알아야 할 상식입니다. 이런 코스로 나가다가 주최자측이 어떠한 목표 밑에서 계획했던 그 코스를 달리 할지라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과거의 선지자들이 달려 나온 역사적인 코스를 알고 또 그 코스에서 싸워 나온 경로, 그리고 싸우고 있는 현실의 사정과 앞으로 싸워야 할 계획을 다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다 알아야 최후의 승리자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신앙자의 생활을 가만히 더듬어 보면,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해 나왔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이 순간 어떠한 프그램으로, 어떠한 계획하에서 어떻게 움직이고 계시는지 모르고 있다는 거예요. 그런 입장에 선 사람들을 경주자라고 할 수 있겠어요? 여러분들은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6천년 동안 역사해 나오면서 이 경기 종목을 운영하는 방향이 있습니다. 골수가 있다는 거예요. 우리는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우리 인류의 시조로부터 인류의 종말시대까지 일관된 목표 밑에서 일관된 프로그램으로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대신할 수 있는 종교

이런 견지에서 내가 어떠한 인생행로를 달리는 경주자가 되었다는 것을 느끼고 승리자가 되기를 바란다면, 역사성을 띤 종교를 찾아야 될 것입니다. 또 시대성을 띤 종교를 찾아야 되고 미래성을 띤 종교를 찾아야 될 것입니다. 그런 종교라야 인간이 최후까지 믿어도 낙심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수많은 종교인들이 있었지만 그 수명은 몇 세기밖에 안 되었습니다. 그런 견지에서 헤아려 보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모르는 가운데 섭리해 나오셨습니다. 인간이 타락한 그날부터 시작하여 우리들이 가고 난 후 미래까지 섭리하실 것이어늘, 그런 섭리를 경영해 나오시는 하나님의 프로그램을 대신할 수 있는 종교가 있다면 그 종교는 어떤 종교이어야 할 것인가? 역사적인 면에서 공헌하는 종교요, 인류역사 시초의 인연을 갖고 나온 종교라야 됩니다. 그리고 선악의 기원을 논단하는 종교여야 할 것이며, 인생행로의 모든 역사상을 포용하고 미래의 최후 목적지에서 승패를 결정지을 수 있는 종교라야 된다는 거예요. 그런 점에서 바라보게 될 때 오늘날 기독교가 문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상을 받는다 할진대 오늘 이 시대에 잘했다고 하여 상을 받을 수 없습니다. 저 나라에는 수많은 경주자들이 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노정에서 경주 마당을 달려갔던 수많은 사람들이 가 있는데, 경주 마당에서 죽어간 사람, 혹은 어떠어떠한 천태만상의 사정을 갖고 간 사람들입니다. 그 많은 사람들을 전부 다 모아 놓고 그들을 대표하여 상을 받아야 할 존재라면, 그는 옛날의 선조들이 가지 못한 것을 다 갔다는 승리의 조건을 갖추어야 되고, 또 오늘날의 인간들 앞에서도 승리적인 조건을 갖추어야 됩니다. 또 미래의 인간들도 ‘옳소이다’ 할 수 있는 기준을 갖춘 자라야만이 하나님께서 표창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럴 게 아니에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우리는 인생의 행로를 달리고 있습니다. 최후의 한 날의 목적지를 향하여 달려 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뇨? 역사적인 하나님입니다. 더 나아가서 시대적인 하나님이요, 미래적인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이 세우신 목표도 역사적인 목표요 시대적인 목표요 미래적인 목표입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이 이러하고 우리 인간들이 바라는 소망의 기준도 그렇다 할진대 하나님도 역사적인 하나님, 시대적인 하나님, 미래적인 하나님으로 알고 믿어야 한다는 거예요. 그래야 하나님이 상을 주실 때 슬퍼하며 주실 것이 아니라 기쁜 가운데 주실 것입니다. 그 상을 주는 분의 심정을 알 수 있는 최후의 순간이 와야 합니다.

수많은 종교는 몇 천년 혹은 몇 백년 동안 나오다가 이 시대적인 사조 앞에 밀려 나가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기독교도 지금까지 수천년간 나왔지만 미래의 한때를 걸고 다시 넘어가야 할 운명에 놓여 있습니다. 여기에 만일 골수에서 우러나온 하나님의 어떠한 경기 코스가 있다 할진대 그 코스는 역사적인 코스요, 시대적인 코스요, 미래적인 코스이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때에 어떠한 새로운 진리가 있다 할진대 그 진리는 이 시대적인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청년들은 똑똑히 알아야 됩니다. 시대성만 띠어 가지고는 절대 안 됩니다. 무슨 주의 무슨 사상이 있다 하더라도 한 시대 한 때에 맞는 것이라면 그 주의와 사상은 지나가고 말아요. 연면한 역사의 배경을 가지고 이 시대의 사조를 통해 넘어갈 수 있는 이념, 새로운 주의가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동락(同樂)하며 승리할 수 있는 경주자

왜냐하면 하나님과 더불어 즐거워하고 하나님과 더불어 승리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역사적인 하나님이요 시대적인 하나님이요 미래적인 하나님이시니, 우리들도 역시 역사적이요 시대적이요 미래적인 조건을 갖춘 경주자로서 거기에 대한 지식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 할진대 여러분은 미래의 어떠한 사조에 휩쓸려 나갈 것입니다.

거기에 대한 상식을 갖추고 더 나아가서 역사적인 하나님의 심정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식구라는 것은 사정에 엉클어져 있습니다. 사정은 상대적 관계입니다. 역사적인 아버지의 심정, 시대적인 아버지의 심정, 미래적인 아버지의 심정이 이러니 그 심정을 중심삼고 경영하는 아버지의 경기 프로그램에 대한 그 모든 지식을 갖추어 심정의 분야까지 맞추어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승하되 최후에 만족할 수 있는, 하나님을 상봉하여 영원히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자가 되기를 하늘은 바라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종교라는 것은 진리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도라는 것은 진리만이 아니에요. 주의와 사상은 진리를 중심삼고 나가지만 종교는 진리 외에 심정이 내포되는 거예요. 이것이 달라요. 주의와 사상에는 심정이 없습니다. 그러나 종교는 자식과 부모가 말없이 사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무엇이 얽혀져 있습니다. 논리적인 조건을 넘어 움직이는 어떤 내용이 갖추어져 있다는 거예요. 종교라는 것은 그렇습니다. 그러나 주의는 그렇지 않습니다. 주의는 조직적인 결합입니다. 심정적인 결합이 아니고 조직적인 결합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들이 목표를 향하여 달리는 경주자의 태도로서 갖추어야 할 것은 역사적인 그 코스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되고, 시대적인 실정을 잘 파악해야 됩니다. 그 다음에는 미래적인 내용, 그 계획을 어느 정도까지는 알아야만 달려갈 수 있다는 거예요. 이것이 우리 경주자가 가져야 할 상식입니다. 이렇게 하늘을 향하여 내 생명을 걸고 나가는 데 있어서 하늘의 역사적인 심정, 시대적인 심정, 미래적인 심정까지 갖춘 자가 있다 할진대, 하나님이 지금까지 이 코스를 세워 나오고 닦아 나오기에 얼마나 수고하셨다는 것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는 어떠한 어려움에 부딪쳐도 무난히 뚫고 나가리라고 봅니다.

다음에는 그 목표를 향해 달려 나가는 데 있어서 싸움의 심정을 잃어버리지 않아야 합니다. 모든 준비를 갖추고 지식이 있는 어떠한 원수를 대하여 싸우더라도 이기고야 말겠다는 심정을 가져야 합니다. 싸움에 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실천 분야는 싸움입니다. 이 땅 위의 어떠한 무엇과도 싸워서 승리하고 맨 나중에는 상을 주는 하나님이 나를 들이치더라도 나는 굴하지 않겠다고 할 수 있는 용자가 되어야 합니다. 나는 그렇게 보고 있어요.

시험이 많은 도(道)의 길

도의 길을 가는 데에는 반드시 시험이 많습니다. 이 경주 마당을 달리는 데는 내 자신이 힘드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생각지 않은 무수한 시험이 있습니다.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수많은 악령들이 우리를 시험하는 과정이 있고, 그 코스가 지나가면 천사들이 시험합니다. 또 그 코스가 지나가면 어떠한 도인과 도주(道主)들이 시험합니다. 만일 예수를 믿고 나간다면 예수가 시험합니다. 처음엔 끌어주다가 맨 나중에는 시험하는 겁니다. 하나님도 나를 이끌어 주다가는 최후에 상을 줄 때 가서는 시험합니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왜 그런가 하면 인간이 하나님을 배반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상을 주기 위해 자연환경을 지어 놓았지만 인간이 하나님을 배반했기 때문에 그것을 다시 회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시련 과정을 통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시험 없이 주려고 했으나 시험받을 조건에 놓여 있으니 반드시 시험을 거쳐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상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6:46)라고 기도하신 것처럼 하늘은 버리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싸움의 용자로서 내가 달리는 것도 달리는 것이려니와, 거기에는 마음의 싸움과 몸의 싸움이 벌어지게 됩니다. 결심 가지고는 안 됩니다. 달리는 데에 마음의 싸움과 몸의 싸움이 엉클어져 나타나게 된다는 거예요. 6천년 코스를 거쳐온 그 고비 고비에서의 하나님과 사탄이 싸워 오던 내적 고충이 달리는 자의 심중에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탄이 싸우던 것이 내 한 자체에 부딪쳐 옵니다. 그래서 그런 내적 고충과 외적 고충이 오늘의 나에게 나타나게 된다는 겁니다.

나 자신은 그저 달리는 것이 아니고 내적인 싸움과 외적인 싸움을 해야 하는 동시에 하늘의 시험을 이겨야 합니다. 인생행로에서 승리하려면 그 싸움에서 승리해야 됩니다. 반드시 그렇다는 거예요.

왜 그러냐? 역사가 6천년을 경과했지만 이 코스에서 아직까지 골인한 사람이 없습니다. ‘나는 간다.’ 했지만 결승점까지 간 사람이 없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이유

여러분, 예수님은 지금 천당에 가 있는 줄로 믿고 있지만 낙원에 가 있어요. 예수님이 낙원에 가 있겠다고 했습니다. 낙원은 천국 들어가는 대합실입니다.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것은 낙원 문을 헤치고 천국 문을 개방시키기 위함입니다. 이 땅 위에서 할 일을 다 못 했으니 다시 달려서 최후 결승점에 골인해야 한다는 거예요.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들이 달리고 있는 경기의 종목은 신앙이란 명사를 건 최후의 코스입니다. 경기로 말하면 아마 마라톤 경기와 같을 거예요. 경기 중에 제일 빛나는 종목이요 경기의 왕좌를 차지할 수 있는 종목이 종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경기의 종목에 들어선 우리들은 어떻게 달려야 되느냐? 내 결심만 가지고 달려서는 안 돼요. 여기에는 여러 가지 싸움이 가중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마음의 싸움과 몸의 싸움, 원수와의 싸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몸을 걸어 놓고는 세상이 당기고 있습니다. 그렇잖아요? 참다운 신앙생활을 하는데 몸을 걸어 놓고는 세상이 당기고 있고 마음을 걸어 놓고는 주의 사상이 당기고 있습니다.

그 목표가 어디입니까? 막연합니다. 가는 그 길에는 무수한 원수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화살을 쏘고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고 믿고 있던 예수도, 하나님까지도 최후에 가서는 ‘넌 누구냐?’ 하고 모른다고 하신다는 겁니다. 반드시 그런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싸움의 용자로서 어떠한 결심을 해야 되느냐? 내가 달리는 이 길의 목표가 틀림없다는 결단을 딱 내렸을 때는 죽음을 각오하고라도 가겠다는 결심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코스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망하는 데에도 최고로 망하겠다는 결심, 죽는 데에도 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하게 죽고, 고생하는 데에도 제일 고생하겠다는 결심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고생하신 것보다 하나 더 고생하겠다는 각오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달리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바라봅시다. 더욱이나 우리 통일교회 신도들은 이러이러한 목표가 있다고 해서 나왔고 지금 달리고 있습니다. 달리는 생활은 싸움이요, 싸움에는 몸을 끌고 당깁니다.

하나님이 자랑할 수 있는 아들딸이 되려면

지금까지 믿고 나오던 신앙 관념이 끌고 있습니다. 여기에 또 원수들이 들이칩니다. 그것이 끝나면 최후에는 하나님이 들이칩니다. ‘네가 내 아들 딸이야? 자신 있어?’ 하고 반문할 거예요. 그럴 거 아녜요? ‘너 무엇에 우승했어?’, ‘예, 이러 이러한 것에 우승했습니다.’, ‘정말이야?’ 이렇게 되면 실적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세상의 스승들도 자기 제자에게 자기의 어떤 무엇을 맡기기 위해서는 여러모로 시험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은 최후에 남아질 인생의 코스를 달리는 경주자로서 싸움의 용자임을 알아야 하고, 하늘의 정병임을 알아야 하고, 또 그 정병으로서의 각오를 해야겠습니다. 몸을 쳐도 ‘치려면 쳐라,’ 어떠한 이념과 사상이 쳐도 ‘좋다’, 어떠한 핍박이 와도 ‘좋다’, 국가가 세계가 하늘이 이 모두가 동원하여 들이치더라도 ‘좋다’, 하나님까지 나서서 반대하더라도 ‘반대하려면 하십시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천지가 동원하여 반대하더라도 거기에서 승리한 자가 있다 할진대 그는 하나님이 영원히 자랑할 수 있는 아들딸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너한테는 안 되겠다. 복귀섭리노정을 출발하여 인간을 찾아 나선 뒤 너 같은 사람은 처음 만났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모두 다 항복한다는 거예요. 그것은 생사를 걸어 놓은 싸움이든 어떤 싸움이라도 그렇습니다. 제가 체험한 견지에서는 내용이 그렇게 되어 있어요.

끝날에 이러한 최후의 도의 길을 달리고 있는 경주자가 있다 할진대 최후의 우승을 바라고 달리는 경주자가 있다 할진대 그는 각오해야 됩니다. 믿고 있는 교주가 구주가 아닙니다. 최후에는 실력전을 해야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왜냐? 구원섭리가 종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인 하나님의 경기장에서 모든 경기가 끝나지 않는 한, 모든 경기가 끝나 가지고 하나님이 상을 주지 않는 한 싸움은 계속이에요.

하나님이 세우시고 싶은 섭리적인 대표자

2천년 전에 예수가 이 경기 마당에서 승리하여 4천년 역사를 대신한 메시아의 사명을 했으나, 기독교인들이 그 메시아의 승리의 바통을 받아 가지고 지금까지 그 2천년 역사를 산 역사로서 하나님 앞에 세워 나와야 했는데 못 했다는 거예요. 예수가 왔다 가신 후 지금까지 기독교의 형태는 갖추었으나 심정문제라든지 그 외에 갖출 바 싸움에서 승리한 기준이 세워 지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날부터 지금까지 승리했다고 할 수 있는 하나의 기준이 나오지 않았다는 겁니다.

예수님도 반대해 보고 하나님도 반대해 봐서 ‘응 너는 됐다.’ 하고 예수님과 하나님이 손을 들어 축복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어떠한 장애물이라도 극복해야 됩니다. 그럴 거 아녜요?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구원섭리를 해 나오는 데 있어서 어떠한 섭리적인 대표자를 세우고 싶을 것인가? 사탄 앞에는 물론이거니와 하나님도 그 앞에는 어떻게 할 수 없다 할 수 있는 승리의 아들딸을 세워 사탄세계나 하늘세계에 자랑하고 싶은 것이 하나님일 거예요. 인간의 마음이 그렇거든 하나님의 마음도 그렇다는 거예요.

그러므로 오늘날 도의 길을 가는 우리들, 통일교회 식구들, 최후에는 하나님이 시험합니다. ‘이 길을 가지 말라.’ 할 것입니다. 그래도 ‘나는 갑니다. 나는 달리다가 죽겠습니다.’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나와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없을 때에는 성경 이상의 말씀은 나오지 않습니다. 예수가 왔다 가신 이상의 말씀은 나오지 않습니다. 절대 안 나옵니다. 예수 이후 하나님이 하고 싶으셨던 말씀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 코스를 달리는 데는 예수 이상의 십자가도 와라, 하나님이 6천년의 섭리노정에서 당했던 그 고생과 슬픔의 고통도 와라, 오늘날 이 땅 위의 27억 인류 전부가 동원되어 한꺼번에 화살을 쏘아대는 자리까지도 와라, 하나님의 섭리도 인간을 중심삼고 하고 사탄의 반대도 인간을 중심삼고 하니, 전세계 인류를 동원해서 와라, 지옥도 최고로 가고 천당도 최고로 가겠다는 신념을 갖추어야 됩니다. 마음으로 긍정도 해 보고 반대도 해보고 또 실증도 해 보아서 틀림없다는 결심이 나면 달려야 됩니다. 달리는 데는 누구도 스톱시킬 수 없어야 합니다. 어떤 무엇이 와도 물리치고 나가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6천년 동안 한으로 가로막혔던 고개를 무난히 넘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통일교회 신도 여러분들, 여기에 선생님이 있다 할진대 그 선생님에게 와서 ‘해 봅시다’ 할 수 있는 기백을 갖춘 용자를 하늘은 고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뜻이 이루어진다는 거예요. 만일 그러한 지식을 갖추고, 그런 결심을 갖고, 그런 싸움의 각오를 하고 나서는 아들딸이 있다면 하늘이 그를 무시할 수 없다는 거예요. 하늘이 어떻게 하겠어요? ‘아버지시여, 이렇지 않습니까? 아버지의 심정이 이렇지 않습니까? 아버지의 역사적인 소망, 시대적인 소망, 미래적인 소망이 이렇지 않습니까? 그리고 현 단계에서 이래서는 안 되겠으니 이것을 무시해 버리고 이렇게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하면서 미래적인 소망의 조건을 갖추고 나오면 예수 아니라 어느 누가 반대하더라도 하나님은 ‘오냐, 네 말이 옳다.’ 하고 인정 하게 되어 있다는 거예요.

승리한 자가 받을 상(賞)

과거에 왔다 갔던 수많은 성현, 혹은 우리들이 믿고 있는 구주는 그때의 세계와 미래의 세계를 개척하기 위해 세우셨던 거예요. 그러니 예수님이 말씀하시려던 미래의 것을 갖고 예수 앞에 나타나 항의하면 예수는 고맙게 생각한다는 거예요. 어느 누가 섭리를 중심삼고 이 시대 이후의 미래의 섭리적인 내용을 갖고 ‘하나님이시여! 이것을 빨리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것보다도 이것을 해야 되지 않습니까?’ 하면서 현재의 것을 무시하고 미래의 이것을 들고 나선다고 해도 하늘은 그를 치지 못합니다. 도리어 칭찬할 겁니다.

우리는 그런 싸움의 각오를 갖고 나가야만 됩니다. 그래 가지고 하늘이 인정하는 날에는 어떠한 상을 받느냐? 오늘날 세상에서 어떤 경기 종목의 승리자가 되면 주최자가 거기에 해당하는 상을 주는데, 하나님의 6천년 경기 마당에서 최후로 승리한 그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무엇을 줄 것인고? 여러분, 무슨 경기에 우승해서 상 탈 때는 좋지요?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이지 않습니까? 지나고 나면 그 경기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이 또 다른 사람이 우승을 하고 상을 받게 되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경기장에서 최후의 결승점에 골인한 사람은 두 번 다시 없습니다, 없어요. 전무후무한 것입니다. 끝나려면 영원히 끝나지 또 무엇이 없습니다.

끝나는 그 경기에서 상을 받는 기쁨은 오늘만이 아닙니다. 영원이에요, 영원. 그 이상 좋을 수 있는 내용이 전개될지 몰라도 그 이하로 떨어질 내용은 없다는 것입니다. 승리한 그들에게 하늘은 무슨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아들딸이라는 영광을 주실 것이고, 하나님이 지으신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그들 앞에 맡기실 것입니다. 하늘의 어떠한 왕궁이 있다면 그들을 거기에 살 수 있는 하늘의 왕족으로 허락하실 것입니다. 영원무궁한 상을 주실 것입니다.

그처럼 승리한 아들딸이 있다 할진대 하나님이 6천년 동안 준비한 천국 전부를 동원시켜서 환영잔치를 할 것입니다. 그 잔치는 하루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계속될 것입니다. 그 세계가 바로 천국, 패러다이스(paradise)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여러분들은 그러한 이념 밑에서 달리는 경주자의 한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승리할 수 있는 그룹

오늘날 종교가 많습니다. 유교, 불교, 회회교 등 여러 가지 종파가 많습니다. 경기장 안에 달리는 길도 많아요. 그렇지만 하늘은 장소를 지정합니다. 요 경기장, ‘경기 종목은 요것이다.’ 하고 조건이 되어 있습니다. 어느 교파, 어느 종파, 어느 누구의 명령 밑에서 움직이는 인간이 되어 있는 것은 한스러운 일이에요. 인간이 타락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어차피 하나님의 경주장에 참여해야 됩니다. 그래서 어느 한 종목에서라도 달려야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민족 민족이 다릅니다. 하늘이 원하는 경기는 민족별 경기가 아닙니다. 세계적인 경기입니다. 말하자면 올림픽 대회와 마찬가지입니다. 그 경기장은 각 민족 민족의 대표자가 선발되어 모이는 곳입니다. 이 경기장에 와서 달려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복귀섭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기에 하늘은 세계적인 마라톤 대회의 우승자를 찾기 위해 섭리해 나옵니다. 많은 경기 중에서도 왕좌를 차지할 수 있는 이 마라톤과 같은 입장에 있는 것이 종교입니다.

그러니까 종교라고 다 좋은 것이 아닙니다. 계통이 세워져서 나와야 좋은 종교라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거기에 대한 상식을 갖추어야 합니다. 만일에 거기에 대한 지식이 없다 할진대 아무리 준비했다 하더라도 승리할 사람을 만들 수가 없습니다. 가르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맹목적으로 달리기만 해서는 우승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몸 마음의 준비와 지식을 갖추어 가지고, 최후의 싸움터에서 하늘과 땅이 모두 동원되어 반대할지라도 굴하지 않고 그것을 뚫고 넘어갈 수 있는 신념을 가지고 싸우고 밀고 나갈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런 사람이 되어야만 인생행로의 최후 코스에서 승리할 수 있는 그룹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 주기 바랍니다.

<기 도>

저희의 선조들은 달렸사옵니다. 아담도 하나님의 경기 종목 중 한 분야를 맡아서 달리던 도중에 자기를 존중하다가 쓰러졌사옵니다. 하늘 대하던 황공한 마음으로 노아를 대해야 할 함이 함부로 대했던 그 장면 때문에 노아도 달리던 도중에서 쓰러졌사옵니다. 아브라함도 하늘을 대하는 노정에서 작으나 크나 모든 것을 하늘 것으로서 지극히 존중하며 그것들의 상대적인 가치를 세워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연고로 꺾어졌사옵니다.

저희들이 모세노정을 살펴보면, 이스라엘 민족도 쓰러졌고 모세도 역시 쓰러졌사옵니다. 하늘이 노하기 전에 노해서는 안 될 모세였고, 하늘이 낙망하기 전에 낙망해서는 안 될 이스라엘 민족이었는데, 하늘이 노하기 전에 모세가 먼저 노하여 반석을 두 번 치고,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는 입장에 서는 이스라엘 민족이 된 연고로 모두 광야에서 쓰러졌사옵니다.

예수님 시대를 볼 때, 세 제자마저 예수를 배반하던 일은 어떠했습니까? 생명을 걸고 가야 할 길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가기 싫어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싸여서 사라지던 세 제자들의 처량한 모습이 인류의 한의 탑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오늘 저희들은 복귀원리를 통하여 역대의 선지들이 가신 길이 곧 우리가 가야 할 길임을 배웠사옵니다. 아담가정으로부터 출발하여 그 고비 고비에 부딪친 역사적인 모든 것이 하늘을 대하여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하신 예수님 시대에 와서야 그분이 비로소 생사를 걸어 놓고 승리자의 모습을 갖춘 줄 아옵니다. 이제 저희들도 그러한 모습을 갖추지 않는다 할진대 이 경기 마당에서 경주자로서 싸울 수 있는 자신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아버님, 복귀의 내용이 어떻다는 것을 알았사옵고, 복귀하여야 할 저희들의 각오가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사오며, 싸움이 얼마나 치열하다는 것을 알았사오니, 이제 이 경주 마당에서 패배자가 되지 말게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하늘땅 앞에 맹세한 저희들, 어떠한 죽음이 온다 할지라도 어떠한 어려움과 고통이 휘몰아쳐 온다 할지라도, 아니 인류 전체의 반대가 폭풍우와 같이 한꺼번에 몰려온다 할지라도, 또 천지가 변할지라도, 세운 바의 중심은 변치 않겠다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그 모든 어려움을 제거시키고 검은 구름을 헤쳐내어, 광명한 천지에서 하늘의 기쁨의 은사를 바라볼 수 있는 승리한 영광의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오늘 참석한 저희들을 아버지,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어차피 달리는 이 한 마당에 섰사오나, 달리는 사람도 있지만 아직까지 달리지 못하는 사람도 있사오니, 스스로 자기 자신을 반성하여 달려야 할 이 운명적인 코스를 피해가지 말게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부딪쳐 오는 환난과 시련을 달게 받아 그것을 저희 것으로 소화시킴으로써, 아버지 앞에 자랑과 영광의 조건을 세워드리고, 그것을 하나의 제물적인 조건으로 삼을 수 있는 늠름한 모습으로 저희들을 세워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6천년 동안 상을 주고 싶어하셨던 아버지 마음속에 숨겨진 유업, 그것은 아버지의 심정의 유업임을 알았사옵니다. 이것을 논위하여 나는 신랑이요 너희는 신부라 하였고, 이것을 논위하여 나는 너희의 참아버지요 너희는 나의 참아들딸이라 하셨사옵고, 참가정, 참국가, 참세계를 논위한 것이 아버지였음을 알았사옵니다. 그러나 오늘날 저희들에게는 가정도 없고 민족도 없고 국가도 없사옵니다. 어느 하나도 충실하게 갖춘 것이 없는 불쌍한 저희들, 그 모든 것을 회복하려는 부모 앞에, 하늘 가정 앞에, 하늘나라 앞에 꺼릴 것이 무엇이 있으며, 주저할 무엇이 있사오리까? 각오한 결심한 일편단심의 정열을 기울여, 달리고 또 달려서 사탄 진영을 점령하고, 하늘의 승리의 깃발을 세워 ‘아버님, 한을 푸시옵소서.’ 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떠한 고난이 닥쳐와도 감수하면서 싸움에서 승리하는 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사오니, 인생행로를 달리는 경주자로서 낙오자가 되지 말게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 바라고 세워 주신 그 기상을 잃는 저희들이 되지 않게 하여 주시옵고, 그 심중을 상하게 하는 저희들이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내일도 생애를 걸고 늠름하고 씩씩하게 달려갈 수 있는 하늘의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이 코스에서 낙오되는 아들딸 되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하나님의 경주장에서 최후의 승리자가 되어 아버지의 영광을 만천하 앞에, 만존재세계 앞에 자랑할 수 있는 귀한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올 때,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요한복음 14:11 고린도전서 13:1-13

<기 도>

저희들은 말씀의 아버지를 믿고 싶은 것이 아니오라 역사적인 인연을 맺어 나오신 아버지를 믿고 싶사옵니다. 오늘의 나와 직접적인 관계, 직접적인 인연을 맺을 수 있는 아버지, 직접적으로 말씀을 주실 수 있는 아버지를 요구하고 있사옵니다.

오늘날 인류는 하나님을 대상적인 존재로 믿고 있사오나 오늘 저희들은 그러한 신앙의 대상으로 추구하는 하나님이기를 요구치 않사옵니다. 생활적이고 실증적인 주체로 계시는 그 하나님을 원하고 있사옵고, 저희의 사정과 생활의 모든 사실을 통할 수 있고, 나누어지려야 나누어질 수 없으며, 시간 시간을 함께 동거할 수 있는 아버지를 고대하고 있사옵니다. 이런 인연이 땅 위에 이루어지는 한 시간은 인류가 원하는 시간인 동시에 하나님이 원하는 시간이옵니다.

오늘날 저희는 아버님이 바라시는 소원의 동산이 관념적으로 어떤 이상 동산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사오나 실상은 그것이 아니었사옵니다. 저희들은 마음으로부터 사무쳐 들어오고, 실천을 통하여 느껴지고, 현실의 내 자체를 통하여 느낄 수 있으며, 내 감정을 통하여 노래부를 수 있는 그런 천국관념을 갖지 않으면 안 될 때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사옵니다.

그런 관계에 그런 인연을 맺기 위한 것이 구원섭리의 목적이요, 복귀역사의 목적이요, 십자가 구원의 목적이었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하오니, 오늘 저희가 진정한 아버지라 할 수 있고, 진정한 아들딸이라고 스스로 인정하고 스스로 결정지어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아니하는 위치에서 노래할 수 있으며, 즐거워할 수 있으며,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이 한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역사적인 아버님에 대해서는 저희들이 많이 배웠사옵고 말씀 가운데 계시는 아버님은 많이 알았사오나, 이제는 저희의 심중으로 증거할 수 있는 그 아버님, 저희의 몸으로 체휼할 수 있는 그 아버님, 저희의 입으로 한 말이 아버님의 말씀이 되도록 능(能)의 행사를 일으킬 수 있는 아버님, 저희와 같이 계시는 아버님을 요구하고 있사옵니다. 하오니 아버지께서 실증적인 느낌을 일으켜 주시는 이 시간이 되게 하여 주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나이다.

아버지, 여기에 모인 당신의 아들딸들, 자신들의 마음 몸을 수습하게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마음의 주인도 자기가 아니옵고 몸의 주인도 자기가 아니옵니다. 그 무엇인지 모르게 멀리 바라보면서 믿고, 멀리 바라보면서 소망하고, 나아가 어떤 절대자에게 귀의하고 의지하려는 자신들이오나 주체적인 절대자가 인정할 수 있는 입장에 처해 있지 않은 저희들이옵니다.

이는 대상적인 가치의 입장으로서 절대자의 은사를 받기에 부족한 저희들임을 알고 있사오니, 아버지께서 친히 주체가 되시어서 저희를 상대적인 위치에 세워 주시옵소서. 절대자이시며 주체자이신 당신의 이념을 상대적인 저희들의 이념으로 주고받을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저희의 마음이 그 이념에 취하여 아버지의 전체의 사랑을 노래할 수 있게 이끌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마음으로 움직이고, 마음으로 전하고, 심정으로 체휼하고, 심정으로 전하고, 몸이 굽히어서 몸에 화할 수 있는 역사가 이 시간 벌어지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말씀을 전하고자 하오니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은 사람의 말을 요구치 않습니다. 오늘날 인간들이 하는 말은 저희들이 많이 들었사옵고 단에서 외치는 수많은 교직자들의 말도 이미 많이 들었사옵니다. 하오나 이것을 원치 않사옵니다. 죽었던 생명을 약동하게 하고, 죽었던 심정을 솟구치게 하고, 흐려졌던 마음을 깨끗하게 할 수 있는 새로운 말씀을 원하옵고, 내 아버지께서 내 심정, 내 뜻, 내 이념, 내 주체인 것을 알 수 있고 아버지와 저희와는 영원한 하나인 것을 느낄 수 있는 재창조의 말씀을 원하오니 나타내 주시옵고, 직접적인 은혜의 단비를 부어 주실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전하는 자의 마음과 듣는 자의 마음의 간격을 노리는 것이 사탄의 역사인 것을 아오니, 이 시간 스스로 섰다 하는 자리를 피하고, 아버님으로 말미암아 섰다 하는 자리에 서서, 아버지 앞에 모든 것을 맡기고 의지하고 바라고 기대하는 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긍휼을 받을 수 있는 귀한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바라옵고 원하오며,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말 씀>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려 하는 제목은 ‘아버지의 것은 나의 것’입니다. 범위를 더 크게 하면 ‘하나님의 것은 우리의 것’이 됩니다. 이러 한 제목을 가지고 잠깐 동안 말씀드리겠습니다.

절대자와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할 인간

우리는 지금까지 자기의 가치가 무한한 줄 알고 있습니다. 가치의 내용은 알지 못하면서 가치를 지닌 존재로만 알고 있는, 그런 입장에 처해 있습니다. 그렇지만 자기의 완전한 가치를 찾아 세워 완전히 남아질 수 있는 역사적이며 우주적인 대실존 앞에 멋지고 늠름하게 자랑할 수 있는 모습이 못되어 있는 것을 우리는 느끼는 바입니다.

이런 입장에 있는 우리인 연고로 그 가치의 존재를, 가치의 모습을, 가치의 인연을, 가치의 세계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누구나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곳을 찾아 나가야 할 모습들입니다. 이것을 시인하면서 만상을 바라보고 대우주를 바라보게 될 때 허전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의지할 수 있는 그 무엇을 추구하고 추구해야 할 운명에 처하여 있는 것을 항시 양심생활을 통하여, 양심의 작용을 통하여 체휼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견지에서 하나님이 없다 할지라도 가상적인 절대자를 세워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나, 그러한 위치에 살고 있는 우리가, 과연 느끼고, 즐기고, 노래하고 있는 어떠한 행동의 절차가 있다 할 진대 그것과 가치적인 인연을 맺고 느끼며 즐거워할 수 있는 모습인가를 생각해 볼 때에 그렇지 않다는 것을 제가 아니더라도 여러분이 단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처지에 놓여 있는 인간인 연고로 이러한 불쌍한 사정에 엉클어져 있는 인간인 연고로, 하늘이 있다면 여기에 어떠한 인연을 세워야 할 책임이 있을 것입니다. 하늘이 절대적인 가치의 주체요 가치의 본체라 할진대 하늘이 그 가치의 인연을 찾아 세우기 위해 수고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에게는 사랑이니 무엇이니 무엇이니 하는 말이 적용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논리적인 견지에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인간이 타락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본연의 위치를 상실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본연의 가치를 잃어버린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나, 이러한 우리들은 이 전체의 세계를 바라보고서 하늘이 있다 할진대 ‘하늘이여’ 하고 울부짖어야겠고, 절대자가 있다 할진대 ‘절대자여’ 하고 울부짖어야 되겠고, 선의 형체를 갖춘 그 무엇이 있다 할진대 그것이 실체적인 것으로 나타나 주기를 간구해야 되겠고, 그러한 절대자나 하늘 혹은 선한 존재를 간곡한 마음으로 그리워해야 되겠습니다.

하늘은 이러한 관계, 이러한 입장에 있는 인간임을 아시는 연고로 우리를 찾아오시기에 온갖 수고와 노력과 자기 희생도 개의치 아니하시고, 인류를 붙들기 위해 자신이 소모되는 것을 개의치 않으시고 전체의 가치 이상의 가치를 찾아 헤매고 계시다는 사실을 긍정한다 할진대 우리는 공손한 마음을 갖고 쌍수를 합하여 그 앞에 경배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전체의 움직임을 헤아려 보고, 역사의 움직임을 헤아려 보고, 심정의 움직임을 더듬어 보게 될 때에, 내 자신은 알지 못하나 역사의 배후, 내 심정의 깊은 흐름의 배후에서는 그 무엇이 나를 이끌고 있고, 나를 재촉하고 있습니다. 내 심정 깊이에는 나로 하여금 가치를 추구케 하는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우연한 것으로 자연적인 것으로 돌려버려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나와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어떤 인연이 맺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그 인연을 풀어 그 가치를 논위하게 될 때, 최대의 선인 하나님의 그 무엇이 여기에 개재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계를 아니 지어 놓으려야 아니 지어 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왕자가 되어야 할 인간

이와 같이 하늘이 배후에서 자기의 고통을 감수하면서 절대적인 가치를 인간 앞에 부여하기 위하여 오늘날까지 수고해 오셨고, 또 이후에는 그 수고를 계속하시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들이 알게 될 때, 하늘을 생각만 하여도 황공한 마음으로 머리 숙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연고로 하나님은 인류를 대하여 그들이 내용도 모르고 뜻도 모르는 말씀을 선포해 오셨습니다. 종교를 세워 놓고 간곡한 인연을 맺기 위한 내정의 뜻이 있으면서도 인연을 맺어야 할 우리 앞에는 막연하게 나를 믿으라고 하였습니다. 선포한 내용은 막연한 것이었습니다. 또 나를 바라보라고 외쳐 나왔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나를 사랑하라고 외쳐 나왔습니다. 그것이 무슨 인연과 무슨 내용으로 되어 있는지는 모르나 듣고 겪어 보니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심적인 인연의 세계의 그 무엇이 관계되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그러한 막연한 말씀에 의지하여 믿고 나왔고, 바라고 나왔고, 사랑하고 나왔습니다. 또 신앙자들은 믿는다는 자리에서 쓰러졌고 소망한다는 자리에서 쓰러졌고 사랑한다는 자리에서 쓰러졌습니다. 신앙노정에서 쓰러진 자가 많았습니다. 하늘을 믿다가 죽은 자가 어느 한 일개국의 충신 열사보다 몇 천만 배 많습니다. 소망하다 죽은 자가 많고 사랑하다 죽은 자가 많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는 믿음의 왕자라고, 소망의 왕자라고, 사랑의 왕자라고 칭송을 받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사실이 그렇다 할진대 하나님을 대하여 원망하여야 합니다. 사실이 그렇다 할진대 믿는다는 말, 소망한다는 말, 사랑한다는 말이 없어야 합니다.

6천년의 섭리를 들춰 보게 될 때, 믿음의 승리자가 되기를 바라다가 쓰러진 자는 있으나 믿음의 대왕자가 되어 인류 앞에 받듦을 받은 자가 없었고, 소망의 한 터전을 찾기 위해 헤맨 자는 많았으나 그 소망의 터전 위에서 하늘의 칭송을 받은 자, 인류의 칭송을 받은 자가 없었으며, 사랑을 말한 자는 많으나 그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이 4천년 동안 찾아 헤매던 믿음의 실체요, 아버지의 심정을 체휼한 분이었습니다. 그러한 분이라는 것을 민족은 몰랐습니다. 민족은 몰랐다는 거예요. 세계 인류 가운데 아무도 몰랐습니다. 아는 분이 있다 할진대 하나님 한 분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

그러니 예수님은 갈 곳이 없었습니다. 믿음의 역사를 창조하기 위하여 오셨으나 알아주는 사람이 없으니 세계를 뒤로 하고 알아주는 분을 찾아가신 길이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믿음을 상속받고 인류의 소망이 되시는 하나님의 소망을 상속받아 그 무형의 하나님을 대신한 실체적인 믿음의 주체, 실체적인 소망의 주체가 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상대적인 믿음의 주체가 아니고 절대적인 믿음의 주체로 무형의 하나님을 대신하여 땅 위에 나타나신 분이기 때문에, 여러분은 하나님은 믿지 않더라도 예수님은 믿어야 돼요.

성경은 예수를 믿고, 예수를 소망하고, 예수를 사랑하라 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실체를 쓴 인간 앞에는 실체가 가깝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인류는 예수를 실체의 모습으로 세워 주신 하나님의 수고의 공덕 앞에 머리 숙이고 천만 번 울어 마땅합니다. 이것을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터전을 세우고, 소망의 환경을 개척하고, 사랑의 울타리를 세우려 했던 예수의 이념은 이 땅에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4천년 역사는 믿음의 실체를 세우기 위한 역사요, 예수와 성신 이후의 2천년 역사는 소망의 실체를 세우기 위한 역사입니다. 주의나 사상 기준도 그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가 소망하는 세계관과 또 그 반대의 세계관이 오늘날 민주와 공산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이처럼 소망이 끝에 다다랐기 때문에 이 때를 끝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저 맹목적으로 끝날이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어떠한 조상이냐? 믿음의 조상이기보다는 소망의 조상입니다. 소망 중에서도 실체로서 소망할 수 있는 조상입니다. 인간에게 소망이 있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소망할 것입니까? 우리는 몸 가운데 마음이 귀한 줄 알았습니다. 마음 가운데 심정이 귀한 줄 알았습니다. 소망이 있다면 마음의 실체대상과 심정의 실체대상이 되는 분 이상의 소망이 없기 때문에 예수님은 인류를 대하여 너희는 신부요 나는 신랑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똑똑히 아십시오. 그러니 세계는 아무리 나갔댔자 소망하는 그 이상의 한계를 못 넘어갑니다.

그러면 소망은 어떠한 소망인가? 오늘날 기독교에서는 말씀적인 소망의 세계를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말씀을 지나 실체를 고대해야 할 때입니다. 천만 가지의 믿음의 명사보다도, 믿음의 역사가 훌륭한 것보다도 한 사람 실체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한 실체가 나타나지 않으면 말씀적인 소망의 세계관은 막혀 버립니다. 실체를 연결시키지 못하는 한, 그 세계는 역사와 더불어 흘러가 버리고 맙니다. 두고보십시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목적

오늘날과 기독교는 명실공히 세계적인 종교가 되었고, 민주주의를 중심 삼고 움직이는 민주 진영의 세계노선도 기독교 이념의 한 부분에 의해 움직이고 있으나, 이제 그것도 끝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여기에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말씀만 가지고 즐기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실체로서 영원한 생활로 즐길 수 있어야 합니다.

역사는 회오리바람과 같이 돌고 있습니다. 소용돌이치는 오늘의 사조 밑에 모여 있는 우리들은 과거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그 이후 역대 선지들의 모습을 추앙합니다. 그 이후 2천년의 소망의 왕자였던 예수를 바라보고 치열한 투쟁의 역사를 회고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들이 이루려 했던 것은 말씀을 위주로 한 약속의 소망이었지, 실체적인 생활로써 나타날 수 있는 소망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바란 소망의 한 날이 실체적으로 이루어지는 때가 끝날이요, 그것이 이루려는 것이 재림이상이요, 그 뜻을 성사시키기 위해 오시는 분이 재림주입니다. 그러면 이제 남은 것이 무엇이냐? 믿음을 위주로 하던 시대는 예수로 말미암아 끝났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이 실체이기 때문에 그를 믿으면 예수님 이전 4천년 동안 믿어 왔던 어느 누구보다도 훌륭한 가치를 지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믿음 없는 백성 앞에 믿음을 세워야 했고, 소망 없는 백성 앞에 소망을 세워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았어요?

이 성경을 보십시오. 아브라함 이후의 예언을 보십시오. 믿음을 기반으로 한 소망은 메시아 한 분을 붙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상징적인 약속권 내에서 신랑 신부라고 하는 소망을 갖게 되었으니, 이것은 예수가 십자가의 죽음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지 못하고, 믿고 있습니다. 지금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나중에 이해하는 때가 있을 것입니다. 실체적인 하나님의 역사라면 그래야 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야 이치가 맞다는 거예요.

그러면 소망의 실체요 믿음의 실체이신 그 분이 이루려고 하시는 것은 무엇이뇨? 다시 말하면 소망과 믿음의 목적이 어디에 있느뇨? 그것은 인간들이 자기를 찾아 사랑을 노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밖에 없습니다. 주님을 만나려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로 말미암아 나의 가치를 인정받고 주의 사랑의 품에서 살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이 인류의 최대의 목적입니다.

하나님이 믿음을 세운 목적, 하나님이 소망을 세운 목적, 하나님이 사랑을 세운 목적, 그 목적은 예수만도 아니고, 아브라함만도 아니고, 우리 선조 중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오늘의 나를 위한 것입니다. 그러면 나를 위하여 6천년 동안 믿어 주고 찾아오신 그 분이 누구냐? 하나님입니다. 그 분이 누구냐? 나의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천지가 뒤집히는 곡절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와 성신의 사랑을 통한 중생

그러므로 믿던 아버지, 소망하던 아버지, 사랑하던 아버지, 그 아버지를 여러분들이 붙들 때, 예수도 ‘지금까지 너를 만나기 위해 허덕여 왔고 너 때문에 수고하였다.’고 말할 수 있고, 하나님도 그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자리에서 여러분이 ‘하나님이시여! 같이 삽시다. 예수님이여! 같이 삽시다.’라고 할 때, ‘오냐, 너와 더불어 영원히 같이 살자.’라고 할 수 있는 곳이 천국입니다. 망상적인 천국, 가공적인 천국은 인류에게 필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실체적인 천국을 이루기 위해서 싸워야 됩니다.

예수님께서 오셨다 가시면서 ‘내가 못 다 이루고 가니, 나를 믿는 대신 성신을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만 믿어야 구원받는 줄 아십니까? 천만에요. 성신을 믿어도 구원받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게 하려는 것이 성신이니 성신도 믿어야 합니다.

성신은 무슨 신이냐? 어머니신입니다. 이것을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모르고 있어요. 내 말이 거짓말 같으면 하나님한테 물어 보십시오. 그럴 것이다. 라는 생각만 가지고 말 안 합니다. 그렇다 이겁니다.

성신은 어머니신이요, 예수는 인류의 참아버지입니다. 참아버지는 완성한 아담입니다. 아담이 타락하여 인류의 조상이 못 되었으니 우리들은 전부 참조상이 아닌 거짓조상의 후손들입니다. 여기에 참조상으로 오신 분이 메시아입니다. 참아버지란 말입니다, 참아버지. 그런데 기독교에서는 삼위 신이 어쩌고 저쩌고들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참아버지이고 성신은 어머니이므로 이 아버지, 어머니의 사랑을 받아야 중생된다는 것입니다. 자식이 부모의 사랑 없이 태어날 수가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묵시록에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계 22:17)고 했습니다. 그런 날은 성신이 실체를 쓰는 날입니다. 그때가 재림시대입니다. 신부 단장을 마치는 날입니다. 어린양 잔치가 무엇입니까? 잃어버린 참부모를 거꾸로 모셔 들이는 날입니다. 그렇게 되면 명사적인 하나님, 신앙적인 대상으로 필요했던 하나님은 지나갑니다. 이름만의 하나님을 믿는 것이나 외형적으로만 믿는 신앙생활은 필요 없습니다. 실체 그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의 실체의 주체는 누구였던고? 예수였습니다. 소망의 실체, 그 주체는 누구였던고? 예수였습니다. 사랑의 실체, 사랑의 주체는 누구였던고? 예수였습니다. 이런 예수를 보냈는데 인간들이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불신함으로 말미암아 그는 가야 했습니다. 그러면 언제 다시 올 것이냐? 한 신랑이 오셨던 것을 아는 사람이 없었으니 다시 오실 수 없다는 거예요. 와 봐야 또다시 푸대접 받겠기에 오시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한이 있음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주님이 오시면 나를 찾아오시겠지.’ 이렇게 생각하는 신자가 기독교를 망치고, 이런 신자가 하나님의 뜻을 파괴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찾아오실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실체, 소망의 실체, 사랑의 실체가 이 세상에 나타나지 않는 한, 믿음을 세운 목적과 소망을 세운 목적과 사랑을 세운 목적이 해결되지 못하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내가 아니면 하나님도 하나님 노릇을 못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아니면 하나님도 이 세계를 움직이지 못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신념으로 사셨습니다. 자신이 아니면 하나님의 사랑을 소개 할 수 없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끝날의 성도의 믿음과 책임

지금은 증거시대입니다. 과학적인 시대라고 합니다. 과학은 논리적인 것입니다. 논리적이라는 것은 원인과 결과가 체계적으로 부합되어야 합니다. 논리적 사실을 생활적인 면에서 실증하고 실행할 수 있을 때, 그것을 과학적이라 할 수 있다는 거예요. 인간은 본래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생활적이고 실증적인 입장을 떠난 행복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 걸 떠나서 민족이니 무어니 하는 것이 있을 수 없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실체를 가지고 논위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끝날은 어떤 때냐? 믿음을 세우기 위한 4천년 역사와 소망을 세우기 위한 2천년 역사가 끝나는 때요, 믿음의 왕자요 소망의 왕자요 사랑의 왕자가 나타나는 때입니다. 나타나는데는 구름을 타고 둥둥 떠서 온다고 믿고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해가 나고 하늘이 청명하게 맑은 날엔 구름이 없으니 주님이 못 오시겠네요?

선생님도 그런 신앙생활을 해 보았습니다. 안타깝고 답답하여 땅을 치면서 하늘을 대하여 항의도 몇 십 번 해 보았습니다. 결국 헤치고 들어가 보니 그런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른말을 하다 보니 욕먹는 자의 대표가 되었습니다. 이단자의 명패를 달고 다니고 있습니다. 지난날 바울도 이단자의 괴수였고, 참을 갖고 오셨던 메시아도 바알세불의 신이 들린 괴수라는 빈정거림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역사적인 서러움이었습니다. 서러움으로 시작된 역사이니 서러움으로 끝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잘 믿은 신도들이 있다 할진대 교회의 마룻바닥에 엎드려 기도하는 신도를 귀중하게 보십시오. 교역자들이 몰아낼 때 눈물을 흘리며 뒤를 돌아보면서 나가는 양떼들을 따라가 보십시오. 거기에는 새로운 꽃동산이 가까이 있음을 느낄 것입니다. 냉랭한 찬바람이 불어오는 한순간이 지나가면 봄절기가 올 줄 누가 알았던고? 그 몸은 역경 속에 있으나 그 심중은 봄절기를 맞이할 수 있는 늠름한 신부의 모습을 한 사람, 주님은 그러한 자를 찾아오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만인 앞에서 대웅변을 토하는 말씀의 왕자는 많으나 실체의 주인공들은 없습니다. 믿음의 실체인 교역자는 없습니다. 소망의 실체인 교역자는 없습니다. 사랑의 실체인 교역자는 없습니다. 이러니 이 교단, 이 신도들은 어디로 갈 것인고? 끝날의 성도들은 어디로 가야 할 것인고?

이 한국 천지에 문이라는 한 존재는 이단자의 괴수로 몰리고, 민족의 반역자로 몰리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 민족이 복받게 된다면 가겠습니다.

말씀보다 더 중한 실체

사실적인, 증거적인 제단이 없어졌으니 실체적인 제단을 꾸밀 수 있는 하늘의 믿음의 왕자는 어디 있는고? 지금은 그런 사람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수많은 군중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장병을 거느리고 호령하는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수만 장병을 위해 잠 못 이루는 장군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늘은 지금까지 인간을 대해 추울세라, 더울세라, 배고플세라 염려하면서 역사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선두에 나서서 나를 보라고 외치는 바리새 교인들이었지만, 예수는 뒤로 돌아서서 눈물지었습니다. 이것이 예수의 모습이었습니다. 선두에 서서 외치는 사람이 인류를 살리는 것이 아니에요. 역사와 더불어 사조와 더불어 쓰러지면서도 하늘을 붙들고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저들은 어떻게 합니까?’ 하고 눈물 흘린 사람들 때문에 역사가 이 모양으로라도 흘러왔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맞을 때가 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통일교회의 말씀이 아무리 좋다 할지라도 말씀의 내용보다는 실체가 문제될 때가 올 것입니다. 그대는 무엇을 갖고 있느냐? 너는 무엇을 갖고 있느냐? 신앙의 자체가 될 수 있는 그 자신이 필요하고, 소망의 자체가 될 수 있는 그 자신이 필요하고, 사랑의 자체가 될 수 있는 그 자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것만 갖추고 있으면 주가 천년 후에 오시더라도 나를 버리지 못합니다. ‘믿음 있는 곳에 내가 있고, 소망 있는 곳에 내가 있고, 사랑이 있는 곳에 내가 있다’ 할 수 있는 자신이 되면 문제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 역사를 실체적으로 해명해야 할 시대는 다가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소망의 한 날은 실체를 만나는 날입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사실이에요. 망상이거나 가공적인 말이 아니에요.

여러분 중에 주의 신부 될 자격자가 있습니까? 누가 그렇게 됐대요? 그렇게 됐다는 사람 봤어요? 된다고 하는 사람은 많지만 됐다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떠한 내용을 갖추어야 되겠느냐? 역사적인 믿음의 내용을 갖추고, 역사적인 소망의 내용을 갖추고, 역사적인 하나님의 심정의 내용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 모든 내용을 갖춘 실체, 그 자체로 말미암아 6천년 역사를 섭리해 오신 하나님의 한을 풀어 드릴 수 있는 자격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주님을 모실 수 있는 것입니다.

이놈의 죄악 세상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해요. 실체를 찾기 위해 수고한 6천년의 역사, 인간들로부터 수없이 배반당해 나온 지긋지긋한 역사입니다. 꿈에도 다시 보고 싶지 않고, 꿈도 꾸기 싫은 역사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붙들고 다시 생각하고 서러워하고 되풀이하며 이루어야 할 것이 실체입니다. 그 하나가 문제입니다.

그러면 결론적으로 여러분 자신들은 어떻게 해야 될 것이냐? 믿음도 내 것이요, 소망도 내 것이요, 사랑도 내 것이라 할 수 있는 자신을 갖고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을 천년 만년 믿을 수 있는 자격자가 되어야 합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나는 믿음 소망 사랑의 실체입니다.’ 하고 6천년을 섭리해 나오신 하나님을 믿는 것 이상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을 믿을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몸뚱이를 믿어요? 여러분 마음을 믿어요? 여러분 심정을 믿어요?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찾고자 여러분에게 6천년 동안 믿고 나온 전부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대신, 예수대신, 성신대신, 만민대신 죄악과 맞서 싸워야 되겠고, 그릇된 모든 것을 부수는 심판자를 대행할 수 있는 자격자로서 내가 나를 믿을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입장까지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과 예수와 성신을 해방시켜 드려야 할 우리

여러분, 예수 믿고 천당 가겠다고 하는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고 천당 가겠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을 천당 좀 보내 주세요. 천당 가서 예수님 만나 보겠다고 하지 말고 이 땅 위에 천당을 만들어 예수님을 모셔 보세요. 내가 예수님의 사랑을 받겠다고? 죄악에 물든 여러분이 예수님의 사랑을 요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예수는 하나님의 황태자입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황태자예요. 어림도 없습니다. 그렇게 믿어 가지고는 어림도 없는 것입니다. 사랑을 받겠다면 예수가 죽던 그 이상의 심정으로 ‘내가 정말로 사랑하고 싶습니다.’ 하는 마음이 사무쳐야 됩니다. 그런데 전부 다 강도의 심보예요. 오늘날 믿는 사람들, 자기들 뜻대로 하려고 하지만 그렇게 안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영계를 들춰 봐도 그렇게 안 되어 있어요. 본질적으로 틀려 있다는 거예요.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해방시켜야 할 운명에 놓여 있습니다. ‘인류 때문에 하나님이 구속을 받고 있구나. 나 때문에 하나님이 구속을 받고 있구나. 나라는 한 개체 때문에 하나님이 사탄의 참소를 받고 있구나. 나 때문에 예수도 죽었구나. 나 때문에 성신이 피어린 투쟁의 역사를 붙안고 뒤넘이쳐 나오는구나. 하나님이시여, 저에게 힘을 주시옵소서. 아버지를 안식시켜 해방의 자리에 옮겨 드리겠습니다. 예수도 성신도 해방의 자리에 옮겨 드리겠습니다.’ 할 수 있는 신앙에 주린 자, 소망에 주린 자, 사랑에 불타는 자를 하나님이 6천년 동안 찾아오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 말에 모순이 있습니까? 그렇게 우리를 사랑한다고 해야 하나님이 내 아버님이에요. 그런 경지에서는 산을 바라보아도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책임 못하는 우리로서는 역사를 들춰 봐도 가슴을 쳐야 하고, 활개를 치며 발걸음을 옮길지라도 탄식의 왕자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천국 보좌에 편안히 앉아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지옥이 만들어져 있는 것을 보시는 하나님은 지옥 이상의 고통을 당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인류는 모르고 있습니다. 만일에 지옥 이상의 고통을 당하지 않으시고 지옥이 있도록 한 그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라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6천년 역사노정에 있어서 지상지옥의 고통을 어느 한 부분도 당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안 당한 것이 없다는 거예요. 알고 보니 하나님은 지옥의 고통을 당하고 계십니다. 그런 허무맹랑한 말이 어디 있느냐고 해도 좋습니다. 우리는 이런 관념에서 하나님을 믿고 모셔야겠습니다. 그래야만 인류의 참하나님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찾기 위해 지옥의 고통을 다 당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 음부 3일 기간이라니, 이게 웬일입니까? 그는 지상 구주가 되어야 했고 영적 구주가 되어야 했습니다. 지옥에 들어가서도 전도해야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지상 지옥의 밑창을 뚫고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러니 역사노정에서 밟혔고 역사노정에서 밀려났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걸음을 걸으셨으니 우리도 그런 사정의 동반자요, 동역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자에게 천국이라는 영광의 동산을 상속해 주겠다는 것이 복귀섭리요, 구원섭리입니다. 이것을 똑똑히 아십시오. ‘하나님, 제가 지옥에 가서 아버지의 고통을 체휼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고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심정을 갖고 기도하는 자는 지옥 가지 않습니다. ‘오, 하나님, 지옥이 싫사오니 천당만 보내 주시옵소서.’ 하는 자는 지옥 갑니다. 지옥 가요.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아바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하고 기도했습니다. 그것은 4천년 동안 이 민족 이 백성을 구하기 위해 지옥의 고통을 당하신 하나님의 심정과 내정을 살펴보게 될 때, 자신도 십자가의 길을 피할 수 없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감정을 느꼈다는 것을 똑똑히 아십시오.

예수의 이념과 정신을 맡을 수 있는 자

이러한 정의 기반을 닦아 놓아야 할 기독교가 그 기반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다시 우리의 손으로 건설하기 위해 일어섰습니다. 말없이 싸우고, 말없이 행진해야 합니다. 그 길은 부귀의 길, 영화의 길이 아닙니다. 그런 것을 원하게 되면 우리의 소망의 한 때가 오지 못합니다. 거기에 정력을 기울이고 거기에 소모할 시간이 없어요. 세상이야 이러든지 저러든지 갈 길을 가자고 나선 우리입니다.

여러분, 무엇인지도 모르고 통일교회를 찾아오거나 말씀을 들으러 온 자가 있습니까? 단단히 말하거니와 통일교회의 길은 가기가 힘듭니다. 고통의 담벼락에 머리를 받히고 몸을 부딪치며 피 살이 에이는 자리를 거쳐야 됩니다. 우리들이 가는 길은 평탄한 길이 아닙니다. 주도 그렇게 갔고 선지자들도 늘 그렇게 갔습니다. 역사를 맡았던 자들은 역사의 정기를 품고 피를 머금은 채 싸움의 용자로 나선 무리들이었습니다. 그런 무리들이 역사를 이끌어 온 것과 마찬가지로 천정을 붙안고 왔던 예수의 이념과 예수의 정신을 맡을 자도 바로 그러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똑똑히 알아야 합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맹목적인 신앙의 시대는 지나갔고 허구적이고 가공적인 논리의 기반은 무지에 의한 것이며, 이 기반에는 완성이 없다는 것을 단정하여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때에 우리가 제기해야 할 문제는 내가 나를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를 믿고 예수가 하나님을 믿듯이, 예수가 성신을 믿고 성신이 예수를 믿듯이, 내가 나를 믿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천륜의 이치가 변할지언정 나는 변할 수 없다. 천지가 없어질지언정 예수의 말씀은 변할 수 없다. 천지가 없어질지언정 나는 변함이 없다.’ 할 수 있는 단계까지 나가야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개개인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믿습니까? 천당에 가겠다고 날뛰는 여러분, 자신을 믿습니까? 말로만 믿는, 내용이 없는 믿음은 쓸데없어요. 내용이 없는 껍데기, 쭉정이는 쓸데없습니다. 그래서 알곡과 쭉정이 비유의 성경 말씀이 있는 거예요. 알맹이의 믿음, 알맹이의 소망, 알맹이의 사랑의 화신체들이 되어 움직인다면, 이 세계가 아무리 넓다 하더라도, 미국 천지가 아무리 광활하고 선진국의 입장에 있더라도 문제없단 말입니다. 문제없어요. ‘너희들은 어느 한 날 굴복할 것이다.’ 하는 자신을 갖고 있는 무리가 있다면 그들은 세계를 지배할 것입니다. 영원한 소망의 아버지이니 아버지를 대신한 사람은 영원한 소망의 실체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영원한 사랑이라 하였으니 여러분이 그 사랑을 품고 주기 위해 노력하고 주기 위해 허덕이고 주다가 죽을 자리를 찾지 못해서 허덕여 보세요. 그래도 이 나라가 망해요?

영원히 내가 나를 믿고, 내가 내 자신을 소망으로 삼고, 내가 내 자신을 사랑하면서 ‘하나님, 저의 사랑을 받으시옵소서. 하나님, 저의 소망을 보고 즐거워하소서. 하나님, 저의 믿음을 보고 즐거워하소서.’ 할 때 하나님께서 ‘오냐’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음을 세운 목적이 그것이요, 소망을 찾는 목적이 그것이요, 사랑을 그리워한 목적이 그것이니, 그렇게 되면 거기에서 주님을 상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주님과 같이 사는 것입니다.

소망과 믿음의 목적이 무엇이냐? 생활 속에서 하늘의 사랑을 중심삼고 살기 위한 것입니다. 종교의 명사를 다 떨쳐 버리고 사랑의 노래를 부르며 사는 새로운 이상세계가 지상천국입니다. 그 세계는 가공적인 세계가 아닙니다. 논리적 견지에서 필연적인 사실로 나타나야 된다는 것을 수준이 높은 사람은 알 것입니다.

이러한 견지에서 생각해 보게 될 때, 이 세계에 남아질 민족은 어떠한 민족일 것인고? 믿음에 불타는 민족, 소망에 불타는 민족, 정열에 불타는 민족입니다. 역사의 모든 장을 들추고 혹은 국가의 흥망사를 헤아려 믿음의 절개를 붙들고 싸워 나온 민족이 어디 있나 찾아보아야 합니다. 소망에 불타는 민족, 정열에 불타서 하나님의 일이라면 생명을 아끼지 않고 움직이려고 하는 민족, 그 민족은 하늘 앞에 가깝다는 거예요.

섭리역사로 본 한민족의 입장

사회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세상에서도 출세하는 사람은 어떠한 사람입니까? 나라에 대한 신의를 지키고, 국가의 이념을 자기의 이념으로 하고 국가를 통하는 심정을 갖고 나타날 때 그 국가에서 출세할 수 있습니다. 그렇잖아요? 가정도 마찬가지예요. 가정에서 신망이 있는 사람, 소망이 있는 사람, 정적인 인연을 갖고 있는 사람, 그 사람이 상속자가 되는 거예요. 그렇잖아요? 그거 부정해요?

역사적으로 볼 때 신앙심에 불타 있는 민족은 어느 민족인고? 하나님이라는 말도 듣지 못했고 선지선열의 어떠한 예언도 없었던 반만년의 역사를 지니고 온 한민족이 무엇인지 모르게 하늘을 대한 신앙심이 높다는 것을 저는 발견했습니다. 여러분이 무어라 해도 좋아요. 저는 발견했습니다. 이 민족, 동반구의 손톱같이 조그만 이 나라가 지금까지 사조 사조, 시대 시대를 거쳐 5천년의 역사, 반만년의 역사를 지니고 나왔다는 사실은 기적입니다. 한국 역사를 뒤져 보십시오. 수십 차례 이상의 침범을 받는 위험한 역사노정을 거쳐왔습니다. 먹었다간 뱉어 버리고, 먹었다간 뱉어 버리고, 뱉을 때는 살이 붙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민족정기로서 흐르는 그 무엇을 가지고 소망의 한 날을 바라고 나왔습니다. 극동의 한반도를 움직여 나오던 소망의 민족 정신, 이것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싸워 나온 것입니다. 이런 정신을 갖고 움직여 나온 민족에게 메시아가 오지 않겠어요? 나 보기에는 그래요.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또 정적인 면에서도 극동에서는 한국 사람 이상 정열적인 사람이 없습니다. 또 동방예의지국이라 했습니다. 기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신의의 종교, 소망의 종교라고 주장하던 불교도, 유교도, 기독교도 그 사명을 다한 단계에 있습니다. 그렇지만 남아 있는 것은 뭐냐? 민족정신을 중심삼아 가지고 세계이념에 불탈 수 있는 숨은 정열이 마음에서 용솟음치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 젊은 사람은 모르지만 나이 많은 사람은 알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민족이 무엇 때문에 이렇게 된 것입니까? 여러분, 사조적으로 헤아려 봅시다. 모든 가치라는 것은 상대의 기준, 비교의 기준이 서지 않으면 그 가치를 결정할 수 없습니다. 아는 사람은 알 거예요. 주체와 대상의 위치를 세우지 않으면 가치관이라는 것을 조성할 수 없어요. 한 국가가 세계적인 지도이념을 갖고 나타났다면 그를 따르는 상대적인 국가가 있어 그 이념을 잘 실천해야만 그 이념을 갖고 나온 국가가 세계의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인류 문명의 흐름과 그 방향

타락이 안 된 본래의 문명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서양문명은 외적인 문명입니다. 오늘날 통일교회 교인들은 미국 같은 데에 가라면 안 가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모든 것은 깨져 나갑니다. 옛날의 역사를 더듬어 보면 정적인 기반으로 모계 중심시대가 있었고, 부계 중심시대가 있었습니다. 지금까지는 부계 중심한 사회가 유지되어 나왔지만 이제 그것까지 깨져요. 그래 가지고 부부 중심시대로 들어갑니다.

그래서 오늘날 미국 같은 나라는 자기 상대밖에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도 깨집니다, 깨져요.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될 것이뇨? 형제계적이요, 민족계적이요, 세계계적이요, 하늘계적인 정적인 세계로 전개되는 것입니다. 그거 무슨 말인지 이해하겠습니까?

또 주권적으로 보면 제국주의 사상이 깨집니다. 왜? 악한 것을 그냥 두어선 안 되겠기에 깨져 버립니다. 깨져 버려요. 그래서 군주주의시대, 제국주의시대가 깨집니다.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제국주의 이념이 깨졌습니다. 그러므로 천사장이 군주야, 군주. 그래서 천사장 주권시대로 움직여 나온 것입니다.

오늘날 이 세계 사조를 보면 제국주의적인 것은 모두 깨져 나갑니다. 군주주의적인 형은 깨져 나가고 민주주의적인 평민주의시대로 들어갑니다. 이래가지고 무엇을 할 것이냐? 여기에서 하나님이 우리의 왕이요, 하늘의 뜻과 선을 품고 사는 사람들이 우리의 식구요, 하나님의 선을 위해 싸우고 있는 사람들이 우리의 백성이라 할 수 있는 세계를 향하여 규합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의 사조를 가만히 보면, 요즈음은 요망스러운 것이 많이 나오지요? 앞으로 조금만 있으면 남의 이름을 빌려 왕 노릇하는 행위도 있을 것입니다. 여왕이니 뭣이니 하여 야단스럽게 따르지요? 그런 때가 지나고 조금만 더 있어 보십시오. 미남자를 세워 가지고 ‘이 도시의 왕자다.’ 하고 모실 때가 오나 안 오나 보세요. 지금 사조는 거꿀잡이로 돌아가는 시대입니다. 나이 많은 여자들이 젊은 청년들과 살고, 젊은 여자들이 나이 많은 남자들과 삽니다. 이상야릇해집니다. 왜 그렇게 되는지 구체적인 내용을 그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민주주의가 나왔습니다. 민주주의는 평등주의입니다. 왜 이런 게 나왔느냐? 기독교는 제국주의에게 핍박받고 멸시받았습니다. 로마제국으로부터 학살당하고 죽임을 당했지만 그 명맥을 이어 나왔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역경 속에서도 자기들의 후계자를 세워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기독일념에 사무친 사람들이 평민사상을 중심삼고 오늘날 민주주의 세계에 참여할 수 있는 권한을 만들어 나왔습니다. 즉 하늘편적인 사람들이 모든 주권을 움직이는 세계로 바꾸려는 것입니다. 이 평민주의시대를 하늘 주권시대로 다시 그 방향을 바꾸는 세계운동, 천주운동이 벌어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에 와 가지고 그 민주주의 행로는 막혀 버렸습니다. 차후의 방향은 어떨 것이냐? 이에 대해 답변을 못 하고 있습니다.

금후의 세계가 어떻게 되느냐 하면 외적인 문화의 발전을 이룩한 서양으로부터 내적인 극동을 찾아 들어옵니다. 지금 한국 여자들이 노랑머리를 하기 위해 물을 들이고, 꼬부랑 머리를 하고, 얼굴에 뭘 바르고 하지만 순박한 한국인의 모습, 동양인의 기품 있는 모습을 그리워할 때가 올 것입니다. 그런 때가 오나 안 오나 두고 보세요.

그들의 철학과 사상의 뿌리는 다 파헤쳐져 끝이 났습니다. 동양철학은 우리 생활관과 인생관에 결부되어 가지고 4천, 5천년의 역사를 면면히 뻗어 나왔는데, 이것이 오늘날 크게 대두하고 있는 것입니다. 문화는 종합적인 이념권 내로 융합되어 나오는 것이 역사적인 실정인데, 이 시대에 있어서 일방적인 기독교 이념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앞으로 종교를 어떻게 요리할 것이냐가 문제입니다.

문화의 중심지는 어디일 것인가

여기에 극동의 문화 전체와 서구의 문화 전체를 절충시킬 수 있는 운동이 벌어져야 됩니다. 그것은 기독교 정신을 내포한 동시에 동양사조와 종교 형태를 갖추고 인간의 정신을 지도해 나오던 모든 사조와 박자를 맞추어야 합니다. 신시대의 형태를 갖추는 동시에 구시대의 좋은 것을 숭배하고 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내용과 체계를 갖춘 종교라든가 혹은 그런 이념을 가진 어떤 무엇이 나와야만 앞으로 세계는 하나되어 움직일 것입니다.

보십시오. 해는 서쪽에서 뜨는 것이 아니고 동쪽에서 뜨는 것입니다. 여러분, 역사적인 노정에 있어서 전쟁은 어디에서 많이 일어났습니까? 극동보다 서구에 많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지식이라는 것은 아는 것이요, 알면 소득을 얻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슨 소득을 얻었습니까? 정신적인 소득이 아니라 물질적인 소득이었습니다. 외적인 소득. 서구인들은 외적인 자연과학과 문명을 통하여 물질적으로 풍족한 세계를 만들어 가지고 자기의 천국, 외적 천국 안에서 잠자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잠에서 깨야 될 때가 왔습니다.

동양 사람은 도를 숭상하는 사람입니다. 도라는 것은 열 가지를 알려면 열 가지를 잃어버려야 됩니다. 천 가지를 알려면 천 가지를 잃어버려야 됩니다. 이 극동 민족들은 도를 숭상하는 민족이 되다 보니 물질적인 면에서는 거지가 되어 버렸습니다. 도를 열 가지 알면 물질은 열 가지 잃어버리고 백 가지 알면 백 가지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리하여 적수공권(赤手空拳)의 처량한 모습이 되어 가지고 마침내는 물질에 굴복하는 인간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다시 이것을 비웃고 나설 수 있는 하나의 움직임이 극동에 나타날 때가 온다는 것을 여러분은 예측해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남다른 프라이드를 가져야 되겠습니다. 극동에 있어서 한국인은 신앙적인 견지로 보나 소망적인 견지로 보나 정적인 견지로 보아도 어느 민족에 뒤지지 않습니다.

사람은 물과 흙과 공기와 태양빛으로 생명체를 완성시켜 나가는 것이 철칙입니다. 그러면 앞으로 어떠한 나라가 세계 최고 문화의 중심지가 될 것인고? 물이 맑고, 땅이 좋고, 공기가 좋은 곳일 것입니다. 그곳이 한국입니다. 물이 맑아서 산에 가나 들에 가나 어디를 가나 냉수를 퍼마셔도 배탈이 나지 않고 생기 있게 살 수 있는 곳입니다. 한국은 이렇게 물이 좋고 산이 좋은 나라, 다시 말하면 산수가 좋은 나라예요. 그 다음에는 공기가 맑습니다. 밤공기, 아침공기가 춘하추동 사철 내내 맑습니다. 한국의 하루를 가만히 보면 참 재미있게 되어 있습니다. 아침은 봄절기요, 낮은 여름절기, 저녁은 가을절기요, 밤은 겨울절기입니다. 하루 안에도 창조이상 세계의 사계절형을 모두 다 갖추고 있습니다. 기후를 보더라도 삼한사온의 모든 내용이 고루 갖추어져 있습니다. 이런 곳에 사는 민족이 우연한 민족이겠습니까?

또 신앙적으로 볼 때 한국의 현하 기독교는 칠팔십 년의 짧은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와 같이 짧은 선교의 역사를 갖고 있으면서도 신앙적으로 어느 국가에 지지 않고 세계 제1의 위치에 서 있습니다. 신앙문제에 있어서는 세계 어느 민족에게 지지 않는 권위를 갖고 있다는 것을 내 자신이 자부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아들딸의 책임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라는 내용을 놓고 볼 때 여러분은 어떠한 사람을 친구로 삼겠습니까? 믿을 만한 사람, 소망이 있는 사람, 맛이 있는 사람을 친구로 삼고 싶겠지요? 그래요, 안 그래요? 하나님도 별수 없습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닮았으니 하나님도 그런 사람을 좋아하십니다. 믿을 만한 사람, 소망이 있는 사람, 맛이 있는 사람을 좋아하신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 인간이 이 땅에 살게 될 때, 환경이 어떠하든 처지가 어떠하든 오늘의 생활에서 맛을 느끼고 사는 사람들이 지상천국에 살 수 있는 사람이요, 맛을 느끼며 살라고 가르치는 것이 성경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마음에 있나니 그 마음의 천국을 중심삼고 죄악된 세계 속에서도 고통을 느끼지 않고 외적 세계를 코웃음치며 사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천국 백성이라는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게 될 때, 문제는 어디에 귀결되겠느냐? 외적 세계도 좋고, 국내의 모든 것 다 좋다 이겁니다. 세계는 될 대로 다 되어 끝이 되었으니 오늘 문제 해결의 시점은 어디냐? 문제 해결의 초점은 나입니다. 여러분들이에요.

그러므로 이제 여러분은 하나님을 모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대상적 위치에 서서 그의 대상적인 가치를 세워 ‘아버지, 제가 왔습니다. 6천년 동안 얼마나 기다리셨습니까?’ 해야 합니다. 한번 그래 보고 싶지 않아요? ‘얼마나 우셨습니까? 제가 왔습니다. 얼마나 바라셨습니까? 제가 왔습니다. 얼마나 그리우셨습니까? 제가 왔습니다.’ 하는 그 한마디를 하나님은 듣고 싶어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아들딸을 만나서 하늘과 지상의 모든 것을 주관하라고 축복한 후 6천년의 한을 잊어버리고 ‘오늘이 내 생일이요, 내 환희의 날이로구나.’ 하고 싶어하시는 것입니다. 6천년의 한을 기억하지 않고 새로운 천지에서 새 아들딸과 정적인 노래를 하며 살고자 하는 분이 하나님이요, 그 하나님이 오늘날 우리의 아버지요, 그 아버지의 아들딸들이 바로 우리라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기 도>

말을 하다 보니 힘이 진하는 것을 알게 되옵는데, 아버님은 6천년 동안 얼마나 수고하셨사옵니까? 사람들을 바라볼 때 믿을 수 없는 모습들인데 아버님, 얼마나 수고하셨사옵니까?

아, 불쌍한 분은 저희들이 믿고 있는 당신인 것을 알았사옵고, 당신을 위로할 수 있는 참아들딸의 모습을 그리워하시는 아버지신 줄 알았사오니, 오늘도 내일도 소리 없이 숫된 제물을 갖고 당신의 상한 심정을 수습하기에 허덕일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믿음도 좋고, 소망도 좋고, 사랑도 좋지만 실체를 잃어버린 자는 아버님 앞에 영원히 서지 못하는 것을 알았사옵고, 내가 문제요, 우리가 문제라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이제 나를 믿자는 이 관념으로 ‘아버님이시여, 저를 믿으소서. 저를 소망으로 보시옵소서. 저를 사랑하시옵소서.’ 할 수 있는 자신을 갖게 하여 주시고, 책임질 줄 아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 하옵나이다. 모든 것 맡기오니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 주시옵기를 부탁드리올 때,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베드로전서 1:21-25

<기 도(Ⅰ)>

아버님께서는 6천년이라는 기나긴 세월 동안 어떠한 수고도 개의치 않으시고 저희의 선조들을 이끌어 나오셨사오나, 저희의 선조들은 아버지를 배반하기를 일삼았사옵고, 어느 한 날 아버지 편에 서서 승리와 영광의 모습으로 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리지 못했음을 생각할 때, 저희들은 아버지를 대할 면목이 없는 범죄자의 후손임을 직고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아버님! 저희의 마음을 불쌍히 보시옵소서. 하늘은 부족한 저희들이라도 다시 붙들어야 할 입장에 계시옵고, 부족한 저희들은 아버지를 다시 찾아야 할 입장에 있사옵니다. 이것을 잘 아시는 아버지시기에 부족한 저희들을 찾아오시며 바라보고 계심을 생각하올 때, 아버지를 대할 면목이 없사옵니다. 그러나 사랑의 심정으로 저희들을 그리워하시며 오늘도 찾으시는 아버지 앞에 자신들의 부족함을 뉘우치는 마음 갖고 모였사옵니다.

찾아오셔서 훈계하실 말씀이 얼마나 많사옵니까? 하오나 말씀을 하실래야 하실 수 없고, 사정을 통하려야 통할 수 없는 저희가 된 것이 하늘의 무한한 서러움인 것을 알고, 스스로 자신의 미급함을 슬퍼할 줄 아는 저희들이 되게 인도하여 주시옵길,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생명의 권한으로 사망의 권세를 깨뜨려야 할 끝날이 저희의 목전에 다가오는데, 저희들은 생명의 고갈을 느끼면서도 생명을 흠모하는 마음이 부족하였사옵니다. 아버지시여! 이러한 저희를 격려하시옵고 격동시켜 주시어서 생명의 전권자이신 아버지를 붙듦으로 말미암아 강한 힘과 강한 심정을 갖고 원수들 앞에 나설 줄 아는 아들딸로 세워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제 아버지의 손길에 붙들리는 것이 저희의 소원이옵고, 아버지의 모습을 닮는 것이 저희의 소원이옵니다. 이 한 시간만이라도 사탄에 의하여 더럽혀진 모든 흔적을 일소하여 아버지의 내적 성상을 닮고, 외적인 형상을 갖추어 본연의 미를 나타내면서 아버지의 영광을 찬양할 수 있는 모습이 되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본연의 심정을 갖추어 창조 이념의 실체가 된 저희와 더불어 즐기실 수 있으며 저희와 더불어 의논하실 수 있는 이 한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사망의 물결이 눈앞에서 저희를 노리고 있사옵고, 사탄은 생명의 권한을 밀어내기 위하여 갖은 흉계를 다 하고 있는 순간임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먼저는 마음의 터전을 바로잡게 하여 주시옵고, 다음에는 저희의 몸을 정하게 하여 아버지를 향하여 뚜렷이 서게 하여 주시옵소서. 몸과 마음이 하나의 목표에 귀착되어 ‘아버지 것이오니 받으시옵소서.’ 하는 간곡한 마음을 가지고 부복하는 모습이 되지 않으면 억만 사탄들이 여지없이 유린한다는 사실을 저희들이 느끼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저희의 마음과 몸에서 저희의 주관적인 관념이나 지난날의 의식적인 주의 일체를 제거시키시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솟아 나오는 음성으로 하늘을 부를 수 있는 간곡한 마음, 간곡한 그리움이 이 한 시간 샘솟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하늘과 새로운 인연을 맺을 수 있고, 새로운 심정을 일으키며, 새로운 생명의 부활의 역사를 일으키고도 남음이 있는 이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제 싸움의 장벽이 저희 앞에 가로막혀 있사옵니다. 이 장벽을 뚫을 수 있는 하늘의 정병이 되지 않으면 안 될 최후의 결전 단계에 있음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망의 권한을 가진 자들을 대하여 늠름히 나설 수 있는 하늘의 용장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원수의 진지를 향하여 진격할 수 있는 아버지의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승리의 푯대를 향하여 말없이 뛸 수 있는 하늘의 정병이 되게 인도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머리 숙인 모양은 각각 다를지라도 목표만은 같게 하여 주시옵고, 사정은 다를지라도 심정만은 같게 하여 주시옵소서. 처하여 있는 입장이 다르고 느끼는 마음은 다를지라도 아버지를 위하는 마음만은 같게 하여 주시옵소서. 진정으로 아버지를 위하여 성심을 다하고자 하는 그 마음을 친히 받아 주시옵소서.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여기에 모인 당신의 아들딸들은 외로운 자리에서 싸우고 싸워 나온 자들이옵니다. 이들은 가정으로부터, 사회로부터 모든 화살을 받아 가면서도 하늘을 부르며 한 줄기 생명의 빛을 따라 나왔사옵니다. 이 모든 일이 아버지께서 시작하신 일이오니 승리의 영광을 아버지 앞에 돌려드릴 때까지 한 생명이라도 지쳐서 쓰러지는 자가 없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를 위하여 기쁨으로 출발하였사오니 기쁨의 열매를 맺어 아버지의 영광의 터전을 넓힐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날은 거룩한 날이오니 만민을 축복하여 주시옵고, 수많은 교단을 축복하여 주시옵고, 불쌍한 삼천만 민족을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의 생명의 등불이 하늘에 있음을 알고 있사옵고, 복귀의 길을 가야 할 운명도 하늘에 달려 있음을 알고 있사옵니다. 이 민족의 사정을 잘 아시는 아버지, 한국 교단의 실정을 잘 아시는 아버지, 심정과 심정으로 연할 수 있으며, 심정을 통하여 하늘을 자랑할 수 있는 아버지의 산 아들딸이 많이 나오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숨은 제단을 붙들고 호소하는 아들딸들이 있사옵거든, 그들을 모으시어서 적은 무리로 하여금 많은 무리를 부끄럽게 하신다는 말씀을 이루시옵소서.

아버지! 바알에게 굴하지 않은 7천여 무리가 간교한 악의 요소를 막아냈던 것과 마찬가지로, 사탄의 간교함을 막아낼 수 있는 7천여 선의 무리가 이 땅 위에 있게 허락해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와 더불어 슬퍼하고 아버지와 더불어 의논하고 생각할 수 있는 숨은 아들딸들을 어서 아버지의 가정에 모으시옵고, 아버지의 식구로 연결시켜서 소원하시는 영광의 동산을 어서 속히 복귀하여 해원성사 하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한 시간 오로지 당신 앞에 맡기오니 처음부터 끝까지 아버지만이 운행하여 주시옵고, 사심(邪心)이 우거하는 시간이 되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의 영광을 그리워하는 표준 앞에 하늘과 땅 전체가 순응할 수 있으며 화하게 할 수 있는 저희들의 경배가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며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였사옵나이다. 아멘.

<기 도(Ⅱ)>

이리 저리로 돌아다니다가 생명의 길을 찾아서 아버지 앞에 엎드린 저희들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사옵나이다.

오늘 아버지를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자리에 세워 주신 은사와, 저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무한한 수고를 개의치 않으시고 저희들을 보호하시고 분별시키어서 이 자리까지 이끌어 주신 은사 앞에 무엇으로 보답하오리까. 보답할 아무것도 갖추지 못하였사옵나이다. 몸을 드려도 그 은사를 갚을 수 없고, 마음 모두를 드릴지라도 아버지의 수고의 공적 앞에 머리 둘 수 없는 부족한 것들임을 이 시간 느끼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여기까지 이끌어 주신 아버님께 저희를 살려야 할 책임도 있거니와 저희를 통하여 영광의 한 날을 보셔야 할 아버지의 사정이 있고, 소원이 있다는 것을 아옵니다. 또한 이러한 저희들을 보시고 위안받으려 하시는 아버지이심을 생각하올 때, 부족한 저희에게 소망을 두시고 역사노정의 고비 고비를 참아 나오신 아버지 앞에 면목없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저희의 피 살이 아버지의 심정을 동정할 줄 알고, 저희의 뼈가 하나의 인격을 구성할 수 있는 형태를 갖추었다 할진대 그 자체가 아버지의 불변의 모습을 증거할 수 있는 하나의 구성체가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세포 하나 하나까지도 아버지께 속하여 영광 돌릴 수 있는 성스럽고 영광스러운 실체를 얼마나 고대하셨사옵니까? 역사노정에 있어서 저희의 선조들은 그와 같은 모습으로 아버지를 모시지 못하였습니다. 하늘을 따라가다가 때로는 원망도 하였사옵고, 때로는 저버리기도 하였사옵고, 선민권을 자랑하다가 그것을 포기해 버리기도 한 역사적인 사실을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지! 이러한 한스러운 혈통을 받은 저희들이기에, 오늘은 하늘을 자신 있게 믿는다고 하지만 내일은 하늘을 배반할 수도 있는 악한 세계와 가까운 입장에 있는 모습들이옵니다. 이러한 저희들을, 아버지, 긍휼히 보시옵소서. 아버지, 붙들어 주시옵소서. 저희들의 갈급한 마음에 아버지의 생명의 심정을 접붙여 주시옵고, 새 생명에 약동하는 부활의 역사를 일으켜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오늘날까지 땅 위에 왔다간 사람도 많사옵고, 지금도 오고 가는 사람이 많사오되, 아버지의 사정을 붙들고, 아버지의 심정을 붙들고 통곡하는 사람은 없사오니, 오늘날 저희들이 아버지의 사정과 아버지의 심정을 붙들고 통곡할 수 있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늘땅을 원망하고, 인류를 원망하고, 역사를 원망하고, 타락한 선조를 원망할 줄 알고, 아버지를 내가 모시겠다는, 아버지를 위하겠다는 마음에 사무친 아들딸들이 땅 위에 많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누구를 보기 위해 이 자리에 나왔겠사옵니까? 어떤 옷 잘 입은 사람을 보기 위한 것이 아니옵고, 어떤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기 위함도 아니옵니다. 추한 흔적을 지니고 상처를 입은 몸들이 존엄하신 아버지의 성상을 닮기 위하여 나왔사오니, 버리지 마시옵고 품어 주시옵소서. 저희의 심정, 저희의 마음이 의지할 곳 없어 외로운 줄을 아버지께서 아시오니, 이 시간 위로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런 심정을 갖고 현현하시어서 영원한 생명의 주체로서 저희를 이끌어 주시옵고, 저희의 몸 마음에 스며들 수 있는 생명의 말씀을 내려 주시옵고, 아버지의 은사를 감사하며 경배드릴 수 있는 이 한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시간 말씀을 갖고 대하고자 하오니 아버님, 여기에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전하는 자와 받는 자의 사이에 간격이 있다 할진대 그것이 사탄의 행로가 되는 것임을 알게 하여 주시옵고, 그 곳이 사탄이 노리고 있는 사망권인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전하는 자의 마음이나 받는 자의 마음이 하나되어, 아버지의 심정에 연하여 동하고 정할 수 있는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남한 각지에 널려 외로이 무릎을 꿇고 호소하는 당신의 아들딸들, 어려움에 시달리는 그들을 권고하여 주시옵소서. 끝까지 참는 자가 구원을 얻는다고 하셨사오니, 참음으로 아버지의 영광을 높이고 아버지의 모습을 이 민족 앞에 실체로서 증거하고 남음이 있게 인도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옵나이다. 모이는 수많은 교단과 수많은 인류 위에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말 씀> 이 시간 여러분 앞에 말씀드리려는 제목은 ‘인생길을 가는 나’ 다시 말하면 ‘인생길을 가는 우리’입니다. ‘인생길을 가는 우리’ 이러한 제 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동기와 목적을 모르는 인생

사람들은 흔히 말하기를, 인간은 왔다가 간다고 합니다. 자고이래 아무리 훌륭한 성현 군자도 왔다가 갔습니다. 이런 역사의 움직임, 이런 천륜의 움직임은 이 순간 나에게도 연속되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생각해야 될 것입니다. 왔다가 가야 할 우리 자신들입니다. 무슨 인연과 무슨 관계인지는 모르지만 이 땅에 와서 이 만상과 혹은 어떠한 이념적인 형태 속에서 뒤넘이치다 가는 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우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은 무엇을 위해 왔으며 무슨 목적을 위하여 가는가? 이것을 수많은 철인들, 혹은 수많은 종교인들이 심혈을 기울여 해결지으려 하였으나 해결짓지 못한 채, 인류역사는 그로 인한 서러움과 더불어 지금까지 움직여 나왔습니다. 또 지금도 계속 움직여 나가고 있습니다.

이런 긴장된 순간에 있는 우리입니다. 아니 가려야 아니 갈 수 없는 인생행로를 걷고 있는 우리임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부모의 혈통을 통하여 태어나고 보니 생각지도 않던 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또 살다가 보면 노쇠하여서 가야 할 운명에 놓이게 됩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꽃다운 청춘시절이 지나가 버리는 것을 막을 수가 없는 것이요, 자기 모습이 노쇠하는 것을 방비하고자 하되 방비할 수가 없는 서글픈 사실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생각하면 안타깝고, 생각하면 클클하고, 생각하면 무엇인지 모르게 사방을 휘저어 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어남을 여러분은 생애노정에서 몇 번씩 느꼈을 것입니다.

내가 왜 왔으며, 내가 왜 살아야 하며, 어디로 가야 하느냐? 태어난 것을 여러분 스스로 태어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태어나기는 했으되 무슨 동기로 태어났으며 무엇을 위해 태어났는지, 나를 낳게 한 동기와 목적을 알지 못하는 우리들입니다. 나기는 났으되 내가 나고자 해서 난 것이 아니요, 살기는 살되 내가 살고자 해서 사는 것이 아니요, 죽기는 죽되 내가 죽고자 하여 죽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를 들어 무엇을 자랑할 것이냐? 자기 자신이 나고 싶어 나지 못하고 자기 자신의 그 무엇을 갖고 살지도 못하고, 죽음 길을 피할 수도 없는 자신을 갖고 무엇을 자랑해 보아야 처량할 뿐입니다. 났으니 살아야 할 운명이요, 또 그렇게 살다 가야 할 운명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살다 가는 목적은 무엇인가? 여러분은 이 문제를 다시 생각해 봐야 합니다. 동기가 나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었으니 목적도 나만의 것이 아님에 틀림없습니다. 사는 데 있어서 행복한 자리를 싫어하는 자가 어디 있으며, 호화찬란한 자리에서 살고 싶지 않은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 나입니다. 그렇지만 또 자신을 자랑하고 싶고, 마음대로 살고 싶고, 마음대로 남아지고 싶은 나입니다. 이런 심정의 교차점을 지닌 나라는 것입니다.

나를 연유하여 나지 않은 내가 보다 큰 무엇을 요구하고, 보다 더 잘살기를 바라고, 더 큰 목적의 가치를 요구하는 것이 나 때문이냐, 그렇지 않으면 어떤 상대적인 목적 때문이냐 하는 것을 여러분 자신들은 분명히 알아야 됩니다. 손을 들어 나 때문이라고 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부모의 혈육을 받고 태어날 때 스스로 나고 싶어서 났어요? 부모가 나를 낳기는 했어도 나는 부모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생명체요, 마음대로 이끌 수 없는 생명체요, 마음대로 죽일 수도 없고 살릴 수도 없는 생명체인 것입니다.

그러한 권한을 누가 갖고 있는가? 그 권한의 소유자를 해명하는 날, 자기를 중심삼고 즐거워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인간들은 이 기준을 넘지 못하고 허덕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이 우리임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마음으로 더 큰 무엇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또 일생을 통해 사망의 권한을 밀고 나가 실제로 더 큰 놀라운 생명의 세계와 인연을 맺고 싶어합니다. 더 나아가서는 어떠한 정적인 사랑의 심정이 있어 인간의 정적인 세계를 넘어 영원불변의 정적인 세계와 접하고자 합니다. 해명하고 증명할 수는 없으되 그런 느낌에 내가 수시로 끌려가고 있습니다. 그 무엇이 모순된 세상을 저버리도록 재촉하고 있는 것을 양심이 맑으면 맑을수록 느낄 것입니다.

악을 피하고 선을 찾아가는 인생행로

그런 연고로 땅 위에 살고 있는 사람은 어느 누구도 선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나고 보니 선한 종자가 아니라 악한 종자입니다. 나고 보니 재창조의 이념 앞에 설 수 있는, 어떤 가치를 노래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자기의 모습이 불초한 모습, 미비한 모습, 불완전한 모습, 부족한 모습임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을 기독교에서는 타락한 인간이라 규정하고 있습니다.

인간들의 본심은 타락세계에서 즐기면서 살고자 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인간은 6천년 동안 이 길을 피하고 피해 나왔으나 아직까지 완전히 피했다 하는 기준을 세우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악을 피하고 선을 지향하면서 그 무슨 목적을 향하여 나가는 것이 인생행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죽어서라도 악을 제거시키고 선을 붙들어야 할 목적 밑에서 악의 환경을 피해 나가는 노정이 인생행로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의 마음은 공포에 떨고 있습니다. 마음의 본향을 향하여 움직일 때는 그렇지 않지만, 악에 치우치는 자리에 서게 될 때는 그 무엇이 나를 잡고 있는 듯한 두려움을 느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죄악사, 혹은 사망의 권한, 흑암권세를 향하여 본심을 피해 가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똑똑히 기억해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도피노정에 있습니다. 하늘이 계시다 할진대 이 도피자들을 어떻게 하실 것인고? 악을 도피해 가야 할 세계 인류를 어떻게 지도하실 것인고? 하늘이 계시다면 그 지도 방법이 나와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도피의 노정은 어떠한 노정이냐? 이 땅 위에는 하나의 지도자가 없습니다. 누구의 사정을 봐주고 누구를 붙들고 내 사정을 말할 입장이 못됩니다. 수많은 인류가 왔다 갔으나 인류는 지금까지 도피해야 할 운명에 걸려 있습니다. 자기 갈 길 가기에 바쁘다는 겁니다. 도피자의 운명이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범죄자가 철창에 갇히었다가 도피한다 할진대 그 앞에 보이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자기가 살 길, 자유의 세계, 자기가 그리는 어떠한 세계일 것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자유의 세계와 자기가 그리워하는 세계에 대한 느낌이 강하면 강할수록 처한 환경에서 도피하여 달음질칠 것입니다.

그런데 인류는 도피자의 운명에 있으면서도 갈구하는 동산이 어디인지, 자기가 소망하는 곳이 어디인지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역사는 돌고 돌고 또 돌고 있습니다. 목적도 방향도 처지도 알지 못하는 입장에서 자위하면서 살아온 인간이었음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 인간이 타락하여 하늘 앞에 범죄했음으로 공의의 신과 불의의 신이 대치하고 있음을 우리는 압니다. 나라는 존재는 불의한 사탄의 구속으로부터 도망치고 있으니, 이 세계의 도주병입니다. 도피자예요. 구원성이 어디뇨? 천국이 어디뇨? 이 세상은 도피해야 할 성입니다.

도피하는 데는 개인적으로 멋지게 도피할 수 있는 방법, 자기 혼자서만 살아서는 안 되겠으니 가정적으로 도피할 수 있는 방법, 민족적으로 도피 할 수 있는 방법, 세계적으로 도피할 수 있는 방법, 천주적으로 도피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 방법을 제시하여 가르쳐 주지 못한다 할진대 하나님을 대해 사랑이니 창조주니 무슨 이념의 절대자니 하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하늘이 인간을 대하여 도피의 방법을 가르쳐 주고 지시할 수 있는 표준은 어디 있느뇨? 어떠한 학설이 아닙니다. 천상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마음에 있습니다. 이것을 똑똑히 아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에 있다는 사실을.

하늘이 도피의 방향을 지시할 수 있는 터전

마음은 자연의 이치에 부합되는 것입니다. 선을 향해 무한히 움직이고자 합니다. 그것은 자석이 남과 북을 가리키는 것과 같습니다. 자연의 이치는 방향을 잃고 선을 피해 가는 법이 없습니다. 그런 현상이 없어요. 인간의 마음도 역시 어떤 목적을 향하여 움직이고자 합니다. 생명을 향하여 움직이는 마음, 심정을 통하여 움직이는 마음, 진리를 분별하는 마음, 전체와 화합하고 싶은 마음, 전체의 어떤 이념에 화하여 살고 싶은 마음, 이 마음이 하늘이 도피의 방향을 지시할 수 있는 터전이라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도피자의 입장에 있는 우리들이 천성을 향하게 하는 이 마음을 지켜 나가려면 싸워야 됩니다. 싸움을 해야 돼요. 이 싸움을 거쳐 도피의 목적을 달성하느냐 실패하느냐의 여하에 따라 구원을 얻느냐 못 얻느냐가 결정된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과정을 거쳐 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는 어떠한 모습으로 달려야 하느냐? 여러분, 잘 생각해 보십시오. 이 싸움의 과정을 거쳐 나가는 데는 하늘이 바라시는 모습으로서, 하늘이 바라시는 작전법으로, 하늘이 바라시는 그곳까지 가야 합니다. 주체자의 프로에 응하여 상대적인 가치를 세워 나가야 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입니다.

여러분들, 여기에서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자신의 모습이 어떤가를. 어떠한 목적세계에서 움직이고 있고, 또 그 세계에 사로잡혀 오늘도 살고 있는 자신임을 부정하지 못할진대 그 자신의 모습이 인생 도피행로에 있어서 어떤 처지에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보십시오. 원수들이 앞길을 첩첩이 가로막고 있는데도 눈도 뜰 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자리에 놓여 있다는 것을 꿈이나 꾸고 있어요? 자기가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줄도 모르고 있습니다. 혹은 달음질쳐야 할 행로에서 피로하여 쓰러진 자도 있습니다. 그 모양은 천태만상입니다, 천태만상.

여러분은 자신을 되찾아야 되겠습니다. 오늘 여기에 참석한 여러분들은 어떠한 처지에서 어떠한 모습을 갖고 있는지 마음의 기준을 잡아서 자신을 분석해야 되겠습니다. 마음은 자꾸 재촉하는데 무엇인지 모르게 클클하고, 무엇인지 모르게 공포의 위압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런 자리에 있어 가지고는 안 되겠다는 것이 자연적인 현상으로도 느껴져 들어올 뿐만 아니라 보이는 모든 물상을 통해서도 작용되어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이런 것을 통해서라도 자신이 어떠한 모습으로 어떠한 처지에 놓여 있는가를 알아야만 될 것입니다.

만일 어쩌다가 여러분이 영의 눈이 열려서 보게 되면, 수천년 전에 왔다 갔던 수많은 도인들이 만인 앞에 외치고 있음을 알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의 옆에는 많은 영인들이 달음질쳐 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야, 같이 가자, 원수가 온다.’고 하며 깨우쳐 주려 하고 있으나, 여러분의 귀는 그런 소리를 들을 줄 모르고, 눈은 볼 줄 모르며, 몸은 감각할 줄 모르는 처량한 모습입니다. 탄식하자면 이 이상 탄식할 일이 없습니다. 이것은 자기 일신만의 탄식할 일이 아닙니다. 이러한 것은 존재의 가치를 전체의 이념 세계와 연결시키려는 천륜 앞에 용납할 수 없는 죄가 되는 것입니다.

본향을 향하여 달음질쳐야 할 운명

사람이 도의 길을 가는 데는 달음질만 쳐서 되지 않습니다. 목적을 이루기 위한 구비조건과 목적하는 내용을 성사할 수 있는 마음 바탕을 갖추어 가지고 그 목적을 향해 달음질쳐야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진리를 잃어버렸고, 마음의 본향을 잃어버렸고, 생명의 본체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사랑의 실체를 잃어버렸습니다. 이 네 가지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면 도피하는 자의 마음에 사무친 것은 무엇이뇨? 본향에 가는 것입니다, 본향. 그 나라에 등록할 수 있는 국민이 되려면 무엇을 갖추어야 될 것이뇨? 진리를 터득해야 합니다. 사탄이 갖고 있는 악한 세계의 모든 비밀을 알아야 되고, 타락한 이 땅의 모든 문제를 해명할 수 있는 진리를 가져야 합니다. 그래 가지고 달음질쳐야 됩니다. 오늘날의 사탄 주권을 하늘 주권으로 연결시키기 위한 목표 밑에서 인간은 진리의 본향, 양심의 본향, 생명의 본향, 사랑의 본향을 그리워하면서 그 곳을 향하여 달려야 할 운명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인류역사 6천년은 진리를 찾는 노정이었습니다. 달음질치는 데에 있어서 인간이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조건이 되는 진리를 찾고 해명하지 않으면 아무리 달음질쳐 봤댔자 소용없습니다. 내가 진리에 입각한 목적관을 가지고 나타날 때는 모든 가치를 타진할 것이며, 진리가 해명되지 않으면 모든 것은 무가치하다는 거예요. 그런 고로 인류는 지금 마음의 방향과 더불어 진리의 방향을 더듬는 단계에 있는 겁니다.

지금까지의 역사노정에는 진리의 왕이요, 진리의 근본이라 할 수 있는 그 무엇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런 연고로 이 세계 인류는 사조나 주의에 휩쓸려 들어가고 있습니다. 진리는 둘이 있을 수 없습니다. 유일이요 영원이요 불변입니다. 그렇지만 이 하나의 진리와 만인류가 화할 수 있는 내용을 갖춘 진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인륜 도덕, 혹은 사회질서를 세워 나오면서 제시된 것이 무엇이뇨? 양심기준에 응할 수 있는 진리의 표준을 찾아 나왔고, 그것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지을 수 있으리라고 알고 있지만 아닙니다. 인간이 아무리 그것을 해결했다 할지라도 자기 앞에 다가오는 생사의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문제에 걸리는 것입니다. 이 생명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이뇨? 인간의 마음은 무한의 세계와 인연 맺으려 하는데, 이 심적 작용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목적관이 없이 움직이는 것은 우주만상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더 나아가서 목적을 중심한 가치적 인연을 벗어나서 작용하는 존재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인할 수 없는 절대적인 어떤 기준에 대한 절대적인 신념을 갖고 내외적으로 침범해 오는 모든 악의 조건을 방비하라고 강력히 주장하는 마음의 작용에는 반드시 그 목적지가 있을 것이며, 그 목적지에서는 어떤 인연적인 가치를 천상 앞에 나타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때에는 마음의 움직임에 의해, 마음이 지시하는 대로 살면 됩니다. 전체목적은 모를지라도 생활적인 가치의 인연을 세우기 위하여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마음을 붙들고 본향이 어디냐고 물어 보았습니까? 보십시오. 역사는 발전해 나왔으며 문화도 발전해 나왔습니다. 문화에 따라, 혹은 인지(人智)에 따라 모든 외적인 환경도 어느 정도까지 변화 발전해 나왔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세계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이 마음의 세계에는 혁명도 없고 발전도 없고 그냥 그대로 영원이요 불변인 것입니다. 마음에 어떤 목적관이 있어 뚜렷한 목표를 설정하면 무한대로 달려 나갑니다. 남과 북을 향하는 지남철이 방향만 잡히면 그 당기는 힘 이상의 힘이 없는 한 방향은 돌이킬 수 없듯이 양심세계는 어떠한 외래적인 힘으로 움직여 내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움직여 낼 수 없는 마음의 작용은 절대적인 이념권 내에 있는 것입니다. 이 마음의 뚜렷한 목적관이 해명되면 모든 세포나 감정까지도 휩쓸려 들어가는 작용을 일으킬 수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면 문제는 간단합니다. 제아무리 훌륭한 양심작용이 있다 할지라도 그 사람이 갖춘 정도 이상의 작용은 못합니다. 이해하겠어요? 자기가 갖춘 정도 이상의 작용은 못해요. 물론 주체적인 입장에 있지만 몇 천만배 이상은 못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은 육신을 수습해야 할 상대적인 입장에 있기 때문에 상대적인 관계를 벗어나서는 작용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양심에도 차이가 벌어집니다. 천태만상의 차이가 있지만 그 양심은 무엇인지 모르게 본질을 향한 방향성을 갖추고 있습니다. 이러한 양심의 방향을 확정짓기 위하여 관(觀)이라는 것이 나옵니다. 인생관이니 우주관이니 하는 것, 또 무슨 주의 주장이나 진리의 표상이 나옵니다. 상대성을 지닌 완전체라는 거예요. 완전한 마이너스(-)가 있으면 완전한 플러스(+)를 대충 알 수 있습니다. 완전한 플러스가 있으면 완전한 마이너스는 성립될 수 있어요. 이것은 자연현상입니다. 따라서 천상에 영원불변한 완전한 주체가 있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은 그 완전한 주체를 본받아 그 주체 앞에 상대기준을 조성하기 위하여 오늘도 내일도 노력해 나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무턱대고 인간의 마음기준을 옮겨 놓으려야 옮겨 놓을 수 없습니다. 몸과 박자를 맞추어서 옮겨 놓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몸을 다스려서 그 몸을 어떤 환경에 몰아넣은 다음 그 심정의 방향을 자연적인 법도와 맞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의 진리의 법도가 세워지길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만약에 세계를 통할 수 있고 하늘의 원칙과 부합될 수 있는 진리가 나온다 할진대 이 양심은 무한대로 뻗어 활동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연고로 인간들은 진리를 찾아 나옵니다. 그러나 오늘날 20세기 문명을 자랑하는 문명세계에 있어서 인간의 마음이 솟구쳐서 찾고자 하는 무한대의 절대자 앞에 자연적인 상대기준을 조성할 수 있는 모습이 되도록 재촉할 수 있는 진리는 지상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 연고로 인간은 타락의 한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에게 이 모양으로 가르쳐 주고 저 모양으로 뒤넘이쳐 나오시면서 하나의 목적에 연결시키기 위한 서글픈 역사를 하고 계시다는 것을 여러분이 생각해야 됩니다.

오늘날 내가 인생행로를 걸고 진리의 방향을 찾아 나가는 도피행로에 있어서 하나님은 얼마나 수고하셨겠습니까? 오늘날까지의 인간 역사의 모든 서글픈 심정과 인간 역사의 비참한 사정을 논위하게 될 때, 여러분은 무시무시한 역사였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역사를 진행시켜 나오는 주체자측에게는 더 무시무시한 투쟁이 지금도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 된다는 거예요. 그런 투쟁이 없다면, 여러분이 편히 눈을 감고 자고 쉴 수 없는 비참사가 벌어질 것입니다.

마음은 시작과 끝이요 영혼과 실존적인 본체와 연할 수 있는 것이기에 그런 슬픔이 사라질 때까지, 그런 슬픔을 영원히 벗어나 해결지을 때까지 그것과 똑같은 자극적인 슬픔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느껴야 되겠습니다. 그런 슬픔을 재촉한 것이 인간이요 그런 슬픔을 연결시키고 연장시켜 나온 것이 인간이니, 이러한 인간을 대해 심판하는 것은 타당한 처사일 것입니다.

우리의 갈 길

이제 인간은 진리를 갖추어 가지고 본향을 향하여 달음질쳐야 되겠습니다. 그 다음에는 생명을 찾아야 됩니다. 내 생명의 주체는 어디 있느뇨? 영원불변의 생명의 주체는 어디 있느뇨?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은 사랑이라 하였고 예수도 사랑이라 하였는데, 그 사랑의 주체는 어디 있느뇨? 이와 상봉하여 ‘내가 갖고 있는 진리의 가치는 이것이외다. 내가 갖고 있는 양심의 기준이 이것이외다. 내가 갖춘 사랑의 기준이 이것이외다’ 하면서 그 가치적인 결정을 받아서 가는 곳이 영계입니다. 영계는 지극히 선한 천상세계가 있는가 하면 그 반대되는 사탄세계, 악한 지옥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가졌습니까? 이제 우리는 찾아야만 되겠습니다. 마음의 현상을 보아 내 마음이 이런 관계에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이제 내 마음을 무한히 솟구치게 하는 본체 앞에 자연적인 작용으로서 음적인 마이너스 입장, 혹은 양적인 주체 앞에 대상적인 입장에 설 수 있는 역사적이요 시대적이요 미래적인 진리가 필요합니다. 아시겠어요? 그래서 진리를 찾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슨 주의를 찾는 거예요.

그리고 더 나아가 진리를 찾아 헤매던 선조들을 비웃을 수 있는 위대한 용자가 나와야 되겠습니다. 역대의 성현 현철들을 대하여 대관절 무얼 했느냐고, 수많은 도를 세운 도주들을 대하여 무엇을 했느냐고 항의할 수 있는 하나의 용자가 땅 위에 나타나기를 나는 고대합니다. 그래야 될 거 아니에요?

그것이 도피하는 생활을 하는 인간에게 있어서 필연적인 조건이요 구비해야 할 절대적인 조건임에 틀림없다면, 오늘날 인간은, 그들로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운명에 놓여 있습니다. 스스로 이런 환경에 나고 싶어서 태어난 인간이 아니요,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원인적인 내용을 갖고 있는 인간도 아니기 때문에, 언제나 상대적인 입장에서 가치적인 관계는 갖고 싶어하되 가치적인 인연을 맺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인생행로에 있어서 자기의 가치를 자랑하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꺾여 넘어가나 안 꺾여 넘어가나. 되지 않은 꼴을 해 가지고 으스대면 그 주위 환경의 만물까지도 ‘이 녀석!’ 합니다. 이것이 우리 양심을 가진 사람의 본연의 현상입니다. 돼먹지도 않은 자가 꺼떡거리면 여러분 어때요? ‘어! 너 잘 한다.’고 치켜세워 주고 싶어요? 아닙니다. ‘이 녀석!’ 하고 한 대 치고 싶단 말입니다. 이것은 나쁜 마음이 아닙니다. 본연의 현상인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 있는 여러분들, 이것을 똑똑히 명심하여 자기의 가치를 주장하고 나서는 자의 모습을 한번 보십시오. 무슨 주의? 무슨 관? 양심 세계는 주의도 없고 관도 없습니다. 이것 똑똑히 알아야 돼요. 양심세계는 주의도 없고 관도 없어요. 따로 떨어져 나가 가지고 해명할 수 없는 세계입니다.

그러면 오늘의 우리의 가치는 얼마나 자랑할 수 있느냐? ‘나는 무슨 주의를 갖고 있으며, 나는 어떠한 존재다.’ 하는 것은 어리석은 놀음일 뿐입니다. 관의 내용을 중심한 진리 앞에, 천리적인 내용을 내포한 어떠한 마음 혹은 생명 앞에, 사랑의 심정 앞에 자신의 모습이 부끄럽지 않은가 여러분 판별해 보십시오. 거기서부터 자기를 찾는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인생이 바라는 최고의 것

우리는 이러한 운명에 처해 있으니, 아니 가려야 아니 갈 수가 없습니다. 필연적이요 절대적입니다. 진리의 본향에서 더불어 즐길 수 있는 마음, 진리와 마음이 합하여서 움직일 수 있는 생명, 진리와 마음과 생명이 접하여 천정(天情)을 일으킬 수 있는 사랑, 이것이 인생이 바라는 최고의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은 어떠한 입장에 있습니까? 엄연히 사지백체를 갖고 있고 감정을 갖고 있다 할진대 여러분의 시선은 무엇을 바라보고 있고, 머리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으며, 여러분의 사지는 무엇을 향하여 움직이고 있는가 하는 문제에 걸릴 것입니다.

‘손아, 너는 진리를 그리워하고, 진리를 찾기에 얼마나 수고하였느냐? 몸아, 너는 진리를 향하여, 본체를 향하여 수시로 달리고 있는 마음 앞에 얼마나 협조했느냐?’ 하고 반문해 봐야 됩니다. 오늘도 내일도 될 대로 되라, 한술 먹었으니 그만, 한잠 잤으니 그만, 이렇게 그만 그만 하다 보면, 인생은 다 지나가고 사망의 절벽에 코를 쥐어박고 가야 할 운명에 놓이게 됩니다. 여러분! 인간은 그렇게 무가치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렇게 무질서하고 무목적적인 입장에서 살라고 대우주의 주인이 우리의 생명을 땅 위에 내놓지 않았습니다.

원인과 목적을 기반으로 한 관계의 현상세계를 통하여 변함없이 그 목적을 추진시키려는 어떠한 인연이 있는 것을 무시 못 할진대 그 인연을 종합하여 관계와 가치를 논해야 할 인간이 그렇게 시시해서야 되겠습니까? 여러분은 그런 인간이 아니에요. 여기에 똑똑한 사람이 왔을는지 모르지만 ‘나는 뭐 인텔리인데’ 하면서 어디 가도 도피하려고 하는 사람은 한번 이 방면을 노크해 보라는 것입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마음의 방향을 높여야 되겠습니다. 마음의 세계를 높여야 되겠습니다. 땅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높은 곳을 바라보아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세계만이 아닙니다. 하늘을 보아야 되겠어요. 하늘을 높이 바라보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마음세계는 땅의 생명으로서 만족하지 않습니다. 땅의 어떤 목적과 이 세계의 양심작용은 거기에서 머물려고 하지 않습니다. 일생 동안 어떠한 만족에 취할 수 있는 생명력을 지니거나 내 심정이 무한대로 뻗어갈 수 있는 영원한 관계를 맺고자 한다는 것을 여러분이 부정하지 못할진대 역사의 종말을 비웃고 넘어설 수 있는 진리의 모습은 어디 있느뇨? 마음의 모습은 어디 있느뇨? 생명의 모습은 어디 있느뇨? 사랑의 모습은 어디 있느뇨? 찾아봐야 되겠습니다.

메시아 앞에 완전한 신부가 되는 길

만일 이 땅에 어떠한 메시아, 구세주가 나왔다 할진대 그는 그러한 내용을 실천할 수 있는 목적관과 실천적인 가치의 내용을 갖고 인간과 하나님을 연결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생활 과정에서 증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지 못한다면 그는 메시아도 아니요 구세주도 아닙니다.

인류역사가 출발한 이래 지금까지 만민 앞에 새로운 각도와 새로운 방향에서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무엇인지 모르게 공헌해 나오고 있는 것이 있으니, 그것이 종교입니다. 종교 중에서도 기독교가 세계의 문화 창조에 위대한 공헌을 해 왔습니다.

그러면 이 기독교의 내용이 무엇이냐? 그 내용은 예수입니다. 믿는 자들은 이 예수를 구세주라 말하고 있습니다. 구세주는 어떠한 모습이어야 되느냐? 그는 진리의 본체요, 마음의 본체요, 생명의 본체요, 사랑의 본체여야 합니다. 마음의 본체가 못 된다면, 그는 절대자의 본체 앞에 상대적인 상대체라도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서 우리가 하늘의 섭리를 돌이켜 보면 역사노정에서 예수처럼 통쾌한 말을 한 사람이 없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독생자다.’라고 하신 이 한마디만 봐도 멋지고 사나이답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구세주라는 명사를 빼놓고도 사나이답다는 거예요. 역사 이래 이렇게 통쾌하고 멋진 표현을 한 사람 봤어요? 가상적이라도 좋아요. 내용은 없다 하더라도 이런 멋진 말을 들어봤느냐 말이에요.

또 ‘너희들은 누구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리 정적인 마음을 가진 호남자가 있다 할지라도 이 이상 통쾌한 말을 들어봤어요? 남자로서 최고의 감성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어때요? 안 그래요? 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목적하는 주체 앞에 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런 논리 밑에서 예수의 말씀이 해명되고 모든 조건에 부합되니, 나는 그를 메시아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수는 인류를 죄의 굴레에서 도피시켜 주기 위한 왕자로서 우리의 인생행로를 개척하러 오신 선봉자였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천상천하에 홀로 나타난 도피의 왕자였다는 말입니다. 후대에 남아 있는 전인류도 죄의 굴레에서 도피해야 할 사람들이지만 그들의 왕자로서 이 땅 위에 오신 분이 예수였다는 거예요.

이러한 예수라는 것을 느낀다면 역사적인 진리를 해명받아야 됩니다. 이 예수를 붙들 때 본연의 양심기준이 뚜렷하게 서야 됩니다. 예수님을 볼 때 생명의 영원성이 뚜렷하게 박혀야 됩니다. 이 예수를 볼 때 절대적인 사랑의 감정이 들어야 돼요. 그렇지 못하면 완전한 신부가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 말이 쉽지, 예수는 억천만상을 다 지으신 하나님의 독생자입니다. 독생자는 하나님의 황태자입니다. 하늘 왕국에 영원무궁토록 계실 독생자 황태자이십니다. 이런 목적을 바라보고 세운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바라는 목적의 날이 그 분을 다시 만날 수 있는 재림의 날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내용이 있기 때문에, 인간들은 아직까지 절대적이요 영원한 생명의 인연은 못 맺었습니다. 암만 예수 잘 믿어도 언젠가는 떨어져요. 암만 예수가 내 신랑이요 무엇이라 해도, 또 배반할 수 있고 또 떨어져 나갑니다. 진리니 뭐니 주장하는 기독교가 있지만, 인간이 나아갈 마음 방향도 완전히 잡아 주지 못하고 있어요. 그러니 예수는 다시 오셔야 됩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개척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예수를 잘 믿는 것보다도 성경에 감추어진 진리를 찾아야 됩니다. 인생행로에 있어서 비운의 곡절을 일으킨 역사적인 모든 내용이, 어떻게 해서 현실과 미래의 세계와 연결되느냐를 알기 위해, 안팎의 검은 장벽을 헤치고 들어가야 되겠고 또 그것을 헤치고 나아가기 위해 싸워 이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자격자들이 나와야만 비로소 진리의 세계가 개척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노정에서 선에 가까이 있고 혹은 진리에 가까이 있던 그 시대의 선봉자들은 어디를 찾아 헤매었느뇨? 광명의 새 아침을 찾아 헤매지 않았습니다. 그 마음으로는 영광스러운 느낌을 가졌지만 생활면에 서는 지옥의 뒷골목을 헤매었습니다.

진리의 뿌리가 박히는 곳

진리는 거기에서 연락됩니다. 진리의 터전은 거기에서 뿌리박습니다. 진리는 호화찬란한 최고의 문화수준에서 뿌리박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문화의 뒷골목에서부터 진리의 뿌리가 박혀야 됩니다. 진리의 뿌리는 천상에 박을 것이 아니라 타락한 이 땅에 박아야 됩니다. 진리의 뿌리는 천국에 둘 것이 아니라 지옥의 밑창에 두어야 돼요. 거기에 진리의 뿌리가 박히는 날, 천상과 연락될 수 있는 하나의 생명체가 나타나게 될 때, 하늘의 새로운 생명의 기준은 세워질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진리를 이상적인 단면으로서, 소망의 표적으로 세웠지마는 그것을 찾아가는 노정에서는 그 뒷골목을 헤매고 있습니다. 생명의 표상을 바라보며 생명의 뒷골목을 헤매고 있고, 마음의 뒷골목을 헤매고 있고, 사랑의 뒷골목을 헤매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이 바라는 최고의 도를 찾아 나가는 기준임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도의 생활을 하는 사람이 본체적인 기준에서 즐거워하는 것 같지만, 도의 뒷골목에서 허덕이면서 그것을 노래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처량한 도의 생활입니다.

어떤 민족의 문화를 보더라도 그 민족이 혁신하고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는 동기와 원천은 어디서 나오느뇨? 불쌍한 자를 붙들고 울 수 있는 마음을 폭발시키면 새로운 소망의 불길은 타오르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불길은 타오를 거예요. 이 나라가 잘 사는 나라가 되려면, 이 나라가 소망이 있는 나라가 되려면, 숨김이 없는 경건한 마음으로 불쌍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붙들고 그들을 위하여 울 수 있는 환경을 이루어 놓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이 나라는 세계를 지배할 것입니다.

예수의 땅 위에서의 처지는 어떠했던고? 가공적인 이상세계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허황된 입장에서 만군의 여호와의 가치를 노래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내용은 그렇되 생활 면에서는 지옥의 왕자였습니다. 이걸 알아야 됩니다. 생활 면에서는 지옥의 황태자였어요. 진리를 주장하고 진리를 개척하는 데 누구보다도 노심초사하셨다는 거예요. 하나를 알면 열 가지를 근심하신 예수였습니다. 자기 일대를 위해서 세상 사람들은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하나의 고통을 느끼지만, 예수는 하나를 알고 하나의 진리를 해명해 주는데 천만사의 고통을 느꼈습니다. 그런 지옥의 왕자의 생활을 하신 예수였음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 예수였기 때문에 지옥에 가도 당당히 지옥을 지배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냥 놀면서 얻은 것이 아닙니다. 체험하지도 않고 느끼지도 않은 사실로 징계하고 징벌하고 형벌 한다면, 그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만약 대한민국에 어떤 주권자가 법적인 조건에 걸린 자를 처벌하는 데 있어서 자기가 느낄 수 있는 심각한 입장에서 형법적인 조건을 세워 놓는다면 이 나라는 살 가망성이 있습니다. 너는 그래도 나는 관계없어. 하는 입장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그런 심적인 느낌을 갖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러한 권한을 갖고 오셔서 나를 사랑하라 하셨는데, 어찌하여 사랑하라 하셨느냐? 거기에는 ‘순간적인 입장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네 모습이 아무리 귀하다 하더라도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사랑하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너희들을 보다 더 좋은 데서 사랑하시리라.’ 하는 뜻이 있었던 것입니다. 나타난 모습은 처량하였으나 180도 반대 방향의 말씀을 하셨다는 것을 여러분 아십시오. 과연 자신이 늠름한 내용을 갖춘 모습이 아니고는 그렇게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견지에서 예수는 메시아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진리는 사탄을 무찌르는 무기

오늘날 우리들에게 있어서 너와 나의 인연이 어떠한 관계로 이루어졌는지 모르지만, 여러분과 여러분이 바라보는 사람 사이에 어떠한 곡절이 맺어져 있는지 모르지만, 가신 예수의 모습을 추구하는 것보다도 실체적인 예수를 논위할 수 있는 영광의 가치를 가졌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오늘날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역사적인 예수를 믿어 왔고 그를 역사적인 구주로 존칭하여 왔으되, 하나님의 섭리 앞에 메시아의 실체 가치를 대하여 논위할 수 있는 완성의 기준을 갖고 대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이왕이면 사람으로 태어났다가, 이 땅의 역사적인 한 실체를 가진 인간으로 태어났다가, 그렇게 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진다면 그는 진리의 왕자가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요 16:12) 하셨고,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요 3:12) 하셨습니다. 이러한 사정을 가진 그는 진리의 실체만이 아니었고 양심의 본원이요, 생명의 본원이요, 사랑의 본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예수 앞에 ‘이것은 이렇지 않습니까, 이러이러해야 되지 않습니까?’ 하며 타진할 수 있는 멋진 사나이가 있다 할진대 우리가 쌍수를 들어 그를 환영하고 모시며 예수보다 더 높인다 해도 예수께서 책망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제 메시아의 기준을 알았으니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예수를 알았으니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예수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또 ‘천국은 네 마음에 있다.’고 하셨으며,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도 하셨습니다. 전부 자신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 예수를 성경 가운데 재현시켜야 하는 것이 기독교인들의 최고의 의무입니다. 그 예수를 이 성경 가운데 재현시켜야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네 안에 있고 네가 내 안에 있다.’고 말씀하셨으매, 그 예수를 내 마음에 재현시켜야 합니다. 그것이 안 되면, 마음이 지향하는 그 기준에 안 맞으면 전부 다 깨져 나가는 것입니다. 내 심중에 재현하고, 내 생명이 약동하는데 재현하고, 내 심정이 움직이는 데 재현할 수 있는 자라야 오시는 주님을 맞을 수 있습니다. 나는 가공적인 주님은 원치 않습니다. 그러한 주님은 필요 없습니다.

도피의 노정에 있는 인간에게 적의 공격이 있을 것이요, 적의 방비가 있을 것인데, 그것을 무찌를 수 있는 하나의 기준이 무엇이냐? 진리입니다. 사탄세계의 모든 것을 해명하고 하나님을 배신한 사탄을 죄인으로 몰아세우고 예수를 내세워 결국에는 사탄을 이길 수 있는 내용을 갖출 수 있는 것이 진리입니다.

사탄이 무엇과 같으냐? 검사와 같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변호사입니다. 하나님은 재판장입니다. 우리는 죄수입니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도피의 노정에서는 우리가 검사의 입장에서 예수를 변호사로 하나님을 심판자로 모시고, 사탄을 범죄자로 처벌해야 합니다. 사탄의 근원부터 모든 것을 해명하여 ‘이러이러한 죄상이 있으니 천상의 처벌이 있기를 바라오.’ 하면 ‘오냐’ 하고 대하시는 예수와 거기에 판단을 내리시는 아버지를 모실 수 있다면 무서울 것이 무엇이겠어요? 그런 승리의 기준을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예수와 인연을 가졌다 할진대 그 마음의 세계는 무사통과입니다. 그 마음에 공포가 있을 수 없습니다. 공포의 현상은 악에 의한 흑운의 날개를 펴고 천지간에 움직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그것을 해명지어 그 주체를 몰아낼 수 있는 입장에만 선다면 세상 천지를 무너뜨리는 어떤 무엇도 그런 사람의 생명을 지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늘의 초대를 받을 수 있는 귀빈

여러분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에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사이에 진리의 물결이 침투하고 있습니다. 양심세계의 흐름이 침투하고 있습니다.

생명의 감촉을 접하고 있습니다. 심정의 인연이 감돌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그것들을 대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황공하옵니다. 어서 오시옵소서.’ 하며 반겨 맞은 때가 있었습니까? 없다 할진대 천상과 지상의 범죄자일 것입니다.

‘진리의 물결이여, 내 마음을 치소서. 하나님의 심정의 움직임이여, 내 마음에 임재하소서. 하나님의 생명의 감촉이여, 내 마음에 임재하소서. 하나님의 사랑의 인연이여, 내 심정을 주관하소서.’ 하면서 눈물짓는 자가 있다 할진대 그는 학박사보다도 더 훌륭한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하늘이 환영하고 초대할 수 있는 귀빈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는 그런 자리에 계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민족의 죄악상을 바라보고 ‘이 민족들아! 너희들은 이 민족 가운데 하나님의 4천년 진리의 흐름이 있는 것을 모르는구나. 너희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심성이 솟구치고 있는 것을 모르는구나. 너희들의 몸에 하나님의 사랑이 머물고, 오늘 이 시간도 애달픈 심정과 서글픈 심정으로 곡절과 비애와 절통한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며 통곡하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모르는구나.’ 하시면서 우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갔습니다. 예수는 왔으되 할 일을 못다 하고 가고 말았으니, 남기신 그 일을 누가 책임질 것이냐? 배워 두어야 할 그 진리를 누가 인계 맡아서 우리에게 가르쳐 줄 것이냐? 개척해야 할 마음밭을 누가 개척할 것이냐? 세워야 할 생명의 기준을 누가 세울 것이냐? 화하여 영원히 영원히 인연 맺어야 할 사랑을 누가 인연 맺어 줄 것이냐? 예수는 한탄, 한탄, 한탄하면서 하나님 우편에서 기도해야 할 운명에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 예수가 신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분이 우리의 신랑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무리 목석같은 인간이라 할지라도 그런 심정에 잠기어 세상을 바라볼 때에는 거기에 예수의 눈물이, 피 살이 묻어 있는 것을 알고, 천지를 바라볼 때는 하나님의 사랑이 심중에 점점 스며오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버님! 예수님! 하면서 남이 가지 않는 길을 밤에도 쉬지 않고, 낮에도 쉬지 않고 천륜과 함께 달음질친다 할진대 그는 하나님의 동역자입니다. 하늘은 그러한 사람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인류는 그러한 사람이 나오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우리 대한민국도 그러한 청년 남녀들이 나오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남들이 호화찬란한 네온사인 불빛 아래서 술잔을 기울이는 그 시간에도 가슴을 붙안고 ‘하늘이여! 땅이여! 이 운명의 서글픔을 나에게 맡겨 주시옵소서.’할 수 있는 청년 남녀가 있다 할진대 이 나라는 절대로 망하지 않습니다.

만상의 뒷골목에 뿌리를 박은 생명의 이념이 있다는 것을 망각하면 망합니다. 높은 자리에 가기 전에 낮은 자리에서 희생의 제물이 되어 피를 뿌리고 쓰러지면서 ‘이 민족아, 이 나라의 운명아.’ 하여 염려할 줄 알아야 합니다. 또 그런 염려의 음성을 듣고 그곳을 찾아갈 줄 아는 위정자들이 있다면 그 나라는 흥합니다. 하늘의 역사는 그러한 역사였습니다.

이 땅에 온 어떤 선지, 혹은 하늘이 택한 어떤 훌륭한 자 가운데 피를 뿌리는 노정을 가지 않은 자가 어디 있으며, 피땀 흘리는 노정을 가지 않은 자가 어디 있어요? 인생행로의 뒷골목에서 허덕이고 밟히고 차이고 밀리고 쓰러짐을 당하여도 그 길을 가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도의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서러움 속에 있는 사람들을 숭배합니다. 그들은 죽음의 뒷골목에 생명의 뿌리를 박기 위하여 허덕이고 몰리고 있습니다. 이 민족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역사와 생명의 흐름과 진리의 흐름과 심정의 흐름과 사랑의 흐름과 인연 맺어 그 터를 넓혀 온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늘도 무시 못합니다. 무시 못해요.

인류의 뒷골목에서 인류 전체를 책임지겠다고 하신 예수는 영광의 메시아가 아니었습니다. 사랑과 기쁨과 행복을 노래할 수 있는 메시아가 아니었습니다. 고통의 메시아였습니다. 슬픔의 메시아였습니다. 죽음의 메시아였습니다. 지극히 억울한 뒷골목에서 인류를 책임지고 도매금에 팔린 예수였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를 믿는 일은 성큼 뛰어나가서 붙드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구 죽겠구나. 너도 가라’ 하고 울면서 덥석 붙드는 놀음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부정하겠어요?

이 예수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눅 9:23) 하셨습니다. 여기서 자기라는 것이 무엇이냐? 사탄세계의 권한입니다. 자기를 중심삼은 개인의 권한, 자기를 중심삼은 비판의 기준, 자기를 중심삼고 느끼는 세계는 세상의 왕, 사탄으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이것을 끊어 버리고 외로이 눈물지으면서, 암담하고 캄캄한 인생행로의 뒷골목에서 허덕이는 데 있어 거름이 되고 거기에 한 원소 원소로서 흡수되어 생명이 뿌리박을 터전을 닦는 사람들이 도의 생활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새 말씀을 가지고 재현하는 주인공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그런 생활을 해야 됩니다. 호화찬란한 문화의 첨단에서 새 시대의 꿈을 노래하며 거기에서 만족하는 사람들이 있다 할진대 그들은 역사로부터 규탄받을 것이며, 이 세상 말단의 심판대 위에 밀어 넣어질 것입니다. 반면에 ‘너희들은 다 가라. 내가 이곳을 지켜 주마.’ 하면서, 사망의 구렁텅이를 자신의 몸으로 피눈물로 메워서 평지로 만들고자 하는 모임이 있다 할진대 하나님께서는 그 모임을 통하여 운행하실 것입니다.

역사는 새로운 이념과 새로운 모양으로 이루어지는데, 그것은 좋은 자리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나쁜 자리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여러분들, 이것은 다 배워서 알지요? 그렇기 때문에 죄가 있는 곳에 은사가 많다는 거예요.

이제 가야 할 우리는 마음을 헤치고서 ‘하나님이여! 예수는 오셨다 가셨으되, 나의 마음이 무한히 솟구쳐 절대자 앞에 늠름히 나설 수 있는 상대적인 가치를 노래할 수 있는 심적인 기준을 갖지 못하였으니, 저는 어이합니까?’ 하고 항의할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를 붙들고 항의해야 되겠습니다. 성경을 붙들고 항의해야 되겠습니다. 남의 말만 믿다가는 망합니다. 망해요. 한국 백성은 남의 말을 듣다가 예속 국가가 되는 비운의 역사를 가졌습니다.

이제 우리는 말 못하는 입장에서 인류를 찾아 나오시는 하나님 앞에 있어서, 남의 말을 무조건 백 퍼센트 믿을 수 없습니다. 본질적으로 틀린 형태가 있기에 가라지와 곡식을 비유했습니다. 믿을 수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마음의 터전과 진리의 터전이 내 심정에 이렇게 이렇게 해라 하고 말은 했지만, 그 말한 내용이 결과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을 땐 항의를 해야 됩니다. 항의를 하려면 ‘나는 이러이러한 사람’이라고 변증을 해야 됩니다, 변증을. ‘아버지, 이러이러한 내용은 이러 이렇게 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되어야 할 텐데, 왜 그렇게 안 되었습니까?’ 하면 하나님은 대번에 ‘오냐’ 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생각해 봤어요?

오늘날 기독교에서는 주님이 재림한다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미륵불이 이 땅에 오고 유교에서는 진인이 이 땅에 나타날 것을 말합니다. 각 종교가 주님의 재현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의 말씀을 그대로 재현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 분은 성경의 말씀을 재현하는 주인공, 어떠한 도의 말씀을 재차 하는 주인공이 아닙니다. 고차적인 내용의 새 말씀을 가지고 재현하는 주인공을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들은 하늘이 있다 할진대 하늘 앞에 그에 대한 대답이 나올 때까지 항의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봤어요? 예수님이 ‘진짜 그래? 하나님이 진짜 그래?’ 하며 항의해야 될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역사가 발전될 것입니다.

오늘날 도를 믿는 도인들이 도주를 숭상하고 역사적인 어떠한 방향성을 갖추어 나왔으나 그 생활적인 면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도주의 상투 끝에 올라가서 하나님을 붙들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될 게 아니에요? 그들의 경서에 나타난 것으로는 모든 것이 해명되지 않으니, 그 꼭대기를 밟고 올라가서 하나님께 항의를 해야 됩니다. 도주를 대하여 항의를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목적이 뭐예요? 믿고 뭐 할 것입니까? 신부가 되겠다고요. 신부가 되어서는 뭘 할 것이냐? 잘 살아. 살면 뭘 할 것이냐? 주고받고 하는 거지요. 그러므로 그렇게 안 됐으면 항의도 해야 될 게 아니에요? 우리가 신랑이신 예수를 만나자는 것인데, 예수의 사랑을 받아 보았어요? 난 그렇게 안 믿습니다. 예수야 사랑하겠으면 하고 말겠으면 말고 상관할 것 없이 나는 예수를 넘어 하나님의 사랑을 받겠습니다. 예수는 조건입니다.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한 조건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누가 나를 끊으리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 이것은 신부 명사권 내에 있는 사랑이 아닙니다. 예수도 신부를 맞이하여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하면, 이 천상의 대 위업을 인계받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을 중심삼은 사랑의 인연을 맺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여러분이 이러한 내용을 갖추기 위해서 마음 문을 열고 진리의 물결이 파도치는 감촉을 느껴 보았습니까? 지극히 맑은 양심을 재촉해 봤습니까? 혹은 양심에 속삭여 들어오는 생명의 흔적을 붙들고 노래해 봤습니까? 무한한 세계와 인연을 맺어 생명의 폭발력으로 나타나는 심정적인 그 무엇을 느껴 봤습니까, 못 느껴 봤습니까?

인간을 통해 자기를 표현하고 싶어하시는 하나님

피조물이지만 자가 창조의 진리적인 면, 자가 창조의 심정적인 감성, 자가 창조의 생명적인 감성, 자가 창조의 사랑적인 감성을 자기 분량만큼 느끼게끔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사랑받을 것이 아닙니까? 죽은 모습을 하고 있다면 누가 사랑하겠습니까?

진리적인 모양이든가, 심정적인 모양이든가, 마음의 모양이든가, 생명적인 모양이든가, 사랑의 모양이든가 자기의 본성을 근거로 한 자동적인 발동력을 가질 수 있는 자극을 느낀 자라야만 하나님이 ‘오냐 내 아들이다’ 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사는 것입니다. 이것을 부정하겠어요?

까딱 잘못하면 오해하기 쉽습니다. 본성적으로 부여된 기반 위에서 자기 자신의 생명, 자기 자신의 진리, 자기 자신의 마음의 힘, 자기 자신의 생명의 충격 등 자가자칭할 수 있는 원천적인 내용, 동기적인 내용을 갖추어야 절대자 앞에 상대적인 기준을 세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면 그저 까먹고 세워 주면 쓰러지고 하는 자들은 안 됩니다.

오늘날 도피성을 향하여 달리고 있는 인생행로에 있어서 나의 모습은 어떤가? 하늘은 무엇을 바라고 계신가? 우리 인간이 말씀하신 진리의 원동력이 될 수 있는 실체가 되기를 고대하시며 6천년 동안 하나님은 허덕이셨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경지에서 들어가게 될 때 그리스도가 그런 것처럼 ‘나는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도 내 안에 있다.’ 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체험해 보면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동기적인 느낌을 가지고 이 사망의 길을 멋지게 가려는 도피의 왕자는 붙들 자가 없습니다. 여러분, 그는 진리와 더불어 움직이고, 우리의 마음세계와 화하고 생명원칙과 인연을 맺어 무한히 운동하고, 심정세계와 더불어 무한한 창조의 묘미를 나타내는 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하늘이 절대 보호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경지에서 자기의 가치를 논위하고 자기를 중심삼고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논위할 수 있게 된다면, 그 모습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은 얼마나 기쁘시겠어요. 여러분 보십시오. 내가 만일 어떤 책을 써서 ‘거기에 아무개 아무개는 이렇다.’고 했을 때에 그 사람이 ‘야 이놈아! 너 기분 나쁘게 왜 그러느냐?’ 할 것 같아요? 어때요? ‘그대가 말하지 않아도 그대의 마음이 이렇지 않습니까?’ 하며 좋은 곡조로 노래를 불러주면 어떻겠어요? 여러분 같으면 어떨 것 같아요?

하나님의 창조이상은 자기의 심성에 내재해 있는 모든 자극적인 감성을 오늘날 우리 인간에게 드러내어 가지고 그 가치를 보고 기뻐하시려는 것입니다.

자기를 중심삼고 사는 사람은 결국 자기가 없어지고 망합니다. 자기의 가치를 백 퍼센트 노래한 자들은 죽음과 더불어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가정의 효자, 열녀, 혹은 일개 종족으로 이루어진 국가의 충신들도 그 국가가 세계 사조에 휩쓸리고 융합되고 망하게 될 때에는 함께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도피성을 향해 달리는 데 있어서는 어떠한 개인적인 것과 자기중심적인 감정은 모두 끊어 버리고 가야 합니다. 6천년 역사 이래 그런 사람이 나왔다면 하나님이 그를 축복해 주지 않을 수 있었겠어요? 그런 사람이 안 나와서 한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만일에 한국에 그러한 청년이 나온다면 하나님을 이 한국에 모셔 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망언이 아닙니다. 전파를 캐치(catch)하는 수신기가 강력히 끌어들일 수 있는 내용을 갖출 때는, 모든 힘을 받아 가지고 다시 발송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원동력을 지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지금까지 자신을 붙들고 자탄하였고, 나 하나에 국한된 가치를 논위하며 슬퍼하였습니다. 처량합니다. 일개 가정, 일개 국가, 세계의 주의 사상에 자기의 목을 걸고 허덕이는 인간들의 무가치한 모습을 바라보고, ‘야 이놈들아, 비켜!’ 하고 소리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오시는 용자가 메시아입니다.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관계의 세계

관념적인 역사관은 쉬 지나갑니다. 인식적으로 이 우주를 해명하지 못하면 역사는 이대로 계속될 것입니다. 역사는 우리의 모든 기준과 기반을 닦아 주지 못하고 해결해 주지 못하였으니, 이러한 근본적인 문제부터 해명해야 합니다.

외적으로는 역사의 흐름과 내적으로는 마음이 움직이는 방향에 박자를 맞추어 가며 멋지게 뒤넘이칠 수 있는 회전 지점에서 하늘 앞에 선다면 하나님께서는 ‘오냐, 승리의 왕자다.’ 하고 인(印)쳐 주실 것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이 사람은 그렇게 믿습니다.

이제 우리가 누구의 말을 들을 때는 지나갔습니다. 어떤 진리보다도, 천만 배 훌륭한 스승의 말보다도 내 마음의 말을 듣고, 들어도 또 듣고 싶어 그 마음을 찾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나도 알 수 없는 무한대의 무엇이 나옵니다. 그것이 창조의 내용입니다.

어떤 위대한 과학자가 어떤 고분자 공식을 풀어 들어갈 때, 거기에 비례될 수 있는 상대적인 기분을 못 잡아서 허덕이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상대적인 기준만 딱 잡으면 그 모든 것이 해명되는 수가 있습니다. 그 기준을 잡기 위해서는 잠을 잊어버리고, 먹을 것을 잊어버리고, 자기의 생활적인 감정을 잊어버리고, 지금까지 자기의 오관으로 느끼던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몰두해야 합니다. 그렇게 허덕일 때 어떠한 내적인 체계로부터 외적이요 실증적인 공식이 문화의 궤도로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러한 작용을 하는 중간 기관밖에 못 됩니다. 그러한 인간인 우리들은 오늘날 어떠한 입장에 있느냐? 원인적인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요 목적의 세계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관계의 세계에서 허덕이고 있습니다, 관계의 세계. 그런데 이 관계의 세계는 지나가고 있습니다. 수학문제를 풀 때에 어떤 공식에 갖가지 수를 대입시켜서 답이 나오면 그 답 외에 나머지 것은 필요 없는 것입니다.

관계의 세계가 비참하였으니 이 관계 세계의 비참사를 해명하여 내정된 하나님의 뜻과 심정을 연결시킬 수 있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는 반드시 영생합니다. 역사와 더불어 심판받지 않습니다. 끝날과 더불어 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여러분이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문제는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께서 먹을 것을 먹지 못하고, 입을 것을 입지 못하고, 밤잠을 개의치 않고 기도하신 원인은 무엇이었는가? 인생길이 바빠서였습니다. 자신의 길도 해결해야 했고, 민족의 길도 해결해야 했고, 세계의 길도 해결해야 했기에 몇백 배의 노력을 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아십시오. 그리하여 인생행로를 가는 데 있어서 얼마만큼 수고하고 노력하면서 이 길을 개척해야 할 것인가 각자가 생각해 보십시오. 인생행로의 낙오자가 되지 말고, 이 도중의 인생행로를 달리는 이 활주로에서 떨어지는 추락자가 되지 말고, 멋지게 대공을 나는 제트기처럼 날아갈 수 있는 용자의 모습이 되어 주시길 바랍니다.

<기 도>

아버님! 오고간 사람들은 많사오되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생명의 인연을 맺어 준 분은 없었다는 것을 저희들이 알고 있사옵니다. 그 한 분을 인류는 역사와 더불어 고대하였사옵고, 오늘도 하늘을 향하여 서글픈 호소를 하고 있사옵니다.

여기에 엎드린 당신의 아들딸들, 말씀을 듣고 보니 남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였사옵니다. 어떠한 대상적인 존재의 관이 문제가 아니고 나를 중심삼고 결정지을 수 있는 실체적인 내용이 문제였사옵니다. 이러한 내용을 갖추어서 아버지라 부르는 그 한 모습을 그리워하신다는 것을 알았사오니, 이러한 아들딸들이 되게 이끌어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제 저희는 마음이 무한히 아버지 앞에 화하고, 몸도 아버지 앞에 화하여 영원한 아버지의 생명과 사랑 앞에, 내 스스로 있는 듯도 하고 없는 듯도 한, 몸 안에 있는지 몸 밖에 있는지 알 수 없는 가까운 거리에서 증거한 것이 하나요, 해명한 것이 하나일 수밖에 없는 불변의 실체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내용의 말씀을 들었사오니 오늘 저희가 그런 느낌을 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나는 어떠한 자리에 있는지, 졸고 있는지, 혹은 곁길에서 허덕이고 있는지, 쉬고 있는지, 잠자고 있는지, 어떠한 환경에 처해 있는지를 스스로 싸움도 해야 되겠고, 마음의 싸움도 해야 되겠고, 생명의 싸움도 해야 되겠고, 심정의 싸움도 해야 되는 개척적인 노정이 저희 앞에 남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저희들이 목적의 세계와 인연을 맺을 수 없다는 것도 알았사옵니다.

오늘 이 목적을 향하여 가는 저희들의 마음과 몸을 격려하여 주시옵고, 본향에 가까이 갈 수 있게끔 생명의 말씀이 저희의 뼈와 살 깊이에 영원히 남아지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올 때,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써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마태복음 10:24-29

<기 도>

봉독한 이 말씀은 진리의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나선 예수께서 자신의 심정 깊이 묻어두었던 사실을 발표하신 말씀인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지, 4천년의 섭리역사를 종결짓고 택한 이스라엘의 수많은 민중을 거느려서, 아버지 앞에 승리의 제단을 갖추고 대제사장의 명분으로 영광의 제단을 쌓아 놓고 모든 것을 복귀해 드려야 할 예수님이었사오나, 지상에서 그러한 역사적인 사명을 종결짓지 못하고 가셨다는 것도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님, 역사는 예수님 이후 2천년이 지났사오나, 그때의 예수님의 모습을 회상할 수 있는 이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때를 끝날이라 하였사옵니다. 모든 죄악된 요소들을 청산할 수 있는 시기가 가까워 온다는 것을 저희의 생활에서 나타나는 현상을 보아 알고 있습니다.

모든 움직임을 볼 때도 끝날이요, 세상의 모든 현상을 볼 때도 끝날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나타나는 모든 징조가 끝날을 예고하는 이때에 저희들이 가져야 하고, 느껴야 하고, 자랑하여야 할 무엇이 있다 할진대 그것은 세상의 어떠한 권세도 아니고, 물질적인 어떠한 것도 아니고, 인격적인 그 무엇도 아니옵니다. 오로지 2천년 전에 왔다 가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는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안 되겠사옵니다. 그의 심정과 그의 소원, 그의 사정을 저희의 것으로 하여, 그의 소원성취의 터전을 저희 자신들이 이루어 놓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들을 저희들이 회상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당시의 예수는 겉보기에 미미한 모습이었습니다. 세례 요한보다 더 부족한 모습으로 나타났던 예수였습니다. 새로운 법도인 세례를 받기 위해 몰려드는 이스라엘 민족 앞에 나타난 세례 요한은 유대인들이 보기에 대단히 훌륭해 보였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그를 선지자로까지 추앙했사옵니다.

예수가 이처럼 그 시대 유대인 앞에 세례 요한보다 인격이 못 미치는 사람처럼 나타나게 될 때 대중이 믿지 못하였으며, 그는 머무는 곳곳마다에서 반대를 받았사옵니다. 그를 따르는 자들은 말할 수 없이 연약한 여성들과 세리들이 대부분이었음을 저희들이 생각하게 될 때, 그 시대에 예수를 독생자로 알 수 있으며, 예수를 구세주로 믿을 수 있으며, 예수를 주님으로 모실 수 있는 참다운 하늘의 아들딸들이 없었던 역사적인 슬픔을 알게 됩니다.

초췌한 예수, 인격적인 면에 있어서나 사회적인 면에 있어서 구비되지 않은 환경 가운데 있었던 예수를 하나님의 독생자로 믿을 수 있고 구세주로 알고 모실 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이 시간 그 시대의 심정을 통하여 예수 앞에 공손히 머리 숙이고, 아버지께서 친히 사랑해 주시는 가운데서 훈계의 말씀을 받을 줄 아는 아들딸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제 아버님의 말씀을 갖고 전하고자 하옵니다. 전하는 자의 마음이나 받는 자의 마음에 간격이 있다면, 이곳은 도리어 사탄의 무대가 될 것이요, 저희의 생명의 문을 막아 버리는 조건이 될 것이옵니다. 그렇게 된다면 차라리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이 나은 줄 저희들이 알고 있사옵니다.

마음문을 활짝 열어 놓고 자기의 어떠한 주의 주장이나 자기의 관념을 일소하고, 아버지의 생명의 움직임에 자기의 몸과 마음을 맡기어 아버지께서 움직이시는 대로 움직이고 느끼고 체휼할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재창조의 말씀의 권한으로 이들에게 생명의 한 중심을 체휼하게 하여 아버지 뜻 앞에 생명의 자체로서 세워질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인도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나이다.

모든 것 맡기오니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사랑하는 식구들도 이 시간 같은 은사의 자리에 머물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말 씀> 이 시간에 여러분들 앞에 드리고자 하는 말씀의 제목은 ‘하늘을 알아드리는 자가 되자’입니다. ‘하늘을 알아드리는 자가 되자’ 이런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상대적 관계로 본 인간과 절대자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자는 앞을 보나 좌우를 보나 혹은 뒤를 돌아다보아도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는 자입니다.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는 것 이상 외롭고 슬픈 일은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들은 자기를 아는 것 같지만 냉정히 비판하여 보게 될 때, 자신을 모르고 있음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 마음은 더 큰 이념을 향하여 자나 깨나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나를 어떠한 방향으로 몰아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움직임이 연속되는 역사와 더불어 움직여 나가고자 하는 사실을 느끼면서도 그런 면을 갖고 있는 자신을 해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스스로 느낄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나를 알아 달라고 말하고 싶고 나를 믿어 달라고 말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고 내가 주장하는 모든 것이 그 어떠한 움직임과 인연을 맺기를 바라면서 지금까지 살아 나왔다는 사실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면 나를 믿어 주고 나를 알아 달라고 요구할 때, 자체를 확정지어 어떠한 천륜의 대목적과 관계맺은 자리에 자신을 세워 놓고 그런 요구를 하였느냐 하면, 아닙니다.

이렇게 생각하게 될 때 오늘 나의 가치는 어디에서 결정될 것이뇨? 만상을 움직여 낼 수 있는 주체, 혹은 주동체가 되기를 마음으로 바라고, 생활로, 그리고 행동으로 움직여 이루고자 하는 자신을 다시 한번 분석해 보고 냉정히 비판하는 과정을 거치기 전에는 대목적을 이룰 수 없습니다. 천륜의 목적을 이루려 하시는 하늘이 있다 할진대 자신이 그런 일을 하지 못하면 하늘 앞에 떳떳이 설 수 없습니다. 천륜 앞에 고개를 들 수 없는 것을 우리는 추리에 의해서나 혹은 논리적인 입장에서 볼 때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내 자신의 신앙, 내 자신의 소망, 내 자신의 이상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나를 위한 것 같지만 나와 관계없는 입장에 있습니다. 이런 슬픈 처지에 있는 연고로, 인간은 이상과 소망을 품고 살고 있으나 그 마음속에서는 슬픔이 굽이치는 곡절에 부딪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역사상에 왔다갔던 성현들은 ‘이상과 더불어 즐길 수 있는 나를 찾자, 이상과 더불어 동하고 정하며 살 수 있는 나를 알자’ 하는 표어를 자기도 모르게 내세웠고, 또 이것을 찾아 세우고자 헤매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성경 말씀을 통해서 잘 아는 바입니다. 이같이 헤매었지만 해결짓지 못하였으니 해결 짓는 그날이 오기를 우리는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상대적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늘이 있으면 땅이 있고, 몸이 있으면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상대적인 세계관을 갖고 생각할 때, 마음의 움직임이 있으면 이 마음을 움직여 낼 수 있는 주체적인 어떤 존재도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절대자라 하든, 하나님이라 하든 창조주, 혹은 신이라 하든 그 명사가 문제되지 않습니다. 그런 무엇이 있어야 된다는 사실만은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어떠한 절대자가 있다 할진대 그 절대자는 내 마음과 어떠한 인연을 맺어 시간 시간을 거쳐 역사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런 연고로 인간들은 참 것, 더 좋은 것을 소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하나의 사실을 비판하거나 판단하려 할 때에도 비교할 수 있는 상대적인 조건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추리를 하거나 어떠한 논리를 전개시키게 될 때에도 가설적인 어떠한 상대 조건을 세우지 않고는 그 논법이 성립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를 완전히 알고 나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비교하고 판단할 수 있는 상대적인 조건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인간들이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절대자이신 것입니다. 그 절대자와 내가 관계를 지어 그 차이를 비교하고 논단할 적에 자기가 어떠하다는 것이 해명되는 것입니다. 그런 연고로 내 마음이 있다 할진대 이 마음을 지배하고 움직이는 절대적인 존재 혹은 주체 되는 그 무엇이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먼저 느껴야만 되겠습니다.

종교나 철학이 찾아야 할 궁극의 목적점도 절대자입니다. 그 절대자를 찾아 내 마음과 영원한 관계를 맺어 내 생활의 이념, 혹은 세계관 우주관이 그의 이념과 같이 움직여, 같이 살고 같이 즐거워할 수 있는 신을 그리워하고 찾아 헤매며 역사를 움직여 나온 자들이 수많은 성현 현철인 것입니다. 나아가 수많은 종교인들인 것입니다. 그들이 목적하고 찾는 것이 그 것일 거예요.

나를 완전히 알기 위해서는

나를 알려면 상대적인 자리에 있는 존재의 가치를 알아야 합니다. 내 마음이 작용하는 것은 내 마음이 스스로 어떠한 이념적인 요소를 창조하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어디든지 내가 상대적인 자체라는 것을 느끼는 자리에 들어가야 됩니다.

하늘은 우리 앞에 찾아오실 때 언제든지 정면으로 나타나십니다. 선이라는 것은 언제나 횡적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정면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앎의 기준을 어디에 세울 것이뇨? 정면으로 들어오는 것이 온 만상을 통할 수 있고, 모든 인식을 통할 수 있으며, 양심세계를 움직여 낼 수 있다 할진대 그것이 나를 해명지어 줄 수 있는 하나의 기준인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사람을 볼 때도 다르게 보입니다.

오늘날 믿는다고 자처하는 수많은 신자들은 스스로 ‘나는 하늘을 알고 있다, 하늘을 믿고 있다, 하늘을 의지하고 있다.’고 자위하고 자신하고 있지만, 알고 있다는 ‘그 앎이 어디서부터 나왔습니까, 믿고 있는 그 믿음이 어떠한 환경에서 믿고 있습니까, 하늘을 믿고 산다는 자체가 어떠한 환경에 있습니까?’ 하고 물어보게 될 때, 그것이 마음과 영원히 상대 될 수 있는 자리에서 움직이는 것이 아닐진대, 그것은 전부 다 하늘이 알아줄 수 있는 자리에 서지 못하고, 하늘이 믿어 줄 수 있는 자리에 서지 못하고, 하늘이 간섭할 수 있는 자리에 서지 못하였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기억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선민으로 택하였습니다. 많은 민족 가운데에서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민족을 찾아 세운 것입니다. 하늘이 이렇게 민족을 찾아 세울 때 어떻게 하셨습니까? 정면으로 대하셨습니다. 정면으로 대하시면서 이스라엘 민족을 찾아 세웠습니다. 하늘은 정면으로 대하는 거리를 단축시켜서 ‘너자 나요, 나자 너.’라 할 수 있는 환경으로 역사를 몰아내려 오시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땅 위에 오셔서 ‘내가 네 안에 있고 네가 내 안에 있으며, 아버지가 내 안에 있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으니, 아버지는 네 안에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택한 민족을 세워 이끌어 오시는 목적은 무엇이뇨? ‘너와 나는 하나다.’라고 할 수 있는 자리까지 가기 위해서입니다. 직선상에 끌어들여 ‘내가 너요, 네가 나’라 할 수 있는 조건을 세우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앎의 관계를 찾아 나오셨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인간은 타락으로 하나님과 정면으로 대할 수 있는 위치를 떠났습니다. 하나님을 대하는 데 있어서 소망으로나, 사정으로나, 심정으로나 정면으로 대하는 인간이 본래 가치의 인간입니다.

인간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그 소망이 바르지 못하고, 사정이 바르지 못하고, 심정이 바르지 못하여 하늘로부터 추방을 당하였습니다. 추방을 당했어요. 선조로부터 지금까지 역사노정에 왔다 갔던 수많은 인류는 바른 소망과 바른 사정과 바른 심정에 입각한 관을 못 가졌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는 천상천하에서 하늘을 움직이고, 땅을 움직일 수 있는 자신을 가졌다.’ 하는 사람이 역사노정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의 소망은 비껴 있고, 사정은 그릇되어 있고, 심정은 반대 방향을 향해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후손이냐? 근본적으로 그 출발에서부터 딴 소망과 딴 사정과 딴 심정에 엉클어져 번식된 후손입니다. 즉 하나님이 바라는 소망, 하나님이 바라는 사정, 하나님이 바라는 심정을 가지고 하나님의 정면에 설 수 있는 인간이 못 되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소망과 사정과 심정이 어떠한 곡절에 매어 있고 엉켜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면 자신을 모르는 것입니다.

타락인간의 소망과 사정과 심정

이래서 타락한 인류 앞에 하늘은 제시했습니다. 인간이 소원하고 소망할 것은 땅도 아니고, 땅 위의 어떠한 위대한 성인도 아니고, 하나님이라고! 하늘은 인간들이 이 세상의 사정에 엉클어져 살고 있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왜? 거짓 것이니. 그래서 하늘이 여기에 대한 대책을 세워 나오셨습니다. 이 사정을 돌려 천적 사정으로 몰아넣자고 하는 사명을 하나님 대신 역사노정에서 책임 맡고 나오는 것이 종교요, 이 종교를 중심삼고 양심의 노정을 개척해 나온 것이 종교인들의 생활이었습니다.

여러분의 소원과 여러분의 사정, 더 나아가서는 여러분의 심정을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돌렸습니까? 돌리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아신 예수님은 이 세계를 바라보시고 온 인류를 하나님 편으로, 다시 말해 새로운 소망, 새로운 사정, 새로운 심정의 세계로 돌이키고자 하셨습니다. 그런 책임을 지고 이 지상에 오셨기에 그를 소망의 주인공이요, 사정의 주인공이요, 또는 심정의 주인공, 사랑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 앞에서는 누구도 당당하게 나는 이런 소망과 심정을 갖고 있다고 큰소리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소원이 하나님이 가지라는 소원입니까, 그 사정이 하나님이 그렇게 살라고 한 사정입니까, 그 심정이 하나님을 통해 나온 심정입니까?’ 하고 묻게 될 때,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가 무엇이뇨? 인간의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만 나를 알 수 있습니다. 현재 살고 있는 인간의 사정도 알아야 되겠고, 또 심정문제도 어떻게든 알아야 됩니다.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상대적인 기준을 찾아야 합니다. 그런데 막연하나마 이것을 인간 앞에 제시해 나온 것이 종교들이었습니다. 타락한 인간의 후손인 우리들은 하늘 앞에 어떤 종족, 어떤 족속인가? 하늘을 배반한 족속들입니다. 하나님의 소원을 가로막고, 하나님의 사정을 가로막고, 하나님의 심정을 가로막고 배반해 내려온 인간들임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런 입장에 있는 인류이기 때문에 어떤 소망, 어떤 사정, 어떤 심정의 세계에 사는 듯하나, 그 마음속에는 딴 마음이 낀다는 것입니다. 이 둘 사이에서 싸우는 고통을 절실히 느끼는 사람은 죽든지 하나님을 찾든지 둘 중의 하나를 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지적이고 똑똑하고 심각한 사람은 죽음을 무릅쓰고 이런 길을 찾아 나갔던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어떠한 느낌을 느껴야 될 것인가? 하늘을 알고 내 자신을 알려면 어떠한 느낌을 느껴야 될 것인가? 우리는 하늘을 배반한 역적의 후손입니다. 누가 이 말에 반대하겠습니까? 천상을 배반한 역적의 후손이에요.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본연의 세계와 연락하고 있습니다. 수시로 연락하는 것이 아니라 주기적으로 연락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몸은 하늘을 배반한 역적의 피와 뼈와 살이 옮겨진 몸들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할 것인고? 이것을 어떻게 할 것인고!

하늘은 우리 인류가 미워서 심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인류를 이렇게 만들어 놓은 사탄, 악을 지배해 나오는 주인공, 하나님을 배반하여 나오는 그 주인공을 쳐서 분립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의 목적입니다. 우리 인간들을 잡아다가 죽음의 가마솥에 처넣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인간을 유린하고 이 땅을 어지럽혀 나오는 사탄을 박멸하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길을 떠나라, 이 길을 피하여 나가서 싸워라, 원수시하라고 여러분의 마음에 경고하고 있습니다. 양심을 가진 자에게는 가면 갈수록 너는 여기서 떠나야만 된다고 경고한다는 것입니다. 원수의 마수에 잡힌 포로가 되는 것이 인간이 이 땅 위에 태어난 본위(本位)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한 본래의 목적은 무엇이뇨? 참아들딸,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본연의 관계는 사랑을 중심삼고 끊을 수 없는 부자의 관계를 가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연을 맺어야 할 오늘의 인류는 사망과 같은 절망 속에 사로잡힌 채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 자신들이 어떠한 입장에서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도무지 모르고 있습니다.

이런 인간들 앞에 본연의 소망과 사정과 심정의 세계관을 갖고 오셔서 어떻게 어떻게 해서 본향을 찾아가라고 가르쳐 주는 분이 있다면, 그는 소망의 구주요 사정의 구주요 심정의 구주일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아요. 살아가는 데는 소망과 사정과 심정, 이 세 가지 요소가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떠한 사정, 이런 사정 저런 사정을, 또 어떠한 소망, 이런 소망 저런 소망을, 또 어떠한 심정, 이런 심정 저런 심정을 갖고 있습니다. 인간의 생활은 어떻게 보면 소망과 사정과 심정에 목을 매고 사는 놀음입니다.

때문에 이제 인간이 바라는 것은 지금 살고 있는 것이 고통스러우니, 이것을 원수시하고 이것을 박차고 나아가 새로운 소망, 새로운 사정, 새로운 심정의 세계를 찾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이 원하는 것은 본연의 세계입니다.

구주는 어떤 분인가

오늘 여러분들 중에 자기를 세워 자랑하는 사람이 있을는지 모릅니다만 돌아들어가 그 자신을 냉정히 비판해야 되겠습니다. 자랑하는 자는 꺾어집니다. 악한 세상이기에 자기 자신을 내세워 자랑하고자 하는 자는 그렇게 됩니다. 그러므로 양심적이어야 합니다. 양심에 따라 움직이려 하는 사람은 악한 자들이 움직이는 환경이 지나간 다음에는, 어느 한 날 반드시 세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작은 사실이지만 역사적인 산 증거입니다. 이러한 일이 세계적으로 하늘땅에 벌어지는 그때는 악이 물러가고 선의 시대가 오는 때입니다.

하늘은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들은 지금까지 6천년의 기나긴 세월 동안 하늘을 향하여 찾아가고 있습니다. 하늘이 세워준 그 소원이 참소원인 줄 알고, 예수가 우리를 구원한 사정이 완전한 구원인줄 알고, 예수가 세워 준 사랑이 참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사랑인 줄 알고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를 믿은 그날부터 ‘세상 소망아 멀리 가라’, ‘세상 사정아 멀리 가라,’ ‘세상 심정아 가거라’ 할 수 있는 자신이 되지 못했습니다. 아직까지 그 한계선을 못 넘어섰다는 것입니다. 이런 죄악의 땅에 예수가 와서 해야 할 일은 무엇이었느냐 하면, 이 죄악된 땅을 혁명하는 것이었습니다. 새로운 소망의 세계, 새로운 사정의 세계, 새로운 심정의 세계인 이상동산을 이뤄 놓아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명을 지니고 오셨던 것입니다.

고통의 세계에 처한 인간의 실상

인간은 고통의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몸과 마음의 세계에 있어서 치열한 싸움을 하고 있어요. 몸이 대하는 세계는 실체의 세계니 대하는 전부가 실체적인 자극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마음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이 실체 세계의 자극 앞에 사로잡히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으로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고 한탄하였습니다. 그것은 왜입니까? 실체로 느껴지는 감정, 즉 실체를 중심삼고 사방으로 들어오는 자극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음의 자극은 사방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한 방향으로 흘러 들어옵니다. 한줄기 방향으로 들어오는 이 마음의 자극보다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실체의 자극이 더 강하기 때문에 마음의 자극은 끊기고 밟혀 왔습니다. 이런 것이 오늘 우리의 마음에 뒤넘이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자극이 오는데 그 방향은 사방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뒤나 좌우로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정면으로 찾아옵니다.

그런고로 여러분들이 악한 세상에 살고 있어도, 자신이 알 수 없는 사이에 ‘아!’ 하고 무엇이 그리워지는 것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혹은 신앙생활을 하는 자들도 자기가 알 수 없는 사이에 기도하고 싶어집니다. 그것은 마음에 어떤 움직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문이 있다면, 그때에 맞게 그 문이 열려 가지고 그 문을 통해 하늘의 인연이 움직여 들어올 때, 여러분은 마음에 자극을 느껴 그 세계를 추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악은 사방성을 갖추어 실체로서 나를 공격해 들어오지만, 하늘은 정면에서 한 방향을 통하여, 마음 밑에서부터 나를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하늘을 수없이 유린해 왔습니다. 그러기에 여러분들은 하늘 앞에 설 수 없는 반역자입니다. 그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인간은 사탄의 철망권, 즉 사탄 주관하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관하에서 살아야 할, 하늘의 백성이 되어야 할, 천국 백성이 되어야 할 우리가 사탄 주관권하의 포로와 같은 처지에 있습니다. 포로병과 같은 우리들이에요. 우리는 이런 입장에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의 마음속 깊이에는 본향의 이념, 본향의 사정, 본향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어떤 움직임이 있습니다. 이 움직임이 마음에서 폭발되어 몸까지도 자유자재로 움직이게 하고 하늘과 땅의 전부를 굴복시키기 위해서 하늘은 사람을 지으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기에 실낱같은 마음의 움직임에 따라 선의 방향을 찾아서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한 싸움의 생활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사탄은 여기에 삼면공격을 해 들어옵니다. 좋은 물질을 갖고 세상의 어떤 권세를 갖고, 세상의 어떠한 권위를 갖고 삼면공세를 해 들어옵니다. 이것을 끊고 끊고 또 끊으면서 싸워 나가는 길이 신앙의 길입니다. 그래서 쉬지 말고 기도하라 하였습니다. 기도의 시간은 싸움의 시간인 것입니다.

예수는 이러한 견지에서 사탄의 포로가 된 인간을 바라보며 사탄 주권 세계를 격멸시키고 궤멸시킬 책임을 짊어지고 왔었습니다. 사탄세계를 궤멸시킬 기반을 구축하여 공작하기 위해, 선발대를 악한 세상에 만들어 놓으려 하는 것이 선생님의 생각입니다, 선생님의 생각. 그리고 섭리할 수 있는 선두 공작대를 만들어 하나님이 이 세계를 복귀하시는 데 하나의 발판으로 쓰기 위해 택하여 세운 것이 이스라엘 민족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민족은 몰랐습니다. 그 민족은 몰랐다는 거예요.

아브라함과 그 가정을 중심한 하나님의 섭리

아브라함 이후 예수 때까지 2천년, 하나님은 그동안 이스라엘 민족 앞에 믿음이라는 조건을 세워 놓고, 개인이 믿으면 개인을 넘어 가정이 믿을 수 있는 기대를 개척하고, 가정이 믿으면 가정을 넘어서 민족이 믿을 수 있는 기대를 개척하였고, 민족이 믿으면 민족의 기대를 넘어서 세계가 믿을 수 있는 기대를 개척해 나오셨습니다. 여러분들은 이걸 알아야 하겠습니다.

하늘이 택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개인으로서 하늘과 연락할 수 있는, 사탄세계에 대한 정탐꾼이었습니다. 오늘날의 말로 하면 간첩이었어요. 세상이 사탄의 세상이었으니 어느 누구도 환영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전부가 원수였기 때문에 그는 듣는 것도 가려서 들어야 하고 보는 것도 가려서 봐야 했습니다. 생각도 분별해서 해야 하고 행동도 눈치를 봐 가면서 해야 했습니다.

밥을 먹어도 눈치밥, 잠을 자도 눈치잠, 사는 것도 눈치생활을 해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늘섭리를 받들어 온, 섭리의 뜻을 대하던 우리 신앙 선조들이 걸어간 길이었습니다.

하늘은 택한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끌어내어 그런 자리로 보냈습니다. 황무지와 같은 곳에서 몰아낸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곳에서 하늘이 세우려던 하늘 주권의 나라가 세워질 한 날이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하늘이 축복한 아들딸들이 바다의 모래알같이,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여 악의 세상을 칠 수 있는 그날을 고대하면서 우리의 선조들은 고국산천을 버리고 나섰던 사실들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왜? 원수의 나라, 원수의 철망 안에 사로잡혀 있으니 지긋지긋하게 느껴져야 합니다. 몸에 소름이 끼치는 것이 여러분도 느껴져야 됩니다. 이런 것을 느끼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하늘 앞에 완전한 신앙자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늘이 아브라함을 세운 목적은 무엇인가? 먼 거리에 있는 인간, 적진 가운데 있는 인간, 사탄세계에 있는 인간과 연락할 수 있는 하나의 기반으로 삼아, 이것을 토대로 하여 횡적으로 뻗어 나가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자칫 잘못하면 하늘과 땅의 관계가 끊어지겠으니 할 수 없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 하여 직계의 혈통을 통해서 움직여 나오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걸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삭과 아브라함이 축복을 받을 때에 그들이 가진 것은 무엇이었느냐? 선민이라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너는 사탄세계와 타협해서는 안 된다. 화합해서는 안 된다. 너는 선민이니 생활도 다르고, 감정도 다르고, 바라는 소망도 다르고, 네가 꿈꾸는 이상도 다르다. 너는 나를 통해서 승리의 한 날을 봐야 너의 후손이 살 수 있다.’고 하는 관점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축복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도 그런 관점에서 이삭을 축복해야 했고, 이삭도 그런 관점에서 야곱을 축복하여야 했으며, 야곱도 그렇게 그의 후대 앞에 축복하여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그 전통적인 축복의 인연을 배반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택하여 개인적인 믿음의 환경을 개척한 이후 야곱시대에 들어와서는 가정을 거쳐 70식구를 거느리고 사탄세계인 애급에 들어가게 했습니다. 이 가정적 기반을 토대로 하여 무엇을 했던가? 민족을 형성하기 위해 사탄세계로 몰아냈습니다. 본국이 아니라 사탄세계의 제일가는 소굴입니다. 그 시대의 이스라엘 민족 앞에 역사적으로 원수인, 사탄세계인 애급으로 쫓아 들여보냈던 것입니다. 그래요, 안 그래요?

이 가정적인 기반을 중심삼고 어떠한 고통, 어떠한 죽음길, 어떠한 분함이 있더라도 참아야 했습니다. 참는 데는 어느 때까지 참아야 되었느냐 하면 민족이 구성될 때까지였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4백년을 유리고객하고 고통의 생활을 하면서도 민족 구성의 소망 밑에서 ‘하나님, 당신의 분함을 푸시옵소서.’ 하는 마음이 사무쳐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4백년 역사는 지나갔으나 이스라엘 민족은 하늘의 전통적인 소원과 사정과 심정에서 이 탈되기만 했습니다. 그렇게 되니 이를 재수습하기 위해 오신 분이 모세였습니다. 이 모세는 60만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였습니다, 민족의 지도자.

이스라엘 나라가 망하게 된 동기

그러면 하나님은 이 민족을 기반으로 무엇을 하려고 하셨느뇨? 민족을 기반으로 하여 세계 무대로 나가고자 하신 것입니다. 때문에 택한 민족 앞에, 하늘은 이 민족을 거느려 새로운 왕국을 건설할 수 있는, 만왕의 왕이 될 수 있는 메시아를 보내주마고 약속하셨습니다. 민족을 기반으로 약속을 하셨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을 기반으로 한 것이 아니요, 야곱을 기반으로 한 것이 아니요, 모세 이후 민족을 기반으로 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와 같이 민족을 기반으로 하여 세계의 사탄 주권을 때려치우고 하늘의 승리의 기반을 닦기 위해 세계적인 대왕자로서 보내셨던 분이 메시아임을 그 민족은 몰랐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어떠한 관점에서 메시아를 고대했습니까? 메시아가 나타나면 민족 전체가 단결하여 세계 무대를 개척하고 사탄세계를 정복해야 할 하늘 섭리 앞에 선민이라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사탄 세상에 사는 것을 통분하고 통분하게 느꼈던들, 그들이 예수를 잡아 죽일 리 만무하다는 것입니다.

이 땅 위에 예수는 오셨었습니다. 그의 소원은 무엇이었느뇨? 개인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12제자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70문도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예수가 문제시한 기준은 이스라엘 민족 전체였던 것입니다. 택한 민족을 통치하여 결속시켜 가지고 새로운 가나안복지를 건설하기 위한, 세계 가나안복지를 향한 행군 나팔을 불어야 할 예수가 민족의 대표 자리에서 몰려나던 그 원한에 사무친 일은 역사노정에서 이스라엘이 망하는 동기가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지금까지는 죽으러 온 예수로 알았습니다. 이런 말을 왜 합니까? 알고 보니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천륜을 위하여 싸울 용자가 필요합니다. 이치가 그렇지 않아요?

4천년이란 기나긴 역사를 거쳐서 하늘이 사탄세계에 연락할 수 있는 정보기관 같고 군사기지와 같은 것을 만들어 놓았는데, 이것들이 다 자빠졌단 말입니다. 4천년 공들인 민족의 기반에 예수를 보냈지만 그들이 예수를 불신했습니다. 그래서 민족의 기반이 무너지니 백성 없는 왕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러니 사탄 세상에서 그를 잡아다가 마음대로 한 것이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왕자의 비참한 사형입니다. 그러나 그 민족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 이스라엘 나라 왕자의 비참한 사형인 것을 몰랐습니다.

어디에서 죽음을 당했느냐? 사탄 주권하에서 죽음을 당했습니다. 여러분들, 여기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더 알고 싶거들랑 나중에 시간이 있으면 나를 만나러 오세요. 그렇게 돼 있어요. 그러니 하나님은 분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내가 와서 죽기는 죽을 것이로되, 죽기 전에 하늘의 통첩을, 비밀 약속의 문서를 너희에게 주마.’ 하셨습니다. 이것이 신약복음입니다. 이 비밀문서가 신약복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를 믿으라. 나를 믿고 따라와야 산다. 나를 믿으면 어디로 가느냐? 해방의 곳으로…. 나를 믿어야 산다. 믿으라. 내가 너희들 때문에 왔다가 죽으니, 나를 믿고 내가 한 말을 믿으라’ 이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살 수 있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성경 말씀은 암호입니다. 하늘이 사탄세계에 와서 연락할 수 있는 암호예요. 비유와 상징으로 쓴 것입니다. 그러니 성경은 아무리 읽어도 모릅니다. 이 암호를 풀 날이 있을 것이어늘, 그러려면 충성을 다하고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예수가 바라던 것이 무엇이었느냐? 민족을 기반으로 하여 세계 복귀의 이념을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세계의 어떠한 사조나 주의 주장이 그것을 해명할 수가 없으니 어느 한때에 이 비밀문서를 해명하여 우리들이 가야 할 방향과 목적지를 제시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각성해야 할 제2이스라엘

오늘날 기독교 신자들은 사라진 이스라엘의 제2의 기반입니다. 오늘날 세계에 있는 기독교 신자들은 2천년 전 세계 가나안복지로 진격하기 위해 세우려 했던 선민, 제2이스라엘임을 각성해야 됩니다.

여러분, 그런 말이나 들어보았어요? 제2이스라엘의 아들딸임을 알고 각성해야 됩니다. 그렇게 되면 지금 내가 여기에서 고통받고 진저리나는 고난을 받고 있지만, 어느 한 날이 올 것이어늘, 그날에는 하늘의 권세 앞에 늠름한 모습을 자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소망하는 재림의 날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이 세계에 있는 제2이스라엘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를 거쳐 나갈 때, 반열 편성이 있었습니다. 제2이스라엘인 여러분은 어느 반열에 속해 있습니까?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이 어느 반열에 속해 있는지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천상에는 열두 진주문이 있는데, 그 열두 진주문의 한 문 한 문에는 사도의 명패가 붙어 있습니다. 그러니 어느 교파, 혹은 장로교면 그 장로교가 무슨 지파에 속해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지파를 잃어버린 제2이스라엘입니다. 지금이 바로 광야에서 허덕이는 그 때와 같습니다. 바로 그런 때예요. 그러니 여러분 앞에는 아말렉과 같은 족속이 공격해 오는 때가 있습니다. 그 때는 생사의 판가리를 지어야 할 때입니다. 2대 진영이 대결하고 있는데 한 편에서 공격, 진격을 하고 있습니다. 하늘은 먼저 치지 않습니다. 쳐들어올 날이 있는데 그 날에는 사상적으로 치고 마음적으로 치고 몸적으로 치고, 생활적으로 치게 됩니다. 근본과는 반대 방향에서부터 우리를 향해 진격해 들어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각성해야 합니다. 전세계의 제2이스라엘은 규합해야 합니다. 예수의 열두 사도와 같이 나는 어떤 사도다, 나는 어떤 반열이다 하며 싸우면 망해요. 그런 시대가 온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급에서 모세를 중심삼고 열두 지파로 분파를 조성해 민족 관념을 강하게 가졌던 것과 같이, 그 열두 지파들이 모세를 대하고 하늘 뜻을 대하던 것과 같이, 예수님 당시에도 메시아를 모시기 위해 반열의 조직을 만들어 단결하였던들, 예수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반열을 잃어버린 민족이 되고 보니 모두 각각이 되어 버렸습니다. 제가끔 끼리끼리, 자기들 멋대로, 제 갈래끼리의 놀음을 하다가는 망하는 겁니다. 이치가 그렇지 않습니까?

선지선열을 통해 찾아오신 하나님과 찾아가야 할 나

하늘은 우리를 찾아와서 이렇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개인을 대해서도 나는 너의 아버지요, 가정을 대해서도 아버지요, 민족을 대해서도 아버지요, 세계를 대해서도 아버지라고. 민족이 아버지를 갖고 있는 한, 네 아버지요 내 아버지입니다. 세계가 그 아버지를 갖고 있는 한, 네 아버지는 내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하늘은 그렇게 되기를 바라십니다.

하늘은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하늘은 사탄 주권의 포로가 된 우리 인간 개개인을 대하여 찾아오셨습니다. 그런데 개인적인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세우셔서도 하고 싶은 말을 못다 하셨습니다. 가정을 세우셨으나 하고 싶은 말을 못다 하셨습니다. 민족적으로 모세를 세우셨으나 하고 싶은 말을 못다 하셨습니다. 예수를 세우셨으나 그 때 역시 하고 싶은 말을 못다 하셨습니다. 못다 했어요. 성경에 엄연히 나와 있어요. 말을 다 못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예수님은 세계적인 하나님이요 천주적인 하나님을 대표하고 하늘땅 전체를 대신한 분으로 오셨기 때문에, 그러한 발판이 없이는 일을 성사하실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끝날에 다시 오겠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자신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자신은 역사적인 빚을 지고 있습니다.

하늘은 여러분에게 알려 주고 가르쳐 주기 위해서 수십 번 수천만 번을 여러분의 종족, 혹은 여러분의 선지들을 찾아오셨습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까?

그러면 예수님은 무엇을 갖고 오셨습니까? 예수는 아버지를 중심삼고 만왕의 왕으로서 만민을 하늘의 자녀로 세워 사탄세계를 심판해 버리고, 행복의 동산을 이루시려는 이념을 갖고 오셨던 것입니다. 그런 소망을 갖고, 그런 사정을 갖고, 그런 사랑의 심정을 갖고 오셨어요. 그런데 오늘날 여러분, 그러한 소망을 가져 보았습니까? 그런 사정을 통해 보았습니까? 그런 심정을 느껴 보았습니까? 못해 봤으면 심판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모세와 역대의 선지, 4대 선지와 12소선지가 부르던 아버지, 혹은 예수가 부르던 그 아버지시여!’ 이렇게 부르짖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아브라함의 힘의 하나님이시여, 야곱의 하나님이시여, 모세의 하나님이시여, 예수의 하나님이시여! 나의 하나님이 되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남의 하나님이면 안 되겠습니다. 나의 하나님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해야만 됩니다.

역사적인 하나님을 부를 때는 지나갔습니다. 그러니 시대적인 하나님이 나와 관계가 없어서는 안 되고 미래적인 하나님이 나와 관계가 없어서 안 되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하나님이시여! 사정이 이렇지 않습니까? 시대적인 하나님이시여! 사정이 이렇지 않습니까? 미래적인 하나님이시여, 사정이 이렇지 않습니까? 소원이 이렇지 않습니까?’라고 했을 때 하나님이 ‘오냐’ 할 수 있는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들은 먼저 사탄세계에 처해 있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사탄의 후손들입니다. 하나님 편이 아닌 사탄의 포로가 된 포로병들입니다. 그런 여러분들을 빼앗아오기 위한 세계적인 연락의 대표가 구주입니다. 구주, 구해 준다는 말입니다. 구주는 포로병들을 구하기 위한 사명을 띠고 왔던 사람입니다. 마음을 격려해 가지고 행동으로 싸우게 했습니다. 때문에 예수는 ‘내가 세상을 화평케 하러 온 것이 아니라 병기를 주어 분쟁을 일으키려 왔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분쟁이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까? 한번 보십시오.

사탄세계를 복귀하시는 하늘의 작전법

우리는 하나님 앞에 찾아가야 할 백성이요, 하늘의 아들딸이요, 하늘의 식구요, 하늘의 부부요, 하늘의 참다운 형제입니다. 그런데 이게 웬 말입니까? 우리는 형제도 잃어버렸습니다. 부모도 없고, 가정도 없고, 백성도 없고 상대도 없는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이것을 다시 복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찾아야만 돼요.

이것을 찾는 데는 마음으로 찾아야 합니다. 하늘은 마음을 통해 찾아 들어옵니다. 마음 문을 두드려 열고 들어옵니다. 그리하여 ‘내가 이래선 안 된다. 이 세계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느낌을 주입시켜서 그 환경과 싸움을 하게 섭리해 오신 것이 6천년 역사입니다. 선을 대표한 사람과 악을 대표한 사람들의 싸움이 반복된 것이 6천년 전쟁사입니다. 인류역사가 전쟁사라는 거예요.

처음에는 악한 사람들이 선한 한 사람을 쳐서 이긴 것 같지만, 그 선한 한 사람을 치고 나면 또 번식됩니다. 죽으면 번식된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맞으면 세 사람 이상을 찾을 수 있는 천적인 조건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는 어느 국가에서든지 먼저 맞습니다. 하나님의 작전법은 사랑하는 아들딸을 사탄세계에 보내어 그들로부터 맞고 죽임을 당하게 하여, 그 값으로 그만큼 사탄세계에서 빼앗아 오는 것입니다. 선한 사람이 먼저 치는 법이 없습니다. 먼저 맞고 맞은 그 대가만큼 사탄세계에 손해배상을 해서 찾아옵니다. 하늘의 작전법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날까지의 기독교 역사는 순교의 역사요, 피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역사노정을 보아도 친 자가 항상 집니다. 세계대전을 보십시오. 1차 전쟁에서도 먼저 친 편이, 2차 전쟁에서도 먼저 친 편이 졌습니다. 3차 전쟁에서도 먼저 친 편이 집니다. 개인 생활에서도 ‘참아라, 참는 자에게 복이 있으니, 맞고 참아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참으면 세워질 날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억울함을 참고 계시고, 6천년 동안 사탄 앞에 참소받으며 억울하고 분한 것도 분풀이를 못하고 계시니 ‘너도 억울하지. 오냐, 너는 내 편이로구나.’ 하실 날이 올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신앙세계에서 참으라 하고 있습니다. 믿고 참으라는 것입니다. 순종, 복종, 희생이라는 것입니다. 왜? 그러다 보면 세워질 한 날이 오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작전법이 먼저 맞고 빼앗아 오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도 맞으면서 기도해 주었습니다. 사탄세계의 법에도 걸리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원수시 했다가는 사탄세계의 법에 걸립니다. 그런 작전법을 세워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여기에 참석한 여러분 개체 개체는 역사노정에서 몇 번씩이나 찾아준 하나님의 아들딸이라는 것, 하늘나라의 백성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늘나라의 식구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늘나라의 형제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직계의 아들딸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아들딸, 이런 식구, 이런 인간, 이런 백성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을 몰랐습니다. 역사적인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시대적인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미래적인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찾아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참다운 아들딸이 되도록 나를 찾아 주신 하나님인 것을 몰랐습니다. 불쌍한 하나님이십니다. 보십시오, 이렇게 나를 찾아 준 하나님인 것을 알았습니까?

알고 보니 우리는 그 아버지에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6천년 동안 하나님은 이 땅 위에서 일해 나오셨지만 아들이라고 영원히 사탄 앞에 자랑할 수 있고 사탄세계에 침범받지 않을 수 있는 자가 있느냐? 없습니다. ‘이 가정이 내 가정이로구나.’ 할 수 있는 가정이 없습니다. ‘이 민족은 내 민족이다.’ 하여 사탄이 침범할 수 없는 민족이 없습니다. ‘오냐, 이 땅은 내 땅이다.’ 할 수 있는 땅도 없습니다.

하늘이 이러한 입장에 계십니다. 그러면 이 일을 누가 해야 되겠습니까? 인간이 타락했으니 인간이 그 일을 해야만 됩니다. ‘아버지시여, 내 집은 아버지의 집이오니, 이 집에서는 사탄을 절대 용납치 않습니다. 영원히 용납할 수 없습니다.’라고 해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집이 있어요?

하늘 앞에 충신이 되려면

역사적으로 찾아오신 하나님, 시대적으로 찾아오신 하나님, 민족적으로 국가적으로 찾아오신 하나님, 나아가서 세계적으로 찾아오신 하나님 앞에 배반자가 될 것이냐, 그렇지 않으면 충신이 될 것이냐, 둘 중의 하나만을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면양과 산양을 가른다고 하였습니다. 충신이 되려면 분함과 원통함을 알아야 됩니다. ‘내 아버지가 과거에는 이렇게 분하셨구나. 오늘의 아버지가 이렇게 분하시구나. 미래의 아버지가 이런 입장에 계시는구나!’ 그 아버지의 분함을 알아야 됩니다.

이제 우리는 단결해야겠습니다. 하늘 백성을 찾으시는 하늘 앞에 하늘 백성이 없으니 우리는 깃발을 높이 들고 죽음을 무릅쓰며 하늘 백성을 모아야 되겠습니다.

하늘의 민족, 하늘의 종족, 하늘 가정, 하늘의 아들딸, 하늘의 부모를 못 가진 하나님을 생각하게 될 때에, 우리들은 머리를 들 수 없습니다. 하늘 앞에 머리를 들 수 없는 인간들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여기에 와서 알아야 할 것은 하늘 앞에 머리를 들 수 없는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내 집에 누워 있는 형제가 내 형제인 줄 알았더니, 아닙니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천지가 내가 살 나라인 줄 알았더니, 아니에요. 내가 연락하고 있는 이들이 내 친구인 줄 알았더니, 아니더란 말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생각해 볼 때, 과연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지당한 말씀입니다. 그는 인간 앞에 할 수 있는 말을 다 하고 갔습니다. 할 수 있는 말은 다 했는데,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는 무리를 바라보고 예수는 통곡하였던 것입니다. 사람을 위하여 왔던 예수, 민족을 위하여 왔던 예수가 민족을 버리고, 반대하는 무리를 뒤에 두고 산중에 들어가 하늘 앞에 눈물짓는 기도의 생활을 했던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몸에서부터 마음에서부터 뜻에 대한 소망을 품고 ‘아버님’ 하고 정면으로 달음질쳐 들어가는, 다시 말해 백성 대신, 민족 대신, 종족 대신, 형제 대신, 자녀 대신 달음질쳐 들어가는 아들딸이 있다 할진대 하나님은 그 아들딸들을 붙들고 통곡을 하실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막달라 마리아가 붙들려 할 때에, 이런 원칙적인 내용을 통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를 붙들지 말라’ 하셨습니다.

역사상의 인류는 아직까지 하나님을 향하여 정면으로 달음질쳐 나가지 못했습니다. 민족과 종족, 형제의 입장을 지나 자녀의 입장에 서서 아버지를 대하여 아버지라 할 수 있는 자리에 나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역사노정에서 예수는 이런 책임을 했기 때문에 구주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가 ‘아버지’ 할 때 하나님이 ‘오냐, 이제는 승리했구나.’라고 할 수 없는 처지에서 예수는 죽어갔습니다. 그러니 예수는 온 우주와 천상천하의 사탄 대한 승리의 목적을 종결짓기 위해서 이 땅에 다시 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름 타고 와서 되겠어요?

이제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나를 알아야 되겠습니다. 겹겹이 가로 막힌 포로수용소에 있는 내 몸이에요. 그러므로 해방된 자유의 천지, 우리 백성이 살고 있고, 우리 형제가 살고 있고, 우리의 부모가 살고 있고, 우리 아들딸이 살고 있는 곳을 하나님은 얼마나 그리워하셨겠습니까?

하나님은 6천년 동안 하루 한 시간도 그와 같은 심정의 세계를 잊어본 적이 없이 인류를 대하여 나오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몰랐습니다. 하지만 이젠 알아야겠습니다. 알고 나서는 하늘을 향하여 정면으로 달음질쳐 가야 되겠습니다. 천상의 모든 것과 땅의 모든 것이 환희하며 축복해 줄 수 있는 그 한 날을 향해 개인으로서 인류를 대표하여 그러한 책임을 지고 달음질칠 수 있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나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 목표는 그것입니다. 그저 믿고 천당 가겠다고? 천당 가겠다고 해서 갈 수 있습니까? 어느 관청에 가서 수속 하나 하는 데 있어서 글자 하나만 틀려도 다시 하는데 천당 문을 그냥 슬쩍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천만 부당한 말입니다. 어떠한 사정적인 조건 가지고는 못 들어갑니다. 천국은 심정관을 통해야 들어갈 수 있는 겁니다. 심정의 세계는 공간과 시간을 초월할 수 있기에, 거기에는 진보도 없고 퇴보도 없습니다. 일정한 관(觀)도 없고 형(型)도 없습니다. 거기서만은 알파이자 오메가요, 시작이자 영원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원과 사랑

사랑의 하나님은 사랑을 걸어 놓고 움직여 나오시는데,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백성 된 나를 느낄 줄 알고 하늘 백성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늘 민족을 사랑할 줄 아는 내가 되어야 합니다. 하늘 형제를 사랑할 줄 아는 내가 되어야 합니다. 하늘 식구를 사랑할 줄 아는 내가 되어야 합니다. 하늘 자녀를 내 몸같이 사랑할 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소원과 사정은 지나가도 사랑은 남아집니다. 이런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늘의 소원은 무엇이뇨? 그저 뭐 예수 잘 믿는 사람을 천당 보내서 면류관을 한 백 개쯤 씌워 주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인 줄 아십니까? 아닙니다. 마음을 터놓고 가슴을 헤쳐 놓고 사랑하고 싶은 것입니다. ‘내가 많은 수고를 하였지만 너 하나를 만난 기쁨 때문에 그 모든 수고를 다 잊어버릴 수 있다. 소망하였던 모든 것이 이루어졌으니, 천상천하의 모든 존재들도 내 아들딸을 보고 기뻐하는 나를 따라 기뻐하라.’ 할 수 있는 그때, 천지는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런 날을 가졌습니까? 가졌다면 사탄으로 인한 공포가 어디 있으며, 사탄의 참소가 어디 있으며, 사탄의 간계에 걸릴 두려움이 어디 있겠습니까? 다 잊어버리고 쌍수로 환영하여 그를 붙들고 기쁨의 울음, 슬픔의 울음을 울 수 있으며, ‘사탄아, 내 아들을 보아라. 네가 안 뺏기겠다던 내 아들이 찾아왔노라. 만민아, 내 아들을 보아라. 너희들이 반대하고 핍박하던 내 아들이니라.’고 자랑하실 때, 사탄도 만물도 ‘예.’ 할 수 있는 하나의 아들을 찾으려 하시는 아버지라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하늘과 상대적인 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아버님과 사랑의 인연을 맺어, 거기에서는 어떤 위신도 체면도 처지도 잊어버리고, 아버지가 나요, 내가 아버지라 할 수 있는, 아버님이 난지 내가 아버님인지 모르는 자리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슬픔을 청산하여 기쁨의 심정을 가질 수 있고, 천상의 새로운 법도를 갖추어야 이 땅 위에 이상세계가 온다는 겁니다.

이와 같은 일을 제시할 수 있는 움직임이 이 땅 위에 나와야 하나님이 역사적인 섭리에서 승리의 발판을 잡을 수 있지, 그렇지 못하면 하나님은 실패하신 하나님이 되고 맙니다.

바울은 말하였습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으되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은 무엇이뇨? 공중에 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외국에 가서 자기 동포가 매를 맞고 핍박을 받고 있으면 자기가 당하는 것처럼 분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탄세계의 포로수용소에 들어가 있는 백성을 바라볼 때 ‘이 백성들이 우리 백성이다, 우리 백성이 그렇게 유린당하고 있구나, 우리 민족이 사탄의 철망에 갇혀 신음하고 있구나.’ 하며 가슴을 쳐야 할 것입니다. 그 철망을 터치기 위하여, 하늘 앞에 ‘아버지, 힘을 주시옵소서. 아버지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나는 아버지의 백성이요, 아버지의 혈족이요, 아버지의 식구요, 아버지의 아들딸입니다.’라고 할 수 있는 자를 하늘은 찾고 계십니다. 이런 아들딸을 찾는 것이 하늘의 소원입니다. 하늘의 소원은 딴 게 아니고 이것이란 말입니다.

이런 아들딸들을 만나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그런 아들딸과 함께 자신의 사정을 나누고자 하십니다. 이런 아들딸을 사탄의 참소를 받지 않고 영원히 사랑하고 싶은 것이 하나님의 심정인 것입니다. 하늘의 심정이 딴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의 심정은 바로 우리 인간에게 있습니다. 그런 나를 알게 될 때, 아브라함을 세우심도 나 때문이요, 모세를 세우심도 나 때문이요, 이스라엘 민족이 처참한 환경에 부딪치게 된 것도 나 때문이요, 예수가 왔던 것도 나 때문이요 우리 때문이요, 다시 와야 하는 것도 나 때문이요, 우리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공동이념, 공동목표 아래 있는 우리들, 형제가 만나게 될 때, 서로 얼마나 수고하였고 얼마나 힘들었는가 하며 눈물지을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반가운 식구를 만나 봤습니까?

8.15해방 후 우리 삼천만 민중에게는 먹을 것이 없던 어려운 때에도, 우리에겐 물질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굶주려 있으면 서로 먹여주려 하고 서로 붙잡고 좋아했습니다. 기뻐하시는 하늘을 모셔 놓고 이 세계의 기독교 신자들이 서로가 붙안고, ‘오! 해방이오. 해방이오.’ 하며 노래할 수 있는 한 날을 맞이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알아야 할 것인가

하늘의 백성이 나요, 하늘의 식구가 우리요, 우리는 하나의 형제요, 하나의 인류라고 하며 서로 권고하고 서로 앞장서서 어려움을 담당하려 하는 움직임이 기독교 안에 나타나지 않는 한, 기독교는 망합니다. 유대교와 같이 됩니다. 광야에 나온 이스라엘 민족이 거기서 쓰러졌던 것과 같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면 민족적인 섭리의 뜻을 누가 받들 것이냐? 기독교가 알지 못하면 이방나라 사람들, 딴 종교의 사람들이 받아서 기독교의 축복을 이룰 날이 필연코 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역사적인 섭리가 자아도취하여 자위 자신하는 무리에게 찾아가서 이렇게 하라고 충고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섭리를 따라 움직이게 되어 있지, 섭리가 인간에 의해 인간을 따라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있는 정성을 다하고 있는 힘을 다하여, 서로 서로가 하늘 백성, 민족, 혹은 식구, 형제인 것을 알고, 하늘의 주권자 하늘의 통치자를 갈망해야겠습니다. 그럴 때가 이때입니다. 하늘의 소원은 그것입니다. 하늘이 사정을 통하고자 하는 나라는 그런 나라예요. 하나님이 사랑하고자 하 는 이상세계는 그런 세계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는 모르더라도 하늘의 백성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늘의 종족, 혹은 식구임을 알아야 합니다. 늠름한 아들딸을 여러분은 만나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자는 땅 위에서 하늘을 아는 자입니다.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안다 하는 자는 나도 하늘 앞에서 저를 안다 하리라.’ 하셨습니다. 그러지 않았어요?

여기 온 여러분은 무엇을 알려고 합니까? 하늘의 소원과 목적을 알고 하늘 백성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사탄세계의 포로가 되어 있는 것을 떨쳐내기 위해 안타까워하시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죽음을 무릅쓰고, 어려움을 무릅쓰고 십자가의 철망을 뛰어넘은 것같이, 그렇게 하는 자는 그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땅 위에서 그와 같이 실천하는 민족이 있다 할진대 새 시대의 왕국을 건설할 민족이 될 것입니다. 또 그러한 여러분이 된다면 하늘이 알아주는 자들이 된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기 도>

아버님, 하늘의 소원이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옵고, 하늘의 사정이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옵고, 하늘의 심정이 하나님 것이 아닌 것을 알았사옵니다. 역사와 더불어, 시대와 더불어, 미래와 더불어 하늘의 소원이 있기를, 하늘의 사정이 있기를, 하늘의 심정이 있기를 얼마나 고대하셨사옵나이까? 이것을 알아 드리지 못한 저희들은 배반자요, 반역자들인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탄의 철망에 생포되어 있는 자신들임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여기에 분한 마음을 품고 아버지를 부르는 부르짖음이 천지에 나타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모여 있는 이들의 가슴 가슴에 아버지의 심정이 와 닿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것이 이 민족 앞에, 이 세계와 이 인류 앞에 이루어지는 날, 그 즐거움은 온 천지간에 가득할 것을 아옵니다. 백성을 그리워하고, 민족을 그리워하고, 형제를 그리워하고 식구를 그리워하고 자녀를 그리워하면서 서로 서로 십자가를 지고 싸워 나가는 저희들이 되지 않으면 이런 이상세계를 건설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사탄세계에 대하여 무한한 적개심을 갖고 오늘도 내일도 싸워 나갈 줄 아는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오늘 주신 당신의 말씀을 통하여 자신이 처하여 있는 그 위치를 해명하여 이제 어디로 갈 것인가를 알고, 하늘이 알아주는 아들딸이 되고, 하늘을 아는 아들딸들이 되게 인도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올 때,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로마서 7:15-25

<기 도>

아버님! 인생이 가야 할 길을 저희들은 응당히 걸어야 할 것을 알면서도, 그 가야 할 길을 알지 못한 채 거닐고 있는 자신임을 이 시간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몸을 중심삼고 사는 사람도 있고 마음을 중심삼고 사는 사람도 있고, 더 나아가서는 몸도 아니요 마음도 아닌 하늘을 중심삼고 사는 사람들도 있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오늘 이 시간 참례한 저희들은 어느 유(類)에 속하여 있는가를 밝히지 않으면 안 될 것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하여 주시옵소서.

내가 지극히 소중하고 만사의 즐거움과 슬픔을 해결할 수 있는 중심체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도 마음속에서는 느끼고 있습니다. 아버지! 참으로 자랑할 수 있는 나, 만사를 비판할 수 있는 주체의 나, 그 나를 저희들은 마음으로 사모하고 있사오니, 몸을 굴복시켜서라도 그 ‘나’를 회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나’를 회복하기 위하여 지금까지 허덕여 왔사옵고 싸워 왔사오나, 아직까지 이 싸움이 끝나지 아니하여 오늘 이 시간도 또한 일생을 걸어 놓고 싸우지 않으면 안 될 운명에 처하여 있는 자신인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시여! 은은한 가운데 저희들을 찾아 주시옵소서. 아버지시여! 저희들에게 명령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의 음성에 사로잡히는 그 순간, 당신과 동행하는 그 순간, 당신과 더불어 즐길 수 있는 그 순간을 찾아 나가는 것이 인생의 중심이요 목적인 것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역사노정에서 당신이 저희들 개개인과 즐길 수 있고, 우리와 즐길 수 있으며, 성도와 즐길 수 있는 한 때와 한 시대, 한 역사를 우리 조상들이 갖지 못한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 깊이 탄식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아버님, 나를 회복하기 위하여 무릎을 꿇고 쌍수를 합장하여 천성문 앞에 엎드린 저희들, 은은한 아버지의 심정에 스며들 수 있는 모습이 되게 하여 주시옵고, 아버님께서 자신도 모르게 저희 손을 붙들고 ‘오! 사랑하는 나의 아들딸아’ 하시며 권고할 수 있는 이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세상에서 믿고 사는 모든 것은 잠깐이로되 마음을 믿고 싸우고, 마음을 중심삼고 노래하고, 마음으로 아버지를 연관시켜 생각하는 그 세계는 무한 무궁임을 저희들이 느끼고 있사옵니다. 나를 세워 자랑할 수 있는 가치의 모습을 어느 때에 종결지을 것인가 하고 묻게 될 때, 자신이 없는 내 자신이 된다 할진대 하늘은 얼마나 슬퍼하실 것입니까?

이 천지 만물 만상 앞에, 하늘땅 앞에 자신의 모습을 나타낼 수 없는 처참한 모습들이옵니다. 지금까지 목적도 없고 느낌도 없이 살아온 과거를 청산하고, 저희의 마음이 아버지의 마음과 더불어 사귈 수 있으며, 아버지의 심정과 저희의 심정이 통할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세상에서 느끼고 사는 체험은 다 있사오나 아버지를 중심삼고 느끼고 생활한 체험이 없어 이것을 바라 나온 저희였사오니, 아버지의 장중에 옮기시어 재창조의 역사를 일으켜 주시옵기를, 사랑하는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말씀을 통하지 않고는 사정을 알 수 없는 것이요, 사정을 알기 전에는 심정을 알 수 없는 것을 아옵니다. 하오니 사정을 통하고 심정을 일으킬 수 있는 하나의 말씀을 허락하여 주시옵고, 그 말씀을 통하여 심정이 하나 되게 인도하여 주시옵기를,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고요한 가운데 아버지가 부르시는 은은한 음성을 듣고 즐거워하고 경배 드릴 수 있는 이 시간이 되옵고, 말씀을 듣고 심정이 솟구쳐 오르는 이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이 날 진정으로 하늘을 대하는 곳곳마다 아버지의 손길이 같이하여 주시옵고, 더욱이 지방에 널리어 아버지 앞에 경배 드리는 외로운 식구들도 있사오니, 일률적인 은사의 손길을 펴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옵니다.

첫 시간부터 끝 시간까지 아버지께 맡기오니 친히 주관하여 주시옵고, 전하는 자의 마음과 받는 자의 마음이 하나되게 허락하여 주옵소서. 하늘이 동(動)함에 저희가 동하고 하늘이 정(靜)함에 저희가 정할 수 있는 이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오면서,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말 씀> 땅 위의 인간이 제아무리 기쁨과 행복을 누리며 산다 한들 그 가운데에는 마음이 기쁘고, 마음이 즐겁고, 마음이 행복스럽다고 할 수 있는 자리에서 산 사람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내 마음이 기쁨과 행복을 느끼지 못한 연고로 나를 이끌고 있는 하늘이라든가 혹은 어떠한 천륜이라든가 하는 주체적인 존재도 기쁨과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고 단정 지을 수 있는 것입니다.

두 세계에 걸쳐 있는 인간

우리들 각자가 자신을 중심삼고 이 세상에서 살게 되어 있다고 알고 있으면 그것은 큰 오해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사는 목적을 추구하고 이념으로는 살고 싶은 어떠한 목적지를 추구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생활을 통하여 똑똑히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에 ‘나’라는 한 존재는 다른 어떠한 목적의 세계와 연관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런 연고로 이 ‘나’는 나의 목적을 위하여, 나를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딴 목적을 위하여 태어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 연고로 나 하나를 놓고 볼 때, 작다면 지극히 작은 것이요 크다면 지극히 큰 것입니다. 그런 연관성을 갖고 역사를 엮어 나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나’가 느끼는 감정, 이 ‘나’가 관찰하는 세계관, 그리고 이 ‘나’가 생활하고 있는 모든 사회생활, 여기에는 상응적인 것과 상반적인 현상이 있는 데, 이것을 우리는 무시할 수 없습니다. 즉 무슨 목적을 위하여 사는 데도 상극적이며 상충적인 면이 있는가 하면, 그 반면에 상응하며 살고 있는 면도 있는 것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이 사회의 현상이요, 오늘날 세계적인 사조요, 천적인 어떠한 경륜의 현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천륜과 천적인 세계관을 분석하게 될 때에, 나의 관념으로 느끼는 것이 아니고, 나 하나에서 움직이는 것이 아닌, 내 관념을 넘어서 가지고 세부적으로 나를 명시해 주는 어떤 다른 존재가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러한 견지에서 내가 서 있는 이 자리, 내가 머물러 있는 이 자리는 한 세계에만 국한되어 있는 자리가 아니라 두 세계에 걸쳐 있는 자리임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마음이 바라는 세계와 몸이 바라는 세계, 이 두 세계가 나에게서 전개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연고로 내 마음은 기쁨과 행복과 어떠한 이념을 바라는 욕망이 있는 반면, 내 몸을 중심삼고는 오관을 통하여 실체적으로 느껴지는 어떠한 쾌락과 감촉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천심과 인심의 입장에서 본 인간의 타락

우리는 흔히 사람은 마음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심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천심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심과 천심에 상응하고 천륜의 법도와 그 질서를 가지고 자신의 생활을 밝히는 인간이 되어야 할 터인데, 인심과 천심이 합한 생활적인 기준을 밝힐 수 있는 질서를 갖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타락이요 탄식입니다.

인심을 떠나고, 또 여기에 하늘이나 선한 양심을 배반하는 것을 악심 혹은 물심이라고 우리는 흔히 말하고 있습니다. 나 하나를 놓고 볼 때, 마음을 중심삼고는 천심이 나에게 들어오고, 또 몸을 중심삼고는 악심이 나에게 스며들어오고 있는 것입니다. 자고이래 모든 성인 현철들이 이 와중에 있는 자기를 보고 탄식한 사실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바울도 마음의 법과 몸의 법이 싸우는 와중에 있었기 때문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롬 7:24) 하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내가 즐기며 살아 나오고 또 살려고 하는 이 세상은 어떠한 세상이냐? 내 마음과 몸이 즐거이 살 수 있는 세상이 못 되어 있고 내 마음의 이념과 화할 수 있는 세상이 못 되어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한 환경에서 고민하고 허덕이는 여러분 자신입니다. 이것을 헤아려 보게 될 때에, 천심이 인심을 움직여야 할 원칙이 있는데도 진정 이 천심을 오늘날까지 우리의 진정한 인심과 짝하여 생활에 나타나거나 우리 일생의 노정을 거치는 동안 즐거움으로 나타난 순간이 한 번도 없었다고 단정할 수 있습니다.

만일 하늘이 있다 할진대 우리의 마음을 중심삼고 하루만 살고 싶겠습니까? 우리의 마음을 중심삼고 영원히 같이 살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과 몸이 싸우는 이 와중에 처하고 있는 내 한 자신입니다. 그러한 마음을 중심삼고 하늘이 살 수 있느냐고 묻게 될 때에,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하늘은 선입니다. 선은 영원이요 유일이요 불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불변이요 유일이요 영원한 생활관념을 못 가졌기 때문에 선을 향하여 움직여 나가는 그 마음에 끊임없이 돌입할 수 없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하늘은 우리 양심을 통하여서는 작용할 수 있으되, 우리의 생활관, 생애관에는 작용하실 수 없습니다. 우주적인 이념 밑에서 우리 인간을 끌 수 없었던 연고로 지금까지의 역사는 악의 주관 하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세계는 천륜과 영원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세계라고 단정 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은 심판받아야 됩니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인간도 역시 심판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천심을 추구해 나오는 종교

인심을 넘어 천심을 추구해 나오는 움직임이 있거늘 이것이 무엇이냐? 종교입니다. 종교가 이것을 붙들고자 애써 나오는 것입니다.

인류 문화사에 있어서 종교는 위대한 공로를 세워 나오고 있습니다. 사람의 양심을 자극시켜 천심을 향하게 하는 움직임을 일으켜 새로운 혁명, 새로운 역사를 전개시켜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인심을 중심삼고 악심과 물심이 합하여 천심을 꺾을 때에는 이것이 추락되고 파괴되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양심적으로 살아라.’ 하는 보편적인 말이 있습니다. 이것만으로 만사가 해결지어지느냐? 양심적으로 세상을 살았다 할지라도 그 양심을 기반으로 하여 온 우주와 더불어 내가 즐거이 살지 못했고, 하늘이 있다면 그 하늘과 더불어 즐거이 살지 않았다 할진대 이는 다시 수정을 받아야 할 자기 자신임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잖아요? 여러분이 실제 양심적인 생활을 한다면 여러분의 마음을 자극시키는 현상이 일어날 것입니다.

인간은 양심을 가지고 있으되, 그 양심과 천륜의 목적과 더불어 즐길 수 있는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타락의 운명을 가진 인간은 천륜의 목적을 대하려는 소망을 갖고 있습니다. 타락으로 양심의 목적과 자유를 잃어버린 것, 즉 양심생활의 목적과 자유를 잃어버린 것이 한스럽고 슬픈 일임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만일 인류의 시조가 어떻게든지 선한 목적을 중심삼고 선한 그 곳에서 생활하고 즐길 수 있는 그 기반을 닦아 놓았던들, 우리 후손도 내 마음과 하늘의 마음이 즐길 수 있는 체험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마음의 목적, 생활의 목적과 인연 맺지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떨어진 것이 타락입니다. 떨어지게 될 때에 무엇을 중심삼고 떨어졌느뇨? 몸뚱이를 중심삼고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개체에서 마음과 몸이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고충의 자리에 서 있는 여러분입니다. 진정한 마음이 여러분에게 있다 할진대 이것을 해결하기 위한 한 순간이라도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역사와 인연을 맺었습니까? 한 해 혹은 몇십 년 혹은 생애가 그런 역사와 인연을 맺었습니까? 그렇지 못하다 할진대 여러분 자신들은 천심에 반역된 입장에 서 있는 것입니다.

이 천심을 끊어 버리고 몸이 즐기는 방향으로 떨어져 내려가면 자연히 자멸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세상에는 몸이 즐길 수 있는 방향으로 이념을 찾아 나가는 주의, 마음이 즐길 수 있는 방향으로 이념을 찾아 나가는 주의가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지극히 작으나 소우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에 있어서 그 싸움의 현상도 세계형을 갖추고 있습니다. 이것을 해결짓기 위한 것이 나와야 하는데 아직까지 나오지 않았습니다. 또 인간 개체를 넘어 민족과 국가와 세계와 더불어 해결할 수 있는 하나의 모형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끝날에 남아질 수 있는 자

나를 걸어 놓고 세계가 뒤넘이쳐 들어오는 고로, 마음과 몸이 싸우는 생활이 계속 진행되는 것입니다. 이 몸과 마음의 싸움에 있어서 마음을 중심 삼아 승리의 개선가를 올리지 못한 자, 그는 도저히 하늘 백성이 될 수 없습니다. 세계를 정복하고자 하는 야욕을 품은 자, 이 세계와 더불어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자기의 이념을 중심삼고 이 땅을 움직이려 하는 자는 이 땅과 더불어 망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의 이념을 붙들고 그 이념을 찾고 또 찾아 나오는 자는 남아질 것입니다.

마음의 세계는 불변의 모습을 갖추고 있고, 마음의 세계는 유일성을 갖추고 있기에 무한한 세계와 연락할 수 있습니다. 이 마음만이 천심과 연락할 수 있는 발판이 되어 있는 연고로, 그것을 붙안고 사는 사람은 기필코 심판의 한 날을 피하여 갈 수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천국은 네 마음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천국은 무한입니다. 천륜 혹은 천심이 있다면, 그 천심을 내 양심 속에 끌어들여 생활의 원동력으로 삼고, 이것을 중심으로 하여 생활을 요리해 나갈 줄 아는 사람은 천국을 건설할 수 있는 왕자가 될 것입니다.

하늘은 심판의 한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심판의 한 날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우주를 심판할 한 날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인 심판도 해내려오고 있고, 이 시간 여러분 개인에 대한 심판도 하고 있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끝날에 처하여 있는 성도들은 대심판의 한 날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대심판을 피할 수 있는 자는 어떤 자뇨? 개인의 싸움에 있어서 그 싸움을 해결짓고 승리의 깃발을 들고 나선 자일 것입니다. 그런데 가정적으로도 그런 싸움이 벌어지고, 민족적으로도 그런 싸움이 벌어지고, 세계적으로도 그런 모양의 싸움이 벌어진다는 것을 오늘날 인간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일이 벌어지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천심과 악심이 부딪쳐 해결 지을 수 있는 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대심판의 권한을 갖기를 바라고 나왔습니다. 원수를 대하여 늠름한 심판의 대행자가 되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정복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마음을 중심삼고 몸을 완전히 정복해야 합니다. 다시는 마음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없게끔 그러한 요소를 완전히 궤멸시켜야 합니다. 신앙적인 이념으로 몸을 때려잡기 전에는 심판의 대행자가 될 수 없습니다.

개인심판에서 승리하는 자는 가정을 심판할 것이요, 가정심판에서 승리하는 자는 사회를 심판할 수 있고, 사회심판에서 승리하는 자는 국가를, 국가심판에서 승리하는 자는 세계를, 세계심판에서 승리하는 자는 천주를 심판할 수 있습니다. 그런 권한이 있는 것입니다.

나 하나를 두고 볼 때 나라는 이 한 존재는 두 세계의 중간에 위치해 있습니다. 마음을 중심삼고 천국은 마음의 윗면을 점령하고 있고 그 아래는 지옥이 점령하고 있어 이 두 세계가 내 마음에서 평행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즉 보이지 않는 영적인 마음의 세계에 있어서 마음의 평행선 위에는 하늘이요 그 아래는 지옥입니다.

여러분, 끝날에 가면 갈수록 어떤 사람은 공포심에 사로잡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반면에 기쁨에 사로잡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러한 움직임이 나타나는 것은 필연적인 현상입니다. 지극히 악한 사람만이 있는 줄 알았더니 지극히 선한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지극히 선한 사람에게는 지극히 악한 것이 침범할 수 없고, 지극히 악한 사람에게는 지극히 선한 것이 관여할 수 없습니다. 이 사회는 하나님도 붙들 수 없습니다. 어떠한 신령한 사람도, 어떠한 하늘의 은사가 있는 사람도 이것을 합하려야 합할 수 없는 때가 옵니다.

그때가 오면 지극히 악한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 하늘과 인연을 맺지 못한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영락없이 심판대에 올라갑니다. 그와 같은 실상이 여러분 마음에서 벌어질 때가 올 것입니다. 마음은 이렇게 가기를 원하나 몸은 저렇게 가기를 원합니다. 그 몸과 마음을 연결지을 수 있는 조건을 갖지 못하여 허덕이는 자는 영락없이 지옥행이라는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행은 어디에서 결정되는가

그렇다면 천국과 지옥행은 어디에서 결정되어지느냐? 나에게서 결정되어지는 것입니다. 몸의 오관을 통하여 느껴지는 조건들 속에서 양심의 가책을 받는 생활을 하는 자는 지옥에 있는 것입니다. 마음을 중심삼고 마음이 즐길 수 있는 생활을 하는 사람은 천국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물욕과 악심을 버리고 양심을 중심삼고 천륜을 바라보는 것이 지당한 일입니다. 이것은 여러분도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라는 것은 기쁨의 한 날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슬픔의 한 날로 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슬픔으로 시작하였으니 슬픔으로 끝나고, 고통으로 시작하였으니 고통으로 끝나고, 절망으로 시작하였으니 절망으로 끝나는 때가 옵니다. 곡식은 심은 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천심을 배반한 우리의 선조입니다. 양심의 도리와 천심의 법도를 어기고 떨어져 내려와서 무한히 슬퍼하였습니다. 이렇게 내려왔으니 이 세계는 마음이 즐길 수 있는 내용을 갖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도의 생활을 하려면 이것을 전부 다 쳐야 합니다. 이와 같은 싸움이 여러분 자신에게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무슨 행동이든지 그 행동이 반드시 선이냐 악이냐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내가 움직이는 이 하나의 손길, 보는 것, 듣는 것, 냄새 맡는 것 등 우리의 모든 감각을 통하여 들어오는 전부가 선을 위주 하였느냐 악을 위주 하였느냐 하는 그 가치를 결정짓는 걸음걸이를 걷고 있는 것이 오늘의 내 생활인 것입니다. 도의 길을 가고 있는 사람도 자신의 전체 오관의 감정세계까지 이런 관념, 이런 선악의 기준이 철저하게 서 있지 않는 한, 이것을 식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그런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싸움. 악한 것이 일어나서 선한 것을 먼저 치지만 악한 것은 오래 못 갑니다. 악한 것은 오래 못 가고 선한 것은 오래 간다는 것입니다. 오랜 역사 과정에서 이것이 개인에서 가정으로 민족으로 국가로 세계로 천주로 점점 확대되어 세계적인 이념시대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세계주의시대가 와도 개인은 개인입니다. 그렇지만 이 사조의 흐름은 범위를 넓히면서 나오는 것입니다.

옛날에 양심적으로 산 사람이나 오늘날에 양심적으로 산 사람이나 입장은 마찬가지로되 관계되어 있는 범위는 넓어져 나옵니다. 옛날에는 개인을 위주 하는 생활형태에서 만족하였으나, 그래야 하느냐 하면 그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가정을 위주 해야 하느냐, 그것도 아닙니다. 사회를 위주 하느냐 하면 사회도 아닙니다. 국가를 위주 하여야 하느냐 하면 국가도 아닙니다. 세계를 위주 하여야 하느냐 하면 세계도 아닙니다. 하늘땅을 위주 하는 생활형태라야 합니다.

역사의 조류와 형태와 그 범위는 넓어져서 흘러와도 마음의 기준만은 변함이 없습니다. 이 마음의 기준을 중심삼고 천륜의 방향과 딱 맞추어 나가면 이 역사의 모든 것은 천륜이 지배하고 있는 연고로 마음이 지향해야 할 목표와 방향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양심적으로 살아라, 양심적으로 살면 복받는다.’라고 했습니다. 심판의 한 날이 우리 앞에 막혀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에, 복받는 것은 과할 것입니다. 당장은 복받는 것 같아도 그때에 가선 맞게 되니, 도리어 복이 못 되는 것입니다. 땅 위에서 복받는 것이 아닙니다. 복은 한때가 올 때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에 남아진 자에게 축복의 기대가 벌어지기 때문에 양심적으로 살면 복받는다고 한 것입니다. 이렇게 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끝날은 하늘땅을 위주 한 천주주의시대(天宙主義時代)

오늘날은 끝날입니다. 우리가 끝날이라고 말하고 있는 이 시대는 세계주의시대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 세계와 멀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천심(天心)이 있다면 천심을 중심삼은 천주주의시대로 들어갈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은 어디를 향하여 가야 합니까? 자기를 위하던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가정을 위하던 때도 지나갔습니다. 사회를 위하고 민족을 위하던 때도 지나갔습니다. 일개 국가를 위하던 때도 지나갔습니다. 이제는 세계주의시대가 옵니다. 어떠한 이념 밑에서 세계를 위하지 않으면 안 될 단계에 들어왔습니다.

인간에게는 외적으로 가는 길과 내적으로 가는 길, 이 두 가지의 길이 있습니다. 내 한 자체는 이 두 길을 대하는 중심에 서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안팎으로 통합하여 가는 하나의 길이 있겠거늘, 그 길이 나타나는 때가 우리가 바라는 이념시대일 것입니다.

이제는 천심이 대하고 싶어하는 개인을 찾아야 되겠고, 천심이 대하고 싶어하는 가정을 찾아야 되겠고, 천심이 대하고 싶은 민족과 국가와 세계와 천주를 찾아야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알지 않는 한, 여러분은 역사상의 위인이나 혹은 성인들의 노정을 되풀이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심의 방향을 천심으로 향상시켜서 나오고, 몸의 방향도 천심을 향하여, 자극적인 물질의 세계도 천심을 향하여 접근해 들어오고 있습니다. 접근해 들어오는데 이것이 안팎으로, 외적으로 내적으로 격동하며 들어오는 것입니다. 부딪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부딪치는데 무엇을 중심삼고 부딪치느뇨? 이 땅을 중심삼고 부딪칩니다. 그 다음엔 무엇을 중심삼고 부딪칠 것이냐? 사람을 중심삼고 부딪치는 것입니다.

싸움의 노정에 있어서 외적인 세계이념을 제거시키고 내적인 세계이념을 창설하기 위하여 이 역사는 뒤넘이치며 움직여 나오고 있습니다. 그 심정을 가운데 놓고 좌우로 갈라져서 뒤넘이치는 것이 오늘날의 현상입니다. 이러한 현상이 여러분 자체에서도 벌어지는 것이고 세계적으로도 벌어진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계셔서 인간을 대하여 섭리하여 오셨다면 하나님께서 이 세계주의시대까지 끌어 나오시기 위하여 얼마나 수고하였는가를 여러분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마음과 몸이 대응하여 몸이 마음 앞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몸 앞에 굴복하는 내 자신이요 우리 선조들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선조들이 마음을 기반으로 하여 그 개인을 넘어 민족을 지나 국가를 지나 세계주의로까지 끌어내기 위한 하늘의 수고가 얼마나 크셨겠는가를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역사 서적을 볼 때는 이렇게 하늘이 수고한 투쟁사가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 볼 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 것을 느껴 봤습니까? 하늘 앞에 ‘나의 이 괴로움을 맡으시고 이 괴로움을 없애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하는 사람은 영광의 나라에 못 갈 것입니다. 가정을 중심삼고, 민족을 중심삼고, 국가를 중심삼고 ‘아버지시여, 축복해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하는 사람은 그때까지만 남아 있을 것입니다. 민족주의는 세계주의가 오면 깨어질 것입니다. 세계주의는 천심을 중심한 천주주의가 오면 깨어질 것입니다.

끝날의 양상과 사탄의 최후 공격 목표

큰 목적, 최종의 목적을 위하여 섭리해 나아가는 하늘이었기에 우리도 최고의 목표가 이루어지는 한때를 바라보고 그때를 대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연고로 끝날이 온다고 하였습니다. 끝날은 어떤 날이뇨? 하늘은 마음이요 땅은 몸이므로 하늘과 땅이 접하는 때, 세계주의와 사상이 접하는 때, 내 몸과 마음이 접하는 때입니다. 접하면 무엇을 노래해야 되느뇨? 마음의 생활을 노래하고, 마음을 통할 수 있는 세계를 노래해야 됩니다. 이 천주와 더불어 노래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날, 그러한 세계는 땅 위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하늘은 그러한 세계를 향하여 움직여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한 세계가 하늘의 최고 목표인 것입니다. 인류의 최고 목표입니다. 그날에 남아질 수 있는 내가 되기 위해서는 내 몸과 이루 형언할 수 없는 투쟁을 하여야 되겠고, 한번 맹세하면 그 맹세가 변하지 않아야 되겠고, 한번 결심하면 그 결심이 변하지 않아야 됩니다.

그러한 결심을 갖고 나서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 물론 그것을 꺾어 바꾸기 위해서 몸이 반항하고 가정이 반대하고 사회와 국가가 반항하고 세계가 반항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를 향해 세계적으로 전체가 습격해 들어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즉 큰 이념을 알면 알수록 큰 이념에 대비되는 상대적인 반역자가 있다는 것을 말하여 주는 것입니다.

기독신자들은 천성을 향하여 가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천국을 찾아 나간다고 자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큰 목적, 큰 이념을 향하여 가는데 거기에 대비하여 큰 원수들이 있다는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여러분은 큰 원수들이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되겠습니다.

그 원수들의 최후의 목표는 어디냐? 내 몸이라는 것입니다. 원수의 과녁은 내 몸뚱이예요. 내 몸에는 생활적인 위협, 사회적인 위협, 국가적인 위협, 혹은 하늘땅의 위협이 가하여 들어오고 있습니다. 바울이 그런 생활을 경험하였습니다. 동족 앞에 나타나면 동족의 원수요, 이방에 가면 이방의 원수요, 교단 앞에 나타나면 교단의 원수였습니다.

오늘날 기독교니 무슨 종교니 하는 세계의 어떠한 종교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것들도 역시 심판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훌훌 못 넘어 간다는 것입니다. 그러자면 철두철미하게 나 자신을 해명해야 됩니다. 마음을 중심삼고 개체를 찾기 위한 노정에 있어서도 이런 세계적인 뜻의 인연이 있는 연고로 세계적인 고충이 부딪쳐 들어오는 것입니다.

끝날이 되면 될수록 세계적인 공포가 어떠한 일 방향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고 사방으로 들어오므로, 끝날이 되면 될수록 양심적인 사람들은 공포에 휩쓸려 들어간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듣고 보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양심적이요 예술적인 사람, 특히 문학계통에 있는 사람들이 자기 마음대로 살 수 없는 공포의 사조에 휩쓸려 들어가는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지금 사실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공포증이니 무엇이니 하는 증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끝날에 처해 있는 우리들은 내 자신을 걸어 놓았던 과거와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 때는 세계주의시대이기 때문에 세계적인 모든 것을 걸어 놓고 천심과 더불어 외적인 분야를 쳐서 분립시키고 ‘아버지! 제가 승리하였나이다.’ 할 수 있는 한 사람이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늘은 그러한 한 사람을 만들려 하고, 사탄은 하늘이 하려는 그 행동을 반대하는 것입니다.

이 세계는 하늘의 세계가 아니고 악의 주권 하에 있는 세계입니다. 그런 악의 주권세계에 그러한 존재가 나타난다면 온 세계가 반기를 들고 반항할 것은 필연적인 사실입니다. 그 한 존재를 쳤다가는 꺾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개인이 쳤다가 개인이 굴복하고, 가정이 반대했다가 가정이 굴복하고, 사회가 반대했다가 사회가 굴복합니다. 더 나아가 국가와 세계가 반대했다가 국가와 세계가 굴복하는 날 최후의 판결이 내려진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것을 보면 지극히 작은 개체를 전세계적으로 벌여놓은 형상적인 것이 역사의 움직임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섭리역사의 전개 방식

오늘날 인간은 출발할 당시부터 기쁨이라는 것을 맛보지 못하였습니다. 이 땅을 중심삼고 행복이라는 것을 노래해 보지 못하였습니다. 자고이래 지금까지 6천년의 기나긴 역사를 거쳐오면서 양심적인 사람이 하늘땅을 대하여 자랑해 본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적이 있습니까?

양심적인 사람일수록 못살고 천대받고 찢기고 죽고 밟히는 불쌍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한 자리에 부딪히면서도 그들이 소망하였던 것은 무엇이냐? 양심을 중심삼고 영원히 즐길 수 있는 한 날, 그 한 날을 소망하였습니다. 이러면서 우리의 선조들은 피의 제단을 쌓아 나왔습니다.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났습니다. 개인들이 쓰러지면 개인들을 규합하여 민족적으로 연결시켜 나왔고, 민족이 쓰러지면 민족을 규합하여 세계적으로 규합시켜 나왔습니다. 이런 역사가 하나님의 섭리역사였습니다.

보십시오. 아담이 깨어질 때에 다시 가인과 아벨을 중심삼아 나왔고, 가인과 아벨이 깨어질 때 다시 노아의 가정을 중심삼아 나왔고, 다시 아브라함, 이삭, 야곱, 3대를 거쳐 가지고 야곱가정을 중심삼아 나왔습니다. 이렇게 가정을 단위로 하여 세계적인 민족을 향하여 나선 걸음이 이스라엘 민족의 애급고역생활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대표자 모세가 민족을 규합하여 그 민족을 거느리고 국가를 회복하기 위하여 원수의 애급 땅을 떠나 가나안을 향하여 진격하였던 것입니다.

개인은 가정을 찾기 위하여 싸워야 되고, 가정을 찾았으면 그 가정은 민족을 찾기 위하여 싸우고, 민족을 찾았으면 그 민족은 국가를 찾기 위하여 싸우고, 국가를 찾았으면 그 국가는 세계를 찾기 위하여 싸워 나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점점 범위가 넓어진다는 것입니다.

개인이 자기의 승리의 기준을 세우기가 간단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개인이 되기 위해서는 역사적인 비난과 고통 가운데서 승리하여야 되는 것입니다. 노아를 보세요. 120년 동안 오늘날 우리들이 받는 이상의 핍박을 받았습니다. 노아 할아버지가 개인 노아로서 찾아질 수 있기 위하여서 120년을 거쳤습니다.

야곱도 그러했습니다. 야곱이 축복을 이룰 때까지 21년 동안을 고난 속에서 싸웠습니다. 싸우는데 친구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형제도 없고 부모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홀로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그 가정을 기반으로 하여 민족을 찾아 나선 걸음이 애급에 들어가는 노정이라는 것입니다. 애급에서 400년, 이것은 민족이 규합되는 기간입니다. 모세가 민족의 대표자로 나왔으니 민족을 기반으로 하여 국가적인 기반을 닦아야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중심한 섭리의 목적과 재림주의 사명

예수는 어떠한 분이뇨? 국가적인 기반을 터로 하여 세계를 찾아야 할 분이셨습니다. 그런 사명을 가지고 왔는데도 불구하고 국가와 민족이 배반하니 예수는 돌아가시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 개인으로부터 가정을 거쳐 민족을 거쳐 국가를 거쳐 세계적인 차원에까지 나와야 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죽어가신 예수 앞에 이스라엘은 원수입니다. 4천년 수고하여 택하였던 유대교인은 원수예요. 민족을 기반으로 하여 세계를 복귀하고 세계적인 가나안 땅을 복귀하여야 할 책임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민족의 발판이 쓰러지니 4천년의 역사 전부가 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역사를 아담 때로부터 되풀이하는 놀음을 하는 것입니다. 2천년 동안 예수가 그 터를 닦아 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전세계에 기독교인들이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예수를 중심삼은 가정은 없습니다. 있습니까? 예수 자신도 신랑 신부의 자리를 거쳐 가정을 가진 한때를 맞이하지 못하셨습니다. 이 신랑 신부가 무엇인 줄 압니까? 하늘 앞에 설 수 있는 가정적인 제2기준입니다. 아담 해와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가정적인 기준을 세우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것을 회복하기 위한 제2의 가정적인 기준인 것입니다. 그것을 기반으로 하여 예수는 천국의 가장이 되어야 했습니다. 지상에서 가장이 되었습니까? 지상에서 제일 중요한 목적은 가장이 되는 것입니다. 가장이 되어야만 자녀가 있을 수 있고, 자녀가 있어야 백성이 있을 수 있고, 백성이 있어야 민족이나 국가가 있을 수 있지 않습니까?

전세계 기독교인들은 각성할 때가 왔습니다. 세계 기독교인들은 어느 나라의 백성이 못 되어 있습니다. 어느 족속, 어느 지파에 속해 있지 않습니다. 예수가 한 가정의 가장이 되려면 12사도들이 하나되어 예수님이 지상에 가정을 이룰 수 있는 하나의 발판을 마련해야 했는데, 그렇게 못 했습니다. 그러니 세계적인 구원섭리를 종결지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2천년 동안 예수님과 성신이 피눈물의 고비를 거쳐오셨습니다. 그 목적은 어디 있느뇨? 제1기준인 가정의 기준을 찾는 데 있었습니다. 다시 새로운 이스라엘, 새로운 야곱의 가정을 찾아 그 가정적인 기준을 민족적인 기준으로, 민족적인 기준을 국가적인 기준으로, 국가적인 기준을 세계적인 기준으로 세워 가지고, 이 세계를 기반으로 하여 천국 혁명을 일으켜 천상에 있는 지옥세계까지 해방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재림사상입니다. 재림주는 얼렁뚱땅하고 영광 누리러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세계를 기반으로 하여 영계에 있는 지옥까지도 박멸하고 천주적(天宙的)인 천국을 이루시기 위한 사명을 갖고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끝나야 하나님도 쉬신다는 것입니다.

마음세계와 심정세계

우리는 마음이 있어도 마음의 방향을 모르고 있습니다. 어지러운 주의 사상에 얽매여 이리 가야 될지 저리 가야 될지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생활적인 편견으로 인해 움직이는 마음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러니 어느 것이 참이요 어느 것이 올바른 것인지 모릅니다. 마음의 방향이 한곳에서 출발을 했는데, 끝에 가서는 갈라집니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출발은 정상적으로 했어도 끝에 가서는 갈라진다는 것입니다. 갈라진다는 것은 꺾어지는 것입니다. 이러면서 지금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오늘날 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가 대결하여 싸우고 있으나, 이 주의로써는 세계를 해결짓지 못합니다. 우리가 마음의 방향을 못 잡는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실상적인 세계도 그렇습니다. 그런 사조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제 여러분 자신들이 마음의 방향을 결정하는 그 순간은 어떤 순간이뇨? 마음이 천심을 통하여 영원히 즐거워할 수 있는 인연이 맺어지는 순간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마음을 부어 준 목적이 무엇이뇨? 하나님과 인간이 마음으로 하나되어 즐길 수 있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을 목적으로 인간을 지으셨습니다. 방향이 결정되어 있지 않은 내 마음의 터전 위에 이제는 부정하려야 부정할 수 없이 마음에 스며드는 기쁨, 이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아니라 하려야 아니라 할 수 없는, 마음속을 통하여 느껴지는 행복감, 이것이 먼저 이루어져야 세계의 행복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몸이라는 것은 끝이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끝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의 세계는 어떠한 관이 없습니다. 우주관이니 무엇이니 하는 것이 없습니다. 더 나아가서 마음보다 더 큰 것은 심정의 세계입니다. 심정의 세계에 있어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심정의 세계는 제재도 받지 않습니다. 마음의 세계는 제재를 받습니다. 마음은 상대적인 조건 여하에 의하여 제재를 받지만 심정의 세계는 제재할 자가 없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을 무엇이 제재할 수 있습니까? 아무리 태산같은 장벽이 앞을 막아도 꺾지 못합니다. 마음의 세계는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마음의 세계는 상대적인 입장이요, 심정의 세계는 주체적인 입장입니다. 마음은 사방성을 갖고 있는 연고로 제재를 받습니다. 그러나 심정의 세계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늘의 소망은 무엇일 것이뇨? 끝날에 예수님이 오신다면 이런 말을 하실 것입니다. ‘천국은 네 마음에 있고 천국은 네 심정에서부터 이루어지느니라.’고. ‘마음에 있느니라.’ 이것만 가지고 됩니까? ‘심정으로부터 이루어 지느니라.’ 하고 결론 맺어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불행을 느끼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마음의 중심과 화할 수 있는 입장에 서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외적인 고충이 아무리 많다 해도 마음으로 화하여 즐길 수 있는 입장에 있다면 그는 행복한 자일 것입니다.

그러면 불행을 왜 느끼느냐? 내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변치 않는 심정의 중심을 못 가진 연고입니다. 원인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행복의 동산이 찾아올 수 있는 기준

여러분들, 세상 것을 붙들고 좋아하여 보십시오. 언젠가는 끝납니다. 제 아무리 마음이 좋고 심정이 좋다 한들 그것은 필시 끝나게 되어 있습니다. 마음에 뚜렷한 중심이 없는 한 여기에는 슬픈 감정이 있고 기쁜 감정이 있습니다. 또 몸을 중심삼고도 뚜렷한 중심이 없는 한, 몸이 즐길 수 있는 감정이 있는 동시에 슬플 수 있는 감정도 있습니다. 이처럼 상대적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마음이 슬펐던 생애노정은 거쳐갔지만 마음이 즐길 수 있는 생활노정은 거치지 못했습니다. 그런 생애노정을 찾지 못한 타락한 인간은 불쌍한 인간, 저주받아야 할 인간, 심판받아야 할 인간이라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이런 길을 찾을 때가 왔습니다. 하늘의 목적이 끝날에 인간을 심판해서 멸망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할진대 우리는 본향의 주인을, 본향의 가정을, 본향의 사회, 본향의 국가, 본향의 세계, 본향의 천주를 갖고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못 갖게 될 때 하나님은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세상을 바라볼 때, 몸을 중심삼은 개인, 몸을 중심삼은 가정, 몸을 중심삼은 사회, 국가, 세계는 다 있어도 우리의 마음은 여기서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바라는 그 세계, 마음이 영원히 즐거워할 수 있는 주인과 가정, 국가, 세계가 있어야 될 게 아닙니까? 만일에 그것이 없다면 여러분의 마음이 왜 그렇겠어요?

여러분의 마음이 선을 향하여 움직이는 것은 창조적인 어떠한 힘을 갖추고 있어서가 아닙니다. 힘이라는 것은 독자적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가 없으면 작용하지 못합니다. 화학적인 현상을 보아도, 물리적인 현상을 보아도 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부정할 수 없는 뚜렷한 양심작용의 실상을 바라보게 될 때에, 슬픔의 한 면을 제거시키고 기쁨의 한 면을 추구하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기뻐할 수 있는 한때가 인류의 소망의 때요, 인류의 행복의 때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는 거기에 귀결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소위 민주니 공산이니 하는 것이 서로 대결하면서 세계를 지배하려는 정책들을 강구하고 있는데,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해결은 어디에서 해야 할 것이뇨? 옛날 타락 전 아담 해와의 모습, 하나님을 중심삼고 기뻐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즐거워하던 그 모습으로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영원한 주인이요, 내 가정의 가장이요, 내 민족의 주인이요, 내 국가의 주인이요, 내 세계의 주인이라 할 수 있는, 이 세계의 어떠한 것과도 바꿀 수 없는 나의 하나님이라 고 할 수 있는 그 기준이 되었다 할진대 이 지상에 행복의 동산은 찾아올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6천년 동안 찾고자 하는 사람

우리의 마음의 세계는 즐길 수 있고, 화할 수 있고, 동할 수는 있으나 취할 수는 없습니다. 서로 동하고 응할 수는 있으되 취할 수는 없습니다. 원래의 사랑이란 인간의 사랑이 아니고 영원불변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접하여 하나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시는 그 순간 그분과 하나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내가 주고받을 수 있는 기쁨의 자리에 들어가게 되면 세계를 정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과 더불어 즐길 수 있는 장면은 온 천상천하의 모든 것을 소유하여서 기뻐하는 것 이상의 기쁨을 취할 수 있는 장면이라는 것입니다. 만일에 인간이 그런 것을 체험 했다면 이 몸뚱이의 모든 오관을 통해서 느끼는 자극은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늘은 내 마음을 중심삼고 무슨 역사를 해 왔느뇨? 우주 개발 역사를 해 오셨습니다. 우주 개척 역사를 제시하여 나를 이끌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하늘은 어떠한 목표 밑에서 여러분의 마음에 명령하시느뇨? 우주적인 존재가 되라는 것입니다. 우주를 품을 수 있는 존재가 되고 우주의 모든 것을 터전으로 해서 자라라고 하십니다. 이러한 존재가 되라고 하늘은 우리를 이끌어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라, 악한 사람을 사랑하고 선한 사람을 사랑하고 만물도 사랑하고 하늘땅 전부를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얼마나 통쾌한 일입니까? 우리 인간은 이런 본질적인 이념의 내용을 잃어버렸습니다. 이제 마음이 즐길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마음이 즐기는 동시에 이 세포까지 즐겨야 하고 마음이 취하는 동시에 세포까지 취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취함의 감성을 내가 상대하는 세계까지 반응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내용과 그러한 작용을 일으킬 수 있는 사람, 그러한 사람이 6천년간 하나님이 찾고자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똑똑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마음이 있다 할진대 마음이 그리는 사람은 어떠한 사람이며, 세계와 국가와 우주 전체가 바라는 사람은 어떠한 사람이냐? 바로 앞에서 말한 그러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정복되는 입장에 들어가도 무한히 감사한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면 될 것 아닙니까? 내가 무한히 희생하고도 좋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만 많으면 지상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딸은 그런 사람입니다. 주어도 주어도, 무한히 주고도 또 주고 싶고 무한히 희생해도 또 희생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이 그렇지 않습니까? 그 사랑의 몇십 배, 몇백 배 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찾고 있고 그리고 있는 그 세계는 아직까지 오지 않았습니다. 심정적인 그 세계와 지상에 있는 인간의 마음이 인연 맺어지는 그 한 날이 와야 합니다. 그것을 통하여 심판의 절대적인 기준이 지상에 서는 날이면 끝입니다. 그 심정을 기본으로 하여 심판이 벌어질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는 마음의 종교를 넘어선 심정의 종교입니다. 하나님은 마음의 주인이 아니라 심정의 주인입니다. 어떠한 악당들이 있더라도 심정을 통해 나오는 하나님의 그 사랑을 막아낼 수는 없습니다. 그 사랑이 물결쳐 올 때 누구나 좋아합니다. 사탄도 악마도 그 사랑은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좋아하는데, 그 사랑을 받을 수 없는 암흑의 자리에 서 있습니다. 인류는 이러한 자리를 자신의 마음으로 기필코 개척해야 할 운명에 처하여 있거늘, 이것을 어떻게 개척할 것인고?

이제 여러분의 갈 길은 판명되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마음을 통하여 들어오는 인연이 있을 것입니다. 물질을 통하여 들어오는 인연이 있을 것입니다. 사람을 통하여 들어오는 인연도 있을 것이고 말씀을 통하여 들어오는 인연도 있을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자기도 모르게 심정을 통하여 들어오는 인연이 있을 것입니다. 마음은 이 세상을 피해 스스로 그런 곳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인연이 어느 곳에, 어느 한때에 나타나기를 바라고 찾고 고대하고 구하는 자는 역사와 더불어 인연 맺어 나오는 하늘이 기필코 찾아준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심정을 계발하려면

도의 길을 가는 사람은 천심을 향하여 나아가는 자이므로, 들려오는 말 한마디도 무심히 대할 수 없습니다. 원수가 칼을 들고 나를 찌르려 하는 장면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어떠한 인연이 있기 때문이라 생각하고 넘겨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 이것은….’ 하는 사람은 안 되는 것입니다. 이 틀린 세상에서 좋은 것으로 나타나는 것은 하늘이 아닙니다. 틀린 세상에 나쁜 것을 갖고 찾아오는 분이 하늘입니다. 그런 문제까지도 아량을 가지고 인연의 가치를 더듬어 살필 줄 아는 사람이 돼야만 심정 계발의 첫 출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위에 사는 사람을 대하거나 듣고 보고 느끼는 모든 것이 선하냐 악하냐를 마음으로 알 수 있습니다. 어떠한 말을 듣게 될 때, 어떠한 인연이 있어 만나게 될 때 마음이 자꾸 끌려갑니다. 어떠한 진리나 어떠한 교회, 어떤 종교가 있다 할진대 생각하지 않아도 자기도 모르게 그것들에게 자꾸 끌려간다는 것입니다. 그럴 것이 아닙니까? 마음은 자연계의 이치와 같은 것입니다.

지남철의 자침이 늘 남북을 가리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마음도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마음에 있어서도 플러스의 마음이 나타나면 상대적인 마이너스의 마음은 언제나 거기에 끌려갑니다.

만일 여러분이 믿고 있는 그 종교에 내 몸이 끌려 들어가는 감각을 느끼지 못했으면 진정한 신앙자가 아닙니다. 그 도(道)에 내 몸이 끌려 들어가고, 내 마음이 끌려 들어가고, 내 심정이 끌려 들어가는 것을 느끼지 못하였다 할진대 도를 믿는 사람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언젠가는 그 도를 못 믿게 됩니다.

그러면 오늘날 온 세계 인류는 무엇을 찾고 있느냐? 이념을 찾고 있습니다. 이념은 무엇으로 해명해야 하느냐? 진리로 해명해야 합니다. 진리는 무엇이냐? 말씀입니다. 내 마음이 영원히 즐길 수 있는 진리, 내 마음이 영원히 즐겨 취할 수 있는 진리는 백 번 듣고 천 번 들어도 새로운 맛을 느낍니다. 여러분, 진리 중에 제일 참된 진리는 밥맛과 같습니다. 어제 먹어도 오늘 먹어도, 70, 80년 같은 밥을 먹어도 맛있으니 진리도 그와 마찬 가지입니다. 고맙게 생각해야 됩니다. 여러분은 말씀을 통하여 사람에게는 두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 했거늘, 몸을 취하게 하고 내 심정을 취하게 하는 진리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말씀이면 됐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 이 때는 가만히 앉아 있을 때가 아닙니다. 방향이 뒤바뀌는 때가 왔습니다. 한 주체를 향하여 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옆을 바라보고 옆길로 가면 지장이 있기 때문에 다 끊어 버리고 가야 합니다. 전부 다 그것을 이단시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만우주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기준을 찾아야 할 때

지금 때는 방향이 거꿀잡이 되는 때입니다. 하늘은 땅이 되고 땅은 하늘이 되어야 합니다. 인간이 주체가 되어야 합니다. 바꾸어지는 때입니다. 바꾸어지는 때이니 내 자신도 하늘땅의 중심적인 존재, 만우주의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하늘이 만우주의 주인공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신 목적은 자신의 권한을 대신한 만우주의 주인공으로 인간을 내세우기 위한 것이었음을 여러분은 잘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 기준에 이르려면, 이제는 내 중심에서부터 해결하고 내 심중에서부터 체휼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아야 됩니다. 내 마음에서부터, 내 심중에서부터 해결지을 수 있는 길을 찾으려면 한 방향을 찾아가야 됩니다. 그 방향을 찾았으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그 방향을 중심삼고 사방을 봐야 됩니다. 사방을 더듬어 살펴서 사방이 어떻다는 것을 알고 그 다음에 천성을 바라보아야 됩니다. 이렇게 해야 자기의 위치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의 종교, 지금의 주의는 나의 마음과 심정과 이념의 완전한 기준이 못 된다는 것입니다. 왜? 새로운 시대가 온다고 했기 때문에 그것들은 다 지나가게 됩니다. 지금의 종교나 주의가 나의 마음과 심정과 이념의 완전한 기준이 못 되었기 때문에 새로운 그 무엇이 내 중심이 되어야 할 때가 왔습니다. 지금 때는 그런 때입니다. 너나 나나 같은 입장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우리를 종이라 하시지 않고 친구라고 하신 것과 같이 너나 나나 같은 입장입니다. 우주가 높은 것이 아닙니다. 우주와 내가 어깨동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종파나 사방성을 갖추지 않았기 때문에 일방적인 면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천심을 그 중심, 심정의 중심으로 결정하고자 하는 자는 자기의 일방적인 방향을 비판하고 사방성을 갖출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마음과 몸이 언제나 싸우고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마음이 몸을 몽땅 사로잡아야 합니다. 그래 가지고 사방으로 끌고 다닐 수 있는 기준이 잡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완전한 해결점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지금 가만히 있을 때가 아닙니다. 그런데 가만히 있어보란 말입니다. 뭐가 되겠습니까? ‘나는 잘났어’ ‘나는 무슨 학자인데’ 하면서 자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무슨 학자 무슨 학자 하지만 그 중에 과학자는 좀 낫습니다. 그 이외 학자라는 사람들은 거꿀잡이 됩니다. 큰소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일수록 책임이 중하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어떤 가상적인 구상 밑에 인심을 결부시켜 가지고 천도 앞에 영향을 끼친 자는 저 나라에 가게 되면 영원한 참소에 걸린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 영웅이 되고 싶지요? 타고나지 않은 영웅이 되려 하다가는 큰 벼락이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훌륭하게 출세하겠다고들 하지만 하늘이 허락하지 않은 출세를 했다간 망하는 것입니다. 그 후손이 망해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돌연한 암살사건이라든가 찔러 죽이는 따위의 잔인한 사건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너는 그 자리에 있을 자격이 못 돼.’ 하면 서…. 이것도 하늘이 시켜서 하는 것입니다. 천법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제 우리들은 욕망을 치워 버리고 나를 찾아야 될 때입니다. 마음 몸이 더불어 즐거워하고 기뻐하며 노래할 수 있는 나를 하나님은 그리워하십니다. 야! 네 손을 만져보자 하시면서 손을 붙들고 기뻐하는 것을 느껴 보았습니까? 여기 오신 여러분들의 마음은 그렇게 돼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 마음이 활동할 수 있게 하고, 몸의 작용을 촉구하기 위하여 실상의 세계를 지어 주셨습니다. 만물을 걸어 놓고 노래하고, 만민을 걸어 놓고 노래하고, 미래의 세계를 걸어 놓고 노래하고, 천상의 세계와 지상의 세계 전부를 걸어 놓고 노래하는 나, 그렇게 마음으로 즐기는 그 모습을 바라보고 하나님이 찾아와 반길 수 있는 모습이 한번 되어 보란 말입니다. 이것은 가공도 아니고 공상도 아닙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젊은 나도 그것을 실감하고 그 느낀 사실이 틀림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천지가 반대하고 하늘땅이 뒤집어지는 한이 있다 해도 이런 노정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시대는 무슨 시대? 끝날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기준을 세운 인간이 없는 한 최후의 심판은 내리지 못합니다. 심판 날은 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끝날에 필요한 진리와 나

종교의 진리는 어떤 진리여야 합니까? 내용만을 설명하는 진리는 필요 없습니다. 몸이 ‘그렇습니다.’ 마음이 ‘그렇습니다.’ 심정이 ‘그렇습니다.’ 할 수 있는 그것이 나와야 됩니다. 그러한 주의, 그러한 이념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이 우리의 주위에서 들려오거나 혹은 인연되게 되면 여러분의 마음은 거기에 이끌려 갈 것입니다. 내가 무슨 일이 있어서 그곳에 가야 할 터인데 하고 몸이 요구하더라도, 그런 조건이 구비되어 있더라도 그것을 다 부정하고, 그것을 다 버리고 그리로 가야 합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이끄는 느낌을 주는 말씀이 있다면, 여러분은 보따리를 다 정리하고, 김삿갓 모양으로 그저 괴나리봇짐을 등에 지고 그리로 따라가 보라는 말입니다. 망하지 않습니다. 그는 역사와 더불어 남아질 것입니다.

그런 자가 되려면 여러분은 옛날의 그 모양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합당치 않은 탈바가지를 벗어 버리십시오. 종교가는 종교가의 탈을 벗어버리십시오. 양심가는 양심의 탈을 벗어 버리십시오. 종교의 무슨 무슨 간판, 다 떼어 버리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통일교회에 나오고 있지만 저는 통일교회 간판 뗄 날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통일교회의 간판을 내건 것은 상대적인 조건이 있기 때문에 투쟁 상대가 나왔기 때문에 간판이 필요하지, 떼어 버려야 합니다. 여러분, 마음세계에 무슨 간판이 필요가 있어요? 심정의 세계에 무슨 간판이 필요해요? 그냥 있어도 자기 스스로 압니다. 그냥 있어도 스스로 하게 됩니다. 그것이 해결지을 수 있는 제1기준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떠한 생활을 해 왔습니까? 오늘 여러분들은 어떤 위치에 있습니까? 두 세계에서 허덕이는 자신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여기에서 자신이 즐길 수 있는 것은 몸이 이끄는 방향이 아니고 마음이 이끄는 방향입니다.

오늘날 세상을 바라보게 될 때 몸이 이끄는 방향, 외적인 조건은 만점입니다. 완전히 구비되어 있습니다. 몇 백 점으로 구비되어 있습니다. 개인을 넘어 가정을 넘어 세계 형태로 벌어져 있기 때문에 몇 백 점으로 구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이끄는 방향은 그 몇 퍼센트밖에 안 됩니다. 이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이 세상을 심판하고 싶은 하늘입니다. 그런 하늘의 서러움은 어떻겠느냐는 것입니다. 그 서러움을 알면서 마음이 즐거워할 수 있는 노정을 찾아 나아가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에 도를 믿는 사람들은 목이 떨어져도 견디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통일교회에 오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진리, 여기서 말하는 말씀 앞에 자신의 몸이 굴복하려 하고, 마음이 굴복하려 하고, 심정이 숙여지거든 그것은 마지막의 것인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뇨? 내 몸의 영원한 주인입니다. 내 심정의 영원한 주인입니다. 본연의 세계는 아무리 사랑하는 부부라 할지라도 남편이 부인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한다고 해서 부인이 그 남편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또 부인이 하나님을 남편보다 더 사랑한다고 해서 왜 하나님을 나보다 더 사랑하느냐고 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보고 좋아할 수 있는 세계가 천국입니다. 세상의 어떠한 사랑, 어떠한 내용을 초월한 주체적인 입장에 계신 하나님은 내 몸의 영원한 주인입니다. 몸뚱이의 영원한 주인이신 하나님의 품, 그 동산에 있으면 죽어도 좋은 것입니다. 내 마음의 영원한 주인, 내 심정의 영원한 주인이면 됐지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이 심정으로 그리는 세계는 어떠한 곳입니까? 요것이나 요것처럼 외계의 감각을 통하여 들어오는, 오관을 통하여 들어오는, 인식 세계에서 빚어진 그 세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세계, 정적인 세계를 그리고 있습니다. 그 세계는 아주 작은 하나의 미립자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정의 세계입니다. 여러분, 그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해 못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 (마 11:15)라고. 통념적인 감성을 가지고는 주체적이요 원형적인 이념세계를 느낄 수 없습니다.

하늘땅의 어떤 것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기쁨

우리는 몸으로 노래해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마음으로 노래해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심정으로 찬양해야 되겠습니다. 무엇을? 나의 주인 된 분을. 그분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이야말로 나의 아버지입니다. 나의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아들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놓고 ‘오! 이 분을 세상의 그 무엇과 바꿀소냐? 세상의 그 무엇이 이 분과의 인연을 끊을소냐?’ 해야 합니다. 인간이 좋다는 사랑도, 인간이 좋다는 욕망도, 인간이 좋다는 부귀영화도 문제가 안 되는 것입니다. 온 피조만물, 온 존재들이 영원히 영원히 주인 삼겠다는 그 하나님을 내 아버지로 점유했다면 그 이상의 행복이 어디 있을까요? 모모한 인사의 부인만 되어도 배를 내어 밀고 야단하고, 무엇이 조금만 어떻다 해도 야단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내 아버지이십니다. 이 기쁨은 하늘땅의 어떤 것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서 ‘6천년의 고난의 길을 거쳐 나를 찾아 헤매던 하나님, 얼마나 수고하셨습니까?’ 하고 아버지를 위로할 수 있는 아들딸들을 하늘은 찾고 있습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를 심판할 줄 알아야 한다

이러한 아들을 만들기 위하여 하늘은 수세기를 거쳐오면서 수천만 번 우리 선조들을 움직여 나왔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얼마나 많이 배반했습니까? 인심을 배반하고 천심을 배반한 우리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천륜, 아버지의 심정을 배반한 우리입니다. 우리는 이 죄를 회개해야 됩니다.

무엇이 천륜을 유린해 나왔느뇨? 이 몸이 유린하였으니 우리의 몸은 죄악된 몸뚱이입니다. 원수는 여러분 앞에 나타난 어떤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몸뚱이가 원수입니다. 이 몸뚱이를 눌러놔야 됩니다. 자기를 심판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도의 길을 가는 사람들은 역리자(逆理者)입니다. 설법도 역설법입니다. 역설법을 주장하고 역리의 노정을 걷고 있으며 역리의 이념을 찾고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들은 지금까지 어디에 목을 걸고 싸웠습니까? 통일교회에 나오는 분들 중에는 통일교회 이름을 중심삼고 싸우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걸어 놓고 싸워야 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여자들이 가슴을 치고 슬퍼 울며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보고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눅 23:28)고 하셨습니다.

내 자신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자신이 문제입니다. 누구를 욕하고 누구를 원망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 자신을 욕해야 합니다. 허망된 자기의 모습을 청산하고, 본연의 마음의 친구, 본연의 심정의 친구인 예수를 마음의 아버지, 심정의 아버지, 더 나아가서는 몸의 아버지, 우주의 아버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런 길로 나아가야만 여러분은 끝날의 심판을 피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을 잊을 수 있는 기쁨의 조건을 찾는 길을 가야만 되겠습니다. 그 길을 가려면 자신의 마음을 이끌어 주는 말씀이 있어야 됩니다. 심정이 움직여질 수 있는 진리를 가졌느냐 안 가졌느냐, 그런 종교를 가졌느냐 안 가졌느냐에 따라서 참이냐 거짓이냐가 결정된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기 도>

아버님! 얼마나 수고하셨습니까? 한 생명을 찾아 세우기 위해 6천년이 걸렸습니다. 아버님은 한 가정을 세우기 위하여 그 살림살이를 다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이제 세계의 모든 외적인 환경도 아버님이 즐거워하실 수 있는 동산으로 이루어져 나가고 있습니다. 주의와 주장도 두 갈래 길에서 판가리 지어야 할 입장에 놓여 있습니다.

이렇듯 이제 저희의 마음 세계에 있어서도 두 싸움을 하나로 결말지어야 되겠사옵니다. 원수들을 전복시켜 승리의 깃발을 들고 세계를 향하여 총진군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천상의 원수들을 심판하는 그날, 아버지의 아들딸 된 것을 자랑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고, 아버지의 은사가 여기에 모인 아들딸의 심중 깊이 스미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들은 지금까지 원수에게 이용당하며 살아왔사옵니다. 마음이 즐길 수 있는 본연의 이상을 향하여, 본연의 세계를 향하여, 본연의 주인을 향하여 싸워 나오지 못한 과거를 청산하고, 이날 이 시간부터는 천심을 향하여 달음질칠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세계는 그런 하나의 이념의 세계로 기필코 종결될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지의 심정과 내 심정이 하나되어 노래할 수 있는 곳이 천국이요 이상동산인 것을 저희들이 알게 하여 주시옵고, 아버지의 심정을 노래할 수 있는 가정이 만천하에 나타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자기 부모의 사랑에 취하는 이상 아버지의 사랑에 취하고, 자기 자녀의 사랑에 취하는 이상 아버지의 사랑에 취하여 그 사랑을 노래하고 그 사랑을 즐기며 그 사랑의 행복감을 갖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러한 환경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요 저희들의 소망인 것을 알고 있사오니, 그 뜻과 소망을 이루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이 기뻐하시고 저희들도 기뻐할 수 있는 생활환경을 저희의 생애가 종결되기 전에 이루어야 되겠사오니, 이 시간부터 이루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 하옵나이다.

미쳐지는 모든 인연과 말씀을 통하여, 모든 사람을 통하여, 어떠한 물질을 통하여서든지 마음이 움직이고 심정이 움직이는 곳을 제거하지 말고 그것에 따라, 그 곳을 향하여 달음질쳐 갈 줄 아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 같이하여 주신 것을 감사하올 때,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써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마태복음 12:46-50

<기 도>

아버님, 저희들은 여러 곳에서 모여 왔습니다. 여러 사람의 자손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런고로 원인과 근거가 여러 가지요, 갖가지 사정으로 엉클어져 오늘날의 저희 자체들이 빚어졌다는 것을 생각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아버님, 여기에는 선한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과 몸의 모양은 천태만상이요 각양각색이오나, 참을 그리고 최대의 선을 바라며, 당신이 하나님이심을 알고 본연의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저희들의 마음만은 변치 않을 것이옵니다.

아버님께서는 어떠한 외모의 형태를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심중 깊이 스며있는 본연의 자체를 일깨워 아버지를 흠모하는 마음을 찾고 그리워하신다는 것을 이 시간 저희들이 심중으로 느끼고 체휼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것을 인정하고 실증하지 못할진대 오늘 여기에 참석한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역사노정과 시대적으로 복잡한 싸움의 노정을 거쳐오시면서 바라시는 소망의 모습을 찾고자 수고하신 아버님을 저희들이 생각하게 될 때, 오늘의 내가 나 홀로 되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저희가 이 땅 위에 태어날 때는 상하 전후 좌우의 인연을 중심삼고 태어났습니다. 이 인연들은 무엇인지 모르게 완전무결한 하나의 목적의 가치 혹은 전체적인 대상의 가치를 추구하도록 저희를 재촉한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와 같은 자아의 모습을 중심삼고 위로는 하늘이 있고 아래로는 선의 역사가 천륜과 더불어 움직이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고, 앞에는 소망의 세계와 좌우에는 우리의 동지와 민족과 동포가 있음을 느껴 본연의 심정을 붙들고 이 모든 것을 관찰할 수 있는, 상하 전후 좌우와 인연 맺고자 허덕이는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자기의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이것이 그리워 허덕이는 사람이 있다 할 진대 그들이 시대적으로는 용납되지 못하고 생활적으로 반대받는 노정을 걸었다 할지라도 끝날에는 기필코 천상 앞에 세워질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저희들은 그런 길을 소망하며 그런 길을 찾아 헤매다가 이 자리에 왔사오니, 아버지, 이제 분부하여 주시옵소서. 말씀하여 주시옵소서.

저희가 마음으로 아버님의 심정을 고대하고 흠모하오니 아버님, 속상한 일이 있으시면 저희에게 체휼시켜 주시옵고, 처참하고 안타까운 일이 있으시면 저희의 몸을 통하여 실증시켜 주시옵소서. 저희의 몸으로 실증되는 자리에서 아버지의 실존을 느끼고, 아버지 앞에 머리 숙여 감사드릴 수 있는 소망의 아들딸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들이 악하고 죄의 쇠사슬에 매어 있을지라도 하늘은 가엾이 여겨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체휼하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가면 갈수록, 느끼면 느낄수록, 알면 알수록 탕감할 수 없는 죄인 중의 죄인이요, 무거운 짐을 진 자 중의 무거운 짐을 진 자임을 느낄 수 있는 자들이 이 자리에 모여야 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자기의 어떤 주의 주장이나 자기의 인식을 청산하지 않고는 천성에 들어갈 수 없다는 엄연한 사실을 느끼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아버님, 여기에 모인 당신의 아들딸들, 이미 왔사오니 온 걸음이 헛걸음이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인연이 되어 만났사오니 이 만남이 무의미한 만남이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인연이 인간적인 인연이 되지 말고 본성적인 인연, 심정적인 인연, 생명적인 인연으로 연결지을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내 무슨 말을 하오리까? 아버님의 심정만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아버님의 모습을 보여 주시기를 원하고 있사오며, 아버지의 성상을 실제로 느낄 수 있기를 원하고 있사옵니다. 이 시간, 너, 나, 우리들은 형제인 것을 느끼고 아버지를 대신한 식구들이 아버지 앞에 하나의 제단을 이루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시간, 삼천만 민중을 대신하여 모인 교단을 축복하여 주시옵고, 27억 인류를 대신하여 아버지 앞에 엎드린 수많은 당신의 아들딸들을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지금까지 우리의 조상들이 악과 대결하여 싸워 나왔으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이 싸움을 감당해야 할 것을 알고 하늘을 대신한 용사로서 내적 장비와 외적 장비를 완전하게 갖추어, 인류 앞에 민족 앞에 나설 수 있는 아들딸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저희는 봉독한 성경 말씀에서 예수님의 서글픔을 보았사옵니다. 예수님은 요셉가정에서 태어나 부모 형제와 친척, 그리고 동족을 가졌지만 부모 형제가 없는, 친척과 동족이 없는 불쌍한 행로를 걸으셨사옵니다. 아버지시여! 그러한 예수님의 슬픈 사정을 저희 자신과 관계를 지어 주시옵고, 기필코 밝혀야 할 천적인 내용들을 이 시간 밝혀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 하옵나이다.

이 몸 마음을 아버지 것으로 드리기를 원하오며, 전체를 아버지 것으로 귀일시키기를 원하옵니다. 아버님, 친히 지켜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올 때에,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써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말 씀> 우리에게는 부모가 있고 형제가 있고 처자가 있습니다. 아무리 못난 사람이라 하여도 머무를 가정이 있는 것입니다. 좋으나 나쁘나 식구가 있고 자기가 머무를 수 있는 가정이 있습니다.

이상세계를 그리워하는 인간의 마음

여러분은 이 가정과 더불어 살다가 죽어야 할 것입니다. 이 가정을 중심삼고 식구와 같이 희로애락 하는 생애노정을 지금 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 가정이 자신과 영원히 인연되는 가정인 줄 알고 있지만 어느 한 때에 가서는, 그 가정 그 식구도 여러분과 인연이 끊기게 됩니다. 여기 많은 사람이 모였지만 영원한 세계에까지 그러한 인연을 갖고 간다고 자신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이 가정을 중심삼고 소망 혹은 행복을 꿈꾸고 있으나 그 소망과 꿈이 내가 살다가 운명하는 그 순간 그치고 말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계속 연결되어 또 다른 어떠한 행복과 소망의 세계와 인연을 맺을 것인가 암담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본래의 마음이 있습니다. 이 마음은 인간이 지향해 나가야 할 크나큰 선의 목적세계를 향하여 나가도록 이 시간도 우리를 몰아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이 역사와 더불어 움직여 나왔던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이 마음의 움직임을 볼 때에 이 마음은 선한 사람이 나타나기를 고대해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 사람은 기필코 역사노정에 나타날 것입니다.

이 사람 저 사람이 그 마음을 통하여 이구동성으로 지금은 끝날이라고 말하는 것을 볼 때, 그 끝날은 오고 있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오늘날 세계 인류는 행복합니까, 불행합니까? 행복하다기보다는 불행하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이 불행의 세계가 끝나는 때가 끝날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은 무엇을 그리워합니까? 행복, 혹은 소망적이고 자유로우며 평등한 이상 세계를 그리워합니다. 우리의 마음속 깊이에서는 그 세계를 그리며 오늘 이 시간까지 생애를 걸어온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참된 마음으로 고대하고 참된 마음으로 바라는 모든 것은 기필코 이루어져야 합니다. 만일 그렇게 안 된다면 하늘이니 무엇이니 하는 것을 믿을 수 없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우리의 마음을 행복하게 못하였고 또 몸을 자극 시키는 행복한 생활환경에서 산 사람은 없습니다. 나의 식구, 내가 지금까지 의지하고 바라보는 부모, 형제자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은 영원한 행복의 보금자리가 못 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느냐? 종교적인 명사를 빌리면 타락되었기 때문입니다. 타락하여 이루어진 세상이요 타락하여 이루어진 종족, 가정, 식구가 어찌 본연의 심정이 추구하는 행복의 이념과 부합될 수 있겠습니까? 결론은 뻔한 것입니다.

그런 연고로 이 시대가 지나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솔직한 말입니다. 어떤 남녀, 그 누구도 이 시대는 지나가기를 바라고 있다는 거예요. 거짓된 사회가 지나가고 거짓된 부모가 지나가고 거짓된 형제가 지나가고 거짓된 부부가 지나가고 거짓된 자녀가 지나갈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이 시간 여러분 마음에 깊이깊이 느껴야만 되겠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몰라보고, 부모는 부모끼리, 자녀는 자녀끼리, 형제는 형제끼리, 동무들 혹은 민족이 끼리끼리 좋다고 하는 모든 것은 산산이 부서져 나가고 맙니다. 그렇게 될 거예요.

여러분들은 신문이나 잡지에서 자식이 부모를 죽이고 부모가 자식을 죽이는 사실들을 보고 듣고 합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볼 때 전통적인 이념은 날이 갈수록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왜 그러냐? 우리가 심정으로 바라는 목적지는 천륜과 더불어 즐길 수 있는 곳입니다. 천륜은 목적지로 향하여 인간을 변혁시켜 나가는 과정에 있는 연고로 천태만상으로 변하는 역사를 거쳐 최후에는 정적인 혁명시대까지 나갑니다. 의식의 혁명시대는 지나고 정의 혁명시대가 옵니다. 인간들 서로의 감정까지도 믿을 수 없는 환경으로 몰아넣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행복을 꿈꾸는 자는 어느 한 날 슬픔을 당할 것이요, 여기에서 안식처를 찾는 자는 어느 한 날 슬픔에 봉착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결론은 자연적으로 나옵니다.

인류를 식구로 맞이하시려는 하나님

한의 세계에 있는 여러분, 이 원한의 때는 지나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이것 아닌 새로운 그 무엇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발걸음을 돌이켜, 여러분의 마음을 돌이켜, 느끼던 감정을 돌이켜 그 무엇이 나와 인연되기를 고대하는지, 그 무엇이 내가 가는 길을 막고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믿을 수 있는 하나의 기준, 심중을 기울일 수 있는 하나의 기준을 나와 직접적으로 인연 맺게 하는 것이 종교입니다. 그 기준을 나의 생활면에 연결해 주는 것이 종교입니다. 만일 이런 인연이 맺어지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없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마음은 자극적인 현실의 고통스런 환경을 피하고 이상을 향하여 나가기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어떤 지도자라도 이 현실과 싸워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상을 지향하고 고대하고 재촉하는 이 마음에 대하여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 마음의 명령에 따라 해야 합니다. 역대의 수많은 선지들도 그 마음에 항거하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어떤 사람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 마음에 응하여야지 누가 어떻게 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항거할 수 없는, 스스로 응해야 할 운명에 처해 있는 자신들임을 명심하고 인정한다 할진대 오늘날 여러분이 살고 있는 이 세계는 이상세계가 아니며, 여러분이 꿈꾸고 소망하는 이상세계와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건 왜? 타락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느낌과 소망과 인연이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한 시대가 점점 가까워 옴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공포가 점점 가중되어 들어옵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믿을 수 없는 세상이요, 편안히 앉아 있을 수 없는 세상입니다. 길을 가는 데 있어서 한 발자국도 디딜 수 없는 세상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노정을 수십년 동안 걸어왔습니다. 이렇게 인간들에게 새로운 그 무엇을 주입시켜 인간들을 새로운 역사로 내모는 천륜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양심적인 현상을 보아서 하늘이 있고 천륜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못할진대 하나님이 이 땅을 창조하실 때에는 어떠한 목적과 이념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목적이 무엇이었던고? 그것은 선한 사람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선한 사람일 것입니다. 또한 자유로운 사람일 것입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과 더불어 즐거워하고 하나님과 더불어 자유동산에서 살 수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수천년의 역사노정을 거쳐왔지만 이러한 사람, 즉 하나님과 더불어 살 수 있는 가족, 하나님의 식구라는 인연을 맺고 간 사람은 아직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창조목적은 무엇인고? 하나님이 인간과 더불어 살 수 있는 이상적인 가정을 이루는 것입니다. 인류는 타락했을망정 마음으로는 하나님이 그 가정의 아버지로서 또는 인류의 아버지로서, 인간이 그 가정의 식구로서 살 수 있는 날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영원한 아버지로 모시고, 나는 그 가정의 식구가 되어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살 수 있다면, 소망의 자체요 이념의 자체요 생활의 자체요 행복의 자체인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살 수 있다면, 우리가 소망하는 목적은 완결되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인간을 구경하기 위하여 지으셨다면, 그런 하나님은 필요 없습니다. 온 신경을 인간에게 기울이고 6천년 기나긴 시련의 세월을 거쳐 오면서 인간을 대하여 섭리해 나오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직접적인 하늘의 가족, 즉 식구의 인연, 부자의 인연을 맺기 위해서입니다. 그러기에 무수한 수고의 고비를 넘고 넘어, 오늘도 이 길을 달음질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들이 바라는 가정 말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가정의 식구로서 등장하여 그 식구의 위신과 가치를 아버지 앞에 나타내는 그날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부활의 날이요 재림의 날일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목표

우리 인류는 타락한 연고로 참부모를 잃어버렸습니다. 타락한 부모는 있으나 본연의 부모를 못 가졌습니다. 그러니 뭐 선하고 어떻고 해도, 갖출 바를 다 갖추어 하나님 앞에 자랑할 수 있는 인격자라 해도, 그 역시 타락한 부모의 혈족입니다. 큰소리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무엇을 가졌다 해도 헤치고 보면 여전히 불안과 불만이 그 심정에 흐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의 탄식은 무엇이며 온 피조만물의 탄식은 무엇이뇨? 인간들이 하늘가정의 식구로서 참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천주의 탄식이에요. 오늘날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목표는 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대해서 ‘아버지!’ 하고 부르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참자녀로서 인류 전체가 형제가 되어 즐거워하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그 한 날을 맞이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6천년 동안 복귀섭리를 해 나오셨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이 그렇고 우리 인간의 마음속의 목적이 그렇다 할진대 그 목적은 기필코 이루어져야 합니다. 기필코 그날이 와야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날이 오지 않는다 할진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와 하늘과는 정적인 인연을 맺을 수 없습니다. 정적인 인연을 맺을 수 없는 한 하나님이 우리의 심정을 보고 내 것이라고 주장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를 하늘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 거예요. 이 인연이 땅 위에서 이루어지는 순간, 하늘의 한이 지상에서 풀어질 것이고 천상에는 지상의 원성이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그 순간 하늘땅을 하나로 연결지을 수 있는 가정적인 이상 세계가 열릴 것입니다. 이러한 목표가 있기 때문에 우리 선조들은 막연하나마 하늘의 말씀을 붙들고 나왔습니다.

인간은 타락함으로 참부모를 잃어버리고 참형제를 잃어버리고 참부부와 참자녀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런고로 이를 찾기 위하여 나선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참부모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타락된 우리가 참부모를 찾아 나아가는 복귀노정에서 어떠한 책임을 져야 되며, 어떠한 각오와 신념을 갖고 나가야 되겠느냐? 우리는 마음으로 본연의 부모의 말씀을 그리워해야 됩니다.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과 더불어 즐길 수 있는 본연의 부모의 모습을 그리워해야 됩니다. 그 부모가 어떻게 생겼냐는 거예요. 또 더 나아가서는 본연의 부모의 마음이 어떠냐를 생각해야 됩니다. 본연의 부모의 사랑이 어떤 것인가를 생각해야 됩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았습니까?

이러한 하늘 가정의 한 식구로서의 삶을 살기 위하여 달음질쳐 나가는 우리 앞에, 하늘은 무엇을 갖고 찾아오시느뇨? 믿음을 기반으로 하여 말씀을 갖고 찾아오십니다. 인간의 소원은 무엇이뇨? 몸과 마음으로 참아버지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말씀에 의하여 몸과 마음이 행동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행동뿐만 아니라 아버지를 붙들고 그 아버지가 어떻다는 것을 보고 싶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그 아버지의 이념을 알고 싶고, 그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싶은 겁니다. 또 그 아버지의 사랑이 어떻다는 것을 알고 싶은 것입니다.

오늘날까지 수많은 선지선열들을 통해 시대 시대 혹은 세기 세기마다 새로운 말씀을 들려 주었습니다. 세상은 이렇게 되어야 하고 앞으로 우리들이 바라는 소망의 세계는 이렇게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역사는 뒤넘이치는 혁명 과정을 거쳐서 세계형으로 벌어져 나오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타락한 우리 인간은 먼 거리에 있는 연고로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직접적인 말씀을 하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선지들을 세워서 중간 연락 혹은 대신 역사를 하면서 지금까지 하나님과 인간들을 접선시켜 나왔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천사를 심부름시켰고, 신약시대에는 아들을 심부름시켰고, 이제는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 할 수 있는 직접적인 시대를 향하여 역사는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으로 할 수 있습니까? 아버지의 말씀을 갖고 합니다. 그러려면 이 말씀에는 심정이 개재되어 있어야 되고 이 말씀을 통한 실체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하늘 가정의 중심인 구세주

타락한 인간들은 말씀을 그리워하는 때를 통과하여야 합니다. 하늘은 역사와 더불어 이 말씀을 중심삼고 말씀을 실천할 줄 알며, 아버지의 말씀에 의하여 살고 싶어하도록 인간의 마음을 재촉하여 나왔습니다.

말씀을 중심삼고 사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인가? 천적인 실체인 하늘이 보내신 아들과 더불어 사는 것입니다. 그 아들은 인류의 참아버지입니다. 그러한 사명을 갖고 오셨던 분이 예수였습니다.

예수는 어떠한 존재이신가? 타락으로 잃어버린 인류의 참아버지가 될 수 있는 존재였습니다. 오랜 역사와 더불어 말씀의 실천적 기반 위에 세워진 말씀의 실체로서, 아버지 대신 존재로 오신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 14:6)고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예수만이 도의 중심이요 마음의 중심이요 심정의 중심이라는 것입니다. 왜냐? 예수가 아버지라는 내용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는 만민의 구세주이며 하늘땅을 대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을 통하여 아버지의 모습을, 그 말씀을 통하여 아버지의 마음을, 그 말씀을 통하여 아버지의 사랑을 더듬어 나가는 것이 오늘날 기독교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 위에 오셨습니다. 무한한 이상을 품고 오셨습니다. 그가 바라던 소원이 있었다 할진대 그것은 하나님을 대신한 소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소원이 무엇이냐? 창조이상, 창조목적을 이루는 것입니다. 예수가 그 소원을 품고 개인의 입장으로 나타나실 당시의 환경은 선하지 못하였습니다. 뜻 앞에 서지 못한 환경은 예수에 대하여 반기를 들었습니다. 예수는 거기에서 쓰러지는 한이 있다 할지라도 자신의 심중에 품은 지조만은 땅 위에 남기고 가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나는 너희의 아버지요 너희는 나의 자녀’라는 인연을 강조하셨습니다. 부모는 참아버지와 참어머니가 있어야 됩니다. 예수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 격으로 오신 분이 성신입니다.

이 땅 위에서 영육을 합한 실체로서 아들딸을 축복할 수 있는 축복의 한 날을 갖지 못하고 간 것이 예수의 슬픔입니다. 해야 할 말씀을 다하지 못하고, 천국 가정의 기준을 세우지 못하고 간 것이 예수의 한입니다. 천국 가정을 이루지 못하였으니 천국 가정의 식구를 세울 수 없었고, 식구를 중심삼은 종족, 종족을 중심삼은 민족, 민족을 중심삼은 국가, 국가를 중심삼은 세계를 이루지 못한 것입니다.

국가적 기반을 갖추어야 했던 유대나라요 택한 이스라엘 민족이었지만 끊겨 버리고, 예수는 유대교단으로부터 몰리게 되었습니다. 하늘도 어찌할 수 없는 처참한 반역자로 몰리신 예수였습니다. 나중에는 12사도들에게까지도 배반받는 예수가 되었습니다. 땅 위에 하늘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하나의 혈족도 인연 맺지 못하고 가신 것이 예수의 서러움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소원하시던 하나님의 가정을 건설하기 전에는 하나님이 소원하시는 민족도 세울 수 없고, 민족을 세우기 전에는 나라도 세계도 세울 수 없는 연고로 가정을 찾기 위하여 싸우던 예수는 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가실 때, 인류 앞에 ‘나는 신랑이요 너희는 신부’라는 명제를 남기셨습니다. 여러분,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아요? 가정이 하나님 나라의 중심이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 실체를 깨닫는 신앙

기독교에서 말하는 어린양 잔치는 무엇이뇨? 그것은 6천년 전에 하나님이 세워야 했던 참부모의 모습을 끝날에 다시 세워 가지고, 여기에 다시 한번 형제의 인연과 자녀의 인연을 갖추어 놓자는 겁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예수님의 소망이요 우리를 이끌기 위해 6천년 동안 역사와 더불어 고생해 나오신 하나님의 소망인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알았을진대 우리들은 무엇을 붙들고 있는가를 생각해야 됩니다. 여러분들은 무엇을 붙들고 있습니까? 2천년 전에 이스라엘 민족은 예수를 붙들 수 있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유대교단은 예수를 모실 수 있는 시대적인 헤택권 내에 있었습니다. 택한 이스라엘 백성 전부가 예수를 모시어 만왕의 왕으로 군림시킬 수 있는 시대적인 환경에 있었으되, 유대 백성들은 예수를 배척하고, 유대교단도 예수를 배척하고, 택함 받았다고 하늘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자처하던 모든 사람들도 예수를 배반한 연고로, 예수님이 소망하시던 상대적인 기준은 다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끊어지니 유대나라의 역사도 끊어지고 유대나라에 내려오던 구약의 말씀도 다 끊어졌습니다.

예수의 말씀을 붙들고 울고불고, 예수의 말씀을 붙들고 살아야 하는 입장에 있는 것이 우리들의 한이요 슬픔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이 서러움입니다. 여러분 기도할 때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하지요? 이런 식으로 어떤 명사에 얽매어 사는 자신이 불쌍한 것입니다. 이제는 자기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가 와야 합니다. 그날이 소망의 날입니다.

여러분들, 이제 우리는 말씀을 붙들고 예수께서 실천하신 행동을 스스로 찾아내어 행하고, 말씀을 붙들고 ‘예수의 모습이 이런 것이로구나.’ 하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재발견해야 돼요. 예수의 모습, 십자가상에서 원수들에게 못 박혀 피 흘리는 처참한 자리에서도 원수들을 위하여 기도하시던 그 모습, 그의 심중에는 무슨 사정이 있었기에 찾아 나가야 할 운명에 놓여 있었는가? 기독교가 예수의 말씀만으로 완결되기를 바라고 있다면 망합니다. 심판을 피하지 못합니다. 말씀하기 위하여 애쓰시던 예수 그 자체와 애달피 말씀하시던 예수의 심정을 붙들고 그와 인연을 지어 세상 것을 청산한 후에라야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게 될 때, 타락한 우리들은 참부모의 말씀과 하나님의 말씀의 참뜻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비유와 상징이 아닌 사실 그대로의 말씀을 똑똑히 알아야겠습니다. 성경을 2천년 동안 연구했지만 모릅니다. 몰라요.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말씀을 통하여 행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예수의 행함과 하등의 관계를 갖지 못한 입장에 있습니다. 말씀의 목적은 행동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의지하여 살아 나온 기독교라면 이 기독교가 왜 오늘날처럼 되었겠는가? 예수께서 하신 그 말씀의 목표와 말씀을 들은 기독교인들의 목표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끝날에는 성령을 붙들고 밤을 새워 기도하라고 말하였습니다. 끝날에는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밀실에 들어가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이 찾아오는 데는 어떻게 찾아올 것이뇨? 말씀을 하면서 오는 것이 아니라 무언 중에 실체를 갖고 찾아오십니다. 우리 자신들이 서 있는 자리와 본연의 말씀이 주장하고 바라는 목표와의 거리가 떨어져 있으면 떨어져 있을수록, 그 거리만큼 예수님께서는 다시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면서 우리를 찾아오시는 것을 신자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이제는 천적인 혁명의 힘이 나를 격동시키고 죽음의 골짜기도 늠름히 넘어가게 할 수 있는 내적인 충격의 내용을 갖추어 가지고 행동적인 주체로 설 수 있느냐를 스스로 판별해야 할 때입니다.

그러려면 여러분, 어떻게 해야 될 것이뇨? 이제는 그리워해야 됩니다. 2천년 동안이나 말씀을 그리워하였으니 이제는 말씀을 그리워하는 동시에 그 말씀에 부합된 행동을 그리워해야 됩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이렇게 갔으니 나는 이렇게 이렇게 가야겠다는 각오가 있어야 되겠습니다.

예수는 누구뇨? 우리의 참부모입니다, 참부모. 그분이 말씀을 하시고 친히 행동하셨으니 하신 그 행동을 그리워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그리워하고 행동을 그리워하고 그 다음엔 그 모습을 그리워하고…. 그렇잖아요. 사랑하는 부모 이상 그리워서 못 견디겠다 해야 합니다. 밥 먹는 것을 잊어버리고 잠자는 것도 잊어버리고 자기 모양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모르고, 그 얼굴을 보고 싶어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런 때가 있었습니까?

그리움에 사무쳐 우는 자리에 나타나시는 아버지

상봉은 어디에서 이루어지느냐? 말씀을 잘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행동을 잘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워하는 자리, 오직 그리워하는 자리에서만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주님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으며 그의 손발은 어떻게 생겼을 것이뇨? 그의 눈과 코의 모습은 이러할 것이어늘, 그 모습을 만지고 싶고 그 모습을 더듬고 싶은 마음, 이것이 최후의 여러분에게 있어서 만나느냐 못 만나느냐를 결정하는 것임을 알아야 됩니다. 말씀을 전해 주던 예수는 하등의 관계가 없습니다. 하나님과 관계 없어요. 만나는 데는 예수의 이름 불러서 되는 구원이 아니에요. 예수 구원입니다, 예수 구원. 실체적인 예수를 그리워해야 됩니다.

이렇게 보고 싶어 허덕여도 볼 수 없는 예수, 다시 오마 하신 그 예수는 왜 안 오시느뇨? 사도들 앞에 나타나마 하신 그 예수는 어찌하여 나타나지 않으시느뇨? 이게 무슨 곡절이뇨? 수많은 사도들과 수많은 사람들이 간절한 마음으로 당신을 보고 싶어하고 만나고 싶어하는데 못 나타나는 곡절이 무엇이뇨? 해가 가고 세월이 지나는 것을 개의치 않고 그의 모습이 그리워서 허덕이는 자가 있다 할진대 기필코 그를 상봉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길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고아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우리는 고아입니다. 땅 위에서 아무리 잘 사는 가정환경을 가졌다 할지라도 이를 하나님이 볼 때는 고아입니다. 우리는 참부모를 잃어버린 자요, 참형제를 잃어버린 자요, 참부부, 참자녀를 잃어버린 자들입니다. 고아와 같은 우리입니다. 이와 같은 우리이니 편할 리가 있어요? 우리의 마음은 재촉합니다. 무엇을 재촉하느뇨? 내 본연의 부모, 본연의 형제, 본연의 처자를 찾으라고 재촉합니다. 그러나 이 지구상을 돌고 또 돌아도 이것을 찾을지 말지 하다는 것입니다. 말씀 가운데서도 찾을 수 없는 내용이니, 어디 가서 찾는단 말예요?

그러니 이제 해결점은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밀실에 들어가 아버지를 보고 싶어하는 마음에 사무쳐 우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찾아 주고 주님이 찾아 줄 수 있는 길이 있다 할진대 어떠한 죽음의 길도 어떠한 험산준령도 개의치 않고 나는 가겠노라는 마음이 사무치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아들딸을 찾기 위하여 겟세마네 동산과 골고다의 길을 찾아가셨습니다. 찾으시다가 안 되니 죽음의 길을 가셨습니다. 본연의 부모를 상봉하는 한 날을 고대하는 우리들, 그 모습을 붙들고 아버지라 부를 수 있고 그 모습을 붙들고 주라고 할 수 있는 그 한 날이 그리워서 여러분은 몇 시간이나 울어 보았습니까?

이제 전세계 기독교인들이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내가 낳은 아들딸보다도 다른 어떤 무엇보다도 그분이 그리워 못 살겠고, 그분의 옷자락이라도 한번 만져 보고 싶고, 그분의 손이라도 한번 만져 보고 싶어야 합니다. 그분이 우리 아버지이시매 나와 인연이 맺어져 있는 그분을 만나 몸 마음을 다 드리고 그의 품에 안기어 지난날의 모든 것을 털어놓고 이야기할 수 있고, 괴로움과 수고로움을 위로받을 수 있는 그 한 시간을 맞는 것이 우리 인간들이 찾아 나가는 최고의 소망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말씀을 그리워하는 것보다도 행동을 그리워하는 것보다도 그 한 자체를 그리워해야 되겠습니다. 그 자체를 그리워하고 난 후에는 그 마음을 그리워해야 됩니다. 그 마음을 그리워해야 돼요.

옛날 유대교 신자들은 예수 그 자체는 붙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잃어버린 부모를 다시 만나기 위하여 그립고 또 그립고, 보고 또 보고 싶은 부모와 같이 그를 대한 자가 한 사람이라도 있었습니까?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인 예수를 이 땅 위에 만민의 아버지, 만왕의 왕으로서 보내실 때, 그렇게 천대받게 하기 위해서 보내셨겠어요? 역사 이래 하나의 중심존재로서, 만민의 아버지로서, 만백성이 그분을 봐도 봐도 또 보고 싶고, 그립고 그립고 또 그리운 존재로 맞아 주기를 고대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늘의 슬픔이요 분한 일 중의 분한 일입니다. 자식을 위해 피 살을 뿌리며 찾아오 셨으나 자식들이 총칼로 대했으니, 이 어이 하늘의 기쁨으로 남아지겠습니까? 하늘의 슬픔이 있다면, 예수의 죽음 이상 슬픈 일이 없습니다.

말씀보다 더 중요한 실체

예수님은 하늘의 아들로서 유언을 해야 했습니다. 사도들을 붙들고 하고 싶은 말을 못다 하고 간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요 3:12),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요 16:12)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사도들이 예수의 친아들딸이 되었던들 말씀을 못 하실 이유가 어디 있겠어요? 가시면서도 유언을 하지 못한 예수였습니다. 마음에 사무친 비밀을 털어놓지 못하고 가신 예수였어요. 그분이 우리의 아버지입니다. 불효 중에 이 이상 불효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들은 이렇게 역사적으로 저끄러진 죄상을 벗기기 위하여 회개해야 됩니다. 만민은 부모를 죽인 죄를 지었기 때문에 다 회개해야 됩니다. 회개는 무엇을 하는 것입니까? 아버지 죽인 죄를 뉘우치고 깨닫는 것입니다. 아무리 목석같은 자식이라도 진정한 선의 그 아버지를 내가 죽였다는 느낌이 들 때 눈물로써 회개하지 않을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은 어떻게 알든 내가 알고 있는 그 하나님과 예수는 그렇다는 거예요.

본연의 가정이 그리워, 그 자녀와 그 형제와 그 식구가 그리워 6천년 동안 뜬눈으로 일을 하시면서도 피곤한 줄 모르고 걸어오신 하늘의 사정을 누가 알겠습니까? 예수님이 30여 년의 생애 동안 어떠한 역경에 부딪쳐도, 외로운 겟세마네 기슭에서 밤을 새워 기도하면서도 그 심중에 생각한 것은 본연의 자식들이었습니다, 본연의 자식들. 십자가에서 운명하시면서도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눅 23:34) 하고 기도하셨습니다. ‘잃어버린 자식을 찾으러 온 부모의 입장에 있는 몸이니, 이런 길도 응당 가야지.’ 하고 생각하셨던 예수였습니다. 거기에서 예수님의 심정을 가히 알 만합니다.

오늘날 전세계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예수를 훌륭하다고 알고 하나님의 아들로 모십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불쌍하고 측은한 예수였습니다. 역적의 괴수요, 배반자의 괴수요, 이단자의 괴수로 취급된 예수였습니다. 역사에 알려진 예수는 훌륭하였으나 실제로는 측은하고 불쌍한 예수였던 것을 알아요? 우리는 역사상에 나타난 훌륭한 이름의 예수 말고 실체로 나타난 그 예수를 찾아 나가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끝날 성도의 책임입니다.

불타는 부모의 심정으로 모든 사정을 넘고 모든 곡절을 넘어서 아들딸을 찾기 위하여 허덕이던 예수였습니다. 부모의 심정으로 수고하신 예수님과 그 부모의 고생을 염려하고 그 모습을 찾기 위하여 허덕이는 아들딸이 상봉하는 날은 하나님이 입회하여 축복할 수 있는 날이에요.

이제 남아진 것은 무엇입니까? 말씀도 실체보다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말씀은 신랑이 신부 앞으로 보낸 편지입니다. 말씀의 주체 되시는 실체가 나타날 때 편지라는 문서를 가지고 의논하겠습니까? 지금 때는 말씀을 중심삼은 행동을 완결지어야 할 때입니다. 사탄들을 정복하여 세계를 하나님의 품에 돌려드리는 행동을 해야 할 때예요. 그래야 실체가 나타납니다. 그러려면 여러분, 딴 것이 없습니다. 예수 앞에 나가는 데 있어서는 내 아들딸이 방해되고 내 종족이 방해되고 딸린 것이 방해됩니다. 이리 걸리고 저리 걸리는 것들을 끊기 위하여 십자가의 고통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라야 합니다. 예수께서 자기의 혈족을 끊고 나가게 될 때에 슬픔의 눈물을 흘리며 복을 빌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도 이 땅 위에 육적인 혈족을 끊기 위한 십자가의 고통을 받아야 한다는 거예요. 십자가의 고통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싫다는 자는 예수 못 만납니다. 절대 못 만납니다.

아버지와 상봉하는 길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기 전 다시 오마 하셨기에 그 고개를 넘고 난 후에 그 심정의 동반자가 되었고, 그와 같이 죽을 수 있고 어려울 때 같이 어려워한 사도들이었기 때문에, 12사도를 위주로 하여 70문도 120문도는 예수 앞에 설 수 있었고 죽음의 담을 문제없이 넘었습니다.

기독교는 로마의 학정하에서 갖은 학살을 당하였으나 그것을 넘어섰기에 그 로마를 정복하고야 말았습니다. 오늘날까지 세계 기독교는 세계를 위하여 무조건 희생의 제물이 되어 나왔기에, 명실공히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단계에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지금이야말로 전세계 기독교인들이 사탄세계를 대하여 하늘의 주권을 세울 수 있는 때입니다. 전세계 기독교인들이 힘을 합하여 실체를 대신하여 죽음을 각오하고 총행군 해야 할 때인 것을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이처럼 말씀시대가 지나고 실천시대가 지난 후에 상봉의 한 날이 벌어지거늘, 상봉의 한 날이 벌어진 후에야 천국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상봉하여 그의 모습이 내 모습이요, 그의 어려움이 내 어려움이요, 그의 상처가 내 상처라고 느낄 수 있는 경지에 들어가서, 그의 마음이자 내 마음이요 그의 심정이자 내 심정이라 할 수 있게 된 후에야 천국 가정이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을 중심삼고 이 땅 위에서 종결되어야 천국 가정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인간들은 하나님은 부모의 입장에 계시고 자신은 자녀의 입장에 있다고 자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름만입니다, 이름만. 양자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연고로 여러분들은 이제 말씀과 행동을 통하여 예수를 만나야 되겠습니다. 기도 가운데서 못 만나면 산중에라도, 산중에 없으면 죽음 가운데라도 찾아 들어가야 됩니다. 산중에도 없고 기도 가운데서도 못 만나면 죽음 가운데라도 있을 것이니 찾아 들어가야 합니다. 이 과정을 예수께서도 거치셨습니다. 밀실의 노정을 거쳤고 산중의 기도시간도 거쳤으며, 죽음의 고개를 넘어가서라도 아들을 찾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들도 이러한 각오 밑에서 찾아 나가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은 성경을 보고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그분을 상봉하는 날에는 어떻게 할 것이뇨? 그분을 대해서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일 것인고? 죄를 지은 우리 인간들이 주님을 만나고 참부모님을 만나는 그 시간에는 아버지를 부르고 주님을 부르면서 ‘나는 이러 이렇게 싸워 나왔고 이러이러한 예물을 가졌왔나이다. 나를 찾기 위하여 6천년 기나긴 세월 동안 얼마나 수고하셨습니까?’ 하며 위로해 드려야 됩니다. 위로해 드려야 돼요. 여러분은 뭐 주님이 이 땅 위에 오시면 나를 중심삼고 천국이 이루어져서 세상이 전부 내 마음대로 될 줄 알지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내가 없어져야 됩니다. 내 소원, 내 기대, 내 소망은 다 버려야 됩니다. 만난 그날부터 그의 마음을 모르니 그가 명하는 대로, 그가 분부하는 대로 나설 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들이 해야 할 것은 ‘얼마나 수고하셨습니까? 내가 이 길을 찾아 나오는 데도 이렇게 힘이 들었거늘, 6천년의 역사 노정을 거쳐오시면서 자녀를 찾기에 얼마나 수고하셨습니까?’ 하는 뼈 살에 사무친 마음을 갖고 그를 위로할 수 있어야 됩니다. ‘당신의 마음이 어떠하셨습니까? 6천 년 기나긴 세월을 거쳐오신 당신의 마음이 어떠하셨습니까? 그 마음을 이 자식은 아나이다. 이 자식은 아나이다.’ 할 줄 알아야 됩니다.

먼저 칭찬 받겠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찾아갈 때는 묵묵해야 합니다. 부활 직후에 막달라 마리아도 예수 앞에 나타날 때 묵묵했습니다.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붙들려 할 때 그는 막았습니다. 인간이 청산해야 할 내용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내용은 무엇이뇨? 역사적인 허물입니다. 그것을 청산해야 했던 것입니다. 역사를 걸어 가지고 ‘아담가정은 이러 이러했고, 노아가정은 이러이러했고,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가정은 이러 이러했고, 모세를 거쳐 역대 선지선열들은 이러이러했고, 예수님은 이렇게 가셨사오니, 이게 다 저의 죄이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하고 사죄를 해야 됩니다.

과거와 현재를 청산한 후에 세움받는 미래의 주인공

만나는 그날에 역사적인 허물을 다시 한번 알아야 됩니다. ‘면목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버리지 않으시고 찾아 주시고 불러 주시니 그 은사 황공 망극하옵니다.’ 그러고 난 후에야 하나님은 ‘내 아들아’ 할 수 있고, 아버지와 아들은 상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자가 선의 가정을 향하여, 천국 가정을 향하여 가는 길인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만일 상봉하게 된다면 그 순간에 무엇을 바랄 것입니까? 예수님 혹은 하나님에게는 역대의 슬픔이 있습니다. 그 슬픔을 샅샅이 드러내어, 6천년 동안 마음에 거리를 두고 혹은 심정에 거리를 두고 투쟁하며 혈투전을 거쳐 나오던 역사의 피어린 자국 자국을 더듬어 ‘이것은 나 때문이요, 우리 민족 때문이요, 내 식구 때문이요, 내 형제 때문이요, 내 처와 자녀 때문이오니 아버지, 황공하옵니다.’ 하고 아뢸 줄 알아야만 됩니다. 여러분, 그럴 수 있어요?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이 천지 창조를 어떻게 하셨고, 타락은 어떻게 되었고, 가인과 아벨의 제물 중 아벨의 제물은 왜 받으셨고 가인의 제물은 왜 안 받으셨으며, 무엇 때문에 노아의 여덟 식구를 택하셨으며,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란 호칭은 왜 나왔으며, 야곱은 어찌하여 간교한 행동으로 에서의 장자 기업을 빼앗았으며, 왜 야곱의 열두 아들을 택한 후 70식구를 만들어 애급으로 보냈으며, 왜 애급에서 400년 동안 고생하면서 60만 대중을 만들어 놓고 모세를 세웠으며, 왜 가나안 복귀를 위해 싸웠으며, 왜 이스라엘 선민권을 세우기 위하여, 그 주권을 세우기 위하여 싸웠으며, 왜 예수는 오셔서 죽으셨고 왜 다시 오셔야 되느냐, 앞으로의 세상은 어떻게 될 것인가를 알아야 될 게 아닙니까?

여러분은 그 뜻을 알고 그 뜻 앞에 인간이 저지른 역사적인 범죄, 시대적인 범죄, 미래적인 범죄상을 낱낱이 직고해야 됩니다. 끝날은 직고의 시대라고 했습니다. 자기 죄 하나 직고하는 것인 줄 알아요? 천만에요. 자기 죄만을 직고해서는 하나님의 가정의 일원으로서 참석할 수 없습니다. 그런 고로 역사적인 죄를 직고해야 되겠고, 시대적인 죄를 직고해야 되겠고, 미래의 죄상을 직고하면서 이것과 싸울 수 있는 신념을 가진 자가 되어야 합니다.

과거와 현재를 청산한 연후에는 미래의 새 나라의 새 주인공으로 천주 앞에 내세우시려는 것이 하나님이 지금까지 인간을 찾아 나온 목적입니다. 또 하나님이 세우려 하시는 하나님의 가정, 하나님의 식구의 일원으로서 인정하기 위한 것임을 알아야 될 것입니다. 여러분, 그걸 생각해 봤어요?

여러분, 내가 믿고 있는 아버지는 이렇고 내가 알고 있는 아버지는 역사 적인 아버지요 시대적인 아버지요 미래적인 아버지이신데, 그 아버지는 이렇다 하는 것을 만민이 마음으로 옳소이다, 그 심정으로 옳소이다, 그 몸으로 옳소이다, 말씀을 통해 봐도 옳소이다, 그 말씀을 통하여 행동해 봐도 옳소이다 할 수 있는 내용을 변증해야만 되는 겁니다.

이상세계를 향한 마음의 추구

심판날은 무엇을 갖고 심판하느냐? 역사적인 하나님의 심정과 시대적인 하나님의 심정과 미래적인 하나님의 심정을 기반으로 한 탕감복귀의 조건을 가지고 심판합니다. 부활한 예수를 만난 막달라 마리아가 그것을 몰랐기에 예수는 붙들게 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막연하게 믿는다고 해서 천국 가요? 생각은 좋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믿으면 아무리 노력해도 말씀의 실체이신 예수와는 상관될 수 없습니다. 말씀을 접하여 암만 실천해도 안 돼요. 아무리 행동하여도 실체와 관계를 맺을 수가 없어요. 왜? 모르기 때문입니다. 모르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므로 우리들은 회개해야 되겠습니다. 회개와 더불어 잘못된 것을 청산해야 되겠습니다. 회개는 무슨 회개? 아담가정으로부터 6천년 동안 우리 선조들이 하늘 뜻을 받들어 나오면서 그 시대 시대에 하나님이 바라신 섭리가 있었거늘, 그 섭리의 뜻을 이루어 드리지 못한 그 모든 죄상을 오늘 내가 책임지고 회개하는 회개의 주인공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은 미래적인 하나님만이 아닙니다. 역사적인 하나님입니다. 역사적인 죄상을 청산하시려는 하나님이 나를 찾으시는 하나님인 줄 알고 그 하나님과 인연을 맺어 자신의 죄상을 청산지어야 되는 거예요.

또 시대적인 하나님이니, 이 시대의 죄상을 청산지어야 되는 거예요. 이렇게 과거와 현재의 죄를 모두 청산해 놓고, 미래의 새로운 하나의 기준을 세워 놓고 아버지의 영광을 노래할 수 있는 그곳이, 우리가 영원무궁토록 살 수 있는 천국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 연후에야 아들딸을 중심삼고 역사상의 죄악을 꿈에도 생각하지 않는 하늘 가정을 형성하고 싶어하시는 하나님의 소망이 이뤄지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하늘 가정의 아들딸로서 인정되어 영원무궁토록 사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예수 믿을 필요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예수 필요 없습니다. 기독교 필요 없습니다. 신앙이 필요 없어요. 그냥 살다 가면 천국이에요.

하나님은 소망의 때가 되고 나면, 6천년 묵은 역사를 다시 바라보지 않습니다. 서글픈 역사의 페이지 페이지를 뒤적뒤적할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이것이 일대에 내 몸과 마음과 심정으로 해결지을 수 있는 틀림없는 기준이로다 할 수 있는 시대가 온 후에는, 과거에 다 청산한 누더기를 가지고 뒤적거리지 않는다는 거예요.

여러분, 지금 시대는 골동품 찾는 시대입니다. 왜 그런지 알아요? 우리가 잃어버린 본연의 것을 찾아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오래 오래 전, 6천년 전에 인간조상 아담 해와가 잃어버린 하나님과 관계될 수 있는 그 맨 처음의 골동품과 같은 것을 찾아 넘어가야 된다는 거예요. 그런 다음에는 골동품시대를 끊어 버리고 또 허덕이며 새로운 것을 찾아야 할 시대로 들어가야 됩니다. 오늘날 이 세상은 새것이 나오면 때려 잡아먹고 삼켜 버리니 망할 세상입니다. 소망의 시대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이상 하는 그 세계는 새것을 추구하는 시대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이 새것을 추구하니, 그러한 시대를 향하여 나아가야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마음은 가다가 가는 길을 자꾸 막습니다. 돌아서라, 옛것으로 돌아가라 돌아가라, 마음 깊은 데로 돌아가라. 그래서 불교에서는 참선하라 하는 것입니다. 본연의 나를, 본연의 마음을 찾아 들어가는 그 놀음을 해야 하는 것이 서러운 이 땅 위의 생활이요, 오늘날 이 땅 위의 현실이지만 옛것으로 돌아가서, 이것을 청산한 후에는 꿈에라도 과거를 생각한다는 일은 지긋지긋하다는 겁니다. 이것을 씨알맹이도 없이 비벼 버리려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새로운 이상세계와 새로운 소망에 취하여 살아야 합니다. 어떤 민족의 과거가 그래요. 로마문명은 희랍문명의 재판(再版)이었습니다. 고대문명을 연구하여 고대 정신을 다시 끌어냄으로써 이것을 새로운 현실과 부합시켜 나왔습니다. 앞으로 우리는 그래서는 안 됩니다. 물론 역사를 연구하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소망의 기준이 못 됩니다. 지금까지는 옛것으로 돌아가야 할 운명에 있고 하늘 것으로 돌아가야 할 운명에 있으니 그랬습니다. 앞으로는 새것입니다.

죄악사와 인연된 묵은 것을 버리고 들어가는 하늘 가정

우리 통일교회 신도들은 옛것을 무자비하게 청산해 버리고 오늘날 새로운 왕자로 태어난 늠름한 모습을 자랑하고, 새로운 세계의 새것을 위하여 노래할 줄 아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야만 됩니다. 한번 잘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사탄세계에서 진을 치고 있던 누더기 보따리를 그냥 하나님 가정에 가지고 가서 쑤석쑤석하는 걸 좋아하겠어요? 듣기도 싫고 보기도 싫고 생각하기도 싫은 겁니다. 그럴 거 아녜요? 그러니 대심 판입니다, 대심판. 그런 종자도 보기 싫고 그런 이념도 보기 싫고 그런 무슨 주권, 그런 역사, 전부 보기 싫다는 것입니다. 대심판입니다. 새로운 소망에 불타 영광의 아버님을 추앙하면서 모실 수 있는 참다운 아들딸의 모습을 찾아 헤매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과거를 붙드는 것도 좋지만 그러다가는 이상적인 모든 뜻을 파괴시키고 맙니다. 예수를 죽였습니다. 여러분들, 이걸 똑똑히 알아야 됩니다. 오늘날 사조에 따라 민주와 공산의 이념을 붙들고 있는 것도 좋지만, 이것만을 붙들고 있다가는 또 새것을 망하게 합니다. 오늘날 믿고 있는 신앙도 좋고 교회도 좋지만 그것을 붙들고 있다가는 또 새로운 것을 깨뜨릴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그러므로 이런 것을 잘 가늠해서 과거를 청산하고 현실을 청산하고 미래의 보따리를 싸 가지고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소망의 하나님의 가정에 절대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탄세계의 아들딸쯤으로 아실 겁니다. 하나님은 독생자인 예수를 세워 놓고 동생들이 형님이라 하는 말도 듣기 싫다는 겁니다. 왜 요셉의 아들이 예수보고 형님이라 하느냐 말이에요. 신앙노정을 거친 후에야, 예수를 믿고 예수의 심정과 예수의 마음과 예수의 몸과 예수의 행동과 예수의 말을 통한 후에야 형님이라고 할 수 있는 겁니다. 마리아가 예수를 아들이라고 하는 말도 하나님은 싫다는 것입니다. 그런 과정을 다 통한 후에라야 아들이라 할 수 있다는 거예요. 타락한 혈족의 모든 것을 생각만 하여도 지긋지긋하다는 겁니다. 그럴게 아니겠어요?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는 독생자에게 재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하늘이 지극히 사랑하는 어떠한 세계 일등 신부가 천성 앞에 불림을 받았을 때는 저 애가 아무개 딸, 아무개 조카, 아무개 누나, 아무개 무엇 하는 것 듣기 싫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딸로 인정받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딸이지 네 딸 될 게 뭐냐?’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옛것만을 존중하는 견지에서는 이런 과정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알고 보니 그래요.

지긋지긋한 6천년, 피의 혈투전이 계속되어 내려온 비참한 역사를 생각할 때, 하나님의 뜻을 배반하고 하나님의 섭리를 연장시켜 나온 것을 생각하게 될 때, 하나님은 보기도 싫으실 것입니다. 여러분, 내 사랑하는 아들딸의 손목을 잡고, 하나님 앞에 가서 ‘나는 지상의 아무개 아버지요 아무개 어머니’라고 말도 말라는 겁니다. 나는 세상에서 이렇게 이렇게 살았다고 말도 말라는 거예요. 죄악사와 더불어 인연 맺은 것은 말도 말라는 겁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인연 맺은 그것만 요구한다는 거예요.

하늘 가족이 될 수 있는 자격자

역사적인 하나님, 시대적인 하나님은 슬픈 하나님이십니다. 과거와 현재의 하나님은 슬픈 하나님이에요. 슬픈 하나님을 알아 모시지 못하는 자는 심판받습니다. 이 세상에서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라 할진대 자기의 슬픔과 자기의 고통이 있을 때 이것을 해결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없는 처지임을 알아야 합니다. 역사적인 슬픔과 고통을 맡아서 지금까지 찾아 나온 것만도 황송하고 고마운데, 이것을 모르고 자기의 슬픔과 자기의 고통까지 다 나타내는 자들은 전부 다 심판받는다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슬픔의 하나님이요 시대적인 슬픔의 하나님께 차마 자기의 고통을 기도할 수 없어 혼자 우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은 알아주실 것입니다. ‘저의 고통보다 하나님의 수고가 얼마나 크십니까? 제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 수고를 제게 맡겨 주시옵소서.’ 하는 아들딸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오늘날 그저 복 달라는 기도하는 사람들, 가면 갈수록 하나님 앞에 머리를 들 수 없는 죄인이 될 것입니다. 은사가 많은 하나님 사랑권 내에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머리를 들 수 없는 죄인이에요. 천상에 가보면 그래요. 여러분, 믿겠으면 믿고 말겠으면 마십시오. 여기서 말하는 사람이 허언망언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알 사람은 그렇게 알아도 좋다는 것입니다. 저 나라는 그렇게 안 돼 있어요. 천적인 세계는 그렇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높여 주겠다 해도 ‘황공하옵니다. 못 가겠습니다.’ 하고 세 번 네 번 거절하는 세계입니다. 추켜달라고 하기 전에 ‘나는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하는 그런 세계예요.

오늘날 주인처럼 나와 가지고 권력 다툼하고 세력 다툼하는 그런 신자, 그런 교역자, 그런 교단은 망합니다. 이제는 돌아서야 할 때가 왔습니다. 높아져도 도망가려고 하고, 위해 주려 해도 거절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늘이 찾아오십니다.

오늘 우리 통일 신도들, 외부의 핍박을 많이 받고 몰림도 많이 받고 있습니다만 서러워 마십시오. 주 가신 길이 그렇고 아버지 걸으신 길이 그렇거늘, 하물며 불충한 죄인이야 당연지사입니다. ‘이 몸에 고통이 가해져서 이 민족의 고통을 제할 수 있고, 이 몸에 서러움이 가해져서 이 세계의 서러움과 하늘의 서러움을 감할 수 있다면 고맙습니다.’ 하는 마음이 앞서는 자는 사탄이 못 물어 갑니다. 하늘은 배반하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사람이 되기 위해, 하늘의 종족, 하늘 가정의 식구가 되기 위해 모인 것입니다. 세계는 잠들어 있습니다. 천국, 말하자면 하나님의 가정을 동경하면서, 하늘 가정의 식구를 동경하면서, 그 식구의 인연을 동경하면서 나를 잊어버릴 수 있고, 하늘 부모를 흠모할 수 있고, 그 흠모하는 부모가 나타나지 않거든 형제가 그리워서 울 수 있는 마음을 가진 무리를 하늘은 고대하시기 때문에 여러분이 모여든 것을 알아야 됩니다.

만일에 땅 위에 그러한 무리가 있다 할진대 아무리 핍박이 가중한다 할지라도 어떤 비참한 일이 뒤넘이치는 한이 있더라도 그 무리는 남아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하늘땅을 붙들고 피눈물로 호소해야 되겠습니다. 역사적인 죄에 대해 통곡해야 되겠습니다. 삼천만 민중을 위해 통곡해야 되겠습니다. 하늘은 그러한 청년 남녀, 그러한 하늘의 식구, 그러한 하늘의 일원, 그러한 하늘의 종족을 그리워한다는 것입니다. 이 민족 앞에 이러한 움직임이 나타나지 않으면 이 민족은 망합니다. 망해 버립니다.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려야 할 기독교

여러분, 이제 친구를 사랑하고 그리워해도 그것들은 다 지나갑니다. 가정도 친구도 다 지나갑니다. ‘그립고 그리운 천적인 친구가 어디 있느뇨, 천적인 식구가 어디 있느뇨?’ 하는 느낌이 여러분의 감정을 움직일 수 있는 길을 찾아야 올바른 길을 가는 거예요. 내가 못 먹어도 먹는 것을 잊어버리고 하늘 식구를 찾고, 내가 억울해도 억울함을 이기고 미래의 후손까지 염려하면서 하늘 앞에 호소할 수 있는 마음이 있는 자는 망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오늘날의 국제정세를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1959년, 1960년을 역사적인 중대한 전환점으로 보고 있습니다. 역사적인 전환시기가 왔다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생사의 기로와 절망과 탄식의 분기점이 목전에 당도하고 생활권 내에 침범해 들어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는 이념적으로도 그런 분열상을 느낄 수 있고 우리의 신앙세계도 그렇고 가정도 그렇고 사회도 그렇습니다. 더욱이나 한국 실정을 바라볼 때, 한국같이 불쌍한 나라는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곳에 안식의 기준을 세웠습니까? 세계도 지나갑니다. 사회와 국가, 민족도 모두 지나갈 것입니다. 우리 민족은 가진 것이 없고 찾으려야 찾을 거리가 없는 민족입니다. 이제는 뒤로 돌아서서 역사의 죄상을 탄식하고, 시대적인 과오를 탄식하고, 쌍수를 들어 아버님이라 부를 수 있는 이 하나의 움직임만이 이 민족을 살릴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면 여기에 어떠한 사람들이 동원되어야 될 것이냐? 나이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 오늘날의 교회 교회가 과거의 것을 새것으로 갈아 놓을 수 있는 역사적인 모험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아는 한, 기독교인들은 당회에 교회를 맡겨서는 안 됩니다. 그런 때가 온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천국은 목사 장로들이 가는 곳이 아닙니다. 참답게 잘 믿는 아들딸들이 가는 곳이 천국입니다. 목사 장로들에게 교회를 맡겨서 그 모양이 되었으니, 세계에 널려 있는 기독교인들은 모두 단결하여 우리 교회로 만들고 내 교회로서 존중하는 운동이 일어날 것입니다. 하늘은 이것을 일으킬 것입니다.

뜻있는 청년 남녀들이여! 이런 시기가 기필코 옵니다. 보십시오! 해방 전에는 아무개 목사 아무개 목사 하고 야단했습니다. 그 목사시대는 지나가고 그 다음에는 아무개 장로 아무개 장로 하며 장로 바람이 불었습니다. 그 다음은 집사 바람이 불었어요. 이젠 평신도 바람이 불 때입니다. 기필코 그런 형태가 벌어집니다. 이제 이 교회를 그들에게 맡겨서는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느낌에 불타서 이러한 움직임을 제창해 나온 것이 통일교회입니다. 지금은 비록 욕을 먹고 있을망정 두고 보십시오. 기필코 역사는 방향을 바꿀 것입니다. 역사가 방향을 바꿀 적마다 시대 시대에 변혁운동을 일으켰습니다. 이때마다 피끊는 청년 남녀들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지 않고는 이 끝날에 새로운 천적인 이념세계가 찾아 들어오는 것을 다시 한번 배반하여 천추에 한을 남기는 불쌍한 민족이 될 것입니다. 이것을 염려할 줄 아는 여러분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마음에 불타 하나님의 한과 역사적인 예수와 성신의 한, 우리 선조들의 한, 그 모든 것을 내 어깨에, 이 시대의 전체의 책임을 내 어깨에 질 수 있는 아들딸, 하나님을 아버지라 할 수 있고, 하늘 가족의 위신을 간직하고 하나님의 아들딸의 위신과 그 이름을 가진 아들딸로서, 만우주를 대하여 늠름히 호령할 수 있는 그 모습을 하나님도 찾고 계시고 인류도 소망의 빛으로 고대하고 있을 것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기 도>

아버님, 말씀을 전하였사옵니다. 슬프고 슬프고 또 슬펐던 아버지, 억울하고 억울하고 또 억울했던 아버지, 그 분이 뉘신 줄 몰랐던 배은망덕한 저희의 조상들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찾고팠던 아들딸들을 이 땅 위에서 찾지 못하신 아버지의 서러움을 깨닫고 울 줄 아는 저희들이 되어야 할 것이오나, 내 만족을 찾아 헤매는 불쌍한 자리에 처하여 있던 저희들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예수께서도 이러한 경지에 있는 그의 모친과 동생들을 바라보고 ‘내 아버지 뜻대로 하는 자가 나의 형제요 나의 자매요 나의 모친’이라고 하셨습니다. 본연의 부모를 갖지 못한 저희, 본연의 형제를 갖지 못한 저희, 본연의 자녀를 갖지 못한 저희, 본연의 부부가 되지 못한 저희이옵니다.

이제 그리고 고대해야 할 것은 본연의 부모, 본연의 형제, 본연의 자녀, 본연의 부부이오니, 본연의 부모가 그리워, 본연의 형제가 그리워, 본연의 자녀가 그리워, 자기의 위신을 잊어버리고 그들을 찾아 헤매는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을 모셔 놓고 친히 천국 가정의 생활을 즐길 수 있는 움직임이 천지에 벌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이념에 화하여 즐기면서 아니 가려야 아니 갈 수 없고 아니 응하려야 아니 응할 수 없는 심적인 혁명, 정적인 혁명이 천지간에 일어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여기에 참석한 당신의 아들딸들, 마음에 느낀 무엇이 있다 할진대 그것을 생의 지침으로 삼아 일생의 전환점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니다.

모든 것을 주관하여 주셨사오매 감사드리며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니다. 아멘.

​요한복음 3:11-21 전도서 7:28-29

<기 도>

아버님이시여, 저희의 사정이 각각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고 또 심정에 느끼는 신앙의 정도도 각각 다른 줄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지, 원하옵건대 저희의 사정이 다르고 저희의 마음 바탕이 다를지라도 이것은 다 세상을 중심삼은 사정이요, 마음 바탕인 것을 저희들이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늘은 저희들을 대하여 이 시간 같은 사정이 되기를 고대하시고, 같은 마음 바탕이 되기를 고대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께서는 저희의 사정이 인간을 통하는 사정이 아니오라 천성을 통할 수 있는 사정이 되기를 바라시고, 저희의 마음 바탕은 인정을 통하는 마음 바탕이 아니오라 천정을 통할 수 있는 마음 바탕이 되기를 고대하고 계신 것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나’라는 한 존재는 두 세계의 첨단에 서 있습니다. 좌를 바라보면 세상의 인연이 나를 얽매고 있사옵고, 우를 바라보면 무한한 선의 움직임이 나를 이끄는 입장에 처하여 있사옵니다. 이러한 찰나의 세계에서 뒤넘이치며 몸부림치고 있는 자신인 것을 저희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사옵니다.

이러한 입장에 처하여 있는 자들을 세워 하늘은 복을 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이러한 자들을 불러 하늘의 사명을 맡길 수 없다는 것을 이 시간 저희들이 체휼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원컨대, 이제 저희의 사정이 한 곳으로 기울어지고 저희의 마음 바탕이 한 곳으로 기울어져, 그 사정 그 마음에 그리고 느끼고 체휼되는 모든 사실은 세상적이 아니고 영원히 존재하는 하늘의 내용으로서 기울어질 수 있고, 움직여질 수 있는 저희 자신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제 저희들 아버지 앞에 엎드렸사오니, 자기의 심중을 샅샅이 털어놓고 아버지의 훈계와 새로운 비전으로 다시 한번 나를 찾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내 자신의 위치를 다시 한번 깨닫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내 자신의 역량을 다시 한번 깨닫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저희 자신이 어떠한 모습으로 어떠한 이념에 속하여 어떠한 가치와 어떠한 기준을 위해 허덕여 왔었다는 사실을 명심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그리하여 과거의 나는 이러하였고, 오늘의 나는 이러하니, 미래의 나는 어떠해야 된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사람을 중심삼은 인연과 사정은 날이 가면 갈수록 많은 인연과 조건으로 갈라질 것이오나, 하늘을 중심삼은 모든 인연과 사정은 많으면 많을수록 있으면 있을수록 통일된 형체를 갖추어, 하나의 뚜렷하고 색다른 그 무엇을 이루어 놓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오늘 저희들은 다시 하나로 화한 색다른 그 모습을 고대하면서 엎드렸사오니, 이 시간 사랑의 손길을 펴 주시옵소서. 능의 권한으로 저희를 좌우하시고, 하늘 것 아닌 일체의 것을 용납하지 마시옵고, 본연의 심정과 본연의 심성으로 이 시간 아버지께서 친히 저희를 움직이시어 아버지 것으로서 인정할 수 있는 전체의 모습이 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이시여! 이제 마음과 마음에 다리를 놓으시고 심정과 심정을 연결시키어서 아버님의 사정을 통과시킬 수 있고 아버지의 심정을 체휼할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역사노정에 수많은 선지선열들이 왔다 갔사오나 하늘의 사정이 어떻다는 것을 몰랐사옵고 하늘의 심정이 어떻다는 것을 모르고 갔사옵니다. 끝날이 돼 오면 돼 올수록 의논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는 하늘의 사정이요, 하늘의 심정인 것을 저희가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희생시키고도 즐거운 마음으로 나설 수 있고, 저희들 스스로 각오하고 제물이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다시 한번 깨닫고 하늘 앞에 부복하는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아버지의 능력을 바라는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시간, 모든 것을 주관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오늘 저희들만 아버지의 은사에 잠기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뜻을 염려하며 숨은 제단을 쌓고 외로이 눈물 뿌리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많을 줄 알고 있사오니, 어떤 형편과 처지에 있을지라도 같은 은사로써 그들을 축복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시간 맡겼사오니, 처음부터 끝시간까지 당신만이 주관하여 주시옵고 전체를 당신의 것으로 인정할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하늘은 모든 준비를 갖추고 있사올지라도 저희 자신들이 그 준비에 대응하여 마음과 몸에 준비의 터전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저희의 마음속에 지금까지의 그 무엇을 남기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어린아이의 심정으로 돌아가 아버지의 은은하신 그 심정의 감촉을 통하여 다시 한번 하늘과 인연 맺을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아버지의 명령하시는 은사에 잠기어 하늘과 더불어 화할 수 있고 아버지께서 친히 저희들과 더불어 의논하고 저희들과 더불어 새로운 약속을 세울 수 있는 이 시간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말씀을 전하고자 하오니, 아버지,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많은 말씀이 필요치 않은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말씀보다도 저희의 마음으로 체휼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사오니, 아버지, 마음 문을 열어 주시옵고 사정 사정을 살펴 주시옵소서. 당신과 인연 맺었던 본연의 성상이 예수이신 것을 저희들은 알고 아버지를 향하여 마음을 다 모아 좌정하였사오니, 아버지의 본성과 깊게 깊게 인연을 맺을 수 있는 한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새로운 약속의 말씀을 통하여 아버지 앞에 다시 한번 각오와 맹세를 할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과거의 모든 것을 뉘우쳐 아버지 앞에 성별된 한 기준을 세워 놓을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전하는 자의 마음이나 받는 자의 마음이 둘이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고, 하나의 심정에 통하고 하나의 은사에 화할 수 있는 이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렇지 않으면 억만 사탄이 이 간격을 노려 사망의 그늘로 끌고 들어간다는 것을 저희들이 두려워하면서, 자기의 모든 사정과 지금까지의 어떠한 주의 주장과 관념이나 인식을 다 버리고, 어린애의 심정이 되어 마음을 터놓고 이 한 시간 아버지의 분부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아버지의 심정과 인연맺을 수 있게 축복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말 씀> 여러분과 같이 생각하려는 말씀의 제목은 ‘사랑하는 자녀를 내세우려는 하나님의 수고’입니다. 이런 제목을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모든 존재물이 제일 필요로 하는 것

하늘이나 땅의 어떠한 존재물을 막론하고 제일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사랑입니다. 하늘에서도 하나의 사랑이 중요한 동시에 인간 세상에서도 인간을 중심삼은 사랑이 중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 앞에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준 분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인간 세계에서 사랑을 놓고 그리워할 것이 있다 할진대 예수의 사랑이요, 천상에서 사랑을 놓고 그리워할 것이 있다 할진대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우리들은 잘 아는 바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의 사랑을 통하는 것이 우리들의 소망인데, 그 사랑은 어떻게 되어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인간시조가 사랑의 동산에서 하나님을 중심삼고 그의 영원한 사랑을 생활이념으로, 생의 이념으로 삼고 사는 것이 창조본연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사랑의 인연을 맺지 못하고 하나님의 원수인 사탄과 사랑의 인연을 맺었다는 것을 우리들은 원리를 통하여 잘 알고 있습니다.

피조만물의 생명의 중심이요, 이념의 중심이요, 가치의 중심은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우리들이 인정할진대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이념과 하나님의 생명을 체휼하지 못한 인간은 아무리 사랑을 논위하고 아무리 생명을 논위하고 아무리 이념을 논위한다 해도, 하늘과 하등의 관계가 없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두어야 되겠습니다. 인류가 처참한 모습으로 살고 있는 것은 무슨 연유이뇨? 하나님의 생명을 잃어버린 때문이요,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린 때문이요, 하나님의 이념을 잃어버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이것을 다시 한번 가슴 깊이 체휼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슬픔이 쌓이면 쌓일수록 그 슬픔에 반하여 하나님의 생명이 그리워지고,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워지고, 하나님의 이념이 그리워지는 사람이 있다 할 진대 그는 소생의 가망이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끊어지고, 하나님의 생명이 끊어지고, 하나님의 이념이 끊어진 이 인간을 하나님께서 구원하신다 할진대 먼저 어떠한 섭리를 하실 것인가? 참다운 생명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사랑에 굶주림을 느끼는 마음을, 이념의 결핍을 느끼는 마음을 움직여서 섭리하고 계시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생명, 하나님의 이념을 심중으로 얼마나 그리워했습니까? 여러분에게 이런 마음이 없다 할진대 하나님의 사랑을 찾으려야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충격이 마음으로부터 폭발되지 않는다 할진대 아무리 하나님의 생명과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이념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들이 우리와 관계를 맺을 도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때는 바야흐로 끝날이 가까워오고 있습니다. 인간들은 이구동성으로 세상이 다 되었다고 합니다. 어느 한 사람을 붙들고, 당신만이 내 심정의 고갈을 채워 줄 수 있고 당신만이 내 생명을 대신할 수 있는 분이라고 할 만한 사람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당신이 내 심정으로, 그리고 흠모하던 분이요, 당신만이 하나님의 사랑을 채워 줄 수 있는 분’이라고 할 만한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이념 분야에 있어서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을 우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필코 하나님의 생명과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이념과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이렇게 되지 않는다 할진대 이 역사의 종말시대에 있어서는 참다운 사랑의 사람, 참다운 생명의 사람, 참다운 이념의 사람이 될 수 없다고 단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인간을 사랑하시는 정도

그러면 우리가 도의 길을 찾아 나가고 종교생활을 하고 있는 목적이 무엇이뇨? 하나님의 생명과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이념을 지니기 위해서 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하나님도 찾으시고 예수님도 찾고 계십니다. 그것을 지닌 존재로서 하나님도 예수도 축복할 수 있는 자, 인정할 수 있는 자가 나와야만, 이 세상에 참다운 사랑과 참다운 생명과 참다운 이념이 세워질 것입니다.

인간을 무한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인간이 타락한 그날부터 찾아 나오셨습니다. 인간을 사랑하는 데 어느 정도까지 사랑하느냐? 여러분의 관념으로는 그것을 인식할 수 없을 것입니다. 타락한 세상에서도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식이 죽음의 자리에서 허덕이고 있다 할진대 부모는 그 자식을 구하기 위하여 고통과 두려움을 개의치 않으며, 죽음도 어떤 행동도 개의치 않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일망정 자식을 사랑하는 심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아끼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이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정도밖에 안 될 것인가? 어떠한 역경과 죽음까지도 넘어설 수 있고, 희생을 개의치 않고 갈 수 있는 것이 사랑이라 할진대 하나님의 사랑은 어떠하겠습니까? 타락한 인간이 자기 자식을 사랑하는 것과는 비할 바가 아닙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창조 본연의 인간을 사랑하시려던 그 사랑은 타락한 세상에서의 사랑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인간들은 사랑하는 자식이 죽거나 혹은 사랑하는 사람이 죽거나 할 때 슬퍼하며 고통을 느낍니다. 또 의식까지 잃어버리거나 미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죽는 자도 있습니다. 땅 위에 살고 있는 사람끼리도 사랑하는 상대를 대하여 슬퍼하고 고통을 느끼고 미치고 죽는 자가 있다 할진대 하나님은 어떠할 것인가? 여러분, 생각을 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목적

하나님은 온 천지 만물을 주관할 수 있는 하나의 주인공으로 아담 해와를 지으셨고, 또한 사랑의 동기 되시며 사랑의 원천 되시는 하나님은 그 사랑을 몽땅 쏟기 위하여 아담 해와를 지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목적은 만우주를 주관하게 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사랑을 주기 위해서 인간을 지으셨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피조만물 전체를 움직일 수 있는 원동력이 하나님의 사랑이라 할진대 아담 해와를 지으시고 축복하신 목적이 어디 있느냐? 하늘로부터 천지에 흐르고 있는 이 하나님의 사랑을 줄 수 있는 대상자로서 아담 해와를 지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중심삼고 우리는 선조를 지으셨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념을 세우시고 천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창조가 이루어짐에 따라 이어서 창조할 아담 해와를 생각하면서 즐거워하셨을 것입니다. 또 아담 해와를 지어 놓으시고 자라는 것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은 무한히 기뻐하셨습니다. 무한히 즐거워하시고 무한히 행복해하며 아담 해와를 바라보셨다는 것입니다. 그럴 게 아니겠어요? 그런 아담 해와였어요.

창조주의 위신까지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위신까지도,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의 실존성까지도 잊어버리고, 그런 심정으로 아담 해와를 사랑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입장에서 타락한 아담 해와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했겠느냐? 이것을 알아야 된다는 거예요.

여러분은 사탄의 혈통을 받고 태어난 자식일망정 무한히 사랑할 줄 압니다. 또다른 사랑의 대상을 놓고도 무한히 사랑할 줄 압니다. 만일에 인간이 타락하지 않아 이 땅 위에 악의 자손이 아닌 선의 자손을 번식하였다면, 여러분은 자식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이 아담 해와를 지으시고 바라보시던 그 느낌을 느낄 수 있고 그 사랑을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 타락 직후의 하나님의 슬픔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담 해와를 바라보시던 사랑의 심정으로 이 땅 위의 아들딸을 사랑한 사람이 역사 이래 한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심정과 그러한 감촉에 화하여 사랑하는 부부가 없다는 거예요.

매일 죄나 짓고 야단법석 대는 이것은 타락한 이후에 벌어진 천사장급 이하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천사장급 이하의 사랑. 그러기에 인간들은 이념적인 주체로 계시는 하나님의 사랑, 이념 자체로 계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동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아담 해와가 타락했다는 것을 그저 막연히 듣고 있습니다. 내용이 희미하고 들은 것이 희미합니다. 거기에 대한 아무런 심정의 반응도 없습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아담 해와가 타락하는 그 순간 하나님의 심정은 터질 듯 찢어질 듯 미칠 듯하였습니다. 자기의 처신을 잊어버릴 만큼 혼돈된 아버님의 모습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생각해 보았습니까?

땅 위의 타락한 인간들도 사랑하는 자식이 죽어 가는 것을 바라보게 될 때는 뼛골이 녹아짐을 느끼며, 자기가 대신 죽는 한이 있더라도 자식을 살리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이거늘, 타락의 길을 밟아 사망선으로 넘어가는 아담 해와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했겠느냐? 그 마음을 알지 않으면 인간은 도저히 하나님의 아들딸이 될 수 없습니다.

어느 누가 아담 해와가 타락하는 것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슬픔을 체득한 자가 있다 할진대 그 사람에게는 인간 세상의 그 무엇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 세상에 어떠한 최고의 사랑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하나님의 슬픈 심정을 위로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탕감복귀역사를 알고 있습니다. 본연의 세계로 되돌아가려면 하나님의 심정을 통하고 하나님과 사랑의 인연을 맺어야 합니다. 그러고 난 후라야만 하나님의 아들딸이 된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아담 해와가 타락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슬퍼하시던 하나님의 심정을 느껴 보았습니까? 인간이 타락된 후에 하나님 속에 맺혀진 원한의 심정, 그 심정을 해원하기 위해서 6천년이란 기나긴 세월을 지난 오늘 이 시간까지도 하나님은 쉬임 없이 허덕이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해원하기 위하여 수많은 선지자를 보내셨고, 이것을 해원하기 위하여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셨던 거예요. 이것을 해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사랑하는 아들을 형장으로 내보냈고, 이것을 해원하기 위하여 수많은 인류가 허덕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참된 기쁨을 가지려면

그러면 땅 위에 기쁨의 한 날이 온다 할진대 어떠한 날이 기쁜 날이뇨? 타락 직후부터 하나님의 심정에 맺혀졌던 한을 풀어 드리는 날이 기쁜 날입니다. 그런데 오늘날까지 하나님의 심중에 사무쳐 있는 원한이 풀어지지 않은 채 천주는 슬픔에 싸여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슬픔의 역사노정에서 허덕이고 있습니다. 고통의 역사노정에서 허덕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기쁨을 찾아 허덕이고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슬픔을 갖게 된 원인은 무엇인가? 돈이 없어서 슬픈 것이 아니에요. 명예가 없어 슬픈 것이 아니에요.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슬프다는 것입니다. 고통은 무엇이뇨? 내가 어떠한 입장에서 억울함을 당하는 것이 고통이 아니에요. 사랑해야 할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는 자리에 서는 것 이상의 고통이 없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기쁨은 어떤 것이뇨? 억만장자가 된다고 기쁜 것이 아니에요. 만 우주를 내 것으로 만든다고 기쁜 것이 아니에요. 사랑을 찾아서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것이 기쁨인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타락한 우리는 마음에 슬픔을 지니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타락한 우리는 생활하는 데 고통을 느끼며 살고 있습니다. 이 선의 이념을 기나긴 6천년 동안 그리워해 왔으나 아직까지 선의 이념이라고 할 수 있는 그 무엇이 나타나지 않은 것을 여러분은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사회, 우리들이 바라보고 있는 세계 사조가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생명이 약동하는 선의 이상동산을 건설한다고는 생각하려야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여러분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세계를 부정할 수 없는 운명에 처하여 있는 우리, 이것이 타락의 한입니다.

이 한의 고개를 넘고 넘어야 할 우리의 생애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 한의 고개를 넘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심정에 입은 상처를 알아 위로해 드려야 합니다. 그러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소망의 그 한때를 갖출 수 없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들을 찾아오십니다. 옛날 구약시대에는 이 타락한 인간과 다리를 놓기 위하여 제물이라는 조건을 세우게 했습니다. 인간 앞에 만물을 내세워 찾아오셨습니다. 제물을 놓고 찾아오시던 그 때에도 선조들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모셔 드리지 못하였습니다. 역사노정의 수많은 선지들은 제물을 드림으로 하나님의 사랑의 심정과 인연을 맺어야 할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알지 못한 채 제물을 유린한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제물을 조건으로 하여 인간을 만물 앞에 내세우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역사를 발전시켜 나오셨습니다. 개인을 찾아 하나님의 심정과 인연을 맺게 하고, 이것을 가정적으로 민족적으로 벌여 나오셨습니다. 그 민족의 터전 위에 하나님이 사랑하실 수 있는 인연의 대표자를 보내신 것입니다.

타락인간을 복귀하시는 하나님의 심정

하나님은 개인으로부터 민족을 세워 놓고 하나님이 사랑하실 수 있는 하나의 실체를 세워 해원성사 하여야 하는 목적이 있는 연고로 그 목적을 향하여 하나님은 역사노정을 붙들고 나오시는 것입니다.

타락한 이후 인간이 천만 번 배반할지라도, 하나님은 인간을 자녀로 생각하셨기 때문에 그를 위한 일이라면 수고도 죽음의 자리도 개의치 아니 하셨습니다. 개인 앞에 배반당하고, 민족 앞에 배반당하고, 유대국가 앞에 배반당하시면서도 반역한 그들을 저버리지 못한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자식이 죄를 짓고 허랑방탕 한다고 부모가 그 자식을 버리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본래 인간은 하나님의 직계 아들딸로서 하나님과 심정적으로 인연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하늘을 저버릴지라도 이 인연을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은 인간을 저버리지 못하시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것을 생각하게 될 때, 우리들은 만천하에 불효의 팻말을 붙여 천대를 받아 마땅한 후손입니다. 우리 선조로부터 지금까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그렇습니다. 국가적으로 보게 된다면, 하나님은 하나의 군왕이십니다. 하늘을 군왕과 같이 모시고 하늘 앞에 충신 중의 충신이 되어야 할 우리가 그런 입장에 서지 못하니, 역적의 종족이라는 팻말을 붙여 만천하에 공개해도 항의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그러한 종족입니다.

인간 대 인간 관계에서 이런 사정이 있다면 원수 중의 원수일 것인데, 그 원수 중의 원수와 같은 입장을 넘어설 수 있는 심정을 갖게 된 이유는 어디에 있느뇨? 사람을 대하여 영원히 동고동락해야 할 아들딸이라는 심정이 하나님 속에서 끊어지지 않고 연해 있기에, 하나님은 오늘도 배척당하고 내일도 배척당하는 한이 있다 할지라도, 이곳에서 배척당하고 저곳에서 배척당하는 한이 있다 할지라도, 참다운 자식을 찾아 나온 걸음을 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하면서 울어본 적도 있습니다. ‘땅 위에 있는 인간들아! 네 자식이 그리워 울기 전에 하늘을 그리워하면서 울어라. 그 무엇이 원통하다고 땅을 치기 전에 하늘을 바라보고 땅을 치며 가슴을 쳐라. 땅의 그 무엇에 미치는 자가 있거든, 이 땅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대하여 미치는 자가 되어라.’ 이렇게 기도한 때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무한히 슬픈 분이십니다. 이것은 추상적인 말이 아닙니다. 추상적이 아니에요. 슬픈 그 가슴을 누구한테 하소연할 것이며, 고통과 억울함을 누구에게 하소연할 것이뇨? 그럴 수 있는 이가 세상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그런 아들딸이 이 땅 위에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슬픔을 붙들고 울고, 하나님의 고통을 붙들고 울고, 위로해 드릴 수 있는 아들딸, 이것이 우리들이 소망해야 할 최고의 기준이라 하겠습니다.

그 분은 어떤 분인가? 어떤 주관자도 아니요 여러분이 그 인연을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아버지입니다. 그 아버지는 6천년 동안 미치는 것 이상의 심정을 지니고 땅을 대하여 허덕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그 아버지를 향해 저주에 저주, 배반에 배반을 거듭하였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이제라도 하늘을 향하여 미칠 줄 아는 사람이 있다면, 하늘은 그 사람을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원과 인간이 소망해야 할 최고의 기준

인간들도 사랑하는 자식이 쓰러지게 될 때에 그 부모가 미치는 일이 있거든 하나님도 마찬가지예요.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어떠하뇨? 부모의 사랑에 부부의 사랑, 자녀의 사랑을 가한 주체적인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여러분이 생각하기 전에, 여러분이 사모하기 전에, 여러분이 그리워하기 전에, 여러분이 찾아 허덕이기 전에 하늘은 이날 이때까지 그리워하며 허덕이고 미칠 듯한 입장에서 찾아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나 거기에 사탄이 조롱합니다. ‘자식을 품고 품고 사랑하여야 할 하나님이여! 자식을 두고 한숨은 웬 말이며 탄식은 웬 말이요?’라고. 그러한 하나님인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들은 신앙생활에서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여 어떤 궁전 가운데 편안히 앉아 계신 줄 알았지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심정을 품고 역사적으로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6천년이란 역사를 허덕이며 찾아오셨습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선조들이 맞기 전에 맞으며 찾아오셨습니다. 우리의 선조들이 몰리기 전에 몰리며 찾아오셨고, 죽음의 고개를 넘으시며 찾아오셨습니다. 선열들이 순교의 고비 고비를 넘을 때마다, 하늘도 그러한 고충을 느끼셨습니다. 사랑의 주체이신 하나님은 자기를 위하여 움직이는 아들딸과 함께 고충을 당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찾아오신 하나님, 그 하나님이 오늘 그렇게 찾아오시던 것을 포기하실 것이냐? 포기할 수 없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당장 심판을 받아 사라져야 마땅한 이 땅 위의 인간을 찾아오시던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설 것이냐? 돌아설 수 없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아요? 세상에 자식이 아무리 악하고 죄를 범하고 부모 앞에 불효한다 할지라도 그 부모는 자식을 향한 걸음을 멈출 수 없습니다. 마음이 그렇게 끌어당기는 것입니다. 과거에 아무리 악하고 과거에 아무리 하나님 앞에 상처를 입힌 인간이라 할지라도 버리지 못하고 오늘도 찾아오시는 하나님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과거에 우리 인간을 그리워하시던 하나님의 모습을 바라보아야 되겠습니다. 6천년 역사노정에서 수많은 선지선열을 붙들고 슬퍼하시던 하나님의 모습을 바라보아야 되겠습니다. 오늘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27억 인류를 대하여 허덕이고 슬퍼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바라볼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을 위로할 방법

그러면 나를 찾아오시던 하나님은 이러했거든, 내일은 어떻게 될 것이뇨? 나를 찾아오신 이 하나님의 모습을 위로할 방법은 없을 것인가? 인간에게 고통이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고통 이상의 고통이 없고, 인간에게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슬픔을 해결하는 것 이상의 문제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슬퍼하시며 찾아오셨던 하나님 이상의 슬픈 심정을 갖고 ‘아버지시여! 얼마나 수고하셨습니까?’ 하고 위로하는 아들이 나타나기를 하나님께서 바라시겠어요, 안 바라시겠어요? ‘아버지시여! 얼마나 수고하셨으며, 얼마나 쓰러지셨으며, 얼마나 허덕이셨나이까?’ 할 수 있는 아들, 천만 번 수고하고 천만 번 모욕을 당하고 천만 번 어려움을 당하시면서도 슬펐던 가슴을 헤쳐 놓고, 억울했던 가슴을 헤쳐 놓고, 분했던 가슴을 헤쳐 놓고 통정할 수 있는 아들딸을 찾아오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여러분이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은 그러한 분이요, 우리가 모셔야 할 하나님은 그런 분입니다.

역사노정에서 십자가의 노정을 뒤넘이치면서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서러움을 아는 참다운 아들딸은 이 땅 어디에 있는고? 그 아들딸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한 아들딸을 중심삼고 화할 수 있는 하나의 무리,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가, 하나의 세계가 하나님이 찾아 이루고자 하시는 세계요, 그러한 세계가 창조이상세계라는 것을 여러분은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불행한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땅 위에 불행이라는 명사가 있다 할진대 하나님 외에는 그런 명사를 붙일 수 없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불행하다 하더라도 하나님에 비하면 그 불행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슬픔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억울함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 해와를 지어 놓으시고 선의 동산을 바라셨습니다. 그들을 품고 사랑하고 천지 만물이 화답하는 가운데서 즐거워하기 위하여 지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어디 그랬다는 곳이 있어요? 아담 해와를 잃어버린 하나님의 심정, 그것은 외아들을 잃어버린 서러운 심정이에요. 하나밖에 없는 딸을 잃어버린 서러움이었다는 거예요.

독생자의 사명

예수님을 독생자라 하였습니다. 독생자란 무엇을 두고 하는 말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홀로 하나님을 위로할 수 있는 하나의 아들을 말합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밖에 없었던 아담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렸으니, 이것을 다시 찾기 위하여 보내신 분이 예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걸고는 처음 낳은 아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독생자라는 거예요.

예수는 이 땅 위에 오셔서 무엇을 했어야 되는가?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은 생활이 어떻다는 것과,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사는 사회가 어떻다는 것과,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사는 세계가 어떻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이 땅 위에 오셔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다는 것을 똑똑히 보여 주었습니까? 못 보여 주고 갔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가정은 이렇다 하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까?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민족은 이렇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국가는 이렇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세계는 이렇다 하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까? 못 보여 주었다는 것입니다. 만일 아담 해와가 타락하지 않고 완성의 자리에 나아갔다면, 하나님은 쌍수를 들어 ‘오 사랑하는 내 아들딸아, 너희는 내 유업을 받아 천상천하의 모든 것을 주관하면서 영원히 영원히 나와 더불어 살자’ 하고 축복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뜻은 깨어져 나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역사 이래 하늘땅을 걸어 놓고 아담 해와와 같은 두 사람을 축복할 한 날을 고대하고 계신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구원이 무엇입니까? 잃어버린 것을 다시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천신만고 역사적인 곡절의 노정을 거치고 거쳐오면서, 민족이 지쳐 떨어지면 붙들고 또 붙들면서 4천년 역사가 지난 후에 예수를 보내셨던 것입니다.

그를 세워 하나님의 4천년의 슬픔을 털어놓고 4천년의 고충을 털어놓고자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로 말미암아 대우주의 창조이념을 복귀 완성시키고자 하셨습니다. 그런 책임자로 보내신 분이 예수였다는 것입니다. 창조이념을 완성시킬 대표자로 보냈던 분이 예수였다는 거예요.

예수의 형편

예수는 태어나서 이 땅 위의 고난의 길을 다 거쳐야 됩니다. 최악의 고난의 길까지도 죽지 않고 거쳐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마굿간에서 탄생하였습니다. 이 땅 위에 아무리 불쌍하고 어렵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역사 이래 마굿간에서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구원섭리는 최하의 자리에서부터 출발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최하의 자리에서 태어난 예수는 자랄 때도 사랑받지 못하였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이걸 똑똑히 알아야 됩니다. 예수의 30여 년의 생애에는 무한한 슬픔이 사무쳐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요셉가정에 태어났지만 요셉에게는 의붓자식이란 말입니다, 의붓자식. 요셉과 하등의 관계가 없는 의붓자식이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그들 사이에서 낳은 아들딸을 기르게 될 때, 예수를 등한시했다는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의붓자식으로 자란 예수였습니다. 동생들한테도 천대를 받고 자란 불쌍한 예수였습니다. 정적으로도 의지할 부모가 없었고 가정적으로도 안식할 수 없었던 예수였습니다.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하늘의 직접적인 지도 밑에서 자랐습니다. 또 심정적으로는 미래의 소망의 심정을 갖고 있는 예수였던 연고로 그러한 환경에서도 민족과 국가를 바라보아야 하고 세계를 바라보아야 할 운명에 처한 예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런 자리를 원망하려야 원망할 수 없었던 것은 무슨 연고인가? 하나님의 심정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믿고 모시는 아버지는 4천년 동안 이런 억울한 길을 걸어오셨다는 것을 알고, 불효의 역사를 거듭해 나온 선조의 잘못까지도 대신 책임지고 탕감복귀해야 할 사명을 지닌 자신인 것을 알았기에, 그는 반대하는 무리를 대하여 원망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정과 대등한 심정을 가지고 생각했기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면서도 반대하는 민족을 축복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오늘날 기독교 신자들은 예수를 죽으러 오신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결과만 바라보니 간단할 것입니다. 그러나 죽을 때까지의 예수, 죽기 전 예수의 사정을 모르고 있습니다. 죽는 예수를 바라보시던 하나님의 심정을 모르고 있습니다.

여러분, 세상에서도 어떠한 사람을 사랑합니까? 사정을 알아주는 사람을 사랑합니까, 몰라주는 사람을 사랑합니까?

예수는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은 어떠하겠느냐?” (눅 12:49-50)고 누구한테 말씀하셨습니까? 말씀을 하셨지만 그 말씀의 상대가 없었던 예수인 것을 알아야 됩니다. 4복음서의 말씀을 하셨지만 그 말씀의 상대를 찾지 못한 예수였다는 거예요. 여러분이 예수를 잘 믿기만 하면 천당 가고, 주님을 신랑으로 모신다고? 천만 부당하다는 사실, 말씀은 믿고 있는지 모르지만 심정과 실체를 믿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하나님의 슬픔을 내적으로 주고받아 가지고 이 슬픔을 위로해 준 예수 앞에, 그의 사랑하는 아들딸 된 사람이 있었습니까? 예수는 하나님의 독생자로 땅 위에 나타났는데, 그 예수 앞에 독생자 될 수 있는 아들딸은 어디 갔는고? 그거 생각해 봤어요?

예수를 보내신 목적

하나님이 타락하지 않은 본연의 아담 해와를 축복하신 목적이 어디 있었던고? 그들만 잘 먹고 재미있게 살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아담 해와의 후손들까지, 그 가정, 그 민족, 그 세계 전체를 대신하여 축복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를 보내신 목적이 무엇이뇨? 그것은 하나님의 독생자로 오셨으니, 그 앞에 독생자 될 수 있는 아들딸을 찾는 데 있었습니다. 이 아들딸을 찾기 위하여 허덕인 예수였기에, 예수와 같은 아들딸을 찾으시려는 하나님의 심정을 통하였기에 멸망을 예고하여야 할 이스라엘 민족인데도 불구하고 십자가상에 쓰러지면서도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시옵소서.’ 하고 기도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심적 동기가 하늘에서부터 출발한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신도들은 예수의 제자만 되어선 안 됩니다. 예수의 아들딸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예수를 품고 하나님의 속에 있는 모든 것을 털어놓고 이것을 유업으로 맡기고 안심할 수 있는 입장에 있었던 예수와 마찬가지로, 모든 것을 털어놓고 사정할 수 있고, 모든 이념을 맡기고 축복할 수 있는 예수의 심정에 사무친 아들딸은 어디 있느뇨? 이러한 아들딸이 이 땅 위에 나타났다면 재림은 오래 전에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2천년이나 걸릴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 아들딸 봤습니까? 예수의 말씀을 믿고 죽어간 사람은 있었으나, 예수의 심정을 알고 예수의 실체를 믿고 죽어간 사람은 없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셨습니다.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으리라 했는데 무얼 믿으란 말입니까? 하나님이 세상과 같이 사랑하는 독생자, 독생자와 같이 사랑하는 세상, 이것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것만 믿으면 천국은 문제없이 간다는 것입니다. 성경 66권을 다 보아도 그 내용입니다. 세상을 독생자와 같이 사랑하고 독생자를 세상같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그 심정을 믿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영원히 남을 수 있는 것, 영원히 승리할 수 있는 것, 영원히 영광의 주인이 될 수 있는 것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죄악된 이 세상일지라도 하나님이 세상을 독생자와 같이 사랑하는 줄 아는 자, 또 독생자를 세상과 같이 사랑하는 줄 아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겠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런 사람들은 강도입니다, 강도. 예수는 이 땅에 오셔서 세상을 자기의 몸보다도 귀하게 바라보았습니다.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 하셨으니, 자신을 주신 것은 세상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을 예수는 알았습니다. 역사적인 하나님의 심정을 헤아려보게 될 때 부인할 수 없습니다. 또 이스라엘 민족 앞에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실체이니, 세상 앞에 서야 할 자신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3년 공생애는 자기 몸을 세우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자를 세우기 위한 3년 공생애였어요. 3년 동안 세 제자를 아들딸 같이 만들기 위하여, 12사도를 참다운 직계의 아들딸로 만들기 위하여 수고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원리에서 탕감복귀역사를 배워서 알고 있을 것입니다. 아담가정에서 잃어버린 세 아들, 노아가정에서 잃어버린 세 아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3대 하나님, 사울왕, 다윗왕, 솔로몬왕 3대를 세워서 섭리하신 것과 같이 전체를 대표할 수 있는 이 3수를 찾아 나오는 천적인 복귀의 원칙에 따라 믿음의 세 아들을 세워야 할 예수였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는 다 버리고 가더라도 이 세 제자는 떨어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까지 같이 데리고 가고 싶었던 세 제자들이었고, 골고다 산정까지 같이 가고 싶었던 세 제자들이었으나, 그들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배반하고 말았습니다. 슬픈 역사는 여기서 벌어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세 제자가 예수님과 같이 죽고자 했던들

만일 세 제자가 예수와 같이 죽고자 했던들, 예수는 승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땅 위에서 이룹니다. 성신이 오고 믿음의 아들딸이 있으니 아버지와 어머니신이 땅 위에서 영적으로라도 기반을 잡고 뜻을 이루어 나간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에 없는 말을 한다고 할지 모르지만 좋아요.

땅을 구하러 오신 예수가 왜 승천하고, 어머니신인 성신이 무엇 하러 예수 대신 땅 위에 오시는가? 배반한 땅, 이 땅은 어머니의 상징입니다. 해와 곧 어머니 때문에 타락했으니, 이 타락한 땅의 죄를 씻는 일은 어머니가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 어머니신인 성신과 오늘 믿는 신자들은 뒤넘이치면서 사선을 넘어 하늘에 계시는 예수를 모실 수 있는 자리까지 찾아 올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4천년 역사 위에 사랑할 수 있는 예수를 보냈으나, 그를 붙안고 깊이 사랑해 보지 못하셨습니다. 또 사랑하는 예수를 인간이 맞았으나 인간이 예수를 붙들고 사랑해 보지 못했습니다. 부활한 후에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를 붙들려고 할 때, 만지지 말라고 했습니다. 왜 막았느뇨? 이것이 서러움입니다. 하나님이 원통하시면 예수도 원통했습니다. 여기에 천지의 곡절이 맺혀 있으므로, 그것을 풀지 않고는 움직일 수 없는 천륜입니다. 그것이 맺혀 있는 것을 해결해 놓고 대하고 보아야 할 하늘은 얼마나 안타까웠겠습니까?

하나님은 잃어버린 아담 해와의 대신 존재를 찾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45절에 예수를 후아담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아담을 생명나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는 잃어버린 생명나무 대신으로 오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땅 위에 사랑하는 그 예수를 세워 놓고 믿는 사람 앞에서 자랑 한번 해봤어요? 하나님이 사랑하는 한 분을 찾고 있는 가정 앞에 가서 한번 자랑해 봤어요? 오늘날 2천년 역사가 지났지만 어느 민족 앞에, 어느 세계 앞에 자랑해 봤느냐 말이에요. 못 해 봤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 해와를 쫓아내야만 했던 그 때도 하나님은 분하셨지만, 예수를 이 땅 위에 보내고서 죽이고 또 다시 보내야 하는 하나님의 입장은 더 분한 것을 알아야 됩니다. 아들의 사명자로 보냈지만 그 사명을 완결짓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과 아들이 기뻐할 수 있는 한 날을 예수 당시에 못 가졌기 때문에 재림이라는 명사를 남기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와 더불어 기뻐할 수 있는 한 시간, 6천년 원한의 심정을 터놓고 하나님과 혹은 앞으로 오시는 주님과 아들딸의 인연을 맺는 날, 그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지 않았다면

여러분, 생각하여 보십시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이 이 땅 위에 오셔서 만일 죽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겠어요? 예수가 독생자라 하였으니 하나님은 그 앞에 독생녀도 보내셨을 것입니다. 전도서 7장 28절에 “내 마음에 찾아도 아직 얻지 못한 것이 이것이라, 일천 남자 중에서 하나를 얻었거니와 일천 여인 중에서는 하나도 얻지 못하였느니라” 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2천년 역사는 신부 찾는 역사입니다. 신부 찾는 역사예요. 그걸 부인하겠어요? 신부 찾는 역사입니다.

예수는 참다운 아들의 모습으로 나타났지만, 참다운 딸의 모습이 없으니 하나님의 뜻을 못 이룬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2천년 역사는 딸 찾는 역사입니다. 우리 통일교회가 앞으로 싸우게 되는 것도 이 문제 때문입니다. 성신은 하나님의 딸로서 오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해원의 그날은 어떠한 날일 것인가? 어린양 잔칫날이라 하였습니다. 일천 남자 중에 택한 한 남자로 주님이 나타나시면 그의 한 신부는 어디에 있을 것인가? 성신이 와서 2천년 동안 이 지상에 해야 할 것은 신부를 준비해 놓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아담 해와를 세워 놓고 축복해 주신 것은 아담 해와만을 사랑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 후손까지도 사랑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럴 수 있는 후손이 있어요? 예수가 사랑할 수 있는 아들딸이 있었습니까? 만일 예수가 ‘이는 영원무궁토록 사랑할 나의 아들딸이요, 나의 직계로다’할 수 있는 아들딸이 있었다면, 이 세상은 벌써 하나님의 나라가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역사적인 심정, 시대적인 심정, 미래적인 심정을 대신하여 죽어 가신 것입니다. 다시 오시는 주님은 그 뜻을 계승하여 땅 위에서 실천하기 위하여 오실 것입니다. 그 분이 오실 때 지상에 있는 수많은 성도들은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예수가 하나님 앞에 아들 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여러분은 오시는 주님 앞에 참다운 아들딸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될 게 아니에요?

세 가지 해원해야 될 것

땅 위에서 효자란 어떤 사람입니까? 무릇 효자가 되려면 부모를 잘 봉양함은 물론이요 자식이 있어야 됩니다. 아무리 효자라고 하고, 아무리 훌륭한 무엇이라 하더라도, 부모 앞에 모든 것을 갖추어 드렸더라도 부모가 바라는 자식을 갖지 못하면 효자가 못 됩니다. 예수는 하나님 앞에 역사적인 효자로 탄생하셨습니다. 독생자의 영광을 갖추고 다 이루었다 하는 자리에 섰다 하더라도 자녀가 없을 때에는 하나님 앞에서 얼굴을 들 수 없다는 것입니다. 2천년 동안 예수님이 왜 수고하셨는지 아십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을 찾기 위하여 미칠 듯이 수고하시는 것을 아시고, 예수님도 땅 위의 인간을 대하여 미칠 듯한 심정을 갖고 30여 년의 생애를 지내셨다는 것입니다. 하늘의 보좌에 가서도 기도하고 계십니다. 2천년 동안 미칠 듯이, 미칠 듯이, 사탄만 없으면 벌써 미쳤을지 모릅니다. 미칠 듯이 이 땅 위의 인간을 고대하고 그리워하신다는 것을 여러분은 아셔야 됩니다. 성경 말씀을 다 잊어버리더라도 예수의 그 심정만 통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 66권을 다 능통했다 할지라도 아버지 앞에 못 간다는 거예요. 예수님의 제일 슬픈 것, 제일 분하고 억울한 것, 제일 기뻐하시는 것, 이 세 가지를 해결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뭐 14만 4천 무리에 들어가겠다고, 혹은 선민이라고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 세 가지를 해원해 주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 가운데 제일 슬펐던 고비가 어디며, 제일 분하고 억울했던 고비가 어디며, 제일 기뻤던 고비가 어디뇨? 슬프고 분한 고비는 나와 있지만 기뻤던 고비는 찾아볼 도리가 없습니다.

친구가 되고 누구보다 가까이 사랑받는 사람이 되려면, 그 사람의 슬픔과 고통을 알아 가지고 그것을 붙들고 위로해 주어야 됩니다. 그래야 그의 친구가 되고 그를 지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심정을 통하고 사랑으로 인연을 맺는다면, 그 사람이 내 마음대로 움직이고 나도 그 사람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4천년 동안의 하나님의 슬픔과 하나님의 기쁨이 무엇이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을 말 못하고 가셨습니다. ‘내가 세상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고 하신 예수님의 슬펐던 심정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슬픔, 하나님의 고통, 하나님의 기쁨을 아셨으니, 우리도 하나님의 슬픔과 하나님의 고통과 하나님의 기쁨을 알아야 되는 거예요. 또한 2천년 동안 하나님께서 수고하고 계시는 수고의 역사노정 위에도 가담되어 있으니, 우리도 거기에 가담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슬픔이 무엇이며 하나님의 고통이 무엇이뇨? 아들딸을 잃어버린 것이 슬픔이요, 아들딸을 찾기 위하여 허덕이는 것이 고통입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모든 슬픔과 고통을 잊어버릴 만한 사랑의 심정으로 아들딸을 사랑하는 그 순간에서부터 기쁨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믿는 사람들은 예수를 위하여 미쳐야 됩니다. 미쳐야 돼요. 어느 정도까지? 세상의 그 어떤 부부가 사랑하는 이상 미쳐야 됩니다. 내 뼛골이, 내 생명이 여지없이 스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대를 위한 충절의 심정이 변할소냐, 그대를 위한 흠모의 심정이 변할소냐 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 밥을 먹는 것도, 보는 것도, 듣는 것도 예수를 위해서다 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에요. 그럴 게 아녜요?

예수 믿는다는 사람 중에 구경하러 다니는 사람이 많습니다. 부모와 자식간에 애달픔과 굽이치는 서러움이 서려 있는데도 불구하고 구경하러 다닙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과 상관이 없습니다. 직계의 자식은 못 되는 것입니다. 직계의 자녀는 못 돼요.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허덕여 나오십니까? 사랑하는 자녀를 찾아 세우기 위하여 수고의 역사를 거듭해 나오셨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려면

여러분, 진정코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싶습니까? 진정코 하나님이 사랑하는 딸이 되고 싶습니까? 진정코 땅 위의 어느 누구의 위로로도 막을 수 없는 서러움이 여러분의 가슴에 움직이고 있습니까? 어떠한 위로, 어떠한 사랑으로도 막을 수 없는 슬픔이 여러분의 마음 몸에 움직이고 있습니까? 그러한 무엇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그 무엇을 갖다 준다 하더라도 아들딸이 안 됩니다. 아버님만 생각하면서 살고, 살면서 싸우고, 싸우면서 달음질치고자 하는 마음이 생활 속에서 생애노정에서 사라지지 않아야만, 여러분이 그분의 아들딸이 될 수 있는 가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심정에 사로잡혀서 하나의 막대기를 붙잡고도 눈물이 앞을 가릴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존재물이 그런 해원의 한 날을 고대하면서 탄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머리 숙여 무지한 인간이라 몰랐으니 미안하다고 할 수 있어야 됩니다. 이게 추상적이 아닙니다. 혹시나 그러한 길을 찾기 위하여 허덕이는 동지를 바라보면 그를 붙들고 ‘너도 우리의 형제로구나.’ 하고 통곡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진 사람이라야 됩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아무리 슬프고 아무리 외롭다 할지라도, 하나님에게 비할 바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산천을 바라보면 산천에도 하나님의 눈물자국이 남아 있는 것을 알고, 흐르는 물을 보고 거기에도 하나님의 눈물이 어려 있다는 것을 알고, 자기가 누운 자리도 하나님의 눈물바다요 골고다의 십자가의 흔적이 남아 있는 자리인 것을 느끼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늘은 이런 마음을 갖고 ‘골고다 산상에서 주님께 십자가를 지게 하셔야 했던 아버지시여!’ 하며 눈물 짖는 아들딸, ‘예수는 죽어 땅 위에 한을 남기고 가셨지만, 나는 죽지 않고 실체로서 이 한을 풀어 드리겠습니다.’ 할 수 있는 아들딸을 찾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6천년 역사는 사랑하는 아들딸을 세우기 위한 하나님의 수고의 역사였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6천년 동안 수고하신 하나님에게 빚을 진 자요, 6천년의 하나님의 눈물의 결정체요, 골고다의 희생의 대가를 치르고 산 나인 것을 느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역사적인 죄를 회개하고, 시대적인 죄를 탕감하고, 미래적인 소망을 품고 아버지를 부르며 손을 벌리고 들어갈 때, 아버지께서 친히 붙들고 ‘오, 내 아들아, 내 딸아.’ 하시며 아버지의 위신을 잊어버리고 기쁨과 서러움의 눈물을 흘리게 하는 자라야만이 아들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아버지요 그러한 예수였다는 것을 아는 자라야 하나님의 아들딸 될 수 있다는 거예요.

이러한 아들딸들을 하나님은 너희가 고대하던 주인이요, 내가 찾던 아들딸이라며, 사탄세계 앞에 천상천하의 모든 존재 앞에 늠름히 내세울 수 있습니다. 이러한 아들딸들이 나타나야만 하나님은 비로소 6천년 수고를 잊어버리고 하늘땅을 맡기고 안식의 자리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슬픔의 역사를 붙들고 예수가 울었고 예수가 죽었던 것과 같이, 여러분도 아버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길이 있다 할진대 고이고이 갈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런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 주시기 바랍니다.

<기 도>

아버님! 황공 망극하옵나이다. 알고 보니 이 길은 가기에 어마 어마한 길이요, 느끼면 느낄수록 가슴을 쥐어뜯어도 그칠 수 없는 슬픈 길임을 알았습니다.

하루도 아니요 몇 년도 아닌, 6천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이것들을 찾아오시던 아버지시여! 이들은 아버님을 얼마나 미칠 자리에 놓아두었으며, 아버님을 얼마나 분한 자리에 머물게 했으며, 또 저희들은 얼마나 불효의 자리에 머물렀는가를 깨닫는 이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 인연을 맺기 전에는, 세상의 것을 가지고 울고불고한 저희들, 죄인 중의 죄인인 것을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 오늘 여기에 모인 당신의 아들딸들, 다 몰라도 좋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이러한 하나님이요, 우리가 모셔야 할 예수는 이러한 예수요, 우리는 그런 아들딸의 위치에 서야 한다는 것만이라도 알게 하여 주시 옵기를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여기에 찾아온 저희들의 소망이 무엇이옵니까? 옷 잘 입은 자를 찾아온 것도 아니요, 권세 있는 자를 찾아온 것도 아니요, 욕망을 위하여 온 것도 아닙니다. 단지 아버님의 사랑이 그리워, 아버님의 정이 그리워, 아버님의 인연이 그리워 왔사오니 아버님, 아버님의 눈물이 있다 할진대 저희도 그 눈물을 갖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아버님의 고통이 있다 할진대 저희도 그 고통을 갖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기쁜 역사를 찾아 헤매는 왕자가 되지 말고 슬픔과 고통의 역사를 대신 책임지고 탕감하는 왕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을 저희들이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러한 자리에서 승리한 아들딸, 하늘땅 앞에 자랑할 수 있는 아들딸을 고대하고 있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았사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6천년 동안 수고하신 것은 사랑하는 아들딸들을 세우기 위한 목적인 것을 알았사옵니다.

오늘날 저희 앞에 맡겨진 책임을 다하고 맡겨진 의무를 감당하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니다. 효자 중의 효자, 효녀 중의 효녀, 충신 중의 충신이 될 수 있는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그리하여 역사적인 아버지가 나의 아버지요, 시대적인 아버지가 나의 아버지요, 미래적인 아버지가 나의 아버지가 되시어, 우주 전체를 동원하여 즐거움의 노래를 부르는 기쁨의 한 날이 올 때까지, 아버지, 이들을 품어 주시고 보호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마태복음 23:29-39

<기 도>

아버지시여! 오늘 이 시간은 예수와 역사적인 거리가 있는 시간이옵니다. 역사에는 거리가 있으되 심정의 세계에는 거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역사적인 예수를 믿는 저희들이 되지 말고 심정을 통하여 직접적으로 예수를 알고 믿을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말씀을 보았사오니, 이 말씀을 하시던 예수의 초초한 성상을 그리면서 마음으로 슬퍼하며 그 앞에 머리 숙일 수 있고, 호소하던 그때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사무친 마음, 간절한 마음, 황공한 마음이 저희의 몸 마음에 어리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자신도 모르게 아버지라 부를 수 있으며 알 수 없는 사이에 주의 황홀한 은사를 느껴 감사드리고, 보내신 메시아의 성상은 천상이 옹호하여 받들어야 할 존재였으나 땅 위에 나타나 처참한 행로를 가신 것을 슬퍼하고, 그의 수고를 염려하고, 그의 분함을 분히 여기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때의 선조들의 행치 못한 모든 것을, 오늘 저희들이 심정적으로 인계 받아 그들 대신 예수의 위로자가 되고 위안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고, 그분 앞에 소망의 상대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는 얼마나 불쌍한 분이었사옵니까? 민족을 바라보는 그의 마음은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고, 교단을 바라보는 그의 심정은 통곡밖에 남아 있지 않았사옵니다. 천륜의 섭리를 책임져야 했던 그의 사정을 인간이 알지 못하였습니다.

사정을 통해야 할 인간을, 심정을 나누어야 할 교단을, 같이 살아야 할 민족을 뒤에 놓고, 홀로 밤중에 산중을 헤매시던 그의 심정을 아는 자 없었습니다. 오늘 저희들은 예수를 모르면서 따르고, 예수를 모르면서 믿는 자들과 같이 되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불쌍한 그의 심정을 붙들고 한없이 울어 줄 수 있으며 한없이 염려할 수 있으며, 그를 위해서는 죽음의 자리도 개의치 않는 저희들이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오늘 여기에 모인 당신의 아들딸들이 무엇 때문에 왔습니까? 여기에서 가르쳐 줄 것은 세상의 어떤 학문도 아니요 학식도 아니옵니다. 마음의 안식처를 찾기 위하여 모였사옵고, 본연의 심정과 연락하여 아니 갈 수 없으며, 머리 숙이지 않을 수 없으며, 심정을 털어놓지 않을 수 없는 인간이 되기 위하여, 하늘 앞에 회개하고 청산하기 위하여 저희들이 모였을진대, 자기 스스로 섰다 하는 자가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긍휼의 손길과 긍휼의 지팡이가 아니면 여지없이 쓰러져 사탄의 제물이 된다는 것을 알고 감사드릴 줄 알며 황공해 할 줄 알고 ‘아바 아버지여! 긍휼히 여기시옵소서.’ 할 수 있는 사무친 심정이 넘쳐흐르는 아들딸들을 만들기 위하여 이 자리를 허락하신 것을 아오니, 이제 말씀을 전하는 자도 말씀을 받는 자도 그러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역대의 선조들과 인연되고 한 날을 세우기 위하여 하늘이 수고하신 결과로 오늘 저희들이 상봉한 것을 알고 있사오니, 마음으로 느끼고 심정으로 체휼하여 새로이 결심하는 바가 있다 할진대 그것은 오늘 이 시간에 빚어지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수고의 실적을 통하여 선조들, 혹은 선지, 혹은 의로운 사람들이 동원하여 다리를 놓고 인연을 이어 나와 내 한 자체가 실체적으로 빚어졌다는 것을 느끼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바라보는 심정, 대하는 성상은 다를지라도 아버지와의 인연을 맺는데 있어서 같은 마음으로 움직이고 같은 심정으로 동하여 같은 모습으로 빚어질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전하는 자의 마음이나 받는 자의 마음이 둘이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고, 사탄은 이와 같은 터전을 노리며 저희 앞에 사망의 장벽을 가로놓으려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힘과 능을 가하여 주시옵고 성삼위 신이 보호하시는 가운데 승리의 영광만이, 재창조의 영광만이, 존귀의 영광만이, 자랑할 수 있는 것만이 저희 자체에서 빚어질 수 있으며 느껴질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외로운 식구들 지방에 널리어 이 시간도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는 곳곳마다 같은 은사를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부탁드리올 때,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니다. 아멘.

<말 씀> 잠깐 드리려 하는 말씀은 ‘찾으시려던 예수님’입니다. ‘찾으시려던 예수님’ 이러한 제목을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을 세우신 하나님의 목적

우리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독생자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예수는 하나님께서 4천년 동안 찾으시려 했던 분이었습니다. 이 예수는 택한 이스라엘 민족의 갖은 수고의 노정을 거친 후에 찾으신 분이었습니다. 또 그 예수는 찾으시려는 하늘의 뜻과 모시고자 하는 백성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수고하신 분이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 예수 하나를 놓고 하늘의 인연이 엉클어져 있고, 하늘이 택한 선민 이스라엘의 역사적인 인연과 시대적인 인연과 미래적인 인연이 엉클어져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이 예수를 완전히 찾으실 때 이스라엘을 택한 목적이 이루어지는 것이요, 이 예수를 하나님이 완전히 품으실 때 선민 이스라엘을 품는 것이요, 예수와 더불어 즐기며 사는 그때에 비로소 하나님이 택한 이스라엘 백성과 더불어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예수를 완전히 찾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 할 수 있으며, 예수를 완전히 모시는 것이 타락한 후손, 구원을 바라며 나아가는 우리 인류의 소망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천주적인 예수를 찾기 위하여, 하늘은 타락 이후 예수가 올 때까지 갖은 수고를 하셨다는 것을 우리들은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또 이러한 예수 한 분을 모시기 위하여 택한 선민들은 역사노정에서 말할 수 없는 핍박의 길과 죽음의 길을 갔고, 쓰러졌다 일어서고 일어섰다 쓰러지고 또 일어서는 싸움의 역사를 거듭하여 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의 한을 품은 이스라엘 선민은 예수 한 분을 붙들 때에, 그 한이 풀릴 수 있고 예수를 보내기 위해 수고하신 하나님의 한도 풀릴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는 왔더랬습니다. 예수는 이 땅 위에 와서 일하였습니다. 예수는 이 땅에 와서 우리를 위하여 싸웠습니다. 하늘을 위하여 참고 싸웠습니다. 죽음의 길까지도 홀로 갔습니다. 예수는 틀림없이 시대를 위하여 왔고, 미래를 위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역사의 한을 풀지 못한 입장에 있고, 시대의 한을 풀지 못한 입장에 있습니다. 그런 연고로 예수가 왔다 간 이후 2천년이 지난 이 날, 예수가 다시 와야 한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오늘 이 시대는 예수가 다시 필요한 시대입니다. 오늘 이후 미래에도 예수는 필요합니다.

이것을 생각할 때 하늘은 예수를 보내시고 소망하시는 대로 찾아지기를 얼마나 고대하셨을 것인고? 예수는 이 땅에 와서 위로는 하늘의 위신과 아래로는 땅의 위신을 대신하여 서기를 얼마나 고대하셨을 것인가? 그러나 예수는 자기의 위신을 세워 본 적이 없습니다.

예수는 민족 앞에 나타나 만민을 통치할 수 있는 만왕의 왕으로 하늘의 황태자로 군림하기를 고대하였을 것입니다. 그것은 차치하고라도 4천년 동안 준비해 온 이스라엘 민족은 죽는 한이 있어도 예수를 놓지 말아야 하고 또 예수도 죽더라도 이스라엘 민족을 놓지 말아야 할 것이었는데, 죽음을 앞에 놓고 서로 서로 나눠지고 서로 서로 갈라졌으니, 예수는 민족 앞에서 사라지게 되었고, 이 땅 위에서 가지 않으면 안 될 입장이었던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그러한 사명을 갖고 왔던 예수, 그는 역사적인 사명감과 시대적인 사명감에 충천해 있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사망의 물결에 휩쓸려 아우성치는 인류를 구원하려는 심정이 불탔던 예수였습니다. 그 예수, 그러한 예수, 메시아요 하늘의 독생자이신 예수를 모신 자가 있었느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하늘이 예수를 걸어 놓고 찾는 것이 있다 할진대 무엇을 찾을 것인고? 예수를 통하여 찾고자 하는 것이 있다면, 예수를 아는 자를 찾을 것입니다. 진정 예수를 아는 자는 하나님을 아는 자요, 하나님을 아는 자는 예수를 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자처해 나오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믿을 수 있는 예수를 알아 모셔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인류는 예수를 잃어버려야 했고, 하늘도 예수를 잃어버려야 했으며, 예수 자신도 사명을 땅 위에 남겨두고 죽어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사실을 우리들은 다시 한번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를 모시는 백성을 그리워하신 하나님

6천년의 역사가 경과한 오늘에 있어서 하나님의 소원은 무엇일 것인고? 땅 위에서 예수를 다시 찾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예수가 지상에 왔던 목적을 다 달성하고 하나님의 우편에 가서 하나님의 영광을 갖추어 승리의 경배를 드린 줄 알고 있는데, 그것은 크게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는 가시면서 이 땅 위에 성신을 보냈습니다. 성신을 보내 놓고 하늘의 심정을 대신하여, 아버지가 찾으시는 모습으로서 나타나기 위하여, 완결짓지 못한 사명을 책임지기 위하여 영계에서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이 예수의 기도의 내용은 무엇인고? 예수가 기도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하늘이 4천년 동안 준비하여 예수를 보내시고 그를 통하여 찾으시려던 것은 승리의 모습, 십자가의 예수가 아닌 영광의 예수였습니다. 예수께서 기도하신 목적은, 그러한 하나님의 뜻을 이뤄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하늘이 찾으시려던 예수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고 예수는 하늘을 어떻게 바라보았고, 후대 사람들은 믿기를 바라셨던 예수를 어떻게 대하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믿는 사람이 예수를 대하는 것이나, 예수가 하나님을 대하는 것이나, 하나님이 예수를 대하는 것이나, 하나님이 민족을 대하는 것이나 같아야 합니다. 같은 목적하에 움직여서 그 목적이 이루어진 자리는 슬픔과 고통이 아니라 승리와 영광, 온 하늘땅이 즐거워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그 한 날, 그 날에 움직일 수 있는 예수, 자랑할 수 있는 하나님과 그 예수를 최고로 모실 수 있는 백성을 하늘은 그리워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늘이 예수를 땅에 보내신 목적이요, 예수를 믿게 한 목적이었으나 아직까지 지상에서 그 목적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 연고로 예수는 다시 와야 됩니다. 다시 와야 돼요. 예수가 승리하여 세운 영광의 동산, 하나님이 즐거워하실 수 있는 그 세계는 어디 갔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심중에, 예수의 심중에만 남아 있습니다.

예수는 만왕의 왕으로 이 땅에 왔습니다. 하늘이 세우신 이스라엘 선민을, 유대 나라를 지극히 사랑하고 품어 주고 그들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 그들이 죽으면 예수도 죽고 그들이 살면 예수도 살아야 할 철석같은 인연을 맺기 위하여 왔습니다. 이러한 인연을 갖기 위하여 예수는 민족을 대하여 외치고 부르짖었으나, 민족은 그 인연을 유린하고 예수를 십자가에 내놓고 말았습니다.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공동 목표인 그 목적이 이 땅 위에 성취되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를 통하여 생사의 분기점을 세우려 하였으나, 그 기준이 지상에서 이루어지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사탄은 다시 인간 세상을 침범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와 성신은 영적으로 이 세계를 이끌어 나오고 있습니다. 2천년 동안 무수한 싸움의 역사를 거듭해 왔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예수를 찾기 위한 것이었으나, 예수와 택한 민족이 하나되지 못하여 예수를 잃어버림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민족은 하늘 앞에 버림받게 되었고, 하나님은 다시 영적인 이스라엘 민족을 세워 놓고 메시아를 약속하셨습니다. 예수가 왔다 간 이후 영적으로 다시 메시아를 보낼 것을 약속하시고, 실패한 이스라엘의 복귀운동을 해 온 것이 지금까지의 2천년 역사입니다.

그러면 오늘 이 때는 어떤 때인가? 끝날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끝날은 무슨 날? 하늘이 소원하시는 날이 가까워 오는 때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다시 세우시어 소원성취 하는 날이 끝날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소원하시는 것이 무엇이뇨? 창조본연의 세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세워 이 땅 위에 창조본연의 세계가 이루어지기를 고대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이 끝날 죄악된 사탄세계에 살고 있는 여러분은 하나님이 찾으시려던 예수를 바로 모실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하나님은 끝날 예수님이 마음대로 지배할 수 있는 세계가 되기를 고대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세계는 하나님이 예수에게 보여 주고 싶은 세계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택한 민족, 택한 자녀가 있다 할진대 그를 들어서 예수 앞에 자랑할 수 있게 되기를 고대하시면서, 하나님은 6천년 동안 참아 나오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땅은 하나님이 예수 앞에 드러내 놓고 자랑할 수 없는 세계가 되었습니다.

이 땅에 다시 예수가 오신다면, 그는 이 땅의 인간들을 거느리고 만왕의 왕으로 군림해야 할 것이며,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려야 할 것입니다. 또 우리들은 역사적인 슬픔과 역사적인 한을 해원하여 그를 승리의 왕자로 모시고, 그가 하늘 앞에 드릴 영광을 대신 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땅 위의 인간들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드러내고 싶어하신 하나님

하나님의 소원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가 오시는 그 때에 선한 세계가 나타나기를 고대하실 것입니다. 예수의 소원은 무엇일 것인고? 선한 나라의 승리자로서 선한 백성을 통치하고, 하나님이 소원하시던 그 목적을 이루어 하늘 앞에 승리와 영광을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땅 위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그러한 예수와 하나님을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가 다시 와야 할 끝날은 예수님 당시, 즉 2천년 전 이스라엘 민족 앞에 예수를 보냈던 그때나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4천년 동안 불쌍한 선민을 위해 수고하시고, 그들을 지도하시고,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면서 끌고 나와 예수에게 인계하신 것은 예수를 배반하는 민족을 만들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유대교단을 세운 것은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배척하는 선봉에 서는 교단으로 만들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예수가 하나님 앞에 양과 같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 민족은 누구보다도 예수 앞에 양 중의 양이 되어야 했습니다. 교단은 물론이거니와 이스라엘 민족도 예수가 동하면 동하고 예수가 서하면 서하고,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사는 민족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런 민족을 만들기 위하여 하나님이 4천년 동안 수고하셨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 앞에 보이고 싶었던 택한 이스라엘의 위신이 꺾어지게 될 때, 예수가 보고 싶은 교단을 보지 못하고, 찾고 싶고 세우고 싶은 사랑하는 자녀, 혹은 사랑하는 제자들을 찾지 못하는 것을 바라보실 때에, 하늘은 슬퍼하셨고 통곡하셨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4천년 동안 참아 나온 하늘의 분한 심정이 폭발되었다는 것을 그 때의 백성들은 몰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하늘을 알았기에, 그런 입장에 있는 자신을 바라보고 슬퍼하시는 하나님이 4천년 동안 수고하신 하나님임을 알았기에, 몰리고 배척받고 거처할 곳도 의지할 곳도 없이 쫓겨 다니는 그 마당에서도 ‘아버님, 제가 죽는 것을 한하지 마소서. 저의 서러움을 한하지 마소서. 저의 분함을 한하지 마소서.’ 하시며 하나님을 위로하셨던 예수의 심정을 그 누가 알았던고?

예수가 죽는 그 순간, 하늘이 4천년 동안 수고한 이스라엘 민족은 일시에 사탄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택해 세운 유대교단이 사탄의 함정에 떨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역사적인 수고와 역사적인 공적을 존중하던 예수는 하나님의 수고가 허사됨이 너무 안타깝고 너무 분해서, 자기 몸이 갈래갈래 찢기면서도 아버지 앞에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런데 그 심정을 누가 알았습니까?

택함을 받았다는 사람, 하나님을 모신다는 사람은 수없이 많았으나, 애달피 외치고 애달피 부르짖는 예수의 심정과 사정을 안 사람은 없었습니다. 이렇듯 사정을 통할 수 없었던 예수를 여러분은 믿고 있습니다. 심장이 찢어지는 가슴, 예수는 그 가슴을 부여안고 쓰러졌다는 사실을 모르는 채 여러분은 믿고 있어요. 이제 우리들은 끝날에 이 예수를 드러내 드려야겠습니다. 이 예수를 배반한 유대교 앞에 드러내야 되겠습니다. 배반한 이스라엘 민족 앞에 드러내야 되겠습니다. 배반한 가나안 7족 앞에 드러내야 되겠습니다. 사탄세계 앞에 드러내야 되겠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역사상에 예수를 드러낸 자, 그 누구뇨? 없습니다. 하나님의 소원은 예수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원은 예수를 이 땅 위에 승리의 왕자로 나타내고 모시는 것입니다. 예수의 소원도 그것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교단이 있습니다. 소위 믿는다는 사람은 많습니다. 자랑하지 마십시오. 역사는 모순된 노정을 거쳐왔습니다. 역사의 흐름은 냉엄한 입장에서 판결지어 나오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그 찰나에도 역사는 인연되어 있거늘, 공포가 찾아 들어오는 이 때, 혼란하고 혼돈되어 중심을 잃어버리는 이 때에 여러분 자신들은 어떠한 심정, 어떠한 인연, 어떠한 가치를 갖고 천상의 한을 염려하고 있습니까? 천상의 원한을 풀어 드리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습니까? 그것이 문제입니다.

배반당해 홀로 남은 예수

예수가 왔다 간 이후 2천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는 남아 있습니다. 배반한 형태는 남아 있으되 배반당했던 형태는 어디 갔느냐? 사라졌습니다. 배반당하여 죽어가면서 남긴 한서린 예수의 말씀은 남아 있는데, 예수의 심정과 사정은 어디 갔느냐? 하늘을 대신하여 싸움을 지도해야 할 예수, 땅을 대신하여 승패를 겨루어야 할 예수였는데도 불구하고, 남지 않아야 할 것이 남아 있고 남아 있어야 할 예수의 터전은 남아 있지 못한 채 다시 끝날이 되는 것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세계에 널려 있는 수많은 기독교인들, 자칫 잘못하면 이스라엘의 전철을 밟게 됩니다. 그렇지 않다고 누가 자신하겠습니까? 유대교의 전철을 밟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것입니까? 장담할 수 없습니다.

지금을 세기말, 끝날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끝날에는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밀실에 들어가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나타난 진리를 찾아 헤매는 것이 하늘의 뜻에 맞는 것이 아니요, 형식에 매여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을 모시는 것이 아닙니다. 옛날 하나님이 세우신 예수님은 모르는 가운데 나타났습니다. 도둑과 같이 나타났습니다. 영광의 왕자가 도둑과 같이 왔습니다. 호화찬란한 왕궁에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똥거름내 나는 마굿간에서 태어남이 웬 말입니까?

그런 자리에 태어난 예수를 메시아로 믿으라고 권하던 동방박사는 어디 갔느뇨? 그럼 예수를 메시아라고 증거하던 목자는 어디 갔느뇨? 안나, 세례 요한 일당은 어디 갔는고? 다 가버렸습니다. 하나님이 보낸 사람들이 가버리니 알지 못하는 이스라엘 민족도 갈 수밖에, 유대교단도 갈 수밖에…. 그리하여 예수는 홀로 남아졌습니다. 홀로 남아진 예수님입니다, 홀로 남아진 예수. 4천년 동안 하나님이 수고하시고 싸우시어서 세우고자 하셨으나 홀로 남아진 예수, 하늘이 거느렸던 수많은 장병을 다 잃어버리고 홀로 남은 예수, 교단을 다 잃어버린 예수, 민족을 잃어버린 예수였습니다.

오늘날 여러분이 믿고 있는 이 성경 말씀은 배반당한 예수의 말씀입니다. 수많은 사도들은 예수를 배반할 뿐 아니라 말씀도 배반했습니다. 말씀도 배반당하고 자신까지도 배반당하던 예수였습니다. 하늘이 그처럼 배반당할 예수를 세우시기 위해서 4천년을 수고하셨습니까? 아니올시다. 예수는 왜 믿는고?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고 예수의 분함을 풀어 드리기 위하여 믿어야 합니다. 천당에 가든 지옥에 가든 개의치 않고, 지옥에 가는 한이 있더라도 예수의 소원을 풀어 주고, 지옥의 왕자가 될지라도 하나님의 소원을 풀어 드리기 위하여 믿어야 할 텐데 ‘예수가 망하든 하늘이 어떻게 되든 나만 천당 가면 됐지.’ 합니다. 이것은 강도보다 더합니다. 신앙이 본질적으로 틀렸어요. 오늘날 이러한 기독교를 바로 세우기 위하여 가는 것이 통일신도들이 가는 길입니다.

찾아야 할 예수는 역사적인 예수입니다, 역사적인 예수예요. 그 예수는 시대적인 예수입니다. 또 그 예수는 미래적인 예수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가 전개하려던 역사가 잘려 버렸습니다. 시대도 잘려 버렸고 미래도 잘려 버렸습니다. 갈 곳 없는 예수가 돼 버렸다는 것을 알아요? 4천년 동안 하나님이 수고하신 역사적인 인연의 결실체로 오신 예수를 붙들고 울고불고 죽고살고 해야 할 텐데 다 잃어버렸습니다. 당시의 이스라엘 민족을 붙들고 가야 했던 예수는 그 민족을 잃어버렸습니다. 예수 이후에 예수가 주관 할 수 있는 참다운 후손들이 되어 있느냐? 오늘날 이 시대는 예수를 또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과거 현재 미래의 인연을 가지고 천상의 사명을 대신하여 왔던 분입니다. 그런 분이 땅에 와서 과거를 잃어버린 것만으로도 분한 일입니다.

오늘날 시대, 역사적인 종말시대의 예수가 다시 나타난다면 역사적인 인연을 세워야 됩니다. 오늘날의 기독교는 역사적인 인연을 세워야 돼요. 역사적인 인연을 세우는 데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오늘날 기독신도들은 이스라엘과 같은 민족, 혹은 예수를 배반한 유대교단 같은 교단 말고 하나님이 바라보시는 기준에서 예수를 받들어 드릴 수 있는 제2이스라엘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독신도들은 성경 말씀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이 전하는 근본정신이 어떻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 심정이 어떻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어떤 족보를 캐고 무엇을 논위하더라도 그 족보의 위신과 가치를 책임성 있게 다룰 수 없으면 족보를 캘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의 진정한 부모 형제

예수는 하나님의 위신을 세우기 위하여, 역사적으로는 4천년 동안 하늘의 뜻을 받들면서 희생한 수많은 선지자들의 해원을 위하여 왔었습니다. 시대적으로 사탄세계에 사탄의 유린을 받고 있는 민족의 분함을 해원하기 위하여 왔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을 못하고 갔습니다. 못하고 갔어요. 해원하러 왔는데 못하고 갔으니, 다시 와야 할 운명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찾고 계신 것은 무엇이뇨? 예수가 애타게 찾고 있는 것은 무엇이뇨? 선의 나라입니다, 선의 나라. 승리의 나라요, 영광의 나라요, 기쁨의 나라입니다.

그런데 예수가 선한 사람을 만났습니까? 못 만났습니다. 예수는 형제들한테서 몰려났습니다. 부모한테서도 몰려났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를 그렇게 만들기 위해 이스라엘 민족을 세웠겠어요? 예수를 그렇게 만들라고 유대교단을 세웠겠어요? 아담 이후 4천년 동안 섭리의 뜻을 인계시켜 나오면서 요셉가정으로 예수를 보내실 때 그렇게 대접하라고 보냈겠어요? 30여 년 동안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생활하면서 메시아를 모시기 위하여 준비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그렇게 모시라고 보냈겠어요? 다 가버렸습니다. 다 지나가버렸습니다.

이렇게 예수가 이 땅 위에 왔는데도 불구하고 민족이 저버리고, 예수는 자기를 맞이하기 위하여 준비한 민족의 뒤를 따라오던 사탄과 정면충돌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를 맞아 놓고 돌아서서 사탄을 향해 반격을 해야 할 택한 선민들이 다 가버리고, 홀로 남은 예수가 일선에 서서 싸우다 돌아가신 그 길이 십자가의 길입니다.

하늘의 정병들을 선두에 세워 놓고 사탄세계를 향하여 행군의 명령을 해야 할 예수였는데, 당신만이 남고 다 가버렸습니다. 동방박사는 어디 갔으며, 안나는 어디 갔으며, 목자는 어디 갔으며, 세례 요한은 어디 갔으며, 요셉가정은 어디 갔으며, 그 형제 친척은 어디 갔으며, 교단은 어디 갔으며, 민족은 어디 갔으며, 나라는 어디 갔느냐? 다 지나갔습니다. 다 지나갔어요. 다 지나갔으니, 예수님은 ‘나는 너희들을 위하여 죽었다.’ 하는 이 인연을 맺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고 다시 민족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지나가고 이 나라는 망해 버리지만, 하늘은 바라볼 것이다’ 하는 예수였기 때문에 천상에 올라가 그 민족을 위하여 다시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 예수의 사정이 이러하다면 예수의 소원이 무엇이겠어요? 참다운 제자를 찾는 것입니다. 예수가 찾는 그 참다운 제자는 하나님이 찾으시는 제자요, 예수가 증언할 수 있는 제자입니다.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예수가 편안히 쉴 수 있는 환경을 이루어 드린 적이 있었습니까? 예수에게 가정이 있었어요? 예수의 모친과 동생이 찾아왔을 때에 그는 하늘 아버지의 뜻대로 사는 자라야 나의 모친이요 나의 동생이라 했습니다. 예수에게는 모친도 없고 동생도 없었습니다. 예수에게는 친척도 없고 민족도 없었습니다. 예수에게는 가정도 없고 형제도 없었습니다. 안 그래요? 예수님은 그것이 분하여 죽은 후 영계에서도 모친과 형제, 종족, 민족, 교회, 나라, 세계를 찾아 나왔는데, 그것이 기독교 2천년 역사입니다. 예수는 하나님이 찾아 세우신 이스라엘을 잃어버리고 이 땅 위에 한 조각의 소유물도 세워 놓지 못하고 갔기에, 다시 와야 합니다. 예수를 중심삼은 예수의 가정, 예수의 종족, 예수의 민족, 예수의 나라, 예수가 꿈꾸던 세계를 이루지 못하고 갔으니, 다시 와야 돼요.

여러분들, 끝날에 다시 와야 할 예수께 또 다시 서글픔이 미쳐질까 봐 염려하는 자 있습니까? 예수의 동생이 되어 봤습니까? 이것을 하늘은 묻고 싶은 것입니다. 나이 많은 분들, 예수의 어머니 아버지와 같은 입장에서 예수를 사랑하고 싶은 마음을 가져 보았습니까? 예수와 같은 심정으로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을 그렇게 아끼고 그 아들딸을 위하여 뼛골이 녹아나고, 자기에게 피곤함과 어려움이 엄습해 와도 그것을 개의치 않고 붙안고 눈물 흘리는 신앙생활을 해 보았습니까?

어느날 이 땅 위에 예수는 다시 찾아옵니다. 무엇 때문에 오느뇨? 사랑하는 제자를 다시 찾기 위해서 옵니다. 역사노정에서 배반한 제자들을 다시 찾아가서 머리를 숙이게 하고 끌어모아서 그들을 중심삼고 뜻을 세워 나와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하나님의 한이요 예수의 한입니다. 이런 한을 남긴 것이 우리 선조들의 수치요, 우리 역사의 수치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사도를 높이 높이 받들어 모시고, 그들이 하늘의 지극한 사랑을 받는 자로 알고 있지만 결코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알고 보면 그렇지 않아요. 그들은 인류를 대표하여 위안해 드려야 하는데, 그것을 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죽고 나서 용서를 빌어야 했던 신세였음을 한해야 됩니다.

참다운 하늘나라의 식구

예수가 부활한 후에 찾아 모셨던 자들은 어떤 자였습니까? 배반했던 제자의 일당들이었습니다. 구원섭리를 하는 데 있어서 제자들을 용서해 주고 기쁨으로 맞이해야 했던 예수의 심정을 누가 알았느냐? 아무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 일이 한없이 서러웠던 것입니다. 서럽지만 가야 할 운명이었습니다. 땅 위에서 영적으로라도 발판을 잡으려니, 다시 찾아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인류를 맞고자 하신 예수 앞에 대표자로 택한 사도들이 배반하고 인류를 대표한 제자들이 배반하니 전체가 배반한 것이 되었기에,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한 예수를 붙들려 할 때 막았던 것입니다. 그 사정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들은 슬프신 예수를 배반한 자들입니다. 우리들이 훌륭하다고 모시고 있는 그 사도들 가운데 예수를 배반하지 않은 자가 한 사람이라도 있었습니까? 그들을 믿고 있는 여러분들도 같은 배반자의 종족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배반하지 않은 자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배반자의 종족이기에 배반, 배반, 배반을 거듭하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악의 생활을 하고 있어요.

예수가 다시 찾아올 때 그 예수 앞에 용서받아야 할 무리가 되어 있으니 하늘의 슬픔은 언제 끝날 것이냐? 언제 끝날 것이야? 우리들은 예수를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는 역사적인 인연을 세우려 하고 시대와 미래의 인연을 세우려 하던 분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서글픈 곡절을 땅에 남기고 갔으니, 그 한을 맡아 지는 것이 신부들의 사명입니다.

여러분들, ‘주여 오시옵소서! 내 죄 보따리를 다 맡아 주시옵소서! 주여 오시옵소서!’ 하며 주가 오기를 간절히 고대하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고대합니까? 내가 잘 먹고 잘 살고 좋기 위해서입니까? 자기의 관이나 자기의 목적을 세워 놓고 하늘을 대하는 사람은 어느 한때에 배반자가 됩니다. 신앙관이 어떻고 주의가 어떻다 해도, 하나님과 천성천하의 모든 존재물들이 ‘옳다’ 하고 판정하기 전에는, 어떠한 종교나 어떠한 사람도 ‘나를 따라라.’ 할 수 없습니다. 뭐 ‘우리 교파를 믿어야만 좋아. 우리 교파를 따라야만 돼.’ 할 수 없다는 거예요. 여러분, 얼마든지 통일교회를 지나가 십시오. 이런 입장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의 사정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늘이 찾으려는 예수, 예수가 찾으려는 그 자체, 예수를 찾으려 하는 우리들, 이제 우리는 자신을 나타내기 위해 애쓰지 말고, 죽기 전에 예수의 사랑 받을 수 있는 동생이 되어야 합니다. 아벨 편에 서려면 동생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죽기 전에 예수가 그의 심정을 다 털어놓을 수 있고 그 가슴에 있는 비밀을 남김없이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랑하는 제자, 예수가 모든 것을 인계해 줄 수 있고 또 그것을 인계 받을 수 있는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성경에 있듯이 예수는 ‘내가 아직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하는 말을 남기고 갔습니다. 이제 우리는 오시는 예수를 바라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이 이 끝날에 다시 세우려 하시는 예수, 하늘이 찾으려 하시는 예수, 우리가 모셔야 할 예수, 예수 자신이 세우려 하는 그 예수, 그분을 알고 모셔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은 예수의 제자만 되어서는 안 됩니다. 아들딸이 되어야 합니다. 승리한 하늘의 아들딸이 있다 할진대 그 아들딸에게는 사도까지 굴복하게 됩니다. 예수께서 ‘사랑하는 내 동생아, 사랑하는 내 식구야’ 하며 품어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사도들은 그의 종이 될 것입니다. 사도까지 무릎을 꿇고 경배할 수 있는 자리까지 나아가야 됩니다. 이런 말을 한다고 또 이단이라 할지 모르지만 그건 모르는 사람들의 말입니다. 여러분, 신부라는 명사는 사도들을 놓고 한 말이 아닙니다. 신부라는 명사는 사도들 앞에 허락한 명사가 아니에요. 허락했으면 무엇 하러 다시 오시겠어요? 후대의 인간들 앞에 허락한 말씀입니다. 똑똑히 아십시오. 자녀라는 명사는 사도들 앞에 허락한 것이 아니라 하늘을 배반하지 않는 후대의 아들딸을 위하여 한 말입니다.

아담 이후 지금까지 수많은 선지자들은 왔다 갔지만, 내가 알기로는 예수의 아들 될 자가 없습니다. 예수의 참다운 직계 자손이 될 자가 없습니다. 그것은 예수가 다시 오신 후에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십시오.

예수가 이 땅에 다시 오시는데 누구를 찾아오시는가? 동생들을 찾아오십니다. 부모를 찾아오십니다. 종족을 찾아오십니다. 민족을 찾아오십니다. 백성을 찾아오십니다. 세계를 찾아오십니다. 지금까지의 이 세상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에서 식구라는 명사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교인이 아니고 식구가 되어야 합니다.

사도를 능가하지 않으면 따를 수 없는 예수

예수의 슬픔이 무엇인가? 겟세마네 동산의 세 제자는 어디 갔으며, 사랑하는 부모, 사랑하는 동생은 어디 갔느뇨? 예수는 다 그리웠다는 것입니다. 요셉가정을 중심삼고 종족이 예수를 모셨던들, 예수는 안 죽었을 것입니다. 종족이 예수를 모셨다면 예수는 안 죽었을 거예요. 그런데 가정에서 쫓겨나고, 하늘이 찾아 세운 세례 요한한테 쫓겨나고, 교단에서 쫓겨나고, 민족한테 쫓겨나고, 제자한테 쫓겨나니 죽을 수밖에 더 있습니까? 이런 사정을 모르고 지금까지 예수가 죽기 위하여 왔다고 믿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람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렇게 믿고 나온 사람은 예수 앞에 제2의 십자가를 걸머지우는 놀음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는 찾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동생을 찾고 있습니다. 내 사랑하는 부모는 어디 갔으며, 내 형제는 어디 갔으며, 내 친척은 어디 갔으며, 내 종족은 어디 갔으며, 내 교회는 어디 갔으며, 내 교단은 어디 갔느냐? 이 한을 풀기 위하여 그는 2천년 동안 ‘아버님, 다시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나는 세계의 대표로 왔다가 실패했사옵고, 이스라엘을 거느리러 왔다가 실패했사옵고, 교회를 거느리러 왔다가 실패했사옵고, 종족과 가정을 다 거느리러 왔다가 실패했사오니 용서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이 그래요. 알고 보니 그렇단 말입니다.

하나님의 서러움이 무엇이뇨? 혈육을 연한 형제지간에 배척받는 것을 바라보실 때에, 하늘은 얼마나 서러워하셨겠습니까? 애지중지 기른 부모마저 예수를 알지 못하여 갈라지는 것을 볼 때, 하늘은 얼마나 슬퍼하셨겠습니까? 수천년 동안 준비하여 요셉의 종족을 택해 예수를 보냈으니, 환희하고 모셔야 할 그 종족이 예수를 배반했을 때 어떠하셨겠습니까? 유대교회가 배척할 때 어떠하셨겠습니까? 이스라엘 민족이 배반할 때 어떠하셨겠습니까? 개인으로부터, 형제로부터, 가정으로부터, 보낸 자로부터, 교회로부터, 사회로부터, 국가로부터 배척받을 때, 하나님의 심정은 터질 듯하셨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하늘이 다시 보내마 하신 예수는 기필코 올 것이며, 오셔서 이 시대를 책임질 것입니다. 끝날을 바라보고 있는 여러분, 여러분은 오시는 그 분을 모셔야 할 공동운명에 처해 있습니다. 그러면 그 분을 모셔야 할 시대는 다가오고 있는데, 어떠한 입장에 들어가야 모실 수 있겠는가? 지금까지의 신앙처럼 성경만을 믿다가는 못 모십니다. 예수가 오셨을 때, 구약만 즐겨 믿다가 못 모셨어요. 무턱대고 하나님만 믿다가는 못 모십니다. 구약 때에도 신약 때에도 그러했거늘, 오늘도 그러지 않는다고 누가 단정할 수 있어요? 우리는 아들딸의 자리에 들어가야 됩니다. 식구와 같은 입장에 들어가야 됩니다. 그렇지 않고는 못 모십니다.

이제 역사적인 하나님과 아들딸의 인연을 맺고 미래적인 하나님의 심정과 인연을 맺는 자리에 들어가야 됩니다. 이러한 때입니다. 이러한 때에 성경 끼고 교회에나 다니면 천당 가요? 어디로 가게 되나 죽어 보십시오. 저는 가끔 이런 것을 볼 때가 있습니다. 천국 간다고 뽐내던 목사들이 영계에 가서는 처량한 자리에 앉아 있단 말입니다. 그런 사람이 많습니다. 큰소리치지 마십시오. 현실의 교회에 치력(置力)한다고 하나님의 아들딸이 아닙니다. 누구한테 높임을 받는다 하고, 학박사라고 높임 받는다 해도 하나님의 아들딸이 아니에요.

말씀한 바와 마찬가지로 사도마저도 예수의 아들딸과 예수의 식구가 못 된다 했거늘, 땅 위의 그 누가 자칭 예수의 아들딸이라고, 예수의 형제라고 나설 수 있겠습니까? 사도들이 왜 그런 자리에 서지 못했느뇨? 역사적인 예수를 몰라봤기 때문이요 시대적인 예수를 몰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오늘날 우리들이 이런 아들의 입장에 나가려면 6천년의 역사적인 하나님을 알아야 됩니다. 역사적인 예수를 알아야 됩니다. 27억 인류를 거느리는 시대적인 하나님, 시대적인 예수를 믿어야 됩니다. 더 나아가서는 이 시간 이후에 뒤넘이쳐 180도 다른 형태로 벌어지는 미래적인 예수를 믿어야 됩니다. 이런 자리에 주님이 오셔서 그냥 끌고 나갈 것 같습니까? 천만에요. 뒤넘이쳐야 돼요. 말도 다르고 글도 다르고 모든 것이 다릅니다. 요점은 여기에 있어요. 사도 이상의 하나님의 아들딸, 사도 이상의 제자, 사도 이상의 신부, 사도 이상의 형제의 자리에 나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하늘이 찾아 세우려는 예수의 식구

역사적인 예수의 심정을 모르던 그 때의 사도들은 예수를 배반하였습니다. 역사적인 뜻을 가지고 움직이는 예수를 그들은 배반하였습니다. 미래의 뜻을 품고 움직이는 예수를 모르고 배반하였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 배반의 역사를 가로막고 청산하기 위해서는 예수의 친동생이 되어야 하고, 예수가 사랑할 수 있는 신부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와 영원무궁토록 같이 살 수 있는 식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거든 예수와 더불어 싸움터에 나가 싸울 수 있는 백성이라도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하나님의 심정을 아십니까? 이 시대의 하나님이 어떤 입장에 계시는지 아십니까? 오늘날 전세계 기독교는 배반의 역사를 되풀이할지도 모를 위험한 단계에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찾으셨습니다. 인간 앞에 예수를 보내시고 예수의 동생 될 자, 예수의 식구 될 자를 찾으셨습니다. 하늘은 이것을 바라셔서 4천년 동안 수고하셨습니다. 요셉가정은 예수를 사랑하고, 죽든지 살든지 그 뜻과 더불어 살아야 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가 가기 전에 신부급에 도달해 있어야 했는데 못 되었습니다. 그의 동생들 가운데에도 예수가 어디 가게 될 때 ‘형님, 어디 가십니까? 제가 가지요’ 하는 동생이 없었습니다. 요한복음에 어떠했어요? 예수님의 형제들도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믿지 못했습니다.(요7:1-9). 또 세례 요한은 성령이 하늘에서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와 그 분의 머리 위에 임하는 것을 보았다고 증거를 하고도 ‘주여! 어디 가서 어떻게 사시렵니까?’ 하고 물어 보았어요? 제자들이 물어 보았어요? 유대교인들이 물어 봤어요? 택함 받았다는 이스라엘 민족이 물어 봤어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는 말할 수 없는 한을 품고 갔습니다.

이 한을 푸는 날이 끝날이요, 풀지 못한 한을 청산하는 날이 심판날입니다. 심판날에 남아지고자 하는 여러분, 마음을 헤쳐 놓고 냉정한 입장에서 비판해 보십시오. 나는 하늘이 찾고자 하는 그 예수를 찾을 줄 아는 자가 되었느냐? 예수가 맞이하고자 하는 천국 가정, 아니면 그 이념국가의 백성이라도 될 수 있는 자격자냐? 나아가서는 신부, 더 나아가서는 예수의 사랑하는 직계의 아들딸이 되었느냐? 신부가 못 되면 아들딸이 되고, 아들딸이 못 되면 형제가 되고, 형제가 못 되면 식구가 되고, 식구가 못 되면 종족이 되고, 종족이 못 되면 민족이 되고, 민족이 못 되면 그 국가의 백성이라도 되어야 할 게 아닙니까? 이런 안타까운 심정을 품고 기도하고 계신 예수님이신 것을 사람들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모인 여러분, 우리는 어려운 길을 가고 있고, 또 그 길을 개척해 나가고 있습니다. 역사 노정에 없던 일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신약에 없는 말들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신령한 사람들이 체험하지 못하는 사실들을 우리는 체험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목적은 주가 땅 위에 오실 때에 그의 품에, 혹은 그의 울타리 안에 들어가 살 수 있는 식구가 되고 종족이 되고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되기 위하여 모인 무리입니다.

예수 앞에 제일 가까운 자리에 서야 할 사람이 누구뇨? 신부요 형제요 자녀인데, 이를 통틀어 말하면 식구입니다. 예수의 식구인 것입니다, 예수의 식구. 이는 하나님이 고대하던 식구요, 이는 예수가 찾으려 하던 식구입니다. 이 식구를 땅 위에 세워 놓는 것이 역사적인 소원이거늘, 그 소원을 풀기 위하여 우리는 예수의 형제, 아니면 예수의 자녀가 되든지, 아니면 예수의 신부가 되든지, 아들딸이 되든지, 아니면 적어도 종족권 내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야만 14만 4천 무리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14만 4천 무리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불쌍한 하나님, 불쌍한 예수였습니다. 불쌍한 우리의 선조들이었습니다. 죽고 또 죽어갔지만 해원의 한 날을 갖지 못한 선조들, 해원의 한 날을 잃어버린 이 땅, 해원의 한 날을 알지도 못하고 죽으면서 따라나온 선조들입니다. 우리들은 이런 모든 슬픈 사실들을 알아 가지고 찾으시던 예수, 세우시려던 예수, 모시고 싶었던 예수를 모실 수 있는 그런 자리까지 나아가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섭리노정을 따라 나가고 있습니다. 우리 한민족의 역사를 보면 이 민족은 불쌍한 민족이었습니다. 불쌍한 이 민족인데도 불구하고 세계 사조는 이 민족을 걸어 놓고 뒤넘이쳤습니다. 또 오늘날은 기독교계가 이 민족을 걸어놓고 뒤넘이치고 있습니다.

기도의 순서

우리들의 마음과 몸을 가다듬어 준비해야 할 때가 오고 있습니다. 이 준비를 하는 데 있어서 자기 개인을 위한 준비를 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영적인 체험을 한 사람들은 기도할 때에 자기를 위한 기도는 맨 나중에 합니다. 신령한 세계에 들어가 기도하게 되면 누구를 위하여 기도해야 되느냐? 먼저는 하나님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주인을 만나는 시간이니, 주인의 복을 먼저 빌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는 예수를 위하여 기도할 줄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기도해야 역사적인 하나님의 심정을 압니다. 예수를 위하여 기도해야 역사적인 예수의 심정을 압니다. 그 다음에는 지금까지 기독교계에서 뜻을 위하여 싸워 나온 수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타락 이후 아담으로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선지자들이 간 걸음 걸음을 더듬으면서 ‘제가 이들을 해원하는 제물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하고 하나님께 기도드린 후 선지자들 앞에 ‘나는 그대들의 한이 땅 위에 남아 있는 것을 알고 그 한을 풀고자 하오니 협조해 주시오.’ 하면서 눈물 흘릴 줄 알아야 됩니다. 그런 후에 사랑하는 아들딸을 위해서 기도하고, 그 다음에 자기를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천법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는 민족을 위하여 기도하기 전에 아버지를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그는 30여 년의 생애 동안 ‘하나님! 얼마나 슬프십니까?’ 하며 하나님을 위안해 드리고 하나님을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 그 다음에는 수많은 선지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 ‘그대들이 고대하고 그대들이 예언하고 그대들이 약속하였던 대신 존재로서 내가 보내심을 입었으니 그대들이 소망하는 기준에 어긋나지 않게끔 충성을 다 하리이다.’ 하고.

그는 역사적인 심정을 가지고 그 시대를 위하여 기도했고, 뜻 앞에 어긋나 있는 이스라엘을 위하여 기도했고, 뜻을 알지 못하는 유대교회를 위하여 기도했고, 증거하고도 따르지 못한 세례 요한을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또 그 다음에는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과 사도들을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예수는 아직까지 자기를 위하여 기도해 보지 못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아바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나에게서 이 잔을 피하게 하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 뜻대로 하시옵소서.’ 하시던 예수는 소원을 다 이루지 못하고 간 것입니다.

이 예수가 예수 자신을 위한 기도를 할 수 있는 날이 끝날입니다. 예수가 자신을 자랑할 수 있는 날이 끝날입니다. 예수의 한이 풀리고 그 심정에 기쁨이 넘쳐 하나님을 위안해 드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날이 끝날입니다. 예수는 그런 날을 갖지 못하였습니다. 여러분들 때문에, 인류 때문에, 하늘땅 때문에 그러했습니다. 이처럼 불쌍한 예수인 것을 아십시오.

우리의 선조들이 이러한 운명에 있었던 것을 보고도 ‘나를 구원해 주시 옵소서.’하는 것은 가당치 않은 것입니다. 그렇게 안 되어 있어요. 여러분의 기도 방식은 어떤지 모르지만 난 그렇게 안 합니다. 불쌍한 민족을 위하여 울었던 선지자들이었습니다. 민족을 위하여 울었던 예수였습니다. 교단을 위하여 울었던 예수였습니다. 그러니 정상적인 신앙노정을 가는 자라 할진대 세계를 붙들고 울고, 하늘땅을 붙들고 울고, 민족을 붙들고 울고, 교회를 붙들고 울고, 자기 식구를 붙들고 울고, 맨 나중에는 ‘나에게 책임을 주시옵소서.’ 하는 기도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아직까지 해원의 한 날, 소원성취의 한 날을 갖지 못한 하늘의 사정을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늘의 뜻을 찾아 나간다고 하면서도 하늘의 심정을 알고 그 뜻을 받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이 땅 위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들이 모든 것을 다 빼앗기고 세상에서 아무리 배척을 받고 아무리 불쌍한 자리에 처한다 할지라도, 예수가 알아주는 형제가 되고, 예수가 알아주는 식구가 되며, 예수가 알아줄 수 있는 신부가 되고, 예수가 알아 줄 수 있는 아들이 된다면, 인간으로서 그 이상 바랄 것이 없을 것입니다.

악한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는 자가 만날 수 있는 예수

‘나의 사랑하는 아무개야! 나는 땅 위에서 너와 같은 아들딸을 찾기 위하여 2천년 동안 수고하였노라. 나의 죽음도 이를 위함이요, 어려움과 고통을 당함도 이를 위함이었느니라. 이제 너를 찾았으니 하늘의 복, 땅의 복을 받을 수 있도록 내 하나님 앞에 기도하겠노라.’고 축복해 줄 수 있고 축복받을 수 있는 아들딸들이 이 천지간에 나타나기를 예수는 바라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이 땅 위에 그러한 사람이 있다 할진대 오마 하신 예수,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은 예수를 그리는 심정이 사무칠 것입니다. 그는 눈물 없이 세상을 바라볼 수 없으며 서러움과 분통함과 억울함에 사무치지 않고는 살 수 없을 것입니다. 하늘을 보아도 억울하고 땅을 보아도 억울할 것입니다. 하늘땅의 분함을 해원해 드려야 할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며, 자기의 모든 것을 희생하고도 부족해 하며 주를 부르는 사람이 하늘과 가까운 자일 것입니다.

예수가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게 될 때에, 그 어머니가 가슴을 치고 울며 따르던 것과 마찬가지로 역사적인 예수, 오늘도 나를 위하여 수고를 거듭하고 있는 예수를 생각할 때에, 눈물이 앞을 가리고 뼈 살이 에이는 듯하고 가슴이 조여드는 것 같은 심정에 사무쳐서, 보는 것마다 느끼는 것마다 ‘황공하옵니다. 죄송합니다.’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에 사무쳐 사는 사람이 이 땅 위에 있습니까? 없습니다. 예수가 ‘민족의 죄가 있으면 나를 제물로 하여 용납하여 주시옵고, 세계의 죄가 있으면 나를 제물로 하여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하며 하늘 앞에 섰던 것과 같이, 예수 앞에 그렇게 설 수 있는 형제가 나타나기를 지금까지 고대하고 계신 하늘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하늘은 식구들과 즐거워하는 예수의 모습을 보고 싶으신 것입니다. ‘오 사랑하는 신부여, 사랑하는 내 아들딸아, 사랑하는 내 형제여, 사랑하는 내 친척이여! 내 소원을 성취하였으니 기뻐하자, 하늘과 더불어 기뻐하자, 땅과 더불어 기뻐하자, 역사와 더불어 기뻐하자, 시대와 더불어 기뻐하자, 미래와 더불어 기뻐하자. 하나님 축복해 주시옵소서.’ 할 수 있는 그 자리가 예수님은 그리운 것입니다. 그것을 찾기 위하여 땅 위에 오셔야 하는데 오지 못하고 영계에서 기도하고 있는 예수의 안타까움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 분은 남이 아닙니다. 나를 위하여 수고하셨고, 나를 위하여 억울함을 당하셨으며, 나를 위하여 죽어 가셨습니다. 여러분, 세상의 타락한 인간들도 자기 형이나 동생을 위하여 피눈물을 흘리고 통곡할 줄 알거늘, 하늘의 왕자가 이 땅 위에 와서 천하고 천한 족속들을 붙들고 동생 삼기 위하여 죽어갔는데, 울 줄 모르는 자, 통곡할 줄 모르는 자가 사람입니까?

예수는 언제 와서 ‘사랑하는 나의 신부여, 사랑하는 내 아들딸아, 사랑하는 형제여!’ 하면서 가슴에 맺힌 원한을 풀 것인가? 그것을 풀어야 하늘의 소원, 예수의 소원, 인류의 소원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늘의 식구가 있다 할진대 그는 세상에서 고립된 자일 것입니다. 하늘의 아들딸이 있다 할진대 그들은 악한 세상에서 미움받는 자들일 것입니다. 여러분은 원수의 나라, 사탄의 도성을 궤멸시키기 위한 책임자로 나타난 사람들이기 때문에, 가정에 들어가면 가정의 핍박을 받을 것이요, 사회에 나가면 사회의 핍박을 받을 것입니다. 예수가 그러하고 하나님이 그러하고 하늘을 위하여 죽어간 사람들이 그러했기 때문에, 역사적인 슬픔의 고개가 우리 앞에도 있는 것입니다. 그 고개를 넘고 나서 모실 수 있는 예수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는 그런 자리에 서 있는 사람들과 친구하기 위하여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예수를 외면하고 예수를 죽인 가책을 느껴 ‘오! 주여 황공망극하옵니다.’ 할 수 있고, ‘역대의 선조들이 피 흘리고 간 역사적인 터 위에, 미래의 행로에 가담할 수 있는 영광을 내게 부여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할 수 있는 무리, 그럴 수 있는 교회, 그럴 수 있는 민족, 그럴 수 있는 국가, 그럴 수 있는 세계를 예수는 그리워하시며 찾아오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인정을 지닌 여러분도 잃어버린 자녀를 찾는 데 뼈 살이 녹아나거늘, 천 정을 대신하여 찾아왔던 예수의 심정이야 어떠했겠느냐? 여러분, 세상에서 자기가 제일 사랑한다고 하는 정적인 인연과, 하나님과 예수와 나 사이의 인연을 비교해서 하늘과 예수와 나 사이의 인연이 더 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역경은 하늘의 은사가 찾아오는 터전

심정의 세계는 역사적인 거리를 초월합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거예요. 어떤 권한이나 아무리 무서운 세력도 그 정적인 길을 막을 수 없습니다. 태산으로 막고, 혹은 온 하늘땅을 들어 막는다 해도 그걸 막아낼 수 없습니다. 그 심정을 왕래하는 데는 장애물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심정의 주인공은 예수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맨 나중에 남을 것은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하여 와서 심정의 세계와 더불어 살아 왔기 때문에 오늘날 예수의 세력은 확대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이 심정에 심정을 연하여 그의 마음이 내 마음이요 내 마음이 그의 마음이다, 그와 나는 영원히 이별할 수 없고, 세상적인 어떤 조건도 그와 함께 넘어설 수 있다 하는 무리가 되어야만 예수의 제자가 되고 예수의 식구가 됩니다. 초대교회시대에 예수의 제자들은 식구의 자리까지 나가지 못하였습니다. 그 한계선을 자유자재로 늠름히 넘어설 수 있고 어떤 고개도 모두 넘어서서 예수를 위하여 나설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어 있느냐 안 되어 있느냐 하는 이것이, 지금 이 시간에 해결해야 할 중요한 문제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세우시려는 예수는 어디로 갈 것인고? 하나님이 땅 위에 보내 세우시려던 예수는 어디 가서 설 것인고? 이것을 해결하지 못하면 예수님은 설 자리가 없습니다. 땅 위에 와야 할 예수인데, 올 자리가 없다는 거예요. 와서 일을 해야 하는데 동료가 없습니다. 또 잡아죽일 것입니다. 또 십자가에 몰아낼 것입니다. 또 또 속썩일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식구의 심정을 통하고 자녀의 심정을 통하고 신부의 심정을 통해야 합니다. 그리움에 사무쳐야 됩니다. 약속의 날이 있으니, 그리움에 사무치고 미칠 듯한 심정을 가져야 합니다. 나의 생활 감정을 억누르고 어떤 의식이나 관념을 초월하여 나를 무한히 한 방향으로 이끌어 주는 어떤 힘을 체험한 사람은 기필코 천상세계에 들어갈 것입니다.

예수는 2천년 전에 왔습니다. 땅을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만난 사람은 누구입니까? 만났다면 자기 개인을 중심삼은 예수는 만났을는지 모르지만 개인을 넘어서 가정, 가정을 넘어서 사회, 국가, 민족, 세계, 하늘땅을 통치할 수 있는 예수를 만난 사람은 없었단 말입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심정에 사무쳐야 합니다. 심정의 세계에 들어가기 전에는 해결할 도리가 없습니다. 만일에 그러한 것을 해결할 수 있는 무엇이 있다 할진대 여러분의 심정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있다 할진대 그것에 끌려 들어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 갔다가 괴로워 발버둥치고 나온 사람이 있다 할진대 거기는 다시 가지 마십시오.

우리의 마음은 찾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전파도 아무 곳에서나 작용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수신기가 있는 곳에서만 작용하는 것입니다. 상대기준이 있으면 어디서든 작용을 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예요. 참다운 양심과 참다운 심정적인 기준, 하늘의 심정적인 터전을 가진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 사람은 어디 가든지 어느 때든지 억울하고 슬픈 자리에서도 자기도 모르게 살 길이 생깁니다. 오해받는 자리에서도 살 길이 생겨요. 그 살 길은 좋은 자리에서는 그렇게 많이 안 생깁니다. 역사적인 혁명, 역사적인 발견, 역사적인 성공을 했다는 사람 가운데 평탄한 자리에서 성공한 사람은 없습니다. 죽음과 직면한 자리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늘은 그런 자리에서 여러분을 찾아오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사람이 하늘 앞에 서려면 반드시 곡절에 부딪칩니다. 물질적인 곡절과 인간을 중심삼은 사정과 심정적인 곡절에 부딪칩니다. 거기에서 뒤넘이쳐 가지고 내 갈 곳이 이곳이라고 부르짖고 나가게 될 때에, 수많은 사정과 곡절에 부딪쳐 허덕이는 사람들을 지도할 수 있는 대표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가 그랬습니다. 목수인 요셉의 일을 협조해 주면서도 편안한 생활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심정은 무한한 곡절의 노정을 거쳐왔다는 것입니다. 역사적이요 시대적이요 미래적인 노정에서 인류가 지나온 고비 고비, 골짝 골짝을 그 마음속에서 뒤넘이쳐 넘었고, 사탄과 판가리 싸움에서 승리한 기준을 세웠기에 메시아라고 주장하고 나설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사랑의 가치

심정세계에서 하늘의 심정은 영원히 차이가 없습니다. 알파요 오메가라고 한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사랑의 실체, 사랑의 중심 존재이기 때문에 알파와 오메가가 없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시작과 끝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정적인 세계를 향해 나가는 복귀섭리 노정에서 역사의 배경을 파고 들어가 ‘하나님의 심정이 여기 숨어 있구나. 오! 이 길이 우리 민족의 갈 길이다.’ 하고 부르짖고 나설 수 있는 주의가 민족을 살릴 것입니다. 세계 역사의 배후에 흐르고 있는 하나님의 심정을 찾아 가지고, 이것이 세계인류가 살 길이라고 부르짖고 나서는 자가 있으면, 그는 세계 인류의 살 길을 개척할 수 있는 자일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천상천하, 하늘과 땅, 영계, 전체의 심정이 이것이라고 주장하고 나서는 사람이 있다면, 그 분은 다시 오실 주님일 것입니다. 그러면 하늘땅의 개벽과 재창조, 완성의 역사는 벌어질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 있기 때문에 이런 세계를 찾아 나가는 것이 우리의 소원이요 우리의 신앙생활입니다. 그런 길을 가야 할진대 여러분 자신은 심정의 방향을 정해야 합니다. 최후에는 심정의 방향을 정해야 돼요. 세상의 그 무엇을 사랑하는 이상, 하나님을 사랑할 줄 알고, 예수를 사랑할 줄 알고, 예수가 사랑하는 세계를 사랑할 줄 알고, 예수가 사랑하는 민족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보다 큰 것을 사랑하고 난 후에 남음이 있거든 자기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반대입니다. 나라야 망하든, 세계야 망하든, 하늘이야 슬퍼하든 내 아들딸과 나만 망하지 않으면 된다. 이것은 거꿀잡이예요, 거꿀잡이.

예수는 이것을 끊어 버리기 위해 네 집안 식구가 원수라고 했습니다. 공적인 뜻을 위해서는 사적 감정을 버려야 합니다. 가정보다도 자기가 소속된 단체를 위하여 움직이는 사람은 그 단체의 충신입니다. 나아가서 그 단체와 국가를 위하여 희생하면 그는 국가의 충신입니다. 또 국가를 넘어서 세계의 공적인 이념을 위하여 죽는 자가 있다면 그는 국가의 역적이 되고 반역자가 될는지 모르지만 세계의 충신입니다. 더 나아가서 세계를 넘어서 하나님을 위한 길을 가는 자는 최대의 충신입니다. 예수가 그러한 대표자입니다.

인간 앞에 부여된 행복의 최대의 기준은 하나님의 참다운 종이 되고 참다운 충신이 되고 참다운 효자 효녀가 되는 것입니다. 고맙고 황공한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알고 있었습니까? 여러분은 하늘이 인정할 수 있는 충신, 효자, 열녀가 되었습니까? 내 가정, 내 국가, 이 세계를 밟고 올라가서 하나님을 찾아가야 합니다. 가는 데는 늠름히 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가 그렇게 갔습니다.

내 가정이 반대하면 가정을 뚫고 나가고, 민족이 반대하면 민족을 뚫고 나가고, 국가가 반대하면 국가를 뚫고 나가고, 세계가 반대하면 세계를 뚫고 나가고, 영계에 있는 수많은 악령이 반대하면 그것도 뚫고 나갈 수 있는 사무친 심정이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입니다. 그 심정 앞에는 사탄의 철망도 자연히 걷히고 마는 것이에요. ‘아버지시여! 누구보다도 당신을 더 사랑합니다. 세계 어떤 인류보다도 더 사랑합니다. 예수가 사랑하던 것과 같이 나도 아버지를 사랑합니다.’ 할 수 있는 아들딸이 신부가 됩니다. 그런 아들딸들이 나오면 예수가 ‘야, 이놈아, 네가 왜 그러니?’ 그럴 줄 알아요? 아닙니다. 그러한 아들딸들이 나타나기를 2천년 동안 고대하셨습니다. 그러한 식구, 형제, 그러한 자녀를 그리워하고 땅 위에서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하여 허덕이는 사람이라야 찾고자 하시는 예수를 세울 수 있는 백성이 되고, 식구가 되고, 가족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사명을 감당하지 못했던 것도, 사랑의 심정을 갖춘다면 이룰 수 있기 때문에 그러한 자리를 찾아 나서야 합니다. 사랑은 온 하늘땅의 어떠한 것과도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준 손수건 하나는 억천만금과도 바꾸지 않으려 합니다. 수는 적더라도, 심정을 통할 수 있고, 예수의 골수까지 움직일 수 있고, 예수가 바라는 소망의 세계를 포괄하고도 남음이 있으며, 하나님을 안식시켜 드릴 수 있고 나란히 엎드려서 경배 드릴 수 있는 아들딸들이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예수와 더불어 하나님 앞에 경배드릴 수 있는 식구를 예수는 그리워하셨고, 땅 위에 그 기준을 세우기 위해 2천년 동안을 싸우셨으며, 인간들이 그 예수와 더불어 사는 것을 보시기 위하여 하늘이 예수를 찾아 세우셨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 이 목적을 위하여 사무치는 심정으로 개인을 넘어 민족의 한을 밟고 세계의 한의 고개를 넘어서 하늘과 인연을 맺겠다는 불타는 심정이 자동적으로 폭발되는 존재가 되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예수를 올바로 모실 수 있으며, 찾으시려던 예수로서 세울 수 있느냐 없느냐를 좌우한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기 도>

아버지시여! 황공하옵니다. 가면 갈수록 부족한 자신임을 발견하고 맺혀진 하늘의 한에 대해 눈물로 통곡하며 살아야 할 인간인데도 불구하고 천정은 천정대로 남아 있고, 민족의 심정은 민족의 심정대로 남아 있는 채 서로 싸우고 뒤넘이치는 생애노정을 거쳐온 것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인정을 넘어서 천정과 더불어 즐길 수 있는 인연을 예수가 와서 세운 것을 알았사오니, 그 인연을 찾아 헤맬 수 있는 예수의 참다운 제자, 참다운 식구, 참다운 자녀, 참다운 신부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니다.

이러해야만 하나님이 세우시려던 예수를 세울 수 있고, 예수의 역사적인 원한도 풀 수 있고, 역대의 우리의 선조들이 범한 과오도 우리 일대에서 청산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사오니, 그러한 입장에서 예수를 모시고 살 수 있는 하늘의 식구들이 되게, 하늘의 자녀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시여, 마음에 느낀 바가 하늘로부터 시작하였거든 영원히 마음에서 사라지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뇌수에서 사라지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생명력이 사라지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기필코 가야 한다면 시간과 모든 것을 초월하여 종적으로 지배하여 주시옵고, 통할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말씀과 더불어 길이 길이 같이하여 주시옵고, 승리를 위한 싸움노정에서 저희들이 보조를 맞출 수 있고 노력하고 충성을 다 할 수 있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문선명선생말씀선집 제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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