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상 19:1-21

<기 도(Ⅰ)>

오늘 당신이 허락하신 날을 맞아 부족한 자신들을 염려하면서 무릎을 꿇고 당신의 존전에 모였사오니, 이제 저희의 마음들이 어느 곳에 있는가 통찰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 생명의 길을 개척해 오신 노정은 지극히 엄숙한 노정이었고, 지극히 성별된 노정이었음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님, 이 자리에 모인 당신의 아들딸들을 긍휼히 보시옵소서. 여기에 존엄하신 아버지의 모습을 나타내 주시옵고, 허락하신 승리의 기준을 세우시어 성별된 무리라 인정해 주시옵고 찾아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남겨진 섭리의 노정이 슬픔의 노정이라 할진대, 이 슬픔을 가로막아야 할 책임이 저희들에게 있는 것을 알고 있사옵고, 하늘의 무한한 슬픔을 느끼지 못하는 자는 그 슬픔을 책임지지 못할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사옵니다. 남겨진 하늘의 슬픈 심정과 남겨진 하늘의 싸움을 책임지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알고 있사오니, 남겨진 하늘의 슬픈 심정과 싸움을 책임질 줄 아는 자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누구보다도 큰 슬픔을 체휼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알고 있사오며, 누구보다도 억울한 자리의 싸움터에서도 낙오자가 되지 않아야 할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님, 저희의 몸들이 하늘 앞에 바쳐지는 승리의 제물이 될 수 있는가 염려하는 마음을 갖고 이 시간 참석한 무리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예수님께서 왔다 가신 이후 2천년 역사가 경과하였사오나 예수님이 갈보리 산상에서 쌓으시던, 하늘이 함께 우시던 참다운 승리의 제단은 이 땅 위에 나타나지 않고 있사옵니다. 하늘이 움직이지 않을 수 없고, 땅 위의 인간들이 움직이지 않을 수 없는, 하늘과 땅이 접하는 세계적인 골고다 산정이 나타나야 할 때가 되었사옵고, 겟세마네 산정이 나타나야 할 때가 되었음을 알고 있사옵니다. 이러한 책임을 감당하는 수많은 성도들이 있어야 할 것이옵니다. 그러나 하늘이 찾아와 기뻐하실 수 있는 무리가 없는 것을 알면 알수록, 아버지의 심정을 염려하는 아들딸들은 이 땅을 바라보고 통곡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임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지시여! 소원의 한 날을 고대하시는 아버지의 간곡한 마음이 크면 클수록 아버지를 위하여 충성하는 한 모습이 땅 위에 나타나기를 고대하는 심정도 크다는 것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저희들의 마음과 몸을 다 드려서 아버님의 손길에 붙들릴 수 있으며 아버님의 심중에 세워질 수 있는 아들딸이 되어서 역사적인 모든 서러움을 맡을 수 있는 모습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께서 친히 역사하시는 그 역사를 통하여 저희의 마음과 몸이 새로이 부활되는 이 시간이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지난 일주일 동안 저희들에게 맡기신 바의 책임을 다하지 못했음을 용납하여 주시옵고, 아버지 앞에 충성을 다하지 못한 것을 용납하여 주시옵고, 아버지의 심정을 붙들고 눈물어린 생활을 하지 못한 것을 용납하여 주시옵고, 저희 한 개체들을 찾아오시기 위해 당신께서 수고의 걸음을 개의치 않으신 사실을 망각한 것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이 시간, 새로운 각오와 새로운 결심을 하고, 각자 과거의 모든 부족한 것을 깨닫고, 아버지의 심정을 중심하고 자신의 마음을 붙들고 나설 수 있는 아들딸 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이시여, 이날은 거룩한 날이오니 불쌍한 처지에 놓여 있는 삼천만 민족을 긍휼히 보시옵소서. 이들의 친구가 되어 주시옵고, 이들의 지도자가 되어 주시옵고, 이들의 생명을 부활시키는 주인이 되어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께서 이들의 소망의 중심이 되시옵소서. 이들이 아버님을 떠나서는 움직일 수 없는 무리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민족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교단이 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아버님,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민족 앞에 허락하실 축복을 이 시간을 통하여 내려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승리의 한날을 책임진 당신의 아들딸들, 그 사명과 책임을 감당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 뜻을 이루어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야 할 책임이 이 민족에게 있음을 아옵니다. 그 책임을 완수해 나가는 과정에는 무한한 시련이 있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그 시련의 노정에서도 책임을 다하여 아버님을 대신하여 나설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뜻을 알지 못하는 수많은 인류에게도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생명과 사망의 물결이 휩쓸려 가는 이때에 아버님을 붙들어 당신의 아들딸이 될 수 있는 무리가 이 인류 가운데 많이 나타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인류를 심판의 채찍으로부터 피하게 해 주는 전체의 책임을 감당하여 아버지 앞에 나설 수 있는 아들딸이 이 땅의 인류 가운데 많이 나타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와 같은 사명과 이와 같은 때와 이와 같은 책임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 있다 할진대는 저희를 통하여 경고시키시옵고, 그들이 끝날의 책임과 사명을 감당하게 할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 이 날을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지방에 널리어 외로운 심정을 품고 아버지 앞에 호소하는 무리들 위에 일률적인 은사의 손길을 펴 주시옵고, 허락하신 승리의 한 날을 찾아 세우기 위한 싸움의 도중에서 떨어지는 자들이 되지 말게 붙들어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시간, 첫시간부터 끝시간까지, 아버지, 친히 주관하여 주시옵고 어둠의 권한이 움직이는 시간이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나이다.

모든 것 아버지 앞에 드리오니 맡아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였사옵나이다. 아멘.

<기 도(Ⅱ)>

뜻을 위하여 이 땅 위의 많은 사람들이 수고의 길을 거쳤사옵고, 피눈물의 혈투를 거듭해 왔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나이다. 오늘 저희들은 하늘 앞에 그 피의 결실이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알고 있사옵고, 남겨진 섭리의 터전 위에 승리의 깃발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될 것도 알고 있사옵니다.

오늘 이 한 시간, 저희 자신을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가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의 마음이 저희의 것이 아니요, 움직이고 있는 저희의 생명도 저희 것이 아니요, 바라고 있는 욕망도 저희 것이 아니므로 저희 자신을 중심으로 헤아리는 마음을 가지고 하늘을 대하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것으로 시작된 저희들이오니 아버지 것으로만 움직일 수 있는 이 한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의 마음이 아버지 것이 되어야 되겠고, 저희의 몸도 아버지 것이 되어야 되겠고, 저희의 주의 주장도 아버지 것이 되어야 할 것을 알고 있사오니, 아버지 것이 아닌 모든 것은 용납하지 마시옵소서. 저희의 마음 몸에 아버지께서 원치 않는 악의 요소가 있사올진대 제거해 주시고, 아버지 것이 아닌 모든 주의 주장을 제거해 주시어서 오직 아버지 것으로서만 움직일 수 있는 이 한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시여,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땅 위에 아무리 잘난 자가 있다 할지라도 하늘을 대하여 설 자가 누구이옵니까? 어떤 변명의 조건을 갖고 아버지 앞에 나타날 자가 없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마음으로 뉘우쳐야 할 저희들이요, 죄악의 역사에 젖어 있는 저희 자체들이요, 역사적인 죄악 위에서 사탄의 제물이 되었던 저희 자체들인 것을 깨달을 때가 된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님, 저희의 마음이 저희의 것이 되어야 하고, 저희의 몸이 저희의 것이 되어야만 하는데, 사탄의 제물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이것을 슬퍼할 수 있는 마음을 회복하게 하여 주시옵고, 이것을 통분히 여기는 통회의 심정을 일으켜 주시옵소서. 자기를 깨닫고 자기를 발견하여 하늘과 인연을 맺을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무수한 사탄이 저희의 마음과 몸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지께서 용납하실 수 없는 죄의 쓴 뿌리가 남아 있사올진대, 아버지시여! 나타나시어서 능(能)의 권한으로써 재창조의 역사를 일으켜 주시옵고, 저희의 마음이 아버지 앞에 굴복할 수 있게 하늘의 역사를 일으켜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하늘이 움직이실 때 땅이 움직이지 않을 수 없사옵고, 땅이 하늘을 대하여 요구할 때 하늘이 이루어 주시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사옵니다. 오늘 진정한 마음을 갖고 참다운 심정으로 하늘을 자기 것으로 붙들기 위해 싸우는 하늘의 아들딸이 있사옵니까? 하늘의 모든 사정을 자기의 사정으로 알고, 하늘의 일을 자기의 일로 알고, 하늘의 이념을 자기의 이념으로 알고 이것을 붙들기 위해 싸우고, 이것을 붙들기 위해 천대받고, 이것을 붙들기 위해 몰림받으면서 한평생을 산 자가 있사옵니까? 저희가 그런 자리에 있지 않다고 할진대, 저희는 하늘 앞에 용납받을 수 없는 범죄자인 것을 직고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날 저희들은 알지 못하고 있사오나, 하늘은 6천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거쳐오면서 수많은 선지선열을 보내시어 피의 제단을 쌓게 하셨사옵고, 이 민족에게 충신열사들을 보내시어 민족의 갈 방향을 잡아 주셨사옵니다. 그러기 위해 어느 지역을 개의치 아니하셨고 민족을 초월한 어떤 영역까지라도 내적으로 섭리해 나오신 아버님의 수고가 있었음을 잊는 자들이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께서는 이 하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모든 성심을 기울이셨사옵고, 모든 노력을 기울이셨사옵고, 어떤 희생도 각오하시고 저희들을 찾아 주셨사온데, 이러한 아버지의 은사 앞에 면목을 세우지 못하는 뻔뻔스런 아들딸이 되지 말게 해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제 하늘이 계신 것을 알았사옵고, 하늘 아버지가 누구신가를 알았사옵니다. 아버님과 저희는 어떤 인연을 맺어야 할 필연적인 조건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아버지, 오늘 이와 같은 심정을 통하여 하늘 아버지와 인연을 맺어 아버지의 서러움을 내 서러움으로, 아버지의 통탄과 슬픔을 내 통탄과 슬픔으로 느낄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사탄과 격전을 벌이기 위해 나서는 천적인 행군이 이 민족 앞에 나타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이 땅 위에 나타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6천년 동안 하늘을 대하여 참소하던 원수 사탄들을 이 지구상에서 몰아내고, 아버지의 한을 풀어 드리고 찾으시던 이상동산을 어서 속히 건설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민족이 가야 할 방향을 지시하여 주시옵고, 교단이 가야 할 방향을 밝혀 주시옵고, 참다운 아들딸들이 가야 할 길을 명시하여 주시옵소서. 혼돈하고 혼란하여 흑암 권세에 사로잡혀 들어가는 역사적인 슬픔의 때가 온 것을 알고 있사오니, 이 때를 넘어설 수 있는 하나의 표준을 세워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인류를 대해 오신 예수님과 하나님께는 슬픔이 걷힐 새가 없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2천년 전 예수님을 회고하여 볼 때, 그는 남 모르는 눈물도 흘렸사옵고, 남 모르는 굶주림의 생활도 했사옵고, 남이 모르는 핍박의 노정에서 서럽게 우셨던 것도 알고 있사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러한 걸음을 걸으셨고, 그 뒤를 따른 수많은 성도들도 피의 길을 개의치 않고 걸었고, 죽음의 길도 개의치 않고 싸워나갔다는 사실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오늘 하늘을 향하여 경배드리고 산 제물을 드려 축복을 받아야 할 끝날이 가까워 오고 있사옵고, 생명 전체를 드려 하늘의 영광을 노래해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사온데, 하늘 앞에 산 제물을 드릴 당신의 아들딸들은 어디에 있사옵니까? 영광의 모습으로 아버지를 기쁘게 하고 송영을 드릴 수 있는 모습은 어디 있사옵니까? 그러한 모습들이 어디 있는지 찾고 계시는 아버지의 심정을 알고 있사옵니다. 슬픈 일이 있다면 당신의 상대를 찾지 못한 것이요, 영광의 한 실체를 찾지 못한 것인 줄 아옵니다. 이러한 하늘의 서러움이 오늘 저희들이 움직이는 발자취를 통하여 천추만대의 후손에게까지 연하게 될까봐 두려워 떠는 마음이라도 가질 수 있게, 아버지,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여기 모인 당신의 아들딸들, 무엇을 바라고 나왔사옵니까? 무슨 뜻을 바라고 나왔사옵니까? 이들이 가야 할 곳은 이 자리가 아니고 아버지의 집이옵니다. 이들이 머물러야 할 곳은 아버지 마음의 중심자리이온데, 아버지의 보좌 위에 앉은 자가 있사옵니까? 아버지의 마음속에 기억될 자가 있사옵니까? 저희들이 그러한 모습이 되지 못한다 할진대 저희들은 억천만 사탄의 조롱거리와 제물밖에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이 시간 마음 모아 아버지 앞에 엎드릴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천성으로 가는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러기에 자기 십자가를 등에 지고 골고다의 산정까지 가야 하고, 십자가의 피흘린 자리까지 나아가 핍박을 당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고, 자기의 슬픔을 잊어버리고, 자기의 고통을 잊어버리고, 오늘도 내일도 이 골고다의 길을 가기에 전력을 다하는 무리를 하늘이 찾고 계시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한국의 삼천만 민족을 긍휼히 보시옵고, 민족을 대신하여 나타난 수많은 교단을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형제가 형제를 물어뜯는 이 때이옵고, 식구와 식구가 서로 원수가 되어 천륜을 배역하고 인륜을 파탄시키는 이 때이옵고, 하늘을 부르는 무리들이 또한 하늘을 부르는 자를 농락하고 잡아 먹기에 굶주린 사자보다 더 허덕이고 있는 실정을 바라보시는 하늘의 서러움을 아는 자는 통곡해야 할 이 때요 탄식해야 할 이 때이온데, 이것을 알지 못하는 불쌍한 민족을, 아버지, 긍휼히 보시옵소서.

참길을 찾아 헤맨다 할진대 그 길은 눈물 없이는 갈 수 없는 길이요, 참다운 살 길을 찾아 헤맨다 할진대 밤낮을 개의치 않고 그 길을 찾지 않으면 안 될 것이온데, 삼천만 민족은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있사옵니다. 이들의 운명을 책임진 자 그 누구이며, 이들을 대신하여 하늘의 슬픔을 체휼 하는 자 그 누구이옵니까? 이들의 운명을 책임질 자도 없사옵고, 하늘의 슬픔을 풀어 드릴 자도 없사옵고, 하늘의 탄식 소리와 울부짖는 소리를 듣는 자도 없나이다. 그러한 자가 나온다 할진대 하늘의 슬픔은 땅에 사무치지 않을 것이며, 하늘의 심판이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옵니다.

아버님이시여, 오늘 이 시대에 슬픈 심정을 토로하시던 예수의 슬픔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을 역사적인 예수로만 아는 것은 필요 없사오며, 우리의 환경 속에서 현재적인 예수를 알아야 할 때가 되었사오니, 그 높고 존엄하신 심정 앞에, 그 사랑 앞에 저희의 몸과 마음을 제물로 드리겠다는 오직 그 하나의 심정에 사무쳐 죽든지 살든지 하늘만을 향해 울부짖는 무리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 이 무리는 이 땅 위에서 몰릴 자들이요, 교단 앞에 버림받을 자들인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여기에 모인 당신의 아들딸들이 그와 같은 자리를 사수할 수 있는 무리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시여,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하늘의 슬픔이 이 민족 앞에 남아 있는 것을 저희들이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일신의 편안함을 좋아하는 저희들이옵니다. 저희는 일신의 편안을 누리기 이전에 하늘의 슬픔이 있고, 자신이 싸우기 전에 이미 하늘의 싸움은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불쌍한 무리들이옵니다.

오늘 저희들이 여기에 온 목적이 무엇이옵니까? 어떠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옵니다. 어떠한 친구를 사귀기 위하여 온 것도 아니옵고, 어떠한 학식 있는 자를 만나기 위하여 온 것도 아니옵고, 오직 아버지를 만나기 위함이요, 아버지의 슬픔을 알기 위함이요, 아버지의 십자가를 맡기 위함이옵니다. 이를 싫어하는 자, 아버님이시여! 여기서 제거시켜 주시옵고, 이 일을 책임지지 못할 자, 성별시켜 주시옵소서. 최후의 성벽을 지키기 위해 사탄을 향해 화살을 쏘고 자신은 하늘을 위해 쓰러질 줄 아는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남이 아니라 하는 길을 찾아 들어온 이들은 남이 모르는 슬픔을 체휼해야 할 뿐만 아니라 남이 모르는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지, 이들의 사정을 아버님께서 이렇게 만드셨을진대는 이들의 사정을 책임져 주시옵고, 이들의 환경을 이와 같이 만드셨을진대 그 환경을 책임져 주시옵소서. 책임지신 아버님은 변치 않으셨사오나 변하는 저희들의 모습을 보시고 당신이 탄식하고 계심을 알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하늘의 마음은 한 분의 마음으로 나타나 4천년 역사를 통합하기 위한 심정의 기준을 세웠지만, 인간들이 그것을 유린하고 배반함으로 말미암아 오늘날 인류는 처참한 상태에 처하여 있사옵니다. 이들의 슬픔이 아버지의 슬픔임을 알지 못하는 이 땅 위의 수많은 인류를, 아버지, 돌이켜 주시옵소서.

이들을 위하여 눈물을 흘리고 제단을 쌓을 줄 아는 외로운 무리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야곱도 광야노정에서 슬픔의 제단을 쌓았고, 모세도 그리하였으며, 엘리야도 그리하였음을 알고 있나이다. 하늘의 뜻을 책임졌던 우리의 선조는 어느 한 사람도 그런 노정을 걷지 않은 자가 없었던 사실을 알고 있사옵니다. 그들의 전통을 물려받는 저희들이 되고자 하오니, 남겨진 제단을 쌓고 허물어진 성을 다시 쌓아 아버지의 지성소를 갖추어서 아버지를 모실 줄 아는 아들딸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날, 아버지, 당신께서 허락하실 축복이 있사옵니까?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그렇지 못하다면 아버님의 슬픈 심정을 체휼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자기의 죄상을 폭로하고 회개할 수 있는 마음이라도 일으켜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한국 교계가 나가는 길을 염려하여 주시옵고, 이들의 모든 것을 맡아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몰림받고 있는 무리들의 사정을, 아버지, 알아 주시옵고, 쫓김받아 탄식하고 슬퍼하는 무리들을 알아 주시옵소서. 그들에게 아버지의 사랑의 품에 안길 수 있는 최후의 승리의 한 날을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넘고 가야 할 과정에서 허덕이면서도 꾸준히 걸어가는 수많은 인류에게 광명의 새 아침을 허락하여 주시옵 길 간절히 부탁드리옵니다.

오늘 여기에 모인 당신의 아들딸들, 아버지 앞에 충성하지 못했다 할진대 머리 숙여 아버지 심중에 찾아 들어갈 수 있는 간절한 심정과 흠모와 사모의 열이 충천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자기의 인식의 범위를 넘어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심정권에 들어갈 수 있어서, 아버지의 긍휼의 은사와 인연을 맺을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인도해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나이다.

지방에 널려 있는 외로운 식구들도 이 시간 같은 은사로 품어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올 때,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말 씀>

하나님께서는 타락의 역사가 시작된 후 기나긴 세월 동안 무수한 수고를 개의치 않으면서 택한 이스라엘을 붙들고 나오시다가 3천년 만에 그 때의 이스라엘 민족이 알지 못하는 가운데 크나큰 소망과 기대를 갖고 사울왕을 세우셨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책임을 감당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본래의 뜻은 다윗왕을 거쳐 솔로몬왕 때까지 연장되었습니다. 즉 사울을 세워 이루려 하셨던 하나님의 뜻은 솔로몬왕 때까지 120년 간이나 연장되어 나왔다는 것입니다.

​1. 분열하여 이방신을 섬기던 유대민족

​솔로몬왕은 하늘의 뜻을 받들어 성전을 짓고 그의 민족을 통솔하여 성전과 하나되게 해야 할 천적인 책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자신도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민족을 사탄으로부터 농락받는 입장에 내주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결국 솔로몬왕이 죽은 후 여로보암왕과 르호보암왕에 의해 이스라엘(북조)과 유대(남조)로 갈라졌습니다. 하나님을 중심삼은 하나의 지도자가 나와서 그가 좌 하면 같이 좌 하고, 그가 우 하면 같이 우 해야 할 택함받은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께서 수고의 역사를 거쳐 오면서 이끌어주시던 민족이, 하늘의 이끌림을 받던 이스라엘 민족이 하늘의 소망과는 달리 남과 북의 두 왕조로 갈라졌던 서러운 사실을 우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열두지파 전체는 하늘편에 서서 하나의 제단을 중심삼고 하늘과 하나 되어야 했습니다.

야곱이 하란을 향해 갈 때 하나님은 벧엘에서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축복해 주셨고, 야곱은 베고 자던 돌을 세워 석상을 삼고 하나님께 서원하였습니다. 그리고 얍복강을 건너기 전 길르앗산에서 돌무더기를 만들어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라반과 약속을 했습니다. 이렇게 하늘로부터 축복을 받아 야곱으로부터 시작된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이 권한을 행사하실 수 있는 하나의 주권국가로서, 하나의 주권민족으로서 하나되어 성전을 받들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천적인 사명을 저버리고 12지파는 북조 10지파와 남조 2지파로 갈라졌습니다. 이 서글픈 사실을 우리는 역사적인 사실로만 알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당시의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피눈물의 3천년 역사와 싸움의 노정을 거쳐오면서 죽다 남은 무리요, 몰리다 남은 무리요, 천대받는 서글픈 노정에서 남아진 무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선조들을 유린하였던 수많은 이방민족과 하나님의 뜻을 배신한 수많은 사탄들을 원망하고 원수시하여야 할 입장을 망각하고 동족끼리 혈투전을 벌였습니다. 이런 서글픈 사실을 저끄러 놓은 이스라엘과 유대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심정이 어떠 하셨겠는가를 생각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의 인도로 가나안 복지에 들어간 이스라엘 민족은 솔로몬왕을 중심삼고 하나님이 거하실 성전을 건축하여 하나님을 모셔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북조 이스라엘과 남조 유대로 갈라져 서로 다투었고, 바알신과 아세라신을 숭배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런 처참한 광경을 바라보시던 하나님의 심정을 우리는 알아야 될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를 이끌어 나오신 하나님은 슬픔에 사무치게 되었고, 그 사무친 슬픔은 역사를 거쳐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연하여 있습니다. 그런데 그 역사적인 서러움은 어디로 갔으며, 민족적인 서러움은 어디로 갔으며, 더 나아가서 천적인 서러움은 어디로 갔을 것인가! 이러한 조건들이 여러분의 심정을 싸고돌고 있다는 것을, 이러한 조건들이 하늘을 찾아나가는 우리의 주위를 에워싸고 있다는 것을, 이러한 조건들이 우리의 의식세계를 초월하여 우리의 갈 방향을 바로잡으려 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몰랐습니다.

​2. 소명받은 엘리야의 마음

이러한 처참한 환경을 바라보시던 하나님은 길르앗 땅에 살고 있는 농민 가운데에서 엘리야라는 사람을 찾아 세우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왕도 있었고, 10지파의 족장도 있었으나 다 제쳐놓고 길르앗 땅에서 한갖 농민 생활을 하고 있던 엘리야를 택하신 것입니다. 이런 슬픈 사실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국가를 지배하면서 하늘의 성전을 거쳐야 할 이스라엘 왕은 그 책임을 망각해 버리고 하늘을 배척하고 원망하며 민족을 유린하였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하늘의 원수인 바알을 위하여 단을 쌓고 아세라 목상을 만들어 민족 앞에 내세우고 섬겼습니다. 이런 아합왕을 하늘이 얼마나 증오하셨겠는 가를 우리들은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증오의 심정을 억제 하실 수 없어서, 택한 백성이 사탄의 유린을 당하는 것을 보셔야 하는 슬픈 심정을 억제하실 수 없어서 그 서글픈 사정과 심정을 해원하시기 위하여 한 사람을 택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택함 받은 사람은 나라의 왕도 아니요, 황족도 아니요, 어떤 족장도 아닌 평민 엘리야였습니다.

하늘은 찾아야 할 자를 찾지 못하고, 가져야 할 자를 갖지 못하고, 거느려야 할 자들을 거느릴 수 없는 입장에 서게 될 때 안타까운 심정을 붙안고 왕으로부터 족장들과 많은 사람들을 찾아다니셨으나 찾지 못하고, 그 시대의 민족적인 슬픔과 천적인 슬픔을 알고 염려하고, 하늘을 향하여 기도하며 울부짖는 하나의 모습을 찾아 세우셨는데, 그가 엘리야였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세워진 엘리야였습니다. 여러분! 그 엘리야를 회상해 보십시오. 엘리야는 종족의 후원을 받았던 사람도 아니요, 자기를 옹호하고 자기의 입장과 처지를 옹호해 주는 환경을 가진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늘의 심정을 알고, 하늘의 부르심을 받고 나타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때 그가 대하고 바라보고 거한 환경은 아합왕의 주권 하에 있던 원수의 환경이었습니다. 그러한 환경에서 하늘의 불림을 받은 엘리야는 죽더라도 이 민족을 붙들고 죽겠다는 마음이 누구보다도 강했습니다. 죽더라도 민족적인 섭리역사노정에서 역사적인 심정을 대신하였던 선지선열의 전통을 존중하고자 했던 엘리야였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심정을 염려하여 눈물을 흘렸으며, 민족과 역사를 대신하여 눈물을 흘린 엘리야였음을 여러분은 회상해야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은 이러한 엘리야를 찾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자 하는 제목은 ‘엘리야를 대하는 하늘의 심정’입니다. ‘엘리야를 대하는 하늘의 심정’ 이런 내용으로 잠깐 동안 말씀드리겠습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은 3천여년의 슬픈 심정을 대신하여 엘리야를 찾아 주셨습니다. 즉 수많은 선지선열들이 걸으며 느낀 역사적인 심정을 대신하여 당신께서 손을 들어 이스라엘이라 축복해 주신 약속을 잊지 않으시고 그것을 염려하신 하늘이신 고로 야곱 이후 엘리야 때까지 1천여년의 역사 과정을 거쳐오면서 섭리해 내려온 심정을 붙안고 엘리야를 찾아주셨던 것입니다.

​3. 하나님이 엘리야를 부르신 심정과 책임자로 세우신 방법

​원수에게 사로잡힌 이스라엘 민족을 다시 회복하기 위해 엘리야를 세우신 하나님에게는 슬픈 반면 소망스러운 면도 있었다는 것을 우리들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함받은 이스라엘 민족이 아합왕과 그의 왕비 이세벨과 함께 이방의 바알신을 숭배하고 아세라 우상을 만들어 더렵혀져가는 것을 보시고 슬픔을 참으실 수 없어서 엘리야를 부르실 때에 그는 기쁜 마음으로 아버지 앞에 나타날 수 없었습니다.

엘리야는 하늘이 부른다고 해서 ‘아버지! 옳소이다. 당신이 원하시는 그 길을 제가 가겠나이다. 당신이 부르시는 뜻을 제가 책임지고 가겠나이다.’ 라고 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아무것도 아닌 평민이로소이다. 하늘이시여, 저보다 훌륭한 족장도 많고, 왕도 있고, 왕족도 있으며, 수많은 이스라엘 민족이 있사온데, 저같이 미미한 것을 찾아주신 일은 어인 일이옵니까?’라고 했던 것입니다. 양심을 가진 엘리야는 이스라엘을 염려하는 마음이 크면 클수록 사심 없이 하늘 앞에 사양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은 시기로 보아 그 민족 전부를 찾아 세울 수 없고 엘리야가 아니면 안 될 것을 아셨던 연고로 엘리야를 세우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엘리야가 그 사명을 당장에 하도록 명령하여 몰아친 것이 아니었고, 그 환경을 정리시키고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충격을 주어 자동적으로 나타날 수 있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엘리야가 하늘의 부르심을 받고 아합왕에게 나타나게 될 때, 하늘은 ‘아버지의 명령이니 제가 당장 하겠나이다.’ 하는 순간적인 결심을 하게 했던 것이 아니라, 아니 가려고 해도 아니 갈 수 없는 환경에 부딪치게 하시고, 자기의 처참함과 민족의 처참함이 더해 가는 것을 알게 하셔서, ‘민족 대신 제가 죽겠사오며, 종족 대신 제가 죽겠사옵니다.’ 하는 각오를 갖게 한 이후에 싸움의 책임자로 내세웠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알 아야 되겠습니다.

​4. 노아와 마리아의 신앙 자세

​우리의 조상인 노아도 그러했습니다. ‘120년 후에 온 세상을 물로 심판 하리니 너는 방주를 지으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해 나가면서 노아는 내적인 싸움 노정에서 하늘을 의심할 수 있는 때도 많았을 것이고, 자기 자신의 미약함을 탄식할 수 있는 환경에 놓일 때도 많았을 거예요. 그러나 노아가 그런 입장에 서면 설수록 마음에 사무친 것은 이 땅 위의 인간들이 물에 쓸려가는 심판을 받을 날이 가까워온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마리아를 보십시다. 그녀는 순결한 처녀요, 이스라엘 민족을 누구보다도 깊은 심정으로 염려하였던 이스라엘의 참다운 여성이었습니다. 하늘이 수천년 전부터 약속하였던 우리의 지도자 메시아는 언제나 올 것인가 하며 메시아를 고대하는 심정이 이스라엘 민족의 어느 누구보다도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메시아를 보내시려는 하늘의 심정을 안 마리아였습니다. 이렇게 메시아를 맞이해야 할 이스라엘 민족을 대표한 마리아의 심정을 인간들은 알지 못하였으나 하늘은 알았습니다. 이런 심적 기준을 마리아는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마리아의 심적 기준은 민족을 대신하여 원수를 쳐부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고통 가운데에서 신음하고 있는 민족의 서글픔을 청산하기 위해 싸움의 용자로 나서려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늘의 슬픔이 있다는 것을 알고 눈물 흘릴 줄 아는 심정, 당시의 사람들은 알지 못했지만 민족의 배후에 슬픔의 역사노정이 있었다는 것을 아는 심정, 택한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 앞에 서지 못하는 처참한 실정을 통탄하는 심정을 가졌던 것입니다.

이렇게 나타나야 할 늠름한 모습이 나타나지 않을 때, 그 모습이 나타나기를 바라며 눈물 흘리고, 뼈에 사무치는 심정을 품고 있다는 그 공적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역사적인 심정과 인연을 맺을 수 있었던 연고로, 예상치도 않은 때에 천사가 현현하여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눅 1:31)라고 청천벽력과 같은 통고의 말씀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가 주저하며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일이 있으리이까?”(눅 1:34) 하니, 천사가 다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리라.”(눅 1:37) 하였습니다. 아버지의 일을 이루고자 하는 천사의 이러한 말을 듣고 마리아는 서슴지 않고 ‘주의 계집종이오니 뜻대로 하시옵소서.’ 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이렇듯 하늘의 심정과 인연 맺으려 했던 마리아의 심정은 간곡하였고, 자신의 생애가 파탄되고, 끝내 죽음을 당할지도 모르는 입장에 처했지만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처녀의 몸으로 잉태했다는 말이 퍼지게 되면, 그 당시는 모세의 율법에 의해 당장에 돌에 맞아 죽어야 하고, 민족으로부터 추방을 당해야 하고, 종족으로부터 용납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환경에서도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어느 누구 한 사람 자기를 환영해 주지 않을 것이지만 마리아는 ‘주여! 계집종이오니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슬픔에 사무쳤던 내적 심정과 실제적인 믿음을 나타내는 거기에서, 마리아는 역사적인 주인공이요, 시대적인 주인공이요, 미래적인 주인공이요, 세계적인 인류의 주인공인 메시아를 탄생시킬 수 있는 모친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5. ​엘리야의 눈물과 충절

이와 마찬가지로 하늘 앞에 엘리야는 불림을 받았습니다. 하늘이 그를 찾으실 때까지 엘리야는 남이 알지 못하는 눈물을 흘린 눈물의 왕자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어느 왕보다도, 이스라엘의 어떤 사람보다도 많은 눈물을 흘린 눈물의 왕자였습니다. 불쌍한 처지에서 눈물을 흘린 이스라엘 백성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들이 흘린 눈물은 자기 자신을 위해 흘린 눈물이로되, 하나의 평민이었지만 엘리야가 자신의 환경과 위신을 잊어버리고 흘린 눈물은 자기 자신을 넘어선 눈물이었습니다. 그에게는 하늘이 이끌어 주신 이스라엘이 왜 이렇게 되었는가? 하는 마음이 무엇보다도 컸었던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애급고역 4백년을 거쳐 광야의 40년노정에서 60만 대중을 잃어버리고 남아진 민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국가를 이룬 이스라엘이, 이방 나라에 의해 이런 일을 당하고 원수에게 농락을 받으며 하나님의 택함받은 선민권이 몰락하는 것을 보고 사무친 슬픔을 가졌던 사람이 엘리야였습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민족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누구보다도 하늘을 향하여 정성을 많이 들였습니다. 그러한 엘리야만이 이스라엘을 대신할 수 있었기에 하늘은 그를 찾으셨던 것입니다.

하늘 앞에 불리움을 받은 엘리야는 하늘로부터 ‘엘리야야, 엘리야야!’ 하는 말씀을 듣게 되었을 때 당황했을 것입니다. 그는 ‘이 어인 연고입니까? 이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요, 예상치 못한 일입니다.’라고 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황공해 하며 크나큰 뜻 앞에 나서게 될 때 하늘은 ‘내가 있으니, 가서 아합왕에게 권고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늘의 그 말씀에 엘리야는 하늘을 대신하여 아합왕과 싸우게 되었습니다.

이방나라에서 온 왕비 이세벨을 통하여 들어온 바알과 아세라 목상으로 말미암아 오래 안 가 심판날이 다가올 것을 염려했던 엘리야요, 다년간 하늘의 슬픔과 민족을 부둥켜안고 슬퍼했던 엘리야였던 고로, 하늘의 명령에 ‘아버지여, 민족이 살 수 있다 할진대는 이 몸이 제물되어 그 일을 단행하겠나이다.’ 하고 나섰던 것입니다. 이같이 하늘의 명령을 받고 나서, 아합왕을 향하여 출발한 그날부터 엘리야의 생활에 기쁨이란 명사는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보는 것도 예상치 않은 현상을 보아야 했고, 듣는 것도 생각지 않은 것을 들어야 했고, 먹고 입고 눕는 환경도 편치 못한 환경이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엘리야는 아합왕에게 이방 신을 숭배하면 망하게 될 것이고, 흉년이 들어 굶주리게 될 것이라고 예고하였으나 아합왕은 그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오히려 엘리야를 죽이려 했습니다. 그러자 엘리야는 도망쳐 그릿개울로 피신하였습니다. 그때 엘리야의 심정 역시 무한히 슬펐다는 것입니다.

하늘을 몰랐던들, 그에게는 누울 수 있는 집이 있고, 부모가 있고, 친척이 있고, 형제가 있었을 것입니다. 살 수 있는 땅도 있었을 것이요, 자기를 인정해 주는 환경도 가졌을 것이로되, 하늘을 붙들고 나선 그날부터 그는 생각지도 않던 계곡에 피신해야 하는 신세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도 엘리야는 하늘을 원망한 것이 아니라 아합을 원망하였고, 민족을 원망한 것이 아니라 이세벨을 원망하였습니다. 그렇게 쫓기고 몰림받는 환경에서 하늘에 대한 충절의 마음이 없었다면, 엘리야는 그런 환경을 저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자기의 환경이 조여오면 조여올수록 더욱 더 하늘의 슬픔을 붙들고 민족을 붙들었습니다. 하늘을 붙들고 슬퍼하는 생활이 잠시 동안 기쁨을 느끼는 생활보다 큰 것을 아는 엘리야였던 연고로 역사적인 선조들의 공적을 저버리지 않고 자신의 고통을 개의치 않고 하늘 앞에 가까이, 더 가까이 나아갔던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엘리야는, 형제가 생각해 주는 이상 하늘이 자신을 생각해 주시고, 친족이 염려해 주는 이상 하늘이 염려해 주시고, 부모가 염려해 주는 이상으로 하늘이 자기를 염려해 주신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언제나 지나고 난 후에 하늘의 심정을 알게 되니, 이것이 하늘을 찾아나가는 슬픈 사정입니다.

​6. 엘리야의 중요 행적과 고난

​엘리야는 그릿개울에 피신해 있는 그 환경에서도 각오를 새롭게 하였습니다. 아합과 이세벨을 물리치고 이스라엘 민족을 구하기 위해 피신해 있던 엘리야의 애달픈 심정을 사람들은 몰라주었지만, 까마귀가 찾아와 먹을 것을 날라다 주었습니다. 이렇게 굶주리는 생활을 계속하면서도 하늘의 심정을 알 수 있는 무리들을 찾겠다고 다짐하던 엘리야를 여러분들은 알아야 합니다.

그는 생사의 기로에 서 있는 민족으로 인해 하늘의 슬픔이 사무쳐 있고 그 사무친 심정이 가해져 심판날이 올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홀로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느끼면 느낄수록 하늘의 뜻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하나의 동지를 엘리야는 그리워했던 것입니다. 민족을 사랑하는 만큼 자기 앞에 나타나는 동지들을 사랑하고 싶고, 하늘을 사랑하는 만큼 자기 앞에 나타나는 동지들을 사랑하고 싶은 마음에 사무쳤던 엘리야였습니다.

그러한 엘리야의 마음이 민족을 구할 수 있는 마음이요, 민족을 살릴 수 있는 무리를 포섭하려는 마음이었습니다. 또한 하늘과 인간을 인연 맺게 할 수 있는 간곡한 마음이었습니다. 엘리야에게 이런 심정이 있었던 연고로 하늘은 그를 택하셨고, 그를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한번은 굶주린 엘리야가 하늘의 인도로 사르밧 과부의 집에 가서 떡을 얻어먹게 되었는데, 그 불쌍한 엘리야를 협조해 준 과부는 자기가 먹다 남은 밀가루로 떡을 해 준 것이 아니라 한 끼니밖에 먹을 수 없는 밀가루를 가지고 떡을 해 주었습니다. 그런 연고로 그후 사르밧 과부는 식량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집에 머물 때 병들어 증세가 위중하던 그 과부의 아들이 숨을 거두자 과부는 그 아이를 붙들고 엘리야에게 호소하였습니다. 그 과부의 간절한 호소를 듣고 엘리야가 하늘 앞에 기도를 하니 죽었던 어린아이가 살아났습니다. 또 갈멜산 꼭대기에서는 바알신의 선지자와 아세라신의 선지자 8백여명을 잡아 죽였는데, 이것은 거짓 신과 참 신을 갈라 세우기 위한 일대 싸움이었습니다.

이런 입장에서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민족을 사랑하시는 연고로 자신을 부르셨다는 걸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부르심은 원수를 미워하는 당신 대신 싸워 달라 하시기 위함이었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것이에요. 민족을 대신하여 불렀고, 하나님을 대신하여 바알신과 아세라신의 선지자들을 대해 싸울 수 있는 책임자로 부르신 것을 알고, 엘리야는 물에 적셔진 제단을 하늘이 불을 내려 타게 할 때, 바알신의 선지자와 아세라신의 선지자 8백여명을 잡아죽였던 것입니다. 이 일이 끝난 후에 흉년과 굶주림으로 비탄 중에 있는 이스라엘 민족을 불쌍히 본 엘리야는, 갈멜산 산정에 올라가 생명을 걸어 놓고 하늘 앞에 일곱 번이나 거듭 호소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아합왕이 돌아가기 전에 비가 내리는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이러한 역사를 통하여 아합왕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알고, 자기들이 섬기고 있는 바알신이 거짓 신이라는 것을 똑똑히 알고 뉘우쳐서 엘리야의 뒤를 따라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엘리야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아합은 군중에 들어가 이세벨에게 그 일을 상세히 고했습니다. 그러자 이세벨은 엘리야에게 ‘네가 칼을 들어 베어 버린 바알의 선지자와 같은 운명에 놓이리라.’는 전갈을 보냈습니다.

이에 엘리야는 이스라엘의 국경을 넘어 유대의 브엘세바에 이르러 그곳에 사환을 머물게 하고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 정도 더 나아가서 로뎀나무 아래에서 하늘 앞에 제단을 쌓고 기도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국경을 넘어 소망하였던 유대 땅으로 갔으나 갈 길이 막혔습니다. 허락한 이스라엘을 구하기 위하여 자기가 택함받은 것을 안 엘리야는 수많은 역경과 수많은 싸움의 노정을 거치면서 수고할대로 수고하였으나 그 실적을 세우지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유대 땅으로 도망해 갔으나 갈 길이 막힌 엘리야는 무릎을 꿇고 ‘하늘이여, 당신이 보내신 선지자들을 다 죽여 버렸기에 저를 세우셨사오나, 하늘을 찾고 하늘을 대하고자 하는 심정을 가진 자를 찾을 수 없고, 또 저들이 저를 잡으려 하오니 저는 이제 더 이상 갈 수 없사옵니다. 저를 죽여 주시옵소서.’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7. 아버지여! 나만 남았나이다

​섭리를 경영하시는 하나님께서 믿고 불러 세우신 목적을 이뤄 드리기 위하여 수고하며 민족을 이끌어 나온 엘리야가 몰리는 슬픈 자리에서 ‘아버지여, 나만 남았나이다!’라고 호소하는 것을 바라보시는 하늘은 더 가중된 슬픔을 느끼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늘은 쫓김받고 몰림받아 피신해 있는 엘리야를 수많은 이스라엘 민족보다도 더 귀하게 느꼈고, 이스라엘 땅에 둔 소망보다도 더 큰 소망을 그에게 두셨습니다. 지칠대로 지치고 소망도 끊어진 채 그 나아갈 방향도 가릴 수 없는 광야에서 최후의 결정을 내려 줄 것을 호소하였던 엘리야를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되겠습니다. 더 나아가서 이스라엘 민족을 이끄신 하나님, 엘리야를 찾아 세우기 위해 수고하셨던 하나님, 엘리야가 곤경에 빠져 있을 때 여러 모양의 이적으로 도와주시고, 집에서부터 그를 붙들어 주셨던 하나님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기에서 엘리야를 대하는 하늘의 심정이 슬픔에 잠기게 되었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합니다.

유대 땅에도 머물 수 없는 것을 깨달은 엘리야는 40주야를 걸어서 이스라엘 민족이 애급에서 나오게 될 때 하나님이 그들에게 축복을 내리신 산, 그의 조상들이 하늘과 인연을 맺었던 시내산 가까이에 있는 호렙산으로 도망을 가게 되었습니다. 엘리야가 국경을 넘어야 할 것을 아신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도망가는 엘리야의 갈 길이 멀고, 또 그가 가는 길에 친구도 없고 동정자도 없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로뎀나무 아래에서 자고 있는 엘리야에게 천사를 통하여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의 물을 주며 먹으라 하였습니다.

엘리야는 그것을 먹고 다시 힘을 얻어 하늘의 슬픔과 민족의 슬픔을 품고, 원수를 갚기 위한 적개심을 품고, 슬픔의 땅인 이스라엘을 향하여 달음질쳐 가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반대로 호렙산을 향하여 도망을 간 것입니다.

그렇게 40주야를 걸어 호렙산의 어느 굴에 가서 잠을 자는 엘리야는 패잔병과 같은 처량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끌어 주시는 길을 이탈한 후 자기 일신의 안위를 위해 도망하여 굴 속에서 자고 있는 엘리야를 하늘은 또 찾아 주셨습니다. 자고 있는 엘리야에게 하나님께서 ‘엘리야야, 네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하자, 엘리야는 ‘하늘을 열심히 생각하고 있나이다. 그러나 나는 선조들보다 약한 자외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을 위로하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졸고 있던 엘리야를 산에 세워 놓으시고 여러 모양으로 권고하셨습니다. 강한 바람으로, 혹은 지진으로, 혹은 불길로 권고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직접 엘리야 앞에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그 후 조용한 가운데 하나님은 나타나셔서 엘리야를 부르셨습니다. 엘리야는 대답했습니다. 아버지여, 당신의 예언자들이 모두 저들의 손에 죽고 이스라엘 민족 앞에 나만 남았나이다. 갈래야 갈 수 없습니다. 몰리고 몰리는 이 자리에서 저는 어이 하오리까? 그러나 하나님은 다시 ‘이스라엘이 아합의 수중에 있으나 그 가운데 할례를 지키며 바알에게 굴하지 않은 7천여 무리가 있으니 이들을 어찌할 것인고?’라고 하셨습니다. ‘아합왕의 수하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바알에게 굴하지 않는 7천여 무리는 어찌할 것인고?’ 이것이 엘리야를 대하는 하늘의 서러운 심정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엘리야는 다시 결심하여 하늘의 명령대로 다메섹으로 돌아가 하사엘과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우고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자신의 뒤를 이을 선지자로 세웠던 것입니다.

엘리야는 발걸음을 돌리며 바알에게 굴하지 않은 남은 7천여 무리를 하늘이 염려하신다는 것을 알고 새로운 결의를 하였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섭리의 뜻을 대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수고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피눈물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등에 지고 몰림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슬픔과 통분함과 억울함의 자리는 누구 때문에 생기게 되었는고? 민족 때문이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6천년의 원수인 사탄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슬픔과 고통이 치밀려 들어오고 핍박의 폭풍이 휩쓸려 들어오는 사정에 놓여지는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민족을 살리기 위함이요, 하늘을 해방시키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하늘 뜻을 대하는 사람들도 그런 하나님의 심정을 느끼기 어렵습니다.

​8. 십자가상에서도 하늘을 염려하고 원수를 사랑한 예수

​예수는 교단으로부터 몰림받고 민족으로부터 몰림받았습니다. 교단의 이단자로, 율법의 파괴분자로 보였습니다. 그는 자기 종족에게 몰렸고,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세례 요한 일당한테도 몰렸습니다. 광야에 나갔으나 거기서도 사탄에게 몰렸습니다. 그것으로 끝나지 아니하였습니다. 나중에는 전체가 동원하여 십자가의 길로, 골고다의 길로 내몰았습니다.

그러나 반역자로 내모는 민족을 위하여 오히려 눈물을 흘린 예수였습니다. 예수님은 유대교단으로부터 이단자로 취급받았지만 이스라엘의 어떤 제사장보다 그들을 위해 더 피눈물을 흘린 사람이었습니다. 그 시대의 어느 한 사람도 자기 편이 되어 주는 사람이 없었으되 예수는 그 시대의 친구였습니다. 민족의 반역자로 몰림받았으되 민족의 충신이었고, 교단의 이단자로 몰림받았으되 교단의 충신이었습니다.

그의 걸음은 어떠한 걸음이었느뇨. 찢기고 몰리고 쓰러지는, 십자가를 진 처참한 걸음이었습니다. 그 길뿐이었습니까? 무모한 악당들이 채찍을 들어 내모는 사정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자리에서 만일 예수가 엘리야와 같은 사람이었더라면, 또다시 ‘아버지여, 나만 남았나이다.’ 이런 기도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세 제자를 뒤에 놓고 기도하게 될 때에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위대한 것입니다. 자기의 사정도 딱하나 자기 일신은 민족의 제물이요, 인류의 제물이요, 천륜의 제물인 것을 아셨던 것입니다.

이런 것을 아신 예수는 자기의 슬픔도 슬픔이거니와 하늘의 슬픔이 얼마나 클 것인가를 염려하는 마음이 더 컸다는 것입니다. 민족을 위해 나타났으나 민족 앞에 배반받는 자신을 바라보시는 하늘의 슬픔이 얼마나 클 것인가 하는 것을 더 염려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는 하늘의 황태자요, 만우주의 주인공이요, 메시아였습니다. 그런 ‘예수가 처참한 십자가의 운명이 웬일이뇨?’ 하고 탄식하려면 이 우주를 동원하여 탄식할 수도 있었으나 탄식할 수 없는 자기 자신임을 느끼셨기 때문에 몰리는 자리에 서게 된 것을 면목없게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교단을 규합시키고 민족을 규합시켜 하늘의 왕국을 건설하고 세계를 아버지 품에 안겨 드려야 할 책임을 짊어졌던 예수는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십자가의 길을 가게 될 때에 원망할 어떤 무엇도 느끼지 않았다는 것이에요. ‘이 잔을 피하게 하시옵소서.’ 하고 기도하신 것도 자기 일신이 죽는 것이 서러워서가 아니었습니다. 자기 일신이 죽음으로 말미암아 민족의 서러움과 하늘의 서러움이 가중될 것을 아셨기 때문에 그렇게 기도하신 것입니다.

예수는 자신이 십자가에 쓰러지면 후대의 세계 인류 앞에 가중될 십자가가 남아지고, 그로 인해 슬픔의 역사가 끝나지 않을 것을 아셨습니다. 골고다의 길이 끝나지 않을 것을 아셨습니다. 죽음의 길이 끝나지 않을 것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골고다의 길을 가면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도 골고다의 길을 걷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아셨습니다. 십자가뿐만 아니라 더 어려운 길이 남아질 것을 아신 예수였다는 거예요.

양손 양발에 못이 박히고 옆구리가 창에 찔려 피를 흘리는 자리, 가시 면류관을 쓰는 자리에 선다 하더라도 이것이 자기에게서 그쳐지지 않을 것을 아시고도 예수는 하늘을 향하여 ‘다 이루었다.’고 했습니다. 그 말씀은 인간 세상에 있어서 십자가의 길이 다 끝났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가를 위하여 울며 염려하는 마음의 호소가 하늘과 통했다는 것이에요.

예수는 수많은 선지선열들이 하늘 앞에 저끄렸던 모든 잘못을 짊어지고 하늘을 위로해 드리기 위해 자기 자신이 산 제물로서 하늘 앞에 바쳐졌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예수를 대하시던 하나님의 심정은 어떠했던고? 죽어가는 예수의 그 모습, 하늘을 염려하며 십자가의 고개를 넘어가는 그 모습을 바라보실 때, 인간세계에 분함이 있다 할진대 이 이상의 분함이 없을 것이요, 하늘의 4천년 역사노정에 분함이 있다 할진대 이 이상의 분함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자신은 죽어가면서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장에 노아 때 이상의 심판을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예수가 민족을 붙들고 죽고 교단을 붙들고 죽고 십자가를 붙들고 죽은 연고로, 하나님은 인간들을 버리지 못하시고 붙들어 나오고 계신 것입니다. 이런 심적인 인연이 후대의 인간, 남아진 이스라엘 민족과 맺어져 있었기 때문에 배반하는 후대의 인간들을 버리지 못하시고 붙들어 나오고 계십니다. 배반하는 후대의 교단을 붙들어 나오신다는 것입니다.

9. ​우리가 해야 할 일

후대에 태어난 우리들은 이제 이런 하늘의 심정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는 이런 심정으로 하늘을 대하기를 고대했고, 이러한 생애를 살기를 바라셨습니다. 예수의 종족이요, 예수의 후계자요, 예수의 위업을 상속받아야 할 우리, 하늘 앞에 영광의 실체라고 자랑할 수 있는 무리가 되어야 할 우리, 이런 사명과 책임을 짊어지고 천적인 기대 앞에 선 오늘날 우리 는 이제 무엇을 찾고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또 무엇을 생각해야 할 것인가? 예수의 친구가 되고 예수의 신부가 되라고 하셨으므로 그런 사람이 되겠다는 생각을 해야 하겠습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우리의 선조들이 하늘 앞에 맺혀지게 하였던 역사적인 한을 풀어 드려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죽음의 탄식의 인연을 우리 후대에 남기지 말아야 되겠습니다. 싸움의 노정을 죽음의 골고다로 남기지 말고 승리의 골고다로 남길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늘은 이런 책임을 질 자를 찾고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끝날의 사명이 믿는 신도들에게 있다 할진대, 심판의 날을 고대하고, 부활의 주를 찾아 영광의 터전에 서기를 바라는 우리는 예수의 심정과 노아가정을 대했던 하늘의 슬픈 심정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늘 앞에 세워진 노아가 120년 동안 수고한 끝에 홍수심판을 면하게 될 때, 하늘은 남아진 노아의 여덟 식구를 통하여 그 동안의 원한을 다 풀고자 하셨는데, 함의 실수로 말미암아 재탄식의 조건이 남아졌다는 사실을 알고, 노아 가정의 슬픔을 다시 풀어줄 줄 아는 우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아브라함은 제물의 실수로 말미암아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쳐야 했으며, 그의 후손들은 가나안 땅을 떠나 애급으로 들어가 4백년의 고역시대를 거치게 됩니다.

하늘은 이스라엘 민족을 가나안 복지로 복귀시키기 위해 모세를 세워 수고케 하셨으나 그 복귀노정에서 이스라엘 민족은 여러번 하늘을 배반했던 것입니다. 그 이후 수많은 우리의 선조들이 뜻을 대하여 나오고 있으나 하늘이 ‘오냐. 네가 뜻을 다 이루었다. 내 소원을 다 이루었다.’고 하는 칭찬과 축복을 받은 무리는 없었습니다.

이렇게 선조들로 인하여 슬픔의 심정에 사무쳤던 하늘의 마음까지 여러분들은 알고, 오늘 드린 말씀과 같이, 아합왕 앞에 갖은 핍박과 몰림을 받던 엘리야와 같은 입장에 설지라도, 초로의 인생으로 사라지는 한이 있다 할지라도 자기의 신세를 한탄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붙들고 나가야 되겠습니다.

겟세마네 동산과 골고다 산정에서 예수가 품었던 것과 같은 심정을 엘리야가 품었던들, 그래서 하늘과 인연 맺었던들 하늘은 거기에서 역사적인 슬픔의 일단을 해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슬픔은 예수에게까지 연장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이 뜻은 해원되지 못한 채 오늘날까지 연장되어 오고 있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10. ​이 시대의 엘리야

​오늘날 이 세계에서 벌어지는 현상들을 바라보게 될 때, 그것은 옛날 이스라엘 아합왕의 시대에 벌어진 것과 맞먹는 현상입니다. 우상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늘을 저버리고 다른 무엇을 숭상하는 것, 그것을 하나님 이상으로 높이는 것이 우상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수많은 인류들은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문명이라는 우상 아래에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때에 아합왕을 바라보던 엘리야와 같은 심정을 가지고, 즉, 아합왕을 바라보며 하늘의 슬픈 심정을 내적 심정에 가중하여 느끼던 엘리야와 같은 심정을 가진 자가 있다 할진대, 엘리야와 같은 심정으로 하늘을 위로 하며 ‘이 땅을 아버지의 품에 안기게 할 수 있는 사랑하는 아들딸로 세워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는 무리가 있다 할진대, 그들은 엘리야 이상의 분개하는 마음을 가지고 이 시대를 바라볼 수 있는 무리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무리가 없다 할진대 내 자신이 비록 천하다 할지라도 선조들이 하늘의 뜻을 받들어 천륜의 도를 세웠고, 섭리의 전통을 세워 섭리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남아 있다는 것을 알고, 자기 자신이 비록 부족하다 할지라도 부족하다 생각하지 말고 남 모르는 가운데 제단을 쌓고 남 모르는 눈물을 흘리는 무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이런 무리가 이 땅 위에 나타나 싸우지 않는다 할진대는 이 세계의 종말적인 형상을 막아낼 수 없을 것입니다.

아합왕이 하늘을 배반하고 이스라엘 민족을 농락했다 하지만 그것은 민족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세계적으로 사람들이 물질을 우상화하고 그 문명의 노예가 되어, 자기의 생명의 중심이 어디 있으며 자기가 갈 방향과 위치가 어디인지 알지 못하고 있으며, 하늘을 찾아가지 못하고 허덕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무리는 옛날 아합왕에게 사로잡힌 무리와 같습니다.

오늘날 우리 앞에는 세계적인 하나님의 심판이 남아 있습니다. 아합왕과 이스라엘 민족 앞에 심판이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종말기에 있는 우리 앞에 우상의 보따리를 깨뜨려야 할 심판의 한 날이 있을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 하늘은 엘리야를 대하던 이상의 슬픈 심정을 가지고 오늘날 여러분을 대하신다는 사실을 꿈에라도 생각해 본 일이 있습니까? 없다 할진대 반성해야 됩니다.

아합왕을 중심한 이스라엘 민족이 죽어도 성전이요, 살아도 성전이라는 마음으로 하늘을 대하고 하늘의 전통을 계승하고 하늘의 혈족을 이루기 위해 수고했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아합왕을 중심한 이스라엘 민족은 혈투전으로 끝을 맺고 말았던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역사적인 실정은 시대적인 실정으로써 오늘날에 다시 재현되고 있습니다.

세계도 세계거니와 우리는 이 시대를 바라보고 우리 민족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대한의 아들딸입니다. 조상으로부터 피와 살을 이어받은 대한의 혈족입니다.

우리는 나라를 위하여, 민족을 위하여, 민족의 장래에 광명의 아침이 찾아들게 하기 위하여, 민족 정신을 고취하기 위하여 피 흘리고 눈물을 흘린 충신들이 많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어느 민족의 역사에도 없는 슬픔과 비극의 처참한 환경을 거쳐왔으며, 그때마다 수많은 충신열사들이 피의 길을 걸어간 역사를 가진 민족인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전통을 인계받아 인륜적인 것보다도 천륜적인 것을 갖고, 아합왕 시대의 우상과 같은 이 세계의 문명을 밀어놓고, 하늘이 군림하실 수 있는 새 예루살렘 성전을 건설할 자는 누구인가 하는 것을 염려할 때가 왔습니다.

이제 우리는 마음을 넓혀야 되겠습니다. 나의 슬픔보다도 민족을 붙들고 슬퍼할 줄 알고, 나아가 세계 인류를 붙들고 슬퍼할 줄 알고, 더 나아가 하나님과 하늘땅을 위해 슬퍼할 줄 아는 자가 되어야겠습니다.

타락권 내에서 탄식하고 있는 민족을 품고 하늘 대신 울 수 있는 심정을 가진 주인공은 어디에 나타날 것인고? 만일 이 땅 위에 만왕의 왕이신 주가 강림한다 할진대는 틀림없이 세계적인 이념을 갖고 올 것이요, 세계적인 지도자로서 인류와 심적 인연을 맺기 위하여 오실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여러분들이 그런 것을 생각하지 않으면, 주는 여러분과 어떠한 관계도 맺을 수 없습니다. 그런 이념을 갖고 통치하실 주가 와도 그러한 이념의 세계를 꿈꾸고 생각하지 않으면 그 세계와 하등의 인연을 맺을 수 없다는 거예요. 생각이라도 하고 염려라도 하고 공상이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여러분은 놓여 있습니다.

여러분은 개인을 염려해 보았습니까? 도탄 중에 신음하고 있는 가정을 염려해 보았습니까? 어떠한 사회나 국가를 염려해 보았습니까? 그렇지 못한 자리에 선 자기를 발견하거든, 우주 역사 앞에 범죄자인 자기의 정체를 폭로시키고 하늘 앞에 회개할 수 있는 마음이라도 가져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만일 그러한 마음조차 없다 할진대 이 민족은 어떻게 될 것인가? 5천년 역사를 자랑하고 있는 한민족이지만, 하나님의 섭리역사를 거치고 고난의 역사를 거쳐 남아진 민족이지만, 그런 무엇이 없다면 세계사, 혹은 세계 문명권 내에서, 혹은 하나님의 섭리권 내에서 무엇을 가지고 공헌할 수 있을 것인고?

우리가 자랑할 무엇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하늘과 천적인 인연을 못 맺으면 오히려 하늘에 슬픔을 가중시키는 것밖에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11. 역사의 주인

역사는 몰리고 몰리는 무리들이 주역이었습니다. 역사를 지배해 나온 주의는 그런 무리들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고대광실(高臺廣室) 높은 자리에서 호화찬란히 살면서 진수성찬을 즐기는 무리가 어떤 주의를 만들어 오지 않았습니다. 몰리는 자리, 밟히는 자리, 불쌍한 자리에 있는 자들이 만들어 나온 것입니다. 그들은 발걸음을 내디딜 때 눈물의 발걸음을 옮긴 자들입니다.

민족이 부패하고 세계가 혼란스러울 때, 세계를 붙들고 하늘을 대신하여 눈물 흘리는 무리는 세계적인 엘리야의 후계자들입니다. 그런 무리들은 엘리야가 염려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대신하여 하늘 앞에 설 수 있을 것입니다. ‘엘리야는 엘리야요, 나는 나.’라고 하다간 망합니다. 하늘이 울고 하늘이 슬퍼하시거든 같이 울고 같이 슬퍼할 수 있는 우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으로만 계신 하늘이 아닙니다. 말씀과 실체와 심정과 사랑의 하나님 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말씀도 모르는 무리가 되었습니다. 몸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습니다. 자신의 심정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하늘이 주장하시는 하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까? 심정이 어떤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까? 자기 자체가 어떤 존재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까? 자기가 하는 말이 어떤 말이라고 설명할 수 있는 무엇을 갖고 있습니까? 없습니다. 없어요.

오늘날 사람들은 자기의 잘남을 자랑합니다. 허나 그것을 자랑한다 한들 몇 세기 동안이나 자랑할 수 있을 것인고. 과거 어느 시대에 자랑하던 이름은 몇 세기나 갔던고. 그러기에 인간에게 오직 자랑할 것이 있다 할진대는 남이 가지 못하는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런 민족은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모든 민족이 공통적으로 간 길을 간 사람이 민족을 살리고 세계를 살린 것이 아니라, 남이 가지 못하는 길을 간 사람들이 민족을 살리고 세계를 살려 나온 것입니다. 기독교가 걸어온 노정도 이런 노정입니다. 오늘날 세계의 기독교는 탄식해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을 알고, 예수 이후 성신을 보내어 2천년 동안 수고한 역사를 안다 할진대, 현실의 기독교를 바라보고 편안한 잠을 잘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인들은 이 시대의 교인보다도 더 교회에 가는 것을 즐겨했습니다. 이 시대의 교회보다 더 잘 예식과 형식을 구비했습니다. 말씀이 없었던 것이 아니요, 역사가 없었던 것이 아니요, 자랑할 조건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유대교를 하늘 앞에 자랑할 수 없었던 까닭은 무엇이뇨? 그것은 그들이 하늘의 새로운 섭리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자신의 죽음을 연상하여 ‘예수님의 심정이 내 심정이요, 갈보리 산정에서 못박히던 예수님의 몸이 내 몸이다.’라고 생각하며 자신을 위해 울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 친구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또한 죽으면서도 말 못했던, 심중에 사무치도록 마음으로 그리던 신부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 신부를 만나는 날에야 마음을 터놓고 그의 생애 전부를 말할 수 있을 것이고 6천년 동안 역사하신 하나님의 내적 심정의 서글픔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내용은 성경에 있는 말씀과는 다를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의 슬픔과 하나님의 슬픔이 여러분의 사랑하는 아들딸 앞에 있다 할진대 어떻게 할 것입니까? 여러분의 사랑하는 부모 앞에 있다 할진 대 어떻게 할 것입니까?

때는 점점 최후의 해결점을 향하여 흐르고 있습니다. 역사도 흐르고 있고, 종교도 흐르고 있고, 주의도 흐르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니 여기도 싸움이요, 저기도 싸움이요, 여기서도 탄식하고 저기서도 탄식하고 있습니다.

이런 혼란기에, 믿을래야 믿을 수 없고 걷잡을래야 걷잡을 수 없는 때에 엘리야가 나타나 새로운 심정의 일단을 토로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역사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하늘의 심정을 토로하는 어떤 새로운 음성은 없을 것인고, 여러분들은 그런 생각을 해야 할 것입니다.

​12. 이 시대의 신앙인들이 취해야 할 자세

​주의와 사상은 오늘날 여러분을 시시각각으로 자극시키고 있습니다. 더욱이나 이때는 묘한 때입니다. 역사에 대한 공포가 여러분을 몰아내고 있는데, 그 공포와 싸워 개인적으로 승리의 개선가를 부를 자는 누구일 것인고? 없습니다.

그러면 이 역사는 어디로 갈 것인고? 사망이 뒤넘이치고 있는데 새로운 소망과 새로운 해방을 부르짖는 소리는 어디서부터 나올 것인고? 어서 빨리 나와야 될 것인데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제 여러분이 상상하지 못한 새로운 무엇이 나와야 합니다. 여러분이 상상하지 못하고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무엇이 나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 시대는 종교의 싸움을 거치고 있는 시대입니다. 앞으로는 민족의 싸움, 국가의 싸움, 세계의 싸움, 주의의 싸움, 종교의 싸움은 다 지나갈 것입니다. 마음의 싸움이 남을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마음이 여러분이 알 수 없는 그 무엇에 휩쓸리더라도 그것을 이길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런 때가 왔습니다.

이 세계에 많은 사람이 살고 있으나, 하나님과의 종적인 관계를 중심하고 보면 여러분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습니다. 3천만 민족이 여러분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로 맺어져 있는 줄 알지만 하나님과의 종적인 관계를 중심하고 보면 하등의 관계가 없습니다.

갈멜산 꼭대기에서 엘리야가 ‘하나님이여, 나만 남았나이다.’라고 하던 그 부르짖음은 엘리야의 부르짖음만 되어서는 안 되고, 오늘날 이 끝날에 심판받아야 할 무리의 부르짖음도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 입장에 놓여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의 생명을 누가 보증해 줍니까? 부모도 아니요, 사랑하는 처도 아니요, 자식도 아니요, 국가도 아니요, 주의도 아닙니다. 여러분, 이런 생명을 존중시하고 있는 여러분 자신을 생각해 보십시오. 밑도 끝도 없는 소용돌이에 휩쓸려 들어가 자기 정체를 해명할 수 없는 허무한 자신을 자랑하지 마십시오.

오늘날 세계 인류는 갈멜 산정에서 싸우던 엘리야의 투쟁역사를 거쳐야 합니다. 하늘을 향하여 ‘나만 남았나이다.’라고 호소하던 엘리야와 같이 하늘 향해 호소할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자기도 알지 못하는 역사노정을 거쳐 역사의 종점에 선 자신들을 어떤 주의가 구해 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으면 하늘을 향해 머리를 높이 들어야 하겠습니다. 머리를 높이 들고 마음이 지향되는 곳, 마음을 해방시켜 주는 곳, 그런 곳을 소망하여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욕망에 사무쳐야 하고, 우리 가운데 생명이 약동해야 하겠고, 우리가 해야 할 남아진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예수께서 갈보리산상에서 하늘을 대신하여 ‘다 이루었다.’고 했던 것과 같이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무리가 있습니까? ‘하늘이여, 나만 남았나이다.’ 할 수 있는 무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때가 여러분에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심판의 한 날을 계기로 하여 새로운 역사를 출발시키려는 섭리의 뜻이 여러분 앞에 남아 있다는 걸 아는 이상 여러분은 ‘나만 남았나이다.’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 왜? 왜?

오늘날 우리는 어떤 종교도 믿을 수 없고, 어떤 주의도 믿을 수 없고, 어떤 가정, 친척, 스승도 믿을 수 없고, 어떤 도(道)도 믿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그 어느 것 하나도 믿을 수 없는 입장에 놓여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늘을 향해 ‘나만 남았나이다.’라고 할 수밖에 없는 입장에 놓여 있다는 거예요. 이런 입장에서 취해야 할 자세는 하늘을 향하여 ‘나만 남았나이다.’라고 울부짖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차피 마음으로부터 이렇게 울부짖어야 합니다.

이제 여러분 각자는 투쟁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이루어야 할 천적인 뜻이 있고, 찾아야 할 민족이 있고, 성별시켜야 할 교단이 있는 것을 알고 하늘 편에 있는 사람들은 뜻을 위해 동원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로마서 8:18-21

<기 도(Ⅰ)>

저희를 사랑하시어 선의 조상들을 이 땅에 보내시고, 죽음의 자리에까지도 내모신 아버지의 심정을 이 시간 저희들이 체휼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불충스런 인간 조상이 타락한 이후 오늘날까지 하늘과 땅은 기쁨의 한 날을 맞이하지 못한 채 슬픔의 역사, 싸움의 역사가 계속되어 왔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지시여, 이와 같이 곡절이 많은 이 땅 위에서 언제나 저희들이 아버지께서 기뻐하실 수 있는 효자의 모습이 되어 아버지를 찬양할 수 있사오리까? 그럴 수 있는 한 날이 오기를 저희들은 고대하고 있사옵니다.

이날 부족한 저희들이 아버지 앞에 모였사오니 긍휼히 보시옵소서. 연약한 저희들을 강하게 하시어 남아진 싸움터에서 승리의 깃발을 들 수 있게 하시고, 아버지의 아들딸이 된 자신의 모습을 자랑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 일주일의 생활 가운데 아버지 앞에 옳지 못한 것이 많았을 줄 알고 있사오니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부족한 몸 마음을 다 바치고자 이 시간 아버지 앞에 엎드렸사오니, 옳지 못한 모든 것을 제하여 주시옵고, 당신이 취하실 수 있는 것만 저희의 몸 마음에 우러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들을 끔찍이나 사랑하시어서 이 시간 이 자리에 모아 주신 것이 아버지의 은사인 줄을 알고 있사오니, 그 은사에 보답하여 간곡한 심정을 아버지 앞에 바칠 수 있는 이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뜻, 아버지께서 소망하시는 그 한 목표를 향하여 모든 것을 참으면서 끝까지 싸워나갈 수 있는 아들딸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날은 거룩한 날이오니 만민을 축복하여 주시옵고, 불쌍한 이 민족을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더욱이나 외로운 자리에서 당신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식구들도 있사오니 그들을 축복하여 주시옵고, 일률적인 보호의 은사와 가호의 손길을 그들의 머리에서 떼지 마시옵고, 아버지의 영원한 한 날을 맞이할 때까지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옵고, 보호하여 주시옵고, 인도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시간 저희들, 아버지 앞에 나왔사오니 저희의 몸 마음 다 바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세상의 모든 관념을 다 제거하여 아버지의 참된 아들딸의 심정을 갖고 아버지를 대할 수 있는 이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시간 오직 아버지께서 친히 주관하여 주시옵고, 사탄이 틈타는 시간이 되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시여,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허락하신 은사의 손길로 저희를 영원히 붙들어 주시고, 아버지의 생명의 동산에까지 저희를 옮겨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오면서,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기 도(Ⅱ)>

이 한 날을 거룩한 날로 축복하시옵소서. 이 한 시간을 성별해 주시옵소서. 이 한 무리를 거룩한 무리로 인정해 주시옵소서. 이 한 청중에게 오로지 아버님의 심정에 어릴 수 있는 간곡한 마음을 가지도록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저희의 마음대로 느끼는 이 시간 되지 말게 주관하여 주시옵고, 아버지 심정에 화하고, 아버지의 성상(聖像)을 대하고 싶은 간곡한 심정이 넘쳐흐르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지금까지 자기를 중심삼고 생각했던 일체의 주의 주장이나 관념을 제거하여 주시옵고, 오직 아버님과 인연될 수 있는 것만이 저희의 심중으로부터 우러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은 당신이 원하시는 하나의 이념과 하나의 목적을 흠모하는 마음, 아버지의 뜻을 위하는 마음만이 간절할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제까지 당신의 뜻을 위하여 왔다 간 사람들이 많았사옵는데 보잘것없는 저희들을 불러 이 한 자리에 모이게 하심은 당신의 크나큰 은사인 줄 알고 있사오며, 당신이 저희들을 모으신 것은 분부하시려는 뜻이 있어서인 줄 알고 있사옵나이다. 아버지시여! 이 시간 개개인의 심령 위에 당신의 생명의 말씀과 은혜를 내려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저희들은 오늘도 내일도 소망의 동산을 바라보면서 싸움의 일로를 개척하지 않으면 안 될 싸움터가 남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이 시간 저희 몸 마음이 강하고 담대하여 사망의 물결을 휩쓸어 몰아낼 수 있게 인도하여 주시옵고, 생명의 권한을 갖고 부활의 은사를 자랑할 수 있는 당신의 아들딸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님, 이 시간 당신의 아들딸에게 허락하실 것은 허락하여 주시고, 아버지께서 원치 않으시는 모든 것은 제거하여 주시어서, 당신의 마음과 저희의 마음이 하나되게 허락하여 주시고, 당신의 성상과 저희의 몸이 하나되어서, 남겨진 일체가 아버지 것이 아닌 것은 하나도 없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나이다.

아버님이시여! 오로지 당신의 뜻을 중심삼고 예배드리는 이 시간이 되게 인도하여 주시옵고, 저희의 마음 몸이 아버지의 뜻을 위하는 간곡한 심정을 지니고 당신의 거룩한 성호를 노래할 수 있으며, 당신의 아름다운 심정을 찬양할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사랑하는 아버님! 이 삼천만 민족을 긍휼히 보시옵소서. 이 민족을 대표하여 모이는 수많은 교단을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특히 외로운 가운데 당신 앞에 무릎을 꿇고 간곡히 기도하고 있는 식구들에게도, 아버지, 축복의 은사를 내려 주시옵소서. 일률적인 은사의 손길로써 그들을 보호하여 주시옵고, 일률적인 역사로써 그들을 권고해 주시어서, 남겨진 싸움터에서 사탄과의 최후의 일격전에서 패배하는 자들이 되지 말게 보호하여 주시옵고, 영광의 개가를 높이 부르며 아버지의 아들딸이라고 자랑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수많은 무리가 당신의 소망을 바라고 있사오되, 당신의 진정한 사랑의 심중을 헤치고 당신을 위로하고자 하는 아들딸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하오나 이 시간 이 자리에 모인 이 무리는 당신의 심정을 붙안고 위로할 수 있는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아버지의 심정과 일치하는 경배를 드릴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많은 무리가 아버님을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끝까지 참고 이기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그 노력과 수고가 결실되지 못한 사실을 알고 있사오니, 아버님이시여, 끝까지 참고 끝까지 노력하여 아버지 앞에 최후의 결실을 이루어 드릴 때까지, 오늘도 내일도, 아니 일생을 건 어떠한 싸움도 개의치 않고 나아갈 수 있는 아들딸들 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저희들을 모아 놓으신 데에는 아버지의 각별한 은사가 있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그 은사에 대한 막중한 책임을 짊어져야 할 저희들이오니, 이제 그 책임을 감당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아들딸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한 시간 부족한 마음 몸을 모아서 아버지 앞에 경배드리고자 하오니 일체를 주관하여 주시옵고, 사탄이 틈타는 시간이 되지 말게 주관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오면서,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기 도(Ⅲ)>

아버지시여, 저희들을 긍휼히 보시옵소서. 아버님의 은사가 아니면 죽을 수밖에 없는 불쌍한 저희들이옵니다. 아버지, 이 시간 저희들을 버려두지 마시옵고, 당신의 크신 사랑의 품에 품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지금까지 수고의 길도 어렵다 생각하지 아니하고 따라나온 당신의 아들 딸들, 당신의 사랑이 아니면 방황할 수밖에 없사오니, 긍휼히 보시옵고, 당신의 크신 사랑으로 품으셔서 당신이 허락하시는 영광의 은사를 체휼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인간을 중심삼은 모든 것은 끝이 있으되 아버지를 중심삼고 움직이는 모든 것은 영원토록 계속되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인간을 중심한 모든 것을 제거하여 주시옵고, 오직 당신을 중심한 것만이 저희의 마음동산에서 부터 나타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님을 찾아 헤매는 간곡한 마음이 있으면 있을수록, 당신의 성상을 그리면 그릴수록, 당신의 마음 앞에 가까이 가기를 원하면 원할수록 아버님의 크신 사랑은 저희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같이하신다는 사실을 저희들은 잊어버리는 때가 많사옵니다. 아버님은 저희가 바쁠 때나 급할 때를 막론하고 언제나 저희와 같이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여기에 모인 당신의 아들딸들 긍휼히 보시옵소서. 이들의 생명을 책임져 주시옵고, 이들의 소망을 책임져 주시옵소서. 당신의 소망을 저희들에게 허락하셨을진대 그 소망의 동산을 차지할 때까지 아버님과 더불어 싸워 나갈 수 있는 힘을 저희들에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원수와의 싸움에서 지치지 말게 보호하여 주시옵기를,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제 여기 모인 당신의 아들딸들을 긍휼히 보시옵소서. 사망의 세계를 헤쳐나오는 동안 저희의 손발은 상처를 입었사오니, 아버님이시여, 이 시간 품으시어 저희의 손길을 붙들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님께서 저희를 모른다 하시면 저희와 같이 불쌍한 자가 없는 줄 알고 있사오니, 아버님, 이 시간 저희를 붙드시옵고 위로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님의 명령이 아니고서는 생명조차도 포기할 수 없는 저희들 참다운 길이라 하옵기에 분부하시는 명령을 받들어 나왔사오니, 아버지, 버리지 마시옵고 이 시간 품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모인 아들딸들을 긍휼히 보시옵소서. 모든 것이 아버지가 아니면 안 되고, 아버지의 뜻이 아니면 안 되고, 아버지의 역사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이들이 뼈 살에 사무치게 느끼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남기신 그 사업, 남기신 그 뜻, 남기신 그 소망을 일신에 지니고 끝까지 싸워 아버지의 아들딸의 늠름한 모습을 나타낼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 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제 모인 당신의 아들딸들 긍휼히 보시옵고, 저희의 일체를 맡겼사오니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허락하신 이 시간에 말씀을 전하겠사오니 당신의 뜻 가운데에서 전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일체의 사탄 것은 제거하여 주시옵고, 당신의 심정에 동감하는, 당신의 심정에 얽히는, 당신의 심정에 화하는 이 한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 전하는 자의 마음이나 받는 자의 마음이 하나되어 이 한 시간만이라도 아버지의 사랑에 사무친 심정으로 아버지 앞에 경배드릴 수 있으며, 아버지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 이 시간도 외로운 식구들이 지방에 널리어 아버지 앞에 호소하고 있는 줄 알고 있사오니, 일률적인 역사로 보호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올 때,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말 씀>

여러분들에게 잠깐 동안 말씀드리려 하는 제목은 ‘소망을 품고 지나가야 할 인생길’입니다. 이러한 제목을 가지고 잠깐 동안 말씀 드리겠습니다.

​1. 소망을 잃어버린 인간

​인간이 타락한 연고로 하늘의 참다운 소망을 이루지 못하고, 하늘이 허락하셨던 그 소망을 잃어버린 채 지금까지 살아왔다는 것을 우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차피 태어난 그날부터 죽는 날까지 참다운 소망의 한 길을 찾아서 가지 않으면 안 될 운명에 놓여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타락 전 아담 해와에게 ‘땅에 충만하여 모든 만물을 주관하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아담 해와에게 소망의 한 기준을 허락하신 것이었는데, 인간시조 아담 해와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늘이 허락하였던 그 소망의 기준도 잃어버리고, 더 나아가서는 아담 해와가 완성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영원히 살 수 있는 행복의 동산, 즉 전체적인 이념의 세계까지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참다운 소망의 길을 잃어버린 인간들은, 이 땅에 태어난 이후 잃어버린 그 소망의 길을 다시 찾기 위하여 온갖 곡절의 노정, 싸움의 일로를 걸어나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들은 뼈저리게 체험하고 있는 바입니다.

세상에 태어나고 보니 소망이 없는 인간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지금까지 인간들은 알지 못하고 있었는데, 하나님의 긍휼하신 은사로 말미암아 인간들에게 하나의 소망의 약속이 세워졌습니다. 이것은 인간들 앞에 그 무엇보다도 다행한 일이요, 복이라면 이 이상 더 복된 일이 없을 정도의 복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까지 우리 인간은 영원하신 하늘을 중심삼고 무한한 소망권 내에서 영원한 생명을 구가하며 사는 존재가 되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은 인간들이 그런 소망권 내에서 살지 못하는 것을 긍휼히 보시고, 인간으로 하여금 비참한 생활 환경을 넘어서서 소망의 한 길을 개척해 나갈 수 있도록 해 주시기 위해 무한히 애쓰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땅 위에 태어난 인간들 가운데는 소망을 갖고 사는 사람들이 있고, 소망을 갖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소망은 인간을 중심 삼은 소망과 하늘을 중심삼은 소망의 두 가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태어난 그날부터 어머니 품속이 그 무엇보다도 자기에게 제일 좋은 것으로 알고 자라나지만 자라면서 어머니의 품을 떠나게 되고, 다음에는 친구들을 사귀어 친구들이 제일 좋은 것으로 알고 지내지만 친구들과도 헤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점점 자라면서 사랑하는 부모도 자기 소망의 전체가 못 되고, 사랑하는 부부도 자기의 소망의 전체가 못 되고, 더 나아가서는 사랑하는 자녀도 자기 소망의 전체가 못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인간들이 많은 것을 소망하지만 소망하는 그 마음이 사라지고 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가정에 대한 소망, 혹은 국가에 대한 소망, 더 나아가서는 세계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지만 연령이 많아짐에 따라 그 소망하는 마음이 점점 약해져가는 것이 사실입니다.

땅 위에 살고 있는 인간들 중에는 그 소망을 자기의 전체 소망으로서 자랑하고, 자기의 생명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살아가 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인간은 그렇게 살다가 최후에는 죽음과 싸워서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되는 운명에 봉착하게 됩니다.

​2. 죽음을 이길 수 있는 소망

​인간은 일생 동안 온갖 소망을 품고 살지만 나중에는 죽음에 부딪쳐 자기가 품었던 소망의 전부를 다 버린 채 가고 만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살기를 바라고 내일도 살기를 바라며 새로운 소망을 찾아 헤매고 있으나, 죽음에 부딪치게 될 때에는 소망을 갖지 못한 채 절망하면서 최후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인간이 자기를 중심삼고 볼 때는 소망을 가진 듯하나 죽음의 고개를 넘을 수 있는 소망을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소망을 갖지 못한 채 사라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일생의 본으로 알고 죽어갈 것이냐? 그렇지 않으면 죽음도 비웃고 넘어설 수 있는 하나의 소망을 찾아 그 소망을 즐기면서 갈 것이냐? 이것이 오늘날 땅 위에 살고 있는 인간들이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될 중요한 문제라고 봅니다.

오늘날 세상만사는 다 지나가 버리고 맙니다. 가정도 지나가고 국가도 지나가고 세계 혹은 어떤 주의도 다 지나가고 마는데, 최후에 남아져야 할 것은 무엇이냐 하면, 죽음과 싸워 승리할 수 있는 하나의 소망일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런 소망이 없다면 우리는 인생의 패배자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태어나면서부터 세상 사람들이 바라는 일체의 소망을 거부하고, 생활하면서 인간적인 것 일체를 거부하고, 인간 세상의 소망이 아닌 새로운 하늘의 소망, 영원한 소망을 품고 사는 무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늘은 인간적인 소망을 중심삼고 살고 있는 지상의 인간으로 하여금 새로운 소망을 갖고 죽음의 고개도 넘을 수 있고, 영원한 세계를 흠모하면서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무한히 애쓰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땅 위의 어떤 소망을 품고 살 것이 아니라 죽음 까지도 넘어설 수 있는 소망을 품고 영원한 소망의 세계를 꿈꾸며 생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하여 우리들도 지금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예수께서 온갖 고난과 죽음을 이기실 수 있었던 이유

​예수님은 인간들이 품고 있는 지상의 소망 일체를 어렸을 때부터 다 버리고 사신 분이었습니다. 어렸을 적부터 자기 가정도 버리고, 자기의 환경도 버리고, 또 자기의 교단도 버리고, 더 나아가서 자기의 국가까지 버릴 수 있는 소망, 어느 누가 움직일래야 움직일 수 없는 하늘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소망을 갖고 살았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어린 마음에 품었던 그 소망은 어떠한 어려운 환경에 부딪칠지라도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철두철미한 불변의 소망이었던 연고로, 꾸준히 자기 갈 길을 달려갔다는 것을 우리들은 다시 한번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열두 살 되던 해에 부모와 함께 예루살렘 성전에 갔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모는 먼저 돌아오고 예수님만 그곳에 혼자 남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그의 부모가 예수님을 찾으러 왔을 때에, 예수님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눅 2:49) 하고 도리어 부모를 책망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오직 아버지에 대한 소망만을 품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께서 철이 들면 들수록 주위환경을 정리하기 위하여 무한히 애쓰셨다는 것을 알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하늘을 위한 신념을 가지셨습니다. 예수님이 가진 그 신념은 어느 누구도 갖지 못한 신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소망의 왕국을, 새로운 소망의 세계를 건설하겠다는 신념을 가졌기 때문에 그의 나아가는 길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것들이 그가 품고 있던 소망을 제거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생애 기간에 요셉가정에서 목수의 일을 하셨는데, 자유롭지 못한 환경, 내적으로 고충을 느끼는 환경에도 불구하고 물러서지 않고 그 자리를 극복해 나갔습니다. 하늘을 위하는 마음, 간곡한 소망을 품고 싸워 나가셨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30살이 되매 뜻을 품고, 새로운 각오와 결의를 하고, 모험의 길로 나서게 될 때에 주위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는 길을 옹호하지 않았습니다. 가정은 가정대로 핍박하고, 교회는 교회대로 핍박하고, 사회는 사회대로 핍박했습니다. 어느 누구도 예수님을 돌아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낙망하실 수밖에 없는 자리에서도 그 어려움을 뚫고 나온 것은, 어느 누구도 가지지 못한 신념, 즉 하나의 소망을 가지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러한 소망과 신념을 품고 어떠한 어려움도 극복 하면서 모든 환경을 정리하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열두 제자를 세웠으나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는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면 몰릴수록, 어느 누구도 그의 심정을 알아주지 못하면 못할수록 그가 더 간절히 생각한 것은 무엇이뇨? 그것은 아버지의 나라였습니다. 아버지의 심정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싸움과 어려움에 부딪쳤지만 그것들이 한번 품은 예수님의 그 소망의 심정을 물리쳐 낼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면서부터 소망을 붙들고 끝까지 싸워 나갔습니다. 교단과 민족이 예수님을 배반하고 제자들까지도 배반했지만 소망을 버리지 않았고, 더 나아가서는 자신이 십자가에 달릴 것을 알면서도 소망을 붙들고 후퇴하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물론 살아 생전의 생명도 귀하지만 죽음 후의 영원한 생명에 대한 소망의 마음이 더 컸기에 십자가의 길도 늠름히 넘어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통하여 하늘과 땅 앞에 소망의 전체를 실제적으로 증거하였던 것을 우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마지막 십자가 도상에서 “할 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라고 기도하신 예수께서는 그 마음에 죽음의 공포가 휩쓸면 휩쓸수록 소망의 날이 가까워온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철저히 느끼셨던 것입니다.

육신의 죽음을 넘고 난 후에는 새로운 소망의 세계가 그 앞에 전개될 것을 느끼며 그 세계를 동경하였다는 것입니다. 육신의 죽음 이후에 영원한 자유의 몸으로 부활하기를 소망하고 동경하였기 때문에, 죽은 후에 부활의 영광을 입을 수 있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4. 소망에 대한 자각과 신념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믿는 신도들은 땅 위에 남아질 수 있는 어떤 소망을 붙들고 사는 것보다도 영원한 세계에 남아질 수 있는 소망을 붙들고 사는 것이 얼마나 더 귀한가 하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기독교 신도들은 신앙생활을 통하여 중요시해야 할 그 영원한 소망을 중요시 하지 않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원한 세계와 연결될 수 있는 소망을 붙들고 그 소망으로 인해 모든 것을 희생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만 참다운 최후의 승리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뿐만이 아니라 과거의 모든 선지선열들도 죽음의 길을 개의치 않고 그 길을 갔습니다. 모든 사람이 비웃는 것도 개의치 않고 갔습니다. 핍박도 개의치 않고 갔습니다. 이와 같이 그들이 그 모든 어려움의 길을 걸어간 것은 그들이 어느 무엇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영원한 소망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세상적인 소망이 아니라 영원한 하늘을 통하여 자기 심중에 연결되어 들어오는 간절한 소망을 가졌던 연고로, 죽음의 길 핍박의 길 고난의 길을 개의치 않고 갔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 믿는 신자들은 소망에 불타는 마음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죽은 후에 이루어질 소망만을 갖고 믿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 소망을 현실로 끌어들여 현실 생활권 내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 승리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한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는 진정으로 승리한 신앙자라고 볼 수 있으며, 땅 위의 어떤 소망을 가진 자가 아니라 영원한 소망을 가진 자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이런 소망이 거짓이라면, 수천년 동안 하늘이 인간들에게 하늘 대한 소망을 가지라고 강조하였던 이 모든 사실들이 거짓이라면, 하늘은 말할 수 없이 거짓된 존재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을 기만하여도 이 이상 더 기만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인간들은 지금까지 마음으로 선한 것을 동경하고 더 좋은 것을 동경해 나왔습니다. 오랜 역사 과정을 거쳐오면서 하늘을 잊지 못하고 그 마음으로 사모하며 몸으로 노력해 나왔습니다. 하늘은 누구나 다 동경해야 하는 것이요, 모든 인간이 지향해야 할 하나의 목표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수많은 인류들이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하늘을 소망의 기준으로 대하여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여러분에게는 하늘을 소망하는 사무친 마음이 환경을 뚫고 나가도록 충격을 주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이것이 문제가 됩니다. 여러분 자신에게 주는 이런 충격의 횟수가 줄어든다 할진대, 여러분은 죽음에 봉착하여 쓰러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세상적인 모든 소망을 다 저버리고 영원하신 하늘의 소망을 붙들고 나아가야 되겠습니다. 세상을 중심한 일체의 소망을 밀어낼 수 있는 확고한 신념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그런 신념이 없다 할진대 여러분의 신앙생활은 정상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고통의 길, 핍박의 길, 혹은 죽음의 길을 걷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영원한 소망을 찾아 나서는 데 있어서, 내적 외적으로 어떠한 어려움이 부딪쳐 오더라도 이 소망과 바꿀 수 없다는 확고한 신념을 갖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렸을 때 품은 뜻을, 싸우는 중에도, 싸우다가 쓰러지는 그 자리에서도, 쓰러졌다가 부활한 후에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가졌던 소망을 일생 동안 저버리지 않고 하늘을 붙들고 싸웠던 연고로, 예수님은 만민이 살 수 있는 소망의 길을 개척하게 되었고, 만민이 의지할 수 있는 소망의 중심존재로 세워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여러분들은 무엇을 소망해야 되겠습니까? 죽음의 고개를 넘어 부활의 영광을 차지하고 싶은 소망, 부활의 영광을 차지한 후에는 하나님의 참다운 아들딸이 되고 싶은 소망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과 영원히 동거하고, 영원히 하나님을 위하여 살고, 하나님의 참다운 사랑을 찾고 싶은 소망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소망이 이루어질 때까지는 무한한 십자가의 길이 있을지라도, 무한한 고통이 여러분을 휩쓸지라도, 무한한 어려움의 고비 고비가 있을지라도 거기에서 후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당연히 이런 고통을 당할 것을 알고 그것을 몸으로 밀고 나갈 수 있는 확고한 소망을 가진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런 여러분이 되지 않는다 할진대 여러분은 최후의 승리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5. 소망과 실천생활

​예수님께서 왔다 가신 이후 열두 사도들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로마에 들어가 무한한 학대를 받았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혔고, 톱에 쓸려 죽었으며, 혹은 기름 가마에 넣어져 죽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소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소망은 죽음보다 더 강했고, 어떠한 고난보다 더 강하였으며, 어떠한 무기보다 더 강했습니다. 어떠한 권세보다 더 강하였고, 세상에서 자랑하는 그 무엇보다도 강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무엇보다 강한 소망을 품고 걸어간 그 터전 위에서 기독교가 세워졌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새로운 소망을 품고, 뜻을 세계적으로 세워 나가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처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자인한다 할진대, 여러분들은 자신들이 품고 있는 그 소망은 어떠한 힘보다도 강한 위력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될 것입니다. 죽음이 온다 할지라도 이것을 넘어설 수 있고, 전체가 사라지는 한이 있다 할지라도 이걸 넘어설 수 있는 위력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이런 변치 않는 소망의 주인공이 되어야만이 여러분은 하늘 앞에 설 수 있으리라고 보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잘 믿는다고 자기 자신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그렇게 자랑하던 사람들도 일시에 사라져 버리는 것을 왕왕 보아 왔습니다. 아무리 잘 믿는다고 자랑한다 할지라도 최후의 죽음의 고개를 넘어 승리한 소망의 한 중심존재로 서지 못한다 할진대, 그는 결국 인생의 패배자가 되고 만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들이 자신의 모든 것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소망, 단 하나인 내 생명보다도 더 귀한 소망을 품고 하늘을 위하여 충성하는 모습들이 되어 교회를 이루고 민족을 이루었다 할진대, 소망이 없는 이 땅 위에서 그 교회와 민족을 통하여 새로운 소망을 찾는 일이 벌어질 것이며, 소망을 찾지 못하여 헤매던 만민이 그들로 말미암아 새로운 소망을 찾게 되리라는 것을 생각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길을 찾아나선 여러분 각자 각자의 심중에는 어느 누구에게 자랑하지 않으면 안 될 소망, 만민 앞에 자랑하지 않으면 안 될 소망, 어떠한 공포와 죽음 앞에서도 자랑하지 않으면 안 될 영원불변의 소망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런 소망을 가지고 있다는 신념 밑에서 어떠한 어려운 환경에 부딪친다 할지라도 그것을 늠름히, 기쁨으로써 넘어갈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런 사람이 된다 할진대, 여러분은 세상의 기쁨을 차지하는 사람이 아니라 영원한 하늘의 기쁨을 차지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찾아진 생명은 이 세상에서 살다가 죽는 생명이 아니라 영원히 살 수 있는 생명입니다. 또 그런 소망을 찾는 사람이 있다고 할진대, 그는 인간들이 부르짖고 있는 사랑이 아닌,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영원히 살 수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또한 그러한 소망을 찾은 사람이 되었다 할진대, 그는 영원하신 아버지의 아들딸로서 만민 앞에 서기에 부족함이 없는 자격자라고 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땅 위의 소망이 아닌, 죽음의 고개에 막혀지는 소망이 아니라 죽음의 고개를 박차고 넘어설 수 있는 소망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이런 소망을 우리 자체가 갖지 못한다 할진대, 죽음의 고개를 넘어 우리를 찾아오신 하늘의 섭리역사는 실패로 끝나고 말 것입니다.

하늘은 우리 인간이 죽음의 고개를 넘고 난 후에야 영원한 소망, 영원한 행복, 영원한 이념이 있다고 강조하십니다. 실상 하늘은 이 죽음의 고개를 통하여 우리를 찾아 나오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죽음을 박차고 넘어설 수 있는 소망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런 소망이 없으면 우리들은 이 길을 넘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라는 말을 하였던 것입니다. 바울도 역시 그 누구도 갖지 못한 철저한 소망의 심정에 사무쳐 어려운 환경을 홀로 책임지고 싸워 나갔던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들이 알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하늘도 인간들에게 이 소망을 찾아 주기 위하여 수천년 동안 수많은 죽음의 고개를 개의치 않고 찾아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는 천적인 소망을 품고 죽음의 고개를 넘을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런 사람이 되지 못하면 영원한 하늘의 소망을 차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한 말이 아니라 하늘을 대신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것은 모순된 말씀 같으나 인간에게는 모순된 환경을 타개하고 나가야 할 생명의 노정이 남아 있는 연고로 예수는 이러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6. 최후로 남은 문제

이 말씀은 인간 세상의 소망을 소망으로 삼지 말고 영원한 소망을 소망으로 삼으라는 부탁의 말씀인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그 길을 가셨습니다. 소망 없는 이 땅 위에 소망을 세우고, 생명이 없던 이 땅 위에 생명의 길을 개척하고, 부활이 없던 이 땅 위에 부활의 길을 개척하신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그 소망을 어느 때까지 붙들고 나가야 하느뇨? 죽음의 길, 부활의 고개를 넘어서 아버지의 보좌 앞에 나아가 아버지의 참다운 사랑을 받을 때까지입니다. 여러분이 그때까지 그 소망을 붙들고 나갈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소망을 품고 그 소망을 바라보면서 결심하기는 쉬우나 소망을 붙들고 싸우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어떤 소망을 품기는 쉬우나 그 소망을 가지고 끝까지 살고, 만민이 그 소망을 갖고 살도록 그 소망의 일로를 개척하기 위하여 자신이 선두에 서서 죽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길을 늠름히 가셨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최후의 부활의 한 날, 소망의 한 날을 바라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바라고 있는 그 소망의 때는 만민이 즐길 수 있는 소망의 때로되 그 때는 쉽사리 다가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소망은 죽음을 이긴 자만이 소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소망은 하나님과 더불어 사탄과 싸운 자만이 차지할 것입니다. 그 소망은 하늘을 위하여, 하나님과 더불어 핍박을 받은 자라야만이 차지할 것입니다.

이런 때가 우리 앞에 온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이 생활 환경을 넘어서고, 죽음의 공포까지도 넘어설 수 있는 간절한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그런 간절한 마음이 여러분에게서 우러나지 않는다 할진대, 그 소망의 한 날을 여러분의 생활권 내에 끌어들여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다운 생활을 한다는 사람은 ‘내가 어떠한 모습으로 죽을 것인고?’ 하는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70, 80년 살다가 죽는 그 시간에야 ‘나는 어떠한 모습으로 최후의 한 날을 장식할 것이냐?’ 라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죽음의 자리에 가서 ‘다 이루었다.’ ‘아버지여, 내 영을 받아 주시옵소서.’라고 했습니다. 과연 그는 인생 행로에 있어서 승리하신 분이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앞으로 어느 한 날에 죽음을 당하게 되고, 죽음을 앞에 놓고 지난날을 회고해 보게 될 텐데, 그때 어떠한 한 마디의 말을 남기고 갈 것이냐 하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 길은 친구도 없는 길입니다. 사랑하는 부모도 없는 길이요, 사랑하는 형제도 없는 길이요, 사랑하는 부부, 사랑하는 자녀도 없는 길입니다. 오로지 혼자 가야 하는 길입니다. 다시 가볼 수도 없고, 갔다가 올 수도 없는 길, 한번 가면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길인데, 이 길을 가게 될 때에 여러분은 어떠한 마음을 갖고 갈 것인가? 여러분이 죽음에 봉착하는 그 순간에 그 죽음을 넘어설 수 있는 소망이 없다 할진대는 거기에서 마지막입니다.

오늘날까지 하나님의 뜻을 받들고 하나님의 뜻을 세워 나온 수많은 사람들은 어떠한 사람들이었느냐 하면, 죽음의 길 앞에서 후퇴한 자들이 아니라 죽음을 비웃고 죽음을 늠름히 넘어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하늘의 길을 세워 나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역사를 통하여 잘 아는 바입니다.

여러분은 각자 각자가 죽음에 봉착하게 되더라도 이것을 넘어설 수 있는 소망을 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길을 넘고 나면 나는 하늘 앞에 떳떳이 서게 될 것이라는 소망과, 마음으로 동경하던 세계 그 본향을 향해 기쁨으로 달음질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상세계를 소망하는 마음이 간절하여야만 죽음을 이길 수 있는 존재가 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세상만사는 다 지나가 버리고 맙니다. 사랑하는 부모, 사랑하는 아내, 사랑하는 모든 것은 다 지나가고 나중에는 죽음 앞에 봉착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죽음까지도 지나가 버리게 하는 승리적인 소망을 가진 자라야만이 하늘 앞에 설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땅 위에 살고 있는 인간들은 고통의 길이나 슬픔의 길을 원하지 않습니다. 어떤 기쁨의 장면이 있으면 그 기쁨의 장면이 지나가는 것을 애석하게 생각하고, 기쁜 사실이 있었다 할진대 그때를 그리는 것이 인간의 심성입니다.

​7. 소망을 성취한 하나님의 아들딸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은 슬픔과 기쁨이 뒤넘이치고 있는 세상입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모든 기쁨은 죽음과 더불어 사라지는 기쁨, 즉 죽음을 넘어서 남아질 수 있는 기쁨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슬픔이 죽음과 더불어 사라지고, 즐거움도 죽음과 더불어 사라진다면, 인간이 기쁨을 찾고 더 좋은 것을 바라며 영원한 세계를 동경하는 그 마음도 죽음과 더불어 끝날 것이냐? 아닙니다. 마음이 그런 방향으로 움직이고 심정이 그런 방향으로 움직인다는 것은 그런 세계가 실제로 있다는 증거입니다.

인간은 영물인 고로 그 생명이 영원합니다. 사람들이 하늘 앞에 충성을 다하고, 하늘을 위하여 죽음의 길도 가고, 많은 사람이 싫다 하는 길도 소망을 품고 간 것은 보통 사람들이 느끼지 못하는 것을 느꼈고, 보통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가치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랬기에 죽음의 길도 갈 수 있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동경하는 마음이 현실 생활에서 부딪치는 어떠한 역경과 어려움과 슬픔 혹은 죽음보다도 더 강하지 못하다 할진대, 여러분들은 죽음 앞에서 후회할 자요, 슬픔과 고통 앞에서 후퇴할 자밖에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의 고개를 넘어 영원한 세계를 가셨기에, 부활의 세계를 건설하였기에 오늘날 우리들도 어차피 죽음의 고개를 넘어가야 할 운명에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늘의 소망을 품고 사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뇨? 인간이 슬퍼하는 죽음의 고개도 기쁨으로 넘어설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하늘의 소망을 품는 자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죽음을 앞에 놓고 세상만사를 원망하고 탄식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기뻐하고 하늘 앞에 서서 자기의 죽음의 가치를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하늘은 이러한 소망의 아들딸들을 찾고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런 자리에 서서 하늘의 기쁨을 느낀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는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을래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하늘을 대하여 울부짖는 무리가 있다 할진대 하늘이 그 울부짖음에 응답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 자신은 그러한 심각한 자리에서 오늘날까지 어느 누구도 갖지 못했던 소망을 갖고 하늘 앞에 울부짖으며 호소한 때가 있었느냐? 그런 자리에서 사망의 권한을 물리치고, 승리의 기쁨을 느끼고, 영광을 하늘 앞에 돌린 때가 있었느냐? 그러한 일을 이 육신이 죽기 전에 땅 위에서 체험하지 않는다 할진대, 그는 하늘 앞에 설 수 있는 영원한 소망을 가진 자라고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는 그런 심정에 사무쳐 있었습니다. 그래서 뭇사람이 배척하는 자리, 원수들에 의해 죽음을 당하는 자리, 즉 세상에서 더 이상 말할 수 없는 불쌍한 처지에 봉착했을지라도 자신의 불쌍한 처지에 대한 안타까움이 아니라 하늘의 소망의 심정에 사무쳐서 원수를 대하여 복 빌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들은 깨닫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들도 자신이 갖고 있는 소망은 억천만금을 주고도, 이 땅 위의 어떠한 귀한 것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것이요, 내 생명을 희생시키고서라도 이루지 않으면 안 될 귀한 소망이라는 불타는 마음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런 마음이 확실히 자리잡지 않는다 할진대 하늘은 여러분을 믿어줄 수 없다는 것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 심정이 되어 있지 않는 한 하늘은 여러분을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늘은 세상만사는 다 버리면서까지 하늘의 소망을 붙들고자 하는 아들 딸, 하늘이 믿고 영원히 사랑할 수 있는 아들딸들을 수천년 동안 찾아 나오셨습니다. 여러분들은 이것을 깨달으시고 이제 소망을 가지고 살고, 소망을 세우기 위하여 싸우고, 소망을 성취하기 위하여 죽음도 개의치 않고 나서는 사람들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기 도>

아버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참을 아신 그날부터 가진 그의 소망은, 철이 들면 들수록 가정을 넘어 민족을 넘어 국가를 넘어 세계를 넘어 무한한 영계까지 넘어서 아버지와 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고, 또 모든 것의 시작도 끝도 아버지와 더불어 움직여야 된다는 것을 아시고, 어려운 길, 슬픈 길, 십자가의 길을 개의치 않고 가셨다는 것을 저희들은 잘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님,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어차피 지나가는 인생길을 걷고 있습니다. 저희의 눈 앞에 보이는 모든 것이 아름다운 것 같으되, 그것들은 한낱 저희와 더불어 지나가는 현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저희들이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저희가 좋다 하고, 저희가 믿고, 저희가 의지하던 세상의 일체는 저희 마음의 세계와 영원한 소망의 세계에는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아버님이시여! 이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오직 아버님을 중심삼은 소망이 저희 생명의 전체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생애의 전부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님을 위하고 아버님을 향한 소망이 저희의 어떠한 것보다도 더 귀중하고, 저희의 생명보다도 더 귀중하기에 그것을 붙들고 싸워 나가는 자가 되지 아니하면 아버지의 아들딸들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죽음의 고개까지도 비웃고 넘어설 수 있는 강한 소망을 저희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것이 소망으로써만 끝날 것이 아니라 이 소망에 불타는 충격의 마음이 더욱 강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그 마음과 몸이 이 길을 향하여 달음질칠 수 있는 아들딸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을 위하려는 소망의 일념이 강한 자가 아니고는, 죽음의 길까지 넘을 수 있는 소망을 가진 자가 아니고는, 당신이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을 저희들이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저희들의 소망은 몇 년 동안 붙들고 나갈 소망이 아니라 영원토록 붙들고 나가야 할 소망인 것을 알고, 나아가 그 소망이 없으면 살 보람이 없다는 것을 아는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이시여! 저희가 아버지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아버지가 그리워지는 소망의 심정, 아버님의 생명을 그리워하는 소망의 심정, 아버님의 사랑을 그리워하는 소망의 심정을 갖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그리하여 아버지의 약속과 더불어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아들딸로 세워 질 때까지 간절한 소망의 마음을 저희의 생애노정에서, 생활에서 빼앗기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수많은 사탄들은 이것을 빼앗기 위하여 저희들을 침범하고 있음을 알고 있사오니, 당신이 허락하신 소망의 마음을 끝까지 붙들고 싸워서 아버지 앞에 영광을 돌려드릴 수 있는 아들딸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최후에 남겨진 싸움터에서 아버님의 소망을 붙들고 사탄과 싸워 승리하여, 아버지 앞에 영광을 돌려드릴 수 있는 아들딸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히브리서 11:1-32

<기 도(Ⅰ)>

오늘 불초한 저희들이 아버지 무릎 앞에 다시 찾아 나왔사오니 긍휼히 보시옵소서.

저희의 마음과 몸이 아버지의 지체로 인정받을 수 있는 자리까지 저희들을 이끌어 주시옵길,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많은 사람들이 천성을 향하여 출발을 하고 있사오나, 아버님의 심중을 바라보고 나가는 참다운 아들딸들이 얼마나 되는지 생각하게 될 때, 염려하는 마음 갖고 아버지 앞에 서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버님께서 저희를 부르시고 찾으신 지가 6천년이었사옵니다. 만물의 주인으로 친히 저희를 부르시고 찾으셨사온데, 저희가 그에 합당한 기쁨의 열매로서 아버지의 무릎 앞에 나와 있는가 스스로 생각하게 될 때에, 저희 자신들이 살아왔던 과거의 모든 것들을 아버지 앞에 다시 뉘우치지 않으면 안 되겠사옵니다. 평소에 저희들이 움직이는 것 전체도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되겠사오며, 오늘을 계기로 하여 내일 또 움직이는 전체의 모습을 처량하게 바라보면서 뉘우치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서 있음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하늘이 고대하시는 본래의 모습은 영광의 모습이었고, 찾고자 하시는 모습은 자랑스런 모습이었사오나 오늘 저희들은 그러한 모습이 되지 못하였고, 부르실 수 있는 참된 본연의 모습을 갖추지 못하였사옵니다. 이렇게 자탄할 수밖에 없는 자아를 발견하게 될 때, 아버지 앞에 면목 없는 자신을 뉘우치는 간곡한 마음이라도 가질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하늘을 향하여 나서게 될 때 어느 누가 아버지의 아들딸이 되고 싶지 않은 자가 있겠사오며, 하늘을 향하여 희생의 제물이 되겠다고 맹세하지 않을 자가 어디 있겠사옵니까? 그러나 아버지의 참다운 아들딸로 선 자가 심히도 적었사옵니다. 맹세한 자들을 취하여 이끌어 나오셨사오나 하늘이 자랑할 수 있는 모습으로서 나타난 자가 심히 적었던 것을 역사 과정을 통하여 저희들이 잘 알고 있사옵니다. 저희들이 지닌 모든 타락의 흔적과 허물들을, 아버지,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하늘은 참다운 마음으로, 참다운 심정으로, 참다운 행동으로 저희를 찾아오셨사오나, 참 것으로 대하지 못한 모든 불비함을 용납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저희는 아버님께서 함께 손길을 붙들고 땅을 바라보고 눈물지을 수 있는 참다운 아들을 그리워하시는 것을 알고 있사옵고, 딸을 그리워하시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버지의 손길을 붙들었다가도 저버리는 자리에 나감으로써 잊혀진 줄 알고 있사옵니다. 오늘날 저희들은 하늘을 향한 일편단심으로 내 몸을 거느리고 내 생명을 바쳐서 아버지의 손길을 붙들고 사정을 아뢸 수 있고 남아질 수 있는 아들딸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 이번 기간 저희들의 마음을 분별시켜 주시옵소서. 아버님이시여, 약속하신 그 때를 바라보는 저희에게는 부족한 점이 말할 수 없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걷고 있는 저희의 발걸음은 이미 지쳐 있사옵고, 바라보는 시선도 불비한 입장에 있사옵고, 하늘을 향하여 양심 깊은 곳에서부터 간곡하게 부르짖던 마음마저 사탄이 빼앗아 가려 하는 사실을 저희들이 알고 있사옵니다.

이와 같은 환경에 접할 적마다 하늘이 슬픈 심정을 가지고 바라보고 있는 사실을 저희가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참다운 선이 승리의 표적을 드러내야 할 때가 가까워오면 가까워올수록 저희를 붙들어 줄 수 없고, 권고할 수 없는 하늘의 내적인 사정을 저희들이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남아진 운명의 길, 원한의 그 길을 저희들이 스스로 걸어갈 수 있는 하늘의 정병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많은 사람이 하늘을 원망하고, 하늘을 배척하며, 하늘을 배반하는 자리에 설지라도 저희들만은 불변의 심정을 품고 아버지께서 기뻐하실 수 있는 환희의 한 날을 찾아가는 아들딸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 이날은 거룩한 날이오니 만민 위에 축복하여 주시옵고, 불쌍한 삼천만 이 민족을 아버지, 긍휼히 보시옵소서. 이들의 생명과 운명을, 발걸음을 책임질 수 있는 주인이 땅 위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먼저 부름을 받은 저희들이 아버지 앞에 믿는 자로서 그 책임을 감당하게 됨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저희 스스로 아버지의 존전에 나아가 믿을 수 있는 하나의 모습이 되어, 맡겨 주신 책임을 감당하지 않으면 안 되겠사옵니다. 그러한 전체적인 책임이 저희의 잔등에 지워져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는 저희들 되지 말게 인도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마음으로만 움직이는 저희들 되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저희의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아버지 앞에 바쳐 드림으로써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아들딸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날 이 시간에 제단에서 외로이 무릎을 꿇고 하늘을 향하여 기도하는 당신의 아들딸들을 축복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 오늘 이 시간까지 이끌어 주신 것을 감사하오며, 남기신 본향의 이상으로만 남아 있는 것을 알게 된 저희들, 이제 아버지의 심정을 일신에 지니고 그 이상을 지상에 실제로 이루어야 할 책임과 사명도 남아 있다는 것을 알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께서는 부족한 저희 인간을 구해 주시기 위해 나오셨사옵니다. 이제 최후의 승리의 한 날을 향해 가는 저희들, 기도하는 마음이 변하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불효하는 자리에 서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시여! 저희를 권고하시옵소서. 아버지의 그 뜻에 대한 전체의 책임을 진 저희들, 아니 갈래야 아니 갈 수 없음을 알고 있사오니, 끝까지 아버지의 명령 앞에, 아버지의 심정에, 아버지의 사랑에 불효하지 않는 아들딸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번 기간, 역경을 넘으며 섭리역사노정에서 슬퍼하시는 아버지의 심정을 느끼어 아버지 허락하신 뜻 앞에서 불효하는 저희가 되지 말게 인도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시간 저희의 몸 마음을 아버지 것으로 맡아 주시옵소서. 부족한 모습들이 아버지 앞에 모여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이고 아버지의 품에 안기기를 원하는 저희의 마음을 아시고 받아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나이다.

처음부터 끝시간까지 친히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기 도(Ⅱ)>

사랑하는 아버님, 저희들을 이 민족 앞에 세우시기 위해 저희들이 알지 못하는 가운데 수고하신 아버지의 눈물 자국이 저희의 주위에 흩어져 있는 것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 슬픔과 탄식의 사망권 내에 휩쓸려 하늘과 인연맺을 수 없는 불효의 자식들이었사오나, 내리신 은사 앞에 황공한 마음을 지니고 자신의 본성을 수습할 수 있는 하나의 모습이 되게 허락하여 주셔서, 아버지를 모실 수 있는 이 한 시간 되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님께서 오라 하시는 그 길이 있는 것을 안 그때부터 눈물의 길에도 아버지께서 같이하시는 것을 알았사옵고, 십자가의 길, 고난의 길, 슬픔의 길, 쇠사슬에 매이는 그 길까지도 같이하시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아들딸들의 배후에서 수고하시며 역사노정을 밟아 나오신 아버지의 그 가시밭길도 알고 있사옵니다.

오늘 저희들을 모아 놓으시기 위해서 저희가 알지 못하는 수고의 역사를 거듭하였던 것을 알고 나니, 이와 같이 수고하신 아버지의 면모를 마음으로 그리며 경배드리는 저희들이지만 몸둘 바를 알지 못하겠사옵니다. 아버지의 충격의 심정으로 저희 자체들을 사로잡아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하늘의 뜻이 있고 하늘의 소망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불리움 받은 저희였사오니, 오늘 저희에게 닥쳐오는 십자가의 길도 저희로 말미암은 것이 아님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천추만대의 후손까지도 선조들이 수고한 역사적인 그 인연의 길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 저희들이 무한한 기쁨과 무한한 행복과 무한한 소망을 품을 수 있는 마음을 가졌다 할진대, 그것은 저희 자신으로 말미암아 시작한 것도 아니요, 어떤 인간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라, 모든 것이 하늘로부터 시작하고 하늘로부터 움직였다는 사실을 저희의 몸 마음에 깊이 간직하여, 하늘이 움직이셨던 그 터전을 그리워하며 이것을 붙들고 눈물지을 줄 아는 아들딸들 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 외로운 이 한 자리에 찾아온 당신의 아들딸들, 이들이 갈 방향을 당신은 알고 있사옵고, 이들이 취하여 나아갈 길도 당신은 알고 있사옵니다. 이들의 마음의 시작도 자기로부터 시작한 것이 아니옵고, 이들의 권고의 자리에 서는 것도 자기를 위함이 아니고, 남을 위하고 아버지를 위함이었을진대, 끝까지 그 심정이 변하지 말게 주관하여 주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남아진 고난의 이 한 기간을 통하여 아버지께 불효하여 떠나는 자들이 되지 말게 허락해 주시옵고, 섭리해 나오신 아버지의 슬픔을 느끼고도 이 어려운 시기를 넘어가지 못하는 아들딸들이 되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끝까지 아버님의 심정을 지니기 위하여 자기를 버리고 아버지를 염려하고 아버지의 심정을 위로할 줄 아는, 아버지의 사정을 이해할 줄 아는 아들딸들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스스로 섰다고 하는 자는 넘어지는 때가 되었사옵고, 스스로를 인식하는 길을 가는 자는 그만큼 하늘을 배반하기 쉬운 때가 왔사오니, 아버님이시여, 이 한 날 아버지 무릎 앞에 모인 당신의 아들딸들, 생명의 권고에 기뻐하는 모습들이 되어, 아버님께서 기쁨을 맛볼 수 있는 이 한 시간 되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시간, 저희의 마음엔 아버지의 것 외에는 일체 요구되지 않사옵니다. 이제 저희들은 오늘의 고난을 밟고 넘어가 약속의 동산을 바라보아야 되겠고, 영원한 축복의 하늘나라를 그리워해야 되겠사옵니다. 나타날 하나님의 축복은 말할 수 없이 큰 영광의 자리라는 것을 저희들이 알고 있사오니, 오늘의 저희들, 아버님에 대한 심정을 변치 않고 끝까지 참아 남아지는 무리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끝까지 싸워 아버지 앞에 설 수 있는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의 뜻을 염려하는 당신의 아들딸들도 있사오니 그들 위에 축복하여 주시옵고 권고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한 날도 외로이 지방에 널리어서 아버지 앞에 통회의 시간을 갖고 있는 자녀들이 있는 줄 알고 있사오니, 그들 위에 일률적인 은사의 손길을 허락해 주시옵고, 그들의 마음 마음을 분별시켜 주시옵고, 도중에서 쓰러지는 자들이 되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제 저희의 모든 것을 아버지께 드리오니 받아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옵고, 저희가 아버지의 은사를 입는 이 시간, 저희 마음이 아버지의 것으로 움직여 아버지의 승리의 영광을 체휼할 수 있는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남아진 이후의 시간을 맡아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주의 이름으로써 기도하였사옵나이다. 아멘.

<기 도(Ⅲ)>

아버님! 당신의 은사를 천만번 죽을지라도 보답할 수 없는 것들이 감히 아버지라고 부르게 된 것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저희가 아버님을 복된 아버지로 알고 부르는 것을 용납하여 주시옵고 존귀한 자리에 있는 아버지로서만 모신 것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는 만군의 아버지시요, 만우주의 주인이요, 만천하의 권한을 가지신 주인공이었사오나 아들딸들이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이렇게 불쌍한 사정이 처하여 계시니, 그 아버지의 심정을 이 시간 저희들이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로 하여금 남기신 섭리의 원한의 고개를 바라보고 패자와 같이 약한 모습들이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들이 못 갈지라도 아버지께서는 가셔야 할 섭리의 길이요, 또 저희들이 아버지를 저버릴지라도 아버지는 저버림을 당하시면서도 슬픔을 머금고 가셔야 할 길이요, 민족을 거치고 세계를 향하여 오늘도 십자가의 길을 개의치 않고 가셔야 할 아버지임을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정을 아는 자들이 땅 위에 심히도 적어 아버지의 서러움이 이 땅에 사무친 것이요, 아버지의 탄식이 땅에 닿아질 것이며, 아버지의 심판이 땅에 내릴 것을 염려치 않을 수 없사옵니다. 긍휼의 아버지, 사랑의 아버지, 오늘 저희들의 심정에 아버지의 약속의 뜻이 살아 있사올진대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목을 놓아 울면서 심정의 제단을 쌓는 사랑하는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6천년의 뜻이 이렇다는 것을 알고 나가게 될 때에 믿어 오던 자들보다도 더 믿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고, 어떠한 핍박에도 이기는 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고, 어떠한 외면에도 이기는 자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배반의 기수가 될 수 있는 저희들이지만 이 자리에 찾아왔사오니, 아버님을 향한 일편단심으로 변함없는 충효의 아들딸들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 저희들이 걷던 이 걸음을 멈추게 될 때, 민족의 서러움은 더 가해질 것이며 저희들의 탄식도 더 가해질 것을 알고 있사오니, 가야 할 길을 가게끔, 아버지, 재촉하여 몰아내 주시옵고, 아버지의 주장을 내세울 수 있는 핵심을 이뤄 놓게 끝까지 몰아내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하늘의 심정을 전하게 될 때에 아버님의 아들딸로 서지 않으면 뜻을 이룰 수 없다는 하늘의 사정을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님께서는 땅 위의 누구도 모르는 자리에서 이 때문에 번민해 오셨다는 사실을 저희들이 알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저희들 자신의 모든 것을 아버지 앞에 바치고 새로운 맹세와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 될 때이오니, 이 땅 위에 오셔서 서러움을 남기고 가신 그 예수님을 얼마나 마음에 모시고자 하였던가 반성하게 하여 주시옵고, 새로운 맹세와 각오를 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잠들어 있는 이 민족 위에 능력의 손길을 펴시옵고 성령의 단비를 내려 주시어서, 그들로 하여금 승리의 한 날을 자랑할 수 있고 아버지의 영광을 노래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들이 아버지 앞에 나서게 될 때에, 모든 어려움을 개의치 않고 갈 것을 각오하셨던 예수님의 그 외로운 심정을 체휼할 수 있었사옵니다. 이제 각오하고 나선 저희들이 품고 있는 소망을 자랑할 때는 왔사오니, 하늘 편에 서서 앞장서 나가게 하여 주시옵고, 하늘이 남기고 싶으신 것을 남길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이제 심정에 심정을 가하여 아버지를 위로하며 아버지를 위하여 싸울 수 있는 참다운 무리를 붙들어 주시옵길,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인간에 대한 섭리를 포기할 수 없는 아버지의 이념이 있는 것을 알고, 이제 나타나야 할 하늘의 진심을 알고, 맞고 돌아가야 하는 하늘의 슬픔을 아는 저희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참된 이스라엘이 되고자 충성하는 자들과 고락을 같이하게 품어 주시옵소서. 모세의 인도를 받으며 광야를 유리했던 무리들도 눈물어린 고통 가운데 있다가 뜻을 배반했던 사실을 알고 있사옵니다. 역사적인 전환의 기운이 오늘날 저희에게 나타나고 있사오니, 저희로 하여금 역사적인 해원을 하는 무리가 되게 하시옵소서. 아버지의 세운 뜻 앞에 있어서 자신이 부족함을 느껴야 되겠고, 역경 속에서도 아버지를 믿고 아버지의 제단을 건설 하고자 했던 모세의 심정을 대신할 수 있는 아들딸 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의 염려와 아버님의 고통과 아버님의 수고는 오늘 저희들이 당하는 것에 비할 바가 아니옵니다. 무한한 수고의 노정을 걸어가시고 걸어오신 아버지의 그 정상(情狀)을 바라볼 줄 아는 자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무한한 고통의 길을 걸어가시는 아버지의 성상을 바라볼 줄 아는 자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 저희들이 당하고 있는 억울함, 저희들이 받고 있는 비난, 저희들이 당하고 있는 핍박, 이 모든 것을 넘어설 수 있게 하여 주시옵고, 저희들이 어떠한 자리에 있다 할지라도 주저하지 않고 아버지를 위하여 나아갈 수 있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이 모든 사실을 저희들에게 깊이 알게 깨우쳐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오며, 최후의 승리의 터전 위에 설 때까지 아버지께서 염려하시는 심정으로 권고해 주시옵고, 그 모든 것을 개의치 않는 아들 딸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 이 시간 모였사오니 하늘의 권고가 저희의 마음 몸 위에 나타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저희에게 슬픔이 있고, 저희에게 외로움이 있고, 저희에게 어려움이 있다 할지라도, 아버지라고 부를 줄 아는 의식을 가진 자라 할진대는, 감히 자기라는 존재의식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이 시간 친히 개개인의 마음 몸 위에 찾아와 주셔서, 아버지, 생명의 일체감을 느끼게 하여 주시옵고, 영광의 은사를 가해 주시옵소서. 끝날까지 참아 남아질 수 있는 새로운 각오와 새로운 결심과 새로운 맹세를 갖추고 나설 줄 아는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나이다.

이 시간도 외로이 아버지 무릎 앞에 엎드려 눈물을 머금고 있는 식구들이 있을 줄 아오니, 이 시간 그들의 아버지요, 그들의 친구로서 나타나시어 일률적인 역사로 대하여 주시옵고 권고하여 주시옵기를, 나의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한 시간 모든 것을 맡겼사오니 뜻대로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주의 이름으로써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기 도(Ⅳ)>

아버님, 이 시간엔 오로지 아버지의 심정에 어리는 저희의 마음 몸이 되게 허락해 주시옵소서. 본연의 그 마음에 어리는, 아버지의 심정에 이끌려 감을 느낄 줄 아는 이 시간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모습을 대하여 아버지에게로 달음질쳐 나아가 아버지의 목을 안을 수 있는 사무친 심정이 저희의 몸 마음에 싹틀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은은한 가운데 은은히 나타나셔서 저희 마음을 털어놓기 전에는 동하지 아니하시는 아버지이심을 알았사옵니다. 이제 저희의 마음이 더럽혀졌을 망정 아버지를 향하는 충심만은 갖고 있사오니, 아버지, 이 심정을 통하여 저희들을 찾아 주시옵고, 이 심정을 통하여 명령하시옵소서. 몸의 부족함을 뉘우치고 과거의 생활이 불충했음을 깨달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을 흘리며 아버님을 내 아버님이라 부를 수 있는 간곡한 심정이 우러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하늘은 그 누구도 보호하기를 주저하지 아니하시는 것을 알았사옵고, 하늘을 찾아 나오는 자의 친구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사옵고, 하늘은 하늘을 향하여 울부짖고 눈물 뿌리는 자들의 친구요 영원히 같이 살 아버지로서 나타나기를 즐거워하시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아버님, 은은한 가운데 권고하시던 아버지의 음성이 그립사옵고, 은은한 가운데 품어 주시던 그 놀라우신 사랑의 감촉이 그립사옵니다. 그러한 저희의 마음을 통하여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한 순간이 그리워지옵고 손을 들어 내 아버지라 자랑하고 싶고 부르짖고 싶사옵니다.

멀리 멀리 계신 아버지이신 줄 알았더니 저희의 마음속에 계셨고, 그 아버지를 만나던 순간이 기뻤사옵니다. 멀다 할 때 가까운 심중에 계셨고, 심중에 계시다고 안심하고 있을 때 멀리서 부르짖으시던 아버님이셨사온데, 오늘날 인간들은 여기에 박자를 맞출 줄 모르고 있사옵니다.

나를 버리신 줄 알았던 그 자리가 아버지와 가까운 자리요, 나와 함께 계시지 않다고 생각했던 그 자리가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셨다는 것을 알지 못한 과거의 저희 자신들을 이 시간 뉘우치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랑하는 아들이라 명명하시옵고 사랑하는 딸이라 명명하시는 이상, 그 아들딸들을 고생의 자리에 두고 싶지 않으신 아버지의 마음을 몰랐사옵니다. 아버님의 곡절의 심정을 모르는 저희들은 수고의 길에 내놓으신 아버님을 매정하고 무정한 아버님이라고 알았고, 그 동안 아버님을 대하여 자탄한 때도 많았사옵고 원망한 때도 많았사옵니다. 아버지와 저희들 사이에 가로막힌 곡절의 벽을 알지 못하여 원망도 하였고, 배척도 하였고, 부정도 하였고, 불신하는 자리에 나간 것을, 아버지,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이것은 우리 조상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저끄러 놓은 죄상 때문이었고 인류 역사상에 원한의 핏자국을 남기고 선지선열들이 죽은 연고임을 알았사옵니다. 오늘 저희의 마음의 기준이 높은 자리에 있습니까? 그 마음을 불살라 없애 주시옵소서. 내 몸과 내 위신을 내세워 하나님을 대신하고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습니까? 아버지의 성상 앞에 면목 없는 이 몸을 치고 처참한 입장에 계신 아버지이심을 깨달아, 아버지를 부를 줄 아는 아들딸들 되게 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 많은 말이 필요치 않은 것을 알았사옵니다. 말씀을 전하였는데 행하지 못하는 무리를 보시고 하늘이 슬퍼하시게 될 때, 말한 자는 스스로 거짓말하는 자가 되었고 아버지의 슬픔은 날로 가중되었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처한 이 슬픈 사정을 하늘은 알고 있으나 땅 위의 인간은 모르고 있사옵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면서도 하늘은 그런 인간들을 저버릴 수 없어서 염려하시며 다시 권고해야 할 하늘의 입장임을 다시 알지 않으면 안 될 저희들을, 아버지, 용납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도 거룩한 날이라고 모였사옵니다. 말씀을 고대하여 모였사옵니까? 하늘의 은사를 고대하여 모였사옵니까? 그 무엇을 바라고 모인 줄 알고 있사오니, 이제 참된 자체를 바랄 줄 아는 자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참된 자체로부터 내려지는 말씀과 명령을 들을 줄 아는 자들이 되게 인도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제가 아버님의 뜻을 따라 40평생의 노정을 걸어오면서 슬픈 일이 있어도 낙망하기를 원치 아니하고, 시련을 당할 때 패배하여 후퇴하기를 원치 않았음을 아버지께서는 아실 것이옵니다. 아버지, 이제 남은 길에도 수없이 연속되는 고난의 역사가 남아 있는 것을 알게 될 때에 오늘의 불충함을 아버지 앞에 머리 숙여 아뢰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원컨대 역사의 서러움을 이 한 몸에 지니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남아진 고난의 전부도 이 한 몸을 제물삼아 하늘이 밟고 넘어가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 안식할 수 있으며, 모든 탄식을 저버리고 기쁨의 한 순간을 맞아 서로 목을 껴안고, 내 아버지요, 내 아들이라 부를 수 있는 그 순간이 그립사옵니다. 저희들이 어떠한 희생과 어떠한 각오와 어떠한 비참한 모습으로 땅 위에서 사는 한이 있더라도 그 충절의 일편단심만은 이 땅 위에 세우고 사라질 수 있는 아들딸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런 길을 가기를 각오하고 있는 저희들이오니, 아버지, 개의치 말도록 몰아 주시옵고 이끌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새로운 마음과 몸으로 각오하고 맹세할 수 있는 이 시간이 되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부탁하옵니다.

허락하신 이 시간 무슨 말씀을 하오리까? 아버지께서 나타내시고자 하는 것을 전하려 하오니, 그 심정 그대로 전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받는 자의 마음과 화하여 하나의 일체적인 심정이 되고 아버지의 크신 품에 안기어 아버지의 영광을 노래할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부탁하올 때에,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말 씀> 이 시간에 드리려 하는 말씀의 제목은 ‘신앙자의 태도’입니다. ‘신앙자의 태도’ 이러한 제목을 가지고 잠깐 말씀드리겠습니다.

​1. 신앙의 본질세계

​여러분들은 지금까지 믿는다고 자처하였습니다. 우리는 현실의 이 나라를 소망삼아 걸어나온 것이 아니라 영원한 나라를 소망하고 나왔습니다. 여러분은 그 나라를 본 일도 없고 간 일도 없습니다. 말씀을 듣고서 그럴 것이라 믿고 나왔을 뿐입니다.

그런 연고로 신앙의 본질이 현실의 모든 조건과 타당성을 갖춘 것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크고 무한한 하늘이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영원한 이념의 동산으로 존재하여, 나라는 존재와 상반적인 관계를 갖고 언제나 나의 이념을 재촉해야만 거기에서 신앙의 길이 계속될 수 있다는 것을 진정한 신앙생활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느끼리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소망하는 그 나라는 꿈으로나 상상으로나 또는 어떠한 지혜로운 추측으로써도 이렇다 하고 논리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것임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 세계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 세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의 무한한 세계인 것이요,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의 선과 행복과 사랑과 이념의 세계인 것입니다. 그 세계가 우리가 바라는 신앙의 나라, 우리가 살고 싶어하는 신앙의 천국입니다. 그 세계의 본질을 통해 신앙하는 사람을 땅을 중심삼고 보면 불쌍하다면 지극히 불쌍한 것이요, 외롭다면 지극히 외로운 것이요, 처량하다면 지극히 처량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자리에서도 하늘의 심정을 체휼하고 그 심정권 내에서 미쳐지는 충격과 자극을 느끼는 자가 있다면 땅 위의 어떠한 핍박이나 고통이나 죽음의 길이 가로막더라도, 그 사람이 가는 길을 막을래야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우리들은 먼저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2. 진정한 신앙자의 생활

​이런 심정이 마음을 격동시키고 그 마음이 몸을 재촉하여 사지를 움직이게 함으로써,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무한한 경지를 향하여 걸어 나가게 되는 생활의 일편 일편을 체휼하고자 노력하는 것이 바로 오늘날 속세에 살고 있는 신앙자의 생활이라고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이러한 감촉과 이러한 충격의 생활을 할 수 있고 멀리 있는 이념을 실제 생활의 힘으로 나타낼 수 있으며, 나아가 그 힘의 충격으로 주위에서 휩쓸려 들어오는 사망의 물결까지 밀어낼 수 있는 심적 기반을 닦아야, 하늘이 그러한 사람을 대하여 진정한 신앙자로 인정하리라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우리가 어떠한 입장에서 하늘을 향하여 부르짖게 될 때에, 거기에서 자아의 인식을 통해 느껴지는 것이 어떤 주의나 사상에서 느껴지는 그 무엇보다도 더 크고, 그것이 심적 혹은 육적, 또는 생활 환경의 핵심적인 빛의 가치로 나타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이러한 중요한 결정적인 입장에서 승리의 일로를 거쳐 나가는 놀음이 신앙생활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길에는 핍박이 가중되어 왔고, 슬픔이 가중되어 왔으며, 십자가의 길, 혹은 죽음의 길이 가중되어 왔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노정을 통하여 잘 아는 바입니다.

이러한 역사와 전통을 갖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 여러분도 이러한 역사적인 신앙노정을 배반해서는 안 될 입장에 처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들은 바른 신앙의 태도를 취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귀하다는 것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3. 어려운 신앙의 길을 늠름히 넘어가려면

​이런 신앙의 길을 가면서 어려움의 길, 핍박의 길, 죽음의 길을 늠름하게 넘어가기 위해서는 먼저 느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오늘날 여러분 한 자체가 생겨난 것도 자신이 생겨나고 싶어서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나라에 태어나고 싶어서, 이러한 나라의 백성으로 이러한 부자유스런 환경에 태어나고 싶은 의식이 있어서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도 알 수 없는 어떤 움직임에 휩쓸려서 이 땅에 태어났고 이러한 일을 한다는 것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자신에게 이러한 동기를 만들어 주었고, 이러한 과정을 거치게 하였고, 이러한 결과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한 것을 다시 생각하게 될 때에, 이 나라는 존재는 나 스스로 자랑할 나가 아니라 나에게는 역사를 들어, 전체를 들어 혹은 미래를 들어 이념적인 권내(圈內)에서 자랑하고 싶어하는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여러분이 이런 신념과 느낌을 갖지 못한다 할진대, 여러분의 신앙길에는 오늘날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복잡한 일이 벌어지게 되고, 슬픈 일이 미쳐지게 되고, 어려운 일이 미쳐지게 되고, 억울한 죽음까지 부딪치게 되며, 천륜의 인연을 저버리는 신앙자의 태도를 취하기 쉽게 되고, 하늘을 배반하기 쉬운 입장에 서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하나님의 이념에 대한 사무친 심정을 지녀야 되겠고 내 생활을 이 이념에 의해 관찰해야 되겠습니다. 무한한 신앙세계의 이념과 인연을 맺으면서 자신은 우주적인 인연을 빛내기 위한 하나의 제물이라는 것을 느끼면서 살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이념이 마음에서 사라지지 아니하고 그런 느낌이 심중에서 떠나지 않는 신앙생활을 하는 한 이 땅 위에 감히 여러분을 침범하거나 굴복시킬 존재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선조들은 이러한 인연을 많이 느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야곱이 이스라엘의 축복을 받고 시작된 그 민족은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이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선민의식이 유대민족사를 만들어 왔고, 복귀 섭리역사를 계승시켜 새로운 복지동산을 건설하는 노정에 있어서 소망의 터전이 되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비단 그 민족뿐이 아니라 민족을 거느렸던 민족의 지도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담 이후 1천6백년 동안 하늘을 저버렸던 인류 앞에 다시금 새로운 약속의 인연을 맺을 수 있게 하기 위해 노아를 찾아 세웠습니다. 그는 그 시대의 사람들이 우러러보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는 보잘 것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자신을 택하여 천추의 한을 푸시려는 하늘의 심정을 안 노아였기에, 노아는 하늘의 뜻, 하늘의 명령을 붙들고 120년 동안 모든 어려움을 극복해 나갔습니다.

노아는 하늘이 세워주고 불러주고 명령하였던 그 인연이 귀중함을 알게 될 때, 그 앎이 크면 클수록 하늘과의 인연이 큰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세월이 지나감에 따라 자신을 불러주신 하나님의 내적 심정의 뜻이 얼마나 컸었던가 하는 것을 더 깊이 느꼈던고로,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이 비웃고 배척했지만 노아는 120년 동안 방주를 만드는 생활을 저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4. 중심인물들의 마음가짐과 생활

​그의 동족들, 그의 친근자 등 모든 사람이 배반하였는데 오로지 그만이 하나님의 뜻을 배반할 수 없다는 철석같은 신념을 가졌던 원인은 무엇이뇨? 그래도 자기를 찾아주신 하늘의 인연이 자기의 형제를 저버리는 것보다 더 크고, 자기의 친척을 저버리는 것보다도 더 크고, 자기의 일생을 저버리는 것보다 더 크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이 허락하신 그 뜻 앞에 불쌍한 사정이 미쳐지면 머리를 숙이고 눈물로써 그 인연에 사무친 심정을 가지고 무한한 세계를 그리워했습니다. 이것을 여러분들은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노아뿐만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모세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호화찬란한 바로 궁중은 모세에게 있어서 영화를 누릴 수 있는 최대의 자유스러운 환경이었지만, 그는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이 역사적인 인연을 통하여, 선조들의 뼛골을 통하여 자기의 피 살에 뻗혀 있다는 것을 생각했기에 그것을 다 버렸던 것입니다. 바로 궁중에서 애급의 모든 문화를 통달하고 원수 나라의 모든 것을 알면 알수록 그는 내적으로 이스라엘 선민의 역사적인 인연을 알지 못하는 것을 슬퍼했을 것입니다. 민족이 민족의 서글픔을 알지 못하는 것을 슬퍼했을 것이에요. 자유로운 환경이 아무리 좋다 할지라도 선민의 후손이 되었다는 그 인연에 사무치게 될 때에, 그는 바로 궁중을 적대시하고 애급 백성을 원수삼아 나설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렇게 모세는 바로 궁중을 뒤로 하고 하늘과 인연이 있는 무리인 이스라엘 민족을 찾아 나섰던 것입니다. 뜻을 알고 있는 모세는 이런 심정을 품고 살아가고 있었으되, 그 뜻을 모르는 유대 백성은 그러한 모세를 알아보지 못한 연고로 여기에서 역사적인 슬픔과 탄식이 사무치게 된 것을 우리들은 다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민족을 찾아 주었던 모세는 민족조차 자기를 저버리자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동안 목자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그러한 길을 걸을지라도 하늘의 선민된 절개와 지조를 지니고 그 몸이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자기가 품은 신념을 그 누구에게라도 남기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그는 바로의 학정 하에서 신음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생각하며 눈물을 뿌렸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또한 그는 이스라엘 민족이 잠들어 있고 무지한 가운데 있을 망정 눈을 들어 축복의 땅 가나안을 바라보면서, 자지 못하며 심정의 피기름을 짜면서 민족을 위하여 기도했고, 민족을 대한 서글픈 심정을 갖고 하늘 앞에 통회하는 생활을 했습니다. 이러한 생활을 한 모세였기에 그 시대의 주인적인 책임을 질만하였고 하늘의 대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늘은 이러한 인연의 역사를 다시 찾아 세우기 위하여, 인연의 요소를 다시 갖추기 위하여 쓰러져 가는 이스라엘 민족 앞에 모세를 내세웠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역사를 통하여 알고 있습니다.

​5. 예수님이 지상에서 느낀 것과 각오

​그뿐만 아니라 그 외의 수많은 선지선열들이 걸어온 걸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담 해와의 타락 이후 4천년 만에, 타락한 아담의 모든 실수를 그 몸에 담당하고, 하늘의 슬픔과 만민의 슬픔과 온 만상의 슬픔을 그 몸에 지니고, 하늘의 탄식과 슬픔을 자아내게 하는 모든 흑암의 조건들을 홀로 담당하고 이것을 타파시키기 위하여 오셨던 제2의 인류 조상인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들이 회상해 봅시다.

예수님은 땅 위에 어떤 분으로 오셨던고? 그는 4천년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범죄로 인한 두려움을 느끼지 아니하고, 죄로 말미암은 슬픔을 감촉하지 아니한 사람, 즉 하나님께서 선의 감촉과 선의 심정에 사무쳐서 지으셨던 본연의 아담 해와를 그 마음으로 동경하였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인류의 참된 선의 조상이 되어야 할 아담 해와의 모습을 대신 복귀하기 위한 역사적인 인연과 하나님의 창조의 이념을 대신하여 왔다고 하는 신념이 사회의 어떠한 환경보다도, 살아가는 자기의 어떤 심적 동향(動向)보다도 컸 다는 것을 우리들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에게 외로움이 있다고 하면, 그 외로움은 하늘과 인연되어 있는 외로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외로움을 통하여 하나님의 외로움을 헤아리게 될 때에 자기의 외로움은 외로움으로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그 자신이 어떤 소망이나 이념에 사무칠 적마다 인류 앞에 그 소망과 이념을 소개해야 할 책임감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바라는 소망을 이루어 드려야 하고 선조들이 타락으로 저끄린 모든 죄상을 탕감해야 할 주인으로서의 책임을 진 자기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런 것을 느끼면 느낄수록 그는 타락한 아담을 원망하기에 앞서, 타락한 후손을 원망하기에 앞서, 나아가서는 천사장을 원망하기에 앞서 그 원망에 사무치는 마음이 있으면 있을수록 한걸음 더 나아가 창세 이후 4천년의 서러운 복귀역사에 있어서 하나님과 자기와의 관계가 아버지요 아들이라 할 수 있는, 하나님과 뗄래야 뗄 수 없는 자기 자체인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하늘은 아버지요, 땅은 어머니요, 자기 자신은 하늘땅을 대신한 아들로 태어났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비장한 자리에서 느껴진 그 인연의 충격으로 하늘을 바라볼 때에 하나님의 성상이, 땅을 바라보게 될 때에 땅의 성상이, 만민을 바라볼 때 만민의 성상이 자기와 영원한 인연을 맺어야 한다는 사실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을 우리들은 깨닫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자리에서 그의 마음에 사무친 것은 무엇이었던가? 기쁜 인연이 아니라 슬픈 인연을 느끼게 되었던 것입니다. 원래 인간은 기쁨의 인연을 갖추고 영원한 이념의 동산을 건설하여 하늘과 부자의 관계를 맺어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그 자신의 일체의 조건이 아버지의 기쁨의 조건을 자극시켜 드리고 그 기쁨의 심정을 노래해야 했으나, 기쁨의 인연을 맺지 못하고 슬픔의 인연을 맺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느끼면 느낄수록 슬퍼하며 통곡하지 않을 수 없었던 예수님의 심정을 여러분이 알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 서 있던 예수님은 4천년 동안 자기 선조들이 맺은 인연이 기쁨의 인연이 아니고 슬픔의 인연인 것을 알았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슬픈 세계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슬플 적마다 각오하였고, 어려울 적마다 각오하였던 것입니다. 그러한 예수님이었음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천륜의 기쁨의 제단을 갖추어 서지 못하는 민족과 유대교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슬픔은 컸습니다. 교단을 알고 보니 안 만큼 슬프고, 민족을 알고 보니 민족을 안 만큼 슬프고, 자기의 종족, 자기의 사정을 안 만큼 슬펐습니다.

이렇게 알면 알수록 그 앎이 기쁨의 조건이 되지 못하고 슬픔의 조건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슬픔에 연한 역사를 책임졌기 때문에 그 심정에는 말할 수 없는 슬픔을 느끼시고 애통함을 가지시고 가셨음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의 마음은 무한히 영광된 선한 인연의 세계를 그리워하였으나 그가 살고 있는 현실은 자탄할 수밖에 없는 무한히 슬픈 세계였습니다. 이렇게 두 교차점에 선 예수님의 사정을 안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6. 신앙자의 바른 태도

​그 예수님이 오늘날 우리들이 믿고 있는 예수님이시고 이 신앙을 세우기 위하여 생애를 바친 분이었음을 역사 이래로 신앙자들 가운데에서 아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러한 예수님을 붙들고 울 줄 아는 자가 이 땅 위에 없더란 말입니다. 이렇게 헤아려 보게 될 때, 예수님의 그 서러움에 하염없이 울 수 있는 마음이 여러분의 생활 속에 감돌고 여러분 자체를 휩쓸어 움직이는 느낌이 없다면, 이는 천국을 향하여 나아가는 신앙자라고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불쌍한 이 민족을 바라보게 될 때에 이 민족의 운명에 대해 슬퍼할 줄 알고, 하늘을 찾아나가는 교단들이 산산이 나뉘어 서로 싸우고 있는 것을 바라보게 될 때에, 여러분은 자신과 뗄래야 뗄 수 없는 인연을 가진 입장에서 그것을 바라보면서 예수와 같은 마음으로 역사를 대신하여, 현시대를 대신하여, 미래의 후손을 대신하여 슬퍼할 줄 알아야만, 여러분의 후손에게 이스라엘에 허락한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그 인연의 조건이라도 지상에 남길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바른 신앙자의 태도는 자기라는 것을 다 없애는 것입니다. 죽음의 고개까지도 넘어야 하늘과 기쁨의 인연을 맺고 사라지는 그 시간에 ‘아버지여, 예수님처럼 다 이루었습니다.’ 할 수 있고, 지금까지 맺어왔던 슬픔과 원한의 인연을 종결짓고 기쁨으로 얽힌 인연을 노래할 수 있는 순간을 소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자들이 소유할 것이 영원한 나라요, 이러한 자들이 살 곳이 하늘나라요, 이러한 자를 찾기 위한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통일교회를 찾아 들어온 여러분들을 보면 불쌍한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통일교회를 찾아 들어올 때에는 그 무엇인지 모르게 인연이 맺혀져 있기 때문입니다. 발길을 돌리려 해도 무엇인지 미련을 가지게 하는 인연이 여러분들을 끌고 있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룩된 아니 갈래야 아니 갈 수 없는 인연이 나로 말미암은 인연이 아니라면 누구로 말미암은 인연이었던고? 피눈물의 역사를 해원하기 위해 세운 선조들의 공적의 터전이 우리들의 배후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야겠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러한 감촉이 심중에 느껴질 때마다 자기 존재의식조차 잊어버리고, 쓰러지면서라도 하늘을 대하여 ‘아버지!’ 하고 부르고 싶은 마음이 폭발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최후에 슬픔으로 인연된 역사의 고개를 넘어 기쁨의 세계와 인연될 때에 비로소 주를 맞을 수 있는 자격자가 된다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여러분들도 그렇지만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 무엇인지 모르게 참을래야 참을 수 없는 서글픔이 북받치고 사무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나도 알 수 없는 역사적인 한의 인연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도 알 수 없는 천적(天的)인 인연과 지적(地的)인 인연과 인적(人的)인 인연이 오늘의 나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하늘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뇨? 땅 위에서 슬픈 인연을 다 탕감할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이시여! 하늘의 슬픈 인연을 제가 다 탕감하겠사오니 슬픔으로 인연된 역사의 주인이 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옵소서. 슬픈 인연의 세계에서 남아지고 그 세계에서 하늘이 요구하는 모습이 되고 민족이 되게 하시옵소서.’라고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이러한 마음을 가졌다 할진대는 수많은 십자가가 오늘 우리의 마음에 부딪혀 온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끝이 아님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 하심은 무슨 뜻이었던고? 하늘의 슬픔을 탕감하는 노정에서 자기 일신의 죽음을 통해 어느 한계까지만 다 이루었다는 거예요. 즉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죽게 되면 말할 수 없는 슬픔이 하나님의 심중까지 연결되어 들어가고 따르는 무리들에게 처참한 죽음의 길이 남게 되지만, 영적인 구원의 터전이 이루어지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자기의 죽는 것 정도는 늠름히 넘어설 수 있었다는 거예요.

​7. 참된 신앙의 길

​이러한 느낌이 여러분의 마음에 용솟음친다면 비록 가진 것이 없을지라도 하늘땅을 소유한 자요, 비록 동지가 없다 할지라도 하늘땅이 동지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된 신앙의 길은 인연의 역사를 이어나가는 길이요, 하늘과의 인연의 탑을 쌓아 나가는 데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느껴야만 되겠습니다.

세상의 친구도 사귀었다가 헤어지게 될 때에는 서운해 하고 슬퍼하거늘, 하물며 하늘을 중심삼고 나가던 인연의 노정이 끊어지는 그 순간은 어떠하겠습니까? 역사적인 슬픔의 순간이요, 천지의 슬픔의 순간이요, 인류와 천상의 슬픔의 순간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느낄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를 느끼는 자가 있다 할진대, 가도 가도 부족함을 느끼지 않을래야 느끼지 않을 수 없고 터져나오는 눈물을 참을래야 참을 수 없을 것입니다. 또 여러분이 원리를 통하여 배웠듯이 오늘날 우리 개체가 선 위치는 하늘 땅과 저나라에 있는 영인들의 한까지 해원성사해야 할 자리인 것입니다. 이러한 우주사적인 운명의 제단에 놓여 있는 여러분입니다.

이렇게 제물된 자신의 입장이 슬프다면 무한히 슬플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제물을 바라보고 있는 수많은 영인들의 슬픔, 제물을 바라보고 있는 수많은 민족의 슬픔, 제물을 바라보고 있는 하늘땅의 수많은 존재들의 슬픔이 여러분의 슬픔보다 더 크다는 사실을 안다면, 여러분은 하늘을 향하여 나가는 노정에서 낙망할래야 낙망할 수 없을 것이요, 탄식할래야 탄식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내 마음에 느껴지는 이러한 감촉, 내 마음에 인연되어진 이 충격이 어떠한 영원한 이념까지 인연맺기 위하여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기필코 이러한 이념을 성취시켜 그 세계에서 살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음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따라서 영이 있다 할진대 그 영이 즐겨 살 수 있는 그 세계까지 우리가 건설해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이 땅 위에서 인연된 그 폭과 높이로 말미암아 그 세계를 소유할 수 있는 권한이 좌우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에 여러분들은 이렇게 움직이거나 저렇게 움직이면서도, 혹은 기쁠 때나 슬플 때도 죄인이란 심정을 금할래야 금할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하늘을 찾아 나가는 신앙자의 길이라고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40년을 이 길을 걷고 있는 저 역시 각오하고 이 길을 나서게 될 때 ‘하늘이여! 제가 하늘을 찾아가고자 하오니, 오늘 하늘과 약속한 이 인연을 죽는 그 시간까지 저버리지 말게 하시옵소서. 하늘이 없어지고 땅이 없어지고 이 몸이 사라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 인연에 따라 살고 그 인연에 따라 죽을 줄 아는 사람이 되게 하시옵소서’라고 간구하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도 이러한 역사의 와중에서 한 시대를 살아가면서 어려움에 부딪치고, 십자가가 부딪치고, 핍박이 가중되는 그런 순간 순간 마다 하늘과 약속했던 자신을 그리워하며, 그런 환경에서도 하늘 앞에 눈물지으며 머리 숙여 자기의 미급함과 자기의 불완전함과 자기의 무기력함을 탄식하면서 하늘을 붙들고 울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하늘을 찾아가는 자의 발걸음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선생님이 가진 모든 것이 선생님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나의 모든 것을 여러분 것으로서 맺어주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역사적이요 시대적이요 미래적인 것으로서 남기고 싶어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심정을 통하여 인연되어 있는 민족인 것을, 종족인 것을, 개인인 것을 망각하면 안 됩니다. 내가 말하는 신이 거짓 되지 아니하고, 내가 바라는 이념이 거짓 되지 않는다 할진대, 여러분이 하늘의 뜻을 부정한 만큼 심판의 조건에 걸리지 않겠는가 염려됩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심정을 가지셨기에 죽어도 가야 했고 살아도 가야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자리에 계셨기에 만민이 동정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8. 선생님의 생각

​내가 알건대 여러분이 나를 따르고자 하고 스승으로 모시고 정성을 다 하려고 하지만 그 정성 그 모심을 받기를 주저하고 있는 스승인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왜냐하면 하늘이 이 땅 위에서 그런 한 날을 맞이하지 못하셨고, 내가 먼저 아버지 앞에 기쁜 마음으로써 성심을 기울여 매일 매일 경배드리지 못하고 모시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기쁨으로 하늘을 대하지 못하는 자신임을 너무나 잘 알기에 여러분의 성심을 거부한 때도 많았고, 하늘 앞에 울부짖는 애달픈 심정을 알지 못하게 잘라 버리는 것 같은 입장을 취할 때도 많았습니다.

이것은 나의 어떠한 욕망을 취하기 위해서 그랬던 것이 아니라 인연의 세계의 원한을 생각하고 현실 세계의 만상을 바라보게 될 때에 아니 그럴래야 아니 그럴 수 없는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이런 모양 저런 모양을 바라볼 적마다 거기에 싹터 있는 하늘의 슬픔을 염려하는 심정을 가진 자들이 되어 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늘과 만나서 좋아하였다면 좋아한 그것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의 슬픔이 있다 할진대는 그 슬픔이 오늘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소망이 있고 기쁨이 있다 할진대 그것은 말할 수 없이 큰 기쁨이요, 땅 위에 슬픔이 있다 할진대 그것은 말할 수 없이 큰 슬픔인 것입니다.

이러한 땅의 슬픔을 해원하고 아버지의 슬픔을 위로 할 줄 알며, 땅의 기쁨을 노래하여 아버지의 심정에 묻혔던 기쁨을 드러낼 줄 아는 주인공들이 어느 날에야 이 땅 위에 나타날 것인고? 여러분은 이러한 심정을 지니고 그러한 주인공을 만날 수 있는 인연을 무시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내가 여러분을 무시할 수 없고 여러분도 역시 나를 무시할 수 없어요. 여러분 끼리끼리는 눈물과 슬픔의 6천년 역사를 거쳐 만난 사람들입니다.

하늘은 하늘의 식구를 고대하였고, 하늘의 가정을 고대하였고, 하늘의 민족을 고대하였고, 하늘의 나라를 고대하였습니다. 그러기에 하늘의 나라를 고대하는 민족이 되지 않으면 그 민족은 사라질 것이요, 하늘의 민족을 바라는 가정이 되지 않으면 그 가정도 사라질 것이요, 하늘의 가정을 고대하는 개인이 되지 않으면 그 개인도 간 곳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말 것입니다.

​9. 하나님의 아들딸로 결정될 수 있는 자리

​나를 넘고 가정과 민족을 넘어 국가적인 하나의 기준을 세워 놓고 그 이념권 내에서 슬픔을 탕감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국가 형태의 이념을 찾아 세우기 위하여 6천년 동안 수고하신 아버지, 슬픈 인연을 넘은 국가를 소망하여 나오신 아버지를 위안할 수 있는 자격자가 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 자리에서 비로소 하늘의 아들딸로 결정 될 것이요, 그런 자리에서 비로소 하늘과의 인연이 회복될 것이며, 그런 자리에서 비로소 기쁨의 역사가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어느 민족도 주권이 없게 되면 오고 가는 사람이 농락하고, 지나가는 사람까지도 비웃을 수 있지만, 주권이 서는 그날부터는 어느 누구도 마음대로 지나갈 수 없고, 마음대로 농락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지상에 널려 있는 기독교인들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못되어 있습니다. 하늘 주권이 있는 하늘 백성이 못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늘의 백성이라 할지라도 그 백성을 거느릴 수 있는 주권을 갖지 못하면 그 민족은 농락당하고 저버림당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 60만 대중을 중심삼고 애급에 천국의 주권을 회복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하늘 주권의 나라를 소망하여 60만 대중을 인연의 땅 가나안을 향하여 광야로 내몰게 된 원인은 어디에 있었던고? 이런 저런 핍박을 받고 죽음의 고개를 거쳐서라도 하늘이 직접 움직일 수 있는 하나의 주권국가를 세워야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사망이 물결쳐 들어오는 광야로 이스라엘 민족을 내몰았던 하늘의 심정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어떤 민족이든지 국가 형태를 갖추어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주권을 회복하지 못하면 그 민족은 망할 수밖에 없고 유린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하늘의 섭리를 보게 될 때에, 세계에 널려 있는 기독교인들은 자기 교파를 위주하여 나갈 때가 아닙니다. 선민주의적인 사상을 넘어서 천민주의적인 사상을 하늘의 사상으로 알아야 합니다. 그 나라의 백성 된 위신과 절개를 가지고 천적(天的)인 인연과 지적(地的)인 인연과 역사적인 인연과 인간적인 인연을 맺고, 하늘을 중심하여 단결할 수 있는 제단이 나타나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제단이 나타나지 않는 한 지상에서 천국을 실현한다는 것은 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각자 각자에게는 수많은 원수들이 살았던 역사적인 인연이 있고, 농락당했던 수많은 선지선열들의 인연이 사무쳐 있고, 사탄으로 인해 하늘이 슬퍼하였던 뼈저린 역사의 인연이 사무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비록 만나는 것은 일개인이요, 대하는 것은 한낱 인간이지만, 하늘의 인연과 하늘의 사정이 얼크러져 있을지 모릅니다. 그 이면에는 우주사적인 인연이 맺어져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6천년 동안이나 하늘이 주권을 찾아 헤맸고, 하나의 주의를 찾아 헤맸고, 하나의 인연을 찾아 헤맸고, 참다운 심정을 갖춘 동지를 찾아 헤맸습니다. 모든 것은 출발에서부터 종결까지 이런 역사적인 인연을 거부할 수 없으며, 이런 통합적인 인연의 역사 과정을 상속하고 상봉하며 살아 나가는 신앙생활이라 할진대, 아무리 동지에게 결핍됨이 있고, 아무리 식구에게 부족함이 있고, 아무리 식구가 여러분에게 자극을 준다 하더라도, 어떻게 하늘과 인연맺기를 바라는 마음 이상의 분한 마음을 가질 수 있으며, 이 인연을 저버릴 때 느끼는 슬픔 이상 큰 슬픔이 어디 있겠습니까?

나라를 위하여 자기 일신을 돌보지 않고 충성을 다하는 사람을 충신이라 하고, 가정과 친척을 위하여 자기 일신을 저버리고 효성을 다하는 사람을 효자라 하고, 가정을 붙들고 자기 일신을 돌보지 않고 제물 삼아 산 여성을 열녀라고 하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인연의 역사를 바라보면, 하늘은 신랑이요 우리는 신부라는 인연을 맺고 있습니다. 우리의 시선을 통하여 바라보는 이 인연, 이 상대적인 인연에는 역사적인 시선이 주시하고 있고 역사적인 울부짖음이 메아리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런 인연의 심정을 느껴 아버지를 부를 수 있는 순간, 그 자아의 의식이 돌아오게 될 때, 그 나는 오늘의 나로되 이 땅 위에 한정된 나가 아니요 영원한 세계의 이념권 내에서 보장하는 나인 것입니다. 이러한 자를 하늘은 완성한 자라고 명명할 것입니다. 제가 알진대는 참된 신앙자의 태도는 무엇보다도 이러한 인연의 심정을 느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받은 바의 은사도 오늘의 기쁨의 인연이 미쳐진 은사가 아니라 역사적인 인연을 인계받은 은사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10. 하늘이 안심하고 명령할 수 있으려면

​오늘 나에게 하늘을 위하여 충성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 할진대 그 마음 앞에 먼저 머리 숙일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 마음은 나로부터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에서 자동적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어떠한 진리를 통하여, 어떠한 사정을 통하여, 하늘과 땅에 맺혀진 인연을 통하여 생겨난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마음에 느껴지는 것을 소중히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마음에 결심한 바를 소중히 생각해야 되겠고 마음에 맹세한 바를 소중하게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그 결심, 그 맹세, 그 심정에 느껴진 충격을 그날로 종결지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역사와 더불어 종결지어야 하고 역사와 더불어 해결을 지어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 하늘의 은사가 함께하는 것입니다. 그런 인연을 갖고 있는 고로 결심한 그 결심이 역사와 더불어 사라져서는 안 될 것이며, 혹은 맹세하였던 그 맹세도 역사의 해결점과 더불어 사라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런 책임적인 사명을 느끼는 자가 있어야만이 하늘은 안심하고 명령하실 수 있으리라고 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슬픔에 사무쳐 있다 하나 지금까지 하늘의 인연을 하루에도 몇 번씩 저버리는 마음을 지닌 사특한 인간을 대하는 하늘의 슬픔은 얼마나 크겠습니까? 하늘은 이러한 인간을 걸어 놓고 저울질하고 있다는 것을 느껴야겠습니다.

아니 갈래야 아니 갈 수 없는 인연이요, 벗어날래야 벗어날 수 없는 인연입니다. 천국에 간다 하더라도 벗어날 수 없고 지옥에 가서도 벗어날 수 없는 인연입니다. 그러기에 지옥에 가서 고통을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11. 본연의 인연 가운데서 살아야 할 우리

​여러분을 만난 시간이 짧다 하더라도, 하늘 앞에 은사 받은 것이 1개월, 2개월, 혹은 1년, 2년, 3년, 4년의 역사를 갖고 있어도 여러분이 그 기간만큼 은혜 받은 것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나는 하늘의 은혜를 받은 것이 6천년이나 되었소이다.’ 할 수 있는 감정을 느껴야 합니다. 그러한 마음이 우러나오면 여러분들은 하늘 대하여 황공할 것입니다. 천만번 죽어 마땅할 이 한 일신을 찾아 세우기 위해 수고는 하늘이 하셨는데 기뻐하기는 내가 하는 이런 사악한 여러분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연의 인연에서 살고, 본연의 인연에서 울고, 본연의 인연에서 죽는 무리, 그 무리가 역사의 주인이요, 시대의 주인이요, 미래의 개척자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늘은 이러한 자들을 모으기 위하여, 이러한 자들을 부르기 위하여, 이러한 자들을 세우기 위하여 인연맺는 역사를 포기하지 않고 섭리해 나오고 계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심판이 있다 할진대 이 인연을 저버린 자 이상 두려운 심판을 받을 자가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통일교회를 생각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여기에 있는 이 건물을 생각하는 자도 아니요, 세상의 어떤 진리를 믿는 자도 아니요, 여기에 모여 있는 이 무리를 생각하는 자도 아닙니다. 이것을 넘어 하나님과 인연 지어진 통일교회를 인식할 줄 알고, 그런 통일교회의 진리에 자복할 줄 알고 그런 인연으로 모인 통일교회 식구의 감정을 통할 줄 아는 사람이 바로 통일교회 식구입니다. 더 많은 말씀을 드리지 않겠습니다.

12. ​하나님이 고대하는 인간

​그 다음 신앙자의 태도는 어떠해야 되겠습니까? 고대하는 심정이 있어야 되겠습니다. 인연을 갖고 있는 연고로 고대하지 않을래야 고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하늘은 무엇을 고대하느뇨? 신앙자를 고대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 가운데서 실천하는 자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나도 신앙자가 되기를 고대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 가운데서 실천하는 자가 되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소망의 나라를 고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나라에서 생활할 수 있는 사람을 고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신앙이라는 명사를 걸어 놓고 고대하고 있으나 그러한 단계를 넘어서 생활적인 신앙을 해야 되겠습니다. 즉 하늘과 같이 생활하는 식구, 하늘과 같이 생활하는 백성, 하늘과 같이 생활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생활하면서 즐길 수 있고 노래할 수 있으며, 영광을 돌려드릴 수 있는 신앙생활을 해야 되겠습니다. 하늘은 이것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역사 과정의 수많은 우리 선조들 앞에 신앙이라는 명사를 세워 놓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대해 고대한 것은 무엇이었던가? 그 자리에서 싸우고 있는 신앙자로서의 그 자체가 아니라 끝날까지 남아져 아버지와 같이 살 수 있는 사람을 고대하셨던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늘이 우리를 고대하였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고대하신 것은 신앙을 위하여 기꺼이 사라져 갈 수 있는 나, 신앙을 위하여 죽었다가 부활할 수 있는 나, 사망권을 벗어나 생명권 내에서 부활의 가치를 노래할 수 있고 영원한 세계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살 수 있는, 그런 나를 고대하고 계십니다. 이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하늘이 고대하던 나, 그 나를 그리워할 줄 알고, 그 나를 찾기 위하여, 그 나를 만나기 위하여 허덕이는 여러분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오늘날 여러분이 여기에 서 있지만 여러분은 하늘이 고대하는 그 나가 아닌 것을 잘 알 것입니다. 하늘이 찾고 있는 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하늘을 생각하는 마음이 있고, 하늘을 위하는 마음이 있고, 하늘과의 인연이 있다 할진대 본연의 나를 고대하는 간절한 마음이 자신의 생활 표준으로 세워져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나를 찾는 때에는, 그 나를 자랑하고 나의 가치를 노래하면서 그런 나를 찾던 아버지를 모시고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나를 고대하는 여러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 심정을 잃어버린다 할진대는 신앙의 길을 갈 수 없을 것입니다.

​13. 신앙자의 제일 표준이 되는 본연의 나

​사람은 자기를 중심삼고 시작하고, 자기를 중심삼고 해결짓고, 자기를 중심삼고 비판하여 나가는 길이 제일 효과적인 길입니다. 그런고로 여러분들은 하늘이 찾고 있는 상대적인 나를 추구하는 것보다도 상대적인 나의 가치를 추구하는 그 마음에 더(加)하여 직접적 인연을 가진 자기를 추구해야 하겠습니다. 그런 나를 찾기 위하여 울고 싸우고 하는 충격이 나에게서 시작하여 나 자신을 격동시켜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그 격동된 나와 소망의 내가 인연을 맺는 느낌을 가져야만 어려운 신앙의 행로를 무난히 돌파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겠습니다.

여러분이 따르고 있는 이 선생은 오늘의 인간을 대해 무한히 슬퍼하고 있습니다. 오늘에 처한 인연을 내적으로 무한히 저주하고 싶은 일면 소망하는 그 나를 대해서는 노래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와 같은 마음을 시간 시간을 통하여, 생애를 통하여 느낄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대인관계에 있어서나 교회관계에 있어서나 어떠한 환경과 처지도 개의치 아니하고 그런 나를 찾아가는 걸음이거늘, 그 일을 내 어이 저버릴 수 있으며, 내 어이 더디 할 수 있으며, 내 어이 주저하고 바라볼 수만 있겠습니까 하는 마음을 지녀야 하겠습니다. 그와 같은 노정에서 후퇴하는 자라면 바라던 그 나를 소유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나는 그 시간서부터 탄식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하던대로의 생활을 계속하면 탄식과 자포자기와 자멸적인 상태에 빠지게 될 것이고, 무능력하고 무기력한 자체를 탄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상적 신앙자에 제일 가까운 표준은 그 소망의 나를 찾아 고대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어느 한 날 그 나를 상봉할 것이냐 하는 심정에 사무쳐 있다 할진대 하늘을 바라볼 줄 알 것이요, 그 나를 찾기 위해 싸울 것입니다.

​14.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으려면

​하나님께서 창조이념을 세워 놓으시고 바라셨던 한 자체의 모습이 역사 과정을 통하여 소망의 모습으로는 나타났으되 실질적인 모습으로서는 나타나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6천년 역사노정을 참고 싸워 나오실 수 있었느냐 하면, 소망의 그날을 고대하는 마음이, 소망하는 인간을 고대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마음이 강하신 연고로, 이리 가도 저리 가도 언젠가는 그 실체적인 모습과 상봉할 날이 있을 것을 아시는 연고로 하늘은 지금까지 참아 나오고 계시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넘어 부활의 은사를 갖추었으나 그날을 자랑하지 못하고 ‘다시 오마.’ 하는 소망의 그날을 세워 놓으시고 가셨습니다. 그 이후 ‘다시 오마’하신 한 날을 그리면서 2천년 동안 싸워 오고 계십니다. 하늘도 이렇게 가거늘 땅 위에 있는 오늘의 우리도 그런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는 이 땅에 지어 놓으신 본성의 모습, 그 나를 세워 주기 위한 하늘의 수고의 역사가 있다는 것을 아는 무리가 되어야 하겠고, 하늘의 체면과 위신을 염려할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역사적인 소망의 그날을 노래하면서 나아갈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즉 영광으로 오시는 부활의 주님을 만날 나는 어떠할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그 나에 대한 확고한 기준을 가지고 이것을 찾는 날까지 어떤 일이 생길지라도 가겠다는 그러한 결의와 맹세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렇지 못했다 할 진대는 오늘날까지의 신앙생활이 오히려 나를 유린하는 생활이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예수 이후 2천년 역사 과정을 거쳐오면서 하늘은 다시 올 소망의 그날을 바라보면서 참고 나온 것입니다. 역사 행로의 발자취가 그러한 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땅 위에서 내가 식구를 위해 봉사하고, 내가 식구를 찾아가 권고하는 이 모든 것은 당연지사인 것입니다.

신랑 되신 주인공을 맞기 위한 그날을 찾아가는 데 있어서 그것은 신부로서 갖추어야 할 하나의 단장물이요 하나의 장식물인 것을 알고, 그것을 감사하고 그것을 즐거워하며 아버지 앞에 눈물을 지을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하늘세계는 멀고 무한한 세계입니다. 그 세계에 있어서 하나의 존재는 무한한 존재라는 마음을 갖고 하늘에 사무쳐 호소하는 자리에 나가게 될 때에 예수님께서는 나를 찾아 주실 것이고 소망으로 찾아온 나를 환대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한 시간이 여러분의 영적인 체험 시간이요, 영적인 면에 있어서 예수와 만나는 시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나고자 하는 마음이 여러분에게 사무치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그 마음이 없는 자는 아버지 앞에 세워질 제2의 자아를 찾을 수 없고 나아가 아버지 앞에 설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15. 신앙을 하는데 참을성이 필요한 이유

​그 다음에는 참을 줄 아는 자가 되어야겠습니다. 하나님도 참아 오셨습니다. 에덴에서 죄를 지은 그날부터 이날까지의 역사노정은 참음의 노정이었음을 부정할 자는 없을 것입니다. 민족을 대해 나오신 하나님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더라도 참으시며 눈물을 흘리신 길이요, 참으시며 피를 흘리신 길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더욱이나 기독교의 역사를 보십시오. 사랑하는 독생자를 원수들이 농락하고, 죽음의 제물로 사라지게 할지라도 하늘은 참아 나오셨습니다.

또 하늘이 택한 이스라엘 민족은 오랜 역사를 거쳐오면서 세계 어떤 민족 앞에 나타날 때도 유린당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몰리지 않은 시대가 없었습니다. 그러면 그 민족의 하나님이요 그 백성의 하나님이신데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참아 나오신 것은 무엇 때문인가? 참지 못하여 타락한 인간이 되었던 연고로 참는 자가 승리의 한 날을 세울 때까지는 하나님도 참지 않을래야 참지 않을 수 없는 운명에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참지 못하고 뜻을 어겼으니 참는 한 자체를 찾기 전에는 하나님의 심정이 해원될 수 없습니다.

즉 참아서 하나님의 심정을 해원해 드리고, 참아서 민족을 해원하고 우주를 해원하여 행복의 한 날을 소망하고, 싸움의 길, 핍박의 길, 죽음의 길에서도 남아지는 개인과 가정과 민족과 국가를 만나시기 전까지는 참아 나오신 역사를 종결지을 수 없고 심판의 행사를 할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렇게 6천년 동안 참아 나오시며 분한 마음이 사무쳐 있으시되, 심판의 권한이 있으시되 심판하지 못하고 참으시는 아버지의 서글픔과 아버지의 비통함과 아버지의 원통함이 있는 고로 참는 것으로 출발하고 참는 것으로 끝을 맺어야 하겠습니다.

기독교에는 심판이라는 명사가 있는데 그 심판은 무엇이뇨? 하늘이 참아 오신 역사를 종결지을 수 있는 한 때라는 것입니다. 하늘은 그런 한 때를 고대하며 참아 오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이 풀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통하여 풀 수 있습니다. 심판의 권한을 갖고 심판대에 나서서 원수를 심판할 수 있는 기독교가 되어야겠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겐 6천년을 참으신 하나님의 그 참으심이 뒷받침이 되어야 합니다. 역사노정에서 참으신 아버지의 심정을 체휼하고 또 인계받아 ‘아버님! 참으시던 심정을 풀어 놓으시고 나로 말미암아 해원성사 하시옵소서.’ 할 수 있는 각오를 가지고 나서는 자가 있어야 되겠습니다.

6천년 동안 하늘은 뜻을 세우시고 선열들을 대하여 시대 시대 또는 세기 세기를 거쳐오면서 말할 수 없이 무지무지한 싸움의 역사를 거쳐오면서 참아 나오셨습니다. 이렇게 참아 나오시던 하나님의 심정에 여러분의 전체의 마음을 다 합하여 참고도 남음이 있는 여유의 마음을 가지고 나타나야 하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참으시던 심정의 기준을 넘을 수 없고 그로 말미암은 해원의 기준을 세워 심판을 재촉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늘은 끝날에 7년 대환난이 있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예고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을 위하여 하시는 말씀이 종말에는 택한 자도 미혹하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또 끝날에는 이 환난 가운데서 끝까지 참는 자가 구원을 얻는다고 하셨음을 여러분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16. 참음의 종착지

​그러면 그 참음의 종착지는 어디인고? 인내의 종착점은 어디인고? 여러분은 그 종착점을 더듬어서 헤매어 봤습니까? 그곳이 아담가정이었습니까? 거기도 아니었습니다. 노아가정이었습니까? 거기도 아니었습니다. 역대 선지자들이었습니까? 거기도 아니었습니다. 오늘 내 한 자체에도 역시 참음의 역사가 남아 있고, 이 한 사회에도 참음의 역사가 남아 있고, 내 이후 후손에게도 참음의 역사가 남아지려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나는 참음의 왕자로서의 자격을 갖추어 아버지 앞에 나타나야겠습니다. 6천년을 참아 나오신 아버지를 위로해 드리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하늘 앞에 나가겠다는 생각이라도 하는 자들이 땅 위에 있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에게 참음이 있다 하지만 그 참음이 역사적인 참음의 종착점과는 먼 거리에 있는 것을 깨달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와 인연된 사람들이 ‘지쳐서 못 가겠다.’고 합니다. ‘통일교회는 좋지만 어려워서 못 가겠다.’ 하는 말을 듣게 되는데, 그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자일 거예요. 땅을 두고 보면 행복한 자일지 모르나 하늘을 두고 보면 불쌍한 자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과연 가기가 어렵습니다. 가는 길은 눈물의 길입니다. 보고 울고, 느끼고 울고, 싸우면서 우는 눈물의 길입니다. 눈물이 그칠 시간이 이때인 줄 알았더니 아닙니다. 눈물이 더 연속되어야 하는, 즉 더 참음의 눈물을 고대하시는 하늘의 심정이 있는 것을 알고 하늘이 처량한 모습들인 우리를 기다리는 것을 알게 될 때, 내가 참았다는 그 사실도 하늘 앞에 면목이 없습니다. 선생님은 해방 이후 오늘까지 나왔으나 아직까지 내 참음의 한계를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또 끝나기를 바라지도 않습니다. 끝나기를 바라는 그 시간서부터 자기를 살필 것이며, 그 시간서부터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신앙생활에서 느껴봐야 되는 것입니다.

참으신 아버지, 그 아버지가 내 아버지요, 참으신 그분이 나와 영원히 같이 살 나의 아버지며, 참으신 그분이 내가 모실 신랑이라고 여러분은 마음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거의 없을 것입니다. 하늘 앞에서 기뻐하고 영광을 누린 자가 있다 합시다. 그를 바라보고 부러워하는 것보다는 참음의 자리에서 늠름하고, 참음의 자리에서 태연자약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늘 앞에 참음의 모습으로 나타난 그 자가 오늘의 이 혼란된 역사에서, 참음의 역사 과정에서 행복스러워하는 자보다도 귀한 자인 것을 느낄 줄 아는 여러분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러한 심정으로 오늘의 이 혼란된 시대를 넘어갈 줄 모르는 자는 하늘에 대해 배반자가 되고 맙니다.

여러분에게 물질로 인한 고통이 있습니까? 이것을 참아야 되겠습니다. 지식으로 인한 고통이 있습니까? 이것도 참아야 되겠습니다. 내 일신에 대한 심적인 고통이 있습니까? 이것도 참아야 되겠습니다. 참음의 6천년 역사를 배반하는 그런 자가 되지 않기 위하여 참고 참고 또 참아야겠습니다. 망하는 줄 알았더니 남아진 것이 하늘의 역사요, 쓰러지는 줄 알았더니 소생해 나온 것이 하늘의 역사입니다.

여러분들은 사육신에 대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민족의 혼이 꺾어지려 할 때, 민족정신이 흐려지려 할 때 다시 민족을 새로운 소망으로 이끌어 줄 수 있었던 터전은 무엇이었던가? 그건 우리들이 알고 있는 성삼문을 비롯한 사육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참음의 길도, 죽음의 길도, 어떠한 고통의 자리도, 가혹한 창칼도 참았던 그 터전이 있었기에 우리의 민족정신을 떠받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하늘의 전통적인, 천적인 정신을 이어받을 자 그 누구뇨? 참음의 제단을 높이 받드는 자입니다. 참음의 제단을 받들고 하늘을 향하여 고대하고 있는 무리가 그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런 마음이 가공적이고 공상적이 아니라 실제적인 감정, 실제적인 촉감에서 느껴져야 하겠습니다. 그 느껴지는 것은 내가 참을 약속하고 맹세하였던 것과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비웃을 수 있고 그런 여유가 여러분의 뱃심으로부터 그 세포까지 움직여져야 합니다. 그런 충격이 없다 할진대 남아진 고난의 도수를 어떻게 채울 것인고? 민족이 넘어야 할 고난의 고개를 어떻게 넘어갈 것인가? 세계가 넘어야 할 고난의 고개를 어떻게 넘어갈 것인가? 하늘이 넘어가야 할 이 고개를 어떻게 넘을 것인가? 고난의 성을 쌓고 죽음의 성을 쌓으면서 참는 과정을 거친 후 복지가 나타나지 않는다 할진대는 하나님의 참으심도 어느 한 날에 끝을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17. 참된 지도자를 어디서 찾을 것인가

​오늘 우리들은 신앙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하늘의 이념을 찾아 나간다고 자처하고 있습니다. 내일의 생명을 노래하고, 내일의 소망을 찾고, 내일의 희망을 기준삼고, 내일의 나라와 내일의 백성, 내일의 민족, 내일의 가정, 내일의 나를 찾아 나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길인데 그 내일의 나와는 아직까지 거리가 남아 있습니다. 그 나는 오늘에 있지 않습니다. 여기서 찾다가는 전부 다 낙망합니다.

여러분의 주위에도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먼저 걸을 바의 고난의 길을 다 걸어야 되겠고, 고대할 바의 간절한 심정의 기준을 높여야 되겠습니다. 세울 바의 인류 역사가 남아 있는 한 이것을 청산하기 전에는 그날이 되어지지 않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의 걸음은 그 소망의 이념을 위하여 행차할 준비를 하고 출발한 하늘의 정병이거늘, 그 발걸음은 앞밖에 모르고 나가야 되겠습니다. 뒤에서 소리가 난다고 돌아보면 안 됩니다. 그것은 원수의 소리입니다. 옆에서 다정하게 군다고 가까이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내 생명을 노리는 원수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살아 나가는 환경에는 참다운 친구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살아 나아가는 데 있어서는 참다운 지도자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참다운 진리를 찾고 여러분이 참지도자를 찾는 자리에서만이 참다운 하늘의 지도자가 나타날 것입니다. 여러분이 거짓 된 마음을 갖고 있으면 아무리 참된 자라도 거짓 된 자가 될 것입니다. 역사 과정에는 아무리 참다운 생명의 인연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거짓 된 생명의 인연으로 나타나야 했던 곡절이 있었습니다.

참을 찾되 여러분의 마음에서 찾아야 합니다. 참의 스승을 찾되 여러분의 마음에서, 참의 집안을 찾되 여러분의 마음에서, 참의 고향을 찾되 여러분의 마음에서, 참의 나라를 찾되 여러분의 마음에서 찾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소망의 이념을 귀일점으로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나아가 그것을 중심하여 환경적인 어두움과 싸워 그 인연을 자랑해야 되겠고 갈급한 심정으로 소망이 이루어지길 고대하여야 되겠습니다. 이런 참된 자신의 모습을 자랑하며 주위의 환경을 해치고 나갈 때에 비로소 하늘의 역사는 가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최후의 승리의 결정선에서 최후의 한 발짝을 내디뎌 그 선을 끊어야 여러분에게 새로운 소망이 나타날 것입니다. 여러분이 새로운 날을 맞을 것입니다. 새로운 이념을 여러분 것으로 소유할 것입니다. 그 새로운 이념을 여러분 것으로서 인연맺기 위해서는 그와 같은 길을 가야 할 천적인 조건이 남아 있음을 우리들은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역사적인 운명을 앞에 놓고 가고 있는 우리들은 단단한 각오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이제 이런 견지에서 여러분 자신을 돌아가서 반성해 보십시오. 나는 과연 신앙자의 태도를 갖추고 있습니까? 소망의 마음을 세워 나오기 위한 신앙이었습니까? 그것을 바라던 나였습니까? 묵은 믿음을 갖고 다 될 줄 알고 모든 것을 해결짓고자 하면 그 길을 못갑니다.

바른 신앙의 태도를 지니고 가야 할 우리인 연고로 이제 우리에게 사망의 위력이 부딪혀 온다 할지라도 그 사망의 힘을 청산하고도 남음이 있어야겠습니다. 남아지는 흔적이 있어야겠습니다. 내 정열도 그렇고, 내 충성도 그렇고, 내 노력도 그렇고, 내 참는데도 그렇고, 내게 속한 모든 것이 남아지는 분야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늘의 상속의 제1기준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의 이 복잡한 유형을 거쳐 나가기 위해서는 그 소망을 찾아 나가야 합니다. 역사적인 인연과 시대적인 인연과 미래적인 인연을 마음에 품고 소망의 나 한 자체를 고대하면서 이것을 찾아 나가야겠습니다. 이것을 찾아 나가는 데는 무한한 원수들이 가로막을 것이나 이들과 싸우고 또 싸워야겠고, 나가고 또 나아가며 부딪치고 또 부딪쳐야겠습니다. 그리하여 참음의 제단을 내 어깨로 고이고, 발로 고이고, 손으로 고이고, 몸으로 고이고, 머리로 고이고, 참음의 고개를 넘기를 각오한 산 제물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참다운 신앙자의 태도를 지닌 자라고 볼 수 없을 것입니다. 하늘의 뜻과 하늘의 진리를 찾아 나가는 자라고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기 도>

아버지시여! 때가 가까워 오면 가까워 올수록 부활의 주를 만나기를 주저하는 마음이 우러나옵니다. 때가 가까워 오면 가까워 올수록 죽음의 슬픈 인연을 품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연상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형틀에 달려 돌아가신 그는 원한을 품고 가신 분이었음을 알았사옵니다. 그가 거니신 골고다의 산정은 인연의 눈물 고개인 것을 알았사옵니다. 그가 흘리신 피와 땀은 오늘까지 인연의 역사에 살아남아 인류의 심중 심중에 부활되어 들어가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이 모든 것이 인연의 역사적인 섭리의 뜻 가운데서 흘리신 피와 땀이었던 연고로 그 인연이 존재할 때까지 그 피와 땀으로 인해 모든 것이 움직여 나갈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오늘날 그런 심정에 사무치는 저희, 그런 경지에 있는 저희가 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렇게 가신 주님, 신랑 되신 주님은 인연의 역사를 거쳐 다시 찾아주마 하셨사옵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마음 몸을 기울여 저희를 찾아 세우고자 하는 심정이 간절하신 줄 아오니 저희들 자신의 모습을 갖추어 만민 앞에 단장된 모습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 간절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 길을 나가려니 악한 세상이요, 주가 가시던 그 길이 남아 있으므로 참고 또 참고 또 참아 민족의 남은 고개를 걸어야 되겠사옵고, 세계의 남은 고개를 걸어야 되겠습니다. 이제 땅에 남아진 십자가의 고개를 넘을 수 있는 순교의 역사를 참음으로써 지탱시키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저희들이 비로소 알았사옵니다.

저희가 이제 말씀을 듣고 보니 아버지 앞에 황공하옵고, 알고 보니 죄송한 마음이온데, 이제 무엇을 더 아버지 앞에 변명하며, 아버지 앞에 무엇을 바라겠사옵니까? 자랑할 아무것도 없음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새로운 마음으로 인연을 느끼고, 새로운 마음으로 고대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참으면서 아버지를 붙들고 통곡할 수 있는 그날까지 나아갈 수 있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시옵고, 맺혀진 슬픔의 인연을 넘을 수 있는 저희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기쁨의 인연을 자랑할 수 있는 그 시간까지 참고 남아져서 사망의 권한을 밟고 부활의 영광을 노래할 줄 아는 아들딸들 되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부탁하올 때에, 이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니다. 아멘.

마태복음 11:1-30

<기 도(Ⅰ)>

불초한 모습들이 아버님의 거룩하신 성상을 그리워하면서 다시 아버지의 존전에 나와서 마음 몸을 굽혔사오니, 긍휼의 은사로써 저희를 대하여 주시옵소서. 사랑하시기를 몇십만번 하셨던 아버지였사옵고, 참으시기를 수없이 해 오신 아버지였사옵니다.

저희를 버리시지 않고 새로운 사랑으로써 인도하시기를 쉬지 않으신 아버지시여! 오늘에 나타난 저희의 모습이 뜻 앞에 합당치 못하고 아버지의 마음에 들지 않을지라도 불쌍한 마음을 갖고 대하여 주시옵소서. 그래도 험한 세상을 피하여 아버지의 심정의 세계를 찾아들어가고자 하는 간곡한 마음이 있사오니, 이 마음을 보시사 아버지의 긍휼의 사랑을 가하시어 이 시간 용납하시옵고 찾아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의 사랑을 받는 그 한 자리는 지음받은 온 만물이 흠모하는 자리요, 과거의 수많은 인류가 흠모했던 자리이며, 현시대의 인간과 미래의 인간들이 흠모하여야 할 자리이옵니다. 이것을 생각하고 저희들이 아버님의 사랑의 심중에 안기려 하면 할수록 만물이 주목한다는 사실을 이 시간 느끼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저희에게 아버지를 나의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마음, 그 아버지가 나를 위하여 수고하신 아버지이신 것을 아는 마음, 아버지는 나로 인해서 슬픔에 잠겨 있는 것을 아는 마음을 주시옵고, 그 마음에 감격되어 아버지라 부르며 아버지를 붙들 수 있는 간곡한 아들의 모습, 딸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간곡한 심정으로 아버님을 찾아나서고, 아버님의 사정을 염려하면서 나타난 자는 아버지께서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저희의 마음이 아버지의 마음을 향해 달음질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저희의 몸이 아버지의 품에 안기기 위하여 달음질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분하고 서글프고 원통한 죄악사를 박차고 나설 수 있는 움직임이 이 시간 저희의 몸 마음에 충만하게 하여 주시옵고, 저희의 몸 마음을 충동시켜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는 자신 있는 발걸음으로 하늘을 찾아 나가지 못하는 연약한 자들인 연고로 아버지께서 신앙의 주인으로 계시길 바라오며, 땅이 험악하여 어려운 환난의 노정이 남아 있사온데, 거기에서 저희들은 지쳤을망정 하늘은 강한 모습으로 나타나기를 바라옵니다.

아버님께서 저희 인간을 찾아오셨다가 낙망하신 일이 많았던 것을 저희는 몰랐사옵고, 인간을 염려하시고 인간을 위하여 수고하시며 소망하시던 바가 저희로 말미암아 이루어지지 않을 때 아버님께서는 또다시 타격을 받고 돌아서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몰랐사옵니다. 저희의 소망보다 아버지의 소망이 크다는 것을 저희들이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는 저희가 연약할 때 강하기를 바라셨고, 뜻을 붙들고 섭리하실 때 강한 자를 찾으신다는 것을 저희가 잊지 말게 하여 주시옵기를, 나의 아버님, 진실로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저희의 마음은 아버님의 성상이 그립사옵고, 저희의 몸은 아버지의 형상을 바라보고 싶사옵고, 저희의 손은 아버지의 손길을 붙잡고 싶사옵고, 아버지의 몸을 붙들고 싶사옵니다. 그와 같은 참다운 아들딸, 당신의 사랑을 노래할 수 있는 아들딸들을 맞고자 하시는 것이 인간을 대한 아버지의 중심 소원임을 알고 있사오니, 저희의 마음만이라도 그와 같은 심정에 사무칠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날 저희는 죄악에 물들어 있사옵고, 흑암 가운데 있사오며, 그동안 저희의 감각과 저희가 가지고 있는 오관은 아버지의 슬픔과 탄식을 느낄 줄 모르고 아버지의 서러운 심정을 망각한 채 저희 자신의 서러움을 호소하기에 급급하였사옵니다.

아버지 앞에 내놓을 수 있는 어떠한 무엇도 갖추지 못한 저희들, 스스로 슬퍼할 수 있는 마음이라도 가질 수 있게 이끌어 주시옵소서.

과거의 잘못되었던 나를 견책하고, 오늘의 미비한 나를 원망하는 서글픈 심정이 저희의 심중으로부터 폭발되어 아버님을 부를 수 있어야만 아버님께서 저희를 붙들 것이고, 아버님께서 저희를 바라볼 것이며, 아버님께서 저희를 품어 주실 것을 알고 있사오니, 아버님, 그와 같은 심정을 지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와 같은 심정에 사무쳐 부족한 자아를 인식하여 아버님의 존전에 일체를 바칠 수 있는 간절한 마음이 저희에게 나타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이 자리에 모인 부끄러운 자녀들을 긍휼히 보시옵소서. 안다 하던 것도 모를 수 있는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고, 자기의 입으로 자기를 변명하던 자체를 부인하고 거듭나야 할 시기가 닥쳐왔다는 것도 알고 있사옵니다. 모든 역사적인 서러움은 탕감조건을 통하지 않고는 해원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제 저희에게는 당신의 이념 앞에 가인과 아벨의 입장에 놓여지는 시기가 온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개개인의 마음과 몸이 싸워 몸은 마음을 핀잔하고 비난하며 마음이 몸 앞에 굴복하는 때, 역사적인 종말시기가 가까워오면 가까워올수록 개인으로부터 가정, 교회, 사회, 세계에 이르기까지 연결되어서 일어날 수 있는 때가 저희의 눈앞에 다가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때를 알지 못하여 서러움의 역사로 저끄러 놓은 우리의 선조들을 알고 있는 오늘의 저희들도 죄악 역사를 꾸며 나가는 도구로 이용되기 쉬운 입장에 처하여 있사옵니다. 그러나 저희에게 하늘의 선을 쌓아 나가는 데 이용될 수 있는 요소가 심히도 적다는 것을 알고 있는 저희들, 이제 말하고 싶어도 입을 막을 줄 알게 하여 주시옵고, 보기 싫은 것을 보고도 참을 줄 알게 하여 주시옵고, 듣기 싫은 말이 들릴 때는 귀를 막을 줄 아는 마음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하늘을 향해야 할 마음이 혼란 가운데 방황하고 있고, 몸이 머무를 장소를 찾지 못하는 환경에 처하여 있을지라도 아버님께서는 저희를 버리지 않으시고 은사의 손길로 아버지의 품에 이끄실 줄 알고 있사오니 저희들을 긍휼히 보시어서 아버지 앞에 엎드려 호소할 수 있는 마음을 일으켜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런 심정이 없어 천추의 한을 돋구는 하늘의 배반자들이 될까봐 두려워 자신을 붙들고 우는 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형제를 놓고 서러워하는 것보다 내 마음을 놓고 더 서러워하고, 이웃 형제가 나와 같이 서러운 입장에 처할까 염려하여 그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이 저희의 심중에서 우러나지 않으면 끝날에 넘어야 할 최후의 고개를 가지 못할 것을 알고 있사오니, 아버님이시여, 이 시간 사랑하는 식구들의 마음을 권고하여 주시옵소서.

이때까지 저희를 찾아 나온 섭리의 목적이 무엇이고, 소망이 무엇인가를 알고 스스로 찾아 세우고자 하는 내용을 마음으로 분석하고, 세우고, 지켜 아버지 앞에 결단하지 않으면 안 될 이때인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거룩한 이날, 수많은 인류를 축복하여 주시옵고, 여기에 모인 수많은 당신의 아들딸들을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하늘을 향하여 아버지라 부르는 아들딸들이 수없이 많사온데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진정한 아들딸, 아버지께 내 아들딸이라 부를 수 있는 진정한 아들딸들이 심히도 적사옵니다. 이 슬픔을 막아줄 자가 누구이며 아버지의 이 서러움을 위로할 자가 누구입니까? 땅 위에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이런 이념을 갖춘, 아버님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참다운 아들딸들이 당신을 찾아가 당신의 품에 안기고, 만우주를 대신하여 자랑할 수 있는 그 한 순간이 역사적인 종말시기에, 소망의 끝날에 나타나야 할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님, 여기에 모인 당신의 아들딸들, 누구를 위하여 나왔고 누구를 받들기 위하여 나왔으며 누구를 모시기 위하여 나왔는가를 스스로 반성하여, 외로우신 아버지 앞에 경망한 태도를 버리고 온유겸손한 모습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슬픔 중의 슬픔을 느끼고 어려운 심정을 체휼하여 아버지를 위로할 수 있으며, 아버지를 부를 수 있는 이 시간 되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시간도 외로운 식구들이 지방에 널리어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을 줄 아오니, 그들의 사정을 아시는 아버님, 버리지 마시고 그들의 주관자가 되시옵고 보호자가 되시옵소서. 모든 염려를 아버님께서 같이해 주시고 위로해 주시어 아버지의 영광을 노래할 수 있는 기쁨의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옵나이다. 부족한 몸들이 아버지 앞에 엎드려 경배드리고자 하오니 친히 성별하여 주시옵고, 처음부터 끝까지 사탄의 일체를 용납하지 말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며, 모든 말씀 주님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기 도(Ⅱ)>

아버님, 저희의 가는 길이 험하오나 이 길을 가면 하늘의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소원의 한 날이 멀지 않은 것을 알게 되오며, 이 길을 가는 저희의 발걸음이 피곤할 때도 있사오나 아버님께서 걸어가신 길이기에 아니 갈 수 없는 인생길인 것을 알았사옵니다.

이제 저희가 마음에 사무쳐 아버지를 부를 수 있는 간곡한 마음이 일어나는 그때에는 나보다도 안타깝고 간곡한 심정을 가지고 바라보시는 아버지가 계시다는 것을 알았사옵고, 한 걸음 두 걸음 더듬어 알 수 없는 길을 오라 하시는 아버님의 음성을 따라가는 발걸음도 편치 않은 것을 알았사옵니다.

오늘의 남기신 뜻 앞에 저희가 미급하여 충성의 제물이 되어 드리지 못함을 탄식하지 않을 수 없사옵고, 고난의 역사를 거두어 하늘 앞에 기쁨을 돌려드리지 못한 서러운 역사를 돌이켜볼 적마다 탄식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이러한 모습들이 아버지 앞에 복을 구하였던 과거의 부족함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 인간들을 바라보시고, 인간들을 찾기 위하여 상심하시는 아버님의 성상을 바라보는 아들딸이 있다면 아버님 앞에 복을 빌 수 없고, 그 성상 앞에 자기의 주장을 펼 수 없는 것을 아옵니다. 이런 역사적인 서러움이 남아 있는 것을 천번 만번 망각하였던 이 불충불효한 자식들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심정으로부터 우러나 아버지를 부를 수 있는, 하늘땅이 즐거워할 수 있는, 아버지와 저희가 하나되는 그 한 순간에 새로운 역사는 시작될 것이며 소망이 이루어질 것을 알고 있사오나, 오늘 저희의 마음 바탕이 그와 같은 심정에 사무칠 수 있는 자리에 있지 못한 것을 놓고 낙망하지 않을 수 없고 탄식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아버님, 여기에 나와 당신을 부르고 있는 이들의 모습을 긍휼히 보시옵소서. 이들이 아버님 앞에 충성한 내용이 있다면 이들을 기억하지 않을 아버님이 아니시옵고, 이들이 아버님을 위하여 남모르는 억울한 자리에 있다 할진대 그것을 모르는 아버님이 아니심을 아옵니다. 아버님, 저희가 하늘에 염려를 가하는 일을 했을 망정 아버님께서는 저희들 앞에 염려를 남기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망각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땅 위에 슬픔이 있다 할진대, 슬픈 자를 위로하시는 아버님의 슬픔 이상의 슬픔이 어디 있으며, 고통이 있다 할진대 아버님을 배반하고 나가 고통을 당하는 사람을 붙들고 위로하시는 아버님의 고통 이상의 고통이 어디 있사오리까?

아버님께서는 당신의 위신과 체면과 권한을 세우지 못하고 소망을 남긴 채 역사노정을 거쳐오는 동안 수많은 선한 선조들을 붙들고 내 심정을 알아 달라고, 내 사정을 알아 달라고 울부짖으며 간곡히 호소하셨다는 역사적인 말씀을 저희는 들었사옵니다. 하오나 오늘의 저희는 역사를 대변할 수 없으며, 역사적인 실체를 증거하여 선의 자체라고 자랑할 수 있는 그 무엇을 갖지 못한 모습들로서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사오니, 면목 없는 자체들임을 이 시간 폭로하고 직고하게 해 주시옵고, 사탄에게 유 린당한 자신들임을 깨달을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남기신 섭리의 뜻 앞에 불충하는 자는 많으나 충성하는 자가 없어 오늘도 염려하시고 내일도 염려하시며 섭리의 뜻과 심정을 털어놓고 권고하시지 못하는 아버님의 사정을 이 시간 저희들이 알아차릴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시간 여기에 엎드렸사오니 저희의 마음이 어느 자리에 머물러 있는가를 생각할 수 있게 하시옵소서.

아버님께서는 하늘의 뜻과 심정의 기반 위에서 움직이기를 바라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오늘 저희의 마음이 허공을 향해 달리고 있지 않은가? 목적과 방향을 잃은 채 슬픔의 자리에 머물러 있지는 않은가? 아버지의 염려의 채찍을 받기에 합당한 서러움의 자리에 서 있지는 않은가? 스스로 뉘우치게 하시옵소서.

나는 남기신 선의 동산을 향하여 가는 사람이요, 남기신 사명을 위하여 싸우는 하늘의 용사라 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 찾으시는 모습이 자신인 것을 알아, 찾아지기 위해 노력하고 있음을 아버지 앞에 명시할 수 있는 각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스스로 각오하고 스스로 성별할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흩어진 마음을 수습하여 본향을 그리워할 수 있는, 재창조의 손길이 가해질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해 주시옵고, 아버지의 축복을 상속받기 전에 먼저 아버지의 슬픔을 상속받아 그 슬픔의 주인공이 되어서, 아버지 앞에 장담하며 나서겠다는 각오와 결심을 하는 이 시간이 되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오늘 통일의 이념을 갖추어 놓고 남이 아니라고 하는 이 자리에 몰아내신 아버지, 자기가 원치 않는 그 한 곳으로 발걸음을 재촉하도록 몰아내신 아버지, 선한 일을 시작하신 분도 아버지요 선한 일을 성사하실 분도 아버지이심을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지의 뜻과 통하지 않고는 부르심과 모으심의 뜻이 성취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그 뜻 앞에 물이 되고, 불이 되고, 기름이 될 수 있고, 오늘도 내일도 뜻 앞에 겸손한 제물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악한 세상을 불사를 수 있는 기름이 되고 불이 되어야 하며, 선을 대하여서는 온유겸손 하여야 됨을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이러한 법도로 저희를 찾아 나오시는 연고로 예수님께서 높고자 하는 자는 낮아지고 낮고자 하는 자는 높아진다고 말씀하셨으며, 희생과 봉사와 온유겸손으로써 천도를 세워 나가셨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저희도 그 중심에 사무쳐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아버지 앞에 무한히 겸손할 수 있으며, 자기 자신의 일체의 것을 제물로 드릴 수 있는 심정이 각자 각자의 마음과 마음을 통하여 천심까지 미쳐질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날도 때를 알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는 수많은 인간들이 있사오니 그들의 운명을 붙들어 주시옵고, 더욱이나 반만년의 역사를 자랑하면서도 불쌍한 처지에 있는 삼천만 민중을 긍휼히 보시옵소서. 이 민족의 역사노정은 피로 물든 노정이었음을 알고 있사오며, 이 민족은 선을 가로막는 존재들과 싸워 나온 불쌍한 민족임을 알고 있사옵니다.

이런 민족을 세워 놓고 하늘은 섭리의 뜻을 예고하셨고, 섭리의 때를 가르쳐 주셨사옵니다. 이들 앞에 하나의 중심을 통고하신 아버님이시여! 이 민족으로 말미암아 가중되어지는 아버님의 슬픔을 덜어드릴 수 있게 하여 주시옵고, 그럴 수 있는 조건이 이 민족에게 없다 할진대, 먼저 뜻을 알고 심정을 안 저희들이 아버지의 심정을 붙들고 그 슬픔을 억제시켜 드릴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제 저희의 마음이 아버지를 향하여 무한히 달릴 수 있게 하여 주시옵고, 아버지가 그리워 붙들고 싶은 마음과 어린아이와 같은 심정을 갖추어 아버지를 무한히 흠모할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고, 죄악에 물든 일체의 주의나 일체의 관념, 일체의 의식이 저희에게서 떠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원하옵건대, 이 시간, 본심이 발로되고 본성이 발로되어 본연의 모습이 나타나게 이끌어 주시옵고, 아버지께서 기뻐하실 수 있고 아버지께서 재차 품을 수 있으며, 만우주와 사탄 앞에 세워 자랑하실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이 시간 역사하여 주시옵고, 나아가 한 단계를 넘어서 아버지 앞에 머리 숙이는 모습들이 되게 해 주시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끝날에 아버님께서 이러한 모습을 찾으실 때에 작고 가냘픈 음성으로나마 ‘만민의 서글픔을 품고 찾아 주신 아버지, 부족한 것이 여기에 있사오니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할 수 있어야겠사옵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느끼면서 아버지의 부르시는 음성 앞에 대답할 수 없고, 얼굴을 들 수 없는 자신의 부족함을 뉘우치고 다시 반성할 수 있는 아버님의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님을 대하여는 이와 같은 마음을 갖고, 불의와 악에 대해서는 격분하여 참지 못하는 공분의 심정을 갖고 이 몸이 제단에 오르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천륜의 개척자의 모습, 세워진 하늘의 정병의 체면을 깎는 모든 것에 대하여 굴함이 없이 싸우는 모습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님을 모실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외로운 심정으로 기도하고 있는 식구들 위에도 일률적인 은사로써 역사하여 주시길 부탁드리옵니다.

하나에서 끝까지 아버지께서 주관하여 주시옵고, 천천만 성도와 천군천사들이 옹위하는 가운데 계신 아버님의 심히 깊고 넓고 높으신 성상을 체휼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저희의 눈으로 아버지를 바라보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저희의 귀로 아버지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오며, 하늘의 성령이 실체로서 나타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부탁드릴 때, 모든 것을 주님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기 도(Ⅲ)>

가슴에 못자국을 남긴 슬픔이 어떠하다는 것을 저희는 말씀을 통하여 배웠사옵니다. 아버님! 이 말씀을 읽으니 황공하고 이 말씀을 하시던 예수님의 초조한 모습이 그리워집니다. 심정을 붙들고 통곡해 주는 친구 한 사람도 없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의 슬픈 사정을 동정하는 저희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인간적인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한 제자들과 하늘의 슬픔을 아는 인간세상의 서글픈 실상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체휼한 자가 없었음을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님, 30여년 동안 광야에서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수도하던 세례 요한이 품은 소원은 무엇이었나요? 그의 소원 전체는, 그의 마음 중심의 하나는 오시는 메시아를 맞는 것이었음을 알고 있사옵니다.

메시아를 증거한 그는 메시아와 하나되지 않으면 안 될 천륜의 인연이 있으나, 그가 내 마음에 있고 내가 그 안에 있으며, 그의 것이 내 것이요, 그의 심정이 내 심정이요, 그의 생애가 내 생애라고 하는, 즉 예수의 모든 것이 세례 요한의 심중에 반영되어 일체를 이루었어야 했는데, 그는 그렇지를 못했사옵니다.

요단강가의 많은 무리 앞에서 손을 들어 하늘의 아들이라고 증거한 기억을 갖고 있던 세례 요한은 슬프고 외로운 모습으로 철창에 갇혀, 자신의 서글픈 신세를 탄식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에서, 자기가 증거했던 메시아, 하늘이 증거하시고 세워 주신 메시아에게 제자들을 보내어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마 11:3) 하고 반문했던 장면은 역사적인 슬픈 장면이요, 하늘이 넘기 어려운 서러운 장면이었음을 저희들은 알았사옵니다.

역사의 흐름 속에 세례 요한의 노정은 그대로 남아 있사옵니다. 새로운 이념을 찾기 위해 허덕이고 있는 우리, 새로운 역사를 고대하면서 준비한다는 우리들이 이제 세례 요한과 자신을 바꾸어 생각할 줄 아는 자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하늘의 백성들이 하늘 뜻을 배척한 사실을 역사를 통하여 알았사오니, 오늘날 저희는 그러한 역사적인 전철을 다시 밟는 자들이 되지 말게 주관하여 주시옵고, 광야에서 단장시키고 준비시키셨던 그 뜻을 잃는 자들이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딸들이 많이 모였사오니, 이제 그 마음과 마음을 터놓고 그 몸과 마음이 아버지 앞에 면목이 없음을 깨닫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 권고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슬픈 심정을 인계받을 수 있게 하여 주시옵고, 천적인 슬픈 심정을 안고 인간들이 알지 못하는 새로운 이념의 주인공을 맞을 수 있는 마음과 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시대를 지켜 나갈 주인공은 누구이며, 이 시대에 남아질 수 있는 민족은 어떠한 민족일 것인가를 염려하며 그러한 모습을 그리워하며 슬픈 심정에 사무칠 수 있는 이 한 시간이 되게 해 주시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들려오는 말씀과 들려오는 음성에 귀를 기울여 거기에 동조하고 반응하는 생활을 하는 저희들, 이제 저희가 걸어온 길을 돌이켜 보고 새로이 각성하여야 할 때가 되었사옵니다.

혼란과 혼돈 가운데 놓여 가지고 생사를 결판해야 할 입장에 있는 자기 자신을 염려하는 입장에서 우리가 벗어날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믿을 수 없는 사회요 믿을 수 없는 세계인 것을 알고 있사옵고, 믿을 수 있는 이념의 세계에 잠기고, 그 이념의 세계와 인연맺을 수 있도록 스스로 각성하고, 자아를 인식하여 하늘을 붙들어야 할 때가 되었고, 마음의 변혁을 일으키지 않으면 안 될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이러한 환경에 처해 있는 자신임을 명심하여 새로운 나를 추구할 수 있게 인도하여 주시옵고, 원한에 사무친 슬픔의 고개를 넘고 넘어 환희의 모습을 맞이할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고, 그 모습을 그리워하며 그 세계에 이끌리고 그 세계와 화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이 사회 환경이 자유롭지 못하고 슬픔에 사무쳐 있는 것을 비통히 여겨 이것을 가로막고 싸울 수 있는 힘과 용맹을 주시옵소서. 영원하시며 절대적이신 하늘이 있다 할진대, 죄악의 일체를 밀어낼 수 있는 능력을 가하여 주시옵 기를 부탁하옵고 간구하옵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모는 목자였던 모세, 비록 그의 손에는 지팡이가 들렸을 망정 그는 이스라엘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새로운 각오와 새로운 소망과 새로운 이념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고 있사옵니다. 또 이러한 소망과 이념을 품고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을 살았던 모세의 절개심을 저희들이 알고 있사옵니다.

이제 저희들은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자리에 있사옵고, 소망하였던 그분을 만날 수가 있사온데, 소망하였던 그분 앞에 나타나는 저희의 모습은 새로운 모습이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지께서 ‘내가 네 안에 있고, 네가 내 안에 있다.’고 하신 말씀을 저희는 알고 있사옵니다. 이것을 아는 저희들, ‘일체를 맡기었사오니 재창조하여 주시옵고, 아버님의 기쁘심의 뜻대로, 원하시는 제물로 이용해 주시옵소서.’ 할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아무 말 하고 싶지 않사옵니다만 허락하신 이 시간, 이제 말씀을 해야 할 시간인 고로 입을 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여기에 나온 당신의 아들딸들이 당신의 형상을 보고 싶은 마음, 당신이 계신 곳에 가고 싶은 간절한 마음, 당신과 더불어 살고 싶은 사무친 심정, 흠모의 마음에 사무쳐서 사랑의 심정만이 이 분위기를 감싸, 재창조의 영광이 나타날 수 있는 시간이 되게 해 주시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하나로 시작하여 하나로 끝을 맺을 수 있도록 하나의 주도적인 역사가 전체 위에 나타나게 해 주시기를 부탁하옵고, 사탄이 틈타는 시간이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기를 바라면서,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말 씀>

오늘날 우리는 마음에 이끌려 움직이든가, 사정에 이끌려 움직이든가, 그렇지 않으면 어떠한 소망에 이끌려 살고 있습니다. 세상 사는 것도 그러하거니와 하늘 길을 걸어가는 것도 그러하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입장을 떠날 수 없는 우리요, 나라는 것을 인정한다 할진대, 나의 삶이라는 것은 필시 내 한 자체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님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사회적인 환경이나 신앙노정도 역시 어떤 전체적인 계획 밑에서 어떤 목적을 향하여 나아가며 그 모양이 점점 변해간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1. 타락인간의 삶의 실상

​이런 것을 헤아려 볼 때 오늘날 인생행로에서 승리하였다고 장담할 수 있고 자랑할 수 있으며, 혹은 섭리의 뜻 앞에 당당하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는 엉클어져 있는 이 세상에서 사는 사람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자체가 아직까지 역사노정에 나타나지 못하였고, 그러한 자체가 역사를 지배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부정하지 못할진대, 우리는 그러한 나를 마음으로 그리워하고, 주의와 사상과 혹은 생활 과정을 통하여 추구하고 또 추구해 나가는 것은, 그러한 나를 찾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그러한 개인을 중심삼은 가정이 되고, 그러한 가정을 중심삼고 하늘을 높이고 증거할 수 있는 사회가 되고, 그러한 사회를 중심삼고 하늘을 높이고 증거할 수 있는 국가, 더 나아가서는 그러한 세계가 되어야 합니다. 하늘 앞에 나타나서 자신 있게 아버지시여, 저를 보시옵소서. 아버지시여, 저를 붙드시옵소서. 저를 보시고 역사적인 모든 슬픔을 잊으시옵소서. 할 수 있는 개인을 찾아서 역사는 흘러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소망의 내가 되지 못하고 원치 않는 탄식과 절망 가운데에서, 미지의 행로에서 허덕이고 있습니다. 나아가 그러한 나를 재촉하여 내가 살고 있는 사회와 국가와 세계를 재촉해 낼 수 있는 무엇이 없는가 하고 우리는 슬퍼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소망의 나와 소망을 이루지 못한 나를 붙들고, 최후의 결단을 내려 오래 전부터 찾던 그 나를 찾아 온 피조만상 앞에 자랑하며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처할 수 있는 그 순간을 위해 인간들은 오늘도 싸우고 있고, 내일도 그리고 이 해도, 앞으로 수년 후도 싸워 나가리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런 운명에 처한 우리 자신임을 생각하게 될 때, 오늘날 우리는 얼마나 큰 책임을 진 입장에 있는가를 알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에덴동산의 아담 해와가 하나님의 품에서 자랄 때에는 나타나는 모든 것에 대하여 자신을 갖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허락하지 않은, 천륜의 법도를 어긴 후부터 그들의 마음에는 자기를 내세울 수 있는 자신이 사라졌습니다. 여기에 비운이 있고 여기에 곡절이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다시 한번 생각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인간을 포기할 수 없는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신 책임이 있는 연고로 이를 다시 회복시키기 위한 운동을 제시하셨는데, 이것이 인간들을 이끌어 나온 종교운동이라는 것입니다.

​2. 재림기에 처한 인간의 바른 삶의 태도

​인간은 비록 타락하여 떨어졌을 망정 하나님께서 창조이념으로 세워 놓은 하나의 법도와 본성의 나를 자랑할 수 있는 자유의 이념은 창조 전부터 창조 이후 지금까지 변치 않고 하나님의 심중에 그대로 사무쳐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하나님의 마음은 이러이러하다고 해명한 자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념은 이런 것이라고 주장한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늘은 인간을 위하여 계시고 하늘을 위하여 인간을 지었다 할진대, 하나님과 본연의 인간이 살 수 있는 이념의 세계, 하나님의 심중에 감추어져 있는 본연의 세계는 필연적으로 나타나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까지 하나님께서는 정상적인 길을 걸어온 것이 아니었고, 타락한 인간을 붙들고 곡절의 노정을 거쳐오셨음을 역사를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성서를 중심한 역사를 더듬어보면, 가인 아벨로부터 지금까지 하늘을 불신하는 인간들을 이끌고 곡절의 노정을 거쳐오셨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의 흐름은 최후에는 하나의 이념세계를 향하여 달릴 것이고, 하늘은 그 이념세계로 인간들을 몰아내실 것이 틀림없습니다. 인간의 양심이 그 이념세계를 향해 오늘도 내일도 허덕이며 가야 한다고 재촉한다는 것도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아무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늘이 세우고자 하시는 이념과 우리가 찾는 이념이 상봉하는 순간이 인간의 소망의 순간이요, 하늘이 이끌어 오신 섭리의 목적임을 우리들은 재인식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하늘은 신앙의 길을 찾아 나가는 종교인들, 특히 기독교인들에게 끝날을 예고하셨습니다. 그날이 재림의 날이요, 그날의 주인공이 재림주라고 예고하셨습니다. 따라서 그 한 날이 하나님의 소망의 종착점이요, 인류의 소원 성취의 종착점인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날을 맞이해야 할 우리는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할 것인고? 문제는 여기에 귀착됩니다. 어떠한 모습이 되어야 할 것인가? 이제까지는 진정으로 이것을 깨우쳐 줄 수 있는 논리도 없었고, 종교도 없었고, 심정을 수습해 주는 친구도 없었습니다. 이런 자리에 처해 있는 인간들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시시각각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사회생활의 형태가 변하고 있고, 주의와 사상도 장소와 시기에 따라 변해 가고 있습니다.

절대적인 나, 전체의 이념을 대신하여 나설 수 있는 나, 변치 않는 나를 찾아가는 것이 신앙의 길이라 할진대, 우여곡절의 길을 가야 하는 천차만 별의 지상세계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심정은 무엇이뇨, 어떤 행로를 걸어가야 할 것인고, 우리가 수습하여 세울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들은 너나할 것 없이 염려하지 않으면 안 될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러한 것을 알게 될 때 끝날을 바라보는 우리들, 내가 기다리는 태양이 어느 곳에서 솟을지 알 수 없는 이때, 여러분의 눈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어디를 살필 것인가? 이것이 문제입니다. 조심 조심 온 정력을 기울여 동방의 해 뜨는 곳을 향해 자신의 마음과 몸의 방향을 맞추도록 해야 합니다.

인류의 운명이 이런 길로 종결되어야 하는 연고로, 또 이 인연을 벗어나지 못하고 이 권내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인 연고로 조심성 있게 살피면서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앞에 말씀드리고자 하는 제목은 ‘조심히 살펴야 할 신앙의 길’입니다.

​3. 절대적으로 부정해야 할 나

​여러분은 지금 자신을 갖고 있습니까? 스스로 장담하고 있습니까? 자신이 있다면 그 자신은 누구를 통한 자신입니까? 개인을 통하고 환경을 통과할 수 있습니까? 사회, 국가, 세계를 통과할 수 있습니까? 더 나아가서 천륜이 있다면 천륜을 통과할 수 있습니까? 이런 문제에 대해 자신을 갖지 못하는 한 여러분은 자신을 절대적으로 부정해야 됩니다.

이러한 입장에 처해 있는 인간이기 때문에, 여러분은 항시 천륜이 지향하고 움직이는 방향은 어디며 그 종착점은 어떤 형태로 나타날 것인가 하고 찾아 헤매야 합니다. 여러분이 자신 있게 주장하고 자랑하는 무엇보다도 그런 마음이 간절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고 자기를 내세워 자랑하고 자기를 중심삼고 움직이는 범위가 크면 클수록 끝날에 역사적인 배반자로 등장하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야 됩니다.

우리는 부족한 자들입니다. 우리는 몰리고 있고 사정에 휩쓸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가 ‘천륜아 나를 밀어다오.’ 할 자신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못 가집니다. 우리의 선조들도 자신을 갖지 못한 걸음으로 하늘을 찾아 나왔습니다. 그러기에 하늘이 명령하는 곳으로 갈 때마다 한 걸음도 조심하고 두 걸음도 조심하고, 한 날의 생활도 조심하고 한 밤의 잠결에서까지도 조심하여 나왔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런고로 이런 생활을 하지 못하는 자라면 뜻을 받든다 할지라도 최후에는 하늘 뜻에서 이탈하고, 하늘 뜻을 사탄세계에 돌리는 데 공헌한 자로 종결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자신 없는 가정이요, 자신 없는 민족이요, 자신을 갖지 못한 국가요, 자신을 갖지 못한 세계이기 때문에, 이 세계의 어떤 무엇, 어느 누구도 천륜 앞에 불변의 것이라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이런 입장에 처하여 있는 우리인 연고로 우리는 하루의 생활을 조심하고, 일년의 생활을 조심하고, 일생을 조심해야 합니다. 이렇게 조심하며 가는 것이 선을 바라보고 나아가는 걸음걸이임을 알고 우리들은 걸어야 되겠습니다.

역사는 발전해 나오고 있습니다. 개인으로부터 씨족을 거쳐 부족으로, 나아가 민족을 거쳐 국가, 세계로까지 발전해 나왔습니다. 과거의 수많은 씨족들은 자기들의 이념과 자기들의 주장을 가지고 있었으나 시대의 흐름에 의해 씨족시대에서 민족시대로 이행될 때에는 씨족시대의 모든 사조(思潮)들이 민족시대의 사조에 휩쓸려 들어갔고, 또 민족시대의 사조는 국가 시대의 사조에 휩쓸려 들어갔고, 국가시대의 사조는 세계시대의 사조에 휩쓸렸고, 세계시대의 사조는 앞으로 천륜에 휩쓸릴 것입니다. 역사는 이렇게 하나의 귀일점을 향하여 흡수되어 나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을 부정하지 못할진대, 오늘의 나는 어떠한 자리에서 살고 있고, 움직이고 있고, 서 있는 나인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살고 있는 그 자리가 마지막 종착점이라면 문제는 간단하지만, 여기에서 또 변혁되어야 하는 역사가 남아 있다면, 여러분은 역사 이념시대, 혹은 섭리 이념시대, 혹은 신앙 이념시대의 목적지에 당도하지 못하고 중간에서 머무르는 자밖에 되지 못할 것입니다.

​4. 하나님의 이념세계를 건설할 수 있는 최후의 무리

​하늘은 인간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는 연고로 인류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인류를 붙들고 역사노정을 움직여 나오셨습니다. 그리고 시대 시대가 변할 때마다 새로운 이념을 주셨습니다. 씨족에서 부족으로 넘어가게 될 때에는 부족시대로 넘어갈 수 있는 이념을 주셨습니다. 씨족에게 부족권을 넘어선 먼 거리의 이념을 주면 이들이 따라갈 수 없기에 양심과 연락될 수 있는 정도에서 한 단계 앞의 이념을 세워 주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씨족시대에는 부족의 이념을, 부족시대에는 민족의 이념을, 민족시대에는 세계의 이념을 주어 연결지어 나오셨다는 것을 우리들은 신앙 역사를 보더라도, 인류역사를 보더라도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역사노정에 남아질 수 있는 민족, 역사노정에 남아질 수 있는 종족은 어떤 민족과 종족일 것인가? 예컨대 씨족시대에서 부족시대로 넘어갈 때 천륜을 붙들고 넘어갈 수 있는 종족입니다. 그리고 천륜이 부족을 지나 국가의 이념을 갖기를 바라면 국가의 이념을 향하여 나설 수 있는 무리, 혹은 그 국가 앞에 세계의 이념이 남아 있다 할진대 국가를 지나 세계의 이념을 향해 나설 수 있는 무리입니다. 이런 무리가 최후에 남아질 수 있는 무리인 동시에 세계를 건설할 수 있는 무리일 것이요,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무리일 것입니다. 이러한 씨족, 부족, 민족, 국가, 세계를 완성해야 역사적 승리의 민족, 승리의 국가로 설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러한 이념을 찾아 나가는 종족이 있어야 되고, 이러한 섭리의 뜻을 받들어 나가는 종족이 있어야 됩니다. 나아가 이러한 섭리의 뜻을 받들기 위하여 투쟁의 노정을 거쳐 나가는 민족이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등장하고, 이스라엘 민족이 등장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의 통일된 가정, 통일된 국가, 통일된 이념을 주장하셨던 원인이 여기에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그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그는 본연의 주인공이요, 맨 처음으로 하늘의 이념을 갖춘 실체, 하늘과 영원히 동거할 수 있는 이념을 완성한 실체로서 나타나셨던 분입니다. 그분은 인류를 전체적으로 대할 때에는 지도자이시고, 우리 개인 개인을 대할 때에는 아버지이시며, 본래의 창조 이념세계를 찾아가는 입장에서는 신랑이십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결론지어 놓고 가셨습니다.

그러면 앞으로 하나의 세계, 하나의 이념 동산, 하나의 이념 국가가 이루어지는 때의 이념은 어떠한 이념일 것인고? 그것은 역사의 변화나 혁명에도 변하지 않는 이념일 것입니다. 예컨대 부모의 사랑과 같이 변하지 않는 사랑의 이념일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대하는 심정은 변함이 없습니다. 변하지 않는 하늘의 사랑을 중심삼고 엉클어지는 세계, 대하는 곳곳마다 사랑의 감정이 앞서는 그 사회, 그 국가, 그 세계에서는 혁명이라는 명사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 세계는 하나님의 심정이 개인의 생활을 통하여 나타나는 세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만민을 자녀로 생각하시는 심정을 모두가 체휼하는 세계입니다. 그래서 서로 형제라고 생각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심정의 세계일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이러한 세계가 인간이 찾아가야 할 마지막 종착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하였고, 자신을 신랑이라 하였고, 또 우리를 한 단계 추켜세워 형제라 하였습니다. 참으로 고마운 은사의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일신의 인연을 통하여 이 땅에 나타나신 분이 아닙니다. 4천년 역사를 거쳐오는 동안 하늘이 수많은 선지선열을 통하여 보내마 보내마 하신 분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천륜의 배경을 갖추고, 섭리역사의 뜻을 기반으로 하여 인류 역사를 수습하기 위하여 나타나신 분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세계는 예수님을 중심삼고 오늘날까지 나왔고 그의 이름은 지금까지 남아 있습니다.

​5. 이 시대에 나와야 할 역사의 주인공

​오늘날 이 시대는 어떤 시대인가? 선과 악이 교차되는 시대이고 선으로 합류해 들어가는 시대입니다. 이러한 시대에 처해 있는 우리는 어떻게 될 것인고? 선악이 교차되어 합류된 후에는 어떠한 세계가 될 것인고? 이 세계가 흘러가면 어떠한 세계가 올 것인고? 궁금한 문제입니다. 오늘날 뜻을 가진 청년 남녀들이 있다 할진대 가던 발걸음을 멈추어 하늘이 있는 것을 알아야 하고, 땅에 있는 만물의 소망을 알아야 하며, 그 소망의 폭발지가 교차점에 머물러 있는 이 세계가 아니라 바로 자신들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섭리해 오셨습니다. 만일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하나님 앞에 죄를 짓지 않았다면, 타락의 서러운 노정을 가지 않았었다면, 아담은 6천년이 지난 지금까지 하나님의 뜻을 대해 나왔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생각해 보았습니까? 아담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하나님의 뜻을 받들고, 하나님의 섭리를 책임지며, 하나님과 동거하였다면, 수많은 선지선열들과 수많은 우리의 조상들, 뜻을 품고 왔던 수많은 선한 사람들이 죽음을 당하는 참사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소원하고 고대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소망하고 찾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타락하지 않은 모습, 역사에 영원히 남아질 수 있는 모습, 변천하는 역사를 수습할 수 있는 모습, 선의 이념을 세울 수 있는 모습입니다. 그러한 모습이 이 끝날에 나타나면 우리들은 탄식하지 않을 것입니다. 절망의 자리에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탄식하고 절망해야 할 사실인고? 뜻 앞에 설 수 있는 역사적인 주인공이 없는 것이 탄식하고 절망해야 할 사실이요 슬픔입니다. 이 역사적인 주인공을 찾아 나온 것이 역사의 흐름인 연고로, 우리 인간들은 이리 쓰러지고 저리 쓰러지면서도 발걸음을 멈추지 못한 채 이 시간도 걷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전세계 인류가 다시 호소해야 할 것이 있다 할진대 그것은 역사적이요 시대적이요 미래적인 주인공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는 것입니다. 이 주인공을 간절히 고대하고 고대해야 할 때는 왔습니다. 역사는 이미 지나갔는데 주인공은 언제 오실 것이냐? 천륜이 없다면 그 주인공은 인류 앞에 오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천륜이 있기에 이 시대적인 주인공은 언젠가는 반드시 인류 앞에 오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그 주인공이 어떤 모양으로 오실 것인가 하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왜냐하면 과거에도 새로운 주인공이 왔으나 그 주인공을 몰라 보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하늘의 뜻을 종결짓기 위한 하늘의 섭리가 남아 있다는 것을 아는 한, 여러분은 이 시대적인 주인공이 누구일 것인가를 생각해야 됩니다. 여러분 자신이 그 주인공이 될 자신이 없다면, 머리를 숙이고 그 주인공을 찾으려는 각오와 행동이라도 할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들이 요구하는 최후의 주인공은 이 시대만의 주인공이 아니라 미래의 주인공까지 될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러기에 오늘날 기독교사상 가운데서 고마운 것은 재림주사상입니다. 4천년 역사를 대신하여 역사적인 지도자로 오셨던 예수님, 그 시대를 대신하여 오셨던 예수님께서 미래의 주인공으로 오실 것이기 때문에 그 예수님이 우리 인류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인류는 이제 다시 오실 예수님을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오실 예수님이 그러한 주인공으로서 책임을 질 수 있기에, 그 예수님의 이름이 인류에게 필요하기에, 오늘날 인류는 다시 오실 주님 앞으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무도 부정 못할 것입니다. 부정 못해요.

그러면 끝날에 당도한 여러분은 이 때에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여러분 자신이 이 시대의 주인공이 되어야 되겠고, 미래의 주인공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런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이것이 하늘을 바라보고 나가는 사람들이 필히 염려하여야 할 최후의 문제요 중심문제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자신이 그러한 것을 해명할 수 없고 그러한 이념을 주장할 수 없다면 여러분들은 어떤 휩쓸림에 휩쓸려 버릴 것입니다. 이 휩쓸림을 막고 나서 새로운 무엇을 고대할 자신이 없는 한 최후의 심판대 앞에서 후퇴해야 할 망국의 종족이 되고 만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지 않겠어요?

​6. 변하는 세계에서 변치 않는 자신이 되려면

​오늘의 세계는 또 다시 변해야 할 세계입니다. 지금까지 세계가 이러이러하게 변해 왔으니 오늘날은 다시 크게 변해야 합니다. 이런 세계에 살고 있는 여러분은 변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변하는 세계, 변하는 사조 속에서 변치 않는 자신이 되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 여러분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것을 해결해 주어야 할 것이 종교요 진리일 것입니다.

역사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변함없이 흘러왔고, 현재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나 인심은 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하루의 생활에서도 몇 번씩 변합니다. 여러분이 주장하는 주의도 일생에 몇 번씩 변합니다. 이런 사특한 인간이요 에덴에서 하늘을 배반한 타락의 후손들이라는 것을 우리들은 생활에서 느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을 막아줄 수 있는 종교는 없겠는가, 이것을 막아줄 수 있는 지도자는 없겠는가, 이것을 막아줄 수 있는 책임자는 없겠는가 하면서 가슴을 헤쳐 놓고 우주의 슬픔과 비애를 탄식하며 아우성쳐야 할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역사는 시기 시기, 혹은 세기 세기마다 변해 왔습니다. 하나님의 6천년 섭리역사를 회고해 볼 때 여기에는 제물시대가 있었고, 율법시대가 있었고, 신앙시대가 있었습니다. 또한 구약시대가 있었고, 신약시대가 있었고, 앞으로 성약시대가 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제 새로운 이념의 세계가 와야 하는데, 이 세계가 변하기 전에는 그 이념의 세계가 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하루에도 천번 만번 변하면서도 태연히 잠을 자고 있는 역사적인 슬픔의 열매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무리, 제 아무리 자기의 주의를 도도하게 자랑한다 하더라도, 자기 일신을 변명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변할 자랑이요 변할 변명입니다.

그러면 사람도 변하고 역사도 변하고 이 땅도 변하는데, 이것을 수습할 수 있는 심정적인 자세는 어떤 것이뇨? 이것은 조심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조심성 있게 살피는 것밖에 없습니다. 여기에 와도 마음 졸이며 조심하고 저기에 가도 마음 졸이며 조심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변하는 시대를 넘어 가려면 새로운 세계를 흠모하고 그리워하고, 변하는 것을 피해 조심스럽게 나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야 됩니다.

과거의 선지자들도 하늘이 부르실 때는 용맹스럽게 나타났습니다. 하늘 앞에 불리움 받을 때는 용맹스럽게 나타났으나 사탄에게 보내졌을 때는 다 패했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하늘이 불러줄 때는 좋아서 출발했지만 하늘이 부르신 목적을 해원하기 위해 사탄을 향해 진격했을 때는 다 쓰러져 버렸습니다. 이런 패배의 발자취를 갖고 있는 역사를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7. 무엇을 조심히 살펴야 할 것인가

​그러면 이제 우리가 무엇을 조심히 살펴야 할 것인고? 사망권 내에 있는 천만 번 죽어 마땅한 인간을 찾아오시는 하늘의 수고가 있음을 조심히 살필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하늘이 사망권 내에 있는 우리를 찾아 주실 때에는 세상의 무엇보다 귀한 것을 갖고 찾아 주시고, 사망권 내에 있는 우리를 구원해 주실 때에는 염려하는 마음과 애달픈 심정을 갖고 구원해 주신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하늘이 우리를 사망권에서 빼앗아 오실 때에는 갖고 있는 모든 것을 희생할 각오를 하고 빼앗아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찾아 주신 그 수고를 알아야 하겠고, 찾아 주신 그 사랑의 심정을 알아야 하겠고, 찾아 주신 그 싸움의 행로를 알아야 되겠습니다. 본래 아버지와 나는 하나입니다. 따라서 아버지의 마음이 내 마음이요, 아버지의 목적이 내 목적이니 가라 하시는 그 곳에 가야 하겠습니다. 책임지겠다는 심정에 사무쳐 가야 하겠습니다. 억천만 고난의 길이 있고 어떠한 십자가의 장벽이 있다 하더라도 넘어갈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가야 되겠습니다. 이런 신념과 아버지의 심정을 바탕으로 역사적인 모든 것을 밟고 올라서겠다는 각오를 가진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는 필시 승리하고야 말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그런 솟구쳐 오르는 심정이 있어야 변하는 세상을 박찰 수 있습니다. 섭리의 뜻, 역사적인 싸움이 종결되기를 바라시는 아버지의 심정을 붙들고 나설 수 있는 마음이 신앙자인 여러분의 심중에서 사라진다면 여러분은 역사와 더불어 변할 사람입니다.

계시록에서는 첫사랑을 잃어버리지 말라 하였습니다. 첫사랑은 생명을 주고도 바꿀 수 없습니다. 하늘이 처음으로 주신 그것을 여러분 일생의 가장 귀한 것으로 여겨야 합니다. 그것을 여러분이 갖고 있는 이상의 가치, 여러분의 관념 이상의 가치로 느껴야 하겠습니다. 이 은사는 세상의 어떤 무엇을 가지고도 바꿀 수 없는 은사요, 죽음이 천만 배 이상 가중되어도 바꿀 수 없는 은사라고 느낀 사람은 필시 하나님의 심정 가운데 있는 사람이요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있는 사람이니 하나님의 위업을 소유할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조심히 살펴야 하는데 무엇을 조심히 살펴야 할 것인고? 하늘은 어느 때에 우리에게 귀중하고 값비싼 그 선물을 주셨던가? 역사를 회고하여 보면 우리의 선조들이 역사적인 선물이었고, 2천년 전에 오신 예수님이 인류 앞에 사랑의 선물이었습니다. 이 고마움의 역사를 회고하여 통곡하는 그 순간, 우리의 마음은 하늘과 통할 수 있으며, 그 심정을 바탕으로 하늘의 재창조의 역사가 시작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런 심정에 불타는 모습, 이 벅찬 가슴을 억제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자신을 가진 모습만이 역사적인 실천노정에서 최대의 승리자로 등장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역사노정에서 수없이 우리를 찾아 주셨고 우리를 위하여 희생하셨습니다. 우리가 갚을래야 갚을 수 없는 은사를 여러분은 생각이나 해 보았습니까? 우리는 역사적인 배반자임을 자인해야 되겠습니다. 천적인 선물을 갖고 역사를 섭리해 나오시는 하늘 앞에 배반자임을 자인하고, 죄인임을 자탄하고, 회개라도 해야 할 우리입니다.

통일교회 신도인 여러분은 남들이 아니라 하는 길을 가기 위해 이 자리에 왔습니다. 그런 여러분에게 나는 묻고 싶습니다. 무엇 때문에 왔느냐고. 일생의 모든 것을 사탄이 빼앗아 간다 할지라도 선조들을 대신하여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현실의 모든 것을 희생하는 한이 있더라도, 죽음의 자리에 나가게 될지라도, 나를 ‘지켜 주시고 나의 일을 염려해 주시는 하늘의 은사만은 잊지 못하겠나이다.’ 할 수 있는 마음, 그런 불변의 심정이 있어야만 통일이념을 성취하는 그날까지 남아지는 우리가 될 것입니다.

이러한 심정이 여러분의 가슴에 싹트지 않고, 이러한 이념의 세계에 대한 감정이 여러분의 마음에서 움직이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될 것이냐? 방황, 방황, 방황하다가 최후의 순간에는 자기 자신을 변명하지도 못한 채 죽음의 함정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이런 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입을 막고, 코를 막고라도 다시 한번 살피는 마음이 있어야 됩니다. 훌륭한 신앙자의 태도는 대인(對人)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로 조심히 살피는 태도입니다. 이런 살피는 마음, 조심스런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마음이 없는 사람은 무책임한 사람입니다.

역사는 책임자를 구하고 있는데 어떠한 책임자를 구하느냐 하면, 역사적이고 시대적이며 미래적인 책임자를 구합니다. 그런 책임자를 구하고 있어요. 옛날의 성인들 혹은 역사적인 우리의 선조들은 모두 그 시대에 역사적인 책임을 호소한 분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의 종말시대인 오늘날까지 그분들의 말씀은 우리의 가슴을 울리고 있는 것입니다. 또 그분들의 행동은 우리의 심정을 격동시키고 그분들의 생애는 우리 생애에 방향을 제 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8. 역사가 요구하는 사람

​이제 여러분은 한마디 말을 하는 데 있어서도, 듣는 데 있어서도, 보는 데 있어서도, 느끼는 데 있어서도 살피고 조심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역사적인 책임을 다하기 위하여 얼마나 애써 봤습니까? 어려움도 개의치 않고, 분함도 개의치 않고, 몰림과 쫓김도 개의치 않고, 굶주림도 개의치 않고, 죽음도 개의치 않으며 역사적인 책임을 다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박차고 나서 보았습니까? 얼마나 조심스런 마음을 가졌습니까?

혹시 나의 환경에 나를 이끌고자 하는 어떤 섭리적인 천륜의 손길은 미쳐져 있지 않은가 하고 살피면서 책임감에 불타는 심정, 그것을 찾고 싶어 하는 심정이 일신에 감돌아 지금까지의 자기의 입장을 부정하고 새로운 생각을 하는 시간을 여러분은 얼마나 가져 봤습니까? 못 가져 봤으면 여러분은 얼굴을 들 수 없음을 느껴야 할 것입니다.

에덴동산에는 먼저 지음받은 천사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새로 아담 해와가 나타나자 이미 환경을 지배하고 있던 천사장은 공격자가 되었습니다, 공격자. 이것이 역사의 출발이었습니다. 습관적인 역사, 혹은 전통적인 역사를 주장하던 인간들은 언제나 하나님께서 가시는 길을 반대하였습니다. 어느 한 때에도 협조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조상이 그렇기 때문에 후손도 그렇다는 거예요. 역사노정에서 몰림받던 자들이 싸우면서 역사를 이끌어 나왔다는 것입니다.

하늘을 대하던 노아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당시 사회의 전통을 주장하는 무리들 앞에 그는 광자로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광자, 엉터리, 바보로밖에 보이지 않았다는 거예요. 아브라함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백세에 하늘이 축복해 주심으로 낳았던 독자 이삭을 죽이려 했습니다. 모세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와 같이 뜻을 품고 나선 사람들을 모함하고 배반하고 몰아내자고 선동한 자들은 누구였던고? 역사적인 전통을 고수하는 무리였습니다. 하늘이 있다 할진대 그런 자들은 심판받아야 됩니다.

지금까지의 역사적인 것에 대한 모든 미련을 한꺼번에 끊어 버리고, 과거의 낡은 옷을 벗어 버리고 새로운 동산에서 새 아침을 맞이하여 흰옷을 입고 새로운 소망을 가지고 나타나고자 하는 것이 복귀의 이념입니다.

이러한 역사 과정을 거쳐온 타락한 인간인 연고로 새로운 학설이 나타나도 때렸습니다. 새로운 무엇을 주장하면 얻어맞았습니다. 그런데 가정적으로 맞으면 그것은 가정적인 사명을 대신한 것이요, 민족적으로 맞으면 그것은 민족적인 사명을 대신한 것이요, 국가적으로 맞으면 그것은 국가적인 사명을 대신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대의 그 국가의 백성들로부터 맞으면 그것은 그 시대와 국가와 백성들의 이념적인 사명을 대신한 것입니다.

역사는 흘러 오늘날은 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가 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앞으로 반드시 공격전 혹은 수비전, 즉 격투가 벌어질 것입니다. 이것이 역사적인 전체의 종결점이 되고 이것으로써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면 모르지만, 그렇지 못한다면 여기에 새로운 무엇이 나타나야 되는 것입니다. 그 새로운 것은 어떻게 될 것이뇨? 종교를 갖고 나오면 종교인들에게 맞을 것이요, 어떠한 책임을 갖고 나오면 사회 환경에서 배척받을 것이요, 어떤 이념을 갖고 나오면 세계의 주의로부터 배척받을 것입니다. 나중에는 민주주의로부터 배척받고 공산주의로부터 배척받을 것입니다.

오늘날 이 세계는 그런 과정을 거쳐 나가야 할 타락세계인 고로 배척받고 몰림받으면서도 거기에 굴하지 않는 어떤 무엇이 나와야만 이 세계는 새로운 세계로 넘어설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무엇이 필시 나올 것을 알고 있습니다. 또 우리는 그런 이념을 소개하기 위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우리는 핍박을 개의치 않고 오늘도 내일도 나아가기 위해서 모였습니다.

여기에서 여러분은 어떤 각오를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역사적인 각오가 아닙니다. 시대적인 각오가 아닙니다. 한 때의 순간적인 각오도 아닙니다. 천주적인 각오, 천주적인 각오를 해야 합니다. 천주를 주재하시는 하늘은 반드시 그런 각오를 가진 무리를 모으실 텐데, 천주의 이념에 불타는 포부를 품고 몰리는 무리에 가담하는 용자들이 있어, 시대에 꺾이지 않고 남아진다 할진대 그들은 후대의 역사를 움직일 수 있을 것입니다.

​9. 새로운 종교가 나와야 할 때

​오늘날까지 종교는 제창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억조창생을 구하자’고 말씀하셨습니다. 선의 이념권 내로 인류를 인도하고 하나의 목적세계를 소개하기 위하여 제창하였습니다.

이제 새로운 종교이념이 나온다면 그것은 지상의 인류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왔다갔던 수많은 선지선열과 뜻을 배반하여 지옥에 간 영인들까지 구해야 할 것입니다. 새로운 이념을 갖춘 주의라면, 그런 종교라면 지상의 억조창생을 구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천상에 가 있는 영인들 혹은 지옥에 가 있는 수많은 죄인들과 하늘을 배반한 사탄까지도 구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종교가 반드시 나와야만 됩니다. 그런 종교의 이념이 나와서 모든 종교를 통일하고 모든 종교인들의 마음에 불을 던지고, 평화와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평화와 기쁨을 주고, 새로운 이념권 내로 돌진할 수 있는 각오와 맹세를 할 수 있게 해야 됩니다. 이 땅 위에 그런 각오, 그런 맹세를 하게 할 수 있는 새로운 움직임이 나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것을 생각해 보았습니까? 찾아보았습니까? 상상이라도 해 보았습니까? 그 이념의 목적은 모든 것을 통일하는 것입니다. 지상도 통일하고, 영계가 있다면 영계도 통일하고, 원한에 사무쳐 있는 지옥까지도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직접 못하면 이념이라도 갖춘 종교가 나와야 됩니다. 그런 이념을 갖춘 종교가 나와야만 우리가 사모하는 세계, 즉 선의 세계와 악의 세계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현 시대를 말세라고 하는 여러분은 무엇을 찾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생명문제와 연관되는 이념은 지극히 작은 한마디에서부터, 하나의 손길로부터, 하나의 발자취로부터, 하나의 상징적인 암시로부터 여러분에게 접촉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날 인간들은 다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세계를 바라볼 때는 원수가 없습니다. 악과 부딪친다 하더라도 악이 나의 나아갈 길을 재촉해 주는 것이 될 수 있는 것이요, 선도 역시 나를 재촉시키는 것이 됩니다. 이런 견지에서 우리는 무엇인가를 찾고 조심성 있게 살피는 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10. 모든 것을 이긴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면

​오늘도 내일도 하늘에 대한 소망을 가져야 하겠고, 죄악의 현실, 엉클어져 있는 세상에 대한 미련을 끊고 움직일 수 있는 심적인 충격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그 충격이 하루, 일년 나아가 일생 동안 계속 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여러분이 사모하는 그 목적지까지 가느냐 못 가느냐 하는 문제가 결정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 충격이 없다 할진대는 말할 수 없이 초조할 것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이 초조하고 공포의 분위기에 휩쓸리는 것을 인식할 수 있는 때입니다. 조그마한 양심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무엇인지 모르게 초조하고 불안한 환경으로 자신을 몰아넣고 있는 감촉을 느낄 거예요. 여러 청년 남녀들이 이러한 것을 느끼더라도 초조함을 해결할 수 있고 공포를 해결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싹튼다면, 그것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소망의 터전을 점령하고 있던 공포와 초조가 물러가고 양심적인 것이 움직일 수 있는 세계가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초조와 공포심을 넘어 조심성 있게 그것을 찾는 마음이 여러분의 걸음을 재촉하고 여러분의 몸을 이끌어간다면 지금도 절대 늦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최후의 귀일점은 어떠한 물질적인 이념이나 인간적인 어떠한 이념이 찾아 주는 것이 아니요, 내 마음에 폭발되어 오는 간곡한 심정이기 때문입니다. 최후에 남아지는 이념의 한 곳을 향하여 움직여 나가게 하는 것은 심정입니다. 심정이 최후의 나의 전체를 결정지어 준다는 것입니다.

이 심정 하나만을 붙들고 조심성 있게 찾는 자가, 들려주는 말씀을 들을 수 있고, 보여 주는 환상을 볼 수 있으며, 생활에서의 모든 실정을 분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을 느끼며 초조한 심정과 불안한 마음을 억제하면서 새로운 이념을 찾고 움직이는 청년 남녀들이 있고, 그들의 울부짖는 음성이 들리는 그런 심정의 움직임이 있다 할진대는, 여러분은 그들의 심정을 통하여 역사적인 모든 것과 오랫동안 느껴오던 모든 것을 한꺼번에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심정을 느끼고 자기를 각성하여 ‘하늘이 찾던 이념의 주체가 이것이었구나! 세계가 찾던 참된 모습이 이것이었구나! 하늘땅 앞에 세워서 자랑할 수 있는 모습이 이것이었구나!’ 하고 자기도 모르게 부르짖는 순간을 갖는 자만이 역사적인 주인이요, 섭리적인 주인이요, 천륜적인 주인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여러분들은 홀로 살 수 없는 자신임을 부정 못할 것입니다. 관계와 인연의 세계에서 책임을 다하고 실적을 남겨야 할 인생행로를 가고 있는 우리인 것을 부정 못할 것입니다.

책임을 다하고 실적을 남기면 어떻게 될 것이냐? 자기를 자랑할 수 있고, 본연의 인간을 대신한 승자의 모습이 나였구나 하는 각성이 생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순간에 세계는 여러분의 것이 될 것이며, 이 우주도 여러분의 것이 될 것입니다. 또한 오늘날까지 섭리해 나오신 하나님도 여러분의 하나님이 될 것이며, 여러분은 그 하나님의 위업을 상속받을 수 있는 직계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찾아 나가는 데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조심히 살피는 것입니다. 그러는 가운데에서 이런 일이 이루어질 수 있고 찾아질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명심해 주시기 바랍니다.

<기 도>

변화산상에서 판가리 싸움을 하던 예수의 마음은 슬픔에 잠겨 있었사온데 베드로, 야보고, 요한은 ‘선생님이여,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저희가 여기에 장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짓겠나이다.’ 하던 제자들의 심정을 저희들이 감히 짐작하겠나이다.

땅 위에서 이념의 흔적도 느끼지 못하고 이념세계의 실정도 알지 못한 무지몽매한 그들, 온 우주를 주관하고 포괄하고도 남을 수 있는 이념적인 환경이 벌어지는 그 자리에서 그런 말을 하지 않을 자가 있겠사오리까? 과연 그리던 그 한 장면이요, 살고 싶었던 그 한 장면인 것을 마음으로는 알았으나 현실적인 과정을 거친 후에야 이루어진다는 것을 그때의 베드로, 야보고, 요한은 몰랐었사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세계에 널려 있는 기독교인들은 마음으로 천국을 고대하고 그리워하고 있으나 천국을 찾는 데에 싸움의 행로가 남아 있다는 것은 망각하고 있사옵니다. 이러한 기독교인들을 각성시켜야 할 책임이 저희에게 있사옵니다. 더욱이나 끝날인 오늘날에는 역사도 변하고 있고, 신앙도 변하고 있고, 인심도 변하고 있고, 전통도 변하고 있고, 주의도 변하고 있고, 이것 아니면 죽는다던 사랑의 심정도 변하고 있는 이때, 변하지 않는 이념, 변하지 않는 모습, 변할래야 변할 수 없는 자체, 그것, 그 동산, 그 세계, 그 주권, 그 지도자, 그 음성, 그 생활, 그 환경이 그립사옵니다.

아버님, 맺혔던 가슴을 여시옵소서. 이제 오늘의 내 한 자체가 이렇게 초조하고 이렇게 좁은 자신임을 알았사옵고, 오늘의 나를 넘어 내일의 나를 추구하기에 급급할 수 있는 내가 그립사옵니다.

통일신도들이 가는 걸음에 핍박이 있다 하더라도 그 핍박을 내가 가는 길을 막는 악의 요소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나를 하늘의 심정으로 더 가까이 몰아내주는 자극적인 작용으로서 이용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 핍박은 핍박이 아니라 심정을 연결시키기 위한 아버지의 역사임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앞에 합장하고 머리 숙여, 천상의 법도는 역사노정과 모순됨이 없다 할 수 있는 자리에서 승리의 개가를 아버지 앞에 돌려드림으로써 아버지께서 과연 내 아들이라 할 수 있는 모습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 기뻐하심에 같이 기뻐할 수 있고, 내가 기뻐함에 사탄까지도 부끄러운 얼굴로 웃지 않을 수 없는 심정을 일으킬 수 있는 아들딸의 모습을 하늘은 요구하신다는 것을 알았사오니, 그런 나를 찾아 헤매는 세계의 기독교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러한 나를 재촉시킬 수 있는 선발대로 나서는 통일신도가 되게 허락해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들이 바라던 것은 너무나 적었사옵니다. 저희들이 귀중하게 여기고 존중시하던 것, 그것으로 끝인 줄 알았는데 그것을 넘어 무한한 사랑과 무한한 은사가 있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아버님의 은사 앞에 길을 막는 자신이었음을 탄식하는 마음이 이 시간 식구 식구에게 우러나게 하시옵소서. 이제 심정의 자극을 받고 사명감에 불타 오라 하실 때에 기쁘게 오고, 가라 하실 때에 기쁘게 갈 줄 아는 사람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부르시는 음성을 고마워했거든 명령하시는 음성도 고마워하며 원수들의 진영을 향하여 돌진할 수 있는 하늘의 용자들이 되고, 하늘 세계의 주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여기에는 화살을 맞아 쓰러지는 자도 있을 것을 알고 있사오니, 이런 마당에서도 패배하여 후퇴하는 자들이 되지 말게 인도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행복에 잠겨 아버지와 의논하는 순간이 있는 반면에 싸움터에서 피눈물을 뿌리고 하늘의 원한을 호소하며 쓰러지는 순간이 이 아들딸들에게 있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기쁨도 책임지고 슬픔도 책임지고 싸움도 책임지고 억울함도 책임지고, 끝날의 심판대 앞에서 역사적인 것을 거부하고 ‘아버지시여, 손을 들어 저희를 축복해 주시옵소서. 아버지시여, 저를 보고 분함을 참으시옵소서. 아버지시여, 저를 보고 고통과 억울함을 참으시옵소서. 아버지시여, 저를 보고 수고를 거두시옵소서.’ 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런 아들딸들이 나타나기를 바라기를 6천년, 조심스럽게 찾아오시기를 6천년이셨으니, 아버지, 황공하고 망극하옵나이다. 찾으시는 그 시선, 찾으시는 그 모습, 조심스러운 그 발자취를 저희가 망각하였나이다.

오늘 들었사옵고, 이 시간 알았사옵니다. 조심스럽게 찾아오라고 하셨음을 아옵니다. 조심스럽게 찾아오신 아버지, 저희들을 붙들려 하신 그 손길을 몇 번이나 배반한 저희들이, 아버님의 체면을 망각하였던 자신들임을 알았사옵니다.

이제 저희가 아버지 앞에 서고, 아버지와 인연된 생활을 하고, 아버지를 대신하여 조심히 찾아가야 할 길을 가게 해 주시옵소서. 이 길을 다 간 후에, 이 길을 모르는 다른 사람들에게 조심스럽게 찾아갈 수 있는 방향을 가르쳐 주어야 할 저희들이온데, 그런 천적인 명령을 받은 저희들이온데, 여기에서 슬픈 눈물을 흘리며 후퇴하는 자들이 되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배반하는 무리들을 사랑하고 배반하는 무리들을 축복해 주시려 하셨던 아버지의 심정이 분함으로 남아 있는 것을 아옵니다. 이제 끝날에 엘리야가 기도하던 이상의 기도를 아버님께 드리며 나타나는 한 분의 슬픔을 위로할 자가 없는 것을 알고 슬픈 조건을 넘어서, 그분을 권고할 수 있는 간곡한 마음을 갖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찾아 헤매는 발걸음이 피곤하여 쓰러지고, 조심성 있게 찾아 헤매는 걸음이 기진맥진하여 쓰러질 때마다 아버님께서 ‘내가 있다, 내가 가는 길로 오너라’ 하시던 그 때가 그립사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인간을 믿고 일할 수 없었던 것을 알았사옵고, 인간과 의논하면 하늘의 일이 지연에 지연을 거듭했던 것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오늘날 이때는 많은 무리가 필요치 않음을 아옵니다. 이때는 넘고 가야 할 때요, 이때는 청산하고 가야 할 때요, 이때는 모든 것을 맺고 넘어가야 할 때요, 이때는 있는 그대로 나타나야 할 때입니다. 이 길은 불평하는 자 못 갈 길이요, 스스로 변명하는 자 못 갈 길이요, 스스로 자기를 세우는 자 후퇴할 길인 것을 알았사옵니다. 이 길은 예수님이 피흘리며 가신 십자가의 길, 연장된 골고다의 길인 것을 알았기에 변명할 몸이로되 변명할 줄 모르고, 자기 자신을 세워 자랑하고 싶으나 자랑할 줄 모르고, 분함을 알면서도 밟히며 가야 할 길임을 알았사옵니다. 6천년 섭리노정에서 이런 길을 걸어간 하늘의 성도들을 생각할 때 원통하옵나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아버지의 심정이 더 원통하다는 것을 알게 될 때에 회개해야 할 저희들이옵니다. 슬픔 중의 슬픔이요, 말할 수 없이 후회해야 할 사정인 줄 아옵니다. 저희 일체의 소원이 아버지 것이요, 저희의 일체가 아버지의 소유요, 저희의 심정과 사랑의 중심이 아버지시온데, 이러한 것을 느끼지 못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불쌍한 자임을 아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그런 아버지를 알고 붙드셨기에 죽음도 두렵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오히려 원수를 대하여 복을 빌던 그 늠름하고 여유 있는 인격이 그립사옵니다. 그 걸음이 그립사옵니다. 오늘도 내일도 역사의 변함과 생활의 변함과 자기 일신의 변함을 비웃을 수 있는 승리의 왕자는 어디에 있사옵니까? 아버지, 그립고 그립습니다.

역사적인 주인공, 시대적인 주인공, 미래적인 주인공이 갈라질 것이 아니라 하나의 실체로 나타나고 당신의 심정을 인간들에게 옮겨 줄 수 있는 그때, 그 세계, 그 동산이 그립사옵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무리가 나와야 되겠고 교단이 나와야 되겠사옵니다.

모든 것을 잊고 그것을 찾기에 준비하고 성심을 기울여 책임을 다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모든 것을 탕감하고 아버지 앞에 서기 위해 어떤 희생도 개의치 않고 달음질칠 수 있는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 이 삼천만 민족을 어이 하겠사옵니까. 이 땅 위에 널려 있는 27억 인류를 어이 하겠사옵니까? 민족의 운명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사옵고, 인류의 종말이 비운의 흑막에 싸여 있음을 바라보게 될 때 비통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느끼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아버지의 역사적인 슬픈 심정을 아는 연고로 무지한 인간들 앞에 이런 마음을 전함으로 말미암아, 이런 마음을 일으키지 않으면 안 되겠기에 이런 말을 하였사오니,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불충한 인간들로 하여금 불충의 자리를 피하게 하기 위해 이런 애절하고 비통한 심정을 전하오니 용납하여 주시옵고, 이런 기도를 용납하여 주시옵기를, 사랑의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의 서글픔이 역사적인 서글픔인 것을 알고 있사옵고, 갈보리 산정에서 피눈물을 흘리시던 예수님이 그립사옵니다. 이제 그의 대신자, 아버지의 실체로서 역사를 비웃고 역사를 책망할 수 있는 하나의 모습이 나타나기를 인류는 고대하고 있사옵니다. 하늘도 고대하고 계심을 아옵니다. 그러한 자체가 그리워 오늘도 내일도 찾아 헤매는 아들딸들이 되게 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갈 길을 다 가지 못하고 슬퍼하는 자들 되지 말게 허락해 주시옵고, 갈 길을 다 간 후에도 또 가고 싶어하고, 갈 길을 다 간 후에 찾아지는 기쁨을 마음에 품기 위하여 허덕이는 무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야만 놀랍고 크신 섭리의 뜻 앞에 하나의 주춧돌이 된다는 것을 저희들은 배워 알았사오니, 오늘도 내일도 이 뜻을 위하여 동원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의 세계도 이 뜻을 위하여 저희의 후손도 이 뜻을 위하여 동원되어야 하는 운세에 있사오니, 명령하여 주시옵고 이끌어 주시옵소서. 저희들은 가겠나이다.

아버님! 아뢰고 싶은 저희의 모든 심정을 아시옵고, 기도하는 바를 이루어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남아진 험한 길도 지켜 주시옵소서. 주님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마태복음 25:1-13

<기 도(Ⅰ)>

아버님을 모셔야 할 본연의 아담 해와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지금까지의 역사는 슬픔의 노정이 되었다는 사실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범죄한 아담 해와의 후손 된 인간들이 남겨진 죄의 보따리를 짊어진 채 몰리고 쫓기고 시련당하면서 오늘날까지 나온 이 인류역사를 저희들이 분히 여길 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와 같은 자리에 떨어진 인간들을 하늘은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창조주로서의 책임이 있는 연고로 어느 시대, 어느 때를 개의치 않고 이 인간들을 다시 찾기 위해 수고의 역사노정을 거쳐오셨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나이다.

오늘 이런 입장에 처해 있는 저희는 자신들을 놓고 탄식하는 동시에 아버지께서 무한한 수고와 고통의 길을 걸으신 것을 마음 아프게 생각할 줄 아는 모습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를 대해서는 면목없는 자신들이라는 것을 느끼고 역사적인 죄의 혈통을 이어받은 인간들에 대해서는 분히 여길 줄 아는 마음을 갖게 하여 주시옵길,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의 마음에는 아직까지 죄악의 근성이 남아 있사오며, 저희의 몸은 아직까지 죄악의 쇠사슬에 매어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사옵니다. 긍휼의 아버지께서 힘과 능(能)으로 나타나 주시기를 고대하고 있사옵고, 참다운 아들딸이 될 수 있기를 고대하고 있사옵니다. 아버님께서는 죄악의 철망을 끊고, 사무쳐 들어오는 죄악의 인연을 끊고 맞싸우는 모습이 되지 못한 채 실패하고 있는 아들딸을 바라보시게 될 때 더욱 슬퍼하실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이제 마음 문을 열고 몸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서 새로운 마음, 새로운 몸을 갖추어 본연의 아버지를 내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하나의 모습이 나타나기를 고대하시는 아버지 앞에, ‘아버지, 당신의 뜻을 대신한 자체이오니 받으시옵소서.’ 할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한 역사적인 승리자, 원수들과 싸워 승리하고 아버지의 슬픈 마음을 위로해 드릴 수 있는 아들딸이 나타나는 것이 아버지의 소원인 것을 저희들이 알고 있사옵니다.

이제 저희 자신들이 그와 같은 자리에서 아버지를 내 아버지라 부를 수 있으며, 아버지를 위로해 드릴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것이 저희들의 소원이요 아버지의 소원인 것을 알고 있사오니, 저희들을 격려하시어서 그 자리까지 이끌어 주시옵소서. 이끌어 주신 아버지의 손길을 붙들고 어떠한 역경의 길도 가기를 원하는 간절한 마음을 가진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 이날에 저희를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를 찾아 주시옵소서. 저희의 마음과 몸에 사무친 모든 흑암을 제거시키시어서, 광명하신 아버지의 품에 안길 수 있는 이 한 날이 되게 하여 주시옵길,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민족을 축복하여 주시옵고, 이 인류를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특히 이날 외로운 심정을 품고 아버지 앞에 머리 숙인 식구들 위에, 아버지, 긍휼의 손길을 펴 주시어서 승리의 모습을 찾아서 자랑할 수 있게 해주시고, 이들이 드리는 경배와 송영에 하늘땅이 함께 동하여 기뻐할 수 있는 시간으로 이끌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일체를 아버지 앞에 맡기오니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기 도(Ⅱ)>

거룩한 날을 맞이하여 준비없이 나온 몸이로되 염치불고하고 아버지의 존전에 나와 머리 숙였사오니, 사랑의 아버님, 긍휼의 아버님, 관용의 아버님이시여! 저희들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저희의 마음은 아버지의 마음을 닮고 싶사옵고, 저희의 몸은 아버지의 형상을 닮고 싶사옵니다. 알지 못하여 그 일을 이루지 못한 저희들이오니 마음으로 알려 주시옵고, 몸으로 체휼시켜 주시어서 당신의 성상을 본받은 모습으로 이 한 시간 아버지 앞에 엎드릴 수 있기를 간곡히 바라옵나이다.

아버님의 뜻 앞에 합당하지 못한 아들딸이 있사올진대 친히 찾아오시어서 훈계하여 주시옵소서. 귀가 어둡고 눈이 어두워 당신의 말씀을 들을 줄 모르고, 당신의 모습을 바라볼 줄 모르는 저희들을 다시 듣게 하셔야 할, 다시 보게 하셔야 할 당신이 저희 이상 슬플 것이요, 저희 이상 애달플 것이며, 저희 이상 답답하시다는 것을 이 시간 마음으로 몸으로 체휼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께서는 저희를 대하여 수천만 번 손짓을 하셨사오나 거기에 반응할 줄 몰랐던 저희들이옵고, 수만 번 부르셨사오나 들을 줄 몰랐던 저희들이오라, 어찌 아버지 앞에 설 면목이 있사오리까마는, 그래도 오라 하시는 당신의 음성을 듣고, 그래도 손짓하시며 부르시는 당신이 계심을 알고 부복하였사옵니다. 불쌍한 자 중의 불쌍한 자요, 의지할 곳 없는 자 중의 의지할 곳 없는 자들인 것을 아버지 아실 줄 믿사오니, 추한 모습들이지만 저희들을 찾아오시어서 사랑의 손길로 붙들어 주셔야 되겠사옵니다. 저희들의 눈이 어둡고 저희들의 몸이 상처를 입어 생명의 본체를 알지 못하는 자리에 있을지라도, 아버님, 사랑으로 친히 품어 주시옵소서. 피곤한 발걸음을 멈추시고 상심된 마음을 기쁜 마음으로 돌이키시사 저희들을 위로해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슬픔을 남기고 있으면서도 아버지께 다시 슬픔을 느끼게 하는 것은 타락된 세상이기 때문임을 아옵니다. 사탄이 저희의 갈 길을 막고 있으며 사망의 권세로써 세상을 휩쓸고 있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저희에게 책임을 맡기시지 않으시고 홀로 책임지시고 원수를 대해 싸워 나오신 아버지, 그러하신 아버지를 공경하는 마음이 크면 클수록, 저희의 죄와 저희의 허물을 용서하고 싶으신 마음이 크실 것을 알고 있사오니, 그 심정을 통하여 이 시간 다시 한번 저희들을 찾아 주시옵소서.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참다운 생명의 감정을 갖고 아버님께 경배 드리는 모습이 되어야 할 땅 위의 인간들이 그와 같은 모습이 되지 못한 것을 용납하여 주시옵고, 아버지를 부르고 싶은 마음, 아버지를 따르고 싶은 마음, 아버지를 위하고 싶은 마음을 가진 저희들이지만 무한히 슬픈 사정이 있음을, 아버지, 알아주시옵소서.

이제 이 한 시간, 저희들 역사적인 죄상을 염려하고, 시대적인 죄악을 염려하고, 미래에 남아질 죄악의 조건들을 염려하면서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하여 주시옵고, 부족한 모습들이나마 아버님을 모셔 놓고 머리 숙여 경배드릴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길,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죄인 된 것을 뉘우치고 눈물지으며, 통분한 심정으로 눈물 흘리며 간곡한 심정으로 회개하는 마음을 갖게 될 때 아버님께서는 6천년간 용납하여 주셨사옵고, 오늘 이 시간도 긍휼의 심정으로 대하고자 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울고 있는 저희의 마음 문을 두드려 주시옵소서. 죄악에 사무친 지금까지의 모든 주의 주장과 관념을 제거시켜 주시어서 저희의 마음과 몸으로 아버지의 생명을 감촉하는 이 시간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지금까지 느끼지 못한 하늘의 사랑의 은사, 하늘의 사랑의 심정, 하늘의 간곡한 곡절의 심정을 체휼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있고, 아버지께서 저희들을 아들딸이라 부를 수 있는 인연이 맺어지는 이 시간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 삼천리 반도에 살고 있는 삼천만 민족을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이들을 염려하는 참다운 사람들은 많지 않은 것 같사옵고, 이들을 위하여 눈물 흘리고 땀 흘리는 무리는 심히도 적은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님께서 긍휼히 여겨 주시지 않으면 이 민족은 머무를 곳이 없사옵고, 의지할 곳이 없사오며, 바라볼 곳도 없사오니, 아버님이시여! 불쌍한 이 민족을 돌보아 주시옵소서. 간절히 바라옵니다.

이 민족 앞에 새로운 약속을 예고하시어서 생명의 움직임을 일으키려 하시는 아버지의 수고가 있다는 것을 이 시간 모인 저희들은 알고 있나이다. 오늘까지 이 민족을 살리기 위한 천적인 섭리를 받들어 나온 저희 자신들의 부족함을 이 시간 아버지 앞에 아뢰지 않을 수 없사오니, 부족한 저희들을 권고하여 주시옵소서. 새로운 생명의 움직임을 일으키고 새로운 소망의 동산을 건설하는 책임을 맡기고도 남을 수 있는 하늘의 아들딸이 되게, 아버지, 격려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니다.

저희 자신들이 부족하여 사망의 그늘에서 신음하고 사탄의 철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할진대, 아버지께서 은혜의 손길을 펴시어서 저희를 이끌어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시간 수많은 인류가 당신의 품이 그리워 경배 드리고 있는 줄 알고 있사오니 그들 앞에 아버지, 모든 것을 보이시옵소서. 섭리의 뜻을 예고시켜 주시옵고, 그 뜻을 이룰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시간 수많은 외로운 아들딸들이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호소하고 있는 줄 아오니, 그런 심정으로 아버지께 간구하는 곳곳마다 사랑의 손길을 펴 주시고, 아버지, 현현하심의 영광을 그들 앞에 보여 주시옵길 간절히 부탁하옵니다.

남은 시간 아버지 앞에 맡기오니, 아버지로 시작하여 아버지로 끝을 맺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생명의 기쁨을 이 시간 체휼하여 아버지 앞에 영광을 돌릴 수 있게 친히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니다. 아멘.

<기 도(Ⅲ)>

아버님! 고요히 아버지로부터 그에 속한 모든 것들에 대해 가르침 받던 그 시간이 그립사옵고, 그의 영광을 황홀하게 바라보면서 땅에 머물기를 원치 않았던 때가 그립사옵니다. 깊은 사랑에 잠기어 아버님의 심정을 체휼할 때 하늘땅이 환희하던 그 시간도 그립사옵니다.

아버님께서는 고요한 가운데 현현하시기를 즐겨하셨사옵고, 어려운 가운데에 나타나시기를 개의치 않으셨사옵니다. 싸움터에서도 친히 저희들과 같이 싸워 주셨사옵고, 낙망의 자리에서도 저희들과 함께 하여 주신 역사성을 띤 아버지이셨음을 저희들이 다시 깨닫게 될 때에, 언제나 저희와 함께 계셨사옵고, 언제나 저희와 같이 싸워 주셨고, 언제나 저희와 더불어 살기를 고대하시던 아버지이심을 이 시간 생각하게 될 때에, 땅에 살면서도 땅을 배척하고 거부하기를 즐기던 지난날의 신앙노정을 뉘우치게 하여 주시옵소서.

초연한 자리에서 즐겨 모시던 아버지는 영광의 아버지셨사오나, 땅 위에 나타나신 아버님은 불쌍하고, 초췌하고, 서글픈 아버지이신 것을 알았사옵니다. 또 그러한 모습으로 저희를 대하여 오신 것을 역사노정을 통하여 배워 알았사옵니다.

이제 저희들, 영광 가운데 나타나신 아버지를 모시고 즐거워할 것이 아니라, 땅 위에 상처 입으시고 어려움에 시달리시며 참다운 아들을 찾기에 허덕이신 그 아버지를 모시고 즐거워할 수 있는 그런 영광의 자리에 서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그러한 자리에서 아버님을 모시고자 원할진대 먼저 눈물의 길을 가야 할 것이요, 가시밭길을 걸어야 할 것이요, 십자가의 고난길을 넘어야 된다는 것을 아옵니다. 그래야만 아버지가 계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을 아옵니다. 저희에게 이런 서글픈 신앙노정이 남아 있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사랑하는 아버님! 사랑하는 아버님! 이 시간 저희가 자탄하는 자리에 있사옵니까? 자기를 붙들고 슬퍼하는 자리에 머물러 있사옵니까? 혹은 민족을 붙들고 슬퍼하는 자리에 있사옵니까? 혹은 세계와 하늘을 붙들고 슬퍼하는 자리에 머물러 있사옵니까?

이제 저희들은 자기 정체를 명시하여, 바라보고 계시는 곳이 어디인가를 스스로 깨닫고 하늘의 소원이 무엇인가 염려하면서 머리 숙일 줄 아는 아들딸들이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알고 있사오니, 이제 아버지 앞에 서기에 자신이 없거든 마음으로라도 회개하고, 아버지 앞에 나서기에 부족함이 있다 할진대 스스로 정결히 하는 모습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이시여! 이와 같은 무리를 다시 재촉하시어 천성의 길을 예고시키지 않으면 안 될 당신의 사정이 남아 있는 것을 땅 위의 인간들은 모르고 있사옵니다. 나타날래야 나타날 수 없는 환경을 대하셔야 하는 아버지이시옵고, 아버지의 심정 앞에 이끌릴래야 이끌릴 수 없는 이 땅의 환경이오나, 인간을 세우셔서 이끌 수 없는 환경을 이끌어야 할 책임을 지고 계신 당신의 사정을 알았사옵니다.

지금까지 이런 사명을 갖고 나타난 수많은 선지자들을 마음대로 쫓아버리고, 마음대로 몰아내고, 마음대로 핍박하고, 마음대로 죽여 버리던 죄악의 혈통을 이어받은 저희들이 이제 어떠한 천적인 책임을 감당하고자 어떤 결심을 갖고 있는가 스스로 뉘우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하늘은 예고하시기를 지금은 자다가 깰 때라고 하셨습니다. 어두운 밤에 광명한 등불을 들어야 할 때라는 것을 예고하셨사온데, 저희의 마음이 어두움에 잠겨 있사옵니까? 저희의 몸이 사망의 철망에 매여 있사옵니까? 이것을 끊고 헤치고 나서서, 하늘을 향하여 달음질칠 수 있으며, 하늘을 대신하여 싸울 수 있으며, 하늘을 대신하여 책임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아버지라 부를 수 있고, 아버지께서 오시기를 고대하는 아들딸이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알고 있사오니, 아버지 뜻 앞에 서기에 부족한 자들이 있사올진대, 아버지, 이 시간 격려해 주시옵소서.

때와 시기가 촉박한 것을 알게 해 주시고, 사망의 그늘에 휩쓸려 심판받는 자들이 되지 말고, 생명의 부르심에 이끌려 아버지 품을 찾아서, 자유의 동산을 향하여 그 몸이 찢기는 한이 있다 할지라도, 죽는 한이 있다 할지라도 달음질쳐 갈 줄 아는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천성을 바라보게 될 때에 슬픈 일이 너무도 많은 것을 알고 땅 위의 저희들은 슬퍼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아버님, 저희가 가야 할 남아진 길이 피눈물로 연속되는 길인 것을 알 때, 저희들, 주저하고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사오나, 이런 환경에 처한 저희를 오라 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은 더 슬프고 안타까운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날은 부활주일을 지난 첫날이오니 이제 마음의 등불을 켜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의 몸과 마음에 아버님의 영원한 생명의 진액을 받지 않으면 안 되겠사오니, 아버님이시여! 새로운 이 한 시간에 생명의 역사를 일으켜 주시옵고, 재창조의 역사를 일으켜 주시옵소서.

사망권에 휩쓸려 자탄하는 자들이 있사옵니까? 아버님의 부르짖으시는 음성에 스스로 회개하는 마음을 일으켜 존엄하신 아버지 앞에 자복할 수 있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사망의 쓴 뿌리가 몸 마음에 남아 있어서 아버님을 배반하려는 심정을 갖고 있는 자가 있사올진대 이것을 제거시켜 주시옵고, 부활의 권한, 생명의 권한으로 역사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여러 모양의 사람들이 모였사오니 하나의 마음이 되게 하여 주시옵고, 하나의 심정으로 화할 수 있는 이 시간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새로운 마음으로 활동할 수 있는 이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억만 사탄들은 이 시간도 저희들을 노리고 있사오니 사탄이 일체 침범하지 못하게 하여 주시옵고, 천상에 있는 천천만 성도들을 동원시키고 참다운 심정을 갖고 하늘을 향해 호소하는 지상의 성도들을 움직여 낼 수 있는 예배가 되게 해주시고, 하늘땅의 인연을 소개할 수 있는 이 시간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니다.

이제 많은 말씀을 원치 않사옵니다. 허락하시기를 더디하시는 아버지의 심정을 알았사옵고, 주저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았사오니, 아버님, 이제 저희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전하고자 하는 마음을 알아 주시옵고 받기를 고대하는 아들딸들의 마음을 알아 주셔서, 모든 것이 아버님으로부터 연유하여 전하는 자의 마음이나 받는 자의 마음이 하나되어, 이 한 시간 아버님의 영광으로 모실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면서,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나이다. 아멘.

<말 씀>

“그런 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마 25:13)는 말씀을 중심해서 지금부터 드리려는 말씀의 제목은 ‘하늘과 같이 깨어 있어야 할 때’입니다. ‘하늘과 같이 깨어 있어야 할 때’ 이러한 제목으로 잠깐 동안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자신을 이 시간 아버지 앞에 내놓고 여러분의 마음과 몸 가운데 깨어 있는 부분이 어느 만큼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면서, 또 아버지께서 여러분을 깨우치시기 위해 어떠한 심정과 어떠한 사정을 가지고 계실 것인가 하는 것을 마음으로 느끼면서 이 시간 말씀을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1. 깨어 계신 하나님

​가정이면 가정, 또 사회면 사회, 혹은 어떤 민족이나 국가의 흥망사를 살펴볼 때 깨어 있지 못한 사회나 민족이나 국가는 망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인간에게 지극히 귀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깨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바라며 깨어 있어야 할 것인가? 살고 있는 현실을 바라보며 깨어 있을 것이 아니라 앞으로 올 때를 바라보며 깨어 있어야 됩니다. 즉 갈급히 소망하는 심정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되는 날에는 소망의 사람, 혹은 소망의 나라의 사람으로서 남아 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과거 역사에서 나라를 사랑했던 사람은 그 나라가 어두움 가운데 잠기고 사망권 내로 휩쓸려 들어갈 때 국민들에게 미래의 한 때를 바라보며 깨어 있으라고 외쳤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늘은 우리를 위하여 얼마만큼 수고하셨으며, 우리를 위하여 얼마만큼 깨어 계셨던가? 그것에 대해 우리가 아는 범위는 자기가 수고한 만큼, 자기가 깨어나 있었던 만큼밖에는 알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늘이 여러분이 알고 있는 만큼 깨어서 인간을 대해 역사하셨느냐 하면 아닙니다. 하늘은 아담 해와를 창조하신 이후 지금까지 창조이념에 대한 소망을 잊으신 적이 없었습니다. 어느 한 날도 쉬는 날이 없었고, 조는 시간이 없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에덴동산에 아담 해와를 지어 놓고 그들이 자라는 것을 바라보시는 것으로써 하늘은 만족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담 해와의 내일, 즉 미래를 염려하시며 깨어 있는 입장에서 자라는 아담 해와를 바라보셨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늘은 아담 해와로부터 지금까지 역사상의 후손들에 대해서도 미래의 입장에서, 깨어 있는 입장에서 그들을 바라보셨다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타락이었던가? 깨어 계신 하늘의 심정을 모르고 하늘의 사정을 모르고 하늘의 소원을 모른 것이 타락이었습니다. 깨어 계시는 하늘의 심정! 깨어 계셔서 자신들과 인연을 맺고자 하시는 하늘의 심정! 미래의 자신들과 함께 영광을 누리시려는 하늘의 그 소원! 그 소망을 잃어버린 것이 타락이었습니다. 그래서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께서 바라셨던 소망의 한 날을 보지 못하게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깊은 사정과 인연을 맺지 못했고, 더 나아가 지금까지 우리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하 나님의 사랑의 품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늘은 당신 품을 떠나게 된 인간들을 염려하시고 다시 찾으시기 위해 섭리를 해 오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섭리입니다. 하늘의 심정과 하늘의 사정과 하늘의 소원과 아무런 관계를 갖지 못하고 있는 오늘의 나 한 자체를 들어 다시 한번 회상해 볼 때, 아버지의 심정과 아버지의 사정과 아버지의 소원 앞에 보답해 드릴 수 있는 어떠한 무엇도 가지고 있지 못한 우리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담 해와가 떨어질까봐 염려하시던 하늘은 떨어져 버린 그들을 대해 다시 염려하는 심정을 품으셨습니다. 그리고 사탄 품, 곧 사망권에 떨어진 그들을 다시 구원하려 하신 하늘이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떨어질까봐 염려하셨고, 떨어지자 떨어진 인간을 염려하셨고, 죽음의 자리에 있는 아담 해와를 다시 살려 주시고 싶은 심정을 가하시어 6천년이란 기나긴 세월을 한시도 조는 일 없이 하루같이 우리 인간을 찾아오셨다는 사실을 이 한 시간 마음으로 느낄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새로운 소망과 심정적 충격을 고대하는 인류

인간의 욕망은 무엇인가? 자기의 가정을 넘어, 민족을 넘어, 국가를 넘어 세계를 제패하고 싶은 욕망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그러한 자기의 욕망을 성취하였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심정과 하나님의 사정과 하나님의 소원과 일치되는 자리에 서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심정과 사정과 하나님의 소원을 소유하는 자리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하늘 앞에 설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역사노정을 헤아려 보면 개인, 가정, 국가, 세계는 땅덩어리 하나를 놓고 소망을 찾기 위하여 허덕여 왔습니다. 지금도 그 무엇인지 모르게 새로운 소망을 찾아 허덕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것으로는 새로운 소망을 찾을 수 없습니다. 즉 역사적인 인연을 통한 일체의 관념이나 주의를 가지고는 새로운 소망을 찾아 나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예상해야 되겠습니다.

그래도 인간들은 소망을 품고 천륜과 인륜이 같은 입장에서 인연맺어질 수 있는 하나의 사정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이 하나의 심정을 근거로 새로운 이념 세계를 건설하는 사정을 찾고 있는데, 그런 사정은 아직까지 인류 역사상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종족을 초월하고, 동서문화를 초월하여 심정적으로 느끼고 생활적으로 얼크러지고, 공평하고 일률적인 사정으로 얼크러져야 하는데, 그러한 사정을 인간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무엇인지 모르게 마음이 클클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무엇인지 모르는 자극적인 충격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무엇인지 모르는 심정의 새로운 충격을 고대하고 있으나 아직까지 어떠한 충격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소망을 찾고 사랑을 통한 인연을 맺었다 할지라도 심정적인 합일점을 찾지 못한다 할진대 어느 때인가는 분산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노정은 무엇을 나타내는 것이냐 하면 하늘이 인간시조를 대하시던 그 천적인 내용입니다. 이것을 인류 앞에 보여 주시기 위한 것이 역사의 실상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지금을 끝날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말을 하고 있는데, 지금까지 인간들이 소망했던 그 소망은 물러가야 할 것이며, 지금까지의 인간들의 사정도 영원히 인연맺을 수 없는 것이기에 물러가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할 때가 온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심정을 중심삼은 가정적인 기반이나 사회적인 기반 혹은 국가적인 기반이나 세계적인 기반이 변할래야 변할 수 없는 하나의 천주적인 중심, 어느 누구도 움직여 낼 수 없는 하나의 반석과 같은 중심이 못 되는 연고로 그것들은 어차피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마음들이 동요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인간의 마음의 동요가 크면 클수록, 조급함을 느끼면 느낄수록 더 큰 심정의 때는 올 것이고, 그때가 오면 인류에게 소망이 있을 것입니다.

만일 그런 때가 찾아오지 않는다 할진대, 인류는 절망으로 시작하여 절망으로 종말을 고할 것입니다. 그러나 인류에 대한 하늘의 뜻이 있다 할진대 그것은 소망으로 출발하여 소망으로 종말지어야 할 뜻이고, 또 하늘에게는 그 뜻을 이루어야 할 책임이 있는 연고로 기필코 역사의 목적이 이루어지는 때가 오고야 말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인간들은 모든 동기가 인간으로부터 시작된 줄 알고 있지만, 아니올시다. 오늘의 사회와 국가 혹은 세계도 어떠한 역사적인 인연을 기반으로 하여 되어진 줄 알고 있지만, 그것이 아닙니다. 역사적인 인연이라는 것은 인간으로부터 시작된 인연이 아닙니다. 그것은 더 고차적인 인연과 더 고차적인 소망이 이루어질 때까지 움직여 나오는 역사의 궤도에 보조를 맞추어 나온 것에 지나지 않는 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역사를 대하는 바른 자세

이제 잠에서 깰 때라고 하였는데, 밤에 자다 깨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시대 시대마다 예고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끝날에 이루어야 할 어떠한 이념적인 세계가 있다 할진대, 그 세계를 찾아가는 인간들 앞에 시대 시대마다 예고하는 말씀입니다.

지금 여러분에게는 자기를 내세우고 자기를 주장하고 전체를 통솔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그 마음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가?

여러분은 잠 가운데 빠져 있습니다. 오늘날 인류는 잠 가운데 빠져 있습니다. 개인도 그렇고, 가정도 그렇고, 사회, 국가, 세계, 더 나아가서는 영계까지도 소망의 한 때를 맞지 못한 채 깊은 잠 가운데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인연이 이 시대에서 이대로 종결되어질 것이 아니라, 다시 한 단계를 넘어서 새로운 무엇으로 종결되어야 한다는 것을 어느 누구나 공통적으로 느낀다 할진대는 그 새로운 무엇이 문제일 것입니다.

그런데 과거의 역사를 살펴볼 때 전통적인 습관만을 절대적으로 주장하던 민족은 역사에서 밀려 나갔습니다. 우리는 옛날 골동품 같은 시대에 가졌던 생각들을 버려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인간들은 복귀노정을 걷고 있는 연고로 역사노정의 유물을 중요시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 말은, 인간 세상에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마음이 반영되어 나타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현실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골동품적인 옛 사상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하여 본연의 이념에 대한 귀한 가치를 알고 자극을 받아 그 귀한 이념에 자기 일신을 맡기고자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그런 자만이 태초부터 하나님의 심정 속에 감추어져 있던 이상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끝날에 당도한 우리들은 역사를 돌아보며 무엇을 찾을 것이 아니라 역사를 결산하여 하나님 속에 숨겨져 있는 전체이념을 자신을 통해 재현시켜 새로운 것으로 보여질 수 있는, 그 한 시간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그 한 시간이야말로 하나님도 깨는 시간이요, 땅 위의 인간들도 깨는 시간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복귀의 시대가 다 지나간 때에는 새것을 찾아 나서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대가 끝날이라 할진대,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청년 남녀들은 사람들이 지금까지 귀하다고 했던 모든 것들을 일소해 버리고 새로운 것을 찾아 허덕이는 간곡한 마음이 싹터야만 깨어난 새 시대의 역군들이 될 수 있습니다. 이 끝날에 새것을 찾아 눈을 뜨고 허덕이는 무리, 그런 무리에게는 미래의 소망과 접할 수 있는 길이 가까워 올 것이요, 미래의 사정과 인연맺을 수 있을 것이요, 역사적인 종말시대에 나타나는 천적인 심정과 인연을 맺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나는 어떠한 자리에 서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타락한 세상, 사망의 권세가 휩쓰는 땅, 선의 피를 빨아먹는 땅, 민족이 민족을 잡아먹고, 국가가 국가를 잡아먹는 역사적인 인연을 지니고 있는 땅에 서 있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새로운 소망의 심정세계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너는 너 갈 데로 가고 나는 내 갈 길을 가야 되겠다는 확실한 하나의 한계점이 여러분 자신에게 설정되지 않는다 할진대는, 사망의 물결에 휩쓸려 나오던 역사의 흐름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새로운 시대와 인연맺지 못하게 하고 사망세계로 몰아낼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까지는 이러한 역사의 흐름을 붙들고 나와야 했지만 끝날의 심판대 앞에서는 이것을 넘어서야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께서 30여년의 생애를 마치고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에 부활의 승리를 맞이하게 될 때에, 예수 자신이 30여년의 생활을 분히 여겼다거나 혹은 자신을 가지고 있었다거나 자기 자신을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여겼던들, 하늘이 부활시키려 하셨어도 부활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부활하실 수 있었던 것은 당시까지 살아온 생애노정의 일체를 미련없이 청산하고 새로운 소망에 불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의 심정과 사정과 소원이 땅의 것이 아닌 하늘 것으로 교체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순간 부활의 은사를 입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여러분들도 이제 그러한 교체 시기를 맞을 것인데, 그 날을 가까이 바라보고 있는 여러분들은 확실한 심적 각오를 갖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어떠한 모임에 가담했다 하더라도 그 모임의 대표자를 근거로 해서 그런 각오를 가질 것이 아니라, 그 모임을 통하여 여러분 자신들이 심정적 기준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라야만 깰 수 있는 자연적인 환경을 가진 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청산해야 할 것

그러면 이제 여러분이 그러한 입장에 나아가야 할 텐데, 오늘의 여러분들이 그러한 입장에 나갈래야 나갈 도리가 없는 입장에 서 있는 것을 자인한다 할진대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여기에서 무엇을 청산해야 할 것인가? 우선 여러분은 인간 끼리끼리의 인연과, 인간 끼리끼리의 사정과, 인간 끼리끼리의 소원을 근거로 하여 가지고는 도저히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무엇과 인연을 맺어서 넘어가야 될 것인가? 슬픈 인류역사를 논의만 해서는 안 됩니다. 섭리역사의 슬픔과 하늘의 슬픔을 청산해야 합니다. 그러기 전에는 이 모든 것을 청산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오늘까지의 인류역사는 하늘이 소망을 두시고 맞추어 놓으셨던 뜻의 프로 앞에 억천만번 배반한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피 살에 사무치게 느낄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런 마음이 있어야 죄악의 현실을 증오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슬픈 인류역사를 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자신의 행동을 놓고 오늘 나의 이 행동은 타락한 인류 역사의 그 무엇을 증거하는 행동인가 하는 것을 생각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내가 취한 이 행동이 천적인 프로를 세워 가지고 섭리해 나오시는 하늘의 행동과 얼마만큼 배치되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볼 줄 알아야 하고, 이 차이에서 오는 충격을 느낄 줄 알아야겠습니다.

나의 이 행동이 하나님의 심정과 하나님의 사정과 하나님의 소원을 배반하는 것이요, 하늘의 심중에 피눈물을 가중시킨 행동이라는 것을 느낄 때 비로소 하늘을 대하는 자신의 심정이 땅을 대하는 심정보다 몇백만배 크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사망세계에 대한 일체의 미련은 끊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늘은 지금까지 이러한 입장에 서 있는 우리 인간들을 주시하면서 나오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느 한날도 쉬지 않으셨고 졸지 않으셨습니다. 창세 이후 타락의 역사를 봐 오신 하늘은 우리가 보지 못한 꼴을 보셨을 것이요, 우리가 당하지 못한 일을 당하셨을 것이요,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슬픔과 분함과 원통함을 느끼셨을 것입니다.

때로는 참다운 아들딸들을 보내셨으나 그들을 죽이는 인간들을 바라보면서도 참으신 아버지! 그 아버지는 어느 한 날도 쉬지 못하시고 깨어 우리를 바라보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들은 느낄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그러한 심정에 어리어 산다 할진대, 여러분은 심판의 자리에 나가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한 몸은 지극히 작은 몸이로되 역사는 이 한 몸을 향하여 호소하고 있습니다. 시대는 이 한 자체를 향하여 호소하고 있습니다. 세계는 이 한 자체를 향하여 호소하고 있습니다. 하늘은 이 한 자체를 향하여 오라고 부르짖고 계십니다.

이러한 기로에 서 있는 여러분의 한 자체! 기필코 바른 방향을 잡아가야 할 때가 왔고 흑암에 싸인 환경을 정리하고 나서야 할 때가 왔는데, 여러분은 가야 할 방향이 어디이며 흑암의 환경을 정리해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한 여러분 자체들을 바라보고 계시는 하늘의 심정은, 옛날 에덴동산에서 아담 해와가 타락할까봐 염려하시던 그 마음보다, 타락한 아담 해와를 바라보시던 그 마음보다, 타락한 인간을 살리기 위해 6천년 동안 수고해 나오신 그 마음보다 더 안타까우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여러분 한 자체가 하늘을 배반하는 날에는 하늘땅에 슬픔을 가중시킨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인간들을 깨우치려 했던 선조들의 수고

이제 우리는 깨어나야 되겠습니다. 깨어나야만 되겠습니다. 잠자던 눈을 떠야 되겠습니다. 움직이던 우리의 행동을 돌이켜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입장에 있는 우리가 깨어나기 위해서는 무엇을 중심삼고 움직여야 깨어날 수 있는가? 여러분의 생애노정에 쌓은 어떠한 공적이 아닙니다. 그것 가지고는 역사적인 인연에서 벗어날 수 없어요. 지금까지의 역사는 타락한 인간의 역사요, 심판받을 인연세계에 머물러 있는 역사인 연고로 이 땅 위에 남겨진 인연을 가지고 혹은 어떤 실적을 가지고는 돌이킬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어떤 권세를 가지고 돌이킬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소유했던 일체, 어떤 영광의 조건을 가지고도 돌이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처지에 우리는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돌이키기 위해서는 새로운 각성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새로운 각성을 하고 나서려면 인간들이 갖고 있는 마음이나 인간들이 갖고 있는 심정, 혹은 인간들의 인연, 인간들의 소원으로만은 안 됩니다.

그러면 가져야 될 그 하나의 마음은 무엇인가? 우리 것 이외의 역사, 즉 우리가 살아온 역사 이외의 역사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오늘날 인류가 알고 있는 역사 이외의 역사가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모르는 역사가 있었으니 우리가 모르는 역사적인 심정도 있었고, 우리가 모르는 역사적인 사정도 있었고, 우리가 모르는 역사적인 소원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6천년 전에도 그러한 내용이 있었고, 4천년 전에도 그런 내용이 있었고, 2천년 전 예수 당시에도 그런 내용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늘을 대신하여 왔다 갔던 사람들, 그 시대를 깨우치기 위해 왔다 갔던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뇨? 노아를 두고 말하면, 노아는 타락 이후 1천6백년 동안 흘러온 인간들의 역사적인 심정 말고, 인간들의 역사적인 사정 말고, 인간들이 바라던 역사적인 소원 말고, 다른 역사적인 심정과 다른 역사적인 사정과 다른 역사적인 소원을 품고 소망을 모르는 인간 앞에 소망을 알게 해야 했고, 사정을 모르는 인간 앞에 사정을 알게 해야 했고, 심정을 모르는 인간 앞에 심정을 알게 해야 했습니다. 이것이 노아의 홍수 심판의 목적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분이었던가? 역사적인 심정과 역사적인 사정과 역사적인 소원을 소개하기 위하여 오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이미 다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역사 말고 인류가 알지 못하는 천적인 소원과 천적인 심정과 천적인 사정을 갖고 오셨습니다. 그 소원을 기반으로 하여 심정을 깨우치기 위해 오셨던 것이요, 사정의 인연을 맺기 위해 오셨던 것이요, 소망의 중심이 되기 위해 오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시대 인류가 그를 배척하고 나니 역사노정에는 하늘이 바라는 소원의 기준은 간 곳이 없어지고, 사정의 기준도, 심정의 기준도 간 곳이 없어지고, 하늘의 역사 그 자체만으로 열매를 맺고 예수는 갔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은 이것을 다시 연장시켜 6천년 역사의 종말을 향하여 인간 역사가 아닌 천적인 역사의 프로를 진행시켜 나오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천적인 역사와 이 땅의 역사의 진행 기준을 맞추어 가지고 위로는 하늘을 붙들고 아래로는 인류역사를 붙들고 자신 있게 나설 수 있는 모습이 되어야겠습니다. 오늘날 인류는 그래야 할 것입니다. 하늘도 그러기를 바라실 것입니다.

그러면 그 하나의 모습은 어떤 모습인가? 그는 6천년 섭리역사, 인간 역사 말고 천적인 섭리역사의 심정을 붙든 자요, 천적인 소원과 천적인 사정을 붙든 자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류 역사 과정에는 두 흐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인류는 땅의 역사의 내용은 해명할 줄 알지만 천륜이 움직여 나온 그 역사의 내용은 해명할래야 해명할 수 없었습니다.

인간의 슬픔과 하늘의 분함은 무엇인가

무엇이 인간의 슬픔인가? 역사의 일체를 모르는 것이 슬픔이 아니요, 역사와 인연맺지 못한 것이 슬픔이 아닙니다. 인간의 슬픔은 천적인 역사 노정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적인 역사의 소망이 무엇이며, 사정이 무엇이며, 심정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끝날 뜻있는 청년 남녀에게 이런 것을 알려주고 그들의 가슴 가슴에 충격을 일으켜 주는 때가 오지 않는다 할진대 이 세계는 역사와 더불어 망할 것입니다.

이런 견지에서 바라보게 될 때에 잠자고 있는 오늘날 우리들은 깨어야만 되겠습니다. 우리 인류는 선조들이 자던 잠을 계속하여 또 자고 있습니다. 선조 때부터 수천만년의 역사노정을 거쳐왔으나 하늘과 인간과의 역사적인 규합점을 세워 자신 있게 하늘을 향해 부르짖은 자가 아직까지 없습니다. 천륜 앞에 자신 있게 책임한 사람이 아직까지 한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늘이 슬퍼하는 일이 무엇일 것인고? 그 한 규합점이 맺어지지 않는 것이 슬픔입니다. 그러면 인류가 슬퍼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인류 중에 한 사람이 나타나서 그러한 인연을 종결짓지 못한 것을 슬퍼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역사의 흐름, 혹은 천륜의 흐름인데, 이 두 방향의 흐름은 우리의 마음과 몸을 갈라 가지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마음은 ‘천륜을 향하여 가라.’ 하고 몸은 ‘역사적인 인연을 떠나지 말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싸움에 부딪쳐 신음할 줄 아는 청년 남녀들이 많아야 할 것인데, 이 싸움의 고통을 느낄 줄 아는 자가 없으니….

그런 견지에서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롬 7:24)라고 자탄했던 것입니다. 마음의 법과 몸의 법이 있어 그 두 법이 싸운다고도 했습니다. 이런 것은 역사의 전체성을 폭로시킨 것입니다.

섭리적인 소망의 기준을 먼 거리에 두고 있는 인간을 역사적인 거리를 넘어 그 흑암 권세는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오늘의 나를 지배하고 있는 흑암 권세와 공포를 뚫고 나설 수 있는 자극을 스스로 일으키지 못한다 할진대 구원섭리는 완성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천국이념은 허사라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마음에서 즐기고, 마음에서 살고, 마음에서 노래할 줄 아는 그런 나를 그리워하며 찾아가는 것이 종교인들의 행로였습니다.

여러분은 마음을 가다듬어 과거의 인연을 회상하고, 현재의 인연을 생각하고, 미래의 인연을 그리면서 마음의 그 나! 그 나를 찾아 헤매기에 얼마나 급급했었는가, 반성해 보아야 되겠습니다.

하늘은 때와 시기는 변할지라도 우리의 마음을 통하여 수시로 연락하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인 그런 심정을 체휼하지 못하고 있다 할진대, 여러분은 일개 국가를 배반한 역적을 넘어 온 천주를 배반한 반역자일 것입니다.

이런 것을 모르고 사는 인간이 되어 버렸으니 참다운 심정, 변치않는 심정이 크면 클수록, 그 사정이 크면 클수록, 그 소원이 크면 클수록 역사 과정을 섭리해 나오시는 하나님의 분함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하나님의 서글픔이 얼마나 컸으며, 하나님의 애절한 곡절이 얼마나 많았을 것인가? 이러한 심정이 반응되어 그 하나님을 붙들고 자기도 모르게 눈물지을 수 있는 감격된 마음을 가진 자, 그는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이제 그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천적인 인연이 있다는 것을 알고, 천적인 심정을 그리며 천적인 행로를 바라보아야 되겠습니다. 자신도 알 수 없게 간곡한 하늘의 사정이 그리워지고 하늘의 사정이 체휼되는 그러한 자리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 그러한 사람이 있다 할진대 역사노정을 더듬어 나오신 아버지께서는 비로소 그의 손을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을 중심삼고 억천 만민 모두가 손을 붙들어야 할 것이었는데, 택해 세운 과거의 선지선열들은 자기들이 붙들었던 손을 놓기가 일쑤였습니다. 하늘은 우리 선조들을 붙들었던 그 손을 끝날까지 붙들고 나오시고 싶었으나, 아니, 세계 인류 모두를 붙들고 나오고 싶었으나 우리 선조들은 그 손을 뿌리치고 배반하기를 일삼았던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그런 선조들을 잃어버리고 또 다시 깨우치시고, 잃어버리고 다시 일으키신 하늘의 그 심정과 다시 일으킴 받아야 할 입장에 있는 여러분의 심정과는 큰 간격이 있는 것입니다. 체휼할래야 체휼할 수 없는 슬픔이 있다 할진대 무한한 슬픔의 고개가 남아 있을 것이고, 어려움이 있다 할진대 무한한 어려움의 고개가 남아 있을 것이고, 통분한 십자가의 길이 남아 있고 무한한 십자가의 장벽이 가로막혀 있을 것입니다.

새로운 소망과 각오와 결심이 필요할 때

그러므로 이것을 터쳐내야 할 빚을 지고 있는 오늘 우리들은 마음을 붙들고 울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마음을 붙들고 울되 무엇을 염려하면서 울 것인가? 마음을 붙들고 울되 내 마음을 붙들려 하시는 하늘을 염려하면서 울어야 되겠습니다. 몸을 붙들고 울되 그 몸을 붙들려 하시는 하늘을 염려 하면서 울어야 되겠습니다.

하늘 대하여 ‘오늘의 슬픔보다도 내일의 슬픔이 더 심절하고, 오늘의 억울함보다도 내일의 억울함이 더 심절하고, 오늘의 고통보다도 내일의 고통이 더 심절하더라도 가겠나이다,’, ‘죽더라도 가겠나이다.’라고 맹세할 수 있는 심정을 갖고 자신을 찾았다 하는 자리에 서지 않으면 여러분은 깰 수 있는 자리에 서지 못하게 될 것을 알아야겠습니다. 그렇지 않겠어요?

세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실패자가 성공을 하려면 그 마음에 새로운 소망과 새로운 각오와 새로운 결심을 가져야 합니다. 자기가 낙망 했던 것보다, 자기가 실패했던 것보다 더 강한 마음의 충격이 일어나야만 실패한 기준을 넘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지금까지의 역사적인 일체의 모든 것보다도, 인간들이 심적으로 고통받던 그 모든 것보다도 더 강한 충격을 받지 않는 한 오늘의 인류는 살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이 6천년 역사의 종말이라 할진대, 하늘은 인류를 대하여 6천년간 심절한 심정으로 부르짖으시던 그 이상 이 시간 우리를 대하여 부르짖으실 겁니다. 인륜을 대하여 부르짖으실 것입니다. 하늘이 6천년 역사의 어느 시대에 인륜을 대하여 가졌던 심정보다도, 품으셨던 소망보다도 이 시대의 우리에 대하여 품으신 소망이 더 클 것입니다. 소망이 그렇거니와 사정도 그렇고, 심정도 그러할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을 깨우쳐 일어나야 할 이 때에 여러분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여러분이 자신을 일으키려면 천적인 심정을 느껴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 자신이 스스로 이러한 일을 책임지지 않는다 할진대 책임진 어떤 존재가 땅 위에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늘은 그렇게 역사하십니다. 하늘은 노아 때는 노아를 세웠고, 아브라함 때는 아브라함을 세웠고, 모세 때는 모세를 세웠고, 예수 때는 예수를 세우셨습니다. 그러니 끝날에 세울 수 있는 하나의 인물이 나타나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나타나는 그 모습을 지금까지의 전통적인 역사와 환경은 알아줄 줄 몰랐습니다. 그러니 행동으로부터 시작해서 사는 것, 움직이는 모든 것을 여러분이 헤아려 가지고 그 새 모습을 중심삼고 과거의 모든 것을 버리고 그것 대신 중심인물을 세워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그분 앞에 절대 순응할 수 있고, 절대 복종할 수 있고, 절대 화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은 깰래야 깰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때는 자기도 모르게 초조감이 드는 때입니다. 인류를 새로운 시대에 소망의 존재로 내세우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인간 자신들도 모르게 초조감과 공포에 휩싸이고 협박받는 것을 허용하고 계신 것입니다.

앞으로 여러분은 최후의 철퇴를 맞기 전에 철퇴가 여러분의 이마를 치는 감을 느낄 것입니다. 그러한 감이 여러분의 환경을 휩쓸매 공포의 마음을 느낄 것입니다. 그럴 때가 옵니다. 하늘이 치는 동시에 인류가 칩니다. 인류가 치는 동시에 사탄까지 칩니다. 그것이 대심판입니다.

심판의 의의

오늘날까지 인간들은 서로 싸웠습니다. 사탄과도 싸웠습니다. 하늘은 또 여러분을 쳤습니다. 이렇게 삼면에서 인간들을 쳤습니다. 땅에도 그렇잖아요? 육군이니 공군이니, 또는 해군이니 하는 것이 있지 않아요? 종말 시대에는 인간 하나를 중심삼고 이런 세 가지 형태로 습격해 들어올 것입니다.

육군과 같은 인간들의 습격이 있을 것이요, 해군과 같은 사탄세계의 습격이 있을 것이요, 공군과 같은 하늘 세계의 습격이 있을 것입니다. 이런 모양으로 습격해 올 것입니다.

그런 대심판의 시대가 오는데, 이러한 공포의 시대가 휩쓸려 들어오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망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악을 쳐 가지고 역사 노정에 눌렸던 마음을 회생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이러한 숨은 뜻이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인간을 죽이려는 하늘이 아니라 살리려는 하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이 우리를 밀어내는 것은 올라가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를 위협하는 것은 어떤 면을 개방하기 위한 힘의 작용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위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포의 시기가 되었다고 낙망하지 마십시오. 공포와 싸워야 됩니다. 정면으로는 공포가 나타나지만 그 후면에는 새로운 안식의 터전이 있습니다. 이것을 사람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이제 막혀진 모든 공포의 세계를 물리치고 새것을 돌려 잡아야 할 때가 옵니다. 그렇습니다. 인류를 지배하는 것은 사탄입니다. 그 사탄은 우리의 코를 끌고, 손을 끌고, 일신의 모든 것을 잡아끌어 종말에는 공포와 죽음의 자리로 이끌고 있습니다. 거기에 인류는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와 같이 사탄에게 끌려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류는 그와 같이 끌려가고 있지만 하늘은 우리의 뒤를 따라 나오고 계십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여러분의 행동을 수습해서 결정지어 나오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여러분이 행동을 먼저 해도 모든 결과적인 책임은 양심이 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것을 증거하는 실증입니다. 이것이 역사적인 전체의 증거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여러분은 끌려가고 있습니다. 사망의 함정으로 끌려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이끌려가는 처지에서도 그 모든 공포를 물리칠 수 있는 심적인 충격을 받는다 할진대는 돌아설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러한 한 때를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처해 있는 자리가 깨어 있는 자리가 아니고 어둠의 자리, 사망의 자리이니 이것을 돌이켜 깰 수 있는 그 한 순간을 가져야겠다는 것입니다. 그 순간이 역사의 종말인 말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내적인 모든 것이 복잡해지면 복잡해질수록, 혼란해지면 혼란해질수록, 공포의 세계가 밀고 들어오면 들어올수록 삶의 날이 목전에 당도하고 있다는 것을 느껴야 되겠습니다. 생명선이 사망선 위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느껴야 되겠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오늘날 인류는 그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살아 있지만 그 뒤에는 사망선과 연결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생명선이 사망선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인류는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인간들은 역사적인 방향과 더불어 마음의 방향을 찾아 헤매었습니다. 역사적인 방향과 더불어 소망을 바라보았고, 어떠한 인연과 심정 혹은 사정에 있어서도 그것을 역사적인 방향과 더불어 바라보고 나왔습니다. 따라서 이런 억측적인 움직임으로 그것을 박차고 돌아설 수 있는 그 한 때서부터 새로운 세계, 새로운 우주는 전개될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가고 있는 우리의 방향을 돌이켜야 하는데,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이냐? 사망의 물결이 소용돌이치고 있는 이 마당에서 돌아서려면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여러분은 3점을 기반으로 한 한 점을 찾아야 됩니다. 여러분 자신은 역사적인 흐름과 휩쓸리는 소용돌이 속에서 벗어날래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그 반대적인 입장에 있는 하늘의 한 점을 찾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공포와 사망의 휩쓸림에서 박차고 나오려면

공포와 사망의 웅덩이로 휩쓸려 들어가는 입장에서 박차고 나오려면 여러분은 천적인 팻말이나 3점의 기반을 둔 1점을 취해야 합니다. 그리고 또 모험을 해야 합니다. 모험, 모험을 해야 돼요. 그 흐름을 박참과 동시에 옆에 있는 새로운 무엇이라도 붙들려는 각오를 해야 삽니다. 그렇지 않으면 역사와 더불어 심판의 제물이 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내가 흐르고 있는 방향을 주시해야 됩니다. 그리고 주시하되 자기 감정으로 주시할 것이 아닙니다. 종말이 가까워 오매 여러분은 공포와 불안과 사망의 절박감이 느껴지면 느껴질수록 자신의 방향을 바른쪽으로 돌리든지 다른 일면을 보아서 어떤 생명의 구조선이 있는 가 찾아봐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나의 세계관, 내가 느끼는 심정의 모든 인연을 박차고 나아가 다른 무엇이 없는가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깨어날래야 깨어날 수 없습니다.

만일 여러분의 심중으로부터 여러분 개체의 감촉을 통하여 느껴지는 무엇이 있다 할진대 그것은 죽는 자리보다 나을 것이어늘, 그것을 붙들고 모험을 하기 위해 모든 것을 박차고 나서야 되겠습니다. 그 순간에 사망의 인연이 끊어진다는 것입니다. 과거 역사를 돌이켜봐도 그렇습니다.

노아 할아버지가 지은 방주는 역사적인 흐름에는 배치되는 하나의 표지였으나 그 방주는 하늘이 세워 주신, 우리 인간이 살 수 있는 하나의 표지였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급에서 말할 수 없는 고역을 당하고 있을 때에 나타난 모세라는 존재도 민족의 흐름에는 배치되는 표지였던 반면에 민족이 살 수 있는 하나의 표지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4천년 죄악 역사를 돌이킬 수 있는, 죽음의 길을 살 길로 돌이킬 수 있는 하늘의 표지였습니다.

우리가 마음으로 성현 현철들을 그리워하는 것은, 우리가 복귀될 수 있는 표지를 찾아 소망의 곳, 사정의 곳, 심정의 곳인 이념의 그 세계를 무한히 그리워하여 움직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돌아가려 하고 있습니다.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하늘땅의 흐름의 일체, 역사의 모든 것, 다시 말해 6천년 역사를 종결지을 수 있는 불변의 한 중심이 서지 않는 한 이 세계는 파멸입니다. 파멸이에요.

그것을 세우지 못하는 하나님이라 할진대 그런 하나님은 필요 없습니다. 그것을 세우지 못하는 하나님이라면, 인류 앞에 ‘나를 믿으라.’는 신앙의 표어를 세워 놓은 것은 모두 가식이요 외식(外飾)이 됩니다. 인류를 주관받게 하시려는 하나님밖에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박한 순간, 사망의 자리에 생명의 구조선으로 나타나십니다.

이제 여러분은 새로운 각오를 하고, 새로운 소망 새로운 심정 새로운 사정을 갖고서 역사적인 소망의 때, 천적인 소망의 때, 모든 존재세계의 소망의 때가 박두해서는 자기의 일체를 박차고 부활한 모습으로서 모험을 각오하고 하나의 중심을 붙잡고 나설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런 마음이라야 역사노정, 혹은 섭리노정에서 비로소 깨어날 수 있는 마음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먼저 소망을 갖고 사망이 물결치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견디겠다는 각오를 해야만 되겠습니다.

심판 때에 있어서의 자기 책임

오늘날 한국 청년 남녀들을 바라보면 그들은 전부다 부평초와 같이 방향 없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물결치는 대로 흘러서 어디로 갈 것인가? 이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는 움직임은 없는가? 깨어날 수 있는 길은 없는가? 오늘날은 자기가 처해 있는 환경을 무한히 미워하고 분히 여기는 공분의 심정에 사무쳐서 그런 길이 있다 할진 대, 악의 역사와 악의 세계를 밀어내기 위해 이제까지 충성한 어떠한 사람 보다 더 나은 충신 효자 효녀가 되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일대 모험을 할 줄 아는 시대적인 왕자가 필요한 시대인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많아야만 이 민족 앞에 소망의 날이 가까워질 것입니다. 또 이 세계 앞에 우리가 바라던 소망의 때는 열려져 올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을 하늘이 해 주시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늘이 할 일이 아니라 우리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현재 처해 있는 자리에서 만족할 것이 아닙니다. 하늘의 간곡한 심정을 품고 사망권에 있는 인간들의 죽음을 염려하여 인간들을 깨우기 위해 부르짖는 사람은 없을 것인가 하고 찾아야 하고 그 부르짖는 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는 부르짖는 사람의 모습을 바라볼 줄 알아야 되겠고, 그 다음에는 듣고 바라봤으니 행동을 개시할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 들을 줄 아는 귀를 가졌습니까? 바라볼 줄 알아야 되겠고, 그 다음에는 듣고 바라봤으니 행동할 수 있는 몸의 장비를 갖추고 있습니까? 이것이 문제입니다. 여기서의 듣고, 보고, 행동하는 것은 역사적인 모험의 행동이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역사적인 사망권을 박차고 나설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어떤 음성을 들었으며, 어떠한 모습을 보았으며, 어떠한 행동을 했습니까? 자기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행동할 것을 알지 못하니,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할 사람이 많겠기에 하늘은 그렇게 보여 주고, 그렇게 들려주고,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들을 내세워 역사해 나오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생사의 기로에서 자신의 행동을 결정짓고 나서야만이 죽든지 살든지 그 판가리를 할 수 있습니다. 심판은 하늘이 먼저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이 먼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자기 스스로 심판해서 승리하여 남아지는 자리에 서야 하늘의 심판을 받는 자리에 나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스스로 심판하여 남아지는 모습도 되지 못했는데 하늘의 심판은 무슨 심판입니까?

여러분들은 자신의 일체의 죄상을 중지시키고, 자신의 일체의 감정을 중지시키고, 자신의 일체의 생활을 다시 한번 정리하여 돌아설 수 있습니까? 그것이 문제입니다. 역사적인 선지자들은 그런 길을 갔습니다. 노아도 그런 길을 갔습니다. 하늘이 노아에게 ‘돌아서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살던 모든 환경을 박차고 돌아서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 명령을 받들어 개시해야 할 행동은 노아 자신도 지금까지 상상할 수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배를 산 꼭대기에 지으라….’ 배는 물 위에라야 뜰 텐데 산 꼭대기에 지으라고 하셨으니, 그런 억지가 어디 있어요? 그러나 노아는 순종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늘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 하셨을 때도 ‘예.’ 했었고, ‘이삭을 번제 드리라.’ 하셨을 때도 ‘예.’ 했던 것입니다. 모세도 민족의 고통을 염려하면서 이제까지의 흐름을 막고 애급 사람을 쳤습니다. 그것을 보고 민족이라도 좋다고 했으면 그래도…. 그 다음에 예수께서도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 했습니다.

역사는 이렇게 흘러나왔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선지자들의 부르짖음을 들을 줄 아는 사람, 그들의 모습을 볼 줄 아는 사람, 그들의 생활을 동경할 줄 아는 사람은 역사노정에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하늘의 슬픔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슬픔은 골고다 산상에서 죽어가는 예수의 모습을 바라보고 슬퍼하셨던 것 외에, 돌아가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하늘의 심정을 염려하고 그를 동정하여 눈물 흘리고, 죽음의 자리도 개의치 않고 나서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더 서러우셨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늘은 우리가 나아갈 길을 시대 시대마다 하나의 표지로서 세워 주셨는데, 끝날에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사망의 공포가 밀려들면 밀려들수록 그것을 박차고 나설 수 있는 심적인 절박감을 느껴야 합니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항상 초조감을 느껴야 됩니다. 잠이 문제가 아니요, 먹는 것이 문제가 아니요,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고 해야 합니다. 이런 절박한 심정을 느끼고 마음에 충격을 받아 모험을 각오하고 미련없이 나설 수 있는 역사적인 새로운 움직임이 나와야만 이 세계는 살 길이 열릴 것입니다.

깨어 일어나 충절과 분별의 생활로 하늘과 인연맺으라

하나님께서 이제까지 과거의 역사노정에서 그렇게 해 나오셨거늘, 끝날에도 필연코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이러한 움직임이 있다 할진대 지금까지 자기가 믿고 나온 과거의 신앙이나 과거의 어떤 주의나, 혹은 과거의 어떤 인연이 문제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살게 되는 것입니다.

보세요. 성경에 보면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의인이라고 했습니다. 동정녀로서 예수를 잉태한, 이것은 역사적인 억지였습니다. 그러나 하늘이 천사를 시켜 예고하시고 마리아를 세우려 할 때 마리아는 서슴지 않고 이에 순응했던 것입니다.

역사상의 충신, 효자, 열녀들이 남긴 지조가 무엇입니까? 악당들이 반대하는 그 흐름에서도 서슴지 않고 생명을 걸고 모험을 했던 선조들인 것을 여러분은 몰랐을 것입니다. 하늘의 뜻을 받들었던 어느 한 사람도 그런 길을 가지 않은 사람이 없고, 역사상의 어떤 충신·효자·열녀도 그런 길을 가지 않은 사람이 없거늘, 생사를 결판지어 최후의 영광을 바라보며 천국 백성, 아니 하늘의 아들딸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그런 길을 가야 되겠습니다.

여러분 그러한 각오를, 결심을, 맹세를 한 일이 있습니까? 없다 할진대 여러분은 역사적인 섭리를 대한 모독자 중의 모독자요, 배반자 중의 배반자입니다. 때가 오기 전에 여러분은 이러한 각오를 가져야만 새로운 자기를 찾게 됩니다. 이 행동을 개시하는 그 순간이 잠에서 헤매던 6천년 역사 노정을 박차고 비로소 깨어나는 순간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깨고 보면 나만이 있는 것이 아니고 부모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깨어나서 그 부모를 붙들고 눈물지을 수 있는 그날을 왈 재림의 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눈을 뜨고 나면 내 앞에는 인류가 6천년 동안 슬퍼한 슬픔을 대신하여 슬퍼하신 참부모님이 계셨다는 것, 나를 찾아 6천년을 헤매이신 참다운 부모님이 계셨다는 것, 내가 슬퍼하기 전에 나를 대하여 슬퍼하신 하늘이 계셨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역사적인 심정에 사무쳤던 모든 사실이 한 날에 전개될 때 에, 비로소 나는 하늘을 대하여 아버지라 할 수 있고 하늘은 나를 대하여 아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날이 바로 최후의 깨는 날인 것입니다.

그때는 역사적인 소망의 심정과 그 외의 일체가 내 일신의 가슴 속으로 찾아드는 때입니다. 그러므로 그때의 기쁨은 하나님의 전체 목적이 이루어졌을 때에 느끼는 기쁨이요, 그때의 감정은 인류가 타락하지 않고 완성했을 때 느낄 수 있는 감정인 것입니다.

그리고 인류가 느낀 그 많은 역사적인 슬픔과 인류가 당한 그 많은 역사적인 고통에 비례하는 기쁨을 느껴 사탄 앞에 늠름히 나타나 자랑할 수 있는 모습으로 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지까지 나가야 할 우리인 고로 그런 입장에 서지 못했다 할진대, 우리는 돌이킬 수 있는 방향을 향하여 마음과 몸과 환경을 단속하여야 되겠고, 들려오는 말과 나타나는 현상을 보고 정신을 가다듬고 생명을 각오하여 돌아서야 되겠습니다. 그런 행동을 할 수 없다 할진대 우리는 깰래야 깰 수 없을 것입니다. 깰래야 깰 수가 없다는 거예요.

외적인 환경이 위협해 들어오면 들어올수록 그에 비례하여 내적 결심은 더 커야 되겠습니다. 절망과 낙망이 우리 사회를 휩쓴다 할진대 우리의 내적 심정에 있어서는 더욱 굳은 각오를 하고 소망의 한 때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싹터야 되겠습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소망의 한 날, 혹은 사정의 한 때에, 심정의 한 모습으로서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늘과의 인연을 맺고 슬픔의 역사를 박차고 승리의 재출발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명심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기 도>

아버님! 저희가 새 일을 생각하고자 할 때 지금까지의 움직임이 계속되는 자리에서는 생각조차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사옵고, 역사의 흐름을 정지시켜 놓고 자신을 생각할 수 있는 순간을 갖기 전에는 깰래야 깰 수 없음을 알았사옵니다. 잠들어 있는 이 한 모습이 새로운 자극을 받지 않고는 깨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아버님이시여! 저희들에게 역사적인 인연을 벗어날 수 있는 새로운 충격을 연속적으로 가해 주시옵소서.

자극적인 마음이 없다 할진대는 깰 수 없다는 것을 알았사오니, 그런 마음을 찾아 흠모할 줄 아는 존재가 되지 않으면 안 되겠사옵니다.

아버님께서는 시대 시대마다 깨워줄 수 있는 책임자들을 보내셨습니다. 아버지께서 타락한 인간을 바라보시고, 슬퍼하신 당신의 심정을 붙들고 살다 가게 하셨기에 노아가 그렇게 살다 갔고, 모세도, 예수도 그러하였사옵니다.

아버님이시여! 저희의 마음 바탕에 새로운 느낌의 충격을 가해 주시옵고, 저희 일신을 넘어 아버지의 슬픔을 체휼하며 사망세계에 휩쓸려 들어가는 민족을 염려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시옵소서.

이런 마음을 가진 자가 있다 할진대 그는 민족적인 해방을 받을 수 있는 자요, 더 나아가 세계를 붙들고 염려하는 마음이 있는 자가 있다 할진 대 그는 세계적인 해방의 은사를 받을 자요, 더 나아가 천주적인 해방을 염려하여 울 줄 아는 자가 있다 할진대, 그는 역사와 더불어 망하지 않고 새로운 역사 세계에 남아질 인물인 것을 알았사오니, 오늘 자신의 감정을 들추어 자신을 붙들고 우는 자가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전체가 바라는 선을 행하고, 저희를 바라보시는 아버지의 간곡한 심정을 대신할 수 있는 저희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들이 따라 나오지 않을까 마음 졸이시던 그 마음, 인간이 타락할까 봐 가슴 졸이시던 아버지의 마음을 대신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고, 따라 나오는 자들이 떨어질까봐 염려하시고, 또한 떨어진 자들이 쓰러져 죽을까 염려하시던 아버지의 마음을 본받아 민족을 바라볼 줄 알고, 세계를 바라 볼 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을 바라보며 ‘아버지, 제가 있사오니, 아버지의 심정을 제가 맡았사오니 안식하시옵소서.’ 할 수 있는 아들딸이 있다 할진대, 이런 모습을 통하여 역사는 새로운 방향으로 흐른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그런 방향으로 출발해야 할 저희들, 잠에서 깨어야 할 저희들, 역사적인 비운의 아우성 소리가 나타남에 따라 마음 깊이 새로운 결심과 각오와 맹세를 하고 새로운 방향을 향해 출발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나설 줄 아는 자들이 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러한 자리로 이끌어 주기 위하여 눈물 흘리며 싸우던 자를 대신하여 천적인 심정을 갖고 싸우는 자가 있어야만 하늘은 그로 말미암아 안식하실 것이며 땅에는 새로운 기쁨의 동산이 건설될 것을 알고 있사오니, 저희들이 그런 책임의 자리에 서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아버지, 권고하여 주시옵소서. 저희의 걸음이 더디거든 채찍을 들어 쳐서라도 그런 자리로 몰아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하늘이 깨어 계시는 것과 같이 깨어 있어서 천륜과 더불어, 역사와 더불어 슬퍼하고, 기뻐할 줄 아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릴 때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니다. 아멘.

마태복음 7:1-20

<기 도(Ⅰ)>

하늘의 영광을 찾으시기 위하여 오랜 역사 과정을 참으시며 싸워 나오신 아버지! 그 섭리의 영광을 아버지 홀로 누릴 수 있는 날이 어서 속히 이 천지간에 나타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 세우신 본연의 뜻을 인간이 실수한 그날부터 무수한 사탄들 앞에 여지없이 유린당하여 왔다는 사실을 저희들은 잘 알고 있사옵니다. 이 땅 위의 인간을 중심삼고 이루어야 할 뜻이 유린당함으로 말미암아 그 뜻을 대할 수 있는 사람을 찾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처한 하늘의 사정을 저희들은 몰랐사옵니다.

뜻을 대하는 사람이 없기에 아버지 홀로 수많은 수고의 노정을 거쳐오시면서 애쓰셨고, 아버지의 심중에 사무친 뜻을 인간 앞에 옮겨 주시기 위해 무수히 수고하신 역사가 오늘날까지의 구원섭리역사임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님이시여! 이제 저희들 나타난 구원섭리의 뜻을 통하여, 역사노정을 통하여 아버지께서 기뻐하실 수 있는 그 뜻을 마음에 소유하고, 아버지의 영광의 길을 찾아가기 위해 모든 정성을 다 바칠 수 있는 하늘의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의 뜻은 참다운 아들딸을 찾는 것임을 아오니, 이제 저희가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참다운 아들딸로서 아버지를 모실 수 있는 그 나라, 그 세계, 그 천지를 이룰 수 있게 함께해 주시고, 또 이것이 아버지의 소원의 나라요, 소원의 뜻임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참다운 아들딸들이 전체의 만물을 송영을 드리는 것이 6천년을 싸워오신 아버지의 최대의 기쁨이요, 소망임을 저희가 알고, 그 나라를 건설하기 위하여 모든 것을 다 바치고 나설 수 있는 하늘의 아들딸들이 되지 않으면 안 되겠사옵니다.

아버지! 그날 그때까지는 무한한 거리가 있사오니, 오늘 저희들이 아버지의 뜻을 알고 아버지의 뜻 가운데 택해 세워진 아들딸임을 알고, 이제 아버지의 영광의 한 날을 위하여 오늘도 내일도 싸움의 길, 억울한 길, 죽음의 길을 개의치 않고 생명을 바치고 나설 수 있는 하늘의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 오늘 이 시간 당신의 아들딸들이 소망하는 땅 위에서 뜻을 중심한 심정을 품고 아들의 영광을 대신하여 나왔사오니 보살펴 주시옵고, 아버지께서 친히 여기에 임재하시어서 전체를 주관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참다운 뜻을 품은 참다운 아들의 모습으로 아버지를 모시고 아버지께 경배드릴 수 있는 이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 뜻을 성취하기 위하여 모이는 곳곳마다 무수한 사탄의 세력이 침범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저희 각자의 마음과 몸으로 침범해 들어오는 어둠의 세력을 제거하여 주시옵고, 저희를 아버지의 너그러우신 품에 품으시어 산 모습으로서 아버님의 영광의 시대를 이루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시간, 아버지 앞에 모였사오니 친히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이 날은 거룩한 날이오니 만민을 축복하여 주시옵고 만백성을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이 삼천만 민중도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영광과 기쁨을 아버지 앞에 돌릴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지난 일주일을 지내는 가운데 아버지 앞에 옳지 못한 모든 조건들을 이 시간 청산하고, 이제 하늘의 뜻을 품은 참다운 아들의 모습으로서 산 제물로 바쳐질 수 있게 축복하여 주시옵고, 친히 움직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며 주님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기 도(Ⅱ)>

아버님! 오늘 이 날을 기억해 주시옵고 허락하실 은사를 나타내 주시옵소서. 허락하실 생명의 움직임을 오늘 저희의 심중 심중을 통하여 나타내시옵고 부활의 영광을 불충한 저희들에게나마 허락하실 수 있사오면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저희의 마음과 몸을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저희에게 마음이 있으되 저희 것이 아닌 것을 알았사옵고, 몸이 있으되 저희의 것이 아님을 알았사옵나이다. 마음은 선한 방향을 지향하되 몸은 악한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하오매, 그 사이에서 허덕이고 있는 자신이요, 하늘의 탄식권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저희들인 것을 아버님께서도 아시고 저희를 대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나이다. 아버님, 이런 저희들을 긍휼히 여기시어서 저희에게 하늘의 생명의 은사를 가하여 주시옵고, 저희의 심중에 강력한 부활의 힘을 가하여 주시지 않으면 안 되겠사옵니다.

몸은 마음을 굴복시키려고 하지만 하늘의 뜻은 마음이 몸을 쳐서 마음 앞에 몸을 영원히 굴복시킬 수 있는 승리의 한 기준을 찾아 이루는 것이옵니다. 이런 기준을 오늘날 저희 자신을 통해 성취하지 않으면 안 되는 필연적인 싸움이 저희에게 남아 있는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나이다.

이런 연고로 저희 앞에 연이어 나타나는 싸움은 저희들이 두려워할 싸움이 아니옵고, 이런 싸움의 환경에서 부닥쳐오는 온갖 슬픔이 큰 슬픔이 아니라 마음과 몸의 싸움에 있어서 마음이 몸의 주관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더 큰 슬픔이라는 것을 오늘 저희들이 느끼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이시여! 강한 마음을 일으켜 주시옵고, 강한 은사를 가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의 마음이 몸을 굴복시킬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할 수 있게 도와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일이 저희들로부터 성취되지 않으면 전체 생명의 부활을 성사시킬 수 없다는 것을 저희들이 마음을 중심삼은 생활을 통하여 알고 있사오니, 아버님이시여! 저희들의 마음이 용솟음치지 않으면 안 되겠사옵나이다.

생명을 대하는 마음, 은사를 대하는 마음, 부활의 역사에 화할 수 있는 마음, 그 마음에 받은 충격과 감격이 저희의 몸을 휩싸고 저희의 환경을 휩쌀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러한 천적인 재창조의 역사가 저희의 몸 가운데 나타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저희의 마음은 아버님의 영광을 향해 무한히 솟구치고 있사오되 아버님을 위한 저희의 몸은 무한히 지치고 허덕이는 입장에 있사오니, 아버님이시여! 이런 환경을 조절하여 마음이 원하는 대로 몸을 움직일 수 있는 기쁨의 동산이 이 땅의 만민 앞에 어서 속히 나타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런 아들딸들이 있을진대 역사에 길이 남기시어서, 그들로 하여금 이 땅을 주관하고 하늘을 움직여 낼 수 있게 축복하여 주시옵기를,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땅 위에 사는 인간에게 마음의 천국을 이룰 수 없는 문제가 있을진대 말씀에 근거한 천국은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고, 마음의 평화를 이루지 못한다 할진대 평화의 나라는 건설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먼저 저희의 심중 깊이 깊이 아버님을 대하여 감격하고 아버님을 대하여 기뻐하며 아버님을 대하여 노래할 수 있는 마음을 회복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 마음에 몸이 움직여 화할 수 있는 승리의 모습을 하늘은 그리워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지, 저희들은 그런 모습이 되기 위해 지금까지 싸워 나왔사오니, 승리의 모습을 회복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러한 무리들이 모이는 이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간곡한 마음의 중심을 가지고 아버지 모시고, 원한의 조건이 되는 모든 요소를 제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모든 것을 주관하고도 남을 수 있는 승리의 손길이 이 자리에 머물게 하여 주시옵기를,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마음의 천국, 마음의 평화가 저희 자신을 통하여 이루어지지 않는다 할 진대 그 영광스러운 천국도 저희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는 것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 여기에 모인 당신의 아들딸들 가운데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간절한 심정이 동기가 되어 아버지를 직접 대할 수 있는 영광된 자격을 갖고 있는 자가 있사옵니까? 아버지를 위한 천륜의 심정에 어리어 산 제물된 입장에서 경배를 드리려 하는 자가 있사옵니까? 죽음의 길도 개의치 않고 가고자 하는 그 갸륵하고 눈물겨운 마음이 무한히 하늘의 심정에 동반함으로써 생명의 움직임으로 화하여 평화의 한 모임을 갖고자 하는 자가 있사옵니까? 그러한 마음이 저희들에게 없다면 하늘도 슬플 것이요, 저희 마음도 슬플 것이요, 오늘의 이 모임도 슬픈 모임으로 나타날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님! 여기에 영광의 모습으로 현현하시옵소서. 친히 주인으로 나타나시옵소서. 그런 은사를 느낀 자가 있다 할진대 그의 마음 문을 여시옵고 아버지의 소망을 다시 주입하여 주시옵소서. 수많은 생명들이 흑암 권세에 사로잡혀 사망세계에서 신음하고 있사올진대 생명의 부활을 일으켜 주시고, 부활의 권한을 가하여 주시어서, 다시 빚어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그리하여 찾아오시는 주님을 모시고 쌍수를 합장하여 아버지 앞에 경건히 경배드릴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앞에 충성 하고자 했던 존재는 많은 시험을 받았던 것을 이 시간 느끼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날까지 수없이 하늘을 배반한 선조들의 후손인 것을 느끼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은 지금까지 사탄의 제물이 되어서 하늘의 길을 막기에 누구보다도 앞장섰던 모습들임을 깨닫고, 황공한 마음을 금할 바 없어 눈물을 뿌리며 아버지 앞에 용서를 구하는 경배를 드릴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시간 여기에 모인 청중을, 아버지,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이들의 마음에 사탄이 침범코자 하오니 분별해 주시옵고, 이들이 마음의 방향을 잡을 수 있는 등대가 되어 주시옵소서. 이 시간에 모인 전체 청중들에게 친히 아버지께서 찾아 주시옵고, 그 마음을 통하여 몸까지도 아버지의 은사로 말미암아 기쁨 속에서 아버지의 영광을 찬양할 수 있고, 전체를 대신하여 아버지 앞에 경배드릴 수 있는 이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 이날은 거룩한 날이옵니다. 일주일 동안 지내는 가운데 입은 상처가 심한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지의 심정으로부터 멀어져 그릇된 자리에서 슬픔에 잠기었던 모든 사실들을 용납하여 주시옵고 친히 향유를 발라 주시옵소서. 아버지가 그립다 할 수 있고 인(印)칠 수 있는 은사를 이 시간 모인 청중에게 내려 주시옵소서.

삼위신은 불쌍한 자를 돕기 위해 수고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고, 아버지의 긍휼을 바라며 자기의 천함을 탄식하고, 아버지의 귀함을 노래하고자 하는 자를 찾아 주신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오늘 저희의 마음이 그러한 아버지의 존귀하심을 알고 자기의 천함을 탄식하게 하여 주시어서, 아버지께서 찾아주시는 은사를 맞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이날은 거룩한 날이오니 삼천만 민중을 축복하여 주시옵고, 온 인류를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천상에 있는 천천만 성도들도 저희들을 옹위하여 기쁨의 경배를 드릴 수 있도록, 아버지, 친히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특히 지방에 널리어 외로운 심정을 품고 뜻을 염려하면서 기도하는 식구들이 모인 곳곳마다 아버지의 긍휼의 손길을 거두지 마시옵고, 사랑의 손길로써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끝날에 남은 수고의 고개를 넘는 데 있어서 지쳐 쓰러지는 자들이 되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어서 아버지의 손길을 붙들고 끝까지 참고 나가 아버지께 제물로 바치고자 할 때에 받아주시옵소서.

어려움 가운데 일을 이룰 수 있고 슬픔 가운데 뜻을 세울 수 있으며 낙망 가운데서도 이 뜻을 높일 수 있어서, 아버지의 마음속에 기억되는 아들 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날을 통하여 저희들을 아버지의 특별한 은사의 품에 품어 주시옵고, 남기신 은사를 약속하여 주시옵고 승리의 그날까지 붙들어 주시옵길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이 한 시간 뜻대로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기 도(Ⅲ)>

아버님! 말씀을 대하니 2천년 전 예수님의 성상이 그리워지나이다. 말씀을 전하시던 예수님 앞에는 삭막한 세상이 놓여 있었고 자신을 위주하고 자기를 높이고자 하는 무리들이 있었사온데, 그러한 무리들을 바라보시던 예수님의 시선에 무한한 슬픈 심정이 흐르고 있었음을 깨닫겠나이다.

유대교단은 교파 교파끼리 싸우고, 교인들은 교인들끼리 다투는 실정을 바라보시던 예수님! 자기의 흠은 숨기고 남의 흠을 들추어 자기를 내세우기에 허덕이던 그때의 시대상을 저희들이 회고하게 될 때에, 과연 세상과 시대를 책임지고 오셨던 예수님의 마음이 무한히 슬펐음을 알겠나이다.

그런데도 “구하라. 그러면 너희들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 7:7)라고 외치시던 예수님의 심정이 측량되옵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할 자들은 민족이었고 교단이었고 개인이었으나, 구해야 할 자들이 구할 줄 모르고 찾아야 할 자들이 찾을 줄 모르며 두드려야 할 자들이 두드릴 줄 모르는 것을 바라보시는 예수님께서는 인간을 대신하여 구하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계셨고, 인간을 대신하여 찾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계셨고, 인간을 대신하여 두드리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계셨으니, 아버지! 슬픈 일이 이것이었습니다.

인간이 찾아 주기를 고대하여 보냈던 메시아가 오히려 찾아야 할 입장에 계셨고, 인간들이 모셔 주기를 바라며 하늘은 오랜 역사노정을 준비하였사오나 인간들로부터 모심받지 못한 입장에 계셨던 예수님의 서글픈 심정을 저희들이 이 시간 느끼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예수님은 땅의 인간을 대할 때 눈물지으며 한탄할 수밖에 없는 사정이었지만 오히려 아버님께서 축복해 줄 수 있는 땅이 되기를 고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그 성상이 오늘 저희의 목전에 현현하게 역사해 주시옵고, 저희들이 그의 분부하시는 음성을 들어 묵묵히 그 내심에 흐르는 천적인 심정을 사모하고 체휼하여 눈물지으며 경배드릴 수 있는 무리들이 되게 해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제 저희들은 아버지를 향하여 손을 들고 벌거숭이와 같은 모습으로 나타났사오니 긍휼히 보시옵소서. 저희의 마음에는 아버지밖에 없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저희의 소망과 저희의 욕망과 저희의 일체의 요구 조건은 아버지 것 외에는 없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무한한 아버지의 심정에 사무친 그 마음을 붙들고 살고, 그 마음을 체휼하며 살고, 그 마음과 더불어 싸우며 살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게 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님! 여기에 모인 청중을 긍휼히 보시옵소서. 자기의 마음과 몸이 자기의 것이 아닌 것을 알았사오니, 그 마음과 몸 그리고 모든 것을 아버지 것으로 소유할 수 있는 주도적인 권한이 나타나게 역사해 주시옵고, 이 시간이 친히 아버지의 아들딸이라 하시며 인칠 수 있는 약속의 시간이 되게 해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시여! 이 시간 아버지께서 허락하신 말씀을 갖고 나타났사오니 여기에 함께하여 주시옵소서. 주는 자의 마음과 받는 자의 마음에 간격이 없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의 마음으로 아버지 앞에 나타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인간 끼리끼리의 인연을 맺어 아버지 앞에 영광을 돌려드릴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일체를 주관하여 주시옵고 모든 것을 뜻대로 나타내 주시옵기를 부탁드릴 때,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말 씀>

하나님의 소망인 실존체로서 이 땅 위에 나타나신 분이 예수님이었습니다. 그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하나님께서는 4천년 동안의 기나긴 세월을 간곡한 심정과 애절한 심정으로 수많은 선지와 수많은 선조들을 세워 역사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으로 오셨나

하나님께서 이렇게 역사를 섭리해 오신 단 하나의 목적은 소망의 실체인 예수님을 세우시어 하나님과 예수가 하나의 기점에서 하늘의 소원과 역사적인 선조들의 바람과 전 인류의 소원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그 한 순간을 바라시어 하늘은 역사해 오셨고 우리의 선조들은 싸워 나왔다는 사실들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입장에 선 예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보실 때 그는 둘도 없는 하나님의 독생자요, 이 세계의 만상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존재였습니다. 예수가 나타날 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실 수 있고, 예수가 기뻐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수 있으며, 예수가 영광을 누릴 때 대신할 수 있는 하늘의 영광으로 나타나셨던 예수였습니다. 그가 아니면 하늘의 보좌도, 영계도, 지상의 어떤 만물도 그 가치를 나타낼 수 없습니다. 전체의 중심되는 가치적 존재가 예수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천적인 가치를 지니고 오셨던 예수, 이 예수를 인간적으로 보게 될 때에도, 이스라엘 민족이 자기들의 선조를 자랑하고 자기들의 역사를 자랑하고 자기들이 택함받은 선민임을 자랑했지만, 그는 그때까지 이스라엘의 역사상의 나타났던 어떠한 의인보다도 귀한 존재였습니다.

그를 버리고는 자기 생명도 취할 수 없고, 그를 버리고는 자기 교단도 세울 수 없고, 그를 버리고는 자기 민족도 세울 수 없고, 그를 버리고는 이스라엘이 소망하던 나라도 세울 수 없는, 없어서는 안 될 하늘과 땅의 중심존재였습니다.

하늘이 이분을 인간들에게 보내신 것은 탄식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땅이 이분을 맞이하여 낙망하고 절망하도록 하기 위해 보내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늘이 이분을 통하여 기뻐하기 위하여 보내셨고, 땅의 인간들이 이분을 맞이하여 기뻐하도록 하기 위한 중심존재로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이 바라시던 예수의 생애와 나타난 현실

그런고로 예수의 일거일동 모든 것은 하늘의 영광을 그릴 수 있어야 했고, 그가 생활에서 느끼는 감정은 역사적인 원한의 조건들을 무너뜨릴 수 있는 영광의 감정이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생애는 그러한 생애가 되지 못했습니다.

또한 인간들은 예수를 맞이한 그날부터 누구보다도 그를 영광스러운 자리에 모시고, 누구보다도 그를 위하고, 누구보다도 그를 칭송해야 했었습니다. 그런데 민족은 민족대로 떠나 버리니 예수는 민족을 잃어버린 입장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민족을 붙들기 위해 예수를 보내셨지만 그 예수를 잃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를 잃어버리고 나니 하늘의 기쁨도 잃어버리게 되었고 천국도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어야 할 예수님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비운에 부딪쳐 십자가에 사라지신 예수님은 그런 비운을 겪지 않고 승리의 영광을 갖추어 하늘땅이 기뻐할 수 있는 한 날을 다시 세우마고 약속하셨는데, 그날이 왈 끝날이요, 재림의 날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사는 사람이 되려면

하늘의 보내심을 입고 땅 위에 나타나 지상 생애를 거쳐 영계에 가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역사적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오늘날까지도 성부와 성신과 더불어 싸워 나오고 계십니다. 그 예수님을 그리워해야 할 우리입니다. 그 예수님을 다시 소유하여야 할 우리입니다. 그 예수님과 더불어 살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있는 우리인 것입니다. 그러한 우리가 되려면 하나님과 같이 살 수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과 같이 살 수 있어야만 예수님과 더불어 살 수 있는데, 그러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나님의 소망을 이루는 자가 되어야 하고, 예수님의 소원을 성취하는 자가 되어야 하며, 인류역사의 소원을 성취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사람이 되지 못하면 영광으로 현현하실 예수님 앞에 설 수 없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예수님을 맞기 위해서 우리는 어떠한 길을 걸어야 될 것인고? 이것이 문제입니다. 오시는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땅을 찾아오시지만 우리는 그 예수님을 땅에서 맞을 수 없습니다. 인류를 찾아오시는 예수님을 오늘 이 자리에서 그냥 맞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정을 통할 수 있는 심정을 붙안고, 예수님께서 땅 위에서 하셔야 했던 일을 다하고 종결지은 후에라야만 오시는 예수님을 대접하고 맞을 수 있습니다. 그 예수님을 다시 맞게 되는 날이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바라는 재림의 한 날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맞기 위해서는 땅 위에서 책임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 필연적인 조건입니다. 땅 위에서 책임을 감당하고 난 후에라야만 예수님을 맞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 앞에 드리려는 말씀의 제목은 ‘주가 가신 길을 본받자’입니다. ‘주가 가신 길을 본받자’ 이러한 제목을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메시아가 나타나기를 고대했던 마리아

천사는 마리아 앞에 나타나서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할 것을 예고하였습니다. 그때 마리아는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매 그 일을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거부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시 ‘능치 못함이 없으신 하늘이 하시는 일임에 성령을 통하여 잉태하게 될 것이다.’하는 천사의 말에 마리아는 ‘주의 계집종이오니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마리아가 ‘주의 계집종이오니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대답한 순간은 4천년 역사노정에 있어서 한낱 미미한 처녀가 하늘을 향해 역사적인 답을 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주를 생각하게 될 때 흔히 주의 십자가를 생각하고 영광의 부활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올라가 마리아의 신세를 생각하고 요셉가정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4천년 동안 수고하시어 인간을 찾아주신 하늘의 최후의 한마디가 마리아에게 들려졌을 때 ‘주의 계집종이오니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하던 마리아의 이 한마디가 역사를 섭리해 오신 하늘의 발판을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뜻을 품고 오시는 그 존재를 마리아는 누구보다도 고대하였다는 것을 여기에서 우리는 생각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이것을 보아 우리는 동정녀의 순결한 심정으로 이스라엘 나라에 구주가 나타나기를 누구보다도 간곡히 고대하던 마리아였음을 추상할 수 있게 됩니다.

‘주의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말했던 것을 보아 마리아는 하늘의 숨은 뜻이 나타나기를 무한히 소망하고 기도하면서 생활해 나왔던 사람이란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늘의 뜻을 생각하는 토대를 통하여 하늘이 찾아 들어오셨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비단 예수뿐만 아니라 선지선열들도 마찬가 지였습니다. 한 사람의 선지가 태어나기 위해서는 그 선지를 맞을 수 있는 발판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지들을 땅에 태어나게 하기 위해서는 그 선지를 품을 수 있는 부모가 있어야 된다는 것, 그 부모가 먼저 뜻의 발판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탄생시킬 수 있게 한 마리아와 요셉의 심정

마리아가 예수 탄생의 예고를 받고 난 후 ‘주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뜻대로 이루시옵소서.’라고 했듯이 이 말은 타락한 인간이면 누구나 한번 해야 될 말입니다. 비단 마리아뿐만이 아니라 생명의 길을 찾아 나아가고 하늘 노정을 찾아 나아가는 사람이라면 ‘주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할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러한 한마디의 답변을 하지 않는다 할진대 예수님과 생명의 인연을 맺을래야 맺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터전 위에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는 태아가 자람에 따라 누구보다도 더 뜻을 생각했습니다. 이 아이가 탄생되는 그날에는 민족의 소원인 구주가 나타나 민족의 원한을 풀 수 있고, 민족의 슬픔을 청산할 수 있다고 믿고, 땅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그 시간을 누구보다도 더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는 탄생되었습니다.

만일에 요셉가정이 없었던들 예수가 어떻게 태어났을 것인가? 동정녀로서 아이를 잉태했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진다면 모세의 율법에 의하여 돌에 맞아 죽는 일이 벌어졌을 것입니다. 그러한 사실은 당시의 사회적인 환경과 시대적인 여건에서 용납받지 못할 위법 중의 위법이요, 민족의 수치 중의 수치로 남아질 오점이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와 요셉에게는 이 모든 환경을 거부하는 자리에서 뜻을 대해 나설 수 있는 간곡한 심정이 있었으므로 예수님을 탄생시킬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뜻만을 생각하고 가는 그들의 발걸음이 악한 세상에 부딪치는 순간마다 하늘은 살 길을 개척하여 주셨습니다. 예수는 이런 걸음을 쭉 거쳐 나오셨습니다. 애급 땅으로 피난을 가 거기에서 3년 노정을 거치고, 돌아와서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목수의 일을 하던 아버지 요셉을 협조해 주는 보조자의 한 사람으로서 묵묵한 생활을 하면서 뜻을 펼 수 있는 한 날을 바라고 준비하시던 예수님을 우리는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오늘 읽은 성경 말씀 가운데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며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 7:7)라는 귀절이 있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새로운 복음을 가지고 개척의 노정을 출발할 때에 간곡한 심정으로 외치신 말씀입니다.

유대민족을 바라보면서 예수님이 취한 생활태도

예수님께서는 그 민족이 메시아를 모셔야 할 입장인 것을 아셨습니다. 누구보다도 간곡한 마음으로 메시아의 실체를 구하여야 할 민족인데도 불구하고 구할 줄 모르는 입장에 있는 민족, 누구보다도 애달픈 심정으로 찾아야 할 입장에 있는 유대교단들이 그런 입장을 떠나 찾지 못하는 것을 바라보시며 예수님은 사셨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하늘의 문이 열리기를 바라며 두드려야 할 유대교인들이 두드릴 줄 모르고 있는 실정을 바라보시며 사셨던 것입니다.

하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은 간절하면서도 그 뜻을 이룰 수 있는 실체를 찾고, 구하고, 두드리는 마음이 간절하지 못한 민족을 바라보신 예수님께서는, 멀지 않아 하늘의 진정한 뜻을 알지 못하는 민족과 관계를 맺어 천적인 뜻을 이루겠다는 심정을 품으셨기에, 한 날, 한 시간, 한 초도 뜻을 생각하지 않은 때가 없었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뜻의 실천자로 오셨던 예수님의 심정은 마리아가 뜻에 대해 염려하던 심정 이상의 심정이었습니다. 요셉가정에서 생계를 위해 요셉의 일을 묵묵히 협조하던 예수님의 심정은 민족을 바라보면 볼수록, 민족에 대한 신망이 없어지면 없어질수록 뜻에 대해 염려하지 않을 수 없고, 새로이 각오하지 않을 수 없는 심정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30여년의 준비 기간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와 같이 뜻을 염려하는 간곡한 심정을 품고 남이 알지 못하는 자리에서 하늘을 위하여 민족을 대신하여 책임을 다하기에 수고하신 예수님의 생활이었음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민족을 대신하여 누구보다도 간곡한 심정으로 구하기에 수고하신 예수님이었음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민족을 대신 하여 누구보다도 염려하는 마음을 갖고 하늘 문을 두드리기에 끊임없이 수고하신 예수님이었음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사생애 기간의 예수님, 그 심정과 생활상

예수님께서는 철이 든 후부터는 먹는 것도 민족을 위하여 먹었고 사는 것도 민족을 위하여 살았습니다. 그가 무엇보다도 고심했던 것은 하늘 아버지의 뜻을 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늘의 뜻을 위하여 노심초사하신 예수님의 30여년의 생애를 알아 예수님을 붙들고 구한 자가 없었고, 예수님을 붙들고 찾아나선 자가 없었으며, 예수님을 붙들고 그의 심중을 두드린 자가 그 당시에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런 환경이었기 때문에 불쌍한 예수님이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하늘을 위하여 민족 대신 구하지 않으면 안 될 입장이 되었고, 민족을 대신하여 찾지 않으면 안 될 입장이 되었고, 민족을 대신하여 문을 두드리지 않으면 안 될 입장이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이 위로는 하늘을 대신하여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선 반면, 아래로는 땅을 대신하고 민족을 대신하여 간곡히 구하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서게 되었습니다. 또한 간곡한 심정을 품고 찾으면 민족의 심정을 두드려 민족의 마음을 열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서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예수님은 하늘을 위하여 30여년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나를 사랑하시는 하늘이시여! 나를 보내신 아버지시여! 나를 보내신 것은 민족의 갈 길을 제시하기 위함이요, 나를 보내신 것은 민족의 생명을 아버지와 인연맺기 위함임을 아오니, 민족의 실수와 민족의 부족함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였습니다.

불신과 배반의 민족을 바라보시는 예수님께서는 그 민족이 자고 있을 때도 향락을 누리고 있을 때에도 편히 자지 못하고, 쉬지 못하고, 즐거워하시지 못하고 민족을 붙들고 하늘과 인연 맺어주기 위해 싸우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예수님 자신만이 알고 계셨습니다. 민족 중의 어느 누구 한 사람이 예수님의 심정을 위안해 주는 사람이 없었던 것입니다.

환경과는 동떨어졌던 예수님의 심정은 뜻의 때를 고대함에 반하여 말할 수 없이 초조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30여년이 지나 뜻의 실천노정을 각오하고 나서던 예수님의 심정은 비장하다면 말할 수 없이 비장할 것이요, 형용할 수 없는 심정이었을 것이며, 인간으로서는 체휼할 수 없는 애달픈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뜻을 실천하려는 공생애노정을 염려했던 예수님을 우리들은 깨닫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예수님이 40일 금식을 하시게 된 이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하늘을 대신하여 오시고 만민의 구세주로서 만민을 구원하러 오셨으나 구원을 받아야 할 민족 가운데에 그 예수님의 심중을 헤아려 나타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의 심중은커녕 그의 30년 수고의 노정도 알지 못하였습니다. 광야생활을 하고 민족을 책임져야 할 입장에 있던 세례 요한 일당마저도 반대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슬픈 심정으로 민족을 바라보면서 세례 요한에 대한 한 가닥 기대를 걸었지만, 세례 요한마저 예수님을 외면하고 나서게 될 때 예수님에게는 더 큰 슬픔이 가중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민족 앞에 하늘의 복음을 갖고 나타나야 할 때가 가까워오는데도 불구하고 민족이 간 곳 없고 민족 앞에 하늘이 세우신 세례 요한도 간 곳 없어져, 예수님께서는 인간 앞에 나타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노정을 거치게 되신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에게 있었던 40일 금식기간이 영광스러운 기간이요, 예수님께 반드시 있어야 할 기간으로 알고 있지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40일 금식기간을 거치시게 된 것은 예수님 앞에 민족이 사라진 연고요, 세례 요한 일파가 사라진 연고였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동방의 세 박사와 안나, 시몬, 그리고 뜻을 품고 예수를 잉태하였던 요셉 가정의 마리아가 예수님의 실천노정을 나설 때에 그를 알아주지 못하였던 연고이기도 했습니다. 땅의 주인공으로 오신 예수님이요, 만민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오신 하늘의 황태자이신 예수님이요, 또한 만민의 구주이신 예수님께서 이처럼 불쌍한 신세가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4천년 역사를 종결짓고 새로운 하늘 제단을 꾸며야 할 예수님이 이루셔야 했던 하늘 제단은 영광의 제단이요, 기쁨의 제단이요, 승리의 제단이었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제단을 꾸미기 위해 나선 예수님은 불쌍한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굶주리는 예수가 되었고, 사탄의 시험을 받는 예수가 되었습니다. 사탄에게 시험받는 그 장면은 온 인류가 가장 비통하게 여겨야 할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주리신 후 사탄에게 농락당하고, 그 사탄이 제시한 여러 조건의 시험을 당하는 슬픔의 시간은 원래 민족이 겪어야 할 시련기간이 되어야 했는데, 도리어 예수님의 슬픔으로 인계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예수님께서는 택함받은 선민임을 자랑하고 그 민족을 끊어버리고, 그 민족을 원망하고 저주하여야 할 입장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굶주린 몸을 일으켜 하늘의 심정을 붙들고 민족을 위해 사탄과 싸우셨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처한 자리는 이스라엘 민족도 모르는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에서 각오를 하고 하늘 앞에 나타나실 때의 예수님의 심정은 어떤 슬픔의 자리를 거쳐서라도 자신이 온 목적과 자신이 품은 아버님의 뜻에 대한 일편단심이 변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본래의 아버지의 뜻이 민족을 통하여 만민을 구하려는 것임을 아시는 예수이시고 그 뜻을 존중하는 예수였던 연고로, 굶주림과 헐벗음도, 부딪쳐오는 어떠한 핍박과 시험도, 그가 30여년 동안 뜻을 고대하고 바라던 마음을 깨뜨릴래야 깨뜨릴 수 없었습니다. 그런고로 뜻을 품고 나타날 적마다 예수님은 하늘을 대신하여 자기가 겪게 되는 서글픔과 하늘이 당하시는 서글픔을 동시에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또 그런 자리에서 뜻을 대하여 더 한층 굳은 결심을 했기에 배반한 민족과 배반한 무리를 다시 찾아 나설 수 있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살아 있을 때 이스라엘 민족이 찾아 주기를 바라셨으나 그렇게 해 주지 않음으로 인하여 반대로 죽고난 후에 찾아 주어야 할 예수님이 되었습니다. 민족이 예수를 모셔 주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자리에서 인류를 구원해야 할 예수님이 죽어서 구원의 역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살아 계신 실체 예수님의 심정을 통하여 두드려야 하고 구해야 하고 찾아야 하는데, 죽고 난 뒤에 두드리고 있는 것이 오늘날 기독교인의 신세요 전세계 인류의 신세인 것입니다. 이렇게 된 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잘못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슬픔과 분함과 원통함이 무엇인가

그러면 하나님의 슬픔은 무엇이뇨? 하나님의 분함은 무엇이며 하나님의 원통함은 무엇일 것인가? 예수님이 살아 있는 자리에서 구해야 할 때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살아 있는 자리에서 찾아야 할 때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살아 있는 자리에서 두드려야 할 때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살아 있는 자리에서 하늘의 비밀을 밝힐 수 있게 그 문을 개봉해야 할 환경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살아 있는 자리에서 하늘의 비밀을 밝힐 수 있게 그 문을 개봉해야 할 환경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나서 깨닫고 보니 구세주 되시는 예수님께서는 이미 영계에 가셨습니다. 그렇게 되니 예수님을 보낸 인간은 가신 예수를 대하여 구해야 할 신세가 되었습니다. 가신 예수님을 찾아야 할 신세가 되었고 가신 예수님의 마음을 다시 두드려야 할 신세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끝날에 처한 오늘날 우리들은 예수님이 가시기 전에 구할 줄 알고, 가시기 전에 찾을 줄 알고, 가시기 전에 두드릴 줄 알고, 가시기 전에 찾을 줄 알고, 가시기 전에 두드릴 줄 아는 인간들을 찾아 세우지 못한 것이 하나님의 슬픔이요, 예수님의 슬픔이요, 인류의 슬픔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심으로 말미암아 이러한 비운의 역사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실천노정에서 뜻을 품고 나설 때, 제자들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권고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걸음은 그러한 걸음이었습니다.

마태복음 7장의 내용은 전부 예수님 생애의 전반적인 사실을 암시적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구하는 자리, 찾는 자리, 두드리는 자리를 거쳐 뜻을 찾아 나서서 걸으신 예수님의 길은 평탄한 길이 아니라 험산준령이었고, 영광스럽고 큰 승리의 궁전이 아니라 좁은 십자가의 문이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민족이 믿지 않고, 민족이 따르지 않고, 민족이 바라보지도 않는 입장에, 민족이 싫다 하는 입장에 서신 예수님께서는 소수의 제자들을 모아 놓으시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서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 7:13-15)라고 권고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과 그를 따르는 제자들의 사정이 그렇다는 것을 지적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당시의 사회 환경과는 반대의 입장에 있는 자신을 예로 하여 자신과 그 사회 환경의 중간 입장에 있는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임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민족 앞에 나타나 실천노정을 걸으실 때 탄탄대로를 걷지 못했습니다. 유대교단이 가로막고, 민족이 가로막고, 세례 요한이 가로막았습니다. 때문에 그에게 갈 길이 있다 할진대 그 길은 모든 사람이 가기 싫어하는 길이었습니다. 그 길도 문이 있는 길이 아니었습니다. 길 없는 곳에 길을 닦아야 했고 가로막힌 담에 문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걸음을 걸으신 분이 예수님이셨습니다.

선민의 불신으로 초래된 고난의 길

4천년 섭리역사노정의 터에서 하늘로 통하는 하나의 문을 세워 하늘과 만민이 연결될 수 있는 길을 닦기 위해 보내신 예수님, 이 예수님을 이스라엘 민족이 믿고 받들었던들 평화의 길은 열렸을 것입니다. 그랬더라면 4천년 동안 수고하여 세워 놓은 유대교단은 하나님께서 왕래하실 수 있는 대로(大路)가 되었을 것입니다. 또 하늘나라를 찾아가는 백성들의 출입문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민족이 반대하니 민족의 갈 길이 막히고 민족의 문이 막혔으며, 교단이 반대하니 교단의 갈 길이 막히고 교단의 문이 막혔다는 것입니다.

유대민족에게 몰리고, 유대교단에게 몰리고, 자신의 증거자들한테 몰리고, 나중에는 제자들에게까지 불신당하신 예수님이셨기에 인간으로서 갈 수 있는 최대의 비극의 길을 아니 가실래야 아니 가실 수 없었습니다.

그런고로 4천년 역사노정에 천성을 찾아가는 데는 문이 많은 것 같고 6천년 역사를 통합해 보면 천국으로 가는 문이 더욱 많은 것 같지만 예수님께서 열고 가신 문은 단 하나요 그 문이 아직까지 이 땅 위에서 열려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끝날에 처해 있는 오늘날 기독교 신도들은 많습니다. 자기들의 신앙을 고취하고 교파를 세워 소개하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많습니다만, 이들이 가는 길이 하늘로 가는 길처럼 보이고 이들이 안내하는 문이 하늘로 안내하는 천국문같이 보이지만, 예수님께서 살아 생전에 개척하시던 그 길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살아 생전에 열던 그런 좁은 문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들은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신 길

예수님께서는 3년 공생애 실천노정에서 생명을 걸어 놓고 싸우다 가셨습니다. 그 길은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피를 뿌리며 원수를 대하여 복을 빌던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길을 지나서 부활하셨습니다. 이런 길이 예수님께서 가신 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신 길은 민족이 배반한 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신 길은 교단이 배반한 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신 길은 부모 형제, 나아가서는 사랑하는 제자들, 더 나아가서는 세 제자까지 배반하던 길이었습니다. 그 길은 예수님을 따라 수많은 인류들이 가야 할 길인데, 예수님께서 가신 이후 그 길은 막혀 버렸고, 예수님께서 들어가신 문은 닫혀 버렸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이 간 길만 열려 있으니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들은 사도들이 간 길을 따라야 합니다. 그 길을 따라 어디로 갈 것이뇨?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따라가야 됩니다. 그 길을 따라가야 되는데 그 길을 따르는 데는 목적이 뚜렷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 목적은 무엇이냐?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이러이러하다는 그 목적이 뚜렷해야 되는 동시에 내용도 뚜렷해야 됩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가신 뜻의 길이었습니다. 이 뜻에 대한 내용과 목적은 예수님께서 33년 동안 수고하여 찾은 내용이요, 수고하여 세운 목적이었습니다. 그 내용과 목적은 30여년의 생애를 희생하여 찾아진 내용이요 목적이었기에, 어떤 환난이 일시에 예수님을 친다 할지라도, 죽음의 장벽이 휩쓴다 할지라도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뜻으로 남아진 것입니다.

그런 내용을 가지신 예수였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들은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걸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좁은 길, 험한 길을 가셨으니, 오늘날 우리들도 그의 뒤를 따라 그러한 길을 가야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입장에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떠한 길을 가셨느냐? 죽음의 고비에 부딪쳐서 사망의 물결이 휩쓴다 할지라도 ‘살아 계신 하나님이 계시니 하나님께서는 내게 부활의 권한을 일으켜 주실 것이다.’라고 믿으며 모든 것을 박차 버리고 나아가셨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죽음을 박차고 부활하지 않으면 안 될 그 무엇이 있었다는 거예요.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부활의 권한을 일으킬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신앙자들에게 있어서의 중요한 문제

오늘날 우리 신앙자들에게 있어 중요한 문제는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슬픈 세상을 바라보시며 구하던 마음을 느끼는 자, 사망의 땅을 바라보시며 예수가 찾던 마음을 품은 자, 멸망의 첨단을 달리고 있는 세계를 바라보며 두드리던 마음을 가슴에 품고 생명을 주입시키고자 하는 간곡한 마음을 가진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런 마음을 가진 자들이 하늘이 바라는 목적을 심중에 지니고 이 땅을 대하여 싸우겠다는 각오를 갖고 나서기 전에는 하늘이 우리를 예수님께서 가신 길로 인도하실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께서 거쳐가신 그 문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끝날의 성도들이 역사적인 원한을 풀어 드려야 된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2천년 전에 택함받은 제1이스라엘이 택하신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선민권을 상실해 버렸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선포하신 진리로 말미암아 민족을 넘은 전세계 크리스천들은 제2이스라엘의 선민권을 부여받게 되었습니다. 이 제2이스라엘 선민의 권한을 갖고 있는 끝날에 처한 기독교 성도들은 하늘을 배반한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이 되지 말고, 재림하시는 주님 앞에 잃어버린 제1이스라엘을 대신할 수 있는 제2이스라엘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영계에 가셔서 수고하시고 있는 일이 무엇이뇨? 이 땅에 오셨을 때 산 실체를 가지고 제2이스라엘 왕국을 건설하지 못하신 것이 탄식의 내용인 연고로 예수님께서는 2천년 동안 성신과 더불어 만민을 동원하여 제2이스라엘 선민권을 조성해 나오고 계십니다.

천국문을 통과하려면

이스라엘 선민권이 조성되면 어떻게 할 것이냐? 이스라엘 왕국을 건설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끝날의 성도들은 12사도들의 문을 거쳐 예수가 들어가신 문을 통과해야만 천국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끝날의 성도들 앞에 열려 있는 천국문은 12사도형으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끝날의 성도들이 천국을 들어가는데는 이 12사도의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세계 기독교인에게는 수많은 문이 열려져 있습니다. 수많은 교파로 갈라져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천국을 소개하는 문의 사명을 하고 있다고 장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원칙은 그렇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중심삼은 12사도로 말미암아 기독교가 시작되었으니 끝날 성도들은 그 12사도의 문을 통하지 않으면 안 될 운명에 놓여 있습니다. 6천년 종말에 찾아져야 할 예수님 당시의 제1이스라엘형인 제2이스라엘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떤 교파에 속하여 어떤 문을 거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먼저 12사도의 한 이념의 표지를 이마에 받고 나서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문을 통과할 수 있습니다.

이제 전세계에 널려 있는 기독교인들 앞에, 예수님 당시의 사명을 대신하여 그 시대의 사명을 실체로써 종결지어야 할 세계 기독교인들 앞에 12사도형의 문을 찾아야 할 때가 올 것입니다. 무수히 갈라졌던 종파는 천지 운세에 따라 자기들도 모르게 통일이념 형태를 갖춘 환경권 내에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전세계에 널려 있는 기독교인들, 그리고 그 외의 각 교파에 속한 모든 사람들은 자기들이 어느 지파에 속해 있는가를 알아 예수님의 12사도의 반열을 찾아 들어가야 할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60만 대중을 거느리고 12지파와 70장로를 세웠던 것과 마찬가지로 선민인 이스라엘을 수습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던 예수님도 역시 12제자와 70문도를 세우셨습니다. 그리하여 민족적인 이스라엘의 이념을 세계적인 이념으로 세우고자 하셨으나 그 뜻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연고로 오늘날 전세계의 기독교인들은 제2이스라엘권 내에 있습니다.

제2이스라엘권 내에 있으되 그들은 자신이 제2이스라엘인 줄도 모르고 있습니다. 자신이 어느 지파에 속해 있는지 모르는, 지파 반열을 잃어버린 인간들이 된 것입니다. 그러한 세계 기독교인들이 되어 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12사도로 말미암아 택한 민족을 수습하고 12지파의 반열을 재수습하려다가 실패하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런고로 예수님께서는 세계 기독교인들 앞에 다시금 12지파, 70문도, 120문도의 형을 땅 위에 세워 천적인 섭리와 맞춰야 할 사명을 갖고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여러분이 사도의 문을 거치고 나서 예수님의 문을 거친 자를 찾아야 할 때입니다. 이 땅 위에 참다운 성도가 있다 할지라도, 아무리 잘 믿는 성도가 있다 할지라도 ‘너는 어느 지파냐?’ 하고 물으면 ‘나는 어떤 지파다.’라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하나의 지파, 하나의 지도자를 못 가졌다 할진대 천국건설 이념시대에 동참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끝날에는 이념이나 하나의 민족 앞에 있어서 자기의 위치가 뚜렷하지 않으면 애매한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여기서도 저기서도 간섭할 수 없는 입장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때는 교파가 문제가 아니라 여러분 끼리끼리 모아야 할 때입니다. 끝날은 어떠한 때냐 하면, 6천년 역사노정에서 선한 사람을 거두어들이는 인류역사 종말시대의 수확기입니다. 수확기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한 밭에 여러 가지 곡식을 심는 시기였습니다. 곡식을 심을 때는 한 밭에 여러 가지 곡식을 심을 수 있었으나 추수기에는 같은 종류의 곡식만을 한 창고에 넣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추수기입니다.

끝날은 어떤 때냐

예수님께서 당시에 오셔서 하셔야 할 일은 무엇이었던고? 이스라엘 12지파의 반열을 다시 수습하여 천국 창고에 들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명을 완결짓지 못하셨기 때문에 가시면서 이것을 재차 실현하시기 위해 세우신 날이 다시 오시리라 하신 약속의 한 날인 재림의 날입니다. 그 날을 앞둔 땅 위의 성도들에게는 유대교가 문제가 아닙니다. 사두개 교회가 문제가 아닙니다. 본연의 지파와 본연의 지도자를 찾아 헤매야 할 때입니다.

그러려면 과거의 어떠한 이념, 인습적인 어떠한 절개, 전통적인 어떠한 법도, 지금까지의 습관적인 모든 관념을 거부하고 새로운 면으로 뒤집어 놓을 수 있는 그 무엇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오늘날 여러분은 제1이스라엘 시대였던 예수님 당시의 시대와 맞먹는 세계적인 이념시대를 넘어서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마음 맞는 성도 끼리끼리 갈라져 나갑니다. 교파는 자꾸 자꾸 분열되는 것입니다. 외적으로는 통일형을 부르짖고 있으나 내적으로는 분열형을 갖추어 나갑니다. 겉으로는 통일된 것 같으나 속으로는 분열되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내적으로 수습하기 위한 한 때가 오는데 그때가 재림시대입니다.

내적으로 수습할 때가 오면 외적인 통일형이 반기를 들고 나타날 것입니다. 이것은 불가피한 사실입니다. 하나의 씨앗 속에서 싹이 나올 때 그 껍질은 반대로 터져서 떨어져 나가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의 현상입니다.

씨알맹이와 생명의 싹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렇듯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경 그 자체가 아닙니다. 성경 내용에 있는 생명이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 자체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자체에 있는 하나님의 뜻이 필요한 것입니다. 문제는 거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소원

그러면 예수님께서 돌아가시면서도 소원하신 것은 무엇이었던가? 자신의 몸이 희생되는 것을 개의치 않으시고 오직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그의 소원이요 목적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어 그들로 하여금 생명체를 이루어 나아가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에 목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고로 오늘날 우리들이 찾아야 할 때가 왔습니다. 구하고 두드려야 할 때가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12사도를 세워 모세가 세워 놓은 12지파의 권한을 그대로 상속시켰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슬픔이었습니다.

또한 살아서 하늘 앞에 구하여야 할 예수님께서 그러지 못하셨고, 살아서 하늘을 찾아야 할 예수님께서 하늘을 찾지 못하셨고, 살아서 하늘로 향한 문을 두드려야 할 예수님께서 하늘로 향한 문을 두드리지 못하셨으니, 끝날의 전세계 기독교인들에게는 살아서 예수님께 구하여야 할 때가 옵니다. 살아서 예수님을 찾아야 할 때가 옵니다. 살아서 예수님의 심정의 문을 두드려야 할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원도 이것이며 예수님의 소원도 이것입니다.

그 자리에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떨어졌으니 올라가야 합니다. 올라가려면 먼저 사도의 문을 두드려야 됩니다. 이제는 전세계 기독교인들 앞에 예수님 당시 쓰러져간 사도적인 모습이 나타날 때가 왔습니다. 전세계 기독교를 수습하고 12지파의 대표형을 갖추어 나설 수 있는 세 사도의 모습이 나타나야 할 때가 왔습니다.

사도 중의 사도요 제자 중의 제자인 이 세 제자는 동쪽 문을 대신하였습니다. 하늘은 천국문을 상징하여 동서남북의 각각 세 문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동쪽의 세 문, 남쪽의 세 문, 서쪽의 세 문, 북쪽의 세 문을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중심한 세 제자인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동쪽의 문이었습니다. 그런 연고로 기독교는 베드로적 기독교, 야고보적 기독교, 요한적 기독교로 상징되는데 구교는 베드로적 기독교입니다. 베드로는 믿음을 상징하고 야고보는 소망을 상징하며 요한은 사랑을 상징합니다. 종적으로 기독교 역사는 베드로적 기독교, 야고보적 기독교가 나왔는데 야고보적 기독교가 신교입니다.

끝날에 요구되는 것

그러면 끝날에 요구되는 것은 무엇이냐? 요한적 기독교입니다. 예수님은 요한이 죽지 않고 주를 모신다고 하셨습니다. 요한은 순교를 당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끝날에 요한적 기독교가 새로이 나타나 주님을 상봉하게 될 것을 예지하시고 그런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품에서 귀염을 받았고 깊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요한은 사랑을 상징하였습니다. 그래서 요한적 기독교는 사랑의 기독교인데, 끝날에는 이 요한적 기독교, 사랑의 기독교가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보여 주었거늘, 아직까지 기독교인들은 자기들이 어떤 문으로 들어가야 할 것인지 모르고 있습니다. 베드로적인 문도 좋고 야고보적인 문도 좋으나 우리는 요한적인 문, 사랑의 문을 통해 찾아가야 합니다. 이 사랑의 문은 예수님께서 정면으로 바라보신 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문을 바라보시며 6천년 동안 싸우셨고 예수님도 그 문을 바라보시고 2천년 동안을 싸우셨거늘 역사적인 소망의 문은 아직까지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늘은 이 문을 열 수 있는 한 대표자를 세워 약속을 이루려 하셨습니다. 이것이 왈,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 신부라는 명사를 세워 놓으신 이유인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오시는 주님 앞에 세계 인류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이뇨? 기도해야 됩니다. ‘당신께서 땅 위에 오셔서 남기신 슬픔이 이것인 것을 알았습니다. 살아생전에 해원하시지 못한 그 원한의 곡절이 이것인 것을 알았습니다. 역사의 원한을 걸어 놓고 슬퍼하시며 싸우시기에 얼마나 수고하셨습니까?’ 하고 예수님을 위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천년 전 예수님을 배반하던 사도 대신 산 사도, 배반하기 전의 그 사도들과 같은 성도가 되지 못하면 역사적인 인물, 역사적인 구원의 완성자가 되어야 할 인류, 구원섭리를 완수해야 할 인류는 하늘 앞에 체면을 세울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끝날인 오늘날 재림의 한 날을 예비하고 바라고 있는 세계 기독교인들은 겟세마네 동산과 갈보리 산상에서 예수님을 모른다 하던 세 제자와 같이 되지 말고, 교단을 통솔하고 수많은 성도들을 품에 품고 예수님 대신 기도할 수 있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개도 대신 넘어갈 수 있는 제자들이 되어야겠습니다. 교회는 그러한 모임이 되어야겠습니다.

재림주님 앞에 세계 인류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종교역사는 복귀역사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계22:13)고 하셨습니다. 알파와 오메가라는 말은 타락 때문에 생긴 말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그것을 영원성으로 말한다고요? 그들이 말하는 것은 영원성이 아닙니다. 타락이라는 명사가 생겼기 때문에 알파가 생겼고 복귀하여 다시 돌아가는 오메가라는 명사가 생겼습니다. 이스라엘 나라에 오셔서 예수님이 성취해야 했던 알파적 이념이 끝날인 오늘날 성도들의 오메가적 이념으로 거두어지지 않는다 할진대는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실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소원이요 인류의 소원이며, 하나님의 기쁨이요 인류의 기쁨입니다. 그런데 그의 알파적 이념이 오메가적 이념으로 종결되기 전에는 기쁨의 모습으로 인류 앞에 나타날 수 없을 것입니다. 만일에 그러한 예수님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할진대 예수님은 다시 슬픔의 모습으로 나타나야 할 운명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자기 멋대로의 천국은 건설되지 않습니다. 자기 멋대로의 신앙관념, 자기 주장, 자기의 이념으로는 천국의 심정을 통할 수 없더란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땅 위의 성도들은 아직까지 예수님께서 개방하신 그 문을 거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일 그 문을 거쳤더라면 신부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붙들려 하였으되 막았던 것입니다. ‘너를 사도로 세운 것이 아니니 사도의 문을 통하여 오라.’ 이겁니다. 천법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 말씀이 제일이다라고 하게 된 이유

그런 연고로 오늘날 우리는 전세계 인류 앞에 사도와 같은 사명을 가진 자가 있는지 찾아봐야 됩니다. 지금이 그러한 자를 찾아야 할 때입니다. 여러분! 초대교회는 방언을 하였고 신령역사를 하였고 예언을 하였고 별의 별 일을 다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초대교회에서 신령한 역사가 많이 벌어짐으로써 그 내용을 알지 못하는 무지한 인간들이 영적인 현상에 이리 부딪치고 저리 부딪쳐 혼란하게 되니, 그것을 막기 위해 ‘성경 말씀이 제일이다.’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도 이런 말씀이 나온 것입니다. “끝날에는 내 영을 많이 부어주리라.”(행 2:17) 그래서 초대교회에서 일어난 현상이 종말의 기독교 역사세계에 나타나 사방에서 미쳤다, 사교다, 이단이다 하는 말을 듣는 무리들이 많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우리 통일교회도 그 중의 대표적인 한 멤버(member)로 들어 있습니다.

끝날에 영적인 현상이 많은 이유

영(靈)의 부음을 받은 자는 감히 그럴 수 없습니다. 그가 이유를 모르면 하늘이 가르쳐 주십니다. 그가 눈을 뜨면 영계(靈界)를 보고, 그가 행동을 하면 영계 사람의 행동을 합니다. 여러분의 눈과 여러분의 마음과 여러분의 행동과는 판이합니다. 미친 사람처럼 보입니다. 옛날 예수님도 뭐 똑똑한 사람으로 보였어요? 그 당시 사람들이 볼 때는 바보 멍청이였어요.

앞으로 이와 같은 영적인 현상이 휩쓸 것이며, 민족을 휩쓸 것이며, 교단을 휩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세계적으로 알 수 없는 정신계통의 환자와 신경계통의 환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가고 있습니다. 공포의 세계, 불안하고 초조한 세계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께서 초조감과 불안감과 흥분된 심정을 갖고 일생을 거치시고 뜻을 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계적인 운세가 그렇게 휩쓸린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중에는 방향을 찾을래야 찾을 수 없게 되고, 참것이 거짓 것 같고 거짓 것이 참것 같은 현상이 벌어집니다. 거짓이 우세하고 참이 열세가 되는 시대, 거짓이 번성하며 참이 말할 수 없이 미약한 상태가 되는 시대가 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시대를 거쳐 넘어가야 합니다.

오늘날이 끝날이라 할진대 세계적인 이스라엘로 나타난 기독교, 즉 제2이스라엘을 수습해야 할 12사도는 어디 갔는고, 12사도를 통솔할 하나의 주인공 메시아는 어디로 오실 것인가 하는 것이 뜻있는 크리스천들이 해결 하여야 할 중대한 문제입니다.

끝날의 성도가 할 일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이 사방으로 갈라졌으니, 이를 복귀하는 데는 오실 주님을 걸어 놓고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가 다시 이 땅에서 세계적으로 나타나야 됩니다. 땅 위의 어느 곳에서도 겟세마네 동산에서와 같은 기도의 소리를 들을 줄 아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후에 남아진 사도들이 기도하던 그 음성을 들을 줄 아는 무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즘에 자기가 베드로다, 야고보다, 요한이다, 안드레다 하는 사람이 많이 나타납니다. 까꿀잽이입니다. 노아나 아브라함이나 예수님이 열두 사도와 같은 그런 지파의 반열이 없기 때문에 당연합니다.

우리는 12사도 중에서 사도 중의 사도인 세 제자, 또 그 세 제자 중에서도 요한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1차 부활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소원성취의 한 날을 바라보시며 싸워 나가시던 예수님께서 세 제자를 동반하고 기도하시던 겟세마네 동산을 그리워하는 기도의 시간을 여러분 가져봤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주무시지도 않고 피땀 흘리며 기도하셨는데 세 제자는 졸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심정을 알지 못한 그들은 예수님이 골고다 산정에서 십자가에 달릴 때에 모두 배반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겟세마네동산에서 피땀 흘리며 기도하시던 예수님을 대신하여 피땀을 흘리며 기도하는 무리를 찾아야 할 때가 왔습니다.

신랑되신 예수님께서 인간을 위하여 그렇게 가셨거늘, 그 심정을 체휼하기 위해서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유대교단 앞에 몰리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께서 원수를 대해 복을 빌던 것과 같이 세계 기독교인들 앞에 몰리는 십자가를 지고 그들을 위해 복을 빌 수 있는 하나의 모임, 하나의 무리가 있어야 할 것인데, 그들은 누구일 것인가? 그들은 이단자들입니다. 예수님과 같은 이단자예요. 그들은 예수님같이 민족 앞에 반역자요, 주의와 사상에 있어서 이단자요, 기성 관념의 파괴분자입니다. 그러한 움직임이 나와야만 세계는 새로운 방향을 찾아갈 것입니다.

궁극적인 소망을 이루는 데 필요한 것

기성 종교를 가지고는 여러분의 마음에 덮여 있는 모든 흑운을 제거하여 버리고 삶의 변혁을 가져오는 심령의 해방운동을 일으킬 수 없습니다. 어떠한 논리, 어떠한 철학적인 사상을 통해서도 심적인 변혁을 일으킬 수 없습니다. 그들의 수단을 가지고는 몇 천년이 지나도 안 됩니다.

온 인류는 과학 만능을 부르짖게 될 때 그것으로 인하여 세계평화를 건설할 줄 알았더니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종교를 일으켜 세계 만민을 구할 줄 알았더니, 하나님의 선민을 통해 잃어버린 만민을 구할 줄 알았더니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여기에 확실한 대답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당에 단 하나 필요한 것은 묵묵히 십자가에 달려 못박히면서도 인류를 위해 복을 빌던 그리스도의 성상입니다. 죽음을 초월하여 생의 애착을 버리고 자기의 소망 전체를 버리는 자리에서도 그 소망을 원수들 앞에 남기고 가신 그러한 모습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간 대로 오마.’ 하시고 ‘알파요 오메가’라 하셨으니, 기독교의 종말시대에는 예수님의 모습을 닮은 하나의 신부가 나타나야 할 것이고 12사도가 나타나야 됩니다. 그러한 데가 여기인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세계 기독교에 그러한 사람들이 나온다 할지라도 까딱 잘못하면 옛날 이스라엘의 노정을 반복하는 현상이 벌어질 것입니다. 그들이 걸은 전철의 노정을 피할래야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전세계 기독교인들은 각성해야 되겠습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겟세마네 동산에서 깨어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십자가에 못박혀야 되겠습니다.

가슴에 사무친 천적인 비운이 예수님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빚어졌으니, 자신도 그런 천적인 심정을 품고 하늘을 위로하여 ‘제가 이런 자리에서 예수님과 같이 죽을지라도 가겠사오니, 저를 받아 주셔서 그 심정에 사무친 원한을 푸시옵소서.’ 할 수 있는 하나의 존재를 그리워할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끝날의 성도들은 그러한 동지, 그러한 친구, 그러한 지도자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땅 위에 오셨던 예수님, 구하면 주실 수 있었고, 찾으면 찾아 주실 수 있었고, 두드리면 열어 주실 수 있었던 그 예수님을 다시 상봉할 수 있는 기쁨의 시간이 만민 앞에 열려져 있어야 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기성교단이 분열되는 현상을 바라보게 될 때, 그것이 생명의 발판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직시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뜻있는 지도자, 하늘의 심정을 품은 청년 남녀들은 분기해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기성세력을 대해 가지고 분기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은 입장에서 “거짓 선지자를 삼가라.”(마 7:15) 하셨습니다. 거짓 선지자를 삼가라 하셨는데 그 거짓 선지자는 누구였느냐?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이 아니라 예수님을 반대하던 유대교단, 이스라엘 나라였습니다.

오늘날 사회적인 발전상이 그런 코스를 밟아오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거짓 선지자를 삼가하라 하시고 외식하는 자들에게 시련을 주어 쳤습니다. 또한 외식과 외형으로 흘러가는 유대교를 타파하는 데 선봉자로 나선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을 거쳐 골고다 산정에서 원수들을 대해 복을 빌었습니다. 그것은 사탄을 위한 것이 아니고 사탄을 굴복시켜 사탄의 품에 있는 사람을 빼앗아 와야 했기 때문에 복을 빌었던 것입니다. 사탄의 품에 있는 그들에게 소망을 걸고 복을 빌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해당 세력을 중심삼고 움직이는 형식주의로 흐르고 있습니다. 뜻있는 지도자, 청년 남녀들이 있다 할진대 생명을 잃어버린 그러한 기독신자들에게 교회를 맡길 수 없다는 운동이 반드시 벌어질 것입니다. ‘목사, 장로들에게 교회를 못 맡기겠다. 우리 교회는 우리 교인 끼리 끼리 맡자.’ 하는 운동이 벌어집니다. 그때가 되거든 마지막인 줄 아십시오. 그때가 되면 마지막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목사시대가 지나고 장로시대가 옵니다. 이 장로시대에는 무슨 장로, 무슨 장로가 나와 날뛰게 됩니다. 이 시대가 지나면 집사들이 날뜁니다. 그 뒤 평교인들이 날뛰는 때가 오거든 그때가 끝날인 줄 아십시오.

역사를 더럽히고 배반한 자들을 구하기 위해 오신 분이 역사적인 지도자였던 예수입니다. 그런데 그 지도자를 끌어다가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 것은 이스라엘이었습니다. 하늘은 이것을 분명히 아십니다. 이제는 평민을 중심삼고 해방운동을 해야 할 때입니다. 제1차 대전 이후에는 상류계급이 출세했고, 제2차 대전 이후에는 중류계급이 출세했으며, 지금 때는 하류계급인 노동자 농민이 출세할 때가 왔는데 신앙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전세계에 널려 있는 기독교인들은 어떠한 지도자를 지도자로 믿지 말고 자신의 양심을 지도자로 삼아 가지고 다시 바라보아야 할 때가 왔다는 거예요. 어떠한 지도자를 앞에 놓고 찾아야 할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 7:7) 라고 하신 말씀은 천상에서 필요한 말씀이 아닙니다. 지상에서 필요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땅에 보내심도 천국에서 필요해서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천국은 그냥 그대로도 있을 수 있으되, 그가 땅에서 필요하기 때문에 보내신 것입니다.

역사가 이러이러해서 망했기 때문에 하늘은 이 망한 역사의 원한을 풀기 위해 박차고 나설 수 있는 용자를 고대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새 시대의 용자는 누구일 것이뇨? 다시 초대교회로 돌아가서, 다시 옛날로 돌아가서 사도의 심령에 불탈 수 있는 청년 남녀, 주님이 채찍을 맞는 것을 보고 쫓아가서 대신 맞을 수 있는 청년 남녀들입니다. 오늘날 부패한 이 기독교를 바라보고 자신의 몸이 찢기고 매를 맞더라도 책임지겠다는 청년 남녀들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청년 남녀들이 단결하여 새로운 지도자를 구하는 한 날이 끝날에 찾아올 것입니다. 오래지 않아 한국 교회는 그렇게 될 것입니다.

새시대의 용자는 어떤 사람인가

오늘날 기독교의 단체는 많습니다. 세계적인 기독교 단체인 NCC, WCC 등 외형적인 것은 많습니다. 그러나 내적으로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내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서는 예수님의 심정에 불타고 무지한 네로 황제의 압정 하에서도 불타오르는 심정으로 전진할 수 있었던 성도들, 그와 같은 하늘의 청년 남녀들이 필요합니다. 그러한 하늘의 용자들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들이 이 끝날에 실증적으로 벌어진다 할진대 크리스천들은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이것을 다시 한번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문예부흥이 고대의 헬레니즘 문명을 복고하고 인본주의 사상을 개척하였듯이, 오늘날 우리들은 2천년 전의 기독교를 회상하여 예수님적인 신본주의 천국을 건설해야 되겠습니다. 중간 다리가 필요 없습니다. 지금의 때는 끝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이한 현상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뭐 나 장로, 박 장로, 통일교회 등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영적으로 분석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사명으로 남아 있습니다.

여러분! 이제 세계적으로 70문도의 역사시대가 옵니다. 역사는 복귀섭리 역사이므로 법도에 의해 다시 올라갑니다. 잃어버린 것을 되찾으려니 다시 올라가는 것입니다. 70문도시대 다음에는 12사도시대가 옵니다. 한국에는 그러한 입장의 철학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왔다가 사라졌습니다. 다음에는 3제자시대가 옵니다. 세 가지 형태의 대표적인 움직임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곳에 머물러 있습니까

예수님의 발자취를 더듬어 가는 것이 기독교인들의 신앙노정이라 할진 대 여러분은 어느 곳에 머물러 있습니까? 예수님의 광야시대에 머물러 있습니까? 혹은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자라던 시대에 머물러 있습니까? 어느 곳에 머물러 있습니까? 여러분! 예수님의 생애는 인간으로서 가야 할 길을 가신 인간의 전형적인 생애였습니다. 인간의 표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어느 자리에 서 있습니까? 예수님의 40일 금식기간에 있습니까? 혹은 3년 공생애노정에서 허덕이고 있습니까? 혹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는 자리에 있습니까? 혹은 십자가에서 최후의 생사를 판결짓는 그러한 길을 걷고 있습니까?

주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야 할 우리는 사도의 문인 기독교의 문, 그리스도의 좁은 문을 거쳐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좁은 문을 찾아 나서는 성도가 어디 있습니까? 없습니다. 오늘날 교직자와 교역자들은 오히려 좁은 문을 찾아가려는 성도들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밤을 새워 기도하셨고 쉬지 말고 기도하라 하셨습니다. 쉬지 않고 기도하면 어디로 가느뇨? 인간 세상을 잊고 영계에 들어갑니다. 영계에 들어가서 또 쉬지 않고 기도하면 어디로 가느뇨? 천사를 만날 수 있습니다. 거기에서 더 들어가게 되면 예수님과 성신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가야 할 미지의 행로, 즉 예수님이 가신 미지의 세계의 관문을 헤치고 나가야 할 기독교인들의 길은 막혀 있습니다. 사도들이 죽을 수 있는 자리까지는 안내했으나, 천국이 어떤 곳이고 예수님이 가신 길이 어떠했다는 것까지는 해명해 주지 못하였습니다. 그것을 해명함과 더불어 예수님께서 생애 동안 느끼신 심정을 체휼하게 할 수 있는 진리도 나온 적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에 나온 여러분들은 예수님께서 가신 그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열고 들어가신 문을 열고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던 그 자리까지 나가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모였습니다. 그러니 우리들은 이 사명을 책임지기 위하여 전세계 앞에 호소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 다음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어서 다시 땅에 나타나신 목적은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걸으신 부활의 노정을 우리가 다 따라 걸었다 할지라도 우리는 부활 승천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의 기쁨을 맞이하시고도 하늘로 승천하지 않으시고 사망권 내에 있는 인류를 찾아 나섰습니다.

우리가 가야 할 길

여러분도 은혜를 받고 하늘의 뜻 앞에 서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은사의 자리에 선다면 그때 하늘을 향하여 달음질칠 것이 아니라 땅을 향하여 달음질쳐야 되겠습니다. 땅을 향하여 달음질칠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그러한 신앙생활을 했습니까?

부활하신 후에도 땅을 구해야 한다는 하나의 중심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아신 예수님께서는 배반자 중의 배반자인 제자를 찾아가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반한 것은 어떠한 민족, 어떠한 교단이 배반한 것보다 더 분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배반자 중의 배반자인 사도들을 다시 찾아 세웠기에 땅과 인연을 맺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신앙노정을 다 간 뒤에는 어떻게 될 것이뇨? 그리고 부활한다면 부활한 후에는 어떻게 될 것이뇨? 땅 위에 와서 해야 할 일을 다하여 자기가 머물 수 있고 자기를 증거할 수 있는 혈족을 만들어 놓고야 주님 앞에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예수님이 그러했거늘 여러분도 그래야 합니다.

여러분은 마음에 사무치는 은사를 받았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40일 금식기간에 노력하셨던 것처럼 6천년의 슬픔을 품고 핍박 받으면서도 우리들 자신에게 필요한 천적인 기반을 찾아 세우기 위해 노력해야 되겠습니다.

만일에 주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신다 해도 그런 기반, 그런 환경적인 토대를 갖지 못한다면 신랑 되신 그 주님 앞에 신부로서 설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기반을 찾아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합니다.

이것은 선의 뜻을 지향하는 것인데 그 뜻은 예수님이 바라신 뜻이요,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뜻이요, 성신이 바라시는 뜻입니다. 그 뜻을 여러분은 이루어야 됩니다. 그 뜻을 예수님과 더불어 사는 것입니다. 그 뜻의 목적과 내용도 역시 예수님과 더불어 사는 데 있습니다.

그러한 자리까지 나아가려면 여러분들이 오늘 부활의 은사를 입었다 할지라도 그 자체에 만족하지 말고 은사를 입은 자로서, 땅 위의 사망권 내에 있는 사람을 찾아가 하늘 앞에 세울 수 있는 최소의 조건이라도 세워야 되겠습니다.

뜻이 지향하는 목적은 예수님과 더불어 사는 것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 12사도를 찾고 70문도를 다시 찾고 120문도를 다시 찾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후의 성신이 강림하여 하나의 교단, 하나의 교회를 세우시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복귀노정에도 먼저는 참부모님이 필요합니다. 그 다음에는 노아의 8식구가 있어야 되고 야곱의 12형제가 있어야 되며, 그 다음에는 70가족이 있어야 되고, 120친척이 있어야 됩니다. 이러한 뜻의 기반이 종결되기 전까지는 예수님께서 실천적인 제2의 행사를 하실 수 없습니다.

오늘날 믿는 여러분들이 예수님의 정신을 이어받았다 할진대, 예수님의 정신을 이어받은 산 예수의 형(型)이 되어서 산 사도와 같은 자를 세워야 되고, 산 70문도와 같은 자들을 세워야 되고, 120문도와 같은 산 교단을 세워 놓아야만 될 것입니다. 그래야만 거기에서 비로소 천국건설운동이 벌어집니다.

성경 말씀에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마 7:22-23) 하였습니다. 모른다고 했습니다.

또한 “아버지 뜻대로 하는 자 이외는 내 앞에 올 자가 없다.”고 했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가? 병을 고치고 권능을 행하시면서 천지법도를 찾으려 하시던 예수님의 심정에 맺힌 것이 무엇인가? 그 찾으려 하시는 목적이 무엇인가? 그 내용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알아 그 뜻을 이뤄 드리는 자만이 예수님의 신부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러한 길을 보여 주신 것은 오늘날 우리들도 그렇게 살아 주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여러분은 예수님의 원한을 풀어 드릴 수 있는 예수님의 목적체로서 하늘 앞에 엎드릴 수 있어야만 예수님의 본을 받아 그의 뒤를 따라가는 자가 될 것이요, 그의 뜻을 이룬 신부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기 도>

아버님! 지금까지 저희들은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 몰랐사옵니다. 역사적인 뜻도 몰랐고, 시대적인 뜻도 몰랐으며, 개인의 생애와 생활에 대한 뜻도 몰랐사옵니다. 그러나 황공하옵게도 역사적인 뜻을 알 수 있는 은사를 허락해 주시니 감사하옵니다.

시대적인 심정, 생애적인 심정, 생활적인 심정, 시간적인 심정까지도 가르쳐 주신 은사에, 아버님, 참으로 감사하옵니다.

이 심정을 품고 저희들은 사도의 문을 거쳐야 될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가신 그 길을 따라 좁은 문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되겠사옵니다. 그리하여 죽음의 고비에서 싸워 이겨 부활의 은사를 얻고도 남을 수 있는 자가 되어 다시 땅 위에 부활된 선의 종족을 남겨 열매를 맺게 해야만이 심판을 피할 수 있다는 말씀을 알고 있사옵니다.

선한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는 다 찍어 버린다고 하셨사오니 선한 나무가 되지 않으면 안 되겠사옵니다. 선한 나무가 되어서 선한 열매를 맺는 자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께서도 선한 열매를 거두기 위하여 2천년 동안을 싸워 나오셨사오니, 오늘날 저희도 부활의 은사를 입어 선한 나무로서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땅 위에 그 씨를 뿌려 놓고 갈 줄 아는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것이 아버지의 뜻이요, 이것이 땅에 찾아오신 아버지의 목적이요, 이것이 아버지께서 싸워 나오신 내용인 것을 알고 그 뜻, 그 목적, 그 내용에 사무쳐 살 수 있고 싸울 수 있고 아버지를 붙들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남기신 뜻을 다 이루고 달려갈 길을 다 가서 주님을 위로할 수 있으며, 아버님을 위로할 수 있는 최고의 효자 효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며, 모든 말씀 주님의 이름으로써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요한복음 14:1-24

<기 도(Ⅰ)>

사망의 물결이 뒤넘이치는 도탄 중에 있는 저희 인간들은, 이 땅 위에 긍휼의 한 날을 펴시기 위하여 기나긴 세월 동안 수고하고 억울함을 당하시면서 싸움의 역사를 섭리해 나오신 아버지 앞에 면목을 세울 수 없사옵고, 아버지께서 믿을래야 믿을 수 없는 죄인들인 것을 깨닫게 되옵니다.

이제 애급고역과 같은 6천년의 역사를 해방시키옵소서. 영광의 한 때와 한 날을 약속하심을 감사하옵니다. 수많은 선지선열들 로 하여금 먼저 피눈물의 길을 걷게 하시어 갈 길이 이렇다 하고 그 가야 할 방향을 지시한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음을 저희들은 역사를 통하여 잘 알고 있사옵니다.

긍휼의 아버님이시여! 사랑의 아버님이시여! 자비의 손길로 이 땅을 붙드시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는 저희들이옵니다. 불충하고 불비한 모습들이오나 당신의 긍휼함을 흠모하고 당신의 사랑이 그리워 아버지 존전에 나왔사오니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탄식과 슬픔이 남아 있는 이 땅에서 생을 갖고 있는 저희들을 긍휼히 보시옵소서. 현실의 생활에서 허덕이고 있는 저희들을 긍휼히 보시옵소서. 하늘의 심정을 가지고 염려하는 자가 있다 할진대, 이 땅을 눈물과 슬픔으로 바라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옵니다. 또 하늘을 위하여 통곡하지 않을 수 없는 실정을 저희들은 통탄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원컨대 그와 같은 심정에 사무쳐 가나안 복지를 소망하는 애급고역 노정과 같은 6천년 시련 역사의 탄식권을, 아버님, 제거시켜 주시옵소서.

인간을 바라고 믿고 따라 나왔사옵니다. 가는 길이 고역의 노정이었사옵고, 가는 발걸음이 슬픔을 재촉하는 것임을 알고 있사오나, 원한의 타락 행위를 저지른 인간인 고로 아니 갈래야 아니 갈 수 없사옵니다.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허덕이는 인간은 하늘의 약속을 알고 난 그날부터 이 사망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허덕이지만, 오늘날까지 사탄 휘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알고 있사옵니다. 또한 그 중에 누구보다도 저희 자신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이제 살기 위하여 오로지 살아 계신 아버지를 불러야 할 때가 되었사옵고, 섭리의 뜻을 세우신 아버님을 위하여 충성을 다하는 아들딸들이 나타나지 않으면 안 될 때가 되었사오니, 불비한 자신을 원망하고 미비한 자체를 탄식하고 불충한 자신을 치면서 오늘도 내일도 그 나라를 세우기 위하여 허덕이겠다는 간곡한 심정이나마 갖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나선 걸음이었사옵고 싸움의 방패를 들었사오니, 그날 그날의 싸움에 하늘의 능력을 허락하여 주시옵고, 승리의 한 날을 예고하시옵소서. 새로운 각오와 새로운 결심을 하지 않으면 고난의 그 노정을 거쳐 나갈 수 없고 황무지인 광야의 노정을 개척할 수 없사옵니다.

아버님이시여! 이스라엘 60만 대중이 바로 궁중을 탈출할 때에는 기쁨의 환호성이 하늘에 충천하였사오나 그 뒤에 바로의 병거가 따르게 될 때에는 탄식하고 하늘을 원망하였던 선조들의 발걸음을 잘 알고 있사옵니다. 오늘날 저희들이 아버지 앞에 나설 때 기쁨의 심정이 있사옵니까? 그 심정에 반하여 하늘을 원망하는 심정이 커질까봐 두렵사옵니다. 환희하였던 그 한 날을 자랑할 수 있는 마음을 갖고 만민이 즐거이 하늘을 노래할 수 있는 끝날의 한 날을 소망삼아야 되겠사옵니다.

어떠한 곡절과 어떠한 슬픔이 부딪치는 한이 있다 할지라도, 원수들이 죄악의 구렁텅이를 파놓고 기다릴지라도 꾸준히 싸워 하늘의 정병다운 절개를 상실치 말게 하여 주시옵기를,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가는 길에는 산고개도 있을 것이요, 자갈밭도 있을 것이요, 황무지도 있을 것이요, 원수들이 저희들을 노리는 때도 있을 것이오니, 이미 각오한 결심으로 모든 것을 개의치 아니하고 오늘도 내일도 싸움의 일로를 개척하고 약속한 가나안 땅을 해방할 때까지 그 마음 마음에 책임을 느끼고 돌진 할 수 있는 하늘의 용병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오늘 아버지 앞에 모인 당신의 아들딸들 긍휼히 보시옵소서. 아버지, 이날 여기에 모인 당신의 아들딸들이 아버지 앞에 새로운 약속을 할 수 있게 하여 주시고, 새로운 결심과 각오를 갖게 하여 주시옵소서. 약속한 한 때를 위하여 마음으로 몸으로 준비하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아버지시여! 역사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하늘에 있는 천천만 성도들이여! 이 한 시간을 성별시키시옵소서. 아버지 앞에 합당치 못한 저희의 마음과 자아를 중심삼은 어떠한 주의 주장이나 관념, 또한 뜻 앞에 옳지 못한 것이 있거든 일체를 제거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 이 시간 아버님이 운행하고, 아버님이 주관하고, 아버님이 행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간곡한 심정만이 사무쳐서 아버지 심정과 접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제 모든 것을 아버지 앞에 맡기오니 주관하여 주시옵고, 삼위신이 운행하시어 모든 악의 요소를 분별하여 주시옵소서. 저희가 승리의 조건만을 제시하여 아버님의 영광권 내에 사로잡힐 수 있는 이 한 시간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날도 지방에 널려 외로이 뜻을 위해 싸우며 염려하고 있는 수많은 아들딸들이 있사오니, 그들 위에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그들에게 허락하신 은사를 베풀어 주시옵고 생명의 은사를 이 한 청중 위에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나이다.

아버님, 이날은 거룩한 날이오니 모이는 곳곳마다 당신의 사랑의 봉화를 들게 하여 주시옵고, 영광의 은사를 베풀어 주시옵고, 만민이 회생할 수 있는 은사의 불길을 내려 주시옵소서.

모든 것을 맡기오니 뜻대로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니다. 아멘.

<기 도(Ⅱ)>

한없는 슬픔이 하늘에 사무쳐 있다는 것을 이 땅에 사는 인류들은 아직까지 알지 못하고 있사옵니다. 한없이 고통스러운 것이 하늘의 역사라는 사실을 저희들은 하늘을 믿고 나오면서도 몰랐사옵니다.

아버님, 저희들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말씀을 주셨사옵고, 지금까지 인간들이 찾아 헤매고 헤매었으나, 찾지 못했던 그 소망의 한 때를 저희들에게 예고해 주시니, 아버님, 황공하옵니다. 부족한 저희들이 감히 천주 앞에 마음 몸을 굽히고 아버님을 대해 부르짖기에는 민망스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아버지께서 오라 하시는 길을 나선 저희들, 그 길이 기쁨의 길인 줄 알았사온데, 가다 보니 한없이 눈물 뿌리며 가야 될 길임을 알게 되었사옵고, 남모르는 가운데 하늘과 땅을 대신하여 원한의 심정을 품지 않으면 안 될 서글프고 외롭고 걱정스러운 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사옵니다. 그 길은 살고자 하는 자는 가지 못할 길이요, 죽고자 하는 자만이 남아지는 길임을 체휼치 않을 수 없사옵니다.

아버님, 여기에 모인 당신의 외로운 아들딸들 긍휼히 보시옵소서. 이들의 마음에 천적인 이념이 움직이고 있사옵니까? 그 이념은 자기를 중심삼은 이념이 아니라 역사적인 이념임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념을 통하여 움직이는 심정이 있사옵니까? 그 심정은 자기 일대에 머무는 심정이 아님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받은 바의 은사와 느낄 바의 은사를 이들이 체휼하였을진대, 이제 자기를 중심삼고 자기 혼자서만 하늘나라를 이루어 살 것이 아님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일을 시작하신 분은 당신이었사오니 자기의 모든 것을 아버지 것으로 바쳐 드릴 줄 아는 저희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께서 오라 하시는 그 길을 나설 때에 저희들은 모든 것을 이미 아버지 앞에 다 드렸사옵니다. 저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 저희의 심정까지도 아버지 것으로 드렸사옵니다.

전체를 드리고도 즐거워할 수 있는 하나의 모습을 아버지는 그리워하고 있사온데, 없어지는 것을 보고 슬퍼하는 저희가 되어 있는 것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전부를 내맡기고도 무한히 기뻐할 수 있는 마음을 갖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러한 마음을 소유한 자는 아버지의 전체를 소유할 자요, 이렇듯 하늘 대한 간곡한 심정을 품고 가는 자는 하늘땅에서 승리할 것임을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님, 저희의 생활 환경에서 모든 것을 빼앗아 가는 것은 아버지께서 즐거워하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아버님의 전체를 저희에게 인계시키기 위한 섭리의 뜻이 있었음을 알았사옵니다. 그러한 곡절의 뜻을 가지고 저희를 찾지 않으면 안 되고, 부르지 않으면 안 되고, 오라 하지 않으면 안 될 아버지의 심정을 알았사옵니다. 아직까지 지기를 중심삼은 의식이나 감촉이 남아 있사올진대, 지금 그것을 다 아버지 앞에 내놓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하늘땅에 존재하는 모든 만상을 바라보고, 아버지 앞에 무한히 감사드릴 수 있는 마음만을 저희의 몸 마음에 채워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께서 슬퍼하심을 바라보고 슬픈 자신이 된 것을 감사하게 여길 줄 알게 하여 주시옵고, 아버님의 수고하심을 바라보고 저희들도 수고하는 자신이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할 줄 알게 도와주시옵소서.

하늘의 싸움의 노정을 바라보고 저희들도 그와 같은 자리에 있음을 감사하게 여길 줄 아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옵고, 이 한 존재들을 아버지 품에 품어 주시옵고 세워 주시옵기를, 나의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 이날 모였사오니 긍휼히 보시옵소서. 하나에서부터 전체가 아버지 것으로서 인연맺을 수 있는 시간이 되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외로운 발자취를 더듬어 이 자리에 나왔사오니 일주일 동안에 입은 모든 상처를 아버지, 맡으시옵고, 위로하여 주시옵고, 권고하여 주시옵고, 당신의 은사의 손길을 펴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님, 이날은 거룩한 날이옵고, 이 땅과 인연맺고자 하는 천상의 시간인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하늘의 천천만 성도들과 선을 지향하여 노력하고 있는 수많은 이 땅 위의 인류를 붙들어 주시옵소서. 더욱이 아버님 앞에 무릎을 꿇고 모이는 곳곳마다 선의 역사로 협조하여 주시옵고, 거기에 당신의 능의 역사를 가하시어 사망이 물결치는 이 땅 위에 승리의 한 표적을 세워 아버님의 영광을 노래할 수 있는 이날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아버님께서 이 시간 나타나시어 영광의 은사를 내려 주시옵고, 직접적인 역사로 이끌어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면서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기 도(Ⅲ)> 바라고 기다리던 소망의 한 날을 맞이하기 위하여 섭리해 나오신 아버지, 불신하는 인간들을 버리지 못하시고 수많은 외로운 무리들을 품으시기 위해 이스라엘이라는 축복을 해놓고 역사를 끌고 오다가, 약속하였던 한 존재를 보내시던 그 날은 아버지의 영광이 하늘에 사무쳤어야 했고, 만민의 환희의 심정으로 말미암아 천상에도 기쁨이, 땅에도 기쁨이 충만해야 할 것이었사온데, 4천년의 설움이 예수님 한 분을 대해 가해졌다는 역사적인 통분의 사실을, 아버님,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마굿간에서 탄생하여 사신 30여년 생애는 그렇게도 처참하였고, 그렇게도 외로웠고, 그렇게도 의지할 곳 없었사옵니다. 땅 위에 그렇게도 믿을 자 없었던 예수님, 땅 위에서 자신의 흉금을 털어놓고 그 간곡한 심정을 전하지 못한 채 원한의 주인공으로 가신 예수님이었다는 것을 오늘날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권고하여야 할 천적인 말씀이 남아 있었사오나 받아야 할 인간이 믿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그 말씀을 다하지 못하고 품고 가신 서러움, 2천년 전 예수님의 서러움을 모르고 있는 만민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그래도 하늘을 따르던 제자들을 모아 놓고 권고하시고 부탁하신 말씀과 기도를 저희들은 들었사옵니다. 땅의 인연과 하늘의 인연이 상봉하는 그 순간 하늘의 기쁨이 나타나야 했고 나아가 땅 위에 새로운 나라가 건설되어야 할 것이었는데, 부딪치는 그 순간 기쁨은 사라지고 탄식과 서러움이 시작되고 원한의 십자가의 길이 생긴 역사적인 통분의 사실을 알고 있사옵니다.

저희의 선조들은 하늘 앞에 빚을 졌고 저희들도 하늘 앞에 우주적으로 빚을 지고 있사온데, 그것을 탕감할 줄 모르고 자기의 안일을 위해 허덕이는 무리가 된 것을 용납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외로운 무리들이 아버지 앞에 모였사오니 권고할 말씀이 있사옵거든 권고해 주시옵소서. 지금까지 많은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전하고 보니 아버지의 슬픔이 나타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알려 주고 보니 우리가 아버지의 염려를 가지고 통일되지 못하였음을 알았사옵니다. 인간을 대하는 아버지의 서러움이 그와 같은 노정 노정마다 나타났사옵고, 세기 세기, 시대 시대마다 나타났음을 알았나이다.

아버지, 비통한 심정을 체휼하여 땅을 염려하고 하늘을 염려하는 마음을 가진 아들딸들이 이 땅 위에 얼마나 있사옵니까? 아버지, 심히 희귀하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불쌍한 만민을 구하시기 위해 수많은 수고를 개의치 않으시고 외로운 저희들을 권고하시기에 시일을 경과해 오신 아버지, 저희들 앞에 새로운 약속을 세우시옵소서. 이들에게 새로운 약속과 새로운 시대의 사명을 맡기시려는 천적인 뜻이 있다 할진대, 아버지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이 한민족을 불쌍히 보시옵소서. 한반도를 긍휼히 여기시옵소서. 이 민족은 불쌍한 민족이요 의지할 곳 없는 민족이옵니다. 자랑할 전통도, 자랑할 아무것도 없사옵고, 하늘 앞에 내세울 만한 민족성도 갖지 못한 민족이 옵니다. 이 민족의 생명을 책임져야 할 사람이 아무도 없사오니, 불쌍한 이 민족을 긍휼히 보시옵소서. 이 민족은 외로운 민족이오니 이들의 살 길을 열어 주시옵고 이들의 갈 길을 염려하여 주시옵고, 이들이 서 있는 위치를 돌아보시어 동정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 이 땅에 희망을 걸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민족이오니 하늘의 심정을 통하는 것으로써 이 민족의 살 길을 개척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하늘을 대하여 땅을 대하여 이 민족의 비참함을 호소하는 무리가 많게 하여 주시옵소서. 갈 길이 막혔다 하여 쓰러지는 자가 되지 말게 하옵시고, 갈 길이 막힌 그 사실을 놓고 아버지 앞에 호소하며 탄식하는 사람들이 많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 핍박받는 통일교회의 길을 찾아든 당신의 아들딸들 긍휼히 보시옵소서. 이러한 길을 가기 원치 않았사오나 이 길에 들어서 남모르는 일을 알고 남과 다른 책임을 지고 보니, 아니 갈 수 없는 입장에 있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아버지, 지금까지 외로운 길로 인도하신 아버지의 심정과 뜻을 세워 나오신 아버지의 심정을 알았사오니, 외로운 저의 뒤를 따르고 있는 자들을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불쌍한 자리에서 하늘을 향하여 애달픈 심정으로 호소하는 자가 있다면 그 뒤를 따르는 자도 그와 같은 처지임을 알았사오니, 아버지, 그들을 동정하여 주시옵고 붙들어 주시옵소서.

그들은 인간의 일을 통하여 움직이지 않았사옵고, 인간의 사정에 얼크러져 움직이지 않았사옵니다. 천정의 사랑을 통하여 출발하는 걸음이어늘 인간으로 말미암아 그 발걸음을 잃지 말게 하여 주시옵고, 그 가는 과정에서 낙망하지 말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역사노정을 회고해 볼 때 새로운 시대와 새로운 역사를 창건하여 나온 사람들은 그 시대에 몰림받는 무리였사옵고, 몰리고 몰리다 남아진 무리인 것을 알게 되옵니다. 아버지, 이 움직임을 긍휼히 보시옵소서.

하늘의 뜻을 품고 당신을 위한 충절의 마음을 가진 아들딸들, 억천만 가지 고통이 휩쓸어 올지라도, 아버지께서 원하는 뜻일진대 이 일을 위하여 죽고 또 죽는 한이 있더라도 실적을 남기고 쓰러질 수 있게 하여 주시옵고, 남기고자 하는 심정을 가지고 끝까지 싸우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날은 4월 10일(음력)이옵니다. 아버지시여, 이 민족을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인류에게 사랑의 손길을 펴셨을진대 거두지 마시옵고, 진리의 사도들을 이 천지간에 보내 주시옵고, 사랑의 사도들을 온 땅 위에 보내 주시옵소서. 신의를 세워 아버지를 모실 수 있는 신의의 사도들을 보내 주시옵소서.

찾고, 고대하고, 바라고, 싸워 나오시던 아버지의 사랑을 받아 최후의 심판대 앞에서 사탄을 부끄럽게 할 수 있는 무리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시간에 무슨 말씀을 하오리까? 아버지시여, 맡아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전하는 자의 마음이나 받는 자의 마음이 둘이 되지 말고 하나가 되게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이 한 시간에는 아버지 뜻과 아버지 심정과 아버지 사정에 나도 모르게 얼크러져 아버지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기 위한 맹세와 각오를 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니다. 맡아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니다. 아멘.

<말 씀>

여러분에게 잠깐 말씀 드리고자 하는 제목은 ‘천국을 찾아 이루려는 슬픈 아버지와 아들딸’입니다. ‘천국을 찾아 이루려는 슬픈 아버지와 아들딸’ 이런 제목을 가지고 잠깐 동안 말씀드리겠습니다.

인간이 선한 목적을 추구하는 이유

인간시조가 실락원의 슬픔을 체휼한 그날부터 지금까지 모든 인간들에게는 마음의 슬픔이 있고, 몸의 슬픔이 있고, 생활의 슬픔이 있게 되었고, 그 슬픔은 전세계와 하늘까지 연하여 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한 목적을 추구해야 할 우리 인간들이 두 목적을 대할 수 있는 입장에 처함으로 말미암아 한 분의 주인공이신 하나님을 대해야 할 인간이 하나님 외에 사탄을 대할 수 있는 입장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타락한 우리 인간은 두 목적의 세계를 대할 수 있는 입장에 처하여 있다는 것을 생활을 통하여 체휼하는 바이고, 그것은 누구나 부인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으로 보면, 인간은 하나의 주인공을 중심 삼고 하나의 목적과 하나의 이념을 가지고 살아야 할 존재였는데, 타락한 그날부터는 두 주인을 대하고 두 목적의 이념을 바라보는 인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됨으로 말미암아 선악은 내 한 개체의 환경권만이 아니고 전세계에까지 인연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땅뿐만 아니라 하늘에까지 이런 인연이 미쳐지게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목적 세계를 향해 아니 갈래야 아니 갈 수 없는 운명에 처해 있으며, 그 무엇인지 모르지만 내 양심이 어떤 방향성을 지향하여 나를 재촉하고 있는 것을 거부할래야 거부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의 우리 인간들은 현실적인 사회의 모순을 대하게 될 때, 세계의 복잡한 실정을 초월한 새로운 이념의 세계를 마음으로 추구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러면 나로 하여금 그러한 심정을 느끼게 하고 나 자신도 모르게 어떤 감촉을 통하여 내 마음을 그런 하나의 방향으로 이끌고 있는 동기는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인가? 그것은 하나의 목적과 이념을 지닌 하나의 주인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분은 하나의 이념을 지니고 하나의 목적을 지향하여 나아갈 수 있는 인간과 하나의 세계를 재창건하기 위해서 여러분의 생활 환경을 간섭하며 이끌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오늘날 인류는 새로운 문화세계를 창건해 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문화세계를 창건해 가면서 그 문화를 통할 수 있는 마음 세계의 이념까지 지향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거부할 수 없는 입장에 처해 있는 자신이라는 것을 안다면 여러분은 편안한 나날을 가질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조상이 실락원의 한을 품은 그날부터 그 슬픔의 감정은 우리에게까지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엄청난 사실은 역사적으로 실증된 사실입니다. 우리의 심정을 통하여 생활적으로 체휼되는 그 사실을 무엇으로 거부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것을 놓고 심각하게 생각하고 뜻을 품은 어떤 인간이 있다고 한다면, 그는 이 한되고 슬픈 곡절의 인연을 풀기 위하여 하늘땅을 향하여 두 팔을 벌리고 호소하며 허덕이는 입장을 모면할래야 모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오늘의 우리가 그러한 모습이 되기 위하여 어떠한 목적과 이념을 가지고 어떠한 중심을 향하여 생활하는 개척자의 입장에 서 있는가를 다시 한번 돌이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될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늘은 이러한 시대를 만들기 위하여, 이러한 뜻을 세우기 위하여 역사노정을 거쳐오면서 양심을 기반으로 하여 선을 지향하고 선의 이념을 찾아 나가는 섭리를 우리 선조들을 붙들고 해 나오시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의 심정이 선을 지향하도록 어떠한 충격을 느끼는 순간이 있다 할진대, 그 순간은 숭고한 순간입니다. 숭고한 순간이에요. 이는 역대 우리 선조들이 여러분을 세워 온 인류가 바라는 선한 목적의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재촉하는 순간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하늘이 자신을 세워 주고자 하는 순간임에 틀림없습니다.

인간의 심정이 선을 지향하도록 충격을 느끼는 순간은

그렇기 때문에 참다운 이념, 참다운 중심의 뜻을 향하는 양심의 움직임을 가진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는 그것을 어떻게 수습하여 자기 마음의 중심으로, 몸의 중심으로, 생활의 중심으로, 이념의 중심으로 ,혹은 목적의 중심으로 세우기 위해 허덕였는가 하는 것을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이러한 견지에서 인간이 그 자체를 비판하고, 자기를 중심삼고 인연되어 있는 세계를 비판하고, 더 나아가서는 이 모든 것이 보이지 않는 무형의 창조주와 인연되어 있다는 것을 염려하는 심정을 가지고 허덕였다 할진대, 우리 인간의 심중에 맺혀진 한의 고개는 벌써 역사노정의 어느 한 때에 무너졌을 것입니다. 하늘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하늘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 연고로 하늘은 이러한 일을 어느 한 때에 어느 한 사람, 어느 한 모임, 어느 한 국가에게 예고시키고 섭리해 나오지 않을 수 없고, 또 그러한 역사의 흔적을 남기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흔적을 찾아서 추구해 볼 때, 그 한의 역사를 청산하는 일은 어떠한 논리적인 방편이나 이론적인 형식으로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음의 세계를 찾아 들어가 선의 이념을 추구하고 더 나아가서는 영적인 세계, 즉 초자연적인 차원의 감정을 이끌어 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아 가지고 인간과 인연을 맺지 않으면 안 되겠기에 종교라는 것이 나타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종교를 통하여 우리가 느껴야 될 것은 하나의 목적, 하나의 이념, 하나의 중심이 역사의 시작으로부터 종말시대까지 변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일관된 사상으로 흘러가야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여러분들은 선악의 기준, 다시 말해 선한 민족, 선한 사람, 선한 일을 무엇을 기준하여 판단하겠습니까? 시작과 종말이 동일한 것은 하늘이요 선이기 때문에 그것을 기준으로 하여 판단합니다. 참다운 선, 참다운 하늘이라 할진대 옛날이나 지금이나 그 목적, 그 이념, 그 방향이 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가 하나의 이념을 세웠으며 역사의 변천이 있을지언정 그 이념은 변치 않고 꾸준히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실존체가 나타나게 되면

인간의 슬픔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빚어졌습니다. 더 나아가서 하늘의 슬픔도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빚어졌다 할진대, 이 슬픔을 해원할 수 있는 한 날을 예고하는 어떠한 뜻이 있어야 할 것이고, 이를 실천할 수 있는 방편이 있어야 할 것이고,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어떠한 사람이 있어야 함은 틀림없을 것입니다.

이 일을 감당하고 이 일을 책임하도록 하기 위해 보내졌던 분이 종교적으로 보면 도(道)의 책임을 진 자인 것입니다.

전세계적인 어떠한 도의 사명, 구세주의 사명을 가지고 오는 것을 두고서 기독교적으로 예수의 강림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중심존재가 천상의 슬픔과 지상의 슬픔을 해원하기 위해 이 땅에 나타난다면 절대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실존체가 나타나는 데 있어서는 역사의 과정을 부정할 수 없고 시대상을 도외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늘이 슬픈 과정을 거친 역사가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천주의 이념을 대신할 수 있는 이념의 주체요, 목적의 주체요, 생명의 주체로 이 땅 위에 나타나기 위해서는 그러한 과정을 거쳐야 됩니다.

실존한다는 것은 인연의 과정을 거쳐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실존의 토대를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도 역사적으로 인연 된 그 슬픈 심정을 체휼해야 되었던 것입니다. 인간을 대표해서 그런 심정을 체휼하는 반면 하늘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슬픈 심정까지 체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인륜적으로 보는 관과 종교적으로 보는 관은 다릅니다. 인간들이 볼 때에는 자기를 부정하고 전체를 대신하여 대중의 고통을 지고자 하는 사람을 선한 사람이라 하여 추앙하지만 종교적으로 볼 때는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적인 슬픔을 대신하는 동시에 천륜의 슬픔을 대신할 수 있는 입장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타락으로 저끄러지고 엉크러진 그 원한의 곡절을 품어야 할 인간들이 반드시 갖추지 않으면 안 될 천적인 요구요 전인류의 요구인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이러한 원한을 해원하고 타락으로 저끄러진 곡절을 타파하기 위해 오신 분이 예수님이라 할진대, 그는 4천년 인류 역사노정에서의 어느 누구도 체휼하지 못한 하나님의 슬픈 심정을 느끼는 길을 가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4천년 역사노정에 나타났던 어떠한 주의보다도 하나님의 심정 깊숙이 사무쳐 있는 슬픔의 감정을 체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것입니다. 만일 땅 위의 인간 중에 하늘의 슬픔 심정을 체휼한 자가 있다 할진대, 그는 눈물없이 땅을 바라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까지 슬픔에 사무쳐 탄식하고 통곡하는 경지에 부딪치고 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심정을 느끼셨습니다.

그것이 누구 때문이었던가? 첫째는 하늘 때문이요, 하늘이 인간을 위하여 그를 이 땅에 보내셨으니 그 다음엔 인간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의 슬픔을 품고 인간을 붙들고 울어야 했던 예수님이요, 인간의 슬픈 사정을 붙들고 하늘을 향하여 호소하며 울어야 했던 예수님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슬픈 심정을 일소했다는 한 시간, 즉 하나님의 심중에 사무쳐 있는 슬픔을 해소시킬 수 있는 한 시간이 찾아오지 않는 한, 인류의 평화도 이루어질 수 없고 천적인 하나의 이념도 이 땅 위에서 결실의 한 때를 맞이할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런 곡절에 처해 있는 여러분, 이런 곡절에 사무쳐 허덕이고 있는 오늘날 인류가 이제 새로운 각성을 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울려오는 경종의 소리에 우리들은 때가 다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오늘 이때는 역사상에 두려운 때가 많았다 할지라도 이 이상 두려운 때가 없었고, 슬픈 때가 있었다 할지라도 이 이상 슬픈 때가 없었다고 할 수 있는 그런 때인 것입니다. 왜냐 하면 부모가 자식을 모르고 자식이 부모를 모르는 때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귀한 정적인 인연을 자기 마음대로 포기하고 파탄시켜 버리는 그들이 어디에 가서 자신의 슬픔을 위안받을 수 있을 것인지를 생각하면 그 이상의 슬픔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인류가 처한 상황과 우리가 취해야 할 방향과 태도

슬픔이 내 마음에 사무쳐 있는데 또 한편으로 공포의 세계가 나를 엄습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상태에서 허덕이고 있는 내 한 자체에게 있어서 안정된 심정의 동산은 어디일 것이며 안식과 자유의 한 동산은 어디일 것인가? 이것이 이 시대의 인류,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 해결해야 할 절박하고도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권내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한 여러분임을 재인식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오른손을 들고는 ‘하늘이시여, 저희의 손을 붙들어 주시옵소서.’라고 힘을 다하여 외치고, 왼손을 들어 ‘인류여, 나와 더불어 전진합시다.’ 하고 외쳐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충격을 마음으로 느낄래야 느낄 수 없고 그런 자극을 받을래야 받을 수 없는 이 땅 위에서 어찌할 것인가?

인간은 지금까지 자기들끼리 찾아보고, 싸우고, 별의별 놀음을 다 해봤지만 그것을 해결하지 못하고, 그 결과는 절망과 사망과 멸망밖에 없었어요. 우리 인간의 노력에 대한 보답이 없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때가 되었습니다.

하늘이 있다 할진대 인류는 역사적인 노력을 기울여 어느 한 분야에서 하늘과 인연을 맺겠다는 신념을 가지고 하늘을 찾아 나설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날이 개인에서 싹트면 개인이 소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날을 찾아 헤매는 민족, 국가, 세계가 있다할진대 그 민족, 국가. 세계에는 이 새로운 인연의 세계를 찾아 이룰 수 있는 동기와 이념이 없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만일 하늘이 있어 이러한 세계상을 바라보고 계시다는 사실을 안다면 우리는 보다 더 많은 공포를 느낄 것입니다. 심적인 세계에 있어서 자기도 모르는 공포의 자극은 날이 가면 갈수록, 시대가 촉박해 들어오면 들어올수록 더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세계, 그 방향을 그대로 취하여 나아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길로 가다가는 생명에 위협을 느끼고 생사에 위협을 느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 길은 본연의 심정을 가진 인간의 갈 길이 아닌 것을 재인식하고 돌아갈 수 있는 환경을 찾아보는 여유의 심정이라도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심정을 가져야 합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이 땅 위에나 하늘 앞에 충성을 한 그 이상 충성하고, 고난 받은 이상 고난을 받고, 어떠한 정열을 기울인 이상의 정열을 기울여야 합니다.

본연의 나

어떠한 선의 주체, 어떤 선의 목적체, 이념의 세계가 그 마음에 사무쳐 가지고 여러분이 아니 느낄래야 아니 느낄 수 없고 아니 허덕일래야 아니 허덕일 수 없어야 합니다. 그런 모습이 되었다 할진대 여러분은 어떠한 목적 세계를 찾아갈 수 있는 동기를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자기가 가진 어떠한 합리적인 논리를 통하여 세워진 주관이나 인식을 통하여, 자기 나름대로 세워 놓은 관념을 가지고 자기의 전생애를 내맡기고 생활하면서 안도감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이는 그 배운 지식이 자기를 자승자박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여러분의 마음 밑창을 들추어 생각하게 될 때, 이러한 감정의 흐름을 부정할 수 없는 하나의 진리체요 실존체라는 사실을 안다면, 그 모습은 우주적인 모습이요, 우주적인 증거물이요, 역사적인 증거물이요, 이념의 증거물이요, 한 분의 주체에 대한 대상적인 존재가 되고 있음은 확실한 사실입니다.

이제 하늘이 있다 할진대, 우리는 주체이신 하늘이 대상인 내 개체를 백 퍼센트 신임해 주는 그 한 날을 찾아야 되겠습니다. 그 목적에 대해 백 퍼센트 신념을 가지고 그 한 곳을 찾아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또 백 퍼센트의 신념을 가지고 돌진할 수 있는 방향성을 갖추어야겠습니다. 이것이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인류가 해결해야 할 최후의 중대한 문제인 것입니다.

이러한 슬픔의 환경을 넘어가야 할 인간이기에 하나님은 이것을 해결하는 어떠한 조건을 세워 나왔음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역사노정에서 어떻게 섭리해 오셨던가? 인간시조가 타락한 것은 하나님을 믿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여러분은 잘 알고 있습니다. 믿지 못했기 때문에 타락한 것입니다. 더 들어가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모시지 못했기 때문에 타락한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에서 말하고 있는 신앙의 3대 요소, 즉 믿음, 소망, 사랑을 상징한 것입니다.

신앙자들의 소망의 표준

우리들의 최후의 소망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모시는 것입니다. 인간이 반드시 찾아야 할 것은 천적인 인연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해원할 수 있는 하나의 역사적인 조건, 섭리적인 조건, 미래적인 조건이 있다 할진대, 그 조건들은 무엇을 통하여 우리를 찾아오고 있는가? 과거의 우리 선조들이 믿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고 모시지 못하였던 연고로, 믿음의 운동을 제시했고 사랑의 운동을 제시해 왔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통하여 우리를 찾아오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기 전까지는 믿음의 터전을 닦기 위해 허덕였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는 인류를 사랑하기 위해 싸우셨으나 그 뜻을 다 이루시지 못하고 신랑 신부의 이념만 세워 놓고 가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인류를 품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의 주인공이 와야 합니다.

그러면 그 주인공을 맞이한 그날 이후부터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생활 속에서 그분을 모시며 살아야 합니다. 그곳이 지상천국입니다. 그와 같이 무한히 모시며 사는 세계, 그러한 천국 세계에서 사는 자는 신앙자들의 소망이요 표준입니다. 역사의 섭리노정도 그러한 방향으로 움직여 나오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이 슬픔에 사무친 인간을 찾으시려면 역설적인 요소와 역리적인 조건을 통해 순리적이요 법도적인 조건을 찾아 세워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늘의 곡절이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슬픔도 크지만 하늘의 사무친 슬픔이 더 큰 것인데, 인간은 그런 하늘의 슬픔을 모르고 있습니다. 무지한 인간 앞에 법도를 세워 순리적인 과정을 거쳐서 찾아오셔야 하는 하늘의 슬픔을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 이후 지금까지의 역사는 신의의 역사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믿음의 한 기준을 조성하고 또 그 기준을 높여 나왔고, 선의 실적을 쌓아 나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의 한 중심으로 이 땅에 오셨으나 오신 목적을 다 수행하지 못하고 가신 연고로, 앞으로 신의(信義)의 시대에서 시의(侍義)의 시대로 넘어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은 슬픈 환경 가운데 놓여 있는 내 한 개체를 구원하기 위하여 다시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인연맺을 수 있는 조건 ― 믿음과 실천

역사적으로는 무엇을 통하여 하늘이 인간을 찾아 주셨느냐 하면 믿음이라는 조건을 가지고 찾아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늘은 인간으로 하여금 이 믿음의 조건을 세우게 하시는 한편 인간에 대하여 무엇을 요구하셨느냐? 실천을 요구했습니다. 하늘과 내가 인연되어 슬픔의 감정을 제거시킬 수 있는 하나의 발판을 세우기 위해서는 믿음을 중심삼고 하나의 실천적인 행로가 벌어져야 합니다. 그래야만 역사적인 인연을 세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라는 존재는 나 개인을 위해 살 것이 아니라 나를 부정하고 하늘이 가는 방향을 따라야 할 운명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은 우리 개인을 몰아 세계와 천주를 위한 방향으로 그 방향성을 갖추어 나가기 때문에 선의 방향성이라는 것은 나를 중심하지 않습니다. 선의 표준은 나를 중심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국가가 대상이 되어 있고 하늘이 대상이 되어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하늘은 믿음과 실천을 강조하면서 인류를 대해 섭리해 왔습니다.

오늘날까지 믿음과 실천을 강조하여 나온 역사가 6천년, 이 6천년의 역사를 검토해 보면 말할 수 없이 슬픈 역사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여러분은 인류의 슬픔보다도 인류를 붙들고 나오는 하늘의 슬픔이 더 컸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서는 천적인 인연을 맺을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그것을 아는 무리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인간들이 하늘을 추방해 나왔고 선지선열들을 죽였던 역사적인 선례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늘은 인간이 무한히 믿고 실천하면서 당신을 찾아 주기를 바라고 계셨지만, 인간에게는 하나님을 대할 수 있는 심정이 없고, 믿음을 가지고 실천하고 실행할 수 있는 발판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또 믿음의 발판이 되어 있다 하더라도 인간은 하늘의 슬픔을 동반할 수 있는 감정을 통할 믿음, 감정을 통할 수 있는 심정을 가지고 실천해야만 하늘의 믿음과 인간의 믿음이 맞부딪쳐 인간의 모든 슬픔을 해원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이 그런 경지에 서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이 새로운 이념을 향하여 나아가고 새로운 뜻을 지향하여 나가는 데 있어서 스스로의 믿음을 자신하고 있습니까? 자신이 없을 것입니다. 그 자신과 더불어 역사적인 인연을 거부할 수 있는 내 생명체를 갖지 못했다 할진대, 역사적인 인연의 환경을 개척해야 할 실천노정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설혹 믿고 있는 바를 실천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 하더라도 천정의 슬픔을 체휼하여 하나님의 믿음에 사로잡히고 하나님의 실천에 사로잡히고자 하는 감정이 앞서지 않는다 할진대,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찾아 이루시고자 하는 천국과 하등의 관계가 없을 것입니다. 하등의 관계가 없을 것이에요.

인간 끼리끼리의 신의도 슬픈 면과 기쁜 면이 상대적 관계를 맺어야만 그것이 오래 유지될 수 있고 그 신의를 기반으로 해서 약속된 일들을 오래도록 실천할 수 있습니다. 하늘을 대하는 신앙노정에 있어서나 실천노정에 있어서도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하늘의 기쁜 면과 슬픈 면을 느끼면서 믿고 실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기쁨의 자아가 되려면 슬픔의 자아를 먼저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의 주인공으로 오셨던 예수님은 만민을 대신하여 믿음의 중심이 되는 심정을 가지고 참된 신앙자의 모습을 갖추어 하늘 앞에 나타나고자 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늘은 예수가 만민을 대신하여 당신과 믿음의 인연을 맺고 그 예수가 만민과도 인연맺기를 바라셨으나, 바라신대로 다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과 하늘은 인연을 맺었으나 예수님과 인간 사이에는 소원하시던 바의 인연을 맺지 못한 채 지금까지 지나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성도들은 믿음을 세워 실천한다고 하였지만 믿음과 실천이 자신에게서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는 날을 맞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참된 믿음과 실천

천국이란, 참된 믿음은 ‘이러이러한 것이다.’라고 해석할 수 있고, 참된 실천은 ‘이러이러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곳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인간들이 그런 참된 믿음과 실천을 성사시키기 위한 노정에서 하늘이 당하는 고초와 슬픈 감정을 체휼함에 있어서 그 감정의 한계를 분석하고 동감하는 자리에 서지 못한다 할진대, 그는 아직까지 천국이념의 세계에서는 쌍수를 들어 환영할 수 없는 입장임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옮기시는 발자취는 귀중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한마디 말씀이 서면 하늘이 서는 것이요, 그 말씀을 실행하면 하늘의 뜻이 실행되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여기에 기준을 맞추어 살아가시는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인간을 염려하는 마음이 컸고, 하늘을 염려하는 마음이 컸고, 하늘땅의 슬픔을 체휼하는 감정이 컸다는 것입니다.

성경 가운데에는 예수님이 기쁨에 넘쳐 춤을 추며 말씀한 귀절은 없습니다. 왜? 하나님도 아직까지 기쁨의 동산에서 자녀인 인간에게 말씀하지 못한 고로 예수님께서는 심중에 기쁨이 있다 하더라도 하늘땅을 넘을 수 있는 기쁜 감정으로 자유로이 말씀하실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기쁨의 감정을 가지고 소개할 수 있는 말씀이어야 했는데 말씀하신 그 자체는 슬픔의 감정을 통하여 하신 것임을 알아야 됩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이제 그런 감정에 사무쳐서 말씀의 존엄성을 깨달을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과 내가 역사성을 초월하여 관계를 맺을 수 있고, 현실의 생의 이념권 내에서 인연 맺을 수 있는 말씀이 못 된다 할진대 그 말씀은 하늘의 말씀이 아닙니다.

신앙자의 본질과 하나님의 소원

여러분! 이제 여러분에게 진리의 길을 찾아 신앙노정을 부활시키려 하는 갈급한 심정이 있다 할진대는, 예수님께서 슬픈 감정으로 말씀하시던 신앙관념의 최후의 한계선은 어디인가를 알고 그 한계선을 넘어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은 천주의 슬픔을 해원해야 되고 인류의 슬픔을 해원해야 될 중간적인 책임자였기 때문에 그의 마음은 헤아릴 수 없는 슬픈 심정이었습니다. 인류의 슬픔이 백이면 백, 천이면 천의 심정을 느꼈고, 나아가 하나님의 천만 가지의 슬픔을 느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이 예수님의 슬픈 감정을 통하여 나타난 말씀에 대한 인간의 믿음의 기준이 서야만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막혔던 인연이 다시 맺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기준을 세우는 것이 신앙자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는 웃음의 종교가 아니었습니다. 눈물의 종교였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 한 가지를 알고 보면 가슴이 막히고, 두 가지를 알고 보면 자기도 모르게 통곡이 나오고, 알고 알고 또 알고 보면 자기 스스로가 제물 되어야 할 입장임을 아니 느낄래야 아니 느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감정에서의 신앙, 그런 감정에서의 실천을 하게 되면 죽은 인간을 살릴 수가 있게 됩니다.

하늘 앞에 제아무리 훌륭한 공적을 세웠다 할지라도 그 공적의 결과는 자기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늘로 말미암아 된 것이에요.

그러면 섭리의 실마리는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가? 인간의 마음이 하늘의 슬픔과 통하는 그 순간에 새로운 섭리역사는 개척되어 쌓여 왔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 대하여 믿음과 실천의 노정을 걸을 것을 촉구하시면서 6천년의 기나긴 역사노정을 거쳐오셨습니다. 온 인류를 대해 그러한 존재가 되기를 간곡히 바라셨습니다. 온 인류 앞에 하나님 자신을 백 퍼센트 세워 드릴 수 있는 실체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하늘은 한없이 믿고 행하고도 그 사실을 잊어버릴 수 있는 하나의 존재를 찾고 계십니다. 하늘의 표준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믿으라는 말이 쓸데 없고 실천하라는 말이 필요 없는 그런 존재를 찾으신다는 거예요. 예수님을 통해 주신 말씀을 세울 수 있고 실천의 명사를 세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하늘의 감동을 일으킬 수 있는 존재를 찾아 나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와 같이 하늘이 인간을 찾아오시는 그 한계성을 넘어서 실천했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찾고 있는 사람

오늘날 기독교의 수많은 신자가 있다 할지라도 그러한 심정의 한계성을 넘어 실천노정을 자랑할 수 있는 하나의 천적인 자녀가 어디 있는가? 천적인 자녀가 어디 있는가?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믿음의 명사를 꿈에라도 바라고 세울 수 있어야 되겠고, 어떠한 한 사실을 놓고도 시대성과 역사성을 초월하여 영원에서 영원까지 자유자재로 내 것으로 여기어 즐길 수 있고 내 것으로 응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대해 믿음의 바탕이 되는 길을 세웠다 하는 그런 내용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신의(信義)의 법도를 잊어버릴 수 있는 하나의 존재, 실천의 가치를 잊어버리고, 실행의 가치보다도 귀하게 여길 수 있는 그런 경지에서 하늘의 뜻에 사무치게 될 때 하늘은 비로소 내 아들아, 내 딸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아들과 딸을 찾지 못한 것이 하늘의 슬픔이요 이 땅 위의 인류의 슬픔입니다. 이 인류를 아들딸로 대하지 못하는 것이 하늘의 슬픔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절대자를 놓고 하나님이라 부를 수 있는 말은 가지고 있으되 하나님을 이렇다 하고 소개할 때 진정으로 감정이 통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감정을 떠난 말이 있을 수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말이 통하고 감정으로 접할 수 있는 신(神)은 어디에 있을 것인고? 여러분이 신앙노정을 가는 데 있어서 절실한 심정을 가지고 이런 문제에 부딪쳐서 믿음이란 명사와 실천이란 명사를 넘어서서, 아버지에게 사로잡혀 자신도 모르게 자기 세포와 자기 심정이 동하여 아버지를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늘은 필시 그런 외침이 생리적인 상태로 머무를 수 있는 한 존재를 찾고 계실 것입니다.

오늘의 인류가 울어야 할 일이 있다 할진대는 인류 전체가 책임하지 못한 것을 놓고 서러워하며 울어야 할 것입니다. 6천년 동안 하늘을 슬프게 하였던 역적이요 배반자인 우리 선조들을 대해 서러워해야 되겠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오늘 내 한 자체를 놓고 서러워해야 되겠습니다.

오늘날의 신앙적인 관점에서 우리 자신들이 어떠한 한계권 내에 헤매 나오지 않았는가를 생각도 해 보지 못하고 움직이고 있다면, 그러한 우리를 대해 하늘은 ‘옳구나.’ 하겠습니까, ‘슬프구나.’ 하겠습니까? 그 심정은 4천년을 지나 6천년 역사의 인연을 가한 슬픔으로 가득찰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하늘이 여러분을 대해 탄식할 수 있는 입장에 놓여 있음을 자인해야 할 것입니다.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믿음을 잃어버리고 사랑을 잃어버리고 모심의 생활을 잃어버린 심정에 흐르는 것은 무엇이었던가? 슬픈 감정이었습니다. 뭣인지 모르는 슬픈 감정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도 신앙 생활에 있어서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슬픈 감정이 싹트고, 어떠한 의식적인 기준을 세우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생활적인 분야에 있어서, 주위 환경에서 슬픔이 찾아오는 시간이 있을진대 하늘이 찾아오는 시간인 줄 아십시오. 그러한 시간에 그 슬픔의 실체를 붙들고 눈물로 인연을 맺는 이가 있다면 그는 소생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인연을 맺어야 할 인간이지만 타락한 인간이 하늘에 대해서 입체적으로 대할 수 없기 때문에 평면적인 주인공으로 이 땅 위에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타락한 인간에게는 실체 주님 되시는 예수님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시게 되었던 것입니다.

4천년 슬픈 역사노정에서 몰리고 쫓기던 이스라엘 민족이 하늘의 슬픈 감정을 품으신 예수님을 붙들고 통곡할 수 있었던들 그 민족은 오늘날 세계 앞에 이름을 드날리는 민족이 됐을 것입니다. 그랬더라면 민족을 잃어버리고 주권을 잃어버리고 국토를 잃어버리고 유리하는 민족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런 민족이 되지 않았을 것이에요. 그렇지 않았겠어요?

기쁨보다 슬픔이 더 컸던 예수님의 생애

통일교회는 본래 험한 길을 가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여러분이 통일교회에 들어오는 것을 바라볼 때 환영하는 마음보다는 염려하는 마음이 앞섭니다. 그런 마음을 갖고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환영하기보다는 주저하는 마음을 갖고 바라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하늘의 내용과 하늘의 실정, 즉 우리 인간을 대하여 찾고 계신 하늘의 사정이 이렇게 간곡하였다는 것을 느끼는 사람일수록 자기를 찾아 세울 수 없고 자기를 부인할 수밖에 없게 될 것입니다.

자기 의식과 자기 주관으로는 비판할 수 없는 경지에 자기도 모르게 끌려갈 수 있는 어떠한 존재로 되어 있다면, 그런 경지의 슬픔을 느끼는 반면 주체적인 입장에서 하늘을 안심시키고 위로할 수 있는 한 부분을 맡아서 연결짓는 그 자리에서만 이 길을 갈 수 있는 거예요. 그렇게 해야 이 길을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편안한 길 가기 원하는 사람은 이 길로 오지 마십시오. 내가 걷고 보니 그 걸음은 친구가 없는 외로운 걸음이요, 동지가 없는 걸음이요, 사정을 통할 수 없는 걸음이요, 의지할 수 없는 걸음이요, 믿을 수 없는 걸음인 것을 알았습니다. 걷고 보니 그런 곡절을 지니고 계셨던 예수님의 심정을 가히 짐작할 수 있게 됩니다.

내가 오늘날 예수님을 소개한다면 먼저 슬픈 면의 예수님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밥먹는 시간도 잊어버리고 잠자는 시간도 잊어버리고 슬픈 가슴을 붙안고 이 마을 저 마을로 몰리며 쫓겨 다니시던 예수님, 그 시대의 어느 누가 그의 심정을 알고 친구가 된 사람이 있었습니까? 하늘은 서러운 하늘이었습니다. 하늘을 대신하고자 했던 선지자도 서러운 제물이었는데 예수님마저 죽게 되니, 뜻을 품고 계셨던 하늘, 그 하늘은 서러운 하늘이었습니다.

그 하늘이 누구인가? 알고 보니 아버지였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인간의 관계를 알고 보니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였습니다. 우리 인류는 아버지의 서러움을 알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알지 못하는 아버지의 그 서러운 심정을 알려 줘야 할 책임은 하나님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수행하기 위해서 선지자가 왔고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슬픔의 왕자

하늘은 지금까지 고대해 왔고 요구하고 나왔습니다. 예수가 가던 슬픈 신앙의 노정, 예수가 싸우던 슬픈 신앙의 싸움, 그 싸움을 오늘날 자녀의 명분을 갖고자 하는 자는 대신 싸워서 승리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인류는 아직까지 땅 위에서 기쁨의 한 날을 갖지 못하였고 영광의 한 날을 갖지 못하였습니다. 그러한 사정을 놓고 슬픈 감정에 동하여 하늘을 부르게 될 때는 나도 모르게 하늘이 있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제가 알건대는 예수님은 남모르는 눈물을 많이 흘리신 분입니다. 이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는 몇 군데밖에 나타나 있지 않지만 예수님은 남모르는 눈물을 많이 흘리신 분입니다. 산천을 바라보고 책임감을 느끼신 분이요, 널려져 있는 민족을 바라보게 될 때에도 책임감을 느끼신 분이요, 무한한 하늘에 대해서도 책임감을 느끼신 분이었습니다. 책임을 지워 놓고 실천할 수 없는 분야가 있는 것을 바라보시면 더욱 슬픈 심정을 가지셨고, 그 위에 또 하늘을 위로해야 할 입장에서 위로해 드리지 못한 슬픔, 인간을 구원하여야 할 구주의 책임을 감당치 못해서 가해지는 슬픔 등 그는 진정 슬픔의 왕자이셨습니다.

우리들이 믿고 있는 예수님은 어떤 만왕의 왕자, 영광의 왕자, 승리의 왕자이기보다도 슬픔의 왕자이십니다. 뜻을 위한 슬픔의 왕자이심을 우리는 느낄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런 말을 하면 기독교의 이단자로 낙인을 찍힐는지 모르지만 알고 보니 그렇더란 말입니다. ‘예수님은 만민 앞에, 역사 앞에 처음으로 나타난, 하늘의 슬픈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왕자이셨구나!’ 하며 감격에 북받칠 수 있는 순간을 가져야만 여러분이 그분과 인연맺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그뿐이겠습니까? 예수님은 고통의 왕자이셨습니다.

예수님의 깊은 심정과 사정

하늘 배반하기를 일삼고 하늘 대하여 저주하는 데에 선봉에 섰던 자들은 누구였던고? 그들은 믿고 따르라고 세운 유대교인이요, 이스라엘 민족이었습니다. 하늘은 예수를 잡아죽이라고 4천년 동안 준비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세웠을 리는 만무합니다.

이걸 볼 때 예수님은 온전히 승리하고 가신 분이 아닙니다. 완전한 승리를 하지 못했습니다. 여러분들 생각에도 그렇지 않아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이 완전히 승리한 것이라면 수난의 한 날이 그 이상 기쁠 수가 없을 것이며, 십자가에 돌아가셨던 그 순간이 최후의 승리의 순간이요 만민 만상을 동원하여 기뻐할 수 있는 순간임에 틀림없을 것인데, 기쁨의 순간이 못 되었던 것을 우리들은 얼마든지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막달라 마리아가 환희의 심정으로 맞으려고 할 때 예수님께서는 오지 말라고 막아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와 더불어 기쁨에 사무쳐 하늘 앞에 영광을 돌려드리지 못하였습니다. 그걸 못 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슬픔을 품은 예수요, 애통해했던 죽음이요, 슬픔을 품고 이루어진 부활이 되었음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하늘의 슬픈 심정을 체휼하면서 자기의 몸 둘 곳을 모르고, 자기의 생활의 방편도 잊어버리고, 문전 문전마다에서 눈총을 받으며 이 마을 저 마을로 허덕이면서 쫓겨다니던 그 초췌하신 예수님의 동지자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민족 앞에 몰렸고, 교단 앞에 몰렸고, 친척 앞에 몰렸고, 사랑하는 제자들에게도 몰렸습니다. 이와 같이 슬픔 중의 슬픔을 느끼신 예수님이었지만 하늘의 심정을 품고 세계 인류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주겠다는 마음을 가졌고, 또한 인류를 믿어 주려는 마음을 지니셨던 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슬픈 감정으로 통할 수 있는 인류를 대한 인연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까지 연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심중에 품었던 그 간곡한 소원, 간곡한 마음, 간곡한 사정을 인류 앞에 다 알려 주고 가지 못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 끝날에 있는 성도들은 말씀을 붙들었다는 그것만으로 자기가 하늘의 왕자 앞에 설 수 있는 약속의 신부라고 자처하고 나서지 마십시오. 그렇게 안 되어 있습니다. 알고 보니 그렇게 안 되어 있어요.

그러므로 이제 여러분은 ‘아버지시여! 저희가 말씀이 두렵고 저희의 행함이 부족하옵니다.’ 하는 황공한 마음에 사무쳐 아버지라 부르기에 눈물이 앞서고, 아버지라 생각하기에 가슴이 막혀 애타는 심정이 동해야 합니다. 자기는 천만 번 제물 될지언정 역사를 이끌어 오시기에 수고하신 아버지 앞에 자기를 세워 무엇을 기대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 마음이 하늘을 향해 가고 가도 부족하고, 가고 가도 황공하고, 가고 가도 민망한 심정에 사무쳐 슬픔의 눈물을 흘리는 자라야만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예수님의 신부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경지에 들어가야 예수님께서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 8:20) 또는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마 11:23)고 하신 말씀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심정에 동하여 말씀을 파헤쳐 볼 때 그 말씀이 예수님의 말씀으로서가 아니라 여러분 자신의 말씀으로서 뼈 살에 사무쳐야 합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새로운 이념, 새로운 각오, 새로운 결심을 갖고 새로운 목적의 시대를 지향해야 되겠고, 그러한 충격을 지닌 모습으로 주위 환경을 개척할 수 있는 신의(信義)의 자녀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만 본질세계를 통한 예수님 앞에 신부로 설 수 있는 하나의 대상이 되고, 신앙자라고 말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를 찾아준 예수님께서는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하시는 한편 무엇을 말씀하셨는가 하면,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자비의 하나님, 의의 하나님 등등 하나님의 여러 면을 말씀하셨지만 하나님의 모든 면을 대표할 수 있는 결론에 있어서는 하나님은 사랑이다. 하는 정의를 세워서 우리를 지도하셨습니다. 즉 참된 사랑을 찾아 헤매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나를 더 사랑하라는 말의 뜻

‘무엇보다 나를 더 사랑하라.’는 그 말은 무슨 의미인가? 내가 너를 믿어 주고 너를 사랑하겠다는 것이요, 또 하늘은 우리를 그렇게 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늘은 우리를 사랑하기에 시간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교계에 책임자들이 있다 할진대, 허덕이는 양떼를 보고 자기의 뼈 살에 사무쳐 그들의 생명을 붙들고 눈물지을 수 있고 통곡할 수 있는 마음이 없으면 천법에 걸리는 교역자가 될 것입니다. 천법에 걸려요. 그렇지 못한 목자가 있다 할진대 그는 죽은 목자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말보다 먼저 심정이 앞서는 것이 특징입니다. 심정에 사무쳐 자기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말씀 앞에 사탄은 굴복한다는 것입니다. 악은 그런 데에서부터 굴복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말을 했다 할지라도 악은 굴복하지 않습니다. 사무친 심정이 발로되어서 인간의 생명이 생사의 기로에 선 것을 분하게 여겨 가지고, 그것을 자기 일신의 고통으로 느낄 뿐만 아니라 자기의 처지를 돌보지 않고 몸을 던져, 그들을 구해 주기 위해 붙들고 싶은 사무친 심정이 앞서야 거기에서부터 구원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실 때 사랑하라는 말을 남기고 갔습니다. 십자가 상에서도 하늘을 떠나 원수 앞으로 가는 그들을 원망하지 않았고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자신의 아픈 심정보다도 그들을 대한 불쌍한 마음이 앞섰기 때문에 원수 앞으로 나아가는 그들을 가로막을 수 있었고, 손을 들어 원수를 위하여 기도해 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기도 앞에서만 사탄이 굴복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을 위해 살고자 하고 하늘 앞에 나아가려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먹고 있는 그 자체가 남보다 더 나을 때는 가책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입고 있는 것, 사는 것, 보는 것 자체를 놓고 가책의 마음을 앞세우고 가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는 굶는 법이 없고 쫓기는 법이 없고 몰리는 법이 없습니다. 혹시 사탄세계에서는 몰리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하늘의 심정을 찾아가는 무리들 앞에는 몰리는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은 우리 인간을 대하여 ‘나를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 그 사랑은 오늘날 여러분의 감정으로 느끼는 그런 사랑의 심정이나 한계지어진 사랑이 아니에요. 6천년의 서러움을 해원할 수 있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그것은 에덴동산에서 아담을 추방해야 했던 그 서러운 심정, 나아가 지옥에 갈 생명까지 불쌍히 여겨 통곡할 수 있는 심정을 가진 사랑이라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응당 벌을 받아야 할 죄인이라 하더라도 사탄과 하늘 앞에 놓여진 조건의 법도가 있으므로, 그 법도의 조건을 실천하도록 하기 위해 그를 때리고 나서 서러워하고, 버리고 나서 또 붙들고 나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볼 때, 반역하는 이스라엘 민족은 어느 누구보다도 하나님 앞에 배신자요 배반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늘은 그들을 버렸다가 취하고, 다시 버렸다가 취해 나왔습니다. 취했던 개인을 버렸다가 다시 취하였고, 거기서 번식된 가정을 취했다가 또 버리고 한 가정을 세워 하늘 앞에 수백, 수천, 수만 가정을 취했다가 또 버리고 취했다가 버리면서 이스라엘 민족을 세워 오늘날 제2이스라엘 민족형인 세계 기독교를 전개시켜 나왔습니다. 다시 말하면 제2이스라엘이라 할 수 있는 세계 기독교를 세워 나왔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세계와 인연맺을 수 있는 출발점

여기에 있는 모든 신자들은 사탄에 대해서까지도 미련을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심정과 사탄까지도 용서할 수 있는 법도를 생각하고, 섭리하며 싸워 나오신 하나님의 심정을 알아야겠습니다. 그런 하나님이신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합니다.

이제 그런 심정을 가진 하나님이신 줄을 알고, 오늘날 여러분은 하늘을 배반하였던 죄와 자신이 부족하여 저끄러뜨린 과거의 생활을 돌이켜보면서 사랑하는 마음뿐만 아니라 무조건 섬기고 싶은 마음, 무조건 위해주고 싶은 마음이 동해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순간부터 여러분은 하늘이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부모도 잊어버리고, 부모도 기억할 수 없을 만큼 움직여 질 수 있는 그 한 경지가 하늘의 입장입니다.

타락한 인류의 부모도 자식의 허물을 잊어버리고자 하거든 하물며 천정(天情)을 대신해야 할 우리는 더욱이나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여러분이 그런 심정에 동하고 그런 아버지인 것을 체휼하여 그 아버지를 무한히 존경하고 무한히 섬겨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자기 자체를 다 빼앗기고, 또 누가 자기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가도 ‘저는 감사합니다.’ 할 수 있는 심정에 사로잡혀야 합니다. 바로 그런 시간이 하나님의 사랑의 세계와 인연을 맺을 수 있는 출발점인 것을 여러분은 똑똑히 알아야 되겠 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사랑을 강조하시고 사랑의 주체로서의 사명을 완수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모든 생활은 봉사의 생활, 주기 위한 생활이었습니다. 주지 못해 허덕인 예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진 생명을 주려 하였고, 자신에게 있는 말씀을 주려 하였고, 자신의 영광을 주려 하였고, 자신의 보좌까지 주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모든 것을 주어도 받지 아니하니 마침내 자기의 몸, 자기의 피와 살까지 인류를 위하여 던지고 가셨습니다.

이것이 사랑을 표방하여 실천한 예수님의 생활이었습니다. 우리도 그런 사랑을 추구하여 나가는 자신이라 할진대는 오래 믿었던 사람을 보면 스스로 머리 숙여지고, 하늘 앞에 수고한 사람을 보면 스스로 섬기고 싶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이런 심정이 없다 할진대 천적인 사랑의 인연은 끊어질 것입니다.

인간이 지금까지 지니고 있는 사랑은 영원한 사랑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은 사랑이라는 명사를 걸고 그 영원한 사랑을 찾기 위해 죽기를 각오하고 허덕이고 있습니다. 인간적인 사랑이 천적인 사랑의 이념에 부딪쳐서 사랑의 감촉을 느끼는 순간은 대우주의 소유권한을 결정할 수 있는 가치의 감미를 느끼는 것입니다. 천적인 사랑에 접촉되는 그 순간은 모든 것을 잃고도 미련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 세계는 망상적이 아니에요. 어떠한 가공적인 공상의 세계가 아니라 실존적인 실상의 세계입니다.

그런 감정이 오늘날 인류의 심정 내에, 대우주권 내에 있습니다. 우리가 알 수 없는 천정의 세계에서 인류를 향하여 돌고 있는 감정이 있습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사랑의 진수를 소개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이것을 소개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세우기 위해서는 인류를 대신하여 수천년 동안 수고하신 하늘을 섬기고 위하려는 마음에 사무쳐야 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신앙의 세계가 그랬습니다. 첫째는 믿음의 세계요, 둘째는 사랑의 세계였습니다. 사랑의 세계는 신랑 신부의 세계를 말합니다. 이제 앞으로의 시대가 어떤 시대냐 하면 모심의 시대입니다. 그런데 믿음의 과정을 통하고 사랑의 과정을 통과해야만 모심의 시대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지금까지 믿음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사랑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믿음과 소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으로 갈 곳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통일 용사들은 믿음의 논리를 주장하여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하는 것보다도 사랑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표어를 가지고 나서야 되겠습니다.

세계를 움직일 수 있는 주인공

사랑은 내 개인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을 넘어 세계와 하늘을 사랑하기게 미칠 줄 아는 심정입니다. 자신에게 열이 있고 힘이 있고 살아 있는 한 정성들이고 싶고 외치고 싶은 마음이요, 세계를 넘어 하늘과 인연 맺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러한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 오늘도 역경 내일도 역경이 닥쳐온다 해도, 주고 또 주고, 섬기고 또 섬겨야 했던 예수님의 30여년의 생애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교인에게 ‘회칠한 무덤 같은 자들이여.’ 하며 책망하고 저주한 적이 있는데, 한없이 위해 주고 싶고, 한없이 받들어 주고 싶었으나 그들이 그 마음을 몰라주니 그런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위하여 사는 사람을 못 찾고 있습니다. 진정 위하여 사는 사람을 못 찾고 있습니다. 이 한민족은 위하여 사는 민족이 못 되고 있습니다. 위하여 사는 어떠한 이념을 못 가졌습니다. 과거의 이 민족을 위해 줄 수 있는 이념을 못 가졌고, 현재의 이 민족을 위해 줄 수 있는 이념을 못 가졌고, 내일의 이 민족을 위해 줄 수 있는 이념을 못 가졌기 때문에, 위해 주려는 하늘 섭리의 뜻과는 상충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 자체도 그렇습니다. 자동적인 발로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위할 수 있는 마음이 나타나야 됩니다. 내가 성공하여 이름을 내겠다 하는 등 자기를 중심삼는 것은 타락의 길입니다. 타락의 길이 그렇다는 거예요. 어떠한 주권자의 입장에 섰다 할진대 그는 높임을 받아야 하는 자가 아니요, 삼천만이면 삼천만 전체를 위해 주어야 하는 자입니다.

이 민족 모두가 밥 한 숟갈을 먹더라도 삼천만의 피와 살을 먹는 심정이 되고, 옷 한 벌을 입게 되더라도 그런 심정이 동할 줄 안다면 이 민족은 망하지 않습니다.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강조해야 할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한 개인, 그러한 목자, 그러한 기독교가 나와야만 민족이 산다는 것입니다.

이제 이러한 비애와 곡절의 탄식권 내인 현실을 바라보는 우리들은 각성해야 되겠습니다.

하늘이 제시하였던 사랑의 표어를 실천할 수 있는 하나의 일면이 무엇이었던고? 살이 찢기고 피를 뿌리면서도 위하여 복을 빌어 주고 싶은 마음이 온 우주에 꽉 차고 넘치어서 하나님까지 사로잡을 수 있는 마음을 지닌 한 존재가 나타난다 할진대, 그는 세계를 움직일 수 있는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심정의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심정세계의 이념을 찾아 세워 나왔던 하늘까지도 그 사람을 붙들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결단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은 여러분의 신앙노정에 있어서 중요한 일면인 사랑이라는 명사를 세웠습니다. 죄악된 세상에서도 사랑을 찾아 나가는 데는 심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심정에 사무쳐 위할 수 있는 어떤 무엇이 없다 할 진대는 사랑의 예수님도 여러분과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늘의 탄식을 해원하기 위해 세워졌던 목표는 무엇이었던가? 잃어버린 천국 복귀였습니다. 잃어버린 참아들딸, 영원히 품고 사랑할 수 있는 아들딸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생활적인 면에 있어서 하나님을 잃지 않고 영원히 동거할 수 있는 아들딸, 타락 전 아담 해와와 같은 본연의 인간들로 복귀하는 것임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늘이 이루고자 했던 목표

타락한 인간이 신앙노정을 다 거친 후 심판대를 넘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하나의 모습을 갖춰 아버지의 자녀로 나타나고자 할진대는, 먼저 본연의 아담 해와의 형을 갖춘 입장에서 믿으라는 말이 필요없고, 슬픔의 경지를 넘어 사랑하라는 말과 모시라는 말을 하지 않더라도 감정으로나 몸으로나 행동적으로 또는 생활 전체, 이상 전체가 그러한 면으로 자동적으로 움직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법도적인 조항에 의하거나 명령 계통을 따라 움직이는 것보다도 우리의 심정이 법도를 앞서고, 우리의 양심 작용이 어떠한 논리, 어떠한 최고의 법규를 넘어서는 곳이라야 천적인 인연이 완성된 세계입니다. 천적인 심정에 사로잡혀 아니 움직일래야 아니 움직일 수 없고, 아니 행할래야 아니 행할 수 없고, 아니 사랑할래야 아니 사랑할 수 없고, 아니 위할래야 아니 위할 수 없는 그런 숭고한 모습이 되어야겠습니다. 기독교인들에게는 이것이 최고의 신앙의 표준일 것입니다. 오늘날 이것이 현실에 나타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러한 자를 상봉하는 그 순간,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붙들려 하게 될 때 예수님이 막았던 그 심정을 체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오냐 죽음의 길도 오너라.’ 하는 마음으로 어려운 고비를 넘어야 되겠고, 실천의 길을 거치면서 사랑의 심정을 품고 나가야 되겠습니다. 허덕이고 몰리면서도 그 고비를 넘어 부활의 은사에 감사할 수 있고 하늘 앞에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순간, 사랑의 심정을 품고 모실 수 있는 영광권에 들어서야만, 거기서부터 천국생활이 전개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에게 있어서는 천국이라는 명사가 관념적인 명사로 남아 있습니다. 그 관념적인 명사가 나에게 있어서 언제 생활적인 명사로서 전환되겠느냐, 이것이 문제예요. 하늘이 있다면 이 전환점을 이룰 수 있는 한 점을 찾아 세우실 것입니다. 그때를 왈 끝날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견지에서 하늘은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여러분 자신들을 놓고 반성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은 하늘을 믿는다 하고 하늘을 사랑한다 하는 그것을 기반으로 하여 신앙의 원천이 되신 하나님을 자기에게 예속시키려고 하였고, 대실천자이신 하나님을 자기가 실천해야 할 것을 대신하는 조그마한 존재로 세우려고 하였고, 우주적인 사랑의 주인공을 자기 사랑의 심정권내에 찾아 세우려고 하였고, 위함의 주인공이신 하나님을 대하여 자기를 위하는 친구가 되어 달라고 하였던 과거를 자탄하며 서러운 심정에 사무쳐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부활의 순간을 맞이하여 ‘아버지여! 나의 아버지여!’ 하고 부를 수 있어야 될 뿐만 아니라 아버지 앞에 자기의 몸이 녹아질 수 있어야 합니다. 나아가 바울이 삼층천에 들어가 체험했던 것같이 자기가 몸 안에 있는 지 몸 밖에 있는 지 분별할 수 없는 경지에 부딪쳐야만 천적인 기준을 생활로 넘어간다고 나는 보고 있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런 경지를 찾아 헤매는 하늘인 것을 알게 될 때에 그 하늘이 계신 곳은 어디이며 그 하늘은 어떠한 하늘이냐? 그곳은 우리의 나라, 영원한 내 나라일 뿐만 아니라 내가 살 곳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내 아버지예요. 그런 아버지를, 그런 나라, 그런 생활무대를 알지 못하고 허덕이던 인간들이 이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환희의 노래를 불러 드리고 사탄 대하여는 격분하여 무찌르겠다고 하며 나설 수 있는 그 때가 바로 심판날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사탄을 무찌르고 ‘주여, 승리의 한 기준이 섰사오니 다스려 주시옵소서.’ 할 수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야만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품어 주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찌하여 막달라 마리아를 환대하여 주지 못하셨던고. 사탄과의 싸움에서 승리해야 할 노정이 남아 있는데 그녀는 그 노정을 거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승리의 노정을 거치지 못한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 앞에 설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사탄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자리에 들어가 하늘 대하여 ‘아버지!’ 하고 부르며 아버지를 붙들게 되면 온 우주를 소유하게 되는 거예요. 내 몸에 대한 의식을 잊어버리고 그 아버지를 믿을 수 있는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경지에서 아버지를 생각하고 아버지를 믿게 될 때에 자기 감정이 없어집니다.

이제 내 아버지를 원수시했던 사탄 대한 분개심을 품고 그에게 심판의 일격을 가한 후, 승리의 모습으로 나타나 ‘아버지!’ 하고 부르며 아버지를 붙들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런 자리에서 기쁨과 서러움에 사무쳐 울고 난 신앙자라야만 천국생활 이념시대에 들어갈 수 있다고 나는 단언하고 싶습니다.

그러한 세계에서 모심의 생활을 해야 할 우리입니다. 소망의 천국은 맞이했으나 모시고 실천하면서 생활할 수 있는 천국은 맞이하지 못했습니다. 즉 생활적인 주체의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과 일체된 신앙생활을 해야 할 우리

하늘은 예고하셨습니다. “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내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 하셨습니다. 이것은 부정적인 말씀이 아닙니다. 관념상으로는 신의 실존하심을 알고 있고 대상적인 신앙의 주체로 계시는 하나님은 알았으나, 직접적으로 내 양심의 주체요, 내 몸의 주체요, 내 생활의 주체요, 내 생활권 내에서 찾아지는 주체로서의 하나님이 실존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느냐? 신앙의 한계선을 넘어서지 못하고, 또 사랑의 심정과 접선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류를 복귀해야 할 사명을 짊어진 끝날의 성도들은 이런 사실을 알고 어떠한 희생, 어떠한 어려움, 어떠한 핍박이 있더라도 천성의 슬픔과 천주의 원한을 풀어 드리겠다는 심정에 사무쳐 하늘의 깃발을 들고 나서는 무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무리가 어떠한 민족 앞에 나타나면 그 민족에게는 선한 마음이 주도하는 시대가 올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오늘날 이 세계는 지적인 것을 추구하고 진리적인 것을 추구하는 세계입니다. 진리를 움직여 내는 동기는 체(體)였습니다. 체를 움직여 낼 수 있는 동기는 마음이었습니다. 마음을 움직여 낼 수 있는 실체는 무엇인지 자세히 모르지만 영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리만으로는 만사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래에는 우리의 마음의 방향을 한 곳으로 지향시키고, 심정의 움직임 을 한 곳으로 지향시키고, 영적인 감정까지도 한 곳으로 지향시킬 수 있는 세계가 올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 이념의 세계가 온다고 믿고 그러한 세계를 찾아 나가려 하는 오늘날 우리들은 관념적인 것에 취해 살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실제 생활에서 하늘을 대하여 노래할 줄 아는 승리의 용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이 땅 위에 나타나야 되겠습니다.

만일에 그런 신앙을 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는 꿈속에서도 그것을 생각해야 될 것입니다. 또 가능성이 있고 하늘이 있다 할진 대 실제로 한번 그것을 실현해 보고 싶은 간곡한 마음이라도 가져야만 하늘 앞에 가까이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간곡한 마음을 가질 뿐만 아니라 시간성을 초월하여 생활적인 면에서 6천년 전 인간이 에덴에서 부르던 노래를 오늘의 노래로 부를 수 있어야 되겠고, 그때의 감정을 오늘의 감정으로 살릴 수 있어야 되겠고, 타락한 후부터 느껴온 서러운 감정을 오늘에 와서는 기쁜 감정으로 바꿀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존재가 모심의 주체인 동시에 역사적인 해원의 주체인 것입니다.

그러한 존재가 나와야만 여러분은 그와 관계를 맺어 승리적인 존재가 될 수 있을 것이요 하늘땅의 슬픔을 풀 수 있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그러한 관계 속에서 여러분이 슬픔과 고난의 심정을 가진 하나님께서 영원한 나의 아버지요, 내 나라, 내 집의 주인 되시는 분임을 실감할 것이고, 또 여러분은 신랑 되신 분의 슬픔 전부를 해원해 드릴 수 있는 참다운 아들딸이 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이러한 길을 찾아 나서고 보니, 아버지가 슬픈 아버지이심을 알았습니다. 그 슬픈 아버지의 아들딸은 어떠해야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천국을 회복하기 위하여 슬픈 자리에서 싸워 나오시는 하늘의 분함을 알았습니다. 하늘의 억울함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원수를 대하여 분함과 억울함과 적개심을 품어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어떤 민족보다도 역사적인 승리의 표어를 내걸고 모든 것을 책임지고 자신 있게 승리하겠다는 하나의 기준이 여러분의 마음에서, 몸에서, 생활적인 분야에서 확고하게 섬으로써 승리의 역사가 벌어져야 합니다. 그래야만 여러분이 실체를 가지고 부활권 내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실체를 쓰고 천국복귀동산에 들어가서 여러분이 하나님을 대하여 아버지라 할 수 있고, 하나님은 여러분을 대하여 아들딸이라고 할 수 있는 경지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원 - 천국 복귀

이러한 경지에서 심정의 세계를 찾아가는 여러분들은 자신을 위해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천국을 가겠다는 관념, 내가 무엇 하겠다는 관념을 버립시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이 천국가겠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은 우주를 위하여 믿고, 민족을 위하여 믿고,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을 위하여 믿는다는 신앙관념을 가지셨습니다. 이는 가공된 말씀이 아닙니다. 사실이 그러했습니다.

내가 행하는 것은 나를 위하여 행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를 위해서 행한다, 세계를 위해서 행한다, 아버지를 대신하여 행한다 하는 믿음, 이 얼마나 통쾌합니까.

내가 사랑함은 내 일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을 걸어 놓고 사랑 한다, 인류를 걸어 놓고 사랑한다, 하나님을 걸어 놓고 사랑한다, 하늘땅을 걸어 놓고 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심도 인류를 걸어 놓고 모시고 하늘을 걸어 놓고 모셔야 되겠습니다. 또 모시면서 감사하는 마음, 믿으면서 실천하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마음으로 사랑하고 몸으로 섬길 줄 알고, 마음으로 모시면서 생활로써 감사할 줄 알아, 나를 넘어 믿고, 나를 넘어 사랑하고, 나를 넘어 모신다는 관념을 지니고 여러분의 신앙 행로를 걸어 나간다 할진대 거기에는 절대로 사탄이 침범하지 못합니다. 사탄의 유혹의 손길이 제아무리 강하다 할지라도 이런 신앙자들에게는 터치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늘의 소원이 무엇이뇨? 잃어버린 천국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부모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자녀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내 나라, 내 백성, 내 부모를 찾아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참다운 부모의 참다운 자녀가 되어 6천년의 모든 원한을 잊어버리고 사탄을 물리치고 승리의 조건, 사랑의 조건을 자랑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래야만 슬픈 역사를 거쳐온 하나님 앞에 참다운 아들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기 도>

아버님, 극단의 말을 해 놓고 보니 아버지 앞에 민망한 심정을 아니 느낄래야 아니 느낄 수 없사옵니다.

거리가 멀고 한계가 큰 그 세계의 움직임이 좁고 거칠고 부족한 저희들과 어떠한 인연을 맺겠사옵니까?

그 인연을 맺기 위해서는 수많은 신앙의 선조들이 희생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생명의 길을 개척하기 위해 수많은 교역자들이 피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아버지, 알고 있사옵니다.

오늘 이날을 통하여 슬프다 할 줄 아는 자기의 모습을 찾아 아버지의 영광의 은사를 흠모할 수 있고, 실전의 자리에서도 쓰러지지 않아 영원히 승리하겠다는 각오를 가진 자에게만 아버지를 대하여 아버지라 할 수 있고, 아버지께서는 그를 대하여 내 아들, 내 딸이라고 할 수 있는 그 한 날이 있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아버지! 신앙길을 가기가 이렇게 어렵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인류의 시조로부터 저끄러진 죄로 말미암아 인류가 슬픔의 길을 가야 함을 알았사옵니다. 지금까지 사탄의 생각을 품고 살아온 인류는 망령된 모습이었다는 사실도 알았사옵고, 저희의 생명을 다 바쳐서라도 사망의 고개를 넘어 이것을 해원하지 않으면 안 될 복귀의 터전이 저희 목전에 당도했음을 알았사옵니다.

이제 저희들은 하늘 아버지의 아들딸이 되어야겠고, 당신을 참아버지라 부르며 모실 수 있어야 되겠사옵니다. 인류를 대한 아버지의 사랑의 심정이 저희의 심정에 사무치어, 어떠한 역경, 어떠한 슬픔, 어떠한 불편함도 이겨낼 수 있도록, 아버지, 인도하여 주옵고 이끌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 여기에 참석한 당신의 아들딸들 가운데서 자기들이 생명을 가졌다는 사실에 감사함을 느끼지 못하는 자들이 있사옵니까? 그들이 말씀 중에 감동되고 느끼는 무엇이 있을진대 생명의 불길을 발동시켜 주시옵고, 부활의 역사를 일으켜 주시옵소서.

천적인 이념을 추구하는 이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역사적인 오늘의 환경을 개척해 나가면서 아버지의 심정과 인연맺을 수 있는 이 한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니다.

전하는 말씀이 저희 심중의 표준과 저희의 생활표준이 되게 하여 주시옵고, 이들의 마음을 이끌어 주시옵고, 이들의 생활관에 자극적인 한 표준이 되어, 언제나 불의한 것을 수습할 수 있는 산 말씀이 되게 하여 주옵시며, 심중과 그 뼈 살을 움직여 낼 수 있게끔 역사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비옵고 원하옵니다.

이 시간도 외로운 환경에서 아버지 앞에 눈물지으며 호소하는 식구들을 위로하여 주시옵고, 아버지 앞에 경배하는 수많은 인류에게도 축복의 손길을 펴주시옵길 간절히 부탁하올 때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마태복음 23:1-39

<기 도(Ⅰ)>

아버님께서 계시는 곳은 무한한 인내의 세계요, 무한히 수고하는 자리라는 것을 저희들이 알고 있사옵니다.

선조 이래 지금까지 저끄러진 모든 죄상을 대하시는 아버님의 심정과 뜻을 아는 저희들은 창조 본연의 존재를 찾기 위하여 그다지도 수고의 길과 참음의 길을 걸어오신 아버님 앞에 민망스런 심정으로 머리 숙이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기나긴 세월을 하루와 같이 저희의 선조와 더불어 참으시고, 선조와 더불어 싸워 나오시면서 인간들을 붙들기 위하여 허덕여 나오신 아버님을, 저희들이 이 시간 마음을 넓히고 몸을 숙이어 마음에 모셔들이고 몸으로 붙들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땅 위에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수고의 길을 피해 가는 사람은 많사오되, 당신의 사정을 알고 당신의 심정을 마음 몸에 지니기 위하여 수고의 길을 찾아 나서는 사람은 심히 적다는 것을 알게 되옵니다.

아버님을 위하여 충성하고, 아버님을 위하여 제물이 되어 아버님의 제단을 꾸미고, 아버님의 참으시는 심정을 땅 위에 나타내는 인간들이 심히도 적다는 것을 알게 될 때에, 아버님께서는 지극히 불쌍한 분이신 것을 알게 되옵니다. 인간을 사랑하시면서도 탄식하시는 아버님이시며, 인간을 대해 염려하며 수고하시는 아버님이심을 저희가 느끼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나의 아버님이여! 이제 그와 같은 아버지의 사정이 땅 위에 살고 있는 인류 앞에 옮겨질 수 있는 날이 어서 속히 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온 인류의 가슴 가슴에 그와 같은 아버지의 사정이 사무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고대하고 있사옵니다.

아버님, 이 한 날, 이 거룩한 날에 당신을 향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여 복을 받기를 고대하는 무리가 많사온데, 복은 하늘의 것이고 수고와 고난과 참음의 노정은 인간이 담당해야 할 것임을 알지 못하는 무리가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늘 것은 하늘로 돌리고 인간 것은 인간이 맡아 책임하는 당신의 아들 딸이 심히 적은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오늘의 저희들이 그런 무리와 마찬가지로 이 시간 아버지를 대하는 민망스러운 모습이 되지 말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저희에게 기쁨이 있다 할진대 그것을 아버지 것으로 돌리고, 행복과 감사함의 심정이 있다 할진대 그것도 아버지의 것으로 돌리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슬픔과 원한에 사무친 아버지의 서러움의 노정을 저희 것으로 맡는 아버지의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일주일 동안 험난한 세파에 시달리고, 아버지의 심정과 일치되지 못한 자리에서 싸우다가 지친 당신의 아들딸들이 있사옵니까? 지친 그 마음은 쉴 수 있는 보금자리를 찾고 있사오며, 피로한 그 몸은 아버지의 품에 안길 수 있는 은사를 고대하고 있사오니, 아버지, 그들의 마음을 찾아 주시옵고 몸을 붙들어 주시어서 그들이 가야 할 곳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이 저희가 맡은 책임을 완수할 수 있게 하는 권고의 시간이 되게 해주시옵고, 충격을 일으키는 은사의 시간으로 이끌어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여, 이날 저희의 심정을 통솔하여 주시옵고, 죄에 시달린 저희의 일체의 관념을 통솔하여 주시옵소서. 굽힌 머리 위에서 아버지의 긍휼의 손길을 거두지 마옵시고, 심정을 기울여 아버지의 염려의 마음을 찾고자 하는 저희의 마음을 긍휼히 여겨 주시어서 아버지께서 친히 저희를 대하여 주시는 이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날도 지방에 널린 외로운 식구들이 무릎을 꿇고, 싸움의 노정에서 지친 몸으로 아버지를 향하여 간곡히 호소하고 있는 줄 알고 있사오니, 일률적인 축복의 손길을 가해 주시어서 몰리는 자리에서 남아지는 무리가 되게 하여 주시옵고, 쓰러지는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 아버지 앞에 제단을 쌓아 경배드릴 수 있는 성별된 무리가 되게 보호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불쌍한 민족을 축복하여 주시옵고, 수많은 교단을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당신께서 허락하신 뜻에 모든 것을 의지하고 그 뜻을 위하여 모든 것을 바치고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는, 그리고 끝날에 큰 뜻을 위하여 살고 큰 뜻을 위하여 모이는 민족과 교단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니다.

모든 것 맡기오니 처음부터 끝까지 주관하여 주시옵고, 사탄이 일절 틈타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천천만 성도가 옹호하는 가운데 아버지의 기쁨과 영광을 이 시간 드러내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면서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니다. 아멘.

<기 도(Ⅱ)>

이 시간 저희의 몸과 마음이 어떠한 자리에 머물러 있는가 살피고 또 살펴, 저희의 마음이 아버지의 마음이 계시는 곳에, 저희의 몸도 아버지의 성체가 계시는 곳에 있기를 원하고 원하옵니다.

아버지와 더불어 살 수 있는 그 한 날이 그립사옵니다. 아버지를 그리며 아버지를 향하여 달리는 저희들, 아버지와 더불어 살 수 있는 영광의 한 날을 맞이하여 아버지 앞에 감사와 기쁨의 송영을 돌림으로써 지으신 만물을 화동시킬 수 있는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의 마음 몸은 아버지의 형상을 닮아 지은 것이오니, 온전히 아버지를 닮은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여! 당신의 슬픈 마음이 땅 위에 서려 있는 것을 인간들이 모르고 있사옵고, 하늘의 서글픈 눈물자국이 인류역사의 발자취에 스며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사옵니다. 한없는 하늘의 탄식이 저희의 마음과 몸에 감돌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는 하늘 앞에 면목을 세울 수도 없고 하늘의 신임을 받을 수도 없는 패역한 인간의 후손이 됨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아버지, 땅에는 당신의 눈물을 거두어 드릴 자가 없사옵고, 당신의 슬픔을 붙들고 위로해 드릴 자가 없사옵고, 당신이 가시는 그 길을 지킬 자가 없사옵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 한이 있다 할진대 그것은 하늘의 한이 사무친 땅이라는 것이요, 슬픔이 있다 할진대 하늘의 슬픔이 사무친 땅이 라는 것이요, 원한이 있다 할진대 하늘의 원한이 사무친 땅이라는 것이옵니다.

그러기에 이 땅에 살고 있는 인간들은 슬픔의 제물이 되지 않을래야 되지 않을 수 없는 운명에 처해 있사옵고, 한스러운 자리를 넘지 않을래야 넘지 않을 수 없는 운명에 처해 있사옵니다.

낙망 가운데에서 최후의 음성으로 하늘을 향하여 ‘아버님이여! 저희를 도와주시옵소서.’라고 부르짖을 때가 되었사옵고, ‘아버님이여, 사랑의 심정을 가지고 인류를 찾아 주시옵소서.’라고 부르짖어야 할 끝날이 당도하고 있사온데, 이러한 때에 아버지의 심정을 붙들고 서러워한 자 누구이오며, 아버지의 마음을 붙들고 통곡하는 자 그 누구이옵니까? 그런 자가 있다 할진대 그는 아버지의 참다운 아들딸이라 할 수 있고, 또 아버지의 실체적인 대상이라 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저희의 마음에 힘을 일으켜 주신 아버님, 애절하고 통분한 아버지의 심정을 느낄 수 있는 마음의 동기가 그립사옵고, 그 심정의 원천에 접하고 싶사오니, 접할 수 있는 은사를 가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그 심정에 화한다 할진대 그 자리에서는 자기의 부족함을 폭로시키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사옵고, 인간의 죄상을 대신하여 회개하지 않을래야 회개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님, 불초하고 부족한 저희들, 반석 되지 못한 저희들을 세우시고 염려하시는 아버지 앞에 민망스러운 마음을 갖고 아버지의 원한의 심정과 슬픈 심정을 위로해 드림으로써 영광 가운데 현현하실 수 있는 터전을 갖추는 성도들이 되지 않으면 안 되겠사오니, 아버지의 힘과 능으로써 부족한 저희들을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얽히고 설킨 죄악의 형상을 가지고 있는 자가 있다 할진대, 사랑의 손길을 펴시어서 다시 주관하여 주시옵고 다른 모습으로 빚어 주시옵소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축복하시던 능권이 아버지께 있는 것을 아오니, 저희를 아버님 품에 품어 주시고 아버지의 장중에 쥐시옵소서. 아버지 것만을 남기시옵고 아버지 것 이외의 일체는 제거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아버지의 영광의 존전에 제물로 드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아버지의 것으로 취해질 수 있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게 이끌어 주시옵기를,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저희 자체들이 생명을 유지해 나가는 신앙노정에서 억천만 사탄들이 세력에 휩쓸려 들어갈 때가 많았사오나, 반면에 아버님을 염려하는 심정이 있사오니, 오늘 여기 모인 당신의 아들딸들을 붙들어 주시옵소서.

이들은 땅에서 승리할 최후의 한 날, 최후의 한 시간까지 아버지를 위해 나가겠다는 각오를 하고 나선 몸들이오니, 이들의 일편단심이 변치 말고 승리의 동산으로 돌진할 수 있는 하늘의 성도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날 억만 사탄들이 저희의 주위를 에워싸고 있다 할지라도 천주를 대하여 지성을 다하려는 저희의 심정 앞에는 그 자취를 감추게 하여 주시옵소서. 권능과 능의 역사를 일으키시어 저희의 마음과 몸이 부활의 행사에 참여할 수 있는 자리에 서게 하여 주시옵기를, 나의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날 이 자리가 저희들만 참석하는 자리가 되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불쌍한 억천만 인류를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방향을 잃고 갈 길을 알지 못하는 수많은 교단을 축복하여 주시옵고, 생명의 위기를 당하여 허덕이고 있는 수많은 당신의 아들딸들을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끝날, 불쌍한 인류 앞에 생명의 실체를 예고시키시어 그들을 아버님 편으로 연결시켜 주시옵소서.

이제 아버지의 존엄하신 영광을 드러내어 자랑할 수 있는 심정을 갖춘 아들딸들을 아버지께서 축복하실 수 있는 한 날이 어서 속히 임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시련과 환난에 부딪친다 할지라도 저희는 아버지를 위하여 제물 되기로 이미 각오하였사오니, 그 마음을 다시 사탄에게 빼앗기는 아들딸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의 몸 마음 이미 아버지께 맡겼사옵고 드렸사오니, 죽든지 살든지 아버지 것으로서 취해질 수 있으며 바쳐질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아버지 앞에 경배드릴 수 있는 아들딸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모든 것 아버님께 맡기오니 저희 것이 움직이는 이 시간이 되지 말게 해주시옵고, 당신 것으로 남아질 수 있는 이 한 시간이 되게 주관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니다.

외로운 식구 식구를 친히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기 도(Ⅲ)>

이 시간 제가 전할 말은 아무것도 없사오니 아버지께서 나타내고 싶으신 말씀을 나타내 주시옵소서. 아버지 뜻 안에 있는 것 이외에는 나타내기를 원치 않사오니 전체를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저희의 마음과 몸이 이 한 시간만이라도 어떤 관념에 사로잡히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 동하면 동할 수 있고, 정하면 정할 수 있고, 화하면 화할 수 있는, 저희로서는 어쩔 수 없는 그러한 마음의 터를 아버지, 이 한 시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아버지께서는 동기가 되시옵고 저희는 결과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움직임에 따라 저희가 움직일 수 있도록 저희의 마음 몸을 이 시간 다시 빚어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날을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외로운 식구들이 지방에 널리어 아버지 앞에 기도하는 시간이오니 같은 은사의 손길로 보호하여 주시옵길,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 봉독한 성경 말씀은 하다 하다 할 수 없는 입장에 선 예수 그리스도의 처참한 심정에서 우러나온 최후의 저주의 말씀인 것을 저희들이 알고 있사옵니다. 끝날 저희에게도 이와 같은 말씀이 귀에 들려오거든 마음의 문을 열고, 몸을 굽히고, 머리를 숙여 받을 수 있게 하옵소서. 듣기를 고대하여 귀를 열고, 보기 위하여 눈을 밝히는 아들딸이 많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여기 모인 무리를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사랑의 품에 품으시어서 새로운 말씀으로 권고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의 품에 품길 수 있는 이 한 시간 되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전하는 자의 마음이나 받는 자의 마음에 간격이 없게 하여 주시옵소서. 전하는 자의 마음이 받는 자의 마음을 움직이고 받는 자의 마음이 전하는 자의 마음에 감촉을 일으켜, 아버지께서 친히 운행하실 수 있고 아버지와 주고받는 이 자리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성별된 제물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니다.

삼위신이 일체를 맡아 주관하여 주시옵고 어두운 세력이 틈타지 말게 인도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옵니다.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니다. 아멘.

<말 씀>

봉독한 말씀은 예수님께서 오래지 않아 작정한 길을 가야 할 것을 생각하면서, 이스라엘을 대하여 걸었던 소망과 기대가 간곡하고 컸던 만큼 그들 앞에 뜻을 세우지 못하고 가야 하는 자신의 슬픈 심정에서 우러난 최후의 저주의 말씀이었습니다.

오늘은 이 말씀을 중심삼고 ‘한 많은 아버지를 모실 이’ 이러한 제목을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한의 인간, 한의 역사, 한의 하나님

오늘 우리들은 행복된 생활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자유의 천지를 마음으로 동경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심중으로 바라고 동경하며 기대하는 것과 오늘날 우리들이 살고 있는 실제면과는 상충된 입장에 있다는 것을 일상생활을 통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한날을 사는 동안에도 상충된 것들을 수습하고 지배할 수 있는 그 무엇을 심중에 가져야 할 텐데 갖지 못한 연고로 마음이 그리는 곳을 향하여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또 심정으로 바라는 것이 행동으로 옮겨지기를 원해도 마음대로 옮겨지지 않는 것을 우리들은 생활면에서 느끼고 있습니다. 또 느껴 왔습니다.

그런 가운데 자신을 지배할 수 있는 이념도 갖지 못하고 자기 환경을 정리할 수 있는 어떤 고민도 없는 우리 자신인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또 생활 속에서 큰 소망과 희망을 품고 노래하며 살고 있지만 반면에 심중에는 한스러움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항시 느끼고 있습니다. 오늘도 어제도 이런 한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이와 같은 한스러운 무리들이 합하고 합하여 하나의 국가를 형성하고 세계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한스러운 자기 자신을 연속시켜 사회로 국가로 세계로 한의 역사를 뻗쳐 나가고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역사노정을 통하여 잘 알고 있습니다.

비단 우리 인간만이 한스러운 역사 속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한스러운 노정을 걷고 있는 연고로 인간에게 속한 모든 것도 이런 한스러운 환경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인간을 지배하는 창조주, 천륜을 경륜하여 하나의 이념세계를 다시 찾고자 하는 절대자가 계시다 할진대, 그도 역시 한스러운 역사를 거쳐오는 인간들 때문에 이 땅을 대하게 될 때 기쁨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자신에게 한스러운 일이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한스러운 사실이 많으면 많을수록, 또 이 세계 전반에 걸쳐 한스러운 사건이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는 이 한스러운 일이 인류 끼리끼리에서 시작되어 인간 개개인에서 종결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을 넘어 역사를 섭리해 나오는 천적인 영역에까지 그 영향을 끼치게 된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또 사실이 그런 것입니다.

타락 이후 6천년 동안 인간을 붙들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부정하지 못할진대, 6천년 동안의 한스러운 생활을 끝내기 위하여 섭리하시는 그 하늘의 한스러운 일과 오늘 여러분 일대에서 자기 심중에 스며드는 한스러운 일과 견주게 되면 대조도 비교도 할 수 없는 차이를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만일 참다운 인간이 있어 인간 세상의 모든 한스러운 요소들을 제거시키고, 하늘이 한스러워하던 것을 해원해 드리고, 땅 위에 평화의 나라를 건설할 수 있는 어떤 주의와 사상을 갖고 나온다고 하면, 그는 자기 개인의 한스러운 역경에서부터 인류의 한스러운 고비 고비와 그 애절한 심정을 전부 거쳐 나가야 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천상의 한스러운 전체의 심정, 하늘의 애절한 심정을 헤쳐, 이것을 해결지을 수 있는 그 무엇을 가지고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다 할진대, 인간 세상에는 한탄스러운 역사를 밀어내는 한의 침범을 받지 않는 평화의 세계, 행복의 세계, 자유의 동산은 건설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슴을 헤치고 스스로 자문자답하여 보십시오. 내가 누구이며 누구를 위하여 어떠한 목적을 놓고 헤매고 있는가 반문하여 볼 때에 그 물음에 어떠한 답변이 나옵니까? 어떤 확실한 신념과 가치를 가진 답을 얻지 못할 때, 그 물음이 심각하면 심각할수록 거기에 부딪쳐오는 여러분의 한탄의 심정도 정비례 될 것입니다.

한을 풀기 위한 하늘의 섭리

오늘날 우리가 역사의 원한과 천륜의 곡절을 종합하여 청산지어야 할 입장에 있다면, 여러분은 어떠한 각오로, 어떠한 모양으로, 어떠한 태도로 그 물음에 답변할 수 있겠는가? 만일에 하늘이 인류역사를 붙들고 원한에 사무친 심정을 풀지 못한 채 인간을 대해 나온다 할진대-또 사실이 그렇습니다-그런 하늘의 원한의 심정을 풀어 드릴 자가 누구일 것인가? 이 한의 곡절이 생긴 원인이 하늘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에게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인간들이 이러한 원한의 곡절을 풀어야 할 입장에 처한 자신들임을 깨닫지 못하고 그 곡절을 해명하지 못한다 할진대, 원한의 역사는 돌고 돌아 시대를 지나고 세기를 지나도 하늘의 섭리와는 유리되어지는 역사로 계속 되어 나갈 것입니다.

하늘이 계시다 할진대 이러한 역사를 가로막고 하늘의 한과 인류의 한을 청산지어 줄 수 있는 하나의 사람을 찾아 헤매실 것입니다. 하늘은 그 하나의 사람을 세우시기 위하여 지금까지 싸워 나오신 것입니다. 그 한 사람으로 하여금 하늘을 모시게 하기 위하여 오늘날까지 역사를 지배해 오신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제 우리가 생각을 돌이켜 이런 면을 다시 회상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하늘은 그 한 사람을 보내기 위하여 약속하셨고, 그 한 사람을 세우기 위하여 무한한 싸움을 해 나오셨고, 그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무한한 고통의 역사를 거듭해 나오셨습니다.

그러나 역사노정에 그 한 사람을 모시고 산 사람이 없었고, 그 한 사람을 붙든 사람이 없었던 연고로 하늘은 지금도 원한의 심정을 갖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런 하늘의 원한의 노정을 따라 싸워 나가지 않으면 안 될 운명에 놓여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들은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한이 쌓인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인간 앞에 자신의 한스러움을 터쳐 놓을 수 없고 인간 앞에 자신의 한스러움을 통고할 수 없는 원한에 사무친 분이십니다. 이 사무친 하늘의 원한은 하늘로부터 말미암은 것이 아닙니다. 인류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늘은 한을 품고 이 한을 해원할 수 있는 날을 고대하시며 인류 역사를 이끌어 나오셨고, 시대를 세워 섭리해 나오셨으며, 미래를 개척하시기 위하여 지금도 원한의 심정을 품고 애쓰고 계십니다. 그러한 하늘이 계심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한을 풀 수 있는 하나의 모습을 세우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그 하나의 존재를 살리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을 알았으니, 역사적인 종말에 처해 있는 오늘날 여러분은 나로 하여금, 우리로 하여금, 이 민족으로 하여금 하늘의 한을 해원할 수 있는 그 한 날을 세울 수 있도록 은사를 허락해 주기를 바라는 간곡한 마음이라도 가져야 되겠습니다. 또한 한이 많은 하나님이시니, 우리 인간들은 한에 사무쳐 계신 하나님을 모시고 그 한을 풀어 드려야 할 역사적인 빚을 진 자들임을 망각하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늘은 지금도 인류를 살리기 위하여, 인류의 한을 풀어 주기 위하여, 인류의 모든 슬픔의 곡절을 제거시켜 주기 위하여 천신만고의 수고를 하고 계신다는 것을 여러분은 느껴야 되겠습니다. 그것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는 가던 발걸음을 돌이켜 살고 있는 생활을 정리하고, 지나온 생애를 청산하고 한스러운 심정을 붙들고 살 것입니다. 이런 충격을 마음으로 느껴야 할 때가 된 것입니다. 만일 이것을 느끼지 못한다 할진대 한에 사무친 심판의 한 날을 맞이할 것을 각오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 시간도 한을 품으신 하늘을 모시고, 한스러운 하늘의 심정을 품고 한 많은 이 세상을 청산해야 할 천적인 사명을 짊어진 아들딸임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타락한 인간의 후손인 연고로 한 많은 아버지의 심정을 해원해 드리기 위하여 생애를 걸어 놓고 싸우지 않으면 안 될 책임과 의무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해야 할 이유

그러기에 하늘은 인간이 타락한 이후 4천년의 역사를 경고하여 선민을 택하여 세워 놓고 그들에게 ‘너희의 지도자요, 너희의 주인이요, 너희의 평화의 왕자요, 자유의 왕자요, 행복의 왕자가 될 사람을 보내 주마.’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늘은 행복의 주인공이요 평화의 주인공이요 자유의 주인공이며, 하늘의 한을 풀고 하늘의 복을 소개할 수 있는 한 존재로, 오랜 역사를 거쳐오면서 약속하였던 그 한 분을 보내셨습니다.

그리하여 오랜 역사를 거쳐오면서 약속하였던 그 한 분이 나타났으나 택함받은 이스라엘 선민들이 그 한 분을 모시지 못하고, 환영하여 그 뜻대로 살지 못하였기 때문에, 즉 그분의 뜻대로 단결하여 하늘의 뜻을 세우고 하나님의 한을 풀기 위하여 싸우지 못하였기 때문에 한스러운 역사는 지금까지 연장을 거듭해 오고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평화의 왕자요 행복의 왕자요 자유의 왕자로 오셨던 그분은 누구인가 하면, 타락 이후 4천년 역사 과정의 한스러운 심정을 도맡아 갖고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4천년 인류역사를 책임져야 할 예수, 4천년 하늘의 섭리를 책임져야 할 예수님은 역사적인 한과 천적인 한을 품고 오셨던 분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한을 풀기 위해 어떠한 과정을 거쳐야 했었던가? 슬픔의 과정을 거치고 고통의 과정을 거쳐야 했습니다. 그리고 난 후에야 한이 풀리고 기쁨의 한 때가 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땅에 오셨던 예수님은 4천년 역사노정에서 누구보다도 슬픔의 한을 체험하신 분이요, 고통의 한을 체험하신 분이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 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습니다. 그를 만왕의 왕이요, 하늘의 독생자요, 자기들의 구주로 믿고 있으며, 평화의 왕자요, 자신들에게 행복을 소개해 주는 행복의 왕자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좋은 면에 선 예수라고 알기 전에 먼저 알아야 될 것은 그가 슬픔의 왕자요, 고통의 왕자요, 전인류의 한을 품은 한의 왕자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될 것입니다.

그와 같이 한스러운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 그 심정은 누구를 위함이었던가? 당시의 인류를 위함이었고, 인류를 붙들고 계신 하나님을 위함이었습니다. 한스러운 심정, 그 심정은 하늘로부터 가지고 온 심정이요, 인류에게 전하기 위해 갖고 오신 심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한스러운 심정을 이어받아 한스러운 입장에서 하늘과 더불어 한을 풀기 위해 악을 대하여 싸워 이기기 위해 나선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그것을 아신 예수의 슬픔도 컸거니와 그를 보내신 하나님의 한은 더 컸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렇게 되어 땅의 역사도 원한에 사무쳐 있고, 이 시대도 원한에 사무쳐 있으며, 우리들 자신도 원한에 사무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무친 원한의 역사, 사무친 원한의 시대, 사무친 자신들의 한을 제거시키고 싶지만, 우리들 자신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입장에 있는 것을 우리는 느끼고 있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사무친 한의 전체를 책임질 수 있는 한 주인공과 상봉해야 할 운명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죽어가신 예수, 부활하여 승천하셨던 예수께서 이 한스러운 심정의 곡절을 청산하기 위하여 한탄스러운 이 땅에 오시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재림입니다.

하나님의 한(恨)과 끝날의 성도가 지녀야 할 신앙자세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6천년 동안 인류를 사랑해 내려오신다고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슬픔이 있다 할진대 사랑의 심정을 통하여 스며드는 슬픔 이상의 슬픔이 없고, 고통이 있다 할진대 사랑의 심정을 통하여 스며드는 고통 이상의 고통이 없을 것입니다. 또 기쁨이 있다 할진대 사랑의 심정을 통하여 스며드는 기쁨 이상의 기쁨이 없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하늘은 사랑이라 하였는데 사랑이신 하늘이 기뻐하셨는가? 그렇지 못하셨습니다. 타락한 인류를 대하고 계시는 하늘, 인간을 사랑하시는 그 하늘은 오늘날까지 기쁨의 한 날을 갖지 못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으로 알았는데, 그 사랑의 하나님께는 기쁨과 행복과 평화만이 스며있는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인류는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의 심정을 가졌기에 인간을 구하려는 마음이 크면 클수록 그 심정에 스며든 슬픔이 크다는 것을 느끼는 자가 이 땅 위에는 없습니다. 그 사랑의 심정에 사무쳐 있는 천적인 고통을 아는 자가 없다는 것이에요.

인류는 하나님이 사랑이라는 것, 사랑의 주체가 되신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인류를 대신하여 당하고 계시는 피흘리는 곡절의 심정은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끝날에 처한 우리 성도들이 알아야 할 것이 무엇이뇨? 사랑의 하나님을 안 이상 그 하나님의 심정에 스며드는 천적인 슬픔을 알아야 되겠고, 그 하나님의 심정에 스며드는 천적인 고통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래야 할 때가 온 것입니다.

만일에 사랑을 통한 천적인 기쁨이 이 땅 위에 허락된다 하더라도 그 기쁨은 오늘날 우리가 믿고 있듯이 기쁨을 바라고 있는 성도들에게 줄 수 없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그 기쁨은 역사를 통하여 부여해야 하는 하나의 행복이요, 역사 앞에 약속되어진 하나의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이 행복과 희망은 나를 넘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나를 이끌고 가는 역사와 더불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 연고로 하나님의 사랑이라 할진대 오늘날 그 사랑의 하나님을 붙들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자는 하나님의 사랑의 심정에 스며드는 슬픔을 붙든 자요, 사랑의 심정에 스며드는 고통을 붙든 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자라야만이 하늘의 사랑을 통하여 소개되는 행복을 유업으로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한은 무엇일 것인가? 하나님을 믿어 주는 사람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아 주는 백성이 없는 것이 아니에요. 사랑의 하나님에게 한스러움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심정에 스며드는 슬픔을 알아 주는 사람이 없고, 사랑의 심정에 스며드는 고통을 알아 주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슬픔이요 한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인류의 한을 수습하고 천적인 한을 해원하여야 할 끝날이 온다 할진대 그때에 우리들은 어떠한 주인공이 되어야 하겠느뇨? 하늘을 대신하여 슬픔의 심정을 붙들고, 고통의 심정을 붙들고 ‘인류를 사랑해 주시옵소서.’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런 마음을 갖는 데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나를 붙들고 ‘나를 사랑해 주시옵소서.’ 할 것이 아니라 인류를 붙들고 ‘인류를 사랑해 주시옵소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무친 심정을 통하여 자기도 모르게 행동으로 움직여지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인간 세상에 천적인 슬픔을 증거하는 자요, 천적인 고통을 체휼한 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슬픔과 하나님의 슬픔

그러기에 하늘의 한을 풀기 위하여 오셨던 예수님은 행복을 가지고 나타나지 못하셨고, 자유를 갖고 나타나지 못하셨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최고로 선한 자리에 있으면서도 죄인 중의 죄인과 같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이 이상 슬픈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온 천상이 환희할 수 있는 하늘의 왕자인데도 불구하고 지상에서는 밟힘의 왕자요, 핍박받는 왕자요, 사라져가는 왕자와 같이 사시던 예수의 슬픔 이상의 슬픔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위신과 자기의 처신, 그리고 사명받은 것을 다 이루지 못하고 역경에 부딪쳐 말없이 사라져 갔던 예수님 이상 슬픈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4천년 동안 하늘이 수고하여 선민으로 택해 세운 이스라엘 민족 앞에 배척받았습니다. 섭리의 뜻을 받들게 하기 위하여 오랫동안 사랑해 나오던 유대교단 앞에 핍박받았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사랑하는 종족에게 몰림을 받았고, 사랑하는 제자 앞에 몰림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때 만일 예수가 인간적인 한을 가졌다면 이들에게 저주밖에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민족을 위하여 왔으나 교단이 배반하였고, 종족과 친척 혹은 택한 자들을 위하여 왔으나 그들에게서 마저 배반당한 입장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예수가 원한을 품고 그들을 대해 저주를 하려면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저주를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는 도리어 역사노정을 거쳐오면서 당했던 그들의 슬픔의 한을 붙들고 자신을 잊고 염려해야 했던 것입니다. 이런 예수의 사정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가 천국 건설의 왕자인 줄 알았더니 아니에요. 그것은 나중의 일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모든 슬픔을 제거하기 위하여 수많은 선지선열들이 선을 바라고 뜻을 바라 나온 역사노정의 애절한 심정, 사무친 원한의 심정을 체휼하고 나선, 역사를 대표한 슬픔의 왕자였습니다. 흑암의 세계에서, 사탄 주관 하에서 신음하고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고통 가운데 있는 세계 인류를 대신하여 그들의 모든 짐을 짊어져야 했습니다. 내적으로는 슬픔의 심정을 책임지고 외적으로는 고통의 짐을 책임져 이것을 사탄 앞에 해결지어야 할, 그리하여 하늘 앞에 승리의 발판을 세워야 할 슬픔과 고통의 왕자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을 위하여 그토록 슬픔과 고통 속에서 사는 것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심정은 예수의 슬픔 이상, 예수의 고통 이상, 예수가 느끼는 한스러움 이상 한에 사무쳐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에 아담 해와를 지어 놓으시고 고이 고이 성장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런데 허락된 자유의 동산에서, 허락된 이념의 세계에서 하늘과 더불어 평화스럽고 행복스럽게 살아야 할 아담 해와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그런 것을 잃어버리고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그 한 사실은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한스러운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영원히 동고동락해야 할 아담 해와가 하늘의 품을 떠나 사탄에게 유린당하고 사탄에게 옮겨가는 것을 바라보셔야 했던 하늘의 한스러운 심정, 그 한스러운 심정을 잊지 못하시는 하늘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4천년의 한스러운 인류역사를 뒤바꾸기 위하여, 그 한탄스러운 역사를 청산하고 행복스런 복귀의 세계를 건설하기 위하여 예수님이 오셨으나 이렇게 오신 예수님을 모셔야 할 민족은 어디 갔던고? 받들어야 할 세례 요한은 어디 갔던고? 섭리를 대하여야 할 제자들은 어디 갔던고? 다 가버렸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택한 것은 예수님께 한스러운 고난의 길을 거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만일 예수를 죽이기 위하여 보냈다면 이스라엘 민족을 4천년을 통해 선민으로 택해 세울 리가 만무하다는 거예요. 이 예수님을 모셔야 할 민족이요, 받들어야 할 교단이요, 섬겨야 할 세례 요한이었고, 예수님 앞에 충신이 되어야 할 사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 예수님을 버리고 가 버렸습니다. 다 버리고 가는 이들을 보고 예수님은 무엇을 느꼈을 것인고?

제1이스라엘의 불신으로 인한 예수님의 슬픔과 제2이스라엘의 사명

땅을 위하여 왔던 걸음이었지만 땅을 버리고 가야 하고, 민족을 위하여 왔던 걸음이었지만 민족을 버리고 가야 하고, 교단을 위하여 왔던 걸음이었지만 교단을 버리고 가야 했던 예수님의 운명이었습니다. 이것이 슬픈 사실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감람산을 향하여 발걸음을 옮긴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발걸음을 옮기며 하늘 대하여 호소하던 예수님은 무슨 기도를 하셨을 것인고? 자신이 억울한 입장에 있는 것을 슬퍼하신 것보다도 자기를 보내신 하늘이 슬퍼하실까봐 염려하는 마음이 더 컸던 것입니다.

민족과 더불어 잘 살고, 민족을 통솔하여 만방을 이상국가로 만들고자 예수를 보내신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으나, 그 길이 막혀 하늘 앞에 애절한 기도를 드려야 할 입장에 있었던 예수님은 자신의 고통을 피하기 위해 기도하신 것이 아니라 자기를 보내신 하나님의 더 큰 슬픔을 위로하기 위해 기도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도상에 나가시면서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라고 하셨던 마음, 자신을 이러한 자리로 몰아내어야 하는 아버지의 슬픔과 원한이 더 큰 것을 아셨기에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셨던 그 마음이 있었기에 역사적으로 하늘이 슬퍼하던 심정과 예수의 사명적인 슬픔이 예수의 일신을 통하여 하나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순간이 십자가상에서의 죽음의 순간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4천년 전 아담이 타락한 이후부터 한이 맺힌 아버지의 가슴에 예수의 죽음은 더욱 한스러움을 가중시키는 사건이었으나, 예수는 자신의 죽음을 한탄하지 않고 하나님의 고통을 한탄하여 나타났기 때문에, 땅을 대하여 심판이라는 명사를 걸어 놓고 한을 푸는 노정을 지금까지 개척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오늘날까지 2천년 역사를 경과하여 나왔습니다.

예수의 죽음으로 제1이스라엘은 다 깨져 나갔으나 부활하신 예수를 중심하여 다시 수습하는 노정이 제2이스라엘 선민의 노정입니다. 그런고로 제2이스라엘 선민인 오늘날 세계에 널려져 있는 기독교인들을 통합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과거 제1이스라엘은 선민권을 자랑하였으나 오늘날 세계에 널려 있는 제2이스라엘인 크리스천들은 제2이스라엘 사상을 고취하여 가나안 복지인 천국을 건설하기 위하여 총궐기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세계에 널려져 있는 제2이스라엘을 동원하여 천민권을 세워 오셨고, 심판의 역사를 거쳐 나갈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이스라엘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한스러운 역사를 품고 나오신 하늘의 슬픈 심정은 어느 때에 풀릴 것인고? 과거에 선민권을 자랑하던 제1이스라엘은 사탄 앞에 몰리고 유린당하였으나 천민권을 자랑할 수 있는 제2이스라엘은 사탄세계를 몰아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오늘날 우리 신자들로 말미암아 한스러운 역사는 풀릴 수 있고, 한스러운 역사를 섭리해 나오신 하나님 앞에, 예수의 죽음 이후 2천년 동안 수많은 곡절과 고통을 거쳐온 예수와 성신 앞에 해원의 한 점을 세울 수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이제 역사의 종말에서 한탄스러운 역사를 박차고 한스러운 인류와 세상을 넘어서서 한스러운 아버지의 가슴을 헤치고 그 심중의 슬픔과 고통을 체휼해야 합니다. 역사적인 모든 비애의 곡절과 사무친 원한을 품고 그 한의 원인이 된 억만 사탄을 대하여 최후의 일격을 가하겠다는 각오를 갖는 하늘의 아들딸이 되지 않으면 안 될 때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역사적인 원한의 장본인인 사탄과의 관계를 청산하려면

오늘날 이러한 세상을 만든 장본인이 사탄이요, 이런 세상을 이끌어 나온 것도 사탄이요, 이런 현세의 실상을 만들어 놓은 것도 사탄이기 때문에, 오늘날의 성도들은 천적인 슬픔과 천적인 고통을 가슴에 품고, 또는 몸에 걸머메고 천민의 권한을 가지고 움직여서, 역사적인 원한의 장본인인 사탄과의 관계를 청산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럴 수 있는 하나의 움직임, 하나의 민족, 하나의 주권이 이 땅 위에 나타나기를 하늘은 바라고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 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우리 통일신도들은 복귀원리를 배워 알듯이 우리들 자체가 하나님의 심정에 사무치는 체휼적인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이름만의 아버지가 아니라 실감적이고 사실적인 아버지로 체휼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에덴동산의 아담 해와가 타락하던 모습을 바라보고 한스러워하시던 하나님 대신 무한히 한스러운 심정을 가지고 울 수 있는 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또 그 다음에는 하나님께서,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을 바라보실 때 무한히 한스러워하시던 심정을 체휼해야 되겠습니다. 그 이후 1600년을 지나 노아, 그로부터 400년을 지나 아브라함, 그로부터 400년을 지나 모세, 또 그로부터 1600년을 지나 예수 때까지 시대 시대마다 천적인 사명을 지닌 책임자로서 보내졌던 수많은 선조들이 슬픔과 원한에 사무쳐 싸워 나온 역사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슬픈 심정을 실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4천년을 지나고 6천년의 역사를 거치면서 섭리해 나오신 하나님의 대표적 섭리의 담당자들이 슬퍼하였던 그 마음을 체휼해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땅 위에 사는 사람들 모두 그들을 대신하여 슬퍼해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심적인 각오를 갖고 고통과 슬픔을 초래했던 원한을 체휼하여 역사적인 분함과, 하나님의 심정적인 분함을 풀어드려야 되겠다는 북받쳐 오르는 심정을 갖는 자가 되지 않는다 할진대, 예수가 찾고 하늘이 찾으시는 끝날의 소망의 한 자체로 세워질 수 없고 신부의 자리에 나갈래야 나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끝날의 성도들 가운데 참다운 신앙생활을 하는 자가 있다 할진대, 그는 자신도 알 수 없는 무한히 한탄스러운 심정에 스며드는 고비고비에 부딪치게 되는데, 그런 고비를 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한, 시대적인 한, 미래적인 한, 그 한스러운 곡절의 원인을 청산하여야 할 때가 끝날입니다. 그러기에 이 끝날을 찾아가고 있는 우리는 한스러운 역사와 더불어 울고, 시대와 더불어 울고, 미래와 더불어 눈물지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자신의 행복을 잊어버리고 인류의 슬픔과 고통을 책임지고 아니 갈래야 아니 갈 수 없는 입장에 있게 될 때, 하늘의 기쁨은 그런 사람들로 말미암아 소개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우려 하신 복음의 내용과 세계를 구할 수 있는 자

우리는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수많은 말씀도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그 말씀을 통하여 사랑의 심정에 사무친 신앙생활을 어느 만큼 해 왔습니까. 하늘의 심정을 품고 한 많은 역사를 바라보며 한 많은 뜻을 염려하고 한 많은 하나님의 심정을 헤아려 보았습니까? 사랑의 심정을 내세워 인류를 오라 하시는 하늘 아버지의 마음속에는 우리에게 기쁨을 소개하고 반기려 하시는 기쁨의 마음보다도 우리를 찾아 주시려는 슬픔과 고통이 더 많으시다는 것을 여러분은 체휼하여 보았습니까? 이런 마음을 체휼해야 되겠습니다.

‘아버지여! 하늘을 보니 말할 수 없이 서럽습니다. 아버지를 바라보고 뜻을 생각할 때, 한없이 슬퍼해야 할 인류를 바라볼 때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럽습니다’ 하는 마음, 이것이 예수가 지녔던 하늘을 대한 충절의 마음이었습니다. 하나님에게는 슬픔과 고통이 없어야 하기 때문에, ‘기쁨이 있다 할진대 아버지의 것으로 하시고 슬픔과 고통은 내게 맡기시옵소서.’ 하던 예수, 기쁜 것은 아버지 것으로 돌리려는 것이 예수가 세우려 하던 복음의 내용이라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들은 하늘의 복을 찾기 위하여 지금까지 허덕여 나왔습니다. 그러면 하늘의 복을 찾게 하고 하늘의 복을 소개할 수 있는 길을 누가 닦을 것이고, 이러한 터는 누가 닦을 것인고? 이 길과 터를 닦을 수 있는 책임자는 누구일 것인고? 이 길을 닦는 데는 기쁨으로 닦아지는 법이 없습니다.

기독교 역사는 슬픔의 역사요 고통의 역사입니다. 기독교라는 종교는 슬픔의 종교요 고통의 종교인 것입니다. 비단 기독교뿐만이 아니라 도(道)라는 명사를 가지고 나가는 어떠한 종교도 이러한 형태로 움직여 나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역사적인 슬픔과 인류의 슬픔을 붙안고 뒤넘이치는 한 순간을 체휼했습니까? 역사적인 고통과 더불어 인류의 고통을 붙안고 뒤넘이치는 한 순간을 체휼했습니까? 체휼하지 못했다 할진대는 죽어서라도 해야 됩니다, 죽어서라도. 그곳이 지옥입니다. 슬픔의 곳, 그곳이 지옥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지상의 성도들은 지상에서 지옥의 슬픔을 박차고 넘어서야 되고, 지상에서 지옥의 고통을 밟고 넘어서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죽기 전에 천국의 기쁨을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천적인 원리입니다.

민족을 구할 자는 어떤 자이뇨? 민족의 슬픔을 뼈저리게 느끼는 자, 민족의 고통을 뼈저리게 느끼는 자라야 합니다. 세계를 구할 자는 누구뇨? 오늘날 선진국은 미국이 아닙니다. 여러분 그들 앞에 기대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세계의 심부름꾼은 될 수 있으되 지배는 못합니다. 만일에 그들이 세계의 슬픔을 아는 민족이라면 모릅니다. 세계의 고통을 아는 민족이라면 몰라요. 세계의 슬픔과 고통을 알지 못한다 할진대 그들은 세계를 지배할 수 없습니다.

일개 국가의 충신이라 할진대, 그는 그 국가의 모든 슬픔과 고통을 대신 짊어지고 살고자 하는 개척자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이념을 세우고 이 세계를 수습할 수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뇨? 세계의 슬픔을 붙안고 우는 자들이요, 세계의 고통을 붙안고 몸부림치는 자들입니다. 이들로부터 세계의 기쁨은 소개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철칙임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 한민족은 불쌍한 민족입니다. 오랜 역사노정을 거쳐왔지만 다른 민족 앞에 장담하고 나설 수 있는 어떠한 내용도 민족성도 갖지 못한 민족입니다. 가진 것도 없고 자랑할 것도 없어요. 그러나 이제 이 민족이 21세기의 신문화시대에 하늘이 소망하시는 심정을 품고 인류의 슬픔을 붙안고 몸부림치는 민족이 되고, 인류의 고통을 붙안고 몸부림치는 민족이 된다면,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슬픔과 하나님의 고통을 붙들고 몸부림치는 민족이 된다면, 세계를 지도하고 하늘의 사랑을 받는 민족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왕 중의 왕이요 메시아로 결정될 수 있었던 이유

예수는 어떤 자리에서 왕 중의 왕으로 결정되었던고? 어떤 호화찬란한 왕궁의 보좌에 앉아서, 행복한 입장에서 만민 앞에 자랑하며 노래 부르는 자리에서 만왕의 왕으로 결정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는 십자가 도상에서 역사적인 서러움과 인류의 서러움, 역사적인 고통과 인류의 고통을 붙들고 만민 앞에 하늘의 기쁨의 도화선이 되고자 하는 심정에 미친 자였습니다. 그러한 심정에 미친 자였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는 만민을 구할 수 있는 구주가 되었고, 슬픈 천상의 역사노정에 뚜렷이 드러나는 주인공이 되었던 것입니다. 또 하늘이 걸어온 고통의 역사에 자랑할 수 있는 주인공이 되었고, 슬픈 역사노정 위에, 고통의 역사노정 위에 미래의 신앙역사에 나설 수 있는 왕자가 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기에 슬픈 역사노정을 거쳐간 수많은 영인들도 예수를 구주로 모시지 않으면 안 될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는 왔다 갔지만 오늘 이 땅의 인간들이 그를 구주로 모시는 것도 그러한 까닭에서이며 미래에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님의 소망을 성취하는 한 개체로 나타나서 신부가 되려 하는 자는 자기를 중심삼은 신앙에 만족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늘을 염려하고 하늘의 역사적인 근심을 품고 하늘의 역사적인 고통을 품고 예수님을 대신하여, 자기에게 기쁨이 있다면 그 기쁨은 하늘 것이요, 슬픔과 고통이 있다면 그것은 내 것이라 할 수 있는 심정을 소유한 자라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라야만이 천상을 지배할 수 있고 지옥까지도 지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옥까지도 지배할 수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우리들이 가져왔던 신앙 관념, 믿고 천국 가겠다는 신앙 관념을 끊어 버리십시오. 내가 믿고 천국 가겠다는 신앙 관념을 끊어 버리세요. 예수는 자신이 왕자라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천국의 왕자라고 생각했으면 죽긴 왜 죽어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세상의 모든 슬픔과 고통을 책임진 입장에서 ‘아버지여! 뜻대로 하옵소서.’라는 간구(懇求)의 말씀을 남겼던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인간들은 어떠한 마음을 가졌습니까? 자기들의 슬픔에 울고 자기들의 고통에 허덕이는 민족에게는 절망만이 있을 것이로되, 자신을 넘어 민족을 붙들고 세계를 붙들고 슬퍼하고 고통스러워하는 민족이 있다 할진대, 그 민족에게는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길로 재촉할 수 있는 하나의 이념이 이 한민족 앞에 나와야 됩니다. 하늘의 신앙 방편이 이 한민족 앞에 세워져야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제시하고 나선 것이 통일교회입니다.

이 통일용사의 심정, 통일용사의 정신을 품은 자는 , 그 심정에 내가 구원을 받기 위해 믿는다는 마음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 믿는 것은 민족을 구원하기 위하여, 세계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더 나아가 지옥 문을 개방하여 원한에 사무친 지옥의 영인들까지 구원하기 위하여 믿는다는 심정, 그런 심정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 심정을 품고 한 가지 일을 하면 그 일은 억천만 가지 일의 가치와 맞먹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가 그랬기 때문에 역사적인 메시아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배당을 출입하는 기독교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게 될 때 여러분은 생각해 봐야 되겠습니다. 당신의 가는 걸음은 무엇을 위해 가고 있습니까? 자기 일개인의 생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움직이렵니까? 그러면 하늘의 아들딸이 될 수 없습니다. 백성은 될 수 있을지 모르고 종이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아들딸이란 명사는 가질 수 없게 됩니다.

하늘의 아들딸이 되려면

하늘의 아들딸이 되려면, 하늘의 아들딸이 되고자 하는 마음을 가졌다면 하늘의 슬픔이 미쳐져 있는 인류를 대신하여 하나님과 인류를 슬픔에서 해방할 수 있는 해방운동의 선각자로 나서야 합니다. 그리고 천적인 싸움의 용자로서 원수들을 대하여 진격할 수 있는 정신적인 무장, 이념적인 무장을 해야 합니다. 자기를 중심삼은 이념 말고 온 우주를 품을 수 있는 이념으로 무장을 하고 나서야 됩니다. 그래야만 하늘의 아들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제 하늘은 복귀섭리의 문을 열어 놓고 끝날의 성도들을 대하여 개인적인 대표자, 가정적인 대표자, 민족적인 대표자, 국가적인 대표자를 찾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자가 어디 있느냐? 오늘의 역사를 통틀어 보아도 하늘이 찾고자 하시는 그러한 개인을, 가정을, 국가를, 세계를 찾을 수 없습니다. 자신을 중심삼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은 자체의 생존의식을 갖되 세계의 생존의식과 더불어 가질 줄 알고 천륜의 생존의식과 더불어 움직일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의식이 필요합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범위 내에서 찾아진 의식을 갖고 그것이 생존의 가치인양 살고 있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에요. 역사는 그를 비웃을 것입니다. 이 시대도 비웃을 것이며 천륜도 비웃을 것입니다. 우리의 의식을 넘어 세계 의식이 있고 세계의식을 넘어 천적인 의식이 있거늘, 여러분은 마음을 넓히고 넓혀 세계의식을 넘어 의식을 통하여 스며드는 슬픔과 고통의 고개를 넘어서 환희의 한 모습으로서, ‘하늘이시여! 저희를 대해 주시옵소서.’라고 할 수 있는 부활의 모습을 갖추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그러한 길을 갔던 것입니다. 슬픔과 고통의 길을 거쳤으나 우주적인 새로운 의식의 힘과 더불어 새로운 이념과 더불어 새로운 생명의 감촉이 부딪히게 될 때, 예수는 사망권을 헤치고 부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역사적인 탈을 벗으려 하는 이 세계 앞에 새로운 대우주의 광명의 빛을 비춰 가지고 새로운 자아의식을 세우고 나오는 사람이라야만 끝날 재림부활시대에 하늘이 찾는 영광의 국민으로서, 영광의 아들딸로서 나설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자리에서만 역사적인 한을 거친 자요, 천적인 한을 풀어 드린 자요, 또 이 시대에서 하늘의 기쁨을 들고 나설 수 있는 자격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다시 한번 돌이켜 하나님의 입장을 생각해 보면, 사랑하는 아들딸들을 핍박받게 하셔야 하는 그것이 하나님의 서러움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박히게 한 한을 품고, 그 아들이 못박혀 간 이후 2천년 역사를 거쳐오면서 수많은 성도들이 죽음을 당한 그런 한을 품으시고 그렇게 유도하신 목적은 어디 있느뇨? 우리를 위해서였습니다.

하늘이 지금까지 수고하신 것도 우리를 위함이었고, 하늘이 한의 길을 걸어오신 것도 우리를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세계를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늘의 신세를 지고 하늘의 이끌림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오늘날 땅 위에 있는 사람을 바라보고 하늘이 역사노정에서 느끼신 심정을 평면적으로 체휼하여 하늘 앞에, ‘슬픔과 고통을 다 벗고 나섰사오니, 아버지시여! 나를 보고 영광받으시옵소서.’ 할 수 있으려면 여러분 자신들이 슬픔의 왕자, 고통의 왕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온 인류와 더불어 죽고 산다는 신념을 갖고 죽음의 고개를 현실에서 타파하고, 고통과 슬픔의 고개를 현실에서 타파하여 오늘날의 모든 역경을 헤치고 천적인 기쁨을 체휼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하늘 대하여 ‘아버지여! 나를 보고 기뻐하시옵소서. 만민이여! 나를 보고 기뻐하소서. 만우주여! 나를 보고 기뻐하소서.’ 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그런 존재가 나와야만 하나님의 한이 풀린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존재가 되어서 보고 싶었던 하나님을 내 아버지로 모시고, 맞고 싶었던 하나님을 내 아버지로 모시고, 같이 살고 싶었던 하나님을 내 아버지로 모시고 살게 될 때 하늘의 한, 역사노정의 한, 하늘의 슬픔, 역사노정의 슬픔, 하늘의 고통, 역사노정의 고통이 나로 말미암아 해결되어 진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런 존재가 되어야만 통일왕궁의 아들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기 도>

아버지여! 한스러운 역사는 오늘날 저희 자체들을 휘감아 움직이고 있사옵니다. 이 한스러운 생활 환경에 처하여 잊는 저희들에게 한스러운 역사를 수습하고 한에 사무친 하늘의 심정을 풀어드려야 할 어마어마한 사명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이러한 사명을 짊어진 저희들은 하늘땅의 심정을 품고 슬픔을 체휼하고 고통을 느껴 천만번 죽더라도 아버지를 위안해 드릴 수 있는 자리에서 죽고자 하는 아들딸이 되어야만 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 위에 오실 당시, 많은 교단들과 신자들은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었으나 그들은 메시아가 자기들이 소망하는 정도 이상의 모습으로 오실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오신 메시아는 기쁨의 메시아가 아니었고 인류의 총합적인 슬픔의 메시아요, 인류역사의 고통이 부합된 고통의 메시아였다는 것을, 그 당시에는 천국 대표자로 오시는 메시아가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리라 생각했던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역사는 보여진 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역사에 나타난 사실을 끝날에 그대로 재현시켜 탕감복귀한다는 원칙을 배우고 있사오며, 에덴동산에서 슬퍼한 감정, 역사노정에서 슬퍼한 감정, 종적으로 흘러 나온 역사의 슬픈 감정을 저희 개체들을 중심삼고 횡적으로 전개시키고 횡적으로 수습하는 횡적인 면의 기쁨을 아버지 앞에 돌려 드려야 할 책임이 끝날 성도들에게 있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님이여! 이제 저희가 세계를 위하여 충성하기를 원하옵니까. 만인류를 위하여 하늘의 복지를 건설하기를 원하옵니까? 그러려면 하늘의 사무친 슬픔과 고통을 상속받는 주인공들이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고통과 슬픔을 다 소화시키는 자라야만이 천적인 기쁨의 상속자로 등장할 수 있다는 것을 이미 알았사오니, 오늘날 자신들의 마음의 기쁨을 찾아 헤매는 민족, 이는 패할 것이요, 이는 망할 것임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여! 기쁨을 찾아서 헤매고 싸우는 자는 승리의 실적을 갖지 못할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하오니 슬픔이 있으나 고통이 있으나 참고 ‘전체의 생명을 위하여 내가 살겠습니다.’ 하고 나선 사람이 역사적인 제물의 제단을 높인 자요, 역사를 이끌어 왔다는 것을, 또 그런 사람이 망하는 민족과 망하는 세계를 이끌어 나가야 한다는 것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끝날 교단을 바라보아도 한스럽고, 인류를 바라보아도 한스럽고, 하늘 땅을 바라보아도 한스러운 이때에 오늘날 저희들이 누구를 믿겠사옵니까? 어떤 지도자를 따를 것도 아니요 어떤 교주를 모실 것도 아닙니다. 아버지를 모시고 아버지의 한을 풀어 드리기 위하여 싸우고, 살지 않으면 안 될 최종적인 심판의 때가 다가오고 있사온대, 아버지, 저희들 가운데 마음 전체가 자기도 알 수 없는 그늘에 휩싸인 자가 있사옵니까? 그 그늘을 타파하여 주시옵소서. 새로운 슬픔의 감정이 휩쓸어와도 그것을 해결하기 위하여 헤매는 사람은 오늘 죽을지라도 내일 살아나게 된다는 것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자기도 알 수 없는 우주의 고통 가운데 휩쓸려 탄식과 죽음의 길을 헤매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있사옵니까? 이들의 생명이 경각에 달려 있는 것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와 같이 생사가 경각에 달리게 된 결과가, 슬픔과 탄식과 고통이 생기게 된 결과가 인간으로 말미암은 것이오니, 그것을 인간이 청산짓고 또 이 땅 위에 천국이념을 이루고 기쁨의 동산을 이루어 놓고 하늘을 찾아야 비로소 하늘을 대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오늘 들려준 말씀이 당신의 아들딸의 심중에서 잊혀지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한 많은 생애를 청산하고, 한 많은 민족, 한 많은 세계, 한 많은 하늘을 바라보고, 이 한스러운 심정, 한의 역사를 밟고 올라서서 기쁨의 심정으로 승리의 모습을 갖추어서 ‘아버지, 슬퍼하지 마시옵소서. 당신이 고대하던 영광의 아들딸들이 왔사오니 품어 주시옵소서.’라고 할 수 있는 늠름한 모습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이 땅 위에 기쁨으로 나타날 수 있는 아들딸의 모습을 저희들의 노력과 희생으로라도 세울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천만번 제물이 되어서라도 그런 아들딸들을 아버지 앞에 내세울 수 있는 길을 닦는, 터를 닦는 사람이라도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면서,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요한복음 3:1-15

<기 도(Ⅰ)>

어려운 인생길을 거쳐가는 저희들이 슬픈 사정에 잠겨 있는 것을 알고 있사옵고, 고통의 사정이 남아 있는 것도 알고 있사옵고, 어느 한 날 기쁨에 잠기어 아버님과 이 땅과 만민을 대해 노래할 수 있는 심정을 갖지 못했음을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님! 슬픔에 지치고 어려움에 지쳐, 갈 방향조차 알지 못하고 허덕이던 저희들을 긍휼히 보시옵소서. 의지할 바를 알지 못하여 방황하던 저희들을 붙들어 주시옵소서. 당신이 저희에게 허락하신 은사가 놀랍고 크신 것을 느끼는 저희들이었사오나, 그 은사를 받고도 아버지 앞에 영광을 돌려 드리지 못하는 불충한 저희들을, 아버지,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는 슬픈 세상에서 그 슬픔을 피해 갈 수 있는 길을 저희에게 미리 제시해 주셨사오나, 그 예고하신 뜻을 받들기에 충분하지 못한 저희들이었던 것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고통스러운 행로를 가야 할 저희들이었사오나, 이것을 피할 수 있는 한 길을 저희들에게 세워 주셨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버지 앞에 감사하며 그 길로 가지 못한 것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남은 바의 생애를 아버지의 기쁨과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 아버지의 의중에 맡기고 살기를 바라고 있사오나, 땅 위에 사망의 권한과 죄악의 권세가 워낙 강하게 저희 주위를 둘러싸고 있사옵니다. 이것을 벗어나기가 어려운 것을 아버지께서도 알고 계시오니, 긍휼의 아버지, 이 시간 현현하시옵소서.

아직까지 해방된 자리에서 아버지의 영광을 찬양하며 아버지 앞에 기쁨을 돌려드리는 저희들이 못된 것을, 아버님, 용납하여 주시옵고, 새로운 힘과 능력의 손길을 펴시어서 어둠의 권한을 제압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승리의 모습으로 부활의 영광을 노래할 수 있도록 재창조의 역사를 일으켜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사망의 권세가 저희를 휩쓸고 있사온지라 생명의 감촉과 생사의 판가리를 거쳐서 이것을 밀고 나갈 수 있는 자동적인 힘과 자발적인 능력이 필요하오니 아버님, 이 시간 그것을 염원하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있사올진대, 그들에게 친히 능력을 가하시옵고 부활의 권한을 허락하시어서, 내일의 소망을 품고 하루 하루의 생활을 개척해 나가는 하늘의 정병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지금까지 걸어 나온 모든 생활이 부족하였다 할지라도, 아버지,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내일의 뜻이 있다 할진대, 그 뜻과 그 이념과 그 소망을 바라보면서 오늘도 내일도 개척자의 책임을 다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님, 이 때는 자기 스스로 성별할 때이옵고, 자기 스스로 감정하여 아버지 앞에 나서야 할 때이옵니다. 의지할 곳을 찾을 수 없는 때이옵고, 참다운 중심을 통하여 저희의 모든 것을 통할 수 없는 때인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님이여, 끝날에는 자기 스스로 아버지의 심정을 통할 줄 아는 자, 자기 스스로 사탄의 세력을 제거시킬 줄 아는 자, 자기 스스로 승리한 모습을 갖추어 아버지 앞에 영광을 돌려드릴 줄 아는 자가 필요하옵니다. 그와 같은 모습을 만들기 위하여, 그와 같은 존재들을 세우기 위하여 저희들을 불러 주셨사온데, 오늘 저희들은 아버지 앞에 면목이 없는 모습이오니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이 길을 가는데 심정을 통할 수 있는 말씀도 들었사옵고, 아버지의 은사를 증거하는 행동도 보았사오나, 저희들이 그 뜻을 받들어 아버지 앞에 충성된 제단을 세우지 못하고 하늘의 정병이 되지 못함으로써 아버님의 탄식이 가해질까봐 두렵사오니, 아버님, 저희들을 이끌어 주시고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을 대하여 충성했다 하는 자가 있사오며, 아버님을 대하여 스스로 옳다 하고 나설 수 있는 자가 있겠사옵니까? 부족한 것만이 있고, 불충스런 면만이 있는 저희들이옵니다. 선을 지향하시는 아버님의 심정을 알고, 선의 뜻을 세우려 하는 사람을 찾고 계시는 것을 알면서도 뜻대로 행하지 못하는 불충한 몸들이었사오니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이러한 사정이 얼크러져 있는 아버지의 심정을 앎으로써 저희들의 모든 것을 다 내어 놓고 아버지가 취할 수 있는 것으로서 재정돈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직 아버지의 심정을 부둥켜안고 아버지에게 붙들려 아버지께서 가시는 곳곳에 저희가 따라갈 수 있고, 아버지께서 움직이는 대로 저희도 같이 움직일 수 있으며, 아버지께서 행동하시는 대로 저희들도 행동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제 이 삼천만 민족을 재창조해 주시옵소서. 이들의 생명을 다시 아버지의 소망의 동산으로 이끌어 주시옵소서. 이 민족을 이끌기에 부족함이 없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뜻을 이루기 위해 아버지의 뜻 앞에 저희들을 먼저 불렀을진대, 이들에게 하늘의 심정을 통고하는 책임을 감당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하늘의 말씀을 전할 줄 아는 아들딸들이 되게 해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 오늘 여기 모인 당신의 아들딸들, 이제 각자의 심정 심정이 다를지라도, 그 마음 중심은 같을 줄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지를 위하고 싶고, 아버지를 따르고 싶고, 아버지의 심정을 본받고 싶은 마음이오니, 이것을 기반으로 아버지께서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 움직이시어서 저희들에게 부활의 영광을 보이시옵소서. 그리하여 해방의 은사권내에 저희들을 옮겨 주시옵기를,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시간에 아버지와 저희 사이에 틈이 없는가 하고 억만 사탄들이 노리고 있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아버지의 심정과 저희의 심정이 통할 수 있으며, 아버지의 형상과 저희의 몸, 아버지의 사정과 저희의 사정, 아버지의 소원과 저희의 소원이 일치하여 아버지께서 친히 운행하실 수 있는 이 한 시간 되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나이다.

그럼으로써 저희들이 밀려들어오는 사탄의 어떠한 권한도 막아내고 아버지 앞에 승리의 영광을 돌려드리겠다고 약속하는 이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고, 최후의 결정을 지을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님, 이 시간 맡겼사오니 뜻대로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스스로 옳다 할 자 없사오니, 긍휼의 아버지시여, 이 시간 품어 주시옵고, 친히 저희 앞에 분부하실 말씀이 있다면 분부하여 주시옵고, 저희가 부족하여 아버지께서 분부하시는 말씀의 뜻을 알지 못하면 채찍을 들어 쳐서라도 깨달을 수 있게끔, 아버지,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이후의 전체 시간을 성삼위신이 친히 주관하여 주시옵고, 천천만 성도들이 옹위하여 사탄이 일체 틈타는 시간이 되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성별된 마음, 성별된 몸, 성별된 심정으로 산 제물로서 아버지 앞에 묶어 바치어져 아버지 것이라고 인정받을 수 있는 이 시간 되게 하여 주시옵고, 아버지 친히 주관할 수 있는 이 한 예배의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참석하지 못한 식구들이 있사올지라도 아버지, 같은 은사로 보호하여 주시옵고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외로운 심정을 품고 지방에서 싸우고 있는 당신의 어린 아들딸들도 이 시간 같은 은사로 보호하여 주시옵기만을 간절히 부탁드리올 때,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기 도(Ⅱ)>

이제 저희의 마음이 어떤 곳에 머물러 있는가를 살피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몸은 비록 한 곳에 모여 있사오나, 마음들은 천태만상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흙덩이가 자유자재로 움직이시는 아버지의 손길을 따라 움직이게 될 때 아담이 빚어진 것과 마찬가지로, 저희의 마음도 아버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이제 저희의 몸의 형태는 하나의 제단 형태를 갖추었으되, 마음의 본형과 본질은 아버지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지성소가 되어 있는지, 이 시간 염려하는 마음으로 존엄하신 아버지를 그리워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온유하신 아버지의 성상을 대해 간곡한 심정이 자신도 모르게 스며들 수 있는 마음의 감촉이 없으면 안 될 것을 저희들이 느끼고 있사옵니다. 깊은 가운데 의논하시기를 즐겨하시고 은은한 가운데 현현하시어서 저희의 사명을 밝히고자 하시는 아버지의 움직임의 역사를 저희들은 마음으로 바라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저희들이 은은한 가운데 계시는 아버지를 모시고 아버지와 은밀한 사정을 통할 수 있는 모습이 되지 못했을 때, 슬프고 외로운 분은 아버님이셨고 딱한 입장에 계신 분도 바로 아버님이셨음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한 입장에 계신 아버님을 저희의 친아버지로 모시고 일체적인 관계를 맺어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사랑을 중심삼고 나뉘어질 수 없는 인연으로 묶어져야 되는 것을 느낄 줄 알아야 할 터인데, 저희의 마음에 이런 심정이 떠오르지 않는다 할진대 어찌 아버지의 아들이라 할 수 있으며 아버지의 딸이라 할 수 있겠사옵니까? 아버님과 저희가 나눠질 수 없는 인연이 있다고 어찌 말할 수 있겠사옵니까? 그러한 저희들이라 할진대는 허락하시고자 하신 천국 이념도 저희와 관계가 없게 되고 역사적으로 수고하신 아버지의 위로의 터도 저희와는 관계가 없다는 것을 이 시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긍휼의 아버님, 사랑의 아버님, 불쌍한 것들을 그냥 내버려두면 사망의 그늘 아래에서 영영 헤어날 수 없는 모습들이 되옵니다. 이런 입장에 있는 저희가 잘난 것이 무엇이 있어 아버지 앞에 옳다 하고 나설 수가 있사오며, 저희가 가진 것이 무엇이 있어 아버지 앞에 옳다 하고 나설 수가 있사오며, 저희가 가진 것이 무엇이 있어 아버지 앞에 내 자신을 변명하겠사옵니까? 아무것도 없사옵니다. 있다고 하는 것은 부족한 것뿐이요, 느끼는 것은 황공한 마음뿐이오니, 아버지의 인자하심과 자비하심과 긍휼하심을 바라는 사망의 무리를, 아버지, 긍휼히 보시옵소서. 저희 모두가 하늘을 향하여 아버지의 손길이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사오니, 긍휼히 보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섭리의 때는 끝날을 재촉하고 있사옵고, 사망의 물결은 저희 주위를 휩쓸어 저희 개체를 여지없이 삼키려 하옵니다. 저희가 혼란된 환경에 처하여 있는 것을 아시는 아버지께서 저희들을 위하여 염려하시는 심정이 이 땅에 남아 있고, 수고하신 자국이 남아 있는 것을 아옵니다. 이런 것을 보시고 아버지의 마음이 말할 수 없이 초조하다는 것을 알 수 있사오나, 아버지, 이 시간 이들을 긍휼히 보시고 이끌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외로운 심정을 가지고 있으면 이 시간 털어놓고 아버지의 심정으로 바꾸어 가져야 하고, 슬프고 말할 수 없이 답답한 심정을 가지고 있다면 아버지의 기쁨과 생명의 심정으로 바꿔 가져야 할 불쌍한 처지에 놓여 있는 저희들이옵니다. 이것을 아시는 아버님이시여, 아버님의 힘든 입장을 대신 담당하고 덜어드려야 할 저희들인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저희의 어려운 사정을 맡기고 아버지께 다시 힘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될 타락권 내에 있는 것을 용납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 모인 자의 심정 심정이 통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사망 권내에서 허덕이던 저희들이, 서로 아무런 관계가 없고 인연이 없던 저희들이 한 식구라는 명목을 갖고 모였사옵고, 아버지의 천적인 이념을 대할 수 있는 섭리의 이념을 흠모하여 모였사오니, 아버지, 긍휼히 보시옵고 찾아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그 누가 아버지 앞에 자신을 가질 수 있사오리까? 아버지께서 자신이 있다고 하시기에 저희들도 자신을 갖기를 바랐사옵고, 아버지께서 이렇다 하시기에 그렇다는 것을 느끼기를 바랐사오니, 여기에 그릇됨이 있사오면, 아버지, 용납하여 주시옵고, 친히 주관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삼천만 이 민족을 긍휼히 보시옵소서. 갈 바를 알지 못하고 허덕이고 있사옵고, 생사의 기로에서 아우성을 치고 있사옵니다. 이들의 생명을 노리고 있는 사탄의 저울대는 높아가고 있사오니, 아버지, 이것을 슬퍼할 줄 아는 저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들의 길과 이들의 사망줄을 깎아 내려 승리의 터전을 높여야 할 것을 저희들이 알고 있사오니, 아버님이시여, 힘이 부족하오면 힘을 허락하여 주시옵고, 용단 용맹의 마음이 부족하올진대 용단 용맹의 마음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여호수아와 갈렙을 대하여 강하고 담대하라고 하셨던 그러한 충고의 말을 이 시간 허락해 주시어서 저희들을 충고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그리하여 저희로 하여금 이 삼천만 민족을 아버지 제단 앞에 이끌어내어 아버지의 생명과 연결시킬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이것을 끊고자 하는 사탄의 세력이 있다 할진대는 이것이 끊기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하는 한이 있더라도 싸워 나갈 수 있는 아버님의 아들딸이 되게 인도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날도 외로이 지방에 널리어 있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슬픈 심정을 품고 아버지 앞에 호소하고 있을 줄 알고 있사오니, 그들의 친구가 되어 주시옵고, 그들의 보금자리가 되어 주시옵고, 그들의 인도자가 되어 주시옵소서. 그들을 권고하여 주시옵고, 위로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슬픈 사정에 처해 있어도 인간 대하여 그 사정을 토로할 수 있는 환경을 갖지 못하였고, 외로운 입장에 처하여도 그 심정을 털어놓을 수 있는 식구들을 갖지 못한 당신의 아들딸들을 긍휼히 보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의 심정에 연한 세계에서는 시간과 공간의 거리를 초월하여 움직이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이 시간도 같은 심정에 연하여 하늘의 마음이 동하면 그들의 마음도 동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 일률적인 은사의 손길로써 그들을 감격시켜 주시옵고, 그들을 아버지 심정에 다시 얽어매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제 허락하신 시간에 말씀을 갖고 나타나려 하오니, 아버지, 같이 하여 주시옵소서. 좋은 말도 필요치 않고 복된 말씀도 필요치 않사옵니다. 필요한 것은 내 자신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옵고, 죄인의 혈통을 벗어나지 못하고 심판대 앞에 설까봐 두려워할 줄 아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오니, 그러한 몸과 그러한 심정을 갖고 허락하신 말씀을 대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전하는 자의 마음이나 받는 자의 마음이 둘이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고, 하나의 심정이 연하여 아버지의 은은한 심정으로 통할 수 있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은은한 모습을 갖추어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자기도 모르게 경배하고 싶은 심정으로 화할 수 있는 이 한 시간이 되게 이끌어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사탄이 틈타는 시간이 되지 말게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주의 이름으로 아뢰옵나이다. 아멘.

<말 씀>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려 하는 제목은 ‘새로운 나와, 그가 살 수 있는 천국’입니다. ‘새로운 나와, 그 새로운 내가 살 수 있는 천국’ 이러한 제목을 가지고 잠깐 말씀드리겠습니다.

인간의 궁극적인 소망과 우리가 처한 현실

땅 위에 많은 사람이 살고 있으되, 그 마음에 천국을 소유했다고 장담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또 인간이 동경하면서 찾아 나온 이상세계가 어디냐 하면, 그것이 이제 말하였던 천국임이 틀림없습니다.

오늘날 이 세계에는 잘 살고 복된 자리에 처하기를 바라는 자는 많으나 ‘잘 살았다.’ 하고 ‘복 받았다.’고 하는 사람은 심히도 적은 것입니다. 그런 사정을 놓고 볼 때, 땅에서 살고 있는 우리의 생활이 천국생활이 아니라 그 반대의 생활형태인 것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런 경계선에 서 있는 내 한 자체는 천국을 향해 찾아가야 할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 곳을 찾아가서 살아야 할 입장인 우리 자신임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은 더 좋은 이념을 찾고 있고 우리의 몸도 더 좋은 안식처를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 역사 이래에 이것이 최고 좋은 것이요, 이곳이 인간의 본심을 통할 수 있는 곳이라고 장담하고 제시할 수 있는 그런 곳, 그런 생활방식, 그런 생활을 할 수 있는 사회조직은 아직까지 인류 역사상에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이 바라는 소망의 세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원치 않는 생활 환경을 피할 수 없는 처지에서 오늘도 어려움과 더불어 살고 있습니다. 내일도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일생의 생애노정에서도 역시 우리는 소망의 세계를 흠모하는 환경권 내에서 탄식과 원망을 하며 살지 않으면 안 될 처지에 있다는 것을 어느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환경에 처해 있는 나 자신을 끌고 끌며 넘고 넘어 소망의 동산, 이념의 동산, 행복의 세계는 어느 때에 이루어 놓고 살게 될 것인가, 또는 어느 때에 우리가 소망하는 것을 중심삼고 살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가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할 문제 중의 문제요, 인류가 다시 제창하여 해결해야 할 난문제 중의 난문제인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이런 문제를 방관할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이 실현되기 어려운 문제라 해서 우리는 우리의 마음세계에서 끊어 버리고 살 수 없는 운명에 놓여 있다는 것을 자신의 생애를 통하여 잘 아는 바입니다.

우리는 행복의 동산에서 태어났느냐

우리는 이 땅 위에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이 땅 위에 한 생애를 갖고 태어난 것이 잘 되었는지 잘못 되었는지, 우리는 생각도 해보지 않았습니다. 인간들 중에는 현실에서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이 참다운 생애냐 참답지 못한 생애냐 하는 문제를 생각하지 않고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또 우리는 이 땅 위에 태어나서 살다가 어차피 육신을 벗고 가야 할, 죽어가야 할 입장에 처하여 있습니다. 우리 한 개체들은 죽음의 고개를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놓여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자신의 죽음이 참된 죽음이고 또 자신이 참다운 곳에서 죽느냐, 그렇지 못한 곳에서 죽느냐, 이러한 문제가 여러분과 직접 관계되어 있고, 여러분의 생애를 통하여 인연되어 있습니다. 시작을 했으면 끝을 맺어야 할 이런 권내에 우리는 처하여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내가 부모의 혈육을 받아 이 땅에 태어났다는 그 자체를 자랑하는 사람이 많을지 모르지만, 참다운 부모의 심정을 가진 자가 있다면 낳아 놓은 자식을 바라보고 탄식해야 할 것입니다. 또 그가 태어난 순간 그 아이가 행복의 보금자리에 누웠다고 해서 고고의 음성을 울리는 그의 일생이 행복스러울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는 한, 그 낳아 놓은 부모 자신도 역시 기쁨의 심정을 체휼하기 전에 슬픈 심정을 체휼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의 탄생이 행복의 동산에서 나지 못한 것을 인정할진대는, 그가 나서 사는 생활도 그러할 것이고, 그가 살다가 가는 죽음의 고개도 그러할 것입니다. 이런 권내에 살고 있는 우리 자신임을 명심해야 되겠습니다. 너는 참다운 생을 고대한 때가 있었느냐, 너는 참다운 생의 가치를 노래하면서 최후에 맞이할 죽음을 승리적으로 넘어갈 수 있는 자신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어느 누구도 ‘아니오.’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 연고로 이러한 개인 개인들이며 이런 모든 인간들은 타락권 내에 처해 있고 탄식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정상적인 마음의 세계에 처해 있는 것이 아니고 비정상적인 세계, 비정상적인 환경에 처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살아 나가는 생활 전체, 즉 태어난 그날부터 죽는 그때까지, 어느 누구든지 행복이라는 명사를 세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바라는 행복이니 이상이니 희망이니 하는 것은 오늘날 여러분과 관계를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마음이 행복하지 못한 것은 스스로 즐거워할 수 있는 내가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스스로 소망의 실체를 이룬 심정을 갖고 있다고 한다면, 그 소망을 이룬 가운데서 기뻐할 것인데, 오늘의 나는 그런 기쁨을 갖지 못하였습니다. 내가 이념적인 실체를 이루었더라면 만상을 대하여 나를 따르라고 자기를 세워 당당히 호령할 수 있는 입장에 설 수 있는 것인데, 오늘날 나는 그런 입장에 서지 못하였습니다.

참된 이념을 가져야 할 인간이 참된 이념을 갖지 못하였고, 행복된 환경에서 살아야 할 인간이 행복의 동산을 잃어버렸습니다. 자유와 평화를 노래하고 더 나아가서는 창조주 앞에 내 심정에 스며드는 행복의 전체 요소를 가지고 영광을 돌려드려야 할 인간이 되어야 했는데, 그러한 인간이 되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것을 두고 볼 때, 우리는 이 이상 불쌍한 것이 없고 이 이상 슬픈 일이 없다는 것을, 먼저 알지 않으면 아니 되겠습니다.

그런 연고로 이러한 자리에 예수님이 4천년 역사의 모든 짐을 짊어지고, 4천년 역사에 왔다 갔던 선열들의 전체 책임을 짊어지고, 또 4천년 역사노정의 인간들이 품었던 모든 이념과 소망을 짊어지고, 행복과 천국의 이념을 짊어지고 왔다 할진대는, 그 예수님이야말로 우리의 마음 세계에서 친구 중의 친구요, 중심 중의 중심이요, 우리의 생활 전체의 중심이요, 소망이나 이념, 더 나아가서는 생사의 중심까지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땅에 행복이라는 한 명사를 남기고 갔을 것입니다.

하늘은 이런 탄식권 내에 머물러 있는 인간들을, 불행한 사망권 내에 머물러 있는 인간들을, 다시 새로운 소망을 가질 수 있고 새로운 천국 이념권 내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사람으로 회복하기 위하여, 당신의 뜻을 다시 찾아 세우기 위하여 4천년이란 기나긴 세월을 섭리하셨다는 것입니다.

섭리를 성취시키려면

그러면 이 섭리를 성취시키려면 먼저 어떠한 작전을 갖고 나와야 되느냐? 하나의 사람을 세워 거룩히 성별하는 입장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늘날 땅 위에 살고 있는 사람 그대로는 하늘과 인연을 맺을 수 없기에, 하늘은 역사노정을 거쳐오면서 인간과 인연을 맺기 위해 선민을 택하여 나오셨습니다. 이 선민 가운데에서도 선민을 택하여 나오신 섭리의 역사노정을 우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노아를 택함도 그러한 것이요, 아브라함을 택함도 그러한 것이며, 모세를 택함도 역시 그러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 한 분을 세워 놓고 4천년 역사를 종결짓고자 하시고, 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역사적인 모든 해원을 성취코자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심정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 예수님이 아니면 안 될 입장에 계셨고, 또 역사적인 섭리의 뜻을 대하여 나오던 택한 이스라엘 선민도 예수님이 아니면 안 될 입장에 놓여져 있었습니다. 또 선민뿐이 아니었습니다. 그때 살고 있던 세계의 인류 역시 예수님이 아니면 안 될 입장에 놓여 있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그 때 있던 만물, 즉 천상으로부터 지상에 연하여 존재하고 있는 어떠한 피조물이든지 예수님이 아니면 안 될 입장에 놓여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늘이 없으면 모르거니와 하늘이 있다 할진대는, 하나의 실체인 인간이 바라는 이념의 중심, 혹은 행복한 환경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어떤 하나의 원칙적인 기준을 세워 놓고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섭리의 철칙일 것입니다.

공식을 통하지 않고는 어떤 문제를 풀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역사적인 원한을 박차고 인류의 심정에 소개할 수 있는 하나의 원칙적인 기준이 서지 않는다면, 하늘의 어떠한 행복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인간과 관계를 맺을 수 없고, 하늘의 어떠한 이념과 생명이 있다 할지라도 인간과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의 심정을 대신할 수 있으며, 하늘의 행복을 대신할 수 있으며, 하늘나라 전체의 이념을 대신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하늘은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여금 그러한 심정을 품고 그러한 이념을 받들도록 섭리하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 이스라엘이 하늘과 실체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 행복의 동산, 선의 동산을 건설하기 위해, 하나님은 4천년 동안 섭리하여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으로 오셨는가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고? 4천년 역사노정에서는 아무도 하나님의 기쁨을 소개할 수 없었으나,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비로소 하나님의 기쁨이 소개될 수 있었고 하나님이 허락하는 행복의 동산이 건설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와 같이 역사적인 새로운 존재였음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의 한 모습은 선조들이 소망하던 하나의 실체요, 선조들이 싸워 나오면서 찾고자 하던 소망의 존재였다는 것을 그때 이스라엘 민족이 알아야만 했습니다.

또한 예수님 한 자체는 선조들의 소망을 다시 부활시킨 존재요, 또 하나님의 심중에 사무쳐 있던 땅을 대신한 소망의 존재요, 또 하나님이 심중으로 동경해 마지 않던 천국이념을 인간 세상에 이루어 놓기 위하여 보내셨던 하나님 대신의 존재요, 또 인간 앞에 있어서는 행복의 동산을 건설할 수 있는 우리의 대신 존재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그 당시의 이스라엘 민족이 알아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땅 위에 오셨으되 새로운 세계의 주인공이 못 되었고, 새로운 세계의 백성을 못 가지셨고, 새로운 세계의 생활을 개척해 놓지 못하셨고, 새로운 세계의 사회와 새로운 세계의 국가를 건설해 놓지 못하고 가셨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은 타락한 세상입니다. 타락한 이 땅의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세우고자 하시던 실체가 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 있는 하나의 형태로서 나타날 수가 없다는 거예요.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생활이라든가 환경이라든가 나라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심중을 그냥 그대로 통할 수 없는 환경이요 사회요 나라요 세계인 연고로, 하늘은 이 세계를 대하여 심판의 명사를 걸고 바라보고 계시다는 걸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이제 하늘이 고대하고 있는 것은 무엇이뇨? 새로운 것을 고대하고 있음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이 유대교 앞에 나타나게 될 때, 택함을 받은 민족이라고 자랑하는 바리새교인들 앞에 나타나게 될 때, 말씀 하시기를, ‘너희들이 주장하고 너희들이 자랑하고 있는 그것만 가지고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자신은 천적인 새로운 실체로서 새로운 이념과 새로운 우주관을 갖고 왔기 때문에 누구든지 나를 통해야 된다는 것을 명시하시기 위하여, 그런 입장을 선포하시기 위하여 나서서 싸우신 것이 그의 3년 공생애노정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런 예수님 앞에 나타난 수많은 무리, 이런 예수님을 따르고 있던 제자들을 대해, 예수님은 다시 한번 새로운 무리가 되기를 바라고, 새로운 제자가 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났으면서도 그가 새로운 심정, 새로운 이념, 새로운 생명, 새로운 행복을 소개하였다거나 이것들을 건설하기 위하여 오셨다고 믿고 따른 사람은 적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 가지고 자기가 품었던 새로운 이념, 새로운 주의, 새로운 생활방식, 새로운 세계 형태, 이것을 다 말씀하시지 못하고 가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심정을 품고 허덕이는 예수님 앞에 니고데모가 나타났습니다. 이는 유대의 관원이요 택한 사람들을 지도한다는 스승의 입장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다시 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강조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오늘날 우리도 다시 나야 할 운명에 놓여 있습니다.

6천년 역사의 종말기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때에 이 역사의 모든 것을 청산지어야 할 것으로 하늘은 보고 있습니다. 하늘이 이 죄악 세상을 어느 한 때에 심판하여 청산지어야 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들은 끝날을 두려워하면서 신앙노정을 걷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끝날은 어떤 때이뇨? 옛것을 청산해 버리고 새것을 주장하여 나오는 때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가지고 오신 것

역사노정을 헤아려 보면, 과거의 수많은 주의 주장은 역사의 발전과 더불어 변천해 나왔습니다. 끝날에 처해 있는 오늘날 우리들, 민주와 공산이 대결하여 서로 선후를 노리고 있는 이런 판에 서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여러분은 반드시 이 싸움판에서 새로운 한 방향을 다시 찾아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하늘은 우리 인간에 대하여 새로운 제2의 자아가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의 양심은 오늘의 내가 아닌 좀더 새로운 나를 찾아 헤매고 있는 것입니다. 양심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는 이것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의 양심은 ‘이래서는 안 되는데, 이와 같은 생활을 하면 안 되는데….’ 하면서 이와 같은 사회, 이와 같은 세계 실정을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양심 작용이 있음으로써 내 마음과 내 모든 이념을 통할 수 있는, 즉 심중의 평화를 가져올 수 있으며 심중의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새로운 나의 모습을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그리면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은 4천년 하나님의 복귀섭리역사를 종결짓기 위하여 오셨는데, 무엇을 갖고 오셨는고? 새로운 생명을 갖고 오셨습니다. 새로운 생명을 갖고 오신 동시에 새로운 이념을 갖고 오셨습니다. 새로운 이념을 갖고 오신 동시에 새로운 사랑을 갖고 오셨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은 여러분의 심정을 통해야 할 천륜의 어떠한 운세가 있다면, 그 운세와 연합할 수 있고 같이 움직여 나갈 수 있는 생명의 약동을 느낄 수 있습니까? 모든 존재, 천지의 이념적인 일체의 존재물을 움직여 낼 수 있는 하나의 중심적인 이념의 심정을 느끼고 있습니까? 이 모든 만상을 품고 그 심정으로 녹여낼 수 있는 어떤 사랑의 심정을 체휼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그러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일에 하나님이 계시다면

만일에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생명력을 가진 어떤 존재물이라도, 오늘 이 시간도 움직이는 동시에 또 오늘 이후 영원한 미래에까지도 움직일 수 있는 생명의 주체가 되시는 분인 것을 우리는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또 생명을 가진 것은 어떤 존재일지라도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함께하고 싶고, 하나님을 중심삼고 생활도 같이하고 싶고, 생사까지 같이하고 싶은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이념권 내에서 벗어날래야 벗어날 수 없는 세계에서 주체적인 입장에 계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지으신 만물을 대하여 자기 정열을 다 기울여 사랑과 정적인 인연을 갖고 만우주를 지배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분명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새로운 심정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이념을 찾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새로운 이념은 어디에서 끝이 날 것인고? 인간과 인간이 개재된 곳이 아니라 나와 하나님이 직접 같이할 수 있는 자리에서 끝납니다. 역사적인 종말기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을 것인데, 그 심판은 무어냐?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개재돼 있던 간접적인 모든 조건들을 다 청산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 간접적인 조건을 청산해 버리면 인류와 하나님이 직접 부딪칠 수 있는 새로운 역사가 전개되는 것입니다.

만일에 이러한 일이 없다고 하면 하나님은 계시나마나입니다. 만일에 하나님께서 이런 목표를 중심삼고 섭리하시지 않는다 할진대는, 오늘날 기독교에 있어서 심판이라는 명사가 없어야 할 것인데 심판이라는 명사가 있는 것을 보니, 이러한 목적을 중심삼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은 틀림없이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6천년의 섭리역사와 나

우리는 타락한 연고로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생명의 주체 되시는 주인공을 잃어버린 나요, 이념의 주인공을 잃어버린 나요, 사랑의 주인공을 잃어버린 나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은 참된 기쁨을 맛볼 수 있는 생명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더 나은 우주적인 이념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심정은 더 고차적인 사랑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타락 이후 인간들이 찾아 나오는 생명력, 인간들이 찾아 나오는 이념, 타락한 인간들의 정을 중심삼고 엉클어진 그 사랑이란 것은 타락 역사의 출발로 말미암은 것이지, 하나님의 이념이 이루어진 동산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6천년의 역사적인 모든 것을 미련없이 밀어낼 수 있는 생명력이 필요한 때가 왔습니다. 우리에게는 역사를 대신할 수 있는 생명력, 6천년 동안 내 힘과 생명의 가치를 자랑하였던 그 모든 것을 다 밀어낼 수 있는 생명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6천년 역사는 어떤 역사냐? 생명력을 지닌 인간으로 회복하기 위한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들은 6천년 동안 사탄이 옹호하고 사탄이 지배하던 권내에서 움직이던 이 모든 것을 밀어낼 수 있는 생명의 위력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 할진대 우리들은 새로운 나로서 다시 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제 우리가 새로운 나로서 나타나기 위해서는, 오늘날까지 6천년 역사 과정을 거쳐오면서 하나의 형태를 갖춘 어떠한 주의나 사상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을 밀어낼 수 있는 이념을 내가 가져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는 새로운 시대의 역군으로서 나설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새로운 나로 태어날 수가 없다는 거예요. 6천년 역사를 거부할 수 있는 생명의 위력을 갖고 지금까지의 어떤 주의 주장 또는 인간이 찾고 있는 이념적인 모 든 것을 밀어낼 수 있는 새로운 이념을 갖지 않는 한, 새로운 내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니에요. 오늘날 인간 세상에 있어서 우리의 가정만이라도 정으로 얼크러질 수 있는 방향으로 역사는 발전해 나오고 있습니다. 하늘은 이것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런데 가정이 이념을 실천시킬 수 있는 완전한 발판이 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끝날에 가서는 다 깨뜨려진다는 걸 알아 야겠습니다.

끝날은 어떤 때인가

오늘날 인간들은 20세기 문명을 이루어 놓고 세계를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는 입장에 있는 것 같지만, 그들이 갖고 있는 생명의 위력은 이 세계를 움직이기에는 지극히 약한 자리에 떨어져 있습니다. 그들이 갖고 있는 이념도 지극히 몰락된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그들이 느끼고 있는 정적인 심정도 역시 마찬가지예요. 물질적인 면에서도 세계형을 갖추어 나오고 있으되, 내적인 생명력에 있어서는 지극히 미약한 것이 20세기 문명인들입니다. 이념에 사무친 심정을 가진 사람들이 없는 시대, 더 나아가서는 참다운 인간의 사랑의 심정을 찾아볼 수 없는 시대로 역사는 흘러 나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정을 찾아봐도 부부지간이나 부자지간에 있어서 하늘 앞에 자랑할 수 있는 심정의 인연을 찾을 수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부부간도 그렇고, 동기간도 그렇고, 친구간도 역시 의리와 인륜의 법도는 물론 정적인 기준까지 다 끝을 바라보고 있는 이 때입니다. 하늘이 그것들을 전부 다 깨뜨려 부수려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는 때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세상 끝날인 오늘날은 이 혼란된 세상을 수습할 수 있는 생명의 위력이 필요한 때이며 이념적인 권한이 필요한 때입니다. 그러한 때가 왔습니다. 이제 생명의 위력을 가진 사랑이 결탁되어 하나의 목적을 위하여 전체가 단결할 수 있는 , 이러한 형태의 움직임이 필요한 때가 왔 다는 것입니다.

하늘은 뭇 인간들을 대하여 말씀으로 예고하였습니다. 끝날에는 사랑이 다 식어 버릴 것을 말했습니다. 모두가 다 하늘을 배척하고 하늘을 배반할 것을 말했습니다. 그때는 모두가 다 수고와 고통의 길에서 쓰러질 것을 말했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위력이 있다면 어떠한 고통도 문제되지 않을 테지만 끝날에는 고통에 지칠 것이요, 하늘을 배반할 것이요, 사랑의 심정이 갈라질 것이라 했습니다. 그런 때가 끝날입니다.

주님은 무엇을 갖고 다시 오실 것이뇨

그러면 하늘은 무엇을 갖고 다시 오실 것이뇨? 세상을 없애 버리고 말 하늘이 아니라 다시 새로운 이념으로써 찾아오실 하늘이기 때문에, 그 하늘은 무엇을 갖고 다시 올 것이뇨? 생명의 위력을 갖고 올 것이요, 또 이념의 권한을 갖고 올 것이요, 사랑의 원천을 갖고 나타나신다는 것입니다. 그분을 기독교에서는 주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타락한 역사노정을 엮어오고 또 걸어온 우리들에게는 내가 즐길 수 있었던 어떠한 생명의 감촉보다도 더 강하고 영원히 즐길 수 있는 생명의 감촉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생명이 감촉되는 한 자리는 영원한 안식의 자리요, 그 자리는 영원히 떠나고 싶지 않은 자리인 것입니다.

변화산상에서 변화된 엘리야와 모세와 예수님의 형상을 바라보는 세 제자는 그 변화산상에서 계속 있기를 바랐습니다. 여러분도 이것이 나의 영원한 복지요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곳이니, 시작과 끝의 한계를 볼 수 없는 그런 경지에서 살 수 있는 심정을 가져보고, 또 그런 체험을 해보았습니까? 온 천지만물이 머리 숙일 수 있는 생명의 위력을 갖고 나타나게 될 때 그는 만물의 영장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가 헤아리고 그가 바라보는 이념세계는 온 피조만물이 안식할 수 있고 깃들 수 있는 이념, 만물뿐이 아니고 하나님께서도 거기에 와 머무르고 싶어할 수 있는 그런 이념과 심정이 있어야 될 것입니다. 그래야 될 거예요.

또 어떠한 정적인 심정이 우러나온다 할진대는 온 만상이 그 심정과 더불어 화동할 수 있고, 하나님도 그 심정과 더불어 즐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정적인 경지가 있다는 거예요. 이러한 내용이 오늘날 인류역사 종말시대에 벌어지지 않으면 하나님의 섭리는 파괴의 섭리로 종결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 위에 섭리하셨던 것이 모두 허사가 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섭리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지금까지 수고해 나오고 계십니다. 그래서 오늘날 인류 앞에 새로운 생명의 동산, 새로운 이념의 동산, 새로운 사랑의 동산이 반드시 찾아오는 것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끝날을 맞이하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그러면 오늘날 이 끝날을 맞이하는 내 한 자체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고? 이 문제를 해결지으려면 우리를 위하여, 만민을 위하여 오셨던 메시아를 붙들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지금까지 역사적인 인연을 거쳐왔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섭리역사는 하늘이 사랑하는 택한 선민을 통해서 하신 역사였고, 사랑하는 아들딸들을 품기 위한 역사였던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6천년 역사를 밀어낼 수 있는 생명의 위력을 가지려면, 6천년 역사를 움직여 나오던 천적인 내용과 부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2천년 전에 오셨다 가신 예수님께서도 역사적인 하늘의 심정을 통하여 4천년 역사를 밀어냈습니다. 4천년 역사의 모든 것을 청산한 토대 위에 새로운 동산을 건설하고자 했던 분이 예수님이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그 예수님의 심정을 붙들고 역사를 청산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요, 그의 심정을 붙들고 미래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여러분은 자신이 예수님의 그 심정을 붙들고, 당시에 어떠한 새로운 이념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를 고대했던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니고데모를 대해서 네가 거듭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나는 어차피 역사적으로 부정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잘했다고 변명하고 스스로 세워 놓은 무엇이 있다 할지라도 내 한 자체는 부정되어야 합니다. 타락의 인간이기 때문에 그런 권내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부정되어야 할 생애요, 부정되어야 할 생활이요, 부정되어야 할 죽은 인생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상적인 것 같으나 정상적이 아닙니다. 비정상적인 생애를 살았고, 비정상적인 생활을 했고, 비정상적으로 죽었으니, 들어가는 곳이 지옥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천국은 어떤 곳이냐? 정상적으로 나서 정상적으로 생활을 하고, 정상적으로 죽는 사람만이 가는 곳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지옥과 천국을 분별하시고 지옥의 문을 닫고 천국의 문을 개방하여 천국을 건설하기 위하여 오셨다고 할진대는, 부정당할 수 있는 이념을 갖고 오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부정당할 수 있는 생명을 갖고 오시지 않았습니다. 부정당할 수 있는 사랑을 갖고 오시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이런 예수님께서 땅에 오실 때 누구를 찾아오셨던고? 4천년 동안 하나님이 천신만고 끝에 선민이라고 세워 놓았던 이스라엘 백성, 그 백성을 찾아오셨고 그 가운데에서 택해 세운 유대교를 찾아오셨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민의 종교인 유대교에 있어서 예수님은 절대적인 존재였습니다.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그 사회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십자가에 달려 사라진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에 있어서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예수님이요,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될 것이 예수님이 달려 돌아가신 십자가라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의 가치와 십자가

예수님은 어찌하여 이 땅에 오셨으며 누구를 위하여 오셨느뇨? 하늘을 대신해 나타나셨지만 땅에 온 것은, 하나님의 심정과 역사적인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심정을 품고 역사노정을 걸을 수 있는 인간들을 만들기 위하여 오셨다는 것입니다. 유대교인들이 하나님의 역사를 따라나올 줄은 알았으되 심정을 따라나오지는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받들어 나왔으나 하나님의 심정은 받들고 나오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 연고로 예수님은 오직 역사적인 심정을 붙들고 나타났고, 섭리의 배후에서 움직이신 하늘의 심정을 가지고 나타났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심정은 4천년 역사를 총합한 실체의 심정을 가지고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그 때의 이스라엘 백성과 유대교인들은 몰랐습니다.

하나님을 찾아 들어가는 것은 하나님의 심정을 통하여 나오는 생명을 붙드는 것이요, 하나님의 심정을 통하여 나오는 이념을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통하여 나오는 사랑을 찾는 것입니다. 심정을 거치지 않는 생명이 있을 수 없고, 심정을 통하지 않는 이념이 있을 수 없고, 심정을 통하지 않는 사랑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실 때, 심정에 있어서는 4천만 역사의 주인으로 오셨습니다. 그 심정은 천적인 심정을 대신한 것이기 때문에 그의 심정을 통해 나오는 것은 생명력을 가진 것이었습니다. 천적인 심정을 대신한 그 자체는 역사적인 생명의 실체였고, 역사적인 소망과 이념의 실체였으며, 역사적인 사랑의 실체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한 분을 이스라엘 민족보다도 더 중히 여겨야 하고, 이스라엘 나라보다도 더 중히 여겨야 하고, 유대교단보다도 중히 여겨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렇듯 중요한 예수님을 그때의 유대교인들은 잡아죽였습니다. 예수님 한 분을 가짐으로 말미암아 민족적인 심정을 가질 수 있고, 예수님 한 분을 가짐으로 말미암아 섭리적인 심정을 가질 수 있고, 예수님 한 분을 가짐으로 말미암아 그의 이념과 우주 전체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을 그 때의 유대교인들은 몰랐던 것입니다. 몰랐기에 예수를 잡아죽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이러한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들이 믿어야 할 것은 죽은 예수님이 아닙니다. 새로운 이념과 새로운 생명을 갖추었고, 새로운 사랑의 심정을 갖추었던 실체인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은 어디로 갔는고? 이 세상에는 계시지 않습니다. 가버렸으니, 죽여 버렸으니, 가고 말았으니 이 땅에는 계시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분은 어느 때 다시 오실 것인고? 지상에서 한 때를 사시다가 가셨던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다가 가시게 될 때에 새로운 형태의 이념을 세워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생명과 심정으로 엉킨 새로운 역사와 민족을 건설하여야 할 책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이루지 못하고 가셨기 때문에 다시 오겠다는 명사를 남긴 것입니다.

다시 오신다는 명사, 이 말은 무한히도 슬픈 뜻을 가진 말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이 말을 영광의 말로 알고 있습니다. 영광의 말로 알기 전에 돌아가신 예수님에 대하여 슬퍼하고 난 후에 다시 소망으로 바라야 할 그런 말씀이라는 것을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들은 이제 새로운 나를 찾아오시는 분이 있다 할진대 그분을 받들어야 되겠습니다. 그분은 새로운 나를 찾아오고 계십니다. 이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이 오셨다 가신 이후 2천년 역사가 경과한, 6천년 역사의 종말시대에 처하여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고? 아브라함의 후손은 아브라함의 충절을 본받아야 됩니다. 모세를 따라 나오던 이스라엘의 60만 대중은 모세의 충절을 본받아야 됩니다. 예수님이 오셨다 가신 이후의 2천년 기독교 신자들은 예수님의 충절을 본받아야 됩니다. 이것이 알파요 오메가일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역사를 섭리해 오신 하나님의 애달픈 심정을 품고 그것을 풀어 드리기 위하여 싸우는 무리가 되어야만 하늘의 심정세계에서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역사의 종말시대에 처한 우리의 신앙자세

어떤 효자 효녀가 있다면 그들은 어떤 사람일 것인가? 생활적인 면에서 즐거워하는 부모를 대한다고 해서 즐거워하는 사람이 효자 효녀가 아닐 것입니다. 즐거움이 이루어질 때까지의 파란곡절의 과거노정을 그 마음에 느끼면서 즐거워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들은 진실로 효자요 효녀일 것이로되, 즐거움이 이루어질 때까지의 모든 것을 알지 못하고 기뻐한다면 그것은 부모 앞에 불효가 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인간 세계에 있어서의 상정이라고 할진대는, 천륜을 대해야 할 미래의 섭리의 뜻 앞에 있어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분이었던고? 4천년 역사와 바꿀 수 있는 새로운 부활의 실체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역사노정에서 일찍이 보지 못했던 새로운 분, 하늘땅에 대신해서 새로 오신 분이라는 것을 그때 인간들은 몰랐습니다.

예수님이 사두개 교인을 위해 오셨고 이스라엘 민족을 위하여 오셨다는 것을 제사장이나 교법사들이 알았던들, 유대교 교인들이 그에게 가는 것을 반대하지 않고 어서 가시옵소서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다 막아 버렸으니, 30여년의 생애를 살다 가신 그리스도는 이 땅 위에 오셔서 불쌍하게 사시다가 불쌍하게 가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인류의 죄일 뿐, 하나님의 죄도 아니요, 예수님의 죄도 아닌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4천년 동안 수많은 선지선열들을 통하여 보내마 약속하셨던 그 메시아의 실체가 누우신 곳이 말구유였다니 이게 웬 말입니까?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말구유가 웬 말이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성탄절을 좋다고들 축하하고 있지만 가슴 아픈 일입니다. 통곡, 통곡, 통곡해도 그칠 수 없을 정도로 슬픈 날인 것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메시아 오시기를 고대한 그 정성에 사무쳐 있는 사람, 그 지성이 천성에 통할 수 있는 사람이 당시에 있었던들 오시는 메시아를 그렇게 모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를 맞아 준비를 한 사람이 있었어야 할 텐데 그런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끝날을 맞이한 시대에 있어서, 2천년 이전의 선조들, 다시 말해 6천년 전부터 4천년까지에 왔다 갔던 수많은 선조들에 대하여 원망을 품어야 되겠습니다. 원망은 무슨 원망이냐? 오신 메시아를 박대할 수 있도록 역사적인 인연을 맺게 한 선조들의 처사에 대하여 원망을 품어야 되겠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2천년 전의 유대교인과 바리새인들에 대해서 원한을 품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분함이 있었다고 하면,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분함이 있었을 것입니다. 유대교인들을 대하여 분한 마음이 있었지만, 그 선민인 그들을 버리고 가면 하늘의 발판이 끊어지고 말기 때문에 그들을 원망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이 4천년 동안 수고 하신 천적인 그 심정을 생각하여 보게 될 때, 자신이 그들을 원망하며 버리고 가면 이스라엘 민족에 대해 4천년 동안 수고하신 하늘의 역사가 전부 다 끊어지고 만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이것을 아신 예수님은 자기 죽음에 있어서는 민족적인 서러움이 있으되 역사적인 인연이 끊기기 때문에 그것이 두려워 원수에 대하여 복을 빌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기뻐서 복을 빈 것이 아니었습니다. 유대교인들을 사랑해서 복을 빈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사랑해서 복을 빈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역사를 섭리하시는 데 있어서 사무쳤던 그 심정에 염려를 가중시킬까봐 인류를 위해 복을 빌었던 예수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따라서 끝날에 처해 있는 오늘날 우리들은 분하게 가신 예수님을 대신 할 수 있고, 그의 십자가의 죽음에 대한 분을 품을 수 있어야 하나님의 심정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인간들은 예수님이 죽기 위해서 오셨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안 죽어야 할 예수님이 죽는 자리까지 나가게 되니 예수님도 슬펐고 하늘도 슬펐습니다. 하늘을 위하여 오셨던 예수님이요 민족을 위하여 오셨던 예수님이신데, 그 예수님을 죽이니 그날은 천지가 캄캄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날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를 위해 사셨는가

예수님은 인간 역사노정에서는 처음으로 새로운 존재로 이 땅 위에 태어나셨으나 사는 것은 불쌍하게 사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누구를 위해 사셨던고? 예수 자신을 위해서 사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몰림받은 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생명과 이념의 위력을 지니고 있었고 열렬한 사랑의 위력을 지니고 계시면서도 그 모든 것을 다 펼쳐 보지 못하고 사신 분이었음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누구를 위하여 사셨느뇨?

불쌍한 민족을 위하여 살다 가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산 실체를 가지고 죽은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지금까지 수고해 나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 이후 2천년의 역사노정입니다. 그분의 30여년의 생애는 누구를 위한 생애였던가? 예수님 자신을 위해서 사신 생애가 아니라, 하나님과 타락한 인류를 위한 생애였다는 거예요.

또 더 나아가서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은 지금까지 누구를 위하여 애쓰셨느뇨? 하나님께서도 지금까지 자신을 위하여 살아본 적이 없다는 거예요. 타락하여 죽어진 이 백성들을 다시 살리기 위하여 애쓰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끝날은 어떤 때뇨? 예수님이 자신을 위하여 살지 못하셨으니 그 예수님께 자신을 세워 살 수 있는 한 때를 인류가 부여해 드려야 됩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이 자신을 위하여 움직이지 못하셨으니, 그 하나님께 자신을 위하여 움직일 수 있는 한 때를 세워 드려야 됩니다. 그러한 때가 끝날입니다.

오늘 이 때까지 하나님은 타락의 혈통을 받은 인간, 죽은 인간들을 살리시려고 자기를 위하여 사시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도 2천년 역사를 거쳐오면서 자기를 위하여 사시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어진 인간들을 붙안고 다시 살려주기 위하여 새로운 날을 회복하시는 섭리를 6천년 동안 해 오셨습니다.

우리는 어떤 각오를 해야 되겠는가

그러면 오늘날 우리는 어떠한 각오를 해야 되겠는가? 새로이 탄생하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되겠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자신의 마음에 스며드는 생명의 위력을, 생명의 감촉을 느낀 바가 있었습니까? 이것만이 전인류가 찾아야 할 하나의 이념이라고 느낀 적이 있습니까? 이것만이 최후에 인간을 부활시킬 수 있는, 혹은 새로운 역사를 창설할 수 있는 것이라고 느낀 적이 있습니까? 있다 할진대 여러분은 자기만을 위하여 사는 생활 태도를 버리고 예수님이 가신 걸음을 다시 걷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땅을 바라보시고 이 땅에 하나님의 근심이 스며있고 하나님이 이루어야 할 수고의 역사가 남아 있는 한, ‘하나님이여! 그 모든 것을 저에게 맡기시옵고 안식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하고 싶었던 것이 바로 예수님의 심정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안식하실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슬퍼하시니 하나님도 슬퍼하셨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니 하나님도 죽음의 고통을 느끼시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가신 예수님을 우리들이 믿고 있는 한, 여러분이 부활하여 끝날의 심판대를 넘어서 가지고 부활하신 주를 다시 모실 수 있는 영광의 자리에 나아갈 수 있는 자신이 있다 하여도, 여러분의 마음은 영광의 세계를 흠모하여서는 안 됩니다.

예수께서는 이 땅 위에 만왕의 왕으로 오셔서 천국 주권을 회복하고, 하나님 앞에 영광의 아들로서 하나님을 안위시키고 만민을 안식시켜야 할 분이었으되, 한 때도 그런 말, 그런 심정을 가지고 즐거워해 보지 못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직 우리 인간들을 위하여 사시다 가셨습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의 심정의 친구가 되기 위하여서는, 하늘이 아직까지 이 땅을 붙들고 있고, 예수님이 아직까지 이 땅을 붙들고 있고, 성신이 아직까지 이 땅을 붙들고 있으니, ‘하늘이여! 삼위신이여! 이제 땅은 제가 붙들겠습니다,’라고 할 수 있는 심정이 있어야 합니다.

진정한 송영이 되려면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어떠했느뇨? 나실 때도 마굿간에서 나셨고, 사실 때도 몰리고 천대받으면서 사셨고, 죽으실 때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십자가의 길’을 통과한 그 심정을 느껴야 할 것이 오늘날 통일신도들 앞에 놓인 과제인 것입니다.

영광이 있다면 내가 영광을 노래하기 전에 주님이 아버지 앞에 노래하고 아버지께서 만민 앞에 노래하셔야 됩니다. 그런 후에 내가 영광을 노래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만민 앞에 영광을 노래할 수 있도록 하려면 먼저 이 땅이 천국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먼저 하늘을 안식시켜 드려야 되겠고 예수님을 안식시켜 드려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에게 창조주로서의 위신이 설 수 있도록 해 드려야 되겠고, 예수님에게도 구주로서의 위신이 설 수 있도록 해 드려야 되겠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위신은 일개 족속과 제한된 어느 민족 앞에 세우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하늘과 땅, 천상과 지상의 모든 존재물, 또 영계에 있는 수많은 영인들, 지옥에 가 있는 영인들까지도, 심지어 사탄까지도 ‘당신은 하늘의 아들’ 이라고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들은 슬픈 역사노정이 아직까지 종결되지 않았고, 심판의 때가 아직까지 당도하지 않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러분이 천적인 생명을 느끼고, 천적인 이념을 품고, 천적인 심정의 충격을 받았다 할진대 그 생명, 그 느낌, 그 이념은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물론 여러분에게 하늘의 소망을 인계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늘의 목적입니다.

하늘의 근심과 예수님의 근심이 이 민족 앞에 있으니, 우리에게는 이 민족 앞에 남겨진 그 모든 근심을 맡고 예수님을 해방시키고 하나님을 안식 시킬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 됩니다. 그리하여 그러한 마음을 중심삼고 여러분들이 어떤 싸움의 실적을 갖고 예수님의 친구가 될 수 있는 기준을 세워야만 비로소 여러분들은 실체를 가지고 부활 단계에 나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렇게 사시다가 돌아가신 후 부활했기 때문에 오늘날 지상에서도 그렇게 살아 가지고 부활했다 하는 자리를 넘어서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우리들은 새로운 나를 찾기 위해서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야 되겠습니다.

부활의 과정

하나님의 역사는 새로운 개인만을 찾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가정을 찾으셔야 하고, 새로운 민족을 찾으셔야 하고, 새로운 세계를 찾으셔야 하고, 더 나아가서는 천국을 찾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새로운 자체로서 그의 인격적인 가치, 천적인 인격의 기준을 이 땅 위에 세워 놓고 가지 못하신 연고로, 지상에 오셨다 가실 때에 신랑 신부라는 말을 남기셨습니다. 하늘의 뜻이 천적인 개체를 세우시어 가정을 찾고, 그 가정을 표준삼아 민족을 찾고, 그 민족을 표준삼아 국가를 찾고, 그 국가를 표준삼아 세계를 찾고, 더 나아가서 하늘땅을 복귀하여 천국을 건설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새로운 나, 부활된 내가 되기 위한 과정을 거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하나님이 우리를 바라보시고 ‘내가 너를 위하여 변명할 수 있고, 네 생명을 책임질 수 있고, 네 이념을 책임질 수 있고, 네 사랑과 심정을 책임지겠다.’고 할 수 있는 기준을 세워야 합니다.

어떠한 무엇이 침범해도 하나님께서 책임지겠다 하는 기준이 있으면 쳐도 또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그것이 있었기 때문에 이 땅 위의 수많은 사탄들이 쳤다 할지라도 부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생명적인 권한, 이념적인 권한, 사랑적인 권한이 하나님의 심중과 통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심정을 갖고 대신해서 움직였던 예수님의 실체는 부활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이런 심정을 갖고 있으면 내 생명의 위력을 누가 침범하며, 내 이념의 위력을 누가 침범하며, 내 정적인 위력을 누가 침범하겠습니까? 하늘과 더불어 있다 하면, 사탄에게 천만 번 맞더라도 또 천만 번 죽임을 당한다 할지라도 살아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권한을 갖고 심판대 앞에 나서야만이, 새로운 기준을 가진 새로운 나로서 하늘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고, 천국 백성으로 인정받을 수 있고, 천국 가정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에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고. 오늘날 우리가 새로운 내가 되기 위해서는 역사적인 모든 것이 전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끝날이 되면 나 자신이 죽어져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심판날이 오기 전에 사탄세계에서 죽어져 가지고 먼저 하나님의 심정과 하나님의 이념과 하나님의 사랑의 힘으로 죽음의 권한을 밟고 올라서서 부활의 영광을 느낄 수 있어야만 새로운 내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그런 심정을 품고 땅 위에 어떠한 폭풍우가 불어와도 늠름하게 하늘의 생명과 하늘의 이념과 하늘의 심정을 품고 그것을 녹여낼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만 고대하던 제2의 나의 모습, 새로운 나의 모습, 새로운 시대의 주인공의 자격을 갖춘 모습, 새로운 시대에 합당한 모습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원

지금 땅 위에는 하늘의 슬픔이 무엇인지를 헤아릴 줄 아는 사람이 없으며, 하나님의 사랑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혈통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념을 갖추고자 하는 민족이 없어요. 하나님의 생명이 연결되어 억천만대 연면히 하나님과 더불어 남아질 수 있는 혈통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오늘날까지 역사적인 모든 것을 사탄이 점거하여 나왔기 때문에 인간은 양자입니다, 양자. 혈통이 달라요. 그렇기 때문에 양자의 입장에서 새로운 모습을 갖추어 직계의 자녀가 되려면, 직계의 형태를 갖추어야, 즉 천적인 생명의 위력, 생명의 감촉, 생명의 이념, 생명을 지닌 사랑의 충격을 받아야 됩니다. 그렇지 않다 할진대는, 새로운 나로서의 천국 백성이 될 수 없고, 새로운 천국의 자녀를 가질 수 있는 부모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원이요, 인류의 소원이요, 예수님의 소원이요, 하나님의 소원인데 지금까지 이것을 몰랐습니다.

그런 견지에서, 여러분은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이제 새로운 생명을 찾는 마음이 없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만일 새로운 이념과 새로운 사랑을 찾아 헤매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새로운 시대에 남아질 수 있는 무리가 못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되겠습니다.

<기 도>

오고 가는 사람은 무수하였사오나 아버님을 대신하여 온 자, 아버님을 대신하여 간 자는 심히도 적었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이 땅을 중심삼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많았사오나, 아버님을 붙들고 사랑하는 사람은 없었던 것을 알았사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마음으로 그리고 동경하는 것은 소망의 동산, 이념의 동산이었으나, 아버님을 붙안고 이것을 소망의 전체라고 노래하는 사람은 없었사옵니다. 아버지, 오늘 여기에 모인 당신의 아들딸들, 이제 느낀 바의 무엇이 있다 할진대는, 아버님에 대한 감정을 느끼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이 이념의 전체요, 아버님이 생명의 전체요, 아버님이 사랑의 전체인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고, 아버님의 모든 뜻을 대신할 수 없는 저희인 연고로, 오늘 아버님께서는 그 위신을 세울 수 있는 환경에서 저희를 대하지 못하는 것이 서러움임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아버님의 위신을 세워 드릴 수 있는 저희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고 예수님의 위신을 세워 드릴 수 있는 저희가 되게 허락하여 주셨사오니, 땅 위에 슬픔이 있다 할진대는 그것을 내 것으로 도맡을 수 있는 모습이 되어야겠사옵니다. 땅 위에 고통이 있다 할진대 이것은 내가 맡아야 할 것임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땅 위의 저희들은 진정 아버지의 마음을 통해야 되겠고 예수님의 마음을 통해야 되겠사옵니다. 아버지의 슬픔과 어려움은 내가 도맡겠다는 각오를 하게 하여 주시옵고, 모든 것을 밀어내고 아버님의 생명의 은사를 느끼지 않으면 안 될 역사적인 전환기에 처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이제 저희가 새로운 마음 바탕을 갖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저희가 새로운 이념과 새로운 심정을 지니고 아버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한 기준을 갖지 못했다 할진대는 , 역사의 심판과 더불어 청산 받는 운명을 면치 못한다는 것을 이 시간 깨닫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예수님도 이 일을 위하여 사셨다는 것을 알았사옵고, 30여년의 생애를 자기를 위하여 사시지 않고 민족과 타락한 인간들을 위하여 사셨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이제는 예수님 자신을 위하여 살 수 있는 천국의 시대가 온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고, 그 나라의 백성으로, 그 시대의 택한 자로 서기 위해서는, 땅 위에 예수님이 겪으신 십자가의 고비 고비의 모든 길을 다 넘어 승리한 실체의 모습으로서 부활의 영광을 허락받지 않으면 안 될 최후의 과업이 저희에게 남아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여기에 모인 당신의 아들딸도 이러한 내용을 알았을진대는 그 실체와 그 뜻에 자신을 부합시키고, 그 뜻의 목적을 성취시키기 위한 하나의 실체적인 제물을 준비해야 될 줄 아오니, 아버님,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가 인정할 수 있는 승리의 제단을 조성하여 본연의 성전을 갖출 수 있는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 이 시간 이후의 모든 것을 맡아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이날에 행하는 전체의 일정에도 같이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오며, 이 민족과 식구들 위에도 일률적인 보호의 손길을 떼지 마시옵기를 부탁드리면서,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였사옵나이다. 아멘.

마태복음 10:34-39, 18:15-20

<기 도(Ⅰ)>

본연의 동산을 지어 놓고, 본연의 참다운 자식들을 품고, 본연의 심정을 통하여 즐겨야 할아버님의 이념은 이 땅 위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저희들이 알고 있사옵니다. 저희 인간들은 사망에 사로잡힌 그날부터 오늘날까지 본연의 심정으로 하늘을 노래한 때가 없었던 것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본연의 한 개체로서 아버지를 부를 수 있는 영광의 자리에 서지 못한 불쌍한 저희들을 용납하여 주시옵고, 본연의 심정을 갖추어 나의 아버지라고 간곡한 심정에 어리어 부르지 못한 것을, 아버지, 긍휼히 여겨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본연의 동산을 잃어버린 인간들은 사망의 세계에 떨어져 흑암과 싸웠사옵고, 원수들의 장중에 사로잡혀 탄식과 절망 가운데 있었사오나 본연의 마음의 흔적이 남아 있는 양심을 통하여서는 본연의 고향을 그리워하고 있사옵니다. 역사적인 싸움을 거쳐오면서도 시간 시간 느껴지는 하늘의 감촉을 통하여 하늘의 생명의 한 줄기를 찾아 나온 저희들을 협조해 주신 아버지, 감사하옵니다.

지극히 어리고 부족한 저희들이 이 한 노정에 시달려 지쳐 있음을 아버지 아시오니, 이 시간 다시 긍휼의 손길을 펴시옵소서. 재창조의 능력을 허락하시고 본연의 심정을 회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본연의 모습으로서 아버지께 접근할 수 있도록 붙들어 주시옵기를, 나의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저희는 이 땅 위의 모든 것을 끊고서라도 하늘이 소망하시는 본연의 세계를 향하여 가지 않으면 안 되겠사오니, 이제 저희에게 본향을 그리워하는 간곡한 마음이 사무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저희의 몸이, 저희의 다리가 피곤하게 될지라도 본향을 향하여 달릴 수 있는 자리로, 아버지, 몰아 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저희의 몸과 마음이 하나되어 하늘의 심정을 사모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아버님께서 최후에 저희 인간들과 더불어 즐거워하실 수 있는 행복의 동산을 저희로 하여금 건설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대의 억천만인이 말리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사랑의 마음을 갖고 그것을 밀고 나갈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타락한 무리들이오니, 어차피 복귀노정을 거쳐서 본연의 자체를 찾지 않으면 안 될 것이고, 본연의 고향을 찾아, 본연의 아버지를 모시고, 본연의 세계를 건설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임을 알고 있사옵니다.

오늘날 이 악한, 타락한 저희는 아버지의 사랑의 심정을 몰랐사옵고, 본연의 고향을 몰랐사옵고, 본연의 인격과 본연의 한 자체를 몰랐사오니, 아버지시여! 다시 말씀을 통하여, 인격을 통하여, 사랑의 심정을 통하여 본연의 그 한 자체가 될 수 있는 전체 요소를 구비하여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데 부족함이 없도록, 저희 한 자체를 영광의 모습으로 세워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러한 일을 막기 위해 수많은 원수 사탄들은 역사적인 노정에서 선조로부터 오늘의 저희 자체에 이르기까지 때와 시기를 개의치 않고 침범해 왔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이제 이를 거부하고 이를 제재해야 할 책임이 저희에게 있다는 것을 알고 나선 저희들이 아버지의 심정으로 무장하고 아버지의 말씀으로 무장하여, 원수들 앞에 당당하게 나설 수 있는 하늘의 참다운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제 저희 자체들이 본향을 찾아가지 않으면 안 되겠사옵니다. 저희의 가정과 저희의 사회와 이 강토 위에 살고 있는 삼천만 민중, 지구상에 널려 있는 수많은 인류, 영계에 가 있는 수많은 영인들까지 잃어버린 본향을 찾아 헤매고 있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아버지시여, 저희들로 하여금 아버님의 심정과 통하는 본향을 건설할 수 있는 책임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가 원수의 세계에서 참다운 아들딸들을 찾아, 그들을 규합시켜, 본연의 동산을 건설할 수 있는 하늘의 일꾼, 하늘의 정병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 일주일 동안 상한 심령을 그냥 그대로 지닌 채 아버지 앞에 나왔사오니,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옳지 못한 모든 것은 제거시켜 주시옵고, 아버지의 심정과 통할 수 있는 요소만이, 아버지의 본성에 화할 수 있는 본질적 요소만이 나타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최대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여 주시옵고, 찾아 드려야 할 본연의 한 자체를 찾아 즐길 수 있는 이 시간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부족한 몸들이 아버지 앞에 모여 경배드리는 시간이오니 성별시켜 주시옵고, 억천만 사탄이 틈타는 시간이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늘에 있는 천천만 성도, 천군천사가 옹위하여 아버지를 친히 모시고, 심정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인연이 맺어질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시간 이후의 전체 시간도 아버지께서 친히 주관하여 주시옵고, 운행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기 도(Ⅱ)>

이 땅을 섭리하시는 아버지! 탕감복귀해야 할 서글픈 역사상의 죄를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수많은 인류가 당신을 찬송하였사오나 당신의 뜻을 이루어 드리지 못한 채 슬픈 역사는 흘러 6천년이 경과했사옵니다. 그 모든 것이 누구 때문인가를 생각하올 때 황공한 심정을 금할 바 없사오니, 저희의 이 심정을 보시고 친히 찾아와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제 헝클어진 마음과 몸을 가지고 아버지의 존전에 무릎을 꿇었사옵니다. 저희들의 주인은 당신이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요, 저희들의 모든 사정을 통할 수 있는 분은 당신이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알고 있사오니, 사랑의 아버님이시여, 이 시간 당신이 주관하여 주시옵고, 당신이 권고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인간들이 아버님을 찾기 위하여 역사노정에서 허덕였다 해도 아직까지 아버님을 모시고 산 자들이 땅 위에 없었사옵니다. 이 땅의 어느 한 귀퉁이가 아버지 것이며, 어느 한 가정이 아버지 것으로 어느 것 하나 이 땅 위에 찾아 세우지 못한 아버님의 그 슬픈 심정을 감히 헤아릴 수 있사옵니다.

당신께 슬픔이 있다 할진대, 이 땅의 주인인 당신이 주인의 입장에 서지 못하고, 이 땅을 책임져야 할 당신이 책임지지 못하는 입장에 계신 것임을 알고 있사옵니다.

땅의 인간들을 책임져야 할 입장에 계시되 책임지지 못하는 섭리를 이끌고 나오신 아버지, 저희의 심정을 통하여 직접 주관하시고 직접 명령하셔야 할 입장인데도 불구하고, 그런 입장에 계시지 못한 아버지, 저희의 생활을 통하여 저희의 전부를 주관하셔야 할 아버지이심에도 불구하고 저희의 내적인 생활과 사정을 주관하지 못하시는 아버지, 저희를 두고 선의 결실이라고 찬양하여야 할 아버지이심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한 날, 한 때 한 사람을 찾지 못하신 아버지, 이런 서글픈 입장에 계신 아버지이심을 저희들은 몰랐사옵니다.

이제 저희가 이 땅 위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한이 있다 할지라도 아버지의 서글픈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아버지의 사정과 곡절을 친자녀의 입장에서 느낄 수 있고, 아버지께서 눈물 흘릴 때 같이 눈물 흘리고, 어려움을 당할 때 같이 어려움을 당할 줄 아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러한 사람을 세우기 위하여, 이러한 사람을 찾기 위하여 아버님께서는 오랫동안 수고하셨사오나 인간을 대표할 수 있는 주인공을 만나지 못하셨사옵고, 하늘을 대신할 수 있는 하늘의 법도의 주인공을 만나지 못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한 가운데 아버님께서 오랜 역사 과정을 거쳐 이스라엘 민족을 형성시켜 놓고 아버님을 대신하고 아버님의 심정을 붙들고 움직일 수 있는 실체 메시아를 땅 위에 보내셨사오나, 이스라엘 민족이 메시아를 모시지 못하고 메시아와 더불어 동거하지 못함으로 인해 세계를 유리고객했다는 사실도 알고 있사옵니다.

오늘 끝날, 다시 오셔야 할 주의 재림의 한 날을 바라고 있는 저희들이옵니다. 하늘을 대신할, 하늘이 찾고 계시는 그 하나의 모습은 하늘이 슬퍼하실 때 같이 슬퍼하는 자요, 하늘의 사정을 붙들고 하늘과 같이 싸우는 자요, 하늘의 기쁨을 대신하여 하늘과 더불어 노래하는 자라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이 땅 위에 수많은 인류가 살고 있사오나 역사와 더불어 시대와 더불어 미래를 대신할 하나의 존재를 알아보지 못한 것을 이 시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그 한 존재를 맞이할 수 있는 소망의 한 날을 바라보고 오늘날까지 무릎을 끓고 아버지 앞에 기도드렸사오니, 간곡한 사랑의 심정을 갖고 오실 귀한 실체를, 아버지시여! 허락하신 동산에, 허락하신 때에, 이 천지간에 맞이할 수 있는 기쁨의 날이 어서 속히 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님! 저희의 마음이 부족한 것을 알았사옵고, 저희의 몸이 속된 것을 알았사오며, 저희의 욕망이 사탄과 더불어 움직이고 있음을 알았사옵니다.

이러한 내적인 요소를 가진 저희들, 하늘을 대신하여 허락하신 한 때, 한 시대, 한 시기에 오시는 하나의 주인공을 기다릴 수 없는 처참한 모습들이오니, 불쌍한 자신을 걸어 놓고 탄식할 줄 알게 하여 주시옵고, 불쌍한 가정과 불쌍한 사회와 불쌍한 인류와 불쌍한 하늘땅을 걸어 놓고 탄식할 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슬픈 심정으로 하늘땅 앞에 속죄해야 할 때가 왔사오니, 아버님이시여! 저희의 마음 문을 열어 주시옵소서. 저희의 심정은, 아버지, 당신의 심정을 대할 줄 모르는, 대할 수 없는 입장이오니, 이러한 저희의 몸과 마음을 아버지의 형상과 아버지의 심정에 화할 수 있는 실체로 다시 빚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러한 저희들을 이대로 내버려 두면 사망세계에서 사탄의 밥밖에 되지 못할 것이옵니다. 6천년을 섭리해 오신 아버지시여! 이 끝날에 저희들을 버리지 마시옵소서. 저희를 통하여 승리의 표적을 세우고 승리의 동산을 건설하여 원수 앞에 자랑하려 하시는 아버지의 뜻이 남아 있음을 알고 있사오니, 어떠한 수고의 자리라도 동참하여 영광의 모습이 되게끔 이끌어 주시옵소서. 어떤 난관에 부딪쳐 깨어지는 한이 있다 할지라도 아버지의 뜻 대한 일편단심의 심정을, 하늘 앞에, 땅 위에 남길 수 있는 하늘의 충신들이 되게 이끌어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 이날 저희들 모였사오니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이제 저희가 아버님의 심정을 헤아리게 하여 주시옵고, 아버지 뜻 앞에 합당치 않은 것이 있다 할진대 그 일체를 제거시켜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심정이 저희의 심정이 되어 아버지 실체의 움직임에 저희의 몸이 아니 움직일래야 아니 움직일 수 없고, 저희가 아버지 앞에 회개하지 않을래야 회개하지 않을 수 없고, 저희의 사정을 털어놓지 않을래야 털어놓지 않을 수 없게끔 직접적인 능의 손길을 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하늘이 용납할 수 없는, 지금까지 갖고 나온 일체의 세상적인 관념이라든가 주의주장을 제거시켜 주시옵고, 그 모든 것을 아버지 것만으로서 화할 수 있게 본질적인 감성의 기준을 높여 주시옵고, 양심적인 기준을 높여 주시옵소서. 저희의 심정을 연결시키어서 아버지의 심정과 통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고, 천적인 사정과 통할 수 있는 이 한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 옵길,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 인간들이 제아무리 선하다 할지라도 아버지 앞에 얼굴을 들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는 죄악된 인간임을 깨닫게 하여 주시옵고, 자기 스스로 자기를 변명할 어떤 내적 조건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하늘 앞에 변명의 조건을 내세울 수 없는 타락의 후손인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길,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하늘에 있는 천천만 성도들을 보내시어 저희의 주위를 성별시켜 주시옵고, 저희의 심정 심정을 깨뜨리시어 아버지의 능의 손길로 다시 빚어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저희가 재창조의 말씀과 더불어 재창조의 성품을 받아 사망의 실체인 저희가 생명의 실체로 화하여 영광과 환희가 기쁨 속에서 아버지를 부르는 기쁨의 시간을 맞이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길, 나의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 이날은 거룩한 날, 만민이 당신을 높이 찬양해야 할 날인데도 불구하고, 이 민족은 당신을 알지 못하고 있사옵고 인류의 대부분은 당신을 반대하는 입장에 있사옵니다. 이러한 인류를 붙들고 슬퍼하시는 아버지의 곡절의 심정을 알아야 할 때가 왔사오니, 외로우신 아버지의 심정을 대신하지 못하고 외로우신 아버지의 모습을 대신하지 못한 역사적인 죄상을 느껴, 이 시간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하염없는 눈물이라도 흘릴 줄 아는 아들딸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심정의 억울함을 느껴 저희의 몸이 사라지는 한이 있을지라도 아버지의 심정을 노래할 수 있으며 그 심정을 위로해 드릴 줄 아는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 여기 모인 당신의 아들딸들, 불쌍한 자들이옵니다. 이들에게는 땅 위의 어떤 친구도 없사옵고 변명자도 없사오며 동역자도 없사옵니다. 외로운 고개, 외로운 길, 외로운 가시밭길을 지나 맞고 맞고 맞으면서 이 길을 찾아왔사옵니다. 이렇게 해서라도 가야 한다고 느낀 바가 있기에, 쓰러지고 죽더라도 이 길을 지켜야 할 뜻을 알았기에 오늘 아버지 앞에 모였사오니 긍휼히 보아 주시옵소서.

생명의 고갈을 느껴 아버지를 대신한 천적인 이념을 고대하고 있는 아들딸들, 이들의 생명을 책임질 분도 당신뿐이옵고, 이들의 사정을 위로할 분도 당신뿐이오니, 이들의 심정, 이들의 사정, 이들의 환경을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이들 위에 아버지께서 운행하시는 거룩한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고, 거룩하게 예배하는 이 시간 되게 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끝날, 시각을 재촉하는 이 시대에 당도한 저희들, 이제 저희의 머무른 자리, 머무른 그 위치가 어떠한 곳인가를 제3자의 입장에서 비판해야 할 때가 되었사오니, 나는 어떤 곳에 머물러 있으며 어떤 방향에서 어떤 목적지를 향하여 걷고 있는가 스스로 비판해 볼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늘의 바람과 저희들의 바람에 차이가 있다 할진대 그것을 해소하기에 수고하는 저희들이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님, 이 시간 저희의 마음과 몸이 통하여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시옵고, 아버지께서 동하면 저희도 동하고 아버지께서 정하면 저희도 정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께서는 경륜의 귀일점을 세워 주시고, 저희는 하늘의 심정을 대신한 하나의 모습을 갖추어 하늘의 영광을 노래하여 천상의 천천만 성도들까지 움직여 낼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이날 쌓고 있는 수많은 제단을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그들이 아버지 앞에 심정 심정, 가슴 가슴을 헤쳐 놓고 자기의 과거 모든 것을 털어놓아, 아버지로 말미암아 새로운 혈연적인 형제의 인연을 맺을 수 있는, 아버지의 경륜이 이루어지는 복귀의 한 날이 어서 속히 이 땅 위에 나타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시간도 외로운 식구들이 지방에 널리어 무릎을 꿇고 아버지 앞에 호소하고 있을 줄 아오니 그들에게도 같은 은사로써 역사하여 주시옵고, 심정이 미어지는 사정을 갖고 아버지 앞에 호소하는 곳곳마다, 아버님, 친히 사랑의 손길을 펴 주시옵고 생명의 움직임을 일으켜 주시옵소서.

이 시간 부활의 영광을 노래할 수 있는 주관권 내로 인도하여 주시옵고, 사랑의 심정으로 품어 주시옵소서. 어린이와 같은 심정으로 아버지를 흠모하고 갈급한 심정에 사무칠 수 있는 몸 마음이 되어 아버지 앞에 바쳐질 수 있는 저희들 되게 축복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올 때에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기 도(Ⅲ)>

아버님, 나의 아버님! 저희의 마음이 아버지의 것이라고 느낄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의 몸은 아버지께서 빚으신 흠 없고 티 없었던 본연의 아담 해와와 같은 모습인 것을 저희들이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마음과 몸이 하나로 화합하여 영광의 결실체로서 아버지께 바쳐져야 할 자신들이라는 책임감을 이 시간 스스로 느끼면서 나의 아버님이라고 부를 수 있도록 하늘의 은사를 이 시간 베풀어 주시옵소서.

인간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슬픔은 아버지의 사랑과 인연맺지 못한 것이요, 아버지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본연의 양심을 잃어버린 것이며, 그 심정과 양심이 화할 수 있는 몸과 마음이 화합할 수 있는 입장에 있지 못한 것임을 잘 알고 있사옵니다.

타락한 연고로 아버지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감각이 저희에게서 떠나갔고, 아버지의 심정을 체휼하여 만상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저희들에게서 없어졌사오니, 아버지, 그 심정을 회복할 수 있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저희의 몸과 마음이 하나되고, 저희 것이 아버지의 것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 것을 다 아버지 앞에 세워 놓고 자랑스런 모습으로서 사랑의 활개를 펴서 만물을 품을 수 있는 넓은 아량의 심정을 가질 수 있도록, 아버지! 이 시간 역사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나의 아버님! 이와 같은 심정에 통하게 할 수 있는 말씀이 이 시간 절실히 필요한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저희들이 잃어버린 것은 말씀이옵고, 그 다음은 실체요, 그 다음은 심정인 것을 알고 있사오니, 아버님, 말씀을 통하여 잃어버린 저희의 본연의 심정을 일으켜 주시옵소서. 본연의 말씀에 머리 숙일 수 있는 마음이 되고 본연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몸이 되어 아버지의 영광의 품에 안길 수 있는 은사를, 이 시간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일을 시작하신 분이 당신이셨사오매 이를 성취하실 분도 당신인 것을 알고 있사옵고, 선으로 시작하였으니 선으로 결말을 지어야 할 것이옵니다. 아버지께서는 나는 알파요 오메가라 하셨고 처음과 나중이라 하셨으며 시작과 끝이라 하셨사온데, 처음에 본연의 심정을 잃어버린 인간이기에 끝에 가서도 천적인 심정을 통할 수 없사옵니다. 이제 끝날에는 본연의 심정을 붙들고 심정을 연결지어야 할 터인데, 타락의 원한의 구렁텅이에서 허덕이고 있는 저희들임을 용납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시간 저희의 마음이 저희 것이 아니고 당신의 것임을 알게 하여 주시옵고, 저희 몸이 저희의 것이 아니고 당신의 것임을 알게 하시며, 저희들의 심정, 감성, 이 모든 것이 저희에게 속하지 않고 아버지에게 속하여 움직인다는 사실을 실체적이고 실증적으로 체휼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 이제 말씀을 전하고자 하오니 전하는 자의 마음과 듣는 자의 마음에 간격이 없게 하여 주시옵소서. 자기 주관적인 무엇을 세워 헤아린다 할진대 천성의 은사를 가로막기 쉬운 줄 알고 있사오니, 응함도 당신을 위하고 화함도 당신을 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 저희들 어린아이와 같은 심정으로 돌아가 들리는 대로, 또 느껴지는 대로 받아들이고, 모든 것을 아버지 장중에서 시작하여 끝을 맺을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님! 허락하신 말씀으로 예수님이 당시에 말씀하시던 그 심정을 통할 수 있고, 사정을 통할 수 있으며, 그의 이념과 소망의 실체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예수님을 맞이하여, 그의 사정과 심정에 화하여 아버지를 모실 수 있는 기쁨의 조건을 찾아 세우는 이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나이다. 허락하신 이 한 시간 아버지의 영광의 은사에 잠길 수 있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말 씀>

우리는 자신을 세워 놓고 볼 때에 나홀로 되어 있지 않은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자신과 어떠한 곡절의 인연을 갖고 있는 사회가 있고 가정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또 양심을 중심삼고 볼 때에는 크고 높은 선을 지향하는 어떤 인연 가운데 서로 얼크러져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얼크러져 있는 인간과 하늘의 소망

그러므로 우리가 자신을 완전히 해명하기를 원하고 완전히 안정된 위치에 서기를 원한다면 지금까지의 환경적인 모든 인연을 정리하고 새로운 가치와 절대적인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또 심적인 이념의 세계와 절대적인 인연을 맺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일을 오늘날 이 땅 위에 사는 동안 결정지어 그것을 하늘의 것으로서, 혹은 인류의 것으로서, 완전한 자기 것으로서 내세울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인간의 최대 희망이요 최대의 임무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탄식이 있다 할진대는 하나님께서 그런 입장에 계시지 못한 것이 아니라 친히 창조하신 인간이 천적인 가치와 화합할 수 있고, 만우주의 존재가치와 화합할 수 있는 존재, 안정된 위치에서 절대적인 인연을 노래할 수 있는 존재가 되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늘의 탄식이요, 인류 역사의 탄식이요, 오늘날 우리의 마음 세계에 탄식의 조건으로 남아져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자신도 모르게 이러한 절대적인 인연과 그 행복을 노래하고 싶고 자유와 평화의 이념을 노래하여 살고자 하는데, 그것이 마음과 몸 전체의 소원인데도 불구하고 마음으로 그런 세계를 이룬 자가 없고 몸이 그런 환경에서 살아 본 사람이 없습니다. 이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여러분의 생활이 증명하고, 여러분의 생애가 증명하는 바입니다.

이렇게 우리 자신을 헤아려 보고 제3자의 입장에서 냉철하게 비판해 볼 때에, 우리는 행복스러운 자가 아닙니다. 우리가 불행하다면 하늘을 대신하여 불행한 자요, 인류를 대신하여 불행한 자요, 사회를 대신하여 불행한 자라는 것을 우리는 자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나, 이러한 우리 자신을 해결짓든가 보충시킬 어떤 방안이 우리에게 없다 할진대, 우리는 절대적인 가치를 노래할 수 있는 안정된 자리에 머무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을 종교적인 말을 빌어 타락한 세상에서, 속된 죄악권 내에서 사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하늘이 계신다 할진대는 이러한 사람을 자유의 실체로 해방시켜 해방의 동산으로, 이념의 세계로 이끌고자 하실 것입니다. 만상을 대신하여 자기 자신의 가치를 존중시하며 만우주의 실존 세계와 더불어 움직일 수 있는 화동의 주체가 되는 동시에, 천상의 창조주가 스스로 우리의 움직임에 화하여 나타날 수 있는 그런 절대적인 모습이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인류가 바라는 최후의 소망일 것입니다. 하늘의 섭리의 뜻이 있다 할진대 그 한 존재가 찾아 세우려는 섭리의 최고 목적일 것입니다. 또 역사의 흐름이 있다 할진대는 이런 하나 하나의 사람들이 서로 통할 수 있는 세계를 건설하는 것이 그 흐름의 목적일 것입니다.

오늘의 나 자신을 놓고 보게 될 때에 어떠한 인연의 세계가 관여되어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오늘의 내가 있음은, 오늘의 나로 말미암아 시작되어 있게 된 것이 아니라 과거의 인연을 통하여 있고 시대적인 인연을 통하여 있습니다. 또 미래의 인연도 가져야 할 운명인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과거의 인연의 곡절, 시대적인 인연의 곡절, 미래적인 인연의 곡절, 더 나아가서는 천상과 내가 인연을 맺고 있는 이 곡절들을 어떻게 해명할 것인가? 어떠한 철학자가 있다면 이것을 해명하기 위하여 고심해야 할 것이고, 어떤 종교가가 있다 할진대는 이것을 해명하기 위하여 고심해야 할 것이며, 양심과 정적인 어떠한 인격자가 있다면 이런 이념을 갖고 노래하고 이런 주의와 사상을 갖고 주장하여야만이 과거의 역사와 현시대와 미래에 있어서 새로운 소망과 새로운 이념을 지니고 그 가치를 대신하여 나타날 수 있는 자격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류역사가 시작된 이후 온 세계 존재물 가운데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류의 어떠한 생애역사를 막론하고 이런 가치적인 실체로서 만우주와 더불어 노래하고 만우주의 행복을 찬양하여 그것을 인간 앞에 제시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면 하늘의 목적, 하늘의 소망, 또는 창조의 이념도 그러한 한 존재를 찾아 세우고자 하는 것이 기준이라 할진대, 하늘은 어찌하여 이러한 이념의 조건, 우리가 심정으로 찾고 인연 맺고자 하는 체휼적인 감정을 인간 세계에 나타낼 수 없었고, 또 우리의 역사적인 모든 위인들은 이러한 사정을 우리에게 소개하여 줄 수 없었던가? 인류역사가 우리들이 바라는 본질과 본성이 화합된 선의 세계를 재촉할 수 있는 발판이 되지 못하였기 때문임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도 선의 이념의 실체를 세워 그의 가치를 노래하고, 또 그의 가치를 배양하며, 그가 있는 곳에 우리가 머무를 수 있는 조건을 갖지 못한 사회라는 것을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역사와 사회는 우리의 이념세계와 상응될 수 있는 입장이 아니고 상반되고 상충되는 입장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고로 상반되고 상충된 이것을 해소시킬 수 있는 어떠한 하나의 행사라든가, 어떠한 하나의 주의라든가, 어떠한 하나의 주장이 나와야만 됩니다. 그냥 이대로는 모든 인간이 본심으로, 본연의 심정으로 헤아리는 이념세계에 도달할 수 없기에 어떤 하나의 주의나 하나의 이념의 그 방향을 제시하면서 나타나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상충되고 상반되는 그 모든 것을 돌이킬 수 있는 어떤 역사적인 조건과 시대적인 환경의 조건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종교를 통한 섭리역사의 목적

그런데 역사에 있어서 대중이 관심을 두지 않는 한 분야를 개척해 나오고, 그 시대에 있어서 대중이 호응치 않는 가운데 한 분야를 붙들고 나오는 것이 있으니,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왈 종교라는 것입니다. 종교라는 거예요. 역사의 흐름에 따르지 않고 그 역사노정에 상반되고 상충되는 일로를 걸어오면서 역사의 배후에서 전체의 선의 이념을 호응시켜 나오는 역사적이요, 사회적이요, 조건적인 하나의 기반이 있으니, 그것이 왈 종교라는 것입니다.

하늘이 역사와 더불어 우리 인간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어 나오시는데, 역사노정에 그러한 인연적인 발판과 조건적인 환경을 갖추어 놓지 않았다 할진대, 그 하늘은 오늘날 역사적인 우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취시켜 놓지 않았다 할진대 하늘은 오늘날 우리들의 양심과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인 인연을 거쳐 나오고 환경적인 기반을 조성해 나온 종교는 당시의 사회와 상반되는 입장에서 모든 것을 제창해 나왔습니다. 본인도 현실과 화합할 수 없는, 이 시대의 흐름에 상반되는 입장에서 제창해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언제까지나 이 사회와 화합되지 못하는 한, 역사적인 종말에 있어서 혹은 섭리적인 종말에 있어서 나타나는 행복의 동산, 다시 말하면 하늘이 동하고 인류가 동하고 온 우주가 동하는 행복하고 자유스러운 평화의 동산은 건설될 수 없고, 또 그러한 이념은 성립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늘이 깨져 나가면 우리의 양심의 절대적인 선의 기준도 깨져 나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 절대적인 선도 역사적인 인연의 과정을 거쳐야만 역사적인 인간과 관계를 맺을 수 있겠기에 이러한 섭리를 해 나오는 것입니다.

6천년이란 기나긴 세월을 거쳐오면서 하늘은 무엇을 하였던고? 역사상의 인류를 대하여 하늘은 새로운 선의 이념을 세우고 또 그것을 기반으로 종교의 형태를 갖추어 얽혀진 역사상의 모든 조건, 역사상의 모든 인연을 개방하기 위해 선의 이념을 제창하여 나오셨습니다. 개인의 역사성과 더불어 엉클어져 있는 것, 또는 민족이 세운 전통에 고착되어 있는 것을 개방시키는 운동을 해 나오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푸는 역사를 해 나오셨다는 것입니다.

역사의 시작은 선이 아니고 악이었습니다. 악이 먼저 출발하였습니다. 오늘날 공산주의자들은 변증법의 논리를 세워 그것의 핵심인 정반합(正反合)의 논리로써 역사를 해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닙니다. 반정합(反正合) 논리를 적용시켜야 합니다. 어떠한 정이 있는데 거기에 모순적인 무엇(반)이 나와 갖고 투쟁 과정을 거쳐 하나의 새것(합)을 빚어낸다는 논리는 맞지 않습니다. 옳지 못한 것(반)이 나왔으니 그것에 대비하기 위해 참된 형태(정)가 나와 가지고 그것과 화합하여 새로운 무엇(합)이 나온다는 논리를 적용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역사의 시작은 선이 아니고 악이었으니, 그 악에 대치하는 새로운 무엇(정)이 나와 그것에 악을 융합 시켜 나오는 것이 역사의 발전 과정입니다.

어차피 하늘의 목적이 이루어질 때에 가서는 최대의 선이 자리를 잡고 최대의 해결점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날이 역사의 종말이요, 종교의 종말이요, 그 시대의 인류가 품은 소망의 종말이요, 천적인 섭리의 종말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은 개인을 붙들고는 개인을 개방시키기 위하여, 민족이 다르고 환경이 서로 다른 입장에서 잘못된 습관과 고루한 전통에 젖어 있는 사람들을 개방시키기 위하여 갖은 고생을 겪어 나오셨습니다. 이렇게 역사적인 우리 선조들로부터 오늘의 우리들까지를 이끌고 계시는 하늘이 있음을 우리는 고맙게 생각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인류역사가 맺힌 역사인 고로 하늘은 지금까지 이 맺힌 인류역사를 푸는 섭리를 하고 계십니다. 엉클어지고 맺혀진 역사, 그 역사가 하나님의 선의 이념과 화할 수 있는 인연의 역사가 되지 못하고, 거기에 상반되는 정적인 타락의 내용을 중심삼고 인연되어 있는 역사인 연고로 하늘은 이것을 개방시키는 역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릇된 역사를 개방시켜야 할 뜻이 있기에 하늘은 개인을 붙들고는 개인을 개방시키고, 가정을 대해서는 가정을 개방시키고, 민족을 대해서는 민족, 국가를 대하여서는 국가, 세계를 대해서는 세계를 개방시킬 수 있는 한 날을 찾아 나오시는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염두에 두어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 앞에 말씀드리려 하는 제목은 ‘풀어 놓고 풀어 놓아야 할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맺히고 막힌 이 모든 인연의 역사를 부정하는 입장에서 역사적인 종말시대를 바라보면서 이 세계가 하나님의 경륜에 의해 풀리는 그 날까지 싸움을 계속하면서 섭리해 나가신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개방운동을 해오신 하나님의 섭리와 오늘의 양상

풀고 풀어야 할 하나님의 뜻, 이런 하나님의 뜻이 역사를 개방시키는 일이라 할진대, 역사적으로 관찰해 보면, 과거의 모든 주권 형태는 개방운동을 통해 점점 무너져왔고 이 시대에 와서는 민주주의 형태까지 개방운동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늘은 중세시대에는 농노를 해방시키고, 그후 봉건사회를 개방시키고, 군주국가를 멸망시켜 오늘의 민주주의 형태를 이루어 나옵니다.

그런 가운데 하늘은 전체가 국가를 대신하고, 전체가 세계를 대신하고, 전체가 이념을 대신하고, 개체가 전체를 대신할 수 있고 전체가 개체를 대신할 수 있는, 전체가 개체를 무시할 수 없고 개체가 전체를 능히 대할 수 있는 그러한 기준을 향하여 개방운동을 해 나오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역사적인 방향과 상응되는 방향이 아니라 상반되는 방향으로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인 종말시대인 오늘날 2대 조류가 대치하고 있는데, 그 하나는 공산주의요 하나는 민주주의입니다. 공산주의와 민주주의가 대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역사적인 실증으로 보아 민주 진영은 하나님의 섭리의 뜻을 옹호하는 기반 위에서 움직이는 진영입니다. 그러면 공산 진영은 무엇이냐? 외적인 것, 즉 물리적인 기반 위에서 움직이는 진영이요, 심적인 기반을 갖고 있는 우리 인간 세계에서 용납할 수 없는, 우리와는 반대적인 입장에 있는 진영인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러면서 쌍방이 세계적인 개방운동을 표방해 나오고 있습니다. 세계적인 표준에서 쌍방이 개방운동을 표방해 나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이 두 진영이 부딪치게 될 텐데 그 때에는 어떤 것이 옳은 것인가, 옳지 않은 것인가, 어떤 것이 정(正)인가 부(否)인가 반(反)인가 하는 것이 판단될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의 가치를 논하게 될 때에 그 외적인 모양이 잘났다고 해서 그 사람을 훌륭한 사람이라고 평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의 가치를 평하게 될 때에는 무엇을 중심삼고 평하느냐? 그가 갖고 있는 사상과 양심 기준입니다.

그리고 그 사상과 양심 기준에 심정문제가 어느 정도까지 개재되어 있는 가에 따라서 그 사람의 인격을 논하는 것입니다.

개인의 인격도 그렇거니와 주의 사상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외적인 형태만으로 이념을 세운다 할진대 인간은 그것을 만족할 수 없습니다. 외적인 것에만 만족할 인간은 절대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행복을 느낄 때도 내적인 행복의 기준을 세워 놓고서야 외적으로 행복하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질입니다.

그러므로 물질을 기반으로 하고 오늘의 현실사회를 토대로 한 주의와 사상은 최고의 선을 향하여 움직이는 인간을 대해 그들이 소개할 바, 그들이 연결지을 바를 다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신을 인정하고 신의 움직임에 따라 양심을 움직이고 이 양심을 기반으로 주의와 사상을 제창해야 합니다. 평화와 행복, 사랑을 앞세워 무조건 봉사하고 무조건 희생하는 본질적인 요소를 지닌 이러한 주의와 사상을 갖지 않고는, 양심을 통해 선을 자동적으로 감촉하고 자동적으로 체휼하지 않고는 우리 인간 세계에서 행복의 조건을, 행복의 이념을, 행복의 주의를 세울 수 없다는 것을 우리들은 잘 아는 바입니다.

역사는 흘러 민족주의 사상은 지나갔고 지금의 때는 세계주의 사상이 전체를 대신하여 설 수 있는 시기입니다.

이 세계는 어떠한 기구나 어떠한 대표적인 인물이 지배하는 세계가 되어야 할 것이 아니고 민주주의 형태, 평등한 입장에서 만민이 이 세계는 내 것이야, 주권도 내 것이야, 이념도 내 것이야 할 수 있는 세계가 되어야 합니다. 하늘은 이런 경지까지 나아가도록 역사를 개방시켜 나오고 있습니다. 이렇게 섭리해 나오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돌이켜보면, 시대의 조류와 상반된 위치에서 내적인 면에서 섭리해 나오십니다. 각각 다른 민족이지만 전체가 움직일 수 있는 선의 방향을 세워 민족을 단결시켜 나오는 것입니다. 민족과 민족이 움직일 수 있는 중간적인 새로운 종교 형태를 갖추어서 민족과 민족을 규합시켜 나오고 있습니다.

오늘날 이 천적인 섭리의 뜻을 대표할 수 있는, 하늘의 섭리 앞에 나설 수 있는 어떠한 종교가 있다 할진대 이는 오랜 인류역사의 전통적인 기준과 더불어 역사적인 모든 기준과 시대적인 환경과 더불어 앞으로의 소망적인 이념에 응하여 나갈 수 있는 내용을 갖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 관점에서 각 종교를 살펴보면 어떠한 종교보다도 기독교가 더 지도적인 위치에 있는 종교입니다. 연면한 전통을 갖고 있는 동시에 섭리의 뜻을 대신한 이 기독교의 역사는 인류역사의 움직임에 있어 변혁 혹은 혁명 과정을 거치면서도 연면히 계속되어 오늘의 시대도 움직일 수 있고, 미래의 소망의 기반도 될 수 있는 내용을 갖추어 나온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역사가 발전하고 진보함에 따라 인간이 고취하는 주의와 사상, 혹은 민족적인 모든 전통도 변혁해야 되겠기에 섭리의 뜻을 대하는 모든 종교인들에게는 세상과 인연맺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이것을 시대적으로 보면, 외롭고 형편없이 불쌍한 자리에 그들이 처한 것 같지만 역사를 알고 변혁해 나오시는 하나님 편에서는 그렇게 막고 이끌어 나오는 것이 도리어 사랑인 것입니다.

과거 구약시대에는 법도를 통하여 하늘 앞에 나아가게 했고, 신약시대에는 인격을 표방하는 믿음을 통하여 하늘 앞에 나아가게 하는 섭리를 해 나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구약시대가 끝났듯이 앞으로 주님이 다시 오시면 신약시대도 끝이 납니다. 다시 말하면 종교도 최후에는 개방적인 역사관을 포섭할 수 있는 형태로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적인 종교를 보면 기독교를 위시하여 불교, 유교, 회회교가 있는데 이것을 어떻게 터뜨릴 것이냐 하는 것이 앞으로 하나님의 섭리 프로 가운데 중대한 문제일 것입니다.

개방역사를 통해 본 기독교의 사명과 그 본질

하늘이 개방역사, 해방역사를 제시해 나온다 할진대 교주를 중심삼은 시대, 교주를 존경하는 시대는 지나가야 됩니다. 군주를 높이는 봉건사회를 깨치기 위하여 투쟁역사를 전개시킨 것과 마찬가지로 종말시대에는 자기들이 숭배하는 교주와 평등한 가치를 논의할 수 있는 종교가 필요합니다. 모든 종파를 통할 수 있는 인격자를 하늘은 찾으실 것입니다. 그럴 것 아니겠어요? 그래야만 역사적인 종말시대에 개방섭리의 뜻을 종결지을 수 있습니다.

지금 기독교를 믿는 크리스천들은 이방 종교를 열교(裂敎)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과거의 그 형태로 있게 되면 새로운 한 때에 가서 그것을 개방하려 할 때 천만 배의 수고가 필요합니다.

과거의 모든 것을 합해서도 안 되지만 끝에 가서는 그것을 하나로 청산 짓고 개방시켜, 역사도 이념시대, 주의 사상도 이념시대, 우리의 마음도 이념시대, 하늘도 이념시대에 들어갈 수 있는 이러한 개방역사를 제시하는 주인공이라야 하나님 것이 됩니다. 또한 그런 주인공이 움직여 나오는 종교라야 세계 인류가 숭상할 수 있는 종교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날 기독교 신자들은 하늘의 섭리가 이런 개방운동을 해 나온다는 것을 알았다 할진대 자신의 신앙 관념을 개방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긴박한 문제입니다. 동시에 사회의 전반적인 조건들이 하늘이 인정할 수 있는 인연의 조건이 되지 못하였으니 그 모든 조건들을 개방시켜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럴 게 아니에요? 지금까지는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어 나왔지만 앞으로는 종교와 정치가 규합되어 들어갈 것입니다. 구교인 바티칸 왕국은 머지않아 정치적인 형태를 갖추고 나와서 이념이나 사상을 내세우는 체제와 싸울 때가 올 것입니다. 두고 보세요.

그런 연고로 개방, 이 개방의 방향은 하나는 오른쪽이요 하나는 왼쪽으로, 좌우의 방향으로 역사가 갈라져 내려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무한대로 갈라져 파괴될 것이 아니라 하나의 목표를 두고 너도 필요하고 나도 필요한 입장으로 이끌어져야 할 것입니다. 즉 좌우로 갈라진 목적은 파괴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완전히 하나로 규합시키기 위한 것이었음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사상에서도 그렇거니와 종교의 이념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세계 종교임을 자처하고 있는 기독교, 또 자기들에게 그런 가치관이 있다고 자처하는 크리스천들, 그들이 그들의 마음과 교파를 어느 정도까지 개방할 수 있는 융통성을 갖고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언젠가 하늘이 시대적인 종말의 첨단에 서서 각 종교와 교파, 또 신도들을 대하여 제창할 때가 올 것입니다. 그런 때가 반드시 올 것입니다.

오늘의 기독교를 살펴보면 기독교 역시 과거의 구교의 의식을 중심삼고 행하던 것처럼 어떤 형식과 관념에 얽매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의식과 형식에 얽매어서는 하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형식과 의식을 주관할 수 있는 인격자는 하늘 앞에 설 수 있으되 형식과 의식에 구애받는 자는 하늘 앞에 설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루터는 어떠한 형식이나 관념을 타파하고 성서를 위주한 신앙으로 하나님 앞에 돌아가자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그런 고로 말씀을 의지하여 살고 있는 사람들, 말씀에 지배받는 사람들, 말씀에 구애받고 말씀에 의하여 움직이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딸이 못됩니다. 말씀을 지배할 수 있고 말씀을 할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이 예수였기에 그 대신 설 수 있는 사람이라야 하늘의 아들딸이 될 것입니다. 하늘은 그런 사람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여기에서 오늘날 우리가 신교나 구교를 막론하고 고대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성경의 말씀도 필요하지만 말씀의 중심인 실체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은 무슨 말이냐 하면, 예수 한 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한 분을 고대해야 합니다. 말씀은 지나가도 좋거니와 지나가서는 안 될 것이 무엇이냐 하면 말씀의 주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기독교의 최후의 목표는 무엇인가? 성경 완성이 아닙니다. 말씀 완성이 아닙니다. 말씀을 통과하여 말씀을 좌우할 수 있는 하나의 실체입니다. 그가 왈 재림주요, 그가 왈 기독교의 소망의 표본일 것입니다. 또 그 실체는 비단 기독교뿐만이 아니라 불교나 유교 모든 종파의 소망의 표본일 것입니다. 그 한 실체를 바라보는 각도는 달랐지마는 그들이 증거하고 소개한 내용은 하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떠한 종파든지 반드시 재현해야 할 그 한 실체에 대한 인격 기준을 명시해 놓은 것을 보아 알 수 있습니다.

성약시대는 평신도들이 책임을 감당해야 할 시대

오늘날 기독교의 역사를 살펴보면, 즉 6천년 역사를 살펴보면, 구약시대인 율법주의 시대가 있었고 신약시대인 믿음의 시대가 있었으니, 이제 앞으로는 새로운 뜻을 이룰 성약시대가 와야 합니다. 종적인 역사가 그렇게 움직여 나오고 있습니다. 어떠한 제도나 주권을 갖고 전체를 움직일 수 있는 시대는 지나가고 개인에 의하여 주권이나 조직이 좌우될 수 있는 시대로 바뀌어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한국 기독교를 보면 교직자들을 위한 교인, 교직자를 위한 단체 같습니다. 그러나 원래의 기독교는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교인들을 위한, 양떼들을 위한 목자요 지도자이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사시대는 지나갑니다. 지나가요. 때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냥 두어서는 안 되겠다는 거예요. 하늘은 그렇게 섭리해 오십니다. 뜯어 놓는다는 거예요. 이렇게 해서 목사시대가 지나가면 장로시대가 옵니다. 무슨 장로, 무슨 장로가 나왔습니다. 그리고는 집사시대로 들어갑니다. 그래서 무슨 집사, 무슨 집사가 나왔습니다. 그러면 집사시대가 지나가서 어떤 시대로 갈 것이냐? 평교인시대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에게 역사적인 종말도 평등하게 찾아오는 것이요, 섭리적인 종말도 평등하게 찾아오는 것입니다. 시대를 대표한 교단도 평등한 기준에서 움직여 나갑니다. 예수도 나를 위하여, 목사들도 나를 위하여, 교인들도 나를 위하여 있다는, 그러한 하나의 기준 앞에서 절대적인 가치를 존중해 가지고 전체적인 가치에 대비할 수 있는 존재를 찾아 헤매는 것이 하늘의 섭리역사입니다.

한국 교계는 어떻게 될 것인고? 그렇게 됩니다. 두고 보십시오. 이제 한국 교회 앞에, 세계 교회 앞에 부르짖어야 될 것은 무엇이냐? 교권자들의 위신은 내려가고 평등 형태를 갖추어야 되고, 세계의 종교는 통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슨 세계니, 무슨 연합이니, 기독교의 무슨 연합이니 하는 것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평신도들이 책임을 감당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역사를 돌이켜보더라도 그렇지 않아요? 구약시대는 하나님이 직접 섭리하시던 때요, 신약시대는 아담 해와 대신 예수와 성신이 섭리하시던 때였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이 끝날은 우리들이 섭리하여야 되는 때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우리의 손으로 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교권자의 지배 밑에 살던 생명은 필요 없습니다. 나의 가치를 세계적인 가치와 평등하게 대비하여 즐길 수 있는 생명의 가치를 우리는 가져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청년 남녀들은 오늘날의 현실 교회를 대하여, 교파주의를 대하여 먼저 반기를 들고 나서야 될 것이며 평신도의 단결을 외쳐야 되겠습니다. 평신도는 단결하여 옳지 못한 모든 교직자들을 추방하는 운동을 해야 합니다.

시대사조는 이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옛날에는 어떤 주권자나 제왕 혹은 군주들이 하나님을 대신한 행세를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하나님이에요? 그 사람들만 하나님 행세를 해야 돼요? 아닙니다. 아니에요. 만민이 하나님의 혈육을 받고 난 아들딸인 고로 어느 누구든지 하늘의 아들딸인 것입니다.

그래서 민주주의 형태가 나왔습니다. 너에게도 나에게도 하나님의 아들 딸 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시고 개방역사를 전개시켜 나오셨습니다. 전부다 개방시켜 나오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오늘날까지 왔으니 이제 개방시켜 나온 이 역사를 어떻게 수습할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역사와 섭리와 종교가 개방되고 평등의 형태를 갖추어서 움직이고 있거늘, 세계 사조가 이렇게 움직이고 있거늘, 이렇게 움직이는 세상을 어떻게 조정할 것이냐? 이것이 오늘날 정치가의 고민이요, 역사가의 고민이요, 종교가의 고민인 것입니다. 어떻게 수습할 것이뇨?

하나님은 죄악의 역사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기 위하여 6천년을 수고해 오셨습니다. 수많은 선지선열을 희생시키고 더 나아가서는 사랑하는 독생자 외아들까지 희생시키면서도 참아 나오셨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개방시켜 온 이 세계를 다시 한번 질서 있는 새로운 형태로 바꾸어야 할 천적인 사명이 남아 있다는 것을 오늘날 크리스천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오늘날 인류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어떠한 종교도 어떠한 종파들도 모르고 있습니다. 사회와 종교가 이렇게 움직여 나오거늘 끝날에는 어떻게 될 것이냐. 이제 우리들이 고쳐야 할 것은 고쳐야 하겠습니다.

누구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라

예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 10:34)고 하셨습니다. 놀라운 선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메시아를 평화의 왕으로, 만민의 죄를 속죄해 주기 위한 구세주로 알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는 놀랄 만한 선언을 해 버린 것입니다. 민족적인 면에 있어서도, 사회적인 면에 있어서도, 국가적인 면에 있어서도, 가정적, 개인적인 면에 있어서도, 즉 존재하는 모든 것에 걸릴 수 있는 일대의 선언이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니라.”(마 10:35)고 하셨습니다. 이런 말이 있을 수 있어요? 더 나아가서는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마 10:37-38)고 하셨으며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 10:39)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시대적인 관점에서 보면 모순 중의 모순된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 이후 2천년 역사가 경과했지만 우리가 예수님 당시를 섭리의 종합시대요 섭리의 규합시대로 안다 할진대, 그 시대에 제창했던 말씀은 어차피 종말시대에 풀려야 됩니다. 성경 66권의 풀려지지 않은 모든 말씀도 종말시대에 풀려야 됩니다. 얽혀진 이 세계가 풀려야 되고, 얽혀진 어떠한 주권도 풀려야 되고, 얽혀진 어떤 사회, 어떤 가정, 어떤 개체를 막론하고 종말시대에는 풀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과연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여러분은 생각해 보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보다 나를 더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혁명의 언사 중의 혁명의 언사였습니다. 여기에는 자신의 부모에 대한 관념이 개재되지 않았고, 사랑하는 아들딸에 대한 관념도 개재되지 않았고, 사랑하는 부부에 대한 어떤 관념도 개재되지 않았습니다. 하늘은 이 세계가 타락한 세계인 것을 인정하십니다. 이 역사는 어디서부터 출발하였느냐? 아담 해와가 사탄을 중심삼고 혈연관계를 맺어 벌어진 역사입니다. 천사장과 맺은 정을 기반으로 역사는 시작되었습니다. 그러한 기반을 통하여 번식된 우리, 악을 중심으로 악의 씨를 번식하고 있는 국가와 민족을 하늘은 용납 하실 수 없습니다. 하늘의 고충이 여기 있는 것입니다.

노아의 여덟 식구만 남겨 놓고 전세계를 쓸어버린 노아심판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하늘은 120년 동안 방주를 지은 노아의 여덟 식구만 남겨 놓고 당시의 인류와 번식되었던 모든 것을 물로 심판해 버리셨던고? 하늘이 사탄의 피를 받고 난 그 때의 인류와 만물을 심판하고자 하신 것은 하나님의 심정과 연결될 수 있는, 하나님을 중심삼고 마음과 몸을 화합하여 혈연적인 인연을 맺을 수 있는 혈족과 만물이 필요하셨기 때문입니다. 사탄과 인연을 맺은 혈족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인연맺을 수 있는 혈족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은 노아의 여덟 식구를 남겨 놓고 전세계 인류를 멸해 버리신 것입니다.

예수가 만민의 구세주로 오셨는데 어떤 구세주로 오셨느냐? 어떠한 주의 사상을 고취시키러 오신 구세주가 아닙니다. 사회 환경을 개척하여 행복한 환경으로 만들기 위해 오신 구세주가 아니에요. 그러면 어떤 구세주였느냐. 만민의 생명을 하늘 생명으로 옮겨줄 수 있는 구세주, 하늘의 이념을 갖추게 해줄 수 있는 구세주, 하늘의 생명과 하늘의 이념을 갖추어서 하늘의 사랑을 즐길 수 있는 입장으로 만민을 옮겨 줄 수 있는 구세주였습니다. 이런 내용을 갖고 오신 예수의 생애를, 그런 심정을 갖고 오신 예수의 생명을, 그런 내용을 갖고 오신 예수의 사랑의 심정을 인간 중에 어느 누구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그런 연고로 예수께서는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요 3:12)고 탄식하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 8:20)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무엇을 기반으로 하신 말씀인가. 오늘날 세상의 어떤 주의나 사상, 혹은 어떤 제도를 기반으로 하여 혹은 자신의 가정적인, 어떠한 정적인, 인정적인 기반을 중심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이념을 중심삼은 제도를 생각하면서, 그 새로운 제도권 내에서 즐길 수 있는 생명의 실체를 꿈꾸면서, 나아가 그 실체들이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한 사랑을 노래할 수 있는 때를 그리는 심정에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에 예수는 머리 둘 곳이 없었습니다. 예수는 지극히 외로운 사람이요 불쌍한 사람이었습니다. 왜? 세상과 정반대, 세상과 180도 반대 방향의 내적인 심정과 세계관을 갖고 오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머무르던 장소도 원수의 땅이요, 그가 살던 생활 환경도 원수의 환경이었고, 그가 지배받던 주권도 원수의 주권이었고, 그가 사랑을 찾고자 하는 곳도 원수의 세계였습니다. 그러니 그가 움직이는 데는 평화가 있을 수 없었습니다. 부딪치는 것마다 원수였습니다, 원수.

그런 가운데서 하늘의 생명적인 기반을 세워 놓고 하늘 대신 개방운동을 해야 할 책임을 짊어진 예수, 하늘의 영원한 이념적인 기반을 세워 놓고 그 이념을 중심삼고 혁명을 일으켜야 했던 예수였습니다. 오늘날 여러분이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십자가에 피흘려 죽어서 만민을 구원한 졸장부 예수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억천 만민의 심정 심정과 양심을 꿰뚫어 가지고 예수가 우하면 그들도 우하고 예수가 좌하면 그들도 좌할 수 있는 운동을 일으키려 했던 예수였습니다. 예수의 관심은 거기에 있었습니다.

개방역사를 규합시킬 수 있는 내용과 기준

하늘은 개방운동을 한다고 하셨습니다. 시대도 개방, 역사도 개방, 이 세계의 모든 주의나 사상도 개방, 종교도 개방, 이 모든 것을 개방시켜 놓고 무엇으로 이것을 규합시킬 것이냐? 인간 세상에 없었던 하나의 심정으로 규합시킬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인간이 타락의 인연에서 빚어진 인종인 연고로 그릇된 관계의 세계를 타파시키는 역사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끝날에는 예수께서 과거에 주창하신 것과 같이 나의 부모, 나의 자식이, 즉 부자지관계가 원수가 되어야 합니다. 너희 부부, 네 가정 자체가 원수라 하셨거늘, 오늘날 가족을 단위로 사회적인 형태를 보세요. 부자지관계의 의리가 깨져 나갑니다. 그렇지 않아요? 부모가 자식을 죽이고 자식이 부모를 죽이고 부부의 의리가 깨져 나갑니다. 가정적인 의리가 깨져 나갑니다. 인간들이 제창하던 윤리 도덕도 깨져 나갑니다. 종교의 교리도 깨져 나갑니다. 그리하여 이것인지 저것인지 알 수 없는 시대에 봉착했습니다. 다 흔들렸어요.

이런 알지 못하는 입장에서 낙망하고 탄식해야 할 입장에서 ‘아버지여, 어서 이런 시대가 오게 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하는 무리가 삼천만 민족 가운데에서 나타나야만 되겠습니다. ‘어서 그런 시대를 만들어 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하는 하늘의 아들딸들이 나와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예수께서 선언하신 말씀이 자동적으로 그 외적인 형태나마 이루어져 가고 있는 것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께서는 왜 이런 말씀을 하셨는고? 어차피 지나가야 할 역사요, 지나가 버려야 할 정적인 기반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연고로 예수께서는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천정을 품고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셨습니다. 천정을 대신하여 우리 신도들을 형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끝날 이 시대에 전세계 인류는 무엇을 느껴야 될 것인고? 하나님께서는 개방운동을 펴셔서 역사도, 종교도, 우리의 가정적인 기반도 개방하셨거늘, 이제 이것을 규합시킬 수 있는 하나의 기준은 무엇일 것인고? 그것을 찾아봐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 앞에 만물을 주관하라는 축복을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인간의 주관권 내에서 움직일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런고로 오늘날 세계는 인간들이 주관할 수 있는 세계 형태로 되어가고 있습니다. 외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복귀한다고 말하였으니, 복귀하는 데는 하나님으로부터 복귀할 것이 아니라 개인으로부터 복귀해야 됩니다. 그 다음에 가정복귀로 들어가 형제를 복귀하고 부모까지 복귀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제 예수를 대신할 수 있고 예수께서 제창하신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정적인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자체를 그리워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그러한 자체가 문제입니다. 아무리 여기에 수많은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제일 사랑하는 사람은 두 사람이 있을 수 없습니다. 정적인 세계는 두 사람이 주관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의 기독교, 움직이고 있는 사회역사, 이 모두를 총합하여 역사적으로 대표할 수 있는 민족, 시대적으로 대표할 수 있는 민족, 종교적으로 대표할 수 있는 민족, 그 가운데에서 그러한 주의와 사상을 대표할 수 있는 한 사람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하늘은 이것을 벌려 놓고 수습해 나오시는데 여기에 하나의 중심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4천년 역사를 벌려 놓고 그것을 다시 수습하기 위한 대표적인 사명자로 오셨던 분이 예수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6천년 역사의 모든 것을 벌려 놓고 다시 수습하기 위하여 오시는 분이 재림주라 하였거늘, 그 재림주는 어떠한 주의 사상을 갖고 오실 것인고? 심정주의사상을 갖고 오십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사상주의시대 이전까지는 진리주의시대였습니다. 어떤 철학적인 기반이라든가 어떤 지식적인 기준을 갖고 사회를 지도해 나왔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날 사상주의시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철학적인 기반에서 움직이고 있으되 그것도 사상권 내에서 서로 비판받고 있습니다.

다시 오시는 주님이 갖고 오실 내용과 그 역할

그 다음에 이 사상주의시대가 지나고 인간이 요구하는 최후의 시대는 정적인 주의시대입니다. 인정이 아니라 천정을 통할 수 있는 정적인 주의시대입니다. 우리는 그 시대를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아무리 잘났다고 하는 무엇이 있다 할지라도 반드시 그런 시대가 와야만 역사는 해결될 것입니다.

이러한 세계적 종말시대가 온다 할진대, 종교이념을 지닌 세계적 종교를 헤아려 보면 기독교가 이것을 잘 간파해 나왔습니다. 그러면 그 기독교의 정적인 기반은 무엇인가? 나는 신랑이요 너희는 신부라 하여 신랑 신부의 횡적인 관계를 세운 그 주의, 하나님은 아버지요 나는 아들이라 하여 부자 관계의 인연을 맺을 수 있었던 그 주의, 만민이 형제라 하여 온 세계 인류를 형제로 연결시킬 수 있었던 그 주의, 그것은 관념주의가 아니라 양심을 넘어선 정적인 주의입니다. 이 시대가 천정을 통할 수 있는 천주주의시대인 것입니다.

하늘은 하나의 온전한 것을 찾기 위하여, 완전한 하나가 나오게 하기 위하여 거짓된 것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부패하는 듯하다가 새로운 혁명의 깃발이 나오는 것과 마찬가지로 세계가 분열되는 듯하다가 내적으로 통합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원칙이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세계가 반드시 올 것이어늘, 이러한 세계가 전체로 오는 동시에 개체로 올 것이어늘, 문제는 전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개체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체를 존중시하는 우리의 관념, 나에 대한 관념이 문제예요. 그러면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하늘은 여러분을 대해 어떤 주의, 어떤 종교, 어떤 역사적인 사조, 어떤 위치에 놓여 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이 물음에 대하여 여러분이 ‘아버지여!’ 하고 나타나는 데는 옛날에 이스라엘 선민을 대하여 주장하고 나선 예수와 같이 ‘화평케 하러 온 것이 아니라 분쟁을 일으키러 왔다.’고 할 수 있는, 또 그런 자신을 갖고 늠름한 모습으로 ‘인간을 사랑하는 것보다 하늘을 더 사랑하라.’고 하며 나타날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런 책임을 완수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해방시켜야 합니다. 우리의 역사도 해방, 종교도 해방, 심정세계도 해방시켜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지금까지의 주의와 사상과 이념을 대신한 새로운 이념, 지금까지의 생활 환경에서 갖고 있던 생명력을 대신한 새로운 생명력, 이 생명력과 이념과 더불어 즐길 수 있는 새로운 심정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당시 사탄세계에 오셨던 연고로 그 시대에 환영받은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 시대에 어떤 친구나 동조자를 가진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 시대에 몰림받은 예수요, 혈혈단신 십자가까지 넘어가신 예수였습니다. 하늘을 대표하여 오신 분이었지만 원수의 땅 사탄세계에 오셨기에 사탄세계의 원수였습니다. 원수를 환영할 수 있어요? 원수를 환영하는 것, 그것은 거짓입니다.

오늘날 민주사회에서 그 사회를 반대하는 어떤 대표자가 나오면, 공산사회에서 그 사회를 반대할 수 있는 하나의 주의를 갖고 나오면, 기독교 사회에서도 그 기독교의 사상으로부터 반대를 받을 어떤 주의를 갖고 나오면, 심정세계의 어떠한 주의를 갖고 나오면 모든 인간들이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시대가 왔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역사를 해결하고 시대와 미래를 해결하고 천륜을 해결지을 수 있는 것은 오늘날 기성적인 세계 형태가 아닙니다. 여기에 반대받는 새로운 형태, 우리의 양심을 넘어서 심정을 통할 수 있는 내용, 인륜 도덕을 초월하여 천륜을 통할 수 있는 내용을 가진 새로운 형태라야 되는 것입니다. 기성 관점에서 기성 논법을 변증하려는 논리 말고 기성논법을 새로운 논법에 융합시키고 화하게 할 수 있는 논리적인 내용을 갖춘 주의라야 합니다. 양심을 가진 천만인이 있다 할지라도 그들 앞에 그런 말씀을 전하고 그런 이념을 소개하면, 오늘날 그들의 양심 방향을 180도 돌릴 수 있고 양심혁명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양심혁명을 일으킬 수 있는 이념뿐만 아니라 그 양심이 돌아선 후에는 그 양심을 꿰뚫고 있는 천정이 우리 마음과 영원히 갈라질 수 없는 정적인 인연을 맺어 줄 수 있는 하나의 주의, 하나의 이념이 나타나면 마지막 시대입니다.

예수의 신랑 신부의 이념과 하나님의 사랑

예수께서는 이런 것을 무지한 인간들에게 가르쳐 주기 위해 제창하기를 ‘나는 신랑이요 너희는 신부’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신랑이요 너희는 신부’라고. 신랑 신부, 오늘날 세상에서 말하는 남녀의 정적인 이념 이상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관계를 말한 것입니다. 양심의 방향과 정적인 이런 움직임이 하늘을 대하여 움직일 수 있는 자리에서부터 역사는 새로운 관문을 거쳐 새로운 세계로 나아간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 정도까지 개방시켜야만 하늘의 일이 종결된다는 것입니다.

인류역사 과정에서 정적인 문제는 혁명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2천년 전에 주장하시기를 ‘어미나 자식이나 누구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합당치 않다.’고 하셨습니다. 놀라운 말씀입니다.

그러면 더 사랑하라고 했는데 그 내용이 무엇인가? 그 내용은 예수께서 돌아가셨기 때문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그 내용을 찾고자 하는 때가 우리의 소망의 때요, 재림의 때라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말씀은 하셨으나 말씀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그 내용이나 주의 사상이 나타나지 않았으니, 그것이 나타나는 날에는 세계는 평화의 세계가 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 중심은 양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양심을 가진 사람이라 해도 주관하지 못하십니다. 여러분이 양심을 가진 선한 사람이라 해도 하나님이 이리 가라 저리 가라 마음대로 못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과 정적인 인연을 맺었다 할진대는 얼마든지 주관하실 수 있습니다.

사람의 타락은 양심을 잃어버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정적인 관계를 맺지 못한 것이 타락입니다. 그러니 양심을 넘어서서 하나님과 정적인 인연을 맺어야 합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하늘의 원한이 풀리고 복귀섭리는 끝이 나는 것입니다. 그런 기준이 인류 앞에 나타나야만 하늘을 대신한 인류가 될 수 있을 것이고, 그런 주의와 사상, 그런 종교적인 이념을 실천해야만 하나님께서 이 땅 위의 모든 만물권에까지도 운행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대에 분파적인 종교는 추방해야 합니다. 통일교회 이전에도 종교란 명사는 무수하게 많았습니다. 우리는 교파의 탈을 벗겨 버리고 형태적인 교회를 없애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정적인 교회, 개인적인 교회를 고대하십니다. 만물권까지도 선의 성전, 지성소가 되어 자유자재로 운행하실 수 있게 되기를 하나님께서는 고대하고 계십니다. 이런 동산을 바라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애당초 인간이 가진 심정과 하나님의 심정이 결합된 인연을 잃어버린 것이 타락인 연고로, 그러한 인연을 맺으려 하는 것이 하늘의 복귀섭리요 인간의 소망의 기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섭리와 소망의 대표로 오신 예수는 자신을 신랑이요 우리를 신부라 하셨습니다. 그런 경지를 넘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될 것이뇨? 여러분에게 신랑 신부 이상의 감정과 충격과 흠모와 사모의 심정으로 하늘을 중심삼고 체휼한 무엇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무엇이 없다 할진대 여러분은 못 넘어갑니다.

이렇게 개방시켜 나온 인류 앞에 하늘은 다시 무엇을 내놓으려 하시는가? 지금까지의 역사는 인간의 사랑이란 두 글자로 메꾸어 나왔습니다. 이것을 깨쳐 버리고 다시 하나님의 사랑이란 두 글자로 메꾸려 하는 것이 하나님의 복귀섭리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체휼한 사람 있습니까? 여러분 중에 신비스러운 경지에 들어가 하나님의 사랑을 체휼한 사람이 있다 할진대, 여러분의 사랑의 감정은 그것이 존재세계 전체의 감정을 총합한 것임을 느꼈을 것입니다. 인간의 사랑의 감정이란 것은 존재세계 전체의 의식을 총합한 감정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 그 순간은 존재세계 전체의 감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 가치를 가진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의 경지는 개체가 전체, 전체가 개체를 통할 수 있는 경지입니다. 영계는 이런 사랑을 기반으로 하는 초자연적인 인식세계입니다. 그러므로 그 세계는 시간과 공간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태양 빛을 중심삼고 만물이 그 빛을 흠모하여 방향을 돌리는 것과 마찬 가지로, 어느 누구든지 인간의 본성이 요구하는 하나님의 정적인 기반을 갖고 나타나면 그 앞에 만민이 머리 숙일 것입니다. 그런 때가 반드시 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조건을 제시하기 위하여 오셨던 예수였습니다. 그 예수께서 돌아 가셨기 때문에 정적인 인연의 기준을 지상에 내놓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탄식이며 하나님의 6천년 원한이요, 예수의 2천년 원한입니다. 그래서 이 원한을 해원성취할 수 있는 한 날을 바라보고 나오는 것이 6천년 섭리역사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때가 그렇고, 개방역사를 규합하시려는 하늘의 뜻이 있다 할진대, 타락된 우리는 ‘하나님이여! 당신의 사랑이 어디 있습니까? 당신이 사랑하는 교파, 당신이 좋아하는 종, 당신이 사랑하는 아들딸은 어디 있습니까?’라고 기도해 봐야 되겠습니다. 만일에 그러한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는 이 시대에 몰리는 사람일 것입니다. 하늘은 알파요 오메가라 했으니 형태가 작고 크고 차이는 있을망정 처음과 끝이 같은 모양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아담 해와를 잃어버리실 때 느끼셨던 슬픔을 느낄 줄 아는 참다운 인간의 모습이 나타나야 됩니다. 그가 하나님 대신자입니다. 역사노정을 거쳐오시면서 만민을 대하여, 이스라엘 선민을 대하여 슬퍼하신 하늘을 붙들고 역사를 대신하여 울어줄 줄 아는, 그런 감정을 느낄 줄 아는 심정의 소유자가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사망권 내에서 어디로 갈 것인지를 모르고 헤매고 있는 인류를 바라보고 그 시대를 대신하여 하나님과 같은 심정을 느끼고 자기 몸 둘 바를 몰라하며 하늘 대해 애달피 축원하던 무리, 참다운 양떼들이 유린당하는 것을 보고 자기 위신이 어떻게 되든 개의치 않고 허덕이는 심정을 가졌던 무리는 그 시대에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하늘 역사가 그렇거늘, 개방과 더불어 다시 규합해 들어가는 종말시대에 하늘의 심정과 통하고자 하는 심정이 아무리 갈급하다 하더라도 심정을 통하는데는 대번에 통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심정을 잃어버릴 때까지 어떤 과정을 거쳤던고? 하나님의 말씀을 잃어버렸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아 하나님께서 지어 주신 몸뚱이를 잃어버렸습니다. 몸뚱이를 잃어버린 이 후에 하나님의 사랑도 잃어버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귀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입니다.

엉클어졌던 모든 것이 풀어지려면

오늘날 우리에게는 몸과 마음에, 본성에, 본정에, 양심 깊이 숨어 있는 심정에까지 미치어 영원히 영원히 움직여 나가게 할 수 있는 말씀이 있어야 됩니다. 양심을 놓고 양심 가운데 숨어 있는 심정을 일으켜 하늘의 사랑을 흠모할 수 있는, 이런 내적 능력을 갖춘 말씀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들으면 지금까지의 어떤 주의, 어떤 사상, 어떤 관념적인 인식까지도 일시에 무너뜨려 버리고 새로운 심정이 우러나와 천적인 일을 하겠다고 할 수 있는 이런 말씀이 나와야 합니다. 오늘날 종교가 있고 기독교가 있는데, 기독교가 해야 할 일이 그것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셔도 해야 할 일은 그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에 영원히 붙들리게 할 수 있는 말씀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말씀과 화합한 실체가 되어야 합니다. 사탄세계와는 인연맺지 않고 영원한 하나님의 세계와 인연 맺어야만 그 생활이나 심정문제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수 있는 하나의 인격을 갖출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사랑하실 것 아니에요. 좋지도 않은 것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실 것 같아요?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신랑 신부라 하셨는데, 이 말씀은 외적인 말씀이요 편지와 같은 것입니다, 편지. 지금까지의 종교는 양심종교였습니다. 심정종교가 아니었어요. 심정적인 표적은 세워 놓았으나 심정적인 내용은 갖추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말씀은 양심적인 형태요 약속의 편지였어요. 그러니 이 편지 말씀의 내용을 통할 수 있는 심정의 말씀을 찾아야 합니다. 내가 그 말씀에 영원히 취할 수 있는 심정의 말씀, 그 말씀을 그리워하고, 그 말씀과 더불어 즐기고, 그 말씀과 더불어 사랑하고, 그 말씀과 더불어 살 수 있는 그런 내용의 말씀은 없을 것인가 찾아봐야 합니다. 그 다음에 우리는 아버지의 말씀의 실체가 되어야 합니다. 만우주를 대신하고 하늘이 부정할 수 없는, 예수께서 신부라고 아니할 수 없는 실체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천적인 사람이 됩니다.

이제 여러분이 믿고 있는 성경 말씀을 모르겠다, 예수가 누구인지 모르겠다, 말로만 알지 심정적으로는 모르겠다, 관념적으로는 예수를 알지만 체휼적으로는 모르겠다, 이래서는 안 됩니다. 이래 가지고는 예수와 하등의 관계가 없어요.

오늘 이 때를 말하기를, ‘찾아야 할 때’라고 하였습니다. ‘구해야 할 때’ ‘문을 두드려야 할 때’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높은 벽돌집이나 넓은 문을 왕래하면서 찾기를 수십년 했지만 못 찾았습니다. 그러니 반대 방향에서 찾아야 합니다. 하늘은 뒤에서 우리를 밀어주며 나오는 것입니다. 마주쳐 옵니다, 마주쳐 와요. 그래서 하늘은 선한 사람을 끌어다가 악한 세상으로 몰아내는 거예요. 핍박받는 무리에게 하늘의 새로운 역사가 내재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다고 그러한 무리가 통일교인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처음 온 사람들은 ‘에이, 통일교회 저저 에이….’ 그럴지 모르겠습니다만 여러분 나름대로 생각하세요.

앞으로 이 세계의 종말시대에는 공산주의도 반대하고 민주주의도 반대하는 어떠한 이념을 가진 주의나 사상이 나와야 됩니다. 기필코 나와야 돼요. 공산주의와 민주주의가 합동작전을 하여 ‘저 주의를 몰아내자.’ 또 교파나 종파, 무슨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하여 40여파가 있는데 전부 통합하여 ‘그 하나의 단체를 몰아내자, 그 하나의 움직임을 몰아내자.’ 하는 하나의 주의나 사상이 역사의 종말시대에 나타나야만이 새로운 역사는 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의 주의나 사상이 나타나면 거기에 가고 싶고, 있고 싶고, 살고 싶은 감정이 여러분의 마음에 우러날 것입니다. 그와 같이 보고 싶은 감정, 움직이고, 살고 싶은 감정이 우러나고 또 말하는 것, 사는 것에서 그럴 수 있는 감정이 유발되어 나온다면, 그것이 나타나는 그곳은 인류역사의 최종점일 것입니다. 최종의 주의일 것입니다. 심정의 내용을 소개할 수 있는 최종적이고 역사적인 것일 것입니다. 엉클어졌던 모든 것을 개방시키고 그것을 다시 규합시켜 하나의 심정과 하나의 이념과 하나의 생명체에 결부시킨 하나의 인격자, 그 이념에 의한 하나의 세계관, 그 심정을 노래할 수 있는 만우주를 화동시킬 수 있는 하나의 주의나 사상이 나와야 합니다. 그래야만 개방시켜 나오신 하나님의 전체의 뜻이 비로소 풀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늘이 안식할 수 있고, 하늘이 안식하므로 만민이 안식하고 역사도 안정점을 잡아 새로운 시대로 출발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기 도>

하늘의 역사노정은 푸는 역사노정인 것을 알았습니다. 저희의 몸과 저희의 마음에는 식욕과 정욕과 탐욕이 있는 것을 아옵고, 수면욕도 있다는 것을 아옵니다. 이러한 것들을 가진 인간을 중심삼고 하늘이 역사 노정에서 섭리하시고자 얼마나 많이 허덕이셨던가를 생각할 때,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임을 알게 되오니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하늘이 푸는 역사노정에 있어서 보이지 않는 수많은 사탄들은 반대로 얽어매기 위한 역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았습니다. 푸는 역사라고 말했으나 반대의 세계에서는 얽어매는, 다시 새로운 곳으로 못 나가게 하기 위하여 얽어매는 역사의 일면도 있다는 것을 오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매기 위한 슬픔의 역사와 풀기 위한 기쁨의 역사가 교차되는 환경에 처해 있는 저희들, 몸은 매기를 고대하고 마음은 풀기를 고대하는 탄식권 내에 있는 저희들, 이 마음을 들어 몸을 쳐서, 몸이 마음 앞에 굴복하는 기쁨의 한 시간을 가져야 할 슬픈 역사의 종점을 바라보고 있는 저희들, 이런 경지에 있는 자신들임을 망각지 말게 하여 주시옵고, 이런 천운권 내(天運圈內)에 있는 자신들임을 망각지 말게 하여 주시오며, 이런 복귀섭리의 해원 과정에 들어서 있는 자신들임을 잊어버리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랑의 아버님이여! 참으로 오랫동안 수고하셨습니다. 하나의 사상을 중심삼고 얽어매기에 얼마나 수고하셨으며, 하나의 이념을 예고시켜 민족 민족을 움직이기에 얼마나 수고하셨습니까? 또한 이것을 외적으로 세워 놓고 내적으로는 역사의 배후에서 이것을 생명적인 선의 기준과 연결시키기 위해 종교를 세워 놓고 그 종교를 움직여 나오는 과정에서 얼마나 수많은 희생자를 내었습니까? 안팎으로 희생자를 내면서 수고하신 아버지 앞에 오늘 이렇게 개방적인 세계를 바라보는 저희들의 마음, 듣고 알고 깨닫고 보니 황공하고 망극하옵니다.

아버님이여! 본연의 실체의 한 자체가 이렇게 원한의 역사를 개척하여 나왔다는 사실을 아는 저희들, 죄악된 자들이요, 아버지의 수고 앞에 빚진 자들이요, 아버님 앞에 용납받고자 나서기에 말할 수 없이 민망스러운 자 들이온데, 이런 환경을 모르고 도리어 하늘을 배반하기를 일삼았고, 하늘은 풀고자 하시는데 매기를 몇천만 번, 오늘도 내일도 계속해야 할 운명에 처해 있는 저희들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여기 모인 당신의 아들딸들, 이들의 마음이 무엇에 매어지기를 바라고 있사옵니까? 이들의 몸이 무엇에 매어지기를 바라고 있사옵니까? 오늘날 아버님이 모르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이념에 매어지기를 바라는 자들도 있사옵고, 주의나 사상, 혹은 인륜 도덕에 자기의 양심과 몸이 매어지기를 원하는 자들도 있사오나, 본성을 통하여 헤아려 보면 그들은 영원히 아버지 앞에 설 수 없는 서글픈 환경에 처해 있음을 알게 되옵니다.

이러한 노정을 앞두고 나아가는 인류 가운데에는 자기도 모르게 스며드는 초조와 불안과 서글픔의 심정을 체휼한 자들이 많사오나 그것을 막을 자가 없사오니, 아버지, 역사와 더불어, 때와 더불어, 주의와 더불어 즐거워하지 못하고, 생의 원칙을 모르고, 생의 방향을 모르고, 생의 노정을 모르고, 생의 목적을 모르고 허덕이는 인류를 누가 책임져 주겠습니까?

아버지, 참다운 청년 남녀들을 불러 삼천만 민중 앞에 세워 주시옵소서. 몰리고 맞는 저희들의 인연이 귀중하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남다른 길로 몰아내신 아버지의 섭리의 손길에, 수고의 손길에 역사의 피어린 자국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므로 저희들은 역사적인 슬픔의 자리를 거쳐 나가지 않으면 안 되겠사옵고, 역사적인 핍박과 과정과 역사적인 죽음의 고개를 넘지 않으면 안 되겠사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으면 나에게 합당치 않다고 하신 말씀을 이루어야 될 것이요, 나를 위하여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고 하신 말씀이 이루어져야 할 때가 온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님! 오늘 저희들은 남이 아니라 하는 길을 걷고 있사옵니다. 맞고 맞으면서 막고 막는 수많은 담을 밀고 넘고 나와 아버지 앞에 부복하였사오니, 슬픈 심정을 붙들 줄 알고 슬픈 사정을 붙들 줄 아는 천정과의 인연을 가졌다 할진대, 그 인연을 통하여 서로 존중하고 서로 생각하는 마음이 커서 세상에 있을 수 없는 하나의 천적인 인연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저희들은 그 인연이 이 땅 위에 처음 나타나는 인연이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저희들은 저희들 끼리끼리 서로 풀어야 되겠습니다. 맺힘이 있다 할진대 푸는 것이 역사노정의 원칙인 연고로, 예수는 원수를 대하여 맺힌 원한의 심정을 나타낼 수 있는 자리에서 원수 대하여 풀려 하셨기에, 원수 세계를 푸는 해원의 동산을 건설할 수 있는 자격자가 되었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하늘도 이 일을 기뻐하시어 예수를 부활의 자리에 내세우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민족 앞에 배척받고 민족이 원수의 자리에 선다 해도 그 민족을 원수시하는 저희들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세계가 저희들을 반대한다 하더라도 원수시하지 말고 그들 앞에 개방된 하늘의 심정만을 남겨 놓기 위하여 원수의 심정을 넘어설 수 있는 천적인 심정의 소유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고, 천적인 생명의 지도자가 되게 하여 주시오며, 생명의 주권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 모인 당신의 아들딸의 몸 마음에 역사적인 서글픔을 느끼는 대신 역사의 해원 기준을 찾을 수 있는 심정을 갖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들이 영광의 은사, 영광의 생명, 영광의 이념, 영광의 사랑을 노래할 수 있으며, 우주 전체의 가치를 노래할 수 있으며, 이념의 세계에서 하늘을 대신한 내 개체성을 존중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한 저희의 영광의 가치, 절대적인 가치를 만물 만상 앞에, 사탄 앞에 내어 보여 자랑할 수 있는 당신의 아들딸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면서,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옵나이다. 아멘.

창세기 2:1-25

<기 도(Ⅰ)>

본연의 모습을 바라볼 줄 아는 본연의 사람이 천지간에 없음이 아버지의 탄식이었음을 이 시간 저희들이 느끼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본성을 받은 인간들이지만 아버님께서 그들과 더불어 즐거워 할 수 있는 한 날을 친히 가져 보시지 못한 아버지의 슬픔을 이 시간 저희들이 생각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더 나아가서는 그 슬픔을 저희들이 직접 체휼할 수 있는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크나큰 이념을 지니시고 기쁨의 동산을 꿈꾸었던 아버지 앞에 슬픔의 탄식을 안겨 드린 인류 조상의 흠을 용서하여 주시옵고, 그 소망을 다시 찾기 위해 수고와 곤고의 역사노정을 거쳐오시게 한 지금까지의 저희 선조들의 잘못을 다시 한번 용납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당신이 천추의 한을 걷어치우고 승리하여 당신의 이념을 이루실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고, 또 믿고 있사옵니다. 그 일을 위하여 저희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 충성하고자 하오니, 아버지시여, 그 마음과 뜻을 주관하여 주시옵고, 승리의 한 표준을 거둘 수 있는 아들딸의 모습이 되게 인도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들이 일주일 동안 지내는 가운데 아버지의 뜻과 아버지의 심정과 아버지의 이념에 대해 간절한 마음을 갖지 못한 생활이 있사옵거든 용납하여 주시옵고, 아버지의 심정과 통하기를 간절히 고대하였사오나 일치되지 못하는 기준에 선 저희들을 용납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역사노정의 선조들을 대하여 오시면서 슬퍼하시던 아버지의 심정을 알고 있는 저희들, 끝날을 맞이하고 있는 이 때에 있어서 선조들의 허물과 인류의 모든 허물을 저희들이 책임지고, 아버지의 그 심정을 위로할 줄 아는 최후의 참다운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사랑하는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비록 불충스럽고 불비한 몸들이지만 이 아침에 아버지 앞에 경배드리기 위하여 무릎을 꿇고 부복하였사오니, 아버지, 굽어살펴 주시옵소서.

혹시 저희들에게 아버지 앞에 옳지 못한 주의 주장이나 관념이나 혹은 인식을 갖고 아버님을 헤아리는 마음이 있거든 그 마음 일체를 제거시켜 주시옵고 용납하지 마시옵소서. 아버님의 심정과 더불어 즐길 수 있으며, 아버지의 심정과 더불어 체휼할 수 있는 감화의 마음과 긍휼의 심정을 오늘 이 한 시간 경배하는 저희들 전체의 마음 몸에 나타내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오며, 하늘에 있는 천천만 성도와 천군천사가 저희들과 함께 즐거워하며 그 환희의 영광을 아버지 앞에 돌려드릴 수 있는 이 시간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본연의 동산에서 슬픔을 체휼하셨던 아버지께서 저희들로 말미암아 해원되실 수 있으며, 저희들로 말미암아 위안받으실 수 있는 이 한 경배의 시간이 되옵기를 원하옵니다. 부족한 정성이나마 아버지 앞에 묶어 바치고자 하오니 첫시간부터 끝시간까지 사탄이 틈타는 시간이 되지 말게 인도하여 주시옵고, 승리의 방패로써, 아버지, 저희를 주관하여 주시옵고, 불꽃같은 눈으로 살피시옵소서.

저희의 심성에서 옳지 못한 모든 근성을 제거시켜 주시옵고, 그 자리에 본연의 심정을 일으켜 주시어 아버지와 더불어 활동할 수 있는 기쁨의 경배 시간이 되게 인도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면서, 모든 것을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기 도(Ⅱ)>

시온의 동산을 잃어버린 인간들이 다시 시온의 땅을 찾지 않으면 안 될 수고의 역사가 남아 있음을 저희들은 뼈저리게 느끼고 있사옵나이다. 본연의 심정을 지닌 참다운 사람들이 사는 이 땅이 되지 못하였고, 본연의 심정의 흔적을 땅 위에 세울 수 없으니, 이들을 붙들고 본연의 세계를 꿈꾸면서 싸우시는 아버지의 서러운 심정을 이 시간 위로해 드릴 줄 아는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 저희들은 아버님의 슬픈 역사노정을 회상하면 두려운 마음을 금할 수 없사옵고, 수고하시는 아버지의 성상을 대할 적마다 황공한 마음 금할 길 없사옵니다. 이제 이들이 자신의 몸 마음을 제물로 바치어 아버지의 수고를 덜어 드릴 수 있으며 중지시켜 드릴 수 있는 아들딸들로 세워 주시옵소서.

당신은 즐거워할 수 있고, 기쁜 자리에서 해방을 노래할 수 있는 승리의 한 날이 어서 오기를 고대하셨사오나, 그 해방의 뜻을 이루는 것은 당신이 아니요, 사망권에서 허덕이는 불초한 저희 인간들이 아니면 안 된다는 사실을 저희들이 알고 있사옵나이다.

이와 같이 중요한 입장에 처해 있는 인간 자신의 가치를 알지 못한 채 사망의 노정에서 허덕이고 있는 인류를 용납하여 주시옵고, 이제 저희들에게 본연의 심정을 회복하기 위한 새로운 기치를 들고 아버지의 영광의 심정을 노래할 수 있는 간절한 마음을 일으켜 주시옵소서. 본연의 성상과 본연의 형상을 갖추고, 참다운 아들딸의 모습을 갖추어 아버님의 해방을 노래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것이 저희의 천추의 소원임을 아버님께서 아실 줄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지, 승리의 한 날이 있을 것을 아는 저희들, 불쌍한 자리에서 신음하고 있는 이 민족을 대신하여 머리 숙여 아버지 앞에 기도드리옵니다. 승리의 한 표준의 자리에 저희를 이끌어 주시옵고, 맡기고자 하시는 큰 뜻 앞에 제물이 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이끌어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제 아버지 존전에 모였사오니, 그 마음을 헤쳐 놓게 하여 주시옵고, 그 몸의 사정을 전부 다 풀어 놓고, 참다운 심정에서 우러나오는 간곡한 마음을 갖고 아버지를 위로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오며, 아버지를 대해 겸손히 머리 숙일 수 있는 심정의 움직임이 이 시간 나타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에게 과거를 뉘우치고 현실을 더듬어 아버지의 거룩하신 은사를 흠모할 수 있는 간곡한 마음을 일으켜 주시옵고, 그 마음을 아버지께서 친히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새로운 느낌과 새로운 감촉을 일으켜 새로운 방향을 취하지 않으면 안 될 자신임을 깨달을 수 있는 이 한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저희들이 부족한 정성을 묶어 이 한 시간 산 제단을 갖추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저희 개체 개체가 승리의 제물이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예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사오니, 아버지 앞에 옳지 못한 것 일체를 제거시켜 주시옵고, 아버지, 권능의 손길을 펴시어서 새로운 재창조의 권한을 일으키시옵소서. 아버지의 것 이외의 일체를 제거시킬 수 있는 본연의 재창조의 성상을 갖추어 주시옵고, 형상을 갖추어 주시옵길,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제 아버님이시여, 잠들어 있는 삼천만 민중을 깨우시옵고, 도탄 중에 헤매고 있는 27억 인류를 아버지의 장중에 두시어서 이들을 한 곳으로 몰아 아버지의 본향의 동산, 아버지께서 이상하시는 선의 동산으로 이끌어 주시옵소서. 어떠한 핍박과 어떠한 환난을 거쳐서라도 이 인류를 빨리 아버지 원하시는 동산 가운데로 이끌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버지, 인간이 실천하지 않으면 안 될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아버님이시여, 사랑하는 아들딸들에게 명령하시옵소서. 남아진 죄악의 땅과 남아진 백성을 찾아야 할 책임이 있다 할진대는 이들을 일으키셔서 명령해 주시옵고, 승리의 동산을 건설할 수 있는 하늘의 정병으로서, 역군으로서, 아버지 원하시는 곳으로 명령하여 보낼 수 있는 시간, 작정할 수 있는 이 한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이날도 외로운 당신의 아들딸들이 모여서 호소하는 곳곳마다 당신께서 친히 영광과 사랑의 손길을 펴신 것을 그들로 하여금 느끼게 하시어, 마음 다 드려 하나의 제단에 하나의 심정을 모아서 하나의 형태로써 드릴 수 있는 이 한 시간이 되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니다. 또 수많은 민족을 대신하여 모이고 있는 수많은 교단 위에도 축복하여 주시옵고, 승리의 한 날이 이루어지고 아버지의 즐거움이 회복된 기쁨의 이 땅이 되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제 저희들의 모든 것을 맡으시옵소서.

이제 아버지 뜻 앞에 반대되는 어떠한 것이 있사올진대, 그것이 사탄이 틈타는 조건이 될까보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사오니, 아버지시여! 사탄이 틈탈 수 있는 일체의 조건을 제거시켜 주시옵고, 권능의 은사로써 이 모든 것을 품으시어 아버지께서 친히 명령하여 주시옵고, 친히 품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첫시간부터 끝시간까지 친히 아버지 것만으로 주관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올 때에 주의 이름으로써 기도하였사옵나이다. 아멘.

<기 도(Ⅲ)>

아버님이시여, 참다운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다 할진대 본연의 그 세계가 그립지 않을 사람이 없사옵고, 참다운 몸을 갖고 사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 본연의 그 세계의 생활을 그리워하지 않을 사람이 없음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타락 전 아버지를 직접 대할 수 있었던 본연의 아담 해와의 모습, 하늘이 생겨나고, 땅이 생겨나고, 만물이 생겨난 이후 처음으로 인간으로 지음 받은 아담 해와의 모습, 그 모습은 얼마나 아버지께서 기뻐하셨던 모습이었사옵니까? 아버지를 대할 수 있는 영광의 자리에 처해 있던 저희 조상들의 그 모습은 얼마나 존귀한 모습이었사옵니까?

이제 저희가 마음으로 본연의 세계를 흠모할 수 있는 이 한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의 심정을 직접 반응시킬 수 있는 선의 심정이 심히도 그리워지옵고, 아버지의 손길을 붙들 수 있는 본향의 선의 모습이 심히도 그리워지오니, 본연의 그 조상을 그리워할 줄 아는 저희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심정의 세계는 역사적인 거리도 없고, 시간과 공간의 한계도 없다는 것을 저희들이 땅 위에 살면서 알고 있을진대, 무한한 사랑의 심정에 의해 태어난 본연의 조상의 그 모습, 본연의 나의 모습을, 이제 사망권내에서 잠들어 있고 방향을 잃고 허덕이는 저희들이지만 그리워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러한 나의 모습이 그리워 하염없이 눈물짓고, 그러한 나를 지으시던 아버지를 찾기에 허덕이는 모습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고, 초초한 모습이 될지라도 그 세계의 분위기, 그 세계의 환경, 그 세계의 만물, 그 세계의 만상과 화동할 수 있는 미의 자체가 이 시간 저희 한 몸 마음에 체휼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나의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땅 위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제각기 잘났다고 하고 있사오나 아버지께서 그리던 본연의 그 모습을 갖추지 못한 자리에 서서 자기를 나타내기에 급급하고 있사옵고, 자기를 높이기 위하여 허덕이고 있사옵니다. 이러한 인류를 대하는 아버지의 슬픔이 하늘에 사무치고, 땅에 사무치고, 또 한 주인을 잃은 만물까지 탄식권 내에 머물러 있다고 말씀은 전하고 있사옵고, 저희들 또한 이 사실을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님, 오늘 저희 자신들이 이런 탄식권 내를 벗어나고 아버님을 해원해 드려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살아가는 자체들이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 저희들은 아버지를 부르되 타락의 역사노정에서 수고하시던 아버지를 부르기는 즐겨하였사오나, 타락의 서러움을 느끼지 않으시고 선의 동산에서 즐거워할 수 있는 본연의 아버지를 그려볼 줄은 몰랐사옵고, 그 아버지를 찾아 헤맨 때도 없었사옵니다. 참다운 구주를 믿는 데 있어서도 저희 인간들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는 참다운 구주로 믿었사오나,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지 않고, 고통과 핍박을 받지 않고 영광의 주님으로 현현할 수 있는 예수를 중심삼고는 믿지 못하였음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 오늘 저희들에게 본연의 그 자체와 더불어 본연의 그 이념과 본연의 그 선을 중심삼고 살 수 있는 화동의 세계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넘쳐흐르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본연의 심정으로 아버지를 부를 수 있는 기쁨의 자리를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나의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죄악이 땅을 물들인 그날부터 6천년 역사가 돌고 돌았으나, 슬픔이 그칠 날이 없이 지금까지 역사의 서러움이 중첩되어 왔다는 이 한 사실은 저희 선조의 실수로 말미암았던 것임을 저희들이 알고 있사옵니다. 역사적인 서러움을 벗어나고 슬픔에서 해방받아야 할 저희의 불쌍한 신세를 아버지, 아시오니, 저희들을 위로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힘없는 손길을 붙들어야 할 아버지의 사정이 남아 있사옵고, 연약한 무리를 재촉하여 강한 승리의 군대와 승리의 장병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되는 아버지의 슬픈 사정이 남아 있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오늘 저희들을 경책(警責)하여 주시옵소서. 선의 말씀으로, 참다운 심정으로 이들을 권고하여 듣지 않거든 채찍을 들어서라도 저희들을 쳐서 아버지께서 쓰실 수 있는 역군으로, 심부름이라도 시킬 수 있는 모습들로 세워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애급에서 헤매고 있던 60만 이스라엘 대중을 인도하고 싶었던 모세의 심중을 저희들이 알게 하여 주시옵고, 모세가 애틋한 심정으로 민족을 대했다는 사실을 저희들이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세계에 널려 있는 제2이스라엘의 축복을 인계받아야 할 세계의 기독교인들이 바라보고 있는 가나안 복지가 남아 있는 것을 알려야 할 책임이 저희들에게 있사옵고, 이 사명을 성취해야 할 책임이 오늘날 저희들에게 있다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아버지시여, 남겨진 원한, 남겨진 분함, 남겨진 통분이 저희들 일신의 뼈 살에 사무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 몸 마음이 백번 죽고 천번 쓰러지는 한이 있다 할지라도,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야 말겠다는 하늘의 절개를 지닌 당신의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니다.

부르시는 명령을 받들어 나오고 보니 십자가의 노정이 남아 있음을 알았사옵니다. 어려운 길을 자진하여 나서고 있는 외로운 당신의 아들딸들이오니 이들의 마음의 친구가 되어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 영원히 영원히 저희들의 중심이 되올 때, 저희들의 몸 마음도 아버지를 본받아 불변의 중심존재로서 아버지를 대신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사오니, 이제 저희들의 몸 마음 친히 아버지 것으로 다시 취하여 주시옵기를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들 이미 각오한 바의 결심이 있사오니 이 결심과 더불어 싸우고, 이 결심과 더불어 살고, 이 결심과 더불어 쓰러질 수 있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 이 시간 외로운 식구들을 대하여 말씀을 전하고자 하오나 무슨 말씀을 하오리까? 아버지의 분부를 마음에 느껴지는 그대로 옮겨드릴 수 있게 인도하여 주시옵고, 받아들일 수 있는 하늘의 제물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제 저희의 몸 마음을 아버지 것으로 인정하여 주시옵고, 아버지 취하시기에, 아버지 보시기에 반대되는 어떤 죄악의 근심이 남아 있사올진대, 아버지께서 삼위신의 영광을 대신하여 이것을 제거시켜 주시옵고 사탄이 틈타는 시간이 되지 말게 인도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부탁하옵나이다.

저희가 어린이의 마음으로 돌아가, 알고 있던 모든 주의와 주장을 제거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고, 저희가 느끼고 체휼한 바의 모든 것을 제거시켜 주시옵소서. 어린이의 심정으로 돌아가 흠모의 마음, 사모의 심정에 취하고, 아버지의 말씀에 이끌릴 수 있는 이 한 시간 되게 인도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올 때,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써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말 씀>

이 시간에 여러분께 드리고자 하는 말씀의 제목은 ‘그리운 에덴’입니다. ‘그리운 에덴’ 이러한 제목을 갖고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본연의 세계를 그리워하는 인간

타락이 없었던 본연의 동산, 즉 에덴 산을 생각할 때에, 어느 누구나 연상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연상되는 반면에 하나님께서 6일간 창조함을 필하시고 축복하셨던 아담 해와가 연상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을 중심삼고 죄없는 본연의 우리의 조상들이 있었다는 것이 연상되는 반면에 죄악의 침범을 받지 아니한 만물이 연상되는 것입니다.

만물이 있음은 인간을 위함이요, 인간이 있음은 하나님을 위함이었다는 것을 생각하여 보게 될 때에, 하늘을 위주한 인간이 되지 못하였고, 인간을 위주하여 화동할 수 있는 만물이 되지 못하였다는 이 한 사실은, 에덴을 생각하는 인간들 앞에 크나큰 슬픔이요, 혹은 서러움이요, 혹은 억울함으로 남아져 오늘날 우리의 마음과 몸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은 아무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본연의 세계와 본연의 동산에서 살고 있던 우리의 조상과 그 조상을 거느리고 있던 선(善)만을 위주하여 움직이셨던 하나님을 놓고 우리가 심각히 생각하게 될 때에, 그분과 오늘날 우리는 너무나 먼 거리에 처하여 있음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과 더불어, 어떠한 최고의 선과 더불어 인연을 맺으려는 간곡한 심정이 있으면 있을수록 자신이 그 최고의 선, 즉 하나님과 먼 거리에 있다는 고민을 우리는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고민을 해결하려는 참다운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는 하나님을 중심삼고 살던 아담 해와와 더불어 화동할 수 있었던 만물, 선만을 위주로 할 수 있으며 선만을 찬양할 수 있었던 본연의 그 세계를 막아 버렸던 그 타락의 흔적에 대해서, 더 분하고 강한 적개심을 품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선을 지향하고 참다운 본연의 세계를 그리고 있는 한편, 이것이 나와 인연맺고, 시간성을 넘어 영원히 어떠한 천적인 심정과 인연맺어야 할 일이 남아 있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은 우리 자신도 알지 못하게 수시로 그 천적인 심정과 인연될 수 있는 길을 따라 움직이고 있음에 틀림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움직이는 심정을 연결시킬 수 있는 외적 환경이 되지 못한 것이 탄식이요, 또 그럴 수 있는 내적인 사정을 갖추지 못한 것이 우리 인간의 탄식이 아닐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내 한 자체가 타락한 아담 해와를 원망하지 않으면 안 되고, 오늘날 살고 있는 이 현실의 환경을 원망치 않을 수 없는 입장에서 우리들이 살고 있음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러한 환경에 내가 그냥 그대로 휩쓸려서 마음과 몸이 행복스러움을 느낄 수 있느냐? 이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도저히 불가능한 환경을 타개해 넘어가야 할, 무엇인지 모르지만 필연적인 곡절의 노정을 거쳐가야 할 그 무엇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지금까지 방향도 잘 모르면서 무엇인가를 찾아서 허덕여 왔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해야 하겠습니다. 이제 때가 왔습니다. 그리고 내가 참다운 양심을 가다듬어 양심의 주체인 하늘과 영원한 인연을 맺고 영원한 행복의 기준을 찾아 세우고자 하는 간곡한 마음이 우러나면 우러날수록, 오늘날 이 땅에 대해서는 분개심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될 것이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를 대하여서도 적개심을 갖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또 이 적개심을 막아낼 수 없는 현실이기 때문에, 여기에 미쳐지는 고통 이상의 큰 고통이 없다는 것과 여기에서 해결지어야 할 문제 이상 큰 문제가 없다는 것을 우리들은 다시 느끼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하늘이 있다 할진대 이런 고통 중에 있는 우리를 사랑하실 것이고, 이와 같이 불쌍한 자리에 있는 우리 인간을 찾아 주실 것입니다. 이처럼 인연을 존중하여 찾아 주는 관계가 있어야만 우리는 하늘이 있다고 인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런 불쌍한 입장에 처해 있는 인간을 대하여 하나님은 인간이 타락한 그날부터 지금까지 슬픈 마음을 억제하시면서 타락한 인류의 발자취를 따라 나오면서 수고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여러분은 다시 느껴야 될 것입니다.

하늘의 심정이 동하여 사는 에덴

오늘날 우리는 자신을 자랑하기에 앞서 타락의 종족임을 자인해야 됩니다. 자신의 무엇을 나타내기에 앞서 타락성에 물든 죄악 역사를 드러내고 죄악의 본성을 고백해야 합니다. 이런 입장에 놓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자리를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이 많이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될 때, 하늘은 기필코 역사적으로 물든 죄상을 청산해야 되고, 혈통적으로 맺혀져 내려오는 죄악의 원한을 풀어야 됩니다.

이 죄악의 원한을 푸는 것이 하늘의 소원이요 우리의 소원인데, 그 모든 것을 드러내는 날이 없다 할진대 해원의 한 날이 없을 것이요, 해방의 한 날이 없을 것입니다. 해원과 해방의 한 날이 없다 할진대는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뜻이 성취되는 한날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 성취의 한 날이 없다 할진대는 인간을 대하여 섭리해 나오시던 하나님의 영광의 한 날이 없을 것이요, 섭리를 뒷받침하여 따라 나오고 있는 인간도 영광이 한 날을 맞을 수 없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제 우리들은 마음으로 몸으로, 혹은 심령으로 자연의 모든 신성을 느낄 줄 알아야 되겠고, 인간의 본성이 하늘 심정의 감촉을 느껴야 되겠고, 본질 본성 본성품을 통하여 몸에 체휼되어 들어오는 어떠한 천심이나 천정을 느낄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만일 그러한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는 이 땅 위에 누구보다도 행복한 사람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타락 전 인류의 조상은 하나님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마음을 갖고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만물을 수습하여 만물은 하늘 앞에 영광의 조건으로, 기쁨의 상징적인 대상으로, 미의 대상으로, 자극을 일으킬 수 있는 하나의 외적인 대상으로 세우고, 그 만물로부터 오는 자극을 통하여 내적인 자극을 일으켜 천성의 심정을 대하여 영광의 실체임을 자랑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못한 것이 무엇보다도 슬픔이 된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하늘의 심정에 동하여 살 수 있는 에덴, 선과 화할 수 있는 그 에덴, 하늘의 그 이념과 더불어 생활할 수 있는 그 에덴,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이 선의 상징이며, 선을 자극시키지 않는 것이 없는 그 에덴, 여러분 자신이 하늘의 심정에 화하고 여러분 한 자체가 선한 자리에 서서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영광의 한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그것은 여러분에게 있어 최대의 행복일 것입니다.

또 하늘이 그러한 인간과 인연 맺을 수 있다면, 그 이상의 인연을 더 요구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것을 알아야만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과정을 더듬어 보면, 하나님께서는 참다운 자기의 형상을 대신할 수 있는 본연의 아담 해와, 참다운 선의 부모, 우리 인류의 조상인 아담 해와를 짓기 위하여 닷새 동안 모든 만물을 지어 놓았습니다. 이 주인공을 지어 놓고 하나님은 어떠한 심정으로 바라보았겠느냐? 여러분, 이것을 다시 한번 회상하면서 아버지를 마음으로 부를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우리들은 우리의 시선에 자극을 주는 삼라만상을 매일같이 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 날을 그저 같은 심정 혹은 같은 감정으로 삼라만상을 대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만일에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선을 중심삼은 본연의 자연이 되었을 것인데, 또 그랬더라면 우리의 조상은 이 자연을 보고 어떻게 느꼈으며, 또한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은 어떻게 느꼈을 것인가 하는 것을, 여러분은 다시 한번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풀 한 포기에서도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는 마음

들에 자라고 있는 미미한 풀 한 포기라도, 거기에는 하나님의 손길이 거치지 않은 것이 없음을 우리는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자라고 있는 나무 한 그루를 보더라도, 거기에는 하나님의 무한한 내적 심정의 인연을 통한 사정이 거쳐 나가고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다시 한번 상기해 보아야 되겠습니다.

비단 초목뿐만 아니고 들에서 뛰놀고 있는 어떠한 짐승이나 곤충, 혹은 어떠한 조류를 막론하고, 이것들이 무심하게 되어진 것이 아니라 철두철미 한 하나님의 내적인 심정을 통하여 지어졌고, 실체의 손길을 거쳐서 지어졌다는 것을 우리들은 다시 한번 느껴봐야 되겠습니다.

만일에 지으신 만물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 할진대 우리들은 어떠한 생각을 해야 되느냐 하면, 하나님이 만물을 지어 놓고 다 선한지라 하셨지만, 그 가운데서도 제일 사랑하는 것이 무엇일까? 풀이면 풀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제일 사랑하는 풀이 무엇일까를 생각해야 됩니다. 이런 것을 여러분이 시간을 아끼지 않고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자리에 머무른다 할진대, 여러분은 사람을 짓기 전에 만물을 통할 수 있었던 하나님의 은사와 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포기의 풀을 붙들고도 즐거워하면서 이것이 한 날의 소망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기쁜 심정을 가져야 하고, 하나님의 손길을 거치어 나온 풀이라는 것을 체휼해야 되겠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타락한 인간이로되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던 하나님의 창조의 심정세계에 서는 하나님의 친구의 입장에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럴 게 아니겠어요?

여러분들은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이 풀이라면 풀 가운데서 어떠한 풀을 제일 좋아하실까, 꽃이라면 꽃들 가운데서는 어떤 꽃을 사랑하실까, 지으신 나무들 가운데서는 어떤 나무를 더욱 사랑하실까를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새는 물론이거니와 날으는 곤충 등 하등동물로부터 고등동물에 이르기까지 모두 하나님의 심정을 통하여 지음받은 존재들이지만, 그 가운데서도 어느 것을 아버지께서 제일 사랑하실 것인가를 생각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하늘의 심정을 흠모하고, 하늘의 이념을 고대하고, 하늘의 복귀의 동산을 바라보는 참다운 마음을 가졌다고 하는 사람 중에는 하나님을 높이면서 영광의 자리, 즐길 수 있는 자리에서 기쁨을 체득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사람은 많을지 모르나, 미미한 초목으로부터 곤충, 나아가 전체에 이르기까지 미쳐져 있는 아버지의 내적 심정의 인연을 상기하면서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은 적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정력을 다 기울여 어떤 곤충을 만들었다 할 적에, 그가 기울인 이상의 정력을 가지고 사랑하려는 사람이 나타나 마음과 정을 다해 바라보며 그 곤충을 사랑해 줄 수 있다면, 그 곤충을 만든 분에게는 그 이상의 만족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2천년 전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 백성을 찾아 세워 드리기 전에 무엇을 찾기 위하여 허덕였을 것인가? 그의 심정은 무엇을 찾아 헤매셨을 것인가? 저는 이렇게 알고 있습니다. 백성을 붙안고 그들이 하늘의 탄식권 내에 머물러 있다고 마음을 졸이는 예수님이셨고, 그들을 위해 밤을 새워 눈물을 흘리시며 기도해 주시던 예수님이었음에 틀림없다고.

만일 예수님께서 인간시조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본연의 심정적 인연을 유린당한 만물이 탄식권 내에 놓여 있는 것을 바라보고 울어 주고 밤을 새워가며 슬퍼하신 분이 아니었다면, 그는 만우주를 통치할 수 있고 만우주를 구원할 수 있는 구주가 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나는 단언하고 싶습니다.

사람에게서 만물의 요소를 제거하면 그 생명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귀한 한, 자기의 본질을 이루는 요소를 공급해 주는 만물에 대해 인간은 희열의 매개체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심정을 앞세워 나가는 사람이라면, 그는 어디 가든지 자연의 정도(正道)를 갖출 수 있고, 어떠한 환경에 처하든지 정도의 자리, 만물과 통하는 자리에 서서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려드릴 수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자연을 바라보신 예수님은 많은 풀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유달리 이 풀을 지극히 사랑할 것이다, 꽃들 가운데서도 어느 하나의 꽃을 제일 사랑하실 것이다, 나아가 어떤 나무면 나무, 어떤 산천이면 산천을 보시고 하나님은 이러한 것들을 제일 사랑하실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셨을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그런 예수님의 사랑의 심정을 다시 한번 회상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지금까지 생애노정에 있어서 얼마만큼의 책임적인 감정을 갖고 하나님이 정을 기울여 지으신 이 만물을 대했습니까? 혹은 이 산천을 대했습니까? 한 덩이의 흙을 붙들고 이 흙을 빚으신 하나님의 심정이 어떠했겠는가를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없다 할진대 여러분들은 창조이상을 세우신 하나님의 심정을 무시하는 죄인이 될 것입니다.

자연을 벗어나 생각할 수 없는 인류문화

오늘날 우리들은 이 만물세계, 피조세계의 원리와 법칙, 공리와 공식을 해명하기 위해 노력하는 분야가 과학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연에 깊이 숨어 있는 정서적인 분야를 나타낸 것이 문학일 것입니다. 자연에 나타나 있거나 숨겨져 있는 아름다움을 어떤 형태로써 구상하여 표현한 것이 예술일 것입니다. 그리고 자연의 근본이치를 해명하려는 분야가 철학인 것입니다. 이런 단계 위에 있는 것이 종교입니다.

그러면 참다운 종교와 종교가가 해명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 것인가? 그것은 자연 속에 깊이 흐르고 있는 정적인 내용을 해명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책임을 종교가 짊어져야 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인류의 문화는 자연을 벗어나서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자연을 떠난 인류문화는 말할 수 없다는 거예요. 인간이 제아무리 당당하게 그 위세를 자랑하고 권세를 누린다 해도 자연을 무시한다면 그 모든 것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생활을 가치 있게 해 주는 것이 자연이요, 우리의 생애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자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 만상에 흐르고 있는 심정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 되지 못한다면, 참다운 행복을 누릴 수 없고 하늘과 인연을 맺을 수 있는 영광의 자리에 나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될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하나의 풀을 바라보더라도 하나님의 입장에서 바라볼 수 있어야 되겠고, 꽃을 바라보더라도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한 입장, 하나님의 심정과 통할 수 있는 입장에서 바라보아야 되겠습니다. 곤충이나 새, 혹은 어떤 동물을 바라보게 될 때에도 하나님의 심정과 인연맺어지는 그런 내적인 감정을 체득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가 어떤 공식과 정의로써, 즉 과학적인 논리로 그것을 해명하지는 못할지라도, 혹은 문학적으로 그 정서를 표현하지는 못할지라도, 혹은 예술적으로 그 미를 표현하지 못할지라도, 정서적으로 사랑을 체휼하는 힘이 없을지라도 이는 위대한 과학자요, 위대한 문학가요, 위대한 예술가요, 위대한 철학자요, 위대한 종교가임에 틀림없습니다.

오늘날 세계적인 인물이라는 사람, 혹은 위대한 학자라는 사람이 많이 있어서 자기들 나름대로 우주를 탐구하고 있지만, 이제까지의 논리를 넘어 최후의 문제, 즉 이 우주와 인연되어 있는 어떤 존재에 대한 궁극적인 무엇을 갖고 나오기 전에는 세계적인 인물이라 할 수 없습니다.

주체와 대상의 격차가 없는 심정세계

이제까지의 과학적인 논리와 공식과 법칙을 가지고 우주를 바라보고 느끼는 그 단계를 넘어서서, 거기에서 자기도 모르게 비밀히 통하고 있는 심정적인 감응이 없는 사람은 그 이상 발전이 없습니다. 문학도 그렇고, 예술도 그렇고, 철학도 그렇고,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정으로 세계적인 위대한 학자가 있다 할진대, 그 학자의 심정 깊이에는 자연의 심정과 화할 수 있는 감성이 있을 것이요, 자기가 연구하는 그 분야 이상으로 수시로 연락되는 감성이 있기 때문에 생각지도 않은 암시나 환상이나 혹은 몽시와 같은 현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자기 전공 분야에 취해 들어가는 그러한 상태에서만 벌어지는 현상입니다.

정이 풍부한 사람일수록 큰 일을 한 것은 역사를 보아서도 부정하지 못합니다. 또 그런 감정에 화하여 한 포기의 풀을 대해서도 ‘하나님!’ 하고 부를 수 있는 어떤 종교가가 있다면, 그는 그야말로 위대한 종교가인 것입니다.

오늘날 불교에서는 불상을 모셔 놓고 복을 빌고 있는데 주체와 대상의 외적인 차이는 참으로 천지의 차이가 있다 할지라도 심정의 세계에 있어서는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느껴지는 감정을 통하는 모든 것을 하늘과 같이 알고 믿고 대하면, 하늘은 그 마음을 버리지 않으시고 이루어 주시기에, 여기에서 소원 성취라는 말이 생겨납니다.

이렇게 생각하게 될 때, 지금까지 우리들이 살아왔던 과거의 생활과 오늘날 우리들이 살고 있는 현실의 생활은 너무나 무감각적이요, 너무나 무정서적이요, 너무나 몰락된 우주관을 갖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서러워해야 되겠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것을 서러워할 줄 아는 사람이 된다면 그는 새 시대의 인물로 소명받을 것이고, 새로운 시대의 사명을 맡을 것입니다.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나는 단정지어 말하겠습니다.

우리는 오늘의 자기 주위 환경을 바라보고 얼굴을 찌푸리고 탄식하거나 사회의 모순상을 바라보고 낙망하지 말고, 자라고 있는 풀 한 포기를 바라보고 그 즐거움에 자기의 슬픈 감정을 잊어버릴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만일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새 시대에 남아지는 사람입니다. 어떤 이상적이고 심정적인 세계를 지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기필코 하나님과 어떠한 인연을 맺으려 할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 통일교인 여러분, 자라고 있는 풀 한 포기를 바라보며 어쩔 줄 모르는 심정을 느껴 보십시오. 거기에는 무한한 생명이 있고 하나님이 계십니다. 솟아 있는 하나의 산봉우리를 바라보게 될 때에, 어제 보던 감정과 오늘 보는 감정이 다릅니다. 춘하추동 사계절의 변화에 따라서 내 심정에 느껴지는 감정의 차이를 노래할 수 있다면 그 얼마나 고상한 일입니까? 이는 온 자연과 더불어 화동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타락하지 않은 본래의 사람은 그런 사람일 것임에 틀림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흐르는 물가를, 넓은 벌판을 흐르는 시내를, 솟아 있는 산맥을, 떠오르는 태양의 아침 햇볕을, 동녘에서 비쳐오는 달빛을, 이 모든 만상을 대해 어느 시기를 가리지 않고 마음으로 노래할 수 있고 마음으로 즐길 수 있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는 하나님이 만물을 지으시면서 꿈꾸고 이상하셨던, 지으신 그 만물을 맡기려고 하셨던, 하나님이 세우고자 하신 참다운 본연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경치가 좋은 모든 명승지를 찾게 되는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인간을 원하셨다는 것입니다.

인간과 더불어 자연을 노래해 보지 못한 하나님

그러면 본연의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담 해와와 더불어 자연을 노래하고 자연에 대한 감정을 표현하는 한 시간을 가졌느냐 하면 못 가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아들아, 저 산을 바라보아라. 저 산은 내가 어떻게 어떻게 지었다, 혹은 저 초목을 바라보아라. 이것은 내가 어떻게 어떻게 지었다. 이 모든 것은 너의 행복을 위해 지은 것이다.’라는 말씀을 하시고 싶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실제로 그런 말씀을 하지 못하셨습니다. 왜 못하셨느냐? 아담이 아직 철이 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바라보면서 말씀하시고 싶었던 간절한 내적 심정이 있었음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정적으로 미숙한 자리에 있었기에 아담을 대하여 말씀하실 수 없었던 하나님의 사정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그러실 수 있는 자리에 아담이 있었다면, 하나님께서 그의 손을 붙들고, ‘야, 아담아, 내가 보고 싶은 저 동산의 꽃을 바라보아라, 내가 바라보고 싶은 산천을 같이 바라보자.’라고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선조들이라도 그러한 생활을 하였던들, 오늘의 인류는 이러한 도탄 중의 사망권 내에서 허덕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고로 오늘 여러분들은 그리워하여야 되겠습니다. 본연의 에덴을 그리워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이 있는 세계, 한번 시작하면 그대로 영원히 사랑의 감정에 화할 수 있는 세계, 한번 노래하면 영원무궁토록 노래에 취할 수 있는 세계, 한번 뛰면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뛰고 싶은 마음이 우러나는 세계, 한번 움직이고 한번 책임지면 이것은 영원한 가치의 책임이 된다 생각하고 노력할 수 있는 세계, 이러한 세계가 그리워 울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한 심정을 지닌 인간을 찾지 못한 것이 하나님의 슬픔입니다. 땅을 대하여 섭리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기필코 그러한 사람을 찾아 세우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르는 노래에도 산천 혹은 자연이 들어 있는 것은, 이 모든 것을 빌어 가지고 우리의 감정을 높이려고 그러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그래요. 만일 본연의 세계에서 아담과 해와가 하나님이 가고 싶은 심정과 같은 심정으로 갈 수 있었던들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얼마나 좋았겠어요.

이제 여러분들은 그런 심정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그런 마음이 풍부한 자, 그런 심정을 체휼한 자가 바로 새 시대의, 새로운 이상천국 시대의 백성으로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 복귀의 원한을 풀고 역사의 슬픔을 밟고 올라서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손길을 붙들고자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을 붙들 것인가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만물을 내 대신 즐겨다오. 이 만물을 내 대신 느껴다오. 이 만물을 내 대신 사랑해다오.’라고 할 수 있는 그러한 사람을 붙들고 싶어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느 한 때에 신비스러운 분위기, 혹은 은혜의 분위기에서, 자연의 꽃 한 포기를 바라보는 것을 마음으로 그리워한 적이 있었습니까? 또 조상의 누구를 만나는 것과 같은 간절한 마음으로 대해본 적이 있었습니까? 혹은 산천을 바라보게 될 때, 품겨 들어오는 자극에 자기도 모르는 찬미를 하늘 앞에 드린 일이 있습니까? 없다 할진대 여러분은 만물의 주인이 될 자격이 없다고 나는 단정합니다. 인간들이 그리워하는 에덴동산이 아무리 좋다 할지라도, 만물과 그것을 바라보는 인간이 심정을 통하여 하늘을 움직일 수 있는 곳이 아니라면 그리워할 곳이 못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기도하기를 인간을 위해서만 기도하였습니다. 나는 그렇게 안 합니다. 인간을 위하여 기도할 뿐만 아니라 하늘을 위하여 기도해야 되겠단 말이에요. 예수를 위하여 기도해야 되겠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밤을 새워가며 기도하셨는데 갚아야지요. 다음으로 오늘날까지 수고하신 하나님을 위해 기도해야 되겠고, 더 나아가서는 만민을 위해서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그런 감정에 사는 사람이 하나님과 제일 가까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체험을 해보니 그렇다는 거예요.

여러분도 길을 걷다가 고단한 자리에서, 쉬는 자리에서 그런 감정이 있다 하면 하늘이 반드시 같이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한 그루의 늙은 느티나무 뿌리를 붙들고도 거기에서 하늘의 심정을 노래할 수 있고, 그늘진 큰 바위를 의지하고도 거기를 안식의 보금자리로 하여 하늘의 정서를 노래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만물을 놓고 기쁨과 슬픔, 양면을 느껴야 하는 타락인간

오늘날 통일교회 교인 된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지으신 선한 만물 중에서도 제일 사랑하는 것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꽃이면 꽃 중에서 어느 꽃만을 제일 사랑한다 하는 꽃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감정이 없다 할진대 그는 심정세계에서의 불합격자일 것입니다. 꽃 중에서 무슨 꽃, 나무 중에서 무슨 나무를 제일 사랑하고, 풀 중에서도 무슨 풀을 제일 좋아 한다고 할 수 있어야 되는 거예요. 그래야만 자연이 그리운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내 생명이 약동하는 동시에 그 생명을 품어줄 수 있고 자연을 끌어들일 수 있는 심정의 인연을 갖고 있는 사람, 이는 뜻있는 사람이요 함부로 살 수 없는 사람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바라보는 이 자연은 어떠한 자연이며, 내가 밟고 있는 이 땅은 어떠한 땅이뇨? 서럽게도 타락한 땅, 기뻐하다 말고 슬퍼해야 할 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느껴야 되겠습니다. 만물을 바라보게 될 때 마음에 좋다고 느껴지는 반면 슬픈 사정이 남아있는 탄식권에 있는 만물임을 느껴야 하겠습니다. 산고수려한 명승지가 있어 그곳을 바라보고 좋다 하더라도 무한히 슬픈 감정을 느껴 아버지와 연결시킬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 오늘날 타락한 인간들의 입장입니다.

이제 우리는 한 포기의 풀을 붙들고 기쁨을 느끼는 대신 슬퍼하며 울 줄 아는 자신이 되어야 하겠고, 기쁨을 돌이켜 하나의 나무를 붙들고 울 줄 아는 자신이 되어야 하겠고, 산천 혹은 만상을 바라보고도 깊은 한숨을 쉴 줄 아는 모습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에덴이 그리워지는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심정에 사무쳐 계신 분이 하나님이요, 그러한 심정의 인연을 아직까지 벗어나지 못한 인간인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런 심정을 가진 사람이라면 자연을 바라보고도 에덴을 그리워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운 에덴이라 한다면 자연도 그리워져야 되겠거니와 또 그 속에서 온 피조만물을 주관할 수 있는 본연의 사람도 그리워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만물이 그리워하는 참다운 사람

예수님은 원수를 대하여 복을 빌었습니다. 양손 양발에 못을 박고 머리에 가시관을 씌우는 그들을 대하여 복을 빌었습니다.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는 무모한 원수들을 대하여 복을 빌었습니다. 왜 그랬느냐? 그것은 아버지께서 최대의 정력을 기울이시고 심중에 애절한 사정을 거치신 수고의 결과로 지어진 사람이라는 사실을 잘 아시기 때문에 복을 빌 수 있었습니다. 아시겠습니까?

하늘의 사정을 지니고 오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비록 원수로부터 반대 받는 입장에 있었지만 하늘의 본연의 심정을 더듬어 볼 때, 하나님께서 온갖 정력을 다 기울여 지었다는 인연이 있는 인간이었기에 그들 대하여 복을 빌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30여년의 생애를 거치시면서 명상이나 혹은 상상 속에서 하나님과 완전한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본연의 참사람이었습니다, 본연의 참사람. 이는 만물이 그리워할 수 있는 사람인 동시에 하나님이 그리워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날 인간도 자기가 만드는 물건을 대하여 오늘 짓다가 끝나지 않으면 내일 또 가서 그 뒷일을 계속하여 완전히 마무리짓고자 하거든, 하나님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을 지어 놓고 얼마나 기뻐하셨는지, 그 심정 세계에 들어가서 체휼한 사람이 있다면, 그가 춤을 춘다면 몇 십년이라도 추고 싶어할 것입니다.

오늘날 신앙자들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간단한 법칙의 가치를 통하여 나타나는 인간이라면 그런 인간은 필요 없습니다. 이는 법칙으로 잴 수 없는 무한한 신축성을 가진 절대적인 원칙을 통하여 지어진 사람이었기에 그 가치가 크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들여다보니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전체의 속성을 느낄 수 있고, 만우주 전체의 감정이 흐르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을 바라보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는 무한히 기뻤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라보시고 기뻐하시던 아담 해와, 하나님이 그리워하시던 아담 해와, 더 나아가서는 만물도 주인이 되어 주기를 고대하고 바라던 아담 해와, 이처럼 하나님이 그리워하였고 만물이 그리워하였던 아담 해와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타락으로 말미암아 그리움이 변하여 저주와 원망이 되고, 행복과 소망이 변하여 탄식과 절망이 되고, 생명이 변하여 사망이 되고, 사랑이 변하여 통곡이 되었다는 사실은 기막힌 일입니다.

이러한 한스러운 조상을 모시고 있다는 사실을 놓고 말할 수 없이 한탄해야 할 입장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 가운데는 이 한스러운 사실이 어디서부터 출발하여 오늘날 우리와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박차고, 한스러운 심정을 쓸어버리고 인간 본연의 심정을 찾고 나서 환희하고, 그 환희의 음성을 높이는 무리는 이 땅 위에 없을 것인가, 하늘은 찾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자리에 들어간 사람은 없느냐, 하늘은 찾을 것입니다.

이런 심정 문제에서, 하늘이 그리워할 수 있고 만물이 그리워할 수 있는 가치적인 사람이 오늘 요모양 요꼴이 되었으니, 심판을 받아야 된다는 거예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버지시여! 제가 심판을 피하고자 할진대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심정의 합격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에덴에 아담 해와를 지어 놓고 즐거워하시던 마음, 가 보고 싶고 만나 보고 싶은 그 마음, 그 심정에 합격됨으로써 심판을 피하여 노래할 수 있는 하나의 승리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고 기도해야 됩니다. 하늘은 그러기를 바라고 있어요.

천륜을 그리워할 줄 아는 내 자신이 되는 동시에 사람이 그리워지는 자신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심정을 체휼하게 하기 위하여 일남 일녀를 지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은사인가를 여러분은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땅 위에 남성이 있고 여성이 있다 할진대, 그들은 하나님의 전체적인 성품과 성상을 대신해서 세워진 존재인 것입니다. 따라서 한 여자를 사랑할 줄 아는 남자가 되어야 하고 한 남자를 사랑할 줄 아는 여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통하여 아담이 바라던 기준의 심정과 해와가 바라던 기준의 심정을 지닌 자들로서, 자유를 누리며 하늘을 포옹할 수 있는 부부가 땅 위에 있다면 그들에게 온 우주를 넘겨주고 안식하겠다는 것이 하늘의 뜻임을 오늘날 인간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인간은 이런 심정의 법도를 유린하였기 때문에 오늘날 심정의 세계에서 무한한 그리움에 허덕이게 된 것입니다. 어떠한 취미를 갖고 예술을 통하여, 학문을 통하여, 또는 땅 위에 있는 어떠한 사랑의 대상을 통하여 이 그리움을 메우려 하지만 메울 길이 없어 허덕여야 하는 것이 타락한 인류의 실상입니다. 이것이 역사적인 비애요 비극인 것입니다.

이러한 그리움이 여러분의 마음에 솟구쳐 오른다 할진대, 본연의 동산을 그리워한 만물과 더불어 그 본연의 동산을 그리워할 줄 알고, 본연의 심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이끌고 있던 본연의 사람 형태를 갖추어 하늘을 그리워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런 사람이 되면 하나님은 쌍수를 들어 ‘오냐, 내 아들아, 내 딸아.’ 하면서 붙잡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주만상을 관할할 수 있는 인격자를 배양해야 하는 종교의 사명

여러분이 자기의 가치를 높여 하늘 앞에 나아가기를 원한다 할진대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리워하던 본연의 동산에 살 수 있는 본연의 사람의 가치를 체휼함으로써, 하늘이 그리워지는 심정에 응할 줄 알고 하늘을 그리워할 줄 아는 마음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사람이 나타난다면 하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그리움이라는 것은 사랑을 빼놓고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 사랑은 인간적인 사랑이 아닌 영원한 안식과 영원한 생명의 원천인 하나님의 사랑이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딴 종교보다도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로서 그 사명을 다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종교의 목적은 심정세계의 법도를 활용하여 생활적인 감정과 대하고 있는 우주만상의 모든 이치를 관할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그런 인격자를 배양하기 위한 것입니다.

목석과 같은 사람들이지만 하나님께서는 6천년 동안 우리 인간을 그리워하는 심정의 기준을 세워 가지고 섭리해 나오셨습니다. 역사는 천태만상으로 벌어져 왔지만 하나님께서는 알파요 오메가의 입장에서 시종일관 그리워하고 그 심정을 잃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의 그러한 심정과 차이가 있다 할진대, 그 인간은 패배자요 역사노정에서의 낙오자일 것입니다. 하늘이 ‘나는 알파요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하였거늘, 이것은 고마운 명사였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나아가서는 타락한 인간을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그리운 마음에 슬픈 감정이 가하여져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보잘것없는 이 한 몸뚱이를 붙들고, 본연의 심정에 상처를 입힌 이 타락된 인간을 붙들고 그리워하는 마음을 하늘은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이 타락한 인간에 대한 슬픔의 흔적을 가슴에 품고 슬픈 감정 속에서 그리워하고 있는 하늘이었다는 것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런 사람은 틀림없이 천국에 갈 겁니다. 나는 이렇게 기도한 때가 있었습니다. ‘아버지! 제가 자신의 손을 붙들고 그리워 울 줄 아는 사람이 되어 봤으면 좋겠습니다.’ 하고. 하나님께서는 그걸 바라고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진정 사랑으로 붙들 수 있는 손이라 할진대 자신이 그 손을 붙들고 울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타락하지 않고 하나님을 그리워하던 본연의 그 아담의 손을 붙들고 울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더 나아가서 아담을 붙들고 해와를 붙들고 울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런 사람이 되면 타락의 역사를 밟고 올라설 것입니다.

우리들은 본연의 사람을 그리워하고 그 가치를 자랑하여야 할 역사적인 책임이 있고, 자랑해야 할 그 가치를 하나님 앞에 높이 세워야 할 책임이 있는 연고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 가치를 높이려 하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 개체를 그리움의 대상으로 세우고자 하는데, 이것이 인지상정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 그런 이념을 인간은 본래부터 갖고 있었기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가치를 세우려 하다가 까딱 잘못하면 타락된 세계의 가치를 용납하게 되고, 나를 그리움의 대상으로 세우려다가 까딱 잘못하면 타락의 근거가 되기 쉽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타락한 인류는 전체가 부정, 부정입니다. 다 버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담 해와가 모든 것을 갖지 못한 자리에서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아담 해와는 그런 이념을 갖지 못했고, 그런 심정 문제의 어떠한 무엇도 갖지 못했습니다. 자기 스스로 만물을 주관할 수 있는 당당한 권세를 가진 입장에 서지 못한 것이 타락이라는 거예요. 아담이 만물을 주관할 수 있는 입장에 서 봤어요? 서지 못했습니다.

이와 같이 본연의 사람을 그리워하여 그를 찾아 나아가야 할 역사적인 조건에 걸려있는 연고로, 인간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울음으로부터 출발하여야 할 존재임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울음을 유발시키는 종교가 어디 있는가를 찾아보게 될 때, 기독교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말하는 것을 듣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 위에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기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 하셨는데, 이는 통곡하라는 말씀입니다. 네 자신을 보고 통곡하고, 네 가정을 두고 통곡하고 네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 네 민족, 네 나라, 네가 살고 있는 이 땅 위의 전체를 보고 통곡하라는 겁니다. 여기에는 그리움의 인연을 새로이 맺기 위한 하늘의 뜻이 남아 있는 연고로 그랬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종교를 통해서만 풀리는 인생문제

우리는 만물을 그리워할 줄 알고 사람을 그리워할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들! 사람을 그리워해 봤습니까? 순수한 하늘의 심정과 연락되어 무한히 주고도 잊어버리면서 좋아할 수 있는 그런 심정을 체휼해 봤습니까? 이런 심정을 유발시키기 위하여 하늘은 종교라는 명사를 걸어 놓고, 구주라는 명사를 걸어 놓고, 신랑 신부라는 표어를 걸어 놓고 섭리해 오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위해서는 내 모든 것을 다 드릴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은 심정과 그리움의 사정이 연결되어서 드리는 만물을 받게 되는 날을 고대하고 계십니다. 심정과 그리움에 사무쳐서 드리는 가정을 받고자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움에 사무쳐 이 나라, 이 백성, 이 세계가 바쳐지기를 바라고 계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은 이제 하늘 앞에 그리운 심정에 사무쳐 ‘한푼밖에 되지 못하는 이 동전이라도 받아 주시옵소서.’라고 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럴 때 그 한푼은 우주를 대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천한 가정이라도 ‘부족하오나 이 가정을 받아 주시옵소서.’라고 할 때 그 가정은 천국의 유업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불쌍한 민족, 광야에서 헤매고 있던 이스라엘 민족이지만 그 민족이 하늘을 향한 그리운 심정에 ‘이 민족을 받아 주시옵소서.’라고 할 때, 하늘은 그 민족에게 지상천국의 주도적인 권한을 주려 했던 것입니다.

나라도 마찬가지요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이 땅 위에 인류들 앞에 주어야 할 어떠한 이상주의, 또는 이념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하늘을 그립게 하고 하늘을 심정적으로 사모하게 할 수 있는 그런 주의가 아니고는 인생의 근본 문제를 해결지을 수 없고, 천륜의 근본 문제를 해결지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심정적인 문제를 찾아 하늘을 그리워할 수 있고, 본연의 동산을 그리워 할 수 있는 한 시간을 갖지 못한 것이 타락이었기에, 그러한 관계가 맺어진 세계를 내 한 자체를 걸어 놓고 이루어야 하는 것이 복귀의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명을 다하겠다는 심정에 사무쳐 아버지의 마음을 위로할 줄 아는 하나의 모습으로서, 그 심정적이고 그리운 동산의 이념권 내에서 운행하시고 만물을 찾으시며 혹은 인간들을 찾아 움직이시는 하늘을 대하여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하나의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 사람은 하늘이 모른다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심정을 갖고 본연의 동산을 찾아 헤맨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는 하나님이 모른다 할 수 없고, 전인류가 모른다 할 수 없고, 온 피조만물이 모른다고 할 수 없는 본연의 참다운 사람임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운 에덴, 거기에 자라고 있는 만물, 거기에 살고 있는 인간, 거기에 찾아 주시던 하나님이 따로따로 사정을 통할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사람을 중심삼고 위로는 하늘이요 아래로는 만물이 화합하여 응할 수 있는 하나의 즐거운 보금자리를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곳에 있는 사람은 하늘이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요, 인간들이 위할 수 있는 사람이요, 만물이 존중할 수 있는 참다운 주인임에 틀림없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 일이 종결되지 않는다 할진대 복귀섭리, 즉 하늘이 세우신 전체의 뜻은 끝을 맺어 승리의 영광을 볼 수 없고, 우리도 역시 타락의 슬픔을 해원하고서 소원을 성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뤄지지 않는다 할 진대, 승리의 한 날을 갖춘 세계를 이 땅 위에 건설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기 도>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복귀의 노정이요, 한이 남겨져 있는 채 돌고 돌아야 할 우리 인간임을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나 수고하신 아버지의 심정세계를 통하게 될 때는, 돌고 있던 슬픔의 역사가 오늘날 저희와 관계를 맺게 되고, 오늘날 싸움의 관계는 미래의 인연을 조성할 수 있는 터전이 될 수 있으며, 무한한 소망, 무한한 행복, 무한한 그리움의 동산을 건설하고야 만다는 이 심정의 인연을 저희들이 알아야 되겠사옵니다.

아버지께서 아담을 거느리고 이곳 저곳 다니시면서 자랑할 수 있는 그 산천이 어디 있사옵니까? 아담과 더불어 자랑하고 싶었던 피어나는 꽃이 어디 있으며, 자라고 있는 수목이 어디 있으며, 푸르른 초원이 어디 있으며, 흐르고 있는 시내가 어디 있사옵니까?

그러한 심정을 통할 수 있는 경지에서 아버지와 동반한 자리에 설 수 있었던 아담은 타락하여 아버지의 곁을 떠났으나, 이제 저희 자체들은 그리워하던 아버지를 옆에 모시고 온 만상과 더불어, 온 만민과 더불어, 온 천주와 더불어 즐길 줄 아는 기쁨의 모습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나의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남기신 십자가의 원한도 그리움을 통하여 가지 않으면 인연을 맺지 못하고, 남기신 영광의 자리도 그리움에 사무쳐 이념의 동산을 흠모하는 마음이 없으면 인연맺지 못하는 것을 저희들이 알았사오니, 그리운 심정을 갖고 본연의 사람으로서 본연의 동산에서 만물을 대할 수 있는 아들딸, 타락의 인연을 맺지 아니한 아버님의 축복을 받는 승리의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해 주시오며, 참다운 인류의 조상들이 되게 이끌어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이날의 모든 것을 맡겼사옵니다. 드린 바의 말씀을 통하여 이들의 심정 위에 새로운 기쁨을 체휼한 심정이 싹터오르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오면서, 모든 것 주의 이름으로써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문선명선생말씀선집 제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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