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1972년 7월 2일, 금년을 뜻 가운데서 맞이한 것이 어제 같사온데, 벌써 반년을 지내고 이해의 후반기 첫달이 되는 7월 이 아침 안식일을 맞이했습니다. 아버지 앞에 만민의 해방과 만민의 승리를 아버지와 더불어 요구해 왔던 수많은 안식일 가운데서, 오늘이 당신의 뜻 앞에 있어서나 저희들 앞에 있어서 기념될 수 있는 날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바라옵니다.
아버지, 역사적인 섭리를 앞에 놓고 최후의 승패의 결정을 가름하여야 할 중차대한 시점에 서 있는 금년 이 후반기를 당신이 지켜 주시옵소서. 한계내에서 태어나서 한계내에서 살다가 한계내에서 끝을 맺기 쉬운 것이 인생살이인 것을 저희들은 보아 알고 있나이다. 당신께서는 이 한계 선을 넘어서 출발하셨고, 한계선을 넘은 자리에서 모든 것을 처리하여 승리의 목표를 다짐하고 나가는 자리에 계신 것을 생각하게 될 때, 하늘과 우리 인간은 언제나 화합이 되고 일체가 되고 상응이 될 수 있는 자리에 서기가 어렵다는 것을 역사노정을 통해 배워 알고 있는 저희들이 무한한 아버지 앞에 부족한 자신을 드러내고 머리를 숙인 이 자리이오니, 아버지, 찾아 주시옵소서.
오고 가는 모든 역사시대에서 수많은 선조들이 섭리의 뜻을 갈구하면서 최후의 승리를 하늘 앞에 돌려 드리겠다고 때로는 맹세도 했고 때로는 싸우기도 했지만, 번번이 당신이 경륜하시는 섭리의 뜻에 승리보다도 슬픔의 흔적을 많이 남겨 왔다는 것을 저희들은 너무나 잘 아옵니다. 오늘 이 시간에 처해 있는 저희 자신들은 역사를 넘어선 자리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역사의 와중에서 이것을 극복하고 최후에 하늘이 요구하는 정상을 넘기 위하여 출발한 무리였기 때문에, 가고 간다 하더라도 정상의 고개를 넘지 못하는 한 그것은 이편 사람이요 저편 사람이 아닌 것을 저희들은 똑똑히 아옵나이다.
어려움이 가중되는 험산준령이라 할지라도 연약한 자체의 부족을 탄식 하는 자리에서 그 환경을 마다 할 때에는, 준엄한 그 환경은 우리 앞에 행복의 여건을 가져다 줄 수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되옵니다. 그러기에 아무리 지치고 아무리 부족한 자리에 있다 하더라도, 생명을 다하여서라도 극복에 극복을 하여 정상을 넘지 않으면 안 될 복귀의 운명이 가로막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제한된 인간으로서는 한계선을 넘기 어려운 입장인 것을 잘 아시는 아버지요, 잘 느끼고 있는 저희들이옵니다.
악이 성한 모습을 바라보시고 이것을 방지하고 이것을 제거하시기 위하여 역사적 싸움으로 밀고 나오시는 아버지께서는, 이것을 아버지 자체로서는 방지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람과 더불어 합동작전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아시고 지금까지 역사시대와 더불어 같이 싸워 나오신 것을 저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내가 아니면 이 정상도 넘을 수 없는 것이요, 우리가 아니면 이 정상을 넘어 악의 분수령을 새로이 설정하여 이것을 제거시킬 수 있는 길도 바라볼 수 없기에, 아버님께서는 어떠한 수난길을 거쳐서라도 그것을 넘기를 바라는 간곡한 마음으로 뜻의 길을 찾는 어떠한 개인의 도상에 숨어 있다는 사실을 저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미미한 존재라 하더라도 그 한 개체를 두고 바라보는 것보다도 역사적인 섭리의 심정을 붙안고 오시는 아버지께서는 최후의 승리의 한 정상을 넘을 수 있는 모습이 되기를 바라시는 마음을 가지고 그 누구에게도 소원을 두고 나오시는 아버지이심을 저희들은 미처 몰랐습니다.
아버지, 이제 부복한 저희 자신들을 살펴보게 될 때, 악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악하기가 일쑤인 저희들임을 너무나 잘 직시하고 있나이다.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어떤 면으로 바라보더라도 하늘이 은은한 가운데 스며들 수 있는 자체의 본성이 되지 못하고, 환경을 아무리 헤치고 헤쳐 찾고 찾아 보더라도 당신의 형상적인 권한을 갖춘 아무런 내용이 없는 입장에서 하늘을 우러러보는 부족한 자신을 탓하면서 아버지를 부르지 않을 수 없는 자리에 서 있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저희들을, 아버지여, 긍휼히 보시옵소서.
그래도 이들이 아니고서는 당신은 갈 길을 넓힐 수 없사옵고 소망의 인연을 계승시킬 수 없다는, 딱하고도 비참한 아버지의 사정을 저희들은 알고 있습니다. 저희 자신들이 슬프기 전에 아버지가 얼마나 슬펐던가를 저희들은 미처 몰랐고, 저희 자신이 어려움을 당하는 자리만을 피하려 하는 마음이 더 간곡한 모습들임을 바라보게 될 때, 저희 개인의 몇천만배 되는 수난길을 넘어서기 위해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애달픈 길을 걸어오셨는가를 생각지 못하는 인간의 폐단을 너무나 잘 알고 있나이다.
한 생명을 구도의 길로 인도하는 생애노정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체험한 저희들에게 있어서는 역사의 가름길이, 역사의 행로가 구부러지고 으스러진 것을 바로잡아 가지고 그 누구나 소망의 터전으로, 희망과 행복의 노정으로 그릴 수 있는 복귀의 길을 다짐해야 할 아버지의 입장이 얼마나 불쌍하신가를 미처 몰랐나이다.
지난날의 역사를 통해서 많은 피와 눈물의 길을 가려 왔사옵고, 그뿐만 아니라 수많은 희생의 댓가를 치름에 있어서 피를 흘리는 순교의 흔적을 연결시키어 비참하고 처참한 슬픔의 역사를 오늘날 저희 개인개인들에게 계승시켰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에, 각자에게 역사적인 줄이 쥐어져 있는 현재의 입장인 것을 저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역사의 길을 당겨 가지고 끌고 가야 할 책임이 저희에게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되겠습니다.
내 자체에는 내 한 개체만이 아니라 역사가 지워져 있는 것을 저희가 알고 있사옵고, 현실적으로 모든 책임이 저희의 어깨에 지워져 있는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과거,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에 선(善)을 설정시키지 않으면 안 될 싸움에서 승리한 모습을 갖고 아버지를 부르지 않으면 안 될 우리의 행로가 남아 있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아버님, 저희가 현재 처해 있는 입장이 얼마나 슬프고, 저희를 바라보시는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조이고 있는가를 미처 몰랐습니다.
아버지, 이 시간 모인 당신의 자녀들, 굽어살피시옵소서. '나'라는 개체를 아버지 앞에 드러낼 수 없는 수치의 모습을 가리우고 아버지 앞에 엎드린 것을 저희들은 자각해야 되겠습니다. 제 얼굴을 아버지 앞에 드러내기에 부끄러운 얼굴인 것을 저희들은 몰랐습니다. 제 사지백체가 거룩하신 아버지 앞에 드러낼 수 없는 부족한 것임을 저희들이 자인하면서, 긍휼과 자비의 주인이신 아버지를 흠모하면서, 사랑의 아버지를 갈구하면서 저희 자체를 당신 앞에 맡기옵니다.
아버지 앞에 맡길 수 없는 부족한 자신이기에 주저하오나 저희를 바라고 계시는 아버지시기에, 이것이라도 뜻앞에 메움이 되고 뜻의 길 앞에 거름이라도 되게 하기 위해서 바치옵니다. 당신께 사용되는 면이 있거들랑 거름더미로 삼아서라도 하나의 생명이 자라는 데 보탬이 될 수 있게 받아 주시옵소서. 받을 수 없는 것을 받지 않으면 안 되는 불쌍한 아버지의 마음을 가지고 바칠 수 있는 그러한 모습이 나타나게 될 때, 창조의 능력을 지니신 아버지께서는 그 마음을 따라 어떠한 환경에서도 새로운 창조의 인연을 제시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부족한 자아의 체면을 불구하고 엎드린 것을 긍휼히 보시옵소서.
갖추지 못한 자신들이 살 수 있는 빛나는 영광의 날을 바라고 엎드렸다는 사실이 부끄럽지만, 죽음의 자리를 누구라도 피해 가기를 고대하시는 것이 아버지의 소원이기 때문에, 벌거숭이면 벌거숭이라 할지라도 추한 모습을 가릴 수 없는 저희들이 그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나온 것이오니, 품어 용납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진정 마음 문을 여시옵고 찾아오시어서 분부하여 주시옵소서. 지금까지 뜻을 위해 나오는 자리에 섰지마는 어떠어떠했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아시는 아버지 앞에 저희들은 솔직해야 되겠습니다. 솔직할 뿐만 아니라 하늘 앞에 있어서는 자기도 모르게 자동적인 입장에서 주저함이 없이 직고할 줄 아는 그런 모습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선(善) 앞에는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고, 본성이 폭발되는 발로의 심정이 각자의 마음에서 발발할수 있는 그 인연이 남아지지 않고는 아버지의 동정을 살 수 없는 타락의 후예인 것을 잘 아는 저희 자신들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부복한 이 모습들을 굽어살피시사 당신이 사랑스러워 품에 품을 수 있는 놀라우신 영광이 있을진대, 저희 자신이 그 자리에 안길 수 없으면 안기는 그 누가 있어서 그를 바라볼 수 있는 자리에라도 세워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 갖고 부복한 자녀들을 기억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7월을 맞이하여 첫번 맞는 안식일 이 아침에 당신의 현현과 더불어 당신의 창조의 손길이 저희 개개인의 심령 위에 머무시옵소서. 내일의 새로운 계기를 삼을 수 있는 오늘의 빛난 자아를 발견하고, 자체 앞에 연결되어 있는 하늘의 인연을 드높이 자각할 수 있는 이 아침이 되게끔, 아버지,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전국에 널려 있는 자녀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시고, 전세계에 널려 있는 당신의 어린 자녀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세계의 슬픈 운명을 가로막고 새로운 생명의 깃발을 드높이 들고 나선 소수의 무리, 초췌한 모습으로 일선 장병의 모습을 갖추고 하늘을 위하여 깃발을 들고 나선 무리가 있사오니, 이것이 세계에 널려 있는 통일의 기동대원인 것을 잘 아시는 아버지여, 그들을 지켜 주시옵소서.
당신이 같이하지 않는 곳에서는 성사를 바라지 않는 것이 저희 통일교회의 염원이 아니옵니까? 하늘을 제거시킬 수 있는 그 무엇을 남기고 싶지 않은 것이 저희들의 소신인 것을 아시는 아버지여, 그들이 남아 있는한 아버지의 뜻이 남아 있고, 그들이 존속하는 한 아버지의 현현하심이 존속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핍박과 슬픔과 고통과 비애의 자리에서 참아 나오시던 아버지여, 한스러운 절정을 밟고 넘어가 한을 풀 수 있는 때가 저희 목전에 다가오면 올수록 최후의 절박한 싸움이 저희를 맞이하고 있다는 사실을 저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전체가 이 싸움터로 총진군하여서 이것을 격파시켜 놓고 승리의 모습으로서 이 산정을 넘고 피안의 당신편에 뛰어들 수 있는 기쁨의 날을 기약하기 위해 모인 무리들이요 출동한 무리들이오니, 가는 길에 영광이 흡수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싸우는 길에서 당신의 현현하신 모습을 대신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아버지의 영광이 그들과 더불어 나타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만국 만민 앞에 아버지가 살아 계시는 실권을 드러 낼 수 있게끔 역사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그들이 나선 걸음은 하늘의 명령과 분부에 따른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 누구의 명령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시대적인 사명을 촉구하고 있는 현시점에 있어서, 아니 갈래야 아니 갈 수 없는 사명을 느끼고 아버지의 분부를 받고 가는 행렬이 세계 각처에서 움직이고 있사오니, 아버지, 지키시옵소서. 그들이 눈물 지을 자리에 있거든 아버지, 지켜 주시옵소서.
제가 그럴 자리에 있을 때 찾아오시어 위로하시던 아버지는 살아 계시어 이 시간도 그들과 더불어 같이 있기를 바라고 있사옵니다. 자기를 중심삼아 가지고 승리를 바라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당신을 중심삼고 승리를 바래야 되겠고, 자기 편의 욕망을 요구하여 나선 무리가 되어서는 안 되겠사오니, 하늘의 뜻만을 위한 편에서 나선 무리가 되지 않고는 안 된다는 것을 확실히 깨닫는 무리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갈보리 산정, 겟세마네 동산에서 최후의 십자가를 앞에 놓고 담판 기도하던 예수님의 입장,'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 뜻대로 하시옵소서' 하던 예수님의 간곡한 심정과 통할 수 있는 인연의 마음을 늘 갖고, 최후에는 아버지에게로 달려가고 아버지에게로 통합되고 아버지에게로 흡수될 수 있는 그 시간을 향하여 기뻐하는 마음을 갖고 부딪치고 전진하는 무리들 되게 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1972년 후반기가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하였습니다. 아버지, 이 기간을 누가 지키겠습니까? 이 기간의 주인이 이 땅 위에 없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민족 가운데도 없는 것이요, 이 세계 가운데도 없는 것이요, 저 하늘도 책임질 수 없는 것이옵니다. 보잘것없는 통일의 무리들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 이들이 아니면 안 된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될때, 저희들은 강하고 담대해야 되겠습니다. 그 누구도 요동할 수 없는 확고한 터전 위에 서 있어야 되겠습니다.
여기에 쌍수를 들어 아버지를 부르는 절규의 모습에 천지가 진동할 뿐만 아니라 영계의 천천만 성도들과 모든 영인들이 협조할 수 있기를 바라옵고, 이 순간에 하늘이 협조할 수 있기를 간곡히 바라옵니다. 그리하여 천지가 화합하는 자리에서 새로운 발동을 제시하여 새로운 출발의 기원이 될 수 있는 이번 기간이 되지 않으면 안될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사오니, 아버지여,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여, 지켜 주시옵고, 아버지여, 가리시어 당신이 승리의 터전으로 이끌어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 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어린애와 같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저희 마음은 어린애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아버지를 알던 자식이 아버지를 잃어버리고 어머니를 알던 자식이 어머니를 잃어버린 그 슬픔이 얼마나 크겠는가를 생각하게 될 때에, 잃어버렸던 아버지를 찾고 잃어버렸던 어머니를 찾은 그 기쁨은 또 얼마나 크겠는가를 생각하게 되옵니다. 잃어버릴 때보다도 찾았을 때의 기쁨이 더 큰 것을 느껴야 할 것이 오늘날 저희들의 입장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타락의 후예로 태어나 슬픔의 눈물로 출발한 역사를 맞음으로 말미암아 아버지를 잃어버렸지만, 이제 상봉의 한날을 맞이하는 그 시간에 있어서는 감사의 눈물이 앞을 가릴 수 있는 기쁨의 한날이 되어야 되겠고, 기쁨을 증거하고 승리를 증거할 수 있는 눈물과 더불어 아버지와 상봉할 수 있어야만 되겠습니다. 아버지의 아들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아버지의 딸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아버지의 자녀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영원한 축복과 기업을 이어받을 수 있는 새로운 가정 식구들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이들을, 아버지, 지켜 주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 그 누구를 위한 저희가 아니었습니다. 당신을 위한 것이요, 저희의 민족 그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당신이 원하는 세계를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이들은 싸워 남아야 되겠습니다. 이들은 기필코 이 땅을 지켜야 되겠습니다. 기필코 아버지를 대신해서 심정을 퍼붓는 효자 효녀들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가정을 빛냄과 동시에 그 나라에 있어서 충신 열녀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새로이 깨닫는 무리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덧없이 흘러가는 세월이 빠르다고 탄할 것이 아니라 뜻 앞에 승리의 터전을 마련하지 못한 부끄러움을 탄해야 되겠습니다. 지친 모습을 이끌고 이 자리까지 당도하여 내일의 희망이 없이 절망한 자리에 서서 울부 짖는 마음을 가지고 당신을 부르는 것보다도 아무리 쓰러지더라도 내일의 소망을 가지고 '아버지여. 참으소서' 위로하면서, 당신의 협조를 바라지 않고 현재의 입장을 극복하기 위하여 몸부림치는 그 모습이 얼마나 귀하다는 것을 깨닫는 저희들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저희의 모든 것을 온전히 아버지 앞에 바쳐 드리오니, 아버지, 지켜 주시옵소서. 저희는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보고픈 그리움이, 사무치는 심정이 필요합니다. 당신을 만나거들랑 자기 사연보다도 당신의 사연을 듣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야 되겠습니다. 형제를 대표하여 자기가 제물이 되겠다는 마음이 사무치는 것이 신앙자의 본질의 노정이요, 당신이 찾고 있는 무리 가운데 선각자가 되는 것을 저희들은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아무리 벌거벗었을지라도 그 수치는 거기에서 가리워질 것이고, 아무리 미급하고 부족하더라도 부족함이 없으신 아버지의 영광과 더불어 자랑할 수 있는 모습 가운데서 저희를 보호할 수 있는 그 뜻 앞에 선 저희들은, 부족한 자가 아닌 자리에서 당신의 영광에 동참할 수 있는 것을 깨달으면서, 이 아침 찾아온 이 무리를 기억하여 주시옵시길 간절히 바라옵니다.
전국에 널려 있는 당신의 자녀들 가운데 이 시간 이곳을 흠모하고 간곡히 사모하며 눈물짓는 자들이 있거들랑, 아버지, 반드시 지나치지 마시옵시고 찾아가시어 위로하여 주시옵고, 지켜 주시옵고 천만배의 복을 빌어 주시옵길 간절히 부탁드리옵니다.
이제 남아진 모든 것을 친히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한달을 아버지 앞에 바치오니 맡으시옵고, 이 해를 아버지 앞에 드리오니 맡으시옵소서. 기억될 수 있는 이 해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니다. 아멘.
여러분들은 통일교회의 일원인 것을 자부하고 있습니다. 또, 우리 통일교회는 뜻을 대신한 단체라는 것을 자부하고 있습니다. 우리 통일교회가 있는 이 한국은 뜻을 이어받을 나라라고 우리는 자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이 시대는 역사에 빛날 수 있는 시대라고 우리는 자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할 입장이 우리 통일교회, 혹은 우리 자신들로 말미암아 되어진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이 시대에 처할 수 있는 우리의 입장도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되어진 것이고, 이 나라가 이런 입장에 처해 있는 것도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서 되어진 것임을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또, 통일교회가 이와 같은 기반을 갖춘 것도 통일교회 자체에 의해서 되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동기가 되어서 이와 같은 처지에 있는 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들이 통일교회의 일원으로서 처하게 된 것도 여러분 자신들이 그런 자리에 서고 싶어서 섰다고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내가 있게 되고, 내가 인연된 이 자리라는 것은 나로 말미암아 되어진 것이 아닙니다. 통일교회가 있게 된 것도 통일교회 자체로 말미암아 되어진 것이 아닙니다. 한국이 이와 같은 섭리의 인연을 맺을 수 있는 운세의 자리에 선 것도 한국이 원해서 되어진 것이 아닙니다. 금세(今世)에 이와 같은 역사적인 사명을 해야 할 뜻의 때가 임하였다는 것도 이 시대가 요구해서 된 것이 아닙니다. 전부가 배후에 계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되어졌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즉, 우리가 처해 있는 자리는 나로 말미암아 되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내가 태어난 것도 나로 말미암아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 남자가 태어난 것은 남자를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여자를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예요? 여자는 남자를 위하여 태어난 것이 아니예요? 그러한 모습을 가진 것은 상대적인 목적의 가치를 다짐짓기 위해서 오늘날 자기라는 존재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미루어 보게 될 때, 남자는 여자를 위해서 태어났고, 여자는 남자를 위해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누구를 위해 태어났느냐? 사람은 사람을 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지 않느냐. 우리 인간은 어디까지나 결과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그 결과가 나타나기 위해서는 동기가 없는 결과가 있을 수 없는 것이 아니냐. 그러면 그렇게 태어날 수 있는 동기가 되는 어떤 주체가 있어서 그 주체를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냐.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사지백체에 있어서 눈을 두고 볼 때, 눈은 눈을 위해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몸을 위해 생겨난 것이 아니예요? 손이면 손은 손을 위해 생겨난 것이 아니라 몸을 위해 생겨난 것입니다. 보다 큰 자체를 위해서 모든 지체는 존속하는 것이 아니예요? 이것은 당연한 이치인 것입니다.
이렇게 보게 될 때에, 통일교회가 생겨난 것은 통일교회를 위해서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먼저 하나님을 위해 생겨난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이 나라와 이 세계를 위해서 생겨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 혹은 이 세계가 그 자체들이 원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배후에 있는 하나님을 중심삼아 가지고 이루어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배후의 인연을 보다 가치 있게 연결시키기 위해서, 보다 가치 있게 하나 만들기 위해서, 보다 빛날 수 있는 가치의 자리를 결정짓기 위해서 그러한 요인의 주역을 맡게 하기 위한 그 무엇이 있어야 될 것이 아니예요.
거기에는 개인이 있을 것이고, 단체가 있을 것입니다. 그 단체는 국가면 국가, 민족이면 민족 앞에 하나의 주도 역할을 해야 할 것이 아니냐. 그 주도 역할을 끝내 가지고 국가가 어떠한 하나의 목적 기준에 서게 될때, 그 목적 기준을 중심삼아 가지고 새로운 세대의 세계적인 무대 앞에 새로운 주역을 해 나가는 데 있어서 인간에게 보다 나을 수 있는 소망이 깃들 수 있지 않느냐. 이것은 두말할 바 없는 사실인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내가 처하고 있는 현재의 처지, 내가 존재하고 있는 현재의 입장이 나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다 이거예요.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50년이면 50년, 또 여러분이 지금까지 살아온 생애노정을 자기가 살아온 것처럼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자기가 산 것이 아닙니다. 그 배후에 그렇게 살게 하는 동기가 있었기 때문에 산 것임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배후를 망각하게 될 때에 인간은 고립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인간은 허무한 것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자체에 있어서 어떠한 주체적인 책임을 추구하고, 자기 자체로 말미암아 새로운 길을 출발하려는 마음을 갖게 될 때는 언제나 약하게 되는 것입니다. 언제나 고독한 자리에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내가 이런 자리에 서 있는 것은 나로 말미암아 되어진 것이 아니고 내 배후에 크나큰 역사적인 동기, 섭리적인 동기, 혹은 하나님이 있다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어떠한 가중된 동기가 투입된 자리에 서 있는 자기 라는 것을 자각하게 될 때는 강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필요하다구요. 이것이 무너지기 전에는 강한 것입니다. 사람도 그렇지 않아요? 뒤가 든든하면 강해지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악한 세계에서 빠져 나오는 사람, 환경의 여건을 자기보다 큰 것으로 울타리를 삼고 혹은 터전을 삼고 나서는 사람은 강한 것입니다. 이것이 없이 혼자 덩그렇게 나서게 될 때는 위험천만입니다. 고독한 사람입니다. 일선에서 소수의 병력이 수만 대군을 맞아 접전하는 그런 자리에 서게 될 때, 그야말로 생명이 경각에 놓여 있지만 내 뒤에 보다 강한 후원병이 진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 입장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유지시키기 위한 작전을 모색할 것이고 어려운 격전 가운데에서 때를 연장시키는 작전을 할 것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패자의 입장에서 전투에 임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희망적인 승세자의 모습으로 전투에 임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에, 오늘날 우리들은 어떤 생각을 하느냐 하면, 나만으로 출발한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자의 폐단이 아니예요? 자기 혼자 출발해서 이 모든 것을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어리석은 생각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내가 이렇게 된 것, 나는 역사가 동원되어 가지고 여기에 증거물로 태어난 것입니다. 증거물로 제시된 자아를 발견하는 사람은 무서운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 입장을 자각하고 나서게 될 때, 그 배후가 크면 클수록 약한 것이 아니라 크면 클수록 강하고 끈기가 있는 것입니다. 자기 자체의 자각을 하기에 앞서서 역사적인 자각과 그 존재의 유래에 대한 배후의 자각을 느끼는 사람은 위대한 사람인 것입니다. 보통 사람은 그러한 자리에 서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런 자각된 자리에 서기가 어려운 것이지만, 그러한 것을 느껴서 자기 스스로 자각하고 나설 때 이는 개인이 아닙니다.
만일에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 하나님은 오늘 이 시점내에만 들어와 있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내 생활감정과 언제나 상대될 수 있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 하나님은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존속해 나오는 하나님, 즉 역사적인 하나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하나님이 역사를 계승시켜 나오시면서 바라 나온 길은 어떤 길이냐 하면, 스스로 자각한 것에 취해 가지고 노력하는 사람을 통해 역사의 배후를 따라 나오시는 하나님이 아닌 것입니다. 연결될 수 있는 역사의 방향이라는 것은 섭리의 내용을 먼저 깨닫고 그 역사를 빛낼 수 있는 시점에 선 자아를 중심삼고 자각된 입장에 선 사람이 그려 가는 생활터전을 통해서 하나님은 섭리를 발전시켜 나올 것이고, 섭리의 뜻을 존속시켜 나올 것이 틀림없는 것이 아니냐, 이렇게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즉, 그 자리가 어떤 자리냐 하면 자기를 위하는 자리가 아니라 공적인 자리입니다. 공적인 자리인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배후의 보증된 그 환경을 대신해서 나는 이러한 자격자로 섰다고 하게 될 때, 그 배후의 가치를 크게 느끼면 느낄수록 부딪쳐 오는 원수가 아무리 강하더라도 크게 느끼는 이하의 것이면 정복하고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자동적인 원칙입니다. 누구의 원조를 받아 가지고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자율적인 입장에서 극복하고 남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념이 앞서지 못하면 무슨 일이든지 성공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더우기나 싸움에 있어서 벌써 패기가 빠져 가지고는 전투에 임하는 자세가 못 되어 패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패기와 자신감은 어디서 갖게 되느냐? 자기로부터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뜻 있는 국민, 민도가 높은 국민일수록 '역사적인 우리 선조들은 이러한 전통을 세워 왔다' 하는 자극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 전통을 이어받을 순간에 서 있다. 그 역사가 보다 빛날 수 있는 순간을 맞이했다.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나는 일격을 가하고, 하나의 행동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 행동은 역사를 대신한다'는 신념에 사무친 결의 밑에서 나서는 무리는 강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 교인들을 가만히 보면 혼자 다니고 있습니다, 혼자. 혼자라고 생각지 말라는 거예요. 여러분은 원리를 통해서 배웠을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소우주다. 인간은 성상과 형상, 내성과 외형을 갖추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본성을 통해서도 그렇고 외적인 모든 상징적 형상적 요소를 갖추고 있는 것을 두고 보더라도 그렇다. 만유의 공통 요소를 전부 다 지닌 모체다'라고. 인간은 소우주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 하나가 서 있는 것은 아무개 아들딸로 덩그렇게 태어나 가지고 그 자리에서부터 출발해서 20년이면 20년 역사를 지나온 그 사람으로 서 있는 것이 아니지 않느냐? 그것은 인간 창조 이후 역사 전체를 대표해 가지고 선 것이 아니냐? 그 한 사람의 움직임은 이 우주를 대표한 움직임이 아니냐? 그러한 배후와 더불어 자각된 자신을 갖고 나서는 사람은 당당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의 생명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겠느냐'라고 하셨는데, 그 생명은 오늘날 아무개의 30여년 생애권내에 있는 그런 생명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주를 주관하고 남을 수 있는 소망적인 생명을 말한 것이 아니겠어요? 그런 자각된 입장, 보다 큰 인연적인 배후와 더불어 자각된 자아를 들고 나서는 사람은 강한 사람입니다. 강해야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입니다.
힘의 균형에 있어서 열세자는 싸움에서 패하는 것이요, 강세자는 승리하는 것입니다. 우열의 차이에 따라서 승패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 우열이라는 것은 무엇으로 되느냐? 자기 몸뚱이가 뚱뚱하다고? 힘이 있다고? 아닙니다. 이어진 유래와 더불어 그 유래의 주체성을 대표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은 그 사람을 남겨 나오는 것입니다.
오늘날 통일교회 교인 하게 되면 그 교인은 통일교회의 전시품입니다. 박람회의 모든 출품작은 아무리 구석진 자리에 놓여 있더라도 그 나름대로 거쳐온 당당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대회에 참가할 수 있는 자격을 가졌다는, 자기 나름의 당당한 무엇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두드러진 자리에 놓인 것이면 그 자리에 있을 만한 그 내적인 인연에서 평균적인 인연을 거친 자리에 섰기 때문에 하나의 출품작으로 등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니예요?
이렇게 볼 때에,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 교인은 통일교회 교인 그 자체로서의 교인이 아닙니다. 통일교회를 대표한 전시품과 같은 입장에서의 통일교회 교인이 되어야 할 것이 아니예요. 그러므로 그를 붙들고 헤쳐 보게 될 때, 그를 통해서 통일교회의 현재를 알 수 있어야 됩니다. 확실히 알 수 있어야 된다구요. 먹고 사는 그의 생활을 통해서 통일교회의 현재를 역력히 볼 수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 통일교회의 운명과 더불어 그는 길이길이 남아지는 것입니다. 그를 또 헤쳐 보면 현재뿐만 아니라 통일교회 역사를 엿볼 수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 된다는 거예요.
통일교회는 통일교회를 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보다 내적인 인연을 통해 가지고 태어난 것입니다. 통일교회 역사의 깊은 자리는 나라를 위하는 것입니다. 그 나라는 세계를 위해서, 세계는 하나님을 위해서, 그 하나님은…. 하나님까지도 동원되어 있는 것은 뭐냐? 사랑을 위해서…. 그렇기 때문에 최고의 하나님의 사랑을 끌어다가 세계를 위하는 자리에서 자기 자체를 투입해 나가자는 거예요. 이것이 섭리관적인 입장에서 개체가 자리잡아야 할 처지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진국가면 선진국가, 미국이면 미국 국민과 우리나라 국민이 다른 게 뭐냐? 밥을 먹으면 우리가 더 많이 먹는다구요. 여러분, 뭐 미국은 자유의 나라고 무엇이고 그러지만 그 사회에 가 보라구요. 우리는 자유의 나라, 개방된 나라같이 생각하지만 그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완전히 구속되어 있다구요. 법을 어길 줄 모릅니다. 금을 딱 그어 놓고 어제 아침까지 서쪽으로 가던 길에 오늘 동쪽으로 가라는 푯말만 돌려 놓으면 서쪽으로 가던 사람들이 동쪽으로 가는 것입니다. 누가 있다고 가는 것이 아니고 없다고 안 가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있건 없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민도가 높은 국민입니다. 선진국가 국민인 것입니다. 어떤 면으로 보면 이것은 부자유입니다. 자유가 아닙니다.
그 자유라는 것을 거칠 수 있는 전통적인 인연을 어느때나 보호하고 육성할 수 있는 그러한 국민이기 때문에 그 국민은 역사를 보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역사를 보증할 수 있기 때문에 현재의 자격자로 등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역사를 보증하지 못하는 사람은 파탄자요. 현재를 망치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무엇으로 알 수 있느냐? 생활체제로 알 수 있습니다. 역사를 보증하고 역사를 관리할 수 있는 그런 자리에 서 있는 사람들이 결국 선진국가의 국민입니다. 그 한 사람을 봄으로 말미암아 그 나라를 엿볼 수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통일교회면 통일교회 한 사람을 엿봄으로 말미암아 통일교회 전체를 엿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아무리 망하더라도 자기 개체와 더불어 망하지 않습니다. 그가 쓰러지더라도 그 개체로 쓰러지는 것이 아니라 통일교회와 더불어 쓰러지는 것입니다. 죽더라도 통일교회와 더불어 죽고, 살더라도 통일교회와 더불어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거라구요.
애국자는 어떤 사람이냐? 자기와 더불어 사는 것이 아니라 나라와 더불어 사는 사람입니다. 그게 애국자입니다. 죽더라도 자기 혼자 죽는 것이 아니라 나라와 더불어 죽고, 살더라도 나라와 더불어 사는 사람이 애국자입니다. 이것은 두말할 것 없는 사실입니다. 사실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여러분들은 언제나 자기 관념에 매여 살고 있습니다, 자기 관념에. 이게 원수라구요. 타락의 동기가 뭐냐? 자기를 중심한 자각에서부터 타락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해와는 좋은 것을 원했습니다. 하나님과 같이 되어야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을 사탄은 미끼로 한 것입니다. 자기를 중심한 자각에서 자기 울타리를 공고화시켜서 이것을 넘지 못한 것이 악의 기원이 아니예요.
그렇기 때문에 자기에 대한 자각심이 강한 사람은 언제나 고독하기 마련입니다. 고독해요. 어디 가든지 고독한 것입니다. 행동하면 할수록 넘어치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면 할수록 좁아 들어갑니다. 여러분, 소용돌이 알지요, 소용돌이? 그것은 맨 처음에는 빙글빙글 노라리 가락으로 돌지만 그것이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점점 넓게 벌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뒤 것이 앞이 되고, 또 뒤 것이 앞이 되고 이래서 점점 조여들어 가지고 소용 돌이가 되는 것입니다. 소용돌이가 되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쑤시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딴 길을 따라가려고 하는 것을 우리가 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사망의 소용돌이에서 해방받자 할 때, 사망의 소용돌이가 어떻게 생겨났느냐? 자기 중심한 자각에서부터 생겼습니다. 아담은 해와로부터, 해와는 천사장으로부터 돌기 시작해 가지고 한 굽이가 되어 중심 없이 돌다가 떨어져 나간 것입니다. 이것을 해탈해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중심한 자각을 먼저 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 중심한 자각에서부터 출발한 인간이기 때문에 자기 중심한 자각을 하는 자리에 서는 복귀니 구원섭리니 하는 것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여기에서 자각해야 할 것은 무엇이냐? 역사적인 자각을 촉구해야 되는 것입니다. '역사적이다. 역사적이다' 할 때 결국 이것은 근본문제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참다운 사람에 대한 자각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참선(參禪)이란 뭐냐? 마음에 대한 자각입니다. 그러면 자각된 그 마음은 어디서 나느냐? 마음에서 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본체의 유래된 기반에서 존재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마음에 대한 근본을 자각하고 나서게 되면 자기 홀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체를 발견 하게 되면, 누구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예요? 주체를 위해 있다는 자각된 자리에 들어가면 주체와 하나되는 것입니다. 하나되면 여기에서 초월적인 능력이 비추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석가 같은 양반이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말을 응당히 할 수 있었습니다. 역사는 전부 다 그 하나의 가치적인 존재를 형성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그 자리에 등장하게 되면 역사는 그로 말미암아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아독존이란 말을 당당하게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통일교회 교인들이 언제나 생각해야 할 것은 자기의 처지를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현재의 입장이 어떠한데…' 하는 것을 혁명해야 되는 거라구요. 혁명해야 돼요. 김 아무개면 김 아무개, 박 아무개면 박 아무개 그 자체를 철폐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작전을 하더라 이거예요. 여러분, 그래요. 조금이라도 신비스러운 체험을 하는 사람은 그걸 대번에 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사랑하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전부 다 깨뜨려 버린다구요.
선생님 일생을 두고 볼 때도, 친구 중에서 선생님이 생각하기에 제일 믿을 만한 친구도 다 잘라 버렸다 이거예요. 예외가 없습니다. 어떤 가정에 대해서 믿으면, 그 가정도 뜻 앞에 합당치 못하고 앞날에 도움이 못될 때는 전부 다 헤쳐 버립니다. 그러니까 개인도 그렇고, 가정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단체도 합당치 않을 때는 헤쳐 버립니다. 어떠한 나라도 합당치 않을 때는 나라도 헤쳐 버립니다. 나라는 크니까 기간적으로 오래 걸릴 뿐이지, 그 공식원칙은 마찬가지입니다. 왜 헤쳐 버리느냐? 그게 있으면 장애가 되니까.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것을 없애 버리는 놀음을 해주시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오늘날 통일교회를 기성교회가 그렇게 반대하더니 왜 기성교회가 저렇게 약화되었느냐? 통일교회 때문입니다. 반대하는 데에서는 반드시 하나는 흡수되고 하나는 흡수해야 됩니다. 그러지 않으면 통일이 벌어지지 않습니다. 보다 발전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발전하는 것은 둘이 하나님 앞에 완전히 하나로 흡수되는 데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모순 상충이 없이 자연적인 흡수를 계속하면 급속적인 발전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자연적인 환경에서 흡수되는 기간이 길면 길수록 더디 발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칙입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은 '아, 현재의 내 입장. 이거, 침범받으면 큰일이다' 하면서, 그것이 자기로 말미암아 시작되고 자기로 말미암아 끝날 줄 알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그것은 역사의 흐름 가운데 한 점에 불과한 것입니다. 한 점에 불과한 거라구요.
산맥으로 말하면, 산맥이 아무리 뻗어 있더라도 거기에 큰 봉우리가 연결되어 있어야 그 산맥이 윤이 나고 빛이 나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모르지만 하나님편에서 수많은 국가 혹은 국민들을 바라보면, 그것은 산맥과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히말라야 산맥같이 장엄 하고 웅장하고 변화가 많은 그러한 형태를 갖춘 산맥은 세계에 추앙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라의 운명도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맨 처음 모양이 곱상한 평지는 맨 나중에는 시궁창에 가서 뿌리를 박고 만다구요. 그건 출발이 아무리 좋다 하더라도 그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라산을 가 보면 말이예요. 척 보면 이렇게 보이지 않는다구요.(행동으로 표현하심) 보게 되면 내 키보다 작아 보여요. 왜 그러냐? 서서히 경사가 커 나가기 때문에 높은 줄 모릅니다. 그런데 올라가 보면 진땀 빼는 거라구요. 가도가도 그 모양입니다. 그러나 계속 가다 보면 안올라온 것 같은데, 뒤돌아보니 어휴, 많이 올라왔다는 것입니다.
우리 통일교회도 그와 같은 길입니다. 지루하다구요. 지루합니다. 아이구, 뜻이고 무엇이고 와장창 병이 나든지 다리가 부러지든지 머리가 깨지든지 아주 따끔하면 좋겠는데, 그날도 이날 같고 이날도 저날 같고 이게 변화가 없습니다. 변화가 없지만 올라가는 걸음을 걷고 있으면 가고 난 후에는 틀림없이 어제의 자기와 오늘의 자기가 현격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귀섭리는 일시적으로 세계를 멸망시키려는 것이 아닙니다. 남모르게 서서히 이겨 나오는 것입니다. 그걸 알아야 됩니다. 도깨비식으로 말이예요. 여러분, 도깨비식이라는 말이 있지요? 붙잡자마자 승패를 결정하려는 것은 기습작전이니까 그것이 불가피합니다. 기습작전은 도깨비식 전법입니다. 그러나 정예군이 작전하는 것은 정상적인 작전이기 때문에 훈련부터, 벌써 작전하기 전부터 다 아는 것입니다. 출발할 때부터 다 안다는 것입니다. 알고 있지만 정규전입니다. 그렇지만 패배하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이겨 나가는 것입니다, 서서히. 서서히 이겨 나가야 망한 자리에도 폐해가 없다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무슨 말인지? 격전을 하게 되면 이겨서 노획물을 취하더라도 하나도 쓸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서서히 싸워서 이기면 노획된 물건은 완전히 쓸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걸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은 도깨비 전법을 쓰지 않습니다. 장기작전을 하십니다, 장기작전. 서서히 언제 이겼는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자는 기간에 이겨 버리고, 쉬는 기간에 이겨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졌지만 진 줄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걸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이 통일교회에 들어와서 지금까지 10년이면 10년을 지냈다면 '그 동안에 내가 통일교회를 위해서 얼마나 일했나? 통일교회 앞에 두드러지게 무슨 혹 같은 것을 보탠 적이 있는가? 할 때 아무것도 없습니다. 각자 따지고 보면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것 같지만 통일교회는 발전해 나왔다 이겁니다.
높은 산의 산정이 되면 될수록 올라가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산정이 가까와 오면 올수록 따라 올라가는 사람의 수는 적어지게 마련입니다. 알겠어요. 무슨 말인지? 이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맨 처음에 험악한 산정을 누가 넘느냐? 열 사람이 행렬을 지어서 '야, 오른다' 해가지고 한꺼번에 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누군가 혼자 넘는 것입니다. 험한 산이면 산일수록 혼자 넘어가는 것입니다.
역사 이래 히말라야 최고의 산정을 정복하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역사 이래 처음 가는 길이니만큼 처음 느끼는 모험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 모험길을 타개해 나가는 그 걸음걸이가 얼마나 정성스러워야 되겠어요? 한 발자국도 조심스러워야 되고, 모든 행동 하나하나에 자기의 모든 역사를 보증시킬 수 있는 그런 전진법을 사용하지 못하게 될 때는 왕창 다 무너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것을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우리 통일교회 교인인 어떤 사람에게 '통일교회에 들어온지 얼마나 됐소?' 하면 '1년이요''당신 통일교회 교인이요' 하면 '교인입니다' 이렇게 당당합니다. 10년이 된 사람에게 '당신 통일교회 교인이요?' 하면 '교인입니다' 합니다. 지금 6개월이 된 사람이 통일교회 식구라고 하는데 '당신도 식구요?' 하면 '예. 식구입니다' 하고, 10년이 된 사람도 식구라고 하는데, 그러면 무엇이 다르냐? 나무는 같은 나무인데 잎도 나무요, 가지도 나무요, 순도 나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가지 중에도 큰 가지가 있는 것이 아니예요? 바람이 불게 되면 큰 가지가 먼저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잔가지가 먼저 흔들리게 되어 있습니다. 통일교회에 있어서 먼저 흔들리는 사람은 송사리 떼입니다. 큰 줄기가 먼저 흔들리는 법이 있어요? 다릅니다. 처해 있는 처지가 다릅니다.
나이 많은 사람하고 젊은 사람하고 다릅니다. '다르긴 뭐가 달라? 평면적으로 밥 먹기는 마찬가지 아니야? 아침 밥 먹는 것도 같은데 다르긴 뭐가 달라?' 할지 모르지만 지나온 역사의 유래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좋은 물건, 나쁜 물건 무엇이 다르냐? 좋은 물건은 거쳐온 유래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나쁜 물건은 또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우주의 공법이 있다는 것을 아는 한 여러분 자신이 자신을 재 가지고 '나는 얼마짜리다' 그러지 말라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금덩이가 나 얼마짜리다?' 하고 나가서 춤을 추었다가는 도둑놈이…. 거기에 상극이 벌어집니다. 이놈은 저놈 때려잡고 저놈은 또 이놈 때려잡는 것입니다. 가만히 박혀 있어도 그 진가를 알고 파고들어와서 구해 내고, 피와 땀과 노력을 통해서 그것을 얻은 사람일수록 보다 가치를 알아주는 것입니다.
자기가 자신을 비준해 가지고 '나는 얼마짜리다?' 자랑을 하고…. 여자분들은 그게 참 빠르지요? 왼손에 좋은 것을 하나 가졌으면 '야 이것 봐라. 이것 봐라. 네 것보다 낫지?' 이렇게, 자랑을 앞세우지 말라는 겁니다. 자랑은 역사와 더불어 해야 합니다. 역사와 더불어 자랑하기 위해서는 오늘 자기 자체가 역사적인 자기가 되어야 됩니다. 역사적으로 자랑하는 사람보다 낫지 못해서는 안 됩니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 그런 관념을 가지고 자기 스스로를 연마하며 싸워 나오는 사람은 자기 혼자 뜨내기처럼 날뛴 사람과 역사의 시일이 길면 길수록, 연한이 많으면 많을수록 현격한 차이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걸 알아야 됩니다.
어디를 가더라도 자기 혼자 달랑 가 가지고 '나 아무개요' 해 가지고는 소용없어요. '아침에 출발해 가지고 무슨 밥을 먹고, 무슨 옷을 입고서 어느 곳에서 어느 곳까지 거쳐온 아무개요' 그런 사람은 누구나 다 맞이 하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나는 가문을 통해서 볼 때, 집안을 통해서 볼 때, 이러한 충신의 도를 이어받은 그런 뜻 있는 실적을 가지고…. 또, 나로 말하면 지금 시대적인 사명을 이렇게 이렇게 지니고 그 사명을 빛내기 위해서 왔습니다' 할 때는, 그것은 말하지 않아도…. 그렇지 못한 사람은 무엇인지 모르게….
천도라는 것은 보이지 않는 권위가 있는 거예요. 명령을 해서, 주먹다짐을 해 가지고 잘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말하지 않고도 체제를 갖출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디에 척 가더라도 혼자예요? 사방이 갖추어져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누구나 다 살고 있는 처지입니다. 즉, 우리의 처지입니다. 그 처지에는 천태만상의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격의 '격(格)' 이라는 것은 반드시 갖추어진 형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격이다 할 때 그 격이 무슨 격이냐? 아무개 아들딸로 태어난 그 격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격이라는 것은 역사성을 띠고 있는 것이요, 시대성을 띠고 있는 것이요, 미래성을 띠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성을 띠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인연의 주체가 있어야 될 것입니다. 그러한 분이 하나님이 아니예요? 그 하나님을 닮아야 된다, 그렇게 되어야 됩니다.
어디 전도 나가 가지고 배고프면 '아이고, 배고파라! 선생님이 못 먹게 하나 누가 뭐 보기를 하나' 하면서 먹게 마련입니다. '나는 뜻을 위해서 나라를 위해서 나온 사람인데, 내가 나라를 위해 간다는 이런 자리에서 배고플 때 먹는 것이 원칙이 아니냐?' 그 생각은 좋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먹을 수 있는 나라의 보증을 받았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만일 나라의 보증을 받았다면 어디 가서든지 먹더라도 걸리지 않는다구요. 나라의 보증도 못 받은 자리에서 턱을 들이대고 먹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그건 뭐냐면 비겁자입니다, 비겁자. 세상에서 그런 사람을 좋아하는 법이 없습니다.
세상에도 그렇잖아요? 인사도 안 하고 잔에 들어다 부어 먹어 보라구요. '이놈의 자식아…'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다 예(禮)가 있고 법도가 있는 것입니다. 그 예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안팎이, 전후 좌우 사방에 어울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어울리게 되면 아무것도 안 갖추어도 '야 멋지다' 하는 겁니다. 멋진 사나이라는 것입니다. '야, 그 녀석, 한 잔 주고도 기분 좋다'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잃어버려도 기분 좋다. 야, 그 녀석 한번 쓸만하다'라고 하게 될 때 관심도 갖고 멋지다는 말도 나오지, '이것으로 그만이다' 할 때는 침 뱉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걸 알아야 됩니다.
통일교회 교인들, 우리 자신들은 언제나 혼자가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외국 같은 데에 나가 보게 되면 동양 사람은 말이예요. 동양 사람, 동양에서는 모릅니다. 다 머리카락이 새까맣고 눈이 새까맣기 때문에 모르지만, 서양에 가 보면 동양 사람은 어디를 가든지 판에 찍어 놓은 듯이 간판을 붙이고 다닙니다. 아무리 서양 사람처럼 별의별 것을 갖다 붙이고 지지고 고치고 하더라도 그건 감출 수 없습니다. 그것은 드러나기 마련 입니다. 그래서 거기서는 내가 서양을 자랑하려고 안 합니다. 동양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동양을 자랑하는데 자기 얼굴을 자랑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동양의 문화라든가 그런 것을 자랑해 가지고 자기 권위를 세우려고 합니다. 나도 그런 놀음 할 줄 안다구요.
그렇지 않아요? 자기 조상이라든가 옛날 문화라든가, 지금은 전부 다 볼장 다 봐 가지고 지나가는 사람도 바라보지 않는 그런 문화의 틀거지를 가지고 '아, 난 고대문화국의 국민이다' 이러지 않아요? 여기 여러분들도 그렇습니다. 자기 어머니 아버지 자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국민학교 어린애들 보면 '너희 엄마는 어떻고, 우리 엄마는 어떻다. 너희 엄마는 나이가 많지만 우리 엄마는 젊다. 그렇기 때문에 너희 엄마 보다 우리 엄마가 낫다' 그러면 나이 많은 엄마를 가진 아이는 '우리 엄마는 나이가 많기 때문에 생각이 넓다' 이럽니다. 다 각기 주장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랑하려고 할 때는 '나 봐라!' 전부 다 이렇게 하게 안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먼저 울타리를, 자기 동네를 자랑하려고 하고 자기 부모를 자랑하려고 합니다. 멀리 외국에 가서는 자기 나라를 자랑하려고 하지요? 벌써 습관적으로 다 알고 있으면서도 왜 그러냐? 그러한 유래를 수습해 가지고 그 보증자로 서 있는 것이 현재의 입장을 자증하는 것인 데도 불구하고 이것을 확실히 관념적으로 수습해 가지고 생활 감정에 일치화시키지 못하는 폐단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현재의 이러한 환경을 통하여 재인식할 수 있는 자각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혼자가 아니라는 거예요, 혼자가. 좋다는 것을 자랑하는 데는 혼자 하게 안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뭐 하나 하려면 증거물이 필요합니다. 그것을 입증하려면 입증시킬 수 있는, 보장받을 수 있는 조건물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통일교회 안의 교인이라고 생각 하지 말라구요.
여러분, 하나님의 섭리를 두고 보면 섭리의 목적은 무엇을 이루려 하느냐? 나라를 이루려고 하고 세계를 이루려고 하는데, 세계와 나라를 다 이루고 난 후의 귀결점이 무엇이냐? 나라의 주권이라고 해서 보좌가 아닙니다. 결국은 사람입니다. 출발도 사람 때문에 했고 귀결도 사람 때문에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최후에 남아질 수 있는 귀결체는 어떤 것이냐? 그 귀결체, 귀결된 그 자체는 역사적인 승리의 결실입니다. 여러분 이걸 알아야 돼요. 아무리 못생겼다 하더라도 그 가운데는 역사의 빛이 빛나는 것입니다. 국가면 국가의 빛이 납니다. 국민이면 국민의 빛이 납니다. 각 분야에 있어서 이것이 원만하게 비칠 수 있는 내적 인연을 갖게 될 때 결실이 되는 것이지, 그 인연을 완전히 수습하지 못하면 결실이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 가을에 잎이 다 떨어진 감나무, 그 감나무의 맨 끄트머리에 달려 있는 홍시가 있다면 말이예요. 지극히 외로울 것이예요. 그렇지만 그 모양은 다릅니다. 판이하게 다릅니다. 수십년 자란 나무라면 수십년 거쳐온 모든 인연의 요소가 종합적으로 거기에는 전부 흡수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열매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종합적으로 흡수된 그것이 치우치지 않게 될 때 역사시대를 거쳐 나가면서 자랑할 수 있고, 자기가 가치 있는 존재로 환영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치우치게 되면 다 찌그러집니다. 마찬가지로 결실이라는 것은 유래의 요건을 초월한 자리에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오늘날 여러분이 기도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6천년 섭리의 역사적 열매입니다'라고 당당하게 큰소리합니다. 거 맞습니다. 그렇다면 헤치고 보면 그 가운데는 종합된 역사의 빛이 나야 됩니다. 역사에 잃어버리고 찾지 못한 것을 새로운 가치로 수습될 수 있는 생명의 요인이 깃들어 있게될 때는, 자신이 어디에 가 있더라도 그 본색은 열매를 통해서 다음에 맞이할 수 있는 봄날의 새싹을 중심삼고 새로운 세계를 맞이할 수 있는 것이 자연의 이치입니다. 거기 뭐 특별히 고려니 생각이니 하는 것이 필요없습니다. 자연히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 알아주고 몰라주고 불평하고 좋아하고 할 여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왜 이 말을 하느냐? 금년이 무슨 해냐 할 때 72년이다. 이러지 않습니다. 길더라도 '일천 구백 칠십 이년이다'라고 합니다. 일천을 빼도 안 되고, 구백을 빼도 안 되고, 칠십을 빼도 안 됩니다. 1972년입니다. 그러면 오늘 맞이하는 이해는 1972년. 이것(2)의 연장이요, 이것(70)의 연장이요, 이것(1900)의 연장이요, 그 다음엔 이것(1900)의 계승이요, 보다 이것(1970)의 계승이요, 보다 이것(1972)의 계승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1972년 오늘이라는 것은, 이해라는 것은 역사적인 결실의 날이고 역사적인 결실의 해입니다. 안 그래요? 결실이 못 되거든 역사의 결실을 향해서 전진하는 과정적인 한 토막의 해입니다. 이것이 길면 길수록 나쁜 것이냐? 나쁜 거예요, 좋은 거예요?
우리 한국의 5천년 역사가 좋은 역사냐, 나쁜 역사냐? 거지 꼴이 되어 가지고는 5천년 아니라 5만년이라도 그것은 가치가 없습니다. 왜 가치가 없느냐? 한국 백성은 세계 문화사에 보조를 맞출 수 있는 입장에 서지 못했기 때문에 비참한 백성이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아무리 역사가 길더라도…. 원숭이 역사가 사람 역사보다 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거 가치가 없느냐? 세계 인류 문화사에 공헌될 수 있는 무엇이 없기 때문에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몇 억만년이 되었어도 그것은 누가 돌아보지도 않습니다. 그렇지만 짧더라도, 단 5년이라도 역사 이래 찾을 수 없는 5년이 되었다면 여기서부터 새출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는 냉혹한 것입니다. 보다 나은 데서부터 보다 차원 높은 세계로 전진하려는 것이 역사적인 실정입니다.
여러분들이 통일교회에 들어와 가지고, 통일교회 원리 말씀을 듣고 들어와 가지고, 아이쿠 옛날에 통일교회가 우리 뒷집에 있었는데, 그때는 동네 방네 소문도 많고 잠도 안 자고 해서 원수 중의 원수였는데, 10년, 20년 지내 놓고 보니 이거 야단났구나. 반대할 때 태어난 외아들은 장가가 버렸는데, 뜻을 알고 보니 아이쿠 큰일났다. 내가 그때 들어와 가지고 아들이라도 축복받게 했으면 좋았을 텐데 이게 뭐야' 이렇게 후회합니다. 후회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걸 알아야 합니다.
역사의 열매가 어떤 모양으로 맺힐 것이냐? 통일교회 모양으로 열매 맺힐 것이냐? 붙들고 싸움하는 자리에서 맺힐 것이냐? 모른다구요. 알아요? 아버지 어머니를 붙들고…. 부자지간에 붙들고 싸움하는 데는 하나는 선하고 하나는 악하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일지라도 선하지 않고 악한 때는 붙들고 싸워야 됩니다. 싸움하는 아들이 역사적인 대표자라면 하나님도 그 싸움을 진지하게 구경하실 것입니다. 만일 수염이 있다면 수염을 드리우고, 정신을 차리고 진지하게 바라보실 것이 아니예요. '어서 싸움을 끝내라. 지지 말고' 하며 후원하실 것입니다. 그럴 수도 있다구요. 안 그래요?
싸움이라고 다 나쁜 것이 아닙니다. 부부 싸움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싸움하라는 것입니다. 악착같은 사탄의 여왕 후계자와 같은 여편네, 그렇다고 여자를 사탄의 후계자라 했다고 기분 나빠하지 말아요. 또 하나님의 아들 될 수 있는 남자, 세계적인 남성을 대표하고 대왕이 될 수 있는 선한 아들, 이 둘이 결혼했으니 싸움하는 것이 일쑤지…. 그건 싸움 안하면 안 됩니다. 남자가 양보하면 하늘세계가 망하는 것이고, 또 여자가 양보하면 사탄세계가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싸워야 됩니다. 싸움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사탄은 사탄편을 후원할 것이고, 하나님은 하나님편을 후원할 것입니다. 그런 싸움은 사탄의 관심거리요 하나님도 관심거리입니다.
그러면 그 싸움이 얼마나 계속될 것이냐? 하나님은 될 수 있는 대로 장기전을 하려고 하고, 사탄은 될 수 있는 대로 단기전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걸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은 '야 야, 싸움을 하지만 싸움하려고 하지 말고 남보다 노력을 더 해라. 다른 사람이 잠을 잘 때 너는 자지 말고 일을 더 해라. 담을 쌓더라도 남보다 더 높은 담을 쌓고, 성을 쌓더라도 두꺼운 성을 쌓아라' 이러는 거예요. 이것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뜻 있는 사람이라든가 희망적인 사람은 벌써 거동이 다릅니다. 급진적으로 돌격적으로…. 여러분 백 미터 선수가 될 거예요, 마라톤 선수가 될 거예요? '나는 백 미터 선수가 될 거야. 아이고, 마라톤을 몇 시간 동안이나 거 지루해서 어떻게 해. 뭐 몇 초내에 해결해 가지고 상을 받아야지' 상에 미쳐 가지고 백 미터 선수 하겠다는 것은 미친 것들입니다. 열흘이 걸리더라도 마라톤 선수…. 이건 언제 끝날지 모른다구요.
여러분, 운동종목 가운데서 마라톤이 왜 왕좌를 차지합니까? 마라톤이 단기전이예요? 그게 단기전이예요? 장기전입니다. 기름이 빠지고 뼈가 녹고 절여질 뿐만이 아닙니다. 그러나 자기가 거쳐가는 곳마다 전부 다 인연을 맺어서 이겼기 때문에 문제가 되고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마찬 가지로 통일교회는 종교에 있어서 마라톤 선수들로 등장한 패들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백 미터 단거리가 아닙니다.
'예수 믿고 천당가자. 믿기만 하면 된다!' 이것은 단거리 선수들입니다. '믿으면 천국간다. 예수 믿고 천국가자' 이거 얼마나 간단해요? '아. 예수님 피의 공로로…. 나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십자가의 피의 공로로 믿기만 하면 천당간다' 그런 식이 참 훌륭한 식 같다구요. 나도 그런 식을 한번 연구해 보면 좋겠습니다. 거 얼마나 간단하고 멋져요? 또 '안 믿으면 지옥간다'고 하면 눈이 번쩍한다는 것입니다.
통일교회에서도 지옥이 있는 것을 압니다. 지옥이 있는 것을 아는데 '지옥간다'는 위협을 절대 안 합니다. 통일교회에서 '너 그렇게 하면 지옥 간다' 그런 말 들어 봤어요? 통일교회는 지옥이 없는 것같이 생각합니다. 지금 여러분에게는 지옥이라는 관념이 없다구요. 기성교회는 천당, 지옥, 사탄, 예수님…. 설교하는 데 이것을 다 이용해 가지고 '이길 것은 내가 이겨야 된다'고 합니다. 그것은 자아적인 신앙관입니다. 그 말로는 추풍 낙엽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우리 통일교회는 종교에 있어서 무슨 선수? 마라톤 선수가 되어 보자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 밑창에서부터 뛰는 것입니다. 뛸 적부터 소문이라구요, 뛸 적부터. 출발 당시부터 죽느니 죽이느니 소문 내놓고, 전부 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이 놀음 해 가지고 이제 어지간히 올라왔다구요.
여러분들, 지금 어떤 사람들을 보게 되면 '나야 통일교회 교인인가? 응원부대야, 응원부대' 하는데 따라다니면서 응원하면 얼마나 좋겠어요. '아이구, 힘들어 어떻게 하나? 승리할 때 목전에서 응원하지' 어떤 것 될래요? 따라다니면서 응원하는 부대가 될래요, 결승점에 가서 '아이구, 이겼다. 뭐 이겼구만' 하는 부대가 될래요? 따라다니는 응원부대가 되어야 합니다. 경기 기간이 지루하면 지루할수록 승리의 최후의 결승선을 돌파 하게 될 때, 결승선에서 응원한 사람은 모르지만 따라다니며 응원한 사람은 기절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기절할 수도 있다구요. 그런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비록 자기 손에 상이 들어와 있지 않지만 그 상을 나라의 것으로 알고 기절하는 사람이 있다면, 상을 탄 마라톤 선수는 전통을 이어받을 수 있는 후계자를 못 남길는지 모르지만, 기절한 응원자는 틀림없이 자기 후대에 그 마라톤 선수의 기록을 낼 수 있는 후계자를 남길 것입니다. 어떤 것이 귀하냐? 상을 받고 끝난 선수를 자랑하는 것보다 역사를 빛낼 수 있는 보다 많은 선수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이 귀한 것입니다.
여러분, 축구 경기장 같은 데 가 보면 축구 팬들은 말이지요. 괜히 앉아가지고 흥분하고 있습니다. 씩씩 거리면서…. 내 언젠가 축구장에 갔는데 옆에 앉은 젊은 사람이 축구 선수 모양으로 얼굴이 불그레해 가지고 손을 내저으며 흥분하는 것을 보고 '아. 이 사람 무던히 화낸다'라고 평을 하고는 '그러나 나보다 낫다' 이렇게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낫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실감을 한다는 것입니다. 실감을 한다구요. 여러분도 실감이 나야 됩니다. 여러분이 경기를 못 하면 구경이라도 할 줄 알아야 됩니다. 뛰지도 못하고 구경할 줄도 모르면 그것은 인간 이하입니다. 그건 차라리…. 예수님이 가롯 유다 보고 '차라리 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했다'고 하셨지만, 그것은 '차라리 보이지 않았으면 좋을 뻔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차라리 눈앞에 보이지 않으면 좋을 뻔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통일교회 패입니다. 이 패가 커지면 무엇이 돼요? 패 다음엔 뭔가요? 아무개 패, 김씨네 패, 무슨 패가 있지요?
자, 이렇게 생각할 때 '나다' 하는데 무엇이 '나'냐? 한번 따져 보자는 것입니다. '너 밑천 갖고 있어?' '우리집이 있습니다' '이 녀석아, 그게 네 밑천이야? 이 녀석아, 죽을 때 갖고 가겠어, 달고 가겠어? 너는 빌려 쓰고 있지 않느냐? 그게 네 것이냐?' 우리는 전부 빌려 쓰고 있습니다. 밥을 먹는 데 있어서도 아이들은 '내 밥, 내 밥 줘, 내 밥' 하는데 그게 아이들 밥이예요? 따지고 보면 어머니 아버지가 벌어 온 밥입니다. 그것은 또 어머니 아버지 밥이예요? 그 밥의 본래 주인은 농부입니다. 농부가 주인이예요. 그러면 농부가 주인이예요? 그것은 아무 지방의 흙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면 흙이 주인이냐? 아닙니다. 흙보다 근본으로 파고 들어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어디에 처해 있느냐? 내 밥이라는 것은 어디에서 성립되는 것이냐? 여러분이 내 밥이라고 할 때, 그것은 내내 계속해 온 인연을 가진 밥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내 밥' 뭐 연기 같은, 냄새나는 밥이 아니라 내내 계속해 온 밥입니다. 그게 내 밥이라구요. '내 것' 하면 내내 계속해 온 것이 내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한국말이 재미있지요?
'내가 어디냐? 내가' 하는 자리를 중심삼고 '좋기는 어디서부터 좋아? 이 녀석아!' 라고 따지게 되면 '좋기는 뭐, 나 좋으면 되지' '이 녀석아, 네가 어디서부터 너야? 그 좋다는 것이 무섭다는 것입니다. 무엇 가지고 좋아하느냐 이것입니다. 지금 좋아하는 것이 하늘 천법으로 보면 벼락맞을 일입니다. 그럴 수도 있다구요. 내내 좋을 수 있는 것을 좋아해야 됩니다. 그러지 않으면 벼락맞는 것입니다. 잘하다 한번 걸리면 전부 다 따오기 춤을 추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나'라는 것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역사적인 보증을 받고 난 터전 위에 선 나라는 거예요. 그러므로 역사를 입증시킬 수 있는 데 있어서 그 나라 국민이면 국민으로서의 내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 씨족이면 씨족으로서의 내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가정이면 그 가정의 유래를 이어받는 자리에서, 가정을 대표한 자리에서 내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알겠어요?
이 젊은 사람들은 이런 관념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뭐, 히피라는 무리가 나오는 것입니다, 히피. '뿌레기가 어디냐?' '뿌레기가 어디긴 어디야 내가 뿌레기지!' 하는 것입니다. 뿌레기도 없이 줄기가 생겨 나고, 줄기도 없이 가지가 생겨나고, 가지도 없이 잎이 생겨날 수 있어요? 이것이 문제입니다.
지금 현재의 세계적인 정세를 두고 볼 때, 난국에 처해 있다는 것입니다. 왜 난국에 처해 있느냐? 그 자체가 어떠한 동기에서 나왔느냐? 어떠한 유래를 거쳐와서 선, 종합적이요 연속적인 관계성 이런 것을 다 망각해 버린 자리에서 자아를 찾는다는 것은 우스운 것입니다. 찾을 수 없습니다. 좋고 나쁜 것은 반드시 역사성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걸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처지, 내가 처해 있는 곳, 내가 처해 있는 땅, 이것을 여러분이 자각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의 눈을 가만 보면,'네 눈은 누구의 눈 닮았어?' '내 눈은 우리 엄마의 눈 닮았어요' '그러면 네 엄마의 눈은 누구 닮았어!' '엄마의 아버지 눈을 닮았어요' '그 아버지의 눈은 누구 닮았어?' '그 아버지의 어머니 눈을 닮았습니다' 이렇게 왔다갔다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네 눈은 여자의 눈도 아니고 남자의 눈도 아니구나' 그렇잖아요? 누구의 눈 닮았어요? 여자의 눈도 아니고 남자의 눈도 아닌 눈을 닮았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여자를 통해서 닮아 오고, 때로는 남자를 통해서 닮아 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되어 있다구요.
그러면 오늘날 우리에게 박혀 있는 눈은 '여자의 눈이다' 할 때, 그것이 여자만의 눈이예요? '여자의 눈은 고운 것만 깜빡깜박 바라보는 것이다' 그것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남자의 눈으로도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이것은 여자의 종합적인 눈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남자의 눈의 계통을 갖고 있기 때문에 남자가 보는 눈으로도 봐 줘야 되겠다는 거예요. 이러니까 남자라는 것은 대외적인 활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체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좋다는 것보다도 전체가 좋아할 수 있도록 내가 뭘 해주어야지' 이래야 원리적입니다.
코도 그렇다구요. 누구의 코 닮았어요? 어머니 코를 닳은 것이 아닙니다. 남자코, 여자코 전부 닮아 가지고 이렇게 되었습니다. 손도 그렇습니다. 몇천대 남자 여자 공동작전을 해 가지고 엉클어져 나온 것이 내 손입니다. 나에게는 남자 여자 전부 다 들어 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전부 들어가 있습니다. 안 그래요? 머리카락 하나도 그렇습니다. 누구의 머리카락이냐? 내 머리카락이 아니예요. 그것은 전부 다 남자 여자 선조를 통해서 계승받은 유물이지, 자기 자체가 창조물이 아니지 않느냐 이겁니다. 박물관과 같은, 골동품을 저장한 곳과 같은 것이 내가 아니예요? 그렇기 때문에 골동품 가운데에는 별의별 것이 다 있는 것이 아니냐 이겁니다.
여러분이 저 루브르 박물관이나 런던 박물관과 같은 데 가 보면, 거기에는 별의별 것들이 다 있습니다. 어떤 것은 어린애들이 보고 도망갈 수 있는 것인데 간판을 붙여 가지고 '이것은 역사적인 유물이요' 해 놓았습니다. 아이들이 보고 도망만 가요? 보고 쓰러질 수 있는 물건을 갖다 놓고도 이것은 역사적인 유물이라고…. '꿈에라도 다시 만나지 않기를 제발 빕니다' 이럴 수 있는 것이 귀한 물건으로 되어 있다 이겁니다. 그 귀한 물건이 뭐냐? 문화세계에 있어서 공헌한 줄기입니다.
만일에 종교의 기원에 있어서 세계에서 제일 큰 바윗돌이 하나 있어서 이게 뭐 해 가지고…. 우리 인류의 조상이 그 큰 바위를 보고 종교를 시작했다면 그것은 종교의 발원지로서 역사에 남는다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그 자체가 남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결부시켜서 둘이 상대적 관계를 맺으면 남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이 아닙니다. 역사적인 열매입니다. 이렇게 거쳐온 것이요, 이렇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이렇게 내가 이어받아 가지고 온 것입니다. 이것은 또 가야 하는데 올바른 전통의 흐름에 보조를 맞추게 될 때, 그것이 정의에 입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이 계시다면 하나님도 그러한 길을 따라서 찾아올 것이 아니예요? 이것은 두말할 것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처지, 통일교회가 통일교회를 위해 있는 종교가 되면 망하는 것입니다. 통일교회를 위하다 망하게 되면 말이예요. 모두가 '아이구, 잘 망했다' 하고 통일교회 교인들이나 눈물을 흘릴 것입니다. 그렇지만, 통일교회가 나라를 위하다 망했다 하게 되면 통일교회 교인만 눈물을 흘리겠어요? 뜻 있는 사람은, '아이쿠…' 하고 삼천만이면 삼천만이 눈물을 듬뿍듬뿍 흘릴 것입니다. 알겠어요?
사람은 죽어 봐야 안다는 말이 있잖아요? 그 은덕이 얼마나 크고 그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가 하는 것을 죽어 봐야 안다는 것입니다. 또 그 사람이 잘살았는지 못살았는지 안다는 것입니다. 그 자식 앞에 부모가 책임을 잘했는지 못했는지는 죽어 봐야 압니다. 자식들이 곡하는 소리를 듣게 되면 '아. 부모의 은덕을 받은 아들딸이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동네 사람들이나 친척이 와서 엉엉 울고 곡하는 것을 보게 되면 그 사람이 얼마나 영향력 있었는가를 알수 있고, 또 그 제자들이 와서 가슴이 시리고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끼는 것을 보게 되면 그 사람의 인격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예루살렘 같은 데 가 보라구요. 예수님 무덤에 가 보면 말이예요. 난데없는 오색 인종들이 와 가지고 무덤을 붙들고 눈물을 철철 흘리고 있는 것을 보면 '야, 이래서 훌륭하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역사는 지나가고 흔적은 없지만, 그 인연을 더듬는 가운데 뼛골이 울려 가지고 녹아날 수 있는 기름 땀을 흘리고 피어린 심각한 심정을 가지고 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볼 때, 과연 위대한 인물이고 성자라 아니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통일교회가 망하게 된다면 공산당이 '아이구. 좋아라' 할 것입니다. 민주세계는? 민주세계는 눈물을 흘리겠어요? 공산당보다 나은 자리에서 쓰러졌으면 공산당을 지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걸 알아야 돼요. 예수님이 천도를 앞에 놓고 자기를 잡아죽이는 그런 악당들보다도 나은 자리에서 죽었을 때 천도는 타락권을 지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걸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 통일교회는 가중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입체적인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통일교회 교인들 '그저 주일날이나 교회 가면 통일교회인이야! 그 부산스럽게 남들 사는 세상에 젊은 청춘도 다 잃어버리고…' 통일교회에서 날뛰어 봤자 국물도 없다구요. 선생님은 뭐 생기는 것이 있어요? 아무것도 없다구요. 있다면 있고 없다면 없습니다. 그 있는 것이 자기 눈앞에 깜박깜박하는, 나타나서 '아이구 좋아'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라와 더불어 있을 수 있는 것을 바라고, 세계와 더불어 있을 수 있는 것을 바라게 될 때 그것이 남는 것입니다. 공적인 활동을 하지 않게 되면, 원수와 같이 이간시키고 살랑살랑 눈치를 봐 가지고….
여러분, 선생님이 요전에 제주도를 갔다 오는데, 비행기를 타기 위해 쭉 줄을 서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얌전한 중년 부인이 있었어요. 우리 식구 세 사람이 가서 선생님 대신 줄을 서서 있었는데 나중에 내가 그 줄에 가서 섰습니다. 아무리 대신 세웠더라도 자기가 안 하고는 마음이 떳떳하지 못한 것입니다. 안 그래요? 옆으로 쓱 가서 붙었는데 그 부인이 '저 남자가 체구는 그만한데 새치기를 하려고 그러는구나' 이렇게 마음으로 생각을 한 모양이예요. 그런 생각이 마음에 와 닿아요. 조금만 더 지나면 입을 열거나 눈짓을 할 것이다 했는데 아닌게 아니라 그러는 것입니다. 그래 기분이 좋지 않았어요. 그렇다고 왜 그러냐고 할 수 있어요? 그러는 것이 당연하지요.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남은 맨 처음부터 와 서 있는데 떡 와서 앞 사람 옆에 가서 쓱 붙어 서니까, 그 부인은 앞 사람이 선생님과 관계된 사람인지 모를 거라구요. 그런데 세 사람이 쭉 빠지고 선생님이 혼자 서니까 그 다음에는…. 그걸 보면 그런 것은 통하는 모양이지요? 대신자가 한 사람보다도 두 사람, 세 사람씩이나 빠져 나가고 줄을 서니까 불평하던 것이 도리어…. 식구 들이 대신 가서 안 서 주면 내가 서 있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대신 이라는 것이, 대신 가지고는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그때도 느껴 봤어요. 대신 가지고는 완전하지 못합니다. 알겠어요?
하나님도 타락한 인간들을 내세워 가지고 일을 시킬 때 재미가 있겠느냐? 아이쿠 얼마나 가슴이 섬뜩섬뜩하겠어요? 어린아이를 우물가에 데려다 놓고 놀게 하는 것과 똑같은 놀음을 시키는 것이 되는 거예요. 자, 보라구요, 철이 있나. 여러분이 맨 처음 들어와서 철이 있었어요? 칼을 사방에다 늘어 놓고 춤추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신나서 춤을 추다가 허리가 부러지고…. 맨 처음 통일교회는 그런 식이었던 것을 여러분이 알 것입니다.
선생님이 하지 말라고 한 것은 '아이고, 너만…. 비밀이야. 이것은 나만 아는 것이다' 하며 쏙닥쏙닥해 가지고 그저 잡아먹으려 하고…. 별의별 놀음 다 해 가지고 생사람 잡아먹었습니다. 여러분, 그걸 알아야 됩니다. 날총잡이, 산에 다니면서 깊이 잠들어 있는 산돼지를 깨우고 놀라게 하는 것은 날총잡이입니다. 포수는 원래 죽이더라도 놀라지 않게 살짝 죽이는 것입니다. 놀라서 얼이 다 빠지게 해 가지고 기진맥진하게 해서…. 이들은 날총잡이들입니다, 날총잡이.
하나님이 복귀섭리를 하시는 데 여러분들을 내세우게 될 때에,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보라구요. 그런 여러분을 내세워 놓고 편안할 수 있겠어요? 이렇게 가다가는 코가 깨지겠으니, 그러다가는 머리가 터져 죽겠으니 할수없이 '야 야, 한바퀴 돌아왔다' 그럴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라구요. 하나님 눈으로 볼 때 여러분들의 꼴이 얼마나 해괴망측하겠느냐 이겁니다. 또, 그 주제에 자기 부족함을 알고 얼굴을 못 들고 땅에 엎드려 엉덩이를 높여 가지고 '아이고 나 죽소!' 이러면 모르겠는데 '내가 잘나서 이렇게 되었지요, 아버지? 내 얼굴 예쁘지요? 이게 무슨 수작이예요? 여러분들이 하는 놀음 놀이를 하나님이 눈으로 한번 들여다본다고 생각해 봐요. 철딱서니가 있어요. 없어요?
저, 석온씨 노친네도 참 철딱서니가 없다구요. 주름살을 한 바가지나 달고 다니면서 뭐 쏙닥쏙닥하고 살랑살랑하면서 뭐 어떻고 어떻고…. 어떤 때 보면 철딱서니가 없다구요. 그게 한두 번이 아닌 것을 알아야 돼요. 내 눈으로 봐도 그런데 하나님이 볼 때, '어이구, 내 딸 용하다 용해. 똥을 뭉겨도 용하다 용해. 또 싸라 또 싸라' 하시겠어요? 그 용하다는 것이 어떻게 용하다는 것인지 알아야 됩니다.
생각해 보라구요.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이 볼 때 그 동기 심통까지도 빤히 들여다보이는데, 여러분 같으면 뭐 남아졌을 것 같아요? 여러분 같으면 지금까지 남아날 것 같아요? 하나님이니까 참았지, 여러분들 같으면 씨알도 없을 것입니다. 안 그랬겠나 생각해 보라구요. '그래도 내가 이렇게 된 것은 타락한 후손이니까 할수없지 않소!' 할 때 그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이렇게 된 것은 내가 잘못한 것이 아니라 그 누구 누구. 아무개 때문에 이렇게 됐다'고 남을 물고 들어가려고 합니다.
형무소 생활을 해보면 영웅이 아닌 사람이 없습니다. 전부 다 성인입니다. '당신 왜 들어왔소?' 하면 '왜 들어와, 내가 잘못했나? 나는 일시에 이렇게 해 가지고 3년 후에 대한민국 백성을 잘살게 하려고 했는데, 그위정자들이 내 작전계획에 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들어왔다'고…. (웃음) 이렇게 죄인이라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내가 승리했으면 영웅이 될텐데…' 합니다. 패하면 역적이요 승리하면 충신이라는 말도 있듯이 변명은 다 있습니다.
자, 그런 것을 볼 때, 하나님이 몰랐다가는 큰일나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모르시지 않고 다 알고 있다구요. '요놈아!' 변명 할래야 변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입을 열게 되면 자기가 생각했던 것이 다 지워지리만큼 자기가 알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공판 정에 서서 아무리 부정을 하려고 하더라도 증거할 수 있는 자료가 눈을 감게 할 때는 입을 벌릴 수 있어요? 마찬가지라구요. 여러분은 그걸 생각해야 됩니다.
자기 자신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뜻을 위한다는 것이…. 손이 놀아나는 것을 가만히 하나님 눈으로 본다고 생각해 보라구요. '야, 이놈의 손아! 어디 가 어디, 어디 가? 이놈의 입아! 왜 놀아 왜? 이놈의 눈아! 어딜 봐 어딜 봐?' 전부 다 불합격품입니다. 합격품은 하나도 없습니다. 본래 불합격품인데, 불합격품을 대접해 달라는 그 자체가 모순입니다, 나를 알아 달라고? 불합격품은 불합격품으로 알아줘야지, 알아주긴 뭘 알아 줘요? 그런다고 섧다고 생각하면 합격될 수 있는 물건은 영영 나올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합격품은 불합격품으로 이마에 도장을 탁 찍어서 제쳐놓아야 합니다. 그래야 '아이쿠. 안 된다' 각성을 하고, 제 2 의 소모를 해 가지고, 다시 출발하여 소망을 가지고 죽은 무덤이라도 남겨야 합니다, 그러면 소망을 가졌기 때문에 지옥에 가더라도 거꿀잡이로 다리를 고쳐 가지고 떨어지는 패가 안 되고, '하나님, 저 살려주십시오' 이렇게 소망하는 패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조이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것을 생각할 때 현재 우리들의 처지는 나만이 아닙니다. 알겠어요?
요전에도 내가 수택리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지만, 여러분 자신들의 주인은 누구냐 하면 여러분 자신이 아닙니다. 여러분 자신들이 지니고 있는 그 몸이면 몸의 주인이 누구냐? '누군 누구야? 내가 주인이지' 하는데 아닙니다. 그 주인은 누구냐? 만물이 주인입니다. 그 몸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를 전부 다 빼 가면 꺼풀밖에 안 남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주인이 누구냐? 어머니 아버지를 통해서 나왔으니, 어머니 아버지가 본전을 찾아가면 없어지는 것입니다. 또, 그 다음에 마음의 주인은 누구냐? 하나님입니다.
주인이 전부 다 발동하여 소유관념을 가지고 주장하게 되면 내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어떤 것이 내 것이예요? 눈이 자기 거예요? 손이 자기 거예요? 몸뚱이가 자기 거예요? 아닙니다. 그러니 이 땅이 제 1 부모고, 그 다음엔 자기를 낳아 준 부모가 제 2 부모고, 하나님이 제 3 부모입니다. 이 세 부모의 유물입니다. 유물. 사랑의 유물. 사랑했다는 증거물로서 등장한 패가 오늘의 '나'입니다.
사랑의 유물로 남아졌기 때문에 그가 얼굴에 붙이고 다닐 것은 사랑입니다. 이렇게 된 것입니다. 그가 입고 다니는 것도 사랑입니다. 땅에 대한 전체의 사랑을 자랑해야 되고, 부모에 대한 은덕의 사랑을 자랑해야 되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자랑해야 합니다. 사랑의 유물이니 사랑의 박물관에 납품해야 할 진열품들입니다. 그러니 사랑의 인연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사랑의 길을 따라가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했습니다. 그렇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유물로서의 사랑의 인연을 공개시켜 가지고 환경에 그 빛을 발해야 할 인간인데도 불구하고 사랑받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싸움하는 데 있어서 제일 말리기 어려운 싸움이 사랑받겠다고 싸우는 싸움입니다. 그것은 생명을 내건 싸움입니다. 사랑받겠다 하지 말고 사랑하겠다 하고 싸우라는 것입니다. 그런 싸움은 싸우다 죽어도 하나님이 표창한다는 것입니다. 둘 다 죽어도 어느 하나 죄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려고 싸우다 죽게 되면 말이예요.
부처끼리 서로 사랑하려고 싸움하게 된다면 말이예요. '아, 당신은 나를 너무 사랑하는데 나보다 더 사랑하면 안 된다'고 남편이 그러면, 아내가 '여보, 그 말이 무슨 말이예요? 내가 당신보다 더 사랑해야지 당신이 나보다 더 사랑하면 안 됩니다' 이렇게 싸우다 둘 다 죽었다 합시다. (웃음) 둘 다 죽었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찾아와서 기념비를 세워 줄 것입니다. 알겠어요? 하나님은 심판관이기 때문에 그러는 날에는 기록이라도 남겨 줘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 같은 양반을 보라구요. 예수가 무슨 건덕지가 남아 있어요? 죽을 자리에 갈 때는 올바른 신발 하나 신고 가지 못했습니다. 옷 짜박지까지 전부 추첨해 가지고 나누어 갖는 형편이었습니다. 부패해 들어가는 말정(未政)의 시대였던 그때에 얼마나 궁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죽은 죄수의 옷을 서로 갖겠다고 추첨해서 나누어 갖는 그 신세들을 보면 얼마만큼 피폐한 역사적인 종말시대였는가를 알아야 됩니다. 형편없이 몰락한 사나이가 예수입니다.
보라구요. 민족한테 추방을 받고, 교회한테 추방을 받고, 어디 가든지 몰리고 이러다가 명성을 남기고 죽었어요? 누구를 위해 죽었느냐? 예수는 사랑하려고 하다가 죽었습니다. 알겠어요? 누구 누구를 사랑하려다 죽었느냐? 세계를 사랑하려고 하다가 죽었습니다. 간판을 가졌다구요. 사랑받겠다고 하다가 죽은 패가 아닙니다. 사랑하겠다고 하다가 죽은 패 입니다. 사랑을 하려고 하는데 원수들이 사랑을 안 받겠다고…. 그런데도 복을 주고 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죽은 푯말 밑에 사랑의 꽃이 피었습니다.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는 새로운 꽃이 피었습니다. 그 꽃을 하나님은 기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기념품으로. 그것이 기독교입니다. 당연한 것입니다.
이론적으로 생각할 때, 사랑받겠다고 하는 세상 가운데서 사랑하겠다는 운동을 제시한 것이 새로운 역사에 새로운 문화 창건의 동기가 되었던 것이 아니예요?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가 어디까지나 사랑받겠다고 하니 망한다는 것입니다. 지도자들이 사랑받으려 하고, 무슨 감독(監督)이 되면 '아, 내 휘하에 있는 교인들은 나를 사랑해야 된다' 그런 녀석은 미친 녀석 입니다. 낮도깨비입니다. 통일교회 문선생한테 사랑받겠다고 하는 녀석은 전부 건달입니다.
사랑하려고 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올바른 역사가 설정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데는 자기만 사랑할 것이 아니라 전체를 사랑하자. 왜? 내가 그렇게 태어났기 때문에, 그러한 사명을 터전으로 해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렇게 살고 그렇게 끝을 맺는 것이 본분이 아니예요.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려고 태어났고 사랑하려고 살고 사랑하려고 애쓰다가 죽어 가야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려고 하고, 어떻게 하든지 사랑했다 하는 사람은 불쌍한 사람이 아닙니다. 알겠어요? 불쌍한 사람이 아니라구요. 사랑을 하면서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부모가 있느냐? 진정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는 주는 것을 가지고'너 좋지?' 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포괄하기 때문에 사랑의 눈으로 볼 때,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면서 '더 좋은 것을 줄께'하고, 주고 나서도 미안함을 느끼고 '야! 이것으로 참아다오'할 수 있는 그러한 세계에서만이 천국이 탄생되지, 사랑받겠다고 하는 데서는 천국이 탄생 안 됩니다. 절대 안 됩니다.
현재 우리의 처지가 어떤가를 알아야 됩니다. 내가 통일교회에 들어온 것은 통일교회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들어온 것이 아니다, 이렇게 생각 해야 됩니다. 통일교회를 흠뻑 한번 사랑해 보자, 사랑하는 데는 먼저 만물을…. 부모의 사랑을 중심삼고 볼 때는, 사랑 못 받는 자리가 슬픈 자리입니다. 부모의 눈 밖에 나는 자리가 아니예요? 그것은 등외품의 자리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 구석에서부터 사랑해야 됩니다. 그래 통일교회를 사랑해 봤어요?
자, 통일교회를 보면 청파동에 통일교회 본부가 있는데, 사랑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가 어저께도 이야기했다구요. 여러분들이 본부를 다 뜯어고치고 다 그랬는데, 선생님도 없는데 전부 뜯어고쳤다고 해서 내가 기분이 나빴습니다. 내가 순회하면서 당장에 전보를 쳐서 정지하라는 명령까지 했습니다. 왜 그러냐? 역사적인 유물이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인 유물인 것입니다. 누구든지 뜻을 아는 사람이면 그 자리를 역사적인 내용이 깃들어 있는 곳으로 알고 찾아올 것입니다. 아무리 잘 뜯어고쳐 봐야 서양의 먼 발치의 구색도 갖추지 못한 그런 형태를 가지고 자랑하려고 할 아무것도 없습니다, 자랑할 아무것도 없다 이겁니다.
부족하면 부족할수록 빛나는 것이 아니예요? 거기에 전통이 있는 것이요, 거기에 빛이 있는 것이요, 거기에 가치가 있는 것이요, 거기에 흐름이 있는 것이요, 인연이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드러난 사실, 지금 현재에 보조를 맞추는 자리에 역사가 인연되는 것이 아니지 않아요? 전통을 존중시할 줄 모르는 민족은 망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기분 나쁘게 생각한다구요.
왜냐? 선생님이 무슨 집을 좋게 만들려면 자기네들 손 아니라도 당장에 만들 수 있습니다. 내가 아직까지 사랑하는 데 있어서 끝을 보지 못한 자리에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대해서 약속하고 맹세한 것을 끝을 보지 못한 자리에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땅을 사랑하는 것이 원칙이 아니예요? 이런 걸 생각할 때 순서가 엇바뀌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당장에 좋다고 하는 그것만 좋다고 생각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갈 것이냐, 어디를 통해서 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결국 거기에는 사랑의 때가 깃들어 있는 것이 아니예요? 역사와 더불어 증거적인 환경의 여건이 아무리 비참하더라도 거기에 남아 있어야 할 것이 아니예요? 여러분은 이걸 알아야 돼요.
여러분, 전도 나갔던 사람들이 전도 나가서 식기가 없어서 깨진 사기 그릇에다 밥을 담아 먹었다면, 그 그릇은 여러분의 일생에 둘도 없는 보물이 아니예요? 그런 걸 알아야 됩니다. 그걸 붙들고 나라를 염려했고 거기에다 밥을 먹으면서 하늘 앞에 통곡하며 기도했던 그 사실, 그 사상적인 전통이 보다 귀합니다. 예수가 십자가 형틀에 돌아가면서도 '아바 아버지여. 저들이 범하는 죄를 알지 못하니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 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위대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역사를 돌이킬 수 있는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이 통일교회에 들어와서 얼마나 사랑받으려고 했느냐? 그것은 흘러가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건 한때의 바램이지 영원히 유지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영원히 사랑하려고 하는 그런 전통을 따라서 남아져 오는 것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입장이 아니예요? 사랑받으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을 다 하고 나서 결과를 봐 가지고 좋으면 받고 나쁘면 안 받으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이 아니예요? 그러니까 하나님 자신이 사랑을 다 못한 자리에서 후회하는 역사를 붙들고 나오기 때문에 지금까지 수난의 그 복귀의 역로를 더듬어 왔던 것이 아니예요? 여러분은 그걸 알아야 된다구요.
일생 동안의 자기 생애를 생각할 때, 내가 이렇게 나이는 많지만 교회를 위해서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느냐? 교인들 보기에 부끄럽지 않아야 됩니다. 알겠어요? 여러분, 동료간에 부끄러움을 느낄 때가 있지요? 부끄러운 때는 그 환경에 어울리지 못하게 될 때입니다. 그런 수치감을 느껴 왔지요? 내 이야기 하나 하지요.
내가 스물 몇 살 때 일이예요. 우리 친구가 있었는데 목포에서 제일 갑부였어요. 지금 당장이라도 그 집에 찾아가게 되면, 다 알고 인사도 할수 있고 쉴 수도 있는 입장입니다. 그 친구가 어느 집 외동딸과 결혼을 하게 되었어요. 그때는 왜정시대라 전부 다 국방색 옷을 입을 때입니다. 그때는 무슨 예복이니 뭐니 입고 예식을 하지 않을 때예요. 그래도 목포를 대표할 수 있는 도평의회, 그때로 말하면 도의원이지요. 그런 입장에서 도지사부터 한다는 패들이 전부 다 모이는…. 그때는 왜정 때이지만, 난시(亂時)지만, 전시(戰時)지만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국방색 옷을 입고는 결혼식을 하는 곳에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나는 응당히 그럴 줄 알고 갔다구요.
그때는 결혼식 하게 되면 사회풍조가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에, 국가시책이 그렇기 때문에 그럴 줄 알고 떡 갔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라는 사람이 말이예요. 들러리로 서는 사람이 친구 세 사람이었다구요. 그 세사람 옷을 마련했는데, 그 옷을 보통 사람을 기준으로 해서 똑같이 마련을 했다는 겁니다. 여러분 보기에는 선생님이 몸집도 얼마 크지 않은 것같고 보통 사람 같지요. 그런데 보통 사람들이 입는 옷을 입으면 여기밖에 안 오고 여기밖에 안 와요. (행동으로 표현하심) 그렇기 때문에 시장에 가도 김일 선수 정도의 사이즈가 아니면 맞지 않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둘레가 이렇구 상당히 그렇다구요 선생님이 다른 남자들처럼 어깨는 이렇게 쪽 빠졌지만 엉덩이가 큽니다. 여러분이 얼마나 세밀히 보는지 모르지만 나만큼 모를 거예요.
이제 한두 시간 후에는 식이 벌어질 텐데, 거기에 가니까 도(道)에서 저명한 사람들이 전부 다 예복을 입고 격식을 갖추어 가지고 모여 들었습니다. 전쟁 때지만 옛날에 준비해 놓았던 옷들을 입고 다 나서는데, 내옷 입은 것을 보니 내가 봐도 이 옷이…. (웃음) 거울을 보니 이것 죽지도 못하고 도망도 못 가겠고…. 자 그 옷을 입어 놓으니 말이예요. 와이셔츠는 이렇게 되고 웃옷은 이렇게 짧아서 이것을 잡아당기려니 여기가 그렇지, 이래 가지고 이게 맞지 않지…. 그때의 창피함은 일생 동안 잊혀 지지 않습니다. (웃음) 지금도 생각하면 아주 실감납니다. 그걸 보면 선생님도 끔찍이나 체면을 생각하고 그런 환경에 어울리는지 안 어울리는지에 대한 감정이 예민한 사나이라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참 빠릅니다. 벌써 척 보면 저 사람은 틀렸다, 대번에 안다구요.
색깔을 고르는 데도 참 빠릅니다. 일본에 가서도 넥타이를 고르는데 누구는 본 것을 보고 또 보고 수없이 보면서 뒤적뒤적하는 거예요. 나는 쓱 보면…. 남은 하나 고르는 데도 한 시간이 걸렸다는데, 선생님은 한번 쓱 보고 단 몇초에 재깍 골라냅니다. 가만 보면 뚱뚱한 사람에게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데 자꾸 하고 다니다 보면 어울리게 됩니다. 맨 처음엔 별로 멋이 없는 것 같지만 자꾸 하고 다니다 보면 좋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단조로운 것은 고르지 않습니다. 입체적인 것, 보통 사람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 같은데 쓰다 보면 뭐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머니도 옷을 해 입을 때는 나한테 '부탁합니다' 합니다. 색깔을 잘 골라 주거든요. 그런 뭐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오죽했겠어요? 그 환경에 어울리지 못했던 그때의 챙피라는 것은 일생을 두고 잊혀지지 않습니다. 야, 지옥이 따로 있나, 지옥이. 지옥이 다른 게 아니라구요. 그 환경에서 자기의 수치감을, 자기의 비준에 맞지 않는 것을, 그 어울리지 않은 것을 환경적으로 백 퍼센트 느끼는 것이 지옥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 어울리지 않을 때 거북한 것 있지요? 꽁무니를 아무리 빼려고 해도 뺄 틈바구니가 없습니다. 여러분 그런 것 느낄 때가 더러 있지요? 자기 변명하지 않고 설명도 않지만 부끄러워 가지고 따라갈 수도 없고 도망갈 수도 없는 그런 느낌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자, 그런 것은 운이니까 그때는 다 지나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계, 무한한 세계에 가게 되면 시간은 영원입니다. 한번 보게 된다면 영원히 따라다녀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알겠어요? 한번 했다 하게 되면 영원히 남아지기 때문에 영원히 따라다니게 됩니다.
그런 판국이 벌어지는 세계가 된다면, 한번 뒤집어지면 백방이 알고 살아갈텐데 그때의 자기 정체를 어떻게 수습할 것이냐? 그런 것 생각해 봤어요? 그걸 수습할 수 있는 비법은 이 육신생활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바로잡을 수 있는 것은 이때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걸 바로잡는 것은 절대 나를 위해서 바로잡는 법이 없습니다. 알겠어요? 나를 위해서 바로 잡는 법이 있다면 통일교회 문선생이 지금까지 50년 동안 절대 고생 안했습니다, 통일교회 들어와 가지고 '내가 고생했는데 그걸 몰라준다'고 하는 사람 있으면 그 입을 째야 됩니다. 입을 째 버려야 된다구요. 통일교회에서 누구보다도 선생님이 더 고생했습니다. 거 틀려요. 맞아요? 맞지요? 통일교회 선생님이 누구보다 고생했는데도 불구하고, 일등인데도 불구하고 등수도 못 되면서 나 알아 달라고? 그것은 강도입니다. 도둑놈 패라구요. 입을 다물고 후퇴하라는 것입니다.
통일교회 문선생도 그렇다구요. '하나님, 나 고생했으니 알아주시오' 하면 불효자입니다. 어떤 아들이 '내가 십년 동안 효성한 것에 대한 대가를 몰라주시오, 아버지?' 이렇게 한다면 불효자입니다. 그 누구를 위해 있었느냐? 부모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한 거라구요. 자기 이익을 위한 유도방법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아무리 고생했다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꿈에도 불평을 안 합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역사시대를 거쳐오면서 고생하신 하늘의 부모가 계신 것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자기가 고생했다고 얼굴 들고…. 어림도 없습니다. 자, 이렇게 생각하게 될 때, '뭐 이러고저러고'변명해 가지고 쩨쩨하게 내가 통일교회 안 가는 것은 누구 때문에 안 간다고…. 그 죽은 유 협회장이 욕 많이 먹고 갔지요. '아이구. 그 유효원이 그게 어떻고…. 내가 뭐 통일교회 선생님이 싫어서 그러나? 지금도 나가 가지고 그럽니다.
엊그제 어떤 아주머니가 와 가지고, 통일교회에서 나가 가지고 자기 멋대로 시집을 갔다는 거예요. 그래 통일교회 생각이 떨어져 나갔으면 좋겠는데 이거 점점 굳어진다나요? 몽시에라도 안 보이면 좋겠는데, 꿈에 안 나타나면 좋겠는데 밤낮없이 나타나 가지고 못살게 만든다고…. 못살기야 왜 못살아요? 옳은 길 가라는데, 이것 안 보려고 해도 보이고, 생각 안 하려고 해도 생각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편한테 툴툴거리면서 이러고저러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됐다고 그러니까, 남편이라는 사람이 도대체 통일교회 문선생이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고 관심을 갖더라는 것입니다.
통일교회가 그런 곳입니다. 여러분이 적당히 지나갈 수 있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그럴 수 있으면 여러분보다도 선생님이 먼저 갈 것입니다. 선생님이 여러분만큼 머리가 없는 것도 아니요, 수단이 없는 것도 아니요,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보다 낫습니다.
우리 예진이에 대해서 얘기하면, '너 머리 나쁘니?' 하면 머리가 좋다는 것입니다. '네가 공부하면 일등은 틀림없지?' 하면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적이 일등 자리에서 벗어나서는 안 될 것이 아니냐?' '그건 내가 안 하니까 그렇지. 이제라도 하면 돼' 합니다. 예진이가 5학년까지도 글을 지었습니다. 4학년 때부터 소설을 참 많이 읽었어요. 선생님 책장에 있는 것을 거의 다 읽었다구요. 아주 앉아 가지고 독파를 다 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너 졸업생이 될 텐데 나하고 약속하자. 너 머리가 좋은지 나쁜지 내가 한번 테스트할 테니까 실력 한번 발휘해 보아라' '예, 합시다' 찬성하더라구요. 하면 전부 다 백점입니다. 그래서 예진이가 공부 해서 5학년 때보다 6학년에 올라가서 그렇게 차이가 나니까 그 담임이 컨닝하지 않았느냐고 하더라는 거예요. 그런 말을 듣고 기분 나쁘고 분하다고 해요. 그래 분해라. 그 선생님이 남자 같으면 쫓아가서 배때기를 차 버리고, 모가지를 잡아도 놓지 않고 '이놈의 선생, 너 가르쳐 준 것이 컨닝밖에 없느냐?' 했을 텐데 여자라서…. 여자니까 그래서는 안 되겠지요? 남자 같으면…. 그걸 보면 예진이가 머리가 있다구요.
우리 효진이도 '너 일등해야지?' 하면 '합니다' 한다는 것입니다. 백점 받아 오는 것입니다. 4학년 올라갈 때 일등했습니다. 일등할 수 있는 머리가 있습니다.
선생님이 머리가 있는 사람입니다. 뭘 연구해 가지고 학박사 됐다 하면 박사 하나만 생각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셋 이상 안 하면, 40대까지 앉아 가지고 내가 죽든가 살든가 판가리하고 출발한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뭘하느냐? 다 계산하고 저울질해 보니 그것이 포괄성이 없기 때문에, 다 집어 던지고 통일교회 문선생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통일교회 선생 노릇 쉽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해먹으라고 해도 못 해먹습니다. 통일 교회 문선생이나 해먹게 되어 있지 다른 사람은 갖다가 안겨 줘도 하루도 못 해먹는다구요.
여러분이 이 길을 도망갈 수 있고 피해갈 수 있었으면 선생님이 갔지, 이러고 있겠어요? 그렇게 주먹구구식으로 사는 사람인 줄 알아요? 여러분이 피해 가서 이익될 수 있는 길이 있었다면 선생님이 벌써 피해 가서 낮잠 자고 쉴 것입니다. 갈 데가 없기 때문에 이 노름 하는 것입니다, 갈데가 없기 때문에. 알겠어요? 갔다가도 또 와야 됩니다. 안 올 수 없습니다. 머리를 들고 갔으면 그 다음엔 배밀이를 해 가지고 돌아와야 하고, 한 번 좋다고 웃고 갔으면 천 번 눈물을 흘리고 그저 '살려주십시오' 하며 돌아올 길이니까 할수없이 붙어 있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할수없다고 해서 낙망적이 아닙니다. 희망적인데 그 책임이 너무 크기 때문에 할수없다는 말이 나올 뿐입니다.
생각해 보라구요. 여러분, 선생님이 같은 입장에서 뭘하면 누구에게도 절대 뒤떨어지지 않습니다, 무슨 일을 하나. 세상에 무슨 일을 하더라도 절대 질 자신이 없다구요. 질 자신이란 말이 이상한 말이지만 말이예요. (웃음) 절대 지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내가 한다고 결심하면 합니다. 머리가 열두 쪽이 나더라도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친구들이 나를 믿는 것입니다. 왜정 때 지하운동이나 학생사건 때도 '나를 믿어라!' 하면 전부 다 내가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모가지가 동강이 나도 절대 안 부는 것입니다. 아무리 고문이 쏟아져도 '쳐라 이 자식아!' 하며 절대 안 붑니다. 강제에 못 이겨 가지고 굴복하는 사나이가 아닙니다.
우리 아들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야, 잘 닮았다. 어쩌면 그렇게 옛날 나 어릴 때 모습이냐' 참 실감이 납니다. 놀기를 시작하더라도 저녁 때 내일 논다고 마음먹으면 책은 눈앞에서 보이지 않게 저 헛간에 집어 던져 버립니다. '너 집에 가' 하고는 공부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고 마음대로 노는 것입니다. 그렇게 놀 때는 새벽이 되어도 잠을 안 자는 거라구요. 마굿간에서 잠자는 소의 배때기를 들이차서 깜짝 놀라서 '엉' 하고 날뛰는 것을 보고 그런 흥분된 자극적인 환경을 보고 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효진이가 딱 나를 닮았습니다. 머리가 깨지면 깨지고 간다 하면 가는 것입니다. 그런 성격의 소유자라구요.
그런 것을 보면 하나님이 참 계산을 잘하셨다는 것입니다. 나 같은 사람을 잡아 썼기 때문에 지금까지 모진 핍박과 멸시를 받으면서도 끈질기게 버터 나가고 있지…. 그런 사람입니다. 뭐 남의 비위나 맞춰 가지고 한들한들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구요. 여러분 그걸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저렇게 갈 수 있는 길이 있으면 내가 먼저 갔습니다. 알겠어요? 먼저 갔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여기 모인 것은 여러분 때문에 온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할수없이 몰려온 패입니다. 알겠어요? 여러분 자신 때문에 온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인연이 있어서 왔습니다. 통일교회 문선생과 인연이 있다구요. 인연이 있어서 온 것입니다.
대해(大海)를 향해서 흐르는 물은 전부 만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만날 때가 됐기 때문에 통일교회에서 만나 가지고 천하의 대해로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러한 인연이 있어서, 통일교회에서 단결해 가지고 더 큰 분야의 대해를 향해서 흘러가기 위해 온 것이 아니예요. 그러니 대해로 흘러갈 수 있는 훈련을 해야 됩니다. 여러분 그걸 알아야 됩니다. 그것이 갈 길입니다.
여러분, 대부분의 사람들, 자기들이 뭘 해먹겠다고 하는 패들이 많습니다. 앞으로 동창생들을 중심삼아 가지고 자기가 뭘 해먹겠다고 합니다. 다 해먹으라는 거예요. 다 해먹는 동안 나는 구경이나 하고 시정이나 해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갈 때, 죽을 때는 전부 다 나한테 상속해 주고 갈 것이다 하는 것이 선생님의 배짱입니다. 그렇게 되어 있다구요.
그렇다고 통일교회 문선생 하나를 중심삼아 가지고 내가 자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생각할 때 '통일교회 문선생은 자기 자신을 문선생이라고 말을 하다니 세상에 자신을 높이는 사람이 어디 있어?' 하겠지만, 그것은 나를 중심삼은 가치적인 미스터 문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적인 대표로 선 미스터 문이기 때문에 나도 존경해야 된다 이거예요. 알겠어요? 존경할 수 있는 미스터 문이라는 그 기준을 내가 알기 때문에 그 기준 앞에 상대적인 역할을 해야 할 개인 미스터 문을 말하지 않는다 이겁니다. 다릅니다.
공적인 것은 지금도 공적이요, 그 아무한테 머리를 숙이지 않습니다. 언제라도 공적입니다. 자식이 어렵게 될 때 부모의 탈을 벗고 머리를 숙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통일교회 문선생이라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공적인 그 자체로 볼 때 내가 문선생이라고 이야기해도 조금도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생님이 추구하는 목적을 높임에 있어서, 사명을 촉구할 수 있는 자아를 강조하는데 있어서 자극은 될는지 모르지만 자기 자신을 높이는 자리에 있어서 이런 감정을 표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보라구요. 선생님이 지금 청파동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어떻게 세계와 맞먹어 들어가느냐? 이게 수수께끼입니다. 수수께끼라면 그런 수수께끼가 없다구요. 통일교회 문선생이 말하는 것이 역사와 더불어 들어맞더라 이겁니다. 그걸 여러분이 자각할 줄 알아야 돼요. 자기 아버지가 잘난 것을 자식이 모릅니다. 선생님이 잘난 것을 그 제자들이 모른다는 것입니다. 딱 그 격이라구요. 아무리 금강산이 아름답다 하더라도 가까이 가 보면 바위돌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모든 이야기를 하는 것은 여러분 자신들이 자신을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닌 것을 알아야 되겠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 이 길이라는 것은 통일교회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통일교회가 바라는 이상의 나라를 위해서 있는 것이요, 그 이상의 나라는 통일교회가 바라는 세계를 위해 있는 것이요, 그 세계는 하나님이 이상하시는 개방된 단 하나의 사랑의 세계를 위해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입장에 선 '나'의 처지입니다. 여러분은 자기의 처지를 알아야 됩니다. 처지라는 것은 내가 서 있는 곳을 말합니다. 그 서 있는 자리는 혼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가정이 연결되어 있고, 민족이 연결되어 있고, 국가가 연결되어 있고, 세계가 연결되어 있고, 하늘땅이 연결되어 있고, 천주가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 밑창인 저 깊은 곳이 되느냐, 아니면 꼭대기가 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깊은 곳은 내려가기 쉽지만 높은 곳은 올라가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깊은 곳을 표준으로 삼고 가는 것이 아니라 높은 곳을 표준하고 찾아가는 것입니다. 통일교회는 그러한 입장에서의 처지를 지녀야 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어요. 흔히 폐단이 무엇이냐 하면, 이러한 인연을 통해서 거쳐온 자기 입장을 망각하는 데에서 타락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해와도 그래서 타락했습니다. 하나님을 통해서 거쳐온 처지를 망각하고, 인연의 자리를 망각할 때 타락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자기 자체를 들고 나오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자체가 전체 산맥이라면 산맥을 통해서 그 움직임에 맞게끔 산이 이어 나가야 하는데, 자기 자유의 움직임을 중심삼은 주체적인 입장에 있으면 파탄이 벌어집니다.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어색한 것입니다. 어색한 것은 중심이 못 되는 것입니다. 어울리는 것일수록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는 어울리자, 민족 앞에 어울리자, 교계 앞에 어울리자는 거예요.
우리는 요즘에도 그렇습니다. 우리 통일교회가 지금 현재 종교계에 있어서 선두에 달리고 다 이러니까, 오래된 종단이니 무슨 교파니 자랑하던 사람들이 끌려가는 입장에 있기 때문에 기분 나빠할지 모르지만, 그들의 움직임도 그 길을 가기 때문에 안 따라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고비 넘어 완전히 옳고 그른 것이 판결나게 될 때는 천하가 공인하기 때문에 여기에 반대하면 역적으로 몰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사랑을 받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사랑을 하기 위해서 온것입니다. 알겠어요? 사랑을 하기 위해 온 것입니다. 하늘을 대표한 내가 주체적인 입장에 서려면 사랑을 해야 됩니다. 상대적 입장에 있으면 사랑을 받아야 되지만 주체적인 입장에 서려고 하는 것이 오늘날 통일교회의 사상이요, 우리의 처지가 아니예요? 그렇기 때문에 주체라고 하는 것은 사랑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랑하는 데는 어떤 자리에서? 서 있는 자리에서 사랑하라 이겁니다. 통일교회 교인이거들랑 통일교회 교인을 사랑하라. 통일교회를 사랑하라는 거예요. 통일교회는 나라를 사랑하기 위해 미쳐라. 그 나라는 단순히 나라를 사랑하기 위해서 미칠 것이 아니라 세계를 사랑하기 위해 미쳐라. 그러면 그 나라는 발전하는 것입니다. 세계는 세계를 사랑하기 위해 미칠 것이 아니라 천주를 사랑하기 위해 미쳐라, 천주는 천주 자체를 사랑하기 위해 미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 미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 미친다면 두루뭉수리 같은 평화의 세계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표현을 두루뭉수리라고 했지만 그저 좋다는 것입니다. 그저 좋다는 거예요. 그저 좋다는 말 있지요? 그저 좋고 그저 좋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미치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환경이 벌어져 가지고 서로가 좋아할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이 바라시는 천국이요, 인간이 바라는 천국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 도달하게 되면 그 세계는 어떤 세계일 것이냐? 웃게 되면 천년 만년 웃을 것이 아니냐? 그렇다는 겁니다. 춤을 추게 되면 천년 만년, 손을 들어 한번 추기 시작하면 그 춤은 영원히 계속될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이상세계가 와야 합니다.
내가 현재 이런 환경에서 스톱할 것이냐? '환난과 핍박아 어서 와라! 나는 간다' 하려니 드럼통 같은 것이 되어서는 안 되고 단단해야 되겠습니다. 단단해 가지고 아무데나 붙들 수 있고, 반동적인 자각을 이룰 수 있는 것이어야 되겠습니다. 그럴수록 뭘해야 하느냐 하면, 역사적인 핍박이나 시련을 수련을 통해서 극복해야 합니다. 극복의 터전이 단단하면 단단할수록 도약하는 데 있어서 반동작용을 일으킬 수 있는 모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나를 퇴폐시키고 나를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보다 가중된 속도를 가해 줄 수 있는 도약의 터전이 되는 것이 아니냐? 이렇게 생각할 때 멋집니다. '와라, 와! 부딪쳐 봐라…' 그래 가지고 개인적인 환경을 밟고 도약해야 합니다. 선생님은 그런 쾌감을 느끼고 삽니다.
자. 이번에 승공연합이 반공연맹을 밟고 올라서자 해 가지고 지금 올라섰습니다. 기성교회를 밟고 올라서자! 나슬나슬 넘어서고 있습니다. 그 재미에 살지, 그 재미가 없으면 무슨 재미로 살겠어요? 지지리 욕을 먹고 못살고 말 일이지. 자, 올라서자! 아시아에서부터 아시아를 딛고 올라 서자, 구라파 천지를 딛고 올라서자, 지구성을 딛고 올라서자, 영계를 딛고 올라서자, 최후의 승리적인 권한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의 가슴을 붙들고 하나밖에 없는 사랑을 향해서 득세하자, 이것이 통일 포탄의 갈 길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지다, 기지입니다. 새 새끼가 날아갈 시기가 되면 집은 엉망이지요? 안 그래요? 청파동이야 어떻든 날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사랑을 해야 합니다. 알겠어요? 사랑하기에 미치자는 것입니다.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남자는 나라를 사랑하고 나라의 보장을 받은 자리에서 여자를 사랑하라. 세계의 보장을 받은 자리에서 여자를 사랑하라 이겁니다. 그러한 입장에 있는 우리의 처지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반성해 보라구요. 나는 사랑받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통일교회 교인도 사랑받기 위한 패가 아니라구요. 사랑하기 위한 패입니다. 알겠어요? 사랑하기 위한 패이니까. 세상 사람들은 사랑받으려고 하기 때문에 어디를 가든지 환영한다. 안 한다? 어느 거예요? 세상 사람들은 사랑받겠다는 패이고 우리는 사랑하려는 패이니 세상 사람들이 환영하기 마련입니다. 거기에서 우수한 사람은 사랑하기 마련입니다. 우리 가는 대로 따라오기 마련입니다.
여러분의 손발이 통일교회를 사랑하기 위해 얼마나 움직여 봤느냐? 손발이 내 밥을 먹기 위해서는 많이 움직여 봤고 내 눈이 많이 움직여 봤지만, 통일교회 식구를 사랑하기에 얼마나 움직여 봤느냐? 통일교회를 위해서 내 땀을 얼마나 흘려 봤으며 내 노력을 얼마나 했느냐? 피곤한 몸으로 잠자리에 들게 될 때 누구를 사랑하기 위해서 그랬느냐? 자기를 위해서 그랬다면 부끄러움이요. 세계를 사랑하려고 그랬다면 영광입니다. 천국의 한 탑을 쌓는데 한 조각 한 조각 올려 쌓은 터전이 그 피곤한 잠자리 가운데 쌓여져 올라가는 것이 아니냐? 사랑하자. 그래서 교회를 넘고 나라를 사랑하자. 우리가 그 놀음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저께도 잠깐 이야기했지만 열교(裂敎)가 있습니다, 일반 전통적인 기독교를 중심삼고 보게 되면 예수 믿는 것 이외에는 전부 다 지옥간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열교의 책임자들이 지금 선생님을 만나자고 합니다. 수택리 언제 가느냐고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몇 해 전부터 만나자고 해도 내가 안 만나 주고 있습니다. 한다 하는 사람들이 만나자고 해도 안 만나 주고 있습니다. 왜 안 만나 주느냐? 먼저 기독교 책임자들을 만나고 나서 만나야 할 것이 선생님 책임이기 때문입니다. 그걸 알고 있다구요. 모르지 않습니다.
기독교 목사들 보면 나하고 원수입니다. 칼이 있으면 등골의 뼈가 우썩 부서지는 것보다도 더욱 폭삭 녹아질 수 있을 정도로 찔러 버릴 수 있는 원수들입니다. 용서 할 수 없는 원수들이다 이겁니다. 통일교회 문선생을 잡아죽이려고 별의별 놀음을 다 했습니다. 용서할 수 없는 원수들이지만 2천년 역사시대에 있어서, 이스라엘 민족을 잃어버린 그 시대에 있어서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 아버지를 대해서 효성의 도리를 지키겠다고 죽음의 대가를 치러 나온 기독교가 아니냐는 것입니다.
딱 요셉과 마찬가지입니다. 열 한 형제가 요셉을 팔아먹고, 원수와 같이 취급해서 죽이려고 했던 입장에 섰습니다. 요셉에게는 그 열 한 형제는 형제가 아니라 원수입니다. 원수가 어려운 자리에서 찾아오게 될 때 당장에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일생 일대의 분한 마음이 있었지만 부모를 사랑하는 요셉은 그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자신이 부모를 모시지 못하고, 부모 앞에 효도해야 할 입장에서 들려 날 수밖에 없었을 때, 부모를 위해서 울타리가 되었던 것이 그 형제들이 아니냐는 거예요. 형제들을 부모를 봐서 용서해 주었습니다. 선생님이 딱 그 마음입니다. 그건 누구도 모를 거라구요. 그래서 그들을 끌고 나가는 것입니다.
만일에 열교(製敎) 사람들을 대해 주면 모든 것을 몽땅 빼앗겨 버립니다. 빼앗겨 버리면 어떻게 되느냐? 2천년 역사는 어디로 가느냐 이겁니다. 서자가 종손이 되는 입장에 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선생님이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습니다. 이 한계 때까지 선생님이 해야 할 책임을 아직까지 다 못했다 하는 것이 선생님 생각이기 때문에 지금 만나지 않고 있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걸 보면 통일교회 문선생이라는 사람은 누구보다도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통일교회가 고생을 좀더 하더라도, 통일교회가 좀더 어려운 길을 가더라도 그냥 그대로 전통을 살려주고, 빛날 수 있는 결과를 같이 맞이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역사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갈길이 아니냐,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우리가 조금 편하게 된다고 '아이고, 나 그거 좋소' 하게 되면 그것은 장날의 장돌뱅이밖에 못 되는 것입니다. 반짝했다가 보따리 싸 가지고 떠나는 장돌뱅이밖에 못 되는 겁니다. 자리잡은 장사꾼은 못 되는 것입니다. 자리잡은 장사꾼은 손해가 나더라도 그 단골손님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손해를 감수할 줄 아는 것입니다. 그런 판국을 거쳐서 자리를 잡게 되면 장사가 잘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여러분, 통일교회는 사랑을 받기 위한 패들이 아니예요. 알겠어요?
사랑은 사람을 통해서 받는 것보다도 하나님을 통해서 받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한 것만큼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사랑한 것 이상, 자기가 사랑 하고 나면 다 없어지는 줄 알았는데 열만큼 쓰면 열 둘의 순이 나왔다는 겁니다. 알겠어요? 자기 것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 커지더라 이겁니다. 이 재미를 본 사람은 또 한다구요. 통일교회 문선생이 그것을 알았기 때문에, 어떤 어려운 길을 가더라도 마지막인 줄 알게 되면 신나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여러분,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그것입니다. 뜻을 위해서 지향하는 곳에 있어서 체면과 위신과 환경을 망각해서 하늘이 원하는 방향에 일치될 수 있을 때 아론의 지팡이가 역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도 살아 계신 하나님이 가시는 길 앞에는 마찬가지의 공식이 적용되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 놀음을 한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그래 여러분들도 그런 놀음을 하게 되면 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이런 말을 한 것을 알고…. 우리의 처지는 사랑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위한 것입니다. 난 나를 위해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종합적인 미래를 위해 투자하려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신념에 입각한 사람은 역사를 정복하여 이기게 되면 나를 정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위대한 사람이고, 그런 사람들로부터 역사와 하늘의 승리는 완연히 빛을 발해서 승리적 터전을 남길 수 있는 것이 아니냐 하는 것을 여러분이 기억해야 될 것을 알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아버님, 당신이 심중에 그리던 선의 역사가 저희 목전에 당도한 것을 바라볼 적마다 이 주인은 그 누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더더욱 느끼지 않을 수 없나이다. 당신이 주인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통일교회 문선생도 주인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영원한 한계선을 초월하신 당신이 주인이 되어야만 영원히 보장을 받을 수 있는 입지적 조건이 성립되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통일교회를 지도하는 것은 그 누구의 책임이 아닌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여, 주인이 되시옵소서.
제가 50여 평생을 지내 오면서, 헐벗은 자리에 섰고 몰리는 자리에 섰더라도 여한이 없습니다. 당신은 슬프고 비통하고 비참하였지만, 당신의 마음이 얼마나 슬프다 하는 것을 제가 모를 때 당신은 이럴 수 있는 이상의 것이라고 하던 그것을 저는 잊지 않았사옵니다. 오늘 자신을 지니고 있는 통일교회 지도자로서의 가야 할 길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 시간도 달음질을 쳐야 되겠습니다. 이해도 또 달려가야 되겠습니다.
이제는 활동 무대가 점점점 세계를 향하여 전개되는 때가 왔기 때문에 대한민국만을 위해 싸울 수 있는 시대는 이제 지나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한 가지 슬픈 것은 이 민족, 이 나라 백성과 더불어 하늘을 부여안고 사랑의 체휼적인 환경을 소개하지 못한 것이 한없이 한없이 슬프고 한없이 한없이 당신 앞에 면목없음을 느끼는 바입니다.
아버님, 세계를 향하는 새로운 시대를 앞에 놓고 저희들은 주저하는 졸장부들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내일의 희망과 더불어 벅찬 자기 가슴을 억제하면서 극복의 환경의 수련을 거쳐서 빛난 광명 앞에 하늘의 늠름한 용장의 모습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아들딸들로서 당신이 세우기를 고대한 그때와 그런 환경이 되었기 때문에, 저를 보내시어서 할 수 있는 준비된 무리가 통일교단에 속한 당신의 자녀들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버지, 그러한 사명을 짊어지는 데 있어서 당신이 얼마나 노심초사 역사적 심정을 다짐했다는 사실을 저희들은 망각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아침 저희들의 처지라는 것은 얼굴을 들 수 없는 처지 입니다. 선조들이 패자의 걸음걸이로 하늘 앞에 배반자의 역사를 남겼기에 저희들이 그 후예라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부끄러운 형체를 드러낼수 없는 죄책감을 느껴야 할 그의 후손된 자기 자신임을 자각해야 되겠습니다.
그렇지만, 당신의 수고의 대가를, 탕감의 내용을 당신이 제시해 가지고 오늘날 남기신 역사적 인연을 따라온 보잘것없는 저희들이지만 저희들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아시는 아버지시기 때문에, 저희들을 앞에 내세워 놓고 저희들이 한 발자국 가면 당신도 한 발자국 올라가시고, 저희들이 기뻐하면 당신도 기뻐하시고, 저희들이 싸우려고 하면 당신도 싸우려고 하시는 입장에 계시옵니다. 이 사실이 분하다면 분한 일이요, 원통하다면 원통한 일이지만 감사하다면 이 이상 감사한 일이 없는 것입니다.
미물의 동물만도 못한 존재들이 눈물짓는 자리에 천만 승리의 권한을 갖추어 만국의 주권을 장중에 넣고 호령하시는 전지전능하신 주권자인 당신이 오시어서 저희들과 더불어 눈물지으시고 계시다는 사실을, 저희들과 더불어 의논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저희들은 미처 몰랐습니다. 당신 앞에 엄숙히 부림을 받을 수 있고, 당신 앞에 충효의 인연을 가질 수 있다면 그 말만으로도 고마운 것이옵니다. 그럴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천상 천하에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없는 자랑이 아닐 수 없는 고귀하고도 놀라운 것을 소홀히 하였던 저희들은 과거지사를 다시 한 번 회개해야 되겠습니다.
아버님, 고요히 고요히 스며드는 당신의 은은한 현현을 마음으로 그리 면서, 내일의 약속과 더불어 계약을 다짐하면서 당신을 틀림없는 역사적 주인으로 저희들은 다시 한번 흠모하옵니다. 전통적 인연을 그렇게도 추구하고 있는 당신의 내정적인 심정 앞에 당신을 사랑하기에 미칠 듯이, 당신의 뜻만을 위하여 사는 그러한 아들딸들이 된다 할진대, 당신은 천만 죽음길이라도 타고 넘어가서 저희들을 보호하시고자 애쓰시는 아버지인 것을 저희들은 미처 몰랐습니다.
그러한 아버지를 알고 그러한 아버지의 보호를 받는 아들의 가치를 아는 자리에 서는 통일교회 교인들의 긍지를 높이 평가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 아버지의 소원이요, 과거에 왔다 갔던 선조들의 소원이요, 이 땅위의 사망의 장벽에 부딪쳐 있는 인류들이 바라는 소망인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저희들은 깨어 있어야 되겠습니다. 저희들은 쉬지 말고 전진해야 되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매일같이 제단을 지키고, 하늘 앞에 분향을 하여 당신의 마음을 위로해 드리고, 역사적인 심판날이 가까와 옴에 따라서 인류의 심판의 벌을 막기 위하여 남모르는 가운데 담판 기도하고, 당신의 마음을 내 스스로의 앎의 조건으로 세우기 위하여 노력할 줄 아는 무리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이것이 1972년도에 통일교회 신도들이 죽더라도 넘겨야 할 전통인 것을 확실히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7월 들어 첫번째 주일을 맞이하였습니다. 7월을 맞이하였습니다. 역사적인 1972년 7월 2일, 이날이 기념의 날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여기에 참석한 개개인의 심정 위에 저희가 처해 있는 처지가 어떻다는 것을 말하였사오니, 이 전통을 이어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엄숙하고 긴장하고 당황한 자리에 당신의 현현한 거동을 따라 순응적인 실체의 효의 아들딸이요, 충의 인연을 받은 자리에서 돌격전을 망각하는 불충스러운 무리로서 오늘 이날을 맞지 않게 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무것도 없는 벌거숭이 몸들, 아무것도 남길 수 없고 자랑할 무엇이 없는 무리들이지만, 당신의 전통을 이어받고 당신의 슬펐던 사연을 이어받은 그 믿음만은 당신의 마음과 더불어 있기를 바라오니, 그 마음이 저희의 소유 중의 소유요, 생명의 뒷받침이 될 수 있는 우리의 재산 중의 재산이요, 역사적 전통의 결실 중의 결실인 것을 저희들은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자기로서의 내일을 보장할 수 있는 자신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내일을 보장할 수 있는 창조자가 되어 아버지의 대역을 책임지고 사망의 세력을 가로막는 일을 성사시킬 수 있는 당당한 하늘의 용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럴 수 있는 무리들 되게 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이제 저희들이 7월을 맞고, 8월을 맞고, 9월을 맞고, 10월을 맞고, 11월, 12월을 맞으면서 이해에 당신이 경륜하신 뜻을 중심삼고 나아가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언제 봄이 오고 언제 여름이 왔는지 모르게 봄은 지나갔고 여름도 다 지나가고 있사옵니다. 이제 가을이 찾아오고 겨울이 찾아오는 것을 저희들이 사계절 순환의 법도를 통해서 알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언제 저희의 운명이 바뀌는지 모릅니다. 쉬고 있는 시간에 역사적인 교차점이 지나갔는지 아브라함도 몰랐고, 노아도 그때를 몰랐습니다. 야곱도 몰랐습니다. 모세도 몰랐습니다. 요셉의 가정도 그 시간이 언제 지나갔는지 몰랐습니다.
모르는 사이에 역사는 비운의 역사로서 심어져 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끝날이 되면 깨어서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밀실에 들어가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아는 때를 맞추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처지에 있는 저희 자신을 밝혀 가지고 내일의 보증을 받을 수 있고 역사적인 실증 앞에 있어서 부끄러움이 없는 아들딸로 남아지게 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고 원하옵니다.
오늘 산지사방, 남한 각지에 널려 있는 자녀들이 이달을 대표해서, 이제 금년의 후반기를 대표해서 첫번 맞는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세계에 널려 있는 뭇 자녀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시고, 이곳을 향하여 정성들이는 자녀들이 있거들랑 천만배 갚아 주시옵소서. 제가 빚을 지는 자리에 서지 않기를 권고하시던 아버지여, 그 뜻을 끝까지 지켜 나가기 위해 몸부림치는 행렬을, 아버지여, 지켜 주시옵소서. 그와 같이 당신은 저희들 앞에 빚을 지지 않는 것을 알았사오니. 전통적인 위업을 남기고 갈 줄 아는 통일의 무리, 저희 자신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길 바라옵니다.
오늘 이 시간을 가진 것을 감사드리오니, 금후의 모든 것을 당신이 정하신 뜻대로 성사하시옵소서. 모든 말씀 참부모님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아버님, 오늘은 1972년 7월 9일, 이달을 맞이하여 두번째 맞는 거룩한 안식일이옵니다. 이 아침에 당신의 무한하신 사랑과 자비와 긍휼과 보호가 불쌍한 이 민족과 이 세계 위에 같이하시옵소서.
주인이 없는 이 천지에 아버지께서 주인이 되셔야 되겠습니다. 금후에 가야 할 이 나라의 운명을 책임지고 지도할 수 있는 중심도 당신이 되셔야 되겠습니다. 저희의 가정이나 개개인이 바라고 나가는 소원의 중심도 아버지가 되셔야 되겠습니다. 세계에서도 필요로 하고, 나라에서도 필요로 하고, 가정에서도 필요로 하고, 개인도 필요로 하는 것이 온 천지를 지으신 주인 되시는 당신이요, 아버지이신 것을 저희들은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당신은 무한한 능력을 가지신 분이요, 시간과 공간세계의 어떠한 제재를 받지 않으시는 전능하신 분인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습니다. 당신으로 말미암아 지어지지 않은 것이 없고, 당신은 모든 것의 원인의 내용을 갖추신 주체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당신의 인연을 따라서 존재한다는 것을 저희가 알고 있사옵고, 존재하는 것은 주체이신 당신 앞에 상대적 목적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이 없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 자리에 선 개인이요, 가정이요, 국가요, 세계가 되어야 하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먼저, 당신을 주체로 하고 저희 자신들을 영원한 대상의 실체로 세워 주체와 대상이 분립될 수 없는 하나의 통일된 모습을 갖추어야 되는 것이, 저희 개인의 인생 행로의 소원이요 바라는 정착점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날을 모색하기 위하여 역사는 동원되어 왔고, 그러한 자체를 형성하기 위하여 개개인에 있어서 생활과 생애의 노정이 설정되어 있는 것을 언제나 언제나 망각하기 쉬운 저희들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자리에 서 있는 인간들이기 때문에, 자기 자체를 새로운 입장으로 형성하는 데에 자기만으로 될 수 없는 인간들 앞에, 아버지는 역사시대를 거쳐오면서 수많은 선지선열과 예언자를 통하여 당신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을 예고하신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습니다.
어디를 가더라도 아버지를 모시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수많은 종교는 다 가르쳐 주었습니다. 인간이 아버지와 일치가 되고 아버지와 더불어 존속하지 않으면 당신의 영광의 세계에 남아질 수 없다는 것을 수많은 종교는 가르치면서, 그러기를 바라면서 역사시대에 공헌해 온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와 같이 공헌해 오던 수많은 종교의 목적은 본연의 자아의 가치를 찾아 본연의 주체 앞에 불변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는 개인적 완성의 모습을 그렸던 것임을 저희 자체는 회상하면서, 저희 자신에게서 이와 같은 가치를 추구하게 될 때에 자신이 부족한 것을 자탄해야 할 우리 인간인 것을 다시 한번 발견해야 되겠습니다.
아버지, 이 아침에 소수의 무리가 당신의 존전에 나왔습니다. 당신은 주체이시니 저희는 대상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당신은 주인이시니 저희들은 주인의 지시를 받는 추종자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당신은 어버이시니 저희는 자녀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당신이 주도적인 능력과 모든 생명의 원천이시기 때문에, 당신을 통하는 길만이 저희에게 있어서는 보람 있는 생애의 행로가 되는 것을 알고 그렇게 가기를 바라고 이 자리에 나왔사옵니다.
햇빛이 비치면, 모든 존재가 그 햇빛을 통해 생명의 틔움을 바라 가지고 그와 더불어 일치하려는 것을 저희들이 바라보게 될 때에, 미물도 하나의 중심을 향해서 그와 같이 행하는 그 현상을 저희 자신들이 바라보게 될 때, 그와 같은 자리에서 당신은 저희 생명의 주체 되시는 아버지요 저희의 갈 길과 방향을 밝혀 주시는 아버지임을 알고, 당신과 일체가 되고 당신과 하나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생명의 길이 막힌다는 것을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호흡하는 것도 그 가치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요, 저희의 직감과 직관도 보다 입체적인 분야에 있어서 그 가치를 적응시키기 위한 것으로 당신과의 인연을 갖추게끔 부여해 주신 당신의 은사의 조건들인 것을 저희들은 미처 몰랐습니다. 내가 보고 느끼는 것이 나를 위해서 보고 느끼는 줄 알았사오나, 그것이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아버지, 여기에 부복한 저희 자신들. 무엇을 위해 이 자리에 나왔습니까? 누구를 만나기 위해 나온 자리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의 모습을 깨치고 당신과의 인연을 두터이하기 위해서 나온 자리인 것을 저희들은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내 마음 깊이 갈구하는 소원의 일념을 당신 앞에 내놓고, 저는 이러한 자식이요 이러한 길을 가는 모습인데 당신이 원하시는 방향과 바라시는 소원과는 어떠한 차이가 있느냐고 하면서, 그 차이를 알아 가지고 그 간격을 좁혀 일치점을 추구하기 위해 나온 무리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당신이 기뻐하실 때 저희들도 기뻐하고, 당신이 슬퍼하실 때 저희들도 슬퍼하며, 당신이 바빠하실 때 저희들도 바빠하는 그런 부자의 인연을 저희들이 가졌다는 것을 자각하고 나서게 될 때에, 잃어버린 어버이를 찾은 기쁨, 어버이의 소유를 찾은 기쁨, 그리고 그 어버이가 세우려는 나라와 세계를 찾은 기쁨을 진정 맞아들일 수 있게 되고, 당신 앞에 있어서 환영받고 당신의 집에 있어서 환영받고 당신의 나라와 당신의 세계에 있어서 환영받을 수 있는 진정한 아들딸이 될 수 있사옵니다.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 저희의 소원이 아닐 수 없사옵고, 그 소원이 당신의 소원이 아닐 수 없사옵니다. 아들의 소원과 어버이의 소원이 일치될 수 있는 점은 그 자리밖에 없사옵니다.
개인에서 만나고, 가정에서 만나고, 나라에서 만나고, 세계에서 만나서 일치화할 수 있는 부자의 인연을 가진 어버이는 행복한 어버이인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자식을 가진 그 어버이는 행복한 어버이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또, 이와 같이 지도를 해주는 어버이를 가진 자식들은 행복한 자식들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을 찾지 못하게 될 때에는 나는 어디에 머물 것이며, 내 가정은 어디에 머물 것이며, 내 나라는 어디에 머물 것이며, 이 세계는 어디에 머물러야 하겠사옵니까? 그 자리는 당신의 품을 떠나서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죽으나 사나 당신의 품에 머물 수 있는 개인이 되고 가정이 되고 나라가 되고 세계가 되기를 바라옵니다. 이것은 당신의 소원인 동시에 자녀의 소원인 것을 생각하게 될 때, 내 기거하는 목적도 여기에 귀결되게 하고, 생애 모든 전체를 이 무대에서 해소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옵니다.
아버지, 어느 한때에 그럴 수 있는 아들을 맞고, 어느 한때에 그럴 수 있는 딸을 맞아 가지고 세계 앞에, 나라 앞에, 가정 앞에, 만민 앞에 '이 아들을 본받으라. 이 딸을 본받으라'고 자랑하고 품어 보았습니까? 그럴수 있는 참사람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이걸 보게 될 때에 저희들은 죽으나 사나 그런 경지를 찾아 나가야 되겠습니다. 그것을 위해 저희는 모였습니다.
아버지, 저희는 소망의 나라를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소망의 세계를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소망의 나라는 소망의 가정이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요, 소망의 가정은 소망의 개인들이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그 소망의 개인이라는 것은 자기 자신을 중심삼고 자랑할 수 있는 자리에 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중심삼고 자랑할 수 있는 자리에 서야 할 것이옵니다. 천지에 그러한 사람이 없는 것을 아시는 아버지는 이 땅을 바라볼 적마다 질식된 슬픈 마음에 가중된 자극을 받아 얼굴을 붉히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인 것을 생각할 때에, 이 땅에 서실 수 있는 자리가 없는 당신은 불쌍한 분이신 것을 저희가 알았습니다.
아버지, 당신이 저희의 문전에 찾아와 가지고 문을 두드리기 전에, 저희가 아버지를 만나기를 그리워하고 흠모하는 아들딸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저희의 집에 찾아오셔서 뵙게 되거든 떠나지 말라고, 영원히 영원히 같이 살자고, 오늘뿐만 아니라 천년 만년 살고 지자고 마음으로 붙들고 환경으로 붙들고 생활로 붙들고 행동으로 붙들 수 있는 아들딸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그 가정을 중심삼고 살 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에서 살자고, 제가 자랑할 수 있고 당신이 바라고 있는 나라가 이런 나라가 아니냐고, 이 나라에서 살자고 할 수 있는 그런 나라를 가져야 되겠습니다. 그 나라뿐만 아니라 당신이 바라는 세계는 이런 세계이기 때문에, 이런 세계에서 같이 살자고 당신이 떠나지 마옵기를 바라며, 세계와 나라와 가정과 자기 개인을 대신하여 아버지를 간곡히 붙들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 할진대는 천년 한을 풀어 놓고, 만인에게 줄 행복의 짐을 다 풀어 놓고 그와 더불어 천년 만년 살고 지고, 사랑의 모든 것을 나눠 주고 싶은 것이 당신의 소원인 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그럴 수 있는 자리를 그리워하는 무리가 불쌍한 자리에서 최후의 싸움을 바라보고 있는 저희 통일의 무리가 되어야 된다는 것을 이 시간 다시 한번 자각해야 되겠습니다.
아버지, 전국에 널려 있는 어린 자녀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은 남다른 십자가를 등에 지고 달리고 있는 무리이옵니다. 남이 모르는 서글픈 눈물을 흠뻑 머금고 나가는 무리이옵니다. 그 누구에게 말하고 싶은 사연이 많지만 먼저 당신의 사연을 풀지 못한 것을 알기에, 효의 도리와 충의 도리를 따라가야 할 길이 남아 있기 때문에, 당신의 사연을 일신에서 짊어지고 가정에서 짊어지고 나라에서 짊어지고 세계에서 짊어질 수 있는 무리를 이루어 보겠다고 몸부림치는 가련하고 불쌍한 무리가 통일의 무리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책임을 수행하겠다고 허둥지둥 수난길, 핍박의 길을 개의치 않고 당신을 향하여 따라 나온 무리인 것을 기억하시옵소서.
당신에게 슬픔이 있거들랑 이들을 책함으로써 더 나아질 수 있고 슬픈 마음을 풀 수 있다면, 그 책함받기를 바라는 통일의 무리가 되어야 되겠고, 당신의 저주와 원망이 오늘날 이 세계를 향하여 있거들랑 그 저주와 원망을 풀어 드리고 위로해 드릴 수 있는 무리는 저희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저희는 저희 자신을 위해서 사는 무리가 되어 가지고는 당신을 위로할 수 없다는 것을 안 무리이기 때문에, 저희들이 태어난 것도 당신을 위해 태어난 것이요, 사는 것도 당신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아버지, 저희들이 부르는 '아버지'라는 명사는 다릅니다. 저희들이 모시고 있는 '하나님'이라는 그 명사는 다릅니다. 저희들이 바라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내용도 다릅니다. 높고 거룩하신 당신의 현현의 한날을 대해 저희 개인이 맞이할 수 있는 그 기쁨을 천하와 더불어 갖출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 저희의 소원이요, 당신을 기쁜 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가정의 인연을 천지와 더불어 맺기를 바라는 것이 저희의 소원이요, 당신의 기쁨의 영광을 나라와 더불어, 만국과 더불어 맞기를 바라는 것이 저희의 소원이요, 이 세계가 당신을 기쁨으로 맞을 수 있기를, 영계와 육계가 통일된 자리에서 맞기를 바라는 것이 저희의 소원입니다.
맞되 그 누구를 높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당신은 당신대로 우리는 우리대로 따로따로가 아니라 하나가 되어 오직 사랑으로 엮어진 둘이자 하나인 통일된 형태를 갖추어 전체의 요인이 될 수 있는 심정 어린 자리를 바라는 것이 통일사상이 주장하는 심정의 세계관인 것을 알고 있는 저희들, 그 자리를 바라보면서 이 시간 개체의 미숙한 것을 제거하고 새로운 전진과 발전을 추구하기 위한 생활을 다짐하기 위해서 아버지 앞에 나왔사오니, 긍휼히 보아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전국에 널려 있는 당신의 자녀들, 이곳을 향하여 마음을 조아리며 아버지 앞에 축수를 드리고 있는 무리가 많을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본부에 살고 있는 무리는 빚지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빚지는 사람은 부끄러운 사람이옵니다. 빚지는 사람은 그 누구에게도 변명할 수 없는 것이요, 그 누구에게도 자랑할 수 없는 것이요, 그 누구에게도 줄 수 없는 것임을 저희들은 알고 있습니다. 본부에 있는 저희들. 혹은 서울에 있는 식구들은 전국의 식구들 앞에 빚을 지워야 되겠습니다. 주어야만 되겠습니다. 한국에 있는 통일의 무리들은 세계에 널려 있는 통일의 무리들 앞에 빚을 져서는 안 되겠습니다. 줄 수 있어야만 되겠습니다. 원천(源泉)이 있으면 그 원천을 통하여서 제한된 그릇의 물은 넘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언제나 주는 것이 계속되기 때문에 언제나 새로운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럴 수 있는 이 본부가 돼야 되겠습니다.
당신이 이 자리를 지키시옵소서. 이 자리의 주인은 그 누구도 아니옵니다. 당신만이 주인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당신이 현현하시는 곳에 새로운 것이 조성되는 것이요, 새로운 발전적인 동기가 싹트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부디 찾아오셔서 개개인을 붙드시옵소서. 당신은 주체 되시고 능력의 원인이시니, 개체 되는 상대적인 요소를 흡수하셔서 당신의 성상 형상으로 빚어질 수 있는, 그러한 인연이 맺어지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남아진 이날을 복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남아진 이달과 이해가 귀중한 것을 저희들은 알았습니다. 7월 초하루를 중심삼고 이제 남은 6개월이 얼마나 귀중하다는 것을 알았고, 이 나라가 가야 할 길도 그런 운명에 놓여 있으며, 이 세계가 가야 할 가름길도 그러한 기간에 놓여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남한 백성을, 아버지, 지키시옵소서. 북한 백성을, 아버지여, 긍휼히 보시옵소서. 당신이 걸어오신 경륜의 방향에 일치될 수 있는 무리가 되어 천륜을 시봉할 수 있는 민족이 되고, 당신의 거룩한 은사를 대할 수 있는 백성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나라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저희들이 특별히 기도하고 있는 이 기간에, 아버지의 긍휼과 지도가 이 민족과 이 세계 위에서 떠나지 마시옵시기를 재삼 부탁드리옵니다. 온전히 어린아이의 심정으로 당신의 품에 품기는 것만을 소원의 일념으로 가지고 이 자리에 참석한, 거룩한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님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섭리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물건도 섭리에 의해서, 다시 말하면 어떠한 주체가 있어 가지고 그 주체의 치리함을 받아 가지고 그 치리 하에서 존속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섭리라는 말을 생각하게 될 때는, 절대적인 주체를 긍정하고서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온 피조세계를 두고 보나 혹은 역사적인 우리 인간들을 두고 보나 그것들은 결과물임에 틀림없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결과물입니다. 결과가 나타나기 위해서는 원인에 의해 과정을 통해야 됩니다. 그것을 벗어나서는 결과는 형성될 수 없는 것입니다. 결과가 보다 차원 높은 원인에 속해 있게 될 때에, 그 결과는 보다 가치 있는 목적을 추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높은 차원에 처해 있는 원인이 결과를 대해 엇갈린 자리의 방향을 취해 가지고는 원인이 추구하는 결과를 맞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그 원인이 추구하는 결과를 향해서 일치된 방향을 취해야 되는데, 거기에서 이탈하게 될 때에는 그 결과는 원인에 부합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결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인과 결과에 있어서는 과정이 있고, 그 과정에는 반드시 단 하나의 방향만이 있을 수 있지 두방향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게 될 때에, 오늘날 우리 인간들은 원인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완전한 원인의 존재라면, 그 자체는 완전한 결과를 즉석에서 차지할 수 있어야만 될 것입니다. 그래야만 완전한 원인과 완전한 결과가 즉석에서 하나로 통일되게 되고, 거기에서 완전한 기쁨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완전한 기쁨이라는 것은 어느 한 편에 치우쳐 가지고는 형성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만나 가지고 말하는 데 있어서 '갑'이라는 사람이 말하는 그 말에 '을'이라는 사람이 완전히 하나되게 될 때에, 말하는 사람도 기쁜 것이요 듣는 사람도 기쁜 것입니다. 행복이라는 것도 혼자만의 자리에서는 형성될 수 없는 것입니다. 반드시 원인과 결과, 혹은 주체와 대상이 완전히 하나되는 데에만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모든 존재의 원인과 결과를 두고 볼 때에, 존재하는 것에는 원인을 연결시킬 수 있는 방향이 있는 것이요, 결과를 향하는 방향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인간 자체를 두고볼 때 우리 인간 자체가 완전한 결과의 자리에 있다면, 이 인간에게는 원인에게로 돌아가려는 소원밖에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 자체를 두고 보면, 완전한 결과의 자리에 처해 있다고 볼 수 없습니다. 나 개인을 두고 볼 때에, 내가 만일 어떠한 절대적인 원인자가 있어서 그 원인자 앞에 완전한 결과자로서 언제나 일치될 수 있는 자리에 있다면, 나는 원인자가 추구하는 완전한 대상임에 틀림없다고 하는 자리에 있다면, 나는 인간으로서 최고의 결과의 자리에 선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 섰다면, 그 개인은 이 만유의 어떠한 인간을 대표해도 부끄럽지 않은 존재인 것입니다.
또, 그러한 결과적 존재로서, 어떠한 가정이 나오면 그 가정은 역사시대, 어떠한 시대를 통하든지 부끄럽지 않은 가정일 것입니다. 그러한 가정들이 연결되어 가지고 이루어진 나라가 있으면 그 나라는 하나님이, 절대자가 추구하는 원인적이고 이상적인 나라에 적합한 나라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나라가 있다면, 그 나라는 거기에서 새로운 무엇을 추구하는 것보다도 원인자와 하나됨으로써 행복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혹은, 그러한 세계가 있으면 그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세계가 아무리 복잡다단한 입장에 있다 하더라도 과연 절대적인 원인이 바라는 결과에 선 세계가 된다 할진대는, 그 세계가 미래를 통하여 또 다른 결과의 존재세계를 바랄 것이 아니라 거기서 끝을 맺는 것입니다. 결과로서 완성된 존재이기 때문에, 완성된 존재는 원인인 주체를 다시 이어받을 수 있는 자리에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세계적인 결과의 자리에 선 그 세계는 비로소 세계적인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눈이면 눈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에서 보는 각도가 치우치게 될때에는, 새로운 것이 아니라 반드시 별다른 각도의 시각을 우리가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손발이나 몸 전부가 하나의 형태로서 상대적 여건을 갖추어 가지고 나타나는 데에는 부작용을 느끼지 않지만, 그것이 결여되게 될 때에는 결여된 이상의 부작용을 느끼게 되는 것을 우리가 평시 생활 가운데에서 느껴서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생각하게 될 때에, 혼자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결론을 지을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결과가 훌륭하더라도, 그 결과가 결과를 위한 목적에서 되어진 것이어서는 안 되고 원인이 추구하는 대로 되어진 것이어야 합니다. 원인이 추구하는 과정에서 이탈된 결과의 목적체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원인과 일치되어 가지고 과정과 방향이 일치된 그자리에 있어서 비로소 완결, 완성의 결과가 되는 것이고, 그렇게 되게 될때 원인을 이어받는 것이요, 과정을 흡수한 완전한 결실이 벌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한 나무의 열매를 두고 말해 본다면, 그 하나의 열매가 완전한 열매라고 할 때에, 십년 자란 나무에서 거두어진 열매는 십년 동안의 그 나무의 운명의 모든 것을 이어받은 것입니다. 그것은 거두어진 결과이지만 그 거두어진 결과 자체로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나무가 겪어 온 인연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년이면 일년 동안, 즉 춘하추동의 풍상, 변동기의 모든 자극이라든가 모든 소성의 느낌이 그 열매에 완전히 투입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열매는 십년 세월을 지낸 나무의 결실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매는 그 원인 되는 나무, 십년 세월을 지낸 나무의 인연을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일년이면 일년을 중심삼아 가지고 잎이 나서 꽃이 피고 열매가 될 때까지 그 지향성을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걸 전부 다 흡수해 가지고 십년을 자란 나무가 어떠한 과에 속한 나무로서 완전한 나무라면 그 나무의 열매는 완전한 것입니다. 만일에 그 나무가 부족하다면 부족한 만큼 거기에 해당하는 열매가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미루어 볼 때에,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가 아니예요? 우리 한개인을 보면 하나의 나뭇잎과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 나뭇잎은 나뭇잎 만으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나뭇잎이 태양빛을 받아 가지고 탄소동화작용을 하는 것은, 그 나뭇잎 자체의 삶의 목적을 가려 가기 위해서도 하지만, 나무전체의 목적을 따라서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이럼으로써 나뭇잎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예요?
이렇게 볼 때,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나 자신을 두고 보면, 부모가 있는 것이요, 그 부모 위에는 또 부모가 있는 것이요, 쭉 역사시대를 거쳐 조상을 따라 올라가게 되면 맨 종지조상까지 올라갈 것입니다. 그 조상을 중심삼아 가지고 어떠한 절대자가 출발을 보았다면, 절대자의 경륜 앞에서 '사람은 이래야 된다. 이러저러한 것이 완전한 사람이다'라고 해 가지고 결과적인 하나의 남성이면 남성, 여성이면 여성이 출발을 볼 것이 아닙니까?
남성과 여성을 두고 보면, 그 남성은 남성으로 말미암아 태어난 것이 아니요, 여성은 여성으로 말미암아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횡적 관계를 두고 보면, 이들은 주체와 대상의 관계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남자도 남자를 위한 것이 아니고 여자도 여자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서로서로를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여성이 그와 같은 모습으로 태어난 것은 여성을 위한 것이 아니요, 남성이 그와 같은 모습으로 태어난 것은 남성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보게 될 때에, 본래 태어나게 될 때 남성을 위해 태어나지 않은 것이 남성이요, 여성을 위해서 태어나지 않은 것이 여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성이 가진 목적은 어디서 이루어지느냐? 여성만으로서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피합니다. 남성과 더불어, 그렇지 않으면 남성을 통하든가 하는 데에서만이 이루어집니다. 거기에 남자의 기쁨이 있는 것이요, 여자의 기쁨이 있는 것이 아니예요? 이것은 두말할 바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자연계를 바라보면, 자연계의 모든 존재에는 우리 원리의 술어를 빌어 말하면 성상이 있고 형상이 있습니다. 성상과 형상은 내적 외적인데, 외적인 것은 무엇 때문에 있느냐? 내적인 것을 위해 있는 것입니다. 내적인 것은 무엇을 위해 있느냐? 내적인 것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외적인 것을 위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있는 것은 현재의 입장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보다 나은 것을 위해 있는 것입니다. 보다 나은 것이 되는 데는 그냥 그 자리에서 될 수 없습니다. 반드시 어떤 과정을 거쳐 가지고 이루어집니다.
이렇게 보게 될 때에, 우리 인간의 행복이 인류시조 아담과 해와의 시대에서부터 시작됐으면 그들만의 행복으로 있을 것이냐? 그 둘만의 행복으로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완전히 하나되었다면, 둘이 공동적인 목적을 합한 체(體)로 하나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되어 그것이 하나의 체(體)라면 또 다른 상대를 가리어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모든 역사는 이렇게 발전되는 것입니다. 혼자서는 발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상이라는 것은 혼자서는 이룰 수 없습니다. 상대적 관념이 입체적인 구성을 갖추어 가지고 얼마나 원만하게 이루느냐 하는 여하에 따라 가지고 그것이 이상이 되느냐, 못 되느냐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도 원만한 사람을 바라는 것입니다. 원만한 사람이란 일방성의 사람이 아닙니다. 사방성을 갖추어 가지고 사방성의 비교기준이 될 수 있는 사람이라야 원만한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예요?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 또 다른 중심 존재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사물의 세계도 그와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연계를 바라보면, 독자적인 입장으로 존속하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반드시 상대성을 갖고 상대를 위해 존재하고 존속합니다. 미물의 동물도 혹은 광물세계의 원소까지도 반드시 상대적인 관계를 추구해야 힘이 생기고 작용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존재하려면 힘이 있어야 된다는 것은 누구나 공인하고 있습니다. '존재하려면 반드시 힘이 있어야 된다. 운동을 해야 된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 우주의 구성은 힘으로 말미암아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힘 자체는 어떻게 형성되느냐? 힘은 작용을 통하지 않고는 발생할 수 없습니다. 작용하려면 어떻게 되어야 되느냐? 독자적으로 작용할 수 있느냐? 독자적으로 작용하는 것은 없습니다. 이것은 과학세계에 있어서, 더우기나 화학 실험실에서는 그런 것을 확실히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실험하는 당사자가 어떠한 원소와 원소를 통해 무슨 작용을 일으키려고 아무리 힘을 가해 가지고 노심초사해 봐도 인간의 힘 가지고는 작용하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수 없는 원소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왜 그러냐? 상대적 여건이 설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이 어떠한 힘을 가중시키더라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 원소를 구성하고 있는 이상의 힘을 가중시킬 수 있는 또 다른 힘이 설정된 기반에서는 작용하지만, 그 원소의 힘이 존속하는 것을 인정한 자리에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상대적 여건이 이루어지지 않게 될 때에는 아무리 작용을 시키려고 해도 안 됩니다.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상대적 여건이 설정 되는 데 있어서는 작용시키지 않아도 자연적으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지 말라고 해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연의 법칙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근본문제에 들어가서 보면, 존재하는 모든 것은 주체와 대상의 요건이 없어 가지고는 존속할 수 없는 것이요, 주체와 대상이 작용을 하는 데에 있어서 손해나기 위해서 작용한다는 우주의 원칙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작용하는 데 있어서 손해나기 위해서 작용하는 것은 없습니다. 장사하는 데 있어서 손해나기 위해서 장사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여러분이 오늘 아침 일찌감치 통일교회에 손해보기 위해서 찾아왔다면 그 사람은 돈 사람입니다. 그는 정상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무엇인가 이익되는 데서 작용하는 것은 천법입니다. 이것이 우주의 공리입니다.
이 공리를 인정하게 되면 진화론이 문제가 될 것입니다. 또, 우리가 이 공리를 세워 가지고 나가게 될 때에는, 오늘날 소위 공산주의 철학으로서 세계적인 문제가 되어 있는 변증법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상충된 자리에서, 둘이 서로 모순된 자리에서 대립물이 서로 투쟁해 가지고 발전한다는 것은 천리원칙에 부합되지 않는 말입니다.
여러분, 역학에 있어서 힘이라는 것을 볼 때, 들어오는 힘과 나가는 힘이 같은 법이 없습니다. 어떤 작용을 했을 때는, 들어오는 힘보다 나가는 힘이 반드시 작은 것입니다. 입력 이퀄 출력이 될 수 없습니다. 입력보다도 출력이 작은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아메바가 작용을 해 가지고 더 큰 물건으로 어떻게 나오느냐? 이것이 문제가 됩니다. 어떻게 나올 수 있느냐? 나올 수 있으려면 두 가지 요인이 필요합니다. 아메바 자체가 자체보다 큰 것을 창조할 수 있는 주체적인 창조의 능력을 가졌느냐? 그것이 없다면 다른 데에서 힘을 끌어들일 수 있는 유도력을 가졌느냐? 이 두 가지 요인이 필요합니다. 이 두 가지 요인이 없다면 발전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 발전은 어디서 형성되느냐? 상대적인 여건의 환경이 갖추어져 가지고 서로서로가 보다 플러스될 수 있는, 마이너스도 플러스도 플러스될 수 있는, 두 자체가 보다 나은 차원에 도달할 수 있는 데에서만이 발전이 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통일교회에서 제창하는 논리입니다.
존재의 기원 문제를 놓고 볼 때, 존재가 있기 위해서는 운동을 해야 됩니다. 운동을 하려면 힘이 있어야 됩니다. 힘은 어디서 나오느냐? 혼자로서는 힘이 나오는 법이 없습니다. 주체와 대상 관계가 있어야 됩니다. 존재하려면 작용이 필요한 것이요, 작용하려면 반드시 주체와 대상이 있어야 됩니다. 주체와 대상이 없어 가지고는 작용할 수 없습니다.
국가면 국가간에 친교를 하겠다고 하는 것에 있어서도, 서로서로 보다 나을 수 있는 공동적인 목적을 추구하는데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공산세계와 민주세계가 격렬한 투쟁을 해 나오다가, 근세에 와 가지고 화해의 무드가 벌어져 나가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두 세계가 보다 나을 수 있는 목적관을 설정해 가지고 출발한다면 틀림없이 두 세계는 통일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관이 없어요.
여기에서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보다 플러스될 수 있는 내용을 확보해 가지고 마이너스될 수 있는 미급한, 미완성 분야를 충당시키고도 여력을 갖추게 하여 자기를 따라올 수 있는 새로운 목적 형태를 제시하면 세계는 하나될 것입니다. 하나됩니다. 모든 존재물은 보다 나은 것을 추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 보다 나은 것을 추구해 가지고 작용할 수 있게 되어 있느냐? 최고의 절대자가 있다면, 최고의 절대자 주체 앞에 상대적인 전체성을 부여하려니 그런 창조관으로 짓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존재하기 전에 힘이 있어야 됩니다. 힘이 있으려면 작용을 해야 됩니다. 작용하는 데에는 혼자 하는 법은 없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아무도 없는데 내가 혼자 말한다면 나는 미친 사람이라구요. 아무리 큰소리를 하고, 아무리 무엇을 한댔자 그것은 미친 짓이라구요. 아무리 세계적으로 훌륭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 사람이 혼자 있게 되면 그는 두말할 것도 없이 불쌍한 사람입니다. 안 그래요? 아내가 없고, 가정이 없다면 불쌍한 사람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나라가 없게 될 때에는, 그는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것은 왜 그러냐? 보다 가치적인 환경의 터전을 못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개인으로서도 그렇고, 가정을 두고 봐도 그렇고, 나라를 두고 봐도 그렇고, 세계를 두고 봐도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쌍한 민족은 어떠한 민족이냐? 세계를 위해서 공헌하지 못하는 민족입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세계에 공헌하면 왜 불쌍하지 않으냐? 세계에 공헌함으로써 세계의 원인 되시는 절대적인 주체와 하나되고, 세계적인 결과의 세계를 총합해 가지고 주체를 선봉에 서서 맞을 수 있고, 그 민족을 통해서 행복의 길이 트이기 때문에, 행복을 맞을 수 있는 선두에 서기 때문에 보다 행복한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여러분, 기록을 가진 사람이 행복하다고 하지요? 아폴로 11호를 타고 달에 갔다 온 사람들은 역사시대의 누구보다도 행복한 것입니다. 그 다음에 12호, 13호…. 여러분은 생각이나 해요?
이런 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오늘날 우리들은 존재물임에 틀림없습니다. 여러분이 존재물임이 틀림없는 한, 여러분은 상대적 관념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체와 대상 관계에 있어서 종적 주체와 횡적 주체가 있어야 됩니다. 이래야 이상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행복이라든가 이상이라는 것은 보다 나은 결과적인 존재가 형성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적인 존재라는 것은, 개인도 결과적인 존재요 가정도 가정으로서 결과적인 존재입니다. 혹은 사회면 사회로서, 그 나라면 나라로서 결과적인 존재입니다. 그 결과가 추구하는 것이 두세계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세계는 하나가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만일에 두 세계를 추구하는 주체가 있다면 그 주체는 머리가 둘이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주체는 절대적인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원인적인 주체가 두 결과를 추구한다면 그것은 절대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절대적이란 단 하나입니다. 완전한 기원이라는 것은 둘이 아닙니다. 하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기원에서 시작한 결과의 세계는 필연적으로 하나여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불가피한 것입니다.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날 역사시대를 거쳐온 인류를 한번 바라볼 때에, 이 인류라는 것은 현시대에서 태어난 산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적인 산물입니다. 우리 선조들이 그렇게 걸어왔기 때문에, 그것을 이어받은 것입니다.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초월이라는 것을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계승적입니다. 방향을 새로이 설정할 수 없습니다. 인연된 방향 밑에서 그것을 추종하는 방향은 인정하되 새로이 설정된 방향은 인정할 수 없습니다. 왜냐? 원인이 추구하는 방향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인간을 두고 볼 때에, 인간은 원인이 추구하는 본래의 주체 앞에 상대적 가치를 지닐 수 있는 개인적인 출발을 했느냐? 했다면 행복이 어떻다 하는 것을 체험한 조상이 있을 것입니다. 남자면 남자 혼자서 행복을 느껴 가지고 '나만 행복한 사람이다'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 행복이라는 것은 그 개인에게 한한 행복이 아닙니다. 그 개인은 전체를 대표하기 때문에, 전체의 원인이 되는 주체의 행복을 대신한 상대적 존재이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께 기쁨을 미칠 수 있는 행복의 요인을 반응시킨 주체임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기뻐했으면 주체 되시는 그분도 기뻐하셨을 것입니다. 내가 춤을 췄으면 그 주체도 춤을 췄을 것입니다. 그러한 개인은 '인생에서 이러한 것이 행복이다' 하는 것을 느끼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한 남성이 있었으면 그 남성과 더불어 산 여성이 있었을 것입니다. 여성도 '이런 것이 행복이다'라고 하는 것을 느끼며 살았을 것이 아니예요?
이러한 남자 여자가 우리 본래의 조상이었다면 행복한 터전 위에 사랑을 중심한 가정을 형성했을 것이 아니냐. 그런 가정에서 태어난 아들딸이 있었을 것이 아니냐. 그 아들딸은 어머니 아버지의 행복을 그냥 그대로 이어받을 수 있는, '이것이 인생의 행복이다'라는 전통을 제창할 수 있는 역사적인 무엇이 있었을 것이 아니냐. 있을 성싶지 않아요?
아버지가 어머니를 사랑하는 자리는 천도의 원칙과 일치된, 원칙에 귀일된 그런 자리입니다. 원인이자 결과를 반영시키는, 결과이자 원인을 반영시키는 최고의 가치 추구를 다짐하는 자리입니다, 그리고 보다 나은 내일의 소망을 추구할 수 있는, 가중적인 목적을 그릴 수 있는 자리입니다. 그런 자리가 행복된 자리가 아니겠어요? 그 행복된 자리는 전부 다 끌어당기는 그런 자리가 아닙니다. 행복이 찾아올 때에는 주고 싶은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도 그렇지 않아요? 진짜 좋으면 덮어놓고 주고 싶고, 덜 좋게 될 때에는 방향을 갖추어 가지고…. 이렇게 볼 때에, 우리 인류 시조가 참다운 행복을 그려 가지고 살았으면 그것이 역사적인 전통으로 남았을 것이 아니예요?
그랬다면 참다운 부부의 도리는 어떠해야 되느냐? 그것은 이미 귀결되어 출발했을 것입니다. 참다운 부모는 어떠해야 할 것이냐? 그것도 이미 설정되었을 것이 아니예요? 참다운 자녀의 도리는 무엇이더냐? 그것은 이미 보여지고 알려진 것이 아니냐? 안 그래요? 그래 가지고 그 자식들은 횡적으로 친척관계에 있어서 '이렇게 사는 것이 전통을 통한, 원인이 추구하는 방향에 일치된 결과적인 종족이다' 할 것입니다.
그 종족을 통해서 수 없이 확대되어 가지고 구성된, 절대적인 원인을 통한 결과적인 나라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 나라가 귀결점에 서야 됩니다. 이렇게 된 세계는 주체와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상응, 상화(相和)할 수 있으며, 보다 고차적인 목적을 서로 자극시킬 수 있는 현실적인 기반을 가지려고 할 것이 아니예요? 거기에 비로소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자, 그럴 수 있는 인간들이 있어요? 그럴 수 있는 인간들이 없습니다.
단적으로 결론을 지으면 천지의 패턴으로서의 개인 타이프(type), 그 원형이 있어야 됩니다. 여러분 형(型)이라는 것, 모형이라는 것이 있지요? 요즘 시대는 오토메이션(automation)시대이기 때문에 철형(鐵型)이 있으면 그걸 놓고 한 번만 작동하게 되면 딸가닥딸가닥하면서 같은 모양이 찍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한 형이 있지요? 몇만 개 몇백만 개라도 찍어낼 수 있는 형(型), 그 형이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사람입니다. 이게 있어야 됩니다. 그런 어떤 주체가 있어야 됩니다.
방향에 있어서도 동서남북에 따라서, 360도에 따라서 방향이 다르고 각도와 위치가 다른 입장에 어떠한 타이프가 되어야 된다고 하는 그런 무엇이 있었을 것이 아니예요? 인간으로서 절대적인 원인이 추구하고 그 원인이 추구해 나가는 방향과 일치될 수 있는 결과가 되어야 되고, 그 결과에 있어서는 원인을 내재시키고 또다시 자기로부터의 제2의 방향을 설정할 수 있어야만 씨가 될 게 아녜요? 봄에 씨를 뿌려 가지고 가을에 거두어들여, 다시 찾아오는 새로운 봄날을 맞아 가지고 씨를 뿌리게 될 때에, 첫번 뿌렸던 봄날의 씨 그 자체를 대신할 수 있어야만 완전한 씨가 되는 것이 아니냐.
그러면 인간에게 있어서 싹이 나고 열매 맺히는 것이 어떤 것이냐 할때에,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이 우리 인간이 싹이 나고 열매 맺는 것이지' 그렇게 생각해요? 열매맺는다는 것은 우리 인간의 이상입니다. 가을이 되어 가지고 거두게 되면 벼는 벼끼리 전부 다 한섬에 들어가지, 벼가 '아이고, 나는 강냉이 섬에, 수수 섬에, 팥 섬에, 콩 섬에 들어가겠다'고 해요? 그것은 주인이 가르는 대로 한섬에 들어가게 마련입니다. 콩은 콩끼리, 팥은 팥끼리 한섬에 몰아넣는 것입니다. 이렇게 오늘날 역사 시대를 바라보면, 지금 때는 가을절기입니다. 인류역사가 수확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앙상한 가지만 남습니다. 그 가지도 혹독한 바람이 불면 꺾여질 것입니다. 그러면 뿌리만 남을 것이 아니냐, 그런 때가 왔습니다.
그래서 인류는 전부 다 어디로 갈 것이냐? 내가 찾고 있는 이상세계는 어디로 갔느냐? 인류는 절망하고 있습니다. 어디로 갈 것이냐? 내가 찾던 이상세계는 어디로 갔느냐? 민주세계면 민주세계 자체를 두고 보면, 민주세계가 찾고 있는 이상향이라는 것은 오늘날 현시점을 초월시킬 수 있는 아무런 주체성을 갖고 있지 못하고 상대성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공산주의도 공산주의 자체로서 세계 제패를 꿈꾸고 나왔지만, 이제는 도리어 분쟁하고 있는 현시점을 우리가 직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예요? 그것은 통일의 형태를 갖출 수 없습니다. 분열에 분열을 촉구하여 개인 공산주의화 단계까지 내려갈 것입니다.
오늘날 민주세계가 추구해 나오는 결실이 무엇이냐? 오늘날 자유 민주 세계의 결실이 무엇이냐? 개인주의 사상입니다. 여러분, 미국에 가 보면 말이예요. 히피족들이 있어요. 여러분, 버클리 대학교를 가 보라구요. 그게 대학이예요? 한번 휘발유를 뿌리고 불살라 버렸으면 하는 생각이 납니다. 그들은 나쁘다고 안 그럽니다. 그들은 좋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나쁘다구요. 원칙에 서 있지 않습니다. 절대적이면 절대적으로 거기에 흡수될 수 있는 요건을 갖추어 가지고 일치된 절대권, 단 하나의 방향을 갖고 있는 데에서 절대적인 통일권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방종입니다. 방종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들 앞에 나라가 있느냐? 나라가 없습니다. 그들 앞에 가정이 있느냐? 가정이 없습니다. 스승이 있느냐? 스승이 없습니다. 동물성을 중심삼고 너와 내가 같다는 거예요. 질서가 없습니다. '질서가 뭐야? 먼저 난 것이 나중 될 수 있고, 나중 난 것이 먼저 될 수 있지. 애비가 뭐야? 에미가 뭐야? 이러면서 여건을 따져 가지고, 동물성을 가지고 별의별 짓을 다 하고 있습니다. 듣기에 할머니하고 같이 산다는 말을 내가 들었습니다. 그것은 동물, 동물이 그러는 거예요. 이건 천도도 없고, 인륜도덕도 없고, 나라나 그 모든 것이 없습니다. 개인주의화 되어 가지고 극단적인 육(肉)의 만족을 취하려는 방종적인 현실권내에서 별의별 짓을 다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지막입니다. 거기에서 무슨 이상적인 인간이 나오겠어요? 그것은 망하는 것입니다. 안 망하게 되면 통일교회의 문 아무개라도 망하게 만들 것입니다.
오늘날의 이때는 어떤 때냐? 현재의 문명을 보면, 인류의 문명은 온대 문명입니다. 옛날의 열대문명을 거쳐 가지고 지금은 온대문명권내에서 가을을 맞이할 때가 왔습니다. 여기에서는 북쪽의 찬바람이 불어오는 것입니다. 한대문명이 세계를 휩쓰는 시대에 오지 않았어요? 그러면 인간세계에 있어서 진정한 봄날, 우리 통일교회 술어로 말하면. 원화문명(圓和文明)을 맞게 되는 거예요. 봄절기 문명권이 있었느냐? 있었다고 봐요?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상이 무섭다구요.
오늘날 인간의 가치가 이렇게 추락될 줄은 몰랐다는 거예요. 자, 병이 났는데 이것을 낫게 하는 데에는 병이 난 결과를 치료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아이고, 손가락이 썩었는데 손가락을 잘라 버리면 되느냐? 그러면 안 됩니다. 염통에서 이상이 생겨 가지고 손가락이 썩어 들어가고 있는데 손가락을 잘라 봤자 또 썩습니다. 그러니까 뿌리를 빼기 위해 염통의 잘못된 부분을 갈라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 있습니다. 씨는 씨인데 올바른 씨가 아니라 쭉정이와 같다면, 그런 씨를 원하겠어요?
이렇게 볼 때 이러한 형, 개인적으로 이러한 형, 어떤 섭리적인 주체가 있으면 그 주체가 와서 보고 '사람은 이래야 된다'고 할 수 있는 형이 있어야 됩니다. 사람 가운데에는 남자와 여자가 있습니다. (판서하심) 이것이 남자라면 이것은 여자예요. 이 둘이 합해 가지고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자와 여자가 되어야 할 이러한 형이 있어야 됩니다. 즉. 두 사람이 합해 가지고 가정을 바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정에 대한 어떠한 패턴(pattern)이 있어야 됩니다. 세계적 완성권을 만드는 데 있어서 한 가정은 세계를 구성하는 부속품입니다. 그 부속품은 어떠해야 된다는 패턴이 있어야 됩니다. 패턴이 있어요? 여러분이 살고 있는 가정에 있어서, '아! 천륜대도를 대신 집행할 수 있는 대표적 가정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요? 어림도 없습니다. 없는 것이 아니예요? 그 다음에 종족이면 종족도 마찬가지예요. 국가면 국가에 있어서 '천륜이 바라는 국가는 이래야 된다'고 하는 어떠한 패턴이 있어요?
오늘날 공산주의 국가도 자기들이 패턴이라고 하고, 민주세계 국가도 자기들이 패턴이라고 합니다. 패턴이 둘이 있을 수 있어요? 둘이 있는 데에서는 싸우는 거예요. 싸운다구요. 어차피 해결되어야 할 중차대한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이 근본문제를 처리하지 않고는 해결이 안 돼요. 남북이 무슨 선언을 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근본문제, 즉 들춰 가지고 해결 해야 할 중차대한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공산세계가 철학을 근거로 하고 출발했기 때문에 철학적인 투쟁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결과에서 암만 했댔자 안 되는 것입니다. 원인과 결과를 타진해 가지고 그 과정이 올바른 형태를 갖추어 방향이 일치되게끔 가려 놓지 않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가 아니예요?
그러면 오늘날 세계를 중심삼고 볼 때, '이것은 인류가 바라고 섭리의 주체 되는 원인자가 바라는 세계의 패턴이다'라고 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있느냐? 없습니다. 없지만 인간은 그래라 하는 것입니다. 보다 고차적인 것을, 보다 통일적인 것을 찾아 나가는 거라구요. 그것은 그래야 되는 거예요. 하나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하나에서 출발한 것은 아무리 뻗어 나가고 아무리 많아진다고 하더라도 나중에는 하나로 귀결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마치 나무의 열매와 똑같습니다. 하나에서 출발해 가지고 가지가 나고 잎이 많이 났지만 여기에서 하나의 귀결점은 또 다른 열매를 맺기 위해서…. 모든 잎, 가지 등에서 흡수될 수 있는 모든 요소를 집약시킨 결정체가 열매가 아니예요? 그렇지요? 역사는 그렇게 발전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 시조로부터 퍼져 갔다가 또 다른 씨를 찾으려니 엇갈리는 입장에서 두 사조가 나왔습니다. 왜 둘이 나왔느냐? 하나는 그릇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나무에 열매가 있으면, 열매에 있어서는 완전한 열매와 완전치 못한 열매가 있게 되는데, 가을에 와 가지고 그 정체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완전한 열매는 주인을 위하는 열매인 것이요, 완전치 못한 열매는 주인에게 반항하는 열매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신이 없다고 주장하는 주의와 신이 있다고 주장하는 주의가 나온 것입니다. 안 그래요? '신이 죽었다. 신이 없다' 그러면 인간은 어디서 나왔어요? 원숭이한테서 나왔어요? 자연과학을 가르치는 대학 교수가 교단에 서서 인간은 원숭이로부터 나왔다고 설명하였다고 합시다. 학생이 '선생님, 오늘 강의를 잘 들었습니다. 선생님의 할아버지는 원숭이지요?'라고 하면 '아. 그렇고 말고'라고 대답할 사람이 있어요? '예끼 이놈!' 한다는 거예요. 여러분의 조상이 원숭이 같아요? 이것은 영계니 뭐니 아무것도 모르는 무식장이들이라구요. 앞으로 이런 것들을 전부 다 재차 교육해야 됩니다. 영계가 엄연히 있다구요.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에, 오늘날 인간의 패턴을 어디서 구할 것이냐? 개인의 패턴이 어디 있느냐? 가정의 패턴이 어디 있느냐? 국가의 패턴이 어디 있느냐? 세계의 패턴이 어디 있느냐? 공산주의가 그것을 대행할 수 있느냐? 민주주의가 그것을 대행할 수 있느냐? 대한민국이 그것을 대행할 수 있느냐? 어떠한 종파가 그것을 대행할 수 있겠느냐? 어떠한 가정이 그것을 이어받을 수 있는 가정이 되기 위해서 지금 나가고 있느냐? 아니라구요. 아니예요.
인간은 '아니'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아니라는 결론을 지을 수 밖에 없습니다. 부정적인 출발을 했으니 부정적인 결정을 함으로써 청산해야 됩니다. 요즈음엔 전부 다 부정하지 않아요? 실존철학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극복하는 데는 현실을 부정함으로써…. 현실을 부정하지 않으면 여기에서 승리하든가 초월할 수 있는 길은 없는 것입니다. 승리할 수 있는 방안은 없다구요. 방안을 아무리 모색해도 목적을 모르니까 모색할 길이 없다구요. 그러니까 부정을 해 가지고 극복해 보려고 몸부림치는 것이 현실이 아니냐. 그러나 불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부정의 기원을 또다시 부정하라. 인간이 부정으로 출발했기 때문에 이것을 부정해서 긍정적인 자아를 재발견하라고 제창하고 나온 것이 종교가 출현하게 된 동기입니다. 종교는 그런 사명을 갖고 있더라는 거예요. 예수님이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라고 했는데, 이것은 역리적인 논법입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 전부 다 반대의 말을 했다구요. 예수를 믿으면 산다고 해야 할 텐데,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은 곧 부정하지 못하는 사람은 긍정을 발견할 수 없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완전한 종교는 완전한 부정을….
여러분, 참선도 그렇지 않아요? 참선이 무엇이냐 하면 '양심이, 마음이 무엇이더냐? 이런 문제에 자기 긍정이라는 기준을 놓고서 자기의 관을 초월해 가지고 우주가 공인할 수 있는 경지를 추구하는 데에서 새로운 자아를 발견하자고 하는 것입니다. 뭐 도의 길이나 모든 것이 그렇게 되어 나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느냐? 우리는 십자로에 서 있습니다. 이 현실적인 세계를 직시하게 될 때에, 나는 어디에서 있느냐? 불합격품이 합격품이 되겠다는 싸움의 판국에 내가 서 있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내가 불합격품의 권을 부정해 버리고 합격품이 될 수 있는 길을 어떻게 모색하느냐? 여기에는 새로운 우주적인 혁명이 제시되어야 됩니다. 개인적인 혁명이 아니예요. 개인으로서 우주적인 혁명을 누가 제창할 것인가? 그럴 때가 왔어요, 그럴 때가.
오늘날 개인주의 사상이 어떻게 되었느냐? 모든 혁명을 한다고 했지만 환경을 초월한 것이 아니요. 극복한 것이 아닙니다. 밀려 나가면서, 차원이 떨어지면서 낙후해 가는 자리에서 혁명을 해 나온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망해 들어가는 것입니다. 차원이 낮은, 망해 들어가는 혁명 형태를 거치고 있는 것입니다. 세계가 어디에 있고, 나라가 어디에 있으며, 부모가 어디에 있느냐? 부모도 밥을 먹어야 좋아하고, 나도 맛있는 것을 먹어야 되고…. 동물들은 맛있는 것이 있게 되면 에미 애비끼리도 싸우는데, 사람이 무엇이 다르냐? 우선 먹는 것이 지혜로운 것이다. 그저 재빠른 것이 이기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것을 들이치는 거라구요.
이런 것을 생각하게 될 때, 그러면 내가 설 자리는 어떤 곳이냐? 이것이 문제라구요. 내가 설 자리는 어디일 것이냐? 섭리적인 십자로권에 서 있는 것입니다. 왼쪽으로 가는 길도 있고 오른쪽으로 가는 길도 있습니다. 안 그래요? 왼쪽이나 오른쪽 중에서 오른쪽으로 가라. 그렇지 않아요? 왼쪽으로 가면 좌익세계요, 오른쪽으로 가면 우익세계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오늘날 공산세계와 민주세계라는 것은 십자가 상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중심삼고 오른편 강도와 왼편 강도에 의해. 왼편 강도는 '하나님이 어디 있어? 예수가 뭐야? 다른 사람들은 살려주었으면서 너는 왜 못 살려?' 이렇게 비난했습니다. 인류역사에 그런 것을 뿌렸기 때문에….
미국이 기독교문화권의 나라입니다. 미국이 오른편 강도가 되어야 될텐데, 하나님 앞에 죽음을 각오하고 예수님 대신 생명을 걸고 하나님의 방파제가 되고 예수님의 사상으로 지탱해 가지고 몸부림쳐야 할 것인데도 불구하고, 지금 허리가 부러져 가지고 똥을 싸고 뭉개고 있다는 거라구요. 역사는 심은 대로 거두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십자로를 보라구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될때에 바라바라는 사람이 있었어요. 바라바는 누구냐 하면 그 당시에 있어서 폭동을 일으킨 반동분자라구요. 요즘 공산당들이 말하는 반동분자와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바라바는 예수님 때문에 살아났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살아난 사람이라구요. 그 다음에 예수님이 있어요. 이렇게 네 인물이 등장했다는 거예요. 그렇게 심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진리라면 그 진리의 형태로 세상을 거둘 수 있는 가을을 만들어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민주세계와 공산세계는 오른편 강도와 왼편 강도와 같고, 지금 아랍권(회회교권)은 바라바권입니다. 회회교권은 칼을 가지고 나서고 있는데, 그것은 종교의 원리원칙적인 이념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왼손에는 코란경, 오른손에는 칼을 들고 나서야 된다고 하는 거예요. 그것이 뭐냐? 바라바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살아서 지배하려던 무대까지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아랍권 전체가, 아브라함의 후손인 열두 지파가 축복 받은 그 땅이 전부 다 회회교권에 말려들어간 거예요.
이제 남은 것이 무엇이냐? 다시 오시는 예수권입니다. 이렇게 색다른 형태의 십자로가 생겨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그렇게 되어 있다구요. 세계적으로 보면 그렇게 되어 있다구요. 그와 마찬가지로 여러분 개인을 두고 보면, 오늘날 세계적으로 어떻게 되어 있느냐? 내가 우익이냐, 좌익이냐? '내가 자기냐?'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자기라는 것은 '하나님이고 뭣이고 없고 자기만이다' 이렇게 되어 있다구요. 그러한 바람에 휘몰리는 개인과 같이 가정도 좌익 가정이냐, 즉 왼쪽 가정이냐, 오른쪽 가정이냐, 자기만의 가정이냐는 것입니다. 자기만의 가정은 하나님이고 뭣이고 없는 회색분자, 내가 이익 보면 된다는 가정입니다. 여기에 색다른 것이 무엇이냐 하면 예수만을 붙드는 무리들입니다. 그런 때가 왔기 때문에, 재림시대가 되어 온다는 것을 우리가 섭리관적인 입장에서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만을 위하여 예수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던 것과 같은 것을 재차 맞이할 때입니다. 십자가로 갔으니 십자가로 와야 됩니다. 울음으로 갔으니 울음으로 와야 됩니다.
오늘날 참다운 인간은 어디에 있느냐?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이렇게 예수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자기 일신을 다 부정하는 자리, 생사의 기로에 서 가지고 하나님을 붙들고 늘어질 수 있는 자리에 섰기에 오직 삶의 한 역사적인 방향이 설정된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 세상도 그렇게 해야 됩니다. '끝날에는 밀실에 들어가서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기도하라'고 한 것이 그거라고요. '내 뜻대로 마옵소서, 내뜻대로 마옵소서' 해야 됩니다.
오늘날 우익도 좌익도 전부 다 인간의 뜻입니다. 오늘날 양심주의나, 뭐 나만 중심삼아 가지고 살면 된다고 하는 것은 전부 다 인간주의예요. 다 인본주의예요. 인본주의의 출현은 인간의 타락 때문이예요. 신본주의를 위주로 한 인본주의의 형성은 인정할 수 있지만, 신본주의를 부정한 인본주의의 형성이 타락이 아니었어요?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인본주의를 부정하고 신본주의의 긍정에서부터 인본주의의 긍정을 재차 추구 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하나님을 붙들고 하나님을 절대시하지 않고는 돌아갈 길이 없다는 결론을 지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는 죽음길을 가더라도 천도를 따라가야 된다고 하는 것을 인류역사의 전폭적인 사실을 두고 보여 준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개인도 마찬가지라구요. 혼란된 환경을 이어 가지고 '내 이익만 한데 모으면 된다' 이러면 망하는 것입니다, 그런 놈은 망하는 거예요. 또, 자기 당파의 이익을 꿈꾸는 것들도 망합니다. 망하게 마련이라구요. 그렇지만 자기 생명을 버리면서라도 하나님을 위해서 끝까지 변호하고, 또한 자기가 살아 있는 것, 단체가 건재한 것. 나라가 있는 것은 그 중심을 위하여 천도를 위하여 있다고 옹호하고 나설 수 있다면, 그러한 개인이나 단체나 민족과 국가는 산다고 봅니다. 지금 때가 그런 때라구요.
오늘날 우리가 생활하는 데 있어서 도덕관을 중심삼고 보더라도 '내가 지금 선하다. 내가 선하겠다'고 한다면 선 악이 있습니다. 오른쪽은 선한 것이고, 왼쪽은 악한 것이라구요. 그 다음에는 뭐냐? 선도 아니요 악도 아닌 것이 있다구요.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 선이면 뭐 어떻고 악이면 뭐 어때? 그런 것 생각하고 있을 게 뭐야? 적당히 살지' 이런 것이 있다구요. 안 그래요?
오늘날 공산세계와 민주세계가 있고, 그리고 회색주의가 있습니다. 회색주의는 눈치 봐 가지고 살짝 넘어서고, 이것은 여기도 못 믿고 저기도 못 믿고 왔다갔다하고,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습니다. 안 그래요? 그런 회색분자들, 눈을 깜빡깜빡하면서 살짝 넘어서고 들락날락하다가 잘못하면 모가지가 달아나는 거라구요. 그런 녀석들이 있어요. 차든지 덥든지 해야 되는 거라구요. 알겠어요? 미지근하다가는 전부 다 쓰레기통에 들어가게 됩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예요. 여러분도 선하냐, 악하냐, 그 다음에는 미지근하냐…. 이런 입장에 있습니다. 그렇지요? 이것은 절대적인 선이 아니냐? 이렇게 공판할 수 있느냐? 너도 안 되었고, 너도 안 되었고, 너도 부족하다. 이렇게 판단할 수 있는 절대권을 가졌느냐? 그런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4대 십자로가 형성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은, 우리의 현실, 자아의 생활환경을 통해서 내릴 수 있는 자연적인 결론이 아니냐.
그러면 여러분은 어디 있어요? 통일교회는 적극파입니다. 아마 일본에 있어서 '통일교회는 우익보다 더 우익이다. 통일교회는 초우익이다' 그래요. 이거 잘 붙였습니다. 기분이 나쁘지만…. 그 초(超)자를 갖다 붙인 것이 속된 말 같지만, 초우익이면 좋지요. 우리는 초우익이예요, 초우익. 그러면 초좌익은 무엇이냐? 그것이 일본에 있어서의 조총련이라구요.
그래, 초우익과 초좌익이 붙어 보자 이거예요. 네가 죽느냐, 내가 죽느냐? 우리는 이미 죽음을 무릅쓰고 공산당과 싸우고 있습니다. 박 대통령이 선언을 했지만 반공교육을 강화해야 됩니다. 지금까지의, 먼 자리에 서 가지고 얼씬 못하는 자리에서의 반공이 아니라구요. 주먹으로 싸울 때가 아니고 이제는 눈과 눈을 맞대고 콧등과 콧등을 맞대고 말로 싸울 때가 왔다는 거예요. 이론 투쟁을 해야 된다구요. 그것을 지금까지 해 나온 것이 통일교회의 승공연합입니다. 어제도 구보끼 일본 협회장이 왔다 갔지만 지금까지 해 나왔습니다.
내가 이번에 3차 세계순회하면서 일본에 들러 말한 것이 무엇이냐? 공산당과 공개토론하자는 것입니다. '공개토론을 하자. 우리가 공산당하고 이론 투쟁할 테니 텔레비젼 방송국은 중계하라. 신문은 보도해라' 그랬어요. 그러면 얼마나 좋겠어요? 이렇게 공개선언한 거라구요. '나와라' 이러니 꽁무니를 빼는 거라구요. 은좌(銀座)거리는 토요일 오후부터 주일 오후 여섯 시까지 차량 통행이 금지됩니다. 그래 토요일 오후에, 혹은 일요일에 가게 되면 사람이 꽉찼다구요. 거기 십자로에다가 간판을 붙이고, 또 신문에 '아무날 몇시에 은좌 아무 거리에서 공산당 책임자하고 공개 토론한다. 아무개 누구도 나올 것이다' 이런 광고를 붙이고 그 일을 대대적으로 전국적으로 하는 거예요. 그들이 꽁무니 빼는 날에는 들이치는 거라구요. 지금 이 싸움을 하고 있다구요. 그러니까 공산당들이 우리에게 하는 말이 '우리는 몇십만밖에 안 되는 조그만 공산당이 아니냐? 우리를 보고 그러지만 말고, 자민당한테 그래라' 지금 이러고 있습니다. 못살게 그러지 말라는 거예요. (웃음)
공산당 앞에 야당이 나왔습니다. 지금까지 공산당 50년 역사에 있어서 야당이 없었습니다. 독주, 안 된다는 거예요. 브레이크를 건다는 거예요. 그 브레이크가 얼마나 큰지, 혼자 돌아가는 것을 돌아가지 못하게 찌그러지도록 브레이크를 걸자는 거예요. 이것이 우리 통일교회예요. 초우익 이라구요. 알겠어요? 겉보기에는 나약한 칼이지만 그 껍데기만 벗겨지는 날에는 어떤 강철보다도 강합니다. 그래요, 안 그래요? 우리 젊은 사람들, 그래? 「예」 얼빠져 가지고 여기 앉아 있어서는 안 되겠다구요.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바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나에게서 지나가게 하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당신의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 기도를 잘했어요, 못했어요? 잘했다고 봐요. 못했다고 봐요?「못했습니다」 왜 못했어요? '아, 당신의 뜻은 그만두고 내 뜻대로 하옵소서' 이래야 돼요? '당신의 뜻이자 내 뜻이요. 내 뜻이자 당신의 뜻이옵니다' 이런 기도를 하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왜 그런 기도를 하게 되었느냐? 예수님이 바라시던 제자의 어떤 패턴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를 따르는 교인의 패턴은 이래야 된다고 하는 것이 있었을 것입니다. 있었을 거 아니예요? 약속한 메시아를 보내게 되면 유대교는 메시아를 맞을 때 이렇게 해야 된다고 하는 패턴이 있었을 거라구요. 그런데 거기에 합격된 유대교가 못 되었고, 거기에 합격된 이스라엘 나라가 못 되지 않았느냐. 그래서 예수는 마음으로 제 2 이스라엘 나라와 유대교를 그릴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음으로 그리던 유대교와 마음으로 그리던 이스라엘 나라가 안팎으로 완전히 하나되었으면, 어떻게 되었겠느냐? 하나님은 이스라엘 나라를 위해서, 유대교를 위해서 수천년 전에 메시아를 보내 준다고 약속하셨는데, 그런 약속을 받은 그 백성과 교회가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 되었더라면, 예수님이 그런 기도를 하셨겠어요? '당신의 뜻이 내 뜻이요, 내 뜻이 당신의 뜻이옵니다. 나에게는 당신이 세운 교회를 잘 이끌어야 할 책임이 있고, 당신이 세운 나라를 나는 잘 다스려야 할 것이 아닙니까?' 이렇게 기도했어야 합니다. 그랬어야 할 텐데도 불구하고 나라와 교회가 하나님이 지도하시려던 입장과는 어긋나 있었기 때문에, 나라를 취하고 교회를 취하려니 하나님과 배치되고, 하나님을 따라가려니 나라와 교회에게 배치되는 가운데에서, 예수님은 교회를 버리고 이스라엘 나라를 버리더라도 하나님을 따라가지 않을 수 없는 입장에 섰기 때문에, 그런 기도를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아니예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불쌍한 분입니다. 안 그래요?
예수님은 죽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예요. 졸장부로서 무력하게 쓰러지려고 오신 예수님이 아니예요. 이스라엘을 동원하고 지금의 아랍권 일대,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축복받은 열두 지파의 그 아랍권 민족을 동원해 가지고, 강대한 로마제국에 대항하고 나서기에 부족함이 없는 환경이 자연적으로 되어 있어야 했습니다. 그때에 로마의 모든 정치 풍토는 약화 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예요? 빌라도가 분봉왕으로서 다스리는 조그마한 이스라엘 나라에서 민란이 날 것을 두려워한 것을 보게 되면, 얼마나 행정력이 미급했는가 하는 사실을 한눈에 알 수 있지 않느냐 이거예요. 여러분이 그것을 알아야 된다구요.
하나님이 찾고 있던 이스라엘 나라는 어떠해야 됐느냐? 하나님이 찾고 있던 유대교는 어떠해야 됐느냐? 예수님이 볼 때에 교회는 이래야 되고 나라는 이래야 되는데, 이러한 나라와 교회는 어디에 있느냐? 없었습니다. 배치되었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반대를 받으신 것이 아니예요? 이스라엘 나라와 유대교가 예수의 뜻대로 했고, 하나님의 뜻대로 했으면 누가 예수를 반대하고 누가 죽여요? 빌라도는 살려주려고 했는데, '바라바는 살려주고, 예수를 죽이자. 예수를 십자가에 달자'고 누가 했어요? 유대 민족이 했어요. 빌라도의 아내까지도 꿈을 꿔 가지고 빌라도에게 예수님에게 손대지 말라고 권고한 것을 보면, 예수님은 죽게 안 돼 있는 거라구요.
그것을 보면 예수님은 어떠한 입장에 섰었느냐? 그야말로 십자로에 섰었습니다. 섭리의 나라와 섭리의 교회를 등에 지고 세상 나라와 세상 교회 앞에 접근하게 될 때, 예수는 그야말로 십자로에 섰었습니다. 그렇지요? 십자로에 섰었습니다. 그런데 오른편 교회와 오른편 나라는 본래 예수가 추구해 온, 소망했던 교회와 나라인데도 불구하고 왼편 교회가 생겼고 왼편 나라가 생겼습니다. 이것이 예수에게 배치되는 일이 아니예요? 이것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예수가 희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예수가 재차, 이 땅 위에 회생(回生)될 때까지 유대 나라는 땅에서 머리를 들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은 2천년 역사노정을 거치면서 수많은 민족의 총칼 앞에, 혹은 말발굽 아래에 밟혀 희생의 제물이 되었던 것이 아니냐. 1948년을 중심삼아 가지고 비로소 유엔의 협조를 받아 가지고 독립을 했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 아니냐, 예수를 반대하던 이스라엘, 로마제국보다도 더 큰 세계적인 반대권을 가지고 고고(孤孤)한 신세에서 독립을 했지만, 이제 헤쳐 나가야 할 길에 있어서 철옹성 같은 원수의 터전들이 남아 있는 것이 아니냐. 아랍권을 어떻게 극복하며, 어떻게 공산권을 극복할 것이냐 하는 것이 이제 이스라엘 민족이 해결해 가야 할 문제가 아니냐. 그것은 민주세계의 공동 운명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자, 그렇게 볼 때에,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옛날에는 '예수 믿는 사람' 하면 높이 봤습니다. 혹은 종교를 믿는 사람을 높이 봤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에 있어서는 점점 그것이 떨어져 가고 있습니다. 요사이 과학이 발달된 이때에 있어서, 모든 것이 분과 제도로 되어 있기 때문에 세부적인 원칙을 따라 가지고 하나의 분과 속에 수많은 사람들이 규합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초월해 가지고는 인간의 가치 추구를 인정할 수 없다. 물질적 상대세계를 맞은 이때에 있어서 종교가 뭐 필요하냐?' 이런 때에 들어왔다구요. '종교가 필요없다. 종교가 바라는 이상이 뭐 필요하냐? 종교가 바라는 인격, 종교가 바라는 가정, 종교가 바라는 국가관 세계관이 필요없다' 이렇게 돼 있다구요.
자, 이러한 세계 앞에 하나님이 있어 가지고 섭리를 추진시켜 나오신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하실 것이예요? 절대적인 종교를 위주할 것이 아니예요? 절대적인 하나님을 위주한 사상을 위주할 것이 아니냐. 그러면 오늘날 이 역사적인 종말시대에 있어서, 물질문명이 극단에 처해 있는 현시대에 있어서 여기에 남아질 것은 무엇이냐? 하나님이 있어서 세계가 떨어지는 낙엽이 되지 않기를 바라신다면, 여기에 무엇이 있어야 할 것이 아니예요? 세상에 반대되는 것, 하나님이 제시하는 절대적인 종교, 절대적인 국가관, 절대적인 사상관을 갖고 나오는 그러한 무엇이 있어야될 것이 아니예요? 이래서 또 다른 새로운 십자가의 형성이 이 땅 위에 벌어질 것이 아니냐. 마찬가지라구요. 그것은 그래야 돼요.
그러면 끝날은 어느때가 끝날이냐? 여기가 출발이라면 여기가 끝날입니다. 끝날은 끝이 아닙니다. 새로운 차원을 거쳐 나가게 되면 새로운 출발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심어진 밭에 따라서 씨의 결실은 달라지는 것이 아니예요? 돌짝밭에 뿌리느냐, 옥토에 뿌리느냐 하는 문제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악한 사람한테 뿌리느냐, 선한 사람한테 뿌리느냐 하는 문제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수확된 결실을 가지고 돌짝 밭과 가시덩굴 밭에 뿌리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옥토에 뿌리기를 원할 것이 아니예요? 옥토가 무엇이냐? 옥토로 준비한 것이 무엇이냐? 오늘날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이 옥토로 설정해 가지고 준비한 것이 종교가 아니예요?
그러면 옥토라고 주장하는 종교가 진짜 옥토가 되어 있느냐? 옥토라는 것은 어떠해야 되느냐? 흙이라는 것은 어떠해야 되느냐? 씨를 위해서만 있어야 됩니다. 씨가 필요한 요소를 흡수하게 될 때에, 백의 요소를 흡수할 수 있다면 백의 요소를 갖추어 그 상대적 진액을 씨 전체에 보급할 수 있어야만 완전한 옥토가 되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그럴 수 있는 종교가 있느냐?
그 완전한 씨와 같은 것이 무엇이냐? 기독교에서는 재림주가 이 땅 위에 온다고 했습니다. 메시아 사상을 중심삼고 볼 때, 그가 오면 옥토를 향해서 올 것이 아니예요. 그러면 옥토가 될 수 있는 교회가 있느냐? 옥토라는 것은 자기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씨를 위해서 있습니다. 씨를 위해 있는데 씨가 백만큼의 필요한 요소의 흡수력을 가졌으면 천, 만의 요소를 갖추어 가질수록 그것은 옥토인 것입니다.
이런 옥토가 될 수 있는 종교가 있느냐? 나라가 있느냐? 기독교가 있느냐? 전부 다 돌짝밭이요, 전부 다 가시덩굴밭입니다. 옥토라는 것은 자기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통일교회에 이런 때가 온 것입니다. 하나님과 갈라졌으면 끝날에 심판을 받든가, 칭찬을 받든가 또다시 만날 날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틀림없습니다. 자식이 부모 앞에 불효해 가지고 나갔다면 다시 만나 가지고 한번 담판을 하고서야 인연을 끊든가 안 끊든가, 갈라지든가, 정을 끊든가 하는 일이 벌어지지요? 불효했다고 해서, 뛰쳐 나갔다고 해서 부모가 '에이, 이놈의 자식! 나갔으니까 나하고 관계없어!' 하고 관계를 끊어 버리는 부모는 없습니다. 나갔으면 다시 돌아와 만날 날을 기다리고, 돌아올 때에는 옛날에 그랬던 것을 다시 한 번 회상해 가지고 자기 스스로 자책하고 회개하는 자리에서 본연의 효의 모습을 갖고 나타나기를 바라고, 또 그런 자리에서 자식을 맞기를 바라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자식은 그럴 수 있는 요인을 지녀야 할 것이 아니예요? 그런데 돌아와 가지고도 회개하지 못하고 '뭐야!' 할 때에는 잘라 버리는 거라구요.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에 주체 되시는, 원인 되시는 그분이 인류의 아버지라면, 부모의 자리에 계시다면 그 부모는 인류를 대해 다시 만날 날을 고대하실 것이 아니예요? 만나는 데에는 보따리를 싸 가지고 올 것이 아니냐? 효자로 오게 되면 더 좋은 것을 주겠다고 보따리를 다 싸 가지고 오실 것이 아니냐?
만일에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게 되면 여기에 배가되는 심판을 받게 될것입니다. 그러한 역사적 종말시대가 와야 하기 때문에, 끝날이 와야 되는 것입니다. 끝날은 무엇이냐? 심판하는 부모를 맞든가 칭찬하는 환영의 부모를 맞든가 이 둘 중의 한 부모를 맞을 수 있는 날이 끝날입니다. 안 그래요?
인간이 그것을 준비해야 하겠기 때문에, 인간이 심판받아 가지고 쫓겨 나는 무리가 되어서는 안 되겠기 때문에, 인간에게 그것을 교육해 가지고 그러지 말라고 하기 위해 종교의 터전을 넓혀 온 것입니다. 그러한 인간이 회개해 가지고 하나님을 절대시하고, 절대적으로 원인을 주체로 삼을 수 있는 모습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 하나님의 본의가 아니겠어요? 이것이 섭리의 중심사상이 아니겠느냐. 이것은 두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때에 가서 '나는 어떻게 어떻게 돼서 그렇게 됐습니다. 내가 이렇게 본래대로 돌아와 가지고 부모를 찾아오려고 했는데, 내가 쫓겨나 가지고 그냥 오려니 면목이 없어서 체면상 위신상 돈이라도 모아서 예물을 사 가지고 오려다가, 지금 이렇게 왔습니다' 이런 변명은 필요없습니다, 거기에는 예물이 필요치 않습니다. 사무친 마음에서 터져 나오는 회심 (悔心)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만이 통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마 4:17)"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해방하라 천국이 가까왔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다'는 이 말은 인류의 공동적인 표어인 것입니다. 불효했기 때문에, 자기의 주장대로 했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주장을 따른 자기의 주장은 성립되는데, 부모를 제쳐 놓고 자기 주장을 했던 것이 아니예요? 불충이 무엇이냐? 군왕을 내놓고 자기를 주장한 것이 불충입니다. 불효가 무엇 이냐? 부모를 내놓고 자기를 주장한 것이 불효입니다. 그렇게 되어 있다구요. 그래서 종교는 무엇을 가르쳐 주었느냐? '하나님 앞에 절대 순종하라' 이것을 가르쳐 준 것입니다.
이제 두 갈래 길이 오는 거라구요. 다시 말하면, 오늘날 이 세계, 혼탁된 이 땅 위에 있어서 인간들로서 인륜도덕을 논의하면서 국가관, 세계관을 바라고 있지만 이것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여기에 색다른 무엇이 있어서, 하나님이 제시하는 새로운 천도를 밝혀 가지고 모든 인류가 하나의 공동적인 패턴의 원칙을 갖춘 새로운 세계 형태로 접근해야 될 것이 아니예요? 그때를 말하게 되면, 끝날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끝날은 어떠할 것이냐? 옥토가 된 거기에 순응할 수 있는 사람이 와야 합니다. 잃어버렸던 자식을 만나러 오는 그 부모가 지금까지의 모든 것을 다시 찾아서 다 보따리를 싸 가지고 올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거기에는 완전한 개인도 있을 것이요, 완전한 가정도 있을 것이요, 완전한 나라도 있을 것이요, 완전한 세계도 있을 것이요, 그뿐만 아니라 천상천하를 통일할 수 있는 충만한 사랑의 내용이 깃들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차지하게 될 때에는 그 누구보다도 그것을 몽땅 붙안고 어버이의 가슴에 품겨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자리는 '내가 뼈라면 너희는 살이다'고 뼈살이 하나될 수 있는 공감된 자리요, 희열의 눈물로써 하나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더냐.
그러면 끝날을 맞이하는 우리 성도들의 입장은 어떠해야 되느냐? '나는 그 사람이 그립다. 그 가정이 그립고, 그 나라가 그립고, 그 세계가 그립다' 이러면서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리고 '하나님이시여! 오시옵소서' 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어떠할 것이냐? 만일에 오시는 날에는 나는 이렇게 정성을 다할 것이다. 개인으로서 땅 위에서 하고 싶었던 모든 일을 내가 다 해봤지만 이것에 미칠 수 없겠기 때문에, 그 이상 할것이다. 한 남성으로서 한 여성을 맞이했으면 가정은 이런 가정을 만들 것이고, 나라는 이런 나라를 만들 것이다. 어버이 되신 하나님이 바라시는, 즉 원인이 바라는 세계를 만들 것이다. 그러나 주체의 염원대로 이루어질 것이 없으면 거기에 상대적인 형태라도 갖추겠다'고 준비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당신이 찾는 아들이 이렇지요? 당신이 찾는 가정이 이렇지요? 당신이 찾는 나라가 이렇지요? 당신이 찾는 세계가 이렇지 않습니까? 하면서 그것을 실현해 드려 가지고, 그것을 보시고 감동하실 수 있는 어버이를 맞고 싶다는 사람이 있게 될 때에, 하나님이 여기에 찾아와 가지고 몽땅 품고 사랑하실 수 있는 길이 생겨날 것이 아니냐. 이렇게 돼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심판을 받게 됩니다. 만일 하나님이 심판하시게 되면 반대하는 녀석이든 무엇이든 몽땅 잘라 버릴 거라구요. 안 그래요? 내가 하나님이라도 그럴 거라구요. '이놈의 자식들 같으니라구. 씨알머리도 없이 몽땅 잘라 버릴 거야. 그렇게 속을 썩이더니 찾아와 가지고 그 꼴이야? 이 녀석아! 네 이놈! 배은망덕한 놈!' 하며…. 그렇지만 '아버지, 그를 살려주소서. 나를 용서하셨으니, 불효하던 내 자신을 용서하셨거든, 나를 용서하시는 마음을 가지셨거든 나와 그와의 차이가 얼마나 있습니까? 그를 대신해 나를 쳐 주십시오' 이렇게 그 아버지의 손을 붙들고 울어 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아들이 있다면, 하나님이 사랑을 가지고 심판받을 사람도 용서해 주시고 싶은 그런 인연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망할 수밖에 없는 이 세상에서 살아갈 길은 그 길밖에 없는 것이 아니예요?
이와 같이 예수님도 십자가상에서 망할 수밖에 없는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와 연결된 세계를 바라보고 '당신이 나를 용서하시거든 내가 죽더라도 이들을 용서하시고, 나를 보내 주시려거든 처음에 온 이스라엘 나라에 다시 보내 주시옵소서' 이랬어요. 죽어 가면서도 원수를 위해서 복을 빌어 준 것이라고요. '나를 용서해 주신 하나님, 당신의 사랑이 있거든 나를 통하여서 그들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이런 진언의 이념이 오늘날 세계 구원의 길이 연장된 동기가 되지 않았어요? 그걸 알아야 돼요.
그러니 개인을 대표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고, 가정을 대표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고, 민족을 대표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고, 나라를 대표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고, 세계를 대표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사람이 열 사람 있더라도 안 되고, 한 사람을 통해야 됩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인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절대적인 하나님이 절대적인 한 개인을 통하여서 출발하셔야 할 것이 원칙이 아니예요? 그런데 인간 세상에는 그런 사람이 없기 때문에 다시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에 재림사상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와 가지고 심판의 공약을 제시하는 데에는 망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개인이 가정과 더불어 칭찬을 받고, 종족과 민족을 걸어 칭찬을 받고, 국가와 세계를 걸어 칭찬을 받고, 하늘땅을 대신하여 칭찬을 받고 나서거든, 하나님이 반대하는 무리를 치려고 할 때에 '나를 용서하시거든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할 수 있는, 어떤 국가를 대표한 하늘편의, 종교를 대표한 하늘편의, 세계를 대표한 하늘편의, 개인을 대표한 하늘편의 간증자와 변호하는 사람이 있어야만, 망할 수밖에 없는 개인이 살아날 것이고, 가정이 살아날 것이고, 나라가 살아날 것이고, 세계가 살아날 것이 아니예요. 오늘날 그럴 수 있는 종교가 있고, 그럴 수 있는 신앙을 가진 종교인들이 있느냐? 없습니다. 없으니 망하기 십상이라는 거예요.
이런 판국에 있어서 오늘날 이것을 보강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고 있는 곳이 소위 통일교회입니다. 무엇을 통하여 통일하자는 것이냐? 힘으로, 무력으로 통일하자는 것이 아니라 심정을 가지고 통일하자는 것입니다. 개인의 심정을 찾아 흐느껴 나오시는 아버지의 심정의 골수를 헤쳐 가지고 '당신이 만나고 싶었던 아들이요, 딸이 아닙니까? 회개한 아들이 아닙니까? 그 아들과 딸이 만나가지고 가정을 만들어서 당신만을 위하는 하나의 남편이 되고, 아내가 될 수 있는 가정이 아닙니까?' 하고, 여기에 철석같은 반석의 터전을 이어 가지고 '이것만이 하나님이 행차의 요인으로 삼을 수 있는 터전이 아닙니까? 틀림없습니다' 이래야 됩니다. 그런 가정이 필요한 것이 아니예요? 그러한 종족이 필요할 것이 아니예요?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는 색다른 결혼 방법을 취해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새로운 종족 편성입니다. 새로운 국가를 바라는 것이요, 새로운 세계를 바라는 것입니다. 영계의 해방을 제창해 나오는 거라구요. 이것이 통일사상이 가는 길입니다.
우주 종말시대에 있어서 우리는 모든 것을 교체해 버려야 됩니다. 제계의 주도권을 갖고 있던 미국으로서의 권위를 자랑하라' 이렇게 내가 미국에 가서 별의별 소리를 하며 미국을 들이쳤다구요. '미국은 망한다. 망하게 돼 있다. 망하지 않으려면 이렇게 하라' 그러한 세계적인 재각성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는 사명을 어디서 해야 되느냐? 오늘날 통일교회에서 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개인의 이익을 찾아가는 날에는 통일교회에도 끝날이 오는 거라구요. 그것이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것입니다. 민족주의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자기 민족을 초월해 가지고 세계 인류를 위해서 민족을 희생시킬 수 있는 통치가가 있거든, 그런 전통을 가진 통치가가 있다면 그는 세계를 지배할 것입니다. 대한민국에 나라가 없고 역사가 없다고 한하지 말라는 거예요. 만약 30세기에 가서 이 민족이 개척하고 이 백성을 주도했던 사상을 세계 인류가 받들 수 있는 때가 되면, 대한민국은 그때에 비로소 꽃필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섭리의 십자로에 선 우리는 나를 스스로 오른편으로 완전히 갈라내야 되겠습니다.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나라와 새로운 개인을 갈라내야 되겠습니다. 내 개인은 하늘을 위하여 나라를 위하여 서 있는 것입니다. 나라와 하늘이 내 개인을 위해서 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라는 세계를 대신해서 서 있는 거예요. 알겠어요? 그것을 알아야 된다구요. 물론 나라는 백성을 위해 있지만 백성만을 위해 섰다가는 망하는 거라구요. 그 나라는 세계를 위해서, 세계 정세의 첨단과 보조를 맞추어 가지고 백성을 위할 수 있는 길을 가야 됩니다. 나라는 세계를 위하여 있는 거예요. 세계를 위할 수 있는 데에서 백성을 위해야 그 백성이 세계를 이어받을 수 있는 백성이 되지, 세계를 집어 던지고 나라를 위하려다가는 세계는 남아지더라도 나라는 망하는 거라구요. 이것을 알아야 된다구요.
그렇기 때문에 개인주의 시대에서 가정주의 시대, 가정주의 시대에서 종족주의 시대, 민족주의 시대, 국가주의 시대를 거쳐 지금은 세계주의 시대입니다. 이렇게 거치면서 세계주의 시대도 지나고, 결국 나중에는 세계주의 가지고는 망하는 거라구요. 혼자로서는 안 되는 거라구요. 그러면 맨 나중 세계주의의 끝에는 무슨 시대가 오느냐 하면 하나님주의 시대입니다. 이렇게 귀결되어 돌아가는 거라구요.
그러면 통일교회주의는 무슨 주의냐? 하나님주의입니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하나님주의. 그 관을 통한 개인은 어디에 내놓아도 심정이 통합니다. 관념적인 하나님을 모시는 것이 아니라 생활적인 하나님을 모시자는 거예요. 통일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심정을 논한다는 거예요.
오늘날,'신학(神學)'하면, 신학은 신을 배우는 것입니다. 배워 가지고 아는 것으로는 심정을 모릅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알아야 돼요. 알아 가지고는 심정을 모른다구요. '통일교회 문선생이 저 사람이구먼. 눈은 어떻게 생기고, 코는 어떻게 생기고, 뭐가 어떻게 생기고, 내가 보니까 저렇게 생겼구나' 이렇게 봐 가지고 아는 것으로는 나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사람과 살아 봐야 합니다. 알겠어요?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살아 보면 그 가외의 것은 다 드러나는 거예요. 그렇지요?「예」 살아 봐야 돼요. 사는 데에는 맹목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잘살아야 돼요. 잘살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사랑을 걸고 살아야 됩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사랑으로 살아야 돼요. 사랑을 통해 체휼적인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슬퍼하실 때에 내가 슬픔을 느끼는 것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실 때에 자기도 모르게 기뻐지는 거라구요. 효자는 어떻게 하는 것이 효자냐? 천만리 떨어져 있다 하더라도 부모의 사랑은 언제나 그 효자의 곁에 있는 거예요. 알겠어요? 하나님의 편재성에 있어서, 하나님은 어디에 있느냐? 지식적인 내용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이라는 것, 개성진리체라는 것은 그것으로 원인 동기가 끝나가지고 그런 형태, 즉 또다시 제 2대상을 상대세계에서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극과 극을 넘어서 편재를 타당하게, 가능하게 하는 것이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 자식을 향한 부모의 마음이 아니예요? 그렇지요? 사랑을 통하는 그 길에 있어서 부모는 무소부재입니다. 어디나 있지 않은 데가 없다구요. 그것은 사랑만이 가능합니다. 사랑만이 그 아들을 완전히 지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전능한 권한은 거기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고, 알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과 같이 살자는 거예요. 하나님이 인간을 교육해 가지고 뭘하시고 싶었던 것이냐? 교육해 가지고 머리만 크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알려 줘 가지고, 가르침을 받았으면 행하라는 거예요. 같이 살라는 거예요. 살면서 뭘하자는 것이냐? 울자는 것이냐. 좋아하자는 것이냐? 좋아하자는 거예요. 좋아하려니 사랑하자는 거라구요. 우리는 이러한 자리를 향하여 나가고 있다는거예요.
그러면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편재성을 어떻게 느끼느냐? 공기를 하나님의 입김과 같이 느껴라, 태풍이 불어오거든 그것을 하나님의 콧김과 같이 느끼라는 거예요. 흐르는 물이 있거든 그것을 하나님이 이 세계를 위해서 수난길을 극복해 나오시면서 흘리신 땀과 같이 느끼라는 거예요. 태양을 바라보거든 그 태양이 이 우주 전체의 생명의 요인을 상징하였음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을 태양에서 배우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하는 데 있어서 하나의 교본이요 교재로 전개시킨 것, 사랑하는 아들딸을 기쁘게 하기 위한 교재로 새워 놓은 것이 자연이 아니예요. 그렇다는 거라구요. 나뭇잎을 보고 자기 아들딸같이 여기고 혼자 중얼거릴 수 있는 사람이 있거든 그는 성인에 가까운 거예요. 알겠어요? 미친 사람이 아니라구요.
행복이 어디에 있더냐? 지식에 있는 것이라면 그 지식을 찾아가라구요. 행복이 어디에 있더냐? 사랑에 있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믿음과 소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진대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다'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무한한 편재성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무한한 존속성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무한한 가능성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무한한 생명력이 거기에서 설정되는 것입니다. 큰 희망을 가지고 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시간적 거리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과정을 거쳐 나가기 위해서는, 그 과정이 보다 큰 차원에 있어서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날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시간을 따라가서 보다 전진적인 자극이 추구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 자극을 어디서 받느냐? 지식에서? 어림도 없다는 거라구요. 지식은 그것을 '그렇다'고 결론을 내면 다 끝나는 거라구요. 오직 사랑에서만이….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우주를 대표한 아들을 생각하라는 거예요. 밥을 먹더라도, 혼자 있더라도 하나님이 보이더냐? 안 보여요. 그것을 어떻게 실감하느냐? 이 우주의 만물은 하나님의 모든 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상징적으로 그려 놓은 거예요. 화폭과 마찬가지예요. 그것을 바라보고 취해 가지고 좋아하고…. 그렇지 않아요?
자기가 그린 작품을 중심삼아 가지고 밤이나 낮이나 취해 가지고 바라 보고 눈물을 흘리며 감탄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것을 그린 화가가 그걸 보고 기분 나빠하겠어요? '이 녀석이 울긴 왜 울어? 그래요? 그런 사람이 있으면 데리고 와서 안방에다 모시고 '왜 그랬소' 하면서, 사연을 얘기하게 할 것이 아니예요? '아이고 좋아, 아이고 그리워, 아이고 같이 있고 싶어' 한다고 해서 미쳤다고 하겠어요? 여러분이 하나님을 몰라도, 하나님이 만 우주에 꽉차 있는 편재성을 지식적인 주체로 계시는 것보다도 사랑으로 계시기 때문에 '내가 어떻게 사랑의 동감권을 각 분야에서, 민족을 넘고 세계를 통해서 체휼할 수 있느냐? 하는 자리에서 하나님은 재인식되는 거라구요. 재발견되는 거라구요.
이래서, 하나님의 사랑에 입각한 자리에 내가 서 있다 하는 신념을 갖고 나올 때, 그 사랑은 개인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주체적인 사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에게 주고 나서 '야, 너에게 줬다' 이렇게 머리에 기억해 가지고 '이만큼 주었으니…' 이런 장삿속 사랑이 아닙니다. '내가 백만큼 줬으니 너는 나에게 백 하나만큼 줘야 한다' 이렇게 바라고 주는 것이 아닙니다. 주면서 부끄러워하는 거라구요. 주고 나서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부모는 사랑하는 자식에게 아무리 좋은 옷을 해주었더라도 '이 땅에 수많은 왕자, 왕녀들이 왔다 갔던 것이 아니냐? 내 아들이 그 왕자들보다 못하더냐? 내 딸이 그 왕녀들보다 못하더냐? 이러면서 그 이상 사랑하고 싶은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자리에서 해준 옷을 생각하게 될 때에, 세계의 그 누구보다도, 세계의 어떠한 아들보다도 더 사랑하고 싶은 부모의 마음은 더 좋은 옷을 해주기 위해서 눈물이 앞선 자리에 있기 때문에, 그런 부모에게는 아들이 아무리 파고들어가도 끝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 비로소 취하는 사랑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끝이 있으면 취하지 않는 거라구요. 한 바퀴를 돌면 취해지지 않습니다. 몇바퀴를 돌아갈 때에 중심을 잃어버리며 취해지는 거라구요. 취하는 사랑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고 잊어버릴 수 있는 사랑, 즉 주고서 내가 주었다고 수첩에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주고 나서 받겠다는 마음이 아니라 주고 나서 상대가 감사하는 데 있어서 받지 않아도 받은 것보다 더 좋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주는 사람도 미안해하고, 받는 사람도 미안해하게 될 때, 그 사랑만은 영원히 남는 것입니다. '아이고, 내 기분이다' 해 놓고, 그 다음에는 '없어' 이러면 안 됩니다. 둘이 주고받고 나서도 그 사랑은 없어지지 않아야 돼요. 이런 이상적인 부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내가 남편을 사랑하고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고 나서 '아, 당신이 나보다 더 사랑해 주시오' 한다면, 그것은 파괴될 수 있는 사랑이라구요. 사랑하고도 '내가 아직도 부족합니다. 내가 아직까지 미급합니다' 이렇게 사랑한 것이 한 터전이 되어 가지고, 그것이 장본이 되어 가지고 거기에서 알곡이 거둬질 수 있는, 밑천이 남아질 수 있는 사랑을 해야 됩니다. 그래야 이상적인 가정이 되어 나라를 찾고 다 찾게 되는 거예요. 알겠어요? 「예」
지금은 어떤 때냐? 끝날입니다. 그런데 이 패턴의 개인, 가정, 종족, 민족, 국가가 역사시대 어느때에 대표해서 나타난 적이 있었느냐?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배반한 인간 앞에 있어서, 지금까지 인간역사는 무엇을 해 나왔느냐? 완전한 남성 하나를 찾아 나왔습니다. 그러나 찾지 못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돼요. 종교가 나와 가지고 무엇을 했느냐? 하나님이 패턴으로 그리던 이상형의 하나의 남자를 다시 찾으려고 했습니다. 그 표준을 따라 가지고 그 표준 앞에 일체되는 대상의 실체를 그려 보기 위해서 수많은 종교의 교주들이 노력했지만, 그것은 아직까지 형성되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재림사상이 있는 것입니다. 남자 하나를 못 찾았다구요.
그러므로 남자를 못 찾은 권내에서는 부처(夫妻)가 성립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독신생활을 하라고 한 거예요. 참된 개인이 없으니 나라가 필요 없는 것입니다. 참된 나라는 참된 개인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입니다. 가정도 필요 없는 것입니다. 참된 남자로부터, 참된 여자로부터…. 먼저 있어야 할 것이 참된 남자와 참된 여자가 아니예요? 역사시대에 아직까지 참된 남자와 참된 여자의 패턴을 못 찾아 놓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고맙게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독생자라는 이름을 갖고 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 순수한 전통을 이어받아 가지고 거기에 상충적인 내용을 지닌 아들이 아니라 본질적인 사랑에 화할 수 있는 역사시대의 하나의 남성적 대표자로, 신랑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신부를 맞이함으로써 비로소 인간세계 앞에 남자 여자가 하나님이 이상하는 패턴을 중심삼고 상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가 바라는 재림사상입니다.
이 가정이 벌어지기 전에는 아무리 세계에 가정이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안중에는 없는 것입니다. 패턴을 찾으라는 거예요. 그런 가정에서의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도리가 오늘날 인륜도덕의 원칙이 될 것이 아니냐. 부모, 부부, 자녀의 인연, 하나님이 그리는, 오늘날 통일교회에서 말하는 사위기대 원칙에 입각한 이상적인 본연의 형태의 기준을 어떻게 결정짓느냐 하는 것입니다. 세계를 걸어 놓고 통일, 평화를 꿈꾸는 데에는 이런 기본 문제가 남아 있으니, 이것을 결정짓지 않고는 통일세계는 올 수 없는 것입니다. 기본 문제에 있어서의 개인적 남성 패턴과 여성 패턴을 중심삼고 가정적 패턴을 형성하는 데서부터 통일의 세계는 이루어진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그럴 수 있는 때가 언제든지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패턴을 중심삼고 볼 때, 예수는 그러한 개인적 패턴, 가정적 패턴을 이룰 수 있는 대표자로 오신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중심삼고 '그대가 이루고 싶었던 가정을 이루어 보소서' 하던 이상적인 패턴을 이루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못 이루었던 것이 아니예요? 왜 그러냐? 옥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가정적 패턴뿐만 아니라 종족적 패턴을 이루었을 것이 아니예요? 예수님에게는 섭리에 입각한 패턴이 있었을 것이고, 거기에서 민족적 패턴이 나왔을 것이고, 국가적 패턴이 나왔을 것이고, 그 국가를 중심삼고 세계적 패턴이 형성되었을 것입니다. 그랬더라면 이 역사시대에는 그 패턴 형태의 규격을 따라 가지고 새로운 민족, 새로운 세계가 형성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못 이루었기 때문에, 재차 그러한 패턴을 이루어야 하기 때문에 하나의 남성(예수님)을 대신해서 다시 세계에 찾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이때가 끝날입니다.
이것이 역사 이래 예수님 때에 이루었어야 할 것인데, 다시 이때에 와 가지고 개인과 가정과 종족과 민족과 국가와 세계가 그 패턴으로 평면적인 무대에서 다 연결된다면, 개인에서 가정, 가정에서 종족, 종족에서 민족, 민족에서 국가, 국가에서 세계까지 한꺼번에 그 패턴을 통과해 넘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때가 끝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때에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섭리상에 있어서 개인적 십자로를 통과해서 가정적 십자로를 통과해야 됩니다. 혹은 종족적, 민족적, 국가적 십자로를 통과해야 됩니다. 또 세계적 십자로를 통과해야 됩니다. 통과하는 데에는 여러분 자신 가지고는 안 됩니다. 안 된다는 거예요. 패턴을 따라 가지고 거기에 일치될 수 있는 데서만이…. 이것이 한꺼번에, 개인을 넘고 나면 가정이 기다리고, 가정을 넘고 나면 종족이 기다리고…. 이런 때가 오기 때문에, 악한 세계의 인륜도덕 형태를 그냥 둬서는 안 되겠기 때문에 다 쪼개 놓은 것입니다. 나라 나라도 조각조각이 나고, 종족 종족끼리 싸움이 벌어지고, 가정 가정끼리 싸움이 벌어지고, 남편은 아내를 못 믿고 아내는 남편을 못 믿고, 자식은 부모를 못 믿고 이렇게 전부 다 깨져 나가 가지고 서로 삿대질하는 때가 끝날입니다.
자, 이것이 나쁜 징조 같지만, 여기에 모색 발안이 있으면, 좋을 수 있는 하나의 방안만 있으면 새로이 재편성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이 가능한 무대를 형성한 것이 오늘날 혼란된 끝날입니다. 따라서 끝날이 되면 될수록 혼란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자식이 부모를 몰라보고 부모가 자식을 몰라보고, 남편이 아내를 몰라보고 아내가 남편을 몰라보고, 제자가 스승을 몰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나라와 백성이 다 갈래갈래 갈라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서도 다 포기한 것이 아니라고요. 그러면서도 '아이고, 세계가 하나될 수 있는 것이 없는데…' 이렇게 되거든 하나님이 난데없는 데에서 새로운 운동을 벌이게 해 가지고 그러한 목적을 대행시킬 수 있는 놀음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사랑의 하나님이지, 아무것도 준비 없이 깨뜨려 놓기만 하면 하나님은 망령된 하나님이라구요. 세상을 사랑했다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통일교회는 개인적 십자로를 올바로 넘어가고, 가정적 십자로, 종족적 십자로, 민족적 십자로, 국가적 십자로, 세계적 십자로를 통과해야 되겠습니다. 아까 말한 것과 마찬가지로 승리적 십자로를 거쳐 가지고, 한편이 원수의 나라라면 그것을 때려부수는, 심판해 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저희를 긍휼히 보시거든 저들도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해야 됩니다. 그래야 가인 아벨의 싸움의 역사는 통일 기준이 형성됨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통일의 귀일점에 돌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가인과 아벨이 싸워 가지고 피흘린 역사인데, 피 흘리지 않고는 못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그러한 개인이 필요하고, 그러한 가정, 그러한 종족, 나라, 세계가 필요합니다. 그러한 세계가 없기 때문에, 그것을 찾자고 하는 것이 통일사상입니다. 아시겠어요? 우리는 개인의 십자로에 서 있지만 국가의 십자로에 서 있고, 국가의 십자로에 서 있을 뿐만 아니라 세계의 십자로에 서 있으며, 세계의 십자로에 서 있을 뿐만 아니라 천지의, 영계와 육계의 십자로에 서서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대신적인, 원인 앞에 있어서 원인이 추구하는 결과적인 실체를 이루기 위해서, 보다 전체의 가치를 대신할 수 있는 중심의 자리를 결정하기 위해서 가고 있는 무리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이 길을 가고 나면 하나님은 여러분의 아버지가 되는 것이요, 세계가 아버지의 것이기 때문에 세계 또한 여러분의 것이 되는 것이요, 하나님의 가정과 하나님의 나라는 여러분의 가정과 여러분의 나라이기 때문에 아무리 못난 여러분이지만 만군의 여호와요 만왕의 왕이신 그분의 아들 딸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늘나라에 기억될 수 있는 공주가 될 수 있는 것이요 왕자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예요? 그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첫째부활입니다.
우리는 십자로를 어떻게 넘느냐? 자기 아내를 붙들고 자기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아내를 붙들었으면 나라를 생각해야 되고, 나라를 붙들었으면 세계를 생각해야 되며, 세계를 붙들었으면 하늘땅을 생각해야 됩니다. 이것을 단계적으로, 정상적으로 거침없는 행로를 거치고 나서게 되면 모든 원수들이 기다리는 십자로는 사라져 버리고, 평탄한 대로로 들어가 해방의 자유화가 형성되게 되고, 천지에 평화의 왕국, 하나님이 바라시는 이상세계는 실현될 것입니다.
이런 것을 여러분이 알고, 거기에 매진하여 그 일로를 따라 복종해 나가는 것이 우리의 갈 길이라는 것을 단단히 알아야 되겠어요? 아시겠지요?「예」
오늘 이 자리에까지 죽지 않고 남아져 1972년 7월을 맞았습니다.
다 잃어버리고 고독한 자리에서 다시 찾으시기 위해 나선 아버지는 불쌍하신 아버지이옵니다. 성경에 보면 이 세상의 임금이 사탄이라고 하였습니다. 있을 수 없는 말을 듣고도, 저희는 자책하지 못했고, 충격을 받지 못했습니다. 저희 앞에는 개인의 성벽이 가로막혀 있고, 그 개인을 넘고 나면 또 가정이 성벽이 되어 있는 것이요, 가정을 넘고 나면 씨족이 성벽이 되어 있는 것이요, 씨족을 넘고 나면 민족이 성벽이 되어 있는 것이요, 민족을 넘고 나면 국가가 성벽이 되어 있는 것이요, 국가를 넘고 나면 세계가 성벽이 되어 있는, 그런 포위망 속에 서 있는 자신들임을 몰랐습니다.
아버지, 이 엄청난 역사적인 구속의 자리를 그 누가 해방시켜 주겠습니까? 오직 당신만이 이 일을 책임져 주신 것을 감사하옵니다, 지루한 인류역사의 배후를 더듬으면서 낙후한 인간들을 수습하시어 종교의 문을 개방하시기에 얼마나 애쓰셨습니까? 아버지여, 오늘날 그것의 결과를 추구하는 이 종말시대에 있어서, 통일교단은 이 땅 위에 나타난 그날부터 찬서리 모진 비바람에 부딪혔지만 가냘픈 생명을 깊은 뿌리에 지녀 놓고 죽지 않고 남아졌사옵니다. 통일의 무리를, 아버지, 키워 오시기에 얼마나 수고하셨습니까?
이것을 볼 때, 통일교회를 대하시는 아버지는 불쌍한 아버지이신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외로우신 아버지이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눈물이 넘쳐 있는 아버지인 것을 저는 알았습니다. 이 길을 책임지고 나오는 자, 몰림받으면서 이 길을 개척해 나오는 자가 외로운 자이기 때문에, 그 외로운 자의 뒤를 따르는 사람도 외로운 자이옵니다. 이 외로운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 복귀의 운명길이기 때문에, 부모가 그렇기 때문에 자식도 그렇고 그런 것이요, 끝까지 그러한 운명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오늘날 통일노정에 있어서의 섭리길인 것을 아는 이 불쌍한 무리를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오늘날 저희들은 자신을 생각하기에 급급하였습니다. 자기가 있어야만 세계가 있는 줄 알았고, 자기가 아니면 안 될 줄 알았지만, 아니올시다. 당신이 있어야만 세계가 있는 것이요, 당신이 있어야만 내가 있게 되는 것을 저희는 알았습니다. 당신을 위하는 길에 있어서 아직까지 힘을 다하지 못한 자리에 있기 때문에, 미급한 자신을 발견하기에 급급한 자리에 서 있는 것이 통일교회의 무리이옵니다. 금후에 이들의 갈길을 아버지 앞에 맡기오니 맡으시옵소서.
외로운 때에 낙망할 때에 주저하고 지쳐 배반길을 찾아 나서는 무리가 있습니까? 아버지여, 그들을 지켜 주시옵소서. 여기에 서 있는 자식이 이 길을 오면서 외로울 때에, 지도해 주시던 아버지의 음성을 제가 들었고, 당신의 간곡한 사연을 제가 알았기 때문에 오늘까지 싸워 왔습니다.
이제 금후에 이 나라가 혼란된 와중을 거쳐서 선의의 싸움에서 승리를 다짐하여야 할 때가 이 민족의 운명으로 남아 있사옵니다. 그런 때에 통일교회는 아버지를 붙들고 늘어질 수밖에 없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가 기도했듯이 세계에 널려 있는 통일교회 교단에서 '제 뜻대로 마시옵고, 저희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할 수 있는 무리가 많다는 것을 생각하오니, 감사하옵니다.
아버지, 당신을 위하여 있는 통일교회가 돼야 되겠습니다. 이 나라 이 민족만을 위해서 있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 누구, 지도자를 위한 단체도 아니옵니다. 여기에는 오직 당신만이 계셔야만 되겠습니다. 당신의 눈물이 흘려진 것은 세계를 찾으시기 위한 것임을 알았기 때문에, 저희는 그 눈물의 뿌리와 같고, 그 진액과 같이 눈물을 흘리는 무리가 되지 않으면 안 되겠사옵니다. 말로만 불쌍하신 아버님이 아니오라 사실 불쌍하신 아버님임을 알았습니다. 말로만이 아니라 살아서 싸우고 현실에서 생활무대를 개척하시는 아버지가 비참하시기에, 저희들은 그 비참한 길을 아니 갈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부모 앞에 효하려는 자식이 있거든, 부모가 굶을 때 자식도 굶어야 되고, 부모가 눈물지을 때 자식도 눈물지어야 되는 것이 천도인 것을 저희는 아옵니다. 아버지가 눈물지을 때 저희도 눈물지어야 되겠고, 아버지가 한숨 짓는 수난길을 극복하셨거든 저희도 그것을 참고 극복해야만 되겠습니다.
모진 비난 비소를 받으시고 참아 나오신 아버지의 전통길을 바라볼 때에, 입이 있어도 말할 줄 모르는 통일교회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주먹을 가지고 싸울 수 있는 힘이 있어도 싸우지 못하는 통일교회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그것은 아버지를 사랑하고 아버지의 전통을 존중하기 때문이옵니다. 통일교회를 대해 망하라는 무리가 많았지만 망하지 않은 것은 기적이 아니라 당신이 그렇게 싸웠기 때문이옵니다.
당신은 맞고 빼앗아 나오는 작전을 해 나오시는 것을 저희는 알고 있습니다. 악은 치고 빼앗겼지만 당신은 맞고 빼앗아 나오는 선의 작전을 하셨기 때문에, 통일교회는 맞고 빼앗아 나오는 전통을 이어받았고, 맞는 자리에서 망하는 것이 아니라 발전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 무리이옵니다. 끝까지 참아, 최후의 승리를 다짐할 수 있는 자리에 아버님과 사탄과 인간, 이 셋이 연하여 십자로가 형성될 때에 사탄을 분립시키고 하늘편이 되어 가지고 사탄까지도 해방시키겠다는 통일교회의 무리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오늘 이 아침에 '섭리의 십자로'라는 제목으로 말했습니다. 내 말 한마디가 그런 자리에 서 있는 것이요, 내 하나의 눈총이 그런 자리에 서 있는 것이요, 내 하나의 손길이 그러한 자리에 서 있는 것이요, 내 하나의 행동이 그런 자리에 서 있는 것을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예수가 그려 가던 가정과 나라와 세계를 전통으로 이어받아 가지고, 그것을 실천 성사하기 위하여, 승리적 세계관을 앞에 놓고 저희들이 용진하기를 다짐하는 이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니다.
오늘이 복되고, 이달과 이해가 복되게 하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1970년대가 당신의 승리의 권한을 작정할 수 있는 때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재삼 부탁하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님의 이름으로써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사랑하는 아버님, 7월도 벌써 절반을 보내고, 남은 절반을 새로이 맞는 세번째 안식일이옵니다. 이 아침에 당신이 사랑과 자비로 같이하시옵고, 당신이 안위와 권위와 은사로 같이하시옵소서. 땅 위에 살고 있는 수많은 백성들을 당신의 자녀로 책정하시사 당신의 승리의 나라를 건국하시고, 당신의 영원한 승리의 권한을 세우시어 온 천지를 통치 하시기를 바라나이다.
아버님, 이 아침에도 어린 자녀들이 당신의 무릎 앞에 또다시 모였사옵니다. 어리면 어릴수록 당신을 신뢰하고, 당신의 모든 환경을 살피고, 당신이 가는 길을 따라가고자 하는 마음뿐이옵니다. 저희에게 있는 모든 것은 당신에게서 받은 것이요, 저희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 역시 당신의 것을 이어받은 것밖에 되지 않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계심으로 말미암아 저희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이요, 당신이 목적하는 것을 따라 감으로 말미암아 저희의 가치적 내용이 결정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주체 되시는 분이기 때문에 저희는 대상의 가치를 추구하면서, 당신이 머물 수 있는 안식의 곳을 향하여 가야 되는데 돌아가기를 원하지 않는 몸들이기에 투쟁하고 또 투쟁하기를 바라는 저희들이오니, 아버지여, 인도하시옵소서. 저희 앞에 인도자가 없게 될 때에는, 사망의 세계에서 출발하였기 때문에 사망의 귀결점에 봉착하는 것이 자연적 이치임을 알고 있습니다.
아버님이여, 저희는 악에서 출발한 입장이기 때문에 당신의 지도와 당신의 보호와 당신의 직접적인 가호가 없어 가지고는 악의 환경을 밟고 넘어설 수 없고, 이 길을 타개하여 승리의 자리까지 도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아버지를 추구하오니, 당신이 현현하시어 저희가 갈길을 지시하여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을 당신 앞에 하나로 묶어 바치는 이 시간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전국에 널려 있는 통일의 자녀들이 해야 할 이 시대적인 특별한 사명을 절감하면서 기도하는 이 기간, 아버지, 외면하지 마시옵소서. 당신의 은사와 더불어 자고 깨며, 당신의 보호 아래서 저희 자신을 봉헌해 드릴수 있는, 당신의 소원 앞에 제물의 실체로 나타날 수 있는 어린 모습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하늘을 부여안고 자신의 욕망을 달성하기 위해서 몸부림치기보다도 나라의 운명과 세계의 운명을 부여 안고 불철주야 호소하는 정성된 무리가 있거들랑, 아버님이여, 버리지 마시옵소서. 그들이 산야의 어떠한 곳에 있을지라도 당신이 찾아가시어서, 그들을 보호하고 권고하시고, 새시대의 사명을 절감할 수 있는 무리들이 되게 하시어 하늘나라를 건국하는 데 필요한 당신의 자녀들로 삼아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 세계에 널려 있는 통일의 무리는 이 세계 앞에 새로운 선포를 하고 나선 무리들이옵니다. 이들은 비록 수는 적다 하나 당신의 내정적 심정을 대신하여 땅 위에 현현한 행렬이기에, 당신이 밤이나 낮이나 그들과 함께 계시지 않으면 뜻의 방향이 빗나가 그날을 맞지 못한다는 것을 생각할 때, 이들이 가는 길을 아버지께서 소망을 갖고 바라보시는 반면, 이들이 가는 노정에 아버지의 사랑과 권위를 나타내시어 시대적인 사명을 절감하는 당신의 자녀들로서 부끄러움이 없는 걸음을 걸을 수 있게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인도해 주시옵소서.
오직 하늘만을 받들고, 오직 하늘이 남기신 뜻만을 사랑하면서 1972년 후반기 6개월을 힘차게 달림으로써 살아 계신 아버지가 현현하고, 현재를 운행하시는 아버지의 행차가 만민 앞에 현현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국경를 넘고 민족의 감정을 넘어, 문화와 전통 혹은 세속적인 배경을 초월하여 새로운 문화 창건을 위한 기수로서 이미 행군을 시작하였사옵니다. 이들이 머물 수 있는 종착점이 어디냐고 묻게 될 때 세계를 구하는 것이요, 세계를 구함과 동시에 당신과 상봉하는 것이요, 당신을 만남과 동시에 당신의 안위의 한날을 맞아 효의 도리, 충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라고…. 이것이 이들이 가는 종차점이요, 목적인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충효의 도리라는 것은 자기를 찾고 자기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보다 존귀한 부모 앞에, 하늘 앞에 자기를 잃어버리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이 옵니다. 자기의 생활 감정은 자기로 말미암아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시작되는 것임을 생각하게 되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무리의 대열에 참석한 터전이 자기로 말미암아 되어진 것이 아니라 위로 말미암아 되어졌다는 것을 확실히 아는 무리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세계에 널려 있는 기동대원들에게 아버지께서 명령하셨사오니, 하늘의 권위로 그들의 갈 길을 살피시옵고 보호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당신께서 세우셨사오니 당신께서 지도하시고 키우시어서 당신의 나라에서 덕망지자(德望之者)로서의 사명을 할 수 있게끔, 완전하고도 늠름하게 자랄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날이 감에 따라 가지가 뻗고, 잎이 나고, 꽃이 피어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그날이 만국을 통하여 이루어질 수 있는 인연을 펴시옵기를 재삼 바라옵니다. 그들이 마음을 모아 하늘을 그리워하고, 아시아의 일각에 있는 한국 땅, 서울, 이 본부를 그리워하면서 눈물짓고, 혹은 거리에서 애절한 하늘의 심정을 가지고 속죄의 길을 다짐하면서, 아버지, 호소하고 절규하는 그들의 모습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뭇사람 앞에서 비난의 대상, 혹은 조롱의 대상이 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당신의 뜻이 크기에, 당신께서 하셔야 할 의무와 사명이 남아 있기에, 그 뜻과 사명에 동참해야 할 아들딸로서 태어났기에, 그 일을 감당하는 길 위에 있사오니 부디 당신이 버리지 마지옵소서, 제가 그러했을 때에 당신이 지켜 주시던 것을 생각하면서, 이들도 그러한 자리에 세운 것은, 아버지, 하늘로 말미암은 것이옵니다. 하늘에 의해 시작하였거든 결과도 하늘에 의해 되어져야 한다고 생각되옵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늘을 중심삼고 살수 없는 것이요, 하늘을 믿고 승리의 생활을 거쳐갈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옵니다.
아버지여, 살아 계신 아버지의 모습을 드러내고 지나가는 날들 가운데 아버지의 깊은 심정의 인연을 묶으시어서 당신이 소망하는 영광의 때를 단장할 수 있는 무리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이제 한국의 동산을 당신께서 맡으시옵소서. 사람의 힘으로써는 그 무엇도 할 수 없는 것을 압니다. 전능의 아버지요, 창조의 능력을 지니신 아버지요, 생사의 기연을 주관하시는 아버지요, 운명을 결정지으시는 아버지이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아버지의 뜻 앞에 맡기고 아버지의 소원 앞에 일치될 수 있게 하시옵소서. 이 민족이 금후에 가야 할 길을 가려 주시옵소서.
남북으로 분단시켜 놓고 있는 원한의 삼팔선을 헤쳐 버리고, 생명의 인연을 따라, 사랑의 인연을 따라 인생의 가치를 추구하면서 하늘이 남기신 길을 거두어 드릴 수 있는 민족적인 사명이 남북한의 이 동포를 통하여 이루어지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당신의 뜻 앞에 일치되지 못하는 무리들이 있으면, 그들을 제거하시고 막으시옵소서. 원하시는 뜻 앞에 원치 않는 무리, 굴복시켜야 할 가인의 무리가 있는 것을 아옵니다. 이들을 굴복시키는 데는 하늘이 직접 채찍을 들어 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통하여 그들을 감동시킬 수 있도록 정성을 다하고 난 후에, 그들이 그 정성을 받아들이지 않게 될 때에야 심판해 나온 역사적인 분별노정을 아는 저희들이옵니다. 엄숙한 제물의 사명을 다 해야 한다고 전국에 있는 통일교회 무리 앞에 통고하고 있사오니, 아버지. 무릎을 꿇고 아버지의 심정을 안고 밤을 지새워 흐느끼며 옷자락을 적시는 무리가 있으면, 아버지, 같이해 주시옵소서.
망하지 않는 하늘을 믿고 하늘을 위하는 자리에 섰기 때문에 망할 수 없는 모습이요, 이러한 모습을 영원히 지탱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당신의 은사밖에 없다는 것을 아오니, 당신이 품에 품으시어 보호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저희들이 하고 있는 모든 일을 지키시어 기쁘게 이루어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이 아침에 소수의 무리가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이들이 무심코 나온 무리가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나는 어디로 가고 나는 어디에 있으며, 나는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가를 명심하여 당신에게로 돌아가는 복귀의 한스러운 길에 서 있는 것을, 저희들은 망각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당신의 심정과 당신의 생활과 당신의 이념과 일치되어, 싸움노정에서 지쳐서는 안 될 것을 잘 아는 무리들이 되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니다.
오늘은 거룩한 날이오니 당신의 이름 아래 모이는 남한 각지의 무리들과 세계에 널려 있는 무리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종교의 이름을 가지고 하늘을 그리워하는 수많은 만민들 위에 당신의 지극한 사랑과 은사의 손길이 떠나지 마시옵길 재삼 부탁드립니다. 남은 시간들도 기쁨으로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 참부모의 성호 받들어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사람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데는 자기 혼자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나'라는 자신을 볼 때, 자기 하나만 가지고는 안 되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내가 한 자리에 서기 위해서는 전후좌우의 사방이 있어야 되고 상호관계가 연결되는 자리를 갖추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나'의 위치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또, 그 결정된 위치에서 자신이 어디로 가느냐 하는 방향을 갖추게 될 때, 그 사람이 어떠한 사람이라는 것이 구별되어지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이냐 나쁜 사람이냐 하는 것이 무엇에서 결정되느냐 하면, 그 사람이 처해 있는 위치에서 방향을 가려 나가는 데서, 다시 말해 직장이라든가 혹은 사회의 어떠한 부류에 속하여 무엇을 하느냐에 의해 결정되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 개인이 그러한 입장에 서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우연히 그렇게 선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어떠한 기정적인 운명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자리에 설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상하관계를 두고 보면, 부모가 있고 앞으로는 후손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역사적으로 보면 과거가 있고, 현재가 있고, 다음에 미래로 통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자기를 중심삼고 보게 되면 좌우와 통하고, 전후와 통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개인은 상하 전후 좌우의 관계에 의해 존속하고, 위치를 결정해 가지고 방향을 취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 관계라는 것은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관계가 맺어지기 전에 반드시 인연이 있어야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길을 가는 도중에 난데없이 한 사람을 만난 것이 인연이 되어 그 인연에 따라 일생에 없어서는 안 될, 승패를 결할 수 있는 중대한 결과를 가져 오는 것을 우리는 느끼고 혹은 볼 수 있습니다. 우연이라는 것은 없다 이겁니다. 우연 같지만 역사시대를 거쳐온 인생일진대, 그 인생의 배후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지만 그런 인연이 엮어져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그 만난 당사자들은 한 시대권내에 있지만 그들이 만나기 전까지의 배후라는 것은 역사성을 띠고 있는 것입니다. 그 역사과정에는 개인이 동참할 수 있는 것이요, 혹은 가정, 종족, 민족, 국가, 대한민국이면 대한민국 전체가 가담되어 들어가는 것입니다.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한 나라를 지나 이방, 더 나아가 전세계가 그 권내에 가담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을 중심삼아 가지고 빚어진 이 세계뿐만이 아니라 하늘이 있다면 하늘까지도 그 배후에는 반드시 인연이 개재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두 사람이 만난 것이 순간적인, 일시적인 기준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생각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 남성과 한 여성이 부부를 이루게 된다고 할 때, 그 부부를 이루게된 것이 20대면 20대, 30대면 30대의 평면적인 생을 지닌 사람들로서 만나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종횡, 혹은 전후 좌우를 중심삼은 방대한 인연의 운명길이 연결되어 가지고 어느 한 시점에서 상봉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게 될 때, 결혼이라는 문제는 역사적인 사건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두 사람이 살아가는 것은, 두 사람만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삶을 대신해 가지고 살아 간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있어 가지고, 거기에 하나님의 인연이 가담되어 있다고 한다면 그들은 역사적인 부부일 뿐만 아니라 천륜을 대변할 수 있는 부부로서 인연이 맺어져 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평면적으로 보면 개인과 가정과 종족과 민족과 국가와 세계를 연결시킬 수 있는 인연이 연결돼 있고, 종적인 면으로 보게 된다면 천륜이 가담돼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인생 행로를 거쳐 나가는 과정에서 나타난 생활감정이나 그 모든 것이 그 사람들만의 생활로서 종결되는 것이라고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적인 원인을 통해서 인연된 것으로, 그 귀결점을 바라고 그들을 끌고 나가기 때문에 미쳐지는 결과라는 것은 그 개인들로서 한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역사적인 내용이 내포된 생활을 해 나간다고 우리는 봐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 하나 잘돼 가지고는 좋아할 수 있는 입장이 못 되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남자면 남자 한 사람만 기뻐 가지고 가정이 평화로울 수 없고, 여자면 여자 한 사람만 기뻐 가지고 가정이 행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두 사람이 행복하다고 해서 그 가정이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현재의 이 시점이라는 것은 인연을 통한 관계에 의해서 되어진 결과이기 때문에, 그 결과는 보다 가치적인 인연을 추구하기 위해 있는 것이요, 그 결과를 통하여 보다 가치적인 관계를 입체적인 면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있기 때문에 그들의 행복은 그들만을 위한 행복이 아닌 것입니다. 그들의 행복은 과거의 불행을 채우기 위한 행복도 될 수 있는 것이요, 과거에 행복한 때가 있었다면 그 기준을 넘어 보다 더 나을 수 있는 자리에 서기 위해 있는 행복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과거에 행복하였던 것은 인연을 통하여 높고 낮은 길을 거쳐가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존재형태는 직선이 없습니다. 이것은 상하고저,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 발전해 나가기 때문에 높았던 것은 낮아지는 것이요, 낮았던 것은 높아지는 것입니다.
운명길이 이와 같이 엇갈리고 교차되면서 발전해 나가는 역사인 것을 우리가 보게 될 때, 여러분의 생활이라는 것은 매일 매일 달라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기분도 아침 저녁으로 달라집니다. 아침에는 기분이 좋았지만 저녁에는 무엇인지 모르게 기분이 나쁘다! 혹은, 봄절기에는 운이 좋았지만, 여름절기엔 운이 나쁘다! 혹은, 작년에는 운이 좋았지만 금년에는 운이 나쁘다! 혹은, 청년시대에는 운이 좋았지만 노년시대에는 운이 나쁘다! 이렇게 엇갈리는 모든 것이 우리들이 원해서 그런 결과가 되어졌느냐 하면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어느누구나 영원한 행복을 추구하고 바라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행복은 계속되지 않는 것입니다. 행복하기를 절절히 바라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불행이 닥쳐오는 것은 어떤 원인 때문이냐? 현실적인 무대가 어떤 인연의 박자에 맞추어 전개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실을 생각할 때 우리는 운명만을 탓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인연에 따라 가지고 관계가 설정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관계는 반드시 나빠지느냐, 아니면 좋아지느냐 하는 결론이 벌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좋을 수 있는 관계가 되느냐, 내가 슬플 수 있는 관계가 되느냐? 내가 자랑할 수 있는 관계가 되느냐, 나에게 부끄러운 관계가 되느냐? 관계를 통하여 반드시 결과가 나타나는데, 그 관계라는 것이 자기가 주동이 되어 있는 것 같지만 자기만의 주동으로 이뤄진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반드시 역사시대의 어떠한 인연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시작하는 데 주동적 인연이 있었으면 과정에도 주동적 인연이 연결되어 그것이 어느때에 가서는 주동적 결과로 인연맺혀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 결과가 좋은 것으로 나타나느냐, 나쁜 것으로 나타나느냐 하는 것은 자기 일대(-代)로 말미암아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선대(先代)로부터 조상들이 쌓아 나온 공적의 인연으로 말미암아 좌우된다는 것을 우리는 여기에서 생각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조상들이 만약 선한 터전을 세웠다면….
그렇다면 선은 어떤 것이냐? 선이라는 것은 자기를 위하는 데서는 성립될 수 없는 것입니다. 상대를 위하는 데에서 성립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하는 데에서 선이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위하는 데에서 선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하루하루 천지만물을 지어 놓고, 그 만물을 대해 '보기에 좋은지라, 선한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보기에 선한 지라' 한 그 선의 출발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느냐? 내가 혼자 있으니 선하다는 그런 말이 아닙니다. 상대적인 피조물을 만들어 놓고, 그 피조 물을 바라보며 그것을 위하는 그 마음의 자세, 피조물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는 자리에서 선하다는 역사적 전통이 세워진 것입니다. 역사적으로볼 때 선의 기원은 자기를 위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위하는 데서 설정되는 것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이다 할 때, 그 좋은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자기를 위해 가지고 환경을 소화시키기 위해서 움직인 사람이 아니라, 자기가 소화되어 가지고 환경을 움직인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선한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불교 믿는 사람들은 적선을 많이 말하고 자비를 말하고 있습니다. 즉, 선을 쌓으라는 말을 하는데 그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남을 위해서 공을 세우는 데서 선이 쌓아진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선이 쌓여져 완전히 다 이루어지게 될 때 그 선은 상대의 것도 아니요, 주체의 것도 아닌 자리에 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부부가 완전히 하나가 되어 부부일심을 이루게 되면 그 부부는 남편만을 위한 것도 아니요, 아내만을 위한 것도 아닙니다. 부부일심이 이루어지게 될 때 그것은 누구의 것이냐? 그 부부의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동시에 그 부부는 누구의 것이냐? 그것은 공적인 것입니다. 벌써 부부가 하나됐다고 하게될 때는 남편의 것도 아니요, 아내의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공적인 것입니다.
공적이라는 것은 어떤 것이냐? 어떠한 환경이 주체자와 중심적인 내용을 결합시켜 가지고 그 중심이 움직이는 데에 완전히 보조를 맞추게 될때, 일치를 이루게 될 때에 거기에 선한 토대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갑과 을, 둘이 하나될 때 갑이라는 존재로 말미암아 혹은 을이라는 존재로 말미암아 하나가 됐지만 그것은 갑의 것만도 아나요, 을의 것만도 아닙니다. 이것은 반드시 둘의 것입니다. 이 둘의 것인 그선도 둘만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전체를 대표한, 전체의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된다 이겁니다. 행복이라는 것은 어디에서 나오느냐? 완전한 행복이라는 것은 어디에서 설정되느냐? 나 혼자만 행복해 가지고 행복이 설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둘다 행복하게 될 때 행복이 설정되는 것입니다. 둘다 행복한것은 어떤 것이냐? 보다 차원 높은 인연을 연결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갑은 동쪽에서 왔고 을은 서쪽에서 왔으면 동서가 연결되는 것입니다. 이렇게될 때에 행복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에 완전한 선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완전한 선이 결정됨으로 말미암아 완전한 행복감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그것은 인연을 따라오는 과정에 있어서 관계를 맺어 온 수많은 역사적 사건들이 비로소 꽃을 피우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인연을 통하여 보게 될 때 그것은 인연의 부활이요, 관계를 통하여 보게 될 때에, 하나의 결실로서 등장하는 자리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자리가 행복한 자리요, 선한 자리라고 우리는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자비라는 것은 무엇이냐? 완전한 선이 성립되어 가지고 그 누구의 것이 아니라 보다 큰 것을 위해 줄 수 있고, 보다 큰 것을 위해 상대할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될 때에 자비의 마음이 출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주체의 마음을 가지고 사랑하게 될 때는 보다 높은 차원의 경지가 벌어짐으로 말미암아 거기에서 비로소 자비스러운 주체라고 말할 수 있고, 자비스러운 대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자기를 중심삼고 횡적으로 사랑한다고 해서 '아! 자비스러운 주체, 자비스러운 대상'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둘이 하나되어 가지고, 하나 못된 그 환경을 초월한 자리에서 중심이 되고, 하나가 되지 못한 데에 본이 되는 공적인 자리에서 공적인 주체가 되어 보다 공적인 기준을 따라오는 그들을 위하여 사랑의 마음이 흘러 내리게 될 때에, 자비의 마음이 설정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도 여기에서 벌어 지는 것이요, 보다 차원 높은 행복의 요인도 여기에서 벌어지는 것은 두말할 것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보다 큰 것을 중심삼고 하나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왜 보다 큰 것을 중심삼고 하나되려고 하느냐? 하나됨으로 말미암아 거기에서, 자기를 초월한 자리에서, 보다 자비스러운 사랑의 주체, 보다 자비스러운 선한 주체, 보다 자비스러운 사랑의 중심이 싹트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의 중심이 커 감으로 말미암아 본래의 절대적인 자비의 주인이요, 사랑의 주체요, 선의 주체 되시는 하나님 앞에 접근해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보다 큰 것과 하나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보다 잘난 사람, 보다 유명한 사람, 보다 훌륭한 사람과 하나되려는 것은 그와 내가 하나되게 되면 그의 것도 아니요, 내 것도 아니요, 하나의 공적인 것으로 남아지기 때문입니다. 이 공적인 것을 주체가 상대에게 다시 주는 경지에서 자비와 사랑의 터전이 설정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예수 그리스도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이땅에 와서 하려고 한 것이 무엇이냐? 밥을 그리워한 것이 아닙니다. 혹은, 자기의 생활무대를 그리워한 것도 아닙니다. 그럼 뭐냐? 예수님은 이땅에 주체로 오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중심삼고 나라면 나라, 세계면 세계를 하나로 만들기 위해 일하신 것입니다. 그 하나된 것은 예수님의 것도 아니요, 세계의 것도 아닙니다. 그 하나된 것이 하나님 것으로서, 보다 차원 높은 중심적인 존재로서 차원이 낮은 사람들을 대하고 사랑하게 될 때에, 여기에 자비의 천국이 형성되고 새로운 선과 사랑의 세계가 형성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예수는 일구월심 생애를 통해 싸움의 행로를 개척해 나갔다는 사실을, 그 개척와 목적이 달성되지 않을 때는 생명까지 바치는 데에 순응해 가지고 죽음길도 기쁨으로 맞이해 나갔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는 사람과는 하나 못 됐지만, 사람과 하나돼 가지고 인간 세상에 새로운 주체로 서야 할 것인데도 불구하고 인간을 대해 가지고 주체로 서지 못했지만 영적으로나마 하나님과 하나 된 자리에 섰기 때문에, 그 마음과 하늘이 하나되었기 때문에 그 하나된 기준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역사시대의 중심적인 생명이 인연되어 새로운 생명의 부활권, 하나님의 은사권과 자비권, 사랑의 세계, 선한 역사가 창조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자기 혼자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혼자 태어난 존재는 없습니다. 반드시 두 존재가 하나되어 가지고 거기에서 '나'라는 사랑받을 수 있는 실체가 나온 것은 두말할 바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부모가 사랑을 통해서 하나되는 혈연적인 터전을 통해 가지고 태어난 것입니다. 보다 높은 터전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 부모는 나를 사랑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어머니 아버지가 서로 사랑하지 않더라도, 싸움을 하더라도 나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하나된 기준 위에서 보다 차원 높은 대상의 존재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필연적인 소망의 기준으로 추구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될 대상이요, 인간 본연의 행로인 것입니다. 그 행로를 따라가야 할 인생에 있어서 아무리 자기들 부처끼리는 싸우더라도 자식을 대해서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선이라는 것은 혼자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협동해야 됩니다. 보다 새로운 혁명을 제시하는 역사적인 운동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어떠한 사상이 있어 가지고 그 사상을 중심삼고 주체자와 대상이 서로 하나되었다면, 그 사상은 주체자에게 속한 주창자의 사상이냐? 아니면 따라오는 사람들의 사상이냐? 그것은 따라오는 사람들의 사상인 동시에 제창한 사람, 즉 지도하는 사람의 사상인 것입니다.
그 사상을 중심삼고 하나가 되게 될 때는 그 하나된 사상은 제창한 사람의 것만도 아니요, 따라오는 사람의 것만도 아닙니다. 그것은 새로운 주체의 인연을 가지고 역사시대에 새로운 운동을 제시할 수 있는 선의 모체가 되고, 사랑의 모체가 되고, 생명의 기원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시대를 통해서, 우리의 생활환경을 통해서 매일같이 당하고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볼 때 여러분 자신들도 그러한 운명길을 가려 나가야 합니다. 개인이 그러하기 때문에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한민국이면 대한민국을 중심삼고 볼 때, 대한민국도 한 나라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대한민국이 주체적인 자리에서 세계에 영향을 미치려고 한다면 세계는 그 국가의 이념과 정책과 하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된 그 세계는 대한민국도 아니요, 세계도 아닙니다. 그것은 보다 공적인, 차원 높은 새로운 것으로 등장해 가지고 역사를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어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생각해 보게 될 때,'나'라는 것은 현재의 나로 말미암아 존재하게 된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인연을 통하여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 인연 길이라는 것은 일방통행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남향이면 남향만을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수천 수만의 선조를 거쳐 가지고 내가 태어난 것입니다.
그 선조들 가운데에는 남향을 향해서 가던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북향, 동향, 서향, 혹은 아래 위로 가던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천태만상의 인연을 가진 사람들이 내 한 생명체를 빚어 내기 위해서 역사적인 공을 남기고 갔다는 것입니다. 그들 가운데는 올라갔다 내려갔다 한 조상도 있었을 것이고, 혹은 앞으로 나가는 조상이 있는 반면 뒤로 후퇴한 조상도 있었을 것이고, 후퇴하다 말고 떡 하니…. 여러 가지 모양이 있었을 것 아니냐?
그러한 인연의 길을 걸어온 사람들이 어떤 한 출발 기점에서 전진을 해야 되는데도 불구하고 전진하지 못하고 후퇴하게 될 때는, 기준에서 후퇴한 그 거리만큼 탕감을 하지 않고는 못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탕감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타락으로 인하여 창조이상의 한계점에 서야 할 인간이 그만큼 후퇴한 입장에 섰기 때문에 그 후퇴된 거리에 해당하는 탕감이 설정돼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선조가 선한 기준까지 끌고 나왔을 때, 그것을 넘어 선한 기준에 올라가게 되면 발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원칙입니다.
그러한 자리에서는 정상적인 발전이 벌어지고 그 과정을 통하여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조들이 이만큼 끌어 나왔는데도 불구하고 자기 일대에 와서 그것을 후퇴시켰다 할 때는 역사적인 탕감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비운의 인연을 거쳐 나오는 역사권내에 살고 있는 우리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 한 사람의 생애노정이라는 것은 천태만상으로 벌어지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랬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내일은 저렇게 되기를 바라는데 그렇게 되지 않는다 이겁니다. 혹은, 청춘시대에는 이러기를 바라는데 그렇게 안 된다구요. 마음대로 안 된다는 겁니다. 사람의 욕망은 언제나 지금보다 나은 것을 추구하기 마련입니다. 지금보다 낫기를 바라고 전진하기를 바라지, 후퇴하려고 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 살아가고 있는 인간을 볼 때는 전진하려고 하는데 후퇴하지 않으면 안 될 놀음이 벌어진다구요. 이렇게 나가서는 안 되고, 반대의 그 인연을 탕감하기 위해서는 반대의 길로 가야 하는데 인간의 욕망은 앞으로 나가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환경에서 반대로 돌아서 가야 할 텐데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가려고 하다가는 반드시 들이맞는다는 것입니다. 병이 나고, 혹은 불행한 일이 벌어지고 하는 것은 그런 때를 통하여 급격히 변하는 방향의 차이로 말미암아 탕감이 벌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개인이면 개인이 탕감을 하는 것이요, 가정이면 가정이 탕감을 하는 것이며, 국가면 국가가 탕감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운명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운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요즈음 보면 골상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손금이나 관상을 보고 뭐가 어떻다고 얘기를 하지만, 사람이라는 것은 역사적인 산물입니다. 귀 하나만 보더라도 그 귀가 자기 어머니의 귀만 닮지 않았다는 거예요. 지금의 나는 선대로부터 연결된, 모든 조상의 피와 살을 이어받은 하나의 종합된 실체로 빚어진 존재이기 때문에 선조들의 만물상을 대표한 입장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재에 나타나 있는 나의 모습은 선조로부터 인연된 그 관계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반드시 자기 일대에서 결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나쁜 선조, 선한 선조가 내 일생에 반영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사람은 반드시 그 반영의 결과로서의 생활을, 생애를 걸어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높고 낮음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연적인 이치인 것입니다.
이러한 인생길을 걸어가는 인간들이 이것을 어떻게 모면하느냐, 이것을 초월할 수 있는 방안이 없겠느냐? 이게 문제라구요. 불행한 사람은 그 불행의 환경을 어떻게 극복하고, 그것을 초월할 수 있는 방안이 없겠느냐? 이것이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방안은 무엇이냐? '선조를 이겨라! 선조들이 가진 목적 이상의 목적을 가져라!' 문제는 그겁니다. 그럴게 아니예요? 이만큼 떨어져 내려 왔으면 그것을 복귀하기 위해서는, 그 떨어져 내려온 것을 원상복귀하려면 반대로 그 이상 올라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선조들이 갖고 나온 모든 생활방법을 극복하라는 것입니다. 그런 운동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연적인 결론입니다.
선조들이 이렇게 이렇게 살아서 이렇게 됐기 때문에, 나는 이렇게 이렇게 살아서 이렇게 만들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반대의 행로를 주장하는 운동이 없어 가지고는 그릇된 인생 행로를 바로잡을 길이 없다고 단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여러분은 수천만대의 선조들을 가졌습니다. 선조 가운데 선한 선조가 많았느냐, 악한 선조가 많았느냐 그것을 종합해 볼 때 선한 선조가 많았다는 사람은 비례적으로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왜? 일생을 살고 나서 임종하는 순간에 가 가지고, '내가 일생 동안 선한 일을 많이 하였느냐, 악한 일을 많이 하였느냐? 하고 회고해 볼 때, 선한 일보다도 악한 일을 많이 했다는 결론을 어느누구나 내린다는 것을 볼 때, 우리 선조들 전체가 선한 사람이 못 됐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비례적으로 악한 선조가 많았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나는 선할수 있는 새로운, 혁신적인 운동을 제시해야 되겠다 하는 마음을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이것을 극복하고 초월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인연의 혁명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어떠한 인연의 결과물로 태어난 존재로서 그 운명을, 그 환경을 그냥 그대로 따라가 가지고는 비참한 자리에서 파탄되는 결과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혁명해야 됩니다. 반대의 길을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있다면 그러한 역사적인 인연을 따라 살아가고 있는 인간들을 바라보고 '야야, 거기에서 네가 좋아하는 대로 살아라!' 해 가지고 인간을 구할 수 있겠느냐? 절대 구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있다면 반대의 행로를 제시해야 됩니다. 그것은 불가피한 일입니다.
악한 선조들이 많았기 때문에 너는 선한 사람이 되라고 합니다. 그러면 선조들은 어떻게 살아왔느냐? 선조들은 자기를 중심삼고 자기 부인, 자기 남편, 자기 아들딸, 자기 어머니 아버지를 중심삼고 자아완성, 자아 목적을 성사시키기 위해 자기 족속, 자기 가정을 위주해 산 것이 아니냐? 그것은 틀림없다 이겁니다. 우리 어머니 아버지도 그렇게 살아왔고, 할머니 할아버지 고조할머니 고조할아버지도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총괄적인 결론을 내리면 그들은 자기 아들딸, 자기 가정밖에 모르는 사람으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안 그렇겠어요? 그런 류의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보편적인 결론인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계시다면 어떻게 하실 것이냐? 자기 가정을 위해 살아 가지고는 벗어날 길이 없기 때문에 반대의 길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가정을 위해 살지 말라! 자기를 중심삼고 살지 말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있다면 이 운동을 제시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역사 가운데, 선한 사람들은 자기를 위해 산 사람 들이 아니라 남을 위해 산 사람들이었습니다. 남을 위해 사는데 어떤 것을 위해 산 사람이냐? 같은 시대에 태어난 사람으로서 동네를 위하는 사람은 자기 집을 위하는 사람보다 나은 사람입니다. 면을 위하는 사람은 그 부락을 위하는 사람보다 나은 사람입니다. 군을 위하는 사람은 면을 위하는 사람보다 나은 사람입니다. 이렇게 갈라지는 거라구요.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가정이 존경하는 사람보다 그 마을이 신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구요. 마을뿐만이 아니라 면에서, 면뿐만이 아니라 군에서, 군뿐만이 아니라 도에서, 도뿐만이 아니라 나라에서, 나라에서뿐만이 아니라 세계에서…. 이렇게 돼야 합니다. 욕망이 가는 길은 그렇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작은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큰 것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악의 결과로 빚어진, 그 인연의 불순분자로 태어난 나 자신임을 발견했다 할진대, 만일 하나님이 계시다면 하나님은 어떤 작전을 하실 것이냐? 이것을 유지시키는 작전이 아니라 파탄시키는 작전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반대의 길로, 반대되는 극의 방향을 거쳐 가지고 살리는 운동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결론이 나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종교에서는 반대의 길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중심삼고 볼 때, 사람을 위해서 살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과 사람은 주체와 대상 관계로서 하나는 남극이요 하나는 북극과 마찬가지입니다. 남극에서 있는 사람을 보고 남극을 위해 살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북극을 위해 살아라! 북극을 바라보고 살아라' 하는 가르침을 주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너를 위해서 죽고자 하지 말고 하나님을 위해, 북극을 위해 죽어라!' 이와 같은 것이 지금까지의 종교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종교가 사실 그렇게 됐다면 역사적인 섭리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인간은 무엇을 해야 되느냐? 극과 극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원인적인 존재고 인간은 결과적인 존재니까 원인적인 존재를 위해서 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한 것입니다. 거꾸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 다음에는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아무 목적도 없이 죽어요? 하나님을 위해서 죽고자 하는 사람은 살고, 자기를 위해서 살고자 하는 사람은 죽는다 이겁니다.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죽고자 하면 산다고 했는데 그냥 맹목적으로 죽어요? 누구를 위해서? 무엇 때문에? 그것은 하나님을 위해서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자기를 위해서 살고자 하는 사람은 죽는 다는 말입니다. 반대적이다 이겁니다.
반대적 교훈이 있는 것을 볼 때, 이것은 완전한 종교사상입니다. 완전한 종교 완전한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 신은 죄악된 인연권내에 고착돼 있는 인간을 해방시키기 위하여 일시에 혁명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지저분한 것들을 한꺼번에 깨뜨려 버려야 되겠다 이겁니다. 그래서 사람을 믿지 말고, 사람의 사상을 믿지 말고 하나님의 사상을 믿어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최대의 비법이 아니겠느냐? 그런 결론이 나오는 거라구요.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우리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완전한 종교는 어떤 것이냐? 자아부정을 가르치는 종교입니다. 이렇게 돼 있는 것입니다. 자아부정을 자각함과 동시에, 그 다음에는 무엇이냐? 타아(他我)라는 말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타아 즉 남을 위해서 살라 그겁니다. 그 남은 남이 아닙니다. 하나되는 목적을 중심삼은 남이라구요. 상대적인 나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상대적인 입장에 될 때, 그 천지만물은 지어진 물건으로서만이 아니라 자기의 소성을 발전시킨 또 다른 나라는 것입니다. 외적인 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거라구요.
그렇기 때문에 자아는 나를 통해서 형성되는 법이 없습니다. 그럴 수 있게 되면 우리는 완성한 사람입니다. 그냥 완성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을 수 없습니다. 자아완성은 자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타아를 통해서, 다른 것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타락은 무엇이냐? 타아자각을 한 것이 아니라 자아자각을 한 것입니다.
자아자각에서부터 시작했는데 여기에서 타아자각을 어떻게 하느냐. 그 범위를 자기와 같은 일체적인 감정으로 어떻게 확대시키느냐에 따라 세계적인 인물의 등급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가정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같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고 했지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남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큰 환경을 자기와 같이 사랑해 가지고 그 사랑한 것이 돌아오게 될 때는, 지금 사랑하는 자리가 아니라 보다 차원 높은, 전체를 포괄한, 전체가 하나된 자리에서 사랑의 주체격을 갖출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이 보다 높은 환경을 향해서 출발할 수 있는 제2기대가 되는 것입니다. 그 기대는 제 3 기대, 제 4 기대로서 차원을 높여 가지고 하나님에게까지 그것이 상승하게 마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고차적인 소망을 가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세계적인 인물이 되는 것이 쉬워요? 쉽지 않습니다. 동네에서 이만큼 사랑받고 칭찬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됐으니 이만하면 됐다고 할지 모르지만 거기서 끝나서는 안 되는 거라구요.
이렇게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수고를 했더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환경을 토대로 제 2 의 출발을 또 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범위를 넓혀 면을 통해서, 군을 통해서, 도를 통해서, 나라를 통해서, 세계를 통해서 나가야 됩니다. 그래야 비로소 도약이 벌어지는 거예요. 달나라 가는 거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 지구성이 하나의 유도탄 기지와 같이 되어 가지고, 인공위성의 기지와 마찬가지로 되어 가지고 밀고 나가야 됩니다. 아무리 좋은 인공위성을 만들어 왔다 하더라도 밀어 주는 추진력이 없게 되면, 그런 터전이 없게 되면 무너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잘 날리려고 해도 날릴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단단한 터전이 되어 가지고 어떠한 힘으로서 밀더라도 그것을 반대로 밀어제낄 수 있는 기대가 있어야만 인공위성을 날릴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거예요. 우주적인 도약을 바라서 하나님에게로 직행할 수 있는 심정적 유도탄을 발사하게 될 때, 그것이 가서 맞는 날에는 천지는 그 사랑 앞에 폭파될 것입니다. 폭파가 되면 산산조각으로 깨지는 것이 아니라 산산조각으로 깨어졌던 것이 통일이 벌어질 것이 아니냐,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연을 통한 죄악된 결과의 자리에 선 우리 자신들에게, 하나님이 있다면 어떻게 하실 것이냐? '반대의 길을 가라'고 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사랑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되느냐? 본래 사랑의 기원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기원으로 해 가지고 하나님의 아들딸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외에는 인간 본래의 이상적인 사랑은 출발할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그것이 본래의 인연인데도 불구하고 그 인연을 무시하고 포기해 버리고 출발한 것이 타락입니다. 그 포기된 자리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포기 하지 않았던 자리 이상의 자리를 사랑할 수 있는 운동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타락은 어떤 것이냐?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한 것이요, 하나님이 아들딸을 사랑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을 사랑하지 못하였고 하나님이 사랑하는 딸을 사랑하지 못하였으니, 이 운동을 다시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메시아란 어떤 사람이냐?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아들로 등장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을 사랑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사랑 하지 못한 하나님의 아들을 사랑하기 위한 운동을 연결시키는 분입니다. 이것이 메시아 사상입니다. 간단하지 않은 거라구요.
동기가 되어 가지고 인연의 결과를 가져왔으면, 그 이상적인 자아는 이상적인 사랑의 뿌리와 줄기와 가지와 잎이 돼 가지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 새로운 열매는 본질적인, 원인적인 존재와 일치될 수 있는 열매가 되어야 할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런 열매로서의 인연을 지니고 있지 못합니다. 이게 타락된 것입니다. 본래 인연된 열매의 출발은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하나님의 아들딸로부터 연결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아들딸로서 사랑받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과 사랑의 인연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과 사랑의 인연을 가져야만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을 하나님의 사랑의 주체에게로 돌아가도록 하는 것이 메시아가 사랑을 가지고 오는 목적이요, 그가 해야 할 책임입니다.
메시아가 남자로 오면 남자만 가지고는 안 되기 때문에 그 메시아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 메시아가 사랑할 수 있는 하나님의 딸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랑신부입니다. '끝날에는 신랑신부가 온다!' 이것은 결국 사랑을 사랑답게 갖지 못했던 인간에게 사랑다운 사랑을 찾아가자고 하는 말입니다. 불륜한 사랑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이별되었던 것이, 본연의 이상적인 사랑이 섬으로 말미암아 원칙적인 사랑의 세계로 들어가기 때문에 그 세계는 행복한 세계요 이상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종교적으로 보면 지상천국이요 천상천국이 아니겠느냐? 그건 당연한 말입니다.
그러려면 복귀를 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아요? 처녀 총각들이 맨 처음에는 서로 죽자살자 좋아서 결혼했지만, 지난날을 가만히 보니까 사랑하는 그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했던 흔적이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기뻐할 상대가 있어요? 손들어 봐요. 있어요, 없어요? 자, 우리 여자들 있어요? 우리 할머니들, 옛날 할머니들은 남편에게 절대 순종하는 법에 매여 살았지요? 그런데 남편을 가만히 보니까 외도를 한다고 할 때,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 또, 그런 정력을 가졌다고 할 때 좋아할 사람 있어요? 지금까지 좋던 것이 뒤집어지는 거라구요. 왱가당 댕가당. 전부 다 위가 아래되고 아래가 위가 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렇지요? 마찬가지라구요. 타락한 인간도 그렇거든 하나님도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아들로 맞으려고 할 때, 원수의 아들로 태어나 가지고 원수의 사랑을 받으면서 침을 질질 흘리면서 '아이고 좋아, 아이고 좋아' 하면서 살아온 그런 꼬락서니를 바라보고 있는 하나님이 그러한 작자를 사랑하고 싶겠어요? 여러분 대답해 봐요. 사랑하고 싶겠어요, 사랑하고 싶지 않겠어요?「사랑하고 싶지 않겠습니다」 어림도 없다는 거라구요. 그런 패들은 절대 사랑하고 싶지 않다는 거예요. 보기만 해도 그저 메스껍고, 보기만 해도 그저 밉고 보기만 해도 물어뜯고 싶고, 보기만 해도….그럴 수 있는 사람일수록 하나님이 볼 때 '야, 고거 고거…'그럴 것 아녜요?
이런 관점에서 성경을 보면 말예요. 누구보다 나를 더 사랑하라는 말은 인간에게 있어서 위대한 복음이다 이겁니다. 미완성이요, 절망권내의 역사적 인연을 벗어나지 못하는 인생을 두고 볼 때, 그런 인간 앞에 누구보다 나를 더 사랑하라는 말을 했다는 것은, 이것은 우주적인 혁명입니다. 우주적인 혁명인 동시에 우리 인간 앞에 지극히 복된 복음입니다.
더 사랑하면 어떻게 될 것이냐? 사랑을 못해서 그렇지 더 사랑하면 어떻게 될 것이냐? 수가 난다는 것입니다, 수가. 인간세계에서 상상하지 못할 고차적인 사랑의 세계가 비로소 문을 여는 것이 아니냐? 사랑의 세계가 현현되는 것이 아니냐? 새로운 천지에서 활기를 펴고, 환희와 기쁨에 충만한 모습으로 천지를 자기 것과 같이 사랑하기 위하여 제일보를 나서는 행복된 그 자아가 얼마나 멋지겠느냐?
그것을 볼 때 하나님도 '히야-' 하고 침을 흘린다는 것입니다. '아이구 좋구나, 야, 야 너만 가지 말고 나도 데려가 다오!' 하나님도 그걸 보고 위신상 가겠다고 나설 수 없어도 마음으로는 고대하고 있을 때 '하나님 가십시다' 그래야지 고대하지도 않는데 '가십시다!' 이런다고 나설 것 같아요? 마찬가지예요. 사람과 마찬가지라구요. 사람이 하나님을 닮았다구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과 같은 양반은 이 땅에 와 가지고 누구보다도 자기를 더 사랑하라고 말했습니다.
'아내를 더 사랑해도 안 되는 것이요, 부모를 더 사랑해도 안 되는 것이요, 아들딸을 더 사랑해도 안 되는 것이요, 그 누구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지 않고는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혁명적인 이야기입니다. 파탄시키고 파괴하는 것 같은 말이지만, 건설과 희망의 교차로가 여기에서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확실히 느끼는 기독교인들이 과연 몇 사람이나 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대하여 그렇게 부탁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네 몸과 같이 사랑해라 이겁니다.
여러분을 보면, 뜻을 위해서 간다고 해 가지고 지금까지 왔지만 먹다 남은 찌꺼기, 먹다 남은 쓴 오이꼭지처럼…. 여러분 자체가 뜻을 위해 산다는 사람들의 새빨간 가슴을 해부해 놓고 한번 자기를 비판해 보십시오! 내가 천국에 가겠는지 못 가겠는지, 하늘나라의 백성인지 아닌지, 하늘나라 전통을 이어받을 수 있는 혈족이 될 수 있는지 없는지, 한번 해부해 보자구요. 좋은 것이 있으면 좋은 것은 내 거! 나쁜 것은 네 거! 그래 가지고는 완성의 세계, 이상의 세계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세계를 바라본 예수는 자기 인생은 '이렇게 가야 된다'고 결정했다는 것입니다. 간단하다는 겁니다. 반대로 가야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원수를 갚으려고 하는 것과는 반대로 해야 되기 때문에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라!' 한 것입니다. 거기에서 새로운 정의와 새로운 문화의 기원이 벌어지고, 새로운 개인의 인생관과 새로운 세계관과 새로운 우주관이 벌어진 것은 두말할 것 없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여러분 솔직하게 얘기해 봅시다. 숫총각이 있다고 한다면 자기 친구와 얘기를 할 때 '야, 이 녀석아! 너는 숫총각인데, 이 다음에 어떤 색시를 만날 거야! 여자학교 졸업한 아가씨를 만날 거야? 남녀공학한 학교를 다닌 아가씨를 만날 거야?' 하고 묻는다면 지금 사회제도가 그러니 그렇지, 그 남자는 '야, 야 나는 남녀공학을 졸업한 아가씨는 원치 않아' 그렇게 대답합니다. 이건 보수적이 아닙니다. 통일교회 문선생은 보수적이라서 그렇게 말한다고 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보수적이 아니라 진취적이라는 거예요. 공식이 딱 그렇게 돼 있습니다.
혹은 남녀공학인 학교를 졸업한 여중학생 혹은 고등학생, 혹은 대학생 이면 대학생 처녀를 아내로 맞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어요? 진짜 사랑하려면 누구 한 사람도 곁눈으로 바라보고 딴 생각 하지 않은 그런 여자를 상대로 원한다는 거예요. 선생님 말이 틀렸어요? 남자들 그런 마음이 있어요, 없어요? 어디 한번 대답해 봐요. 있어요, 없어요? 남녀공학한 대학을 나온 여자들은 다른 데에 능란해 가지고 살림살이하기가 좀 힘들다구요. 자기의 남편을 대하게 되면 벌써 자기가 대학 다닐 때의 학급 남학생들과 비교한다는 것입니다. 나보다 공부 잘하던 아무개는 얼굴이 이렇게 생겼고 어떻고, 나도 공부를 잘했기 때문에 프로포즈했던 제 1 호, 제 2 호, 제 3 호… 제 10호 이렇게 딱 그 상판대기를 언제든지 비교하고 분석한다는 거예요. 그런 학생을 내가 보이코트했는데 이런 졸장부를 만났구만….
이렇게 볼 때 남자라면 숫처녀를 원하고, 여자라면 숫총각을 원한다는 거예요. 처녀 총각들 그래요. 안 그래요?「그렇습니다」 뭘 그래?(웃음) 정말 그래요? 이렇게 생각한다면, 하나님이 얼마나 시기 질투가 많은지 알아요? 하나님은 시기하는 데도 천하의 대왕이요, 질투하는 데도 천하의 대왕입니다. '나만 사랑하라!' 그 대신 나도 너하고 죽자살자 사랑하겠다는 거라구요. 그러면 됐지, 그렇지 않아요? 그게 나쁘냐 이겁니다. 시기도 좋다, 질투도 좋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적인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거예요.
이렇게 볼 때 시기가 나빠요? 질투가 나빠요? 사랑하게 마련인 자리에서 자기만 사랑하겠다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이 나빠요? 그것은 방어적 울타리라구요, 방어적 울타리. 누가 침범할 수 없는 절대적인 방어적 울타리라구요. 그런 것을 생각해 보라구요.
여러분들 지금 하나님의 아들딸 되겠다고 하는데 가만히 보면, 누더기 보따리도…. 어린애가 똥 싸서 뭉개 놓은 것은 그래도 초밤중이예요. 이것은 뭐, 몇십년 전 할아버지 똥, 처녀 때 똥, 총각때 똥 해 가지고 똥주식회사 같은 것을 싸 가지고 다닌다는 거예요. 그게 인간이라는 거예요.
그렇게 해 가지고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렇게 기도하겠다고 입이 벌려져요, 입이? 얼굴을 들고 이렇게 해 가지고 입이 벌려지느냐 이거예요. 이 땅에서 족보에도 자기 자신이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기도를 해야 할 텐데, 뻔뻔스럽고 대담하다는 거예요. 그 비린내 나는 것을 대해 가지고 지금까지 복귀섭리, 구원섭리를 해 나오시는 하나님이 얼마나 기가 막히겠느냐 이거예요. 생각해 보라구요.
시집 온 색시가 조금만 뭐하면 보따리 싸들고, '나 안 살아' 하면서 한번 나갔다 들어오고, 두 번 나갔다 들어오고, 세 번 나갔다가 들어오고…. 그걸 또 따라가면서 사랑하겠다고 하는 사내가 있으면 그런 사내는 때려 죽여야 돼요. 미친 녀석이라구요. 그렇게 말하지요? 그래요, 안 그래요?
하나님이 이러한 모든 것을 생각하게 되면 얼마나…. 하나님이 뭐야, 하나님이 뭐냐구. 나중에야 하나님이 있지…. 임자네들 하는 놀음을 보라구요. 그거 메스껍겠어요. 안 메스껍겠어요? 구역질 나겠어요, 안 나겠어요? 구역질이 나게 돼 있어요, 안 나게 돼 있어요?
우리 아줌마들, 뭐 얼굴에 분 바르고 잘 꾸미고 온 아줌마들, 마음 심통, 그 마음의 역사를 가만히 뒤적뒤적 전시해 놓고 척 바라보게 될 때, 얼굴에 분 바르고 나타날 수 있는 자신이 있어요? 그거 생각해 볼 문제라구요.
그래 가지고도 뻔뻔스럽게시리 '나를 왜 몰라줘! 누구는 어떻고 나는 어떻고…' 그렇게 말하게 안 돼 있다구요. 인연의 판정의 도수가 달라요. 공판정이라고 전부 다 같은 형, 1년 6개월짜리만 공판하는 게 아닙니다. 공판정은 사형에서부터 몇십년, 몇백년 천태만상으로 벌어집니다. 그렇지 않아요? 그런데 다 같기를 바랍니다. 안 된다구요. 그러니 누구에게 불평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불평하려면 자기 조상에게 불평하라 이거예요. 불평하려면 나에게 불평하라 이거예요. 이 불평을 벗어나는 길은 인연의 길을 혁명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혁명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혁명하는 단 하나의 길이 있나니, 이것이 뭐냐? 전부 부정하고 박차 버려라!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 인정하지 말고 전분 다 옥살박살 부정해 버려라 하는 것입니다. 부정해 가지고 부정을 한 그 이상의 자리로 점핑해 가지고 그 자리를 붙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종교가 고마운 것은 하나님을 절대 믿으라고 한 것입니다. 이게 혁명의 본위입니다. 알겠어요? 절대 믿어라? 네 자체를 타령하지 마라! 타령해 봐야 백지 한 장 차이입니다. 알겠어요? 인간들끼리 무슨 죄가 많고 어떻고 하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 평면적으로 보게 되면 백지 한 장 차이입니다. 잘났다고 했댔자 그렇고, 못났다고 했댔자 그렇고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절대적으로 믿어라! 절대적으로 믿으면 일시에 돌파구가 생겨가지고 초월할 수 있는 길이 벌어집니다. 그래서 절대적인 신앙은 운명길을 혁신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알겠어요? 또한 인연도 바로 잡을 수 있고, 관계도 개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새로운 시대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역사적으로 고착된 그 관계를 개선해야 되는 것입니다. 개선하려면 새로운 신앙에서부터, 신앙은 새로운 이념에서부터, 새로운 이념은 새로운 사상에서부터 출발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안 되어 있어요? 그래서 그 이념과 사상을 제창한 인물이 오늘날 우리들이 말하는 세계적인 성현들이 아니냐 이겁니다.
그 성현들이 추구하던 것은 무엇이냐? 그 골자사상은 자기를 위주로한 사상이 아닙니다. 인간세계로 보면 그들은 약자였습니다. 자기 주장은 없고 오로지 하늘, 하늘, 하늘이었습니다. 예수님과 같은 양반도 '아바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했지요? 세상적으로 보면 그게 얼마나 비굴한 사나이 입니까? 그렇지 않아요? 안 그래요?
죽을 자리에 들어가서도,'아바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무슨 사내가 그렇게 생겨 먹었어요? 세상적으로 보면 그건 인중지말(人中止末)입니다. 누가 그의 말을 믿겠어요? 졸장부같이…. 사내답게 혁명을 못 일으키고…. 모든 것을 혼자서, 장엄한 자세로 칼을 빼어 들고 원수들이 목을 뚝뚝 잘라 버리는 것이 시원하고 남자답지. 아이쿠, 궁둥이를 하늘로 쳐들고 눈물을 흘리면서 '아,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그건 인간적으로 보면 인간다운 모습이 아닙니다. 그는 예외의 인물이었더라 이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외의 길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여러분은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이러한 사실을 알았습니다. 인연의 장난은 여러분의 운명 앞에 갖은 슬픔과 비극을 전개시켜 나오고 있는데,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반대의 길을 추구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절대적으로 믿어라는 것입니다. 절대적으로 믿고 넘어가야 된다 이겁니다.
어떤 강을 건너뛰게 될 때, 넓이뛰기에 있어서 자기의 기록이 있다구요. 자기의 기록이 4미터 내지 5미터쯤 된다면, 4미터쯤의 거리는 쉽게 건너뛸 수 있지만 5미터라는 한계선을 건너뛰려면 비장한 각오, 지금까지 없었던 비장한 각오, 죽음을 각오하고 뛰어넘어야 합니다. 해봐야 죽든지 살든지 둘 중의 하나가 결정됩니다. 알겠어요? 그길밖에 없다는 거예요.
건너뛰어야 되는데 '아이구, 건너뛸까 말까! 난 자신이 없는데, 다리가 건너뛰겠지' 그렇게 생각해요? '난 자신 없지만 다리가 건너뛸 것이다' 그러면서 뛰는 녀석이 있어요? 그건 미친녀석입니다. 먼저 마음이 문제 입니다. '좋은 고비다. 이건 문제가 아니다' 하며 심각한 마음으로 그것을 뛰어넘고도 남을 수 있는 신념을 가지고 행동해야 넘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지, 넘을까, 될까 말까 이래 가지고 되는 수가 있어요? 이것은 틀림없이 가다가 쿵하고 떨어지는 거라구요.
절대적인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은 모험을 촉구해 나가는 개척자의 행각의 노정에서는 불가피적입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다고 하니, 이 권위가 이거 참 얼마나 멋져요? 하나님이 인간을 구도하기 위한 최고의 표어가 아니냐? 안 그래요?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다! 운명은 여기에서 엇갈리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격동하는 세계사적일 현실을 바라보게 될 때에, 현실의 어떠한 주의나 사상도 그것을 극복하고 초월할 수 있다고 자부할 수 있는 절대적인 신앙관과 생활이념을 갖고 나서게 될 때는, 그 신앙관과 생활이념을 통해서 개혁이 벌어지고 새로운 세계의 문화가 형성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는 통일사상을 주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통일사상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그것이 이념화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념은 뭐냐, 생각입니다. 생각하는 상응사상입니다. 사상이 이념화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념은 체계화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에서 둘, 둘에서 셋으로 전진적인 체계화 놀음이 벌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사상은 이념을 전개시켜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이념은 비로소 생활법도가 되어 실천장을 형성하게 되고, 그것이 새로운 문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 실천장에 있어서는 이념이 고차적이니만큼 행동도 고차적인 행동을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가 가야 할 목적관에 대한 강력한 생각이 앞서야 됩니다. 구상하는 생각, 그것이 앞서지 않고는 안됩니다. 자신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무슨 일을 하게 될 때, 자신이 있느냐고 물어 보지요? 조금만 다른 새로운 것을 하더라도 '너, 자신 있나?' 이렇게 묻지요? 일을 해보기 전에는 자신이 있는지 없는지 모를 텐데, 자신이 있느냐고 묻는 것은 네 마음이 결정돼 가지고 그 이상 넘어설 수 있느냐 그 말입니다. 그말은 뭐냐 하면, 신앙적으로 볼 때에 현재에 당면한 문제를 극복할 수있는 마음의 방향이 갖춰져 있느냐 하는 뜻입니다. 그러한 마음이 갖춰져 있으면 마음이 가는 대로 몸이 가기 때문에 변치 않고 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적기사 같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병자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도 그래요. 삼신(三神)이 동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동해야 되고, 내 마음이 동해야 되고, 물심이 동해야 됩니다. 병난 사람을 보면, 그 몸뚱이가 수척한 것을 보고 자기가 아픔을 느끼면서 이 병자를 하나님이 보면 얼마나 기가 막힐 것이냐? 이래 가지고 부모의 심정으로 측은하게 보면서 병자라는 생각이 없이 그를 붙들면 대번에 병이 낫는다는 것입니다.
그를 병자라고 생각하는 것보다 잃어버린 아들딸, 십년 혹은 천년 동안 찾던 아들딸을 만난 것 같은 사랑의 마음이 여기에 덮어져 그 환경을 초월할 수 있는 심정의 인연이 벌어지면 대번에 병이 낫는다는 것입니다. 이적이 뭐 다른 게 아닙니다. 그것을 동화시킬 수 있는 자리, '그는 나요 나는 그다' 하는 자리, 창조원리대로 둘이 하나되는 데는 하나님이 임재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시게 되면 재창조의 운동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바라는 소원이 아무리 크다고 하더라도 재창조의 능력이 가해져야 새로운 결과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원리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통일교회 교인들이 어떤 문제를 중심삼고 기도할 때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 이루어질지 말지…. 그게 아니라구요. 여러분은 이러한 비운의 운명을 불신하고 나섰지요? 그렇기 때문에 제일 문제되는 것이 뭐냐? 여러분 자체를 정비하는 것입니다. 아까 이야기했듯이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라고 했는데, 그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아버지를 사랑하는 나 자신이 되었느냐? 내가 누구를 더 사랑했느냐 이겁니다. 먼저 나 자신을 정비해야 되는 것이 문제가 아니겠느냐? 그렇잖아요?
여러분을 보면 여러분도 그렇다구요. 자기의 남편은 세상에 둘도 없는 남편이다 이거예요. 그 사람이 총각으로서 자기와 결혼했고 일생 동안 자기만을 위하고 말이예요. 남성으로서 세계에 둘도 없는, 참 존경할 만한 남성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과거에 실수가 있었다고 하면 이는 언제나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말을 하지 않고 숨기고 산다고 하더라도 일생 동안 죄책감을 받는 거라구요. 남편이 잘 해주면 잘 해줄수록 죄책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나는 부족하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그렇다는 거예요. 마음은 속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순수한 그분 앞에는 순수한 여성이 되어야 하는 것이 원칙이 아니냐 이겁니다.
이런 관점에서 순수한 하나님 앞에 내가 얼마나 순수하지 못했느냐 하는 문제를 중심삼고 볼 때, 차원 높은 자리에서 새로운 심지(心地), 마음의 밭을 어떻게 개발해야 되느냐 하는 문제를 생각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분인데, 우리는 타락의 후손입니다. 이것은 배반이예요. 여러분의 조상들이 지금까지 하나님을 얼마나 배반했겠습니까? 배반자의 후손들…. 이게 또 둥글다면 모르겠습니다. 얼럭꿍 덜럭꿍 제멋 대로, 될 대로 돼 버린 것이, 나는 이래뵈도 하나님의 아들딸이라구….
그러한 자기를 발견할 때에는 눈물로 회개해야 됩니다. 눈물이 없는 사람은 전통적인 신앙길을 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눈물을 흘린다면 얼마나 흘려야 되느냐? 자기의 과거를 생각할 때, 수치스런 자기를 회상할 때는 부끄러워서 회개의 눈물을, 그렇던 자기가 이런 은사의 자리에 있는 것을 생각할 때에는 황공해서 감사의 눈물을, 내 생활 가운데 자랑할 것이 있으면 부끄러움과 황공한 눈물을, 이런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나는 아직까지 기쁨의 눈물을 흘릴 수 없는 것입니다, 기쁨의 눈물은 그분 앞에 무엇을 해드리고 그분이 좋아하게 될 때, '야! 오늘은 나만 좋은 것이 아니라 너도 좋다!' 하며 그가 손을 들고 춤을 추면서 나에게 춤을 추자고 끌어낼 때, 그때에야 비로소 기쁨의 모양 이라도 갖출 수 있는 것이 인간이 아니냐?
3대 눈물을 흘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맨 처음에는 무슨 눈물? 슬픈 눈물, 그 다음에는? 황공한 눈물, 자기의 과거를 생각하게 될 때, 용서받을 수 없는 나 자신이 하늘 앞에 용서를 받기 위해서는 회개의 눈물을 흘려야 됩니다. 용서받은 자리에 있는, 이와 같은 것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하나님을 대할 때는 황공하다는 거예요. '어쩌면 당신이 나 같은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느냐!' 황공한 눈물을 흘려야 된다 이겁니다. 그렇게 될 때까지는 하나님이 중심이 돼 가지고 나를 위해서 주체적인 역할을 한 것이 아니냐?
내가 기쁠 수 있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요구하는 것을 내가 대신 갚아줘 가지고 그가 기뻐하는 자리에 서서, 그 다음에 그가 나를 리드해서 세워 가지고 기뻐하는 그 자리에서 기뻐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것이 오늘날 타락한 인간으로서 하나님을 대한 심정의 길을 개발하는 정상적인 노정이 아니겠느냐? 이렇게 보는 거라구요.
그런데 오늘날 통일교회 교인들은 참 뻔뻔스러워요. 참 배포들이 크다구요. 원리가 그래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배포들이 큽니다. 배포 큰 거, 좋지 않아요. 하나님 앞에서도 배포가 커야 됩니까? 하나님 앞에서는 어린아이가 되어야 되는 거예요. 아이들 보면 그렇지 않아요? 그렇게 엄마를 못살게 하고도 말이예요. 어머니가 자기 때문에 죽을 자리에 들어가서 큰 상처를 입었는데 불구하고, 그 아들은 어머니 앞에서 잉잉 운다구요. 잉잉 우는데 '야 이놈의 자식아! 내 팔 봐라 내 팔, 이놈의 자식아 이걸 보고 어떻게 울어!' 어머니가 그래요?「그렇지 않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 어머니는 자기 아들딸 때문에 상처를 입었지만, 그 철모르는 아이가 울게 되면 그 부러진 병신 팔을 가지고도 또 그 아이를 위해 주려고 합니다. 그것은 왜?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이니까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에 어린애와 같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물론 어린애와 같이 철모르고 순진해야 되지만, 부모의 마음이 언제나 어린애에게 떠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하나님의 마음을 끌 수 있는, 하나님의 자비의 마음과 동정의 마음이 떠나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만 천국에 간다는 것을 두고 한 말입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철모르는 어린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랑을 그리워하고 하나님을 제일 좋아할 수 있는 입장에 서야 합니다. 그러면 용서받는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어떻든간에 하나님만 좋아하고 '다른 사람은 난 몰라!' 해야 된다는 거예요. 어린아이가 어머니 외에 다른 사람을 알아요? 젖통도 크고 어머니보다 더 잘생긴 미인이 와서, 이렇게 암만 내밀고 아이에게 먹으라고 해도 싫다고 하는 거라구요. 안 그래요? 그저 못생겼더라도 어머니를 찾아가게 돼 있습니다. 어머니밖에 모른다구요. 어머니밖에 몰라요. 하나밖에 모른다는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어린애와 같아야 된다는 이 비유의 말이 타당한 말이라고 봐야 된다는 것입니다. 무지해 가지고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가 아니라는 겁니다. 한 길, 오직 어머니밖에 모르는…. 사랑의 길에 있어서 하나님은 그런 순결한 사랑을 찾아 나오는 것입니다. 옆을 보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것, 그런 것은 하나님과 관계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의 골수 사상은 이런 인연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여러분의 얼굴이 아무리 못났다고 하더라도 걱정하지 말라구요. 되어진 그 얼굴로 몇십 배 더 강력한 정성을 들이고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믿게 되면 그 사람의 길이 바뀌어진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렇게 나오던 것이 꺾여진다 이겁니다. 알겠어요? 새로이 믿음으로써 끌고 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자기 선조들 이상이 돼 가지고 수평선에서 떨어져 내려온 것을 딛고 올라가야 합니다. 이때까지는 사탄들이 반대하는 거예요. 그 길을 거쳐 나가게 될 때는 악한 사탄들이 모질게 들이치는 것입니다. 신앙을 꺾어 버리기 위해서….
악의 주체 되는 사탄은 역사상의 모든 선조들을 악한 길로 떨어뜨렸기 때문에 아무런 공로도 없이 그것을 벗어나려고 하나님을 믿고 나서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사탄이 역사적인 선조들을 때려잡던 방법으로 땅땅 내리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조들이 사탄 앞에 꺾여 나가던 그런 신념이 아니라 그 이상의 고차적인 신념을 가지고 어느 과정을 거치고 나면 올라서게 된다는 거예요. 올라서 가지고 딱 넘어서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펴지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통일교인을 보면 그런 무엇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전도 나가게 되면, 이건 나가자마자 아무것도 없지만 사람들이 그저 밥 싸 가지고 따라 다닌다는 거예요. 사람이 줄줄 붙어 다녀요. 그 사람을 보면 국민학교밖에 안 나오고, 인품을 봐도 몇푼짜리밖에 안 됩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이 눈물을 흘리면 그 동네가 눈물을 흘리고, 그 사람이 새벽같이 일어나면 전체가 새벽같이 일어나고 말이예요. 그런다구요. 그것은 세상에서 기를 못 펴고 희생한 많은 선조들이 하늘의 복을 받을 수 있는 인연을 따라서 그 시점에 태어나 가지고 그 선을 넘을 수 있는 자리에 섰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운세, 하늘의 낮의 운세를 맞을 수 있는 자리에 섰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은 어디에 가든지 피해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반대의 사람이 있습니다. 얼굴도 잘생겼고, 그렇지만 어느 곳에 배치를 해도 지지리 고생합니다. 그것은 옛날에 선조들이 잘살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탕감길에 들어서서는 거꾸로 서야 되는 입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벗어나서 올라가는 데는 시일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기간에는 반드시 사(邪)가 있고 어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고 보따리 싸 들고 가는 사람은 그 이상 절대 못 올라갑니다. 통일교인 중에 나가서 전도하는 것이 힘들다고 하는 사람은 아무리 통일교회를 믿었다고 하더라도 운명의 인연을 초월해 가지고 승리의 자리에 올라가지 못합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도 공평하고 인류의 운명길도 공평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이예요. 자기 일대(一代)에서 '아이쿠 좋아라, 아이쿠 좋아라!' 이렇게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작다구요. 이게 크다구. (그림을 그리시면서 말씀하심) 이렇게 보게 되면 '아 나는 행복한 사람 이다'고 생각한다는 겁니다. 각도로 보면 요거, 요거, 요렇게 돼 있어요. 이거 지나게 되면 이만큼 행복합니다. 어떤 사람은 반대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대로 들어가는 거예요. 그러니 얼마나 불행합니까? '행복은 아이쿠…' 나중이 더 높다는 겁니다. 이것은 역사적인 인연을 탕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와 같은 싸인 커브(sine curve)라는 것은 한 개인이 그렇고 한 가정이 그렇습니다. 또한 한 씨족이 그렇고 한 민족도 그렇습니다. 이 커브가 클 뿐이지 민족도 그렇다는 거예요. 세계를 보면 세계도 그렇다는 거예요. 이것이 하나는 내려가는 운세라면 하나는 올라가는 운세라는 겁니다. 싸인 커브, 이것이 심판대입니다. 타락되었기 때문에 인류는 타락세계에서 육천년간 기반을 닦아 가지고 비로소 천국세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아무리 어떠하더라도 박자를 맞추는 사람입니다. 종교가 그렇게 해온 것입니다. 수천년의 운을 맞자! 수천년 고생해 왔지만 한때에 찾아오는 수천년의 운을 맞자는 것입니다. 여기서 출발하여 이 기간에 천년 운세를 맞을 것입니다.
그래서 개인생활을 혁명하고, 가정생활을 혁명하고, 친척이나 종족생활을 혁명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나라의 백성으로, 민족으로 태어나 군왕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왕으로 보내져 가지고 배반자의 길을 가고 산중 수도를 한 것은 무엇 때문이냐? 어떻게 보면 인간으로서는 낙오자와 같은 입장에 섰지만, 그것은 무엇이냐? 한 나라의 국운을 겨루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운수에 도수를 맞추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 무리들이 종교인들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끝날까지 참고견디는 자는 복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끝날이 언제냐? 내리막길을 가는 비운의 역사가, 이렇게 골짜기의 비참한 운세가 새로운 해방권의 역사로 벌어져 상승할 수 있는, 안팎이 교차되는 순간이 역사시대에 벌어질 것을 종교에서는 말해 왔습니다. 그때가 끝날입니다. 그러한 시대에서 새로운 운세를 타고 천년왕국을, 지상 천국을 향하여 가야 됩니다. 그리하여 승리의 날을 맞게 될 때 거기에서는 행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아무리 행복했댔자 거기에 도달할수 없습니다. 여기는 전부 다 지옥입니다. 지옥이라구요.
그러면 여러분은 개인의 운명을 존중할래요? 개인의 운명을 타개하기 위해서 살지 말고 국가의 운명을 넘어서야 합니다. 그래야 역사는 세계적인 사상의 시대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한 세계주의 시대가 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계의 종착점을 향해서 가는데, 그 가는 데는 그냥 가는 것이 아니라 가르쳐 주고 갑니다. 세계적인 종말, 세계적인 사상시대가 도래하는 것입니다.
그 사상시대에는 무엇으로 연결시켜야 하느냐? 인정(人情)이 아니라 천정(天情)을 결합할 수 있는 사상이어야 합니다. 그 사상 가운데 천정을 결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인정을 통할 수 있는 사상도 있겠지만, 천정을 통할 수 있는 사상, 인정과 천정을 결합할 수 있는 통일적인 사상이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려온다면 천정을 갖고 내려오고 인간이 올라간다면 인정을 가지고 올라가기 때문에, 인정과 천정이 한 점에 합해질 수 있는 합일점이 반드시 있을 것인데 그것이 뭐냐 하면, 인간이 바라는 최대의 희망의 자리, 상봉의 자리가 아니겠어요?
사람으로 말하면 참다운 남자가 참다운 여자를 만나는 자리요. 참다운 땅이 참다운 하늘을 만나는 자리요, 참다운 인정이 참다운 천정과 결합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겠느냐? 인정이자 천정이요 천정이자 인정, 인정과 천정이 합해 가지고 인정도 아니요 천정도 아닌 것이 되어 새로운 행복과 이상적인 모든 것이 화해지고 그러한 행복의 출발이 이 땅에 벌어 지면 그것이 지상천국이요, 세계 만민이 희망하는 자유세계, 자유동산이 아니겠느냐?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혜로운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천년을 그려 살고 만년을 그려 사는 사람입니다. 만년을 맞기 위해 사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하루 노력해 가지고 하루 성공하기를 바랄래요? 하루 노력해 가지고 그것을 홀딱홀딱 다 까먹고, 또 하루 노력해 가지고 홀딱 다 까먹고 이런 사람 될래요? 하루 고생하고, 이틀 고생하고, 사흘 고생하고, 10년 고생하지만 그 이상되는 20년 행복이 있으면 어떻게 할래요? 그러면 '야, 20년 행복을 위해서 10년 고생을 해야지!' 한다는 거예요. 보라구요. 우리가 일생 동안 고생하면 영생토록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하나님이 보장해 줍니다. 그러니 여러분 개인에서 승리해야 됩니다.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 사상은 천주주의(天宙主義)입니다. 천주주의라는 말이 재미있습니다. 천주가 뭐냐? 집이예요, 집. 천주주의는 하나님의집 주의입니다. 집이 왜 좋으냐? 집 없는 사람은 불쌍한 사람입니다. 집을 갖지 못한 사람은 고향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렇지요? 집은 내가 태어난 곳이요, 내가 자란 곳이요, 내가 사는 곳이요, 내가 죽는 곳입니다. 그렇지요? 그렇게 돼 있다구요.
인생의 시작에서부터 잘살든 못살든 모든 인연을 여기에서 다 풀고 다 전시를 했다가 나중에는 보따리 싸 가지고 그 집에 가는 것입니다. 날때에도 그 집에서 울며 났고, 갈 때에도 울고 가든가 웃고 가든가 그 집에서 가야 되는 것입니다. 모든 시작과 끝을 최총적으로 종결지을 수 있는 곳이 집입니다. 그렇지요? 그래서 집이 좋은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 집이 어떻게 돼 있느냐? 하나님을 빼놓은 집이 됐습니다. 주인을 빼놓은 집이 됐습니다. 그러니 타락한 세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주로 한 집이 아니라 개인을 위주한 집이 됐습니다. 김 아무개란 간판이 붙은 집이 됐습니다.
통일교회 교인들은 앞으로 문패를 말이예요. 다른 표식을 해야 됩니다. 성을 뭐라고 갈면 좋겠어요? 여러분 성을 갈면 좋겠어요, 안 갈면 좋겠어요? 어디 대답해 보세요. 타락한 조상으로부터 태어나 누더기 보따리를 이고 다니는게 좋아요. 집어치우는게 좋아요?「집어치우는게 좋아요」 그리고 아무개 김씨의 딸로 태어난 게 좋아요, 나빠요?「나쁩니다」그럼 나쁘면 어떻게 할 거예요? 그래, 성을 간다는 말이 있지요? 성을 갈게 되면 종자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통일교회는 성을 갈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무슨 성을 만들 것이냐, 그거 생각해 봤어요? 세상에 제일 좋은 글자가 무슨 자냐, 생각해 봤어요? 제일 좋은 글자가 하늘 천(天) 자라구요. 그 다음에 제일 좋은 글자가 뭐냐? 아버지 부(父) 자입니다. 그 다음에 제일 좋은 글자가 무슨 자냐? 지아비 부(夫) 자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게 되면 재미있습니다.
제일 좋은 글자는 하늘 천(天) 자라구요. 그것이 제일 좋은 글자지요? 하늘 천(天) 자를 보면 이 글자는 두 사람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부(父) 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 부(父) 자는 뭐냐 하면 여덟 명이 연결되어 있어요. 여덟 사람씩 둘이 합한 거라구요. 그렇지 않아요? 이게 사람 인(人) 자라구요. 이것은 두 사람 표시라구요. 그렇지요? 따로따로 나누면 두 사람이라는 거예요.
그리고 이 지아비 부(夫) 자는 재미있는 것이 뭐냐면, 이 부(夫)자는 하늘을 뚫고 올라갔습니다. 이게 두 사람이긴 두 사람인데, 부(夫) 자입니다. 그렇지요? 그렇기 때문에 옛날에 한문을 지은 사람들은 천리를 통해 다 계시받고 지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문선생이 설명을 그렇게 해서 그게 근사하다고 생각하지 말라구요. (웃음) 이 부(夫) 자, 이놈은 하늘보다 높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도 외톨이로는 있을 수 없다는 그 말입니다. 지아비를 가져야 된다 이겁니다, 그것은 뭐냐? 부부가 돼야 된다 이거예요. 부부가 될 땐 그것이 이렇게 부(夫)가 된다구요. 그래서 제일 높다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하늘은 높고 땅은 제일 넓은데, 그보다 높다는 것입니다. 전부 다 두 사람입니다. 두 사람이지요? 아버지 부(父)자도 이것을 (八) 없애 버리면 십자(十字)가 됩니다. 십자 아니예요? 이 두 아버지는 복귀 아버지가 되는 거예요. (웃음) 이것을 보면 재미있습니다. 어질 인(仁) 이니 무엇이니, 이것도 전부 두 사람을 말하지 않아요?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좋은 것은 어떤 것입니까? 외톨이가 좋아요? 눈이 여기에 딱 하나만 있으면 좋겠어요? 귀가 여기에 나 있어서 이만큼 끄트머리가 나오니까 보기에도 좋은 거예요. 눈이 움푹 들어가 둘이 까박까박하고 말이예요. 전부 다 둘이 아닙니까? 입술도 둘이고 전부 둘로 돼 있습니다. 둘이 합해야 좋다! 이렇게 돼 있다구요. 내 눈 하나 병신 돼도 좋소! 그런 사람 돼 보라구, 좋은가. 좋은 것은 혼자 좋은 법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도 별수없습니다. 하나님 혼자 '하하하' 웃는다면 그놈의 하나님 미쳤지 하더라도 별수 있어요? 그러니 사람을 안 지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생각해 볼 때, 우리는 천주주의(天宙主義)입니다. 이제 보라구요. 집 주(宙)지요? 그렇지 않아요? 이 집 주(宙) 자는 밭 전(田), 밭 전(田)자보다 높지요? 요 위에 갓머리를 덮어씌운 것을 말합니다. 평안할 안(安) 자 하게 되면 갓머리를 씌워 놓은 그 안에서 여자가 살고 있는 것을 말하지 않아요? 그러므로 여자는 행복하려면 울타리 밖으로 나가면 안 된다. 그 말이예요.
자유(自由)라 하면 말이예요. (판서하심) 여기를 보면 이것은 우주를 말합니다. 이건(自의 目) 뭐냐? 소생, 장성, 완성. 이것은(目의 )의 뭐냐? 하늘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한 사람은 자유입니다. 자유는 자주적인 입장을 말합니다. 쉴 식(息) 자를 봐도 재미있다구요. 이것을 갖다 놓고 하나돼야 쉬는 것입니다. 이것(自)은 천지를 말하는 거라구요. 천지와 마음이 하나돼야 쉰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라구요. 한문이 참 재미있는 글자입니다. 무슨 영어의 알파벳보다 재미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동양사상은 계시적 사상입니다. 이런 건 뭐 비사로 듣고….
통일교회 교인들은 이제 천주주의를 그려 나가야 되겠습니다. 천주주의는 집 주의입니다. 하나님의 집 주의입니다. 하나님의 집 주의니 그 집살림살이는 하나님주의 살림살이입니다. 하나님은 세계의 왕이요, 세계를 위한 살림살이를 주도해 나가는 주체이기 때문에 그러한 살림살이를 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주주의 사상권내에 있는 통일교회 축복가정들은 자기를 위해 살아서는 안 됩니다. 자기의 남편이나 자기의 아내만을 위하여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돼 있지 않습니다. 옛날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가정을 위주하고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되 혼자서는 구원 못 받는 것입니다. 혼자서는 못 가는 겁니다. 절대 혼자 못 갑니다. 혼자는 천국가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한 이념의 터전을 이 지상에서 새로이 출발시킨 것이 통일교회입니다, 그러므로 통일교회는 앞으로 무엇이 주인이냐? 가정입니다. 전통적 가정입니다.
타락은 가정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가정에서 하나님을 모셔드리지 못했으니, 가정에서 먼저 이루어야 합니다. 그것이 복귀입니다. 비운의 역사를 거쳐 떨어져 내려왔으니 올라가야 되는데 세상과 짝해 가지고는 안됩니다. 하나님만을 생각해야 됩니다. 하나님만 생각하지 않고는 올라갈 길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타락의 비운권내에 살고 있는 나라고 하는 존재는 어떠한 원인을 따라 빚어진 결과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그 결과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개인이 개인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보다 큰 것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산 기준에 따라 선의 실적기반이 닦아지면 그 선은 자기의 것이 아닌 전체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을 중심삼고 남자와 여자가 하나가 되면, 그 가정의 사랑이라는 것은 남자의 것도 아니요 여자의 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 가정의 본래의 사랑이 나를 심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님이 인간과 사랑할 수 있는 창조이상적 그 사랑으로 모든 천지 인간의 가치를 심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기원을 중심삼고 가치 판단을 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을 대하여 자기만을 사랑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자기만을 절대적으로 사랑하라고 한 것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냥 그대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절대적인 신앙과 절대적인 신념을 가진 자만이 돌아갈 수 있기 때문에, 이 길을 거쳐가지 않고는 인연과 인정의 길을, 인연과 관계되어 있는 지금까지 자기의 과거사를 청산지을 수 없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여러분들은 위대한 혁명가들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일대에 있어서 세계사적인 혁명을 제시해야 할 위대한 혁명가요, 세계를 바로잡을 수 있는 위대한 선봉자들인 것을 자각해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신념이 앞서야 됩니다. 그 신념을 위해서 기거동작하고, 그 신념을 통해서 일방통행하게 될 때는 그것은 반드시 끝이나는 것입니다. 그 끝에는 대해(大海)가 있는 것입니다. 지류로서, 남이 보기에는 북으로 흘러가는 줄 알았는데 하나의 구비를 돌아 흘러가게 될 때에는 남으로 흘러간 것보다 앞설 수 있는 길도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도 그렇지요? 돌고 도는 길이요 반복되는 것 같은 길을 종교인들이 걸어왔지만, 최후에 대해를 향해서 하나의 문호를 개방하여 해방의 기수가 될 수 있는 역사적인 길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러한 길로 내몬다는 것을 알고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 종교인들이 가는 길이 얼마나 복된 길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알겠어요?「예」
이제 1972년도도 중반을 넘어섰습니다. 우리들은 지금 '꿈에도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선생님이 1965년도에 제 1 차 세계노정을 나서면서 여러분에게 우리의 노래로 부르라고 해 가지고 그때부터 부르기 시작했지요? 지금까지 7년 됐습니다. 1972년도를 들어서면서 남북이 현재 정치적인 협상을 하지만, 통일의 기운을 바라보며 나가는 이것은 천지의 때가 가까이 다가왔기 때문임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망하느냐 흥하느냐, 사느냐 죽느냐 하는 문제, 탕감이라는 것은 저 동쪽 끝이나 서쪽 끝에 가서 되는 것이 아니라 너와 내가 서로 씨름을 해 봐야 되는 것입니다. 하늘땅 앞에서 공판을 해야 됩니다. 누가 참이냐 하는 것을 제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참이 참으로 결정되기 위해서는 일대 씨름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네가 이기느냐 내가 이기느냐 씨름을 해야 할 민족적 운명이 지금 남북으로 갈라진 한국의 운명이 아니예요?
서로 싸우게 되면 남한이 이기겠느냐. 북한이 이기겠느냐? 그것은 누구도 자신 못 합니다. 그러면 이것을 누가 가려 줄 것이냐? 북한은 북한이 이겼으면 좋겠다고 하고 남한은 남한이 이겼으면 좋겠다고 서로 엇갈린 목적을 가지고 있으니, 그 소원을 이루어 줄 자는 누구냐? 문제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있다면, 북한만 사랑하거나 남한만 사랑하는 사람 가지고는 안 된다고 할 것입니다. 남북한을 넘어서 북한 땅의 백성을 남한땅 백성이상으로 사랑하고 남한 땅 백성을 북한 땅 백성 이상으로 사랑할 수 있는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통해서 그러한 거국적인 운동이 전국 방방곡곡에 메아리칠 수 있는 활동을 하게 할 것입니다. 그런 활동체제가 벌어지게 될 때는 그 운동을 통해서 북한도 흡수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는 것이요, 남한도 흡수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세계적인 비운의 역사 가운데서 하나님이 이 민족을 통하여 새로운 역사가 개문되기를 바란다면, 그러한 커다란 기대를 가진 어떤 개인이나 어떠한 단체나 어떠한 무리가 나타나서 그러한 국민운동을 주도해 주기를 바라실 것이 아니냐? 이러한 생각을 해보게 될 때, 오늘날 이 삼천리 반도를 중심삼고 그러한 일을 할 성싶은 단체가 없지 않느냐? 기성교회가 그러한 일을 할 수 있겠느냐? 나장로나 박장로가 그러한 일을 할 수 있겠느냐? 자기 교단의 이익을 무시하면서 국가의 운명과 세계의 운명을 가려 나가자고 몸부림치고 그것을 지향하며 지금까지 물고 나온 것은 통일교회밖에 없지 않느냐? 여러분 그것을 알아요? 그거 아느냐 말이예요.
이제야말로 남한 땅을 전부 샅샅이 뒤지고 북한 땅으로 들어가 가지고 방방곡곡에 하늘의 깃발을 꽂기 위해 재무장해야 할 때가 아니냐? 그런데도 불구하고 남한 땅에 나가서 전도하기가 싫어요? 이제야말로 남편이 남한 땅을 지키면 그 아내는 북한 땅에 가서 북한을 구해야 할 것이고, 아내가 남한 땅을 지키면 그 남편은 북한 땅에 가서 북한에 살고 있는 동포를 구해야 될 것이 아니예요?
남북이 엇갈려 파탄되었던 한 가정을 탕감복귀하기 위해서는 우리 통일교인이 남북으로 갈라져 가지고 심정적 인연을 중심삼고 손에 손을 잡고 공산권과 자유세계로 분단된 이 난관을 넘어 가지고 통일의 기원을 열매 맺을 수 있는 가정적 인연의 승리적 터전을 닦아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민족 해방을 바란다는 것은 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언제나 보따리를 싸 놓고 살아야 됩니다. 남북을 자유롭게 출입하게 될때까지,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는 그 터전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언제나 피난 보따리를 싸 놓고 나그네 신세의 놀음을 해야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과 마찬가지입니다. 목적을 빨리 성사시킬 수 있는 길이 있게 되면 홍해로 가라 할 때 가야 됩니다. 그런 시급한 때가 왔습니다. 우리 한국의 입장에서 볼 때에 인연의 운명길을 통해서 이것을 연결시키면 얼마나 좋겠어요. 이제야말로 우리가 승리할 때가 왔습니다. 알겠어요? 이제야말로 승리할 때가 왔다구요.
옛날에는 벽돌담 너머에다 전부 다 가두어 놓고 일했지만, 이제는 벽돌담을 헐고 문을 열어 놓고 이마를 맞대고 일할 때가 왔습니다. 누가 더 영향을 미치느냐 하는 실력과 실적을 가지고 공격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실적 앞에는 꼼짝 못하는 것입니다. 철두철미한 사상과 구상이 있으면 그 구상은 반드시 실천해야 됩니다. 실천이 구상보다 나을 때에는 그 이념은 급진적으로 세계를 통일시킬 것입니다. 이상은 좋은데 실천에 있어서 미급한 분야가 과정에 남아서 역사시대를 거쳐 나가는 한 통일세계는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을 지도하는 지도자는 강력히 내몰아서 현실 생활에 있어서 보다 이상적인 구조의 실적의 가치를 드높여야 되겠습니다. 통일교회는 모르지만, 통일교회의 실적을 보아 가지고 국가나 혹은 세계가 공인할 수 있는 기준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것을 만들지 못하면 하나님의 뜻이고 무엇이고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을 찾아오는 인연과 국운, 모든 것을 대해 여기에서 우리가 국가를 구하겠다는 새로운 신념과 절대적인 신앙을 가지고 세계를 구하기 전에는 죽을 수 없다고 해야 합니다. 그런 신념의 결합운동이 통일교회를 중심삼은 주체사상이 되어, 남한 땅을 움직이고 북한 땅을 움직인다면, 나라는 망하더라도 세계를 구할 수 있는 길은 남아지는 것입니다. 통일교회가 다 쓰러지더라도 한 권의 책에 이렇게 싸웠다는 역사의 한 페이지만 남아 있으면, 그 한 권의 책에 남아진 역사로 인해 세계를 다시 점령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내가 다년간 주장해 온 것은, 공산당들이 나라를 위해 애국애족하는 사상을 갖고 나온 통일교회를 보고 자기들보다 낫다고 증거할 수 있는 재료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북한 땅에 들어가서 누가 더 나라를 사랑했느냐 묻게 되었을 때, 그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옳소! 통일교회가 그렇소' 할 수 있는 재료를 수습 할 수 있는 때는 이미 지나갔습니다. 그렇지요? 피어린 역사의 길, 엇갈린 역사적인 길을 개척해 나온 그 생활이 슬펐다면 슬프고 비참하였다면 비참하였지만, 그것이 자기 일신의 행복을 위한 것이 아니라 민족의 해방과 세계의 평화를 위한 하늘의 사자로서 그런 일을 했다면 이는 길이길이 역사에 남아질 것이 아니겠느냐? 그 실적이 드높이 빛나게 될 때에 이 터전을 통하여 남북한의 해방은 물론이요, 아시아의 새로운 해방의 종소리는 울려 퍼질 것이고, 세계의 해방의 기운은 여기서부터 솟구쳐 오를 것이 아니겠느냐? 그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지금까지 이것을 바라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보게 되면 말이예요. 여기에 있는 아줌마들, 옛날에는 뭐 본부에 드나들고 할 때는 눈물을 흘리고 야단하더니 다 어디로 갔어요? 여러분 이제는 허리띠 졸라매고 또다시 보따리 쌀 준비를 하라 구요. 우리 통일교회가 또 가정을 버리고 전도 나가게 되면, 그렇게 했다고 그 남편이 통일교회에 와서 땡깡을 부리더라도, 그런 꼴을 또 보더라도, 이제는 북한을 위해서 배치해야 할 때가 왔다 이겁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남한 땅에 배치되는 줄만 알았지요?
자, 여러분 그냥 그대로 있으면 좋겠어요? 흥해야 되겠어요, 망해야 되겠어요? 그냥 그대로 있는 게 좋아요? 좋지 않으면 얼마만큼 좋지 않아요? 기분 나쁠 만큼 좋지 않아요? 문제라구요. 그저 그렇소, 그래요? 기분 나쁠 만큼 좋지 않아야 됩니다. '이놈의 집이 그냥 그대로 있다니 기분 나쁘다구' 이래야 돼요. 여러분이 지금 앉아 있는 그 자리가 기분 나빠야 된다구요. 지금 이래 가지고는 안 된다고 느끼는 그 자리에 그냥 있다가는 망하는 거라구요. 그래요, 안 그래요? 망하는 거예요. 아무리 큰소리쳐도 망한다구요. 안 되거든 혁명을 해야 됩니다. 안 하겠다면 들이패서라도 끌고 가야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우리 자체내에서 정비해야 된다는 공동적인 규약을 세워 가지고 코를 꿰어서라도 끌고가야 됩니다. 그래야 되겠어요, 안 그래야 되겠어요?
이것을 보라구요. 이스라엘 민족이 내일이면 애급을 떠나야 할 텐데 자기 사촌, 삼촌, 친척들 중에 '야, 야, 나는 여기서 이렇게 살 거야. 야이 녀석아, 난 애급을 위해서 사는 놈이야. 난 애급 사람 되겠다구. 언제 이스라엘에 들어가서 언제 나라를 이루고 어떻게 살아!'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거예요. 일본에 살고 있는 교포들이 일본 사람으로 귀화하는 운동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요즈음에 들어와서 7천 명 이상이 귀화했 다는 보고를 듣고 있습니다.
만일 그러한 이스라엘 민족을 그냥 내버려 두면 전부 망하는 거라구요. 애급 사람들의 장자를 때려죽일 때, 애급에 이스라엘 민족이 남아 있으면 하나님이 장자뿐만 아니라 차자까지도 그냥 내버려 둘 것 같아요? 하나님은 애급에 남아 있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장자뿐만이 아니라 차자까지도 친다는 약조를 세우고서야 장자를 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남는 날에는 큰 것 작은 것 할것없이 모가지다 이거예요.
이렇게 된다는 것을 알았다면 '아버지 갑시다' 할 때, 안 가겠다고 하면 '이놈의 영감…' 하고 모가지를 끌고서라도 가야 하는 것입니다. (웃음) 그게 효자예요, 불효자예요? 대답해 봐요. 「효자입니다」 아버지 모가지를 끄는데 효자예요! (웃음) 그럴 때가 있다는 거예요.
아무리 호랑이같이 무서운 남편이라도 죽게 될 때는 살 수 있는 길을 찾는 겁니다. 강아지 사타구니에 들어가 엎드려 있어야 살 수 있다면 강아지 사타구니에 들어가 엎드려 있어야 합니다. 살 수 있으려면 그래야 된다구요.
끝날에는 아내가 남편의 말을 들을 줄 알아야 되고, 남편은 아내의 말도 들을 줄 알아야 됩니다. 늙은 영감 할아버지는 손자의 말을 들을 줄도 알아야 합니다. '내가 80이 넘도록 쓴맛 단맛 뭐 짓궂은 것 다 알고 있는데' 하면서, 여섯살짜리 손자 녀석이 와서 '할아버지 불났어요!' 하는데도 '이 녀석아. 내 코가 메지 않았어, 연기 냄새가 나지 않는데 무슨 말이야!' 했을 때, 만약 그 할아버지가 감기가 걸려 가지고 코가 멨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웃음) 직접 보고 이야기하는데 가만히 앉아 가지고 그러면 되겠어요? 벌써 보고 듣고 행동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허, 난 보지 않고 냄새만 맡아 가지고도 안다!' 하겠어요? 그런 수작들 그만두라는 거예요. 지금이 그런 때입니다.
젊은 사람들은 동원되고 늙은이들은 잠만 자고 있으면 되겠어요? 이제부터는 여러분이 전부 나가 가지고 전체적인 훈련을 해야 되겠습니다. 그냥 그대로 따라가다가 쉬면 안 됩니다. 딴 패가 나와요. 여기 남한 땅에서 사랑한 무리가 북한 땅에 가서 사랑을 해야 합니다. 그러려니 여러분이 북한 땅을 맡아야지요. 남한을 사랑했다고 한다면, 아벨 나라만 사랑하면 돼요? 가인 나라도 사랑해야지요. 가인 나라를 사랑하지 못하면 복귀가 되지 않습니다. 그것이 원리의 가르침이 아니예요? 준비해야 됩니다. 그러지 않고는 남북으로 엇갈린 이 땅을 다시 찾아 세울 수 없습니다. 이러다가는 언제든지 치어 죽습니다. 이것을 밟고 올라서야 되는 거예요.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자, 여러분 동원하면 좋겠어요, 안 하면 좋겠어요?「해야 되겠습니다」 어떻게 너만 하면 좋겠지? 다 해야 되겠어요, 몇몇 특수부대만 해야 되겠어요? 다 해야 되겠지요?「예」 그러면 아주머니들은?
보세요, 집은 늙은 사람들이 지킵니다. 늙은 사람들이 집을 지키는 데는 왕입니다. (웃음) 도적놈이 오는 데는 누가 지키느냐? 늙은 고양이가 쥐 잘 잡고, 늙은 개가 집 잘 본다구요. 사람이 집을 지키는 데도 늙은 사람이 잘 지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옛날의 예언자들은 전부 늙은이들이 었습니다.
요즈음은 때가 달라졌기 때문에 늙은이 시대는 지나가고 젊은이 시대, 산시대로 들어갈 때가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젊은이 시대로만 끝나는 게 아닙니다. 젊은이 시대는 늙은이들의 꽁무니를 붙들고 빙글빙글 돌아가야 됩니다. 그래서 통일교회는 지극히 젊지만 할머니 궁둥이를 붙들고 따라다녀야 됩니다. 그리고 할머니는 늙기는 늙었지만 젊은이들의 궁둥이를 붙들고 따라다녀야 됩니다. 그것은 무슨 말이냐? 젊은이가 가는 곳에 늙은이가 못 가고, 늙은이가 가는 곳에 젊은이가 못 간다는 말이예요?「아닙니다」 그러면 뭐예요? 같이 가면 됩니다. 그렇지요? 같이 가면 왜 안 된다는 거예요?
할머니가 가는 데에 젊은이도 가라! 그 말은 무슨 말이냐? 지방에 나가서 개척을 하게 될 때 젊은이들만 찾아다녀 가지고는 안 되는 겁니다. 집을 지키는 할머니들도 찾아가라는 거예요. 할머니들은 집을 지키기 때문에 사연을 잘 아는 겁니다. 그래서 '할머니. 그 동안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라고 물으면,'아, 너 왔니! 내 말좀들어 봐라!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다. 아무날은 이렇고 아무달은 이랬다! 그랬다 이랬다'고 얘기해 주는 겁니다. 이렇게 사연을 잘 아는 사람은 그 집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 외에는 잘 모릅니다. 그렇지요?「예」 그렇기 때문에 지방에 가서 일하고 돌아오면 그 할머니한테 가서 보고하는 것을 기뻐해야 됩니다.
이 젊은 녀석들은 '아이고 보고하려면 젊은 사람 찾아가야지, 할머니가 뭐야? 그래서는 안 됩니다. 돌아가야 된다구요. 나이 많은 할머니는 나이 많은 할머니만 만나면 되겠어요? 나이 많은 할머니는 전부 다 젊은 사람 밀어주고, 또 젊은 사람은 할머니를 밀어 주고, 이렇게 자꾸자꾸 밀어 주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이렇게 밀어 주면 망해요, 굴러가요? 빨리 굴러갑니까. 천천히 굴러갑니까? 빨리 굴러갑니다.
우리 할머니들은 엎드려서 기도만 해서는 안 됩니다. (웃음) 그 반대로 따라가 보라는 거예요. 따라가 보고 '아이쿠. 우리 손자와 같은 젊은이들 수고가 많은데' 하며 누룽지도 좋다는 거예요. 누룽지 알지요. 누룽지, 새까만 누룽지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눈물 콧물, 때나 코딱지, 혹은 다른 것이 묻어 있어도 좋다는 거예요. 누룽지 보따리 하나 들고 땀을 흘리며 천리길을 가는 사람은 복 받기 마련입니다. 알겠어요. 할머니들?
이제는 기도만 하는 건 필요 없어요. 내가 기도만 하라고 그랬어요? 지금까지는 기도하고 정성을 들여 준비하는 때였어요. 준비했으니까 이제는 실천할 때라구요. 기도하는 할머니도 한 달에 세번씩은 저 먼데 다녀오라 이거예요, 먼데…. 할머니가 손자들을 사랑해 줘야 그 집안이 잘될 게 아녜요? 그렇지 않아요? 여기에 온 할머니들, 열심히 기도는 했지만 다른 사람에게 밥 한 끼 갖다 주기 위해서 금식한 일이 있었어요, 없었어요? 없었다구요.
그래서 이번에 선생님이 책임자들에게 지시한 내용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의 산하단체의 모든 장들은 한 달에 한 번씩 지방에 다녀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럴 때가 왔다 이겁니다. 자기 혼자만 잘살려고 할 때가 아니라는 거예요. 알겠어요? 살림살이하는 아줌마들! 선생님도 옷이 구겨졌지만. 이거 왜 그래요. 선생님이 아침에 기도하느라고 옷이 구겨졌으면 양심에 가책을 안 받지만 도적질을 갔다가 그랬다 할 때에는 양심의 가책을 받는 거예요. (웃음) 종류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이번에 가정을 동원한 것은 3년 전부터 예고했던 것입니다. 가정 주부 들을 동원한다고 했더니 '설마 축복해 준 선생님이 원리에 위배되는 일을 하겠나! 잘살라고 했는데 뭐 또 갈라 놔! 그럴 리가 없어!' 하겠지만, 없긴 왜 없어요? 통일교회 교인들도 그렇거늘, 기성교회 교인들도 동원 한다면 통일교회 교인들을 그냥 놔 두지 않을 것입니다. 길을 잘못 들면 망하게 마련입니다. 그렇지요? 약을 잘못 먹으면 죽게 마련입니다. 독약을 먹고 죽게 되어 있는데도 안 죽어요? 여기 보라구. 내가 뭐 임자네들보다 못해서 이 놀음 하는 줄 알아요?(잠시 녹음이 되어 있지 않음)
하나는 종이요, 하나는 아들이요, 하나는 무엇이냐? 여자입니다. 종자 아들과 딸, 이 세 사람을 세우지 않고는 하나님이 역사하실 수 없습니다. 그것은 왜 그러냐? 에덴 동산에서 세 사람을 중심삼고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세 사람이 없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어제도 내가 수련소에서 그것을 지시하였습니다. '반드시 근본적으로 우리의 체제를 정비해야 되겠다. 사위기대복귀니만큼 이제 지방에 돌아가면 한 교회 책임자가 사위기대를 만들어야 된다. 네 사람이 하나될 수 있는 기반을 만들라'고 했습니다. '네 식구가 새로운 하늘의 가정이 되어 아침에 나갔다 저녁에 돌아오면 한 사람만 없어도 그 세 식구는 밥을 먹지 못하는 입장이 되어야 한다'그 자리에서 한 식구의 심정을 재차 강조하였습니다.
네 식구가 하나가 되어 잘 때도 같이 자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내가 할 터이니 형님 누님, 혹은 아버지는 주무십시오' 할 수 있는 그런 기운이 그 가정에서 싹터야 합니다. 그래야 그 가정이 행복한 가정이 됩니다. 하나님이 행차하더라도 그런 가정에 찾아와서 쉬려고 할 것입니다. 싸우는 가정에 가서 쉬려고 하겠어요?
내가 요전에 제주도에 갔을 때 기분 나쁜 일이 있었습니다. 제주도에 가면 기념으로 파인애플을 몇 개 사옵니다. 조금 싸게 파인애플을 파는 집이 있었는데 지금은 약 8키로미터쯤 떨어진 곳으로 옮겨 갔더군요. 그집을 찾아갔었어요. 그 주인 아주머니는 뚱뚱하면서도 얼굴이 구수구수 하게 생겼습니다. 흰 찰떡에 시꺼먼 팥고물을 묻힌 것이, 보기에는 그렇지만 맛은 근사하고 감칠맛이 더 있듯이…. 그런 아주머니였습니다. 얼굴이 구수구수하게 생긴 것이 그저 돈냥이나 붙어 있겠다 생각해 가지고 다음에 올 때는 틀림없이 돈 좀 모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구요.
제주도에 온 김에 기념품으로 파인애플을 사 가지고 가자고 생각하여 그 집을 찾아갔는데, 보니까 큰 밭에 파인애플 농장을 만들어 놓고 양옥집을 척 지어 놓았더군요. 판국을 보니까 아주 격식을 잘 갖춰 놓은 집이더군요. 이거 옛날에 왔던 집하고는 다른데 하고 떡 들어가 가지고 주인을 만나 파인애플을 사는 도중인데, 아, 안방에서 왱가당 댕가당, '야, 이놈의 자식아! 너 그럴 줄 몰랐다!' 하고 나팔 소리가 들려 오는데 근사하더구만. 아주 뭐 평안도 사투리가 절반은 섞인 목소리로, '이놈의 백정 간나 놈의 새끼 말이야!'(웃음) 그러면서 '너 그럴 줄 몰랐다. 네가 이런 집에 사는 것이 네가 잘나서 그런 줄 알아! 나를 몰라보면 안 돼! 내가 있기 때문에 그렇다구!' 아, 이렇게 그 여자가 엮어대는데 야, 그거 근사하더군요.
이 여자 틀림없이 배가 뚱뚱하고 여기가 이렇게 나왔지, 눈이 이렇게 생겼다고 생각했는데 아닌 게 아니라 나오는 것을 보니까 옛날 그 아주머니예요. 그때 나를 척 보더니 날 봤던 기억이 있으니까 '아, 옛날에 왔던 분이 아니요', '그래요? 난 모르겠는데요? 그랬어요. 안다고 하면 얼마나 창피하겠어요. (웃음) 배짱이 달라지는 거예요. 그래서 '아, 언제 한번 내가 파인애플 사러 온 적이 있었지요. 내가 모르는 게 아니라 당신을 잘 알아요' 그랬어요. 내가 아주머니에게 인사를 드렸다구요. (웃음) 그냥 그대로 파인애플을 사려고 했으면 기분 좋았겠어요, 나빴겠어요? 기분이 이상한 것입니다.
'저, 주인 양반! 아, 어디 갔소, 오늘은 봄날이라 날도 좋은데, 양지바른 곳에 가서 콧노래 부르며 춤이나 추고 놉시다! 아무개 아버지 있소, 없소!' 해 가지고 숨막히는 노래가락으로 꾀꼬리같이 노래 한 번 불러 주면 얼마나 기분 좋겠어요? 우리 같은 사람 아주 뭐 기분파라구요. 그래서 춤이나 덩실덩실 추면 얼마나 좋겠느냐 말이예요.
싸움하는 집에 찾아가고 싶어요, 노래하는 집에 찾아가고 싶어요? 어느 집이예요, 싸움하는 집에?「아닙니다」 여러분 통일교회에 와서 칭찬 받는 게 좋아요, 욕먹는 게 좋아요? 어떤 게 좋아요?「칭찬받는 게 좋습니다」 칭찬받는 게 좋지요. 그렇지만 통일교회 문선생이 번번이 욕을 하면 호락호락 그 욕을 잘 먹어. 여러분은 욕먹는 게 기분 나쁘지요? 그러나 욕먹고 더 좋은 일이 생기면 욕먹는 것도 좋다는 것입니다. (웃음)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자, 하나님도 싸움하는 집에 찾아가고 싶겠어요, 웃고 노래하는 집에 찾아가고 싶겠어요? 여러분 대답해 봐요. 어떤 집을 찾아가겠어요? 웃고 노래하는 집을 찾아갑니다. 통일교회 문선생도 어디를 지나가게 될 때,'아이고 배고파, 배. 선생님 아이구 나 배고픈데 쌀 한 말만 주소!' 그렇게 기도하는 그 집을 찾아가겠어요? 배고프더라도 선생님이 오게 되면 밀가루 부침개라도 만들어 가지고 물 한 그릇을 준비해 놓고 기다리는 그 집을 찾아가겠어요? 어느 집을 찾아가겠어요? 만일 내가 하나님이라면, 혹은 여러분이 선생님이라면 어떤 집을 찾아가 겠어요? '아이고, 배 고픈데 쌀 한 말 사다 줘요!' 하는 집을 찾아가겠어요? 아닙니다. 가난하지만 덜 먹고 정성들이며 기다리는 그 집을 찾아간다구요. 마찬가지라구요.
'오늘 교회에 가게 되면 7,4 남북공동 성명도 있었기 때문에 틀림없이 오늘 아침에 선생님께서 무슨 새로운 말씀을 하실 것이다. 뭐, 이제 복닥불나게 때려몰지 모르지'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내가 점친 것이 맞았으니 기분 좋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것이 자기와 관계가 없게 될때는 십년공부 나무아미타불된다구요. 점을 쳐서 맞추지 못했더라도 점을 쳐서 맞춘 가치 이상의 자리를 찾는 사람이 주인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알겠어요?「예」
여러분, 전도 나가라고 하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어요? '아이쿠, 우리 남편 때문에 못 나가겠소, 우리 아들딸 때문에 못 나가겠소!' 그럴 거예요? 그러면 여러분이 죽을 때에 자기 아들딸이나 남편 때문에 안 죽을 수 있어요? 죽을 때 마음대로 할 수 있어요? 아들딸 때문에 죽고 사는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느냐 말이예요. 신앙인으로서 죽고 사는 데는 마음대로 살아야 되겠어요? 왜 나는 못 살아요? 선생님은 그런 사람이 아니예요. 통일교회 선생님이 무슨 여러분들 종이예요?
선생님이 어떤 때는 길을 가다가 우두커니 서 가지고 '이 사람, 너 어디로 가니?' 내가 나에게 물어 보는 거예요. '어디로 가긴 어디로 가우! 어디 어디 뭐 하러 가우', '거긴 뭐 하러 가! 그래 남달리 왜 미쳐 가지고 날뛰는 거예요? 좀 편안히 쉴 일이지…' 한다는 거예요.
어제도 한 곳에 다녀왔더니 밤 한 시가 넘었더군요. 오늘도 다섯 시인줄 알고 일어났더니 새벽 세시였습니다. 어디를 가게 되면 한 시간 전에 일어나서 세수하고 기도를 해야 되거든요. 일어나서 보니까 한 시간을 착각한 것입니다. 선생님이 복닥불이 난 거예요. 시계가 야광시계인데 보길 잘못 본 것입니다. 틀림없이 시간이 다 됐구나 하고 벌떡 일어나서 '엄마, 시간이 다 됐는데 왜 안 일어나요?' 했더니,'지금 뭐 네 시도 안 됐는데 왜 그래요?' 하는 거예요. 그러고 나서, 일찍 일어났다고 또 잘수 있어요? 그래서 몇 시간 안 잤어요. 여기서 이야기를 마치면 열두 시경에 수택리에 가서 일본 식구들에게 이야기를 해줘야 되고 그리고 또, 종로교회에 가야 됩니다. 나는 종로교회가 어디 있는지 모릅니다. 여기에 종로교회 아는 사람 있어요? 아는 사람은 대답해 봐요. 동하가 아는지 모르겠구먼.
선생님은 새벽부터 일어나 가지고 이 놀음 하고, 또 낮에는 어디에 가야 되고, 저녁에는 어디로 가야 되고, 이거 뭐 인생이 눈코 뜰 새가 없다구요. 피곤하다구요. 선생님은 지금 이러고 있는데 여기 본부에 있는 녀석들은 꿈속이라구. 그런 사람들은 다 선생님과 인연이 없다는 거예요. 그런 사람들은 절대 안 데리고 갑니다. 앞으로. 따라오라는데 못 따라올 때에는…. 미국도 영국도 같이 갈 수 있어야 합니다. 이사 다니는 거예요, 따라와라 이겁니다. 그들이 환영할 수 있게끔 노력해 가지고 미국에서 '아, 한국에 있는 누구를 모시러 가겠습니다!' 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돼라 이거예요. 영계에서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돼라 이거예요. 그래 가지고 세계 한 12개 국쯤 돌아다니면서 살고 말이예요. 그렇게 따라 올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느냐? 그 나라가 모두 환영하면서 '그대들은…' 그럴 수 있는 역사적인 전통을 지닌 사람이 있다면, 내가 지원하지 않더라도 자동적으로 그 역사적인 전통을 알아 가지고 그들이 환영식을 해줄 수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런 사람 있어요? 어림도 없다는 거라구요.
여기를 보면, 외국 식구들이 뭐하러 여기에 와서 앉아 있겠어요? 말을 할 줄 알아요, 들을 줄을 알아요? 그런데도 여러분보다 먼저 와서 앉아 있는데, 이거 본국에 살고 있는 괘씸한 날나리꾼들은 뒷전에 다 들어왔지요. 나중에 들어와 앉아 가지고…. 내가 창피하다구요. 외국 식구들이 무슨 말인지 모르기를 잘했지, 이걸 통역을 하더라도 이 말은 빼놓고 통역해야 된다구. (웃음)
기분 나쁘지만 할 수 없다구요. 그렇지 않아요? 돼지 새끼도 눈에 뭐가 묻으면 어미가 핥아준다구. 이것들을 어떻게 하든지 입장을 세워주고, 어떻게든 뭐 해주고, 용서를 해주고 하면 지지리….
눈을 보니까 심상치 않구만. 이거 뭐 놀 때는 잘 놀았지만 망하는 거라구요. 이번에 안 나간 사람들은…. 협회장, 나갔나?「예」 어디로?
전부 다 결의합시다. 60년도에 처음으로 개척했던 곳, 1차 2차 3차로 나가서 개척한 곳으로…. 그곳에 교회가 없거든 다시 나가서 개척해라 이거야! 이것은 천명(天命)입니다. 전체가 나서야 됩니다.
이제야말로 그 땅에 서서 '하늘이여, 이제 우리 나라를 어떻게 할 것입니까? 당신이 이 나라를 사랑했거들랑 나를 봐서 살려주시옵소서!' 이렇게 나라 사랑하는 심정으로 하나돼 가지고 남북을 깔고 올라서야 됩니다. 북한의 김일성 도당이 김일성을 중심으로 하나되어 가지고 남한을 자기 나라로 만들려고 하는 그 사상을 능가할 수 있는 사상을 가지고 하나님을 중심삼고 통일적인 심정의 기반을 닦지 않으면 망하는 것입니다.
우리 선조들이 잘못하여 가졌던 비운의 역사를 하나님을 믿는 절대적인 신념을 가지고,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고 선생님을 믿고 선생님은 여러분을 믿고 셋이 절대적인 신앙으로 하나가 되어, 삼팔선을 넘나들며 어느누구보다 이 민족을 사랑하는 봉화의 횃불을 들고 나설 때, 그 움직 임이 거국적으로 나타나게 될 때는 공산당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 새로운 신념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절대적인 신앙을 가져야 돼요. 우리가 아니면 안 된다는 신념을 가지고 불철주야 노력하여 실적을 가지고 부딪쳐야 합니다.
지금까지 현정부가 우리를 얼마나 핍박했습니까? 정부면 정부가 우리가 고와서 지금까지 협조했습니까? 자기들이 갖지 못한 실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실적이 나라를 위하고 민족을 위하고 미래의 역사에 남아질 수 있는 실적이 되게 될 때는, 사람은 공의의 법도를 존중시하는 양심이 있기 때문에, 그 양심을 따라 순응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누구 앞에 변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지금 때에 들어와서는 말이예요. 북한 사람들까지 사랑해야 할 입장에 놓여 있기 때문에, 통일교회에 들어왔다가 나간 사람들, 혹은 반대한 사람들을 모두 용서해 주라고 금년부터 선생님이 말해 왔습니다. 우리들은 지금 남한 땅의 원수가 문제가 아니라 북한 땅의 원수들이….
이것을 어떻게 대비해 나갈 것이냐?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끼리 하나되어 가지고 교파면 교파를 초월해야 됩니다. 내가 지금까지 초교파운동을 해 나왔는데 통일교회에 조금이라도 이익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앞으로에 있어서 비운의 역사가 이 나라를 휩쓸 때가 오기 때문에, 그 때를 대비해서 전교파를 규합해 가지고 하나의 장벽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가 그런 때를 알고, 선도적인 입장에서 사명감을 느껴 가지고, 물질적인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그런 단체를 만들어 가지고 그에 대비하겠느냐? 선생님은 그런 걸 미리 알고 반공전선의 노선을 공고화시켜야 한다는 문제를 중심삼고 종교협의회를 형성한 것입니다.
종교협의회 형성이 다른 누구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닙니다. 여기 통일교회 문선생을 통해 가지고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렇지만 내가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금후에 사라질 사나이와 같이 아무 이름도 없이 나타나지 않고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 통일교회의 모 부처를 중심삼고 '누구는 이런데 난 왜…' 이놈의 자식! 권력을 잡기 위해서 여기에 들어왔나? 이놈의 자식들! 나는 그런 사람을 제일 싫어한다구요. 기관장들 가운데 앞으로 그런 사람이 있으면 우리의 원수야!
이제야말로 삼천만 민중이, 아내와 남편이 남북으로 갈라져 이 나라의 평화의 기수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 가지고 나간다면 해방의 종소리와 더불어 삼팔선 경계에서 아버지와 어머니 혹은 남편과 아내가 서로서로 붙안고 눈물의 상봉을 하고, 그 삼팔선이 하늘 앞에 감사의 선이 되는한 이 한국은 평화통일이 될 것이고, 하늘의 왕국으로 설정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서로서로 반목질시하는 비운의 심정을 품은 개개인이 되게 될때는 망합니다. 망한다구요. 망합니다. 그것을 누가 할 것이냐? 통일교회 밖에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8월까지의 기도 기간은 심각한 기간 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알겠어요?
이제부터 재차 비판해야 되겠습니다. '너는 정말 나라를 사랑했느냐! 교회를 사랑했느냐! 하나님을 사랑했느냐! 스승을 사랑했느냐! 하나님의 가정을 사랑했느냐!' 하는 것을 재차 우리는 비판해야 되겠습니다. 하늘이 인연지어 준 그인연을, 이 땅위에 선 자기 가정의 인연을 통하여 종족과 민족과 국가와 세계를 거쳐 영원한 복지 천국의 터전을 이루어 주기를 바라서 고이 맺어 준 그 인연을 산산조각으로 깨지게끔 하고, 자기 멋대로 갈래갈래 갈라진 그런 인연을 품고 오늘의 행복을 꿈꾸는 사람은 망하는 것입니다. 망하는 거예요. 이런 비장한 때가 왔습니다.
타락의 비운의 행로를 걷어차고 복귀의 승리의 인연을 다시 회복하여 하나님만을 위주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미치고, 하나님의 사람을 사랑하기에 미치고, 하나님의 종족을 거느리기에 미치고, 하나님의 백성을 품고 지도하기에 미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태어나서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살다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죽는 사람은 하늘나라의 백성이 될 것이고, 하늘나라의 가정의 식구가 될 것이고, 하나님의 아들딸이 될 것이 틀림없는 것을 알고, 이런 목적을 가지고 거국적으로 다시 출동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여러분이 기억해 주기를 바라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아시겠어요?「예」
자, 그러면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나라를 사랑할 수 있는 최후의 장벽을 맞이한 이때에 있어서 이것을 격파하기 위해서 선두든 어떠한 일선이든 개의치 않고 나는 돌진하겠다고 결심한 사람 손들어 봐요. 내려요.
아버지! 통일교회 문 아무개라는 사람이 이 자리에 남아져 있는 것은 저에게 어떠한 계획과 어떠한 머리가 있어서 남아졌다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고 싶은 것이 어린 자식의 마음인 것을 아버지께서는 잘 알고 계십니다. 그렇게 소원하시던 당신의 나라가 얼마나 그리웠습니까? 그렇게 그리워하시던 당신의 백성을 보기에 얼마나 시선이 둔하여졌습니까? 자녀들을 품고 그렇게 살아왔던 당신의 마음은 얼마나 상처를 받았습니까?
아버지, 불쌍한 아버지를 제가 알았고, 저희의 본향땅이 어떻다는 것을 제가 알았기 때문에, 저희의 고국과 조국의 창건이 이래야 된다는 것을 알고 난 그날부터, 저 자신의 수난길을 생각지 않기를 각오한 그날부터 제 생애에 슬픔의 길이 엇갈리고 비운의 운명이 감돈다 하더라도 하늘을 위로하겠다는 일편의 심정을 붙안고 몸부림쳐 나오던 과거지사가 어젯날같이 생생하기만 합니다. 그날들이 하루와 같이 지난 것 같은데, 벌써 10년, 20년, 30년, 40년, 50여년의 생애로 반세기의 생애를 넘어섰습니다. 인생 행로가 오르막길이 아니라 내리막길을 가야 할 길임을 알았을 때는, 아버지여! 왠지 모르게 가중된 당신의 슬픔을 더더욱 느낄 수 있는 마음이 스며드는 것을 금할 길 없사옵니다.
아버지! 소망이 크면 클수록 그 소망을 품을 수 있는 대상들이 많아야 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커져 나가는 통일교회의 세계를 바라보게 될 때에 그것을 책임지겠다고 신념에 불타 있는 자들이 얼마나 되옵니까? 당신은 언제나 히말라야 산맥의 제일 높은 최고봉을 찾아오시는데도 불구하고 그 산맥에 연결될 수 있는, 그 하나의 영산 줄기에 잇닿은 조그마한 산 언덕도 되지 못한 저희들을 바라보게 될 때에, 하늘은 언제나 불쌍한 자리에 있다는 것을 제가 깨달았습니다. 그렇지만 버리지 못하는 아버지의 심정을 알았기 때문에, 그런 자리에 선 아버지는 더더욱 불쌍한 분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지! 세상 사람들이 통일교회는 무엇이 많고 뭐가 어떻다고 하는 말을 들을 적마다, 그것은 당신의 눈물의 결정이요 피의 댓가로 말미암아 보상을 받은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잘 관리하지 못하고 치리하지 못하게 될 때에는 역사가 망하고 후손이 망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무서운 자리가 이 자리인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신 앞에 나설 적마다 아버지라고 부르는 그 말 가운데에는 당신의 천년 한이 숨어 있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당신의 마음에 사무쳐 있는 아무도 모르는 그 사정을 저는 알았기 때문에, 당신이 눈물을 흘리며 슬픔의 골짜기를 헤매이던 그러한 생애의 모든 날들에 있어서 당신이 어떻다는 것을 발견하게 해준 것도 당신의 은덕인 것을 저희들은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과거를 생각하게 될때는 타락의 선조를 가진 슬픈 후예가 된 것을 저희들은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의 현실을 바라볼 때에, 부름받은 수많은 민족 가운데서 당신을 모르는 민족이 많고, 수많은 백성들 가운데서 당신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비참한 무리들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믿을 수 없는 민족, 갈라져 있는 민족, 자주성이 강하여 통합할 줄 모르는 이 민족을 보게 되옵니다. 당신의 어떠한 인연도 찾을 수 없는 이 민족, 한 피를 받고 태어난 이 민족과 이 땅을 아버지께서는 기억하시옵소서.
이 민족 가운데서 오늘날 이와 같은 무리를 새로운 기수로 세워 세계에 문제를 제시하게 한 것도 당신의 은사인 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황공한 눈물을 금할 길 없는 생애의 길을 남기고 있는 것이 통일교회를 지도하고 있는 문 아무개의 노정인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제 생애에 제 눈에서 기쁨의 눈물과 더불어 당신 앞에 충의 도리를 다하고 효의 도리를 다하였다고 자신을 가질 수 있는 저를 발견하지 못한 것을 당신은 잘 알고 있습니다. 가면 갈수록 당신이 그리워하던 완전한 그 승리의 표적이 어떻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한스러운 복귀의 길 가운데서 그 놀음을 거쳐 개척자의 행각의 노정이 오늘날까지 계속해야 된다는 사실을 두고 볼 때, 아버지 앞에 나타나기에 부끄러운 것을 느낄 때가 많은 것을 당신은 잘 알고 있습니다.
입이 있어도 입을 열 수 없고, 마음 다하고 싶어도 당신 앞에 부끄러움을 자처하면서 주저하는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 당신을 위하는 길인 것을 아옵니다. 당신은 그런 사람의 친구가 되고, 당신은 그런 자의 지도자가 되고, 당신은 그런 자의 아버지가 되기 위해 찾아온다는 그 사실이 더더욱 감당하기 어려운 황공한 일인 것을 느끼게 되옵니다.
아버지! 통일의 무리들이 본연의 전통을 이어받을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아들은 그 아버지의 모양을 닮아야 되겠고, 아버지의 가정에서 자란 아들딸은 그 아버지의 교육을 받아야 되겠습니다. 그런 가정을 통일가가 理루어야 할 것이기 때문에, 그런 가정과 그런 자식 들의 인연을 상속받고 남을 수 있는, 권위 있는 아들딸들을 아버지께서 지극히 고대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지금까지 통일교회는 숱한 고역의 노정을 거쳐왔고, 슬픈 투쟁의 역로에서 시달려 왔습니다. 그렇지만 저희들은 알면 알수록 피곤해도 피곤타 할 수 없고 지쳐도 쓰러질 수 없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이를 악물고 있는 힘을 다하여 최후의 피곤한 심신을 무시하면서, 적진을 향하여 가일보 전진하고, 가일보 준비하고, 가일보 투쟁해서 실적을 남기기 위해 다짐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이 통일의 무리의 운명길인 것을 잘 알았습니다.
아버지! 금후의 한국을 아버지께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 3차노정과 더불어 세계의 정세는 이렇게 급변될 것을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지만, 당신은 배후에서 염려에 염려를 가하시사 저희들의 갈 길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고 저희들은 나왔습니다. 모든 것을 당신 앞에 맡기고 어려운 것을 스스로 자기의 생애의 직업과 같이, 자기 부모의 일과 같이 느끼면서 탕감복귀의 행각을 순조롭게 다 짊어지고 달려갈 수 있게 허락하여 주옵길,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여기에 참석하였던 아들딸들, 이제 당신 앞에 손을 들어 맹세 하였사옵니다. 아버지여 ! 저희들이 당신의 나라를 언제 사랑해 봤습니까? 통일된 삼천리 반도를 언제 사랑해 보았습니까? 아버지, 저는 이북 땅에서 눈물지을 때도 있었고 남한 땅에서 눈물지을 때도 있었지만, 이북 땅에 들어가서 눈물을 흘리고 당신의 심정을 가다듬고 호소해 보지 못한 남한 땅에 살고 있는 우리 통일교회 무리들에게는 북한 땅을 중심삼고 슬펐던 역사를 해원성사하고 탕감해야 할 사명이 남아 있다는 것을 망각 하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렇게 보고 싶고 그렇게 그리던 함흥 땅이 어떠하며, 그렇게 생각하던 정주 땅이 어떻더냐?'고 하루바삐 달려가서 승리의 깃발을 꽂고, 당신의 영광을 찬양하면서 당신 앞에 이곳이 거룩하다 할 수 있는, 해방의 은사를 감사할 수 있는 무리들로서 나타나겠다고 생애를 걸고 밤을 지새워 수난길을 극복하면서 승리를 다짐할 수 있는 영광된 무리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옵길,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7월, 8월, 9월, 이 3개월을 아버지께서 지켜 주시옵고, 금년을 지켜 주시옵소서. 1974년까지 제 2 차 7년노정이 끝나는 이 3년노정에 있어서 이제 통일교회가 민족을 대해서 사명해야 할 중차대한 시점으로 접어든 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자기를 믿고 아버지를 믿고 스스로 담판지어 나갈 줄 아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옵길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니다.
남아진 그날들과 오늘 저희들의 모든 생활을 당신 앞에 맡기고 기여하오니, 그 마음이 일편단심 그날과 더불어 전진하게 허락하여 주옵길 부탁하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님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니다. 아멘.
여러분이 소속해 있는 이 교회는 종로교회입니다. '종로' 하게 되면, 어떠한 인상이 드느냐? 종(鍾)이 생각납니다. 종이 있는 거리라는 것입니다. 화신 앞에 큰 종이 있는데, 에밀레 종이 아니고, 무슨 종이라고 하나요? 아뭏든 종각이 있지요? 그 종각을 연상케 됩니다.
종은 새로운 소식이나 특별한 소식을 멀리, 많은 대중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울리는 것입니다. 그 종소리가 울리게 되면 나라에 새로운 일이 생겨나고, 그 종소리가 울리게 되면 특별한 사건이 벌어졌다는 것을 우리가 연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 종로교회 사람들은 통일교회에 있어서 언제나 새로운 사건을 제시하는 데 특별한 사명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번에 이곳의 책임자로 온 박종구군은 아주 개척정신이 농후한 사람입니다. 남이 가는 길을 따라가기를 좋아하지 않고, 남이 하지 않은 새로운 일을 선두에 서서 하기를 좋아하는 기질이 있다는 것을 지난 몇 개월 간을 통해서 여러분이 잘 알고 있을 줄 압니다.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충주에 있을 때 성화학원을 신설해 가지고 많은 영향을 미친 그런 경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만큼, 여러분이 이런 책임자를 만난 것이 종로교회와 인연이 있어서 그렇지 않느냐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런 의미에서 종로교회는 통일교회에 있어서 새로운 사건을 일으킬 수 있는 하나의 모체가 되었으면, 서울 장안에서 새로운 문제를 제시하는 교회가 되었으면 하고 바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새로운 종소리, 새로운 종을 울리는 데에는 어떤 의미의 종을 울려야 되겠느냐? 좋은 의미의 종을 울려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나라로 말하면, 나라에 희소식이 있어 가지고 그것을 서울 장안 사람 전체 앞에 알리기 위한 종이 되어야지, 나라가 비운을 맞아 가지고 그 비소식(悲消息)을 통고하기 위한 종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종소리에는 두 종류가 있을 것입니다. 한 나라의 사건을 두고 볼 때, 종을 울리게 되는 데는 그 내용에 있어서 두 종류가 있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는 좋은 일이요, 또 하나는 나쁜 일입니다, 이렇게 나라면 나라의 운명을 통고하기 위해서 종을 울리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 종로교회 교인들…. 내가 원래는 이번에 전국을 순회하고, 또 종로라든가 서울 시내도 순회하려고 했는데 그렇게 못 했습니다. 그런 시간적 여유를 만들려면 만들 수 있었지만, 순회 후에 내적인 모든 것의 정비라든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기 때문에, 특별한 기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오다 보니 이렇게 늦어져서 미안합니다.
그런데 박군이 특별히 전전 주일인가 나에게 와서 '오는 16일에는 종로교회에 반드시 오셔야 되겠습니다'라고 하기에, 가겠다고 확실히 약속은 하지 않고, 그 전날쯤에 다시 한 번 연락을 하라고 멀찍이 약속을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운이 좋은지 나쁜지 모르지만…. 오늘 아침에도 선생님은 말씀을 했습니다. 오늘도 일본 식구들이 141명인가 수택리에 와 있는데…. 하긴 어제 왔어요. 한 80명이 어제 오후 두 시까지 오고, 나머지 식구들이 열한 시에 왔는데, 만나 보지도 못하고…. 그래서 오늘 여덟 시 반에 약속을 하고 갔다 오다 보니 이렇게 늦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종로교회의 식구들 앞에 오늘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사건을 제시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무슨 사건을 제시해야 되느냐? 선한 사건을 제시하는 일을 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여러분 앞에 드릴 말씀의 내용은 '선악의 분기로에서' 혹은 '선악의 분기점에서'입니다. 이런 내용을 가지고 잠깐 말씀해 보자구요.
이 세상을 가만히 보면, 어느 나라 사람이든지 자기 나라가 좋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자기 나라, 자기들의 나라가 좋다고 생각 하지 않는 나라가 없다는 것입니다. 나라도 그렇고, 또한 자기 가정을 중심삼고 볼 때도 어느누구든지 자기 가정을 좋다고 생각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개인을 두고 보면 어떠냐? 개인도 자기를 좋다고 생각 하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이렇듯 개인이나 가정이나 혹은 국가면 국가를 두고 생각하게 될 때도, 자기의 나라를 좋다고 자랑하고 싶어하는 것이 오늘날 인간의 본심인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 나라는 좋아하지만 이 세계는 어떠냐?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 이 세계를 좋아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겁니다. 그것이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인간들을 두고 볼 때, 인간들이 좋기를 바라는 것은 자기가 좋아지기를 바라고, 자기의 집이 좋아지기를 바라고, 자기가 살고 있는 나라가 좋아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역사 속에서 인간들이 추구해 나온 목적인 것을 우리는 알고 있는 것입니다.
대한민국 백성이면 대한민국 백성이 외국에 나가게 되면 대번에 느끼게 됩니다. 외국에서 대한민국 동포를 만나게 되면 반가운 것입니다. 또, 대한민국 사람이 외국에 가서 천대를 받게 되면, 그 사람이 나하고 관계 없는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그 분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슬픔을 당하면 당했지, 동포가 슬픔을 당하는 것을 보고는 견딜 수 없는 자극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어떤 백성이든지, 어떤 민족이든지 자기의 나라와 자기의 가정과 자기가 좋기를 바라는 것이 지금까지, 유사 이래 역사시대를 거쳐오면서 인간들이 바라는 소원인 것입니다. 그러나, 세계가 좋기를 바라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또, 나쁘게 되는 일에 있어서도 '내가 나쁘게 되어서는 안 되겠다. 나를 넘어서 가지고 다른 사람은 나쁘게 되더라도 나는 나빠지면 안 되겠다. 우리 집을 빼놓고는 나쁜 일이 있을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우리 집안은 나빠서는 안 되겠다. 그리고 우리 나라만은 나빠서는 안 되겠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이 땅 위에 나라를 가진 백성으로서, 가정을 가진 식구로서, 자기를 존중시하는 사람으로서 바라는 소원이 되어 있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좋기를 바라게 되면 자기를 중심삼고 좋기를 바라고, 나쁘기를 바라게 될 때는 자기를, 자기 편을, 혹은 자기 나라를 빼놓고 나쁘기를 바라는 것이 인간들의 욕망이더라 이겁니다. 요게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여러분들도 그럴 거라구. 전부 다 좋은 일은 내 것, 나쁜 일은 남의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바라는 인간들인데도 불구하고 사실이 그렇게 되도록 되어 있느냐 하는 문제를 다시 한 번 분석해 볼 때, 좋은 것만을 내가 갖고 좋은 곳에서만 내가 살 수 있게 되어 있지 못한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출세를 하고 성공을 하기 위해서 노력을 한다고 하지만 그런 노력은 누구나 다 하는 것입니다. 하나에서부터 천만이 되는 국민이 있다 하더라도, 어느 개인을 두고 보더라도 그 국민 한 사람을 빼놓지 않고 전부가 좋게 되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또 나라를 두고 보더라도 좋게 되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렇듯 전체가 좋게 되기를 바라지만, 좋게 되는 결과가 많이 나타나느냐 할 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바라는 것은 전부 다 좋기를 바라는데, 되어 지는 결과는 바라던 것보다도 도리어 나쁜 결과에 부딪히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나 많이 봅니다.
좋은 일이 많다면 인간은 고해(苦海)니, 비애의 운명이니 하는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좋은 반면, 좋은 결과가 나와 더불어 관계맺어지기보다는 나쁜 결과가 나와 더불어 관계맺어지는 것이 많기 때문에 '인생은 슬픈 것이다. 인생길은 고해와 같은 것이다' 이렇게 말하게 되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것은 다 바라는 데, 좋은 것을 바랄 수는 있으되, 좋은 것을 차지하기는 쉽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개인이면 개인이 좋기를 바라는 기준이 있어야 될 것입니다. 가정이면 가정이 좋기를 바라는 기준이 있어야 될 것입니다. 나라면 나라가 좋기를 바라는 기준이 있어야 될 것입니다. 그 기준이 갑이라는 사람이 다르고 을이라는 사람이 달라 가지고는 좋은 것을 바란다는 사실이 우스꽝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 사람, 만 사람 전부가 좋다고 하게 될 때는 '이건 이렇기 때문에 좋다'고 할 수 있도록 다 수긍할 수 있는 내용이 제시되어야지, 그런 내용의 제시가 없으면서 '좋다'고 한다는 것도 우스꽝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면, '좋다' 하는 데는 어떻게 좋아야 되느냐? '개인은 이렇게 좋아야 되고, 가정은 이렇게 좋아야 되고, 나라는 이렇게 좋아야 된다'고 하는 어떤 모델(model)이라 할까, 공식이라 할까, 어떤 하나의 목적체가 있어야 됩니다. 그것이 없어 가지고는 안 될 것입니다. 그게 원리예요.
역사라는 것은 악을 중심삼고 발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악이 성(盛)하게 될 때 역사는 후퇴하기 마련입니다. 악을 넘어서 가지고 선이 성하게될 때 그 역사, 혹은 역사적인 환경, 개인의 환경이나 가정의 환경이나 국가의 환경은 발전하기 마련입니다. 그게 원리예요.
그러면 선과 악을 제시할 수 있는 개인적인 표준은 어떤 것이냐? 이것이 지극히 문제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을 두고 볼 때, 신(神)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양심적으로 살면 된다. 양심적으로 살면, 내가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으면 당당하지 않느냐?'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양심을 가진 사람, 그 양심을 가졌다는 그 사람이 전부 다같으냐? 같지 않다구요. 얼굴이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그 양심이 처해 있는 자리도, 위에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요. 아래에 있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여기 하나의 선을 그어 놓으면 이 수직선을 중심삼고 횡으로 뻗어 나갈 때 90도 각도 된 사람이 있는가 하면, 10도 20도 30도 등 천태만상의 방향을 중심삼아 가지고 그 위치와 방향이 전부 다를 것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양심적'이라는 그 기준도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은 선하기를 바라는데 그 선할 수 있는 길이 어떻더냐 하는 것을 확실히 모르고 살고 있습니다. 왜 선해야 되느냐. 왜 좋기를 바라느냐, 좋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는…. 수학으로 말하면 하나 플러스 하나 하면 둘이 되고, 여기에 셋을 가하면 다섯이 된다. 이런 결과적인 공식은 수학을 배우는 사람이면 누구에게서나, 역사를 초월하여 어떤 시대든지 똑같은 것입니다. 똑같이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에 대한 확실한 기준이나 규정은 설정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양심적'이라는 그것이 어떤 자리에서 양심적이냐? 그게 문제라구요. 올라간 자리냐, 내려간 자리냐? 어떤 한계선을 벗어난 자리냐? 혹은 이것이 아낙(內)이라면 어떤 위치의 아낙이냐? 여러분 자신을 보게 될 때, 여러분 자신은 지금 이 시간에 선생님을 만나 가지고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한낱 개인을 보더라도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어떤 기정적인 인연을 통해서 만나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 아가씨면 아가씨, 총각이면 총각, 학생이면 학생을 보게 될 때, 이렇게 생긴 노정균이라는 학생이 있다 이겁니다. 그래서 '노정균!'하고 부르면 '예' 하고 답하는 것입니다. '너 무엇을 했어?' 하고 물으면 '저는 오늘 무엇을 했어요'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 사건은 간단한 것입니다. 그가 나타나서 한 행동이 혹 물을 떠 왔으면 물을 떠 온 사건에 귀결되지만, 이 물이 놓여질 때까지의 그 역사적인 인연이라는 것은 수천만년 까지 연결되는 것입니다.
물을 떠 온 그 손은 노정균의 손이되, 그 손은 노정균의 손만이 아닙니다. 그 손은 누구를 닮았느냐? 아버지 어머니의 손을 닳았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어머니의 손만을 닳은 것이 아닙니다. 할아버지의 손도 여기에 조금 닮은 것입니다. 또, 할아버지뿐만 아니라 증조 할아버지, 고조 할아버지…. 수천 대의 선조의 세포를 받은 손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손을 중심삼고 보면 손 주식회사의 사장과 마찬가지입니다.
이 눈을 봐도 그래요. 한 눈을 보면 그 눈이 깜박깜박하고 있는데, 그눈이 자기의 눈 같지만 자기의 눈이 아닙니다. 그것은 종합된 인연의 결실체로서 하나의 집약된 물건으로서의 눈입니다. 그러면 그 눈의 부분 부분을 보게 된다면…. 선한 선조의 눈을 닮은 부분은 좋게 보일 것이고, 악한 선조의 눈 세포의 일부를 받은 눈은 나쁘게 보일 것입니다. 선한 선조를 닮은 눈은 나쁜 것은 안 보인다고 하고, 좋은 것은 잘보인다고 그럴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 있을 것이라구요. 그걸 보면 그렇게 그것이 종합되어 가지고….
요즈음엔 머리카락 하나를 분석하게 되면 그 사람의 성질부터 직업까지 모든 것을 분석해 낼 수 있는 지와 마찬가지로, 그 사람의 배후의 관계를 전부 분석할 수 있고, 처해 있는 환경도 분석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과학적인 시대에 우리가 서 있다는 것을 바라보게 될 때 우리의 한 부분, 지체라는 것은 자기의 것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욱 연결되어 있다구요.
이런 관점에서 자신이 좋아서 '아이구 좋다' 하는 그 자리는, 현재의 아무개 하나에게만 좋은 것이냐? 그 자리는 역사를 대표한 하나의 정상의 자리입니다. 그래서 역사를 대표해 가지고 저울질을 하는 것입니다. 저울질을 딱 해 가지고 수평이 되어야 할 텐데, 조금 어떻게 되면 이렇게 되고 조금 어떻게 되면 이렇게 됩니다. 이 경계선이라는 것은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것인데 그것이 천지를 뒤집어 박는다는 것입니다. 그런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까딱하게 되면 선이 되는 것이고, 까딱하면 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의 정로(正路)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의 그런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거기에 조금이라도 보태서는 안 되는, 그래야만 된다는 그 절대적 기준이란 것이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개인이, 혹은 가정이, 나라가, 세계가 갈 수 있는 어떤 정도가 있어야 될 것이 아니냐 이겁니다. 안 그렇겠어요?
이렇게 볼 때 그런 공식, 개인은 이래야 된다 하는 그런 타입이 누구냐? 할 때 '나다'라고 할 수 있느냐? 여러분은 생각해 봤어요? '나는 비록 키는 작은 소녀의 몸이지만, 세계의 여자들을 전부 종합한 하나의 정도의 딱 중앙에 서 있는 사람이다' 이런 생각 해봤어요? 저울로 말하면 그걸 세밀하게, 몇만 분의 일을 잴 수 있는 저울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이 있는지 없는지 하는 것도 다 알아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중앙에 있는 그 자리를 보게 된다면 있는지 없는지 하는 그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 무엇이 있을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선악이 대립되어 있으면 그 경계선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삼팔선을 두고 볼 때, 삼팔선이라는 그 선이 어디냐? 완충지대를 지나가 가지고 선을 그은 것입니다. 삼팔선은 선도 굵은 것입니다. 있는지 없는지 하는 것, 그것이 문제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삼팔선을 진짜 아느냐?' 하고 물으면 '삼팔선을 알지' 한다는 것입니다. '진짜 알아' 하고 따지고 들어가게 되면, 어떤 것이 삼팔선인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경계선이자 경계선이 아닌 그 자리가 선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이쪽 편이자 저쪽 편이요, 저쪽 편이 아니자 이쪽 편이 아닌 그러한 자리가 경계선이라는 것입니다.
아침에서 점심때가 될 때 말이예요. 열두 시 '땡' 하게 될 때, 그것을 완전히 점심때다고 할 수 있어요? 시계가 열두 시에 '땡' 한다고 해서 진짜 열두 시예요? 진짜 맞는 것은 세계에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럴 것 아녜요? 그 하나도 모른다구요. 열두 시가 됐는지 안 됐는지 그것도 모른다구요. 그렇게 이게 심각한 문제라구요.
봄이 되고 여름이 되었을 때, '나는 그 봄과 여름의 경계선을 확실히 안다'고 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저 나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어영부영 봄이 왔다가 알지 못하게 여름이 찾아오는 거예요. 그러면 여름이 찾아오는 것을 아는 사람, 그 사람을 만날 수 있느냐? 진짜 만난 사람을 만나기는 힘든 것입니다.
또, 봄을 진짜 송별하면서 '하하! 이 순간 봄아 가거라. 이 순간 여름아 오너라' 해 가지고 진짜 그것을 보내고 맞이한 사람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 만나 봤어요? 만나 봤어요, 못 만나 보았어요?「못 만났습니다」 못 만나 봤지요?
그렇게 생각하게 될 때, 선과 악이 진짜 있느냐? 어떤 것이 선이냐? 그 선과 악이 있으면 경계선이 있을 거라구요. 선과 악이 경계선을 이루고 있는데…. 선과 악이 엇갈리는 데에는 반드시 그 교차점이 있을 것입니다. 그 기로, 분기점이 있을 텐데 그곳이 어디냐? 그게 문제라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선악의 분기점이 문제되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오늘날 우리는 '통일이다. 통일교회다'라는 말을 하는데, 통일은 어디에서 해야 되겠느냐 할 때는 '근본에서 통일해야지' 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 근본이 어디서부터냐 할 때, '그거 우리 집에서부터지…' 아니라구요. 집이 나오기 위해서는 아버지 어머니가 있어야 되고, 아버지 어머니가 나오기 위해서는 남자가 있어야 되고, 그 다음에 여자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통일은 남자 여자에서부터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남자 여자만 있으면 되느냐? 몸과 마음이 통일된 그런 남자를 거쳐 가지고야, 몸과 마음이 통일된 그런 여자를 거쳐 가지고야 통일된 가정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요렇게 되는 거라구요. 그렇지요?
몸 마음이 완전히 엇갈려 가지고 몸은 이리 가자 하고 마음은 저리 가자 하는데 통일될 수 있어요? 여러분의 몸과 마음은 매일같이 싸워요, 친구삼고 잘살아요?「싸워요」 싸워, 싸워 ! 그러면 여러분은 어느편에 서있느냐? 두 편에 같이 서 있습니다. 몸이 좋아하는 편으로 가자는 한 패당하고 마음이 좋아하는 편으로 가자는 한 패당이 있으니, 여러분에게는 두 패당이 있습니다.
그러면 '진짜 아이구 내가 너를 놓고 못 산다. 너는 나를 놓고 못 살것이 아니냐? 그러니 요렇게 요렇게 하나되자' 할 수 있는 그런 나의 자리는 어떤 자리냐? 알아봤어요? 알아봤어요, 못 알아봤어요? 개인의 선악의 분기점이 있을 것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파헤쳐 가지고 '요놈아! 안 되겠다' 하고 해부해 보는 것입니다. 병이 났으면 병의 근본된 것을 수술해 봐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가 되기 때문에 근본에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사람이 양심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 문제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모델이 있어야 되고 어떤 표준이 있어야 될 것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양심적인 사람, 통일된 사람, 선에 완전히 일치된 사람은 이래야 된다 하는 역사적인 규정을 어느 한때에 설정하지 않고서 천도와 인도, 천륜과 인륜, 천정과 인정이 통합될 수 있는 세계를 모색한다는 것은 망상입니다.
자, 여러분 그렇잖아요? 그림을 그리는 데는 말이예요. 지금도 불란서 루브르 박물관에 가 보면 모나리자 그림이 있는데,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높은 의자를 척 갖다 놓고 말이예요. 사람들 꼭대기에서 봐 가지고 그림을 그리더라구요. 그림을 그리는 데 있어서 새로운 천에다 새로운 페인트를 써 가지고 새로운 수법으로 새로운 그림을 그리는 데, 그린 그 그림을 척 보게 되면 말이예요. '아. 요것은 산뜻하고 마음에 든다. 어쩌면 그렇게 똑같애' 할 정도로 그려 놓았다면 시로우또(素人)는 보고도 모른다구요. 그러나 진짜와 똑같이 그려 놓았다 하더라도 '저것은 진짜이고 이건 가짜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또, 여러분 미터 원기(原器)라는 것이 있다구요. 그것이 있는데, 진짜는 세계에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요? 그렇기 때문에 만일에 진짜가 고장나면 큰일납니다. 이것은 춘하추동 기후의 변화에 따라서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춘하추동. 기후야 변하겠으면 변하고, 그것과는 상관없이 변하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되지요?
그와 마찬가지로 선한 사람, 진짜 선한 사람의 그 출발점이 어디냐? 그것을 모르면…, 즉 이것이 선이다 하는 기준을 모르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선의 반대되는 것, 즉 이렇게 되는 것은 악이다 하는 것을 모르게 됩니다. 안 그래요? 선의 반대는 악이니까 선에 대한 규정을 확실히 내려야만 악이 확실히 드러나는 것입니다.
세계에는 유명한 분들이 많이 있는데, 사람들은 위인이 유명하다고 합니다. 그 '위인'은 위대한 사람이라 할 때의 위인입니다. 위인은 어느 나라든지 가질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에 있어서 위인 하게 되면 이순신 장군 보고 위인이라고 하는데, 그는 위인의 자리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성인은 많지 않습니다. 성인은 많지 않다구요. 그렇지 않아요?
성인은 세계에 있어서 4대성인을 말합니다. 기껏해야 네 사람밖에 없습니다. 다 쳐 보더라도…. 그러면 이 4대성인이 왜 성인이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이 사람들을 분석해 보면 이들은 우스꽝스러운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인류역사가 발전해 나오는 데 있어서 인륜도덕의 지침을 설정하게 될 때에는 그 나라 백성들 끼리끼리 합해 가지고 헌법 같은 것을 설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인이 가르친 그 인륜도덕관을 중심삼고 헌법도 제정해 나오는 것입니다. 그건 틀림없다구요. 오늘날 어떤 국가도 좋은 국가를 이루려고 하기 때문에, 역사시대의 좋은 분들의 사상을 기틀로 하여 그것을 따라서 모든 국가면 국가의 체계화를 이루어 나가는 것이 지금까지의 역사적인 실정인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성인이란 사람들을 가만히 보면 우스꽝스럽습니다. 왜 우스꽝 스러운 사람들이냐? 성인이란 사람들은 자기 주장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게 우스운 말이라구요. 그게 무슨 소리냐? 성인은 사람은 사람이되 무슨 주장을 하는 사람이냐 하면, 사람 주장을 하다가 죽은 사람은 아닙니다. 심부름꾼 놀음을 하다가 죽은 사람입니다. 무슨 심부름을 했느냐? 절대적인 신이라는 분의 심부름을 하던 종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 있다구요. 그래서 그 예수 같은 양반도 기도할 때,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그 다음엔? '아버지 뜻대로 하시옵소서' 했습니다. 이건 자주적인 인격을 가진 사람이예요? 주동적이예요. 피동적이예요?「주동적입니다」 그게 피동적이지 뭘…. 그런데 피동적인 사람이 어떻게 성인이 되느냐 이겁니다. 그게 우스꽝스럽다구요.
오늘날 가치를 따지고 내 지갑에서 조금만, 한푼만 떠나가도 '앵'하는 세상인데, 내가 침범받기 싫어서 방어진을 치고 야단하는 세상인데…. 이런 세상에서 예수님이 한 말을 보라구요. '뭐 오리를 가자' 하면 어떻게 하라구요? 십리를 가 주고…. 겉옷을 달라 하면 무엇하라구요? 속옷을… 그러니 이게 뭐예요? 인간의 종류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구요. 오늘날 살고 있는 우리 속된 인간들, 그런 종류와는 별다른 종류라구요. 종류라는 말을 하면 안 됐지만 말이예요. 여러분에게 실감나게 하려니까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라구요. 물건을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할수없다구요. 사람보다 물건을 더 좋아하니까 '종류'가 통한다구요. 그러니 우습다는 거예요. 보라구요.
그러면서 또, 자기를 땅땅 못박은 자들과는 원수가 되어 가지고 천년 만년 사활(死活)을 걸고 복수를 해야 할 그런 원수를 대하여 '아버지여, 저들이 자기의 죄를 모르니까 저런 놀음을 하는데. 저들을 용서해 주소서' 했습니다. 그러니 이게, 무슨 놀음이 그래요? 우스꽝스럽다구요.
또, 이 성인들이란 패당을 떡 나열하여 종잡아 가지고 가만히 보니까, 이 패들은 자기 주장을 하지 못하고 남의 심부름 하는 심부름 패당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인은 어떤 사람이냐? 그들을 보면 하나님을 중심으로 해 가지고 그분이 하라는 대로 백이면 백, 천이면 천, 만이면 만이라도 죽도록 하겠다고 하는 대표적인 패들입니다.
어떤 사람이 성인이 되었느냐? 종교의 종주들이 성인이 되었더라 이겁니다. 그거 이상하지요? 예수도 기독교의 종주고, 석가도 불교의 종주고, 공자도 유교의 종주고, 또 마호메트도 회회교의 종주다 이겁니다. 그러면 소크라테스는? 소크라테스는 성인이 못 돼요. 철인은 되었지만 성인은 못 되는 사람이라구요. 한 급(級) 떨어지는 거라구요. 그거 왜 그러냐? 지식의 왕은 될는지 모르지만 생명의 왕은 못 되기 때문입니다.
종교의 종주들은 무엇을 했느냐? 생명을 움직여 나왔습니다. 이렇듯 종주들은 생명 역사 발전에 있어서 혁명의 기수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철인은 지식의 기수는 될는지 모르지만 생명의 혁명을 일으켜 가지고 생명의 역사 발전을 추진시킬 수 있는 원동력은 제시 못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철인은 성인 축에 못 들어갑니다. 알겠어요? 세계적으로 볼 때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무엇을 가진 사람들이냐 하면, 본래 꿍꿍이 속을 가진 사람들이라구요. 이게 우스꽝스러운 패들이라구요.
여러분은 통일교회 믿지요? 혹은 이 가운데 '오늘 우리 선생님이 오시는데 한번 가 봅시다' 해서 구경삼아 온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건 통일교회 패가 아닙니다. 통일교회도 교회라구요. 자, 그러면 통일교회 문 아무개란 사람이 통일교회의 무엇이냐? 교주다 이겁니다. 교주지요? 그렇지 않아요? 예수는 예수교회의 교주이고, 석가모니는 불교의 교주이고, 공자는 유교의 교주입니다. 교주라는 이름은 같지만, 교주 가운데 내용이 다른 교주다 이겁니다.
그러면 교주 가운데-통일교회 문선생을 빼놓고-지금까지 성인이란 이름의 반열에 등극한, 동참한 교주들이 4대성인인데, 그들 가운데에서 누가 제일 중심이예요?「예수님요」 예수 믿는 패들이니 예수라고 하지. 불교 믿는 패들한테 물어 보라구요. '석가모니' 그런다구요. (웃음) 그렇게 되는 거라구요. '왜 제일이냐?' 하고 물을 때 '제일 좋은 내용을 많이 갖고 있기 때문에 제일이지' 한다면, 그건 말이 되는 거라구요. 그렇지만 '아이고, 좋은 내용이 덜 갖추어졌다' 할 때에는 추앙을 덜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교주 가운데서 제일 좋은 내용을 많이 갖고 있는 교주는 누구냐?
제일 좋은 내용을 갖는 데 있어서, 사람의 욕망이 얼마나 크더냐? 여러분의 욕심이 얼마나 크더냐? 학교나 교회에 다닐 때 들고 다니는 가방 보따리보다도 작더냐, 크더냐? 커요, 작아요? 크지요?「예」'아이고 우리 집이 몇 층짜리 벽돌집인데 그 집보다도 작더냐?' 할 때, 여러분의 욕심이 그보다 작아요?「커요」 대한민국을 슬쩍 삼켜 넣고도 더 큰 것을 꿀떡하려고 한다구요. 그렇지요? 그렇잖아요? 그래 가지고 '세계를 내 것으로 만들었다' 해 가지고 세계를 하나만 집어 넣고 '아이구 이제는 됐다'할 사람이 없다구요. 세계가 백개, 천개가 있다면 그것을 다 집어 넣고 돌아다 보고 더 이상 없게 되어야 '이제는 됐다' 하는 그런 욕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만하면 욕심 보따리가 괜찮지요?(웃음)
또, 세계를 내 욕심 보따리에 집어 넣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더라도 그 세계를 지은 분이 있고 그보다 더 큰 분이 있다면, 그 큰 분까지도내 보따리에 집어 넣고 싶어요, 안 넣고 싶어요?「집어 넣고 싶습니다」그건 여자들도 그렇고 남자들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나이 많은 사람도 그렇고, 나이 어린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거기에는 통일이….
그러면 천지(天地)간에 있어서 하늘이 먼저냐, 땅이 먼저냐? 지천(地天)이냐, 천지 (天地)냐? 부모(父母)도 부모(父母)냐, 모부(母父)냐? 부부 (夫婦)도 지아비 부(夫) 자하고 며느리 부(婦) 자가 거꾸로 된 부부(婦 夫)냐, 올바로 된 부부(夫婦)냐?「올바로 된 부부입니다」 지천(地天)을 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전부 다 천지 (天地)를 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이 먼저 되어야 하느냐? 하늘이 먼저 되어야 됩니다. 그 다음에는 무엇이 되어야 되느냐? 땅이 먼저 되어야 됩니다. 그리고 부모가 있는데, 부모(父母)는 왜 어머니가 먼저 안 되고…. 그렇다고 여자를 내가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구요. 이제 들어 보라구요. 여자도 좋아진다구요. (웃음) 부모(父母)는 아버지 부(父) 자가 먼저 있어야 됩니다. 그 어머니 모(母) 자를 가만히 보게 되면, 요거 재미있다구요. 가만히 보면 이렇게 해 가지고, 이렇게 해 가지고, 이렇게 해 가지고 이렇게 됩니다. (판서하심) 이것은 무엇이냐 하면 계집 여(女) 자를 둘 갖다 거꾸로 뭉쳐 놓은 것입니다. 알겠어요? 그렇지요? 그거 참 재미있다구요. 그게 어미 모(母) 자입니다, 어머니 모(母) 자.
그렇기 때문에 그 여자라는 것, 어머니라는 것은 참 재미있습니다. 이것도 여자, 이것도 여자인데 이것을 거꾸로 이렇게 해 놓은 것입니다. 여자를 두 사람 갖다 붙여 놓은 거라군요. 그렇지요? 거꾸로 갖다 맞춘 거라구요. 그렇지 않아요? 이것이 어머니입니다. 그게 어머니이기 때문에 하늘의 마음을 가진 어머니가 되어야 되고, 땅의 마음을 가진 어머니가 되어야 됩니다. 다시 말하면, 하늘의 마음을 가진 여자가 되고, 땅의 여자를 대표한 마음을 가진 여자가 되어 가지고 그 두 마음을 맞추어 놓아 야만 어머니가 된다는 것입니다. 재미있지요?
내가 아침에도 이야기했지만, 애비 부(父) 자를 보면…. 아버지 부(父)자를 보고 '애비' 하게 되면 기분이 나쁘다구요. 아버지 부(父) 자인데…. 선생님이 이야기하게 되면 '아바지'라는 말을 잘 쓰는데 그 말은 평안도 사투리입니다.
아버지 부(父) 자를 보게 되면, 이렇게 떡 해 놓은 것입니다. (판서하 심) 이것이 무엇이냐? 딱 떼어 놓으면 사람 인(人) 자가 두 개입니다. 그것이 딱 합쳐져서 되어 있는 겁니다. 그렇지요? 그것을 한데 갖다 묶어 놓은 거라구요. 그것이 무엇이냐? 남자는 남자인데, 사람은 사람인데 혼자가 아니라 둘을 갖다가 묶어 놓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아버지가 된다 이겁니다. 그건 뭐냐 하면 하늘 사람과 땅 사람이 묶어져 가지고 한가지로 행동을 할 줄 알아야 아버지가 된다는 말입니다. 요걸 생각하면 재미있지요?「예」
또, 하늘 천(天) 자를 가만 보면, 그것은 무엇이냐? 하늘이란 것은 혼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둘(二)이 있어야 하늘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 천(天)은, 두 사람을 갖다 맞추면 하늘 천(天)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지요?「예」 요거 참 재미있다구요.
또, 지애비 부(夫) 자는 무엇이냐? 이게 꼴불견이라구요. 감투를 쓰고 하늘보다도 높이 올라가는 거라구요. 이건 무엇이냐? 두 사람이 서로가 좋아하면 하늘 꼭대기까지도 뚫고 올라간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부부라는 말이 설정되는 것입니다. 재미있지요?「예」 재미있는 것 같다구요. 여러분이 작전에 말려 들어가면 안 된다구요. (웃음)
그러면 좋은 데는 '나는 이만큼 미남이요, 이만큼 훌륭한 남자이기 때문에 나에게는 아버지 어머니가 필요 없다' 하는 사람이 있어요? '나는 남자이기 때문에, 남자인 아버지가 필요 없다. 아버지가 죽으면 내가 대신 아버지 되기 때문에, 내가 주인이 되니까 아버지는 죽고 어머니만 남으소서' 하는 그런 남자가 있어요?「없어요」 또, '내가 여자인데, 우리 집안에서 여자 가장이 되려고 하니 어머니는 죽고 아버지만 혼자 사소' 하는 그런 딸이 있어요?「없어요」 그런 사람이 있다는 녀석이 있으면 때려 죽이라구요. (웃음) 죽일 사람이 없기 때문에 욕을 해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없다 이겁니다.
그러면, 무엇이 있어야 되느냐? 둘이 있어야 됩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혹은 딸만 있어야 되느냐? 아닙니다. 딸도 있고 아들도 있어야 됩니다. 둘이 있어야 됩니다. '시집 가서 애기를 낳거든 아들만 낳으소' 하고 축복해 주는 사람이 있으면 '왜 아들만 낳으라고 하나? 저 녀석은 아들밖에 모르는 사람이야' 하고 욕하고 싶을 거라구요. 또, 자녀도 '시집가거든 딸만 낳으소' 하면 '에이 딸만 낳으라니…' (웃음) 그러니까 '시집가거든 아들딸을 낳으소' 하면 에…. (행동으로 표현하심) (웃음) 좋아한다구요. 그거 이상하다구요. 그것은 혼자는 싫다는 말입니다. 혼자는 싫은 거라구요.
학교 다니면서 공부 잘한다고 하지만 외톨이가 되어 가지고 아침에도 외롭고, 점심에도 외롭고, 저녁에 올 때까지 외롭다, 또 학교에 들어설 때도 외롭고 학교를 나올 때에도 외롭다고 한다면, 그렇게 해서 일등하면 무엇해요? 그러한 일등을 하면 되겠어요? 아니라구요. 일등을 하면 할수록 전체가 다 '아 왔느냐!' 고 반기고, '아이구 어디 가면 나도 따라갈래, 아이구, 나도 따라갈래' 이래야 좋은 거라구요. 그렇지요? 혼자는 싫은 거예요.
그러면 도주들이 무슨 뭐 성인이라는 사람들인데, 대관절 가르쳐 준 그 내용이 무엇이냐? 그분들은 원칙을 따라서 천지를 따라가자고 한 것입니다. 즉, '천(天)을 알고 지(地)를 알자. 사람에게는 인륜이 있는가 하면 천륜이 있는 것이다. 인정이 있는가 하면 천정이 있는 것이다. 인륜은 인륜으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천륜을 따른 인륜이 되어야 되고, 인정은 인정으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천정을 본받는 인정이 되어야 되는 것이다. 이것이 인생의 본위요 도리가 아니겠느냐? 상하가 있어야만 모든 것의 수평을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냐' 이렇게 되는 거라구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수직선에 중심을 결정해 가지고 하나의 90각도를 통해서 수평을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거리를 측정함으로 말미암아 이것이 완전히 원형이냐, 구형이냐 하는 문제를 놓고 거리를 타진해서 그 위치를 찾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인의 가르침인 도(道)는 무엇이냐? 인륜의 도리만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까지 인간들이 역사를 통해서 추구하는 하나의 방향을 거쳐 가지고 그런 놀음을 해 나온 것입니다. 그렇지만 인륜 종말시대에 있어서 인륜의 기원이 탄식의 기원을 가졌으면 탄식의 종국이 벌어질 것이요, 인륜의 미비 혹은 미완성의 출발을 보았으면 미완성 적인 인륜의 종국밖에 맞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기쁨이란 것은 인륜만 가지고 안 되는 것입니다. 기쁨에는 천륜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천륜이 있고 인륜이 있고, 천정이 있고 인정이 있거든 그것은 어디에 가서 합하느냐? 합하는 교차로가 어디냐? 그 분기점이 어디냐? 분기점 하게 되면 나누어지는 점을 말하는데…. 그 분합점이 어디냐, 합일점이 어디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런데 천정과 인정은 방향이 엇갈린다구요. 사람은 이렇게 가려고 하지만 하늘은 이렇게 가려고 하고, 몸뚱이는 이렇게 가려고 하면 마음뚱이는 이렇게 가려고 한다는 거라구요. 그런다구요. 이것이 결과로 나타난 것이 공산세계와 민주세계입니다.
예수 같은 양반들은 무엇을 하고 싶었더냐? 인륜을 존중시함과 동시에 인정을 세우려 하는 데 있어서는 인륜 도덕만을 위한 것이 아니요, 인정만을 중심삼은 것이 아닙니다. 천륜과 천정을 토대로 해 가지고, 거기에 하나의 상대성을 갖추어 가지고 하나의 목적이 되든가, 하나의 상대가 되든가, 하나의 주체가 되든가 해서 그것과 연결됨으로써 방향이 결정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차원 높은 세계의 방향을 제시하기 위해서 왔던 분들이 성인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그 개인을 통하여 볼 때, 그 개인이 가는 방향은 개인만의 행복을, 개인만의 선한 세계를 찾아간 것이 아닙니다. 개인의 행복을 찾아간 것은 세계 만민에게 행복의 표준형을 결합시켜 주기 위한 노정을 개척해 간 것입니다. 그들이 바라는 가정이란 것은, 즉 남자 여자가 만난다는 것은 인륜 도덕관에 의해서 결합되는, 그런 남성과 여성으로 만나기 위한 남자 여자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천륜과 천정이 규합될 수 있는 가정, 하늘땅이 보장하고, 하늘땅이 거기에 따라가며 좋아할 수 있는 입장에 있어서의 가정을 추구한 것입니다. 그런 어떤 기준이 있었을 것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인이 추구하던 그 가정은 어떠한 가정이냐? 그들이 추구하던 나라는 어떠한 나라냐? 그들이 바라던 하나의 세계, 이상세계는 어떠한 이상세계냐? 인간만을 위주로 한 이상세계를 추구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과는 다르다는 거라구요.
오늘날 청년들 혹은 지성인들에게 '종교' 하게 되면 코웃음 치면서 우스꽝스러운 무리들이 가는 길로 알고 있지만, 그것은 그들이 잘못 알았다는 거예요. 성인들이 깃을 내리고 닻을 내려 가지고…. 자기들의 출발의 동기를 만들어 놓은 그 곳이 어디냐? 종교의 종주라는, 종교의 테두리 안에서 출발한 것임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분의 영향 밑에서, 그분의 교육 밑에서 하나의 지향성을 따라 내일의 세계 이상을 찾아 나가는 인간들, 그런 과정에 있는 인간들이 '어-' 하며 종교에 대해서 불평한다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것입니다.
자, 그러면 대관절 선이 무엇이고, 악이 무엇이냐? 성인들은 어찌하여 수많은 사람들의 추앙의 대상이 되어 가지고 역사는 변천하고, 시대는 혁명적인 과정을 거친다 하더라도 종교적인 흠모의 대상이 되는 성인들의 가르침은 왜 혁명이 이루어지지 않느냐? 그게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륜만 가지고 좌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륜으로 말미암아 시작된 것은 인륜으로 좌우할 수 있고, 인정으로 말미암아 시작된 것은 더 높은 인정을 통해서 그것을 변경시킬 수 있지만, 인정과 천정을 통해서 설정된 것은 인정과 천정이 합해진 것보다 더 가중된 그 기준을 찾아 놓기 전에는 변화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종교사상을 중심삼고 역사적인 문화권이 형성된 것입니다. 이것은 하늘이 있기 때문에, 땅이 있기 때문에 지어지는 불가피한 결론 입니다. 여러분들은 이걸 알아야 돼요.
그렇기 때문에 종교 지도자들은 이러한 사람들이다 이겁니다. 인륜을 초월해 가지고 초월된 세계를 추구했고, 초월된 가치를 제시했고, 초월된 인간상을 추구했고, 초월된 인륜, 초월된 인정, 즉 천륜과 천정을 추구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이것을 소화시켜 가지고 인륜에다 어떻게 귀일시키느냐 하는 문제를 가지고 노심초사하다가 생명을 저버리면서도 이것을 붙들고 갔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위대한 성인이 되지 않았느냐? 여러분들은 이것을 알아야 되요. 그러면 그 사람들은 선한 사람이냐, 악한 사람이냐? 선한 사람이예요, 악한 사람이예요?
그러면 절대적인 신(神)이 있으면, 그 신을 위해서 '죽자' 하는 데는 어떻게 죽느냐? 한꺼번에 옥살박살나게 죽자는 것입니다. 죽는 데에도 여러 가지가 있을 거라구요. 죽는 방법도 천태만상이 있을 것입니다.
'애국자' 하게 되면 말이예요. 열 사람의 애국자가 있다면, 그 가운데서 그냥 밥 먹고 정상적으로 살면서 애국하다가 자기의 명(命)대로 죽은 애국자하고, 반대를 받는 그런 비상시대에 있어서도 국가의 운명을 대신해 가지고 억천 원수의 무리와 싸우다가 적탄을 맞고 쓰러져 죽은 애국자하고 어느쪽이 진짜 애국자냐 할 때, 잘먹고 살면서 애국하던 사람과 나라를 위해 생명을 바치면서 죽은 사람은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요?
또, 다 같이 총을 맞아 죽는 데 있어서도 총으로 한 대 '빵!' 맞아 그냥 죽은 사람하고, 눈깔이 뽑히고 손이 잘리고 다리가 잘리고 몸뚱아리만 남아 가지고 '빵' 하고 총에 맞아 죽은 사람이 있다면…. 그 죽은 것을 보면 제일 기분 나쁘게 죽었다구요. 이렇게 보게 될 때에 죽은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죽을 때까지의 과정에 있어서 비참함의 도수가 높으면 높을수록 애국자 가운데 최고의 애국자가 못 된다? 어떻게 되는 거예요? 못 된다? 「됩니다」 못 되지? 「돼요」 비참하면 비참할수록 애국자의 등수가 낮아진다? 「높아진다」 요것은 틀림 없다구요.
그러면, 하나님을 위해서 효도하는 효자 가운데 '왕효자' 이렇게 말하면 속된 말 같지만…. 점잖은 말은 못 되지만, 우리 학생들이 많으니까 그래야 실감이 난다구요. 왕초를 좋아하는 것이 젊은 사람들의 마음이기 때문에 말예요. 아뭏든 효자 중에는 왕효자가 있을 것입니다. 배고플 때에 내가 밥 먹고 남은 것을 딱 갖다 드리며 '아버지 어머니, 배고프지요?' 하는 사람도 효자라구요. 안 갖다 주는 것보다 효자라구요. (웃음)
효자의 역사를 파고들어가 보면, 진짜 효자가 어떤 것이냐? 자기의 피땀을 흘려서도 다할 수 없어서 나중에 자기의 피를 팔아서 부모를 봉양 해야 될 때에, 피땀을 흘려 가지고 모시겠다고 하는 그런 사람도 효자라 구요. 그렇게 갖다 주는 것도 효자지만, 자기의 피를 팔아 가지고 부모를 봉양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피땀을 흘리면서 갖다 주는 효자보라 못하다, 낫다?「낫다」 그러면 피를 팔아 가지고 봉양하는 사람도 효자지만, 부모를 위해 봉양하다가 자기의 목숨을 버리고 죽음길을 간 사람이 있으면 자기의 피를 판 효자보다 못하다? 「낫다」 그렇다구요.
자기의 아들이 진짜 효자 되기를 바라는 부모가 있다면,'야! 내 아들아, 너는 목숨을 버려야 효자 된다'고 가르쳐 주는 부모가 있어요? 「없어요」 '이렇게 해야 진짜 효자가 나온다. 진짜 효자는 다 좋아하는 것이 부모들이다. 그러니 너도 이렇게 생명을 바쳐 가지고 내게 효도해라' 하는 부모가 있느냐 이겁니다.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 뭐예요? 그 아버지 어머니가 틀렸다는 말 아니예요? 이렇게 보면 우스꽝스럽다는 거예요. 이걸 나중에 다 정리해 줄께요.
이 집이 참 거룩하게, 공기가 잘 통하는구만. 종로에 오니까 종(鍾)감투 쓰고 딱 서 있는 것 같지요?
자, 그러면 부모를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바치는 데 있어서 자기의 인식과 존재가치를 생각하고 죽은 사람과 자기의 인식이나 존재가치를 생각하지 않고 부모를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바치는 사람이 있다면, 다시 말하면 나는 이렇게 살아야 할 남자이고 이런 아들이 되어야 할 텐데 하는 생각을 하고 죽은 사람하고, 그런 생각도 하지 않고 몽땅 부모의 것이 되어야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죽은 사람은 어떤 사람이 더 효자냐 할 때, 자기를 생각하는 사람이예요,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예요?「자기를 생각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것 보라구요, 알기는 다 아는구만.
성인 중의 성인은 어떤 사람이냐? 문제가 커요. 효자 중의 효자는 어떤 사람이냐? 아까도 뭐 효자가 되자고 했지요? 그런데 효자 되기가 쉽지 않다구요. 충신은 죽기 전에는 못 되는 거라구요, 충신 신청은 할 수 있지만. (웃음) 역사적인 충신은 신청해 가지고 충신이 된 것이 아니라 전부 다 생명이 달아나는 자리에서 충신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방면을 뚫고 올라가기 위해서는 그 이상의 경기를 해 가지고 챔피언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자, 효자 될래요, 안 될래요?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되겠습니다」 그래요? 충신이 되고 싶어요?「예」 정말이예요? 그럼 되소, 되소. 그 다음엔, 성인 되고 싶어요?「예」
나랏님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람을 충신이라 하는 것이요, 부모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람을 효자라 하는 것이요, 하늘을 위해서 목숨을 몽땅 바치는 사람을 성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돼요. 성인이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을 알아야 된다구요.
성인이 어떤 사람이냐? 이걸 알아야 된다구요. 몽땅 바쳐야 돼요. '내 귀도 그를 위하여 있는 것이요, 눈도 그를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지백체는 전부 다 그를 위하여 있는 것이다' 하면 성인의 반열에 동참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명을 바치는 데는 하나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구요. 그분들이 생각하는 것은 거룩한 전통을 남겨 가지고 남아 내려온 인류역사 가운데 자기와 같은 전통을 쭉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그분이 부디 이와 같이 행복한 자리에서 성인의 무리, 효자의 무리, 충신의 무리를 맞이할 수 있게끔 그 전통까지 남기기 위해 죽는 사람이 되어야 됩니다. 다시 말하면, 나라를 사랑하고 세계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런 전통을 남기기 위해 죽어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 같은 양반은 겟세마네 동산에 가 가지고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피하게 하시옵소서. 그러나 내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 뜻대로 하시옵소서' 하는 기도를 했습니다. '내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 뜻대로 하시옵소서' 이것은 상대적이라구요. '아버지의 뜻' 하게 되면 이것은 상대적입니다. '아버지, 아버지 자체로 하시 옵소서' 이렇게 안 했다구요. '아버지 뜻' 하면 뜻은 상대적이지요? 그렇지요?「예」 그런데 사람들은 전부 다 '내 뜻대로 천국' 그럽니다. 그러나 나와 뜻과는 다른 거라구요. 그렇지요? 나 이퀄(equal; 같은) 뜻이 아니예요?
그러면 뜻이란 무엇이냐? 목적을 두고 말한 것이지 예수를 두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요?「예」 그 뜻의 세계에 미래가 연결되는 것이요, 그 미래가 연결되는 과정에서 역사는 발전하는 것이요, 그 역사과정에서 민족이 형성되고 국가가 형성되고 세계가 탄생하는 것입니다.
그런 인륜에 의해서 아버지의 뜻을 존중시해 가지고 자기 개인의 이익을 초월한 자리, 초월적인 자아의 신념을 가지고 하늘을 위주로 하는 자리, 거기에서부터 비로소 성인의 도리가 판국을 찾아 가지고 출발했다는 것을 우리는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자, 그렇게 했으면 그것이 나쁜 것이냐, 좋은 것이냐?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나쁜 것이예요, 좋은 것이예요? 대답해 보라구요. 좋은 거예요, 나쁜 거예요?「좋은 겁니다」 뭐가 좋아, 뭐가 좋아! 지금 모가지가 끊어져 가지고 죽게 되었는데 좋아? 이 녀석아! 나빠, 안 나빠?「좋아요」 나쁘다구!「좋아요」 좋긴 좋은데 내용이 다르다구요. 나에게는 나쁘지만 하나님께서는 좋다 이겁니다. 이것을 알아야 된다구요. 알겠어요? 그래, 죽는 게 좋아요?「예」 에이 이 녀석아…. (웃음) 죽는 것은 좋지 않다구요. 나에게는 나쁘지만, 하나님께는 좋다 이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분이냐? 내 주체입니다. 대상은 주체를 위해 있는 것입니다. 이 자각을 우리는 해야 되는데, 그런 자각을 지금까지 못하고 있다구요.
주체는 누구를 위하여 있느냐? 주체는 주체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요, 대상은 대상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구요. 여기에 있어서 주체는 대상을 위해 있는 것이요, 대상은 주체를 위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상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선한 것이요, 주체를 위해 희생하는 것이 선한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은 선이라고 하는 것이요, 자식이 부모를 위해서 충성하고 희생하는 것은 효라고 하고 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말이 무슨 말이냐? 주체가 대상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은 악이 아니라 선이 되는 것이요, 주체가 대상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이나 대상이 주체를 위해서 희생하는 것은 선이 된다는 것입니다. 알겠어요?「예」내용이 달라진다구요.
죽는 것은 나쁜 거예요. 희생이 좋아요, 나빠요? 희생이 좋아요, 나빠요?「좋아요」 희생이 좋아요?「예」 그럼 밥도 먹지 말라구요. 숨도 쉬지 말라구요. 그게 좋아요? 콧구멍 딱 막아 가지고 바늘구멍만한 구멍으로 숨쉬어 보라구요, 얼마나 힘든가. 아-아-아 (행동으로 표현하심) (웃음) 그래도 좋아요? 좋아요, 나빠요? 나에게는 나쁘다구요. 나에게는 나쁘지만 내가 대하는 주체에게는 좋다 이겁니다.
그러면 주체가 좋아하는 것과 대상이 좋아하는 것을 가치적인 면에서 볼 때, 주체와 대상이 상대가 되어 가지고 서로 좋아할 수 있는 인연이 있으면 이것은 안 깨진다구요. 주체와 대상이 좋아해 가지고 맺어진 것은 깨지지를 않아요. 그렇지만 나 혼자 좋아한 것은 깨지기 쉽다구요.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선악의 기원을 파헤쳐 봅시다. '남자는 태어나기를 남자를 위해서 태어났고, 여자는 태어나기를 여자를 위해서 태어났다. 여자가 곱살하게 생긴 것은 여자 때문에 그렇게 곱살하게 생겼다' 그래요. 안 그래요?「안 그래요」 그건 누구 때문에 그렇게 생겼어요? 남자가 곱살한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렇게 생겼다구요.
또, 여자 앞에 있어서 남자는 왜 덩치가 커 가지고 울툭불툭 보기 싫게, 밉살스럽게 생겼어요? 그것은 여자가 그런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렇게 생겼다 이겁니다. (웃음) 그렇기 때문에 남자가 태어난 본래의 출생의 본위를 헤쳐 보게 될 때에, 자기를 위해 태어난 녀석은 없다구요.
이놈의 남자들아! 이놈의 남자들아!「예」 거 뭣이 예야? 이놈의 남자들아 하는데 뭣이 좋아요? (웃음) 이것 여자들아! (웃음) 이렇게밖에 말할 수가 없다구요. 본래는 여러분들이 태어나게 된 것은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전부 남을 위해 태어나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요, 안 그래요?「그렇습니다」 본래 그렇게 되어 있다구요. 남자는 여자를 위해 태어났고 여자는 남자를 위해 태어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태어난 본래의 가치라는 것은 자기를 위해서 사는 데에 서는 생겨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게 타당한 결론이예요.
이렇듯 생애의 가치추구노정에 있어서 태어난 본연의 목적이 남을 위해서 태어난 남자와 여자인데도 불구하고, 자기를 위해 태어났다고 강조 하는 사람은 낙오자라구요. 낙제감이다 이겁니다. 아무리 잘났다는 간판을 가진 학박사도 낙제감입니다. 불행한 사람입니다. 불행 안 하겠다고 하는 녀석은 틀림없이 불행한 사람이예요.
이런 관점에서 세계 대통령을 생각해 보라구요. 그는 세계의 대통령으로서, 덩치도 큼직하고, 상통은 뭐 아주 간판을 잘 붙이고 태어났다구요. 또, 권력을 보더라도 세계를 주름잡을 수 있는 권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에게 있어서 부인도 없고, 아들도 없고, 딸도 없기 때문에 행복하다? 「아닙니다」 행복해요? 「아닙니다」 왜? 돈도 있고, 권력도 있고, 자기 밸이 발동하는 대로 마음대로 할 수도 있는데 왜 행복하지 않아요? 이것은 공식 원칙에 부합되지 않는 것입니다. 남자는 여자를 위해서 태어난 것인데 여자가 없기 때문에…. 그렇지요?
이렇게 생각하면 예수님이 혼자 살다 죽었는데, 잘 했어요, 못 했어요? 「못 했습니다」 왜 못 했어요? 예수님이 남자예요, 중성이예요?「남자입니다」 보았어요? (웃음) 마찬가지 이치라구요. 예수님이 남자라면 그는 반드시 그와 대등할 수 있는, 나아가 자기보다도 훌륭한 여자를 얻고 싶었을 것입니다.
내가 못난 여러분들 결혼을 많이 시켰다구요. 합동결혼을 시켰다는 말입니다. 그때에 이 욕심 많은 사내 녀석들은 자기는 소학교밖에 못 나왔으면서도 '선생님, 나는 국민학교밖에 못 나왔으니까 공평하게 하려면 대학교 나온 여자 얻어 주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그래! 네가 소화시킬 수 있는 역량이 있느냐' 하니까 '그거야 뭐 여자는 남자를 따라오게 마련인데요' 하는 거예요. 그거 말 잘했다구요. 그렇게 욕심이 많다구요. 그렇기 때문에 남자는 자기보다도 못난 여자를 만나고 싶고. 여자는 자기보다 못난 남자를 만나고 싶어요?「아니요」 욕심이 지나치지만, 자기보다 잘났으면 좋겠다고 그래요, 안 그래요?「그래요」 그게 뭐 그렇게 되느냐 못 되느냐 하는 것이 문제이지, 잘나기를 바라는 것은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잘난 사람을 만날 때는 서로가 행복한 것입니다. 그렇지요?
내가 이렇게 얘기하다가는…. 오늘 뭐 더운데 종로에 와 가지고 땀 빼고 뭐 그럴 게 있어요? 적당히 하고 가자구요, 적당히 하고. (웃음) 땀이 자꾸 나는구만! 그렇다고 목욕탕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쉬어 가지고, 한5분 동안 샤워라도 하고 난 뒤에 이야기하게는 안 되어 있거든요. (웃음) 그러니까 너무 열을 내지 말고…. 듣기도 어렵거니와 말하기도 어려운데, 간단히 합시다?
선은 어디서에서부터 출현하느냐? 선악의 기원을 파헤쳐 보자는 것입니다. 좋기를 바라는 그 기원이 있다면 어디서부터 좋아지느냐? 또, 나빠지기를 싫어하는 것은 어떻게 해서 그런 것이냐? 이러한 것을 확실히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 유래를 파헤쳐 확실히 명시해 가지고 결정적 기반 위에서 나의 제일보의 행차를 옮겨 놓는 데 있어서 비로소….
자, 그러면 선의 유래는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느냐? 사람으로부터 시작되느냐? 아닙니다. 남자 여자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냐? 물론 남자 여자로부터지만, 인간을 보게 되면 인간은 생겨났다구요. 본래 인간 자체를 보게 될 때, 인간은 어디까지나 결과적인 존재이지 동기적인 존재는 못된다는 거예요. 인간은 결과적인 존재라구요.
선이 어디에서부터 출발했느냐? 그 출발지가 어디서부터예요? 내 아버지 어머니가 있는 안방에서부터 시작했어요? 「아니요」 아버지 어머니의 주머니에서부터 시작했어요? 「아니요」 아버지 어머니의 마음에서부터 시작했다고 생각하나요? 「아니요」 그러면 그 선의 출발지가 어디 일 것이냐, 그 근원지가 어디냐? 인간이 아니고, 하나님이 있다면 보다 차원 높은 선의 중심인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한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인륜을 넘어서 천륜이 있는 것이요, 인정을 넘어서 천정이 있기 때문에 출발의 기원은 천륜과 천정이 아닐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동기요, 오늘날 우리 인간은 결과적 존재임에 틀림이 없다는 거예요. 알겠어요?
그러므로 하늘이 여기에 개재하는 데서부터 출발했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개재되는데, 하나님은 어떻게 해야 선한 하나님이 되느냐? 선한 하나님의 입장이 어떻게 되어야 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거라구요. 하나님이 엿새 동안 떡- 만물을 지어 놓고, 사람까지 지어 놓고 '아! 선한지라' 했다구요. 혼자 있을 때 '아! 선한지라. 좋다. 좋다' 그런 것이 아니라구요. '선한지라'에서 이 선의 이름이 무엇이냐? 지어 놓은 물건들이 전부 다 자기와 화동하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딱딱 보조를 맞추어 주기 때문에 '아이구 좋다' 하게 될 때 선하다는 것입니다. 선(善) 자는 착할선 자이지요? 착할 선 자이니까 착하다고 할 때는 거기에는 반드시 미(美)가 개재되어 있다구요.
이런 입장에서 '선하다' 하는 그 선의 상대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되어야 되느냐? 선의 상대가 되기 위해서는, 선한 물건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중심에서부터 희생의 대가를 치러야 됩니다. 그러한 결과를 갖지 않고는 선의 대상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알겠어요. 무슨 말인지?「예」 다시 말하면 하나님만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선한 것을 보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있는 창조적인 힘, 즉 에너지(energy)를 소모시키는 결과에서부터 선이 성립된다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선의 밑바닥은 하나님인데, 하나님이 왜 선하냐? 하나님은 왜 선하게 되어 있느냐? 선의 주체가 되느냐?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 그분은 결국 상대를 위해서 자기의 힘을 소모시키는 자리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즉, 희생의 주체로서 등장된 입장에 서 있기 때문에 선의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예」
그렇기 때문에 선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희생해야 하고 먼저 주어야 됩니다. 주는 데는 전체를 주는 운동이…. 이런 발동이 벌어져 가지고 그 발동의 결과가 나타나는 데에서부터 선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결과에서부터 선이 벌어지는 거라구요. 그래서 주체 되는 하나님은 희생을 당하지 않을 수 없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선의 역사는 희생에서부터 라는 결론이 나오는 겁니다. 알겠어요?「예」 자기를 사랑하는 것보다도 대상을 더 사랑하기 위해서 자기는 희생되는 것입니다. 자기는 소모전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부터 선의 역사가 발발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자기를 희생시키는 거기에서부터 창조의 능력이 가중된 상대의 세계, 피조세계가 형성된 것입니다.
기독교 신도들은 하나님을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믿고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야, 백두산아 나와라!' 할 때, '예이' 이렇게 나올 줄 알아요? 그렇게 나오게 하기 위해서는 그 구성요소에 필요한 힘이 있어야 됩니다. 소모력을 가중하는 데에서부터, 구상력이 전진함에 따라 가지고 힘의 배열을 통하여 그 구상력에 일치화될 수 있는 소모적인 힘이 투입되는 데서부터 상대적 피조세계가 형성되는 것이 아니예요. 그건 이론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거라구요.
선을 투입하고 나서는 길은 어떤 길이냐? 자기 소모과정에 있어서 소모의 대가 그 이하의 것이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소모시키는 데 있어서 자기를 위해서 소모시키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위해서 소모시키면 그것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냥 그대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경우에도 형제 중에서 자기를 닮은 형님이 좋고 누나가 좋지요? 형제 중에도 자기를 닮은 끼리끼리가 좋은 거라구요. 그래서 쌍둥이는 그저 밤이나 낮이나 붙어 다니기 일쑤라구요. 그렇지요? 닮았기 때문에…. 밤에 보아도 닮았고 낮에 보아도 닮았고 걸음걸이도 닮았거든요. 말을 하더라도 한 사람이 '엄마' 하게 되면 다른 한 사람도 같이 '엄마' 하려고 한다구요. 닮는 것 좋아하지요?
어떤 엄마 아빠에게 아들이 있는데 그 아들이 잘났으면 말이예요. '아이고 얼굴은 아버지 닮았고 머리는 엄마 닮았다'라고 하면 둘이 싸움하는 거라구요. (웃음) 머리가 좋을 때는 아버지가 '이 애는 당신을 안 닮았어. 몸뚱이를 보면 날 닮았다구. 나를 닮았기 때문에 머리가 트였어' 하고, 어머니도 '당신의 머리가? 뭐 형편없는 머리지만 내 머리가 좋기 때문에 내 머리 닮아서 머리가 좋지요?' 하며 싸움을 하지요? 그러니 자기 닮은 것을 좋아하는 것이 천지의 이치라구요. 그렇지요? 그러므로 하나님이 힘을 투입해 가지고 상대를 만드는 데 있어서는 엇갈리고 반대되는 상대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꼭 맞는 상대를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주 멋진 작품을 만드는데 한 20년 걸려서 만들었다고 합시다. '요 20년 걸린 작품이 어쩌면 저렇게 내 마음에 쏙 드나?' 할 때에는 20년 세월이 흘러갔어도 '아이고 좋아' 한다는 것입니다. 임자네들 그렇지요? 그거 거짓말 아니라구요.
선의 역사는 어디서부터 출발했느냐? 주체의 입장에서 상대를 위하여 무한히 투입시킬 수 있는 데서부터, 자기 부정적 가치를 추구하면서 상대적 가치의 입력을 무한히 추구하는 데서부터 무한한 이상세계는 발전 하기 마련입니다. 이러한 결론을 지을 수 있는데, 그 말이 좀 어렵다구요. 여기 중고등학생들에게는 좀 어렵겠지만 말입니다. 나야 말을 했으니….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정도가 미급이기 때문이지만, 내가 말하는 것은 틀림이 없다구요.
그렇기 때문에 '선한 길을 찾아가는 사람들이여! 그대들은 하나님의 입장을 접해 봐라' 이렇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선의 주체이기 때문에 선을 번식시키고, 선의 창조의 세계를 추구하던 거와 마찬가지의 전통을 이어받아 가지고 오늘날의 현실 사회생활에서도 그것을 적용해서 살게 된다면 여러분들은 틀림없이 하나님의 아들딸이다 이겁니다.
'선한 사람' 하면 그 사람에게는 반드시 희생의 역사가 깃들어져 있는 것입니다. 알겠어요?「예」 자기를 희생시키는 데서만이 선의 가치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나를 완전히 희생시키게 될 때는, 천만의 군중도 그 하나의 완전한 희생의 대가에 대한 가치를 완전히 이어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요, 안 그래요?「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은 희생의 대가를 치러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옮겨지는 거라구요.
그렇게 옮겨져 가지고 어떻게 되느냐 하면 그것이 나에게 돌아오는 거라구요. 그렇게 되게 된다면 횡적인 나와 종적인 나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 말이 조금 어렵다구요. 그리하여 거기에서 천지가 결속되는 것입니다. 주체와 대상이 자기의 본위의 자리를 확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인의 역사를 찾아 보면 그 성인의 길이란 것은 역사를 위해서, 만민을 위해서 얼마만큼 자기를 희생시키는 전폭적인 생애가 엮어져 있느냐 하는 것으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전세계 만민을 위해서 백 퍼센트 희생했고, 인간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소원을 중심삼고 완전히 희생한 사람은 성인의 대열에 있어서 으뜸가는 성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돼요. 알았어요, 이제는.
선이 가는 길은 희생의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자기를 주장 하는 데는 파탄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일에 하나님만을 주장해 가지고 살았다면 상대의 세계, 피조세계가 형성되었겠느냐? 됐겠어요? 「안 되었겠습니다」 그건 고립이라구요, 고립. 누구나 자기를 위하라는 마음을 자꾸자꾸 갖게 된다면, 자기 자체가 소모되어 가지고 나중에는 자기 자체도 부정할 수 있는 자리에 들어간다는 거예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예」
그렇기 때문에 남을 위하면 발전하는 것이요, 자기를 위하면 망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상대를 위하면 사방성을 거쳐 가지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중심의 자리를 결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자기를 위주하면 상대를 전부 다 파탄시키고 나중에는 종적으로 선 사람이, 자기 자체가 누워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망하는 거라구요.
이렇듯, 자기를 위하라고 하는 사람에게는 상대적인 세계가 없어지느니만큼 맨 처음에는 친구가 많지만 시일이 지나감에 따라 친구가 더 많아진다, 적어진다? 「적어진다」 남을 위해서 희생하는, 친구를 위해서 희생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는 시일이 가면 갈수록 친구가 많아진다? 적어진다? 「많아진다」 그의 친구들도 떨어질까봐 야단이고, 자기도 떨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기의 누이동생이 있다면 자기의 누이를 그 친구에게 시집 보내고 싶은 마음까지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의 아버지 어머니는 아들딸을 그 친구와 관계를 맺게 해 가지고 부부의 인연으로 연결시키려고 애달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요?「예」 그러니 시일이 가면 갈수록 그는 발전하는 것이요, 자기를 주장하고 나서게 되면 시일이 가면 갈수록 완전히 없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예」
악은 무엇이냐? 선에 대적(對敵)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이 흥하면 악은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망하는 길을 가지 말라고 하는 것이 선의 길이요, 망하는 길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 선의 길이기 때문에, 그러한 선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망하는 길을 제거해야 됩니다.
망하는 길이란 뭐냐? 자기를 위하여 끌어 붙이는 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길을 파탄시키라는 것입니다. 개인을 위주로 하는 사람은 개인 앞에서 몰려나는 것이요, 가정만을 위주해 가지고 전체 가정을 자기 가정 앞에 굴복시키려는 그 가정은 독재 가정으로서 전체 가정들로부터 추방당하는 것입니다.
나라를 중심삼고 볼 때 독재자도 그렇습니다. 히틀러면 히틀러를 중심삼고 보더라도 그는 '구라파 제국은 게르만 민족을 중심삼은 독일 국민을 위해서 있어야 된다'고 했습니다. 만일에 히틀러가 구라파를 위해서 그 많은 대군과 국력을 소모했더라면, '구라파인을 위해서 독일이 있다' 라고 하며 희생했더라면, 오늘날의 독일은 싸움을 하지 않고 구라파를 제패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민주세계를 중심삼고 보면, 미국이 자기 나라를 위주해 가지고 다른 민족과 대치되는 입장에 서게 된다면 미국은 망하는 것입니다.
공산세계도 새로운 하나의 세계를 추구해야 할 세계의 이념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기 민족의 관념을 초월하지 못하고 세계의 공산국가는 소련을 위주한 슬라브 민족만을 위해서 희생하라고 하면 망합니다.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만일에 소련이 공산주의 사상을 가지고 '소련은 세계를 위해서 있다' 하는 입장에서 자기를 희생시켜서 전세계 해방과 전세계 공산당의 권위를 세계 만민 앞에 부여해 주기를 바라며, 그것을 행복과 희망으로 생각했다면, 오늘날 공산당은 중공과 소련으로 갈라질 수 없는 것입니다. 갈라질 수 있어요?
오늘날 미국은 망합니다. 미국은 망하는 거라구요. 자기 일개 국가의 주권를 옹호하기 위해서 세계의 수많은 주권 국가의 해방의 권한을 망각 하면 그 미국은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미국 하나는 망하더라도 세계를 살리기 위해서 스스로 싸워 나가는 국민으로서, 주권이 없고 국토가 없더라도 그런 국민 사상만 남아 있다면, 그 국민은 20세기를 넘어서 30세기의 역사시대에 있어서 세계를 제패할 수 있는 국민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천도가 가르치는 선의 절대노정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알겠어요?「예」
나는 상대를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나는 나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 세계를 위해서 있다는 것입니다. 남자는 남자를 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여자를 위해 태어난 것이요, 여자는 여자를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남자를 위해 태어난 것입니다. 거기에서 이상적인 가정이 나오는 것입니다. 영원한 선을 중심삼고 하나의 아내와 영원한 모델로서 사랑을 그릴 수 있는 하나의 표준형이 거기서 나올 것입니다. 거기에서 표준을 찾을 수 있지, 자기를 위주해 가지고 간구하는 곳에서는 표준을 찾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거예요.
자, 남편이 아내에게 '당신은 내 여편네니까. 아내니까 내 말대로 해!' 한다면 몇 해 못 가 가지고, 아무리 얌전한 아내일지라도, 한 3년쯤 가다가 딱 대드는 것입니다. 임자네들에게도 그런 일이 자주 있지요?(웃음) 시일이 가면 갈수록 알 수 없게끔 자기를 내세운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묵사발이 돼 가지고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 자빠져도 좋고, 일어나도 좋고…. 그런 남편이라면 혼자 자고 있을 때 말이예요. 자기가 가는 길목에서 자면서 발을 쭉 뻗더라도 그것을 보고 '아이고, 이발 참 고맙습니다' 그럴 수 있다구요. 그렇지 않은 남편인데 그랬다가는 '요것 봐라. 왜 이래?' 한다는 것입니다. 행동은 같은 행위인데 하나는 극좌로 벌어지고 하나는 극우로 벌어진다구요. 그거 이상하지요? 자기를 위하는 관념이 생겼을 때는 파탄이 오는 것이요, 자기를 희생시키고 남을 위하는 사상이 남아질 때는…. 이렇게 될 거라구요. 그런가, 안 그런가?「그렇습니다」
그러면 타락은 무엇이냐? 자기의 자각을 중심삼고 자기 주체 확립을 강조하는 데서부터 타락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천사장도 '하나님의 사랑을 내게만 결부시키겠다'고 했고, 해와도 때 아닌 때에 '아이고 나도 그래 보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보다도, 전체를 생각 하는 것보다도 요것을 어떻게든지 하려고 해 가지고 망구지가 된 것이 해와입니다.
여자들을 보면 이상스럽다구요. 그렇지만 여자들은 앞으로 소망의 어머니가 될 수 있는 다른 면이 있기 때문에 뭐 희망이라도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상대를 위해 사는 사람은 어떻게 되느냐? 망하는 것이 아니라구요. 상대를 위해 살게 되면 중심자가 되는 것입니다. 가정에 있어서도 아버지 어머니한테 효도하고 형제들 앞에 희생봉사하게 된다면, 시일이 감에 따라 틀림없는 중심으로서 뿌리를 박게 됩니다. 그렇지요? 그렇게 되면 아버지 어머니도 '얘야!' 하면서 의논하게 되고, 형제들로 그를 따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싸움 없이 제패할 수 있는 하나의 평화의 터전이 이런 사상기반 밑에서 벌어지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이것을 교육했던 것입니다. 하나님도 이것을 승리의, 승패의 기점으로 했던 거예요.
자기를 위하는 사람은 망하는 길을 가는 것이고, 알겠어요?「예」 보다 큰 것을 위하는 그 길을 찾아가는 사람은 흥하는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은 가정을 위해서 희생해야 되고…. 선이 가는 점진 적인 발전 과정을 여러분은 가야 됩니다. 개인은 가정을 위해 희생해야 되고, 가정은 씨족을 위해서 희생해야 됩니다. 하나의 김씨 문중에 태어났으면 김씨 문중을 위해서 희생해야 되고, 김씨 문중은 대한민국의 민족을 위해서 희생해야 되고, 민족은 나라를 위해서 희생해야 됩니다. 지금 한민족이 둘로 갈라져 있는데 이 한민족은 통일된 주권을 위해서 희생할 줄 알아야 됩니다.
오늘날 김일성이와 박정권이 현재 7,4공동성명을 통해 가지고 통일방안을 모색하는데, 자기 주장만으로 일방통행하다가는 안 됩니다. 다 깨진다구요. 이런 입장에 있어서, 나는 너를 위해서 있고 너는 나를 위해서 있다는 이런 것을 어떻게 모색하느냐? 이러한 원칙이 적중된다면 한국에서는 싸우지 않고, 피를 흘리지 않고 통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자기의 가치를 자기에게서 추구하기보다는 상대에게서, 즉 상대적 기준에서 그 가치를 추구할 수 있는 길을 탐구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 아닙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심정의 터전은 상대권을 가졌기 때문에 가나 오나 그는 외롭지 않고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돼요.
대중 앞에서 자꾸 이 허리띠를 잡고 있는 것은 실례인 줄 알지만 말이예요. 지금, 내가 미국에서 올 때보다 체중이 10킬로그램이 줄었어요. 그때에 허리띠의 구멍이 꼭 맞던 것이 요즈음 자꾸 안 맞아 구멍을 뚫어야 하는데 그것 뚫을 사이도 없다구요. 자 그러니 자꾸 내려가는데 할수없어요, 실례이지만. 이 정도보다 더 실례할 것이 있으니까 뭐…. 선생님은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웃음) 이제 여러분 알겠어요?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학생들 끼리끼리도 선악이 어디에서 갈라지느냐? 보다 자기를 생각하는 사람은 보다 악한 사람이요, 보다 남을 생각하는 사람은 보다, 보다? 「선한 사람」 착한 사람입니다. 세상에서도 그렇잖아요. '착한 애기 돼라. 착한 사람이 돼라'고 하는 것입니다. 착한 사람이 되라고 할 때, '얘! 네고집대로 해라, 네 욕심대로 해라' 그래요? 아기를 기르는 부모들도 그래요.
그래서 종교의 길은 희생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세계 평화의 자동 적인 해방권이란 것은 여기서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자기를 위주해 가지고 투쟁하고 힘을 기준으로 하여 굴복시켜 가지고 판도를 넓혀 나오는 역사를 거쳐가는 것은 망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역사시대는 끝날이 와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있다면 끝날이 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떠한 무리가 그 끝날을 이어받아 가지고 새로운 역사시대의 기수가 될 것이냐? 세계를 위해서 희생하는 것을 철칙으로 알고, 그 나라를 위해서 희생하는 것을 철칙으로 아는 종교가 있어야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통일교회는 그런 사상을 갖자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통일교회 교인들은 고생을 하더라도 이 나라를 사랑하자는 것입니다. 통일교회는 망하더라도 이 나라를 살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통일교인은 굶고 못살더라도 이 나라의 백성은 잘살게 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이 나라의 백성 들이 그 갖추어진 공의의 이념을 알게 될 때에는, 내가 눈물을 열 번 흘렸으면 그들은 눈물을 백 번 흘리며 굴복하고, 내가 열 번 종의 자리에 있었으면 그들은 천번 만번 종의 자리에 서서 자기들을 지도해 달라고 할 때가 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거라구요. 알겠어요?
예수님이 제창한 도리의 내용은 치고 빼앗아 나오는 도리가 아니라 맞고 빼앗아 나오는 것인데, 그런 승리의 비결법을 역사 이래 비로소 처음으로 탐색해 가지고 지금까지 나온 것이 기독교의 역사입니다. 기독교는 피를 흘리면 흘릴수록 발전하는 거라구요. 핍박이 가중될수록 발전하는 거라구요.
그러니 통일교회에서 핍박이 사라지지 마소서 해야 합니다. 핍박의 길을 피해 가는 종교는 패퇴하는 것이요, 핍박을 받고도 그것을 소화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지고, 자기의 기대를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고차적인 나라와 세계가 기대한 것을 목표로 정하게 될 때, 하늘이 같이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는 핍박을 받았지만 망하지 않고 발전해 나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선의 작전법과 악의 작전법은 다릅니다. 악은 치고 나서 빼앗아 가지고 망하지만, 선은 잃어버렸다가 점령합니다. 점령하는 데는 손해배상을 첨부시켜 가지고 빼앗아 나오는 겁니다. 이런 작전을 하는 거라구요.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하나의 평화의 세계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아까 말한 거와 마찬가지로 자기가 좋아지려면 자기 가정이 좋아져야 되고 자기 나라가 좋아져야 된다는 것이 습관화된 그런 인간 앞에 있어서, 자기가 희생되고, 자기 가정이 희생되고, 자기 나라가 희생되더라도 세계 국가가 좋아질 수 있는 새로운 가치관을 가지고 출발할 수 있는 그런 사상적인 체제가 있다면, 그 사상적인 체제를 통하여 새로운 역사의 개문 (開門)이 틀림없이 벌어질 것입니다. 하나가 올라가면 하나는 내려가는 것이요 하나가 내려가면 하나는 올라가는 법과 같이, 이 세상은 죄악의 세상이기 때문에 죄악된 세상에 있어서 그것이 결말을 지을 것이 아니라 죄악을 해탈할 수 있는 하나의 방향성을 갖추어 가지고 승리적 천국을 형성할 수 있는 때가 올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여러분에게는 가야 할 길이 있습니다. 개인을 위하여 갈 길이 있고, 가정을 위하여 갈 길이 있고, 나라를 위하여 갈 길이 있고, 세계를 위하여 갈 길이 있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아무리 개인을 위해서 가야 할 길을 다 갔다 하더라도 가정을 대표해서 갈 수 있는 길을 찾지 못하면, 개인완성은 가정완성에 동참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또한, 개인적으로 아무리 가정완성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그 가정만을 중심삼고 승리한 사람은 종족완성시대에 동참할 수 없는 것이요, 그런 종족은 민족적 승리의 대열에 동참할 수 없는 것이요, 그런 민족은 국가적 완성시대에 동참할 수 없는 것이요. 그런 국가는 세계완성시대에 동참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개인을 희생시켜서라도, 개인완성을 무시해서라도, 가정의 완성을 결정짓기 위해서 노력해야 됩니다. 그러면 개인승리를 하기 위한 수고를 하지 않고 가정승리만으로도 개인 승리 플러스 가정승리의 길을 차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예」 또한 가정의 승리는 못 했더라도 종족승리권을 위해서 자기의 일신을 희생해 가지고 부부가 그 길을 위해서 나가면, 가정승리는 못 하더라도 종족승리의 터전을 이어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종족의 승리는 못 했지만 민족을 위해서 희생하는 그런 자리에 선다면 민족승리를 이어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지혜로운 사람이란 어떠한 사람이냐? 그 위에 한 계단 위를 찾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비약하라는 것입니다. 한꺼번에 몽땅 해치울 수 있는 그곳을 찾아가는 사람이 제일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래서 종교는 끝날을 맞이하여 이 한때를 보고 밑천을 들어 가지고 장사하자는 거라구요. 그거 장사 속이라구요. 남들은 개인 찾고 가정 찾고 뭐 이러고 있는데, 맨 끝날에 가 가지고 한꺼번에 다 찾자는 거예요.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나님만 붙들면 됩니다. 알겠어요? 개인복귀, 가정복귀, 종족복귀, 민족복귀, 국가복귀, 세계복귀, 천주복귀를 해 가지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복귀하자는 겁니다. 하나님만 붙들면 되는 거라구요.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를 보게 되면 욕심꾸러기 중의 대장 욕심꾸러기라구요. 종교 믿는 사람이 꿍꿍이속이 있는데, 이게 엉큼하고도 놀라운 꿍꿍이 속이라구요. 기분 좋지요? 그래서 성경에 가르쳐 주기를 '야, 너희들 여편네를 데리고 나를 따라오지 말고, 너희들 아들딸을 끌고, 가정과 나라를 이끌고 나를 따라오지 말라. 귀찮다, 귀찮다' 이거예요. 그들을 끌고 왔댔자, 탄식거리 보따리가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은 얼룩덜룩한 보따리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싫어하는 거라구요. 하나님은 사랑이니, 동정이니, 인정이니, 사정이니 하는 그러한 관심을 한 치라도 안 주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게 실감이 안 나거든…. 우리 총각들, 여러분들은 총각이지요?「예」여러분들은 처녀지요?「예」 이 다음에 시집 장가가지요? 뭐 얌전하게 안가고 싶다고 얼굴을 붉히지 말라구요. 통일교회 처녀들은 그것이 실감이 날 것입니다. 가는 거예요?「예」 내가 하나 물어 보자, 너 고등학교 1학년 이야? 「예」 자, 대학을 떠억 나와서 스물 두살, 혹은 스물 세살쯤 되었다고 합시다. 대학을 나왔는데…. 귀여운 아가씨를 만나는데 가만 보니깐 말이예요. 처녀 중의 숫처녀를 만나고 싶어요. 껄럴껄렁한 처녀를 만나고 싶어요?「숫처녀요」(웃음) 숫처녀? 그거 아는구만. 숫처녀를 다 좋아하지요?「예」 그런 처녀를 만나고 싶다고요. 만나고 싶은데, 진짜 숫총각이 제일 좋은 순정을 가진 아내를 맞으려고 하게 되면, 그 총각도 숫총각이 되어야 되는 거예요. 숫정을 가진 그런 사람이 되어야 된다구요.
자 이렇게 볼 때…. 여러분들 왜 그래요? 나 나오라구? 나 나오라구 그래? 나 나오라면 좋겠다구. (웃음) 내가 지금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데 누가 철없이 그러노? 총각들은 생각을 할 때 말이예요. 숫처녀가 길거리에 다니면서 매일같이 어떤 남자들에게 프로포즈를 당하는 그런 역사가 있다 하면 기분이 좋겠어요, 나쁘겠어요?「나빠요」 나쁘지요? (웃음) 그러면 총각들은 어떤 생각을 하느냐 하면, 밤이나 낮이나 그런 티가 없는 것을 바란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자가 대학교 출신이라도 남녀공학인 서울대학 출신이 좋으냐 할 때?(몸짓으로 표현하심) (웃음) 왜? 그건 뭐 틀렸다는 거예요. 진짜 숫처녀를 고르려면 '아하, 이화여자대학, 여자만의 대학, 남자에 대해서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여자만의 대학 출신!' 그러겠지요? 남자와 공학한 여자들은 틀려 먹었다는 거예요. 여기에 그런 사람들 있거던 오늘부터 수속해 가지고 딴데로 전학가기 위해서 노력을 해도 괜찮을 거라구요. (웃음) 그건 뭐 그러고 싶으면 그러고, 말고 싶으면 말라고요.
여자들은 말이예요. 남자를 대하는 데 있어서 자기는 4학년이라도 1학년 남학생 가운데 좋은 사람이 있게 되면 '아, 1학년 아무개 녀석, 나이는 나보다 한두 살 아래지만 생기기를 잘생겼어! 허우대가 좋구만! 나이만 한두 살 많았다면 내가 한 번 생각해 볼 것인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건 매일 그저 전부 다 왔다갔다하는 거예요. 2학년 패도 그렇고, 3학년 패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또, 4학년 동급생 가운데서도 미스터 한, 미스터 박, 미스터 김을 대하면 전부 비교해 보고 맞춰 보는 거예요. '아이고! 네 녀석은 어떤 것이 빵점이요, 네 녀석은 10점이요, 네 녀석은 20점이요. 네 녀석은 50점이요, 네 녀석은 60점이요, 네 녀석은 65점이요, 네 녀석은 70점이 못 되고 69.9점이다. 72점이 되어야 할 텐데 71.5점이니 네 녀석은 낙방이다' 해 가지고 전부 다 잘라 버린다구요. 그런데 70점짜리 한 놈이 딱 버틴다구요. 그래도 그를 잘라 버리고 다른 데서 신랑이라는 사람을 떡 얻었는데, 그 꼬락서니를 보니까 옛날 자기 대학시대의 1호하고 비교해 볼 때 아이고, 10점도 못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2호하고도 안 맞고, 10호하고도 50호하고도 안 맞누만. 그래서 불행하다' 하면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그렇게 되는 거라구요.
자, 그건 또 그렇다 하고, 두 부처(夫妻)끼리 재미있게 한 30년 살았다고 합시다. '아이고 남자는 내 남편밖에 없고, 여자는 내 아내밖에 없다, 하면서 31년 동안 살아왔는데 말이예요. 어떤 소식이 들려오는데 알고 보니까 말이예요. 어떤 친구가 '네 남편이 옛날 너하고 만날 때, 죽자 살자하고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대' 할 때, 그 여자는 어떻게 해요? 뺑 돌아 가요, 안 돌아가요? 30년을 살았으면 이제는 뭐 걸러 먹고 또 걸러 먹고, 탁주로 말하면 찌꺼기까지도 마시고 그랬다구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마음이 후딱 돌아간 가지고 '요 녀석아! 30년 사기꾼아!' 그러는 거라구요. 그 기간이 길수록 간단해요, 더 분해요?「분합니다」 분하다구요. 길수록 분한 거라구요, 길수록.
이렇게 볼 때 하나님도 사람과 마찬가지입니다. 천지에 한 분밖에 없는 하나님은 사랑하는 데 있어서도 최고의 왕사랑을 할 분이라구요. 사랑에도 절대적인 주체 되시는 분인데, 그런 주체 앞에 설 수 있는 상대적 존재라는 것이 어떻게…. 누구하고 좋아하다가 죄 짓고 찾아왔을 때, 하나님이 기분이 좋겠어요? 좋겠어요, 나쁘겠어요?「나쁘겠습니다」 나쁘면 얼마나 나쁘겠어요? 죽이지 못해서 참는 거라구요. 그러니 얼마나 나쁘겠어요? 그걸 용서할 수 없다는 거예요.
그런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시기도 많고 욕심도 많아요. 그 다음엔 또 뭐 있어요? 시기, 욕심, 질투를 더덕더덕 갖다 붙여 놓은 것 같습니다. 그런 질투가 나빠요? 단 자기 하나만을 중심삼아 가지고 몽땅 사랑하게 될 때에는 그런 질투가 있는 것이 좋은 거라구요. 자기만을 사랑하기 위해서 완전히 점령하기 위해서 욕심을 가지는 것은 좋은 거라구요. 그렇지요? 그래요, 안 그래요?「그렇습니다」 이것이 나쁜 것 같지만 좋은 면에 이것이 다 구속될 수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노여워하는 하나님이라고 그랬다구요. 자, 이런 하나님이 인간들끼리 제멋대로 살면서 부부끼리 사랑하고, 아들딸 사랑하고, 받아 먹을 것 다 받아 먹고, 후줄근한 누더기 보따리같이 되어 가지고 '나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당신은 내 남편이 되어야 합니다. 당신은 내 아버지가 되어야 합니다' 하면 기분이 나쁘겠어요. 좋겠어요?「나쁘겠습니다」이 타락한, 수천년 동안 그런 사고거리로서 두루뭉수리가 된 인간상을 하나님이 생각할 때, 아까 뭐 사랑하는 그 기간이 오래면 오랠수록, 그것이 감추어져 가지고 알려지지 않은 기간이 길면 길수록 분하고 원통하다 했는데, 수천년 동안 그런 놀음을 일삼아 온 이 인간상을 볼 때, 하나님의 기분이 좋겠어요? 좋겠어요, 나쁘겠어요?「나쁩니다」 나쁘다구요.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외에는 조그마한 건덕지라도 절대 곁길로 가서는 안 된다, 몽땅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첫째되는 계명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 믿는 사람은 독신생활을 하라는 것이 원칙으로 돼 있다구요. 여러분들 독신생활할래요?「아니요」 왜 안해?(웃음)
낙제감하고 백점 맞는 사람하고는 등수가 다르다구요. 백점을 맞고 나서 마음대로 가는 것이지, 백점도 맞지 못해 가지고 '아니요'예요? 백점 맞기 전에는 골을 싸매고 공부를 해야 되는 거라구요. 놀러 못 간다구요. 그렇지요? 그래 여러분들은 그런 사랑을 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았어요? 기반 못 닦았으니까 홀 살아야 되는 거라구요. 이렇게 생각해 보게 될때 종교에서 독신생활을 강조하는 것도 하나님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걸 보면 역사적으로 하나님이 있다는 것이 증거되는 거예요.
자, 나라를 사랑하는 데 있어서 그 나랏님이 바라볼 때에, 나랏님이 충신의 역사를 엮어서 그 나라의 충신을 이제 선출하려고 할 때, 그는 자기 아들을 나랏님보다도 더 사랑했다고 한다면 걸려요, 안 걸려요? 나랏님보다도 자기 아들을 더 사랑했다 할 때는 걸리는 거예요. 여편네를 나랏님보다 더 사랑했다 할 때는 낙제권 점수이고, 충신이 아니예요. 자기의 욕심을 위해서 나랏님을 배반했을 때는 역적의 탈을 쓰는 겁니다. 그렇지만 자기 생명을 희생시키고, 자기의 아내와 자식을 전부 다 희생시키더라도 나랏님을 위해서 자기의 모든 것을 바치게 될 때는, 부끄러움이 없는, 만국의 청사에 길이길이 남아질 수 있는 충신의 반열에 동참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칙입니다. 그렇지요?
그러면 여기에서 하나님을 부모로 삼아 가지고, 크게 보면 나랏님과 같고 세계로 보면 성인의 스승과 같은 입장에 선 그분을 위해 가지고 새로운 역사적인 전통을 세워야 할 하나님의 뜻을 중심삼고 볼 때, 세상에서 부모를 위하는 효자 이상 되지 못해 가지고는 안 됩니다. 세상의 충신 이상 되지 못해 가지고는 안 됩니다. 세상의 성인 이상 되지 못해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 교인들을 성인보다도 더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자 하는 것이 내 욕심이라구요. 옛날에 공자 같은 양반이나 예수 같은 양반이나 석가 같은 양반은 세계를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자기 나라도 완전히 사랑하지 못하고 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뜻을 배경으로해서 나라를 사랑할 수 있고 세계를 사랑할 수 있는 자리에 선다면, 예수가 이루지 못한 이상세계를 내가 개문하고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예수보다 나을 수 있는 거라구요. 아까 말한 거와 같이, 개인완성은 못했더라도 전체를 대표해서 하나님을 사랑해 가지고 세계 전체 앞에 내세워서 하나님이 자랑하기에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이 된다면, 그는 예수 이상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통일교회의 가는 길은, 통일교회 역사는…. 여러분들은 선생님이 오기를 바란다고 했지만 내가 좋아하지 않는다구요. 오늘 내가 오긴 왔다구요. '뭐가 어떻고 어떻고. 선생님, 선생님요….' 이러면서 이 박종구 수작이 아주 근사하다구요. '선생님, 16일에는 한번 와 주셔야 되겠습니다. 내가 틀림없이 200명을 모아 놓을 테니까 꼭 와 주셔야겠습니다' 이렇게 물고 늘어지는 거예요. 그래 200명 모아 왔어요? 200명 더 되나, 이게? 안 됐으면 약속 위반이예요. 약속을 못 지켰으니 벌을 받아야지. 그런 이야기 했지? 왜 위반했어, 왜? 「……」에이 이 녀석아! (웃음)
200명이 되고 한 사람만 더 있더라도… 수자를 세어 보아서 199명만 되게 되면 그것도 걸린다구요. 저기 마루 끝에 서 있는 저 사람이 발을 들여 놓으면 199.9라구요. (웃음) 그렇지만 그것을 넘어서게 될 때는 '암만 그래도 괜찮소' 할 수 있는 겁니다. 그것이 걸리게 되면 뭐야! (웃음) 조건에 걸려 있다구요. 그렇기 때문에 기준이 필요한 것입니다.
자, 그래서 하나님은 욕심장이 하나님이라는 거예요. 사랑하는 데 있어서, 자기 아내를 대해서 욕심을 품는 것이 나쁜 것이예요? 저기 엄덕문! 자기 아내를 대해서 '나만을 사랑하시오. 나도 당신만을 사랑하겠다'고 욕심을 품는 것이 나쁜 것인가, 좋은 것인가?「좋은 겁니다」 또, 저기 고희용! 잘살아 봤으니까 뭐 그런 것도 다 알 게 아니예요? '당신이 나만을 위해서라면 최대의 욕심을 부려도 좋소!' 이렇게 되어 있는 거라구요. 그럴 수 있는 남편이 못 되어서 사고지, 그럴 수 있는 아내가 못 되어서 사고지, 그럴 수 있다면 몽땅 내 사랑이 되는 거예요.
자, 그러니까 하나님이 욕심장이인데, 좋아요, 나빠요? 그 욕심이 꽉차 가지고 꿀젖 같은 사랑이 흘러 나온다면, 그것을 마시는 상대는 얼마나 좋을까? 천년 입을 벌리고 숨을 안 쉬어도 웃음이 터져 나올 것입니다. 그러니 그 욕심이 나쁜 것이 아니라구요, 그 욕심이. 욕심이 있어야지요. 달보다 더 두껍고 해보다 더 두꺼우라는 것입니다. 그 욕심이 자리를 잡고 올바른 방향으로 전부 다 주입되는 날에는 천지가 녹아날 수 있는 거룩한 것이 됩니다. 알겠어요?
그래서 욕심이 갈 길을 잘 닦자니 통일교회 문선생이 욕심이 많다구요. 욕심이 많다구요. 선생님의 눈을 보게 되면 철저하게 생겼다구요. 매섭게 생겼다구요. 누구 말 듣게 되어 있지 않다구요. 세상이 암만 속닥거려도 그것에 넘어가지 않는다구요. 이치에 맞지 않으면 안 믿는 거라구요. 또 내가 신념을 가지면, 대한민국 같은 나라 몇백 개가 와서 반대하더라도 양보 안 합니다. 내 고집대로, 내 욕심대로 해 가지고 이만큼 기반 닦았는데, 여러분들은 선생님의 욕심 재료로 등장한 패들이라구요. 기분 나쁘지만 할수 없다구요.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을 그 욕심에 접붙여 놓으면 '아이고 내가 한밑천 잡겠습니다' 하는 거예요. 그럴 때는 하지 말래도, 눈이 뽑아지더라도 하게 되어 있다구요. 다 장사속이라구요. 뭐 통일교회가 좋아서 믿는 거예요?(웃음) 뭐 문선생의 얼굴이 좋아서 믿는 거라구요? 가만히 보니까, 그거 그래 가지고 망하지 않을 것이 뻔하니까 믿는 거지요.
그렇지만 통일교회가 가는 길은 다르다 이겁니다. 통일교회를 위해서 전도하는 것이 아니라구. 관(觀)이 다르다구요. 우리는 종파를 초월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초교파 운동을 하기 위한 힘도 갖추어 나오는 것입니다. 또한 초민족 사상을 중심삼은 초국가 이념을 형성하기 위한 새로운 민족 편성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본 사람도 선생님 앞에서는 '음-, 이렇게 해야 돼!' 하면 '하이(はい)' 하고, 미국 사람도 '예스(yes)' 하고 있다구요.
그것이 왜 그래요? 대한민국에 누구 뭐 수절한 사람이 많다고 자랑하는 사람이 있지만, 통일교회 문선생이 하는 것은 못 합니다. 하라고 그자리를 줘도 못 한다구요. 사흘도 못 가서 쫓겨나는 거라구요. 그렇지요? 딴 사람이 통일교회 문선생 대신 와서 내가 문선생 대신으로 왔다 하면 여러분들은 따라갈래요?「안 따라갑니다」 안 따라가지요? 따라가고 싶으면 따라가라구. (웃음) 누가 따라가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구요. 따라갔다가 다시 돌아올 것을 알거든. (웃음)
이제 결론을 지어야 되겠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이 무엇이냐 하면 '선악의 분기점에서'입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서 있느냐 하면, 그 자리에서 있는 것입니다. 한 발자국 잘하면 선할 수 있고, 한 발자국 못하면 악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 발자국 잘하면 천지가 나를 환영할 수 있는 희망의 길이 열리는 것이요, 한 발자국 잘못하면 암혹의 지옥이, 함정의 문이 열려서 나를 환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보는 이 한 눈의 시선은 선악의 갈림길에 서 있는 것이요, 내 손길 하나가 누구를 위하여 움직이느냐 하는 문제가 선악의 저울대에서 먼지 한 알과 같은 그런 가치의 사명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보고 말하는 것도 자기의 욕망을 위해서 하고, 내가 여러분을 이용하고, 종로교회에 와 가지고 내 계획에 여러분을 찬동시켜 가지고 내 한 보따리를 모으기 위해서 그런다면 이는 사기꾼이라구요. 그렇지만 마음으로 여러분을 위해서, 남을 위해서 자기의 모든 피땀을 흘리는 것은 사기꾼이 아닙니다. 알겠어요?「예」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손길 하나가 행동하게 될 때는, 그것이 선악의 분기점에서 선이냐 악이냐가 결정되게 마련입니다. 무서운 거라구요. 내가 한번 보는 것도 선이냐 악이냐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내가 말하는 것도 그런 것이요, 가는 것도 그런 것이요, 내가 눕는 것도 그런 것이요, 먹는 것도 그런 것이요, 느끼는 것도 그런 것이요, 누구를 만나는 것도 그런 것입니다. 전부 다 선악의 결정적 분기점에서 행동하는 자체들이라는 것을 자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은 사업할 때 속여먹기 위해서 말을 하느냐, 서로의 공동이익을 위해서 '그도 잘되었으면' 하는, 그렇게 도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느냐 할 때, 진정 그렇다면 인연을 따라서 옛날 친구보다도 그가 더 자기를 중시(重視)하게 되면, 옛날 친구를 밟고 넘어서서 이제 새로이 만나는 그 사람을 친구로 삼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돈을 모으게 되면 '우리 아들딸 공부시키기 위해서 저금통장에 저금한다' 통일교회 문선생은 그래 본 적이 없는 거예요. 내가 내 아들딸 공부시키기 위해 저금한 돈 한푼도 없습니다. 돈 있는 사람들, 거부들은 말이예요. 자수성가한 사람이면 그 집문서를 생명을 걸고 지키려고 하지만, 내 집문서와 인감도장은 어디에 가 있는지 나는 모르고 있다구요. 선생님이 도장 꽝꽝 누르면 수십억 원의 돈이 왔다갔다할 수 있는 그런 재산을 가지고 있지만 말이예요, 나는 그것을 관리하기에 미친 사람이 아닙니다. 돈을 갖다 쓰는 데는 나보다 더 잘 쓸 수 있으면 갖다 쓰라는 것입니다. 그 대신 내가 보는 그 원칙기준에서 이탈되는 날에는 무자비하다구요. 선생님은 한번 엇갈려 가지고 관계를 끊고 난 후에는 천년공사를 하더라도 그와 합하기 어려운 매정한 사람입니다.
그런 것이 있었기 때문에, 험악한 세계의 산정을 넘나들면서 벼랑길을 가려 가면서, 추락되지 않고 낙오자가 되지 않고 지금도 당당하게 서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돼요. 원리원칙에는 지극히 선생님 자신이 약한 존재입니다. 원리원칙을 들고 나와서 나에게 충고를 할 때는, 스승의 보따리를 집어 던지고 제자의 자리에 들어가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이겁니다. 그렇지만 원리원칙에 입각하지 않을 때는 제아무리 천하를 호령하는 사나이, 천하를 주름잡는 사나이가 왔더라도 촌보도 용서하지 못합니다. 비굴하게 굽실거리는 사나이가 아닙니다. 원칙을 따라 가지고 올바른 것과 그른 것을 가리는 싸움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발자국 가게 되면 반드시 악이냐 선이냐 하는 심판 행사를 하고 가야 됩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여자들이 시장에 가는 길도 선악의 길을 찾아가기 위한 길이어야 돼요. 일체가 그렇다고요. 내가 어디로 길을 떠나게 되면, '아버지여! 이 길을 떠나는 데 있어서 가는 길은 이렇지만 돌아올 때에는 하늘 앞에 마이너스될 수 있는 비참한 모습으로 이 문안으로 들어서지 않을 사나이가 되어 돌아오겠습니다'하는 기도를 하고 나서는 것입니다. 심각한 문제라구요. 알겠어요?
선악의 분기점, 이것을 피해 갈 수 있는 길은 뭐냐? 자기를 처리의 중심으로 세우려고 할 때는 망하는 것이지만, 전체의 이익을 위해서 처리 하려고 할 때는 나도 살고 전체도 살고 둘 다 사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돼요.
통일교회는 통일교회를 위해서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을 중심삼고 승공활동을 하고 있는데, 그것은 대한민국만 중심삼아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방어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 싸움을 하기 위해서 막대한 돈을 지출하고 있는 겁니다. 그 돈 가졌으면 통일교회의 지방교회를 훌륭하게 다 짓고도 남았을 거라구요.
내가 지방에 가서 초라한 교회의 문을 들어가게 될 때에, 교회가 이렇게 비참하다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거예요. '오냐 이 비참한 모습이 현시대에 있어서는 지나가는 비참으로 흘러갈 것이로되, 역사적인 시대가 오게 되면 이 비참한 것은 깃발을 드높여 만국 만민 앞에 자랑할 것이요, 부패해져 가지고 하늘의 몰락상을 드러내던 교역자들을 심판할 수 있는 방망이가 되는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신세를 지고서도 좋다고 잠자는 그 뒤에는 원수의 엇갈리는 총 끝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돼요. 남에게 신세를 지우고 잠자는 사람에게는 평화의 해방이 찾아올 것이고, 승리의 영광의 찬양소리가 준비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세상에서도 그렇잖아요? 매 맞은 사람은 다리를 오므리고 자고, 때린 사람은 펴고 잔다고 그랬나요?「아니요」 매맞은 사람은 다리를 펴고 자고, 때린 사람은 다리를?「오므리고」 오므리고 잔다는 것입니다. 매 맞는 통일교회는 다리를 펴고 자고, 때리는 기성교회는 다리를 오므리고 자기 때문에, 기성교회는 점점 떨어지고 통일교회는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렇지요? 그래서 내가 어디를 가더라도 부끄러움이 없다구요. 어디에 가든지 기성교회의 어떤 사람을 만나더라도 당당한 거라구요.
내가 요전에도 그런 얘기를 했지만, 통일교회 전통이 무엇이냐? 남에게 주기 위한 통일교회가 되자는 것입니다. 남을 돕게 되어 있지…. 여러분 요셉의 역사를 알지요? 여기에 기성교회 목사들이나 기성교회 책임자 들이 왔으면 똑똑히 좀 알라 이겁니다. 통일교회의 문선생이라는 사람을 자기들이 이단이라고 규탄하게 안 되어 있다구요.
보라구요.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면, 성경에 말하기를 '누구보다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 어미나 자식이나 혹은 아내 사랑하기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합당하지 않다.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서 이기고 나를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통일교회는 성경대로 살자 이겁니다. 그러니 자기 여편네를 버리고 뜻을 위해 나서라, 자식을 버리고 뜻을 위해 나서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성교회는 알지 못하고 기성교회 목사들은 하지 못했지만, 통일교회 문선생 자신은 한 거라구요. 여편네를 버리고 나섰고 부모를 버리고 나섰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왔다 이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는 사람이 이단이고, 그렇게 살지 못한 사람이 진단이예요? 그러한 천륜은 없어요!
여러분은 선생님이 명령하면, 선생님 명령대로 할래요?「예」 할래, 정말? 「예」 '뜻을 위해서, 조국광복을 위해서 가정을 버리고 나가자? 해가지고 20년 동안 나갔던 그 무리로 말미암아 조국광복의 한날을 맞이한 그런 기쁜날에 있어서, 20년 동안 수난길을 나오면서 희생의 제단을 쌓아 온 그 무리를 잘라 버리고 조국광복의 축하식을 할 것 같아요? 여러분, 김구 선생이니, 이박사니 다 훌륭하다고 말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예요? 그들도 자식을 사랑할 줄 알았고, 그들도 여편네를 사랑할 줄 알았고, 부모를 모실 줄 아는 그런 인륜의 심정은 다 가졌지만, 그것을 극복 하고 천정(天情)을 따라 전체가 행복할 수 있는 길을 따라갔기 때문에 추모의 대상으로 남아진 것입니다. 그렇지요?「예」
우리 젊은이들, 여러분들은 선악의 기로에 서 있기 때문에, 한 발자국 잘못 가게 되면 그것은 천야만야(千耶萬耶)한 사망의 구렁텅이에 걸려들어가는 것입니다. 힘들지만 한 발자국 딛고 올라서게 될 때는, 빛나는 내일의 소망의 산정을 넘어서 희망의 광야를 바라볼 수 있는 승리의 왕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한 발자국을 주의해야 되는 것입니다. 한 눈길을 주의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공부하는 데 있어서 한 페이지의 책을 읽게 될 때는 이 한 페이지를 내가 전부 납득함으로 말미암아, 한단어를 캐치(catch)하여 잘 알아 둠으로 말미암아, 앞으로 나라의 비운의 역사를 가려내게 할 수 있는 터전이 이 한 단어에 있다는 것을 느끼는 그런 입장에서 공부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 공부는 나라를 위한 공부가 되는 거라구요.
내가 한 페이지의 책을 보더라도 하나님의 섭리의 뜻이 여기에서 개문할 수 있음을 생각하고, 그런 심각한 입장에서 그 한 페이지의 책을 통독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필요로 하는 것을 위해서 준비해 나가는 사람이 틀림없으니,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들어 쓰는 것입니다. 그러나 적당히, 어영부영, 그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 아무 장단에나 맞추어 절개 없이 춤추는 그런 사람은 그 나라의 주인이 못 되는 거라구요. 자리도 분별하지 못하고, 여자들하고 붙어 뭐 춤추고, 남자들하고도 춤추고 그러는데…. 그러면 안 돼요. 갈래가 다르다구요. 통일교회의 가는 길은 갈래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돼요.
우리는 선의 길을 가야 되겠기 때문에 생사의 분기로, 선악의 분기로, 혹은 흥망성쇠의 분기로가 여러분 앞에 있는데, 거기에 닻줄을 걸게끔 해주지는 않았다구요. 그러면 그것을 누가 지탱해야 되느냐? 내가 당겨 들어가야 된다구요. '이놈의 닻줄아' 하고 내가 당겨 들어가야 합니다. '선의 닻줄아 올라가자, 올라가자. 개인을 지나고 가정을 지나고 종족을 지나고 민족을 지나고, 하늘까지 올라가자' 그래야 합니다. 이렇게 달려 올라가는 거라구요. 알겠어요?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하나님의 섭리는 나라를 찾을 때까지 종적으로 거꾸로 올라가는 놀음이라구요. 아직까지 수평선에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에 거꾸로 올라가니, 나라를 못 가진 기독교인들과 종교인들 앞에 나라를 가진 악당들이 그 나라를 지배하기 때문에, 그 종교인들의 모가지를 자르는 거라구요.
그런 원통한 역사적인 한과 숙명적인 원한의 타락권을 우리가 접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헤쳐 타파해 버리고 내 스스로 해방을 노래하고 내스스로 승리를 다짐할 수 있는 그런 석방의 날, 해방의 날, 광복의 날이 우리 앞에 남아져 있다구요. 그렇기 때문에 개인으로서 광복의 날을 맞고, 가정으로서, 민족으로서, 국가로서, 세계로서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는 광복의 날까지 맞아 가지고 나서야만 비로소 인생으로 태어난 본연의 사명과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 분기의, 출발시점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다구요.
그러면 세계통일은 어디에서 벌어지느냐? 나에서부터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 몸과 마음이 하나된 그 기준을 갖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꿈이 크고 이상이 높더라도 세계 통일적인 그 인연을 연결시킬 수 없는 것이 원칙임을 알아야 됩니다. 오늘날 선악의 분기점에 서 있는 여러분들이 잘 가려가야 되는 거라구요. 옷을 입더라도 얻어 입고 좋아하지 말라구요. 대한민국 백성들은 얻어먹기를 좋아하다가는 망하는 거라구요.
'통일교회 교인들은 주고 살아야 되고, 위해서 살아야 된다' 이런 사상을 가진 사람은, 시일이 감에 따라 중심으로 결정되는 것이 틀림없기 때문에, 여러분이 출세를 꿈꾸지 않더라도 출세는 자동적으로 환경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원칙에 따라서, 더우기나 특히 젊은이들은 선악의 기준이 이렇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내일의 승리자가 되어서 빛나는 조국광복을 넘어 가지고 세계 천국이 개문하는 행복의 한날을 맞이하여야 됩니다. 그리하여 승리의 왕자로서 승리의 왕녀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뿐만이 아니라 만국을 대신해서 이분을 본받으라고 할 수 있는 치하를 받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라서 잠깐 동안 말씀드렸어요.
사랑의 아버님! 이 자리에 모인 종로교회의 어린 식구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여기에 모인 것은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옵니다. 자기도 모르는 인연을 따라 타의에 의해서 하늘이 중심되어 가지고 모인 것이기 때문에, 저희는 주체를 앞에 놓고 대상의 자리에 서있다는 것을 항시 기억해야 되겠습니다.
나는 대상을 위해서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내 닮은 가치추구에 있어서 그가 완성되게 될 때, 그 완성이 나에게 귀일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 자리에 서게 되면 하나를 잃어버렸지만 둘을 소유할 수 있는 자리에 서는, 보다 가치적인 결정이 벌어지기 때문에 이는 선한 것이요, 둘 다 기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기쁠 수 있는 것이 차원이 높아지는 자리에 기쁨의 중심이 됨으로 말미암아 그 중심을 통해서 하늘은 새로운 역사의 출발을 다시 다짐할 수 있다는 것을 이제 알았사오니, 여기 어린 가슴 가슴들이 새로운 각오를 다짐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종로교회는 종로교회를 위해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서울과 대한민국을 위해서 싸우고 있사오니, 언제나 이 세계인류와 공동적인 보조를 맞추어 가면서 거기에 지지 않는 교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만나게 하여 주신 것을 감사하오며, 만나서 말씀하신 말씀이 이들의 피살이 되게 하시옵소서.
일생의 생명노정에 있어서 당신을 흠모하고 당신 앞에 가까이 나아갈수 있는 자극적인 무리가 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부탁하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님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사랑하는 아버님, 오늘은 이달을 맞이하여 네번째 맞는 안식일 아침이옵니다. 전국에 널려 있는 당신의 자녀들이 이곳을 우러러 보며 아버지 앞에 경배하는 곳곳마다 당신이 무한하신 사랑과 긍휼과 자비로 같이하여 주옵소서.
우리 통일의 무리들은 아버지의 남은 복귀의 사명을 책임지고 정성을 모아 최후의 전선에서 승리를 다짐해야 될 긴박한 때에 처해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특별한 40일 기간을 중심삼고 정성들이는 이 기간 위에 당신의 각별한 지도와 편달이 있기를 바라옵니다.
사람은 언제나 부족하기 때문에 하늘이 원하는 뜻과 그 표준 앞에 어긋나기가 쉽다는 것을 저희들이 알게 될 때에, 당신의 수고로우신 복귀 노정에 저희들이 얼마나 얼마나 가중되는 염려의 대상들인가를 다시 한번 느끼옵니다.
아버지, 이 시간도 저희들만 여기에 남겨 두지 마시옵고, 당신이 현현 하시어서 최후의 한날과 최후의 승리를 다짐하는 데 있어서 하늘이 보람 있어 하고 하늘이 기대하고 사랑할 수 있는 자녀들로서 최후의 노정을 지켜 나갈 수 있게 허락하여 주옵소서. 이 아침에 모인 어린 소수의 자녀들을 당신이 굽어살피시옵소서. 인간은 언제나 당신의 뜻을 따라가야 할 운명에 처해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더우기 복귀노정에서 숱한 슬픔을 남기고 있는 악한 선조의 후손으로 태어난 저희들인 것을 생각할 적마다 아버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무한하신 보호가 더하여 주실 것을 다시 바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버지여, 이 시간 굽어살피시옵소서. 저희의 마음에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아버지 편에 서고, 아버지를 대신할 수 있는 간절함이 있어야 되겠습니다. 하늘을 생각하게 될 때 언제나 습관적인 관념을 가지지 말고, 흘러가는 세월의 날들을 맞듯이 무의미한 날들을 보내는 저희가 되지 말고, 하루하루를 뼈살에 사무치는 마음을 갖고 아버지의 뜻의 길을 다짐하고 나갈 수 있는 자녀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여! 이 7월도 이제 후반기에 들어섰습니다. 아버지, 이달도 아버지의 거룩한 뜻 가운데서 저희들이 한 달을 놓고 청산하게 될 때에, 무엇을 하늘 앞에 남기고 무엇을 하늘 앞에 바쳐 드렸느냐 하는 것을 생각 하게 될 때, 언제나 부족한 자리에 처해 있는 것을 자인하게 되오니, 그럴 적마다 저희들이 정성으로라도 그 자리를 메워 나갈 줄 아는 자녀들 되게 허락하여 주옵소서.
아버지, 전국에 있는 당신의 자녀들을 지키심과 동시에 이 시대적인 사명을 따라서 일선에 서 있는 세계의 기동대를 아버지께서 지키시옵기를 바라옵니다. 그들이 가는 곳곳마다 당신이 직접 현현하시어서 살아 계신 아버지의 권위를 드러내고, 당신이 운행하심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들이 아버지 앞에 귀일될 수 있으며, 영계에 가 있는 수많은 영인들이 땅 위의 그들을 통하여 통일적인 일치점을 가짐으로 말미암아 땅 위의 완성을 다짐함과 동시에 영계의 해방권을 이를 수 있게끔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지금까지 왔다 갔던 모든 영인들이 땅 위의 저희들을 통하지 않으면 완성되지 못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현재의 저희의 입장이 얼마나 지중한가를 저희들은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저희에게는 한 시대를 대신한 것만이 아니라 3시대를 대신해 가지고 연결된 사명을 책임져야 할 방대한 사명이 있다는 것을 생각할 적마다, 저희 한 사람의 미급함이 과거 현재 미래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생각할 적마다, 저희 한 개체의 완성으로 말미암아 과거 현재 미래가 새로운 의미에서 아버지 앞에 바쳐질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할 적마다, 저희는 자기의 한 생명이 아버지 앞에 얼마나 간곡한 자리에 서서 효의 도리와 충의 도리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을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버지여! 이 시간 친히 지키시옵소서. 이 하루를 지키시옵소서. 뜻을 따라 충성을 다짐하는 곳곳마다 당신의 풍부하신 사랑의 손길이 떠나지 마시옵고, 뜻을 위하여 생명을 내놓고 아버지 앞에 전진하는 무리들 위에는 무한하신 능력의 손길로 같이하시옵고, 승리의 영광이 그들과 같이 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한 많았던 복귀의 한계선을 저희들이 밟고 넘어서 가지고 승리로써 아버지를 모시고, 당신을 찬양하고, 또 당신으로 말미암아 사랑받아 하늘의 하나의 가정의 식구들로서 아버지를 부모로 모시고 효성의 도리를 다하면서, 크게는 온 만국의 중심존재로 모시기 위한 충효의 도리를 다짐하는 저희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세계에 널려 있는 당신의 어린 자녀들을 기억하여 주옵소서. 아버지, 지금 일선에서 싸우는 곳곳마다 당신이 각별히 같이하여 주셔야 되겠습니다. 당신이 현현하시는 가운데서, 무한하신 능력과 무한하신 권위가 그들의 전후 좌우를 친히 옹호하는 가운데서 승리의 날들을 갖게 허락하여 주옵고, 만민 앞에 새로운 사명적인 노정을 제시하고 남음이 있게 허락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니다. 전체를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참부모님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우리 개인 개인들이 처해 있는 환경은 비록 제한되어 있지만. 그 개인이 처한 환경이 가정이면 가정을 대표할 수 있는 자리가 되는 것이요, 그 가정은 사회를 대표할 수 있는 자리가 되는 것이요, 그 사회는 나라를 대표할 수 있는 자리가 되는 것이요, 그 나라는 세계의 환경을 대신할 수 있는 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생각할 때, 자기라는 한 사람은 자기에게만 한하여 있지 않음을 우리는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 하게 될 때 그 나의 배후에는 가정이 연결되는 것이요, 그 나라, 혹은 이 세계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평면적으로 세계 인류를 대신해 있음과 동시에, 하늘이 이 땅을 대해 가지고 주체적인 입장에 서 있다면, 우리한 개체라는 것은 땅을 대신할 뿐만 아니라 주체 되는 하늘을 대신해서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 하나의 태도는 나 하나에서 빚어져 가지고 나 하나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연결 되어 가지고 사회를 넘고 국가를 넘어 세계까지 인연되어진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인 사건들을 우리가 추적해 보면, 그 역사적인 사건이 역사적 기준까지 되어진 이후에는 큰 것으로서 기억될 수 있으되, 그 당시에는 그것이 별로 인간들 앞에 알려지지 않고 대수롭지 않게 취급받아 그냥 지나가 버리는 사실들이 많은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아무리 역사적 사건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역사적 사건으로 받아들이고 역사적 사건으로 환경에 적응할 수 있게끔 그 사회나 국가는 늘쌍 받아들이지 못한 것을 우리는 알게 되는 것입니다.
또, 때가 지나고 나서, 한 시절이 가고 나서, 다음 시절에 와 가지고 어떠한 특정한 인물이면 인물이 거쳐갔던 것을 역사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인 사실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두고 보면, 30여 생애를 두고 싸워 나오던 그의 행로를 두고 볼 때에, 그 시대에는 그가 움직이는 모든 생활 자체를 공인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분이 대했던 환경은 그분을 위한 환경이 아니라, 그분과 상치되는 환경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시대의 유대 교면 유대교, 이스라엘 민족이면 이스라엘 민족을 두고 볼 때, 그들 가운데는 그렇게 바라던 소망인 메시아가 왔는데도 불구하고 그 메시아를 메시아로 모실 수 있는 소수의 사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두고 볼 때, 이것은 인간적으로 볼 때 비참한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혹은, 유대교로 볼 때는 유대교의 말로(末路)를 예고할 수 있는 비정하고도 통절한 순간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나라를 4천년 역사를 거치면서 하나의 선민적인 터전으로 고이 길러 오면서 한 줄기의 소망을 남겨 가지고 지도하셨던 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메시아를 보낸다는 그 약속을 따라 가지고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4천년 숙명의 그 모든 터전이 현실적으로 이스라엘 민족 개개인에게 연결될 수 있는 환경을 맞았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환경에서 메시아라는 소망의 존재를 맞아들이는 이스라엘 민족이 되지 못했던 것을 우리는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왔던 그분을 보내 놓고 나서, 그분의 뜻을 알지 못한 자리에서 쫓아 버린 그 민족과 그 교단은 여지없이 처참한 결과에 봉착 하였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를 보낸 하나님은 그가 어떠한 사명을 갖고 이 땅에 왔고, 또 그가 해야 할 책임이 무엇인가를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아무리 사회가 환영하지 않고 그 시대가 그를 용납하지 않더라도 부정된 그 환경을 타개해 가지고 긍정적인 환경으로 개척해 오셨습니다. 지금까지 기독교는 그 사명을 인계받아 가지고 그 뜻을 따라 발전해 나온 것을 우리는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역사가 지나고 난 후에야 그가 어떠한 사명을 갖고 왔었다는 사실을 알고, 그를 추모하고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게 될 때에, 사람이 자기 일생의 운명이 언제 어떻게 된다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아침에서 낮으로 교차하게 될 때 교차하는 그 시간을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혹은 아침과 저녁을 잇는 자정이면 자정, 오정이면 오정, 그것이 언제 넘어가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느 순간에 지나가는지 잘 모르는 것입니다. 시간이라는 관념이 있기 때문에, 시계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몇 시라고 하고 있지만, 그 몇 시라는 정확한 시간, 그것은 전도 아니요 후도 아닙니다. 없다면 없는 것 같은 그 선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이라는 것을 우리는 모르고 지내는 것입니다.
우리 일생에 있어서 자기가 성공할 수 있는 일이나, 혹은 실패할 수 있는 일이 어느때에 나에게 찾아오고 관계맺어지느냐는 것을 우리는 모르고 지내 버리기 쉬운 것입니다.
우리 개인이 그런 것과 마찬가지로, 한 국가의 운세를 두고 볼 때 국가의 운세도 그것이 언제 어떻게 찾아와 가지고 언제 지나가 버리는지도 왕왕 잊어버리가 쉬운 것입니다. 그것을 적절히 알아 가지고, 전후를 맞추어 가지고 출발이 이랬기 때문에 끝은 이래야 된다는 서로의 뜻이 맞는 확실한 길을 알고 국가면 국가 자체가 갈 수 없는 것을 우리가 생각 하게 됩니다.
이렇게 볼 때 세계의 운세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어느때에 이 세계에 비운이 찾아들겠느냐 하는 문제도 우리는 모르는 것입니다. 어느때에 세계가 하늘의 뜻이면 뜻을 중심삼고 승리의 한때를 맞을 수 있겠느냐 하는 것도 그때가 오더라도 이것을 정면으로 받아들이기란 힘들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적 사실들을 미루어 봐도 그렇고, 우리 생활적인 제반사를 두고 보더라도 확정지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큰 사명을 책임진 사람들, 혹은 큰 책임을 짊어지고 선두에서 가는 사람이 있다면, 선두에서 달리는 그 사람들도 역시 언제나 자기가 가는 길에 대해서 항상 주시하고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한 책임자가 잘못하게 될 때는 그에게 속한 전체는 비운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한 책임자가 비운의 자리에서 고통을 당하더라도 자기가 그것을 해결하는 데 있어서 천운에 맞게끔 해결짓게 되면, 해결하는 그것이 당대에 있어서는 비참한 것 같지만 지나고 나게 되면 역사적인 승리의 기점을 맞는 거룩한 시간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한 사람의 생활이라는 것은 자기 하나만의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혹은, 중요한 책임을 짊어진 사람도 자기 하나만이 아니지만, 중요한 책임을 짊어진 그분이 결정한 것을 따라가는 사람도 자기 혼자가 아닙니다. 그가 혼자 움직이지만 혼자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는 반드시 역사적 인연이 있는 것입니다. 자기 선조로부터, 그 사람이 자기의 선한 선조면 선한 선조, 악한 선조면 악한 선조의 인연을 따라 가지고 결과로 나타났기 때문에, 그들의 가는 길은 반드시 그 영향을 받기 마련입니다. 영향을 받기 마련인데, 그런 현시점에 있어서 자기가 어떻게 결심하고 결정짓느냐에 따라 새로운 시대를 맞아들일 수도 있고, 새로운 시대를 저버릴 수도 있는 입장에 선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이런 입장에서 볼 때, 우리 통일교회의 교인으로서 현재의 입장에 서 있는 우리들의 자세는 어떠해야 되겠느냐? 언제나 자신을 가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자신을 갖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승리를 했다고 자랑하는 그 순간은 자기 일생에 있어서 최후의 기쁨의 통고가 되는 동시에 그것이 끝남으로 말미암아 도리어 그 이상의 비운을 맞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 한 장면을 자랑하고 그 자랑이 끝나자마자 그 이상의 슬픔이 찾아올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어떤 면을 보게 되면 비운에 싸여 가지고 지극히 낙망한 자리에서 '나는 이제 절망이다. 나는 이 이상 갈 수 없다. 나는 이 이상의 소망을 바랄 수 없다'고 하지만, 그 누구와의 어떤 인연을 통해 가지고 절망의 자리에서 새로운 희망과 새로운 소망을 갖고 힘차게 재기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게 될 때, 사람은 언제나 자신을 가질 수 없는 것이요, 슬퍼하되 절망적인 자리에서 슬퍼만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냐 하는 것을 우리는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에 자기가 자랑할 일이 있다면 그 자랑은 오늘의 자랑으로서 끝나지 말길 바라야 됩니다. 자랑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 자랑은 내일의 빛나는 계승을 할 수 있는 자랑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만으로 끝나는 자랑이 되면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만의 자랑이 되게 된다면, 다음에 비운이 찾아오면 그 비운은 도리어 더 비참할 것이 아니냐, 자랑하지 않았다면 더욱더 좋았을 것이라고 느낄 것이 아니냐 하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쁨이 있더라도 그 기쁨이 종결될 수 있는 목적점이 더 빛나는 기쁨으로 연결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고 기쁜 자리에 서면, 내일의 보다 높은 승리의 한점을 다짐해 가지고 겸손히 바라볼 수 있는 제 2 차적인 혹은 고차적인 소망을 다짐해야 합니다. 그런 자리에 선다면, 그는 자기의 기쁨에 대한 자랑이 끝난 후에 아무리 비운이 다가온다 하더라도 그 비운을 뚫고 나갈 수 있는 저력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
아무리 절망 가운데 있더라도 그 절망은 절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만사는 돌아가는 것이 이치입니다. 한 번 높은 때가 있으면 낮은 때도 있는 것입니다. 양지와 음지가 서로 교체되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게 될 때, 내가 아무리 슬픈 자리에 섰다 하더라도 그 슬픔은 보다 빛날 수 있는 기쁨을 빛내주기 위해서 찾아오는 슬픔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슬픔을 소화하고 그 슬픔을 기쁨으로 맞아 넘어서게 될 때 그 후에 찾아오는 기쁨이 있다면 그 기쁨은 그야말로 그 슬픔이 깊었던 이상의 빛날 수 있는 기쁨이 될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생각하게 될 때, 아무리 슬픈 일이 있더라도 그것을 슬픔으로서 모든 것을 청산하지 않고 슬픔 후에 찾아올 수 있는 빛난 기쁨의 한때를 위하여 그 시간을 극복할 수 있는 저력을 가진 사람들은 반드시 그것으로 끝을 맺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예수를 맞이한 이스라엘 민족을 두고 볼 때, 예수라는 분은 하늘이 보낸 분이기 때문에 하늘에서 보게 될 때는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있어서는 그 누구보다도 귀한 분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과정에 있어서 예수가 나타났다는 것은 역사적 사건 중에서도 지극히 큰 사건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 앞에 최대로 기쁠 수 있는 것인데, 그가 나타나는 데는 기쁠 수 있는 내용으로 나타나지 못한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자랑하고 그들이 행복의 터전으로 삼고 있던 구약시대의 모든 진리를 중심삼고 보면 이것이 모두 상충적이고 파탄적인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이나 유대교는 이것을 정면적으로 충돌해 가지고 해결하려고 했는데, 거기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실수가 있었고 유대교의 실패가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를 바라볼 때 그는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행적은 역사 이래 놀랄 만한 것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방이 우러러볼 수 있고, 환경이 움직여질 수 있는…. 그런데 자기 입장이 침범을 받고 자기 입장이 치우침을 받는다고 해서 그것을 방어하고 그것을 슬퍼한 나머지 예수를 대하는 데 있어서 크나큰 실패를 가져왔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 서지 않고 예수를 대해 가지고 '저가 저렇게 나타나는 것은 우리에게 어떠한 충고와 어떠한 새로운 무엇을 계승시켜 주기 위한 것이 아니냐. 이것을 두고 보고 이것을 극복하고, 이것으로 말미암아 망해 있는, 로마의 속국이 되어 있는 이 나라 앞에 새로운 내일이 찾아올 것이 아니냐' 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 누구도 갖지 못한 민족적 저력, 4천년 동안 하늘의 뜻을 받들어 온 저력을 가지고 참고 기다리는 가운데 두고 봤더라면, 이스라엘 민족은 역사적인 참사를 당하는 비참한 민족이 되지 않았을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만일 그런 자리에서 예수에 대해서 다시 타진하여 그 결과가 좋을 것이라 판단하여 그와 영합했더라면 이스라엘 민족은 역사상에 있어서 그러한 비참한 민족이 되지 않았을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역사를 두고 미루어 볼 때에 사실임을 알게 됩니다.
예수의 제자들을 두고 보면, 그들에게는 예수가 죽은 것이 지극히 비참한 것입니다. 베드로를 두고 볼 때, 열두 제자를 두고 볼 때, 예수가 죽은 것은 그들의 모든 생명선이 절단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들의 모든 가치관이 여기에서부터 근절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제자들은 조급해하지 않고, 예수가 가면서 한 말씀, 일러준 말씀, 절망의 귀결로서 끝나지 않는다고 가르쳐 준 그 말씀을 중심삼고 조급해 하지 않고 기다리는 마음을 가지고 꿋꿋이 나갔더라면, 베드로면 베드로, 열두 사도면 열두 사도는 그렇게까지 하나님을 몰라보는 자리에 서지 않았을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예수 앞에 있어서는 이스라엘 민족도 물론 비참하게 한 민족이 되었지만, 죽음의 자리를 찾아가는 예수 앞에 그 제자들이야말로 말할 수 없는 타격을 준 존재들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법정의 심문받는 자리에서 어떤 종이 나와 가지고 베드로에게 '너도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라고 반문할 때, 그것을 서슴치 않고 부정하는 베드로였습니다. 만일 '이와 같은 법정의 자리에 선 것은 이것으로 역사는 끝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부터 새로운 역사가 출발한다' 하는 신념을 갖고, 과거지사를 그런 신념의 기반 위에 집중시켜 새로운 소망을 그리면서 꿋꿋이 서 있었더라면 그는 역사에 비참한 오점을 남기지 않았을 것이 아니냐?
이런 것을 미루어 보아 우리 통일교인들이 통일교회를 믿게 된 동기를 살펴보면, 대다수가 자기가 동기가 돼 가지고 믿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지방에 나가 전도하는 통일교회 대원들을 통해, 여자면 여자를 통하든가 남자면 남자를 통하든가 해서 들어오게 될 때, 물론 말씀은 통일교회 전도대원들이 했지만 그 말씀은 자기만 들은 것이 아닙니다. 듣는 그 말씀 자체보다도 고차적인 말씀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듣고 난 후에는 자기 마음이 이끌려가는 것을 느낍니다. 그런 것을 느낌과 동시에 자기도 모르게 결정지어 가지고 통일교회 식구가 된 사람이 많은 것을 우리는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 배후에는 영계가 직접 가입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내 한 생명을 이 길에 세우기 위해서 배후에서 하늘이 동참해 가지고 내 길을 모색해 준 사실들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만일 내가 이 길을 부정하고 나선다면 하늘은 어떤 면으로라도 이것을 방어하기 위해서 입체적인 배후를 가지고 얼마나 얼마나 수고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역사를 지내온 통일교회 교인들 가운데서, 나가는 도상에 어떤 어려움에 부딪치게 될 때 그 어려움을 단순한 어려움만으로 맞아 이것을 해결하려다 중도에 떨어져 나가는, 혹은 중도에 낙심하는, 중도에 지쳐 버리는 사람들을 우리는 왕왕 보게 됩니다.
모든 일이라는 것은 좋은 일로만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단 것만 매일 먹어 보라구요. 그것처럼 고통스러운 것이 없을 것입니다. 단것을 진짜 자극적인 면에서 알아보려면 쓴 것을 맛봐야 되는 것입니다. 쓴 것을 맛본 후에는 보다 빛나고 보다 높은 단맛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공기를 타고 전해지는 전파를 보더라도 이것이 소밀력(疏密力)관계로서 전파되는 것입니다. 한꺼번에 직선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이 한때가 있으면 또 다른 한때가 이어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어오게 될 때는 경계선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한때하고 다음에 찾아 오는 한때하고 같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연결하기 위해서는 거기에는 반드시 정상적인 것이 아닌, 지금과 같은 정상적인 환경과 다른 모양을 거치지 않고는 새로운 사건이 연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통일교회에 들어와 가지고, 하늘의 인도함을 받아 자기가 들어왔다는 것을 알고 나서도 자기 앞에 환경의 변화가 오게 되면 그 환경 변화에 좌우되는 무리가 많은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어떤 환경의 변화가 오더라도 그 환경을 직선으로서 뚫고 나가게 되면 그 변화는 보다 내일의 소망의 터전을 넓혀 주고, 내일의 공고한 전통적 기반을 확고히 해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기가 동요함으로 말미암아 앞으로 올 새로운 전반적인 축복의 터전을 파탄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때가 얼마나 얼마나 많았는지 우리는 알아야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슨 문제를 당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직시해 가지고 정오(正誤)를 가릴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에 좋은 일이 있으면 그 배후에 찾아오는 슬픈 일이 있게 될 때, 그 슬픔과 좋은 일은 상대적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의 씨를 심었으면 그것이 열매맺히기 위해서는 여러 단계를 거쳐야 되는 것입니다. 싹이 나오고, 줄기가 나오고, 가지가 나오고, 잎이 나오고, 꽃이 피어야 열매가 여는 것입니다. 그 떡잎이 나오고 줄기가 나오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줄기에서 가지가 뻗는 것도 다른 것입니다. 가지에서 잎이 나오는 것도 다른 것입니다. 잎에서 꽃이 피는 것도 또 다른 것입니다. 꽃에서 열매맺는 것도 또 다른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전체는 한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떡잎의 자리에서 줄기가 나온다고, 그것이 다르다고 해서 그걸 부정하는 자리에 서면 그는 가지를 못 만들 것입니다. 줄기에서 가지가 나온다고, 그것이 다르다고 그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잎을 못 볼 것입니다. 가지에서 잎이 나온다고, 그것이 다르다고 그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꽃을 못 볼 것입니다. 잎사귀가 나오고 꽃이 피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결실을 못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 사건인 것입니다. 이것은 한 일을 완성하기 위한 필연적인 운명의 길인 것입니다. 새로운 싹에서부터 줄기가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맞지 않더라도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줄기에서 가지가 옆으로 동서로 뻗어야 되는 것입니다. 곧장 올라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가지가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가지에서 잎이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꽃이 피어야 되는 것입니다. 꽃에는 반드시 하나의 열매가 맺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상적인 과정입니다.
하나의 나무가 싹으로부터 결실되기까지 이러한 과정이 연결되어 하나의 바람직한 결실을 맞는다는 사실을 미루어 볼 때, 우리 인간 하나가 완성이라는 것을 향해 나가는 데 있어서, 혹은 한 국가가 완성을 바라며 나가는 길에 있어서, 혹은 이 세계가 하나님의 섭리를 중심삼고 한때의 완성을 바라고 나가는 과정에 있어서 늘 좋은 때만 바라고 있다면 이것은 비정상적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원리에서 배운 것과 마찬가지로 소생기에도 소생 장성 완성이 있고, 장성기에도 그렇고 완성기에도 그렇습니다. 전체를 보게 되면, 이 전체의 소생 장성 완성이라는 단계는 변천적 형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냐 이겁니다. 이것을 볼 때 그것을 연결시켜 가지고 그 환경에 상충이 없게끔 조화적인 입장으로 흡수시킬 수 있는 터전으로 넓혀 나가는 데 있어서 발전적인 귀결점을 바랄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렇게 보게 될 때 오늘 우리 통일교회 교인들로서 현재의 여러분은 각자가 다 다른 것입니다. 각자의 얼굴이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그 얼굴이 다르다는 것은 각자가 역사시대의 선조로부터 이어받아 온 후손이기 때문에 그 선조들이 걸어온 역사가 다른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 가지고 내가 태어났습니다. '나'라는 것은 나 하나로 되어진 것이 아닙니다. 역사적인 선조의 산물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산물은 나로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나는 미래의 선조로서 결정지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 있어서 나무로 말하면 잎이면 잎이 얼마만큼 잎으로서의 충실한 자리에 서서 그 영양을 섭취해 가지고 그 나무 전체가 자라는데 얼마만한 공헌을 했느냐에 따라 가지는 그 방향을 달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게 될 때, 오늘날 우리가 현재 처해 있는 입장이라는 것은 가장 심각한 자리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잘못하면 과거를 망칠 수도 있고, 잘하면 과거를 빛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좋다고 하는 것이 내일도 좋다고 보장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에 좋다는 것이 내일 슬픔을 보장하는 터전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또한 오늘 슬픈 것이 오늘의 슬픔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내일에 좋을 수 있는 터전을 이어받는 좋은 경각성을 제시하는 것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게 될 때, 우리는 그러한 역사적 사실이나 현실적인 환경에서 어떠한 문제를 대하게 되면 침착해야 되겠습니다. 속단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오래 참고 그것을 감정해야 되겠습니다.
내 옆을 스쳐 지나가는 어떠한 우연한 사건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두고 두고 해결해 나가면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에게 어떠한 인연이 지어질 수도 있지 않느냐? 이러한 문제를 두고 두고 생각하면서, 두고두고 보아 나가면서 해결짓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겠느냐 이겁니다.
사람들 중에는 왕왕 후회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인데…' 이런 후회를 합니다. 만일 그런 문제를 두고 심사숙고해 가지고 '이것은 내 자신을 두고, 내 생애를 두고 맹세하고 결단을 지었다'고 하는 입장에서 그렇게 했다면, 그는 책임을 져야 되는 것입니다. 후회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 인격을 알고 자기가 결정한 것을 소중히 여긴다면, 만약에 결정한 것이 실패로 돌아가더라도 그 실패를 달갑게 받을 줄 아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을 필요로 할 것이 아니냐. 그렇지만 실패한 것을 나는 책임질 수 없다고 하며 변명하는 무리는 인간세계에서도 환영 못 받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환영 못 한다면 역사는 더욱 환영하지 못하는 것이요, 역사가 환영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은 더더욱 환영하지 못하는 것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환경을 지니고 있는 우리에게 있어서는 내가 취해야 할 자세라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 자세를 어떻게 취해야 되느냐? 기쁜 일이 있으면 기쁜 일로 맞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게 지혜로운 것입니다. 기쁜 일이 있다고 해서 기쁜 일만으로 일방통행이 안 되는 것입니다. 기쁜 일이 있으면 기쁜 일로 맞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기쁨이 나로 말미암아 슬픔을 맞을 수 있는 동기가 될 수 있다면 이것을 냉정히 맞아들여야 되겠습니다. 분석해야 되겠습니다. 그 기쁨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제삼자의 것으로 보관시켰다가, 타진해 가지고 내 것으로 나누어 갖는…. 또 그러한 다짐을 하고서 내 것으로 받아 가지고 관리하고 소화하겠다는 사람은 발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슬픔이 있으면 슬픔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슬픔을 대해 가지고 내 것으로서 받아들이지 말고, 그 슬픔을 중심삼고 제삼자의 것으로 받아들여 그것을 두고 보아 가지고 내 것으로 완전히 소화시킬 수 있으면, 그 슬픈 것이 나를 망하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도리어 슬펐던 일이 새로운 소망을 가질 수 있고 주위 환경으로부터 신임받을 수 있는 좋은 찬스가 되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저런 슬픔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슬픔을 이렇게 소화시켜 넘어가는구나' 하게 될 때 그 인격이야말로 주위 환경에서 신임받을 수 있는, 그 이상의 문제를 책임질 수 있는 중심존재로서 신임받을 수 있는 좋은 조건도 되는 것입니다. 자기 자체는 손해났지만 환경에 있어서 이익될 수 있는 결과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문제를…. 더우기나 신앙생활에서는 이런 태도가 필요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무엇을 봤다고 해서 '내 눈으로 봤으니…' 하며 속단해서는 안 됩니다. 들었다고 해서 속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두고두고 보아 가지고 이것을 자기와 관계를 맺어 가지고 '나는 발전해야 되겠다. 나는 보다 전진해야 되겠다' 하는 생각이 있으면, 전진하는 그 방향을 중심삼아 가지고 어떻게 소화하느냐?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어떻게 소화시키느냐.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문제…. 여기에는 슬픔도 나쁜 것만이 아니요, 기쁨도 좋은 것만이 아닙니다. 소화 여하에 따라서는 슬픔이 도리어 기쁨보다 좋을 수도 있는 것이다 하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자는 이러한 자세가 필요할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신앙자들만이 가져야 할 자세가 아닙니다. 책임을 짊어지고 가는 사람들 앞에는 더더욱 이게 필요한 것입니다. 누구누구로부터 어떠한 보고를 받았다 하게 되면 책임자는 그것을 속단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가려 가지고, 전과 후의 결과를 타진해 가지고 그것이 미쳐지는 결과가 전체의 환경에 치우침을 받게 될 때는 이걸 방어해야 되고, 그것을 보류시켜 나감으로 말미암아 전체의 환경에 이익될 수 있으면 보류시킬 줄도 알아야 됩니다. 그것을 모름지기 잊어버리고 넘어가게 됨으로 말미암아 전체에게 이익이 될 수 있다면 그렇게도 할 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책임자라고 해 가지고, 자기에게 관계되는 모든 것을 속단하는 사람은 큰일을 책임질 수 없는 것임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중심삼고 생각하게 되면,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겠느냐? 우리 인간에 대해서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겠느냐? '인간이 타락을 했다' 이것은 일대 돌변적인 사건입니다. 있어서는 안 될 지극히 문제되는 사건입니다. 이 사건을 맞은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을 당장에 처단해야 될 문제였지만…. 에덴동산에서 쫓아냈을 때, 당장에 하나님이 타락 하자마자 '이놈들아' 하며 쫓아냈느냐? 여러분, 어떻게 생각해요? 타락 하자마자 즉결처분해 가지고 쫓아 냈겠느냐?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아담 해와 자신들이 '타락이 어떻더냐?' 하는 것을 잘 알게끔 한 후에 쫓아낸 것입니다. 한 법정에서 죄인을 판정하는 법관은 죄인에게 '당신은 이러이러한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이러이러한 결과를 응당히 맞아야 되는 것이다'라고 해야 명재판관이 아니냐, 이렇게 보는 거예요.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이 타락한 아담 해와를 대해 가지고 즉결처분했느냐? 자신들이 거기에 대해서 몰랐다면 그것이 뼈에 사무치게 알 수 있게끔 시간적 여유를 주었을 것이 아니냐, 슬프다고 해서 당장에 복닥불나게 처분한 것이 아니라, 그 자신들이 결과에 대해서 책임을 느끼고 난후에 처분해야 될 것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니 당장이 아닐 것이요, 시간적 거리가 있었을 것입니다. 양심의 가책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당장에 쫓겨나는 것보다 하나님 앞에 나타날 수 없는 아담 해와 자신들이 스스로 죄책감을 느끼면 느낄수록 점점점점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기도했을 것이 아니냐? 세상도 그렇지 않아요? 그리하여 그 이상 주저해서는 이것을 지탱 못 할 것을 안 아담 해와가 도리어 '하나님 앞에 얼굴을 영영 나타내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고 생각 하는 그때까지 기다려 가지고 하나님은 쫓아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쫓김 받는 아담 해와는 눈물을 흘리고 떠났을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아량 있고 그렇게 사랑하던 그 부모를, 하나님을 버리고 나서야 할 자신들은 자기 자신을 걸고 한탄했지 하늘을 걸고 원망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돌아서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기까지는 장구한 세월을 거쳐 가지고 그들이 쫓김받는 자리에 섰을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영계에도 그래요. 영계에 가게 되면 무슨 천당을 하나님이 보내는 것이 아니요, 지옥을 누가 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결정해 가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하나님은 그 기간에 얼마나 괴로웠겠느냐 이겁니다. 희비극이 교차되는 그런 입장에 섰지만,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참은 입장이었기 때문에 도리어 그 인간을 대해서 다시 구해 줄 수 있는 아량의 마음도 거기서 생겼을 것이 아니냐. 극복이라는 그 자체, 참았다는 그 자체가 원통하고 분한 것이지만 그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서 도리어 구원의 문을 개방할 수 있는 하나의 열쇠가 찾아졌을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생각해 보면, 하나님이 그러한 입장에서 처리하셨다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들도 마찬가지가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쫓겨나는 아담 해와를 대해 가지고 하나님도 비통한 자리에 섰을 것입니다. 본래는 저래서는 안 될 모습이…. 세상에도 그렇지 않아요? 진정 사랑하는 자식이, 옛날에 죄를 짓지 않았을 때는 자연스럽게 부모 앞에 와 가지고 품길 수 있었고 얼굴 그 어디에도 주름살이 없이 대할 수 있었던 자식이, 뭘 하나 잘못해 가지고 쭈뼛쭈뼛하며 자연스럽지 못한 것을 볼 때에 부모는 그 환경에서 고통을 받는 것이 아니냐? 그러면 거기에서 그것을 자연스럽게 해주고 싶은 부모의 마음이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연스럽지 못한 것이 클 때는 거기에 동정의 마음이 싹트기 마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엇갈리는 환경의 여건이 우리 앞에 부딪쳤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해결하려는 사람들은 전부 다 일방적인 사람이 아니냐 하는 것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신앙자의 자세, 우리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느냐? 눈물을 지을 수 있는 자리에 내가 부딪혔다 할 때 그 눈물은 누구를 위해 흘려야 되느냐? 그 유래를 따져 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눈물 흘리는 것이 나만을 위해 흘리는 눈물이라면, 그것이 제삼자에게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걸 알아야 돼요. 어떤 사람은 자기에게 슬픔이 있으면 제삼자에게까지 영향이 미치게 환경을 그저 휘저어서 구정물을 내 가지고 자기가 슬프니 제삼자도 슬프게 만들고야 마음이 편안한, 그런 종류의 사람들도 있다구요. 그건 잘못 돼서 그런 거예요.
이 슬픔이 누구로 말미암아 슬프냐? 뜻으로 말미암은 슬픔이라면 전체가 슬퍼할 줄 알아야 하고, 그것을 전체의 슬픔으로 나타나게 하는 것이 정당한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자기로 말미암아 되어진 슬픔이라면 뜻앞에나 전체 앞에는 절대로 침범시켜서는 안 됩니다. 내 것은 내가 해결 짓겠다는 이런 사람이 돼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은 보다 더 큰 책임을 맡겨주고 싶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있다면, 그런 사람은 현재 처해 있는 자리보다도 보다 차원 높은 자리로 발전시키게 돼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관점에서 우리 신앙자의 태도…, 신앙의 길이라는 것은 하루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믿다가 내일 그만둘 것이 아닙니다. 일생을 넘어서 영원이예요. 영계에 가서도 우리가 하나님 믿어야 된다구요. 하나님을 모셔야 된다구요. 차원 높은 의미에 있어서 신앙해야 된다구요. 안 그래요?
인간은 언제나 사랑받으면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분야 분야의 엇갈리는 일에 있어서, 여러 가지 분과별로 일의 종류가 달라짐에 따라 거기에 처해 가지고 일하게 될 때, 그 자리에서 일하는 사람을 대해 하나님이 명령하는 데는 사랑을 가지고 명령 안 한다구요. 네가 일을 잘했느냐, 못 했느냐를 추구한다구요. 그렇다고 해서 사랑이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일을 중심삼고 추구하는 입장이 다르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고는 그가 발전할 수 없고, 보다 높을 수 있는 자리에 못 가며, 보다 높을 수 있는 자리에 못 가면 보다 높은 사랑의 인연을 못 맺기 때문에…. 보다 높은 사랑의 인연을 맺으려니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생각하게 될 때 우리가 당하는 만사는 모두 행복으로 소화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냐? 이러한 태도가 가장 귀한 것이 아니냐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은 하루 아침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일생 동안…. 신앙생활 가운데 있어서, 내가 죽더라도 영원을 중심삼고 신앙해 나가는 길에 있어서, 내가 그 절개를 지켜야 할 것이 문제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의 중심 되는 골자가 있어야 됩니다. 영원히 믿고 가야 할 길이기 때문에 영원히 그것을 부정할 수 없는 나라는 것을 발견해야 됩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 부모의 자식으로 태어났으면 '부모 앞에 불효는 할 수 없다, 그건 죽더라도 영원히 할 수 없다' 하는 관이 서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 그는 부모 앞에 언제나 신임받을 수 있는 자식이 될 것이요, '부모를 배반할 수 없지' 그런 결심이 없는 사람은 가다가 언제라도 불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신앙생활에 있어서는 변할 수 없는 하나의 추가 있어야 됩니다. 핵심이 있어야 됩니다. 그게 뭐냐? '내게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나 자체의 슬픔은 영원하더라도, 나 자체의 고통은 영원하더라도 그것을 하나님의 고통으로 제시할 수 없다. 나는 하늘 부모를 모시고 나왔다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다. 하늘을 대해 부정의 도리를 세울 수 없다' 하는 철칙을 가져야 합니다. 그게 가장 귀한 것입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것을 못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내가 있고 하나님이 있지, 효자도 내가 있고 효자지, 충신도 내가 있고 충신이지' 하는 사람은 효자가 아니요, 충신이 아닙니다.
신앙길은 하루에 가는 길이 아닙니다. 영원한 길이기 때문에 영원을 더럽히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영원을 가로막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가운데 자기가 책임지지 못할 문제를 가지고 영원한 하늘 길을 가로막는 무리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역사시대에 가롯 유다 같은 사람 보라구요. 그 당시에 예수님이 '저는 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하였다'고 했으니, 그는 그릇된 거라구요. 영원한 생명의 길을, 영원을 두고 가려 가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자기의 일시적인 어떠한 욕망의 여건을 보고 판단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극히 경솔한 짓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길을 안 갈 수 있어요? 며칠 안 되어 가지고 파투나고, 자기의 옛날 길로 되돌아오려고 암만 노력했댔자 그런 행동을 저지르고 나면 돌아올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목을 매는 것입니다.
한 가지 주류적인 그 기준을 중심삼아 가지고 내가 죽어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이를 악물고 혓바닥을 깨물고라도 결정적인 말은 하지 않아야 된다구요. 여러분이 이걸 알아야 돼요.
통일교인들을 가만 보게 되면, 뭐라고 할까 부평초와 같은 녀석이 많아요. 이 길이 자기들이 가야 할 길이라는 것을 안다면, 그 길을 지도하고 있는 통일교회 선생님이면 선생님, 하나님이면 하나님에 대해서 뭐 어떻고 어떻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루살이 사람들이라구요. 자기가 그렇게 말한 것이 자기 목을 자르고 사지 전체를 구속해 버린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한 번 말했으면 그 말에 대한 책임을 지고 넘어가야 됩니다. 그 책임은 일신의 생애를 통해서 져야 되고, 만약에 그가 책임 다하지 못하게 될 때는 후손까지 걸려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은 가까운 자리에 두지 않더라구요. 그거 무슨 말인지, 여러분, 알겠어요?
통일교회의 신앙길은 생애를 걸고 가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주류의 행로를 걸어가는 그 길에 대해서 이러고 저러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극히 두려운 것입니다. 까딱 잘못하다가는 자기가 걸려 버립니다. 그렇지 않겠어요? 거기에는 풀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가 맨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매고 자기가 푸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이 동기가 되고 하늘이 과정이 되고 하늘이 결과가 되어 가지고 갔기 때문에 거기에 말려들게 될 때는 영원히 말려들기 마련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돼요.
그렇기 때문에 신앙길에서는 언제나 나는 죽더라도 이 일만은, 하나님만은…. 그렇기 때문에 '내가 죽음을 남기면 남겼지 그렇게 걸릴 수 있는 말은 남길 수 없다' 하는 신념이 서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라야 하나님도 그를 세워 쓰시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을 지도하고 있는 통일교회 문선생도 그래요. '어떠한 수난이 엇갈린 곡절에 가서 부딪친다 하더라도 딴 것은 다 제쳐 놓고요 문제만은 요지부동이다' 하는 게 있다구요.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理 문제만은 터치할 수 없다. 이것은 내가 신앙으로서 안고 죽어야지, 이것을 털어 놓고 죽을 것이 아니다' 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것을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저버렸다 이겁니다. 나는 생애를 통해서이 문제만은 잃을 수 없다는 그 무엇이 있어야 돼요. 줄기가 있어야 된다구요.
그래야 나는 죽더라도 내 신앙이 그와 더불어 그 영원한 뜻과 더불어 남아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뜻이 이루어질 때가 되면 나의 부활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나마 다 막혀 버리면 부활은 무슨 부활? 하나님은 그렇게 어리석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아무리 변명하더라도 통하지 않는다구요. 그 무엇이 있어야 될 게 아니예요?
신앙길은 하루에 가는 길이 아니기 때문에 몇 사람의 칭찬을 받는 자리에 있다면 거기에는 더 조심해야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아직까지 영원히 개척해야 할 신앙의 자세가 완연히 남아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더우기나 부인들은 그러한 데 더욱 주의해야 되는 것입니다. 통일교회를 믿고 나가는 것이요, 하나님을 믿고 나가는 길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하루살이 일로서 끝나지 않는 것입니다. 하루의 기분으로 이러고 저러고 할 것이 아니예요. 자기에 대해서는 이러고 저러고 할 수 있지만 주류적인 신앙의 대상에 대해서는 이러고 저러고 하면 안 됩니다. 그건 차라리 믿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 그러다가는 배반자의 역사를 거기서 드러내고 가는 것임을 여러분이 알아야 돼요. 베드로와 같은 자가 될 거예요? 환경이 다르다고 해서 베드로의 후계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자신들이 잘 알고 있어야 돼요. 이것만은 내가 죽더라도 믿고 나가겠다, 이것만은 죽더라도 보호하고 나서겠다는 결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없는 사람은 하늘의 중요한 책임을 짊어질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자세가 귀하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어요.
이렇듯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제일 문제가 되는 것은 신앙의 대상, 하나님입니다. 그 다음엔 뭐냐? 신앙의 주체 되는 하나님은 사람을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사람은 하나님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있지만, 하나님은 사람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요것이 엇갈려요, 다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 문전에 서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나 자신이 남겨야 할 하나의 골수적인 사상을 지니고 생사를, 같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찾아 나오는데 하나님이 사람 앞에 어떻게 하느냐? 이게 문제예요. 하나님은 사람 앞에 이랬다저랬다하지 않는다구요. 정했으면 정한 대로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약속했으면 손해보는 일이 있어도 그것을 변명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약속을 했으면 손해를 달게 받는 것이 하나님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손해나게 되면 달게 안 받는다구요, 할수없이 받지. 그게 다른 거예요. 그 차이예요.
이것을 볼 때 여러분들은 하나님과 같은 태도를 가질 줄 알아야 됩니다. 공적인 분야에서는 선한 사람이라면 공적인 문제를 두고 이익보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여러분이 알아야 돼요. 공적인 생활을 두고 선하다고 하게 될 때는 자기가 이익볼 수 있는 자리를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한 사람이라고 하게 될 때는 손해보는 자리에 선 사람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생각해야 돼요. 선은 손해보는 자리입니다. 대인관계에 있어서 결국은 내가 공적인 입장에 서 가지고 하늘 대신해서는 손해를 봐야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 사람이 하늘을 대신해서 손해보면 어떻게 하느냐? 그것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이 갚아 준다. 이렇게 돼요. 그게 행복하다는 거예요. 사람이 갚아 주는 것이 아니라구요.
하나님을 대신해서 공적으로 손해보게 될 때는 무한한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 지금도 창조적인 권한을 가지신 하나님께서 그 손해본 것에 대해서 선의(善意)의 손해배상을 해주시는 것입니다. 악의(惡意)의 손해배상을 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선의의 손해배상을 해주시는 것입니다. 열을 손해보면 열로서 열매맺히는 것이 아니라구요. 반드시 그것은 열이 백으로서 열매맺힐 것입니다. 그때까지는 시간이 필요한데, 이 시간을 극복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불행입니다. 여러분 그걸 알아야 돼요. 요 시간을 극복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여러분 중에 기도를 해본 사람들은 대번에 알아요. 사람의 욕심이라는 것은 언제나 더 높아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욕심 많은 사람의 기도를 자꾸 이루어 주면 어떻게 되겠느냐? 이거 큰일난다는 것입니다. 욕심 많은 사람이 자꾸 기도한다고 해서 자꾸 이루어 주면 뭐가 될 것이냐? 그거 다 주고 난 다음에는 어떻게 될 것이냐? 그 주는 것은 자기를 위해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공적인 것을 위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욕심 많은 사람이 공적인 것을 받아 가지고 공적으로 쓸 수 있겠느냐? '없다' 할 때는 암만 기도해도 안 준다는 거예요. 거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여러분들 가운데 '기도를 암만, 뭐 몇 십년 해도 하나님은 내 기도 안들어 주더라' 하며, 불평하는 사람이 있을는지 모르지만, 그 복을 주고 축복을 해주는 것은 개인적인 것으로 안 주는 거예요. 개인적인 것으로 줄 걸로 알아요? 높은 것을 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더 높은 것은 공적인 것을 통해서 들어오기 때문에 공적인 것을 주려고 하는데, 이 욕심꾸러기가 공적인 것을 받아 가지고 이걸 공적으로 활용할 수 있느냐? 그걸 보기 때문에 암만 기도해도…. 그렇기 때문에 선한 자리에 서라고 하는 것입니다.
부모면 부모도 그렇고, 사랑하는 사람 끼리끼리도 그렇습니다. 서로가 좋은 것이 있으면 '이것은 네 거다' 하면서 자꾸 주려고 합니다. 좋은 것은 자기 아들딸이 있으면 아들딸에게 주려고 하고, 자기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려고 하는 거예요. 이것이 본래의 사랑의 원칙입니다. '아이구. 좋은 것은 내 것이다' 한다면…. 만약에 부부끼리 산다고 할 때, 남편이 '여편네 가진 것은 전부 다 내 것이다' 해 가지고 무슨 뭐 반지 같은 것이 있더라도 '여편네 장속에 넣어둔 것은 전부 다 내 것이니까 내 장속에 넣자' 그렇게 몇 번만 해보라 이겁니다. 있더라도 없다고 감추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적인 것을 보다 중요시해야 합니다. '아이고, 내가 이것은 정말 써야 할 텐데, 공적인 것에 써야 할 텐데, 이거 이렇게 안 하면 전체가 피해를 입을 터인데…' 하게 되면, 배달하지 않더라도, 내가 나눠 주지 않더라도 벌써 다 해결해 주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하나님도 바쁘게 이루어 준다구요. 하나님도 바쁠 게 아니예요? 그것이 한번 꽝하는 날에는 전체가 말려 들어간다 할 때는 하나님도 바쁘게 대해 주는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도와 주었다고 해서 자기 자체가 소모되지 않는 것입니다. 주신 그 공적인 물건 앞에 자기 것을 더 첨부해 가지고 밑천 까지 털어 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절대 밑천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런지 안 그런지 보라구요.
여러분, 선생님 주의가 그런 주의라구요. 내가 공적인 일을 하는 데 있어서는 빚을 지더라도 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못 하겠다고 생각 안 해요. 빚을 지더라도 해야 된다, 그렇게 해 나가면 언제나 다 해결돼요. 그런 것을 많이…. 기도할 필요도 없습니다. 큰 문제를 중심삼고 자기가 대책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심각한 자리에서 '저 사람들이 저렇게 되면 안되겠다' 하는 마음으로, 이것을 빨리 방지하기 위해서 조급한 마음을 갖고 '이럴 때는 하나님도 얼마나 바쁘실까?' 하면서 자기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보다 자기에게 바쁜 일이 있으면 그것을 자기의 책임으로 정지시켜 버리고, 하나님까지 염려시키지 않겠다고 해야 됩니다. 그것이 효의 마음이요, 충의 마음인 것입니다.
그러한 자식을 가진 부모가 있으면 자식이 잠잘 때라도 몰래 뭘 갖다 놓는 거라구요. 그렇지 않아요? 그런데 살살 눈치 봐 가지고, 뱀장어 새끼 모양으로 편리하면 대가리를 쏙 내밀고 꽁지를 내밀어서 싹 빠져나가려 하고, 불리하면 꽁지고 대가리고 쏙 들어가려 하면 안 된다구요. 그것은 임시방편은 될는지 모르지만 하늘세계에서는 통하지 않는다구요. 그러다가는 결국 꺾여 나간다구요.
그렇기 때문에 대인관계에 있어서 여러분들이 잘해야 되는 것입니다. 공적인 것은 공적으로 소화시킬 수 있어야 됩니다. 공적인 것을 관리해 가지고 자기가 거기에서 이익보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걸 관리해 가지고 자기 자신이 손해보겠다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언제나 충의 도리와 효의 도리를 하늘 앞에 남길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절대로 망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그래 가지고 망하는가 보라구요.
여러분이 자식들을 두고라도 한 번 시험해 보라구요. '아이고, 우리 마누라 성격은 요렇고 내 성격은 요런데, 거기에서 나쁜 성격은 요런 성격이고, 좋은 성격은 요런 성격이니까, 내 좋은 성격과 부인의 좋은 성격을 합한 좋은 면만 딱 닮아난 아들딸이 태어났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해야 한다는 거예요. 그러려면 그럴 수 있는 부모의 성격이 되어야 된다구요. 나쁜 성격을 가지고 태어나지 못하게끔 눌러 놓는 생활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부부가 그러면 좋은 것만 닮은 자식을 낳을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 하나님은 공적인 면을 위해서 사는 사람을 참 사랑한다는 것을 각 분야에서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각 분야에서…. 뭐 하나님이 있다 없다 물어 볼 필요도 없다구요. 각 분야에서 체험할 수 있어요. 그런 마음 가지고 나아가게 되면 하나님은 언제 벌써 다 준비해 가지고 앞을 다 가려 주더라구요. 여러분이 이런 것을 잘 알아야 됩니다.
욕심이 누굴 위한 욕심이냐? 나를 위한 욕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중심삼은 욕심, 이것은 언제나 좋습니다. 밤이나 낮이나, 잘 때나 밥 먹을 때나 어디고 무사통과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제한이 없는 것입니다. 오르고 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상승일로로 통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자기가 개재해 가지고 이러고 저러고 할 때는 문제가 클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에도 나타나기를 잘하는 사람들은 오래 못 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걸 알아야 돼요. 그 사람은 반드시 실수하게 마련입니다. 이런 것을 알고 여러분이 준비해야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인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의 사정을 이어받아 연결시킬 수 있는 여러분이 되어야 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손해를 보시는 것입니다. 부모는 언제나 자식을 대해 가지고 손해를 보는 자리에 있지만, 손해배상을 청구하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이게 부모의 마음이예요. 만일에 열 번 잘못해 가지고 회개한 것을 하나님이 용서했으면 '야, 내가 열 번 용서했다' 하며 치부(置簿)해 가지고 '야, 너 영계에 온 것은 내가 열 번 용서해 줘서 온 것이니 너는 기쁘게 살 수 없다' 하며 장사하는 하나님이라면 어떻겠어요? 수없이 용서해 줬지만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잊어버린 그 부모를 만난 아들의 자리에 섰기 때문에, 그 아들은 자기의 과거를 잊어버리고 행동할 수 있기 때문에, 행복을 소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자기가 회개할 때 아이구 눈물 콧물 다 흘리고 했는데, 그 창피한 것을 전부 다 생각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자유로운 그 무엇을 느낄 수 있겠어요? 다 잊어버리는 부모이기 때문에, 그런 티가 없기 때문에 그도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들, 뭐 세상에도 그래요. 형제끼리 돈 십원 가지고 싸우는데, 그런 형제 두고 보라구요. 돈 때문에 싸우다가 나중에는 서로서로 생명을 걸고 싸우는 놀음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형제끼리 밥 한끼 안 먹으면 어때요? 국수 한 그릇 안 삶아 먹은 것으로 알고 넘어가게 되면…. 그렇게 극복하는 사람은 형제 중에서 제일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열 형제가 있으면 열 형제 중에 아홉 형제끼리는 전부 다 싸우는데 한 사람만은 그러지 않고 참아 넘어간다면 그들의 모든 비밀은 전부 다 참고 넘어가는 그 사람 앞에 갖다 보관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렇게 지내고 보면 자기들의 비밀을 전부 다 아니까 큰소리 못 하는 것입니다. '형님, 뭘 그래요?' 하고 한마디 하면 '어-어-' 그러고, 또는 '야, 이 녀석아. 뭘 그래?' 하면서 동생에게는 얌전하게 대하는 겁니다. 재료를 다 제공했으니 꼼짝달싹하지 못하고 완전히 지배받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내가 너희들에게 요렇게 해줬으니까 그건 도로 갚아야 돼' 하면….
여기 통일교회 문선생은 돈을 쓰고 수첩 같은 데다 기록 안 했어요. 옛날에는 사람들이 참 이러길 잘 했어요. 한 푼도 그저 기록했어요. 선생님은 이 뜻을 알고 가는 길에서는 돈을 썼다고 해서 무슨 장부 만들어서 기록하는 것 참 싫어하는 성미예요. 지장이 많아요. 그걸 기록하고 다시 한 번 기억한다는 것은 무한한 신앙의 발전에 있어서 상당히 지장이 많다는 것을 느꼈어요. 뭐 그렇다고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예요.
하늘은 값없이 주고 값없이 잊어버리려고 하기 때문에, 그런 마음을 갖고 나가는 사람은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한 번 해보라구요. 절대 망하지 않는다구요. 선생님이 일생을 통해서 그런 경험을 참 많이 했습니다. 망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런 사람을 잡아내 가지고 사지에 내몰면 사지에 내모는 사람이 죽으면 죽었지, 죽으라고 내몰린 사람은 안 죽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알아야 돼요. 그렇기 때문에 약속을 했으면 손해보는 것을 무엇보다도 달갑게 소화시켜라 이겁니다. 그런 사람은 인격자로서 환경의 추대를 받는 것이며, 하나님도 그런 사람을 찾으시는 거예요. 눈이 새빨개 가지고 도도해 가지고, 뭐 마음이 편안치 않아 가지고 밸이 꼬여서 뿔뚝뿔뚝하는 사람들은 사람도 싫어하는 거라구요. 사람도 싫어하지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주류적인 사상은…. 신앙길이란 것은 일시적이 아닙니다. 영원한 것입니다. 그러니 주류적인 중심을 남겨야 됩니다. 사람을 대하게 될 때도 하나님이 취해 나가는 주류적인 방향을 흡수 해 가지고 여기에 적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이 떨어지라고 해도 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도 그런 사람이 좋은 거라구요. 뭐 하나 척 얘기해 주면 천년 가더라도 그 입에서 털어져 나가지 않는다구요. 틀림없다구요. 뭐 무슨 명령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야야 요건 너한테만…' 국가 비밀도 그렇다구요. 1급 비밀 같은 것도 자기 여편네라고 해 가지고 '당신은 내 사랑하는 여편네니까 요걸 이야기하니 딴 사람에게는 얘기하지 말라' 하면 그 여편네는 '아이구, 내 어머니니까 이것을 얘기하니 어머니는 누구에게도 얘기하지 말라'고 그러고, 그 어머니는 또 아들에게, 아들은 또 전부 다…. 이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차라리 얘기 안 해주는 게 낫습니다. 암만 울고불고 앵앵하더라도 안 해주는 것이 낫다 이겁니다.
하늘의 비밀이 밝혀지는데 지금까지 왜 6천년 동안 걸렸더냐? 사람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한 사람이, 그러한 책임을 질 수 있는 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알겠어요?「예」 여러분, 선생님은 기도할 때'아, 하나님이 약속했는데 왜 안 이루어 줘요? 아이구, 뭐 하나님도 별것 없다' 하지 않아요. 안 이뤄지는 게 아니예요. 이루어지고 있는데 그런 말 한다고 해봐요. 얼마나 기분 나쁘겠어요. 이루어 주고 있다구요. 그것이 여기서 이루어지느냐, 세계에서 이루어지고 있느냐 하는 거라구요. 이루어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 뭐 하늘의…' 한다면, '이 녀석, 뭐야?' 하며, 이중의 채찍을 맞는다구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은 '세계를 위해 뛰어라' 하는 거예요. 우리가 지금 세계를 위해 일하지 않아요? 여러분이 뭐 방안에서 일해요? 세계를 위해서, 내가 지금 세계를 위해서 일하고 있기 때문에 어떠한 곳에서든 이루어져 오는 것입니다. 이루어서 오는 그 길이 없으니 그 길을 닦는 거예요. 길을 닦아 오는 것입니다. 일방에서 길을 닦아 오는 것입니다. 이걸 갖다 연결시키기 위해서는 길을 닦는데 하루에 해주면 그것밖에 없어요. 그것 가고 나면 끝이라구요. 그렇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는 하나님은 땅 끝에서부터 나를 향해서 길을 닦아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시일이 걸리게 마련입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사실이 그렇다는 거라구요.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은데, 결국은 이루어졌다 하는 일이 많더라구요. 요건 뭐라고 할까요? '아버지…' 하고 아침에 기도하고 나서 점심 때에 가서 '기도했으니 좀 주소' 한다면, 먹는 밥은 줄 수 있지만 나라를 움직일 수 있는 대임(大任)은 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이루어 주고 나오는데도 불구하고 그러다가는 태풍이 와서 이걸 왕창 깨뜨려 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녀석!' 하며 이루어진 것까지, 준 것까지 첨부해서 탕감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옛날에 뜻을 대해 가지고 중심 책임을 짊어진 사람들이 한 번 걸리는 날에는 용서를 못 받았어요. 보라구요. 어디 용서를 받았나요? 용서를 못 받았다구요. 딴 사람들은 용서를 받았지만, 책임진 사람이 잘못되면 용서 없다구요. 그러므로 여러분은 신앙을 중심삼은 생활에서 이러한 자세가 가장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자리를 두고 볼 때 내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느냐 하는 확인이 필요하다구요. 내가 지금 하늘로 올라가느냐, 땅으로 내려가느냐? 땅으로 내려가면 어디로 내려가느냐? 땅으로 내려가는 것은 인간을 위해 내려가면 되는 것입니다. 오르락내리락할 길은 그 길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늘 전통을 중심삼아 가지고 추구해 가는 길, 부모의 마음을 가지고 인간을 위해서 사랑하는 길, 그것이 하늘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곳이예요. 그 외의 길은 없다 이겁니다. 이 자리를 잡고 나가게 될 때는, 그 사람은 망하는 법이 없습니다. 하늘은 그런 사람과 같이하기 마련입니다. 이게 문제예요. 이게 제일 여러분의 생활의 문제인 것입니다.
오늘날 통일교회 잘 믿는다는 사람, 뭐 영계를 통하느니 뭐 하느니 이러지만, 대인관계에 있어서는 빵점이예요, 빵점. 하나님을 대해 가지고는 밥도 굶고 뭐 하지만, 사람을 대해 가지고는 속을 빡빡 긁어 가지고 그 사람이 눈물을 깨깨 흘려야 '야, 시원하다' 하는 성격을 가진 사람이 있거든요. 그런 사람이 가서 사는 천국에 가고 싶은 사람은 따라가라구요. 그거 천국이겠어요? 그거 큰일난다구요. 그렇기 때문에 인격적 분야에 있어서 여러분이 그런 소양을 갖추어야 합니다. 따라서 신앙자의 약속은 변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공약이예요, 공약. 일생에, 천년 만년 가더라도 변할 수 없는 지조를 지켜 나가야 되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입장에 있는 여러분이기 때문에 여러분은 종적, 횡적 자리를 통해 가지고 그 중심의 자리에서 횡적인 문제를 조정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다 산다는 거예요. 이렇게 본다면 (칠판에 그림을 그리시면서 말씀하심) 요것이 앞뒤로 똑같은 거리인데도 나라는 것은 저 뒤에 서서 조정해야 언제나 기준이 맞게 되는 거예요. 이래 가지고 이게 주고받으면, 이것이 하늘 되면 이것은 벌어지게 마련이죠? 그렇지요? 이것이 요렇게 싹 내려 붙으면 이와 같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요것이 이렇게 되고 요것은 이렇게 되어, 오른쪽은 하늘이요 왼쪽은 땅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수직과 같은 그 기준, '나는 이렇게 산다' 하는 걸 정해 놓고, 그 다음에 이것을 각도에 따라서 조정하는 것입니다. '아, 저 사람은 어떠한 사람이고 내가 지금 어떠한 사람이니까 이렇게 대해 주면 좋다, 어떤 사람은 어떻게 보고 있으니까 이렇게 대해 주면 좋다'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만일 판정이 틀리더라도 그것은 공적인 기준을 통해서, 공적인 것을 사랑하는 기준을 통해서 판정한 것이기 때문에 그 판정에는 아무런 참소조건이 없다, 이렇게 돼요. 그렇지만 거기에 자기가 들어갈 때는 용서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라는 것이 들어가게 될 때는 용서없이 탕감받아야 됩니다. 심판을 받게 됩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거 알겠어요, 무슨 말인지?
이와 같은 위치에서 하늘을 대신해 가지고 판정을 하게 될 때는, 그 판정이 만일에 그릇되더라도 자기가 걱정 안 해도 돼요. 틀림없다구요. 그렇지 않아요? 세상에도 그렇지 않아요? 법관이 형법이면 형법을 중심삼아 가지고 사형선고를 내렸을 때, 그가 사람 죽인 것을 책임집니까? 그도 사람을 죽였다구요. 사람을 죽이긴 죽인 거라구요. 죽인 사람을 사형시켰으니, 죽인 사람을 또 죽이는 자리에 서니, 재판장이 죽인 자리에 선 것입니다. 그렇지만 공법에 의해 가지고 그렇게 한 것은 안 걸린다는 것입니다. 알겠지요? 자기 탕감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자기가 개재 되어 들어갈 때는 더 큰 죄값을 받는 것입니다. 틀림없이 영계에 가 가지고 그 법에 적용돼요. 그렇게 공판하던 판사가 있으면 그는 영계에 가 가지고…. 자기의 이익을 중심삼고 삿(邪)된 관점에서 했다면 대번에 걸린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법관의 자식은 3대 이상을 못 갑니다. 끝이 좋지 않은 것입니다. 그게 무서운 자리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어요. 잘못하다가는 걸려드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부흥강사의 아들딸이나 유명한 목사의 아들딸들이 불량자가 되고 명동 같은 데 들어와 가지고…. 깡패 소굴에 있어서 그 중의 3할 이상이 잘 믿는 목사나 장로의 아들이라는 평가를 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늘의 뜻을 위해서 공적인 일을 안 하고, 자기가 개재해 가지고 놀음놀이를 했기 때문에 반드시 배가의 심판 환경이 그의 목전에 나타난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일 무정하고 제일 무서운 자리가 공적인 자리라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더우기나 신앙길이란 것은 만민을 다루어야 할, 만민의 생사 문제를 다루어야 할 지극히 두려운 길입니다. 여기에 들어와 가지고 은혜가 없고 자기 세계가 어떻고 하게 되면 이것은 일족뿐만이 아니라…. 한국에도 팔족을 멸한다는 말이 있잖아요? 그렇게 걸려드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가 여러분이 모르는 이 주변에서 선민사상을 중심삼고 얽어져 나간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나라는 존재가 얼마나 신중한 자리에 서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어요. 뜻이 아니라 할 때는 모가지를 잘라도 안 간다는 것입니다.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뜻이다 할 때는 세상이 뭣이라 하더라도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공적인 자리에 선 사람들이 가야 할 길인 것을 알고, 우리들의 자세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 다는 것을 잘 파악해야 되겠습니다. 알겠어요?
신앙의 문제를 중심삼고, 대인관계를 중심삼고, 환경에 있어서 좋고 나쁜 문제를 속단하지 말고 이러한 공적인 문제로 판단하게 되면, 여러분은 망하는 세상에서 망하지 않고 발전할 수 있는 것이요, 흥하더라도 그늘진 곳에서 흥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같이 햇빛을 바라보고 상승하는 발전상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하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것을 중심삼아 가지고 여러분의 생애를 한 번 반성해 보라구요.
나는 어떻게 살아왔느냐? 통일교회에 들어와 가지고 오늘 이전의 과거는 어떻게 살았느냐?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고, 앞으로는 어떻게 살 것이냐? 요 원칙에 어긋나게 될 때는 빨리 시정하지 않고는 안 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깨우치기를 바라서 말씀드렸어요.
아버님, 1972년 7월 이후의 이 기간에 저희들이 갈 섭리를 중심삼은 숙명의 노정 위에 당신의 사랑이 언제나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먼저는 뜻이 저희들에게서 떠나서는 안 될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저희들이 아버님을 떠날지라도 아버님은 뜻을 들고 기다리고 있는 것을 저희들은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뜻을 대하고자 하는 통일의 무리들 위에서, 아버님이여, 떠나지 마시옵소서.
뜻이 먼저 앞서고 우리는 따라가야만 되겠습니다. 자기가 앞서서 뜻을 끌고 가려 하는 사람은 가장 위험한 자리에 서는 것임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더우기 통일교회의 책임을 짊어진. 혹은 중요한 직책을 가진 사람들에게 있어서 자의의 행동을 하다가는 파탄이 벌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공적인 것이기 때문에 공적인 연유를 통하지 않고 행동하다 가는 공법에 걸리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버지, 우리의 자세가 이렇게 중요한 것을 알았습니다. 오늘의 내가 처해 있는 현실은 나 혼자의 인연으로 되어진 것이 아닙니다. 나를 넘어 가정이 여기에 엉켜 있고, 가정을 넘어 국가가 엉켜 있으며, 국가를 넘어 세계가 엉켜 있는 동시에 거기에 평면적인 세계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개재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무섭고도 어마어마한 자리인 것을 저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연유를 따라 오늘의 현실적인 생의 가치를 타진하는 역사적인 여건들이 내 주위에 둘러쳐 있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우리 가정이 나의 심판장이 되는 것이요, 이 나라가 나의 심판장이 되는 것이요, 이 세계가 나의 심판장이 되는 것이요, 온 영계가 나의 심판장이 되는 것이요. 아버님이 나의 심판장이 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그 앞에 있어서 저희들이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고 꿀리는 자리에 서지 않는 당당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공적인 입장, 가정을 위하고, 나라를 위하고, 세계를 위하고, 하나님을 위해 사는 입장에 서야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지 않고는 어느 한때에 걸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통일사상이 지향하는 것은 나보다도 공적인 입장에 선 가정을 추대하라고 했고, 가정보다도 나라가 공적인 자리에 섰기 때문에 나라를 모시라고 했고, 나라 위에 세계가 있기 때문에 세계를 위해 희생하라 했고, 세계 위에 온 영계가 있기 때문에 그 영계와 하나되라고 했습니다. 그 전체의 주체 되시는 아버님을 중심삼아 가지고 최후에는 아버님의 사랑까지 결속해야 되겠기 때문에, 우리는 희생길과 죽음 길을 각오하더라도 감사하며 가라고 당신을 중심삼고 가르쳐 나왔습니다. 여기에 어긋나게 될 때는 그 어긋난 기준 이상의 것이 나를 심판할 수 있는 주인으로 남아지는 것을 생각하면서, 무섭고 두려운 자리인 것을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나만을 중심삼고 가증스럽게 행동하는 무리가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가정을 등지고, 나라를 등지고, 세계를 등지고, 아버님을 등지는 비참한 자리에 서서 자기 자체의 행각의 노정을 망쳐 버리는 무리가 되지 않게끔, 아버님이여, 지도하여 주시옵소서.
지금까지 통일교회 전통이 어떻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습니다. 이 전통을 세우기에 지금까지 싸워 나온 아버님의 지도 방법을 저희들은 압니다. 아버지, 금후에도 아버지께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이 자리의 주인은 그 누구도 아닌 것을 아옵니다. 여기에 서 있는 이 자식도 아니라는 것을 제가 알고 있습니다. 당신의 것이기 때문에, 당신에게는 관리 보장(寶藏)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내가 여기에 노력을 가해 가지고, 현재 처해 있는 자리에 어떻게 플러스 시킬 수 있느냐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생애에 남겨진 사명으로 알고 가는 자리는 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것을 바라보고 지금까지 통일교회는 싸워 나왔습니다. 생애를 바쳐 가지고 개척해 나왔습니다. 여러가지 사정도 많았고, 슬픈 사연도 많았지만 그 사연들이 슬픔의 결과로 말미암아 사망과 짝한 것이 아니라, 그런 슬픔의 조건들이 하늘의 생명을 촉구하고 내일의 새세계를 창건하는 데 있어서 원동력으로서 화해졌다는 것을 생각할 때, 이 어이 당신 앞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까.
통일교회 역사 가운데 여러 가지 비참한 수난길이 있었지만, 그것이 수난길로서의 일방적인 결과에 봉착한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말미암아 후대에 올 사람이 그 수난을 겪은 선래의 사람들 이상의 사람들로 배양될 수 있는 정신적인 전통의 기준이 닦아진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아버님은 수난을 무엇보다도 귀한 선물로서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을 이제 와서 느끼게 되옵니다.
아버지, 통일교회 가는 길 앞에 핍박이 없었다면 무가치한 교회가 되었을 것입니다. 통일교회를 지도하는 지도자 앞에 영어살이의 노정이 없었다면 무의미한 인연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역사들이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고 뜻의 일념을 다짐짓기 위해서 그렇게 갔기 때문에 뜻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눈물로써 그 길을 되찾고 눈물로써 그 길을 더듬어 계승해 나가겠다며 여기에 연결되고자 한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 이러한 무리는 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여실히 보았사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통일교회는 공적인 분야에서 희생하라고 오늘도 내몰고 있는 것입니다. 내일도 그러해야 되겠습니다. 이 움직임이 교회를 거쳐서 나라를 거쳐서 세계의 도처에까지 발전하더라도 그 노정을 여실히 세계의 종말시대까지 몰고 나가지 않으면 통일교회에 종말이 온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두려운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뜻이 귀한 줄을 알았기 때문에, 이것은 우리에게만 있어서는 안 될 것이기에, 이 길로 내몰아야 했고, 이 길로 다짐지어야 할 생활을 같이 넘겨야 할 것을 알았기 때문에, 또한 핍박의 길, 수난의 길로 내몰았고, 한스러운 길을 행복의 터전으로 소화시킬 수 있는 자동적이요, 능동적인 무리가 돼야 할 것을 아셨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인도해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금후에 어떤 길이 있더라도 저희들은 가기를 결심하였습니다. 어떠한 곳이라도 머물기를 결심한 몸들이오니, 분부하시는 거룩한 뜻 앞에 슬픔의 조건을 남기지 않고 소망과 기대의 조건을 남겨 생명을 다하는 일이 있더라도 달려갈 줄 아는 믿음직한 통일의 무리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옵고, 강하고 담대한 하늘의 병정의 모습을 갖춘 무리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7월 20일 이후가 되었습니다. 이 기간은 저희들이 전통을 따라 개척전도와 이 나라를 대해서 싸워야 할 기간이오니, 이 기간에 뜻을 위하여 일선에 서서 싸우는 당신의 어린 아들들과 어린 딸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그뿐만이 아니라 이 세계적인 때를 대해서 성화의 봉화를 들고 새로이 나타난 세계의 십자군, 아버지여, 평화의 십자군을 아버지께서 지키시어서 이들이 가는 곳곳마다 당신이 살아계심을 느끼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보이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나타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이 죽었다고 하는 이 비참한 현세계 정세를 바라보면서 아버님이 살아 있는 실재를 보임으로 말미암아 그들 앞에 증거시키어 그들을 당신 앞에 굴복시킬 수 있는 일이 세계적으로 이루어지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악이 팽창하는 이 환경을 선으로서 소화 흡수할 수 있는 주체적인 역량을 지녀야 할 무리가 통일교회 역군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저희들은 강하고 담대해야 되겠습니다. 주류사상에 일체가 되어가지고 부동해야 되겠습니다. 철두철미한 전통적 기원을 따라 가지고 일방통행을 하더라도 사방을 거느릴 수 있는 일방인 것을 느낄 줄 아는 무리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 하루는 거룩한 날이오니, 당신의 이름을 갖고 모이는 곳곳마다 친히 같이하여 주옵소서. 측은하게 여기시는 사랑을 가져 가지고 동역자가 되시옵고, 협조를 해주셔서 내일의 승리의 상속자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재삼 부탁드리옵니다. 뜻과 더불어 승리의 세계가 어서 오기를 바라면서, 참부모님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여러분은 통일교회 성화학생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통일교회' 하면…. 이 통일교회는 오늘 이 시대에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통일교회는 역사적인 산물이기 때문에 그 역사를 더듬어 보면 수많은 종교 역사를 겸해 가지고, 기독교 역사를 거쳐 인류시조인 아담 역사까지 올라가는 인연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아담을 중심삼고 보면, 아담은 하나님의 소원을 대표해서 지어진 분이기 때문에 여기에는 아담만 개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까지도 개재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인류시조가 타락을 했기 때문에, 타락한 인간들을 그냥 둘 수 없으므로 하나님은 지금까지 역사를 거쳐오면서 구원섭리를 해 나왔습니다. 섭리역사를 어느 한때에 귀결지어야 할 목적이 있는데, 그것은 특정한 종교를 통해서 귀결지어야 합니다. 그런 전체 섭리를 귀결지어야 하는 대표적인 사명을 짊어진 곳이 어디냐 하면, 통일교회로 알고 있습니다.
'통일교회의 역사' 하게 될 때, 여러분은 선생님이 뜻을 알고 뜻의 길을 개척할 때부터라고 할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이 생겨났기 때문에 복귀의 사명을 짊어진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미루어 보게 될 때에, 타락이 선생님 시대에서부터 시작되지 않은 한 통일교회는 역사적인 인연을 갖고 있는 것이 틀림없는 것입니다. 그런 인연을 더듬어서 올라가게 된다면, 이제 말한 거와 마찬가지로 아담 해와를 중심삼은 그 이전시대에까지도 연결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지금까지 복귀섭리역사를 해 나오는 데 있어서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이 직접 간섭을 해서 복귀역사를 추진했으면 쉬웠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을 대해 직접 선두에 서 가지고 복귀역사를 개척할 수 있는 입장에 서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우리 인간은 자기의 권위를 잃어버리고, 종인 천사장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천사장이 지금까지 인간을 지배하는 데 있어서 하늘을 시봉(侍奉)할 수 있는 자리에서 이끄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반대하는 자리에서 이끌고 나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귀역사를 하나님이 직접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천사장이 지배하는 이 실패의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하늘을 위하는 천사장, 혹은 인간을 위하는 천사장과 같은 사명을 감당하는, 즉 하늘편에 선 천사장적 사명의 시대를 거쳐 가지고 거기에서 천사장의 자리를 배반하고 떨어져 나간 그 사실을 대신 탕감복귀할 수 있는 승리의 터전을 이루어 놓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이루어진 그 터전을 본래 타락하지 않은 아담과 같은 입장에 선 사람이 인계받아 가지고 또다시 사람으로서 사탄을 굴복시킬 수 있는 터전을 닦아야 합니다. 이 터전을 닦지 않고는 복귀역사를 추진하지 못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 복귀역사를 시작하기 전에 전체가 하늘편에 설 수 있는, 전체가 하늘편에 협조할 수 있는 천사세계권 복귀운동과 같은 역사시대를 거쳐 나와야 됩니다. 이것이 섭리적인 관점에서 보는 초기단계의 역사인 것을 우리는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이것이 어느때냐 하면, 구약시대 입니다. 구약시대는 어떤 때냐 하면, 야곱 이전까지는 종의 종시대이고, 야곱 시대부터는 종의 시대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종의 시대를 거쳐서 예수님 시대에 와 가지고 비로소 아들의 시대로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그 아들이 와 가지고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면, 지금까지 하늘을 협조한 천사세계의 무리들을 영계와 육계를 합해 가지고 지배해야 되는 것입니다. 아들이니까…. 타락하지 않은 아담은 천사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입장에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아들된 예수가 이 땅에 오게 된다면 천사세계의 사명을 감당한 역사시대를 주관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역사시대의 주관권내에는 영적인 역사적 배경 위에 있는 영계의 영인체들과 지상의 역사적인 배경의 토대 위에 있는 지상의 인간들이 있는 것입니다. 이 둘을 합해 가지고 지배할 수 있는 자리가 타락하지 않은 아담의 자리, 즉 천사장까지도 지배할 수 있었던 아담의 자리이기 때문에 아담의 자리를 대신 이어받아 성사하기 위해 오시는 예수님은 영계에 있는 영인들과 구약시대권내에 있는 지상의 모든 사람을 완전히 지배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새로운 아들로서 역사적 출발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리관입니다. 원리책에는 이런 내용이 나와 있지 않지만 이러한 점을 먼저 해결해 가지고 그것을 인계받은 터전 위에서 메시아로서 출발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메시아로서 등장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아담이 실패한 것을 실패하지 않고 승리했다는 자리, 다시 찾았다는 자리, 다시 사탄을 주관할 수 있는 권위의 자리에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사탄한테 끌려가서 시험을 받아 사탄의 시험을 이기고서야 비로소 구약섭리의 연장이지만 이것이 출발할 수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예수는 이 땅 위에 와서 천사세계를 지배하는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냐? 아닙니다. 하나님의 창조목적인 창조이상 완성, 그 목적을 성사해야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아담 해와의 완성을 봐야 되는 것입니다.
완성의 자리는 어떠한 자리냐?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하나님의 소원과 일치하는 자리요, 하나님의 소원이 전부 다 이루어지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이상이 이루어지게 될 때 하나님의 소원이 성사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원이 성사될 때 비로소 하나님이 기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통해서 이런 자리를 해원성사해 놓지 않으면, 즉 타락한 아담 해와의 해원성사까지 겸하여서 이루어 놓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예수님의 사명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남자로 혼자 왔습니다. 남자 혼자로서 아담의 사명을 대신할 수 있는 자리에는 섰지만, 혼자로서는 본연의 우리 인류의 조상, 타락하지 않았으면 참부모의 자리에 설 수 있었던 인간 조상의 자리를 해결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남성으로 와서 여성을 찾아 가지고 비로소 둘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야 합니다. 둘이 한마음 한뜻이 되는 것이란 자기들의 욕망을 중심삼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창조이상을 중심삼고 한마음 한뜻이 되어 가지고 이상적인 실체들이 되어야 되는 거라구요. 그 이상적인 자리에서 아담 해와는 횡적으로 하나 되고, 횡적으로 하나된 아담 해와를 중심삼고 하나님과 아담 해와가 하나되어야 되는 거예요. 이럼으로 말미암아 횡적인 세계에 있어서 종적인 출발이 사랑을 인연으로 하여 성립될 것이었는데, 이것이 되지 못했다 이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이 땅 위에 자리를 못 잡고, 땅 위에 기반을 갖지 못했습니다. 기반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이루어야 할 이상세계는 횡적으로 벌어질 수 없게 된 것입니다.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과 아담 해와의 본연의 사랑은 갈라져 나갔고, 이게 갈라졌다는 것입니다. 아담 해와가 하나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은 본연의 사랑이 갈라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아담 해와가 종적으로 하나될 수 있는 중심점이 다 깨져 나갔습니다. 아담 해와가 종적 횡적으로 하나될 수 있는 자리가 성립 안 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는 완전히 공(空)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되어야 되느냐? 영계에 천사세계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천사장의 후계자가 인간이기 때문에 지상에 살고 있는 인간들이 사탄의 종이 되어 있지만 하나님편에서 하나님을 위할 수 있고, 본연의 인간의 주인이 태어나면 그 주인을 위해서 절대복종할 수 있는 지상 천사 장세계와 같은 것이 있어야 됩니다. 알겠어요?「예」 지상 천사장세계와 같은 것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사탄 천사장세계가 불신의 세계라면 하나님을 믿고 나온 이스라엘 민족은 하늘편의 천사장세계와 맞먹는 것입니다. 불신의 사탄권이 아닌 하늘을 중심삼은 신의의 천사장권이 어떠한 것이냐 하면, 이스라엘 민족을 중심삼은 유대교 판도입니다. 알겠어요?「예」
여기에 있어서 유대교하고 이스라엘 민족이 딱 하나돼야 되는데, 그것을 우리 원리로 말하면 아벨 국가입니다, 아벨 국가. 알겠지요? 그 아벨 국가 앞에 최고의 원수는 뭐냐 하면 로마 제국인데, 그것은 가인 국가의 세계적인 대표입니다. 이 가인과 아벨이 싸워야 됩니다. 부딪쳐야 됩니다. 부딪쳐 가지고 아벨이 가인을 굴복시켰더라면, 사탄이 주관하는, 즉 사탄편 천사장권이 하늘편 천사장권 앞에 굴복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아담 앞에 이 지구에 살고 있는 인류들이 굴복할 수 있는 자리에 서는 것이고, 그 자리가 주인된 아담 앞에 굴복한 천사세계와 맞먹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이렇게 되었더라면 예수님은 이 땅 위에 다시 올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 이스라엘 나라를 중심삼고 유대교를 통해 가지고 세계에는 하나님의 이상국가, 타락하지 아니한 선의 이상이요 사랑의 이상세계, 횡적인 사랑의 중심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횡적인 세계를 대표한 중심이 비로소 결정됨과 동시에 횡적인 중심이 완전히 하나님의 창조이상을 중심삼고 결정되기 때문에 여기에 종적인 하나님의 사랑이 임하여 가지고 비로소 종횡이 하나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반 위에서 아담과 해와가 사랑을 중심삼고 가정을 이루었으면, 이것은 남자로서 사랑을 중심삼은 최고 이상의 기점이 됩니다. 최고 이상의 중심자리다 이거예요. 또한 여자로 보게 된다면, 여자로서 남편을 대하여 바라던 최고 이상의 목적지다 이거예요. 그거 이해가 돼요? 남자로서는 여성을 대한 최고의 희망봉이요. 여자로서는 남성을 대한 최고의 희망봉입니다. 이 땅 위에 있는 어떠한 이상보다도, 어떤 귀한 것보다도 그 자리가 남자 여자들로서는 최고의 희망의 꽃봉오리다 이거예요. 이것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다구요.
그것이 뭐라구요? 남성과 여성의 희망의 뭐라구요?「꽃봉오리입니다」꽃봉오리입니다. 이거 모르면 안 되는 거라구요. 그것이 남자와 여자가 바라는 희망의 꽃봉오리인 동시에 천지를 창조한 창조주의 입장에서 볼때에, 창조이상적인 꽃봉오리입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게 되면 뭐라구요? 창조이상적인?「꽃봉오리」 꽃봉오리입니다. 하나님도 '아이고 그런 때가 왔으면…' 하고 고대했겠어요. 안 했겠어요? 하나님도 '그때가 왔으면, 그때가 왔으면…' 하고 매일같이 바랐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한 귀결점을 두고 아담 해와가 무럭무럭 자라나는 것을 보고 얼마나 하나님은 사랑스러웠을 것이냐?
이러한 입장에 서야 할 우리 인류시조는 난데없이 자기들 멋대로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아담 해와가 타락하고 난 후에 아담이 해와한테 불평했을 것입니다. 요것아, '너 때문에 타락했어!' 그랬겠어요 안 그랬겠어요? 뭐 조그마한 애들 말 한마디만 조금 잘못해도, 딱 듣고는 '너 때문에 내가 그렇게 대답했는데' 하는 거예요. 그런데 아담이 타락하고 난 후에 '해와 너 때문에 타락했다'고 그랬겠어요, 안 그랬겠어요? 우리 남자들, 우리 거룩한 남자님들, 우리 학생들은 그렇지 않지. (웃음)
타락하고 보니 기가막히게 처량하게 됐는데, 가만히 보니 요건 누구 때문에 그렇게 됐나 생각해 보고 해와 때문에 그렇게 됐다면 '야! 해와야, 너 때문에 이렇게 됐다'고 말을 하고 빡빡 긁었겠어요, 안 긁었겠어요? 「긁었겠습니다」 남자들도 긁나? (웃음) 그럴 수 있는 반면에, 해와는 '야, 이 아담이 멍텅구리야. 하나님의 원칙으로 보면 너는 주인이 되고 중심이 돼 가지고 여자가 암만 그러더라도 절대로 말 안 듣고 불상처럼 떡 버티고 있었으면 타락하지 않았을 것이 아니냐? 난 너 때문에 타락했다'고 박박 긁었을 거라구요. (웃음)
이렇게 되니 신의의 세상이 되어진 것이 아니라 불신의 세상이 되었고, 서로의 화합의 인연이 벌어진 것이 아니라 불화의 동기가 싹트게 됐다는 것입니다. 보면 볼수록 사랑스러운 것이 아니라 보면 볼수록, 눈도 찡그리고, 코도 찡그리고, 입도 찡그리고, 귀도 찡그리고, 손도 찡그리면서 대하는 생활이 벌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타락 이후의 결과다 이겁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이냐? 아담 해와가 진심으로 합할 수 있는 그 본원지는 어디 갔느뇨? 찾아볼 수 없습니다. 타락한 이후에 둘이 사랑을 하며 끌고 다니고 끌려 다니긴 하지만 서로가 부르튼 마음을 가지고 살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태어난 아들딸이 있을 것입니다. 그 아들딸이 계승한 것이 역사시대의 우리 조상들이요, 그 조상의 하나의 역사적 결실체로 태어난 것이 여러분의 어머니 아버지요. 그 아버지 어머니의 피살을 받아 가지고 태어난 것이 오늘날의 우리 자신들이라는 것입니다. 이거 틀림없지요?「예」
그러면 여러분들은 어때요? 타락한 죄악의 뿌리를 중심삼고 태어났기 때문에 줄기도 타락한 것입니다. 그렇지요? 가지는? 잎은? 그 이파리(잎 사귀)에 있는 하나의 세포는? 전부, 전부, 전부 타락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보라구요. 여러분의 마음 가운데 있어서 본심이 찾아가야 할 곳이 어디냐? 오늘 이 땅 위에서 내가 아버지 어머니품에서 태어났고, 그 가정에서 키워지고 있지만, '아-, 여기에서 천년만년 살고지고, 우리 집은 행복한 집이요. 우리 집을 중심삼고 난 죽어도 감사할 수 있다'고 하는 그런 가정에서 사는 우리 청소년들이 있어요? 더더구나 요즈음에 뭐 청소년입네 해 가지고…. 청소년들이 지금 세계에 문제를 일으켜 가지고 이게 큰 문제가 되어 있는 때입니다. '엄마 아빠는 무슨 엄마 아빠. 엄마 아빠시대 하고 우리 시대하고는 세대가 다른데, 사고방식이 다른데. 아버지 어머니가 올려다 보면 우리는 내려다 봐야 돼' 요렇게 된 시대라구요.
자, 그러니 여러분이 살고 있는 가정 환경이 여러분의 행복의 보금자리가 되지 못하는 것을 자인한다는 것이 됩니다. 언제든지, 밤이나 낮이나 눈을 똑바로 뜨고 주의하지 않게 될 때는 언제 죄악의 그물이 나를 삼켜 가지고 알 수 없는 곳으로 끌고 갈지 모르는 위험천만한 환경에서 살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래요?「예」
더더구나 여학생들은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된다구요. 남자들은 어떠한 존재냐 하면, 천사장의 후계자입니다. 그렇지요? 남자들은 복귀시대에 있어서 천사장의 후계자라구요. 기분 나쁘지요? 왜 대답을 안 해요? 여자들은 복귀시대에 있어서 누구의 후계자예요? 해와의 후계자예요? 천사장의 후계자는 후계자인데, 복귀시대에 있어서는 여자가 앞선다는 것입니다. 한발을 앞선다는 거예요. 여자가 남자보다도 한단계 앞서니까 나쁜 거예요, 좋은 거예요? 「좋은 것입니다」
복귀역사라는 것은 타락할 때, 잃어버릴 때의 상태를 그냥 그대로 세워 가지고 반대로 탕감복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 있지요?「예」
태초에 말이예요, 하나님이 있었고, 아담이 있었고, 해와가 있었고, 그 다음엔 뭐가 있었나요?「천사요」 천사가 있었는데, 요렇게 타락을 했다구요. (판서하심) 타락함으로 천사는 어떻게 되었느냐? 천사는 본래 영적인 존재인데, 영적 존재하고 육적 존재 둘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예」 그거 그렇다구요. 사탄이 있지요, 사탄? 사탄이 있고, 그 다음 사탄의 실체가 있는데 그것이 뭐냐 하면 가인이라는 존재라구요, 가인이란 존재. 또, 이쪽 반대편은 하나님을 중심삼고 아벨이라는 존재가 있는데, 영육도 이와 마찬가지라는 거예요.
이렇게 보게 된다면, 아담 해와의 자리에 돌아가지 않고는 복귀가 될 수 없다는 말이라구요. 그렇지요? 아담 해와의 자리에 돌아가지 않고는 복귀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담 해와가 이 자리에서 이렇게 타락했기 때문에 복귀하려면 이 자리에 올라가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달라요. 이 자리보다 나아야 돼요, 못 해야 돼요?「나아야 됩니다」 나아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남자와 여자지요? 이쪽은 남자고 이쪽은?「여자」 틀림없이 남자고, 틀림없이 여자입니다. 그렇지요?「예」 그러면 여러분, 복귀하고 싶어요?「예」 복귀하고 싶다구요? 「예」 복귀하려면, 여기 천사장한테 끌려 들어가서 떨어졌으니 천사장한테 끌려 올라가야 되겠어요? 「아닙니다」 누구한테 끌려가야 돼요? 이것이 뭐냐 하면, 재림주라는 존재라구요, 이게. 아담이라는 존재, 즉 완성한 아담입니다. 그럴 거 아녜요? 그렇지요?「예」 그럼 누구한테 끌려 올라가야 된다구요? 이것은 타락한 아담이라구요. 타락하지 아니한 아담, 완성한 아담이 와서 끌고 올라가야 된다구요.
천사가 끌고 내려갈 때 누구를 먼저 끌고 내려갔어요?「해와입니다」그 다음에는 해와를 통해 가지고?「아담을 끌고 갔습니다」 이렇게 됐지요? 그러면 이것하고 이것이 같지 않아요?「아닙니다」 이것은?「타락한 아담」 타락한 아담이고, 이것은?「완성한 아담입니다」 완성한 아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완성한 아담이 아니고는 못 넘어갑니다. 그렇지요? 「예」 타락선을 넘을 수 있는 것은 완성한 아담입니다. 완성한 아담이 아니고는 못 넘는 것입니다. 그거 틀림없다구요.
그래서 하늘이 지금까지 수고한 것이 뭐냐 하면, 이 타락선을 넘어가 가지고 반대로 복귀할 수 있는 시대를 찾아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해와를 빼내어 가지고 끌어 올리고, 그 다음에는 해와를 통해 가지고 아담을 구해야 됩니다. 그렇지요?「예」 반대로 해야 된다고 하니까, 그럼 그렇게 하지말고 아담하고 하나되어 이렇게 해와를 끌고 올라가면 되지 않느냐고 하겠지만, 그러면 천사장이 하던 거와 마찬가지의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요?「예」 이것은 하나될 수 없습니다. 타락권내에 있기 때문에 복귀되어 가지고야 따라올 수 있는 길입니다. 이것이 마이너스, 이것은 플러스지요? 플러스와 플러스끼리는 어떻게 돼요? 반발하는 거라구요. 그렇지요?「예」 그러니 안 된다구요.
그렇기 때문에 반대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주님이 와 가지고 해와를 끌어내야 합니다. 그래 가지고 해와한테 절대복종해야 이것이 복귀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입장에 있기 때문에 여자들이 한단계 앞서 있다는 것입니다. 기분이 좋아요? 기분 좋아요, 나빠요? 기분이 좋은가, 나쁜가? 「좋습니다」 저 뒤에 있는 아가씨들은 기분이 좋지 않은 모양이구만. 기분이 좋은가, 나쁜가?「좋아요」 말이 들려요, 안 들려요?「들립니다」 안들리지 않지 않구만. (웃음) 자, 이거 방해가 되기 때문에 할수없다구요. 실례지만 말이예요. (무엇을 치우심) 요거 알았다니…. (웃으시면서) 일본말을 자꾸 했더니 '알아 띤따디' 이렇게 되누만. 일본말을 자꾸했더니 말이예요. 알았지요?「예」
이러한 입장에서, 보게 될 때 세상 끝날이 되어 오거들랑…. 오늘 제목이 뭐냐 하면 '하늘이 바라는 청소년 시대'입니다. 여기서부터 이제 잡아 가지고 이야기해야 되는 거라구요. 하늘이 지금까지 역사를 해 나왔습니다. 그런데 사탄이 전부 끌고 가는데는 말이예요, 앞에서 끌고 가는 것이지, 그렇지요?「예」
아담 해와가 몇 살 때 타락했다고 생각해요? 청년 시대요, 청소년 시대요? 「청소년 시대입니다」 스물 전이예요, 스물 후예요?「스물 전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아, 어떻게 알아?(대답을 여러 가지로 함) 성년이 되려면 못해도 스무살이 되어야 됩니다. 원리로 보게 되면 3곱하기 7은 21, 21수가 좋은 정수이기 때문에 이것을 넘어야 됩니다. 이것을 넘으면 벌써 남자면 남자의 모든 갈 길을 알고, 여자면 여자의 갈 길을 알았을 것입니다. 이런 것을 두고 볼 때에, 20대 전이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알겠어요? 내가 알기로는 뭐 만 16세쯤 되지 않았나, 이렇게 보는 거예요. 자, 그러면 여기 그 연령되는 사람은 손들어 봐요.
사탄이가 코를 꿰는데는 말이예요…. 오늘은 좀 자극적인 얘기 합시다. 사탄이가 코를 꿰는데도 말이예요, 몇 살짜리를 꿰었어요? 열 여섯은 관두고, 청소년부터 꿰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딱 꿰어 가지고, 그 다음에는 청소년만 꿰었겠어요? 장년도 그 코에 걸렸고, 또 그 다음엔? 노년도 그 코에 걸렸고, 이 세상 사람뿐만 아니라 영계에 있는 영인들까지도 그 코에 걸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그렇게 끌고 가는데는 누구를 먼저 끌고 갔느냐? 타락역사를 두고 볼 때에, 맨 처음 누구를 끌고 갔느냐 하면 나이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 너희들 같이 눈이 또렷또렷 하고, 얼굴이 홍도 같이 불그스름한 여러분 같은 패를 끌고 갔다구요. 그런가? 안 그런가? 그래요, 안 그래요? 「그래요」 틀림없이 그렇다구요.
그렇게 다 끌고 나가는데, 젊은 청소년을 앞세우고, 그 다음에는 청년, 그 다음에는 장년, 그 다음에는 노년, 다 죽게 된 노년을, 그리고 영인체도 있지만 영인체는 그만두고, 산 사람만 두고 볼 때 이렇게 돼 있습니다. 죽게 된 할머니 할아버지는 인중지말(人中之未) 맨 끝장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탄이 끌고 가는 것을 빼앗아 왔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렇기 때문에 하늘은 인중지말인 할아버지 할머니를 찾아서…. 쓰레기통에 들어갈 쓰레기감을…, 늙은이 사 가라면 누구 사 가는 사람이 있어요? 70세 된 늙은이를 5만 원만 주면 얼마든지 팔겠소 할 때에, 여기 사겠다는 사람 손들어 봐요? 있어요, 없어요?「없습니다」 없어요? 그럼 불효막심한 것들…. 「여기 있습니다」 이 녀석은 말 듣고 그말 했지, 이녀석. 이 꿍꿍한 녀석아…. (웃음) 죽게 될 할아버지 할머니는 5만 원에도 싫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냥 가져 가라고 광고를 붙이면 70세 넘은 할머니를 먼저 가져 가겠다고 서로 빼앗는 싸움판이 벌어질 것 같아요, 안 벌어질 것 같아요?「안 벌어집니다」 인간으로서는 무용지물이다. 기분 좋아요, 나빠요?「나쁩니다」 여기 할머니가 없으니까 하는 얘기지, 있었으면 '저 선생님 큰일날 사람이다. 우리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합동해서 데모해야 되겠다' 이럴지 모를 거라구요.
오늘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없으니까 우리끼리 이야기 좀 해보자구요. (웃음) 할머니와 미인 손녀가 있는데, 그 미인 손녀를 얻기 위해서는 할머니까지 맡아라 할 때 남자들은 어떻게 해요? 「맡아야지요」 먼저 할머니와 손녀를 맡아 놓고, 그 다음에 할머니는 갖다 치울라고 그러지요? 그 맡은 것은 사랑스러워서 맡았어요, 할수없어서 맡았어요?「할수없어서…」 그렇지 그래, 할수없이 맡았다구요. (청중들과 같이 웃으심) 이렇게 보게 된다면, 늙어 죽게 된 사람들은 인중지말입니다. 인간으로서는 어디 뭐 의지할 데 없고, 처량한 이런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 늙어 죽게 된 할머니들이요, 할아버지들입니다. 알겠어요?「예」
하나님은 복귀역사를 하는데 있어서, 맨 앞에서 끌고 가는 사탄 앞에 서는 것이 아닙니다. 사탄 뒤에 가 가지고, 맨 꽁지에 가 가지고 '야, 야, 사람들아 내 말 들어라, 내 말 들어라' 하는 것입니다. 이게 복귀역사라구요. 알겠어요? 떡 나가 가지고 '이놈들아, 들어라' 이게 아니라구요. '야야, 내 말 들어라, 내 말 들어라' (웃음) 이게 무슨 역사라구요?「복귀역사입니다」
자, 그런 복귀역사하시는 하나님이 처량하신가, 안 하신가?「처량합니다」 여러분의 아버지가 그런 놀음 하면 반대할 거예요, 안 할 거예요? 「반대합니다」 틀림없이 반대할 거라구요. 저런 미친 늙은이, 혹은 아버지면 저런 미친 아버지, 어머니가 그런다면 저런 미친 어머니라고 할 것입니다. 내가 저런 아버지 어머니의 아들딸로 생겨났다는 이름만 들어도 기분이 나쁘다고 그럴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아버지 어머니로 삼고 싶다 하는 사람 손들어 보라구요. 한 마리도 없구만. 한마리도 없어. (웃음) 한 마리도 없으니까 욕을 해도 괜찮지요?
이렇게 볼 때에, 인간들이 타락한 이후에 하늘이 인간을 찾아 구원역사를 출발한다면 어디서 하느냐? 새파란 청소년들을 품에 품고 사랑할수 있는데서 소망을 갖고 나온 것이 아니라, 인간 쓰레기들을 중심삼고 일보 일보 가중된 눈물을 머금고, 그들을 젊은 사람 이상으로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늘의 입장이었습니다. 그게 가능하겠는지 생각해 보라구요.
꽃다운 청춘인 아담과 해와, 그들의 사랑 앞에 혹은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둘이 헤어질 수 없는 그런 인연을 가졌던 하나님이 꽃다운 청춘 남녀 아담 해와를 사탄에게 다 내 주고 늙어 죽게 된, 쓰레기와 같은 것을 품고 그 이상으로 사랑하지 않고는 복귀할 수 없는 운명이더라 이거예요. 안 그래요? 하나님이 타락전 이하의 기준에서 사랑을 해가지고는 구원을 못 하는 것입니다. 구원하려는 뜻이 있거들랑 타락전 이상의 사랑을 가지고 구원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원칙이기 때문에, 사람이 타락하지 않았을 때 대하던 사랑을 가지고 대하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에, 천사장이 하는 사랑보다 더 높은 사랑을 가지고 사랑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탄이가 싫어하는 인간 쓰레기를 타락하지 않은 아담 해와를 대하던 그 이상의 마음을 가지고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 여러분 생각해 보라구요.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구약시대를 두고 볼 때 구약시대의 복귀역사는 뭐냐 하면, 종 복귀역사예요, 종 복귀역사라구요. 종 복귀역사인데 종 중에는 나이 많은 종부터 붙들고 나오는 거예요. 노아를 노아 할아버지라고 그래요, 노아 아저씨라고 그래요?「할아버지요」 언제 할아버지인 줄 알았나? 아브라함 아저씨예요. 아브라함 할아버지예요?「할아버지요」 모세 아저씨예요, 모세 할아버지예요?「할아버지요」 전부 할아버지지요? 할아버지는 있는데, 할머니는 있어요? 할머니도 있긴 있지만 명색이 없다구요. 그럼 예수는? 예수는 뭐예요? 청년이예요. 아저씨예요? 아저씨도 좋고 청년도 좋습니다.
비로소 역사시대에 있어서 하나님의 품에 품길 수 있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처량한 신세를 모면하고 비로소 소망의 한줄기 빛을 찾아나설 수 있었던 것이 누구냐 하면 예수뿐이었다 이겁니다. 그가 태어난 역사를 말하면 여러분이 눈물 흘릴 수 있는 그런 배경은 다 빼놓고, 그가 하늘을 위하여 나라를 대표하고 세계를 대표하고 당당히 나서게 될 때, 비로소 하나님도 큰 기대를 가질 수 있고 사탄세계 앞에 위신을 세울 수 있는 한때를 맞고, 하나님이 '몽땅 내 사랑아' 하며 온갖 정열을 다 퍼붓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예수를 중심삼고 하나님이 사랑의 정열을 퍼부었느냐? 어땠어요? 「……」 사랑의 정열을 퍼부을 수 없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원리적인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아담을 사랑하는 동시에 해와를 사랑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요?「예」 해와는 제쳐 놓고 아담만 사랑하는 것은 천리원칙이 아니기 때문에, 청년 예수를 앞에 놓았지만 원리의 주인공인 하나님은 아담 해와를 같이 사랑하는 것이 본연의 원칙이기 때문에 해와 없는 아담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신만고 수고의 길을 다 지나가더라도 아담 앞에 같이 사랑받을 수 있는 해와를 모셔 놓고야 비로소 사랑의 노래를 부를 수 있고, 사랑의 봄 동산을 맞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 앞에는 맞을 수 있는 해와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요거 기가 막히지요?
그 당시에 여러분이 여자였다면, 해와 한번 되어 주고 싶었을까, 안 되어 주고 싶었을까? 「……」 자, 대답을 해봐요. 해와 한번 되어 주고 싶었을까, 안 되어 주고 싶었을까?「되어 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건 말을 하면 반응이 있어야 말을 하지. 미욱하게 못생긴 깊은 산골짜기에 가면 '와' 하면 '와'라고 대답도 하는 산울림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들은 피가 있고 눈을 깜박깜박하고 해쭉빼쭉 웃으면서 왜 대답이 없어? (웃음) 기분 나빠서 못 견디겠구만. 젊은 애들은 요렇게 말해야 신이 나거든. (웃음) 더운데 내리닫이로 이야기하면 재미없는 거예요. 덥지요?「예」
더운 줄 모르게 어떻게 재미있게 이야기하느냐 하는 것을 선생님이 연구하고 연구해 나오는데, 나 오늘 재미있게 이야기할 수가 없다구요. 재미있게 하려고 하는데 대답을 안 하니까. 그래 이제부터 재미있게 하자우, 말자우?「재미있게 해요」 내가 뭐 말을 하면 10분 혹은 20분 동안에다 끝낼 수 있다구요. 한 시간 필요 없다구요. 더운데 왜? 땀이 지금 궁둥이까지 흘려 내린다구요. (웃음) 이거 이해가 돼요?「예」 그럴 성싶어요?「예」 콧등에 땀방울이 진 것을 보니까 그럴 성싶다구요. 지혜로운 사람은… . 오랜 시간 땀 흘리는 사람은 미욱한 사람이고, 자기 몸을 생각 하고 그래도 내일도 뛰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거든 적당히 해 가지고 조건적 말만 해도 통과되는 내 아니냐? 그렇지요?「예」 그렇기 때문에 30분 이내에 끝내자 이거예요. 어이 어때요? (한 사람에게)「……」(웃음) 30분인데, 묻는데 대답을 안 했다가는 대답 못 하고 끝날 수도 있다구요.
자, 그러면 묻는 데 대답할 거예요, 안 할 거예요?「하겠습니다」 여자 들은 싫대도 남자들은 대답할 거예요, 안 할 거예요. 「하겠습니다!」남자 들은 싫어 하더라도 여자들은 대답할 거예요, 안 할 거예요?「하겠습니다!」어-, 여자들은 믿을 수 없다구요. 아까 물어 봤을 때는 대답 안 하고 이제 하겠다고 하는 여자들은 믿을 수 없다구요. 남자들은?「대답 하겠습니다!」이제 남자들에게는 물어 볼 수 있는 소망이 남아 있다구요. 여자한테는 안 물어 볼 거라구요. (웃음)
자 그러면 한번 더 여자들한테 물어 보자구요. '예수님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해와가 그렇게 필요했다면, 내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그 예수님이 사랑을 받게끔 한번 해와 놀음을 해보겠소' 하는 마음이 여러분들이라면 있었겠어요. 없었겠어요?「있었겠습니다」 있었다는 사람 손들어 봐요. 거 왜 이렇게 해요? 누구를 보고 손들어요? 나 보고 손들어야지. (웃음) 손들어 봐요.
자, 이렇게 많은 경쟁자가 있었다면 예수님이 기분 좋았겠어요, 나빴겠어요?「좋았겠습니다」 얼마나 좋았겠나! (웃음) 그때 유대 나라 여자들이 전부 다 예수님한테 그렇게 되게 됐다면, 그 싸움이 천년도 갈지 모를 거라구요. (웃음) 전부 다 그렇게 됐다면 남자들은 어떻게 해요. 남자 들은 어떨꼬?「장가를 못 가죠」(웃음) 그렇기 때문에 그것도 야단이라구. 그것도 야단이라구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광고를 붙이고 그렇게 했다간 큰일난다는 것입니다. 만일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역사 이래 모든 것을 책임지고 온 분이요, 나를 붙드는 사람은 하나님을 붙들 수 있고, 하늘나라를 붙들 수 있고, 하늘나라를 차지할 수 있는 특권 중의 특권이 있다' 이렇게 선전을 했다가는 큰일날 거라구요. 큰일이 났겠어요, 안 났겠어요?「큰일났겠습니다」 조금 얼굴이나 반반한 딸을 가진 욕심 많은 부모들이라면, 콧등을 떼서라도 예수님 문전에 갖다가 놓고 드시게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것을 잘 아시는 하나님이나 예수님은 그런 광고를 붙이고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알겠어요?「예」
그러면 어떻게 했을까요? 그거 궁금할 거라구요. 그거 설명할까요? 넘어가자나, 설명 하자나?「설명해 주세요」 그거 설명하려면 시간이 많이 간다구요. 「설명해 주세요」 그것을 세밀히 설명하려면 한 시간이 걸릴 텐데…. 그것은 여자들은 재미있지만, 남자들이 재미가 없어요. 「재미있습니다」 그건 나중에 이야기 하고…. 만약에 아까 말한 거와 마찬가지로 그렇게 되었다면 이스라엘의 여자들은 전부 다 동원했을 것입니다. 안그래요? 그랬을 것입니다.
자 그러면, 예수님이 말이예요, 30세 된 총각이었는데, 몇 살쯤 된 처녀가 예수님의 상대가 되었으면 좋았을까요?(여러 가지로 대답함) 그거 여러분들, 연구해 보라구요. 그거 숙제로 줄께요, 그거 좀 연구를 해야 정신이 나지, 다해 놓으면 재미가 없다구요.
이렇게 볼 때에, 예수님에게는 그러한 여성이 없었습니다. 그러한 여성이 없어서 십자가에 돌아가셨다 이거예요. 그거 기가 막히지요? 예수님은 완성한 남성의 대를 이어 가지고 이 땅에 왔지만 창조원리적인, 원칙적인 하나님은 아담만 사랑하게 되어 있지 않는 것이 원칙이예요. 그렇지요?「예」 아담과 해와를 같이 품고 같은 날 사랑해야 하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에, 아담에게 필요한 것은 해와이고, 아담은 해와를 찾고 나야만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요걸 알아야 된다구요.
그러면, 그 아담은 어떠한 아담이 되어야 하느냐? 아담이라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천사장을 지배할 수 있는 주인이기 때문에 본연의 천사장 입장에 있어야 할 사탄까지도 주관할 수 있는 능력이 있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그럴 수 있는 남성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남성 앞에 부름받은 여성도 사탄까지 주관할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 해와가 되지 않고는 사탄한테 주관받은 원한의 뿌리를 뽑아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요?「예」 그럴 수 있는 여성이 없었다는 거예요.
남성 하나 세우기 위해서는 4천년의 역사를 통해 종의 시대를 거쳐 가지고 예수 시대까지 거쳐 왔지만, 여성 하나 세우기 위해서는 그런 역사적 연대(年代)가 계승되지 않았더라 이겁니다. 본래 아담을 통해 해와가 지어졌기 때문에 아담 자신을 통해 가지고 해와가 복귀되어야 될 입장에 섰던 것입니다. 그런데 해와가 복귀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은 죽어 가지고 2천년 동안 영적인 신랑의 입장에서 영적인 해와를 찾아 나온 것인데, 그 역사적 연장시대가 지금까지의 기독교 역사입니다. 이걸 알아야 되겠습니다. 알겠어요?「예」 요렇게 되면 확실히 알 거라구요.
그래서 오실 주님이 이 땅 위에 오시는 데는 어떻게 오시느냐? 해와를 데리고 오는 것이 아니라구요. 해와를 데리고 오면 좋겠지요? 하나님이 전부 다 살짝 창조해 가지고, 사탄 몰래 속닥속닥해 가지고 전부 다 딱 맞추어 가지고 '옛다, 이젠 너 사탄은 졌다' 이렇게 하면 좋겠지요? 원리의 하나님은 그렇게 할 수 없다 이거예요. 아담이 나옴과 더불어 해와가 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는 무슨 종교냐? 신부의 종교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돼요. 4천년 동안 수고해서 찾아왔던 신랑을 맞지 못한 유대교와 이스라엘 민족 앞에 있어서 배반의 역사와 계대를 이어온 것을 제거시켜 버리고 새로운 개척적인 세계 무대를 넓혀 나오는 것이 신부의 종교인 기독교입니다. 이 기독교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이 기독교 문화권 세계요. 자유세계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알겠어요?「예」 이만큼 나왔어요, 자유세계.
그래서 오시는 주님은 어떤 입장으로 오느냐? 자유세계라는 그 세계가 영육을 중심삼은, 즉 기독교가 유대교를 완성시킬 수 있는 터전을 이어 받는 것이 아니라, 영육이 완성될 수 있는 상속의 터전이 아니라 영적인 터전만을 다시 이어받은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세계적인 발전을 이루어 놓은 것이 기독교입니다. 알겠어요?「예」
그러면 오시는 주님은 어떻게 되느냐? 예수 시대와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예수 시대와 달라요. 예수 시대와 다른 것이 무엇이냐 하면, 예수 시대에는 유대교와 이스라엘 나라를 중심한 영육을 중심삼은 지상 기반이 있었지만, 현대의 기독교는 육적인 기반은 없고 영적인 기반만을 중심삼은 세계인 것입니다. 알겠어요. 무슨 말인지?「예」
그래서 영적인 세계의 승리의 패권을 쥐고, 육적인 세계의 승리의 패권를 쥐어 가지고 통일을 시키면, 이것은 영적인 세계를 중심삼은 천사 세계와 지상의 영적 세계가 완성을 보는 거지, 육적 기반은 완성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예」 다르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오시는 주님은 영계와 육계, 영적인 천사세계와 영적인 지상세계를 대하여 싸워서 이기고 그것이 완전히 통일적인 형태를 갖추고 난 후에야 비로소 육적인 세계를 연결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알겠어요?「예」
그러면 영계와 육계를 연결시키기 위해서는 어느 자리에서 연결시켜야 되느냐? 예수님을 중심삼고 보게 되면, 영육을 중심삼고, 즉 이스라엘 나라와 유대교를 중심삼고 하나 만들어야 했던 그 기준에 있어서 육적인 기준은 깨뜨려 버리고 영적인 기준만을 다시 연장시켜 나왔기 때문에 영적인 국가 기준을 중심삼고서만이 영적 천사세계와 영적 기독교세계를 묶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거 좀 어려워요. 그렇지만 선생님이 말은 틀리지 않게 했다구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예」 이것이 연결되고 난 후에라야 비로소 육적인 세계와 연결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확실히 알아야 원리를 통해 앞으로 세계가 어떻게 되는지 아는 거라구요. 자, 이만큼만 이야기해 놓자구요.
이제 여기서부터 가닥을 달리하게 되면 청소년시대는 넘어가는 거라구요. 세계 문제가 연결되기 때문에…. 그렇게 되어 있다 하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 두어야 되겠어요.
그러면 오늘날 통일교회의 현재의 입장은 어떠한가? 이것만 이야기하자구요. 제 1 차, 제 2 차, 제 3 차 세계순회노정이 있었는데, 영계와 육계를 연결시키기 위해 영적인 국가 기반을 연결시키고 돌아온 것이 제 3 차 세계순회노정입니다. 알겠어요?「예」 그런 기준이 있기 때문에 육적인 국가 기준을 중심삼아 가지고 상대관계를 맺을 수 있는 때가 1972년 이후부터 1974년까지의 기간입니다. 이것이 제 2 차 7년노정이라구요. 예수님은 둘째 번이기 때문에 그렇지요? 아담 대신인 예수는 둘째번 아들이라 구요. 둘째번으로서 소생기 장성급에 맞먹기 때문에, 제1차 7년노정과제 2 차 7년노정은 예수에 해당하는 기간이기 때문에, 제 2 차 7년노정의 마지막에 영육의 통일적인 형태가 목전에 다가오는 시대가 되어야 합니다.
이래서 남북이 지금 말이예요, 재미있지요? 지금 북과 남이, 즉 가인과 아벨이 만나 가지고 '싸움하지 말자, 우리 서로 피해를 입히지 말자' 이렇게 나오고 있습니다. 재미있다구요. 그런 시점에 놓인 때, 그때가 바로 어느때예요?「말세 때입니다」 바로 그 때가 이 때다 이겁니다.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를 보면, 예수님이 실패하던 때를 넘어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종족이 있었어요?「없었습니다」 없었다 이거예요. 예수님의 가정이 있었어요?「없었습니다」 예수님에게 아내가 있었어요?「없었습니다」 예수님에게 아들이 있었어요?「없었습니다」 이제는 그와 같은 자리를 넘어갔다는 거예요. 가정이 있고, 자녀가 있고, 종족이 있고, 민족 형태를 갖출 수 있는 이 시대에 들어왔습니다.
유대교와 마찬가지의 입장인 영적 기준이 되는 것이 기독교라는 거예요. 기독교가 통일교회와 하나만 되면…. 통일교회는 육적이라구요. 알겠어요?「예」 통일교회는 육적인 입장에 있다는 거예요. 통일교회와 기독교가 하나되고 통일교회와 나라가 하나되는 날에는 영육이 하나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거라구.
통일교회가 왜 육적이냐? 아담 해와는 실체를 가진 존재가 아니냐 이거예요. 그렇지요? 천사장은 영적인 존재이지만 영적 세계보다도 실체 세계가 높은 것입니다. 알겠어요?「예」 기독교는 무엇이냐 하면, 유대교의 연장이기 때문에 예수 앞에 가인적인 존재입니다. 그렇지요?「예」 가인적인 존재예요. 오늘날 이 세계의 기독교는 통일교회 문선생 앞에 영적 기준에 있어서 가인적인 존재입니다. 가인적인 영계와 육계를 하나 만들 수 있는 조건만 세우고 나오면, 즉 아벨적인 육과 가인적인 영이 일체만 되면 영육이 완성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알겠어요?「예」 통일교회는 아담의 자리이기 때문에 천사세계보다도 실체적인 입장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지금 기성교회와 나라와 합류하게 하는 운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재미있지요?「예」 이것이 바로 지금인 것입니다. 남북이 갈라진 이 시대라구요. 국가는 남북으로 갈라졌고, 세계는 좌우로 갈라져 있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예」 예수를 중심삼고 보면, 십자 가는 남북으로 갈라졌고, 좌우로는 왼편 강도와 오른편 강도로 갈라진 것입니다. 그렇지요?「예」 한국은 남북으로 갈라졌고, 세계는 좌우로 갈라졌습니다. 그것이 어느때까지 이래야 되느냐? 남북이 하나되고 좌우가 하나되어 예수를 공인할 때까지입니다. 오른편 강도도 예수를 공인하고, 왼편 강도도 예수를 공인하고, 남쪽도 예수를 공인하고, 북쪽도 예수를 공인해야 비로소 통일세계가 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알겠지요? 「예」 여기 지구상에, 역사시대의 어느 한때에 좌우와 상하가 연결될 때가 있어 가지고 횡적으로 연결되고 종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묶어질 수 있게 되면 그 터전이 하늘나라의 출발이 되고 이상세계의 출발이 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다구요. 이것이 뭐냐 하면 지상천국의 출현이라는 것입니다. 알겠어요?「예」
그런데 지상천국을 파탄시키는 골수 분자는 어떠한 사람이냐? 이를 보니, 청소년이라는 사실…. 알겠어요?「예」누구라구요?「청소년요」무엇이?「지상천국을 파탄시키는…」지상천국을 파탄시키는 괴수들. 그 책임자가 어떠한 패라구요?「청소년요」청소년 패다 이겁니다. 그러면, 통일교회 여기에 모인 통일교회 패들은 어떤 패라구요?「청소년 패요」 청소년 패인데, 어떤 청소년 패라구요? 지상천국을 망치는 청소년 패예요, 흥치는 청소년 패예요? 흥치는이라는 말이 있다고 하면…. 흥망이라고 할 때,'망' 반대가 '흥'밖에 없지. 흥치는 패예요? 어떤 패예요?「흥치는 패입니다」 틀림없어?「예!」그래?「예!」
그러면 여러분이 아담 해와보다 나아요?「예」 뭣이 나아, 이 녀석들아? (웃음) 무엇이 나아 이 녀석들아?「낫습니다」 이 녀석들, 무엇이 낫다는 말이예요?「낫습니다」 뭐 재수없게시리 저녁부터…. 반조무래기들이 그러면 기분이 나쁘다구요. 아담 해와보다 나아?「예」 무엇이? 그럼 물어 보자구요. 아담 해와는 타락하기 전에 '하나님' 하면 하나님께서 '오냐, 나 여기에 있다. 이리 와라' 하면서 하나님과 일문일답을 했는데, 여러분은 일문일답을 다 해요? 일문일답 다 해요?「예」 정말이예요? 내가 눈으로 볼 때는 그렇지 못한데. 어디 그렇게 한다는 사람 손들어 보라구요. 이 녀석아, 어디 일문일답을 해 봤어?「예」 누구하고?「선생님하고 해봤습니다」 에이 녀석아, 선생님이 하나님이야? (웃음) 그래 못한 것이 대번에 탄로가 나잖아요.
능란한 천사장이 영적으로 나타나 가지고 '야야 아무개야' 하면, 천사장인지 무엇인지 여러분이 알아요? 알아요, 몰라요?「……」알 수 있어요, 없어요?「있습니다」 알 수 있어? 그러면 타락하기 전까지는 천사장이 아담 해와를 모셨나요. 안 모셨나요?「모셨습니다」 그럼 여러분들도 아담 해와와 같이 천사장의 모심을 받아 보았어요? 받았어요, 못 받았어요?「못 받았습니다」 못 받았다구요. 그러니까 못한 것이 아니냐, 이거예요. 물어 보면 꼼짝달싹 못 하는 녀석들이 뭐…. 아담 해와보다 못하지요? 「예」 사람은 솔직해야 되는 거라구요. (웃음)
더우기 이 처녀들은 시집을 가야 되는데…. 내가 왜 자꾸 이리 보느냐 하면, 이쪽은 어둡다구요. 여자들은 하얀 옷을 입어서 밝으니까 자꾸 이리로 눈이 갑니다. 그 눈이 참 이상하지요? 여긴 거무튀튀한데다가 또 어둡다구요. 이렇다 보니 자꾸 밝은 데로만 가서 내가 참 남자들한테 실례가 됐어요. 어떤 녀석은 손가락질하면서 '선생님 봐라, 선생님도 남자니까 여자만 좋아한다. 기분 나쁘다' 그럴 거예요. (웃음) 자 보라구요. 여기는 컴컴해요. 컴컴한가요, 컴컴 안 한가요?「컴컴합니다」 그러니 할수 없다구요. 이제부터는 내가 남자도 좀 봐야지. 말하다 보니까 내가 실례를 했다구요.
자, 아담 해와보다 나아요?「예」 낫다고 생각해요, 못하다고 생각해요? 「낫다고 생각합니다」 이 도둑놈들아! (웃음) 무엇이 나아, 무엇이?(여러 가지로 대답함)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구요. 아무리 생각해도 못합니다. 절대 못하다구요. 그렇기 때문에 메시아가 필요한 거라구요. 알겠어요?「예」 그렇기 때문에 메시아가 절대 필요하다는 거라구요. 알겠어요, 무슨 말인지?「예」 아담보다도 나은 사람이 되지 않고는 구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아담보다도 하나님의 사정을 더 잘 아는 사람이 되지 않고는 구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담보다도 더 능란해 가지고 사탄의 계교를 도리어 감아 넘길 수 있는 수완이 없어 가지고는 복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난문제들이 있다구요.
아담 해와를 중심삼고 볼 때, 아담 해와는 타락될 때 무엇 때문에 타락했느냐? 무엇 때문에?「사랑 때문에요」 사랑은 나중이예요, 나중. 불신에서부터…. (판서하심 ) 어디서부터?「불신」 불신을 잉태한즉 무엇을 낳았어요?「죄악을…」 죄를 낳아 가지고는, 그 실체를 낳았습니다. 불신의 실체를 낳았다는 것입니다. 그 불신의 실체가 잉태한즉, 뭘 낳았느냐? 불신의 실체는 불신의 사랑을 낳았습니다. 무엇을 낳았다구요?「사랑」 사랑.
오늘날 사랑이 좋다고 무슨 문학서적이니 무엇이니 전부 다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 사랑을 믿을 수 있더냐? 믿을 수 있는 사랑이 있어요? 이거 뭐 동네방네에 소문을 내면서 그 아가씨와 그 총각이 그저 뭐 끔찍이나 연애 연애 연애하여 결혼을 한다고 잔치를 하며 야단을 하고 난 뒤에 깨가 무수히 쏟아지게, 청춘시대는 물론이요, 장년시대는 물론이요, 노년 시대는 물론이요, 저, 고사리대 구부러지듯이 구부러지도록 그저 잘살 줄알았더니 몇 일도 못 가 가지고 왱가랑댕가랑 하더라. (웃음)
사랑을 중심삼고 볼 때에, 불신의 사랑이 많아요, 신의의 사랑이 많아요?「불신의 사랑요」 자기 사랑하는 여편네를 내놓고, 자기 사랑하는 남편을 내놓고 지금 별의별 놀음 다하는, 장단에 맞추어 춤추는 여자와 남자들이 많지요?「예」 그게 불신의 사랑이예요, 참신의 사랑이예요?「불 신의 사랑요」 그러면 여러분의 아버지 어머니에 대해 한번 조사해 봤어요?「안 해 봤습니다」 나는 다 조사해 봤다구요. 아버지 어머니는 어디에서 어떻게 살았느냐? 그렇게 조상의 족보를 파헤칠 줄 알기 때문에 통일교회 문선생이 됐다구요. 조상이 어떻게 되어 있느냐를 알아야 됩니다. 알겠어요?
여러분들은 그러지 않아도 괜찮을 거예요. 순수해야지, 뭐 (웃음) 빨강 것을 보게 되면 빨강겁니다 해야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뭐 청색하고 황색하고 합하면 녹색이 나옵니다 하는 그런 뭐 복잡한 것은 알 필요 없다구요. 순수한 것이 좋아요, 안팎이 다르면 다르다고 이렇게 가르는 게 좋아요?「순수한 것이 좋습니다」 순수한 것이 좋아요. 원리도 그저 뭐'원리' 두 글자만 알면 되지요?「안 됩니다」 그럼 뭐예요? 원리라는 그 말씀이 제일 순수하지요. 원리 가운데에는 타락론, 창조원리, 복귀원리, 무슨 원리, 다 들어가는데, 원리가 왕땡이니 왕땡이만 알면 되지…. (웃음) 둘 다 필요하다구요. 이렇게 말하다가는 시간이 많이 걸릴 텐데….
젊은 세대가, 청소년 세대가 하늘땅을 망치게 했습니다. 망치게 한 理 젊은 세대의 실수를 누가 책임지고 탕감해 나왔느냐? 이게 문제라구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숱한 수난길에서 탕감의 피와 땀을 흘려 나왔던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틀림없지요?「예」 노아 할아버지는 120년 동안을, 또 아브라함은 일생 동안 수많은 국경을 넘나들었고, 모세는 이방에 들어가 가지고 출세할 수 있는 모든 영광의 자리도 버리고 민족을 사랑하다가 양치는 목자로서 비참한 40여 해의 생애를 거치는 이런 놀음을 하면서 수난의 길을 걸었습니다. 이것은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그 기간에 할아버지 할머니 뿐만 아니라구요. 아저씨 아주머니들도 얼마나 희생되었을 것이냐? 80대(代)에서부터 70대(代), 70대에서부터 60대, 60대에서부터 50대, 50대에서부터 40대, 40대에서부터 30대, 30대에서부터 20대, 20대에서부터 10대까지 그게 내려온다구요. 복귀니까….
복귀는 잃어버린 상태 그냥 그대로의 입장을 세워 놓고 그것을 찾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타락해서 떨어져 내려간 인간들을 중심삼아 가지고 하나님은 거꾸로 복귀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노년시대에서부터 장년시대, 장년시대에서부터 청년시대, 청년시대에서부터 청소년시대까지 내려와 가지고 아담 해와보다 나은 청소년을 발견하기 위해서 오랜 섭리역사 가운데 수난길을 걸어오면서 꿈의, 소원의 한 상대로서 찾아 나왔던 것인데, 그것이 이 젊은 청소년들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다 이거예요. 알겠어요?「예」
그러면 이 청소년이 지녀야 할 긍지는 무엇이어야 하며 하나님이 찾아올 수 있는 청소년의 입장은 어떠한 것이냐? 이게 문제라구요. 그건 불신의 조상인 아담 해와가 더럽힌 그런 노정을 따라가는 청소년이 아닙니다. 의심하고 불평 불만하는 그런 젊은이들이 아니예요. '절대 희생이다. 절대 신앙이다. 절대 복종이다. 절대 순응이다. 이것만이 일방통행이다'할 수 있는 순수한 젊은 청소년이 아니고는 안 될 것입니다. 그렇겠어요, 안 그렇겠어요?「그렇겠습니다」
이제 복귀시대의 한계점이 다가오는 이때에 태어난 여러분들이여 ! 1972 년을 맞은…. 오늘이 며칠인가요? 1972년 7월 27일을 맞은 성화 중,고등학생 여러분이여! 통일교회의 청소년 패들이여! 그대들이 서 있는 자리라는 것은 흘러가는 역사시대와는 다릅니다. 영육을 중심삼고 영계와 육계의 통일적인 기반을 갖추고, 육적인 아벨 기반을 갖추어 가지고 새로운 세계에 등장하여야 할 통일사상 앞에 있는 여러분들, 특히 젊은 청년 여러분들이여! 이제 이 경계선을 넘어 새로운 기수로서 깃발을 들고 나서는 그 무리가 나이 많은 노인이 아닙니다. 나이 많은 장년이 아니요, 나이 많은 노인들이 아닙니다. 오로지 젊은이들, 피끓는 젊은이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다 이거예요. 10대 청소년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다 이거예요.
빛나는 이 청소년의 무리를 이 지구상의 어느 한 곳에서라도 발견할 수 있는 그날이 와야만 하나님의 6천년의 한이 풀릴 수 있는 것이요, 아담의 원한의 터전이 되고 있는 죄악의 뿌리를 뽑아 가지고 뒤집어 박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발견하지 못하고, 이것과 상봉하지 못하게 될때는 천주는 암흑 그대로 연장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부르고 있는 세대는 노년 세대가 아니요, 장년 세대가 아니요, 청년 세대가 아닌 바로 청소년 세대라는 것을 우리는 엄숙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때 그 자리에 있어서의 마음은 모든 것을 감사해야지 자기를 위주한 감정을 가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자기 위주한 감정을 갖기 시작하게 될때 아담 해와의 타락이 벌어진 것입니다. 하늘나라를 위주하는 감정을 가지고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과 육이 하나된 자아를 발견한 자리에서 하나님을 대해 불신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 신임할 수 있는 절대적 기준을 어떻게 제시하느냐 하는 것이 청소년으로서 이 세계사적인 경계선을 넘어가 가지고 하늘 앞에 부름을 받을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를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숨가쁘고, 이렇게 처절하고, 이렇게 긴박한 자리에 서 있는 것이 1972년의 후반기 7월을 맞은 여러분 세대인 것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다구요.
아담이 불신했기 때문에 여러분이 불신의 뿌리를 뽑아야 되겠다 이겁니다. 여러분이 바라보는 그 나라는 여러분이 이어받을 수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살고 있는 그 사회는 여러분이 이어받을 수 있는 사회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자라고 있는 그 집안도 여러분이 이어받을 수 있는 집안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행하고 있는 길이 있으면 그 길은 여러분이 행할 길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새로운 세계관을 모색하여 새로운 세계를 찾아야 되겠고, 새로운 나라를 찾아야 되겠고, 새로운 사회와 새로운 가정과 새로운 나를 찾아 가지고 타락한 원한의 터전 위에 처해 있는, 청소년기에 더럽힌 모든 역사를 뿌리째 뽑아 버려야 합니다. 그리하여 새로운 나라, 혹은 승리적 전통을 빛낼 수 있는 기원을 마련해 가지고 나서야만 통일교회의 청소년으로서 지닐 바의 긍지를 지닌 청소년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는 것을 알아야 되겠다 이거예요.
이제부터 3년간…. 선생님이 7월 초하룻날 장충단 공원에서 말씀했듯이 이제 이 6개월 기간이라는 것은 이 나라의 비운의 역사를 가름지어야할 역사적인 기간입니다. 이 나라 이 민족뿐만이 아니라 세계사적인 사명을 짊어질 수 있는 때가 되었습니다. 그럴 수 있는 것이 만천하에 드러난 현 시점에 있어서 여러분, 한국 민족을 생각해 보라구요. 저 서쪽으로는 중공이 있고, 북쪽으로는 소련이 있고, 동쪽으로는 일본이 있다 이거예요. 일본이 금후에 어떻게 되느냐 하는 것이 아시아의 문제를 좌우할 것이 아니냐? 일본에 영향 미칠 수 있는 한국이 못 돼 있기 때문에 일본을 따라가야 할 운명에 서 있는 한국은 비참한 것이 아니냐?
이런 관점에서 섭리의 뜻을 가려 나가는 사명을 하는 데 있어서 하나의 길은 오늘 우리 통일교회 원리가 주장하는 소망의 길밖에는 없다는 사실을 두고 볼 때 여기에서 오늘 우리는 전날 자신의 좁던 모든 것을 버려야 되겠습니다. 얕은 가슴을 깊게 만들어야 되겠습니다. 낮은 가슴을 높게 만들어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어느 정도 높고 깊음을 목표해서 가느냐? 역사시대에 있어 어떠한 장년들도 갖지 못한 그런 심정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어떠한 노년들이 갖지 못한 그런 심정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그들이 우리 가슴속에, 그들이 우리 활동무대에, 그들이 우리 소원 가운데 춤을 출 수 있어야지 오늘날까지 우리 선조들이 남긴 그 무대에서 우리가 춤추어 가지고는, 선두에 서 가지고 하나님의 복귀섭리의 최종적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말입니다. 그런가요, 안 그런가요?「그렇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절대적인 신앙, 절대적인 신앙, 절대적인 신앙이 필요한 것입니다. '입이 가로로 째져 가지고 타락한 것을 알았기 때문에 입이 세로로 째지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참말을 하는 것이다. 나는 한 가지밖에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한 가지밖에 들을 수 없는 것이다. 나는 한 가지 길밖에 갈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일방통행으로 절대적인 귀결을 바라보고 나가는 사람이 되지 않고는 청소년시대에 타락하였던 원한의 구렁텅이를 메우고 넘어갈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결론입니다.
여러분, 그런 입장에서 오늘 나라는 존재를 다시 한 번 냉정히 비판해 보게 될 때 여러분은 이런 청소년 시대에 있어서, 그 귀결점을 해원성사해 드리기 위하여 역사적으로 수많은 선지자를 희생시키고, 혹은 천사세계의 사명을 복귀하기 위한 역사시대에 있어서 예수를 위주한 영적인 아벨의 역사로 연결되어 가지고 기독교 순교역사, 그 희생의 대가를 치러 가지고 찾고자 하는 하나의 역사적인 중심 결실체로서 부름받을 수 있는 청소년인 나 자신이 되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 여러분이 아브라함보다 나아요? 모세보다 나아요? 아니예요. 노아 할아버지가 내 앞에 머리를 숙여야 되고, 아브라함 할아버지가 내 앞에 머리를 숙여야 되고, 모세 할아버지도 내 앞에 머리를 숙여야 됩니다. 예수 자신도 나한테 부탁할 수 있는 이런…. 예수는 30대에 사명의 출발을 봤지만, 아담이 본래 18세, 십대에 출발하여야 할 것이었는데,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예수도 나한테 부탁할 수 있는 자리에 서야 될 것이 아니냐? 그런 역사를 전체 탕감하여야 할 엄숙한 자리에 서 있는 청소년인 것을 자각한 사람이 있느냐? 어디 있어요?「예」 대답은 잘한다.
보라구요. 아침 저녁으로 하나님의 보호를 받으면서, 하나님과 의논하면서 살고 있던 아담 해와도 타락을 했다구요. 하나님이 계신 것을 확실히 알면서도 타락을 했다구요. 여러분은 하나님이 계신 줄 확실히 알아요?「예」 알긴 뭘 알아요.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아담이 하나님을 믿었던 믿음은 여러분보다 차원이 높아요. 타락의 후예로 태어난 우리 자신들은 이것을 확실히 깨닫고 자각해 가지고, 내가 아무리 하나님을 믿는다 해도 아담처럼 믿을 수 있느냐? 없다구요. 그러니까 할수없이 절대적인 신앙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알아야 되겠다구요.
청소년이 장년보다도 못해서는 안 되는 것이요. 예수보다 못해서는 안됩니다. 예수 이상의 신념을 가져야 되겠다 이겁니다. 모세 이상의 신념을 가져야 되겠고, 아브라함 이상의 신념을 가져야 되겠고, 노아 할아버지 이상의 신념을 가져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 이상의 신념을 가져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다고 하나님이 싫어하겠어요? 여러분이 이것을 알아야 돼요.
한스러운 타락의 근거지가 불신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몸뚱이는 불신의 열매로 맺혀진 것이 아니냐? 자, 여러분의 마음과 몸이 싸워요, 안 싸워요? 「싸웁니다」 그러면 몸이 하자는 대로 해요, 마음이 하자는 대로 해요? 「마음이 하자는 대로 합니다」 마음이 하자는 대로 해요?「……」왔다갔다하지요?「예」 마음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타락한 실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 알고 하나님의 아들딸이라는 입장에서 하나님만 따라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 가외의 길은 없는 것입니다. 그 가외의 길이 있을 수 있어요?「없습니다」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눈에다 '교회고 무엇이고 나는 모르겠다. 이제 대학교에 들어가야지…' 하는 이렇게 색안경 낀 녀석들은 전부 가짜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늘이 세울 수 있는 청소년이 못 되는 것입니다. 오직 그 바라는 기준은 하나밖에 없어야 합니다. 그래야 될 것 아니예요? 부모가 못산다면 그도 못사는 것이요, 부모가 망하면 그도 망해야 되는 것입니다. 부모는 망하는데 난 안망하겠다고 도망빼는 자식은 있으나 마나한 자식입니다. 그런 점에서 볼때에 하늘이 제시한 이외의 길을 갈 수 없다는 결론이 나는 거라구요. 알겠어요?「예」 여러분들은 그래요? 그런가, 안 그런가?「그렇습니다」
보라구요. 청소년인 아담 해와가 천지의 모든 사랑의 이상을 다 깨뜨려 버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깨뜨려 버린 것을 또 깨뜨려 버리기 위해서…. 또 깨뜨려 버리면 어떻게 돼요? 복귀되는 거예요, 복귀. 깨뜨려 버리고 그냥 두자는 것이 아니라구요. 깨뜨려 버린 것을 또 깨뜨려 버리기 위해서는 아담 이상 당돌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아담은 자기를 붙들고 당돌했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붙들고 당돌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골리앗 대장 앞에 나타난 다윗과 같이. 우린 다윗과 같지요? 아무리 권세가 등등하고 세계의 모든 권한이 그 휘하에 감겨 들어간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믿고 나선 다윗의 발길은 감당치 못할 것입니다. 신념이 앞섰습니다. 절대적인 신념을 가지고 부딪힌 것입니다. 자기의 돌팔매는 총알 보다도 무섭고 어떠한 검보다도 더 무섭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런 실체가 필요합니다. 그런 실체가 필요합니다.
발판이 될 수 있는 통일교회…. 인공위성이 날려면, 케이프 케네디 같은 기지가 있어 가지고 그 기지가 그것을 밀어 주고도 남을 수 있는 견고한 기대가 되어야만 됩니다. 그렇지요?「예」 마찬가지라는 거예요. 여러분들의 실체가 문제인 것입니다. 이 몸뚱이가 누구한테 끌려가느냐? 이 나라에 끌려가느냐? 자기 아버지 어머니의 사정에 끌려가느냐? 사회 사정에 끌려가느냐? 내가 하늘의 사정에 끌려가느냐? 이 두 경계선에서 여러분이 또 다시 비운의 투쟁을 하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서 있기 때문에 이것을 빨리 청산지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청산짓기 전에는 사랑이라는 것은 영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역사시대에서 청산하지 못했기 때문에 종교를 믿고 나가는 사람들에게는 가정도 허락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요것을 알아야 되겠다구요. 알겠어요?「예」
우리가 찾아 나가는 것은 아담 해와를 하나 만들고, 하나된 그 사랑의 기반 위에 횡적인 중심이 결정되면 그 터전 위에 종적인 하늘과 하나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입체적인 사랑의 터전인 영적인 기쁨과 육적인 기쁨이 벌어지고 천국세계의 기원이 될 것이었는데, 이것을 깨뜨려 버렸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이것을 복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의 젊은 청소년들이 이제부터 가려 가야할 것이 무엇이냐? 아담 해와보다 나아야 됩니다. 알겠어요?「예」 나아야 됩니다. 먼저는 어떻게 나아야 되느냐? 우리는 타락의 혈통을 받은 인간이기 때문에 타락한 혈통의 자리에 그냥 서 가지고는 아담 해와보다 나을 수 없는 것입니다. 아담 해와는 타락하기 전에는 하나님의 사랑권 내에 있었던 것이 아니냐. 하늘편에 속한 자리에 서 가지고 타락을 했지, 사탄편에서 있다가 타락을 했어요? 그 출발을 하늘편에서 했던 것인데, 여러분들은? 사탄편에서 출발한 것은 꺾어 버려야 되겠다 이겁니다. 다르다구요.
하나님편에서 출발한 아담 해와도 타락을 했는데, 사탄편에서 출발한 우리들에게 있어서 타락은 더더욱이나 있을 수 있는 문제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신차려야 됩니다. 그런고로 내가 가는 것, 내가 미치는 모든 일체는 하나님과 상극적인 입장에 서 있다는 것을 알고 이것을 처리하는데 온갖 정성을 쏟아 나가야 됩니다. 이래 가지고 하늘 편에서, 내 생애 전체를 중심삼아 가지고 어느때에 '나는 새로운 출발을 했다' 하는 것을 각자가 가져야 됩니다. 그런 출발을 가졌어요? 가졌어요. 안 가졌어요? 못 가졌지요? 가졌어요, 못 가졌어요?「가졌습니다」 가졌어요? 통일교회 들어온 날은 그게 아니예요.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했다는 그런 날을 가졌어요? 가졌어요, 못 가졌어요?「못 가졌습니다」 못 가졌다구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가질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자기 목숨을 팔고 자기 전체를 희생시키더라도 가야 됩니다. 그 하나를 찾기 위해서 인류가 수천년 동안 희생의 대가를 치러 나왔고, 하나님도 이것을 찾기 위해서 지금까지 신음의 고빗길을 극복해 나왔고, 예수님도 수천년 동안 이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서 투쟁해 나온 것이 아니었더냐? 모든 역사적인 대가를 치러 가지고 이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나왔던 그 길이 아니었더냐? 그런데, 섰다 하는 결정적 승인을 받은 그때가 언제 될는지 모르는 이런 입장에 선 여러분들이 그런 자리에 섰다고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냐? 알겠어요?「예」
그러면 그 자리를 넘어설 수 있는 길을 돈을 주고 살 수 있다면 돈을 주고 살래요?「예」 돈을 얼마나 주면 살 것 같애요? 한국을 주고 살 수 있어요? 한국의 3천만 민족을 한꺼번에 제물로 드려서 살 수 있겠어요? 「없습니다」 세계 30억 인류를 한꺼번에 제물로 드려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이 기준을 해결해 주기 위해서 오시는 분이 누구냐 하면 메시아라는 분입니다. 알겠어요?「예」 메시아는 역사적으로 소원해 온 실체입니다. (판서하시면서 말씀하심) 메시아는 시대의 중심입니다, 시대의 중심. 요것은 역사적인 중심이라구요. 그 다음엔 미래의 출발자입니다.
그러면 그는 어떤 분이냐? 과거 천사장세계 복귀역사시대의 모든 것을 승인받아 대를 이어야 되고, 아벨을 중심삼은 영적인 복귀시대에 있어서의 대를 이어 가지고, 실체적인 복귀의 터전까지 이어서 세계로 가는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을 만나기 위해서는 온갖 희생의 대가를 치르고 또 치르더라도, 극복하는 길이 아무리 멀고 멀더라도 찾아가야 됩니다. 그러지 않으면 안 될 길이 메시아를 만나는 길이다 하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메시아라는 분은 어떠한 분이 되어야 되느냐? 여러분과 무슨 관계가 되어 있느냐? 이분을 청소년의 기준으로 보게 된다면, 역사에 없는 하늘편에 제일 가깝고 사랑받을 수 있는 청소년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되겠지요?「예」 청년시대에 있어서도 이분은 역사시대에서 제일 사랑받을 수 있는 청년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되겠지요? 장년시대에 있어서도 이분은 역사적인 하나님의 심정세계를 두고 볼 때에 장년 시대를 대표한 역사적인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되겠지요? 노년시대를 두고 볼 때에도 하나님이 사랑하고 남을 수 있는 노년시대의 사랑의 주인공이 되어야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청소년의 하나의 패턴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젊은 청년의 하나의 패턴이 되어야 됩니다. 그 다음에 장년의 패턴이 되어야 되고, 노년의 패턴이 되어야 됩니다. 그럴 수 있는 내용을 지니고 오시는 분이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분은 무자격한 것이 아닙니다. 아담이 세계적인 중심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분에게는 세계의 모든 전체를 관리 통합시킬 수 있는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알겠어 요? 무슨 말인지?「예」
그러면 오늘날 땅 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사탄세계 속에 있는 사람들이 살 수 있는 하나의 길은 무엇이냐? 청소년시대부터 전체를 바쳐 가지고 그분이 지향하는 그 길을 따라서 그분이 청소년시대에 완성하지 못한 것을 대신 이어받고, 혹은 장년시대를 완성하지 못했으면 그 대를 이어받고, 노년시대를 완성하지 못했으면 그 대를 이어받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하늘은 그분을 세워 가지고 또다시 이끌어 나갈 것입니다. 이렇게 보는 거라구요.
그렇다면, 오늘 통일교회 문선생을 두고 볼 때, 선생님이 그런 사명을 바라보고 나가는 사람이다 하게 된다면 말이예요. 선생님의 청소년시대를 알아요? 알아요. 몰라요?「모릅니다」 요게 궁금하지요?「예」 모르지요? 「예」 또, 선생님의 청년시대를 알아요?「모릅니다」 뭐 여러분 중에 50세 넘은 선생님을 오늘 처음 본 사람도 많잖아요? 50세가 넘었으면 청년이예요, 장년이예요?「장년입니다」 장년도 꽉차 가지요? 통일교회 역사를 두고 보게 된다면 말이예요, 하나님의 소원이 어떻겠느냐? 그게 문제라구요. 알겠어요?「예」 하나님이 청소년시대에 뜻을 이루고 싶었겠지요? 타락했던 그 자리를 잊고 싶었겠지요? 그렇겠지요?「예」 청년시대도 마찬가지이고, 쭉 그래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도 이것을 알아야 된다구요. 선생님이 왜 나이 어린 어머니를 모셨느냐 하는 문제. 알겠어요?「예」 선생님이 40세가 넘어 가지고 18세의…. 18세된 아가씨들 손들어 봐요. 손들어 보라구요. 이제사 피어 오르는 아씨, 아씨라구요. 어린 아씨라고요. 40세나 된 그런 양반이 귀에 피도 안 마른 아씨를 데려다가 그래도 무엇을 해보겠다고 시작할 때에, 기가 막혔겠어요, 안 막혔겠어요? 생각해 보라구요. 기막힐 겁니다. 그거 왜 그랬는지 알아요? 거 왜 그랬어요? 둘 중에 하나라도 그런 자리에 서야 되는 것입니다. 둘 중에 하나라도, 그렇지 않으면 역사를 연결시킬 수 없습니다. 부부는 일신이라고 하지요? 알겠어요?「예」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고 있는데, 그 사랑하는 아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고 시기하는 남편이 있어요? 없지요? 또, 아내가 자기가 사랑하는 남편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고 해서 '아이쿠 나를 사랑해 주지 왜 우리 남편을 사랑하나' 그런 여자가 있어요?「없습니다」 없지요?「예」 그런 점에서 볼 때, 이것을 전부 갖추지 않으면 안 될 역사적인 인연이 있기 때문에 그런 놀음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은 결혼을 무엇 때문에 했느냐? 무엇 때문에 했어요? 자기 때문에 했어요? 「아닙니다」 선생님이 이 땅 위에서 대학교나 대학원을 나오고 박사 되는 이런 아가씨들을 얼마든지 모셔올 수 있다구요. 그렇지요? 「예」 안 그래요? 그렇지만 세상을 표준하고 한 게 아니라구요. 결혼도 무엇 때문에? 뜻 때문에, 뜻 때문에…. 또, 아들딸을 낳는 것도 무엇 때문에? 「뜻 때문입니다」 뜻 때문에…. 전부 공적이라구요. 또, 여러분을 시집 장가 보내는 그 축복, 합동결혼식을 해주는 것도, 선생님이 무슨 돈을 받고 해줬어요? 무엇 때문에? 「뜻 때문에…」 뜻 때문에…. 지금까지 생애를 바쳐 투쟁한 것도 일체가 뜻 때문입니다.
하늘 앞에 빛낼 수 있는 장한 10대를 만들어야 됩니다. 그것을 알아야 돼요. 알겠어요? 장한 20대를 만들어야 됩니다. 장한 30대를 만들어야 됩니다. 장한 40대를 만들어야 됩니다. 장한 50대를 만들어야 됩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알아야 돼요.
그러나 선생님은 40세를 넘어 가지고야 비로소 땅 위에 발을 붙였기 때문에 선생님에게는 장한 10대가 없습니다. 알겠어요?「예」 선생님은 장한 30대가 없습니다. 안 그래요? 40이 넘어서야 비로소…. 이런 것을 생각할 때에 어머님을 통해 가지고 그것을 끌고 나가기 위해서…. 어머님이 세상을 다 알았겠어요? 아무것도 모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 지인데, 철부지를 갖다가 키워야 된다구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예」민며느리감을 키운다는 말이 있지요? 이것은 민며느리감이 아니고, 뭐예요? 민마누라감…. (웃음) 그런 남자가 얼마나 불쌍한 남자예요. 그렇지요? 불쌍한 남자예요, 행복한 남자예요?「불쌍한 남자입니다」 자 대답해 보라구요, 아가씨들. 불쌍한 남자예요, 행복한 남자예요?「불쌍한 남자입니다」 불쌍하지요. 그건 여러분들은 모른다구요. 여러분들은 모른다구요.
그렇다고 해서 사정 얘기를 하면서…. 그렇게는 안 되게 되어 있다는 거예요. 사정 이야기를 하면 안 돼요. 엄격하다구요. 한 번 잘못되는 날에는 천지가 왔다갔다합니다. 거기에는 영수증을 받아야 되고 영수증을 써 내야 되는 거라구요. 그런 거 알아요? 탕감복귀 해원성사에 있어서 해와 완성을 위한 탕감복귀역사가 있어야 됩니다. 선생님은 아담 복귀완성을 위한 투쟁의 역사를 거쳐 가지고 승리의 터전을 닦아 온 당당한 남성으로 설 수 있지만, 여성이 당당한 여성으로 서기 위해서 해와의 탕감 복귀노정이 있는 것입니다. 그거 모르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누구도 모르는, 누구도 모르는 심정적 투쟁은 물론이요, 심적 투쟁도 물론이요, 몸적 투쟁도 물론이요, 신앙적 투쟁까지 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머니도 그래요. '아이구, 통일교회고 무엇이고, 귀찮아 죽겠다. 아이구, 뜻이고 뭣이고' 이럴 수 있는 길을, 아슬아슬한 길을 개척해 나오는 거예요. 알겠어요, 무슨 말인지?「예」 그래서 1차 7년노정이 끝남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부모의 날, 자녀의 날, 만물의 날. 하나님의 날을 맞이했던 것이요, 비로소 이 땅 위에 여자로서의 간판을 얻어 가지고 동등한 자리에 서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알겠어요?「예」7년노정이 남아 있는 거예요, 7년노정.
해와의 후신(後身)으로서, 해와가 간 길을 따라가야 할 지금의 기독교 역사는 신부의 종교의 대를 이어가야 할 그 발판이, 오시는 신랑을 중심삼고 7년노정을 거쳐 들어가야 할 길이 남아 있기 때문에, 이것은 후대의 남자나 여자나 절대적으로 가야 할 길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알겠어요?「예」7년노정은 남아 있다구요. 앞으로 이 길을 다시 가야 된다구요.
그래서 여러분 자신들에게 있어서 남자면 남자를 중심삼아 가지고 하나님의 날, 부모의 날, 자녀의 날, 만물의 날이 있어야 됨과 동시에 그 아내를 중심삼아 가지고도 하나님의 날, 부모의 날, 자녀의 날, 만물의 날이 있어야 합니다. 부부가 서로 엮어 놓아야 할 7년노정이 여러분 앞에 남아 있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예」
그러면 어느때부터 이 일을 해야 되겠느냐? 여러분은 선생님보다 나아야 된다는 거예요. 알겠어요, 무슨 말인지? 그래서 선생님보다 나을 수 있는 하나의 길이 있는데 그걸 가르쳐 주겠다는 거예요. 선생님보다 나을 수 있는 그 하나의 길이 무엇이냐? 그것이 하늘이 바라는 청소년시대 입니다. 그것이 청소년시대인데, 그것이 무엇이냐? 선생님도 아무리 큰소리를 치지만 40대에 절름발이 기반을 닦았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예」 아담 해와는 나이가 서로 비슷했지요? 그런데 선생님은 나이가 많고 어머님은?「적습니다」 선생님은 다리가 길다면, 어머님은 다리가 짧잖아요? 알겠어요, 무슨 말인지「예」 그것이 지금까지의 한이기 때문에, 그 한이 대한민국에 있어 그냥 그대로 갈라져 남아 있고, 그 한이 역사시대에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원한의 세계로 연장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어머님의 나이가 금년에 몇 살이냐 하면, 서른 살이라구요. 사실 어머님이 33세, 그때가 되면 통일교회의 운세는 활짝피게 되리라 보고 있다구요. 어머님의 나이 40세가 될 때는 세계적인 시대가 되리라고 보고 있다구요. 알겠어요? 응?「예」 원리가 그렇다구요.
이런 것을 볼 때에, 역사시대에 어떤 훌륭한 선지자도 많았고, 성인도 많았고, 영웅도 많았지만 그들은 다 종의 시대의 일면, 일익을 담당했던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잘났다 하더라도 완성을 바라보는 아담 해와 이상의 자리에 설 수 있는 청소년의 자리, 그 자리를 이어받을 수 있는 자격자들은 못 되었던 것입니다. 알겠어요?「예」 전부 다 종의 자리가 아니면 양자의 대를 잇는 것밖에 할 수 없었지만 오늘 우리에게 허락된 특권, 통일교회 청소년 앞에 부여된 그 특권이야말로 어느 세대의 그 누구가 바랄 수 없는 빛나는 영광의 터전으로서 그것을 여러분이 맞이한 것을 알아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부심을 우리는 가져야 되겠다 이거예요.
선생님이 20대를 지나면서 40대까지의 그 기간은 눈물어린 투쟁기였습니다. 그건 여러분이 모르는 거예요. 감옥을 자기의 생활무대와 같이 생각하면서, 고문받는 그 길을 하나의 필생의 탕감의 노정으로 알고, 대가를 치러야 할 당연한 노정으로 알고 걸어가는 노정이었습니다. 이러면서 국가의 반대를 받고, 교계의 반대를 받고, 삼천만 민중 어느 누가 반기를 들고 반대하지 않은 사람이 없으리만큼 서글픈 자리에 몰렸던 역사를 남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 한을 어디 가서 풀 것이냐 하는 문제가 통일교회가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그 한이 20대를 넘어 40대까지 연장되어 가지고 50대 60대의 시대까지 연장될 것이 아니라, 청소년 때인 그 한계선에서 해결을 지어야 됩니다. 그래 가지고, 승리의 20대를 맞고, 승리의 30대를 맞고, 승리의 40대를 맞고, 승리의 50대를 맞지 못하였던 그 한을 풀 수 있는 단 하나의 사람들은 오늘 통일교회의 부름을 받은 하늘이 바라는 청소년인 여러분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다 이거예요. 알겠어요, 무슨 말인지? 「예」 여러분들은 선생님이 청소년시대면 청소년시대에 지냈던 이상의 자리를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때는 선생님이 개인으로서 국가를 대해 출발할 수 있는 길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개인을 위해 출발했던 때가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 분들은 나라를 대해서 출발할 때가 아니냐? 선생님이 개인을 대해 출할한 때에 피어린 투쟁을 감행하면서, 그것을 당연한 길로 찾아간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여러분은 나라를 위하여 희생할 수 있는 이런 때를 바라고 선생님 이상 당당해야 됩니다. 그러지 않고는 하나님의 위신을 탕감 복귀할 수 없는 것이 아니냐?
오늘날의 한국 실정을 바라보면, 이제 남북이 교류하지 않으면 안 될 운명에 놓여 있습니다. 이북은 완전히 적색화된 사상의 터전 위에서 이남을 대해 때를 노려 가지고 한 손아귀에 틀어쥘 만반의 준비를 다 갖추고 있습니다. 그런 북괴가 이제 남한에 자유로이 왕래할 수 있는 무대를 갖게 될 때에, 나서서 이것을 방지하고, 이것을 막아낼 수 있는 젊은 청소년들이 한국에 있느냐, 혹은 젊은 청년들이 있느냐, 장년들이 있느냐, 노년들이 있느냐 할 때 없지 않느냐? 다만 소망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은 통일교회의 청소년만이, 통일교회의 청년만이, 통일교회의 장년만이, 통일교회의 노년들만입니다. 이들만이 여기에 대비할 수 있는 자신을 갖고 있지, 그 외의 사람은 그렇지 못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볼 때에, 수천년 동안 나라를 목표로 하고 찾아 나오던 하늘의 뜻,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이 2천년 전 왔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십자가의 한의 고생길을 가면서 신부의 소망의 터전을 남기고 갔습니다. 그 후 근 2천년 역사를 거쳐서 다시 찾아오는 역사를 이어받아 가지고 한때의 소원을 연이을 수 있는 시대적 환경을 갖추었던 우리 통일교회, 우리 한국, 이 한국과 통일교회가 하나됐으면 모르지만, 하나가 못 되고 나누어진 입장에 있어서 이것을 누가 일치화시키느냐?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 노년도 아니요, 장년도 아니요, 청년도 아니요, 오직 청소년에게만 희망이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이제 여러분이 아침 햇빛을 바라보게 될 때는 아담 해와가 바라본 이상의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햇빛을 바라보아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달빛을 바라보게 될 때에도 아담 해와 이상의 마음으로 달빛을 바라봐야 되겠습니다. 그 달빛이 내가 살고 있고, 내가 서 있는 땅을 비춰주고 있는 것을 볼 때에, 그 빛 아래에서 타락의 만행을 자행하던 아담과 같은 악의 무리가 될 것이 아니라 하늘의 희망과 하늘의 소원과 하늘의 이상적인 사랑이 깃들 수 있는, 언제나 언제나 바라보고 기뻐할 수 있는 행복의 승리적인 실체로서 바라볼 수 있는 여러분이 되지 않고는 안 될 것을 알아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타락한 해와의 발걸음과 같은 걸음을 걸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 이상의 걸음을 걸어야 되겠습니다. 내 이목구비를 갖추어 가지고 천추의 한을 가려 놓아야 되겠습니다. 역사적인 원한의 터전인 사탄세계의 모든 얼굴을 타파해야 되겠습니다. 우리 선조들의 비운의 역사를 우리가 해방의 역사로 가려 놓아야 되겠고, 한국 민족의 처참한 현실을 우리가 행복의 터전으로 가려 놓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게 해야 할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청소년들에게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자나 여자나 우리는 새로운 시대의 남자와 여자로서의 자각을 해야 되겠습니다. 빛나는 내일의 역사를 창건하는, 새로운 왕국의 건설자로 자부하고 나서야 되겠습니다. 북한 땅을 넘나들지라도, 충절과 효성에 사무친 절개와 지조를 가지고 고생을 해야 되겠고, 생사를 결정지을 수 있는 무리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슬픈 역사를 지루하게 참아 나오신 하나님 앞에, 고된 수난의 심정역사를 이끌고 나오신 하나님 앞에 이 죄의 역사를 가로막아 가지고 하나님을 위로해 드리고, 하나님 앞에 효의 효가 여기에 있고, 충의 충이 여기에 있노라고 하며 봉헌할 수 있는 그런 청소년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다구요.
이러한 마음을 가진 한 사람이 두 사람으로 화하고, 두 사람이 열 사람으로 화하고, 열 사람이 쉰 사람으로 화하고, 쉰 사람이 백 사람으로 화하고, 백 사람이 오백 사람으로 화하고, 오백이 천으로 만으로 거치고 넘어가게 될 때는, 그 무리에게는 결속밖에 있을 수 없는 것이요, 통일밖에 있을 수 없는 것이요, 거기에는 가인과 아벨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아벨만이 들어가는 것이지, 아벨만. 타락한 역사를 이어받은 가인이 없다는 것입니다.
타락은 자기를 자각한 데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자기를 자각하는 무리가 없고, 나라를 자각하는 무리들이 있기 때문에 자기를 자각하는 무리가 없고, 세계를 자각하는 무리들이 있기 때문에 여기에는 가인이 없는 것이 아니냐? 아벨만으로 통일된 무리요, 아벨만으로 결속된 무리요, 아벨만으로 빛나게 된 하늘의 아들딸이요, 아벨만으로서 대표할 수 있는, 하나님이 자랑할 수 있는 청소년이 되게 될 때 능력의 주체는 언제나 능력의 주체로 계실 것이고, 불변의 주체는 언제나 불변의 주체로 계실 것이며, 이상적인 주체는 언제나 이상적인 주체로 계셔서 이것을 반드시 성사시킨다는 것을 알고 이제 우리는 좁은 가슴을 넓혀야 되겠습니다. 넓히고 넓혀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을 해방해야 되고, 예수와 성신을 해방해야 되고, 영계에 있는 모든 천천만 성도를 해방해야 되고, 남북 통일을 우리의 손으로 성취해야 되겠습니다. 좌우로 갈라진 이 세계를, 혼란된 이 세계를 방향을 잡아서 통일의 지상천국으로 변혁시켜야 할 사명이 다른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젊은 청소년 여러분의 두 어깨에 지워져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다구요.
그러한 '나'로서 잠자리에 들고, 그러한 '나'로서 아침에 깨어나게 될때, 짊어진 중임(重任)이 자기를 억누르는 것을 알기 때문에 여기에서 패자 졸자가 되어 쓰러질 것이 아니라, 이것을 뚫고 올라가 가지고 빛나는 가치를 나로 말미암아 플러스시켜 가지고 하나님과 후손 앞에 넘겨주고 말겠다는 결의, 결의, 결의에 사무친 여러분이 되어야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시대에 있어서 이 통일교회 청소년들의 사명인 것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다구요. 이러한 여러분이 됨으로 말미암아 하늘나라는 새로운 의미에서 승리의 개문이 벌어질 것이고, 지루하였던 타락의 역사는 새로운 천지개벽의 역사로서 빛나는 아침 햇빛을 맞고, 광명한 지상천국의 자유의 그 뜻을 향하여 출발할 수 있는 세계로 전개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틀림없는 약속인 줄 알기 때문에 그럴 수 있는 방안의 하나로서 이번 총회에 여러분이 모인 것이니, 그러한 표적이 되어 가지고 총진군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우리는 맹세해야 되겠습니다. (잠시 녹음이 되어 있지 않음)
영광의 가치를 차지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될 수 있다면, 이것은 그 어떠한 민족보다도, 그 어떠한 누구보다도 마음이 우위에 있다는 것을 알고, 이 귀한 때를 놓치지 않게끔 온갖 충성을 다해 주길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오늘 저녁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랑의 아버님, 철부지한 어린이들이 여기에 모였습니다. 너무나 순진하여 악이 무엇인지, 선이 무엇인지 모르는 어린이들이 여기에 모였습니다. 아버님이여, 그러나 철부지한 것들이라고 그냥 그대로 둘 수 없는 입장이 당신이 찾아 나오던 복귀의 한스러운 노정인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
이제 우리가 땅을 딛고 서게 될 때는 튼튼히 디디고 서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시선은 나라를 넘어 세계를 인식해야 되겠습니다. 내가 아침에 솟아오르는 태양을 바라보게 될 때, 옛날과 다른 신념과 더불어 맹세와 더불어 내가 바라는 소망의 존재가 되겠다고 다짐해야 되겠습니다. 달을 바라보아도 그래야 되겠습니다. 이 지구덩이를 딛고 서게 될 때에, 사악된 인류를 접해 나와 가지고 그냥 그대로 비참의 역사에 물들어 나오던 것을 아시는 아버지는 이 지구를 향해서 그러한 사람이 아니라는 자부심을 갖고, 자신을 가지고 보여 줄 줄 아는 사나이로서 당당히 땅을 디디고 살 수 있는 무리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어린 가슴에 불을 퍼부어 주시옵소서. 당신이 그리워 사무친 심정과 그 누구도 억제할 수 없는 간절함이 불타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소망이 찾아드는 청소년시대의, 사춘기시대의 정열 가운데에 하나님이여, 기쁨의 심정을 퍼부어 주시옵소서.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부터 3일간 당신이 여기를 맡으시옵소서. 이제 하늘이 바라는 청소년시대가 어떻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자랑할 수 있는 청소년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내가 이런 중차대한 세계적인 시점권내에 선것을 미처 몰랐습니다. 이제 알았습니다, 아버지! 안 자로서 부끄러운 행동을 하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당당한 아들딸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의 어렸을 때의 모습, 그 모습을 대신할 수 있는 내가 되기 위해서 결의하는 이 시간이 되었사오니, 고이 받아 주시옵소서.
모든 전체를 당신이 주관하여 주시옵고, 금후의 대한민국을, 아버지, 이들과 더불어 이끌어 주시옵시고, 이 아시아를 이들과 더불어 지키시옵고, 세계를 지키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합니다. 당신의 사랑이 일체의 움직이는 이 기간 내에 같이하여 주시옵기를 바라면서, 모든 말씀을 참부모님의 성호 받들어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오늘은 1972년 7월 30일, 7월 들어 마지막으로 맞이하는 안식일 아침이옵니다. 이 한 달도 보호하심 가운데서 보내게 된 것을 감사드립니다.
아버지, 이 아침 여기에 모인 자녀들과 전국에 널리어 이곳을 바라보며 마음을 다하여 정성을 들이는 자녀들 위에 당신의 무한하신 사랑과 자비가 같이하시옵소서. 그들도 당신이 소원하시는 영광의 세계에, 당신의 마음 가운데 기억되는 무리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한국을 중심삼고 연결되어 있는 수많은 나라 위에 이 시간 일률적인 은사를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바라옵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하늘을 위하고 하늘을 모시는 그 자리에 있어서 부족한 것을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겸손해야 될 것을 마음으로부터는 헤아리지만 환경적 습관에 젖어 있기 때문에, 하늘을 위하여 하늘이 바라는 알뜰한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역사시대를 거쳐오면서 우리 선조들이 아버님을 염려시킨 것이 얼마나 많았사옵니까? 그런 것을 알면서도 저희들이 그와 같은 길을 번번이 반복해 가고 있는 것을 아버지께서 아시고 저희들도 알고 있습니다.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이 자리에 부복한 이 무리들을 아버지께서 긍휼히 보시옵소서. 저희는 하늘을 위해 나선 무리이옵니다. 통일교회가 이 땅 위에 나타나서 이 자리에 올 때까지는 많은 수난길을 거쳐왔습니다. 그 누구도 염려하지 못하는 하늘의 염려를 받는 자리에서 지금까지 나온 것을 생각하게 될 때, 더더욱 하늘이 앞날에도 수고의 인연을 벗을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할수록, 저희들은 마음과 몸으로 정성을 다 바쳐서 하늘의 보람 있는 희망의 대상이 되고, 땅 위의 진실된 자녀들로서 아버님이 자랑할 수 있고, 아버님의 사랑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자녀들이 되어야 되겠사옵니다. 이 시간, 온전한 하나의 모습으로 아버지께서 받아 주시옵길 바라옵니다.
아버지, 금후의 한국의 운명을 당신께서 맡으시옵소서. 금후의 세계가 가야 할 당신의 뜻의 노정을 가리시사 당신의 소원대로 성취하시옵기를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이 아침도 무한하신 사랑으로 자비를 허락해 주옵소서. 따뜻한 아버지의 보호하심과 긍휼의 은사로 저희 주위와 저희 생활권내를 보살펴 주시고 지도하여 주시옵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만만세에 은사와 사랑이 길이길이 같이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님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이 피조세계는 하나님의 한 대상으로 되어 있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만물을 짓게 된 것은 하나님의 소원성취를 위해서였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행복이나 만족, 혹은 즐거움이라는 것은 혼자서는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전능하신 분이시라 하더라도 그분 혼자서는 행복이나 만족을 느낄 수 없는 것이요, 기쁨을 느낄 수 없는 것입니다. 기쁨이나 행복이라는 것은 상대적인 관계에서만 성립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고 받는 자리에서만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게 될 때, 하나님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절대자로서 혼자 있어 가지고 기뻐한다면 그것은 정상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 생활을 통해 미루어 보더라도 그렇듯이 하나님도 기쁨의 자극을 느끼기 위해서는 반드시 상대적 기준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그에게 주었으면 그도 나에게 돌려주는, 즉 주고받는 데서 모든 인연과 관계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인연이 있어 가지고 관계가 맺어지고, 그 관계를 통해서 색다른 진전이 이루어지고, 거기에서 비로소 사람은 만족을 느끼고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게 될 때, 하나님이 지으신 이 피조세계는 하나님의 사랑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그 최고의 이상이 무엇이냐? 물론 보고 좋아하는 것도 있겠고 같이 살고 싶은 무엇도 있겠지만, 그 최고의 목적은 무엇이냐? 사랑을 중심삼자는 것입니다. 보되 사랑을 통해서 보는 것이요, 살되 사랑을 중심삼고 사는 것입니다. 사랑의 자극과 사랑의 만족을 친히 대상을 통해서 인연짓기 위해서 만물을 지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만물지중에 가장 귀한 것이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 가운데 최고의 걸작품이 인간입니다. 그런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지어졌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사랑의 주체 되시는 하나님이 계신다면, 그 주체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상대가 있어야 됩니다. 그 상대는 인간 외에 또 다른 존재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상대, 그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자격자가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물을 담으려면, 얼마만한 양의 물을 담으려면 그만한 양의 물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있어야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무한한 사랑을 갖고 계신다면, 그 무한하신 사랑을 담을 수 있는…. 또 무한히 줄 수 있는 사랑을 갖고 계시다면 그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상대가 있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적인 사랑을 가지신 하나님 앞에 상대적인 입장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은 그 절대적인 사랑을 받고도 남음이 있는 입장에서 지어졌다고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한하고 지고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인간에게 임하게 될때 모순되고 상충되는 자리에서 주고받는 입장에 서게끔 하나님은 인간을 짓지 않았다고 보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영원히 그 깊은 사랑까지라도 무한히 받고, 또 무한히 돌려줄 수 있는 상대적인 존재라야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 인간도 그러한 사랑의 주체 되시는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의 상대적인 입장에 서게 될 때 비로소 무한한 사랑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행복한 자리라는 것은 혼자서 기뻐해 가지고는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둘이 다 기뻐해야 됩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거기에 관여되어 있고 관계되어 있는 환경까지 기쁨의 환경에 사로잡히게 될 때, 그 전체는 행복한 환경으로 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행복한 환경이 연결되어 인간을 중심삼고 하나님이 지은 온 피조세계가 일원화되는 자리에서 이상세계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높은 자리나 낮은 자리나 결국 같은 사랑의 인연 가운데 있게 되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태양을 보게 될 때, 태양 빛을 받고 있는 상대세계는 밝은 것과 마찬가지로, 밝은 세계의 입장이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은 세계임에 틀림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세계가 하나님이 이상하셨던 지상천국이요, 이 천국을 연결시킨 것이 천상천국이라는 것을 우리는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관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그 오관은 우리만이 관계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감각기관을 통해서 보다 차원 높은 하나님의 사랑이 깃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오관을 통해서 그 하나님의 사랑과 횡적인 면에서, 혹은 종적인 면에서 반드시 관계를 맺게끔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그 오관을 중심삼고 살고 있는 우리의 일체는 그 오관을 통해서 자기만 관계맺게끔 지어진 것이 아니라, 주체되시는 하나님과 더불어 관계맺게 지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일체가 느끼는 모든 직감, 혹은 직관까지도 나만을 중심삼은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그 이념을 이어받고 관계를 맺어 가지고 서로서로가 행복할 수 있는 내적 인연을 지니고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주체와 대상 관계에 있어서 언제나 문제되는 것은 주는 것이 있으면 돌려주는 것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일방적인 것이 되어 가지고는 관계가 계속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주고받아야만 되는 것입니다. 주고받는 데 있어서 그것이 넓고, 혹은 굵으면 굵을수록 그것은 행복의 척도를 잴 수 있는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니냐. 그러면 잘 주고 잘 받는 시간이 오래되면 오래될수록 점점점점 차원을 높여 갈 수 있는 내용을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도 사귐에 있어서, 서로서로 알 때부터 그 기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거기는 생활적인 면도 통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정서적인 문제까지도 연결되는 것입니다. 내가 살고 있는 입장, 전폭적인 분야가 그 관계되어 있는 상대와 더불어 일체적인 자리를 갖추기를 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크고 넓고 높을수록 그는 내 앞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친구면 친구일 것이고, 혹은 가정이면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기간이 오래면 오래일수록 나쁜 것이 아니라 좋은 결과로 남아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일시에 중단되는 것보다도 무한히 확대해 가지고 무한한 행복의 경지까지 연결시키기를 바라는 것이 인간 생활에 있어서의 관계인 것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인연을 연결시켜 가지고…. 그렇기 때문에 자기 자신에게 좋은 것이 있으면 그것이 일시적으로 좋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좋은 것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또한 가정이 잘되면 일시적으로 잘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히 잘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 부모가 잘되었으면 자녀도 역시 잘되기를 바라는 것이요, 그 후손도 그러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그것이 연결되어 가지고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그 나라를 중심삼고 볼 때 자기가 살고 있는 나라는 행복한 나라가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 행복이 일시적인 행복이 아니라 영원히 지속되는 행복이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연결되어 가지고 세계로, 이것이 유형세계 뿐만이 아니라 무형세계, 영원한 세계에까지 연결된다는 것을 우리는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기쁨은 나만의 기쁨이 아니라 상대와 더불어 기뻐할 수 있는 기쁨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존재세계에 있어서 상대적 인연을 갖지 않은 것은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천운이 있다면 그 천운은 상대적 인연을 옹호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존재세계의 철칙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공식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공식에 부합되지 않으면 그 비중에 해당하는 우주적인 반대의 힘이 작용하는 것입니다. 열만한 상대를 갖추었다면 거기에 열만한 천운이 옹호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그것을 중심삼아 가지고 모든 인연을 통해 운행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존재하는 상대세계의 원칙으로 되어 있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 원칙에 반대가 되든가 결함이 생기게 될 때는, 천운은 그 분량만큼 반대적인 입장에서 몰아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말하면, 남자 여자가 사랑을 중심삼고 하나가 될 때 그것을 진정한 의미의 부부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상적인 부부라고 보는 것입니다. 또한 부자관계에 있어서,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기에 마음을 다하고 그 사랑을 받는 자식이 기쁨의 대상이 될 때에 그 부자관계는 이상적인 관계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렇듯 사랑을 중심삼고 남자 여자를 두고 보면 그 남자 여자가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될 때, 비로소 그 남자와 여자는 하나님 앞에 있어서 기쁨의 대상이 될 수 있는 부부가 되는 것입니다. 완전히 사랑을 중심삼고 주고받게 되면 이상적인 부부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는 우주의 힘이 그들을 보호하고 옹호하지만 여기에 그 사랑이 결여되게 될 때는 반드시 결여된 분량만큼 반대로 몰아 내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끼리 살다가 그 중 한 사람이 죽게 되면 왜 슬프냐는 것입니다. 왜 가슴이 아프고, 자기가 지탱하지 못할 만큼의 고통이 느껴지느냐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가 고통을 느끼려고 해서 느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연적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자신이 거기에 무슨 슬픈 동기나 요인을 가지고 마음속으로 그리워하거나 동경하거나, 혹은 스스로 어떠한 자극적인 무엇을 추구하지 않더라도 자연적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게 왜 그렇게 느껴지느냐? 이 우주의 원칙이 완전한 사랑을 중심삼고 하나되는 것을 옹호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이탈되게 되면 반작용으로 몰아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주의 공법의 불합격자가 되는 것입니다. 불합격자는 우주공법 이념권내에 있어서 다 같은 자리에서 존속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자연히 그 원칙을 옹호하기 위해서 반대적인 작용으로 몰아내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완전한 이상적 기준을 성립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슬픔이라는 것은 나에게 우주의 힘이 작용을 할 때 느껴지는 것입니다.
부자지간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식과 부모가 완전히 사랑을 주고받고, 부부면 부부도 사랑을 중심삼고 완전히 서로 주고받는 자리에서 이상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봅니다. 이렇게 볼 때 남자 자체를 두고 볼 때 남자가 존재하는 것은 남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여자를 위해 서입니다. 마찬가지로 여자도 남자를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남자가 남자만 위해 있다고 하면 곤란합니다. 자기를 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됩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데 있어서는 '부모는 이래야 된다'고 하는, 어떠한 고착된 형태를 가지고 자기를 주장하는 자리에서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주장하지 않는, 자기를 부정하는, 즉 자기가 없는 자리에서 자식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부모는 부모의 권한을 가지고 언제나 당당한 자리에서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권한을 망각한 자리에서, 그 이상의 자리에서까지 자식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랑을 가지고 자식 앞에 임하는 것이 부모가 아니냐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사랑이 있다는 것은 부모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식을 위해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라는 것은 부모의 사랑이라고 해서 부모만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상대를 위해 있는 것입니다. 자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식이 부모를 사랑한다 할 때 그 사랑은 자식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부모를 위해 있는 것입니다. 결국 사랑이라는 말은 자기를 중심삼고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자기 이상 존중하는 데에서 성립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을 위해 태어났다는 그 자체는 상대를 위해 태어났다는 것과 통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사랑의 이상의 자리를 추구하는 자리에서 보게 될 때, 내가 태어난 것은 무엇 때문이냐 할 때, 사랑을 위해 태어났다면 그는 사랑을 위해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태어난 것이 목적이 아니고 사랑하기 위해서 태어난 것입니다. 그건 무슨 말이냐 하면 주체적 존재로서의 목적을 완성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상대적 이념을 완성하기 위해서 존재해야 된다는 결론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 인간들이 그러한 하나님의 창조이상을 중심삼고 하나님의 사랑을 완전히 받은 적이 있느냐? 이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인 동시에 절대자이십니다. 그러면, 절대자가 지니고 있는 권한과 더불어 절대자가 지니고 있는 속성을 찾으려 할 적에 그가 가진 모든 전폭적인 권한, 전폭적인 가치, 대상을 추구하는 전폭적인 사랑, 이런 것을 인간에게 완전히 주어본 적이 있느냐?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만일 그랬다면 완전히 사랑을 주고받는 그 자리에서는 완전히 하나가 되는 거예요. 둘이 아니고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 하게 되면 남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남녀가 하나되어 가지고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되는 데는 그 모양을 중심삼고 하나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양을 중심삼고 하나되어, 즉 남자의 모양과 여자의 모양이 뒤범벅이 되어,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된다는 것은 이상을 중심삼고 하나되는 것을 말합니다. 부부일신이라고 하는 것은 이상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이상이란 뭐냐? 행복이라는 것이다! 행복은 뭐냐? 기쁨의 길이다! 이렇게 볼 때, 그 이상 실현은 사랑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된다는 것은 사랑을 중심삼고 일치되는 것을 말하지, 그 상대권을 중심삼고 일치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흔히 원리를 이야기하면서 하나님의 이상의 일체라는 말을 합니다. 이상의 일체라는 말이 무슨 말이냐? 그것은 얼굴이 다른 남자 여자를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잘나고 못난, 그런 미모를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상 일체라는 것은 그 이상의 것이 없는 사랑을 중심삼고 하나된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볼 때, 절대자인 하나님이 완전히 기쁠 수 있는 자리에서 상대적인 인간을 대해, 하나님에게 있어서 우리 인간이 둘도 없는 상대자라면 그 상대를 사랑해 본 적이 있었느냐?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이런 원칙을 두고 볼 때 사랑받은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타락이라는 것은 탈락을 말합니다. 이것은 미완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미급을 말하는 것이 아니더냐. 정상적인 기준에서 어떤 이상적인 완성을 이룬 그 자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이 결여된 자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냐.
이런 입장에서 볼 때, 완전하신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 하나님이 완전하지 못한 것을 바라보게 될 때, '아이구! 사랑하고 싶다' 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겠느냐? 작가가 작품을 만드는 데 있어서 작가가 구상한 것은 100퍼센트 완전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바라는 그것이 90 퍼센트밖에 안되었다 할 때, 거기에는 10 퍼센트의 미련이 남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더해야만 완성한 기준에서 '아이고 기쁘다' 할 수 있는, 그야말로 내 행복이 극할 수 있는, 만족할 수 있는 자리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90 퍼센트 완성을 했다면 90 퍼센트에 해당하는 사랑을 할 수 있지만 100 퍼센트의 사랑은 못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게 될 때 99 퍼센트까지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다음엔 100 퍼센트 사랑하기를 바랄 것이 아니냐?
최고의 자리, 인간 완성을 중심삼은 그 자리에서, 완전한 주체가 그 이상은 아무것도 없다 하는 자리에서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이 있느냐? 주체로서 그러한 사람을 맞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볼 때, 타락을 공인하는 그런 세계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본래 그렇게 사랑하고 싶은 소원을 가지셨지만, 그런 소원을 이룰 수 없는 환경을 바라보는 하나님은 기쁨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100이 되기를 바라는데 90이 되었다 할 때는 기쁘지 않은 것입니다. 여러분이 학교 다닐 때 이런 생각 했을 겁니다. '나는 시험을 치게 되면 틀림없이 100점 맞는다. 맹세코 100점 맞는다. 맹세코 100점 맞는다. 이것이 나의 이상이다' 하고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열심히 공부했는데 100점을 못 맞았다, 99점, 혹은 99.999점을 맞았다, 그렇게 되면 그걸 자랑할 수 있어요? 100점과 같은 레벨이지만 손을 들고 자랑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절대자면 절대자일수록 그것은 절대적이 돼야 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이 이 상대이상을 가지고 우리 인간을 대해서 그야말로 좋아서, 만면에 희색을 띠고, 자기 자신을 망각할 수 있는 최대의 사랑을 중심삼고 '이 자리야말로, 이 길이야말로 나의 행복이다. 천지 만물을 창조한 그것이 이 사람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빛나는 것이다. 기분 좋다' 할 수 있는 이상적인 인간이 있었느냐? 하나님으로서 인간을 사랑해 보실 수 있었느냐? 그럴 수 없었습니다. 왜 그러냐?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틀림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타락하지 않고 완성한 자리에서 하나님의 그러한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본연의 인간의 모습이라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왔겠느냐? 우리의 눈을 바라보게 될 때, 세계적으로 유명한 시인이 그 심정으로 최고의 절정을 다해서 표시한 그 도수, 극의 자리를 넘어설 수 있는 미의 상징체로서 사랑할 수 있는 모습이 아니었겠느냐? 그럴 게 아니예요?
그러면 자기의 내심의 기억이 살체로 나타난 그 모습, 자기의 내정의 모든 그리움이 자극적인 미모로 나타날 수 있는 그 모습을 갖게 될 때, 하나님은 그 모습을 보고 얼마나 찬양할 수 있었겠느냐는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한 가지 가지고도 자기 사랑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요, 자기 기쁨의 대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사랑하는 사람끼리 주고받는 물건이라는 것은 죽을 때까지 일생에 잊을 수 없는 기념물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손수건 하나라도 천만금을 준다고 해도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눈이면 눈을 볼 때, 이는 내 전체의 창조이념을 걸고 맹세하면서 사랑의 마음을 표시하고, 기쁨의 표시를 해도 끝이 없을 것이 아니냐? 그럴 것이 아니예요? 코를 보나 귀를 보나 얼굴을 보나, 뒤를 보나 앞을 보나, 전신의 어떠한 부분을 보더라도, 손끝 하나까지도 그것은 나쁘지 않을 것이 아니냐?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찬양할 수 있는 존재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사랑권내에 품겨 가지고, 그 사랑에 동화되어 가지고 '사랑이 어떻더냐? 할 때, '이렇게 행복한 것이다'라고 증거할 수 있는 실체대상으로서 사지백체는 나타날 것이 아니냐?
그런 자리에 선 인간에게 불행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손을 바라보고 기뻐하시면 그 기쁨을 내가 느낄 수 있으니 이 손은 아름다운 손일 것이 틀림없습니다. 또한, 내 일신을 거울에 비추어 보게 될 때, 거울에 비치는 자기의 몸은 하나님이 완전히 취해 가지고, 하나님 앞에 백퍼센트의 합격품으로 등장해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을 자극하는 요소로서 지금도 자극하는 것이요, 영원히 자극시킬 수 있는 소망적인 지체라고 생각하게 될 때 그것을 바라보는 나는 어떻겠느냐? 그런 자기 자신을 보고 얼마나 만족하겠느냐? 그럴 수 있다구요. 여러분. 안 그래요? 남편이 아내를 사랑할 때, 아내는 그 얼굴을 보고 '사랑하는 남편이 사랑하는 얼굴이지' 하는 것을 느끼면, 그 얼굴에 대한 존귀성과 그 미모에 대한 가치성은 배가되는 것과 마찬가지 입장인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의 이상인 사랑의 실체가 이 우주 창조 이후에 나타났다면 그 얼마나 이상적이겠느냐? 오늘날 인간이 쓴 시편이나 아가서에서 사랑을 찬양하고 있지만, 하나님이 기쁨의 심정을 다해 가지고 하나님이 시편과 같은 노래를 부르고 아가서와 같은 사랑의 기록을 남겼으면 그 얼마나 멋졌겠어요? 그것이 인간에 있어서 사랑의 표준이 되고, 사랑이 움직이는 정서생활의 전통이 되고 역사가 되었으면, 오늘날의 인간이 불행할 수 있었겠어요?
이런 입장에서 보게 될 때에, '하늘이 주관하는 세계' 그 세계는 어떠한 권력을 가졌다고 해서, 전능한 능력을 가졌다고 해서 권력을 행사하는 세계가 아닙니다. 권력은 사랑을 보다 강하게, 보다 빛나게, 보다 폭넓게. 보다 높게 뒷받침해 주구 밀어 주는 힘으로 작용은 할 수 있을망정…. 뭐라 할까 위하라는 건 있을 수 있겠지만…. 이 권력은 사랑이 가는 길 앞에 있어서 그 모든 것이 즐거움이 되도록 도와주고 즐거움의 뒷받침이 될 수 있는 힘이 될 뿐입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이 가지신 절대적인 모든 권한이 깃들어 있고, 혹은 영원성이라든가 무한성이라는 게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길을 제한시키고 브레이크 걸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보다 입체적인 자극으로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가지고 일체화시키기 위한 자극적인 요소가 될 뿐이지 방해 작용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자리에서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 얼마나 행복할것이냐?
그러한 관점에서 역사적으로 우리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 혹은 우리 인간조상 가운데 남자 여자를 두고 볼 때, 남자 대표로 그러한 사랑을 받은 사람이 있다면 그 남자는 자랑할 만합니다. 또, 남자는 그런 사랑을 못 받았지만 여자로서 그러한 사랑을 받은 대표자가 있다면 그 여자는 자랑할 만합니다. 이렇게 볼 때, 그 사랑은 일시적인 사랑이 아니라 영원한 사랑일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타락한 이 세상에서도 사랑하는 사람끼리 서로 사랑하면서 맹세했던 그 약속을 중심삼고 일생을 고독한 자리에 살더라도 그것을 극복하고 내심 그 사랑을 추구하면서 그 사랑의 내정적인 심정의 인연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게 될 때, 타락하지 않은 본연의 세계, 완성한 이상적인 세계에 있어서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느껴지는 자극은 일시적이 아니라 영원한 것입니다. 그 사랑의 자극은 영원한 것이기 때문에 그 사랑의 시작은 전통이 되었을 것이고, 그 전통은 역사를 한 방향으로 끌고 나갈 수 있는 힘의 주체가 되었을 것이 아니냐.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 있느냐?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 오늘날 우리 신앙자들이 바라는 최고의 소망은 무엇이 되어야 하느냐? 고차적인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어떠한 권력이 아니예요. 지식도 아니예요. 물론 진리도 추구해야 되지만, 진리라는 것은 근본 문제가 아니라는 거예요. 사랑이 있은 후에야 진리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행복한 다음에 지식이 필요하지 불행한데 지식이 있으면 뭘해요? 불행한데 권력이 있으면 뭘해요? 불행한데 돈이 있으면 뭘해요? 사랑하는 사람이 당장 죽게 되었는데 돈이 있으면 뭘해요?
이렇게 볼 때, 전부 다 무엇이 필요하다 무엇이 필요하다 해도 근본문제에 들어가 완전히 자기가 이상하는 사랑을 남겨 놓은 후에, 사랑을 제일 조건으로 세워 놓은 후에 부가적인 조건이 필요한 것입니다. 권력 이니 지식이니 돈이니 하는 것은 다 부가적인 조건입니다.
또, 사는 것도 그래요. 사람이 살아서 뭘해요? 동물과 같이 살아서 뭘해요?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이 가는 길은 죽어서도 따라가고 싶은 것이 아니냐, 그러므로 살고 싶다, 먹고 싶다, 갖고 싶다, 뭐 하고 싶다 하는 것이 천만가지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사랑을 갖고 난 후에 필요한 것이지, 사랑을 잃어버리게 되면 그건 다 필요 없는 것이 아니냐? 안 그래요? 사랑을 잃어버리고 난 후에는 낙심하지 않습니까? 안 그래요?
이렇게 생각하게 될 때,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냐? 하나님은 사랑의 주체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의 주체라면, 그분은 우리 인간보다 높아야 할 것이 아니냐? 우리 인간이 그러니까 우리 인간보다 더할 것이 아니냐. 더한 것도 절대적입니다. 절대적으로 더합니다.
이렇게 볼 때, 그분이 그리워하는 사람, 그분이 보고 싶어하는 사람, 그분이 미치도록 사랑하는 사람은 어떠한 사람일까? 여러분이 생각해 보라구요. 그분이 사랑하는 주체가 되고, 그분의 사랑을 받는 내가 될 때 나를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지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절대적인 사랑만이 나의 동기가 되고 나의 과정이 되고 결과가 될 뿐이지, 그 외의 일체는 누구든지, 어디든지 따라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인간을 중심삼은 모델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모델의 남자가 있어야 되고 여자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원칙을 두고 볼 때, 타락이라는 말은 지극히 비참한 것입니다. 뭐가 어떻게 됐든지간에 다 그만두고 타락이라는 그 말 자체가, 미급하고 미완성했다는 그 말 자체가, 목적성사를 하지 못했다는 그 말 자체가 비참한 것입니다. 누구에게 비참한 것이냐? 우리 인간 앞에 비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비참한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 일반 신앙자들은 하나님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요.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요, 절대적인 하나님이라고 찬양은 할 줄 알고 그로 말미암아 행복을 구하기를 바라고는 있는데, 과연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에게 행복을 줄 수 있는 하나님이 되었느냐?
여러분은 불행하게 되면 짜증이 나지요? 짜증이 나요, 안 나요? 짜증 나지 말라고 하더라도 나는 것입니다. 손도 짜증을 내고, 눈도 짜증을 내고, 사지백체가 짜증을 낸다구요. 몸도 그렇지만 마음도 그렇습니다.
이렇게 볼 때, 최고의 이상적인 상대권을 상실해 버린 하나님 앞에 온갖 죄의 누더기를 쓰고 찾아가 가지고 '아버지 하나님이여! 내 죄를 맡아 주시옵소서. 하나님, 나는 이러이러한 죄를 지었습니다. 내 죄를 맡아 주시옵소서' 할 때, '오냐' 할 수밖에 없는 하나님이라면 그 하나님은 얼마나 불쌍하겠어요? 얼마나 비참한 하나님이겠습니까? 그거 행복하겠어요?
지금 죽을 지경에 놓여 있는 사람에게, '여보, 나도 이렇게 죽을 지경에 있는데, 이왕지사 당신도 죽게 되었으니 내 죽을 것도 맡아 주소' 하면 '그럽시다' 할 사람 있어요? 그저 고통스러운 자리에서 죽어가고 있는데 친구들이 '여보게 임자는 나하고 둘도 없는 친구가 아닌가. 그러니 이왕이면 고생은 되겠지만 내 고통까지 맡아 주소' 할 때, '오냐, 당신 말대로 하소' 그래요? 친구고 뭐고 다 벼락이 난다고요. '예이, 원수놈아! 네가 내 친구야? 한다는 거라구요. 이 녀석도 아니고 '이놈아' 한다는 거예요. 거꾸로 쥐어박고 다리를 꺾고 싶을 것입니다. 그렇지요?
그런데도 오늘날 인간들은 번번이 잘못하고 나서는 '하나님, 나 이렇게 됐습니다'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그런 사람하고 죽자살자고 할 수 있는 인연이 되어 있나요? 이런 것을 생각하게 될 때 기도하기가 두려운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한다면 기도하겠다고 머리를 숙이고 하나님을 부르다가도 자라가 모가지를 내밀다가 위험을 느껴가지고 다시 집어 넣는 것과 같은 처지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될 게 아녜요? 이런 모든 근본 문제를 파헤쳐 생각하게 될 때, 우리가 얼마나 오류를 범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타락의 역사시대를 지내오는 동안 어느 한때 하나님의 해방을 부르짖고, 그러한 사랑의 이상을 중심삼고 절대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배양시킬 수 있는 운동을 한 사람이 있었습니까? 예수님 같은 양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바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라고 기도했습니다. 그거 비참한 것이 아닙니까? 어찌하여 내 뜻이 생겨 났느냐는 것입니다. 내 뜻이 따로 있었다 이겁니다. 하나님과 완전히 화합해 가지고 하나되어 있었다면 그 뜻은…. 바른발이 가면 왼발도 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내 뜻이 없다, 둘이 같은 뜻이다, 그렇게 되어야 할 텐데 왜 내 뜻이 있게 되었느냐? 이것이 비참한 것이 아니냐? 비참한 것입니다. 안 그래요?
부처끼리 살면서 부인의 뜻, 남편의 뜻 해 가지고 아내가 남편에게 '당신의 뜻도 있지만 내 뜻도 있소. 당신의 뜻은 크고 내 뜻은 작지만 요만큼이라도 내 뜻이 있소' 하게 되면 남편이 진정 기쁘겠느냐? 그렇지 않다는 거라구요. 남편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아내라면 남편을 대해 '당신의 뜻이 내 뜻입니다'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남편이 '옳소' 해야 아주 개운하게 기쁜 것입니다. 그런데 '당신의 뜻은 아흔 아홉이지만 내 뜻은 하나입니다. 당신의 아흔 아홉 개의 뜻은 잃더라도 내 뜻 하나는 줄 수 없소' 한다면, 그 하나의 뜻은 아흔 아홉의 뜻보다 더 크고 백보다 더 무서운 뜻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심각한 문제가 우리 신앙노정에 있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내 뜻이 왜 생겨났느냐? 예수님은 타락한 세계를 구원해야 할 책임이 있는 분으로서 인간의 사정과 하나님의 사정이 다른 것을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에서 여실히 증거한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메시아로서 인간을 구원해 주어야 할 대표자이니만큼 하나님의 뜻을 위주하여 하나되어야 될 입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악한 세상을 쓸어 버린다면 언제나 하나될 수 있지만 이것을 붙들고는 하나될 수 없는 비통한 자리에서 있는 입장임을 직고하는 말씀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따르자니 인간을 버려야 되겠고, 인간을 존중시하려니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게 되는 자리에서 예수님은 그러한 비참한 기도를 올린 것이 아니냐? 그 자체가 어찌할 수 없는 인간의 고통의 와중에서 신음하고 있는 사실을 직고한 것이 아니냐? 그게 그렇다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여러분도 마찬가지라고요. 뜻의 길을 가려면 그렇지요? 뜻의 길을 가려면 세상이 붙들고 잡아당깁니다. 그와 마찬가지예요. 뜻의 길을 가려니 남과 달라야 된다는 거예요. 모든 일체가 다르다구요. 일체가 다른 걸음을 한걸음 한걸음 전진하는 거라구요. 그런데 전진했다가 급히 돌아와 가지고 수습해야 합니다. 돌아오는 시간이 짧아야지 길게 될 때는 나간 것보다 더 후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달려갔다가 벼락같이 와서 수습해 가지고 본연의 자리에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있다가는 이 신앙길을 못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비참해요? 행복한게 아닙니다.
통일교회 신도들도 비참하다는 거라구요. 뜻을 알고 났으면 그 자리에서 플러스될 수 있는 행복의 여건이 사방으로 연결되었으면 좋겠는데 그렇지는 않고, 거기에 있다가는 양심의 가책을 받게 되니 이게 죽을 지경 이라구요. 뜻을 몰랐다면 그런 것은 생각지도 않을 텐데 말이예요. 주위를 가만히 바라보니 식구들은 다 뛰고 있다구요. 같이 출발했는데 나 혼자 처져 가지고 있으니 마음까지 편하지 않다구요. 그래서 지금 여러분은 '아이구! 내가 통일교회 원리를 듣지 않고, 선생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오죽이나 좋았겠나' 하는 고통 가운데 있다구요. 여러분의 입장은 예수님의 입장과 마찬가지입니다. '오호라 나는 괴로운 사람이로다'라고 직고하던 바울의 신세와 마찬가지라구요.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려면 인간세계를 포기해야 되겠고, 인간세계를 붙들려면 하늘세계를 포기해야 되겠으니, 이 두 세계를 조정하는 배우 노릇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두 얼굴의 배우가 되어야 된다 이겁니다. 그것이 인간세계를 중심삼으면 이는 꺼꿀잡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갔다가는 복달불나게 다시 돌아와 수습해 놓고 가야만 정상적인 신앙길을 조금이라도 발전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입장에서 볼 때,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주관하는 하나의 사람, 최초의 사람, '내 이상이 이루어졌다'고 기뻐 가지고 자랑으로 만우주 앞에 선포하면서 '이 기쁨에 동화될지어다. 이 기쁨에 찬양할지어다. 이 기쁨과 더불어 영원할지어다' 할 수 있는 사람이 나와 가지고 그 사람 앞에 만물이 주관받게 된다면, 이 세계의 모든 만물도 하나님의 사랑의 전통을 받아 그와 더불어 기쁨을 자극시켜 줄 수 있는 상대적인 물건들이 되는 것이 아니냐? 만물을 바라보는 거기에는 불행의 요건이 있을 수 없을 것이 아니냐? 다시 말하면,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자기의 손을 사랑받기 전보다 몇천만 배의 가치 있는 것으로 인정하면서 그것을 보고 즐길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사랑을 중심삼고 차원 높은 자리에서 찬양할 수 있고, 감상할 수 있는 만물이 되었을 것이 아니냐. 이렇게 볼 때, 로마서 8장 22절 이하에 '만물이 탄식한다'는 바울의 말은 참 당연한 말입니다. 참된 말입니다. 만물의 탄식 뿐만이 아닙니다. 인간도 이런 이상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비통한 탄식을 지닌 인간이 아니냐? 틀림없습니다. 인간뿐만이 아니라 하나님까지도, 성신까지도 이 탄식의 권내를 벗어나기를 바라고 지금까지 탄식한다는 것을 볼 때 그 말은 온당한 말입니다.
수많은 종을 거느린 부잣집 주인이 슬픈 아침을 맞고 슬퍼하게 되면 그 종들도 슬픔에 사로잡히는 것이 아니냐. 그렇지요? 일체가 그 권내에 포괄되어 버리고 마는 것을 우리가 상습적인 생활 주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이상적인 기준에서 만물을 지었던 하나님이 그의 이상 실현을 불가능하게 하는, 이 타락이란 원한의 터전을 대하게 될때, 느꼈던 충격과 상심이 어떠했겠느냐? 효자의 한마디 반항의 말은 불효자의 천 마디 반항의 말보다 더 아픈 것이 아니냐? 그렇죠?
그렇게 생각할 때, 하나님은 불쌍한 분이 아니냐? 그렇기 때문에 이 불쌍하신 분을 내가 어떻게 위로해 드려야 하느냐 하는 문제가 신앙자로서 우리가 최고의 지조로 삼아야 할 문제입니다. 내가 그분에게 사랑을 받기 전에, 사랑을 요구하기 전에 내가 그분을 어떻게 위로할 것이냐? 그분의 사랑의 길을 찾아 나가는 데 있어서 어떻게 찾을 것이냐? 이러한 문제를 두고 볼 때, '나는 이러한 사랑을 중심삼고 어떻게 살아야 된다.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 된다' 하는 것을 우리는 고찰할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 인간에게 한이 있다면, 남자로 태어나서 독신생활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여자로 태어나서 독신생활하는 것이 한이 아닙니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인간이 하나님을 빼놓고 자기들 끼리끼리 아무리 부부의 행복을 노래하고 살았다 하더라도, 본연의 주체 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이상을 중심삼고 볼 때는 불합격자입니다. 두 사람이 하나되어 가지고 하나님의 이상적인 사랑을 완성시킬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 부부가 손을 잡고 합해 가지고 가야 되겠지만, 만약 두 사람이 손을 잡고 합해 가지고도 완성시킬 수 있는 길이 없다 할 때는 남편이 먼저 가든지, 아내가 먼저 가든지 서로 먼저 달려가라고 권고해야 할 입장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아, 당신하고 나하고 둘이 같이 갑시다. 죽더라도 같이 가다가 죽읍시다' 그런 말을 하는 것은 망조입니다, 망조. 더 이상 합심할 수 없기 때문에 피난길을 가야 하는 것입니다. 피난길을 한 번 가보라구요. 바쁘다구요.
선생님은 6,25때 피난길을 맨 나중에 떠났는데, 인민군들은 30리 밖에서 뒤쫓아 오고…. 한 발자국이 얼마나 다급한지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입니다.
그 둘이, 부처끼리 하나되어 가지고 혼자 가는 것과 같이 그 길을 찾을 수 있다면 별문제이지만, 그럴 수 없는 입장에서 너나 나나 둘 중의한 사람이 빨리 가 가지고 찾아야 한다면 '어서 내 앞에 가소. 나를 버리고 가소' 해야 합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래야 될 것 아니예요? 또 다른 사랑의 길이, 둘이 찾아갈 수 있는 이상적인 경지가 있다면 모르지만…. 경주장에서 한 선수를 붙들고 '우리 여기서 죽더라도 같이 죽자'고 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구요. '나를 버리고 어서 그것을 찾아가소. 남자를 버리고 찾아가소. 여자를 버리고 찾아가소' 이런 말을 해야 되는것입니다.
그런 내용을 가진, 그런 사랑의 이상을 가진 하늘이 역사시대에 종교를 낼 때. 어찌하여 독신생활을 강조했느냐? 둘이 붙들고 이것을 주파해 낼 수 있다면 둘이 사랑하라고 가르쳐 주는 것이 정당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래 가지고는 안 되겠기 때문에 '둘 중의 한 사람이라도 살려야 되겠다'는 입장에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 인류 역사의 배후와 신앙의 터전 가운데 있기 때문에, 둘중에 한 사람이라도 달려가서 그 길에 도달하기를 바라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남자 여자 가운데서 누가 먼저 그 자리에 도달하기를 바라겠느냐? 남자가 주체이기 때문에 주체인 남자가 먼저 그 자리에 도달하기를 바랄 것 아니예요? 그러므로 그 주체가 먼저 도달하기 위해서는 대상인 여자를 가려 가야 되는 것입니다. 여자의 모든 것을 품고 그 자리에 오라고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정이 있기 때문에, 도의 길에 있어서는 독신생활을 강조하면서 그 길로 내몰았던 사연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독신생활을 하는 자리에 있어서, 즉 횡적인 상대를 저버리고 종적인 이상세계를 찾아 나가는 그 자리에 있어서, 꿈에라도 자기 상대를 생각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자리에서 출발하여 끝까지 일생을 바쳐 주파해 낸 신앙자가 있었느냐?
그것을 바라신 하나님의 원칙적인 심정을 두고 볼 때,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만을 사랑하기를 바라신 분임에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길을 가라고 명령한 것은 아무리 고독한 신앙길을 간다 하더라도 인간이 하나님과 더불어 상관하고 관계를 맺게 하기 위해서인데도 불구하고 인간은 횡적인 면에서 자기를 중심삼고 관계되어 있는 정서적인 문제에 얽매어 가지고 허덕이는 때가 얼마나 많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길이 얼마나 비참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생각하게 될 때,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 제자가 와서 '선생님이여,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와서 만나자고 합니다' 하니, 예수님은 '내 모친과 내 동생이 누구냐. 오직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만이 내 모친이요. 내 동생이다'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심각한 경지의 말은 무엇을 두고 한 말이냐? 하나님의 사랑의 이상적인 주체 앞에 이상적인 상대로서, 하나님이 사랑하고 싶은 본래의 이상의 남자의 길을 가려 하는 예수에게 있어서는 부모와 동생이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방해가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 끼리끼리의 정을 중심삼고 '여기서 같이 살자' 하는 어머니와 '형님, 우리를 버리고 어딜 갑니까? 우리와 같이 있습시다' 하는 동생은 하나님의 사랑길을 찾아가는 데 있어서는, 뜻길을 가는 데 있어서는 방해가 된다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간곡한 심정을 가지고 말했을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시간이 없기 때문에 간추려 말하자구요.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이 진정한 의미에서 남자를 사랑해 봤느냐? 하나님은 아직까지 진정한 의미에서 남자를 사랑해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예수님을 어느 정도 사랑해 봤느냐? 예수님 자신은 이땅에서 완전히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갔느냐? 남자로서 다 못 받고 갔습니다. 못 받고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인 것이 하나님의 사랑 이상이예요? 예수님의 사지백체를 바라보면서 그야말로 내 사랑 중의 사랑이라며 이상적인 하나님을 중심삼은 기쁨을 노래할 수 있고, 사랑의 노래를 할 수 있는 대상으로서 내 사랑이라고 하며, '너와 나는 영원히 그 무엇이 침범할 수 없는 절대적인 자리에 섰노라. 여기에 순응하지 않은 자는 용서할 수 없다. 몽땅 내 사랑이다'라고 할 수 있는 자리에서 사랑을 받고 갔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런 사랑을 받고 갔다고 생각해요?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못에 땅땅 박혀 피를 흘리고 신음하면서 '아바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했습니다. '아바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 말이 예수가 목적을 이루었다는 말이예요? 그 말은 '당신의 소원은, 그러한 이상적인 기준 앞에 내가 절대적인 사랑의 대상으로서 기뻐하기를 바란 것이요, 기쁘게 되어야 할 것이 내 사명인데도 불구하고, 내가 오늘 이와 같은 자리에 선 것을 보게 될 때 당신은 어찌하여 본래의 입장과는 다른 입장에서 나를 맞아 주는 당신이 되었습니까' 하는 말이라구요.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은 역사시대에 있어서 하나님이 구상하는 이상적인 남성, 완성한 남성으로서 완전히 갖출 수 있는 하나의 상대권을 이루어 몽땅 사랑할 수 있는 권을 못 가진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사랑한 그 남성을 맞이했다면 어떻게 하셨겠는가? 하나님이 몽땅 사랑하는 여성을 보내 그 남성과 맺어 줄 것이 아니냐? 물론 그럴 것입니다. 그렇게 고대하던 하나의 남성의 사랑을 다 이루었으면 '남성의 사랑은 이런 것이다' 하는 전통을 여성으로 하여금 이어받게 해 가지고 그 전통 앞에 일치될 수 있는 여성을 맞게 해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부부를 이루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남자는 오른팔이요, 여자는 왼팔로서 손에 손을 잡고 '남자와 여자의 사랑은 이런 모습이다. 부부의 사랑은 이런 모습이다. 너와 나와 하나된 것과 마찬가지로…. 너희들 입장도 나와 너희들 사이와 같은 입장이 아니냐. 이것이 남녀를 중심삼은 이상적인 부부의 사랑의 기원이다. 원칙이다. 전통의 출발이다'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런 남자와 여자를 몽땅 품고 하나님이 이상적으로 사랑할 수 있고, 사랑에 취해서 다 주더라도 이것만이 내 전부라고 할 수 있는 사랑을 해봤느냐 하는 것입니다. 해봤다고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역사는 하나의 남성을 찾아 나오는 것입니다.
그 남성이 메시아이기 때문에 이 땅 위에는 메시아 사상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고맙게도 이 땅 위에 종교라는 것이 있고, 그 종교에는 재림사상이 있어서 끝날에는 인간의 모델이 될 수 있는 하나의 남성이 나온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이 인류의 한의 역사 가운데서 희망으로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 소망의 주인이 군림하게 될 때, 무엇을 가지고 와야 되느냐? 그분은 돈을 가지고 오시는 분이 아닙니다. 권력을 가지고 오시는 분이 아닙니다. 지식을 가지고 오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모두 부수적인 조건입니다. 그분은 무엇보다도 고귀한 하나님의 사랑을 완성시킬 수 있는 하나의 남성의 대표로 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실체로 오시는 것입니다. 오직 그분만이 완성을 추구할 수 있고, 오직 그분만이 완성을 결정지을 수 있는 주체적 대신자로 오시는 것입니다. 인류역사상에 그런 사람이 있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역사는 그 하나의 남성을 찾아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교의 귀결점으로 되어 있는 재림사상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무엇을 추구하실 것이냐? 돈도 아니요, 지식도 아니요, 권력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런 것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단 하나 주체 되시는 하나님은 사랑을 필요로 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의 대상이 없는 세계는 암흑 같은 세상이 아니냐. 사막과 같은 세상이요. 빙하와 같은 세상인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을 하나님은 원치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망의 세계와 같은 세계를 넘어서 희망의 세계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까지의 섭리역사인 것입니다.
그러면, 그분이 이 땅에 오신다면, 그분에게 배우고 그분에게 전통으로 이어받아야 할 것이 무엇이냐? 돈이 아니예요. 권력도 아니예요. 어떠한 수완이 아니예요. 어떠한 지식이 아니예요. 숨어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발굴하느냐가 문제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입체성을 다하게 될 때, 하나님이 바라시는 상대적 가치를 추구할 수 있는 입장에 서게 될 때,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기쁨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어야만 내가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기쁜데 하나님은 슬퍼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죄를 회개했을 때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하지요? 기뻐하시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복귀의 길을 닦을 수 있는 다리가 놓여지기 때문입니다. 이상이 이루어져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구요. 일차적인 소원은 그 터전이기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지만 이차적인 소원은 그 터전이 아니라 그 터전 위에 길이길이 남아질 수 있는 사랑의 이상인 것입니다. 그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통일교회 여러분은 무엇을 그리워해야 하느냐? 하나님이 주관하고 싶으신 이상적인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은 어떠한 사랑이냐? 부모의 사랑, 부부의 사랑, 자녀의 사랑을 몽땅 한꺼번에 합한 것입니다. 그것이 실감이 안 나면….
원리를 배운 사람들은 알겠지만,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출발한 것이 아닙니다. 누구의 사랑을 받고 출발했느냐 하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원수 되는 사탄의 사랑을 받고 출발한 것입니다. 사탄은 어떤 존재냐? 아담보다도 아래예요. 물론 하나님보다 아래요. 아담의 아들보다도 아래에 있는 존재입니다. 다시 말하면, 종의 사랑의 기원을 갖고 출발한 것이 오늘날 타락한 인류세계인 것입니다. 알겠어요, 무슨 말인지? 종의 종의…. 지금까지 인간들의 정서적인 기반, 그 기대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 사탄의 사랑입니다.
사탄이란 뭐냐? 천사장입니다. 그 천사장의 사랑을 급으로 말하면 소생밖에 안 된다구요. 천사장적 사랑을 소생이라 하면 아담적 사랑은 장성적 사랑이고, 하나님적 사랑은 완성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생, 장성. 완성을 거쳐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그런데 타락한 인간은 사탄의 사랑권내에서 태어나 그것을 터전으로 죽자살자 하고 나가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사탄의 사랑은 무엇을 부정하고 나오느냐? 인간의 자리를 부정하고 나옵니다. 아담 해와의 자리를 부정하고, 하나님의 자리를 부정하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탄권 세계의 역사적인 전통을 이어받아 가지고 출발한 역사이기 때문에 인류의 역사를 두고 볼 때, 인간은 인간의 가치를 부정하는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인간의 가치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도 모르는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본래 절대적인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되었다면, 사랑이 어떻다는 설명이 필요없다구요. 총각 처녀들한테 '사랑이란 이런 것이다'고 설명한다 해서 그들이 알아요? 고아에게 내가 부모의 사랑을 받아 보니 어떻더라 하고 아무리 몇천 번 설명한다 해도 그들이 알 수 있어요? 부모의 사랑이 어떻다 하는 것은 자식을 낳아 봐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전에는 모르는 것입니다. 그저 그렇다더라 한다고 아는 거예요. '더라'가 '그렇다 '와 일치돼요? '그렇다더라' 하는 것은 '그렇다'와 극과 극도 될 수 있다구요. 반대도 될 수 있다는 거라구요. 진정한 의미에서 '사랑이 이렇다' 하는 그 사랑은….
인간은 하나님을 중심삼고 이상적인 사랑권내, 즉 본연의 자리에서 출발한 것이 아닙니다. 천사장급 사랑의 자리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이에 대한 이론을 세워 가지고 결론을 낸다 하더라도 인간을 이렇게 만든 동기는 천사장급 사랑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천사장급 사랑도 생명을 버릴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도 부모는 자식을 위해 목숨까지 버리는 것을 많이 보잖아요? 그런데 그보다 차원 높은 본연의 인간의 가치를 당당히 알고, 주체 되시는 하나님을 알고 당당히 사랑했다 하는 자리에서 하나님이 있다 없다 하는 말이 성립돼요? 하나님이 있다 없다…. 그런 걸 논하는 무골충 같고 덜된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보고도 하나님이 없다고 할 수 있어요? 주체와 대상이 서로 사랑을 받아 봤는데, 사랑이란 이렇다 하는 것을 느껴 봤는데, 내 세포의 신경 자극이 그 이상 최고의 자극을 느낄 수 없는 자리에서 사랑을 받아 봤는데, 그래도 없다고 할 수 있어요? 의식 기관이 그 무엇보다 강한 의식을 느껴 봤는데 그것을 부정할 무엇이 있어요? 그런 무엇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있다 없다 하는 그런 생각도 할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여러분은 호흡을 하고 있지만 그 회수를 세어요? 여기 가슴에서 망치로 두들기듯 두들기고 있는데 그 북소리를 들어요? 파리가 머리카락을 살짝만 해도 아는데, 여기에서 망치로 두들기는 것같이 두들기고 있는데 자극이 없어요. 그거 이상하지요? 파리가 슬쩍 지나가는 것은 알면서도 망치로 심장을 두들기는 것은 모르는 거 보라구요. 여러분이 청진기로 들어 보면 쿵딱쿵딱 한다구요. 그렇게 뛰는 힘의 자극으로 보면 그것은 파리가 살짝 지나가는 것보다 몇십 배 몇백 배 강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알지 못하고 파리가 스쳐가는 것은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게 조화통이라구요.
여러분이 그 뚝딱뚝딱하는 맥박 소리를 세었다가는 모두 신경병에 걸릴 것입니다. 하나 둘 셋 넷…. 이렇게 세어 보라구. 셀 수 있어요? 하루, 어떤 때는 일주일, 열흘, 한 달 동안 심장이 움직이는 것을 생각이나 해봤어요? 만일 그것을 상대적으로 보았다간 큰일날 거라구요. 보라구요. 아! 이것이 오늘은 이렇게 가다가 내일은 살짝 이렇게 가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날에는 죽는다구요. 그러니 모르기를 잘한 거예요. 그것을 상대적으로 봤다간 큰일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몸에 있는 신경기관 같은 것이 안 보이기를 잘했지, 거미줄 같은 신경이 있어 가지고 그것이 작용하는 것을 보고 산다고 생각해 봐요. 이렇게 복잡다단한 것이 아이쿠…. 이것은 기계로 말하면 최고의 정밀기계라구. 수억 개가 되는 부속품이 있는데, 이것이 고장 안 난다고 볼 수 있어요? 이렇게 볼 때, 그거 다 안 보이길 잘했지, 그것이 보였으면 큰일날 거라구요. 심장이 뛰는 것을 모르길 잘했지, 알면 큰일난다구요.
그것은 왜 모르느냐? 너무나 가깝기 때문입니다. 내 생명이 있는 그이상에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그것이 내가 존속하는 생명 감각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벽이 되어 있어서 영화 스크린과 같이 반사되어야만 비쳐지는데, 그것을 타고 넘어가 있기 때문에, 그 벽을 돌아가서야 느끼게 되어 있기 때문에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도 너무 가깝기 때문에 안 보이는 거예요. 눈도 가까이 있기 때문에 안 보입니다. 그래서 가까와도 안보이고 멀어도 안 보이지요? 세상만사가 다 그렇게 되어 있다구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 더불어 사랑을 느낀 사람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이 있고 없고 하는 것이 문제 안 된다구요. 안 그렇겠어요? 그런 세계가 있다구요.
그러면 천사장급 사랑 가지고도 죽자살자하는데, 이것이 아담급 사랑 이라면 어느 정도이겠느냐? 아담적 사랑은 어느 만큼일 것이냐? 물이 펄펄 끓는데 찬물을 갖다 퍼붓거나 얼음을 팍 집어 넣으면 어때요? 소리가 나요, 안 나요? 팍 소리가 납니다. 한번 해보세요. 아이고 더운데 찬물 들어오니 좋다 하는 거라구요. 폭발되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그 사랑에도 수백조 개가 되는 세포가 한꺼번에 달려온다구요. 알겠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을 접했으면 어떻게 될 것이냐? 머리카락도 춤추고 세포도 춤춘다는 거예요. 그렇다구요. 백 퍼센트 그 사랑에 취하면 나가자빠지는 것이 아니라, 천년 만년 살고지고가 되는 거라구요. 누가 깨려고 하면 깨지 말라고 하는 거예요. 요지경 판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신선 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것을 모른다는 말이 있지요? 그만큼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고차적인 사랑에 취할 수 있는 길이 있을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사람은 취해서 살아야 합니다. 취해서 사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예술가들은 예술에 취해 삽니다. 문학을 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구상하는 책을 쓴다든가, 어떤 명작에 취해 사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사지백체는 입체적인 하나님의 이상적인 사랑에 취해 가지고 그분만 따라다녀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외적으로 파이프를 대 가지고 술 먹고 취하자, 아편 먹고 취하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아편보다 못해요? 하나님의 사랑이 술보다 못해요? 하나님의 사랑이 꿀단지만 못해요? 사탄 세계의 똥개 같은 것을 사랑이라고 해 가지고 그것 가지고도 죽느니 사느니 하고, 사랑이 영원하니 어떠니 수작하는데, 생각해 보라구요.
하나님의 사랑을 느낀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누가 춤을 가르쳐 주기 전에 자동적으로 율동적으로 춤을 추게 되어 있는 거예요. 버튼만 누르면…. 주파만 맞추면 무인 비행기가 이리 오자면 싹 오는 거와 마찬가 지로 거기서 놀아나는 대로 놀아나는 것이지, 자기가 뭐 '나 싫소' 하면서 떨어지게 안 되어 있다구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있다 없다 하는 그런 생각 하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이 있다 없다는 걸 논하는 것은 미치광이 짓이지요, 비정상적이라구요. 남편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나 남편 없어. 남편의 사랑이 뭐야' 하는 것과 같아요.
그러면 하나님의 소원이 뭐냐? 임자네들이 아들딸을 수두룩하게 낳아 가지고 좋다고 춤추는 거예요? 그 아들딸을 보고 좋다고 춤을 추었다면 그건 사탄세계의 춤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릇된 사랑에 의해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릇된 사랑을 청산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예수님도 '누구보다 나를 더 사랑하지 않으면 나에게 합당치 못하다'고 표준을 세워 놓은 것입니다. 2천년 전 예수님이 '네 어미나 아비나 처자나 누구보다 나를 더 사랑하지 않는 자는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제자가 못 된다고 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했습니다.
지금까지 역사시대에 있어서는 인간은 나 하나만 잘되려고 했습니다. 그러면 다 망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구원받는 비결이 뭐냐 하면 '나도 불쌍한 사람이지만, 불쌍한 나를 대하시는 하나님은 얼마나 불쌍합니까? 그 불쌍한 하나님은 나와 같이 불쌍한 사람이 사는 세계를 구하지 않으면 안 될 하나님이시요 나는 이왕지사 죄를 지어 망할 몸, 세계 사람들의 죄를 대신하여 나를 잡아죽이고 그들을 용서해 줄 수 있다면 용서해 주시옵소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길밖에 없다는 거예요. 이것이 종교의 길, 십자가의 길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의 짐을 내가 대신 지고, 하나님의 수고의 길을 내가 감소시키는 길 외에는 내가 하늘을 찾아갈 수 있는 길이 없기 때문에, 예수님은 자기를 희생시키는 자리에, 원수의 복을 비는 자리에 대표적으로 섰던 것입니다. 불신하는 세상에 선의 사상을 남기는 길은 그 길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서적 분야에 있어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재차 발굴해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내 소성에 있어서 그런 요소가 없느냐? 요소가 풍부하게 있습니다. 지남철을 보게 되면, 이런 판자 위에 철가루를 놓고 지남철을 대고 그 위로 쭉 끌고 가면 판자 위의 철가루가 쭉 따라옵니다. '이놈아, 오지마 오지마' 해도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걸 높이 떼게 되면 점점 약해지는 겁니다. 점점 높아지면, 아물아물하게 되는 거예요. 우리 인간도 이렇다구요. 6천년 동안 떨어져 있는 거라구요. 성경의 6천년은 몇 십만년이 될 수도 있다구요. 인간의 역사를 8천만년이라는 말도 있지만….
하나님은 지남철과 같고 인간은 철분과 같은데 하나님이 이렇게 왔다 갔다하면 요 끄트머리가 하나님을 따라 움직입니다. 알겠어요? 그래도 여러분의 선조가 선한 사람은 꼭대기가 좀 많이 움직인다구요. 그 비중에 따라서 선조가 더 선한 선조면 밑창까지 움직입니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안테나와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에게는 그런 소성이 있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그런 소성을 발굴해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벗겨 버려야 합니다. 무엇을 벗겨 버려야 되느냐? 전통이니 습관이니 역사니 문화니 사상이니 배경이니 하는 껍질을 벗겨 버려야 됩니다. 이 누더기 껍질이 붙어 있다구요. 그러니 눈으로 보려거든 떼버려라 이거예요. 먹자, 그러면 떼버려라 이거예요. 냄새 맡으려고 하면 떼버려라 이거예요. 맛을 보려거든 떼어버려라 이거예요. 다 부정해야 합니다. 다 부정하면 다 없어집니다. 그래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에 취해서 아버지를 부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째까닥 달라붙는다는 거예요. 말하자면 그렇다는 거예요.
그래야 지금까지의 종교의 명분이 서지요. 없는 하나님을 그렇게 찾았어요? 그렇다면 종교는 인간세계에 있어서 용납할 수 없는…. 이것을 무엇이라고 할까? 기만, 기만이라구.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심전(心田)계발이라는 말이 있다구요. 심전, 마음 밭을 계발하라는 것입니다. 돌짝 밭이 많고, 가시덩굴이 많고, 바윗돌이 많고, 골짜기가 많고, 험산준령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이것을 평지로 만들라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무엇이더냐? 마음속에 그리는 것이 사랑인데, 그것이 사랑인지 뭔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제일 빠른 길이 사랑의 길입니다. 제일 빠른 길이 사랑의 길이예요.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그것을 발전시켜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걸 알아야 돼요.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언제나 신앙자들이 주의해야 될 것은, 신앙자에게는 반드시 가르쳐 주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암시나 혹은 몽시나 계시나 묵시를 통해서 가르쳐 주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암시라는 것은 상관없는 데서, 즉 여기서 파리가 날아갔는데 거기에서 무엇이 연상돼 가지고 깨닫게 되는 거예요. 혹은, 어떤 사람을 척 만났는데 자기가 무엇을 느낄 수 있는 거예요. 이런 것들을 중심삼고 발전시켜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 내가 떨어져 있다 하는 관념을 갖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본래부터 나와 하나다, 하나다' 하는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걸음 가면 하나님과 몇 걸음 떨어지느냐 하는 생각을 해야 됩니다. 얼마만큼 떨어져 있느냐? 내가 다섯 걸음을 가면 하나님은 몇 발자국 떨어져 따라오느냐? 이렇게 생각하라는 거예요. 하나님은 틀림없이 따라온다는 거예요. 자기가 태어날 때 열 발자국의 거리를 갖고 태어났으면 하나님은 항상 열 발자국 뒤에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그 사이를 점점 가깝게 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뭐, 하나님이 올 수 없다구요. 내가 하나님을 찾아가야 됩니다. 거꾸로 가는 거예요. 그래야 될 것이 아니예요? 그래서 신앙길은 거꾸로 가는 것입니다. 거꾸로 가는 거라구요.
뭐, 여편네 사랑하고 남편 사랑하고 자식들을 품고 가는 길이 아니라구요. 거꾸로 가려니 세상과 다르다는 거예요, 그 법이. 입산수도 하려면 세상과 멀어지는 거예요.
잘나나 못나나 인간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인데 어찌하여 하나님을 따라갈 수 없느냐?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나보다 하나님이 조금 앞서 가는 거예요. 이렇게 돼 있다구요.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하신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아무리 사악한 세상이라도 내 발걸음보다 내 아버지의 발걸음이 앞서야 되는 것이지 내가 앞서서는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손을 들더라도 나보다 하나님을 중심삼고 간절하게 들어야 됩니다. 뭐든지 그렇게 살아야 됩니다. 또, 내가 보는 것도 내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아요? 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주체의 요건 앞에 일치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대상의 인연이 성립될 수 있는 기본 원칙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주체와 대상이 일치하게 될 때, 사랑의 인연은 성립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생활 감정에 있어서 하나님의 감정과 공감된 감정을 어떻게 느끼느냐 하는 것이 문제인 거예요. 내가 그래요. 혼자 있으면 '아버님' 하고 나도 모르게 부르게 되는 거라구. 그러면 '오냐' 하는 느낌을 받아요. 일체되면 그렇게 되는 거라구요. 아무도 없는 것 같지만 누가 나를 주관하고, 지도하고 있다구요 그런 생활권내에 들어간 사람이라면 하나님이 있다 없다 하는 것이 문제가 돼요? 어려움에 부딪히면 반드시 나를 옹호해 주고 그곳으로 인도하고 있는 것을 아는 자리에서 하나님을 저버리고 갈 수 있어요?
그러므로 표면화된 생활 감정을 내가 어떻게 발굴하느냐가 문제입니다. 혼자가 아니라구요. 모든 만사를 그렇게 생활을 해야 됩니다.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을 대할 때 아버지의 반기는 얼굴과 같이 대하고, 아버지가 내 전체에 그늘진 것을 밝혀 준다고 생각하라는 거예요. 광명한 그 모습을 보고 아버지를 모시고 기뻐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자연을 바라보고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소성을 전부 대응적으로 자극시킬 수 있는 생활, 자연을 필연적인 요건으로 느껴 나와 상관을 짓고, 하나님에게까지 연결시킬 수 있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아요?
옛말에 '천, 지, 인'이라고 했지요. 천 지 인, 즉 하늘과 땅과 사람이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종으로도 연결되어 있지만 횡으로도 연결돼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것들과 일체화할 수 있는 감정적 생활이 필요 하다구요. 그렇게 되면 여러분이 그런 경지에 들어가게 됩니다. 즉, 자기의 손을 보고도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 겁니다. 자기가 자기를 안고 춤추고 싶은 세계가 있다는 거예요. 알겠어요? 거기에는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보다 고차원적인 인간의 가치의 기준이, 절대적인 하나님의 사랑과 일치될 수 있는 주관권이 우리 인간 앞에 본성으로 부여된 기준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계발하면 누구나 다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수난의 길이 고통이 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쓰러져서 생명이 경각에 달하는 입장에 서더라도, 그 자리에 들어감으로 말미암아 아버지의 사랑이, 아버지의 동정이 나에게 가중되어 들어오는 것을 느끼기 때문에 그 자리는 외로운 자리가 아니라구요. 또, 그런 자리에 들어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수고의 길을 내가 대신 가면서 효의 자리, 충의 자리에서 책임을 다할 수 있고, 하나님의 안식을 위해서 내가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그 이상 행복이 어디 있겠어요? 그렇지 않아요?
남편을 위해서 수고하는 아내의 손은 영광의 상징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굳어진 손을 바라보게 될 때 그것이 불행이 아닙니다. 남편을 위해서 충을 다한 손이라는 거예요. 남편을 위해서 열을 다한 손이 라는 거예요. 그런 아내의 손은 불행한 손이 아닙니다. 그것은 위대한 손입니다. 그것은 도리어 전통에 빛날 수 있는 역사적인 기원으로 남아지는 것이 아니냐.
이런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주관하는 세계를 바라고 있는데, 그런 세계가 되려면 하나님이 주관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됩니다. 무엇으로 주관하느냐? 사랑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그것과 얼마만한 거리에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예요. 그것을 어떻게 실현시킬 수 있느냐? 실현시킬 수 있다는 거라구요. 그런 경지에서 여러분이 병자를 붙들고 기도를 하면 병이 낫는 거예요. 그 어머니 아버지 이상의 아픈 마음을 느껴야 돼요. 그런가 안 그런가 두고 보라구요.
죽어 가는 자식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마음 이상의 마음을 갖고 부르짖으면 하나님은 같이하십니다. 사랑의 이상을 들고 나오는 상대적인 요구에 대해서는 언제나 시간과 장소를 초월해 가지고 상대해줘야 할 주체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러한 심정적인 경지에 들어가 붙들고 기도하게 되면 안 이루어지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예」아내면 아내가 병석에 누워 신음하는 것을 바라보는 남편의 그 애절한 심정 이상의 심정을 내가 어떻게 체휼하느냐? 문제가 그거예요. 내가 그를 붙들고 눈물을 흘리고 그 사람의 생명 이상의 자극을 가지고 사랑의 마음으로 위할 수 있는 동기가 어떻게 벌어지느냐는 것입니다. 그것만 되는 날에는 말 한마디에 병도 나을 수 있는 거예요. 그것은 기적이 아니라구요. 그와 같은 사랑의 인연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도 천지를 창조하게 되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문제는 거기에 있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나라면 나라를 사랑하는 데 있어서, 나라의 운명을 놓고 그 나라의 역사적인 모든 충신들이 아파하는 그 이상으로 염려하는 마음을 가지고 나라를 위하여 기도하게 되면, 그 사람의 기도는 그 나라의 국운을 좌우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이렇듯 사랑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은 이루어지고, 사랑으로 말미암아 보다 고차적인 진전이 성립된다는 결론이 나온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오늘날 종교인들은 이 세상의 비종교인들이 갖지 못한 새로운 입체적인 감정의 세계를 가진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것이기에 생명을 버리더라도 그 절개와 전통을 남기고 가려고 하는 것이 순교의 길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 점점 이상의 때가 다가오고, 우리의 목전에 세계의 관문이 열려 들어오는 이때에 있어서, 하나님이 맞고 싶은 무리는 어떠한 무리냐? 여러분과 같이 오늘의 현실에 고착된 생활을 중심삼고 신음하는 무리가 아니라, 이것을 해방하고 개방시키는 새로운 기수가 되어, 새로운 선포와 새로운 선언을 할 수 있고, 하나님의 사랑의 대를 이을 수 있는 자녀들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은 두말할 바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러한 우리들을 만나게 될 때, 비로소 사랑 어린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사랑 어린 손으로 우리를 안아 주고, 사랑 어린 마음으로 우리와 함께 사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24시간 우리와 같이 살 수 있는 그 세계를 이루어 그 세계에서 살고 죽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이 타고난 생애의 목적이 아니겠느냐?
여러분들은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자신이 하나님께서 사랑 하실 수 있는 그런 아들딸이 못 되면 '아버지, 그러한 사람을 만나게 해주시옵소서. 당신이 사랑하는 것을 한 번 보고 싶습니다. 내 눈은 당신의 사랑 한 번 받을 수 없는 눈이 되었을망정, 당신이 사랑하는 아들을 보고 싶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그런 사람이 있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그런 사람이 없거든 '내가 천만 배의 수난의 길을 가더라도 나 같은 사람을 통해서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면 나를 세워 주시옵소서. 가고 싶습니다' 할 수 있는 아들딸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 가지고 '평화로운 하나님을 내가 보고 싶다. 종족이면 종족을 치리하는 하나님을 만나고 싶다. 나라를 다스리는 하나님을 만나고 싶다. 천하를 주관하는 하나님을 만나고 싶다. 하나님의 주관권내에서 부족함이 없는, 그야말로 이상이요, 만족이요, 행복의 최고의 절정에서 살 수 있는 세계, 하나님이 사랑으로 주관하는 그 세계를 보고 싶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세계를 볼 수 없겠거든, 나 자신이 보게 해야 되겠다고 하며 그 책임이라도 하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되면, 천신만고 수고의 길에서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런 사람이라면 하나님은 그래도 지옥은 면하게 하여 천국 아닌 제 2 차적인 세계에라도 데려다 줄 것이 아니냐? 이것은 틀림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런 사람이 못 되거든 그런 사람을 보기라도 해야 합니다. 볼 수도 없으면, 하나님은 누구보다 불쌍한 분이기 때문에 나라도 그 길이 어떠한 역경의 길이라도 그 길을 가겠다는, 어떤 조건이라도 세우겠다는 신념을 갖고 가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라면 그는 그래도 하늘편에 속한 사람이 아니냐? 그런 일이 벌어질 때 거기서 하늘의 주관권, 하늘의 이상권이 연결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두말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은 그러한 사람에게 복주고 사랑할 것이 아니냐 이거예요.
예수님의 30여 년의 생애를 두고 볼 때,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아들로 왔지만, 사랑을 못 받고 십자가에 달리셨는데 그 모습을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보고 싶지도 않다고 하셨던 하나님의 원한의 그 모든 구렁텅이를 내 생애에서 메워 주고, 그 이상의 아들을 갖고 사랑할 수 있는 아버지를 보고 싶다고 해야 됩니다. 예수님이 죽지 않고 신부를 맞아 가정을 이루어 사는 것을 보고 싶다, 그렇지만 못 보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위해 살아야 되겠다, 예수님이 왕과 제사장이 되어 이스라엘 나라와 유대교를 치리하면서 사는 것을 보고 싶다, 그렇지만 그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위해서 살아야 되겠다, 그것을 보는 것이 내 일생의 소원이다, 지상천국, 사랑의 세계를 이루어 내 기쁜 세계를 보라고 자랑하고, 모든 동물이나 미물까지도 하나님을 존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할 수 있는 그러한 주관주, 만물의 주인공을 보고 싶다고 해야 될 것입니다. 그럴 수 없는 입장이지만 그것을 소망으로 삼고 보고 싶어서 몸부림치며 살아가는 것이 신앙길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할 것이냐? 여러분, 이것이 말뿐이 아닌 것입니다. 선생님이 뜻을 가려 나올 때 제일 심각한 것이 무엇이었느냐 하면 '우주 주관 바라기 전에 자아 주관 완성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제일의 표제였습니다. 우주 주관은 누구나 다 하고 싶지만 자아 주관은 못하는 것이 아니냐? 자아 주관은 무엇을 중심삼고 하느냐? 내 욕망을 중심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어떻게 자아 주관을 완성하느냐? 생명을 여의는 한이 있더라도 그 기준을 중심삼아 가지고 일대에 격전을 하여 나는 패자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둘째 번은 무엇이냐? 하나님이 주관하는 세상을 그리워하기 때문에, 당신을 통해서 당신이 하는 것을 보고 싶소…. 그 생활입니다. 의논하고, 의논하고 살아가는 거라구요. 무슨 사건을 대하게 될 때 '나는 이렇게 생각하지만, 공의의 하나님은 이렇게 할 것이다' 하며 그 하나님의 답변과 결론을 따라서 사는 것입니다. 통일적 주관권의 이념을 실천하자 하는것입니다.
세째 번은 무엇이냐? 책을 중히 여기지 말고 사람을 중히 여기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생님의 생활의 3대 목표입니다. 나는 지혜를 원치 않고, 나는 지식을 원치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느끼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이 3대 요건인 것입니다.
이걸 이루기 위해서 나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믿고 가겠소, 배드로의 신앙이 문제가 아니요, 솔로몬의 지혜를 추구하는 그런 모든 것이 문제가 아니다, 무지하더라도 좋다, 절대적인 신앙이다, 사탄이 내 앞에 와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전하면 사탄의 그 말을 하나님의 말씀화시켜야 된다. 이런 신앙을 표방해 나오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믿지 못할 것이 없다, 누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믿어야 되는 것이다, 그런 신앙 자세를 갖고 나오다 보니 통일교회의 책임자가 되었습니다.
교단의 규탄을 받았고 대중이 부정하는 길을 내가 걸어왔지만 하나님은 부정 안 했습니다. 태양빛은 몇 만 볼트짜리 억천만 개의 전기불보다도 밝은 것이 아니냐? 태양이 나오면 억천만 개의 전기불은 다 빛을 잃는 것입니다.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지…. 여러분이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그것을 어떻게 생활화시키고 실천화시키느냐? 그것이 그리워 자기도 모르게 혼자말로 '난 이렇게 삽니다' 이렇게 중얼거리며 보고를 할 수 있는 경지로 들어가야 합니다. 아버지가 보고 싶어서 몸부림치면 볼 수 있다구요. 그러한 인연이 인간에게서 벌어지기 전에는 하나님이 주관하는 세계는 현현하지 않습니다. 그 세계는 사랑의 터전을 통해서 지었기 때문에 그 인연을 거치지 않고는 하나님과 연결될 수 없는 것이요, 하나님의 주관권이 성립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그것을 표준으로 해 가지고 바라고 나온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재림이라는 말이 얼마나 고마운 말인지 모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 기독교의 지도자들은 '뭐 예수야 재림하시든지 마시든지 나는…' 그럽니다. 우리 통일교회 교인들은 그래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들은 기성교회 교인들 앞에 비할 수 없는 신앙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직접 체험을 하고 있다 이거예요.
선생님은 여러분을 영적으로 전부 다 지도하고 있습니다. 이게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통일교회의 비밀입니다. 일본 식구들에게 이번에 쭉 물어 보니까 체험했다는 사람이 90 퍼센트 이상 이더라구요. 이것은 통일교회의 위대한 힘이라구요. 이건 설명아 필요 없다 이거예요. 이러한 것이 공간 세계를 초월해 가지고 가능한 자리에 있다구요. 그러므로 하나님이 사랑하고, 보고 싶어 하는 그 사람의 생활, 그 사람이 가는 길, 그 사람이 원하는 그곳을 나도 보고 싶다고 거기에 취해 가지고 거기에 미쳐 가는 사람은 대번에 통해 버리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대번에 통해 버리는 거라구요.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는 다릅니다.
통일교회에서 제시하는 얘기에 순응하지 않아 보라구요. 고통이 오는 거라구요. 아무리 혼자 바위틈에 숨어 있어도 양심이 편안치가 않다구요. 그러니 시늉이라도 하면서 따라가야 합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느냐?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이 세계가 하나님의 주관권내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이 나라가 하나님의 사랑권내에 품기기 위해서는…. 우리가 눈물길을 닦자는 것입니다. 고속도로를 닦자는 거라구요, 경부고속도로를 내는 데에도 77명의 희생자가 나지 않았어요?
내가 고맙게 생각하는 것은 통일교회가 하나님권으로 천로역정을 닦아 나가는 데 있어서 얼마나 희생되었겠느냐는 것입니다. 나 자신도 아직까지 희생되지 않았는데, 고생이야 좀 했지…. 생명을 바치고 나서야 참다운 효자가 나오고, 생명을 바치고 나서야 충신이 나오는 거라구요. 아무리 7,80년 고생을 했더라도 생명을 바친 젊은 충신보다는 못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그러한 희생이 없었기에 하나님이 배가의 희생을 치렀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이 자는 시간에 하나님은 복닥불나는 싸움을 하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손에 손을 잡고 군과 군을 연락하고, 면과 면을 연락하고, 마을과 마을, 가정과 가정. 개개인에게 연락해 가지고, 서울에서부터 삼천리 반도를 연결시켜 하나님의 손길을 붙들고 모실 수 있는 이상적인 이 주관권을 확대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세계를 복귀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러한 입장에서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냐?
오늘날 여러분은 혼자가 아닙니다. 이런 것을 알고 지금 이때가 얼마나 긴급한 때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 민족이 가려 가야 할 수많은 싸움이 남아 있는 것을 생각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부여안고 기도해야 되고, 민족을 사랑해야 되고, 세계를 사랑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소개해 주고, 하나님의 주관권의 환경을, 하나님의 사랑의 인연을 맺어 주고 발전시키는 데 있어서만이 하나님이 주관할 수 있는 이 세계가 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고, 그렇게 생활해 나가기를 바라서 말씀드렸습니다.
아버님, 당신의 사랑 앞에는 지극히 어리석은 대상이옵니다. 여기 서 있는 이 자식도 일면 보면 무지한 것 같고 어리석은 것 같이 살아왔습니다.
세상에 이목구비를 갖고 살면서도 자신을 치다꺼리 못 하고, 당신만을 위하여 모든 것을 잊으며 싸워 나왔습니다. 과연 그 길이 쉬운 길이 아닌 것을 생각하게 될 때, 그 길을 가라는 당신의 마음은 얼마나 아팠습니까? 이런 자리에 세워야 되는 당신의 심정은 얼마나 비통했습니까?
그 하나의 심정만이 전폭적인 생명의 원동력이 됨으로 말미암아 오늘날까지 죽지 않고 이 자리에 서서 어린 자녀들을 대할 수 있게 된 것이 옵니다. 이것은 당신의 노고와 수고의 공적인 터전에서만이 가능한 것임을 절실히 느낍니다.
아버지,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세워 놓고 약속이 컸던 것을 생각하게 될 때, 황공합니다. 그렇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이들을 붙들고자 하시는 아버지가 불쌍하옵니다. 그렇게 찾을 민족이 없어서 대한민국의 이 불쌍한 한민족을 찾아왔다는 것이 불쌍합니다.
세계에는 이 나라보다도 잘난 나라가 많이 있습니다. 세계에는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데 있어서 우리보다도 월등한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당신의 사랑 앞에는 먼 것을 알았습니다.
철부지하고 순진한 자식이 부모만을 그리워하며 우는 모습을 바라 볼 때, 일면 어리석다고 평은 하지만 뼛골에서 우러나오는 내정을 가지고 목을 안고 통곡하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인 것을 생각하게 될 때, 내가 그럴 수 있었던 때가 얼마나 많았던가를 느끼게 됩니다.
세상이 뭐라고 해도 당신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까지 싸워 나왔습니다. 나라가 뭐라고 하더라도 당신의 영광을 가릴까봐 조심조심 가고 있는 길입니다. 그 누구는 통일교회 책임자는 행복하겠다고 말하겠지만, 사랑의 길은 고달픈 길이었습니다. 효도의 길은 가고 나서는 자랑하는 것이 아닌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충신이 가는 길이란 다하고 나서 부끄러움을 느끼는 길임을 알았습니다.
아버지, 통일교회의 문이라는 사람이 얼굴을 들고 자랑하는 그날이 있기를 바란다면 당신이 먼저 그럴 수 있는 날이 있고 나서야 그러고 싶은 것이 저의 마음인 것을 당신은 잘 알고 있습니다. 가고 또 가고, 달려가고 또 달려가야 되겠습니다. 밤에도 가야 되겠고, 낮에도 가야 되겠습니다. 피곤해도 가야 되겠고, 지쳐 쓰러지더라도 가야 되겠습니다. 죽을 자리자서도 죽을 수 없는 미련을 남긴 운명을 지니고 살아가야 할 이 길이 보다 행복한 길인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이날까지 싸워 나온 것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아버지, 세계를 주관하고 싶은 것, 이것이 당신의 소원인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 세계를 위해서는 자기의 혈족도 제물 삼아야 되겠습니다. 그 세계를 이루기 위해서는 통일교회의 사랑하는 무리들을 희생시키지 않으면 아니 될, 억울한 길을 가야 되겠습니다. 하늘이 주관하는 세계를 이루기 위해서는 수많은 종교인들을 희생시켜서라도 가야 할 길인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하늘의 세계를 이루기 위해서는, 대한민국이면 대한민국을 희생시켜서라도 세계를 구해야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통일교회는 지상의 권력을 잡기 위해서 꿈을 꾸고 있다는 말들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옵니다. 저희들은 당신의 사랑의 나라를 그리워하는 무리이옵니다. 세상에 미련을 갖고 있지 않은 무리들인 것을 당신은 알고 있습니다.
삼천만 민중이 당신의 사랑 앞에 결속되게 될 때, 김일성이는 문제가 아닙니다. 공산당이 문제가 아닙니다. 신이 없다는, 이런 비원리적이요, 비진리적인 그 사상이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천만 마디의 말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가지고 있는 체험이 문제인 것을 그 누가 뭐라 해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자기를 사랑하고 있는 어머니를 부정할 수 있는 논리는 없는 것이요, 사랑하고 있는 아내를 부정할 수 있는 논리는 없는 것이요, 사랑하고 있는 자식을 부정시킬 수 있는 논리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아버님의 집에 거할 수 있는 아들이 되고, 딸이 되고, 주인이 되는 것이 문제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럴 수 있는 자녀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아침, 여기에 온 당신의 아들딸들이 이제 7월을 보냅니다. 8월을 맞게 될 때는 당신의 소망의 때가 어서 가까이 오게 하시옵소서. 비운의 역사를 해결하여야 할 남북한의 이 민족이 아버님의 광명한 사랑의 빛을 바라볼 수 있는 날이 어서 속히 오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것을 위하여 저희들은 또 가야 되겠습니다. 남한 땅의 핍박길을 가려 나오기 위해서 지금까지 피땀을 흘려 나왔지만, 북한 땅의 핍박의 길을 가려 나가기 위해서 또 싸워 가야 되겠습니다. 이제야말로 통일교회 신도들은 나라를 넘고 가기 위한 결의를 하지 않고는 통일교회의 일원으로 남아질 수 없는 때가 다가온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버지! 생사를 결정지어 놓고 하늘을 사랑하기 위해 그것을 넘어설 줄 아는 당신의 무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7월을 보내고, 맞이해야 할 8월은 해방이라느니 광복이라느니 이런 것을 자랑할 수 있는 달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일제 식민지로부터의 제 1 차 해방, 남북이 가로막힌 것을 헐어야 할 제 2 차 해방, 세계가 가로막힌 것을 헐어야 향 제 3 차 해방을 꿈꾸고 나가는 것이 통일교회가 가는 길인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이 3 차 세계 해방을 이루어 당신이 승리 주권자가 되고, 사랑의 주도자가 되는 그날을 보지 않고는 죽어서는 안 될, 한을 품고 있는 무리가 통일의 무리이옵니다.
아버지여, 저희들은 당신과 같이 이러한 사정이 있사오니 당신께서 인도하시고 같이하시기를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그러한 무리로 시작하고, 그러한 무리로 남아지고, 그러한 무리로 끝을 맺게 허락하여 주옵길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니다.
만만사의 사랑과 당신의 긍휼이 길이길이 보잘것없는 저희들의 머리 위에, 생활 위에, 생애 위에 같이하옵길 간절히 부탁하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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