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님! 저희들의 발걸음이 하늘을 향하여 뒤넘이쳐야 할 때는 가까워오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고생이 컸음을 저희들은 알았사옵고, 아버지께서 작정한 뜻이 무엇이라는 것도 알았사오며, 또 아버님께서 저희들에게 행하기를 바라시는 자녀의 책임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 하는 것도 알았사옵나이다.
아버님의 뜻을 아는 사람, 아버님의 허락한 동산에 살 사람, 그 한 사람은 아버님을 향하여 무한히 눈물짓지 않으면 안 될 것도 알았사옵니다. 그 한 사람이 아버지를 향하여 나아가게 될 때에 상처를 받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사옵고, 그 한 사람은 아버지와 더불어 동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도 알고 있사옵니다. 또 그 한 사람은 몸에도 그런 흔적을 가져야 됨을 아는 동시에, 마음에도 비통한 심정을 갖고 한없이 통탄해하고 아버지의 심판의 한 날을 대비하여 호소해야 된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또한 저희들, 그러한 아들딸을 찾으려 하시는 아버지와 영원히 인연맺어야 된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그러나 오늘 저희들은 아버지 앞에 선 자라고 자인하는 입장에 서지 말게 인도해 주시고, 말하기도 부끄럽고, 행동하기도 부끄럽고, 얼굴 들기에도 부끄러운 자신들임을 망각하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저희 중에 마음을 열어 천상의 염려를 알고 아버지의 심정을 체휼하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는 아버지와 이 민족의 서러움을 대신하여 통곡하지 않을 수 없고, 인류의 서러움을 대신하여 통곡하고, 모든 영인들과 더불어 하늘땅에 사무쳐 있는 슬픔을 같이 나눌 수 있는 친구가 될 것임을 저희들이 알고 있사옵니다.
오늘 저희 자체가 그런 자리에 섰는가 하고 생각해 볼 때, 아버님, 수고하신 아버지 앞에, 염려하신 아버지 앞에, 고난의 길을 걸어오신 아버지 앞에 체면을 세울 수 없으면 송구스러운 마음이라도 가질 줄 아는 모습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나의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 택한 무리들을 거느리고 거룩한 성, 예루살렘 성문을 통과시키기 위한 아버님의 슬픔, 저희 한 자체를 거느려 선의 입장에까지 이끄시려는 아버님의 고충이 얼마나 크셨사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저희들은 아버님의 수고를 잊어버렸고, 아버지의 염려를 잊어버렸고, 아버님의 권고해 오신 발자취를 잊어버렸사오니, 이제 하늘의 정병 된 자들의 움직임이 있다 할진대, 그 움직임이 아버지의 발자취를 따르는 발걸음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마음에 긍지를 갖고 나아가는 움직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만민은 이 길을 가기 싫어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뭇사람들은 이 길을 마음으로는 원하고 있으되 행동으로 연결하지 못한 채 머물러 있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이를 해결해야 할 책임이 아버지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요, 어떤 지도자에게만 있는 것도 아니요, 우리에게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러나 이 엄연한 사실을 책임지려는 사람들이 심히도 적다는 사실을 저희가 알았사오니, 안일한 저희 마음에 아버지의 간절한 마음이 넘쳐흐르게 해 주시옵고, 아버지의 서글픈 심정이 넘쳐흐르게 해 주시옵고, 하늘의 권고의 길을 찾아 나설 수 있는 의로운 무리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하늘의 복을 바라는 사람은 많사옵고, 아버지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 정성들이는 사람은 많사오나, 6천년 역사가 경과한 오늘날은 아버지의 참다운 아들딸, 아버지 앞에 제물이 되고자 하는 충성된 사람을 찾기가 어려운 때인 줄 아옵니다. 저희들이 혹시나 아버님의 섭리노정을 혼란시키는 불쌍한 무리들이 될까 심히 두렵사오니,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장담할 수 없는 저희 자신들을 염려하는 사람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자신을 염려하여 아버지 앞에 부끄러운 자녀, 염려되는 자녀가 되지 않기 위해 수고하는 아들딸 되게 인도하여 주시옵길,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선조의 원한이 저희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이때에, 불신의 억만 사탄들이 저희를 유혹하고 있는 이때에, 아버지 앞에 넉넉히 자랑할 수 있는 하나의 가치적인 존재로 찾아질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날 저희들이 아버님 앞에 경배하기 위해서 나왔사오니, 몸 마음 스스로 반성하여 하나될 수 있는 조건, 선의 조건을 세우는 그런 자리에 설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 이날을 위하여 아버지를 염려하면서 기도하는 무리는 누구이옵니까? 눈물짓는 무리는 누구이옵니까? 하늘땅을 대신하여 슬퍼하는 무리는 누구이옵니까? 그들을 축복하여 주시옵고, 그들 위에 영광의 날이 어서 속히 임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여기에 모인 당신의 아들딸들이, 아버님, 뭇사람들이 책임 못한 것까지도 도맡아 책임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남겨진 사명 앞에 진실하고, 남겨진 뜻 앞에 신실하며, 아버지의 뜻 하나를 위하여 모든 것 다 바쳐 싸워 나갈 수 있는 당신의 아들딸 되게 허락해 주옵길,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 싸우고 있는 저희들의 발자취와 그 머무는 위치가 본연의 이상 동산과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있는가, 스스로 분석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그 염려의 기준을 돌파하기 위한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게 인도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이날 모든 것 하락하신 뜻대로 이루어 주시옵소서. 기쁨의 은사를 받을 수 있는 심정을 갖춘 자가 있거든 그에게 역사해 주시옵길 바라옵고, 아버지를 대하는 대로 나타나시옵고, 아버지를 위해 정성들이는 대로 축복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니다.
모든 것 아버지께 맡기었사오니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사탄이 틈타는 시간 되지 말게 허락해 주시옵길 간절히 부탁드리며,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사옵나이다. 아멘.
‘하나님의 소유와 우리의 소유’ 이러한 제목을 가지고 잠깐 동안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지음 받은 피조물이 주인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만물도 그러하고 우리 자신들도 그러하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인간들은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소유되지 못하고 있고, 또 만물과 이 세계를 절대적으로 소유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절대자이신 하나님도 지으신 만물이 자신의 소유라고 주장하며 자신 있게 주관하지 못하고 계신 이 서글픈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역사노정은 한 주인 앞에 소유되기 위한 노정이었다는 것입니다. 시대를 지나고 세기를 지나 오늘 이날까지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파란곡절의 투쟁역사를 거쳐 나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이 모든 피조만물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부인하지 못한다 할진대는 이 피조물을 주관하는 주인, 어떤 절대자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 절대자의 주관하에서 어느 누구도 참소할 수 없는 절대적인 안정점을 찾지 않는 한, 이 세계는 투쟁의 역사를 모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지은 만물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시지 못하는 그 한 사실을 오늘날 신자들은 누구나 다 잘 알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온 정력을 기울여 지으신 만물을 뜻대로 주관하시지 못하고, 뜻대로 활용하시지 못하는 입장에 계십니다. 그래서 본래의 입장을 회복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역사가 있게 되었고, 지금까지 신앙자들은 시대 시대마다 억울한 죽음을 당하고 억울한 박해를 받으면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 나오고 있습니다.
하늘을 위하여 충성하고, 하늘을 위하여 생명을 바쳐 그 한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 싸워 나오고 있는 수많은 자녀들을, 하늘이 선의 이념을 중심삼고, 승리의 영광을 중심삼고 주관할 수 없는 것 또한 하나님의 서러움입니다. 그리고 참다운 신앙노정을 가고자 하는 참다운 사람들의 서러움임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실존적인 소유의 가치를 만우주 앞에 자랑할 수 있게 되는 그 한 날은 하나님의 섭리가 총결산되는 날이요, 온 피조물의 바람의 초점이요, 예수님과 지금까지 왔다갔던 성현 현철들이 이상하는 기준점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과 여러분이 살고 있는 생활 환경을 살펴보게 될 때, 여러분이 갖고 있는 소유물이나 여러분 한 자체, 여러분이 속해 있는 가정, 여러분이 속해 있는 사회, 그리고 여러분이 속해 있는 국가와 세계는 누구의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늘의 소유라고도 할 수 없고 여러분 것이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타락한 인류에게는 슬픔 중에서도 가장 큰 슬픔이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은 구원섭리라는 표어를 세워 놓고, 당신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세상 것을 다 갖고 나를 위하라고 말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정, 지극히 슬픈 사정을 우리는 느껴야 되겠습니다. 사람을 만물의 주관자의 입장에 세워주어야 할 하나님인데, 갖고 있는 모든 것을 갖고 당신을 따르라고 권고하지 못하시는 하나님의 사정을 우리는 느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도(道)의 노정을 찾아 나가는 사람은, 어느 시대, 어느 민족, 어느 세계에 속해 있다 하더라도 자기가 갖고 있는 모든 소유물까지도 다 끊어 놓고 따르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서러운 심정을 뼈저리게 알아야 하고, 뼈저리게 느껴야 하고, 뼈저리게 체험해야 하겠습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소유권이 찾아지는 때가 오게 될 때 하나님과 하등의 관계가 없게 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믿는다는 사람들은 구원받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늘의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 하늘나라의 백성이 되어 택한 제3이스라엘의 이름을 가지고 나서고자 하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한 마음을 가지는 것은 좋으나 내 한 자신이 그것을 가질 수 있는 기준과 자격을 갖고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늘이 만물을 주관하지 못하는 입장에 처해 있는 연고로, 이 땅 위에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 많이 왔다 갔을지라도 이 땅을 완전히 주관하여 자기 것으로 결정지을 수 있는 용자는 나타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역사노정은 어느 때까지 계속될 것이뇨? 이 땅이 영원히 내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하나의 주인공이 결정지어지는 그날까지 역사는 곡절의 노정을 거쳐 나갈 것입니다. 오늘날까지 인간들은 문화, 혹은 어떤 정치권력과 종교, 그 모두를 자기의 소유인 것같이 자랑해 왔지만 사조의 변화에 따라 어떤 민족이 자랑하던 그 문화는 그 중심이 다른 데로 옮겨져 왔고, 어떤 주의 주장을 중심삼던 모든 정치권력도 바꾸어져 왔으며, 종교까지도 바뀌어 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역사노정을 고찰해 볼 때 이러한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즉 그 어떠한 움직임도 결정적인 소유권을 가진 입장에 서지 못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역사노정을 돌이켜볼 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완전히 주관할 수 없는 때에 자기 마음대로 행동한 것이 타락의 발단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완전히 주관할 수 있는 때를 맞이하여 행동했던들 타락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세 이후 지금까지 주관적인 권한을 갖고 행사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민족을 움직이려 했고, 국가를 움직이려 했고, 세계를 움직이려 했으되, 그 시대를 총책임진 사람으로서 머물지 못했던 것입니다.
개인뿐만 아니라 씨족과 부족과 민족과 국가와 더 나아가서 하늘땅까지 하나님이 주관하는 때가 와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늘땅, 영계가 있다면 그 영계까지 주관하시게 되는 필연적인 움직임이 역사적인 종말시대에 나타나지 않으면 하나님이 주관하는 전체의 이념이 성취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은 우리 인간들을 대하여 자기가 갖고 있는 모든 물질을 버리고, 자기가 갖고 있는 생명을 버리고, 자기가 갖고 있는 이념을 버리고, 이 땅 위에서 즐거워할 수 있는 정까지도 버리라고 요구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인간을 대해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도의 기준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이런 요구의 조건을 우리에게 내세우셨던가? 그것은 절대자의 소유의 권한이 나타나는 한 때가 기필코 오므로 그때에 우리를 하나님 앞에 넉넉히 설 수 있는 자격자로 만들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지금까지 하나님을 따르고 선의 뜻을 찾아 나가는 사람들이 지켜 나가야 하는 필수적인 조건이었던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를 돌이켜보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기쁨을 주기 전에 고통을 당하게 하셨고 무엇을 자랑하게 하기 전에 핍박을 받게 하셨으며 스스로 즐길 수 있는 환경을 피하여 쉬지 말고 기도하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러한 도의 기준을 인간들 앞에 제시한 것은 어느 한 때를 계기로 하여 인간들을 하나님의 완전한 소유가 되게 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성경 본문 말씀에 보면 ‘너희는 모든 것을 다 버리고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라고 할 수 있는 그 나라, 하나님의 의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그 의는 어디 있을 것인가? 또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어디 있을 것인가? 즉 하나님이 소유할 수 있는 나라는 어떤 나라일 것인가? 선의 나라일 것입니다. 그 나라는 종교를 초월하고, 일개 국가의 관념을 초월하고, 인간의 차별을 초월하고, 주권을 초월하고, 어떤 문화나 사상을 초월하는 선의 나라일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국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선한 사람들이 자기들의 이상적인 나라라고 주장했던 나라요, 자기가 살고 싶은 곳이라고 주장했던 곳입니다. 그리고 천국은 자기의 것을 마음 놓고 주장할 수 있는, 소유의 관념을 세울 수 있는 곳입니다. 이와 같은 곳이 우리가 바라는 천국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면 기독교, 어떤 교파면 교파가 자기들만을 중심삼은 소유관념, 또는 교파적인 소유 관념에 젖어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 사람들을 때리는 시기는 기필코 옵니다. 어떤 일개 국가의 주의만을 중심삼고 전체를 끌어당겨 규합시키고자 하는 그런 주의를 칠 때가 반드시 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철칙입니다.
하나님은 사탄까지도 용납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사탄을 치지 못하고 용납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사탄의 간청을 들어주시고 사탄의 참소조건을 들어주시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사탄이 비록 하나님의 뜻을 반대하고 따르지는 않지만 하나님을 싫어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는 않지만 마음속으로는 하나님을 존경하고 좋아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탄이 하나님을 대하여 ‘하나님이여! 내 수중에 있는 이 세계는 당신께 드리겠사옵니다. 그러하오니 아담을 제쳐놓고 아담의 자리에 대신 나를 세워 주시옵소서.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나도 인간 이상 하나님을 모시겠습니다.’라고 간청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탄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러한 입장에만 세워 주신다면 인간 이상 하나님을 모시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난처한 입장에 계십니다.
그러면 하늘이 수많은 선지선열들을 보내고 예수를 보내서 하시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던가? 사탄이 아는 이상 하나님의 사정을 알고, 사탄이 하나님을 위하는 이상 하나님을 위할 수 있는 사람을 세워 사탄에 대한 소유권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완성하는 것이 재림역사의 목적입니다.
그러면 사탄이 사탄 된 동기가 어디 있는가? 천륜을 파탄시킨 동기가 어디 있는가? 아담 해와보다 더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려는 데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담 해와를 사랑하는 이상 아담 해와를 사랑하려 하고, 아담 해와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상 하나님을 더 사랑하려 했던들 타락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기에 조건이 걸렸던 것입니다. 악은 무엇인가? 자기보다 남을 위하지 못하고, 선을 섬기지 못한 것이 악입니다. 오늘날 타락한 인간은 이 조건에 다 걸려 있습니다.
그러면 선한 나라는 어떠한 나라인가? 하나님이 소유할 수 있는 나라는 어떠한 나라인가? 또 하나님께 소유될 수 있는 사람은 어떠한 사람인가? 하나님께 소유될 수 있는 만물은 어떤 것인가? 그 귀결점은 무엇일 것인가? 자기를 중심한 것은 어떤 것도 하나님이 소유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중심한 입장에 선 존재, 하나님께 흡수될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런 존재를 하나님은 소유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사탄세계의 법은 자기를 위하라는 법입니다. 그래서 사탄세계의 사람들은 가정, 사회, 국가, 세계, 하늘땅의 모든 존재가 모두 자기 개인만을 위해서 존재해야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선한 하나님의 법도와 다른 점입니다. 그러면 선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자기가 소유한 모든 것, 관념까지도 남의 것으로 느끼고 남을 위하여, 혹은 전체의 것으로 느끼고 전체를 위하여 쓸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고로 인간세계에서 어떤 타락의 현상이 벌어졌는가 하면, 만물과 세계와 하나님까지 자기를 중심한 생활 속으로 끌어들이려 하는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탄의 역사로 말미암아 생긴 타락 현상입니다.
그렇다면 선의 역사는 무엇인가? 내 개인에서 혁명을 일으켜 가지고 하나님을 위하고, 세계를 위하고, 남을 위하여 새로운 방향의 노정을 개척해 나가는 역사입니다. 이것은 곧 종교의 목적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 역사를 돌이켜보면, 어느 시대 어느 세기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사명을 갖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던 사람 중에는 자기를 위하여 산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까지 사탄세계에서 자기를 중심하고 자기를 위하라고 하던 영웅호걸은 다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역사가 지나면 다 비판받는 것입니다.
예수가 이 땅 위에 오신 목적이 무엇이었던가? 하나님이 소유할 수 있는 나라, 하나님이 소유할 수 있는 사람, 하나님이 소유할 수 있는 만물을 회복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또 그가 주장한 주의는 무슨 주의였던가? 예수님의 주의는 ‘나를 희생하고 민족과 세계와 우주를 위해 봉사하자.’는 주의였습니다. 우주를 위하여 많이 봉사하고 많이 희생한 사람은 그 우주의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악의 세계에서도 그런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말없이 충성하고 말없이 봉사하는 무리는 어떠한 국가나 어떠한 사회나 어떠한 곳에 가더라도 주인이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이 나 개인과 가정, 사회, 국가, 세계, 천주를 소유하실 수 있는 권한을 찾아 드려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음을 느껴야 하겠습니다. 이런 소유권은 하나님 자신이 세우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세워서 해결해 드려야 합니다. 이러한 중대한 의무가 남아 있기 때문에 역사적인 섭리를 대표하여 왔던 수많은 성현 현철들은 이 의무를 완수하기 위하여 목베임을 당하고 죽음을 당하면서도 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는 30여 평생 요셉의 집에서 일을 하면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하늘의 전권대사와 같은 존재라고 주장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도 긴 역사를 거쳐오시면서 그런 주장을 한 번도 못 하셨음을 아시는 예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앞에 놓고 최후의 기도를 하는 마당에서도, 자기 뜻을 중심삼고 ‘아버지여! 이루어 주시옵소서.’라는 기도를 못 하시고,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세주로서 땅에 대한 사명감과 책임감이 강하면 강할수록, 크면 클수록 자기에 대한 존재 의식과 소유 관념이 강할 것이지만, 내가 내 자신만을 위하여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아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어디까지나 자기는 하나님의 것으로서 하나님께 소유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고,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할 줄 아는 동시에 하나님의 뜻을 찾아갈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정을 자기의 심정으로 대신할 수 있었고, 하나님의 뜻을 자기의 뜻으로 대신할 수 있는 입장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피조만물 앞에 하늘의 뜻을 따라가고, 하늘의 심정을 따라가야 할 인간 앞에 구주로서의 자격을 갖출 수 있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천국의 백성들은 어떠한 사람들이겠는가? 자기를 들어 만민 앞에 봉사의 깃발을 들고 나선 무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우리는 어느 민족을 구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것을 그 민족을 위하여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그래도 안 된다면 자기의 생명까지 바칠 줄 아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사람이 곧 천국 백성입니다. 이러한 백성을 규합해 가지고 천국 이념을 성취하여야 할 하나님의 사정이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하나의 소유적인 가치를 이 땅에서부터 결정짓고자 하시는 사실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할진대, 여러분은 자신을 중심삼고 생각해 보아야 됩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마 6:31)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그 시대 사람들에게는 모순된 경고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이러한 말씀을 하셨는가? 그것은 6천년 동안 안 먹고, 안 마시고, 안 입더라도 회복하여야 할 천적인 소유의 이념이 남아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굶주리고 불쌍한 민족이 있다 하더라도 그 민족 이상 불쌍한 입장에 계시며, 어떤 억울한 민족이 있다 하더라도 그 민족 이상 억울한 입장에 처해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우리보다도 우리 자신들을 더 염려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알아야 할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자기 개인을 중심삼고 염려하고 있는 것을 바라보게 될 때에, 예수님은 그러한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예수님의 그 말씀대로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는 자기의 굶주림을 걸어 놓고 ‘땅 위에서 나와 같이 굶주림을 당하는 선한 무리들이 얼마나 많습니까?’라고 염려하면서 하늘 앞에 호소해야 할 것입니다. 선한 입장에 있지 못한 자신이 굶주림을 당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선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굶주려서는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위하여 염려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운명이 우리에게 지워져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입지 못하고 먹지 못하는 자리에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소유할 수 있는 그 나라와 그 백성을 만들기 위하여 수고해 주기를 바라셔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계신다 할진대 어떠한 사람을 택할 것인가? 또 어떠한 사람을 택하여 자기의 자녀로 삼을 것인가? 자기의 굶주림을 넘고 자기의 어려움을 넘어서 손을 들어 남을 위해 축복할 수 있는 그 한 사람을 찾을 것이고, 자기의 분함과 슬픔을 넘어 하나님의 분함과 슬픔을 염려하여 울 줄 아는 사람을 찾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자기 일신의 운명이 촌각에 달려 있는 십자가상에서도 원수들을 바라보며 ‘하늘이여! 영존하신 하늘이여! 저들 앞에 영원한 천벌을 내리소서.’ 하지 못하시고, 도리어 손을 들어 그들에 대해 복을 비셨습니다. 그러한 예수님의 심정이 천국 백성의 심정이요, 곧 하나님의 심정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원칙에 입각하여, 오늘날 우리들의 신앙생활과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기독교를 살펴보게 될 때, 하늘나라에 남아질 수 있는 백성은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더 나아가 하나님의 소유라고 영원히 주장할 수 있는 민족은 어디 있으며, 하나님의 나라라고 주장할 수 있는 땅은 어디 있으며, 그러한 물건, 그러한 사람은 어디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모두 천국 가기를 원합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어떤 사람들이 ‘아! 천국은 내 것이야.’라고 자신 있게 주장하는 것을 왕왕 보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을 볼 때, 어쩌면 저렇게 하나님 이상 소유적인 면에 대해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 자신조차도 아직까지 천국은 내 것이라고, 예수님께서도 천국은 내 것이라고 주장하는 입장에 서지 못하시는데….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하늘을 향하여 기도하는 입장에 계십니다. 또 하나 님께서도 지금까지 수고하고 계십니다.
영계에 있는 수천억의 영인들이 지상을 위하여 협조하는 것이나, 해방의 자리, 영광의 자리에서 즐거운 생활을 하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어찌하여 그러한 입장에 서야 하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창세 이후 지금까지 천국을 이뤄 놓고 내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입장에 서지 못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입장에 계신데도 불구하고 오늘날 땅 위의 성도들 가운데 몇몇 사람들은 천륜의 원칙과 배반되는 입장에 서서 그러한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늘을 향하여 나가면 나갈수록, 하늘의 원한을 해원하면 할수록, 빚져 있는 자신을 깊이 느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6천년 동안 이 땅을 대하여 그 나라와 백성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래서 찾아오시며 수고하신 역사적인 그 빚이 6천년 동안 쌓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한 자체가 만족과 기쁨을 가졌다고 해서 천국을 소유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하늘의 아들딸이라면 하나님 대신 염려하고 하나님 대신 보호해 주어야 할 책임이 있는 땅이 남아 있고 세계가 남아 있어서, 즉 그것들이 하나님께서 소유할 수 있는 것이 되어 있지 못하는 한, 자신할 수 없는 자기라는 것을 느껴야 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하늘의 왕자로서 주도적인 행사를 할 수 있는 심적 기준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지만, 그것을 한 번도 행사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가는 곳마다 제자의 발을 씻어 주는가 하면, 병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일생노정은 자기를 위하여 생활한 날이 하루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의 생애를 회고해 보면 오로지 남을 위하는 생활이었습니다. 남을 위하여 허덕이고, 남을 위하여 눈물 흘리고, 남을 위하여 욕을 먹고, 남을 위하여 찢기며, 남을 위하여 죽임을 당하는 서러움의 생활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서러움을 풀어주지 못하는 하나님이라 할진대는, 그런 하나님은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한 날에 하나님을 이 서러움의 쇠사슬에서 해방시켜 드림으로써 하나님이 온 하늘땅이 내 것이라고 주장하며 손을 들어 만민을 대하여 ‘다 같이 즐기자!’고 할 수 있는 그 날이 되기 전에는, 자신의 입장을 주장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곡절이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의 진리는 사랑을 강조하였고, 희생과 봉사를 강조하였고, 핍박과 천대받는 생활을 강조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나님을 위하여 눈물을 많이 흘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슬픔을 대신 슬퍼하려는 마음을 가진 만큼 하나님의 소유가 될 것이며, 하나님의 고생을 대신 짊어진 만큼 하나님의 소유가 되고, 하나님 대신 사탄의 참소를 받은 만큼 하나님의 소유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행한 만큼 충성한 만큼 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것이며, 그것은 좋은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다 싫다고 접어둔 슬픔이나 고통을 붙들고 충성을 하게 될 때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 길이 기독교인들이 가야 할 원칙의 길입니다.
한국의 기독교에 불을 붙이게 된 것은 바로 초창기의 기독교인들이 이러한 노정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천국 백성인데 왜 죽어?’ 하며 부정하는 무리가 나타났던들, 하나님의 섭리의 뜻은 한국에 전파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내가 하나님의 아들인데 왜 죽어, 왜 욕을 먹고 천대를 받아야 하느냐?’고 부정하였다면, 오늘날 여러분들이 믿을 수 있는 구원의 노정은 인류역사상에 나타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모든 국가에서 그 국민들을 지도하는 방편으로서 애국자를 들어서 충성하는 법을 가르친 것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것은 자기의 가정을 버리고, 자기의 일신의 욕망과 명예를 버리고 일국의 뜻을 대신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 나라가 당하는 고통을 자기가 대신 맡고, 그 슬픔을 대신 맡아 가지고 자기가 먼저 슬퍼하고, 그 나라의 주인을 대신하여 모든 것을 책임지고자 했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또한 이것이 하늘의 법을 지키는 자세인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혼란된 이 세상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잘났다고 자기의 주장을 세우고 자기의 가진 권한을 나타내려고 하고 있습니다. 참다운 크리스천을 찾기도 어렵습니다. 참다운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이 소유할 수 있는 참다운 백성을 만나기는 더욱 어렵습니다.
이제 우리는 친구를 맞아야 되겠고, 하나의 천국 백성이 되어야 하겠고, 하나의 교단을 이루어 하나의 종족을 편성해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으로부터 소유의 결정을 받은 그 하나의 성도는 한국 강토의 어디에 있는가? 그 하나의 교단은 한국 강토 어디에 있으며, 그 하나의 민족은 세계의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내게 있는 온 기운을 쏟아 지칠 때까지 부르짖어야 하며, 내 발을 움직여 쓰러질 때까지 찾아야 할 때가 왔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여러분은 나를 단장하기 전에 이 삼천만 민족을 단장하려는 마음, 나를 생각하기 전에 이 땅 위의 만민을 생각하려는 마음이 우러나와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는 풀 한 포기까지도 붙들고 울어 줄 수 있는 마음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심중에서 폭발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심정을 갖지 못하고서는 완전한 하나님의 아들딸이 못 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인간은 하나님의 눈물의 열매요, 하나님의 고통의 열매이고, 또한 하나님의 피의 제단 위에 오르는 제물인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생각지 않고 뻔뻔하게 자기를 주장하고 나서기 때문입니다. 만물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이 민족의 갈 길을 개척할 자는 누구인가? 진정 이 민족을 위하여 땅을 치고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백성이 나와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이 분열된 교단을 누가 바로잡을 것인가? 교단을 붙들기 위해 불타오르는 열정을 가진 청년 남녀들이 위선자들과 대결하기 위하여 땅을 치며 호소하여 피 흘리는 혈투전을 각오하고 나설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이 세계를 구원할 사람은 누구인가? 여러분 청년 남녀들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서구의 물질문명이 많이 발달하였습니다. 이것은 대륙 이집트를 시발로 하여 앗시리아 문명, 바빌로니아 문명을 거쳐 희랍문명을 거치고 로마문명을 거쳐서 지금까지 서구문명을 형성해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종교역사를 알아보면 예수님 당시에 이미 3천년 이상의 문명을 자랑하고 있던 애급 나라는 무엇을 중심삼고 그러한 문명을 건설했던가? 애급 사람들은 태양신을 숭배하였고 오시리스(Osiris)라고 하는 신을 믿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신앙과 사상으로 그들의 정신을 무장하여 단결된 힘을 발휘하여 그러한 강대국가와 문명을 건설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이것을 정책적인 이념으로 삼아 예식을 강화시켰으며, 그 이상적인 표준을 향하여 민족을 이끌어 가지고 애급 문명을 탄생케 했던 것입니다.
이리하여 나라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을 세웠고, 그로써 지배할 수 있는 기준을 가지게 되었던 바, 이때에 그들이 자기의 민족을 넘어서 이방 나라 에 좋은 점이 있다 할 때는 그 좋은 점은 흡수해야 했습니다. 자기 나라의 어떠한 것이라도 희생시켜서 바꾸어 받아들였다면 그 나라는 멸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국가는 멸망하였지만 그들의 문명은 역사를 따라 발전해 왔습니다. 오리엔트 지방에서는 앗시리아 문명과 바벨론 문명이 일어났었는데, 팔레스타인 지방에서는 유대교를 중심삼고 헤브라이즘이 형성되어 신을 중심한 문명이 발전해 나왔습니다.
그리스 지방에서는 외적인 신의 이념을 중심한 희랍문명이 발전해 나오다가 예술을 숭배하는 여러 가지 사조와 내적으로 조화를 이룹니다. 이것이 지식의 왕국 희랍을 거쳐 희랍인들이 창설한 독특한 종교적 이념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세계적인 문명권을 형성하였는데 혼란된 사상권의 시기를 지나는 과정에서 기독교 사상과 융합되었고, 그후 로마로 건너가 기독교 문명을 창설하였던 것입니다. 중세시대에 기독교는 이 종교의 이념을 중심삼고 그 이념 아래 있는 사람들은 상하를 막론하고 흡수하여 융합시켜야 했었습니다. 그런데 이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세속적으로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도 치시게 되었습니다.
만일에 로마 교황청이 부패하지 않고, 자기들이 있음은 세계를 위함이요, 자기들이 있음은 인류를 위해 있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자기들이 좋으면 자기들이 좋기 전에 남이 좋을 수 있게, 즉 나보다는 남을 위해 사는 사상을 제창하였다면 교황청은 붕괴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 교황청이 그렇게 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것을 그냥 두면 안 되겠기에 하나님께서는 외적으로는 문예부흥을 일으켜 치셨고, 내적으로는 종교개혁을 일으켜 구교를 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후 퓨리턴을 중심삼고 미 대륙으로 건너가 거기에서 기독교 이념을 중심한 국가를 건설하게 된 것입니다. 즉 로마의 정치이념, 기독교의 종교이념, 희랍의 지성주의가 융합되어 오늘날 전 민주주의를 지배하는 범미주의(汎美主義)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미국이 오늘의 민주주의를 통합하여 천륜과 연할 수 있는 그때까지, 국가적인 사명을 대신하고 소유적인 권한을 대행할 수 있는 책임을 감당하려면 어떠한 사상을 가져야 할 것인가? 먼저 자기 제일주의 사상을 버려야 됩니다. 이것이 미국 국민에게 있어서 그 무엇보다 긴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국이 가지고 있던 경제, 문화, 과학, 종교, 정치체제 이런 모든 것이 자기 국민만을 위하여 있다고 주장하게 되면 이는 맞게 됩니다. 그래서 문예부흥운동이 일어나서 각성시켰으며, 오늘날에는 공산주의가 나와서 각성시키고 있습니다. 이제 사상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들이치는 움직임이 나타날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들은 선각자의 마음을 가지고 천적인 움직임을 알아내야 하겠습니다. 이 미국에 일침을 가할 수 있는 종교 이념은 어디서 나올 것인가? 뜻이 있는 사람들은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절대자의 소유 권한을 찾아 드리지 못했기에 치고 어르기라도 해서 그 자리까지 끌고 나가기 위해 있게 되는 역사 발전의 과정적인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문예부흥운동은 무엇인가? 그것은 헬레니즘의 복고운동, 즉 그리스 정신에 입각하여 인간 본성을 회복하고 자아의식을 강조하는 운동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미국을 위주로 민주주의권 내에 있는 모든 기독교는 초대 기독교 정신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드러난 말씀만 믿을 것이 아니라 말씀 속에 내포되어 있는 사상을 찾아 그것을 중심삼고 재무장하는 운동이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만일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현 기독교는 중세의 구교와 마찬가지의 입장에 서고 말 것입니다. 왜 그런가?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이 요구되고, 하나님의 민족, 하나님의 나라가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그것을 위하여 나온 것입니다.
이제는 말씀 절대시대를 지나 실체 절대시대를 건설해야 할 때가 와야 합니다. 그러므로 말씀 통과시대를 지나서 실체 통과시대의 역사적 종말시대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시대가 왈 심판시대인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하게 될 때, 역사는 오늘날 우리에게 경종을 울리고 있습니다. 지난날의 선지선열들이 간 걸음은 우리들의 생활을 움직이고 있으며, 그들의 정신은 우리의 사조(思潮)를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서 이탈되는 사람들은 천법에 의하여 대수술을 받아야 할 때가 기필코 올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땅을 찾으시고, 땅의 사람을 찾아 하늘의 것으로 하신 후에는 어떻게 되어야 할 것인가? 하나님의 생명을 자기 것으로 자랑할 수 있는 날을 맞이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념과 사랑을 만우주와 인류 앞에 자랑할 수 있는 날을 맞이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여러분 가운데 하나님의 생명을 자랑한 사람이 있습니까? 있으면 나와 보세요. 또 영광의 하늘나라를 이루고자 생명까지 바치려고 했던 사람이 있습니까? 있으면 나와 보세요. 그리고 하나님의 참아들이 되고자 이 땅에 천국을 건설하겠다고 나선 사람이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복귀 과정에서 사탄의 참소를 받을 수 있는 권내에서 천국의 맛을 보았을지는 모르나, 사탄을 제거시킨 가운데 진정으로 영원한 평화의 조국, 천국의 맛을 체휼한 사람은 없습니다. 진정한 천국의 맛을 느끼고 하나님의 사랑을 느낀 사람은 사탄과 싸워야 한다는 자극을 받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천국의 맛을 느끼고 하나님의 사랑을 한번 받으면 하나님으로부터 다시는 떠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랑을 체휼한 사람이 이 땅에 나타나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소유가 결정되어야 할 한계선은 어디까지인가? 그것은 한포기의 풀에서부터, 한 평의 땅에서부터, 하나의 사람에서부터, 최말단에서 출발하여 천국까지, 더 나아가 하나님의 심정세계까지입니다.
그런데 그 소유의 형태는 상대적이거나 관념적인 형태이면 안 됩니다. 주체적이고 주관적인 형태여야 합니다. 그러한 세계가 건설되어야만 비로소 하나님의 안식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을 인간이 좋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연고로 하나님께서는 제7일을 안식의 날로 정하고 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6천년 역사가 지난 오늘날까지 안식의 날을 자랑하시며 쉬어 보시지 못한 하나님이심을 여러분은 알았습니까? 알아봤어요?
예수님도 복음의 말씀을 강조했고, 안식일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2천년 섭리역사의 곡절 속에 싸움의 역사를 붙들고 왔지만, 승리의 영광의 한 날을 맞아 아버지께 자랑하고 만민과 더불어 안식하자고 하신 때가 있었습니까? 없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예수께서 안식하실 수 없는 입장에 계시니 우리들도 안식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안식이 오기 전에 전쟁이 있을 것이며, 안식이 오기 전에 고통이 있을 것이며, 안식이 오기 전에 죽음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각오하고 넘어설 때 비로소 우리는 안식의 맛이라도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 이후에 안식의 일면을 느꼈던 것은 그러한 길을 거치고 난 후였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무엇을 소유해야 할 것인가? 안식의 동산, 행복의 동산, 선의 동산, 사랑의 동산, 이상의 동산을 소유해야 되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소유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사탄에게 맞고 하늘에게도 맞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사탄과 하늘에게 맞았습니다. 유대교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몰아낸 동시에 로마인들도 몰아냈습니다.
그 다음에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라고 간절히 기도하신 것을 볼 때 하나님께서도 버리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천국을 소유할 사람, 천국에 소유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찾아 나가는 노정에서 하나님 때문에 가장 불쌍한 입장에 놓이는 사람입니다. 세계 인류 가운데 하나님을 소유할 수 있는 민족은 어떤 민족이냐? 가장 불쌍한 민족입니다. 그런 민족일수록 하나님에게 가까운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끝날에는 대환란이 옵니다. 이것은 무엇이냐? 자기를 중심삼고 소유하려는 마음이 강한 자, 자기를 중심삼고 편안하기를 바라서 행동을 하는 자는 들이침을 당할 것입니다. 이것이 대환란입니다. 그래도 인간들로 하여금 이러한 것을 거치도록 하여 각성해서 대심판을 통과하게 하시려는 아버지를 생각할 때, 우리는 아버지께 감사드려야 합니다.
만일에 이러한 일이 없다 할 때, 참을 위하여 살고 참을 위하여 죽고자 하는 사람들은 불쌍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의 무덤에서 남아지는 그 무리가 안식의 동산의 주인공이 되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볼 때 성경 66권 가운데서 모든 것을 다 버리고라도 예수님이 죽으면서 증거한 그 진리를 붙들고 실천한 사람은 예수님의 소유가 될 것이고 하나님의 소유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과거의 자기를 중심삼고 내가 무슨 책임자니, 내가 어쨌는데 나를 몰라주느니 하며 불평하는 사람이 있다면 보따리를 싸 가지고 나가야 합니다. 그런 무리는 어차피 한 때에 가서 청산됩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정의에 불타는 마음, 새로운 이념의 동산을 건설하고자 하는 간절함을 가졌다 할진대, 여러분의 일거수일투족은 하나님의 소유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것이어야 하고, 하나님의 소유의 권한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따라서 이제 여러분은 자신을 넘어 세계를 대신하여 싸워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의 손길이나 여러분의 발걸음, 여러분의 몸이 그렇게 움직여야 합니다.
오늘날은 하나님의 재창조이념을 성취하여야 할 천주시대입니다. 이러한 때에 새로운 안식의 동산을 건설하기 위한 하늘의 용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사탄이 간섭할 수 있는 모든 요소를 밀어내야 합니다. 그리고 하늘나라에 있는 모든 것을 가져다 하나님을 모시고 위로해 드려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여러분은 하늘을 위하여 걸어갔던 예수님 이상, 6천년 동안 뜻을 위해 갔던 어떠한 사람 이상 어려운 길을 늠름히 걸어갈 수 있는 심정을 갖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세계를 소유하기 전에, 하나님의 이상을 소유하기 전에, 하나님의 고통과 슬픔을 소유하고 하나님이 가신 역경까지 소유하고 나서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천국도 지옥도 주관할 수 있습니다. 지옥도 주관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지옥을 주관할 수 있었느냐? 만일 선한 면에서만 하나님의 뜻을 책임지고 선한 면에서만 하나님을 위해서 죽었다 할 때는, 천국은 주관할 수 있지만 지옥은 주관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악한 자리에서도 자기의 절개를 지켜 천적인 기준을 세웠기 때문에 지옥까지도 주관할 수 있는 기준에 서게 된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지옥의 고난을 밟고 올라서서 사탄을 대하여 늠름하게 승리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어야 되겠습니다. 그러기 위하여 여러분은 하나님의 선을 증거할 줄 알고, 하나님의 의를 염려할 줄 알고, 하나님의 전체적인 뜻을 당당하게 나타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만이 비로소 하늘의 축복을 받을 수 있으며 그때에 가서 우리 기독교인들은 하늘 앞에 나설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최후의 심판 무대까지, 최후의 결정점까지 달려가야겠습니다. 따라서 이제 여러분은 그곳을 향하여 개인으로 민족으로 세계로 달려 넘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넘게 하기 위하여 개인을 넘어 민족, 세계가 전부 들이침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서 같은 이념으로 감사하며 넘어서는 무리가 새로운 하늘의 백성이 되어 새로운 가정, 새로운 사회, 새로운 국가를 형성하여 천국을 건설한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위하여 염려하고 우는 사람은 불쌍한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 통일교회 교인들에게는 금식도 시켜 보았습니다. 그건 왜냐? 자기를 중심삼고 허덕이는 그 자리를 떠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금식도 시키고 시련도 겪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를 피하면 들이 맞는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하며 넘어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탄도 하나님의 일을 했다는 기준에 세우시기 위하여 6천년 동안 참고 나오셨습니다. 여러분들이 악을 중심삼고 움직이던 모든 사람들을 선으로 굴복시키는 그날이 대심판의 날입니다. 그러한 입장에 서서 하나님께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이 대심판을 넘어설 것이며, 하나님의 소유가 될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하나님은 자기중심적이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있다.’고 하셨는데 이것은 고마운 말씀입니다. 여러분도 그러한 느낌을 느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여러분은 잃어버린 줄 알았던 세계가, 만우주가 더 멋지게 하나님과 더불어 여러분 앞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네 안에 있고 네가 내 안에 있다.’ 는 말씀은 공언(空言)이 아닙니다. 그래야만이 하나님의 것이자 내 것이요, 하나님이자 내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랑할 만하지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내가 없으면 안 될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위해 만물을 지으셨는데, 인간에게 준 만물을 다시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초점의 대상으로 세웠기 때문에 인간 없이는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을 보면 전부 도는 이치입니다. 힘의 작용이 직선으로 뻗어나가면 영원한 소모입니다. 하나님께서 피조세계를 창조하신 제일 원칙적인 목적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그것은 직선으로 나가는 힘을 돌리기 위하여서였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이치는 도는 이치이며, 그와 동시에 움직이는 이치입니다.
여러분들이 화학을 공부하려면 물질을 연구 분석하고 운동하고 작용하는 모든 현상을 관찰하게 되는데, 그 이치를 벗어난 존재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모든 것이 360도를 돌고 있는 것입니다. 우주도 돌고 사회도 돌고 내 마음도 돌고 있습니다.
온 우주의 중심인 하나님의 심정을 중심삼고 돌 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이 돌면 그도 돌 것입니다. 하나님이 도는 한 이 우주도 돌 것입니다. 하나님이 돌면 우리가 돌고 만물이 돌게 될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 서야 비로소 하나님의 심정이 우리의 심정으로 화(化)하는 것을 느낄 것이며,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자신의 몸 안에 있는지 몸 밖에 있는지 모르는 경지를 강하게 느꼈을 뿐 아니라, 삼층천(三層天)이라든가 무형실존체의 존재 가치를 느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신앙자의 위력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런 경지에서 주장할 수 있는 그 한 때를 바라고 지금까지 참아 나오고 계십니다. 기독교 신자들도 그러한 한 때를 바라고 지금까지 참아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찾아오는 그 한 때를 맞이할 수 있는 심적 기준이 되어 있는가? 그러려면 여러분 자신이 먼저 하나님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내 주관도 하나님 것이요, 내 생명도 하나님 것이어야 합니다. 나아가 가정도 사회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요, 다 아버지의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취하시더라도 사탄이 주관하여 더럽혀진 것은 취하실 수 없습니다. 사탄의 요소(죄악)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한번 때려서 죄악의 요소를 제거하고 난 다음에야 취하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서러움이 어린 복귀역사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물을 드리게 될 때는 칼을 들어 쪼개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도 그러한 때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끝날에는 갈라지는 역사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갈라져서 전쟁을 할 것입니다. 한국은 남북한으로 갈라져 있습니다. 세계에 한국과 비슷한 국가가 6개국 이상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이치를 벗어나서는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이런 것을 알아 가지고 자신의 생명을 아버지께 드린다고 하여 하나님께서 척척 받으실 수 없습니다. 그냥 받으신다면 사탄의 무한한 참소에 걸리게 되므로 하나님은 채찍을 들어 치시고야 받으십니다. 그래야 사탄이 참소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택하셨던 노아도 그러했고, 아브라함도 그러했고, 모세도, 예수님도 그러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들도 그래야 되는 것입니다. 만일 그 길을 피하여서 도망쳐서 돌아가겠다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정상적인 문으로 들어가려는 무리가 아닙니다. 정문이 아니라 담을 타고 넘으려는 절도나 강도와 같은 무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절도나 강도는 어떤 사람이냐? 남의 것을 자기 것으로 행사하고 이용하겠다는 자가 절도요 강도인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알고 복귀의 고비를 넘어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볼 때 여러분은 ‘내 생명을 아버지께 바치겠습니다.’ 하고 아무리 기도드려도 ‘오냐 네 생명이 참 그리웠다.’ 하며 받으실 수 없는 아버지의 서글픈 사정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러한 사정을 알기 전에는 우리의 모든 것을 아버지 앞에 드린다 해도 절대 받지 못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정을 인간들에게 말씀해 주시고 또한 풀어야 했던 예수님께서 그러지 못하고 가신 연고로 재림이라는 서글픈 사실이 남아졌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끝날에 처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러한 ‘아버지의 서글픈 사정, 곡절의 그 마음을 저희들에게 가르쳐 주시옵소서’라고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열 번으로 탕감받아야 할 것을 한 번으로 받을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 길을 찾아 나서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끝날 기독교 성도들이 갈 길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자리를 찾아서 넘어가야 할, 즉 환란의 길을 먼저 넘어 승리하여야 할 세계적인 운명의 길에 처해 있는 우리들인 것입니다.
끝날에는 대심판, 7년 대환란이 온다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맞기를 싫어하고 피하는 자는 천국 가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때를 즐겨하며 ‘어서 오게 해주시옵소서. 한 시간에 부딪치고 부딪쳐, 내 생명이 끊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7년 대환란을 넘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할 수 있는 아들딸이 나타나기를 하나님께서는 바라고 계신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자가 되면 6천년 역사의 소유는 문제없고, 천국과 하나님의 심정까지 소유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언제든지 말씀드리고 요구하면 하나님께서 응해 주시는 이러한 소유적인 존재, 즉 하나님의 절대 대신의 가치적 존재로 설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아버지는 우리를 자랑하시고, 우리는 수고하신 아버지를 대하여 공손히 경배하며 위로해 드릴 수 있는 한 날이 벌어진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잃어버린 참다운 자녀를 찾기 위해 복귀의 서글픈 노정을 헤쳐 나오시는 아버지의 심정과 아버지의 사정과 아버지의 형상을 이 시간 마음으로 몸으로 더듬어 체휼할 수 있는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심정에 사무친 사랑의 마음으로 아담 해와를 사랑하지 못하시고, 6천년 기나긴 세월을 사랑에 굶주려 나오신 아버지의 심정을 체휼할 수 있는 아버님의 아들딸이 되게 해 주시고, 서글픈 아버지의 심정을 붙안고 위로해 드릴 수 있는 간곡한 자녀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이 마음과 몸을 아버지의 것으로 바쳐 드릴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저희의 몸과 마음을 저희의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영원하신 아버지의 것으로 자랑할 수 있는 승리의 제물이 되게 인도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나이다. 그리하여 6천년 동안 참다운 사랑의 심정으로 붙안고 사랑하지 못하였던 심정을 해원해 드릴 수 있는 당신의 혈족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땅 위에 수많은 사람이 살고 있지만, 아버지께서 내 아들딸이라고 사랑하고 사탄 앞에 내 아들딸이라고 변명하며 붙안고 사랑할 수 있는 아들딸이 없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2천년 전 예수님께서 이 땅의 만민을 구하기 위하여 싸움의 노정을 걸을 때에도 아버지께서 친히 붙들고 사랑하지 못하셨다는 것을 저희들이 알고 있사옵나이다.
아버지께서 사랑하는 자녀는 어느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이다. 아버님의 심정에 사무친 예수님이었지만 당신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는 것을 저희들 알고 있사옵니다. 사랑하지 못한 아버지의 사정도 저희들이 알고 있사오니, 영광의 한 날을 세우시고 하늘의 아들딸을 세우시어서 사무친 심정을 푸시옵고, 붙안고 사랑하며 모든 심정을 토로하시옵소서. 그런 하늘의 아들딸이 이 땅에 나타나는 것이 아버지의 소원인 것을 저희들이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저희들은 가진 것 없고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할지라도, 아버지의 사랑의 품에 품기어 영원한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아들딸이 되기를 원하옵나이다.
사랑하는 아버님! 저희를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권능의 손길을 펴 주시어서 저희를 성별시켜 주시옵소서. 악의 요소를 제하여 온전히 아버님의 것이 될 수 있는 저희의 몸과 마음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그러한 모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 저희의 마음을 아버지께서 아시옵고 저희의 몸을 아버지께서 아 시오니, 이 시간 아버지의 존전에 엎드린 저희의 이 한 몸 마음에 부족한 것이 있다 할진대, 아버님, 능력을 나타내 주시옵고, 능력의 손길, 재창조 의 역사를 일으켜 주시어서 성별된 모습이 되게 허락해 주시옵소서. 아버님만이 운행할 수 있으며, 아버님만이 주관할 수 있으며, 아버님만이 권고할 수 있는 이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사랑하는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많은 사람이 이 땅 위에 살고 있사온대, 그 가운데 보잘것없는 저희를 택하시고 아무것도 아닌 저희를 불러 주신 아버지 앞에 책임과 사명을 감당하지 못할까봐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있사오니, 아버님이시여! 이 시간 저희를 권고하여 주시옵소서. 모세가 지팡이로 홍해를 쳤을 때 홍해가 갈라진 것을 아옵니다. 아버지께서 저희의 지팡이가 되어 주시옵고, 아버지의 손길이 움직이는 대로 움직일 수 있는 하늘의 막대기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날 여기에 모인 당신의 아들딸들, 아버지, 친히 주관하여 주시옵고, 싸움의 터전을 향하여 행군하지 않으면 안 될 최후의 시간이 이미 되었사오니, 이제 자기를 살피어 내가 어느 곳에 처해 있는가 분별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것으로 드려지는 저희가 되게 인도하여 주시옵고, 각자의 입장에서, 처한 곳곳에서 아버지 앞에 제물로 드려지는 아들딸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삼천만을 대신하여 저희들이 싸움의 한 날을 정하고 기대하고 고대하고 있사오니, 아버지, 그날을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저희가 새로운 생명의 폭탄이 되어 던져짐으로 인해 죽었던 생명들이 살아나고, 아버지의 안식의 터전을 찾아 드릴 수 있는 기쁨의 날이 어서 속히 지구촌 가운데 나타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이 민족 가운데 나타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제 저희의 불충한 몸 마음을 하나로 묶어 아버지 앞에 드리고자 원하오니, 스스로 죄의 모든 요소를 버리고 순결한 몸 마음으로, 아버지의 것만으로 드려질 수 있게 축복하여 주시옵고, 사탄의 침범이 없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니다. 아멘.
아버님, 이들의 마음을 주관하여 주시옵고, 엎드린 이 자녀들의 심령 심령이 여러 가지 모양을 하고 있을지라도, 아버님의 생명의 움직임에 의해 통일된 성품을 갖추어 하나의 제물로서, 이 시간 아버님을 모실 수 있는 자녀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날은 뭇생명들이 아버지 앞에 나와 아버지를 찬송하는 날인 줄 아오니, 아버지의 이름을 노래하는 곳곳마다 사랑의 손길을 펴 주시옵고, 하늘의 은사를 내려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특히 외로운 식구들이 이 한 시간 아버님께 간구하고 있을 줄 아오니, 그들이 호소하는 음성을 들으시고, 그들의 간곡한 심정을 어여삐 여기셔서 그들이 바라는 뜻과 그들이 요구하는 소원을 성취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제 여기에 모인 당신의 아들딸 앞에 한마디 말씀을 전하고자 원하오니, 주는 자의 마음이나 받는 자의 마음이 둘이 되지 말게 인도하여 주시옵고, 동하면 같이 동하고 정하면 같이 정하여 아버지의 현현하심에 저희들도 같이 화하여, 지으신 본연의 동산의 즐거움과 은사의 심정을 아버지를 모셔 놓고 체휼할 수 있는 이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헛된 자기를 중심삼은 모든 생각이나 주의 주장, 관념과 의식, 하늘을 서럽게 하는 심정을 갖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모든 것을 다 내어놓고, 무아의 심정과 어린애 같은 마음을 갖고, 아버지께 바쳐 드리고 뜻대로 맡 길 수 있는 이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올 때,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방금 봉독한 본문 말씀은 하나님께서 아담 해와를 지어 놓으시고 축복하신 말씀입니다. 자기의 형상대로 일남 일녀를 지으시고 이 모든 만물을 주관하고 동시에 이 땅을 주관하면서 후손을 번식하라고 하신 축복의 말씀입니다. 오늘 여러분과 같이 생각하려는 말씀의 제목을 ‘하나님이 주관하시려는 복지를 찾아 세우자’입니다. 이런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이 아직까지 생각하지 못하던 더 높은 이념을 중심 삼고 피조세계를 지었던 것입니다. 그 이념을 중심 삼고, 즉 하나님과 인간이 영원한 사랑권 내에서 같이 살기 위하여 피조세계를 지으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이러한 아버지의 뜻과, 즉 창조주 하나님의 뜻과 하나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 연고로 하나님이 인간 앞에 나타내시려던 이념은 이념대로 남게 되고, 그의 경륜은 경륜대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복귀, 혹은 구원이라는 서글픈 조건이 개재하게 되었고, 그런 조건들을 통해 하나님이 인간을 대해 나오고 계시다는 것을 우리들은 원리를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타락된 나, 오늘의 이 나는 타락하기 전 본연의 나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해야 할 필연적인 의무요, 하나님께서 이루어 놓아야 할 필연적인 책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하나님은 이 땅 위에 있는 인간을 찾아오시기 위하여 허덕이셨고, 인간은 하나님을 찾아가기 위하여 허덕이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느껴야 되겠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셨던 발자취를 찾아 나가는 것이 우리들의 신앙생활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하나님과 선지선열, 그리고 우리의 선조들이 인간을 다시 찾기 위하여 수고의 노정, 애달픈 피의 노정을 걸어온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면 하늘이 찾아오시고 우리 인류가 찾아온 그 종착점이 무엇이냐 하면 ‘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늘이 인정할 수 있는 나, 역사를 대표할 수 있는 ‘나’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섭리의 종말시대인 이때, 필연적으로 그러한 사람이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러한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다 할진대, 하나님께서 6천년 동안 찾아오신 섭리의 노정도, 우리 인류가 6천년 동안 뜻을 찾아서 허덕이던 신앙노정도 다 수포로 돌아간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하늘이 요구하고 인류가 요구하는 그 ‘나’는 어떠한 ‘나’인가? 이는 하나님이 나타내시지 못했던 창조이념을 갖출 수 있는 심정과 사정과 소망을 가진 ‘나’요, 오늘날 인간 역사노정에 있어서 인간이 체득하지 못하였던 심정과 혹은 천적인 심정을 갖추어 온 만물을 대하여 노래할 수 있는, 즉 만우주의 주관자의 영광의 가치를 갖춘 ‘나’입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날 인간들은 그 사람을 찾아서 그와 인연을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과 인간들이 인연을 맺지 않는다 할진대는 인간들은 구원될 수 없으며 하나님의 구원섭리도 완성을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 오늘날 역사적인 목적도 어떠한 완성의 기준을 세울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인간들이 그 이념적인 표적을 향하여 달려왔다는 것을 명심해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인간이 타락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타락이란 무엇인가? 타락이란 인간이 주인의 입장을 잃어버린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만우주의 주관자로서 늠름하게 나설 수 있는 입장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은 인간을 당신의 실체로 세우기 위해, 만물만상 앞에 나서서 호령하게 될 때 만상이 동하고 정할 수 있는 이런 본연의 한 자체로 세우기 위하여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본연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오늘날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다시 복귀하기 위하여 본연의 ‘나’를 찾아 헤매는 것이 복귀역사 노정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무엇을 잃어버렸는가 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렸고, 하나님의 말씀을 잃어버렸으며, 그 말씀의 실체를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본연의 자아를 찾아 나가고 있는 우리에게 있어서 필연적으로 해야 할 것이 무엇이냐? 그것은 잃어버린 것들을 다시 찾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사람을 잃어버렸으니 이것을 찾아 우리는 헤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구원섭리해 오신 하나님도 이것을 찾으려 하셨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잃어버린 인간, 말씀을 잃어버린 인간, 실체를 잃어버린 인간, 인간은 왜, 무엇을 못하였기 때문에 사랑과 말씀과 실체를 잃어버렸느뇨? 믿지 못했기 때문에 이것들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믿지 못한 연고로 이것들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찾아오시려면 인간들이 믿음의 조건을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믿음을 조건으로 해서 인간들을 대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을 전제조건으로 하여 인간들을 구원섭리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실체를 찾고, 말씀을 찾고, 하나님의 사랑을 찾아 나가는 복귀노정에 있어서도 먼저 무엇을 찾아야 되느냐 하면 믿음을 찾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을 찾아 나서는 인간들 앞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소개되어 있고, 하나님의 말씀이 소개되어 있고, 하나님이 찾고자 하시는 실체가 소개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완전한 믿음이 무엇이냐? 오늘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와 완전한 일체의 관계를 맺지 않으면 안 됩니다. 또 믿는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을 소유해야 하고, 하나님의 실체를 소유해야 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해야 합니다. 이런 믿음이 복귀노정에 있어서 필연적인 조건입니다. 이러한 연고로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조건을 걸어 놓고 우리 인간을 찾아오고 계십니다.
인간들이 실체를 갖추고, 말씀을 갖추고, 사랑을 갖추고, 사랑과 믿음이 화합하여 사랑만 남게 되면, 그 사랑으로 하나님을 대할 수 있게 인도해온 것이 복귀의 골자입니다. 이와 같은 일이 복귀섭리노정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한 개체를 두고 보더라도 몸이 있고, 마음이 있고, 영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지 못하고 타락한 연고로 몸과 더불어 만물을 잃어버렸고, 하나님의 말씀을 잃어버렸고,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 이것이 인간이 저지른 죄의 원천적인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한 개체가 이것들을 복귀하려면 역사노정의 전체적인 죄악상을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복귀의 노정을 걸어야 하겠는가? 오늘날 타락된 이 세상은 몸의 안식처를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즉 몸뚱이만을 중심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몸이 안식하려면 물질이 필요하므로 지금까지 인류는 물질, 즉 외적인 조건을 만족시키기 위해 투쟁해 나왔습니다.
내 몸이 안식하는 동안에 그 다음에는 내 마음이 안식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 마음의 안식의 동산은 어디뇨? 오늘날까지 인간들은 그곳을 찾아 헤맸던 것입니다. 나아가 그 마음의 복지를 찾은 후에는 무엇을 찾아 나가야 할 것인고? 여러분은 영원하신 영혼의 복지를 찾아야 되고, 영원하신 내 생명의 복지를 찾아야 합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이와 같이 몸이 안식할 수 있는 복지를 찾고, 마음이 안식할 수 있는 복지를 찾고, 영이 안식할 수 있는 복지를 찾은 후에 믿음을 완성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결부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역사의 발전노정을 가만히 헤아려 보면, 역사는 지금까지 물질을 중심삼고 투쟁해 나온 역사였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전까지는 물질을 중심삼고 투쟁해 나왔습니다. 즉 경제적인 기반을 찾아서 몸의 안식처를 찾아서 헤매는 놀음을 2차대전 전까지 해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다음, 2차대전 이후의 역사는 어떠한 역사인가? 정신계 즉 인간의 본연의 마음을 찾아 나가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사상과 주의를 중심삼고 벌어지고 있는데, 인간의 마음의 복지를 해결해야 할 사상과 주의가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지금 막히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몸을 잃어버렸고, 마음을 잃어버렸고, 영을 잃어버렸습니다. 이것을 복귀하고 안식의 조건을 찾아 헤맨 역사가 인류역사인데, 물질을 찾아 헤매던 단계를 지나 지금은 양심을 찾아 헤매야 할 단계에 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세계가 사상과 주의를 중심 삼은 2대 진영으로 갈라져 대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나아가 우리는 복귀의 노정을 거쳐 나가야 할 입장에 있는 연고로 물질을 중심한 이념을 넘어서서 마음을 중심한 이념을 찾아 헤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종착점이 인류역사 노정에서 없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마음의 복지를 찾은 다음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영원한 정적인 복지를 찾아야 됩니다. 최후의 이 땅 위에 남아질 수 있는 하나의 승리의 조건이 뭐냐? 그것은 하늘땅을 초월할 수 있는 정적인 주의, 마음도 움직여낼 수 있고 우주도 움직여낼 수 있는 주의입니다. 이 우주는 다른 어떠한 인연에 의해서도 절대 움직이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도 어떠한 정적인 이념의 세계를 찾아 헤매고 있다는 것을 양심을 통해 봄으로 알 것입니다.
자본주의 시대도 지나가고, 사상의 시대도 지나갔고, 이제는 양심의 시대가 와야 될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양심의 시대를 넘어 영원한 천적인 사랑을 중심삼은 심정의 시대가 와야 합니다. 이런 시대를 거치는 것이 타락한 인간들의 운명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영의 안식처를 찾아야 하고, 마음의 안식처를 찾아야 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은 영원한 정적인 안식처를 찾아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길은 인간이 아니 갈래야 아니 갈 수 없는 운명의 길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 한 자체가 그런 입장에 서 가지고, 어떠한 권한을 회복해야 되느냐? 하늘과 땅을 주관하는 권한을 회복해야 됩니다. 이것은 인간이 당연히 행사할 수 있는 본연의 권한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하늘땅을 대표하여 하늘땅을 주관하고, 하늘땅을 귀일시켜 하나의 심정의 이념세계를 찾아 세워야 합니다. 이러한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세계가 인간의 본연의 안식처였는데,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그 본연의 안식처를 잃어버렸고, 그로 인해 복귀의 노정이 있게 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떠한 과정을 거쳐 나가야 되는가? 나 한 개체를 중심 삼고 가정을 거치고, 사회를 거치고, 국가를 거치고, 세계를 거쳐나가야 됩니다. 이것이 복귀노정에 있어서의 단계입니다.
만일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으면 인간의 마음과 본연의 이념이 실제생활에서 조화를 이루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이념은 이념대로 남아지고 인간의 마음은 딴 길로 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이념과 마음의 간격이 인간에게 고통으로 남아졌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무엇 때문에 그렇게 되었느냐? 하나님을 배반하고 천륜의 법도를 어긴 사탄 때문입니다. 그러면 사탄이 오늘날까지 인간을 지배해 나오는 이념의 복지는 어디까지였던가? 그것은 이 땅덩어리, 보이는 실체세계 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본연의 이념의 복지를 남겨 주고 먼저 사탄이 주관하는 이 땅의 만민을 붙안고 사탄과 대결해 나오셨습니다. 이것이 복귀섭리역사입니다. 이제 하나님이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새로운 세계가 인류 앞에 나타나야 되겠습니다. 그 세계가 나타날 수 있는 한 날이 기독교가 말하는 재림의 날이요, 그 한 날이 종교에서 말하는 심판의 날이라는 거예요.
옛날부터 인간들은 서로 싸워 나왔습니다. 그래서 씨족으로부터 부족, 민족, 국가간의 싸움을 거치는 동안 점점 여러 민족이 융합되었고, 현재는 두 세계로 형성되었습니다.
인류가 이러한 과정을 거쳐 나온 것은 인류가 복귀의 운세를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땅 위에 그런 형태가 갖추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탄이 이런 두 세계를 각각 대하여 지금도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 하나를 놓고 보면 인간은 아직 몸을 복귀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몸을 복귀하기 위한 투쟁의 역사가 2차대전 이전까지의 투쟁역사입니다. 2차대전 이전은 물질을 중심삼은, 즉 경제를 중심한 투쟁의 역사였습니다. 2차대전 이전까지는 물질, 경제가 좌우되면 나라의 주권과 세계 전체가 좌우되어 들어갔습니다. 이러한 물질을 중심한 시대가 지나간 후에야, 즉 2차대전 이후에야 사상의 시대가 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역사 발전의 필연적인 흐름이었습니다. 이제 정신을 중심한 주의와 사상의 시대가 왔습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어떠한 사상이 승리할 것인가? 그것은 물질을 지배할 수 있는 사상입니다. 마음이 몸을 주관해야 하듯이 사상과 주의가 물질을 지배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세계의 모든 주권국가는 반드시 경제의 기반 위에 성립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국가의 이념이 세계적으로 확산되려면 그 이념은 물질을 초월한 이념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민주진영과 공산진영도 여러 나라들이 각기 주권을 갖고 서로 대결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어느 진영이 승리할 것인가? 그 승리를 결정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어느 진영이 먼저 소유하고 있는 물질을 약소국가들에게 줄 줄 아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여기에서 승패가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자유진영에서 약소국가들에게 경제원조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지만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소련은 이것을 약점으로 잡아 경제공세를 취하여 나오고 있습니다. 이집트에 대한 경제원조를 하면서 민주진영의 약점을 이용하려는 작전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민주진영에서는 이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전세계에 주의 사상을 전파하려면 그 사상이나 주의는 물질을 지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 그러한 사상이라도 그것을 전세계에 전파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 다음에 인간이 찾아 나가야 할 최후의 길이 무엇이뇨? 양심주의 세계를 지향해 나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인간들로 하여금 주의와 사상의 시대를 지나서 양심의 시대를 지향해 나가게 하고, 영원한 생명의 세계를 지향해 나가게 하고, 하나님의 정적인 이념의 세계를 지향해 나가게 할 수 있는 무엇이 나와야 됩니다. 이것이 무엇인지 오늘날 인간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계신다 할진대는 하나님은 어느 때를 바라보고 작전계획을 세우시고 준비해 나오셨느냐? 하나님은 사상의 시대를 지나 양심의 시대를 바라보고 나오셨습니다. 그때가 바로 하나님의 작전과 계획이 실천 단계로 들어가는 때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앞에는 2대 진영, 즉 민주진영과 공산진영 앞에 종교의 형태를 갖춘 아랍권이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옛날의 사라센제국을 모방한 회회교 문명권을 형성하고, 하나의 이념을 내세우며 하나의 블록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나타내느냐? 인류를 종교이념의 세계로 귀일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복귀섭리의 목적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런 복귀섭리의 목적의 최후에는 이러한 작전이 필연적으로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민주진영과 공산진영이 싸워 가지고 공산진영이 깨어진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공산진영의 여러 나라들이 자유진영 쪽보다는 아랍권으로 흡수될 가망성이 많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알아야 됩니다.
오늘날 이 땅에 하나의 목적, 하나의 이념을 중심한 통합세계가 건설되어야 할진대, 이 시대에 있어서 민주진영에서는 무슨 일이 있어야 할 것인가? 하나님의 심정을 중심한 이념을 갖춘 종교, 하나님의 실체인 인간을 사랑하는 종교, 모든 주의 주장을 대신할 수 있는 종교가 필연적으로 나와야 합니다. 그런 종교가 나오는 끝날이 다가온다는 사실을 오늘날 인간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어느 날에나 민주진영에서 아랍진영, 즉 회회교권을 제압시킬 수 있는, 통일의 이념을 갖춘 종교가 나타날 것인가?
통일 이념, 이것은 새로운 시대에 있어서는 반드시 나와야 될 역사적인 기준이요, 우주적인 기준이요, 천주적인 기준입니다. 그런 기준 위에서 종교의 통일이 벌어진다는 것을 오늘날 여러분들은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통일교회라는 이름이 일리가 있는 것입니다.
아직까지 통일이념을 중심삼고 계속 발전하면서 그 이념을 주장하고, 이런 세계의 움직임 앞에 선두에 서서 싸워 나가는 어떤 몰림받는 무리가 나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제 사상의 시대, 주의의 시대에 있어서 우리가 찾아 세워야 할 것이 무엇이뇨? 인간들은 마음으로 본향을 그리워해 왔고, 하나님의 심정을 중심하여 즐길 수 있는 사랑의 동산을 꿈꾸며 갈망해 왔습니다.
우리가 역사발전 과정을 살펴보면, 인류 최초의 문명인 이집트 문명은 나일강을 중심한 하천문명입니다. 즉 이집트 문명은 나일강을 모태로 해서 발상된 문명이라는 것입니다. 그 이집트문명은 또 어떻게 해서 발전되었는가? 그들은 ‘강 저편에는 무엇이 있을 것인가?’ 하고 궁금해했습니다. 항상 강 건너 저편에 가 보기를 소망했는데 이런 것들이 이집트문명을 발전시키는 정신적인 배경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하천문명시대가 지나간 이후에 지중해문명이 건설되었습니다. 피안을 바라보는 간절한 마음, 소망의 심정이 동기가 되어 인류사회가 발전돼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피안을 향한 간절한 심정이 문명의 혁명을 일으켰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리스 로마시대에는 지중해를 중심삼은 문명권이 형성되었습니다. 지중해를 바라보며 지중해 너머, 즉 피안에 대한 관심을 가진 민족이 지중해를 지배하였던 것입니다. 16세기에 들어와서는 지중해문명이 쇠퇴하고 대서양 문명권이 형성되었습니다. 그후 대서양을 건너가 보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의지와 노력에 의해 대서양을 횡단하여 미국에 도달하였고, 이제는 미국과 아시아를 잇는 새로운 태평양문명권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때가 거의 다 되었다는 거예요.
이제는 인간들이 이 땅에서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게 되었고, 바라던 소망도 이루었기 때문에 우주로 진출하려 하고 있습니다. 즉 새로운 피안을 찾아 나서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우주시대가 열릴 것입니다. 그리고 ‘달나라에 가겠다.’는 소망대로 실제 인간들이 달에 도착할 것입니다.
그러면 역사발전 노정에서 새로운 이상향을 소망하고 실체적으로 개척하게 했던 인간의 심적인 동향과 이상향을 그리는 인간의 이러한 마음의 움직임이 우주를 정복한 후에는 끝날 것인가?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우주를 넘어서 마음의 동산, 세계 만민의 마음을 주관할 수 있는 동산, 마음의 세계를 찾고, 그 다음 마음세계를 넘어서 신이 실존한다면 그 신의 이념세계에서 완전히 신과 일체를 이루고, 신의 이념에 취하여 다른 아무 것도 요구되지 않게 돼야 이상향을 그리는 마음의 움직임이 끝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인류가 과학문명을 노래하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인가? 16세기 후반기부터였습니다. 과학문명의 역사는 겨우 4백년밖에 안 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6천년의 인류역사를 생각해 볼 때, 인류는 6천년 내 내 마음으로 이상향, 즉 천국을 지향해 나왔고, 하나님을 찾아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찾아 천륜에 의해서 하나님과 인연맺기를 바라고 나왔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여러분은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인간의 마음이나 양심을 부정하는 책자는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 땅에 마음을 부정하는 세계, 마음을 부정하는 주의는 없습니다. 인간이 영원한 이념의 세계, 인간의 감정과 통할 수 있는 체휼의 세계를 흠모하고 지향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주의는 없는 것입니다.
수많은 교회와 수많은 종교가 이 마음의 세계를 이념으로 하여 가르쳐 왔는데, 헛것을 가르쳐 온 것인가? 천만의 말씀입니다. 수천 수만 권의 책자를 보아도 그 이념을 부정하는 책자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종교의 이념이 옳은데도 그 이념이 이루어지지 않는 원인은 무엇인가? 이것은 인간이 타락된 연고입니다.
이제 인간들은 마음의 세계, 영원한 영적인 세계를 돌파하여 행군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끝날에 처한 인간들이 해결해야 할 중요한 문제라는 것을 여러분은 확실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종교와 도를 통해 가지고 주의 주장의 세계를 넘어서 한 때를 바라보고 나오십니다.
오늘날 공산주의자들이 물질적인 혁명을 주장하고 있는데 이것 가지고는 안 됩니다. 물질적인 혁명,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더 나아가서 양심의 혁명을 제시해야 합니다. 그러면 양심의 혁명을 제시하며 나설 수 있는 하나의 주의는 어디 있을 것인가? 더 나아가서 심정적인 혁명을 일으킬 수 있는 주의는 없겠는가? 이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주의가 나오기 전에는 이 세계는 통일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그러한 주의가 나온다면 그 주의는 물질을 기반으로 해야 하고, 말씀을 기반으로 해야 합니다.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믿음을 잃어버렸고, 사랑을 잃어버렸고, 말씀을 잃어버렸고, 실체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이것들을 복귀하기 위해서 인간들은 먼저 물질주의시대를 거쳤고, 이념과 사상의 시대를 지내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정적인 시대가 오는 것입니다.
말씀을 믿게 하는 것은 정(情)입니다. 사람들은 지정의(知情意)라고들 하지요. 그러나 정이 먼저라는 거예요. 이 인간 본연의 정을 폭발시켜 가지고 본연의 정의 세계에서 정적인 감흥으로 피조만물을 노래할 수 있는 위대한 예술가가 나와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정적인 위대한 과학자와 종교가가 나와야 하겠습니다.
오늘날까지 인간들은 무엇을 찾아 헤맸느뇨? 인간들은 주의도 만족해하지 않았고 믿음도 만족해하지 않았습니다. 참다운 말씀, 진리를 찾아 헤맸다는 것입니다. 그 진리를 찾아서는 무엇을 하자는 것이냐? 내 마음이 새로운 이념을 중심하고 생명이 약동할 수 있는 봄동산을 맞이하자는 것입니다. 인간들로 하여금 생명이 약동하게 하는 진리라야 참다운 진리일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기독교를 통하여 진리의 말씀을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인간들에게 실체를 복귀하기 위한 말씀을 주셨으나, 그 말씀의 사명이 종결되지 못한 채 역사는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2천년 전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그 말씀의 사명을 완결시키고 마음의 혁명과 정(情)의 혁명을 일으키려고 하셨는데, 인간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고 모시지 않은 연고로 이런 것들이 이루어지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이것들이 인류 앞에 다시 일으켜야 할 것으로 남아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있는 기독교 신자들뿐만 아니라 그 외 수많은 종교인들도 그러한 참된 말씀을 고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타락 인간들을 복귀할 수 있는 몸과 마음, 정, 모든 것을 통할 수 있는 진리의 말씀이 나온다 할진대 세계는 자연히 통일될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들을 구원하는 복귀섭리가 필연적으로 있어야 하는데, 타락으로 인해 잃어버린 것들을 그대로 되찾는 내적 혁명이 있어야 합니다. 이 내적 혁명을 수행해야 할 사람들이 끝날의 기독교인들이요, 종교인들이요, 양심가들입니다. 사실 양심가들은 하나님의 복귀섭리에 큰 기여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아무리 고생을 했더라도 말세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성경 66권의 말씀은 고마운 말씀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통해서는 인간의 본연의 마음을 불러일으키고 본연의 심정을 유발시키기는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두 가지 내용을 갖춘 새로운 말씀을 우리는 찾아야 합니다.
만일 이러한 말씀을 찾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6천년 섭리역사는 실패로 돌아갑니다. 이러한 현상을 보게 될 때, 하나님의 복귀섭리가 실패로 돌아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세계의 문화와 사상이 규합되어 나오는 역사의 추세를 감안해 볼 때, 이제 마지막 날에 꼭 필요한 것은, 본연의 마음을 움직이고 본연의 심정을 움직여낼 수 있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2천년 전에 이 땅에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시고 싶은 말씀을 다 하시지 못하셨습니다. 또 인간들을 사랑하고 싶으셨지만 다 사랑하시지 못하셨습니다. 이것이 인류에게는 큰 슬픔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에게도 슬픈 일이었습니다. 복귀노정에 있는 인간들에게 몸과 마음의 세계, 정(情)의 세계, 그리고 하나님의 심정을 소개하는 말씀을 해 주지 못한 것이 하나님의 슬픔이요, 예수님의 슬픔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들이 그 말씀을 찾는 데 있어서, 하나님은 우주를 초월해서 존재하시는 분은 아닙니다. 피조만물도 하나님과의 관계와 인연을 벗어나 가지고는 완성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의 집을 짓는데도 모든 재료를 연결시키고 서로 연관성을 갖게 해서 지어야 집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제 성경 66권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마음과 심정을 찾아야 되었고, 예수님의 마음과 심정을 찾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마음과 심정을 알아야만 내 마음과 심정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하나님의 마음과 심정, 예수님의 마음과 심정이 완전히 나타나 있지는 않습니다. 성경에 ‘천국이 네 마음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과연 ‘천국이 내 마음에 있다.’고 할 사람이 얼마나 있습니까? 그런 사람이 어디에….
오늘날 그런 것들을 찾아야 할 우리들, 여기에서 생각해 볼 때, 좋은 성경구절을 외는 사람은 많습니다, 훌륭한 명문구들을. 이제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과 심정을 알려면, 만민의 구주요 만인간의 참아버지로 오셨던 예수님께서 왜 이 땅 위에서 슬퍼하셨는가, 그리고 예수님께서 무엇을 제일 슬퍼하셨는가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이것을 알아야 예수님의 마음과 심정을 알았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제일 억울하고 분하고 고통스러워했던 것이 무엇이냐, 그 곡절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 가지고 예수님을 대해 당신의 심정과 마음이 이러이러하지 않습니까? 내가 그 심정과 마음을 아옵니다.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위로해 드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비로소 참다운 인간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 하나를 찾기 위하여 지금까지 슬퍼하시고, 고통당하신 그 역사적인 내용이 이러이러했다, 시대적인 내용이 이러이러하다, 나아가 미래에 대한 소망이 이러이러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 전세계의 인류가 허덕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슬픔의 길을 걸으시고, 고통의 길을 걸으시고, 십자가의 길을 걸으신 후에야 부활의 기쁜 한 날을 맞이하셨는데, 하늘 대해서는 기뻐할 수 있었으나 땅의 인간들을 대해서는 기뻐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부활의 한 날을 맞은 예수님께서 어찌하여 하나님을 대해서는 ‘아버지시여!’라고 하며 기뻐하실 수 있었으면서 인간들을 대해서는 기뻐하실 수 없었던가?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의 심정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정을 붙들고 하나님의 마음을 붙들고 눈물 흘리며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땅 위의 인간들은 그러한 예수님을 붙들고 기뻐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인간들을 대해서 기뻐하시지 못한 것입니다. 부활의 영광권 내에서 하늘이 즐기시는 그 자리에 인간이 참석하여 즐길 수 있었던들 2천년이라는 서러운 역사 과정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곡절의 심정을 가지고 부활하신 예수, 그 예수님의 부활의 모습을 막달라 마리아가 뵙고 오 주여! 하며 붙잡으려 하였을 때 예수님께서는 ‘나를 붙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웬 말입니까? 인간이 아무리 예수를 붙들려고 해도 예수의 슬픔과 고통을 알지 못하고 예수의 마음과 심정을 알지 못하고는 예수님과 하나될 수 없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제 이 땅에 살고 있는 인간들은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물질이나 주의를 버리고 나서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반대한 무리들이 어떤 무리들이었습니까? 우리는 내가 가지고 있는 물질이나 내가 가지고 있는 이념이나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버리고라도 예수님의 심정을 알려고 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심정은 자신을 위하려고 한 심정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려고 한 심정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심정을 마음에 간직하고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려고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정에는 곡절의 코스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해명하여 ‘하나님이시여! 이제 알았나이다. 당신이 섭리하신 궁극적인 뜻이 무엇이고, 어떤 심정을 품으시고 섭리하셨는지 알았나이다.’라고 하시며 하나님을 붙들고 자기의 위신과 체면도 잊어버리고 눈물 흘리며 기뻐하셨습니다.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여러분도 예수님을 붙들고 눈물을 흘리며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내적인 세계의 이념이 외적인 세계의 이념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핵심이기 때문에 인간이 쌍수를 들어 주를 믿고, 사랑으로 말씀을 실천하고, 신앙으로 실체를 회복하더라도 맨 나중에 남는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마음과 예수님의 마음과 인간의 마음이 하나되고, 나아가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이 하나되는 일입니다. 이것이 신앙인들의 최후의 과제요 정적인 과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의 종교인 기독교는 최후에 남아지는 종교입니다.
하늘나라의 사람들은 주기 위해 허덕이는 사람입니다. 내 몸과 마음, 내 모든 전부를 주기 위해 허덕이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타락한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두 자기를 중심삼고 살려고 허덕이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마음의 혁명을 일으킬 수 있어야만 인간과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과 만물을 품에 품으시고 사랑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아들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는 한 번도 영과 육이 완성되었다는 조건을 갖춘 사람을 붙안고 사랑해 보지 못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사랑해 보지 못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아직도 낙원에서 기도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 연고로 우리는 우리의 영과 육, 온 전체를 품으시려는 하나님의 사랑만을 갈망하고,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의 사랑은 문제가 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그러한 권내에서 비로소 하나님의 자녀라는 명분을 세워 만물을 주관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런 세계가 하나님이 복귀하시려는 주관세계요 안식의 동산인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 개체의 문제로 돌아가, 복귀의 운명에 놓여진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면, 새로운 이념을 찾아 헤매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할 때가 왔습니다. 앞으로는 진정한 인생관 문제, 우주관 문제가 대두될 것입니다. 보이는 실체세계에 대한 인식과 관념을 토대로 한 우주관은 벗어난다는 것입니다. 마음의 세계에 대한 인식과 느껴지는 느낌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세계를 개척할 것입니다.
오늘날 이 땅 위에 천주적인 이념, 마음의 세계를 통합할 수 있는 어떠한 주의가 나온다면 그 주의는 마지막 주의입니다. 그 다음에는 사랑뿐입니다. 오늘날 이 땅 위에는 과학문명이 극도로 발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과학문명을 지배할 수 있도록 정신문명의 수준을 향상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세계를 주관할 수 있고, 나아가 영의 세계를 주관할 수 있는 그 어떠한 주의를 필히 찾아야 합니다. 이런 주의를 찾아야 하는 것이 우리의 운명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확실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래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과 결부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주를 통한 사랑이니 그 사랑을 붙들면 온 우주가 내 속으로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러한 우주적인 감정을 느끼고 우주의 모든 만상을 대표하여 하늘 앞에 노래할 수 있고, 하늘과 더불어 기쁘게 살 수 있는 아들딸이 되어야 합니다. 나아가 만물을 주관할 수 있는 주관권을 갖춘 아들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아들딸이 되어야 비로소 하나님의 창조이상 동산에서 살 수 있는 아들딸로 인정되고, 하나님께서 품고 사랑하실 수 있는 아들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버님, 역사의 흐름을 인간들은 알지 못하오나 아버지께서 친히 섭리의 뜻을 경영하여 나오신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습니다.
오늘 여기에 나온 당신의 아들딸들, 이제 자기가 어떠한 환경에 처해 있는가 스스로 비판하게 허락하여 주옵소서. 몸뚱이를 찾기 위하여, 몸뚱이의 안식을 찾기 위하여 살고 있는 자가 있습니까? 마음의 안식만을 위하여 살고 있는 자가 있습니까? 이것을 넘고 넘어 아버지의 사랑에 의하여 안식을 찾을 수 있는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것이 인간이 가야 할 필연적인 복귀의 노정인 것을 알았습니다. 타락으로 인하여 이것을 잃어버린 연고로, 믿음과 실체와 말씀과 사랑을 찾아 헤매온 인류 역사 앞에 늠름히 일어설 수 있게 허락하여 주옵고, 천적인 심정과 천적인 사랑과 천적인 소원을 가지고 이 땅의 모든 만물 앞에 어엿이 나설 수 있는 아들딸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 영원하신 생명으로 저희의 몸 마음을 영원히 품어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오며,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였사옵니다. 아멘.
사랑하는 아버님, 사랑의 이상 동산을 바라보며 아버지의 사랑을 흠모하여야 할 인간들이 사랑의 이상 동산을 건설하시려는 아버지의 심정을 배척한 이후, 수천년의 역사노정을 거쳐오면서 서글픈 피눈물의 발자취를 남기고 있사옵니다. 이러한 저희 인간들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잃어버린 아버지의 사랑을 그리워하여야 할 때가 되었사옵고, 아버지의 심정을 더듬어 아버지 편에 서지 않으면 안 될 복귀의 끝날이 다가오고 있는 것을 저희들이 알고 있사옵니다. 사랑의 아버님, 오늘 저희들을 세우시고 새로이 권고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를 부르셨사오니 새로이 경책하시옵소서. 복귀의 서러움을 제해놓고 환희와 영광의 모습으로 아버지 앞에 경배드릴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저희의 마음이 저희 마음만으로 머물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저희의 몸이 자신만의 몸이 되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저희가 느끼는 감정으로부터 저희가 갖고 있는 관념이나 주의 주장까지 모든 것이 내 것이 되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나로부터 시작된 것은 하나도 없으며 모든 것이 하늘을 근거로 하여 되어진 사실을 저희가 알고 있사오니, 이 시간 아버지 것으로 다 내세울 수 있으며, 아버지 것으로 다 돌려드릴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저희 한 개체는 내 마음을 주장한다 할지라도 그 마음만을 가지고 만상 앞에 나타날 수 없는 것이요, 내 몸이라 하더라도 자랑스럽게 만민 앞에 나타날 수 없는 자신인 것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무엇으로써도 스스로 만우주 앞에 자랑하여 나설 수 없는 자신인 것을 인정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자신이 모든 것을 다 내어 놓고 아버지의 부활의 심정을 받아 아버지의 심정으로 화하게 하여 주시옵고, 아버지의 심정에 파고 들어갈 수 있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재창조의 명령의 말씀을 환희의 심정으로 받을 수 있는 간절한 마음을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 어린 모습들이 이 한 시간 모였사오니 저희들이 갖고 나온 마음 을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존전에 엎드리게 될 때에는 예물을 드려 야 하는 것이 저희의 본분이었사오나, 아무것도 가지고 나오지 못하였사오니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앞에 드릴 것은 오직 간절한 마음뿐이오니 이 마음을 아버지 것으로 다 받아 주시고, 이 몸을 아버지께 바치오니 하나의 산 제물이 되게 하시옵소서. 이런 간절한 심정, 흠모의 심정이 여기 모인 전체의 머리 위에 나타나고, 심정 위에 나타나고, 마음 위에 나타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님이여! 여기 모인 당신의 아들딸들의 마음 마음을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개체 개체가 다르니만큼 그 사정도 다를 것이며, 느껴지는 감정도 다를 것이며, 피땀 흘린 지난날의 노정도 다를 것이며, 자기들의 주장이 다르므로 그 헤아림도 다를 것이오나, 이 한 시간만이라도 아버지의 심정에 붙들리고, 아버지의 간곡한 마음에 붙들리게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서로 서로를 하나의 묶음에 묶어 주셔서 하나의 목적을 위한 제물이 되게 허락해 주시옵고, 이 청중 가운데 사탄이 틈탈 수 있는 마음의 요소를 가진 자가 없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허락하신 한 기틀을 지닌 것을 아버지 앞에 감사드리오며, 저희들이 책임하여야 할 사명을 깨닫게 되옵니다. 아버지, 저희들이 이 민족 앞에 말씀을 선포하였사오니, 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하늘을 향한 흠모의 심정을 갖고 나타나는 무리가 많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 민족, 이 백성 가운데 이 말씀을 붙들고 당신을 향하여 간절히 기도하는 무리가 많이 나타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끝날에 처한 저희들이 하늘의 영광과 뜻을 성사시키기 위해 승리의 제단을 갖출 수 있도록 하시어서 아버지의 승리의 날이 어서 속히 임하게 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의 영광이 결실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으로 알고 있사옵니다. 저희들이 이를 위하여 준비하기에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충실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제 저희들에게 이때는 마음과 몸을 다 바쳐서 기도하여야 할 이런 시기인 것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전할 바의 말씀을 저희의 마음과 몸에 지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그 책임적인 심정을 잃지 않는다면, 그 결실이 이 민족 앞에 나타날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지, 이루실 뜻을 이 민족을 통하여 이루시옵고, 받으실 영광을 이 민족을 통하여 받아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날은 거룩한 날, 만민에게 축복하마 약속하신 날이었사오니, 당신을 향하여 간곡히 무릎을 꿇고 모인 제단 제단마다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하나의 심정을 통하여 하나의 핏줄을 연하여 아버지 앞에 아들의 이름을 가지고 모인 자녀들이오니, 서로서로 하나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서로서로 용납하게 허락해 주시옵고, 서로서로 화합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품으신 심정을 저희도 품고 아버지의 뜻을 염려할 수 있는 무리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 한국 교계를 불쌍히 보시옵소서. 그들이 생명의 길을 찾고 있사오나 스스로 나아가는 발걸음이 어디인지를 알지 못하고 있사옵고, 자기의 생명에 대한 자신을 갖지 못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러한 교단 위에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갈 바를 알지 못하여 방황하는 그들 앞에 생명의 빛을 비추어 주시옵소서. 온 천주 앞에 한 날의 승리의 영광을 드러내는 아버지의 아들딸들로서 만민 앞에 자랑할 수 있는 이 민족이 되게 허락해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님, 저희를 외로운 자리에 몰아내신 이 한 뜻을 알고 있사오니, 저희들을 민족 앞에 제물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제물의 도리는 먼저 아버지께서 기뻐하시고, 만물이 기뻐한 후에 기뻐해야 하는 것임을 아옵니다. 그러기에 제물은 자기의 피 살을 다 내어 놓은 채 아버지의 뜻을 위해 고이고이 살아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을 여기 모인 아들딸들은 또한 알고 있사옵니다.
이제 세우신 천정(天情)을 받들어서 이 한 몸 마음이 제단이 되고, 이 몸 마음이 아버지 앞에 바쳐지는 제물이 되게 하시옵소서. 이 한 몸이 아버지의 실체 성전이 되어 아버지의 영광을 노래할 수 있으며, 홀로 아버지의 사정을 위로해 드릴 수 있는 아들딸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날도 지방에 널리어서 갖은 핍박과 갖은 어려움 가운데 맡겨진 바의 책임을 다하기 위하여 싸우고 있는 당신의 아들딸에게도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그들을 아버지께서 이끌어내셨을진대 그들의 결실도 아버지의 품에서 이루어지게 인도해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제 부족한 정성이나마 아버님 무릎 앞에 엎드려 그냥 그대로 바치오니, 아버지, 부족함이 있사오면 친히 채찍을 들어 쳐 주시옵소서. 그래도 아버지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는 자녀들이 있사옵거든 붙안고 아버지의 사정을, 아버지의 심정을 토로할 수 있는 이 한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나이다. 이날의 모든 것을 맡아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니다. 아멘.
아버님, 이 한 해도 저물어 가는 이때에 저희들이 지나온 한 해를 회고하면서 새로운 해를 맞이할 수 있는 준비의 심정을 가지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새해에도 아버지의 새로운 영광을 바라보면서 지난 일년보다도 더욱 깊고 간절한 심정으로 아버지의 손길에 붙들리고, 아버지의 사정을 통할 수 있는 자리로 저희를 이끌어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품에 이끌리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가시는 곳 어디든지 따라갈 수 있는 준비와 각오를 갖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 저희의 생명은 저희의 것이 아님을 아옵니다. 저희의 이념, 사랑까지도 저희의 것이 아닌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이제 저희의 마음, 저희의 몸, 심지어 저희의 생명까지도 아버지로 말미암은 것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나로 말미암은 것이 되지 말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인간이 자기를 중심삼고 자랑하는 것도 육신을 쓰고 있는 기간 동안인 것을 저희들이 알고 있사옵니다. 인간이 아무리 스스로 높다 하더라도 한계 지어진 시간권 내를 넘지 못하는 부족한 존재인 것을 저희들이 깨달았사오니, 아버지의 높으신 심정을 본받을 수 있는 마음을 주시옵소서. 넓으신 심정을 본받을 수 있는 애달픈 마음을 주시옵소서. 깊으신 심정을 닮기 위하여 스스로가 자신을 부정하고 하늘을 향하여 엎드릴 수 있는 마음을 품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 저희의 몸을 제물로 드리오니 받아 주시옵소서. 이 제단 앞에 엎드렸사오니 대하여 주시옵소서. 인간적인 어떤 것도 여기에 횡행하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인간의 능력을 통한 그 무엇도 엉겨들지 말게 해 주시옵소서.
이 한 시간만은 아버님께서 6천년 동안 인간을 찾아오시던 간곡한 심정과 그 심정 위에 넘쳐흐르는 정적인 내용을 가지고 몸부림치게 하옵시고, 당신의 서글픔을 체휼하여 무한히 흐느껴 울 수 있는 마음의 변화가 일어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의 사정을 붙들고 가슴을 칠 수 있는 지극한 심정을 지니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 잃어버린 인간을 찾기 위하여 수고하신 것이 6천년 역사의 복귀섭리 노정이었다는 것을 저희들은 배웠사옵니다. 그런 역사노정을 통하여 남기신 피눈물 흘리는 제단의 무리가 아버지를 대신하여 슬픔의 길을 걸어왔다는 것을 저희들이 알았사옵고, 어느 한 때 편안한 행로를 걸어보지 못한 당신의 사정이었다는 것을 저희들이 알았사옵니다. 이제 저희 마음이 조급한 자리에 처하여도 자기를 위하여 있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무한히 안타까운 자리에 처하여도 자아를 중심삼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말할 수 없이 외롭고, 말할 수 없이 핍박받고, 무한히 몰리고 무한히 억울한 자리에 서더라도 자기를 위한 자리에 서지 않고 아버지를 위한 자리에 설 수 있는 당신의 아들딸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마음은 마음을 통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며, 생명은 생명을 통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며, 이념은 이념을 통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며, 당신의 사랑도 사랑을 통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지, 영원한 생명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생명은 생명으로 움직여야 하며, 사랑은 사랑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님, 그러하오니 생명의 주체이신 아버지께서 생명으로 나타나 주시옵고, 사랑의 주체이신 아버지께서 사랑으로 나타나 주시옵소서.
저희는 그 생명의 고갈을 당하고 있사옵고, 사랑의 고갈을 당하고 있사옵니다. 그러면서도 모든 이념적인 면에서 궁핍한 자리에 있어서 한 날의 생활도 보호할 수 없는 부족한 모습들이옵니다. 하늘땅을 배반하여 이념을 잃어버린 타락의 원한을 저희들이 가슴에 품고 이날도 슬퍼하여 아버지 앞에 엎드리오니, 불쌍한 이 모습들을 아버지, 품어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 모른다 하시면 누가 저희를 맡아 주겠으며, 아버지께서 붙들어 주지 않으면 누가 저희들을 붙들어 주겠습니까? 저희 앞에는 지도자도 없고 스승도 없사오니 오로지 아버지만이 저희와 함께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들이 어려운 일을 당할 때나 슬픈 일을 당할 때마다 아버지께서 저희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하여 수고하시는 것을 대하게 될 때, 아버지 앞에 면목이 없는 저희임을 아뢰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가라.’ 하시는 길을 따라서 저희가 핍박받는 걸음을 걷는 것을 보시고 눈물짓는 아버지, 죄송하옵니다. ‘오라.’ 하시는 아버지의 부름에 응하여 아버지께서 걸어가신 발자취를 따라 나선 저희들이옵고, 죽음의 길도 각오한 저희들이오니, 아버지, 죽음의 길이 나타나게 될 때 사망선을 두려워하여 그 앞에서 물러서는 자 들이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의 몸이 찢기고 마음이 갈래갈래 찢겨지는 아픔이 닥친다 하더라도 아버님의 한숨이 남아 있고, 아버님의 원이 남아 있고, 아버님의 사랑이 남아 있는 한, 모든 것을 극복하고 나설 수 있는 하늘의 참다운 용사, 하늘의 참다운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님, 저희를 민족 앞에, 외로운 자리에 몰아내신 것은 아버지의 크나큰 섭리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지께서 친히 치고 때리고 역사하여 주셔서 저희로 하여금 사망의 세계를 뚫고 나갈 수 있는 생명의 기틀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이런 생명의 움직임이 저희를 통하여 외로운 제단에까지 나타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망 세계를 뚫고 나갈 수 있는 하늘의 용사가 있다 할진대, 그도 역시 감사드릴 수 있는 마음의 준비를 갖추고 나서게 하옵시고, 아버님께서 남기신 이 마지막 노정에서 주저하는 자가 되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남기신 무리들이 그 노정을 보고 돌아서는 자가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날 사망의 도성을 향하여 돌아갈 수 있는 노정에 서 있는 저희이오니, 아버지, 능력의 손길을 거두지 마시옵소서. 권능의 말씀을 주시어 최후의 영광을 노래하는 한 날까지, 최후의 승리를 쟁취하는 날까지 이끌어 주시옵고 권고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님, 40수 노정을 찾아 세우기 위하여 저희들보다 더 수고하신 것을 저희가 알고 있사오며, 이룰 때가 가까워오고 있는 것을 저희들이 알고 있사옵니다. 이제 저희의 마음은 어디로 갈 것이며, 저희의 몸은 어디로 갈 것입니까? 저희와 같이 거하고 있는 이 민족은 어디로 갈 것이며, 이 인류는 어디로 갈 것이뇨? 어디를 가도 사망의 공포가 사무쳐 있사오니, 여기에 이 백성들을 책임지고 하늘을 향하여 이끌고 나아갈 수 있는 피끓는 청년 남녀가 필요한 때가 되었사옵니다. 여기 모인 당신의 아들딸들을 권고하여 주시어 이들의 피와 살이 아버지 것이 되게 하옵시고, 사랑의 폭발물, 사랑의 원자탄이 되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사망의 세상을 이겨 모든 것을 아버지의 것으로 돌리게 하시옵소서. 그 승리의 동산을 새로운 재창조의 이념권 내에서 품고 남을 수 있는 늠름한 용세(勇勢 용감한 기상)를 갖춘 정병의 모습이 되게 인도하여 주시옵기를,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간절히 기도드리옵나니 이 민족의 운명을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이 민족을 붙들고 무한히 눈물 흘리고, 무한히 슬퍼하고, 무한히 통회할 수 있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많아야 되겠습니다. 이 민족 가운데는 천륜을 위하여, 국가를 위하여, 민족을 위하여 울어야 할 택함 받은 무리들이 있사옵니다.
아버님이여! 저희들의 마음에 민족적인 생명의 감정, 민족적인 사랑의 감정이 폭발되게 하시옵소서. 이 민족을 나의 형제로서, 나의 부모로서, 나의 친구로서 붙들고 당신을 향하여 나아갈 수 있는 아들딸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깊은 잠 가운데 빠져서 방황하고 있는 인류를 긍휼히 보시옵소서. 이 인류의 생명을 대신하여 당신 앞에 제단을 쌓고자 수많은 아들딸들이 모인 곳곳마다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어서 속히 아버지의 일을 놓고 무한히 용납할 수 있는 마음, 무한히 양보할 수 있는 마음을 갖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일이라 할진대, 생명을 초월하고 자기의 모든 소유권까지 초월하여 아버지 앞에 모든 것을 바쳐야 할 인간인 것을 알고 있사오니, 서로서로 위하고, 서로서로 높이고, 서로서로 붙들어 줄 수 있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잃어버린 하나의 이념의 세계, 하나의 선의 동산을 복귀할 수 있는 아버님의 역사가 이 온 만민 가운데, 머리 숙인 곳곳마다 나타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시간 영계에 있는 천천만 성도, 천군천사 뭇영들을 동원하여 옳지 못 한 어둠의 세력을 막아 주시옵고, 제거시켜 주시옵소서. 아버님만이 좌정하시어, 홀로 주도적인 영광을 맡아 주시옵기를 바라옵니다. 외로운 식구들을 품어 주시옵고 권고하여 이끌어 주시옵기를 바라옵니다.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였사옵나이다. 아멘.
아버님, 저희의 심정을 비어있는 심정으로 바꾸어 주시옵소서. 아버지를 향하여 무한히 용솟음칠 수 있는 저희의 심정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러한 심정 가운데 아버지께서 만물을 창조하시던 그 창조이념을 옮겨 놓아 주시사, 아버님께서 동하시면 저희 마음이 동하고, 아버님께서 정하면 저희의 심정이 정할 수 있는 자신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고요한 마음에 잠기어 그 마음에 어리는 모습을 보고 즐기기를 바라시던 아버님, 고요한 심정을 보고 찾아와 쓰다듬기를 바라시던 아버님, 이제 저희의 마음과 저희의 심정은 아버님에 의하여 움직이고 아버님의 것으로만 쓰여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아버님의 것만으로 화할 수 있으며 아버님의 것만으로 본질세계에 사무칠 수 있는 저희의 몸 마음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땅 위에 수많은 사람이 살고 있지만 그 마음 바탕, 그 심정이 아버지 속 에 숨겨지며 묻혀지기 위하여 허덕이는 무리가 없다는 것을, 아버지, 알고 있사옵니다. 오늘 저희의 마음은 지극히도 본연의 심정이 그립사옵고, 창조 본연의 본성이 요구됩니다. 이를 위해서는 아버지의 새로운 말씀이 필요한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님께서 기뻐하시기 위하여 지었던 인간이 비록 타락하여 악한 세상에 살고 있을망정 본성의 본연의 세계를 향하여 움직이고 있사옵니다. 본성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본연의 재창조의 말씀을 고대해 나오기를 6천년, 그러한 말씀을 사모하고 찾기를 6천년….
이제 사망의 도성이 심판의 한 날을 앞두고 있습니다. 아버지, 이런 때를 당하여 공포의 세계에서 허덕이고 있는 이 인류, 갈 길을 알지 못하여 방황하고 있는 이 인류, 중심을 잃어버리고 처할 자리를 알지 못하고 머물 곳을 찾지 못하고 있는 인류를 긍휼히 보시어서 당신의 품안으로 돌아올 수 있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여기에 모인 자녀들은 아버님께서 찾아가실 수 있는 성전이자 본질적인 터인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님이 운행하시지 않게 되면 이 땅 위의 모든 피조만상은 심판의 한 날을 맞이하여 한없는 고통을 당할 것이오니, 아버님이시여, 재창조의 손길을 펴 주시옵소서.
사랑하기 위하여 아담 해와를 지으셨던 본래의 창조원칙이 있지 아니하옵니까? 그 원칙에 의지하여 이 인류를 아버지 앞에 다시 찾아 세우시기 위하여, 피로함도 개의치 않고, 억울함도 슬픔도 개의치 않고, 분함과 눈물의 길도 개의치 않고, 피의 제단도 개의치 않고 나를 붙들고 있는 아버지의 심정을 알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럴 수밖에 없는 아버님의 역사적인 사정을 알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의 조급한 심정을 헤아려서 이 시간 고이고이 아버님 것으로만 화하게 하시고 아버지 것 외에는 일체를 제거시켜 주시옵소서. 아버님께서 즐거워하시면 저희도 즐거워할 수 있고, 아버지께서 동하시면 저희도 동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만상 앞에 하나의 미의 영광을 갖춘 본연의 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새로운 음성으로 전파할 수 있는 모습들로 회복하여 주시옵기를,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제 내 마음이 내 마음이 아닌 것을 알았사옵고,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것을 알았사오며,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이 내 것이 아닌 것을 알았사옵니다. 이 우주가 내 것이 아니고 지으신 모든 물건이 내 것이 아니라는 사실 을 알았사옵니다. 모든 것은 아버지에게 연유된 것이요, 아버지의 뜻과 연결된 것으로서 아버지를 위하여 지음받은 것임을 알고 있사옵니다.
이렇게 지음받은 한 중심을 대하여 만민은 기쁨의 영광을 찾아야 하는 것이 창조의 본성임을 알고 있사옵니다. 세우신 한 중심의 영광에 화하여 마음이 동하고 온 우주가 동할 수 있는 그러한 화동의 실체, 본연의 자체로 회복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우주적인 슬픔의 역사노정을 청산하고 새로운 기쁨의 역사를 창조하지 않으면 안 될 때는 왔습니다. 아버지, 저희가 힘이 부족하오니 강한 힘을 주시옵고, 강한 욕망을 갖게 허락해 주시옵소서. 새로운 용맹성을 갖추어 목표를 향하여 자신 있게 나아갈 수 있는 하늘의 정병의 모습을 갖추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니다.
가나안 땅을 바라보는 여호수아와 갈렙에게 아버님께서는 ‘강하고 담대하라.’고 하셨사옵니다. 원수를 대하고 있는 여호수아 앞에 세워진 하나의 기준은 ‘강하고 담대하라.’는 것이었사오니, 오늘날 저희 모습도 강하고 담대하게 가나안 도성을 향하여 총진격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최후의 판가리 싸움이 목전에 당도한 이때, 어둠의 세력을 맞이하여 이 땅 위에서 책임지고 싸울 수 있는 아들딸이 필요한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님, 여기 모인 당신의 아들딸이 그와 같은 책임자가 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여기에 모인 아들딸들의 마음 마음을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자기를 세워 주장하는 자가 있사옵니까? 자기의 어떤 주의나 사상이나 자기의 관념을 통하고, 자기의 인식을 통하여 아버지를 대하는 자가 있사옵니까? 이는 아버지의 절대적인 권한을 알지 못하는 자요, 아버님의 배후의 고통을 알지 못하는 자이옵니다.
아버지, 저희의 심정을 붙들어 주시사 저희가 아버지의 새로운 생명의 말씀을 듣고 새로운 사랑의 감정을 통하여 재창조의 역사를 일으킬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자신의 부족함과 미숙함을 깨닫게 하시옵고, 미완성한 자체인 것을 직고하여 머리 숙일 수 있는 아들딸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본성은 하나의 이념을 향하여 움직이고자 하오니 저희의 몸 마음도 그 뜻을 따라 움직일 수 있게 하옵소서. 이 시간 마음과 몸이 하나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이 하나된 몸 마음이 제물로 바치어질 수 있게 하옵소서.
원한과 슬픔으로 6천년간 막혀 있던 사망의 장벽을 헤쳐낼 수 있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천천만 성도들이 동할 수 있으며, 삼위신을 중심으로 한 영계의 수많은 영인들이 이 시간 환희의 송영을 드리게 하옵소서. 만유만상(萬有萬象)의 모든 존재 앞에 복귀와 해원의 날을 기약할 수 있는 이 한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마음이 주동이 되어 움직이는 전체의 세계를 몸으로 규합시켜 아버지의 제단 앞에 묶을 수 있는 이 시간 되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말씀을 전하고자 하오니 전하는 자의 마음과 받는 자의 마음이 둘이 되지 말게 허락하여 주옵소서. 마음으로 움직이는 말씀이라 할진대 마음으로 마음을 느끼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몸으로 화하게 하여서 아버지의 실체의 모습 앞에 이끌려 갈 수 있는 이 한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사탄이 일절 틈타지 말게 하옵시고, 사탄이 참소할 수 있는 요소를 성별시켜 주시옵고, 아버님께서 친히 운행하여 주시옵소서.
스스로의 부족함을 깨닫지 못한다 할진대 불꽃같은 눈으로 나타나 주시옵고, 저희 몸 마음을 아버지 것으로 주장하시어 당신이 임하시옵소서. 고생의 조건을 통하여 탕감복귀의 사명을 완수하는, 그 역사를 일으킬 수 있는 저희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오늘 여러분들에게 잠깐 말씀드리려 하는 제목은 ‘참을 찾아서 헤매이는 인류’입니다. ‘참을 찾아서 헤매이는 인류’ 이러한 제목을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날 여러분은 말할 수 없는 조급함과 바쁨을 느끼는 일면 슬픔을 느끼고 있는 자신임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내 몸에는 마음이 있고, 또 마음에는 마음이 바라는 어떠한 목적이 있어서 내 몸을 어떠한 목적의 본체에로 무한히 흡수하려는 힘의 움직임이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 무엇인지 모르지만 나를 어떤 정처없는 방향으로 무한히 이끌어 가는 것 같은 생활 여건 내에 처하여 있는 여러분 자신인 것을 부정하지 못할 거예요.
이런 것을 느낀다 할진대 여러분은 자신에게 다시 돌아들어와 자신의 몸을 다시 감정해 보아야 하겠고, 자신의 마음을 다시 감정해 보아야 되겠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오늘날 인간들이 알지 못하는 어떠한 이념적인 무형의 세계가 있다 할진대, 그 영적인 세계의 영(靈)을 중심삼고 내 자신을 재감정해 보아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그 영과 나와는 둘이 아닌, 즉 어떠한 관념이라든가 사상이라든가 이념권 내에서 일체적인 관계를 이루어 하나의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자신을 찾아야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 할진대는 여러분의 심정에는 평화가 있을 수 없는 것이요, 여러분이 행복과 그 무엇을 요구한다 할지라도 그 소망이 성취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먼저 여러분에게 단언하는 바입니다.
여러분이 원리를 통하여 배우신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은 본래 선한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그 선한 인간이 한 날의 잘못으로 말미암아 선하지 못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고 우리 종교인도 증거하고 있습니다. 또 나 자신도 그 사실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 선의 기준은 우리의 생명과 그밖의 전체가 추구하는 이념의 기준이요 소망의 기준입니다. 더 나아가 마음과 마음속에 움직이고 있는 영원한 사랑의 중심이며, 정적(情的)인 이념의 초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날 내 마음을 이끌어 어떠한 절대적인 안식처를 추구하도록 합니다. 또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내 몸을 제재하고, 내 마음의 방향을 제재하고, 내가 목적하고 있는 이념을 제재하는 힘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이것을 나 하나를 중심삼고 볼 때, 즉 몸을 중심삼고 보든가, 마음을 중심삼고 보든가, 혹은 영(靈)을 중심삼고 보든가간에 그것이 하나 하나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자유롭게 대할 수 있으며 자유롭게 화할 수 있어서 개인의 생활적인 감정이 전체의 감정으로 연결될 수 있는 그런 환경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는다 할진대 여러분의 마음과 몸, 혹은 영적인 움직임의 전체의 가치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타락으로 말미암은 원한이 오늘날 이런 슬픔의 자리를 빚어냈고, 타락으로 말미암은 슬픔이 인류를 이런 역경 가운데로 몰아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가고 있는 역사노정은 타락으로 기인된 행로를 그대로 걷고 있고, 또 그러한 입장에서 허덕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허덕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제3자의 입장에 서서 비판하여 보십시오. 그대의 몸은 어떠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가? 그대의 마음은 어떠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으며, 그대의 영적인 모습은 어떠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가? 그 무엇인지 모르는 절대적인 이념의 본체요, 선의 본체요, 생명의 본체요, 사랑의 본체인 그 무엇을 필연적으로 찾아야 할 인간인데 내 한 자체는 지금 방황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나의 모습이 절대적인 선의 방향과 각도에 비해 어떠한 방향과 각도를 가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내 마음은 우로 가고자 하는데 좌로 가는 것은 웬 일이뇨? 내 마음은 더 높은 이념을 가지고자 하는데 한계적인 우주관을 갖고 있는 것은 웬 일이뇨? 이러한 입장에서 벗어나 본연의 자체를 찾기 위해 복귀의 행로를 걷고 있는 오늘날 인류입니다. 이제 여러분의 모습을 다시 한번 냉정한 입장에서 관찰해 보아야 할 때가 왔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 무엇을 찾기 위하여 허덕이고 있는 자신의 강팍한 모습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더 나아가 여러분의 마음과 영이 실체로 화하여 하나의 영광의 가치를 대신할 수 있는 모습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창세 이후 이러한 모습은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인지 모르게 찾아가야 할 길, 운명의 길을 걸어야 할 내 한 자체임을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내 한 자체에는 몸이 있고 마음이 있고 영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몸과 마음과 영이 통합한 하나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이 땅 위에 어떠한 창조적인 주인이 있다면, 그 주인 앞에 끌리어 안길 수 있고, 그 한 자체가 남을 품어 줄 수 있는 모습, 이것이 창조주가 찾고 있는 모습일 것입니다. 또한 오늘날 우리 인간이 찾고 있는 모습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면 내 마음은 몸에게 참된 것을 찾으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먼저 참된 몸을 찾으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세계 인류는 무엇인지 모르게 참것을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타락으로 인한 원한 가운데 사무쳐 있는 이 세계에 살고 있는 연고로 무엇인지 모르게 참것을 찾아야 할 이런 운세에 휩쓸려 들어가고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찾아야 할 본연의 나를 놓고 기뻐하지 못하는 자신인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슬픔에 처해 있는 자신인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어떠한 세계를 보고 슬퍼할 것이 아닙니다. 고통을 느끼더라도 어떠한 상대적인 세계에서 벌어지는 고통을 느껴서는 안 됩니다. 슬픔과 고통을 느낀다 할진대 참된 나를 찾지 못한 슬픔, 참된 나를 찾지 못한 고통을 느껴야 합니다. 세상에 슬픔과 고통이 많이 있다 할지라도 참된 나를 찾지 못한 슬픔과 고통보다 더한 고통과 슬픔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창조주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누구를 찾아 내려오고 계시는가? 여러분 자체, 즉 나를 찾아오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된 내가 완전히 결정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지 못할 때 완전히 하나의 실체를 중심삼은 참된 가정, 참된 가정을 중심삼은 사회, 국가, 더 나아가 국가를 단위로 한 세계, 세계를 단위로 한 천주(天宙)와는 인연을 맺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완전히 내가 되는 것이 모든 단계의 제일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6천년 동안 인간을 대해 무한히 슬퍼해 나오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아들딸을 잃어버린 이 한 사실은 분하다면 그 이상 분한 일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온 피조만물이 우주 공간에 꽉 차 있지만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아담 해와 하나를 잃어버림으로 말미암아 온 천주가 흑암의 세계로 화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무한히 고통과 슬픔을 느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인간들이 잃어버린 자신을 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잃어버릴 당시의 하나님의 심정을 회상하여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본연의 나를 찾을 도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것은 잃어버린 그 장소에 다시 가야 찾을 수 있는 것과 같이, 잃어버린 나를 찾기 위해서는 나를 잃어버릴 때의 하나님의 심정을 회상해야 합니다. 그런 운동을 제시하지 않고는 인간들은 본래의 자기를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은 우리 인간을 대하여 6천년 동안 찾아오고 계십니다. 즉 내 한 개체를 찾기 위해서 6천년 역사노정을 거쳐왔다는 것입니다. 그 6천년의 역사노정은 피눈물의 길이요, 그 6천년의 역사노정은 핍박의 길이요, 그 6천년의 역사노정은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이러한 노정을 거쳐오면서도 하나님은 나 하나를 찾기 위하여, 6천년 전 에덴동산에서 아담 해와를 잃어버리고 흘리셨던 그 슬픔의 눈물, 고통의 심정을 잃어버리지 않으신 채 싸워 나오셨습니다. 6천년을 하루같이 잃어버린 그때의 심정으로 인간을 찾아 싸워 나오셨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심정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슬픔이 6천년 전 하나님의 심정으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에 오늘날까지의 역사는 슬픔의 역사로 남아졌고 우리에게는 슬픔의 열매가 생겼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중에 사무친 그 슬픔을 풀기 전에는 오늘날 인류의 슬픔은 해소시킬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맺혀진 곡절은 맺혀진 자리에 가서 탕감복귀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섭리의 철칙입니다. 이것이 철칙이라 할진대 오늘날의 우리 인간에게는 내 한 자체를 찾아 세우기 위하여 잃어버렸던 그 심정을 찾아 헤매야 할 역사적인 종말시대가 온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끝날에는 어떻게 되는가? 하나의 심정의 표준을 정해 놓고 그 심정을 기준으로 심판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 자체를 두고 볼 때, 여러분 한 몸에는 6천년 동안 하나님의 슬픔의 눈물자국이 얼룩져 있으며, 하나님의 고통의 핏자국이 얼룩져 있는 것을 알아야 하겠으며, 골수에까지도 악에 대한 원한이 사무쳐 있음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또 이런 원한의 조건을 제거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슬픔과 고통이 내 한 몸에 사무쳐 있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옛날 에덴에서 쫓겨나던 인간은 하나님의 심정을 모르고 자기를 중심삼고 슬퍼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이제는 내 몸의 슬픔과 고통을 잊어버리고 먼저 하나님을 슬픔과 고통에서 해방시켜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가 되지 않고서는 역사적인 원한을 해원하고 넘어갈 수 없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내 한 자체가 6천년 동안 흘리신 하나님의 눈물의 결정체인 것을 느껴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내 한 일신은 하나님의 눈물의 결정체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고통의 결정체인 것을 깨달아야 됩니다. 그러한 자리에서만이 나의 존재 가치가 회생되어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타락으로 인하여 생긴 슬픔과 고통을 해원해야 할 끝날에 처한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하여야 되겠습니다. 6천년 동안 슬퍼해 오신 하나님을 대신하여 슬퍼할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6천년 동안 고통받은 그 하나님을 대신하여 고통을 받아야 되겠습니다. 그 하나님을 대신하여 맞아야 할 입장에 처해 있는 인간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을 알지 못하는 인간인 연고로 하늘은 심판이라는 명사를 걸어 놓고 인간을 대해 눈물 흘리시며 섭리해 나오신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심판을 피할 수 있는 길은 어떤 길인가? 내 몸을 붙들고 울 것이 아니요, 내 한 자신의 고통 때문에 울 것이 아닙니다. 나를 구하기 위하여 내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을 지니신 하나님의 고통을 알아야 합니다. 내 슬픔보다 더 큰 하나님의 슬픔이 있는 것을 알고 내 몸의 어려움보다 더 큰 하나님의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나의 일체를 부정하고, 배후에서 역사를 움직여 나오신 하나님의 심정에 사무쳐 있는 모든 고통을 해원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일을 감당할 수 있는 몸을 찾아 헤매야 할 운명이 있는 것이 오늘날 인류인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타락한 인간이 자신을 깨뜨리고 나가는 데는 무엇으로 해야 하는가? 내 마음을 움직여낼 수 있고, 내 몸을 움직여낼 수 있고, 내가 가지고 있는 물질을 움직여낼 수 있는 것이 무엇이뇨? 이것은 온전한 사랑의 심정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영(靈)이 마음을 붙들고 사랑하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사람, 마음이 몸을 붙들고 사랑하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사람, 몸이 만물을 붙들고 사랑하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바로 그러한 사람이 우리 인간이 찾아야 할 목적지요 종착점인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있으되 마음이 몸을 붙들고 사랑하고 있는 것을 느끼는 사람이 없었고, 영이 마음을 붙들고 사랑하고 있는 것을 느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과 마음과 몸을 붙들고 사랑하고 계시지만 그것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은 내 영을 붙들고 사랑하고, 내 영은 내 마음을, 내 마음은 내 몸을, 내 몸은 만물을 붙들고 사랑하면 심정이 통일되는 것입니다. 그런 세계에서는 만물을 사랑하는 심정은 몸을 통하고, 몸을 사랑하는 심정은 마음을 통하고, 마음을 사랑하는 심정은 영을 통하고, 영을 사랑하는 심정은 하나님과 통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찾아 나가는 종착점입니다.
여러분을 붙들고 ‘너에게 어떠한 사명이 있는지 아느냐?’고 물어 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모르는 사이에 여러분의 가는 길을 가로 막고 ‘너는 누구뇨? 너는 어디로 가느뇨? 너는 어떤 일을 할 것이뇨?’ 하고 권고하고 계시는 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이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면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무엇을 잃어버렸던가? 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린 것이 인간이 탄식하게 된 원인이라는 거예요. 그리하여 인류역사도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린 가운데 탄식의 역사노정을 거쳐 나왔다는 말입니다. 아시겠어요?
하나님의 사랑은 실체 지상천국을 건설할 수 있는 영원한 천국이념의 발판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타락으로 인하여 영원한 세계의 이념적인 기반인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린 연고로 하나님은 인간에게서 떠나갔습니다. 그리하여 지상천국을 이룰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은 점점 무너져 내려오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린 것이 타락이라 하였습니다. 여기서 그 타락의 역사적 경로를 생각해 볼 때 어떠한 길을 거쳤는가? 맨 처음 해와가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 다음에 아담이 그랬고, 그 다음으로 그들의 자녀가 그랬습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타락의 경로인 연고로 인류역사도 사랑을 잃어버리는 역사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처음으로 사랑을 논의하고 나선 자가 누구였던가? 에덴동산의 해와였습니다. 그 다음에는 누구였던가? 아담이었습니다. 그 다음이 가인 아벨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늘 앞에 처음 나타났던 인류의 종족이 걸어온 타락 역사의 원형(原型)이라는 것입니다. 이 타락 역사형이 인류역사 시초에 벌어졌기 때문에 인간들은 지금까지 이러한 역사를 거쳐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만우주를 통솔할 수 있는 하나의 중심입니다. 주관적(主管的)인 중심이요, 통솔적(統率的)인 중심이요, 관용적(寬容的)인 중심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이념인 것입니다. 이 이념이 역사의 터가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역사노정을 살펴보면, 원시시대에는 모계(母系)를 중심한 씨족사회였습니다. 이것은 맨 먼저 해와, 즉 어머니가 사랑을 논의하였던 연고입니다. 이것이 부족사회를 거치면서 부계(父系) 중심한 역사로 옮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이것이 오늘날 민주주의시대에 들어와서는 형제를 중심한 형제주의시대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내려온 역사는 끝날을 맞이하였습니다. 오늘날 인간들에게서는 부모에 대한 사랑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오늘 민주국가가 그렇습니다.
그리하여 나중에는 형제의 입장에서 부부의 이념을 갖추어 나아가는 어떠한 것까지도 깨어지는 시기가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하늘이 인간과 연락할 수 있는 사랑의 사다리가 끊어져 가고 있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 인류는 부모의 사랑을 잃은 고아, 참다운 부부의 사랑을 잃은 고아, 참다운 형제의 사랑을 잃은 고아와 같은 입장에서 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선진국가에서는 먼저 이런 것이 종적(縱的)으로 벌어졌는데, 현재는 이런 것들이 세계적으로, 횡적으로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타락이 어떻게 이루어졌던가? 아담 해와가 하나님과 종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고 사탄과 상대적이고 횡적인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타락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기에 역사적인 종말시대인 오늘날은 민주주의를 중심해서 평등주의를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러면 타락으로 아담가정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느뇨? 가인이 아벨을 죽인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 아벨은 해와의 대신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선진국가에서는 평등주의를 부르짖는 동시에 여성이 남자보다 더 권한을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때는 횡적인 면을 거쳐 종적인 면을 세워야 할 시대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완전한 종적인 관계를 맺지 못함으로 깨지고 있는 세계적인 양상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이 찾아 나가야 할 길은 하늘이 제시하는 새 이념의 길이 요, 생명의 길이요, 사랑의 길입니다. 이런 새 이념과 생명을 소개해 주는 사랑의 길을 찾아 나가는 역사노정에 서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여러분 자신이 잃어버린 그 부모는 어떠한 부모뇨? 잃어버린 그 부부는 어떠한 부부뇨? 잃어버린 자녀, 그 자녀는 어떠한 자녀인가? 그들은 타락하지 않은 부모요, 타락하지 않은 부부요, 타락하지 않은 자녀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타락의 종족이 되었던 그 에덴의 슬픔을 박차 버리고, 에덴의 기쁨을 획득할 수 있는 하나의 무리가 이 땅 위에 나타나야 될 것입니다 그러한 무리가 나타나지 않는다 할진대, 하나님의 6천년 복귀섭리는 근본적으로 파멸의 위기에 처할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을 구원해온 인류역사는 탕감원칙에 의한 역사였습니다. 어머니에서 아버지, 아버지에서 자녀로 이렇게 주관권(主管權)이 옮겨져 온 역사였습니다. 이제 역사적인 대전환시대를 맞이했습니다. 그래서 천지의 운세가 회생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탕감복귀의 필연적인 운명노정에 처해 있는 인류인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기에 현재에 와서는 남녀평등권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여자들이 남자들에게 대우 받을 때가 왔다는 거예요. 그렇지요? 이것은 에덴에서 거꿀잡이로 어머니인 해와가 아담을 지배하던 것을 탕감복귀하는 것입니다. 타락으로 말미암아 흘러온 역사는 정상적인 역사가 아니었고, 평면적인 역사가 아니었고, 상대적인 역사가 아니었습니다. 분별적이고, 일편적이고, 일방향의 역사였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돌아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늘은 타락하여 떨어진 인간을 돌려 가지고 하나는 왼쪽, 또 하나는 오른쪽으로 갈라놓는 섭리를 하셨습니다. 이렇게 좌우의 분립 형태는 남자와 여자 사이에서도 벌어지며, 남자 남자끼리, 국가 국가끼리, 세계 세계끼리에서도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좌(左)라는 것은 그릇된 것을 상징하는 것이요, 우(右)라는 것은 옳은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천성을 갖고 살 수 있었는데 타락한 연고로 천성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양심의 직고에 의해 선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오늘날 여러분은 하늘 앞에 굳건히 서야 되겠고, 만우주를 주관하는 주인공이 되어야 할 입장에 처하여 있습니다. 그러면 만물의 주인공으로 결정될 수 있는 하나의 본질은 무엇이뇨? 생명력도 아니요, 이념도 아니요,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고린도전서 13장 13절에 보면 “그런 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즉 사랑의 길이 인간이 걸어가야 할 길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길을 걸어가야 할 인간이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그러한 말을 해주고 가신 것입니다. 예수는 내적인 영(靈)과 외적인 육(肉)을 합하여 자녀의 입장을 나타낼 수 있는 하나의 사랑의 기준을 세우셨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유대 백성이 불신함으로 말미암아 그 기준은 세워지지 못했습니다.
인류역사는 재창조역사이기 때문에 복귀과정이 다시 전개되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예수는 하늘로 올라가고 지상 인간을 상대해야 할 성신이 땅에 오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습니다. 이 성신은 지상에 있는 영적(신앙적)인 자녀를 품어 가지고 무엇을 하셔야 하는가? 에덴의 이념을 다시 성취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성신이 강림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성신과 자녀의 명분을 가지고 신랑 되신 구주(救主)를 찾아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구주를 찾아 헤매는 데 있어서 기독교인들은 영육을 합하여 찾지 못하고 이념적인 면만 가지고 찾고 있습니다. 오늘날 도의 길, 신앙의 길을 가는 사람들도 육을 치는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신앙인들은 마음의 세계, 영의 세계를 찾아 헤매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자녀격인 성도들은 영육을 합한 형태를 갖추어서 영적인 어머니인 성신을 중심삼고 복귀를 소망하여 가야 하는 것입니다. 에덴에서 아버지를 주관하던 어머니는 거꾸로 주관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어머니의 자리를 잡아야 합니다. 그래 가지고 자녀를 주관해야 합니다.
그 에덴의 소망은 영과 육을 합하여 이루어야 합니다. 인간이 타락함으로 인하여 영과 육이 단절되었기 때문에 영과 육이 일치된 입장에 서야 합니다. 그리고 종적인 입장에만 설 것이 아니라, 횡적인 입장에도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방성을 취하지 않고 일방적인 면만을 붙들고 나오다 보니 인간은 몸과 마음이 갈라졌고 마음과 영이 갈라진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소원성취의 날은 언제인가? 예수님이 땅에 오셔서 성신을 세우고 가셨는데 그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재림의 약속을 남기고 갔기 때문에 그 약속을 이루기 위해 다시 와야 합니다. 그 재림의 이상은 에덴동산에서 잃어버린 몸적인 어머니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찾아진 그 어머니는 타락한 어머니를 지배하여 몸적인 아버지 자리를 복귀하여야 합니다. 여기에서 예수의 소원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소원의 성취는 영육이 합할 수 있는 하나의 이념세계에서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게 돼야만 비로소 영육을 갖춘 하나의 부모가 천지간에 나타납니다. 섭리의 법도를 두고 볼 때, 일방적인 역사관이 상대성을 갖춘 역사관으로 성립되는 그날이 인류역사노정에 필연적으로 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연고로 오늘날 인류가 일방적인 면만을 취하면 슬픔의 세계에서 고민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이렇게 볼 때 복귀의 운명길을 걷고 있는 우리 인류는 무엇을 찾아야 하는고? 영원히 사랑할 수 있는 내 참 몸뚱이를 찾아야 하며, 이 몸뚱이의 부모를 찾아야 됩니다. 몸의 부모를 찾기 전에는 마음의 부모, 영의 부모가 나타날 도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천지의 창조가 외적인 것으로부터 이루어져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이 글을 쓸 때에도 왼쪽부터 써 나가는 것입니다. 바른쪽부터 써 가지 않는다는 거예요. 이것은 창조이념세계의 존재방식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인간들이 고통 가운데서 부르짖는 신음소리는 언제 끝날 것이뇨? 하나님을 대신해서 내 몸을 사랑해 줄 수 있는 부모를 찾는 그 한 날을 맞이하지 않고는 인류의 고통은 이 지구상에서 제거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잘났다 하여도 여러분은 본연의 육적인 참부모를 잃어버린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참부모가 나오지 않은 이상 참자녀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니 아직까지 이 세상은 죄악된 세상이요, 지옥의 세상이요, 고통의 세계가 아닐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을 하나님께서는 거꿀잡이로 찾아오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영(靈)을 통해서 우리의 영을 찾고 몸을 찾아오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인류의 참부모요, 즉 영적인 참부모요, 마음적인 참부모로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영과 마음을 합한 부모의 입장에 서 계시는데 육적인 부모를 찾아 상봉하는 한 날을 인류 앞에 예고하셨습니다. 그날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어린양잔칫날입니다. 이제 그럴 때가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모계시대(母系時代)를 거친 다음 부계시대(父系時代)를 거쳤고, 이제 형제시대에 들어왔습니다.
인간은 새로운 주의 주장과 제도를 들고 나오지만 거기에서 이상적인 상대, 이상적인 형제, 이상적인 자녀, 이상적인 부모가 나올 수 없다면 그 주의 주장과 제도는 깨져 나갈 것입니다. 어디까지 밀려 나갈 것이뇨? 만물보다 못한 자리로 밀려 나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심판의 한 날에 다다르게 됩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 인간은 참부모를 찾아 헤매야 합니다. 실체(육신)를 가진 참부모는 새로운 이념과 비전을 가지고 인간을 찾아오셔야 합니다. 인간이 그 참부모를 모시고 사는 세계가 바로 이상세계입니다. 그러한 세계를 이루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다시 오겠다는 말씀을 남겨 놓으신 것입니다. 또 그리하여 재림이라는 명사가 성립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단계에 처하여 있는 여러분 자신을 이제 온 피조세계 앞에 세워 놓고 공격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사탄을 대신하여 여러분 자신의 몸뚱이를 자신이 공격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몸뚱이를 사탄 대신하여 자신이 치고 나아가야 되는 것이 도의 길입니다. 자신의 몸뚱이를 쳐야 한다는 거예요.
부모의 길, 사랑의 길은 나 혼자 찾아 넘어갈 수 없습니다. 그것은 왜? 내 개체는 역사적인 타락 행로를 거쳐서 이 죄악세상에 존재하게 되었고, 시대적인 타락의 운세권 내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길은 혼자 찾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역사적인 문제들이 얽혀 있습니다. 거기에는 내 개인을 중심삼은 가정의 문제가 있고, 사회, 국가, 세계 더 나아가서 영계의 문제가 있습니다.
새로운 이념의 세계와 인연을 맺고 그 세계와 절충을 하여야만 이념적인 사랑의 세계를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도의 길은 역경 속에서 싸우며 찾아 나오는 길입니다. 또한 이것이 6천년간 섭리해 오신 하나님의 노정이었던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무엇입니까? 6천년을 대표하는 제물입니다. 따라서 6천년을 대표하는 제물이 되기 위해서는 6천년 동안 인간으로 하여금 제물을 바치게 한 하나님의 심정을 알고 나타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 해와가 타락하여 하나님의 사랑권에서 쫓겨날 때 어떠했던가? 그들은 쫓겨나는 자신을 두고 슬퍼하였습니다. 이것이 인류의 눈물의 기원(起源)이 되었고 고통과 질고의 기원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에덴동산에는 그런 아담 해와의 슬픔만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담 해와를 쫓아내면서 쫓겨나는 그들의 슬픔보다 더 큰 슬픔의 심정을 가졌던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고 사는 인간들입니다. 여러분은 그걸 알아야 돼요.
그래서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권에서 쫓겨난 종족이요, 그 후손이 되었습니다. 그런 인간들은 자기를 중심삼고 슬퍼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쫓겨나 있는 인간을 보고 오늘도 슬퍼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을 중심삼고 하늘을 배반하여 쫓겨났던 인간은 어떻게 해야 복귀되는가? 내 슬픔이야 있거나 말거나, 내 억울함이나 내 사망이야 있거나 없거나 자신의 모든 것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슬픔과 하나님의 고통과 억울함을 붙들고 눈물을 흘릴 줄 아는 무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는 복귀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에서 회개하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회개는 무엇을 뜻하는가 하면 통곡하라는 거예요. 즉 울음으로 출발한 역사의 기원을 다시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내 자신의 슬픔을 가지고 울어서는 안 됩니다. 사망선에 떨어진 인간을 6천년 동안 품어 주시고 인간이 알지 못하는 가운데 울어 주고 고통으로 슬퍼해 오신 하나님을 붙들고 울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이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오냐, 네가 바로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라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말씀과 더불어 하나님이 반겨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나온다면 하나님께서 인간 때문에 슬퍼하시고 억울함을 당하시고 고통 당하셨던 모든 것을 탕감하고 해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가 누구입니까? 인류의 참아버지입니다. 4천년 만에 하나님 대신 참부모의 심정을 가지고 땅 위에 오신 분입니다. 4천년 동안 불쌍하게 허덕인 인류와 상봉하여 하나님 대신 그들을 붙안고 사랑하기 위하여 오셨던 아버지였습니다. 그런 예수님을 인간은 알아보지 못하고 십자가에 달아 죽였습니다. 그런데 죽이고 보니 자기 아버지였던 것입니다. 죽이고 나서야 자기의 참아버지인 줄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 오셨던 예수님, 그 예수님은 우리를 생명으로 이끌어 주실 참아버지이셨습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예수를 죽였을망정 그가 진실로 자기 아버지인 줄을 알게 되면 눈물을 흘리지 않을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악당, 살인강도라 할지라도, 목석같은 자식이라 할지라도 가슴을 치고 통곡할 것입니다. 아버지의 서글픔을 모를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4천년 동안 고생한 부모의 서글픈 심정을 모르는 인간들로 하여금 통곡하게 하는 하나의 자극이 되었다고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만난 자는 통곡하여야 됩니다. 통곡하더라도 예수가 하늘을 대신하여 이 땅에 참부모로 오셨는데, 그 예수를 죽인 것을 놓고 먼저는 하나님을 위하여 통곡하고, 오셨던 참부모를 위하여 통곡하고, 나아가 땅의 인류를 위하여 통곡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끝날에 처한 성도들은 어떠한 통곡을 해야 할 것인가? 나를 위하여 통곡할 때는 지나갔습니다. 가정을 위하여, 민족과 국가를 위하여 통곡할 때도 지났습니다. 이제 세계를 위하여, 하늘을 위하여, 성부, 성자, 성신을 위하여 통곡할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래야만 사랑을 중심삼고 창조한 전체의 세계를 주관하는 이념권 내에 참석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를 죽인 인간들이지만 예수가 참부모였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 참부모를 잃어버린 서러움과 원통함을 느껴 다시 살아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한 본성이 인간에게 있었던 연고로 하나님께서는 그 소원을 이루어 주기 위하여 재림주를 보내 주시는 것입니다.
그 재림주님을 맞이해야 할 끝날의 성도들도 같이 눈물을 흘려야 됩니다. 즉 역사적인 눈물을 대신 흘리고, 시대를 대표하여 대신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그 다음에 기쁨의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우리는 살고 있는 동안에 이러한 눈물을 흘려야 하겠습니다. 인간들은 오늘날까지 슬픔의 눈물은 흘렸지만 기쁨의 눈물을 흘리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쁨의 눈물을 흘릴 수 있는 한 날을 인간들은 고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날이 바로 재림의 날이고, 잃어버린 참부모를 찾는 날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고대하고 있는 참부모님은 다만 몇십년간 준비하여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 기간은 인간의 한 생애가 아닙니다. 6천년이었습니다. 오시는 데는 편안히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편안히 잠을 자고 쉬고 있을 그 시간에도 하늘은 여러분을 찾으시기 위해 애쓰셨다는 것입니다. 거지의 모양으로, 빈민의 모양으로, 방랑자의 모양으로, 죄수, 핍박받는 자의 모양으로, 비참하기 그지없는 모습을 해 가지고 인간 최하의 자리에서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잠자는 시간에도 하늘은 눈물의 길, 슬픔의 길, 폭풍우에 휩쓸리는 길, 잠시도 쉴 수 없는 길을 걸어 나오셨습니다. 이런 길이 예수님이 걸으신 길이었고, 또한 수많은 선지선열들이 걸은 길이었습니다.
여러분이 편안히 먹고 자고 편안히 쉬는 자리에도 하늘의 슬픈 음성이 울리고 있고, 하늘의 억울한 고통과 통곡소리가 울리고 있다는 서글픈 사실을 여러분이 느껴야 하겠습니다.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 할진대, 여러분은 참부모 앞에 사랑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여러분은 마음을 붙안고 잠을 자면서도, 밥을 먹으면서도 송구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죄인 중의 죄인이요, 천지가 용납할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느껴야 하겠습니다. 내가 보는 것, 듣는 것, 보고 느끼는 모든 사실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고, 나 개인은 이런 배반자의 결실체인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나를 찾아 헤매고 있는 하나님의 사정을 여러분은 몰랐다는 것을 느껴야 하겠습니다.
오늘날 성도들은 그런 사정을 알고 형제의 손을 붙들고 통곡할 줄 알아야 합니다. 길가를 헤매는 거지를 보고 붙안고 통곡할 줄 알아야 하겠고, 어려운 노동자를 보아도 ‘어찌하여 나의 형제가 저렇게 되었는고!’ 하며 탄식할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눈을 들어 그들을 바라볼 때 그들을 찾아 세우고, 그들을 통해 나를 찾아 세워야 할 천륜의 역사노정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 만나는 사람마다 눈물을 갖고 대할 수 있는, 그런 감정에 사무친 인간들이 땅 위에 나타나기를 하나님께서 6천년 동안 고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민족의 굶주림을 보고도 배불리 먹고 누워 있는 자 심판받을 것입니다. 민족은 헐벗고 있는데 배를 두드리며 춤을 추는 놀음을 하는 자들은 심판받아야 됩니다.
그러면 타락한 인류가 해야 할 것이 무엇이냐? 내가 굶주릴지라도 형제의 굶주림을 안타깝게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못 먹고 못 입을지라도 형제를 위하여 세계 인류를 위해 살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늘이 세계인류를 위하여 우시던 것을 나로 인하여 횡적으로 탕감복귀해야 된다는 거예요. 하늘은 이러한 성도를 찾고 계시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6천년 역사노정에서 어느 한 때 어느 한 사람이 그런 심정을 가지고 하늘을 향하여 아버지라 불러 주었던가? 누가 하늘을 부모라 불러 주었고, 누가 인류를 참형제라 불러 주었던가? 그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단을 인도하는 교직자들, 신앙의 노정을 걷고 있다는 교직자들, 그들의 마음은 어디에서 방황합니까? 하늘이 6천년 역사를 두고 애타게 찾아왔고, 하늘의 어려움과 슬픔과 소원을 대신했던 사람들도 이런 길을 갔거늘, 여러분의 몸은 어디로, 여러분의 마음은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이것을 해명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것을 해결지어야 할, 타락의 원한에 사무쳐 있는 인류인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역사에 남을 수 있는 인물은 자기를 주장하고 나선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민족사에 남아질 인물이라 할진대 그는 민족을 붙들고 나선 사람이요, 사회적인 인물이라 할진대 사회를 붙들고 나선 사람이요, 세계적인 인물이라 할진대 세계를 붙들고 나선 사람이요, 하늘적인 인물이라 할진대 하늘을 붙들고 나선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날 여러분은 죄인 중에서도 부모를 죽인 용납 받을 수 없는 죄인이기 때문에, 어느 누가 욕을 해도, 핍박을 해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몰림뱅이가 되어도 당연하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한 자리에서도 하나님의 슬픔과 역사적인 분함을 느껴 ‘감사합니다.’라고 해야 할 여러분입니다.
그러면서도 욕하는 형제를 붙들고 눈물지을 수 있는 곳이 하나님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자리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상에서 자기를 치는 자를 오히려 염려하고 그를 위해 눈물 흘리시며 기도해 주시던 예수님의 심정, 이런 심정을 품고 가는 길이 참인간이 가는 전형적인 길이요, 골수에 사무쳐 가야 할 길인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들은 제물입니다. 우리 통일교인들은 모두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하늘은 이러한 역사적인 제물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제물은 어떠한 존재이뇨? 받으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만민이 기뻐한 후에 비로소 머리를 드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기 전에 머리를 들었고, 만민이 기뻐하시기 전에 머리를 들었다면 깨어집니다. 기독교가 만민을 위하여 봉사해야 할 사명을 지고 있는데 그러하지 못하고 있다면, 만민을 위해 제물이 되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다면 개혁해야 할 때가 온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왕의 왕이요 하늘의 황태자이신 예수께서도 기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물로 오셨던 연고입니다. 영계에 가서도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지상의 성도는 기뻐하여도 제물이신 예수는 기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만민이 기뻐한 후에야 비로소 예수가 기뻐할 수 있는 날이 오는 것입니다. 그날이 재림의 날입니다. 이것이 제물이 가는 길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이 민족이 받는 모든 핍박을 바라보게 될 때, 여러분의 마음은 어떠합니까? 반만년의 역사를 거쳐오면서 우리 민족은 갖은 고생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슬픔이 있어도 어디 가서 호소할 줄 모르고, 분함과 억울함이 있어도 호소할 줄 모르는 가운데 이 민족은 걸어 나왔습니다. 그러면 민족을 붙들고 여러분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고아와 같은 이 민족이지만 우리끼리 손을 붙들고 통곡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 민족이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형제의 잘못이야 있든 없든, 하늘이 허락한 같은 핏줄기와 뼈 살을 가지고 태어난 형제이니, 자기 개인의 사정을 넘어서서 부모의 역사적인 혈통과 심정에 결합하기 위해 울 줄 아는 아량 있는 사람들이 나와야 합니다. 그런 청년들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그러한 청년들의 피끓는 정열이 있다 할진대 그 정열을 어디다 기울일 것인고? 일신의 출세와 욕망을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일개인의 한계권 내에서 종결될 것입니다. 인간의 본래 이념은 무한대의 선을 넘고 넘어서 하나님을 붙들고 기뻐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인간 본래의 이념을 위하여 그 정열을 쏟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민족이 거쳐온 역사노정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다 할진대 그 섭리의 종국에 하나님은 어떠한 무리를 요구하실 것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울 줄 아는 모습일 것입니다. 하나의 뜻에 엉키어 울고, 하나의 심정에 엉키어 울고, 하나의 행동에 엉키어 울면서 먼저 제물이 되겠다는 무리들입니다. 하늘은 그러한 무리들을 찾으실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2천년 전 예수는 인간을 대하여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마 10:3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표면적으로 생각할 때, 이런 모순되고 엉터리 같은 말이 어디 있습니까? 이해할 수 없는 말 같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랑을 잃어버리고 타락의 행로를 거쳐 나온 인류가 역사의 종점에서는 자기 개인을 중심삼고 다 깨져 나갈 것을 아셨기 때문에 그것을 막아 주기 위하여 그러한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만일 그때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역사가 벌어졌던들 2 천년 동안 그런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이제 하늘을 중심하지 않은 부모의 사랑, 부부의 사랑, 자녀의 사랑을 깨뜨려야 할 시대가 왔습니다. 이러한 사랑을 깨뜨리고 그 대신 하늘을 중심한 부모의 사랑, 자녀의 사랑, 부부의 사랑을 가르쳐 주려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러기에 기독교에서는 신랑 신부의 명사를 걸어 놓고, 아버지라는 명사를 걸어 놓고, 자녀라는 명사를 걸어 놓고 섭리해 온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들은 사랑을 잃어버린 존재들입니다. 이러한 인간들 앞에 사랑의 주인공으로서 지상에 다시 천적인 사랑을 복귀하려고 왔던 예수였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영계로 가셨습니다. 그리하여 인간은 영적인 사랑의 기준을 세워 놓고 육적인 사랑을 복귀해 나가는 노정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인간에게는 상하가 있고, 전후가 있고, 좌우가 있습니다. 그 상(上)을 대신함이 부모요, 하(下)를 대신함이 자녀요, 전후를 대신함이 부부요, 좌우를 대신함이 형제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원칙입니다. 아시겠어요? 인간은 이 길을 찾아 나가야 하는데 그 중에서 전후관계에 있는 부부관계가 제일 중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 신랑 신부를 제일 강조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는 신부를 찾는데 어떠한 심정으로 찾으려 하는가? 하나님을 대신한 신부, 자녀를 대신한 신부, 형제를 대신한 신부를 찾으려 하십니다. 알겠어요? 신랑 신부를 보내시어 땅 위에 하나의 기준을 세우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 뜻은 신부를 중심삼고 상(上)으로는 하나님, 하(下)로는 자녀, 좌우로는 형제가 있어 그 전체가 사위기대의 형태를 이루자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을 대표한 상대 존재인 신부를 찾아 나온 역사가 2천년 섭리노정입니다.
그러면 이제 여러분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남자 된 자는 여성을 존중해야 하고 여자 된 자는 남성을 존중해야 합니다. 서로 존중하는 마음이 있어야만 여자는 남자를 대할 수 있고, 남자는 여자를 대할 수 있습니다. 남자는 아버지의 분체(分體)요, 여자는 어머니의 분체입니다. 분신(分身)이라는 거예요.
그러기에 오늘 복귀과정에 있어서 남녀간에 서로를 대할 때 그 얼굴을 보고 따라가는 사람은 깨어질 것입니다. 상대를 하나님의 이성성상(二性性相)의 일성(一性)이라 생각하고 남자면 여자, 여자면 남자를 존중해야 하는 것입니다.
상호 존중심을 가지고 개개인의 상대적인 성품을 찾아 나서야 하는 것이 본연의 인간들이 걸어야 할 노정인 것입니다. 자식을 대할 때에도 그들이 아무리 자기의 아들이라도 그를 아버지의 분신으로, 딸은 어머니의 분신으로 생각하고, 그 성(性)을 존중할 줄 아는 심정을 가져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이상을 전개하여 만물을 창조하시고, 그것을 총합시켜 만물의 주인공으로 인간을 창조하셨던 그 이념을 마음에 품고서 자식을 붙안고 사랑할 줄 아는 부모가 되어야겠습니다. 그러면서 타락세계에 서 있는 그 자식을 바라보고 하나님이 6천년 동안 슬퍼하시던 그 감정에 ‘오냐, 너는 하나님께서 기뻐하고, 인류가 고대하고, 만물이 고대하던 본연의 사람이 되라’고 하며 눈물 흘릴 줄 아는 참다운 부모가 되어야겠습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는 만물을 대하고 우주를 대할 자격을 갖추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는 자기가 찾는 신부는 하나님의 대신이요, 인류의 대신이요, 천추만대 후손의 대신 존재라는 감정을 가지고 신부를 찾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랑 된 예수의 심정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 신부를 찾는 날에는 하늘과 땅을 품은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부모를 대해서도 마찬가지요, 자녀를 대해서도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러한 사랑의 주인공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모를 대신하고 자녀를 대신할 수 있는 일체이상(一體理想)의 감정을 가지고 실체형(實體型)을 갖춘 신랑 신부로서 상봉하는 날이 와야 합니다. 그날이 와야 천지, 즉 피조세계의 비극적인 모든 것, 또는 하늘과 땅에 막혔던 모든 것이 전후 좌우 상하로 화동(和動)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날이 우리 인류가 바라는 날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인간들이 찾아 나아가야 할 곳이 어디냐 하면, 이 한 곳을 찾아 나가야 합니다. 여러분이 이 한 곳을 찾아 나가려면 부모를 대해서 그런 마음, 형제를 대해서 그런 마음, 자기의 상대를 대해서도 그런 마음을 느낄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 하나로써 세계를 대신하는 감정을 느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런 사랑의 심정을 갖추어 가지고 하늘땅 앞에 나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이 4천년을 역사하여 예수와 성신을 세운 것처럼, 실체 신랑의 입장에서 실체 신부를 상봉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계를 맺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목적이요, 이러한 실체적인 상대를 찾는 것이 인간이 걸어가는 목적점(目的點)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의 몸에 하나님이 들어와 일체(一體)로 화(和)할 수 있는 이상 동산이 벌어집니다. 이것이 인간이 찾아 나아가는 최후의 목적점이요, 인간이 찾아야 할 필연적인 운명의 표준점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하겠습니다. 기도합시다.
아버님, 참을 찾아 헤매고 있는 인류 앞에 내 한 개체는 하나님의 대신이요, 부부의 대신이요, 부모의 대신이요, 자녀의 대신이요, 형제의 대신임을 알았사옵니다. 또한 이러한 위대한 근본적인 존재의 위치를 결정지을 수 있는 마음의 안식처를 내 한 개체를 통하여, 우주에 이루어 놓지 않으면 안 될 필연적인 역사노정이 있다는 것을 저희들이 알았습니다.
이제 저희 한 개체에 있어서 남자는 참된 누나를, 참된 누이동생을 찾고 있고, 참된 어머니를 찾고 있고, 참된 상대를 찾고 있으며, 또한 여자에게도 참된 상대를 찾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이렇게 같은 이념을 찾아 헤매고 있는 인류요, 같은 입장에 놓여 있는 인류요, 원수 될래야 될 수 없는 인류요, 창조이념으로 얼크러져야 할 인류임을 아옵니다.
그런데 인류의 타락으로 부모의 사랑이 깨어졌고, 부부의 사랑이 깨어졌고, 형제의 사랑이 깨어졌습니다. 따라서 오늘 저희들이 이를 찾아 나가기 위해서는 먼저 형제와 형제끼리 사랑의 감정을 느껴야 되겠습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6천년의 서러움을 대신하여 사랑할 수 있는 상대를 찾아야만 하늘땅을 대신할 수 있는 원칙적인 기준이 복귀된다는 사실을 이제 알았사옵니다.
오늘날 저희 하나의 모습은 단순한 존재가 아니라 사방성(四方性)을 갖추어 어느 한 면도 결핍되어서는 안 될 존재인 연고로 저희에게 형제가 없으면 슬픈 것이요, 친구가 없으면 슬픈 것이요, 부모가 없으면 슬픈 것이요, 자녀가 없으면 슬픈 것임을 아옵니다. 이것은 인간이 사방성을 갖추어 서로 사랑하는 것이 천리원칙이요, 그것이 영원한 본심으로서 하나님이 허락해 주신 삶의 제1기준이 되는 연고로, 현 생활에서 이러한 현상에 처하게 될 때 슬퍼하게 된다는 것을 여기 모인 당신의 아들딸들이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제 인류를 하나님 대신 품을 수 있는 마음, 성자 대신 품을 수 있는 마음, 성신 대신 품을 수 있는 심정을 갖게 해 주시고, 하늘의 자녀로 품을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그러한 마음을 갖고 하늘을 생각하고 땅을 생각할 수 있는 저희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혹은 슬퍼하고 고통을 당하면서도 기뻐할 수 있는 한 날을 맞아 영원한 만물세계 앞에 하나의 중심으로 복귀될 수 있는 기쁨의 날이 어서 속히 임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 오늘 참을 찾아 헤매는 노정의 종착점에서 사랑할 수 있는 형제를 가지지 못한 자는 심판받을 것이요, 사랑하는 자녀를 가지지 못한 자 핍박받을 것이요, 사랑하는 부모를 가지지 못한 자, 사랑하는 신랑 신부를 맞지 못한 자는 심판받는다는 것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런 절대적인 철칙에 의하여 내 몸에서부터 몸의 부모, 몸의 형제, 몸의 부부, 내 마음에서 마음의 부모, 마음의 형제, 마음의 부부, 영원한 이념세계에서 영(靈)을 중심삼고 영의 부모, 영의 형제, 영의 부부로 갖추어진, 즉 3대 부모, 3대 형제, 3대 부부의 삼위형(三位型)을 평면적인 내 개체에서 이룰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러한 실체적인 결실체로 증거되어 하나님의 인정을 받아 축복받을 수 있는 한 날을 맞아야 되겠사옵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오늘날 우리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내 육신(肉身)의 참부모를, 마음의 참부모를, 영(靈)의 참부모를 찾아 헤매야 되겠사온데 영의 부모는 아버님이요, 마음의 부모는 다시 오시는 주님이요, 육의 부모는 나를 낳은 부모이오니 이에 상대되는 내 자녀, 형제, 상대를 찾을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이루 형언할 수 없는 비극과 슬픔을 남긴 역사의 사실들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고, 에덴동산을 바라보면서 즐거워하시던 아버지의 심정이 아담 해와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슬픔의 심정으로 화하였고, 그것이 6천년이란 기나긴 세월을 통하여 역사적인 서러움이 되었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나이다. 또한 저희가 마음과 몸을 다하여 아버지의 염려 하시는 심정을 붙들고 잃어버린 에덴동산을 회복해 드려야 할 역사적인 책임을 짊어지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님! 잃어버린 아담과 해와를 다시 찾기 위하여 아버지께서 4천년 동안 수고한 끝에, 아담의 형상을 갖추어 이 땅에 보내진 분이 예수님이었음을 저희들이 알고 있사옵니다. 예수가 탄생될 때까지의 아버지의 수고가 크면 클수록 그 수고로 인하여 탄생하신 예수님의 모습은 하늘의 자랑거리가 되어야 했고, 피조만물과 인류의 자랑이 되지 않으면 안 될 모습이었사옵니다. 그러한 사실을 하늘은 알고 있었으나 땅은 무지하여 알지 못하였고, 하늘은 이를 환영하였으나 땅은 알지 못하여 환영하지 못하였음을 오늘날 저희들이 부끄러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수고하신 아버지의 소망의 눈길이 말구유에 누우신 예수의 가련한 모습에 머물러야 했던 이 처량한 사실을 저희들이 회상하면서, 선조들이 불신 하였고 선조들이 불충하였던 것을 통절히 느끼옵니다. 아담 해와의 타락의 허물을 인간들이 다시 그 자리에 나타냈다는 이 한 사실을 알고 있사옵기에, 오늘 저희들은 역사적인 서글픈 사실을 마음으로 느끼며 심히 슬퍼할 수밖에 없사옵니다.
옛날에 아버지를 위로해 드리지 못했던 그 이스라엘 민족, 택함 받은 선민을 대신하여 저희들이 아버지의 슬픔을 위로해 드릴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예수님이 오셨다 가신 지 어언 2천년이나 경과하였지만, 심정의 세계는 시간을 초월하는 줄 아옵니다. 역사를 초월하여 계시는 아버님, 슬픈 심정을 품고 천성에 가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을 붙안고 이 시간 위로해 드릴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허락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이 오셨다 가신 이후 2천년의 서러움을, 오늘 이때까지 하늘과 땅에 남아진 사무친 원한을 저희들이 알아, 예수님이 탄생하시던 그 당시의 모습을 저희들이 마음으로 받들 수 있는 이 한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오늘 그날을 기념하는 이 한 시간을, 아버지, 축복하여 주시옵고, 예수님께서 소원하셨던 그 기쁨의 영광을 나타내시어서 2천년 전에 왔다 가신 예수님께서 슬퍼하셨던 것이 이 한 날로 말미암아 해원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내적 심정을 알고 있는 저희들이 이날을 기념하고자 하오니, 인간들이 알지 못하여 남긴 모든 과거의 서러움을 이 한 시간으로 말미암아 탕감받을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저희가 아버지 앞에 설 수 있게 허락하시어서 예수님이 기뻐하시고 아버지께서 위로 받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여기 전체적인 복귀의 사명을 맡고 뜻을 대하고 있는 저희들이옵니다. 복귀의 한 부모를 찾아 모셔야 할 입장에 처한 오늘의 저희들임을 당신은 아실 것이옵니다. 이제 저희들이 예수를 참형으로 모실 수 있는 때가 되었사옵고, 예수를 참오빠로 모셔야 할 때가 되었사오니, 참형제 된 입장에서 이 땅 위에 남겨진 당신의 슬픈 사실을 체휼하여 해원해 드릴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땅 위에 하늘을 향하여 살길을 찾고 있는 수많은 백성은 있사오되 당신의 생명의 힘이 어떤 뜻 가운데서 나타난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사오니, 아버지여! 이 한 시간에 그들의 마음과 그들의 몸을 아버지께서 직접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영적인 모든 움직임을 동원하시어서 그들로 하여금 끝날을 예고하시는 아버지의 전체적인 뜻을 알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아버지의 내적 심정을 헤아릴 수 있게 허락해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당신의 참다운 아들딸들이 될 수 있는 기쁨의 날이 어서 속히 이 땅 위에 임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땅 위에 와서 십자가의 고난길을 가신 예수님도 이와 같은 일에 협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저희가 알고 있사오니, 땅에 있는 저희들이 전심전력을 다하여 당신이 기뻐하는 뜻을 이루어 드리는 데 조금도 부족함이 없도록 격려해 주시옵고, 땅 위의 형제들이 단결하여 나갈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저희들이 마음을 묶어 아버님께 바쳐 드리는 이것이 역사적인 해원의 제물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남겨진 천추의 한을 저희들로 말미암아 해원함으로써 이제부터 행복의 기원을 찾을 수 있는 거룩한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잠깐 드리는 경배이지만 축복하여 주시옵고, 부족한 마음과 몸 다 묶으시어서 아버지의 뜻대로 주관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현현하실 수 있는 영광의 은사만이 여기에 나타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부탁하올 때에,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였사옵나이다. 아멘.
아버지여, 이 시간에 온 만민 위에 축복의 손길을 다시 허락하시옵소서. 이 시간에 삼천만 민족에게 다시 축복의 손길을 펴시옵소서. 당신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수많은 자녀들 위에 사랑의 은사를 허락하여 주시옵고, 더욱이 이 한 시간 외로운 자리에서 마음으로 기도하고자 부복한 자녀들의 머리 위에, 아버지, 사랑의 손길을 들어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죄악이 머무는 땅 위에서 남기신 서러움을 일대에 위로해 드리고자 이 시간 아버님을 위해 염려하고 있는 식구들이 있다는 것을, 아버지, 기억해 주시옵고, 이 시간 축복해 주시옵기를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땅 위의 모든 사람들이 이날을 알지 못하고 있사옵고, 맺혀진 하늘의 서러움을 깨닫지 못하고 있사옵고, 한없이 슬픈 당신의 심정은 더더욱 알지 못하고 있사옵니다. 그날의 통탄스런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는 저희들에게, 아버지, 이날을 허락하여 주시어서 만민이 이해하지 못하는 이 한 날을 그리스도의 탄생일로서 축하할 수 있는 영광의 은사를 허락하여 주신 것을 감사하지 않을 수 없사옵나이다. 여기에 모인 당신의 아들딸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이날을 축하하는 것이 2천년 동안 서러워하신 예수의 심정을 위로 할 수 있는 계기가 되도록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서러운 자리에서 탄생하여 30여년의 생애를 바쳐 골고다의 길을 개의치 아니하시고 가신 그리스도를 회상하며, 그의 전적(戰跡)을 유업으로 받을 수 있는 이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분이 생전에 남기신 위업을 저희의 사명으로 인계 받을 수 있는 이 시간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님이시여! 예수님께서 남기신 원한이 땅 위에 아직까지 남아 있다는 것을 이 땅 위에 있는 인간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이제 여기 모인 당신의 아들딸들, 그 몸과 마음이 당신의 심정에 사무치고 당신의 심정에 붙잡힐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어린 예수님의 심정을 알고, 죽을 지경에 처했던 예수님의 심정을 깨달아 위로해 드릴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인간들은 모르지만 예수님은 지금껏 영계에서 수고하고 계신다는 것을 체휼할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한 시간 불충불효한 몸 마음이나마 이날을 축하하기 위하여 아버님 무릎 앞에 엎드렸사오니, 당신이 임하시어 복귀의 새로운 이념을 개척할 수 있도록, 넘치는 은사를 여기에 나타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 이날을 기억하시옵고 이날을 축복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제 잠깐 동안 말씀을 전하고자 하오니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이날에 저희들이 기도하고 간구하는 모든 것이 하늘과 땅 위에 맺혀진 것을 해원하는 조건으로 남아질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귀중한 이날 저희들이 새로운 뜻을 받들어서라도 한 조건을 세워 아버지 앞에 승리의 표적을 남기지 않으면 안 될 중요한 날이오니, 이날을 기억하시옵소서. 기쁨으로 아버지, 현현하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올 때, 주의 이름으로써 아뢰었사옵니다. 아멘.
오늘은 하나님이 소망하신 그날인지도 모를 중요한 날입니다. 저 역시 뜻을 받들어 나오면서 소망하던 날입니다. 그리고 4수로 탕감하는 동시에 새로운 3수를 찾아서 탕감하는 이 시간이야말로 역사적인 인연의 시간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은 먼저 기억해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 앞에 잠깐 말씀드리고자 하는 말씀의 제목은 ‘서러웠던 하늘의 심정’입니다. 이러한 내용의 말씀을 가지고 오늘 이날을 기념하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 하나를 짓기 위해서 모든 만물을 지어 나오셨습니다. 첫날서부터 닷새날까지 지어지는 그 만물을 바라보시게 될 때에 무한한 소망과 무한한 희망을 갖고 즐거워하셨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모든 만물의 주인공으로서, 하나님 대신 만물을 주관하는 주인으로 우리의 조상인 아담과 해와를 지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무한히 기쁜 심정으로 그들을 위해 축복하셨던 것입니다. 즉 그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 1:28)고 하셨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축복의 말씀을 우리 인간에게 주신 것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우리 인간이 지음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또한 하나님도 이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에게 축복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그 축복을 아담과 해와는 이루어 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오늘 이 시간까지 그 축복이 이루어지지 않은 가운데 서러운 역사가 흘러왔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이 이 한 시간 다시 한번 회상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아담이 자라고 있을 때 하늘은 무한히 기뻐하셨습니다. 만물도 아담을 통하여 하늘 앞에 기쁨을 돌려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담이 천륜의 뜻을 완전히 알지 못하는 입장에서 하늘의 뜻을, 하늘의 말씀을 받들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타락이라는 서러운 굴레에 매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천지의 법도를 세우시고 천륜을 세워 나오신 하나님이 아담 해와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이들을 당신의 사랑의 품에서 내놓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서글픈 심정을 만물은 알고 있었고, 천사세계의 선령(善靈)들은 알고 있었으되, 타락한 인간의 후손 된 우리들은 지금까지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오늘날 여러분들은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오늘 이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우리들은 모였습니다.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하여 모였습니다. 그러면 그 예수는 어떠한 분이셨던가? 그는 잃어버린 아담을 대신하여 하늘이 찾아 세우신 존재였습니다. 그러므로 당시 사람들이 예수의 탄생과 동시에 하나님의 가슴속에서 4천년 동안 사무쳤던 슬픔을 체휼하여 아기 예수를 붙들고 대신 울어 줄 수 있고, 예수를 붙들고 대신 기뻐해 줄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많아야 할 것이었는데, 탄생하신 예수를 붙들고 기뻐해 주고, 탄생하신 예수를 붙들고 하나님 대신 울어 주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슬픔은 인간으로 말미암아 맺혀진 연고로, 하나님의 슬픔은 하나님 홀로 풀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마음 깊이 사무쳐 있는 슬픔이 풀어지려면 반드시 사람을 통해야 됩니다. 사람으로 말미암아 이런 슬픔이 맺혀진 연고로, 사람이 하나님 대신 슬퍼해 주지 못한다면 하나님 속에 맺혀진 슬픔은 풀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말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 예수를 바라보고 하나님 대신 울어야 할 입장에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마리아와 요셉은 하나님의 내적 심정이 이렇게 슬프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런 연고로 요셉과 마리아는 말구유에 있는 예수를 바라보고도 진정한 마음으로 하늘 대신 슬퍼할 줄 몰랐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찾아온 동방박사 세 사람, 양치는 목자와 안나 등 여러 사람들이 예수를 증거하고 기뻐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기뻐하기 전에 하나님 속에 슬픔이 사무쳐 있다는 것을 안 사람은 한사람도 없었다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들은 이제 무엇을 해야 될 것인가? 아담 해와를 잃어버리신 하나님의 슬픔을 체휼하는 동시에 예수가 탄생한 이 한 사실을 기뻐할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심중에 사무쳐 있는 슬픈 심정을 풀어 드리기 위해서는 인간 조상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이 죄악의 세상을 탕감복귀 해야 합니다. 죄 많은 세상을 탕감복귀하기 위해서는 하나님 대신 울 수 있는 간곡한 마음을 가져야 되겠고, 예수를 붙들고 울 수 있는 한 자체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만일 요셉과 마리아가 이런 사람이 되었던들 예수의 뜻을 받들었을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마음을 가진 동방박사가 되었던들 그들 역시 예수의 뜻을 따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위하여 수고하고, 예수를 위하여 뜻을 받들고 나서야 했던 요셉과 마리아도 진정으로 하늘의 슬픈 심정을 품고 예수를 대하지 못했고, 동방박사 세 사람도 역시 하늘이 슬픈 심정을 품고 예수를 바라보시는 것처럼 예수를 바라보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먼저 예수가 태어날 때까지 하나님께서 슬퍼하셨던 그 심정을 회상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 해와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그들을 추방하실 때의 슬펐던 그 심정, 둘도 없는 독생자로 세운 아담이 원수 사탄에게 끌려가는 모습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슬프고 처참했던 그 정경을 여러분들이 마음으로 회상해야 되겠습니다.
이 슬픔을 해원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아담 해와의 타락 이후 4천년 동안 섭리해 나오시면서 수많은 선지선열들을 보내셔서 이 슬픈 사정을 만민 앞에 통고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이 이런 하나님의 슬픔을 알지 못했고, 하늘이 보낸 선지자의 슬픔을 알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민족은 하늘을 배반하는 역사노정을 거쳐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필코 뜻을 이루셔야 하므로 잠시도 쉬시지 못하시고 수고하셨습니다. 결국 4천년 역사가 경과한 후 비로소 잃어버렸던 아담을 복귀하실 수 있었는데, 여기에 마리아와 요셉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면 요셉과 마리아는 어떠한 입장에 있었는가? 아담과 해와는 약혼 단계에서 타락하였는데, 요셉과 마리아가 바로 그와 같은 입장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요셉과 마리아를 그런 입장에 세워 놓고 섭리하시게 된 것입니다. 그러한 요셉과 마리아를 택해 세울 때까지는 4천년이나 걸렸습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마리아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된 동기와 요셉이 하나님 앞에 서게 된 동기를 생각해 볼 때에, 마리아는 어린 몸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이 민족을 통하여 섭리하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메시아가 이 땅 위에 오시기를 누구보다도 간곡히 바랐습니다. 요셉도 역시 자기 민족을 구해 줄 수 있으며 택함받은 이스라엘 선민을 하늘왕국의 백성으로 이끌어 줄 수 있는 메시아가 오실 것을 누구보다도 간곡히 바랐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성심을 다하여 메시아가 오시기를 고대하였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그 마음에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정성을 들이면 어떠한 방법으로라도 메시아가 탄생하실 것을 예고해 주시리라 믿었고, 또 예고해 주실 것을 바라며 정성들였던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옛날 에덴동산에서 아담 해와는 믿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타락하였지만 그들은 민족을 대표하여 믿는 마음, 메시아가 오시기를 바라는 마음, 정성을 다하는 마음, 충성을 다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마음이 하나님을 감동시켰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메시아를 보내 주실 것을 약속하실 수 있는 동기가 되었던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서 메시아를 잉태할 것을 예고했을 때 마리아는 당황했습니다. 자기는 아직까지 남자를 알지 못함으로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부인했던 마리아였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뜻에 대한 간곡한 마음을 가진 마리아는 천사의 분부에 대답하기를 ‘주의 계집종이오니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한마디는 유대민족이 4천년 동안 지켜온 이스라엘의 율법에 배치되는 대답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처녀가 잉태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는 잉태한 처녀는 당장 돌에 맞아 죽임을 당해야 할 정도로 모세의 율법이 엄격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는 이런 결단을 내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처녀의 몸, 더구나 약혼한 처녀의 몸으로 하늘 앞에 택함받은 마리아는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를 해결해야 할 입장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또 자기의 혈족과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대한 입장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이 세상 모든 것은 다 포기하더라도 아버지 뜻 하나만은 포기할 수 없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데 있어서는 어떠한 일이라도 감사히 받겠다는 확고한 심정이었습니다. 이렇게 마리아가 전인류를 대신하여 자기의 모든 위신과 체면, 자기의 일생, 자기의 생명까지도 제물로 내놓는 그 순간에 비로소 메시아가 탄생할 수 있는 인연이 맺어졌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또한 그러한 입장에서 메시아를 잉태한 마리아, 하늘 앞에 맡겨진 몸으로서 메시아의 탄생 후에 자기가 나아갈 길을 무한히 그 마음으로써 염려하여야 되는 입장에 있었던 마리아의 사정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 사정은 하나님의 딱한 사정을 방불케 하는 사정이었고, 그 염려함은 악한 땅을 염려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방불케 하는 염려였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통해서 요셉에게 마리아를 보호할 것을 명령하셨던 것입니다.
요셉 역시 천사를 통하여 자기와 약혼한 마리아가 잉태하였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인간적인 면에서는 이를 용납하기 어려운 입장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크나큰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인간을 세우시고 그 인간을 통해서 섭리하신다는 것을 아는 요셉은 천사의 명령에 따라 마리아를 맞아들였던 것입니다. 이렇듯 마리아와 요셉이 협력하였던 그것이 에덴에서 잃어버렸던 아담을 다시 회생시키는 터전이 되었다는 것을 우리들은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여러분이 2천년 전 예수의 시대로 돌아가서 마리아와 요셉의 입장에 처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늘이 여러분을 찾아와 간곡한 사정을 전하고 여러분과 인연 맺기를 원하는 일이 있다면 여러분들은 어떠한 태도를 취할 것인가? 여러분은 어떠한 심정을 갖고 하늘을 대할 것인가?
여러분이 마리아와 같은 심정, 요셉과 같은 심정을 갖고 하늘 앞에 나타나지 못한다면, 마리아와 요셉이 하늘을 염려하는 심정으로 탄생시킨 그 예수님을 축하하고 있는 오늘날 여러분의 입장은 하늘 앞에 합당한 입장이라고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여러분들은 마음을 돌이켜 내가 과연 요셉의 입장에 있는지 혹은 마리아의 입장에 있는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되겠습니다. 어느 때에 하늘이 나에게 명령하시더라도 그 뜻을 따르고, 그 뜻을 믿고 실천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회적인 인습이라든가 풍습, 자기가 믿고 따라 나온 윤리관까지도 부정하던 요셉과 마리아와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자신의 생명을 걸어 놓고 이러한 문제를 넘어설 수 있는 믿음을 가지고 이 한 시간에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입장에 서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보내놓고 요셉과 마리아가 염려하지 못하는 염려를 하셨고, 요셉과 마리아가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생각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요셉과 마리아가 탄생하신 예수를 품어 고이고이 보호하여 성장시켜 주기를 바라셨습니다. 예수가 원수의 세계 앞에 싸움의 책임자로 나설 때까지 지성을 다하여 양육하고, 지성을 다하여 받들어 주기를 바라셨습니다. 또 지성을 다하여 예수의 생활적인 제물이 되어 주기를 바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가 탄생할 때까지는 요셉과 마리아가 하나되어 하나님의 소원을 염려하는 마음을 가졌으나, 예수가 탄생한 이후에는 하나님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염려하지 못했고, 자기들의 염려의 조건을 중심삼고 예수를 바라보았고, 자기들의 생활적인 조건을 통하여 예수를 양육했던 것입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의 보호자가 되어야 하고, 예수의 울타리가 되고, 예수의 싸움의 방패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하여 나타난 예수를 죽으나 사나 받들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위하여 생명을 걸고 예수님을 받들어야 했던 요셉이요 마리아였습니다. 자라고 있는 예수님은 자기가 낳은 아들이로되, 자기에게 속한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만일 요셉과 마리아가 예수를 잉태했을 때에 가졌던 결심을 예수가 자라는 동안에도 가졌던들 예수의 십자가의 길은 막아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모자가 협조해야 할 내적인 사정과 외적인 사정을 완결짓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는 가정을 버리고 제자를 찾아 나섰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는 갈릴리 지방 가나의 혼인 잔칫집에서 마리아로부터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 달라는 말을 듣고 마리아에게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요 2:4)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생각하게 될 때, 우리는 예수가 마음에 품은 생각을 마리아가 몰랐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셉도 몰랐고 그의 사랑하는 형제도 몰랐던 것입니다. 예수는 그 마음으로는 하늘을 염려했고 그 몸으로는 생활 환경을 염려했었습니다. 예수가 하나님을 염려한 것은 당연한 일이로되 생활 환경을 염려한 것은 서러운 사실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서럽게 났고 서럽게 자란 예수였습니다. 하나님만을 위하고 하나님만을 염려하면서 살아야 할 예수는 그 생활 환경을 잃어버려,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염려하고 몸으로는 생계를 염려하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놓였던 이 슬픈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리하여 예수가 가정을 떠나게 된 것은 곧 형제를 떠나게 된 것이요, 4천년 동안 지나온 요셉의 종족을 떠나게 된 것이었습니다. 믿어주지 않는 모든 무리들을 바라보게 될 때의 예수의 심정은 어느 누구에게도 하소연할 수 없는 서글픈 심정이었음을 우리는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예수의 마음이 아픈 것은 그의 환경이 슬프고 어렵기 때문이 아니라 어머니와 형제들, 그리고 친척들이 자신을 몰라주는 것이었습니다. 이 한 사실이 예수에게는 슬픔 중의 슬픔이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들은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본래의 마리아의 입장을 회복해야 되겠고, 요셉의 입장을 회복해야 되겠고, 예수의 형제의 입장을 회복해야 되겠고, 예수의 종족의 입장을 회복해야 되겠고, 더 나아가서는 예수의 입장까지 회복해야 되겠습니다. 이러지 않으면 안 될 역사적인 원한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예수가 탄생하여 이 땅에 왔다가 십자가를 지고 간 30여년의 생애를 마음 깊이 느끼고, 예수께서 슬퍼했던 사실, 혹은 마음으로나 몸으로 고통 당했던 그 사실을 뼈저리게 느껴야 되겠습니다. 그렇지 않고 태어나신 예수만을 축하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태어나셨다가 그렇게 슬프게 가신 예수를 알아야만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자격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탄생하신 예수를 품고서 바라보고 있는 그 장면은 하늘 앞에 기쁨의 조건이 되었는지 몰라도, 예수의 전생애를 품어 주지 못하고 축하해 주지 못한 연고로, 하나님 앞에 기쁨의 조건을 세우지 못한 결과를 남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하게 될 때, 우리들은 나신 예수를 환영하는 반면 가신 예수를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그 예수를 따라 십자가에서부터 거슬러 올라가서 나신 예수를 붙들고 축하드릴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이러이러하게 가신 예수였으니, 이러이러하게 싸우신 예수였으니, 그 생애에서 느꼈던 모든 심정을 알고 그 심정을 계승해 가지고 대하지 않으면 왔다 가신 예수를 축하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들은 예수 일신의 슬픔을 진정한 내 슬픔으로 여기고, 예수의 일생의 고통을 진정한 내 고통으로 여기며, 예수가 지금까지 2천년 동안 역사하신 전체의 뜻을 내 뜻으로 심중에 품고 바라볼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자랄 때의 예수의 심정과 자라서 고통을 받고 십자가에 돌아가시던 예수의 심정을 우리들이 알아야만 왔다 가신 예수를 축하할 수 있으며, 그 예수와 우리가 인연을 맺을 수 있고, 그 예수를 조건으로 하여 하나님과 우리가 인연이 맺어질 수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예수 앞에 찾아간 동방박사도 대신해야 되겠습니다. 예수를 찾아가 황금과 몰약과 유향을 갖다 드리고 경배하던 세 동방박사가 준비한 예물도 준비할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길 가던 목자가 찾아가 경배하던 그런 준비라도 갖추어야 되겠습니다. 하늘의 천천만 성도들이 예수가 땅에 탄생하신 것을 기뻐하여 부르던 노래가 하늘에 퍼졌던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은 알지 못하고 있으되 나신 메시아 한 분을 중심삼고 온 만물까지 화답했던 이 한 사실을 우리들은 생각하면서, 오늘 우리 자신들이 전체를 대신하여 예수를 축하하는 마음을 갖지 않으면 안 될 것이며, 축하할 수 있는 마음, 세 동방박사를 대신하여 축하할 수 있는 마음, 목자를 대신 해서 축하할 수 있는 마음, 만물을 대신하여 축하할 수 있는 마음, 이러한 마음을 갖고 예수를 직접 대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그렇게 될 때에 온 우주는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게 될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고 난 다음에 기쁨으로 축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야 하는 것이 예수를 보내고 난 오늘날 우리 인류의 사명인 것을 우리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분이 어떠한 심정을 품기를 바라시는가? 예수님께서는 어떤 심정으로 이 한 날을 기념해 주기를 바라시는가? 예수님이 심정으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있다 할진대 그것은 자신이 땅 위에서 30여년의 생애를 살 때,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던 그 심정을 알아주는 것이요, 2천년 역사노정을 거쳐오면서 수많은 성도들을 학살당하고 죽는 자리로 내 보내셨지만 참아 나왔던 심정을 알아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또 예수님은 자신이 하늘을 대신하여 땅 위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놓는 책임을 다 이루지 못한 이것을 대신 탕감복귀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제 우리의 마음은 예수의 붉은 마음을 붙들고, 우리의 몸은 피 흘리던 예수의 실체를 붙들고, 하늘땅을 위하여 만민을 위하여 눈물짓고, 원수들을 위하여 복을 빌어 주던 예수의 심정을 찾아 마음으로는 아픔을 느껴야 되겠고, 몸으로는 피곤함을 느껴야 되겠습니다.
이런 마음을 갖고 ‘하늘의 서글픔을 이 시간 우리들을 통하여 해원받으시옵고, 예수의 역사적인 슬픔을 우리를 통하여 해원하시옵소서.’라고 할 수 있는 마음이 여러분의 심중으로부터 우러나야만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 오셔서 인연을 맺어 주실 것입니다.
예수는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에 영적 구원의 한 터전은 개척하셨으나, 이도 평탄한 길을 거쳐서 개척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죽음길도 불사하는 외로운 길을 거쳐서 개척하신 것입니다. 이런 예수였던 연고로 오늘날까지 하루도 쉴 사이 없이 눈물의 역사를 닦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제 예수를 붙들고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아야 할 공동운명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예수의 죽음이 곧 나의 죽음이요, 예수의 슬픔이 곧 나의 슬픔이요, 예수의 분함과 억울함이 곧 나의 분함과 억울함이라는 것을 느껴야겠습니다. 예수님의 뼈에 사무치는 분함과 억울한 심정이 아직까지 땅 위에 남아 있는데, 이 분함을 풀어야 할 사람은 예수 자신도 아니요, 하나님도 아니요, 오늘날 우리들이라는 것을 잠시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에게 축하의 의미를 갖고 예수를 바라보면서 경배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할진댄, 여러분은 이제 예수가 남기고 간 원한의 도성을 향하여, 원한의 땅을 향하여 전진해야 하겠습니다. 이걸 붙들고 먼저 싸우고 책임하고 난 후에 예수를 축하하게 될 때에만 예수는 우리를 대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가 이 땅에 오셔서 이루어야 할 뜻은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 뜻은 이루어야 할 뜻으로 2천년 역사가 경과한 오늘날까지 수많은 후손들 앞에 남아져 내려온 것입니다.
예수가 남기신 뜻은 십자가에 죽어가면서라도 이루어야 할 뜻이요, 예수가 남기신 뜻은 하나님이 모른다 하는 자리에 설지라도 이루어야 할 뜻이며, 예수가 남기신 뜻은 민족이 배반하고 이 땅의 어떤 가까운 사람이 배반한다 할지라도 버릴 수 없는 뜻이라는 것을 알고, 여러분 자신들이 그 뜻을 이루겠다고 예수를 대신하여 하늘 앞에 서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이 뜻을 품고 나서는 데 있어서는 어떠한 무엇이 나를 배반하고 어떠한 무엇이 나를 가로막을지라도 여러분은 옛날 예수가 남기신 뜻을 내가 맡았다는 입장에 서서 그것을 당연한 일로 알고 싸워 나가야 되겠습니다. 그러지 못한다 할진대 예수가 남기신 뜻을 성사할 수 없는 동시에, 예수가 남기신 한을 풀어 드릴 도리가 없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가 남기신 뜻을 이루어 드리고 남기신 한을 해원해 드리지 않으면 2천년 동안 우리를 찾아오셨던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원한을 해원해 드릴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오늘의 나’는 개인이로되 ‘개인적인 나’가 아닌 것을 알고, ‘나’는 일분자로되 ‘온 우주와 인연되어 있는 나’라는 것을 알아서 역사적인 전체의 심정을 대신해 주기를 바라고, 예수님의 전체의 뜻을 대신해 주기를 바라고, 더 나아가서는 미래의 소원까지 가하여 오늘날 우리들에게 책임을 맡기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이 남아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렇듯 역사적으로 어마어마한 위치에 처해 있는 내 한 자체인 것을 알고 예수를 부르고 하나님을 부를 수 있는 여러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4천년의 심정과 요셉과 마리아의 심정이 인연이 되어 탄생하신 예수가 30여년 생애를 사시며 우리에게 바라신 간절한 심정이 있고, 다시 이것이 2천년이라는 기나긴 역사가 흘러와서 오늘날 우리 한 자체에게 절실히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제 여러분에게 하늘을 향하여 손을 들고 구원을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까? 몸을 굽혀 하늘을 향하여 회개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사지를 움직여 하늘을 향하여 달릴 수 있는 마음이 있습니까? 내 모든 마음의 준비와 몸의 준비를 갖추어 십자가를 앞에 놓고 싸우던 예수의 장엄한 싸움을 책임질 수 있는 심정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어떤 심정을 갖고 있는가 스스로 분별하여 남겨진 역사적인 원한을 해원하는 운동을 책임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이 시간 다시 통감해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예수는 우리 앞에 무엇을 예고할 것인가? 예수는 땅 위에서 진정으로 그의 심정을 토로하고 하늘의 사정을 권고할 수 있는 참다운 아들딸을 찾아오셨으나, 예수는 참다운 아들딸을 찾지 못하였습니다. 30여년 동안 허덕이며 찾아 다니셨으나 생사를 같이할 수 있는 사람, 하늘의 유업을 상속해 줄 수 있는 하나의 사람을 만나지 못하여 상속해 주지 못하고 가셨습니다.
이러한 예수의 심정을 알고 여러분 자신도 그와 같은 책임을 지고 그와 같은 입장에 서서 하늘을 향하여 아버지라고 불러봐야 되겠고, 땅의 만민을 바라보고 회개하고 외쳐봐야 되겠고, 만물을 바라보고 하늘을 축하하라고 부르짖을 수 있는 간곡한 심정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심적인 충동이 없다 할진대 여러분은 오셨던 예수, 가신 예수, 가셔서도 수고하시고 계시는 예수의 뜻을 받들어 2천년이 지난 이 세월을 거쳐오면서 죽음의 자리에서 싸워 나온 수많은 선지선열들 앞에 면목을 세울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아버지 앞에 손을 들어 간구하고 맹세해야 되겠습니다. ‘아버지시여! 이 시간 부디 원컨대는 저희가 2천년 전에 이 땅에 왔던 예수의 몸을 대신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제단 앞에 내놓은 이 몸이 2천년 전에 왔다 가신 예수를 대신하게 허락해 주시옵소서.’라고 간구하고 맹세해야 되겠습니다.
이제 심정을 걸어 놓고 하늘을 향하여 맹세해야 되겠습니다. 우리들이 품은 심정과 뜻이 예수의 심정과 예수의 뜻을 대신할 수 있고, 우리의 사지백체가 예수의 몸을 대신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심정으로는 하늘을 붙들고, 몸으로는 땅과 만민을 붙들고자 하시던 예수의 심정과 사정을 우리들이 일대에 대신 해원해 드릴 수 있는 예수의 화신체가 되어야겠습니다. 그리하여 마음으로는 하늘을 붙들고 몸으로는 이 땅 위의 인류를 붙들고 싸울 수 있는 우리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먹은 것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었고, 사신 것도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었고, 슬퍼하신 것도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었고, 안타까워하신 것도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슬플 때에도 예수님은 자신보다 먼저 슬퍼하시는 아버지를 바라보고 면목없음을 느꼈습니다. 고통이 있을 때에도 하늘의 고통이 더 크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머리 숙여 더 강하게 책임감을 느끼던 하늘의 아들인 예수의 모습을 우리들은 본받아야 됩니다.
불신의 만민을 구하기 위한 책임을 갖고 나타났던 예수였기에 30여년의 생애에 고난의 길, 수고의 길, 원통하고 고통스러운 길이 많았지만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아버지 앞에 서지 못하는 것을 생각하며 꿈에서까지도 원통해하시던 그 예수의 심정을 오늘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뜻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이 간절하면 간절할수록 마음으로 하늘을 붙들고 몸으로는 땅을 대하여 간절한 마음을 갖고 나타날 수 있어야만 되겠습니다. 예수는 골고다의 길을 가면서도, 피 흘리는 자리에서도, 피 살이 녹아지는 자리에서도 하늘을 붙들고 위로했고, 만민을 붙들고 염려하던 분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이러한 심정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는 불쌍한 분이었습니다. 부모를 가졌으되 진정한 부모를 가지지 못했고, 형제를 가졌으되 진정한 형제를 가지지 못했고, 제자를 가졌으되 진정한 제자를 가지지 못한 분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역사적인 일을 회복하여 내 한 자신들이 예수의 진정한 부모가 될 수 있어야 되겠고, 예수의 진정한 형제가 될 수 있어야 되겠고, 예수의 진정한 제자가 될 수 있어야 되겠으며, 예수의 진정한 교인이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나이 어린 사람들은 나이 많은 분들을 바라볼 때에 참다운 부모로 모시고 받들고 싶은 마음이 넘쳐야 될 것입니다. 또 나이 많은 분들은 나이 어린 사람들을 바라보게 될 때에, 그의 모친과 부친과 같은 입장에서 그를 붙안고 자기의 심정을 다하여 사랑할 수 있는 마음, 자신이 제물 될 수 있는 간곡한 마음이 여러분 자신에게서 우러나와야 하겠습니다.
진정한 형제를 갖고 싶어한 예수였는데, 진정한 형제를 갖고 하늘 앞에 나아가고 싶은 간곡한 마음을 목숨이 다할 때까지 한 번도 풀지 못하고 이루어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것이 예수의 한이었습니다. 이것을 해원해 드리고자 하는 우리들이라 할진대 우리들은 진정한 형제의 입장에서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런 마음이 있어야만 예수의 원이 풀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권 내에서 영원히 둘이 아닌 하나의 입장에 설 수 있는 진정한 제자로서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자가 없었고, 예수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제자를 갖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한이 되었습니다. 이 한을 해원해 드리기 위해서 우리는 진정한 예수의 제자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진정한 제자는 어떤 제자인고? 예수의 심정을 통하고 예수의 피를 통한 그런 사람입니다. 지금까지 6천년 역사가 경과하고 예수를 믿는 교인은 많았으되 오늘날까지 진정한 교인을 갖지 못한 예수였습니다.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교인을 갖지 못한 예수였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아는 오늘날 우리들이 예수를 믿는 진정한 교인이 되어 예수를 모실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에게는 진정한 종족이 없었고,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민족이 없었고, 사랑할 수 있는 나라가 없었고, 사랑할 수 있는 세계가 없었음을 깨달아서 오늘날 우리들은 손에 손을 잡고, 마음에 마음을 합하고, 사정에 사정을 합하여 예수의 민족, 예수의 국가, 예수의 세계를 찾아 드려야 되겠습니다. 진정으로 예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입장에서 이 일을 성취시키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그러면 이 땅 위에 있는 만물이나 천상에 있는 천천만 성도들이 땅 위에 있는 우리에게 호소한다 할진댄 무엇을 호소할 것인고? 예수의 원을 풀어 주기를 호소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의 원은 무엇이었던고? 땅 위에 와서 참부모를 못 가졌고, 참된 형제들을 못 가졌고, 참된 제자를 못 가졌고, 참된 민족과 참된 국가를 못 가졌고, 참된 세계를 못 가진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수의 원을 풀어 드려야 되겠습니다.
지금까지 쉬시지 못하시고 싸워 나오고 있는 것이 예수의 입장이거늘, 오늘날 우리 한 개체가 하나님의 참다운 아들딸이 되기 위해서는 예수의 부모도 될 줄 알고, 예수의 참다운 형제도 될 줄 알고, 예수의 참다운 제자도 될 줄 알고, 예수의 참다운 교인도 될 줄 알고, 예수의 참다운 대신자도 될 줄 알고, 예수의 참다운 세계를 이루는 용사도 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사람이 되어야만 예수의 원은 비로소 해원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이러한 심정을 갖고 예수 편에 서는 무리가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예수가 이러한 심정을 가지고 왔으매 오늘날 우리들도 이러한 심정을 갖추어 벅찬 마음을 갖고, 태어나실 때의 예수를 찾아가 만남의 기쁨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예수를 만나서 축하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앞으로 다시 오시는 재림주도 축하할 수 있는 자격자가 될 것입니다.
지금 하늘은 우리들을 대하여 무엇을 요구하고 있습니까? 하늘의 기쁨은 우리들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요, 하늘의 해원도 우리들로 말미암아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한 개체는 이제 이러한 역사적인 중요한 입장에 놓여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말은 예수의 말을 대신해야 하고, 우리의 행동은 예수의 행동을 대신해야 하는 것입니다. 핍박을 받으며 걷는 걸음도 예수가 배척받으며 걸어야 할 발걸음을 대신하는 것으로 알고 친구가 없어 외롭고, 형제를 잃거나, 부모를 잃거나, 제자를 잃더라도 예수의 사정을 여러분들이 체휼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서야 옛날 예수님께서 감람산 기슭을 헤매시던 사정과 통할 것이요,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서 기도하던 예수의 비장한 심정과 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들이 해야 할 것은 무엇이뇨? 예수가 찾던 참다운 하나의 가정을 찾는 것입니다. 하나의 부모를 모시고 형제들이 하나의 종족을 이루어 가지고 번식하여 하나의 민족, 국가, 세계를 이루는 것이 예수의 소원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각기 가정에 들어가면 부모가 있고 자녀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랑의 참질서를 세워 참다운 형제와 부모와 친척과 교단과 민족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런 마음을 품고 여러분들이 이 땅 위에 태어나신 예수를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이 있다 할진대는, 예수는 말구유에 누웠을망정 기뻐할 것입니다. 이러한 심정을 갖고 오늘 이 한 날을 기념하기를 부탁합니다.
아버님, 보내셨던 예수를 어찌하여 죽음의 자리에 내놓으셨는가를 인간들은 지금까지 알지 못하고 내려왔습니다. 아담을 잃어버린 아버님의 슬픔과 예수를 잃어버린 슬픔을 오늘 저희들이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불쌍한 예수를 믿는 불쌍한 성도들이 나와야 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주님의 뜻을 아는 신자가 나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섭리의 길을 따라간 사람들은 죽음의 길을 허덕이면서도 참다운 길을 찾아 헤맸다는 걸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참다운 부모를 찾아 헤맸다는 걸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것이 천추의 한이 되었다는 사실을 저희들이 이 시간 알고, 나는 참부모를 가졌는가, 참형제를 가졌는가, 참제자를 가졌는가, 참교인을 가졌는가, 참민족을 가졌는가, 참세계를 가졌는가를 음미해 보게 하시옵소서.
하늘의 서러움이 오늘도 땅과 하늘과 만민 가운데에 한없이 사무쳐 있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이날을 축하하는 저희들은 참부모가 되기 위하여, 참아들딸이 되기 위하여, 참다운 효자가 되기 위하여, 참다운 충신이 되기 위하여 모였습니다.
부족한 저희들을 통하여 지난날 서러우셨던 예수님을 위로해 주시옵고, 아버지의 심정 가운데 항상 머물러 당신의 사정을 해원성사시켜 드릴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허락하시옵소서. 모든 것을 맡기오며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사랑하는 아버님, 새해에 이 한 날을 저희들에게 허락하여 주심을 감사하옵니다. 이 첫 시간에 아버님 앞에 나왔사오니 부끄러움이 없는 참다운 경배의 시간을 가질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어서, 아버님께서 즐거워하실 수 있는 이 시간이 되시옵소서.
저희들이 아버님 앞에 너무나 불충스러웠던 것을 용납하여 주시옵고, 섭리하시는 뜻 앞에 저희의 모든 것을 버리고 아버님이 원하시는 제단을 위하여 충성을 다하고 남을 수 있는 모습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시간 아버님께서 친히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저희들의 몸과 마음을 아버지께 드리고자 하오니 받아 주시옵고, 친히 운행하시어서 아버지께서 분부하실 말씀과 내용을 내려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 지금까지 저희들이 뜻을 붙들고 싸워 나왔던 그 모든 내용들이 이 한 해에 있어서는 승리로 귀결되지 않으면 안 되겠사오니, 온 정성을 바치어 아버지께서 기뻐하는 실적을 드러낼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길,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아버지께서 허락하신 당신의 아들딸들이 기뻐할 수 있는 은사를 내리시옵고, 택해 세우신 당신의 아들딸 위에 친히 승리의 표적을 남겨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시간에도 외로운 식구들이 지방에 널리어서 아버지 앞에 경배하는 곳곳마다 사랑과 은사의 손길을 펴시옵고, 긍휼의 은사를 내리시옵소서.
아버지의 전체의 뜻 앞에 충절을 다할 수 있는 당신의 아들딸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땅 위에서 당신의 이름을 사용하는 곳곳마다 사랑의 손길을 펴시옵고, 긍휼의 은사를 내려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면서, 이 한 날 모든 것을 맡아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니다. 아멘.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자 하는 내용은 ‘승리의 나라를 회복하자’,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자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말의 뜻은 승리라는 뜻인 고로 ‘승리의 나라를 회복하자’ 이러한 뜻의 제목을 가지고 잠깐 동안 말씀드릴까 합니다.
방금 본 창세기의 말씀 가운데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어 놓고 축복해 주셨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축복은 이루어진 축복이 아니라 약속의 축복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담 해와는 크나큰 소망을 갖고 만물을 주관할 수 있는 그날을 마음으로 흠모하는 입장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입장에 처한 아담 해와에게 하나님께서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는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담 해와는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소망을 마음에 품고 살아야 했습니다. 따먹지 말라는 그 말씀을 믿고 따를 때에 아담 해와는 비로소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는 일남일녀(一男一女)로서 하나의 가정의 출발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원칙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인간은 반드시 소망을 가진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우리가 소망을 가지고 영원한 관계를 맺고, 인연을 맺으려면 믿음의 과정을 통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소망이 이루어지고 믿음이 이루어지는 날 비로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칙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도 고린도전서 13장에 말하기를,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타락으로 소망을 잃어버렸고, 믿음을 잃어버렸습니다. 소망과 믿음을 잃어버림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중심한 사랑을 잃어버렸던 것입니다. 이것을 복귀하기 위한 것이 지금까지의 6천년 복귀섭리역사인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제 우리들은 아담 대신 혹은 해와 대신, 하나님께서 피조만물 앞에 허락하신 축복을 소망으로 삼아 가지고, 그 소망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하라 하신 일과 하지 말라 하신 일을 분별하여 실천해야겠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처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중심한 소망과 믿음을 갖고, 나아가 실천 생활에서 승리할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개인복귀의 기준을 세울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떠한 개인이나 가정과 교회, 온 피조만물까지도 이러한 권내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이념을 가지고 피조세계를 창조하셨는데 타락으로 말미암아 이런 것들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지금까지 인간들은 소망을 찾아 나오고, 믿음을 찾아 나오고, 사랑을 찾아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6천년 역사를 우리가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면, 구약시대는 소망을 바라보면서 실천해 나온 시대요, 신약시대는 믿음을 찾아 실천해 나온 시대입니다. 따라서 다가올 성약시대는 사랑을 찾아 실천해 나가는 때라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소망을 찾기 위한 섭리시대였던 구약시대에는 할례를 통해 선민이라는 조건을 세워 나왔고, 신약시대에는 물 세례와 불(성령) 세례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 믿음을 세워 나왔습니다. 그 다음 성약시대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사랑의 인을 맞음으로써, 하나님과 사랑의 인연을 맺어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6천년 역사는 무엇을 하기 위한 역사였는가?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소망과 믿음과 사랑을 회복하기 위한 역사였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회복하기 위해서 수고해 나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소망과 믿음의 시기를 지나 사랑의 시대에 처해 있어야 할 때인데, 아직 믿음의 때에 머물러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소망은 무엇을 상징하였느냐? 하나님의 새로운 말씀을 상징했습니다. 또 믿음은 무엇을 상징하였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참다운 아들딸이 되기 위한 것을 상징하였습니다. 참아들딸을 찾아 세우기 위해서 믿음을 상징해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내 개체가 완성한 후에 가정을 찾아 들어가야 거기에서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이 성립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6천년 동안 복귀섭리역사를 해 나오시는 데 있어서 인간 앞에 소망의 하나님, 믿음의 하나님은 될 수 있었지만 아직까지 사랑의 하나님은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 자신들이 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소망의 하나님, 믿음의 하나님을 토대로 하여 사랑의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생활적인 환경을 이루어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환경을 타개하지 않으면 안 될 중요한 때가 바로 이때인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나 하나를 찾기 위한 일이었습니다. 잃어버렸던 아담 해와와 같은 입장에서 원죄 없는 본연의 개체를 찾기 위한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최후에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가? 먼저는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아 가지고 개체 개체끼리 합한 하나의 가정을 찾는 것입니다. 나아가 하나님께서 사랑할 수 있는 그 가정을 중심삼아 거기서 벌어지는 종족을 찾고 민족과 세계를 찾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전체적인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들은 우리 자신들의 소망의 때, 혹은 믿음의 때가 다 지나가기 전에 소망과 믿음을 다 찾아 세워야 되겠습니다. 우리들의 한 개체가 6천년 동안 하나님께서 섭리하신 전체를 결실한 모습, 즉 완전한 아담 해와의 한 모습을 갖추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한 새로운 가정을 형성해야 된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도 하늘나라를 약속하고 이 땅에 오셨으나 그 뜻을 다 이루지 못하고 가셨습니다. 과거에 왔다 갔던 수많은 선지선열들도 하늘을 증거하였지만 그 뜻을 다 이루지 못하고 갔습니다. 따라서 그 모든 역사적인 소망과 믿음으로 찾아 나오던 천국, 즉 승리의 동산을 찾아야 할 오늘날 우리들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여러분들이 무엇을 해야 될 것인가? 하늘이 기뻐하는 개체를 찾아 가지고 하늘이 기뻐하는 가정을 찾아 들어가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그 가정을 찾으려면 참부모를 찾아야 되고, 참부부, 참형제를 찾아야 됩니다.
이것을 찾기 위한 것이 하나님의 섭리역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망을 상징한 시대는 구약시대요, 믿음을 상징한 시대는 신약시대입니다. 앞으로는 사랑을 상징하는 시대가 오는데 그 시대를 성약시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와 같은 인연이 천상으로부터 지상세계에까지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가 오기 전에는 구약시대에 왔다 갔던 수많은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소망의 존재였습니다. 그리고 예수 당시의 신약시대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믿음을 세울 수 있는 상대였습니다. 그런데 앞으로 성약시대에 있어서는 소망의 존재를 대신 할 수 있고 믿음의 존재를 대신할 수 있는 단계를 넘어 사랑할 수 있는 존재를 찾아 세우고자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6천년간 섭리해 나오신 전체의 뜻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끝날에 여러분 한 자체가 아버지 앞에 사랑의 제물로서, 혹은 사랑을 가진 하나의 실체로서 서고자 원할진대, 하나님의 소원을 대신하고 소망을 대신하고 믿음을 대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 이러한 자격자가 됨과 동시에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6천년간 슬퍼했고, 6천년간 고통을 당했고, 6천년간 억울함을 당했던 이 모든 내적 심정을 여러분들이 해원시킨 후에라야만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 사랑 때문에 하나님의 슬픔이 생겼고, 하나님의 고통이 생겼고, 하늘의 싸움이 생겼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슬픔과 고통을 해원해 드려야 되겠고, 하나님의 싸움을 대신 싸워 드려야 되겠습니다. 그런 후에 너는 나 대신 싸워 승리한 장한 아들딸이라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 연후에라야만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야 되는데, 과거 소망시대에 받고 나왔던 그런 사랑은 우리에게 필요없습니다. 또 믿음시대에 받고 나왔던 하나님의 사랑도 필요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모든 원한의 역사를 넘어서 너만을 사랑한다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축복을 받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하늘땅에 맺혀진 원한을 해원해 드려야만, 예수와 여러분들이 신랑 신부의 인연을 맺을 수 있고 사랑의 조건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복귀섭리의 전반적인 뜻인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한 자체가 되었다 할진대 그는 구약시대를 대신한 자요, 신약시대를 대신한 자요, 성약시대를 대신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지금까지 영계에 가 있는 낙원의 영인들과 현재 지상에 살고 있는 기독신자와, 또는 앞으로의 재림 때에 찾아질 수 있는 새로운 시대의 성도들과 합하여 하나의 뜻을 달성하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처해 있습니다.
여러분은 과거의 믿음 지향적이고 소망 지향적인 신앙권 내에 왔다 간 사람들, 즉 구약시대부터 신약시대까지 거친 수많은 영인들은 끝날에 성약시대의 사람을 통하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설 수 없고 또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들은 이제 하늘땅의 모든 것을 대하여 싸워 이길 수 있는 승리자의 모습을 갖추어 가지고 역사적인 하나의 결실체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하늘의 전체 섭리를 보게 될 때 지금까지 천상의 낙원에 가 있는 영인(靈人)들은 소망의 이스라엘이요, 현재 지상세계에 있는 기독신자들은 믿음의 이스라엘입니다. 앞으로는 또 새로운 이스라엘의 세계가 와야 되는데, 그 이스라엘은 어떠한 이스라엘이냐 하면 사랑의 이스라엘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이스라엘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사랑을 받았다는 증거를 가진 이스라엘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과거의 소망시대와 믿음시대를 거쳤다는 하나의 조건을 완결지어 아버지 앞에 떳떳이 설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을 여러분들이 깨닫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우리는 예수 전 시대까지의 성도들을 제1이스라엘이라 하고, 예수가 왔다 간 이후 지금까지 예수를 믿고 있는 성도들을 제2이스라엘이라 하고, 앞으로 재림시대에 재림주를 모시고 직접적인 하나님의 사랑권내에서 살 수 있는 사람들을 제3이스라엘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 연고로 끝날에 있어 이 제3이스라엘의 입장에 들어서는 사람들은 역사노정에 처음 나타나는 무리입니다. 또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해서 사랑이라는 명사를 걸어 놓고 친히 대할 수 있는, 창세 이후에 처음 나타난 무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무리가 나타나지 않으면 하늘의 소망의 섭리도, 믿음의 섭리도 전부 다 깨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끝날에 처해 있는 오늘날 우리들의 사명이 얼마만큼 중요한가 하는 것을 다시 느끼지 않으면 아니 되겠습니다.
이 땅을 바라보게 될 때에 이 땅에는 제2이스라엘이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계(靈界)에는 제1이스라엘이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하나님이 통솔할 수 있는 제3이스라엘이 형성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지파 편성으로부터 교회 편성 혹은 가정 편성도 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이 이 땅을 대해서 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은 야곱, 모세, 예수 때로부터 12형제, 12장로, 12사도와 같은 천적인 수를 찾아오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늘의 모든 원칙의 수를 찾아 가지고, 이 수로 말미암아 천상(天上)이나 지상에 있는 모든 사람을 하나의 반열(班列)에 연결시켜 하나로 통합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늘의 섭리의 목표인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천국의 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천국의 천성문은 하늘나라에서만 열릴 것이 아닙니다. 지상에서도 열어서 넓혀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하나의 지역적인 한계권 내에 있었던 그 천성문이 예수를 믿고 가는 성도들이 많아짐으로 말미암아 점점 넓혀져 나왔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그런고로 여러분이 끝날에 복귀의 뜻을 세워 사탄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하늘땅을 대신한 영광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려면 오늘날 모든 피조만물은 하늘나라의 천성문을 통한 존재들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 자신들은 어떠한 지파에 속하여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오늘날 전세계에 기독교의 교파가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그 교파는 열두 사도를 대표하는 어떠한 하나의 지파에 속하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늘이 지상을 통솔하고 움직일 수 있으며 명령할 수 있는 이러한 지파 편성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한 이 땅을 하늘은 이 시간도 염려하고 있습니다. 모세시대의 12지파는 야곱시대의 12형제를 대신하였습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모세 때까지의 택한 백성으로 세워진 이 무리는 야곱가정을 중심한 복귀시대의 지파를 대신한 민족복귀형의 무리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12지파를 중심삼아 가지고 4백년 동안 번식한 자녀들은 모두 각 지파권 내에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의 지파권 내에 들어와 있는 백성들은 세계를 대표하여 복귀의 사명을 갖고 오신 예수의 12제자를 중심한 지파권 내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모세로 말미암아 예수 때까지 형성된 이스라엘 민족은 예수의 12제자를 중심삼은 지파에 편성되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복귀적인 사명이 남아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당시 예수가 와서 죽지 않고 뜻을 이루었다면, 구약시대의 영인(靈人)들이 제2이스라엘이 되고, 예수를 믿어 하늘의 참다운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무리가 나옴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제3이스라엘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뜻이 이루어지지 못한 연고로 제2이스라엘에 대한 뜻은 그대로 남아지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제2이스라엘에 대한 뜻이 이루어지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이것이 연장되어 2천년이 지난 지금까지 기독교 신자들이 예수 당시에 살고 있던 택한 선민이 담당해야 할 사명을 보충해 나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께서 12사도를 중심삼고 이 땅 위에서 이스라엘을 통솔할 수 있는 지파 편성을 하지 못한 것이 하나님의 서러움, 예수의 서러움, 성신의 서러움이었음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들은 예수의 목적을 성취시켜 드려야 되겠고,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시켜 드려야 되겠는데, 그러려면 먼저 무엇을 하여야 될 것인가? 하늘이 이 땅 위에 전세계를 대신하여 세울 수 있는 하나의 지파를 편성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지파 편성을 하는 데는 야곱의 12아들, 모세의 12장로, 예수의 12사도까지 나옵니다. 그런데 야곱과 12아들의 관계는 부자의 관계였습니다. 따라서 모세와 12장로의 관계도 부자의 관계가 되어야 했는데 부자의 관계가 되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예수와 사도들 역시 부자의 관계가 되었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복귀섭리 노정에 있어서 하나의 슬픔의 조건이 남아지게 된 근거였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야곱과 12아들은 부자의 관계에 서 있었으나 모세와 12장로, 예수와 12제자는 부자관계의 인연이 맺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를 자기 민족의 아버지로 모시고, 즉 자기의 민족을 하늘나라의 승리한 민족으로 세워 줄 수 있는 분으로서, 하늘이 세우신 민족적인 아버지로 알고서 부자관계의 인연을 맺어 가나안 땅을 향해 출발하였던들,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를 배반하였을 리 만무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와 12지파가 부자관계의 인연을 맺지 못한 연고로 모세가 슬퍼해도 그 민족은 슬퍼할 줄 몰랐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서로 사이가 갈라지니 여기서 하나님께서 사랑을 통하여 복귀하려 하시던 전체의 뜻에 금이 가기 시작하여 택함받은 이스라엘 60만 대중은 광야에서 쓰러지게 된 것입니다.
그 후 이스라엘 민족은 여호수아와 갈렙을 중심삼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예수가 올 때까지 가졌던 소원은 한 분의 주를 맞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를 세우지 않으면 안 되었던가? 모세를 민족적인 부모로 모시지 못한 연고로 이스라엘 민족은 앞으로 오실 세계적인 부모를 맞이해야 할 한 때를 바라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즉 참아버지격으로 오시는 메시아를 바라보면서 이스라엘 민족은 준비하여 나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 위에 메시아가 탄생한 후 이스라엘 민족이 하늘의 뜻을 받들어서 12사도와 함께 예수와 부자의 인연을 맺었더라면, 예수와는 갈라질래야 갈라질 수 없고, 사도들도 서로 갈라질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부자관계의 인연을 맺지 못한 것이 오늘날 역사적인 서러움이 되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이때에 있어서 우리들은 하늘이 소망하고 찾으시는 12지파의 지파장과 같은 그러한 대표자를 다시 세워 오시는 주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부자의 인연을 맺어야 하겠습니다. 그러지 않는다 할진대는, 역사 노정에 찾아 세우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뜻을 완결지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복귀노정을 거쳐온 우리 인간들이 야곱, 모세, 예수 때까지 4천년 동안 섭리해 나오신 하나님의 뜻을 배반함으로 말미암아 전부 다 잃어버린 입장에 서고 말았습니다. 아담 이후 예수까지 4천년 동안 섭리해 오신 하나님의 뜻을 전부 무너뜨린 것과 같은 입장에 서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민족이 저끄러뜨린 죄상을 다시 책임지고, 예수가 왔다 간 이후 2천년 동안 수고한 모든 것까지도 책임져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책임을 감당하고 새로운 지파를 편성하여 예수와 부자의 관계로 인연되기를 소망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우리 기독교인의 입장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선조들이 이루지 못한 것을 전부 유업(遺業)으로 삼고, 그 지파를 역으로 편성해 들어갈 것을 바라보면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처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파 편성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이스라엘 민족이 되려면 아브라함 시대에는 할례를 받아야 했고, 예수님 시대에는 세례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앞으로는 예수님의 인(印)과 아버지의 인을 맞아야 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새로운 지파 편성을 하여 나아가는 데 있어서 중요한 문제입니다. 예수님의 인을 맞고 아버지의 인을 맞아야 됩니다. 이것을 위해 하나님은 지금까지 6천년 동안 섭리하여 오셨습니다. 소망적인 구약시대와 신앙적인 신약시대를 거친 후에 사랑적인 성약시대로 넘어가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안고 사랑할 수 있다는 입장을 세워 놓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들은 이런 과정에 놓여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개인적으로 완성된 성별된 자체가 된 후에는 하늘이 이루고자 하셨던 본연의 아담가정을 찾아 나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아담의 형제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부모를 잃어버린 인간들은 형제끼리 합하여서 부모를 복귀하는 역사노정을 거쳐왔습니다. 아담가정으로부터 노아가정, 야곱가정을 거쳐 찾아 내려오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개체가 아버지의 인정을 받은 후에는 형제를 찾아야 할 때가 오는 것입니다. 형제라면 내 형제뿐만이 아닙니다. 그 형제는 아담으로부터 야곱까지 와서, 즉 2천년 하나님의 섭리를 완결지을 수 있는 기준을 조성하여 하늘의 가정을 대표할 수 있는 한 부모가 나온 후에야 비로소 12형제를 가집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들도 복귀섭리 노정에 있어서 내 개체가 아버지 앞에 인정받은 후에, 아담가정의 3수(數)를 거치고 노아가정의 3수를 거치고 야곱가정의 3수를 거쳐서 그 다음에 야곱가정의 12수를 거쳐 나가야 합니다. 나아가 이것을 거친 후에는 70수를 거쳐 나가야 하고, 그 다음에는 문도형(門徒型)의 120수를 거쳐 나가야 할 입장에 놓여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참다운 형제를 찾아야 할 때가 바로 이때입니다. 참다운 형제를 찾은 후에는 참다운 부모를 찾을 수 있습니다. 부모를 찾은 후에 형제를 찾는 것이 아니라 형제를 찾은 후에야 부모를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런 것을 기준으로 생각해 볼 때 거꾸로 생활을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참다운 부모를 찾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은 형제를 통하지 않고는 부모를 모실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제일 염려하시는 것은 하늘을 대표한 참된 부모가 없는 것이 아니고 참된 형제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섭리적인 뜻을 책임져야 했던 예수님은 제자들을 참다운 형제의 입장에 세워 놓기 위하여 세 제자를 택했고 12제자를 택했습니다. 그런데 세 제자가 하나되지 못하고 12제자가 하나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참된 부모를 복귀할 수 있는 길을 깨쳐 버렸다는 이 서러운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들은 참다운 자녀의 자리를 거치고 참다운 부모의 문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6천년 섭리의 소망으로 남겨진 하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런 때가 반드시 올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자기 개인에 있어서의 가인과 아벨의 싸움에서 승리하여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늘 앞에 있어서 나는 신부요 예수님은 신랑, 즉 신랑 된 예수님은 아벨이요 우리는 가인으로서, 아벨 되신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와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여야 될 것인고? 신부 혼자서 찾아가서는 신랑 된 예수님을 맞을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신부 자신만이 가서는 신랑 된 예수님을 못 만난다는 것입니다. 형제와 하나 되어 나가야 만난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예수님은 신랑의 이름을 갖고 오시는데 신랑의 문을 통하고 난 후에는 무엇을 찾을 것인고? 하늘의 잃어버린 가정을 찾을 것입니다. 그것을 찾아 나가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승리의 길을 개척해 나아가고 하나님의 참된 사랑을 받아야 할 우리는 먼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내 마음과 몸에 있어서 내 마음의 죄를 굴복시키고,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생활권 내에서 몸을 자유자재로 완전히 주관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신랑 된 예수를 아벨 삼아 내 몸이 신부의 입장에서, 또는 가인적인 입장에서 그와 완전히 하나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써 일이 종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신랑 되신 예수님과 내가 완전히 하나된 후에는 신랑 되신 예수님께서 찾기 위해 애쓰던 세 제자를 대신하는 존재들을 찾아야 됩니다. 또 12제자를 대신하는 존재들을 찾아야 합니다.
어찌하여 예수님은 세 제자를 찾았던고? 아담가정의 세 아들을 대신한 제자를 찾아 가지고 참된 아담의 입장에 서야 되겠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어디서부터 형성되었느뇨? 야곱으로부터 형성되었습니다. 아담 가정의 세 아들을 대신한 사람을 찾은 연후에 야곱 때에 와서 비로소 승리의 조건을 세웠습니다. 나아가 그 세 아들을 기본으로 하여 12제자가 하나 되어 이 땅 위에서 승리적인 발판을 세울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세 제자와 12제자가 다 배반하고 나니 예수님께서는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 위에 참다운 가정을 건설하기를 원하셨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가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들이 예수님의 신부의 입장에 서려면 예수님이 이 땅 위에 남겨 놓았던 그 몇몇 조건을 찾아 가지고 나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랑 되신 주님을 만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담가정의 3수를 찾는 노정이 오늘날 우리 교회에 있어서는 삼위기대 편성입니다. 따라서 삼위기대를 중심삼고 서로 하나가 못 된다면 하늘 앞에 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삼위기대가 하나됨으로 말미암아 아담가정에서 잃어버린 것을 다시 복귀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2천년 지난 야곱 때에 와 가지고 열두 형제를 찾아 세워 섭리의 뜻을 세워 나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3수를 기본으로 하여 12제자를 찾아 하나가 된 연후에야 비로소 여러분들은 부모를 모실 수 있게 되고, 나아가 하나의 지파를 대신할 수 있는 종족권 내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것이 아담가정에서부터 야곱 때까지 2천년 역사를 탕감하기 위한 절대적 기준이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도 이 길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요, 예수님도 이 길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12지파가 섭리의 뜻 앞에 있어서 무엇을 뜻하는 수이며 70장로가 무얼 뜻하는지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3제자를 택해 놓고, 또 12제자를 택해 놓고, 이 70문도를 세워 놓고 역사적인 인연을 맞추어야 할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이런 섭리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기반을 갖추어서 반드시 민족의 발판 위에 서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이 민족적인 발판을 닦아 놓는 책임은 예수님께서 감당해야 할 것이 아니라 세례 요한이 감당해야 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이 깨어짐으로 말미암아 민족적인 발판이 깨어지게 되었고, 4천년간 섭리하셨던 모든 것이 깨어진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다시 아담가정으로 되돌아가 복귀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 3제자로부터 12제자와 70장로 그리고 120문도를 찾아 세우기 위한 2차적인 노정을 걸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선민 이스라엘의 입장에 서야 할 유대 백성들이 하늘 앞에 전부 다 버림 받은 바 되어, 믿지 않고 있던 어부들과 이방의 사람들이 이 축복을 계승하여 나왔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셨다 가신 후 3제자의 지파는 어디 갔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셨다 가신 후에 12제자의 지파는 어디 갔던가? 없습니다. 70장로와 120문도도 말씀에 대한 조건은 세워 놓았으나 실체(實體)에 대한 조건은 세워 놓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날 우리들이 복귀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을 도저히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앞으로 세계적인 사명을 감당해야 할 재림이상시대(再臨理想時代)에 있어서 재림주가 이 땅에 와서 뜻을 이루시려면, 예수님께서 세우려 하셨던 그 발판을 세우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복귀의 사명을 종결지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은 먼저 세 제자를 찾았다는 기준을 맞춰 세울 것입니다. 찾아진 그 세 제자는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 수 있어야 되겠고, 셋이 하늘을 대신할 수 있는 입장에 서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12수를 찾아야 됩니다. 이것이 최소한도의 하늘의 발판인 것입니다.
그 다음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먼저 천국 백성을 찾는 것이 아니고, 천국 가정을 찾는 것입니다. 백성이 있으려면 먼저 가정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가정을 찾은 후에야 비로소 부모를 모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거꿀잡이입니다.
구약시대는 백성을 찾는 때요, 신약시대는 자녀를 찾는 때요, 성약시대는 부모를 찾는 때입니다. 그래서 신약시대부터 가정을 찾는 시대였으므로 예수님께서는 사랑을 소개하셨으며, 사랑의 도리를 세워 놓았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이 복귀시대를 거쳐서 새로운 이상시대(理想時代)로 넘어가야 할 우리는 어떠한 입장에 처해 있느냐? 예수님께서 이 땅 위에서 장자(長子)의 사명을 감당하시고 하늘 앞에 서야 할 책임을 짊어지고 오셨으나 이 책임을 완성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2천년 동안 연장되었으니, 오늘날 우리들에게는 이것을 대신 탕감복귀해 드려야 할 사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끝날의 성도인 우리들은 이러한 중대한 입장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자신들이 하늘나라의 한 가족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늘이 최소한도로 찾고 있는 것, 즉 노아가정에서 잃어버렸던 그 수를 보충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데 이 3수를 보충했다 해서 하늘 앞에 설 수 있느냐? 그것도 아닙니다. 아담가정의 3아들을 대신할 수 있는 수가 야곱 때에 와서 비로소 종결되었기 때문에 지금 이때는 그 3형제의 조건만 세워서는 안 되며, 기필코 12수의 조건을 세워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비로소 하늘 가정으로 복귀한 기준을 땅 위에 세워 가지고 아버지 앞에 나갈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남자나 여자나 각각 이런 책임을 짊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원래는 자기를 중심삼아 가지고 3형제를 만들어야 앞으로의 새 시대에 부모의 입장에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끝날은 어떠한 때냐? 부모가 나오는 때입니다. 그런데 부모가 나오되 우주적인 부모가 나오고, 민족적인 부모가 나오고, 가정적인 부모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우주적인 부모를 본받고, 혹은 교단적인 부모를 본받은 후에야 비로소 가정적인 부모를 찾아 나설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6천년 복귀섭리 역사노정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인류를 대하여 참부모의 입장, 우주적인 부모의 입장에서 섭리해 나오셨습니다. 예수와 성신은 지금까지 택한 제2이스라엘을 대해 민족적인 부모의 입장에서 섭리해 나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민족적인 사명을 대표하고 교단적인 사명을 대표했기 때문에 대제사장의 입장에서 나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러한 예수를 중심삼아 하늘 앞에 설 수 있는 가정적인 대제사장이 되어야 하고 가정의 참부모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끝날 이 땅 위에 찾아 세우시지 않으면 안 될 섭리의 중점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단적인 부모의 입장에 계셨던 예수님께서는 세계적인 부모의 입장까지 나아가기 위해 재림이라는 명사를 남기고 가셨습니다. 그러면 세계적인 대제사장의 책임을 지고 오실 분이 누구냐 하면, 그분은 세계적인 부모인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오늘날 이 땅을 바라보게 될 때에 우주적인 참다운 부모가 없고, 교단적인 참다운 부모가 없고, 가정적인 참다운 부모가 없습니다.
그러면 참다운 부모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각자가 교단적인, 대제사장의 입장에 있는 교단적인 부모를 모신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가정적인 부모가 될 수 없습니다. 또 그 교단적인 부모는 천주적(天宙的)인 부모를 모시지 않고는 완전히 교단적인 부모의 행사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섭리역사가 종결되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을 바라보게 될 때에, 하나님의 뜻은 아직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전체 복귀의 사명을 종결지어야 할 우리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먼저 우주적인 부모를 찾아 모셔 놓고 교단적인 부모를 찾아 모셔야 되겠습니다. 이 일을 하여야만 가정적인 부모의 자격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 국가를 보더라도 거기에는 대표자가 있고, 종족에는 종족의 대표자가 있고, 가정에는 가정의 대표자가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런 전체 세계와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주적인 부모, 교단적인 부모, 가정적인 부모를 모시고 나아가야만 하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땅 위에 살고 있는 전세계 인류가 찾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 우주적인 부모를 찾고 있습니다. 특히 기독교 신자들은 교단적인 부모가 나타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 우주적인 부모가 나타나는 날이 바로 재림의 날입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교단적인 부모를 상봉시킬 수 있는 섭리가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하늘은 6천년 동안 섭리의 뜻을 세워 나오셨으나, 교단을 중심삼고 대제사장의 책임을 지고 와야 할 재림주의 사명이 남아 있는 것을 보게 될 때, 신랑 신부라는 약속권내의 섭리는 이루었으되 신랑 신부가 교단을 중심삼고 생활할 수 있는 참부모의 자리에는 아직까지 나가지 못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참부모의 위치가 결정되기 전에는 참다운 자녀들로 이루는 참다운 가정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한 단계 더 나아가서 우주적인 부모의 위치가 결정되기 전에는 교단적인 부모의 위치가 결정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타락한 인간들에게 부모는 있으되 그 부모는 참부모가 아닙니다. 그 부모는 하나님 앞에 인정받은 부모가 아니에요.
그러면 끝날 우리들이 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들이 살아 있는 이때에 우주적인 부모를 모셔야 되겠고, 교단적인 부모를 모셔야 되겠고, 그 다음에는 가정적인 부모까지 모셔야 되겠습니다. 즉 3대의 부모를 모셔야 되겠습니다. 가정은 백성을 대표할 수 있는 형(型)이요, 교단은 자녀를 대신할 수 있는 형이요, 우주적인 부모는 참부모를 대신할 수 있는 형입니다.
오늘날 땅 위에 인간들이 살고 있으되 하늘이 허락한 참다운 부모의 사랑권을 벗어나고 있습니다. 부모와 피와 살이 상통(相通)하는 이러한 인연이 나면서부터 영원한 세계까지 연결되지 않은 이것이 서러운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정적인 부모로부터 교단적인 부모와 우주적인 부모와 하나님의 사랑이 엉크러져야만, 비로소 6천년 전체의 사랑권에 들어가 하나님 앞에 얼굴을 들고 설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이 필히 가야 할 노정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 우리들은 아직까지 가정적인 참다운 부모의 자리에 들어가지 못한 입장에 처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정적인 참다운 부모의 자리를 찾아 나가야 되겠는데, 그 부모를 찾는 데는 그냥 찾을 수 없습니다. 왜? 떨어져 내려갔으니 다시 찾아 올라가기 위해서는 형제의 다리를 놓아야 됩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희생시키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참다운 부모를 찾아 나가고 혹은 내 자신이 참다운 부모가 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역사적인 해원(解寃)의 조건을 들어서 탕감했다는 기준을 세워야 되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늘은 여러분을 용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해야 할 것이 무엇이냐? 부모를 모셔야 될 입장에 있으니 부모를 모실 수 있는 형제의 기반을 닦아야 되겠습니다. 이것이 삼위기대의 의의입니다. 편성된 삼위기대(三位基臺)의 형제들이 하늘의 부모를 모실 수 있는 중심을 갖추어 가지고 3형제가 하나되고 12형제가 하나될 때, 비로소 하늘나라의 가정으로서 자격을 부여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가정은 부모를 확대시켜 교단이면 교단, 민족이면 민족, 국가면 국가를 대표하는 그러한 형태를 갖추어 가지고 그 위에 부모를 모실 수 있는 기준을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후에 교단적인 형태를 갖추어 가지고 세계적인 부모를 모실 수 있는 준비를 해 나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야곱 때에도 가정적인 기준을 세워 놓았지만 그 후손들이 믿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그 기준이 다 깨어졌습니다. 모세 때에도 민족적인 가정의 기준, 민족적인 부모의 기준을 닦아 내려왔으나 믿지 못하여 다 깨져 나갔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땅 위에 오셔서 세계적인 가정의 기준을 닦아 놓으려 하셨으나 인간들이 믿지 못한 연고로 그 뜻이 다 깨어졌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인간은 소망을 갖고 있고 믿음을 갖고 있으되, 사랑은 갖고 있지 못합니다.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소망을 잃어버렸고, 믿음을 잃어버렸고, 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다시 찾아 나가야 할 운명에 처해 있는 우리는 새로운 소망을 가져야 되겠고, 새로운 믿음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나아가 새로운 소망과 새로운 믿음이 화하여 하나될 수 있는 형제들을 갖추어 놓아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야곱 이후 소망으로 찾고 예수님 이후 믿음으로 찾던, 그 모든 전체의 뜻을 대신할 수 있는 기준을 여러분 실체(實體)를 통하여 내세우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이러한 실체적인 조건을 다 구비하였을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그러한 우리 한 자체들을 보고 소망의 존재요 믿음의 존재라고 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인간들은 하나님을 소망으로 바라보고 나왔고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땅 위에 소망과 믿음의 결실을 갖춘 실체가 나오게 될 때 그를 대해서 소망을 가질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해 소망을 가질 수 있고 우리 자신이 믿을 수 있는 실체가 되어야만, 하나님의 사랑이 세계와 인연을 맺을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탕감복귀원칙에 따라 여러분들의 중심에 부모의 사랑이 성립되어야만 부부의 사랑이 성립됩니다. 나아가 부모의 사랑과 부부의 사랑이 성립되어야만 형제의 사랑이 성립됩니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부모의 사랑은 하나입니다. 부부의 사랑은 부모를 중심삼아 번식하기 위한 것이요, 형제의 사랑은 이 부부를 대표하여 번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에서 출발하여 점점 확대시키기 위한 것이 바로 부모의 사랑입니다. 타락한 우리 인간이 이것을 찾아 들어가는 데는 최소 단위인 형제에서부터 출발합니다. 형제에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이상세계를 건설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참다운 부모를 모시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참다운 부부가 되어 참다운 가정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위에 참부모를 모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선생님을 믿고 따르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을 믿고 따르는 그 마음만큼 다른 사람이 여러분을 믿고 따를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이래 가지고 예수가 찾고자 했던 가정의 형을 갖추어야 됩니다. 그럴 때에 만민은 형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만들어 주기 위해 삼위기대를 편성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앞으로 무엇을 한다고 할 때 혼자 해서는 안 됩니다. 전도를 하더라도 혼자 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삼위기대를 이루어서 자기들이 부모의 입장에 섰을 때에도 형제끼리 하게 해서는 안 되고 그들과 합해야 됩니다. 부모와 형제가 합해야만 가정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한 민족형을 갖추려면 이러한 가정이 12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10수 이상 넘어야만 민족적인 조건을 대신 맡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찌하여 120명의 문도를 세웠던고? 아담부터 노아까지 10대요, 노아부터 야곱까지 12대입니다. 이 2천년 전부를 대신한 종적인 결실체가 야곱의 12아들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종적인 12수를 중심삼았습니다. 노아부터 야곱까지의 12대와 노아부터 아담까지의 10대를 대표하는 수를 갖추기 위하여 12수에 10을 승하니 120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복귀하기 위한 전체 수를 대표한 수였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난날 여러분을 대해 전도하라는 말을 많이 했던 것입니다. 인간은 땅 위에 사는 동안 120명을 전도하고 가야 됩니다. 그것을 못 하겠으면 12사람이라도 전도해야 됩니다. 12사람을 전도하되 그 12사람만이면 안됩니다. 120명 전도는 못 했지만 횡적으로 120명을 만들 수 있게끔 해야 됩니다. 즉 120명이 횡적으로 화(和)할 수 있게라도 해야만 복귀의 사명을 이룰 수 있습니다.
오늘날 여러분들에게는 승리의 나라를 건설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승리한 나라 가운데는 승리한 하늘땅을 대신할 수 있는 참부모가 있어야 되겠고, 그 다음에는 교단을 비롯하여 세계적인 모든 종교를 대표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할 참부모도 있어야 되겠습니다. 또 가정을 대표할 수 있는 참부모도 있어야 되겠습니다. 이것을 횡적으로 보게 되면 교회는 사회성을 띠고 있고, 국가는 세계성을 상징해 나아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종적으로나 횡적으로 인연을 맺지 않는다 할진대는, 한 나라의 백성으로서 한 가정을 가진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가는 이 길이 천국 가는 길이니 여러분은 기필코 가야 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가정을 맡은 사람은 가정적인 책임을 해야 됩니다. 혹은 교회를 책임진 사람은 교회적인 책임을 다해야 되겠고, 더 큰 사명을 맡은 사람은 더 큰 사명의 책임을 다해야 되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 모양과 움직임이 같습니다. 즉 사명적인 분야가 다를 뿐이지 그 생활형(生活型)도 같고 생활 방식도 같아요. 범위가 크냐 작으냐 여기에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여러분들은 가정의 입장에서 세계를 대신할 수 있는 탕감의 조건을 세워 나가야 되겠습니다. 민족을 대신할 수 있고, 교회, 교단들을 대신하여 이것을 세워 나가야만 비로소 우주적인 참부모의 이념을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또한 오늘날 복귀의 이념을 성취시키는 데 있어서 땅 위에 사는 우리들의 책임이 얼마만큼 귀중하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모세노정이 예수님의 노정이요, 예수님의 노정이 우리들의 노정입니다. 모세가 12지파와 70장로를 중심삼고 60만 대중을 거느려 나왔고, 예수님께서도 12사도와 70장로, 120문도를 중심삼고 역사하셨는데, 이스라엘 민족이 함께 움직여 나왔더라면 예수님께서는 세계적인 발판을 잡아 가지고 출발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민족이 받들어 드리지 못한 연고로 예수님께서는 뜻을 이루지 못하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재탕감시대(再蕩減時代)에 있는 우리들은 어떠한 사명을 해야 되는가 하면, 서로 단결하여 셋이 12명을 이루고, 12명이 120명을 이루고, 120명이 60만, 그 이상까지 움직여낼 수 있는 때를 만들어야 되겠습니다. 그것을 만들어 놓아야만 하나님의 전체적인 섭리를 중심삼아 하늘이 전권적(全權的)인 행사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래야 민족을 지나 국가적인 단계에까지 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앞으로 소망의 한 때를 바라보며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소망의 한 날을 위하여 준비해 나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 있어서 우리들은 가정적인 사명도 해야 되겠고, 민족적인 사명도 해야 되겠고, 세계적인 사명도 해야 되겠습니다. 우리들이 핍박을 많이 받고 있는 원인이 여기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핍박을 받으면서도 가정적으로 혹은 교단적으로 국가적인 사명을 완수했다는 조건을 세움으로 말미암아, 6천년 동안 하나님께서 섭리해 오신 그 터 위에 우리를 세워 놓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 뜻 앞에 서는 날에는 예수 이후 지금까지 영계(靈界)에 있는 수많은 영인(靈人)들은 제1이스라엘의 입장에 서고, 예수님께서 땅 위에 왔다 가신 이후 믿은 성도들은 제2이스라엘의 입장에 서고, 오늘날 완성적인 조건 위에 선 사람들은 제3이스라엘의 입장에 선다는 것입니다. 제3이스라엘의 입장에 서는 것이 신랑이 걸어가야 할 노정의 목적지인 연고로 우리는 반대의 경로를 따라서 가야 되겠습니다.
사랑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제3이스라엘인 연고로 사랑의 목적을 통하지 않으면 하나님과 인연을 맺을 수 없습니다. 그런고로 영계에 있는 제1이스라엘은 지상에 있는 제2이스라엘인 기독교인들을 통해야 되겠고, 제2이스라엘인 기독교인들은 제3이스라엘을 통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제3이스라엘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들은 중매적인 기준을 찾아 세우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자기 개체에 있어서도 그렇고, 가정적인 분야나 교단적인 분야에 있어서도 그렇고, 세계적인 분야에 있어서도 여러분은 이러한 입장을 찾아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체의 뜻을 앞에 놓고 자신이 어느 단계에 처해 있는지는 오늘날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선생님, 선생님 하는 것은 고맙습니다. 선생님, 선생님 하는 것은 고맙지만 복귀의 조건을 찾아 나오지 않는 한 선생님도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참부모를 찾아 나가는 노정에 있어서 참다운 형제끼리는 어떠한 것을 찾아 세워야 되느냐? 지금까지 6천년간 타락의 혈통을 거쳐 나오면서 어느 시대에 어느 누가 형제를 사랑했던 것 이상의 사랑을 이 땅 위에 세워야 되겠습니다. 이것을 세우지 않는 한, 하늘이 ‘오! 너희는 내가 인정할 수 있는 형제다.’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같이 참다운 형제의 노정을 거친 후에야 여러분은 가정적인 부모가 될 수 있는 혜택권 내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위해서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민족적인 부모, 우주적인 부모를 위해서 가정적인 부모의 입장에 서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이런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제 아무리 잘 났어도 이러한 탕감노정을 조건으로 하여 나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을 세우지 못하면 승리한 이스라엘의 부모가 될 수 없고, 승리한 이스라엘의 형제가 될 수 없고, 승리한 이스라엘의 백성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형제를 편성해 가지고 하늘 앞에 인정받은 후 가정 편성을 하고, 그 다음에는 가정이 합하여 민족을 편성하기 위해서 반열(班列)을 편성해야 되겠습니다.
하늘이 땅 위에서 찾고 있는 12지파를 대신하였던 세계의 모든 기독교가 이스라엘의 이름은 갖고 있으되, 이스라엘적인 반열이 없는 연고로 하나님께서 섭리하실 수 있는 발판이 못되어 있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섭리하실 수 있는 발판을 만들기 위해서는 오늘날 흩어진 이스라엘 반열을 다시 편성하여 복귀할 수 있는 세계적인 발판을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책임이 오늘날 우리들에게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전도하고 있습니다. 전도는 형제를 찾는 것입니다. 그래서 형제가 많아지면 종족이 되고, 종족이 많아지면 민족이 되고, 민족이 많아지면 국가가 되고, 국가가 많아지면 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다운 형제를 찾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어도 나 혼자서는 안 되니 너와 내가 합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아버지 앞에 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개인은 형제와 하나되어야 가정적인 부모를 모실 수 있고, 교단은 교단끼리 형제와 같이 하나되어야만 교단적인 부모를 모실 수 있습니다. 또 세계는 세계, 국가는 국가, 서로 형제와 같이 사랑하여 하나되어야만 우주적인 부모를 모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역사적인 사명을 책임하여야 할 시대에 처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잃어버린 반열을 우리들의 손으로 찾아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해서 우리가 하늘 앞에 서려면 가정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예수도 가정을 통과하지 못했기 때문에 낙원에 가 계십니다.
지금까지 6천년 섭리의 뜻은 가정을 통과하기 위한 뜻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가정의 문을 통과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명사를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이 가정의 문을 통과하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도 재림해야 된다는 이런 명제를 남기게 되었고, 영계에 가서도 낙원이라는 중간단계에 머물러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정을 통과한 후에 민족을 통과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안 됩니다. 민족권 내에 가정이 들어가고 국가권 내에 민족이 들어가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가정을 합해 가지고 민족을 편성하고, 민족을 편성하여 국가를 형성하고, 국가를 편성하여 세계를 형성해야 할 중대한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여러분들이 내가 사는 목적이 내 가정을 위하여 산다는 관념을 가지면 하늘과의 관계가 끊어진다는 것입니다. 내가 비록 가정을 중심삼고 살되 민족을 위하여 살고, 세계를 위해 산다는 관념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따라서 가정을 대표하여 사는 분이 있다 할진대 그 가정은 민족을 대표하여 살아야 하고, 민족을 대표하여 사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 사람은 세계를 대표하여 살아야 하고, 세계를 대표하여 사는 사람들이 있다 할진대 그 사람은 하늘땅을 대표하여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새로운 역사를 우리들이 창조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그래서 가정 편성으로부터, 민족 편성, 세계 편성까지 하여 승리한 새로운 동산을 복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중대한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금년 새해에는 선생님의 계획대로 여러분들이 움직여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형제들끼리는 부모의 사랑을 본받아 가정을 찾고, 가정들끼리 합하여 민족을 구원해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과거에 왔다 가신 예수님의 심정을 본받아 형제끼리 서로 사랑함으로써 부모를 모실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러한 심적기준(心的基準)이 되어 있지 않는 한 절대로 승리의 아들딸은 될 수 없습니다. 승리의 아들딸이 되지 못하면 승리의 가정을 찾지 못할 것입니다. 승리의 가정을 찾지 못하면 새로운 나라를 찾고자 하는 전체적인 복귀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특히 오늘 이 말씀을 부디 명심하기 바랍니다.
아버님이시여! 당신께서는 지극히 천하고 낮은 자리에 떨어진 우리 인간들의 참부모로서, 주인공으로서 계시기 위하여 역사적인 섭리를 해 오셨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예수님께서 지금까지 2천년 동안 수고하신 것은 민족적인 혹은 교단적인 부모로 서기 위함이었음을 저희들이 알았사옵니다.
오늘날 이 시대에 있어서 저희들은 우주적이요, 민족적이요, 가정적인 부모를 이루어야 될 때가 왔다는 것을 알았사옵나이다. 오늘날 저희 자신들이 가정적인 참다운 부모의 입장에 서지 못한다면, 민족적인 참다운 부모의 자리를 완결지을 수 없고, 민족적인 참다운 부모의 자리를 완결짓지 못하면 우주적인 참다운 부모의 자리도 완결지을 수 없다는, 이 어마어마한 사실이 저희 한 자체에서부터 좌우된다는 것을 저희들이 알았사옵니다.
오늘날 저희들이 그 복귀의 한을 탕감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당신이 바라시는 소망의 조건을 다 구비하여 아버지 앞에 나설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저희들이 참다운 형제의 자리를 통과하고 참다운 부모의 자리에까지 나아가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저희들이 참다운 부모가 된 후에는 참다운 가정을 이루고, 그 가정을 통하여 민족의 자리까지, 민족을 통하여 우주적인 부모의 자리까지 나아갈 수 있는 역사적인 사명을 감당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 각자가 가정을 중심삼고 사는 것이 가정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민족을 위한 것임을 알고, 민족을 위하여 산다는 마음을 갖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민족을 위하여 책임을 진 어떤 가정이 있다 할진대 그 가정은 민족만을 위하여 살 것이 아니라 하늘땅을 위해서 산다는 마음을 갖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런 마음에 사무쳐 살 수 있는 무리가 되어야만 아버지의 크나큰 한을 풀어 드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사오니, 아버님이시여, 저희들이 이날부터 당신의 뜻을 실천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형제끼리 하나되어 아버지의 영광의 뜻을 넓혀 나갈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올 때,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였사옵니다. 아멘.
뜻 앞에 세우시어 자녀의 명분을 가르쳐 주시고, 저희들의 본연의 가치를 가르쳐 주신 아버지 앞에 이 시간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이제 저희의 마음을 저희의 마음으로 내버려두지 마시옵고, 아버지의 마음과 연결시켜 아버지의 마음을 대신할 수 있는 마음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저희가 마음으로 느끼는 모든 것이 아버지를 대신한 느낌이 되게 해 주시옵고, 저희가 체휼하는 모든 것이 인성(人性)을 벗어나 천성(天性)을 대신하여 체휼하는 것이 될 수 있는 이 한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 아버님과 이별한 저희들이 다시 아버님을 만나야 되겠사오니, 저희의 발걸음이 자신의 모든 것을 잊고 잃어버린 아버지를 찾기 위하여 허덕이는 간절한 발걸음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간곡한 심정과 간곡한 충절과 그것으로부터 우러나오는 행실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아버님이시여! 저희의 불충함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앞에 충성을 다해야 할 저희들이 지조를 갖지 못한 것을 용납하여 주시옵길,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이날은 새해 들어 두 번째 맞이하는 성일(聖日)이오니, 이 한 날에 저희가 새로운 각오를 가지고 출발하게 해주시옵소서. 이 한 날, 저희들의 심중 심중이 아버지 앞에 하나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저희들, 아버지의 손길에 붙들리지 않으면 안 되겠사오니, 아버님이여! 친히 찾아와 주시어서 저희의 마음을 쓰다듬어 주시옵고, 저희의 몸을 품어 주시옵소서.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저희들이 아버지 앞에 하나의 산 제물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이 한 시간부터 아버지 앞에 산 제물로 바쳐지는 저희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날은 거룩한 날이오니 이 땅 위의 만민을 축복하여 주시고, 삼천만 민족을 축복하여 주시고, 수많은 교단을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특히 이날도 외로운 자리에서 하늘의 한 뜻을 품고 눈물겨운 호소를 하고 있을, 지방에 널려 있는 외로운 식구들을 품어 주시옵소서.
하늘의 뜻이 있는 연고로 이들이 외로운 자리에 서 있고, 또한 이들이 하늘의 심정과 사정을 알고 있는 연고로 하늘의 심정과 사정을 대신하여 싸우고 있사오니, 이 한 시간도 같은 은사로써 이들을 품어 주시옵소서.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이시여! 지방에 널려 싸우던 당신의 아들딸들이 이 한 주일을 통하여 새로운 각오와 새로운 결심과 새로운 무장을 하기 위하여 모였사오니, 이 수련회를 통하여 아버지의 영광의 흔적을 몸으로 마음으로 체휼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만상(萬象) 앞에 나타나 하늘의 자비로써 실천하신 그 성상의 가치를 저희들이 대신 증거할 수 있도록, 하늘의 단장을 갖출 수 있게 축복하여 주시고 역사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여,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제 이 한 시간 부족한 저희들이 남달리 모여서 마음을 모아 아버지를 모셔 놓고 경배드리고자 하오니, 이 자리에 현현하시어서 친히 받아주시옵고 친히 품어 주시옵소서. 감추었던 생명의 은사로써 저희를 권고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어두운 세력 가운데서 신음하고 있는 이 민족과 만민을 구해야 할 책임이 저희들에게 있사오니, 아버지여! 자나깨나 이들을 붙들고 어둠의 세력과 싸우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들을 대신하여 생명을 걸어 놓고 제물이 되지 않으면 안 될 전체적인 책임과 사명이 있음을 깨닫고, 이 한 시간 아버지 앞에 맹세하는 저희들이 그 사명을 인계받을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며, 모든 것을 맡기오니 뜻대로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아버님이시여! 땅 위에 살고 있는 만민을 긍휼히 보시옵소서. 뜻을 완결지어야 할 날이 가까워 오고 있다는 것을 저희는 알고 있사옵니다. 그날은 아버님의 해원의 날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소망의 날이요, 인류가 간곡히 고대하던 날임을 저희가 알고 있사옵니다.
그 한 영광의 날을 맞이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마음으로 모시지 않으면 안 될 때가 되었사옵고, 그 한 두려운 심판날을 맞이하기 전에 저희들이 죄악 역사를 피하지 않으면 안 될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이제 아버지, 저희의 마음을 다시 빚으시어 당신께서 기뻐하실 수 있는 심성(心性)을 갖추게 해 주시옵소서. 저희의 몸을 다시 빚으시어서 당신께서 운행하실 수 있는 형상체(形狀體)가 되게 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그리하여 이 시간 마음으로 몸으로 아버지께서 지으시던 본연의 소원을 노래할 수 있는, 당신 것으로 소유될 수 있는 참아들딸이 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그 영광 가운데 하나되어 아버지의 즐거움이 저희의 즐거움이요, 저희의 즐거움이 아버지의 즐거움인 동시에 천상에 있는 천천만 성도들의 즐거움이요, 피조만상의 즐거움으로 나타날 수 있는, 아버님의 소망의 날과 아버님의 영광의 날과 아버님의 기쁨의 날이 어서 속히 이 땅 위에 나타나기를 저희들은 간곡히 바라고 있사옵니다.
이제 마음이 미급한 자가 있사올진대 아버님의 본연의 마음을 따라 달음질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아버지의 성상을 대신하여 지으신 인간 본연의 형상을 갖지 못한 자가 있사올진대, 몸을 굴복시켜 모든 악의 요소를 제거시킬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 동하실 때에 마음으로 몸으로 아버지의 심정에 화하여 동할 수 있는 하늘의 아들딸들이 심히도 그립사오니, 아버님이시여! 저희의 마음이 당신의 본연의 마음에 동하여 움직이지 못한다 할진대 그 마음을 제거시키시옵고, 본연의 형상을 닮지 못해 아버지의 심정에 동하여 움직일 수 있는 형상체가 되지 못한 몸이 있사올진대, 그 몸을 굴복시키시어서 본연의 형상을 갖출 수 있는 하나의 미의 자체로서 나타나기에 부족함이 없는 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 이날 모인 당신의 아들딸들, 한 생명이라도 사탄의 품에 품기지 말게 하시옵고, 아버님의 사랑의 품에 품으시어서 성별시켜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니다. 아버지께서 친히 임재(臨在)하실 수 있는 전(殿)으로서, 아버지께서 친히 움직여낼 수 있는 하나의 몸으로서, 아버지께서 친히 모든 것을 자유롭게 주관하실 수 있는 성도들로서 빚어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님, 이날은 거룩한 날이오니 불쌍한 삼천만 민족을 긍휼히 보아 주시옵고, 갈 길을 찾아 헤매며 방황하고 있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많사오니 그들을 품어 주시옵소서.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흑암의 권세에 사로잡혀 생명의 길을 찾지 못하고 허덕이는 당신의 아들딸들을 어서 속히 붙들어 성별시키시옵소서. 하나의 이념으로 통할 수 있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게 만드시옵고, 축복하여 주시옵고, 끝날 하나의 제단을 갖출 수 있는 방향으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저희들의 몸 마음을 다 드리오니, 아버지, 받아 주관하여 주시옵고, 사탄이 틈탈 수 있는 일체의 요소를 제거시키시옵소서. 아버지께서 친히 주관하시고, 친히 명령하시고 화할 수 있고 선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이 한 모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갖고 있는 모든 심정을 다 내놓고 다시 어린애의 심정으로 돌아가서 아버지의 명령에 전체적으로 응할 수 있는 이 한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이시여! 이날을 기하여 외로운 심정으로 기도하는 곳곳마다 당신의 사랑의 손길을 거두지 마시옵고, 이 한 시간 저희들 전체의 마음 몸을 주관하여 주시고 품어 주시옵소서. 이 한 모임이 아버님의 거룩한 지성소에서 아버지 앞에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제사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였사옵나이다. 아멘.
아버지시여! 사랑하는 제자들을 앞에 놓고 머지않아 땅 위에서의 생애를 종결짓고 아버지의 나라로 갈 것을 얘기해야 했던 예수님의 서글픈 마음을 통찰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허락해 주시옵소서.
시간적으로 보면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는 2천년이라는 간격이 있사오나 심정의 세계에서는 시간을 초월할 수 있는 줄 아오니, 오늘도 예수님의 초초한 모습과 서글픈 심정에 어리어 한마디 한마디 간곡히 훈계하시던 성상을 바라볼 수 있는 직접적인 체휼의 역사를 일으켜 주시옵소서. 이러한 장면은 인간 된 저희들로서 그리워하지 않을 수 없는 장면이옵니다.
이 땅 위의 어느 누가 예수님의 마음을 알았사옵니까? 수심에 잠긴 그 모습을 보고 마음 깊이 사무쳐 오는 하늘의 슬픔을 체휼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으니, 하늘은 이러한 인간들을 놓고 탄식하실 수밖에 없었음을 아옵니다. 하늘의 심정을 알아 ‘주여!’ 하고 부르는 제자 하나도 갖지 못한 예수님께서 의심으로 점철된 생애노정을 가셔야 했고, 또한 의심을 받으며 그 서글픈 생애의 종말을 맞아야 했던 슬픔을 이 시간 저희들이 마음으로 동정할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께서 간곡한 하늘의 심정을 품고, 하늘의 전체의 위업을 품고 인간을 찾아오셨사오나, 인간들은 그러한 예수님을 자기들 멋대로 대하였고 배척할 대로 배척하였사옵나이다. 외로운 자리로 몰아넣을 대로 몰아넣었사옵니다. 그러나 슬픔에 잠기고 탄식의 자리를 여지없이 밟아 나오시면서도, 예수님은 그러한 인간들을 버리지 못하시고 생명의 동산을 향한 한 길을 개척하시기 위하여 그들을 끌고 겟세마네 동산을 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과 골고다 십자가의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생각하시는 예수님의 처참한 가슴 앞에, 믿음직한 제자 하나 없었던 서글픈 사정을 저희들이 알게 해 주시옵소서.
끝날에 하늘이 저희들을 찾는다 할진대는, 하늘의 최후의 심정을 고이 받들어 그 마음과 더불어 그 말씀과 더불어, 마음 몸을 통하고 심정을 체휼할 수 있는 하늘의 자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저희가 알고 있사옵니다.
지난날의 슬픔은 저희 선조들의 부족했던 소치(所致)요, 하늘의 심정을 알지 못하였던 데 기인하였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오늘 저희들이 이런 사실들을 생각하면서 천상(天上)을 대할 수 있고, 고아와 같은 입장이었던 예수의 심정을 가지고 ‘아버지시여!’ 하고 사정할 수 있으며, 그때의 심정을 통할 수 있게 하옵소서. 이들로 하여금 마음을 헤쳐 놓고 믿을 수 있는 제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고, 예수님을 증거할 수 있는 존재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여기(요 14:5)에서 도마는 ‘주의 가시는 길을 모른다.’ 하였고, 요한복음 14장 8절에서 빌립은 ‘주의 성상을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하늘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요구하는 제자들을 보게 될 때에 예수의 슬픔이 얼마나 컸는가 하는 것을 여기에 있는 무리들이 같이 느끼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이 하나님과 같이 사신 것을 알지 못하였던 제자들, 이런 제자들을 남겨 두고 한 생애를 종결지어야 할 입장에 있던 예수님의 심정, 생애의 전부를 인간을 위하여 살았는데도 불구하고 그 생애의 결실을 보지 못하고 처절한 심정에 잠기어 하늘을 염려하시던 예수의 마음을, 저희들이 이 시간 동정할 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님, 여기에 당신의 아들딸들이 부복하였사오니 이들의 마음을 합해 주시옵소서. 이들이 아무것도 갖지 못했을지라도 아버지께서 남겨 주신 심정, 아버지께서 친히 예수님을 보내시어 나타내고자 하시던 간곡한 그 심정을 체휼할 수 있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하늘의 전체 심정을 대신할 수 있고 하늘의 뜻을 바라고 하늘의 심정세계를 그리워하는, 피조만상을 대신하여 나타나기에 부족함이 없는 아들딸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만상 앞에 자랑할 수 있는 아들딸들이 나타나기를 오늘날까지 바라고 계시는 아버지의 심정과 예수의 심정을 이 시간 헤아릴 줄 아는 아들딸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깊은 사망의 물결에 휩쓸려 잠들어 있는 삼천만 민족을, 아버지! 이끌어 주시고 흑암권세에 대하여 생명의 권한을 갖고 싸워야 할, 당신이 세우신 교단들이 하나되게 해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뜻을 따르고는 있사오나 그 뜻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하늘의 길을 간다고는 하오나 그 길이 어떤 길인지 모르고 있사오니, 아버님이시여! 저희들에게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을 허락하시고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 여기 모인 당신의 아들딸들, 이 민족을 대신하여 하늘의 간곡한 심정을 깨닫는 자들 되게 하시옵고, 아버지와 가장 가까운 자리에 서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의 권고의 말씀을 들을 수 있으며, 아버지의 간곡한 사정을 붙들고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라 부르며 통곡할 수 있는 사무친 마음을 가지고 아버지 앞에 경배드릴 수 있게 허락해 주시옵길,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사탄은 저희들의 심정의 세계를 유린하기 위하여 이 시간도 갖은 간교한 수단으로 저희들의 눈을 가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 주시옵고, 저희가 마음 마음을 합하여 온전히 하나되어서 산 제물로 아버지 앞에 드려지는 이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 당신의 생명의 길을 찾지 않으면 안 되겠사옵고, 당신과 생명의 인연을 맺지 않으면 안 되겠사옵고, 당신의 생명의 말씀과 접하지 않으면 안 되겠사옵나이다. 이것을 알고 당신의 말씀을 전하고자 원하오니, 전하는 자의 마음이나 받는 자의 마음이 간곡한 자리에서 흠모의 심정에 사무쳐 하나되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아버님의 창조 본연의 이념을 저희의 심정으로 체휼할 수 있으며, 그 심정을 내 것으로 옮겨 받을 수 있는 마음을 갖고 허락하신 말씀에 동하여 다시 빚음 받는 저희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오늘 이 시간 이후 모든 것을 맡기오니 뜻대로 이루시옵고, 외로운 식구들을 친히 품어 주시옵길 부탁하면서,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였사옵나이다. 아멘.
오늘 여러분들에게 잠깐 드리고자 하는 말씀의 제목은 ‘같이 살 아야 할 우리들과 하나님’입니다. ‘같이 살아야 할 인간과 하나님’ 이러한 제목을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온 피조만물을 창조하신 동기와 목적이 어디에 있었느냐 하면, 같이 사는 데 있었습니다. 같이 살기 위하여 창조하셨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지극히 작은 것에서부터 큰 것에 이르기까지 그 과정에 연하여 있는 모든 존재물들은, 하나님과 더불어 하나님의 사랑권내에서 움직일 수 있는 기쁨의 존재들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우리 인간은 하나님께서 심혈을 기울여 지으신 존재입니다. 즉 하나님의 생각 중의 생각의 존재요, 심정 중의 심정의 존재요, 창조이념 중의 이념의 존재요, 창조 실체 중의 실체의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소유하는 것이 온 우주를 소유하는 것이 되는 것이요, 인간을 주관하는 것이 또한 피조세계 전체를 주관하는 것이 되는 것이요, 인간과 더불어 기뻐하는 것이 피조세계 전체와 기뻐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듯 창조이상으로부터 창조의 결과에 이르기까지 목적의 전체를 대신한 대표적인 존재로 인간을 세우셨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피조세계를 지으신 목적은 ‘같이 사는 것’인데, 오늘날 인간과 만물, 모든 존재물들이 하나님과 더불어 살 수 있는 권내에 있지 않으니, 이것은 어떻게 된 곡절이뇨? 타락으로 인해 그렇게 되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타락한 연고로 하나님이 임재하실 수 있는 터전이 사라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아담 해와를 잃어버린 그날부터 오늘 이 시간까지 우리 인간들을 찾아 헤매시는 것은 무엇 때문이뇨? 그것은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의 전(殿)이 되고, 하나님의 몸이 되고, 하나님과 일체를 이루어 하늘과 땅을 대신한 하나의 실체 존재가 되면, 우리 인간이 기뻐하는 것이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하나님의 기쁨이 우리 인간을 통하여 만물에게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 인간이 하나님과 만물을 연결시키는 중간 매개체이기 때문입니다.
본래 이렇게 되어야 할 우리 인간들이 오늘날까지 그러한 기쁨을 느껴본 적이 없고, 하나님이 지으시려던 본연의 성전을 갖추어 본 적도 없고, 하나님의 심정과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이념을 가져 본 적도 없습니다. 이것이 오늘날까지의 인간들의 실상이었습니다.
땅 위에 아무리 잘나고 훌륭하다고 만상 앞에 자기를 내세워 자랑할 수 있는 무엇을 갖춘 성현이나 현철이 있다 할지라도, 그는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이념의 전(殿)이 될 수 없으며, 하나님께서 찾아 주실 수 있는 이념의 실체가 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할 수 있는 참된 모습을 갖추지 못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한 권내에 있던 우리 인간, 그러한 운명에 처해 있던 우리 인간은 어디를 거쳐 어디로 가서 어디에 머물고자 하여 6천년의 기나긴 세월을 거쳐왔던가? 오늘도 살기를 바라고 내일도 살기를 바라고, 생에 대한 애착심을 갖고 생의 끝없는 연장을 소망하면서 하나의 이념을 찾아 헤매는 인간들, 이 인간들이 머물고자 하는 소망의 기점은 어디인고?
지어 주신 주인이 계시되 그 주인을 모르고, 심정의 주체가 계시되 그 심정의 주체를 알지 못하고, 본연의 참다운 사랑의 주체가 계시되 그 본연의 사랑의 주체를 알지 못하고 다른 것을 찾아 헤매고 있는 인류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심정은 어떠하겠습니까?
창조의 이념이 없고 창조의 실적이 없으면 모르겠거니와 창조의 실적인 만상이 있고, 창조의 이념이 하나님 속에 남아 있다면 그 이념과 실적을 완성시키고 완결시킬 수있는 존재가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존재는 어떤 존재이겠습니까? 그 존재는 만물도 아니요, 하나님도 아니요, 바로 인간이라는 것을 우리들이 알아야 될 때가 왔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러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6천년 동안 우리 인간을 찾아오셨습니다. 오늘날까지 우리 인간을 한 터로 삼아 하늘 것으로 옮기기 위해서 찾아오고 계십니다.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모든 조건을 완비하여 생활을 통하여 창조이념 전체와 연결될 수 있고, 그 이념권 내에서 완성될 수 있고, 완성된 실체로서 하나님 앞에 이념의 실체가 될 수 있을 것이었는데,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떠나가시고 만물과의 인연도 끊어져 버렸고 인간과 인간끼리의 인연도 끊어져 버리게 되었으니, 이것이 슬픔 중의 슬픔이요, 탄식 중의 탄식인 것입니다.
이것은 내 한 개인에 국한된 탄식이 아니라 옆을 바라보면 동포의 탄식이요, 눈을 들어 세계를 바라보면 인류의 탄식이요, 더 나아가 만물을 바라보면 만물의 탄식이요, 머리를 들어 마음을 통하여 하늘세계를 바라보면 하늘의 탄식입니다. 이런 어마어마한 사실을 여러분들은 느껴 본 적이 있습니까?
마음 몸으로 그 탄식을 붙들고 크게 탄식하면서 울어 본 적이 있습니까? 탄식하는 모든 만상을 붙들고 이 위에 맺혀 있는 탄식, 우리를 지으신 주인의 탄식을 염려하여 더 큰 탄식에 사무쳐 하늘을 붙들고 통곡하고, 만민을 붙들고 통곡하고, 만물을 붙들고 통곡하고 싶은 그런 심정을 한 번이라도 가져 본 적이 있습니까?
그런 마음을 갖지 못한 우리들이지만 하늘이 탄식의 심정으로 우리를 찾아 헤맨다 할진대 여러분들은 그 하늘 앞에 불효자 중의 불효자요, 역적 중의 역적이요, 배반자 중의 배반자라는 것을 느끼기라도 해야 합니다.
만일 그런 하늘이 안 계시다면 모르지만, 계신다면 오늘날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우리 인류는 용서받을 수 없는 역적이라는 것을 알아야 될 것입니다. 이러한 불신의 인간이요, 배반의 인간이요, 절망의 인간을 다시 빚어낼 조건을 찾아서 하늘은 오늘 이 시간까지 헤매고 계십니다.
타락한 아담의 위치에 있는 인간을 끌어내 가지고 하늘 편에 세워 놓고, 하나님의 이념으로부터 하나님의 소원까지 하나님의 전체의 속성을 완비시키시어 그들과 더불어 의논하면서 살고자 하시는 것이 창조주가 인간을 찾아 헤매는 목적입니다. 이것을 느끼는 자가 있다 할진대는 하나님께서는 그 이상 고마워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오늘날까지 하늘은 인간들이 모르는 사이에 개인을 통하여 환경적인 섭리의 발판을 닦았고, 환경을 통하여 세계적인 섭리의 발판을 닦아 나왔다는 것을 여러분은 복귀노정을 통하여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하늘은 아무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6천년 역사를 거쳐 오면서 우리 선조들과 인연맺기 위하여 투쟁해 오셨고, 우리 민족과 국가와 땅과의 인연을 맺기 위해 투쟁해 나오셨던가? 그 목적은 무엇인고?
하나님의 말씀은 태초에 그 말씀을 배반하였던 우리의 선조들에게만 나타내신 것이 아닙니다. 타락 이후 6천년 역사노정을 거쳐오면서 어느 시기나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하나님은 말씀을 나타내 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나타나지 않은 때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심어 말씀의 결실을 맺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인류의 슬픔 중의 슬픔인 것입니다. 하늘의 말씀을 마음에 심어 말씀의 결실을 맺기를 원하시던 하늘의 소망을 수천만 번 배반한 선조들임을 알게 될 때, 타락의 혈통을 남긴 선조들을 대해 적개심을 갖는 참다운 후손들은 나오지 않겠는가? 여러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선조들이 하늘의 말씀을 배반하여 하늘 앞에 서러움을 안겨 드리고 죄의 담을 쌓아 놓은 것을 분하게 여겨 그 선조들을 붙들고 항거할 수 있는, 북받치는 심정으로 하늘땅을 대하여 외치고 나설 수 있는 참다운 아들딸의 모습은 없겠는가? 하늘은 찾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 해와의 몸에 당신의 말씀을 심어 그 말씀을 통하여 실체를 갖춘 본연의 인간으로 세워 놓고자 하셨는데, 그 마음속에는 무엇을 옮겨 주고자 하셨느냐? 하나님의 마음을 심으려 하셨고, 하나님의 이념을 심으려 하셨으며, 또한 하나님의 생명과 하나님의 사랑을 그 마음속에 옮겨주고자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그러한 창조이념이 우리 선조들의 배반으로 말미암아 온데간데 없어졌고, 하나님의 말씀도 온데간데 없어졌고, 하나님의 실체인 본연의 인간도 없어졌고,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생명,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도 간 곳이 없어졌습니다. 이와 같은 것을 잃어버린 이상의 슬픔은 피조세계에 또다시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서글픈 사실을 놓고 뼈 살에 사무치는 심정을 갖고 흐느껴 울 줄 알아야만 하겠습니다.
이러한 것을 잃어버리고 타락의 제물이 된 연고로 인간들은 잃어버리기 전의 ‘본연의 나’를 그리워합니다. 그 ‘본연의 나’가 그립다는 것입니다. 땅 위의 어떠한 물건이 그리운 것이 아닙니다. 지어진 만상이 있다 해도 그 만상이 나와 관계가 없는 입장에 있습니다. 역사와 세계가 있으나 그 또한 내 마음의 세계와 인연을 맺을 수 없고, 참나를 위로해 줄 수도 없으며, 어떤 자극적인 충격을 줄 수도 없는, 나와는 하등의 관계도 없는 입장에 있습니다. 그러면 이것이 어찌하여 그렇게 되었느냐?
인간에게 있어 제일 귀한 것은 ‘본연의 나’, 즉 하나님의 전체의 속성을 갖추어야 할 본연의 나입니다. 그런데 그 자체를 잃어버렸으니, 즉 제일 귀한 것을 잃어버린 인간인 고로 그것이 찾아지기 전에는 인간 그 자신 속에서 기쁨이나 행복을 느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타락한 인류는 동서남북 사방에 흩어져 그 본연의 나를 찾아 헤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먼저 무엇을 찾아야 될 것인가? 오늘날 우리는 만물을 주관할 수 있는 내가 못 되어 있고, 몸은 있으되 하나님의 전(殿)이 못 되어 있고, 마음은 있으되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는 마음이 못 되어 있고, 심정은 있으되 하나님의 심정과는 하등의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있는 심정이 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내가 이념과 사랑을 찾고 논의하되 그것들이 하늘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는 입장에 떨어져 버렸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슬픔이요, 하나님의 슬픔이요, 피조만물의 슬픔입니다. 이것을 생각하게 될 때, 하늘을 찾아 나선 우리들, 하나님의 선과 하나님의 사랑을 찾아 나선 우리들, 하나님의 한을 해원하려 나선 우리들은 어느 누가 치고 천대하여도, 그들에게 맞으면서라도 하늘을 향하여 하늘이 원하시는 뜻을 찾아가야 할 운명에 놓여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은 인간을 치는 데도 개인으로부터 종족을 거쳐 민족을 거쳐 세계까지 친다는 것입니다. 하늘이 인간을 치는 목적은 인간을 망하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인간과 접하고 있는 악의 분자를 제거시키기 위함입니다. 이 악의 분자 때문에 인간을 친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까지 사탄이라는 비원리의 주인공이 우리를 유린해 나왔고, 우리의 가정과 사회, 우리의 창조이념의 세계를 유린해 왔습니다. 이 사탄과 사탄으로 말미암은 죄가 오늘날까지 우리의 생활을 지배하여 왔고 세계를 지배하는 하나의 중심이 되어 왔으니, 이제 우리 인간들이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을 생각하고 창조 본연의 나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사탄이 내 육신을 지배하고 세계의 모든 피조물을 움직여 왔으니, 그보다 강한 조건이 우리들의 마음에서 폭발되어 나오지 않는 한 우리는 하나님과 창조 본연의 인연을 맺을래야 맺을 도리가 없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렇게 우리 인간들은 사탄에게 얻어 맞으면서 나오다 보니 오늘날 종말시대까지 나오게 되었습니다. 지금 이때는 하나님의 6천년의 소원이 접해 들어오는 때요, 사탄이 깨지는 때요, 인류의 소원이 접해 들어가는 때입니다.
이 끝날은 사탄에게는 무한한 슬픔의 날이요, 본연의 인간에게는 무한한 기쁨의 날이요, 섭리해 나오신 하나님 앞에는 무한히 영광스러운 날입니다. 우리는 이 끝날을 맞이하기 위하여 나서는 끝날의 성도들이 되지 않으면 안될 운명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6천년 동안 무엇을 해 나오셨던고? 우리에게 무엇을 주입시키기 위해 기나긴 세월을 수고해 오셨던고? 우리를 하나의 발판, 하나의 터로 삼아 하나님의 말씀을 주입시키기 위해서 수고해 나오셨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주신 말씀을 인간이 잃어버린 연고로 그것을 회복하기 위해 6천년이 걸리더라도 이 땅 위의 인류 앞에 참다운 말씀, 하나님과의 관계를 알 수 있고, 하나님의 실존성을 알 수 있으며, 하나님의 심정과 하나님의 이념과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는 그러한 말씀을 인류 앞에 나타내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까지 인류 앞에 그런 말씀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그 말씀을 찾아 주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6천년을 수고해 나오신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의 몸을 헤쳐서 분석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속성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말씀을 뿌리기 위해 6천년 동안 수고하셨는데, 그 피 땀의 결정체인 말씀이 여러분 마음 가운데 들어가 있느냐? 하늘은 이렇게 물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차피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와 하나되어 우리의 생활 환경과 이 세계에 이념의 동산을 창설하셔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복귀섭리가 끝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연고로 하늘이 여러분을 찾아오실 때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것으로서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서 사탄세계의 어떠한 말보다 강력한 하늘이 뿌리신 말씀의 소유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지으실 때에도 말씀을 통해서 지으셨고, 우리를 찾아오시는 데도 말씀을 통해 찾아 나오십니다. 그런 고로 여러분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 할진대는, 하나님이 말씀을 뿌렸으니 여러분에게는 그 말씀을 거두어서 아버지 것으로 찾아드려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면 끝날은 무엇이냐? 말씀을 거두어서 하나의 실체를 갖추어야 하는 때입니다. 실체! 말씀을 통하여 실체가 빚어집니다. 이같이 말씀을 통해 빚어진 실체를 찾아 헤매신 것이 하나님의 역사요,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 위에 오셨던 목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인간에게 실체를 먼저 보여 주지 않고 말씀을 먼저 보여 주셨는데, 이것은 거꿀잡이로 찾아 나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잃어버린 순서대로 찾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실체를 소망하시되 먼저 타락한 인간들의 가슴 가슴에 그 말씀의 씨를 뿌린 후 그 말씀을 근거로 하여 하나의 생명체를 이룬 실체를 갖추게 하는 거예요. 이러한 실체가 나오면 성경에 “하나님께서 아담 해와를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 2:7) 한 성경말씀과 같이 생기를 불어 넣어 주실 것입니다.
이처럼 실체가 된 후에 하나님께서 생기를 불어 넣어 주시어서 생령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생령은 또 무엇인고? 생령은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라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존재, 하나님과 일체를 이룬 세계에 들어가서 뗄래야 뗄 수 없는, 영원불변의 하나님의 실체대상이라는 것을 체휼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인간들이 그런 가치를 느낄 수 있는 생령체로서 완성되어 당신 앞에 나타나기를 바라셔서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역사해 나오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의 마음의 터 위에 뿌려 놓으신 말씀을 통하여 무엇을 할 것인고? 에덴동산에서 잃어버렸던 아담 해와의 형상을 다시 빚으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4천년 역사가 끝날 때 하나님께서 인간 앞에 4천년 동안의 말씀을 대신하여 말씀의 실체로 보내신 분이 누구냐 하면 예수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의 실체로 나타난 예수는 이 땅에서 무엇을 했어야 했는가? 예수님에게는 구약시대에 뿌려진 말씀을 받은 인간들을 주장해야 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구약 율법을 믿고 있던 그 시대 사람들은 마음의 터전 위에 말씀의 대신 존재를 세워야 했고, 예수의 몸을 붙들어야 했고, 예수의 마음을 붙들어야 했고, 예수의 이념을 붙들어야 했고, 예수의 생명과 예수의 사랑을 붙들어야 했습니다.
4천년 동안 예언자를 보내어 약속하셨던 실체, 구약의 말씀을 통하여 증거하였던 그 말씀의 실체가 이 땅 위에 메시아로 나타나신 예수입니다. 그런데 수많은 말씀을 통하여 예언되고, 하나님의 무한한 고생을 통하여 보내진 예수, 전체의 말씀을 대신할 수 있는 실체 존재로, 우리 인간이 직접 눈으로 볼 수 있게끔, 귀로 들을 수 있게끔, 손으로 만질 수 있게끔, 붙들 수 있게끔 보내진 그 예수는 어디로 갔는고! 그 예수는 어디 갔는고! 예수는 이 땅 위의 인간을 위하여 오셨으되 하나님께서 4천년 동안 내리신 말씀의 완성 실체로, 구약시대 인간들 앞에 무형의 신으로 말씀하셔야 했던 하나님의 서글픈 심정을 대신한 실체로 오셨고, 실체를 갖춘 실체 하나님 격으로 나타나셔서 인간 앞에 실체의 말씀을 주어 말씀의 목적인 인간과 하나되기 위하여 예수는 오셨는데, 인간들은 실체 예수가 필요 없다 하여 보내진 예수를 마음대로 유린하고, 마음대로 처단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는 실체를 잃어버린 인간이 되었습니다.
예수가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늘의 말씀, 즉 구약의 말씀을 거두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거두는 동시에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를 믿어 몽땅 그 마음속에 들어오게 하셔야 했습니다. 거꿀잡이로 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4천년의 구약역사! 1600년 전부터 모세를 통하여 세워진 율법이 하나님 말씀인데 예수는 뭐야? 이 말씀에 굴복 안 하는 자는 반역자다.’ 하여 예수를 죽였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똑똑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말씀은 실체 앞에 굴복하고, 실체는 하나님 앞에 굴복해 들어가야 되는데, 그 실체인 예수를 인간이 죽여 버린 것입니다. 실체인 예수는 하나님과 일체를 이루어 4천년 동안의 역사적인 모든 원한의 조건을 청산하려 하셨습니다. 그러면 역사적인 원한의 조건은 무엇이냐? 4천년 동안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배반한 것입니다. 이 원한은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 한분을 믿고 하나됨으로 말미암아 풀려지는 것인데, 이스라엘 민족은 4천년의 원한의 말씀을 내세워 그 실체를 잡아 버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민족이 범한 죄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은 세계를 유리고객(流離孤客)하면서 종의 종이 되어 세계인으로부터 밟힘을 당했고 천대에 천대를 받아야 했습니다. 영광 중의 영광의 나라를 건설하여야 할 민족이 고통과 십자가의 길을 헤매면서 영광의 나라를 바라면서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왜? 예수를 죽인 죄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오늘날 전세계 기독교인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 같은 것은 있었지만 하나님의 참말씀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신하여 땅 위에 실체적인 말씀을 세워 놓으셔야 했던 예수가 구약 말씀 같은 약속의 말씀을 남겨 놓으신 것이 신약 말씀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신약 말씀에서 실체를 찾아 허덕여 왔습니다. 그런데 이 성경을 봐도 말씀의 중심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요 16:13)고 하시며 말씀을 못다하고 가셨습니다. 인간이 완성한 실체, 땅 위에서 완전한 기반을 잡은 실체로서 살 수 있는 생활적인 말씀은 어디 있는고! 없습니다. 성경 가운데도 없습니다. 없다는 거예요. 이 말씀을 못 다하고 가신 예수인 연고로 다시 오셔야 된다는 명제가 남아졌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믿어지지 않으면 기도해 보세요. 기도해 보면 가르쳐 줍니다.
그러면 오늘날 말세는 어떠한 때인가? 말씀의 실체, 말씀의 주인공을 상봉하는 때입니다. 그런데 말씀의 실체를 상봉하려면 인간들을 살리기 위해 하나님께서 6천년 동안 참다운 인간 앞에 나타내려 하신 그 말씀, 하나님의 말씀의 중심을 통할 수 있는 말씀을 지니고, 그 말씀과 일체(一體)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만이 오시는 주와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땅에 완전한 말씀을 전하기 위해 오셨으나 완전한 말씀을 나타내지 못하셨습니다. 그러나 성신을 통하여 그 완전한 말씀을 나타낼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2천년 동안 수고하신 성신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끝날에 예수가 나타내시려던 말씀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통하여 실체로 나타나실 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그분을 알아서 그분을 신랑으로 모시고 우리는 신부로서 신랑 신부의 상대적인 관계를 맺어야 되겠습니다.
예수께서 실체를 갖고 이 땅에 오셔서 인간들을 실체적인 성전으로 완결시키기 위한 말씀을 못 하셨으니 우리가 그 말씀을 대신한 가치적 존재로, 제2의 실체 성전으로 나설 수 있어야만 우리의 몸 가운데 하나님이 임재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존재가 살 곳이 지상천국입니다. 성경을 붙들고 울어 본 사람이 있습니까? 구약의 완성 실체로 오셨던 예수를 죽였던 연고로 성경에는 그 예수가 완성하여 실체로서 나타내실 모든 말씀이 기록되어 있지 못합니다.
무형의 하나님이 말씀을 통하여 인간을 대하던 것을 실체로 대하기 위하여 예수를 보내셨는데, 예수께서 돌아가신 연고로 구약형의 말씀밖에 남기지 못하셨는데 이것이 신약 말씀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의 말씀을 믿을 것이 아니라 예수의 실체를 믿어야 됩니다. 실체! 지금은 실체신앙 시대예요.
베드로는 12사도 중에서도 예수의 말씀을 자유롭게 들을 수 있고 믿을 수 있는 입장에 있었으나, 예수를 자신의 마음에 바로 받아들일 수 있는 자리에는 못 나갔습니다. 마찬가지로 말씀의 실체를 붙들 수 없는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한 예수를 붙들려 했으나 붙들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이렇게 실체를 붙들 수 없는 인간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럴 수밖에 없게 된 것이 우리 인간의 제2차적인 비극입니다.
1차의 비극은 에덴동산에서 아담을 잃어버린 것이요, 2차는 예수를 잃어버린 것, 말씀의 완성 실체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런 연고로 다시 오셔야 됩니다. 이것이 알고 보면 한없이 울어야 할 일입니다. 이 땅에 살고 있는 인간에게 슬프다면 이 이상 슬픈 일이 없을 것입니다.
하늘은 해원의 날을 바라시고 4천년 동안 눈물의 고개, 슬픔의 고개, 복통할 수밖에 없는 고개를 거쳐 나오셨습니다. 이러한 고개를 넘으시면서 소망의 실체로 예수 한 분을 이 땅에 세우셨는데 그만 이스라엘 민족은 그 예수를 죽음의 자리로 보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이스라엘 민족 앞에 하나님의 생명을 대신하고 약속한 이념을 대신한 메시아로 보내셨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여금 메시아의 뒤를 따르고 메시아를 모실 수 있는 준비를 하라 하셨는데, 메시아로 오신 예수를 붙들고 울어야 할 민족이요, 통곡하여야 할 이스라엘은 어디 갔는고? 아담을 잃어버린 그날부터 4천년 동안 하나님을 모시던 이스라엘 민족은 어디 갔는고? 사탄의 제물이 된 것입니다. 이 이스라엘 민족은 하늘의 역적이 되었습니다. 역적!
오늘날 믿는 사람들은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러 왔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의 강림 목적을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다. 십자가의 도리를 믿을 것이 아니라 부활의 도리를 믿어야 됩니다. 십자가는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의 몸을 유린한 죄의 조건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것임을 알아야 돼요. 이 십자가를 넘어서 부활하신 후 40일을 지난 뒤 이루어진 성신 강림과 더불어 부활하신 예수를 믿는 것이 기독교의 정통적인 신앙입니다. 이것이 바른 기독교의 신앙이에요. 그런데 기독교에서는 예수를 죽으러 왔다고 합니다. 만약 죽으러 올 것 같으면 4천년 동안 이스라엘 민족이 안 믿으면 들이치고, 애급에서 고역당하게 하고, 눈물을 흘리게 하면서 끌어내었겠습니까? 또 바빌론에 포로가 되었을 때에도 선지자를 세워 간곡히 권고하였겠습니까? 4천년 동안의 역사가 예수를 잡아 죽이기 위한 역사입니까? 다시 생각해 봐야 할 때가 왔습니다.
이러한 기독교인들이 세계에 널려 있습니다. 이들이 하늘을 저버리고 하늘을 배반한 이스라엘 민족과 같은 제2이스라엘 민족이 아니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이 심각한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말씀을 완성한 실체로서 하늘나라의 말씀을 해 주셔야 했습니다. 그 말씀은 사탄이 시험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믿고 나서는 사람에게는 사탄이 시험을 못 합니다. 오늘날 땅 위의 예수를 믿는 성도들 가운데 시험 받지 않은 사람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다. 누구나 시험 받아야 해요.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사탄이 억천만 번 시험을 하고자 해도 시험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사탄에게 침범 받으면서 남겨놓고 가신 말씀을 가지고 믿고 나가고 있으니 그 성도들에게 사탄이 공격해 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실체를 갖추어서 사탄의 시험을 통과할 수 있는 시대는 어느 때에나 올 것인고? 그때가 재림의 날입니다.
내 몸에 사탄이 침범할 수 없는 말씀의 씨앗을 심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둬들여야 하겠고, 내 몸에 말씀을 통한 실체를 심어서 하나님의 실체로 거두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기쁨에 겨워 품으시고 사랑하실 수 있는, 영과 육이 하나된 완성 실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존재가 기독교에서 말하는 최후의 신랑 신부가 될 수 있는 존재입니다.
끝날인 오늘날에는 성신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런 고로 우리들 가운데서 이 성신이 백 퍼센트 역사할 수 있게 재촉할 수 있는 성도가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러면 성신이 오늘날 우리를 위해 역사하는 그 이념의 기준은 무엇인가? 성신을 앞에 세워 놓고 물어 봐야 되겠습니다. 이것이 끝날 우리 성도들이 해야 할 일 중의 하나입니다.
예수님이 왔다 가신 이후로 성경은 모두 66권이 되었습니다. 신약은 4 복음서 이외에도 여러 권이 있지만 예수님이 지상에 왔다 간 이후 최후에 수록된 묵시록이 있습니다. 그 말씀은 예수가 이 땅에 오셔서 하시고 싶은 말씀이었는데 그것을 영계에서 보여 준 것입니다.
성신이 이 땅에서 하시는 일을 끝나게 하려면 예수가 돌아가시고 나서 성신을 보내실 때의 말씀의 본의를 완전히 알고, 보내신 실체의 사정을 알아 그 실체 이상의 자리까지도 넘어갈 수 있는 하나의 존재가 나와야 됩니다. 이렇게 성신의 역사는 땅에서 거두어지고 땅 위에 성신의 대신 존재를 세워서 성신의 역사를 계승시키려 하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의 뜻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이 하나님을 대신한 예수에게 옮겨졌었고, 예수의 일이 성신에게 옮겨졌었습니다. 이제 성신의 일을 오늘날 믿는 성도들에게 옮겨 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삼위신이 쉴 수 있습니다. 그런 자리까지 나가기 전에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말씀을 찾을 수가 없고, 우리 몸에 말씀을 심었다 해도 그 말씀의 목적을 이룬 자체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예수는 부활 후 신부가 되어야 할 입장에 있었던 막달라 마리아가 붙들려 할 때에 오지 말라고 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막달라 마리아가 ‘오냐 오냐.’ 하고 예수가 손을 벌려 품어 줄 수 있는 신부의 단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인 원한을 다 탕감하고, 살아서 완성의 말씀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선 신부가 되어야만 사탄이 참소할 수 없습니다. 또 그래야만 섭리가 끝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가 왔다 가신 이후 2천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기다리고 싶었던 것이 하나님의 본래의 마음이 아니요, 예수의 마음 역시 그렇기를 바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2천년이란 기나긴 세월을 기다리게 되었던고? 수많은 곡절을 다 넘고 나서 ‘하나님의 6천년 역사의 내용이 이러이러한 것이오.’ 라고 할 수 있는 실체, 즉 하나님을 대신한 완성 실체로서 사탄이 반박할 수 없는 말씀을 할 수 있는 사람이 한 사람도 나오지 못한 연고로 2천년 동안 기다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2천년이라는 기나긴 세월 동안 섭리가 연장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슬픔이요, 예수님의 슬픔입니다.
이제 끝날에 있어서 우리가 예수의 말씀을 통하고 예수님의 실체를 붙들고 나서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우리는 사탄이 침범할 수 없는 일을 해야 하고, 사탄이 침범할 수 없는 말씀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 말씀은 어떤 말씀인가? 예수의 몸을 붙들고 난 후에 예수의 마음과 사랑을 우리의 마음에 옮겨 받을 수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통할 수 있는 실체를 갖추고, 예수님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심적 기반을 갖춘 연후에야 비로소 인류 앞에 약속한 하나님의 사랑이 부여됩니다. 이것이 복귀입니다.
타락하지 않고 말씀을 완성한 실체로 섰던들, 아담에게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아담은 하나님의 실체, 말씀의 화신이 되었을 것입니다. 즉 아담의 몸 가운데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아담의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으로, 아담의 심정은 하나님의 심정으로, 아담이 느끼는 감정도 하나님의 감정으로 나타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창조의 목적이었습니다. 여러분, 똑똑히 알아야 됩니다.
오늘날 기독교에서 믿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존엄하셔서 우리와 관계맺을 수 없는 분이냐? 아닙니다. 성경은 똑똑히 말했습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고….
우리는 무엇을 믿을 것인가? 예수의 껍데기만 믿을 것인가?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를 말씀의 실체요, 하나님의 심정의 실체요, 하나님의 마음의 실체로 믿을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심정과 하나님의 이념, 그리고 하나님의 생명과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몸에 옮겨 받아 가지고 하늘이 동하면 같이 동하고 하늘이 정하면 같이 정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읍니다. 이렇게 생활적인 면에서 하늘과 동하고 정할 수 있는, 하늘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은 인간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 창조목적이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을 믿고 있는 사람들처럼 ‘오! 하나님!’ 하는 그런 관념적인 신앙을 가질 때는 지났습니다. 그런 하나님은 오늘날 발전하는 이 사회에 하등의 가치를 부여해 주지 못합니다. 그런 하나님은 필요 없어요.
이제 끝날에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찾아 나온 참다운 하나님의 아들딸이 있다 할진대 그들은 하나님을 생활의 중심으로 세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하나님을 인간이 찾는 그때에야 하나님은 한숨을 내쉬실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한숨을 내쉬시고 의논할 수 있는 인간은 억천만 사탄이 있다 할지라도 침범할 수 없습니다. 왜!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하나님의 심정을 통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통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사람, 하나님의 사정을 붙안고 사랑하는 자를 빼앗아 갈 수 있는 존재는 없기 때문입니다. 없습니다. 없어요.
예수가 이 땅에 왔다 갔으되 하나님께서 예수를 붙들고, ‘너는 내 영원한 아들이요, 사탄을 근본적으로 굴복시킨 내 참다운 아들이다.’라고 하시면서 한 번도 사랑해 보지 못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붙들고 사랑하지 못하셨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께서 영육을 통하여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받고 가셨던들, 낙원에 가서 기도하실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의 원한은 무엇이뇨? 신랑 신부의 관계를 이루지 못하고 가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할 수 있는 개체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영육을 합한 실체로서 사탄이 도저히 참소할 수 없는 승리의 말씀을 하나님 대신 나타낼 수 있는 입장에 섰던들, 그때 당시에 예수께서 그런 말씀을 세워놓고 가셨던들, 예수를 믿는 기독교인들에게 사탄은 꼼짝도 못하고 굴복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 실체로서 종결지어야 할 창조이념을 종결짓지 못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께서는 영계에 가셔서 영적인 일을 하고 계십니다. 예수께서 성신을 통하여 영적으로 활동하고 계시되 육의 일이 남아 있습니다. 그런 고로 예수는 육을 찾아 나서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사정입니다.
예수의 육을 친 사탄에게는 오늘날 이 땅 위에 인류의 육을 붙들고 대항할 수 있는 조건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고 그 조건을 당당히 반대하고 나서야 하겠습니다.
성신도 우리를 찾는 데 있어서는 우리의 육신이 없으면 안 됩니다. 몸이 없으면 안 돼요.
몸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거하실 수 있는 성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몸을 성전으로 지으신 연고로 예수도 성전을 통해야 되고, 성신도 성전을 통해야만 구원섭리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구원이 무엇인가? 선을 번식하는 것입니다. 선의 아들딸을 번식하는 거라구요. 영육의 실체를 통하지 않고 번식하는 존재가 땅 위에 어디 있어요? 그런 창조물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도 예수를 땅 위에 세우시어 타락 이후 4천년간 쌓여온 역사적인 서러움을 탕감하려 하셨습니다. 그런 고로 예수는 하나님의 말씀을 성사시킬 대신 존재요, 하나님이 임재하실 수 있는 창조 본연의 제2의 아담적인 존재로 오신 분이요, 하나님의 심정과 사정과 소원을 갖고 오신 분이요, 하나님의 이념과 생명력과 사랑을 가지고 나타나신 분이었습니다. 이것을 똑똑히 알아야 됩니다. 인간이 타락한 이후 하나님의 슬픔은 무엇인가? 말씀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을 잃어버린 것이요, 그 다음에는 생명을 번식시킬 수 있는 실체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거하실 수 있는 하늘의 혈통을 가진 민족은 어디 갔느뇨! 그래서 생명의 중심으로 계시는 하나님께서 말씀의 상대체를 찾고 계시고, 말씀을 대신할 수 있는 생명체를 갖춘 하나님의 혈족을 찾고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이념을 찾으십니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사랑을 부여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귀섭리를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자 창조이상임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처음 들으시는 분들은 이 내용을 잘 모르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끝날은 어떤 시대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할 수 있는 하나의 존재가 이 땅에 없으므로 인류는 동서남북으로 분열되어 수많은 곡절의 노정을 거치면서 말씀의 실체를 찾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물질을 빼앗으려는 전쟁시대를 거쳐, 사상전쟁시대를 맞이했습니다. 이제 이 사상전쟁시대를 거치면 양심전쟁시대가 올 것인데 앞으로 올 그때를 왈 종교전쟁시대라 할 것입니다.
그런 때를 지난 후에는 어떤 시대가 와야 할 것인가? 심정과 사랑의 전쟁시대가 와야 됩니다. 사탄의 사랑이 크냐, 하나님의 사랑이 크냐 하는 시대가 와야 합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류가 걸어가야 할 운명의 노정입니다. 아니 갈래야 아니 갈 수 없는 필연적인 노정임을 알아야겠습니다.
그러면 지금의 때는 무엇을 해야 할 때인가? 사상계 대신 정신계를 형성해야 할 때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마음주의가 나와야 합니다. 만일에 마음주의가 나오면 여러분의 마음은 그 이념에 끌려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주의가 나와서 기반을 잡으면 천정(天情)이 동하고, 인정이 동해 들어갑니다. 이와 같이 그 이념권 내에서 아니 살래야 아니 살 수 없는 그러한 주의가 나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역사는 물질적인, 즉 최하의 차원에서부터 싸워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6천년의 종적인 역사는 물질로부터 정신계, 정신계로부터 마음세계로 쭉 찾아 올라가는 역사입니다. 반면 사탄의 권한은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역사를 거쳐 나오고 있습니다. 최고라고 주장하던 상류계급에서부터 중류계급, 하류계급으로 내려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사탄권 하에 있는 연고로 다 사라져 버립니다. 역사 발전 과정도 물질 중심한 전쟁, 즉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을 거쳐 사상전쟁시대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 또한 다 지나갑니다. 그 다음에는 마음전쟁시대가 오고 마음주의시대가 옵니다.
지금까지의 역사노정에 있어서 상류계급도 세계를 지배해 보았고, 중류 계급도 세계를 지배해 보았습니다. 이제는 하류계급이 세계를 지배할 것입니다. 또 역사 발전 과정을 보면, 인류는 물질을 중심삼고 싸워 나오던 시대를 거쳐왔습니다. 지금은 정신을 중심삼고 싸우는 시대입니다. 앞으로는 양심을 중심삼고 싸우는 시대가 옵니다. 이 양심을 중심삼고 움직이는 것이 바로 종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가 싸우는 때가 곧 옵니다. 그래서 앞으로 하늘을 중심한 마음, 그 천적인 마음을 중심삼은 진리, 마음을 통하고 정을 통하고 온 천지와 정을 나누고, ‘하나님과 나는 하나다.’라고 결론지을 수 있는 진리를 가진 종교가 나와야 됩니다. 그런 시대가 올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지 안 되는지 두고 보십시오.
종교인들은 옛날부터 물질을 찾아 나가지 않고 물질을 포기해 왔습니다. 이들이 가장 어리석은 것 같지만 가장 지혜로운 사람들입니다. 종교는 역사적인 전쟁의 조건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반을 닦아 놓았습니다. 예수를 믿고 간 사람들은 투쟁역사를 거친 사람들이 간 지옥을 모면할 수 있는 제일 안전한 기반을 닦아 놓은 종교를 믿은 것입니다.
오늘날 자기를 주장하고 돌아다니는 청년 남녀들이 ‘어! 종교!’ 하고 우습게 알지만 그런 때는 지나갑니다. 두고 보십시오. 그런 케케묵은 사상을 가지고 있으면 앞으로 공산당에게 들이맞습니다. ‘아이구! 내가 몰랐구나!’ 할 때가 옵니다. 천지운세는 이러한 과정을 거쳐 넘어가는 것입니다.
이제 남아진 최후의 주의는 어떤 주의뇨? ‘양심적인 인사(人士)는 다 동원하라.’ 하는 표어를 부르짖고 나오는 주의입니다. 이런 주의는 인류가 소망하는 말씀을 대신하고, 말씀을 통하여 실체를 대신하고, 실체를 통하여 정을 대신할 수 있는 주의입니다. 그러한 내용을 갖추어 가지고 ‘양심적인 인사는 동원하라.’ 할 때가 올 것을 여러분이 모르고 있었다면 바라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오늘날까지의 역사노정에서 양심적인 도의 생활을 한 사람들이 한번 세계를 흔들어 본 적이 있었나요? 예수께서도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는 말씀을 하셨지만, 도의 생활을 한 사람들이 세계를 흔들어 본적이 아직 없었습니다.
마음의 세계에서만이 온 우주를 지배할 수 있습니다. 물질세계와 정신세계에는 장벽이 많아요. 정신세계에는 주의가 사방성(四方性)을 갖추고 있습니다. 하나의 통일적인 중심을 갖출 수 있는 기반은 어디서부터 시작되는가? 그것은 정신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노정을 공통적으로 움직여 나가는 마음 바탕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이것을 생각해 봤어요? 정신도 분별된 위치에 설 수는 있지만 변치 않는 하나의 기준은 마음주의입니다.
우리는 참종교를 찾아 헤매 나왔습니다. 6천년 동안 헤매 나왔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마음을 헤쳐 놓고, 역사발전노정의 움직임과 걸어온 섭리노정의 서글픈 곡절을 알고, ‘이제 하나님이 임재하실 수 있는 본연의 마음이 그립습니다.’라고 하면서 하염없는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주인공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늘은 그러한 존재를 찾아 헤매이셨습니다. 오늘도 헤매고 계십니다. 내일도 찾아 헤매실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 연고로 하나님께서는 수많은 민족을 거느리시며 그들에게 선을 지향시키고 양심을 바로잡아 종교라는 명사를 의지하여 그 종교의 도리를 발판으로 세계를 움직여 나오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의 이념은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평면의 직선상을 걷고 있습니다. 역사야 곡절을 거치든 말든, 사상 주의야 어떤 곡절, 어떤 투쟁노정을 거치든 말든, 어떤 희생과 어려움에 부딪친다 해도 심적 세계의 이념으로 세워진 종교는 평행선상을 지켜 나가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언제까지나 평행선상만 걸어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양심적인 기준을 찾아 나가는 거기에도 악이 대립하고 있고 사탄이 반박할 수 있는 여지가 있습니다. 그런 고로 우리는 우리의 마음과 하늘의 마음이 일체 되는 그 기점 위에 인정(人情)과 천정(天情)이 일체 되고, 우리의 이념과 천적인 이념이 일체 되는 그 기점 위에 우리의 생명과 하늘의 생명이 하나되고, 우리의 사랑과 천적인 사랑이 하나로 엉키는 그 기점 위에서 하늘과 인연을 맺어야 합니다. 하늘과 우리의 마음이 하나되고, 생명이 하나되고, 이념이 하나되고, 사랑이 하나된 인연을 무엇으로 끊을 수 있겠습니까? 타락한 인간 끼리끼리 맺은 정(情)의 인연도 끊지 못하여 울고불고 야단인데 천정에 엉키어 하나되는 그 인연을 누가 끊을 수 있겠습니까?
세상에 아무리 죄악의 힘이 강하고 땅의 권세가 강하다 할지라도 이 마음 근본에서 맺어진 정적인 흐름의 한 기준을 꺾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기준을 찾을 때까지 역사는 허덕일 것이며 인류는 도탄 중에서 신음할 것이어늘, 이것을 방지할 용자(勇者)는 땅 위에 없을 것인가? 청년 남녀가 있다 할진대는 이러한 책임을 짊어지기 위하여, 이러한 사명의 노정을 개척하기 위하여, 자신의 몸을 하나의 폭탄으로, 하나의 원자탄으로 삼아 가지고 사탄 도성을 터쳐 내겠다는 불붙는 폭발의 심정을 가진 용자가 있기를 나는 고대합니다.
오늘도 가야 되고 내일도 가야 되는 탄식과 원한의 길, 때를 넘기면 천추만대 후손들까지도 가야 할 서글픈 노정을 누가 책임지고 막아 줄 것인가? 있다 할진대 하늘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것을 알았으니 우리 때에 이런 길을 가야 하겠습니다.
먹을 것 먹지 못하고 입을 것 입지 못하고 온갖 어려움과 폭풍이 몰아쳐 온다 해도 ‘이것을 내가 책임지고 원수들 대해 싸우겠다.’ 할 수 있는 참아들딸, 이러한 용맹성을 갖춘 하늘의 정병들이 많이 나타나기를 하늘은 바라고 계십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사람이 세계가 요구하는 사람이요, 민족이 요구하는 사람이요, 교단이 요구하는 사람입니다. 인간이 살아 봐야 70~80년 사는데,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하여 6천년 동안 허덕이신 것을 알고, 그 하나님의 심정을 안다면, 이 땅 위의 일들이 자기의 소원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탄식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핍박이 있어도 하나님이 당하신 6천년 동안의 핍박에 비하겠습니까? 서러움이 있어도 하나님이 당하신 6천년의 서러움에 비하겠습니까? 몰리고 쫓김을 받더라도 하나님의 6천년의 서러움에 비하겠습니까? 우리는 밟히면서도 변명할 줄 모르고, 몰리면서도 변명할 줄 모르고 나가야 할 것입니다. 억울함을 당하고 천대를 받아도 변명할 줄 모르고, 하늘의 심정을 위로해 드리기 위하여 ‘아버지여! 인간의 조상이 이러한 곡절을 일으킨 장본인이었사온데 우리 조상을 대신하여 오늘 저를 천대받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수고하신 고난의 노정과 역사노정을 이 시간 하늘의 심정과 더불어 체휼할 수 있는 역사적인 제물로 세워 주신 것을 감사하옵니다.
아버님이여! 제가 아버지의 눈물을 대신하겠사오니, 아버지, 눈물을 거두시옵소서. 제가 아버지의 슬픔을 대신하겠사오니, 아버지, 슬픔을 거두시옵소서. 저의 억울함과 분함으로 아버지의 억울함과 분함을 대신하겠사오니, 이제 억울함과 분함을 거두시옵소서. 사탄 대한 싸움과 역사 이후 지금까지 아버님의 마음에 걸려 있는 구름을 모두 거두시옵소서. 저를 제물 삼아 탕감하시옵소서. 제가 있사오니, 아버지, 위안받으시옵소서.’ 할 수 있는 하늘의 용자, 청년 남녀가 나타나기를 하늘은 고대하고 계시다는 것을 여러 분이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늘을 위하여 나선 길이 죽음의 길, 몰림받는 길, 눈물의 길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가야 하겠습니다. 그 길은 우리가 울기 전에 하늘이 먼저 우리를 위해 우셨던 길이요, 우리가 슬퍼하고 통곡하기 전에 하늘이 먼저 슬퍼하고 통곡하신 길입니다. 이와 같이 하늘이 우리를 위하여 6천년 동안 수고해 나오셨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역사노정은 마음의 주인공을 찾아 헤매는 노정입니다. 이제 이 역사는 어디로 갈 것인가? 마음의 중심을 찾지 못한 자, 마음의 주인을 찾을 수 있는 심적 기준을 갖지 못한 자는 천적인 사랑은 꿈도 꾸지 말아야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날 믿고 있는 기독교 신자들을 바라보면 이것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천정을 통하여 나가는 길이 골수의 길입니다. 인정을 통해 나가는 길은 외적으로 흐르는 길입니다. 이러한 자세로 하늘을 대표하여 선 것처럼 행동하는 것은 경거망동인 것입니다. 이러한 무리가 지구상에서 일소되는 날이 끝날 심판의 날임을 여러분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은 핍박받는 통일교회를 찾아왔습니다. 왜 이곳을 찾아왔습니까? 여러분은 생명을 굶주린 자들이요, 마음의 조갈증을 느끼는 자들이요, 이념의 결핍증을 느끼는 자들이요, 생명의 기갈을 느끼는 자들입니다. 그런고로 몰리고 몰리어 상한 몸을 끌고 여기를 찾아왔는데 이곳에는 또 상한 몸에 가해지는 채찍이 있으니, 여러분, 미안합니다.
그렇지만 상한 몸을 끌고 온 우리에게 어떤 어려움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하늘의 어려움에 비할 바 못됩니다. 이것을 예수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십자가의 죽음의 고개에서도 민족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을 보내셨으나 민족을 잃어버리게 된 하나님은 얼마나 서글프실 것인가 하는 것을 느끼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서글픈 심정을 알고, 민족을 위해 4천년 동안 수고하신 하나님을 염려하는 마음에 사무쳤기에 자신 일신을 사탄에게 내주면서 원수를 대하여 복을 빌 수 있는 늠름한 마음의 여유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이러한 기독교 신자가 있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주어진 사명을 나누어 짊어져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이시여! 우리에게 힘을 주시옵소서. 이것을 알았으니 힘이 다하는 날까지 이 목표를 향하여 달리겠습니다. 달리다 힘이 없어 쓰러지면 또 힘을 주시옵소서.’ 하고 나서야 합니다. 기도하면 또 힘을 주십니다. 오늘도 내일도, 아니 10년, 20년, 40년을 달릴 각오를 하고 나서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이런 각오로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 헤매야 되겠습니다.
이 땅에 성전을 건설하기 위해 오신 예수를 배반한 이스라엘 민족은 예수님과 하나되지 못한 고로, 성전의 실체인 예수를 잃어버리고 2천년 동안 광야를 유리고객하는 민족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60만 대중 앞에 하늘을 대표하여 세운 모세를 민족의 지도자가 아니라고 배반하던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를 저버린 것이 예수를 배반할 수 있는 역사적인 조건이 된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곡절의 역사의 자리에 되돌아와 가지고, 끝날에 처한 오늘날의 온 세계 인류는 세계적인 가나안 복귀 2천년 과정을 거쳐, 세계적인 가나안 복귀를 위한 40년 노정을 중심삼고 1차, 2차 세계대전을 거쳤고, 이제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위험 속에 살고 있는데, 섭리의 중심이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한 채 허덕이고 있습니다.
어떠한 학설이나 어떠한 논리를 근거로 하여 실천해 보아도 해결책을 찾지 못해 허덕이고 있고, 자기들이 주장하는 실증적인 어떤 것이나 생활적인 윤리관도 자기들의 실체적인 영원한 기준이라고 자신할 수 있는 내용과 심적인 기준을 갖추지 못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도 허덕이고, 윤리도 허덕이고, 철학도 허덕이고, 어떤 주의도 모두 허덕이고 있는 것입니다. 과학자들까지도 허덕이고 있습니다. 이때가 세계의 종말시대, 처참함 광야시대입니다. 중심존재들이 중심을 찾지 못하고 천륜을 배반할 수 있는 때요, 가지고 있던 중심까지도 잃어버릴 수 있는 때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에 우리는 세계 가나안 복지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쓰러진 이스라엘 민족이 되지 말고 제2의 이스라엘의 이념을 갖추어, 모세를 배반한 민족을 박차고 가나안 땅을 탈환하겠다고 외치고 나서던 여호수아와 갈렙 같은 인물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성경은 끝날의 두 감람나무라고 한 것입니다.
이런 때가 끝날에 올 것입니다. 그때 세계 기독교인들은 광야에서 유리고객하던 60만 대중과 같이 허덕이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서 제2의 선민적인 이념을 새롭게 인식하여 새로운 이념을 갖추어 가지고 지금까지의 모든 잘못된 이스라엘의 생활습관을 박차고 ‘여호수아와 갈렙을 중심삼고 나아가자, 행진하자!’고 할 수 있는 무리가 나타나야 되겠습니다.
그런 고로 끝날에 처해 있는 오늘날 기독교 신자들은 새로운 가나안 복지를 향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새로운 가나안 복지에 갈 수 있는 사상관념으로 무장해야 할 절박한 입장에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이념 동산을 가로막고 있는 원수들을 대해 일격을 가할 수 있는 심정적인 무장을 한 용사들이 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막연하게 황야를 떠돌고 있습니다.
요단강을 건너 여호수아와 갈렙의 뒤를 따라 새로운 가나안 복지를 찾아 나선 2세들처럼, 모세가 바로 궁중에서 포악한 마수를 박차고 나올 때 이상의 결심을 갖고, 과거의 민족이 갖고 쓰러졌던 모든 역사적인 관념을 일소해 버려야 합니다. ‘그런 관념을 일소해 버리고 나아가자’ 하고 부르짖는 음성이 땅 위에 들려오면 신자들은 귀를 기울이고 똑똑히 들어야 될 것입니다.
이제 끝날에 처해 있는 우리 성도들은 하늘을 향하여 역사적인 기도를 올려야 되겠습니다. 어떤 기도냐? 모세가 시내산에서 석판을 받기 위해 드린 기도 이상의 기도, 아브라함이 모리아산상에서 드린 이삭 번제 때 이상의 기도, 예수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생사를 걸어 놓고 드린 기도 이상의 기도, 십자가를 등에 지고 골고다를 향하여 하나님의 심정을 찾아 일보 일보 걸으며 마음으로 드리던 기도 이상의 기도입니다.
이러한 기도를 하고자 하는 심정에 사무쳐 하늘땅을 붙들고 눈물짓는 무리는 어디 있을 것인가? 찾아야 할 때가 왔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일주일 동안 지나는 가운데 받은 상처와 상한 심령을 가지고 또다시 아버지 앞에 나왔사오니, 긍휼의 아버지시여! 이 한 시간 사랑의 손길을 펴시사 저희의 몸과 마음을 품어 주시옵고, 저희의 심정 위에 아버님의 사랑과 훈계의 말씀을 내려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하옵나이다.
아버님, 이날은 새해 들어 세 번째 맞이하는 거룩한 날이오니, 저희의 마음이 아버지의 심정 속에 머물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저희의 몸은 아버지의 품에 품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한 해에 저희들이 아버지와 더불어 즐길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아버지의 소망권 내에서 살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아버지 대신 사탄 대하여 싸울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선의 이념과 선의 사랑과 선의 생명과 선의 영광을 가지시고 저희들을 찾아오시기에 수고하신 아버님의 역사노정을 알게 될 때에, 저희는 아버지 앞에 면목없는 종족임을 직고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그러하오나 아버님의 선한 그 마음을 돌이키지 마시옵고, 저희들을 찾아 주셔서 다시 훈계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생명과 사망이 오늘날 저희의 한 생명을 저울에 올려놓고 주시하고 있는 이 한 시간인 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의 몸과 마음을 아버지 앞에 바쳐 드리는 산 제물이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알았사옵니다. 그리고 저희들이 지금까지 지내 온 날과 오늘 이 한 날의 생활도 성별하지 않으면 안 될 이 한 시간인 줄 알고 있사오니, 몸과 마음 모든 것을 아버지 앞에 다 드려 다시금 아버지의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이 시간 되게 하여 주시옵길,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저희는 아버님께서 큰 기대를 가지고 대하게 될 때에는 낙심하실 수밖에 없는 부족한 것들이오나, 당신과의 역사적인 인연과 혈통적인 인연을 갖고 있는 저희임을 보시고 용납하여 주셔서 이 한 시간 친히 저희를 찾아 주시옵소서.
부족한 몸 마음들이 하나되어 사탄과 대결하기 위하여 아버지 앞에 엎드렸사오니, 저희들의 호소와 드리는 경배가 아버지 앞에 기쁨이 될 수 있기를 원하옵나이다. 아버지께서 저희들을 책임지고 대해 주시지 않으면 저희는 사탄 품에 끌려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아버님, 이 시간 친히 저희를 주관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제 여기 모인 당신의 아들딸들 친히 훈계하여 주시옵고 분부하시옵소서. 이 한 날 하늘을 위하여 싸울 책임을 저희들이 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님, 사랑하는 어린 아들딸들이 아버지 앞에 모여 지내고 있는 이번 이 기간을 통하여 하늘의 심정을 체휼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이번 기회에 아버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걸어간 사람들의 그 자취를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나아가 아버님의 아들딸이 싸워 나가던 그 싸움의 노정을 알게 하여 주시어서 하늘의 일을 알 수 있는, 하늘이 영원히 붙들고 놓을 수 없는 아들딸들로 만들어 주시옵기를, 아버님, 진심으로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들에게는 만방에 널려 있는 수많은 형제들을 찾아야 할 책임이 있사옵나이다. 숨은 제단을 쌓고 하늘 앞에 간곡히 기도하면서 피어린 제단을 쌓고 있는, 밟힘 당하고 있는 당신의 아들딸이 많은 것을 알고 있사오니, 그들을 권고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 그들을 모으신 것은 하늘의 사명을 주시기 위함인 줄을 아오니, 아버님, 그들을 사탄세계와 영원히 분별시키시옵고 아버지께서 영원히 품어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아버지의 영광의 제단을 책임질 수 있는 제사장들로서 그 책임을 다하는 완전한 모습을 갖추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 오늘날 은혜에 보답할 길이 없는 저희들이옵고, 아무것도 드릴 것이 없는 저희들이오니, 불쌍한 자를 불쌍하게 여기라 하신 아버지, 외로운 자들의 친구가 되라고 하신 아버지, 죄인들을 용서하라 하신 아버지시여, 그와 같은 자리에 있는 저희들을 용납하여 주시옵고, 이 한 시간 버리지 마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저희의 마음을 아시는 아버님, 때로는 외로운 자리에 처하여 하늘에 대한 그리움으로 허덕이는 아들딸들이 있는 것도 아실 것이오니, 그들을 보시옵고 전체를 긍휼히 여기시옵소서. 그들은 이 한 시간 아버지의 용서와 아버지의 권고가 있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오니 그들에게 은사에 은사를 가하여 주시옵고, 긍휼의 손길을 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님이시여! 이 시간 잠들어 있는 수많은 인류를 축복하여 주시옵고, 도탄 중에 있는 삼천만 민족을 축복하여 주시옵고, 길을 잃고 갈 길을 알지 못하여 사분오열되어 싸우고 있는 한국 교단을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그들에게 생명의 깃발을 들게 하시옵고, 채찍을 맞게 해서라도 아버지의 권고를 받을 수 있는 아들딸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저희들에게는 오나가나 제물 되지 않으면 안 될 책임이 남아 있사옵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 이 제물의 생활을 원치 않을 때가 많은 저희들인 것을 아시면서도 이와 같은 책임을 지어 주시는 아버님의 심정을 저희들이 알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이와 같은 모든 조건을 밟고 넘어서서 오늘도, 내일도, 십년 후에도, 나아가 죽음의 고개까지도 저희들이 가지 않으면 안 될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알고 부디 그 한 길을 다 갈 때까지 지치지 말게 하여 주시옵고, 낙망하지 말게 하여 주시옵고, 주저하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 간절히 원하옵나이다.
오늘 저희의 이 한 경배를 친히 받아주시옵고, 이 시간에도 지방의 외로운 식구들이 목자를 보내 놓고 무릎을 꿇은 채 간곡히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저희들이 아오니, 부디 그들의 눈물 어린 기도를 유린하는 자들이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고, 그들의 진실을 유린하는 자가 되지 말게 인도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저희들 마음과 마음이 통하고, 심정과 심정이 통하는 무리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아버님을 중심삼고 모든 것을 통하고 사정을 주고받을 수 있는 무리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옵니다. 남은 시간 친히 권고의 시간으로 세워 주시옵기를 바라면서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아버님, 많은 사람들이 가야 할 방향을 알지 못하면서도 당신을 찾기 위하여 지극히 서글픈 역사노정을 허덕이며 걸어왔음을 저희들은 잘 알고 있사옵니다. 계시는 듯하면서도 계시지 않는 것 같은 아버지의 실존, 역사와 더불어 살아 계신 것 같으면서도 확실히 존재하시다는 인식을 가질 수 없는 아버님이시여, 저희의 마음과 더불어 같이 계시는 것 같사오나 실체적인 존재로 규정지을 수 없는 아버지를 저희들은 심히도 슬픈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사옵니다.
선의 이념으로 만우주를 지으시고 인간에게 참된 양심을 주시어, 지정의(知情意)의 감정을 통하여 그 선의 이념을 체휼할 수 있는 놀라우신 축복을 내려 주신 것을 저희들 잘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하오나 아버지의 실존성은 어느 한 때의 시간적인 한계에서 느껴진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음도 저희들 잘 알고 있사옵니다.
이제 저희의 마음으로 찾아드는 아버지의 성상이 그리워질 적마다 저희들은 자신도 모르는 서글픔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처참한 자아의 모습을 놓고 탄식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이런 경지로 이끌어 주시는 아버지, 그것은 저희의 생명을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주시기 위한 아버지의 역사적인 심적 작용임을 알고 있사옵니다.
역사의 배후에서 역사를 하나의 실체적인 이념으로 구성하기 위하여 저희 인간들이 알지 못하였지만 그 심정과 마음을 통하여 찾아 주셨던 아버지를 알기 원하옵고, 아버지의 마음을 저희의 생활의 이념과 생의 이념으로 세우기를 간곡히 고대하고 있사옵니다. 그러나 아버님의 실존의 가치를 확실히 알지 못함으로 인해 저희 생활의 가치도 알지 못하고 저희의 생의 가치도 알지 못한 채, 오늘도 내일도 허덕여야 할 처참한 입장에 처해 있사오니, 아버님, 그러한 저희들을 긍휼히 보시옵소서. 처참한 사망선상에서 방황하고 있는 오늘날 저희의 개체 개체를 긍휼히 보아 주시옵소서.
이제 아버님, 사랑의 손길을 펴 주시지 않으면 안 될 때가 된 줄 아옵니다. 그 사랑의 물결이 저희들의 주위 환경과 저희들의 심정의 세계에까지 미쳐야 되겠사옵고, 홀로 주도적인 권한을 갖고 있는 그 아버지의 심정의 권한을 저희들이 회복해야 될 때인 줄 아옵니다. 마음을 중심삼고 싸워야 할 시기가 당도할 줄 알고 있사오니, 이제 닫힌 마음문을 열 수 있는 아량을 가진 자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몸을 굽혀 아버지 앞에 경배드릴 수 있는 준비를 갖춘 아들딸이 되지 않으면 안 될 때가 되었사오니, 저희들의 마음문을 두드리는 아버지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저희 앞에 현현하시는 아버지의 손길을 바라볼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남겨진 원한의 터전, 원한의 장벽을 저희들이 헤치고 나가지 않으면 끝날에 판가리 싸움이 남아지게 된다는 것을 저희들이 알고 있사오니, 아버지시여, 이것을 알고 아버지의 실존을 알고 있는 당신의 아들딸에게 힘과 능력을 가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모든 고난을 헤치고 나가 싸울 수 있는 늠름한 모습, 하늘 정병의 모습을 갖추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당신의 용단에 맞추어 심판의 권한을 대신하는 데 있어서 늠름하고 자신 있는 아들딸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택한 무리를 축복하신 분도 당신이었사오니 이를 성사시킬 분도 당신인 줄 알고 있사옵니다. 저희 마음의 근본은 선이요, 또 선을 통하여 움직이는 것을 알고 있사옵고, 선의 목적도, 역사적인 목적도, 섭리적인 목적도 아버지를 중심삼고 하나가 되는 것인 줄 알고 있사옵니다. 따라서 선의 심령을 통하여 흠모하는 이념적인 정점(頂點)이 결실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그 이념의 자체가 되기 위해 꾸준히 나아갈 수 있는 자신을 세우는 이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저희의 마음의 방향이 어디를 향하고 있고, 저희의 몸이 어디를 향하여 움직이고 있는가 살피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저희의 마음이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선을 흠모하는 데 모든 정력을 기울일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저희의 몸은 선을 붙들기 위해 허덕이며 갈급한 손길을 붙들고 아버지를 부를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를 붙들고 간구해 온 것이 6천년 역사라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아버지 앞에 솔직한 자체를 세워 경배하고 자기의 모든 사정을 직고하여 분부의 권고를 받을 수 있는 이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이시여, 여기에 모인 아들딸들을 긍휼히 보아 주시옵고, 이 시간은 아버지 앞에 제물 드리는 시간이었사오니, 이제 이 시간만은 하늘도 머리 숙이고, 천천만 성도도 머리 숙이고, 만민도 머리 숙이고, 만물도 머리 숙일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옛날 이스라엘 민족이 아버지 앞에 제물을 드릴 때, 아버님께서도 머리 숙여 살펴보셨사옵고, 지상의 만민, 만물도 머리 숙인 줄 알고 있사오니, 오늘의 이 한 시간 저희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숙여 긍휼의 은사를 바랄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바라오니, 아버님, 친히 찾아 주시옵고 받아주시옵고 이끌어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남이 아니라 하는 길로 몰아내시는 분도 아버지였사옵고, 가기 어려운 길로 인도하시는 분도 아버지였사오니, 아버지께서 이 길을 책임져 주시옵소서. 저희들은 어떠한 인간의 마음에 의해 움직인 것도 아니었사옵고, 어떠한 인간의 사정에 끌려온 것도 아니었사오며, 아니 갈래야 아니 갈 수 없는 마음의 힘에 이끌리어 이 자리까지 왔사오니, 게으르지 말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이 재촉하시는 권고의 말씀을 모르는 저희들이오니 말씀을 깨닫고 그 말씀의 방향을 향하여 나아가도록 시간 시간 힘의 충격을 가해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모처럼 당신을 향하여 나아가는 과정에서 낙오되는 사람이 없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자신의 모든 것을 아버지 앞에 내놓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저희로 말미암아 아버지의 제단을 더럽히는 일이 없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성심을 다하여 아버지 앞에 제물 드리고자 부복하는 이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자기의 주의나 인식 또는 어떠한 관념이 남아 있사올진대 이 시간 다 제해 주시옵고,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모든 것을 아버지의 것으로 드림으로써 다시 돌려받아 가지고 땅 위의 사탄에 대하여 자랑할 수 있는 아들딸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제 말씀을 대하고자 하오니, 아버님,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많은 권고의 말씀을 주실 줄 아오니, 듣고 난 후에 하늘을 섭섭하게 하는 일이 없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전하는 자의 마음이나 받는 자의 마음이 하나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만은 어린아이의 심정으로 돌아가서 어머님의 품에 안기어 젖을 먹는 것과 같은 그러한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오늘날 여러분은 신(神)이 있는지 없는지 확실히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아니 살래야 아니 살 수 없는 운명에 처해 있고, 또 아니 갈래야 아니 갈 수 없는 운명에 처해 있습니다. 그러면서 여러분은 항상 더 좋은 것을 찾아 나가고 있습니다. 이런 움직임은 오늘도 내일도 아니 역사가 끝나는 날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또 여러분이나 여러분의 후손까지도 이 길을 갈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여러분들은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어차피 어떤 목적을 향하여 가야 할 우리라면 우리는 어디를 향해 가야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떻게 행해야 하며, 선과 악에 대하여 어떠한 주장을 가져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을 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이러한 복잡다단한 모든 문제를 하나 하나 해결해 나가면서 해명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긴다 할지라도, 이 세상의 현실을 바라보게 될 때 후퇴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 길을 취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 것입니다. 눈을 떠 모든 세상을 바라보아도 세상이 여러분이 원하는 환경이 되어 있지 않고, 몸을 돌이켜 내가 살고 있는 사회를 돌아보아도 사회가 내 마음이 원하는 하나의 복지사회가 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느낄 것입니다.
이제 사회 환경과 세대가 복잡다단하게 흐름에 따라 그 사회에 여러분이 머물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상도 복잡하지만 오늘날 어떠한 이념을 가지고 심령세계를 이끌고 있는 종교단체의 움직임은 더욱 복잡합니다. 그래서 그런 종교단체를 찾아가 보더라도 마음으로는 이끌리지만 역시 그들을 따라가기는 어렵습니다.
오늘날 이러한 복잡다단한 사정에 엉클어져 있어서 마음이 원하고 있고 몸이 가고 싶어하지만 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마음이 원하는 방향을 따라 움직이지 못하는 자신을 자탄(自嘆)하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처해 있는 것이 우리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만일에 이러한 입장에 처해 있는 인간들이 살아 있는 동안 스스로를 세워 놓고 비판하지 않는다면 죽은 후에라도 만우주 앞에 자기를 세워 놓고 비판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곳을 종교에서는 누구도 가기를 원치 않는 지옥세계라고 규명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아니 갈 수 없는 입장에 서 있기에 이럭저럭하면서 이 길을 걸어 이 자리까지 나왔습니다. 그러면 내 자신을 세워 여기까지 왔다 하는 하나의 가치를 하늘이 찾고자 원할 때에 여러분 자신들은 무엇을 자랑할 것인가? 살아온 과거를 회고하면서 후회의 한숨을 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살아온 과거를 바라보아도 그렇고, 현세를 바라보아도 그렇고, 미래를 바라보아도 그런 입장에 서 있는 우리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인지 모르게 최후의 이념과 최고의 행복을 마음으로 갈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것은 모순된 나 자신과 이 세계를 넘어서서 어느 때에 이뤄질 것인가? 이러한 사실을 깨닫고 마음에 충격을 받아 모순된 환경을 타개하려는 사명감에 사무쳐 있는 참다운 청년 남녀가 있다 할진대는, 그는 생애에 대한 애착심까지도 없어지는 그런 경지에 들어갈 것입니다.
내 몸에서 모든 죄악을 제거하여 버릴 수 있는 자신을 갖지 못하고 있고, 죄악 된 몸을 포기하여 누구보다도 낮은 자리에 처할 수 있는 자신을 갖지 못하고 있는데, 여러분의 마음을 어떠한 무엇이 붙들고 있고 어떤 이념을 지향시키고 있는 이 모순을 어떻게 넘어갈 것인가? 온 세계 인류가 여기에 걸려 있습니다. 온 인류와 만물, 즉 하늘땅의 어떠한 존재물도 이러한 과정에 걸려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인 것을 여러분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을 시인하는 그날부터 나는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 하는 자탄의 호소, 울부짖는 심정의 호소를 들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자 하는 제목은 ‘오! 나는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입니다. 이러한 제목으로 잠깐 동안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은 타락의 역사노정을 거쳐왔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내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타락된 현실에서 살고 있습니다. 또 현실을 근거로 하여 타락 역사가 연장될 것이라고 우리는 예측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과거의 타락, 현세의 타락성, 미래까지 연장될 타락의 원인을 어떻게 해명 지을 것인가? 오늘날까지 6천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거쳐 오면서 우리 선조들은 수많은 수고와 수많은 희생을 거듭하면서 이것을 피하기 위하여 애썼지만 타락의 역사를 계속해 왔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 오늘날 현세에도 죄악 된 이 세상을 벗어나기 위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허덕이고 있고 노심초사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과거에도 그러했고 현재도 그러한 세계에 살고 있는 내 자신을 돌아보게 될 때에, 내 마음에 과거의 선조들이 가졌던 원한의 심정이 움직이고 있고, 현세의 충격으로 인한 슬픈 감정이 흐르고 있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이제 그리워지는 한 가지의 인연이 있다 할진대는 그것이 무엇일 것인가? 지금 이때는 타락의 역사노정을 거쳐오면서, 슬픔의 심정을 붙안고 싸워 나왔던 우리의 선조들을 그리워해야 할 때입니다. 또한 이 현세에 있어서 사망권에서 탈피하기 위해, 고난권과 타락권에서 벗어나기 위해 슬픔의 심정을 붙안고 싸우고 있는 우리의 동지들이 그리워져야 할 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과거를 그리워한다면 과거에 되어진 역사적인 사실을 그리워할 것이 아닙니다. 그 역사적 비애와 대결하여 참다운 믿음의 심정을 붙안고 싸워 나가던 선조들의 그 심정을 그리워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선조들이 역사적인 비애를 청산하기 위해 지녔던 지조는 무엇이었던가? 우리의 선조들이 오늘의 내 일신을 붙안고 세워 놓고자 하는 지조는 무엇인가? 오늘날 미래에 소망을 가지고 현실의 모든 역경을 이겨내면서 내일의 한 선의 터전을 쌓기 위하여 싸우고 있는 동지들은 누구인가.
이러한 마음을 회생시킬 줄 모르는 사람은 역사적인 인연을 배반한 자요, 시대적인 인연을 배반한 자요, 미래를 망칠 자인 것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들은 바로 이러한 입장에 서 있습니다.
그러면 어떠한 선조들이 나타나서 여러분 자신에 대하여 ‘너는 나를 아느냐?’ 할 때에 여러분은 무슨 대답을 할 것인가? 또 오늘날 이 시대에 있어서 죄악된 세상과 대항해 싸워 나가는 어떠한 형제에 대하여 ‘너는 나에게 무슨 말을 해 줄 것인가?’라고 물을 것입니다. 그리고 ‘내일의 길을 타개하기 위하여 싸우고 배척받는 입장에 서 있는 나를 위하여 무슨 권고의 말씀을 해 줄 수 있겠는가?’라고 물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관점(觀點)에서 들려오는 그 음성을 대하여 여러분은 어떠한 대답을 할 것인가? 이것이 문제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선조들이 하신 말씀을 듣고, 선조들이 하신 말씀과 그 심정을 내가 알았다 할지라도 그 앎으로써 끝나지 않는 사실이 또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시대적인 사정을 다 앎으로써 끝날 수 없는 사정이 남아 있고, 미래적인 모든 사정을 안다고 해서 그것으로써 끝날 수 없는 사정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곧 역사적인 서러움, 시대적인 서러움, 미래적인 서러움이 남아있 다는것입니다. 이러한 서러움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에, 우리는 선조들을 대신하여, 현재의 인간들을 대신하여, 후손들을 대신하여 대변하여야 할 자신들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만일 이러한 책임을 질 수 있는 하나의 후손을 갖지 못했다 할진대는 과거의 우리 선조들이 아무리 공적을 세웠다 할지라도 그 선조들은 탄식할 것입니다. 뜻을 위해 싸우던 분들, 비애의 심정에 북받쳤던 선조들, 하늘땅을 향한 원한의 심정에 사무쳤던 선조들이 오늘날 우리를 대해 하나의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심정을 갖지 못한다면 우리의 선조들의 슬픔은 더 가중되어질 것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나 미래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복귀노정은 말하고 있습니다. 아담가정으로부터 슬픔의 역사가 시작되어 복귀섭리를 받들어 온 선조들은 슬픈 노정을 거쳐 나왔습니다. 노아가 거치고 아브라함이 거치고 예수까지 파란곡절의 비운의 역사를 거치면서 이런 비운의 역사는 세계를 휩쓸어 나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비운을 가로막기 위하여 하늘을 대표하고, 인류를 대표하고, 역사를 대표하고, 시대를 대표하고, 미래를 대표하여 왔던 예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도 이 역사적인 비운의 운세 앞에 승리적 조건을 완전히 이루지 못하고 하나의 소망의 날을 약속하고 가심으로 말미암아 지금까지 슬픔의 역사가 흘러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나는 어디로 향하여 가고 있느냐! 이제 여러분은 옛날의 아담의 심정을 넘어야 되겠고, 노아․아브라함․모세의 심정을 넘어야 되겠으며, 어느 선지자나 어떤 개인의 심정도 넘어야 될 뿐만 아니라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심정까지 넘어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이 왔다 간 이후 오늘날까지의 2천년 역사과정에서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학살을 당하고 순교를 당한 애달프고 서글픈 심정을 넘어서야 되겠습니다. 그 모든 것을 대신할 수 있는 하나의 실체의 열매가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은 여러분이 역사적인 그 심정의 인연과 상대 되기 위하여 어떠한 심적 기반을 여러분의 마음에 갖고 있는가 반문하실 것입니다.
하늘이 역사를 거쳐오면서 싸웠다 할진대 끝날에 하나의 승리한 아들딸을 세워 놓고자 하실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역사적인 슬픔의 심정을 체휼하여 승리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들은 이 시대에 있어서 역사에 맺힌 하늘의 슬픈 심정의 모든 조건을 회복하여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전체 역사에 대한 하늘의 슬픈 심정을 붙들고 위로할 수 있는 하늘의 아들딸이 되어야 합니다. 만일에 그러한 아들딸이 있다 할진대는, 하나님께서 6천년 동안 어떠한 사람을 품지 못하였을지라도 그러한 개체 개체를 통하여 기쁨의 심정을 갖고 품어 주시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심정이 있다면 이것은 여러분 개체에서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선조의 인연을 통하고, 선조의 심정적인 기반을 거치지 않은 존재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심정은 역사적인 심정권 내에 속하여 있는 심정임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나는 어떠한 심정의 세계에서 방황하고 있으며, 어떠한 시선과 어떠한 오관을 갖고 생을 영위하고 있는가? 그러나 이것을 생각하기 전에 여러분은 먼저 ‘하늘이여! 내가 그러한 감각을 갖고 생애를 살아가고 있다 할진대, 옛날 에덴에서 아담 해와가 타락하기 전 하나님을 대하던 심정, 타락하던 심정, 하나님이 쫓아내시던 심정, 이 인류를 붙들고 노아를 세울 때까지 1,600년 동안 수고하시던 하나님의 심정, 노아가 120년 동안 산꼭대기에서 방주를 지으면서 무한한 천대와 학대를 받으면서도 하늘을 붙들고 수고해 나오던 그 심정, 우여곡절과 천태만상의 역사 과정을 거쳐온 하나님의 심정을 붙들고 한번 살고 싶습니다.’라고 말하고 싶을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역사의 산 실체로서, 승리의 표적으로 하나의 인간을 내세우고자 하실진대, 여러분은 ‘아버지여, 손길을 펴시어서 저희가 인간이 타락 전 아버님과 즐겼던 그 심정으로부터 타락 이후 역사의 비애의 그 장면 장면을 볼 수 있도록 여행시켜 줄 수 없습니까?’라고 기도해 보세요.
그러면 하늘의 슬픔과 인간의 슬픔이 해결되지 않는 초점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사람은 있지만 하나님의 심정을 붙드는 사람이 없고, 역사적인 심정을 붙드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고, 오늘 이 시대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심정과 미래적인 심정을 붙들어 하나님의 심정을 인간의 심정과 연결 짓는 역사를 이루어 놓은 사람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늘의 탄식이 있다 할진댄 이 뜻을 세우지 못한 탄식보다 더 큰 탄식이 없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여러분은 하늘을 찾아가는 노정을 다시 회상하여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영원한 소망의 동산으로 보내기 위하여 우리를 대하여 찾아오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원리를 통하여 아시다시피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배반한 연고로 하나님의 말씀을 잃어버렸고, 하나님의 실체를 잃어버렸고,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의 심정은 어떠했으며, 실체를 지을 때의 심정은 어떠했으며, 그 실체를 통하여 자랑하고자 하시던 하나님의 내적 심정은 어떠했겠는가?
이러한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잃어버린 자요, 본연의 실체를 잃어버린 자요, 하나님의 이념 동산을 움직여 낼 수 있는 사랑의 실체를 잃어버린 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나를 세워 자랑할 수 없는 죄인인 것을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또한 내 실체를 세워 주도적인 행사를 일으킬 수 없는 존재요, 내 마음을 세워 안식의 터전을 찾을 수 없는 존재인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이 된 연고로,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시는 데는 먼저 실체를 찾아오시고 사랑의 심정으로 찾아오고 싶으시되, 인간이 실체와 사랑과 말씀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직접 실체로 오실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가 실체를 대신하여 오셨으나 예수도 실체를 갖춘 행동을 다하지 못하고 갔습니다.
말씀을 배반한 인간에게 실체를 대신한 존재를 주셨으나, 인간이 그 실체마저 배반한 연고로, 또 하나님의 사랑을 주셨으나 그것도 배반한 연고로 오늘날 우리 인간 앞에는 실체와 말씀, 사랑 등의 명사만 남아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인류는 그것을 찾아 허덕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역사를 돌아가는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말씀 같은 말씀이 우리를 완성시킬 수 없고, 실체 같은 실체가 우리를 실체로서 이끌 수 없고, 사랑 같은 사랑으로써 우리의 영원한 안식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으니 우리는 ‘참다운 말씀이 어디 있느냐? 실체가 어디 있느냐? 사랑이 어디 있느냐?’라는 표어를 내걸고 그것을 찾아 허덕여야 할 입장에 서 있습니다.
이런 입장에 처한 인류를 바라보고 예수님은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마 7:7-8)고 말씀하셨음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내가 걷고 있는 발걸음은 어디로 향하여 가고 있느냐? 찾기 위해 걷고 있고, 구하기 위해 걷고 있고, 두드리기 위해 걷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걸음을 타락 이후 6천년 동안이나 걸었으나 아직까지 정지할 줄 모르는 운명을 처해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내가 옮기는 걸음은 어디로 갈 것인가? 이 땅을 바라보면 선한 것만 있지 않습니다. 선한 것보다 오히려 악한 것이 많습니다. 이러한 때, 우리의 발자취가 좌로 가느냐 우로 가느냐 또는 선의 방향으로 옮기고 있느냐 하는 것이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참다운 스승을 찾아 헤매고 있는데, 선의 지도자, 참다운 스승을 찾아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가? 그들을 통하여 내 마음의 안위(安慰)와 소망을 일으킬 수 있는 말씀을 듣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 무엇인가 새로운 말씀을 찾기 위하여 새로운 스승을 찾아 헤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말씀을 찾아서 무엇을 할 것인가? 그 말씀과 하나될 내 자신의 실체를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말씀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우리의 선조들도 하늘의 존재성을 규명하기 위하여, 인생의 근본 문제를 해명하기 위하여 수고했고, 또 그러한 수고는 지금 이 시간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그러한 관념 속에 사로잡혀 있건 없건, 관심을 가진 많은 사람들은 오늘도 두드리고 있고, 찾고 있고, 구하고 있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런 모습들을 바라볼 때 여러분도 그러한 입장에서 허덕이고 있느냐 하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허덕이고 있지 않다면, 역사를 지배해 오신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세계에 그러한 사람이 없다 할진대는 하나님의 뜻과 선의 이념, 혹은 우리들이 바라는 소망의 시대는 하늘과 더불어 인간과 인연을 맺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결론을 우리는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모를지라도 기필코 찾고, 헤매고, 허덕이고 있는 사람들이 여러분의 선조 때부터 있었고, 현재에도 있고, 또 앞으로도 끊임없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견지에서 오늘날 나라는 존재는 어떠한 입장에 있느냐 하는 것을 반문해 봐야 될 것입니다.
오늘날 젊은 학생들이 가방을 들고 학교에 갑니다. 그런데 가방을 들고 어떤 목적으로 가느냐 하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는 학생들이 있습니다. ‘나는 사회로 나간다.’ ‘가면 어디로 갈 것이냐?’ ‘나는 국가의 중대한 책임을 지고 나간다. 세계가 있으니, 세계를 이끌기 위해 나간다.’ 하고 나가지만, 거기에서 더 나아가면 어디로 갈 것이냐? 하늘이 있다면 엑스(X)가 가로놓입니다. 세상만사가 이와 같은 곡절의 자리에 놓여 있는 것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내적인 세계도 그렇거니와 외적인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무한히 뻗어 나가고 싶지만 한 발짝 나아갈 때마다 그 곡절의 징조가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피하여 내적인 세계로 찾아갈 때, 도의(道義)니 도덕이니 윤리니 종교니 하는 방향으로 내 자신을 이끌어 나가려 하는데, 거기에 또 천태만상의 곡절이 가로막는다는 것입니다. 그럴때면 ‘하나님이여, 종교를 세웠습니까? 하나님이여, 역사를 지배하고 있습니까?’라고 하면서 원망하고 싶은 생각도 들 것입니다. 하나님이 있다면 어찌하여 이러한 비운(悲運)의 역사를 만들어 놓았는가, 또 그것을 체험하게 하는 원인은 어디 있으며, 내가 세상의 모든 내적인 세계를 박찰수 있는 권한이 없어 허덕이는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를 해명하려는 입장에서 하늘과 땅과 세상을 걸고, 내 생명을 걸고 이 비운의 힘과 대결해야 합니다. 이것이 판가리 고개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인간은 어차피 이것을 넘어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 비운의 곡절을 어디 가서 풀 것인가? 세상을 보면 천갈래 만갈래 파탄하는 이념밖에 없고, 내적인 세계를 보면 더욱 암담하고 캄캄해지는 입장에 부딪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서 진리를 추구하는 마음이 간절하면 간절할수록, 땅도 하늘도 인간 자신도 잃어버린 가운데, 하늘땅을 대신하고 역사노정을 대신하여 선조들이 허덕였던 그 역사적인 심정이라도 알아서 자기도 모르는 말로써 역사적인 그 비운의 모든 곡절의 말을 한번 자기 입으로 해보았으면 합니다. 그러나 하늘을 찾아갈 수 없고, 땅을 찾아 나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역사적인 심정의 경지에서 ‘내가 믿겠습니다.’라고 말을 해보고 싶어도 안 된다는 것이에요. 이런 순간을 여러분이 살아생전에 느끼지 못하면 운명 직전에 가서라도 봉착한다는 거예요. 그러나 그때는 이미 때가 늦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인류가 허덕이는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운명 직전에 이러한 난관에 부딪치지 않으려면 젊었을 때 간절히 믿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같이 젊었을 때 간절히 믿는 믿음을 갖고 있는 인간의 소망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운명 직전에 이것에 봉착할 때는 이도 저도 어쩔 수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하늘은 인간이 젊을 때 선을 중심으로 한 생활 관념, 세계 관념을 세울 수 있게 하기 위해, 즉 자신의 모든 문제를 해결지을 수 있는 하나의 해결점을 지어 주기 위하여 역경이 길로 몰아넣는 것입니다. 하늘은 인간으로 하여금 세상을 피하라고 인간을 더 반대의 길로 몰아넣는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교리, 어떠한 교파보다도 나를 더 믿으라고 강조하고 나옵니다. 나를 믿는 데는 내가 인류를 믿던 것만큼 믿으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믿고 있는 모든 신자들을 바라볼 때 그들이 ‘하나님을 믿소이다.’ ‘예수를 믿소이다.’라고 말로만 하고 있는데, 좋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믿음은 지나가는 행인도 말할 수 있다는 거예요. 이러한 믿음을 하늘은 원치 않습니다.
그러면 하늘은 어떠한 믿음을 원하는가? 예수님이 ‘나를 믿으라’는 말씀을 하신 것은 자신이 하나님을 믿듯이 예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라고 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여기고 믿듯이 하나님도 자신을 아들로 여기고 있다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하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믿음을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말씀을 찾아 헤매고 있고, 말씀을 기반으로 한 신앙노정을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말씀을 가지고 참신앙을 중심하여 인간들을 찾아오시는 그 실체적인 하나의 중심존재를 기독교적으로 말할 때 재림주라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을 신앙의 표준으로 삼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신앙을 분석해 보면, 말씀을 기반으로 인류를 지도해 나왔습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이제까지의 종교가 모든 것을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다시 싸워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적으로 말하면 끝날의 7년 대환란 시기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 실체를 만나야 합니다. 오늘날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사람은 많지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은 많으나 예수님의 실체를 의지하여 따라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가야 할 인간인데 참다운 말씀을 가진 분이 나타나도 믿지 않고 오히려 핍박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인가? 말씀과 하나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대신하여 오신 분은 천적인 유일한 존재요, 모든 인간의 표본이요, 인간의 전체 이념을 대표한 존재인데, 그 존재와 우리를 비교할 때 우리가 차이가 있는 존재가 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최고로 선하시고, 최고로 의로우시고, 최대의 승리자이신 그 하나의 실체를 표방하여 여러분은 다시 제2의 발걸음을 옮겨 놓아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가야 할 길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이 땅 위의 모든 인간들은 6천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지내 오는 데 있어서 말씀에 의지하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허덕이며 나왔으나, 말씀의 주인공이요 말씀의 실체가 되시는 분을 모시고 산 사람은 없습니다.
역사적인 우리의 선조부터 지금까지 그러한 존재를 제대로 모시고 산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타락 이후 4천년 역사를 섭리하시면서 수많은 선지선열들을 세우셨고, 무한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의 중심을 찾게 하기 위하여 민족을 규합시켜 하나의 방향으로 이끌어 나오시면서 말씀의 실체를 보내 줄 것을 약속하셨는데, 그분이 누구냐 하면 바로 메시아였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마 5:1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때까지의 모든 말씀을 완결지을 수 있는 분이었고, 하나님께서 역사노정에서 주신 그 말씀 이상의 것을 가지고 오셨던 분입니다. 그러한 존재로 오신 메시아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의 실체인 메시아를 고대하고 나오던 수많은 인류는 정작 나타난 말씀의 실체를 몰라봤습니다. 말씀의 실체를 다 잃어버리고 만 인간이 되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겠습니다.
홀연히 말씀을 가지고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붙들고 판가리 싸움을 하여 역사적인 모든 조건을 밟고 넘어선 것과 같이, 우리도 예수님을 붙들고 판가리 싸움을 해야 되는 조건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붙들고 어떻게 할 것이냐? 야곱이 천사를 붙들고 싸우던 것과 같은 싸움을 해야 되겠습니다. 장자의 기업을 이삭으로부터 축복 받은 야곱은 그날부터 말씀을 중심으로 축복의 조건을 세우려 했습니다. 축복의 조건을 세운 후에는 실체를 회복해야 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하늘을 붙들고 판가리 싸움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래 우리 인간이 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기독교를 바라볼 때 아직 사탄을 지배할 수 있는 말씀의 권한을 이뤄 놓지 못하였습니다. 진실로 사탄을 지배할 수 있는 권한의 실체인 예수님을 소개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고 나서는 신자는 이 땅 위에 드물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까지의 말씀에 포용되어, 거기에서 아무리 해 봐도 갈 길은 요원합니다.
오늘날까지 6천년 동안 역사는 흘러왔는데, 이제 여기에서 어디로 갈 것인가? 어디로 갈 것인고? 말씀을 밟고 올라서 실체를 붙들어야 하겠습니다. 신약은 대부분 서신인데, 서신으로 만날 것이 아니라 마음에 북받쳐 오는 사정을 통하여 만나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하늘과 하나된 하나의 존재, 타락 이후 6천년 역사 속에서 처음 나타나는 그런 입장에 나아가 본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밟고 올라서 예수님을 붙드는 사람이 있다 합시다. 그러나 예수 앞에 나아가 ‘당신이 지니고 있는 하늘의 전권의 능력과 구세주의 자격으로서 만민을 구도하기 위한 권한을 나에게 가르쳐 주시옵고, 모든 죄의 근본을 청산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옵소서.’, 그 다음에는 ‘당신과 더불어 영원히 즐길 수 있는 하늘의 사랑을 소개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며 나선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있어야만 합니다.
만일 예수를 만나 그러한 조건을 요구하여 축복을 받고 혜택을 입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 합시다. 그러나 예수님 자신이 쌍수를 들어 ‘오! 그대의 소원이 이렇거늘 영원한 행복을 누리라.’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늘의 심정이 바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도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 땅 위에서 신랑 신부로서 둘이 하나로 합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이여, 당신이 우리 실체를 세웠으니 당신의 속 깊이 숨겨진 사랑을 주시옵소서.’라고 해야 할 부분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오냐! 이곳까지 오기에 수고했으니 나를 조건으로 하여서 네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라.’고 말씀하실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사랑만 받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기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다고 했습니다. 자신에게 있는 사랑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부의 이념을 찾아가는 여러분들은 이러한 말씀을 통하여 실체를 찾았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 ‘아버지여, 당신의 사랑을, 사랑의 전권을 우리에게 축복해 주시옵소서.’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입장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오늘날 우리는 진리를 찾아 넘고 실체를 찾아 넘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이시여! 나에게 사랑의 축복을 해주시옵소서.’라고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무슨 이유인가? 이것은 하나님을 찾아온 사람에게 하나님이 ‘나를 찾아 나올 때까지 수많은 사탄, 수억만의 사탄의 시련을 거쳐오느라 대단히 수고했다.’라고 하면서 사탄과 더불어 싸워 승리한 노정, 하나님을 알게 될 때까지의 노정을 칭찬해 줄 수 있으되, 하나님의 심중으로 그리던 이상 동산에서 취하여 살 수 있는 사랑의 심정으로는 축복해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늘은 ‘그것이 네 소원이거든 이제 죄악 된 세상에 나아가라.’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즉 ‘너희는 죄악 된 부모의 후손인 고로 복귀의 과정을 거쳐야 되겠다. 그래서 나의 아들딸이 될 수 있는 자리에 이르렀다 할진대 너희는 잃어버린 참부모를 찾아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면 다 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저끄러진 분야가 아직 남아 있습니다. 즉 인간 조상이 인류의 참조상이 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참부모를 가지지 못했고, 참다운 자식이 되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양자로서 하나님을 알아 사탄과 싸워 승리했다 할지라도 직계 혈통의 인연을 맺으려면 참부모를 모셔야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어떠한 신앙의 용자라도 하나님 앞을 떠나면 허덕이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께 나아가 ‘그 부모가 땅에 있습니까, 없습니까?’라고 질문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때 하나님은 땅에 있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에 땅에 없으면 어떻게 할 것이뇨? 여러분이 그 부모 대신 책임을 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네가 한번 부모가 되어 봐라.’ 이런 말씀을 하신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 신앙의 용자는 다른 곳으로 발을 옮겨 갈 것입니다. 이 땅의 모든 신앙자들을 더듬어 편답할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참부모를 찾아서 그 부모 앞에 나아가 ‘오! 제가 지금까지 어려운 고비를 넘고 넘어 이제 참부모인 당신 앞에 나왔사오니, 아버지여, 지금까지 걸어오면서 느꼈던 역사적인 모든 슬픔을 위로해 주시고, 이제 당신의 영원한 복지에서 살 수 있는 전권, 당신의 이념 동산의 전권을 저희에게 인계하여 주시옵소서.’라고 호소해도 호소한 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부모는 또 ‘네 갈 길이 또 남아 있으니 네가 형제를 찾아오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는 부모를 떠나 형제를 찾으러 갑니다. 그래서 땅을 헤매고 헤매어 형제를 만나면, ‘네가 아니면 내가 못되고 내가 아니면 네가 못되는 이러한 형제,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수 있는 형제, 뼈를 연하고 살을 연한 지체 중의 지체로서 너와 내가 나눠질 수 없는 형제를 찾아서, 내가 이러한 명령을 받고 너에 관한 뜻을 알고 너를 찾아왔으므로 6천년 역사의 해원이 우리들로 말미암아 된다면, 너와 내가 형제로서 그 해원성사의 행복을 누려 보자’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면 참다운 신앙의 형제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오, 그대가 찾아온 것은 고맙소. 그러나 우리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전체적인 뜻이 이뤄진 것은 아닙니다. 또 가야 할 길이 남아 있습니다.’라고. 그러면 그 길은 무슨 길입니까? 남아 있는 그 길은 선의 종족을 찾아와야 되는 길입니다. 이 신앙의 용자는 또 발길을 옮겨 갑니다.
그래서 한 종족을 만나 가지고 ‘내가 이러이러한 역사과정을 거쳐서 그대들을 만났으니 그대들을 통해 천적인 소원을 성취해야 되겠습니다.’라고 사정을 해도 그 종족들은 ‘환영은 할 수 있으나 기쁨의 춤을 출 수가 없다.’라고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의 종족을 깨뜨렸던 사탄이 아직도 남아 있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그리고 사탄으로 인해 깨어진 종족이 있는 동시에 이 종족과 연결된 민족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그런 민족이 있는 동시에 ‘선한 백성이 있었다.’라고 하는 대답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또 고개를 넘어서 그 백성을 찾아 가지고 ‘오, 이제는 기쁨과 행복과 소원 성취를 다 할 수 있는 한 백성을 찾았으니 하늘의 백성 될 자들과 즐기자.’라고 하지만 안 된다는 거예요. 또 있다는 것입니다. 세계를 넘어 우리의 참부모와 참형제와 참종족, 참백성, 참민족, 참인류가 모여서 일제히 하나님 앞에 경배를 드리고 난 후에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역사의 배후를 움직여 나오신 하나님의 심정에 애달픈 곡절을 쌓이게 한 것이고, 이것이 우리들이 살아나온 역사의 목표입니다.
이것과는 반대 방향으로 엉클어진 것이 죄악의 세상이고, 이 이념을 세우지 못하게 그 앞길을 가로막는 것이 사탄의 역사임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필히 가야 할 인생의 행로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진리의 본체로 오셨고, 하나님을 대신한 실체로 오셨고,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한 사랑의 실체로 오셨으며, 누구보다도 인류의 참부모, 참아버지의 실체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참아버지로 오셨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 참형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않고 끝날에는 자녀라고 부르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자녀라는 거예요.
부모이신 예수를 중심삼고 형제로 출발하여 종족을 만들자는 것이었는데, 그 기반이 70문도와 120문도라는 것입니다. 그 무리를 중심삼고 이스라엘 교단을 움직이고 민족을 움직이고자 했는데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제1이스라엘은 깨져 나가고 제2이스라엘의 역사가 시작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기독교 역사라는 것입니다.
이래서 기독교는 오늘날까지 예수를 중심한 세계 민족을 형성해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끝날에 당도한 오늘날 인류는 자기 한 자체가 역사적인 비운의 고개를 다 넘고 나가는 데 있어 승리적인 인연을 맺고 나아가지 않으면 14만 4천의 무리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묵시록 14장에 ‘어린양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함께 14만 4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인(印) 맞았어요? 먼저 예수님의 인을 맞아야 하고, 그 다음 아버지의 인을 맞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인만 맞으면 다 될 줄 압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의 인을 맞고 아버지의 인을 맞아야 된다는 거예요. 이것이 타락한 인간들이 속죄의 완성을 바라보고 나온 목표인 것입니다.
타락하지 않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선한 사람의 목표는 먼저 하나님의 인을 받고 내가 형제에게 인을 쳐 주는 것입니다. 나아가 종족과 민족에게 인을 쳐 줄 수 있어야 됩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에 하늘의 슬픔이 얼마나 컸을 것인가 하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하늘의 슬픔에 대한 말씀은 꿈에서도 알지 못하였던 말씀이요, 어떠한 친구에게서도 들어 보지 못하였고, 어떠한 스승이나 어떠한 교역자에게서도 듣지 못하였던 말씀인 것입니다. 이런 내용은 진실로 심각한 말씀입니다.
그러면 오늘 여기에 서 있는 이 발걸음은 내일 어디를 향하여 갈 것인가?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의 사랑권 내에 있습니까? 참부모의 사랑권 내에 있습니까? 참형제의 사랑권 내에 있습니까? 참종족의 사랑권 내에 있습니까? 참민족의 사랑권 내에 있습니까? 하늘땅을 통합해서 하나님 앞에 머리 숙일 때 그 하나님이 품을 수 있는 사랑권 내에 있습니까? 그러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일을 못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아직 낙원에서 보류상태에 머물러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끝날에 다시 오셔서 필히 무슨 일을 해야 할 것인가? 이 일을 회복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밟고 올라섰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막달라 마리아가 붙들려 할 때 배척하던 분이었고, ‘신부여! 나와 더불어 아버지 앞에 갑시다.’ 라고 할 수 있는 자리를 거치지 못한 분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2천년 동안 신부의 자리를 찾는 그날을 바라보면서 수고해 나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원래 환희하는 신부와 더불어 아버지 앞에 나아가 축복을 받고 참부모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참다운 자식을 품고, 참다운 종족, 참다운 민족을 건설하여야 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이 천지에 참다운 조상이 되라고 축복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류의 참조상의 입장에서 축복을 받지 못하고 가셨던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늘의 슬픔이요, 예수님의 슬픔입니다. 이제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는 이러한 비장한 심정의 사무침이 여러분 마음에 동해야 되겠습니다. 하늘의 말씀을 배반한 나요, 하늘의 실체를 배반한 나요, 하나님을 배반한 나요, 하늘의 형제, 종족, 민족, 백성을 배반한 나요, 더 나아가서는 하늘의 주권을 유린한 나를 어찌 하늘이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임을 알고 자기의 몸 둘 곳을 몰라 몸부림치는 청년 남녀들이 많이 나오기를 하늘은 바라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알게 될 때 우리의 심정은 불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이 통하고 마음이 움직이며, 역사를 대하여 원망하고 싶고 시대를 대하여 원망 하고 싶은 마음이 북받쳐 오를 것입니다.
이 분한 마음이 강할수록 이 분한 마음을 어디 가서 해원할 것이냐 하는 생각이 날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비애는 사탄 때문이었으니, 사탄과 더불어 일대 격전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각오를 가진 청년 남녀들이 많아야만 부모를 회복할 수 있고, 형제를 회복할 수 있고 종족, 민족, 국가와 하늘의 주권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 동안 우리들은 태평세월을 보내 왔습니다. 감각 없는 무골충으로, 존재 의식은 가졌으나 존재의 가치를 갖지 못하며 서글픈 행로를 걸어왔습니다. 그러면서 그래도 잘났다고 뻔뻔스럽게 나서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이 같은 죄악의 종족이라는 것을 이 시간만이라도 인식해야 되겠습니다. 이것조차 모르고 있는 인간들은 하늘의 천벌을 받아 마땅하고, 심판날에 유황불 구덩이에 던져지는 심판의 제물이 되어 마땅할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내가 심판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늘은 나보다 더 슬픈 사정에 처해 있음을 알아야겠습니다. 또 선조들이 간 걸음이 나보다도 슬픈 사정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고, 오늘날 이 시대에 뜻을 품고 나선 참다운 사람들이 오늘 내가 느끼는 슬픔과 고통 이상의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사정을 알아주는 사람이라도 되어야겠습니다.
우리 인간들은 오늘도 가고 내일도 가고 살아서 못 가면 죽어서라도 영원을 걸어 놓고 가야 합니다. 이런 운명의 고개, 이 비참한 곡절의 사연은 원망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늘은 이 곡절을 일으킨 주인공인 사탄과 격전하기 위한 하늘의 정병이요 용자로서 하늘땅을 대하여 호령하며 나설 수 있는 청년 남녀들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향해 달려 나갈 수 있는 하늘의 심정을 가지고 울부짖는 무리가 그립다는 것을 알아야겠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여러분은 하나님의 심정을 통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나아가 참부모의 피를 받은 자녀, 그 피와 연결되어 있는 민족이 되고 백성이 되어야겠습니다. 그 부모와 하나되어 그의 기쁨이 전체의 기쁨이요 전체의 기쁨이 내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만민이 하나님을 모셔 놓고 그 앞에 송영을 돌리고 경배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타락한 인간이 필히 가야 할 목적지임을 여러분이 알아야겠습니다.
아버님, 에덴동산을 잃어버린 인간이 거쳐온 수모의 역사노정과 고통의 역사적인 인연을 거쳐 아버지를 찾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어마 어마한 슬픈 장벽과 고개가 저희 앞에 놓여 있음을 알았사옵니다.
아버님, 오늘도 내일도 가지 않으면 안 될 저희들의 이 역사의 서글픔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생명의 근원 되신 당신의 슬픔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영원하신 아버지의 행복의 동산을 알아 그 동산까지 발걸음을 옮겨 나가는 데 있어서 행진의 일로를 맞춰나갈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들이 어떠한 단계에서 가고 있는지, 어떠한 단계에 머물러 있는지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 지금까지 무책임하게 살던 저희 개체로 하여금 배반자의 역사노정을 거치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전체에 화답하여 하나의 이념 동산에서 아버지를 모시고 아버지 앞에 경배드릴 수 있는 한 날이 있기까지 사탄 대하여 싸우고 싸워 나갈 수 있는 아들딸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 여기에 당신의 아들딸들이 모여서 말씀을 들었사오니 이 말씀을 통하여 자기 인생의 행로를 새로운 각도에서 찾고, 하늘의 법도에 의지하여 목적지를 향하여 달리는 혁신적인 운동이 일어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날의 모든 것을 주관하여 주시옵기를 바라며, 주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사옵나이다. 아멘.
아버님! 이날을 기억하시옵소서. 저희의 몸과 마음이 자기를 중심삼은 채 아버님의 존전에 나오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저희의 마음과 몸이 아버님께서 친히 임재하실 수 있는 거룩한 지성소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아버님께서 운행하실 수 있으며, 훈계하실 수 있는 숫것의 제물로서 아버님께 드려질 수 있는 이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 일주일 동안 지내는 가운데 상한 심정과 지친 몸 마음을 갖고 아버지 앞에 나왔사오니, 사랑의 손길을 펴시사 새로운 생명의 기쁨을 저희들에게 부여하여 주시옵고, 아버님과 저희와의 사이에 끊을 수 없는 영원한 인연을 맺어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님께서 기뻐하시면 저희들도 기뻐할 수 있게 해주시고, 아버님께서 슬퍼하시면 저희들도 슬퍼할 수 있게 허락해 주시옵고, 아버님께서 행하시면 저희들도 행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아버님께서 싸우실 때에 저희들도 함께 싸울 수 있게 허락해 주시옵고, 영원히 지워질 수 없고 뗄래야 뗄 수 없는 인연을 맺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지금까지 수많은 저희 선조들도 아버님과 인연을 맺기 위하여 무한히 애써 나왔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저희들을 당신께서 기뻐하실 수 있는 모습으로서, 영원히 품고 사랑할 수 있는 하나의 존재들로 세워 주시고, 아버지와 영원한 사랑의 인연을 맺어 아버님과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관계를 이 시간 맺게 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날은 거룩한 날이오니, 아버님의 사랑의 심정과 저희들이 하나될 수 있는 인연을 맺음으로 말미암아 삼천만 민중이 이 한 시간 같은 은사를 받을 수 있고, 아버지의 사랑권 내로 찾아질 수 있는 간접적인 역사를 일으켜 주시옵소서.
숨은 제단을 쌓아 놓고 아버지를 대하여 염려하고 기도하는 식구들이 많은 줄 알고 있사오니, 아버님, 그들도 뗄래야 뗄 수 없는 하나의 생명줄에 엉클어지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아버지께서 기뻐하실 수 있는 사랑의 동산에서 얽힐 수 있는 귀한 모임이 되게 인도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이 시간 저희의 모든 것을 바치오니 당신 것으로 취하여 주시옵고, 당신의 마음속에서 떨어져 나올 수 없는, 영원한 일체를 이루는 존재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저희의 모든 것을 다 내놓고 아버지의 것으로 저희의 몸과 마음을 채우고, 진정한 마음의 기쁨을 회복할 수 있는 이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전체 위에 아버님의 축복의 손길을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였사옵나이다. 아멘.
아버님이시여! 당신께서 모으신 자녀들을 앞에 놓고 허락 하신 말씀을 전하고자 하오니, 저희 마음의 주인이 되시고 저희 몸의 주관자가 되시옵소서.
아버님, 저희들, 2천년 전 예수님께서 소망의 한 기준을 잃어버리고 십자가를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될 처량한 순간에 하신 말씀을 보았나이다. 아버님이시여! 때와 시기는 이미 지났사오나 심정의 세계는 시간성을 초월한다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예수님을 보내시고 염려하시던 아버님의 분한 심정이 저희의 분함으로 나타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예수님의 30여년의 생애가 저희의 생애에서 나타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 우리의 선조들이 하늘을 대하여 책임을 다하지 못했던 사실이 천추의 한이 되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땅 위에 없사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이 불초한 자들을 모으시어서 많은 말씀으로써 하늘의 심정을 소개하시고, 가지고 있는 사정을 통하여 저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셨사오나, 저희에겐 아버지 앞에 바칠 수 있는 아무것도 없사오며 갖춘 것도 없사옵니다. 오직 아버지 앞에 드릴 것은 죽어질 수 있는 하나의 산 제물밖에 없다는 것을 이 시간 저희들이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의 마음을 통하여 저희 마음이 움직이고, 아버님의 심정을 통하여 저희의 심정이 움직이어 서로 서로가 손을 붙들고 하늘 종족의 무리로서 나아갈 수 있게 인도하여 주시옵고, 아버지의 아들을 배반했던 사실을 분히 여길 뿐만 아니라 당신의 아들을 다시 맞을 수 있는 간곡한 심정을 갖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러한 간곡한 심정이 이 청중의 마음을 통하여, 몸을 통하여 나타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 이제 허락하신 짧은 시간에 아버지의 말씀을 전하고자 원하옵니다. 전하는 자의 마음과 받는 자의 마음이 하나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말씀이 아무리 좋다 할지라도 그 말씀이 저희의 심정과 인연이 맺어지기 전에는 저희 자신들과 하등의 관계가 없는 것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님이 저희에게 운행하셔야만 그러한 인연을 맺어질 것을 알고 있사오니, 처음부터 끝나는 시간까지 전체를 주관하여 주시옵기를 부탁드리옵니다. 지방에 널려 있는 외로운 식구들도 이 시간 같은 품에 품어 주시고, 같은 은사로써 주관하여 주시옵기를 부탁드리올 때에,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기독교가 지금까지 역사 과정을 거쳐오면서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던 것이 무엇이냐 하면 산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여러분들에게 ‘산을 찾아가시는 예수의 슬픈 심정’이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본문 말씀에 의하여 이미 잘 알고 있겠지만, 변화산상을 찾아 올라가는 예수의 모습을 이 한 시간 다시 회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산정까지 올라가신 예수님은 과거 역사에 있었던 전체 섭리를 대신한 존재요, 그 시대 전체를 대신한 존재요, 더 나아가서는 앞으로의 후손들 전체를 대신한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변화산상에 기쁜 마음으로 오르시지 못하고 비장하고 슬프고 쓸쓸한 심정을 가지고 오르셨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이 회상하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사건은 비단 그 순간만에 그쳐진 비장한 사건이 아니고, 예수님 이전 시대와 예수님 당대와 예수님 이후에까지 그 영향이 미쳐지는, 중대한 결정이 내려지는 사건이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중대한 일에 봉착할 때마다 발걸음을 옮겨 찾아가신 곳은 높은 산들이었다는 것을 우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광야에서 40일 동안 굶주리고 난 후 사탄의 3대 시험을 받으시는 예수는 하늘에 대한 염려와 인류에 대한 염려와 피조만물에 대한 염려를 그 일신에 지니고 전후좌우를 명백히 갈라내야 했습니다. 그러한 책임을 진 예수에게 있어서 그 장면은 하늘과 사탄, 하늘 일과 사탄의 일을 판가리해 내야 할 중대하고도 비장한 장면이었습니다. 그때에도 역시 예수님은 사탄에게 이끌리어 올라가 산상봉에서 시험을 당했습니다.
예수님과 인연된 산을 살펴보면, 예수 앞에는 광야에서 사탄에게 이끌려 올라갔던 한 산이 있었고, 유대 백성들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최후의 십자가를 지는 문제를 하늘 앞에 결정짓기 위하여 찾아간 변화산상이 있었고, 그 다음에는 죽음의 골고다의 길을 넘어가기 위한 결정적인 기도를 했던 겟세마네 동산이 있었습니다. 이 사실들을 우리는 회상해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산을 찾아가던 예수의 발걸음이 어떻게 움직였으며, 그가 느끼던 슬픔과 서러움의 심정이 어떠했으며, 그가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났었던가를 우리들은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2천년 전 광야로 나가던 예수의 모습을 우리들이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탄을 대하여 싸움의 노정을 가던 예수의 애타던 심정을 알 수 없을 것입니다.
광야노정의 3대 시험에서 예수님이 사탄을 굴복시키고 최후의 승리를 한 곳도 높은 산꼭대기였습니다. 택함받은 세례 요한과 그 일당에게 배척을 받고 유대민족에게 배반을 당하고 찾아가는 광야노정의 걸음이야말로 오늘날까지 이 땅 위에 어느 누구도 체휼하지 못한 슬픈 심정을 가지고 걸었던 걸음이었음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독생자요, 4천년 역사를 해결할 자요, 또한 그 시대와 천추만대의 후대 앞에 하늘이 자랑할 수 있는 승리의 표적으로서 나타나신 분이었습니다. 그러한 예수가 백성도 뒤로 하고, 교단도 저버리고, 택한 세례 요한도, 요셉가정도 남겨 두고 친구도 없이 홀로 광야로 나가던 서글픈 심정을 우리들은 회상치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그러한 역사적인 탕감조건을 세우겠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결심을 하고 나선 예수는 40일 금식을 하면서 그 한 장소에서 무엇을 회상하였던고? 옛날 선조들이 걸어 나온 슬픔의 노정을 자기 일신으로 탕감복귀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책임감을 누구보다 절절히 느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이 시간 우리들은 깨닫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그러면 3대 시험 과정에서 사탄에게 이끌려 높은 산꼭대기로 올라가던 예수는 어떤 생각을 하였을 것인가? 4천년 역사 전체의 노정을 마음으로 염려하면서 최후의 승리의 방패를 세워 사탄을 굴복시키느냐 못 시키느냐 하는 비장한 심정을 갖고 높은 산꼭대기를 향하여 올라가던 예수였다는 것입니다.
광야를 걷던 예수는 옛날 에덴동산에서 아담 해와가 쫓겨난 후 에덴동산을 잃어버림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후손 역시 그 동산을 찾아 헤매야 할 것을 그 마음에 회상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추방당한 아담 이후 슬픔의 동산에서 살아온 역사적인 선조들을 회상하게 될 때에 예수님은 산이라는 명사와 함께 산에 대해서 그 마음에 심각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담 해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김을 받았던 것을 쫓김받지 않았던 입장으로 원상복귀하기 위하여 1,600년 이후에 나타난 노아가 120년이라는 기나긴 세월 동안 아라랏산 기슭에서 모든 역경을 참으면서 방주를 만들었던 그의 절개심을 회상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노아가 그와 같은 생애를 보낸 것은, 오늘의 나 한 자체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노아가 이와 같이 산정에 올라 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워하며 수고했을 것이라고 예수는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아브라함 시대로 와서 아브라함이 제물 실수를 한 이후 이삭 번제의 명령을 받고 산상을 향하던 것을 회상치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때에 사라의 만득자(晩得子)인 이삭을 속여서 모리아산상으로 데리고 가던 아브라함의 비장한 심정을 회상치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삭은 누구를 위하여 제물로 바쳐지지 않으면 안 되었던고? 아브라함은 누구를 위하여 독자인 이삭을 제물로 드리지 않으면 안 되었던가? 물론 아버지를 위함이요, 동시에 오실 메시아를 위함이었다는 것,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을 회상하였을 것입니다.
그 다음에 모세를 회상했을 것입니다. 그는 바로 궁중 40년과 미디안 광야 40년의 수고의 노정을 거쳤습니다. 이렇게 서글픈 심정을 품고 나오던 모세 앞에 호렙산 기슭의 불붙은 가시덤불 가운데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새로운 약속을 하시던 그 장면을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또 모세가 자기를 찾아오신 하나님을 호렙산에서 만나 불변의 인연을 맺는 장면, 원수인 사탄을 이 우주에서 기필코 제거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와 그 뜻에 대하는 모세의 충절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모세가 인연맺는 그 장면을 회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택한 이스라엘 백성을 애급 땅에서 가나안 복지로 인도하라는 명령을 받은 모세는 80노객이요 광야에서 시달린 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시선과 모습이야말로 하늘의 심정에 사무친 모습이었습니다. 그런 마음의 표준을 갖고 있던 모세를 회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60만 대중을 먹을 것도 없고 입을 것도 없는 황무지인 광야로 끌고 나온 입장에서, 끝까지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야 할 책임을 짊어진 모세는 그들이 잘못되거나 그릇된 길로 가지 않을까 염려해서 찾아 올라간 곳이 시내산이었습니다. 시내산정에서 모세는 40주야 금식기도를 했습니다. 그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가지고 내려오게 되는데, 예수님은 그러한 모세의 사정을 연상치 않을 수 없었습니다.
모세가 이렇듯 시내산에 올라가서 40일 금식기도를 한 것은 오로지 하늘 아버지를 위함이요, 메시아가 오실 길을 닦기 위함이었고, 더 나아가서 선민을 세우시어서 하나님이 찾고자 하시는 복귀된 나라를 찾아 세우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엘리야가 갈멜산 꼭대기에서 사탄 편인 바알의 제사장들과 대결하던 그러한 장면은 모두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이러한 회상을 하며 걷던 예수께서는 선조들이 산정에 올라가서 판가리 할 수 있는 하나의 해결점을 찾기 위하여 하늘 앞에 기도했던 그 사실이 모두가 하나님을 위함이요, 나아가서는 자기를 위함이었다는 것을 생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산에 대한 이러한 역사적인 인연을 회상하며 비장한 심정을 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이러한 예수의 심중의 세계를 회상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광야노정에서 사탄에게 이끌려 가던 그 발걸음은 자기를 위한 생각을 하며 걷던 걸음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이 원리를 통하여 알다시피, 예수님은 개인 복귀와 환경 복귀와 세계 복귀를 해야 할 것을 그 심중에 품고 이러한 상징적인 조건의 과정을 거쳐서 산정(山頂)에 나아가셨던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일대 시험이 벌어질 것을 각오하고 역사적인 새로운 선조로서 전통을 세우고 하늘의 심정을 상속받겠다는 마음을 품고, 사탄을 따라 산꼭대기까지 올라가셨던 예수님이었음을 우리는 알아야 될 것입니다.
이렇게 뜻에 대해 누구보다도 비장한 심정을 품고 나선 예수님이었습니다. 어떠한 역사적인 선조보다도 확고한 각오를 하고서 사탄을 그 장중에 쥐고 굴복시키고야 말겠다는 불타는 마음을 가지고 광야에 나가셨던 분임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산정에 홀로 섰던 예수님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는 이러한 역사노정을 회상할 때 자기 일신이 비장한 각오를 해야 함을 느낀 동시에, 그 당시 택한 이스라엘 민족을 생각하게 될 때에도 역사적인 책임감을 느끼며 말할 수 없는 슬픔의 심정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 위에 세례 요한을 세워서 하늘의 뜻을 성취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닦게 하였습니다.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터를 닦게 하기 위해 미리 세례 요한을 보냈는데, 그 세례 요한이 예수를 불신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되니 이스라엘 민족을 선민으로 축복하시고 4천년 동안 끌고 나온 그 역사를 대신하고, 시대적인 책임을 담당하고 나타날 수 있는 백성과 택한 자가 간 곳이 없어졌습니다. 그런 연고로 잃어버린 무리를 다시 찾아야 했던 예수님의 그 사정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 자리에 서게 된 예수님은 낙망하지 않을 수 없는 심정이었습니다. 그 시대의 모든 택한 백성과 세워진 무리를 생각하게 될 때는 슬픔에 북받치지 않을 수 없는 예수님의 심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자리를 만든 동기와 기원을 더듬어 살피고, 또한 그 당시까지의 역사적인 심정을 헤아려보게 될 때, 이런 곡절을 있게 한 존재가 바로 사탄이라는 것을 느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기필코 사탄에게 승리하겠다는 확고한 결심을 갖고 사탄의 시험을 대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비장한 장면을 여러분은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탄이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마 4:8-9)고 말했으나,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단호하게 사탄을 배척했습니다. 그리하여 사탄 앞에 하나의 승리의 기준을 세웠던 것입니다. 또 그럼으로 말미암아 역사적인 슬픔과 시대적인 슬픔에 연결시킬 수 있는 자신의 기준을 획득해 가지고, 역사적인 인연의 발판이 되어 있는 택함받은 이스라엘과 세워졌던 유대교를 향하여 다시 찾아 내려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그 예수의 사정을 여러분들은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이리하여 예수는 광야노정에서 승리의 기준을 세워 가지고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단을 찾아갔으나 그들은 모두 환영해 주지 않았습니다. 예수가 가는 길과 머무는 곳곳마다 환영해 주기는커녕 오히려 그를 핍박과 반대와 조롱으로 대했다는 것입니다. 첫번에 배척을 받고 광야노정에 나간 것도 섭섭하고 분한데, 사탄을 대하여 승리한 조건을 갖고 다시 백성을 찾아 나선 예수 앞에 반기를 들고 나서는 유대교와 이스라엘 민족을 바라보게 될 때는, 그야말로 말할 수 없이 비통하고 서러운 심정에 사무쳤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입장에 처했던 예수를 오늘날 우리들은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핍박받는 어지러운 환경에서도 민족과 교단을 돌이키기 위하여 산정에서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였고, 3년 공생애노정을 통하여 사탄과 싸웠으나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끝에는 자기가 죽어서라도 기필코 무지한 백성을 경각시켜야 되겠다는 심정으로 변화산상에 올라가셨던 거예요.
예수님은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어떠한 노력을 한다 해도 성과가 거두어지지 않을 것을 알고 난 후에는, 자기가 죽어 제물이 되고 피와 살을 뿌려서라도 역사적인 인연과 시대적인 인연을 맺고 있는 그들, 하늘의 심정에 연하여 있는 그 무리를 구하겠다는 간곡한 마음을 품고 나섰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마음을 품고 찾아간 곳은 훌륭한 궁전이 아니었습니다. 자기를 받아줄 수 있는 제자의 집도 아니고, 그 나라의 백성의 집도 아니요, 당시 유대교인들이 집도 아니었습니다. 그가 간 곳이 어디였느냐 하면 변화산상이었습니다. 갈 곳이 없어 변화산상을 이리저리 걸으시던 예수님의 서글펐던 심정을 여러분들은 더듬어 살펴야 되겠습니다.
예수가 서글픈 광야노정을 걸었던 것도 선조들이 불신하고 책임을 감당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았던 것인데, 3년 동안 하늘의 심정을 알아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 헤매었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또다시 산을 찾아 올라가야 했던 그 서글픈 심정과 그 발자취를 우리들은 회상해 보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예수님이 광야에 나가던 발걸음은 사탄에 대하여 승리하겠다는 기준을 가지고 민족을 붙안기 위해 나섰던 발걸음이었지만, 변화산상으로 찾아가는 그 발걸음은, 가졌던 결심을 다 버리고 자신의 몸을 민족 앞에 나누어주기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찾아가는 걸음이었습니다. 이 시간 그렇게 산을 오르던 예수의 심정과 모습을 회상하고, 그것을 자신의 애달픔으로 체휼할 수 있고, 또 그런 심정으로 예수를 바라보는 자가 있다 할 진대 그는 하늘 대한 예수의 서러움과 민족을 대한 예수의 서러움, 그리고 교단을 대한 예수의 서러움까지도 체휼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변화산에 올라갈 때에는 세 제자가 예수의 뒤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보기에 민족을 대표해서 택한 제자 입장이었으나 산에 오르시는 예수 앞에 아무런 도움의 조건도 세워 드리지 못한 제자들이었습니다.
예수가 광야를 찾아 나갈 때는 그래도 천사가 와서 수종을 들어 주었는데, 민족을 위하여 싸우고 민족을 위하여 죽음을 각오하며 변화산을 오를 때는 민족을 대표하여 따르던 세 제자마저 예수의 수종을 들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하게 될 때, 슬픔으로 시작되어 슬픔으로 끝난 예수의 생애는 비통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느끼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예수는 무릎을 꿇고 하늘을 우러러 내 힘이 닿는 데까지, 내게 있는 모든 정성을 다 들여 원하시는 뜻을 따라 나가겠다고 기도했습니다. 역사적인 어떠한 선조들보다 굳은 지조와 충의와 성심과 노력을 기울여 3년 공생애노정을 걸었으나 민족에게 몰리었고 교단으로부터 몰림 받았습니다. 친척과 제자들 어느 누구 한 사람 자신의 편이 되어 주지 않는 가운데서 예수님은 하늘을 향하여 기도하는 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심정은 자신이 외로운 자리에서 슬픔을 느끼는 것보다도, 하나님께서 인간을 대해 4천년 동안 수고해 나온 역사의 결과가 이 모양 이 꼴인가 하여, 하나님 앞에 자기의 심정을 고하기에 민망스러운 심정이었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심정에 사무쳐 있는 예수에게 민족에 대한 원망심이나 교단에 대한 원망심, 혹은 타락된 아담 해와에 대한 원망심이 나올 수 없었습니다. 누구를 원망할 여지가 없었던 예수였음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옛날 선조들은 슬플 때 하늘의 위로를 받았으나 예수는 슬픈 자리에서도 슬프다고 기도할 수 없는 자신임을 깨달았다는 거예요. 기도하기 전에 흐느낌의 눈물이 먼저 예수의 무릎을 적시었으리라고 나는 봅니다. 그 모습은 하늘땅 위에 죄인 중의 죄인과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4천년 동안 수고의 역사를 거듭하여 섭리하셨던 하나님 앞에, 승리의 조건을 세우지 못하고 패배의 일로에서 서글픈 사정을 품고 변화산상에 홀로 나타나 하늘을 대해 호소하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서게 된 예수는 차마 입을 열어 기도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 모습과 사정이 딱하였기에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와 모세를 보내시어 예루살렘에서의 예수의 죽음을 의논하게 하셨습니다. 제자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슬픔에 잠길 것을 안 예수는 백성을 위하여, 또 이 후대를 위하여 하늘이 염려하실 것을 아시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놓고 슬퍼하셨던 것입니다. 죽음의 길을 걸어서라도 소망이 없고 앞길이 가로막힌 가운데 처해 있는 유대 백성들을 살려야 할 것을 느낀 예수는 엘리야가 ‘아바 아버지여! 나만 남았나이다’라고 호소하던 그러한 기도의 심정으로 하나님 앞에 나타났던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심정은 참으로 비통하였던 것입니다.
오늘날까지 우리 선조들이 하늘을 대하여 나오는 데 있어서 그 행한 일들이 이렇듯 슬픈 역사를 남겼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변화산상에서의 제자들이 자기들이 죄의 종족임을 알고 예수와 같은 심정으로 또는 예수 대신 민족의 서러움을 염려해 주기를 바라셨습니다. 예수를 위로해 드리고 예수 대신 기도해 주기를 원하셨으나 제자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우리의 선조들이 걸어 나온 역사노정의 실상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을 예고 받은 예수는 그 죽음의 한 날을 남몰래 준비했습니다. 예수는 자신의 죽음의 날이 점점 촉박해지고 사태가 어지러워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또 사랑하는 제자가 자신을 팔 것을 알고 자신이 십자가에 나가기 전에 먼저 세상의 모든 만사를 다 종결지어야겠다는 심각한 심정을 가졌습니다. 그러한 심정이 그의 몸 마음에 어리었다는 것입니다.
죽음을 앞에 놓고 최후의 길을 가야 할 구세주의 사명을 짊어진 자신임을 예수는 알았기 때문에 죽음의 길을 거친 후에 가야 할 방향을 설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예수는 자신의 이러한 죽음으로 말미암아 역사적인 서러움과 시대적인 서러움, 그리고 미래의 서러움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고개를 넘고 난 후에까지도 저끄러진 채 남아 있을 것을 염려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의 심정은 어느 때보다도 비장한 것이었음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심정에 사로잡혀 있는 예수를 알아준 사람은 땅 위에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 사정을 알아주는 하나의 제자도 없었습니다. 예수의 사정을 아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는 자신만이 아는 서글픈 심정을 지니게 되었고, 역사적이요 시대적이요 미래적인 원한을 품게 되었고, 비운의 장벽과 검은 구름이 앞을 가로막는 환경, 죽음 앞에 몰리는 비참한 환경에 처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의 심정이 슬프다면 이 땅 위의 어느 누구보다 슬픈 심정이었을 것이요, 분하고 억울하다면 어느 누구에게도 비할 수 없이 분하고 억울했을 것입니다. 내 아버지여 할 만하시거든…
그러면 예수께서 누구를 위해 이 땅 위에 오셨던가? 역사를 대신하고 시대를 대신하여, 또 민족과 교단을 위하여 왔었으나 그가 나아가는 길은 너무도 슬펐습니다. 예수는 그의 슬픔이 자신의 슬픔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슬픔이 역사적인 슬픔으로, 시대적인 슬픔으로 연결될 것을 알았기에, 또한 미래의 슬픔으로 연결될 것을 알았기에 몸둘 바를 모르고 초조한 심정에 잠겼던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 연고로 예수께서 찾아가신 곳이 겟세마네 동산이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놓고 슬퍼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만민의 구세주요 만왕의 왕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가 최후의 슬픔을 토로한 곳은 제자의 집이 아니었습니다. 믿고 있는 유대교단도 아니요, 유대 나라의 궁중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과 의논하여 모든 것을 결정짓기 위하여 올라가신 곳은 깊은 밤에 아무도 가지 않는 겟세마네 동산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따라서 끝날에 있는 오늘날 우리 성도들은 슬픔의 눈물을 흘려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흘렸던 눈물을 대신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또 그러한 예수의 제2의 모습을 그리는 마음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그래야만 역사적인 슬픔을 품고 시대와 미래를 위하여 우셨던 예수, 처참하고 불쌍한 사정에 처해서 세 번씩이나 피땀을 흘리며 우시던 예수와 인연을 맺을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밤이 새도록 “내 아버지여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 26:39)라고 기도하시던 예수께서 분하다면 말할 수 없이 분하고, 서럽다면 말할 수 없이 서러웠을 것입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4천년 역사가 하루에 넘어가고, 수많은 이스라엘 민족이 하루 아침에 망하고, 4천년 섭리의 터전이 한 시간에 무너지고, 세워졌던 유대교단이 한 시간에 무너질 것을 생각하게 되면, 그가 흘린 피땀은 역사의 거리를 연결시킨 피땀이요, 그가 흘린 피눈물은 역사의 거리를 연결시킨 피눈물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유대 백성들은 이러한 내용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르던 제자들은 선생님이 어디를 가든지 함께 따르겠다고 맹세는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그 비통한 심정을 누가 인계받고, 누가 이 비통한 피눈물의 사정과 인연을 맺었던가? 땅 위에는 그러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한 일들은 오직 예수께서 홀로 행하고 가셨지, 이 땅 위의 인간 중에는 그러한 심정을 인계받을 자가 없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앞에 놓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세 번씩이나 하늘을 대해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 14:36)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 호소는 하늘땅이 터져 나가는 한마디요, 사망세계가 권세를 갖고 들어서려는 것을 저지하려는 비장한 한 마디였습니다.
따라서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가 기독교 신자들에게 죽은 기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어느 시대나 어느 세기를 지나도 이 애달프고 피어린 최후의 호소의 음성이 우리 인간의 마음속에 끊임없이 살아 있어야 합니다. ‘오! 하늘이여!’라고 부르짖던 예수의 심정에 여러분의 심정이 같이 동하는 한 날을 소망하여 하늘은 다시 섭리해 나오고 계십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오늘날 끝날에 있는 성도들은 갈보리산상과 겟세마네 동산에서 호소하시던 예수의 그 역사적이고 비장한 심정을 이어받아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겟세마네 동산에서 잠을 자던 예수의 세 제자와 같은 입장에 있는 기독교인들을 각성시키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이러한 시대가 당도하고 있음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 하늘을 향하여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 26:39)라고 기도하시던 것과 같은 심정을 품고 ‘아바 아버지시여! 할 수만 있으면 우리의 메시아를 십자가에 내어 주지 마시옵소서’ 라고 기도하는 무리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 26:39)라고 세 번씩이나 기도하실 때, 그와 같은 심정으로 ‘아바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예수님 대신 내가 십자가에 달리게 하시옵소서’ 라고 기도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러한 기도를 할 수 있는 하나의 택한 신자가 없었고 하나의 택한 민족이 없었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께서 걸어가신 생애노정은 산꼭대기에서 벌어지는 그러한 비장한 일의 연속이었지 기쁨으로 되어진 일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외로울 적마다 감람산 골짜기를 찾아들었고, 슬픈 적마다 고요한 삼림을 동무 삼아 무언의 설교를 하는 생활을 했습니다. 어느 누구 하나를 붙들고 그의 깊은 심중의 내용을 호소할 수 있는 자유스러운 자리를 갖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께서는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아버지를 대할 적마다 슬픔과 서러움을 갖고 대하셨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예수에게는 소원이 있었으니 그 소원은 무엇일 것인가? 그는 보이는 모든 산천이 하나님의 눈물과 인연맺어져 있고 선조들의 애달픈 심정과 인연지어진 터라는 것을 회상하면서 이 모든 산천이 슬픔과 눈물의 산천이 되지 말고, 기쁨과 영광의 제단을 꾸며 승리의 송영을 드리는 산천이 되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의 소원이었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들은 산을 바라보고 무엇을 느껴야 되겠는가? 우리의 선조들이 과거에 비장한 각오를 하고 모든 슬픔의 역사를 이 산에서 종결지으려 한 것을 안다 할진대, 그 산들이 선조들이 사탄세계를 대해 승리해 줄 것을 바랐다는 것을 느낄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산들은 예수께서 비장한 장면 장면에서 승리의 기준을 세우기 위하여 기도한 곳이라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이 산에서 승리와 영광의 제단을 쌓고 ‘아바 아버지여, 나로 말미암아 영광을 누리시옵소서’ 라고 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다렸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을 안 여러분들은 이제 산을 바라보게 될 때에, 예수의 피와 눈물의 터가 되었던 산임을 느껴야 되겠습니다.
아마도 예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의 풀포기를 붙들고도 호소하셨을 것이며, 하나의 바위를 붙들고도 호소하셨을 것입니다. 그런 고로 그 바위 그 풀은 밤새도록 기도하시는 예수의 심정에 연하여 그 심정 가운데 잠길 수 있었으나 그 당시 인간들은 그렇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나아가 슬픔의 인류가 된 것을 자탄하고, 만물을 보기가 부끄럽고 산을 보기가 부끄러운 자신들임을 깨달아, 끝날에 이 땅 위에 다시 오시는 주님 앞에는 예수를 산으로 쫓아 버리던 유대민족들과 같은 사람이 되어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가정에서부터 주님을 모시고, 사회에서 모시고, 국가에서 모셔야 되겠습니다. 들이나 산 어디에서든지, 심지어는 산꼭대기에서까지도 주님을 모셔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하늘 앞에 기쁨의 존재로, 영광의 존재로 그 주님을 모실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또 그 주님의 한마디는 슬픔의 말이 아니고 기쁨과 사랑이 어린 말씀이 될 수 있는 환경을 준비해 드려야 할 책임이 여러분에게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산아! 산천아!’ 하시며 슬픔의 역사를 탄식하시던 하나님의 눈물자국을 받은 산들, 혹은 이 땅을 대해서, 또는 피조만물을 대해서, 역사노정을 대해서, 이 시대를 대해서 어느 하나의 존재물도 하늘은 서글픈 눈물을 통하여 바라보시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의 어떤 존재물에게도 슬픈 심정을 품고 대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산에서부터 출발하여 산으로 산으로만 걸으시던 예수의 행로를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께서는 산정에서부터 승리의 조건을 갖추었고 생활 환경에서도 승리의 조건을 갖추었습니다. 산꼭대기에서도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날을 소망하신 예수님인 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것은 산을 찾아가셔서 승리의 한 기준을 세우기 위해서 기도하시던 예수의 역사적인 심정이요, 예수의 시대적인 걸음이요, 또한 예수의 소망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합니다.
나아가 우리들은 오늘의 광야노정에서 예수 대신 사탄과 싸워야 되겠고, 변화산상에서 싸우시던 예수 대신 민족과 국가 세계를 위하여 죽음을 각오하고 싸울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죽음을 앞에 놓고 역사적인 인연을 맺으시던 예수의 심정을 갖고 하늘 아버지를 향하여 부르짖을 수 있어야 합니다. 가슴 터지는 벅찬 심정을 가지고 이 땅과의 인연을 맺고자 하시는 하늘의 심정을 인계받을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을 통하여 하늘의 심정과 연결시킬 수 있는 하나의 존재를 세워 놓지 않으면, 예수께서 걸으신 산정(山頂)의 수고는 수포로 돌아간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아버님! 종교를 찾아 나오는 인류에게는 명승 명산이 필요하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역사에 나타난 모든 위대한 인물들은 산과 인연을 맺어 산과 더불어 사정을 토로하고, 산과 더불어 생사의 기준, 승패의 기준을 결정지어 나왔다는 사실을 저희들은 잘 알고 있사옵니다.
예수께서는 인류를 대표하여 가신 분으로서 그가 가시는 곳은 산정이었고, 마음을 연결시켜 하늘을 대하여 사정을 호소하시던 곳은 산정이었음을 알았사옵니다.
이와 같은 역사적인 인연을 연결시켜 나온 것이 산이었음을 알았사오니, 이 삼천리반도 강산에 널려 있는 산정에도 하나님의 아들딸이 나타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하나님께 승리의 영광을 돌려 드리며 역사적으로 산에서 맺혀진 원한을 탕감해 드릴 줄 아는 자랑스러운 자들이 되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그러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저희 개인뿐만 아니라 가정과 사회, 또한 종교와 민족과 세계가 이 산정을 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사오니, 오늘 저희들은 하늘땅을 대신하여 산정을 오르내리시던 예수의 심정을 본받을 수 있게 인도하여 주시옵고, 그가 남기신 발자취를 따르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최후에 승리의 제단을 산정에 쌓아 호산나의 개가를 부를 수 있는 날까지 저희들은 변할 줄 모르고 싸우는, 또 그 싸움에 임하여 지칠 줄 모르는, 후퇴할 줄 모르는 아들딸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 이런 각오와 결심이면 아버님께서 협조해 주실 것을 알고 있사오니, 그 정한 일념으로써 어떠한 곡절의 길이라도 뚫고 나아갈 수 있게 이끌어 주시옵고, 아버님께서 원하신다면 찾아가서라도 그 뜻을 받들어 아버님의 심정과 연결시킬 수 있는 책임을 짊어지는 참다운 아들딸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며, 모든 말씀 주님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니다. 아멘.
아버님, 불충스러운 몸들이나마 아버지를 찾아 나왔사오니 긍휼히 보아 주시옵소서. 저희를 오라 하시는 아버지의 음성을 듣고 이 자리에 나왔사오니 저희의 마음과 저희의 몸이 아버지의 것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당신과 영원히 인연맺을 수 있는 이 한 자리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당신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저희의 심정이 되고, 당신의 성상(聖像)을 접할 수 있는 저희의 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아버지와 영원한 인연과 영원한 관계를 맺어 아버지께서 움직이시면 저희들도 움직일 수 있으며, 그 뜻에 따라 행할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모이게 한 이 사실이 우연한 일이 아닌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사망의 권한을 끊기 위하여 저희들을 모아 주셨사옵고, 사탄을 이긴 제물로 세우기 위하여 저희들을 불러 모았사오니, 당신의 소원의 뜻대로 저희들을 맡아 주시옵고, 당신께서 기뻐할 수 있는 제물로 세워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저희들 자신을 중심한 어떠한 조건도 갖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저희의 몸이 당신 앞에 해가 될 수 있는 어떠한 요소도 갖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마음과 몸이 통하고 오직 당신만 통할 수 있으며 당신이 마음대로 주관할 수 있는 본연의 모습을 갖추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당신의 심정으로써 하나로 화할 수 있는 몸들이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알고 있사오니, 아버님이시여, 저희의 몸을 당신이 친히 임재할 수 있는 성소로서, 저희의 마음을 당신이 친히 임재할 수 있는 지성소로서 만들어 주시옵소서. 저희의 몸 마음이 아버지께서 친히 임재하시고 안식하실 수 있는 터전이 되게 빚어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마음 문을 열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모든 죄악의 요소를 제거시켜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뜻 앞에 합당치 못한 모든 요소를 제거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당신만이 주관하실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당신의 생명체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일주일 동안 사는 가운데 부족한 것이 많았을지라도 아버지 무릎 앞에 엎드렸사오니 아버지께서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재창조의 고난 가운데에서도 저희를 다시 사랑하여 주시옵고, 이 한 시간만이라도 번제의 제물로서 아버님 품에 안길 수 있는 아들딸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날은 거룩한 날이었사오니 만민 위에 축복하여 주시옵고, 삼천만 민중 위에도 축복하여 주시옵고, 수많은 교단 위에도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의 심정을 연모하고 당신의 천륜의 뜻을 바라고 있는 수많은 아들딸 위에 아버지의 직접적인 은혜의 손길을 나타내어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 세계적으로 섭리하고 계시는 것을 저희들이 마음 몸에 체휼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날 지방에 널려 있는 외로운 식구들, 아버지의 뜻 하나를 염려하면서 기도하고 있는 그 아들딸들 위에 일률적인 은사를 내려 주시옵고 친히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시련과 핍박 중에도 끝까지 남아지는 무리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갈 길을 알지 못하여 방황하던 저희들을 아버지께서 이 한 자리로 이끌어 주심으로, 상처받은 몸과 마음을 가지고 아버지 존전에 부복하였사옵나이다.
아버님 앞에 드릴 것을 갖추지 않았사오나 이끌어 주시옵고, 긍휼의 은사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사랑의 아버님, 저희들의 피로한 손길을 붙드시옵고, 의지할 곳 없는 저희의 몸을 안아 주시옵소서. 영원한 그 세계의 사랑을 저희에게 베푸시옵고, 고대하였던 소망의 아버지로서 저희를 훈계해 주시는 이 한 시간이 되게 허락해 주시옵기를, 나의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진정한 심정을 털어놓고 아버지를 대하고자 하오나 아버지와의 거리가 너무나 먼 것을 느끼옵니다. 그러나 이 한 자리에는 당신을 위하여서는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겠다고 맹세한 자들도 많사옵고, 당신 앞에 모든 것을 바치겠다고 각오한 자들도 많사오니, 아버님, 그들 위에 현현하시옵고 분부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께서 친히 권고하시고, 아버님과 사랑의 인연을 맺을 수 있는 이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저희가 가는 길도 아버지를 위함이고, 저희가 사는 것도 아버지를 위함이고, 저희에 속한 모든 것이 아버지의 뜻 하나를 위한 것이오니, 이제 저희의 한 몸을 친히 맡아 주관하여 주시옵고, 친히 품어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인간과 인연맺고자 하시는 그 뜻이 아버님의 사랑의 움직임으로 말미암아 나타나게 허락하여 주옵고, 찾고자 하시는 본연의 한 자체를 이 한 시간을 통하여 다시 빚어낼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나의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들이 가고 싶어서 이 길을 나선 걸음이 아니었사옵고, 아니 갈래야 아니 갈 수 없는 천륜의 뜻이 있어 찾아 나왔사옵니다. 당신의 수고하심과 피어린 노정을 알고 그 뜻을 완결짓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사오니, 저희의 마음과 몸을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당신이 세워 주신 생명의 등대를 찾아 나왔사옵고, 아버지 앞에 자랑할 수 있는 하나의 모습이 그리워 찾아 나왔사오니, 아버님, 분부해 주시옵소서. 영광의 은사를 허락해 주시옵고 재창조의 손길을 나타내 주시옵소서.
아버지 앞에 합당치 못한 저희의 모든 것을 제거시켜 주시옵고, 아버님의 선의 역사만이 나타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 친히 운행하실 수 있으며 저희들 기쁜 마음과 몸으로 아버지 앞에 경배드릴 수 있는 이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들은 새로운 동산을 마음으로 그리워하고 있사옵고, 새 나라의 이념을 흠모하고 있사온데, 아버님이시여, 이 길을 막는 원수들이 많사옵니다.
오늘도 싸우고 내일도 싸우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처해 있사오니, 아버님, 함께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의 자극적인 힘과 충격을 이 한 시간 시간을 통하여 가하여 주시옵소서. 하늘의 사랑을 흠모하는 간곡한 마음만이 저희의 생활을 주관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환경을 움직여낼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이시여, 이 나라 이 민족을 긍휼히 보시옵소서.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있사옵니다. 이 민족이 원하는 것은 희망의 제단이옵고 자유의 동산이옵니다. 하오나 허락하신 이상세계와 하늘이 운행하심을 아무도 알지 못하고 있사오니 이들을 깨우쳐 주시옵고, 이들에 대한 저희의 책임이 크다는 것을 아오니, 오늘 이 한 시간 아버지 앞에 엎드린 저희들, 이 민족에 대한 책임을 다할 수 있도록 함께 하여 주시옵소서.
흑암의 권세 하에서 신음하고 있는 이 땅 위의 인류를 구원해야 할 책임을 짊어지고 있다는 것을 각성할 수 있는 이 한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의 새로운 진리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이 민족을 새롭게 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이 땅 위의 인류를 사랑할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이시여, 이번 기간 지방에 널려 있는 외로운 식구들 긍휼히 보시옵소서. 목자로 보내 놓은 그들이 당신을 향하여 호소하는 이 시간이었사오니 일률적인 은사로 품어 주시옵고, 남아진 싸움터에서 쓰러지는 자들이 되게 말게 보호하여 주시옵고, 낙오자가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불충스러운 몸들이나마 가다듬고 아버지의 거룩한 성전에 모였사오니, 아버지 앞에 합당치 못한 일체의 요소를 제거시켜 주시옵고, 나를 중심삼고 주장하는 어떠한 주의나 관념이나 인식까지도 제거시켜 주시옵소서. 당신만이 움직일 수 있는 이 한 시간 되게 하여 주시옵고, 당신만이 관여할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모든 것 맡기었사오니 뜻대로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주의 이름으로써 아 뢰었사옵나이다. 아멘.
아버지여! 알 수 없었던 섭리의 뜻이라는 것을 저희들이 다시 한번 마음속 깊이 회상해 볼 때, 우리의 선조가 타락한 이후 6천년이란 긴 역사를 지나 왔지만 인간들은 아버지의 그 심중을 통하지 못하였던 사실들을 저희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사옵니다. 또한 아버지의 사정이 어렵고 딱하다는 것도 이미 배웠사옵고, 아버지의 소원이 오늘날 땅과 온 인류와 하늘 앞에 머물러 있다는 것도 저희들은 알았사옵나이다.
오늘날 저희가 아버지의 소망권 내(所望圈內)에 서서, 아버지의 심정의 동산에 서서 ‘아버님이여, 내가 있사오니 위로 받으시옵소서’ 라고 할 수 있는, 존엄하신 아버지 앞에 칭찬받을 수 있는 아들딸의 절개를 가졌는가 생각해 볼 때, 저희들은 너무나 먼 거리에 처해 있음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아버지의 그 심정을 대신할 수 있는 소원의 실체로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가 땅 위에 다시 나타나실 때에, 천륜의 심정을 찾아 헤매는 자는 그 예수님의 심정을 통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천륜의 사정을 통하여 헤매는 택한 이스라엘에 있어서는 그들의 사정이 예수님의 사정과 하나되었어야 할 것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예수님을 보낸 아버지의 소원이 만민을 위한 소원이었다는 것을 이스라엘 민족은 알았어야 했사온데, 소원의 실체인 예수님을 몰라봄으로 말미암아 이 서러움이 오늘날 저희들에게까지 연장되어 내려오게 된 이 역사적인 슬픔 또한 느끼게 되옵니다.
이제 아버님을 대하여 부르짖고 싶은 것이 무엇이며, 아버님을 향하여 찾고 싶은 것이 무엇이며, 구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오늘날 저희의 선조들이 갖지 못하였던 아버지의 심정을 예수님이 대신하였던 것처럼 저희들도 그 심정을 소유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사정과 소원을 소유하여 끝날에 아버지와 같은 심정을 지닌 존재들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과, 지금까지의 당신을 대한 역사적인 모든 빚을 탕감해야 할 책임이 있음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이제 저희의 몸과 마음을 합하여 아버지 존전에 엎드렸사오나 무엇 갖고 아버지라 부를 수 있으며, 무슨 사정으로써 아버지의 사정에 동반할 수 있사오리까? 또한 무슨 소원을 갖고 아버지의 6천년 소원의 심정을 대신할 수 있사오리까? 아무런 것도 갖지 못한 불초한 모습들이옵니다.
이러한 자리에 처해 있는 인간들을 불쌍히 보시는 아버님이신 것을 아는 연고로, 긍휼의 심정이 크신 아버지이신 것을 아는 연고로, 십자가의 노정을 걸으시며 참아 나오신 아버지께서 ‘오라’ 하신 것을 아는 연고로 아무것도 갖추지 못한 불충하고 부족한 모습들이오나 두 손을 합하여 아버지 앞에 엎드렸사옵니다. 무릎을 연한 비참한 이 모습들을 긍휼히 보시옵고, 아버지의 말씀으로 저희들을 깨우쳐 주실 것을 바라고 있사옵고, 아버지의 사정에 화하게 저희들을 훈계하여 주시기를 바라고 있사오니, 아버님, 저희들을 대해 참으셨던 분한 마음이 있다 할진대, 그 마음을 풀 수 있는 이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억울하고 통분한 마음이 있더라도 보잘것없는 저희들이나마 저희들을 통해 그 모든 것이 해원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 2천년 전에 왔다 가셨던 예수님은 정말 불쌍한 분이셨사옵니다. 최후의 순간까지도 그의 심정을 헤아리는 자는 한 사람도 없었고, 그의 사정과 소원을 아는 자는 아무도 없었사옵니다. 땅을 보나 만민을 보나 당신의 뜻을 펼 수 있는 터전이 없어 30여년의 생애를 서글프고 처참하게 살다 가신 예수님의 사정을 아는 자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예수의 심정을 닮은 자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옵소서. 소망을 품고 예수께서 남기신 발자취를 따를 수 있는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4천년 동안 찾아 세우신 유대교단은 어디 갔으며, 이스라엘 민족은 어디로 갔습니까? 세우신 예루살렘 성전도 예수님을 위하여 준비한 것이었사오나 예수님과는 관계를 맺지 못하였고, 준비한 유대교단도 예수님과 관계를 맺지 못하였습니다. 준비한 민족도 예수님과 하등의 관계가 없는 입장에서 오히려 예수님을 몰아치는 자리에 섰었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이 외로운 자리에 홀로 서서, 몰아치는 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 예수님의 사정을 아는 자들이 이 시간 여기에 많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시여, 저희들이 이 자리에 모인 것은 아버지께서 오라 하시는 명령을 들었기 때문이옵니다. 이제 저희들의 가는 발걸음에 십자가의 길이 남아 있는 줄 알고 있사옵고, 눈물어린 시선을 갖고 죄악 된 세상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될 때가 왔사옵고, 아버지의 심정을 통해야 할 때가 왔기에 저희들을 부르신 줄 아옵니다. 그러기에 아버님의 마음을 저희의 마음으로, 아버지의 사정을 저희의 사정으로, 아버지의 소원을 저희의 소원으로, 아버지의 원수를 저희의 원수로, 아버님의 싸움을 저희의 싸움으로 하여서 아버지의 소원을 성취해 드릴 수 있는, 승리의 제물로 바쳐질 수 있는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일 곳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던 예수의 한 맺힌 사정, 저희들이 운다고 해서 풀려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저희들이 죽는다고 해서 풀려질 수 있는 것도 아닌 그 원한의 사정을 이 한 시간에 저희들이 체휼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 앞에 가까이 나아가고 예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갈 수 있으며, 삼위신(三位神)의 품에 안길 수 있는 이 한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저희의 이 한 모임이 아버님께서 머리 둘 곳이 되게 허락하여 주옵고, 깃드실 곳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말씀을 전하고자 하오니 많은 말씀보다도 아버지의 심정을 전하게 허락하여 주시고, 아버지의 사정을 전하게 허락하여 주옵시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말없이 움직일 수 있는 저희들이 되어 아버지의 심정에 화하고, 아버지의 영광을 바라보며 아버지의 심정을 체휼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각자 각자가 산 성전으로서 아버지와 동(動)하고 정(靜)할 수 있는 모습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 한 시간 성별(聖別)된 제단을 쌓게 허락하여 주옵시기를 나의 아버님,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오며, 사탄이 틈타는 시간이 되지 말게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였사옵나이다. 아멘.
오늘 여러분들과 같이 생각하고자 하는 제목은 ‘개척자가 되신 예수의 실체’입니다. ‘개척자가 되신 예수의 실체’ 이러한 제목을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인류를 붙들고 구원섭리하시기 위하여 무한히도 애써 나오셨습니다. 우리 인간들이 죄악에 빠져 있을 때 우리를 찾아 주고, 우리를 위하고 우리에게 복지를 소개해 주기 위해서 수고하신 분이 있다고 하면, 그는 우리의 사랑하는 부모도 아니요, 어떠한 정(情)으로 인연맺어져 있는 자식이나 부부도 아닙니다. 또한 국가도 아니요, 어떠한 성현 현철도 아니고 하나님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은 명심치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의 소망의 전체를 개척해 주기 위해서 오늘날까지 수고하셨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우리의 사정과 심정을 해결해 주기 위해서, 우리의 엉클어진 모든 것을 해결해 주기 위해서 쉼 없이 수고하며 싸워 오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역사 이래 이 시간까지 개척자의 사명을 감당해 오셨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이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늘은 아담이 타락한 이후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4천년이란 기나긴 세월을 통하여 개척의 수고를 이어받아야 할 인간이 무지한 입장에 있었지만 변함없이 섭리해 나오셨습니다. 우리 인간을 대해 한 날의 소망을 두고 행복의 동산을 목표해 나오셨습니다. 우리 인간은 역사를 거쳐오면서 한걸음 한걸음 그 세계를 향하여 찾아 나왔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타락 이후 4천년 동안 개인을 통하고 민족을 거쳐 오면서 이스라엘 민족을 세워 놓고, 당신의 소원의 뜻을 성취하기 위하여 4천년 수고한 터전 위에 하늘의 전체적인 사명을 인계시키고 하늘의 심정과 소원을 인계시킬 수 있는 하나의 주인으로서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그때 믿고 있던 유대교인들과 택함을 받아 선민이라고 자랑하고 있던 이스라엘 민족은 그분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수고로 인하여 택함받은 이스라엘 민족은 그의 수고를 해원성취하기 위하여 보내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받들지 못했고, 교단이 받들지 못했고, 사회와 가정 어느 누구도 받들지 않았습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소원하셨던 개척의 뜻은 좌절되었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성취의 일로(一路)를 걸어야 할 이스라엘 민족은 실패의 일로, 즉 죽음의 길을 갔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개척의 노정을 걸어오시면서 수고하셨고, 예수님은 이 개척의 뜻을 완수하여 하늘의 수고에 보답해야 할 영광의 사명을 지니고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 택한 무리들이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추방하니, 예수님께서는 4천년 수고해 나오신 하늘 앞에 그 동안 개척해 놓은 이스라엘 민족을 대신하여 다시 개척자의 입장에 서지 않으면 안 되었던 사정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을 받들고 택한 민족들이 소망하는 이념의 세계를 건설하여야 할 책임을 짊어지고 오셨습니다. 그런데 메시아를 바라고 있던 이스라엘 민족은 정작 나타난 예수님이 자기들이 소망하던 메시아인 줄을 몰랐습니다. 여기에서 하늘의 슬픔과 비극의 장면은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 되었던 것입니다. 그릇된 방향으로 전개된 이 한 사실을 놓고 우리들은 하나님 대신 슬퍼할 수 있는 심정이 있어야 되고, 예수님 대신 슬퍼할 수 있는 심정이 있어야 되겠습니다. 만일 그러한 심정이 없다 할진대 인간을 대하여 개척자의 사명을 해 오신 하나님의 심정, 택해 세운 민족 앞에 개척자의 뜻을 품고 나타났던 예수의 심정을 우리들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행복의 터전과 소망의 동산을 이루기 위해서, 그 교단과 민족은 예수님이 선두에 서서 죽음의 고개를 가면 같이 가야 했고, 예수님이 행복과 기쁨의 고개를 가면 역시 같이 가야 했습니다. 하늘은 4천년간 수고하시면서 끊을 수 없는 천적(天的)인 인연을 맺어 주었으나, 우리의 선조들은 하늘과의 인연을 배반하였고, 하늘의 개척의 공로를 배반한 이 사실들을 우리는 통분히 여기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지금부터 2천년 전 예수님은 불신할 수 있는 요소를 지녔던 이스라엘 민족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셨습니다. 또 천적인 심정의 터전 위에 세워져야 할 유대교단이 모세가 받은 율법의 형식적인 면에 사로잡혀 하늘 제단의 입장을 떠난 것을 바라보셨습니다. 어떠한 곳이 자기들이 살 곳이고, 어떠한 방향이 자기들이 가야 할 방향인가를 알지 못하고 허덕이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을 바라보는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4천년 동안 개척의 노정을 통하여 자신을 세우고, 자신으로 하여금 이들을 수습하여 새로운 세계를 개척하는 무리로 세우려는 목적 아래 자기 자신을 보내셨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럴 때에 예수님의 심정은 비장한 심정이 아니 될래야 아니 될 수 없었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는 마구간에서 탄생한 이후 외로운 생활을 하면서 목수인 아버지 요셉을 도왔습니다. 그의 생활은 한정된 환경 가운데의 생활이었지만, 그의 이념은 이스라엘 민족을 넘고 세계를 넘어 온 천주까지 연할 수 있는 것이었고, 또 그렇게 사시는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명령하고 있는 요셉도, 그를 따르고 있던 동생들도 이 한 사실을 모른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예수님은 말할 수 없이 비통한 자리에 처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물정(物情)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섭리에 스며있는 내적 심정을 알고, 현세(現世)에 처하여 있는 땅의 사정을 바라보게 될 때에 그것들이, 즉 심정과 사정과 물정이 하나로 합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움직여 나가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심정은 심정대로, 예수님의 사정은 사정대로, 세상의 물정은 물정대로 갈래갈래 혼돈되어 움직였습니다.
이 한 사실을 바라보는 예수님은 어떠한 각오와 결심을 하였던가? 30년 준비의 노정을 거친 후 실천노정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완성하겠다는 각오와 결심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한 때를 바라보면서 자신의 마음이 슬프면 슬플수록 하늘을 향하여 부르짖었고 땅을 향하여 갈 길이 막막하면 막막할수록 그 사정을 인간을 통하여 풀고자 하셨습니다.
하늘의 심정이 자신과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세상이 자신과 가까워야 하고, 택한 민족과 하늘이 세운 교단이 자신과 가까워야 하는데, 하나님에는 가까움에 반하여 민족은 오히려 멀어짐을 느끼며 살아야 했던 예수님의 생애야말로 여러분이 상상할 수 없는 심각한 생애가 아닐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예수님은 하늘의 심각한 사정을 알지 못하는 이 백성들을 대하여 원망하고 갈 것이 아니라, 이들의 생활을 뚫고 가야하고, 이들의 마음 문을 열어 놓고 가야하고, 나중에는 이들의 심정을 품고 넘어가야 할 행로(行路)가 남아 있는 것을 생각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바로 너희들이 바라는 소망의 구주다’ 라고 주장할 수 없었던 서글픈 사정이 있었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한번 생각해 봐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역경 가운데 서서 새로운 각오를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늘이 4천년 동안 개척자의 사명을 하면서 이루어 놓으신 기반이 무너졌기 때문에, 그 자리에 하늘의 이념을 세울 수 없는 것을 아신 예수님은 다시 이스라엘 민족을 대하여 싸우겠다는 비장한 심정을 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날 우리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환경에 처하여 ‘하나님이여, 힘을 주시옵소서. 하나님이여, 저에게 새로운 방향을 갖추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이여, 저로 하여금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비장한 결심을 갖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라고 하늘 대해 내적으로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또 하늘을 대해 말없이, 심중으로 자문자답하는 생활을 30년이란 긴 세월 동안 거듭했다는 것을 우리들은 다시 생각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 서신 예수님은 무형으로 계시는 하나님을 대신해서 개척자의 사명을 하는 데 있어서 어떠한 사명감을 가지게 되었던가? 하늘을 위하여서는 막혀진 하늘의 문을 열어 천국을 건설해야 할 개척의 사명을 느꼈고, 또 땅을 위하여서는 엉클어져 있고 막혀 있는 만민의 마음세계, 하늘과 막혀 있는 마음의 세계를 개척하여야 할 사명을 느끼셨던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인류가 살고 있는 이 죄악 된 세상을 다시 한번 개척해야 할 사명이 있다는 것을 예수님은 느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4천년 동안 수고하여 오신 복귀섭리역사를 중단시킬 수 없고,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을 배반하더라도 자신은 변치 않고 그 하나의 목적을 성취해 놓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각오로 걸어가셨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하늘이 움직이신 그 내적인 인연, 그 천적인 인연을 생각하게 될 때, 이처럼 비장한 각오를 그 일신에 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당시의 환경권에서 이러한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개척자가 되느냐 못 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그러한 개척자가 될 때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 민족을 대신하고 선민을 대신하고 역사를 대신하여 나타날 수 있었고, 그의 각오를 하나님이 믿을 수 있었고, 하나님이 자랑하실 수 있는 하나의 모습으로서 나타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이러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어떻게 하였던가? 준비 기간을 거치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마음에 인류의 마음을 접붙이고자 하셨고, 하늘과 땅이 동하고 하늘과 사람이 동할 수 있는, 즉 일체적인 이념을 성취하고자 하셨습니다. 자기의 일신을 걸고 하늘과 땅이 하나되고, 인간과 땅이 하나되고, 땅과 하늘이 하나되고, 하늘과 사람이 하나될 수 있는 그러한 입장을 성취하는 개척자로 나서려고 했던 예수의 각오는 말할 수 없이 비장한 것이었음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늘이 택한 이스라엘을 위해 자신을 세우셨고, 또한 땅 위에 있는 온갖 피조만물을 위해 자신을 세우셨으니, 땅이 자신을 배반해도 민족이 남아 있으니 자신을 버릴 수 없었고, 민족이 배반해도 하늘이 남아 있으니 자신을 버릴 수 없었던 예수였습니다.
그러하여 그는 내적 심정으로부터 비장한 각오와 결심을 갖고 나타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탄으로부터 세계를 되찾고야 말겠다는 비분(悲憤)의 심정과 원수에 대한 적개심이 심중으로부터 폭발되면 폭발될수록 그는 무한히 서러웠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충일된 준비 기간에 있어서 예수는 몇백 번, 몇천 번, 몇만 번을 마음속으로 맹세했을 것입니다. 이 이념을 향하여 나가는 노정에 있어서 4천년 동안 하늘을 대신하여 나오던 이스라엘 선민의 역사를 회고해 볼 때, 이스라엘 민족은 하늘의 편이 되어 주지 못했습니다. 이것을 알게 될 때, 예수님께서는 이 길을 향하여 나아가는 데는 어려운 핍박이 있을 것을 예상하시고 새로운 각오를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도 이 처참한 환경 가운데 살고 있는 인간을 찾으시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찾기 위하여 허덕이고 있는 하늘과 인간이 서로 통하지 못하는 것을 해결해 주어야 할 책임을 느낀 예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이스라엘 민족이 하늘이 세워주는 방향으로 가지 못하는 것을 바라보게 될 때 무한히 슬픈 심정을 느꼈습니다. 또한 이 지상세계를 바라보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당신이 찾아오실 수 있는 발판이 되지 못하고 선의 터전이 되지 못한 이 땅, 사탄이 주관하며 유린하고 있는 이 땅을 바라보시면서 4천년 동안 수고하셨다는 것을 생각하면 생각 할수록 말할 수 없이 슬픔 심정에 사무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슬픔에 잠기는 그 시간마다 ‘나는 하늘을 위하여, 인류를 위하여, 이 땅을 위하여 하늘 편에서 싸우겠다.’는 각오와 어떠한 핍박이나 어려움이 닥친다 할지라도 이것을 이겨 내고야 말겠다는 결심이 그에게서 용솟음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30년 준비 기간에 다짐한 것은 앞날의 실천노정에서 일대 싸움을 전개하리라는 각오였습니다. 불신의 입장에 있는 이스라엘 민족 앞에 배척의 제물이 되어 사라지는 한이 있더라도 지금 나는 이러이러한 길을 가야겠고, 이러이러한 방편을 찾아 세우겠다고 각오했습니다.
믿으면 이렇게 할 것이고 안 믿으면 이렇게 한다는 방안을 누구도 생각지 못하는 가운데 생각하였고, 누가 염려하지 못하는 가운데 하늘을 대하여 기도하였던 예수였음을 알아야겠습니다. 또한 30년 동안 목수 요셉의 가정에서 자라면서 형제들이 기뻐하더라도 기쁨의 얼굴을 할 수 없었고, 친척과 교회 등 모든 모임이 즐거워한다고 해도 즐거움을 표시할 수 없었던 예수였음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것은 왜 그러냐 하면, 하늘이 바라는 방향과 인간의 생각하는 방향이 너무나 차이가 났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바라보게 될 때에, 그 차이가 크면 클수록 예수는 더 굳은 결심을 하셨고, 그 차이가 크면 클수록 그 간격은 장차 자신이 메워야 할 일임을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하고 싶은 말이 많아도 입을 다물고 있어야 했던 예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지역 지역을 돌아다니며 전도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여도 가정에 도움이 되어 주지 않을 수 없었던 예수의 30년 준비 기간의 슬픔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가 30년 준비 기간에 개척자로서 가진 바의 결심은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죽음의 고개가 있어도 나는 간다. 핍박의 길이 있어도 나는 간다, 망하는 일이 있어도 나는 간다’는 결심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는 이 준비기간에 자신의 생활적인 환경을 청산할 수 있고, 자기를 위한 생애의 이념을 청산할 수 있고, 민족적인 모든 인연을 청산할 수 있고, 구약과 법도를 중시하는 유대교단의 형식까지도 모두 청산할 수 있다는 평생의 각오를 했다는 것입니다.
하늘나라를, 온 세계 인류의 마음을 개척해야 할 예수는, 자나 깨나 그 생활에 있어서 그의 심정은 하나님의 이념의 경지에 하루에도 몇 번씩 왕래하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그러한 예수였음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30년 준비 기간 동안의 내적 서러움을 이 땅 위의 만민들은 몰라주었지만, 오직 하나님만은 예수의 편이 되어 주셨습니다. 예수가 대패를 들고 나무를 미는 자리에서도, 까뀌를 들고 나무토막을 깎는 자리에서도, 톱을 들고 나무를 자르는 자리에서도, 밥을 먹고 쉬는 자리에 머물지라도 그의 마음은 하나님의 심정과 사정을 체휼하기를 바랐고, 하나님의 소원이던 천국이 건설되기를 소원했고, 어느 일순간이라고 그것을 잊어버린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4천년 역사를 저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이러한 가치는 저버릴 수 없고, 택한 이스라엘은 저버려도 이러한 가치는 저버릴 수 없고, 택한 교단은 저버려도 이것은 저버리지 못하겠고, 부모 친척 어떠한 것도 다 저버릴 수 있지만 이것만은 저버릴 수 없다는 것을 심중에 그리고 뼈와 살에 사무치게 느끼셨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철두철미하게 움직일 수 있는 천정(天情)의 심정을 갖추어 소망의 한 날을 바라보면서 준비해 나오던 예수의 생애야말로 비장한 생활의 연속이었음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한 날을 찾아, 한 때를 찾아 준비하던 예수의 심정과 그의 모습을 여러분이 다시 한번 그려 보라는 것입니다. 그가 입은 것은 초라하고 그의 모양은 서글퍼 보이더라도, 그의 시선만은 땅의 어떠한 정복자나 어떠한 개척자에게도 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하늘의 심정과 통하는 그의 시선이었고 우주를 뚫고도 남음이 있는 기막힌 시선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생각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러한 심정과 시선을 가지고 바라보는 그는 시련받는 불쌍한 사람의 모습이 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었고, 서글픔을 지닌 모습이 아니 될래야 아니 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회고해 볼 때에, 예수님은 역사노정을 통하여 수고해 내려오시는 하나님을 붙드는 심정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불신의 이스라엘 민족이 될까봐 염려하는 마음이 커졌고, 불신의 사도들이 될까봐, 또 불신의 제자들이 될까봐 무한히 염려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는 이러한 마음을 품고 묵묵히 30년 준비 기간을 지냈습니다.
예수가 하늘 편에 서서 타오르는 심정의 열도가 아무리 강해지더라도 그것은 자기 일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늘의 소망에 불타올라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이 아무리 심각하더라도 그것은 자기 일신의 욕망을 위한 것이 아니었음을 우리는 알아야겠습니다.
그가 바라보는 시선은 다만 이스라엘 민족을 위하고자 함이요, 그의 심정도 이스라엘 민족을 위하고자 함이요, 전세계를 위하고자 함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무한히 슬픈 눈물을 흘렸던 것입니다. 그러한 준비 기간에 예수는 십자가의 고개를 한 번만 각오한 것이 아닙니다. 어느 누가 죽는다는 소문이 있으면, 그가 회생시켜야 할 사람이 바로 자기라는 것을 느끼기를 몇백 번이었습니다. 어느 누가 억울하게 핍박을 받고, 억울하고 몰리고, 불쌍한 처지에서 억울함을 당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 할 진대, 그 사정을 자기의 사정으로 바꾸어 생각했습니다. 당시에 벌어지는 사회의 처참한 현상을 자기 일신의 실천 노정 위에 벌어지는 실증적인 제물과 같이 생각하면서 바라보았던 예수의 심정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2천년 전에 오셨던 예수, 30년 준비 기간을 서글프게 사셨던 예수, 그 예수 앞에는 심정에 어리어 그를 알고, 그에게 경배드리며 그를 모실 수 있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보기에 추한 불구자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슬픈 사실입니다. 그러한 사람이 있었던들 오늘날 후대의 우리 인간들은 면목이라도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해 보게 될 때, 오늘날 우리들은 하늘 앞에 빚진 것이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세례 요한의 30년 준비노정을 바라보면서 무한히도 기대를 가졌던 예수였습니다. 그리하여 공생애의 노정을 출발하는 실천의 한 날을 바라고 있던 예수님은 드디어 준비 기간을 거쳐 실천 과정으로 나서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민족이 환영할 줄 알고, 혹은 세례 요한이 환영할 줄 알고 찾아가 보았으나 민족도 세례 요한도 냉대하고 반대했습니다. 유대교단도 반대했습니다. 준비 기간에 있어 비장한 각오를 하고 나온 예수가 실천의 일보를 나서는 데 있어서 이스라엘 민족을 터로 하여 세계를 대하여 싸워야 할 것이 본분인데 오히려 그들이 자신을 반대하고 나서니, 오히려 이스라엘 민족을 대하여 싸우지 않으면 안 될 처참한 실천 노정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4천년 동안 수고하여 메시아 맞을 준비를 했던 이스라엘 민족은 제2차로 밑바닥부터 다시 개척의 사명을 하게 된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4천년 동안 섭리하여 쌓아 왔던 전체 발판이 무너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아담 해와가 타락한 직후에 섭리하시던 그 역사노정의 절대성을 가지고 다시 되풀이하여 전체 백성 앞에 나타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예수의 슬픔을 우리가 생각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택한 백성이라고 찾아갔던 걸음이었는데 오히려 그들로부터 쫓김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예수가 간 곳이 어디인고? 하늘이 4천년 동안 수고하여 세웠던 이스라엘 민족이 하늘을 배반하고 오히려 사탄의 입장에 서니, 이것을 바라보는 예수의 서글펐던 심정을 누가 알 것인가! 그래서 예수는 광야에 나가 40일 금식을 하게 됩니다.
오늘날 여러분들이 믿고 있는 예수가 이렇게 불쌍한 분이었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미처 몰랐을 것입니다. 하늘의 독생자요, 하늘의 황태자인 예수가 인간세상을 찾아와 인간들로부터 배척을 받고, 광야에 나가 먹을 것도 먹지 못하고, 하나님이 원수인 사탄 앞에 시험을 받는 분통한 이 사실을 그 시대 인간들은 몰랐습니다. 그러니 이러한 예수의 분한 노정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분함을 어떻다고 말로 표현할 수 있었겠습니까!
분함으로 말미암아 가슴에 아픔을 느끼고 있는 예수는 자기 일신의 서글픔을 보고 하늘이 염려할 것을 아셨습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슬픈 심정도 표시하지 않으시고 하늘 대하여 지극한 효심을 가지셨던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을 우리들이 회상해 볼 때, 예수는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하늘을 배반하던 그런 경지를 떠나 자기를 위하여 염려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느꼈습니다. 그리하여 자기 자신의 슬픔을 놓고 응당히 기도해야 할 입장인데도 이것을 피하고 분한 마음을 억제하면서 하늘을 위로하려 했기 때문에, 타락의 슬픔을 돌이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소망의 길을 열어 놓을 수 있었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는 30년 준비 기간에 있어서 이것을 실천의 노정으로 찾아 세우겠다고 각오하였습니다. 자기의 나선 발걸음이 민족을 원수 삼아야 할 것을 아셨습니다.
이러한 것을 생각해 볼 때, 우리의 선조들의 잘못으로 인하여 슬픔의 역사를 빚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늘은 변화산상의 제자들이 예수님과 같은 심정으로 민족적인 서러움을 염려하면서 예수님을 위로해 드리고, 예수님 대신 기도하기를 바랐습니다. 바로 이러한 제단을 쌓아야 할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딴 생각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통해 죽음의 한 날을 예고받는 입장에서 새로운 각오를 했고 그날을 맞기 위해 준비하는 생활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작전법은 어떠한 것이냐? 한 사람을 찾으려면 그 한사람의 가치만큼 맞고서야 찾아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늘의 섭리입니다. 하나의 가정을 찾으려면 그 가정만한 것을 하늘이 대신 맞고서야 그 가정을 빼앗아 옵니다. 따라서 민족을 다시 찾아 세우려면 하나님께서 그 정도 만큼의 타격을 받고서야 찾아 세운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실천 노정에 있어서 이것이 하늘의 작전법인 것을 아셨습니다.
하나님을 대신하여야 할 예수였던 연고로 민족을 찾기 위해서는 개인의 제물이 되고, 가정의 제물이 되고, 교단의 제물이 되고, 민족의 제물이 되어 얻어맞는 희생의 개척노정을 걸어오셨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이념의 실천 방법을 갖고 나타나신 예수는 준비한 유대교단으로부터 자기의 동지를 구하려고 했으나 한 사람도 환영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오늘날 한국 실정을 놓고 보더라도 어부라 하면 사람 취급 받지 못하고 빈천하기가 짝이 없다는 것을 우리가 알거니와,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 그때 당시에 무지몽매한 어부들을 찾아가신 예수가 어떠한 입장이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성경에서 보는 것과 같이 베드로와 같은 사람들이 예수를 보고, 예수의 말씀을 듣고 대번에 감동되어 따라 나왔다고 봅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성경에는 그 배후의 생활적인 내용이 나타나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같은 사람들은 예수를 믿을만한 소문을 들었다는 것을 알아야 돼요.
민족 앞에 저버림을 당한 예수는 노동자 모양으로 나타나 가지고, 어부의 친구 모양으로, 그들과 사정을 같이하는 친구가 되었고, 심정을 같이하는 친구가 되었고, 소원을 같이하는 친구가 되시어서 그들의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죽기를 각오하고 이루어 주겠다는 마음으로 싸우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심적인 내용과 심적인 이념을 갖고 증거하고 싸우셨던 연고로 베드로와 같은 어부들이 따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식한 제자들을 택해 놓으시고 3년 동안 무엇을 하셨는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세우시기 위하여 4천년 동안 수고하며 봉사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세워 놓으시고 봉사의 생활을 하셨습니다.
12제자를 택해 놓으신 예수님은 그들에 대한 소망이 크셨습니다. 유대 교단을 움직이고, 제사장들과 모든 서기관들을 주관하기 위하여 하늘이 보내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이념은 컸고, 그가 가진 욕망도 컸고, 그의 심적 기준도 높았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실체 이념을 갖고 하나의 개척자의 입장으로 나타났던 예수님을 몰라보았던 당시의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타락 직후의 아담 해와보다 더 불쌍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무리를 보시고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던가? 하늘이 4천년 동안 선민을 세우기 위하여 봉사의 노정을 거쳤고, 사탄 대해 희생과 제물의 노정을 거쳐 나오신 그 역사적인 전통을 예수님은 3년의 공생애노정으로 거치셨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먹고 싶은 것이 있어도, 먹을 것이 생겼다 할지라도 그것을 잊어버리고 제자들을 찾으셨으며, 입을 의복이 있으면 자기가 헐벗은 것은 생각지 않고 제자들에게 주셨던 것입니다. 편안한 자리가 있으면 제자들을 그 자리에 두시고 자기는 천한 자리에 계셨습니다. 하늘과 결합된 이러한 마음과 이러한 이념을 갖고 생활했던 예수님의 3년 공생애노정이 필연적으로 승리적인 성과를 거두어야 할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러한 성과를 얻지 못했던 그 사정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의 심정을 알지 못하는 제자들은 예수를 이용하여 높은 자리에 오르려는 놀음을 하였습니다. 그것을 아시는 예수는 땅을 치며 울어도 그 마음을 풀 길 없고, 하늘 대하여 통곡하여도 이를 풀 길이 없는 서글픈 심정을 갖고 사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니 갈래야 아니 갈 수 없는 사명의 노정이 남아 있는 연고로 그 마음을 억제하고 제자들을 대하여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 23:12)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의 심중에 사무친, 자신의 뼈 살에 사무친 결심의 일단을 재차 증거하셨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때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은 그것은 예수의 말이지 자기들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여러분! 요한의 모친이 자기의 두 아들을 끝날 영광의 자리에 세워 달라고 할 때에, 답답하고 참담하였던 예수의 그 심정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는 불쌍한 분입니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그렇게 가르쳐 주고, 그렇게 훈계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뜻을 알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따르는 무리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제자들은 자기들이 기쁘다 하는 행동은 나타냈지만, 예수님이 자신들에게 실천으로 보여 주고 가르쳐 주고 훈계해 준 것을 본받아 자기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 앞에 본이 되고, 예수님을 높여 주고 예수님을 섬기는 이런 제물적인 입장에는 서지 못하였습니다. 도리어 제자들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 나오기가 어렵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 제자들에게 자신들을 넘어 교단이 부르짖고 있는 것을 성사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을 알았고, 교단에게는 교단을 넘어 민족이 부르짖는 것을 성사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을 알았고, 민족에게는 민족을 넘어 세계가 부르짖고 있는 것을, 세계 인류에게는 세계를 넘어 하늘이 부르짖고 있는 것을 성사해야 할 책임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심정을 어느 누구 한 사람 아는 사람이 없었다는 거예요. 그러한 사정에 처해 있는 예수님, 자기만을 대하여 달라는 몇몇 제자들을 바라보시는 이러한 예수님에게 슬픔이 있다면 그 이상의 슬픔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는 천신만고의 지성을 다하여 성도들이 배고플 때에는 떡을 만들어 먹이셨고, 그들이 때를 위하여 울 때 그들을 위로하셨고, 낙망하게 될 때에 팔복(八福)의 말씀을 통해 하늘의 축복을 소개하였습니다. 이처럼 그들을 거느리고 다니면서 낙심할까봐, 혹은 떨어질까봐 염려하셨던 예수님의 심적인 애달픈 사정을 표현한 것이 바로 복음서의 말씀인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나아가 한 가지 사정을 걸어놓고 말하면 말할수록 그 말씀을 듣고서 가까워져야 할 제자들인데도 불구하고, 더 먼 자리로 나가는 것을 바라보시는 예수의 심정을 오늘날 여러분들이 느끼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하다못해 머리에 수건을 동여매고 대야를 들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면서 내 도리는 ‘섬기는 것’이라고 주장하시던 예수님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야만 하늘과 인연을 맺을 수 있다는 것을 아신 예수님이셨기에 아니 갈래야 아니 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슬픔을 느끼면서도 제자들을 바라보시던 예수님이었음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복귀의 노정을 걸어가신 예수님께서 이적 기사를 행하신 것은 기뻐서 행하신 것이 아닙니다. 기쁘고 편안하여서 이적 기사를 행하신 줄 안다면 큰 오해입니다. 여기에는, 이 땅에는 몸둘 곳이 없고, 이 우주 안에는 의지할 곳이 없으니 하늘을 대하여 호소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사정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비장한 경지에 계셨던 예수의 간곡한 모습을 여러분은 바라보아야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동정을 안 해줄 수 없는 서글픈 사정에 처하여 손을 들어, ‘아버지시여!’ 하고 부르게 될 때에 여기에서 이적이 벌어진 것입니다. 지극히 슬픈, 뼈 살이 녹아지는 슬픈 장면에서 외치는 그 한 사정을 통하여 나타났던 것이 이적 기사였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 이적 기사를 예수가 태만해서, 혹은 좋아서 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벳세다 들에서 5천여 무리가 예수여, 당신은 우리의 구세주요, 택한 이스라엘의 지도자이십니다 라고 손에 손을 흔들면서 부르짖었습니다. 이처럼 이익이 될 수 있는 입장일 때는 찾아왔으나, 시일이 지나 예수가 자기들과 심적 기준이 달라지고, 사정이 달라지고, 표준이 다른 경지에로 한 발짝 더 나아가니 그들은 예수를 배반하고 돌아섰습니다. 이것이 예수가 걸어온 실천 노정에 있었던 현상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외적인 여건이 달라진다 해도 예수의 마음은 변할 수 없고 그의 가는 길도 변할 수 없었습니다. 이 길은 타락한 우리 인류가 필히 가야 할 운명의 길임에도 불구하고 따라가야 할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를 배반했고, 따르던 무리가 배반했고, 응당히 예수를 믿고 섬겨야 할 제자들마저도 그와 심정과 사정과 소망을 달리했습니다. 이것을 바라보는 예수의 시선에는 서글픔을 느끼게 하는 장면이 많이 보였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개인적으로 핍박을 받아야 할 자신임을 아시고, 가정적으로 핍박을 받아야 할 것을 아시고, 교단적으로, 민족과 국가적으로, 당시의 세계를 대신하여 로마 제국 앞에 핍박을 받아야 할 것을 아시고, 묵묵히 갈 뿐이었습니다. 변화산상을 넘어 갈보리산을 찾아가는 그는 ‘어떠한 핍박이나 고난이라도 오겠으면 오고 말겠으면 말아라. 나는 내 때를 향하여 넘어야 할 것은 넘어야겠다’는 각오를 가진 모습이었습니다. 만일 그것을 넘지 못하면 준비 노정이 슬픔의 일면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각오하던 이 고개, 죽음의 고개를 향하여 나아갔습니다. 이 뜻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죽음의 제물로서 이 인류에게 나의 피와 살을 나누어 주고 가겠다는 각오가 천심을 대신하였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인류를 대신하여 천심(天心)에 북받쳐 각오하고 걷는 예수의 걸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준비 기간에 각오했던 바 그 결심을 실천하기 위하여 걷는 그인 줄을 그 누구도 몰랐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자신을 배척하는 수많은 무리들을 원망할 줄 모르는 예수요, 누구보다도 예민하고, 누구보다 더한 분함을 갖고 있는 예수였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민족을 중심한 뜻길을 다시 개척해야 할 사명이 자신에게 있다는 책임감을 느끼셨던 예수였습니다. 4천년의 인연을 통한 하나님의 심정이 가해진 것을 아시는 예수는 버릴 수 없는 민족이었기에 저들이 배척할지라도 ‘나를 통하여 살려 주시옵소서’, ‘저들이 핍박할지라도 나를 통하여 이 민족을 구하여 주시옵소서’, 나중에는 제자들이 배반하는 자리에 처하여서도 나를 통하여 구원의 뜻을 이루시옵소서 라고 하늘 대해 간구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러한 노정을 걸어가셨습니다.
12제자들이 예수님과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겠다는 각오로 ‘주여! 어디에 가시든지 함께 가겠나이다’라고 하였던 이 말은 예수께서 복음을 들고 나타나게 될 때에 한 말입니다. 따르는 제자들이 ‘선생님이 어디에 가시든지 나는 따르겠나이다’라고 각오하던 것은, 예수님이 처음 출발하던 심정과 겟세마네를 향하던 때의 심정과 방불한 것이었음을 여러분이 알아야겠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 곳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구나.’ 하시며 ‘내 몸과 머리와 심정을 아버지 품에 맡기옵니다’라고 하신 기도는, 얽혀진 인류의 탄식과 역경을 다 밟고 올라가 수고하신 하나님을 붙들고 안타깝고 서러운 자신의 심정을 맡기는 것이요, 이것이 바로 겟세마네 동산의 단판기도였습니다. 이러한 약속을 세워 놓고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나서는 걸음이 십자가를 등에 지고 골고다의 길을 걷는 예수의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는 하나님께서 4천년 동안 수고하신 그 노정을 대신하여 하나의 제물로써 바치어지겠다는 각오를 하였습니다. 이것이 그 때까지 섭리의 뜻을 대한 하나님의 심정을 알지 못하고 배반해 나온 타락 인간을 대표하여 반대하는 인류 앞에, 자신을 죽음의 제물로 바치겠다는 결심을 갖고 나아가던 예수의 걸음이었음을 우리는 잊어서는 아니 되겠습 니다. 그리하여 예수의 실천의 노정도 슬픔으로 종말을 지었던 것입니다.
즉 그는 실천의 노정에 있어서 어느 한 사람의 동지도 갖지 못하고 종말을 지었습니다. 외적인 심정에서도 그러했고, 실천적인 생활 환경에서도 그러했습니다. 그런 연고로 예수는 역사의 제물로서 홀로 피 살을 뿌리며, 다시 새로운 생명의 노정을 인류 앞에 제시하기 위하여 죽음을 각오하고 간 걸음이 바로 그의 실천 노정이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피를 흘리며 운명하기 전에,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하는 기도 끝에 이제는 “다 이루었다.”(요 19:30)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다 이루었다’는 말씀은 민족을 믿고, 그 민족을 중심삼아 성취하여야 할 이념적인 세계를 다 이루었다는 것이 아니라, 30년의 준비 기간에 있어서 ‘슬픔의 행로가 벌어지는 날에는 이렇게 하겠다’고 결심했던 그 결심을 다 이루었다는 말씀임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 한마디의 말씀이 기쁨의 말씀이 아니요, 예수가 온 인류에게 자신의 슬픈 심정을 토로한 말씀이었습니다. 알지 못하는 인간들에게 그 서글픈 심정을 말씀하신 최후의 유언인 것을 우리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는 예수의 내적 슬픔의 행로를 개척하여 진정으로 다 이루었다 할 수 있는 한 날이 오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재림의 날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 그거 알아야 돼요.
예수가 작정하고 사탄세계와 대결해 나오던 행로가 바로 십자가의 노정이었던 연고로, 오늘날 전세계 기독교인들도 그 길을 본받아 나오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하늘은 맞고 찾아온다고 했습니다. 민족이 배반했고, 12사도까지도 예수를 부인했기 때문에 죽임을 당했던 예수가 부활하여 찾은 존재가 누구였느냐 하면 12제자들이었습니다. 하늘은 이렇게 맞고 찾아 나옵니다. 또 예수를 믿고 있던 스데반은 돌로 쳐죽임을 당합니다. 이처럼 하늘 편의 스데반이 죽임을 당하자 하늘은 대신 사울을 찾았습니다.
예수가 부활하여 자신을 배반했던 제자들을 다시 찾은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의 제자들이라면 다 죽이는 그때에 예수는 부활의 권한을 행사하여 사울을 빼앗는 일, 즉 맞고 찾아오는 일을 하였습니다. 또한 사울은 바울로 개명을 한 뒤에 12제자들 대신 맞았습니다. 이와 같이 쫓김받고 몰리던 바울이 사도 중의 사도가 되어 기독교의 기반을 닦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러면 누가 예수를 쳤느냐? 로마 병정들이 예수를 쳤고 이스라엘 민족 전부가 쳤습니다. 그 중에서도 주도적으로 친 것이 누구냐 하면 로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맞은 것을 더하여 탕감복귀 해야 할 원칙이 남아 있어서 로마에 들어가 대신 맞았습니다. 12사도와 70문도, 또 믿던 수많은 군중이 민족을 대신하여 맞은 것을 다시 탕감복귀 해야 할 원칙이 남아 있는 연고로, 때리고 난 로마는 그대로 넘어가지 못했습니다.
로마 제국시대를 지나고 구교가 성하였던 봉건사회를 지나 가지고 개혁기에 들어가면서 부패한 구교는 루터가 반기를 들었을 때에 이를 때렸습니다. 이처럼 때리면 맞던 신교는 그 후 그 자리를 떠나 천도를 중심삼아 가지고 대서양을 건너 그들이 자랑하고, 그들이 세워 나오던 문화를 일으켜 오늘의 미국을 건설하였습니다. 그것은 세계적인 외적 가나안형을 쫓김받는 기독교 무리를 통하여 세워 나왔다는 것을 나타내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이스라엘이 민주국가를 대표하는 이러한 사회형으로 벌어졌으니, 하늘은 또 한번 맞는 무리를 찾아 헤맬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때는 역사적인 전환기입니다. 역사가 맞는 무리를 찾아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때는 교단 가운데, 민주국가에서 맞고 쫓기는 무리가 나와야 될 것입니다. 쫓기는 무리는 그 주의와 이념이 기존의 것과 다릅니다. 왜? 예수가 갖고 온 이념은 지상이념이 아니라 천국이념이기 때문에 지상에서 통하던 이념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이념에 따라 살려는 백성은 그 이념의 건설자가 예수였기 때문에 천지개벽적인 변혁의 과정을 거쳐서 나타나게 된다는 것을 우리들은 역사를 통해서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찰나에 어떠한 무리가 나타나야 할 것인가? 역사의 종말시대에 예수의 골고다의 길을 따라가며 믿는 신령패들, 즉 하늘의 축복받은 무리가 나와야 되겠습니다. 골고다의 산정을 향하여 몰림받고 쫓기면서라도 아니 갈래야 아니 갈 수 없는 이런 길을 되걷고 있는 무리가 나와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개인적이 아니라 기독교적인 혹은 교단적인 골고다의 짐을 지고 가는 교파가 나와야 할 때가 온다는 것을 우리는 잊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가 차지할 것은 맞고 차지했습니다. 로마에게 맞았으니 로마를 차지하였습니다. 이래 가지고 교단복귀운동과 국가복귀운동과 세계복귀운동을 전개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맞는 골고다의 길을 가신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은 교단적으로 맞는, 즉 골고다의 길을 가는 교단이 나와야 되겠고, 민족적으로도 골고다의 길을 가는 민족이 나와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끝날에는 이것이 하늘 가는 공식적인 길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이 시대에 있어서 하늘을 찾아 준비 기간을 지나고 실천 기간을 지나 천륜의 본성을 찾아 나서야 할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되느냐? 또 어떠한 입장에 서야 되느냐? 예수가 30년을 준비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러한 입장에 서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내적인 천적 심정으로부터 인간의 심정을 대신하여, 혹은 모든 주권을 대신하여 대결하고 나서서 홀로 나가겠다는 각오를 가져야 합니다. 따라서 오늘날 그러한 각오를 갖고 세계적인 골고다를 넘어가는 무리가 반드시 나타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가 돌아가시면서 ‘다 이루었다’고 하셨는데, 그것으로는 섭리 완성의 종결점이 되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서 ‘다 이루었다’고 할 수 있는 노정을 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천군천사와 영인과 피조만상이 머리 숙여 ‘오, 당신의 소원 성취의 날이 오늘이오니 영광 받으시옵소서.’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자리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할 수 있는 날을 준비해야 할 때가 바로 이때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크리스천들은 죽음으로써 ‘다 이루었다’라고 하던 그날을 넘어서 살아서 ‘다 이루었다’라고 할 수 있는 그날을 맞이하기 위하여 믿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제1차적인 완성기에 있어서의 천적인 개척자의 사명을 여러분 자신이 감당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예수는 세계를 위하여 죽은 것 같으나 세계적인 무대에서 핍박받지 못했습니다. 민족과 국가적인 무대에서 핍박받았습니다. 그러나 최후의 승리적인 골고다를 넘어야 할 완성기인 기독교 종말시기인 오늘날에 있어서 여러분은 세계적인 무대를 기반으로 하여 예수의 30여년 생애의 준비 기간에 지녔던 그 마음, 그 결심을 갖고, 또 3년 실천 노정에 지녔던 작전법을 갖고 어떠한 골고다라도 죽음을 각오하고 넘어가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이 일을 이루어야 할 책임을 짊어지고 원수라도 치지 않고 개척자의 사명을 대신 감당하여야 되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늘의 새로운 제2차적인 무대를 만들어야 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원수를 대하여 기도하던 예수의 내적 심정을 붙들고 넘어설 줄 아는, 즉 세계적인 사명을 인계받은 크리스천들이 되어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이 되지 못하면 완성의 한 날, ‘다 이루었다’고 하는 그때, 즉 영광의 한 날을 맞지 못한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까지 기독교인들은 번번이 미완성의 행로를 거듭하면서 이 길을 책임지고 개척자의 사명을 하였으나 이제는 완성의 일로를 개척해야 되겠습니다. 따라서 하늘의 이념을 마음에 품고 준비하여 나오던 그 제1차적인 이념이 제2차적인 이념으로 나타난 것을 오늘날 우리들이 인계받아야 합니다. 그래 가지고 제1차적으로 예수의 심적인 한을 해원하고 그 다음 6천 년의 하나님의 한을 해원해 드려야겠습니다. 그리하여 하늘 앞에 죽지 않고 ‘다 이루었다’고 할 수 있는 그날을 맞이하여야겠습니다.
사탄 대하여 싸우는 비운의 역사노정을 감추어 두고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싸워 나가는 승리의 한 날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또 여러분은 십자가의 길을 가던 예수와 같은 심정을 갖고, 또 그의 실체와 같은 모습을 갖추고 하늘 앞에 나서야 되겠습니다. 그래야만 예수가 이 땅 위에 와서 양면의 개척자의 사명을 다하지 못한 것을 오늘날 여러분들이 대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가 남긴 그 세계적인 골고다의 길을 개척해야 할 자신임을 뼈저리게 느껴야 되겠습니다.
여기에 예수께서 쫓기게 하고 몰리게 하던 그들을 쳐 버리지 못하고 민족을 붙들고 원수를 붙들고 기도하며 넘어가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도 그러한 무리를 붙들고 복 빌어 줄 수 있는 아량을 가져야 되겠고, 죽음을 넘어서서 하늘을 붙들 수 있는 각오가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래야만 영광의 한 날을 맞이하여 하나님의 사랑에 안길 수 있는 세계적인 아들 딸, 세계적인 새로운 동산의 개척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예수가 세우고 가신 천국이 내 마음에, 예수가 찾고자 하던 사랑의 마음이 내 마음에, 예수가 찾고자 하던 세계가 내 한 몸에서 전부 완결지어져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사탄이 아무런 미련도 가질 수 없는 승리자의 모습으로, 새로운 우주적인 개척자로서 하늘의 영광의 깃발을 갖고 나서야만이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고, 여러분의 복귀의 사명이 종결되고, 예수의 한을 풀어 드리는 일이 완결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버님! 황공하옵게도 저희에게 사명을 맡기시고 부르짖는 애달픈 그 음성에 저희의 뼛골이 움직이는 은사를 받은 것에 대해 감사하옵니다.
이제 저희의 믿음이 저희들의 마음이 아니라 눈물 없이는 대할 수 없는 아버님의 마음인 것을 알았사옵고, 불쌍한 것들을 붙안고 몸부림치시는 하늘의 심정을 알게 되옵니다. 목을 놓아 울어도 끝이 없을 황송한 그 은사 앞에 몸을 굽히고 머리를 숙여 죄인 된 종족, 죄인된 자체임을 폭로하지 않을 수 없음을 깨닫게 되옵니다.
사랑의 아버님! 찾아주셨사오니 감사하옵나이다. 오늘의 찾으신 걸음은 기쁨으로 찾아오셨사오나, 내일의 떠나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환희의 송영(頌詠)의 날을 약속하고 떠날 수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되지 못할까봐 두렵사옵니다. 만나기는 기쁨으로 만났사오나 헤어지는 날은 슬픔으로 헤어지는 것이 인간을 대해 나오신 아버지의 곡절의 노정이었음을 알았사옵니다. 오늘보다도 내일이 아버지 앞에 그리워지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청춘기보다도 노년기에 들수록 더 아버지를 그리워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마음의 깊고 높은 그 세계로 한걸음 한걸음 나아갈 줄 아는 아들딸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나아가 아버지의 원한의 심정을 위로하고 예수의 원한을 해원하고 역사상의 선조들의 원한을 해원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오늘날 종말적인 사명, 천적인 해원성사를 저희들로 말미암아 이루어 받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오늘 저희들은 개척자의 심정으로 오셨던 것을 알았사옵니다. 영광이 변하여 개척자가 왠말입니까? 세례 요한이 배반한 연고였사옵고, 교단이 배반한 연고였사옵고, 민족이 배반한 연고였사옵고, 세계 모든 사람들이 배반한 연고였사옵니다. 이것이 오늘날 기독교사에 남아진 사실(史實)인 것을 아는 한, 예수가 준비 기간으로부터 실천 기간을 통하여 완성 기준을 향하여 넘어가던 그 내적 결의의 심정이 종말기에 남아진 저희들의 마음 터 위에 용솟음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는 민족적인 원수, 국가적인 원수를 대했사오나, 오늘날 저희들에게는 민족을 넘어 세계적인 원수, 우주적인 원수를 대해야 할 책임, 즉 마지막 개척자의 사명을 감당하지 않으면 안 될 책임이 있사오니, 아버지, 저희에게 능력을 주시옵소서. 이 책임을 홀로 지고 세계적인 골고다의 길을 끝까지 늠름히 걸어 나아가, 승리하는 영광의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곡히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아버님, 아버님께서 본연의 동산을 잃어버리고 슬퍼했던 그 심정을 이 시간 저희들이 깨닫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담 해와의 슬픔이 저희들의 슬픔이 된 것을 지금까지 저희들이 몰랐사옵고, 또한 저희들의 슬픔보다 아버지의 슬픔이 더 컸다는 것도 저희들의 몸으로 마음으로 체휼하지 못하였사옵니다. 아버님께서 저희들이 알지 못하는 가운데 눈물을 흘리며 무한한 슬픔과 무한한 고통 속에 계셨다는 것을 이 시간 몸 마음에 느끼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담 해와의 타락으로 인한 아버지의 슬픔도 크거니와 복귀섭리의 뜻을 책임지고 땅 위에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모든 사명을 완수하지 못하고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도 아버님의 이루 말할 수 없이 큰 슬픔이었고, 외로움이었고, 고통이었음을 이 시간 저희들이 깨달아 그 모든 서글픈 심정을 몸 마음으로 체휼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선조들이 아버님을 배반한 연고로 통분할 수밖에 없는 슬픈 역사노정을 거쳐온 것을 생각하면서, 오늘의 내 일신이 아버지 앞에 슬픔을 더욱 가하는 불쌍한 자리에 서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담 해와의 슬픔을 대할 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슬픔을 대할 수 있는 모습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저희들의 몸과 마음이 단순한 저희들의 몸과 마음에만 멎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저희의 마음이 아버지의 마음을 대신하고 저희의 몸이 아버지의 형상을 대신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저희가 슬픈 심정을 갖고 계신 아버지를 증거할 수 있고 아버지를 부를 수 있는 이 한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위신을 세울 수 없는 저희들이오나 세워 주시고 찾아 주신 아버지의 내적 심정을 알 수 있는 무리들이 되게 하시옵소서. 불초한 모습들이오나 몸 마음을 합하여 아버님께 기원하고 있사오니, 이 시간 긍휼의 손길을 펴시옵고 사랑의 빛을 내려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승리의 정병으로 세우시옵고, 사탄과 싸워 나갈 수 있는 당신의 아들딸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사랑 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예수가 왔다 간 이후 2천년 역사노정에서 우리의 선조들이 천륜의 도리를 다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많은 선지자들이 피를 흘렸다는 사실을 저희들이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한 사실에 대해 분한 마음을 품고, 그들의 실수와 범죄했던 모든 내용들을 책임지고 회개할 수 있는 자녀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모든 것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선조들이 저지른 역사적인 죄상을 저희들이 알았사오니, 이제 저희들을 세우시어 아버지께서 찾고자 하시는 하나의 생명 기준을 찾아 세울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본연의 아담 해와를 대신한 실체로서 나설 수 있는 당신의 아들딸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날 저희들의 주위에는 억만 사탄들이 배회하며 노리고 있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저희들의 갈 길을 인도하여 주시옵고, 억만 사탄들을 물리칠 수 있는 내적 준비와 외적 준비를 갖추는 이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 이 시간을 통하여 승리의 기준을 세우시옵고, 아버지의 영광을 나타내시옵소서. 잠들어 있는 아들딸이 있사올진대 그들을 깨워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 그들을 친히 맡아주실 것을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오며, 억만 사탄이 틈타는 이 시간이 되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시간 저희들, 아버지의 심정을 닮을 수 있게 인도하여 주시옵고, 아버지의 분한 마음을 체휼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간곡한 심정에 저희들이 화하여 오직 아버지의 충고와 권고를 바랄 수 있는 이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시간 민족을 대신하여 모이는 수많은 제단 위에 축복을 내려 주시옵고, 지방에 널리어 간곡한 심정으로 아버지 앞에 호소하고 있는 외로운 자녀들이 있는 줄 알고 있사오니, 아버지, 그들을 축복하여 주시옵고 일률적인 은사로써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내적인 사명을 다할 수 있게끔 부활의 역사를 그들에게 더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한 시간 아버지 앞에 모든 것을 맡겼사오니 처음부터 끝까지 주관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올 때에,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써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본문의 말씀은 우리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 첫째 날로부터 여섯째 날까지 지으신 만물을 대하여 하나님은 좋다, 즉 선하다고 하셨습니다. 이 선하다는 말씀 가운데는 무한히 자랑하고 싶은 하나님의 내적 심정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다시 한번 회상하지 않으면 안 되리라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엿새 동안 지은 만물을 바라보시고 자랑하고 싶으셨습니다. 모든 피조물을 바라보게 될 때에 무한히 기쁘셨던 것입니다. 그 기쁜 마음을 가지고 ‘선한지라,’ ‘선한지라.’ 하고 거듭거듭 하신 이 말씀은 누구에게 하신 말씀이었느냐? 이 말씀은 천사장에게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만물에게 하신 말씀이었다는 것입니다. 만물을 대해 그렇듯 간절한 마음을 품고 말씀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지음 받은 모든 피조물이 에덴동산에서 ‘선한지라’ 하고 찬양을 받았던 그 피조물들이 선의 가치를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자랑하시려던 그 뜻이 만물 가운데 실체적으로 나타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서러운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 ‘선한지라.’ 하셨던 그 말씀이 슬픔의 말씀이 되었다는 것을 우리들은 다시 한번 기억하여야 될 것입니다. 선한지라 하신 그 말씀이 슬픔의 말씀이 된 것입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의 심정과 사정을 알아주는 참다운 본연의 사람이 있었다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지극한 수고의 손길을 거쳐서 지어진 만물을 바라보며, 더욱더 큰 기쁨을 느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선한지라 하신 그 말씀의 가치 기준을 알고 그 말씀을 대해준 재물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회상하게 될 때에 피조만물을 사랑하셨던 아버지의 심정에는 서글픔이 잠재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은 선하게 지어진 그 피조 만물보다도 그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 자신을 더 자랑하고 싶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여러분 앞에 말씀드리고자 하는 제목은 ‘자랑하고 싶었던 하나님을 알자’ 입니다. ‘자랑하고 싶었던 하나님을 알자’ 라는 제목으로 잠깐 동안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 해와를 지어 놓고, 그들이 자라는 만물을 주관하고 선의 이념권 내에서 말씀의 가치를 실현하기를 바라셨습니다. 또 아담 해와로 말미암아 온 피조만물 앞에 자랑할 수 있는 한 날이 도래하기를 고대하면서 아담 해와를 바라보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다시 한번 회상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아담 해와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은 그들이 완성단계에 올라서서 만물을 주관하고 하나님 대신 존재로 나타나는 그 한 날을 심중으로 그리워하셨고 고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담 해와를 세워 놓고 오랜 기간을 거치며 만물을 지었던 사실을 자랑할 수 있는 역사적인 한 순간을 갖고 싶었을 것입니다. 또 아담 해와를 세워 놓고 네 자신은 나의 내적 성상과 외적 형상을 닮은 실체로서 네 마음이 곧 내 마음이요, 네가 기쁘면 나도 기쁘고 네가 응하면 나도 응하는, 둘이 아닌 하나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 그 한 날을 소망하며 고대하셨습니다. 이러한 하늘의 심정을 오늘날 우리들은 더듬어 헤아릴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심정을 우리 인간 조상이 알지 못했기 때문에 타락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창세 이후 하나님은 인간 조상을 통하여 자랑할 수 있는 사람, 자랑할 수 있는 가정이 나타나는 한 날을 심중으로 고대했었는데,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이러한 자랑의 조건들이 전부 사라져 버렸습니다. 자랑의 조건이 슬픔의 조건으로 변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타락한 인간들에게는 자신의 모든 정력을 다 기울여 본연의 아버지의 내적 성상에 사무쳐 있는 자랑의 심정을 파고 들어가, 이것을 들추어내어 하나님 앞에 자랑할 수 있는 그 한 날을 찾아 헤매지 않으면 안 될 역사적인 책임이 남아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피조만물을 지어 놓고 한 날 한 시간도 자랑하지 못한 그 하나님, 자랑이 변하여 슬픔으로 나타났고 자랑이 변하여 눈물로 나타난 천적인 그 사정을 우리들은 몰랐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때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자랑하시고자 하시는 본성을 찾아야 할 때요, 본연의 생명을 찾아야 할 때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이제 하나님을 대할 수 있는 본성의 사랑의 심정을 마음속에 지닌 존재로서 하나님께서 자랑하시려던 본연의 모습을 갖춰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사탄을 부끄럽게 할 수 있는 하나의 실체의 모습, 자랑할 수 있는 하나의 모습을 6천년 동안 고대하며 찾아 나왔지만 그런 사람을 찾지 못한 채, 이 시간까지 나오고 있는 이 슬픈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인간은 자랑하기를 좋아합니다. 자신을 내세워 자랑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또 나를 중심삼은 부모와 형제와 자녀, 즉 한 가정의 전부를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나아가 종족을 내세워 자랑하고 싶고, 국가를 내세워 자랑하고 싶고, 더 나아가 세계와 온 하늘땅을 내세워 자랑하고 싶은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이지만 자랑하고 싶은 본심이 여러분의 생활을 지배하고 있고, 지금까지의 역사를 지배하여 나오고 있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자랑하고 싶은 이 마음을 옳지 못한 것으로 인정하는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일상생활 속에서 자기 자체를 자랑하고 싶어합니다. 이웃 사람들에게만 자랑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전세계의 사람들에게까지 자랑하고 싶어합니다. 자기 자체를 자랑하고 싶은 마음은 나쁜 마음이 아니라 본성의 마음입니다. 이것은 하늘나라에 갈 수 있는 창조 본연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한 자체를 자랑하여 가정을 지나고 사회를 지나고 국가를 지나 세계에까지 자기 자신의 이름을 날리고 싶은 것이 땅 위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심정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자랑하고픈 심정이 우리의 심정을 움직이고 마음을 격동시키는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본성적으로 자랑하고 싶었던 마음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마음이 있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이 일체적인 이상을 이루었더라면 우리의 자랑이자 하나님의 자랑이요, 하나님의 자랑이자 우리의 자랑이 될 수 있는 본연의 관계가 있었던 연고입니다.
그래서 비록 우리 인간이 타락했을망정 이런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으며, 오늘날 우리들은 그러한 만우주의 중심가치를 찾기 위하여 허덕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타락한 인간인 연고로 우리의 마음에 움직이는 모든 자랑의 법칙이라는 것은 순리적인 법칙으로 되어 있지 않고, 반대로 역리적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본연의 심정을 따라 순리의 법도를 찾아 나가는 인간이 되어야 할 것이었는데,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그것을 잃어버리고 역로(逆路)를 거쳐 나가야 되는 연고로, 본연의 심정이 지향하는 그 방향과 현실 환경과는 대립해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아 나가는 우리, 도의 길을 찾아 나가는 우리가 이제 누구를 내세워 자랑해야 할 것인가? 자기를 내세워서 자랑하기 전에 하나의 중심을 내세워 먼저 그를 자랑하여야 될 것입니다. 나라를 자랑하고 싶다 할진대, 자기를 중심삼고 자랑하는 것보다 어떤 충신을 세워 그 나라를 자랑해야 되고, 어떤 종족을 자랑할 때에도 하나의 중심을 세워서 그 종족을 자랑해야 됩니다. 가정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타락한 인간들은 자신을 버리고 자신을 넘어, 단체에서는 단체의 중심, 도에서는 도의 중심, 국가에서는 국가의 중심, 세계에서는 세계의 중심, 더 나아가 하늘땅에 있어서는 하늘땅의 중심인 하나님을 걸어놓고 자랑하는 그러한 노정을 거쳐 나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지 못하면 하나님 앞에 자랑의 존재로 설 수 없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자기를 중심삼고 자기가 기쁘기 위해 자랑하는 사람은 천리원칙에 어긋나는 조건을 세우는 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자신의 자랑의 조건을 넘어 상대적인 존재를 자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상대방의 선함을 자랑할 줄 알고 그의 특성을 자랑할 줄 아는 자가 되면 될수록 그 정도만큼 하늘 앞에 가까이 나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들은 자기를 넘어 가정을 자랑하고 싶고, 교회라든가 국가, 세계를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우러나고 있지만, 지금까지의 역사노정에서 혹은 오늘날 이 땅 위에서, 진정으로 머리 숙여 자랑하고 싶은 세계나 국가, 교회, 가정을 찾아보지 못했습니다. 영원히 자랑할 수 있는 세계와 국가, 교회, 가정을 아직까지 찾지 못한 인간들입니다.
우리 인간이 비록 불신의 입장에 서 있지만, 어차피 하나님 앞에 자랑의 인연을 맺어야 합니다. 자신을 넘어 가정을 자랑해야 하고, 사회와 국가와 세계를 자랑해야 할 입장에 놓여 있는 우리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의 마음은 항시 그 방향으로 이끌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들은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 사무쳤던 하늘의 심정을 회상해야 되겠습니다. 나를 찾기 위한 하늘의 6천년 동안의 수고의 역사, 혈투전을 벌여온 비참한 역사의 노정을 거쳐 오늘날 나를 찾아오신 하나님을 생각하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는 역사노정 중 어느 한 때도 인간을 세워서 자랑할 수 있는 조건을 갖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천적인 사정이 있는 것을 알게 될 때에, 오늘날 우리 자신은 감히 하나님 앞에 자기를 세워 자랑할 수 없고 어떤 조건을 갖고 나타날 수 없는 것입니다.
본래 선의 동산에서는 우리 개체를 하나님이 자랑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개체를 세우시어 만물 앞에 자랑할 수 있었고, 만물을 세우시어서 천사 세계 앞에 자랑할 수 있었습니다. 자랑하고 싶은 본연의 마음이 나에게서 출발하여 가정, 사회, 국가, 세계를 통하여 내 자신의 자랑이 하늘의 자랑과 인연맺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 못한 입장에 있는 타락한 후손들은 반대로 그 자랑의 조건을 세우기 위해 자신을 치는 걸음을 걷지 않으면 안 될 슬픈 입장에 처해 있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랑의 조건인 아담 해와, 사탄까지도 ‘당신이 자랑할 수 있는 참다운 아들딸입니다. 과연 당신의 사랑을 받기에 합당합니다.’라고 하면서 숭배해야 할 본연의 아담 해와가 되지 못하고, 6천년이란 기나긴 세월 동안 사탄의 제물이 되었었습니다. 이런 인간들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슬픔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제 우리들은 이러한 슬픔에 처해 있는 하나님께 자랑할 수 있는 조건을 세워야 되겠습니다.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열이 되고, 열이 천 만을 이루어 민족 혹은 국가, 세계를 이루어 하나님께서 지향하시는 자랑의 방향을 찾아 나서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 방향을 찾아 나서지 않으면 안 될 타락한 후손이요, 오늘날 땅 위에 살고 있는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제 하나님이 자랑할 수 있는 본연의 세계를 향하여, 하나님이 자랑할 수 있는 주권을 향하여, 하나님이 자랑할 수 있는 본연의 사람을 향하여, 하나님이 자랑할 수 있는 본연의 생명과 본연의 성품과 본연의 사랑을 향하여 찾아 나서지 않으면 안 될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바울은 갖춘 바의 지위와 학식을 갖고도 자신을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종족을 세워 자랑할 수 있는 배경을 갖고 있고, 자기 교파를 세워 자랑할 수 있고, 자기 국가를 택한 이스라엘이라 자랑할 수 있었는데도, 오직 그 마음에 자랑하고 싶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내세우신 자랑의 조건이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자랑하고 싶은 그 자랑의 조건을 붙들고 싸워 나간 바울의 생애를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옛날 노아시대부터 지금까지 하나님 앞에 세움 받은 수많은 선조들은 무한한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조건 하에서 우리를 대하시는가? 사탄세계에서 제일 싫어하는 조건을 세워 우리를 대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믿지 않고 타락했으니 믿지 못할 환경에서 믿으라고 강조했고, 따먹으면 죽을 수 있는 위험한 입장에서 따먹지 않기를 강조하던 분이었습니다.
그런고로 우리의 선조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실행하기 어려운 환경에서도 말씀대로 실행해 나왔습니다. 노아는 역경 가운데서도 120년 동안을 하루같이 믿었습니다. 몰려드는 모든 핍박과 비소를 단연히 추방해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통하고자 하는 마음이 간곡했습니다. 자신이 자랑하고 싶어하는 어떠한 조건보다도, 사회의 어떠한 자랑의 조건보다도 하나님이 자랑하고 싶어하시는 그 조건이 크고 귀하다는 것을 알고 따라 나왔습니다.
그러한 길을 따라 나온 노아였기 때문에 만민을 물심판 하더라도, 하늘을 배반하고 불신하는 그 무리들이 항거할 수 있는 어떠한 조건도 성립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한 노아는 하늘이 자랑할 수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천적인 자랑의 가치와 실체적인 가치를 세워 놓은 것이 노아의 심판입니다. 노아의 아들딸들은 노아가 중심으로 사모하던, 즉 하나님이 세우고자 하는 자랑의 심정을 통해야 할 것이었는데, 그 중심을 떠나 자기를 중심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거기서부터 천륜은 뒤집혀져 나갔던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사탄세계에서 누구보다 행복스럽고 재미있게 살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처는 지극히 아름다웠고, 그의 생활은 풍부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사탄세계에서 누구보다도 풍요한 생활의 조건을 갖추고 누구보다도 재미있게 살고 있던 아브라함을 불러, 그 반대의 처지인 역경 속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자기 족속들이 걷지 못하고 가족이나 민족 어느 누구도 걷지 못했던 역경의 자리로 내모는, 즉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는 명령을 하셨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을 넘어 종족과 후손을 이상적인 이념의 세계로 이끌어가는 하늘이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깊이 느끼고 있었던 사람임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살고 있는 현실의 생활이 민족이 살 수 있는 자랑의 기준이 아닌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런 심정을 가진 그에게 하나님의 명령이 있자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그렇게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재미있게 살던 가정과 모든 재물을 다 버리고 하란 광야로 향하던 아브라함의 사정은 비참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비록 불쌍한 방랑객의 모습일지라도, 오늘은 비록 자랑할 수 없는 처지와 환경에 처해 있다 할지라도 언젠가는 자랑의 한 날이 있을 것을 믿고 가는 아브라함의 발걸음은 늠름하였다는 거예요.
어떠한 역경과 어려움이 부딪쳐 올지라도 그것을 백번 천번 넘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하늘이 지향하는 자랑의 동산을 찾아가려는 마음은 그 시대의 어느 누구보다도 컸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심정과 자랑할 수 있는 하나의 상대적인 존재를 찾아 헤매던 하나님의 심정이 보이지 않는 이념권 내에서 어떤 합일점이 맺어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 자신이 이상하는 절대적인 이념의 동산을 내세우시고 자랑의 축복을 해 주셨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리하여 아브라함은 하늘 앞에 믿음의 조상으로 축복받은 자리에 서게 되었는데, 그 후손들은 그때 자신들이 머무는 곳이 자랑할 수 있는 자리인 줄 알았습니다. 민족을 넘어 세계를 향하여 나가야 하는데 그들은 그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저 한 곳에 머물러 자기들의 자랑거리를 붙들고 있다가 하나님이 자랑할 수 있는 이념의 때와는 점점 더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럼으로써 인간들은 슬픈 역사노정을 거치게 되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모세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호화찬란한 바로 궁중에서 40년 동안 어느 누구 못지않게 잘 살았습니다. 그러나 남부럽지 않은 생활적인 환경에서 살았으되 그는 하늘이 민족을 세워 자랑할 수 있는 날을 누구보다도 고대했습니다. 애급에서 4백년 동안 도탄 가운데서 신음하고 있는 불쌍한 민족이었지만,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기필코 이들을 축복하시고 허락한 땅 가나안 복지로 이끌어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새로운 소망의 동산을 건설하여, 어느 민족 어느 국가 못지않은 나라, 하나님께서 제일 자랑하는 지상천국을 건설하여 주실 것을 모세는 바랐습니다.
그는 자유로운 환경에서 불편한 것이 없었는데, 그것을 전부 거부하고 자랑의 조건으로 삼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는 신음하고 고통 당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하늘 앞에 자랑하고 싶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아브라함에게 축복하였던 가나안 땅, 가나안 칠족에게 빼앗긴 그 땅을 사모하며 자랑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이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에 이스라엘 선민을 세워 자랑하고 싶은 그 마음과 통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민족 앞에 모세를 세워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어 내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정이 있었음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모세가 60만 대중 앞에 나타났을 때, 이스라엘 민족은 모세가 그러한 내적 심정을 갖고 나타난 것을 아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대다수가 모세를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수많은 이적과 기사로써 모세가 하나님 대신 이스라엘 민족이 살 수 있는 자랑의 동산으로 인도할 책임자라는 것을 인식시키고, 그 모세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게 하시어서 이스라엘 민족을 끌어냈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민족은 누구보다도 모세를 하늘이 세운 자로 알고 모세를 끝까지 자랑할 줄 알아야 했습니다. 그러한 민족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천적인 권한을 갖고 바로 궁중에 나타나 궁중을 치게 될 때는 하나님이 세운 자요 우리의 지도자라고 좋아하더니, 광야에 나와 보잘것없는 환경에 처하게 되자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할 수 있는 존재가 못된다고 불신하였습니다.
하늘이 자랑의 인물로 내세운 모세에 대해서, 이스라엘 민족은 자랑의 지도자, 자랑의 대표자로 알고 그의 슬픔은 민족의 슬픔이요, 그가 가는 길은 민족의 운명을 해결하기 위하여 가는 길이요, 민족을 지도하는 것도 민족을 살려 주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일구월심 모세를 중심삼고 생활하였던 사람이 있었다면, 60만 대중은 광야노정에서 전부 쓰러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랑하여야 할 모세를 원망한 그날부터, 따라야 할 모세를 배반한 그날부터, 모셔야 할 모세를 모시지 못한 그날부터 하늘의 자랑과 모세의 자랑과 민족의 자랑은 사라졌습니다. 모세로 말미암아 이러한 뜻을 이뤄야할 것이었는데 이루지 못했습니다. 민족을 대신하여 세운 모세를 민족이 배반했습니다. 여기에서 모세는 바로 궁중에서 가나안 땅을 그리워하며 살았던 때 이상의 슬픔을 느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모세는 소망의 동산인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민족을 광야로 이끌고 나왔습니다. 광야에서 민족이 배척하고 불신하는 환경에서도 민족을 이끌어야 했던 모세의 비통한 심정은 이루 다 형언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민족 전체가 자랑하여야 할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모르고 무시하는 민족은 당장 망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만일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의 심정을 알았더라면 불평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굶주리고 있는 민족을 바라볼 때, 모세는 굶주리고 있는 어떠한 이스라엘 민족보다도 비장하고 심각한 입장에서 하늘을 향하여 그들에게 축복이 있기를 호소하였습니다. 그러한 마음이 하늘을 움직였던 것입니다. 모세가 자신의 처지를 잊고 자기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음을 이스라엘 민족은 꿈에도 생각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60만 대중이 망하지 않으려면 모세가 자신들보다 더 굶주렸고 자신들보다 더 처참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했습니다. 또 민족을 살리려는 모세였다는 사실도 알아야 했습니다. 따라서 모세를 천추만대 후손 앞에 하늘의 자랑의 조건으로 내세워야 할 민족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도리어 뒷걸음질쳐 반대의 입장에 서게 될 때, 모세의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서러웠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생명을 바쳐 하늘을 위하는 모세의 뜻에 순응해 나아가야 할 것을 민족이 알지 못하게 될 때에, 그로 인해 모세가 슬퍼했을 뿐만 아니라 하늘은 모세보다 더 슬퍼했다는 것입니다. 모세의 슬픔보다 하늘의 슬픔이 더 컸다는 것, 이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민족을 대표한 지도자, 누구보다 하나님이 자랑할 수 있는 모세였지만, 민족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처참한 말로를 가게 되었던 서글픈 사정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늘은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를 따라 주기를 바랐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세우고자 하는 만큼 따라주기를 바라셨지만, 그 소망은 사라져 버리고 이스라엘 민족은 원치 않는 사탄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바로 궁중에서 40년,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광야노정에서 40년 동안 한결같이 바라던 소망은 간 데가 없어졌습니다. 그리하여 자랑할 수 있는 민족과 땅은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래도 모세는 지지리 못난 이스라엘 민족을 이방나라 앞에 자랑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하나님이 세운 훌륭한 모세를 이스라엘 민족은 자랑할 줄 몰랐다는 거예요.
그러면 앞으로 끝날에 세계를 움직일 수 있는 천적인 권한을 소유할 수 있은 국가는 어떠한 국가이며, 그 백성은 어떠한 백성일 것인가? 하늘이 내세운 사람을 하늘 이상 자랑할 줄 아는 백성과 국가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럴 게 아니겠어요?
예수를 우리들이 한번 생각해 봅시다. 예수는 하나님이 4천년 동안 수고하신 결정체요, 사랑과 심정의 화신체였습니다. 또 그의 말씀과 사정과 소망과 심정은 하나님의 전체 속성을 대신했습니다. 하나님의 소망을 대신하고 자랑할 수 있는 한 존재로 세웠던 분이 예수였음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4천년이라는 긴긴 세월을 참아 나오신 끝에 예수를 자신의 대신자로, 자랑할 수 있는 중심존재로 보내셨는데, 그러한 예수도 이 땅 위에 와서 자기를 자랑한 일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는 자리에서 예수는 한 번도 자랑해 보지 못했고,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을 만큼 어느 누구도 예수를 들어 자랑해 준 사람이 없었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오셨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자랑하고, 가정과 교단과 민족과 세계 앞에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는 것입니다. 그럴 게 아니겠어요? 그는 4천년 동안 고대하던 자랑의 결실체로 오셨던 연고로 자신을 가정과 사회와 국가와 세계 앞에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예수가 수만 군중 앞에 자기를 세워 자랑할 발판이 없었습니다. 하나님도 예수를 세우실 때에는 하늘땅의 모든 피조만물 앞에 자랑하고 사탄 앞에까지 자랑하기 위하여 세우셨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어느 한사람도 그를 자랑하지 않았고, 하나의 가정도, 하나의 교단도, 하나의 민족도 세계도 그를 자랑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늘을 배반한 종족의 후손인 우리는 하늘 앞에 위신과 체면을 세울 수 없는 무리입니다. 역사적 죄과를 저지른 우리 인간은 자기를 내세워 자랑할 수 있는 위치에 서지 못하고 있고, 그런 환경을 갖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자랑할 수 있는 하나의 사람과, 자랑할 수 있는 하나의 교단과, 자랑할 수 있는 하나의 민족을 만나지 못한 것이 하늘의 무한한 슬픔인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는 하늘이 그를 4천년 역사를 대신하여 세웠을 때 ‘황공하옵니다’ 하고 눈물 흘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마음에 사무친 것은 그 세우신 뜻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자신을 변명하기보다 ‘나를 세워 수고하신 아버지의 소원이 이렇게 될 줄이야!’라고 탄식하며 하늘 앞에 머리를 숙였던 예수였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제 이러한 심정을 가졌던 예수를 자랑하여야 할 때가 왔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크리스천들은 예수가 개인과 가정과 민족과 세계 앞에 세우고 싶었던 자랑의 한 날을 이루어 그를 모셔 드려야 할 것이 자신들의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하늘이 지금까지 바라시는 소원입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을 창조하시고 인류를 세워 자랑하고 싶었던 그 본연의 심정을 여러분이 깨달아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자랑하여야 할 예수님, 영광의 모습으로 자랑하여야 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셔야 했던 처참한 모습이 되었던 억울한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십자가 형틀을 지고 골고다를 향하여 걸어가던 예수의 마음, 민족을 대하여, 하늘땅을 대하여, 사탄을 대하여 품으신 그 원한의 심정을 해원하고 싶은 마음이 여러분의 가슴에 가득차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마음이 있어야 되겠습니다. 하늘의 뜻에 대한 간곡한 심정이 사무쳐야 되겠습니다.
심정의 결실체로 오셨고, 인류의 소망의 결실체로 오셨고, 인간으로 하여금 하늘과 끊을 수 없는 부자의 인연을 맺어 주기 위해 오셨던 참아버지를 원한의 자리에 몰아넣은 것이 우리의 선조들이었고, 사탄이 저지른 행사였으니, 오늘날 우리들은 그 선조들의 죄를 청산 짓고, 사탄을 심판하고 싶은 불타오르는 마음이 있어야겠습니다. 지금도 우리의 혈육에는 악성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하늘이여! 힘을 주시옵소서. 하늘이여, 나를 용납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고함을 칠 수 있는 마음이라도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자랑의 동산이 슬픔의 골고다로 변하다니 이게 웬 말입니까? 오늘날 믿는 사람들은 십자가를 자랑할 줄만 알았지 하늘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지 않고 있습니다. 예수를 따르면서도 예수를 자랑하지 못하고, 하늘을 대해 간곡한 심정을 가지고 산 제단을 찾기 위하여 허덕였던 예수의 심정에 대해서는 자랑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늘땅에서 찾고자 했던 하나의 사람과 하나의 가정과 하나의 민족을 붙들어서 하늘의 뜻을 이루려 했던 심정은 몰랐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다 버리더라도 우리가 최후에 해야 할 것은, 역사적으로 저지른 모든 죄를 청산하고 하늘의 심정을 체휼하여 하늘이 그렇게 찾고 있던 하나의 사람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러한 가정과 종족이 나타나고, 그 다음에는 그러한 선민이 나타나야 하고, 그러한 천민(天民)이 나타나야 합니다. 인간의 사정이 아무리 억울하고 어떠한 곡절이 맺혀 있더라도 그것이 문제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러한 뜻을 이루기 위한 마음이 여러분에게서 솟구쳐 올라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런 심정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위하여 오셨던 예수는 불쌍한 분이었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상봉한 바울은 그날부터 예수 앞에 고개를 들 수 없는, 즉 면목이 없는 자신인 것을 깨닫고 예수를 위해 살려고 했습니다. 그가 예수를 위하여 일생을 바치겠다는 심정에 사로잡혀 ‘죽으나 사나 당신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게 인도해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하면서 예수를 대해 변할래야 변할 수 없는 심정을 가지고 있었기에 기독교의 새로운 터전이 여기서부터 닦아지게 되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를 자랑해야 되겠습니다. 그의 심정을 자랑해야 되겠습니다. 예수의 사정과 소원을 자랑하고, 더 나아가서 예수가 찾고 있던 신부를 자랑해야 되겠습니다. 예수가 찾고 있던 신부를 자랑하는 동시에 예수가 찾고 있던 가정, 민족, 국가, 세계를 자랑하고 난 후에야 비로소 하나님이 우리를 드러내어 자랑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우리를 자랑하고자 하는 우리들 앞에 가로 놓여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나를 가로막고, 나를 찢고, 나를 핍박하는 십자가가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오히려 그것을 자랑하며 가는 것이 기독교 신자들이 가는 걸음입니다. 이것은 무한히 슬픈 일입니다.
실체 예수를 자랑해야 되는데 골고다의 십자가를 진 예수를 자랑하지 않으면 안 될 조건이 인간 앞에 남아진 연고로, 그 십자가를 자랑하지 않으면 여러분 자신들은 자랑의 조건을 세울 수 없습니다. 하늘을 위하여 무한히 고통 당했다는 이 하나의 자랑의 조건을 세우지 않고는, 하나님의 심정이나 예수의 심정을 지닌, 온 만상에 대하여 자랑의 조건을 갖춘 하늘의 아들딸들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마음으로는 그런 세계를 알고 감정의 느낌으로는 그러한 사실을 안다 할지라도, 실제로 여러분이 활동하는 생활권 내에서 자랑의 조건을 갖추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요 19:13)고 한 것과 같은 그러한 기준을 갖고 나서야만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믿으실 수 있고 예수가 우리를 믿을 수 있는 동시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워 자랑하실 수 있고 예수가 우리를 세워 자랑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가 왔다 간 이후 2천년 역사가 경과했지만 지금까지 예수를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 불타는 사람을 만나 본 적이 있습니까? 그러한 교단과 지도자가 되지 못하였다면 이는 저끄러진 삯꾼 목자입니다. 자기의 몸이 찢기고 옆구리에 창이 들어오고 이마에 가시 면류관이 씌워지고 손발에 못이 박혀 죽더라도, 하늘 앞에 자랑의 조건을 세우기 위하여 십자가의 고개를 달게 넘어가시던 예수의 모습을 여러분은 자랑하여야 되겠습니다.
예수는 영광스러운 모습을 자랑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으나 그것을 표시하지 않았습니다. 그 반대로 불쌍한 하나의 죄인의 모습으로 사셨습니다. 그리하여 죽음의 길에서도 하나님 앞에 자랑해야 되겠다는 심정을 갖고 가신 예수의 생애를 바라보며, 오늘날 우리들도 그런 마음을 가지고 그 고개를 넘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붙들려 하였을 때 거절당했습니다. 부활하신 모습은 환영할 수 없는 것입니다. 부활하기 이전, 산 예수님의 슬픔을 위로해 드리어 하늘땅 앞에, 사탄 앞에 ‘다 이루었다’는 자랑의 기준을 세웠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비운의 골고다가 남아 있는 연고로 지금까지 기독교인들은 그 고개를 올라가다 내려오고 올라가다 내려오는 놀음을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올라가다 내려오고 또 올라가다 내려오는 이 놀음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직까지 골고다를 넘어 주님은 영원히 나의 신랑이라고 하늘땅을 향해 외친 사람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오! 주여 나를 아버지의 품으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라고 하는 신앙자는 많았습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을 자랑하여야 할 그 내적 사정을 모르고 예수가 오라 하시니 그저 따라갈 뿐입니다. 예수의 심정세계, 그 내적 사정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랑하고자 하는 것이 예수에게서 열매 맺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열매를 맺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는 신부를 세워 그 열매를 맺고자 2천년 동안 기다려 왔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여러분 자신들은 예수의 신부 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어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자랑하고 싶은 존재, 예수가 자랑하고 싶은 존재, 나아가 여러분이 자신을 자랑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어린양 잔치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부모는 당연히 자식을 자랑하려고 하고, 자기를 중심삼고 있는 전후 좌우 상하의 모든 것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도 자신의 주위에 속한 모든 것을 자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만, 전체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예수 앞에 자랑의 조건으로 세워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끝날에 처한 우리들은 자신을 냉정히 비판해야 되겠습니다. 나는 누구를 통하여 자랑하고 있습니까? 하늘은 누구를 통하여 자랑하고자 하시며, 예수는 누구를 통하여 자랑하고자 하시며, 나는 누구를 통하여 자랑하고자 합니까? 하늘을 내세워 나를 자랑하고 싶어하고, 예수를 내세워 나를 자랑하고 싶어하고, 온 만물을 내세워 나를 자랑하고 싶어하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버지께서 자랑하고 싶었던 본연의 모습, 아버지의 심정을 대신한 자랑스런 모습이 여기 있사오니 이 몸을 내세워 사탄 앞에 자랑하여 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자랑의 마음과 생명의 권한과 본연의 성품을 갖추어 하나님이 믿을 수 있는 내가 되면 하나님과 나 사이의 모든 것을 온 피조 만상 앞에 자랑할 수 있으며, 만인간 앞에 자랑할 수 있으며, 삼위신 앞에도 자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더 나아나가서 사탄까지도 ‘옳소이다. 당신이 세우신 하늘의 아들딸이오, 그들은 하늘이 자랑할 만하고, 땅이 자랑할 만하고, 인류가 자랑할 만하고, 우리들도 자랑할 만하오니 그들을 내세워 영원히 당신의 영광을 누리시옵소서’라고 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존재가 나타나기를 열망하시며 6천년이란 기나긴 세월 동안 그 소원의 한 날, 자랑의 한 날을 찾아 죽음의 고개도, 슬픔의 고개도, 억울함의 고개도, 피의 고개도 넘으시며 찾아 나왔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하나님이 자랑하고 싶었던 본연의 심정을 통하여야 되겠고, 하나님이 여러분을 대해 ‘내가 이 세계를 다 잃더라도 너 하나를 찾으면 만족하도다’ 라고 할 수 있는 그러한 자리에 나가야 되겠습니다.
그 사무쳤던 원한을 해원하는 동시에 소원과 이상을 성취해야 참다운 사랑의 중심과 하나될 수 있고, 영원히 뗄래야 뗄 수 없는 부자의 인연을 맺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늘이 우리를 영원히 자랑할 수 있고, 우리들 또한 하나님을 영원히 자랑할 수 있으며, 하늘땅 위에 있는 모든 존재가 우리를 자랑의 조건으로 세울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입장에 서야 되겠습니다.
아버님! 오늘날까지 당신을 찾아가는 걸음은 역경의 걸음걸이 였사옵고, 모순된 역사노정을 거쳐 나온 걸음이었사옵니다.
옛날의 선지선열들도 그 당시의 인간들이 볼 때에는 정상적인 행동을 한 사람들이 아니었사옵니다. 그들은 당시대의 관점에서 볼 때 시대적인 낙오자요, 조롱을 받는 자요, 비정상적인 존재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사옵니다. 노아도 그러하였고 아브라함도 그러하였습니다.
독자를 제물로 드리라는 하늘의 명령에 칼을 들어 치려 한 아브라함을 보고 칭찬할 사람이 누구겠사옵니까? 그는 미친 자 중의 미친 자요, 이상한 자 중의 이상한 자요, 돈 자 중의 돈 자로 보였으나, 당신은 그런 자와 인연 맺어 나오셨사옵니다. 또한 그들은 불쌍한 자리에 있는 인간을 아버지 앞에 바로 세우기 위하여 억울한 자리에서 무지한 인간들의 조롱과 반대를 받았사옵니다. 오늘 이 시간까지 당신의 심정과 끊을 수 없는 관계를 맺게 해 주시기 위하여 저희들을 불러 주신 아버지, 그 은사 앞에 저희들은 황공함을 금할 바 없사옵니다.
이제 저희가 몸과 마음을 다 드려 아버지의 그 은사 앞에 보답할 수 있는 역사적인 생축의 제물이 되겠다고 할진대, 자기의 처지와 위신을 잊어버리고 감사의 눈물을 흘릴 수 있고, 그 마음은 하늘을 향하여 무한히 솟구쳐 오를 수 있으며, 그 몸이 찢기는 것도 잊어버릴 수 있는 아버지의 뜻에 미친 자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당신의 뜻에 돈 자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런 자들이 나타나기를 바라고, 이런 행렬이 이 땅 위에 나타나기를 바라고, 이런 민족이 이 땅 위에 나타나기를 바라고 계시는 아버지의 간곡한 소원과 심정과 사정을 이제 저희들이 알았사옵니다.
저희를 세워 자랑하고자 하신 것은 땅 위의 인간들 앞에 자랑하기 위한 것이 아님을 알았사옵니다. 저 나라에 가서 자랑하시기 위하여 오늘 이런 자리로 몰아내신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찢기고 밟히고 난 후에도 죽지 않은 저희를 자랑하기 위한 것이 당신의 뜻이었고, 복귀의 한 때를 바라보면서 섭리해 나오시는 아버지이심을 저희들 잘 알았사옵니다.
오늘 섭리의 종단을 바라보고 있는 저희들, 생사를 걸고 넘어가야 할 저희들은 아버지의 간곡한 심정과 예수님의 간절한 심정을 느껴야 되겠사옵니다. 그리하여 골고다를 밟고 넘어가 사탄 앞에 자랑의 조건으로서, 산 제물로서 나설 수 있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그러한 모습이 되어야만 아버지께서 자랑하실 수 있으며 예수가 자랑할 수 있는 아들딸인 것을 알았사오나, 오늘의 저희들은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사옵니다. 혹 저희가 자랑하려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다 뽑아 버려야 되겠사옵니다. 저희들이 쌓은 바의 인격, 가진 바의 지식, 이것들은 모두 아버지로부터 먼 거리에 있음을 알았사옵고, 나아가 이 땅 위의 어떠한 것도 저희들에게는 필요치 않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우리의 아버지시요, 우리의 주인이시요, 우리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오늘도 자랑하고 싶은 심정을 갖고 땅 위의 인간을 대하시거늘, 저희들이 어찌 당신을 뒤에 두고 자신을 내세워 자랑할 수 있사옵니까? 천륜을 배반하는 그러한 자리에 서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원리와 질서를 파괴하는 자들이 되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자랑의 조건이 있다 할진대 그것을 모두 아버지의 것으로 돌려 드리고, 슬픈 조건이 있다면 그것을 우리들의 것으로 인계받아 그 슬픈 일에 있어서 사탄이 따라오지 못하게 하시고 사탄 앞에 당신의 아들딸임을 자랑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런 기준을 세워 가지고 아버지 앞에 머리 숙여 나설 수 있는 아들딸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께서는 이 민족을 자랑하고 싶으신 심정이오나 이 민족이 자랑의 민족이 되지 못하고, 예수의 자랑스런 신부들이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을 알았사오니, 이제 맺혀진 모든 원한의 조건을 넘어서 그의 신부가 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심정을 통하여 온 피조만물 앞에, 더 나아가 사탄 앞에까지도 자랑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아들딸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부탁하옵니다.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써 아뢰었사옵니다. 아멘.
아버님, 흑암 권세와 어두움과 깊은 잠에서 깨어나야 할 인류인데, 깨어날 줄 모르고 있사옵니다. 어떤 장벽이 저희의 앞길을 가로 막는다 할지라도 새로운 광명의 깃발을 향하여 달음질칠 수 있도록 아버님의 긍휼의 손길을 저희에게 나타내 주시옵소서.
아버님, 어린 저희들을 위하여 수고하신 아버님의 역사적인 노고를 저희는 알고 있사옵고, 어둠의 근성이 잠재해 있는 자신들을 세워 놓고 슬퍼하지 않으면 안 될 저희들이라는 것도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지께서 땅을 바라보시고 슬퍼하셨던 것처럼 오늘 저희들도 자신을 바라보고 슬퍼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옵니다.
나아가 저희 자신을 넘어 슬퍼하고 있는 만물에 대한 빚을 청산하고, 슬퍼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위로해 드려야 할 책임이 저희에게 남아져 있다는 것을 마음으로는 알고 있사오나, 이 책임을 감당하지 못한 채 오늘 이 자리까지 나온 것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슬픔의 역사를 슬픔으로 계승하여 슬픔의 실체를 빚어 놓고 말았사옵니다. 아버지께서는 기쁨의 역사와 기쁨의 실체를 세우려 하셨는데, 원망과 탄식의 결실체가 되었으니, 이 어찌 아버님의 슬픔이 아니 되겠으며, 이 어찌 아버지의 심정의 곡절이 아니 되겠사옵니까?
오늘 이러한 처참한 모습들, 재분석되고 재창조의 역사로써 다시 빚어지기를 바라지 않으면 안 될 불쌍한 처지에 있는 저희들을, 아버님, 더욱 불쌍히 보시사 아버지 것으로 취하여 주시옵고, 아버지의 이념으로 다시 빚어질 수 있는 실체로 취하여 주시옵소서. 원하시는 뜻대로 저희가 하늘의 본성의 미를 갖출 수 있게끔, 이 시간 본연의 창조의 법도에 의하여 저희의 마음과 몸을 다시 빚어 주시옵소서. 나의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슬픔의 장벽을 헤치고 나와 새 아침의 광명을 바라보고, 할렐루야 개가를 부르고, 만우주의 주인을 찾은 기쁨을 노래할 수 있으며, 만우주를 창조하신 아버님을 모신 것을 기뻐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지으신 만상을 대하여 본연의 그리움을 느낄 수 있고, 본연의 자랑을 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사람이 타락한 이후로 만물까지 슬퍼하고 탄식해 왔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고, 참아들딸의 손길에 의해 본연의 피조물의 입장에 다시 설 수 있기를 소원하고 있다는 것을 저희가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님을 위로해 드리고, 만물을 다시 본연의 입장으로 복귀시켜 주어야 할 사명이 저희에게 있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오늘 저희의 부족한 것을 아버지 앞에 아뢰옵고, 또다시 아버지의 수고를 고대하지 않으면 안 될 사정에 처해 있는 것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이렇게 해서라도 아버지의 소원과 지으신 만물의 소원을 성취하여, 저끄러진 6천년의 탄식을 종결하고, 원한을 해원하지 않으면 안 될 책임이 저희 각자에게 있다는 것을 아오니, 긍휼의 아버님, 사랑의 아버님, 저희의 마음이 아버님과 먼 거리에서 움직이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의 성상 형상과 먼 자리에서 움직이는 저희들이 되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께서 지으신 고로 아버님과 마음도 통하고 몸도 통할 수 있는 창조의 인연이 있는 것을 아오니, 티끌만도 못하고 미물만도 못한 저희들을, 아버지, 본연의 능력의 권한권 내(權限圈內)로 인도하여 주시옵고, 본성의 자체들로 다시 세워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그리하여 아버지 앞에 자랑할 수 있고 천적인 위신을 세울 수 있는 하나의 아들로서 하나의 딸로서, 어두운 세상에 광명한 빛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어두운 이 땅 위에 새 하늘의 기쁨을 전할 수 있는, 동방의 빛을 대신하여 나타날 수 있는 어린양떼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께서는 말씀하신 바대로 작은 자를 일으켜 큰 자를 부끄럽게 하실 것을 알고 있사옵고, 적은 무리를 일으켜 큰 나라를 건설하실 것을 알고 있사오며, 불쌍한 자를 세우시어서 축복받았던 민족 앞에 자랑하실 것을 알고 있사오니, 오늘 지극히 불쌍하고 의지할 곳 없는 저희들을, 아버님, 이날 다시 자랑의 실체들로 세워 주시옵소서.
아버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대로 저희를 세우실 것을 알고 있사오니, 믿는 마음과 순종하는 마음으로 아버지의 명령하심에 응하여 따라갈 줄 아는 어린양떼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그리하여 본연의 동산에 남겨진 슬픔을 제거하고 만민의 심신에 스며있는 죄악의 근성을 샅샅이 헤쳐 내어, 그 뿌리를 뽑아 버림으로써 하늘의 영광의 터전으로 저희들을 세워 주시옵고, 이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역군으로 저희들을 보듬어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부탁드리옵고 원하옵니다.
오늘 여기 모인 자녀들의 마음 몸을, 아버지,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이들의 마음 가운데 머물러 있는 자기의 어떤 주의 주장이 있사옵니까? 자기의 어떤 관념을 중심삼고 움직이려는 마음이 있사옵나이까? 그 모든 것을 제거시키시어서 하늘로 연하는 인식을 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사랑에 화하고 정(情)을 체휼하여 본연의 자체와 화할 수 있으며, 통할 수 있으며, 인연 맺어질 수 있는 이 한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어두운 세력을 움직이고 있는 억만 사탄들은 이 시간도 저희들을 노리면서 넘보고 있을 줄 아오니, 어둠권 내에 사로잡히는 생명이 하나도 없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로지 이 한 시간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이 식구들과 이 민족과 이 인류 앞에 어서 속히 해방의 날이 오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모든 사명과 책임을 저희들이 맡을 수 있게끔 힘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아버님! 이 땅 위에 슬픈 일이 일어날 때마다 하늘도 슬퍼하셨고, 우리의 조상들도 슬퍼하였고, 만물들도 슬퍼하였고, 오늘 저희들도 슬프옵니다. 이 슬픔이 제거되는 해방의 한 날을 바라면서도 갈 길을 알지 못하고, 그 무엇을 찾으면서도 깨닫지 못한 채 방황하고 허덕이면서 6천년이란 기나긴 세월을 지내 왔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 아버님, 이제 아버님께서 나타나신다면 붙들고 목을 놓아 한없이 울고 싶은 심정이옵니다.
이제 이 모든 것을 알고 본연의 부모님을 찾아 나선 저희들, 슬픈 눈물 대신 기쁜 눈물을 흘리고, 저희 자신의 존재 의식을 잊어버리고 땅과 하늘을 대하여 통곡할 수 있는 한 날, 슬픔을 제거하고 기쁨만이 남을 수 있은 한 날이 어서 속히 오기를, 이 시간 마음으로 몸으로 바라고 있사옵니다.
이제 저희들은 갈 곳이 어디라는 것을 알았사옵고, 저희가 어디에 소속되어 있는가도 알았사오며, 본연의 무엇이 어떻다는 것도 알았사옵나이다. 잃어버린 자녀의 가치를 알았사오나, 저끄러짐으로 말미암은 슬픔과 죄악의 소리가 너무나 커서, 오늘날 저희들이 듣고자 하는 아버님의 말씀을 가로막고 있는데, 그 세력을 물리칠 수 없는 무능력한 저희들인 것을 슬퍼하지 않을 수 없사옵나이다.
아버님! 이제 복귀의 능선을 향하여 달리고 있는 저희들, 상한 다리를 이끌고 아담 해와가 소망하였던 그 정상을 향해 나가고 있는 저희들, 이제 최후의 힘을 가하여 이 선을 넘을 수 있게끔 채찍을 들어서 저희들을 몰아쳐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그 선을 넘어갈 수 있도록 아버님의 충격을 저희들의 몸 마음에 나타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합니다.
오늘 이 시간, 아버지,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께서 이 시간 말씀하고 싶은 것이 있다 할진대, 아버님이 기쁘셨다는 것이 아니오라 아버님이 무한히 슬펐다는 사실, 아버님이 무한히 어려웠다는 사실, 아버님이 무한히 고통스러웠다는 사실임을 아옵니다. 이것을 저희들이 마음으로 깨닫고 체휼하여 아버지의 본연의 심정을 대신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인간을 잃어버린 하늘은 어떠하셨을 것인가? 그 심정과 사정을 알고, 또 하늘의 사정을 안 한 분의 심중을 통하여 흘러나오는 말씀에 저희들이 화할 수 있는 이 한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제 전하는 자의 마음이나 받는 자의 마음이 둘이 되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하나로 화하여 아버지의 뜻만이 저희 전체 위에 나타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사탄이 틈타는 시간이 되지 말게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였사옵나이다. 아멘.
이 시간 여러분과 같이 생각하려고 하는 제목은 ‘다시 눈을 떠서 하늘을 바라보자’ 입니다. ‘다시 눈을 떠서 하늘을 바라보자’ 이러한 제목을 가지고 잠깐 동안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은 하나님의 창조의 이념이 이루어진 새로운 아침을 바라보지 못한 채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기나긴 잠 가운데 흘러 내려 왔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온 역사가 그러하였거니와 우리가 지니고 있는 마음 역시 그러하며, 우리가 바라는 심정, 우리가 찾고자 하는 모든 것이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즉 사탄권 내에서 깊은 잠에 빠져 깨어날 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어 놓으시고 손을 들어 축복하실 때의 아담 해와는, 깨어있는 모습이었고 영원한 이념 세계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즐길 수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목적을 위하여 아담 해와를 지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 해와는 자신들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이며, 어떤 이념 밑에서 온 만물을 대해야 하는가를 확실히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이와 같이 완성을 바라보고 나아가는 미완성 단계에서 타락이라는 서글픈 과오를 저질렀습니다. 이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 해와에게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창 2:17)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너희는 만물의 주인공이 되고, 만우주의 주관자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만일 말씀하시던 하나님의 심정과 그 말씀을 듣던 아담 해와의 심정이 완전히 하나되었던들 타락이란 결코 없었을 것입니다.
말씀하시던 하나님과 말씀을 대하던 아담 해와 사이에는 심정적인 거리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담 해와는 성장과정을 거쳐서 말씀의 목적을 성취하여야만 하나님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입장에 있었습니다. 그런 입장에 있었던 아담 해와가 만물과 천사를 볼 때마다, 또 어떤 존재물을 대할 적마다 자신들에게 분부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말씀이고, 하나님의 심정이 어떤 심정인가 하는 것을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생각하며 대할 줄 알았던들 타락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들의 위치를 알고 깨어난 심정으로 하늘을 생각하고 하늘의 심정을 생각하였던들, 하나님의 말씀과 옆으로 들어오는 천사장의 말을 분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언제나 깨어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 있어야 할 아담 해와요, 언제나 깨어 하나님의 심정과 더불어 있어야 할 아담 해와가 그러한 입장에 서지 못하게 될 때, 천사의 유혹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하늘은 내가 졸고 있을 때나 깨어 있지 못할 때에도 늘 깨어 나를 바라보고 계셨으며, 내가 나의 가치를 알지 못할 때에도 하늘은 내 가치를 알고 나를 바라보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맡은 바의 책임과 사명과 지켜야 할 바의 그 무엇을 알지 못할 때에도 하늘은 그 책임과 사명과 지킬 바의 전체의 가치를 알고 나를 바라보셨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부자관계의 일체적인 이념권 내에서, 그 심중에 사무친 사랑을 중심삼고 영원히 같이 살아야 할 전체적인 가치를 아시고 아담 해와를 바라보셨습니다. 그러나 아담 해와는 그러한 하나님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한 입장에서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자신들이 어떤 존재인가를 알지 못하였고, 무엇을 해야 하며 무엇을 지켜야 할지, 또 자신들이 무엇을 사랑해야 하는가를 알지 못한 채 타락하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슬픔이 있다 할진대는, 아담 해와를 지어 놓으시고 시간 시간마다 순간 순간마다 그들을 바라보시며 지켜 주시고 위해 주셨던 하나님을 알아드리지 못한 것입니다. 어떤 목적을 향하여 자라기를 고대하고 있는 하늘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인간 조상이 하늘과 종적인 인연을 맺지 못하였던 연고로, 후손들은 하늘을 모르고 있고, 그 자신들의 존재 위치를 망각하고 있습니다. 또한 자신들이 누구의 것이며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을 모르고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을 지켜 주시고 책임져 주시며 모든 것을 아시고 바라보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들도 무엇을 해야 하며 무엇을 지향해야 하며 무엇을 지켜야 할 것인지 모르고 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사랑의 심정으로 인간과 하나될 것을 소망하시고 바라보셨는데도 불구하고 이것을 몰랐던 연고로, 인간들은 사랑의 길을 찾아 헤매고 있으되, 그 목적마저 알지 못한 채 6천년이 경과했습니다.
하늘이 아는 것과 인간이 아는 것이 상반되었던 것이 타락의 곡절인 연고로, 이제 우리들은 나를 일으켜 나의 존재를 회상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내가 나를 회상하고 나를 회복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인간에게 이런 의무가 있는 연고로, 수많은 철학자나 종교인들이 이것을 해결하기 위하여 싸워 나왔으나 아직까지 해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입니다. 즉 나라는 존재는 누구의 것이냐 이거예요.
필연적인 인연을 맺고 있는 인간이라면 그 인연의 주체가 있어야 할 것인데, 우리를 존재케 한 그 주체, 그 주인은 어떤 분인가? 그리고 우리는 그 주체 앞에 얼마만한 가치의 소유물인가? 우리는 이런 것을 밝혀내어 그 주인과 나의 관계를 재정립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 마음의 주인, 내 몸의 주인, 내 심정의 주인, 그리고 내 생명의 주인이 있다 할진대, 그 주인은 어떤 분일 것인가? ‘오! 그분만이 나의 전체를 대신한 분이요, 그분만이 이념을 대신한 분이요, 그분만이 내 생명을 대신한 분이요, 그분은 내게 없어서는 안 될 분입니다’라고 할 수 있는 분입니다. 바로 그분을 안 그날 우리는 변하는 역사과정을 거쳐 나오시면서도 변치 않는 주인의 입장에서 우리들을 붙들기 위하여 싸워 나오신 하나님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간부터 만사가 해결될 것입니다.
그 다음에 한 주인으로부터 생겨난 우리들이었으니,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 한 자체들을 세워 놓으시고 우리들 앞에 무엇을 맡기고, 무엇을 주관하게 하기 위해서 수고하고 계시는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만물을 주관하라고 축복하셨습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인간을 지어 놓고 만물을 주관하라고 축복하셨던고? 지으신 하나님께서 직접 주관하지 않으시고 인간을 세우시어서, 우리를 세우시어서 만물을 주관하라고 축복하신 원인은 어디 있는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실 때의 심정을 인간에게 알게 하기 위함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만물을 주관하라고 축복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지으신 사정과 심정을 우리 인간들로 하여금 체휼하게 하기 위하여 만물을 주관하라는 축복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 해와는 자신들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지키라 하는 것을 지키고, 만물에 대한 자기들의 의식이 높아가는 정도에 따라, 하나님께서 만물을 지으실 때 느끼시던 미의 감정과 사랑의 감정과 만물을 붙들고 기뻐하시던 심정을 체휼하여 만물을 사랑하고 만물 앞에 하나님의 대신적인 입장에서 기뻐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창조의 심정을 체휼하려는 입장을 떠나 난데없는 사탄의 유혹, 즉 천사장의 유혹으로 말미암아 느껴서는 안 될 심정을 느끼고 허락하지 않는 곳에 발을 들여 놓아 타락을 저질렀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렇듯 우리들은 타락한 아담 해와의 후손인 연고로, 오늘날 피조세계를 바라볼 때에 그 마음에 사무쳐 천지 만물을 지으시던 하나님의 기쁨의 심정을 체휼할래야 체휼할 도리가 없는, 영락해 버린 인류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내 한 자체를 회복하여 주인을 모시는 입장에 서 가지고 에덴동산에서 만물을 주관하라고 축복해 주시던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해야 되겠고, 그 심정을 갖고 나설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런 사람이 되지 않는 한 아담 해와가 저질러 놓은 타락의 원한을 풀 도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일상생활권 내에서 하나님께서 어떠한 심정으로 만물을 지으셨는가를 마음으로 느끼고 체휼한 적이 있습니까? 있다 할진대 만물을 붙들고 사랑할 수 있는 감정이 동할 것이며 정이 동할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귀에 쟁쟁함을 느낄 것입니다. 만물을 대하는 데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당시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하여 즐거운 심정으로 대했어야 할 아담 해와, 다시 눈을 뜨고 하늘을 바라보아야 할 아담 해와가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아담 해와가 그때까지 인지가 발달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연고로 하나님의 심정을 깊이 느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 있다 하더라도 따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의 생활의 표어로, 느낌 전체의 표어로, 생애의 표어로 그리고 자신들의 생명의 표어로 삼고 지켰던들, 옆으로 들어오는 어떠한 유혹도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담 해와는 자신들로 하여금 만물을 주관하게 하신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이 어디 있는가를 몰랐습니다. 이렇게 하라 하신 말씀을 지키고 난 후에 올 것, 즉 말씀의 고개를 넘은 후에 올 것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생명에 대한 인식과 생활 감정을 잊어버리지 않고 따먹지 말라고 하신 말씀을 지키고 난 후에는 무엇이 올 것인가 하는, 그 이후에 나타날 것에 대한 흠모의 심정이 그들의 생활을 지배하여 끌고 나갈 수 있었던들, 아담 해와는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을 것입니다.
흠모의 감정이 없었던 아담 해와는 옆으로 들어오는 천사장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귀한 줄 알았습니다. 거기서부터 인류의 슬픔은 시작 되었습니다. 어두운 잠의 기원은 바로 그것이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순간에 아담 해와가 다시 한번 눈을 떠서 따먹지 말라고 하셨던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인식하고, 만물을 주관하라고 축복하신 그 이후에 자신들에게 허락하시려는 그 무엇이 찾아든 천사장의 유혹보다도 크다는 것을 느꼈던들 타락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이 인류의 모든 곡절의 근원이 되었으므로, 오늘날 우리들은 나를 찾는 운동을 해야 되겠고, 내게 맡겨진 책임을 찾기 위하여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며, 그 이후에는 내가 무엇이 될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아담이 장성하여 만물을 주관할 수 있는 심정을 갖췄다면 그 다음엔 무엇이 이루어졌을 것인가? 아담의 사랑과 해와의 사랑, 만물의 사랑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로 묶어져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전체적인 인연이 완결지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잃어버린 연고로 오늘날 우리들은 탄식하고 있습니다. 죄악 된 이 땅을 원망하며 살고 있습니다. 생의 진정한 가치와 목적을 알지 못한 채 사탄에게 사로잡혀 생의 노정을 걷고 있으며, 죽음의 가치마저 헤아릴 수 없는 흑암 권세권 내에서 허덕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환경을 물리치고 다시 눈을 떠 하나님을 재인식할 수 있는 심적인 변혁이 여러분 자체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할진대는, 절실한 심정이 여러분 자체에서 우러나지 않는다 할진대는, 심적인 새로운 존재 의식이 여러분 자체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할진대는, 여러분은 자기 가치를 자랑하고 싶되 자랑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가치는 하늘과 아무런 인연이 없는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의 생명의 권한을 아무리 자랑한다 할지라도 그것 역시 하늘과는 하등의 인연도 맺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는 거예요.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들은 천사장의 말을 재분석하여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했던 아담 해와의 입장을 되풀이하는 자리에 서지 말고, 오늘의 나를 살펴 제2의 나로서 다시 눈을 떠 나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이 계신 것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그런 순간에서부터 참다운 나의 모습이 싹틀 수 있은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까지 새로이 눈을 떠 보지 못한 연고로 타락으로 얻어진 슬픔, 타락으로 유전 받은 절망과 비운의 구렁텅이에서 헤어날 수 없는 우주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 이상 슬픈 일이 없으며, 이 이상 분한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슬픔과 분함을 풀어야 할 입장에 놓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인간들은 이런 슬픔과 분함이 어디서 생겼는지조차 모르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들도 불쌍하거니와 그런 모습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은 얼마나 불쌍합니까?
말세에 있어서 모든 것을 재확인하고 재인식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 타락한 인간들의 운명입니다. 모든 것을 재인식하여 다시 눈을 뜨는 날, 다시 새로운 나를 발견할 수 있는 기쁨의 그날, 새로운 나의 가치를 중심삼고 만우주와 인연맺을 수 있는 그 순간, 전체적인 가치를 통합하여 하나님과 끊을 수 없는 사랑의 인연을 맺는 그 순간이 인간들이 알지 못하면서도 허덕이며 찾아 나온 역사적인 행로의 목적이며 생애의 목적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다시 눈을 떠야 되겠습니다. 다시 눈을 떠서 하늘을 바라보아야 되겠습니다. 다시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게 될 때에 여러분은 황공함을 느낄 것입니다. 그리고 깊은 잠 가운데서, 사망의 세계에서 갈팡질팡 허덕이면서 생의 가치를 잃어버린 채 죽음을 앞에 놓고 탄식해 온 인간들을 하늘은 어느 한 날 어느 한 순간도 잊지 않으시고 지켜보셨고, 배역하는 인류를 몇천만 번이나 재인식하셨다는 것과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느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이 진정으로 하늘이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그 순간, 슬픈 일면 고마움의 심정에 사무쳐 통곡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늘이 오늘날까지 우리의 생명을 붙들고 다시 바라보기를 몇 번이나 하셨던고! 하늘은 우리의 생애노정과 이념적인 조건을 붙들고, 우리가 소원하는 일체의 조건을 붙들고, 우리들이 알지 못하는 때에도 그 조건을 통하여 우리를 바라보셨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하나님의 슬픔을 아십니까? 우리의 처참함과 슬픔에 비할 수 없는 하늘의 처참함을 느껴본 때가 있었습니까? 없다 할진대는 오늘날 6천년 역사의 종말에 서서 이 모든 것을 해결할래야 해결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안 된다는 거예요. 이 담을 전부 다 깨고 본연의 아담의 위치로 돌아가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할 수 있는 그 한 시간이 오기 전에는 인류의 근본 문제는 해결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우리들은 다시 눈을 떠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을 다시 바라보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를 다시 바라볼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성신과 하나님의 복귀섭리의 사명을 맡고 왔다 갔던 수많은 선조들을 다시 바라볼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역사를 다시 바라보는 동시에 이 시대를 다시 바라보고, 앞으로 올 시대를 염려하며 어떻게 될 것인가도 생각하면서 다시 바라 볼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다시 눈을 떠 하늘을 보면서도 여러분에게 ‘하늘이시여!’하고 울부짖고 싶은 마음이 없다면 여러분의 소망은 끊어질 것입니다.
오늘날 인간들이 가는 길이 왜 다 막히느냐? 종교를 세워 인도하던 성직자마저도 근본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하고 막혀 버리고, 철학이니 과학이니 하는 것도 전부 막히는 원인은 무엇이뇨? 그것은 다시 눈을 뜨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지니고 있던 것으로는 해결할 수 없으니 그것을 저버리고 다시 하늘을 바라볼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늘을 향하는 마음과 하늘을 바라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사람, 그 바라보고 싶은 마음으로 슬퍼하는 사람, 그 바라보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죽어가는 사람들의 마음이 인류역사를 종결지을 수 있는 초석이 될 것입니다.
망해 들어가는 국가의 운명을 염려하여 나서는 자가 있다 하더라도 민족을 위해서 먼저 외치면 안 됩니다. 먼저는 북받치는 마음으로 하늘을 위하여 외쳐야 합니다. 그 다음에 민족을 위하여 외쳐야 합니다. 그럴 때 그 민족은 살아날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가 증거합니다.
그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찾아도 찾을 수 없고 허덕여도 해결점이 나지 않는 미지의 세계를 추방해 버리고, 본연의 마음으로 돌아가 아무것도 없는 공(空)의 상태에서 다시 눈을 뜨는 그날, 그 순간은 곧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는 순간이 될 것이며, 새로운 인생이 출발되는 순간이 될 것이며, 새로운 자아를 발견할 수 있는 재창조의 순간이 될 것입니다.
하늘을 대해 기도하면서 하늘을 찾아 헤맸던 예수였던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30년 준비 기간에 있었던 예수는 형제들이 기뻐한다고 기쁜 표정을 지을 수 없었고, 친척과 이웃이 즐거워한다고 같이 즐거워할 수 없었던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에 하늘이 바라는 방향과 전세계 인류의 방향이 너무나 차이가 있는 것을 바라보고, 이 차이가 크면 클수록 예수님은 더 굳은 결심을 했다는 것입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아도 입을 다물고 지냈던 예수님의 30년 준비 기간의 슬픔을 여러분이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30년 준비 기간이 지난 다음에 예수님은 하나의 개척자로서 가정을 박차고 나섰습니다. 죽음의 고개가 닥쳐와도 나는 간다, 피곤한 길일지라도 나는 간다. 망하는 일이 있더라도 나는 간다 는 마음을 품으시고, 자기의 환경을 청산하실 수 있었습니다.
아담이 옆으로 들어오는 말을 통째로 받아들이다가 망한 것처럼, 우리도 흘러 내려오는 사조를 통째로 받아들이다가는 죽는 일이 생길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재감정하여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자신의 마음과 생명과 정적인 이념을 통하여 이것을 감정할 수 있는 주인의 입장에 선다면 어떤 사상이 여러분을 구속하겠습니까? 어떠한 사상도 여러분을 구속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근본 문제가 해결되었던들 여러분의 마음세계에 평화가 찾아졌을 것이며, 여러분의 생활 환경에도 행복이 찾아졌을 것입니다. 자유와 평등을 향유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이상을 부르짖고 있는 주의가 아무리 많다 할지라도 심적인 해방, 정적인 해방, 이념적인 해방을 시켜준 주의는 없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다시 눈을 들어 잠자고 있던 자기 일신을 서러워하고 깨어난 해방의 한 날을 소망하고 오늘의 환경을 박차고 나서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면 거기에 주인이 계시다는 것을 인간들은 지금까지 몰랐습니다.
그러면 역사노정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 나온 사람들은 어떠한 사람이뇨? 그들은 시대를 박차고 ‘오! 하늘이여!’ 하였던 사람들이며, 땅을 박차고 하늘을 향하여 솟구쳐 오르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시대에 용납을 받지 못하였고, 그 시대에는 낙오자와 같은 입장에 서서 불쌍한 생애의 노정을 걸어갔습니다. 이들은 인간세상에서 불쌍하다면 지극히 불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남들은 잘도 의지하고 살아가는 세상에서 의지할 아무것도 갖지 못하고, 자기의 심정을 털어놓고 의논할 수 있는 친구도, 자기와 더불어 생명을 걸고 싸워 줄 어떤 동지도 갖지 못한 채 그들은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타락 이후 4천년 만에 나타난 하나의 청년, 만민을 구원하기 위하여 먼저 시대를 부정하고 환경을 부정하고 그때까지의 교단을 부정하고 나섰던 청년 예수는 무엇을 주장했던가? 예수님은 인간이 모르던 하나님의 뜻을 주장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품은 예수는 현실의 모든 것이 인생의 전체적인 이념의 재료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는 세상이 배반하여도 이것을 박차고 다시 새로운 눈으로써 새로운 자아를 바라보았고, 새로운 가정, 사회, 국가, 세계를 바라보았으며, 나아가 새로운 주의를 늠름히 바라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그 가치가 현세적인 어떤 가치보다도 높고 귀하고 크다는 것을 알았던 그였기에 이스라엘이 배반하고 유대교단이 배반하여도 까딱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회와 가정, 어떤 유명한 학자가 배반하고 어떤 제사장이나 교법사가 반대하더라도, 어떤 풍파나 곡절이 사방에서 자기의 일신에 마구 부딪쳐 들어온다 할지라도 예수님은 까딱하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직 다시 눈을 들어 하늘이시여! 하셨습니다. 이런 것이 예수님의 생활신조였던 것입니다.
자기를 부정하는 환경을 보고 무한히 슬픔을 느꼈던 예수는 자신을 바라보시는 하나님께서 슬퍼하신다는 것을 깨닫고 몸둘 바를 모를 만큼 죄송함을 느꼈던 것입니다. 예수에게는 자신을 세우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4천년 동안 보내 주신 수많은 선지선열들을 배척한 무리에 대해 가슴에 맺힌 서글픔의 장벽이 있었고, 그 하나님을 수없이 배반한 인간들에 대한 서글픔의 장벽이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는 자기 일신이 죽음의 제물이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슬퍼하시고 인류를 위하여 싸워 나오신 안타까운 심정에 비하면 초개만도 못하다고 느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부정하고 하늘의 심정을 앞세워 머리 숙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인류의 새로운 각성은 촉구되었고 제2의 자아가 출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인류는 회생의 봄을 맞이할 수 있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4천년간 슬픔과 어두운 잠 가운데 있던 인류가 예수를 믿었다면 새로운 봄을 맞이하고 회생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왔다 가신 이후 2천년, 하늘을 위하여 나선 자 가운데 자신의 생명에 애착심이 없었던 사람이 어디 있었으며, 심정에 느껴 오는 슬픔을 느낄 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생명에 대한 애착과 슬픔보다도 주인의 슬픔과 주인의 생명이 찢기고 있다는 사실을 느꼈던 것입니다. 우리의 선조들은 자신들의 모든 것을 부정하고 하늘을 향하여 솟구치는 심정을 지녔던 무리였습니다.
그러한 선조들의 피와 땀과 눈물로 얼룩져 내려온 하늘의 섭리노정은 어디로 갔는가?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노정을 동반하여 내려왔는데 이제 역사의 종말에는 어디로 갈 것인가? 여기에서 끝나고 말 것인가, 아니면 어떠한 새로운 방향을 찾아 다시 갈 것인가? 이렇게 볼 때 이 섭리의 종말시대를 맞이하여 전체를 대신한 피의 제물, 눈물의 제물, 땀의 제물이 되어 ‘하늘이시여! 나를 받으십시오’ 할 수 있는 한 모습이 나타난다면 그는 이 종말시대의 눈물의 구세주요, 피땀의 구세주요, 생명의 구세주일 것입니다.
그러한 분이 있어 그러한 섭리를 책임진다 할진대, 그는 천적인 조건을 동반하여 지상에 나타날 것이며, 천적인 심정을 대신하여 지상에 나타날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런 선지자를 대하게 될 때, 그분의 천적인 심정과 천적인 인격은 모를지라도 현실을 부정하고 다시 바라볼 줄 아는 마음이라도 가질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자기가 살고 있는 자리에서 다시 눈을 떠 바라보아 가지고 자기들이 모르는 제2의 가치와 제2의 인격의 기준을 분별할 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못한다 할진대 여러분은 예수님이 이 땅 위에 오시더라도 그를 모를 것입니다.
보십시오. 이스라엘 민족 60만 대중 앞에 선 모세는 바로 궁중에서 자랐고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던 목자였습니다. 그 자체를 그냥 바라보면 아무 가치도 없고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천적인 심정과 천적인 인격을 갖추어 나타나게 될 때에 이스라엘 민족은 다시 눈을 떠서 그를 바라보아야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러지 못하였으므로 그들은 모세를 따라 다녔지만 광야에서 다 쓰러졌던 것입니다. 예수시대에 도 마찬가지였으며, 오늘날 역사의 종말시대에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죄악 역사는 여러분 자신에서부터 청산하여야 합니다. 여러분이 역사에 마이너스 되는 입장에 서면 지옥이요, 플러스 될 수 있는 입장에 서면 천국입니다. 또 시대와 여러분을 비교할 때, 시대가 여러분보다 크면 지옥이요, 여러분이 시대보다 크면 천국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까지 천지 운세를 따라 나온 인간들은 천지 운세를 조정할 수 있는 날을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한 날을 바라보시며 6천년의 기나긴 세월을 역사해 나오고 계시는 것입니다. 천지 운세를 따라 나오던 역사의 슬픔을 박차고 이 운세를 주관할 수 있는 하나의 용자를 찾아 헤맨 것이 하나님의 6천년 복귀섭리노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회복하고 찾아야 할 운명에 처하여 있는 우리들은 제2의 나의 눈을 가지고, 제2의 나의 생명의 감촉을 느끼면서, 제2의 나의 이념을 찾아, 제2의 나의 인격을 갖추어 그 가치를 자랑하여야 합니다. 그리하여 천지 운세를 대신하여 여러분을 세워 놓고 복 빌어 줄 수 있는 존재가 나타나야만 6천년 섭리는 종결될 수 있습니다. 또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실 수 있는 조건이 성립된다는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세 제자를 거느리고 기도하던 예수의 모습을 회상해 보면, 그는 천지의 심정을 통하여, 자기의 심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심정을 움직이려는 비장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던 곳이 겟세마네 동산이었습니다. 인류의 심정을 움직여 하늘과 땅, 천정과 지정을 통합시켜야 할 예수가 인정에서 배척을 당하고, 땅에서 축출당하는 입장에 서게 됨으로써 천정의 인연을 맺고 넘어가야 했습니다. 그런 자리가 겟세마네 동산이었던 것입니다. 그 자리에 인간을 대표한 세 제자가 같이 있었지만 예수가 느끼는 심정과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느끼는 심정이 달랐습니다.
천정을 그리며 죽음을 앞에 놓고 재차 하늘을 바라보는 예수의 시선은 죽음의 고개를 넘어 부활의 영광에 사무칠 수 있었으나, 자기를 중심삼고 바라보던 제자들은 천정에 사무친 예수의 심정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일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참으로 염치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늘을 배반한 선조들의 행동이었습니다.
우리의 참부모요, 우리의 주인이요, 우리의 신랑이요, 우리의 이념의 주체요, 생명의 주체요, 우리 전체를 대신한 하늘의 실체인 예수를 이렇게 배반하였던 선조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조상들의 후손임을 뼈저리게 느껴 여러분의 심중에 역사적인 인물을 원망하는 사무친 마음이 있습니까?
제자들이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지 못할 때, 예수는 기도하다가 몇 번이나 제자들을 바라보았는지 모릅니다. 시험에 들지 말라고 권고하는 예수의 조급하고 안타까운 심정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그러한 심정을 가진 예수는 하나님을 부르고 하나님의 심정을 느끼면서 자기 자신을 잊은 채 사랑하는 제자들을 몇 번이나 생각하고 몇 번이나 바라보셨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세 제자는 그러한 예수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졸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비단 세 제자들만의 표상이 아니라 인류 전체의 내막을 폭로시킨 일면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하겠습니다.
오늘날 여러분들은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비장하고 피눈물이 어린 울부짖음이 귀에 쟁쟁하게 울려 와도 모르고 있습니다. 눈을 들어 다시 바라보라고 소리쳐도 못 듣고 있습니다. 잠들어 있는 인류를 깨우려 몸을 뒤흔들고 머리를 때리고 때려도 모르고 있습니다. 이렇게 불쌍한 인류를 찾아 세워 아들딸로 삼는 축복의 한 날을 바라시며 수고하시는 하나님의 서글픈 심정을 아는 자가 이 땅 위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 고로 여러분은 선의 이념을 갖고 살 수 있는 본연의 아들딸로서, 하늘의 가슴에 박힌 못 자국을 메우고 역사적인 서글픔을 청산하여 기쁨의 대신 존재요, 만물과 온 천하를 대신한 화동의 매개체로서 ‘너는 나의 자랑이요, 나의 사랑이요, 나의 행복의 제일 기준이다’ 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심정으로 여러분을 바라보고 계시는데, 오늘 여러분이 눈을 들어 그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선에 부활의 기준이 잡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만물을 지으시고 아담 해와에게 이를 주관하라 하신 것은 제2의 창조의 심정을 느끼게 하기 위함이셨습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심정을 느껴야 하고, 만물을 바라볼 때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지으신 솜씨와 수고, 그리고 지어진 만물을 보고 기뻐하시던 그 심정을 느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은 하늘과의 심정의 합일점, 만물과의 심정의 합일점을 찾아 주인의 실체가 되어 하늘 앞에 고스란히 바쳐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순간이 하늘이 바라고 우리 인간이 바라던 종착점이요, 하늘과 우리 인간이 상봉하는 종결점인 것입니다. 그 일은 하나님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이 추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최후에 남아질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천지의 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권에서 새로운 본연의 심정을 갖춘 자격자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늘이 허락하실 수 있는 새로운 인간으로 보여질 수 있고, 나타날 수 있는 본연의 완성된 아담 해와의 모습을 갖추어 하나님께서 쌍수를 들어 축복하시고 기뻐하실 수 있는, 새롭게 찾아진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새 천지에 이루어진 새로운 가정의 주인, 새 천지의 새로운 부모, 새로운 자녀들의 부모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하나의 가정이 여러분을 중심삼고 이루어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을 수천만 번 바라보시면서 역사 과정을 거쳐 오셨는데, 그 역사의 최후의 종착지는 어디일 것인가? 하나님과 인간이 영원히 같이 살 수 있는, 인간이 하나님의 친아들딸로 세워져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네가 없어도 안 되고, 내가 없어도 안 되고, 형제가 없어도 안 되고, 만물이 없어도 안 되는 하나의 가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가정을 바라고 나오셨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내 것이 아니에요. 내가 살고 있는 이 사회가 내 것이 아니에요. 내가 살고 있는 이 국가가 내 것이 아니에요.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내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하늘이 우리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다시 눈을 들어 제2의 나, 제2의 내 것을 찾아 하늘을 향하여 나설 줄 알아야 합니다. 끝날 성도들의 모습은 바로 이런 모습이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인류의 참부모를 모시고 모든 곡절과 슬픔과 원한을 해원하고 여러분 자체의 마음이 몽땅 그 마음에 들어가야 하겠습니다. 그럼으로써 어느 한 부분도 기쁨이 안 되는 부분이 없는 기쁨의 자체가 되어서 참부모님께서 너는 나의 사랑이요, 너는 나의 기쁨이요, 너는 나의 선이며 나의 행복이라 할 수 있는 모습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많은 슬픔을 겪어 온 나를 바라보게 될 때에, 나는 인간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처참한 형상을 하고 있는 나였습니다. 이제 수심에 잠긴 그 모습이 희락과 환희와 영광의 모습으로 변하여 춤을 출 수 있는 그런 제2의 나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이 이 땅 위에 나타나지 않는다 할진대 하나님은 불쌍한 하나님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나를 부정하고 새로운 인정을 받아야 할 운명에 처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땅과 이 땅에서의 생활은 우리에게 천적인 소득을 거두어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세상이 가고, 친구가 가고, 부모가 가고, 처자가 가고, 땅 위의 모든 것이 다 간다 할지라도 다시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는 간절한 이 마음은 갈 수 없다고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다시 눈을 들어 하나님께서 변치 않는 존재이신 것과 같이 나도 변할 수 없다 할 수 있는 그 모습, 또 천적인 인연과 축복의 인연을 붙들고 죽어가는 한이 있더라도 그 사정을 땅 위에 남기고 가겠다는 그 마음, 내 심정이 찢기고 사탄의 제물이 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하고 싶은 그 마음, 타락의 조건들을 몰아낼 수 있는 그 마음이 남아지기를 소망하여 허덕이는 내가 되었습니까? 하늘이 찾고 있던 내가 되었습니까? 하늘 앞에 보여 줄 수 있는 내가 되었습니까? 하늘땅 앞에 자랑할 수 있는 내가 되었습니까? ‘하늘이시여! 내려오소서. 인류여! 모이소서. 만물이여! 춤을 추소서’ 할 수 있는 내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나를 조건으로 하여 천상의 원한을 풀고 지상의 원한을 풀고 만물의 원한을 풀고 천주에 사무친 모든 슬픔을 다 해원하고 하늘을 대신하여 노래하며, 땅을 대신하여 노래하며, 만우주를 대신하여 노래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또 사탄 대하여 명령할 수 있도록 ‘간곡한 충절의 마음만이 저희에게 남게 해 주시옵소서’ 라고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 마음을 가진 자만이 역사의 주인이 되시옵소서, 그 마음을 가진 자만이 인류역사를 움직여내게 하소서. 그 마음만이 우리 후손들의 소망의 표적이 되게 하옵소서’라고 할 수 있어야 하겠고, 그런 마음을 넘겨주어야 할 사명이 여러분에게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도 이 이념을 위하여 싸웠고, 우리의 선조들도 이 이념을 위하여 싸웠으며, 하나님께서도 이 이념을 위하여 땅을 바라보고 어둠권 내의 인간을 깨우쳐 나오고 계시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역사적인 비운의 장벽을 헤치고 하늘의 심정을 통하여 잠들어 있는 인간들의 심정을 깨워 일으킬 자는 누구일 것이며, 잠들어 있는 자기 자체를 깨워 일으킬 자는 누구인고? 폭발되어 오는 하늘의 사랑의 심정을 소개할 자 그 누구일 것인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여러분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밀리고 쫓기며 처참하게 몰려다니더라도, 자신이 그 한 점과 관계 맺어야 할 입장에 처한 선봉자가 아닌가 생각해 보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책임을 갖고 하늘과 땅, 만물 앞에 불러 세워졌으니, 우리는 그 사명과 책임을 다하여 하늘땅의 원한을 풀고 하늘땅의 제2의 소망의 존재로서, 하나님이 모든 원한을 잊고 다시 기쁜 마음으로 바라보실 수 있는 모습이 되어야 하겠고, 인류가 기쁨으로 바라볼 수 있는 내가 되어야 하겠고, 만물이 기뻐하고 화동하며 바라볼 수 있는 그러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기가 이념의 동산이요, 거기가 본연의 천국이요, 그러한 자리에 화하여 하나의 이념을 중심삼고 하나 되는 곳이 지상천국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소개하기 위하여 하늘은 천만 번 우리를 찾아 깨우치고 일으켜 나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우리는 잊었으니, 이 슬픔을 마음에 새겨 이것을 책임지기 위하여 제2의 나를 찾아 허덕일 줄 아는 여러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아야 되겠사옵니다. 저희의 눈이 어두워질 대로 어두워졌사오나 낮이나 밤이나 쉬지 않고 그 무엇이 나타나는가를 바라보아야 되겠사옵니다. 아담 이후의 역사에 편편이 남아진 모든 것을 바라보아야 되겠사옵니다.
이러한 것들이 저희로 하여금 생명의 중심과 이념의 기준을 찾지 못하게 하였으니, 이를 극복하고 하늘을 다시 바라볼 수 있는 마음, 인정을 초월하여 천정에 사무칠 수 있는 마음을 지니게 하여 주시옵소서. 땅을 원망하고 하늘을 원망하고 만물을 원망하며 허덕이는 자체를 인식하여 제2의 나를 찾아 나설 수 있는 배고픈 발걸음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조급한 심정을 갖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해결하지 않고는 클클하여 못 견디는 마음을 갖게 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저희는 잃어버린 본연의 동산, 잃어버린 아버님의 이념을 찾아서 만물을 주관하고 지켜야 할 자요, 만물과 더불어 사랑의 인연을 맺고 그것을 묶어서 아버지 앞에 돌려 드려야 할 자요, 아버지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심정을 통하여 아버지의 사랑의 꽃을 피워 묶어 드려야 할 전체적인 책임을 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그런데 한걸음도 옮겨놓지 못한 채 깊은 잠 가운데 들어 있는 모든 세계 인류를 깨우쳐 주시어서, 새로운 광명의 아침을 맞아 하늘을 바라보고 다시 눈을 뜰 수 있는 무리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새로이 눈을 떠 하늘을 바라보고 세계 역사 앞에 새로운 의지를 일으킬 수 있는 제2의 무리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새로운 이념과 새로운 심정으로 엉켜지는, 새로운 종족을 움직여내는 저희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그러한 민족, 그러한 국가가 있다 할진대 세계는 그들로 말미암아 하늘과 인연맺을 수 있을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오늘날 우리 한민족이 불쌍한 처지에 있다고 낙망하지 말게 이 민족을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현실적인 모든 것을 거부하고 다시 눈을 들어 바라보지 않으면 안 될 역사적인 비운의 고개가 남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버려야 할 요소를 가장 많이 갖고 있는 한민족이옵니다. 오늘날 저희의 종교나 정치를 자랑할 수 없고, 갖고 있는 것 중에 가지고 넘어갈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사오며, 버릴 수밖에 없는 환경에 처한 저희들입니다. 이것을 다시 붙들기 위하여 허덕이는 자가 되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하늘을 향해 다시 눈을 뜨게 해 주시옵소서. 인류가 바라보지 못하는 새로운 곳을 찾아 나설 수 있는 무리가 되게 하기 위하여 이 민족의 갈 길을 먼저 막아 놓았다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낙망하지 않고 피곤함도 잊어버리고 오늘도 내일도 꾸준히 나아가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다시 눈을 떠 하늘을 바라볼 수 있는 무리들이 나와야만 이 땅이 살아 날 것이며, 그 움직임으로 말미암아 세계가 살아날 줄 알고 있사오니, 이것을 책임지는 무리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던 예수의 심정은 돈 한푼 없는 사람의 심정이었습니다. 부모를 잃어버린 심정이요, 형제를 잃어버린 심정이요, 국가나 세계를 잃어버린 심정이었사오니, 오늘 저희들도 그런 심정을 갖고, 다 잃어버린 마음에 하늘을 소유할 수 있게 허락해 주시옵소서. 인연은 땅에서 맺어야 되는 연고로 예수는 죽었다가도 다시 부활하셨사옵니다. 인연의 조건을 이 땅에 세우지 않으면 안 될 책임이 예수에게 있었다는 것을 저희 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오늘날 저희들도 그런 마음을 중심삼고 땅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천적인 기준만을 가지고 쓰러지는 한이 있다 할지라도 예수가 바라던 소망, 하늘이 바라시던 소망, 인류가 바라던 소망이 저희들로 말미암아 기필코 지상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그 한 날을 향하여, 오늘도 내일도 일년도 10년도 남은 생애도 아낌없이 바치면서 달음질칠 줄 아는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간절히 부탁드리면서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니다. 아멘.
본연의 참사람을 잃어버린 아버님께서 기나긴 세월을 통하여 복귀섭리하시기에 얼마나 수고하셨는가 하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그 본연의 아담 해와를 그리워하시면서 역사노정의 피어린 고비고비를 넘어 오셨다는 것을 이 시간 저희들이 마음으로 몸으로 체휼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 일을 계승하여 섭리의 뜻을 받들어 온 우리의 선조들도 가는 곳곳마다 십자가의 서글픈 노정을 걸어왔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이제 가다가 남겨져 있는 이 십자가의 길을, 오늘 끝날에 처해 있는 저희들이 마저 가지 않으면 안 될 역사적인 책임과 섭리적인 책임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당신의 힘과 당신의 권고로써 저희들을 다시 충동시켜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남아진 이 십자가의 고비를 다 넘어가 소원하시던 본연의 동산 가운데서 아버지의 영광을 노래할 수 있는 기쁨의 모습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 자체에 속한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오늘 남아진 일을 성취하기 위해서 섭리역사 앞에 막혀 있는 십자가의 고비고비를 박차고 나설 수 있는 천적인 각오를 하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일을 성취시키기 위해서는 저희들이 비장한 각오를 하고 총검을 들고 싸움터에 나서듯이 나서지 않으면 안 될 때가 되었사오니, 아버님이시여! 오늘도 내일도 어느 때에라도 저희들의 모든 정력을 다 기울여 싸워 나갈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그 나아가는 길을 막고 있는 수많은 사탄 대하여 싸워 나갈 수 있는 힘을 저희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그 싸움터에서 승리의 모습으로 나타나 아버지의 영광의 동산에서 아버지를 친히 모시고 살 수 있게 허락해 주시옵고, 아버님이 소원하시던 전체의 뜻을 이루어 아버지의 사랑을 노래할 수 있는 당신의 아들딸들 되게 하여 주시옵고, 사탄세계와 온 만물만상 앞에 내세워 자랑할 수 있는, 아버님께서 찾으시던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아버지 앞에 찾아진 아들딸로서 아버지와 영원히 동거할 수 있으며, 아버지의 일과 아버지의 사상과 아버지의 소원을 이룬 자로서 기쁨과 영광의 노래로 아버지를 위로해 드릴 수 있는 참다운 자식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남겨진 싸움의 길과 남아진 십자가의 길을 거쳐서 아버지의 영광을 노래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길, 아버지시여!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날은 거룩한 날이옵니다. 만민이 합하여 아버지의 전체의 뜻을 받들 수 있으며, 만민이 움직여 아버지의 승리의 나라를 건설할 수 있는 때가 어서 속히 오게 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니다.
저희 삼천만 민족을 축복하여 주시옵고, 이날 모인 당신의 아들딸 위에도 특별한 은사의 손길을 내려 주시옵소서.
이 민족을 사랑의 마음으로 품으시어서, 당신이 소망하시는 뜻, 남아진 원한의 전체적인 뜻을 책임지고 싸워 이김으로써, 성사시켜 드리는 영광의 모습들로 나타날 수 있는 그때까지 당신이 재촉하시는 대로 움직이는 이 민족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또 그러한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불충스럽고 불비한 자체들로서 이날 아버지 앞에 모였사오니 합당치 못한 일체를 제거하여, 아버지의 영광의 품에 품길 수 있는 본성의 것만을 이 시간 나타내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 본연의 영광만을 각자의 심중에 연결시켜 하늘이 바라던 모습으로서 아버지 앞에 바쳐질 수 있는 이 한 모임이 되게 하여 주시옵고, 오직 아버지의 것으로만 취해질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널려 있는 수많은 당신의 아들딸에게도 길이길이 같이하여 주시옵고 역사하여 주시옵길 부탁드리면서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였사옵니다. 아멘.
아버님, 저희들을 불러 모아 주셨사오니, 이 시간 저희들만 남게 하지 마시옵소서. 많은 시련 가운데서도 이 자리까지 나오게 하여 주신 것을 감사드리옵니다.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런 길로 인도하여 주시는 것을 저희들은 잘 알고 있사옵니다. 하늘의 슬픔과 땅의 슬픔이 저희들을 조건으로 하여 뒤넘이치지 않으면 안 될 역사적인 책임이 저희들에게 있다는 것도 알고 있사옵니다.
허락하신 말씀과 허락하신 은사와 허락하신 생명으로 말미암아 오늘 이 자리에서 아버지를 대하여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영광의 은사를 가지게 된 것을 황공하게 생각하옵니다.
오늘의 저희들에게 맡겨진 책임이 귀중하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사오니, 사랑의 아버님! 이 시간 저희들을 버리지 마시옵고, 다시 한번 아버지 품에 품으시어서 전해 주시고자 하셨던 심정을 저희들의 심정에 옮겨 주시옵고, 맡기고자 원하셨던 전체의 뜻을 저희들에게 맡겨 주시어서 아버님께서 안심하실 수 있는 저희들로 만들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제 저희들의 마음과 몸이 저희들만의 것이 되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이 시간만은 아버지의 것으로 움직일 수 있는 몸과 마음이 되게해 주시옵소서. 아버님께서 친히 주관하실 수 있는 하나의 제단이 되어 아버지 것 이외의 것은 일체 용인되지 않는 이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나이다.
억만 사탄들이 저희들의 움직임을 막고자 혈안이 되어 있사옵니다. 이때 저희들은 마음과 몸 모두를 기울여 이것을 막아낼 수 있는 천적인 힘과 능력을 고대하고 있사오니, 아버님이시여! 힘을 허락하여 주시옵고 은사를 내려 주시어서 부활의 권한을 갖추어 사망권 앞에 나설 수 있는 하늘의 정병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이시여! 저희들에게 허락하신 수련 기간을 통하여 수련을 받고 간 당신의 아들딸들, 간곡한 심정과 새로운 각오와 결심을 가지고 이 삼천리 방방곡곡에 흩어졌사오니, 아버지, 그들의 갈 길을 아버지께서 열어 주시옵고, 싸움을 하게 될 때 힘을 허락하여 주시옵고, 믿음으로 하늘의 권한을 세우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하늘의 실권의 행사를 나타내기에 부족함이 없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들려진 철장의 말씀과 생명의 방패로 원수들을 물리칠 수 있는 능력을 그들에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천적인 승리의 영광을 그들에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6천년 동안 참아오신 아버지의 심정을 해원할 수 있는 때가 왔다는 것을 저희들은 이미 알았사옵고, 이미 저희들에게 그때를 예고시키셨사오니 이 일이 헛되이 돌아가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움직이는 전체 위에 생명의 움직임이 있게 하여 주시옵고, 나타나는 곳곳마다 하늘의 전권적인 역사를 나타내 주시옵소서. 그들로 하여금 생명의 모습을 갖추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원수들이 입을 다물고 굴복할 수 있는 한 날을 맞이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사랑하는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날은 약속하신 날이오니 축복하여 주시옵고, 허락하신 날이오니 아버지의 뜻을 나타내시옵소서. 숨겨졌던 아버지의 사랑의 심정을 저희들의 마음에 옮겨 주시어서 저희들로 하여금 아버님의 은사를 노래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로 하여금 아버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게 허락해 주시옵소서. 아버지 앞에 참다운 경배를 드릴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들로 하여금 잠들어 있는 삼천만 민족을 깨우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이 땅 위의 수많은 인류를 깨우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들이 머무는 곳곳마다 아버지께서 염려하고 계시다는 것을 저희들이 알고 있사옵고, 이들을 쓰러지지 않게 하시기 위해 아버지께서 붙들고 계시다는 것도 저희들이 알고 있사오니, 저희들도 이 민족을 붙들고 싸울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이 인류를 붙들고 싸울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들이 우리를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그들을 위하여 있다는 것을 알았사옵고, 아버님께서는 그들을 위하여 지금도 싸우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저희 자체도 저희를 위하여 살 것이 아니고 당신을 위하여 살아야 할진대, 이들을 붙드시려는 아버지의 뜻과 만민을 대하여 절박한 책임감을 느낄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이런 사명감과 책임감을 갖고 한 날 한 시라도 아껴서 아버지의 뜻을 위하여 싸워 나갈 수 있는 하늘의 정병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날 만민을 대신하여 모이는 수많은 당신의 제단들을 축복하여 주시옵고, 생명의 은사에 사무쳐서 아버지 앞에 외로운 제단을 쌓으며 호소하고 있는 숨은 아들딸들이 많은 줄 알고 있사오니 그들에게 각별한 은혜를 내려 주시옵소서.
끝날에 하늘의 뜻을 예고시켜 주시옵고, 아버지의 영광의 때가 온다는 것을 그들에게 예고시켜 주시옵소서. 하늘의 은사를 중심하여 모일 수 있는 날이 어서 속히 오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그리하여 온 만민이 하나의 제단을 갖추어 아버지의 영광을 노래할 수 있으며, 아버지 앞에 경배드릴 수 있는 날이 온 땅 위에 임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섭리하시는 뜻 앞에 영광의 한 날이 어서 속히 임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그날을 소망하며 싸워 나가는 저희들 앞에 기쁨의 승리의 날이 어서 속히 임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오며, 하늘의 영광이요, 땅에는 승리의 개가가 퍼지는 기쁨의 동산이 어서 속히 이루어지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오늘 이 시간 이후의 모든 시간을 친히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 저희들이 자리에 모였사오니, 저희의 모든 주의 주장이나 저희가 느끼는 관념 전부를 제거시켜 주시어서, 천적인 심정에 화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저희 자신들 오직 당신에게 사로잡힐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니다. 아멘.
아버님! 오늘 여기 모인 저희들, 요단강가에 모였던 서글픈 무리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하늘의 새로운 소식을 듣기 위하여 세례 요한 앞에 모였던 무리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간곡한 심정으로 메시아가 오시기를 고대하며 허덕이던 이스라엘 민족의 발자취를 더듬어 살펴보는 저희들, 역사적인 모든 슬픔을 넘어 천적인 정을 중심삼고 인연맺어 세례 요한을 중심삼고 엉클어져 움직이던 무리들의 모습, 예수를 따르던 무리들의 모습, 심정과 심정을 연하여 새로운 소망에 즐거워하던 무리들의 모습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선민의 권한을 자랑하고 택한 백성임을 자랑하며, 축복권 내에 살던 이스라엘은 어디 갔는가 하고 탄식하시는 아버지의 슬픈 눈물이 이 땅에 남아 있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님께서 4천년 동안 역사적인 서글픔을 참으시면서도 택한 이스라엘 민족을 붙들고 나오신 것은 메시아 한 분을 보내시기 위함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메시아를 두고 사탄의 품에 품기었으니, 그것을 바라보신 아버님의 서글픔은 그때만의 서글픔이 아니라 억천만년 역사의 서글픔으로 남아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옵니다.
당시에 택한 이스라엘 민족은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는 것을 저희들이 회상하게 될 때, 오늘 몸을 굽히고 마음을 가다듬어 역사적인 범죄성을 폭로시키고, 그 역사적인 죄악을 대신하여 회개해야 할 책임이 저희들에게 있음을 저희들은 슬퍼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아버님, 손길을 펴시옵소서. 아버지, 사랑의 심정을 나타내시옵소서. 아버지, 피곤한 발걸음을 다시 옮기시어서 저희를 찾아 주시옵소서.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예수께서는 하늘의 서글픈 심정을 갖고 쓰러져 가는 민족을 찾아 주셨사옵고, 그들을 불쌍히 여겨 자신의 생명도 아끼지 않고 그들을 찾아 주셨사오나, 택한 민족이라 자칭하던 이스라엘 민족은 하늘이 보내신 메시아와 준비하신 세례 요한을 자기들 멋대로 대접하여 역사적인 슬픔의 그늘에 숨겨 버렸다는 사실을 오늘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오늘 여기 모인 당신의 아들딸들로 하여금 그때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저희들보다 못해서 하늘을 배반한 것이 아니었고, 하늘을 위하는 심정이 저희들만 못해서 하늘을 잊어버린 것이 아니었음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새 시대에 대한 소망이 부족하였고, 새로운 메시아의 이념을 갖고 오실 주님의 모습이 클 것으로 알았는데, 정작 나타난 메시아가 너무도 초초하고 불쌍하고 형편없이 작은 모습이었기에 그들이 배척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저희 한 자체가 어떠한 자리에 처해 있는가 살피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오늘 저희들은 흔히 역사적인 이스라엘 민족을 비방하고, 역사적인 그때 당시의 사정을 비판하기 좋아하나 그때의 사정이나 오늘의 사정이 차이가 없음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그때에 있었으면 그들과 같은 무리였을 것이며, 저희들이 그 시대에 있었으면 그들과 같은 입장에 있었을 것을 자인하는 마음을 갖게 해주시고, 그러한 역사적인 죄의 흔적을 지니고 있는 자신들이라는 것과 사탄의 마수가 저희의 몸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이 시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도 모르는 사이에 생명의 권한을 잃어버리고 허덕일 때가 많사오니, 오늘 이 모든 모순된 환경을 타파해 버리고, 환경에 얽매인 모든 사정을 억눌러서 사탄이 즐거워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지 말고, 아버지의 슬픔을 덜어드릴 수 있는 심정의 제물이 되게 하여 주시옵길,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가 누구를 보려고 이 자리에 나왔겠사옵니까? 누구를 찾아서 이 자리에 나왔겠사옵니까? 오로지 저희가 바라고 찾고자 원하는 것은 아버지의 심정이옵니다. 어떤 역사적인 선생을 찾고자 모이는 무리가 되지 말고, 선지자를 통해 나타나는 아버지의 심정을 찾기 위해 모이는 무리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시여! 저희의 마음에는 세상에서 더럽혀진 죄악의 쓴 뿌리가 남아 있사옵고, 저희의 몸은 사탄의 침범을 당하여 상처를 입었사오니, 긍휼의 마음으로 나타나시어서 불쌍한 저희들을 이 한 시간이나마 아버지의 품에 품어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영원한 생명에 취하여 자신의 모든 인식을 넘고 아버지의 실존성에 화하여, 본연의 성품을 갖춘 모습으로 아버지를 대할 수 있은 이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남기신 천국의 이념을 저희에게 찾아 주시옵고, 남기신 새 나라의 기쁜 소식이 저희를 찾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해방의 종소리가 울리고 자유와 해방의 은사 앞에 저희들이 기뻐 춤출 수 있는 날이 어서 속히 오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이 인류 앞에 새로운 기쁨의 동산이 전개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남아진 시간을 주관하여 주시옵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뜻대로 허락하신 말씀을 나타내시옵소서. 어두운 사탄의 그늘을 제거시켜 주시옵고, 참생명을 얻게 된 기쁨을 소개할 수 있는 천적인 인연이 맺어지는 이 한 시간 되게 하여 주시옵고, 죽었던 몸들이 재창조의 부활의 은사를 받아 아버지를 알아볼 수 있는 시간 되게 하시옵고, 재창조의 말씀과 재창조의 생명의 움직임을 여기에 나타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올 때에,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니다. 아멘.
우리 인간들은 타락한 그날부터 오늘날까지 잃어버린 이상의 나라를 흠모하면서, 새로운 소망을 품고서 무한한 고초를 겪으며 싸워 나오고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주위는 행복하여야 할 주위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마음으로 그리며 사모하고 있는 모든 행복의 조건과 인연을 맺지 못한 채 불행 속에서 허덕이고 있다는 사실을 또한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런 입장에 선 것은 인간이 하나님께서 창조이상으로 지으셨던 천국을 잃어버렸기 때문임을 우리들은 다시 회상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에 모든 만물을 지으셨습니다. 그 중 아담 해와는 만물의 주인공으로 지음 받았습니다. 이 아담 해와는 하나님의 창조이상 동산에서 하나님 대신 온 피조만물을 주관할 수 있는 동시에, 하나님의 영광을 누릴 수 있었으며, 하늘과 땅 앞에서 화동할 수 있는 영광의 중심, 승리의 중심, 기쁨의 초점이었습니다. 이런 모습으로서 하늘과 땅 앞에 나타난 아담 해와였는데, 그들은 자기들의 위치를 잃어버리고 맡겨진 바의 책임을 감당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날부터 이 땅은 슬픔과 고통과 죽음의 땅으로 화하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나타나 이 사실을 부정하고, 그렇지 않다고 어떤 조건을 주장한다 할진대, 그는 자신의 마음을 부정하는 자요, 역사적인 사실을 부정하는 자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적인 생활을 부정하는 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인간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자신들은 불안하고 초조한 땅에서 살고 있고, 공포와 죽음의 어려운 환경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될 때가 왔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것을 자각하여 새로운 각성을 하고, 현실적인 모순을 제거하면서 새로운 심정에 사무쳐야 하고, 새로운 이념과 소망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또 우리는 창조주가 있다 할진대 그가 창조주로서 소망하던 이념을 지니고 오늘도 내일도 아니 일생 동안, 그 이념과 더불어 싸울 수 있는 각오를 가져야만 이런 모순된 환경을 타파하고 천적인 인연을 맺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아니 갈래야 아니 갈 수 없는 죽음의 길이요, 아니 부딪칠래야 아니 부딪칠 수 없는 고통의 환경이지만, 이 모든 것을 부정할 수 있는 마음과 모든 것을 부정하고 나설 수 있는 소망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이 모든 것을 잊고 달려갈 수 있는 새로운 이상 동산, 이것이 바로 우리들이 가야 할 목적이요, 이것이 역사노정에서, 혹은 역사의 종말에서 찾아 세워야 할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알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소망하시는 것이요, 인류가 소망하는 것이요, 이 민족과 오늘의 우리가 소망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오늘날 여러분은 그것에 대한 책임을 짊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느껴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 앞에 말씀드리고자 하는 제목은 ‘소망인 이상천국’입니다, ‘소망인 이상천국.’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소망이 꺾어지게 되었고, 인간의 소망도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소망의 대상인 인간은 우주를 대신한 하나의 주인공으로서, 혹은 천주적인 이념의 개체로서, 이상적인 개체로서, 전체적인 제물로서 하늘을 움직일 수 있고 땅을 움직일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인간이 되지 못한 연고로 우리 인간에게는 소망이 남아지게 되었고, 하나님의 소망이 남아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하게 될 때, 인간을 위하여 지었던 창조 동산이요, 인간과 더불어 행복을 누리기 위한 창조이념이라 할진대는, 그 창조 동산과 이념 은 우리 자신들로 말미암아 결정된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다시 한번 회상하여 이 일을 책임질 수 있어야 하고, 싸울 수 있어야 하겠으며, 하나님의 역사적인 한을 풀어 드릴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슬프다면 그 이상 슬픔이 없고, 억울하다면 그 이상의 억울함이 없고, 분하다면 그 이상의 분함이 없는 이러한 심적인 충격이 여러분 자신에서부터 폭발되는 그 시간이 여러분이 새로운 이념과 소망을 찾아 나갈 수 있는 한 시간이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은 타락한 인간들의 마음에 새로운 충격을 일으켜 주기 위하여 오늘 이 시간까지 싸워 오셨다는 것을 우리들은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늘의 사명을 대신 맡았던 수많은 선지선열들도 잠들어 있는 사망권 내의 인류를 깨우쳐 그들에게 새로운 이념의 세계가 있고, 새로운 소망의 동산이 있다는 것을 각성시키고, 지금까지 자기들이 살아온 모든 환경을 부정하고 나설 수 있는 충격을 일으켜 주기 위하여 싸웠고, 또한 죽어갔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선지선열들이 역사노정을 거쳐오면서 하늘을 대신하여 그 시대 시대에 경고하였던 말씀에 충격을 받아 그 말씀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중심삼고서 그 시대를 박차고 나선 무리, 민족, 인류가 없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범죄를 슬퍼해야 할 자체들인데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는 이런 범죄에 대한 인식조차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야곱에게 자신이 원치 않았던 21년의 광야 생애가 있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부딪치는 어려움, 21년 동안에 거듭되는 모든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던 마음의 기준이 야곱에게는 잡혀 있었습니다. 즉 하늘 대한 철석같은 심정과 그의 마음에 부딪친 하늘의 충격에 의한 심정이 그의 생활을 지배할 수 있고 생애를 지배할 수 있었기 때문에, 환경적인 모든 고난을 이겨내고 복귀노정을 늠름히 넘었다는 것입니다.
하늘의 충격을 받았던 그날의 각오를 가지고 일신에 미쳐지는 모든 고통과 어려움을 개의치 않고 나선 야곱이야말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실수하였던 연장의 역사를 가로막고 사탄을 물리친 믿음의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민족적인 책임을 지고 태어났던 모세의 마음은 호화로운 바로 궁중 생활로써 지배할 수 없었습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동안 불쌍한 목자 생활을 한 모세였지만, 그 환경이 모세의 심정에 스며든 심적인 충격을 점령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모세에게는 민족을 넘고, 인류를 넘고, 세계를 넘어서 하늘과 인연 맺기를 원하는, 솟구쳐 오르는 심적인 충격이 있었기 때문에 미디안 광야 40년을 무난히 넘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선조들이 일심으로 고대하였던 것은 무엇인가? 새로운 나라,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었습니다. 이것을 찾아 세우기 위하여 싸워 나왔던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모세가 60만 대중을 거느리고 광야에 나아가 유리한 40년 기간에도 주위 환경은 대단히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그가 모든 어려운 환경적인 조건들을 잊어버리고 60만 대중을 가나안으로 인도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 약속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려는 사무친 심정과 가나안 땅에 대한 소망의 심정이 60만 대중이 반대하는 심정보다 강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4천년 동안 하늘이 소망하셨던 중심존재로, 인류에게 이상적인 천국이념을 소개하고 그 이념을 성취하는 중심존재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그 시대의 환경에 젖어 있는 말씀에 치우치지 않았고, 그 사회 환경의 생활에서 만족하지 않았으며, 형식과 규례에 사로잡혀 있는 의식적인 유대교단의 풍습에 사로잡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역사적인 모든 것을 부정하고 새로운 충절의 심적 기준과 그것을 중심삼은 새로운 말씀을 갖고 나타났을 때, 그 말씀과 더불어 새로운 행동을 제시하고 나타났을 때에, 역사적인 인물, 역사적인 단체, 역사적인 모든 국가는 예수에 대해 반기를 들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가 이념을 찾아 나가는 노정에 있어서 막혀진 곡절이었던 것을 우리들은 역사를 통해서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보다도 내일, 내일보다도 내년에, 내년보다도 금세기에, 금세 기보다도 다음 세기에 더 좋은 이념을 인간에게 연결시켜 주셔서, 인간들을 최대의 이념의 수준에까지 끌어올려 주고 싶어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지나 온 역사를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끝날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하고 있는 때에 살고 있고, 세계 만민이 죽느냐 사느냐 하는 이런 때, 자체의 존재성을 자랑할 수 없는 이런 시점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2천년 전에 예수님이 소개해 주신 이념을 가지고 각자 각자가 새로운 마음의 충격을 받고, 현실적인 묵은 체제 위에 살고 있는 각자 각자가 새로운 마음의 폭발을 일으키게 할 수 있는 움직임이 이 시대에 나타나지 않을진대, 이 시대는 역사의 슬픔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종말에 처해 있는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배울 수 있는 말씀은 다 배웠습니다. 수많은 학자들이 2천년 동안 머리가 터지도록 노력을 기울여 성경을 연구해 보았으나, 그것은 그것으로써 끝나고 말았습니다. 자기들이 완전하다고 했던 이 모든 움직임이 발전한 것 같고, 이상적인 이념을 인간들 앞에 제시한 것 같으나 그것은 인간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천적인 이념이 아니었고, 심정의 동산을 개척하게 할 수 있는 새로운 움직임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현실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이런 장벽을 무너뜨리고 헤쳐 나갈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그러면 지금 인류는 너와 나를 막론하고 모두가 절망하고 있는데 제일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창조주가 계신다 할진대 그 창조주가 이루시길 원하시는 천국이 있을 것인데, 그 천국 이념을 어떻게 인간들에게 소개해 주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까지의 이념으로써는 안 되겠기에 새로운 이념이 필요하다고 느끼고, 마음으로 그 새로운 이념을 흠모하는 심정을 갖지 못한 자가 그냥 새 것을 바라면 그는 역사적인 범죄자라고 보아야 합니다.
새로운 이념이 나타나길 고대하고, 모든 인류가 행복해지기를 바란다면 여러분은 모든 원한의 고개를 넘어야 하고, 현실의 모든 것을 박차고 밀어내고 싸워 나갈 수 있는 마음의 각오가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묻고 싶은 것은,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역사적인 고집을 타파해 버릴 수 있는 사람, 새로운 충격을 일으키고, 새로운 이념에 불탈 수 있는 사람을 만들 수 있는 이념이 어디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또 하늘이 있다 할진대는 이러한 이념을 우리에게 마음 놓고 소개해 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까? 해 보지 못했다 할진대 이 이념의 동산, 즉 이상세계를 그리워하면서 찾아 허덕여 나왔던 우리의 선조들 앞에 면목 없는 죄인인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늘을 향한 심정에 사무쳐서 새로운 창조이념의 세계, 인간이 찾아가야할 소망의 세계를 마음으로 느끼시고, 그 느낀 충격에 의해 행동할 수 있었던 예수님께서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충격에 의해 행동하실 때의 환경은 어떠한 환경이었던고? 예수께서 발걸음을 옮기면 옮길수록 만민이 화합하여 예수를 환영해야 했는데 아무도 환영하지 않는 환경이었습니다. 그때 당시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역사상의 수많은 인류나, 영계에 가 있는 수많은 영인들도 예수님께서 부르짖던 말씀과 그의 역사적인 행적, 또한 예수의 책임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이렇게 예수를 환영한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이념을 갖고 오셨던 예수님께서는 그 이념을 세워 나가는데 있어서, 그 이념의 목적이 성취되는 날까지 자기의 일신에 부딪쳐 오는 모든 반대의 조건들을 타파하고 나서지 않으면 안 될 것을 마음에 사무치게 느끼셨습니다. 이념에 의한 충격이 강하면 강할수록 환경에서 오는 모든 악조건을 물리칠 수 있는 철석같은 일념이 그에게 있었기에, 예수는 어떠한 환경에 부딪쳐도 그것을 물리치고도 남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마음으로 그 무엇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그 무엇을 찾아 허덕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또한 공포와 불안 가운데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이런 때에 처해 있는 우리들은 이 모든 공포와 불안의 조건들을 벗어 버릴 수 있는 그날을 동경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들만이 이러한 환경에 처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2천년 전에 왔다 가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이러한 환경에 계셨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여러분이 회상하면서 예수님께서 어떻게 그 환경을 헤쳐 가셨는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으로부터 만물이 지어졌고, 그 지어진 만물은 참다운 주인으로부터 주관을 받아 이상천국이 이루어졌어야 할 것이었는데,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창조주께서 이상하셨던 이상천국이 지상지옥으로 화하였고, 말할 수 없는 공포와 불안의 세계로, 싸움의 세계로 변해 버렸다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그 이념과 이상천국을 소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상지옥인 이 세상을 책임지고 구원하시기 위해서 공생애노정을 출발하셨던 것입니다.
이상천국을 향하여 나아가는 예수는 말할 수 없는 외로움과 역경과 슬픔에 부딪쳤습니다. 그래도 예수님께서는 가야 할 길인 것을 아셨기에 그러한 길이라 할지라도 이상적인 동산이 이루어질 때까지, 그 동산에서 인류를 대신하여 창조주와 상봉할 수 있을 때까지 예수는 가야만 되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느껴야 되겠습니다. 우리들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그 이상 동산을 향하여 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이 이러한 충격을 받았다 할진대, 그 충격과 더불어 여러분은 ‘아버지여! 나는 가고 싶소이다! 소망의 이상천국을 향하여 나는 가고 싶소이다!’ 하는 마음, 가고 싶은 마음에 사무쳐야 되겠습니다.
소망의 이상천국을 향해 가는 길은 평탄한 길이 아니고 슬픈 길입니다. 천국으로 가는 길은 천국에서부터 출발되는 것이 아니라 죄악세계에서부터 출발되는 것입니다. 죄악세계인 지옥에서 출발하여 그 지옥을 박차고 나서야 천국과 연결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가야 할 운명에 놓여 있습니다. 소망의 이상천국을 향하여 가야할 운명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길을 가야만 했던 예수를 생각해 봅시다. 그 예수는 어떠한 길을 가셨습니까? 평탄한 길을 가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뭇사람으로부터 환영받는 길을 가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만민의 구세주요 만우주의 주인공이었으되, 주인공으로서의 행사를 한 번도 해 보지 않았고 자신을 자랑하여 자기를 따르라고 대중에게 선포하기를 주저하셨습니다.
섭리의 길을 가는 데 있어서도 앞장서서 가야 할 예수는 앞서 가지 못하시고 민족의 맨 뒤에 서서 ‘너희들은 편안한 길을 가라. 나는 제일 어려운 길을 가겠다’고 하시며 민족의 어려움, 세계의 어려움을 도맡고 인류가 싫어하는 고난의 십자가를 도맡아 지고 인류를 위해 가셨습니다. 그 예수께서는 자신이 가야 할 길이 역사적인 슬픈 길이요, 악조건으로 엉클어진 길이라 할지라도 그 길을 가셔야 했기에, 30년 준비기간, 3년 공생애기간 동안 비장한 심적 각오를 하고 걸으셨습니다. 그 각오가 비장하면 비장할수록 슬픔을 겪는 인류의 친구가 되셨고, 인간들이 공포의 생활 속에서 허덕이고 있는 것과 사탄에게 유린당하는 것을 분해하시며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역사적인 최하의 자리에서, 시대적인 최하의 자리에서 사탄과 싸우셨습니다.
‘인류의 슬픔이 있다 할진대 그것을 내가, 인류의 어려움이 있다 할진대 그것을 내가, 인류의 죽음이 있다 할진대 그것을 내가 책임지겠다’는 마음을 갖고 걸으셨습니다. 그의 발걸음은 개인의 발걸음이로되 그의 지신 바의 사명은 역사적인 사명이요, 시대적인 사명이요, 미래적인 사명이었습니다.
그러면 창조 이후의 하나님의 심정과 인류의 심정, 또 피조만물에게 어떠한 심정이 있다 할진대 그 심정까지 헤아려 그것을 해원해야 할 책임을 짊어진 예수님은 어디를 향하여 걸어갔던가? 어떤 호화찬란한 궁전을 찾아 간 것이 아니요, 영광 가운데 권세를 누리는 어떤 고관의 집을 찾아간 것도 아니었습니다. 시대적으로 모든 조건이 구비되지 아니한 때에 뜻 앞에 세워진 것을 아신 예수는 그 반대의 길을 찾아 나섰던 것입니다.
하늘이 4천년 동안 믿어 온 이스라엘과 그 나라를 대표한 유대교단이 가야 할 길이, 하늘과 연결할 수 있는 소망의 길이 막혀 있는 것을 아시고, 이 소망의 길을 터치기 위해서 앞장서 나가려 하셨으나 그들이 믿지 않았던 연고로, 민족의 뒷전을 찾아 나설 수밖에 없었던 예수였습니다.
소망의 천국을 향하여 가야 했던 예수, 개인을 넘고 가정을 넘고 민족과 국가를 넘어서 세계를 하늘로 이끌어야 할, 이념의 세계로 이끌어 가야할 예수, 그 예수는 이념을 품고 민족의 선두에 섰으나 민족에게서 쫓겨났습니다. 교단에게서 쫓겨났습니다. 가족에게서 쫓겨났습니다. 제자에게서도 쫓겨났으며 강도한테까지도 쫓겨났습니다. 그때 당시 예수의 심정이 얼마나 서글펐겠습니까?
아버님의 이념으로 전진해야 할 예수께서, 세계 인류 앞에 행복의 동산을 소개해야 할 예수께서 반대의 길을 가셔야 했는데, 그 예수의 모습과 예수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예수님은 가야 할 곳을 향해 바로 가지 못하게 되면 돌아서라도 가야 했습니다. 4천년 역사가 경과했으니 그 4천년 역사를 되돌아서라도 가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의 사명이요 책임인 연고로 그는 하나님께 몇 번씩이나 기도하였습니다. ‘아버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막는 장애물이 있다면 그것을 버리고 돌아서, 몇천년 걸리는 길을 걸어서라도 나는 가겠나이다. 오직 소망의 동산을 향하여 나는 가겠나이다. 아버님이여, 내가 있사오니 낙심하지 마시옵소서’ 라고.
그런데 하늘이 세우신 민족, 하늘이 세우신 교단, 하늘이 세우신 가정, 하늘이 세우신 세례 요한 일당이 모두 예수의 가는 길을 막았으며 배반하였습니다. 이런 가운데 예수를 바라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예수 앞에 면목이 없었습니다. 안 그렇겠어요?
메시아를 모시기 위하여 4천년 동안 준비하였던 환경적인 모든 조건이 일시에 무너지게 될 때 예수는 도리어 슬퍼하시는 하나님을 위로하려는 입장에 섰습니다. 하나님이 슬프니 그도 슬펐을 것이어늘, 슬픈 자기의 입장을 부정하고 하늘을 위로하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섰던 예수, 그 예수는 민족으로부터 원수 취급을 받았고, 교단으로부터 이단자로 몰림 받았으며, 가정으로부터 배반자라는 비난을 들었으며, 강도들에게까지 조롱을 받았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산정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면서도 죽이려드는 원수를 위해 입을 열어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시옵소서’ 라고 복을 빌어 주고 기도하셨습니다.
하늘의 이념 동산을 향해 갈 것을 하늘 앞에 맹세하고 나선 예수는 그의 길이 영광과 행복과 기쁨으로 종결되지 않고, 슬픔과 억울함과 분함과 죽음으로 종결된다 할지라도 가야 했습니다. 아버지께서 찾으시는 그 이념의 동산을 향해 가야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이념의 동산을 찾아가신 것은 인류를 대신하여 간 것이요, 역사를 대신하여 간 것이요, 온 피조만 물을 대신하여 간 것입니다. 그런 고로 그 예수를 따르고 있는 우리들도 가야 할 운명에 놓여 있습니다. 살아서 못 가면 죽어서라도 가야할 운명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예수는 인류의 고난을 짊어지고 인간의 말단의 자리에서 출발하여 최후에는 골고다 산정까지 갔습니다. 그 자리는 예수 일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는 자리였습니다. 오! 하나님의 아들, 하늘의 황태자, 하늘의 왕자의 모습은 어디로 갔던고! 인류의 메시아, 인류의 구세주로서의 그 모습은 어디 갔던고! 그 자리는 자신의 어떠한 가치를 일푼어치도 주장할 수 없는 분하고 억울한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러한 죽음의 고개를 넘어 하늘을 바라보시며, 하늘의 이념 동산을 향하여 나가실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의 이념이 사망의 힘보다 강했고, 그의 이념이 역사적인 어떠한 힘보다 강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고로 사망권을 헤치고 부활이 벌어졌고, 반대하는 인간들을 회개시켜 오늘날의 기독교가 승리의 터전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가신 예수의 뒤를 따라가야 할 오늘의 우리는 죽어도 가야하고 살아도 가야 합니다. 이렇게 가고 싶은 마음이 여러분에게 사무치고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이 ‘어떠한 충격을 받아도 그 이념을 향해 가고 싶소이다. 먹어도, 굶어도, 매를 맞아도, 천대를 받아도, 핍박을 받아도 가고 싶소이다’ 할 수 있는, 사망의 힘보다도 큰 느낌이 없다 할진대, 역사적인 종말에 나타나는 대심판에서 사망권을 넘을 수 없습니다. 가고 싶은 마음, 즉 ‘이래도 가고 저래도 가겠습니다. 아버님이여, 당신이 계심을 알았사오니, 당신의 이념세계가 이렇다는 것을 알았사오니 아무도 안 가더라도 나만은 가겠습니다’ 하는 마음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는 길은 평탄한 길이 아닙니다. 인간 시조가 처음부터 평탄과 행복과 기쁨으로 출발하지 못하고 슬픔과 비애와 역경과 공포와 불안 가운데서 출발했던 연고로, 이것을 탕감해야 할 최종말기에 있는 우리도 그러한 역사적인 모든 슬픈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하나의 천적인 이념을 소개해 줄 메시아가 나오지 않는 한 인류는 불안과 공포와 사망권 내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살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는 본래 제물의 교단입니다. 십자가의 교단입니다. 피 흘리는 교단입니다. 봉사하는 교단입니다. 먼저 죽기 위해 나서는 교단입니다. 하늘이 움직여 나온 기독교는 이러한 역사 과정을 거쳐오면서 전통을 빛냈거늘, 오늘 이 시대의 기독교에 이런 것이 없다면 천벌을 받아야 된다는 겁니다. 이렇게 단정을 내릴 수 있습니다.
세계의 운명을 개척해야 할 기독교는, 세계적인 서러움을 갖고 통곡하시던 예수 대신, 골고다 산정에서 피를 흘리며 운명하시는 그 경각에 ‘저들의 죄를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라고 하시던 예수님의 심정에 사무쳐 외칠 수 있는 하나의 목자, 하나의 양이 되어 하늘땅의 원한을 헤치고 새로운 이념과 새로운 소망과 새로운 이상 동산을 소개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또한 여러분들은 반대와 핍박 끝에 골고다 산정에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이 부활하실 것을 몰랐던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그들을 대신한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사람이 예수의 죽음을 놓고 죽음을 무릅쓰고 하늘 앞에 나갔던 것과 같이, 죽음을 각오하고 하늘 앞에 나타날 수 있는 목자, 그러한 양떼가 있다면 그들이 새로운 시대와 새로운 천적 이념을 연결시킬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명심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오늘 우리의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을 새로이 감정해야 되겠습니다. 나타나는 어떠한 지도자도 다시 감정해야 되겠습니다. 유대교 제사장들, 그들은 어떤 무리였는가? 그들은 천적인 새로운 소식을 유린한 무리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무엇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고, 무엇이 우리의 나라를 정신적으로 주관하고 있는가를 재분석해야 되겠습니다.
오늘 이 시대적인 모든 죄악의 기반을 타파하고, 새로운 소망 가운데로 이끌어 주는 새로운 이념에 불타게 할 수 있는 충격을 여러분이 교단을 통하여 받지 못할진대, 그 교단은 제1이스라엘이 받은 것과 같은 심판을 모면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가야 되겠습니다. 기성교회, 혹은 타종교 신자들의 신앙 이념을 타고 넘어가야 되겠습니다. 나아가 예수의 십자가를 타고 넘어가고, 더 나아가서 십자가뿐만이 아니라 예수의 부활의 심정을 타고 넘어가, 하나님의 심정까지도 타고 넘어가서 하나님을 위로해 드릴 수 있는 아들딸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그런 자리까지 우리는 가야만 되겠습니다.
가고 싶은 그곳, 아버님이 계신 그곳, 주가 계신 그곳, 인류의 참다운 형제가 있는 그곳, 그곳을 향하여 가는 우리들의 발걸음이 어디에 머물 수 있겠습니까? 땅의 그 무엇이 붙들더라도 가야 할 이념의 길, 우리의 길을 막고 있는 일체의 조건들을 밟고 넘어서서 그들까지도 이끌고 가야 할 길이 여러분 앞에 있습니다.
이러한 책임을 짊어지고라도 가야 할 우리들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6천년 동안 우리를 찾아오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야 할 운명에 놓여 있고, 하늘은 우리를 찾아오셔야 할 운명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를 찾아오시기에 하늘은 말할 수 없는 수고를 하셨는데, 여러분은 그 하늘의 수고를 생각해 보았습니까? 타락한 그날부터 아담의 뒤를 따르시지 않았던 때가 없었고, 아담의 후손들의 뒤를 따라오시지 않은 때가 없었던 하나님, 그 하나님이 오늘도 여러분이 모르는 사이에 쉬지 않고 여러분을 찾아오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그 하늘을 찾아보았습니까? 거기에는 6천년의 슬픔과 수천 수만의 사망의 고개가 가로막혀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를 찾아오신 하늘의 걸음이 이렇거늘, 하늘을 찾아가는 우리도 이러한 길을 가야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일신을 위한 어떤 이념을 찾기 위해 오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만민의 중심으로서 만민에게 행복과 소망의 동산을 소개해 주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래서 만민을 위하여 수고하셨고, 만민을 위해 고통을 당하셨고, 만민을 위해 슬픔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그 예수는 그렇기 때문에 피조만상, 하늘땅의 어떠한 존재도 예수의 슬픔과 관계없는 것이 없었으나, 그는 갈 길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거기에서 슬퍼하고 탄식하며 죽어가지 않고 새로운 소망을 남기셨습니다. 그리하여 메시아의 기준을 완결지어 새로운 소망의 동산을 개척하는 주인이 되셨습니다. 이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까지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니 예수님은 분하고 원통하게 가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알았으니 그렇게 보내 버린 예수를 찾아가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만나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찾아가고 싶은 마음에 사무치는 동시에 만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야 되겠습니다. 4천년 동안 수고하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손길을 붙들고 싸우신 것과 마찬가지로, 여러분들은 예수 이후 2천년 역사, 아니 6천년 전체 역사를 대신한 천적인 모습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과 그분께로 가고 싶은 마음에 사무쳐야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슬플 때 위로해 주시던 하나님과 예수님, 어려울 때 도와주시던 하나님과 예수님, 억울함과 분함을 당할 때 그것을 대신해 주시던 하나님과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만나는 데는 곡절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돌아가실 때 인간들에게 여러 가지 부탁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하늘에 가서 있을 곳을 예비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한편 다시 만날 그날을 약속해 놓으셨습니다. 우리에게는 가야 할 걸음이 남아 있는 동시에 만나야 할 한 날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고로 가야겠다는 결심만 가지고는 안 되겠습니다. 만나야 되겠습니다.
만날 그날이 역사의 종말이요, 기독교적으로 보면 재림의 날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 재림의 날을 맞이하고 싶은 마음과 가고 싶은 마음을 갖고 고난과 핍박과 억울함과 사망권 내에 있는 지옥의 문까지 박차고 나가야 되겠습니다. 사탄이 참소할 수 있는 일체의 조건이 제거되어 하나님의 이념대로 움직이는 곳이 천국입니다. 고통의 조건이 완전히 제거되고 기쁨으로 출발할 수 있는 곳이 천국인 고로, 땅에서 가야 할 고통의 노정을 다 가지 못하고 남기면 남긴 만큼 영계에서 고통 당하게 됩니다.
우리 인간들은 가야 할 길을 다 가고 난 후에야 만날 수 있는 입장에 있습니다. 예수가 먼저 가신 역사적인 길을 다시 걷고 난 후에야 만날 수 있는 이런 입장에 있는 우리가 만난다면 누구와 만나겠는가?
하나님은 예수님이 왔다 가신 후 2천년 동안 만나기 위한 준비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끝날에 하늘의 신부를 만나기 위하여, 영계에 가서 2천년 동안 하나님 앞에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시며 준비하고 계십니다. 가신 예수님에게는 신랑으로서의 책임 분야가 있고, 땅 위의 인간들에게는 신부로서의 책임 분야가 있습니다. 그런 연고로 신랑 되신 예수님께서는 영계에 가서 2천년 동안 그 책임을 감당하는 수고를 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땅에 남아 있는 신부들이 어떻게 신랑을 만날 것인가? 먼저는 책임을 완수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땅 위에 나타날 책임을 완수하고 나타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책임을 완수해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그 대가로 하늘의 선물을 받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부의 입장에 있는 전세계 기독교인들에게 남아져 있는 신부로서의 책임을 완수해야 되겠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 16:25) 하셨습니다.
우리는 책임을 수행하는 노정에서 주기 위해 싸우는 무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책임을 완수하기 위해 먹을 것을 먹지 못하고 하루도 마음을 편하게 갖지 못한 신랑 된 예수와 마찬가지로 역사노정을 거쳐오면서 땅을 위하여 싸운 그 무리들의 심정 앞에 부끄럽지 않게 됩니다. 이렇게 각자가 책임을 다한 후에야 예수를 만날 자격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겠습니다.
오늘날까지 타락한 인간으로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책임을 다한 사람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간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도 낙원에 계십니다. 낙원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대합실입니다.
그러면 인류의 소망은 무엇이뇨? 타락의 원한을 해원할 수 있고, 복귀의 노정을 거쳐서 하늘의 사무친 원한의 조건을 탕감하여 ‘인간으로서의 책임을 다하였나이다’ 할 수 있는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그 모습이 예수께서 2천년 동안 준비하여 찾으려 하시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예수를 만나고 싶은 심정에 사무쳐 오늘날 생활적인 분야에서 예수의 서글펐던 역사적인 조건을 우리가 청산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서글픈 걸음으로 가신 모든 역경의 노정을 우리는 승리하여 기쁨으로 걸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기독교 신자들이 개척 노정을 걸어 골고다로 가시는 예수의 길을 가로막고, 승리의 노정을 개척하여 예수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는 책임을 완수한 입장에서 예수를 맞이해야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에게 보고 싶은 마음이 어디 있고 가고 싶은 마음이 어디 있습니까? 보고 싶은 마음도, 가고 싶은 마음도 없는 우리입니다. 보고 싶은 마음에 사무쳐 자기 일신이 찢기고 죽임을 당하는 자리에 갈지라도, 보고 싶은 마음으로 그것을 넘을 수 있는 간절한 심정을 가진 무리가 땅 위에 나타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2천년 동안 보고 싶어 찾아오신 예수를 만날 면목이 선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저희들은 보고 싶사옵니다. 하늘이여! 예수의 소원이 무엇이었사옵니까? 그의 소원은 이 땅과 하늘이 이상천국이 되는 것이었다는 것을 아옵니다. 그 소원의 천국이 건설되기 위해서는 천국에 살 수 있는 백성이 있어야 되고, 천국을 이룰 수 있는 땅이 있어야 되고, 그에 따른 천국의 주권이 있어야 되고, 그 주권을 움직일 수 있는 하나의 통치자가 있어야 된다는 것을 아옵니다. 이 땅에 사는 만민이 천국 백성이 되게 하시옵소서. 그것이 보고 싶사옵니다’ 라고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 땅이 아무리 넓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땅은 한 조각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내 것이다’ 할 수 있는 땅도 없습니다. 영원히 사탄이 침범할 수 없다 할 수 있는 한 조각의 땅도 갖지 못한 예수였습니다.
그러한 예수의 이념이 하늘의 이념이요, 땅에 건설해야 할 지상천국의 이념이거늘, 그 이념이 보고 싶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싶어서 허덕이며 찾아 헤매는 무리가 있어야겠기에 예수는 찾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문을 두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땅 위에 남아진 원한의 길을 타개해 나가는 데 있어서는, 예수가 마음으로 동경하는 이념의 세계를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야만 그 이념의 실체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제1이스라엘이 망한 후 전세계 기독교인들은 제2이스라엘로서, 예수가 동경하던 그 나라와 그 민족과 그 땅과 그 주권과 그 통치자가 나타나게 하기 위해 지금까지 수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이 그 이념과 부합되지 않으니 슬픔이 있다면 이 이상의 슬픔이 없을 것입니다.
애국자는 어떤 사람이 애국자입니까? 백성의 불쌍함을 보고 자기의 아픔보다 더 아픔을 느끼는 자요, 그 땅이 유린당하는 것을 볼 때 자기의 몸이 찢어지는 것보다 더 아픔을 느끼는 자요, 그의 주권자나 그의 통치자가 억울하고 불쌍한 처지에 있는 것을 보고 자기가 불쌍하고 억울함을 당하는 이상의 억울함과 불쌍함을 느끼는 자가 애국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늘의 왕자를 대할 신부라는 황공한 말씀이 왠 말입니까? 우리는 말씀조차 대할 수 없는 불충의 모습이요, 불미의 모습이요, 죄악의 모습들입니다. 그러니 황공한 마음을 갖고 하늘의 백성이 유린당하고 이 강토가 사탄에게 짓밟히는 것을 볼 때,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것을 회복하기 위해 싸워야 되겠습니다. 우리에게는 선의 주권을 회복해야 할 천적인 사명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은 양심 이념을 갖추어 지상의 악당들을 박멸시켜야 할 때가 온 것을 알아야 됩니다. 예수가 바라시는 모습과 소원의 한 날이 어떠한 것인가를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립고 만나보고 싶은 심정, 예수께서 살아생전에 고대하시던 그 이념의 땅과 그 백성과 그 주권과 그 통치자를 만나보고 싶은 마음, 십자가의 고비도 용서의 심정으로 넘으신 분의 뜻을 성취하기 위하여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내 몸이 사라지기 전에 그 나라를 보고 싶다. 그 나라의 백성을 만나고 싶다’ 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그 나라는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하늘의 땅을 만들고 싶구나. 선의 주권을 회복하고 싶구나. 그런 주의 앞에 충성하고 싶구나’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시대가 촉박해질수록 우리의 운명은 비장한 역사의 시점에 놓여 진다는 어마어마한 사실을 뼈 살이 사무치게 느껴야 합니다. 이럴 때가 왔습니다. 여러분들은 누구를 위하여 존재하는 사람입니까? 여러분은 자신을 위해 있는 것 같지만 자신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요, 가정을 위해 있는 것 같지만 가정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요, 국가, 세계를 위해 있는 것 같지만 국가 세계를 위해 있는 것도 아니라고 나는 단정하고 싶습니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가정, 우리의 사회, 국가, 우리의 세계가 이대로는 하늘의 이념의 세계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만나고 싶은 마음에 사무쳐 우리에게 맡겨진 책임을 다해야만 소망하는 분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만난 다음에는 어떻게 그분을 대해야 할 것인가?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한 예수를 붙들려고 했을 때 예수는 거부했습니다. 이것은 막달라 마리아가 가야 할 길을 다 가지 못했고, 준비해야 할 예물을 다 갖추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예물을 갖추지 못한 자는 예수 앞에 나타날 수 없다는 사실을, 예수는 거기에서 우리에게 훈계하신 것입니다. 그런 고로 우리는 가야 할 길을 다 가고, 싸워야 할 싸움을 다 싸운 승리의 모습으로 예물을 준비해야 되겠습니다.
여기서의 예물은 무슨 예물입니까? 여러분 자체가 예물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예물이 된 정도만큼 여러분을 대하여 주실 것입니다. 또 그 정도만큼 하나님은 여러분을 만나 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갈 길을 다 가고 아버지를 만난 후에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아버지의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또 최후의 신랑 신부의 혼인잔치에 참여하여 기쁨의 상봉을 한 후에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아버지의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인류의 소원입니다. 최후에 남아진 것은 사랑을 받는 일인 것입니다.
‘이 사랑을 받기 위하여, 나는 죽음의 길도, 어떠한 어려운 길도, 고통의 길도 거쳐왔습니다. 사탄까지도 사랑하기에 힘썼고, 죽어가는 한 생명을 붙들고 그 생명 대신 제물 되려고 싸우기도 하였습니다. 아버지께서 땅 위의 인간들을 대해 하고자 하셨던 사랑을 내가 대신하였고, 사랑을 갈구하는 인간들에게 내가 모든 심정을 다 기울여 주었사오니, 아버님! 나를 사랑해 주시옵소서!’ 하는 여러분의 그 한마디에 하늘이 순순히 응할 수 있는 그 한 시간을 여러분은 맞이해야겠습니다.
여러분이 믿고 있는 예수는 30여년 동안 눈물의 길을 걸었습니다. 슬픔과 죽음의 고개를 넘었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셔서 하나님께서 ‘아버지, 내가 왔습니다. 4천년의 아버지의 심정을 내가 알았고, 그 심정을 소개하기 위하여 내가 제물이 되어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아버님!’ 하게 될 때 하나님은 그 ‘아버님!’ 하는 음성에 자신의 위신을 망각하고 예수를 붙들고 통곡하시며 기쁨의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 순간은 잃어버린 자식을 찾은 순간이요, 하늘과 땅과의 인연이 맺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그러한 순간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위신도 잊어버리고 예수를 붙들고 통곡의 눈물과 기쁨의 눈물을 흘리셨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역시 최후에 아버지 앞에 나타나서 ‘오라 하신 길을 왔사옵고, 만나자 하는 말씀을 믿고 아버님을 만나러 왔사오니, 아버지, 이제 황공하신 아버지의 사랑의 품에 품어 주시옵소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사랑의 품에 안기어서 아버지께서 손을 들고 ‘영원한 사랑권 내에서 살지어다!’ 하고 축복해 주시는 그 축복을 받아야만 되겠습니다. 그래야만 우리의 소원인 이상 동산, 즉 천국 건설의 종결이 지어집니다.
천국의 건설은 개체 개체가 그렇게 완성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도 이러한 이념을 위하여 싸우셨고, 우리의 선조들도 이러한 이념을 찾아 나왔으며, 오늘날 도의 길을 가는 수많은 사람들도 이러한 목적을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풀어야 할 심정은 무엇인가? 가고 싶은 마음, 만나고 싶은 마음도 있어야 하겠지만, 그것들은 다 지나가는 것이요, 타락세계의 인간들이 탕감해야 할 것들입니다. 우리에게는 그보다 더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싶은 심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영원 전부터 하나님이 쌓아두셨던 그 사랑을 받은 하나의 영원한 사랑의 실체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사랑의 아들딸을 찾았다고 만물 앞에 세워 자랑하고 온 세계 만민 앞에, 사탄 앞에까지도 자랑하게 될 때, ‘옳소이다. 당신이 찾기를 원하던 사랑의 열매요, 당신이 이념으로 세우고자 하셨던 사랑의 동산의 주인공입니다’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죽지 않고 영육을 합하여 하나님의 진정한 사랑을 받아서 그대는 아버지가 찾고자 하시던 모든 인류가 소망하던 존재요, 하늘과 땅에 천국이념을 건설하고, 그 이념 천국을 지배할 수 있는 제2의 천적인 하나님의 후계자라고 모든 만상과 악한 사탄도 증거하고 머리 숙일 수 있는 그러한 존재가 되어야만, 천국의 주인공이 될 수 있고 천국의 아들딸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날도 재촉하시는 하늘의 심정을 체휼하게 될 때에, 저희 인간의 몸이 연약한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오늘도 하늘의 사무친 심정이 저희들에게 연결되어 흐르고 있다는 어마어마한 사실을 느끼게 될 때 황공하옵니다. 아버지, 저희를 붙드시고 아버지의 소원과 아버지의 심정과 아버지의 사정을 해원해 달라 하시는 황공하신 분부 앞에 몸과 마음이 제물 되어 남기신 십자가의 길을 가고자 원하오니, 끝까지 지치지 말게 허락하여 주옵고, 마음에 사무친 충격의 심정으로 죽음의 고개를 넘고도 남음이 있을 수 있고 지친 몸을 지탱할 수 있도록 하늘과의 인연이 끊기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그립고 보고 싶은 이상 동산을 만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러기 위해서는 저희에게 책임이 있사오니, 책임을 다하여 남아진 결실체로서의 조건을 다 갖추어 선물로 드려질 수 있는 기쁨의 모습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늘이 사랑하고 싶고, 또 하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아버지의 참다운 본연의 아들딸들로서, 영원한 사랑의 인연과 사랑의 생명과 사랑의 영광 속에서 살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께서 사랑하지 않을 수 없고 사랑받지 않을 수 없는 저희들 되게, 아버님, 이끌어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그 나라의 백성으로서, 그 나라의 아들딸들로서, 그 나라의 지도자로서 세우시기에 부족함이 없고 억천만 사탄들 앞에 자랑하고도 남음이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온 피조세계가 환희와 해방의 송영을 드리게 할 수 있는 기쁨의 날이 어서 속히 오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일이 어떤 공간적인 세계에서 벌어질 것이 아니고, 현실적인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저희들의 몸과 마음을 통하여, 실체를 통하여 결정되지 않으면 하늘의 창조적인 이념을 종결지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책임을 감당해야 하는 전체적인 사명 분야에서 저희가 마음으로 느끼고 행동으로 실천하여 소망의 날이 올 때까지 어떠한 싸움의 길도 개척하기에 주저하지 않는 하늘의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남겨진 십자가의 원한을 해원하고, 기쁨과 소망의 한 시간, 영원히 즐길 수 있는 사랑의 한 시간을 맞이하기 위해 어려운 길도 개척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오늘도 그러한 자리에서 살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면서,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사랑하는 아버님! 당신을 찾아가는 인간의 짧은 생애는 간단한 것 같지만 복잡한 것이어서 저희들도 그러한 생활노정을 걷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오늘도 참고 내일도 참아서 남은 생애를 아버님의 품안에서 보내는 복된 아들딸이 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날 이 세상에는 저희 자체들만 사는 것이 아니고 억만 사탄들이 저희들을 둘러싸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고, 이 사탄들은 6천년 동안 아버지 앞에 간교한 싸움과 참소조건을 제시해 나온 것을 아시는 아버지께서는, 저희를 사탄으로부터 보호하시기 위해 수고해 오셨다는 것을 저희들이 알고 있사옵나이다. 이제 저희들 아버님의 염려가 저희의 염려보다 더 크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옵고, 아버님의 수고와 아버님께서 사탄과 싸워 이루어 놓은 그 실적이 저희들이 생애를 다하여 수고하고 싸운 것보다 더 크다는 사실을 이 시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수많은 선조들이 생애노정을 친히 붙드시고 복귀의 뜻을 이루어 나오시는 아버지의 수고의 역사는 십자가의 길이요, 무엇으로도 보답할 수 없는 저희들의 빚인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오늘 그 은사 앞에 저희들의 몸 마음을 다 드려도 부족함을 느끼며 황공한 마음으로 이 시간 아버님을 대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 지금까지의 역사는 부족한 자를 영광의 존전에 세우기 위한 역사노정이었음을 알았사오니, 부족한 저희들에게 간절한 당신의 심정을 가해 주시어 이 시간 아버님께 충성하고자 하는 마음만을 갖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저희의 몸과 마음이 저희의 것이 되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아버지의 심정을 파고 들어가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갖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한 마음에 사무친 하나의 제물이 되게 하여 주시옵고, 아버지의 사랑의 품에 안겨 아버지를 위로해 드릴 수 있고 아버지의 위로를 받을 수 있으며, 아버지께서 사랑하실 수 있는 아들딸로서 이 시간 대하여 주시옵 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와 같은 은사를 바라고 저희들이 이 한 자리에 찾아 나왔사오니 버려두지 마시옵고, 아버지께서 친히 ‘아들아!’ 하고 부르실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께서 친히 붙들고 사랑하실 수 있는 아들딸로 이 시간 대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싸움에 지쳐서 내일도 싸우지 않으면 안 될 책임이 남아 있는 것을 염려하는 연약한 저희의 모습을 긍휼히 보시옵소서. 아버지! 힘을 주시옵소서. 저희의 마음에 새로운 힘을 주시옵고 새로운 능력을 가하시어서, 남아진 싸움터에서 원수들 앞에 굴하지 않는 강하고 담대한 당신의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하늘의 전체 사명을 맡은 싸움의 용자로서 아버지의 영광을 높일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사랑하는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께서 저희의 생명의 주체가 되시어서 사탄의 요구 조건에 걸리는 생명이 하나도 없게 허락하여 주시고, 저희가 아버지 것으로만 소유될 수 있게 허락해 주시옵고, 아버지의 자랑스런 존재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저희의 심중에 죄의 뿌리가 남아 있사올진대 아버지의 능력으로써 이것들을 성별시켜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 원치 않는 속성은 전부 제거하여 주시옵고, 아버지의 속성에 화할 수 있는 심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시여! 저희의 몸 마음에 새로운 힘과 새로운 사랑의 충격을 느끼게 하시어서, 악의 요소를 띤 모든 것을 제거시키고 분별하여 아버지 품에 안길 수 있는 재창조의 역사가 일어나는 이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들이 아버님께서 원치 않으시는 마음이나 주의나 관념을 갖지 말게 인도하여 주시옵고, 저희의 모든 것이 아버지 것으로서 시작하여 움직이고 아버지 것으로 결실될 수 있는 이 한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러한 느낌과 충격이 이 시간 저희에게 없다 할진대는, 크나큰 섭리의 뜻 앞에 모든 것을 맡아서 책임질 수 없사오니, 아버님, 이 시간 친히 오시어서 저희에게 생명의 기쁨과 생명의 부활을 허락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시여! 잠들어 있는 이 도성을 깨우쳐야 할 책임이 저희에게 있사옵고, 삼천리 강산을 새로운 빛 가운데로 인도해야 할 책임이 저희에게 있사오니, 연약한 손길들을 강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부족한 몸들이나마 사탄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하여 하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한 해에 각오하고 맹세한 모든 것을 포기하는 자들이 되지 말고, 이것을 마음에 품고 몸에 지니어 뭇생명을 살릴 수 있는 하나의 폭탄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생명이 원자탄이 되어 어두운 세계를 아버지의 영광의 터전으로 복귀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고, 맡겨진 책임을 행할 수 있는 아들딸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민족을 축복하여 주시옵고, 이 인류를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의 소망하는 전체가 아버지 것이오니, 아버님, 같이하여 주시옵고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남겨진 복귀의 원한을 풀어 드리는 날까지 저희들을 이끌어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도 내일도 정성들이고, 아버지 앞에 나가고 나가면서도 부족함을 느끼고 조급한 심정을 가지고 개척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간곡한 심정을 가지고 개척할 수 있는 충격의 힘만이 저희의 생활과 전체의 생애노정을 움직일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날 지방에 널려서 외로운 심정을 품고 아버지 앞에 기도하고 있는 당신의 아들딸들을 축복하여 주시옵고, 일률적인 은사로 품어 주시옵소서. 허락하신 은사를 자랑할 수 있는 영광의 모습으로 세워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날 경배 드리는 곳곳마다 하늘의 천천만 성도와 천군천사가 옹위하며 당신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는 날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경배의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 오로지 성삼위신이 주관하여 주시옵고, 사탄이 일체 틈타지 않는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오면서,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니다. 아멘.
이 시간 말씀드리고자 하는 제목은 ‘애천자와 애국자가 되자’, 하늘을 사랑하는 자와 나라를 사랑하는 자, 즉 ‘애천자와 애국자가 되자’입니다.
본래 인간은 하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고, 이 땅을 사랑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하늘과 사람과 땅을 모두 사랑하여야 할 존재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본래 사람을 지으실 때 하늘을 사랑할 줄 알고, 형제를 사랑 할 줄 알고, 이 땅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을 목표로 해서 창조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땅 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타락의 후손들인 연고로 하늘을 사랑할 줄 모르고 형제를 사랑할 줄 모르고 이 땅도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것이 타락에 의한 서러움입니다.
그런 고로 하늘은 이 서러움을 품고 타락한 인간을 본연의 인간으로 회복하시기 위하여 지금까지 6천년이라는 기나긴 세월 동안 어떠한 싸움도 개의치 아니하시며 희생을 거듭해 오셨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즉 잃어버린 인간을 복귀하지 않으면 안 될 천적인 책임을 갖고 인간을 찾아 나오고 계시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하나님의 복귀섭리의 뜻은 모르고 있으나 내 마음은 은연중에 천적인 인연을 따르고 있고, 그 천적인 인연은 나의 생활과 생애를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실제적인 생활에서 많이 체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여러분의 마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선하고 큰 이념의 세계를 동경하면서 쉴새 없이 움직이고 있느냐? 여러분의 마음이 어찌하여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고 있느냐? 그것은 여러분이 생각하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방향으로 이끄시는 하나님, 즉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 이상의 인연을 통하여 경륜하시고 수고하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마음은 선의 이념에 이끌려 가는 것입니다.
그 하늘은 최고의 선이요 최고의 이념입니다. 그 하늘은 우리 인간의 최고의 생명이요 최고의 소망의 중심으로서 과거에도 움직이셨고 현재에도 움직이시며 미래에도 움직이실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은 그 하늘이 지향하는 선의 방향으로 이끌려 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깨닫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선을 지향하는 심정을 지니고 있고, 선한 천품을 가졌다고 할지라도 여러분은 그것을 자신의 것이라고 장담해서는 안 됩니다. 또 천품을 근거로 자신의 몸이 빚어져 선한 단계에 있다고 해서 그 몸을 자신의 것이라고 자랑하여서도 안 됩니다.
좋고 선한 것이 있고 남 앞에 빛이 되는 것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만 알고 자기 것으로 나타내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늘이 여러분을 이와 같이 인연지어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이 그것을 망각하고 자신을 내세워 자랑하는 입장에 선다면, 그 시간부터 천적인 죄를 범하는 입장이 된다는 두려운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의 주위에 살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왕왕 이러한 죄를 범하는 것을 목격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모두 선한 것을 바라고 의로운 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에게 선하고자 하는 마음과 의로운 방향으로 움직이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 할지라도 그 마음조차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이 선한 마음의 역사를 들추어 보면 6천년의 인류역사가 드러날 것이고,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가 드러날 것이고, 하나님의 창조 본연의 심정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이와 같은 역사적인 인연과 시대적인 인연과 미래적인 인연을 대신하여 그 중심을 통하여 움직이는 본연의 선을 소유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그 선을 여러분의 것으로 소유하려고 하는 데 있어서 어느 누가 그 길을 가로막으려 하고 그 선에 반대되는 조건을 제시한다면, 그것이 법도적인 조건에 걸리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인간들은 이러한 선의 마음을 찾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이러한 선의 마음을 갖고 그 마음으로 자기를 위주하여 움직일 것이 아니고, 전체적인 선의 주체를 향해 움직여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원래 선이라는 것은 자체 내에서 이루어지는 법이 없습니다. 이 선은 나를 넘고 환경을 넘고 국가를 넘고 세계를 넘어 창조주의 최대의 선과 인연 맺는 데서만 이루어집니다. 실적이 남아지는 노정에서만 이 선이라는 명사가 세워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선의 방향을 찾아서 그 목적지를 알고 그곳을 향하여 움직여야 할 것을 아는 동시에, 선한 자체가 되어 선한 생활의 실적을 남겨야 되겠습니다. 지금까지의 역사노정에 이러한 사실을 알고 모든 것을 책임지고 자신 있게 살아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들을 붙들고 하나님께서는 오늘날까지 수고해 오셨습니다. 수고를 하셔도 그 수고에 보답할 줄 모르는 인간, 죽음의 길에서 자기의 생명을 구해줘도 감사할 줄 모르는 인간을 6천년 동안 끌어 나오 신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서러움의 노정이 오늘날 여러분 대에서 끝나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후손에게까지 연장될 것입니다. 이 서러운 노정이 여러분의 생활 속에, 여러분의 호흡하는 생명 위에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 되지 않는다 할진대, 나라를 사랑하고 하늘을 사랑한다는 말은 헛말이라는 것을 우리들은 생각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루의 생활도 선을 근거로 한 마음에서부터 해야 되겠습니다. 선한 마음이 우리의 생활을 지배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생애의 목표를 이루어 나가는 데 있어서 선의 이념권 내에서 자랑할 수 있는 실적을 세워야 되겠습니다. 그렇지 못한 자는 역사노정과 천적인 선을 찾아 나가는 복귀노정에 아무런 공헌도, 아무런 실적도 남기지 못한 자라고 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류의 타락이 왜 생겼는가? 자기의 생애를 자신의 것으로만 알았기 때문에 타락했다는 것입니다.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해와는 자기들로서 만사가 이루어지는 줄 알았고, 자기들을 근거로 하여 모든 것이 출발되는 줄 알았으며, 자기들로 모든 목적이 결실될 줄 알았기 때문에 타락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선조들이 저지른 죄상을 폭로하고, 자신을 근거로 하여 무엇이든지 해결짓고자 하는 마음을 버려야 하겠습니다. 그 대신 민족과 세계와 하늘땅을 걸어 놓고 해결짓고자 하는 참다운 마음을 가지고, 선한 세계를 지향하는 사람들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런 무리가 있다면 하늘은 그들을 찾으실 것입니다. 양심이 지향하는 목적을 세우고자 섭리하시는 하늘은 그러한 무리를 찾고 계시다는 것을 우리들은 명심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밝히 알고 난 연후에 자기를 재인식해 가지고 거기에서 자기의 가치관, 생활관, 생애관과 인생관, 역사관, 우주관을 갖고 ‘하늘을 사랑합니다’라고 하여야 거기에서 사랑의 인연이 맺어진다는 것입니다. 또 그런 관점에서 나라를 사랑하여야만 여러분이 진정으로 나라를 사랑했다고 하는 입장에 설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 길이 역사적인 인물도 가야 할 노정이요, 시대적인 인물도 가야 할 노정인 것을 알고 이러한 방향에서 자기를 재분석하여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되리라고 봅니다.
오늘날 인간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선한 양심의 작용은 느끼고 있으되 선이 지향하는 목적지는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선을 지향하게 하는 양심의 작용을 받고 살되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 선한 생활을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이러한 모순된 입장에 처해 있는 자신을 밝혀야 합니다. 자신을 새로운 목표와 새로운 이념 앞에 비추어 보아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지니고 있던 어떠한 인식, 어떠한 주의 주장, 어떠한 관념을 버리고 새로운 선의 목표를 향해 나가야 되겠습니다. 끝날에 처한 이 시대의 인류는 그 선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될 위기에 당면해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타락한 인간은 어느 지점까지 떨어졌느냐? 하나님의 창조이념과 정반대의 입장에까지 떨어졌습니다. 인간은 본래 이 세상을 자신들의 세상으로 여기며 즐길 수 있어야 했고, 전인류가 하나의 종족으로 살아야 했고, 또한 창조주 하나님을 자신들의 하나님으로 모시고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땅 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세계를 이루었습니까? 못 이루었습니다. 전인류를 한 종족으로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까, 국가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또 하나님을 자신들의 하나님으로 모시고 사는 무리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런 고로 우리들은 선의 기준을 찾아 세운 다음 우리의 힘과 모든 것을 기울여서 우리의 세계, 우리의 종족, 우리의 하나님을 찾아 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이 찾아 이루지 않으면 안 될 역사적인 사명이라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간 곳 없이 사라졌고, 우리의 종족인 인류도 사방으로 나누어져 버렸고, 우리가 주관하여야 할 이 땅도 여지없이 갈래갈래 갈라져 버렸습니다. 창조주가 계시다 할진대 그 창조주의 이념은 무엇인가? 이 땅을 우리의 땅으로 만들려는 것이요, 이 인류를 한 종족, 한 형제로 만들려는 것이요, 우리를 하나님과 하나로 화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창조주께서 이 인류의 하나님으로, 세계의 하나님으로 나타나고자 하시는 것임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나는 하늘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는 어떤 애천자가 있다 할진대 그는 어떤 사람일 것인가? 그는 우리의 세계를 찾아 헤매는 자요, 인류 전체를 한 종족으로 만들고자 헤매는 자요, 창조주 하나님을 우리 인류의 하나님으로, 세계의 하나님으로 친히 모시고 살고자 하는 자입니다. 이러한 자를 왈, 하늘을 사랑하는 자라고 하겠습니다.
오늘날 인간들은 이러한 표준을 상실하였기 때문에, 선이 움직이는 마음의 작용을 느끼고 있으되 선의 실적을 찾을래야 찾을 수 없는 생활을 하고 있음을 우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선의 작용은 창조이념, 인간이 이루어 드려야 할 천적인 이념과 세계적인 이념을 중심삼고 우리의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데, 그것을 무시하고 끊어 버리고 유린하며 살아온 우리라는 것을 이 시간 다시 한번 뼈 살에 사무치게 느낄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사람이 되지 않는다 할진대 타락한 인간으로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자리에 들어갈래야 도저히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들이 있는 정성을 다 들여 해야 할 일이 무엇이뇨? 어떤 희생도 각오하고 해야 할 일은 무엇이뇨? 하나님께서 소망하시는 세계, 인류가 소망하는 세계를 이루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부모로 인한 혈족, 즉 하나님을 중심한 하나의 종족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중심한 하나의 가정과 같은 세계를 찾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고 이 기준에 맞추어 생활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되지 못한다 할진대 하나님께서 찾고 계시는 이념적인 세계, 이념적인 인류, 이념적인 천국은 이루어질 수 없으며, 이루어진다 해도 우리와 하등의 관계가 없다는 것을 우리들이 깨닫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축복하시기를 ‘만물을 주관하라’고 하셨습니다. ‘땅에 충만하도록 번식하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이 이 말씀을 다 이루어 완성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완성한 인간을 친히 주관하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창조의 기준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 기준을 지금까지 완성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 연고로 우리는 땅을 주관하지 못한 자들이요, 참다운 사랑의 세계에서 번식하지 못한 자들이요, 참다운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한 자들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슬픔입니다. 이러한 인연권 내에 있는 연고로 우리가 사탄의 시험의 제물이 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류를 하늘은 다시 일으켜 땅을 주관하게 하셔야 하고, 선의 공적을 쌓아 악으로 엉클어진 타락한 인류의 모든 것을 청산해 버리고, 이들을 다시 화합시켜 하늘의 혈족으로 만드셔야 합니다. 그런 연후에 이들을 주관하시기 위하여서 하나님께서는 움직이고 계십니다. 이것이 인간이 지향해 나가는 역사적인 목적이요, 인류가 마음으로 동경하는 소망의 기준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곳에서 살아야 할 존재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요소가 몸과 마음이 소망하는 그곳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을 무한히 고맙게 생각할 줄 아는 우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하늘을 잃어버리고, 본연의 형제를 잃어버리고, 떨어질 대로 떨어지다 못해 형편없이 떨어진 인간들은 거꿀잡이로 그것들을 찾아 나가고 있습니다. 본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형제와 사랑의 인연을 맺고, 부부끼리 사랑의 인연을 맺고, 그 후에 부모를 모셔야 할 것이었는데, 하나님과 사랑의 인연을 맺지 못하고 타락한 인간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다운 부모, 참다운 부부, 참다운 형제라고 큰소리를 치는 사람이 있어도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참된 관계를 맺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종족인 연고로 인간이 주관하는 어떠한 물건도 하나님 것이라고 주장할 아무런 이유가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것으로 지어 놓은 이 세계가 사람의 것도 못 되고 원통하게 사탄 것이 되다니 웬 말입니까? 하나님의 것이 되어야 하고 인류의 것이 되어야 할 이 땅이 하나님이나 인류 중 어느 한 편의 것도 되지 못하고 난데없이 사탄의 소유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을 바라보시는 하늘의 슬픔을 체휼하는 자, 인류의 슬픔을 체휼하는 자가 나오지 않으면 이 세계를 사탄의 소유에서 해방시킬 운동을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운동을 전개하시기 위하여 오랜 역사노정을 거쳐오시면서 사람에게 양심의 작용을 일으키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관하셔야 할 인간을 잃어버린 연고로 시대 시대마다 때 맞춰 중심인물들을 보내셨습니다. 인류의 모든 문제를 책임지고 인류가 해야 할 사명과 때를 알려주기 위해 중심인물을 보내셨는데, 그분들이 누구냐 하면 역사노정에 왔다 갔던 선지선열들이었습니다.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기간 6일을 다 잃어버리게 되었고, 안식일이라는 한 날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된 연고로, 수시로 대하여야 할 인간을 잃어버리신 하나님은 그럴 수 있는 계기를 찾아 헤매시면서 무한한 수고를 개의치 않으시고 인간을 찾아 나오고 계십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하나님께서 얼마만큼 수고 하셨는지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면 시기를 맞추어 왔다 갔던 선지선열들, 시대적인 사명을 책임지고 왔다 갔던 천적인 사람들은 이 땅에 무엇을 제시하였던고? 땅의 어떠한 존재가치도 인정하지 않고 하늘을 믿으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인간이 살고 있는 이 땅이 영원한 땅이 아니라고 주장하였습니다. 또 땅 위에서의 생명이 영원한 생명이 아니라고 주장하였습니다. 땅 위에서 즐기고 있는 행복은 영원한 행복과 아무런 인연이 없다는 것을 역사노정에서 제창하고들 갔습니다.
하나님께서 6천년 섭리노정에서 한 시기, 한 세대를 대표하여 수고의 실체로 보내셨던 선지자들을 잡아 죽이기 위해 피 흘리며 싸워 나왔던 범죄의 조상을 가진 우리들, 천륜의 뜻을 배반한 역사적인 배반의 조상을 가진 우리들,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뿐만 아니라 하나님까지 배반하였던 선조를 가진 우리들, 이제 이러한 우리들이 오늘날 어떤 입장에 있는가를 다시 생각지 않으면 안 될 때가 되었습니다.
하늘은 이러한 사람들을 세우시어 타락한 인간과 인연을 맺기 위하여 무한한 수고의 노정을 거쳐오고 계십니다. 이러한 수고가 쌓이고 쌓여 하늘의 슬픔으로, 땅의 슬픔으로, 만인의 슬픔으로 남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이 슬픔을 인식조차 하지 못한 채 자기 개인의 일을 놓고 슬퍼하는 사람이나 자기 가정의 일을 놓고 슬퍼하는 사람들은 많은데, 하늘땅의 일을 놓고 슬퍼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끝날이 가까이 왔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이때에 여러분은 하늘의 서러움과 슬픔을 품고 서러워하는 사람이 없는 것을 아시는 하늘의 심정을 느껴 보았습니까? 하나님께서 6천년 동안 탄식하고 후회하시면서도 인류를 붙들고 싸워 나오셨으나 인간들은 아직까지 하늘 앞에 탄식의 조건으로 남아져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여러분들은 마음문을 열고 하늘과 땅과 온 만물에 사무쳐 있는 하늘의 슬픈 심정, 태산보다 더 높이 쌓여 있는 하늘의 슬픈 심정을 헤아려 보았습니까? 그 슬픔은 어떤 민족의 슬픔보다, 어떤 국가의 슬픔보다 더 큰 것입니다. 지금까지 인간이 슬퍼해 온 어떤 슬픔에도 비할 수 없는 슬픔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우리가 하늘을 사랑하는 애천자의 무리에 동참하여야 할 인간이라 할진대, 이러한 운명의 길을 가야 할 타락한 인간의 후손이라 할진대, 우리의 심중에서 선을 지향하는 마음이 폭발되어 하늘과 온 만물에게까지 사무쳐 있는 하늘의 서러움을 느끼고 그 서러움을 풀어 드리고자 책임을 다하는 무리가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런 무리가 나타나지 않으면 크나큰 섭리의 뜻을 성취시킬 수 없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지금까지 자기만을 중심삼고 싸워 나왔습니다. 자기 가정을 중심삼고 자기 나라, 자기 땅, 자기 민족을 위주하여 싸워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은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세계, 우리의 인류를 위하여,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기 위하여 수고해 나오셨습니다. 그런데 땅에 살고 있는 인류들은 자기를 중심삼은 가정, 자기를 중심삼은 국가, 자기를 중심삼고 주관할 땅을 찾아 헤맨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까지의 역사노정이었습니다.
인간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천적인 심정과 양심과 몸과 만물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이런 어마어마한 사실을 모르는 가운데 그저 자기를 중심삼은 물질, 자기를 중심삼은 몸, 자기를 중심삼은 마음, 자기를 중심삼은 정을 추구하여 왔습니다. 이러한 인간을 붙들어 자기를 넘어설 수 있는 방향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없다 할진대, 인류는 멸망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인류는 멸망했을 거예요.
이러한 인류를 깨우치려고 우리의 마음을 통하여 하루 하루의 생활을 명령하시는 하늘을 대해 우리는 무한히 고맙게 생각해야 됩니다. 오늘날까지 자기를 중심삼고 살아온 타락한 인간들, 떨어져도 아주 여지없이 떨어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중심삼고 땅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들은 본연의 입장으로 나아가야 할 복귀의 운명에 처해 있음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여러분이 갖고 있는 몸은 우주적인 가치를 이루기 위한 몸이요, 여러분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은 우주와 인연 맺을 수 있는 제물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지금까지 이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여러분에게 어떠한 정적인 심정이 있다 할진대, 그 심정은 우주적인 천적 심정과 인연 맺을 수 있는 심정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망각한 인간들, 즉 하늘과 반대의 입장에 있는 인간들과 하늘은 인연을 맺기 위하여 지금까지 수고해 오셨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지금까지의 역사노정에서 흔히 보여졌던 모든 사실들은 자기 개인을 중심삼고 싸워 나온 것입니다. 자기의 한 민족을 중심삼고, 자기의 한 국토를 중심삼고 싸워 나왔습니다. 한 주권 밑에서 자기의 국토와 자기의 민족과 자기의 주권을 위해 싸우는 데 머물렀습니다. 이기주의를 중심삼고 오늘날까지, 즉 1차대전 전후까지 싸워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싸움에서 그친다 할진대 인류는 멸망으로 치닫고 말 것입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민족과 국가가 명멸했는데, 그 민족이나 그 국가를 위하여 충신 된 사람은 많았습니다. 민족과 국가를 사랑한 사람은 많았습니다. 그 시대에 그 민족과 그 국토와 그 주권을 붙들고 사랑한 사람은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 애국자들은 다 어디로 갔는고? 역사상에 이름을 떨쳤던 그 애국자들은 다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역사상의 주권국가에는 많은 충신이 있었지만 오늘날 그러한 충신의 절개심은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지금까지의 역사적인 사실을 살펴볼 때 많은 사람들이 땅을 빼앗기 위하여 싸워 왔고, 국경을 타파하는 놀음을 해 왔지만, 그런 방법으로는 본연의 이상세계를 건설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땅을 빼앗고 확장시키는 제국주의시대를 지난 다음 우리 인간들은 무엇을 찾아 나가야 될 것인고? 세계적인 제국주의시대가 지난 다음에는 사람을 찾아 나서야 됩니다. 그런 때가 온다는 거예요. 그런 사람을 찾아 나서는 데 요구되는 것이 주의와 주장입니다. 그러나 어떤 주의 주장을 중심삼고 땅을 차지하려고 한다면 그 주의는 주의로서 존속하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1차대전을 고비로 하여 새로운 주의와 이념을 찾아 나가는 역사적인 사실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땅을 찾기 위해 싸우는 시대가 지난 다음에는 사람을 찾기 위해 싸우는 시대가 옵니다. 그때가 이념을 가지고 싸우는 시대인 것입니다.
그 시대를 지나서 그 다음에는 무슨 시대가 올 것인가? 본연의 사람이 잃어버렸던 것을 되찾아야 하는 시대가 옵니다. 만물을 주관해야 할 책임이 사람에게 있는 연고로 세계를 우리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우리의 본심은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어떠한 주권을 움직일 수 있는 권한이 있다 할진대는 그 주권을 세계적인 표준에까지 올려 놓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런 고로 본성은 어떤 방향을 제시하여 우리의 마음을 주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아들딸로 온 세계에 충만하라’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딸로 충만하라 하였으니, 오늘날 세계 각 나라는 주의와 사상을 중심삼고 민족성을 터쳐내야 합니다. 민족성을 터쳐내야 하고 민족 관념을 터쳐내야 합니다. 인간들은 모르고 있지만 하늘은 이런 싸움을 붙이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땅을 주관하고 형제를 회복한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하늘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인간이 필시 가야 할 운명의 길인 연고로, 앞으로 새로운 종교가 나온다 할진대 그것은 이 시대의 종교를 극복할 수 있은 애천적인 종교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땅을 찾아 헤매는 인간들 앞에 그것을 찾게 하기 위해 민족을 동원하여 국경을 타파하면서 영토를 확장시켜 나왔고, 인류를 찾아 세워야 할 천적인 섭리시대에서 살고 있는 인류 앞에는 민족과 민족의 장벽을 타파하는 주의와 사상을 세워 나왔는데 그 다음에는 무엇이 나와야 하는가? 하늘을 사랑할 수 있는 주의와 사상, 종교와 종파의 담을 터쳐낼 수 있는 하나의 주의가 반드시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복귀역사의 종결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처럼 어떠한 국토에 욕망을 갖고, 자기 민족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침략적인 정책을 세우는 주권국가는 망해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남을 침략하더라도 다가올 시대의 새로운 이념과 접근된 지도이념을 세우고 침략한다면 그 지도이념의 효력이 소멸될 때까지는 망하지 않고 지속됩니다. 역사는 이렇게 흘러 나왔습니다.
그러면서 오늘날까지 수많은 종족들이 규합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어떤 민족이 천적인 이념과 가까운 이념을 가지고 국가 형태를 취해 움직여 나오느냐? 천적인 이념과 가까울 때는 주권을 행사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 주권이 제삼자에게 넘어갑니다. 또 천적인 이념에 더 가까워질 수 있고,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이념을 가진 제삼자에게 그 주권이 넘어가고 하면서 발전해 온 것이 역사 발전의 실상인 것입니다.
오늘은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삼일절입니다. 우리 민족은 왜정 하에서 36년간 무한한 고초를 겪었습니다. 일제 치하에서 고통 당하던 우리 민족의 소망은 무엇이었는가 하면 일본이 망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민족은 그러한 한 때가 기필코 올 것을 바라면서 꾸준히 살아 나왔습니다. 외적인 환경이 확장되어 가면 갈수록 내적인 강한 의지를 쌓은 그 흐름이 오늘 이 삼일절에 폭발된 것입니다. 1차대전 직후에 윌슨 대통령에 의해 주창된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으로 삼일운동이 벌어졌다는 것을 여러분은 잘 알고 있습니다.
미국이란 나라가 민주주의 진영의 주도권을 갖고 민주진영 전체를 움직일 수 있는 하나의 대표적인 국가로 지금까지 나오고 있는데, 이것도 천적인 복귀섭리노정에 있어서 그 지향하는 방향이 하늘과 가까운 정도만큼 남아질 것입니다. 만일 그 사이에 금이 생기는 날에는 미국도 쇠퇴의 일로를 걷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왜정 36년간에 수많은 애국자들을 보았습니다. 또 이 나라 이 강토에 수많은 애국자들이 피를 흘리고 갔습니다. 피를 흘리면서도 그들의 마음은 이 민족이 비단 지금은 압제 받는 입장에 있지만, 이 환경에서 망할 것이 아니라 기필코 독립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소망을 가지고 싸웠던 연고로, 오늘의 대한민국이라는 주권국가를 회복시키게 되었습니다.
그 애국자들이 압제 하에서 모든 조건에 대항해 싸워 나왔던 것은 물론 민족을 사랑하고 국토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들에게는 승리의 한 날을 바라며 소망하는 마음과 그 승리의 한 날이 기필코 올 곳을 믿는 강한 마음이 있었던 고로, 그런 압정 하에서도 굴하지 않고 싸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의 나라를 찾는 데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천적인 이념을 찾는 데 있어서는 더더욱 변치 않는 신념과 변치 않는 동지애를 가지고 성토(聖土)를 소망하고 하늘을 대신하려고 해야 합니다. 이런 무리가 세상에 없다면 이 세상은 하늘과 인연을 맺을 수 없을 것입니다. 역사적인 흐름에 동반하여 하늘이 섭리하시는 뜻을 받들고 나온 수많은 종교인들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역사를 거쳐오면서 사탄과의 혈투전에서 비참한 희생의 제물이 되었던 기독교인들이 바로 그런 무리라는 것을 우리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구약 4천년 역사로부터 예수 이후 신약 2천년의 기독교 역사를 보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그 이념에 대해 꿈도 안 꾸고, 또 이방 사람들은 전연 생각지도 않는데 하늘의 가르침을 따르다 죽은 사람이 말할 수 없이 많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늘의 이념을 찾아가는 데에 있어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역사노정에서 하늘의 이념을 찾기 위하여 수많은 사람이 희생되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늘의 뜻을 찾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하여 희생되어 나왔던 무리와 이에 반해 국가를 위하여 싸우고 희생해 나온 무리는 어떠한 귀결점에 도달할 것인가? 이것이 이 시대의 우리들에게 궁금한 문제입니다. 앞으로는 세계정부주의시대가 온다고 사람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정부 형태, 하나의 이념의 세계를 향하여 역사는 흐르고 있고, 이 둘은 오늘날 가까이 접근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둘은 서로 화합하려는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니 우리는 이를 어찌해야 할 것인가?
여기에서 여러분은 역사노정에서 하늘을 위하여 무참하게 피를 흘렸던 무리, 하늘의 이념을 붙들고 싸워 나왔던 그 무리들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땅을 빼앗고 주의를 세워 인간을 포섭하는 시대는 반드시 지나갈 것입니다.
종교는 이미 어떤 형태를 갖추어서 하늘이 지향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데, 인간의 소망은 그 자리까지 가지 못하고 중간에서 그치고 말기 때문에 역사상에 수많은 충신들이 있었지만, 그들이 오늘날 역사가 빛나는 이때에, 세계가 움직이는 이때에 자랑할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한국의 사육신 같은 분들이 세계적인 차원에서 자랑할 무엇이 있습니까? 민족적인 차원에서만 자랑할 수 있는 분들인 것입니다.
이런 견지에서 2천년 전의 예수님과 우리를 비교해 본다면 예수님은 어떠한 분입니까? 예수님께서는 국가를 통치하고 세계를 통치하고 인류를 통치할 수 있는 이념과 자격을 가지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셨으며, 하나님의 독생자라고 주장하신 분입니다. 그 이상 또 할 일이 있습니까? 과연 메시아의 자격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어떤 제후의 아들딸이 되고, 세상의 어떤 주인의 아들딸이 되기를 고대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창조주를 걸어 놓고 자기가 그의 독생자라 하셨으니 과연 메시아의 자격이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한 모습으로 나타나신 예수님께서는 어떤 어려움에도 탄식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이 그가 인류 앞에 남긴 최대의 공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신념을 갖고 어떠한 억천만 가지의 어려운 폭풍우가 부딪쳐 와도 그 자리에서 충신의 절개를 세워 놓으셨던 연고로, 오늘날 만민의 메시아로 찬양받으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절개심을 붙들고 하나의 이념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생애를 바치고 나선 예수, 그는 그 길을 막는 부모도 ‘갈 대로 가라’, 민족도 갈 대로 가라’, 종족도 ‘갈 대로 가라’, 교단도 ‘갈 대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붙드신 것은 세계와 인류였습니다. 그는 세계와 인류를 붙들고 돌아가신 것입니다. 부모, 형제, 교단, 민족이 갈 대로 간다 해도 그 앞에서 사라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은 이 세계요 인류였습니다. 그 것이 예수님의 중심 되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 세계 앞에 필요한 분이요, 이 인류 앞에 필요한 분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늘을 붙들고 하늘을 위해 살다가 돌아가신 분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하나님께도 필요한 분이십니다. 이렇게 하늘땅에 필요한 분이시니 메시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이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지금까지의 역사를 모두 수습한다면 다음엔 무엇을 갖고 세계적인 인연을 맺을 것인가? 이것이 오늘날 뜻과 포부와 희망이 있는 청춘 남녀들이 해결해야 할 중대한 문제입니다. 또 무엇을 붙들고 무엇을 버릴 것인가 하는 것이 끝날의 심판을 바라보고 있는 수많은 인류가 최후의 행동을 위해 선택해야 할 문제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시의 시대 상황으로 볼 때 민족의 반역자였습니다. 교단의 반역자요, 종족의 반역자였으며, 나아가서는 전통의 파괴자였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그는 파괴자가 아니라 건설자요, 반역자가 아니라 애국자요 애천자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인간들은 오늘에 와서야 알았습니다. 우리가 참다운 애국자를 말한다면 그는 어떠한 사람일 것인고? 참다운 애국자, 참다운 민족주의자라 할진대 예수와 같이 세계를 하나의 민족으로 알아야 합니다.
골고다의 길, 십자가의 길을 늠름히 걸어가시던 그 모습이 우리가 숭배해야 할 분의 모습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억울하게 이러한 형극의 노정을 가셨는데, 그 억울함을 알아주는 무리는 어디에 있을 것인고? 가신 분의 순교의 터전이 땅 위에 남아 있고 그의 슬픔이 하늘에 사무쳐 있는 한, 이루어야 할 하늘의 뜻이 남아있는 한, 그 모든 슬픔을 풀 수 있는 역사적인 종말의 때는 반드시 올 것입니다. 그 때를 말하여 우리는 심판날이요, 말세요, 종말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종말시대임이 가슴 깊이 느껴지는 이때에 여러분은 어디로 가야하고 무엇을 취해야 될 것인가? 이것은 여러분이 자문자답하여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예수님의 단호한 행동을 모방하여 나설 수 있는 무리가 과연이 민족 가운데 있을 것이며, 이 세계 가운데 있을 것인고? 우리는 시선을 달리하여 다른 각도에서 그러한 무리를 찾아볼 줄 아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예수께서 죽어가신 그 시대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무엇이 다릅니까? 아무것도 다른 것이 없습니다. 없어요. 아무것도 다르지 않은 시대에 살고 있는 오늘날 우리들이, 그 시대에 배척받던 예수를 모실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은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세계를 찾아가는 이때에, 평등을 부르짖는 공산주의는 어떠한가? 노동자 농민을 살리자. 같이 먹고 같이 살자 고 외치고 있습니다. 역사의 흐름을 다시 한번 관찰하여 봅시다. 앞으로 세계를 움직일 수 있는 민족은 어떤 민족일 것인가? 세계를 움직일 수 있는 주의는 어떤 주의일 것인가? 세계를 움직여낼 수 있는 종교는 어떤 종교일 것인가? 그것은 먼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선의 이념에 화하여 모든 것을 거기에 맡기고 행동하는 민족주의 종교일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이냐 하면, 선이라는 것은 자기를 중심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기의 가정을 위주하고 살다가 망하지 않은 가정이 있습니까? 자기 일개 국가를 중심삼고 세계를 찾으려 했던 민족 중에 남아진 민족이 어디 있습니까? 이런 주의를 중심삼고 이 세계를 지배하며 영원불변의 이념을 찾았다고 장담할 수 있을 것 같지만 두고 보십시오. 하늘을 빼놓으면 만사가 끝입니다.
본래의 인간은 하나님을 모시고 천륜을 중심삼고 살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한 인간의 생활에서 천륜의 조건을 대신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인간이 갖고 있는 양심의 기준입니다. 이 양심의 기준 앞에 이념이 있고, 이념의 기준 앞에 천정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내적 환경에서 천륜을 찾아 들어가는 것이 복귀입니다.
우리의 세계를 찾고, 우리의 민족을 찾고, 우리의 종족을 찾고, 우리의 나라를 찾아서 우리의 주인을 모실 수 있는 그날이 왈 하늘이 소망하시는 끝날입니다. 그날이 하늘의 뜻을 갖고 땅에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끝날이요, 우리들이 찾아 나가야 할 소망의 날입니다. 하늘이 소망하시는 날이요, 예수가 소망하는 날이요, 우리가 또한 소망하는 날이라는 것입니다. 그날에는 모든 것이 해결될 것입니다.
여러분, 재림주는 가신 대로 오시는 것이 복귀의 원칙입니다. 어떤 것을 잃어버렸으면 잃어버린 곳에 가야 찾아집니다. 고장이 났으면 그 반대 방향으로 고장났던 순서를 거쳐야만 고장나지 않았던 자리로 돌아옵니다. 이것이 인과법칙에 벗어날 수 없는 철칙이기에, 재림주도 가신 대로 오신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잃어버린 대로 찾아진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는 에덴동산에서 아담 해와에게 허락하였던 것을 되찾아야 할 시대인 것입니다. 오늘날 이 땅에 살고 있는 인간들은 모두 타락한 아담 해와의 후손들입니다. 여러분들도 타락한 부모의 자손인 것입니다. 참부모의 자손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니 다시 참부모님의 자손이 되어야 합니다. 이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여러분은 하나님과 참부모님을 직접 대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권 내에서, 참부모님께서 쌍수를 들어 해 주시는 축복을 받아 가지고 부부를 이루어 번식하는 참부모의 혈족이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까지 우리 인간들은 참부모의 자식으로서 이 땅을 참되게 주관해 보지 못하였으니 참부모의 아들딸이 될 수가 없습니다. 이치가 그렇잖습니까?
그러면 하늘은 4천년 동안 수고하시어 인간 앞에 어떠한 주의를 세우고 어떠한 주인공을 세우셨는가? ‘이 세계가 내 것이요, 온 인류는 내종족이요, 하나님은 내 아버지다’ 라는 주의를 부르짖은 예수를 세우셨습니다. 그리하여 비로소 인간과 인연 맺으시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가 그러한 뜻을 땅 위에서 다 이루지 못하고 십자가에 돌아가셨으니, 가신 그 주님은 다시 오셔야 할 운명에 계신 것입니다. 이것은 민족적인 심판의 끝날이 세계적인 심판의 끝날로 연장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오늘날 이 세상에 예수께서 가신 대로 다시 오신다면,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돌아가심으로써 이루지 못했던 예수의 목적이 이루어져야 하며, 예수를 위주하고 세계이념이 갖추어진 동산에서 예수를 위주한 종족의 움직임이 나타나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의 형태를 갖추어 나오는 운동이 벌어져야 되는 것 입니다. 비단 기독교 통일만이 아닙니다. 모든 종교가 하나의 형태를 이루어야 합니다. 기독교인들이 ‘아…! 당신네는 유교를 믿고 불교를 믿으니 지옥에 간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가보니까 그렇게 안 되어 있어요. 그렇게 되어 있다면 내가 저 나라에 가서 담판해 보겠어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 한 분을 놓고 사방으로 끌어올리려니, 한 곳으로 빨리 몰아야 되겠으니, 횡적으로는 더 못 가겠으니 종적으로 ‘네가 제일이야.’ 하면서 몰아내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 인류는 전부 다 뜻 가운데 있는 무리들입니다.
예수께서는 4천년 동안 민족과 혈육을 버리고 쌓아 나온 유대교단, 4천 년을 거치면서 택해 세운 이스라엘 민족을 일조에 포기하였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은 하나님과 인연이 없는 민족이 아니었습니다. 절대적인 인연이 있는 민족이었습니다. 어떤 입장에서도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다’라고 할 수 있는 민족이었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민족을 예수가 포기하니, 하늘도 포기하고 땅도 포기하고 인류도 포기했습니다. 그런 연고로 유대 백성들은 세계에서 가장 비참한 무리가 되었습니다. 세계를 유리고객하며 이 민족 저 민족에게 몰림 받았습니다.
하늘을 소망하고 있는 오늘의 우리도 비참한 생활을 많이 했습니다. 이것을 지금까지는 사람들이 모르지만, 우리의 한 날이 오게 되면 세계 역사 노정의 움직임에 있어서 우리가 무시할 수 없는 위치에 서게 될 것입니다. 예수를 배반하지 않았다면 영광 된 세계이념을 획득할 수 있었던 민족이 고생과 역경 가운데에서 세계의 이념을 찾아 나오고 있으니, 축복을 받은 민족이나 안 받은 민족이나 마찬가지가 되어 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이 4천년간 공들인 민족을 버리고 붙드신 것이 세계와 인류입니다. 예수님은 유대교를 중심한 종파적인 관념에 사로잡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유대민족이 믿지 않아도 좋다는 각오로 새로운 이념을 갖고 나섰던 예수님이었음을 돌이켜볼 때, 오늘날의 기독신도들에게는 각성해야 할 일면이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들을 전체적으로 정리하여 볼 때에, 민주주의의 형태를 거치고 주의와 사상을 갖추어 이념적인 종교의 통일 형태를 갖추어 나가는 철칙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때에 민주진영에 남아지는 무리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될 것인고?
민주진영에 남아지는 무리가 되려면 예수와 같아야 합니다. 예수와 같이 전세계를 위하여, 전인류를 위하여, 하늘을 위하여 다 버릴 줄 알면 그 나라는 남아질 것입니다. 자신의 속옷까지 빼앗기면서도 ‘오! 하늘이여!’라고 부르짖던 예수, 천정에 사무쳐 하늘만을 붙들고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던 예수의 뒤를 따르면 남아지는 무리가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민족이 그러 한 이념을 갖고 나오면 그 민족 앞에 모든 민족이 제패당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한반도에서 태어난 불쌍한 무리인 우리들은 이제 무엇을 각성하고 무엇을 각오할 것인고! ‘남북으로 갈린 이 나라에 사는 저희들, 가지고 있는 모든 것 다 버렸습니다. 부모 형제도 버리고 가족도 버리고 종족도 버리고 물질도 다 버렸사오나, 이런 것은 개의치 않사옵니다. 원컨대 하늘이여! 세계 가운데 저희들이 있는 이곳이 예수께서 부르짖던 겟세마네 동산의 상상봉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땅이 세계의 겟세마네 동산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나아가서 세계의 골고다산정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고 기원하는 마음이 불타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청년 남녀들이 이 강산에 많이 나온다 할진대 이 나라는 절대로 망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역사를 버릴지라도, 이 시대를 버릴지라도, 어떤 주의 어떤 종족을 버릴지라도 하늘의 심정만은, 하늘이 사랑하시는 것만은 버릴 수 없습니다’라고 할 수 있는 무리가 있다 할진대 이 무리는 세계를 지배할 것입니다. 이러한 무리가 참다운 하늘의 무리입니다.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에는 가신 대로 오신다 하셨거늘 그 가신 발자취,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그 서글픈 심정은 어디 갔는고? 골고다에서 십자가를 지고 피땀을 흘리며 걸으시던 그 애달픈 심정은 어디 갔는고? 예수 그 자체는 문제가 아닙니다. 이제 우리가 찾아야 할 것은 예수의 심정입니다.
심정을 통하여 용서하고, 심정을 통하여 하나되고, 심정을 통하여 화합하는, 참다운 인류애에 사무친 무리가 소망의 동산에서 살 수 있고, 심정을 통하여 세계를 바라보는 주인공들이 되어야 이 세계 만물까지도 화평해지는 것입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라 부를 수 있으며, 6천년 동안 맺혀 있던 억천만 원한의 고개가 있다 할지라도 그것을 넘어서 하늘을 붙들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무리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장하신 예수의 실체의 결실이요,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의 실체의 결실입니다.
그런 고로 이런 존재가 나와야만 온 인류가 선의 동산에서 하나의 종족으로서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로 화하여 살 수 있습니다. 그 세계는 받고자 하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 아니고 주고자 하는 사람들이 주기 위해 애쓰며 사는 곳입니다. 지금까지 역사노정에서 받기 위하여 허덕여 온 것이 바로 사탄입니다. 자기를 위주한 선과 통일을 주장하지 않고 남을 위주한 선과 통일을 주장하는 무리가 사는 곳이 통일교회에서 주창하는 지상천국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선민사상을 주입시키셨는데, 그 선민사상을 갖고 자랑하며 살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천민사상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 고로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찾으시는 사람은 선민을 잃어버린 하늘의 슬픔을 알고, 천국을 건설하기 위한 천민사상에 철저히 화한 사람입니다. 천민사상에 철저히 화한 그 심정이 있는 곳이 천만인의 귀일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곳에 들어가는 자는 망하지 않습니다. 또 그 점을 걸어 놓고 나올 때는 만사에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없습니다. 그 심정에 사무쳐서 남을 위해 주고 주기 위하여 애쓰는 무리들이 사는 세계가 소위 처음에 주장한 뜻의 세계입니다. 또한 오늘날까지 역사 과정을 거쳐오시면서 섭리하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세계요, 지금까지 수고하시고 고통 받으시면서 거쳐오신 역사노정의 소망의 동산인 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 땅에 참나라가 있다 할진대 그 나라는 무슨 나라일 것인고? 그 나라를 왈 지상천국이라고 부릅니다. 그 나라가 되어야만 하나님께서 본연의 아담 해와에게 ‘너희는 완성된 때에 만물을 주관하라’고 축복하신 그 뜻을 이루고, 인간은 비로소 이 땅의 참다운 주인으로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그때에야 비로소 인류는 서로 참다운 형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그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참다운 아들딸이 되는 것입니다. 하늘 아버지를 대하여서는 참다운 효자 효녀요, 주인을 대하여서는 충신이요, 이 우주 만물을 대하여서는 참다운 주인이 된다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전권을 맡기시는데, 외적인 전권만이 아니고 내적인 전체의 심정의 중심까지 옮겨 주시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맡기시고도 안심하실 수 있는 아들딸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아들딸은 역사노정에 어떠한 충신, 열녀, 효자, 효녀보다 큰 존재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을 세계적으로 자랑할 수 있는 날이 앞으로 와야 됩니다.
오늘날 공산주의자들은 자기들이 표방하는 이념을 중심으로 인격자와 공로자를 따라가도록 모델을 세워 놓고 있지만, 민주주의는 그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것을 넘어서 역사노정에서 하늘을 대하여 전체의 이념을 세운 공로자들을 숭배하고 그들의 인격을 존경해야 되겠습니다. 나아가 그들의 발자취를 사수하여 그러한 주의를 갖고 지상에서 하늘이 추구하는 이념의 세계를 향해 움직일 수 있는 사람, 또 그러한 무리가 되어야겠습니다.
그러한 이념권 내에서 이 세계를 한 나라로, 이 세계 인류를 한 민족으로 여기며 소망의 주인공을 모시고 살 수 있는 한 날, 하늘땅을 대신하여 온 피조만물과 화합하여 경배할 수 있는 그날을 바라보고 나아가야 되겠습니다. 그때가 오기까지 모든 것을 주면서 희생을 각오하고 싸워 나가는 사람이 바로 하늘이 바라시는 애국자요, 하늘이 바라시는 애천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버님, 역사노정을 회고하여 볼 때, 인류는 골고다의 노정을 걸어온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저희가 바라보는 산천도 해골 곳이고, 저희가 살고 있는 도성도 해골곳이며, 저희가 움직이고 있는 이 땅도 박토가 되었나이다. 여기에 서 있는 저희는 모두 버린 민족이 되었으니, 아버님, 이제 저희가 한 가지 소유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옵니까? 예수님께서 오른 뺨을 치면 왼 뺨까지 대어 주고, 겉옷을 달라 하면 속옷까지 내어 주라 하셨사온데, 이 말씀은 역사노정의 어느 때, 어느 곳에서 이루어지겠나이까? 어떤 민족을 통하여, 어떤 주의를 부르짖는 사람들을 통하여, 어떤 교단을 통하여, 그 말씀이 이루어지겠나이까?
아버님! 이 민족은 4천년의 유구한 역사노정에서 맞으면서도 변명할 줄 모르고, 절망할 수밖에 없는 일들을 수없이 당해 오면서도 소망의 한 날을 바라보며 꾸준히 나온 민족이옵니다.
그러나 이 끝날에 천적인 숨은 인연이 있어서 이 민족이 세계적인 골고다의 산정에 올려진 것을 알지 못하고 있사오니, 아버님이시여! 아버님이시여!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던 예수님의 울부짖는 소리와 같은 기도가 이 강산 방방곡곡에서 울려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갈보리산상에서 원수들을 용서해 달라고 부르짖으시던 예수님의 성상을 그리워하는 참다운 무리는 어디 있는가 하고 찾을 줄 아는 무리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택한 이스라엘 민족은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예수님을 아는 척도 아니 하였사옵니다. 하늘의 심정에 서글펐고, 인류의 심정에 서글펐고, 땅의 원한을 해원하기에 서글펐던 예수의 심정, ‘땅이여, 깨져라. 하늘이여, 터져라. 몸이여, 찢어져라!’고 울부짖으신 예수님의 그 심정을 아무도 알지 못하였사옵나이다.
예수님의 심정이 터져 들어오는 슬픔에 사무쳤사온데, 그의 세 제자는 그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깊은 잠을 잤사옵니다. 오직 자기 일신을 염려하며 살던 그 사실을 오늘 저희들이 명심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 이 불쌍한 것들을 불러 모으심도 당신이었사옵니다. 당신께서 허락하셨기에 이 자리까지 왔사옵니다. 이 자리에 머물게 하심도 당신이시옵고, 이끄심도 당신이오니,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님을 향하여 세계를 버릴 수 없고, 인류를 버릴 수 없으며, 아버님을 버릴 수 없다고 혼신을 다하여 소리 높여 울부짖으며, 모든 것 다 버리고 청산하고 나선 예수님의 심적인 각오를 가진 아들딸, 즉 천정의 인연을 맺은 아들딸들이 여기에 많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 원하옵고 바라옵나이다.
이날을 대하고 보니 한없이 서글픔을 느끼게 되옵니다. 이날이 이 민족의 슬픈 날이요, 이 민족의 원통한 날임을 저희들 알고 있사오니, 저희가 움직이는 이날, 하늘 뜻에 사무친 마음으로 영원한 하나의 새로운 이념을 제시할 수 있는 충격이 저희에게 가해지는 날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제 말씀을 전하였사오니 저희가 하늘을 사랑하는 애천자가 되고, 하늘나라, 세워질 본연의 나라를 위하는 애국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수많은 인류들이 이런 이념을 가지고 죽으면서도, 생명을 내어 놓으면서도 이 길을 찾아온 것을 오늘 저희들은 알고 또 알았사옵니다. 아버지께서 지향하시는 방향도 알았사옵고 느꼈사오니, 저희가 몸 마음을 다 바쳐 애천자로서의 애국자로서의 천적인 인연을 가짐으로써 천적으로 세워진 6천 년 역사의 전통을 유린하는 자들이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배신자, 반역자가 되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오늘의 말씀을 듣고 여기 이 생명들이 느낀 바가 있사옵니까? 있다 할 진대, 이 말씀이 시대적인 종말에 있어서 각자의 심정 심정에 해결의 기점을 세워서 갈보리산상을 넘어서지 않으면 안 될, 부활하지 않으면 안 될 중대한 사실을 권고하시는 말씀인 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새로운 이념의 세계를, 새로운 주의를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나서던 그리스도의 모습과 같이 저희들 개개의 모든 것을 버리고 나서서 당신의 서글픈 심정을 위로해 드릴 수 있는, 끝날에 남아지는 무리가 되게 하여 주시옵고, 이 끝날의 핍박노정에서 없어지는 무리가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길,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모든 것을 뜻대로 이루어 주시옵소서.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저희의 생사를 주관하시는 아버지 앞에 불초한 모습들이 찾아 나왔사오니, 아버지, 맡아 주시옵소서. 당신의 합당한 뜻대로 취하여 주시옵소서.
생명권에 속하는 아버지 앞에 송영 드리기를 원하오나 사망권에 속한 죄악의 근성이 오늘까지 저희들을 사로잡고 있사오니, 새로운 권내(圈內)로 인도하시기 위해 구원섭리를 해 오신 아버지, 이 시간 현현하시어서 사망의 권한을 제거시키시옵고, 생명과 부활의 은사를 허락하시옵소서.
영원하신 아버지시여! 창조의 가치를 갖춘 하나의 생명체로서 움직일 수 있는 이 한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엎드린 몸들이 아버지의 지극히 선하심을 노래할 수 있으며, 지극히 아름다우심을 찬양할 수 있는 송영의 모습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인간시조의 타락으로 하늘과 땅의 생명의 인연이 끊어지게 됐사옵고, 천사세계를 대신하여 송영을 드려야 했던 천사장은 하늘을 배반함으로써 송영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게 된 사실을 알고 있사옵니다.
오늘 저희들을 부르셨사오니, 송영을 받지 못하심으로 말미암아 쌓인 아버지의 원한을 저희를 통하여 푸시옵소서. 의논하시지 못한 내적 사정을 저희들과 의논하여 주시옵고, 만민과 하늘을 연결시킬 수 있는 인연의 존재로 저희들을 세워 주시옵소서.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창조의 즐거움을 저희들과 함께 나누고자 고대해 오신 아버지 앞에 모든 충절을 다 바치고, 아버지를 협조하는 생명의 실체로서 아버지와 인연 맺을 수 있는 저희들 되게 인도하여 주시옵기를, 나의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하늘은 지극한 마음으로 송영 드리려는 자를 찾고 계신다는 사실, 오늘 저희들이 지극한 협조의 대상으로 아버지 앞에 서기를 고대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오늘 저희들이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로 하여금 모든 것을 주관하게 하시기 위하여 창조이념을 세우시고 지금까지 수고하신 아버지의 심정을 더듬어 살펴서 아버지 앞에 무한한 협조의 존재로, 무한한 송영의 존재로, 무한한 은혜의 존재로 설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불초한 자식들이 아버지의 존전에 모였사오니, 저희만을 중심삼고는 하늘이 요구하시는 어떠한 조건도 성취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시어서, 저희 자체를 넘어서 아버지의 심정을 더듬어 살필 줄 알고 아버지의 사정을 더듬어 헤아릴 줄 아는 자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일주일 동안 지내는 가운데 뜻 앞에 어긋나는 일을 할 때도 많았을 줄 알고 있사오니, 아버지, 이 시간만이라도 아버님께서 바라시는 진정한 상대기준을 조성할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시옵고, 선의 실체로서 아버지의 사랑의 품에 품길 수 있는 이 한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날은 거룩한 날이오니 만민을 축복하여 주시옵고, 불쌍한 이 민족을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외로운 식구 식구를 은사의 품에 품어 주시옵소서. 불충스런 몸들을 굽혀 아버지 앞에 경배드리고자 하오니 이 한 시간 오로지 당신만이 주관하시옵소서.
어두운 세력이 침범하는 시간이 되지 말게 하시옵고, 성별된 자리에서 아버지와 심정을 나누고 아버지의 심정에 화하여 경배드릴 수 있는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첫 시간부터 끝 시간까지 친히 주관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오면서,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본래 하늘땅을 통치하기 위하여 오셨던 그리스도의 실체의 형상을 기념하는 이 시간 되게 하여 주시옵고, 골고다산정에서 피를 흘리시며 원수들을 위하여 기도하시던 그 심정을 기념하는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땅 위에 슬픈 일이 있다면 이 이상 슬픈 일이 없다는 것을 이 시간 저희들이 뼈 살에 사무치게 느낄 수 있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슬픈 사정과 심정을 저희들이 체휼할 수 있고 하늘의 애달픔과 원통하심을 알아 민족과 인류, 더 나아가서는 역사적인 범죄를 저지른 사탄까지도, 미래의 후손들이 나갈 방향까지도 염려할 수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서글픈 사정을 느낄 수 있는 이 시간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체면도 없고 면목도 없는 저희들을 붙드시기 위한 수고의 역사와 슬픔의 섭리를 거듭해 오시기를 6천년, 한 날 한 시간도 쉬임 없이 저희를 염려하시고 심정의 상처를 개의치 않으신 아버지, 이제 저희들이 마음문을 넓혀서 그 심정을 본받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저희들이 몸을 움직여 그 수고의 발자취를 지킬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죄악의 노정을 돌고 돌면서, 그 죄악에 취하여 하늘을 배반하기를 일삼던 저희들이 아무것도 갖추지 못하고 지치고 지친 몸으로 아버지 존전에 모였사옵니다. 이 몸들이 존전에 서기에는 합당치 못한 것을 알면서도, 아버지를 찾아야 할 운명에 놓여 있는 연고로 체면 불구하고 아버지의 심정을 흠모하여 이 자리에 엎드렸사오니, 긍휼의 아버님,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사랑의 아버님, 자비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저희들을 붙들기 위하여 참아 나오셨사옵고 싸워 나오신 아버지, 오늘 다시 권고의 채찍을 드시옵소서. 아버지 앞에 설 수 없는 악의 요소가 있사올진대 이것을 제거시켜 주시옵고, 권고하시어서 듣지 아니하거든 채찍을 가해서라도 악의 요소를 제거해 주시어서 저희들이 하늘의 심정에 접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명령을 순응할 수 있는 이 시간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나의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시여! 이 삼천만 민족을 불쌍히 보시옵소서. 슬픔의 골짜기를 넘으며 오랜 역사 과정을 거쳐왔고, 길을 잃어 방황하면서도 오늘 이 시간까지 나온 남은 무리를 긍휼히 보시옵소서. 갈 바의 목적지를 알지 못하고 허덕이던 이 민족 앞에 하늘의 의롭고 새로운 소식이 전해지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새로운 부활의 제단을 쌓을 수 있는 한 날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새로운 영광의 시간을 이 민족 앞에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부족한 저희들을 모아 놓으시고 아버지께서 민족 앞에 제물 되라 명령하신 것을 알고 있사오니, 하늘 앞에 책임을 감당치 못한 부족한 자신을 자탄하는 입장에 머물 것이 아니라, 아버지 뜻 앞에 모든 것을 바치는 제물, 하나의 폭탄으로서 사탄 도성에 쳐들어가 터질 수 있는 아들딸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방황하는 무리가 이 민족뿐만이 아니오니,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수많은 인류 위에도 새로운 여명의 종소리를 울려 주시옵고, 생명의 빛을 나타내시옵소서. 아버지의 영광의 한 날을 소개할 수 있는 시간이 어서 속히 오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저희들을 불러 세우시어서 하늘의 전체적인 섭리의 뜻을 가르쳐 주신 아버지시여! 오늘 저희들이 아버지의 뜻을 알았사오니, 저희들이 그 뜻을 위하여 행동할 수 있도록 직접적인 능력을 행사하시옵소서. 주저하는 저희들의 발걸음을 재촉하시옵고, 머뭇거리는 이 한 몸을, 아버지, 충동시키시어서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선의 복지를 향하여 새로운 각오와 결심을 갖고 전진하고 전진할 수 있는 하늘의 아들딸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시간 모인 당신의 아들딸들 굽어살피시옵소서. 갈급한 심정을 갖고 엎드렸사오니 긍휼의 손길을 펴 주시옵소서. 사랑의 품에 품으시옵고, 재창조의 영광을 이 시간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이 한 시간도 외로운 식구들이 지방에 널리어 경배드리고 있을 줄 알고 있사오니, 간곡히 호소하는 그들의 모든 내적 심정을 아버지, 알아주시옵고, 그들 앞에 소원성취의 한 날을 허락하시고, 아버님께서 친히 그들과 더불어 기뻐하시는 영광을 나타내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이 시간 저희들이 아버지 앞에 경배하고자 하오니, 갖고 나온 예물은 없다 할지라도 더럽혀진 저희의 심정을 아버지 앞에 다 내놓고 통회할 수 있는 이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악에 침범된 모든 것을 아버지 앞에 다 폭로시키어 긍휼의 은사를 받을 수 있는 회개의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시간 저희들의 관념을 모두 제거시키시옵고, 어린아이의 심정으로 돌아가 하늘의 힘에 붙들려서 하늘의 움직임을 화하여 움직일 수 있고 생명에 취하여 아버지의 영광을 노래할 수 있는 이 한 시간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나이다.
억만 사탄이 이 시간도 노리고 있사오나 시험에 드는 아들딸이 한 생명도 없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님께서 친히 주관하여 주시옵기를 부탁드리오며,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아버님, 저희들은 고아와 같이 갈팡질팡, 목적도 방향도 모르고 어떤 환경에 처해 있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 역사와 흐름에 따라 뒤넘이치면서, 생명의 중심을 잡지 못한 채 밀리고 밀리면서 오늘까지 나온 불쌍한 모습들인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반면 이러한 저희들을 붙드시고, 저희들이 슬퍼할 때 같이 슬퍼하신 아버지가 계시다는 사실도 몰랐사옵고, 사망권 내에 사로잡혀 신음하는 저희들을 찾으시기 위해 밤과 낮을 개의치 아니하시고 수고해 오신 주인공이 계시다는 사실도 몰랐사옵나이다. 이러한 사실들을 알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기쁨의 심정이, 하늘과 땅을 통하는 것보다 귀하다는 것을 저희들이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를 위하여 애쓰신 하늘 아버지가 계시고 저희의 생애를 염려하시는 더 크신 하늘이 계시다는 사실을 저희들이 알고, 마음 몸으로 아버지를 대하여 황공하게 생각할 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상처받기 전에 아버지께서 먼저 상처받는 자리에 서셨다는 사실, 저희들의 몸이 피곤하여 쓰러지게 될 때에 저희를 붙들고 품어 주시고 위안하시어 갈 길을 다시 권고해 주신 아버님의 심정을 저희들이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날까지 말로만 살아온 자신들을 자각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제부터 아버님을 알고 아버님의 사정을 알 수 있는 아들딸로서 아버지와 심정일체를 이룰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고, 나누어질래야 나누어질 수 없고, 아버님과 저희를 갈라낼 아무런 존재가 없고 확고한 위치에서 하늘의 슬픔을 나의 슬픔으로, 하늘의 기쁨을 나의 기쁨으로, 하늘의 일을 나의 일로, 하늘의 책임을 나의 책임으로 느끼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저희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위치에 서서 억만 사탄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될 책임자의 입장에 선 것을 알고, 전체를 살리기 위해서는 제물의 입장에 서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이 준엄한 사실들을 체휼할 수 있는 아들딸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하늘은 저희들이 졸고 있는 시간에도 졸지 아니하시고, 자고 있는 시간에도 주무시지 아니하시며, 이 한 무리를 깨우치고, 이 한 것들을 인도하시면서 수고하신 아버님 앞에 불초한 저희들이 다시 나왔사오니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자는 자나 조는 자가 있사오면 다시 경책하여 주시옵고, 상처를 입은 자가 있사올진댄, 아버지, 기름을 바르시고 싸매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하늘을 찾으려고 애달파하는 자가 있사올진대는 그들을 품으시고 위로해 주시는 이 시간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의 사정 사정을 아시는 아버님이시고, 그 사정의 주인공이시며, 용납하지 못할 모든 어려운 사정까지도 용납해 주시는 아버님이신 것을 저희들이 알지 못했사옵니다. 이제 심중에 사무친 모든 어려움과 슬픔과 염려를 아버님 앞에 다 내놓고 아버님 것으로 바꾸어 취할 수 있는 이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님, 저희들의 마음에 옳지 못한 일체의 요소를 제거시키시옵고, 아버지의 심성에, 아버지의 성상에 화화여 아버지와 일체가 될 수 있는 확고한 각오와 결심을 할 수 있는 이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자아의 관념으로 아버지의 전체의 성품을 헤아리려 하는 아들딸이 없게 하여 주시옵고 완전히 순응하고 화합하여 아버님의 원하시는 뜻대로, 빚으시는 모형대로 움직일 수 있고 나타날 수 있는 아버지의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께서 용납지 못할 요소가 있다 할진댄 일체를 제거하여 주시옵고, 친히 좌정하시어서 명령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나이다.
이제 이들에게 주시고 싶으신 말씀을 내려 주시옵소서. 인간의 어떠한 말씀보다도 아버지의 심정을 통하여 울려 나오는 새로운 말씀이 저희들에게 지극히 필요하옵고, 거리를 두고 아버지의 심정을 느끼지 않고 즉각적으로 느끼고 움직이는 아버지의 심정이자 저희의 심정이요, 아버지의 느낌이자 저희의 느낌이라 할 수 있게 인도해 주시고, 아버지의 억울함을 체휼하여 아버지의 원한을 풀어 드릴 수 있고 마음과 몸에 새로운 말씀의 충격을 느낄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나이다.
전하는 자의 마음이나 받는 자의 마음이 둘이 되지 말고 하나되게 하시옵고, 이 한 시간 은사에 은사를 가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옵나이다. 이날도 지방에 널려 경배드리고 있는 외로운 식구들 위에 아버지의 긍휼의 손길을 일률적으로 같이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면서,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인간들은 어떠한 목적지를 향하여 가고 있는지도 모르며 오랜 역사노정을 걸어왔습니다. 어떠한 이념을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났으며, 그 이념을 통하여 어떠한 목적지에 당도할 것인가? 또 어떠한 가치로써 그 목적과 관계를 맺을 것인가? 이런 문제에 대해서 인간들은 완전한 해결을 짓지 못한 채 허덕이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잘 알고 있습니다.
신앙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나’의 존재 의식에 대해 말을 할 때, ‘나’라는 존재는 출발도 하늘이요, 그의 결과도 하늘이라고 말하고 있고, 그 하늘 뜻 앞에서 하나의 가치를 찾아 나간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관념은 종교인뿐만 아니라 일반 사람들도 갖고 사는 때가 오지 않으면 안 되리라고 봅니다. 인류의 한 사람으로 태어난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것은 우리 자신을 중심삼은 것이로되, 그것의 목적은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넘어 어떠한 이념의 세계와 관계를 맺고자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실제 생활에서 느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세계와 현재의 우리와는 시간적인 거리와 공간적인 거리가 있습니다. 이 거리를 타파해 낼 수 있는 하나의 중요한 것이 있다 할진대 그것은 어떠한 학설도 아니요 어떠한 수단 방법도 아닙니다. 이 거리는 오로지 심정의 세계에 들어가야만 타파될 수 있습니다.
심정, 이것은 종교계에서 문제가 되는 동시에 문학이나 예술분야에서도 문제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심정 자체를 두고 말한다면 개인적인 심정이 있을 것이고, 가정 차원의 심정, 혹은 사회, 국가, 세계 차원의 심정이 있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창조주, 즉 실존의 주인공이 있다 할진대는 그 주인공 역시 심정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살고 움직이고 하는 것은 심정을 중심삼은 것들입니다. 심정을 중심하여 사정을 해결하고 심정을 중심삼고 관계를 맺기 위해 인간들은 움직이고 있고, 사회도 움직이고 있고, 세계도 움직이고 있고, 천륜도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 우주 더 나아가서 천주를 통찰해 볼 때, 우주와 천주는 심정을 근거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즉 이 심정을 기반으로 한 법도를 벗어난 존재는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심정을 중심삼고 생각해 볼 때, 나는 어떠한 심정을 갖고 있는가, 이 사회와 세계 사람들은 어떤 심정을 가지고 있는가, 그리고 하나의 통일적인 천주를 이루어 놓고자 하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 하나님은 어떠한 심정을 갖고 계시는가? 또 그 심정 심정은 어떠한 관계와 방편을 통하여 연결 지어지겠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만일 개인의 심정을 초월하고 사회, 국가, 세계를 넘고 피조세계 전체를 넘어 하나님의 심정에까지 연결시켜 줄 수 있는 위대한 종교가 나온다 할진대, 모든 피조만상은 그러한 종교권 내로 자연적으로 들어오리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들이 더 좋은 선을 지향하고, 더 아름다운 미를 찾아 나가고, 더 정적인 사랑을 찾아 헤매는 최고의 목적은 무엇이냐? 그것은 창조주의 천적인 심정과 인연맺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들은 다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이러한 견지에서 하나님의 심정, 천륜의 심정, 인륜의 심정을 살펴볼 때, 이 심정들이 하나의 목적을 향하여 정상적으로 움직이고 있느냐 하면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사회에서의 인륜과 섭리의 법도를 따라 움직이고 있는 천륜이 방향을 달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종교라는 명사를 빌어 말하면 타락의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타락으로 인해 창조주의 심정과 천륜의 심정, 인륜의 심정이 상충되어 있는 서글픈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자신들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이러한 사회라는 것을 인식 하고, 이러한 세계라는 것을 인식하여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다시 부활한 피조세계를 바라볼 줄 알고, 창조주의 심정을 다시 바라볼 줄 알고, 사회의 실상을 다시 바라볼 줄 알고, 자기의 마음과 몸을 다시 주시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이러지 않고는 새로운 이념의 세계, 새로운 정적인 세계는 인류역사에 등장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런 입장에 선 우리들은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지켜 주시는 그분을 바라보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들의 생활 속에서 우리와 인연을 맺기 위하여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도 움직이고 계시는 분을, 우리의 생활 환경을 단속해 주시고 지켜 주시는 어떠한 존재를, 우리는 발걸음을 멈추고 다시 바라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느껴야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 앞에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발걸음을 멈추고 지키시는 자를 다시 바라보자 입니다. 이러한 제목을 가지고 말씀드리려 합니다.
우리는 전체를 바라볼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더 나아가서 눈을 들어 지극히 작은 미생물의 세계를 바라볼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또 눈을 들어 사망이 물결치고 죽음으로 파괴되어 가고 있는 사회적 실상을 바라볼 줄 알아야겠습니다. 또 눈을 들어 내 마음의 세계와 무한한 이념의 세계와 관계를 맺고자 원하는 정적인 이념의 세계를 바라보아야 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다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우리는 미생물인 세균으로부터 천체(天體)를 내 한 개체와 관계를 지어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또 나 하나를 중심삼고 평면적인 세계뿐만 아니라 입체적인 세계, 즉 마음의 세계를 다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놓여 있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는 태양의 주위를 우주의 법도에 의해서 변함없이 공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지구 자체가 그렇거니와 태양 자체도 자전하고 있습니다. 지구의 130만 배나 되는 질량을 가진 태양이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주에는 이런 태양계 질량의 2천억 배나 되는 광대한 은하계가 있습니다. 이런 은하계를 소우주라고 하는데, 우주에는 은하계와 같은 성운들이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이것을 통틀어서 대우주라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광대무변한 대우주의 세계를 마음을 넓혀서 보아야 하겠습니다. 반경만 해도 수천억 광년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대우주를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그 대우주를 변함없는 법도에 의해서 수억천만년을 움직여 나오고 계십니다. 우리가 생각할 수 없고 느낄 수도 없을 정도로 위대한 힘을 가지고 이 모든 천체를 움직이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주를 지으신 하나님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우리는 그 웅장함과 위대함에 자연히 머리 숙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대우주를 창조하신 그분이 우리를 지켜 주시는 아버지요, 우리를 보호해 주시는 하나님, 실존하시는 위대한 주인공이시라는 사실을 우리는 마음을 넓혀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대우주를 창조하시고 지어진 대우주의 모든 존재들을 바라보시며 무한히 기뻐하셨습니다. 한 날의 소망을 그리면서…. 만일에 하나님이 말씀을 하실 수 있었다면 얼마나 많은 말씀을 하셨겠습니까! 또 자랑하실 수 있었다면 얼마나 많이 자랑하셨겠습니까!
이러한 어마어마한 천체, 우리가 숫자로 헤아릴 수 없는 놀라운 가치의 천체지만 그 천체 자체가 하나님의 창조목적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목적은 태양계 안의 하나의 위성인 지구라는 땅덩이 위에, 대우주에 비하면 티끌만도 못한 보잘것없는 인간을 지어 놓으시고, 인간을 중심한 하나의 이념의 세계를 건설하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 그 고마움과 그 기쁨과 그 영광 됨과 장함이 얼마나 커야 할 것인가를 여러분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또 우리가 삼라만상, 자연계를 바라볼 때, 사계절을 따라 변하는 자연 현상과 때에 따라 모든 만물이 화동하여 미를 나타내는 것을 바라볼 때에 우리는 무의미한 심정으로 바라보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나는 새를 본다거나 나비나 벌을 볼 때, 흐르는 물이나 솟아 있는 산봉우리를 볼 때도 이 모두가 창조하신 하나님의 내적인 심정이 반영된 모습들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느낄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많은 예술가가 있고 많은 문학가가 있지만 모든 예술가와 문학가들은 한결같이 많은 형용사를 동원하여 피조세계, 즉 만물의 미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자연은 예술이나 문학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피조세계, 즉 자연을 빼놓게 되면 우리들이 즐길 수 있는 상대적 조건이 말할 수 없이 감소된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 없어서는 안 될 자연이요, 느끼지 않으면 안 될 자연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관계의 심정을 갖고 자연을 바라보아야 되겠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구형이나 섬모형 등 여러 형태를 갖고 있는 지극히 미미한 세균으로부터 박테리아나 세포, 광대무변한 천체까지, 생물이나 무생물 할 것 없이 모든 존재물은 질서정연하게 자기도 모르게 어떤 목적을 위하여 작용하고 있고 운동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창조주께서는 어찌하여 이 모든 것을 이렇게 지으셨는고? 그것은 땅 위에 살고 있는 지극히 미미한 존재, 천체에 비하면 티끌만도 못한 인간들을 위하여 천주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마음문을 열어 놓고 다시 한번 생각해야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지으신 만물을 보고 기뻐해야 할 것이었는데 기뻐해 본 일이 없으니, 인간에게 슬픈 일이 있다 할진대 이 이상 슬픈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그러한 슬픔을 느낄 줄 모르는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슬퍼할 줄 모르는 인간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오랜 역사 과정을 거쳐오면서 인간이 슬퍼하기 전에 슬퍼하셨고, 인간이 근심하기 전에 근심하시면서 인간을 위하여 지금까지 수고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여러분은 마음문을 열고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눈을 들어 다시 바라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 한 순간이 있어야만 인간의 가치가 회생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하나님을 믿되 우리가 갖고 있는 감성의 주체로, 의식의 주체로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무한한 천체를 움직이시며 영원을 향하여 쉬임 없이 나아가고 계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우리가 믿어야 합니다. 이러한 하나님께서 6천년이란 기나긴 세월 동안 우리를 지켜 주셨다는 사실, 인간은 쉬는 때가 있었으나 하나님은 쉬는 시간이 없었고, 인간은 자는 시간이 있었으나 하나님은 그럴 시간이 없었고, 인간이 알아주든 말든 언제나 인간을 알아주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계셨습니다.
그러면서 오늘 이 시간까지 만우주가 움직이는 모든 법도를 주관하셨고, 한편으로는 인간을 재창조하시어서 그 인간을 하나님을 대신하여 만우주를 주관하는 가치적인 존재로 세우시기 위하여 섭리하셨다는 놀랍고도 고마운 사실을 여러분은 뼈 살에 사무치도록 느껴 본 적이 있습니까?
진정한 종교적인 심정이 우러나는 그 순간에는 만물을 바라보고 머리 숙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을 보거나, 자연을 보거나, 천체의 무수한 성운을 바라보게 될 때 신비스럽고 숭고한 감정이 마음에서부터 우러나게 됩니다. 이런 감정으로부터 종교가 출발된 것입니다. 나를 넘어 자연의 현상을 바라보고 높이 평가할 줄 알고, 움직이는 자연의 모든 것을 바라보고 내 심정세계의 고귀한 것을 대신하여 노래할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움직이는 모든 것을 자연적인 음악과 같이, 자연적인 예술과 같이, 자연적인 문학과 같이 느낄 수 있는 심정이 내 마음에서 우러나게 될 때 비로소 천체를 지배하고 있는 하나님과 내가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와 같이 자신이 모든 것과 관계되어 있다는 심정이 강해져야만 사물을 대할 때 다시 감정할 수 있는 심적 기준이 잡혀집니다. 이것은 우리가 신령한 경지에 들어가면 그대로 느끼게 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과 지음 받은 만물은 이러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만우주는 이러한 인연으로 엉클어져 있는데 다시 인간과 관계맺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느끼며 자연을 바라볼 때 여러분은 비로소 인간의 존엄성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피조만물이 이렇게 뗄래야 뗄 수 없는 인연으로 엉클어져 있는 것은 지극히 작고 미미한 존재인 우리 인간과 연결되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게 될 때, 만물과 우리 인간과의 관계, 또 하나님과 우리 인간과의 관계를 우리는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지에서 우리의 마음은 이런 방향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자신의 생활 속에서 수시로 자신을 그런 방향으로 재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경지에서 예술이 출현하고 종교 이념이 생겨난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광대무변한 우주를 바라볼 때 무의미하게 바라 볼 것이 아니라 우리와 영원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입장에서, 또 그 모든 것이 우리를 위하여 지어졌다는 사실을 느끼는 입장에서 바라볼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거기에서는 여러분에게 어떠한 우주적인 변동이 있게 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 주시고 보호해 주신다는 신념이 생기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또 하나님과 나는 뗄래야 뗄 수 없는 놀라운 인연, 하나님이 심정으로 연결된 나의 아버지라는 것을 느끼게 되고, 몸 마음이 천륜과 통하고 인륜과 통하여 자신도 모르는 어떠한 힘이 부딪치는 것을 감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힘은 하나님의 심정에서 오는 힘인 것이며, 창조적인 원리법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나와 인연되어진 작용의 힘인 것입니다. 또 그 힘은 이념의 세계와 심정의 세계, 혹은 현상의 세계에까지 일괄적으로 통할 수 있는 동시에 무형세계를 통할 수 있는 심적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아는 입장에서 만물을 대할 줄 알고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의 심정을 노래할 줄 아는 자, 천체를 지으시고 기뻐하신 하나님의 심정을 노래할 줄 아는 자, 사람을 지으시고 기뻐하신 하나님의 심정을 노래할 줄 아는 자, 이념의 세계가 선하고 귀하고 아름답게 지어졌다는 것을 노래 할 줄 아는 자, 그러한 심정으로 아버지 앞에 찬양을 드릴 수 있는 모습이 된다 할진대 여기에서 비로소 천정이 맺어지고 인정이 맺어집니다. 또 천륜과 인륜을 통할 수 있는 역사적이고 섭리적이고 창조이념적인 심정의 인연이 맺어진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느껴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흔히 하나님이 우리와 같은 형상을 하신 분으로 알고 또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신앙생활 도중이나 기도할 때, 혹은 어두운 밤에 홀로 고요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자연계를 바라볼 때나, 심각한 마음으로 마음문을 열어 본심에서 우러나오는 심정을 느끼면서 자연계를 바라보게 될 때, 그 자연계가 여러분 자신을 위하여 있다는 사실, 무수한 천체세계가 여러분 자신을 위하여 있다는 사실이 실감적으로 느껴질 것입니다. 그러한 경지에서 머리를 숙이고 ‘아버지, 감사합니다’ 라고 기도하는 그 순간은 인간과 인간끼리의 감정으로 기도하는 어떠한 시간보다도 더 숭고한 기도의 시간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있으나 그 아버지가 우리를 지켜 주시는 줄로만 알았지, 그 아버지가 이렇게 크시고, 그 아버지가 이렇게 위대하시고, 그 아버지가 이렇게 세밀하시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또 그 아버지가 하루도 아니고 창세 전부터 오늘날까지 수천년 동안 우리 인간을 찾아 세워 심정이 통하는 아버지와 아들이라 할 수 있는 관계를 맺기 위하여 수고해 나오셨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진정 마음으로 느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이러한 사실을 진정한 마음으로 느끼게 될 때, 이 아버지는 위대하다는 말을 그분에게밖에 쓸 수 없을 정도로 위대하신 분이요, 크다는 말을 쓴다면 그분에게밖에 쓸 수 없을 만큼 크신 분이요, 놀랍다는 형용사로 찬양하고 위대하다는 형용사로 찬양하고 존엄하다는 형용사로 찬양한다면 그분밖에 찬양할 존재가 없을 만큼 위대하신 분입니다. 그분을 우리가 모시고 있고 또 그분께서 우리를 지켜 주신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오늘날까지 인간들이 바라 온 소망은 왜 그렇게 작았던고? 생각하고 통찰하는 관점이 왜 그렇게 좁았던고? 가지고 있던 감정이 왜 그렇게 사특(邪慝)한고? 우리는 이런 한탄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념세계의 감정을 느끼는 경지에 들어가서 자기도 모르게 머리 숙여 눈물 흘리고, 우리를 지켜 주시는 성상 앞에 쌍수를 합하여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그 한 시간이 여러분의 신앙생활에 없다 할진대,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만물세계를 주관하라 하신 그 주관의 목적을 안다 하더라도 그 책임을 감당할 수 있는 자라고 볼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오.”(마 16:26)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보잘것 없고 미미한 개체지만 이 개체가 어떠한 피조만물의 가치보다 귀하다고 한 것은 무슨 말이뇨? 그 모양이 아름다워서 그런 것이 아니요, 그 형태가 위대하고 굉장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다만 인간이 창조이념의 세계에서 내적으로 흐르고 있는 정을 통할 수 있는 존재인 연고로 귀하다는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무리 광대한 천체세계, 아무리 아름다운 자연계이지만, 그것들로 창조주 하나님께서 어떤 자극적인 감성과 충격을 유발시킬 수 있는 존재가 될지는 모르겠으나, 내면에 있는 아버지의 창조이념의 심정을 어느 한 순간에 포착하여 그것을 나타내어 아버지를 기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천체의 창조적인 심정의 흐름을 순식간에 포착하여 그 감정과 동일한 감정으로 그 심정에 화답할 수 있는 존재는 만물이 아닙니다. 외계에 나타난 만물이 아니라 만물을 주관하라고 지어 놓은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 연고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심정이라는 것을 빼놓으면 인간의 가치는 미물보다 낫다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도 그렇거니와 우리의 행동도 그렇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이념을 세워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심정 앞에 미의 자체, 사랑의 자체, 선의 자체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역사적으로 느껴지는 감정, 시대적으로 느껴지는 감정, 생활적으로 느껴지는 감정, 또 자신을 중심삼고 바라보는 어떠한 욕망이나 희망, 자신을 중심삼은 행복감이나 어떠한 감정보다도 더 숭고한 감정의 인연이 우리의 앞길에 가로 놓여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겠습니다.
지금까지의 역사노정에서 어떤 사람이 나는 행복한 사람이요, 나는 성공한 사람이요, 인간 중에 위대한 승리자다라고 했다 하더라도 그것을 비웃을 정도의 행복이 남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아무리 성공했다고 자랑하더라도 그것을 비웃을 수 있을 정도의 성공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 자기 자신이 돈이 있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에게 그 이상의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역사적인 종말시대인 오늘날 하늘이 우리를 찾아오고 우리는 또 그 하늘을 찾아 나간다 할진대, 우리는 인간들이 미처 알지 못하고 있는 행복이 얼마나 크며, 인간의 성공이 얼마나 위대하며, 역사적인 인물을 비웃을 정도의 행복을 노래할 수 있고 더 위대한 성공을 자랑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있으리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인간들이 기뻐하는 것은 완전한 기쁨이 아니요, 성공했다고 하는 완전한 성공이 아닙니다. 하나의 과정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에 도취되어 살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불쌍한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오.”(마 16:26)라고 하신 말씀 가운데서의 목숨, 즉 생명은 타락권 내에 있는 우리들의 생명이 아닙니다. 그러면 그 생명은 무엇이뇨? 그것은 창조주의 생명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생명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오늘날까지의 역사적인 감정이 아닌 창조 본성에 흐르는 감정과 연할 수 있는 감정, 창조 본성과 통할 수 있는 그런 감정을 가진 가치적인 인간의 생명을 걸어 놓고 하신 말씀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도상에서 타락으로 인한 슬픔의 노정이 가로놓여 있는 연고로 행복하다고 자랑하되 자기를 중심삼은 행복을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사람은 지나가 버리고 맙니다. 자기 민족을 중심삼고 행복을 논하는 자도 지나가 버리고 맙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를 중심삼고 행복을 논하는 자도 지나가 버리고 맙니다.
어떠한 이념을 제창하는 자가 있다 하더라도 자기네 일개국을 중심삼은 이념이나 땅 위의 세계를 중심한 이념을 걸어 놓고 투쟁한다면, 그 역시 지나가 버리고 맙니다. 하늘이 계시다 할진대 우리는 어차피 거쳐가는 역사노정에 서 있는 자기 자신임을 인식하여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다시 한번 바라보아야겠습니다. 살고 있는 우리의 생명을 주관하는 그 주인은 어디 있느뇨? 우리가 행복하기를 원하고 있는데 행복의 감정을 지배하는 주인은 어디 있느뇨? 우리가 어떤 목적을 향하여 나가기를 원하고 성공하기를 희망하는데, 그 성공을 지배하는 주인은 어디 있느뇨? 그 주인은 우리를 가르치는 스승도 아니요, 우리를 이끌고 있는 어떠한 주의도 아니요, 어떠한 종교도 아닙니다.
이런 것을 우리가 헤아려 볼 때 우리는 걷고 있는 발걸음을 멈추고, 참된 이념과 행복과 성공을 소개하는 참된 심정으로 우리를 지켜 주는 그러한 분은 없을 것인가 하고 다시 바라보아야겠습니다. 여러분이 자기를 중심삼고 아무리 행복하다 하더라도 그 행복이 세계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면, 자기를 중심삼은 그 성공은 6천년 인류역사, 아니 영원한 천주의 역사에 무슨 공헌을 하겠습니까? 나라를 위하여 공을 세운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전체를 위하는 입장에서 공을 세웠다면 충신으로 나타날 수 있지만, 자기를 중심삼은 입장에서 공을 세웠다면 충신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역사는 심각한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이제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내 자신은 누구의 것인가? 내 자신은 누구에게 지배 받고자 하는가? 또 내 심정은 누구를 모시고 싶고, 누구를 위하고 싶은가 하는 것을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자기를 중심삼고 행복하게 살려고 해도 행복하게 살 수 없는 것은 무슨 연고인고? 여러분이 생활권 내에서 이것을 생각했다 할진대는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마음으로 고대하는 이념의 주인공은 어디 있는가, 인류 앞에 행복을 소개하려는 분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의 최대 행복의 요소를 지배하고 우리를 역사의 흐름으로 몰아내는 주인이 있다 할진대 그 주인은 어디에 있는가 찾아보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은 잘 모르지만 역사는 목적지를 향하여 흐르고 있습니다. 하나의 통일된 이념세계를 향하여 끊임없이 흐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들의 조작으로 된 것도 아니요, 인간들의 어떠한 공헌으로 이뤄진 것도 아닙니다. 이 흐름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아니 움직일래야 아니 움직일 수 없는 흐름인데, 이것은 내 주위를 휩쓸고, 내 마음을 휩쓸고, 내 국가와 세계를 휩쓸어 가는 어떠한 힘이 있는 연고로, 또 나는 목적하는 세계를 향하여 달려야 할 과정에 있는 존재인 연고로 아니 흐를래야 아니 흐를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운명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다시 한번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이제 이 흐름에 있어서 우리의 발걸음은 어떠한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 좌쪽인가 우쪽인가? 아니면 종적인가 횡적인가? 이러한 흐름을 바라보게 될 때 우리는 자기를 중심삼은 어떠한 행복을 주장할 수 없고 자기를 중심 삼은 어떠한 성공을 주장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어떠한 위대한 예술적인 감정의 세계에서 행복을 느꼈다 하더라도 그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본래 피조세계 전체와 관계를 맺어 피조세계 전체를 대하여 주체적인 입장에 서야 할 가치적인 존재입니다. 그런 연고로 이 만물만상 앞에 자신을 내세워 자랑할 수 있을 만큼 성공하기 전에는 그런 심정의 흐름을 막아낼 도리가 없습니다. 어차피 인간이 가야 할 길은 이러한 길입니다. 이러한 위대하고 놀라운 인연의 세계에서 출발하여 관계의 세계를 거쳐 목적지에 도달하게 됩니다. 거기서는 본연의 가치를 드러내어 자기 스스로 창조주 앞에 자랑하고 나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고로 인간들은 그런 하나의 성공자, 행복자, 자유로운 자를 흠모하며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인간들을 이끌기 위하여 종교가 나오고 예술 문화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감정문제를 수습합니다. 개인적인 감정에서 가정적인 감정으로, 가정적인 감정에서 국가적인 감정으로, 국가적인 감정에서 세계적인 감정으로, 세계적인 감정에서 천주적인 감정으로 넓혀 왔습니다. 과거의 예술이 이러한 방향을 지향해 나왔던 것입니다.
자연계와 인간이 내적인 정의 인연을 맺기 위해서, 이들을 정적인 이념의 세계로 이끌기 위해서 예술이 있고 문학이 있습니다. 이것은 세계적인 주의 형태를 갖추어 나가면서 인간을 이끌고 있습니다. 과학은 외적인 모든 자연법도를 통하여 우리의 생활적인 환경을 연결시키기 위해 공헌하고 있습니다. 과학의 길은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냉정한 길이고, 예술이나 문학의 길은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애달픈 길입니다. 이런 가운데 이 모든 것은 하나의 이념을 향해 움직여 나아가고 있습니다.
종교는 어떠한 것이뇨? 과학과 예술 문화가 아무리 인간세계에 공헌을 하고 외적인 우리의 감정을 넓혔다 할지라도 내적인 감정세계를 영원한 세계까지는 연결시키지 못했고, 본래의 천적인 감정의 세계까지는 연결 지을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내적인 감정의 세계를 책임지기 위해서 나온 것이 왈 종교입니다.
종교는 예술의 내적인 분야를 대신한 것이요, 문화는 내적인 방면을 대신한 것으로서, 예술인이나 문학인들이 상상하지 못하는 어떠한 무형의 주체를, 그리고 그분에 의해 미의 충격을 받으며 살아 나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분파로 갈라진 종교가 합류되어야 할 때가 오게 됩니다. 이것은 어떠한 종교라는 테두리를 중심삼고 되는 것이 아니요, 어떠한 예술이라는 테두리를 중심삼고 되는 것도 아니며, 전체적이요 직접적인 무대가 되는 존재인 여러분입니다, 여러분. ‘나’라는 존재입니다, ‘나’라는 존재. 이러한 종교의 이념이 있다 할진대 그 이념은 핵심을 통할 수 있고, 천정을 통할 수 있는 심정의 기반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예술작품이 아름답고 자극적인 무엇을 느끼게 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이 종교적인 분야와 연결짓지 못한다 할진대는 역사적인 실패라는 규탄을 받고 이 지구상에서 추방당하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중간적인 나를 찾아야 할 우리인데, 종교가 오늘날까지 시대 시대를 거쳐오면서 많이 공헌해 나왔다는 것입니다. 정의 세계는 발전이 없습니다. 발전이 없어요. 왜? 심정의 세계를 대신한 연고로 발전이 없습니다. 몇천년 전이나 몇억만년 후나 발전이 없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심정, 부부가 서로를 사랑하는 심정, 자기 동족과 자기 친척을 사랑하는 심정, 이러한 심정은 발전이 없습니다. 그 심정 하나 붙들고 전체를 대신할 수 있고, 그 심정 하나를 가지고 완전성을 대신할 수 있고, 그 심정 하나가 전체 행복을 대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인생 최고의 행복지는 어디며, 최고의 안식처는 어디인고? 하나님이 어떠한 주체로 계시다면 우리가 그의 아들이라 주장할 수 있고, 그를 아버지라 할 수 있는 곳, 또 그 하나님이 우리를 아들이라 부를 수 있는 곳입니다. 정적인 기반 위에서 그러한 움직임이 지상에 벌어진다 할진대는 그 순간부터 인간세계는 행복한 세계요, 인류가 바라던 최대의 성공의 세계라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종교 이념을 갖고 나온 사람이라도 다 선을 지향하여 선에 대한 감정을 충족시키는 일을 해온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 땅 위에 와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하였고 나는 하나님과 일체라고 하였습니다. 역사노정에 이 이상 위대한 사실을 선포한 자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인류를 대하여 나는 신랑이요 너희는 신부라 하였고, 더 나아가서는 친구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백성이라고도 하였고, 제자라고도 하였습니다.
인간의 전체적인 생활 감정을 움직여 모든 요소를 자극시킬 수 있는 전체 요소를 들어 그의 주체적인 가치를 대신 주장하셨습니다. 어떠한 역사적인 종교의 교주도 예수와 같은 주장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한 예수님은 온 만상을 바라볼 때 정적인 심정으로 바라보셨고, 역사적인 인물들을 대할 때에도 평면적으로 대하지 않고 역사적인 심정으로 대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상충이 벌어졌습니다. 이런 모순된 현상은 타락된 세계였기 때문에 나타났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라’ 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지금까지 습관적인 인연을 맺고 정적인 관계를 가진 세계 앞에 일대 폭탄선언이었고 혁명적인 주장이었습니다. 그건 왜? 예수님은 자신이 느끼고 자신의 마음속에 흐르는 사랑의 심정으로 인간들을 바라볼 때, 하늘땅을 통하고 인류의 모든 심정을 통하고 시작과 끝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견지에서 바라볼 때, 그때까지 인간들이 서로 사랑한 것은 하늘로부터 본연의 사랑으로 인정받을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이런 것을 주장하고 나선 예수님 앞에 나타나는 모든 것은 원수였습니다. 전부가 원수였습니다. 그래서 그가 가신 걸음은 슬픈 걸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슬픈 사정을 아무도 몰랐습니다. 갈보리산상에서, 원수들 앞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피 흘리실 때의 그의 슬픔을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하였습니다. 또 그가 소망과 희망을 품고 바라보았던 기쁨의 심정을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때에도 무한대의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을 바라보시는 슬픔이 무한대의 슬픔일 것을 생각하셨습니다. 만물을 지어 놓으시고 한계권 내의 소망을 가지신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인간이 타락한 것을 탄식하시는 하나님이라 할진대, 인간을 지으신 것을 후회하시는 하나님이라 할진대 그 하나님의 슬픔은, 감성을 가진 우리 인간이 몇천만년 생각해도 알 수 없을 만큼 무한한 슬픔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 반면 하나님의 심정이 무한한 슬픔으로 얼룩지기 전에는 인간을 소망하고 그리는 무한한 기쁨의 심정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무한한 슬픔에 사로잡혀 파멸할 것이 아니라 슬픔을 박차고 무한한 기쁨을 찾아 나섰던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그 심정을 붙들고 싸워 나갈 수 있었던 원인은 무엇이뇨? 말할 수 없는 처참한 생활을, 요셉가정에서 추방을 당하여도 그 슬픔보다 더 큰 슬픔이 있는 것을 아셨고, 국가로부터 몰림을 당하고 교단으로부터 이단자로 몰림을 받아도 그 슬픔 이상의 슬픔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몰림을 당하고 배척을 받아도 그 슬픔 이상의 슬픔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자리에 들어가서도 내가 죽는 자리에서 느끼는 슬픔 이상의 슬픔이 있는 것을 아시는 예수님이었기에, 원수를 대하여 기도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는 자신의 심정보다도 더 큰 슬픔의 심정이, 더 큰 슬픔의 역사가, 더 큰 슬픔의 기준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아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찌하여 예수를 버리시고도 세상을 버리지 못하셨는고? 예수를 십자가에 내어 주면서도 원수들을 버리지 못하신 것은 무슨 연고였던고? 예수가 죽어가는 이상의 슬픔이 있었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입니다.
타락한 우리들은 이러한 무한한 천정을 찾아 우리를 지켜 주시고 섭리 하신 역사적인 심정을 체휼하여, 하나님 앞에 승리의 모습으로 나타나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살고 있는 이 사회를 바라보게 될 때, 이 세상은 기쁨의 세상이 아닙니다. 또 인류역사는 슬픔의 역사입니다. 인류의 역사가 기쁨으로 출발한 역사가 못되고 슬픔으로 시작된 역사였던 연고로 오늘날 인류의 역사는 슬픔의 역사가 된 것입니다.
어떠한 개인이 자기의 슬픔을 붙들고 울부짖는 것을 보면 여러분들은 동정할 줄 알겠지요. 그러나 개인의 슬픔을 동정하고 충고한 자신을 놓고 즐겨하지 마십시오. 개인을 넘어서 가정, 더 나아가서는 국가, 세계, 하늘의 슬픔까지 우리와 연하여 있습니다.
여러분은 흔히 개인의 불만이나 혹은 자기 개인의 불행, 자기 개인의 어려움, 자신의 심중에 사무친 슬픔을 갖고 통곡하여 울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개인의 슬픔보다도 더 큰 슬픔이 가정에 남아 있고, 사회에 남아 있고, 국가, 세계, 하늘땅에 남아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하늘의 심정을 찾아 나서는 용사가 되려면 우리 마음의 슬픔을 느끼되 궁극적인 슬픔까지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인생행로에서 내가 배척을 받고 배반을 당하고 억울함을 당하고 몰림을 받고 하는 것이, 천정을 찾아 나가는 데 있어서 그것들이 최후의 것들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인간 끼리끼리 맺혀진 슬픔 이상의 슬픔이 있습니다. 창조주가 크고 높으시다면 그 창조주의 이념이 크고 높고 그의 선이 크고 높은 것은 당연한데, 그 선과 이념을 그리시는 그 마음 앞에 슬픔이 크고 높으신 이념을 대신하여, 우주적인 선을 대신하여 무한한 대상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천정을 찾아 나가는 데 있어서 슬퍼하고 눈물을 흘리되 자기를 중심삼고 출발하여 자기를 중심삼고 결과를 맺기 위해 슬퍼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자는 자기를 붙들고 망해 버릴 것입니다. 가정을 붙들고 그러는 사람은 가정을 붙들고 망할 것이요, 국가를 붙들고 그러는 사람은 국가와 더불어 망할 것입니다. 세계를 붙들고 그러는 사람은 세계와 더불어 망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붙들고 울 줄 알아야 되겠습니까? 천정을 붙들고 울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하나님의 슬픔을 나의 슬픔으로, 하나님의 어려움을 나의 어려움으로 느낄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우리들은 타락한 인간인 연고로, 슬픈 역사노정을 편답하여 골고다산정을 향하여 걸어 나가야 하는 인간인 연고로 오늘 여러분이 느끼는 고통, 여러분이 당하는 그 슬픔이 끝이 아닙니다. 끝이 아니에요.
이것을 아신 예수님은 원수를 대하여 기도하는 것쯤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더한 슬픔의 고개가 있다 할지라도 그 슬픔의 고개를 넘어서 천적인 아들의 사명을 다해야 할 것을 느끼셨습니다. 그런 까닭에 예수님은 죽음의 고개를 밟고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또 그러한 마음의 충격으로 십자가상에서 원수를 용서하실 수 있었고 죽음을 이겨낼 수 있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종교의 걸음은 무엇을 찾아가는 걸음이냐? 하나님은 종교를 세워, 좋고 귀한 것을 인간 앞에 소개해 주셨지마는, 인간은 좋고 귀한 걸음을 걷지 못하고 어렵고 슬픈 걸음을 걸어야만 했습니다.
하늘이 6천년 동안 수고하고 슬퍼하신 것은 종교의 어떠한 경전에도 소개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선과 우리들이 살 수 있는 복지(福地)에 대해서는 면밀히 소개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하늘은 이러한 방편을 취해 나왔던고? 하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연고입니다. 하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연고로 이 방편을 통하여 우리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인간이 하늘을 찾아 나가는 것도 그렇지만 기쁨은 한 날에 대번에 찾아지지 않습니다. 슬픔의 길을 지나고 난 후에는 기쁨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천국을 바라는 자가 땅 위에 있다 할진대, 하늘의 참다운 아들딸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이 땅 위에 있다 할진대는 ‘내 일생에 하나님의 6천년 슬픔의 눈물을 흘리게 해 주시옵소서’ 라고 손을 들어 기도하고 통곡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생명을 걸고 하늘과 땅과 모든 만물을 걸고 외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선하고, 아름답고, 귀하고,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 입장에 계신 아버지가 아니라 슬픈 입장에 계신 아버지라는 것을 발견한 그 사람이 아버지께서 찾으시는 선의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참다운 아들딸이 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늘이 눈이 있어 눈물을 흘렸다 할진대는 이 땅 위의 어떠한 호수나 대하의 물보다도 더 많이 흘렸을 것이요, 하늘과 땅에 채울 곳이 없을 만큼 눈물 흘리며 슬퍼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슬픔을 체휼할 줄 아는 사람은 산을 바라보게 될 때, 그 산을 하늘의 수고와 고통의 산정으로 느끼고, 바다를 보면 그 바다를 하나님의 눈물로 느끼고, 초목을 바라보면 그것을 하나님의 걱정으로 느낄 것입니다. 크고 높고 깊고 넓은 광대무변한 온 천체를 바라볼 때, 그 모든 현상이 아름답지마는, 그 아름다움이 인간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지 못한 것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에게는 슬픔의 조건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것을 느낄 줄 아는, 그러한 감정으로 아버지를 부를 줄 아는 아들딸들이 이 땅 위에 어디에 있을 것인가 하고 하나님은 찾으실 것입니다.
참다운 효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버지와 더불어 기뻐하고 아버지와 더불어 즐거워하는 데에서만 효자 효녀의 모양으로 나타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을 효자 효녀라 하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기쁨보다도 아버지의 슬픔, 아버지의 어려움을 대신할 수 있는 자녀가 되어야만 효자 효녀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이렇거늘 하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정을 연하여 흐르는 인연이 기쁨으로 맺어질 수 없는 타락한 세계인 연고로, 슬픔과 곡절의 노정을 거쳐가야 할 인간인 연고로 우리는 이 손이 부르트고 이 몸이 피곤해지고 찢겨지더라도 하늘을 향하여 달려가겠다는 마음을 가질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어떠한 인간을 붙들고도 사정할 수 없을 만큼 슬픔에 잠기어서 아버님! 하고 부르짖는 그 한 시간이 곧 잃어버린 천정과 인연맺을 수 있는 시간인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인간은 이러한 시간을 회복해야 되겠고, 자기 일생에 있어서 하늘을 대하여 머리 숙여 눈물지을 수 있는 시간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에서 슬픔이 사라지고 기쁨과 평화를 노래할 수 있는 그 순간이 바로 하늘이 찾아오는 순간이요, 하늘이 웃을 수 있는 순간이요, 하늘이 기쁨으로 손을 들어 내 아들딸이라고 축복할 수 있는 시간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타락한 인간들은 가야 되겠습니다. 오늘날까지 걸어오던 발걸음을 멈추고 새로운 슬픔의 길을 가야 되겠습니다. 6천년 동안 인간을 지켜 주시기 위하여 슬픔의 길을 걸으신 하늘이 계셨다는 것을 몰랐던 인간들, 자기를 놓고 자탄해야 되겠습니다. 내가 살고 있는 가정과 국가와 세계를 걸어 놓고 자탄해야 되겠습니다.
죽음의 골고다를 넘으면서도 하늘의 슬픔을 생각하면서 원수를 위하여 복을 빌었던 예수의 발자취를 따르지 않는 한 하나님의 수고의 심정과 하나님의 슬픔의 심정을 땅 위의 인간으로서는 느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정에 사무친 슬픔을 풀지 못한다 할진대는, 하나님 속에 있는 영원한 기쁨과 영원한 선과 영원한 행복은 땅 위에 있는 인간과 영원히 인연을 맺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자신의 위치를 다시 생각해 보아야 되겠습니다. 눈물을 흘릴 때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눈물은 어디로 갔는고? 다시 한번 반성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손은 여러분 자신이 살기 위하여 많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이 손은 누구를 위하여 움직이고 있는가, 이 발걸음은 누구를 위하여 허덕이고 있는가, 이 몸과 마음은 누구를 위하여 무엇을 그리며 찾고 있는가 하는 것을 발걸음을 멈추고 생각해 봐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역사적인 슬픔에 처해 있는 자신임을 명심하고, 소망의 한 날을 다시 찾지 않으면 안 될 것을 느끼고, 새로이 각성하고 과거의 생활을 비판하여야 하겠습니다. 하늘이 바라는 내가 못 된 것을, 하늘과 인연을 맺지 못한 내 자체를 탄식해야 되겠습니다.
‘이런 입장에 선 나는 가정 앞에도 면목이 없고, 국가 앞에도 면목이 없고, 세계 앞에도 면목이 없구나’ 하는 심정을 여러분은 언제나 느낄 것인가? 이러한 심정이 여러분의 마음에서 우러난다면 가정을 봐도 눈물이요, 나라를 봐도 눈물이요, 세계를 봐도 눈물이요, 하늘을 바라보아도 눈물일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애에서 이런 일이 없다 할진대는 하나님의 심정이 있는 검은 장막을 헤치고 깊이 숨어 있는, 지극한 경지 밑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선과 하나님의 기쁨과 하나님의 행복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여러 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생활하면서 나를 위해 사는가 분석하여 나를 지켜 주시는 그 한 분이 계시다는 것을 알고, 내가 몰라도 지켜 주시고 알아도 지켜 주시는 한 분, 내가 어떠한 곤란한 입장에 있어도 지켜 주시는 그 한 분을 바라볼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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