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4월 들어 세 번째 맞이하는 안식일이옵니다. 아버지여, 여기 모인 자녀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봄절기를 맞이하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새로운 소식과 새로운 인연을 맞게 하여 주시옵고, 새로운 생명의 빛을 찾아온 이들에게 풍족한 은사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여기 모인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새로운 은총을 허락하여 주셔서 당신의 소원과 즐거움이 그 마음에 소생하게 하여주시옵소서.
사람에게는 언제나 변화가 필요한 것이요, 자각이 필요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자극을 받을 수 있는 자체가 되기 위해서는 사모의 심정과 흠모의 심정과 간절한 마음이 없어 가지고는 안 되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스스로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아버지의 뜻 앞에 있어서 내일의 소망을 오늘의 생활권내에 실현하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내일에 빛날 수 있는 실적을 오늘 이 순간권내에서 가져오지 않으면 아버지 앞에나 자기 자체에게 자극이 되지 못하고 기쁨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사오니, 여기 부복한 당신의 자녀들을 살펴 주시옵소서.
인간들은 세월을 그냥 흘려 보내고 있습니다. 한 해가 가면 또 한 해가 오는 걸로만 알고 있지만, 그런 가운데 십 년이 가고 이십 년이 가고 반평생 혹은 전생애를 다 흘려 보낼 수 있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짧은 인생행로에 있어서 저희들은 당신의 뜻을 배반하는 자리에 서서는 절대 안 되겠사옵니다.
섭리의 길을 가는 저희 앞에 저희들이 생각할 수 없는 무자비한 투쟁의 행로를 걸으신 아버지의 결정적인 수고가 없어 가지고는 저희들이 그 길을 갈 수 없고 그 인연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 하루가 기쁨으로 소화되는 것은 감사한 일이지만 이 기쁨을 내일의 기쁨으로 가져가지 못한다면 오늘의 기쁨은 나에게 있어 영영 원수가 되는 것을 알아야 되겠사옵고, 슬픔과 어려움과 탄식의 조건밖에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기쁨이 좋은 것만이 아니며 슬픔이 나쁜 것만이 아닌 줄 아옵니다. 문제는 기쁨과 슬픔을 연결하는 데 있어서 자기의 목적 성사를 위해 내적 투쟁이 그 환경에 얼마만큼 맺어 들어가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줄 아옵니다.
이러한 것을 알게 될 때에 저희들이 뜻과 더불어 생애노정을 가는 데 있어서 뜻과 얼마나 일치되었느냐, 뜻의 가치에 저희들의 기쁨과 슬픔이 어떻게 연결되어 나가느냐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되옵니다. 뜻은 내 일생을 지배하고 영원한 생명과 인연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에, 뜻은 오늘뿐만 아니라 영원한 역사적 시대를 주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옵니다.
아버지께서 직접 실체가 되시어 역사적인 중심으로서 이 시대를 관찰하고 통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 그 중심인 아버지와 일치되는 것은 기쁨이요, 일치되지 못하고 멀어지는 것은 슬픔이 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아버지, 당신의 슬픔을 저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당신께서는 어떤 입장에서 저희를 부르고 있사오며, 어떤 내용을 가지고 저희들을 찾아오시는가를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가고 오는 모든 일들이 쓸모없는 선에서 계획되어서는 안 되겠사오니, 죽든 살든 당신의 권위에 어긋나지 않는 시작과 더불어 과정을 거쳐 결과까지 가야 할 모습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러한 현재의 환경에서 최후에는 아버지 앞에 가지 않으면 안될 저희 인생이기에 저희들의 전체를 아버지와 더불어 의논하고 아버지로부터 충고를 받고 아버지의 최후의 승리와 보조를 맞출 수 있는 모습을 스스로 갖추는 것을 영광으로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 가셔야 할 기쁨의 길에 슬픔이 맺혀진 것을 알았사옵고, 소망의 세계가 찾아오기 전에 절망의 세계가 찾아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저희들이 기쁨의 자녀로서 아버지 앞에 나타난 것이 아니라 슬픔과 눈물의 흔적을 남긴 원한의 자녀로서 나타났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에, 아버지께서 걸어가셔야 할 복귀의 행각이 어떻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버지와 나, 그리고 가정과 민족과 국가와 세계가 판가름 길 앞에 놓여져 있는 것을 저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늘의 뜻을 대하는 데 있어서 저희 스스로를 중심삼을 때가 많은 것이 습관이라는 것을 저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저희들이 습관으로 말미암아 소망스런 전통을 이어받지 못하면 그 전통을 상속하는 자리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보다는 내일, 내일보다는 모레, 이러한 날들을 통해 분부하신 아버지의 뜻에 일치하고 아버지의 높으신 은사와 일치되기 위해서 저희들은 꾸준히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스스로 느낄 줄 아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무릎을 꿇고 아버지 앞에 기도할 적마다 아버지께서는 기쁨의 자리에서 저희들을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수난과 고통이 극한 자리에서 부르시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한 자리에서 내일을 다시 다짐하면서 가야 할 섭리이기 때문에 오늘 나타나시는 모습은 슬픈 모습이요, 그 마음은 외로운 마음인 것을 저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또한 대상의 가치를 추구하시는 아버지의 뜻 앞에 끝까지 효성의 도리를 다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저희들이 진정으로 알아야 되겠습니다.
열 번 칭찬받는 것보다 열 번 수모를 받으면서도 참을 수 있는 힘이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기필코 행복한 아들이 될 것이요, 기필코 하늘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아들이 되는 것을 저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열 번 칭찬받는 자리가 저희에게 복이 되는 것이 아니요, 승리가 다짐되는 것이 아닌 줄 아옵니다. 열 번 이상 책망을 받더라도 마음에 걸리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소망을 크게 가질 수 있는 아들딸이 되지 못하면 세계 복귀라는 크나큰 사명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여, 지금까지 당신은 통일교단을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직접적으로 사랑하는 입장에 계시지만 사랑하는 아들딸을 위해서 더 큰 수난의 고비를 넘지 않고는 사랑할 수 없는 아버지의 입장이기에 오늘 통일교단이 수난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누구도 모르는 수난길 가운데 복귀의 행각을 찾아가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있기 때문에, 저희들은 이 길을 찾아서 싸워 나가야 할 각자의 무대가 있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버지께서 본향의 나라에서 불러 '너는 나라를 위해서 어떻게 싸우며, 나라를 위해서 어떠한 중심을 가지고 싸울 수 있느냐'고 묻게 될 때 당당하게 자세를 갖추어 가지고 나서서 '아버지시여, 제가 그 뜻을 위해 왔나이다' 하고 아버지가 기뻐하실 대답을 할 수 있는 아들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기쁨이 있으면 언제나 자기를 중심삼고 기뻐하려고 하는 것이 인간이요, 슬픔이 있으면 언제나 피하려고 하는 것이 인간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버님이여, 저희들도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서 이와 같은 자리에 서게 될는지 모르지만 뜻을 중심삼고는 더 깊은 어려움과 슬픔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뜻을 위하여 맹세하고 가는 저희들은 강하고 담대한 마음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저희들이 현재의 자기를 중심삼고 과거의 길이 험했다고 탄식하고 비판하는 것보다는 넘어야 할 더 큰 고비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지난날의 그 무엇을 중심삼고 자기를 회상하는 것보다도, 지난날의 뜻을 중심삼은 자기보다도 아버지께서 얼마나 수고하셨는가를 살펴 가면서, 내 슬픔과 괴로움을 망각해 버리고 아버지의 슬픔과 고통을 염려할 수 있는 아들딸이 되어야 하겠사오니, 그러한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이여, 오늘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고, 전국에 널려 있는 통일의 자녀들을 친히 지켜 주시옵소서. 저희들에게는 이 땅을 대신해서 아니 갈래야 아니갈 수 없는 가정적 책임이 있사옵니다. 가정을 대표해서 축복받은 사랑하는 딸들이 일선에 나가 있습니다. 이 길은 내 개인의 사연으로 말미암아 되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민족과 세계의 운명을 걸고 필시 가지 않으면 안 되는 운명의 길이라는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예수가 간 길이 기독교가 가야 할 길이요, 저희 후대들이 가야 할 길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길을 가는 것이 예수의 소원이 아니라는 것을 예수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한 내용을 통하여 알았습니다. 예수가 피흘린 길을 갔기 때문에 측근 되는 예수의 사랑하는 제자들도 피를 흘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피의 노정이 복귀의 길인 것을 알았습니다.
오늘의 통일교단이 걸어온 길도 그러했습니다. 당신이 그런 길을 가셨기 때문에 통일교단이 그러한 운명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개인의 환난노정과 가정의 환난노정, 종족의 환난노정이 있기에 저희들에게도 개인이 가야 할 시련노정, 가정이 가야 할 시련노정, 종족이 가야 할 시련노정이 남아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반드시 가정을 중심삼고 가지 않으면 안 될 운명이 남아 있는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언제 개인이 가정을 대신해서 간 기준이 있었으며, 민족을 대신해서 간 기준이 있었느냐 할 때에 어느누구도 그 길을 가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길을 가는 것을 사명으로 알고 탕감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저희는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운명에 놓여 있는 당신의 사랑하는 통일의 딸들이 일선도상에서 슬픔의 눈물을 흘리는 불효녀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효녀가 되어 가지고 당신 앞에 정성을 다하여 당신의 은사와 보호 아래서 당신의 힘찬 행로에 힘입어, 그 남편과 가정을 중심삼고 그 이웃 동네와 친척과 자기 친구들을 넘어설 수 있게 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저희 개개인의 집안 식구가 모두 원수가 되었던 것이 가정을 중심삼고 넘어야 할 고비가 있을 뿐만 아니라 민족을 중심삼고 넘지 않으면 안 되는 고비가 있사옵니다. 이런 엄청난 복귀의 행각이 남아 있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버지, 저희들은 이 길을 가기로 결심하였기에 묵묵히 따라가야 되겠습니다. 오늘 간 것을 기뻐하기 전에 내일에 다가올 슬픔을 염려하면서 오늘의 기쁨을 연장시키기 위해 그 기쁨을 이 민족과 더불어, 세계와 더불어 나누어 가지게 해 달라고 정성을 다하며 가야 할 저희들인 것을 알고 있사오니, 아버지, 저희들의 앞날을 지켜 주시옵고 저희들의 앞길을 인도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길은 세상의 누구를 보고 갈 길이 못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늘만을 아버지로 알고 가는 길이요, 아버지만을 의지하고 가야 되는 길이요, 아버지만을 모셔야 할 길이기 때문에 어느누구도 스스로 나의 친구가 되어 주지 못하는 것이요,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도, 자기의 처자까지도 이 일을 대신해 줄 수 없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내 집안 식구가 원수가 되기 때문에, 내 갈 길을 막고 내 가는 길에 상처를 입히며 낙망하게 하는 사람은 지극히 가까운 무리인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하나님을 낙망시키고 슬픔의 자리에 몰아넣는 것도 하나님을 믿는다는 무리인 것을 저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기에 가면 갈수록 당신 앞에 겸손하고 가면 갈수록 아버지의 뜻을 염려하는 저희들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백 번 천 번 죽어서 없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당신의 뜻만은 남기고 가야할 것이 오늘 복귀도상에 선 저희의 의무요 사명인 것을 알고 있기에 이 뜻을 위해 나선 이 몸은 맹세한 적이 한 번뿐만이 아니었사옵니다. 천 번 만 번 다짐한 통일교회 무리의 맹세는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그 맹세는 목숨을 걸고 하는 것이요, 비수와 같이 예리한 자리에서, 자기의 생명을 끊는 듯한 자리에서 조건을 통과시키는 것이었사옵니다. 이러한 자리에서 아니 갈래야 아니 갈 수 없는 탕감의 길에 있는 당신의 딱하고 어려운 사실을 저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와 같은 엄숙한 사명과 과제를 앞에 놓고 가는 저희들은 예수님을 대신하여 슬픔을 넘을 수 있는 내적 다짐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요, 소망을 갖고 현실적인 모습을 타개하지 않으면 안 되겠사옵니다. 이러한 노정을 가는 것이 복귀의 길이요, 아버님이 가시는 길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쌍하신 분은 당신밖에 없다는 것을 날이 가면 갈수록 느껴야 할 자가 통일교단의 아들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들이요, 딸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들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 아들딸은 어떠한 조상의 혈통의 인연을 갖고 태어난 그런 아들딸이 아니라 하늘의 도의 인연을 통하여서, 혹은 선조의 피의 공적을 대신하여 거두어진 결실의 아들딸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사옵니다. 이러한 아들딸이기에 엄청난 가치를 지녔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 누가 등극시켜 주기 전에 자기 스스로 등극해 가야 할 저희 자신들인 것을 확실히 알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지금까지 당신께서 통일교단을 이끌어 주셨사오니 금후의 모든 것을 당신께 맡겨야만 되겠습니다. 당신 외에는 어느누구도 저희를 지도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저희 전체를 인도하여 줄 것을 믿으며 그 인도함을 따라가는 저희들은 당신이 가는 길이 십자가의 길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피눈물의 교차로가 거듭거듭 축적되어 있는 길인 것을 알고 있사오며, 그 길을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당신을 믿지 않고는 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자신의 입장에서 비판하고 주장해 가지고는 가지 못하는 길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사옵고, 그 길을 가기 위해서는 오늘도 손해를 봐야 되고 내일도 손해를 봐야 되며 일생을 통하여 손해를 봐야 된다는 사실을 저희가 알아야 되겠사옵니다. 이렇게 생각하게 될 때 이 온 천지간에 불쌍하신 분은 아버지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부모에게 열 자식이 있다면 부모가 그 열 자식에게 다 잘 해주어야 그 자식들은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식들은 부모와 어긋나는 입장에서 좋아하는 때가 많은 것을 보게 될 때, 수십 억 인류를 지금까지 거느리고 나오시는 아버지는 얼마나 고독하고 얼마나 외롭고 얼마나 비참하고 얼마나 딱한 자리에 계시겠느냐 하는 것을 저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버지와는 상반된 혈통적 인연을 가진 인류를 바라보면서 섭리의 뜻을 세워 나가시는 당신의 노고와 고통이 크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당신은 저희들을 채찍으로 몰아 세우지 아니하였습니다.
순응하는 마음, 감동하는 마음을 가지고 당신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자리로 인간을 이끌기 위해서는 천신만고의 형극의 노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저희가 당신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배후에 얼마나 많은 아버지의 피눈물의 공적이 있는지를 알고 저희들은 그것을 헛되이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오늘 내가 남이 모르는 섭리의 뜻 가운데 서 있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그 배후에는 억천만세의 눈물이 어려 있으며, 죽음의 교차로가 연이어 있으며, 피의 제단이 상속되어 나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옵니다. 눈을 들면 눈물 없이 대할 수 없는 것이 뜻의 길인 것을 알게 되옵니다. 아버님, 지금까지 저희 교단을 이끌기 위해서 얼마나 수고하셨습니까? 오늘도 가야 되고 내일도 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어떤 일이든지 자기로 말미암아 시작되어 자기에게로 귀결되기를 바라는 것이 인간의 폐단인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오늘 통일교단만은 여기에 있는 세째 아들로 말미암아 자기에게로 귀결되지 않게 하기 위해 몸부림쳐 나왔습니다. 아버지로부터 시작하였기에 아버지께로 귀결되어야 되겠습니다. 아버님이 비참한 길을 걸으셨기 때문에 저희들도 비참한 길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길을 알았기 때문에 귀결된 자리에서 최후의 비참이 절정에 달하여도 당신이 환희할 수 있는 모습을 찾아 아버지의 영광을 찬양하여야 할 것이 복귀의 도상을 가는 통일교단의 운명이요, 통일교회를 지도하고 있는 이 자식의 사명인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생애를 바쳐 남에게 빚지며 살지 않겠다고 아버지 앞에 맹세하고 몸부림치는 것을 당신이 알고 있사오니 흘러가는 세월과 더불어, 민족의 한스러운 현시대의 운명과 더불어, 앞으로 아시아에 다가올 환난과 더불어, 최후의 절정에 달한 비극의 도상에서 갈 길을 찾지 못하는 세계 인류와 더불어 하늘의 섭리의 뜻이 흘러가야 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당신은 저희들을 세워 주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길을 가는 데는 고속도로를 닦는 거와 마찬가지로 죽음의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안 될 때가 있는 것이요, 스스로 죽음을 각오하고 가야 할 고비가 많다는 것을 저희들은 생각하게 되옵니다.
이 길을 다 갈 때까지 저희들은 아버지 앞에 간절한 마음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아버님을 부를 때는 뼛골이 녹아나는 사무치는 심정을 가지고 불러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심정으로 어려운 생활의 환경을 넘고 넘어야 되겠습니다. 그 누가 뭐라 하더라도 사무친 아버지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저희들은 참고 가야 되겠습니다. 겸손히 아버지를 본받고 아버지의 아들의 인연을 저희들이 맺어야 되겠사오니, 아버지를 따라서 끝까지 달려가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1971년, 금후에 되어질 모든 것이 이루어질 날이 멀지 않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나라의 운명도 점점점 최후의 정상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사오니 여기에 저희들이 기수가 되고 발판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당신의 사정하에서 이 나라를 치리할 수 있는 때에 당신을 모실 수 있는 아들딸이 누구냐고 묻게 될 때에 옷깃을 여미며 '네, 제가 여기 있사오니 명령하시옵소서' 하고 대답할 수 있는 겸손한 아들딸을 아버지는 그리워하며 찾고 계신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모든 일은 말만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는 데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 나가는 사람들은 자기를 자랑하는 사람들이 아니옵니다. 입을 열어 말하는 사람들이 아니옵니다. 묵묵히 남이 모르는 가운데 행하는 사람이요, 귀가 있어도 들을 줄 모르는 것같이 하는 사람이요, 입이 있어도 말할 줄 모르는 것같이 하는 사람이요, 눈이 있어도 볼 줄 모르는 것같이 하는 사람이옵니다. 그런 사람들이 아버지와 더불어 운행하며 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그들을 통하여 역사가 개방되고 그들을 통하여서 역사가 주도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에, 아버지여, 이 교단을 당신이 맡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그 누구도 이 교단의 주인이 아니옵니다. 당신이 역사적으로 섭리해 오던 노정에서 남아진 통일교단이기 때문에 이 교단은 당신의 운명과 더불어 가야 되겠습니다. 역사의 흔적을 남기면서 가야 되겠습니다. 이 길에는 무자비한 싸움의 행각이 거듭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수난의 노정과 외로운 길이 있다면 아버님이 끝까지 운행해 주시옵소서.
자기의 외로움을 가지고 식구들 앞에서 불평하는 것은 타락한 혈통을 이어받은 인간의 습성인 것을 생각할 때, 이스라엘을 지도하던 모세는 훌륭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저희들은 잘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브라함도 훌륭했고 노아도 훌륭했던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저희들은 그들이 걸었던 역사적인 행적과 교훈을 다시 한 번 배워야 되겠습니다.
아브라함은 고향인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는 아버지의 명령을 받고 의심치 않고 떠나갔습니다. 노아도 120년 동안 방주를 만들라는 아버지의 명령을 받고 의심치 않았습니다. 모세도 40년의 미디안 광야 생활을 하면서 아버지를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들은 소망의 마음을 강하게 가졌기 때문에 의심보다도, 아버지를 원망하기보다도 아버지를 더욱 믿고 힘든 길을 참으면서 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희들은 참고 가야 할 행각의 노정에서 굳건하여야 되겠으며 강하고 담대하여야겠습니다. 내 스스로 최후의 자리까지 결의하고 가는 길이 복귀의 길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희들은 생명을 걸고 아버지와 담판하는 순간에 어떻게 할 것인가를 결정지어야 되겠습니다. 이런 문제는 자기 자식과 더불어 결정지어 나가야 되겠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사랑하는 부모와 사랑하는 친척과 사랑하는 나라와 세계 앞에 모든 것을 결정지어 놓고 가야 된다는 것을 스스로 다짐하고, 그 고빗길이 어떻다는 것을 알고 감사할 줄 아는 아들들이 되고 딸들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누가 잘못을 했다면 그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전체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요, 이 책임을 저희들이 다하게 되면 아버지 앞에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희 개인 개인들이 슬퍼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옵니다. 저희 개인 개인이 망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옵니다. 저희 개인의 슬픔으로 말미암아 당신이 슬픈 것이 문제요, 이것이 당신에게 인연된다는 사실이 슬픔이라는 것을 저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 선과 악은 같은 자리에 설 수 없다는 사실을 저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개인이 가는 노정에는 네 집안 식구가 원수라고 했기 때문에 자기 식구가 원수의 입장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가정적인 입장에서도 그렇고, 교단적인 입장에서도 그렇고, 나라를 중심삼고도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 통일교회를 볼 때, 통일교회에는 개인적인 원수가 있었습니다. 가정적인 원수도 있었습니다. 교단적인 원수도 있었습니다. 국가적인 원수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세계적인 원수가 아직까지 남아 있는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원수들이 외적인 입장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통일교회 자체 내에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 원수는 먼저 나에게 있는 것이요, 내 가까이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저희들은 가까운 곳에 있는 원수를 무자비하게 끊고 넘어설 수 있는 당신의 마음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이 길을 가는 데는 자식이라든가 처자라든가 그 누구도 절대 믿을 수 없고 이들에게 절대 운행할 수 없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고 가야 되겠습니다. 당신을 잘 믿었다는 많은 무리가 있사오나 이 길에 관계될 수 없는 것을 저희들은 확실히 알아야 되겠사옵니다. 당신 이외는 믿지 말고 당신만을 높이고 당신만을 의지하고 당신과 의논하면서 가야 할 길이 복귀의 길인 것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제삼자의 말을 하기 전에 아버지와 더불어 나 스스로의 말을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으며, 제삼자를 평하기 전에 나 스스로를 먼저 평할 수 있는 모습들이 되어야 할 것이 통일의 아들딸들이 가져야 할 전통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이 4월과 이후의 모든 전체를 친히 맡아 주관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4월부터 8월까지, 이 기간에는 우리 교회에 거듭되는 수난이 찾아올 것을 알고 있습니다. 외부의 수난이 없다면 자체 내에 수난이 생긴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 수난의 때를 피하기 위해서 저희들은 온갖 정성을 들여야 되겠습니다. 아버지 앞에 겸손히 엎드려야 되겠습니다.
아버지를 진정 사랑했는지 나를 놓고 다시 한 번 물어 봐야 되겠습니다. 아버지가 내 편에 있는지 다시 한 번 알아봐야 되겠습니다. 아버지로 말미암아 살고 있는 나인지 다시 한 번 자신을 비판해 봐야 되겠습니다. 아버지를 위한 생의 목적을 가지고 있느냐고 다시 한 번 스스로 판단해 봐야 되겠습니다. 이런 것을 확정지어 놓고 뜻길을 끝까지 갈 줄 아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오며, 모든 말씀 참부모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니다. 아멘.
사람이 소신을 가지고 자기의 목적을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투쟁과정을 거쳐야 됩니다. 소망이 크면 클수록 그 소망을 이루는 데에는 비례적으로 상극적인 요소가 가로막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요소들은 나에게 흡수되는 것이 아니라 반발하고, 나를 접대하는 것이 아니라 밀어 내려 하는 것입니다. 크나큰 목적을 향하여 가게 될 때는 그 목적에 비례되는 수난길이 있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성공하려고 결심을 합니다. 세상에 크나큰 목적을 중심삼고 성공을 꿈꾸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개개인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꿈을 꾸고 나가지만 그 목적을 성사시킨 사람은 지극히 적습니다. 그 목적하는 바가 민족적이면, 민족적인 기준을 중심삼고 출발을 같이 하였다 하더라도 최후에 남아지는 그 자리에 들어간 후라야 그 민족을 대표할 수 있는 승리의 한때를 맞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민족이 수난노정에 있게 될 때에, 그 수난노정과 더불어 흘러가는 사람은 민족 앞에 있어서 크나큰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민족이 수난노정에 있으면 흘러가는 역사적인 환경을 가로막고 이것을 거슬러 올라가야 됩니다. 거슬러 올라가는 데는 삼천만이면 삼천만 가운데 몇 사람 앞만을 거슬러 올라가면 안 됩니다. 삼천만 앞을 전부 다 거슬러 올라가기 전에는 민족 전체를 새로운 목적의 결과로 이끌 승리의 터전을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문제를 볼 때, 세계적인 어떤 정상을 바라보고 가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 사람이 세계적인 수난의 고비를 피해서 가려고 한다면 그는 세계의 정상에 절대 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상의 길이 나로 말미암아 생겨나고 나와 더불어 있는 것이 필연적인 운명이라고 다짐하며, 이것이 다른 누구의 운명이 아니라 내 필생의 운명이라고 생각하여 그 길을 남이 어렵게 보더라도 먼저 가고 소화시켜 그것을 생명의 가치로 삼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세계적인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런 싸움을 일년, 이년, 십년, 백년, 혹은 수천년 다짐해 나가는 민족이 있다면, 그 민족은 세계적인 민족이 될 것이요, 국가는 세계적인 국가가 될 것입니다. 또 그런 종족이 있다면 그 종족은 반드시 세계를 지배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민족을 알고 있습니다. 오늘날 유대인 하게 되면 세계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민족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2천년 동안 나라를 잃어버린 고객 (孤客)이 되어 유리하는 민족이었습니다. 수많은 민족으로부터 총탄의 세례를 받고 수많은 원수 나라의 말굽에 밟혀 희생되어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절개만은 지켰습니다. 자기 개인을 위해 수난길을 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가진 사상은 무엇이냐 하면 선민사상입니다. 수난길을 가지만 최후의 노정에서는 메시아가 와 가지고 자기들의 모든 수난의 대가를 세계적으로 치러 준다는 소망을 품고 나온 민족임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신문 지상을 통해 알다시피 키부츠(kibbutz)제도의 배후에는 정신적인 동기가 있는데 그것이 선민사상입니다. 나라 없는 민족으로서 몰리는 곳곳마다 수난이 닥쳐왔지만 그 수난이 민족의 골수에 흐르고 있는 선민사상을 빼 버리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은 그러한 환경에서도 선민사상을 다짐하였고, 어려운 고빗길에서도 외로움을 탄식하기 전에 선민의 길을 가기 위해서 하나님을 붙들고 몸부림쳐 나온 민족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세계의 어떤 분야에서도 유대인이 문제가 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유대 민족이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느냐? 세계적 수난길을 피해 가서는 하늘 민족이 못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민족은 이 길을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운명길로 알고 걸어온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어느 나라에서든지 유대인을 환영하는 민족이 없었고 개인이 없었습니다. 지금도 유대인이 주위에 등장하게 되면 누구나 다 싫어하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싫어하는 환경에 몰린다고 하더라도 선민사상이 있기 때문에 그 환경에서 사라질래야 사라질 수 없는 것입니다.
유대 민족은 오래전부터 도피할래야 도피할 수 없는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그런 입장에서 모든 시련의 여건들을 저버리고 그 환경에 동화되지 않았습니다. 그런 입장이 도리어 하늘 앞에 접근할 수 있는 지름길이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전체 유대인이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유대인들은 애국심을 마음 깊이 품고 나아갈 수 있는 하나의 동기를 역사를 통해 가졌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렇게 끝까지 수난노정을 참고 가면서 하늘을 부여안고 나온 민족이었기 때문에 유대 민족이 필시 세계에서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적인 상황에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통일교회의 가는 길이 개인의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간다면 개인과 더불어 망하는 것입니다. 개인과 더불어 사라지는 것입니다. 통일교회의 가는 길이 대한민국의 한민족과 더불어 가기를 원하는 뜻이라면 한민족이 망하면 뜻도 망하는 것입니다. 또한 아시아 몇 개국을 중심삼고 가려고 하는 주의가 되었다면 그 아시아 몇 개국이 역사를 대신하는 승리한 자리에서 세계를 영영 지도할 수 있는 입장이 되지 못하면 통일교회의 가는 길은 막혀 버릴 것입니다.
오늘날 통일교회가 가는 길은 대한민국만을 위한 길이 아니요, 아시아만을 위한 길이 아니요, 세계만을 위한 길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위하는 길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통일교회의 길은 출발에서부터 어떠한 개인을 위한 길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길이었습니다. 동기가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위한 길입니다.
하나님은 기쁨의 하나님이 아니라 슬픔의 하나님으로서 출발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어느때에 기쁨의 하나님으로 나타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은 어떠한 민족의 한계선에서 명령할 수 있는 환경이 있으면 그 정상에서 머물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가야 됩니다. 하나의 민족을 대신했으면 그 민족을 수습해 가지고 또 다른 민족을 가세하여 단계적으로 세계뿐만 아니라 영계까지 통과하여 가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됩니다. 이 길을 완전히 통과할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수난길을 모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슬픔으로 출발하였기 때문에 그런 길을 다 갈 때까지는 슬픔이 남아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 슬픔을 국가가 당한다면 하나님도 당하는 것이요, 세계가 당한다면 하나님도 당하는 것입니다. 이 지상 세계뿐만 아니라 영계에 있는 수많은 영인들을 중심삼고 맺혀져 있는 모든 수난길을 하나님도 기필코 같이 가야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를 정신적 입장에서 타개해 가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세계와 더불어 기뻐할 수 있는 한날을 갖지 못할 것입니다.
세계대전 당시 일본이 망하고 독일이 망하고 이태리가 망하게 되어 전쟁이 끝나게 될 때 민주주의 국가 가운데 전쟁에 가담했던 나라들은 어느 나라보다 비참하였고 수난길 가운데 어려운 짐을 짊어지고 나왔습니다. 그렇지만 수난의 자리에서 최후까지 극복하여 전쟁에서 승리하게 될 때 그 승리는 어떠한 특정 민족만의 승리가 아니었습니다. 여기에 가담했던 큰 나라나 작은 나라를 막론하고 슬픈 자리에 동참했던 무리들은 승리의 한날을 맞이한 기쁨을 자기들의 기쁨으로 맞이했던 사실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복귀 섭리는 기쁨으로 출발하지 않고 슬픔으로 출발했습니다. 슬픔으로 심은 것입니다. 슬픔으로 심었기 때문에 자라는 것도 기쁨으로 자라온 것이 아니라 슬픔으로 자라온 것입니다. 눈물로 심었기 때문에 눈물로써 자라야 되는 것입니다. 죽음길을 거쳐가는 환경에서 심어 나왔기 때문에 죽음길을 다짐하는 자리에서 반드시 전진해야 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통일교회가 가야 할 길은 어떤 길이냐 하면 대한민국만을 위하는 길이 아닙니다. 이 길을 아시아의 어떤 국가의 운명과 더불어 가서도 안 됩니다. 세계를 위해서 가야 합니다. 나라면 나라, 민족이면 민족을 중심삼고 자기 나름의 소망이 이루어졌다고 기뻐하더라도 그 기쁨과 더불어 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기뻐하는 민족이 있더라도 그 민족을 중심삼고 기뻐하는 것은 세계를 중심삼고 기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민족만을 위했다고 할 때는 그 기쁨을 넘어 가지고 세계적 슬픔을 대하여 그 슬픔을 넘어가야 하는 길이 복귀의 길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슬픔으로 심었기 때문에 반드시 슬픔으로 거두어 들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심은 대로 거두어 들인다는 원칙을 여러분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슬픔으로 심었기 때문에 반드시 슬픔으로 거두어야 됩니다.
하나님은 언제 기뻐하실 수 있을 것이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아무리 기뻐하실 수 있는 자리가 있다 하더라도 슬픈 환경이 자기와 하나되는 입장에서는 기뻐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부모가 어려운 가운데 있게 될 때 어려운 부모를 존경하고 부모와 같이 고생하려고 하는 자식이 있다면, 그 자식을 가진 부모는 돈이 없더라도 자기와 더불어 동고동락하기를 원하는 자식을 바라보는 자리에서는 긍휼의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는 새로운 소망을 다짐할 수 있는 자리와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가 슬퍼하는 자리에 있는데 자식이 그 슬픔을 알지 못하고 도리어 기뻐하는 자리로 나간다면 거기에서는 절대로 뜻이 같이할 수 없습니다.
부모가 슬퍼하는 자리에 있는데 자식이 부모보다 더 슬퍼할 수 있는 자리에 가게 되면 그 부모와 역사적인 새로운 인연을 맺게 되는 것입니다. 부모는 모든 것을 상속해 주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기와 더불어 슬퍼하는 자리에 있는 자식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이 자식아, 너는 이와 같은 마음을 죽을 때까지 가져라!'고 하는 것입니다. 나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이런 마음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더욱 간절하고 더욱 높고 더욱 넓은 슬픔을 가지고 수난길에 동참해 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모의 마음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왜 그러느냐? 자기의 전부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전부를 주고 앞으로 다가올 더 큰 수난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부모라 할진대는 부모 이상의 수난을 앞에 놓고 다짐하고, 그 수난길을 가는 것을 생명시하고, 자기의 모든 것을 희생하더라도 부모의 슬픔을 중심삼고 세계적인 슬픔을 넘어서기 위해 다짐할 수 있는 아들딸을 찾는 것입니다. 이것이 슬픈 자리에 있는 부모의 심정이라는 것을 우리가 생각하게 될 때 하나님도 마찬가지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슬픔으로 뿌렸기 때문에 슬픔으로 거두어야 할 운명길을 가는 우리가 하나님의 위로를 받고 나 스스로 기뻐하며 가는 것은 하나님을 위해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슬픈 부모를 어떻게 위로하고 그 부모보다 더 슬퍼할 수 있는 자리에 어떻게 나가느냐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고, 그런 운동, 그런 결의, 혹은 그런 맹세를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위로하고 하나님을 자극시켜서 내일의 소망을 바라보고 현재의 환난 시대를 극복하여 넘어갈 수 있는 놀음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일은 타락한 인간의 부모와 자식간에 벌어지는 것과 같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까지 역사는 슬픔으로 출발하였기 때문에, 슬픔의 역사를 스스로 개척하여 금후에 연속되는 최후의 끝과 최고의 정상까지 가야 됩니다. 이 길이 하나님이 가셔야 할 길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자기 개인을 중심삼고 기뻐하고, 먹고, 울고, 자기 개인의 행복만을 추구하는 사람은 반드시 결렬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끝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최후에 가야 할 최고의 정상이 문제가 아닙니다. 어디서부터 최고의 정상을 이어받느냐, 어디서부터 최고의 정상의 길을 연결시켜 나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은 슬픔으로 출발하셨기 때문에 반드시 슬픔으로 거두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기쁜 날이 언제 있었습니까? 세상에서 뜻을 알고 좋아하고 춤을 추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슬픔을 알아 가지고 한걸음 앞서서 눈물을 흘리며 몸부림치고 외로움을 극복하면서 하나님을 위로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런 자리를 소망하셨던 하나님인 것을 알고 그 수난길을 대신 가겠다고 몸부림치는 무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소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소망을 가지고 '내가 당하는 시련이 너로 말미암아 사라지고 내가 당해야 할 시련이 너 때문에 사라졌다' 하는 마음을 가져야 비로소 그 자리에서 역사적인 슬픔을 망각할 수 있는 것이요, 개인을 대해서 현재의 슬픔을 극복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깊은 뜻이라는 것을 생각해 볼 때,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는 통일교회 식구들은 어느때에 그런 자리에 서 가지고 하나님을 염려해 봤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될 것입니다.
나에게 슬픔이 있게 되면 '아버지여, 내 슬픔을 막으시옵소서. 슬픔은 하나님 것으로 하시고 나에게는 기쁨만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의 기도 방법입니다. 또는 '저희들에게 화를 없게 하시고 복을 주시옵소서. 화가 있다면 그 화를 당신이 가지시고 당신이 가지고 있는 복을 나에게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이런 신앙은 반드시 끝장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반드시 신앙길을 오래 가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 개인이 지금까지의 역사를 회고해 볼 때, 자기 스스로 어려운 길을 잘 극복해 나왔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면 자기가 극복하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잘 참아 나오셨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자기 스스로 걸어온 노정을 생각하며 기뻐하기 전에 하나님이 얼마나 슬퍼하셨는가를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30억 인류를 바라보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입장을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열 자식이 있는 부모가 있다면, 그 부모 앞에 있어서 자식들은 전부 다 자기가 원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대로 해주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의 실상입니다.
30억 인류는 전부 다 자기의 소신을 갖고 있기 때문에 자기 소신대로 하나님이 해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천 사람이면 천 사람에게 다 좋게 해주어야 좋아하는 것이 인간이 아니냐 이겁니다. 그럼, 하나님이 이것을 다 해줄 수 있겠어요? 안 됩니다. 만일 그들이 원하는 대로 좋게 해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좋게 해줘도 불평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노정에는 비애와 슬픔이 교차되어 연속적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좋은 때가 있으면 슬픈 때가 있는 것입니다. 선을 위해서 일생 동안 수난길을 간 사람이 그 일대에서는 기쁨을 못 봤다 하더라도 반드시 그 후대에서는 기쁨을 보는 것입니다. 오늘 통일교단이 가는 길이 그렇습니다.
이런 원칙에 따라 볼 때, 통일교회는 어떤 길을 갈 것이냐? 통일교회를 지도하는 문선생이라는 사람은 어떤 길을 갈 것이냐? 또 문선생을 지도하시는 하나님은 어떤 명령을 할 것이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 길은 기쁨을 구가하면서 가는 길이 아닙니다. 진정한 의미의 슬픔을 느끼기 위해서 가는 길입니다. 자기가 느끼는 가슴 아픈 슬픔은 당사자 외에는 모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에서는 체휼적인 신앙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하자는 것입니다.
왜 체휼적인 신앙을 강조하느냐? 하나님의 슬픔을 몰라 가지고는 하나님 앞으로 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하기 위해서는 부모의 슬픔을 완전히 알고 그 이상의 심정을 가지고 슬픔을 제거시켜 줄 수 있는 실체가 되어야만 효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심정이 부모와 같지 못하면 효자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충신 열녀의 심정과 일치될 수 있는 기반 위에 얼마나 있었느냐? 그런 적이 몇 번이 되느냐? 그러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도수와 그런 때가 얼마나 많았느냐에 따라 믿음은 결정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늘날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통일교회를 지도하고 있는 문선생을 생각해 보세요. 천 사람이면 천 사람이 다 선생님과 의논합니다. 선생님에게 이야기하면 전부 다 도와줄 것 같아서 왔으니, 좋다는 거예요. 그러나 그런 자리에 서기 전에 자신이 이루려고 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봐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통일교회 간부들이 뜻길에 나가 싸우고 있지만, 탕감노정에 있어서 뜻과 더불어 자기가 어떻게 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냉정히 자신을 비판해 볼 때 자기 스스로 자신있는 입장에 설 수 있느냐 하면 없다는 것입니다. 뜻 앞에 자신있게 설 수 없으면서도 자기를 중심삼고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의 욕구를 중심삼고 자신이 좋아하는 거라고요. 이런 사람은 뜻 앞에 절대 설 수 없습니다.
뜻 앞에 있어서 조건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 자신의 욕구조건을 가지고 요구한다면 자신을 망하게 하는 것이요, 전체를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속한 단체는 망하는 것입니다. 망하지 않으면 망하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단체가 망하지 않으면 원칙에 위반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선생님이 여러분에게 어떤 것을 지시하면 여러분은 불평하지 말고 따라와야 됩니다. 따라오는 사람보다 지도하는 사람이 십자가를 더 지는 것입니다. 지금 부녀자들을 일선에 내세웠는데 이것에 대해서는 선생님이 책임지는 것입니다. 그 가정에 피해가 있으면 하나님이 책임지는 것입니다. 일선에 배치했으면 배치된 일선에 대하여 내가 책임을 져야 하는 것입니다.
명령을 받은 사람은 고생하고 명령을 내린 책임자는 편하게 사는 법은 없습니다. 책임자는 하나님 앞에 누구보다 애달프고 안타까운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갖지 않으면 그 단체는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만 있으면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고 그들을 만나고 그들과 더불어 의논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활을 해 나온 것입니다.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면서, 밥을 먹으면서, 혹은 잠을 잘 때까지 기도해야 됩니다. 그러지 않고는 발전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대로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앞으로 통일교회는 이것이 문제입니다.
정상이라는 것, 역사상에 없는 일을 하기 위해서는 정상을 넘어가야 됩니다. 정상으로 모든 사람을 끌어올리기를 바라는 사람은 이미 넘어가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정상을 넘어가는 데 있어서 나는 어디에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너는 어떻게 했느냐' 할 때, '나는 이렇게 했습니다' 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원리를 통해서 아는 것과 같이 예수님이 가는 길은 사도들이 가야 할 길이요. 사도들이 가는 길은 기독교인들이 가야 할 길입니다. 오늘 통일교회가 가야 하는 길은 선생님이 가는 길입니다. 여러분은 선생님이 가는 길을 따라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가야 할 길은 아직도 멀었습니다. 이 길을 가는 데에는 부모, 여자, 친구 그 누구도 다 버리고 가야 됩니다. 그 길은 그렇게 가야 하는 것입니다.
타락이 하늘 가정에 있어서 불화의 출발이었습니다. 이 불화의 싸움은 언제 끝나느냐? 싸움을 다하고 진짜 망하는 자리까지 가야 됩니다. 그런 자리까지 가야 끝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세계와 공산세계가 하나되지 못하면 민주주의도 망하고 공산주의도 망하는 것입니다. 둘이 싸우다가는 둘 다 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그 두 세계 중 한 편에서 선을 중심삼고 세계적인 선의 출발을 모색하는 한때가 온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원리를 통해서 개인복귀 원리를 배웠습니다. 선생님이 개인복귀 원리만 가르쳐 주었기 때문에 가정복귀 원리는 모르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이 왜 죽었느냐 하는 것은 가르쳐 주었지만 예수님이 안 죽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는 세부적인 내용은 가르쳐 주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분은 그것을 모르는 거라구요.
선생님은 가정을 버렸습니다. 개인을 중심삼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도 가정을 버리는 자리에 가야 됩니다. 대한민국이 그런 자리에 가야 되는 것입니다. 세계도 그런 자리에 가야 합니다. 세계가 그런 자리에 설 때 세계는 어디로 갈 것이냐? 대한민국으로 오는 것입니다. 세계의 수많은 여성들이 대한민국에 와서 경배해야 할 때가 오는 거라구요. 세계의 수많은 남성들이 대한민국을 위하여 정성을 들여야 복귀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엄청난 시대적인 사명을 하기 위해 선을 주입시켜 나가는 데 있어서 남자들이 임지에 나간 부인들에게 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통일교회는 이익 없는 놀음을 많이 해 나왔습니다. 언제는 가정적으로 축복해 주더니 이제는 동원한다고 하는데, 비참하더라도 이 길을 가야 됩니다. 아니 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번에 동원된 여러분은 반성해야 합니다. 이것은 원리적으로 갖추어져 있다는 거예요. 누가 물어도 꼼짝 못하게 대답할 수 있는 내용을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자기 멋대로, 자기 마음대로 생각하고 자기 나름대로 생각하는 것은 인간적인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적인 것이 못 된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은 최정상의 길을 가야 됩니다. 우리는 세상에 없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 일을 함으로 말미암아 망하지 않으면 우리에게 이 세상에 없는 가정적 행복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기필코 그 길을 끝까지 가야 됩니다. 그렇지 않아요?
망하는 데는 원수도 망하는 것입니다. 가인 아벨을 볼 때 그렇잖아요? 싸움으로 비참한 자리를 넘어선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동정해야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나타난 환경을 바라보면서 점점 비장한 때가 온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엊그제 일본의 구보끼가 왔다 갔는데 그를 보내고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는 일본을 혼자 책임져야 할 엄청난 사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생명이 엇갈리는 현정세를 막아야 할 책임이 있기에 그는 무자비하게 다짐해야 됩니다. 그 사람은 혼자가 아닙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해보라는 것입니다. 하늘이 같이할 것입니다. 그들과 얘기해 보니까 꿈 같은 일들이 벌어지더라는 것입니다. 그걸 볼 때 뜻 길은 생명을 걸고 가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최고의 정상이 되려면 무엇이 문제냐? 돈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잘먹고 잘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죽고 사는 것이 문제입니다. 죽고 사는 문제의 해결점이 무엇이겠습니까? 심정입니다. 아버지가 수난길에 있을 때, 아버지의 심정에 어떻게 동참하느냐 하는 마음을 가지고, 더 고생시켜서는 안 되겠다는 마음,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아버지를 미래의 주인이 되게 하기 위해서 안팎으로 몰고 들어가 하늘의 협조를 일으키도록 자극을 가해 줄 수 있는 무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무리가 효자가 될 수 있는 것이요, 충신이 될 수 있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정상은 높은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로 가는 길은 기뻐도 기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기뻐도 기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반드시 알아야 될 것은 하늘은 수난으로 뿌리고 슬픔으로 뿌렸기 때문에 수난으로 거두어야 되고 슬픔으로 거두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슬픔이 어디에 있어요? 잘먹고 잘사는 데 있어요? 아닙니다. 못먹고 못사는 데에 슬픔이 있습니다. 누구 때문에 슬퍼하느냐? 뜻 때문에 그러한 무리는 절대 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최고의 심정의 정상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야 됩니다.
우리 통일교인들이 언제나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가 공식석상에서 여러 사람들에게 책망을 가끔 하지요? 왜 그렇게 하느냐는 거예요. 여러분은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어떠한 사람이 잘못한 것을 용서해 주는데 있어서 일대일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와 나, 일대일로는 절대 용서가 안 됩니다.
선생님이 책임진 것은 세계적이요 전체적이기 때문에 선생님이 한 번 잘못하면 세계적으로 전체적으로 걸리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죄를 짓게 되면 공판정에서 선포하고 결정하지요? 마찬가지로 선생님도 공석에서 선포식을 하는 것입니다. 친다는 거라구요. 선생님이 어떠한 사람을 용서해 주기 위해서 공석에서 그를 책망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이 잘 아는 유 협회장은 훌륭한 사람입니다. 내가 공석에서 그를 많이 공박했습니다. 그는 그것으로 탕감하고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 협회장이 돌아간 다음에 어떤 사람은 선생님은 죽은 충신에게 복은 못 주고 상은 못 주나마 공박만 한다고 했지요? 여러분은 이런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내가 수단이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정책적으로 말하는 수단을 못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모르는 내용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 얘기를 하다 보니 여러분 보기에는 그것이 걸리는 것입니다.
영인들이 선생님에게 나타나 자기를 변호해 달라고 간절히 요청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자기들을 구원해 줄 사람은 통일교회 문선생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그런 내용을 전부 다 알고 있습니다. 판결지어 주어야 할 책임이 선생님에게 있는 것입니다.
땅에서 잘못하여 죽게 되어 영계에 가면 그 잘못을 풀기가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잘못했으면 살아 생전에 회개하고 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영계에 가면 이를 악물고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체면불구하고 이 땅에 와서 회개하려고 해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은 모두가 사실입니다. 그들을 공판정에서 판결지어 줘야 되는 거라구요. 그래서 공석에서 그들을 공박하는 것입니다.
좋은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대한민국이면 그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부터 삼천만 국민 앞에 선포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러분도 이러한 입장에서 잘못됐으면 잘못됐다고 선포해야 합니다. 그러나 국가적 권위를 가지고 이러이러한 공적이 있기 때문에 용서해 준다는 법칙이 있으니 전후를 가려 용서해 주는 것이 세상의 법도입니다. 이러한 것은 세상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일입니다.
책임자가 위신을 모르고 책임하라고 책임을 추궁하면서 책임하지 못하게 만들어 놓을 수 있어요? 책임자는 다 알고 있다구요. 그렇지만 그 배후에 여러분이 모르는 곡절이 있기 때문에 오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해받는 것이 문제입니까, 사람의 갈 길을 해결해 주는 것이 문제입니까?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람의 갈 길을 해결해 줘야 하기 때문에 자신의 체면을 불구하고, 오해를 각오하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누가 그것을 이야기해 주겠어요? 이런 배후의 인연은 모르고 선생님이 책망한다고 하는데 여러분은 책망받을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렇더라도 선생님이 그를 위해서 눈물 흘리며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라구요. 그래 그게 잘못됐어요? 그러니 선생님이 공석에서 책망을 하게 되면 왜 그러는 줄 알아야 돼요. 여기 유광렬이 왔어요? 엊그제 부흥회 할 때 공석에서 그를 책망했습니다. 그렇게 책망하고 명령한 것은 그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그렇게 사랑을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한국교회를 일시에 편성해 가지고 지방 지역에서부터 중앙에까지 전부 다 내가 일을 시키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마디의 책망으로 다 해결되는 것입니다. 그 책망을 들어야지요. 전체가 들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해방되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열 번 책망하고 그 이상 책망하고도 안심할 수 있는 아들이라면 그는 효자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한 번 책망했는데 그 책망을 거역했다 할 때는 그는 불효자입니다. 거기에서 효자 불효자가 갈라지는 것입니다. 의심나면 여러분이 영계에 가 보라구요. 그런가, 안 그런가…. 여러분이 영계에 가게 되면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하루 하루의 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문제는 반드시 하나님께 기도해서 해결합니다. 주먹구구식으로 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내가 이러고 저러고 한다고 해서 아버지가 이러고 저러고 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에게, 여러분 자신들에게도 영계에서 가르쳐 준 것이 왜 없겠느냐는 거예요. 없을 것 같아요? 책임자는 누가 말 한마디 잘못 하게 되면 그것을 전부 다 요리해 가지고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아버지 뜻 앞에 불상사가 있으면 벌써 알아요. 손에 일이 안 잡힙니다. 일거리를 가져와도 일이 손에 안 잡힙니다. 지금까지 그러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대번에 안다는 거라구요. 내 개인 일신상의 문제는 문제시하지 않아요. 가정의 애기들이 앓든가 가까운 친척 중에 누가 죽게 되더라도 그것은 문제가 안 돼요. 뜻을 위해 죽는 것은 손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뜻의 기준이 한번 틀어지면 억천만세가 녹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나무의 가지야 꺾이면 또 돋아나지만 종대가 꺾여 나가면 큰일난다는 것입니다.
통일교인 중에서 기도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선생님을 가까이 모시고 있는 사람들도 선생님이 기도하는 것을 모릅니다. 어머니도 처음에는 선생님이 기도하는 것을 몰랐습니다. 기도하지 않고 되는 일이 있어요? 언제든지 하나님 앞에 걱정을 끼쳐 드리는 사람들은 가는 길이 순탄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하늘 앞에 공적을 남기고 가겠다는 사람은 눈물 없는 생활을 해서는 안 됩니다. 눈에 눈물이 마른 사람은 하나님과는 관계가 먼 사람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이 얼마나 슬프게 나왔는지 여러분은 똑똑히 알아야 됩니다. 비참으로 심어졌고 슬픔으로 심어졌고 억울함으로 심어진 역사는 그보다 더 큰 비참을 통하지 않고는, 억울함을 통하지 않고는, 슬픔을 통하지 않고는 거둘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거두어야 될 것이냐? 통일교회가 거두어야 됩니다. 나는 수억의 돈을 가지고 있지만 그 돈으로 양복 하나라도 안 해 입으려는 사람입니다. 무서운 돈입니다. 그 돈을 쓰면 식구들이 걸고 넘어가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쓰지 않는 깍쟁이라구요. 현실의 손실은 무서워하지만 우리 후대를 위해서는 그 돈을 다 쓰면서도 가는 사람입니다.
백년이면 백년 자체의 생을 누릴 것이냐, 천년의 전통적 역사를 남길 것이냐? 우리는 백년 자체의 생을 남겨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천년의 전통을 남겨야 됩니다. 돈이 있으면 후손을 위해서 쓰고 우리는 고생하는 것입니다.
미래를 위해서 현실을 극복하는 사람이 승리하는 거라구요. 통일교회 교인들은 자기는 못먹고 못살더라도 후손들은 잘먹고 잘살게 하려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통일교회 문선생은 불쌍한 사람입니다. 선생님은 친구가 없습니다. 고독단신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있습니다. 선생님이 이 길을 출발할 때에 부모도 개의하지 않고 출발했습니다. 지금도 여러분들을 개의하지 않아요. 누가 통일교회에서 떨어져 나간다 해도 개의치 않습니다. 다만 그 사람으로 말미암아 관계되었던 사람들이 피해를 입을까봐 걱정하지 그 자체를 두고는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아무리 반대하고 그래도 소용없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지금 말한 원칙은 틀림이 없습니다.
후대를 위해서 현실을 부정하고 희생하는 민족, 단체, 사람은 결코 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미래를 부정하고 현실을 의지하는 사람은 망하는 것입니다. 미국을 보라구요. 미국이 흥하겠어요, 망하겠어요? 그 나라는 망한다는 거예요. 미래를 부정하고 현실을 위주하는 나라는 끝이예요. 그렇기 때문에 젊은 층에서 히피족들이 나타나고 그 와중에 끼리끼리 싸움을 벌이는 거라구요. 그건 왜 그러느냐? 슬픈 세상을 거쳐가는 입장에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넘어가야 됩니다. 그러려면 최고의 정상에 올라가야 합니다. 제주도의 한라산에 가게 되면 보기에는 정상이 가까운데 상당히 멉니다. 그 한라산의 정상을 어떻게 올라갈 수 있느냐? 그저 올라가면 정상이냐? 천만에요. 그렇게 알았다면 실수입니다. 최고의 정상점을 어떻게 올라갈 것이냐? 정상을 올라가기 위해 눈물을 흘리며 슬픔을 기쁨으로 소화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출발점이 없으면 못 올라가는 것입니다.
최고의 정상이 어디 있느냐? 높은 꼭대기를 찾아가는 자기 자체의 마음 세계에 있습니다. 슬픈 세계를 다 극복하고서 정상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슬픈 세계는 어디에 있느냐? 자기 자신을 낮춰야 합니다. 제일 낮추어서 극복해 올라가야 합니다. 이렇게 가는 것을 평생에 타고난 팔자인 줄 알고 가는 사람은 최고의 정상을 점령해 가지고 새로운 세계를 향해 출발하는 기수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 복귀섭리역사를 출발하신 하나님의 슬픈 고개가 어디일 것이냐? 세계일 것이냐? 아닙니다. 천주입니다. 우리는 천주주의자이니까 영계까지 해방시켜야 됩니다. 그러니 통일교회 패들은 아예 잘살려고 생각하지 말라는 거예요. 영계까지 우리가 해방시켜야 된다는 거라구요.
그러면 그 최고의 정상은 무엇이냐? 하나님까지 해방하자는 것입니다. 천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6천년 동안 고대해 나오던 일을 우리가 해내자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최고의 정상입니다.
최고의 정상을 넘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내 마음 자체에 있어서 그 이상 결의해야 합니다. 그 결의를 중심삼고 모든 것을 소화시킬 수 있는 주체적인 입장에 서야 합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가온 시련이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 다가올 시련이 문제입니다. 오늘의 나 자신이 문제가 아니라 내일의 나 자신이 문제입니다. 정상을 넘기 위해 내적으로 결의한 나 자신, 정상점을 스스로 결정지을 수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고는 최고의 정상을 향해 갈 수 없는 것입니다. 수난으로 뿌렸기 때문에, 최고의 수난을 극복하는 자제력을 가진 여러분이 되어 이 길을 가지 않으면 정상점을 결정지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가고 오는 복귀의 행각을 당신이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부디 저희들이 영광의 세계에 기수가 되어 당신이 기뻐할 수 있는 축복받은 자녀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통일교회의 갈 길을 아버지, 지금까지 믿고 나오면서 가면 갈수록 눈물이 더 많아야 될 것을 느꼈습니다. 짐이 더 무거운 것을 느꼈습니다. 말로만 아버지 앞에 생명을 걸어 놓고 이렇게 하겠다고 맹세하고 다짐하지 않았습니다. 아직까지 정상에 오르지 않은 것을 느끼며 가는 길이오니 끝까지…. 통일교단이 갈 최후의 고비를 아버지께서 자랑으로써 세울 수 있는 그날까지 저희들은 죽지 않아야 되겠습니다. 이 길이 어려운 길인 것을 알았기 때문에, 후손에게 남겨서는 안 되겠기 때문에 우리 일대에 해결짓기 위해서는 저희들이 죽어서는 안 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초조합니다. 안타깝습니다. 당신이 그렇기 때문에 여기 모인 당신의 자녀들도 그렇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느끼고 누구보다 가까운 자리에서 미래를 개척하면서 힘의 자극제가 되어 영광스러운 세계에 품길 수 있는 아들딸로서 남아지고, 최고의 정상을 넘어갈 수 있는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이 시간 확실히 깨닫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 누구를 믿어야 되겠습니까? 가까운 친구도 아니요, 자녀들도 아니옵니다. 오로지 아버지와 더불어 끝까지 싸워 나갈 줄 아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오늘 모이는 곳에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세계에 널려 있는 통일의 무리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내내 허락하시는 뜻과 더불어 수난길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갈 수 있는 무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면서 이 모든 말씀 참부모님의 이름으로 아뢰었습니다. 아멘.
오늘은 4월 들어 세번째 맞는 안식일입니다. 이 4윌은 여러분이 알다시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가 수난의 길을 거쳐 가지고 부활한 기간이기도 합니다. 어제가 17일이었는데, 우리 통일교회에서는 4월 17일을 부활절로 지내고 있습니다.
4월은 봄절기 중에서도 모든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달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동산을 바라보며 초목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현재 이 동산에는 큰 나무도 있고, 작은 나무도 있습니다. 또, 이제 싹이 터서 자라야 할 나무도 있습니다. 이런 모든 나무의 종대를 바라보게 될 때, 이 나무는 어떠한 나무가 되겠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리라고 봅니다.
현재는 아무리 작다고 하더라도 자라 가지고는 동량지재(棟梁之材)가 되는 나무도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지금 이 앞에 심어 놓은 잣나무를 가만 보면, 새로이 심어 무가치한 존재로 보이지만 이것이 자라게 되면 이 동산에서 제일 큰 나무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즉, 현재에 좋게 보이는 나무가 좋은 나무가 아니라 그 나무를 질적으로 볼 때, 어떤 나무의 종류에 속해 있느냐 하는 것이, 즉 그 종자가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고 있는 싹이 작다고 해서 무시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작은 것이라도 그것이 점점 자라게 되면 동산에 있는 어떤 나무보다도 큰 나무가 될 수 있으니, 그 나무의 종자가 문제인 것입니다.
섭리를 두고 세계 인류 전체를 보게 될 때, 이 동산에서 잣나무가 제일 귀중한 나무이듯이 인류 중에서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단체라든가, 민족이라든가, 나라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단체, 민족, 나라는 어떤 단체, 어떤 민족, 어떤 나라일 것이냐? 세계에 이름이 날 수 있는 나무라면 이 동산 가운데에서만 추앙 받아서는 안 됩니다. 만일에 전세계의 인류가 기원할 수 있는 나무가 있다면, 그 나무를 중심삼아 가지고 모든 종류와 나무들이 크고 작은 가치를 결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복귀섭리의 도상에 있어서, 하나님이 타락한 인류를 찾아 나오시는 역사노정에 있어서 하나님이 인류 가운데에 남기고 싶은 참다운 인간, 하나님의 직계권내에 세우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겠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철따라 피는 꽃 같은 사람은 아닐 것입니다. 혹은 봄이 왔다고 잎이 새로 피어나는 그러한 나무와 같은 사람도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이 전체 세계의 목적을 완성하는 데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인재라야만 될 것입니다. 그 인재가 어떤 종족을 위주해 가지고 그 종족권내에서만 드러난다면 하나님은 그런 인재를 필요로 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 어떠한 단일 민족이 자기의 민족만을 중시하는 생각과 사상을 가졌다면 하나님은 그 민족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계 끝까지 뻗어 나갈 수 있는 그런 가치의 내용을 지닌 종족과 민족을 필요로 하실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랑할 수 있는 민족은 어떤 민족이냐 하면 태초로부터, 타락한 그날부터 지금까지의 역사과정을 거쳐오면서 변하지 않고 꾸준히 하나의 목적을 추구해 나온 민족입니다. 그런 민족은 세계에 있어서 기필코 위대한 민족이 될 것입니다. 나무로 말하면 말할 수 없이 뻗어 올라갈 수 있는 큰 나무인 것입니다. 꼬부라지지 않고 곧게 자랄 수 있는 나무입니다. 그런 나무와 같은 어떤 특정한 민족이 있으면 그 민족은 오랜 역사를 거쳐 흘러감과 동시에 변함없이 목적을 향하여 세계 끝까지 남아질 수 있는 사상을 가진 민족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영원하시고 위대하시고 높고 귀한 가치의 모든 명사를 걸어 충성할 수 있는 중심 존재가 하나님이시라면, 하나님이 요구하는 민족과 하나님이 필요로 하는 사람은 세계를 지도할 수 있고, 역사 위에 두드러지고, 시대를 거쳐 미래의 소망의 터전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민족과 사람을 하나님이 찾아 나오실 것이 틀림없습니다.
오늘날 세계는 민주세계와 공산세계로 나뉘어 대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민주세계를 중심삼아 가지고도 세계를 수습할 수 없고, 공산세계를 중심삼아 가지고도 세계를 수습할 수 없습니다. 이 단말마적인 선단에 처해 있는 현실에 있어서 하나님이 필요로 하는 민족은 어떠한 민족이겠으며, 하나님이 필요로 하는 특정한 단체가 있다면 어떠한 단체가 되겠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에, 하나님은 민주세계권내에서 허덕이는 개인이나 단체나 민족을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민주세계를 넘을 수 있고, 또 공산국가의 권내를 넘을 수 있는 특정한 사상을 가진 특정한 민족, 특정한 단체, 특정한 개인들을 하나님은 필요로 하신다는 것을 여러분들도 추측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보게 될 때, 통일교회가 한국에 나타난 것은 20여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통일교회 역사가 20년의 역사냐 할 때, 우리는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됩니다. 통일교회 역사는 태초로부터, 즉 타락전 세계, 창세전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그 역사는 어디를 거쳐왔느냐 하면 기독교 역사를 거쳐왔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거치고, 기독교 역사를 거쳐 가지고 지금 민주세계권까지 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민주세계의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새로운 목적의 기점을 마련해 주어야 할 것이 오늘의 통일교회입니다.
그러니 통일교회는 민주세계에 포함되거나 거기에 소화가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대한민국이 민주세계의 중심국가라 하는 입장에 서게 되더라도 대한민국의 지배를 받는 통일교회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넘어설 수 있는, 높고 크고 넓고 귀한 내용을 지닐 수 있는 통일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통일교회는 어떠한 역사보다도 긴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역사를 보게 되면, 어떠한 시대에는 충신열사, 혹은 어떤 시대에 있어서는 그 시대를 이끌어 나온 위인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대표하여 역사적 전통을 이어받은 선조들이 있습니다. 또, 현재에도 그 선조들을 대표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무로 보면 한 마디 한 마디 자라 올라가는 것과 같습니다. 맨 처음에 자란 것이나 나중에 자란 것이나 그 내용은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용은 변하지 않지만 나무는 커 가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조상들이 섭리의 뜻 가운데에서 충성한 것이 오늘에 나타나고, 나타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까지 계승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전통적 인연을 미래에 계승시킬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사람, 그러한 사람들이 모인 단체, 그러한 단체로 구성된 민족, 그러한 민족으로 구성된 국가를 형성하여 새로운 사상 체계를 갖추어 놓지 않으면 앞으로 세계 앞에 필요한 개인, 단체, 민족, 국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 교인들이 가진 사상은 하나님이 천지 만물을 창조하실 그 당시의 사상과 상치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즉, 섭리의 뜻을 세운 그 주인이 가진 생각과 배치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주인의 사상을 이어받아 가지고 시대와 더불어 호흡하고 역사와 더불어 발전하고, 그 역사과정의 시대성을 지녀 가지고 언제든지 새로운 뜻과 새로운 이념을 제시할 수 있는 내용을 갖추어야지 그러지 않고는 세계로 나갈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다 알다시피 세계에서 제일 좋은 것이라든가 제일 귀한 것이 있으면 그것을 중심삼아 가지고 사람들은 전부 거기에 모이게 되어 있습니다. 또, 특정한 문명권이 있게 되면 그 문명권을 중심삼아 가지고 전세계인들이 관심을 갖고 거기에 집중하게 되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민주세계를 대표하고 있는 미국을 중심삼고 볼 때, 사람들이 왜 미국에 가고 싶어하느냐? 그것은 미국이 세계에 있는 어떤 나라보다도 고도의 문명권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그 문명권에 동참함으로 말미암아, 그 문명권에 참가함으로 말미암아, 그 문명권에 가담함으로 말미암아 그 혜택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혜택이 과거의 어떤 시대의 혜택보다도 낫고, 현재 사람들이 살고 있는 그 어떤 환경의 혜택보다도 낫기 때문에 그것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뜻을 중심삼고 볼 때,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중심삼고 나가는 과정에 있어서 하나님은 우리를 필요로 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떠한 부모가 있다면 그 부모는 자녀를 필요로 하고, 또 나라가 있다면 그 나라의 군주는 백성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세계를 지도하고 있는 하나님도 역시 인류를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필요로 하는 인류는 어떠한 인류겠느냐 하면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될 수 있는 인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상은 어떠한 역사과정에서 중단되는 이상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영원히 영원히 발전해 가지고 하나의 세계를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세계를 이루어 가지고 거기에서 비로소 '뜻을 성사시켰다. 이루었다'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뜻이기 때문에 후회가 남아 있고, 선악의 투쟁과정이 남아 있는 단계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이것을 극복하고 청산지어 전세계가 선을 위주로 하는 일원화를 이룰 때까지 남아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통일교회가 그런 자리까지 가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들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여러분 자신들이 잣나무면 잣나무와 같은 나무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본성을 본받은 개인으로서 역사적인 선조들 앞에 부끄러운 무리, 비판받는 무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선조들이 '너는 우리와 다르다. 우리 세계에 동참할 수 있는 무리가 못 된다' 하는 무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섭리의 뜻을 받들어 나왔던 선조들이 '너는 우리와 같다. 같은데 옛날 우리보다 더 높은 자리에 있구나. 더 큰 자리에 있구나' 하고 공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실체가 어떻게 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또한 오늘날의 여러분들은 여러분 자체로서 끝날 것이 아니라, 십년 백년 천년 후의 여러분의 후손들을 대해 가지고 '저희들은 우리와 모양은 같지만 때에 대한 발전을 세계적으로 했다' 할 수 있는 전통적 인연을 현재의 입장에서 심어 놓지 않고는 안 됩니다. 그러지 않고는 세계 끝날까지 뻗어 나가 가지고 오늘의 새 이념을 중심삼은 하나님의 뜻을 성사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개인은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면 하나님을 대신한 자리에 서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니만큼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는 아들이 되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 아들은 끝날에 필요한 아들이기보다도 창조 당시에 모든 만물을 지으시던 그때의 기쁨을 대신할 수 있는 아들이어야 합니다.
또한 여러분은 역사시대에 있어서 비참하였던 역사를 전부 다 심판하여 옳고 그른 것을 전부 다 가려 가지고 그른 것은 청산하고 옳은 것은 내세워 공의의 법도에 따라, 그의 지닌 바의 실적에 따라 하나님이 축복을 해줄 수 있고, 하늘의 영광의 자리에 동참시켜 줄 수 있는 분별력과 인격을 갖춘 사람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그런 터전을 갖추어서 판단하고 결정한 것이 하나님의 뜻에 배치되는 것이 없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을 하나님은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으로 말미암아 뻗어 나간 후손이 천추만대를 걸어 가지고 세계에 일원화될 수 있게 될 때, 그 뜻은 에덴 동산의 창세 당시의 이념인 동시에 오늘 이 시대의 이념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고, 그 드러난 이념은 미래의 이념으로 계속될 것이 아니냐 이겁니다. 이런 문제를 생각하게 될 때, 오늘 우리 통일교회가 가는 길이라는 것은 이제부터 올 시대의 인격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 당시의 창조적 이념을 중심삼고 하나님이 바라던 소원의 실체를 현재의 우리가 어떻게 획득하느냐, 현재의 우리가 어떻게 완결시키느냐 하는 문제를 중심삼고 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루는 것이 지금까지 타락한 인류를 통하여 섭리해 나오신 하나님의 소원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체를 역사적인 부활의 실체로서 운행할 수 있게 해야 되겠습니다. 7, 80년의 일생을 나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섭리의 뜻으로 보아 영생의 노정을 거쳐서 발전할 수 있는 뜻을 세워 나온 것이 하나님의 섭리이기 때문에 그 뜻과 더불어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사는 것은 뜻을 드러내기 위해 사는 것이요, 뜻을 위해 사는 것이기 때문에 뜻이 가는 길은 내 생명의 연장이요, 내 이념의 연장이요, 내 생활의 연장이다' 하고 찬양할 수 있는 인격을 중심삼은 생활 무대를 어떻게 펼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잣나무면 잣나무를 볼 때, 지금 그 본체에 새로운 싹이 나와서 자라고 있는 것이 비록 하나밖에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잣나무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또, 아무리 큰 잣나무라 하더라도 그것이 잣나무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잣나무는 일년 사시사철 푸르른 채, 잣나무로서 자랄 수 있는 한계선을 향하여 아무리 폭풍우가 몰아치고 어려운 시련이 닥쳐오더라도 이것을 헤쳐 잣나무로서 자랄 수 있는 한계선을 향하여 뻗어 나가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속한 환경에 따라 뻗어 나가기 위해 환경을 이기고 환경을 개척하면서 자란다는 것을 우리가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나님이 바라시는 사랑하는 아들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그런 아들이 되는 데는 과거에 사랑을 안 받았던 아들이어서는 안 됩니다. 과거에 사랑을 받았고, 현재에도 사랑을 받고 있고, 미래에도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큰 잣나무나 작은 잣나무나 본질에선 차이가 없습니다. 지극히 작은 잣나무라도 태양빛을 받아 가지고 땅에서 모든 영양소를 섭취하는 작용은 큰 나무나 마찬가지입니다. 즉, 잣나무가 그 환경에서 바라는 영양소를 섭취하는 데에 있어서는 아무리 환경이 어렵더라도 필요로 하는 요소를 섭취하는 것은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의 입장에서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아들딸이 되겠다고 노력하는 입장을 떠나 현재 입장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하는 아들딸이 되어야 합니다. 현재 입장에서 사랑을 받고 있는 아들딸이라는 것은 특정한 입장이 아닙니다. 역사과정을 통해 가지고 뜻의 섭리노정에 있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던 아들들을 중심삼고 볼 때, 그 본질에서는 틀림없습니다. 그러한 나 자신을 어떻게 발견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자각된 입장에 서 가지고 과거를 청산짓고 과거의 자기생활을 비판하게 될 때 하나님 앞에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현재에만 사랑받을 것이 아니라, 미래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자체를 하나님이 사랑했다고 하는 사람이 되어야, 그런 인격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하나님의 이상세계에 필요한 참다운 개인이 될 것입니다. 개인으로 필요한 사람이 된 후에는 가정에 필요한 사람이 될 것이며, 더 나아가 가정을 거쳐 종족, 민족, 국가, 세계에 필요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를 생각해 볼 때,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는 어떠한 길을 가야 하느냐? 꼬불꼬불한 길을 가서는 안 되겠습니다. 생명을 짊어지고 있는 통일교회는 아무리 극한 시련과 고통이 있더라도 그걸 뚫고 나가야 되겠습니다. 그 본질이 강하고, 그 본질이 크고, 그 본질이 위대하면 위대할수록 거기에 비례해 가지고 반대되고 상충되는 것도 크지만, 그 모든 것을 뚫고 나가야 되겠습니다. 거기에서 후퇴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죽더라도 어떻게 그 길을 따라 나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나무면 나무, 인간이면 인간이 자라는 데에 있어서는 반드시 시련이 있습니다. 시련이 없이 자란 나무는 귀중한 재목이 될 수 없습니다. 시련을 받으면서 단단히 자라 소기의 목적에 필요한 나무가 될 때, 그 나무는 큰 재목으로 사용된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듯이 사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 나라가 필요로 하는 사람은 대학을 나왔다고 자신만 중심삼고 다른것은 부정하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나라에 환난이 오면 그 환난을 전부 다 도맡아 가지고 해결지을 수 있고, 거기에 있어서 중심적인 주체성을 가지고 전체의 갈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사람이 나라가 필요로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나라를 위해서 가야 됩니다. '이렇게 감으로 말미암아 전체 백성은 반드시 좋게 된다'라고 공인받을 수 있는 방향을 갖추어 나아가게끔 지도할 수 있는 사람을 나라에서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 통일교회가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걸어온 역사를 보게 되면 우리는 비참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곡절의 노정을 걸어왔습니다. 그런 길을 걸어왔지만 그 곡절과 더불어 지쳐 떨어지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 시련 분야가 커지면 커질수록 그것을 막아낼 수 있는 방패를 지녀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확고부동한 신념을 가진 실체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아무리 극한 시련 도상에 있다 하더라도, 지금 당장 그 시련이 세계적으로 움직여 미래에 영원히 계속될 수 있는 시련의 무대가 시작되고 계속된다 하더라도 그것을 피해 가서는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부딪쳐서 뚫고 나갈 수 있는 신념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그것을 뚫고 가야 한다고 할 때, 정면으로 부딪쳐서 뚫고 나갈 수 있는 사람이 하나님이 필요로 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중에는 부산에 가는 고속도로 위를 달려 본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 길이 지금처럼 달릴 수 있는 환경이 되어지기까지에는 천태만상의 수고를 거쳐 가지고 길이 닦여진 것입니다. 그 길을 닦기 위해서 수많은 생명이 제물된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 연후에 국가가 자랑할 수 있는 고속도로가 된 것이 아니냐 이겁니다.
산이 험하다고 해서 꼬불꼬불하게 길을 닦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산이 험하더라도 뚫고 나가는 것입니다. 굴을 뚫고 다리를 놓으며 나가는 것입니다. 다리를 놓고 굴을 뚫는 것은 보다 가치 있는 내용을 결정짓기 위한 절대적인 필요 요건입니다. 굴을 뚫기를 싫어하고 다리 놓기를 싫어했다면 보람 있고 가치 있는 고속도로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굴을 뚫지 않고 수백리 돌아가는 길을 아무리 잘 닦아 놓았다 하더라도, 좁지만 굴이 뚫려 있는 길이 있으면 사람들은 수백리 돌아가는 길로 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굴이 뚫려 있는 빠른 길로 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가까운 거리를 통해서 보다 가치 있는 것을 찾으려는 것이 인간의 욕망이요, 우리도 그런 입장에서 매일매일의 생활을 하고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돌아가는 것이 좋은 게 아닙니다.
돌아가지 않고 직행하기 위해서는 직행하기 위한 길을 닦아야 합니다. 그러면 직행하기 위해 길을 닦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느냐? 이 사람들은 모험을 해야 합니다. 모험이 없이는 용사로서, 혹은 영웅으로서 등장할 수 있는 애국자가 못 됩니다. 역사상의 위인이나 성현을 보더라도 모험노정을 회피한 위인이 없으며 성현이 없었습니다. 정면으로 부딪쳐 가지고 뚫고 나갔기 때문에 성현이나 위인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나무는 심어져서 뿌리를 박고 난 후에는 아무리 그 땅이 나쁘다 하더라도 거기에서 자기의 본질이 흡수할 수 있는 최고의 영양소를 흡수하는 것입니다. 비록 그 자리에서는 크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좋은 땅에 옮겨 심어질 때에는 그 본색을 드러내어 무한히 자랄 수 있는 본성적인 힘과 본성적인 요소가 스며져 있어 그것을 중심삼아 가지고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좋은 곳에 심어지고 싶은 소망은 사랑도 마찬가지이고 하나님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통일교회는 어떠한 길을 가야 할 것이냐? 세계 30억 인류를 중심삼고 볼 때, 통일교회 교인의 수는 지극히 작은 수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뜻이 경부고속도로를 닦는 일과 같다면, 우리는 이제 착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직도 많은 수난노정이 남아 있습니다. 여기에는 많은 사람이 동원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동원되는 데에 있어서 제멋대로 동원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동원된 사람은 목표를 위하여 가는 형편이 다르고 내용이 다르더라도 그 목표인 부산에 도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그것을 극복하여 부산에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뜻의 이념에 일치될 수 있는 목적관이 투철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 목적관과 자기 현재의 환경이 부딪치게 될 때, 목적관이 깨져 나가서는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자기 일신의 생활무대가 깨지면 깨졌지, 부딪쳐 오는 시련이 깨지면 깨졌지, 목적관이 깨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시작하지 않았던 것보다 못한 일이 되고 맙니다.
이런 입장에서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것은, 자기 개인으로 갈 때는 자기 몸이라든가 환경이 자기의 것이 되어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시련노정을 거쳐 가야 할 복귀의 길이라는 것을 알게 될 때, 그것이 크면 클수록 거기에는 비례하는 수난의 환경이 부딪쳐 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사방에서 몰아칠 것입니다. 부딪쳐서 당장 쓰러질 것 같은 운명길이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죽더라도 이 뜻만을 남기고 가야겠다는 신념을 가지고 유언이라도 하고 가야 하는 고빗길이 많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갖고 온 천의의 뜻을 알고 그 뜻을 위한 소기의 사명을 감당하려 하였지만, 그러는 과정에서 그때의 환경이 받들지 못하고 반대함으로 말미암아 불가피하게 후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운명에 처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뜻 앞에 있어서는 자신이 가야 할 길이 그 길이기 때문에 그것을 필생의 사명 의식으로 알고 죽으면서도 다시 와서 가야 되겠다고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소기의 목적을 죽어가면서도 이루려 한 거기에 위대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그것을 중심삼아 가지고 출발했습니다.
그 정신이 죽지 않았기 때문에, 살아 있기 때문에 만 인류의 마음세계에 호소할 수 있는 매체가 되었던 것입니다. 역사과정에 있어서 혼란된 민족들을 수습하여 새로운 민족 형성을 하였기에 새로운 민주세계를 창건할 수 있는 하나의 기반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훌륭하다는 것입니다. 그 뜻과 목적이 영원히 남아지는 시대에는 역사를 더듬어서 이것을 풀려고 할 것입니다. 그때에는 누구보다도 이 뜻에 대해서 더 생각하고, 누구보다도 이 뜻을 이루려고 노력한 사람의 이름이 역사에 남아질 것이 아니냐 하는 문제를 생각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철저한 목적의식이 여러분에게 필요합니다. 그 목적이 민족에게 얼마만큼 영향을 끼치느냐 하는 것을 여러분이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통일교인은 어디에 가더라도 통일교인입니다. 아무리 이 잣나무의 밑을 자르고, 가지를 잘라도 소나무 순이 나올 수 없는 거와 마찬가지로 모양이 아무리 초췌하고 미미하더라도 그 본질에 있어서는 세계적인 노정을 가고 있는 통일교회 교인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우리 통일교회를 중심삼고 가정이나 직장의 사정에 전부가 매여 있습니다. 각자의 사정은 서로 다르더라도 통일교회 교인이라는 이 한 가지는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건 사방에 넓혀질수록 좋은 것입니다. 그러면 매여 있다면 어디에 매여 있느냐? 하나의 이념에 매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동으로 가나 서로 뻗어가나 가다가 돌아오게 되면 같은 중심에 모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가는 데에 있어서 서로 아무리 다른 길을 가더라도 끝에 가서는 전부 다 모이는 것입니다. 과정에 있어서는 갈라졌지만 결국은 모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위기대 법도입니다. 정(正)에서 출발하였으면 분리되었다가도 합해지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고 어떻게 가든지 그 주체 앞에 있어서, 그 본성에 있어서 그것이 틀림없는 것이면 갈라져 가더라도 결국은 전부 다 만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념은 민족권내에 국한되는 내용이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오늘 공산주의나 민주주의에 국한된 이념보다 더 큰 주체를 가진 이념이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은 결정체와 마찬가지입니다. 결정체는 깨고 깨어 그 모양은 작아지더라도 그 성질에 있어서는 변함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결정체를 형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들이 통일교회 이념을 중심삼고 여러분 자체를 보면 현재에는 비록 좁은 환경에 처해 있지만 이것이 뻗어 나가게 될 때는 역사의 방향을 바꿀 수 있는 주체적인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바라보는 저 산을 넘어가지 못하고는 부끄러운 모습이 된다고 생각하고 넘어가야 됩니다. 가는 데는 바다도 있을 것이고, 험한 태산준령도 가로놓여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넘지 못하면 뚫고라도 가겠다는 결의, 그 길밖에 없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수난의 길을 걸어왔다고 하지만 우리가 걸어온 수난길은 너무나 간단한 것이었습니다.
기독교가 로마에 들어가 가지고 4백년 동안 고역을 받은 기간을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로마에는 지금도 카타콤이라는 지하동굴이 있습니다. 그곳은 기독교인들이 로마 제국의 눈을 피해 종교의식을 행한 곳입니다. 이걸 보면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희생당했고, 얼마나 비참했던가를 엿볼 수 있습니다. 이들이 바랐던 것은 화려한 로마문명권내에서 호화롭게 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망할 수 있는 로마문명권의 그런 무리와 박자를 맞춘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비록 지하에 들어가 있었지만, 비록 지금은 지배받지만 앞으로 로마를 점령하겠다는 철두철미한 사상이 그 지하동굴속에서 싹터 뻗어 나갔던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세계적인 기독교의 발전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핍박이 가중되면 가중될수록 모여 있는 사람들은 흩어져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전체의 뜻 앞에 보탬이 되고, 부합되고, 연결되고, 통합되는 모체로서 개개인이 그런 사명을 다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기독교가 세계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동기가 되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우리가 수십 년의 수난길을 걸어온 그것이 다라고 할 수 없습니다. 아직까지 본격적인 출발을 못 했습니다. 당당코 우리 민족이 이 세계의 수많은 민족 앞에 자율성을 자증할 수 있는 입장에 서 보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이 스스로 위대하다는 자율성을 주장할 수 있는 한때를 가져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세계의 국가들아! 우리 국가의 이념을 본받아라. 이 이념을 누가 정복할 것이냐?' 라고 할 수 있는 주체적 입장에 들어가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걸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여러분이 말씀을 전할 때에, 절대적인 말씀을 전한다는 입장에서 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부정하는 입장에서 말씀을 전한다면, 여러분은 부끄럽게 생각해야 됩니다. 피를 토하는 결의를 가지고 민족 앞에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고, 한을 풀 수 있는 환경을 닦아야 합니다. 뜻을 못 이루게 되면 자기의 아들, 자기의 후손, 혹은 후계자를 통해서라도 기필코 그런 날을 봐야겠다는 결의를 할 수 있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이 통일교회 신자들이 갖추어야 할 사상이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핍박을 받아왔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핍박을 하게 될 때는 천년 수천년 수만년 핍박을 해야 되겠습니다. 악에 대해서…. 그럴 수 있는 줄기가 어디 있느냐? 그러한 길에 설 수 있는 기준을 우리가 만들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길을 만들기 위한 터전이 필요합니다. 즉, 땅이 필요한 것이요, 사람이 필요한 것이요, 그 다음에는 모든 사람을 하나 만들 수 있는 사랑이 필요한 것이요, 그 사랑을 중심삼고 하나님을 모시겠다는 자세가 우리에게는 필요한 것입니다.
치열한 전투를 하는 과정에서는 승리만이 목표입니다. 그런 때에 있어서 자기 자신만을 돌보는 사람은 전투요원의 대열에 참여하더라도 전투요원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전투대열을 파멸시키는 것입니다. 그러한 무리가 있다면 대열에서 제거당해야 되는 것입니다.
1971년에 여러분들은 새로운 결의를 해 가지고 출발했습니다. 또, 축복가정을 대표한 축복가정 부인들이 일선에 나가 싸우고 있습니다. 왜 싸우느냐? 그들은 지금 여자로서 역사상에 없던 수난의 고빗길을 맞이하고 있는 것입니다. 남편과 자녀를 버려 두고 여자로서 홀로, 하나님의 뜻을 중심삼고 그 뜻을 세우는 아낙네로서 한번 덤벼 보자는 심정으로 일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멋진 일입니다. 그러한 일을 남자가 해볼 때가 있어야 되겠습니다.
대한민국의 상황에 보조를 맞추는 통일교회가 되어 가지고는 남북으로 갈라진 현 정세권을 넘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싸워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전진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 보라구요. 김신조가 속해 있던 이북의 124군부대 같은 부대에서 훈련받는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가혹한 훈련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쓰러지고 포기해 버릴 수 있을 정도의 훈련, 죽을 지경의 훈련이지만 점진적으로 가중되는 훈련과정을 거침으로 말미암아 그보다 더 어려운 환경을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에게는 그건 비극적인 행로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통일교회는 지금까지 핍박을 받고 수난길을 걸어왔지만 아직까지 그러한 길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이제 여러분은 단단히 각오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가는 길 앞에 무슨 명령이 내려질지 모릅니다. 그 명령으로 말미암아 통일교회 교인들이 전부 다 죽고 한 사람만 남아 가지고 세계를 구할 수 있다면 하나님은 그 명령을 내리실 것입니다.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본성, 나무로 말하면 나무의 씨는 몇천 년 전에 하나님이 창조한 모양 그대로의 씨입니다. 그 씨는 아무리 환경이 어렵더라도 그대로의 씨이고, 그대로의 나무를 배양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또, 거기에서 거둔 열매도 그와 같아야 되는 것입니다. 포도나무가 머루나무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절대 머루나무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 통일교회와 이질적인 사상, 그런 사상을 가질 사람은 용서할 수 없는 우리의 적입니다.
여러분들은 이제 이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세계를 바라볼 때, 이제 갈길이 다 막혀 있습니다. 단 하나 길이 있다면 통일교회를 중심삼고 나가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이 길을 어떻게 갈 것이냐? 경부고속도로를 설계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그 공사기간에 공사가 어떻게 진척되고 있는지에 대해서 밤이나 낮이나 감독하며 그 방향이 어떻게 전개되느냐 하는 것에 관심을 가질 것입니다. 공사가 어디 어디에서는 몇 퍼센트가 진행되어 있고, 어디에는 무슨 난문제(難問題)가 있으며, 또 어디에는 어떤 사고가 있다 하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문제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불철주야 그 목적을 위하는 마음으로 그 환경에 부딪치는 모든 사건들을 처리해 나갈 것입니다. 그래야만 설계를 하고, 또 그것을 지도하는 책임자의 도리를 다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통일교회가 지금 엄청난 목적을 중심삼아 가지고 전진하고 있는데, 여러분은 그 목표까지 도달하는 데에 있어서 이상이 없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들은 총지휘관이나 설계자의 간섭을 받는, 그 법도와 발전적인 기준 앞에 모순된 입장에 서 있지 않느냐, 또는 비판받을 수 있는 입장에 서 있지는 않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목적 달성이라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본부면 본부에서 무엇을 지시했다 하게 될 때에는 지켜야 합니다. 이것은 영계와 더불어 관계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잘 모르겠지만 반드시 영계와 더불어 관계되어 있는 것입니다. 본부에서 지시하는 것을 영계에 가 있는 여러분의 선조들은 알고 있습니다. 후손들이 모든 선조들의 한을 풀어 주어야 할 주체적인 입장에 섰다 할진대는, 여러분에게는 두 세계의 사명을 감당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악한 세계요, 타락된 세계요, 원수들이 흥망사를 좌우하는 현실에 있어서는 미래에 우리의 후손들이 가는 길 앞에 말할 수 없는 방해요건으로 남아질 수도 있는 것이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타락권내에서의 인생살이입니다. 미래에 부여될 모든 환경을 차지할 수 있는 기반을 어떻게 닦느냐 하는 문제를 중심삼고 볼 때, 우리는 노력을 하고 나서 그것으로 기뻐할 것이 아니라, 또 해야 할 노력 때문에 내적으로 다짐하고 나서는 연속적인 생활과정이 있어야 함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우리가 이곳에 한 10여만 평의 땅을 샀습니다. 여의도에는 만여 평의 땅을 사 놓았는데 앞으로 4천평 정도의 땅을 더 사야 되겠습니다. 또 청평에다 금년에 70여만 평의 땅을 사 놓았습니다. 그것을 보고 어떤 사람들은 '통일교회는 교회 신도들을 전부 다 굶게 만들고 선생이라는 사람은 자기를 위해 별의별 땅을 다 산다'고 말들을 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벼락을 맞을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고생을 하더라도 후손들이 잘살 수 있는 터를 닦아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위하며 사는 존재들입니다. 그런 조상을 못 갖는 민족은 망하는 것입니다.
책임자는 교회를 위하여 희생을 각오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깨끗이 희생하라 이겁니다. 모든 계획이라는 것은 섭리로 볼 때 순서가 있는 것입니다. 자기들 개인적으로 나가서 전도하는 사람들에게 전부 다 월급을 주게 되면 오히려 후퇴하는 사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 있게 됩니다.
나무가 자랄 때 영양소를 흡수하지 못하면 죽는 것입니다. 당연지사입니다. 여기에서 시련을 얼마만큼 극복하고 남아지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 교인들은 끈질겨야 합니다. 힘든 역사를 자랑하지 말고 새 시대를 출발할 수 있는 현재의 자신을 자랑하라는 것입니다. 이게 문제되는 것입니다. 자기, 혹은 처자를 위주로 하고 살아서는 뜻을 이룰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선생님은 독재자다'라고 합니다. 내가 독재자라는 겁니다.
복귀를 하는 데에 있어서는 자연복귀가 아니라 탕감복귀입니다. 그런데 열 사람이 참여하는 것을 한 사람이 다해 버리자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면 열 사람의 뜻을 대신해서 한 사람이 복귀섭리해 나갈 자신이 있다는 말이예요? 백 사람을 대신해서 한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탕감복귀할 수 있는 사명을 할 수 있다는 말이예요? 이런 사고방식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타락은 누가 했느냐? 부모가 했습니다. 그럼 복귀는 누가 해야 되느냐? 부모가 해야 되는 것입니다. 부모가 이를 완성하기 전에는 자식은 없는 것입니다. 천사장이 뜻을 받들어 부모의 갈 길을 닦을 수는 없습니다. 원리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가인과 아벨을 중심삼고 볼 때, 아벨이 가인의 말을 듣고 움직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망하는 것입니다. 원리적 견해에 있어서 가인이 아벨의 말을 듣게 되어 있지 아벨이 가인의 말을 듣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부모가 타락했기 때문에 부모가 나오기 전에는 자식도 없는 것입니다. 부모의 뜻이 세계적 기준까지 갖추어지기 전에는 인간은 천사장권내의 후손입니다. 가르쳐 주는 사람이 있으면 복귀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복귀섭리의 골수의 노정을 지금까지 가르쳐 주시지 않았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간부들 중에 자기들은 놀고, '선생님만 알면 된다' 이런 수작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법도가 아닙니다. 이런 무리가 있다면 이런 사람들은 앞으로 갈 길을 못 갈 것입니다. 여러분이 선생님을 중심삼고 모시고 나가는 데에 있어서 어떠한 책임자가 되려면 선생님 이상 열심히 하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선생님 이상 기도하고 있느냐, 얼마나 선생님 이상 뜻을 중심삼아 가지고 사무친 마음을 갖고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할아버지를 중심삼아 가지고 효도하는 아들이 있고 그 아들에게도 아들이 있다고 할 때, 이 3대에서 아버지가 할아버지께 효도한다면 그 아들은 자기 아버지가 효도하는 걸 아는 것입니다. 효도를 하는 그 아버지는 자기 아들도 효자가 되게 하고 싶을 것입니다. 효자관을 갖고 있는 그 아버지 입장에서 보게 될 때, 자기보다 못한 효자를 갖고 싶어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효도해 나왔지만 너는 나보다도 몇 배 더 효도하기를 바란다'고 할 것입니다. 왜? '내 효도는 오늘날의 환경에 있어서 민족권내에 서 있지만, 너는 세계권에 서서 나보다도 더 위대한 효자가 되어서 세계권을 대표하는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부모의 욕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자기보다도 더 효성하는 아들이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자기보다 못한 효성을 하는 아들이 있다면 그를 책망할 것입니다. 그 책망은 자식 앞에 복을 주기 위하여 실천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입니다. 그것 외에는 없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모시고 나오는 데에 있어서 나를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어찌하여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하면서 50평생 이렇게 고생만 시키느냐'고 해 본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내가 동정해야 할 하나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서대문 경찰서에 끌려가는 마당에서도, 영어의 신세, 철창에 갇히는 신세의 자리에서도 그랬습니다. 뜻길을 가기 위한 그 첫걸음에서부터 '이렇게 생명이 남아 있으니 감사합니다' 하고 오히려 하나님을 위로해 드렸습니다. 오늘날 통일교회의 전통적 사상을 지녀 온 역사적 탕감기준을 남기기 위해서 그런 길을 걸어온 것입니다. 이것은 그 어느누가 침범하려고 해도 침범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외에는 침범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성진이가 대학을 나올 때까지 내가 성진이 아버지로서 아버지 노릇 한번 못해 봤습니다. 이것은 비참한 일입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그 녀석의 아버지가 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말하기 전에 나를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내가 하는 일이 틀렸거든 총칼을 들고 아버지에게 대항하라. 나는 원망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뜻 앞에 어긋나지 않는 한 선 앞에 악은 자연굴복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하늘 앞에 책임을 다하고 하늘을 공경하는 환경을 걸어왔기 때문에 여기에 아무리 불평불만의 요소가 있다 하더라도, 또 과거에 잊을 수 없는 한을 엮은 소원이 남아 있다 하더라도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나는 자식을 붙들고 소원해 보지 않았습니다. 가만히 보게 되면 하나님은 우리 가정을 사랑하십니다. 이건 틀림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르지만 나는 반드시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한 십여 년 동안 세계의 역사가 얼마나 급변했는가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수천년 역사과정에 없었던 역사적인 변천을 어떻게 해서 가져왔느냐? 그것은 통일교회 때문입니다. 그건 틀림없는 것입니다. 나는 비록 평범한 한 사람같이 보이지만 세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만은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통일교회는 한 사람만 남더라도 발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신념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1971년도를 바라보면서 내가 여러분들에게 생명을 걸어 목이 잘리는 한이 있더라도 이 길을 가야 된다고 했습니다. 맹세를 했더라도 생명을 다해 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봄을 맞을 적마다 여러분은 자기 과거를 다시 한 번 뉘우쳐야 되겠습니다. 결실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나무, 혹은 생명이 있는 나무로서 남아졌다면 봄이 찾아오면 다시 부활의 운동을 스스로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누가 간섭하지 않아도 계속적인 자연법칙을 따라서 부활의 환경을 개척한다는 것입니다. 햇볕이 따스하게 비춰지고 땅의 수분이 있게 되는 봄절기가 되면 생명 있는 것은 부활을 하는 것입니다. 또한 가지고 있는 모든 소성을 완전히 드러내는 절기가 봄절기입니다. 이것이 여름을 지내고 가을을 지내고…. 이렇게 자연은 순환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선생님이 명령한다고 해서 여러분은 그냥 움직입니다. 그러다가 만일 선생님이 죽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때는 모두 보따리 싸 가지고 갈 것입니다. 문제는 여러분 자신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없더라도 갈 길을 갑니다. 그렇지만 내가 없게 되면 여러분은 갈 길을 못 갑니다. 여러분의 후손도 못 갑니다. 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똑똑히 알아야 됩니다.
이렇게 나무를 심은 주위를 돌아보니 심은 나무를 손질을 해야 되겠습니다. 이거 나무를 간격이 1미터도 안 되게 심어 놓은 것도 있습니다. 나무를 심었으면 정성을 다해서 가꾸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은 내가 이땅을 사기 위해서 얼마나 피어린 심정을 가졌고 여의도 땅을 사기 위해서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느냐 이겁니다. 여러분 중에 선생님을 붙들고 그런 사정을 한번 들어본 사람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전부 다 선생님에게서 뜯어 가려고만 했지…. 그러다가는 망하는 겁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이 가만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지방에 있는 지역장이 밥을 굶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내가 알고 있습니다. 기도 가운데에서 누가 굶는다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거기에 대해서 말을 하지 않습니다. 때가 가까와 옴에 따라서 통일교회 사상을 올바로 가진 사람이 누구냐 하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새로운 결의를 해야 합니다. 희미해 가지고는 안 되겠다 이겁니다.
통일교회 사상은 하늘로부터 인계받은 영광적이고 전통적인 사상입니다. 자고로 뜻을 이루려고 수많은 선조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수난길을 앞놓아 가면서 하늘을 중심하여 인계받았던 그 뜻입니다. 그것은 역사시대를 중심삼고 보더라도, 역사가 지나가더라도 그 본질은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변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미래를 바라보고 사는 여러분이 후손 앞에 그 뜻을 실현하느냐, 실현하지 못 하느냐 하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전통을 중심삼고 앞으로 아내를 맞더라도 그 전통에 일치될 수 있는 아내를 맞아야 되겠습니다. 자식을 낳더라도 그런 입장에 설 수 있는 아들을 낳아야 합니다. 역적의 도당을 낳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여편네를 사랑하는 데 있어서도, 즉 부처(夫妻)끼리 사랑하는 자리에 있어서도 그러한 맹세의 터전 위에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다짐하여야 됩니다. 개인도 가정도 교회도 국가도 세계도 모두가 그러한 목적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뜻을 위하는 일은 영원한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나무를 심었으면…. 나무를 심은 이것은 영원히 남아질 것입니다. 통일교회의 운명과 더불어 영원히 남아질 것입니다.
여의도면 여의도에 그 부지를 마련하는 데에 정성들인 그 도리는 영원히 남아질 것입니다. 그러나 개인을 위해서 하면 일생 이내에 다 털려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가치를 추구하고 영원히 존재할 수 있는 한 페이지를 남기기 위해서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은 모험을 해야 하는 겁니다. 그 모험은 인간을 중심삼은 세계에서는 가능하지 않지만, 하나님이 알고 시대가 알고 뜻이 아는 땅 위의 기반만 있으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걸 알아야 돼요.
선생님이 지금까지 뜻 길을 걸어 나오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선생님을 부정했습니다. 평양에서부터 지금까지 걸어 나오는 가운데 하늘 앞에 맹세했다가 떨어져 나간 사람들을 내가 모두 손으로 꼽을 수 있습니다. 지금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내가 다 알고 있습니다. 과거에 누가 이런 맹세를 했고, 그 사람이 지금은 어떻게 하고 있다는 것도 다 알고 있습니다.
여기에 와 있는 사람들 중에 책임자면 책임자, 혹은 자기 나름대로 잘한다는 사람이 있어서 자기 생활을 변명하고 제삼자를 비판한다면 그런 사람은 어떻게 되느냐? 그런 사람은 어디에 가서 결실을 맺을 것이냐? 결실이 문제라구요.
원수 이상의 수난의 길을 비참히 가는 것, 그게 있어야 됩니다. 많은 씨 중에서 제일 귀한 씨 하나를 빼내야 합니다. 이럴 때의 씨 하나는 역사를 대신한 것입니다. 그것은 또 시대를 대표한 승리적인 표준입니다. 인간의 표준적인 씨가 아니라 하늘나라의 표준적인 씨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상이 필요합니다. 통일사상은 신세 지는 사상이 아닙니다.
나는 지금까지 여러분 앞에 주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자주적인 신념과 더불어 넘길 수 있는, 영원한 빛과 더불어 남길 수 있는 뜻을 지녔다면, 여러분이 죽더라도 그 뜻은 남아지는 것입니다. 뜻을 위해 충성한 그 절개는 변하지 않습니다. 그 지조는 자기 생명과 결속되어 있기 때문에, 그 지조를 붙들고 가게 되면 어디를 가든지 막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신념이 있으면 천국도 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념이 귀하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봄에는 가만히 앉아 있으면 봄맛이 나지 않지만 돌아다니면 사방에서 봄바람이 불어옵니다. 봄바람은 아주 사납습니다. 그렇지만 여기에서 생명이 부활하고, 여기에서 생명의 운동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여건을 중심삼고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게 되면 그것들이 무르익는 여름날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생각해야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먼저 변하지 않는 씨와 마찬가지의 사람이 돼야 합니다.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아담 해와를 창조하시던 그 본성의 심정이 여러분 마음에 사무쳐야 되겠습니다. 타락의 흔적을 이어받은 우리로서는 원한을 품고라도 이 흔적을 벗고 올라서야 됩니다. 지금까지 타락의 흔적을 벗기 위해 싸워온 것이 복귀역사노정이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시대적 환경에 있어서의 통일교회의 사명이기 때문에 이 사명의 자리에 선 우리들은 그 본성의 기준에 일치해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어느 시대에 갖다 맞추더라도 그것이 표준이 되는 완전한 중심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틀림없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미래에 있어서도 틀림없는 것이어야 합니다. 진짜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짜라는 것은 외부 환경의 변천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하지 않고는 여러분은 앞으로 뜻길을 간다고 주장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바라는 것은 선생님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주시해 보라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빚지는 생활을 하지 않습니다. 빚져 가지고 나가는 단체는 발전하는 법이 없습니다. 시련에 부딪치면 부딪칠수록 그것을 꺾어 나가면 그것은 비료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미래의 거름더미가 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거름더미에 뿌리를 박고 자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여러분이 잘 자랄 수 있는 환경과 모든 여건이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자기자체가 앞으로 봄날을 맞이하여 어떻게 발전해 가느냐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창조 당시의 모습과 오늘날 찾아진 모습이 일치되고, 그것을 이 세상에 영원히 남길 수 있는 변하지 않는 주체적인 입장으로 확고화시키지 않고는 여러분의 자리는 꺾어지는 것입니다. 통일교회도 이러한 무리가 되지 못하면 정지되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도 얘기했듯이 지금까지 통일원리는 개인이 탕감해 나가는 내용밖에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가정으로서 탕감해 나가는 내용은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이걸 잊어서는 안 됩니다. 개인적인 시련노정을 넘으면 그때부터는 가정적인 시련노정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축복가정이 좋으냐? 축복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좋은 반면에 거기에 비례되는 수난의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민족을 위해서 희생해야 합니다.
이제 원수라 하면, 그 원수는 개인적인 원수가 아니라 가정적인 원수요, 가정을 중심삼은 단체가 원수라는 것입니다. 통일교회도 원수가 될 수 있습니다. 통일교회가 대한민국을 위해서 충성을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면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때가 되면 선을 위한 통일교회의 환경은 점점 세계적인 환경으로 커져 가지고 일시에 그 환경이 청산될 때가 올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영계가 총동원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자기의 본질을 해부해 보게 될 때, 자신이 통일교회의 전통적인 사상을 지녀 가지고 봄날에는 꽃이 피고 여름에는 무성할 수 있는 그런 본성의 내용에 일치될 수 있는 자기 자체가 되어 있느냐 하는 것이 언제나 문제입니다. 가을이 되면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되는 것입니다. 그런 여러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선생님이 앞으로 천년 만년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아요? 반드시 후대에 자리를 남기고 갑니다. 그러한 자리를 이어받는 사람들은 누구보다 복을 받습니다. 이처럼 어느누구보다 복받는 길이 가치가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때는 본부의 인사 발령을 반대로 합니다. 어떤 사람에 대해서 알려면 반대로 집어 넣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어려움을 당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훈련을 시키십니다. 내가 그런 훈련을 많이 받아온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가려갈 줄 알아야 합니다. 이런 것을 여러분이 다시 한 번 느껴야 되겠습니다.
이제 오늘 남은 시간에 나무를 심을 것입니다. 정성을 다해서 나무를 심어야 되겠습니다. 이 나무들이 자라면 여러분의 후손들이 앞으로 산에 와서 이 나무들을 보고 기뻐할 것입니다. 내가 앞으로 여기에다 대학교를 지으려고 합니다. 교육기관을 만들 것입니다. 그러니 정성들여 이 땅에 나무를 심어야 합니다. 앞으로 다른 데 자리를 잡더라도 여기에서 나무를 옮겨 심든가 씨를 받아 심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역사를 살리고 역사를 지킬 수 있는 내적인 사연을 중심삼고 사랑할 수 있는 터전이 우리의 땅입니다. 청파동을 중심삼고 긴 세월과 환경을 거쳐 나가기 위해서 여기 이 땅도 샀고 청평에 있는 땅도 사게 되었던 것입니다.
본부를 중심삼고 볼 때, 선생님이 거처할 수 있는 집도 사야 됩니다. 그렇게 하게 되면 여러분들 앞에 발전이 있습니다. 또한 가정들 앞에도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내 양심상 내 집을 먼저 못 삽니다. 먼저 하늘의 성전을 짓는 데에 있어서 내 집보다 몇백 배 몇천 배 큰 성전을 지었다는 원칙을 세워 놓고 그 약속을 한 후에 내 집을 지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통일교회 나온 사람들을 내가 전도했다는 것입니다. 뜻을 위해서 젊음을 바쳐 고생을 한 사람을 위해 내가 최선을 다해 정성을 들였다는 것입니다. 그걸 왜 그렇게 해야 하느냐를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36가정에 대해서도 내가 책임을 다 했습니다. 내가 빚을 져 가면서도 다 해준 것입니다. 이제는 내가 생활을 중심삼고 자리를 잡아야 되겠습니다, 그것은 내가 편안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통일교회 위신 때문입니다. 외부 사람들이 와서 볼 때, 현재 상태로는 통일교회 위신이 서지 않기 때문에 통일교회 위신을 세우기 위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또, 하늘의 위신을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힘이 있어야 됩니다.
협회본부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협회본부가 계획적인 사업을 하기 위해서는 예산을 세워야 합니다. 나라를 보더라도 정부의 예산을 책정하는 데에 있어서 먼저 청와대의 예산부터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각 부처면 각 부처의 중요한 순서에 따라 그 예산을 책정하는 것입니다. 통일교회에 있어서도 선생님의 가정을 중심삼고 먼저 예산을 책정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협회에 있어서 자기들의 생활문제를 살피려고 하게 되면 양심적으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늘이 아예 도와주지 않는 거라구요. 그렇게 되면 망하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아무리 청기와집에서 잘산다 하더라도 소용없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얼마 얼마 예산 편성을 해서 선생님이 생활 걱정을 안 할 수 있게끔 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여러분의 생활문제를 해결해 줄 것입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밥을 먹는지 굶는지조차 모르고 있으니…. 생각하는 데에도 순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전통적인 기준이 현재에는 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전통적 기준을 남겨야 하는 것입니다.
원리원칙을 세워서 하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독재하고 싶어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나보다 더 나아야 하기 때문에 그러는 겁니다. 나보다 정성을 더 들이라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데에 있어서 나보다 더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얼마든지 다 넘겨 줄 것입니다. 효도를 하는 어버이가 있다면 이 어버이는 자기보다 더 효도하는 아들을 바랄 것입니다. 그래야 할아버지가 죽을 때 눈을 감고 죽을 수 있을 것이고, 아버지가 죽을 때도 눈을 감고 죽을 수 있을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아들을 자기보다 더 고생시킬 수 있는 심정이 아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당연한 생각입니다. 그리하여 나와 더불어 수고해 오신 하나님을 위로해 드려야 합니다. 이러한 아들딸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런 후계자가 필요하기 때문에 죽어서도 못 잊을 수 있는 효도를 하게끔 하는 것이며, 나보다도 더 고생을 시키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나를 위해서는 깍쟁이입니다. 나를 위해서는 돈 쓸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배가 고프다고 식당에 들어가 혼자 밥을 사 먹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어머니에 대해서도 먹고 입는 것까지 간섭하는 사람입니다.
사람은 하나의 동기를 남겨야 됩니다. 마음이 갈급할 때에 하늘이 눈물 흘릴 수 있는 일을 남겨야 합니다. 그런 사람의 후손은 망하지 않습니다. 그러지 않고는 아무리 충성을 해도 눈 밖에 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생님의 생활철학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으로부터 교육받은 교훈이요 상속받은 진리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나는 매일같이 통일동산에 드나들었습니다. 14년 동안 허구한 날을 이 망우리 고개를 넘은 것입니다. 그것은 놀러 다닌 게 아닙니다. 선생님 버릇이 그렇기 때문에 그렇다고 할지 모르지만, 나는 하늘 앞에 약속한 것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아버지, 이러이러한 기반을 닦기 위해서 아버지 앞에 맹세하오니 그날까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 드나들겠습니다' 한 것입니다. 충성이라면 세계에서 충성한 그 어떤 사람에게도 지지 않습니다. 정성을 들이는 데도 누구에게 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입장이라면 망할 수 있는 자리에서도 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통일교회를 중심삼아 가지고 숱한 노정이 있더라도 빚을 져 가면서 그 일을 하는 것도 다 그것 때문입니다. 나도 돈 아까운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사오천만 원에 해당하는 돈을 투자하는 것입니다.
민족을 위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전통적인 사상을 이어받기 위해서는 다리를 놓아야 합니다. 다리를 놓는 데에 있어서 바쁠 때에는 밤에도 다리를 놓아야 하고 낮에도 놓아야 합니다. 요즈음 젊은 애들, 선생님이 보기에 한심합니다. 잘못됐다는 거예요. 철부지라는 것입니다. 앞으로 다가올 시련무대가 어떻다는 것과 이 민족이 가야 할 운명길이 어떻다는 것을 생각할 때에, 오늘의 비참함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현재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 이 나무를 심으면서 그런 생각을 하라는 것입니다. 현재에 수고한 대가를 받고서 좋아하는 그런 사람이 되지 말고 미래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망하지 않습니다.
내가 만일에 보따리 싸 가지고 나서는 날에는 전국에 있는 통일교회에 부흥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런 자신을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내가 왜 안 나타나느냐? 1차, 2차, 3차 교수회의를 했는데, 통일교회 문선생은 성공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 내가 어떤 대학총장을 만나서 밀담하는 좌석에서 그가 하는 말이 '통일교회 문선생은 이제 승리한 것입니다' 하면서 '자세를 드러내면 그땐…. 큰일 하는데 왜 안 나타나시느냐' 고 하는 것입니다. 그걸 몰라서 안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옛날 청춘시절에 다 체험한 사실입니다.
때가 가까와 오면 가까와 올수록 뜻을 중심삼고 볼 때, 그 뜻이 깊으면 깊을수록 일대일로 부딪쳐야 됩니다. 선생님을 대해 가지고 하나라도 걸리게 되면 한 사람으로서 탕감받는 것이 아니라 3대가 걸려들어가고, 후손이 걸려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은 감옥에 들어가서도 내가 통일교회 지도자라는 말을 안 한 것입니다. 그들의 심령을 비판할 수 있는 능력이 있더라도 안 한 것입니다. 말석의 서러운 자리에서 평소에 도를 어떻게 닦겠느냐를 생각해 나온 것입니다.
천사장 복귀 사명을 하기 위해서는 여러분을 내세워서 일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충성을 잘 하여야 앞으로 자식들이 충성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엄청난 복귀의 운세가 여러분에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모르고서는 안 된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것은 일대뿐만 아니라 몇 대가 걸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모르는 사람은 비참한 사람입니다. 사월 초하룻날 이야기했듯이 4월, 5월, 6월, 7월, 8월이 시련 기간인 것입니다. 외부의 핍박이 없으면 내부에 시련이 생겨납니다. 그러기에 일선에 나가 있는 아내들과 하나가 되라는 것입니다. 또, 뜻이 가는 길과 하나되라는 것입니다. 내부에 심판이 있게 되면 하나님도 처리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도 모르게, 외부인도 모르게 벌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겸손한 자만이 남아지고, 뜻을 위해 충성하는 자는 남아지게 되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이 1971년도를 향하는 여러분들은 전진 도상에 있어서 정상적이요, 전통적인 통일사상의 기반을 닦아야 되겠습니다. 본성에 일치될 수 있는 사람, 세계를 넘고 남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세계의 그 누구한테도 지지 않고, 스스로 하늘을 대신하여 긍지를 지닐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시대가 아무리 무자비하고, 아무리 원통한 환경에 있다 하더라도 그 환경에 쓰러지는 것이 아니라, 그 환경의 분기점을 넘어서 극복해 나갈 수 있는 여러분이 되는 한, 여러분이 가는 길은 순탄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아무리 비참했다 하더라도 여러분 후손들은 여러분의 몇십 배 쉽게 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이 1971년도를 여러분들의 일생에 남아지는 한 해가 되게 해야 되겠습니다.
책임자는 빚을 져서는 안 됩니다. 선생님은 언제나 바쁜 사람입니다. 피곤하다면 언제나 피곤한 사람입니다. 아무도 모르는 한을 품고 사는 사람입니다. 여러분들은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제 이 1971년도에 있어서 보다 넓은 범위의 내일을 생각하고, 선생님이 가는 길과 일치 되어야 되겠습니다. 하나되게 되면 흥하는 것이요, 하나되지 못하면 망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한국 위주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일본 협회장인 구보끼한테 '내가 이러이러한 때를 중심삼고 가니까 이러이러한 것을 준비해' 라고 얘기했습니다. 여러분에게 말하지 않은 내용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여러분들은 부끄럽게 생각해야 됩니다. 한국 통일교회 교인들 앞에 못하는 이야기를 외국 식구들에게 했다는 사실은 주체국가의 체면을 여러분이 세우지 못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지만 이제부터라도 선생님의 명령에 움직인다는 조건을 세워 그걸 지킴으로써 주체국가의 체면을 세워 나갈 수 있고, 여러분의 위신을 세울 수 있다는 것을 망각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처해 있는 통일교회 교인으로서의 자리는 진정 통일교회 교인으로서의 자리가 아닙니다. 우리가 넘어야 할 고개가 아직까지 몇 고개 남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죽는 날까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싸움을 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변하지 않는 본성의 근원을 따라서 무한히 발전할 수 있는 목적관을 가지고 오늘 개체 개체의 생활권내에 있어서 변함이 없어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하면서, 1971년도와 1970년대를 의미 있게 보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람이 일생을 살아가는 데는 여러 가지 변화가 많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소년시대 청년시대 장년시대를 거쳐 노년시대에 이르게 되는 것을 우리들이 다 알고 있는 바입니다. 여기서 우리 젊은 사람들에게 특히 한 가지 말하고 싶은 것은 젊은 시절이 길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이 많은 분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이제 나이가 60이 넘고 70이 가까와지니, 혹은 백 살이 되어 가니 가야 할 길을 가야 되는데 그냥 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후계자를 남겨 놓고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후계자 가운데에는 자기의 손자라든가 혹은 자기의 외손자라든가 하는 혈족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후계자들 가운데에서 자기의 젊은 시대를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을 남겨 놓고 가지 않으면, 갈 길을 가기가 좀 어렵지 않겠느냐 생각하게 됩니다. 자기가 눈을 감고 하늘나라를 가게 될 때 세상에서 자기 대신 일해 줄 수 있는 사람, 즉 자기가 뜻 앞에 다하지 못한 일을 대신해 달라고 부탁할 수 있는 젊은 사람을 남겨 놓지 못하면 가는 길도 순탄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를 두고 볼 때에 나이 많은 분들은 필시 자기 후손을 뜻 앞에 세우는 데에 노력해야 될 것입니다.
그 다음에 젊은 사람들은 그 젊음의 때가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왕에 뜻을 안 사람으로서 하늘 앞에 헌신하고자 나섰으니 귀한 청춘시대, 고기로 말하면 가운데 토막과 같은 청춘시대를 몽땅 아무런 미련없이 하늘 앞에 완전히 바친다면 그것이 얼마나 귀하겠느냐 하는 것을 여러분은 생각해야 됩니다.
간혹 청춘시절을 뜻과 더불어 전부 다 무의미하게 보냈다고 후회하는 사람들을 보게 되는데, 그런 사람들은 뜻이 어떤 것이고 젊은 시대에 뜻과 더불어 지냈다는 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가 하는 것을 망각한 자리에서 불평하고 탄식하는 것입니다. 이 젊은 시대에는 반드시 고개가 있는 것입니다. 청춘시절, 20세를 중심삼고 35세까지 한 15년간을 두고 볼 때 거기에는 반드시 고개가 있다는 것입니다.
각자에게는 반드시 최고의 절정기라고 할 수 있는 청춘시절이 있는데 그 한때를 누구와 더불어 지내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자기 아버지 어머니와 더불어 지내느냐, 뜻 있는 스승과 더불어 지내느냐, 자기 가정에서 자식과 아내와 같이 지내느냐, 혹은 자기 개인을 중심삼고 직장이나 학교에 투신하고 지내느냐 하는 것들을 중심삼고 볼 때,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 것이 가장 귀중하냐? 자기 일신의 행복을 위해 지내는 것보다, 자기 일가의 행복을 위해 지내는 것보다, 나라면 나라, 세계면 세계를 위해 역사와 더불어 영원히 남을 수 있는 문제를 중심삼고 지내는 것이 생애에 있어서 가장 귀하지 않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편적으로 생각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입장에서 지내는 데는 어떻게 지내야 되느냐? 뜻을 중심삼고 볼 때, 이 뜻이 천주사적인 뜻이란 것을 알면 알수록 이 뜻을 중심삼고 최고의 절정기인 청춘시대를 넘는 데에 있어서 어떠한 모습으로 지낼 것이냐가 문제입니다. 다시 말하면 뜻 앞에서 내가 어떻게 행복을 느끼며 지낼 것이냐, 뜻을 중심삼고 보다 나은 행복의 터전을 향해 전진하기 위한 희망의 터전 위에서 지낼 것이냐, 이 뜻을 중심삼고 수많은 나라와 수많은 대중, 그리고 그 국가의 주권까지 반대하는 최고의 고독한 자리에서 세계를 대신하여 영어의 몸이 되더라도 그것을 가치 있게 생각하며 지낼 것이냐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젊은 청춘시대 하면 최고의 절정기인 그때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행복하고 무엇보다도 좋을 수 있는 것을 얼핏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공적인 뜻을 중심삼고 볼 때는 외면적으로 좋을 수 있는 환경보다도 고독한 자리에서라도 내면적으로 하나님의 동정을 받고 하나님께 기억되는 것이 행복한 것입니다. 수많은 국민과 주권에 몰려 영어의 신세가 된다 하더라도 그 자리가 도리어 불행하지 않은 자리요, 일생에 있어서 청춘시대를 빛낼 수 있는 좋은 계기도 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보다 큰 행복이란 것은 하루의 기쁨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천년 만년 수난의 고비 가운데에서 피어날 수 있는 영광의 때를 맞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리에서 평범한 행복보다 고차원적인 행복의 터전이 싹트고 그러한 내용의 인연을 통하여 그 행복이 지상에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게 될 때, 평탄한 생활보다 곡절의 과정을 거치면서 뜻 있는 생애노정을 지내는 것이 인간으로서 보람 있는 생활이 아니겠는가 생각케 되는 거예요.
우리가 자연을 바라보게 될 때 갖가지 수목이나 풀들이 갖가지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잘 자란 나무가 있으면 그 나무는 편안히 자랐을지도 모른다고 감정하고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그 나무는 나무로서 자기의 소질에 부합될 수 있는 영양소를 흡수하기 위해 배후에서 백방으로 노력했을 것입니다. 또, 자라는 데 필요한 영양소를 흡수하는 데에 있어서 여러 가지 반대적 소성들의 훼방을 받아 투쟁과정을 거치는 데서 오는 고통을 받고 있는 나무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나무를 보면 외면적으로 나타난 모습은 꼬부라지고 쪼그라진 비참한 모습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 볼 때에 잘 자란 나무는 외면적으로 평할 수 있지만, 잘 자라지 못한 나무를 바라보게 될 때에는 도리어 동정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꼬불꼬불 꼬부라진 나무는 그 배후에 어떠한 나무도 지니지 못한 곡절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뿌리 밑에 바위가 있다든가, 혹은 바위 위에 심어져 바위틈에 뿌리를 박고 뻗어 나가지 않으면 안 될 수난길에 서 있기 때문에 그렇게 꼬불꼬불한 나무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무절목으로 원만히 자란 나무를 원하지만 그런 나무는 꼬불꼬불하게 자란 나무보다 연륜이 지극히 짧습니다. 그런데 꼬불꼬불한 나무가 지닌 특성은 무엇이냐 하면 강하다는 것입니다. 그 나무는 키가 크지 못하고 쪼그라지고 가늘지만 반면에 이 나무의 한 토막 한 토막은 강하다는 것입니다.
자유스럽게 자란 나무토막과 시련과정에서 자란 나무토막이 부딪치면 어떤 것이 깨질 것이냐? 수난과정을 거치지 않고 자란 나무토막은 쪼개지더라도 시련 가운데서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자란 나무토막은 쪼개지지 않을 것입니다. 큰 것만이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큰 것이 좋은 반면에 시련과정을 통해서 자라난 나무는 강하다는 것입니다. 강한 것이 오래가는 것입니다.
나무가 중도까지 잘 자라다가 그 밑에 뿌리가 뻗어 나가는 데 방해되는 반석이 나왔다면 그 나무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나무는 거기서 죽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정상적으로 무절목으로 자랐는데 그만큼 자란 뿌리이상 되는 반석이 깔려 있을 때에는, 그 나무는 반석을 뚫기 위해서 아무리 애쓴다 하더라도 갖추어진 그 입장에서는 밑에 있는 반석을 뚫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반드시 죽고 말 것입니다.
그렇지만 반석의 틈을 뚫고 뿌리를 뻗어 나가며 자라던 꼬부라진 나무는 그 바위 밑에 옥토가 있으면 무한히 뻗어 나갈 것입니다. 그 나무에는 무한히 뻗어 나가다 반석을 만나더라도 이것을 뚫고 나갈 수 있는 생명의 기운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순조롭게 자라고 외면적으로 보기에 좋게 자란 나무는 환경이 급변하게 되면 자기 자체를 지탱하고 남아지기는 심히 어렵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뜻을 놓고 볼 때에 복귀섭리노정이란 평탄한 길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복귀섭리노정은 반드시 탕감복귀노정을 거쳐야 됩니다. 탕감복귀노정을 거치고서 비로소 정상적인 복귀노정이 우리 앞에 전개되고, 그 정상적인 복귀노정이 끝나게 될 때 영광의 한때가 온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탕감복귀노정은 수난의 길입니다. 희생의 대가를 치르고 피의 대가를 치르고 그 누구도 환희하지 않는 환경 가운데서 뿌리를 박아야 되고 거기에 생명의 여력을 남겨야 되는 것이 탕감복귀의 노정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무를 두고 말한다면, 하나의 소나무면 소나무가 반석의 틈에서 뿌리를 박기 시작한 것과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주위에 있는 다른 나무들은 자기가 자랄 수 있는 좋은 바탕이 되어 있다고 좋아할는지 모르지만, 바위틈에 뿌리를 박은 소나무는 바위가 햇볕을 받으면 받을수록 뜨거워짐으로 말미암아 생사문제가 좌우되는 지극히 위험한 환경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죽지 않고 뿌리를 박아 가지고 1년, 2년, 3년 이렇게 자랐다면, 그 나무는 이전보다 가중된 시련이 자기 앞에 오더라도, 자기 생명에 위험이 미쳐 오더라도 살아 남을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나무는 시련과정이 오게 될 때는 꺾여 나가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인류가 이어온 역사과정도 역시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선을 지향시켜 나오고 참뜻을 지향시켜 나오시는 하나님께서는 참다운 인간의 종자를 구한다면 어떤 종자를 구하실 것이냐? 무절목처럼 잘 자란, 즉 오늘날 미국 국민과 같이 짧은 역사과정에서 세계 문화권을 이룬, 누구든지 다 동경할 수 있는 그런 민족 가운데에서 종자를 구하실 것이냐? 만일에 현재의 문명권내에서 최고의 문화를 누리며 생활하는 민족에게서 종자를 구하셨다면 그 생활 이상은 발전할지는 모르지만, 여기에 섭리적으로 반대되는 입장에 서서 가는 길이 있다 할진대는 전부 다 후퇴하고 말 것이 아니냐?
이런 것을 볼 때, 하나님의 복귀섭리는 평탄한 행로를 통하여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는 수난길을 거쳐야 할 역사적인 과정이 남아 있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쪼그라지고 메말라서 보기에는 가냘프고 연약하지만, 그 가운데서 생명의 여력을 가지고 생명의 영양소를 흠뻑 품을 수 있는 그런 주체 능력을 가진 사람들로 역사과정에 남아질 수 있는 하나의 종자를 구하실 것이 아니겠느냐?
시련도상에서 어려움을 극복하고 시련과정에서 자기 생명의 자체력을 보강한 존재가 있다 할진대는, 그 자체는 자기에게 가중된 시련이 오더라도 그것을 뚫고 나가 투쟁할 수 있는 재기의 결의의 요건이 남아질 수 있으나, 그렇지 못하고 자연스럽게 자란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그 몇 배의 시련 고비가 다가오게 될 때는 전부 당황하고 후퇴하게 되는 것이 인간의 실정인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볼 때, 하나님께서는 역사상에 끈기 있는 민족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끈기 있는 민족뿐만 아니라, 험한 폭풍우가 몰아쳐오는 환경에서, 어느 누구도 남아질 수 없는 최후의 고빗길에서 온갖 수난을 극복해 나올 수 있는 생명의 여력을 가진 종족이면 종족, 민족이면 민족을 통해 섭리해 나가시는 것입니다. 최후의 세계적인 수난을 극복해 나가야 할 섭리노정에 있어서 이러한 것을 책임지기 위해서는 자기 생명과 엇바꾸는 일이 있더라도 감사하며 나갈 수 있는 사상을 가진 그런 무리와 그런 민족이어야 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를 두고 생각해 볼 때, 그런 무리, 그런 민족은 반드시 역사상에 남아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사상을 가진 민족의 예를 들어 보면, 유대 사상을 가진 이스라엘 민족은 2천년 전 예수님을 박해한 그날부터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자리에서 세계를 유리고객하는 민족이 되었지만, 하나님을 위하는 경천사상과 자기들이 선민이라는 선민사상을 가지고, 어떠한 환경의 여건도 자기들의 사상을 뿌리 뽑을 수 없다는 철두철미한 사상적 기원을 중심삼아 가지고, 역사의 흐름과 더불어 부대끼며 가는 곳곳마다 죽음의 교차로와 상봉하는 일이 있더라도 자기들의 민족적 긍지를 중심삼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선서하고 하나님을 추앙하며 하나님을 붙들고 나온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의 인연을 통해 나온 선민이기에 하나님도 이스라엘 민족의 뜻을 무너뜨릴 수 없을 뿐더러 그 이스라엘 민족은 세계 민족을 이끌어 나올 수 있는 새로운 한 시대를 맞이할 것이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이스라엘 민족을 두고 보면 그들이 거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아예 그들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세계적인 학술 분야에 있어서 권위를 나타내고 있는 사람들은 유대 민족 가운데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미국이 아무리 부자 나라라 하더라도 5분의 3이 되는 돈을 누가 갖고 있느냐 하면 유대 민족이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월가(Wall Street)의 재정적 권한을 유대 민족이 좌우하고 있습니다. 또는 정치 분야라든가 그 외의 모든 분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소련에서도 최고간부의 3분의 1 이상을 유대 민족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두고 볼 때, 어떻게 해서 수난받던 민족이 세계도상에서 중요한 책임을 짊어지고 다른 민족들의 추앙의 대상이 되며, 다른 민족이 서지 못하는 최고의 자리에 서 있을 수 있겠느냐?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끈기 있는 민족을 통하여 세계를 복원시키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 하는 생각을 해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온갖 시련을 극복하고 남아진 민족으로서 하나의 주권을 마련하여 세계적 승리를 획득하게 될 때, 그 기쁨은 얼마나 클 것인가? 그때의 기쁨은 그야말로 역사적인 기쁨이 될 것입니다.
수천년 역사과정에서 반대하던 폭군, 혹은 악한 정치이념권 아래에서 부덕하였던 과거의 모든 것들은, 이 민족이 승리를 획득할 때 이 민족의 영광의 한 날을 조롱하는 것으로 남아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세계적이요 천주사적인 영광의 가치를 자극시킬 수 있는 동기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두고 보면 고생한 사람일수록 그 가치를 아는 것입니다. 고생한 보람을 느끼는 사람일수록 그 고생한 뜻에 대해서 보다 낫게 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중심삼고 볼 때에도 그 뜻과 이념을 중심삼고 자기의 생명을 걸어 놓고 수난길을 걸어간 사람일수록 그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알 것입니다. 그러한 개인들이 합하여 민족이 되었다면 그 민족은 어느 민족보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가치를 높고 넓고 깊게 알 것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뜻을 따라가는 길에 있어서, 혹은 천운의 도리를 실천해 가는 길에 있어서 행복이 좋으냐 환난이 좋으냐 할 때, 행복보다도 환난이 좋다는 것입니다. 환난은 우리의 후손들이 망하지 않도록 방비하기 위한 하나님의 작전이란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또, 희생과 시련의 터전 위에서 전통을 상속받아 더욱 발전한다면 앞으로 어떠한 어려운 길도 뚫고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기반을 닦지 못한 민족이 영광스런 한 날을 맞이했다가 거기에 다시 어려움이 몰아치게 될 때는 그들은 좌절하고 말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은 가중된 탕감노정을 통하여 발전하는 입장에 서 있는 것입니다.
개인을 복귀하면 가정복귀가 남아 있는 것이요, 그 다음에는 종족복귀가 남아 있는 것이요, 민족복귀, 국가복귀, 세계복귀, 천주복귀라는 몇 배, 몇백 배, 몇천만 배의 가중된 수난길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시는 하나님은 그 길을 갈 수 있고 그 뜻을 따를 수 있는 사람을 위해서 그에게 시련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싫다고 하는 사람은 그 이상의 복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생명을 걸고 하늘의 복을 받기를 바라면 생명 이상의 복을 받을 수 있지만, 생명 이하에서 복을 받기를 원하면 생명 이하의 복밖에 받지 못합니다.
오늘날 사망권내에 있는 세계 인류를 생명권내로 부활 시킬 수 있는 주체적인 힘을 지구상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명 이상의 희생의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 이상의 가치를 알고, 당당코 이것을 획득하기 위하여, 이것을 당당코 세우기 위하여 무난히 돌파할 수 있는 사상을 가진 하나의 민족이 있다 할진대, 그 민족이 수난길을 거듭하면 거듭할수록 망하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생명을 중심삼고 무엇보다도 강하고 무엇보다도 두텁고 무엇보다도 강직한 생명력을 지닐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 나가는 것입니다.
통일교회가 가는 길도 그런 길을 갖추고 가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탕감복귀노정을 지도하고 있는 선생님의 주요 사상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통일교인들은 이 사상을 중심삼고 가자는 것입니다. 옆을 바라보고 자기 스스로를 비판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가고 또 가야 되겠습니다.
어떠한 주체가 말하기 전에 자기들이 서로 권고하고 자극시켜 가지고 가자는 것입니다. 그러한 명령을 하는 사람이 할아버지일지라도, 홍안의 미소를 자랑하는 젊은이가 아니라 얼굴에 주름살이 가득한 노인이라 하더라도 그의 말을 듣자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어 백발이 휘날리는 노인의 모습이라 하더라도 그 노인에게서 우러난 한마디의 결의가 젊은이를 심판할 수 있는 기운이 있다면, 하나님은 젊은이를 저버리고 늙어 쪼그라진 할아버지를 중심삼고 하늘 역사의 발전 동기를 엮어 나가신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소위 통일교회 간부들도 우리들이 아니면 책임을 못 한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는데 그러한 퇴폐적인 사상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중심삼고 섭리하시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정성은 여러분들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이 더 들입니다. 그 사람들은 갈 길이 한 길밖에 없습니다. 횡적인 소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젊은 사람들은 횡적으로 뻗어 나가는 욕심의 보따리를 칭칭 차고 있으되, 육십 살 이상 된 늙은이들은 한해 한해 흰머리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단 한 곳, 이제 갈곳을 위해 준비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신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뜻을 이루기 위해서 누구보다도 뜻을 사랑하고, 그 뜻을 이룬 그 앞에 누구보다도 보람 있는 자기를 세우기 위해 불철주야 하나의 목적을 향해서 전진하는 자리에 서지만 젊은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젊은 사람들에게는 공상과 망상 밖에 없습니다. 이런 입장에서 볼 때 젊은 세대의 사람들보다 나이 많은 노인층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기대를 남길 수 있고 하나님께서 기대를 걸 수 있다는 것을 젊은 사람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젊은 사람들은 나이 많은 사람들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에 정석온 노인이 왔지만 얼굴을 보면 쭈글쭈글하니 보기 싫습니다. 거기에 이빨까지 빠져서 황금니를 딱 끼워 놓았는데 그 입만 보면 괜히 기분이 나쁩니다. 그 얼굴을 보면 쭈글쭈글하게 되어 가지고 어느 한 부분 팽팽한 곳이 없고, 또 몸집도 호리호리해 훅 불면 날아갈 것같이 불안하지만 여러분들은 이런 할머니를 무서워해야 됩니다. 이 할머니의 한마디의 말은 개인이 생각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계를 통하여 뜻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 선조로부터 관계되어 있고, 혹은 기독교 역사의 중요한 순교 열사들의 생명의 인연을 뒷받침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하나의 기수가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젊은 사람들은 가다가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되면 자기 혼자서 고충을 해결하려고 하는데 그것은 틀렸다는 것입니다. 어려움을 당하게 되면 자기 혼자 해결하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할머니가 계시면 할머니께 의논 드리고 아버지가 계시면 아버지께 보고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뿌리가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원뿌리가 클 수 있는 동기가 안 되어 가지고는 겉뿌리가 강하게 퍼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할머니들을 무시하는 입장에 서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통일교회에는 기도하는 사람들을 평하는 무리가 많습니다. 이것이 현재 통일교회의 폐단이라는 것입니다. 신앙세계에서 이런 무책임한 행동을 하는 것을 선생님은 많이 보았습니다. 선생님 자신도 그런 할머니들을 불러 가지고 영계에서 무엇을 얘기했는지 물어 봅니다. 선생님이 다 아는 사실이지만 말입니다. 그 할머니들이 영계를 통해서 이래라 저래라 얘기합니다. 선생님을 따르는 사람이 그런 소리를 하는데 선생님이 그런 것을 모르겠습니까? 말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을 불러 가지고 믿지 않는 사람들과 얘기하도록 합니다. 사람은 자극이 필요한 것입니다. 자기가 아무리 안다 하더라도 그 아는 것만으로는 자극이 안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안다 하더라도 그 아는 길을 못난 사람을 통해 분배시킴으로 말미암아 그 자극이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창조원칙입니다.
주체와 대상이 주고받으면 번식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주체가 아무리 완전하더라도 그 주체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반드시 상대적인 여건이 있어야 번식작용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창조의 원칙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그런 할머니들이 절대 필요합니다. 공밥을 드시게 하더라도 그 할머니들을 모시며 가야 됩니다.
그런 관점에서 오늘날 지구장들, 귀여운 아가씨를 자기 아내로 모셔들이어 그 귀여운 아내와 더불어 같이 살고 싶은 생각은 있을는지 모르지만, 그런 할머니들을 신앙적인 어버이로, 조상으로 모시어 그 할머니의 아들딸보다 더 효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 하늘이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은 보기 드물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복귀역사를 중심삼고 볼 때, 복귀역사는 과거역사를 현재에 재부활시켜 가지고 탕감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자신들이 지난날의 역사적인 자기 조상들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내적으로 발전하여 현실에 있어서 자기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을 존중시하는 기준에 서지 않고는 탕감부활권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나이 많은 사람 혹은 신앙길에서 수고하는 사람이 있거든 그분들을 모셔다가 자기의 어머니와 같이, 자기의 할머니와 같이 단 한 달이라도 모셔 보았으면 하는 젊은이는 손을 들어 봐요. 이런 사상적인 내용이 없이 자기만을 위주하고 자기만이 잘되겠다고 하면 그 사람은 망하는 것입니다. 자기만 잘되는 법이 선이 될 수 없습니다. 자기만 잘되고자 하는 것은 전체를 부정하는 자리에 서기 때문에 지지를 못 받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생활 주변에서 벌어지는 인생의 인연을 통하여서 그런 것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을 볼 때, 하나님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수난의 길을 가고, 일생을 바쳐 고생한 사람들을 앞으로 태어나는 자기의 아들딸보다도 먼저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던 그 복을 오늘날 우리의 환경, 교단이면 교단, 혹은 가정이면 가정에 인연맺을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영광이냐 이거예요. 그 수고의 터전을 자기의 가정과 더불어 자기 생활, 즉 생애노정에 접근시키고 인연맺겠다고 하는 이는 하나님의 복을 추수할 수 있는 역군이 되고, 하늘의 복을 이 땅 위에 남길 수 있는 하나의 중심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 앞으로 노력하기보다 과거에 노력하여 선의 실적을 쌓아 놓은 사람을 모시는 것이 얼마나 복된 것인가를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모시고 나가는 것도 마찬가지 입장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살아 계시다면 2천 살이 되었을 것입니다. 33세에 돌아가셨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2천 살이라면 어떠한 할아버지가 되었을 것인가 생각해 보았습니까? 만일에 돌아가시지 아니하고 2천년 동안 쭉 살아 나오신 예수님이라면, 여러분은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로 모시고, 하나님의 왕자로 모시고, 자기 생명을 희생하면서도 '감사합니다' 하며 모실 수 있는 자신이 있습니까? 그분을 모실 수 있는 자격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때요?
예수님은 33세의 청춘시대에 하나님을 위해 자기의 생명을 바쳤습니다. 그 예수님은 누구나 다 좋아합니다. 그런데 죽지 않고 동네방네 다니면서 문제를 일으키고, 가는 곳마다 환영받지 못하고 몰리고 쫓기고 모든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집어던지는 돌멩이에 맞던 예수였다면, 여러분은 어떡하겠어요? 그 예수도 예수님임에 틀림이 없다면 어떡하겠어요? 영광의 자리에 태어난 예수와 이렇게 시련과정을 거친 예수가 예수님임에 틀림없지만 나타난 결과가 다를 때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내게 좋으면 하고 내게 나쁘면 하지 않는 사람은 역사적인 위업을 상속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효도하는 사람이 부모가 효도할 수 있게끔 해줘야 효도합니까? 충신이 신하로서 충할 수 있는 길을 군왕이 제시해 줘야 충신이 됩니까? 누구나 다 갈 수 있는 자리에서 충효라는 명사는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전인류를 전부 다 옹호할 수 있는 자리에서 참다운 효와 참다운 충이 발생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젊은 예수님을 다 좋아하지만, 만일 예수님이 꼬부라지고 마르고 머리카락이 없는 대머리라면 고심할 것입니다. 손도 오그라들어 가지고 뭘 주더라도 잘 받지 못하고 음식을 먹더라도 질질 흘리는 그런 예수님이었다면 어떠할 것이냐는 것입니다. 그런 예수였다면 따라가겠다는 사람 손들어 봐요. 사람은 좋을 때 충고를 하는 사람과 좋을 때 축하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참다운 사람이 누구겠어요?
오늘날 제일 사랑하는 심정적 인연을 거쳐갈 수 있는 부자의 인연 가운데에서, 자식이 병신일 때에는 그 자식의 병신 모습을 대신하여 그 이상의 고통을 받고 그 이상의 수난을 느끼며 사는 것이 부모의 심정입니다. 이와 같은 모습으로 예수님이 오늘날 우리 시대에 나타난다면, 2천년 혹은 4천년의 역사적인 시대에 족보의 기원으로 남아질 수 있는 분인데도 불구하고 그런 모습으로 나타난다면, 그 예수님을 영광 가운데에 만민의 추대를 받을 수 있도록 모실 수 있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오늘날 통일교회가 가는 길이 있는데 그 길을 가기가 힘들다고 옆으로 빠지고 뒷걸음질치는 사람은 망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종자로 남길 사람이 못 됩니다. 그렇지 않아요? 여러분은 그런 사람을 종자로 남기겠어요? 부모는 지금 큰 근심을 품고 나가는데 '아이구, 아버지 어머니는 꼴이 그저 저 꼴이라구. 말하는 것이나 모양이나 별수없어. 여기 있다가는 내 신세 다 망치겠다' 하고 구박하고 타령한다면 그런 사람들을 종자로 하겠어요? 그런 사람을 중심삼고 만대의 축복을 해주고 싶은 마음을 가질 수 있는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수난길을 가려거든 아예 아버지 어머니 앞에 가라는 것입니다. 부모가 열 시에 일어나면 아홉 시에 일어나고, 아홉 시에 일어나면 여덟 시에 일어나고, 한 걸음 앞서 가지고 수난길을 개척하고 수난을 먼저 책임지겠다고 몸부림치는 데서부터 역사적인 상속이라든가 참다운 인연이 맺어지는 것입니다. 너는 이러면 나는 저러겠다 하는 대립적인 생각을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오늘날 통일교회가 갈 수 있는 최고 정상의 수난의 고빗길이 어떤 길일 것이냐를 여러분 생각해 보았어요? 통일교회가 가야 할 길에서 최후에 남아져야 할 십자가의 승자 앞에, 혹은 환난 고통 핍박의 승자 앞에 어떤 자리가 최후의 고비가 될 것이냐? 선생님은 이것을 생각합니다. 만약 어떤 독재자가 나타나서 통일교회 문선생은 물론이요 통일교회를 믿는 무리들을 한꺼번에 끌고 가는 일이 벌어진다면 어떻게 될 것이냐?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다고 가정하거든 오늘날 우리가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 기준을 넘는 자신을 발견하기에 노력하는 무리가 되지 않고는 그때에 남아질 정병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적진을 향하여 정예부대로서 출전하기 위해서는, 즉 정예의 군력을 갖추어 출전하기 위해서는 무수한 수난의 훈련과정을 거쳐야 된다는 것입니다. 실전에 부딪쳐 가지고도 남아질 수 있는 실력자가 되기 위해서는 실전 이상의 과정을 거쳐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실전도상에 필요한 정예부대를 형성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최후에 하늘땅이 통합해 가지고 총공격하는 전선, 죽음의 밑바닥 중의 밑바닥이 될 수 있는 그런 치열한 전투장이면 어떡할 것이냐? 현재 통일교회 입장을 생각하게 되면, 선생님이 아직까지는 나라를 위해서 생명을 내던지고 죽으라고 못 합니다. 이 나라 이 민족을 살리기 위해서 통일교인 누구나 다 생명을 걸라고 명령할 수 있는 때를 못 맞았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때는 아직 맞지 못했습니다.
그때는 전략의 한때가 될 것입니다. 자기의 의식기관 전체 사지백체를 움직여 가지고 한 목적을 위해 나아가고, 총탄과 같이 쏴 놓으면 돌아올 수 없는 곳에 가서 폭발하는 것이 자기의 의무라고 할 수 있고, 자기의 존재의식에 어떤 흥패를 요구할 수 없는 포탄의 입장에 선 때가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그때는 '나는 이런 조각으로 요것은 다 쓰고라도 저것은 남아야 되겠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깨질 수 있는 대로 산산조각으로 깨지는 것이 폭탄의 사명, 총탄의 사명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분해가 되어 이 나라 이 민족을 향하여 한번 폭발할 수 있는 포탄이 되어 가지고 격파되어 어떻게 산화할 것이냐? 사나이라면 이런 사나이다운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서 자식이 방해된다면 자식을 청산해야 되겠고, 아내가 방해된다면 아내를 청산해야 되겠습니다.
대립될 수 있는 가치의 내용을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나를 통하여 요구하신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수난길을 피할 것이 아니라 전진적인 수난도상에서 자아를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을 위해 노력하지 않는 무리는 후대에, 최후의 결투장에 남아질 수 있는, 최후의 영광을 차지할 수 있는 왕자 왕녀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을 종자로 남길 것이냐? 여러분이 이것을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오늘 아무개 누구 누구가 하나님의 대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은 가는 도상에 있어서 꼬부라지고 말라빠지는 입장에 서게 되더라도 그 마음에서는 재봉춘하는 자일 것입니다. 남향으로 갔던 태양빛이 북향으로 올라오는 동지를 지나면 누구보다도 생명의 여력을 가지고 환경을 중심삼아 좌우로 흡수하고 자기의 진액을 부어서라도 풍화작용을 일으켜 생명의 요소를 스스로 보급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일선에 선 지역장, 지구장, 혹은 책임을 짊어진 사람들이 자기주의에 떨어져 가지고 남을 배격하고 비방하는 것, 그것은 망하는 일입니다. 자기가 처해 있는 환경에서 하나의 나무를 위해 물을 품고, 그 물이 없으면 피를 뽑아 가지고 거기에 풍화작용을 일으켜 그 밑에서 생명의 요소를 흡수할 수 있는 자체력을 갖춰 전체에 마이너스 시키지 않는 뿌리면 뿌리, 가지면 가지의 입장에 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없으면 그 나무는 망하는 것입니다. 뜻은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오늘 통일교회가 가는 도상에서, 미스터 문이 걸어가는 그 도상에서 종말기에 남을 수 있는 형상으로서 어떠한 무리를 요구할 것이냐? 많은 무리가 아니라 한 사람입니다. 만민을 대표할 수 있는 하나의 대표적인 형이라는 것은 '이러한 사람이어야 되겠다' 혹은 그러한 입장에서 책임을 진 '나'라면 '나는 이러한 책임자가 되겠다' 하고 결의를 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데 죽음의 수난길일지라도 시대적 수난을 거쳐서 어려운 환경을 극복한 결정적인 터전이 벌어지는 그날, 거기서 새로운 터를 마련하여 새로운 봄날을 맞이하고, 하늘의 법도를 따라 발전할 수 있고 천리적이고 순리적인 환경에서 자랄 수 있는 모습이 없다면 얼마나 허전하겠느냐는 것입니다.
비뚤어지고 말라빠지는 과정을 거쳐 거두어들인 씨는 비록 작고 말라 있더라도 그 나무의 본심 본성의 요소를 지닌 순수한 씨인 것입니다. 그 씨가 작고 말라 있지만 봄을 맞이하여 심어지게 될 때는 일대 이대 삼대에 본연의 형태를 중심삼고 자랄 수 있는 본질적인 나무의 형태를 갖출 것이 아니냐? 여러분은 이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아직까지 수난길입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이런 무대를 가지고는 뜻을 이루지 못합니다. 사탄세계를 정복하지 못합니다. 책임자들이 향상되어야 됩니다. 책임자들이 철두철미한 사상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전통과 사상이라는 것은 이어받는 것입니다. 부모가 올바르지 못하면 자식도 올바른 자식이 못 되는 것입니다.
누구나 어려운 길을 싫어하고 더 편안한 길을 가고 싶어합니다. 무슨 단체라든가 하는 것들도 상금을 준다면 많이 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놀음을 계속하게 될 때는 3년, 10년을 거쳐도 누구 하나 남지 않을 것입니다. 상금만 없어질 것입니다. 앞으로 때가 오게 된다면 선생님이 그런 일을 거쳐서 진실을 가려낼 것입니다. 하는 수 없다는 것입니다. 뜻의 길에 아직까지 이렇게 수난길이 남아 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봐요. 자식을 20세까지 키웠는데, 그 자식은 아무것도 모르고 자기가 저절로 큰 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자식이 자랄 때의 부모의 희생은 얼마나 큰 것입니까? 부모가 20년 동안 안팎으로 생활 전면에서 그 자식을 위해 수고하였고, 또는 가정, 가문 전체가 그를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면 가문 전체가 그에게 걸고 있는 기대가 있을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기 혼자 자란 줄 알고 있으니 항상 부모 앞에 불효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식을 바라볼 때 부모는 절망하고, 과거에 자식을 키우느라고 들였던 정성이 그 환경으로 말미암아 부정적인 요건으로서 그 자체를 공격하고 그 자체를 파탄시키고 싶은 반격적인 마음으로 폭발될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중심삼고 복귀섭리의 뜻을 보게 되면 오늘 통일교회가 이만큼 성장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수고하셨는가 하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수고하신 터전 위에서 자란 그 자리는 얼마나 두렵고 엄청난 자리인가를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책임자의 소행이 전통에 침식이 되고 침범될 수 있는 입장이 될 때는 천추에 한을 남기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후대 후손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모든 원한까지 거기에 빨려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 그 자리는 지극히 두려운 자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봄날을 맞이해 보여지는 모든 것을 감상하게 될 때, 나무 중에 '저 나무가 제일 좋다' 라고 생각하겠지만 그 나무의 수고는 느낄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몇몇 시련을 겪고 극복할 수 있는 입장이라면 모르지만…, 수령이 들고 말라지고 쪼그라지고, 혹은 자기 영역에서 어찌할 수 없는 급변하는 환경에 처하게 될 때에도 여기에 밀어닥친 운명을 뿌리를 깊이 박고 있는 나무는 극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걸 알아야 됩니다.
참다운 길, 참이라는 것은 수난의 과정을 거쳐가는 것입니다. 참이라는 것은 선의 요소를 중심삼고 플러스 마이너스의 자연적 환경에 있어서 행복의 여건이 부합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상극이념을 소화시킬 수 있는 주체성을 갖추는 데에서 비로소 미래의 행복의 터전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오늘날 통일교단을 사랑하는 통일교회의 젊은이들이여! 여러분의 갈 길이 무엇입니까? 나는 편안한 길을 가라고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생하는 길을 가라는 말은 여러분이 충분히 복받을 수 있는 말입니다.
민족정기를 되찾기 위해서 망할 때 망하더라도 한판 싸우겠다는 무리는 그냥 흘러가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보여지는 실상과 더불어 박자를 맞추고 모든 환경에 환영받는 것을 중심삼아 자기의 일신을 맡겨 버리는 입장에서 행복을 구하는 무리는 그냥 흘러가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어떠한 길에서도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강인하고 끈기 있는 철두철미한 사상을 가지고 내일의 시련도상을 염려해야 됩니다. 오늘의 시련이 문제가 아니라 내일의 시련을 어떻게 감당할 것이냐가 문제입니다.
오늘 아무리 승리를 자랑하고, 아무리 영광의 절정에서 환영을 받는다 하더라도 그가 한때 잘못하여 걸리는 날에는 참소를 받고 쪼개지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우리 대한민국의 근세사에 있어서 우리들이 목격해 보고 체험한 사실이 아닙니까? 민족의 수난길을 중심삼아 가지고 그 일신이 선의 실적을 남기고, 내일의 소망의 봄날을 맞이하기 위해 자기를 뿌려서 민족의 새로운 법도를 세워야겠다는 사상을 가지고 드러나지 않고 거름이 되고 비료가 되는 무리가 있다면, 그들은 기필코 민족 앞에 환영받고 민족의 정기를 이어받아 그것을 더욱 배양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이 세상 어디에 하늘 뜻을 위해서 하늘을 중심삼아 가지고 내일 죽더라도 가겠다고 다짐하는 처량한 무리가 있다면, 여러분과 여러분의 후손 앞에 책임자로서 남아질 수 있는 무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사실을 생각할 때 여러분은 흘러가는 입장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태양빛이 내려쬐고 바람이 불어치는 가운데에서도 뻗어 나갈 수 있고 생명의 요소를 흡수할 수 있는 자력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자기 앞에 크나큰 시련이 오더라도 그것을 책임지고 싸워 나갈 수 있는 책임자가 되어야지, 현재보다 못한 입장에 처해 행복을 찾아 나간다면 미래에 남아지는 무리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할머니(어떤 할머니를 지칭)가 옛날에는 앞에서, 누가 보지 않는 자리에서 뜻을 위해 희생해 나가더니 요즘에는 그런 것 같지가 않아요. 얼굴을 보면 젊은 것 같은데…. 머리카락이 조금 세었다면 물들이면 그만이라구요. 나도 변하게 되면 저렇게 될 것이냐? 백발을 휘날리는 팔십, 구십이 되더라도 '젊은이들아, 가자' 하고 호령할 수 있는 사나이가 될 것이냐? 아니면 비참하게 죽어가는 사나이가 될 것이냐? 생각해 보라구요.
죽음을 딛고 일어서지는 못할지라도 정의에 불타 하늘을 위해 충효의 도리를 다하는 자신이 되고자 할 때, 그 자리는 하나님이 염려하시는 것입니다. 반항적인 자식을 가진 부모는 그 자식이 현재에 아무리 거지 신세가 되어 지팡이를 들고 문전 구걸하는 입장이라도 앞날에 누구보다 당당한 자식이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나를 바라보실 때에 낙망과 실망으로 얼룩진 패망의 대신자가 되기를 바라시는 것이 아니라 다가오는 소망의 세계 앞에 있어서의 싸움의 기수로서 내세우기에 부족함이 없는 모습을 요구하실 것이 아니겠어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되려면 선의 기준을 알아야 합니다. 거기에 제일 가까운 선한 길이 통일교회의 길입니다. 그것을 만들기 전에 내가 가려고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일시에 폭발하더라도 이 기반을 만들어 놓고 갈 것입니다. 만일에 그 이상의 기반을 만들 때까지 피눈물을 흘리고 정성들이며 불철주야 노력하는 길에 있어서 앞에서 선도할 수 있는 한 사나이가 나타나면 하늘은 불시에 악을 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일을 한 것입니다.
오늘날 통일교회 교인들 중에 그런 문제를 중심삼고 볼 때 '통일교회 전부를 희생시켜서라도 구해야 되겠다'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요? 외적인 분야에서 그런 아들딸의 모습이 없다면 나 자신을 통해서 그런 아들딸을 만들고야 말겠다는 각오를 해야 됩니다. 복귀의 원칙을 볼 때 이런 상극적인 운명이 출발한 하늘의 서글픈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이렇게 되면 여러분들은 천사 세계의 무리와 같은 모습밖에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엄청난 원한이 뜻길 앞에 가로놓인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여러분은 몇백 배의 소원을 갖고 몇천 배의 수고를 해야 되겠습니다. 원수가 막을 수 있는 수난길이라면 내 목이 찔리더라도 그 원수를 찔러 죽여야 되겠다는 결의가 있어야 되겠습니다. 나를 따르려거든 바람직한 관계를 맺고 따라야 되겠습니다. 그것을 통해 책임을 완수해 가지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자기 생명을 부탁하며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기성교회보다도 더 참신하고 더 멋지게 해야겠다는 사람이 누구냐?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나를 찾아오던 역사과정에 심을 수 있는 한 생명이 되겠다고 나를 맡기고 죽을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것은 충신이 갈 수 있는 사랑의 길입니다. 자기의 아들딸을 이렇게 만들어 할아버지 앞에 연결시켜야 합니다. 우리 집은 천추만대에 어떤 민족에게도 지지 않는 가문이 될 것이라고 자랑하고 싶고 그런 일가를 만들고 싶기에 자식에게 이것을 귀결시키는 것이 부모가 가르칠 수 있는 효자의 도리가 아니겠어요?
좋은 것을 먹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좋은 길로 가는 것을 기뻐하지 마십시오. 아직까지 우리는 훈련기간입니다. 아직까지 우리 앞에 치열한 투쟁의 노정은 끝나지 않았고, 내 일생에 있어서 하나님 앞에 치열한 투쟁의 노정은 끝나지 않았으며, 내 일생에 있어서 하나님 앞에 맹세한 그때를 아직 맞지 못했습니다. 내가 갈 때가 오면 가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통일교회를 볼 때, 통일교회의 한 식구로서 남아질 수 있고, 과거와 현재는 물론 미래 앞에 남아질 수 있는 하나의 조상적인 씨가 되어야 됩니다. (중략)
선생님은 20여 년의 수난노정을 걸었습니다. 60년대까지 수난길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40수를 못 채웠습니다. 20대에 이 뜻을 중심삼고 출발했기에…. 60년도를 중심삼고 보면 선생님이 40세인데 80세까지 가야될 것이 아니겠어요? 탕감복귀노정 40년간의 서러운 역사 가운데에서 하나님과의 인연이 맺어졌거든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수 있는 소망의 터전을 내 일생에 만들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2천년대가 되면 통일교회는 어떻게 될 것이냐? 이렇게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수난의 대가를 많이 치러야 할 탕감노정에서는 한 사람 결실시키는 것보다도 두 사람 결실시키는 것보다도 백 사람 결실시키기 위해서, 그것을 단축시킬 수 있는 터전을 개척하며 나아가야 할 길이 여러분의 길인 것입니다. 이 길을 피하는 사람들은 만민 앞에 나타날 때, 어디 가서 나타나겠습니까? 역사적 사실을 돌이켜 볼 때 어디 가서 남아지겠어요? 이 길을 피하고자 거기에 순응하고 거기에 호응하는 무리는 흘러가 버리는 것입니다. 바람결에 부딪쳐 자빠지는 것입니다.
지금 대한민국을 볼 때 남북으로 분립되어 가지고 어려운 입장에 놓여 있습니다. 아시아 정세나 세계 정세가 혼란된 와중에서 방향을 바로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시기에 있어서 여러분은 이 비참한 세계적인 수난을 수습해야 되겠습니다. 한국에서 탕감하여 남아지고, 아시아 정세의 수난과정에서 남아지고, 세계의 수난과정에서 남아질 수 있는 단 하나의 사상적인 기반, 오늘의 수난과정에서 꽃필 수 있는 저력을 갖춘, 그러한 힘의 상징을 가진 사상이 오늘날 지구상에 나타났다 할 때는 금후의 새로운 문화세계에 있어서 20세기뿐만 아니라 22세기, 23세기 이상 꽃필 수 있는 기원을 형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좋은 밥을 대하게 되면, 그것이 이 나라의 원수입니다. 잘살 수 있는 환경이 되면, 그것이 원수라는 것입니다. 지금 부산항에 미국에서 보내 온 링컨차가 도착했습니다. 이것은 물론 777가정 합동결혼식 때에 선물로 온 것이지만 이 차를 타야 될 것이냐? 이것을 팔았으면 딱 좋겠지만 이것은 역사상에 거룩한 눈물과 더불어 하늘의 명예를 걸고 보내 온 것이기에 이것을 파는 날에는 위신, 777가정이 축복받았다는 그런 위신도 서지 않겠으니 그것을 찾아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차를 보내 주었는데 이것을 누가 찾아야 할 것이냐? 한국에서 세관을 통과하려면 차 값의 250퍼센트 내지 300퍼센트에 해당하는 세금을 내야 합니다. 이 세금을 누가 내야 되겠어요? 선생님이 지갑을 털어서 내야 되겠어요?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심각하다는 것입니다. 차가 오는 것이 얼마나 고통인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지갑에서 돈을 꺼내 가지고 그 세금을 낼 수가 없습니다. 선생님이 가지고 있는 돈은 선생님 마음대로 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차로 말미암아 통일교회에 플러스되는 것이 무엇이냐? 국내에서는 마이너스 될 것입니다. 선생님은 차를 자랑하고 싶은 사람이 아닙니다. 오늘날 한국에 있어서 종교인들은 차를 가지고 아이들이 딱지를 가지고 자랑하듯이 네 것이 좋으냐 내 것이 좋으냐 하며 자랑을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어 가겠어요?
선생님은 아직까지 정성을 들여서 하나님의 성전을 못 지은 것이 한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펼치지 못한 것이 한입니다. 차를 못 타서 한이 아닙니다. 잘살지 못해서 한이 아닙니다. 선생님이 수난길을 갔던 것이 한이 아닙니다. 마룻바닥에 엎드리게 될 때는 우리 선조들을 추모하며 천추만대에 영광된 사상으로서 환영할 수 있는 전통적인 내용을 남기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면 7백만 원에 가까운 돈을 누가 낼 것이냐? 그렇다고 미국 사람들이 세금까지 마련해서 보낸 것도 아닙니다. 그래 여러분들 팔아야 되겠어요, 그냥 두어야 되겠어요? 세관에 그냥 두어야 되겠어요, 찾아와야 되겠어요? 어떻게 생각해요? 여러분 내가 돈을 주고 그 차를 찾아 타고 다니면 편안한 점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그 차를 찾는 것을 연기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선생님에게 집을 예물로 사준다고 현금을 5천여만 원 준비해 놓은 모양인데 그러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 돈이 있거든 내가 고생하더라도 여러분들의 후대에 남아질 수 있는 그 무엇을 위해 쓰고, 오히려 더 보태 주겠다는 마음입니다.
선생님이 지금 통일교회를 외곽적으로 볼 때 절박한 문제가 뭐냐? 교회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집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사람보다 집을 보려고 합니다. 주님 모실 것을 대비해야 할 때가 왔기 때문에 외적인 문제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땅도 산 것입니다.
요즈음 돈이 없어서 쩔쩔매면서도, 선생님이 빚을 지면서도 청평 땅을 사고 있습니다. 누구를 위해 땅을 삽니까? 세계를 위하고 대한민국을 위해서입니다. 여러분의 교회를 위해서는 여의도를 샀고, 여러분의 자녀들을 위해서는 이 땅을 샀고, 앞으로의 후손들을 위해서는 청평 땅을 샀습니다. 여러분, 70여만 평의 땅을 샀는데 이것을 7배 이상 늘려야 됩니다. 그러면 이 땅을 살 때 그 누가 헌금을 했습니까? 선생님이 무슨 땅장사를 하기 위해서 그런 줄 알아요? 천만에요. 찾아온 때와 더불어 준비한 사람은 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날 통일교인들은 무엇을 했습니까? 여기 참석한 여러분들 얼굴을 못 들 때가 올 것입니다. 만일에 선생님이 미국에 편지해 가지고 여기 차가 오는데 세금을 내 달라고 하면 내줄 것입니다. 일본 간부들이 이런 문제를 중심삼아 가지고 의논하고 있습니다. 지구장 지역장들이 이런 문제를 의논해 가지고 일치단결하여 돈을 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 재산입니다. 그 차는 외국으로부터 들어오는 첫 선물입니다. 알겠어요? 대한민국 전체 앞에, 하늘땅 전체 앞에 첫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을 팔아먹을 것이냐? 그러면 여러분들 위신이 좋겠어요? 본부의 위신이 좋겠어요? 그 세금은 여러분이 못 내니까 할 수 없이 내가 내는 것입니다. 이런 줄도 모르고…. 이런 일을 반성해야 됩니다.
여러분이 현실적인 무대를 중심삼고 살아가면서 어렵다고 수난길을 거부할 것이 아니라 이 수난길을 넘어서 다가오는 내일에 있어서 또다시 기수가 되고 민족과 세계를 넘어서 남아질 수 있으려면, 이와 같은 사상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마음으로 뒷바라지를 해주고 환경의 개척사업에 말뚝을 박고 철책을 꽂아 놓는 무리가 없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러한 일을 하는 데 기수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젊은 사람들은 좋은 옷을 입으면 좋아하고, 또 '뜻은 자기를 중심삼아 가지고 이루어지지 뭐. 선생님은 언제나 저러려니…' 하고 생각합니다. 참 기가 막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오지 못하면 선생님은 홀로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터전을 닦지 못하면 일본을 통하든지, 일본이 안 되면 미국을 통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독일을 통해서 공산당을 쳐부숴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재각성하여 내일의 선각자가 되고 미래의 출발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보다 강력한 시련과정에 있어서 망하는 것이 아니라 외적으로는 살을 에이는 것 같지만 뼛골에서는 영양을 흡수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런 사람이 한 명이 있더라도 하늘은 그 사람을 통해서 섭리해 나가시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책임자 자리를 떡 맡겨 놓으면, 자기들이 이렇게 이렇게 하고 싶으면 일부러 그 이상 더 합니다. 그리고 앞장서서 가겠다고 합니다. 그래 그런 사람에게 돈을 얼마쯤 푹 줘 보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되겠는가, 선생님에게 돈이 어떻게 쓰였는가, 혹은 무엇을 못 했는가를 다 보고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을 한 번 두 번 세 번 착실히 하게 되면 선생님은 그 사람을 중심삼고 일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그렇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강의를 할 때에 처음에는 잘하지만 나중에 가서는 자기를 자랑하고 나옵니다. 하나님을 자랑하고 나와야 됩니다. 나 자신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내가 잘났다고 자랑할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이만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했다고 자랑할 것이 아니라 커지면 커질수록 높은 곳에서 바라보시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작으면 작을수록 높은 곳을 바라보고 먼 곳을 바라보아야 되지만, 커지면 커질수록 자기 분수를 알고 가야 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사망이란 것은 다른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버리는 데서 오는 것이요, 원수라는 것은 다른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간신이라는 것은 다른 데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제일 가는 충신과 같이 어깨를 겨눠 가지고 가는 데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통일교회가 가는 길에서도 통일교회 자체적으로 가인이 있고 아벨이 있는 것이요, 그 아벨에게 있어서는 전후좌우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옆방에 같이 있는 사람 중에 가인 아벨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 가인 아벨의 싸움 가운데 남아질 수 있는 것은 무엇이냐? 자기가 고생하고 자기가 책임지겠다 하며, 싸울 때도 눈물 흘리고 자기가 잘못했다고 하는 사람은 남아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것을 남기고 싶으신 것입니다. 선생님도 앞날의 그런 분야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각자 자기를 중심삼고 그런 심정적인 터전을 남기게 되면 반드시 하늘의 상속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선생님이 왜 이 말을 하느냐 하면, 여러분이 만약 나무라면 큰 나무가 되기 전에 강한 나무가 되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폭풍우가 몰아쳐 다른 나무들은 다 부러지고 쓰러지더라도 살아 남는 나무는 그 동산 가운데에서 제일 쪼그라졌지만 제일 어려운 수난길을 극복할 수 있는 생명력을 지닌 나무일 것입니다. 이런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무엇을 하게 될 때는 쉽게 하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남이 쉬운 자리에 서 있어도 쉽게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섭리의 뜻을 받들어 나가는 우리들을 볼 때에 자기의 일생노정, 즉 50평생이면 50평생 가운데 하나님을 위해 고생한 기간이 25년 이상이 되느냐, 혹은 3분의 1이 되느냐, 혹은 3분의 2가 되느냐 하는 것을 따져 봐야 합니다. 그 시일이 많아짐에 따라 보다 효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천리원칙이기 때문에 이런 관점에서 한 그루의 나무라도 새로이 심어야 되겠습니다.
선생님이 아까 죽은 나무를 쑥 뽑아 보았습니다. 산 나무들은 쑥 뽑히지 않는데 죽은 나무는 뽑으니까 쑥 뽑혔습니다. 죽은 나무가 왜 죽었는지 가만히 보니까 그저 슬쩍슬쩍 심었더라 이거예요. 그렇지만 산 나무를 뽑아 보니까 딴딴했습니다. 아주 딴딴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런 것을 느끼고 고생하는 길이 있다면 역사의 승리적 기준이 거기에서부터 결정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것을 알고 이 동산을 앞으로 어떻게 만들 것이냐, 여러분이 죽기 전에 이 동산을 어떻게 만들 것이냐 하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이 땅 위에 천국이 오면 여러분이 그저 자기를 위해서 한 것은 자기의 영광에서 끝나지만 남을 위해서 한 것은 국가와 세계에까지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효성을 다하고 수고를 다해 가지고 가는 선한 길은 오래가는 것입니다. 보다 많은 생명력을 희생시켜 가지고 나가면 통일교회 이념은 영생, 발전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것이 통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현재 부름받은 자리에서 이것을 부인하면 통일교회 신앙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늘 통일교회의 영광은 여러분들의 것입니다. 통일교회가 자랑할 수 있는 것을 여러분이 가지고 나라와 세계를 넘어 자랑할 수 있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여러분이 되어야만 역사에 남아진다는 것을 알고 열심히 일해 나가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아버님, 오늘은 이달 들어 마지막으로 맞는 안식일이옵니다. 이 아침을 맞는 통일의 자녀들을 특별히 사랑하시옵소서. 이들이 한 많은 복귀의 도상에 서서, 가야 할 운명길을 개척하는 싸움의 노정에 있어서 당신이 바라고 당신이 찾고 있는 자녀의 모습을 안팎으로 갖추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참다운 아들의 모습, 딸의 모습, 고귀하고 영광스런 가치를 지닌 자랑스런 모습을 아버지께서 얼마나 고대하고 계신가를 진심으로 느끼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저희들은 부자의 인연을 가지고 이 자리에 부복하였사오니 기쁘게 받으시옵소서. 아버지는 먼 곳에 있고, 관계 없는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가까운 자리에 있고, 뗄래야 뗄 수 없는 자리에 있사옵고, 그런 부자의 정이 남아 있사오니, 이 시간 저희들이 아버지를 모시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는 흘러가는 역사와 더불어 흘러가서는 안 되겠습니다. 저희 일생의 노정이 무의미한 결과를 가져와서는 안 되겠습니다. 흐르는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야 된다는 사실을 두고 볼 때에, 이 노정은 계속적인 싸움의 노정이요, 생명의 뒷받침이 없으면 전진할 수 없는 노정임을 알게 되옵니다. 그러나 스스로 이러한 생명력을 지닐 수 있는 저희 각자가 되지 못하여 당신의 보급이 없으면 안 되겠고 힘의 원천이신 당신에게 접하지 않으면 안 되겠기에 저희가 이 자리에 모였사오니, 아버님이여, 돌보아 주시옵소서.
저희가 어느때에 어떤 수난에 부딪칠지 알 수 없는 매일매일의 생활노정을 걷고 있사오니 아버지께서 지켜 주셔야 되겠습니다. 저희가 흘러가는 역사 가운데 있어서 스스로의 갈 길을 가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아버지 앞에 효의 도리와 충의 도리를 하는 데 있어서 가중된 책임도 짊어져야 된다는 이 엄청난 사실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세상이 나를 끌고 가려 하고 있지만, 내 마음을 따라 거하시는 아버님이 나를 이끌고 있사옵니다. 그 사이에 끼여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해 볼 때에 아버지 앞에 한걸음이라도 더 나아가기 위해서는 하루하루의 생활을 다짐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모습임을 알게 되옵니다. 그러한 모습이 되기 위해 다짐할 수 있는 이런 자리를 갖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저희들이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통일제단에 찾아와 지금까지 나온 걸음은 자기 스스로의 승리를 다짐하는 그런 걸음이 아니라, 개인을 넘어 가정을 구하여야 할 책임이 있고 가정을 넘어 종족과 민족과 국가와 세계까지 구하여야 할 엄청난 사명을 짊어지고 나온 걸음임을 저희들은 알고 있습니다. 이런 탕감의 고빗길을 자기 스스로를 중심삼고 부딪치지 않으면 안 될 운명길을 가고 있사오니, 이들 앞에 당신의 무한한 사랑의 은사가 가일층 가해져야 되겠사옵니다.
이들이 외로울 때 당신이 위로하여 주시옵고, 슬플 때 당신이 권고하여 주시옵소서. 부디 이들의 마음 몸을 당신 뜻 앞에 온전히 일치하게 하시옵고, 이들을 당신의 소망 앞에 없어서는 안 될, 당신의 뜻과 당신의 사명을 맡아 가지고 원수의 세계, 적진을 향해 전진할 수 있는 하늘의 용사들이 되게 하시옵소서. 그러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이들이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저희는 그 누구를 위하여 태어난 것이 아니옵니다. 아버지를 위하여 태어났고, 세상의 악을 제거하기 위한 사명을 갖고 태어났다는 것을 절감해야 되겠습니다.
아버님 앞에 플러스되는 생활노정을 자기 일생의 행로에 얼마나 남길 것이냐, 자기가 가고 있는 행로에 있어서 얼마나 그 가치를 발견할 것이냐가 문제이옵고, 많이 남기고 많이 발견하기를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하여 인류가 바라왔고, 역사가 바라왔으며, 섭리 전체에 있어서 아버지께서 바라고 계신다는 것을 아옵니다. 이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오늘 이 순간은 나 자신을 위한 순간이 아니옵니다. 오늘 이 생활이 자기를 중심삼은 생활이 되어서는 안 되겠사옵니다.
저희들은 역사의 운세를 통일시켜야 할 하나의 푯대가 되고, 하나의 선악의 분기점이 되어야 할 자신임을 확실히 깨달아야 되겠사옵니다. 하오니 아버님, 이 자리에 친히 찾아오시어 너와 나 사이의 관계를 끊을 수 있는 그 무엇은 없다고 권고하여 주시고, 저희들이 책임을 추궁할 수 있는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였을진대는, 아버지여, 이 시간에 당신의 긍휼과 사랑의 마음을 퍼부으시옵소서.
저희들은 내일의 소망 앞에, 아버님 앞에 슬픔을 남기는 불쌍한 무리가 되어서는 안 되겠사옵니다. 소망의 뜻 앞에 강하고 담대해야 되겠습니다. 어떠한 원수나 적들이 저희의 앞을 가로막는다 할지라도, 하늘의 일념과 더불어 전진을 그칠 수 없다는 자세로 아버지를 모시고 전진 또 전진하여, 승리의 결과를 갖고 아버지 앞에 개선가를 올려 드리어, 아버지로부터 사랑받는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저희들이 가야 할 길을 지켜 주시옵소서. 당신께서는 이 나라 이 민족 앞에 사명을 부여하시기 위하여 수고하신 것을 저희들이 알고 있사오니, 그 수고의 걸음이 헛되어서는 안 될 것을 또한 저희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당신이 이 나라를 지켜 주셔야 되겠습니다. 이 나라를 중심으로 하여 내일 모레 귀중한 하나의 책임을 결정하게 되어 있사오니, 이 나라를 뜻에 일치시킬 수 있는 당신의 사랑하는 자들을 세우시어, 아버지 앞에 순종하고 아버지를 모시는, 영광의 자리에서 당신으로부터 신임받는 자녀들을 세우시어 이 나라를 주도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금후에 있어서 아시아가 가야 할 입장이 어려운 자리에 서 있는 것을 생각할 때에, 당신이 이 나라를 친히 주도하여 주셔야 되겠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저희들이 이 나라를 염려하고, 저희들이 일치단결하여 이 민족이 가야 할 길을 단호히 붙안고 아버지 뜻 앞에 일치될 수 있게끔 길을 닦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이런 사실을 생각할 적마다 저희들은 바쁜 자리에 섰다는 것을 아옵니다. 저희들은 싸워서 이겨야 할 책임이 얼마나 막중한가를 느끼게 되옵니다. 저희들은 정의를 위하여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잘 알고 있사오니, 정의의 중심 되시는 아버지의 발걸음을 따라가고, 선의 목표를 향하여 굴하지 않는 아버지의 절개를 본받아 끝까지 싸워 나가고, 목적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끝까지 게을리하지 않는 당신의 자녀들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날, 이곳을 향하여 마음을 모으고 아버지의 뜻 앞에 축수하는 수많은 자녀들 위에 친히 같이하여 주옵소서. 그들의 갈 바를 당신은 잘 알고 있을 것이옵니다. 그들이 머물러야 할 자리도, 그들이 갖추어야 할 자리도 잘 알고 있을 것이오니, 알고 움직이는 전체 위에 당신의 뜻을 나타내시옵고, 사랑의 인연이 근거가 되게 하시옵소서. 당신이 친히 그 터전을 상관하셔서 그 곳이 승리의 발판으로 이 지구성에 뻗어 나갈 수 있는 하나의 출발점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이 아버지의 뜻을 위해 싸우는 마당 마당 위에 친히 같이하여 주옵소서. 더욱이 연약한 아낙네들이 이 시대적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선두에 서서, 그 누구도 생각할 수 없는 입장에 서서 하늘을 부여안고 눈물짓고 있사오니, 안팎으로 에워싸인 모든 환경에 부딪쳐 서러움을 느끼거든, 아버지, 천배 만배 위안하여 주시옵시고, 승리의 한 길을 개척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노정이 아버지의 뜻 앞에 필시 이 시대가 요구하는 노정인 것을 알고 책임을 다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세계에 있어서 하늘 뜻 앞에 부끄러웠던 한의 역사, 눈물의 역사를 밟고 넘어 갈 수 있는 귀중한 이번 기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오늘 하루가 당신 앞에 자랑스런 하루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모이는 곳곳마다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금후에 되어지는 모든 것을 당신 앞에 의탁하옵고, 오늘 이 시간을 친히 주관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오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님의 성호 받들어서 아뢰었사옵니다. 아멘.
인간들은 잃어버린 소망의 세계를 다시 찾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인류 시조가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의 뜻을 배반하여 타락한 그날부터 인류는 슬픔의 자리에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슬픔이 여러분이 사는 데 있어서 느끼고 있는 이 정도의 슬픔일 것이냐, 그렇지 않으면 그 이상의 슬픔일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될 것입니다.
절망 가운데 빠져 슬픔을 절실히 느끼는 사람이 그 절망을 박차고 나오면 새로운 소망의 기운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슬픔의 경지에서 소망의 경지로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될 우리 인간인 것을 생각할 때, 그 슬픔이라는 것이 자기 개체에게만 해당되는 슬픔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슬픔은 나를 넘어서 사랑하는 아내면 아내, 자녀면 자녀, 즉 가정을 중심삼고 관계되어 있고, 또 자기의 친척, 혹은 민족, 국가, 세계가 관계되어 있으며, 더 나아가 지금까지의 전역사도 이 슬픔 가운데서 이어져 내려온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슬픔은 내 개인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우리 선조로부터 이어받은, 슬픔의 뿌리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온 역사 속에 흐르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에, 내가 당하는 슬픔은 나에게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역사적인 내용과 결부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이 슬픔의 근원은 어디냐? 즉, 슬픔의 뿌리가 무엇이냐? 이 슬픔으로 말미암아 고통이 연결되는 것이요, 이 슬픔이 오늘날 우리 인간들이 자포자기의 자리, 혹은 패배의 서러운 자리, 뿐만 아니라 사망의 자리까지 나아갈 수 있는 동기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생활하는 주변에서 기쁜 일을 보는 것보다도 너무나 많은 슬픈 사실들을 보고 느끼고 있습니다. 이러한 슬픈 환경을 박차고 나서지 않고는 우리가 소망하는 기쁨의 세계, 기쁨의 천국은 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쁨의 세계와 기쁨의 천국까지 가려고 할 때에 내 자체의 힘 가지고 갈 수 있겠느냐? 슬픈 자리도 벗어날 수 없는 내 자체의 힘으로는 갈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 있어서 신앙이라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는 슬픔을 느끼면 느낄수록 그 느낌에 비례하여 당하는 슬픔을 타개하고 제거시키고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는 힘의 모체가 필요합니다. 슬픔의 경지에 둘러 싸여 있는 우리 자신이 그 슬픔을 타파할 수 없고 극복할 수 없는 자신임을 알게 될 때에, 이것을 극복할 수 있는 중심자, 즉 어떤 실체를 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현재의 입장을 극복하기 위하여 필요한 요건을 찾는 데 있어서 우리에게 신앙길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신앙하는 사람은, 슬픈 자리에 동조하여 끌려갈 것이 아니라, 슬픈 자리가 되지 않게 방비하고 슬픈 요인을 제거시키고 밀고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개인적인 생활환경을 지니고 사는 사람이라야 신앙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신앙자의 자세를 두고 볼 때에 내 개인적인 입장에만 머물 것이 아니라 그것을 세계적 차원으로 연결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용어로 말하면 천주적이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천주적이라는 명사를 지녀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방대한 천주적 노정을 거쳐가야 할 것이 오늘날의 인간이요, 인생에 있어서 필시 가야 할 행로요, 벗어날래야 벗어날 수 없는 운명길인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홀로 계획하고 자신이 홀로 간다는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는 그 길을 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의 대상이 되고 신앙의 중심이 되는 그분의 뜻을 갖고, 즉 내 뜻을 버리고 그분의 뜻을 중심삼고, 내 목적을 버리고 그분의 목적을 중심삼고 가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슬픔의 목적과 슬픈 자아의 입장을 버리고 기뻐할 수 있는 목적과 기뻐할 수 있는 자아로 어떻게 복귀해 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제아무리 결심을 했다 하더라도 그 결심이 일년을 못 가는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한 해의 시작인 정월 초하룻날에 일년의 계획을 세워 결심하고 나선 그 행로가 몇 개월도 못 가서 바뀌는 것을 우리들은 주위에서 많이 보아 왔고, 또 자신이 체험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에 내가 선에 대한 결심을 품었다 하더라도 타락권, 사망권에 포함된 나 자신으로서는 그 결심도 슬픔의 권내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 아니겠느냐.
이런 입장에서 볼 때, 이 슬픔권을 타파할 수 있는 소망이라든가 결심이라든가, 혹은 자각된 결의를 내가 어떻게 갖느냐 하는 문제, 내가 여기에서 살고는 있지만 여기에서 사는 내가 아니라, 이 사망의 세계를 초월해 가지고 피안의 어떤 선권내에 있다고 자처할 수 있는 자신을 어떻게 확보하느냐 하는 문제가, 현재의 슬픈 환경을 불식시키고 선권을 점령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을 결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 자리를 이미 결정했다 하더라도, 그런 자리를 이미 자각하여 가지고 결심했다 하더라도 그 결심은 한때에 불과하지 영속적이지 못합니다. 일년, 혹은 십년, 혹은 일생 동안 그렇게 나아갈 수 있겠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이것은 우리가 지극히 희망하는 문제임을 우리는 신앙생활을 통해서 잘 느끼는 것입니다. 제아무리 스스로 결심을 했더라도 그 결심을 홀로 이뤄 나갈 수 있느냐 할 때에 여러분은 그런 사람이 못 된다는 것입니다.
이미 타락의 사망권내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홀로는 극복할 수 없는 자신이요, 홀로는 갈 수 없는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몸부림쳐서 위로 올라가더라도 되돌아 내려오는 인간이기 때문에 그 슬픔권을 벗어날 수 없는 자신이요, 그 한계권을 초월할 수 없는 내가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를 두고 볼 때 아무리 노력한다 하더라도 그 노력 자체가 자기로부터 시작되었다면, 그것은 자기에게로 귀결된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 자신으로 말미암아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초월자로 말미암아, 절대적인 신앙자로 말미암아, 절대적인 신앙노정을 통하여서만이 시작이 가능하다는 신념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이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이 신념을 갖고 나서는 나 자신이 그 길을 가는 데 있어서는 하나님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또, 여기에는 하나님과 반대되는 사탄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 생활권내에는 선과 악이 뒤넘이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선악이 뒤넘이치는 가운데서 악한 입장에 서게 될 때에는 슬픔을 가져오게 되는 것이요, 선한 입장에 서게 될 때에는 기쁨의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사탄편에 처하게 될 때에는 여기에 슬픔이 가중되는 것이요, 하나님편에 처하게 될 때에는 기쁨이 출발되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 우리 신앙자가 하나님을 중심삼고 선을 위주로 하여 절대적인 신념을 갖고 절대적인 행복을 제시하게 될 때에, 비로소 이 슬픔의 세계를 넘어설 수 있는 하나의 방안이 모색될 것이 아니냐?
그리고 선을 중심삼고, 하나님을 중심삼고 출발하게 될 때에, 출발하는 입장에 선 자신의 과거와 오늘이 얼마만큼 차이가 있느냐 하는 그 비례에 따라 자신이 전진할 수 있느냐, 후퇴하느냐 하는 문제가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어제보다도 오늘이 더 발전될 수 있는 내용을 겸비하게 될 때에는 선한 자리로 한걸음 전진할 것이요, 어제보다도 하나님 앞으로 가일보 전진할 것이로되, 어제보다도 오늘이 침체되게 될 때에는 선 앞에 있어서 반대되는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나 자신이 선을 중심삼고 절대적으로 관계를 맺었다면 나로 말미암아 선한 세계에 있어서의 슬픔은 걷힐 것입니다. 나 자신의 슬픔이 선한 세계의 슬픔을 가해 줄 수 있고, 타락한 인간 한 개체의 슬픔이 하나님의 슬픔까지 가중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엄청난 자리에 선 것이 우리 인간이요, 그러기에 노력하며 가고 있는 것이 신앙노정이 아니냐 하는 것을 여러분이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내 개인의 슬픔은 나만의 슬픔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선한 세계에 슬픔을 가중시키고 하늘세계, 혹은 하나님의 심정세계에 슬픔을 더욱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모든 것이 나로 말미암아 결정되는 것입니다.
나 자신이 그런 경지에 서게 되거나, 혹은 신앙길에 있어서 탄식하고 후회하며 좌절하는 자리에 섰다 하게 될 때에, 그 자리에는 나만이 선 것이 아닙니다. 슬픔에 접해서는 안 될, 슬픈 자리에 서서는 안 될 신앙의 중심 되시는 하나님이 그런 자리에 서신 것이요, 하늘 세계가 그런 자리에 선 것입니다. 또한 앞으로 선한 후손들이 가야 할 선의 터전은 물론이요, 지금까지 역사상에 왔다 갔던 선조들이 선을 중심삼고 싸워 이룬, 수고의 대가를 치러 이룬 역사적인 선의 터전이 있으면 그것 자체가 나로 말미암아 탄식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두고 볼 때에, 만약 나 자신이 그런 자리에 섰다면 나에게서 선한 길은 그만큼 멀어질 것이요, 하나님도 그마만큼 멀어질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탄은 그 멀어지는 차이에 비례하여 자기의 무대를 공고화시킬 것이고, 그 공고한 토대 위에서 나를 중심삼고 하나님 앞에 반기를 들고 공격할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이러한 싸움터에 서 있다는 것을 느껴야 되겠습니다.
선을 옹호하고, 선편에 서서 선을 주장하고, 선을 발전시키는 데 있어서 동기가 되고 힘의 자극이 될 수 있는 입장에 서야 하는 것이 신앙자들이 가야 할 길입니다. 그런데 선을 도리어 나쁜 의미로 자극시키고, 오히려 악이 선 앞에 대항하고 선을 희생시키는 입장에 서게 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내 신앙생활로 말미암아 좌우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오늘 처해 있는 내 입장이 나만의 입장으로만 처해 있다고 생각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내가 하는 한마디의 말이 선을 결정하느냐, 악을 결정하느냐, 혹은 하나의 행동이 선을 결정하느냐, 악을 결정하느냐 하는 문제가 벌어집니다. 나의 말 한마디, 표정 하나로 선한 것이냐, 악한 것이냐, 즉 나에게 있어서 그것이 기쁨을 자극시킬 수 있는 것이 되었느냐, 슬픔을 자극시킬 수 있는 것이 되었느냐 하는 것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그 슬픔과 기쁨은 나에게만 제한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방대한 우주, 방대한 세계, 방대한 역사와 더불어 관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엄청난 신앙자의 입장을 생각하게 될 때, 오늘 우리가 신앙자로서 가는 길에 있어서는 한마디의 말도 함부로 할 수 없고, 하나의 행동도 함부로 할 수 없으며 한 가지의 생각도 함부로 할 수가 없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만일에 말 한마디를 잘못하면 그 말로 인해 악이 자기를 시인할 수 있는 절대적 조건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선이 선으로서 주장할 수 있는 조건이 되지 못한다는 겁니다. 선이 아무리 주장해 봤자 그 주장하는 주장을 악 앞에 양보할 수밖에 없는 그런 일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여러분 한 자체는 지극히 작은 자로되, 여러분 한 자체를 중심삼아 가지고 이 우주가 저울질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선악의 세계가 대결하고 있다 이겁니다. 여러분 하나를 중심삼아 가지고 과거, 현재, 미래의 역사세계가 오르락 내리락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엄청난 사실을 느껴야만 되겠습니다.
예를 들어 말하면, 자기가 대하고 있는 사람, 즉 자기 자식이라든가, 혹은 자기의 친구를 일상 습관적인 자리에서 보게 될 때에는 그냥 그대로 옛날에 알던 그 사람일는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그 사람을 여러분이 모르는 가운데 이 세계를 대표해 가지고 후대에 있어서 뜻을 이룰 수 있는 대표자로 택했을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이 그러한 사실을 모르는 한 그 사람을 옛날과 같이 습관적으로 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대하는 여러분이 습관성을 가지고 악한 입장에서 그 사람의 마음에 타격을 주었다면, 그 타격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이 가는 길에 있어서 소망이 좌절되고, 그것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탄식의 자리에 떨어지는 입장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여러분 개체 개체에 있어서 지금까지의 습관적인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문제가 오르락내리락 할 수 있는 것이 됨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 한마디를 하더라도 그 말 한마디가 평상시에는 아무런 내용을 갖지 않는 것 같지만 그 말을 듣는 사람에게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게 한다는 것, 또 아무것도 아닌 하나의 표정이지만 그 표정을 보는 사람에게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게 한다는 문제를 두고 볼 때, 여러분의 한마디 말과 하나의 표정은 역사성을 띤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러한 기준의 자리에 섰다는 것을 여러분은 언제나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사람이 망하게 될 때에는 한꺼번에 망하지 않습니다. 어느 한때의 기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그냥 지나갈 수 있는 한때의 기분이 망할 수 있는 기원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말 한마디가 그런 기원이 되고 엄청난 악의 출발의 조성점이 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여러분의 표정 하나가 사망세계를 결정할 수 있게 하고, 사탄의 완전한 무대가 출발할 수 있는 하나의 표시점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항시 생각해야 됩니다.
이와 같이 선악은 일생노정을 중심삼아 가지고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한 순간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우왕좌왕하면서 한 발을 내딛게 될 때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천리 길도 한걸음부터 시작되는 것이요, 선한 생애노정도 한걸음을 가려 가는 데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한꺼번에 180도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한걸음씩 한걸음씩 몇 걸음을 움직여 갈 때에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볼 때에 여러분 신앙자의 입장은 저울 눈을 맞추는 것과 같습니다. 저울 눈을 맞추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눈금이 조금만 틀리게 되면 저울대가 반대로 왔다갔다합니다. 이와 같은 입장에 선 것이 오늘날의 신앙자의 입장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의 표정이 선의 길을 대신하고 하늘땅을 대신할 수 있다는 거예요. 이런 자리에 선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생활을 하면서 맹세해야 할 것은 오른편이 하나님편이라면 하나님을 찾아 오른편으로 가야 되겠다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른편 위로 올라가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오른편으로 가고 위로 올라가는 것은 슬픈 입장에서 기쁜 입장으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두드리는 자에게 열리는 것은 누구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방향을 돌리면 여러분이 모르는 사이에 언제나 힘이 소모되는 것입니다. 이 힘을 뒷받침해 주지 않고는 현재의 입장을 견디거나, 혹은 하나님과 관계 맺을 수 없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힘의 소모가 가중되고 있습니다. 치열한 힘의 소모전이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소모되는 힘을 어디에서 보급할 것이냐? 먼저 나 자신이 보급해 줘야 합니다. 나 자신이 보급해 줄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할 때에는 현상유지는 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이 힘을 보강해 주어야 되겠다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힘을 보강받는다면 그것은 나 자신의 공로가 아닙니다. 내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공로입니다.
여러분이 십년 동안 뜻길을 그렇게 갔다 할 때에 그것은 자기의 공로로 말미암아 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수고하신 공적의 터전으로 말미암아, 수고의 실적을 통해서 갔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지금까지 뜻 앞에 남아졌고, 오늘도 뜻 앞에 있어서 내일을 향하여 전진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때에, '역사과정에서 내가 하나님에게 너무나 많은 짐을 지웠고 너무나 많은 빚을 졌구나' 하는 마음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신앙길에서는 가면 갈수록 머리를 들어 자기를 변명하는 것이 아니라, 변명하기 전에 하나님 앞에 회개의 심도를 높여야 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복하고 머리 숙일 수 있는 겸손의 도를 높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자로서 가져야 할 태도가 아니냐 하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오늘의 나는 과거를 돌아볼 때에 타락의 후예임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현재를 볼 때에 자신이 선한 자리에 섰다면 그것은 나 자신이 잘나서가 아닙니다. 과거의 선조의 공적은 물론이요, 하나님이 현재 내 생명의 터전을 남기기 위해 무수한 수난의 피의 대가를 치른 결과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예를 들어, 내가 지금 살고 있다고 합시다. 밥을 먹고 산다 이겁니다. 그렇지만 산다는 이 사실에 대해서 여러분은 아무러한 관계나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산다는 이 사실만을 압니다. 몸의 피곤은 하룻밤만 자고 나면 회복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살고 있다는 이 사실 배후에는 사망이냐 생명이냐 하는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모르는 가운데, 여러분이 살고 있다는 신념을 갖기 전에, 그 신념을 찾고 느낄 수 있는 여러분 자신의 밑바닥에서는 사망이냐 생명이냐 하는 문제로 치열한 싸움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 싸움터를 중심삼고 사망선을 방어하고, 사망선을 뛰어넘은 자리에 있기 때문에 여러분이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그러한 터전이 없게 될 때는 까딱 잘못하면 사망권의 침범이 시작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병이 날 때에는 고통을 받게 되는데, 그 고통은 어디서 오느냐? 그 고통은 사망세계에 순종하는 개체의 비극이 아니겠느냐? 이것이 문제가 되는 거예요. 여러분이 일상을 습관적으로 살고 있지만 자기가 현재 생활하고 있는 터전, 그 밑바닥에서 치열한 생사의 투쟁을 하며 사망을 완전히 제압한 자리에 서 가지고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항시 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앙세계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앙길을 존속해 가는 데 있어서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자신이 모르는 가운데 밑바닥에서 선을 중심삼아 가지고 무한한 힘을 소모하는 수고의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보상 밑에서 오늘날 여러분이 기쁨을 차지할 수 있고, 하나님 앞에 혹은 선 앞에 섰다는 자각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보답이 없고, 그런 대가의 치름이 없이는 자기 자신이 세워질 수 없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오늘날 타락권내에 처해 있는 자신의 뿌리가 그렇게 되어 있으면 뿌리 이상의 자리에서, 혹은 종교가 그렇다면 종교 이상의 자리에 나 자신이 서야 변화가 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에, 악으로부터 출발한 인간은 악에서 결실돼야 될 것인데도 불구하고, 오늘날 나 자신이 선을 추구하고 하나님을 사모할 수 있다는 이 사실은, 나 자신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됐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의 것으로서 바쳐 드리고, 하나님의 것으로서 원활히 주고 받을 수 있는 터전을 만들기 위해 생명을 걸고 거기에 보조를 맞추어야 점진적인 결과의 자리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의 자리는 나로 말미암아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고 난 뒤에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뻐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먼저 기뻐하신 후에 내가 기뻐해야 되는 것이 원칙입니다.
이렇게 나아가야 하는 것이 하나님을 따라가는 신앙자의 입장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기쁨이 있으면 '이것은 내 기쁨이다. 내가 잘해서 오늘 이 기쁨이 찾아온 것이니 당연히 내 기쁨이다'라고 하면서 당당하게 부르짖고, 스스로 이 사실을 공인시키려는 자리에 서게 될 때에는 거기서부터 하나님 앞에 배치(背馳)되는 또 하나의 주체가 생겨난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생각하여야 할 것은 우리는 삼각지대에 서 있다고 하는 거예요. 내가 지금 서 있는 자리는 삼각지대입니다. 내 개인을 중심삼고 볼 때도 마음과 몸에서는 하나님과 사탄이 싸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나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서 보태 주면 나는 하나님편으로 가는 것이요, 반대되게 될 때에는 사탄편으로 가는 것입니다. 일생에 있어서 큰 책임을 한다 하더라도, 개인이나 가정을 넘어 종족, 민족, 국가적인 사명을 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국가적인 기준에 있어서 삼각 작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서는 한걸음을 잘 내디디면 국가적인 공신이 되는 것이요, 한걸음을 잘못 내디디면 국가적인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매국노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결정은 누가 하느냐? 하나님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원리에서 보는 것과 같이 개인이 하는 것입니다. 결정을 누가 하느냐? 이러한 책임분담을 내가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결정할 수 있는 요인을 어느 한때 가졌다 놓았다, 잃어버렸다 찾았다 해서는 안 됩니다. 언제나 여러분들의 마음에 있어야 됩니다. 이것이 신앙자로서 무엇보다도 우선 싸워서 이겨야 할 최고의 표적이요, 승리의 기준이 될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망각할 때에는 출발기점과 결과가 틀리게 되는 것입니다. 출발기점에서부터 그렇게 휩쓸려 갔다면 현재의 입장은 자연히 부정되는 입장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하나님은 언제나 살아 계신다는 자각된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어떤 외로움이 있고, 어떠한 어려운 수난길에 부딪치는 한이 있더라도 그 마음을 잊어버려서는 안 되겠습니다. 최고의 자리에서 기쁨을 맞으려면 최고의 자리에서 죽어야 됩니다.
다시 말하면, 나무는 가을이 되면 잎이 떨어지고, 겨울이 되면 모든 진액을 뿌리에 저장시킵니다. 그러한 나무는 겨울에도 죽지 않고 봄이 되면 그 뿌리로 인해 새로운 새 생명의 싹을 피어나게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신앙길을 가는 데에 있어서도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내적인 중심에 하나의 생명의 동기를 집약시켜야 됩니다. 만약 집약된 생명의 동기를 잃어버렸다면 그것을 찾는 데 있어서는 타의에 의해 피동적인 입장에 서 가지고는 못 찾습니다. 주도적인 입장에서 이것만은 놓칠 수 없다는 심정을 가져야만 찾을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여러분들은 싸워 나가야 됩니다. 10년 신앙생활을 했으면, 그 10년의 신앙생활이 하나님의 심정과 하나되기 위해 싸운 것이어야 됩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어떤 일을 대했을 때 커다란 기쁨을 느꼈으면 그 자극을 중심삼아 가지고 반드시 그것을 이룰 수 있는 날이 와야 됩니다. 그러한 생각이 언제나 끊임없이 여러분의 마음속 깊은 곳에 남아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어려운 환경에 에워싸인 그런 입장에 서거든 '봄이 오면 내가 이것을 다시 한 번 발휘하여 하늘 끝까지 뻗어 나간다. 어느 한때 두고 봐라. 그때가 오거든 나는 이렇게 간다'라고 할 수 있는 신념을 가져야 됩니다.
어려운 환경을 통하여 우리는 자료를 수집해야 합니다. 악이 얼마나 악한가와 그 악의 흉계를 알고, 악이 그 범위를 얼마나 크게 하고 있느냐, 범위가 얼마나 넓으냐 하는 것을 측정해야 합니다. 그래 가지고 악이 선을 대하여 공격하던 그 이상의 힘을 모으고, 그 이상의 공격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앞으로 총투입시켜야 할 때가 올 것입니다. 여러분이 신앙길에 있어서 슬픔에 사로잡히는 한이 있더라도 '이런 마음이 어느 한때에 풀어질 것이다' 하는 신념을 갖지 못한다면 신앙길을 갈 수 없습니다.
또, 여러분이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가 태어나기를 악에서부터 태어났기 때문에 악과 더불어 본질적으로 화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주의하지 않고, 언제나 분별하지 않고, 언제나 선 앞에 기준을 맞추지 않고 가다 보면 악으로 돌아가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습관적인 행로는 그 기원에서 이탈할 수 없기 때문에 악의 기원을 가진 우리의 습관적인 행로의 결과는 반드시 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신앙자의 생활은 스스로가 맹세하면서 가는 것과 반대 행로를 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거기에 있어서 반발적인 힘은 언제나 비례적인 작용으로 나타납니다. 이 비례적인 작용에 의한 소모를 제거시키고 오른쪽이면 오른쪽, 위쪽이면 위쪽으로 올라갈 수 있는 생활을 하루 하루, 순간 순간에서 계속해 나가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하늘편으로 전진 발전할 수 없을 것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오늘날 통일교회 자체가 그렇습니다. 통일교인들 가만히 보게 되면 한 때는 뭐 뜻을 위해 일한다고 야단법석을 합니다. 그거 누구를 위해서 하는 것입니까? 좋은 것은 역사성이 있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또한, 좋은 것은 시대성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또한, 그것은 미래와 더불어 관계되어 있는 것도 알아야 됩니다. 만일 여러분이 역사성을 부정하게 될 때는 기쁨을 지닐 수 있는 자격자가 못 됩니다. 시대성을 부정하는 자리에서는 그 기쁨을 인정할 수 없는 거예요. 여러분이 미래성을 지니고 있는 그 기쁨을 부정하는 자리에 서면 미래를 향하여 가야 할 여러분 앞에 기쁨은 남아지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기뻐하는 그것은 오늘날 통일교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기쁨은 창세 전 하나님의 심정으로부터 창세 이후, 그리고 복귀과정을 거쳐 가지고 복귀완성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시대적인 중심을 결정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시대의 중심뿐만 아니라 미래의 출발의 기원을 세우기 위한 기쁨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기쁨을 가졌다는 것은 역사를 대신한 것이요, 시대를 대신한 것이요, 미래를 대신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기쁨은 내 자체에 뿌릴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현실에 심어 놓아야 되고, 미래에 심어 놓을 수 있는 기원을 마련하여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세계와 더불어 기뻐하고, 미래와 더불어 기뻐하고, 그럼으로 말미암아 영계도 해원성사함을 받아 가지고 기뻐해야 할 것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원이 되었으면 그렇게 결과를 맺는 것이 우주의 이치가 아니겠느냐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나 혼자만 기뻐하겠다고 하다가는 그 기쁨을 다 놓쳐 버립니다. 역사와 관계맺은 기쁨은 역사가 나에게서 떠나게 될 때에는 그 기쁨도 거두어 갑니다. 시대적인 기쁨으로 관계되어 있는 기쁨이라면 그 시대적 인연을 내가 망각해 버리면 시대적 환경이 기쁨을 빼앗아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진 기쁨이 미래적인 기쁨의 터전이 되어야 할 텐데 미래의 기원을 갖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 기쁨은 산산조각으로 갈라져 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뭐 내용도 모르고 하늘이 어떻고 어떻고 야단하다가 나중에 지내고 보면 꿈만 같다는 거예요. 신령역사하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보면 그렇습니다. 세례 요한도 그거예요. 예수님이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할 때에는 열렬하게 증거하고 다녔지만, 그에게 그런 마음이 떠나게 됐을 때에는 '사생아로 살던 예수가 아니냐? 내가 그보다 모든 면에서 낫다'라고 하는 입장에 섰던 것입니다.
나에게 있어서의 기쁨은 나를 위한 자기의 기쁨이 아니라 세계적인 기쁨이어야 합니다. 따라서 기쁨이 크면 클수록 자기 자체가 그것을 결실하려 하는 것보다도 더 높고 귀하고 가치 있는 그것을 향하여 전진해야 됩니다. 오늘날 여러분이 타락한 이 악의 세계, 슬픔의 바탕이 되어 있는 이 세계에서 그 어떤 기쁨을 느껴 가지고 세상의 환경을 규합하여 그 기쁨 이상의 자리까지 나아가 거할 수 있는 한때를 가졌다면 그것이 얼마나 귀한 것이겠느냐 이겁니다.
그것은 억천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것이요, 이 시대를 주고도 살 수 없는 것이요, 과거를 가지고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 3시대의 대가를 치른 입장이 아니고는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과 더불어 가면서 주신 기쁨을 자기 것으로 알면 안 됩니다. 그것이 자기 것이예요? 자기 것으로 아는 사람은 망하는 것입니다. 도둑놈이 그러는 거예요. 그것을 나에게 준 것은 역사를 대신해서 준 것이요, 나에게 느끼게 한 것은 역사를 대신해서 느끼게 한 것이요, 나를 그런 자리에 세운 것은 미래의 출발을 공고화시켜 달라고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이 그런 환경에서 그것을 마음대로 하겠다구요?
그렇기 때문에 신앙자의 태도는 언제나 빚진 자의 자세여야 됩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알아야 돼요. 신앙자로서 제일 중요한 자세는 무엇이냐? 빚진 자의 자세입니다. 여러분, 빚져 봤어요? 빚진 것이 없으면 빚을 좀 져 가지고 단련해 보라구. 빚진 자의 수고가 어떻구나 하는 것을 알아 보십시오. 빚을 갚지 못하는 자리에 서 보라는 것입니다. 정말 비참합니다. 한 푼이라도 빚을 지면 그 조건으로 멱살을 잡힐 수 있고, 근본적으로 인격을 부정당할 수 있습니다. 그렇잖아요? 거기에는 인격이 없습니다.
빚이라는 것은 반드시 갚아야 되는 것입니다. 빚진 자가 빚을 갚겠다고 노력하는 것을 채권자가 보게 될 때에는 동정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렇잖아요? 그런데 빚을 갚을 것은 꿈도 안 꾸고, 돈 있으면 좋은 것을 사고 먹을 것 다 사 먹으면서 자기만 잘살려고 하는 날에는 화근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빚진 자는 언제나 빚을 갚겠다고 하는 태도를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반드시 빚을 갚고야 말겠다고 하는 태도가 빚보다 크게 될 때에는 채권자는 그 사람을 참소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를 동정하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그렇지요?
신앙자의 태도도 이와 같은 빚진 자의 자세라야 합니다. 자신에게 어떤 기쁜 것이나 이익이 찾아오면 그것을 누구한테 돌려야 되느냐? 그럴 때에는 빚을 갚아야 되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자신에게 어떤 기쁜 일이 있으면 그것을 중심삼아 가지고 빚을 갚아 주어야겠다고 해야 합니다. 그것을 내 것이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만일 빚진 사람이 채권자의 재촉을 받았는데 거기에 대해서 불응하면 그는 완전히 부정당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로 말미암아 기쁨이 생길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통일교회 간부들을 볼 때, 어떤 사람은 자기가 원리강의를 그렇게 해주어도 감사할 줄 모른다고 하면서 기분 나쁘다고 하는데 그런 사람은 간부로서의 자격이 없습니다. 자기를 중심삼고 평하는 사람은 불합격자입니다. 옛날에 유 협회장이 있을 때에도 유 협회장이 뭐 어떻고 저떻고 하면서 책임자로서 잘못한다고…. 그렇다면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책임자로서 잘했느냐 이거예요? 집에 돌아가면 아들딸한테 잘해요? 친구들한테 잘해요? 천하의 공의의 자리를 다 차지해 가지고 선 것과 같이 뭐가 이렇고 저렇고 하는 사람은 사탄입니다. 그런 사람은 사탄의 직속 부하입니다. 앉아 가지고 나발불고 앉아 가지고 평하는 녀석들은 사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 그렇게 말하는 너 자신은 책임을 다했느냐 이겁니다. 누구에 대해서 평하는데 너 자신은 책임을 다했느냐는 것입니다.
효자는 자기 어머니 아버지한테만 잘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효자는 자기의 아들딸에게도 잘해야 됩니다. 아들딸의 갈 길을 올바로 가르쳐야 합니다. 어머니 아버지한테 손자까지도 효자로 만들어야 효자가 되는 것입니다. 손자가 불량배가 되었는데 아들이 부모에게 '내 자식이 나빠서 그렇게 되었지만 나는 당신 앞에 효자입니다'라고 할 수 있어요? 그 아들이 효자이겠어요? 그렇지 않습니다. 암만 그래도 그 집안은 망하는 것입니다.
평하는 사람보다 평받는 사람이 수난길에 있고 더 큰 기준에 있다면 그 고통의 자리에 서서 한번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 자리가 얼마나 힘드는지 아느냐는 거예요? 모르는 자리에 있어 가지고….
여러분은 넘어가야 할 길을 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목이 잘리더라도 가야만 합니다. 그래요, 안 그래요? 그렇다는 것입니다.
신앙길이라는 것은 영원한 목적을 표준해 가기 때문에 그 목적을 찾을 때까지 묵묵히 가야 하는 겁니다. 침묵이 선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복귀섭리를 누구한테 선포하시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아무도 이것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모르고 있는 가운데 역사는 그 한계점을 향하여 전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은 빚진 자의 자세를 망각하지 말아야 됩니다. 돈이 없거든 '나는 이렇게 이렇게 빚진 자다' 하는 가슴에 사무친 격한 마음을 가지고, 아버지를 붙들고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심정을 가진 여러분 자신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마음을 갖는 것이 올바른 신앙자의 자세가 아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빚진 자의 입장에서 그러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채권자를 만나 자기 변명을 하지 않고, 변변치 못한 자신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면서 머리 숙여 눈물을 떨어뜨릴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되면 채권자는 흐느끼는 그 사람에게 재촉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는 거예요. 가만히 있어도 그렇습니다. 그러한 사람을 무시하고, 그런 사람의 목을 잘랐다가는 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용서치 않습니다. 천도가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복귀의 행각노정에 있어서 어려운 일을 당하거나 중대한 문제를 맞게 될 때에는 이것을 해결해야 한다는 초조함 속에서 복귀의 어려움을 알고, 또 이것을 해결짓기 위해서 밤을 새워 가며 몸부림쳐야 됩니다. 이렇게 해서 한 고비 한 고비 밟고 가는 길이 복귀의 길이 아니겠느냐? 공적인 책임을 진 사람들은 그러한 입장에서 몸부림치며 뒤넘이치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한 사람들은 그것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종족을 망하게 하고, 자기 선조를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언제나 생각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자의 자세는 빚진 자의 자세여야 됩니다. 한마디의 말, 한 가지의 행동을 잘못하면 자기 혼자만 걸려드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땅이 걸려들어갑니다. 지금까지 잘 쌓아 놓은 공든 탑이 일시에 무너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10년 세월을 보냈으면 그 10년 세월이 아까운 것입니다. 지금까지 통일교회를 따라 생애를 바쳐 나왔다면, 그 지난날 자기의 청춘시절을 바쳐서 정성들인 것이 한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한스러운 것만이 아닙니다. 아깝다고도 생각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만은 줄 수가 없다. 지금까지의 것을 고이 남겨 줘야 되겠다. 남기고 가야 되겠다'라고 해야 됩니다.
봄이 지나고 여름이 지나고 초가을까지 왔으면 늦가을까지 가고, 늦가을까지 왔으면 겨울까지 지내 보라는 것입니다. 겨울 절기가 지나고 봄이 될 때까지 가 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나아가야 할 것이 신앙자의 자세입니다. 이렇게 한 바퀴를 돌고 두 바퀴를 돌고 세 바퀴를 돌면서…. 한 바퀴를 도는 데도 탕감이 있고 두 바퀴를 도는 데도 탕감이 있고…. 돌면 돌수록 탕감이 점점 커지는 것입니다.
개인에서 가정, 종족, 민족, 국가, 세계로 점점 커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중심이라는 것, 이 작은 자아가 지녀야 할 신앙자로서의 자세는 빚진 자의 자세입니다. 그러한 자세를 갖지 않으면 안 되는 겁니다. 제물 드리는 사람이 종족적 제물시대가 오는데 빚진 자의 자세를 안 가지고 제물을 하나라도 바칠 수 있겠어요? 민족적 제물시대가 오면 민족적 제물을 드려야 하는데 빚진 자의 자세를 안 가지고 할 수 있어요? 어림도 없습니다. 무대가 점점 가중되고 커지면 커질수록 빚진 자의 자세를 가지고 가야 할 길이 신앙길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이 말은 순식간에 하지만 그 한마디를 잘못하게 되면 그것이 1년까지 갑니다. 한 순간 잘못 말한 것을 1년 동안 청산시키는 놀음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옛날에 감옥에 있을 때 일입니다. 항상 배가 고프기 때문에 어쩌다 콩밥을 해주는 날은, 그 콩 한 알이 세상으로 말하면 황금덩어리가 됩니다. 그것이 콩알이 아니고 금덩어리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금보다 더 귀하게 느껴집니다. 이 콩 하나를 뭐라고 할까요? 콩 하나 하나가 황금덩이보다 더 귀하다는 것입니다. 밥을 먹다가 콩 하나가 떨어지면 옆에서 얼른 집어 먹어 치우는 거예요, 인사도 없이. (웃음) 체면도 없이 말입니다. 그게 무슨 말인고 하겠지만, 그런 입장에 처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입니다. 감옥은 그런 곳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게 되면 죄인들이 먹는 밥을 한꺼번에 전부 다 먹고 싶은 거예요. 죄수가 수십 명이 있으면 수십 명의 밥을 혼자서 전부 다 먹고 싶은 거예요. 자기가 전부 먹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인식이 되어집니다. 그렇게 하자고 하면 자기도 모르게 손이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까지 작용하게 됩니다. 이렇게 손을 내밀어 그것을 먹겠다고 하는 마음이 한번 들면 그 마음을 없애기가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그것을 탕감하려면 밥을 몇 끼 안 먹어야 돼요. 밥을 몇 끼 안 먹어야 탕감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하나님이 아니고는 복귀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이 거쳐간 것을 고치는 것이 이렇게 힘든 것을 생각할 적마다 오늘날 타락한 인간을 악의 생활권내에서 선의 자리까지 옮겨 놓기 위한 하나님의 수고가 얼마나 컸겠는가를 알게 됩니다. 얼마나 힘의 소모가 컸겠는가를 내가 직접 해보니 알게 됐습니다.
악한 우리들을 이 자리까지 끌어올리기 위하여 배후에서 얼마나 하나님께서 수고하셨겠느냐? 여러분도 한번 해봐요? 해볼 테면 마음 놓고 한번 나가서 해봐요. 그것이 얼마나 신앙길에 자극이 되고 도움이 되는지 알아보세요. 몸과 마음이 한번 결정했다면 일생을 두고 해보십시오. 여기 칠판이 암만 새거라도 한번 금을 딱 그어 놓으면 지우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것을 지우기 위해 일생을 보낼 수도 있습니다. 신앙길에서는 그런 것을 느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 한마디 한마디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아야 됩니다.
선생님이 공석에서 곧잘 여러분을 책망하지만 그렇게 책망할 때 얼마나 여러분의 신앙길을 걱정하는지 알아요? 책망의 천만 배 이상을 돌려 줄 수 있는 자리에서 책망했다면 내가 책망한 것이 오히려 여러분에게는 복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길에 있어서 악한 것은 자꾸 긁어내야 됩니다. 긁어내야 그것이 떨어져 나가잖아요? 그러나 선한 것을 긁어내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요? 선한 것을 통해서 선을 지키는 것입니다. 악은 선편에서 싹 쓸어내야 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악을 빨리 제거하는 방법이기 때문에 선생님이 그런 작전을 하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그 자리에까지 나가기 위해서 그저 어정쩡하게 출발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무수한 수난의 길을 개척해 가지고 나온 것입니다. 그것이 내 책임이기 때문에 그렇게 안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평(評)하는 사람은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이냐? 안팎으로, 이론적으로, 또는 경험적으로 딱 제시해 줄 겁니다. 여러분이 그런 것을 알아야 됩니다.
오늘날 통일교회 교인들은 '선생님이 차를 타고 다니시니 우리도 타고, 선생님이 이렇게 사시니 우리도 그렇게 살자'라고 합니다. 그러나 선생님이 이렇게 사는 것은 생애를 바쳐서 투쟁해 나온 그 결과입니다. 여러분은 반석을 뚫어야 되는 것입니다. 반석을 뚫고 나서 거기에 좋은 옥토가 있으면 그 옥토에 뿌리를 박아야 하는 겁니다. 옥토에 뿌리를 박는 데 있어서, 반석을 뚫는 신앙에 있어서는 말이 필요없다 이겁니다. 복귀노정에 있어서 그런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신앙길에 있어서 한번 잘못하는 날에는 그것을 바로잡기가 심히 어렵습니다. 지금도 그래요. 지금도 그렇지요?
신앙자로서 생각할 수 없는 창피하고 부끄러운 일을 했으면, 죄를 지었으면 뻔뻔스럽게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하면 안 됩니다. 나는 그런 기도 못합니다. 양심에 가책을 받는 일이 있으면 기도가 안 돼요. 아버지라는 말을 하기가 너무나 부끄러워요. 아버지라고 부르기가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여러분 그런 것을 알아요? 그저 철부지같이 아버지 이름을 부르며 '사랑하는 아버지…' 하는 것은 떠벌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끄러워해야 됩니다. 자기의 동지를 만나도 예절을 지킬 수 있는 마음이 앞서야 돼요. 하나님 앞에 나서기 부끄럽다고, 아버지 앞에 서기에 부끄럽다고, 자기 자세를 갖추고 또 갖추는 이런 태도가 필요합니다.
그런 자리에서, 이런 자식이라도 자랑하지 않으면 안 될 아버지의 사정을 생각하고, 세상이 악하니만큼 이런 나를 필요로 하시는 아버지의 사연이 있는 것을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하나님의 동정의 마음을 유발시켜 가지고 아버지를 불러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는 아버지라는 말만 하게 되어도 눈물이 앞서는 것입니다. 그래야 회개를 해도 그 회개가 하나님 앞에 합당한 회개가 되는 겁니다. 인간은 죄 짓는 것이 당연하고, 하나님은 용서해 주시는 것이 당연한 게 아닙니다.
처녀가 시집을 가는데 좋은 비단으로 옷을 만들어 단장하여 어엿한 신부 차림으로 가야 할 텐데도 불구하고 옷을 빌려 입거나 혹은 꿰맨 옷을 입고 갔다고 해보세요. 옷을 장만하지 못하고 그렇게 가는 것이 얼마나 비참하겠어요? 여러분은 그와 같이 얼굴을 들 수 없는 한때를 당해 봐야 됩니다. 그런 마음을 느껴 봤어요? 생사 문제를 중심삼은 결정적인 노정을 가는 데 있어서, 그 이상의 길을 달려가는 데 있어서 그 이상의 부끄러움을 느끼는 데서부터 보다 깊은 신앙의 길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돼요.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신앙길에 있어서 빚진 자와 같이 처신해야 됩니다. 부끄러움을 가지고 부끄러운 자의 참다운 친구가 되어 주고 부끄러워하는 자를 감싸 줄 수 있고 보호해 줄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이 우리 대신 그런 입장에 선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그런 자리에 서 보아야 예수님의 고마움을 아는 것입니다. 또한 선생님이 고마운 분이란 것도 알고, 하나님이 얼마나 고마운 분이라는 것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뭘 느낍니까? 여러분들은 옛날의 그 모양 그 습관을 가지고 언제나 들락날락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여기 본부의 물건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게 뭐예요? 요전에는 또 일본 식구의 물건이 없어졌다는데,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그런 사람은 회개의 심정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선악의 분별 노정을 모르니 그 꼴이라는 것입니다.
말 한마디를 잘못한 그 부끄러움을 바로잡기 위해서 몸부림치며 신앙생활을 해야 할 것이 본연의 자세인데도 불구하고, 남의 물건에 허락도 없이 손을 대어 제 욕심을 채우면 그건 화약고보다 더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그런 미친 짓이 있어야 되겠느냐 그거야. 그 참 나, 연구 자료라구. 그것을 가져다가 뭘 하겠다는 거예요? 또 시계를 주웠으면 주인을 찾아서 돌려줘야지. 그런 사람이 커 가지고 뭐가 되겠어요? 이런 등등의 문제를 두고 볼 때에 신앙자는 빚진 자의 자리에 있다는 것입니다. 빚진 자의 마음을 가진 자에게는 침묵이 흐르는 것입니다. 언제나 침묵이 흐르는 거예요.
내가 공석에서 여러분들에게 이야기를 참 많이 합니다. 이 4월 달에는 젊은 식구들을 대해 가지고 말했는데 내가 더 힘들었습니다. 말할 때까지는 오랜 침묵 기간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돼요. 그 기간이 얼마나 되는지 알아요? 그렇기 때문에 말하기 전에 침묵의 기간이 있어야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말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여러분이 알아야 돼요.
무아의 수도의 길을 가는 사람은 말 한마디를 하기 위해서 열 번 이상을 생각합니다. 그런 자리로 자기를 몰아넣습니다. 통일교회 교인들은 말들은 아주 잘해요. 말은 남의 말을 하고 행동은 남의 행동을 하면서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면서도 '나는 다 됐다'고 할 수 있어요?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신앙자의 자세는 빚진 자의 자세라는 것을.
자기의 신앙생활에 동정을 남기고 가지 못하는 사람은 그것으로 끝장이 나는 거예요. 지금 선생님 자신도 그렇습니다. 나 자신이 물론 공적인 입장에서 어디를 갔다가 예배 시간에 늦게 되면 나오기 전에 기도합니다. 또 어떤 주일에는 예배 시간이 됐는데 못 가게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에도 반드시 회개의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주체적 책임을 짊어진 자로서 그래도 식구들이 나를 걸고 복받겠다고 하고 생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성들이고 있는데, 그 시간에 가지 못한 자신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그게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빚진 자의 자세로 생활해야 합니다. 즉, 자기가 잘못했다는 입장에서 언제나 빚진 사람으로서 자기 스스로를 다짐할 수 있는 그런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왜 그래야 되느냐? 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느냐? 우리 앞에 사탄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공판정에 선 죄수와 마찬가지입니다. 검사가 조건이 없어서 여러분을 못 거는 것이 아닙니다. 판사가 판결을 내리는 데는 그 범죄 결과를 중심삼아 가지고 판결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런데 범죄의 동기가 피동적이냐, 능동적이냐에 따라 판결에 천지의 차이가 벌어지는 거예요. 알겠어요? 그가 주범이냐, 혹은 용의자냐에 따라 천지의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행동은 같이 했지만 동기에 의해서 하늘땅의 차이가 벌어집니다. 그렇지요? 동기가 나라를 위한 애국심에 불탄 것이라면 그것은 도리어 하늘 앞에 칭찬 받을 수 있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죽이면 죄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죽였다는 것은 원칙을 두고 보면 죄입니다. 그러면 나라를 위해서 나라의 원수를 죽였을 때도 죄가 됩니까? 왜 살인을 했느냐 할 때 '이 사람은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이기에 그 피해가 전국민 앞에 미칠 것이 틀림없지 않느냐? 그래서 내가 죽였다'고 한다면 공판에 못 거는 것입니다. 걸었다 하더라도 도리어 칭찬의 결과는 될 수 있어도, 생명이 위협받을 수 있는 자리에는 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동기에 의해 천태만상으로 갈라지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 누가 있느냐? 사탄이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말 한마디하게 될 때에도 반드시 그 말을 걸고 늘어지는 것입니다. 왜 그러느냐? 자기가 살기 위해서 자기를 변호하기 위해서 '넌 내 것이다' 하고 거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을 변호하고 하나님과 하나되면 '당신은 하나님 것이다' 하는 겁니다. 여기서부터 갈라지는 것입니다. 이런 싸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끝내는 변호사와 검사의 싸움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엄연한 하늘의 공의의 법도로 치리하시는 하나님 앞에 있어서 공판정에 선 죄수와 같은 입장입니다. 전부 다 그렇다는 거예요.
기도할 때도 그렇습니다. 기도할 때에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 눈물 없이는 회개할 수 없는 것입니다. 형편이 무인지경이 되어야 합니다. 선생님 자신도 그렇습니다. 내가 통일교회 책임자라는 생각을 안 한 사람입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잘못했으면 그 잘못한 기준을 중심삼고 무자비하게 자신을 추궁합니다. 그렇게 해야 되는 것이 아녜요? '나는 누구의 아버지다. 나는 판사의 아버지다'라고 한다고 용서가 되는 거예요? 안 되는 것입니다. 무자비한 것입니다. 공판정에 서게 되면 언제나 원수입니다.
내가 지금도 고맙게 생각하는 것은 내 일생에 몇 번씩 공판정에 설 수 있었던 사실입니다. 이것으로 큰 경험을 했습니다. 여러분도 그러한 경험을 통해서 악한 것을 중심삼아 가지고 조건을 걸려고 하는 검사의 마음, 악한 사람이 아닌데 악하다고 조건을 걸고 들어서는 것을 느껴 봐야 합니다. 선생님에게 그것은 좋은 추억이었습니다. 또, 변호사가 변론하는 데 있어서 자신은 자신의 죄 값이 사형임을 당연한 것으로 느끼는데 변호사가 그 생명을 구해 주기 위해 변증할 때에 느껴지는 죄스런 마음도 느껴야 됩니다. 여러분이 그러한 자리에 섰을 때에, 여러분을 놓고 예수님과 사탄이 일생 동안 그 일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통일교회 선생님과 사탄이 그 일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경각에 처한 운명의 판가름 도상에 있어서 자기의 생명 되시는 분, 생명의 발판이 되시는 분이 계시니 여러분 앞에 천번 만번 폭풍이 불어치더라도 그것을 감사해야 됩니다. 보답할 줄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은 그런 자리에 있어야 하는 겁니다. 그런 자리에서 변론을 받을 수 있는 입장에 서야 됩니다. 뻔뻔하게 발뺌하고, 자기는 잘했다고 하는 사람들은 내가 한꺼번에 큰 도가니 속에 집어넣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언제나 빚진 자의 자세를 지녀야 됩니다. 빚을 져 보라구요.
또, 어떤 때 억울한 심정을 갖게 되느냐? 여러분이 어쩔 수 없는 자리에 몰려 가지고 남의 물건을 훔쳐 죄를 졌다고 합시다. 어쩔 수 없이 훔쳤다는 거예요. 그 동기를 보면, 틀림없이 천배 만배 갚아 줄 것을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했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아시는데…. 어쩔수없이 그럴 수도 있잖아요? 나 자신을 위해서 한 것이 아니라 보다 넓은 공의의 뜻을 위해서 그렇게 했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은 협력해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걸 알겠어요? 오히려 큰 수욕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할 수 없이 했는데 수욕을 당했을 때 그때의 그 슬픔, 그런 자리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서의 슬픔은 곱절의 슬픔입니다. 보다 선한 사람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쩌다 나에게 요런 물건이 없었느냐? 아무것도 아닌, 서푼 짜리밖에 안 되는 물건으로 인한 사건이 이렇게 내적으로 치명적인 상처를 줄 줄이야…. 그러니 억울하다 이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는 어디에 있느냐? 여러분은 공적인 기준을 중심삼고 선한 환경을 이루어야 됩니다. 만일에 악한 일로 억울하고 분함을 느낄 때에는 하나님 앞에 '이것은 나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큰 것을 위해서입니다'라고 용서를 빌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에는 하나님께서 후대에 반드시 천배 만배 갚아 주실 것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살아야 용서의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악이 아무리 참소하는 자리에 섰다 하더라도 당당한 것을 느낄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뜻을 가지고 사탄세계에서 빼앗아 오는 것은 죄가 안 됩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런데 빼앗아 오는 데 있어서의 형태는 싸워 가지고 빼앗아 오는 것과 몰래 빼앗아 오는 것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알겠어요? 두 가지 방법이 있어요. 알게 빼앗아 오는 방법과 모르게 빼앗아 오는 방법입니다.
하나님 자신도 역사 가운데에서 그런 일을 하고 계십니다. 알겠어요? 그렇게 하는 것이 그 사람을 망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에게 복을 주기 위한 것이라면 걸리지 않습니다. 알겠어요? 아까 말한 것이 이것입니다. 틀림없이 천배 만배 갚아 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런 입장에서 상대에게 행동했다면 행동한 자체는 용납될 수 없는 것으로서 지탄받더라도 그 내용에 있어서는 하나님께서 공인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내용을 중심삼고 복을 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놀음이 있습니다.
통일교회 선생님은 이런 원칙을 알았기 때문에 복귀섭리를 해 나오는 과정에서 그런 일을 많이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을 고생시키는 것입니다. 고생하라는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내가 여러분을 고생시키는 것입니다. 고생시키는 자체는 용서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생시킨 것을 천만 배의 대가로 갚아 주게 될 때에는 고생을 시켜도 타격을 안 받습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기준을 잘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선악의 경계선에 서 가지고 우왕좌왕하는, 판가리 싸움을 하는 입장에서 한 걸음 잘못하면 사망의 세계로 떨어지고 한 걸음 잘하면 생명의 세계로 출발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뜻 가운데'라는 말이 있잖아요? 그런 자리로 가야 됩니다. 그러나 그런 자리에서 까딱 잘못하여 한번 벗어나면….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어떤 때에는 12시간, 흑은 24시간 동안 기도해야 할 문제가 있었어요. 그때에는 생각으로 싸우는 겁니다. 어떤 사실을 놓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생각으로 치열한 싸움을 하는 겁니다. 그런 싸움을 경험하는 자리에 있어서는 생각 일체를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이런 심각한 경지의 수난길이 있는 것을 알고 이것을 해결할 때까지는 자기에게 아무리 좋은 일이 있어도 좋아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외적인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외적인 것을 자꾸만 잊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는 비참한 거예요. 아무리 배고파도 배고픈 것도 잊어버리라는 거예요. 심각하면 그런 면도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신앙길에 있어서, 이런 싸움의 노정에서 선악을 가려 가지고 악을 밟아치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런 노정이 여러분의 깊은 신앙의 길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이러한 길을 가야 하는 것이 지금 여러분의 입장에서 해야 할 사명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문제를 알고 빚진 자를 대신해 침묵으로써 나 자체의 모습을 어떻게 풀며 나가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을 동정해 주고 입증해 줄 수 있는 친구가 있거든, 동역자가 있거든, 혹은 어떤 스승이 있거든, 자기를 위해 수고해 준 그 뜻을 생각해야 됩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몸 전체나 위신, 체면을 다 잊어버리고 그 앞에 완전히 종의 종이 되어도 좋고, 그 앞에 있어서 죽음을 당하여도 감사하겠다는 마음이 있어야 됩니다. 완전히 감사하는 자리에서 그 은사에 보답하기 위해서는 '나는 악의 사슬을 벗어나는 데에 내 생명을 바치더라도 고맙다'고 해야 됩니다. 그런 마음을 갖는 데서부터 본연의 신앙자로서의 자세를 갖추어 출발하게 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천번 죽더라도 감사하고, 자기 존재가 없어지더라도 감사해야 됩니다. 여러분이 그런 각오를 가지고 출발하지 않으면 발전할 수 없는 것입니다.
통일교회에 특별히 좋은 일이 있더라도 선생님은 절대 안 나타납니다. 그것은 왜 그러느냐? 복귀역사를 보면, 누구부터 속죄를 받았느냐? 만물부터 속죄 받았습니다. 구약시대에는 만물이 속죄를 받았지요? 그 다음에는 무엇이 속죄를 받느냐? 종들이 속죄를 받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누가 속죄받느냐? 양자가 속죄받습니다. 그 다음은 아들이 속죄를 받아야 됩니다. 예수님도 속죄를 못했기 때문에 속죄를 하기 위해 이 땅에 다시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부모가 속죄받는 것입니다. 전체 순서는 이렇습니다. 그런데 '좋은 것은 나부터다' 하면 거꿀잡이가 된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에게는 아직까지 더 해야 할 사명이 남아 있기 때문에 누가 만나자고 해도 안 만나 주는 것입니다. 만일 그 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이 잘못하게 되면 대한민국이 걸려들어가게 되는 문제도 있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서기를 좋아하고 칭찬받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선생님은 못 믿어요. 또, 자기가 뭘 했다고 알아주기를 바라는 사람도 못 믿겠어요. 그런 사람들은 자기 갈 길로 가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은 빚진 자의 자세로서 침묵을 지키지 않고는 안 됩니다. 너무나 부끄럽고 부끄러운 수치를 누가 덜어 줄 것이냐? 그 수치에 대해 하나님께 동정을 바랄 수 있는 대변자가 있다면, 그 얼마나 행복할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대변자의 입장에 선 것이 변호사이기 때문에 그의 증거가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수치를 받았다면 참소하는 사람에 대해 얼마나 원한에 사무쳤겠어요? 원한에 사무치게 한 녀석을 들추어내서 제거해야 됩니다.
이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여러분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한날의 생활, 혹은 하나의 표정, 하나의 행동에 있어서 그것을 가릴 수 있어야 됩니다. 이런 마음의 자세를 갖고 가는 사람들은 망하겠다고 해도 하나님이 부활 할 수 있는 축복의 터전을 만들어 주십니다. 죽겠다고 하는 길은 부활의 길이지 죽음의 길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죽게 되면 하나님께서도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만약 그런 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죽었다가는 큰일나는 겁니다. 죽을 자리에 가려고 하면 하나님께서 달려들어 가지고 살려 주는 겁니다. 망할 자리에 들어가려고 해도 하나님께서 도중에서 가로막습니다.
이런 것을 알게 될 때에, '나' 하나를 중심삼고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타락으로 인한 복귀의 한을 품으시고 뒤넘이친 것만도 원통하실 텐데도 불구하고, '나' 같은 사람에 대해 이렇게 죽음의 길을 가려 주시는 그 은혜를 생각하면 황공 망극함을 느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하늘을 보나 땅을 보나 자신의 심정의 거점에 있는 그 사람과 그 은덕을 하늘땅 앞에 돌려드리고 가뿐한 걸음으로 가겠다고 해야 됩니다. 이런 마음이 여러분 신앙생활의 바탕이 되게 될 때, 그것이 정상적인 신앙의 길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나는 지금까지 그런 생활을 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때에는 밖에서 늦게 돌아오면 자고 있는 아이들을 보게 되는데, 그럴 때에는 아이들에 대해 '야, 너희들 얼마나 이 아빠를 불러 봤니?' 하고 물어 보고 싶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부르다가 피곤해 가지고 이렇게 자게 될 때, 하나님의 마음은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이게 남의 일이 아니라구요.
어머니면 어머니에 대해서도 피곤하여 누워 있는 것을 보면 얼마나 수고했으면…. 이런 마음이 듭니다. 이런 마음을 갖고 있으면 그 수고를 알아주고도 남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통일교회 교인들을 놓고도 선생님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선생님은 눈만 뜨면 지방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지방 가기가 바쁩니다. 애기를 보고 싶은 마음 이상 그들이 보고 싶어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아내가 남편을 보고 싶어하는 그 이상의 마음을 갖지 않으면 나는 죄인입니다. 빚지는 자가 되는 겁니다. 저 나라에 갈 때에 하늘 공법 앞에 선조들 앞에서 참소를 받습니다. 이 땅의 사람들에게 일을 시켰으면 선조들 앞에 참소받을 것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나는 죽어도 참소받을 그런 길은 안 갑니다. 그래서 나가서 일하는 사람들도 선생님을 대해 가지고 욕을 하고 싶어도 욕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심정적으로 빚지지 말아야 됩니다. 그런 신앙자의 자세는 망하지 않는 자세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제나 보호하는 겁니다. 동정을 언제나 남기는 생활, 결론은 간단해요. 언제나 동정을 남겨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보면 걸어가는 꼴만 봐도 보기 싫은 사람이 있지요. 그렇지 않아요? 그것은 왜 그러냐? 그럴 수 있는 내용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 사람을 몇 번씩이나 동정해 주었는데도, 동정해 줄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동정하실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디 가든지 하나님이 동정하고 같이 느낄 수 있고 울타리가 되어 줄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통일교회의 여러분이 그런 마음을 가지고 나가면 비록 악한 세계에 있더라도 악한 세계에 휘말려 들어가는 것이 아니요, 슬픈 세계에 있더라도 슬픈 사람이 아닙니다. 또 여러분이 어디 가든지, 혼자 있더라도 묵묵히 혼자 있는 그 마음 세계에서는 하나님과 접할 수 있는 겁니다. 그 자리에서는 기도만 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로 이루어진 생활을 할 수 있는 세계와 연결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천국생활을 할 것이 아니냐? 이런 것을 여러분이 잘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은 현재 자신의 생활에서부터, 자신에서부터 사탄이 틈타지 않게 해야 되고, 사탄이 머물 수 있는 곳을 없애야 됩니다. 그러한 자신을 가져야 됩니다.
여러분은 거기까지 가야 할 노정에 있어서, 하나님의 동정을 받고 그것을 확대시키기 위한 격정의 도상에서 회피할 것이 아니라, 그 책임을 내가 지고 피해를 내가 입겠다는 마음으로 끝까지 죽음의 자리까지 나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쓰러질 수 있는 생애의 종착점이 어디냐? 대한민국이냐? 세계의 끝이냐? 자기 집안을 위해 죽을 것이냐, 객사하는 모습이 될 것이냐 하는 이런 것에 개의치 말아야 됩니다.
하나님이 더 동정할 수 있고, 하나님의 큰 뜻이 깃들 수 있고, 또 그것을 남겨 줄 수 있는 곳이라면, 언제든지 개의치 않고 죽음을 각오하고 가는 사나이라면, 기필코 역사적인 인물이 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고 이것을 명심해야 되겠어요.
더우기 금년 1971년도에 발표한 '통일기반 확보'라는 표어는 이러한 내적인 신앙 문제를 중심삼고 하는 말입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원리를 공부했지요? 원리는 탕감복귀 원리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벌써 배운 것 아닙니까? 그런데 여러분은 지금까지 탕감복귀역사를 해 나오는 수고의 하나님밖에 몰랐습니다. 그러나 복귀됐을 때의 하나님, 복귀해 가지고 영광의 자리에 참석하시는 하나님은 다릅니다. 탕감복귀의 운세를 이끌고 부딪혀 나오시는 하나님과, 복귀된 입장에서 섭리를 추진시키는 하나님, 복귀의 역사를 다 이루어 가지고 영광의 자리에 서서 만민을 아들딸로서 품고 세계를 하나로 거느리시는 아버지, 즉 영광의 하나님과는 다릅니다.
여러분은 탕감복귀하시는 하나님을 모시고 나오고 있는 겁니다. 알겠어요? 「예」 그리고 선생님은 복귀하신 하나님을 모시고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선생님에게도 영광의 때가 올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히 복귀된 가정과 복귀된 종족을 중심삼고 복귀된 나라를 어떻게 이룰 것이냐, 복귀된 세계를 어떻게 이룰 것이냐 하는 문제를 중심삼고 나왔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가정을 넘고, 국가를 넘어 세계로 향해야 됩니다. 그렇게 될 때 하나의 국가와 세계가 이루어질 것이요, 아버지께서 바라시는 통일된 영광의 때가 올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때까지는 여러분이 고생해야 됩니다. 그때에 가서야 비로소 부모가 쉼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이 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쉼으로 말미암아 부모가 쉬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선생님도 내가 일해 줘야 뜻을 이루지, 선생님이라고 별 수 있어? 통일교회 교인들 없이 별 수 있나?' 라고 하는데 천만에요. 그건 잘못 생각한 것입니다.
타락은 누가 했어요? 부모가 했습니다. 부모가 한 거예요. 그렇지요? 부모가 타락했기 때문에, 복귀는 잃어버린 그때의 그 상태대로 가서는 복귀가 안 됩니다. 그렇지요? 그러면 참부모가 이 땅에 와서 무엇을 복귀해야 하느냐? 잃어버린 부모의 자리를 복귀해야 됩니다.
복귀하는 데에는 환경이 그와 같은 환경이 안 되면 안 됩니다. 그때의 환경이 어떠했느냐? 타락할 때에 아들딸이 있었어요? 아들딸이 있었어요, 없었어요? 「없었습니다」 당연히 없다 이겁니다. 그때는 누가 있었어요? 천사, 천사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이 타락할 때의 환경입니다. 그렇지요? 「예」
그러면 참부모를 환영하고, 또 참부모가 의논할 상대는 누구예요? 참부모가 의논할 상대가 있겠어요, 없겠어요? 의논한다면 누구와 해야 돼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말고 말예요. 누구와 의논해요? 천사장입니다, 천사장. 천사장이 복귀역사를 도와주게 되어 있어요, 망치게 되어 있어요? 타락하는 데에 있어서 천사장이 협조했어요, 망쳤어요? 망쳤지요? 망쳤습니다. 그러니 고독단신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기에 김 협회장이 있지만 의논하지 못합니다. 선생님의 길은 홀로 가는 길입니다. 외롭다면 세계에 없는 외로운 사람입니다. 그 누구도 모르는 것입니다.
어머니도 그렇습니다. 어머니의 말을 들어서 되겠어요? 해와의 말을 들으면 어떻게 돼요? 통일교회 교인들은 선생님은 어머니의 말은 잘 들으시대' 이럽니다. (웃음) 그것이 원칙에 맞아요, 안 맞아요? 잘 듣는 것 같지요? 잘 듣는 것 같지만 그럴 수 없습니다. 원리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원리가 그렇기 때문에 어머니를 키워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재창조하는 과정에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어머니가 그런 자리를 거쳤습니다. 그리하여 지금은 어머니 아버지 시대권에 있기 때문에 여자들이 나가 일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가정에도 여자들을 내세워서 탕감복귀하자는 것입니다. 여자들이 활동한다고 하는 것은 하늘편 여자들이 사탄세계에 대적하는 것입니다. 이제 여자들이 나가 일하는 때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때가 얼마만큼 왔느냐 하면 원리를 보면 압니다.
그럼 '선생님이 통일교회 교인이 없어 가지고 뜻을 이룰 수 있느냐?' 그러는데 이러한 말이 성립돼요, 안 돼요? 원리적으로 얘기해 보자구요. 돼요, 안 돼요? 「안 됩니다」 안 돼요. 여러분이 없더라도 내가 통일교인이 되고 여러분이 없더라도 일본 사람이 좀더 고생을 하면 잘 싸울 것입니다. 외국 사람도 있습니다. 내가 지금 말을 못해서 그렇지 말을 배울 때까지 고생하면 될 수 있는 거라구요. 선생님은 그런 생각 안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한 명도 없으면 내가 부흥강사로 나서서 외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경삼아서라도 사람들이 많이 몰려올 것입니다. 시민회관에서 한다하게 되면 사람이 찰 것 같아요, 안 찰 것 같아요? 통일교회 문선생이 부흥회를 한다면 구경삼아서라도 한 번쯤은 올 것입니다. 목사들도 와 가지고는 구경할 것입니다. 목사 공청회 때도 문선생에게 관심이 있었지, 공청회에는 관심이 없었잖아요? 내가 여러분을 대하던 마음을 갖고 하게 되면 순식간에 여러분 이상의 수를 규합할 수 있습니다. 그럴 가능성이 있지요?
타락은 부모가 했지만 아들이 그 결과를 결정지었습니다. 가인과 아벨이…. 그렇지요? 보라구요. 가인과 아벨은 타락의 결과적 존재입니다. 타락은 부모가 중심이 되었지만 그 결과적인 존재로는 아들딸이 됐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귀도상에 있어서 누가 나와야 되느냐? 아벨이 나와야 됩니다. 그리하여 아벨이 역사를 통해서 부모를 찾아 나가야 됩니다.
여러분을 중심삼고 보면, 여러분도 가인 아벨의 관계에 있습니다. 형제라는 것입니다. 그럼 가인 아벨의 노정에 있어서 아벨이 가인의 말을 들어 가지고 뜻을 이룰 수 있겠어요? 말해 보라구요. 또, 가인이 아벨을 대해서 말할 자격이 있어요? 원리대로 얘기해 보자구요. 말할 자격이 있어요, 없어요? 「없습니다」 그럼 누구만이 말할 수 있어요? 「아벨입니다」
그럼 사람이 말할 때에 좋은 말만 해요? 나쁜 말도 하게 되지요? 가인이 아벨을 대해 가지고 책망할 수 있어요? 대답해 보라구요. 평할 수 있어요, 없어요? 「없습니다」 그러면 아벨은 가인에 대해 말할 수 있어요, 없어요? 「있습니다」 책망할 수 있어요, 없어요? 간섭할 수 있어요, 없어요? 「있습니다」 그 간섭하는 방법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관계가 이렇게 되어 있는 겁니다.
이 세계는 화합된 세계입니다. 우주는 상응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간섭도 상응적인 간섭이다 이겁니다. 알겠어요? 저 사람이 나에게 끌려올 수 있는 간섭을 해야 하는 겁니다. 내가 끌려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려면 그 사람을 위해 주어야 됩니다. 그 위해 주는 것이 간섭할 수 있고 점령할 수 있는 방법인 것입니다. 위해 주는 것은 뭐냐 하면 완전한 간섭입니다. 그렇지요?
사탄은 뭐냐? 악이라는 것은 자꾸 높아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하나님 대신 높아지려고 하는 것이 악입니다. 자꾸만 높아지려는 것이 사탄의 본질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 본질적인 조상의 피를 받았기 때문에 너희도 그런 녀석이다 이겁니다. 그러니 높여 주라는 거예요. 얼마만큼 높여 주느냐? 하나님 이상 높여 주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인을 하나님 이상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게 그거라구요.
그러면 가인을 하나님 이상 높여 주었다면 가인이 그 이상 올라갈 수 있어요? 올라갈 데가 있어요, 없어요? 「없습니다」 없으니까 내려와야 됩니다. 그렇지 않아요? 하나님 이상 높여 놓고 내려갈 때에는 혼자 내려가라고 해야 합니다. 내려오긴 내려와야 할 텐데, 내려올 길이 있어요? 안 내려올 수 없는 겁니다. 안 내려오면 옥살박살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돼요? '아이구. 나 살려줘요. 나 살려줘요' 하는 거예요. 그때서야 비로소 '아이구 내가 뒤를 따라갈 걸' 하는 거예요. '제발 살려줘요' 하는 것은 완전굴복하는 것입니다. 원리적으로 사탄을 잡는 방법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누구만큼 높여 주라구요? 「하나님 만큼요」 하나님 만큼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이상으로 높여주라는 것입니다. 가인을 하나님 이상 사랑해 주는 데도 불구하고 그 이상 불평할 수 있어요?
여러분이 가인을 복귀하려면 세 아들딸을 사랑하는 이상의 사랑하는 마음을 갖지 않고는 안 됩니다. 세 아들은 3시대를 말하는 것입니다. 3수는 완성수이지요? 소생, 장성, 완성, 그렇지요? 완성을 말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탄세계의 아들인 가인을 자기 앞에 굴복시키기 위해서는 자기 아들의 3배 이상 사랑하지 않고는 복귀가 안 됩니다. 이것이 원칙입니다. 그래서 이런 원칙에 의해서 하나님도 구약시대, 신약시대, 성약시대를 거치는 섭리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신앙생활 가운데서 불평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가인을 그 이상 높여 줘야 할 나로서, 지금 훈련받고 뛰어야 되는데, 그 일을 못하면서 어떻게 불평을 해요? 나를 높여 달라고 할 수 있어요? 자기를 높여 달라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절대 아벨이 될 수 없습니다. 아벨이 못 됩니다. 자기를 알아 달라는 사람은 전부 다 가인입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확실히 알아야 돼요. 불평을 하면 불가피하게 가인이 되는 거예요. 가인이 되지 아벨은 절대 못 됩니다.
아벨이 될 수 있다, 없다? 「없다」 불평하게 되면 아들딸이 될 수 있다, 없다? 「없다」 없다, 그것이 원칙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역사노정을 홀로 걸어 나오신 것입니다. 성경이 그것을 가르쳐 줬어요, 안 가르쳐 줬어요? 성경이 이러한 골자를 가르쳐 줬어요, 안 가르쳐 줬어요? 「안 가르쳐 줬습니다」 안 가르쳐 줬습니다. 못 가르쳐 주는 거라구요. 다 이루어 놓기 전에는 못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오늘날 통일교회의 원리 말씀도 선생님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선포된 것입니다. 우주적으로 보아도 중심이 있기 때문에 선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한민국에 있어서도 내각을 조직할 때에 밝혀지기 전에는 그 내용을 모릅니다. 결정해 가지고 선포해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예요. 결정되어야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포하면 다 아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원리를 알았다는 것은, 그것은 결과적인 것입니다. 6천년 역사가 개인복귀완성하는 역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안 동시에 실천적인 실체가 결정됐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그런 것을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자신의 생명과 재산 전부와 바꾸는 한이 있더라도 그 가르쳐 준 모든 것을 절대시하고, 그것과 더불어 살고 그것과 더불어 죽으면 그것과 더불어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신앙길에 있어서 심각해야 됩니다.
선생님은 여러분이 아는 길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평면적입니다. 평면적인 일을 하고 있습니다. 알겠어요? 그러나 선생님은 입체적인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생각이 맞겠어요, 안 맞겠어요? 방향이 맞겠어요, 안 맞겠어요? 근본적으로 틀리다는 거예요. 여러분은 여러분만한 일 밖에 못 하기 때문에 선생님이 필요한 것입니다. 선생님과 안 맞는 것 같지만 결국 지내 보면 맞게 됩니다. 그러면 되잖아요? 암만 안 될 것 같은데도 그렇게 된다 이겁니다.
통일교회가 망할 것 같지만 안 망합니다. 통일교회 문 선생도 안 망합니다. 내가 그렇게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예요. 지금까지 망할 길을 얼마나 거쳐왔어요? 그렇잖아요? 앞으로 거쳐갈 것보다도 더 많이 거쳐왔어요. 이제 거쳐갈 것은 쉽습니다. 그렇지요? 그러니까 이제는 어려운 고개를 다 넘었습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알아야 돼요. 그렇지 않아요? 내가 지금까지 생명을 바치고 생애를 바치며 이 세계에 있어서 고립된 자로서 나왔는데 망할 수 있어요? 얼마나 심각했는지 생각해 보라구요.
여러분 보라구요. 아들딸 7, 8명 거느리고 사는 부모가 재산을 다 탕진하여서 따라지가 됐을 때 밤잠을 못자지요? '어떻게 할까?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생각하면 아리까리할 때가 많지요? 밑천이 한 십만원밖에 안 남았는데, 이렇게 결정하면 망할 것이고, 잘못했다가는 몽땅 없어지는데 어떻게 하나 하며 생각할 것입니다. 생명을 걸고 밤을 새우면서 그것을 결정하기 위해 얼마나 왔다갔다하겠어요?
한 가정의 운명을 책임진 책임자도 그 가정을 걸고 밤잠을 못 자고 그러는데, 하늘땅을 위해 일하는 책임자가 하늘땅을 걸고 밤잠을 못 자고 그러는 것이 얼마나 많겠나 생각해 보세요. 한번 잘못 결정하는 날에는 천지가 왔다갔다하는 거예요. 마음대로 될 것 같아요? 선생님이 적당히 생각해 가지고 움직이겠어요? 내가 피어린 투쟁과 피어린 담판의 과정을 거치고 있다는 것을 그 누구도 모릅니다.
통일교회 교인들이 이렇게 하고 있는데 통일교회를 지도하는 사람이 그냥 그대로 해서 될 것 같아요? 말도 안 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그러한 중차대한 문제, 세계가 왔다갔다하는 문제를 결정할 그 당시에 얼마나 심각했겠어요? 여러분은 그것을 모르지요? 암만 알려고 해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은 외로운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 나에게 '당신은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지?' 하면 그 한마디에 십년 이상 통곡할 수 있는 사연을 풍부히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죽을 때까지 갖고 갈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심각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문제를 두고 볼 때에, 하나님을 따라 나가고 하나님을 모시고 나가는 데 있어서 여러분은 그러한 자세로 밀고 나가고, 자기가 참관할 수 있는 참관인이 될 수 있고 감시 감독할 수 있는 판단관의 입장에서 나가야 합니다. 여러분은 앞으로 선생님에 대해서 더 연구해야 됩니다. 지금까지 선생님이 여러분에게 가르쳐 준 것은 탕감원리입니다. 이제부터는 뭐냐 하면 복귀원리를 가르쳐 줘야 됩니다. 여러분은 이 복귀원리를 모릅니다. 복귀를 하려면 선생님이 있어야 됩니다. 지금까지 선생님이 탕감해 왔습니다. 이제 선생님 시대가 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직까지 선생님에 대해서 모릅니다. 그렇잖아요?
그 다음에는 무엇이냐? 복귀가 다 끝난 후에는 창조이상의 생활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복귀를 거친 후의 때가 영광의 시대라는 것입니다.
영광의 하나님을 모시기 위해서는 탕감의 노정과 복귀의 과정을 거쳐야 됩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영광의 하나님을 못 모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 자신으로는 탕감노정을 못 가는 것이요, 복귀노정도 못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선생님을 의지하고 또 선생님은 하나님을 의지하여, 삼기대가 되어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이것이 사위기대 원칙이 아니냐, 결론이 딱 나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그러면 효자인 아버지가 자기 아들한테 바라는 데 있어서, 자기가 아버지 앞에 효도한 것보다도 더 못하기를 바래요? 그래요, 안 그래요? 대답해 봐요. 그래요, 안 그래요? 「안 그렇습니다」 누구나 집안이 더 잘 되기를 바랍니다. 자기가 아버지 앞에 효도한 것보다 더 하기를 바라는 것이 부모의 욕심입니다. 자기 집안이 세계적으로 발전하기 위하여, 흥성하기 위하여 그러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그래서 통일교회 문 선생이 고생을 했으니 여러분을 문 선생보다 더 고생시키고 싶겠소, 안 시키고 싶겠소? 대답해 보라구요. 더 시키고 싶겠소. 안 시키고 싶겠소? 말은 잘 들었지요? 그래 어떤 거예요? 나는 죽을 자리에 가서도 효자가 되고 싶은데, 여러분도 그렇게 하겠어요? 모가지 짜른다고 해도 효도할래? 「예」 이것이 아들의 입장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효도하는 자식이 어버이한테 하는 도리가 아니겠느냐?
내가 고생했습니다. 여러분도 고생했지만 나도 고생했습니다. 청춘시대는 물론 일생 동안 고생했습니다. 나란 사나이도 멋진 사나이예요. 선생님도 이런 것 저런 것 생각하지 않고 살았더라도 멋지게 살았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내가 욕심을 내 봤어요? 연애를 해봤어요? 전부 여자들한테 단련 받으면서 나왔어요. 나를 함정으로 몰아 죄를 한 무더기 덮어 씌우려는 일도…. 별의별 일들에 치였습니다. 기가 막히다는 거예요.
내가 그렇게 데데한 사나이가 아닙니다. 자기가 어떻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데, 왜 그렇게 살아야 되느냐? 왜 그렇게 나와야 되느냐? 그러지 않고는 안 되겠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인류를 사랑하지 못하면 복귀하지 못합니다. 신앙길이 따로 없습니다. 나에게는 무슨 명예욕도 없습니다. 그냥 그대로 몽땅 넘겨 주려는 것입니다. 주는 데는 무엇까지 넘겨 주려고 그러느냐? 내 아들딸까지 내 가정까지 여러분에게 맡기려고 합니다. 알겠어요? 사랑하는 자식들까지 여러분한테 넘겨주려고 한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 자식을 데려다 죽이겠어요? 여러분이 그것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 또 하나님을 대해서 어떻게 가려 가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 여러분에게 있어서 더 어려운 문제라는 거예요. 알겠어요? 자기가 낳은 아들딸이니까 마음대로 취급할 수 있고 마음대로 가릴 수 있는 입장이 되어야 하는데, 여러분은 그러지 못하기 때문에 여러분 앞에 더 어려운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에 더더욱 주고 싶은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러한 문제가 여러분에게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과 내 아들딸을 보게 될 때에, 선생님은 여러분을 내 자식보다 더 사랑합니다. 사랑했어요, 안 했어요? 여러분을 더 사랑했습니다. 처자식을 다 버리고 여러분을 사랑하려고 미쳐서 나온 것이 통일교회 길입니다. 그래서 복귀의 길이 시작된 것입니다.
여러분을 선생님의 아들딸로 만들려면 내 아들딸보다 더 사랑해야 되겠어요, 안 해야 되겠어요? 자기 아들딸보다 더 사랑하려면 훈련을 안 해 가지고 되겠어요? 사탄세계의 아들딸을 내 아들딸보다 더 사랑하지 않고는 망하는 것입니다. 이게 공식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이 가야 할 십자가의 노정과 피의 노정입니다. 이런 생애노정을 거쳐야 하나님의 제2의 소망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돼요. 그런 것을 꿈에도 생각하지 않고 '아이고, 선생님이 그렇다면 나도 그럴 게 아냐' 할지 모르나 입장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나를 더 사랑하기 위해서 고생시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식이 부모보다 더 못하기를 바란다면 망하는 겁니다. 그런 부모는 망하는 거예요. 잘하기를 바라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그러하기 때문에 여러분이 가혹한 시련 노정에 있어서 망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런 시련 노정에서도 내용을 갖춘 여러분을 내세우고, 그런 여러분을 사랑하면서 여러분을 걸어 하늘나라에 상정하고 싶은 겁니다. 그래 가지고 '당신이 찾아 나오던 복귀는 이런 것이요, 당신이 찾아 나온 사위기대의 도상이 이런 것이 아니겠소'라고 말하고 싶은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칭찬받을 수 있게끔 하나의 조건과 기대를 조성하기 위해서 불가피하게 가혹한 길로 내모는 것을 강행하지 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의 심정을 누가 알아주겠어요? 말을 듣고 보니 '그렇구나' 하고 알게 되는 것입니다.
자, 여러분이 불평하게 되어 있어요, 안 하게 되어 있어요? 「안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원칙이 거짓말이라 해도 인정해야 됩니다. 여러분이 이러한 신앙 자세를 올바로 가져야 됩니다. '선생님이 우리 앞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내 일대에 하고 싶었던 모든 내용이다. 또 하늘 앞에 억울한 모든 고비 고빗길을 뜻 앞에서 다 넘길 수 있도록 대신 조건을 세워주기 위해서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고마움을 느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통일교회 교인들 가운데 선생님하고 사돈 될 사람이 있을는지 모를거라. 그렇잖아요? 얼굴이 잘난 사람과 사돈 될 것인가, 어떤 사람들과 사돈 될 것이냐? 그런 생각 안 해봐요? 여러분이 생각이 깊으면 그런 생각도 할 수 있는 겁니다. 선한 조상으로서 선한 길을 가겠다면 이렇게 이렇게 엮어 가지고 땅을 대신하고 하늘을 대신한 자리에 설 수 있어야 합니다. 애기를 밸 때부터, 애기를 낳아서 기를 때부터 눈물로써 정성 들이고, 밤을 지새워 가면서 하나님 앞에 정성들일 수 있는 가정이 어디에 있겠느냐? 이러한 가정을 하나님께서 찾으실 것 아니예요? 이런 큰 뜻을 품은 사람들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내가 통일교회 교주로서 그런 면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복받는다는 것보다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줄 것인가, 잠을 안 잔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지금도 그래요. 공장에 가게 되면 열두 시까지 일을 하는 사람이 있어도 동정을 안 합니다. 나는 열두 시가 아니라 한 시 두 시까지 한다 이겁니다. 이 바쁜 시절에 슬픔이, 괴로움이 문제가 아닙니다. 안 먹고, 안 자고, 안 쉬고 정성을 다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정성을 다한다고 하는 데 있어서 안 먹고 안 자는 것하고, 먹고 자는 것하고 어느 것이 정성을 더하는 것입니까? 어떤 것입니까? 먹고 자면서 일하는 것보다도 안 먹고 안 자며 하는 것이 정성에 있어서 못한 거예요, 더한 거예요? 「더한 것입니다」 그거예요. 남이 먹을 때 먹고, 남 잘 때 자고, 남 말할 때 말하고, 남 놀 때 놀고서 어떻게 정성이라는 말을 쓸 수 있느냐 이겁니다.
요즈음에도 내가 열두 시에 자게 되면 두 시에도 일어나고 그럽니다. 그런데도 낮에 활동하면 피곤한 줄 모릅니다. 머리가 아픈 것도 모릅니다. 그런데 차를 타면 자신도 모르게 잘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가 있어요. 그런 시간에는 하나님께 미안하다고 기도하면서 자는 거예요. 그런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나와 더불어 같이 하시는 것을 느낍니다. 어떤 때에는 무심코 자다가 놀라 깨어날 때가 있습니다. 그런 일이 계속되기도 합니다. 그런 때에는 운동을 합니다. 선생님은 특별한 운동을 합니다. 노곤할 때에는 신나는 운동을 합니다. 운동까지 연구해 가지고 이런 일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앞으로 여러분에게 그 운동법을 가르쳐 줄 것입니다.
선생님은 그러한 비법도 생각합니다. 그러한 비법도 생각해 가지고 일합니다. 내가 이미 나이 50이 넘었는데 한 20년, 80세까지는 이렇게 돼야 될 텐데…. 선생님 나이가 몇 살 때가 2천년이예요? 내가 2천년 역사의 고비를 넘는 날에는 이렇게 돼야 될 텐데 하면서 최후의 역사 앞에 표적을 맞추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맞아 떨어져야 할 텐데…. 그 생각 외에는 뭐 다른 게 없습니다. 지금까지 고생을 해 나왔습니다. 죽을 건데 어때요? 석양을 향해 가는 노인이 아까울 게 무엇이 있겠느냐? 선생님은 이렇게 생각하고 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그런 각오를 하고 가야 됩니다.
오늘날 통일교회를 따라가는 신앙자의 자세는 본질에 가깝고, 본형에 가깝고, 본기준에 일치될 수 있는 그런 자세입니다. 여러분 자신들이 인격적인 면이라든가 모든 면에 있어서 천추만대에 하늘 앞에 있어서, 땅 앞에 있어서, 영계에 가서까지 자기의 후손들 앞에서 칭찬받고, 흠모의 대상이 되지 않으면 통일교회를 믿었다는 위신이 서겠어요? 생각해 보라구요.
이런 엄청난 문제가 여러분이 이제부터 가는 길 앞에 남아진 것을 생각하게 될 때 바쁜 것입니다. 나 같으면 그저 하루에 세계를 전부 다 뒤집어 엎고 싶어요. 전부 다 요거 요렇게 하고 요렇게 하면 틀림없이 되는 것입니다. 틀림없이 된다는 거예요. 이렇게 맞춰 가면 통일교회 패들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여러분이 이 자리에 올 때까지 영계를 통해서 예우를 해 가지고, 울타리를 해 가지고 들이 몰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이런 사실을 알기 때문에 여러분은 복종할 줄 알아야 돼요.
이러한 관점에서 여러분은 1971년도에 여러분 가정의 주부들을 내보내고 있는 통일교회의 움직임을 알아야 됩니다. 아시아의 현재 입장이 얼마나 절박해요? 그렇잖아요? 그러므로 우리가 마음에 결정을 했으면 딱 나서는 것입니다. 세계가 지금 얼마나 절박한 입장입니까? 세계와 대한민국과 우리 통일교회가 딱 한 고빗길에 있습니다. 이것을 잡아채서 하나가 풀리면 다 풀리는 겁니다.
그러니 보세요. 세 가지 제물을 쪼개는 기준에 맞는 것입니다. 세계 정세와 아시아 정세와 한국 정세를 중심삼고 한 제단에서 제물을 쪼개는 때가 온 것입니다. 선생님은 이것에 대해서 최후의 결정적인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알고 자나깨나 통일교회 신앙자로서 취해 나가야 할 자세, 빚진 자의 자세를 갖춰 공의의 법도 앞에서 하나님의 동정의 마음을 찾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절실히 노력해야 되겠습니다.
아버지, 저희는 진정 당신이 그렇게 심각하셨던 분인 것을 미처 몰랐습니다. 저희는 당신이 심정에 사무친 정열을 가지고 인류를 찾아오셨다는 것을 진정 몰랐습니다. 당신이 치열한 사망권과 싸우시기 위해 하루도 쉬지 못하고 6천년간 싸움의 노정을 거쳐오신 것을 저희들은 미처 몰랐습니다.
우리가 쉬는 시간에도. 생각하지 않는 시간에도 당신은 얼마나 초긴장한 자리에서 싸움을 계속하고 계신가를 생각해 봅니다. 그 싸움의 주인이 당신이 아니라 아들이요 딸이 되어야 된다는 것을 생각할 적에 주위에 아들딸이 없이 싸우는 아버지의 서글픔이 얼마나 컸다는 것을 직시하고도 남음이 있사옵니다. 모든 것을 자포자기하고도 남음이 있을 수 있는 역경에 있어서도 오늘날까지 소망의 아들딸을 부르면서, 바라보면서 싸워 나오신 아버지인 것을 아옵니다. 그런 아버지 앞에 오늘날 통일교인이 당신의 절망을 오히려 촉구시킬 수 있는 한 모양의 아들딸이라 생각할 때에 어이없고 면목이 없는 것을 다시 느끼게 되옵니다. 아버지, 이 자식이 철부지한 그때서부터 오늘까지 이끌어 주신 수고를 생각하면서 역경의 노정을 가일층 책임지시며 저희들을 권고해 나오신 당신의 깊은 뜻 앞에 진실로 감사드리옵니다.
오늘날 이 시점에까지 왔사옵니다. 믿을 분은 당신밖에 없고, 의지할 분도 당신밖에 없습니다. 사연을 터놓고 인연을 맺을 분도 당신밖에 없음을 알았습니다. 인간과 인연을 맺다 보면, 그것은 절망의 대상이 될 뿐이요, 신앙인으로서의 노정을 걸어 나오다 보면 마음에 화살을 꽂고 마는 것이 인간의 빈번한 역사적인 사실인 것을 많이 보았고, 많이 당했고, 많이 느꼈습니다. 그렇지만 이제는 버릴 수 없는 하늘의 운명길이 남았기 때문에 이 길을 극복할 수 있는 생활을 연속시켜야 할 책임이 오늘날 통일교단을 지도하는 여기에 서 있는 아들의 책임인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 고요한 가운데서 당신이 분부하신 그 말씀, 저를 품고 사랑하시며 몸부림치시고 통곡하시던 당신의 그 사정을 제가 알았사옵니다. 제가 당신이 소원하는 그 자리에서 충효를 낳은 결과의 세계를 못 이루면 당신을 부르지 않겠다고 각오한 것을 당신은 잘 알고 계십니다. 그곳을 향하여 가는 데 있어서 세월이 흘러가고 환경이 변할지라도 임을 향한 일편단심, 그 마음이야 변할 수 있겠습니까? 날과 시간이 거쳐가고 환경의 어지러움이 더할 적마다 당신의 마음 깊은 자리에 저희가 들어가 처할 수 있게끔, 당신께서 저희를 이끌어 주신 은사를 고맙게 생각하옵니다.
세상이 뭐라 하더라도 당신과 이 뜻은 남아질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과 당신의 뜻을 위해 수고하는 무리들도 기필코 남아질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앞으로 거쳐가야 할 수난의 노정이 남아 있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기뻐하실 수 있는 당신의 형상을 바라는 아들이 있고 딸이 있거든, 이 길이 응당 인간으로서 가야 할 길이요, 타락한 슬픔의 한의 고개를 극복하여야 할 운명길인 것을 알게 하시옵소서. 그러기에 감사의 일념을 자기 생애의 후덕으로 남기면서 가야 하는 것이 저희 통일교단에 선 하나의 신앙자의 모습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자세를 갖추어 가겠다고 이 시간 결심하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배가 고픈 것이 슬픔이 아니옵고, 환경에 몰려 억울한 자리에 선 것이 슬픔이 아니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버지를 잃어버리는 것, 그 이상의 슬픔이 없는 것을 저희들은 미처 몰랐습니다. 아버지가 계시는 자리는 아무리 없는 자리일지라도 무한히 있는 자리요, 아버지가 계시는 자리는 지옥의 중심일지라도 천국으로 화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저희들은 죽으나 사나 있어야 할 곳은 아버님이 계신 곳밖에 없는 것을 아옵니다.
아버님 밑에서 저희의 행복이 있는 것이요, 아버님 밑에서 저희의 소망이 있는 것이요, 아버님 밑에서 저희의 존재 가치가 있는 것을 생각할 때에, 이와 같이 저희들의 모든 승리의 요인이 되고, 행복의 요인이 되며, 결정적 가치의 기준이 될 수 있는 분이 우리 아버님이라는 사실을 미처, 미처, 미처 몰랐나이다. 높은 가치를 추구하는 데 있어서 외적인 무엇을 추구하기 전에 내 마음 깊은 가운데에 이미 가치 있는 내용을 결정할 수 있는 기준이 있는 것을 미처 몰랐습니다. 너와 나의 행복의 기원이 어떠한 피안의 대상적인 세계에 있는 줄 알았더니 저희 마음속 깊은 데에 이미 그 뿌리가 연결되어 있는 것을 미처 몰랐습니다.
이제 아버지께서 통일교단을 통하여 새로이 부활된 생명의 총아로서 아버지 품에 안길 수 있는 아들딸의 모습을 고대한다 할진대, 저희 자신은 그런 자리에 서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알았사옵니다. 그러하오니 겸손히 뜻을 대해 온유의 화신체가 되어 당신의 동정을 살 수 있는 귀여운 아들이 되고 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통일교회 신앙자의 자세가 어떠해야 된다는 것을 말하였사오니, 이들이 새로이 결심하여 아버님을 위한 충의 도리, 효의 도리를 다하는 금후의 생활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누구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이요, 과거 현재 미래를 위한 건설자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있는 자신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 고귀한 생명의 가치를 스스로 느끼면서 아버님과 더불어 살 수 있는 귀여운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오늘은 서울에 있는 자녀들이 야외에서 집합하겠사오니 그 자리에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나아갈 장래와 저희들이 소망하는 나라와 저희들이 아버지를 모시는 영광의 한때가 당신의 사랑과 더불어 인연되어 성사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며, 이 모든 말씀 참부모님의 성호 받들어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사랑하는 아버님, 이 시간 여기에 모인 당신의 자녀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맡겨진 엄청난 사명을 짊어지고 전국 방방곡곡에서 여러 가지 사정과 형편에 부딪치면서, 아버님의 거룩하신 뜻을 가려가면서 싸우던 당신의 어린 딸들이 이 자리에 모였사옵니다. 하오니 만나고 싶어하던 마음을 다 털어놓고 아버지 앞에 정성을 다할 수 있는 환경이 되고 기쁨의 집합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들은 지난 5개월 동안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을 느끼고 많은 것을 체험하였습니다. 이들이 느끼고 체험한 모든 것은 자기의 어떤 영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아버님의 뜻 앞에 보탬이 되고 서글픈 복귀의 한을 제거하기 위한 거룩한 제물된 싸움의 노정이었음을 생각하게 될 때, 그동안 아버님께서 이들을 무사히 지켜 보호해 주신 은사에 진실로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부터 일주일 동안 실시되는 이 모임이 당신의 장중에 완전히 붙들린 바 되게 하시옵소서. 시간 시간마다 당신의 특별하신 은사로 이들을 품으시옵소서. 이 시대적인 사명의식을 충족시키고, 각자가 아버지 앞에 본연의 사명의식을 충당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는 이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이 시간부터 아버지께서 이들 개개인의 심중을 온전히 당신의 것으로 포용하시어서, 지난날의 모든 슬펐던 사연, 외로웠던 사연, 혹은 억울했던 사연들을 당신의 사정을 앎으로 말미암아 다 잊어버리고 새로운 소망을 가지고 내일의 싸움터를 직시하면서, 힘찬 하늘의 용사의 모습을 갖추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될 거룩한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모든 문제를 아버지 앞에 맡겼사오니 당신의 경륜하신 뜻대로 저희들을 맡으시어 격려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오며, 기쁜 날들이 허락하신 당신의 뜻 가운데서 이루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의 소망의 은사가 저희들의 마음과 몸에 충만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그동안 여러분들이 전국에 널려서 각양각색의 형편과 사정을 체험하고 이 자리에 돌아왔다고 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남다른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은 남이 모르는 뜻을 알았기 때문이요, 남이 할 수 없는 사명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시간을 가진다는 사실은, 여러분 가정이나 개인에 있어서 추억으로 남긴다면 일생에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동안 수고한 모든 수고는 자기로 말미암아 수고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수고했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한 수고는 여러분들의 수고가 아니라 하나님의 수고로 결실되고, 여러분들이 느끼고 당한 사연사연은 여러분 개인을 중심삼고 당한 사연이로되 그 사연은 여러분 개인의 사연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신한 자리에서 하나님의 사연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한 나라 한 민족을 중심삼아 가지고, 즉 이 민족과 이 나라를 대표해서 하나님의 뜻을 품고 나서서, 그 나라가 당하는 슬픔을 내가 당하게 되고 그 민족이 당하는 슬픔을 내가 당하게 될 때 그것은 내 일신이 당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중심삼은 나라와 민족을 위하는 길이기 때문에, 그 슬픔은 민족의 슬픔이 아니요 나라의 슬픔이 아니라 하나님의 슬픔으로 연결된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그 어려운 자리를 극복한다는 사실은 이 나라와 이 민족을 아버지 뜻 앞에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즉, 탕감의 여건이 남아 있는 민족과 나라를 하나님 앞에 세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기에 대비되는, 탕감조건에 해당하는 슬픔과 고통을 대신 받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순교자적 사명의식을 갖고 책임을 하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당하는 슬픔은 개인의 슬픔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개인의 슬픔이 아니요, 개인이 당하는 일이라 하더라도 개인이 당하는 일이 아닙니다. 민족의 서러움을 대신 당하는 것이요, 국가의 서러움을 대신 당하는 것입니다.
민족과 나라를 위해 내 개인이 슬픔을 대신 당하는데, 절망하는 자리에 서거나, 원망하는 자리에 서게 된다면, 혹은 나라와 민족 앞에 충성을 다하지 못하고 그 나라 그 민족을 지금까지 강제로 억압하고 있는 사탄의 참소를 받을 수 있는 자리에 선다면, 자기를 중심삼아 가지고 슬퍼하거나 외로와하게 된다면, 여러분이 수고한 그 수고는 하나님의 수고를 대신하는 입장을 탕감한 수고로 세워질 수 있는 데도 불구하고 사탄의 참소를 받는 자리에 서게 된다면, 이 민족과 국가 앞에 한의 조건을 남길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내가 공직에 있게 될 때, 혹은 공적인 입장에서 당하는 모든 것은 민족을 대신하고 국가를 대신하여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기쁨으로 맞게 될 때에는 민족에게 슬픔을 해소시키고 기쁨을 소개할 수 있는 것이요, 또 내가 그 어려움을 책임지고 극복하여 나가게 될 때에는 민족의 어려움이 나로 말미암아 탕감이 되어서 민족 앞에 어려움을 제거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 책임을 해야 하는 여러분들이기 때문에 출발도 자기를 위해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요, 싸우는 것도 자기를 위해서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또 이와 같이 공석에 모이는 것도 자기를 위해서 모이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공적인 입장에서 출발하여 공적인 과정을 거쳐 가지고 공적인 결과에 인연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라는 것은 아무개의 처가 아닙니다. 아무개의 어머니가 아닙니다. 비록 작은 여자의 몸이지만 그 몸 자체는 어떤 특정한 가정의 인연을 중심삼은 여자가 아니라, 민족을 대표하고, 혹은 그 나라의 국민을 대표하는 자리에 선 대표자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입장에서 여러분을 높이 평가하고 귀중한 자리에서 여러분의 가치를 부여하고 계신다는 것을 우리들은 항시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런 가치를 다시 한 번 촉구하고 좀더 큰 의미로 그 가치를 다시 빛내기 위해서 이와 같은 모임을 가졌다는 것을 알고, 이번 수련기간에 여러분이 나가 활동하면서 느꼈던 고충, 혹은 여러 가지 알고 싶었던 것, 보강하고 싶었던 실력이라든가 하는 모든 것들을 종합 비판하여, 이번 기회로 말미암아 새로운 결의와 더불어 새로운 자각과 더불어, 내일의 소망 앞에 있어서 민족이 바라고, 국가가 바라고, 하나님이 탕감적인 조건을 제시하기를 바라는 삼각권내에 있는 여러분이 책임수행하는 데 부족함이 없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현재의 입장에서 뜻을 중심삼고 어떤 자리에서 책임을 해야 되느냐 하는 문제를 중심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한 나라를 구하는 데 있어서, 그 나라 전체가 복귀되기 위해서는 한꺼번에 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한 나라가 하나님 앞으로 복귀되는 데는 한 개인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6천년 동안 섭리해 나오신 노정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복귀해 나오는 데는 어떤 과정을 거쳐야 되느냐? 타락한 인류를 살펴보게 될 때 인간시조 아담 해와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원수의 자리로 떨어졌습니다. 그 원수의 자리에서 원수의 자리를 피해 다시 하나님과 인연을 맺어 가지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는 길이 복귀의 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종의 종도 될 수 없는 우리 인간이 종의 종이라도 될 수 있는 자리에 섰다는 사실은 타락한 인간에게는 무엇보다도 복된 은사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 종의 종의 자리에서 종의 자리를 거쳐 나오는 것입니다. 종의 종의 자리라는 것은 주인을 갖지 못하는 자리입니다. 종의 종의 자리에서 종의 자리에 진전을 한다는 사실은, 즉 종으로서 주인을 맞을 수 있다는 것은, 종의 종으로서는 영광 중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종의 종의 자리를 거쳐 가지고, 종의 자리, 양자의 자리, 아들의 자리를 거쳐 가지고, 부모의 자리로 나오는 것이 복귀노정입니다.
그러면 타락은 무엇이냐? 참된 개인, 다시 말해서 참된 아들딸을 중심삼고 하나의 가정을 이루지 못한 것이 타락입니다. 이루지 못한 가정을 다시 찾는 것이 복귀의 목적입니다. 이 가정이 복귀될 때까지 어떤 역사적 변화를 거쳐 왔느냐? 지금까지 6천년이라는 기나긴 역사과정을 거쳐 나왔습니다. 이렇게 복귀역사를 거쳐 나오는 과정에는 종의 종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 피눈물을 흘리고 간 무리들이 있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종의 종 시대에서 아무리 정성을 다하고, 충성을 다하고, 생명을 잃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그 시대권내에서는 종의 종으로서 인정받을 수 있는 자리밖에 못 된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것이 구약시대에 들어와 가지고 종의 도리를 갖추어 나가게 됩니다. 그 시대에 종의 입장에서 아무리 충성을 다하고 생명을 바쳐 제물된 생활을 했다 하더라도 종 이상의 자리에는 나갈래야 나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구약시대를 거쳐 신약시대로 넘어오면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딸을 맞을 수 있는 한때를 기약하셨습니다.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은 전체의 생명을 대신한 내일의 소망이었고, 하나님의 아들을 상봉할 수 있는 그날은 종의 시대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들 전체의 생명을 대신할 수 있는 소망의 기준이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태어남으로 말미암아 그 아들이 종으로서 충성하는 과정을 거치고 양자로서 충성하는 과정을 거쳐 영원히 가를래야 가를 수 없는 인연을 세워 놓고, 아들의 사명을 다하고 부모의 자리로 올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부모의 인연을 갖춤으로 말미암아 양자의 입장에 있는 사람들은 비로소 새로운 상속권의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종의 자리에서, 혹은 양자의 자리에서 충성을 다하고 나서 아들을 만났다 하더라도 종이나 양자의 자리에서는 상속받을 수 있는 자리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만나서 그 아들과 완전히 하나되어 가지고, 그 아들이 아들로서의 사명을 다하여 부모의 자리에 나갈 수 있도록 충성을 다해 모셔 드릴 수 있는 입장에 서야만, 비로소 아들의 자리를 대신할 상속의 자리를 이어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귀노정입니다.
이렇게 보게 될 때,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 식구들이 새로운 가정의 인연을 중심삼아 가지고 축복받았다는 사실은…. 그 새로운 가정은 얼마나 역사적으로 바라던 가정이었습니까? 이 가정은 역사과정에 있어서 종의 종의 시대에 있어서, 종의 시대에 있어서, 양자의 시대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보낸 아들로서 이 땅 위에 와서 생명을 희생하는 자리에 나갔어도 이룰 수 없었던, 역사적인 소망으로 남아졌던, 예수님을 중심삼고 이루기를 바라던 가정이었던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 기독교를 통해 영적인 기준을 중심삼고 개인적인 복귀과정을 다시 개척하고 가정적, 종족적, 민족적, 국가적인 기준까지 가인적인 형이나마, 외적인 형이나마 세계적으로 다시 탕감하기 위해서 2천년 역사과정을 거쳐온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음의 대가를 치러 가지고도 찾지 못했던 그 가정, 6천년 기나긴 역사과정을 거쳐 희생의 대가를 치러 가지고도 찾지 못했던 그 참된 가정이 오늘날 이 지구상에 현현했다는 사실은 인류에게는 최고의 희망의 현현이요, 역사과정에서 바라던 최고 소망의 성사의 기준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그 참된 가정이 이 땅 위에 나타났다 할진대는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는 출발의 시작이 될 것이고, 하나님의 섭리의 뜻을 위해서 수고한 민족이 있다 할진대는 그 민족이 소원하던 최고의 중심된 가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가정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역사가 출발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그 참된 가정이야말로 역사시대에 있어서, 혹은 현실에 있어서 우리 인류 앞에 소망의 중심이 아닐 수 없고 미래의 새로운 세계를 창건하는 데 출발의 기원이 안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참된 가정을 오늘날 우리가 맞을 수 있고, 모실 수 있고, 그 가정으로 말미암아 여러분도 세상에 없었던 새로운 가정의 인연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 이 얼마나 놀라운 은사요, 이 얼마나 고마운 은사입니까? 그 가정의 배후에 비참한 일이 있다 할진대, 우리 역사상에 없었던 최고의 비참한 역사적인 전통 위에 내적인 인연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 가정을 중심삼고 생각하게 될 때, 여기에 억울함이 있다 할진대, 이 가정이 이 땅 위에 나타나기 위해서 복귀섭리의 도상에서, 이 인연을 세우기 위해서 책임을 지고 왔다 간 수많은 개개인은 물론이지만 그들을 통해서 민족 국가까지 발전시켜 나오는 과정에 있어서의 그 억울함이란 역사상에 그 누구도 당해 보지 못한 억울함입니다. 그런 억울한 역사의 내연을 남긴 기반 위에서 이 가정이 찾아졌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또 죽음의 대가를 치른 역사적인 슬픔이 있다 할진대는, 어떤 민족이면 민족이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 혹은 하나의 국가가 주권을 세우기 위해서 치른 희생의 대가보다도, 혹은 이상을 이루기 위해서 치른 희생의 대가보다도 복귀섭리도상에서 이 가정을 출현시키기 위해 더 많은 희생의 대가를 치렀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역사과정에 있어서 슬픔이 있으면 최고의 슬픔, 어려움이 있으면 최고의 어려움, 피의 대가를 치렀다면 최고의 피의 대가를 치른 그 결과로 찾아진 것이 이 참된 가정인 것입니다.
이 참된 가정이 찾아짐으로 말미암아 역사적인 슬픔이 해원성사될 수 있겠기 때문에, 역사적인 죽음의 대가가 해원성사될 수 있겠기 때문에 역사는 이런 비참한 탕감의 조건을 치러 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참된 가정이 이 땅에 현현했다는 사실은 우리 인류에게 있어서는 그 이상의 기쁨이 없는 기쁨이요, 그 이상의 가치가 없는 가치인 것입니다.
그런 참된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는 참된 부모가 있어야 됩니다. 참된 부모가 있어야 됨과 동시에 참된 부부가 이루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참된 부부가 이루어져 가지고 참된 자녀가 탄생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참된 부모는 사탄 앞에 어떤 참소의 조건을 남겨서는 안 됩니다. 참된 부부는 사탄 앞에 어떤 참소조건에 걸려서 신음하는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참된 가정에 속해 있는 자녀 또한 사탄세계에 참소조건을 남길 수 있는 자리에 서 가지고는 참된 가정의 아들딸이 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여러분은 참부모라는 말을 하고 있으며, 참부모라는 명사를 알고 있습니다. 이 참부모라는 말은 역사시대에 있어서 그 누구도 불러 보지 못했고,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부를 수 있고, 알 수 있고, 모실 수 있는 영광된 자리에 섰습니다. 이렇듯 우리는 역사시대의 그 누구보다도 행복한 자리에 서 있는 것이요, 역사시대의 그 누구보다도 고귀한 자리에 서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참부모라는 이름과 더불어 역사는 지금까지 수고해 나왔고, 참부모의 승리의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서 역사적인 수많은 희생의 대가를 치렀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참부모라는 명사야말로 오늘날 우리 인류에게는 복된 말씀 중의 복된 말씀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참부모라는 그 이름 세 자를 생각할 때, 참부모로 말미암아 역사가 치리되고, 참부모로 말미암아 새로운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 기원이 생겨나고, 참부모로 말미암아 사탄을 굴복시킬 수 있는 내적인 인연이 결정되고, 참부모로 말미암아 외적인 세계를 점령하고 있는 사탄을 정복하여 비로소 하나님을 해원성사해 드릴 수 있는 중심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부모와 더불어 살고, 참부모의 명령을 받들어 행동할 수 있는 이 놀라운 은사에 여러분이 먼저 감사해야 되겠습니다.
자기 일생을 다 희생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참부모의 가는 길에 동조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우리 인류 앞에 이 이상 행복된 일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참부모의 명령을 따라 적진을 향하여 행진하는 병사가 있다면, 그는 인류가 바라는 최고의 희망의 정상 가운데 있어서 하늘과 땅이 직시하고 역사가 주목하는 거룩한 용사인 것을 우리는 잘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참부모의 심정을 대신하여, 혹은 국가와 민족을 대신하여 싸울 수 있는 입장에 섰다 할진대는 그 심정으로 말미암아 국가면 국가, 민족이면 민족이 비로소 행복의 동산의 문을 열 수 있고, 행진해 들어가서 승리의 영광의 자리에 참석할 수 있는 소망의 국민과 국가가 현현한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 참부모의 심정의 깃발을 들고 나서는 여러분이야말로 역사를 불러일으킬 수 있고 사망의 세계를 다시 한 번 심판할 수 있는 기수인 것을 여러분은 자각해야 되겠습니다.
그 앞에 아무리 강하게 몰아치는 시련 고비가 있다 할지라도, 참부모는 사탄을 승리하고 이룬 기반 위에 선 중심이기 때문에 이 중심과 더불어 선 자리에는 아무리 모진 시련이 부딪쳐 온다 하더라도 이것을 밀어낼 수 있는 그 무엇이 없다는 신념을 가지고 가일보 전진을 다짐하고, 가일보 승리를 다짐하는 걸음이야말로 역사시대에 왔다 갔던 수많은 선지선열들이 바랄 수 있는 소망의 터전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암담한 이 사망권내에서 내일의 희망을 잃어버리고 절망에 처해 있는 세계 인류들이 바라는 하나의 소망의 터전으로서, 하나의 희망의 상징으로서 모시기에 부족함이 없는 고귀한 존재가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볼 때, 보기에는 초췌한 모습이요, 나타난 모양은 초라할지라도 오늘날 우리는 이 민족이 부르고 있는 거룩하고 화합된 모습입니다. 이 민족뿐만 아니라 세계 인류가 우리를 맞기 위하여 환희의 함성을 지르고 있고 울부짖고 있습니다. 내적인 시련 가운데서, 혹은 환난 가운데서 '우리를 맞아 줄 수 있는 소망의 무리가 어디 있느냐'고 울부짖는 그들과 하루라도 빨리 상봉하여 가지고 그들을 소원의 터전에 옮겨 주는 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맡겨진 용사의 사명이요, 오늘날 통일신도들이 가야 할 의의 있는 뜻의 길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오늘날 연약한 아낙네의 몸으로서 엄청난 역사적인 시대를 대표하고 섰다는 것을, 그러한 고귀한 모습이라는 것을 우리는 찬양할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내 손은 비록 작은 손이로되 이 손길은 민족이 바라는 손길이요, 방향을 잃어버린 세계 인류에게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손길입니다. 내 입술에서 나는 목소리는 방향을 잃어버린 세계 인류 앞에 방향을 제시해 줄 수 있는 목소리요, 가냘픈 목소리지만 사망의 길을 가려 주는 분별된 주인의 행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이 일이 얼마나 고귀한가 하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내 눈은 비록 어느 지방 작은 마을의 산야를 바라보는 눈이라 하더라도 그 산야를 연속시켜 세계로 뻗어 나갈 수 있는 내일의 소망의 길을 모색하면서, 하나님이 소원하시는 뜻을 희망으로 삼고 불쌍한 인류와 민족을 포옹하여 거느려 가는 것을 직시하는 시야를 가졌다 할진대는, 그 시야야말로 하나님이 바라시는 시야요, 인류가 찾아야 할 소망의 시야이기 때문에 바라보는 모든 만상은 서글픈 만상으로 나타나서는 안 되겠습니다. 눈물이 엇갈리는 자리에 섰다 하더라도 내가 바라보는 산야, 혹은 삼천리 반도는 희망의 상징으로 나타나고, 기쁨으로 품어 줄 수 있는 내일의 행복의 표준으로 찬양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런 눈을 가지고 바라보게 될 때에, 여러분은 역사를 이긴 사람의 시야를 가진 사람들이요, 그러한 여러분의 손길은 역사과정에 있어서 그 누구도 하지 못했던 선한 일을 하는 손길이요, 그런 여러분의 걸음걸이, 여러분의 행동은 역사를 재현시키고 재기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새로운 역사의 창건자로 서 있다는 자부심을 가져야겠습니다. 이것은 참부모의 뜻과 더불어, 참부모의 명령과 더불어 행동하는 무리만이 가질 수 있는 긍지인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참부모를 중심삼고 생각하게 될 때, 참부모가 나타나려면 사탄의 참소권을 초월해야 됩니다. 사탄이 참소 할 수 있는 입장에서는 참부모가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러면 사탄은 어떤 존재냐? 영적인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영적 존재인 사탄을 굴복시킬 수 있는 입장에 선 중심적인 분이 아니고는 참부모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려면 지금까지 영계에 가 있는, 지상에 왔다 갔던 천천만 성도들과 수많은 선조들을 중심삼고 수천억이 되는 영계의 영인들은 참부모라는 그 한 분을 중심삼고 하나되어야 합니다. 하나되어 가지고 사탄권에 대해 승리했다는 환희와 영광의 결정적인 터전을 갖지 않고서는 참부모는 이 땅 위에 현현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영계의 수많은 선조들을 중심삼고 볼 때 그 가운데는 나라의 주권자도 있을 것이요, 각 도면 도의 책임자도 있을 것이요, 군이면 군의 책임자도 있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다른 역사적 배경을 가진 나라에서 책임을 수행했던 군주와 수많은 백성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주권자들이나 수많은 군주들이 참부모를 자기들이 소원하던 중심된 분으로 모셔야 되고, 국가의 각 부서면 부서에서 책임을 하던 그들도 '이분이야말로 우리가 소망하던 참부모이시다'라고 모실 수 있는 기준이 결정되어 있어야 합니다. 수많은 나라에서 백성의 자리에 있던 수많은 영인들이 참부모를 모시는 데 있어서 통일되어 있다, 하나되어 있다고 하는 결정적인 영적 승리의 터전을 갖지 못하고는 참부모는 지상에 현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지금까지 사탄이 영적으로 수많은 나라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지상에서도 사탄은 수많은 나라를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수많은 국가를 중심삼은 군왕이 있고, 도 책임자라든가 군 책임자라든가 하는 책임자들이 있습니다. 사탄을 중심삼은 조직 편제가 지상에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영적으로 승리한 참부모를 중심삼은 하나의 통일된 조직 편제를 중심삼고 공격하는 놀음을 개시하기 위한 것이 이 지상에 참부모의 현현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전체 영계를 동원해 가지고 사탄을 굴복시킨다는 것입니다.
참부모를 중심삼고 볼 때, 지금까지 이 땅 위에 왔다 간 영인들은 천사장권에 해당합니다. 지상에 남아 있는 사탄권은 천사장의 자리에 서서 하늘의 법도를 어긴 죄를 범한 원수 사탄이라는 거예요. 천사세계를 동원하여 이 원수 천사장을 굴복시키기 전에는 지상 낙원권이 형성되지 않는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가 지상에 현현해 가지고 하나의 국가적인 터전을 중심삼고, 하나의 주권을 중심삼고 일시에 세계 주권국가 대열에 평면적으로 올라가고 세계기준까지 올라가야 하는데, 해방 직후에 기성교회와 이 민족이 받들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수난길을 거쳐왔던 것입니다.
영적으로 승리한 영광된 부모의 권위를 가지고 이 땅 위에 와서 무엇을 했느냐? 백성이 있어야 중심 책임자가 있을 것인데 백성이 없었고, 또한 백성을 중심삼고 조직 편성을 할 수 있는 여러 책임자들이 있어야 국가형성을 할 것인데도 불구하고, 기독교가 그것을 대신할 수 있는 입장에서 반대하므로 이것을 잃어버렸기에 참부모의 권위와 위신을 잃어버리고 수난길을 가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 위에 승리의 터전을 소망하는 인류 앞에 다시 한 번 개인으로부터 이것을 불러일으키는 운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다시 지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개인을 세워 나와야 합니다. 가정이 승리할 수 있는 터전을 세워 나와야 합니다.
종족과 민족과 국가의 형태를 거쳐 승리권을 넓혀 가지고 하늘의 부모로서 이 땅 위에 올 때는 본연의 기준을 다시 한 번 복귀시켜 하늘 승리의 영광과 지상 승리의 영광이 맞부딪칠 수 있는 결정적인 때를 맞이하기 위한 노정을 가려내지 못한다 할진대는, 이 지구성은 영원히 사탄권내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됩니다. 이것을 벗어나기 위한 것이 이 지상의 복귀섭리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선열들이 걸어 나온 것은 무엇이냐? 역사과정에 있어서 종적인 역사를 횡적으로 탕감해 나와야 합니다. 그러므로 종의 종의 역사를 거쳐야 되고, 종의 역사를 거쳐야 되고, 양자의 역사를 거쳐야 되고, 아들의 역사를 거쳐야 되고, 부모의 역사를 거쳐야 되는 것입니다. 영육을 중심삼고 일시에 이룰 수 있는 하나의 뜻이 분립됨으로 말미암아 영적인 승리의 영광된 터전을 남겨 놓고 다시 지상노정에 있어서 종의 종의 생활에서부터 출발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인류가 살고 있는 이 고통의 세계, 이 사망세계의 제일 밑바닥에서부터 하나님의 한을 풀기 위한 싸움의 행로를 전개했던 것이 통일교회의 역사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은 모르고 나왔지만 그 배후에는 피어린 투쟁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잠자는 시간에도 여러분이 쉬는 시간에도 발전의 일로를 책임지고 사망과 뒤넘어치며 싸우는 하나의 중심존재가 있어야 되는데, 그 중심존재가 인류 앞에 나타나 영광으로 모심을 받아야 할 참부모라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의 종의 운명을 가려내기 위한 수난길을 거쳐, 종의 자리에서 신음하던 민족을 대신하고 백성을 대신한 싸움의 노정에서 사탄과 일대 일의 대결을 하여, 지상에서 종의 종으로서 이기지 못하였던 것을 이겼노라고 할 수 있는 결정적인 판도를 만들어야 했고, 또한 종의 입장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아들을 모시는 데 있어서 어느누구보다도 충신이 되겠다고 몸부림치고, 충성과 절개를 다 바쳐 가지고, 생명을 내주는 한이 있더라도 인류가 가야 할 전통적인 종의 내연을 결정짓는 싸움의 노정을 거쳤다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리하여 종의 싸움의 터전 위에서 양자의 신세를 대신하여 역사적인 책임을 지고 사탄을 굴복시키기 위한 판가리 싸움을 한 역사과정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통일교회 역사에는 여러분이 모르는 가운데 흘린 피눈물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양자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이 하지 못했던 것까지도 해낼 수 있는, 아들보다 낫다고 칭찬받을 수 있는 기준까지 모진 싸움의 행각을 거쳐 가지고 하늘로부터 공인받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사탄은 패하고 하나님은 승리하고, 영계에서는 지상이 승리하였다고 찬양할 수 있고, 영계에 있는 수많은 나라의 군주는 물론 그 백성 전체가 합하여서 지상의 승리의 양자권을 획득하였다고 찬양할 수 있는 결정적인 기반이 닦여지지 않고는 아들의 자리가 닦아질 수 없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 양자의 자리에서 결정된 승리를 기반으로 해서 아들의 사명을 하는 자리에 들어오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종은 천사장의 입장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상대이념을 허락할 수 없고, 양자의 입장에서도 기쁨의 자리에서 상대이념을 허락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들의 자리에 서야 비로소 상대이념을 허락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정을 이룰 수 있는 권한을 지상에서 부여받을 수 있었다는 사실이 통일교회의 역사에 있어서 얼마나 고마운 역사이고 얼마나 고마운 한때인가 하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때가 바로 1960년도, 민족과 국가, 수많은 종파와 수많은 개인들이 입을 모으고 손길을 들어서 통일교회를 몰아대던 핍박의 절정에서, 생명을 각오하고 생사의 판가리를 하지 않으면 안 될 결정적인 찬스에서, 모진 핍박 가운데에서, 모진 조롱 가운데에서, 모진 시련밖에 남지 않은 그런 극한 자리에서 생명을 걸어 놓고 단판의 판가리 놀음을 한 것이 1960년도에 있었던 성혼식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 성혼식은 한날 하루의 행사로 끝났지만, 그 배후의 역사에는 영계에서 수천억 이상의 개인과의 싸움에서 승리의 영광을 갖춘 참부모의 영광된 모습을 지상의 영광으로 맞이했더라면 기독교와 수많은 종파를 발전시켜 가지고, 세계적 민주세계를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만드는 목적은 이 한 분을 모실 수 있는 자유로운 환경을 부여하기 위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도리어 모진 핍박의 화살을 받지 않을 수 없는 원한의 자리에 휘몰아침을 받아 가지고, 여지없는 슬픔과 고통 가운데에서, 역사적 재탕감의 노정, 종의 종으로부터 종의 노정을 거치고 양자의 노정을 거쳐 아들의 자리까지 올라올 때까지의 눈물어린 슬픈 역사적 사연이 있었다는 것을, 오늘날 통일교회의 그 누구도 모르고 있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됩니다.
민족과 다시 상봉할 수 있는 자리에 서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면서, 소원하였던 것을 바랄 수 없는 자리에서 죽어갔던 한, 그 한이 예수님에게서 그쳐진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한이 되었고 이스라엘의 한은 하나님의 한과 더불어 영계에 있는 수많은 영인들의 한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풀기 위해서 가는 길이 오늘날 한국을 중심삼은 삼천리 반도에서 통일교단을 중심삼고, 외롭고 서글픈 행각의 노정 위에서 핍박을 받으며 통일교회를 주도하는 문선생이 가고 있는 길이라는 것은 아무도 몰랐던 것입니다.
그 한 분이 쓰러지는 날에는 영계의 갈 길은 막혀 버릴 것이고 나라와 민족의 갈 길이 막혀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잘 알기 때문에 여러분이 아버님이라고 부르고 있는 그분은, 여러분이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그 사람은 스스로의 행동도 자유롭게 할 수 없고, 하루의 행동, 한 낮, 한때의 행동도 뜻과 더불어 보조를 맞추어야 하고, 한때의 생각도 뜻과 더불어 보조를 맞추어야 하고, 느끼는 모든 감정도 뜻과 더불어 보조를 맞추어야 합니다. 이렇게 그 누구도 모르는 숙명적인 전쟁터에서 고달픈 싸움의 행각을 계속적으로 책임지고 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통일교회 교인들 가운데 그 누가 알고 있습니까? 그 싸움을 아직까지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 싸움이 중단된 것이 아니라 고차적인 싸움으로서, 입체적인 싸움으로서 전개할 시점에 놓여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아들의 인연을 갖추어 가지고, 아들로서 한을 남겼던 예수 그리스도의 한스런 민족복귀의 기반을 중심삼고, 국가복귀의 기반을 중심삼고 또다시 몰려나서는 안 되겠기 때문에, 다시 몰려나면 마지막이 되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지 몰려나지 않는 그 길을 찾아 나가려니 내적인 싸움의 고충이 얼마나 많았으며, 내적인 고독이 얼마나 심하였던가 하는 사실을 여러분은 망각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밤이면 하늘의 별을 바라보면서 영원히 영원히 반짝이는 별빛, 변하지 않고 빛나는 별빛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통일교회를 책임지고 가는 지도자의 발걸음도 천세만세 빛날 수 있는 지상의 기반을 결정지을 수 있는 발걸음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만일에 빛을 발하지 못하게 될 때는 암흑 천지가 되어 버린다는 사실, 몇억만 년이 가도 생명의 노정을 재현시킬 수 없는 운명길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한마디의 말, 한 가지 행동에 얼마나 주의를 하고 있느냐는 것을 여러분이 생각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처녀들의 일생에 있어서 중요한 일 중의 중요한 일이 무엇이냐 하면 결혼하는 일일 것입니다. 한 남자의 아내가 되기 위한 길을 결정해야 하는 입장에 선 가냘픈 처녀의 사정을 생각해 보게 될 때 한 남자를 관찰해야 할 안팎의 인연이 얼마나 얼마나 간절하겠습니까? 저분이 나와 더불어 영원히 변하지 않을 수 있는 남성이 되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 고대하는 마음, 알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간절하겠습니까? 그것을 한번 결정하게 되면 일생이 좌우되는 것입니다.
선한 남자를 중심삼고 결정하는 날에는 행복이 열려 나지만, 선하지 못하고 불의한 남자를 결정하는 날에는 자기의 일생은 영영 불행으로 말려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자기 일신의 불행으로만 끝난다면 다행한 일이지만, 천추만대의 후손까지 불행의 도가니에 녹아 들어가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므로 종족의 운명이나 개인이 갈 길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며칠 밤을 새워 가면서 씨름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거기에서 누가 권고를 해주고 안팎을 가르쳐 주면서, 이것은 이렇고 이래서 좋다는 말을 들으며 결정지을 수 있는 자리에 선 사람이라면, 그는 무한히 행복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혼자 결정해야 하는 입장에 섰을 때는 얼마나 심각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개인의 운명길을 가려 가기 위한 결정을 짓기 위해서도 이렇게 참담한 인생살이가 있는 것을 생각해 볼 때, 한번 도장을 잘못 찍게 되면 억천만세가 걸려들어가게 되니 얼마나 심각하겠습니까? 나라의 운명이 망하는 것은 물론이요, 역사의 방향이 뒤틀려 들어갈 것이고, 현재의 세계 30억 인류가 함정에 빠지는 것이요, 역사적인 소망을 가지고 왔던 수많은 선지선열들은 낙망과 절망의 길로 저끄러져 나간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생각할 때, 그런 상황에서 예스(yes)냐 노우(no)냐를 결정하는 순간에 처한 그 자리가 얼마나 심각하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 자리에 설 때에는 세상의 사랑하는 아내가 문제가 아니요, 세상의 아들딸이 문제가 아니요, 세상의 부모가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내도 이런 기준을 결정해야 사는 것이요, 아들딸도 이런 기준을 결정해야 사는 것이요, 부모도 이런 기준을 결정해야 사는 것입니다. 책임자에 있어서는 사랑하는 처자로부터 부모로부터 그 나라 백성 전체를 중심삼은 것은 물론이지만 이 지구상 전체가 좌우되는 이런 엄청난 자리에서 결정하는 순간을 거쳐 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복귀의 노정입니다.
그런데 복귀의 노정은 한번의 결정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개인이 복귀되면 가정을 중심삼고 그런 싸움을 거쳐 결정지어야 하는 것이요, 가정의 복귀가 끝나면 종족을 새로운 길로 인도하기 위한 탕감의 노정이 또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종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종족이 그 길을 넘어섰더라도 민족이 가려 가야 할 그 길을 나서기 위해서는 또 민족적인 탕감노정을 결정지어야 할 싸움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민족을 넘어 국가라는, 하나의 주권을 복귀할 때까지 싸워야 합니다. 예수님이 한을 품고 십자가 상에서 사라져 가면서도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하셨는데 소망하던 국가 주권을 결정하여, 그것을 하늘나라로 결정지어 아버지 앞에 봉헌해 드릴 수 있는 그 자리에 섬으로 말미암아 국가적인 지상 승리의 기준이 형성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 보게 될 때, 통일교회의 여러분은 나라가 있느냐? 나라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나라가 없다는 것입니다. 나라가 없는데 가정이 있을 수 있느냐? 있다고 해도 그런 가정은 원수들이 와서 농락하는 거라구요. 그런 가정의 자식들은 원수의 손끝에 다 사라지는 거예요.
우리의 소원은 통일! 통일이 뭐냐? 남북한 삼천리 반도를 우리의 나라로 품을 수 있는 그 날을 맞는 것이 우리의 소원입니다. 이 소원을 이루어야 됩니다. 밥을 먹을 때나, 자나깨나, 오나가나 죽더라도 이 소원을 위해서 죽어야 됩니다. 그것은 부모의 소원임과 동시에 그 인연과 그 핏줄을 따라 태어난 아들딸의 소원입니다. 따라서 그 소원은 부모가 이루지 못하면 아들딸들이 이루어야 되는 것입니다.
영계에서 승리적 영광의 터전을 결정짓고, 이 땅 위에서 한 나라와 더불어 승리권을 결정지어 하늘나라와 지상의 나라가 통일된 자리에서 아버지께서 영광의 선포식을 하기 전에, 만일 선생님이 이 지상에 없게 될 때는 여러분은 불쌍한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은 '그러면 부모의 길을 갈 수 없는 것 아니냐. 그러니 참부모를 모시는 자녀라는 명분을 가진 우리는 생명이 다하기 전에, 죽기 전에 이 나라를 복귀해야 되겠다'고 해야 됩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한과 4천년 만에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소원이 해원성사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죽어도 그 나라를 붙들고 나라를 찾으면서 죽어야 되겠습니다. 살아도 그 나라를 위해서 살아야 되겠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참부모의 인연을 따라 세움받은 아들딸의 사명인 것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밥을 먹어도 그 나라와 그 백성을 위해서 먹어야 되고, 잠을 자도 그 나라 그 백성을 위해서 자야 되고, 사는 것도 그 나라 그 백성을 위해서 살고, 죽는 것도….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여러분들은 이번 이 길을 나서기 전에 언제 하나님께서 이렇게 수난의 길을 걸어오셨다는 것을 생각해 봤습니까? 내가 이와 같은 은사의 자리에 서게 된 것에 대해 언제 한번 자각해 봤습니까? 여러분은 이러한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여러분의 몸과 마음을 중심삼고 볼 때, 자신이 수천년 역사의 한을 남기고 있음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부모가 간절히 바라시는 효성의 도리는 무엇이냐? 여러분이 그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원은 무엇이냐? 여러분들이 해방된 민족으로서 사탄의 참소를 받지 않는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부모를 중심삼고 악의 주권을 물리치고 선의 주권을 갖추어 가지고 영계의 영광의 터전과 지상의 영광의 터전이 일치될 수 있는, 하늘을 대신하고도 영광, 땅을 대신하여도 영광이라 할 수 있는 가정이 결정될 때, 통일신도들이 바라는 소원인 통일이 성사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나라를 바라보게 될 때, 우리가 가는 길 앞에는 반대하는 무리가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우리를 반대하고 있는 기성교회가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럼 이것을 굴복시키는 길은 무엇이냐? 싸움으로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반대하다가 지치고 반대하다가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는 자리에까지 극복해 나가야 됩니다.
복귀의 원칙을 중심삼고 볼 때, 통일교회가 종족의 판국을 가려 나왔다 할진대, 종족이 가야 할 길은 민족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길을 막고 있는 것이 누구냐? 기성교단입니다. 따라서 이 기성교단을 굴복시키지 않고는 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기성교단을 복귀시키는 날에는 그 앞에 민족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가는 길을 막은 자들이 누구였습니까? 기성교단인 유대교와 기성주권인 이스라엘 나라가 아니었더냐? 예수님이 타파하고 가야 할 것이 유대교와 이스라엘 주권이 아니었습니까? 그 다음에 그 주권을 중심삼고 로마를 격파해 버려야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뺄 수 없는 기독교의 전통적 사상이며 하나님의 섭리적 골수의 노정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남편을 모시고, 아들을 낳아서 기르기 위해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럴 수 있는 아낙네가 못 되어 가지고는 안 됩니다. 먼저, 해와가 타락했기 때문에 해와가 하나님 앞에 유린했던 것을 내 일생에서 벗겨 버려야 되겠다고 해야 됩니다. 먼저, 영계에 있는 수많은 선조들이 볼 때에 지상의 여자로서, 해와로서 이겼다고 공인받을 수 있는 내가 되어야 합니다. 영계의 공인을 받는 것은 물론이요, 지상의 통일교회 여자 신도들은 지상의 어떤 종파 어떤 교단의 여자보다도 낫다는 공인을 받아야 됩니다. 그러지 않고는 사탄권내에서 망해 들어가는 현재의 기성교회를 굴복시킬 수 없습니다.
내가 아무리 가냘픈 여자라 해도 그 배후의 인연이 크면 그 여자는 혼자의 몸이 아닌 것입니다. 만일에 한 나라의 황후라면 그 한 사람은 국가와 민족을 대표하는 여성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거동을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전통을 따라가야 되는 것이요, 전통을 따라 살아야 하는 것이요, 전통을 따라 행동해야 하는 것이요, 전통을 따라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나라가 부패하는 것을 보면, 이번 선거공약에도 그런 문제가 제기되어 있습니다. 박대통령이 부패를 근절하겠다고 선거공약까지 했습니다. 그러면 부패를 근절하는 데는 어디서부터 할 것이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남자들이 썩었습니다. 남자들이 썩었으면 여자가 썩지 않든가 아들딸이 썩지 않든가 둘 중의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남자가 썩었으면 썩은 남자를 중심삼고 따라가는 그런 추종자들 가지고는 아무리 노력해 봤자 대한민국의 부패상을 뿌리 뽑을 수 없는 것입니다. 남자가 부패했어도 여자는 부패하지 않아야 된다 이거예요. 부모가 부패했어도 자식은 부패하지 말아야 됩니다. 그러면 일어설 수 있습니다.
이렇게 부패한 남자들을 중심삼고 나라를 망쳐 놓은 현 실정을 바라보게 될 때, 여자들은 단결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여자들은 소망의 하늘나라의 주권을 상속받을 수 있는 선봉에 서야 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이 전통적인 사상을 본받아 가지고 사탄의 화살에, 독약 묻은 창에 맞고 쓰러져 가는 남자들을 그냥 놔둬서는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방부제를 발라야 됩니다. 방비책을 강구해야 되겠습니다.
세상의 부패해 가는 사회 환경을 바라보게 될 때, 남자들을 위주한 사회 환경을 우리들이 불신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사탄이 불신을 심었는데 불신의 열매가 사탄을 중심삼고 맺혀지는 데 있어서 여자들까지 맺혀져서는 안 되겠다는 거예요. 그러니 여자들이 단결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가는 신앙의 길은…. 지금까지는 타락의 동기가 여자이기 때문에 6천년 역사를 가려 나오는 데 있어서 여자들이 희생해 나왔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를 통해서 정성을 들인 사람은 남자가 아니라 여자들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통일교회에서도 정성을 들여야 할 사람은 누구냐? 여자들입니다. 이것을 여러분들이 고맙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 통일교회에 있어서 심판하는 데는 어디서부터 심판할 것이냐? 자기 자체내에서부터 심판해야 된다 이거예요. 그러면 무엇을 중심삼고 심판할 것이냐? 통일교회에 있어서는 개인을 중심삼고 심판하는 때는 지나갔습니다. 통일교회에서 축복받은 사람은 개인을 중심한 참소조건에는 걸리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가정을 중심삼은 탕감조건을 놓고는 심판받아야 됩니다. 가정을 중심삼고 탕감조건을 세운 가정 전체가 연결됨으로 말미암아 종족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에서 축복을 받은 가정 전체가 일심동체가 되어 가정적 탕감노정을 걸리지 않고 하나되어서 넘어가는 날에는, 종족적 승리의 터전을 맞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자리는 예수님이 3년 공생애노정에 있어서 종족적 승리적인 안식의 터전을 갖추지 못하고 죽어갔던 한을 풀 수 있는 자리인 것입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유대교와 하나되어야 합니다. 알겠어요? 또 예수님의 새로운 복음을 중심삼은 기독교가 십자가의 자리가 아닌 영광의 자리에서 유대교와 하나되어 가지고 이스라엘의 종족 편성을 했더라면, 이스라엘 나라는 예수님을 위주한 나라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못 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탕감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여러분은 이스라엘 가정들이, 이스라엘 가정과 아낙네들이 예수님 앞에 책임하지 못했던 것을 탕감해야 됩니다. 이것은 여러분에게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 위에 왔는데 신랑으로 왔습니다. 그러니 신부가 나와야 됩니다. 그런데 신부는 어디에 있느냐? 사탄편에 있습니다. 하늘편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선과 악의 모체가 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왔다갔다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왔다갔다하지요? 통일교회 교인이 되어 전도 나가 가지고도 '안 나갔으면 좋았을 텐데 나갔어'라고 하면서 쉽게 왔다갔다한다는 것입니다. 배가 조금만 고파도 '왜 이렇게 나와 가지고…' 하며 왔다갔다 해요, 안 해요? 그러면 안 됩니다. 절대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신부는 어느 편에 있다고요? 「사탄편에 있습니다」 그런데 사탄편에서 신부가 나타났다고 하면 사탄들이 가만둘까요? 그 신부는 하늘편 신부인데 사탄이 미워하는 사람일까요, 아니면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일까요? 「미워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신부는 이렇게 사탄이 미워할 수 있는 자리에 있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입장에 있기 때문에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랑 되시는 주님이 이 신부를 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사탄세계에서 양보해 주든가, 즉 '어서 인수하십시오. 여기 있습니다' 하고 모셔 주든가,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찾아와야 합니다. 찾아오려면 신부가 누가 주인인 줄 알아야지요? '내 주인은 이분이 아니라 다른 분이다'라고 하면서 자기 주인을 알아야 됩니다. 그걸 알아야지요? 또 주인도 상대편에서, '본래는 내 처가 아니고 당신 처인데…' 하는 입장에 서게 된다면 찾아올 수 있습니다. 그러면 찾아가도 꼼짝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꼼짝 못할 수 있는 패들을 만들어 놓은 것이 유대교입니다, 유대교.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면 눈을 까박까박하다 할 수 없이 넘겨줘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교가 예수님을 받들지 않으니까 이스라엘 나라가 받들어야 되는데 이스라엘 나라는 사탄편입니다. 그러니 사탄이 그냥 넘겨 줄 것 같아요? '너 뭐야, 요놈의 자식, 목을 잘라 버리겠다'고 하는 거예요. 이래서 예수님을 죽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무엇을 찾으러 왔어요? 남자 찾으러 왔어요? 형님 찾으러 왔어요? 아버지 찾으러 왔어요? 동생 찾으러 왔어요? 누구를 찾으러 왔어요? 「신부요」 신부가 여자야, 남자야? 「여자요」 그 신부가 어떻게 생겼는지 난 모르겠어요. 어떻게 생겼을까요? 어떻게 생기기는 뭐 어떻게 생겨요? 여기에 앉아 있는 여러분같이 생겼습니다. 그러니 여자예요, 남자예요? 「여자요」
여자는 자기한테 좋은 것은 좋아하고, 나쁜 것은 싫어하고, 자기 것보다 조금만 더 좋으면 헤헤하고 좋아합니다. 좋은 것은 '좋다' 하고 나쁜 것은 '난 싫다' 하는 패들입니다. 여자들 그렇죠? 여자들이 시집갈 때 '나는 시집가서 고생해야 되겠다. 시집가서 고생해도 괜찮아' 그러면서 시집가는 여자가 있어요? 그런 종자가 있어요? '내가 시집을 가는 것은 사랑받기 위해서, 잘살기 위해서, 이러이러하기 위해서 가는 것이다'라고 합니다. 그런 패들이 바로 여자입니다.
여러분은 남자야, 여자야? 「여자입니다」 젊은 여자야, 늙은 여자야? 「젊은 여자입니다」 여러분들은 젊은 여자이지요? 그러면 예수님이 신부삼는 데 할머니 신부를 원할까요, 아가씨 신부를 원할까요, 아주머니 신부를 원할까요? 아가씨 신부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순 살 쯤 된 신부라면 어떻겠어요? (웃음) 웃을 일이 아니라구요, 심각한 문제라는 거예요. 그러면 여자 중에서 최하여야 해요, 최고여야 해요? 가시밭길을 헤치고 핍박의 화살을 물리치고 홀로 절대적 신념을 가지고 싸워 이긴 예수님이 신부를 찾겠다고 궁리하는 자리에 와서 '당신은 신랑의 자격으로 와서 신부를 찾기 위한 궁리를 하고 있지요? 그 신부는 세계에서 일등가는 승리한 신부가 아니겠습니까' 하는 물음에 '그렇소' 할 때 '내가 그런 신부요' 하고 나온다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30대 청년으로서 '그런 신부는 나는 싫소' 한다면 진짜 인류를 대표하여 찾아온 신랑 자격이 됩니까? 여자들이 가만히 있겠어요? 생각해 보세요. 그런 신랑이라면, 복덩이예요, 아니예요? 여러분, 이걸 알라구요.
그러면 예수님이 30세쯤 되어서 신부를 맞이할 때, 나이 많은 사람이 찾아오기를 바랄까요, 30전의 얌전하고 보화같이 부드러운 각시가 찾아오기를 바랄까요?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어떤 여자를 바랄까요? 20대가 좋을까요, 30대가 좋을까요, 40대가 좋을까요? 어떤 사람이 좋을까요? 「20대가 좋습니다」 알긴 아는구만. 예수님이 서른 살인데 신부가 서른 살 이상 되면 기분 좋아요, 나빠요? 어울린다고 그래요, 안 어울린다고 그래요? 안 어울린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여자를 먼저 만들고 남자를 만들었어요? 남자를 먼저 만들고 나서 여자를 만들었다는 겁니다. 30대 예수님 앞에 80대 할머니가 나타났다면 어때요? 좋아요, 싫어요? 「싫어요」 좋다는 사람 손들어 봐요. 싫다는 사람 손들어 봐요. 부끄러워서 손 못 들겠지요? 신랑을 맞이하는 데 있어서, 처녀들이 말이야, 순정을 잃지 않은, 아직까지 젊은 처녀들은 부끄러워서 손 못 들거라구.
이 땅 위에 있는 여자들이 동맹파업해 가지고 '당신은 나이 많은 사람을 신부로 맞지 않으면 신랑될 자격자가 못 됩니다'라고 해야 되겠어요, '당신은 수난의 길을 통해서 역사를 대표한 주인으로 오시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들 가운데에서 일등가는 신부를 택해서 맞이해야 하지 않겠어요?' 라고 해야 되겠어요?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일등 신부가 될 만한 사람을 추대해 드려야 되겠지요?
이렇게 추대받을 수 있는 아가씨는 미스 하늘나라로 당선되어야 됩니다. 그러면 당선될 수 있는 자격자는 얼굴만 잘나 가지고 되느냐? 아닙니다. 그럼 무엇이 잘나야 되느냐? 마음만 좋아서 될 것이냐? 신부가 무엇을 찾아서 시집 갑니까? 마음을 찾아서 가요? 신랑의 무엇을 찾아가는 거예요? 사랑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심정문제에 있어서 꼴찌가 되어야 되겠어요? 일등이 되어야 합니다. 역사적인 일등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그런 각시가 있다면 그 각시는 나이 많은 신부 대표자 앞에 충성을 다하여 모셔 가지고 '당신이 받은 복을 나에게 나누어 주소' 하여 그분의 것을 상속받아야 됩니다. 그래서 90세 할머니에게 상속받고, 다음에 80세 할머니에게 상속받고…. 내려오는 거예요. 그래서 70세, 60세, 50세 아주머니에게 상속받고…. 그렇게 해서 10대까지 내려와야 합니다. 타락은 10대에서 했기 때문에 10대권까지 내려와야 됩니다.
그 신부는 심정적 사랑의 십자가의 노정을 거쳐야 됩니다. 피어린 수난길을 거쳐야 하는 것입니다. 하늘의 낭군을 찾아가는 데는 사탄이 갖은 방법으로 자기를 유린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렇겠지요? 그래서 꽁꽁 다짐한 절개를 품고 세상의 남자 그 누구라 하더라도 거들떠 보지 않는 일편단심으로 역사의 출발에서부터 역사의 종착지까지 가야 합니다. 그 절개지정을 품고 남아지는 자리에 서야만, 그런 심정을 품고 개인도 지나가고, 수많은 종족도 지나가고, 수많은 민족도 지나가고, 세계도 다 지나가야만 영광으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수난길에서 허덕이는 가운데서 사랑을 맺게 된다면 수난길에 허덕이는 주님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그래서 여자는 이런 수난길을 거쳐 와야 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역사를 두고 볼 때, 여자들은 지극히 어려운 수난길을 거쳐왔습니다. 어떤 가문을 보면, 내가 아는 사람들 가운데는 이런 여자도 있습니다. 시집을 가서 시부모를 모시는 데 밥상을 들고 안방에 들어가서 시집 식구들과 밥을 같이 먹지 못하는 여자도 있습니다. 50세가 넘도록 그렇게 사는 사람을 내가 봤습니다. 비참하지요? 잠자리는 남이 모르는 으슥한 자리요, 밥 먹는 자리는 부엌의 부뚜막이었습니다. 고양이가 친구가 되고, 강아지가 친구가 되는 자리에서 밥을 먹고 살았다 이겁니다. 이런 비참한 역사를 지내 오면서도 남겨야 할 것은 오로지 일편단심이었습니다. 낭군을 위하여 충성하는 그 마음이 변할소냐 하면서….
겨울이 되어 손이 갈라지고, 여름이 되어 몸이 진무르는 한이 있어도 그 마음에서 남편을 위하는 일편단심의 절개지정을 남겼던 것입니다. 그러한 어머니가 죽으면 천년이고 만년이고 그 어머니의 수난을 기억해 가지고 그 어머니가 영계에 가서 하늘의 복을 받을 수 있기를 빌 수 있는 효자를 세워야 되는 겁니다. 또, 딸이 있으면 어머니가 저렇게 여자로 태어나 고생했으니 하늘나라에 가서나마 복받기를 빌어줄 수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절개를 세워 놓아야만 오늘날 역사적인 이 심정적 전통을 이어받을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통일교회 문선생이 이 길을 출발할 때, 어머니를 맞이하는 데 있어서 18세 아가씨를 그냥 그대로 어머니로 맞을 수 있었겠습니까? 수난의 길을 거쳐야 했습니다.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맨 꼭대기에서부터 하늘의 깃발을 이어받아 가지고, 역사적인 심정적 전통의 인연을 이어받았다고 할 수 있는 내적 기준을 상속받고야 신부의 자리로 나올 수 있었던 겁니다. 그 자리에서는 수많은 사탄들이 자기 것을 빼앗아 간다고 떠듭니다. 동네가 떠들고, 나라가 떠듭니다. 세계가 반대합니다. 반대해요, 안 해요? 결국 그 한 분 때문에 그런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두 가지 방법밖에 없습니다. 찾아오지 못하면 빼앗아 와야 됩니다. 신부를 사탄세계에서 데리고 오는 데는 찾아오지 않으면 빼앗아 와야 합니다.
여러분의 부모들은 여러분이 통일교회를 가는 걸 왜 싫어하는지 알아요? 빼앗기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빼앗아 와야 합니다. 지금도 축복가정 남자들이 선생님이 가라 할 때 자기 부인들을 보낸 거예요? 선생님이 빼앗아 온 것입니다. 여러분은 빼앗기는 자리에서 지금까지 반대를 하면서 별의별 놀음을 다 했습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탕감복귀해야 됩니다. 탕감복귀해야 되겠나, 안 해야 되겠나? 빼앗겨야 됩니다. 언제든지 그렇게 해야 됩니다. 여기에 남자가 반대하면 그건 사탄입니다.
이번에 동원된 7백 가정은 아직까지 약혼단계입니다. 도깨비 같은 녀석들은 그저 헐떡헐떡하지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시점에서 부인을 내보내지 않은 녀석은 망합니다. 그런 사람은 남입니다. 남편으로 생각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통일교회에서 제거되어야 합니다. 원리가 그렇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찾아올 수 있는 자리에서 허락되지 않았던 것을 빼앗아 와야 할 입장에서 원수시했던 한이 선생님 일대에 남아 있으니, 이것을 어떻게 탕감할 것이냐? 탕감하는 데는 제일 사랑하는 사람을 세워서 탕감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작전입니다. 그렇지요?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 중에 자기가 제일 사랑하는 사람을 희생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면 선생님이 제일 사랑하고 제일 가까운 사람은 누구냐? 축복받은 가정입니다. 따라서 선생님의 가정이 안식하려면 여러분이 이것을 탕감해야 됩니다. 그러지 않고는 선생님의 가정이 안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새로운 가정적 울타리를 만들어 가지고 이 땅 위에 새로운 전통을 세워야 됩니다.
여러분, 누구를 빼앗아 와야 된다구요 ? 「신부요」 신랑을 빼앗아 와야지요? 「아니요」 신부를 빼앗아 와요? 「예」 그러면 여러분이 신부예요, 아니예요? 「신부입니다」 자기가 신부라고 생각하는 사람 손들어 봐요. 하기야 아직까지 처녀의 입장에 있는 사람은 신부가 아니라구요. 신부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웃음) 이 기준에 딱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신부를 빼앗아 오느냐? 누가 찾아와야 되느냐? 신랑이 찾아와야 됩니다. 신랑이 찾아온다면 어때요? 세계에 있는 여자들을 한꺼번에 몽땅 찾아온다면 남자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연굴복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여자들을 다 찾아오고 빼앗아 왔다면 남자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절대 복종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싫으면 관두라는 겁니다. 50이 되든 60이 되든 혼자 늙어 죽으라는 겁니다. 그리 되면 싹싹 빌면서 '종도 좋고 다 좋소' 이렇게 되는 겁니다. 알겠어요? 이래서 세계의 여자 남자가 딱 한군데 다 모이면 세계 통일이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통일 방안은 간단한 거예요. 여자나 남자나 한편으로 모아만 놓으면 잘났다는 남자들은 돌아간다는 겁니다. 이 놀음 한다는 거예요. 그러니 섭섭하지만 축복받은 가정은 모조리 동원입니다. 누구는 남고 동원하라고 그랬어요 ? 모조리예요, 머저리예요? (웃음) 여러분은? 「모조리」 남편은 머저리이고 여러분은 모조리입니다. (웃음)
선생님은 핍박을 받았어요, 안 받았어요? 「받았습니다」 누구 때문에 핍박을 받았어요? 여자 때문에 받았습니다. 왜 여자 때문에 핍박받았느냐? 이건 통일교회 가지 말라고 해도 동동동 갑니다. '아이고, 나와 사랑하면서 잘살자는데, 내가 잘 해줄 터인데 왜 통일교회 가는 거야' 해도 갑니다. 통일교회에 가서 강냉이 밥을 먹고 보리밥 먹어도 좋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왜? 여기에는 세상적인 사랑이 아니라 참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적인 행복이 아닌 참된 행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행복은 끝나는 것입니다. 한번 뒤넘이치는 것입니다. 하늘 행복은 영원무궁한 것입니다.
직접적인 상대의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여자들이기 때문에 여자들은 통일교회 문선생의 말을 안 들어야 된다? 「잘 들어야 됩니다」 잘 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여러분의 신랑과 선생님을 생각해 볼 때에, 신랑보다 선생님이 더 가깝다는 거예요. 그런가요? 「예」 신랑들이 이 말을 들으면 기분 나쁠 거예요. 거 여러분의 마음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신랑의 말은 틀리고, 선생님의 말을 들으면 가긴 가야 할 텐데 이놈의 남편과 자식이 원수로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는 "그날에는 젖먹이는 여인에게 화가 있다(눅 21:23)"고 했습니다. 이것이 이제 통일교회 축복가정들에게도 걸리는 것입니다. 남편을 가진 여인이 화가 있다는 거예요. 하늘 길을 가는 데 있어서 남편에게도 걸리지 말고 아들에게도 걸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선생님은 걸렸겠어요, 안 걸렸겠어요? 선생님도 걸렸어요? 뜻을 이루기 위한 일편단심으로 신랑의 자리를 찾아가는 데 있어서 모든 남자들이 가지 못하는 자리에까지 가 가지고 신부를 찾아야 됩니다. 죽음의 고비가 몇 고비라도 넘어 가지고 신부를 찾아 넘어갔다는 기준을 세우지 않고는, 세계의 일등 신부를 맞이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치에 맞지요? 그렇지요? 그래 수많은 남자들이 선생님을 반대했습니다. 그저 죽이고 싶었을 것입니다. 몇백 번, 몇천 번, 몇만 번 선생님을 죽이고 싶어했지만 못 죽였습니다. 그래 가지고 남아진 사람이 선생님입니다.
예수님의 한을 풀어야 이스라엘 나라의 한이 풀리기 시작하고 유대교의 한이 풀리기 시작하지요? 그렇지요? 그러면 예수님에게 한이 맺히게 한 것이 누구냐? 신부가 있어서 그랬어요, 없어서 그랬어요? 「없어서…」 없어서 그랬습니다. 그러니 이 한을 풀 수 있는 입장이 되어야 합니다. 알겠어요?
그러면 여러분들이 가는 걸음은 무엇을 위해서 가는 걸음이냐? 하늘 남편을 따라 신부의 자세를 갖추어 가지고 나라를 찾기 위해 가는 걸음입니다.
나라를 찾아야 할 예수님은 유대교와 이스라엘 나라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먼저 예수님을 맞이해야 했던 유대교와 이스라엘 나라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였기 때문에 신부가 가서 맞아 와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신부를 맞이하러 온 예수님을 죽여 버렸기 때문에 신부가 가서 신랑을 맞아와야 탕감복귀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이런 역사의 필연적인 운명의 길이 우리 앞에 가로놓여 있기 때문에, 선생님이 1970년도를 중심삼아 가지고 여러분들에게 동원할 것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알겠어요?
여러분들이 이제 가야 할 길은 다른 데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가는 길은 어디예요? 통일종족은 예수님을 중심삼은 파와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우리가 가야 할 곳은 이방인이라고 쫓아내던 유대교와 마찬가지의, 옛날 하나님께서 준비해 놓으신 교단의 터전을 거쳐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거치지 않고는 이스라엘 나라에 못 갑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통일교회는 하나의 종족을 편성해 가지고 국가와 민족 앞에 공인받아 가지고, 주권 국가의 공인을 받아 가지고 하나의 교단을 형성하여 선생님을 중심삼고 기성교회를 거쳐가야 합니다.
그러면 이 길을 누가 가야 되느냐? 신부가 가야 됩니다. 본래는 신부가 여기에서 와야 하는데…. 신부가 갔다가 다시 오는 거라구요. 신부가 이스라엘 나라까지 가서 탕감해 놓고 돌아와야만 신랑을 맞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그러니 여러분들이 이 길을 가야 되겠어요, 안 가야 되겠어요? 「가야 됩니다」 가야 돼요. 우리 앞에는 이런 노정이 남아 있습니다.
이번 여러분의 3년노정을 중심삼고 세계정세를 두고 볼 때, 아시아에 있어서 일본, 한국, 중국을 중심삼고 세계가 뒤넘이치는 것입니다. 요즈음에 세계가 뒤넘이쳐요, 안쳐요? 앞으로 세계가 뒤넘이치는 것을 여러분이 보게 될 것입니다. 사탄과 하나님이 겨루어 가지고 최후의 결정을 짓는 판가리 싸움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해와가 하늘땅을 중심삼고 뒤집어 놓는 데 판가리의 괴수가 됐던 거와 마찬가지로 한 민족, 한 국가를 대표할 뿐만 아니라, 세계 인류를 대표해 가지고 두 갈래 길을 가려낼 수 있는 선봉에 여자가 서야 됩니다. 이것은 탕감복귀 원칙에 있어서 불가피한 현상입니다. 오늘날 여러분이 어려운 것을 내가 몰랐느냐? 이렇게 몰아냄으로써 여러분의 가정이 파탄되고 남자들은 체통이 형편없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지만 선생님도 이북으로 갈 때, 성진이와 성진이 어머니를 버리고 갔어도 편지 한 통 하지 않았습니다. 그쪽에서 편지가 와도 읽지도 않고 찢어 버렸습니다. 그런 건 보는 게 아닙니다. 편지를 읽으면 사적인 마음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눈물도 흘리게 되고 시시한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는 길은 제자들도 가야 합니다. 타락한 아담의 후손인 인류가 타락권내에 들어 있기 때문에 이것을 복귀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영적인 길을 개척해 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적인 길을 찾아가야 할 기독교인들은 십자가의 운명길에서 피를 뿌리며 갔습니다.
통일교회 신도들도 통일교회 선생님이 가던 길을 탕감복귀해야 되기 때문에, 가정을 버리고 고독단신으로 사탄세계에 있어서 자신의 생명을 도마 위에 올려놓기 위해서, 삼팔선을 넘어 세계적 사탄 공산국가를 찾아가던 선생님의 신세를 여러분은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선생님은 아들딸을 하나님 앞에 온전히 맡기면 망하지 않고 남아질 것을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바쳐 드린 것입니다. 내 아들딸들을 죽이지 못하고 가는 것이 한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산제물로 바쳐 드리고 가운이 돌아오는 그날, 영광의 한 자리에서 만날 수 있기를 바라고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 못 되었다면 그 여자는 이 자리에 못 앉아 있지요? 여러분 가정에 있어서 여러분이 가는 길에 남편이 하나가 못 되면 앞으로 남자는 여러분 앞에 있겠어요, 없겠어요? 갈라서게 되는 거예요. 그런 남자가 있다면 참소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신부의 입장에서 사탄세계를 공격해서 사탄세계를 때려잡아 가지고, 사탄세계를 굴복시켜 가지고 개선장군이 되어서 돌아와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나라가 환영하고, 동네가 환영해야 합니다. 원칙이 그렇게 되어야겠지요? 이렇게 볼 때 우리 뜻의 때가 얼마나 남았는가 하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지금 북괴는 1972년도까지 남한을 침략하겠다는 결정을 내렸고, 아시아 정세뿐만 아니라 세계정세는 급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물이 소용돌이칠 때는 아무 쓸데없는 검부러기 하나가 소용돌이 흐름을 가로막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얼토당토 않은 일인데 세계적으로 나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같이 보잘것없는 몇몇 사람이 움직이는데,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데 세계적으로 나간다는 거예요. 이북이 지금 공산당을 중심삼고 정성을 들이고 있지만, 여러분들은 하늘 부모를 위해서, 하늘 남편을 위해서, 하늘 자녀를 위해서 더 정성들여야 할 이중 삼중의 책임을 짊어지고 있는 축복가정입니다. 알겠어요?
이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몽땅 제물이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가 제물됨으로 말미암아 사위기대가 탕감될 수 있는 기준이 서게 됩니다. 그리하여 이것이 앞으로 새로운 전통의 기반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 이번에 전도 잘 나갔어요, 못 나갔어요? 「잘 나갔습니다」 잘 나갔으면 잘 싸워야 되겠습니까, 못 싸워야 되겠습니까? 「잘 싸워야 됩니다」 틀림없이 잘 싸워야 되는데 '아이고, 배고플 때는 밥을 푸지게 잘먹어야지. 그래야 잘 싸우지' 한다면, 그게 잘 싸우는 거예요? (웃음) 열녀가 되는 데 있어서 극상의 열녀가 되려면 좋은 옷을 입고, 좋은 밥을 먹고, 노래가락을 읊으며 춤추면서 싸워 이겨야지 하면 안 됩니다. 그렇게 싸워서 이기는 법이 있습니까? 큰 승리일수록 악착같이 피땀을 흘리면서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레슬링을 봤어요? 내가 레슬링을 좋아하는데 그래서 좋아하는 거라구요. 진땀 피땀 흘리면서 나가자빠지면서 쓰러뜨리고 이러면서 싸우는 게 좋다는 것입니다. 이번에 김일선수하고 캐나다에서 온 세계에서 제일 힘이 세다는 선수하고 시합을 하는데 김일선수를 업으면 콩알만합니다. 그들이 짓밟고 꺽고 하는데 다 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죽은 듯이 하고 있다가 들려 올라가는 그 힘을 이용해서 말아 가지고 그대로 내리 꽂아 버렸습니다. 선생님은 '저건 내가 쓰는 방법이로구나' 했습니다. 통일교회식 전법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좀 몰리긴 몰렸지요? 몰리긴 했지만 나중에는 떡 반격을 해서 꺼꾸러뜨리는 겁니다.
우리가 목사 찾아가게 되면 뭐 무슨 변명을 하고 별꼴 다 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어떻게 해야지요? 여러분은 전도 나가서 수많은 남자들을 만나 가지고 남자들의 억센 사정을 다 알아야 돼요. 다 부딪쳐 봐야 돼요. 별의별 입장에서 나쁘다는 것은 모두 거쳐 나가야 됩니다. 그러려면 제일 좋아하는 데 가야 되겠어요, 제일 나쁜 데 가야 되겠어요? 제일 싫어하는 데를 가야지요? 그러면 통일교회 교인들이 제일 싫어하는 곳이 어디예요? 그 군의 군수예요? 서장이예요? 그들은 다 우리를 좋아합니다. 그렇지요? 우리를 제일 싫어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기성교회입니다」 기성교회에서도 누구? 「목사요」 목사들입니다.
여러분, 기성교회 목사들 앞에 가기 좋아요, 나빠요? 기분 나쁠 것입니다. '아이고, 내가 어떻게 목사 앞에 갈 수가 있나? 목사는 대학을 나와서 많은 사람들을 지도하는 사람이고 나는 실력 부족인데 어떻게 가나' 하고 생각하지 마세요. '너희는 천사장의 후손이기 때문에 요놈, 내 치마폭에 깔려야 된다' 해야 됩니다. '너 잘 만났다. 이 녀석들, 통일교회를 골려 먹던 요놈의 패들' 하면서 당당한 마음을 가지고 찾아가야 됩니다.
이래 가지고 목사가 여러분의 뺨을 때리는 날에는 여러분의 요리감이 되는 겁니다. 손을 대는 날에는 걸리게 됩니다. 그러면 주일날 당당히 예배시간에 강단에 올라가서 '나 말좀 해야 되겠소. 목사님이 교회는 지키지 않고 민족을 위해서 희생하고 있는 남편 있는 여자의 뺨을 때렸소. 목사님이 나에게 굴복하지 않으면 남편 데려오겠소' 이렇게 공갈 좀 치는 것입니다. (웃음) 그래도 굴복하지 않으면 '대중의 눈들이 있지 않느냐? 대중의 공판을 받아 봅시다' 해 놓고 사연을 쭉 교인들에게 들려주는 것입니다.
원고지 한 서너장 써 가지고 가서 읽어 주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아무개 목사님이 하늘같이 높은 줄 알았더니, 흰 옷 입은 신사인 줄 알았더니 내복은 시꺼먼 것을 입었구만' 한다는 거예요. (웃음) 누구든지 통일교회 여자를 건드리는 날에는 걸립니다. 하나님의 작전은 비상한 작전입니다. 이렇게 살랑살랑 찾아들어가는 거라구요.
그러면 여러분이 가야 할 곳이 어디라구요? 「기성교회입니다」 기성교회 누구를 찾아가야 해요? 「목사입니다」 기성교회 목사를 못 만나면 안 됩니다. 우리는 기성교회를 통해서 가야 됩니다. 꼭대기에서 눌러 내리는 것입니다. 기성교회 목사들 불쌍하지요? 이들을 우리가 구해 줘야 됩니다.
이번에도 그래요. '통일교회의 원리 말씀을 들어 보니 그럴듯한데 내가 여기에 들어올 터인데 차후 대책이 어떻게 됩니까?' 하고 물어 보는 목사들이 수두룩하게 많았습니다. 이번에 왔던 지방교회에 있는 어떤 목사는 한 달에 평균 만 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자, 여러분이 그렇게 잘 싸우기 위해서 나갔으니 잘먹어야 되겠어요, 못먹어야 되겠어요? 「못먹어야 됩니다」 또 내가 잘 싸우기 위해서 나갔으니 희생해야 되겠어요, 편해야 되겠어요? 「희생해야 됩니다」 몸이 원하는 것과 전부 반대라구요. 남이 잠을 열 시간 자면 나는 여덟 시간 자고, 남이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면 나는 네 시에 일어나는 거예요. 또 남이 열두 시까지 일하게 되면 나는 더 늦은 시간까지 일을 해야 하는 겁니다. 다른 도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길을 가는 데 이 주인공님을 모시고 가야 되겠어요, 여러분만 가야 되겠어요? 「모시고 가야 됩니다」 모시고 가야 되겠지. 그렇게 해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날에는, 탕감조건이 성립되는 날에는 하나님의 행차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우리가 2년 동안 잘만 하면 대한민국은 복받을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됩니다. 지금 내가 이것을 맞추기 위해서 구보끼 회장을 중심삼고 입체적인 작전을 추진하는 중에 있습니다. 이렇게 보게 될 때에, 신부가 가야 할 걸음이라는 것은 여러분 일대를 위해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즉, 한 시대를 위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3시대를 위해서 가는 것입니다. 왜? 찾아오시는 신랑은 한 시대를 위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구약시대, 신약시대, 성약시대, 이 3시대를 찾아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찾아오시는 신랑은 종의 시대, 아들의 시대, 부모의 시대를 거쳐 오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시는 그분이 종의 종 시대로부터 종의 시대, 양자, 아들의 시대를 거쳐 부모의 자리까지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가듯이 여러분도 갔다오는 데 있어서 3시대의 사명을 짊어지고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이 3시대를 보게 되면 소생은 한국이요, 장성은 기성교회요, 완성은 통일교회입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통일교회 가정들은 소생이 없고 장성이 없는 완성의 자리에 서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중심삼고 볼 때 소생에 해당되는 것이 이스라엘 나라요, 유대교가 장성이며, 예수가 완성이지요? 앞으로 기성교회가 반대하다가 이제는 반대를 그만두자 하고 반대하는 목사들 사이에 여러 파당으로 갈라져서 환영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라도 반대하다가 나중에는 환영할 것입니다. 2년 동안 여러분은 이런 길을 가야 합니다. 통일교회 신도들이 갈 길은 이 길밖에 없습니다.
그리하여 천상에 영광의 승리의 터전을 결정하고 지상에 승리의 참부모의 인연을 결정하여 민족의 한을 해원성사하고, 국가의 한을 해원성사하고, 세계의 한을 해원성사하여 3시대의 역사의 한을 풀고 영광의 깃발을 들고 로마제국을 대해 기수를 높여 가지고 당당하게 하나의 국가의 형태를 이루어 가지고 나가려 했던 예수의 소원을 이루자는 것입니다. 오늘날 삼천리 반도 대한민국을 중심삼고 여러분이 수고한 공적의 터전을 중심삼아 가지고, 아시아의 기틀을 중심삼아 가지고 미국과 독일을 연결시키고 소련의 모스크바까지 연결시키는 날에 세계는 복귀의 에덴 동산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전체적인 사명을 맡아서 탕감시켜 나가는 가정이 어떤 가정이냐 하면 참된 가정이요, 참부모님의 가정입니다. 알겠어요? 「예」
여러분이 참부모님과 하나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하나되는 것이요, 참부모님과 하나됨으로 말미암아 민족의 한을 해원성사할 수 있는 주체적인 권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이 소망의 일전이 우리의 생애권내에서, 희망의 결전이 우리의 이 기간권내에서…. 생사를 판결할 수 있는 엄숙한 하루하루가 지나가고 있는 이 과정에서 있는 정성을 다 퍼부어 피살을 바치지 못한 것이 한이요, 눈물과 정성을 다해 드리지 못한 것을 한으로 알고 싸워 나가야 할 것이 통일교회에서 축복받은 아낙네들의 사명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거룩한 어버이의 눈물 자국을 덮을 수 있는 눈물을 흘려야 되고, 거룩한 어버이의 핏자국을 내 피로 덮어 하늘의 한이 되지 않게 해야 되겠습니다. 만일 한이 맺혔거든 내가 피를 흘림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한을 풀어 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아들된 여러분의 사명이요, 선생님 가정의 주위에 선 축복받은 가정들의 사명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선생님이 눈물짓기 전에 여러분이 먼저 눈물지어야 되고, 선생님이 수난을 당하기 전에 여러분이 먼저 수난을 당해야 됩니다. 지금까지는 반대였습니다. 이러한 퇴폐적이고 하나님에 반대되는 사상을 일소해 버리고 새로운 전통을 수립하기 위한 아낙네들의 거룩한 행군의 대열이, 지금 삼천리 반도에서 개척의 길을 가고 있는 통일교회의 축복받은 아낙네들에 의해 이루어져야 된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가는 곳곳마다 역사적인 행군이 되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에서는 수천억의 역사적인 우리의 선조들은 승리를 다짐하여 잘 싸우라고 응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이처럼 영계가 동원되어서 응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일의 희망을 바라고 나오는 세계의 수많은 가인적인 종파, 양자격인 가인 세계의 종교권내에서는 어서 빨리 승리하여 자기들의 해방권을 찾아 달라고 재촉하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이것이 내일의 싸움터에서 결정될 것이냐, 아니면 이 밤의 싸움터에서 결정될 것이냐 하는 판가리 싸움을 모색해 나가는 걸음이 지금 여러분이 동원되어서 나가는 노정인 것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여러분이 무엇을 남길 것이냐? 피눈물을 흘리면서 역사적인 투사의 노정을 거치면서 절개 지조를 남기기 위해서 혈혈단신으로 책임을 수행해 나오신 참부모의 전통을 여러분이 처해 있는 가정과, 여러분이 처해 있는 마을과 군, 혹은 도 전체, 삼천리 반도 골짜기 골짜기에, 여러분이 보고 듣고 만나서 인사하는 곳곳마다에 남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 엄숙하고 거룩한 사상을 말없이 그들의 가슴 가슴에 봄볕이 스며들 듯이 심어지게 하고 돌아오는 것이 지금 이때에 사명을 짊어진 여러분들의 입장인 것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에게 슬픔이 있어도 '아무개 아버지! 아무개 애기야?' 해서는 안 됩니다. 애기나 남편과 더불어 가는 것이 아닙니다. 참부모와 더불어 가야 하는 것입니다. 왜 그래야 되느냐? 그렇게 해야 여러분의 가지가 뻗기 때문입니다. 참부모는 뿌리이기 때문에 가지가 뻗어 나가려면 뿌리의 진액을 많이 빨아들여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참부모와 얼마나 하나되고, 참부모의 정성의 일념과 얼마만큼 일치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참부모의 진액을 흡수하여 크게 넓게 가지를 뻗어 가지고 열매를 맺어 참다운 신부의 인격을 갖추어 가지고 가정으로 돌아올 때, 그 가정은 이미 신부 완성한 세계적인 동산의 터전을 계승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남편이 여기에 절대 순응하여 가지고 새로운 가정의 출현이 벌어지게 될 때, 통일가에서 모색하고 있는 천국이 실현되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새로운 종족의 편성이 벌어질 것입니다.
여러분, 지파에 속해 있어요? 속해 있어요, 안 속해 있어요? 지파는 민족을 위하고, 나라를 위할 때 비로소 편성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이스라엘 민족은 12지파를 편성했었습니다. 우리가 민족이 있어요? 그러니 탕감복귀해야 됩니다.
참된 가정을 찾아가는 길에 있어서 참된 부모의 전통을 이어받아 참된 신부의 전통을 세워 가지고 참된 남편, 참된 자녀를 가져서 천리가 바라던 참된 승리의 가정을 우리 일대에 상속받아 가지고, 선한 조상의 기틀이 보잘것없는 나로 말미암아, 나의 짧은 수고의 기간을 통해서 탕감되어 상쇄될 수 있다는 사실은 복중의 복이요, 역사시대에 있어서 어떠한 시대의 여성보다도 최고의 영광된 자리를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기간이 그런 숨가쁜 시간들인 줄 알고 정성을 다하지 못한 것이 한이요, 노력을 다하지 못한 것이 한이요, 한 시간, 한 날도 그 뜻과 더불어 싸우지 못한 것이 한이라는 마음으로, 자기와 인연된 것은 다 잊어버리고 그 이상의 하늘의 인연을 많이 남기기 위해 싸워서, 부디 1972년 새해 새 아침을 맞이하여서는 하나님 앞에 자랑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라면서 이와 같은 말씀을 드렸습니다. 또 그렇게 하기 위해서 자극을 받고, 심정의 수습을 하고, 재차 결의를 하기 위해서 이번에 이런 수련기간을 가진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알고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은 이와 같은 참된 가정의 대표적인 중심 사명을 짊어진 부인으로서 무한한 가치를 지닌 존재인 것을 자각하면서, 내일의 싸움터를 직시하고 책임수행에 필요로 하는 모든 장비를 갖추기 위해서 이번 기간이 필요한 것을 여러분이 알고, 하나님 앞에 감사드리고, 있는 정성을 다해서, 노력을 다해서 수많은 사람들과 생활하는 가운데서 질서를 지키면서 유종의 미를 거두어 주길 바라면서 이와 같은 말씀을 드렸으니, 이것을 여러분이 잘 소화해야 되겠습니다. 알겠어요? 「예」
아버님, 통일교회가 지금까지 존속해 나온 것은 그 누구의 힘 때문이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먼저 아버님의 힘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역사시대에 있어서 피의 대가를 치러 왔던 수많은 선지선열들의 공적의 터전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아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애를 바쳐 나갔던 충효의 도리의 터전이 남아 있음으로 말미암아 오늘날 이와 같은 인연이 성립된 것을 생각하게 되옵니다. 또한 역사노정의 수난길에 있어서 당신께서 저희 앞에서 얼마나 수고하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사옵니다. 제가 외롭기 전에 당신이 먼저 외로왔사옵고, 제가 슬픈 사정에 처하기 전에 먼저 슬픔을 당하셨던 아버지인 것을 잘 알고 있사옵니다.
이제 그와 같은 역경을 거쳐 가지고 오늘날 통일교단을 형성하고 통일종족을 편성하여 수많은 가정들을 앞에 놓고, 오늘 당신의 뜻과 더불어 참된 가정의 인연을 알 수 있는 자리에 선 것이 얼마나 고귀한 것인가 하는 것을 알아야 되겠사옵니다.
참부모라는 이름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알아야겠사옵니다. 아버지의 한을 풀 수 있는 모체요, 인류에 있어서 소원성취의 중심이요, 이상세계의 출현의 기원이 되는 이 참부모야말로 역사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것이요, 시대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것이요, 내 가정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것이요, 내 자식을 주고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저희들이 언제나 명심해야 되겠사옵니다.
그 참부모의 사상을 몸에 지녀야 되겠습니다. 참부모의 뜻은 세계를 구하는 뜻입니다. 참부모의 사상은 현실을 무시해 버리고, 미래의 창건과 역사적 전통을 남기기 위한 사상인 것을 알게 되옵니다. 저희들은 과거의 결실을 맺기 위해서 현재에 있는 것이요, 현재의 목적의 중심이 되기 위해서 현재에 있는 것이요, 미래의 목적의 중심이 되기 위해서 현재에 있사옵니다. 이렇게 3시대의 결정적인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거룩한 자리에 선 것을 생각할 때, 그런 인간임을 저희들은 미처 몰랐사옵니다. 하오나 아버님, 이제는 알았사옵니다.
참된 가정, 그렇게도 당신이 바라시던 참된 가정, 그 참된 가정을 이룸으로 말미암아 참된 민족이 형성되는 것이요, 참된 가정의 전통이 뻗어 나감으로 말미암아 참된 국가가 형성되는 것이요, 참된 가정의 인연을 통해서 국가를 넘고 세계로 흘러가게 될 때에 참된 세계가 형성된다는 엄청난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에, 아버님이 기억하실 수 있고, 아버님이 안식하실 수 있는 참된 가정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아낙네들이 먼저 심정적인 전통의 동산을 가꾸어 세워야 된다는 것을 이 시간에 확실히 알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내 일신이 쓰러지는 데는 얼마만한 가치가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 볼 때, 내 몸 다 드려 하늘의 해원성사, 땅의 해원성사, 참부모의 해원성사, 이 삼대의 해원성사뿐만 아니라 이 민족을 해원성사하고, 후대의 우리 후손들을 해원성사할 수 있는, 입체적인 소원성취의 내정이 결정되는 이 엄청난 자리가 오늘날 축복받은 아낙네들의 자리인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저희들은 정성을 다하여 천추만대에 선한 선조로서의 명분을 세워 길이길이 높임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전통을 세워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금년에는 '통일기반확보' 라는 표어를 내걸었사옵니다.
저희들은 그 기반인 부모님을 몰랐습니다. 저희들이 언제 부모님 앞에 효도하였으며, 언제 꽃피는 봄에 부모님을 모셨으며, 혹은 여름, 가을, 겨울에 언제 같이 싸웠으며, 언제 같이 죽기를 각오했습니까? 3년 동안 부모님을 모셔야 됨에도 불구하고 모시지 못한 저희들에게 부모님과 3년 동안 운명을 같이할 수 있는 이 기간을 부여해 주신 것을 진실로 감사를 드려야 되겠습니다.
낮에도 부모님이요, 밤에도 부모님이요, 외로와도 부모님이요, 기뻐도 부모님이요, 하늘땅을 바라볼 때도 부모님이요, '우리 부모님 모셔 놓고 천년 만년 살고지고' 하는 간절한 눈물이 어릴 수 있는 생활노정이 생활환경에 어리게 될 때에는 수많은 민족이 여기에 감동을 받을 것이며, 수많은 민족뿐만 아니라 수많은 세계 인류가 감동을 받는다는, 거룩하고도 엄청난 사연이 여기에 깃들어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깨닫고 힘차게 힘차게 더 힘차게 전진하는 당신의 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내일이 지나면 새달의 초하루가 되옵니다. 임지활동의 6개월을 맞는 출발의 날이오니 저희들에게 복을 빌어 주시옵소서. 그 동안의 한 많은 사연을 모두 듣고, 서로서로 느끼고 서로서로 나누어야 할 것인데도 불구하고 시간이 없어서 그렇게 하지 못하는 그 사연을 아버지께서 알아주시옵소서. 간절한 마음에 사무치는 마음을 통하여 아버지 앞에 아뢰고, 아버지 앞에 사연을 통고하는 그 자리마다 당신의 거룩한 손길로, 제가 그런 자리에 있을 때 위로해 주시던 것의 몇배로 인연을 통하여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당신의 생명의 불길이 이들의 민족애의 기원을 통하여 온 삼천리 반도에 불붙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거룩한 무리들, 깨끗한 무리들, 숭고한 무리들, 하늘땅이 굽어살피시어 찬양하는 무리들이 이 삼천리 반도의 여성들을 통하여 거룩하게 나타날 수 있게 하시옵소서. 이런 시대적 영광의 터전이 이들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수 있고, 거세적인 놀라운 역사가 이들의 움직임을 통하여 빛날 수 있다는 사실을 고이고이 간직하고, 높고 귀하고 거룩한 이름과 숭고하고 고귀한 내용을 더럽히지 않는, 당신의 사랑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 딸들을 아내로 알고 있는 수많은 아들들과, 이 딸들을 어머니라 부르는 수많은 자녀들 위에 당신의 무한한 복과 사랑의 손길이 떠나지 마시옵기를 재삼 부탁드리옵니다.
모든 전체를 당신 앞에 맡기었사오니, 허락하신 뜻의 영광이 이들과 더불어 길이길이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내일의 싸움터에서 승리한 영광의 기수가 되어 하늘 부모를 높이 높이 모시고 그 부모의 사랑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참다운 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재삼 간구하면서, 이 모든 말씀 참부모의 성호 받들어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통일은 우리의 정성으로,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노력으로, 우리의 싸움으로 성취해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통일의 노래'를 힘차게 한번 불러 봅시다. (다같이 통일의 노래를 부름)
앞으로 우리들이 가야 할 길은 대한민국과 이북을 복귀하는 것입니다. 공산당을 무찌르고 공산당을 복귀해야 됩니다. 그런데 공산당은 세계적인 체제를 갖추어 악착같이 뿌리박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런 공산당을 굴복시키고 이 나라 삼천리 반도에서 추방할 때까지 우리는 얼마나 형극의 길을 가야 되겠는가 하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만일 대한민국을 잃어버리면 우리는 얼마나 비참하겠습니까? 그러니 이 나라를 지켜서 이 나라를 빠른 시일내에 부흥시켜야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가정이 안팎으로 단결하여 남북을 통일시켜 가지고 자주적인 국가를 형성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정부에서는 외적인 문제를 책임지고 있지만, 우리는 내적으로 세계적인 원수 사탄과 대결하고 있습니다. 내적인 부흥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외적인 부흥은 내적인 부흥 위에 자연히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참부모를 사랑하고, 종족을 사랑하고, 가정을 사랑하면 부흥이 됩니다. 이것을 중심삼은 부흥이 외적인 부흥의 여건보다도 더 강하게 드러나게 될 때에, 즉 이것이 삼천리 반도 위에 여파(餘波)를 일으켜야만 통일교회를 중심삼은 내적인 승리의 한 국가가 형성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생각해야 됩니다. 알겠어요? 「예」
군사혁명을 일으킨 박정희 대통령이 어려운 시점에서 외적인 경제부흥을 이룩하기 위해 그 많은 수난길을 거치면서 극복해 나온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여러분들도 내적인 부흥을 하기 위해서는 선생님을 중심한 간부들이 일체화되고, 축복받은 가정들이 일체화되고, 우선 여자들이 일체화되어 여기에 영향을 미쳐 가지고, 심정적인 새로운 싹을 내게 하고, 민족이 갖지 못한 새로운 정기를 여기에서 발현시켜 가지고 삼천리 반도에 거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외적인 경제부흥만을 바라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지금 한계점에 도달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상적인 부흥을 모색하는 이때에 있어서 우리들은 거국적으로 국민 앞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기수들이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멀지 않아서 그런 때가 우리 앞에 반드시 다가옵니다. 이때를 잃어버리게 되면 필시 환난이 오기 때문에 여러분은 일치단결하여 거국적인 터전 위에 통일사상을 심어 놓아야 합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사명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외적인 세계는 남자들이 이끌어 나가지만 내적인 심정 세계는 여자들이 이끌어 가야 합니다. 남자들이 굴복할 수 있는 기준을 세움으로 말미암아 외적인 경제부흥이 내적인 정신부흥의 인연에 끌리게 됩니다. 이렇게 될 때 북진통일의 이념은 성취될 것이요, 하나님은 북한에 대해 새로운 대책을 취해 가지고 우리의 갈 길을 기필코 마련해 주실 것입니다. 이것을 나는 알고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부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북한을 통일시키는 데는 여자의 손을 빌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예」 여러분이 이렇게 동원하면 그 다음에 기성교회가 동원하게 될 것이요, 그 다음에는 삼천만 민족, 남한의 가정들이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북한 땅은 자연히 복귀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단결하게 되면, 수적으로 볼 때, 우리가 그들의 수를 능가하고 결국에는 공산세계와 민주세계의 자원을 끌어들일 수 있는 세계적인 터전이 닦여지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북은 문제가 아닙니다. 이북 땅을 한평 한평 사서라도 복귀하지 않으면 안 될 책임이 우리에게 있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알겠어요? 「예」
그러므로 이 통일을 완수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선생님이 태어난 고향 땅을 한번 밟아 보지 못하고 죽게 되면 한이 남는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이북 정주 땅, 선생님이 태어나 자란 그 곳에 가서 선생님이 어릴 때 마시던 물을 마셔 보고, 선생님이 뛰놀던 동산에 올라가 거닐어 보고, 여러분의 아들딸들이 그 자리에서 거룩한 찬양의 소리를 높여 하나님 앞에 축배를 드리게 될 때, 선생님이 태어난 것을 축하하지 못했고, 선생님을 받들지 못했던 것을 해원성사하고 탕감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이 죽기 전에 선생님이 태어난 곳을 가지 못하면 통일교회 식구로서 한이 남는다는 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알겠어요? 「예」 그러니 이것을 여러분의 특별한 의무로 결심하고, 선두에 서서 통일의 그날까지 용기있게 전진하고 승리를 다짐하면서 싸워 주기를 재삼 부탁합니다. 다시 한번 통일의 노래를 부릅시다. (통일의 노래를 두 번 합창하고 나서 다같이 통성기도함)
이 시간에 우리 다같이 하나님 앞에 통일을 위해서 선서합시다.
통일을 위해서 자기 자신을 바치고, 자기 가정을 바치고, 우리 교회를 바쳐야 됩니다. 이것을 바치지 않으면 통일은 성취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자기 자신을 바치고, 자기 가정을 바치고, 우리 교회를 바쳐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선생님이 직접 선서를 할 테니까 여러분은 '바치자' 하고 따라하시기 바랍니다.
아버님, 여기에 서 있는 당신의 딸들을 지켜 주시옵소서. 저희 개인들을 받으시옵소서. 오늘의 새로운 약속과 맹세와 결의를 집행하시옵소서. 후대의 역사의 창건자로서 부끄러움이 없는 당신의 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
당신이 소원하시는 통일을 위해서 우리 개인을 바치기를 결의하였습니다. 우리 가정을 바치기를 결의하였습니다. 우리 교회를 바치기를 결의했사오니 남북통일을 맞이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의 소원의 날, 당신의 소원의 때, 당신의 소원의 세계를 위하여 저희 나라의 통일을 아버지께서 성취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 저희들이 당신 앞에 결의한 모든 결의가 헛되이 돌아가지 말게 하여 주시옵고, 가슴속 깊이 깊이 묻어 승리의 한날을 맞이할 때까지, 통일의 영광을 맞이할 때까지 싸우고, 또 싸우고 전진에 전진을 다짐하는 당신의 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 이 맹세와 더불어 생애를 아버지 앞에 바치겠다고 선서했사오니, 고이 붙들어 주시어서 그 자리에까지 싸워 남아지고 영광의 자리에서 사랑받을 수 있게끔 승리의 자리에 세워 주실 것을 재삼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의 성호 받들어서 축원하였사옵나이다. 아멘.
사랑하는 아버님, 어린 딸들이 이 자리에 모였사옵니다. 저희들은 겸손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와 같아야 되겠습니다. 배고픈 아기가 어머니의 젖을 그리워하듯이 저희들도 아버지의 긍휼과 자비를 바라는 이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들은 이미 축복을 받았사옵니다. 이들에게는 남편이 있사옵고, 자녀들이 있사옵니다. 한 나라의 대표적인 가정을 이루고 있는 주부의 인연을 가진 딸들이 여기에 모였사옵니다. 이들이 일어서는 것은 자기 개인만 일어서는 것이 아닙니다. 그 남편의 터전이 되고, 자녀들의 기반이 되어 하나의 가정이 일어설 수 있는 중요한 사명이 이 딸들의 가냘픈 몸 위에 있다는 사실을 저희들은 알게 됩니다.
이 가정이 일어남으로 말미암아 사망권내에 있는 민족과 국가가 회생될 수 있으며, 원수 사탄세계에 사로잡혀 있는 인류의 해방을 제시할 수 있사옵니다. 이런 엄청난 인연이 보잘것없는 연약한 이 딸들로 말미암아 새로이 출발되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저희들의 마음과 마음이 하나되어야 되겠고, 하나의 가정을 중심삼고 뭉쳐야 되겠습니다.
그런 가정들이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가, 하나의 세계로 뭉쳐 아버지 앞에 바쳐 드려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옵니다. 뭉치는 데는 각자의 마음대로 뭉칠 것이 아니라 천륜의 원칙에 따라 뭉쳐야 되겠습니다. 자기의 소원대로 행할 것이 아니라 천륜의 소원의 길을 따라 행해야 되겠습니다.
하늘나라, 그 나라는 저희들 마음대로 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니라 부모를 모시고 가지 않으면 안 되는 나라인 것을 알았습니다. 부모를 모심과 동시에 형제들과 함께 가야 되는, 복귀의 한을 넘어가야 할 책임이 저희들에게 남아 있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오늘도 이 책임을 수행하기 위하여 몸부림쳐야 되겠사옵고, 내일도 그래야 되겠사옵니다. 청춘시대는 물론이요, 장년시대와 노년시대를 거쳐 내 생명이 다하도록 가야 할 복귀의 운명길이 저희들을 부르고 있다는 것을 항상 잊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는 이 길을 선두에서 개척하셨사옵고, 저희들이 슬픔의 고비고비에 처할 때마다 제물이 되시어서 죽음의 구렁텅이를 메워 나오셨사옵니다. 아버지께서 그러한 구렁텅이를 없애기 위해 역사노정에서 얼마나 많은 수난길을 걸어오셨는가를 생각하며 저희는 진실로 황공한 마음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죄의 흔적을 이어받고 태어난 저희 한 개인이 가야 할 길을 생각해 볼 때에, 수많은 선조들이 지은 모든 죄의 인연이 저희들을 뒤에서 당기고 있사오니, 저희들은 이것을 탕감함과 동시에 나 스스로를 아버지 앞에 긍휼히 여길 수 있는 제물로 바치지 않고는 갈 수 없는 길이 복귀의 길이라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저희의 후손들은 저희들을 통해서 승리의 터전이 완전히 닦아지기를 바라고 있다는 사실을 저희들은 미처 몰랐습니다. 오늘날 저희의 동족이 저희들에게 삶의 보람의 터전이 되고 증거의 실체가 되어 세계 가운데 없어서는 안 될 개인이 되어 달라고 하는 것을 저희들은 미처 몰랐습니다. 아버지께서 그 동안 얼마나 슬프셨는가를 몰랐사옵고, 슬픈 아버지의 해원성사가 보잘것없는 저희 일신을 통하여 성취된다는 것을 저희들은 미처 몰랐습니다. 겸손히 엎드린 아버지의 아들딸로서 당신의 무릎 앞에 묶이고, 당신의 거룩한 사랑의 손길을 통하여 재차 축복을 받고, 하늘땅을 대신한 새로운 가정의 인연을 가져야 된다는 것을 저희들은 확실히 몰랐습니다.
이러한 저희들을 아버지께서는 부르시어 수난길을 걸어오신고도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없으셨고, 죽음의 고빗길을 극복하시고도 그 표정을 지을 수 없는 자리에서 저희들을 만나게 될 때, 저희들을 또다시 위로해 주시고, 기른 부모와 같이, 아무 일도 없었던 부모와 같은 심정을 가지고 저희들보다도 더 수난의 자리에서도 불쌍한 저희들을 염려하시는 아버지의 후대(厚大)하신 사랑 앞에 저희들은 감사를 드려야 되겠습니다.
아버님을 모시고, 아버님 앞에 효성을 하지 못하여 천추의 한이 될까봐 염려하며 스스로 그렇게 되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딸들이 되고, 한 가정의 어머니들이 되고, 아내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새로운 이 아침, 일주일을 새로이 출발하옵니다. 아버님이여, 저희들이 거룩하신 아버지의 성상을 대하여 스스로 솔직이 아뢸 수 있는 자녀가 되어 아버님이 원하시는 모든 것을 다 바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아버지는 우리 아버지요, 아버지의 뜻은 우리의 뜻이요, 아버지의 가정은 우리의 가정이라 할 수 있는, 뗄래야 뗄 수 없고, 가를래야 가를 수 없고, 분별할래야 분별할 수 없는 자리에서 한 가정의 딸이요, 한 가정의 아내요, 한 가정의 어머니로서 하늘의 혈통과 하늘의 역사적인 전통을 세우는 데 부족함이 없는 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불쌍하신 예수와 우리' 라는 제목을 가지고 잠깐 말씀하겠사오니, 이 말씀을 통해서 예수는 과거 역사에 한정된 예수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자신의 실체를 오늘날 우리의 생활 가운데 심기 위해서 2천년 역사노정을 신음해 나온 그 예수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사옵고, 오늘 저희들은 그런 예수의 한을 해원성사하기 위해서 일깨움을 받아 가지고 그 누구도 모르는 가운데 부름을 받은 자신인 것을 자각할 수 있는 이 시간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아버지, 이 시간을 거룩히 맡으시옵소서. 영광의 품에 품어 주시옵소서. 늠름한 모습으로 내일의 소망에 벅찬 가슴을 안고 민족의 갈 길을 가려 주며 사망의 물결을 막아 가지고 행복의 동산으로 이끌어 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민족을 대표한 거룩한 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들이 지금까지 수고의 길을 거쳐온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리고, 아버지를 만나 기쁨과 새로운 결의를 높게높게, 넓게넓게, 깊게깊게 다짐할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면서, 이 모든 말씀 참부모님의 성호 받들어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우리 통일교회의 식구들은 하나님의 한과, 예수님의 한과, 이스라엘 나라의 한을 풀어야 합니다. 이 3대 한을 풀지 않고는 복귀의 뜻을 이루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로서 이 땅 위에 와 가지고 하나님이 마음속으로 소원하시던 소원의 실체가 되어 이스라엘 나라를 사랑함과 동시에 자기의 가정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자리에 서지 못하였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한이 되었고, 예수님의 한이 되었고, 이스라엘 나라의 한이 된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하면 누구나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책임을 못 하고 간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 땅 위에 온 구주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피의 노정을 남기고 간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일차적으로 이스라엘 민족과 그 민족의 사상적인 지도를 책임졌던 유대교를 위해서 오셨던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예수님은 이스라엘 나라로 하여금 세계 인류 앞에 사랑받을 수 있는 민족이 되게 하고, 세계 인류 앞에 사상적인 중심의 책임을 해야 할 유대교에 기독교의 새로운 복음을 연결시켜 고차적인 자리에 올려놓아야 할 책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책임을 못한 것이 한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감으로 말미암아 그 한이 하나님으로부터 예수님과 이스라엘 민족에까지 인연되어졌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에, 우리는 어느 한때에 가서 하나님께서 본래 예수님을 보내셨던 뜻을 성사해야 되겠고, 어느 한때 예수님이 남긴 한을 풀어야 되겠고, 어느 한때 이스라엘 나라와 유대교의 한을 풀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는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는 것이요, 예수님의 뜻을 이룰 수 없는 것이요, 이스라엘 나라와 유대교의 뜻을 이룰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3대 원한의 조건을 어느 한때에 풀어야 됩니다. 하나의 민족을 중심삼고, 하나의 국가를 중심삼고, 그 가운데의 하나의 종교 형태를 갖춘 터전 위에서 하나님의 한을 풀어야 되고, 예수님의 한을 풀어야 되고, 제 1이스라엘 나라와 유대교의 한을 풀어야 됩니다. 이 한을 풀지 않고는 복귀의 가정이 형성되지 않는 것이요, 복귀의 종족, 복귀의 민족, 복귀의 교회, 복귀의 국가가 형성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실체적인 내용이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상에서 결정되지 않고는 하나님께서 본래 창조하셨던 뜻은 성사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런 역사적인 한을 총체적으로 탕감복귀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개인이 있어야 되고, 가정이 있어야 되고, 교회가 있어야 되고, 국가가 있어야 됩니다. 그러한 개인은 하나님의 한의 대가를 치러야 할 사람이요, 가정도 그래야 할 가정이요, 종족이나 교회나 국가도 그래야 할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한, 더 나아가 유대교의 한과 이스라엘의 한을 풀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한의 역사노정을 더듬어 오면서, 한의 역사노정을 가려 나오면서 찾아 나오시던 하나님의 모든 한의 결실을 총합적으로 탕감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찾아진 개인이요, 가정이요, 종족이요, 교회요, 국가이기 때문에 그러한 개인, 가정, 종족, 교회, 국가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개인, 가정, 종족, 교회, 국가는 하나님의 품에 품김과 동시에 예수님을 맞아 예수님의 품에 품겨야 되는 것입니다. 한 개인을 중심삼고 횡적인 면에서 가정과 종족과 교회와 국가가 일시에 '하나님의 뜻은 성사되었고 하나님의 한은 풀렸다. 예수님의 뜻은 성사되었고 예수님의 한은 풀렸다. 우리의 뜻은 성사되었고 우리의 한은 풀렸다' 하고, 거족적이요 거국적인 입장에서 하나님 앞에 승리의 찬양을 돌려드릴 수 있는 한날이 와야만, 국가적인 기준에서 교회를 중심삼고 하나님과 예수님의 한이 풀릴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이 땅 위에 와서 하나의 종족을 찾기 전에 하나의 민족을 찾으려 했고, 민족을 찾기 전에 하나의 나라를 찾으려 했으며, 나라를 찾기 전에 세계를 찾으려 했던 것입니다. 이런 엄청난 사명을 갖고 왔던 예수님이었습니다. 따라서 그 예수님 앞에 하나의 가정은 물론이요, 하나의 종족,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가, 세계 전체가 안겨야 됩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중심삼고 세계의 국가들이 하나로 합하여 가지고 그들로부터 승리한 예수님이요, 하나님의 소원을 성취할 수 있는 예수님이라고 찬양받아야 하는 데도 불구하고 반대받는 입장이 선 것이 웬말이냐는 것입니다.
영광 가운데 나타나야 할 예수님은 영광의 약속은 갖고 왔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함은 물론이요, 영광은커녕 이 땅 위에 한을 남기고 가신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또, 예수님을 이 땅 위에 보낼 때까지 하나님이 얼마나 수고하셨느냐 하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 가지고 그 아들이 뜻을 이루지 못한 그 한이 얼마나 컸었는가 하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역사노정에서 하나님이 얼마나 수고해 나오셨는가를 알아야 됩니다.
인류의 조상인 아담 해와가 타락했기 때문에 우리 인간 세상은 거짓 부모를 중심삼고 출발되었습니다. 거짓 부모를 중심삼고 출발된 그 자리에는 하나님 대신 사탄이 생겨난 것입니다. 주인 되시는 하나님은 떠나가시고 주인의 원수인 사탄이 인류의 주인이 되어, 부모의 인연의 혈통을 통하여 연결되어 가지고 인류역사가 출발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기가 막히고 원통한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역사노정에서 어느 한때 원수의 쇠사슬에서 벗어난, 승리한 아들딸이 하나도 없었던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땅 위에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지만 그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이 원하지 않으신 사탄권내에 얽매인 쇠사슬을 끊고,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 있도록 하나님의 소원을 성취해 드리고, '당신이 바라시는 뜻에 합당한 나' 라고 하며 나타난 하나의 남자, 하나의 여자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사탄의 쇠사슬을 끊는 사명을 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이 땅 위에 오셨습니다. 그러면 사탄의 쇠사슬을 끊는 데 있어서 어디서부터 끊어야 되느냐? 국가의 쇠사슬을 끊기 전에 민족의 쇠사슬을 끊어야 되고, 민족의 쇠사슬을 끊기 전에 종족의 쇠사슬을 끊어야 되고, 종족의 쇠사슬을 끊기 전에 가정에 엉클어져 있는 사탄의 쇠사슬을 끊어야 됩니다. 이렇게 엄청난 원한의 터전이 역사노정에 있어서 타락한 후손들을 통하여 혈통적 인연으로 이어져 나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시 한의 조건을 남길까봐 이렇게 엉클어진 원수의 쇠사슬을 끊게 하기 위해서 개인, 가정, 민족, 국가를 선택했던 것입니다. 그 민족이 어느 민족이며, 그 국가가 어느 국가냐 하면 이스라엘 민족이요, 이스라엘 국가라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국가 기준에서 사탄의 철망을 제거시킬 수 있는 선민권을 만들어 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선민권에도 하나님의 염려의 대상이 될 수 있는 터전이 남아있기에, 그 선민권내에 하나님을 중심삼고 하나될 수 있는 유대교라는 특정한 교단을 세우셨습니다. 사탄세계의 쇠사슬에 인연이 없는 분별된 교단으로서, 하나님이 언제나 자유스러운 자리에서 활동하실 자유의 터전으로서 남겨 놓은 것이 유대교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쇠사슬이 어느 정도까지 엉클어져 있느냐? 나라는 물론이고 교회에까지도 미쳐질 수 있는 입장이었습니다. 교회를 중심삼고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되게 될 때에는, 말씀을 중심삼은 권내에서는 사탄이 참소할 수 없습니다. 말씀과 실체가 완전히 하나되지 않으면 실체의 해방을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실체의 해방을 이루어 가지고 심정적인 해방을 이루기 위해서 찾아 나온 하나의 중심존재가 누구냐 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 앞에 약속하셨던 메시아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실체가 해방을 받기 위해서는 실체가 말씀과 하나되어야 되고, 심정이 실체와 하나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실체를 갖지 못하면 말씀을 이루었다 할 수 없는 것이요, 그 실체가 하나님의 심정과 일치되기 전에는 사탄세계를 대해 하나님 대신 싸우는 아들이 될 수 없고 딸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섭리의 내용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실체가 사탄의 쇠사슬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심정과 일치가 되어야 된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심정과 일치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근거로 하여 하나님의 핏줄을 이어받을 수 있는 자리에 서야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는 실체가 말씀과 하나되어야 되고, 실체가 사탄의 쇠사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심정과 하나되어야 됩니다. 이 심정이 하나님의 심정으로만 남아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출발해서 태어났다는 자리를 가져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심정적 해방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통일교회는 심정세계를 모색하는 곳입니다. 심정의 인간을 요구하고, 심정의 인격을 요구하고, 심정의 가정과 심정의 역사를 요구하며, 그것을 창조해 가야 할 사명이 통일교회에 남아 있습니다.
심정의 역사는 인간의 육신과 관계되어 있는 터를 중심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천정(天情)이 개재되어 있습니다. 이 천정은 근원도 천정이요 과정도 천정이요 결과도 천정인, 이런 내용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하나님과 한몸으로 태어난, 타락하지 않은 아담 해와와 같이 하나님의 핏줄을 이어받을 수 있는 인연을 가진 자신이 되지 않고는 심정적 승리의 터전을 갖출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가 심정의 중심으로서 이 땅 위에서 메시아의 사명을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태어나야 되느냐? 사탄의 혈통과 관계없는 자리에서 태어나야 됩니다. 예수님은 타락한 세계의 우리 인간과는 다른 분이어야 됩니다. 사탄의 혈통을 이어받은 타락한 인간 조상의 피를 받고 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관계하심으로써 하나님이 동기가 되어 하나님의 승리의 터전 위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은 하나님의 핏줄을 타고 이 땅 위에 태어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일 문제되는 것은 승리할 수 있는 아들로 태어나기 위해서 승리할 수 있는 혈통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승리할 수 있는 혈통을 갖지 않고는 승리할 수 있는 심정을 가질 수 없는 것이요, 승리할 수 있는 심정을 갖지 못하고는 승리할 수 있는 실체로 태어날 수 없는 것이요, 승리한 실체가 되지 않고는 승리한 말씀을 가지고 사탄을 심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인연을 여러분이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이 땅 위에 오기 전까지, 4천년 동안 무엇을 하셨느냐? 타락한 혈통을 바로잡아 가지고 하나님만이 주관할 수 있고, 하나님만이 관계맺어 가지고 보낼 수 있는 예수님 한 분을 위해서 수고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이 땅 위에 오기 전까지의 4천년 역사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인류역사는 가인과 아벨에 의한 두 역사로 출발했습니다. 하나는 악을 대표한 것이요, 하나는 선을 대표한 것입니다. 가인은 악편이요, 아벨은 선편입니다. 선이 아니라 선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선이 될 때까지는 숱한 역사노정을 거치면서 수고를 해야 되고 피눈물나는 탕감의 노정을 거쳐야 됩니다. 그런 노정을 거치지 않고는 선의 실체가 탄생할 수 없습니다. 즉, 악의 실체로 태어난 자신을 선의 실체로 돌이키기 위해서는 수난길 중의 수난길을 거쳐 가지고 승리했다는 그 한때를 갖지 않고는 안 됩니다. 그러지 않고는 선한 사람이 될 수 없고 선한 존재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가인은 악한 편이요, 아벨은 선한 편입니다. 그러면 악한 편과 선한 편이 싸워 가지고 선한 편이 이겨서 무엇을 찾아 세워야 되느냐? 선한 말씀을 찾아 세워야 됩니다. 선한 말씀과 하나됨으로 말미암아 선한 실체를 찾아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한 실체는 근본이 다릅니다. 타락권내에서 사탄의 핏줄을 이어받고 태어난 인간은 선한 실체가 될 수 없습니다. 선악의 중간 입장에 서는 사람이 될 수는 있겠지만 선한 실체는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걸 알아야 돼요. 선한 실체는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가인을 굴복시켰다 하더라도 그 기준을 중심삼고는 선한 실체가 못 되는 것입니다. 선한 실체가 되기 위해서는 가인을 굴복시키는 과정에서 심정적인 선한 승리의 터전을 가져야 되고 혈통적인 선한 승리의 터전을 가져야 됩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아벨이 아벨로서 승리했다 하더라도 선한 실체는 못 됩니다. 선한 실체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중심삼고 심정적으로 일체를 이룬 혈통적 내용을 갖추어야 됩니다. 그러지 않고는 선한 실체가 될 수 없습니다. 선한 실체를 맞을 수 있는 입장에는 설 수 있으되 선한 실체는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원리를 통해 믿음의 기대와 실체기대를 알고 있을 것입니다. 실체기대를 이루었다 하더라도 그 실체는 하나님 앞에 바쳐질 수 있는 실체가 아니라 메시아를 위한 기대, 즉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실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왜 메시아를 맞이해야 되느냐? 우리가 실체의 입장이기는 하지만 종적인 입장에서 볼 때 예수님은 아벨 입장이요, 우리들은 가인의 입장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우리들은 양자의 입장입니다. 아들과 양자는 다릅니다. 아들은 직계 부모의 혈통을 이어받고 태어납니다. 직계 부모의 사랑으로, 혈통적 내연을 통하여 태어난 아들은 부모의 직접적인 사랑을 받을 수 있지만 양자는 부모가 다릅니다. 부모가 다르지만 법에 따라서 상속받을 수 있는 입장에 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심정적인 일치점과 혈통적인 일치점을 해결짓지 않고는 실체 부모의 인연을 상속받을 수 없는 입장에 있는 것이 오늘날 복귀되어 나가는 양자의 입장인 우리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세워야 됩니다. 이것을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알겠어요?
이것을 세워 놓지 않고는 아무리 뜻을 따라 나오고, 말씀을 중심삼고 하나되고, 아벨의 사명을 다했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오늘의 모습 그냥 그대로 내 딸이요 내 아들이라 할 수 있는 자리에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 처음부터 출발을 달리했기 때문입니다. 사탄세계에서부터 출발한 나는 하늘 부모를 맞이하여 다시 절차를 밟아 접붙임을 받아 가지고 본연의 내 모습을 다시 찾아야 할 길에 서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절차, 곧 교체하는 노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 노정을 거치지 않고는 참다운 부모의 인연을 이어받을 수 없는 타락한 인류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역사노정을 볼 때에 하나님은 무엇을 하셨느냐? 가인 아벨을 중심삼고 바꿔치기하는 역사를 하셨습니다. 본래 가인이 태어날 때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태어나야 되는데, 거짓된 사탄을 중심삼고 사탄편인 가인이 태어났기 때문에 가인을 부정시켜야 됩니다. 무엇으로 부정시켜야 되느냐? 하늘편으로써 부정시켜야 됩니다.
그러면 하늘편에 선 아들의 자리는 어떠한 자리냐? 양자의 자리입니다. 악한 편인 가인의 자리는 종의 자리입니다. 양자와 종은 다릅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확실히 알아야 돼요.
종은 양자 앞에 절대 복종해야 되고, 생명을 바쳐 충성해야 됩니다. 또한 양자는 직계 아들이 태어나면 그 직계 아들에게 절대 순종해야 됩니다. 만일 여기에서 양자가 양자의 권한을 행사하게 될 때에는 두 나라가 될 수 있습니다. 두 패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부모는 직계 아들이 태어나면 그 직계 아들에게 모든 것을 상속해 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양자가 양자의 권한을 주장하며 '양자인 나도 아들의 입장이니 상속권을 주시오' 하게 될 때는 양자를 택정한 부모는 고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양자는 직계 아들이 태어나기 전까지는 양자의 입장에서 계승해 왔지만 직계 아들이 태어난 그 순간부터는 직계 아들을 위하는 자리에 서야 됩니다. 양자는 직계 아들을 위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오늘날 통일교회의 여러분들은 아직까지 이러한 사상이 서 있지 않았다는 거예요. 양자는 직계 아들을 위해서 있어야 됩니다.
만일 부모가 직계 아들을 갖지 못했다면 그 부모는 기쁨의 뜻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요, 기쁨의 마음을 가지고 천년 만년 자랑할지어다 할 수 있는 자리에서 모든 것을 상속해 줄 수 없는 것입니다. 만일 양자 앞에 상속해 주게 되면 그 무엇인지 모르게 핏줄 가운데 슬픔이 깃드는 것이요, 심정 가운데 슬픔이 깃드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거예요. 그렇지요? 그렇다는 거라구요. 그렇기 때문에 핏줄이 기뻐할 수 있고, 심정이 기뻐할 수 있는 자리에서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요, 내 심정 중의 심정이기 때문에 내 안팎의 모든 것을 줘도 아깝지 않다' 할 수 있는 자리는 직계 아들과 부자의 관계가 성립되어야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양자의 인연을 가지고 복귀의 길을 따라 선(善)편에서 아벨의 사명을 다해 가지고 하나님의 아들, 곧 메시아를 모실 수 있는 때까지 남게 한 무리가 나라를 대신해서는 이스라엘 나라요, 교회를 대신해서는 유대교입니다. 유대교는 양자의 입장에 선 교회요, 이스라엘 나라는 양자의 입장에 선 나라입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알아야 돼요.
그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요, 그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 이스라엘 나라와 유대교는 아직까지 심정을 중심삼고, 뼈살을 중심삼고 하나될 수 있는 인연이 맺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뼈살이 하나되고, 심정이 하나될 수 있는 이스라엘 나라와 유대교가 되게 하기 위해서는 기필코 아들을 보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본래 뜻한 내 나라요, 본래 뜻한 내 교회라 할 수 없고, 이 내 나라 내 교회를 내 아들딸 앞에 영원히 주어야 할 나라요 교회라 할 수 없기 때문에, 이 문제를 해결짓기 위해서 하나님은 기나긴 역사노정에서 수난길을 극복하시면서 이스라엘 나라와 유대교 앞에 아들인 메시아를 보내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확실히 알겠어요?
우리는 어디까지나 양자입니다. 양자라구요. 그러면 양자로서 직계 자녀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양자가 되었느냐? 왜 양자밖에 못 되느냐? 어머니 아버지가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 어머니 아버지는 누구냐? 사탄입니다. 그 조상이 누구냐 하면 사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양자인 우리가 양자로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이냐? 두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가 사탄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사탄을 따라가는 입장에 서서는 양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사탄편을 좋아해 가지고는 양자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사탄 자체를 좋아해 가지고는 양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누구의 아들이 되는 것이냐? 그냥 그대로 사탄의 아들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 결정적인 양자의 자리에 서기 위해서는 사탄세계에 있는 나라와 가까이해서는 안 됩니다. 그 나라의 백성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그 가정의 식구가 되어서도 안 됩니다. 형제가 있다 하더라도 그 형제지정을 갖고 있어도 안 됩니다. 왜냐? 사탄편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몽땅 끊어 버려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양자는 부모가 있어도 부모를 버려야 되고 형제가 있어도 형제를 버려야 되고, 친척이 있어도 친척을 버려야 되고, 나라가 있어도 나라를 버려야 되고, 자기가 바라는 소망이 있어도 소망을 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내 개인을 중심삼은 욕망, 내 개인을 중심삼은 사랑, 내 개인을 중심삼고 원하는 모든 것을 버려야 됩니다. 그러면서 내 부모보다 누구를 더 사랑해야 양자가 된다고요?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양자가 되어 가지고 양부모 앞에 가서 엄마한테 보내 달라고 울면 양자가 돼요? '아이구, 우리 엄마 아빠한테 가고 싶어. 이놈의 살림살이 나는 싫어. 우리 집에 가고 싶어. 우리 형님 누나 보고 싶어. 우리 아저씨 아줌마 보고 싶어' 하며 양부모 앞에서 눈물을 찔찔 흘리며 밥을 먹으면서도 근심걱정을 하고 그러면 양자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저게 언제 사람이 되려나' 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양자가 못 되는 거예요. 양자가 되려면 자기 일생을 통해 인연되었던 것, 자기가 태어난 근원과 상반된 자리에 서야 됩니다.
자기 아버지 어머니가 찾아와서 '야, 아무개야' 하면 '왜요?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소. 썩 돌아가시오' 하고 나서면, 양부모가 볼 때에 기분이 나쁘겠어요, 좋겠어요? 기분이 나쁘겠어요, 좋겠어요? 여러분이 이걸 알아야 됩니다.
자기 형님이나 누나, 혹은 오빠 언니가 와서 '야 아무개야, 우리 집이 어려운데 너의 양부모네 집은 잘사니까 살짝 해 가지고 우리 집 좀 도와줘야 되겠다'고 속닥속닥할 때 '응 그래 그래' 하게 되면 양자 될 수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잘 알라구요. 양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때에는 '야 사탄아 물러가라, 이 원수야 물러가라! 너는 내 양자의 기업을 송두리째 빼앗아 가기 위한 사탄의 마수다! 이 마수야, 뻗쳐 들어오려고 조건을 걸지 마라' 하며 무자비하게 끊어 버려야 됩니다.
양부모가 양자에게 귀한 예물을 주면서 '네가 주고 싶은 사람에게 주어라. 네가 네 몸보다 더 사랑하는 분에게 주어라' 했을 때 '그래요, 정말이예요?' 하고 양아들이 그것을 받고 나서 가만히 생각해 보고 '그래도 나를 낳아 준 부모가 제일 귀하지. 자식으로서 부모 앞에 효도해야지' 해 가지고 양부모가 사준 귀한 예물을 자기를 낳아 준 부모에게 갖다 드렸다면 양부모는 어떻겠습니까? 섭섭하겠어요, 기분이 좋겠어요? 섭섭하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양부모에게 '나에게는 당신만이 내 부모요, 당신만이 내게 정을 줄 수 있습니다. 나는 당신과 더불어 살고 당신과 더불어 죽겠습니다. 저의 일체는 당신과 하나되겠습니다. 저에게는 드릴 것이 없으니 받은 것을 당신 앞에 돌려드립니다' 하면 양부모는 백 퍼센트 흐뭇해 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백 퍼센트에 가까운 7,80퍼센트까지는 올라갈 것입니다. 그렇지요?
더 나아가 양부모가 앞으로 양자에게 축복을 해줘야 할 텐데, 다시 말해서 전부 다 상속을 해줘야 할 텐데 그 재산은 자기가 생명을 걸고 찾아 이룬 것이요, 몇 번이고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모은 것이라면, 이것을 양자 앞에 상속해 주기 위해서 생명을 걸고 나갈 수 있는 시험을 해 가지고 양자가 그 시험에 통과하게 되면 다 주어도 아깝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그래서 양부모는 양자에게 극적인 반대 놀음을 시킨다 이거예요. '너는 이렇게 원하지만 반대해라. 네가 좋은 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대로 해라' 하면서 사지(死地)에까지 몰아넣는 거라구요. 그렇게 사지에까지 몰아넣어야 하는 양자를 가진 부모의 심정이 얼마나 서글프겠습니까?
양자를 가진 부모는 마음으로 네가 내 아들로 태어났으면 얼마나 좋았겠느냐고, 네가 내 핏줄을 통해서 태어났으면 얼마나 좋았겠느냐고 몇백 번 몇천 번 다짐했겠습니까? 양자가 그런 부모의 마음을 생각하면서 '나는 당신의 핏줄을 통해 태어난 아들보다 못한 자리에서 효도하는 자가 되지 않겠습니다. 그 백배 천배 더하여 효도를 해서 당신의 섭섭한 마음의 골짜기를 완전히 메워 드리겠습니다. 백번 죽고 천번 죽고 또 죽더라도 당신 앞에 효성을 다하여 양자로서 참다운 직계 아들딸이 효도하는 것보다도 낫다는 칭호를 남기고 싶습니다' 하면서 죽음길도 이의없이 달려가 죽음의 자리에 나섰다 하게 될 때에, 그 양부모는 '오냐 사랑하는 내 아들아, 내가 생명을 걸고 수고하여 모은 모든 소유물을 너한테 넘겨 주어도 이제는 한이 없다'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는 아무개 아들딸보다도 낫고 아무개의 효자보다도 더 나은 자리에서 효성을 하는 입장에서, 생명을 바치는 자리에서 부모를 위해 움직였다는 사실은 놀라운 것이다. 귀하게 찬양할지어다!' 할 것입니다. 그때에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송두리째 넘겨 주더라도 슬퍼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할 수 있는 것이 양부모의 심정이 아니겠느냐는 거예요. 이해돼요? 여러분이 이걸 알아야 된다는 거예요.
양자로서 내일 아침에 상속받을 수 있는 자리에 있다 하더라도 부모의 슬퍼하는 마음을 알고 '만일 내일 아침 내가 상속받기 직전에 양부모가 아들을 하나 낳는다면 나는 기쁨으로 그 아들을 받들고 내가 받을 상속은 이 아들의 것이니 부모 앞에 보관시켜야겠다' 하는 마음을 갖는다면 그 부모는 자기의 아들을 틀림없이 양자에게 맡길 것입니다. 알겠어요? '오냐. 양자의 입장에 있는 아무개야. 너는 나를 위하여 생명을 바쳤듯이 내 대신 내 아들을 고이 키워 주고, 내가 지닌 바의 사상을 그냥 그대로 이어주고, 내가 지금까지 싸워 나온 역사적인 행동을 고스란히 가르쳐 주기를 바란다'고 하면서 양자에게 직계의 아들을 맡길 것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이와 같은 입장에 선 것이 유대교입니다. 유대교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양자의 입장을 완전히 알아 가지고 아들이 태어나면 그 아들을 키워 주고 보호해 주어야 합니다. 양자의 입장에서 그 부모의 소원성취를 위해서 생명을 바쳐도 이의가 없으며, 죽음길을 한두 번이 아니라 수십 번, 수백 번 가더라도 이의가 없는 자리에 서야 됩니다. 그리하여 부모가 자기에게 있는 것을 몽땅 주어도 아깝지 않다 하는 입장에 선 양자가 있는데, 부모가 양자에게 상속하기 직전에 아들딸이 태어났다면 그 아들딸을 직접 키우는 것보다도 양자에게 맡겨 키우게 하고 싶은 것이 부모의 심정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내가 기르는 것보다도 네가 기르는 것이 낫겠다. 너는 틀림없이 내가 사랑하는 것만큼 사랑할 것이다' 할 수 있는 역사에 없는 인연을 찾아 나와 유대교 앞에 예수님을 보내셨던 하나님의 사정인 것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렇게 양부모의 아들을 키워 주는 입장에 서게 될 때, 그 아들의 눈물은 양자의 눈물이요, 그 아들의 기쁨은 양자의 기쁨이요, 그 아들의 수난길은 양자의 수난길이라고 하게 될 때, 양자와 아들이 하나된 자리에서 자랄 수 있는 인연을 맺고 키워 주는 과정을 거친 입장에 서게 될 때에는, '내 것이 네 것이요, 네 것이 내 것이다'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둘 다 갖고 싶은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요, 둘 다 갖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러면 '너희 둘은 뗄 수 없다' 하여 한 아들은 오른쪽에, 한 아들은 왼쪽에, 놓고 '너희 형제가 꼭 붙어서 하나되었기 때문에 모든 소유물을 너희들에게 줄 터이니, 하나된 너희들은 천년 만년 갈라지지 말고, 평화스럽게 살아 달라'고 축복해 주고 상속해 주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이와 같은 인연을 만들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 앞에 모든 역사를 맡기고 세계를 상속해 주실 것을 약속해 나오셨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양자의 입장에서 해야 할 것은 생명을 걸고 효도하는 것입니다. 문제의 귀결점은 생명을 바쳐 효성의 도리를 다하는 것입니다. 아들을 갖지 못하는 어버이의 마음이 얼마나 슬프겠느냐? 그 슬픈 마음을 가려 가면서 슬픈 마음을 위로해 드리는 양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생명을 바치더라도 감사해 하면서 효성을 다하게 될 때, 그 양자를 아들과 같은 자리에서 축복해 주고 싶은 것이 어버이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러한 마음으로 타락한 후손을 축복받을 수 있는 양자권까지 끌고 나오신 것입니다. 그 권을 하나의 개인으로부터 하나의 가정, 하나의 종족,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가기준까지 만들어 놓은 것이 4천년 동안 수고하시어 세운 이스라엘 나라요, 유대교라는 것입니다.
양자의 소원이 무엇이 되어야 하느냐? 자신이 양자로서 상속을 받는 것이 아니라 직계 아들로서 상속받는 것이 양자의 소원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너 같은 양자가 없다고 아들까지 맡기면서 축복해 주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이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의 4천년 역사가 딱 이와 같은 내용입니다.
직계 아들은 어떻게 태어나야 되느냐? 사탄의 핏줄과 다른 핏줄을 갖고 태어나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기 위해서는 바꿔치기 역사를 해야 됩니다. 하늘편이 먼저 태어나고 사탄편은 없어져야 됩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본연의 자리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악한 편은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고 선한 편만이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악한 편은 없어져야 되는 거예요.
그러면 선이 어디에서부터 출발했어요? 가인에서부터 출발했어요? 아닙니다. 아벨에서부터 출발했습니다. 선은 아벨에서부터 출발했으니 선한 편이 먼저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선한 편이 먼저 되는 것이 천지의 원칙이지요? 선한 편이 먼저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벨이 태어날 때 첫번째로 태어났느냐, 두번째로 태어났느냐? 두번째입니다. 두번째이지만 첫번째가 되어야 합니다. 바꿔치기 놀음을 하는 거라구요.
바꿔치기는 형제를 중심삼고 하는데, 어떻게 해야 되느냐? 장성한 20세 이상의 연령에서 바꿔치기를 했다 할 때 어떻게 되느냐? 20세 이하의 바꿔치기 못한 연령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그것은 바꿔치기 했다 하더라도 완전한 바꿔치기가 못 되는 것입니다.
만일 스무 살에 바꿔치기를 했다면 한 살서부터 스무 살까지는 바꿔치기를 못 했기 때문에 그 시대는 사탄편에 있지 않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지금 나이가 60세인 사람이 20세에 바꿔치기를 했다면 40년은 하나님에 의해서 주관받은 기간이 되지만 20세까지는 사탄한테 주관받은 것이 되는 게 아니냐는 거예요. 그러므로 20세까지 먼저 주관한 그 인연을 갖고 사탄이 따라다니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그래서 바꿔치기해야 하는 것입니다. 남은 기간을 잘라 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형제끼리 싸워서 그 기간을 좁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에서와 야곱을 바꿔치기하는 것입니다. 따로따로 낳게 되면 먼저 낳은 기간이 있으므로 그 기간만큼 사탄이 주관한 인연을 가지고 따라다닐 수 있는 조건이 되기 때문에 같이 낳았다는 자리에서 바꿔치기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서와 야곱은 쌍태입니다. 쌍태 형제이지요? 그렇지요? 쌍태 형제이니만큼 차이가 나 봤자 몇 시간 아니면 몇 분 차이일 것입니다. 한 30분 차이가 날까요? 몇 시간 차이가 나나요? 많이 나 봤자 세 시간 정도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 시간 이내의 차이가 난다는 겁니다.
쌍동이란 같은 젖을 먹고 자란다는 거예요. 부모에게 귀여움을 받더라도 같이 받고 같은 환경에서 산다는 것입니다. 옷을 해 입혀도 같이 해 입히고 밥을 줘도 같이 줍니다. 복중에서부터 같이 사는 거라구요. 이것을 바꿔치기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이 에서에게서 팥죽으로 장자의 기업을 빼앗은 것입니다. 40세에 장자의 기업을 빼앗았습니다. 그렇지요? 그러니 40세 전까지는 에서가 먼저 나지 않았느냐고 사탄이 참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도 미련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그래서 이렇게 해 가지고는 안되겠으니 또 한 번 바꿔치기를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레스와 세라가 이렇게 태어난 것입니다. 알겠어요? 야곱의 아들 가운데 유다가 있지요? 그 유다의 며느리가 누구냐 하면 유명한 다말이라는 여인입니다. 이 다말이라는 여인은 어떤 여자냐? 유다의 맏아들에게 시집왔는데, 즉 유다의 며느리로 들어왔는데 그 맏아들이 죽었습니다. 애기도 못 낳고 죽은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 나라의 법은 형이 장가가서 대를 이을 후손이 없이 죽게 되면 동생이 형수를 데리고 살게 되어 있어요. 왜 그러느냐 하면 축복받은 대를 이어줘야 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가인 아벨은 형제지만 한 사람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것이 통한다는 것입니다. 가인·아벨·셋은 아담의 세 아들이지만 하나의 아들이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역사적인 내용이 있기 때문에 동생이 형수를 데리고 사는 것은 죄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아들을 낳게 되면, 첫아들은 형의 아들로 주고 둘째 아들은 자기의 아들로 삼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의 둘째 아들과 사는데 그도 죽었습니다. 세째 아들은 어린아이라 같이 살 수가 없었습니다. 축복받은 계대를 잇기 위해서…. 여자로서 아이를 못 낳는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두 형제를 거쳤어도 혈족을 남기지 못한 한을 누구보다도 더 느낀 유다의 며느리 다말은 자기 시아버지 품에 들어가서라도 그 혈족을 남기려 했던 것입니다. 길가에서 창녀의 모습으로 변장해 가지고 시아버지의 품에 안기어 낳은 것이 누구냐 하면, 성경에 나오는 베레스와 세라인 것입니다. 그런 것은 우리 타락론을 들으면 그렇게 안 하면 안 되게 되어 있는 것을 알게 되는 거라구요. 그 이유는 다음에 시간이 있으면 자세히 가르쳐 주겠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여인으로서 혁명을 해야 돼요. 자기 남편의 전체 환경을 부정하고 그 나라의 법도와 그 환경을 완전히 부정했던 것입니다. 다말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내 일신이 죽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창녀의 몸이 문제가 아니다. 길거리에서 객사한다고 해도 문제가 아니다. 하늘의 뜻만 이룰 수 있다면 죽음이라도 감수하겠다' 하는 마음을 가진 여인이었습니다. 하늘의 뜻을 이룰 수 있는 기수 중의 기수였습니다. 자기의 위신과 체면, 자기 가족과의 인연을 전부 다 무시하고 국가의 법과 역사를 무시한 것입니다. 그 당시의 율법을 보면 그것은 돌에 맞아 죽을 일입니다. 당장 즉살을 당하는 때라구요.
여기에서 낳은 아들이 누구냐 하면 쌍동이인 베레스와 세라입니다. 베레스와 세라는 뱃속에서 바꿔치기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에서와 야곱이 바꿔치기한 후 아까 얘기한 그런 과정이 남아 있기 때문에 이것을 완전히 바꿔치기하기 위해서 복중에서부터 둘이 싸우는 거예요.
형이 되는 세라의 손이 먼저 나오니 산파가 그 손에 홍사를 매어 주었지요. 이것은 공산당이 먼저 출현할 것을 예고하는 거라구요. 알겠어요? 종말시대에 주님이 오기 전에, 바꿔치기한 주인이 오기 전이 먼저 나온 세라에게 붉은 끈을 매어 준 것처럼 공산세계가 먼저 나온다는 거예요. 공산세계가 형의 모양으로서 먼저 나왔지만 동생이 그 형을 밀쳐 내고, 세계적인 주권을 갖고 온다는 것을 다 보여 준 거예요. 알겠어요?
그래서 동생이 먼저 나오려고 하는 형을 밀치고 동생의 자리에서, 나중 될 수 있는 자리에서 먼저 태어났던 것입니다. 베레스라는 말은 밀치고 나왔다는 뜻입니다. 알겠어요?
비로소 바꿔치기를 했는데…. 선이 먼저 출발해야 하는데, 악이 먼저 출발했지요? 이것을 비로소 바꿔치기한 것입니다. 아담을 지을 때도 하나님이 지었지요? 하나님의 수고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공적으로 말미암아 사탄세계에 있어서 사탄이 먼저 출발한 것을 비로소 여기에서 바꿔치기하여 선이 출발할 수 있는 대표적인 아들이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 아들이 베레스입니다. 야곱의 손자라구요. 3대 만에 바꿔치기한 것입니다. 아담 가정에서도 3대 만에 주님이 와야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태어나야 된다는 거예요.
에서와 야곱 때를 보면 리브가의 복중에서 서로 싸웠지만 먼저 태어난 에서는 사탄편입니다. 야곱은 태어나서 장자의 기업을 빼앗은 것입니다. 그런데 베레스와 세라는 다말의 복중에서 싸워 베레스가 장자의 기업을 바꿔치기했던 것입니다. 어머니의 복중은 아들딸이 태어나는 근본인데 그 근본에서부터 바꿔쳤다는 거예요. 태어나서 바꿔친 것이 아니고 복중에서 바꿔쳤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중에서 바꿔쳐서 먼저 태어난 아들에 대해 사탄이 '내 아들이다' 하고 주장할 수 없는 것입니다. 복중에서 바꿔치지 않고 먼저 태어나게 되면 사탄편이지만 복중에서 바꿔쳐 가지고 먼저 태어나게 되면 하늘편이라는 것입니다. 다말의 복중에서 싸워 가지고 베레스가 세라를 물리치고 태어났기 때문에 장자의 기업을 빼앗은 것입니다. 그랬으니 태어나면서부터 장자예요, 차자예요? 베레스는 필연적으로 차자가 되어야 하는 데도 불구하고 장자의 입장으로 태어났으니 선이 먼저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아담을 지으신 것은 하나님이십니다. 때문에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혈통으로 교체시켜 놓았습니다. 사탄편 가인과 하늘편 아벨이 혈연을 중심삼고 내려오는 데 있어서 복중에서부터 베레스가 승리하고 태어남으로 말미암아 여기에서부터 하나님의 역사는 본궤도에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유다 지파의 혈통을 통해서 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왜 예수님이 유다 지파의 혈통을 통해서 오지 않으면 안 되느냐? 유다 지파를 통해서 혈통적 승리의 기반을 태중에서 결정지어 놓은 전환점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는 다말의 공이 컸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해와가 타락하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느냐? 하나님은 아버지입니다. 지음받은 입장에서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또 아담을 하나님의 아들로 보면 시아버지가 되는 것입니다. 아담을 보면 해와의 남편입니다. 그렇지요? 3대 남성을 대할 수 있는 인연을 갖고 온 것이 해와의 입장입니다. 즉, 딸의 입장이요, 며느리의 입장이요, 아내의 입장으로 온 것입니다.
그러면 며느리는 어떠한 입장이냐? 양녀의 입장입니다. 하나님과 관계를 중심삼고 보면 아버지이지만, 아담과의 관계를 중심삼고 보면 남편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복귀는 거꾸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복귀원칙으로 볼 때에 다말이 며느리 자리요 딸의 자리에 있지만, 시아버지의 품에 들어가는 것은 죄가 되지 않을 수 있다는 원칙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이렇게 해 가지고 베레스와 세라가 태어난 것입니다. 베레스의 혈통을 받아 가지고 하나되는 자리는 사탄이 참소할 수 없습니다. 알겠어요? 장자의 혈통적 터전이 복중에서부터 출발된 것입니다. 타락으로 인해 복중에서부터 가인 아벨을 출발시켰기 때문에 다시 복중에서부터 가인 아벨을 탕감시켜 아벨이 가인을 주관할 수 있는 자리에 섰다는 것입니다. 그때, 형으로 태어나면 동생을 주관할 수 있어요, 없어요? '이놈의 자식아! 너는 내 동생이니까 내 말 들어야 해'라고 강제로라도 굴복시킬 수 있는 놀음이 벌어진다는 거예요. 그러므로 이런 터전을 중심삼고 하나님께서 이적기사를 행하실 수 있는 지상 터전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부터는 하나님이 이 민족을 대해 간섭하고 반대하는 민족은 들이치는 거예요. 왜냐? 장자의 권한을 갖고 태어난 분별된 민족으로서 하늘의 혈통적 터전을 닦아 왔기 때문에 이 민족을 반대하는 민족을 하나님이 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전에는 안 되는 것입니다.
아벨 때를 보면, 가인이 아벨을 죽였지요? 그런데 아벨을 죽이고 두려워하고 있는 가인을 대하여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가인아, 두려워 말라. 누구든지 너를 죽이려고 하는 자는 벌을 칠배로 받을 것이다' 하셨습니다. 그때는 치지 못하는 거예요.
그러나 이제는 때가 다릅니다. 이 권내에서는 반대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분별된 터전을 통해서 전통적 사상을 가지고 심정적 인연을 계승해 나오는 것이 이스라엘 나라와 유대교의 전통입니다.
그러면 왜 당시에 주님을 보내시지 않았느냐? 주님을 그냥 보낼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사탄은 개인만이 아니라 나라를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나라를 이루어 주권을 형성할 때까지 이렇게 갖추어 나오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나라와 유대교가 완전히 하나되어야 됩니다. 그렇게 하나되는 놀음을 해 나와야 됩니다.
그리하여 4천년 역사노정을 거쳐 비로소 전통적 역사를 이어받은, 다말과 같은 절개를 가진 여자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다말이 그렇게 정성들여 하늘의 뜻을 이룰 수 있는 터전을 만들었듯이 그런 순종을 이어받을 수 있는 여인이 나와야 주님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어떤 여인이냐 하면 처녀의 몸으로 다말과 같은 사상을 이어받은 여인입니다. 주님은 시집간 여자의 몸에서 태어나면 안 됩니다. 그렇지요? 처녀의 몸에서 태어나야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타락전 아담 해와가 처녀 총각이었듯이 처녀의 몸에서 태어나야지요? 그렇지요? 처녀의 몸에서 태어나야 되는 거라구요.
그렇지만 다말은 몇 남자를 거쳐서 아들을 낳았기 때문에 안 되는 거라구요. 그래서 양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말의 그런 절개를 이어받아 가지고 처녀의 몸으로서 정성들여 가지고 하나님 앞에 부름받을 수 있는 여자가 있어야 됩니다. 그런 처녀가 있어야 돼요. 그 처녀가 누구라고요? 「마리아입니다」 마리아예요.
한국 말에는 '말이야'라는 말을 많이 쓰지요? 여기에 재미있는 것은 남자도 '글쎄 말이야' 여자도 '글쎄 말이야' 하는 거예요. 이것이 무슨 말이냐 하면 전부 다 마리아를 찾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국이 주님을 모실 수 있는 나라가 되려니 할 수 없이 마리아를 찾는 것입니다. (웃음) 왜 웃어요? 누가 그렇게 하라고 했어요. 너 말이야, 엄마 말이야, 아빠 말이야, 전부 다 마리아를 찾는다는 것입니다.
마리아를 제일 많이 부르는 민족이 어느 민족이냐 하면 유대 민족도 아닌 한국 민족입니다. 그렇지요? 이렇게 마리아를 많이 불렀으니 마리아를 제일 좋아하는 것입니다.
이 '말이야'란 말은 접속사로서 말을 연결시킬 때의 중간 휴식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귀노정에 있어서 중간 휴식처로서 신부의 사명을 해야 할 마리아가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이런 얘기 했으니 여자들이 이제 내가 마리아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니 여자들, 여자로 잘 태어났어요, 잘못 태어났어요? 그런 처녀가 태어나야 되겠어요, 안 태어나야 되겠어요? 「태어나야 됩니다」 태어나야 되겠지요? 그러려면 다말과 같이 되어야 됩니다. 다말의 심정을 이어받은 처녀가 태어나야 됩니다. 그렇게 태어난 처녀가 바로 마리아입니다.
복귀원리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공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자! 그러면 마리아를 봅시다. 처녀가 말이야. 또 '말이야'라고 했구만요. (웃음) 마리아가 처녀로서 요셉과 정혼을 했는데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나서 '네가 이제 성령에 힘입어 아기를 낳을 것이다'고 예고를 했습니다. 그때 마리아가 '내가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떻게 그런 일이 있겠나이까'라고 말하니 '하나님은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가브리엘 천사가 말했습니다. 그때 마리아는 '주의 계집종이오니 뜻대로 하시옵소서' 했습니다.
그러면 마리아가 종입니까, 딸입니까? '주여 당신의 딸이오니 뜻대로 하시옵소서' 그렇게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종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데 있어서 딸이 없었습니다. 딸이 없었지요?
여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시집간 여자이고, 하나는 시집가지 않은 처녀입니다. 두 종류밖에 없는 거라구요. 그렇지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복귀섭리노정에 있어서는 시집간 여자 하나를 취해 와야 되고 시집가지 않은 처녀 하나를 취해 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시집가지 않은 처녀도 그냥 아무 내연이 없는 처녀가 아닙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요셉하고 정혼을 하고 나서 시집을 가기 위해서 만반의 준비를 하면서 '저 더벅머리 총각이 내 신랑이구나. 잘생겼을까, 못생겼을까' 이렇게 자기 꿈이 부풀어 있을 때라구요. 에덴 동산에서 아담 해와가 뭔지는 몰랐지만 앞으로 천지의 이념을 다 상속받을 꿈이 부풀어 있을 때 타락했기 때문에 복귀하기 위해서는 그와 같은 환경을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는 복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하고 정혼한 처녀 마리아를 하나님이 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리아는 몇 살쯤 되어야 되겠습니까? 생각해 보세요. 스무 살이 넘으면 마리아는 사명을 못 한다는 거예요. 여러분, '마리아' 하게 되면 스물댓 살 된 기분이 들어요, 열 일곱 여덟 살 된 기분이 들어요? 「열 일곱 여덟…」 그렇다는 것입니다. 왜냐? 10대에서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10년이 한 단위권입니다. 소생, 장성, 완성 3단계에 3을 곱하여 하나님까지 합하니 10이 됩니다. 천지창조의 원칙은 10대권을 중심삼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10은 한 단위권이라구요. 그러므로 20대의 사람을 택하는 것이 아니라 20이전 10대의 사람을 택해야 됩니다. 인류의 어머니 될 수 있는 사람은 스무 살이 넘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이 나오는 겁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예」
그러면 마리아가 '주의 계집종이오니 뜻대로 하시옵소서' 그런 말을 할 수 있어요? 천사가 마리아에게 네가 애기를 낳을 것이다 할 때에 정혼한 총각이 있는 처녀로서 '마음대로 하소서' 할 수 있어요? 처녀로서 됐어요, 안 되었어요? 그것은 시집가기 전에 남자를 버리겠다는 뜻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누구 때문에? 자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 하나님 뜻 때문에 무엇을 버리겠다는 것입니까? 남편 될 사람을 버리겠다는 것입니다. 남편 될 사람을 버리겠다는 말은 그 사람이 살고 있는 사회 환경도 버리겠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하면 부모가 가만히 있겠어요? 그러니 아버지 어머니를 다 버린다는 것입니다. 또 형제들이 가만히 있겠어요? 반대하니 형제들도 다 버린다는 것입니다. 고독단신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여자들이 있지만 고독한 여자 중에서 제일 고독한 여자는 나밖에 없구나' 하는 입장에 서게 되면 고독한 여성을 대해 고독한 하나님께서 편이 되어 관계를 맺고 출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고독한 여자, 그것은 다말이 처했던 입장과 마찬가지입니다. 여자로서 절개지조를 다 무시해 버린 것입니다. 자기의 마음에는 단 하나, 하나님의 축복과 하나님의 뜻을 염려하는 마음만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 외에는 전부 다 사라져 버려도 좋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마리아가 한번 되고 싶어요? 다말이 한번 되고 싶어요? 여러분은 시집을 갔으니까 마리아는 못 되지요? 그러니 다말이 한번 되고 싶어요, 안 되고 싶어요? 「되고 싶어요」 그러면 남편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남편이 죽었어요? 「살았습니다」 남편이 살아 있는데 어떻게 될 수 있어요? 그것을 생각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뜻을 중심삼고 사는 여자는 자기 위신과 체면과 절개 모든 것을 염두에 두지 않고 뜻을 위해 일편단심으로 사는 것입니다. 뜻으로 말미암아 죽고 뜻으로 말미암아 살고 누더기가 되고 뜻으로 말미암아 영광 자리에 나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뜻 때문에 죽어도 좋고, 살아도 좋고, 망해도 좋고, 흥해도 좋다는 거예요. 이 말이 무서운 말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됩니다. 그래야 두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두 세계의 승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두 세계의 승자가 되지 않고는 하늘의 터전은 이룰 수 없습니다. 어차피 이 세계는 두 세계가 아닙니다. 가인 아벨의 세계를 넘어서야 된다는 것입니다. 타락한 혈통을 받은 우리에게 있어서는 죽어도 좋고 살아도 좋다는, 두 세계를 넘어설 수 있는 아량을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부모의 사랑도 좋고, 남편의 사랑도 좋다, 아! 이 사랑은 내 것이다. 아들의 사랑도 좋다. 아! 이 사랑만은 내 것이다' 할 때 하늘과 통하겠어요, 안 통하겠어요? 그것은 불통이예요. 역사는 이렇게 이루어져 나왔고, 역사적 전통을 받든 여자가 이렇게 어려운 반대의 길을 걸어왔기 때문에 통일교회 역사 가운데도 그러한 역사가 있어야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들의 가문을 중심삼은 종족에도 이와 같은 역사가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 때문에 부모도 버리고, 하나님 때문에 형제도 버리고, 하나님 때문에 남편도 버리고, 하나님 때문에 자식도 버려야 됩니다. 이렇게 되어야 하는 거라구요. 여러분들은 축복받은 사람들로서 반대하는 패가 아닙니다. (일부 녹음이 되어 있지 않아 정리하지 못했음)
그러니 천사장을 복귀하기 위한 고생도 해야 된다는 거예요. 이것도 축복받은 여러분들이 해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다말의 계승자가 되고, 마리아의 계승자가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입장을 여러분들이 이때에 가름해야 됩니다. 그래서 지금 여러분들은 그것을 다 버리고 나간 여자의 입장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알겠어요? 잘 알겠어요? 「예」
여러분이 임지에 나가기 전에 낳은 아들딸과, 이 길을 다 거치고 난 후에 낳는 아들딸은 다를 것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하늘을 정말 끝까지 따르겠다는 자리에서 아들딸을 한번 낳아 보자 하는 마음을 가진 여자들이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언제 그런 결심을 해 가지고 다 버리고 나선 때가 있었어요? 없었지요? 다 버리긴 뭘 버려요? 찾아 다니는 게 버린 건가요? 그러니 이제야말로 다 버렸다 하는 조건이라도 세워 가지고 여자로서 복귀섭리에 있어서 비로소 얼굴을 내놓을 수 있는 전통을 상속받을 수 있는 여인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행동을 대표한 것이, 통일교회 축복가정 아낙네들을 출동시킨 이번 3년 기간인 것입니다. 여기에는 중대한 의의가 없는 것이다? 「있는 것이다」 아는구만. 듣긴 바로 들었구만.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들은 이렇게 분별된 사상을 계승해야 되는데 무슨 사상을 계승해야 되느냐? 다말의 사상을 계승해야 됩니다. 또, 무슨 사상을 계승해야 되느냐? 마리아의 사상을 계승해야 됩니다. 그 사상을 그대로 계승해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즉, 여러분이 다말의 사상, 마리아의 사상을 계승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계승해 가지고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면 아들을 낳아야 됩니다.
다말과 마리아가 전통적 사상을 계승해 가지고 애기를 낳을 때, 지옥에 갈 아들을 낳겠어요, 천국에 갈 아들을 낳겠어요? 「천국에 갈 아들입니다」 천국에 갈 아들을 낳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럼 축복받은 여러분은 지옥에 갈 아들을 낳아야 되겠어요, 천국에 갈 아들을 낳아야 되겠어요? 어디에 갈 아들을 낳을래요? 「천국에 갈 아들입니다」 천국에 갈 아들을 낳아야 됩니다.
천국에 갈 아들을 낳으려면 천국 주머니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천국에 갈 아들을 못 낳는 거라구요. 그 주머니가 뭐냐 하면 다말 주머니, 마리아 주머니입니다. 이것을 이어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뜻 때문에 여자는 혁명을 했지만, 남자가 혁명하는 게 아닙니다. 남자는 혁명을 못 했습니다. 여자만이 뜻 때문에 혁명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 엄숙하고 거룩한 전통적 사상을 올바로 이어받아야 되겠습니다. 이어받는 데는 그와 같은 자리에서 이어받아야 되겠기 때문에, 그런 자리에서 남아져야 되겠기 때문에, 그런 자리에서 모든 것을 각오해야 되고 거기에서는 세상 나라도 굿바이(good-bye), 세상 남편도 굿바이(good-bye)해야 됩니다. 그래 가지고 누구를 따라가야 하느냐 하면 하나님을 따라가야 됩니다. 지금 그 놀음을 하는 거라구요.
이제 여러분들에게 '다시 시집가라' 하게 되면 어떻게 하겠어요? 대답해 봐요. '다시 시집가라'고 하나님께서 명령을 하시면 가야 되겠어요, 안 가야 되겠어요? 「가야 됩니다」 '아이구, 그래도 축복을 받았는데…' 그래야 되겠어요, 기분 좋게 가야 되겠어요? 남편들은 기분 나쁠 거라. (웃음) 그렇지만 할 수 없다구요. 만일 남편이 반대하면 데리고 살아야 되겠어요, 안 살아야 되겠어요? 노골적으로 이야기하자구요. (웃음) 언제 여러분들이 선생님에게 노골적으로 얘기할 수 있겠어요? 내 말이 농담이 아니라구요. 이런 말을 묻는 데는 다 뜻이 있어서 묻는 거라구요.
남편이 사탄 놀음할 때는 어떻게 할 거예요? 같이 살지 말고 젖을 먹여서 키워야 된다는 거예요. (웃음) 젖을 먹일 때는 뭐냐 하면 양자라구요. 가인적인 남편입니다. 여러분은 가인적인 남편을 모셔야 됩니다. 가인적인 아내의 입장에서 아벨적인 남편을 모실 수 있게끔 굴복시켜 나와야 됩니다.
여러분에게는 지금 때가 제일 좋은 때입니다. 가인적인 남편을 때려잡는 데 있어서 제일 좋은 때라는 거예요. 또 갈라져도 무리 없이 갈라질 수 있는 때입니다. 가인 남편 때려잡는 데 제일 좋은 때요, 일생 동안 보기 싫은 주제넘은 가인을 떼어버리는 데 제일 좋은 때라는 거예요. 내가 싫다고 하지 않았으니 걸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이때가 심상치 않은 때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알겠어요?
처녀가 아기를 낳는 때요, 며느리가 시아버지와 관계를 맺어 아기를 낳겠다고 야단하는 때라는 것입니다. 심상치 않은 때라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역사노정을 통틀어 볼 때에, 오늘날 통일교회 여자들이 나타나서 이런 일을 하는 것은 심상치 않은 때의 걸음걸이라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예」 이걸 잘 알아야 되겠습니다.
다말의 전통, 마리아의 전통을 계승해야 합니다. 여자들은 말할 때마다 생각해야 합니다. 뭐가 어떻고 어떻고 '말이야' 할 때는 '아이고 내가 마리아 될 수 있나' 하고 반성하라구요. 이것이 실감이 나야 하기 때문에 이렇게 설명하는 것입니다. '말이야'를 하루에도 몇 번씩 쓸 것입니다. '글쎄 말이야, 너 말이야, 나 말이야, 저 말이야' 하고…. 그렇기 때문에 참다운 마리아가 되라 이거예요.
우리 한국 민족은 계시 민족입니다. 계시 민족이라서 그렇다는 거예요. 여러분, 전통을 알겠어요? 그러면 이런 전통을 이어받겠다는 사람 손들어 봐요? 손 안 드는 사람 있으면 죽으라는 거예요. (웃음) 똑똑히 알아야 되겠다 이거예요. 이게 멋진 말이라구요. 여러분은 양녀가 될래요, 종이 될래요? 한번 물어 봅시다. 이제 멋진 얘기를 해 줄 텐데…. 이렇게 얘기하다가는 끝이 없겠구만요. 밥도 먹어야겠고…. 밥은 조금 늦어도 괜찮지요? 「예」
양녀가 될 거예요, 종이 될 거예요? 양녀가 될 수 있으면 복이라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주여 양녀이오니 뜻대로 하소서' 그랬어요? 주여 뭐라고 그랬어요? 「종이요」 딸랑딸랑 소리가 나는 게 종이라구요. 여기 치고 저기 치고, 남북으로 왔다갔다하는 것이 종이예요. 그렇지 않아요? 종을 칠 때 생각해 보라구요. 남북으로 왔다갔다하고, 동서로 왔다갔다하고, 어디든지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는 것이 종이예요. 종은 주체성이 없는 거라구요. 그러나 아들딸은 주체성이 있습니다. 그래 종이 되겠어요, 양녀가 되겠어요? 양녀는 '우리 아버지가 이랬는데…'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리아는 종이고, 여러분들은? 「양녀요」 여러분들이 마리아 보다 높다는 말이예요? (웃음)
그럼 종에게서 태어난 아기하고 양녀에게서 태어난 아기를 부모가 가만히 볼 때, 어느 쪽이 더 가깝겠어요? 「양녀의 아기요」 기분 좋겠구만. 그러면 여러분들의 마음은 예수님보다 못한 아들을 낳고 싶어하느냐, 나은 아들을 낳고 싶어하느냐? 「나은 아들이요」 옳거니. (웃음) 이렇게 생각할 때에, 예수님보다 못한 아들을 낳아 가지고는 하늘나라에 못 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보다 나은 아들을 낳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가요, 못 들어가요? 「들어갑니다」 예수님은 지금 어디에 가 있어요? 「낙원이요」 천국 가는 대합실에 가서 기다리지요?
이제 여러분들이 낳은 아들딸들은 어디로 가는 거예요? 대합실이 아니라 차표도 마음대로 살 수 있고, 문도 마음대로 열고 들어갈 수 있는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보다 나은 아들딸을 낳을 수 있는 여자가 세계에서 내노라 하는 왕녀예요, 뭐예요? 그런 왕녀가 아닙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이름난 왕녀라 하더라도 그는 종(사탄)의 후손에 불과합니다. 그러면 황후예요? 세계의 그 어떤 황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그런 왕녀나 황후보다 못한 거예요, 나은 거예요? 예수님보다 나은 아들딸을 낳을 수 있는 여자는 어느 나라의 왕녀고, 어느 나라의 황후입니까? 「천국이요」 천국이 아니라 통일나라의 왕녀예요. (웃음) 통일나라가 없어 가지고 천국이 나올 수 있어요? 통일국의 뭐라구요? 왕녀, 여러분들은 통일국의 왕녀가 되는 거라구요. 왕녀는 공주님이지요? 황제와 황후가 죽으면 누가 그 계대를 이어받아요? 여러분이 그 계대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직계는 아니더라도 양녀로서의 계대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만 되면 대를 이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가만히 보니까 양자가 상속을 받는 것이 아니라, 누가 받아요? 「양녀요」 종의 입장에서 양자가 되었다고 꺼떡꺼떡해 보았자, 되고 보니 천사장 레벨밖에 안 됐다는 거예요. 남자가 요셉 정도밖에는 안 됐다 그말이예요. 따라서 양자는 먼저 상속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누가 먼저 상속을 받느냐? 양녀가 먼저 상속을 받는 것입니다. 왜냐? 신랑 되시는 아들을 낳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여자가 있어야 신랑이 태어나지요? 그렇지요? 신랑은 하늘에서 그냥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여자가 자기 배안에서부터 기르는 것입니다. 그리니 얼마나 복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요, 인류의 주인 되시는 주님을 자기 복중에서 기른다는 것이 얼마나 복입니까?
내가 밥을 먹으면 복중에 있는 주님도 밥을 먹어요, 안 먹어요? 내가 쌀밥을 먹으면 같이 쌀밥을 먹고, 내가 보리밥을 먹으면 같이 보리밥을 먹는 거예요. 또, 내가 죽을 먹으면 같이 죽을 먹는 거예요. 그렇지요? 여자들이 불행한 것이 아닙니다. 불행한 것 같지만 사람 중에서 가장 위대한 복을 받을 수 있는 대표자는 남자가 아니라 여자입니다. 양자 역사권내에 있어서 크나큰 복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양녀입니다. 그 양녀의 몸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양녀가 될래요, 안 될래요? 양녀가 되려면 앞에서 말한 양자가 아들을 모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복중에서부터 고이 모시며 '천년 만년 살고지고' 하면서 복중에서부터 천국의 사랑을 다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복중에 있는 아기를 지긋지긋하게 사랑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렇지 않아요? 배를 마음대로 내놓고 다녀도 안 된다는 거예요. 먹는 것도 마음대로 먹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먹을 때도 기도하고 잘 때도 기도하고 정성들이고 해야 되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그러면 이 3년 기간은 어떠한 기간이냐? 예수님을 다시 해산하는 기간입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3년만에 죽었지요? 누구 때문에 죽었어요? 해와 때문에 죽었습니다. 여자 때문에 죽었어요. 그래서 예수님을 다시 해산해 줘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이 다시 태어나서 어머니와 모자협조해 가지고 상속을 받아 자기 아들딸들에게 넘겨 줘야 그 아들딸들이 비로소 예수님보다 나은 아들딸들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칙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을 대신한 존재로 세우는 것이 뭐냐 하면, 믿음의 아들딸입니다. 예수님이 결혼하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에 처녀 총각과 같은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천사세계와 같은 입장입니다. 즉, 예수님은 천사장의 입장에 서 있다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그러니 믿음의 아들딸들을 대신 속죄시켜 가지고 그들이 자기의 아들딸과 하나되어 상속받아야 합니다. 그 아들딸이 먼저 태어나서 상속받았다는 조건을 세워야 아버지 어머니가 구원받을 수 있고 가인 입장인 믿음의 아들딸들도 구원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칙입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태어났는지 알겠지요? 여러분은 예수님보다 나은 아들딸을 낳아야 되겠다 이거예요. 그러려면 베드로·요한·야고보와 같은 세 제자를 키워 놓아야 합니다. 죽음의 골짜기에서도 자기를 위해 생명을 바칠 수 있는 믿음의 아들을 키워 놓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원수에게 맞아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여러분의 믿음의 아들딸입니다.
여러분 믿음의 아들딸이 있어요? 이 믿음의 아들딸을 누가 낳아야 돼요? 믿음의 아들딸은 여자가 낳아야 됩니다. 이번 기간이 이런 원칙적인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중요한 기간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번 3년노정에 있어서 잃어버린 베드로·요한·야고보와 같은 세 제자를 찾아 세워야 되고 그들을 중심삼아 가지고 열두 제자를 찾아 세워야 합니다. 또한 그들을 중심삼고 70문도, 120문도까지 찾아 세워야 됩니다. 종족을 중심삼고 이 놀음 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120명을…. 여러분 열 사람을 묶어서 전도하라 한 것은 무엇 때문이냐? 여기서 열 사람은 열 지파를 대표한 것입니다. 원리적으로 보면 열 지파는 열두 지파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여러분은 예수님을 중심한 사도들의 아내격입니다. 그 자리에서 믿음의 아들딸들을 찾아 세워 가지고 예수님의 씨족을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의 입장에 세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 하기 위한 기간이 이번 3년 기간입니다.
다말 때에는 사탄이가 그의 아들을 칠 수 있었습니다. 사탄이가 '네 복중에는 내 아들이 들어 있다'고 참소할 수 있었다는 거예요. 알겠어요? 다말 때까지는 그랬다는 거예요. 그래서 마리아 때에는 다말 때의 그것을 청산짓고 혈통적으로 상속하여 예수를 배었으므로, 복중에서부터 사탄으로부터 분별되었기 때문에, 사탄이 참소할 수 없는 전통을 이어받은 자리에 선 마리아이기 때문에, 마리아의 복중에 있는 예수를 사탄이 자기의 아들이라고 주장하지 못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게 되어 있어요, 못 하게 되어 있어요? 「못 하게 되어 있습니다」 못 하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만이 복중에서부터 내 아들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아들이 태어난 것은 역사상에 단 한 분 뿐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탕감노정을 통해서 혈통을 교체시킬 수 있는 역사적 터전을 닦아 놓은 분은 이 한 분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역사를 거쳐온 분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런 터전을 중심삼고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의 생명을 이어받아 가지고 비로소 마리아를 통해 태어난 분이 누구라고요? 예수님입니다. 비로소 지구상에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난 사람은 예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알겠어요?
예수님이 그렇게 태어났으니 종의 세계는 전부 다 예수님 앞에 굴복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 앞에 전부 다 굴복해야 되는 것입니다. 굴복하는 데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아담도 하나님의 아들이지요? 아담 때에는 굴복할 수 있는 무리가 천사세계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때에는 지상세계가 있었어요. 혹이 생겨났다는 거예요. 이것이 왜 생겨났느냐? 하나님과 반대되는 입장에 있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계가 예수님 앞에 완전히 굴복해야 됩니다. 알겠어요? 그래서 천군천사가 예수님의 탄생을 목자들에게 예고했지요? '이는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는 자요, 기뻐하는 자라'고 온 영계가 동원되어 가지고 예수님 앞에 굴복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육계만은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육계, 즉 이스라엘 나라와 유대교가 영계와 보조를 맞추어 가지고 굴복할 수 있는 입장이 되었더라면, 영계와 육계가 통일된 나라가 되어 하나님의 아들의 권한을 중심삼고 하나님이 직접 행사하여 사탄세계를 들이칠 수 있었다는 거예요. 반대하는 것을 들이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땅 위에 굴복할 수 있는 개인과 가정과 종족과 교단과 나라가 없었기 때문에 굴복시키지 못하고 밀려났습니다. 그렇게 밀려난 것이 하나님의 한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을 다시 찾아 가지고 굴복시키기 위한 놀음을 해야 됩니다. 이건 어제 내가 얘기한 말의 되풀이입니다.
선생님을 중심삼고 영계를 굴복시켜 가지고 지상에서 교회와 나라를 중심삼고 하나되게 해서 세계적인 형태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예수님이 나라와 교회 앞에 몰리고 쫓겨 죽은 것과 마찬가지로, 나라와 교회 앞에 쫓겨 이방나라에 갔다가 다시 상륙하여 몰리고 쫓기면서 지하공작을 하여 세운 교회가 오늘날 통일교회입니다. 이제는 백주에 정체를 드러내도 칼을 들고 찌를 수 없고, 몰아낼 수 없는 대등한 자리에 서서 우리라는 축에 끼어 들 수 있는 입장에 왔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억지로 한 것이 아니라구요. 사탄이 보면 어거지예요, 어거지패라구요. 사탄편에서 보게 되면 우리가 악착같고, 지긋지긋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편에서 봐도 사탄이 악착같고, 지긋지긋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편이 더 지긋지긋해야 되겠어요, 사탄편이 더 지긋지긋해야 되겠어요? 하나님편의 아들딸들이 더 지긋지긋지긋지긋지긋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웃음) 지긋지긋이라는 말이 더 길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더 악착같아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세상의 어떤 여자들도 하치 못하는 놀음을 해야 됩니다. '세상에 열녀가 있느냐? 있다면 그 열녀는 내 꽁무니에 설 것이다. 세상에 여자 충신이 있느냐? 있다면 그 여자 충신은 내 꽁무니에 서야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세상에 남자 충신이 있느냐? 있다면 그는 내 본을 받아야 되는 것이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그런 전통을 세워야 되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내가 치마를 둘렀을망정 당신들은 내 꽁무니를 따라와야 된다'고 해야 되는 거라구요. 남편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천사장이 해와의 궁둥이를 따라가다가 사탄이 되어 버렸지만, 이제 여러분의 남편들은 천국 가는 아내 따라가면 뭐가 됩니까? 그 남편은 천국 가는 것입니다. 반대라는 거예요. 역사의 타락은 해와로 말미암아 시작되어 가지고 해와 궁둥이 따라가는 남편과 자식으로 말미암아 되어졌지만 오늘날 탕감복귀원칙에 의해서 여러분들은 복귀해 올라가는 해와가 되어야 합니다. 해와의 입장인데 타락한 해와의 입장이 아니라 복귀해 올라가는 해와의 입장입니다. 그 뒤를 따라가는 것은 천사장겸 남편입니다. 그러니 양자겸 아들과 같은 입장에서 상속받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상속 중에 제일 안 되는 상속이 뭐냐? 여러분을 남자들에게 넘겨주는 것, 이 이상의 상속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기간에는 남편이 찾아와서 마음대로 못 한다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이번 기간에 '남편 아무개다 나와라' 한다고 나가서는 안 됩니다. '우리 조장님과 의논해 볼 테니 조금 기다리시오' 그래야 돼요. 안 그래야 돼요? 자기 마음대로 하다간 큰일납니다.
조장은 누구냐? 해와 대표자입니다. 이런 종합적인 대표자한테 '나가도 됩니까, 안 됩니까?' 하고 물어 봐야 됩니다. 조장이 '못 나간다'고 하게 되면 '아 우리 조장님이 선포하여 가라사대 당신을 만나지 말라고 하십니다. 돌아가시옵소서' (웃음) 그렇게 해야 됩니다. 이번 기간에는 남자의 주관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뭘 해야 하느냐? 어머니 대신 사명을 해야 됩니다. 여자는 해산의 수고를 해야만 복을 받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통일교회에 들어오는 사람은 떨어져 나가지 않아요. 옛날에 들어온 사람들은 막 떨어져 나갔지만 이제 들어오는 사람들은 떨어지지 않아요. 떨어져 나갈 사이가 없어요. 통일교회를 가만히 보니까 눈을 깜박깜박할 사이에 자꾸 커 가거든요. 그러니 떨어지래도 안 떨어진다는 거예요. 옛날에는 '아이고, 언제 복귀해 가지고 이겨내나? 아이고, 가면 갈수록 태산준령이고, 죽고 또 죽으래, 죽어도 또 죽으라고 하네. 이래 가지고 뭘 해먹겠나' 하면서 다 도망갔지만 이제는 그런 때가 지나갔어요. 이제부터는 그야말로 통일교회에서 존경하는 여러분이 해산할 수 있는 때라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그러면 여러분은 아들을 먼저 낳을래요, 딸을 먼저 낳을래요? 「아들이요」 (웃음) 여러분은 딸을 낳으면 안 돼요. 상대적이기 때문에 아들을 낳아야 됩니다. 모자협조를 해야 되는 거예요. 그러면 아들 중에도 유명한 사람이 될 수 있는 아들을 낳을래요, 못난 사람이 될 수 있는 아들을 낳을래요. 「유명한…」 그 아들의 입장이 무엇이냐? 가인입니다. 가인의 대표가 누구냐 하면 목사입니다, 목사. 그렇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목사를 찾아가서 내 젖을 먹고 자라라 해야 돼요. 그렇다고 진짜 젖을 먹이라는 것이 아니라구요. 진리의 젖을 먹여 키우라는 거예요. '내가 비록 이렇더라도 당신을 기를 수 있는 자격이 있다' 이겁니다. 이렇게 아들 중에서도 목사 아들을 낳으라는 거라구요.
내가 지난번에 조장들에게 얘기했는데, 그 조장들 말을 전해 듣고 목사들 찾아가 봤어요? '아이고, 목사들이 무서운 줄 알았더니 만나 보니 아무것도 아니구만' 하고 생각했을 거예요. 그렇다는 거예요. 한 번 만나 보고, 두 번 만나 보고, 세 번만 만나 보세요. 길거리에서 목사를 만나게 되면 '목' 하고 '사' 하기 전에 목사가 먼저 인사하는 거라구요. 그러면 여러분이 인사를 받는 것입니다. '목─' 하고 '목'을 길게 끌라구요. 그리고 '사' 할 때는 '감사합니다. 사' 하는 거예요. 상대편이 나한테 머리숙인 다음에 인사받는 거라구요. 내가 가르쳐 주고 인사받는다고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인사를 하되 그렇게 하는 거예요. 여러분들보다 목사가 낮아야 된다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그러한 자식을 두어야만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중심삼고 볼 때에, 마리아가 누구를 낳았습니까?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았지요? 마리아는 예수님을 낳아 가지고 정성껏 키워야 되는 것입니다. 정성껏 키워야 됩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했을 때, 얼마나 고귀했을까요? 그런데 마리아의 복중에 있는 아기가 사생아입니까? 사생아 반대말이 무엇인가? 이 목사, 사생아의 반대가 뭐예요? 사생아 반대말은 없지요? 사생아지요? 그러니 복중에서 아기가 크면 클수록 마리아는 걱정이 컸겠어요, 걱정이 없었겠어요? 걱정이 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계 인류를 대표한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하여 복중에서 키우면서 걱정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세계 인류를 품어 가지고 그 누구도 환영하지 않는 자리에서 해산을 해야 됩니다. 마리아가 복중의 아기가 크면 클수록 걱정이 컸던 것처럼 그렇게 걱정을 품고 가야 할 길이 이번 3년 전도기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전도는 해야 할 텐데 어떻게 해야 되나?' 걱정, 걱정, 또 걱정을 해야 됩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해산의 수고를 대역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열심히 움직여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예」
예수님이 복중에서 자라는 것은 세계 인류를 대표한 아들로서 가인을 굴복시키기 위한 입장에서 자라는 것입니다. 내가 그런 예수님과 같은 아들을 잉태하기 위해서는, 내 스스로 가인을 굴복시켜야 합니다. 아들이 태어나면 아들이 가인을 만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인 내가 가인을 잘 교육시켜 가지고 가인으로 하여금 내 아들을 아벨로서 모실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것을 어머니가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열매가 가인이 되었지요? 그렇지요? 죄는 어머니가 짓고 결실은 가인으로 맺었지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죄의 근원이 되는 어머니로서 죄의 결실이 되는 가인을 올바로 지도해 가지고 여러분의 아들딸이 가는 데에 상충이 없게끔 해야 됩니다. 그런 자연적인 복귀의 터전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 이번 3년 행각의 노정인 것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알겠어요? 그야말로 어려운 노정을 가야 됩니다. 가인을 교육시켜야 됩니다.
정성들여서 교육을 시켜야 하는데 교육은 어떻게 시켜야 되느냐? 예수님을 배반하고 도망갔던 예수님의 제자 같은 사람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을 배반하고 도망갔던 세 제자들보다도 나은 믿음의 세 아들딸을 키워 놓아야 됩니다. 남편을 쫓아낸 해와로서 위신을 세울 수 없는 입장에 선 해와이지만, 신랑 되신 예수님을 반대하던 그 제자들보다도 훌륭한 믿음의 아들딸들을 키워 놓음으로써 그들이 '당신이 나보다 훌륭합니다' 해야만 쫓겨 갔던 남편이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이번 전도 기간이 그런 것을 결정짓는 기간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이번에 나가서 악착같이 해 가지고 그런 세 아들딸을 기성교인들, 즉 유대교인들 가운데서 찾아야 되는 거예요. 이것은 선생님이 해야 할 것을 여러분이 대신하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여러분이 기성교회를 중심삼고 잘 믿는 사람들을 굴복시켜 가지고 베드로·요한·야고보 이상 될 수 있는 새로운 전통을 세워야 합니다. 그리하여 여러분들을 대신하여 자기의 목숨을 바칠 수 있는 믿음의 아들딸을 교육시켜 놓음으로써 여러분의 아들딸들이 그들에게 위함을 받게 될 때, 비로소 아담이 하늘나라의 3대 천사장 앞에 완전히 모심을 받는 평면적인 지상의 가정 기반이 설정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하나님께서 아담을 지을 때 세 천사장이 하나되어 가지고 아담 짓는 것을 협조했지요? 그와 마찬가지로 여러분 앞에 복귀된 세 아들딸이 합하여 가지고 여러분의 몸을 통해 태어나는 아담과 같은 입장의 아들딸을 정성껏 모실 수 있는, 타락한 천사가 아닌 타락하지 않은 천사장의 사명을 이 지상에서 완결해야 됩니다. 그 기반 위에 선 아들로서 하나님 앞에 바쳐져야만 하늘나라의 아들이요, 하늘나라를 상속받을 수 있는 아들로 등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리관입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슬펐던 예수와 우리', 간단히 얘기하자구요. 그러면 예수님이 태어날 때부터 누구를 서럽게 만들었느냐? 해와를 서럽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은 태어날 때부터 어머니를 고생시키면서 태어난 분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하고서는 얼마나 심려했겠나 생각해 보라구요. 불러 오는 배를 마음대로 남편에게 보일 수 있게 되어 있어요? 마음대로 밖으로 나갈 수 있어요? 이렇게 예수님은 그 누구도 모르는 자리에서 어머니를 심려시킨 역사적인 인연을 갖고 태어났습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이 태어나 가지고 어떻게 했습니까? 어머니를 기쁘게 했어요? 나중에는 '여인이여, 너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했지요. 이렇게 마리아는 예수님을 낳고서도 슬픔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을 영광의 자리에서 맞이하지 못하고 비참한 자리에서 맞았습니다. 그 눈으로 피를 흘리며 죽어 가는 비참한 끝을 봤던 것입니다. 그것이 마리아의 입장이었습니다. 여러분도 이런 비참한 자리에 서 보라구요.
그러면 왜 그런 비참한 자리에 서게 됐느냐?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나라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할 수 있는 교단이 없었기 때문이요, 하나님의 뜻을 세울 수 있는 가정이 없었기 때문이요,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이룰 수 있는 남자가 없었고 여자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행복하다는 거예요. 그렇지요? 우리 앞에 나라는 없지만, 통일교단이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은 마리아의 입장과 다르다는 거예요. 마리아는 교단도 없고, 나라도 없고, 친척도 없는 고독단신이었지만 여러분은 통일교단이 있어 가지고 앞으로 나라를 상속받고, 나라를 통일시킬 수 있는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입장이냐? 마리아와 같지 않습니다. 마리아 이상의 자리에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통일교단이 있다는 거예요. 유대 나라로 말하면 유대교회를 찾은 입장에 있다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그래 가지고 유대교단과 하나되고, 요셉 가정과 하나된 자리에 서 있습니다. 여기에 요셉의 입장을 대신한 사람이 누구냐? 여러분의 남편입니다.
여러분들이 마리아의 한을 해원성사해 줘야 되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고독단신으로 예수님을 낳아 가지고 슬픈 결과로서 예수님을 보냈지만, 여러분은 그것을 탕감해야 됩니다. 여러분은 마리아와 다른 입장에서 마음대로 경배할 수 있는 통일교단을 가졌고 마음대로 뜻을 세워 나갈 수 있는 요셉과 같은 남편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마리아를 지긋지긋하게 반대했습니다. 그렇지만 여러분들은 그런 마리아와는 다르다구요. 또 요셉의 친척과 다른 친척을 가졌습니다. 우리가 가는 길을 염려해 주는 교회가 있고, 친척이 있고, 남편이 있고 아들딸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 전체가 환영하는 가운데서, 하늘땅이 굽어보는 가운데서 예수님이 태어나지 못했던 것을 해원성사해 주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그런 자리에서 예수님을 대신한 아들딸을 낳을 수 있는 입장이 되어야 됩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럼으로 말미암아 슬프게 태어났던 예수님, 슬프게 살았던 예수님, 슬프게 죽었던 예수님을 여러분들이 해원성사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기를 낳을 때 아버지가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아기가 태어난 것을 백방으로 받아들여 환영할 수 있고, 백방으로 행복하게 키워서, 하나님의 영광의 터전 위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 있는 백성으로 바쳐 드릴 수 있는 입장에 선 것이 축복받은 가정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알겠어요?
여러분은 누구의 아들딸을 낳느냐 하면, 여러분의 남편 아들딸을 낳는 것이 아니라구요. 하나님의 아들딸을 낳는 것입니다. 참부모님을 중심삼고 혈통적인 인연이 연결된 아들딸을 낳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아들딸을 자유로운 환경에서 고이 길러야 되는 것입니다. 낳자마자 죽음길에서 신음하는 것이 아니라, 낳자마자 수난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축복가정의 아들딸로서….
그런데 지금 어머니가 임지에 나가 있어서 아기들이 비참한 것 같지요? 그것은 아빠 엄마가 책임 못 했기 때문에 할 수 없다는 거예요. 여러분이 하나되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하나 못 된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 남편들은 천사장들이기 때문에 하나 못 되는 것입니다. 여자들이 하나되어야 됩니다. 여자들은 더 어렵지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되는 운동을 누구에서부터 해야 하느냐? 여자들에서부터 해야 됩니다. 그래서 여자 열 사람이 임지에서 같이 살면서 서로 싸우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이것이 틀어지는 날에는 아무리 전도를 해도 전도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전도가 되나 안 되나 두고 보라구요. 그러므로 열 사람이 하나되어 가지고 하늘을 위하여 정성들이고 선생님을 중심삼고 하나되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열 몸이지만 하나의 어머니의 터전을 갖추어 동서남북 사방의 틀을 갖추어 가지고 행동하면서 나가면 여러분들이 가는 길은 평탄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교회장, 혹은 지역장이나 지구장들 앞에 새로운 전통적 사상을 불어넣어야 됩니다.
그렇게 되면 여러분의 남편들은 어떤 입장이 되느냐? 까딱 잘못하다가는 심정의 감소감을 재현시킬 수 있는 입장에 서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여자들이 3년 전도 나가는 데 있어서 선생님에 대해 불평하는 사람이 많은 거예요. 여러분이 이런 생각에 부딪치기 쉬운 환경에 처해 있느니만큼 철석같은 신념을 가지고 남편을 재교육해야 됩니다.
지금까지는 여러분들이 남편을 따라갔다는 거예요. 그랬어요, 안 그랬어요? 여러분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남편 따라갔어요, 뜻을 따라갔어요? 대답해 보라구요. 여러분은 지금까지 남편 따라갔다는 거예요. 뜻보다도 남편을 위주해서 살아왔다는 거예요. 이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뜻 때문에 남편을 만났으니 뜻을 부정하는 남편은 교육시켜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남편을 따라 나온 입장이었지만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가다가는 선생님의 가정과 동떨어진다는 거예요. 알겠어요? 여러분의 가정에 금이 가기 시작하는 거라구요. 한 고개 넘어가고, 두 고개 넘어가고 세 고개 넘어가게 되면 영영 갈라지는 거예요. 선생님 가정을 못 따라온다는 거예요. 내가 축복을 해주었기 때문에, 그와 같은 길을 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기에, 남편을 위주한 여인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주한 여인을 만들어야 살겠기 때문에 선생님을 중심삼아서 일제히 동원하라고 명령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방비하기 위한 대책으로 마련한 것이 이번 전도기간인 것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래 여러분은 누구의 말을 들어야 돼요? 선생님 말을 들어야 돼요, 남편의 말을 들어야 돼요? 「선생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남편들은 이것을 좋아하지 않지요? 찌뿌둥해 할 것입니다. 그런 때일수록 여러분이 힘을 내 가지고 하나님을 따라가는 입장에서 남편을 올바로 지도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해와의 입장에서 천사장인 남편을 잘 이끌어 줘야 합니다.
그런데 무엇을 갖고 그래야 되느냐? 남편이 어떻다고 하면 안 돌아보지만 아기가 어떻고 어떻고 하게 되면 돌아봅니다. 그러니 보고 싶으면 아기를 찾아간다는 것입니다. 그 아기를 찾아가면 둘 다 걸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아기가 무슨 아기요, 아버지가 문제지' 하고 쳐야 합니다. 이렇게 해 가지고 여러분의 가정이 여러분으로부터 새로운 전통을 이어받은, 뜻을 위주한 가정의 기원이 공고화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의 3년노정이 끝난 다음에는 남편들을 동원해 3년 동안 전도하게 하면 좋겠다 하는 것을 결심해야 합니다. 알겠어요? 여러분들이 3년 동안 이런 전통을 틀림없이 세워 가정을 혁명해야 할 텐데 남편이 책임을 못 했을 때는 남편도 3년노정을 통해 고생을 시켰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때는 여러분들이 아들딸을 기르면서 남편의 신세 안 지고도 홀로 살 수 있겠어요? 그때 여러분이 굶는다면 선생님이 돈을 대줄 것입니다. (웃음)
그런데 요즘에 남편들이 굶는다는 소리를 들어도 안 대줄 것입니다. 지금 고빗길에 왔다는 거라구요. 작년부터 고빗길이라구요. 여기 지역장들 손들어 봐요. 고빗길에 들어서 봐라, 이 사내 자식들. 배고파 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40일 금식을 했어요. 여러분도 결심 안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월급을 몇 개월만 주기로 했는데 지금 약속대로 하고 있습니다. 지금 때는 전부 다 잘라야 됩니다. 그것도 알아 두라구요.
우리 교회의 조직으로 보게 되면 지역장 지구장들은 제사장들입니다. 지역장 지구장들이 뭐라구요? 「제사장이요」 전도대원들은 올바른 생각을 가져야 됩니다. 그러면 제사장들은 누가 되느냐? 레위 족속이 되어야 됩니다. 이스라엘 민족 중에 다른 지파들은 전부 다 분깃을 탔지만 레위 족속은 분깃을 탔어요? 못 탔습니다. 왜 못 탔습니까? 제사장은 제물이기 때문입니다.
제사장은 뭐라구요? 「제물입니다」 제물은 뭐냐 하면 희생을 동반하는 것입니다. 희생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뭘 줄 수 있겠습니까? 피를 팔아서 먹고 사는 거라구요. 눈물과 피땀을 흘리고 그 대가를 받아서 먹고 사는 레위 족속인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제물은 소유권이 없는 것입니다. 제물이 소유권이 있어요? '나는 아무개 아들이요. 나는 아무개집 주인의 소새끼요' 하고 합니까? 제물은 공동소유입니다. 소유권이 없는 거라구요. 소유관념이 없습니다. 그저 주인이 하자는 대로 따라 해야 됩니다. 자기라는 소유관념이 없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존재의식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내가 이렇게 사는 것은 기분 나쁜데…' 하면서 자기를 주장했다간, 존재의식을 가졌다간 하늘의 반역자가 되는 것입니다. 나는 살아 있지만 죽은 것과 마찬가지라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삭이 뜻을 이룬 것은 소유관념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당신의 아들이 아니오?' 하고 생각했다면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는 법이 어디 있소?' 하고 반대했을 것입니다. 또, 존재의식을 가졌다면 '나는 안 죽겠소' 하고 반항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했다면 뜻을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삭이 훌륭한 것은 묵묵부답이었다는 것입니다. 불평 한마디 안 하고 꺼벅꺼벅 죽어가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이 그를 잡아 주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통일교회 지역장 지구장들도 꺼벅꺼벅 앉아 가지고 굶어야 됩니다. (웃음) 눈이 빠끔해지고, 볼이 여위고, 기운이 없어 비틀비틀하면서 쓰러져 죽어 보라는 겁니다. 그렇게 비참하게 죽더라도 불평이 없어야 됩니다. 그런 사람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모두가 머리를 숙인다는 거예요. 만약 그렇게 했는데도 망했다면 기독교 역사, 하나님의 복귀섭리역사는 몽땅 깨져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생님도 감옥에 들어가고 사지에 가서도 가만히 있었던 거라구요. 더 못 죽어서 한이라는 거예요. '내가 죽지 않았으니 산 책임을 해야 되는구나' 하고 꺼벅하고 있는 것입니다. 존재의식이 없다는 거예요. 소유의식이 없는 거라구요. '나는 당신의 아들이 아니오? 아들을 이렇게 고생시키는 법이 어디 있소?'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구장, 지역장 부인들은 똑똑히 알라구요. 알겠어요?
레위 족속에게는 분깃이 없었습니다. '월급이 2만 5천원이야. 3만원이야. 5만원이야…. 나 월급 받아야 돼' 이런 생각을 하는 목회자 그 교회는 망하는 것입니다. 그런 종교는 끝에 가서 사탄의 제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에게 돈이 있어 가지고 쓰고 남는다 해도 여러분에게 월급을 줘서는 안 된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여러분, 아버지한테 월급받게 되어 있어요, 드리게 되어 있어요? 제물은 아버지 앞에 받게 되어 있어요, 드리게 되어 있어요? 「드리게 되어 있습니다」 똑똑히 알아야 돼요. 여러분의 신랑들이 그런 사상을 가지고 있다면 망하는 거라구요. 공장 직원과 다른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월급을 주더라도 교회 책임자에게 월급을 안 주는 것은 이 원칙을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전부 다 망하더라도 천도를 따라 세 사람이라도 남아서 이것만 지키게 되면 통일교인은 망하더라도 통일교회는 안 망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다 떨어져 나가더라도 안 망한다는 거예요. 이것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어요. 본부에서 보내 주는 돈을 가지고 교회를 짓는 것도 원칙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여러분, 미국을 보라구요. 미국이 오늘날 이처럼 부국이 된 원인이 뭐냐 하면, 자기들에게 돈이 생기면 먹을 것을 먹지 않고, 입을 것을 입지 않고, 자기 살 집을 짓지 않고 먼저 교회를 짓고, 그 다음에는 교육기관을 짓고, 그 다음에 자기집을 지었다는 것입니다. 선생님도 그 사상을 알기에, 또 그것이 원칙이기 때문에 먼저 교회를 지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금년에 집을 사려고 몇천만 원 마련해 둔 돈도 교회를 위해서 여의도 본부 건설을 위해서 다 투입한 거라구요. 그 다음에는 학교를 짓기 위해서, 미래의 후손을 위해서…. 현재는 희생하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는 민족은 망하는 거라구요. 알겠어요? 「예」 여러분이 그걸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은 뜻을 원하는 것이요, 미래를 원하는 것입니다. 미래는 후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미래를 복귀하기 위해서 현재를 희생시키는 것이 탕감복귀섭리역사가 아니냐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 세계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 제사장의 책임을 짊어진 자로서 뜻만을 위하고 후대만을 위해야 됩니다. 자기가 뜻 때문에 희생하고 후대 때문에 희생하며 가는 사람은 굶지 않습니다. 밥을 안 굶는다는 거라구요. 밥 굶나 보세요. 그저 굶어 죽을 것 같은데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하고 해서 그것을 피해 간다는 거라구요. 의심 나면 여러분이 한번 해보라는 거예요. 죽을 길을 가는 데도 안 죽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렇게 내려가는 것 같은데 안 내려간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하면 내려가지만 하나님을 위하면 올라간다는 거예요. 그저 꼬불꼬불하면서 올라가요. 이것이 열두 고개입니다.
아리랑 고개가 몇 고개입니까? 열두 고개라구요. 하나님을 사랑하고 낭군을 사랑하는 여자의 마음과 같은 마음을 갖고 '어떤 어려운 길이라도 참고 간다. 배고픔도 참고 눈물길도 참으며 넘어가고 또 넘어가는 것이다. 나는 죽고 없어져도 당신의 소원의 터전 위에서, 승리를 찬양할 수 있는 영광된 자리에서 우리의 후손들이 칭찬할 수 있는 하나의 신랑 신부로 만납시다' 하며 아리랑 고개 열두 고개를 넘어가서 만나자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아리랑 고개를 열두 고개라고 하지요? 그 아리랑 고개는 복귀 고개입니다, 복귀 고개. 한국 민요를 보면, 한국 백성은 참으로 계시적인 민족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고 되어 있습니다. 왜 열두 고개라는 말이 나왔느냐? 복귀노정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걸 알아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사장의 책임은 제물이 되는 것이요, 제물된 자는 존재의식과 소유관념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돈이 조금 생기게 되면 '이 돈으로 내게 필요한 것을 사야 되겠다. 내게 거울이 없으니 좋은 거울을 하나 사야 되겠다. 블라우스가 입고 싶다. 원피스가 입고 싶다. 저 투피스를 한번 사 입었으면 좋겠다' 하는 이런 시시한 생각을 하고 있는 여편네들은 다 없어지라는 거예요. '내가 그런 것을 입기 전에 이 백성을 그렇게 입혀야 되겠다. 내가 좋기 전에 나라가 좋아야 되고 세계가 좋아야 되겠다'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야 할 것이 제사장의 사명입니다. 알겠어요?
내가 먹는 것보다 이 나라를 먹여야 되고, 내가 잘사는 것보다도 이 나라를 잘살게 해야 됩니다. 이렇게 하여 이 고개를 넘어가서 이스라엘 주권을 가지면 제사장은 무엇이 되느냐? 그때까지 제사장으로서 만민을 대표해서 희생을 했고, 만민이 그 앞에 머리 숙이는, 제사장의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주님이 와서 새로운 주권을 갖게 될 때는 주권을 대행하는 책임자가 되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주님이 역사를 통해서 수난길을 참고 걸어온 전통을 제사장의 입장에서 이어받기 위해서는 죽음의 길도, 배고픔의 길도, 혹은 어려운 길, 쫓기는 길도 극복해 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사장이 걸어야 할 걸음인 것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지금 남자들 가운데 그냥 흘러가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여기 있는 여자들을 '망하면 망했지 그런 남자는 안 따라갈 것이다' 하도록 만들어야 되겠습니다. 이것이 선생님의 소원이예요. 반대하고, 지척거리고, 사상이 옳지 못한 남편을 따라가게 만들어서는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남자이거든 올바로 지도하여 굴복시킬 수 있는 여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남자에게 보조를 맞춰 꺼떡거리게 되면 둘 다 망합니다. 또 태어나는 아들딸까지도 망하는 것입니다. 남편이 망하더라도 자식들이 망해서는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알아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예」
꺼떡거리는 남편 바람에 돌아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탕진하는 남편이거든 '넥타이를 매고 다니는 사내가 그게 뭐요? 나같이 가냘픈 여자도 당당코 이 일을 극복해 나가는데 사내인 당신은 왜 그렇게 못났소' 하고 공격할 수 있는 여자가 되어야 합니다.
나라와 민족이 부패한 것은 지도자가 국민이 어려운 환경 속에서 살고 있는데도 그 환경적인 모든 것을 자기의 무대로 삼아 가지고 자기의 환경을 해결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 가지고 부패의 괴수들이 되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 민족의 지탄을 받을 것입니다. 역사적인 것을 뿌리 빼려고 하면 망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른 전통을 단단히 심어 놓아야 됩니다. 알겠어요? 「예」
제사장들은 월급을 받고 하늘 일을 하는 게 아닙니다. 월급을 받아 가지고 사는 게 아닙니다. '내 생활이 얼마나 궁핍한데…. 받아야 되겠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희생의 대가를 받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피 흘리는 데는 모두가 머리를 숙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요? 눈물을 흘리지 않고 희생을 하지 않고 대가를 바라는 제사장은 썩은 제사장입니다. 망한다는 것입니다. 그의 아들딸이 언젠가는 전부 다 벌을 받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걸 알아야 돼요. 알겠어요? 「예」 지역장 부인들 손들어 봐요. 이런 것을 단단히 알아야 되겠어요. 지역장, 지구장, 부장들도 단단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월급을 받게 된다면 선생님부터 월급을 주고 그 다음에 받아야 되는 거예요. 순서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래요, 안 그래요? 「그래요」 원칙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언제 선생님에게 월급을 갖다 주어 봤어요? 여러분이 십일조를 바쳐야 되는 거라구요. 그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우리 교회가 이런 시점에 와 있기 때문에 지금 때는 까딱 잘못하게 되면 남자들이 바람들기 쉬운 때입니다. 남자들이 바람들기 쉬운 때라구요. 자기 멋대로 뜻을 중심삼고 생각하다가는 큰일난다는 거예요. 그러니, 여러분들이 그런 남자를 굴복시켜 가지고 끌고 가겠다는 자각을 해야 할 때라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알겠어요?
그래야, 마리아의 입장에서 한을 품던 요셉의 입장을 피해 넘어갈 수 있는 여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여러분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어머니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한이 무엇이었느냐? 죽음길에서도 어머니를 사도 요한에게 맡기면서 자기 어머니와 같이, 또 아들과 같이 서로 사랑하라는 말을 남겨 준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도 어머니 대해서 미안하다는 거라구요. 자신을 잉태하고부터 태어나 죽음길을 가는 순간까지도 눈물을 자아내는, 비참한 생활을 하는 어머니의 신세를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어머니 앞에 사도 요한을 후계자로 세워 가지고 아들 대신자로서 사랑해 달라고 부탁하고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그러나, 오늘날 여러분은 그런 입장에 서서는 안 됩니다. 마리아와 같은 입장에서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입장에서 아들을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자녀들이 사생아와 같은 입장에서가 아니라 하늘의 자녀로서 자랄 수 있는, 아빠도 하늘의 아빠요, 엄마도 하늘의 엄마로서 축복받을 수 있는 완전한 터전의 가정을 이제부터 여러분이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만들어지게 될 때에는 비로소 지파를 편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파를 편성하려면 나라와 손을 잡아야 되고, 우리 교회와 기성교회가 손을 잡아야 합니다. 선생님이 어떤 놀음이라도 해서 그것을 맞추기 위해 노력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역사하시어서 기필코 그것을 맞추어 내실 것입니다. 이것이 뜻을 중심삼은 선생님의 생각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알겠어요? 슬펐던 예수의 한, 이것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으나 그만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슬펐던 예수님과 마리아와 같이 한을 남기는 여러분이 되지 말고, 기쁜 어머니의 입장과 기쁜 아들의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 모진 시련과 모진 고통을 국가와 민족을 대신해서 짊어져야 한다는 것을 알고, 여러분이 더 책임을 지고 탕감함으로써 남편과 후손 앞에 수난길이 없게끔 노력해 주기를 부탁하면서, '슬픈 예수와 우리'라는 내용으로 잠깐 동안 말씀드렸습니다.
사랑하는 아버님, 역사노정을 더듬어 보면 예수는 그 누구도 모르는 슬픔의 그늘에서 수난의 노정을 더듬어 왔고, 이 땅 위에 광명한 햇빛을 보게 하기 위해서 아버님이 4천년 동안 준비하신 유대교와 이스라엘 민족이 그늘 아래에 있는 예수를 도와주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는 더더욱 그늘 아래로 밀리고 찌그러졌던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 원통하고 또 원통하옵니다.
아버지여, 오늘 불쌍한 예수의 사정이 어떠하다는 것을 전부 말하지 못했사오나 마리아와 예수님과 요셉의 삼각관계에서 맺어진 비통한 사실을 알았사옵니다. 오늘 여기 모인 아내들을 중심삼은 그 가정에서 남편과 이제 태어날 아들이 하늘의 서러운 조건을 남기는 자리에 부디부디 서지 않게끔 어머니로서 전통을 세우고, 아들이 가야 할 길을 완전히 닦아 가지고 바쳐 드림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숙원이었던 가정적인 탕감의 기준을 넘고도 남을 수 있는 역사적인 사명을 다하는 부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부터 시작되는 전체 행사 위에 당신의 거룩하심과 승리의 손길이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내일에 빚진 자가 되지 말고 빚을 지우는 자가 되고, 과거의 빚을 청산하고 현재의 빚을 전부 다 도맡을 수 있는 딸들이 되게 하시옵고, 연약한 여자의 몸이지만 이 역사적인 와중에 선 개체의 사명이 얼마나 귀중한가를 알고, 한마디의 말이나 행동에도 아버지의 뜻과 일체 어긋남이 없게끔 정성에 정성을 다하여, 역사적인 그 어떤 여성에게도 지지 않는 자리에서 오히려 그들을 가르치고 명령할 수 있는 하늘의 왕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이제 저희들이 복을 받을 수 있는 최후의 한날이 저희들은 문을 두드리고 있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저희들은 단장을 갖추어 당신이 찾아오신 복된 세계 앞에 자기 자세를 나타내야 되겠습니다. 그렇게 되어 만민이 머리 숙여 실체를 놓고 영광을 찬양할 수 있어야만, 실체적인 복귀완성을 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의 손발과 그의 자세는 모진 고역의 노정을 참고, 희생의 대가를 치른 후 승리의 표적으로서 남을 수 있는 여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통일교단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이제 저희들이 바라는 것은 이 나라를 아버지 앞에 세워야 되겠고, 이 백성을 아버지 품에 품기게 해야 되겠사옵니다. 기성교회에 결정타를 주어 굴복시킬 수 있는 어머니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 하시옵고, 어머니는 가인 아벨을 하나 만드는 데 주체적인 역할을 해야 된다는 것을 확실히 아는 딸들이 되게 하시옵고, 한때밖에 없는 역사적인 이 시대에 저희들이 이 사명을 감당함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놀라운 승리적 발판을 닦는 딸들이 되게 하시옵소서. (이하는 녹음이 안 되어 있음)
사랑하는 아버님, 오늘은 1971년 5월 초하루입니다. 협회가 창립된지 만17년을 맞는 이 날 위에 아버지의 영광이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이날 이 아침에 전국에 널려서 서울을 향하여 정성들이고 있는 자녀들이 있는 줄 알고 있사오니 그 자리에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섭리의 권을 만들기 위해 지금까지 인류와 더불어 수고하신 아버지의 노고 앞에 저희들은 치하를 드리옵니다. 사망세계에 있는 인류를 해방시키기 위해 분함과 억울함과 원통함을 참으시면서 지금까지 쉬지 않고 계속적인 싸움의 노정을 거쳐오신 아버지 앞에 온 인류는 입을 모아 찬양하지 않으면 안 되겠나이다.
그것은 오로지, 저희 개체들을 아버지께서 품어 주시기 위함이었고, 저희 가정들을 아버지 나라의 가정으로 세우시기 위함이었고, 저희 종족들을 아버지 나라의 종족으로, 저희 민족을 아버지 나라의 민족으로, 저희의 나라를 아버지의 나라로 세우기 위한 아버지의 무한한 사랑의 연고 때문인 줄 아오니 저희들은 진실로 감사를 드려야 되겠습니다.
아버지, 여기에 모인 개체 개체는 자기 한 개체만을 위해 있는 존재가 아닌 줄을 저희들은 알고 있습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연결시킬 수 있는 하나의 결실적인 존재요, 중심적인 존재요, 미래의 소망적인 출발을 위해 있는 존재라는, 엄청난 내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저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저희가 이러한 존재로서 이 땅 위에 존속하는 한 아버지께서 소원하시는 천국을 이 땅 위에 건국하지 않으면 안될 엄청난 사명이 저희에게 있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이 뜻을 위하여 정성을 다 바치고 마음을 다할 수 있는, 아버지께서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여기에 참석한 당신의 자녀들을 기억하여 주시옵고, 이 5월부터 저희가 새로이 아버지의 뜻을 위하여 보다 충성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아침부터 저희들은 축복의 자리를 향해 출발하였사오니, 이 나라 이 민족의 운명을 책임지고, 복귀섭리 전체를 책임지고 한탄할 수 있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아버지시여, 아침에 소망의 햇빛을 바라볼 적마다 태양을 향해 당신의 나라에 빛날 수 있는 태양이 되라고 기도하고, 낮이면 아름다운 자연을 바라보고 하늘이 기뻐할 수 있는 자연이 되라고 기도하고, 저녁이면 이 세계의 모든 인간이 당신의 품에 안겨 당신의 집에 들어가 안식할 수 있는 백성들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할 줄 아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정성에 정성을 들이면서 이 나라의 해방을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하고라도, 이 삼천리 반도를 아버지 뜻앞에 안겨 드려야 할 중차대한 사명이 당신의 자녀된 저희에게 있는 것을 절감하여야 되겠습니다.
아버지시여, 이 시간 이 자리를 살피시옵소서. 저희의 마음과 몸은 오로지 아버지로 말미암아 출발했기 때문에 아버지로 말미암아 존속해야 되고, 아버지로 말미암아 결과의 자리에 도달해야 한다는 것을 아옵니다. 태어나는 것도 아버지의 뜻이요, 죽는 것도 아버지의 뜻인 것을 저희들은 확실히 알았사옵니다. 아버지가 아니면 저희는 살 수도 없고, 아버지가 아니면 저희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존재들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았사오니, 아버지로 말미암아 모든 일체가 이루어지고, 아버지로 말미암아 결과 될 수 있는 생애노정을 살아 아버지의 생애의 일면을 대신할 수 있고, 아버님이 자랑하고 사랑할 수 있는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한국을 위주하여 세계에 널려 있는 당신의 자녀들을 귀히 사랑하여 주시옵소서. 이곳을 위하여, 이 나라를 위하여 마음으로 사모하며 매일같이 정성들이는 수많은 당신의 자녀들이 세계에 널려 있사오니, 그들의 정성이 헛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들의 진실됨이 하늘에 통하여 인류해방의 기치를 드높이 든 그 자리에 아버지의 영광과 권위가 나타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이 한달도 아버지께 맡기오니 이 한달이 자랑의 달이 되게하여 주시옵고, 섭리의 뜻 앞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달이 되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1971년도에 있어서 아버지의 뜻을 높이 드러내어 아버지께서 기뻐하실 수 있는 상징의 달이 되고, 1970년도에 있어서 자랑할 수 있는 새로운 출발의 달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여기에 참석한 자녀들 부디 아버지 뜻 앞에 효성의 도리를 다할 수 있고, 충성의 도리를 다할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 나라의 현재와 미래의 전체까지도 당신께서 살피시어서 부족함이 없고, 아버지의 기업을 받을 수 있으며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남아지는 민족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 교회의 모든 전체가 아버지의 뜻 앞에 일치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민족과 세계 앞에 남겨 주어야 할 중차대한 사명이 저희에게 있기에, 이 전통적인 노정을 개척해 나가는 데 있어서 온 마음을 기울여 하나의 모습을 대신하고, 모든 정성을 모아 하나의 뜻을 높일 수 있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 하루를 당신께서 친히 주관하여 주시옵고, 이달과 이해를 당신께서 친히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나아가 저희들 개인과 저희 가정들과 저희 교회와 저희 나라와 이 세계를 당신께서 주관하여 주옵소서.
악이 주도하는 일체의 모든 권한을 제거시키시옵고, 선의 권한을 회복하시어 당신이 소원하시는 영광의 나라와 승리의 천국을 이루시옵소서. 그리하여 영광의 자리에서 홀로 만국 만민을 통치하시고 만세계를 주관하시는 만군의 여호와가 되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그 뜻을 성취하는 데 있어서 저희들이 발판이 되고, 실체기대가 되어서 아버지의 뜻 앞에 달려갈 수 있는 승리의 터전이 될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당신이 원하시는 당신의 자녀들을 어서 모으시옵소서. 당신이 소원하시는 나라와 소원하시는 세계가 당신의 품에 품길 수 있는 그 날이 어서 속히 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저희들의 희생과 탕감이 필요하거든 저희들이 그 탕감의 책임과 사명을 하는 데 있어서 생명을 다 기울여 충성을 다할 수 있는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이 한 달을 아버지께서 맡아 주시옵기를 재차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오늘은 여러분도 알다시피 협회 창립기념일입니다. 세상적으로는 메이 데이(May Day)라고 하는 기념일도 되는 것입니다. 우리 통일교회로서는 금년으로 17주년을 맞이하는 창립기념일입니다.
그 동안 여러분들은 싸워 나오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곡절을 많이 겪어왔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늘이 우리와 더불어 수고한 결과로 이 나라와 이 민족을 대표해서 우리가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 될 선도적인 입장에 선 것을 자인할 수 있는 단계에 들어온 줄 알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창립 목적을 우리 교회에만 국한시킬 것이 아니라 범위를 넓혀 이 나라를 뜻 앞에 새롭게 세우기 위한 창립의 날로 연결시켜야 되고, 전세계적으로는 이 지상에 하늘이 소원하시는 천국을 세우기 위한 창립일로 연결시켜야 됩니다. 그 사명을 하기 위해 우리 교회가 창립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지금까지 역사과정에서 나왔던 보통 교회와는 달리 전체적인 섭리를 대신해서 총탕감하고 총결산을 지음과 동시에, 미래의 소망의 표준 앞에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 있는 승리의 터전을 남겨야 할 전반적인 책임을 짊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의 창립이라는 것은 한낱 교파의 창립이 아니라 전체의 섭리를 대신하고 뜻을 중심한 하나의 기반을 지상에 세우기 위한 것입니다.
이렇게 창립된 교회의 기반 위에서 개인들이 하늘 앞에 새로이 세움을 받아야 되고, 그 개인들로 말미암아 새로운 가정, 새로운 종족, 새로운 민족, 새로운 국가. 새로운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전통적 사상을 공고히 해야 합니다. 그러한 출발의 날이 바로 우리 교회의 창립일인 것입니다.
원래 이날은 우리 협회원 전원이 한 곳에 모여서 축하해야 할 날이지만, 현재 우리가 싸우고 있는 이 시점에 있어서 이날을 높이 기념하는 것보다는 우리가 해야 할 책임과 사명을 다하기 위해 확고히 다짐하여야 할 입장에 있고, 이날을 기념하는 것보다도 현실의 활동에 주력을 해야 되겠기 때문에 지금까지 협회 창립기념일을 중요시하지 않는 경향으로 내려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개인 개인은 이날을 맞이할 때마다 이날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교회가 이 땅 위에 형태를 갖추게 되었고, 이날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핍박을 받더라도 개인적이 아니라 단체적으로 받게 되었으며, 또한 이날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뜻을 세워 나오는 데 있어서도 개인적으로가 아니라 교회를 중심삼고 전체적으로 세워 나올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터전이 협회 창립 이후에 닦여졌다는 것을 생각할 때, 출발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동안 만 17년이라는 기간을 지나오면서 우리는 여러 가지 형태의 수난길을 걸어왔습니다. 과거를 생각해 보면 부모에게 몰림을 받고, 형제에게 몰림을 받고, 친지에게 몰림을 받고, 더 나아가 사회와 국가로부터 몰림을 받은 것이 어제의 일같이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더우기 우리는 기성교회로부터 지금까지 계속적인 비판을 받아왔습니다. 지금도 우리 앞에는 가야 할 복귀의 노정이 있기에 여러 가지 장애물이 아직까지 많이 남아있습니다. 이것을 극복해 나가는 데 있어서 우리는 협회를 창립하던 창건사상을 중심삼고 나가야 합니다. 출발 당시의 전통적인 사상, 당시의 전통적인 교리를 새로이 입교한 사람들은 모를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 협회가 금후의 후대들을 위해서 남겨 줄 여러 가지 역사적인 문헌을 정리하여야 할 문제들이 남아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각에서 생각할 때, 지금까지 우리가 닦아 나오고 연단해 나온 모든 것들이 과거의 성과로서 그칠 것이 아니라 미래의 동기가 되고 출발의 기원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협회 창립기념일을 축하하는 이러한 터전 위에서 국가를 뜻 앞에 새로이 해방시키고 온 세계를 해방시켜야 할 사명이 우리 교회에 있는 것을 알고, 여러분은 민족과 세계를 위해 배가의 정성을 다하고 몸 바쳐 희생의 제물이 되는 것을 감수하며 싸워 나가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이 엄청난 사명을 대하여 뜻 앞에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이 처해 있는 개체의 입장이 개체에만 속해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교회가 처해 있는 입장이 단지 우리 교회에만 속해 있는 입장이 아닙니다. 개체는 물론이요, 우리 통일교회는 세계 전체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중심적인 입장에 서 있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겠습니다. 우리 교회는 일반교회와 달리 전체의 뜻을 대신해서 창립된 교회이기 때문에, 여기에 속해 있는 여러분도 전체의 뜻과 섭리와 역사를 대신한 존재라는 것을 절감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남겨 나가는 생활은 여러분 일대에만 남겨지는 것이 아니라 자손 만대에 전통으로 남아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족함이 없는 전통의 내용을 갖춘 역사적인 터전을 남겨야 한다는 것을 생각할 때,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아야 되겠습니다.
더우기 여러분이 뜻을 알다시피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세우고자 한 복귀섭리의 표준은 국가와 민족을 넘어서고자 한 것임을 생각할 때, 우리교회에는 그 뜻을 이어받아 국가적인 기준을 넘어야 하는, 제 2차적인 사명을 인계받아 감당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그의 사도들이 죽음을 감수하면서 희생의 노정을 개척했던 것과 마찬가지의 역사과정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런 비참한 일이 없었던 입장에 서 있는 우리가 오늘 국가와 민족을 대신할 수 있는 자리에까지 올라오게 된 사실을 생각할 때, 우리가 수고한 것보다도 그 배후에서 하나님이 얼마나 수고했는가 하는 것을 알아야겠습니다. 그 수고 앞에 우리가 마음으로 감사하면서, 내일의 싸움터를 향해 나가는 현실의 생활 속에서 다짐하고 스스로가 제물적 실체로서 온 세계와 온 인류를 위해 바쳐질 수 있는 최종적인 존재가 될 것을 이날을 맞이하여 다시 한 번 결의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 4월부터 5월 6월 7월 8월까지는 언제나 우리 교회의 수난기요, 시련기로서 고비입니다. 왜 4월부터 그러냐? 그것은 1960년도 4월을 중심삼고 성혼의식을 출발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는 정월 초하루를 새해 출발의 날로 삼지만, 복귀섭리의 뜻을 중심삼고 볼 때는 우리가 4월을 중심삼고 성혼식을 했기 때문에, 4월부터 4개월간이 언제나 문제가 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생각할 때, 우리가 지금 4월을 보내고 5월을 맞이했으니만큼 이 5월부터 4개월 내지 5개월, 즉 9월말까지 또 다시 정성을 들여야 할 기간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더우기 국내외 정세를 보나, 아시아의 정세를 보나, 세계 정세를 보나, 아시아를 중심삼고 긴박한 상황이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문제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이며, 일본을 중심삼고 대만이 어떻게 될 것이냐 하는 문제가 중요시되고 있다는 사실은 섭리적으로 볼 때, 우리 교회와 현재의 입장이 평면적으로 서로 연결될 수 있는 상대적인 입장에 섰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섭리적인 관점에서 볼 때, 중요한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것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와 이것을 책임지고 수행해야 할 우리의 입장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느껴야만 되겠습니다.
우리 나라를 위해서 정성을 들여야 하는 것도 물론이지만, 이 나라를 중심삼고 이루어 나가야 할 그 뜻은 아시아를 거치고 세계를 거쳐야 할 입장에 있기 때문에, 이것을 좌우할 수 있는 주체적인 입장, 혹은 기원적인 입장에 있어야 합니다. 그런 입장에 우리 교회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을 중심삼고 방향을 가려 나가야 할 현 시점에 있는 것을 생각할 때, 여러분은 의미심장한 자리에 있다는 것을 느껴야 되겠습니다. 개인이 개인으로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야 하는 것이요, 개인은 하나님과 더불어 살되 하나님의 뜻 앞에 탕감복귀의 노정을 치러 나가는 입장에서 살아야 된다는 것을 가일층 각오하고, 이 5월부터 9월말까지 이 나라 이 민족의 현재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 정성을 다해 주기를 바랍니다.
만일 하나님이 이 나라를 기억하고, 이 나라 전체의 운명을 책임질 수 있는 입장에 계신다면 이 나라는 망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북괴가 호시탐탐 노리는 입장에 있다 할지라도 그들의 계획대로 되지 않을 것입니다. 어떠한 주권자가 그 주권을 가지고 하나님이 가는 길을 막으려고 아무리 계획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그 주권자의 계획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만이 중심이 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동이 되어 가지고 방향을 갖추고 나가게 될 때, 거기에 반대되는 어떠한 주권이나 국가가 제거당하는 것이지 하나님이 밀려 나가지 않는 것입니다.
단 한 가지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은 언제나 승리할 수 있는 자리에 계시지만 그 발판이 되어 승리의 방향에 보조를 맞추어 나가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복귀섭리는 번번이 연장되어 나온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 개인 개인과 우리 교회 전체가 하나님이 중심이 되어 나가는 그 방향 앞에 있어서, 지상에 있어서의 하나의 터전이 되어 보조를 맞출 수 있는 상대적인 입장에 서야 합니다. 그러한 입장에서 나라의 운명을 염려하고, 아시아와 세계의 운명을 염려하며 정성을 들이고, 그 방향을 향하여 자기 일신을 희생시킬 각오를 하고 나가는 무리가 된다면, 그 무리를 통해서 하늘의 새로운 길이 개척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에 우리가 수난을 당하고 어려운 역경에 부딪치게 될 때에 그것이 마지막이고 끝이라고 생각할 때도 많았지만, 그러한 고비마다 정성을 들이고 하늘에 방향을 맞추어 그 고비를 넘고 새로운 분야를 개척해 나온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범위가 클 뿐이지 내용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범위가 큰 만큼 우리 통일교회 식구들은 지금 이때가 이 나라와 아시아와 세계를 붙들고 거국적으로 정성을 들여야 할 때인 것을 알아야겠습니다. 더우기 오늘 창립기념일을 모든 식구가 새로이 정성들이는 날로 설정하여 출발하는 이때에, 이날을 성대히 축하하는 것보다도 우리는 내심으로 하나님 앞에 정성들일 것을 다짐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일의 한국과 내일의 아시아와 내일의 세계가 하나님을 중심삼고 거느려질 수 있기를 바라는 소망을 놓고 정성들이는 것이 오늘 협회 창립기념일에 있어서 가장 의의 있는 일인 것을 알고, 여러분은 각자 내심으로 결심하여 이 귀중한 기간에 우리의 소원의 뜻이 가는 방향에 하나님이 협조해주지 않을 수 없는 결과가 나타나도록 온갖 정성을 들여 주기를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오늘 이날을 맞으면서 생각나는 것은, 1954년 바로 오늘 유협회장을 중심삼고 몇몇 사람이 북학동의 조그마한 집에서 간판을 걸고 출발하던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벌써 만 17년이라는 오랜 기간이 지났지만 어제일 같습니다. 17년이면 해(年)로 말하면 긴 시간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생각해 보면 어제 같아요.
이런 17년이라는 기간을 두 번 합치면 34년이 되고 세 번 합치면 51년이 됩니다. 이와 같이 어제만 같은데 생각해 보니 벌써 17년이라는 기간이 지난 것을 볼 때, 여기 있는 젊은 여러분들이 20대 혹은 30대라고 하지만 17년이 지나면 40대를 넘어서 50대를 향하는 연령이 될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할 때, 17년 전 내가 서른 다섯 살 때를 생각해 보면 그때와 지금이 별로 거리가 있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아요. 그렇지만 35세에 출발해서 17년이라는 기간을 지내고 보니 벌써 52세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또 17년을 지나게 되면 69세가 됩니다.
이렇게 보면 인생은 덧없는 꿈과도 같습니다. 이러한 생애인 줄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래도 내가 생각해 보면 청춘 시대에 호화롭고 찬란하게 지낸 것보다도, 수고하고 남이 모르는 수난길을 극복하고 싸워 나왔던 것이 더 기억에 남습니다. 과거를 회상해 보게 될 때, 기쁜 날보다도 언제나 어려움을 당하던 날들이 먼저 생각나는 것입니다.
17년이라는 기간을 지내는 동안 우리가 몰리면 피할 수 있는 자유로운 환경, 마음대로 변경시킬 수 있는 자유스러운 환경 가운데서 핍박받은 것보다 감옥에서 고생하던 것이 더 인상적이었습니다. 감옥 생활 가운데도 독방살이하던 때가 더 인상적이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 생애에서 추억으로 남아지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선을 위해서, 참을 위해서, 혹은 남을 위해서, 나라를 위해서, 세계를 위해서, 혹은 공적인 입장에서 수난을 당했다는 그 사실은 일생을 두고 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물로 말하면 벼리와 마찬가지입니다. 언제나 그 일이 먼저 생각나는 것입니다. 그때에 결의하여 결심하고, 그때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투쟁하던 모든 내적 사정은 항상 생생한 것입니다. 역사가 지나면 지날수록 그것이 희미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 되살아나고, 그런 것이 앞으로 닥쳐오는 시련노정을 극복할 수 있는 한 자본이 된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생각할 때, 젊은 여러분들도 20년 이후의 여러분을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은 어떻게 변화되어 있겠어요? 그때 뜻 앞에 무엇을 자랑할 수 있으며, 뜻을 중심삼고 과거를 회상할 때 무엇을 남길 수 있겠습니까? 그것을 생각할 때, 여러분이 자의에 의해서 살고 마음대로 계획한 대로 사는 것은 정상적인 일로서 매일같이 계속될 수 있는 일이지만, 이와 반대적인 환경에서 어려움에 부딪치고 핍박을 받고 시련을 극복해야 할 심각한 시간을 지낸 일이 있다 할진대, 그것은 생애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가장 귀한 것으로 남아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개인이 그러한 것과 같이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교회가 출발한 역사적인 그날부터 지금까지 역사를 이루어 나오는 과정에 있어서 어느때가 제일 수고로왔느냐? 그 수고로운 기간이 수천 년 수만 년 후에 우리 교회를 추앙하고, 우리 교회의 역사를 지탱해 온 선각자들을 회상할 수 있는 기간이 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수난과 시련 가운데 우리 교회가 창립되었다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 하늘의 전체적인 뜻을 중심삼고 볼 때는 슬픈 일이지만, 우리가 역사적 전통을 회상하는 데 있어서는 그렇게 어려운 환경에서 창립된 것이 더 인상적인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모두가 환영하는 자리에서 창립된 것이 아니라 외로운 입장에서 몇몇 사람이 모여서 눈물과 더불어 이날을 선포한 것입니다.
이처럼 서러운 사정이 있었지만 그것이 도리어 역사상에 있어서 추억의 중심이 된다는 것을 생각할 때, 오늘날 흔히 사람들은 좋은 것을 바라고 있지만 좋은 것만이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좋은 것은 일상적으로 지나갈 수 있는 것이로되, 그 좋은 것을 찾기 위하여 어려움을 극복한 역사는 언제나 좋은 것을 맞이할 수 있는 새날의 약속을 자극시키는 힘의 모체로 남아진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날을 맞이하여 우리가 지난날을 회상하면서 어려운 일들을 되살려 가지고 여러분의 생애노정에서 자랑할 수 있고, 후손 앞에 전통으로 남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것이 귀한 것입니다. 이제 금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교회 앞에 아무리 평탄한 환경이 벌어진다 하더라도 그 평탄한 환경에 보조를 맞추면서 살겠다는 사람보다도, 그 평탄한 환경을 넘어 뜻길 앞에 다가올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 그것을 책임지고 가겠다는 무리가 있다면, 그들은 제 2차적인 역사를 창조할 수 있고 제 2차적인 새로운 전통을 세울 동기를 마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오늘 여기에 새로 들어온 식구들 중에 지난 17년기간에 있어서 여러분이 체험하지 못한 수난의 고빗길을 흠모하는 마음이 있거들랑, 앞으로도 여러분이 그렇게 개척해 나가야 할 수난의 길이 남아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그러한 무대로 자진해서 전진하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무리가 많게 되면 우리 교회는 급진적으로 발전하리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날을 맞이하여 내심으로 새로운 결의를 다짐하면서 이날을 기념해 주기를 부탁하는 바입니다. 다시 한 번 기도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아버님, 오늘은 오월 초하루인 것을 저희들이 알고 있습니다. 우리 협회가 창립된지 17년이 되는 이날 위에 당신의 영광이 길이길이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이날을 맞이하면서 저희들이 지난 17년 동안 이날을 기쁨으로 맞이하지 못한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아버지께서 17년 동안 이날을 기억하시고 수고해 오신 것을 저희들은 감사를 드려야 되겠습니다. 아버지시여, 이 70년대에 이날을 맞이할 수 있게 된 이 제단 위에 복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이제 저희들은 가야 되겠습니다. 내일의 싸움터를 향해 전진해야 되겠습니다. 오늘 저희들이 스스로 다짐하는 자세를 갖추고, 이 창립의 날을 맞아 각자가 자기 생애를 중심삼고 뜻을 창립시키겠다는 결의를 다짐할수 있는 날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각자의 소망을 다시 한 번 새로이 다짐하면서 뜻을 따라 나가는 과정에서 어려운 환경을 개척해야겠다고 내심으로 결의하는 이날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날을 설정한 당신의 사랑하는 유협회장도 영계에서 이날을 같이 기념할 줄 알고 있사오니, 그 아들에게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그가 오늘날 지상을 대해 협조하고 있는 것을 생각할 때, 거국적인 터전을 중심삼아 영계의 예수와 예수를 중심삼은 사도들과 기독교를 믿고 간 순교 선열들이 일체가 되어, 지상의 복귀를 위하여 온갖 충성과 정성을 다할 수 있도록 아버지께서 그 범위를 넓혀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날을 기하여 축복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내일의 소망 앞에 저희들이 강하고 담대하게 희망을 품고 나갈 수 있는 하늘의 용자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이 한 달도 당신의 사랑 가운데 승리의 달로 거두어 주시옵기를 간절히 간절히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의 이름으로 축원하였사옵나이다. 아멘.
사랑하는 아버님, 여기 모인 당신의 사랑하는 딸들을 굽어살펴 주시옵소서. 이 딸들이 현재 뜻을 대해 중요한 책임을 짊어지고 있사오니 아버님께서 이들과 항상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이들이 지방에 나가서 지내는 가운데 체험한 모든 것은 우리 교회를 위한 체험이 아니라 이 민족과 뜻을 위한 체험인 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이들의 체험과 정성들인 전체가 하늘과 더불어 남아져야 되겠고, 민족과 더불어 남아져야 되겠습니다.
아버지, 이와 같이 산지사방에 있던 딸들이 이번 기회를 계기로 하여 한 자리에 모였사옵니다. 이 수많은 딸들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동으로 서로 남으로 나뉘어져 있지만 서로 한마음 한뜻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맨 처음에는 자신의 몸과 마음이 하나되고, 나가 있는 현지의 딸들과 하나되어 하늘 전체가 동원되게 해야 되겠습니다.
전국에서 움직이는 이들로 말미암아 지금까지 이 땅 위에 왔다갔던 수많은 선한 선조들이 동원될 수 있는 기반이 다져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들이 하나되어 삼천만 민족을 대신하여 하나로 통일된 모형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들이 한마음 한뜻이 됨으로 말미암아 후손들이 아버지의 뜻과 영원히 하나될 수 있는 인연을 세워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오늘은 더우기 오월 초하루로서 협회를 창립한지 만 17주년을 맞이하는 날이옵니다. 그간의 수난길을 아버지께서 친히 인도하시면서 오늘 이와같은 환경을 갖출 때까지 얼마나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르셨사옵니까? 아버님, 이 모든 것은 아버지께서 수고하시고 염려하시고 참고 극복하신 공적의 결과인 것을 생각하면서 감사를 드리옵니다.
오늘 이 아침에 저희들의 마음을 모으고 뜻을 모으고 정성을 모아 이날을 아버지 앞에서 축하의 날로 기념하고자 하오니 아버지시여, 깊이깊이 통찰하시어 마음 가운데에 흐뭇함을 느끼시옵소서.
미래에 하늘나라를 창건하여야 할 새로운 건국의 기념날을 앞에 놓고, 그날을 설정할 때까지 모든 것을 희생시켜서라도 전진에 전진을 거듭하여 최후의 승리를 거두지 않으면 안 될 중요한 사명이 저희에게 있다는 것을 진심으로 느끼고 있사옵니다.
아버지, 이날을 축복하여 주시옵고, 이 한 자리를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이 해와 70년대를 축복하시옵소서. 뜻을 위해 가는 길에 있어서 모든 안팎의 일들이 일취월장하여 당신의 승리를 찬양할 수 있는 날이 속히 오게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나이다. 전체를 맡아 주관하여 주시옵기를 부탁드리면서 참부모님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이야기 좀 할까요? 선생님도 여러분같이 앉아도 괜찮겠습니까? 저게 무슨 말입니까? (제목을 판서해 놓으시고 그것을 가리키며)전통적 생애라,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누가 한번 이야기해 봐요. 이말은 여러분의 생애가 전통이 될 수 있는 생애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살다가 죽고 난 후에는 반드시 사는 동안에 잘살았느냐 못살았느냐 하는 두 가지 가운데 하나로 귀결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잘살고 갔느냐 못살고 갔느냐 하는 그 둘중 어느 한편으로 결정을 지어 놓고 간다는 것입니다. 잘살고 갔다 하게 되면 그 사람은 선한 사람이라는 말이요, 못살고 갔다 할 때는 악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잘살았다고 할 수 있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잘살았다고 하는 기준은 무엇이고 못살았다고 하는 기준은 무엇이냐? 우리는 생애를 걸고 잘살고 못사는 것을 결정하는 일들을 하며 생활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면 누구나 다 잘살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못살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지금 세상을 가만히 보게 되면, 외부적인 요인을 보고 그 사람 참 잘산다고 말할 때가 많습니다. 보통 잘사는 사람이라고 하게 되면 외적으로 남부럽지 않게, 집을 갖고 있고 돈냥이나 가지고 있고 남편이나 아들딸과 함께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을 하는 데 지장을 받지 않을 만한 환경을 갖추어 놓고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환경적으로 아무리 잘산다는 말을 들으면서 생활한다 하더라도 스스로 '내가 과연 참된 생활을 하고, 내가 과연 선한 생활을 하고 있느냐' 하고 마음으로 묻게 될 때 자신을 갖고 '나는 참되게 산다'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어느누구나 하나같이 참되게 살기를 바라고 있는데 참되게 살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이렇게 참되게 살기를 원하고 있지만 참되게 살 수 없도록 되어 있는 환경에서 살고 있는 존재가 바로 인간인 것입니다. 대다수의 인간이 살고보니 후회의 결말에 부딪히게 되고 일생을 헛살았다고 탄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오늘날 우리 인간들의 생활양식인 것입니다.
그러면 참되게 사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이냐? 참되게 사는 사람은 선한 편의 사람이요, 참되게 살지 못하는 사람은 악한 편의 사람인데, 선한편, 참되게 사는 선한 편의 사람은 어떠한 사람이냐? 희망을 갖고 사는 사람입니다. 먼저 희망을 가져야 됩니다. 높은 희망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높은 희망을 가지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희망과 더불어 사는 사람이 선한 편에 속하는 것입니다. 현재 살고 있는 세상은 좋은 세상이 못되기 때문에 좋은 세상에서 살고 싶어해야 되는 것입니다. 현재 살고 있는 세상이 나쁘면 나쁠수록 그 세상과 짝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 그 나쁜 세상에서도 항상 좋은 세상을 그리면서 좋은 세상과 더불어 짝하고 살고싶다는 생각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선한 사람이란 현재에 살고는 있으되 현재를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현재에 살면서 현재와 더불어 살고자 하는 사람은 선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다 살고 나서 잘살았다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현재의 세상이 타락한 세상이요, 현재의 환경이 악한 환경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현재 악에서 나서 악에서 살다가 악으로 결말맺기 쉬운 타락권내에 살고 있는 연고로, 살고 나서 보면 못살았다는 결론이 내려지기가 쉽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환경 가운데 살고 있는 우리들이 잘살았다고 할 수 있는 자리로 나가기 위해서는 현실과 보조를 맞추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극복하고 내일, 희망찬 미래의 세계와 더불어 살겠다고 몸부림치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1년, 10년, 혹은 일생을 살게 될 때, 그 사람은 잘살았다는 말을 남길 수 있고, 선하게 살다 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의 생활에서 엄벙덤벙하면서 자기의 이익과 만족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은 외적으로 아무리 잘살았다고 해도 잘살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그가 타락한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타락권내에 살면서 거기에 박자를 맞추며 사는 사람은 선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악한 환경에 박자를 맞추며 그 환경에 젖어 사는 생활은 악하면 악했지 선할 수는 없기 때문에 못살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항상 지금보다 더 낫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현재보다 더 낫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더 낫기를 바란다는 것은 곧 더 잘살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얼마나 더 낫기를 바라는 것이냐? 한때만 낫기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나으면 내 후손은 더 낫기를 바라고 그 후손이 나으면 그 후손으로 인하여 세계 만민까지, 혹은 역사시대에서 미래까지 연결되어 더욱 나아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터전을 이루어 놓은 사람이 이 땅 위에 있느냐? 없습니다. 찾아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환경에서 사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이냐? 전통적 생애를 남겨야 됩니다. 그러나 악한 전통적 생애를 남겨서는 안 됩니다. 선한 전통적 생애를 남겨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생애란 일생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생애라고 하는 것은 일생을 말하는 것이요, 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하루하루 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생활은 하루하루를 중심삼고 말하는 것이요, 생애는 일생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일생을 두고 볼 때에 과거에는 선했는데 현재는 선하지 않다고 하면 과거의 선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선으로 뿌렸는데 악으로 거두었다면 그것은 선을 뿌리지 않은 것만 못하다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그리고 악을 뿌려 가지고 선을 거둘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을 거두기 위해서는 선을 뿌려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생을 사는 데 있어서 출발 당시에는 '나는 이렇게 선한 자리에서만 살 것이다'라고 결심해 놓고 그 마음이 중도에 시들해지고 희미해지면 선하게 살았다고 할 수 있는 입장이 못 되는 것입니다. 선한 자리에서 산다고 결심했으면 날이 갈수록 점점 완성을 향해 뻗어 나가야 됩니다. 그리하여 자기 혼자 사는 것이 전체에 영향을 미치고 또한 환경이 그를 우러러볼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선하게 살겠다고 한 결심이 선한 결실로 거두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한 결실을 남기려고 하는 사람은 지금 선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지금이 선하면 내일은 더 선해야 되는 것입니다. 나무로 말하면, 오늘 가지가 셋이 나왔는데 내일 그 세 가지에 다시 세 가지씩 더 나와 뻗쳐 오르기 위해서는 오늘보다 더 많은 영양소를 흡수해야 되고, 그 가지가 자랄 수 있는 활동도 많이 해야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도 갈수록 현재의 입장보다 나아져야 됩니다. 그 나은 것이 더 나아지고 더 나아지고 해야만 된다는 것입니다. 보다 나은 개인이 있다면 그 개인은 가정을 보다 낫게 하고 그 가정은 다시 종족을 더 낫게 하고 그 종족은 다시 민족을, 그리고 그 민족은 국가를 더 낫게 만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우리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의 세계, 우리가 이상하는 최고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제보다 오늘이 더 못한 사람은 패하는 것입니다. 오늘보다 내일이 나아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을 중심삼고 사는 사람의 전통적 생활이라는 것은, 똑같이 일선상에서만 지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점점점 커지는 것입니다. 오늘의 이 환경권내에서 돌아가는 전통은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 환경을 뚫고 나가야 합니다. 나라도 뚫고 나가고, 세계도 뚫고 나가고, 하늘땅도 뚫고 나가야 됩니다. 그러한 전통을 세워야 되겠습니다.
악한 사망권내에서 전통을 세우는 데 있어서 이만큼(판서하심) 전통을 세우게 되면 여기에서는 이것밖에 안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사망권 안에서만 뺑뺑 돈다는 것입니다. 사망권을 뚫고 나가려면 아직도 멀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망권은 언젠가는 벗어나야 되는 것입니다. 사망권을 벗어나기만 하면 어떻게 됩니까? 사망권에 싸이는 것입니까, 아니면 사망권을 싸 버리는 것입니까? 싸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같은 양반도 이 땅 위에 와서 누구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라고 했고 나를 위해 생명을 바치고 충성하라고 했던 것입니다. 성경에도 '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했지요? 그것이 첫째 되는 계명입니다. 그러면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요? 생명을 바치고, 목을 내놓고 하라는 것입니다. 간단합니다. 결론이 이것입니다. 생명을 내놓고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 되는 것입니다. 생명을 내놓을 때도 '아이구, 난 내 생명 못 내놓겠다'라고 하면서 할 수 없이 끌려가면서 내놓으면 그건 내놓으나마나 입니다. '이 세상에서, 여기에서 계속 살고 싶은데' 하면서 내놓으면 내놓으나마나라는 것입니다. 이상하는 그곳에서 살고 싶다고 하며 기쁘게 내놓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훌쩍 넘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를 위해서가 아니라 미래를 위해서, 뜻을 위해서, 뜻의 목적을 위해서 생명을 내놓는 사람은 사망권을 벗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씨를 심을 때 바위 위에다 심으려 합니까, 거름 위에다 심으려합니까? 「거름 위에다가요」 사망권은 썩어지는 것입니다. 죽으면 썩어지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생명이 있으면 어떻습니까? 사망한 거름을 흡수하면서 자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세상에서 악한 것을 보면서 '아이구, 악하구나, 아이구 나도…' 이러면 같이 악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악한 것을 볼 때마다 거기에서 자극을 받아 가지고 '나는 저렇게 되지 않겠다' 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회의 악한 것을 볼 때마다, 사탄들이 좋아하는 것을 바라볼 때마다 거기에 궁금증을 가질 것이 아니라 항상 '이는 어느 한때 내 손아귀에서 비료가 될 것이다. 나한테 치리를 받을 것이다' 하는 마음을 갖고 나가야 됩니다.
세상에 악한 것이 많아도 그것을 무서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부딪치면서 생명적인 자극을 받을 수 있다면 악한 것이 결코 나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악이 끌려가는 것입니다. 이제 복귀섭리의 필연적인 운명이 그렇게 되어 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이 좋으냐 할 때,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살아야 되겠습니까? 이 세상을 부정하고 다른 생활 방식을 취해야 하는 것입니다. 악한 사람들이 이렇게 하면 그와 반대되는 생활을 해야 돼요. 악한 편 반대가 선한 편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내가 선한 사람이 되려면, 악한 사람들이 좋아하며 살면 나는 악한 세상에서 서러움을 당하며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전부 다 반대로 해야 돼요. 악한 사람들이 놀면 나는 수고해야 됩니다. 악한 사람들이 잘먹고 잘살면 나는 못먹고 못살아야 합니다. 잘먹고 잘살면 선한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악한 사람들이 오래 살면 선한 사람은? (웃음) 어때요? 오래 못 사는 것입니다. 전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동네를 보게 되더라도 망할 동네 같으면 쓸만한 사람들이 빨리 죽고, 못 쓸 사람들은 오래 사는 것입니다. 나라를 두고 볼 때도 쓸만한 사람은 빨리 죽어 버리고 쓰지 못할 찌꺼기들만 남게 되면 그 나라는 망하는 것입니다. 전부 다 반대입니다.
그러면, 악한 사람이 서서 살면 선한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되겠습니까? 누워서 살아야 된다고요? 서서 사는 것의 반대는 앉아서 사는 것입니다. 앉아서 살아야 돼요. 악한 사람들이 자유스럽게 살면, 선한 사람들은 부자유스럽게 살아야 됩니다. 또, 악한 사람들이 눈을 뜨고 살면, 선한 사람들은 눈을 감고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웃음) 봤어도 보지 않은 것처럼, 아무 상관이 없는 것처럼 살아야 됩니다. 듣는 것, 보는 것, 느끼는 것, 맛보는 것, 태어나는 것, 살아가는 것, 죽는 것, 일체를 반대로 해야 돼요. 사람이 죽었을 때에도 악한 사람들이 '아이구, 나도 같이 죽겠다'고 야단하며 울면 선한 사람은 좋아해야 됩니다. 달라야 됩니다. 소망을 가진 사람들은 달라야 돼요. 이 악한 세상에서 하나에서 열, 백, 천, 만에 이르기까지 전부 다 반대되는 것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선한 사람이 아닐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선한 것은 잠깐 있다가 죽는 것이 아닙니다. 선한 것은 영원히 가는 거예요. 오늘날 세상 사람들은 인생의 가치를 모르고 일생만을 인생의 전부인 것으로 알고 살고 있지만, 인생은 짧은 것이 아닙니다. 선은 그 반대이기 때문에 기나긴 인생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한 사람은 영생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악한 사람이 내려다보면, 선한 사람은 올려다보아야 됩니다. 악한 사람이 왼쪽으로 가면, 선한 사람은 오른쪽으로 가야 됩니다. 전부 다 반대로 해야 돼요.
그러면 역사상 선한 사람은 도대체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느냐? 그 시대에 환영받던 사람 가운데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이것을 잘 알아야 됩니다. 그 시대에 환영받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선한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냥 그대로의 사람들이 그냥 그대로 좋아하는 것은 그냥 그대로의 것이지, 더 좋은 것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냥 그대로 사는 세상에서 좋아하는 패 가운데는 선한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냥 그대로 사는 것을 지긋지긋하게 싫어하는 패 가운데에는 그래도 선한 사람이 있을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거 이해가 되지요? 옆의 사람이 악한 사람이면 길을 가더라도 기분 나쁜 것입니다. 악한 사람들이 땡땡이를 부리기 좋아하는데 선한 사람이 되려고 하는 사람이 땡땡이꾼이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생각을 해보세요. 안 되지요?
또 세상 여자들은 고운 옷을 입고 분을 바르고 해 가지고 기분 좋게 다니기를 좋아하는데, 그런 세상 여자들이 악한 여자들이라면 악한 여자들이 그렇게 사는데 선한 여자가 되려면 어떻게 하고 다녀야 되겠습니까? (웃음) 대답을 해보세요. 반대로 살아야 됩니다. 반대로! 그러니 거지 모양으로 누더기 보따리를 쓰고 다니고 그러라구요. (웃음) 잘 입었다고 자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잘 입었으면 도리어 머리를 숙여야 되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전부 반대입니다. 세상 여자들을 보면 잘 입었다고 궁둥이를 요렇게 요렇게 흔들며 다니지만. (웃음) 선하려고 하는 아낙네들은 잘 입었으면 도리어 미안해 해야 되는 것입니다. (웃음) 아이고 여러분, 미안합니다…. 그렇게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전부 다 반대로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선하기를 바랍니까, 악하기를 바랍니까? 「선하기를요」 악하기를 바란다면 여기 앉아서 수련을 받을 필요도 없고 전도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그냥 그대로 뒹굴며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죄도 막 범하고요. (웃음) 그러면 얼마나 편하겠습니까? 여러분, 편한 게 좋아요, 불편한 게 좋아요? (웃음) 세상에서 편한 것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악한 세상에서는 편한 것이 좋은 것입니까, 불편한 것이 좋은 것입니까? 어떤 것이 좋은 것입니까? 불편한 것이 좋은 것입니다. 택시 타고 다니는 것보다 걸어다니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웃음)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걸어다녀도 생각을 달리하고 다니면 그것이 낫다는 거예요. 전부가 반대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차를 타고 다니면 '아 나는 차를 타고 다닌다'라고 할 것이 아니라 미안하게 생각해야 됩니다. 달라야 됩니다. 근본적으로 달라야 돼요.
그러지 않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좋아하며 살면 살수록, 이것이 점점 길어지겠어요, 짧아지겠어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좋아하면서 살면 여기서 출발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못 하는 것입니다. 출발도 못 한다는 거예요. 거기서 다 막혀 버리고 남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놈의 세상 가운데서는 아무것도 안 되겠다. 나는 한번 다르게 살아 봐야 되겠다'라고 하며 다르게 살면 살수록 거기에 비례하여 그 사람은 높아지는 것입니다. 하나가 달라지는 데서 끝날 것이 아니라 전부가 달라져야 됩니다. 말도 달라야 됩니다. 나는 저런 말 안하겠다고 해야 돼요. 달라지면 달라질수록 악한 사탄권내를 뚫고 나가는 것입니다. 적극적으로 뚫고 나가려면 적극적으로 달라져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이제부터 말을 해봅시다. 선을 위해 사는 사람들은 이 세상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선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살고는 있으되 이 세상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선한 개인을 위해 살려고 하는 것이요, 선한 가정을 위해 살려고 하는 것이요, 선한 종족, 선한 민족, 선한 국가, 선한 세계를 위해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위해서 살려고 하는 분야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거기에는 수난의 길이 가중되는 것이요, 슬픔의 길이 가중되는 것입니다. 가정을 위해서 살려면 개인을 극복하기 위해 사는 것보다도 더 큰 십자가를 져야 되는 것이요, 종족을 위해 살려면 가정을 위해 사는 것보다 더욱 배가된 십자가를 져야되는 것입니다. 또한 민족을 위해 살려면 종족을 위해 사는 것의 몇 배, 혹은 몇십 배, 몇백 배 가중된 십자가를 져야 되는 것입니다. 또. 나라를 위해서 살려면 민족을 위해 사는 것보다 더욱 배가된 십자가를 져야 됩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나라보다도 세계를 위해 살려고 할 때는, 그 나라에서 당한 십자가에 몇백 배, 몇천 배 배가된 십자가를 져야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십자가를 피하고자 하는 사람은 세계를 위해, 선을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하나님을 위해 살려고 하는 사람은 세계를 위해 사는 사람 이상의 십자가의 길을 더듬어 가야 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사랑을 내 것으로 하고,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역사과정의 어느누구보다도 수난을 겪어야 하고 고통을 받아야 하고, 지긋지긋해 보이고 다른 사람이 곁에 가고 싶지 않을 정도로 일생 동안 비참하게 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하나님의 진정한 사랑의 길과 관계를 맺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생각해 보게 될 때에, 이와 같이 살아간 무리들로 말미암아 참이 출발하였고, 이와 같이 살아온 그 역사적 전통으로 말미암아 참의 역사가 우리 후대의 인간들 앞에까지 상속되어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전세계를 두고 보면 세계의 4대 성인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 성인은 바로 예수, 석가, 공자, 마호메트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들 중에는 그 당시의 사회환경에 보조를 맞추며 생활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석가 같은 양반은 정반왕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나라의 영광스런 권위가 자기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것을 전부 부정해 버린 것입니다. 좋은 환경을 떠나서 반대의 환경인 설산에 들어가 수도의 길을 갔던 것입니다. 또, 노나라 시대의 공자라는 양반은 동네에서 개라는 말까지 들었습니다. 냄새를 잘 맡는다는 거예요. 좋지 못한 일들은 전부 알아 가지고 그것을 충고하고 비판하고 그래서는 안 된다는 부정적인 여건을 제시해 가지고, 그 당시의 사람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하고 그런 명칭까지 남겼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봐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부정적인 입장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습니다. 그렇지요? 태어날 때부터 세상 사람들과 같지 않았습니다. 생활하는 것도 여느 사람들과 같지 않았습니다. 전부 달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친척은 물론이요, 자기의 사랑하는 동생까지도 그를 비난하였습니다. 뿐만아니라 그의 어머니까지도 그를 불신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어머니에게 '여인이여! 너와 내가 무슨 상관이 있느냐?'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자식으로서 부모에게 할 수 없는 최고의 욕설을 퍼부을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그것은 부모가 가는 길과 자기가 가는 길이 다르다는 것을 증거하는 한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예수가 그 당시의 사회와 보조를 맞추기 위해 움직였습니까? 빌라도 법정에서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하고 물었을 때, 그렇다고 대답한 예수, 욕설을 퍼붓고 비웃는 사람들 앞에서 자기가 옳다고 변명했더라면 죽음을 면할 수도 있었는데, 그들과 같은 사람이 되어 변명하고 싶지 않아서 입을 다물었던 예수, 그는 전부 반대적인 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그가 죽은 것은 자기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도둑질을 하다가 잡혀서 죽은 것도 아니요, 자기의 출세를 위해서 나라를 정복하려다가 반역자로 몰려 죽은 것도 아닙니다. 소망의 나라를 그리워하면서, 소망의 민족을 그리워하면서, 소망의 생활을 그 마음에 두고 그것이 실천되지 않는 생활환경을 부정하다가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무원리의 환경에서 몰려 죽음을 당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선한 사람은 그런 유의 사람들속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환영받지 못한 내용이 크면 클수록, 그것이 입체성을 띠고 있으면 있을수록 더욱더 역사적인 인물로 빛나고 있다는 사실을 미루어 보게 될 때에, 지금까지 말한 것이 사실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자로 태어난 여러분이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대한민국의 한 여인으로 태어났습니다. 남과 같이 태어나서 자라고 공부를 하고 시집을 가더라도 여러분은 세상 사람들과 달라야 합니다. 세상 사람 같으면 공부만 하면 되지만 우리 통일교회 교인들은 공부를 하면서 미래의 복귀의 길을 개척하기 위하여 이중의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시집을 가되 한 남편만을 위하여 가는 것이 아니라 그 남편을 넘어 나라를 위해 가야 되는 것입니다. 전부 달라야 된다는 것입니다.
보는 관점도 달라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빵을 위하여, 혹은 외적인 물질세계를 바라보고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는 그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외형적으로 어떤 형태를 갖추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내심의 확고부동한 신념을 가지고 성별된 그 터전 위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는 순정의 길을 따라가야 하는 것이 우리들이 가야 할 길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것을 생각할 때, 여러분은 일반 여성들로서는 감히 생각할 수 없는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여성들은 오로지 자기 남편만을 위해 순정을 다 쏟으면 되지만, 우리의 순결된 마음은 남편만을 위해, 그리고 자식만을 위해 다 쏟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소망적인 미래의 남편을 생각하고 미래의 소망적인 자유스러운 환경에서 자라게 될 아들딸을 바라보면서, 사람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 가정을 바라보시며 기뻐할 수 있는 가정을 만들기 위해 마음을 쏟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역사적 전통이 세워질 날을 바라보면서 살아 나가야 하는 것이 오늘 통일가의 아낙네들의 입장이 아니겠습니까? 자기의 남편을 뒤에 두고, 자식을 뒤에 두고 더 큰 나라를 위하여 정성을 들이고 자기의 육신을 희생하며 산다는 이것이 오늘날 대한민국 여성들과 다른 점입니다.
악한 것은 썩어 없어지는 것이지만 선한 것은 남아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대한민국의 역사 가운데 아무리 훌륭한 역사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보다 대한민국을 위해 더 수고하고, 세계를 위해 더 수고하여 역사적인 내용을 남긴다 할진대 지금까지 남아진 역사적인 것들도 거기에 전부 흡수되고 굴복당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있어 온 충신의 도리나 효자의 도리가 현재 우리가 행하는 충신의 도리보다 못하고, 우리가 행하고 있는 효성의 도리보다 못하게 될 때에는 그러한 전통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전통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부터 새로운 길을 걸어가는 우리의 모든 것들이 과거의 전통을 심판할 수 있고, 현재의 인간들이 살고 있는 모든 환경을 심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미래의 절대적인 기준이 되어 참다운 선의 결정적인 기준을 성립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이렇게 한번 성립된 기준이 영원불변한 것으로 남아질 수 있게 되면 그것으로 인하여 그 나라는 올바른 자리에 서는 것이요, 세계는 올바른 터전이 되어 그 터전 위에 새로운 인류의 문화가 형성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형성되어야 할 그 터전은 오늘날 타락권과 화합할 수 있는 터전이 아닙니다. 타락권과는 상반된 터전입니다. 그런 터전 위에서 진실되고 참된 것으로 남아질 수 있어야 새로운 문화가 형성될 것이고, 새로운 이상세계가 형성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생각하게 될 때, 여러분은 환경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출발한 것이 아니라 환경을 탈피하기 위해 출발한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보통 여인들 같으면 혼자 밥을 먹을 수밖에 없는 서글픈 자리에 처했을 때, 남편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밥을 먹을 것입니다. 모든 감정이 남편을 그리워하는 마음에 사무친 가운데, 혹은 자식을 그리워하는 마음에 사무친 가운데 밥을 먹을 거예요. 그러나 우리는 달라야 합니다. '남편도 나와 같은 자리에서, 자식도 나와 같은 자리에서 함께 나라를 찾아야 한다. 내가 찾아야 할 것은 남편과 지식만이 아니다. 남편과 자식이 공히 찾아야 하는 것은 나라이다' 이래야 됩니다. 이 얼마나 엄숙합니까? 얼마나 고차원적입니까?
이 뜻길이라는 것은 혼자만이 가야 할 길이 아니라 남편도 가야 되고, 후손도 가야 되기 때문에 부부가 먼저 가서 후손이 갈 길을 미리 닦아 놓으면 그 후손은 영광의 후손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 일대에 그 길을 닦아 놓지 못하면 우리 후손도 우리와 같이 신음해야 되고, 우리와 같이 어려움을 극복해야 되고, 우리와 같이 수난길을 밟아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식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후손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 할진대 후손이 짊어지고 가야 할 십자가의 길을 내 일대에 끊어놓고, 내가 이 나라와 이 세계에서 선한 터전을 이룩하여 살겠다고 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앞으로 소망의 후손들이 바라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러한 어머니 그러한 아버지를 후손들이 바랄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여러분이 사는 것은, 이 시대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알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이와 같이 어려운 활동을 하는 것도 오늘날 통일교회만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통일교회의 역사가 만민의 역사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렇게 사는 것은 대한민국이 이어받아야 할 전통을 세우기 위한 것이요, 대한민국을 길이길이 남아질 선한 나라로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대한민국을 자기 가정보다 더 사랑하는 아낙네가 없이는 대한민국의 전통적 역사는 남아질 수 없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은 망하게 되는 거예요.
한 남편을 중심삼고 볼 때, 그가 자기 가정만을 사랑하는 것으로 그치는 입장에 서면, 그 나라는 가정 밑에 깔려 버리는 것입니다. 나라보다 가정을 더 사랑하게 된다면 그 가정이 나라보다 높게 된다는 것입니다. 작은 터전 위에 큰 터전이 머무르는 원칙은 없는 것입니다. 가정이 나라안에 속해 있어야지 나라가 가정 안에 속해 있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큰 것 안에 작은 것이 들어가게 되어 있지, 작은 것 안에 큰 것이 들어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의 법도입니다.
악의 법도는 그 반대입니다. 큰 것을 따라 주지 않고 큰 것을 작은 데에 갖다 몰아넣으려고 하는 것은 악입니다. 나라를 이용해 가지고 자기 가정을 살리려고 하는 것은 악이에요. 큰 것을 작은 데에 몰아넣으려고 하는 것이 악이라는 것입니다. 가정을 자기 개인의 욕심 보따리에 넣으려고 하는 아들딸이 있다면 그는 악한 아들딸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큰 것을 작은 데에 몰아넣으려고 하는 것이 악이라는 것입니다. 통일교회는 엄청난 뜻을 중심삼고 나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기 가정의 행복을 위해서 이 뜻을 이용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악한 사람인 것입니다. 용서받지 못할 사람이에요. 지극히 큰 뜻인데도 불구하고 그뜻을 이용하여 자기가 잘되려고 하는 사람은 지극히 악한 사람인 것입니다. 이렇게 상극과 상반이 오늘날 우리통일교회 가는 길 앞에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명심해야 되겠습니다.
나보다도 가정이 귀하기 때문에, 가정을 위해서는 나를 희생시켜야 됩니다. 올바른 가정을 만들기 위해서는 내가 십자가를 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또, 가정보다도 더 큰 것이 종족이기 때문에, 종족을 위해서 가정을 희생시켜야 되는 것이 원칙입니다. 거기에 들어가서 남아지기 위해서는 희생해야 되는 것입니다. 희생하는 가정들 가운데서도 최고로 많은 희생을 치르고 나면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수많은 가정 가운데서 그 가정 전체를 위해서 대표적으로 먼저 희생하고 나서게 되면, 그 수많은 가정들은 대표적으로 희생한 그 가정 앞에 머리를 숙이게 되고 동시에 자기들의 중심이 되어 달라고 부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원칙을 하나님이 아셨기 때문에 사랑하는 아들딸을 희생시켜 나오신 것입니다. 그 환경에 있어서 언제나 남아질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중심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중심은 남아지는 거예요. 없어지더라도 중심은 곁다리들이 전부 다 없어진 후에야 비로소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심만을 남기기 위한 복귀의 도상에서 어떠한 민족을 중심삼고 복귀역사를 할 때,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사람들을 수난길에 내세우는 것이 하나님의 전법입니다.
당장에 보면 망할 것 같은 길이요, 억울함을 당할 것 같은 길이지만, 그런 길을 극복하고 나면 그 환경이 자기 앞에 굴복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칙이기 때문에 영원히 남아질 수 있는 이 원칙적 노정을 사랑하는 자녀들 앞에 상속시켜 주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을 가진 하나님께서는 타락권내에서 불가피하게 이런 전법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번 전도기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36가정, 혹은 72가정, 124가정, 430가정, 777가정 중에서 어떤 가정이 우리가 본받을 가정이냐 할 때, 잘먹고 잘사는 가정을 보고 본받을 가정이라고 합니까? 이렇게 전체가 동원될 때는 어느 누구보다도 선두에 서서 전체의 어려움을 자기의 어려움같이 여기고 전체의 수고를 혼자 책임지겠다고 허덕이는 사람이 있게 될 때에, 그 희생의 범위가 크고 깊고 넓을수록 그런 사람을 보고 본받을 사람이라고 하지, 큰 것은 제쳐놓고 자기 혼자 좋겠다고 꼬리치고 다니는 사람을 본받을 사람이라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 가운데에는 본받을 사람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 있지요? 그래요, 안그래요?
그러면 남아지기를 바라는 사람들, 혹은 후대에 복받기를 바라는 사람들, 선하기를 바라는 사람들, 잘살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시대와 더불어 짝하여 살아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시대와의 간격이 멀면 멀수록 높은 인격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는 꿈도 못 꿀 그런 세계를 향하여, 그런 이상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이 있으면 그는 그만큼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세계에서 그렇게 산 사람이 있다 할진대 이 세계에서는 망하고 몸뚱이는 죽어 없어질망정 그가 살고 간 사상과 선의 실적은 영원히 남아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반드시 승리의 영광을 받는 모습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터전이 다시 한번 재봉춘하기 때문에, 죽었던 그 사람도 부활할 수 있는 영광을 차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지요?
예수님은 유대교인들이 반대하는 자리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반대하는 자리에서, 그리고 로마의 위정자들이 반대하는 자리에서 죽어갔지만, 그 시대의 로마나 이스라엘 민족, 유대교로부터 치리받을 수 있는 내용을 중심삼고는 하루도 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당시에 살고 있던 세상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래야 맺을 수 없는 별다른 가정과 별다른 나라와 별다른 세계를 위하여 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공인하고 온 인류가 공인하고 미래의 세계가 환영할 수 있는, 공인된 터전 위에서 살았기 때문에 누구도 그를 점령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또한 누구도 그를 침범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죽음의 자리에 나가면서도 당당했던 것입니다. 시대의 지배를 받아 내 몸뚱이는 죽더라도 내 사상은 철석같은 터전이 되고 중심 뿌리가 되어 세계를 움직이고도 남을 수 있고, 세계의 중심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생애를 마치고 간다며 당당하게 걸어간 것이 십자가의 길이 아닙니까?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 시대에 죽었지만 미래를 위해 죽은 것입니다. 또한 예수는 그 시대에 죽었지만 그의 희생은 그 시대와 더불어 흘러가 버리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것으로 남아지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음을 통하여 속죄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혜택을 통하여 그의 뜻을 이어받은 사람들은 그의 사상을 중심삼고 씨족이 될 수 있는 것이요, 민족이 될 수 있는 것이요, 국가가 될 수 있는 것이요, 역사와 더불어 발전하는 문명권을 중심삼고 종말시대에 가서 소망의 천국을 이룰 수 있겠기 때문에 예수님이 재림이란 말을 당당하게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뿌려 놓았으니 내가 거둔다는 것입니다. 내가 동기가 되었으니 결과도 내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그러한 자신감을 가지고 갔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 이 땅에 올 때는 실패한 입장이 아니라, 승리한 입장에서 세상 앞에 선의 권위를 갖고 오시는 것입니다. 개인 앞에, 가정 앞에, 혹은 민족 국가 세계 앞에 당당하게 선의 권위를 들고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민이 그분 앞에 머리를 숙여야 되는 것입니다.
잘사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그 시대에 못사는 사람들이 잘사는 사람들입니다. 사탄세계에서 지긋지긋하게 못사는 사람들이 잘사는 것입니다. 사망권에 깃들어 있는 이 땅 위에서 선을 위하여 지긋지긋하게 못사는 사람들이 잘사는 거예요. 세상에서 당당하게 잘사는 사람은 지긋지긋하게 못사는 거예요.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눈을 볼 때에도, 너는 선을 위해서 얼마나 지긋지긋한 것을 바라보고 살아왔느냐고 물어 보세요. '한번 봐도 싫은 것을 어떻게 1년 동안 보고 살고, 백년 동안 보고 살 것이냐'고 하면, '백년도 더 보고 살아야 된다. 그렇게 태어났으니 죽을 때도 그렇게 죽어야 된다'라고 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눈을 가르치는 절대적인 교훈이요, 참된 교훈인 것입니다.
이 입에 대해서도 '이 놈의 입아! 너는 나불나불하면서 남에게 화를 불어넣는 펌프통 노릇을 했지? 남을 꺽어 넘기고, 남을 헐뜯고. 남에게 침을 주고, 남 앞에 가시가 되는 펌프통 노릇이나 했지?' 해야 합니다.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그 반대로 남에게 힘을 주고 소망을 쥐야 합니다. 낙망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어 줘야 됩니다. 손발을 대해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살아 가지고 망하는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완전한 씨라 할지라도 그냥 그대로 있어 가지고는 거기서 절대로 나무가 나올 수 없습니다. 그렇지요? 완전한 씨일수록 땅에 들어가서 썩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곡식이 나오고 나무가 나오는 것입니다. 완전한 씨는 죽으라고 땅 속에 묻어 놓으면, 도리어 거기에서 새로운 활동을 해 가지고 제 2의 모습이 되어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그러면 오늘날 이 세계 가운데 하나님이 찾고 계시는 참다운 씨가 무엇이냐?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 예수님의 사상을 이어받아 가지고 완전히 죽기 위해서 사는 사람은 남아지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이 사망권에서 살고자 하는 사람은 죽고, 죽고자 하는 사람은 사는 것입니다. 정말 알았어요? 「예」 그렇다면 죽으라우요. (웃음) 죽으라고 하니 고맙습니까, 기분이 나쁩니까? 「고맙습니다」 (웃음) 기분 나빠하는 사람은 망해야 됩니다. 죽으라고 하는 것을 고맙게 생각해야 돼요, 알겠어요? 「예」
그러면 김일성이를 잡으러 38선 넘어 사지로 가라 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꽁무니를 빼야지요? 「아니요」 그 길이 40년, 400년 걸리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그것이 걱정입니다. 한 40일 걸려 가지고 목을 잘라올 수 있으면 되는데 40년 걸려도 안 되고 400년 걸려도 안 되면 어떻게 할 거예요? 그래서 후계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혼자는 망하는 것입니다. 예수도 혼자서 그렇게 죽어갔으면, 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사상을 이어받아 죽음의 고개를 밟고 넘어간 사도들의 대열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기독교가 망하지 않고 예수님이 망하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 혼자만으로 끝났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망했을 것입니다. 그 뜻이 아무리 좋더라도 그 뜻을 이어받아 천년 만년 연속적으로 이루어 나갈 수 있는 후계자가 없으면 소용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후계자를 남겨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은 후 부활하여 40일 동안에 흩어졌던 제자들을 다시 모이게 한 것도 후계자의 터전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전에 스승을 버리고 간 그들을 응당히 배반해야 할 입장이었지만 예수님은 그 반대로 행하셨습니다. 정반대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서로가 서로를 배반하는 것이 일쑤지만, 그는 결코 그럴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인 것입니다. 그가 배반한 무리를 대할 때, 옛날에 사랑하던 그 이상의 마음을 가지고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세 번씩이나 진심으로 묻고 다짐을 받은 것도 그러한 연유에서였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생애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세상 사람들의 삶과 반대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 악한 세상에서 선한 세계가 희생할 수 있는 가망성이 있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추측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게 될 때, 여러분 자신들은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이북에 가서 원수를 갚으라는 말이 있을 때, 그 일이 40일 정도에 끝날 수 있는 일이라면 너도나도 하겠다고 할는지 모르겠지만, 40년이 걸린다 하게 되면 '아, 생각 좀 하고' 하면서 손 들기를 주저할 것입니다. 어디 40년이 걸려도 하겠다는 사람 있으면 손들어 보세요. 알긴 알았구만요. 그러면 4백년이 걸려도 하겠다는 사람 손들어 보세요. (웃음) 그래요. 해보라우요. 해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에게 특권을 주겠습니다. 김일성뿐만 아니라 저 모스크바에 가서 소련의 최고 간부들의 모가지를 잘라 와야 되는 것입니다. 김일성이를 굴복시키는 것보다도 하나님은 모택동을 비롯하여 코시킨이나 브레즈네프를 굴복시키기를 더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 혼자서는 안 됩니다. 또한 우리 대한민국 사람만 가지고도 안 됩니다. 그러니 중공 사람을 전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소련 사람을 전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들을 원수로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정성을 들여 가지고 이 사상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나와 똑같게, 머리에서부터 몸뚱이 꽁지 할 것 없이 빨갱이를 만들거나 혹은 흰둥이를 만들어 가지고 '이렇게 이렇게 해라'하며 명령해야 되는 것입니다. 지금 그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선생님이 대한민국에 뜻을 품고 나타나서 뜻의 길을 가야 되겠다 하고 있는 데 선생님은 잘사는 길을 가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뜻을 안 그날부터 나는 수난길을 걸어왔습니다. 오늘이 바로 우리 협회 창립기념일이지만 우리 협회는 창립 이래 17년을 거쳐 나오는 동안 내내 수난길을 걸어왔습니다. 그 수난의 첨단에 서서 다가올 모든 문제들을 해결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 있는 문제들은 어떤 개인을 위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 일을 잘못하게 될 때에는 하늘땅이 왔다갔다한다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이와 같이 생각만 해도 엄청난 문제들을 해결해야 하는데, 그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누구보다도 자신을 가져야 하고, 누구보다도 철두철미해야 하고, 하나도 그릇됨이 없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런 문제들을 해결하여 하늘쪽으로 넘겨야 됩니다. 그러지 않으면 사탄세계로 굴러떨어지는 일도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보기에는 이 자리가 좋은 것 같지만 좋은 자리가 아닙니다. 여러분들을 남한 각지에 배치해 놓고, 여러분들이 고생하고 있는 것을 볼 때 내 마음이 편한 줄 알아요? 도리어 여러분을 배치하지 않았을 때는 잠이라도 편안히 잘 수 있었지만 배치해 놓은 후로는 그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배치된 여러분이 진실된 자리에서 충성을 하는 것이 천의가 바라는 소원인데도 불구하고, 가증된 자리에서 하늘을 원망하게 되면 그 책임을 누가 져야 되느냐? 여러분도 져야 하겠지만 명령한 사람이 책임을 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원망하는 자리를 피하기 위해서는 내가 그 사람 이상의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원망의 자리를 피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 자신이 정성을 들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평하는 사람 이상의 자리에 서게 될 때, 그 평은 나를 넘어서 나와 상관없이 나가 떨어져서 깨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평을 받을 수 있는 자리에 있을 때는 그 평이 내게서 열매를 맺음으로써 내 갈 길을 막는 놀음이 벌어지기 때문에, 그 평에 걸리지 않기 위해 정성을 들여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는 이 큰 섭리의 뜻을 이끌어 나갈 수 없는 것입니다. 주체와 대상이 주고받아 가지고 하나님을 모셔 드린다는 것이 그리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명령하는 사람은 웃고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명령하는 사람은 울고 살아야 되고, 책임을 더 져야 될 입장에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복귀의 뜻을 이루어 나가는 정상적인 행로인 것을 여러분은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이와 같이 모인 자리에서 여러분이 수고한 내용을 내가 낱낱이 듣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지만 시간 관계로 그러지 못합니다. 그렇더라도 여러분은, 내가 마음으로 여러분이 수고한 것을 동정하는 것 이상으로, 그의 몇백 배로 하늘이 여러분을 동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됩니다.
내가 수난길을 걸을 때, 하나님이 나 이상 수고하신 것을 알았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 앞에 한마디의 불평도 할 수 없었습니다. 가중된 십자가가 앞을 가로막는 일이 천만 번 있더라도, 그 이상으로 수고하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수난의 길도 평탄한 길처럼 넘을 수 있었고 시련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내가 가고 있는 이 길을 따르는 여러분 앞에 내가 힘의 모체는 되지 못할지언정, 여러분의 힘을 깎아 먹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겠다고 하는 것이 하늘의 도리를 알고, 하늘로부터 교육을 받은 선생님의 마음입니다. 나는 여러분의 스승으로서 하나님이 나를 위해 수고하시고 나를 위로하시던 것과 마찬가지로, 여러분 앞에 위로와 힘의 모체가 되기 위해서 밤낮으로 책임을 다하려고 하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선생님이 정성들이는 기준이 여러분의 기준보다 앞놓아가게 될 때 여러분은 언제나 새로울 수 있는 것입니다. 5개월이 지나서 지치는 여러분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1970년 12월 1일, 여러분에게 명령을 할 때 이상의 마음을 가지고 이 명령을 단행해야 되겠습니다. 물론 부작용도 일어날 것이고 반발하는 일도 있을 것입니다. 자체 가정에서 동기가 된 불화의 여파가 교회에까지 미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뜻을 염려하는 마음, 뜻 앞에 미치는 피해가 더 클 것을 염려하는 입장에서 결단을 내려 가지고, 내가 여러분을 출동시킬 때 가진 마음 이상의 마음을 언제나 갖고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항상 그 명령에 순종하여 처음 출발하던 때의 마음을 가지고 움직이게 되면 여러분이 가는 길은 무한히 발전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지 못하면 발전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천리입니다. 원리가 뭐냐? 완전한 주체는 완전한 대상을 창조하는 것이요, 주체와 대상이 완전히 주고받으면 비로소 거기에 하나님이 운행하시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이 운행하시면 창조의 결실이 나타나기 때문에 죽었던 생명들이 부활권으로 옮겨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원리적 견해가 아닙니까?
여러분을 이렇게 동원하는 것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역사와 더불어 살아가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 역사권내에서 잘살아 가지고는 앞으로 후대에 남겨 줄 수 있는 선물이 없는 것입니다. 후대에 남겨 줄 수 있는 전통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생애 가운데에 남겨야 할 것은 무엇이냐? 오늘날 이 썩어빠진 사회에, 심판권내에, 언젠가 한번 제거당하여야 할 이 세상에 남아질 전통이 아니라 심판권을 넘어 미래에 남아질 수 있는 전통을 남겨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통일가를 대표하여 이 시대의 중차대한 사명으로 짊어진, 가냘픈 여인의 몸들을 한 여러분의 책임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은 눈물을 흘려도 자기 아들딸을 위해 흘려서는 안 됩니다. 기도를 해도 자기 아들딸을 위해 기도해서는 안 됩니다. 아들딸을 제물로 삼고 남편을 제물로 삼아서 민족을 살리기 위하여 눈물을 흘려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움이 사무치거든 그 그리움도 자기의 혈연적 관계에서 열매맺게 할 것이 아니라, 민족을 통하여 열매맺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지 못하면 망하는 것입니다. 가정을 떠나서 소망의 심정을 품고 출발하여 사랑하는 남편과 자식을 소망의 귀착점으로 생각하면서 기도하고 몸부림치는 아낙네는 망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남아지지 않아요. 그런 사람은 역사와 더불어 심판받을 것입니다. 심판의 한계선을 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남편을 향해 사무치는 그리움의 마음이 있거들랑, '우리 가정보다도 나라를 중심삼고 머물고 싶은 것이 하나님의 소원이 아니겠느냐? 나아가서 우리 가정보다도 세계를 중심삼고 머물고 싶은 것이 하나님의 소원이 아니겠느냐? 그러니 내 마음을 남편에게 둘 것이 아니라 나라에 두고, 세계에 두자'라고 해야 하고, 그래서 '나라와 세계에 마음을 준 것처럼 남편에게도 같이 줄 수 있는 마음을 갖게 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남편도, 현세에 살고 있지만 미래를 위해 산다고 할 수 있는 자리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또한 그럼으로 말미암아 그 가정은 타락권내에 있는 가정이 아니라, 미래의 한때를 맞이하여 남아질 수 있는 가정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원리적인 견해라는 것을 여러분들은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밥을 먹어도 이 시대를 위해서 먹어서는 안 됩니다. 미래를 위해서, 나라를 위해서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잠을 자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편하기 위해서 잠을 자서는 안 됩니다. 나라를 위해, 내일의 나라의 싸움을 책임지기 위해 자야 되는 것입니다. 먹고 자고 활동하는 일체를 현재의 환경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전통을 남기기 위해 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현재의 통일가의 전통을 누가 미래의 전통으로 남길 수 있을 것이냐? 그때에 가서 하려고 하면 이미 늦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그 전통을 만들어 놓지 않고는 그러한 때를 맞이할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예수가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 담판 기도를 하는 자리에서 '아바 아버지시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나에게서 피하게 하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와 연결되어 있는 제자들도 당시의 환경에 보조를 맞추려 하고 그와 관계되어 있는 친척들도 환경엔 보조를 맞추고 있었기 때문에, 심정적 인연을 중심삼고 볼 때 그 자신도 그들과 같은 입장으로 끌려가는 것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런 그의 마음은 그들과 같이 살며 거기에서 그들과 더불어 뜻을 이루고 싶었지만, 이미 기울어진 형세권내에서는 뜻을 세울 수 없다는 것을 아신 하나님께서는 그 뜻을 이 세상이 아니라 다른 세상으로 옮기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가 살던 그 환경이 아니라 예수가 죽어서 가야 할 미래의 세계로 하나님의 뜻이 옮겨졌던 것입니다. 옛날 이 세상에 주었던 그 뜻을 중심삼고 생각할 때 예수는 서글픈 마음을 가지고 '아바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내 뜻대로라는 것은 그 시대를 중심삼고 이루려는 뜻인 것입니다. 예수는 그 시대를 중심삼고 뜻을 다 이루어 가지고 세계를 대해 호령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뜻을 이룰 수 있는 환경이 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그 뜻을 미래에 두게 되었다는 것을 생각하고 상반된 입장에 서서,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 뜻대로 하시옵소서'라는 담판 기도를 세 번씩이나 신음을 하고 피눈물을 흘리면서 했다는 사실을 알고 그를 동정해야 되겠습니다.
당시의 사회 환경에서 자기 뜻을 중심삼고 변명할 조건이 많았지만, 그 뜻이 현재의 환경에 이루어질 수 없고 미래에 이루어야 할 뜻으로 옮겨졌을 때에도 거기에 순응하는 것이 하나님의 효자의 도리요, 충신의 도리인 것을 예수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길을 따라가기 위해서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 뜻대로 하시옵소서' 했던 것입니다.
거기에 죽음이 가로놓여 있고, 십자가의 비참상이 가로놓여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자기 개인이 비참한 것을 문제삼은 것이 아니라, 그 고개를 넘어 가지고 뜻을 연결시키지 못하면 미래에 억천만년을 두고, 몇억천만 배 가중된 수난의 길과 비참상이 인류 앞에 몰려올 것을 생각한 예수는, 자기 일신을 탕감의 제물로서 십자가에 내놓기를 서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한 결의 밑에서 역사는 진전되고, 새로운 시대의 터전이 닦여 나왔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혼자 이 뜻을 다 이루지 못하겠으면 어떻게 해야 될 것이냐? 후손들에게 올바른 전통을 이어주어야 합니다. 오늘날 통일교회, 통일가에 있어서도 올바른 전통을 이어줘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이어줄 것이냐? 플라스 앞에는 마이너스가 상대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통일가를 중심삼고 볼 때에, 통일가의 중심이 선생님이라면 선생님을 중심삼고 누구를 동원해야 할 것이냐? 여자를 동원해야 됩니다. 알겠어요? 「예」 여자를 동원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원리를 중심삼고 보면 이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여자는, 타락한 해와는 두 남자를 망하게 했습니다. 왼쪽으로는 천사장을 망하게 했고, 바른쪽으로는 아담을 망하게 한 것입니다. 그렇지요? 여자들의 조상인 해와가 그런 죄를 지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동원되어서 역사적 전통을 근본적으로 파탄시킨 해와의 한을 풀어 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 해와는 개인적인 한을 맺히게 한 것이 아니라, 가정의 한을 맺히게 한 것입니다. 그렇지요? 그렇기 때문에 여자 된 여러분들이 두 남자를 위해서 해방의 역사를 이어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알겠지요? 해와가 동기가 되어 타락했기 때문에 그것을 복귀하기 위해서는 여자가 동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반대입니다. 반대예요.
여러분이 선생님을 중심삼고 동기가 됨으로써 오른편쪽 남자를 망하게 했던 그 인연을 메울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여자로서 얼마나 복인지 모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오른편쪽 남자와 의논해 가지고 움직이게 될 때에 천사장은 굴복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여러분이 선생님과 하나되어 가지고 나가게 되면 여러분의 남편은 자동적으로 굴복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되었다 할 때는 자동적으로 굴복한다는 것입니다. 남편을 굴복시켜 가지고 계대를 이어받아 새로운 가정을 형성해야 하는 것이 여러분의 갈 길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려면 여러분이 먼저 무엇을 생각해야 되느냐? 개인을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은 개인의 때가 아니예요. 가정을 가진 여러분이 동원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처녀 총각은 동원하지 않고 가정을 가진 주부들만 동원하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이 가정의 때이기 때문입니다. 알겠습니까? 옛날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중에 60년도에 전도 나갔던 경험이 있는 사람이 있으면, 그때에 기울였던 노력의 3배의 노력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는 핍박을 받으면서도 정성을 들이고 눈물로 싸우며 환경을 개척하고 수난길을 응당히 가야 할 운명길로 알고 달가이 따라왔지만, 이제는 외적인 핍박도 없으니 그저 적당히 하면 되겠지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러면 안 됩니다. 정성을 더 들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남편이 달려 있고, 아들딸이 달려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이 달려 있고, 사위기대가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달라야 하는 것입니다. 알겠습니까?
여자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사위기대를 몽땅 잃어버렸기 때문에, 여자 한 사람을 중심삼아 가지고 잃어버린 것을 모두 복귀해야 하는 것입니다. 천사장을 남편으로 대해 가지고 그런 일이 벌어졌으니 앞으로 하늘편 남성, 본연의 남성을 모시는 자리에서 이것을 지워 버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이 가정으로서 넘어야 할 가정적 탕감기간인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렇게 엄청난 사명을 짊어진 것을 여러분들이 알고, 선생님과 일체가 된 입장에서 정성을 들여야 되겠습니다. 알겠어요?
자, 이제 복귀역사를 더듬어 아담 가정에서부터 한번 생각해 봅시다. 아담 가정의 아담 해와는 두 세계의 모체입니다. 두 세계의 모체이기 때문에 아담 해와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갈라 가지고 가인 아벨을 중심삼고 싸웠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가인이 아벨을 죽였지요? 그 후 가인은 두려워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때려 죽일까봐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가인에게 '너를 죽이는 자에게는 7배의 벌을 내리겠다'고 하셨습니다. 세상에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아벨을 죽인 가인을 당장에 죽여 버리든가, 무슨 처벌을 해야할 텐데, 도리어 그를 죽이는 사람에게 7배나 뭘 주겠다고요? 복을 주겠다고 했습니까, 화를 주겠다고 했습니까? 화를 주겠다고 했잖아요. 그러면 하나님이 사람 죽인 살인자의 편입니까, 죽인 것을 모르겠다고 하는 편입니까? 이것을 묻는 사람이 지금까지 없어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그런 역설적인 발언을 하셨겠는가.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하나님이 가인을 죽이려고 했다면 세상을 복귀할 수 있는 길이 막혀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세상의 원수가 되는 거예요. 알겠어요? 하나님과 세상이 원수가 된다는 것입니다. 형제끼리는 원수가 될 수 있어도 부자간에는 원수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원수가 되면 복귀의 길이 끊어지게 되고, 부자관계도 끊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형제를 살육한 사실은 나쁘지만, 천도를 남겨야 할 하나님은 가인을 벌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를 때려 죽이게 되면 천도가 끊겨 나가기 때문에 복귀고 무엇이고 다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도를 남겨야 할 하나님은 뜻을 생각하고 반대적인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전부 반대입니다. 무엇 때문에 그랬겠습니까? 현재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고 미래 때문에 그런 명령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노아 할아버지를 보세요. 노아 할아버지가 120년 동안 방주를 지을 때 그의 친구나 동네 사람들, 그리고 그의 어머니 아버지와 아내, 아들딸, 며느리들이 그를 좋아한 줄 알아요?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시아버지라는 사람이 매일 까뀌 보따리를 짊어지고 새벽같이 나가면서 며느리에게 '아가 아가, 밥 좀 일찍 해라' 그랬겠어요, 안 그랬겠어요? 분명히 그랬을 거예요. 마누라 보고도 '여보 마누라, 이 영감이 일하러 나가는데 해가 중천에 떴을 때 가서 올라가다 말고 내려와서야 되겠나. 좀 빨리 해주게'라고 간절히 말을 했을 것입니다.
120년이라는 말할 수 없이 기나긴 기간이 있었기 때문에 '놀다가 한 10년 후에 해도 되겠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은 그런 것을 원치 않은 것입니다. 명령받은 그날부터 끊임없는 정성을 들이고, 일어날 때도 누구보다도 먼저 일어나 일을 시작하고, 일을 마칠 때도 누구보다 늦게 마치고, 잠은 누구보다도 적게 자고, 정성은 누구보다 많이 들이기를 하늘은 원했을 것 아닙니까?
'노아야, 너는 이 시대의 대표자가 아니다. 그러니 너는 천추만대 역사 끝까지 남길 전통을 세워야 하고 복귀섭리에 보조를 맞춰야 한다. 너는 그런 대표자이기 때문에 너는 나와 더불어 살 수 있는 전통을 세워야 된다'라고 하시지 않으면 안 되는 하늘의 사연이 있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역사적 환경에 맞지 않는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노아 할아버지는 역사를 넘고 넘어 복귀섭리의 노정에 전통을 남겨야 했던 것입니다. 그의 전통을 따라가야 할 후손들이 있기 때문에 그 자체를 보면 비참하고 불쌍하지만 뜻을 사랑하고 계획했던 복귀의 천국을 잃어버릴 수 없는 하나님은 그를 동역자로 남기려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현실세계와 더불어 짝할 수 없고, 현실적인 환경에서 배척받는 입장에 있기 때문에, 인류역사노정에 믿음의 전통을 세우는 데는 자그마치 120년 동안 수난을 당하는 것이 필연적인 조건이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노아 할아버지에게 시대의 걸인이 되고, 시대의 추방자가 되고, 시대로부터 몰림받는 환경에서도 그것을 극복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즉, 그 시대를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소생되어 오는 미래의 뜻의 세계와 더불어 살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은 노아를 그렇게 무자비한 입장으로 내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노아 자신도 그 뜻을 알았기 때문에 자기의 아들딸을 무자비한 입장으로 내몰지 않을 수 없었고, 자기 부인을 무자비한 자리로 나가도록 권고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노아의 아내와 그 아들딸이 그러한 노아의 권고를 고마운 권고로 받아들이고, 아버지가 행하는 것이 응당히 해야 할 책임을 하는 것으로 여기고, 120년동안 노아를 협조했던들, 노아의 가정에 그러한 불상사의 끝날이 나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불평하고 비판함으로 말미암아, 120년간 정성들여 방주를 지은 노아 할아버지는 내적인 면에서 미래의 전통을 세우기는 했지만 실체적인 승리의 터전을 갖추지 못하고 실패한 운명권내로 흘러가 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노아 할아버지는 그 시대를 위해 산 것이 아니라 미래를 위해 살았던 것입니다. 민족 가운데서도 보다 높은 중심민족으로, 길이길이 남아질 수 있는 민족으로 세우고자 하신 하나님의 뜻이 있었기 때문에 미래의 역사앞에 뒷받침이 될 수 있는 전통을 남기기 위해 노아로 하여금 그 시대에 부정받는 생활을 하게 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미래와 더불어 살게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노아에게 그런 놀음을 시켰다는 것입니다.
또, 아브라함을 보세요. 우상장사의 사랑스러운 아들로서 어머니, 아버지의 슬하에서 잘 자라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그를 불러 가지고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너는 데라의 집에서 떠나라.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예고하고 내린 명령이 아닙니다. 불러 가지고 바로 내린 벼락명령인 것입니다. 청천의 벽력 같은 명령이 떨어진 것입니다. 그때에는 우물쭈물하면 안 됩니다. 떠날 때는 기다렸다는 듯이 당장 떠나야 합니다. '아이쿠,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하며 망설이면 안 돼요. 출발이 깨끗해야 하는 것입니다. 출발이 그릇되게 되면 천추만대의 역사에 한이 될 오점을 남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사탄의 참소조건이 되어 지나온 모든 역사가 부정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알기 때문에 하늘의 명령을 받들고 나선 사람들은 명령을 받은 즉시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명령을 받은 아브라함도 즉시 갈대아 우르를 떠났던 것인데 그때 아브라함은 얼마나 기가 막혔겠습니까? 정든 고향산천과 부모친척 거느리고 형제자매와 같이 재미있게 살던 가정을 떨치고 야간 도망을 해야 했던 아브라함의 심정이 얼마나 기가 막혔겠느냐는 것입니다. 어머니 아버지가 알면 가라고 그러겠습니까, 또 형제자매가 알면 가라고 그러겠습니까? 그러니 할 수 없이 부모 형제자매들이 깊은 잠에 빠진 밤에 보따리를 싸들고 대문을 나섰던 것입니다. 그때 아브라함의 심정이 어떠했겠느냐는 것입니다. '어머니 아버지 안녕히 계십시오. 형제들아 잘 있거라. 나는 천명을 따라가는 길이니 내 앞에는 당연히 비참한 길이 있을 것이고, 연이어 수난길이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나 기필코 이 길을 가서 내가 뜻한 바를 이루고 돌아오겠으니, 그때까지 죽지 말고 살아남아 주십시오' 하며 엇갈리는 마음으로 식구들의 편안을 빌며 돌아서던 아브라함, 슬픔에 엇갈리는 심정을 가지고 고난길을 향하여 나서서 재작전을 하고 내일의 용사로서 결의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입장에 섰던 아브라함의 심정이 얼마나 비장했겠느냐? 그것은 오늘날의 세상 환경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지만 아브라함은 그 명령을 기다렸다는 듯이 이행한 것입니다. 그의 행동 자체는 우상장사 데라, 즉 사탄의 소굴을 완전히 거부하는 하나의 선을 긋는 것이었고, 사망권을 잘라내는 것이었습니다. 고향과 가정을 버리고 미련없이 떠난 그 자체가 사망권에서 완전히 탈피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를 에워싸고 있던 사망권을 완전히 제거시키고 넘어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놀음을 하라고 명령하셨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됩니다.
아브라함은 명령을 받는 순간부터 국경을 넘어 이방의 나그네요, 유랑민 신세가 되었던 것입니다. 짚시의 선조가 될 수 있는 길을 나선 거예요. 그런 아브라함의 생활이 얼마나 비참했겠습니까? 애급에 들어가서는 바로왕에게 아내를 빼앗길 뻔한 일이 있기도 했고, 그랄왕에게 몰리는 처참한 환경에도 처했습니다. 그러한 수욕의 노정이 첩첩이 계속되는 입장에서도 아브라함은 서슴지 않고 아내를 보낸 것입니다.
하나님은 출발이 틀림없기 때문에 모든 것이 틀림없을 것이라고 여기게 된 것입니다. 또한 틀림없는 길을 출발했기 때문에 틀림없는 그날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틀림없이 모든 어려움을 극복해야만 된다고 하는 것이 아브라함의 신념이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아브라함은 백세에 만득자 이삭을 얻어 하나님이 같이하신다는 증거적인 실체를 보았고, 약속하신 하나님이 틀림없다는 것을 알고 또다시 가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결의를 다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입장에서 자식을 잡아 제물로 드리라는 명령이 내렸던 것입니다. 그건 전부 그 시대에 맞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시대에는 누구에게 그런 명령을 내린다 해도 한 사람도 따라갈 사람이 없었을 것입니다. 전부가 부정적인 여건이요, 부정적인 행동이요, 부정적인 조건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조건 앞에 아브라함은 '나는 당신 앞에 바쳐진 종의 몸인데, 주인된 당신을 거역하고 어떻게 내 마음대로 하겠습니까?' 하면서 절개와 지조를 가지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응하는 것이 도리인 것을 알고 수난의 길을 걸어갔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그러한 행로를 거쳐 120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야곱을 중심삼고 복귀의 터전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노아 때에 실수한 것을 재차 수습함으로 말미암아 복귀역사를 되돌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전부 부정적인 생활을 하였습니다. 야곱도 보십시오. 자기 형님을 속이는 일이 있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방에 가서 종살이를 했던 것입니다. 종살이를 했어요. 그 시대의 부정적인 환경에 몰림을 당하고, 환경에 에워싸였지만 환경에 지배받지 않았습니다. 원수의 포위망에 사로잡힌 포로와 같았지만 그의 마음은 그 환경을 넘어서 하나님을 그리워하고 미래의 이스라엘 천국을 꿈꾸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오늘날 복귀세계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그러한 생활을 했고, 야곱도 그러했습니다. 그 시대에 환영받아 가지고는 망한다는 것입니다. 그 시대의 전통을 씻어 버리고 미래의 전통을 남기기 위해서는 그런 수난의 길, 수욕의 길을 거쳐야 됩니다. 그러지 않고는 우리의 선조의 자리에 설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길을 거쳐 선조의 자리에 선 것이 우리의 조상들이 아닙니까?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모세를 보세요. 호화찬란한 바로 궁중에서 왕녀의 아들로 자란 그는 무엇 하나 부러울 게 없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런 모세는 누구보다도 애급 나라에 충성해야 할 입장인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에 대한 자기의 절개를 잃지 않고, 자기 민족을 위해 수고의 길을 나섰던 것입니다. 그 나라 전체가 반대하고, 그 나라 전체가 원수가 되는 입장에서 한 사람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나선 것입니다. 그렇듯 한 사람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나라 전체와 주권을 부정한 그의 단호한 행동은 길이 찬양할 수 있는, 하늘의 절개를 지닌 사나이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이스라엘 나라 전체가 환영하지 않는 독단적인 입장에서 전체의 반대를 받으면서 한 사람을 옹호하고 나섰던 것입니다. 한 사람의 이스라엘인을 옹호하기 위해서 자기의 전체를 희생하고 생명까지 걸고 나섰다는 것은 그 당시의 사회 환경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행동인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선조들은 전부 다 역설적인 행동과 역설적인 방법을 통하여 신앙계의 터전을 닦아 나온 것입니다. 그 터전은 그 시대를 위해서 닦은 것이 아니라 후대 후손인 오늘날의 우리 앞에 남겨 주기 위해서 닦은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이어받아 가지고 탕감복귀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세례 요한도 보세요.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산짐승처럼 살았잖아요? 또 약대 털옷을 입고 살았다지 않습니까? 잘 입을 것이 뭐 있겠습니까? 30년 동안 그렇게 살았으니 그 주제가 형편이 있었겠어요? 전부 다 그런 환경에서 부정적인 행로를 갔던 것입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하늘의 뜻을 따라가는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느냐? 또 그렇게 시키지 않으면 안 되는 하나님의 야속한 내적인 사연은 무엇이냐? 고생시키지 않고 될 수 있었으면 왜 그렇게 안 했겠습니까? 그런 방법이 아니면 안 되겠기 때문에, 사망권을 벗어날 길이 없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빠른 길이요, 그것이 해결할 수 있는 비법이기 때문에 그 비법을 아신 하나님께서는 불가피하게 눈물을 머금고, 이를 악물고 신음하는 소리를 응당히 들어야 할 소리로 여기고 들으면서 오늘날까지 우리 조상들을 거느려 나오신 것입니다. 이렇게, 새로운 미래의 시대에 남길 수 있는 전통을 마련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고 희생했는가 하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태어날 때부터 달랐습니다. 자랄 때에도 달리 자랐습니다. 예수님은 장가가는 것도 달라야 했습니다. 아내를 취하는 것도 달리 취해야 되고, 살림살이도 달리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수고하더라도 그 사회 제도권내에서는 전체가 다른 환경을 이뤄 놓을 수 없는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죽음의 자리로 내세워 가지고 다시 시대를 연장시켜 나오신 것입니다.
그러한 피의 대가를 치러 가지고 복귀의 터전을 넓혀 나온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의 생활도 비참한 것이요, 예수님의 생애도 비참한 것이었습니다. 그런 비참한 생활을 바라보고 좋아할 사람이 그 시대에 누가 있었겠으며, 그런 생활을 하는 예수님 자신은 기뻤겠느냐? 아닙니다. 가는 곳곳마다 눈물을 흘려야 되고, 가는 곳곳마다 도망 다녀야 되고, 가는 곳곳마다 깊은 산중에 들어가 밤을 새워 가며 철야기도를 해야 하는 운명길을 누가 원했겠습니까? 그 시대 사람은 그 누구 하나도 원하지 않았습니다. 다 싫어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상치되는 생활을 하는 것이 선이기 때문에, 참이기 때문에, 하늘을 따르는 길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렇게 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래야 한줄기 하늘의 길이 가려지고, 한줄기 하늘의 전통이 세워지겠기에, 또 그 전통을 따라 하나의 종이면 종, 아들딸이면 아들딸의 모습이 남아지겠기에, 이렇게 하지 않고는 그런 사람들을 만날 수 없겠기에 하나님은 불가피하게 서글프고 또 서글픈 길을 찾아 나왔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통일교회 문선생은 어떠한가?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간 길이 기독교가 걸은 길이었습니다. 아담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전 후손도 아담과 마찬가지로 타락한 길을 걷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예수님이 그러한 타락의 원한을 막아 놓고, 죽음으로써 영적으로나마 복귀의 길을 가려 놓고 갔기 때문에, 사도 이후 지금까지의 기독교는 피의 제단을 연결시켜 나온 것입니다. 피를 뿌려서 출발했기 때문에, 피를 뿌려서 거둬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사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운명을 이어받아야 할 최후의 민족은 피를 흘려야만 비로소 국가적인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은 일본의 압정하에서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습니까? 그렇게 피를 흘려야 되는 것입니다. 피뿌림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에 피뿌림으로 국가를 거둬야 합니다. 이것이 다른 민족을 통해서 미리 이루어졌는데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이 뜻을 받들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제 2차적으로 더 큰 원수를 만나 난데없이 피를 흘린 것이 바로 6·25동란입니다. 6·25동란이 끝났다고 해서 나라의 통일을 가져온 것도 아니고 평화의 국권이 이루어진 것도 아닙니다. 국가는 양단되고 오늘날 신앙자가 걸어가야 할 길은 더욱 피폐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새로운 이스라엘 교권을 중심삼아 가지고 새로운 제단을 묶고, 흩어진 총체를 모아 새로운 건국이념을 들고 나라를 향하여 나서야 할 무리가 통일의 무리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통일교회를 지도하는 선생님의 걸음도 지금까지 하늘의 뜻을 따라 나오던 선조들의 걸음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눈물로 출발했기 때문에 그 나라를 찾아 하나님 앞에 봉헌할 때까지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갈 수 없는 길이 복귀의 길인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선생님을 사모하고 선생님을 따라온 것은 좋지만 선생님의 눈물어린 내적인 생활을 모르면 안 됩니다. 선생님이 역사적으로 어떤 투쟁을 해 나왔는지를 여러분은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선생님 앞에는 개인적인 십자가가 가로놓여 있고, 가정적인 십자가가 가로놓여 있고, 자녀적인 십자가가 가로놓여 있고, 교회적인 십자가도 가로놓여 있고, 국가적인 십자가도 가로놓여 있습니다. 선생님은 나라가 없는 사람이요, 교회가 없는 사람이요, 가정이 없는 사람입니다. 또한 아내가 있으되 아내가 없는 사람과 같고 아들이 있으되 아들이 없는 사람과 같은 외로운 입장에서 싸워나온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그렇습니다. 아들이 없는 하나님이 되어 있고, 아내가 없는 하나님이 되어 있고, 종족이 없는 하나님이 되어 있고, 나라가 없는 하나님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 뜻을 이어받을 수 있는 아들도 없고, 아내도 없고, 가정도 없으며, 종족도 없고, 민족도 없고, 국가도 없는 것입니다. 고독단신으로 고독한 자리에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고독한 것과 마찬가지로 선생님도 고독한 자리에 서서 아들 아닌 아들을 아들로 삼아야 되고, 아내가 될 수 없는 사람을 아내로 삼아야 되고, 종족이 될 수 없는 무리를 종족으로 삼아야 되고, 교회가 될 수 없는 것을 교회로 만들어야 되고, 나라를 이룰 수 없는 무리를 묶어 나라를 만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출발하였으니 역설적인 길을 걸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고 기쁠 수 있는 길을 두고 서글픈 길을 걸어 탕감노정의 대가를 치르면서 민족을 대하고 교회를 대할 수 있는 터전까지 닦아 온 것입니다. 그렇게 거친 수난길을 여러분은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산 것은 모두 이 시대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전부가 이 시대와는 역설적인 생활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생활을 해 나온 것은 앞으로 천년 만년 남아질 수 있는 전통을 남기기 위해서입니다. 이 전통 위에 서게 될때 미래의 역사도 수습될 수 있고, 이 전통을 기원으로 할 때 미래의 역사도 완성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전통적 기원을 올바로 세워 놓지 않고는 역사를 두고 수난길을 거쳐온 하나님의 뜻이 성사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지금까지 이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도상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행복만을 꿈꾸고, 혹은 편안을 꿈꾸고, 혹은 자기 가정을 중심삼고 염려하는 입장에 서 가지고는 이 길을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못 간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오늘날 이 시대를 위해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 시대로부터 핍박받고 모욕당하고 이 시대와 상충하고 상극점에 부딪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부딪치되 죽어서는 안 됩니다. 죽을래야 죽을 수 없는 것입니다. 죽더라도 부딪치는 것을 부숴 없애 버리고 죽어야 할 운명인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국가의 한계점까지 죽지 않고 넘을 것이냐 하는 것을 밤이나 낮이나 생각해야 됩니다. 밤이 오면 무서움을 느끼듯 그것을 생각해야 되고 낮이 되면 싸움터에서 질까봐 염려하는 마음으로 그것을 생각하고 다짐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생활을 하며 한치의 앞길을 개척하기 위해 후퇴가 있을 수 없는 길을 가려 나가야 하는 것이 복귀의 길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 통일교회는 소수의 무리를 거느리고 나왔습니다. 1960년대의 식구 수와 오늘의 식구 수를 비교해 보면 지금이 더 적습니다. 이 수를 가지고 가중되고 전진되는 무대가 입체적으로 넓어지는 터전을 보충시키고 메워 나가기 위해서는 개인적인 희생 가지고는 안 되기 때문에 가정을 희생시킬 수밖에 없는 운명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을 내세워서 죽음길로 보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민족이 망하기 전에 여러분을 먼저 망하게 만들기 위해 동원한 것입니다. 가정들이 망하기 전에 여러분을 먼저 망하게 만들기 위해서 동원한 것입니다. 국가가 망하기 전에 여러분을 먼저 망하게 하기 위한 싸움이 벌어져야 됩니다. 그러한 싸움이 벌어지거든 마지막 싸움의 때가 된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통일교회 안에서도 말이 나고, 기성교회에서도 통일교회 때문에 무슨 말이 나고, 나라에서도 통일교회 때문에 말이 나고, 이 아시아에서도 통일교회 때문에 말이 나고, 세계 정상의 위정자들 사이에서도 통일교회 때문에 말이 나는 때가 되면 세계는 너와 나와의 한판 싸움만 남았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때가 마지막 때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알겠습니까?
세계의 마지막 때가 점점 우리의 눈앞에 다가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고 그야말로 허리띠를 바싹 졸라매야 됩니다. 내 비록 50이 넘었지만 30 장년기에 뜻을 품고 이 민족과 세계 앞에 호령하던 신념을 어떻게 가질 것이냐 하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이상의 기백과 그 이상의 신념을 가지고 원수의 진지를 향하여 나가는 데 있어서 총사령관으로서 서슴지 않고 단안을 내려 호령해야 할 때가 목전에 다가왔다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세계적인 정세를 바라보게 될 때, 오늘 우리의 뜻이 여기까지 온 것은 우리들이 잘 싸워서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배후에서 하나님이 수고하고 수많은 선조들이 세상과 반대되는 부정적인 생활을 해 나왔기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조들이 역사적 전통을 세우기 위해 발을 구르며 십자가의 고난길을 극복하고 우리의 길을 개척해 주고 지상의 터전을 보호하기 위해 얼마나 수고하였던가 하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선조들 앞에 빚진 자가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들의 빛을 가려 주고 그들의 빛을 져 주어야 할 통일신도들이니 아브라함 앞에 부끄러운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겠고, 노아 앞에 부끄러운 사람이 되어서도 안 되겠고, 모세 앞에 부끄러운 사람이 되어서도 안 되겠고, 예수 앞에 부끄러운 사람이 되어서도 안되겠습니다. 그들이 우리를 보고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도록 되어야만 역사를 바로잡을 수 있고, 비로소 이 땅에서 소망의 천국문을 개문할 수 있는 선봉장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분명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모든 놀음을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이 세상이 사탄권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탄권내에 보조를 맞추지 않고 운명길을 가려 가야 하는 것이 복귀의 길인 연고로, 하나님은 이를 악물고 죽음을 각오하고 희생을 치르면서 나오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늘의 길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내가 그 길에 보탬은 못 될망정, 그 길을 가로막거나 그 길에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죽더라도 그렇게는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제부터 우리가 해야 할 사명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치마를 두른 여자의 몸이요, 연약한 아낙네의 몸이지만 치마를 두른 일개 연약한 여자의 몸만은 아닙니다. 세기적인 사명을 띠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망하게 하느냐, 흥하게 하느냐 하는 갈림길에서 죽더라도 하나님을 흥하게 하는 길을 가려 놓아야 할 사명을 짊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한 남편의 사랑하는 아내요, 자녀들의 어머니라는 것입니다. 아내가 잘못하게 되면 그 남편도 걸리는 것이요, 어머니가 걸리면 그 자녀도 걸리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천추의 한을 풀고 가지는 못할망정 남편에게 이 한을 넘겨 줄소냐? 자식에게 이 한을 넘겨 줄소냐? 남편의 한과 자식의 한을 벗겨 주어야 할 것이 타락의 동기의 인연을 갖고 있는, 복귀의 천국을 바라보는, 가정을 가진 해와들의 중차대한 사명인 것을 여러분들은 분명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이 눈이 그리워하는 것을 보며 사는 것이 아니라, 이 눈이 싫어하는 것을 보며 살아야 합니다. 또 이 손이 좋아하는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싫어하는 것을 해야 합니다. 극에서 극을 탐구하면서 그것을 밟고 넘어간 후에야 비로소 소망의 한날이 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알고 내적으로 다짐하면서 극복의 일로를 거쳐가야 하는 것이 여러분의 3년노정인 것을 부디 명심하고, 망해 가는 이 현세에 있어서 하나의 새로운 전통을 남기는 가보들이 되어 주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그런 사상을 가지고 그렇게 움직여야 대한민국이 위기일발의 입장에 서게 될 때, '여성들이여! 동원하자'고 할 수 있는 선동자들이 될 수 있는 것이요, 그들을 모집할 수 있는 모집요원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망해 가는 국가 앞에 여자들이 단결하여 총을 들고 나서 가지고 국경선을 수비하는 입장에 서게 될 때, 남자들을 자극시키고, 저 이북까지 통일의 기운을 몰고 갈 수 있는 동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엄청난 사명이 여러분들이 살고 있고, 여러분이 싸우는 터전 위에서 뒤넘이친다는 것을 항상 생각해야 합니다. 내일 강자로 살기 위해서 오늘 약자의 모습으로 산다고, 오늘은 슬픈 모습이로되 내일은 영광의 모습을 갖기 위해서 이렇게 산다고 다짐하는 생활을 하면 여러분은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살고 간 후에는 못살았다는 레테르가 붙는 것이 아니라 잘살았다는 레테르가 붙어 영광과 찬양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결과를 거두느냐 하는 것은 이제부터 움직여야 할 3년 기간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통일가의 주부들은 잘살았다, 통일가의 남편들은 잘살았다, 통일가의 아들딸들은 잘살았다, 통일가에서 축복받은 온 세계의 통일 족속들은 잘 살았다는 명분을 세우지 않고는 민족복귀를 성사시키기 어렵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합니다.
이런 엄숙한 사명이 여러분의 두 어깨에 지워진 것을 알게 될 때, 비록 배가 고프더라도 비틀걸음을 걸을 수는 없다, 억울한 가슴을 붙안고 돌아서게 될 때, 보통사람 같으면 저주하겠지만 나는 그럴 수 없다고 해야 됩니다. 남다른 길을 가야 되겠기 때문에 복을 빌어 줘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도 죽음길에서 원수들에게 복을 빌어 주었습니다. 예수는 자기가 십자가를 지고 죽어 가는 데 있어서, 최후의 그 순간까지 하나님께서 구레네 사람 시몬을 협조자로 세워 준 것을 볼 때, 사지에까지도 동역자를 세워 준 하나님이 얼마나 마음 졸이며 자기의 뒤를 따라다니셨는가를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알았기 때문에 예수는 죽으면서도 황공한 마음으로 죽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희생하면서도 부끄러운 마음을 느끼면서 희생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역사시대의 그 누구보다도 비참하게 산 사람이로되 누구보다도 멋지게 산 여성의 전통적 기반을 닦아 온 인류 앞에, 혹은 국가 앞에 길이 빛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기를 바라시고 여러분에게 명령하신 것이요, 여러분을 축복해준 이 스승도 이러한 원칙에 입각하여, 여러분을 이 민족 앞에 세우지 않으면 이 민족의 미래에 비운이 찾아올 것을 염려하여 여러분을 동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것을 깊이 명심하고 금후의 갈 길을 가고, 새로운 자세와 결의를 가지고 선조들이 남긴 전통을 고이 이어받아야 되겠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역사상의 선조들을 대신한 대표자요, 세계를 수습할 수 있는 하나의 구세주와 같은 입장에서 미래의 환난을 전부다 무너뜨려서 최고의 행복의 터전과 천국의 기틀을 마련하고, 하늘에 무한한 영광된 터전을 생전에 만들어 놓고 죽겠다고 하며 한의 고빗길도 감사하며 가야 됩니다. 그렇게 되면 반드시 이 시대의 십자가는 끝이 날 것입니다.
끝장이 나는 것은 세계의 끝이 아닙니다. 대한민국입니다, 대한민국! 대한민국이 우리를 반대하지 않고 환영할 수 있는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3·8선 이북이 우리와 대등한 입장에서 우리와 터놓고 이야기하게 될 때 우리가 우위에 서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들보다 우세한 입장에서 그들을 먹여 살리고 사랑으로 품어 가지고 녹여내지 않으면 안 될 길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생각할 때, 우리들은 이북 원수들을 사랑할 수 있는 훈련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오늘날 우리 국민들로부터 받는 수난을 훈련으로 삼아야 됩니다. 미래의 제 2의 싸움터에서 승리의 결과를 얻도록 발돋움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하나의 훈련으로 여길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보다 더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우리는 간단히 실행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나간다 할진대 여러분은 어떤 길을 가도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 지방에 있는 지구장이나 지역장을 믿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선생님과 일치되기만 하면 얼마든지 지역장이나 지구장을 대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무슨 말인지? 「예」 그렇기 때문에, 지구장이나 지역장 회의 때 여러분들을 지역장이나 지구장의 조직 밑에 넣어야 된다고들 하지만 원칙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선생님이 안 된다고 명령했습니다.
여러분을 그들보다 더 높은 곳에 세워 놓은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그들로부터 도움을 받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수고하는 여러분의 얼굴을 바라보고 감동을 받아 거무스레한 남자의 얼굴을 해 가지고 여러분의 무릎 앞에 엎드려 통곡하며 사죄할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그런 감동의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들에게 배우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가르쳐야 되는 것입니다.
정성을 들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 스승의 도리를 따라가는 데, 하늘가정의 전통을 존중하는 데 있어서 어느누구보다 새로운 전통을 세워 나가야 하는 것이 오늘날 통일가를 대표한 여러분들의 사명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러한 사명을 다하면 통일교회는 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또, 망할 운세권으로 들어가는 가정들도 여러분으로 말미암아 재봉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중차대한 사명이 여러분에게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시대와 더불어 사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선각자로 사는 것이요, 미래의 공고한 기반을 닦기 위해 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1971년의 표어가 통일기반 확보인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통일기반 확보는 여기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선조들이 남긴 전통을 이어받는 데서부터 역사는 발전되었고, 그 사상을 근간으로 후계자들이 발전해 나온 것입니다. 그러면 통일기반 확보를 누가 해야 되느냐? 선생님과 여자들이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알겠습니까? 「예」
하늘이 추모하는 자리에서 죽음의 길을 가고, 하늘이 기억하는 자리에서 쓰러져야지, 하늘의 원망을 받는 자리에 서면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이 3년 기간에 못 살았다고 할 수 있는 길을 찾아가지 말고, 잘살았다고 할 수 있는 길을 찾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울음) 여기서 잘산다는 것은 외적인 여건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 부정하는 자리, 세상이 못산다는 자리입니다. 그 자리를 운명으로 알고 거기에서 잘살기 위한 전통을 세워서 미래에 남길 공고한 터전을 닦아야 할 것이 여러분의 사명인 것입니다.
이런 것을 알고 천의에 의한, 한 번밖에 없는, 역사과정에서 전무후무한 이 기간에 여성들의 권위를 다시 찾을 수 있는 최후의 때를 사수함으로써 전통적 권위를 세워야 합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책임입니다. 그러니 부디 이번 기간을 통하여 열심히 연마하기 바랍니다. '내가 졸소냐. 한마디라도 놓칠소냐' 하며 안팎으로 무장해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이 삼천리 반도를 여러분의 치마폭으로 휘어 싸 놓고 하나님 앞에 속죄의 제사장의 아내가 되어 가지고…. 제사장이 죽으면 내가 제사장의 사명까지 대신하겠다는 입장에 서서 아녀자지만 제사장의 책임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만 되면 여러분이 가고 난 뒤에도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틀림없어요. 이것은 하나님과 더불어 선생님이 여러분에게 약속합니다.
이러한 결의 밑에서 최후의 싸움터를 지키고, 최후의 개척자로서의 사명을 다하고, 천의에 의한 탕감노정을 가는 데 있어서 슬픔을 극복하여 하나님 앞에 기쁨의 결과를 돌려 드리고 이 민족 앞에 소망적인 산 실적을 남겨 놓고 가겠다고 해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결의를 하고 소기의 사명을 감당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버님! 여기 통일가가 남아 있나이다. 엘리야가 아버지 앞에 '나만 남았나이다'라고 외로운 자리에서 호소하게 될 때 아버지께서는 바알에게 굴복하지 않은 7천여 무리가 있다고 말씀하셨던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오늘 여기에 모여 있는 당신의 딸들은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과 하나되어야 하겠습니다. 그 누가 반대를 하더라도 하나되어야 되겠습니다. 그 누가 가로막더라도 하나되어야 되겠습니다. 죽음이 가로놓이더라도 죽어서 피로라도 호소할 수 있는 몸이 되겠다고 결의하는 이 시간이오니, 아버지, 받아 주시옵소서.
이번 기간을 통하여 이들 앞에 하늘의 전통을 고이 심어 줘야 되겠사오니, 이들로 하여금 하늘의 전통과 더불어 고이 살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선조들이 이어 남겨 준 이 전통을 붙안고 의의 있게 사는 당신의 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부탁드리옵니다.
이들의 생애에 부끄러움이 없게 하여 주시옵고, 과거와 현재의 전통이 생활 가운데 길이 길이 남게 하여 주시옵기를 재삼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의 성호 받들어서 아뢰었사옵니다. 아멘.
아버님, 당신의 긍휼과 자비와 사랑이 일상 저희들과 같이하여 주신 것을 감사드리옵니다.
이제 이날로부터 이 한 달을 거룩한 한 달로서 아버님께 바쳐 드릴 수 있게 하여 주시옵고, 만물이 소생하는 이 오월에 저희 심령도 만물과 같이 소생할 수 있고 번성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산에 피는 꽃과 벌나비를 보고,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들을 적마다, 한때는 가고 한때는 찾아온다는 것을 저희들이 새롭게 느끼게 되옵니다.
이러한 것을 느끼게 될 때, 신앙생활을 하는 데 일상적이었던 저희들의 옛 때를 흘려 보내고 새로운 때를 맞이하면서 옛 때에 남아진 영양소를 중심삼고 새로운 때에 활기찬 모습으로 뻗어 나가야 할 것이 저의 신앙자들이 취해야 할 태도요, 생활인 것을 잘 알고 있사옵니다.
이 아침, 아버지의 슬하에 부복하였사오니, 저희 마음이 몽땅 아버지께 흡수되도록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의 성상을 그리워하고, 당신의 심정에 잠기기를 간절히 원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한 마음이 하늘과 더불어 인연되고, 그 인연된 마음이 내 자신을 일깨우고, 그 일깨워진 내 자체는 참다운 자리에서 아버지를 부르고, 참다운 아버지를 부르는 자리에서 아버지의 기쁨의 대상이 되어서, 아버지께서 무한한 축복을 베풀어 주시기에 아깝지 않은 거룩한 아들딸의 모습이 되어야 되겠사옵나이다.
저희들은 항상 세속적인 습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요, 언제나 개인의 생활 환경과 전통 가운데에서 허덕이는 처참한 모습이요, 저희의 신세는 고아와 같은 신세인 것을 당신은 잘 알고 계시오니, 당신께서 사랑의 아버지가 되시고 사랑의 어머니가 되시어서 저희의 주위와 환경의 모든 고독함을 제거시키고, 마음이 메마르고 몸이 궁핍한 것을 풍요하게 하시어서, 저희들이 당신이 소망하시는 천국으로 행보를 갖추어 버젓이 나설 수 있게 축복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많은 날들을 지내면서 저희들을 사랑하신 아버지의 은사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리옵니다. 당신의 거룩하신 성상 앞에 저희 일신을 완전히 굴복시키시어, 저희들이 당신으로 말미암아 태어난 존재요, 당신에게 바쳐진 존재임을 알게 하시옵고, '나'를 중심한 일념을 제거하고 당신으로 말미암은 자체를 세워 아버지 앞에 산제물로서 바쳐 드리겠다고 스스로 다짐하고 맹세하는 모습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몽땅 아버지의 것으로 취하시어서 아버지의 것으로 남아지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아침 남한 각지에 널려 있는 당신의 자녀들, 이곳을 향하여 마음을 모아 머리를 조아리고 하늘을 향하여 생명의 인연을 갈구하는 그들 위에 무한하신 사랑과 은사로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또 세계 각국에 널려 있는 당신의 자녀들도 이 한국 땅을 바라보며 소망의 한날, 상봉의 한날을 그리워하며 아버지 앞에 축수를 드리고 있사오니 그들 위에도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도의 길을 따라 나오면서 섭리의 노정이라며 개척자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 모진 수난의 길을 극복해 나오는 종교인들을, 아버지, 긍휼히 보시옵소서. 한 시대에 한 나라와 한 민족의 일원이라는 긍지를 가지고 당신의 영광의 존전에서 찬양하고 감사하여 사랑받을 수 있는 무리로 동참할 수 있는 특권을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고요히 고요히 저희들을 부르시옵소서. 내 세포와 내 피살이 아버지로 말미암아 동하고, 아버지로 말미암아 정하고, 아버지로 말미암아 끌리어 아버지께 경배드릴 수 있는 이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악한 사탄의 요인을 저희들이 완전히 제거시켜 버리고, 아버지하고만 화합할 수 있는 개체의 요인으로서 당신이 기뻐할 수 있는 본성의 자세를 지녀 가지고 진정한 의미에서 아버지 앞에 참되이 경배드리는 이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옵길 재삼 간절히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의 성호받들어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말할 나위도 없고, 믿음이 없는 사람도 은혜를 입게 되면 그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은혜 중에서 가장 큰 은혜는 무엇이냐 하면 그것은 내 생명을 구해 준 은혜일 것입니다. 다음으로 큰 은혜가 있다면 자신이 소원하는 모든 것을 이루어 주는 은혜라고 할 것입니다. 여기에서 큰 은혜가 있다면 그것은 사랑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생명을 구해 주고 자기가 생명 가운데 영원히 남아질 수 있는 사랑을 구해 주는 분이 있다면 그분이야말로 은인 중의 은인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은혜를 받는 데 있어서 평범한 자리에서 은혜를 받는 것과 기뻐하는 자리에서 은혜를 받는 것과 수고하는 자리에서 은혜를 받는 것이 다를 것입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자리에서 은혜를 받았다면, 기뻐하는 그 자리가 나를 중심삼고 기뻐하는 자리가 되느냐, 아니면 나라를 중심삼고 기뻐하는 자리가 되느냐, 아니면 세계를 중심삼고 기뻐하는 자리가 되느냐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생각할 때, 자기가 처해 있는 자리가 크면 클수록 받아지는 은혜는 자기 것만 되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도 그 영향이 미쳐진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다시 말하자면, 자기를 중심삼고 기뻐하는 것은 자기가 동기가 됨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겠지만, 국가를 중심삼고 기뻐하게 된 자리는 자기가 동기가 됨으로 말미암아 된 자리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세계를 중심삼고 기뻐할 수 있는 자리도 자기가 동기가 됨으로 말미암아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큰 의미의 은혜라 함은 내가 동기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나라가 동기가 되며, 세계가 동기가 되고, 역사가 동기가 되고, 이 시대가 동기가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큰 은혜는 짧은 기간내에 올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한 생애는 기껏해야 백년 미만의 짧은 기간입니다. 이 짧은 기간을 살아가는 동안에 우리가 나라를 위하고 세계를 위해서 충성을 다하고 정성을 다해 수고한다 하더라도 과연 그 수고를 통해 나라가 기꺼이 받을 수 있는 은혜를 가져올 수 있겠느냐? 또, 나 자신이 세계를 위하여 충성과 희생과 수고를 했을 때 그것으로 말미암아 세계가 기뻐할 수 있는 은사를 가져올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 내가 동기가 되어서는 그런 은사가 올 수 없는 것입니다. 나라가 기뻐할 수 있는 은사의 날과 때, 세계가 기뻐할 수 있는 은사의 날과 때, 그 때라는 것은 나를 넘어 수천 수만 년 전의 선조들이 남긴 역사적 전통을 통해서 은혜의 터전이 상속되어 내려오는 것을 여러분은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민족을 중심삼고 볼 때 그 민족 가운데 그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고, 또 그 민족을 대표하는 선한 애국자가 얼마나 많았느냐에 비례하여 그 민족이 받을 수 있는 은사의 권이 빨리 올 것이요, 그 민족이 받을 수 있는 은사의 기간이 더욱 길어질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한 입장에 선 애국자들이 얼마나 많이 있었느냐 하는 것과 얼마나 어려운 역사시대를 거쳐왔느냐 하는 문제에 따라 그 민족이 오랜 기간 은혜의 자리나 어떠한 민족 앞에 특출한 은사의 자리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세계가 은혜의 자리에서 즐길 수 있고 감사할 수 있는 자리에 서려면 세계를 위해 정성을 들인 사람이 많아야 합니다. 세계를 위해 정성을 들이는 것은 애국이 아니라, 성인의 반열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많아야 이 세계가 그러한 은혜권내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들이 수고한 그 공의 터전이 두드러지게 될 때 비로소 세계적인 은사의 시대가 올 것입니다. 이걸 두고 볼 때, 세계적인 은사는 맨 마지막에 온다는 것은 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세계적인 은사는 어떠한 사람들을 통하여서 찾아질 것이냐? 그리고 그 역사적 인연은 어떻게 연결되어 가지고 오늘날 우리와 우리 후대 앞에 연결되어 갈 것이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이것은 어떤 특정한 개인보다도 하늘을 따라 가지고, 천운을 따라 가지고, 천명에 의해 가지고, 크나큰 뜻을 품고 세계를 살릴 수 있는 길이라면 서슴지 않고 자기의 일생을 수포로 돌리는 한이 있더라도 희생의 길을 감수하며 갈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때, 그 사람을 통하여 연결되어 나갈 것입니다. 그런 역사적인 터전이 없어 가지고는 세계를 살릴 수 없으며 세계가 기뻐할 수 있는 은사의 자리까지 나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이 세계적인 은사는 어떠한 애국사상을 가진 사람들로부터 인계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위해서 생명을 바치고 세계를 위하여 산 성인들의 사상을 통해서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연결하는 데 있어서 열 사람이면 열 사람이 한꺼번에 일리(-理)를 제시해 가지고 은사를 소개해 주는 것이 아니라 그 열 사람을 대표한 어느 특정한 성인 한 사람을 대표로 세워 가지고 세계적인 은사를 인간세계에 연결시켜 주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오늘 끝날이 되어오는 이 시대에 수많은 종교들은 재림사상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모든 종교들이 재림사상을 주장하는 것을 볼 때, 새로운 세계적인 은사시대는 반드시 종교의 이념을 통해 가지고 새로운 세계애를 실천할 수 있는 대표적인 사명자로 인하여 온다는 것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특별히 기독교를 중심삼고 볼 때에, 기독교는 만우주의 주요, 만민의 어버이요, 만민의 구세주의 사명을 가진 한 분이 비로소 이 땅 위에 오심으로 말미암아 세계적인 은사시대의 문이 열린다는 것을 암암리에 교시해 주고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개개인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게 될 때, 어떠한 사람들은 현재의 입장에서 복을 받고 행복스럽게 살는지 모르지만 그런 개인들의 행복이라는 것은 짧은 기간에 누리는 행복일 것입니다. 주기로 말하면 짧은 주기일 것입니다. 그런 주기를 갖추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국가의 은사권은 그 기준의 몇백 배 몇천 배가 될 것입니다. 또, 세계의 은사권은 그것의 몇만 배 몇억 배가 될 것입니다. 이런 것을 전통적으로 이어받아 일치시킬 수 있는 사람이 있어 가지고 이것을 연결시켜야만 그런 은사의 시대가 올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해 볼 때, 성인들의 가르침을 받아 그 도리를 자기의 생명을 바쳐 가지고 이끌어 나와 역사적 전통의 기원을 남기는 터전 위에서만이 세계적 은사권을 옮겨 놓을 수 있으며, 이것이 끝날까지 이어질 것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이 세계에 개인적으로만 복을 받고 살려는 사람이 많을지 모르지만 과연 그들이 세계의 은사권에 영향을 미칠 수 있겠느냐? 자기 개인이 동기가 되고 자기 선조로 말미암아 동기가 된 것은 세계의 은사권과는 하등의 관계를 맺을 수 없는 것입니다.
어느때 수고를 해 가지고 은혜를 받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할 때, 그것이 자기 씨족을 중심삼은 것이라고 한다면 그런 터전으로 국가를 중심한 은사권을 이어받을 수 있겠느냐? 그것을 이어받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것이 어렵다면 세계적 은사권을 이어받기란 더더욱 어려운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적 은사권이라는 것은 종교의 이념이 뒷받침되어야 됩니다. 인륜이 아니라 천륜을 따라야 하는 것이요, 인정이 아니라 천정을 따라야 합니다. 거기에서 비로소 세계의 은사권은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천륜을 따라가는 길은 인간 위주하고 지상에 어떠한 사람을 중심삼은 것이 아닙니다. 유일무이하신 절대자 하나님을 중심삼고 그분과 더불어 보조를 맞추고 그분과 더불어 심신행보를 맞추는 노정에서만이 세계적인 은사의 터전이 남아진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아셨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말씀하시기를 누구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누구보다 더 사랑하라는 말이 무엇이냐 하면 생명을 바쳐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생명을 남겨 놓고 사랑하라는 것이 아니라 생명까지 바쳐 가며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생명을 바치는 데는 몸과 마음이 다 없어지는 것입니다. 정성이 극에 달하는 자리에서 생명을 다 바쳐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리에 서야 비로소 천륜 앞에 인륜이 인연맺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야 지구성에 세계적인 은사의 때가 올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예측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은혜는 그냥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개개인이 오고 가는 길에서 옷깃을 스치며 지나가는 사람들과도 인연이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나와 원수가 될는지도 모르고 나에게 복을 갖다 줄는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 사람과 내가 그렇게 만났다는 사실은 우연한 일이 아닌 것입니다. 더우기 나를 중심삼고 인연지어 만날 수 있게 되기까지에는 그 배후에 역사적인 수고가 깃들어 있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면 김씨와 박씨 두 사람이 있었는데, 박씨가 어느때에 김씨에게 은혜를 입고 그 은혜를 갚으려고 하다가 갚지 못하고 죽었다고 합시다. 이럴 때는 어떻게 은혜를 갚아야 되겠습니까? 박씨의 후손은 김씨의 후손에게 자기 선조가 하지 못한 것을 갚아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박씨의 후손인 자신은 모르지만 영계에 가 있는 선한 선조가 후손의 마음을 움직여 가지고 그 김씨의 직계 후손과 만날 수 있는 인연을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만나게 되면 박씨의 후손은 과거에 선조가 입었던 은혜를 갚아 주어야 됩니다.
은혜를 갚아 주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여기에서 김씨가 선하고 은혜를 갚은 박씨가 선하더라도 선의 기준이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어떤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김씨가 백만큼 선한 입장에 섰고 박씨가 오십만큼의 선한 입장에 섰다면, 김씨의 은혜를 입은 박씨가 자기의 후손을 통해 김씨나 그의 후손에게 그 은혜를 갚게 될 때, 그 김씨는 은혜를 갚아주는 것을 응당한 대가로 받는 것이 아니라, 고맙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게 된다면 여기에서 두 사람의 선의 기준은 서로 상대적 관계가 맺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에 50의 기준이 100의 기준과 상대적 위치를 취하며 나타나기 때문에 거기에서 하나되어 가지고 맹세한다면 같은 자리에 서게 됩니다. 즉, 동등한 자리로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르기를 맹세하는 것을 경계하라는 이유는 무엇이냐? 맹세하는 사람들은 전부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맹세하지 말라'는 말은 하나님은 높으신 분이니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맹세하지 말라는 겁니다. 또, '교회에 대해서도 함부로 맹세하지 말 것이며, 교회 제단을 두고도 함부로 맹세하지 말 것이며, 교회의 제물 갖고도 맹세하지 말라'고 한 것은 우리 인간의 기준보다 절대적으로 높은 자리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높은 기준에 있는 그 앞에서 함부로 맹세했다가 그 기준과 보조를 못 맞추어 하나되지 못하고 떨어지는 날에는 그 높은 기준의 몇 배, 몇십 배, 몇백 배, 또는 몇천 배로 타락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맹세한다는 것은 아무 권위가 없는 것 같지만 주체의 권위를 가지고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통일교회 교인들은 '나는 통일교인이다' 라고 하는데 통일교회가 나올 때까지의 역사를 보면 수난의 과정을 거쳐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류의 시조가 출발하는 그날부터 지금까지의 역사적 인연을 통합해 가지고 나온 것입니다. 통합하는 데는 나쁜 인연을 통합한 것이 아니라, 선한 사람들의 역사적 인연을 통합해서 그 인연을 직계적으로 계승해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복귀섭리역사를 해오신 뜻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길을 가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이 길을 가면 오시는 주님을 만나는 것이요, 이 길을 가면 오시는 주님과 더불어 천성에 가는 것이요, 이 길을 가면 주님과 더불어 천국의 왕궁에 가는 것이요, 이 길을 가면 하늘나라의 아들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길이 나오기까지 하늘은 그 배후에서 역사적인 수난과 선의 대가를 얼마나 많이 치렀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심는 데에 비례해서 그 결실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수난길을 거쳐오면서, 더우기나 탕감복귀의 역사노정을 거쳐 오면서 얼마나 많은 대가를 치렀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우리들은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여기에는 개인이 동원되어 있고, 가정이 동원되어 있고, 종족이 동원되어 있고, 민족이 동원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나라가 흥하느냐 망하느냐 하는 문제가 개재되어 있고, 더 나아가서는 세계가 흥하느냐 망하느냐 하는 문제가 개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통일교회가 지닐 수 있는 은사는 역사적인 은사요, 수많은 국가의 국가권을 넘어선 자리의 은사인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바라시는 최후의 은사인 것입니다. 이 은사는 종족, 민족, 국가를 넘는 은사의 터전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은사와 하나되기 위해서는 세계적인 공의의 터전을 통하여서 그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이며, 그 치러진 기준을 거두어 들이기 위해서는 세계적인 은사를 받을 수 있는 터전의 자리에 서지 않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 교리에는 지금까지 왔다 간 수많은 성현들의 심정과 인격이 있어야 되고 성현들이 흠모하던 천륜이 들어 있어야 되고, 천륜 가운데 제일 중심이 되어야 할 천정이 들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중심은 무엇이냐? 하나님의 인격을 중심삼은 생명, 인격을 중심삼은 생명과 그 생명을 중심삼은 정(情), 즉 사랑이기 때문에 이것을 중심삼고 통일교회에서는 심정을 논위(論謂)하는 것입니다.
그 심정의 은혜라는 것이 얼마나 크고 위대한 것이냐? 이것은 여러분 일대에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일대에 모두 소모되어서 끝낼 은혜가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손만대에까지 남겨 줄 은혜이기 때문에 종적으로 내려진 이 은혜의 기반을 횡적으로 닦아야 하는 것입니다. 기반을 닦는 데 있어서는 개인적인 수난길과 개인적인 수고의 길만을 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수고하되 나라와 더불어 수고하고, 세계와 더불어 수고하고, 역사와 더불어 수고한다는 입장에 서야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찾아온 은사는 개인을 중심삼은 은사가 아니요, 특정한 어느 국가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세계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계적이라고 해서 지금 현재의 문명을 중심삼는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선을 위주해서 세계 국가라는 한때를 바라 나오던 선한 사람들의 공적의 터전으로 말미암은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선한 사람들이 수고한 대가로 말미암아 찾아진 은사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그 큰 은사를 여러분이 어떻게 받아 감당할 것이냐? 여러분은 박씨면 박씨, 김씨면 김씨라는 아무개의 어머니 아버지를 통해서 태어나서 살았다고 하겠지만, 그렇게 사는 것은 몇십 년에 불과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50살이 되었으면 50년 동안 그렇게 살았을 것입니다. 또는 7,80살이 된 노인이라면 7,80년 동안 이 자리에서 그렇게 살아 왔을 것입니다.
효자라면 부모의 뜻을 받들어 그 뜻을 남겨야 됩니다. 부모로부터 상속받는 데는 재산이 있고, 후손이 있습니다. 효자가 되려면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을 팔아먹어서는 안 됩니다. 그건 불효입니다. 부모로부터 상속받은 재산을 팔아먹는 사람이 되면 불효입니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선조가 물려준 유산에 한 줌의 흙이라도 보태야지 그것을 깎아먹고 팔아먹는 후손이 되면 불효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통일교인들은 선조들이 이 뜻을 남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정성을 들였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오늘 원리가 가르쳐 주는 내용이 사실이고 그렇다고 할 수 있기까지는, 그 배후에 수많은 성현들이 정성을 들이고 생명을 희생시켜 가지고 지금까지 이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하나의 종착점을 향하여 역사를 몰아 나오고 시대를 수습하여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리에까지 연결시켜 나와 최종적인 교차점에서 상봉한 것이 바로 여러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기적이 있다면 이 이상의 기적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러한 시대도상에 내가 서다 보니 10년, 20년의 생애노정에서 역사적으로 굽이쳐 오는 크나큰 물결을 최고의 정상에서 맞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이렇게 상속받은 재산을 소모시키는 것도 불효입니다. 은혜를 받았으면 그 은혜의 자리에서 일치화시켜 가야 할 텐데도 불구하고, 받은 그 은혜를 일체화시킨 자리에 서지 못하고 분열된 자리에 서게 된다면 그 은혜의 터전 앞에서 쫓겨날 것입니다.
재산도 그렇지만 인격을 두고 볼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람이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전통적 사상을 이어받아 철두철미한 목적의식과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태풍이 불어오든가 주권이 흔들리고, 혹은 생사가 걸려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문제시하지 않고 뚫고 나갈 수 있는 목적의식에 불타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세계의 복귀를 위해서, 혹은 은사의 나라를 위해서 그 목적의식에 불타는 마음을 중심삼고 나가야 합니다. 어떠한 사람의 말에 움직이거나 어느 환경의 어지러움에 지배를 당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뚫고 나갈 수 있는 불변의 인격관을 지니고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불변의 인격관을 갖고 선조들이 가졌던 그 이상의 자리에 들어서지 않으면 그 누구도 이 은사권을 물려받을 수 없습니다. 그럴 게 아니예요? 갖춘 내용이 너무나 역사적이요, 너무나 엄청난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 일치될 수 있는 인격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 이것을 따르고, 이것을 염려하고 그 주위에서 서성거린다면, 그것은 은혜로서 남아지지 않고, 도리어 그 은혜가 떠나면서 모든 것을 다 가져갈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간단히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은사는 개인으로서 소화시킬 수 있는 은사가 아니라 나라와 세계와 더불어 소화해야 할 엄청난 은사인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내가 이 은사를 얼마나 고맙게 생각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 은사를 대하여 허리를 굽히게 될 때에, 이 은사가 선조들이 백번 천번 허리를 굽혀 노력한 터전 위에 연결된 것이면 나는 천번 만번 허리를 굽혀도 부족하다는 것을 느낄 줄 아는 마음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 뜻을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데 있어서 밤이나 낮이나 시간을 더하기에 노력하고 피땀을 흘리려는 노력이 있어야만 선조들이 우리를 찾아와 그 정성을 모아 받은 은사를 우리에게 맡길 것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은사가 오늘 우리에게 찾아온 은사요, 그런 책임을 진 우리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은사와 책임을 진 우리들이 이렇게 행동해서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찾아온 뜻과 은사를 받지 않고, 하나되지 않고, 그 은사가 요구하는 인격체가 못 되며, 그러한 환경을 이루어 드리는 책임을 못한다 해서 결코 이 은사는 망해 버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옮겨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은사를 받아 감당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그것이 어디로 옮겨졌느냐? 자기의 편 된 어떤 지파에게 옮겨진 것이 아니라 원수에게 옮겨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그 나라를 중심삼고 이 은사가 머물 수 있는 터전을 닦기 위해서 수천년간 수고해 나왔는데도 불구하고 수고해 나온 그 모든 것이 부정되어질 때에는 그 터전은 뒤집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모든 것이 거꾸로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넘어지니까 거꾸로라도 서야 합니다. 그러니 반대 입장에 있는 나라를 찾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복귀섭리입니다.
자기를 사랑하고 따르던 사람을 중심삼고 나오다가 틀어지게 될 때는 반대편에 있는 사람에게 옮겨 가지고 이어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통일교회를 반대하던 기성교회, 기성교회로부터 반대받던 통일교회는 어떻게 되어질 것이냐? 여러분 이런 것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찾아온 이 은사는 통일교회만을 위한 은사가 아닙니다. 또한 통일교회 문선생 한 사람만을 위주로 한 은사도 아닙니다. 이것은 국가와 민족을 넘어 세계로 보내 줘야 할 은사입니다. 세계로 빨리빨리 보내 줘야 할 은사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총력을 감소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이 은사를 나라를 거쳐 세계로 보내 줘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통일교회가 수난길에서 고생하고 수고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은사를 은사다운 자리에 세우기 위함입니다.
그러면 그 은사가 은사다울 수 있는 자리는 어떠한 자리일 것이냐? 그 은사가 은사다운 자리에 서려면 내가 좋아하는 것만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나라가 좋아하고, 나라가 좋아하는 것은 세계가 좋아하고, 세계가 좋아하는 것은 하나님이 좋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신앙생활에서 언제나 이것을 명심해야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은혜를 받았으면 내가 은혜 받았다고 자기를 중심삼고 자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은혜는 어디로 돌려야 할 것이냐? 그 은혜의 동기는 나라도 아니요, 세계도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왔기 때문에 하나님 앞으로 돌려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하라고 했지 세상을 더 사랑하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생각하게 될 때, 수고로이 찾아온 은사의 터전을 여러분이 더럽혀서는 안 되겠습니다.
이 엄청난 은사는 역사적인 은사요, 세계의 수많은 성현들이 정서적 전통을 이어받아 수천, 수만의 역사과정에서 수난과 희생의 고빗길을 거쳐오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피의 대가를 치르며, 역사과정에 말할 수 없는 수난의 역로를 거쳐 나오는 가운데 남아져 내려온 은사입니다. 이 길이 꼬부라졌다 펴졌다 하면서 오늘날 우리 인류 앞에 연결되고 내 생애 앞에 상봉되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인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보게 될 때, 우리는 나라를 잃었던 백성이 나라를 되찾아 기뻐하는 이상으로 기뻐해야 합니다. 또한 나라를 잃었던 어떠한 군왕이 망명객으로 있다가 다시 국왕의 권위를 되찾은 기쁨 이상의 기쁨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세계를 제패하고자 하는 야망을 가진 사람이 세계를 제패한 이상의 기쁨을 느껴야 될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 은사의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이상으로 우리가 기뻐한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 죄 될 것이 있겠는가? 오히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그 이상으로 기뻐하는 무리가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무리를 통하여 은사를 남겨 주고 싶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지금까지 뜻을 대하고 은혜를 대하면서도 그것이 은혜인지, 아닌지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은혜 입었다고 취해서 죽느니 사느니 하면서 맹세하였지만 지나고 보니 그것이 무슨 꿈만 같다는 것입니다.
더운 여름날에는 물 안에 들어가서 아침부터 저녁 때까지 있으면 그것이 자기의 생활과 같이 느껴질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기온의 변화가 없으니까 물 안에 있는 것이나 땅 위에 있는 것이나 똑같다는 것입니다. 습관이 되어서 물에 들어와서 목욕을 한다는 의식이 흐려진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저것 같고 저것도 이것 같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목욕은 목욕이요, 목욕이 끝나면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확실히 달라야 합니다. 이와 같이 신앙자의 생활은 신앙 없는 자의 생활과는 현격히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사람은 하늘의 크나큰 은사를 감지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늘의 은사는 왔다가 절대 그냥 돌아가지 않습니다. 자석과 같아서 어떤 집에 은사가 왔다 가게 되면 거기에서 붙을 수 있는 것을 전부 붙여 가지고 간다는 것입니다. 끝날에는 게으른 자의 은사를 빼앗아 부지런한 자에게 준다고 한 것은 이것을 두고 한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힘을 쓰려고 해도 힘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미 봄날과 같은 시기가 지나갔다는 것입니다. 올라가는 운세가, 뻗어갈 수 있는 봄이 지나갔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여름과 가을을 지나 겨울철이 올 텐데 어떻게 해야 되느냐? 접붙이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그렇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혼자는 늦어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통일교회는 세계적인 사명을 짊어지고 이것을 인류 앞에 넘겨주어야 할 최후의 은사를 이어받아 가는 길에 서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엄청난 은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시점에 있어서 맡은 바 책임을 다하고 환경적으로 닥쳐오는 세계적인 온갖 세파와 수많은 역사과정을 넘고 넘어 오늘날에 상봉했다는 이 놀라운 사실은 여러분이 한 나라를 가진 것보다도, 세계를 점령하여 다스리는 것보다도, 하늘땅을 다 가진 것보다도 더 놀랍고 엄청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것이 상처를 입을까봐 잠을 못 자고, 이것이 어떤 지장을 받을까봐 마음을 졸이며 가야 할 것입니다. 애기를 품은 채 원수의 포위망을 뚫고 나가는 어머니의 입장과 같다는 것입니다. 애기를 품고 도망가는 어머니는 자신이야 피해를 입든 말든 애기를 위해서는 목숨을 내걸고 희생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갑니다. 우리는 이것을 그 애기보다 더 헌신적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청춘남녀가 그 상대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사랑해야 합니다. 왜? 일생을 중심삼고 가져올 수 있는 은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크나큰 은사를 받은 사람을 얼핏 보면 복 대신 고통을 받은 것처럼 보입니다. 중요한 책임을 많이 진 사람은 편안한 것 같지만 절대 편안치 않아요. 지금 선생님을 보라고요. 새벽 네시 10분쯤에 여기 왔는데 여러분에게 말씀하고 있고, 이제 또 수택리로 가야 합니다. 편하지 않다구요. 그러면 이 은혜를 어떻게 지탱해 나가느냐? 이 은혜의 밑받침이 수고로 말미암아 지탱되어 나왔기 때문에 그것을 지탱해 나가는 방법도 이와 같아야 합니다.
은혜가 크면 클수록 거기에 대한 수고의 터전을 어떻게 유지시킬 수 있겠느냐 하는 문제가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 은혜를 받아 가지고 어떻게 더 좋게 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을 어떻게 하여 후손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고 물려주느냐 하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상처를 입혀 가지고 물려주어서는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의 나무에 가지가 나고 잎이 나고, 열매를 맺게 해서 후손들에게 더 가치 있게 남겨 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여기에 반비례적인 수난의 길이 따르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복을 받겠다는 사람들이 편안히 앉아 가지고 복을 받겠다고 하면 도둑놈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복받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있다면 그 녀석은 도둑놈입니다. 복을 받겠다는 사람이 아침 저녁으로 돌아다니면서 날날이 모양으로 나발 불고 다니면 복을 못 받습니다. 자기가 당한 수난길을 가려 가야할 이 큰 몫을 어떻게 지고 갈 것이냐를 생각해야 됩니다. 남모르는 깊은 침묵이 그의 심정에서부터 흐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남모르는 엄격한 법도가 그의 생활 주변을 가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적당히 넘어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생명을 걸고 다짐하는 수고의 결정적인 노정을 통하여서 그 은사는 보다 빛날 수 있는 터전 위에 남아질 것이고, 보다 빛나게 후손 앞에 넘겨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게 될 때는 그 은사가 여러분의 후손을 때려잡고, 여러분의 후손이 가는 길을 막아 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똑똑히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나 내가 통일교회에 안 들어왔다면 모르지만 통일교회 들어왔다가 그냥 나가는 날에는 아들딸들이 못 들어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통일교회 다니다가 나간 사람들이 잘되나 보라구요. 흔들흔들 해 가지고 잘되나 보라는 것입니다. 잘된 사람이 있나 생각해 보세요. 씨알맹이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볼 때 통일교회는 무서운 곳입니다. 일면은 무서운 곳이고 일면은 반대입니다. 반대는 뭐예요? 일면 좋은 곳입니다. 두면이 있습니다. 그러면 무서운 면을 제거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수고해야 됩니다. 이것을 막는 방법은 수고밖에 없습니다.
뜻을 위해 가는 동료가 백 명이 있을 때 1대, 2대, 3대쯤 가다 보면 백 단계가 벌어질 것입니다. 그러면 이 은혜는 어디로 갈 것이냐? 그 백명 가운데 선봉에 서서 정성들이고 수고해 가지고 그 가치를 보다 입체적인 입장에서 이해하고 세워 주려고 하는 무리가 있다면, 은사는 그곳으로 가지 말라고 해도 갈 것입니다. 갈 때는 여러분의 은사를 모두 끌어내어 가지고 갑니다. 선생님이 그런 싸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절대 빚지는 사람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빚을 지면 발전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빚을 지울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빚지기는 쉬워도 빚을 지우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그렇지요? 어렵기 때문에 수고로운 것입니다. 빚을 지우는 것은 수고를 통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어렵고 어렵더라도 이를 악물고 수고를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수고는 나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중심삼고 해야 합니다. 이 은혜는 크면 클수록 좋은 것입니다. 따라서 이 은혜는 민족을 넘고 국가를 넘어 세계로 가야 됩니다. '나를 통해서 빨리빨리 가라' 해야 됩니다. 따라서 내가 얼마만큼 밀어 주고 발전시켜 주었는가에 따라서 자신의 영향력이 전역에 미쳐질 수 있는 것입니다. 수고에 비례하여 좌우될 것이 아니냐 하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이 이 통일교회에 와서 선생님을 만났지만 선생님이 찾아온 걸음과 여러분이 찾아온 걸음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여러분에게 가끔 맹세를 시키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 하면 여러분에게 선생님과 같은 입장에 설 수 있는 특권적인 은사를 부여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선생님과 같이 보조를 맞추어서 세 고개를 따라 넘어가야 합니다. 아리랑 고개는 열두 고개라 하지만 열두 고개는 세 고개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춘하추동을 중심삼고 보면 봄절기는 세 달입니다. 정월고개, 2월고개. 3월고개, 이 세 고개는 넘어야 합니다. 세 고개를 따라 넘어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루, 이틀, 사흘, 3일기간과 같은 것입니다. 모든 것이 그렇듯이 언제나 이 3일 기간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세 고개를 어떻게 넘어갈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개인 고개를 넘어가고, 국가 고개를 넘어가고, 세계 고개를 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선 개인의 고개를 넘어가려면 나의 욕망을 버리고 나를 부정하라는 것입니다. 나를 때려잡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평탄한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국가라는 고개를 넘어가려면 사탄세계의 나라를 부정하라는 것입니다. 부정이 안 되거든 때려잡아서라도 부정시키고 굴복시키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평탄한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세계의 고개를 넘으려면 사탄세계를 부정해야 됩니다. 부정 안 되거든 때려잡아서라도 부정시키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세계가 복귀되는 것입니다. 자, 이게 쉬워요? 밤낮 싸워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전쟁에 나간 사람이 생명의 위협을 받는 것은 물론입니다. 언제 어디서 누가 내 생명을 앗아 갈지 모르는 입장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불안하고, 언제나 초조하고, 언제나 긴박하고, 언제나 선수를 쓰지 않으면 안 될 이러한 생활과정을 거치는 것이 하늘이 찾아 나오는 고귀한 신앙의 자리에 선 사람들의 생활태도가 아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이것이 없어 가지고는 이 은사를 남길 수 없을 것입니다. 선생님은 이런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통일교회의 사람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통일교회는 지금 위대한 은사의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이 은사의 자리를 지탱시키자니 그 위대한 은사에 반비례적으로 닥쳐오는 극한 수난 속으로 때려 몰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이 은사가 민족적 수난의 고개를 평탄하게 넘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의요, 공식입니다.
세상에서 자고 싶으면 자고, 먹고 싶으면 먹고 해 가지고 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어림도 없는 것입니다.
이 은사는 개인의 일생을 통하여서 전해 온 것이 아니라 수천만 대의 선조들의 피와 살을 오려 가면서 순교한 선열들의 핏줄을 따라온 것이요, 어떠한 국가의 애국정신을 지닌 한 개인을 따라온 것이 아니라 성인의 반열에 선 수많은 종교 지도자들이 닦아 나온 모든 사상의 정수를 규합해 가지고 가져다 준 엄청난 것입니다. 이런 은사의 자리에 섰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자기의 아내와 자녀들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라의 흥망을 판가름하는 입장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보세요! 이스라엘 나라가 망하지 않았습니까? 선민이라고 자랑하던 이스라엘 나라가 망해 떨어졌다 이겁니다. 아브라함 가정, 노아 가정 등 수많은 가정들도 나가떨어졌습니다. 이 역사적인 사실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렇게 되지 않으려니 그 이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나던 이상의 심정을 가져야 되고, 자식을 잡아 제사드리려던 그 이상의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또한 노아 가정이 모든 비난과 비소를 받으면서도 하나의 결의를 중심삼고 120년 동안 싸워나온 이상의 심정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호화찬란한 영광의 자리를 일소해 버리고 거지의 탈을 쓰고도 그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인 모세처럼 되라는 것입니다.
현실 환경에 박자 맞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건 전부 공식입니다. 이 길을 가지 않고는 그 은사를 계승할 수 없습니다. 현실과 박자 맞추지 않은 사람들도 전부 다 그 시대의 은사를 잃어버리고 하늘 뜻 앞에 한의 조건을 남겼다는 것을 생각할 때, 이 뜻을 대하는 우리들은 얼마나 정성들이고 얼마나 긴장되고 얼마나 초조한 마음을 가지고 다짐하며 이 길을 가야 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러고 저러고 하는 사람들은 전부 다 악당 중에서도 대악당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남아 있지 못할 것입니다. 통일교회를 반대하고 비판하는 것은 자기의 선한 선조들의 다리를 잘라 버리고, 목을 잘라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재산 밑천 다 팔아먹는 짓이라는 것입니다.
효자는 기쁜 일이 있더라도 부모의 얼굴을 봐 가면서 웃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충신은 군왕의 얼굴을 봐 가면서 웃는 것입니다. 자식은 자신이 기쁘더라도 부모가 슬퍼하게 된다면 그 기쁜 자리에서 슬픔의 자리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효자인 것입니다. 충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천리(天理)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걸 알아야 됩니다.
따라서 귀하고 높으신 은사인 것을 알았을 때는 그 은사를 지탱하기 위해서 그에 대비될 수 있는 몇천 배의 수고를 가해야 되는 것입니다. 수고를 많이 하면 할수록 그것은 망하는 것이 아니라 복받을 수 있는 자리로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수고를 안 하겠다면 망할 가망성이 많지만, 그 은사 앞에 보답하기 위해서 더욱더 많은 수고를 하면서 감사하고 가는 사람은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그 복은 다른 곳에다 옮겨 놓아도 날아온다는 것입니다. 그럴게 아니예요? 그 복은 통일교회와 더불어 남아질 것입니다. 이것을 남기려고 선생님은 통일교회를 책임지고 지도하면 작전해 가는 것입니다. 이 길이야말로 여러분의 복을 지탱할 수 있는 길이며, 영원히 남아질 수 있는 무리 가운데 여러분을 참석시킬 수 있는 길입니다. 이것은 정상적인 전법이라 하겠습니다.
어떻게 보면 우둔하다는 것입니다. 곰처럼…. 한 고비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죽고 사는 문제는 나중이고 떨어지려면 떨어지라는 것입니다. 빤질빤질해 가지고 타진하고 이러쿵저러쿵 하다 보면 힘들어진다는 거예요. 그런 자들은 못 가는 것입니다.
말을 팔아먹는 사람들은 전부 다 걸리기 쉽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말을 팔아먹는 녀석들은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밑천 없이 찾아 가지고 이용하려고 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 일대에서 찾아질 은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긴장한 마음을 가지고 가야 이 복을 지탱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여러분이 일 대, 이 대, 삼 대를 거쳐 가지고 이 복을 지탱시키지 않고는 도리어 그 집안이 화를 받을 수 있는 무섭고 두려운 입장에 서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것은 말만으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선생님이 지금까지 이 길을 닦아 나오면서 내 눈으로 많이 보았어요.
그러므로 수고와 은혜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수고 없는 은혜는 흘러가 버리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예」 통일교회도 편안하게 적당히 믿지…. 그것이 아닙니다.
여기 석온씨 노친네의 찬송 소리를 가만히 들어 보던 그 음성이 엉망이어서 놀랍지도 않습니다. (웃음) 그렇지만 매일 아침마다 내가 조용히 들어 보면 아주 반갑습니다. 그저 할머니 몇 사람이 모여 앉아 가지고 기운없이 노래를 부르고 있지만 내가 2층에서 가만히 귀를 기울여 들어 보면 그 노래가락이 선생님이 기도하는 데 박자 거리가 되더라 이겁니다. 그거 이상하지요? 그거 보면 하나님께서 그 노래를 나빠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매일매일 새벽에 일어나 가지고 찬송을 하는 것도 할짓이 아니라구요. 그러나 하기 싫고, 남이 하지 않는 곳에서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의 수고를 터전으로 하지 않은 은사는 흘러가 버리는 것입니다. 흘러가는데 그냥 흘러가지 않습니다. 끝날에는 어떻다구요? 무엇을 빼앗아서 어떻게 한다구요?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긴다고 했지요? 있는 자는 돌려받는 거라구요. 그렇기 때문에 꺼떡꺼떡하는 녀석들은 통일교회 문선생한테 전부 다 깝대기 벗겨진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러니 꺼떡꺼떡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다가는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을 몽땅 통일교회 문선생한테 빼앗긴다는 것입니다. 기분 나빠도 할 수 없어요. 내가 전부 다 거두어 간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저 영계를 통해 가지고 야단법석하는 사람들을 많이 내쫓아버렸습니다. 더 두면 더 나쁘게 되기 때문에 많이 쫓아냈습니다. 그가 닦아 가지고 한 단계 올라갔다고 꺼떡대거든요. 올라간 것은 누구로 말미암아 올라갔느냐? 나 때문에 올라갔습니다. 자기가 올라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꺼떡대는 녀석들은 쏙 빼내는 것입니다. 빼낼 때는 그것만 빼는 것이 아니라 은혜까지 몽땅 빼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열매이니까 그 은혜까지 몽땅 빼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몽땅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만한 자는 반드시 꺾여 나가는 것입니다. 교만한 자는 망한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지금 그런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미국과 일본을 위하여 기도하는 가운데서 그 싸움을 전개시켜 나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일본이면 일본을 중심삼고 기도하고, 미국이면 미국을 중심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미국을 누가 더 사랑하느냐? 내가 더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사랑하느냐? 이렇게 이렇게 역사적으로 조건을 세워 가지고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누가 일본을 더 사랑하느냐? 내가 더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천황보다도 더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사랑하느냐? 이렇게 이렇게 조건을 세워 가지고…. 그래서 우리 통일교인들을 고생시키는 것입니다. 현재 일본에서의 고관들 이상으로 고생을 시키는 것입니다. 그 고관이 그 자리에 설 때까지 고생하여 득세한 그 기준 이상 고생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부정했다가는 꺾여 나갑니다. 영적 전법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선생님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같지만 배후에서 조종하여 그런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 통일교회의 판도는 날이 가면 갈수록 내적으로는 커 간다는 것입니다. 여기 모인 식구가 많지는 않지만 앞으로는 세계적으로 몰려올 때가 올 것입니다. 세계 운세는 통일교회의 운세의 박자를 맞추기 위해서 벼락같이 변해 온다는 것입니다. 재미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수고와 은혜라는 것을 언제나 생각해야겠습니다.
통일교회 문선생은 노라리 가락으로 해먹겠다는 사람이 아닙니다. 보통사람들하고 다릅니다. 내가 선두에 서서 해보고 틀림없다고 하면 넘겨 줍니다. 틀리면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그 은사를 계승하기 위해서는 거기에 대비될 만한 수난과정을 거쳐서 계승해야지, 이것을 영광의 자리에서 계승하려 했다가는 모든 것이 거꾸로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오래 못 가서 나가자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수고와 은사라는 것을 잘 기억해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통일교회 믿던 사람들 가운데 아직도 '뜻이 언제 이루어지나? 이러다간 뜻이고 무엇이고 내 일생을 다 망치겠구나'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수작들은 잘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보다 하나님이 더 바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 생각해 봤어요? 뜻이 언제 이루어지느냐고 말하고 다니는 녀석들, 얼마나 바빠서 그래요? 그런 녀석들이 뜻을 가로막는 거라구요. 바쁘기로 말하면 아버지께서 얼마나 바쁘시겠어요? 또 선생님은 얼마나 바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을 선생님이 믿지 않는 거라구요. 내가 대신 책임을 지고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일은 어느 누가 해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편안한 자리에서는 어떠한 것도 얻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과거와 현재의 모든 신앙생활을 재검토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70년대의 긴박한 이 정세 앞에 뜻이 가는 이 절박한 과정에서 여러분이 지녀야 할 긍지가 어떤 것인가를 스스로 명심하고, 시대와 역사 앞에 부끄럽지 않게 은혜를 지탱시키고 활용하려면 거기에 비례하는 수고의 터전을 공고히 하지 않고는 안 된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알겠지요? 「예」
사랑하는 아버님, 오늘날 이 세계를 두고 볼때, 제일 은혜를 주고자 하시는 분이 아버님이요, 이 은혜의 터전을 남기기 위하여 제일 수고하시는 분도 아버님이신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은혜는 수고하신 분과 함께 있기 때문에 아버님과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아야 되겠사옵나이다.
아버님께서는 그런 공적인 입장에서 수고하고 있는 백성이 어디에 있는가 하며 찾아 나오셨던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자기 민족을 위해서보다도 소망의 나라와 소망의 민족을 위해서 수고하는 민족이 어디 있느냐고 찾게 될 때, 그 민족은 어떠한 나라를 중심삼은 특정한 민족이 아니라 종교권내에 서 있는 미래의 소망을 남기기 위한 나라라는 것을 알고 있사옵나이다.
그러한 민족으로서 이스라엘 선민이 있는 것이요, 기독교 선민이 있사옵니다. 아버님께서 이렇게 1차, 2차, 나아가 3차의 선민권까지 찾아 나오신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이는 개인적인 입장이 아니라 세계적인 입장인 것을 저희들은 알아야 되겠사옵나이다.
이것을 이어받을 수 있는 민족은 자주적인 입장에서가 아니라 희생적 입장에서 역사적 과정을 거치며 수난길을 걸어온 민족이어야 된다는 원리적인 공식으로 미루어 보게 될 때, 한민족이 그러한 민족권내에 서 있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일개 국 이상의 시달림을 받아야 할 운명권을 피할 수 없는 것이 지금까지 복귀의 천국을 바라보고 나오는 도상이었던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오늘날 한국은 강국의 틈바구니에 싸여 자력을 가지고 큰소리치지 못했고, 자기 주권을 중심삼고 환경을 움직이지 못한 비참한 민족으로 살아 나왔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이 세계에서 누구보다 비참한 역사를 거쳐 나오신 아버님은 당신과 같은 입장에 있는 한민족을 사랑하사 몇천 년만에 찾아 주신 줄 아옵니다. 이러한 은사의 터전을 받은 이 민족이 금후의 운명을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 하는 교차점에 선 것을 저희들이 알고 있어야 하겠습니다.
저희들은 좌로 가면 안 되겠고 기필코 우로 가야 된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로 가려면 세계의 닻을 거는 터전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요, 하늘의 닻을 거는 터전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될 것을 알고 있사오니, 우리는 나라보다 세계를 더 사랑하고, 세계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면서 세계를 붙들고 놓지 말아야 되겠사옵나이다.
내 일신의 힘이 모자라는 한이 있더라도 또다시 힘을 내서 붙들고, 영영 생명을 희생하더라도 아버지 앞에 돌려 드린다는 최후의 다짐을 남긴채 손을 얹고 죽어갈 수 있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겠다는 이 엄청난 신념과 결의를 갖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이 시간에 다시 한 번 깨닫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나이다.
아버지, 내일의 소망 앞에 아버님이 찾으시고 남겨 오신 은사의 나라를 얼마나 멸시하고 천대했는가를 저희가 스스로 자각하여 철부지였던 과거의 모든 생활을 청산지음으로써 하늘의 심판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특권적인 은사를 받을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저희들은 일생에 있어서 영광을 바라기 전에 수난의 길을 가야 되겠사옵니다. 수난 가운데 웃고 사는 모습이 아니라 울면서도 마음으로는 소망을 갖고 사는 사람은 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그러한 길로 가는 통일가의 운명을 아버지께서 길이길이 지켜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터전을 위하여 정성들이는 무리들은, 아버지, 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사오니, 정성에 정성을 더함으로써 아버지 앞에 감사드리는 모습으로 이끌어 주시옵소서. 후대에 복귀의 천국을 마련해야 하는 각자의 책임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아오니, 저희들은 먼저 내 마음과 몸에서부터 천국을 이룰 수 있어야 되겠사옵니다.
더 나아가서는 가정적인 천국, 종족적인 천국, 민족적인 천국, 세계적인 천국으로 넓혀 나가 연결시켜야 할 사명이 저희들에게 있는 것을 생각할 때, 그것이 저희 힘만으로는 되지 않겠기 때문에 저희들은 역사적 인연을 갖춘 아버지의 수고의 터전 위에 접붙여 가지가 되고 잎이 됨으로써 아버지의 수고에 보응(報應)하여 아버지의 은사에 플러스될 수 있는 자리에 서야 되겠사옵니다.
이런 사실을 느끼면서 개개인에게 맡겨진 매일매일의 생활에서 오늘의 개척자인 동시에 내일의 개척자가 되고, 한시라도 개척자의 심정을 잊어버리지 않고 싸워 나가는 아들딸로 이끄시어 수난이 극한 최후의 결전에서 승리하여, 아버님께서 축복과 은사를 내리시며 너로 인하여 열매맺었노라고 칭찬하고 사랑할 때까지 죽지 말고 끝까지 살아 남아서 하늘을 위로해 드리고 땅에 안정점을 결정지어야 할 사명이 통일교회의 사명인 것을 확실히 알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나이다.
은혜는 그냥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누구에 의한 수고의 대가로 온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공짜로 받아서는 오히려 화를 입는 터전밖에 남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스스로 조심하며 끝날에 심판대에서 제거되는 사람이 되지 말고 심판대를 넘어 아버님의 축복을 받는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부탁드리오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여러분, 무사통과가 좋지요? 여러분이 어느 살림집에 턱 가면 눈치를 봅니까, 안 봅니까? 누가 볼까봐…. 그러는 것이 좋아요, '봐도 좋다' 이래 가지고 그저 더 먹고 싶으면 더 먹고 이러는 게 좋아요? 무사통과가 좋은 것입니다. 그렇지요? 무사통과라는 것은 사랑이 없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어 가지고는 무사통과 사정과 무사통과 환경이 벌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어머니 아버지 앞에서 아들딸들이 자려고 할 때에 '어머니 아버지 부끄럽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래요? 무사통과인 것입니다. 어머니 아버지를 싫다고 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머니 아버지를 왜 그렇게 좋아하느냐? 부모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이요, 희생적인 사랑이요, 봉사적인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보통 '그 여자가 시집가기 전에는 그렇게도 고생하더니 참 시집을 잘 갔어'라고 말할 때, 그 여자의 남편은 어떤 남자이기에 시집을 잘 갔다고 하겠습니까? 그 아내를 밤이나 낮이나 무조건 사랑해 주는 남자라는 거예요. 그저 언제든지 무슨 잘못된 일이 있으면 '내가 잘못했소' 하면서 전부 다 자기가 책임을 지고 색시를 사랑하는 그런 남자의 색시가 되었다면 그 색시는 시집을 잘 갔어요, 못 갔어요? 대답을 해보세요. 잘 갔어요, 못 갔어요? 「잘 갔습니다」 틀림없이 잘 갔지요? 「예」 또, 그렇게 희생적인 사랑을 아내에게 해줄 수 있는 신랑이라면, 그 신랑은 장가를 잘 갔어요, 못 갔어요?
그러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그렇게 하기를 바라요, 안 바라요? 그것도 커지는 거라구요. 또, 여러분의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희생적인 사랑을 하기를 바라요, 안 바라요? 그렇게 어머니 아버지가 희생적인 사랑을 주고받으면 누가 좋아합니까? 누가 좋아해요? 아들딸이 그것을 바란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부모가 서로 좋아 지내면 그 좋아 지내는 것이 아들딸의 좋은 것이 되는 것입니다. 아들딸의 환경이 모두 좋아진다는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둘이 그렇게만 된다면 그 아들딸들은 복이 터지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멋지다는 거예요.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복 중의 최고의 복이 무엇이냐 하면 희생적인 사랑, 봉사적인 사랑, 남을 위한 사랑을 베푸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자기를 위한 사랑은 오래 못 가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남편이 가만 보니까 유순한 아낙네인데…. 여기에도 유순한 처녀들이 있지? 얼굴을 보나 마음을 보나 유순한 처녀들이라 할지라도, 한 번 꼭 찔러 보고 두 번 꼭 찔러 보고 세 번 찔러 보고 네 번까지 꼬집어 보면 이렇게 토라져 가지고…. (행동으로 표현하시자 모두 웃음)
그 순한 처녀들이 자기 자신만을 위한 사랑을 하게 되면 바라보고 비교하고 이러다 보니 아이구 이거야…. 적막강산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자는 세상에 불쌍하게 태어났구나' 그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뭐, 여자는 남자의 무슨 노리개야, 부속품이야? 부속품이라도 움직이는 데 박자를 맞추어 움직여 줘야 부속품 역할을 하지, 이게 뭡니까? 자기를 위하는 사랑은 처음에는 좋은 것 같지만 나중에는 반드시 갈라지는 것입니다. 갈라져요, 안 갈라져요? 갈라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신랑이 있지요? 여러분을 사랑한다는 그 신랑한테 한번 해 보라구요. '당신이 뭐야? 당신이 뭐냐구? 무슨 남자의 사랑이 그래? 좀 더 해주어야지. 당신이 남자니까 더 사랑해 줘야지. 한번 싸웁시다' (웃음) 이래 보라구요, 여러분의 남편이 어떻게 나오나. (웃음) 저 뒤에 들려요? 「예」 자기를 중심한 사랑은 끝장이 나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그렇지만 새신랑이 새신부를 사랑하는 것과 같은 사랑을 계속하게 된다면 끝장이 안 나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그렇기 때문에 사랑의 소재지는 어디냐 할 때 '나'가 아니라는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참된 사랑의 소재지가 어디냐 할 때 남편 앞에는 색시인 것이요, 색시 앞에는 남편인 것입니다. 사랑의 소재지가 자기입니까, 남입니까? 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천지 이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대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의 소재지가 상대이기 때문에 상대에게 머리를 숙이고 '비나이다' 해야만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원칙입니다. 알겠어요? 그래서 봉사하고, 희생하고, 남을 위하게 될 때만이 사랑의 본연의 소재지에서 사랑이 영원히 움직이고 꿈틀거린다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사랑의 소재지가 어디라고요? 자기 자신이 사랑의 소재지라면 희생하는 것은 소모입니다. 그것은 망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체가 사랑의 소재지라면 자신이 희생하는 것은 자기 자체의 소모에 불과하겠지만, 상대가 사랑의 소재지이기 때문에 그 사랑을 유발시키기 위해서는 당당해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온유겸손하고 높여 주고 희생봉사하는 데서만 사랑이 옮겨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요, 안 그래요? 여러분은 그걸 알아야 됩니다.
사랑의 소재지가 어디라고요? 「상대방입니다」 사랑의 소재지가 상대방이기 때문에 상대방을 완전히 점령하기 전에는 내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내 색시, 내 서방' 이렇게 말해야 자극적이거든요? 젊은 사람들은 그렇게 말을 해야 맛이 난다는 것입니다. '내 남편, 내 부인' 하게 되면 맛이 안 나요. '내 색시, 내 서방' 이래야…. (웃음)
'내 사랑' 이라고 하려면 상대를 완전히 점령해야 합니다. 그러기 전에는 내 사랑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남편이 아내에게 '나는 이렇게 잘났기 때문에 당신 같은 여자가 본래부터 나를 사랑하게 되어 있소. 나를 사랑할 줄 모르는 여자는 여자가 아니오' 이렇게 큰소리를 친다면 처음 한두 번은 잘 들어주겠지만 밥 먹듯이 자꾸 그러면 한번 복수하고 싶어지고, 그런가 안 그런가 한번 시험해 보고 싶어지는 것이 여자의 마음인 것입니다. 그래요, 안 그래요? 그런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사랑의 소재지는 자기가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나라를 사랑한다 할 때 그 사랑의 소재지가 어디겠습니까? 자기에게 있는 것입니까? 나라에 있는 것입니다. 세계를 사랑한다 할 때 그 사랑의 소재지가 어디에 있느냐? 세계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랑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세계를 위하여 봉사해야 됩니다. 모두가 봉사하는 가운데서도 생명을 내놓고 적극적으로 나서는 사람이 있으면 생명을 내놓고 적극적으로 희생하려고 하는 그 사람 앞에 먼저 사랑의 인연이 맺어질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처녀가 시집을 가기 위해서 준비를 쫙 해 놓고 순정을 품고 어떤 신랑이 나타날꼬 하면서 오늘이야 내일이야 쓱 기다리고 있는데 이웃 동네의 잘난 미남자로부터 청혼이 들어왔다면 기분이 좋겠어요, 나쁘겠어요? 여자들, 기분이 좋을까? 여자들은 기분이 나쁠 거라, 왜? '누가 볼세라 건드릴세라 그저 꽁꽁 동여매고 뒤집어씌워 간직해 온 순정의 보따리를 누구한테 풀어 놓을꼬'라고 생각하면 그 도둑 같은 남자들을 믿을 수 있겠어요? 누가 장가오겠다고 해도 기분이 나쁠 거예요.
그래, 여러분, 기분이 나쁘겠어요? 장가오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듣게 될 때, 기분이 나쁠 것 같아요, 좋을 것 같아요? 시집가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처녀라면 모르지만, 시집가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처녀라면, 시집가고 싶은 마음을 갖고 있는 아가씨라면 말이에요, 시집을 가고 싶은데도 불구하고 장가오겠다는 사람이 없다면 섭섭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시집가고 싶은데 마침 장가를 오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기분이 좋겠어요, 나쁘겠어요? 나는 여자가 아니라서 모르겠어요. 여자분들, 대답해 보세요. 기분이 좋겠어요, 나쁘겠어요? 「좋겠습니다」 좋을 거라고요.
기분이 좋아 가지고 쓱 그 사람에 대한 궁금증이 생길 것입니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척 일어나면 그 남자를 한번 만나 봤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앞서 돌아갈 것입니다. 내가 구상하는 남자는 이러이러한 사람인데, 고 남자의 구비 조건은 여기에 몇 퍼센트나 합격일까? 처음 만났을때 그 사람의 구비 조건이 내가 바라는 조건에 백 퍼센트 이상 딱 들어맞고도 남아 가지고 그 사람을 붙들고 춤을 출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자기가 바라는 사람 이상의 사람이기를 바라겠어요, 자기가 바라던 사람 이하의 사람이기를 바라겠어요? 욕심은 그 이상의 사람이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그런데, 그러한 남자가 동시에 세 사람이 나타났다 할 때는 한 사람만 보고 싶겠어요, 아니면 세 사람 다 보고 싶겠어요? 「다 보고 싶겠습니다」 욕심들은 많구만. 그러면 한꺼번에 백 사람이 나타났다 할 때는 어떻겠어요? '그때에는 그저 눈을 감고 닥치는 대로 한 사람 택하지 뭐' 그래요? 백 사람이 한꺼번에 나타나서 자기에게 장가오겠다고 한다면 그 사람들을 일일이 다 만나 봐야 되겠어요, 안 만나 봐도 되겠어요? 사흘에 한 사람씩 만난다 하더라도 1년이 걸리는구만.
그 백 사람을 전부 만나 보는데 1번 퇴짜놓고, 10번 퇴짜놓고, 30번 퇴짜놓고, 60번을 퇴짜놓았다고 할 때 그 나머지 사람들이 붙어 있겠어요? (웃음) 남아 있는 녀석은 미련한 녀석이라구. 60번까지 내려갔다면 그 다음 사람들은 다 도망갈 것입니다. 60번째인 사람도 도망가지.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저 여자는 어떻게 된 여자길래 이렇게 잘난 남자들을 다 후려 갈겨 버리고…. 어디로 시집가려고 그래. 에이 쌍 것'(웃음) 그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출발을 잘해야 됩니다. 출발을 잘해야 된다구요. 잘못했다가는 망치게 되는 것입니다. 순정도 출발을 잘못했다가는 망쳐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럼 시집을 가는 데는 어떻게 가야 될 것이냐? 시집을 어떻게 갈 것이냐? 희생적 사랑을 찾아가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생각해 보라구요. 얼굴이 못생긴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남보다 더 노력을 해야 되기 때문에 희생적 사랑이 필요합니다. 희생적인 사랑이 행복이라면, 2배의 희생을 해 가지고 사랑하는 것은 1배의 희생을 해 가지고 사랑하는 것보다 복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있다면 좋은 아들딸을 주는 데 있어서, 1배의 노력을 해서 잘사는 부부가 있고 얼굴이 못생긴 남편을 만나 가지고 2배의 노력을 하여 그들만큼 잘사는 부부가 있다 할 때, 하나님은 누구에게 좋은 아들딸을 주고자 하실 것인가 생각해 보세요. 내가 하나님이라도 2배의 노력을 해 가지고 1배의 노력을 한 부부만큼 잘사는 부부에게 좋은 아들딸을 주고 싶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 아니겠느냐.
왜 그러냐? 사랑의 선물이란 보다 큰 희생의 터전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본질은 희생이기 때문에 그런 터전이 있어야만 비로소 그 후대에 남겨 줄 수 있는 복덩이 아들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졌으면 어떻게 하느냐? 백 사람이 왔다면 그들을 상대로 선을 볼 것이 아니라 '남자라면 누구라도 아침이나 대낮이나 밤이라 언제든지 사랑할 자신이 있소. 나에게 장가오고 싶거든 여러분끼리 시합을 해서 최후에 남아진 남자가 오시오' 해야 됩니다. 여자가 그래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남자들은 '야, 그 여자 멋지다' 한다는 거예요. 그리고는 자기들끼리 경쟁을 하는 것입니다.
서로 '너, 그 여자에게 장가갈 거야? 장가가겠어? 정말 갈 거야?' 할 때, '가겠다'고 하면 '이놈, 정말이야? 나하고 생명을 걸고 싸울 거야? 나와라. 나는 벌써 생명을 걸 각오를 했다' 하면서 얼굴도 보지 않고 덤벼드는 사람이 있다면, 그 백 사람 가운데 맨 나중에는 두 사람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다 싸워 넘어뜨리고 다 쫓아 버리고 남은 두 사람이 싸워 가지고 맨 나중에는 어떤 사람이 남느냐 하면, 생명을 바칠 각오를 한 사람이 남아질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선을 안 보고 신랑을 얻어도, 선을 보지 않고 시집을 가더라도 시집을 잘 가게 마련인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그런데, 알고 보니 애꾸눈이라는 것입니다, 애꾸눈이. 여러분은 애꾸눈이 신랑을 생각해 봤어요? 「아니요」 그렇게 되었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만일에 처녀가 약속하기를 싸워서 맨 나중까지 남아진 사람에게 시집을 가겠다고 했다면, 남아진 사람이 애꾸눈이가 아니라 봉사라도 그 사람에게 시집을 가야 되겠어요, 안 가야 되겠어요? 「가야 됩니다」 그 사람에게 시집을 안 가면 그 처녀는 생과부보다 더 한 여자가 되는 것입니다. 시집을 못 간다는 거에요. 백여 명의 남자들을 싸움을 붙여 놓고 싸움 구경을 좋아하는 간나라고 레테르가 붙게 되면 그 여자는 시집을 못가는 것입니다.
약속을 했으면 그 사람이 비록 봉사라 할지라도 시집을 가야 되는 것입니다. 봉사 신랑을 맞아 보라구요. 비록 앞은 못 보지만 사랑만은 제일 셀 것입니다. 그럴 것이 아니예요? 이렇게 생각해 보면 눈이 안 보인다고 해서 불행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혹은 다리가 하나 없다고 해서 불행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영원히 남기고 싶은 것이지요? 그렇지요? 사랑은 영원히 남기고 싶은 것입니다. 참이란 것은 영원한 것입니다. 행복이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얘기하다가는 한정이 없겠구만.
행복의 소재지는 사랑이로되 사랑의 소재지는 어디라구요? 자기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라를 사랑하려면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어야 되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세계를 사랑하는 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랑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그 사랑의 복을 받기 위해서는 목을 내놓아야 되는 것입니다. 생명을 내놓지 않는 사랑은 사랑답지 못한 사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까 말한 80난 할머니라 해도 자기의 사랑하는 남편을 살리기 위해서는, 남편의 생명을 단 사흘이라도 연장시키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는, 자기의 몸을 제물로 바치는 희생을 하더라도 고마와할 수 있는 심정을 갖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어야만 그 부부의 사랑이 참된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참사랑은 희생을 기반으로 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참사랑은 다 좋아하지요? 여러분은 이것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통일교회 문선생이란 사람이 단에 서 가지고 '잘먹고 잘살아라. 포동포동하게 겹살이 쪄 가지고 말·돼지처럼 살아라' 하는 말을 한번도 들어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들어 봤어요, 못 들어 봤어요? 여러분은 선생님이 나타나면 '또 뭐 고생하라는 타령이 나올 것 같구만. 두고 보자. 내가 점친 것이 백발백중일 거라' 할 것입니다. 그거 백발백중이라구요. 백발백중하는 것이 참입니다. 늙은이가 보더라도 그렇게 되는 것이요, 젊은이가 보더라도 그렇게 되는 것이요, 말을 들을 줄 아는 사람이 보더라도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랬다저랬다하는 것은 참이 아닙니다. 가짜는 이렇게 저렇게, 그저 왔다갔다하지만 말입니다.
선생님은 얘기했다 하면 반드시 고생하라는 얘기부터 하는데 우리들과 무슨 원수가 졌길래 이렇게 고생을 시키려고 하느냐고 할 것입니다. 내가 알고 보니 고생시키는 사람이 됐어요.
고생을 시키는 데는, 너를 위해서 고생을 하라고 하면 망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위해서 고생을 시키면 망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남을 위해 고생시키면 흥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남을 위해 고생하는 사람은 사랑을 점령하기 때문입니다. 알겠어요? 남을 위해 수고할 때는 그 수고의 대가로 반드시 받게 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뭐냐? 그 사람의 사랑인 것입니다.
통일교회 여자들 중에 선생님을 좋아하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있는지 모르겠어요. 여기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선생님을 싫어하는 줄로 알아요. (웃음) 왜 웃어요? 난 그렇게 생각하는데…. 여자들은 본래부터 나를 싫어합니다. (웃음) 여러분들은 선생님을 좋아해요? 「예」 다른 이유가 있어서 선생님을 좋아하는 모양인데…. 선생님이 필요하긴 하지. 왜 필요해요? 약방에서 언제든지 제일 필요로 한다는 무슨 초예요? 그 감초같이 말입니다.
이래도 짝, 저래도 짝 하니까 그저 좋은 때는 자기들이 나서고 나쁜 때는 선생님이 필요하고…. 여러분들이 고생을 하기 때문에 선생님을 좋아하지 잘살아 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고생을 하기 때문에 선생님을 좋아하지 잘만 살아 보라는 거예요. 선생님을 언제 알았더냐 하고 꿈도 안 꿀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여러분이 꿈도 안 꾸게 되면 다 망하겠기 때문에 여러분들을 고생시켜 가지고 꿈이라도 꾸게 하고…. 선생님이 이렇게 대하는 것이 도리어 여러분들을 사랑하는 결과가 되고 여러분이 선생님을 사랑할 수 있는 터전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 여러분들은 선생님을 사랑해요? 「예」 또 한 가지 물어 보자구요. 여러분들 중에서 몽시로, 혹은 기도 중에 가끔 선생님을 만나 보는 사람이 있으면 손들어 보세요. 내리세요. 이것이 사고입니다. (웃음) 왜 그러냐? 이것이 심상치 않은 일이라구요. 여러분이 몽시로는 언제나 선생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때에는 선생님이 가까운 오빠와 같이 나타나서 손을 붙잡고 꽃동산에서 활개를 펴고 힘차게 뛰고 말입니다. 여러분들과 나는 원수가 아닙니다. (웃음) 여러분들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선생님은 여러분들을 누구보다도 사랑하고 누구보다도 존중합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동네에서 손가락질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겠어요? 대답해 보세요. 이 마을, 저 고을에서 '아, 저사람!' 하고 손가락질받기를 원하겠어요? 아니라는 것입니다. 혹은 그 나라의 여자 축에도 못 들어가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겠어요?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또, 수많은 여자들이면 여자들, 남자들이면 남자들이 사는 세상에서 그 축에서 빠지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겠어요? 사랑하면 사랑할수륵 그렇게 되기를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그렇잖아요? 선생님이 멋지기를 원해요, 째째하기를 원해요? 「멋지기를 원합니다」 가는 동네마다 사람들한테 그저 욕이나 먹고 인심을 잃어 가지고 쫓겨나기를 바라요, 동네 사람들 모두가 위해 주기를 바라요? 「위해 주기를 바랍니다」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자리에 나가는 가장 빠른 길은 무엇이냐? 동네를 위하여 정성을 들이고 희생적인 사랑을 줌으로써 그 동네를 굴복시키는 것입니다. (판서하시면서 말씀하심) 그리하여 그 동네가 나를 위하게 되면, 이것은 한 리(里)면 리의 보고거리가 되어 점차로 점프하는 것입니다. 한 면(面)에 열 개의 리(里)가 있는데 그 보고거리가 열 개의 리에 드러났다 할 때는 그것이 운을 타는 것입니다. 운을 타고 그 보고거리가 어디까지 가느냐 하면, 리에서 삥 돌고 쭉 드러나면 면장 꼭대기까지 올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면을 탄다는 거예요. 알겠어요? 그 일이 그렇게 점프되어 올라가게 되면, 면장이 그 이장들을 불러 놓고 각 리의 특별한 사연이 무엇이냐고 해 가지고 그 일을 보고받으면, 그것이 일등이 되는 것입니다. 면장이 '아하, 우리 면에도 이런 특별한 예가 있구나' 하면 가슴속에 딱 일등으로 점령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점령하지요?
그러고 나서 군에서 면장들 회의가 있을 때 그 면장이 군수에게 그것을 떡 보고했을때 군수가 '그것이 수많은 면 가운데서 제일이다. 야! 그거 훌륭하구만' 하게 되면, 점프 한번 해서 어떻게 되느냐? 군의 꼭대기, 군수의 꼭대기를 타게 되는 것입니다.
나중에는 제일 좋은 것은 어디로 가느냐 하면 나라로 가는 것입니다. 작은 동네로 내려가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로 올라가느냐? 나라로 올라갑니다. 그 다음 어디로 가느냐? 세계로…. 그 다음에는 어디로 가느냐? 하늘나라로 갑니다. 하나님 앞으로 가는 것입니다. 제일 좋은 것이 하나님께로 가게 된다고 아까 말하지 않았어요? 참의 행로는 어떻게 되느냐? 제일 좋은 것이 어디로 가느냐 하면 하늘로 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으로 가는 데 있어서 연락병이 누구냐? 여러분들이라는 것입니다. 기분이 좋아요, 나빠요? 「좋아요」 군 꼭대기를 떡 타고서 우리 군에 있는 아무 동네의 아무개가 제일이다 하는 깃발을 갖다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올림픽대회 때에 보면 성화라는 게 있지요? 그것을 뭣이라고 하나? 성화라고 하나? 그것을 들고 뛰는 거와 마찬가지로 말이에요. 군수가 떡 잡고서 도지사 앞에 쓱 가는 것입니다. 도에는 수많은 군이 있는데 그 군의 보고 가운데서 또 일등을 했다고 합시다. 사람 죽이는 보고는 한번으로 딱 끝나지만 살리는 보고는 자꾸자꾸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것이 또 한번 점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 번 뛰고 두 번 뛰고 세 번 뛰게 되면 그 다음에는 어디로 가느냐? 이제 올라가면 어디로 가게 되느냐? 중앙청의 국무총리에게로, 대통령을 모시는 곳으로 돈도 안 들이고 행차하게 되는 것입니다. 돈 들이고 행차해요, 그들이 원해서 돈 받고서 행차해요? 끌려가는 거예요, 모셔 가는 거예요? 받들어 모셔 가는 것입니다. 나랏님한테 바칠 것은 모셔 가는 것입니다. 그거 멋진 행차지요? 그렇게 하여 중앙청까지 올라왔다 이겁니다. 중앙청에서 '전국의 도 가운데서 특출하고 특별한 보고거리가 있으면 보고하시오' 할 때 이것이 보고되어 일등하게 되면 그것이 어디로 가겠어요? 대통령은 이것을 외국에 가서 자랑한다는 것입니다. 세계의 국가 가운데에서 이와 같은 '선한 사람이, 이와 같은 사건이, 이와 같은 공적이 있을소냐'라고 함으로써 거기에서 일등하면 그 다음에 어디로 가느냐? 위에서 관리하는 분이 계신다면 그분에게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제일 낮은 자리에서부터 출발해 가지고 곧바로 직행할 수 있는 놀음이 있다면, 여러분이 그 놀음을 하기를 원해요, 안 원해요? 「원합니다」 그렇찮으면 여러분 다 죽으라구요. 원하기 마련인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일이 무슨 일이냐? 리에서 일등한 내용을 면민 앞에 제시할 때 면민이 '옳소', 군민 앞에 제시할 때 군민도 '옳소', 도민도 '옳소', 전국민도 '옳소', 하나님 앞에 제시할 때 하나님도 '옳다' 하는 날에는 만세의 영광이 그 앞에 같이할 것입니다.
여러분, 통일교회는 리에 있을 때는 리를 대표해서 살고, 면에 있을 때는 면을 대표해서 살고, 군을 대표해서 살고, 도를 대표해서 살고, 전체를 대표해서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혼자 일을 하고 있지만 '나는 삼천만 민족을 대표한 기수요, 30억 인류를 대표한 기수다' 하는 자세를 갖고 정성을 들여 나가야 됩니다.
여러분이 그러한 자리에 올라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지금 이 자리에서 얼렁뚱땅 적당히 해 가지고 되겠어요? 그래서는 절대 안됩니다. 생명을 걸고 하라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기를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이상 큰 사랑이 없다는 말도 그래서 성립되는 것입니다. 그런 일은 남을 위하여 희생적인 사랑을 갖지 않은 길에서는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어느 시대 어느누구를 막론하고 희생적인 사랑 앞에는 머리를 숙이기 때문에 참다운 자리를 잡아서 열매만 맺게 되는 날에는 날아가는 것입니다. 한도 없이 날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볼 때에, 여러분을 그런 자리에서 연마시키고 그런 자리에서 공신을 만들고 싶은 것이 선생님의 생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여하간 생명이 다할 때까지 수고하고 고생하여 희생적인 사랑의 주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주의예요, 예수주의. 하나님주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민족의 반역자로 몰려 제일 나쁜 사람의 입장에서 죽었지만, 그분의 행적을 받들어 가지고 하늘나라까지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마찬가지입니다. 그게 어떻게 해야 가능할 수 있느냐? 자기의 생명을 바쳐 희생하는 길만이, 희생적인 사랑의 터전을 준비해 놓는 그길만이 영원히 남아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은 이 터전을 준비하기 위해 여러분을 희생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마운 일입니까, 나쁜 일입니까? 「고마운 일입니다」 그래, 지금 나가 고생하면서 이것을 고맙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손들어 보세요. 내가 얘기해 주어도 여러분이 모른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여러분에게 꼼짝달싹할 수 없이 복을 받을 수 있도록 가르쳐 준 것이 뭐냐? 선생님은 이런 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근거지는 나 자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어디가서 열매 맺힐 것이냐? 나에게서 열매 맺히는 것이 아니라 세계 복판에서 열매 맺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계 복판에서 열매가 맺히기 위해서는 어떻게 되어야 하느냐? 나라의 복판에서 열매 맺혀야 되고, 도의 복판에서 열매 맺혀야 되고, 군의 복판에서 열매 맺혀야 되고, 면의 복판에서 열매 맺혀야 되고, 리의 복판에서 열매 맺혀야 되고, 마지막으로 가정과 내 자체에서 열매 맺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개인적인 탕감을 거쳐야만 가정으로, 가정적인 탕감을 지내야만 종족으로, 종족적인 탕감을 거쳐야만 민족으로, 민족적인 탕감을 지내야만 국가로, 국가적인 탕감을 거쳐야만 세계로, 이렇게 발전해 나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희생적인 사랑을 깊이 뿌리기 위하여 생명이 다할 때까지 몸부림쳐 나가야 하는 것이 심정세계를 창건하기 위한 우리 통일교인들의 의무요, 책임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알겠어요? 「예」 자세한 건 모르지요?
선생님은 어제도 새벽 3시에 잠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일어나서 기도하고 얘기하고…. 그 다음엔 일본 식구를 데리고 경주를 다녀왔습니다. 경주가 가까운 줄 알았더니 멀더구만. 가는 데 다섯 시간 오는 데 다섯시간이 걸려요. 경주에서 대구에 도착하니 아홉 시 30분이 되었더군요. 연락을 하지 않고 갔으니 누가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겠어요? 할 수 없이 식당에 가서 비빔밥을 시켰습니다. '추우니 얼른얼른 해라' 하고 온돌방에서 앉아 기다리는데 얼마나 냉정하던지 궁둥이 살을 다 뜯어 먹고도 인사를 안 할 것 같았습니다. (웃음) 밥을 그저 맵게만 해 가지고…. 그걸 얼버무려 가지고 한바탕 먹었어요. 배가 고파 보라구요. 경주에 간들 밥줄 사람 있어요? 밥 줄 사람도 없지 바쁘기도 하지 얼른 가서 한 바퀴 돌아보고 왔던 거라구요. 아홉 시 30분쯤에 대구에 도착해서 밥을 먹다보니 열 시 30분쯤 되었습니다.
대구교회에는 그날따라 사업부의 사업대원들 회의가 있어서 한 백 명이 와 있었는데 선생님이 왔다고 연락을 다했다나? 또 그 사람들이 와서 눈을 꺼벅꺼벅하고 기다리고 있을 테니 죽을래야 죽을 수도 없고 도망갈래야 도망갈 수도 없고…. (웃음) 할 수 없이 교회로 올라갔습니다. 가서 내가 사정하고 싶은 것이 천만 가지인데 그들의 얼굴을 가만히 보니 전부 다 한심해서…. 그걸 보니 또 못 견디겠어요. (애기 울음소리가 남) 거기 할머니, 어디에서 온 할머니예요? 이 자리는 애기를 업고 오는 자리가 아니예요. 여기에 있는 애기 어머니들이 전부 애기가 울면 자기 애기만 생각하게 될 테니 얼마나 방해되겠어요? 애기를 저쪽으로 돌리면 괜찮아요. 애기 엄마들은 애기만 보면 환장하게 되어 있는 거라구요. (웃음)
그래 가지고 밤 11시 30분쯤 말씀을 끝내고 12시 15분 전에 서울을 향해 떠났습니다. 밤 12시가 되어 가면 고속도로에서 택시들이 서로가 추월하기 때문에 기분이 나쁩니다. 그러나 밤 12시가 넘으면 고속도로상에는 트럭밖에 없습니다. 트럭은 밤을 새워 지나가도 괜찮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에라, 내 세상이다' 하고 차를 몰아 앞에 가는 트럭들을 따라잡았습니다. 그게 기분이 좋다구요. 그렇지만 추월당하게 되면 기분이 나쁩니다. 그러나 밤 12시가 지났기 때문에 고속도로에는 택시가 없거든요. 나는 야간 통행증이 있거든요. 통행증 없이 어떤 차나 밤 12시 넘어서 다닐 수 있어요? 그래 트럭만이 12시가 지나도 고속도로를 달릴 수 있는데 트럭은 천천히 가니까 닥치는 대로 전부 따라잡는 것입니다. 한 대, 두 대, 세 대 모두….
이렇게 해서 새벽 네 시 5분에 곧바로 서울에 도착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와서 보니 주일 경배식인데 목욕도 안 했으니 어떻게 해요? 그래도 내가 대표자인데 안 나가면 큰일이 나거든. (웃음) 그래서 차에서 내리자 마자 목욕탕에 가서 보니 네 시 20분이 되었어요. 야, 큰일났구나! 목욕하려면 바쁘겠다 싶어 옷이 어디 떨어지는지도 모르게 후닥닥 벗고서 바쁘니 물통에 더운물과 찬물을 섞어 가지고 '아푸 아푸' 하면서 오리새끼 목욕하는 모양으로 목욕을 했습니다. (웃음)
그리하여 경배식을 하기 위해 교회로 오니 찬송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선생님 나오라는 거지요. 뭐 어떻고 어떻고 어떻고…. (웃음) 무슨 팔자가 이런지 몰라. 그러나 할 수 있어요? 이것도 운명, 팔자이니 안 하면 안 되거든요. 그래서 나가 가지고 경배식을 하고 말씀을 했습니다. 또 수택리에서는 가만히 있으면 좋겠는데 뭐하러 오라고 하는지…. 여러분들은 뭐 선생님이 지방에 내려가서 안 올 줄 알고 있을 것이니, 지치기도 했으니 까짓거 뭐 안 가도 된다는 거예요. 하지만 약속이 돼 있으니 여러분이 기다릴 것을 생각하면 안 올 수가 있어야지요. 그런데 와 가지고 좋은 얘기를 하면 좋겠는데 고생하라는 얘기를 해야 된다는 거예요, 기분 나쁘게. 여러분은 이런 얘기 하는 것이 좋아요, 나빠요? 「좋아요」 정말 그래요? 「예」
밤새 달려서 그런지 어머니가 잠을 자길래 깨우려고 갔더니 못 일어나는 거예요. 어머니는 배가 고프면 차멀미를 합니다. 그래서 할 수 있어요? 남편된 죄로 어머니를 내 무릎에 쓱 눕혔지요 뭐. (웃음) 어머니와 내가 일대일의 사정을 두고 보면 나보다 어머니가 더 편할 텐데 말이에요. 새벽부터 곤두박질해 누워 있으니 남자된 죄로 할 수 있어요? 또 피곤해서 수택리 가고 싶지 않다고 하니 할 수 있어요? 선생님 혼자 왔지. (웃음) 여러분은 이 다음에 그럴 땐 암만 피곤하더라도 남편과 같이 가세요. 그래야 되는 거예요. (웃음)
여러분, 남을 위해서 살더라도 어떤 때는 참 슬플 때가 있지요? 그저 쓸쓸하고 슬플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운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 자리가 원수와 최후의 판가리 싸움을 할 수 있는 장소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통일교회를 발전시켜 나온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내가 이렇게 나오니까 안 나온 것보다 좋아요? 「예」 그렇지만 여러분들의 신랑이 나타난 것보다는 못하지요? 「아니요」 정말 그래요? 「예」 그렇다면 선생님이 불행한 사람이 아니게요? 「예」
여자들은 하려고만 하면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동원해서 단결만 한다면 살아 있는 호랑이도 그냥 잡을 수 있어요. (웃음) 그렇찮아요? 지독한 게 여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난 인연이란 간단한 인연이 아니라 아주 큰 인연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얘기하는 제목을 모르겠구만. 여러분은 '오늘 또, 뭘 하겠나' 하다 가만히 앉아 공상하면서 점심 때를 기다리려면 기가 막히지. 내가 이야기라도 해주면 난 좀 피곤하지만 여러분들은 세월 가는 줄 모를 것입니다. 수련받을 때, 여러분이 아침밥을 못 먹고 수련을 받게 되면 기분이 안 좋지요? 그러니 선생님이 탕감을 해주면 고마와할지도 모르겠구만. 해줄까요, 말까요? 「해주세요」 선생님은 고생을 해도 좋고 여러분들은…. (웃음) 선생님이 여러분들을 고생시켜서 무슨 재미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통일교회가 혹이 나오는 것도 아니라구요. 선생님에게 득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부터 정식 코스로 들어가자구요. 이제는 행복이 무엇이냐를 알아야 돼요. 행복은 무엇이냐? 내가 만국을 위하여 희생할 수 있는 사랑의 주인공이 된다면 일 대(代), 이 대, 삼 대, 십 대, 천 대, 만 대를 거친 후라도 아무런 싸움이 없이 세상을 완전히 정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싸우지 않고 한 사람에게도 피해를 입히지 않고 완전히 세계를 정복할 수 있는 끝날을 맞이할 수 있는 길은 이 길밖에 없기 때문에, 현재 통일교회도 이 길을 따라가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이 길을 개척하는 걸음을 걸어 나오셨습니다. 이 길을 중심삼고 시범을 보인 것이 예수님이 이 땅 위에서 간 노정인 것입니다. 그것이 틀렸느냐, 맞았느냐? 사람들이 죽어도 망하지 않는 것이 기독교더라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오늘날 기독교 문화권을 중심삼고 전세계가 하나될 수 있는 이 자리에까지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그 전통적 사상이라는 것입니다. 그 전통적 사상을 선생님이 더욱더 꽃피우고 빛내야 되겠습니다.
과거에는 종교가 남자와 여자를 분리시켜 놓고 가정을 부인하는 길을 갔지만 오늘날 통일교회는 가정을 이루어 그 가정이 몽땅 세계를 사랑할 수 있는 한날을 맞게 해보자고 하는 것입니다. 가정 전체가 나라를 사랑했다 할 수 있는 날을 맞이하게 해주자는 사상은 역사상에 처음 나타난 것입니다. 알겠어요? 그렇지요?
지금까지의 수많은 종교는 나 하나 구원받기 위해서 순교의 길을 가고 희생의 길을 갔지만 통일교회는 그것이 아닙니다. 세계를 살리기 위해서 나를 희생하고 가정을 희생하자는 것입니다. 세계를 사랑하기 위해서 가정이 희생적인 자리에 서게 되면 영원히 하나님편에 설 수 있고, 하나님의 사랑의 근거지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의 신, 하나님이 계시다면, 하나님 혼자서 사랑이 필요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이라 하게 되면 하나님 자체의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소재지가 어디냐 하면, 희생 봉사의 전통을 이어받아 그것을 고스란히 꽃피우고 향기를 내며 열매를 거두어 줄 수 있는 자리입니다. 이와 같은 자리에서 가정을 중심삼고 사랑의 터전을 이루는 곳에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곧 사위기대의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참사랑이 무엇이냐? 부모의 사랑, 부부의 사랑, 자녀의 사랑입니다. 사랑은 서로서로가 희생하는 전통을 갖추지 않으면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깨어지는 법입니다. 그렇지요? 부모가 자식을 위해서 희생하기 때문에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인연은 깨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자라난 아들딸이라면 자기 부모에게 절대로 불효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 남편은 아내를, 아내는 남편을 대해 '당신은 나를 위한다'는 입장에서 서로가 더 위해 주고 더 희생하는 자리가 넓어지게 될 때 그 가정에는 복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정이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복지인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복을 받되 가정만의 복으로서 받지 말자는 것입니다. 복을 받되 나라를 돕고 나서 복받는 가정이 되자는 것입니다. 복을 받되 세계를 돕고 나서 복받는 가정이 되자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정이 천국 가정입니다. 우리 가정만 중심삼고 복받는 일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가정이 복받는 때가 지나가게 되면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그러나 복을 받되 나라를 업고 가정의 복을 받게 되면 내가 가정의 복을 다 누렸더라도 나라의 복을 또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더 나아가서 세계를 업고 가정의 복을 맞아들이게 된다면, 내가 망하고 나라가 망하더라도 또 세계의 복을 받을 수 있는 길이 남아 있기 때문에 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이렇게 올라가서 내가 내 생명을 희생시켜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했다 하게 되면, 다 망하더라도 나는 나중에 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그러면, 예를 들어 볼 때, 은혜받을 수 있고 축복받을 수 있는 가정은 어떤 가정이냐? 일대(一代)에 수고한 터전 위에 복받기를 바라는 가정은 진짜 복받을 수 있는 가정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고로 사람들은 선한 조상을 갖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복이 선대(先代)로부터 상속되어 내려오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그렇기 때문에 전통을 존중시하는 사상이 있는 것입니다. 전통을 이어받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적인 복은…. 세계는 백년 동안에, 일생 기간에 완전히 복귀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요? 세계는 숱한 몇천 년의 역사과정을 거치면서 그 복의 때를 찾아 나오고 있지만 복은 아직까지 안 찾아왔습니다. 세계적인 복의 시대는 아직까지 오지 않았습니다. 세계가 하나되어 하늘땅이 화동하고 하늘땅이 기뻐할 수 있는 세계적인 천지의 때는 찾아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세계가 그때를 찾아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길을 따라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을 중심삼고 볼 때, 대한민국은 남북으로 갈라져 있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백성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국가적인 복을 아직까지 맞지 못했습니다. 그 국가적인 복을 맞기 위해서는 남북이 하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소원은 무엇이냐? 남북한 두 나라가 하나되는 것입니다. 남북한이 하나되어야만 비로소 영원히 망하지 않는 나라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나라를 이루기 위하여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남한에 살고 있지만 남한만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 전체가 통일된 자리에서 우리가 축복을 받고, 모든 민족들로부터 추대를 받고, 민족의 전통을 세워 주는 가정이 되겠다고 하면서 나가야 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살아야 되느냐 하면 나라를 위하여 살아야 됩니다. 남한만이 아니라 남북이 통일된 나라를 위하여 살아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복을 받은 가정이라 하더라도 나라가 비운에 사로잡히게 될 때는 그 나라의 주권과 더불어 그 가정도 거기에 휩쓸리게 되는 것입니다. 나라가 망하게 되면 가정은 아무리 망하지 않겠다고 몸부림쳐도 망하는 운세권내로 말려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가정과 나라중 어느 쪽이 더 귀합니까? 가정보다 나라가 더 귀한 것입니다. 나라가 아무리 흥하더라도 세계가 망하는 운세로 말려들어가게 될때는 그 나라도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망하지 않는 세계를 위해서 부단히 노력해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큰 은혜란 무엇이냐? 은혜가 찾아오는 데 있어서 십년 만에 찾아오는 것은 십년 은혜요, 백년 만에 찾아오는 것은 백년 은혜요, 천년 만에 찾아오는 것은 천년 은혜요, 만년 만에 찾아오는 것은 만년 은혜입니다. 여러분들은 십년 은혜를 받고 싶어요, 만년 은혜를 받고 싶어요? 「만년 은혜요」 그건 틀림없는 것입니다. 그럼 통일교회를 믿고 만년 동안을 희생하더라도 틀림없이 가겠다는 사람은 손들어 보세요? 손 내려요. 만년 동안 희생하겠어요?
어떻게 가겠어요? 만년 동안 가기 위해서는 만년 동안 갈 것을 남겨야 되는 것입니다. 만년 갈 것을 남겨야 됩니다. 만년을 갈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한번 찾아 보세요. 돈을 남기면 그것이 만년 역사의 전통이 되겠어요? 아닙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사랑밖에 없습니다. 박애(博愛)라는 것은…. 예수가 인류를 사랑했다 하는 것은 억천만년 가는 거라구요. 그렇지요? 그렇게 사랑했다 하는 것은 억천만년 가는 것입니다.
나라를 사랑한 애국지사의 사랑은 그 나라가 존재할 때까지 억천만년이라도 남아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계적인 때에 가서는 나라만을 사랑한 애국자는 남아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성현은 남아지는 것입니다. 성현들의 사랑은 세계적이기 때문에 성현들은 나라의 배척을 받으면서 고독단신으로 자기의 생명을 걸고 그 당대(當代)를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후대(後代)를 위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성인은 내적인 인연과 전통적인 생애와 자각의 실적을 남기는 생활을 하기 때문에, 현세에 살고 있지만 미래를 위해 살기 때문에 그러한 입장에 선 성인의 희생적인 사랑의 도리는 세계에 남아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인 중의 성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성인 중의 성인이 어떤 사람이냐? 하나님을 중심삼고 인류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최고입니다.
하나님을 중심삼은 사랑의 인연을 심어 놓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그런 전통을 만년 남기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원리 말씀이 이렇다고 말만 남겨 놓고 실천하지 않는다면 누가 실천을 하겠어요? 실천을 해야 됩니다, 실천. 자식을 사랑할 때도 뼛골에 사무치도록 깊게 사랑하여 자식으로 하여금 부모로부터 받은 사랑의 은공을 잊을래야 잊을 수 없도록 함으로써 자식이 부모의 가르침이 이러하니 나도 이렇게 가야 된다는 마음을 중심삼아 가지고 그렇게 움직이지 않으면 자신의 마음이 괴로울 수 있는 내연적인 터전을 상속시켜 놓아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만년 갈 수 있는 복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자기 후손에게 만년, 만대까지 복을 상속시켜 가지고 받게될 때는 영계에서 누가 그 복을 받아서 나누어 주느냐 하면, 여러분이면 여러분이 나가서 복을 받아 가지고 자기 후손에게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즉, 만년을 복받게 해준 선각자요, 주인인 그 조상이 복을 전부 받아서 나누어 주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계에 가 보면 예수님을 믿는 수많은 후손들이 복을 받는 데는 예수님으로부터 복을 나눠 받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그것이 누구의 뜻이냐? 예수님의 뜻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지 예수님을 믿고 있는 신자의 뜻을 이루는 게 아닙니다. 알겠어요?
여기에서 한 가지 문제 되는 것은 뭐냐? 큰 은혜라는 것은, 큰 복이라는 것은 반드시 거기에 비례되는 수고를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큰 복을 받기를 원하거든, 천년의 복을 받기를 원하거든 천년 동안 그 복이 지탱할 수 있는 수고의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그 복이 남아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그런 걸 알아야 됩니다.
큰 복은 자기 개인의 공적을 의지해 가지고는 받을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역사적인 선한 선조들이 남긴 복의 계대를 받기 위해, 세계적인 선한 선조들 가운데 자기 조상이 없다면, 세계적인 선조와 같은 형의 스승을 모셔야 합니다. 그래서 성인의 도리를 가르침받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성인의 도리를 교육받는 것입니다. 그것을 인계받는 거예요. 그것을 인계받으면 그분들이 바라던 소망의 세계를 내가 이어받을 수 있겠기 때문에….
옛날의 성인들은 개인적인 수난시대에 죽어 갔습니다. 그 개인적인 수난 과정을 거쳐 가정적인 수난과정을 거쳐야 되고, 종족적인 수난 과정을 거쳐야 되고, 민족적인 수난 과정을 거쳐야 되고, 국가적인 수난 과정을 거쳐야 되고, 세계적인 수난 과정을 거쳐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만 세계적인 시대에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수난의 과정에 있어서 희생의 대가를 누가 치를 것이냐? '나는 싫어' 할 수 있습니까? 대가를 치러야 된다는 것입니다.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지 않느냐 이겁니다.
기독교를 보게 될 때, 기독교가 예수와 선조로부터 전통적인 사상을 이어받아 가지고 그 과정을 거치는 데 있어서 그 대가를 누가 치러야 되느냐? 예수가 그러한 것을 심어 놓고 갔기 때문에 그 과정을 이어받은 기독교가 치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예수님처럼 죽음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죽고 살고 해서 살아 남은 사람이 개인적으로 책임을 다하고, 가정적으로 책임을 다하고, 종족적으로 책임을 다하고, 민족적으로 책임을 다하며 나온 것입니다. 나라가 망하면서도 지금까지 남아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남아 나오는 그 은사의 터전이 뭐냐? 그것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끝날에 메시아가 올 수 있는 은사의 터전인 것입니다. 그렇지요? 그러면 그 은사의 터전을 아무 공 없이 맞을 수 있느냐? 아닙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내정적인 심정을 중심삼고 탕감의 과정을 거쳐서 정성들여 점핑해 가지고 타고 넘겠다는 불변의 모습과 그러한 과정, 그런 무엇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이 뭐냐? 생명을 다하는 희생, 생명을 다하는 희생적인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것 이상은 없습니다. 생명을 다하는 희생적 사랑, 그 사랑을 중심삼고 점핑해야 합니다.
점핑을 하는 데에 있어서 자기 리(里)만을 위한 사상을 가진 사람은 더 이상 못 가는 것입니다. 리를 위해서 일하는 데는 세계를 대표해서 한다는 사상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 통일교회 사상은 절대사상입니다.
그러니 통일교회에서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 은혜냐를 생각해 보라구요. 여러분은 그걸 알아야 됩니다. 통일교회에서 받은 은혜라는 것은 6천년, 사실은 몇천만 년이라구요. 몇천만 대(代)의 수많은 인류가 찾아나오던 최후의 결실로 등장한 은사인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여러분 개인의 공적과 개인의 수고만으로 받을 자격이 돼요? 돼요, 안 돼요? 안 됩니다. 받을 도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의 심정을 전부 본받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심정은 하나입니다. 심정은 여기에서도 통하고 저기에서도 통하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아담에서부터 출발하는 부모의 심정, 부부의 심정, 자녀의 심정을 원칙으로 해서 오늘날 이 시대에도 넓은 범위에서 전체를 걸고 싸워 승리의 터전을 닦아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터전 위에서 그러한 책임자를 만나 그 책임자의 명령을 받아 가지고 거기서부터 뿌리를 잡아서 가지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복을 받을 수 있지 그렇지 않고는 어림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뿌리는 얼마나 깊으냐? 여러분의 뿌리는 6천년 이상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이 남아지기까지 하나님과 선조들이 수많은 곡절을 거치고 수많은 대가를 치렀던 것입니다. 그 대가라는 것은, 현실있는 나 한 사람의 생명뿐만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치른 대가를 전부 총합하게 된다면, 대한민국이 문제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세계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대가를 치른 은사를 받은 것입니다.
그런 은사를 대하는 여러분이 통일교회 한 십년쯤 믿은 자격을 내세워서 '내가 당당하지' 할 수 있어요? 어림도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라구요. 이 통일교회에 들어왔다는 사람들, 10년 믿었다든가 15년 믿었다는 사람들, 혹은 36가정이니 무슨 가정이니 하는 사람들, '선생님도 우리가 아니면 뜻을 못 이루지' 하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그런 평을 할 단계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억천만 년에 처음 나타난, 한번밖에 없는 은사를 받아 억천만 년의 수난의 고비를 거치면서 수많은 수고의 대가를 치러 온 터전이 열매 맺힐 수 있는 자리에 내가 서 있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쩌다가 어떠한 은혜인지, 어떠한 인연을 통해서인지 모르지만 역사시대에 한번밖에 없는 시대에 상봉되어, 인연이 되어 이렇게 통일교회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10년 동안 통일교회를 따라 나왔다고 해서 그 10년 동안 산 것을 가지고 자기가 마음대로 할 수 있어요? 어림도 없습니다. 이걸 이어받기 위해서는 천년의 한을 품은 심정을 가지고 정성에 정성을 들여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현재에 세우기 위해서는 내 한 몸이 백번 천번 죽는 한이 있더라도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마음으로도 넘어가겠다고 하고, 행동으로도 넘어가겠다고 해야 됩니다. 그러한 기준도 세우지 않고 복을 받겠다고 하는 사람들은 도둑놈입니다. 공 없이, 수고하지 않고 소유를 탐하는 자리에서 도적의 길이 생겨나고 강도의 길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 자리는 지극히 두려운 자리라고요, 두려운 자리. 그럴 게 아니겠어요?
여러분은 볼모와 같은 자리에 서 있기 때문에 까딱 잘못하면 아담 해와를 타락시킨 장본인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노아를 실수하게 한 장본인이 되는 것이요, 아브라함을 실수하게 한 장본인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열매와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그 열매가 잘 맺혀야 그 실수가 전부 거두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6천년 열매 되는 우리 통일교회를 사랑하시옵소서'라고 말은 잘합니다. 여러분이 6천년의 역사적인 결실이예요? 말들은 잘한다구요.
여러분이 잘못하면 타락한 아담 해와가 또 걸려 들어갈 것입니다. 아담해와를 재타락시킬 수 있는 장본인이 되고, 노아를 또 실패하게 할 수 있는 장본인이 되고, 아브라함을 또 실패하게 할 수 있는 장본인이 되고, 모세를 또 쫓아낼 수 있는 장본인이 될 것 아니예요? 아무리 수고를 했더라도 열매가 안 맺히면 다 허사가 되는 것입니다.
열매에는 진액이 다 들어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여러분에게는 노아의 슬픔, 아브라함의 슬픔, 모세의 슬픔, 예수의 슬픔, 선생님의 슬픔이 다 들어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들어가 있어요, 안 들어가 있어요? 있어요, 없어요? 없기 때문에 그러한 슬픔을 품게 하려고 이런 일을 시키는 것입니다. 그 슬픈 것은 배가 고파서 슬픈 것이 아니요, 못살아서 슬픈 것이 아니요, 돈이 없어서 슬픈 것이 아니요, 처자가 없어서 슬픈 것이 아닙니다. 뭐가 없어서냐? 나라가 없고 세계가 없고 하나님의 주권이 없기 때문에 슬픈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정을 버리고 남편을 버리고 자식을 버리고 교회를 뒤에 두고 한 사람의 거지와 같은 모습으로 한 많고 외로운 곳을 찾아가서 나라를 건국하기 위한 기초를 닦는 것이요, 세계를 창건하기 위한 기초를 닦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나라의 주권을 세우기 위한 전통적 사상을 갖춘 올바른 기수가 되어 가지고, 이것을 백 사람이면 백 사람에게 전해 주기 전에 열 사람을 통해서 점핑하여 전해 줄 수 있는 공을 세우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일을 하는 것입니다.
어느 한 지역에 갔을 때, 역사과정에 왔다 갔던 아무리 훌륭한 선조들이라도 나를 본받고 나를 후원하지 않을 수 없다는 당당한 권위를 가지고 피땀을 흘리며 정성을 들이라는 것입니다.
그 동네에 효자비가 있다면 그 비 앞에 설 때마다 '너는 얼마나 효했느냐? 나는 하늘 부모 앞에 이러이러한 심정을 가지고 효를 하고 있으니, 이제부터 너는 내가 효하는 것을 배워야 된다'라고 교훈을 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효자비를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혹은 역사상의 충신들의 행적을 보게 될 때, 그들에게 충고할 수 있는 자신들이 되라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일대에 충신의 이름을 남겼지만 나는 천세 만세의 역사를 뒤넘이쳐 가지고 끝날에까지 충신의 이름을 길이길이 남길 전통을 찾아가고 있다'는 그러한 입장에서 나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나라가 슬프면 나라보다 더 슬픈 자리에 서지 않고는 그 나라를 구할 수 없습니다. 세계가 슬픈 세계가 되었다면 그 세계를 구하기 위해서는 세계보다 더 슬픈 자리에 서야 합니다. 그래야 세계를 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세계보다도 더 좋은 자리에 서 가지고는 세계를 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의 축복받은 가정들에게 있어서 퇴폐적인 사상이 무엇이냐? '이제는 잘살아야 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잘사는 것도 나라를 찾아 놓고 잘살아야 합니다. 또, 나라를 찾아 놓고 잘살 수 있는 한 때를 가졌다고 하더라도 세계를 향해서 또 가야 되는 것입니다. 세계와 수난길을 개척해 놓고, 대표적인 길을 간 후에 잘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라를 갖더라도 잘사는 자리를 원하지 않아야 합니다. 세계를 중심삼고, 하늘 앞에 잘살았다는 조건을 남기지 않게끔 못사는 입장에서 끝까지 참고 나가야 합니다. 아버지를 모시고 나가는 아들딸이 되기를 원하거든 효의 책임을 다하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고생하면 우리도 고생해야 되고, 아버지가 슬픈 생활을 하면 우리도 슬픈 생활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불철주야 잠도 못 주무시고 나가시지 않느냐? 그렇지요? 거기에 비하면 여러분은 잠잘 시간이 있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잠자는 여덟 시간만은 모든 것을 잊어버릴 수 있지만, 하나님은 24시간 내내 잊어버릴 수 없는 역사적인 한의 심정을 고스란히 지니고 불타는 마음으로 투쟁의 역로를 엮어 나오신다는 사실을 생각하여 볼 때, 자고 나서는 얼굴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회개하는 심정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효자의 모습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매를 맞고 쫓기는 입장에서, 도망하여 산꼭대기에 올라가 가지고 무릎을 꿇고 아버지를 부르더라도 당당한 입장에서 부를 것이 아니라, '어찌하여 아버지의 위신이 이렇게 되었으며, 자식이 이렇게 몰리는 것을 보시는 아버지의 체면이 무엇이냐'고 슬퍼서 눈물 흘릴 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효자의 심정을 가지고 가야 할 길이 통일신도들이 가야 하는 전통적인 노정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천세 만세 남겨질 수 있는 은혜는 개개인 누구나 다 원하지만 그것을 획득하는 것은 누구나 다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획득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만이라도 획득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 800내지 1200가정 가운데에서 하나님이 그 사람을 찾아오시어 '너 하나가 천 가정 만 가정이 수고한 것을 대신했다'고 칭찬을 하실 뿐만 아니라 상금을 주시고, 상금을 주실 뿐만 아니라 천추만대 청사에 길이길이 빛나라고 선포식을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그렇게 하실 수 있는 하나의 딸이 있으면 그 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은 풀려 나갈 것입니다.
백 명의 효자보다도 그 백 명을 대표할 수 있는 한 사람의 효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천 사람의 충신보다도 그 천 사람을 대표할 수 있는 한 사람의 충신을 찾고자 하는 것이 하늘의 뜻이 아니냐!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 오늘날의 이 은혜라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듯이 가상적이요 망상적인 은혜가 아닙니다. 은혜는 희생적인 사랑을 기반으로 하여 맺어져 오고 그 인연이 상속된다는 것을 알고 통일가 전체가 합하여서 이 나라 이 민족을 위하여 희생하고 이 세계를 위해서 희생해야 되겠습니다. 내 일신이 객사의 몸이 되고, 혹은 쓰러져 개밥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내 뼈는 변하지 않는다는 각오를 가지고, 예수의 살은 여기저기 찢겼더라도 뼈는 꺾이지 않았던 것과 같이 나도 그런 결과를 남기면 한이 없겠다는 심정을 가지고 나가야 합니다.
천년 만년 역사적 과정을 거쳐서 찾아온 하늘의 은사를, 비록 가냘픈 여자의 몸이지만 어떻게 내 손길을 통하고 내 발걸음을 통하고 나의 간절한 울부짖음과 간절한 요구와 간절한 행동을 통하여 이 세상에 남길 것이냐! 비록 자기 일대에 그것을 남기지 못하더라도 자식의 손을 붙들고 눈물을 흘리며 '부디 내가 간 전통을 상속받아 가지고 내가 바라고 원하는 나라를 기필코 이루어야 된다'고 유언하고 가야만 이것이 천년의 유업으로, 만년 복귀의 터전으로 남아질 것이 아니냐?
오늘 이때가 문제가 아닙니다. 이후에 어떻게 이 전통을 이어받게 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런 문제를 중심삼고 볼 때, 여러분 스스로가 전통을 세우기 위해 나선 하늘의 대표자인 것을 알고, 여러분이 전통적인 사상을 이어받아서 세우는 기수가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은혜는 책임해야 할 수고를 동반하는 것입니다.
민족을 구하기 위해서, 민족 이상의 민족을 구하고도 남을 수 있는 수고의 대가를 누가 치를 것이냐? 오늘날 통일교회가 민족 위에 나타나기를 바라거든 민족의 수난과 고비를 대신 짊어지고 나타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시 누군가가 깔고 앉게 되는 것입니다. 민족의 수난의 대가를 치러 가지고 올라갈 때는 끌어내릴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민족의 수난의 대가를 치르지 않고 올라갔다가는 끌어내림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분이 누구냐? 하나님입니다. 제일 수고를 많이 한 수고의 대왕이 누구냐?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을 창조하신 그날부터 인간을 보지 않을래야 보지 않을 수 없는 운명을 지닌 아버지의 입장에 계시는 하나님, 사시장철은 물론이요, 6천년 역사 속에서 잠시라도, 한시간이라도 떼어 놓을 수 없는 인간상을 붙들고 뒤넘이치는 신음과 울부짖음을 생활철학으로 아시고, 그것을 걸고 인간을 가누어 주는 생활을 해 나오신 하나님이 얼마나 불쌍한 분이냐는 것입니다.
어떠한 독재자가 원수를 총칼에 쓰러뜨리듯이 간단히 해결하고 간단히 끝낼 수 있는 길이 있다면 도리어 그 입장을 부러워하실 수 있는 억울하고 분통한 입장에 계시는 하나님이심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 땅을 찾아오실 때는 불쌍한 민족을 안 찾아오실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대한민국을 두고 볼 때, 대한민국에 몇천 년만에 이 한때가 찾아왔느냐? 5천년, 반만년의 역사를 거쳐서 비로소 이 한때가 찾아온 것임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 민족은 역사상의 어떠한 민족보다도 수고한 민족이요, 어느 민족보다도 약한 민족으로서 아시아 강국의 틈바귀에서 침략자들의 총칼에 혹은 말 발굽에 쓰러져 그 신음소리가 삼천리 반도에 그쳐 본 적이 없는 고독한 민족이요, 애절한 민족이 아니었던가!
그렇지만 하늘을 사랑하고 절개를 존중시하고 지조를 남기기 위해 몸부림치는 여성상이 이 민족에 있었기 때문에, 남자들은 믿지 못하더라도 여자들은 믿을 수 있는 세계적인 대표의 형태로, 환란 중에서도 절개를 지켜 하나님을 모시고, 충절을 다해서 남편을 위하는 절개와 지조를 남길 수 있는 여성들이 이 나라에서 나올 수 있는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한국은 수고하시는 하나님이 버릴 수 없는 것이 아닐 것이냐!
한국 가운데서도 영광의 자리에 선 단체가 하나님의 뜻을 받드는 것이 아니라 제일 비참한 자리에 선 단체가 하나님의 영광의 은사를 받을 것입니다. 근세에 한국 민족으로부터 지탄을 받고 한국 종교계로부터 지탄을 받는 제일 비참한 무리요, 제일 비참한 입장에 선 종교라면 그 종교는 통일교회일 것입니다. 그런 종교는 통일교회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또 제일 비참한 사람이 있다면, 그런 비참한 종교를 지도하고 있는 통일교회의 스승 외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불쌍하신 분입니다.
공의의 법도를 세우기 위해서 그렇게 수고하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공의의 뜻을 대하여 세계를 향해 정성을 다하는 마음을 가지고, 수난을 받고 핍박을 받고 가는 외로운 거리에서 서산에 뉘엿뉘엿 넘어가는 태양을 바라보면서 잠자리를 염려하고 저녁식사를 염려하는 외로운 신자들의 배후에는, 하늘의 동정의 빛발이 숨어 나왔다는 사실은 그 누구도 모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데서 망할 줄로 알았던 무리가 망하지 않고, 떨어져 썩어 버릴 줄로 알았던 것이 썩지 않고, 거름똥이 되어 망해야 될 텐데도 그 거름똥 속에서 생명의 한 싹이 틔어나 가지고, 이렇게 삼천리 반도 방방곡곡에 새로운 운동을 제시할 수 있는 아낙네의 무리로 나타나기까지 그 배후에서는 얼마나 많은 수고의 대가를 치렀겠는가를 여러분이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천년 사연이 깃들어 있는 수고의 터전 위에, 억조창생들이 소원의 한날을 찾기 위한 소망을 품고 울부짖으며 죽음길을 기꺼이 갔던, 애혼들의 한이 서려 있는 터전 위에 선 여러분 자신들임을 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엄청나다면 엄청난 시대에 태어났고, 단 한번밖에 없는 인연 가운데에 부름을 받았고,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을 단 한번밖에 없는 역사의 흐름길의 쌍곡선이 우리 시대에, 내 일대의 생애노정을 중심삼고 교차되는 그 정상에 불리워졌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6천년의 인류역사상에 있어서 타락의 역사가 제아무리 슬펐고 제아무리 곡절이 많았다 하더라도 오늘날 이 엉클어진 인류 만민을 점령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 이념 가운데에서 역사적인 부활이 남아지는 것이요, 하나님의 한과 하나님의 서러움이 여기에서 해원성사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만국의 만사를 해결지을 수 있는 기원이 된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여러분은 이러한 시기에 태어난 것을 무엇보다도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자신의 얼굴은 아무것도 아니요, 자신의 모습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여러분의 선조들이 선의 공적과 터전을 얼마나 세웠는지는 모르지만, 여러분은 천추만대에 빛나는 선조들의 공적의 인연을 따라 하늘이 찾아와 도와주는, 역사상에 단 한번밖에 없는, 여러분의 선조들이 받고 싶었던 은사를 전체를 대신해서 대표적으로 받는 자신들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삼천리 반도에 신음과 죽음이 엇갈리는 역사가 엮어져 나왔지만 그 역사를 밟고 넘어오는 터전에서 그 모든 것을 일시에 탕감하고, 그것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복을 받을 수 있는 자리가 오늘 여러분이 서 있는 통일교단이라는 것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선생님을 만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필연적인 역사적 운명의 길을 통해서 기정적으로, 내정의 인연이 결정지어져 가지고 만나진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르지만 그 배후에는 부정할래야 부정할 수 없는 힘이 있습니다. 그 무엇이 뿌리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번에 여자들을 동원시키는 데 있어서 동원되지 않으려고 버티는 사람, 마음으로 불평하는 사람도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동원되어 나가는 사람의 뒤를 바라보게 될 때, 자기가 안 나가고는 견딜 수 없으리만큼 마음에 그 무엇인가가 휘몰아치는 어떤 힘을 느꼈다면, 그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이냐? 역사적으로 영원히 남아져야 할,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소원과 심정으로부터 남기고 싶었던 천운의 힘이 배후에서 내밀기 때문에 이것이 여러분의 환경을 밀어낼 수 있는 힘으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이 힘이 동원되는 여러분이 선 이 자리는 천지의 만복을 받은 것보다도 더 감사할 수 있는 복된 자리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이런 자리에서 양심의 고통을 받고 사는 사람은 벌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심으로 불러 일깨워 가라고 명령하셨는데도 불구하고 거기에 보조를 안 맞추게 되면 망하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역사적 시대에 선생님이 앞서 가는 길이 평탄한 길이 아니며, 선생님이 겪어 온 것이 여러분 일대에 당하지 못한 수난길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효의 도리를 다하고 충의 도리를 다하여야 할 여러분의 입장인데, 아직까지 여러분의 효의 기준은 어느 기준이냐? 여러분은 가르침을 받았으나 배운 것을 아직까지 실천하지 못한 기준이요, 천명을 받들어 싸움터에 출전하라고 명령했는데도 출전하지 못한 입장이 아니냐! 그렇게 위신을 세워 가지고 남아질 것 같아요? 그럴 바엔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자기 몸을 가꿀 수 없고 자기 체면을 세울 수 없는 불쌍한 신세인데, 하나님께서 책임을 지시고 체면을 세우고 위신을 갖출 수 있는 이 한때를 허락하신 것은 둘도 없는 고마운 은사라는 것을 알고, 여러분이 가는 걸음 앞에 하늘의 소망이 찾아올 수 있고, 혹은 머무는 그 자리에 하늘의 소식이 싹틀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거기서부터 여러분이 재봉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놀라운 은사요, 그야말로 기적 중의 최고의 기적은 이 일밖에 없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인연 가운데에서 만난 선생님, 선생님을 중심삼고 인연되어진 남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딸들은 우연히 난 아들딸들이 아니요, 역사적인 아들딸들인 것입니다. 이 역사적인 아들딸들을 중심삼고 볼 때, 그들이 눈물을 흘리고, 그들이 혹 외로운 자리에서 길거리에서 사탄세계의 아들딸로부터 조롱을 받고 농락을 당하는 일이 있게 될 때, 그것은 헛되이 흘러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한 일이 하나 둘 가해지는 그 전부는 여러분의 갈 길을 넓혀 주는 것이 되고, 여러분의 외로운 노정을 탕감시켜 주는 것이 되고, 그럼으로 말미암아 민족을 대표해서 하늘 앞에 바쳐 드릴 수 있는 깨끗한 제물이 빨리 마련되어질 수 있는 제물의 노정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외로운 아들딸을 남겨 놓고 가는 것이 도리어 복이 될 수 있고, 사랑하는 남편을 뒤에 두고 가는 것이 복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 심정을 나라를 위해서, 뜻을 위해서 시간 시간 퍼부을 수 있고 바쳐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자리는 보고 싶은 남편과 보고 싶은 아들딸을 볼 수 없는 자리이기 때문에, 보고 싶어하는 마음이 끊어지지 않으면 끊어지지 않을수록, 거기에서 하늘을 위한 희생의 사랑이 생기는 것이며, 또 하늘을 위한 희생적인 사랑의 터전이 넓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통일가가 가야 할, 희생의 대가를 치러 가지고 복귀할 그 터전이 앞으로 국가와 민족을 넘어서 세계로 뻗어 나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생각할 때, 오늘날 우리가 처한 자리가 복스러운 자리라는 사실을 여러분은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연약하고 가냘픈 여성의 몸으로서, 나라를 사랑하는 데 있어서 이순신 장군보다도 더할 수 있는 시기를 맞은 것입니다. 부모를 사랑하는 데는 누구보다도 효성을 더 할 수 있는 입장이요, 세계를 사랑할 수 있는 인연을 자아낼 수 있는 입장이요, 역사상에 한번밖에 없는, 전체적인 사명과 책임을 할 수 있는 이때에 처해진 자신임을 망각하지 말고 여러분은 정성에 정성을 다하여 수고의 대가를 치르기를 더디 하지 말기 바랍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도 부끄러움을 느끼고, 늦게 자고도 한 시간이라도 더 말씀을 전하고 싶은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사람을 그리워하고 사랑하기를, 그리운 사람을 만나면 밤이 깊어 가는 줄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워하고 사랑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딸과 같이 상대적 입장에 있는 사람을 미칠듯이 사랑하고 싶고, 미칠듯이 주고 싶고, 미칠듯이 위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그치지 않는 자리에서 밤을 지새워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멀리 계시지만 그와 같이 계실 것이요, 영계에 있는 수많은 영인들은 지금까지 몇천 년의 역사적 간격을 두고 있지만, 심정세계에서는 거리를 초월하기 때문에, 나에게 동조할 수 있는 권내에 있기 때문에 내 갈 길을 협조해 주고 내가 가는 뜻 길을 받들 수 있는 자리에 설 것입니다.
역사가 뒤넘이치고, 모든 주의와 세계 운세가 나와 더불어 뒤넘이칠 수 있는 거룩한 길이 오늘날 여러분이 이 국가와 민족을 중심으로 하여 세계적으로 수고의 대가를 치르기 위해 가는 길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민족을 위해서 정성을 들여 보고, 자기 남편 이상 사랑해 보고, 자기 아들딸 이상 사랑해 보라는 것입니다. 세계를 위해서 정성들여 보고, 자기 아들딸 이상 사랑하고 정성들여 보라는 것입니다. 360여일이 가기 전에 자기 남편을 잊어버렸고, 자식을 잊어버렸다 해도, 나라 때문에 세계 때문에 그랬다면 그 자식과 남편은 병들지 않을 것입니다. 굶어 죽을 입장이 되었다 하더라도 굶어 죽지 않을 것입니다. 절대 안 죽는다는 것입니다.
이 통일가에서 맞을 수 있는 은사는 억천만세에 남아질 은사요, 역사상에 단 한번밖에 없는 단 하나의 은사인 것입니다. 그러한 은사를 맞으려니 얼마나 희생을 해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냐! 얼마나 정성을 들여서 대가를 치러야 될 것이냐!
선생님이 여러분 앞에서 노력하는 것은 여러분에게 빚을 지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빚을 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고생하는 자리에 세워 놓고 내가 편하려고 한다면 망하는 것입니다. 그런 단체는 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고생시키고 책임을 안 진다면 그 하나님은 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더 고생시킬 수 있는 자리가 이 자리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고생을 하시는 데 있어서 그 고생을 보람 있는 고생으로 여기고 기꺼이 하실 수 있는 입장에 서게 해 드릴 수 있는 입장에 선 것이 통일교회이기 때문에, 고생으로 신음하는 하나님을 고생으로 탕감해 가지고 해방시켜 드릴 수 있는 길이 여기서부터 성립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고생은 고생으로 탕감해야 되는 것이 원칙입니다. 여러분이 고생을 할 때, 하나님이 '얘야, 이제 그만 해라. 너 하나를 놓고 내가 백번 죽어도 좋다'고 추켜 주실 수 있는 입장이 된다면 천하가 뒤집어질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고생길을 피해 갈 것이 아니라 하늘을 대신하여 더 고생하겠다는 마음을 중심삼고, 굶주린 배를 움켜 쥐고 힘없는 다리를 끌고 지친 몸을 이끌고 가냘픈 여성의 몸으로서 절규하는 심정을 가지고 나서게 될 때,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은 뿌리를 깊게 내릴 것이고, 민족을 넘어 세계가 연결될 수 있는 천운의 노정은 나를 통하여 파동치고 세계로 뻗어 나갈 것입니다.
그것은 흡사 방송국과 같은 입장입니다. 방송국에서 내보낸 전파가 파장을 통해서 뻗어 나가게 되면 세계를 돌고 돌아 온 우주에 퍼져 나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가 그럴 수 있는 자리에서, 맥박의 동기가 되고 생사의 기원을 좌우할 수 있는 절대적인 자리에 서서 이런 사명을 한다는 것은 지극히 놀라운 사실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느때에 그런 자리에 설 것이냐? 천 명이면 천 명, 팔백 명이면 팔백여 명의 여러분이 하나로 단결해 가지고 한꺼번에 3년의 기간동안에 바치는 은혜가 역사시대에 어떤 여성들이 바치던 것보다도 크게 될 때는, 역사상의 여성들은 틀림없이 우리 품안에 품기게 되고, 우리 앞에 자연히 무릎을 꿇게 될 것입니다. 그럴게 아니예요? 그래서 120명이 아니라 1,200명을 표준해 가지고 동원한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하겠습니다.
열 사람이 하나되기는 힘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되기 쉬워요? 그래서 제일 먼저는 여러분 열 사람이 하나되라는 것입니다. 하나되어 가지고 지구장이나 지역장들 앞에 그들이 전통으로 본받도록 이렇게 하나되었다고 가르쳐 주라는 것입니다. 지구장 지역장들이 그렇게 못 했기 때문에 통일교회가 망쳐졌다는 것입니다.
이용해 먹고 심부름을 시켜 먹고 헐뜯어 먹고 피를 빨아먹었기 때문에 식구들이 다 도망가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식구들을 다 쫓아 버렸으니 이제 식구를 모으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이냐? 내 자신을 빨리 먹이고 희생해서 먹여 줄 수 있는 일을 하지 않으면 식구들이 안 생기는 것입니다.
그것을 누가 해야 되느냐? 본래 어머니가 자식을 키울 때 자기의 살을 나누어 주는 것 아니냐. 어머니의 살은 아버지의 뼈에 달려야 할 살인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살은 군살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여자들이 정서적인 면에 있어서 일방적인 정은 남자보다 더 깊고 높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방을 갖추어 가지고 정성들이게 되면, 눈물을 흘려도 남자가 한 번 울 때 여자는 세 번은 울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탕감의 양을 많이 필요로 하고 탕감을 위한 수고의 모양과 형상을 많이 필요로 하는 이런 입장에 여자를 내세우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이치인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이런 책임을 해 가지고 부디 망하는 운명을….
이 민족이 망할 수 있는 운명을 막아 나오면서 반만년의 역사 동안 남아진 것도 기적인 것입니다. 이것은 한때를 마련하기 위한 우리 선조들의 공적의 터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오늘날 우리들은 우리 시대에 열매 맺어야 할 입장에 있기 때문에 보람된 열매를 맺어 가지고 앞으로의 후대 후손들 앞에 고생을 남겨 주지 않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깨깨 말라붙어 가지고 죽어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이 뜻을 이루기 전에는 돌아올 수 없다는 결의를 가지고 나가게 되면 빨리 돌아오는 것입니다. '아이구, 이제 나는 못 견디겠다'고 하면 그 일이 흐지부지 연장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알고 여러분 열 사람이 하나되어야 하겠습니다. 지구장, 지역장과 하나되어야 되겠습니다.
사랑의 터전이 어디냐? 여러분들은 서로서로를 사랑의 소재지로 삼고 사랑을 하고, 그 사랑이 지구에서 사랑의 소재지를 찾고, 혹은 민족에서 사랑의 소재지를 찾아 가지고 뿌리를 뻗을 수 있게끔 접붙여야 할 입장에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물을 주어야 하는데 물이 없으면 물 대신 눈물을 뿌리고 피를 뿌려 주어야 하는 것이 하늘의 아들딸의 입장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희생의 대가를 치르지 않고는 남아질 수 있는 무리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이왕에 나선 걸음이니 고이 이 길을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길을 가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은혜를 남기기 위해서입니다. 천년 은혜를 받기를 바라거든 천년 수난의 길을 극복하고, 만년 은혜의 길을 가기를 원하거든 만년 수난의 길을 극복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통일교회가 고생한 것은 20여 년밖에 안 되고 선생님이 고생한 것은 50여년 밖에 안 됩니다. 이것은 모든 수난의 길을 탕감하기에는 너무나 작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가고 또 가고, 하고 또 해야 될 책임감을 느껴야 하겠습니다.
한 사람이 짊어져야 할 짐의 양은 정해져 있는 것입니다. 그 양을 넘게되면 무리하게 됩니다. 무리하게 되면 모든 것이 끝장이 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책임해야 할 양 이상을 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 이상으로 빚을 지우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자식 앞에 빚을 지려고 하지 않고 빚을 지우려고 하는 것이 부모이기 때문에 여러분이 하나님을 위해서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그 짐을 대신 맡아 여러분이 일을 하려고 해도 하지 못하게 하고 편안한 자리에 안식의 터전을 마련해주려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여러분이 이 민족과 이 나라를 위해서 수고하는 것이 하나님이 보시게 될 때, 견딜 수 없고 참을 수 없을 만큼 고마와하실 수 있는 것이 되면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국가는 틀림없이 빨리 복귀될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여러분이 지방에 나가서 일을 하게 되면 나는 본부에 있지만 여러분을 찾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나는 천리를 알기 때문에 빚지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서울의 근거지에서 저 남해까지 가기에는 너무나 힘이 듭니다. 도에 도를 넘어 찾아가기에는 너무나 시간이 허락지 않습니다. 내가 찾아가지는 못하지만 여러분이 당하는 수난이라든가 고통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그런 일을 당할 때에 친구가 되어 주시고 내가 서글픈 자리에 섰을 때 하나님께서 인도하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당신의 딸들이 그렇게 서글픈 자리에 있거든 나를 대하던 그 이상의 마음을 가지고 그들을 대해 주시고, 나도 거기에 협조와 위로와 동정의 마음을 갖게 하여 달라고 하나님 앞에 호소하는 스승인 것만은 틀림이 없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수고를 하면서도 선생님을 원망하고 싶은 마음은 꿈에도 생겨나지 않는 것입니다. 왜? 여러분의 마음이 그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수난길을 걸어왔지만 하나님을 대하여 원망하고 싶은 마음을 갖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죽음을 각오하고 죽음의 길로 나섰을 때, 나도 모르게 몇십 배 평안한 자리에 옮겨 놓아 주시던 하나님인 계시는 것을 생각할 때, 여러분이 수난길에 서 있다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 길은 갈 수 없는 복된 기준을 수난을 통해서 우리에게 상속해 주는 길인 것입니다. 따라서 더 복받을 수 있는 통일교회가 되고 더 복받을 수 있는 여러분이 되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그런 걸음을 걷지 않을 수 없다는 사정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기에는 온갖…. 스승의 희생하는 사랑도 여기에 묶어져야 되고, 여러분의 희생하는 사랑도 여기에 묶어져야 합니다. 이 사랑은, 선생님이 여러분을 위하고, 여러분이 선생님을 위하는 이 사랑은 누구를 위한 것이냐? 나라를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랑으로 삼천리 반도를 얽어매고, 삼천만 민족의 가슴 가슴을 얽어매어, 여러분과 선생님이 주고받는 사랑의 마음, 그 인연을 중심삼고 울부짖게 되면 삼천만 민족은 꺾여 나가는 것입니다. 꺾여 나가도 말이 안 통할 때에는 짤려 나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할아버지가 없는 사람이 있거든 이제 할아버지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고, 할아버지의 사정을 알 수 있도록 만나게 해주니 고맙다고 해야 합니다. 동네방네에는 할아버지도 많습니다. 할머니도 많고 아줌마도 아저씨도 많습니다. 어머니도 많습니다. 언니 동생도 많습니다.
그런 입장에서 볼 때, 예수님이 아버지를 사랑하지 못하였고, 할아버지를 사랑하지 못하였고, 할머니 어머니를 사랑하지 못하였고, 형님 누나 동생을 사랑하지 못하였으니, 여러분은 이 나라를 대표해서 그런 예수님을 모셔 오기 위해 사랑의 터전을 넓히는 아내의 신세, 신부의 신세에 처하게 된 것이라고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만나는 할아버지를 예수님의 할아버지 대신, 할아버지를 사랑하고 싶어했던 예수의 한을 풀어드린다는 마음을 가지고 사랑해 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를 사랑할 수 있는 대표적인 형이 누구냐? 할아버지요, 아저씨요, 형님 혹은 오빠요, 동생일 것입니다. 남자로 치면 그렇다는 거예요. 여자로 치면 할머니요, 아줌마요, 언니 혹은 누나요, 여동생일 것입니다. 이 여덟 가지의 형입니다. 이 여덟 형의 사람을 세계 인류를 대표해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들을 모아 놓고 '오, 세계 인류여, 나를 주목하소서' 혹은 '삼천만 민족이여, 나를 주목하소서' 혹은 '군민·도민이여 나를 주목하소서' 이들 대표자 여덟 사람을 뽑아 가지고 이들 앞에 '내가 정성을 다해 사랑했다는 표를 세우겠나니, 이 표를 세우는 데에 기여해 주시오'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반대할 사탄분자가 있으면 막으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나는 죽더라도 기필코 이 뜻을 세우고 가겠다'고 사수하는 자리에 서게 될 때, 혼자의 힘으로 부족하면 옆에서 협조할 수 있는 열 사람의 동조자가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여러분은 성신보다 낫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성신은 예수와 둘이서 지금까지 자녀를 찾기 위해서 수고해 나왔지만 여러분은 선생님을 중심삼아 가지고 열 사람이 하나되어서 자녀를 찾고 나라를 사랑할 수 있는 입장에 섰으니, 핍박이 심하다 해도 극복하기 쉬울 것이 아니냐! 서로를 위해 눈물 흘려 줄 수 있는 인정어린 대상이 있고, 서로서로 격려할 수 있는 자리에 있기 때문에 옛날 선지자들보다 복된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고맙게 생각해야 합니다.
뜻이란 무엇이냐? 뜻은 세계를 위한 것이요, 후대를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 성사가 대한민국을 위주한 것입니까? 세계를 위한 것입니다. 현재만을 위한 것입니까? 현재는 망하더라도 후대를 위한 것입니다.
현재에 만족하며 행복을 노래하고 춤추는 사람에게는 끝이 가까이 오지만, 미래에 소망을 품고 현재를 극복하는 사람에게는 밝은 내일이 찾아오는 법입니다. 이것이 선생님의 사상입니다. 나는 아직까지 지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선생님은 참으로 기가 막힙니다. 속이 뒤집힐 지경이라는 겁니다. 여러분들에게 온갖 정성을 다 들였건만, 기가 막히다는 것입니다. 동냥이나 협조는 못 해줄망정 쪽박은 깨지 말라는 속담이 있는데 그와 마찬가지 아닙니까? 9부능선을 넘어가는 최후의 고빗길에 있는 이때에 있어서 넘어가라고 후원은 못 해줄망정 끌어내려서야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정을 중심삼고 한번 보십시오. 여러분들은 천사장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부인들은 어떤 입장입니까? 완성의 입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장성의 입장에 있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을 중심삼고 삼천리 반도에 천 이백 명을 동원하였습니다. 이것은 세계적인 일이라는 것입니다. (중략)
본연의 아들딸로서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는 조건을 세우고 넘아가야 하겠기에 천 이백 명을 중심삼고 지금 우리가 이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원래는 1970년도 정월 초하룻날부터 이 노정을 출발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특별히 3년노정을 갔다는 조건을 세워 주기 위해서 12월 초하룻날 출발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여러분을 동정했습니다. 선생님이 그렇게 했나 안 했나 영계에 가 보세요. 여러분은 뜻이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알기나 해요? 하늘의 뜻이 여러분들 생각대로 쉽게 이루어질 것 같아요?
앞으로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자, 말해 보세요. 터놓고 이야기해 봅시다. 선생님의 말이 틀렸다는 사람은 말해 보세요. 원리적으로 말해 보라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여러분 모두에게 월급을 다 주고 싶습니다. 예산편성을 해서 월급을 주고 싶은데, 원리적으로 못 하는 것입니다. 왜 못 하느냐? 예산편성을 하려면 먼저 선생님의 가정생활의 예산부터 세워 놓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대통령이 나라의 세금을 받아 가지고 쓰는 것이 원칙이지 직접 벌어 가지고 쓰는 것이 원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원칙 있어요?
선생님 가정이 쓸 예산편성을 먼저 해 놓고 순차적으로 협회본부, 승공연합, 공장 이렇게 예산편성을 해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을 놓고 볼 때 청와대에서 쓸 예산을 확보하고 나서야, 정부를 중심삼고 순차적으로 편성하는 것이 원칙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그럴 수 있는 기반을 세워 놓았습니까? 이것이 문제입니다.
계획했던 것이 백 퍼센트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선생님이 정월 초하룻날에 여러분에게 일년 동안 무엇 무엇을 해야 된다고 일러주었는데도 불구하고, 연말에 가서 결과를 타진하게 되면 제대로 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조건에 다 걸리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계획을 세워서 조직적으로 사업을 할 줄 몰라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선생님도 머리가 조직적으로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주먹구구식으로 하고 싶어서 하는 줄 알아요?
전체 앞에 게릴라전을 해야 합니다. 이사분기니, 삼사분기니 예산편성을 해서 그것을 여러분이 못 하게 되면 책임추궁하는 것이 제일 간단한 방법입니다. 그것은 누구도 반대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조직권내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월급을 주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지구장들은 제사장이기 때문에 월급받을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월급 받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제사장입니까? 지구장들은 피를 뿌리고 살을 깎는 자신의 희생에 대한 대가가 적다 하더라도 천지가 왔다갔다할 수 있는 대가로 생각하고 받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성경을 중심삼은 전통적인 사상입니다.
제사장이 무엇입니까? 제물대신입니다. 산제물 대신이기 때문에 소유관념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 뭘 갖겠다 하는 관념이 있어 가지고는 제물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의 아들이다, 내가 어느 지파에 속해 있다, 그런 생각 가지고는 제물이 못 되는 것입니다.
또한 존재의식이 없어야 합니다. 스스로 책임추궁을 하면서 내가 해야 할 사명을 다하지 못했다는 것을 한(恨)할 수 있는 입장에서 가야 하는 것입니다. 가면 갈수록 머리 숙이고 가야 하는 것이 하늘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눈물과 피와 땀을 흘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선생님의 전통적 사상입니다. (중략)
이제부터 남아지는 선생님의 노정은 여러분들이 필생을 통해서 세워 가야 할 전통의 족보가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들은 교육을 다시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가끔 일본 식구들한테 여러분에게 하지 않은 말을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가는 일본 식구들에게 몽땅 빼앗길 것이 아니겠느냐는 겁니다.
이런 원리적인 견해로 볼 때, 이번 가정 배치를 잘했어요, 못했어요? 대답해 보세요. 그래, 선생님의 설명을 들어야 대답하겠어요? 무슨 효자가 그래요? 무슨 충신이 그래요? 그래서는 안 될 때가 왔기 때문에 금년에 내가 교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루에 2천여 원 이상을 지불하고 있습니다. 공장도 역시 금년에는 고비를 넘기리라고 보고 있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여러분들이 합심해 가지고 하나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의 방향이 한 방향이 되어야 할 게 아닙니까?
여러분은 선생님이 없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누가 선생님 대신 책임질 사람이 있어요? 모두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협회장도 불쌍한 사람이고, 여기 모인 여러분들도 다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생각 안 해 봤어요? 그러니 사람을 키워 줘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다 외로운 사람들 아닙니까?
여러분들이 어렵게 살면서도 선생님에게 아무개가 어렵게 산다고 보고하면 기쁜 마음으로 돈을 내주고 싶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의문점이 많이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보면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아벨을 죽인 가인에 대해서, 그 가인을 죽이는 자는 칠배의 벌을 받으리라고 하신 내용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중에 어느누구도 그 점에 대해서 묻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노아는 120년 동안 방주를 지었습니다. 노아는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미친 녀석이라고 비웃음을 받았을 것입니다. 자신의 외아들을 제물로 잡아 바치려 했던 아브라함, 바로 궁중에서 살다가 뛰쳐 나온 모세,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30년을 수도생활하였던 세례 요한도 세상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았겠어요? 세상 사람들이 미친녀석이라고 전부 다 비웃었을 것입니다. 어머니, 아버지라도 그거 잘한다고 칭찬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정상적인 생활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왜 그렇게 했을까요? 여러분은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만일 아벨이 죽은 다음에 가인이 죽게 되면 복귀섭리는 못 하는 것입니다. 상대가 있어야 하지요.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이 다 망해 버리는 겁니다. 그러니 그를 남겨야 했던 것입니다.
120년 동안 방주를 지은 노아를 생각해 보세요. 노아가 배를 짓는데 산에서 짓지 않고 바닷가에서 지었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바다가 아닌 산 위에 지음으로써 전부 부정받은 것입니다. 그러면 노아는 무엇을 위하여 살았습니까? 노아는 미래를 위해서 살았습니다. 노아는 그 시대에 있어서 미래를 위하여 살았다는 전통을 세운 사람입니다.
이와 같이 사망권내에서 살더라도 그 사망권을 뚫고 미래의 선권내에 진입할 수 있는 역사성을 띠고 살았다는 전통을 세워 놓아야만 미래의 뜻의 터전이 넓어지고 뜻이 남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현실세계에 있어서 부정적으로 생활을 시킨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 시대에 환영받게 하기 위해 그렇게 시킨 것이 아닙니다. 그 시대에서는 부정받지만 미래의 섭리를 위한 역사적 전통을 세우지 않고는 사망세계에서 벗어날 길이 없기 때문에, 사망권을 넘어갈 수 있는 길을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구원의 책임을 맡겼던 것입니다.
복귀섭리역사는 전부 다 그렇게 해 나왔습니다. 모세도 마찬가지입니다. 호화찬란한 바로 궁중에서 성장하던 모세가 무엇이 부러웠겠습니까? 그렇지만 자신의 혈족과 하늘의 종족을 증심삼고 애급 백성을 전부 원수시해야 할 이스라엘 민족 편에 섰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늘의 전통적인 사상입니다.
이 사상은 이 시대에는 부정을 받지만 미래세계에서는 남아질 것입니다. 세례 요한도 이러한 사상을 가졌고,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선생님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이 시대를 위해서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 시대를 위해서 여러분의 기분을 맞추고 좋아하며 살아 갈 선생님이 절대 아닙니다. (중략)
선생님은 여러분들이 모르고 있는 일을 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정 알고 싶다면 심정을 터놓고 전부 이야기해 줄 수 있습니다. 그 대신 여러분이 책임을 해야 합니다. 전통을 남겨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금년에 '통일기반 확보'라는 표어를 내걸었습니다. '통일기반 확보'라는 것이 무엇인 줄 알아요? 최후에 남아질 수 있는 한때가 오늘날 우리 통일의 무리들을 중심삼고 세워지는 것입니다. 아주 기가 막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구장이라는 이름으로 단에 올라설 때 다리가 휘청거리지 않아요? 그런 것 못 느껴 봤어요? 내가 이 식구들의 생명을 책임진다고 생각해 보세요. 선생님은 중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단에 올라설 때 그렇게 생각하고 올라갔습니다. 발이 바닥에 닿았는지, 안 닿았는지 모를 정도로 심각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이 같이해 주시는 겁니다. 자기 자신을 갖고 단에 올라서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의사가 중환자를 치료할 때와 같은 심정입니다. 최후의 비법을 써 가지고 주사를 잘 놓느냐, 못 놓느냐 할 때 그 심정이 어떻겠어요? 손이 떨리고 온 신경이 집중될 것입니다. 하늘은 그런 자리에서 역사를 진전시키고 그런 자리에서 인연을 맺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같은 그런 자세 가지고 뜻이 이루어질 것 같아요? 냉정히 자신을 비판해 보라는 겁니다. 선생님이 없으면 어떻게 하겠어요? 모두들 헤어지지 별 수 있어요? 그때는 자식들 데리고 어디로 가겠어요? 생각을 해보라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그걸 알아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이 없더라도 선생님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것까지도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일대의 군왕을 위해서만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천대 만 대 군왕을 위하고 민족을 위해서 모시게 해달라고 간청하는 충신이 진정한 충신입니다.
선생님이 있을 때 통일교회 지구장이나 통일교회 협회장 하기는 쉬운 것입니다. (중략)
내가 여러분의 입장이라면, 선생님이 진짜 뜻을 위한 책임자라고 생각하는 마음이 간절하다면 난 여러분과 같은 식으로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모험을 한번 해보겠습니다. 진짜 하늘이 같이해 주는지 한번 모험을 해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거기까지 생각할 줄 알아야 됩니다.
선생님은 60년대에 법원에 조서를 꾸미러 다니면서도 여러분을 축복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여러분들을 살려주기 위해서 애를 썼는데, 결과가 이게 뭡니까?
지금 여러분의 자세 가지고는 아무것도 안 됩니다. 될 것 같으면 내가 쌍수를 들어 환영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번 기회에 자세를 다시 갖추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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