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 도]

아버님, 자비로우신 은사와 더불어 저희와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저희 개개인의 심령은 각각 다를지라도 아버지께서 바라보실 때에는 모두가 당신의 마음 가운데 있는 아들과 딸인 줄 알고 있사옵니다. 이제 당신이 바라시는 마음과 일치가 될 수 있고, 당신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아들이 되고 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앞에 저희의 모든 것을 스스로 솔직하게 내놓고 긍휼의 은사를 바라는 겸손한 자가 되게 하시옵소서. 스스로 낮고 천한 자신을 탄식하는 마음보다도 높고 귀하신 당신의 거룩하신 은사를 흠모하는 마음이 저희 개개인의 마음 동산에 부풀어 오르게 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을 위하고자 하는 소원의 마음이 그 누구보다 간절하게 저희 각자의 마음속에서 솟구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이 존재하고 계신 것을 실제로 느낄 수 있고, 중심이 되시는 아버지를 흠모할 수 있는 자리에 설 수 있는 은사를 베풀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세상의 그 누구도 바라보지 않는 부족한 저희들이오나, 당신의 높고 귀하신 은사로 말미암아 저희들을 택하여 주신 것을 고맙게 생각하옵니다. 이때까지 아버지께서 얼마나 수고로운 노정을 참고 참아 나오시면서 저희 들을 찾으셨다는 사실을 생각할 적마다, 저희는 부족한 자신을 탄식하는 것보다 수고하신 아버지 앞에 감격의 눈물을 지을 수 있는 자녀가 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지난날의 과오를 뉘우치면서 현실적으로 저희들이 부족한 것을 깨닫고, 미래에는 저희 스스로 그런 것을 완전히 청산짓고 아버지 앞에 서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다짐하는 이 시간이 되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서로서로 그리던 당신의 자녀들과 이렇게 만날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하여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여기에 아버지의 사정이, 아버지의 심정이, 아버지의 소원이 저희들의 인연 가운데 온전히 나타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이 진행하시는 목적 앞에 순응할 수 있는 겸손한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일체를 당신께 봉헌하고, 당신의 명령과 더불어 화합할수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여 아버지께 일체를 귀결시킬 수 있는 거룩한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 이 자리를 친히 지켜 주시옵소서. 오늘은 이번 순회노정의 마지막 날이오니, 아버지, 여기에서 친히 결실을 맺으시옵고 당신의 축복의 손길을 두터이 내려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더우기 사랑하는 아들이 싸워 나가는 길 앞에 당신의 무한한 사랑으로 같이하시어서 통일의 이념이 그 생활과 그 계획 가운데 나타나게 하시옵소서. 이 서대문 지구를 통해서 아버지께서 바라시는 소원의 일부를 감당할 수 있는 당신의 교회, 당신의 아들들이 되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허락하신 이 시간을 아버지 뜻 가운데서 지낼 수 있게끔 보호 육성하여 주시옵길 재삼 바라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말 씀

오늘은 '복귀의 한'이란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복귀라는 말의 뜻은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타락하기 전의 본연의 상태로 다시 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아담 해와가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지음받아 축복의 은사권내에 잠겨 있던 자리는 그야말로 거룩한 자리요, 온 만물이 찬양할 수 있는 승리의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를 인류의 조상인 아담 해와는 생애를 바쳐 하나님으로부터 상속을 받고, 또 생활노정을 통하여 그것을 지니고 살아야 했는데도 불구하고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그 모든 축복을 상실했다는 것입니다.

타락한 아담 해와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심정

인간 조상 아담 해와는 타락하기 전에는 하나님과 같이 있을 수 있었지만, 타락한 후부터는 하나님과 같이 있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타락하기 전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대표하는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만물들 가운데에서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딸인 그들과 관계를 맺지 않은 것이 없었지만, 타락한 후에는 이 모든 피조만물들이 그들과 상관할래야 상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담 해와가 타락함으로 인하여 이렇게 비참한 자리에 떨어졌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얼마만큼 비참한 자리에 떨어졌느냐 하면, 만유의 존재 전체를 허락받을 수 없는 자리에 떨어졌습니다. 모든 상대적 세계를 허락받을 수 없음과 동시에 자기 자신도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래야 맺을 수 없는 입장에 떨어졌습니다. 이렇게 된 것이 타락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아들딸이라는 입장을 잃어버린 것은 물론이고,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없는 입장에 떨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주관해야 할 모든 피조 만물을 잃어버렸고, 자기 자체의 생명의 근원이 되는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렸고, 하나님을 중심삼은 모든 인연까지 상실해 버린 것이 타락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타락한 것으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타락했지만 타락한 그대로 버려질 수 없는 운명을 지니고 나온 것이 오늘날 우리 인생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부모가 사랑하는 자식이 큰 죄를 지어서 자식과의 인연을 끊는다고 선포할 수 있는 자리에 떨어졌다 하더라도, 그 부모는 자식에 대한 첫 정이나 첫 인연을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 부모의 심정도 이와 같은데. 세상 부모보다 높은 사랑의 마음을 가지신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시조인 아담 해와가 타락했다 하더라도, 타락한 아담 해와를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내심적인 동정의 마음을 아니 가질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아담 해와에게 허락하신 영광의 가치 기준이 지극히 높으면 높을수록 거기에 비례하여 상반되는 서글픔과 비참함이 남아지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을 우리들은 생각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올래야 돌아올 수 없는, 영영 저끄러진 아담 해와를 다시 만날 수 있는 하나의 길을 모색할 수만 있다면, 부모 되시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 하나의 길을 모색해서 용서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하고 싶은 마음을 안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모의 입장에 계신 하나님의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영영 관계를 맺을 수 없는 입장에 떨어진 아담 해와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들이 타락하기 이전에 사랑하고 싶을 때에 마음대로 사랑하고, 대하고 싶을 때에 마음대로 대하던, 자유스럽고 행복한 기준을 중심삼고 느낀 감정을 버릴래야 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담 해와가 타락하기 전에 먼저 아담 해와를 대해서 느낀 행복의 기준이었기에,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대해서 가질 수 있었던 행복의 마음을 잊을래야 잊을 수 없었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한 날, 한스러운 타락의 결과로 말미암아 빚어진 아담 해와를 바라볼 때, 이 타락의 결과를 취소시켜 버리고 전부 다 망각해 버릴 수 있는 입장에 섰으면 좋겠지만, 사랑의 귀결이라는 것은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오늘날 이 땅 위의 타락한 인간끼리도 서로 인연을 맺고 나오다가 멀리 떨어지게 되면 떨어지게 될수록, 혹은 이와 비슷한 환경이나 어떤 조건이 성립되면 될수록 서로서로가 그리워하고 생각을 아니 할래야 아니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타락한 우리 인간의 심정을 헤아려 볼 때도 그러하거늘, 사랑의 심정을 가지신 본연의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해와를 대해 끊어버릴래야 끊어버릴 수 없는 입장에 계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정이요, 하나님의 심정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무리 그런 심정을 가지고 아담 해와를 생각한다 하더라도 그들이 하나님의 생각을 전폭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대상이 되지 못하고 도리어 슬픔을 돌려드리는 입장에 서서 하나님이 가시려는 길을 막는 여건으로 남아지게 되었을 때, 여기에 내심적으로 부딪쳐 오는 하나님의 심정적 한이 얼마나 컸겠는가 하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되겠습니다.

인간의 타락을 책임지려고 하시는 하나님

아담 해와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불쌍하고 비참한 자리에 떨어졌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리에 떨어진 아들딸을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의 아들딸인 아담 해와는 그런 자리에 떨어져서는 안될 것이었습니다.

아담 해와는 무한한 영광 가운데 인류의 참된 선의 조상으로서 만민으로부터 추앙을 받고, 만민의 사랑의 중심이 되어 만우주와 더불어 화동 하고 만우주의 생명의 근원이 되는 절대적인 입장에 서야 했습니다. 그것이 완성된 인간의 가치였습니다.

완성의 가치를 지니지 못하고 타락하여 비참한 상태에 떨어진 인간을 바라보시는 하나님께서 높고 낮은 그 차이의 한계점을, 높은 자리에서부터 낮은 자리까지의 심정적인 모든 느낌을 취소해 버린다면 모르겠지만, 심정의 세계에서는 그것을 취소할래야 취소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입장에서 아담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내적 고충이 얼마나 컸겠느냐 하는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입장에 떨어지게 된 동기가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인 아담 해와가 책임을 못함으로 말미암아 그런 결과가 되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그 책임을 맡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영영 돌아올래야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이미 떨어진 인간, 파괴된 인간은 자기 스스로 파괴되지 아니한 어떤 환경이나 어떤 기준까지 올라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모든 것을 맡겨서 처리될 수 없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또한 그 책임을 인간에게 맡긴다면 인간은 영영 파괴된 자체로 끝을 맺게 된다는 것을 확실히 아셨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타락한 것에 대해 당신이 창조한 연고로, 당신이 책임을 다하지 못한 연고로 그런 결과가 되었다는 마음을 일으켜 가지고 그 타락의 책임을 인간에게 맡길 것이 아니라 당신이 책임져야 되겠다는 마음을 가지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저끄러진 그 모든 상처를 수습하여 용서의 마음을 가지고 타락의 책임을 하나님 스스로 진다고 결심할 때까지의 과정에 얽힌 하나님의 심정적 사연은 우리 인간으로서는 헤아리기 어려운 것입니다.

세상에서 볼 때, 지극히 사랑하는 아들딸, 특히 외동아들이나 외동딸이 있다면 그를 위해 그 부모는 있는 정성을 다할 것입니다. 어느 부모가 철없이 자녀를 낳아서 철없는 입장에서 그 자녀를 키웠다면 모르지만, 세상에서 느낄 것을 다 느껴 보고, 인간으로서 체험해 볼 것은 다 체험하며 소원하고 소원하던 중에 나이가 들어 귀한 아들딸을 얻었다면, 애지중지하며 정성을 다하여 키울 것입니다. 그렇게 정성을 들여 키웠는데 만약 그 아들딸이 타락의 길로 가서 부모를 저버리고 부모를 배반한 자리에 섰다면, 그 부모의 고충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부모로서는 그것을 옹호할 수 있는 아무런 내용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에서 열까지 책망할 것밖에 없고, 또 부모로서 그 자녀를 추방할수밖에 없더라도 부모는 그 자녀가 어떠한 조건을 세워서 소생할 수 있는 길,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소망의 한 점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타락한 이 세상의 부모도 관계를 맺을래야 맺을 수 없는 자식을 세워 놓고 상심하며 그런 마음을 가지거늘, 그렇지 않은 본연의 하나님께서는 어떠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도 그러한 마음을 가지지 않을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타락한 아담으로서는 다시 희생할 길이라는 것은 생각할 수조차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인간을 희생시키는 책임을 지시고, 인간이 희생할 수 있는 하나의 어떠한 조건을 제시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인간을 대하기 시작하셨을 것이라는 것을 우리가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 자체로서는 희생할 도리가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인간에게 어떤 조건을 세우게 해서라도 희생시키려 하셨던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비참함이 절정에 달했을지라도 진심으로 하나님을 위하고, 진심으로 하나님 앞에 도리를 다했다는 상대적인 조건을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조건을 요구하지 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입장이 얼마나 고통스러웠겠느냐 하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래야 맺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타락한 사랑을 중심삼고 태어났기 때문에 모든 생명과 소원의 동기가 이상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시작한 것이 아니라, 이상적인 하나님의 사랑이라든가 하나님의 생명을 반대하고 방해하며 배척하는 입장에서 출발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랑으로 맺은 생명의 인연이 되었기 때문에, 인간 자체가 갖고 있고 느끼고 소망하는 것은 절대적이고 참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소원과 하나님의 생명력과는 상치된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어떻게 해서 하나님의 소원권 내로, 하나님의 생명권내로, 하나님의 사랑권내로 돌이키느냐 하는 것이 지극히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서려면

인간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려면 서로서로가 화합할 수 있는 바탕이 있어 가지고 하나가 움직일 때 둘이 움직일 수 있는 내적인 동기라도 지니고 있었더라면, 여기에는 모든 것이 가능할 수 있는 접촉점이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이 상치되었습니다.

하나님이 플러스로 나타나면 인간은 마이너스로 나타나서 대응관계 혹은 상대적 관계로 화합할 수 있는 기반을 넓혀 나갈 수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선한 플러스 앞에 악한 플러스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플러스와 플러스는 하나 못 됩니다. 동질적인 플러스와 플러스도 반발 하는데 동질적인 플러스가 아니라 반대적인 플러스 형태로 나타났으니 그 반발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러한 입장에 떨어진 인간을 끌어들여서 다시 이 플러스 앞에 접속시킬 수 있는 요소나 그런 조건을 제시해야 하는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비참하겠습니까? 그리고 인간은 그것을 제시하기 위해서 얼마나 비참한 길을 가야 하고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되겠습니까?

이것은 정상적인 것이 아니라 비정상적인 것입니다. 비정상적인 결의를 하고 나서지 않고는 새로운 무엇도 결정지을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때, 인간 자체가 비정상적인 입장에서 하나님과 상응될 수 있고 화합할수 있는 행동을 할 수 있을 것이냐?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으로 하여금 조건이라도 세우게 하기 위해서 배후에서 조정하시면서 열이면 아홉의 조건이라도 세울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가르쳐 주어야 된다는 문제를 두고 볼 때,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직접 나타나시어서 가르쳐 줄수 있느냐? 그렇게 가르쳐 줄 수 없습니다. 그렇게 가르쳐 줄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가르쳐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에게는 가르쳐 줄 수 있고 상관할 수 있는 다른 어떤 존재가 없습니다. 천사와 단 둘밖에 없던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에 제 3의 어떤 인간이 있다면 모르지만 인간을 대해서 가르쳐 줄 수 있는 존재가 없다는 것입니다.

타락하여 갈 길을 모르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되느냐? 좋은 자리에서 자기가 바라는 환경이 그냥 그대로 순리적으로 벌어지고 모든 것이 원하는 대로 되었다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끝나서 그것으로서 흘러가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사람들을 다시 회생시키려니 하나님께서 그들이 가는 길을 막는 것입니다. 공포를 느끼게 '이놈' 하기도 하고, 위에서 누르면서 눈빛이 돌아가게 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길은 고해입니다. 얼마나 고해냐 하면 죽지 못해서 사는 것입니다. 방법을 정해 놓고 가만히 있으면 돌아갈 수가 없기 때문에, 가는 길을 막고 공통적인 길을 마련하여 그 길을 따라가게 하면 자기도 모르게 그 경지에 들어가서 포위되는 사람이 됩니다. 그런 작전은 성공할 수 있는 작전입니다. 그렇지 않겠어요? 그러므로 인간은 고생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30세까지의 젊었을 때는 바빠야 하고 고생해야 합니다. 그런데 편안한 자리에서 안식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들은 가만두면 내려가니까 그냥 두면 안 됩니다. 뒤로 돌아갈래야 갈 수 없고 옆으로 갈래야 갈 수 없는 조그만 길을 내놓고 내몰아야 합니다. 밀가루를 반죽하여 한쪽이 뚫린 통에다 넣고 들이밀면 그곳으로 삐져 나오는 것처럼 들이모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 이외의 방법이 있겠어요?

그러면 누구부터 내몰아야 되겠어요? 남자부터 나가야 되겠나, 여자부터 나가야 되겠나?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 들이내몰아야 되기 때문에 인류 역사노정에는 강제가 가해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자식이 하자는 대로 가만두면 그 자식이 어떻게 될까요? 열이면 열, 전부 다 흘러가 버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식은 여행을 시켜야 되고, 사랑하는 자식에게는 가장 초라한 초가집을 주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렇게 해라' 하는 강제법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식이 좋다는 데로 그냥 갔다가는 큰일납니다. 자식이 좋다는 데로 그냥 갔다가는 전부 다 망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싫다는 데로 내몰아야 합니다. 누가 싫다는 데로 내 모느냐? 악마가 내모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악마권내에 인연되어 있기 때문에 그냥 꺼떡꺼떡하다가 끌려가면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선한 신도들을 그런 데로부터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 반대로 내모는 것입니다. 먹겠다면 못 먹게 하고, 가겠다면 못 가게 하고, 보겠다면 못 보게 하고, 왼쪽으로 가려 하면 오른쪽으로 가게 하고, 전부 다 반대로 역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일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참된 길일수록 고난이 많아

여러분이 '그 집안은 괜찮은 가문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기준이 되어 있다고 해도 그 집안의 자식들은 무엇이든지 조심해야 합니다. 즉, 훌륭한 가문에서 자라난 아들들은 무엇이든 조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한 발자국을 옮기더라도 조심해야 하고, 말 한마디를 하더라도 조심해야 하고,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조심해야 합니다. 예법이 복잡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요즈음엔 자유가 지나치다 보니 방종적인 자유가 되어 이젠 포화상태에까지 이르러 아주 심각하게 되었습니다. 요즈음의 젊은 사람들이 그런 예법을 좋아합니까? 그러니 그냥 그대로 두었다가는 다 망하는 거예요. 갈 곳이 없다는 말입니다.

위엄이 있는 집안에서는 자식을 교육할 수 있는 자료가 많이 있습니다. 어른을 대할 때, 형제를 대할 때, 부모를 대할 때 어떻게 하라고 자라는 아이들을 모아 놓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학생들, 학교에 가는 것이 좋아요?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을 좋아해요? 사실상 공부하기 좋을 게 뭐 있어요? 생각해 보세요. 아침 일찍 학교에 가 가지고 다섯 시간, 여섯 시간 동안 버티고 앉아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면 뭘 합니까? 당장에 무슨 수가 나는 것 같지도 않은데…. 공부한다고 하지만 그것이 배가 고플때 먹는 밥처럼 맛이 나요? 이건 답답하다는 겁니다. 이런 입장에서 보게 될 때 공부하는 것을 전부 다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 되겠으니까 할수없이 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 세상에서는 우리 자체가 마음대로 살고자 하고, 마음대로 행하고자 하면 반드시 브레이크가 걸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왜 그러냐? 그냥 그대로 두면 망하기 때문입니다. 참된 길일수록 거기에 비례하여 브레이크가 백 퍼센트 걸리게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통일교회 교인이니까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지요?「예」이 얘기는 하나님이 계신지에 대해서부터 얘기해야 하는데, 여러분이 안다니까 그 얘기는 하지 않겠어요.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하고자 하는 일을 백 퍼센트 막는 역사를 벌이시는데, 그러지 않고는 타락된 인간을 구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상충된 입장에 선 타락 인간을 구원하는 방법은 인간 자체가 모색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모색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모색하시느냐? 인간 자체를 그냥 두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로 가지 못하게 끌어다가 성중에다 가두어 놓고 가르쳐야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납치하는 식입니다.

악한 사람이 선한 사람을 납치해다가 악한 사람을 만들면 그것은 악입니다. 그렇지만 선한 사람이 악한 사람을 납치해다가 들이패거나 온갖 치욕을 주더라도 선한 사람으로 만들면 이게 선입니까, 악입니까? 악한 사람을 납치해서 말을 듣지 않으면 몽둥이로 들이패고, 다리를 꺾고, 코를 꿰어 끌고 다녀서라도 올바른 사람을 만들어 가지고 그 사람이 '아! 나는 선한 사람이다'라고 할 수 있게 됐다면 그렇게 한 사람은 선한 사람입니다. 납치해다가 코를 꿰고, 고생을 시키고, 몽둥이 찜질을 하고, 주먹으로 때려서 그 사람을 나쁘게 하고, 그 사람을 망하게 했다면 그것은 악입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했더라도 훌륭하게 만들었다면 그 사람에게 감사하겠어요, 분하다고 하겠어요? 어떻게 대답하겠어요? 분해요, 감사해요?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악한 인간을 선한 길로 이끄시는 방법

여기 아가씨들이 아무리 열심히 공부를 한다고 하더라도 대통령부인이 될 가망성이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을 납치해다가 매달아 치고 밟고 그저 죽도록 고생시키고 훈련시켜 가지고 대통령 부인이 되게 했다면 감사 하겠어요, 분하겠어요? 그렇게 되면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납치한 것이 선이요, 악이요? 기합을 주고 고생시킨 것이 선이요, 악이요? 납치하고 기합을 주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그게 왜 선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선한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몽둥이로 들이패더라도 그것은 선한 입장에서 하시는 것입니다. 죽을 고비에 잡아매더라도 선한 입장에서 하지 않으면 가짜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무리 무자비하고 옥살박살이 되도록 채찍을 내리친다 하더라도 그것은 선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전멸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쳐서 복을 주기 위한 것일 때는 악이예요, 선이예요?「선입니다」 그것은 선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깡패 녀석들이 선한 사람들을 납치해다가 악하게 만드는 것이 선이예요, 악이예요? 그것은 악입니다. 이때는 잡아가는 것도 악이요, 채찍으로 때리는 것도 악이요, 그 결과도 악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그냥 그대로 놓아두지 않고 갈곳을 못 가게 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한 곳으로 들이몰아 가지고 악한 패들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끌어 가겠다는 방법이 좋은 방법이요, 나쁜 방법이요? 그런 방법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을 한 곳으로 들이몰기 위해 어떤 작전을 쓰시느냐? 악한 녀석들한테 스스로 몰리게 하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악한 녀석들한테 몰리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코를 꿰어 가지고 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몰리게 되면 악한 녀석들을 따라가고 싶겠어요, 떨어지고 싶겠어요? 남들은 다 가는데 거지 모양이 되어서 '아이구' 하고 있겠지요?

땅을 봐도 소용이 없고, 하늘을 봐도 소용이 없고, 건너다 봐도 소용이 없고, 내려다 봐도 소용이 없고, 모든 사람들이 다 싫어하는 자리에 몰리게 되면 악한 사람 대부분이 떼로 몰려가게 됩니다. 그렇게 해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납치한다면 말이 안 되지만 브레이크를 걸어 악한 사람과 절교할 수 있는 입장에 세우게 되면 그 모든 악한 무리들이 그 사람을 몰아내게 되고 미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같이 합할 수 있겠어요? 없습니다. 그래서 고독단신이 되는 것입니다. '역사상에 믿을래야 믿을 사람이 없고, 믿을 나라가 없고, 믿을 세계가 없구나. 나는 죽을래야 죽을 수 없고, 갈래야 갈 수 없고, 살래야 살수 없으니 어떻게 해야 되는가? ' 이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일 인간이 아닌 다른 무엇이 나를 데려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하는 데서부터 신앙심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자기도 모르게 그 무엇을 추구할 수 있는 큰 힘이 나오는 것입니다. 한 인간에게 그런 바탕을 빚어내기 위해서, 타락한 인간을 생명의 동산에 이끌기 위해 하나님께 서는 수고하시면서 이러한 길을 재촉하여 오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실을 알게 될 때, 고독한 자리에 선 것은 불행이 아닙니다. 고독한 자리에 서서 스스로 자기의 과거를 반성하고 인간의 근본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면서 태양이나 이 우주를 보게 되면 그냥 그대로 생겨나지 않았다는 것을 틀림없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절대자인 신이 있다면 그 신과 더불어 인연 맺을 수 있는 방법이나 그 길을 찾게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을 위한 소망이 다 끊어지고, 인간이 가야 할 행로에서 낙오자가 된 그 사람은 솟아오르는 태양을 봐도 소망으로 맞는 것이 아니라 지는 저녁놀을 바라보는 것처럼 절망으로서 그날을 보내는 것입니다. 밤을 지새우며 죽느냐 사느냐 하는 귀로에서 신음하면서 '신이여 존재하거든 내 갈 길을 가르쳐 주소서'라고 하는 사람 등 별의별 사람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이런 공상을 하다 보니 세상에서 낙오자가 되어 자동적으로 세상 사람들과 떨어지겠어요, 안 떨어지겠어요? 자동적으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납치하니 자동적으로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인들은 인간생활노정에 있어서 낙오자가 되는 것입니다. 종교인들은 전부 다 낙오자지요? 그래요, 안 그래요? 그것은 왜 그러냐?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방법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통일교회 문선생도 낙오자라는 말이냐? 나는 낙오자가 아닙니다. 기분 나쁘다구요. 난 통일교회 문선생이예요.

하여튼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역사하십니다. 그러지 않고는 길이 없습니다. 길이 없어요. 타락한 인간에게는 그것을 끊을 수 있는 자기 자체의 능력이 없습니다. 가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망하는 길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갈래야 갈 수 없게끔 다 끊어 놓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절망 가운데서 나는 죽는다고 할 수 있는 생사지경, 즉 죽느냐 사느냐 하는 고빗길에 있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작전을 개시하는 때

여러분, 이 세상을 보면 춘하추동이 있지요?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에게도 춘하추동과 같은 것이 있고, 마음의 세계에도 그런 것이 있습니다. 인간을 보게 되면 봄철과 같은 소년시대, 여름철과 같은 장년시대. 가을철과 같은 노년시대, 겨울철과 같은 죽음의 시대가 있습니다. 하루를 보게 되면 아침은 봄에 해당하는 것이요, 낮은 여름에 해당하는 것이요, 저녁은 가을에 해당하는 것이요, 밤은 겨울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천지가 다 이렇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봄이 되면 꽃이 핍니다. 여러분의 소년시기와 같은 봄이 찾아오게 되면 모든 식물은 전부 다 푸르러 가지고 다시 새로운 꽃이 피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도 수난의 길을 거쳐 가게 되면 주기적으로 본향이 그리워지게 됩니다. 무엇인지 모르게 본향에 계신 아버지를 간절히 생각하는 마음의 작용이 자동적으로 솟구쳐 오를 때가 있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그럴 때는 인간의 마음의 문이 딱 열린다는 것입니다. 365일이 일년동안 돌아가지만 그 마음의 문이 일년 내내 하나님과 더불어 맞아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3년, 7년이 지나다 보면 어느 한때에는 딱 맞을 때가 있습니다. 알겠어요? 마음의 문이 하나님과 맞을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마음의 문이 하나님의 문과 딱 들어맞을 때에 봄철과 같이 화답할 수 있는 때가 되는 것입니다.

이때가 되면 비로소 화답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귀의하고 자기의 새로운 살 길을 모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들한테 천대받는 환경을 돌파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는 마음이 사무쳐 가지고 '신이여, 저를 도우소서. 제 갈 길을 가르쳐 주소서'라고 하며 어려움에 부딪쳐 신음하게될 때, 이것이 심문(心門) 천문(天門)이 딱 맞는 것이 되면 하나님께서는 '오냐' 하며 그때에 비로소 작전을 개시하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그때에야 작전을 개시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때는 변번이 있는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때에 이 세상 사람에게 작전을 개시해서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거기에서 뒤넘이쳐 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만이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같이 간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는 것입니다. 그때는 하나님께서 새로이 시작을 하기 위해 들이치는 것입니다.

자동차 타이어라든가 자전거 타이어에 펌프로 공기를 압축해 넣을 때 무시고무의 끝이 딱 붙어 있으면 바람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걸 빼어서 공기를 밀어 넣으면 붙었던 것이 탁 터지면서 공기가 들어갑니다. 그와 같은 작용이 인간과 하나님사이에도 있기를 바라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최후 절정의 고비 끝에 막혔던 것이 터져 나갈 기막히는 때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때는 짧은 순간입니다.

그 무시고무와 같은 역할을 하는 사람이 도주로서 선한 사람이고 역사적으로 심정이 좋은 선한 선조의 후손으로 태어났으면 메시아의 자리까지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게 되면 당장에 힘이 온다는 것입니다.

이래 가지고 내 몸에서 뒤넘이치는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싸움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놈의 악당하고 말이야. 지금 서로가 잘났다고 싸움을 하고 있잖아요? 그렇지요? 서로가 주인이 되겠다고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몸뚱이에 악착같이 들러붙어 있는 나를 포기해 버리고, 승리적 기반을 닦아 해방의 기쁨을 맞게 된다면 그 사람은 공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이러한 사람이 예언자가 되고 선지자가 되는 것입니다. 선지자가 그때 나오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하나되려는 노력과 정성

그러면 그러한 기간이 자동적으로 돌아가는데 그때를 맞추기가 쉬워요? 한번 맞추고 두 번 맞추게 되면 방향을 알 수 있습니다. 해가 높이 떠오른 다음에는 사방이 전부 훤하기 때문에 해가 여기에서 올라왔는지 저기에서 올라왔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새벽에 해가 떠오를 시간이 되면 해가 뜨는 곳이 점점 환해지기 때문에 어떤 곳으로 올라오는지 알 수 있는 겁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여러분의 마음이 몇번 하늘과 접하고 열리기 시작하면 방향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의 마음의 문은 하나님께서 돌아가는 데로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문을 열고 준비하고 있다가 하늘이 지나갈 때 열어야 합니다. 하늘이 지나가는 시간은 짧기 때문에 문을 열어야 할 시간에 그냥 그대로 가만히 있으면 슬쩍 지나가 버리는 것입니다. 그 순간을 잘 포착 하여 그 동기의 인연, 생명의 인연, 감정의 인연, 체휼의 인연, 감각의 인연을 붙들고 따라가야 합니다. 따라가게 되면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문을 열어야 됩니다. 그러한 체험을 하고 그러한 경지에 찾아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감정과 그런 체휼의 경지를 찾아 들어가서 하나님과 더불어 하나되기 위해서 노력하고 정성들이는 것이 기도 입니다. 이것은 다이얼을 맞추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여러분, 라디오는 전파가 있지요? KBS라디오의 주파수는 710킬로헬츠인가 그렇지요? 그 전파를 잡기 위해 다이얼을 맞추는 것과 같이 마음 문을 맞추어야 합니다. 그 주파수를 찾기 위해서 라디오 다이얼을 돌리게 되면 웅웅하며 전파가 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종교생활을 하다 보면 이제 진짜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알았다고 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전파가 오는 걸 보게 되면 먼저 웅웅웅 잡음이 들려옵니다. 그렇게 잡음이 들리다가 다이얼이 기준점에 맞게 되면 생생한 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은혜를 받자는 것입니다. 채널이 딱 들어 맞게 되면 방송국에서 보내는 소리가 조금도 소모없이 그냥 그대로 생생하게 들려오게 됩니다.

그 맛을 보고 그 맛을 안 사람이 있다면 하루만 따라가겠어요? 일년만 따라가겠어요? 늙어 죽도록 따라가고 싶어할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의 맛을 본 사람은 목이 잘리더라도 가고, 가지 말라 해도 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인생의 낙오자가 불쌍하지 않습니다. 인간지말이 됐다고 해서…. 끝이 있으면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서 망하지 않으면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망할 자리에 들어가더라도 '나는 망했다'라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 이 타락한 세상, 부모도 못 믿겠고, 처자도 못 믿겠고, 친구도 못믿겠고, 스승도 못 믿겠고, 그 누구도 못 믿겠다! 내가 부모 이상 믿을수 있고, 형제 이상 믿을 수 있는 분이 어디에 있느냐….이런 문제를 중심삼고 나가야 합니다. 나갈 녀석은 다 나가라 이거야. 나가게 도와주는 거야. 이래서 낙오자가 되어 가는 길에 신이 있거든 신과 인연 맺고 관계를 맺기 위해 몸부림쳐야 되는 것입니다. 딴 면의 소원을 품고 거기에서 절망하지 않고 새로운 소망을 갖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는 망하지 않는 새로운 출발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래야 합니다.

종교인들이 지배하는 시대가 온다

그래서 타락한 인간이 참된 길을 가기 위해서는 타락 세계와는 백 퍼센트 반대의 길로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되겠어요, 안 그래야 되겠어요? 세계적으로 잘사는 사람이 행복하냐, 못사는 사람이 행복하냐 할 때, 사탄세계에서는 못사는 사람보다 잘사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하지요? 그러니 세계적으로 잘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브레이크를 걸겠어요, 안 걸겠어요?

오늘날 선진국가인 미국이 앞으로 계속해서 세계를 지배하지는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때가 바꿔지게 되면 높았던 사람들이 낮아지게 됩니다. 공산당 이론을 보게 되면 노동자 농민이 출세할 때가 온다고 합니다. 옛날에는 지식층의 사람들, 즉 머리가 좋은 사람들이 권세를 잡고 출세를 했습니다. 이제는 어깨가 크고 힘이 센 사람들이 출세할 때가 왔습니다. 그렇지요? 지금은 힘이 있어야 됩니다. 지금 때가 군벌시대입니다. 힘 앞에는 누구나 굴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힘으로 굴복시키면 그것으로 끝날 줄 알지만 그게 아닙니다.

그 다음에는 무엇이냐 하면 손과 발입니다. 바로 노동자 농민이 지배하게 되는 시대가 오는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세상이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머리가 좋은 사람들이 지배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힘, 즉 주먹을 쓰는 사람들이 지배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손발이 지배하는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노동자 농민들이 출세하려고 야단입니다.

머리 좋은 사람들이 세계를 한 번 지배했고, 다음에는 힘이 있는 사람 들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고, 이제는 노동자 농민들까지 세계를 지배하려고 하고 있는데, 뭐 하나 내세울 것 없는 지지리 못난 사람들이 바로 종교인들입니다.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출세해 가지고 세계를 지배해 본 때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무시하지 말라는 거예요. 인간 세계의 낙오자로서 폐물과 같이 천대를 받았지만 그들은 누구의 도구가 되기 쉬웠느냐?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브레이크를 걸 수 있고 소망할 수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제 그들이 자리를 잡고 어깨를 펴고 숨을 크게 내쉬면서 세계를 향하여 호령하는 날에는 머리 좋은 사람들도, 힘이 좋은 사람들도, 노동자 농민을 동원해 가지고 세계를 지배하려는 공산주의도 다 망하는 것입니다.

지금 종교권내에는 20억 이상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제 종교인이 출세할 때가 왔습니다. 공산주의는 노동자 농민을 동원해 가지고 세계를 지배하려고 하고 있지요? 앞으로는 이 세계 인류 가운데 양심적인 사람들을 동원하라는 표어를 내걸고 종교의 대행군이 이 세계에서 벌어지게 될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날에는 머리가 좋은 사람도 간곳이 없고, 힘이 좋은 사람도 간곳없고, 노동자 농민을 동원해 가지고 세계를 지배하려던 공산주의도 간곳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출세하느냐? 하나님이 출세합니다. 누구와 더불어? 인간 가운데 가장 낙오자와 같은 입장에 있는 종교인들과 더불어. 알겠지요? 보면 그렇게 되는 거라구요 세상이. 이제 최후의 출세권이 누구에게 남았느냐? 노동자 농민의 시대도 지나갑니다. 지금은 소련과 중공이 서로 싸우게 되어 있습니다. 종교도 서로 싸우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때가 오기 때문에 통일교회는 '세계의 모든 종교는 하나될지어다'라는 깃발을 들고 나온 것입니다.

그것은 잘했다는 것입니다. 통일교회가 종교를 통일할지 못할지 모르지만 종교를 통일하겠다는 주장을 하고 깃발을 내꽂은 것만 해도 한국이 자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국이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이것밖에 없습니다.

이 깃발을 통일교회 문선생이 내걸었으니 별수없이 통일교회 문선생을 칭찬해야 되는 것입니다.

고생할 각오를 하라

통일교회 패들은 통일교회 문선생을 따라가려고 해도 걱정이 태산 같다고 합니다. 소위 대학생들은 뭐가 어떻고 어떻고 하는데 큰소리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도 대학생 시절을 다 지내 봤습니다. 별것 아니라구요. 괜히 으시대고 바람 피우고 야단하는데 그 속을 보면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보면 건데기도 없습니다. 그저 썩은 해골통 같다는 겁니다. 섭섭하게 생각해도 할 수 없습니다. 항의할 사람은 항의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그런 것을 다 들춰 보고 지금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 세계의 정치가, 미국의 대통령이 '나는 통일교인이다' 라는 깃발을 꽂게 되고, 통일교회가 미국의 종교를 통일하는 날에는 통일교회 승락 없이는 미국의 대통령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미국의 1억 8천만 국민 가운데 3분의 2가 명부에 올라 있는 기독교 신자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만 통일해 놓으면 미국의 대통령도 통일시킨 사람의 사인을 받지 않고는 대통령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요, 안 그래요? 한국에도 종교인이 1, 500만이 넘습니다. 국민의 절반 이상이 종교인입니다. 이들을 다 통일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면 어떠한 자리에서 통일해야 되겠습니까? 여러분이 좋다고 하는 자리에서 통일하면 통일 하나마나 입니다. 알겠어요? 자기가 좋다는 자리에서 통일하길 바라는 사람은 악마의 새끼입니다, 기분이 나쁜 얘기지만 할수없습니다. 그 자리에서는 통일을 못 합니다. 그런 자리에서 통일을 한다 하더라도 또 싸우게 되고, 또 깨져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통일을 하려면 반대로 들이쳐야 됩니다. 반대로 들이쳐도 악착같이 가야 합니다. 가다가 정신을 잃더라도 안 가면 죽는다는 각오로 박박 기어 올라 가야 됩니다.

통일교회는 누구나 마음대로 들어오지 못합니다. 들어오더라도 문선생의 단련에 견디지 못합니다. 신사든 숙녀든 등뼈가 불쑥 튀어 나오도록 일을 시킨다는 것입니다. 항상 좋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기성교회 목사들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봤어요? 모두들 오라고 선전하지 오지 말라고 선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라고만 하니 무슨 곡절인지 모릅니다. 오라고 하는 곳에서 망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보다 오지 말라고 하는 곳에서 망하는 일이 벌어지면 덜 섭섭한 것입니다. 분해도 덜 분하다는 거예요. 그런데 망한다는 곳에서 흥하면 그것보다 좋은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오라는 곳보다 오지 말라는 곳에 가는 것이 더 재미있지요? 중고등학교 때 영화구경을 하지 말라고 지켜 서 있는 선생님을 피해 영화관에 들어가서 보는 영화가 더 재미있지요?(웃음)

그렇기 때문에 선한 길을 가겠다고 하면서 지금 그 자리에서 선을 찾는 사람은 미친 사람입니다. 그 자리에서 신을 찾겠다고 하면 절대 안 되는 것입니다. 이미 뿌리가 악에 박혀 있는데 거기에서 선이 나올 것 같아요? 거기에 선이 있다면 악한테 잡혀먹힐 텐데요. 근본을 뜯어 고쳐야 돼요. 그렇잖아요? 근본이 악에서 출발했는데 거기에서 그냥 좋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시장에 가 보게 되면 가짜 약을 파는 약장수들이 '좋소 좋소' 하고 선전을 하며 오고 가는 아주머니들의 마음을 설레게 합니다. 그 약을 먹으면 가슴앓이니 고열이니 몸살이니 만병이 다 낫는다고 하며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처럼 감칠맛이 나도록 선전을 합니다. 선전을 잘하여 약을 팔고는 '옛다 먹어라' 하고는 보따리를 싸 가지고 뺑소니를 치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통일교회의 길은 아무나 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통일교회의 말씀은 좋지만 고생을 하라고 하니 싫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가짜입니다. 통일교회 말씀도 좋고 고생도 좋다고 하는 사람과 통일교회 말씀은 좋은데 고생은 싫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누가 더 선해요? 어디 학생들 얘기해 보세요? 원리도 좋지만 고생도 좋다는 사람과 원리는 좋지만 고생은 싫다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을 택할 것 같아요? 둘 중에 고생을 좋아하는 사람을 택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에 훌륭한 애국자가 많이 있다고 합시다. 그 많은 애국자 가운데에서 최고 훌륭한 애국자 한 사람만 뽑는다고 할 때, 다 떨어져 나가고 두 사람만이 남았다고 합시다. 한 애국자는 키도 조그마하고 몸집도 작습니다. 그는 남자 축에도 못 들어갈 정도로 작다는 것입니다. 키도 작고 몸집도 작은 사람한테 시집가고 싶다는 여자 있어요? 남자 축에 못 들어 가지만 할수없이 남자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은 허우대도 좋고 몸집도 좋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두 사람이 있다고 할 때, 누가 더 훌륭한 애국자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여러분은 누가 더 훌륭한 애국자이면 좋겠어요? 이 두 사람 가운데 누가 더 훌륭한 애국자이면 좋겠느냐라고 할 때, 일반적으로 보면 잘나고 허우대 좋은 사람이 애국자이면 좋겠다고 할 것입니다. 천 사람이면 천 사람, 만 사람이면 만 사람이 다 틀림없이 그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이 진짜 훌륭한 애국자냐는 것입니다. 이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은 떨어져야 됩니다. 여기에서 허우대 좋은 사람은 애국자는 애국자인데 그는 불과 한 달 동안에 애국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키가 작은 사람은 일생을 거쳐 오면서 공적을 세워 애국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누구를 더 훌륭한 애국자로 선출해야 되겠습니까? 일생을 거쳐 오면서 공적을 세운 그 애국자를 선택해야 부작용이 없는 것입니다.

결국 그 말이 무엇이냐 하면 같은 애국자 가운데서도 보다 훌륭한 애국자는 나라를 위해서 좀더 고생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나라를 위해서 죽을 뻔했다가 세 번 살아난 사람과 네 번 살아난 사람이 있다면 누가 더 애국자입니까? 이것은 물어 볼 것도 없습니다. 국민학생에게 물어 봐도 다 아는 것입니다. 나라를 위한 진짜 애국자는 역사 이래 이 나라를 위해 가장 고생을 많이 한 사람입니다. 그래요, 안 그래요?「그렇습니다」

그러면 대한민국 애국자 한 명을 세워 놓고 세계의 애국자 가운데 등수로 꼽는다면 몇 등이나 될까요? 대한민국이 올림픽 대회에 나가면 몇 등이나 합니까? 나라에서는 일등한다고 큰소리를 하지만 세계 무대에서는 꼴찌를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형편이 무인지경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최고의 효자 효녀로 공인받으려면

자기가 행동을 하고 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어디를 가게 되더라도 '울기 위해서 간다'고 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웃기 위해서 가고, 하나라도 내가 더 좋아질 수 있는 상대적인 그 무엇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좋을 수 있는, 필요 요건을 충당시킬 수 있는 상대를 찾아 가는 것입니다. 오늘 자기가 10만원의 돈을 벌고 싶어서 간다 할 때는 기쁜 거지요?

하나님께 애국자라는 공인을 받으려면 한국적이어야 되겠어요, 세계적이어야 되겠어요? 세계적이어야 됩니다. 그러면 그것이 시대적이어야 되겠어요, 역사적이어야 되겠어요? 역사적이어야 됩니다. 과거 현재 미래의 전체를 보더라도 이런 사람 이상의 사람은 나올 수 없다는 사람이 되어야 하나님께서 '아무개야 이리 와라. 네가 애국자다'라고 하시면서 세계의 애국자 대장으로 세우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세계를 위해 하나님을 위해 얼마나 충성하고 얼마나 정성을 다했겠습니까? 백 번 죽어 살아나고, 천 번 죽어 또 살아나더라도 하늘 앞에 충신의 도리를 다하고 죽으면 한이 없겠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한을 풀기 위해서 몸부림친 사람이 아니었겠어요?

이 말이 실감이 안 나거든 하나의 예를 들어서 얘기해 봅시다. 아들 다섯과 딸 다섯을 가진 한 부모가 있다고 합시다. 여기에서 딸은 시집을 가면 남의 집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부모를 위해서 효성을 하는 데는 아들보다 낫습니다. 아들들은 전부 다 건달꾼이라는 것입니다. 여러 분들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니까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아들들은 돈만 생기면 주막으로 가서 별의별 놀음을 다한다는 것입니다. 처음에 한아들이 아버지께 '아버지! 나 이러이러한 일이 있어서 돈이 좀 필요한데 좀 주소!' 하면 아버지는 '그래 주지' 하면서 돈을 줍니다. 이렇게 해서 달라고 할 때마다 한 번 주고 두 번 주고 세 번 주고 나서 가만히 알아 보니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 준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세 번까지는 주다가 더 이상은 주지 않을 때 그 아들은 어떻겠어요? 반대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아버지가 이제는 못 준다 하면 자식은 '아버지, 이만큼은 내가 활동하는 데 꼭 필요한 돈인데 그 돈도 못 써요? 하며 반발하는 것입니다. 반발하는 거기에서는 부자의 인연이 끊어지는 것이지요? 그런데 '아버지, 젊은 사람이 돈을 좀 쓴다고 왜 그러십니까? 나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이렇게 아버지가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하면 한 번이라도 돈을 더 탈 수 있는 겁니다. 그래요, 안 그래요?

그런 반면 딸 중에도 막내딸이 있는데 그는 평상시에도 아버지가 말하기 전에 알아서 척척 모십니다. 이리 가라 하면 이리 가고, 저리 가라 하면 저리 가고, 가다가 오라 하면 오고, 또 가라 하면 가고 합니다. 그렇게 왔다 갔다 열 번이라도 하면서도 오히려 아버지께서 저희들 때문에 이러시니 얼마나 힘들고 얼마나 생각이 번잡하시겠나 하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젊은 사람은 괜찮으니까 그저 아버지께서 하라는 대로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딸은 먹을 것이 있으면 안 먹고 아버지께 드리려고 하고, 아버지께서 저녁에 일찍 돌아오지 않으면 대문밖에 나가서 울면서 아버지를 기다립니다. 그러면 소문이 퍼지게 되지요? 그 얼마나 사랑스러운 거예요?

조그만 일에도 정성입니다. 뭐 빵 한 개 가지고도 아버지께 드리겠다고 하니 소문이 쫙 퍼진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딸은 자라는 데 있어서 학교에 안 가도 좋다고 합니다. '학교에 가면 뭘 합니까? 저 오빠같이 아버지 어머니 속썩이는 사람 되면 뭘 합니까? 대학교도 싫고, 국민학교도 싫고, 다 싫고 아버지 어머니 좋게 해드리고 기쁘게 해드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 열 살이 되고 스무 살이 되고 서른 살이 되도록 시집을 못 갔다는 거예요.

그러면 아버지 어머니가 그 딸을 보게 될 때 시집가지 못한 것을 한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아버지 어머니는 그 딸이 시집갈까봐 걱정할 것입니다. 그렇게도 재미있게 그렇게도 소중하게 그렇게도 편하게 그렇게도 사랑한 딸을 시집보내 놓고 살 수 있겠어요? 그 딸이 시집가게 된다면 다른 아들딸을 다 버리고 그 딸을 따라가겠다고 할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따라 나선다면 그 아버지 어머니의 재산은 어떻게 되겠어요? 아버지가 아들딸을 모아 놓고 너는 장남이니까 내 소유의 절반을 뚝떼어 준다고 하겠어요? 아들딸 각자에게 재산을 전부다 분배해 주겠어요? 그러겠어요, 안 그러겠어요? 안 그런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어머니의 마음을 몽땅 사로잡고, 밤이나 낮이나 언제나 부모를 위해서 고생한 딸에게 재산을 몽땅 상속해 준다는 것입니다. 둘도 없는 딸을 가졌다고 생각하게 될 때, 부모는 다른 아들딸을 모두 버리고 시집가는 그 딸을 따라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부모는 재산이고 무엇이고 몽땅 그 딸에게 상속해 주는 것입니다.

결국은 무엇이냐 하면, 부모를 위해서 다른 형제들보다 더 슬퍼하고, 더 마음을 쓰고, 더 고생을 하고, 더 참고, 더 서러워하고, 더 눈물을 흘리고. 더 억울함을 당하면서도 부모를 붙들고 가는 사람에게 부모의 모든 것을 상속해 주는 것을 우리 인간 세상에서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인간 세상에서도 그러한데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그렇게 살게 되면 하나님도 그럴 게 아니겠어요? 하나님을 위해서는 백번 천번 죽어도 좋고, 욕을 먹어도 좋고. 감옥에 들어가도 좋고, 마귀 사탄이니 이단의 괴수니 하는 비난을 들어도 좋다고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는 백번 죽어도 마땅하다는 생각을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맨 마지막 고비는 시험입니다. 그런데 누구나 다 할수 있는 일을 가지고는 시험하지 않습니다. 어느 누구나 하지 못할 것으로 시험하는 것입니다. 천 사람이 같은 급에 있으면 천 사람이 다 할 수 있는 것으로는 하지 않습니다. 천 사람 중에서 999명은 떨어져 나가고 한 사람만이 남을 수 있는, 그런 내용을 가지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상적이요, 비정상 적이요? 여기서 하나님이 '해라' 했을 때 하지 못하는 사람은 전부다 꺾여 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길을 가는 데 있어서 '나는 이런 것은 믿고 저런 것은 안 믿겠다' 혹은 '이런 것은 생각하고 저런 것은 생각하지 않겠다'라는 어떤 한계선을 정하면 가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백 년이고 천 년이고 상관없이 죽으라면 죽고 가라면 가겠다고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위해서는 그렇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계적이고 역사적인 아들딸이 있으면 하나님은 누구를 붙들고 사정하겠습니까 ? 누구를 붙들고 역사하고, 누구에게 찾아와서 가만가만 일러주겠습니까? 내가 정통이요. 통일교회는 이단이라고 하는 목사들에게 그러겠습니까? 어림도 없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이단이란 소리를 들으면서도 한번도 신문광고를 통하여 반박 성명을 내 본적이 없습니다. 내가 반박하지 않아도 대한민국 전체, 세계 전체에서 통일교인들이 나타나 세계를 대해 반박할 때가 올 것입니다. 그들이 아무리 핍박을 하더라도 선생님은 가만히 앉아서 못난이 놀음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못나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죽음의 길로 내모시는 이유

나를 죽이기 위해 모질게 밟았지만 나는 죽지 않았습니다. 오늘까지 죽지 않았기에 이곳 서대문 교회에 와서 여러분을 만났습니다. 여기 처음 온 사람이 있으면 기분이 나쁠지 모르지만 내가 바로 통일교회 문선생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처럼 만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한번 시작하면 사생결단을 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반대를 받으면서도 지금까지 세계적 기반을 형성해 나온 것입니다.

우리 통일교회는 잘먹고 잘살면서 가자는 거예요, 못먹고 고생하면서 가자는 거예요? 어떤 거예요? 잘먹고 잘살자는 거예요, 못먹고 고생하자는 거예요?「못먹고 고생하자는 겁니다」 누구를 위해서요? 통일교회 문선생을 위해서요? 누구를 위해서예요? 하나님을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을 녹여내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습니다.

기성교회에 아무리 수백만, 수억의 신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자랑하지 말라는 겁니다. 나보다도 하나님을 위해서 더 고생하고, 누구보다도 죽음을 각오하며 어려운 것을 책임져 가지고, 하나님을 대변하는 수난길을 자기의 운명길로 알고 가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백년 천년 만년 끝까지 갈 수있는 운동을 남기는 그런 주의를 이 땅 위에 심고 가야 되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기독교를 몽땅 삼켜 버리고도 남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통일교회 교인에게는 하나님께서 브레이크를 거는데 거기에 가하여 통일교회 문선생이 또 브레이크를 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백 퍼센트 브레이크를 거는데도 불구하고 통일교회 문선생이 또 브레이크를 건다는 것입니다. 악당이나 독재자도 이보다는 덜할 것입니다. 동정은 못할망정 브레이크를 또 걸지요? 그렇게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고, 힘이 없어 다리가 휘청거려도 '이게 뭐야, 이 녀석아' 하면서 더 때리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그가 자기의 원수요. 자기의 제일 가까운 편이요? 자기편입니다.

선생님은 이북에서 피난 올 때 그런 일을 다 겪었습니다. 뒤에서는 중공군이 따라오는데 데리고 가는 사람은 다리가 부러졌고, 버리고 갈 수없는 사정이 있고. 데리고 가려니 앞길은 막혔습니다. 지나가는 트럭은 전부다 군사물자로 가득하고 길은 이중 삼중으로 막혔습니다. 나보다 큰사람을 데리고 내려 오는데 업고 올 수 없어서 자전거에 태우고 오려니 큰일이었습니다. 가자니 갈 수 없고 죽자니 죽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래도 죽기를 각오하고 갔습니다. 피난민 중에서 제일 고생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나라에 찾아왔던 환란 가운데 제일 고생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면, 통일교회 문선생을 빼놓고는 못 준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그런 마음을 먹고 갔습니다. 여기 김전무(김원필)는 눈을 뜬 채로 졸면서 갔습니다. 인민군이 점점 가까이 오고 있는지도 모르며 자고 있는 것입니다. 인민군이 가까이 오고 있다는 걸 모르니까 자고 있었겠지요. 그때 한 고개만 넘으면 살 길이 있다면 악착같이 내몰아야 되겠어요, 안 내몰아야 되겠어요? 안 가겠다고 하면 들이쳐야 합니다. 멱살을 잡고 억지로라도 끌고 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알겠어요?

여러분 지금 세상은 환란의 때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목전에 그러한 현상이 나타나는 이때에 악착같은 통일의 무리가 생겨난 것은 세상에서 구경할 만한 장면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인간 자체를 그냥 그대로 두면 악에서 구할 수 없기 때문에 인간들을 죽음의 길로 내모는 것입니다. 인간 세상에서 낙오자가 되게 하여 거기에서 한탄할 수 있는 입장에 서게 함으로써 하나님과 인연맺게 하시는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기 위해서라면 아들딸까지도 희생시키시는 하나님

내가 지금 편안하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을 데려다 괴롭히고, 사람들을 데려다 싸움을 벌이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깡패들이 사람들을 데려다가 깡패를 만드는 거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사람을 데려다가 하나님 대신 싸움을 하게 하기 위해서 사지에 내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편을 위해서 죽겠다고 하는 사람들을 데려다가 복을 줘서 잘살게 했던 것이 아니라, 죽음 길로 내보냈던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하나님의 역사노정입니다.

그것은 왜? 이왕지사 하나님 편에 서 있으면 하나님의 사람이요, 하나님의 대신이요, 하나님의 종이니 그들을 희생시켜 가지고 원수의 종들을 살려주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알겠어요? 내 종을 희생시켜 원수의 종들을 구하고자 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내 아들 딸을 희생시켜 원수의 아들딸을 살려주기 위한 일을 하는 것보다 더 큰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이 희생하는 자리에 나가 원수를 해방시켜 주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원수는 이에 대해 항거할 어떠한 조건도 없습니다.

여기서부터 평화의 기준을 세우고 새로운 천지의 복귀점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본래의 목적인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 가지고 원수가 굴복하게 될 때는 내가 아들딸을 사랑하는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아들딸을 희생시킴으로 말미암아 그 나라면 그 나라에 있어서 충신이라든가 공신이라는 이름을 틀림없이 갖게 되는 것입니다. 악한 세상이지만 그를 추모할 수 있는 중심의 인물로 역사에 남기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아들이 역사에 남겨졌으면 그것은 그 부모의 공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남겨졌으면 그것은 하나님의 공로입니다. 그가 개척한 사상은 악한 세상을 가로지르게 되고, 새로운 인류의 복귀 동산의 새로운 소식이 들려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세계 인간들이 새로운 동산으로 돌아오기 위한 길을 마련하려면 몇몇 자식. 몇몇의 종들을 희생시키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죽었다고 해서 그것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죽음으로 말미암아 승리적인 선은 결정적으로 거두어지는 것입니다. 손해를 안 보는 것입니다. 손해 안 보는 자리에서 원수의 자녀를 빼앗아 올 수 있는, 반비례적인 수확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작전을 안 할수 없기 때문에 지금까지 기독교는 많은 희생을 치르며 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아들딸들을 희생시켜 원수의 세계에서 하늘편으로 넘어올 수 있는 길을 뚫으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새로운 기독교 사상권을 만들어 가지고 원수의 세계에 있는 사람들을 하늘권으로 몽땅 빼앗아 나오는 작전을 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여러분이 이대로 천국 가겠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망상

여러분 자신들이 타락한 인간이라고 공인한다면, 현재에 있어서 그냥 그대로 천국에 가고 싶다는 것은 망상입니다. 그렇게 갈 수 있다면 통일 교회 문선생은 벌써 갔을 것입니다. 내가 여러분보다 머리가 좋지 못하고, 지혜가 없고, 미욱해서 타락한 이 세계를 구원하기 위한 일을 하는게 아닙니다. 이 길밖에 갈 길이 없기 때문에, 이 방법밖에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작전 안 하고는 구할 도리가 없기 때문에 그런 작전을 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작전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런 작전이 아니고는 작전할 도리가 없기 때문이요, 그 길밖에 인간이 갈 수 있는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길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작전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목을 잡아 끌고서라도 이 길을 가야 합니다. 통일교회에서는 화장을 하고 핸드백을 들고 그렇게 멋내고 나온 사람은 필요없습니다. 여러분의 멋을 내는 그 시간에도 선생님은 사생결단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느껴야 됩니다. 결투의 날을 몇 날 앞두고 그날을 준비하는 그 이상의 심각한 심정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날 통일교인은 달라야 합니다. 내 몸과 내 주위에서 사탄이 겨누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신을 가다듬어야 합니다. 생사권을 판결짓기 위해서 엄숙하게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야 합니다. 여러분은 그런 생각을 해봤어요? 전부다 거지들처럼 얻어먹으려 하고 있습니다. 내가 씨를 뿌리고 키우고 거두어 가지고 남에게 떡을 해주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해보았느냐는 말입니다. 전부다 얻어먹으려고만 한다는 것입니다.

얻어먹는 거지들은 동네의 양반을 먼저 알아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아무개 목사가 훌륭하니 가자 하며 거지 떼처럼 몰려다닙니다. 어느 목사 설교 잘하니 그 목사에게 가자 그러면서 거지떼같이 몰려다닌다는 거예요. 만약 통일교회가 그런 사상을 가졌다면 욕을 먹어도 당연합니다.

하나님의 작전은 현실에 살고 있는 우리와는 반대적입니다. 우리를 고립시키는 방법으로 끌어내 가지고, 어느 한 경계선을 넘어 사탄이 따라올수 있는 인연이나 조건을 완전히 없애고 완충지대로 넘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한 번 넘어가더라도 다음 넘어올 수 있는 길을 일단 만들어 놓고, 그 다음에 거기에서 밀명을 주어서 그런 작전을 할 수 있는 사람을 다시 원수의 세계에 파송하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던 것입니다.

그 경계선을 넘게 될 때는 죽느냐 사느냐 하는 심각한 문제를 걸고 넘나들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런 것이 여러분의 신앙노정에 한두 번이 아니라 수백 번 수만 번 있어야 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통일 교회를 이만큼 발전하게 하기 위해서 내가 죽음길을 한두 번 넘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절대적으로 참된 사람이 되어야 할 인간

이제 본론으로 돌아가자요. 복귀의 한이라…. 인간이 타락해 있는데 하나님의 마음이 편안하겠어요? 전지전능하고 천지를 창조한 대주재이신 하나님께서 하필 이런 방법이 아니면 인간을 구할 도리가 없느냐? 원수 사탄들을 송두리째 잘라 버리고 다시 만들면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하겠지만, 그럴 수 있는 천도라면 얼마나 간단하겠습니까? 그렇지만 참된 것은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그렇지요? 인간 조상을 세울 때 거짓 것으로 세운 것이 아니라 참된 것으로 세웠기 때문에 참된 것은 둘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참된 것은 하나님과 하나되는 것입니다. 개인도 하나의 참이요, 남자 여자도 하나의 참입니다. 이건 절대적입니다.

인간은 오늘날 자기 스스로 인생문제나 생활문제에 대해 번민하다가, 최후에 생명의 문제를 다짐하는 길에서 이것을 해결하지 못하고 신음하다가 약을 마시고 죽는 그런 무가치한 인간들이 아닙니다. 절대적인 참의 존재인 것입니다.

인간 본연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아담 해와, 인간 종지조상의 모습이라는 것은, 거룩한 하나님을 닮아서 거룩한 자리에 떳떳하게 들어갈 수 있고, 하나님이 절대자라면 절대자인 하나님 앞에 절대적인 상대의 권한을 가지고 나타날 수 있는 모습인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 서 있는 인간입니다. 그 상대라는 것은 하나이지 둘이 아닙니다. 하나밖에 없는 상대적 절대자의 권한을 가진 것이 인간입니다.

그런 참된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인간 창조의 목적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다시 지을 수 없는 것입니다. 다시 짓는다는 것은 참을 부정하는 것이 됩니다. 그런 입장에 설 수 없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다시 지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그러면 절대적인 참된 하나의 남자가 나왔느냐? 아닙니다. 절대적인 참된 하나의 여자가 나왔느냐? 아닙니다. 완전하고 절대적인 하나의 가정이 나왔느냐? 아닙니다. 완전하고 절대적인 하나의 가족이 나왔느냐? 아닙니다. 완전하고 절대적인 하나의 민족이 나왔느냐? 아닙니다. 완전 하고 절대적인 하나의 국가가 나왔느냐? 아닙니다. 완전하고 절대적인 하나의 세계가 나왔느냐? 아닙니다. 이런 암흑의 세계에서 참된 세계를 꿈꾼다 하더라도 참된 세계는 하등의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이상 적인 나라, 이상적인 가정, 이상적인 사랑을 찾아 나가더라도 비운의 고빗길에 부딪치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남성은 어떠한 사람이냐? 절대적인 여성은 어떠한 사람이냐? 완전한 남성과 여성이 하나로 합하여 절대적인 하나님의 보호 아래 하나님의 사랑의 동산에서 보장받는 부부는 어떠한 부부냐? 그런 부부가 됐다면 그 부부는 인류의 참된 부모가 되었을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 조상인 아담 해와가 참된 부부입니까? 여러분은 아담 해와를 찬송합니까, 저주합니까? 아담 해와가 인류의 참조상이 됐어요? 여러분은 아담 해와를 원망해요, 칭찬해요? 기독교의 수많은 신도들이 우리의 조상 아담 해와가 잘했다고 해요, 못했다고 해요? 기도할 때마다 타락한 우리 조상이 나빴다고 하지요? 아담 해와 때문에 망했다고 하지요? 천도를 전부다 망쳐 놓고 인륜을 전부다 망쳐 놓고, 그들이 어디 가서 살 수 있겠어요? 그들의 후손이 되었다는 것이 원통하다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역적 이완용의 손자는 지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자기가 누구의 후손이라는 것이 알려질까봐. 누가 자기 족보를 캘까봐 제일 무서워한다는 것입니다. 이완용이 대한민국을 팔아먹고 싶어서 팔았겠어요? 할수없어서 팔아먹었습니다. 누가 역적이 되고 싶은 사람이 있어요?

그러면 아담 해와는 이완용보다 죄를 더 지었어요, 죄를 덜 지었어요? 이놈의 죄는 무슨 죄인지 억천만 세 후손들까지 전부다 지옥으로 끌고 가는 죄예요. 그들은 악당의 괴수가 되어 망해 버렸습니다. 그런 악당 괴수의 자손이 된 것이 좋아요?

여러분은 참된 말을 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참된 부모가 아니라 거짓된 부모에게서 태어난 거짓된 자식들입니다. 참부모가 나왔어요? 인간 조상이 타락해 버렸는데 유일무이한 참된 부모가 나왔어요? 절대적인 부모가 나왔어요? 나오지 않았습니다. 절대적인 남자가 나왔어요? 절대적인 여자가 나왔어요? 절대적인 가정이 나왔어요? 절대적인 씨족이 나왔어요? 나오지 않았다는 겁니다. 절대적인 씨족이 나왔다면 망하겠어요? 망할 도리가 있겠어요? 하나밖에 없는데….

본래 아담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두 사상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아담의 생활, 즉 아담이 살아가는 그 자체가 주의 사상이 되는 것입니다. 주의는 아담 주의요, 나라는 아담 나라입니다. 그 나라가 곧 천국입니다, 그런데 아담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거짓으로 시작한 이 타락한 세계에 있어서 좋다는 것이 선이 될 수 있어요? 거기서 환영하는 것이 선이 될 수 있겠어요? 그러한 논리법이 있어요?

참된 세계에서 살아 보지 못한 인간

완전한 종교는 완전한 부정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참된 선은 타락한 인간에 의해 완전히 부정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 같은 분은 '살고자 하는 자는 죽고 죽고자 하는 자는 사느니라'고 말씀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냥 그대로 살겠다고 하는 사람은 망하는 거예요, 흥하는 거예요? 그냥 그대로 하늘나라의 선한 사람이 되겠다고 하는 사람은 망하는 거라구요. 이 세상에서 죽는 자리, 외로운 수난길에 들어가서 희생하는 사람은 살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참된 부모의 모습을 역사상에서 한번이라도 보았습니까? 참된 부모가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내 손을 쓰다듬어 보았습니까? 참된 부모의 품에 안겨 젖을 먹어 보았습니까? 참된 부모의 품에서 길러져 보았습니까? 그러지 못했습니다. 참된 교훈과 생활로서 가르쳐 주는 참된 성인의 아들이 되어 보았습니까? 못 되어 봤습니다.

내가 선한 사나이가 되어 가지고 선한 삼촌과 선한 아주머니, 선한 형님 누나를 모셔 보았느냐? 그렇게 해보았어요? 아직 참된 가족을 만나지 못했으니 참된 친척이 있을 수 없습니다. 참된 친척이 없는데 참된 민족이 있어요? 어림도 없습니다. 참된 민족이 없으면 참된 나라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소망하고 정성들여도 참된 나라를 만날래야 만날 수 없는 악한 나라의 싸움의 교차로에서 방황하는 후손들이라고 자탄하는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그 나라의 충신으로서 그 나라의 주권자에게 충신의 도리를 다할래야 다할 수 없는, 그런 주인이 없는 처량한 운명에 놓여 있는 타락한 인류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선한 사람들이 세계에 팽창하여 만민이 평등한 사랑의 인연을 가지고, 만국이 하나로 결속되어 하나의 군과 같이 하나의 도와 같이 되어 보았습니까? 세계의 열강이 하나의 주권 국가를 이루어 세계적인 주권자를 모셔 보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관을 통하여 보고 싶고, 듣고 싶고, 느껴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듣고 느끼지 못하고 전부다 우리가 원하지 않는, 반대의 것을 보고 듣고 느낄 수밖에 없는 여건에 사로잡혀 살고 있는 것이 현재의 인간이 아닙니까? 이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내가 보기 싫어도 봐야 하고 만나기 싫어도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또 살기 싫어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을 탈피하고자 원해서 이 세상에서 격리운동을 전개해 온 것이 역사과정의 종교운동입니다.

지금까지는 남자들이 일선에서 희생해 왔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해야 되느냐? 오늘날 한 사람을 돌이키려면 얼마나 힘이 듭니까? 지금까지 종교의 교주들은 여자가 없습니다. 사람을 돌이 키는 일은 전부다 남자들이 하고 있습니다. 싸움도 전부다 남자들이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여자들은 왜 싸움을 안 하나요? 만약 여자들에게 싸움을 맡기면 몇만 년이라도 계속할 것입니다. 끝이 나지 않는다는 거예요. 하다 말고 자다가 일어나서 또 싸움을 하자고 앵앵 거립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계산을 해보고 여자들에게 싸움을 맡기지 않았습니다. 남자는 항상 후닥닥 후닥닥 싸움을 해서 끝을 내지만 여자들은 한번 싸우면 끝이 안 난다는 것입니다. 남자들은 후닥닥 해 가지고 몇천 년 안 가면 끝이 납니다. 미국과 소련이 서로 싸우고 야단하지만 곧 끝장이 난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싸움에서는 남자들이 많이 희생했지요? 남자들이 선두에 서서 싸웠지요? 여자들은 지금까지 선두에 못 섰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여자를 찾아 나오신 것이 아니라 남자를 찾아 나오셨습니다. 왜 남자를 찾아 나오셨느냐? 이것은 타락할 때 천사장이 먼저 타락했지요?

천사장이 타락하고 그 다음에 사람이 타락했습니다. 그리고 누가 먼저 창조되었느냐 하면 천사장입니다. 그 다음에는 남자가 창조되었습니다. 남자는 천사장 입장이므로 남자를 먼저 복귀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남자를 먼저 복귀하는 것은 천사장 복귀 시대권내에 들어 왔기 때문입니다. 천사장이 결혼했습니까? 천사장에게 결혼하는 법도를 허락했어요?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도의 길을 가는 남자 세계에서 하나님을 진정으로 따라가는 사람은 독신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

천사장 복귀시대가 지나가면 그 다음에는 여자가 득세하는 때가 옵니다. 그것이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1970년대 운세권입니다. 1970년부터 여자들의 운세권내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지금 여자들이 득세할 때가 오고 있는 것입니다. 어디에 취직을 하려고 해도 남자는 못 합니다. 여자가 필요한 때가 왔다는 거예요. 지금 큰 공장들은 전부다 자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밀한 부분은 자동화가 어렵기 때문에 일하는 사람이 재빠르고 한 가지밖에 생각하지 않아야 됩니다. 이런 데에는 여자가 더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데에 남자를 갖다 놓으면 일을 덤벙덤벙하기 때문에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은 여자가 책임해야 할 때

지금은 여자가 필요한 때입니다. 왜 여자가 필요합니까? 천사 세계를 지은 후에 아담 해와를 지었는데 죄악으로 끌고가는 선두에 누가 섰느냐 하면 여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귀시대에 있어서 여자가 먼저 책임을 져야 하는 것입니다.

미스 코리아, 미스 아메리카, 미스 유니버스라는 말이 있지요? 미스터 코리아, 미스터 아메리카라는 말 들어 봤어요? 미스터는 오시는 주인 양반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알겠어요? 그러면 여자는 뭐냐? 신부입니다. 그 미스터는 누구냐 하면 오시는 재림주입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랑 되신 주님입니다.

이제 여자들이 '치마폭이 꽃을 수놓고 토양을 갖추어 가지고 한번 득세해 보세, 세계적으로 주름잡아 보세' 할 때가 온다는 겁니다. 그런 바람이 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 같은 나라에서는 여자들이 남자의 뺨을 때려도 법에 안 걸리지만 남자가 여자를 때리면 법에 걸리는 것입니다. 반대지요, 세상에 그런 법이 어디 있느냐고 하겠지만 그런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남자들은 시세가 없느냐 하면 남자들은 천사장 입장이기 때문입니다. 여자는 주인 마님감이고, 남자는 종감이라는 것입니다. 주인이 살림할 수 있는 시대에 들어와 가지고 아들딸을 찾고 있는데 거기에 종이 필요하겠어요? 그러니까 여자는 득세하고 남자는 시세가 폭락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선생님이 지어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보라구요. 세계적으로 어떻게 되느냐? 하나는 유심적 대장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절대적인 내적인 대장으로서 중심이었습니다. 천사장은 뭐냐 하면 자기가 외적인 하나님이 되겠다, 유물적인 대장이 되겠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맞대어 타락되었습니다. 그렇게 뿌려 졌고, 그렇게 심어졌기 때문에 세계가 딱 두 갈래로 열매맺게 된 것입니다. 하나는 유물적인 세계관, 하나는 유심적인 세계관, 즉 사탄편과 하늘편이 생겼습니다. 하늘편에는 하늘편 천사장, 하늘편 해와, 하늘편 아담이 찾아져야 됩니다. 하늘편 천사장은 종교권내의 남자들입니다.

여기에서 이제 여자들이 득세할 때가 옵니다. 신부가 신랑을 맞이할 때가 되면 득세할 때가 오는 것입니다. 처녀가 시집가기 전까지는 그 집에서 종살이를 하는 것입니다. 형편이 무인지경입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물가져오라면 '예' 하고, 오빠가 그래도 '예', 동생이 그래도 '예', 전부 다들어주는 종살이하는 여자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때가 되어 시집가는 날이 되면 아버지 어머니는 있는 모든 것을 그냥 주고 싶어합니다. 가서 잘살라고 집안 전체가 복을 비는 것입니다. 같이 살면 좋겠다고 슬픈 눈물을 흘리는 반면 부디 하늘의 천사와 같이 잘살라고 축복해 준다는 것입니다. 들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들리는 자리에서 독수리 같은 신랑이 와서 채 가지고 가는 것이 장가가고 시집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여자들이 이러한 때를 맞이했는데 여자들 가운데 자기 아버지 어머니를 모시고 살겠다는 사람이 세상에 있어요?

천사장, 해와, 아담을 복귀해야 하나님의 한이 풀려

역사시대에 있어서 끝날이 어떤 때이냐? 아버지 어머니도 아랑곳없고, 형님 누나도 아랑곳없고, 내가 좋아하는 것만 제일이다 하는 시대입니다. 이때는 처녀 총각의 사춘기 시대와 같습니다. 그러나 옛날 아담 해와가 바람을 피워 타락하던 그런 사춘기가 아닙니다. 새로운 새생명의 사춘기가 왔기 때문에 타락하던 모양의 열매로 거두어지는 일이 세계에서 벌어지는 것입니다. 또, 타락하지 않고 본연의 세계로 들어가는 일도 벌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은 전부 틴에이져(teen-ager), 즉 십대 청소년시절에 다 타락해 버립니다. 오늘날 미국의 대학생들을 보게 되면 90퍼센트 이상이 시집가기 전에 전부다 남녀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부모 몰래 첫사랑을 맺어 망쳐 버린, 그렇게 심었으니 그렇게 세계를 혼란시키고 그렇게 세계를 사되게 만드는 끝날이 왔다는 것입니다. 아담 해와가 20세 전에 타락하여 그렇게 심었기 때문에 그렇게 거두어야 됩니다. 이것이 지금까지의 청소년 문제입니다. 이러한 청소년들을 잘라 버리고 반대로 절대 그럴 수 없다는 때가 나와야 됩니다. 거기서 참된 것이 나오고, 가시밭길에서 참된 것이 나오는 것입니다.

통일교회에 들어오면 연애를 못 하게 되어 있습니다. 연애하게 되어 있어요? 못 하게 되어 있습니다. 뜻을 알고 연애를 한 사람들은 내가 가만 두지 않을 것입니다. 통일교회에 들어오면 7년 동안 수절해야 됩니다. 연애하게 되어 있어요. 못 하게 되어 있어요? 생각해 보세요. 왜 못하는 거예요? 타락이 무엇입니까? 타락은 하나님을 빼놓고 자기들끼리 사랑한 것입니다. 자기들끼리만 사랑했습니다. 오늘날 세계는 자유로운 사회이기 때문에 결혼은 끼리끼리 해야 한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부모가 없는데도 태어날 수 있어요? 부모의 보호를 받지 않고 자랄 수 있어요? 사람이란 부모의 생명의 인연을 받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게 피어 있습니다. 또한 사랑도 생겨나지 않는 것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 해와가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누구를 중심삼고 결혼식을 했을까요? 아담 해와가 그냥 자유 결혼하자고 그랬겠어요? 어림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입회하에서 결혼식을 했을 것입니다. 주례는 누가 볼것이냐? 하나님이 보는 것입니다.

아담 해와가 어릴 때는 남매같이 철모르고 지냈지만, 자라고 보니까 상대적 관계에 있다는 것을 알고 사춘기권내에 들어가게 됩니다. 여자로 봐도 때가 다 되었고 남자로 봐도 때가 다 되었다는 것입니다 남자는 얼굴에 수염난 것을 보면 알고, 여자도 다 보면 알게 되어 있습니다. 그때는 생각이 전부다 입체적으로 벌어지기 때문에 표현도 입체적으로 들락날락 하는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해와는 하나님께‘아버지, 저 요즘 이상해요. 오빠한테 자꾸 업히고 싶고 가까이 가고 싶어요'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또, 오빠되는 아담도 하나님께 '아버지, 동생인 줄 알았던 해와가 이상하게 느껴져요'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했겠어요, 안 했겠어요? 그렇게 하기 마련입니다.

곤충들은 누가 가르쳐 줘서 새끼를 칩니까? 자연적으로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그 입장에 서서 부부의 인연을 맺어 주는 것입니다. 부부의 인연을 맺는데는 하나님 입회하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주인은 아담도 아니요, 해와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랑의 주인이십니다. 여러분이 사랑을 하면서 내 사랑은 영원하다고 말하지만 그 사랑이 자기 것입니까? 어림도 없습니다. 한 여자가 어떤 한 남자를 사랑한다고 해서 자기가 사랑의 주인입니까? 부부끼리 사랑하는데 남편이 자기 아내를 사랑한 다고 해서 그것이 자기의 사랑입니까? 사랑의 주인은 자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입니다. 하나님! 사랑은 뿌리를 끊어 놓고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뿌리에서부터 자라 가지고 아담 해와가 부부가 됐다면 얼마나 멋지게 사랑했겠습니까?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하늘편은 먼저 천사장을 복귀해야 하고, 그 다음에 해와를 복귀해야 합니다. 이는 타락한 해와가 아닙니다. 타락한 여자 들이 길거리에서 남자들을 끌어들이려고 하는데 전부다 그것입니다. 해와가 여자들을 전부 망쳤지 않았어요? 하나님이 사랑할 수 있는 딸, 하나님이 사랑할 수 있는 아들, 하나님이 사랑할 수 있는 천사장이 되지 못한 것이 타락입니다. 그렇지요?

그러니 하나님께서 복귀의 한을 풀려면 어떻게 되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사랑할 수 있는 천사장을 갖지 못한 것이 한이니까, 하나님께서 사랑할 수 있는 천사장을 가져야 되겠어요, 못 가져야 되겠어요? 가져야지요? 그러니 천사장형인 후손을 전부다 하나님편에 잡아놓아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딸이 될 수 있는 해와를 찾아야 되고, 하나님께서 잃어버린 아담을 찾아야 됩니다.

이들을 찾는 데에는 개인적으로 찾고, 가정적으로 찾고, 종족적으로 찾고, 민족적으로 찾고, 국가적으로 찾고, 세계적으로 찾아야 합니다. 이것이 복귀노정입니다. 복귀는 개인만 찾아서는 안 됩니다. 먼저 개인끼리 완전히 하나되어 가지고 새로운 가정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 새로운 가정이 새로운 종족을 만들어야 되고, 그 종족은 새로운 민족을 만들어야 되고, 그 민족은 새로운 국가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 국가는 새로운 이념 세계를 형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귀의 길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께 무조건 순종해야

이놈의 세상은 뒤집어 놓아야 됩니다. 자루를 뒤집으면 어떻게 됩니까? 거꾸로입니까, 바로입니까? 자루를 뒤집어 놓으면 옛날과 같은 모습이예요, 반대의 모습이예요?「반대입니다」 그와 같은 세상이 되어야 됩니다. 그래서 여기에 새로운 물건을 담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 같이하십니다. 그러려면 여러분 자신들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이러한 한의 기준까지 갈 수 있어야 합니다.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께서 어떤 작전을 하시더라도 거기에 무조건 순응해야 하는 것입니다.

좋은 것을 빼앗아 가고 나쁜 것을 주는 것은 악입니다. 좋은 것을 빼앗아 가고 나쁜 것을 주면 누구나 다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그것은 악입니다. 악과 선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좋은 것을 빼앗아 가고 나쁜 것을 주는 것은 악이요, 나쁜 것을 빼앗아 가고 좋은 것을 주는 것은 선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지금 이 세상에 사는데 올바르게 살고 있어요, 그릇되게 살고 있어요? 그릇되게 살고 있습니다. 그릇되게 사는 것을 빼앗아가고 더 좋게 사는 것을 주겠다는데 그것을 받는 것이 선한 사람이예요, 받지 않는 것이 선한 사람이예요? 받아야 선입니다. 여러분의 것을 빼앗으려고 하는 것이 잘한 일이예요, 못한 일이예요? 그릇된 것을 빼앗으려고 하는데 ‘아이고, 나는 그것을 안 빼앗기겠다'고 하는 것이 잘하는 것입니까?

여러분의 것을 빼앗는데 얼마나 빼앗느냐 하면 몽땅 빼앗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옷을 벗기는 데 있어서 내의까지 벗겨야 하는데 죽어도 벗지 않겠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왕 옷을 벗길 바에는 내의까지 벗겨야될 게 아닙니까? 내의를 안 벗겠다고 할때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반죽음을 시켜 늘어지게 해 가지고 옷을 벗겨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만년을 입어도 변하지 않는 훌륭한 옷을 입혀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입고서 춤을 추겠어요, 안 추겠어요? 춤을 출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빼앗는 것입니다. 통일교회는 이런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좋은 것을 빼앗고 나쁜 것을 주면 악입니다. 만약 나쁜 것을 주는 날에는 전체가 들고 일어나 합동해서 때려 쫓는 것입니다.

오늘날 통일교회 문선생은 이런 일을 하고 있습니다. 축복받은 1,200여 가정을 중심삼고 보면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통일교회 교인들은 정말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어려운 생활을 했기에 축복을 받아 잘살려는 소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남비 짜박지 그릇 짜박지 장만해 가지고 살려고 했는데 왕창 버리고 나가라는 겁니다. 남편도 버리고 아들딸도 버리고 전도를 나가야 하는데 그래 남비 짜박지가 귀해요? 다 버리고 나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전도를 나왔는데, 전도를 나가서 가만히 생각해 볼 때, 나는 전부다 빼앗기고 나쁜 것만 받게 되었다고 하면 통일교회 문선생이 쫓겨나겠어요, 붙어 있겠어요? 붙어 있겠다고 아무리 제사를 지내도 붙어 있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거기서 다 빼앗기고 내쫓겼다가 다시 돌다왔는데 그보다 몇 배 낫게 될 때는 마음으로 불평하고 마음으로 공상했던 사람은 선생님 얼굴을 볼 수 있겠어요? 그때는 고개를 푹 숙이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생명을 빼앗기는 자리에 가야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는 생명을 빼앗기는 자리에 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전부터 죽을 것을 생각했겠어요? 예수님은 서른 세 살 때까지만 살다가 죽는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죽게 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죽을 것을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갑자기 변화산상에서 엘리아와 모세가 나타나 예수님이 죽을 것을 얘기하니 청천벽력이었습니다. 모든 환경이 죽지 않을 수 없도록 딱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겟세마네 등산에 가서“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원대로 하옵소서(마 26 :39)”라고 기도했습니다. 이 얼마나 처량합니까? 이게 자식으로서 할 기도입니까?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피하게 하시옵소서. 할 수만 있으면 죽지 않게…' 얼마나 급했으면 이렇게 기도했겠어요? 이것을 볼 때, 죽겠다고 생각한 예수님이었어요? 예수님은 죽는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 안 했다는 것입니다. 돌변지사였습니다.

그렇게 기도해 놓고 미안하니까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한 것입니다. 그것도 한번만 했으면 될 텐데 세번씩이나 했으니 얼마나 처량합니까? 뼛골이 조여 들어가는 판국에 직면 했습니다. 행여나 소식이 있을까 하고 두 번 기도 드려도 소식이 없고, 세번까지 기도 드리고 소식이 있을까 기다렸지만 깜깜 무소식이었습니다. 세번까지 해봤으면 다 알수있지 또 해볼필요가 있어요? 그래서 할수없이 십자가의 길을 택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명 하나를 희생함으로 말미암아 오늘날 기독교가 세계적으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그때는 예수님을 한 젊은이로밖에 보지 않았습니다. 목수의 아들을 누가 알아주었겠습니까? 형편없는 사람으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잡혀가실 때 베드로는 야간도주해 버렸지요? 예수님의 어머니 아버지까지로 예수님이 달린 십자가에 가까이 가 보지 못하고 멀리서 바라보았습니다. 그때 로마제국의 권세가 얼마나 당당했는지 알아요? 그렇게 죽은 예수님이 오늘날 세계를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이 위대한 사실인 것입니다. 그렇게라도 죽지 않았으면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악이 무엇이냐 하면, 좋은 것을 빼앗아 가고 나쁜 것을 주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에서 진정한 공무원이라면 국민의 나쁜 것을 빼앗아 가고 좋은 것을 주고 싶어할 것입니다. 그렇지요? 그 반면 국민의 좋은 것을 빼앗아 가고 나쁜 것을 주면 악입니다. 그렇게 하면 그 나라는 망하는 것입니다. 통일교회 문선생이 여러분을 등쳐 먹고 편안하게 지낸 다면 그것은 악입니다.

복귀의 한의 고개를 넘으려면

오늘날 통일교회 교인들은 선생님한테 꼼짝 못합니다. 여러분의 어려운 것을 전부 다 내가 짊어지고 좋은 것을 주겠다고 하니 눈을 못 뜨고 얼굴을 못 들고 따라옵니다. 선생님이 고생을 지긋지긋하게 하니 여러분은 불평 한마디 못 하고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가는 데는 죽더라도 축복을 하고 죽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진정한 길을 걷는 선은 언제나 선입니다. 선 앞에는 누구나 머리를 숙이는 것입니다. 선 앞에는 머리 숙이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에 선한 입장에 선 사람 앞에는 불평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선이 악 앞에 설때는 당당합니다. 그렇지요? 인간의 본성은 나쁜 악이 들어오면 그 악 앞에는 굴복하지 않지만 선이 들어오면 굴복하는 것입니다.

복귀의 한의 고개를 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여러분들이 세상의 나쁜 것은 여러분 자신들이 다 지려 하고 좋은 것은 남에게 주겠다고 할 때, 여러분 자체의 생활권내에 한스러운 길이 메워져 가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그것은 우리 인간이 한스러운 탄식권내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한은 어디서 풀리느냐? 여러분들이 나쁜 것을 주고 좋은 것을 빼앗아 오는데서 풀려 나가는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을 주고 나쁜 것을 빼앗아 오는 데서 풀려 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어떻게 한이 맺히느냐? 선을 빼앗아 가고 악을 주는 데서 한이 맺히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반대로 선을 주고 악을 빼앗아 가면 하나님의 한은 풀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한을 풀어 드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나의 좋은 것을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의 나쁜 것을 내가 빼앗아 오는 것이 하나님의 한을 풀어 드리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나쁜 것을 주고 좋은 것을 빼앗아 오면, 그것은 하나님께 한을 맺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두 번, 세 번 하게 되면 그만큼 하나님께 한을 더 맺히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성교회 교인들이 하나님께 기도할때 ‘하나님, 내 아들딸이 국민학교, 대학교에 다니는데 그 학교에서 틀림없이 일등하게 해주십시오' 라고 하는데 그렇게 하면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내 아들이 나쁜 일을 해도 하나님 좋은 것을 주십시오' 이런 기도를 하면 망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하는 것보다 ‘내 아들이 제일 잘못했습니다. 내 아들이 철이 없습니다. 내 아들은 아무것도 볼 것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당신이 찾고 계시고 사랑하고 싶은 그 나라에서 제일 힘든 짐을 지고라도 감당할 수 있도록 당신께서 보호하시고 사랑하여 주십시오' 이런 기도를 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누구보다도 있는 정성을 다 들이는 아들을 보면 꼼짝 못하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아들이 감옥에 들어갔다고 인정을 내세워 찾아오는 어머니를 대해서 ‘당신의 아들은 졸장부가 아니오. 민족의 서러움과 더불어 온 세계 인류의 서러움을 짊어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인류 앞에 눈물을 흘림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인류로부터 조롱을 받는 그런 어머니가 되지 말라고 했던 것입니다. 내 앞에서 눈물을 흘리면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시시한 어머니가 되려면 다시는 나타나지 말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때 어머니는 아들이 무슨 뜻을 품었는지 알았거든 당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원수인 왜경들에게 실제 고문을 받고 죽을 사정에 놓여 있었습니다. 최후에 어머니가 이것을 알고 ‘나라에 대한 충절을 버릴소냐! 하늘을 위한 충절을 버릴소냐! 힘차게 빛나게 싸워서 죽음 길에서도 남아지는 사나이가 되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이런 부모를 맞았기 때문에 통일교회 선생님이 있게 된 것입니다.

선생님의 아버지 어머니는 나 때문에 돌아가셨습니다. 선생님은 나의 아버지 어머니보다도, 나의 형제보다도 여러분을 더 사랑했습니다.

좋은 것은 빼앗고 나쁜 것을 주는 것은 악

모든 것은 심는 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통일교회 문선생이 좋아서 지금까지 하나님이 사랑해 주신 것입니까? 천만에요. 공을 들였으니까…. 공든 탑은 무너지지 않는 것입니다. 나는 일주일 이상 칼을 꽂고 밤잠을 안 자고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을 그리워한 적도 있습니다. 그냥 그대로 앉아서 타령만 해서 될 것 같아요?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기도하는 식으로….

그렇게 만만한 자리에서 통일교회가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뼈와 살이 녹는 자리, 최고의 정력을 쏟고 힘을 다하는 자리에서 통일교회는 출발한 것입니다. 최고의 절정에서 통일교회가 출발하였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그 이상의 힘을 갖지 않고, 그 이상의 정력을 쏟지 않고는 통일교회를 점령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통일교회는 안 망한다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선한 것을 빼앗고 악한 것을 갖다 주는 것은 악이요, 좋은 것을 빼앗고 나쁜 것을 갖다 주는 것도 악입니다. 알겠어요? 둘이 있다가 하나가 떨어져 나가면 망합니다. 그렇지요? 그렇지만 나쁜 것을 빼앗고 좋은 것을 주면 좋아하지 말래도 좋아해요, 안 해요? 좋아하지요. 그러면 오지 말래도 ‘아이구, 나는 언제나 좋아' 하면서 따라옵니다. 따라와요, 안 따라 와요? 그러면 망하라고 해도 그것은 흥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자꾸 그렇게 나가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여기에 있는 사람이 한 50명이 되는데, 이 패들 가운데 한 사람이 그런 일을 한다면 전부다 신세를 지게 됩니다. 패라고 해서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기에 모인 여러분은 통일교회패가 아닙니까? 신세를 거듭해서 세 번 지게 되면 마음으로 신세를 갚아야지 하고 생각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마음이 있어요, 없어요? 있지요? 갚아야지 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세를 갚으려고 하는데 또 다시 빚을 지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람들은 우리 교회에서 아무개가 제일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 사람은 교회의 중심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가 되지 않겠다고 해도 중심자로 세우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싫다고 도망을 가더라도 교인들이 떼로 몰려가서 그를 중심으로 세우는 것입니다. 나중에는 중심뿐만 아니라 주인의 자리에 세우는 것입니다. 제일 좋은 자리에 세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부모 대신으로 세우려고 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남을 위해 봉사하면 망하는 줄 알았더니 흥하더라는 것입니다.

공산당식과 하늘 방식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그러한 작전을 해 나오신 것입니다. 기독교는 그런 작전 아래서 발전해 왔기 때문에 오늘날 세계적인 중심종교가 된 것입니다. 이러한 기독교가 역사적인 끝날에 자기 배를 채우기 위해서 자기 권력을 중심삼고 교인들을 등쳐먹기 시작하니 어떻게 되겠습니까? 나쁜 것을 주고 좋은 것을 빼앗아 가니 망한다는 것입니다.

통일교회는 지금 무엇을 하느냐? 대한민국을 중심삼고 대한민국에 나쁜 것을 주고 대한민국으로부터 좋은 것을 빼앗겠다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에 좋은 것을 주고자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나라를 위해서 있는 정성을 다하고, 피땀을 흘리며 생명을 걸고 일하고, 이 나라를 사랑했지만 찾아오는 것은 욕밖에 없습니다. 알겠어요? 대한민국을 위해서 피어린 투쟁의 길, 피어린 곡절의 길을 가고, 이 민족을 위해서 억울하게 몰리고 쫓기고 눈물 흘리면서 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나중에 돌아온 것은 이단이라는 욕밖에 없습니다. 지금까지 욕을 먹고 있습니다.

공산당식은 내 것은 내 것이고 네 것도 내 것입니다. 그리고 나쁜 것은 네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하늘의 방식은 그와 반대입니다. 하늘 방식은 내 것은 네 것이고, 네 것은 나라의 것이고, 나라의 것은 세계의 것이고, 세계의 것은 하나님의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의 자녀의 것입니다.

그러니 너와 나의 것은 누구의 것이냐? 세계의 것이요, 세계의 것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것은 네 것이고 네 것은 아버지 것입니다. 둘 다 아버지 것이라고 하기 때문에 아버지의 것은 우리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돌아오는 거예요. 하늘 가는 길이 지금까지 그렇게 하여 나온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귀한 것을 부모의 것으로 돌리라는 것입니다. 내게 좋 은것 성공한 것 칭찬받은 것을 부모의 것으로 돌리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나라의 것으로 돌려야 합니다. 부모들은 자기 자녀를 나라의 것으로 생각해야 됩니다. 그래야 되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우리 아들딸이 잘되었다. 나라님도 나만 못하다'라고 자랑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 부모는 그 효자를 나라의 것으로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라님은 세계의 것으로 여기고, 세계의 나라님은 하나님의 것으로 바쳐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가야 할 길입니다.

통일교회 문선생은 여러분들에게 하나님께 충성하라는 사상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 사상은 통일교회 문선생의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정성들인 물건은 함부로 받지 않습니다. 정성들인 물건은 독약보다 더 무서운 것입니다. 내가 그 이상 정성을 들이지 못하고 그것을 함부로 대했다가는 선생님이 그 정성에 깔리어 조건에 걸리는 것입니다. 정성은 그만큼 무서운 것입니다.

정성들이며 사는 사람은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원수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나를 죽이려고 별의별 모함을 많이 했지만 오히려 그들이 다 나가자빠지고 나만 남았습니다. 통일교회 문선생은 그런 사람 입니다. 지금까지 통일교회를 반대하던 사람들은 다 깨져 나갔습니다. 그들 자체뿐만 아니라 그들의 아들딸까지 다 걸려들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들을 원수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불쌍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인간끼리 한을 푸는 길이 어디에 있느냐? 한을 풀어 주는 곳이 어디일 것이냐? 빼앗아 가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빚을 지우는 데에 있습니다. 알겠어요? 나쁜 것을 가져 가고 좋은 것을 주라는 것입니다. 빚을 지우고 가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선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다 망하더라도 남아지는 사람입니다.

영원히 남아지는 것은 선과 그 주체 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더불어 남아질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부모가 그런지 모릅니다. 부모가 그렇지요? 부모는 자식의 어려운 것을 전부 다 짊어지고 가니까 부모가 좋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이런 사상을 중심삼으면 형제의 한도 풀 수 있고, 나라의 한도 풀 수 있고,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한도 풀 수 있는 것입니다.

고생길·희생길을 가지 않고는 하나님의 한을 풀 수 없다

하나님의 한, 복귀의 한은 누구에게 있느냐? 먼저는 하나님에게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는 지금까지 피맺힌 한의 심정을 지니시고 복귀노정을 거쳐 오신 역사적인 사정이 있습니다. 오늘 인간 세상에서 아이고 죽는다고 큰소리치며 죽어 나자빠지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 정도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알겠어요? 천지를 지으신 선한 주인이 되셔야 하고, 영광의 아버지가 되셔야 할 하나님께서 인간들보다 더 비참하게 계신다는 것입니다.

열 명의 아들 가운데에 한 아들이 급살맞았다면 그 부모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다른 사람들은 열명의 아들 가운데 한 아들이 죽었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부모의 마음은 열 아들에 대해 똑같은 것입니다. 가슴을 치며 통곡하지 않을 부모가 어디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타락된 인류를 지금까지 구하지 못하고, 구해야 할 부모의 입장에서 허덕이는 하나님의 심정은 얼마나 피눈물이 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고통을 받는 데에도 대왕이요, 눈물을 흘리는 데 있어서도 대왕이십니다. 역사상에서 피눈물나는 곡절의 사연을 모두 품고 나오시며 죽음의 자리 피의 제단 가운데에서 순교자의 왕의 자리에 섰었던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비통한 모든 내용을 중심삼고 볼 때, 아무리 인간이 고생을 했더라도 하나님의 고생에 비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아버지를 알고 그 아버지를 위하는 효성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당하는 수난과 고통은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맏아들이나 독자가 죽었을 때 머리가 헤쳐진 채로 땅을 치며 통곡하는 어머니를 볼 수 있습니다. 나는 그런 걸 많이 보았습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인간을 잃어버린 하나님께서는 어떠시겠습니까? 그 어머니는 자기 자식이 죽었다고 처량한 모습으로 한스러운 모양을 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인류에게 무한한 행복과 선의 이상을 주기 위해서 최고의 희망을 가지고 바라보던 아담 해와가 한 날에 간곳없이 전부 깨져 버리는 운명이 되어 버렸을 때, 그것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했겠습니까? 인간의 슬픔이 아무리 크다 해도 그것에 비할 수 있겠어요? 타락한 인간을 구하기 위해서 온갖 수난을 겪으시고 억울한 자리에 몰려 피어린 고통의 노정을 걸어오신 아버지의 사정에 비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사람은 자식이 급살을 맞아도 눈물을 흘릴 수 없는 것이요, 치가 떨리는 일을 당하더라도 하나님을 위로해 드려야 합니다. 이렇게 해야 할 인간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인간 끼리끼리에 있어서 어려운 것을 서로 책임지려 하고, 선한 것을 남기려고 하는 사람은 인간세계에서 하나님의 한을 풀어 주는 책임을 할수 있습니다. 인간세계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어려움을 내 일신에 짊어지고 나라와 세계의 선봉에 서 가지고, 죽음을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님이여 안심하시옵소서'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책임지고 아버지의 수난길에 있어서 방파제가 되어 적진을 향해 달려가겠다는 아들딸이 있으면, 하나님께서는 천신만고 수백 배의 수난이 앞에 가로놓여 있다 하더라도 그 아들딸을 위해서 고생하는 것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하나님이 기쁨의 고생을 하는 입장에 서야 기쁨과 영광이 상달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한을 풀기 위해서는 고생길을 가지 않고는, 희생의 길을 가지 않고는, 남한테 빚을 지우지 않고는 안 된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기 도

​아버님, 통일의 무리들이 지금까지 외로운 길을 개척하면 서도 자기에게 맡겨진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왔습니다. 아버지여, 여기에 모인 자녀들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망해 썩어질 이 땅 위에 그래도 당신의 거룩하신 뜻을 위해 죽음길을 가로막는 방파제가 되겠다고, 수난의 역군으로 책임하겠다고 눈물 흘리는 당신의 어린 자식들이 있는 것을 아옵니다. 오늘 이 밤에도 그들을 축복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한국을 그리워하는 자녀들에게 소망의 한날이 오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하늘권내에서 서로서로 하나되어 가지고 누구보다 섭리에 충실했다고 아버지께 영광을 드릴 수 있는 무리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복귀의 한의 길, 억천만 대에 엉클어진 한의 길을 극복하여야 할 저희의 입장임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 저희들이 진실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피하지 알고 가는 자신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 길은 희생의 길이요, 신세를 지우는 길이요, 나쁜 것을 받고 좋은 것을 남겨 주는 길이라는 것을 저희들이 아옵니다. 그것은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하면 계속할수록 높은 뜻을 향하여 개인시대를 지나고, 가정시대를 지나고, 종족시대를 지나고, 민족시대 국가시대 세계 시대를 지나가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오늘날까지 기독교는 연속적인 희생의 길을 찾아 나옴으로 말미암아 세계적인 때를 맞이했습니다. 이제 아버지의 긍휼을 바랄 수 있는 때가 되었고, 아버지의 수난의 길을 다시 책임지겠다고 몸부림쳐야 할 때가 왔사옵니다. 인간 세상의 수난의 길은 물론이지만 아버지의 수난의 길을 책임 져야 할 무리가 나와야만, 이 지구성에서 종교인들을 중심삼고 당신을 모실 수 있는 세계적인 터전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아옵니다. 통일교단이 이러한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 온갖 정성을 다할 수 있게 하시옵소서. 그러한 아들딸로서 세워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 이 시간까지 아버지께서 보호하여 주심을 감사하오며, 서울에 있는 식구들, 당신을 부르고 있는 모든 식구들을 친히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날까지 보호하여 주신 은사를 감사하옵니다. 역사적인 인연 가운데 새로 세워진 당신의 자녀들이 내일의 소망 가운데 맡겨진 책임을 다할 수 있고, 온갖 지성을 바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흘러가는 역사와 더불어 흘러가지 말고 흘러가는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외로운 고아의 신세에서 절망하는 자리에 있을 것이 아니라 소망의 한 곳을 바라보고 힘차게 달려갈 줄 아는 선한 무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시간까지 당신이 같이하여 주신 것을 감사하옵니다. 이 시간 이후에도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이 서대문 지구 위에 무한하신 사랑을 내리시어 만복의 터전을 넓히고 이 서울 도성을 복귀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책임을 감당할 수 있게 하여 주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밤에도 이곳을 위해 기도하는 수많은 자녀들 위에 친히 같이하여 주옵길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니다. 만만세의 은사와 사랑이 길이길이 당신과 더불어 이 사랑하는 무리 위에 같이하여 주옵기를 부탁드리며 모든 말씀 참부모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기 도]

아버지, 저희들이 하루하루의 보람있는 생활권내에서 아버지를 찬양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내일의 소망을 중심삼고 아버지를 위로할 수 있는 기쁨의 실체로서 당신 앞에 부복하는 뜻 깊은 길을 가는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자리에 부복한 저희들, 아버지 앞에 비록 부족한 모습이오나 당신께서 저희 개개인의 마음을 지키시사 참자녀의 모습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기뻐할 수 있는 모습이 어떤 모습이며, 악의 조건으로 남아질 수 있는 모습이 어떤 모습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당신께서 원하시는 모습이 되고자 하는 마음에 사무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저희들은 언제나 당신을 그리워하고 있사옵니다. 하오니 저희들을 당신의 사랑으로 품으시어서 당신이 기뻐하실 수 있는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의 마음 가운데 당신의 뜻 가운데 당신의 사랑 가운데 잊혀지지 않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아침, 남한 땅에 널려 있는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 위에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이곳을 향하여 부복하고 마음과 몸을 다하여 당신께 기도하는 그들 위에 거룩하신 사랑과 자비의 손길이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쉬지 않고 하늘을 위하여 기도하는 당신의 자녀들 위에 무한하신 사랑과 긍휼이 같이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아버님, 저희들의 모든 사정을 맡아 주시옵소서.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뜻을 맞이하는 저희들, 아버지를 사모하는 심정으로 하늘의 길을 가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시여 ! 남과 북으로 갈라져 처참한 상태에 있는 이 땅의 사정을 아시오니, 당신께서 이 나라의 운명을 맡아 주시옵소서. 가인 아벨의 탕감 복귀원칙을 생각할 때 오늘날 아벨의 입장은 누구이며 가인의 입장이 누구인 것을 아옵니다. 또한 아벨의 입장인 저희들이 해야 할 책임이 얼마나 막중한가 하는 것을 아옵니다. 저희들이 아버지를 부르기 전에 먼저 가인을 찾아서 아버지 앞에 굴복시켜야만 아버지 앞에 효의 도리를 다하게 된다는 엄청난 사실을 생각할 때, 저희들은 감히 뜻 앞에 설 수 없는 부족한 모습들임을 느끼게 되옵니다. 그러나 뜻 앞에 지체할 수 없는 저희들은 내일의 소망을 품고 싸움터로 나가겠사오니, 아버지 앞에 가인을 굴복 시키는 승리의 한날을 어서 이를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언제나 같은 생활, 습관화되기 쉬운 환경 가운데에서도 하늘을 기억하고 하늘을 흠모하면서 전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와 더불어 승리의 약속을 다짐하며 하루하루의 가중된 생활 노정 전체를 아버지 앞에 봉헌할 수 있는 당신의 사랑스런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한국에 있는 당신의 자녀들을 기억하여 주시옵고, 세계 각처에 널려 아시아의 일국인 이곳 한국을 향하여 머리를 조아리며, 외로운 자리에서 몸부림치고 어려운 환경으로부터 짓밟힘을 받으면서도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아버지 앞에 외로운 사정을 호소하며 타개해 나가는 당신의 자녀들을 위로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그러한 자리에서 일해 나온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한 외로운 싸움터를 타개해 나가지 않으면 하늘의 뜻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오니 외로운 그 자녀들을 지켜 주시옵고, 복을 빌어 주시옵소서.

아버지, 넓고 높으신 당신의 성상 앞에 지극히 낮고 천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당신의 긍휼과 자비의 손길을 간곡히 바라는 자녀들이 되도록 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옵고 원하옵니다.

능력의 주체이신 아버지시여, 생명의 원동력이 되시는 아버지시여, 사랑과 심정의 근본이 되시는 아버지시여, 저희들은 당신 앞에 하나의 실체로서, 하나의 가지와 잎과 같은 입장에서 일체를 당신에게 맡기고, 당신이 슬퍼하시면 저희도 슬퍼해야 되겠사옵고, 당신이 기뻐하시면 저희도 기뻐해야 되겠사옵고, 당신이 바쁘게 일하시면 저희도 바쁘게 일해야 되겠사 옵니다. 이런 면에서 당신과 더불어 모든 생활환경을 접해 나가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의 성상 앞에 저희들의 모습을 드러내 놓았을 때, 과연 저희들이 아버지께서 바라시던 모습으로서,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며 대하실 수 있고 아버지께서 친히 찾아오셔서 속삭임으로 갈 길을 분부해 주실 수 있는 아들딸이 되어 있는가를 생각하게 되옵니다. 저희들이 그런 아들딸이 되기 위해서는 아버지 앞에 누구보다 더 효성의 도리와 충성의 도리를 해야 되겠고, 생명까지도 아버지 앞에 바칠 수 있어야 되겠사옵니다.

저희들이 아버지의 아들된 인연을 갖지 못하게 될 때에는 생활무대에서 뜻 앞에 남아질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오니, 목석 같은 저희들의 마음을 녹이시어 당신의 마음을 닮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사정과 저희의 사정이 만나 저희들이 당신께로 흡수될 수 있는 인연이 이루어지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흘러가는 세월과 더불어 덧없이 자기 생애를 탄식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남겨서는 안 되겠사옵고, 소망과 더불어 힘찬 내일을 다짐하는 아버지의 아들로서의 권위를 갖고 기쁨의 한날, 즐거움의 한날, 자랑스러운 한날을 맞이해야 되겠사옵니다. 그러나 아직 그러한 날들을 갖지 못한 아들 딸들이 오니 얼마나 불쌍하옵니까.

뜻을 안 저희들은 아버지의 능하심을 알고 놀라우심을 체득하면서 내일의 승리자로서, 오늘의 건설자로서, 역사의 승리자로서 당당하고 권위 있는 자리에 서야 된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기에 언제나 스스로를 놓고 탄식하는, 자신을 내세울 수 없는 불쌍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겠다고 스스로 다짐할 줄 아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저희들의 마음이 당신께서 기뻐하실 수 있는 모습을 갖추게 하여 주시옵고, 저희들의 몸이 당신께서 원하시는 모습을 갖추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의 몸은 승리의 산제단이 되고, 저희의 마음은 승리의 산 제물이 되어 당신 앞에 영원히 바쳐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당신께서 찾고 싶었던 제물이 이것이요, 만나고 싶었던 소원의 실체가 이것이라고 우주 만상 앞에 저희들을 내세워 자랑하기에 부끄럽지 않은 아들 딸의 모습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당신께서는 그러한 아들딸의 모습을 얼마나 그리워하셨습니까? 이것을 저희들은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아버지, 겸손히 엎드린 저희 불쌍한 모습들을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오늘 특별히 이들의 마음 가운데 찾아오시어서 허락하실 수 있는 뜻과 약속하신 은사를 내려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하늘의 인연권을 벗어나서는 살 수 없는 불쌍한 인간이기 때문에, 당신과의 인연을 모든 것의 동기로 삼고 또 그것으로 말미암아 당신과 화합할 수 있는 기쁨의 자리에서 살 수 있다면, 하루를 살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인간으로서 더 이상 바랄 게 없다는 것을 느끼는 귀한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새로운 한날을 맞이하기 위해 당신 앞에 즐거움을 가져다 드리고, 소망을 가져다 드리고, 기쁨을 가져다 드리고, 승리를 가져다 드리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되어야 되겠사옵니다. 그리하여 남북은 물론이요, 세계에 널려 있는 원수들을 굴복시켜 아버지의 뜻 앞에 부복시키기 위한 총진군의 대열에 부족한 자신의 모습을 가다듬어 앞장설 수 있는 거룩한 당신의 무리가 되어야 되겠사옵니다.

현실의 고착된 생활환경에 사로잡혀 오늘 하루에 탄식을 남겨 가지로 내일의 소망을 잊어버리고 하늘을 원망하고 하늘을 불신하는 불쌍한 무리가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고, 영원한 해방을 받고 당신의 사랑에 이끌려서 사망의 세계를 아니 헤쳐 나갈래야 아니 헤쳐 나갈 수 없는, 힘있고 보람있는 아들딸의 모습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의 칭찬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모습이 되기를 마음으로 동경하고 몸으로 그리워하며 나아가길 원하오니, 당신께서 친히 여기에 부활의 권한을 일으켜 주시옵고, 이들로 하여금 영광의 터전 위에서 새로운 재출발의 도약을 하도록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아침, 당신의 이름을 부르며 모인 곳곳마다, 당신의 뜻을 위하여 모인 곳곳마다 아버지께서 무한하신 사랑으로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악한 세계에 물들지 않고 분별된 몸을 갖추어서 거룩한 날을 찬양할 수 있는 무리로 세워 주시옵고, 성별시켜 주시옵기를 간절히 원하옵니다. 친히 당신의 품안에 품으시어서 영광의 자녀로서의 인연을 맺을 수 있는 오늘 이한 날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낳아진 모든 전체를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님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말 씀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자기 자신을 중심삼고 바라는 목적 앞에 한 걸음 다가 가느냐 그렇지 않으면 후퇴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전진의 일로를 걸어온 하나님의 복귀섭리

자기 자신이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맞이하기 위해 보다 가치적인 무엇을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그리고 추구하는 그 내용이 크면 클수록, 그만큼 전진할 수 있는 도수를 배가시키겠다는 마음을 갖지 않고는 그 추구하는 목적을 성취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만일 그러한 목적을 중심삼고 나아가야 할 입장인데도 불구하고 나아가지 못하고 정지되는 한때를 맞게 된다면 후퇴라는 일로를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는 일상 생활권내에서 흔히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한 친구를 만나 대화를 나누는 데 있어서, 어제 주고받은 말보다도 오늘 나눈 말 가운데 스스로의 마음을 새로이 다짐할 수 있는 격려의 말과 보다 가치적인 내용의 말이 있었다면, 거기에서는 반드시 내적으로 전진을 결의할 수 있는 것이요. 그 결의와 더불어 생활무대에 있어서 스스로의 환경을 가일보 전진시킬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의 대화 내용이 어제보다 도리어 낙심을 가져다 주는 내용이었다면 후퇴할 수밖에 없는 내적 사연이 남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는 두 사람의 사이가 멀어지게 되는 것은 물론이요, 자기 자신도 대화하지 않은 것만 못한 결과적인 입장에 떨어진다는 것을 우리는 일상 생활을 통해서 잘 느끼는 바입니다.

한 나라의 운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떠한 나라를 중심삼고 보더라도 그 나라가 전진하고 있느냐, 정지상태의 길을 가고 있느냐, 아니면 후퇴 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오늘날의 세계를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의 세계를 보면 두 진영이 서로 대치된 사상적 체계를 갖추어 가지고 서로가 모습을 달리하여 싸우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두 진영 가운데 어느 진영이 승리를 거둘 것이며, 어느 진영을 중심삼고 세계가 수습되어 나갈 것이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이 대치된 두 진영 자체가 스스로를 중심삼고 보다 전진하고 있느냐, 정지하고 있느냐, 아니면 후퇴하고 있느냐 하는 문제를 우리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어느 한 진영 이라도 정지하는 입장에 서게 된다면, 거기에서 다시 전진한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것입니다. 더우기 후퇴하였다고 할진대는 정지한 것보다도 더 나쁜 결과에 부딪치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주의나 사상이든지 전진의 일로를 거듭하여 최후에는 세계의 온인류가 거기에 하나가 되고 또한 하나된 인류가 그것을 일대에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후손에까지 연결되는 전통으로 남기게 될 때, 그것은 역사가 흘러감에 따라 더욱더 빛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입체적인 내용을 갖고 있는 주의 주장이나 사상의 체계는 발전의 일로를 아니 갈래야 아니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발전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역사과정에서 조금씩 발전해 온 모든 여건들을 그냥 소모시킬 것이 아니라 그것을 생명의 기틀로 하여 거기에서 새로운 가지와 잎이 날 수 있도록 어떠한 보탬을 가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전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볼 때, 하나님께서는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한 입장에서 지금까지 섭리를 발전시켜 나오고 있는 것이며, 과거보다도 진일보한 전진의 일로를 현재 취해 나가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걸어 나오는 데 있어서는 어느 정도까지 전진하여 나왔지만 이제부터 나아가야 할 미래를 앞에 놓고 여기에서 계속 전진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을 생각할 때, 더 이상 전진할 수 없다고 하게 될 때에는 거기에서부터 정지상태가 벌어지게 되는 것이고, 또 그러면 거기에는 반드시 후퇴의 일로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계속해서 전진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 문제

사람은 누구나 실패하는 것을 원치 않고 성공하는 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마음으로 몸으로 성공할 날을 바라고 추구하지만, 실패는 어느누구도 바라지 않습니다. 환경 자체도 그것을 원치 않고 있지만 우리의 일상 생활 가운데는 성공보다 실패의 도수가 더 많이 감돌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더우기 우리들은 오늘날 일상 생활에서 그것을 체휼하고 절감하는 입장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후퇴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원수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타개해 버리고 후퇴는 나와 상관없다는 절대적인 입장을 고수해야 될 것이 소망을 갖고, 내일의 희망을 갖고 나가는 사람들의 필연적인 요건이 아닐 수 없음을 우리는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에 있어서 승리의 기점을 가졌다고 그것을 자랑할 것이 아니라, 내일에 있을 수도 있는 정지와 후퇴를 생각하고 오늘의 승리를 분석 비판할 줄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오늘 어떠한 승리를 거두었다 하더라도 그 승리를 놓고 기뻐할 수만은 없는 입장이 오늘날 보다 나아지기를 바라고 전진해 나가는 사람들의 입장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의 승리가 있다면 그 승리는 내일의 새로운 기반이 되어야 하며, 오늘의 진일보한 터전이 있다면 그것은 일보 전진한 것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내일의 생활적인 터전이 되고 사상적인 요건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늘 어떠한 승리를 거두었다면 그것을 터전으로 하여 보다 넓은 의미의 내일을 개척할 수 있는 하나의 모체, 하나의 동기로 소화시킬 수 있는 자체의 능력이나 자주력을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지 못한다면 현재에 아무리 승리를 하고 전진적인 노정을 가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으로는 희망하는 바를 성사시킬 수 없으며, 보다 큰 목적을 달성시키기 힘들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과정을 거쳐 가면서 나갔다 들어왔다 하는 순간들을 연결시켜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이라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현재라는 것이 얼마나 귀한가를 알아야 되겠습니다.

기쁨은 전진하는 가운데 느낄 수 있는 것

오늘날 우리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계속적으로 호흡을 해야 됩니다. 또한 거기에 상응하여 영양을 보급해야 됩니다. 이와 같이 보급된 영양소가 우리 몸의 순환기를 통하여 서로 주고받는 데 있어서 어제와 차이가 있다고 한다면 우리 몸의 컨디션은 좋지 않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상적인 신체 리듬과 보조를 같이해 가지고 어제보다 오늘에 조금이라도 영양을 더 보급해 주면 우리 몸은 자연히 건강해지는 것입니다. 거기에서부터 새로운 전진의 터전이 넓혀져 나가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되는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하는 데에 있어서도 반드시 영양제와 같은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또한 정상적으로 호흡을 하는 것과 같은 생활태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즉 '나는 이렇게 해 나가야 되겠다'는 독자 적인 신앙 기준을 중심삼고 호흡하듯이 신앙노정을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호흡하는 것과 같이 생명력을 보급할 수 있는 정상적인 기준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에 상응해 가지고 영양을 보급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영양제를 어떻게 보급하느냐, 정상적인 신앙 기준 앞에 정상적인 영양제를 보급할 수 있는 보급로를 어떻게 보강하느냐 하는 것이 전방에서나 후방에서나, 전후 좌우 사방에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어제보다 오늘, 이 시간보다 다음 시간에 어떻게 하면 보다 낫고 보다 가치 있는 영양을 보급시키느냐 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생활에서 기쁨이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전진하고 발전을 하는 데서만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그런 내용을 보강받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을 언제나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사람이 일을 하는 데 있어서도 그 일을 하기 전보다 하고 난 후가 더 나빴다고 한다면, 거기에서는 반드시 타격을 받는 것입니다. 나쁘다고 하는 것은 일로 후퇴했다는 것이요, 좋다고 하는 것은 일보 전진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입장에서 볼 때,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 인간들은 죄악된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생활하는 전분야에 있어서 오늘 하루의 생활은 기뻤다고 할 수 있는 결과를 남기기는 지극히 어려운 것임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현실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가 중요

열 사람을 대했으면 그 열 사람을 대하는 가운데 과연 몇 사람이 나에게 희망을 가져다 주겠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할 때, 열 사람이 전부 나에게 플러스적인 결과보다는 마이너스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자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마이너스적인 결과를 어떻게 보강할 것이냐? 그것을 보강할 수 있는 길이 없다 할진대 우리가 나가서 활동하는 환경에서는 우리의 신앙생활이나 환경적으로 우리의 나아가는 길에 전진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없고, 도리어 후퇴의 일로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주지해야 할 것은 내가 과거에 어떻게 어떻게 해나왔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오늘 이 시간부터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내가 처해 있는 현실적인 문제를 중심삼고 어떻게 처리해 나가느냐 하는 것이 지극히 중요하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마음에 원치 않는 사람을 대하게 될 때에는 어떻게 대할 것이며, 또 대하고 난 후에 나타난 결과를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문제들을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슬프고 외로운 자리에 있을지라도 더이상 내려가지 않고 더 이상 타격받지 않는다는 금을 그어 놓고 그 이상은 넘어가지 않는 대인관계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직장이면 직장에서 일을 할 때에도 일하는 자신이 어떠한 입장에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 직장에서 자기가 일보 전진할 것인지 후퇴할 것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처해 있는 직장을 중심삼고 그 직장 자체가 내게 있어서 내일의 소망의 터전을 다짐할 수 있고, 오늘에 있어서도 없어서는 안 될 관계로 남아질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일과 나 사이에 맺어진 관계가 나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필요적절한 내용으로 남아지지 못하고 그저 안심이 되었다고 하는 내용으로 남아지게 된다면, 그것은 정지도 아닌 후퇴의 일보를 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현재의 입장이 여러분의 생사문제를 좌우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목적이 뚜렷하고 동기가 좋아야 전진해

직장에서 펜대를 쥐고 글자 한 자를 쓰는 데 있어서도 누구를 위하여 쓰고 있는가 하는 그 목적관이 뚜렷해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나 자신을 위하여 사는 것보다 하늘의 뜻과 더불어 관계를 맺고 하늘의 뜻을 위하여 사는 것이 더 효과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살아가는 것이 나의 것으로 결과되는 것보다 하늘 것으로 결과지어져서 하늘이 기뻐해야만 우리 자신도 기쁠 것입니다. 어디까지든지 내가 주체가 아니라 하늘이 주체이기 때문에 반드시 하늘이 기뻐할 수 있는 내용을 세워야만 상대적 입장에 있는 우리가 기쁨을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연적인 원칙인 것입니다.

모든 일의 동기는 자기와 더불어 관계되어 있지만 그 결과는 자기 자체를 중심삼은 것이 아니라 더 큰 목적을 중심삼고 그 목적에 플러스되는 요건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루 하루 일을 하며 생활을 하는 가운데 그런 요소를 얼마만큼 남기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제보다 오늘에 있어서 또 오늘보다는 내일에 있어서 더 높이 더 많이 그런 요소들이 쌓이고 쌓여 그것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희망의 도수도 그만큼 높아지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전도를 할 때도 그렇다는 겁니다. 어제 전도할 때의 마음과 오늘 전도할 때의 마음이 출발할 때부터 달라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과거에는 이러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나섰지만 오늘은 새로운 마음을 갖고 해야 되겠다는 각오로. 출발동기부터 그렇게 다른 각오로 나섰다면 틀림없이 좋은 결과를 가져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지 못하고 옛날 보다 더 낮은 입장에서, 어제보다 못한 마음으로 출발을 하게 되면 반드시 후퇴의 일로를 걷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환경 속에서 계속적으로 일을 하면 할수록 거기에는 파경을 자초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그것이 일방적이 아니라 사방적으로 그런 후퇴의 감정을 일으켜 간다면, 아무리 목적이 크고 아무리 스스로 굳게 다짐을 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정지상태로서, 움직일래야 움직일 수 없는 완전히 고착된 입장을 우리는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전진하게 하거나 후퇴하게 하는 것은 자기 자신

우리가 전진과 정지라는 문제를 두고 볼 때 이것을 누가 자극시키느냐가 문제 되는 것입니다. 어떠한 외적인 환경이 나로 하여금 전진하게 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또한 어떠한 외적인 사연이 나를 후퇴하게 하는 것도 절대 아닙니다. 나를 전진하게 하고 혹은 후퇴하게 하는 모체는 누구냐? 어떤 상대적인 여건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나 자신이 문제입니다. 내가 상대했던 어떤 사람이 나빴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자기 자신이 후퇴하는 것도 자기 때문이요, 전진하는 것도 자기 때문이라는 것을 언제나 느껴야 됩니다. 자기 자신을 전진 하게 하고 혹은 후퇴하게 하는 모체가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문제가 상대로 인해 생기는 문제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기와 상관없이 생기는 문제로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생기는 모든 문제는 반드시 자기와 상관이 있기 때문에 생긴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런 문제들로 말미암아 나의 생애에 있어서 보람있는 가치를 결정짓느냐, 또는 그렇지 못한 결실을 맺느냐 하는 것도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러한 문제들을 청산하기 위한 하나의 해결방법을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여러분은 어디까지나 자기가 주체적인 입장에 서 가지고 대하는 모든 문제와 관계를 맺어 가지고 그것을 처리하여 반드시 승리의 결과로서 거두어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에 있어서 이러한 태도와 입장을 취하지 않고는 그 생활이 아무리 훌륭하다고 하더라도 거기에서는 피동적인 결과밖에 거둘 수 없는 것입니다. 피동적인 결과를 가지고는 또한 직접적인 승리를 거둘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분명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누구로 인해서 후퇴했고 또한 나는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됐다는 말들을 해서는 안 됩니다.

슬픔도 기쁨으로 소화하라

더 큰 결실을 거두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기에 대응되는 부정적인 환경을 먼저 거쳐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왜냐? 타락한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은혜가 오기 전에는 반드시 사탄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시련 기간이 지나고 나면 반드시 은혜의 날이 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역사를 보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슬픈 일이 닥쳤다고 해서 슬퍼만 할 것이 아닙니다. 슬픔으로 출발했다고 해서 슬픔으로 끝을 맺는다고 한다면 그 사람의 인생 행로에는 슬픔이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나 시작은 슬픔으로 시작했으나 끝을 기쁨으로 잘 수습했다면 거기서부터 기쁨은 출발되는 것입니다. 또 아무리 큰 슬픔이 찾아오더라도 출발때부터 그 슬픔을 기쁨으로 소화시켜 나가게 된다면, 그 사람은 과거의 슬픔과 현실의 슬픔을 승리로 결실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쁜 마음으로 환경을 대하게 될 때 역사적인 소망의 터전이 거기에 결실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앞에 다가오는 슬픔의 노정을 슬픔으로 대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출발은 슬픔으로 했지만 결과가 기쁨을 맺게될 때에는, 내일은 기쁨의 출발을 우리 자체 앞에 가져올 수 있는 것이요, 출발서부터 기쁜 마음을 가지고 최후까지 간다면 우리는 과거 현재 미래에 기쁨을 연결시킬 수 있는 중심적인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리에 서게되면 하나님이 간섭하시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과거의 승리만을 생각하는 분이 아니요, 미래의 승리만을 다짐하는 분도 아닙니다. 과거의 승리를 오늘의 현실에 대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미래의 승리의 터전을 현실에서 마련하려 하시기 때문에 여러분은 그 현실 환경을 슬픔 속으로 몰아 넣지 말라는 것입니다. 출발서부터 기뻐하고 좋아하는 입장에 서 가지고 결과까지 기쁨으로 소화시킬 수 있는 입장으로 나아간다면, 그 과정에 아무리 큰 슬픔이 부딪쳐 오더라도 그것을 기쁨과 은사로 소화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관계되었던 입체적인 범위, 즉 영계와 자기를 중심삼은 과거 현재 미래가 하늘 앞에 승리의 결과로 거두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생각해 볼 때, 그러한 고비가 많으면 많을수록 빛나는 전진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어려운 고비를 지나고 나면 내가 어떻게 그것을 넘었는지 자기 스스로 생각하게 되고, 또 지나간 그날이 언제나 자기에게 있어서 하나의 새로운 동기가 되고 격려의 재료가 되어 소망찬 내일의 공고한 터전이 되는 사실을 우리는 신앙생활을 통해서 자주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은 자신이 전진하고 후퇴하는 이 모든 인연은 상대적인 여건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인 자신으로 말미암아 되어 진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도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안 될 처지에 섰을 때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 :39)”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거기에서 중심은 하나님이었습니다. 즉, 예수님은 자기를 중심삼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중심삼고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길을 가느냐? 하나님은 슬픔의 길에서부터 기쁨의 길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슬픔의 날로부터 출발했기 때문에 복귀노정에 있어서 언제나 슬픔의 노정을 먼저 거쳐야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입장을 여러분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악과 선이 투쟁하는 데 있어서는 어느쪽이 손해를 보아야 되느냐? 악이 손해를 보는 것이 아니라 선이 손해를 봐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손해를 보고 출발한 행로가 선의 행로이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은 손해를 보는 입장이기 때문에 언제나 슬픈 역사를 거치시고 나서 그것을 청산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슬픔을 제거하면서 내일의 기쁨의 한때를 바라며 나가는 것이 하늘의 복귀섭리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결과에 있어서 기쁨의 결과를 가져오지 못하고 출발할 때보다도 더 큰 슬픔으로 나타났다면, 그 슬픔의 결과를 가져오게 한 사람은 거기에서 꺾어져 다시는 일어설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그것이 복귀섭리노정에 있어서 뜻을 대해 나오는 책임자들이 거쳐온 역사과정인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슬픈 하나님을 위로해 드리려면

하나님은 기쁨으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슬픔으로 출발했기 때문에, 그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는 것은 슬픔의 날을 맞이하기 위하여 오시는 것이 아니라 기쁨의 날을 맞이하기 위하여 오시는 것이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이 슬픈 입장에서 출발하여 슬픈 결과를 맺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하나님을 목전에서 전면적으로 배반하고 추방하는 결과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슬픔으로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기쁨으로 맞을 수 있는 마음의 자세를 갖추어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마음 자세를 갖춘다 할진대, 슬픔으로 출발하여 인간을 찾아오시는 하나님이었더라도 우리를 대하시는 순간 슬픔을 잊고 기쁨의 결과를 세울 수 있는 입장이 될 것이고, 또 그렇게 되면 그 기쁨의 기준이 상승함으로 말미암아 여기에서 복귀가 되는 것입니다. 기쁜 마음을 갖고 대하는 그 자리에 창조적이고 새로운 전진의 역사가 출발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기반을 닦아 넓히고 그러한 환경을 마련하려는 사람을 중심삼고 섭리의 터전을 넓히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복귀섭리를 승리로 결과지으시려는 하나님의 불가피한 욕구요, 요구가 아닐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뜻길을 가는 데 있어서 '내가 외롭기 때문에 하늘이여, 나에게 복을 주소서. 내가 어려운 길을 가고 있으니 하늘이여, 이 길을 막고 나를 쉬운 길로 인도하소서' 하고 기원해 나왔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어느 누구보다도 더 어려운 입장에서 이 시간에도 나보다 더 큰 고통을 당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도리어 하나님께 '당신의 어려움을 나에게 분담시켜 주시옵소서'라고 하며 그 크신 하나님의 고통을 위로하는 입장에 서야 되겠습니다.

어떤 어머니에게 사랑하는 아들이 있었는데 그 아들이 죽었다면 그 어머니는 말할 수 없이 슬퍼할 것입니다. 그럴 때 그 어머니의 마음은 그 이상의 슬픔을 느껴 보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 어머니가 맛본 슬픔보다 못한 슬픔을 겪은 사람이 그 어머니를 위로한다면 그 어머니는 위로받을 수 없지만 자기 이상의 고통을 당한 사람이 위로하면서 '나도 이런 일을 당해 보았다. 이럴 때는 이렇게 하면 손해만 보니까 이렇게 이렇게 하라'고 할 때에 그 어머니는 거기에서 자기의 슬픈 마음을 수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어머니의 다른 아들이 어머니보다 더 슬퍼하면서 '내가 어머니의 슬픔을 대신할 수 있다면 어떠한 어려움도 극복 하겠다'고 하며 나선다면 그 어머니는 그 아들로 말미암아 새로운 소망을 가지고 도리어 그 아들을 위로하는 입장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그러한 입장에서 슬픔을 당한다고 한다면 우리가 하나님이 당하시는 슬픔이 얼마나 크겠느냐 하면서 하나님을 생각하며 눈물짓고 하나님께 너무 슬퍼하지 마시라고 권고할 수 있는 입장에 서야 합니다. 자기의 형편은 제쳐 두고 하나님을 위로할 수 있는 입장에 서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은 슬픈 자리에서도 도리어 우리를 위로하실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고생하는 자리에 서 가지고 '내가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하며 있는 정성을 다하고 핍박과 괴로움을 당하는 것을 자기의 사명으로 알고 그것을 극복해 나가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은 거기에서 위로를 받으실 것이며, 당신의 모든 사연을 털어놓으시고 그와 함께하려 하실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 인간의 심정세계 즉, 정적인 세계를 미루어 보아서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는 뜻길을 가는 데 있어서 언제나 슬픈 하나님을 어떻게 위로해 드릴 것이냐 하는 것을 생각하며, 하나님을 위로해 드리기 위해 하나님보다 더 수고하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그렇게 되면 도리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로하시는 입장에 서게 될 것이고, 또 우리를 위로하시는 입장에 선 하나님은 슬픔을 잊으시고 기쁜 마음을 가지고 우리를 대하시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슬픔을 알았기에 하나님의 슬픔을 대신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안타까와하며 간접적으로나마 위로할 수 있는 입장에 서면, 하나님은 그러한 우리의 모습을 보시고 오히려 우리를 위로하시는 자리에 서실 것입니다. 그러한 자리에 섬으로 말미암아 그 순간은 바로 하나님께서 슬픔을 넘어설 수 있는, 슬픔을 잊을 수 있는 한 순간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두고 볼 때 신앙생활에 있어서 그러한 태도가 얼마나 귀중한가 하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시간이란 것은 자랑하는 시간이 아니라 제물을 드리는 시간이란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이시여, 당신께 슬픔이 있으면 그 슬픔을 나로 인해 탕감하시옵소서. 그뿐만 아니라 우리 교회의 모든 슬픔까지도 나로 인하여 탕감하여 주시옵소서' 하면서 제물되기를 다짐하고 그런 입장을 찾아 나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아무리 멀리하려 하더라도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그가 원치 않아도 하나님은 반드시 그 사람을 중심삼고 인연을 맺으려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을 통해서만 전진할 수 있는 것이 하늘의 역사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터전을 갖고 나서는 사람을 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전진의 일로를 가기 위해서는 슬픈 하나님을 위로할 수 있는 자리에 서야 합니다. 슬픈 하나님을 위로하기 위해서는 슬픈 입장에 있어서는 안 됩니다. 슬픈 입장에서는 슬픈 하나님을 위로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불평하는 마음이나 불만스런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뜻을 위해서라면 천만번 죽더라도 감사할 수 있고, 천만번 다시 회생하더라도 또다시 하늘의 뜻을 위해 죽을 수 있다면 소원이 없겠다는 마음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은 자기 일대(一代)에 있어서 수십 혹은 수백 사람을 대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돌아보며 나는 하나님을 위로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 살았다고 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죽어도 죽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게 개인적인 싸움터에서만 싸울 것이 아니라 그런 마음을 가지고 범위를 넓혀서 가정적인 싸움터에서 싸워 나가야 됩니다. 내 개인이 과거에 그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가정을 붙안고 싸웠으면 또다시 종족을 붙안고 싸우고, 그 다음엔 민족을, 국가를, 세계를 붙안고 싸워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탕감의 단계를 넓혀 나가면 우리가 전진할 수 있는 분야는 점점 사방으로 그 범위를 넓혀 나갈 수 있는 것이요, 그로 인해 우리는 계속 발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뜻을 대하는 데 있어서 과거보다도 오늘이, 오늘보다 내일이 가면 갈수록 점점 그 목표가 감소되는 자리에 서 있다면, 그 자리는 틀림없이 정지하는 자리를 넘어 후퇴하는 자리인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후퇴하는 사람은 하나님도 싫어해

후퇴하는 사람은 세상 사람들도 싫어하지만 하나님도 싫어합니다. 후퇴 하는 사람의 뒤에는 반드시 사탄이 따라와 가지고 그 사람의 전진을 백방으로 막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은 후퇴의 일로를 걷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일보 후퇴하는 사람은 선한 입장이 아니라 악한 사탄의 입장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는 시대가 중요합니다. 자기가 아무리 신앙 생활을 당당히 하고 뜻길을 힘차게 나가며 개인적인 섭리시대에 승리했다 하더라도, 그 시대가 가정적인 섭리시대권내로 일단계 전진해서 가정적인 책임을 짊어져야 할때는 다시 거기에 맞추어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시대에 승리한 결과를 가지고 가정적인 섭리시대에까지 승리로 밀고 나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과거의 신앙생활과 현재의 신앙생활을 두고 볼 때 그 모양이 같고 영역이 같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보다 전진된 시대권내에 있어서는 자기 자신도 전진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개인적인 사명만을 하던 때와 같은 입장에 서 있다면 이는 전진하는 것이 아니라 후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뜻의 길을 가는 사람들은 불평불만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몸을 굽혀 큰 죄를 진 죄인과 같은 입장, 제물의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한스러운 복귀의 노정입니다. 이렇게 한스러운 복귀노정의 탕감은 오늘의 어떤 순간에 완료되는 것이 아니요, 내일 완료되는 것이 아닙니다. 현실, 바로 오늘 이 시간을 중심삼고 완결지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현실을 무의미하게 보낼 수 없는 것입니다. 현실이야말로 죽느냐 사느냐 하는, 나의 생사를 판결짓는 기로요, 분기점으로서 항상 나의 생명을 노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리가 현실인 것을 여러분은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현실에서 패자가 되어 가지고는 미래에 있어서도 승자가 될 수 없습니다. 또 현실에서 패자의 서러움을 맛본 사람은 그것을 과거의 승리의 결과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에 우리의 원수 중의 원수가 나타나기도 하는 것이요, 행복 중의 행복이 뒤넘이치기도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어떻게 하면 이 원수를 때려잡고 행복의 요인을 모색할수 있느냐 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인 것입니다. 만일 자기도 모르게 한 고비. 두 고비. 세 고비 후퇴의 길로 떨어져 나갔다고 하게 될 때에는 이것을 다시 전진의 길로 되돌리려면 얼마나 힘이 드는지 모릅니다. 또 자기의 마음에 금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고 그것을 회복하려 할때에는 몸부림을 쳐도 혼자서는 힘이 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길을 가는 데 있어서 자기가 사랑할 수 있는 아들이나 지도자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복인지 모릅니다. 그럴 때에 만일 자기 주장이나 주관을 내세웠다가는 영영 갈 길이 막혀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가 사랑하는 아들이나 딸이 있으면 그에게 자신의 모든 사연을 털어놓고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며 또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의논을 해야 됩니다. 또 스승이 있다면 그 스승에게 모든 사연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스승님은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상의를 해야 됩니다. 이렇듯 상하 관계에서 문제를 수습할 수 있는 제2의 대상을 찾아 나서야지 자기 혼자 서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후퇴하는 입장에서는 어떻게 가일보 전진할 수 있는 동기를 찾을 것이냐? 자기 자체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제3의 대상을 통하여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가 필요한 것이요, 스승이 필요한 것이요, 사랑하는 아들딸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여러분은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이러한 사람이 없을 때에는 하늘과 담판을 지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미 타격받아 가지고 후퇴한 자리에서 담판을 지으려 할 때에는, 과거에 전진 하던 때보다 몇배의 어려움이 뒤따른다는 것입니다. 몇배의 정성을 들여도 수습할 수 없는 것이 우리 신앙길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알라

이와 같이 촌각을 다투어 가며 싸우는 생활을 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한 시간이 얼마나 무섭다는 것을 잘 알 것입니다. 어느 누가 턱 나타나서 말씀을 해도 그 말씀 한마디가 나를 때려 잡느냐, 아니면 나를 가일보 전진시킬 수 있는 동기가 되느냐 하는 것을 벌써 마음으로 안다는 것입니다. 기쁠 수 있는 대상인지 아니면 슬플 수 있는 대상인지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오늘날 신앙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러한 생활을 하는 데는 그저 아무렇게나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중심삼고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자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타격을 받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충격되는 말을 듣더라도 타격을 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설령 타격받을 수 있는 일이 생겨 자기가 억울한 입장에 서게 되어도 그것은 나를 망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흥하게 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해야 됩니다. 그러한 일이 생기면 생길수록 미래의 때가, 내 때가 가까이 온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환경을 넘기 위해 겸손한 마음으로 온갖 정성을 다 들여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빌라도의 법정에서 예수님에게 유대인의 왕이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당당코 변명할 수 있는 내용이 충분히 있었지만 자신이 지금 서 있는 자리가 어떠한 자리라는 것을 알고, 또 어떠한 변명을 해도 그 자리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에 변명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거기에서 입을 잘못 열었다가는 하늘을 불신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하늘의 종족을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인가 하는 것을 냉정하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주위환경에서의 반대가 강하면 강할수록 하늘의 종족은 거기에 비례해서 커지는 짓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뜻을 중심삼고 역사적인 전통을 세우는 데 필요적절한 내용의 말을 남겼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빌라도 법정에서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는 물음에 그렇다고 대답한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한 내용은 역사적인 승리를 결정짓고 시대적인 중심을 결정지으며, 미래의 방향을 제시한 내용인 것입니다. 그러한 자리에서 책임하지 못했다 할진대는 예수 그리스도가 세우고자 했던 정상적인 복음의 터전은 닦아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언제나 생각해야 할 것은 이 시간, 오늘 이 시간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외롭고 불쌍하신 분인가

어떠한 지도자가 되었으면 단 위에 서서 수많은 대중 앞에 말씀을 전하는 그 시간은 심각한 시간입니다. 지도자가 단에 서서 말씀을 전할 때는 어떻게 뭇 사람에게 생명의 인연을 가해 가지고 하늘과 연결시켜 주느냐 하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이 지도자의 책임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자기가 후퇴했는지, 아니면 일보 전진했는지를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후퇴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가려 놓지 않고 그대로 있으면 그것을 다시 수습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도자의 가는 길이 얼마나 심각하고 처량한 길인가 하는 것은, 자기가 그런 생활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는 것입니다.

지도자는 개개인의 생명을 책임져야 하는 입장인 동시에 모든 일의 첨단에 서야 하는 개척자의 입장인 것입니다. 가냘픈 자리에 있는 사람에게는 생명의 보호자요, 지도자라는 것입니다. 오늘의 터전보다도 내일의 상대적인 터전을 언제나 비교하는 불쌍한 입장에 서 있는 것이 지도자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우리 인간의 지도자가 그렇거늘 하물며 이 우주를 책임져 나가시는 하나님의 입장은 어떻겠습니까? 미래에 대한 것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의 입장이지만 동시에 인간들의 아버지의 입장에서 땅 위의 사람과 서로 상응적으로 모든 것을 가려 가지고 결정해 나가지 않으면 전진할 수 없는 하나님의 입장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땅 위의 한 사람을 찾아 나오시는 그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초조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은 지도자의 생활이 얼마나 고독하고 외로운가 하는 것을 느낌으로써 하나님께서도 외롭고 불쌍하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타락은 언제 오느냐? 타락은 지난날에 왔던 것이 아닙니다. 어느 한 순간, 바로 오늘 이 시간에 나를 걸고 넘어가는 조그만 문제가 나의 생사를 결판지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타락은 노도와 같이 한꺼번에 밀려들어 오는 것이 아닙니다. 어떠한 동기로부터 시작되어 조그만 틈 사이로 알게 모르게 스며들어와 전진의 길이 파탄되어 가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무서운 일이 과거가 아닌 오늘 이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늘과 사탄이 함께 사활을 걸고 노려보는 자리가 현실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만일 현실에 있어서 가일보 전진하지 못하고 후퇴 하는 입장에 서게 될 때에는 친구고, 자식이고, 이웃이고, 가족이고 전부다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터전을 어떻게 해서든지 올바르게 닦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협조하실 수 있는 내용

하나님의 장녀가 되려면 교회를 누가 맡아야 됩니까? 지구장이 맡아야 됩니까? 또 하나님의 장남이 되려면 지구장이 맡아야 돼요? 서로가 맡겠다고 싸워야 되는 것입니다. 어려운 일은 내가 먼저 하겠다는 마음, 죽을 자리에는 내가 먼저 가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도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하늘은 반드시 선하면 올라가게 하는 것이요, 악하면 내려가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올라가고 내려가는 움직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노정에서는 수평선을 기준으로 해서 선한 것을 중심삼고 점점 나아가느냐 하는 것이 지극히 중요한 문제인 것입니다.

교회에 출석하게 될 때에도 내가 과연 누구를 대하러 가느냐, 또 무엇을 하러 가느냐 하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일보 전진하기 위해서 나간다, 또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서 나간다고 할 때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이냐? 어제보다 더 가치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태도부터 달라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벽부터 일하라는 것입니다. 교회를 오는 데 있어서도 그냥 간다는 마음으로 오지 말아야 하고, 잡담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일편단심 한 곳에 지성을 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전차를 타거나 택시를 타거나 해서 교회로 오는 도중에는 오고 가는 많은 사람들을 쳐다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그들의 나타난 모든 형상들을 그냥 지나칠 것이 아니라, 그것을 분별하고 감정해서 자기의 가는 길 앞에 플러스 될 수 있는 재료와 영양소로 흡수할 수 있는 놀음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길을 가다 보면 별의별 사람을 다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이 자기 앞에 보여지는 것은 무언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런 모습들을 볼 때에는 어떤 설교자의 설교에서보다도 더 많은 느낌과 깨달음을 받아야 됩니다. 그런 것들은 모두 자기의 갈 길을 보여 주는 것임을 알아야 됩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은 뜻을 위해서 저렇게 전심전력을 다해 보았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됩니다. 그런 것들을 볼 때에는 그 한 시간을 중심삼고 가일보 전진할 수 있는 재료로서, 자신을 비약시킬 수 있는 상대적인 재료로서 받아들이기에 급급해야 됩니다.

여러분이 처음으로 단 위에 서게 될 때, 그 단에 서기까지에는 졸이는 마음을 느꼈을 것입니다. 또 어떤 때는 지긋지긋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니 그 자리가 공적인 자리일 때는 그 배후에 계시는 하나님은 얼마나 마음을 졸이시겠는가를 생각해야 됩니다. 하나님은 얼마나 마음을 졸이시 겠는가를 생각하고 자기의 부족함이 느껴지면 느껴질수록 하나님의 안타 까와하시는 심정에 접하려고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비참하고 불쌍한 입장에 계시는 하나님을 느끼게 될 때에는 그 자리에 있는 청중을 사로잡을수 있는 것입니다. 그 자리가 아무리 크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동정하고, 하나님을 중심삼고 슬픔이나 감격된 마음을 폭발시키는 내용을 설교할 때는 청중을 사로잡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버려두고 자기 혼자 해보겠다고 한다면 그가 지구장의 자리에 앉아 있다 해도 쉽사리 넘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언제나 하나님을 중심삼고 하나님이 협조하실 수 있는 내용을 갖고 살아야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기도할 때 '아버지' 하는 것은 이미 어떤 한 개인, 즉 김 아무개나 박 아무개의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김 아무개나 작 아무개에게 공적인 섭리노정에 왔다 간 수많은 선조들이 최후에 성취하고자 했던 그 목적을 중심삼고, 그들이 맞이하려 했던 결정적인 순간을 통해서 졸이는 마음을 가지고 기도를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바라심이고 요청인 것입니다. 그리므로 여러분은 '어떻게 하면 그러한 아버지 앞에 공인받는 사람이 되어 사명을 다할 수 있을 것이냐' 하는 것을 늘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고 하늘을 대신할 수 있는 본연의 입장에서 기도를 해야 됩니다. 그러면 그 기도는 자신의 입을 통해서 나온 것이지만 자신의 기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자신이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기가 감동되지 않고는 절대로 상대를 감동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전진하는 신앙자의 생활 태도

오늘날 우리가 처해 있는 현재라는 것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를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여러분이 전진이냐 정지냐 이거예요. 정지해서는 안 됩니다. 정지는 절대로 원하지 않습니다. 정지라는 것은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급경사를 올라갈 때는 잠시라도 정지 하게 되면 여지없이 굴러떨어지는 것입니다. 신앙길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언제나 이런 것을 생각하고 긴장해 있어야 합니다. 급경사를 올라갈 때 한걸음 한걸음 올라가는 그 걸음은 천륜을 대신할 수 있는 가장 귀한 것입니다. 한걸음 올라서기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칠부능선, 팔부능선, 구부능선을 넘어 정상을 향해 갈 때는 다른 무엇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일편단심 정상만을 향하여 올라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일단 정상에 올라서면 세상은 모두 자기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시야에 들어 오는 모든 존재물들도 자기의 품에 품겨져 있는 것이요, 눈 앞에 전개되는 모든 존재물들도 주체인 자기 앞에 상대적인 인연을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기 앞에 희열의 대상, 영광의 대상으로서 기쁘게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느끼는 자리, 생애 가운데에서 그러한 기쁨을 하나님과 더불어 나누고 그러한 승리를 체휼하는 자리에는 하나님이 같이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시간, 그런 때를 많이 갖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같이하지 않을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역사적인 일대를 중심삼아 가지고 내가 100이 라는 기준을 가진 사람인데 200이라는 기준을 갖추었다 하게 되면 그 사람은 아무리 타락된 길을 간다 해도 200을 갖춘 그 기준이 항상 그를 지켜 줄 것입니다. 어려운 자리를 찾아가서 어려운 일을 하려 하면 벌써 그것이 될 것인지 안 될 것인지 그의 마음과 영, 즉 그의 속사람이 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생명체가 되기 전에 그 생명체는 어디에서 자랍니까? 그 생명체는 공중에서 자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에서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영형체와 생령체도 공중에서 자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속에서 자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생령체의 감각, 생명체의 감각, 혹은 영형체가 감지하는 그 무엇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것을 제대로 삼아서 뜻길을 걸어가는 데에 있어서 자신이 전진하고 있는지 후퇴하고 있는지를 가릴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가리지 못하면 여러분은 정지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정지하는 무리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들은 새로 들어온 사람들 앞에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생활과 그러한 신앙태도가 습관화되고 전통화하면 새로운 뜻 앞에 크게 써야 할 사람들이 들어왔어도 그들 앞에 본이 되지 못하고 자극을 주지 못하게 됩니다. 먼저 들어온 사람들이 생활면에서나 신앙면에서 새로 들어온 사람들 앞에 본이 되어서 그 기반을 닦아야 할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러지 못했을 때는 큰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현실에서 싸워야 합니다. 전진하기 위해서는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감각, 즉 오관을 통하여 자기가 전진하고 있는지 후퇴하고 있는지를 감지해야 됩니다. 오관을 통하여 들어오는 그 감각의 일체는 자신이 어떤 일을 하든 그것이 전진할 수 있는 일인지 후퇴할 수 있는 일인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 기준이 되는 것은 제물된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제물된 생활을 해야 되는 거예요. 그러므로 신앙을 하는 우리들이 언제나 즐겁고 기쁜 날만 맞이해 가지고는 자기 자신을 자랑할 수 있는 기백이라든가, 자랑할 수 있는 입장을 갖출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왜냐? 개인적인 복귀단계를 넘으면 가정적인 복귀단계가 기다리고 있고, 가정적인 복귀단계를 지나고 나면 종족적인 복귀단계가 기다리고 있고, 그것을 넘으면 국가적인 복귀단계, 세계적인 복귀단계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늘 앞에 자신의 생애를 바칠 수 있어야 합니다. 과거보다도 다가오는 미래에 더 가중된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합니다. 제물된 입장에서 자기의 생애 전체를 겸손히 바칠 수 있는 생활태도야말로 신앙노정에서 보다 단계를 높여서 전진할 수 있는 하나의 동기가 되는 것입니다. 만일 그런 생활태도를 갖지 않고는 후퇴의 일로를 거듭 갈수밖에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절대 교만하지 말고 남을 위해 희생하라

오늘이 얼마나 귀하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원수도 오늘의 원수가 제일 무서운 것입니다. 과거의 원수가 무서운 것이 아니고 내일에 다가오는 원수가 무서운 것이 아닙니다. 오늘 대하고 있는 원수가 무섭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서로가 서로를 심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서로가 서로의 심판대상임을 알고 그러한 심판도상에서 서로 협력해서 발전할 수 있는 동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사망의 한계점과 생명의 한계점이 오늘 이 현실의 초점을 중심삼고 뒤넘이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생명적인 것과 인연을 맺느냐 아니면 사망적인 것과 인연을 맺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늘과 인연을 맺고 나가느냐, 아니면 실탄과 인연을 맺고 나가느냐 하는 문제가 현실적인 터전에서 결정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때 현실 이상 무서운 것이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그런 것이 생활화된 사람은 어떤 것을 봐도 그것이 사탄적인 것인지 하늘적인 것인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만약 하늘이 원치 않는 것이라면 무자비하게 잘라 버리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조금도 주저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은 겉으로는 떵떵거리지만 실상은 반대적인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자기가 왜 그런 일을 하는지를 모릅니다. 알 턱이 없지요. 하늘의 섭리를 근본적으로 휘저어 버릴 수 있는 행동을 하고서도 자기가 왜 그러는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개인적인 영광이라든가 영화를 다 집어던지고 십자가에 달려'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하던 예수님과 같은 입장에 서야 됩니다. 자기를 포기할 수 있는 동기를 가짐으로 말미암아, 자기를 던져 버림으로 말미암아 하늘이 동정할 수 있는 기준을 세우라는 것입니다. 그 길밖에 없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이란 그러한 바탕 위에서, 그러한 공식노정을 거쳐야만 수습될 수 있고 또 그렇게 수습된 기반 위에 하늘의 소원이 닿아 전진의 기원을 다시 마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오늘의 현실이 얼마나 무섭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침에 오늘은 무슨 일을 할 것인가를 생각할 때가 있지요? 자신이 생각하는 일이 어떤 일이든지간에 현실생활에서 해결지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루도 마음놓고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한마디만 들어도 그 사람이 말하려는 내용이 슬픈 것인지 기쁜 것인지 대번에 알 수 있습니다. 누가 보고하러 들어서면 척 보자마자 마음이 아는 것입니다. 슬픈 소식이면 찬바람이 휙 지나갑니다. 그것이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정상적인 내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반응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럴 게 아니예요?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기쁜 소식도 그렇습니다. 그것도 보고를 듣자마자 대번에 알 수 있습니다. 반응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오늘의 현실 싸움에서 지게 되면 전진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반드시 후퇴의 일로를 걷게 된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래도 신앙길에서 정지되는 시간은 길지 않습니다. 정지되기 시작하는 것은 포화상태가 다가온다는 것을 말합니다. 포화상태라는 것은 내가 나로서 이 이상의 일을 할 수 없다는 패를 말하고, 또한 내 힘이 이 이상 영향을 미칠 수 없다고 하는 때를 말합니다. 그러한 때에 정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상속을 해줘야 합니다. 이삭이 야곱에게 상속해 주던 것처럼 상속해 줄 준비를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앞에 나타나는 것은 모두 대번에 말아먹을 생각만 했지요? 이름도 없는 말석에서 자기의 모든 것을 전부 다 남에게 양보해 주면서 그들을 축복해 주고 빈손으로 돌아서는 손님과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귀한 것들을 가지고 어느 집에 들어가고 모든 것을 나눠주고 나가는 길손과 같은 마음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하늘이 보실 때 동정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자기 소유의 분량까지도 전부 다 나눠주는 사람은 하늘이 동정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운명적으로 타고난 복의 기준이 있기 때문에 다 나눠주고 없는 것 같아도 하늘은 그 사람에게 일시에 그보다 많은 복을 내려주는 것입니다.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나눠주면 그 이상으로 보충받는 거예요. 결국 주는 것은 밑지는 장사가 아니라 이(利)가 남는 장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포화상태가 되거든 모든 것을 나눠줄 준비를 하라는 것입니다. 나눠줄 때에도 어떤 것은 남겨 두고 나눠주어서는 안 됩니다. 자기가 갖고 있는 귀한 것을 모두 나눠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여러분을 동정하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취해야 할 복의 양을 다시 채워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결국 손해보는 것이 아니라 이(利)를 보는 입장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 교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남을 위해 희생하라는 것입니다.

​기 도

​사랑하는 아버님, 통일교회가 현재 처해 있는 자리가 당신 앞에 기억될 수 있는 자리이옵니까? 정지냐, 전진이냐, 후퇴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오늘 우리 통일교회가 발전해 나가는 과정에는 아니 거칠래야 아니 거칠 수 없는 숙명적인 일들이 전개되고 있사옵니다. 사생결단을 하지 않고는 안 될 일들이 전개되고 있사옵니다.

아버지, 지금까지 보잘것없는 이 교회를 보살펴 주시고, 보잘것없는 이자식을 보호해 주신 것 잘 알고 있사옵니다. 부족한 저를 세우시기에 아버지께서는 얼마나 수고하셨는가를 저희들이 기억할 수 있도록 하옵소서.

오늘날 맡겨진 이 엄청난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를 생각하면 생각 할수록 인간은 너무도 약하다는 것을 알게 되옵니다. 그러나 인간이 약하기 때문에 그런 인간에게 기대하시는 아버지의 자비와 긍휼의 손길이 항상 저희 곁에서 떠나지 않는다는 것을 저희들은 아옵니다.

저희가 찾아가는 이 길은 망하기 위한 길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자랑하실 수 있는 길이요, 아버지의 보람있는 협조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길이 라는 것을 저희들은 지금까지 이 길을 개척해 나오면서 깨달아 알고 있습니다.

또다른 주체의 인연을 가지고 나오는 무리들이 얼마나 무섭다는 것을 저희들은 아옵니다. 하오니 밤이나 낮이나 아버지에서 동하시면 저희도 동하고 아버지께서 정하시면 저희도 정해야 되겠사옵니다. 저희가 그런 상대적인 입장을 절대시하지 않으면 당신의 승리의 터전이 이 지상에 닦아질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이 길이 과연 힘든 길 이라는 것을 알게 되옵니다.

아버지, 저희는 기뻐하더라도 자신을 중심삼고 기뻐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 자신을 중심삼고 기뻐하는 것을 느끼는 때가 많사옵니다. 아버지를 중심삼고 기뻐해야 할 것인데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저희들은 현실무대를 통하여 느껴지는 감정의 지배를 받고 있사옵니다. 이렇게 죄인된 자신을 저희가 기도 시간에 별도로 느끼면서 회개의 시간을 갖는 것보다도 생활과정에서 언제나 스스로 회개하는 마음을 갖고 살아가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어야 하겠사옵니다.

저희들이 호흡을 하면서 숨이 가쁘고 몸이 피로하다는 것을 느끼는 것은 과거의 일도 아니요, 미래의 일도 아닌 현재의 일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현재를 지탱시킬 수 있는 동기는 현재의 나의 태도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자기 스스로 높은 가치의 무엇을 가졌다고 자랑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전부 다 하늘 앞에 바쳐 드리고 만민 앞에 나누어 주기 위하여 몸부림친다면 절대로 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그런 자리에서는 전진하지 않을래야 전진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저희들은 또한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지, 여기에 모인 자녀들로 하여금 당신을 사랑하기 전에 먼저 당신의 동정의 마음이 떠날 수 없는 그런 생활태도와 신앙태도를 갖추고 나갈 수 있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저희들은 타락한 인간의 후손이 아니옵니까? 그 떨어진 개인 가정 종족 민족 국가를 복귀시키기 위해 6천년 동안 엄청난 수고를 하셨던 당신의 그 노정을 일시에 횡적으로 탕감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사옵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천만사를 엮어 오신 아버지의 비참한 심정이 저희들의 생활노정에 결부되어 있고, 누구와도 사정을 통할 수 없는 외로움이 저희들의 생활과 연결되어 있는 것을 절감하여야 되겠사옵니다.

아버지께서 안 계시면 저희들 자신도 있을 수 없는 것이옵니다. 아버지께서 존재하시기 때문에 저희가 존재가치를 느낄 수 있는 것이요, 아버지의 내면의 심정이 저희들의 마음속으로 흘러 들어오기 때문에 저희들이 아버지의 소망을 위하여 내일을 다짐할 수 있는 것이옵니다. 이러한 것을 생각할 때마다 하늘을 망각할 수 없고 하늘과 더불어 살아가지 않을 수 없는 저희들의 운명길임을 느끼게 되옵니다. 이러한 운명길을 스스로 느낄 줄 아는 아들딸이 있을진대 그는 절대 망하지 않을 것임은 지금까지의 역사로 보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 것입니다.

아무것도 갖추지 않은 자리에 있어서의 자기 자신의 불쌍하고 초췌한 모습을 바라보게 될 때 옷깃을 여미고 몸을 수그려 아버지 앞에 엎드리기에도 부족한 모습임을 깨닫게 되어 눈물이 앞을 가리옵니다. 저희가 아버지를 대해 부를 때 아버지라는 말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기가 막히게 엉클어진 순간 순간을 생활에서 체휼하는 당신의 아들이 되고 딸이 되어야 되겠사옵니다.

아버지, 정지는 싫사옵고, 오직 전진만을 요구하옵니다. 정지와 더불어 후퇴하는 운명이 아버지의 뜻 앞에 절대 있어서는 안 되겠사옵니다. 내일의 슬픔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자진해서 슬픔의 길을 가겠다고 몸부림 치는 자리에 서야 되겠사옵니다. 그러한 자리에서만이 내일의 승리와 전진의 일보가 시작될 수 있다는 사실을 저희들이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외로울 때 그 외로움이 나를 중심한 것이라면, 하늘을 향하여 자기 형체를 나타낼 수 없는 부끄러운 자신임을 깨달아야 되겠사옵니다. 그리하여 저희들은 세상의 외로움을 대표하는 하늘의 대신자로 서야 되겠사옵니다. 그리하여 악을 대해서는 당당하지만, 하늘을 대해서는 겸손하고 경건한 모습을 갖추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 주변 전체에, 아버지의 무한한 동정의 심정과 긍휼의 마음이 하늘로부터 퍼부어져 저희의 마음속 깊이 흐르고 심정 깊이 인연되어진 것을 느끼옵니다. 고마우신 아버지, 놀라우신 아버지, 그렇게 저희를 협조하지 않을 수 없는 사연을 품고 오신 불쌍하신 아버지를 생각하게 될 때 눈물이 앞을 가리옵니다. 하오니 아버지의 위로가 저희에게 있는 것을 깨닫는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깊고 깊으신 당신의 분부의 음성을 받은 그 마음 가운데 당신께서 찾아 오시어서 머물러 주시옵소서. 뼛골이 울렁이고 뼈살에 사무치는 당신의 분부와 명령을 받고 내심으로 결심하고 다짐할 수 있는 자리를 바라는 당신의 자녀들이 많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복잡한 환경은 생명길에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생명길은 홀로 가야 할 외롭고 고독한 길이라는 것을 아옵니다. 또한 아버지와 아들이 인연을 맺고 다짐한 것을 미래의 소망의 표준으로 삼지 않으면 생명의 분위기는 재현되지 않는다는 것을 저희가 아옵니다.

이러한 저희들을 긍휼히 보시기에 아버지, 얼마나 마음 아프셨고 얼마나 서러움을 당하셨사옵니까? 이제 더 이상은 긍휼의 마음을 갖고 저희를 대할 수 없는 아버지이신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저희가 면전에서 아버지를 추방한 일이 얼마나 많았는가를 느끼게 되옵니다. 이제 앞으로는 이와 같은 불효막심한 아들딸이 되지 않겠다고, 스스로 현실에 있어서 생명과 위로의 대상이 되겠다고 몸부림치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 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는 눈물을 흘려도 민족을 대신하여 흘려야 되겠습니다. 민족의 눈물을 대신하고 세계의 눈물을 대신하는 자리에서 아버지를 위로하고 아버지의 뜻을 염려해야 되겠습니다. 그렇게 되었다고 할진대는 만민은 그길을 박차고 넘어갈 수 없기에 그런 눈물을 흘린 자와 같이 가고 싶어할 것이요, 친구가 되고 싶어할 것이요, 의논하고 싶어할 것이라는 것을 저희들이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금후에 통일제단이 나아갈 길을 당신께서 맡아 주시옵소서. 여기에는 그 누구도 스승이 아니옵니다. 어린아이처럼 당신의 행보를 한걸음 한걸음 따라가면서 보조를 맞춰야 되기에 주위를 바라볼 수 없는 것이 지금까지 통일교회가 걸어온 길이요, 또한 금후에 통일교회가 가야 할 길이옵니다. 내부에 미쳐지는 혹독한 시련과 환경의 큰 파도가 저희에게 밀려오더라도, 평온한 그 수평선 기준 이하에 들어가 넘치는 물결에 휩쓸리더라도 저희는 자기의 위치를 잃어버리지 않고 아버지의 깊으신 품에 품겨 아버지를 모시고 위로할 수 있는 터전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되겠사옵니다. 이러한 것이 저희들의 사명이라는 것을 올바로 느끼는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전진이 좋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한걸음 전진하기 위해서는 피눈물을 흘려야 하는 뒤넘이치는 투쟁의 노정과 비참한 제물의 노정을 거쳐야 한다는 사실을 저희들이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통일교회를 사랑한다면 그 배후에 말할 수 없는 피어린 투쟁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아버님과 선조와 스승들 앞에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자랑할 조건이 있으면 그것을 아버지 앞에 겸손히 돌려드리고 만민의 것으로 돌려드리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현재 스스로의 입장을 아버지와 연결시키기 위해 직접 당신께 노크할 줄 아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오늘 여기에 참석한 자녀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하루를 기쁨의 날로서, 승리의 날로서 바쳐 드릴 수 있게 하여 주시옵고, 이해가 거룩한 해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저희들의 생애도 거룩한 생애가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그리하여 저희들을 통하여 섭리하시는 당신의 역사가 거룩한 결과가 되기를 바라옵니다. 이민족과 이 세계가 아버지 앞에 기억되고 당신의 뜻과 사명을 책임질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올 때에, 모든 말씀 참부모님의 성호 받들어 간절히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기 도]

2월의 마지막 성일 아침이옵니다. 아버지, 이날을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은 1971년도를 맞이하여 당신이 분부하신 '통일기 반확보'를 위해 마음과 자세를 가다듬고 개인, 가정, 종족, 민족, 국가에 있어서 아버님이 인연된 기반을 닦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확실히 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그 기반을 닦기 위해서는 하나의 뚜렷한 목표가 있어야 하고, 그 목표를 중심삼고 대상의 기반을 스스로 만들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저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버님! 당신의 거룩한 뜻을 저희들은 진정으로 받아 들여야 되겠습니다. 수많은 인류가 생애를 다하는 한이 있더라도 당신의 뜻만은 이루어져야 되겠고, 당신이 수고로운 노정을 걷지 않으면 안 되었던 역사적인 슬픔을 해원성사하는 것이 최고의 바람이라면 그 하나의 소원을 성사해야겠습니다. 어떠한 희생이 따르는 한이 있더라도, 개인을 통하고, 민족을 통하고, 국가를 통하고, 세계를 통하여서 수많은 곡절의 길을 넘어 희생의 대가를 치르는 한이 있더라도 오로지 당신의 뜻만은 성취해야 되겠습니다.

여기에 모인 당신의 자녀들은 자기 자신을 위한 내일의 승리를 다짐하기 전에, 당신의 마음속에 그려져 있는 뜻길 앞에 슬픔이 있게 해서는 안되겠다고 매양 염려할 줄 아는 자가 돼야 하겠습니다.

새로운 하루를 맞이할 적마다, 아침 햇빛이 새롭게 저희들을 비춰 줄적마다 뜻을 중심하고 새로운 날이 되기를 바라야 되겠고, 광명한 햇빛과 같은 당신의 소망의 뜻을 사모할 수 있는 저희 자신이 되어야겠습니다.

매일의 생활에 있어서도 당신과 저희 사이에 간격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저희는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가는 길은 저희들도 가야 할 길이요, 당신이 머무는 곳은 저희 들도 머물러야 할 곳이요, 당신이 싸우는 자리 또한 저희도 싸우지 않으면 안 될 자리이며, 당신이 원수와 대결하고 있는 자리 역시 저희들이 원수와 대결하지 않으면 안 될 자리인 것을 저희들은 체휼하면서 가야 되겠습니다.

아버님! 말로서는 아버님을 대해 아버지란 말을 얼마나 많이 했습니까? 저희들이 진정한 의미에서 아버지를 얼마나 사모하였고, 진정한 의미에서 아버지 앞에 부복한 자식이 되었으며, 뜻길에 있어서 당신이 잊을수 없는 저희들이 되었으며, 당신께서 모든 소원과 희망을 걸고 명령하실수 있는 자리에 저희가 선 때가 얼마나 있었습니까?

당신이 요구하시는 자리는 당신이 저희들과 접하고자 하시는 간절한 자리요 역사적인 사명을 추구하는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저희들은 개인적인 소원을 중심삼고 가인적인 생활을 해 나가면서 아버님과 의논하기를 바라는 어리석은 인간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여! 이 시간 이 자리를 찾아오시옵소서. 뜻길을 위해 나아간 역사적인 선조들이 애달픈 길을 걸었지만 최후의 싸움터에서 승리의 깃발을 들지 못하고, 당신을 모시지 못하고 실패를 거듭했던 사실을 생각하게 될때, 오늘날 저희 자신들이 승리의 아들이 되느냐, 패배의 서러움을 머금고 당신에게 슬픔을 더해 주는 불효의 자식이 되느냐 하는 문제를 결정지어 나가야 할 운명길에 서 있고, 뜻의 길에 서 있는 것을 저희들은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버지, 아무것도 아닌 저희들이 아버지 앞에 부복하였사옵니다. 당신이 저희들을 바라보게 될 때, 기뻐하시며 분부할 수 있는 저희의 모습이 되어야 할 텐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되지 못한 것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이날은 1971년도를 맞이하여 벌써 두 달째를 보내는 마지막 날이옵니다. 한 것 없이 지내 버리는 이해가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밤이나 낮이나 뜻 앞에 있어서 눈물지으며 아버지와 더불어 피눈물을 흘리는 그런 자리가 아니고서는, 또한 아버지와 더불어 동참할 수 있는 시간을 많이 갖는 사람이 되지 않고서는 아버지의 뜻과 많이 접할 수 없는 것이요, 생명을 걸고 아버지 뜻 앞에 맹세할 수 있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아버지와 심정적 인연을 맺을 수가 없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옵니다. 저희 들은 매양 스스로 안일한 자리를 찾아 나와 가지고 자기 자신을 중심삼고 생각할 때는 많았사오나, 아버님께서 안식하실 수 있는 입장을 중심삼고는 서지 못하였사옵니다. 아버님을 의지하면서도 전체를 비판하고 생활의 기준을 세우지 못한 저희를 용납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시간 여기에 엎드린 소수의 자녀들, 이들이 가는 길이 어디이며 이들이 머물고 있는 자리가 어디인가를 이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내일을 향하여 나아가는 자세를 중심삼고 올바른 자세가 되어 있느냐. 아버님이 동방을 향하고 있는데 나 자신도 동방을 향하여 책임질 수 있는 자리에서 있느냐? 아버님이 거쳐 나가시는 환경이 어디로 가는지 알고 그 환경에 동참하는 자리에 섰는가를 알아야 되겠고, 만약 그 자리에 서지 못하였다면 조급한 마음을 가지고 다시 따라가야 하는 입장인 것을 스스로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생명길은 누가 권고해서 가는 길이 아니요, 누가 이끌어 줘서 가는 길이 아닙니다. 자기 스스로 이를 감당하지 않고서는 갈 수 없다는 사실을 저희들은 특별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배가 고플 때면 나 자신이 먹어야 되고, 목이 마를 때면 나 자신이 마셔야 되며, 외로울 때면 이것을 풀기 위해 하나의 주체적인 입장에 서서 위안이 될 자격을 갖추어야 하겠사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자연적인 이치인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내가 먹고 사는 데 있어서도 자기 스스로 주체의 자리에 서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피동적인 입장에 서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자기 스스로 다짐하면서 생명의 힘을 가해 나갈 수 있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시간 저희들이 아버지 앞에 솔직히 부복하였사오니, 당신이 저희 자신들을 바라보게 될 때에 악한 자리에 있거들랑 채찍질하시옵고, 선한 자리에 있거들랑 저희들의 손을 붙드셔서 내일의 소망의 뜻 앞에 활기를 띤 아들딸로서 나타나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당신의 싸움터를 인계받아 당신의 뜻 앞에 방해되는 모든 여건을 스스로 책임지고 나서서 당신이 믿을수 있는 충효의 자리를 개척할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오늘 이 아침에 당신의 이름을 따라 모인 자녀들 위에 축복하여 주시옵고, 전국에 널려 있는 당신의 아들딸 위에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지방에 나가 있는 사랑하는 딸들에게도 아버지께서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그들이 있는 정성을 다하여 사방에서 오는 것을 방어하는 그런 행보를 갖출 적마다 당신의 마음을 같이하여 주시옵고, 당신의 슬픈 마음을 더듬어서 당신의 마음편에 설 수 있는 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나이다.

해이해지기 쉬운 세상 가운데 살아가는 자녀들이오니 아버지 뜻 앞에 의욕을 갖고 책임을 다할 수 있는 무리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아침 그들 앞에 힘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맡겨진 책임을 감당할 수 있게 당신의 능력의 손길이 그들과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악한 편을 대하여 강하고 담대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선을 중심삼고 주체적인 입장을 확고히 세우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이 아니면 무엇이든 결정할 수 없고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아버님만을 의지 하는 당신의 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당신의 아들들도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의 딸들한테 지지 않는 자랑스런 아들들이 되겠사오니, 당신이 기억하시어서 그 마음과 생활을 묶어 주시옵고 하늘이 기뻐하시는 소망의 터전 앞에 보조를 맞출 수 있도록 축복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아침에 이곳을 향하여 기도하는, 세계에 널려 있는 수많은 자녀들 위에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앞으로의 소망의 나라를 위하여, 통일의 세계를 향하여 힘차게 자신을 갖고 싸워 나갈 수 있는 아버님의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이 아침 모든 전체를 친히 맡으시옵고 주관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오늘은 특별한 집회를 개최하는 날이오니, 아버지, 친히 같이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과 내일 양일간에 걸쳐 대학에 있는 수많은 교수들에게 말씀을 전하려 하오니, 당신이 경륜하시는 뜻 앞에 새로운 시대를 열고 새로운 시기를 맞이할 수 있는 당신의 자녀들이 많이 나타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민족의 소망과 장래 이 나라의 운명과 세계가 갈 수 있는 방향을 대신하여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계기를 마련할 수 있게끔, 아버지, 역사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오며, 전체의 모임 위에 아버지의 보호와 긍휼과 지도와 관심이 같이하여 주시옵기를 아울러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내일을 기해 3월을 맞겠사오니 내달을 대비하여야 할 자신의 입장을 다시 한 번 다짐하는 거룩한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오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의 성호 받들어 간절히 아뢰었사옵니다. 아멘.

말 씀

우리들은 매일의 생활을 연결해 나가는 날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하루가 가면 내일이 오는 것이요, 내일이 가면 또 다시 모레가 옵니다. 하루 하루를 뜻 있게 보낸다면 소망의 내일이 찾아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오늘 자체가 내일과 상응할 수 있고 서로가 보조를 맞출 수 있는 입장에 선다면 그것이 그러한 내일을 찾아가는 절대적인 기반이 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어제와 오늘과 내일의 상관관계

오늘이 내일의 기반이 되는 것을 아는 우리는 현재보다도 나을 수 있는 미래를 바라서 지금보다도 미래의 더 가치있는 내용을 추구해 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일이라는 것은 오늘과 거리를 두고 있기에 아직 미결정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미결정 상태에 있는 것을 누가 결정상태로 옮겨 놓을 것이냐? 이것은 어디까지나 제삼자가 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자기 자신이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이 시점에서 자리를 확실히 잡아 내일에 연관되도록 하루의 생활 가운데서 기반을 확보해 두지 않으면 내일은 나와 상관없는 자리에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반드시 소망을 갖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소망을 이루어 나가기 위해서는 매일매일의 생활에 있어서 그 소망과 일치될 수 있는 계획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 소망과 일치될 수 있는 계획이 있고, 생활 환경이 되어 있다 하더라도 이것이 덧없이 지나가서는 안 됩니다. 소망을 이룰 수 있는 의욕이 반드시 내 마음에 솟구쳐야 합니다. 내일이란 것은 오늘의 내 생활 가운데 있어서 하나의 꿈처럼 하나의 보물처럼 나타나는 것입니다. 꿈은 우리 인간에게 어떤 면에 있어서 소망을 성취할 수 있는 조건도 되지만 반면에 그 좋았던 꿈이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게 되면 도리어 낙망과 절망을 가져다 주게 되는 것을 우리는 생활 가운데서 많이 느껴왔습니다.

오늘 여기 있는 자기 자체를 두고 볼 때 아침부터 밤까지 하루 24시간을 거치는 과정에 있어서 내일을 지탱할 수 있는 생활을 얼마나 하고 있느냐는 것이 문제입니다.

오늘 우리는 1971년 2월의 마지막 날을 맞이했습니다. 금년 들어와 벌써 1월 2월을 보냈습니다. 이렇게 두 달을 보내는 동안에 우리가 지난날 얼마나 내일의 소망을 중심삼고 의욕을 갖고 지냈느냐 하는 문제를 다신 한 번 회고해 보아야겠습니다. 어제와 오늘이 차이가 없는 생활을 했다면 오늘과 내일 사이에 차이가 날 수 있는 내용을 갖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발전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어제와 오늘, 오늘과 내일을 두고 볼 때 나날이 발전해서 변화의 폭이 크면 클수록 그만큼 성공의 자리가 그 사람에게 가까와진다고 볼 수 있는 것이요, 노력한 만큼 시간이 단축되어 접근해 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제와 오늘, 오늘과 내일에 있어서 차이가 없는 생활을 하게될 때는, 1971년 연초에 결의했던 '통일기반 확보'라는 목표는 목표대로 남아 있고 나는 나대로 남아져서 그 뜻과 나와는 관계를 맺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뜻과 나와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오늘은 내일의 기반이 되고 내일은 오늘의 친구가 될 수 있는 기반을 확보해야 합니다. 이것을 어떻게 확보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그러려면 어제보다도 오늘이 더 의욕적이어야 되고 오늘보다도 내일이 더 의욕적이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어떠한 목적을 중심삼고 의욕에 사무쳐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해이해지게 되면 내일의 소망을 달성하는 데 있어서, 내일의 참된 모습을 맞이하는 데 있어서 그것이 용서할 수 없는 원수와 같은 것이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어제보다도 오늘, 오늘보다도 내일에 보다 더 의욕을 가지고 참된 신앙을 하기 위해서는 보람 있는 시간을 어떻게 증진시켜 나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내일을 맞이하는 자로서 그런 입장에 있어야 타당하지 그렇지 못하게 될 때는 내일이 나와 상관이 없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는 언제나 부단한 투쟁의 노정을 거쳐가고 있습니다. 투쟁은 소모전입니다. 반드시 어떠한 소모를 하고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외적인 물질적인 면에 있어서나 내적인 면에 있어서 어떠한 소모를 요하는 것이 투쟁입니다. 이 투쟁과정에 있어서 소모되는 것을 무엇으로 복구할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 과정에서는 외적인 물질적 조건으로나, 혹은 내적인 정신적 조건으로 반드시 소모되는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소모되면 어제보다 작아지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이 내일보다 나을 수 있는 입장에 서려면 소모된 것을 충당하기 위한 부단한 제 2의투쟁을 가중시키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소모의 구렁텅이를 넘어서지 못하게 되면 보다 나은 내일이 이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원치 않는 결과의 자리에 떨어져 허덕이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면에서나 혹은 생활적인 환경에서 많이 느끼는 바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의 일을 중심삼고 내일의 기틀을 마련해야 합니다.

또한 오늘을 보내면서 더 의욕적인 태세를 어떻게 가중시키느냐 하는 문제를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아침에 밥을 먹었다고 해서 점심과 저녁을 안 먹는 것이 아닙니다. 아침을 먹었더라도 점심 때에 가서 보충해야 하고, 또한 점심을 먹었더라도 저녁 때에 다시 보충해야 내일의 한날을 계승할 수 있듯이, 우리의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루 하루의 생활을 이어가는 데 있어서 혹은 목적을 달성하는 의욕을 가꾸어 가는 데 있어서 해이해지는 자리를 어떻게 피해 나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다시 말하면 밥을 먹어서 배고픔을 피해 나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의욕을 중심삼고 내일의 뜻을 이루어 가는 데 있어서는 해이라는 것은 금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떻게 매순간마다 의욕적인 입장을 가중시켜 나가느냐 하는 것이 오늘과 내일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자체가 그 의욕을 가중시킬 수 있는 주체의 입장이 못 되었다 할 때는 그 자리에서 의욕을 가중시키려 해도 되지 않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중심삼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있어서 의욕적인 기준을 이끌고 나갈 수 있는 주체적인 입장에 서지 못하였다 할 때, 어떻게 주체적인 입장을 유지하고 확보하느냐 하는 것은 지극히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주체적인 입장에 서지 못하면 상대적인 입장에라도 서든가 둘 중에 하나의 입장을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또한 내일을 바라보며 나아가는 길에 있어서, 오늘날 뜻을 중심삼고 살아가는 통일교회 교인들 가운데 누가 주체의 입장에 서느냐 하는 것을 언제나 살피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내가 주체적인 입장에 서지 못하였으면 반드시 상대적인 입장에라도 서 가지고 그 주체가 움직여 나가는 환경과 노선 앞에 보조를 맞춰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보조를 맞추기 위해서는 반드시 주체가 움직이는 방향과 일치해 가지고 그가 거쳐 나가는 환경과 관계 맺을 수 있는 입장을 세워 나가야 합니다.

주체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면 주체가 지향하는 행동과 방향에 맞추어 관계의 도수를 가중시켜 나가야 합니다. 여기에서의 문제는 어떻게 그렇게 해 나가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현재 통일교회는 나가는 방향에 있어서 남자들보다 여자를 내세워 가지고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런고로 남자들이 주체가 아니라 여자들이 주체의 입장이 되어 통일교회 전체를 대신해서 선두에 서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두에 선 그들과 상반된 자리에 설 것이 아니라 주체적인 입장에 선 그들과 상응되는 자리에 서서 그 주체 앞에 대상이 되어서 주체와 동일한 보조를 취해 나가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주체와 대상의 인연을 중심삼고 새로운 하나의 의욕적인 환경을 계승 발전시킬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현실을 극복하려면

만일 이러한 기반을 여러분 자체가 형성하지 못하게 되면 여러분은 주체도 되지 못하고 대상도 되지 못하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이렇게 주체적인 입장에 접할래야 접할 수 없고 대상의 입장에 들어갈래야 들어갈 수 없는 자리에 서게 되면 반드시 여기에서 해이한 입장을 모면할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입장에 서기 쉽다는 것을 매일매일의 신앙생활과 일상생활권내에서 체험하고 있을 것입니다.

만약 그러한 입장에 서게 되면 어떻게 할 것이냐? 여러분 스스로 여러분의 과거와 현재를 중심삼고 과거가 주체가 되고 있느냐, 현재가 주체가 되고 있느냐 하는 문제를 가려 봐야 합니다. 과거와 현재가 주체와 대상의 관계로 형성되지 못할 때에는 미래를 소망의 주체로 삼아야 합니다. 그러나 미래의 소망을 중심삼고 그것을 주체로서 모실 수 없는 해이한 입장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과거를 주체로 삼고 현재를 대상으로 삼을 수밖에 없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생활에 있어서 과거에 받았던 은혜를 그대로 흘려 보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길을 가면서 자기도 모르게 해이할 때에 부딪치게 됩니다. 그럴 때는 과거의 신앙생활을 하나의 주체로 삼아서 오늘 현실적 환경을 어떻게 수습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과거 은혜 생활을 하던 때에 기록한 일기를 다시 보거나 기도 가운데서 체험한 것들을 다시 한 번 회상한다든가 하여 그때의 심정을 재생시켜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그때에 행한 것을 다시 반복함으로 말미암아 과거보다 자극적인 입장에서 결의해야 할 것입니다. 정도는 낮을지 모르지만 다시 한 번 그런 심정 속으로 깊숙이 파고 들어가서 어떻게 자기몸에 그때의 체험을 재현시키느냐 하는 문제를 중심삼고 몸부림을 치지 않고는, 오늘 여러분이 해이한 그 입장을 해결할 방안이 없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뜻을 대해 가는 데 있어서 교회 전체를 대표한 입장에 있는 주체, 진리적인 측면에 주체가 있을 것입니다. 만약 그 주체와 보조를 맞출 수 있는 상대적인 인연을 갖추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겠느냐? 자기의 과거 생활과 현재의 생활을 비교해 볼 때 과거가 오늘보다 낫다면 그 과거의 생활을 현재의 생활에 재현시켜야 합니다. 그렇게 해 가지고 그때 가졌던 결의를 어떻게 다시 한 번 스스로 모색하느냐, 그때에 느끼던 심정을 어떻게 다시 한 번 체휼하느냐, 그때에 내가 싸워오던 환경을 어떻게 다시금 재현해 나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하겠습니다. 만일 이것이 자기 스스로 기도 가운데서 해결되지 않으면 행동적인 면에서라도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들은 이 뜻길을 가면서도 교회와 격리되기 쉽습니다. 교회와 나를 두고 볼 때 교회 안에 있는 내가 아니라 나 자신을 중심삼고 교회 생활을 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 전체를 중심삼고 교회 앞에 있는 나 자신이 되지 않고 교회와 격리된 입장에 있는 제삼자의 입장에 서게 되면 교회와 거리가 멀어지게 되고 교회에 대한 관심이 없어집니다. 자극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교회와 자기와의 관계가 점점 희박해집니다. 그렇게 되면 반드시 교회생활이 해이해지는 입장에 아니 떨어질래야 아니 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생각하게 될 때 금년에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는 것이 문제 되기 때문에 여러분은 교회 전체를 대신해서 주체적으로 활동해야 하고, 그 활동에서 여러분 자신이 고립되지 말라는 겁니다. 고립된 입장에 서지 말고 주체와 보조를 맞추어 나가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같이 보조를 취하며 싸워 나갈 때 선두에 선 사람들이 느끼고 채택하고 의욕을 갖고 있는 환경을 살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교회를 대표하여 주체적인 입장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의 뒤를 따라가는 것만이 아니라 그들보다 앞서 나갈 수 있는 입장에도 서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하늘의 때를 세워 움직이는 입장에 서기 때문에 하나님은 반드시 관계를 맺으실 것입니다. 이렇게 선두의 자리에 서서 나가게 되면 거기에는 낙망이라든가 해이라는 것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과거에 비해 해이한 자리에 서게 됐다면 어떻게 그 자리에서 헤어날 수 있겠느냐? 옛날에 자기가 가졌던 신앙 경험을 자신은 잘 압니다. 그때 나의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던가? 혹은 본부면 본부를 생각했던 마음이 어떠했던가? 선생님을 중심삼고 하늘 앞에 내가 충성했던 때 어떻게 했던가 하는 것을 중심삼고 자신의 상태를 감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모두 감별해서 제 1은 어떻고, 제 2는 어떻고, 제 3은 어떻다는 것을 판결해 가지고 그것을 중심으로 자신을 희생시켜 나가야 합니다. 그렇게 도리를 다해 나가며 행동으로 실제 생활에 자신의 과거를 재현시키지 않고서는, 과거의 은혜로왔던 자리를 자체 앞에 희생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만일에 해이한 입장에 섰다면 어떻게 하든지 의식적으로 혹은 고의적으로라도 그것을 풀고 나가야 되겠습니다. 과거보다 나을 수 있는 조건을 세워야 됩니다. 과거에는 하루에 한 번씩 본부교회에 왔다면 이제는 두 번 이상 다녀가야 합니다. 옛날에는 기도하면 은혜가 되었는데 지금은 은혜가 안 된다면 그때 10분 동안 하던 기도를 20분, 30분, 한 시간 이상 하라는 거예요.

어떻게 하든지 그때의 마음을 희생시키고 그때의 심정을 오늘에 옮겨 미래의 터전으로서 계승시킬 수 있는 입장에 서지 않고는 과거와 현재의 관계는 떨어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과거와 현재가 떨어진 입장에 서게 될 때 하나님은 새로운 목적과 새로운 희망과 새로운 의욕을 줄 수 없을 것이요, 직접적으로 은혜의 손길을 펼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외로운 입장에서 은혜에 사무친 심정을 가졌거든 그것을 위해 외로운 자리를 찾아 들어가야 합니다. 혹은 누구보다도 억울함을 당한 자리에 서서 그런 체험을 하게 되었다면 그때 그 체험을 여러분이 상실해서는 안 됩니다.

만일 기쁜 자리에서 체험했거든 기쁜 마음을 희생하는 자리에서 이것을 다시 한 번 해야 되고, 슬픈 자리에서 체험을 했다면 하나님이 위로할 수 있는 더 큰 슬픔의 자리에 나가지 않고는 옛날 이상의 은혜를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생활에 있어서 주의해야 할 것은 어떠한 자리에서 신앙길을 출발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슬플 때 출발한 사람도 있을 것이고, 외로울 때나 기쁠 때 출발한 사람도 있을 것이고, 절망했을 때나 누구와 의논할 때, 혹은 누구를 모실 때나 봉사할 때, 또는 어떤 것을 위해 일선에 섰을 때, 이렇듯 각자 나름대로 출발의 계기가 다른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신앙생활을 해 나오면서 은혜가 있었던 때가 언제였는가 하는 것을 상기시켜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뭇사람 앞에 책임을 중심삼아 가지고 책임자의 위신을 생각하여 뜻을 위한 일을 해야 합니다. 누구 보다도 더 어려운 자리에 나가고 억울한 자리까지 몰리더라도 이를 넘어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물리는 자리가 내일의 슬픔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요, 내일의 갈 길 앞에 있어서 슬픔을 가중시키는 자리가 아니라 내일의 새로운 은혜를 가중시킬 수 있는 은사의 자리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의 참된 의미

씨를 뿌리면 뿌리는 대로 거두어 들인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슬픔으로 뿌리기 시작했으면 슬픔으로 거둬야 합니다. 십자가로 말미암아 출발했으면 십자가로 거둬야 합니다. 십자가로 뿌려 가지고 기쁨으로 거두려 해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로 뿌려 가지고 기쁨으로 거두는 법은 없습니다.

십자가로 뿌렸으면 십자가로 거둔 다음에 기뻐해야 하는 것이며, 기쁨으로 뿌린 씨앗은 기쁨으로 거두어서 다시 십자가의 길로 가야 합니다. 다시 말해 슬픔으로 뿌렸으면 슬픔으로 거두어 가지고 기쁨으로 가는 것이요, 기쁨으로 뿌렸으면 기쁨으로 거두어서 기쁨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슬픔으로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기쁨으로 뿌렸으면 기쁨으로 거두어 가지고 기쁨으로 갈 것 같지만 그렇게 안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기쁨으로 뿌렸으면 기쁨으로 거두어 가지고 슬픔을 맞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십시오. 은혜가 있은 후에 반드시 시험이 있었습니다. 시험이 있으면 반드시 은혜가 있다는 것입니다. 시험은 시험으로 시작해서 시험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다가올 은사가 크면 클수록 그 시험 기간이 짧은 것이 아니라 비례적으로 은사와 맞먹는 시련 기간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은혜가 크면 클수면 시련 기간은 깁니다. 이 시련 기간을 극복하고서야 기쁠 수 있는 은사의 때를 맞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연적인 현상입니다. 아침이 오면 저녁이 오고 낮이 오면 밤이 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자연은 주고받는 주체와 대상의 관계처럼 상하 관계로 연이어 나가든가 좌우 관계로 엇물려 나가든가 하기 때문에 언제나 계속 유지되는 것입니다. 한 번 높았으면 낮아지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에 좋았다고 반드시 좋게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것을 거두어 가지고 다시 슬픔을 맞이한 이후에야 비로소 하나의 터전이 닦아지는 것입니다.

기초를 닦는 데 있어서도 기초가 그냥 닦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려움이 뒤따르는 것입니다. 기초를 닦으려면 반드시 어려움을 극복해야 합니다. 어려운 이상 소원이 남아야만 어려운 터전 위에 하나의 존재로 남을수 있지 그렇지 못할 때는 사실상 기초가 형성될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뿌린 대로 거둔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반대하는 남편이 있다면 그반대의 도수가 강해진다고 아내의 신앙이 해이해지지 않습니다. 핍박 가운데서 신앙생활을 출발했을 경우 반대가 극심할 때 해이해지는 것이 아니라 반대하던 그 상대가 도리어 이해해 주는 계기가 오게 될 때 해이해 지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가 없는 경우, 열이면 아홉은 해이해지기 쉬운 것입니다. 원수는 어디에 있느냐? 반대가 극심할 경우 이것을 대비하려고 자기의 뜻을 강화 시키는 자리에 원수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목적이 완성되어 안식할 수 있는 하나의 터전이 닦여진 이후에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터전 위에 있을 때 원수가 공격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눈물로 시작한 사람은 눈물로 거둬야 합니다. 십자가로 시작했으면 십자가로 거두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것을 어느 정도까지 계승하느냐? 개인적인 십자가의 길로 시작한 사람은 가정적인 십자가의 길을 계승해야 합니다. 가정적인 십자가의 길을 거친 사람은 종족적인 십자가, 민족적인 십자가, 국가적인 십자가를 계승해야 합니다.

가중된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할 인간

십자가로 시작했으면 반드시 십자가로 계승되는 것입니다. 또한 은혜로 시작했으면 은혜로 계승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슨 말이냐? 과거 개인적인 섭리시대에 있어서 십자가의 수난길을 걸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쓰러졌을 경우 그것을 계승하기 위해서는 그 당시 십자가의 수난길 이상의 자리에 나가지 않고는 먼저 쓰러진 그 사람의 사명을 이어나갈 수 없습니다.

개인적인 사명이 그런 것처럼 가정적인 사명도 마찬가지입니다. 민족적 사명, 국가적 사명, 세계적 사명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반드시 개인탕감이 있으면 가정탐감이 있는 것이요, 가정탕감이 있으면 종족탕감이 있는 것이요, 종족탕감이 있으면 민족탕감이 있는 것이요, 민족탕감이 있으면 국가탕감이 있는 것이요, 국가탕감이 있으면 세계탕감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슬픈 복귀의 길입니다. 이것을 연결시키지 않으면 개인에서부터 세계까지 발전할 수 없는 것이 아니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에, 가중된 십자가 노정에 있어서 새로운 결의를 할 수 있는 출발이 벌어지지 않고서는, 다시 말하면 옛날보다도 더 강하게, 더 자신을 갖고 뜻 앞에 더 의욕 적이요, 하나님 앞에 더 심정적인 자리에서 시대적인 내용을 책임질 수 있는 무리가 나오지 않고서는 이 십자가의 탕감노정을 발전시킬 수 없는 것이 정상적인 것임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통일교회 교인들이 자기 스스로 해이해진 것을 인정하면서도 과거와 같은 신앙길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 통일교회의 출발은 십자가로 뿌린 것입니다. 그래서 개인적인 십자가로 거두어 개인적인 승리의 한날을 맞이해야 합니다. 그러나 개인적인 승리의 한날을 맞이했다고 해서 거기서 끝나서는 안 됩니다.

개인적인 승리를 맞이하고 나서는 제 2차 십자가의 노정을 떠나야 합니다. 그 다음부터는 가정적인 십자가의 노정을 출발해야 하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승리는 가정적인 출발노정에 있어서 하나의 모체가 됩니다. 개인적인 십자가 노정에서 내게 힘으로 작용했던 것이 가정적 십자가 노정을 갖추어 나가는 데 있어서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찾아진 기쁨은 내 개인의 기쁨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기쁨이 내게 필요할 때까지 가중된 수난길에서 열매로 맺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에게 있어서 그 무엇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가장 귀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 분은 이러한 사실을 가슴 깊이 꼭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가슴 깊이 보관된 그 자체 위에 기둥을 세워야 합니다. 그 터전 위에 자기 자신이 서지 앉으면 과거에 받았던 은사에 곁가지를 쳐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을 무시해 버리고 이 터전 위에 서지 않게 된다면 반드시 그 터전은 무너집니다. 그렇게 되면 가정적 십자가의 노정을 출발했다 하더라도 다시 개인적인 십자가의 노정의 승리의 터전을 반복하여 쌓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십자가 노정에서 얻어진 결실의 기쁨이 있으면 그 기쁨은 영원한 기쁨으로 보장되어야 합니다. 그것을 공고화시킨 터전 위에 나 자신이 확고히 서야 하는 것입니다. 가정적인 분야가 넓은 만큼 거기에 해당하는 십자가도 클 것입니다. 이것을 극복해야 합니다.

가정적 십자가에서 승리했다면 그 승리한 결과는 반드시 가정을 중심삼은 기쁨일 것입니다. 그것은 그 가정을 중심삼고 하나님이 같이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과정을 거쳐 나간 그 가정의 아들딸들은 반드시 천운을 타고 나아가게 됩니다. 그것을 보고 가정적인 기쁨이 있다고 해서 가정적 기쁨만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이것으로 만족한다고 하는 안식의 자리, 해이한 자리에 머물게 되면 그것으로써 그 가정은 끝이 나는 것입니다.

종족적 십자가의 노정을 거쳐가야 할, 뜻이 요구하는 사명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가정적으로 허락된 하나님의 은사가 크다 해서 거기에 자리를 잡고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가정적인 차원에서 아무리 승리를 했다 하더라도 가정적 승리로 끝나지 말고 종족적으로 더 고차적인 거와 연결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가정적인 은사의 터전에 그대로 머물게 되면 종족의 때를 연결시킬 수 없고 민족적인 때를 향해 넘어갈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갈 길을 놓쳐 버리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방황하다가 후퇴해 버리게 되면 아무리 뜻이 발전한다 해로 뜻과 하등의 관계가 없게 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관계를 맺지 못하게 되면 자기 스스로 해이해지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과 더불어 생명줄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발전을 하지 못합니다. 자라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라지 못하면 후퇴하고 마는 겁니다. 탕감복귀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중심삼고 어떠한 가중된 십자가의 노정을 범위를 넓혀 찾아오는 것입니다. 범위를 넓혀 찾아가는 데 있어서는 함부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주류적인 노정을 중심삼고 개인적인 탕감노정, 가정적인 탕감노정, 종족적인 탕감노정, 민족적인 탕감노정, 국가적인 탕감노정을 거치는 것입니다. 이러한 노정에 있어서 환경의 범위는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것과 민족적인 것의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정적 섭리의 때와 민족적 섭리의 때의 차이는 방대한 것이지만 내용만은 마찬가지입니다. 그 내용은 어디까지나 나와 가정 문제, 나와 사위기대를 중심삼아 가지고 결정되어지는 것입니다. 범위와 그 위치는 차이가 있을 망정 그 내용만은 마찬가지입니다.

가중된 탕감의 길도 하나만 되면 갈 수 있다

그러면 개인적인 십자가의 때와 가정적인 십자가의 때 가운데 어느 쪽이 더 극복하기 어려우냐? 범위는 가정적인 것이 넓지만 개인적인 때를 극복하기가 더 어렵습니다. 개인이 승리한 터전만 가지면 가정적 기준은 극복하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가정적인 경우는 개인적인 사탄의 참소권내를 벗어났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개인에게 참소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이미 개인적인 시대에서 체휼한 내용이기 때문에 수습할 수 있습니다. 수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개인적인 탕감노정을 극복하기가 더 힘드는 것입니다.

가정적 탕감노정과 종족적 탕감노정 중 어느것이 더 힘드느냐 할 때 그 범위와 위치에서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방대하게 차이가 있지만 내용에 있어서는 가정적인 때보다도 종족적인 때가 더 쉽다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부모를 중심삼고 사위기대를 이루어 하나되면 극복해 나갈 수 있습니다. 민족을 붙들고 기도하고, 민족을 붙들고 어떻게 하든지 극복해 나가면 종족적인 섭리의 때를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정이 아무리 어려운 환경에 있더라도 가정을 중심삼고 주체의 입장에서 그 대상을 붙들고 어려움을 극복하면 이미 사위기대 위에 있기 때문에 넘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당하는 것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어려움이 동쪽 방향에 있으면 동쪽 방향을 중심삼고 지나가 버리지만 서쪽에서는 그와 반대 입장이 전개되는 것입니다.

주위 환경을 거쳐 나가는 데 있어서 언제나 핍박과 괴로움과 싸움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쪽에는 다른 현상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일방적인 면에서 반대가 나타날 수는 있으나 사방적인 면으로 반대의 여건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적인 때보다도 가정적인 때가 쉽고 가정적인 때보다도 종족적인 때가 쉽다는 거예요. 종족과 민족을 범위로 보게 되면 차이가 있지만 내용에 있어서는 도리어 종족적인 때보다는 민족적인 때가 쉽다는 것입니다.

가정을 중심삼고 종족이 하나되고 종족을 중심삼고 민족이 하나되고 다시금 민족을 중심삼고 주체성을 완전히 확보해 가지고 하늘과 일체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상을 중심삼고 언제든지 하나될 수 있는 자세를 갖추어 변치 않고 일치되었다 할진대는 종족이면 종족을 통해서 민족을 중심삼은 탕감노정을 해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적 기반을 계승한 터전 위에 가정적 기반을 계승하고, 가정적 기반을 계승한 터전 위에 종족적 기반을 계승하는 것은 쉬운 것입니다. 가정적 핍박의 노정보다 종족적 핍박의 노정이 쉽습니다. 종족적인 기반에는 개인 기반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 민족 기반을 마련하는 것은 종족 기반을 넘어서는 것보다도 쉽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종족 기반을 마련하는 때에 들어와 있다면 가정은 그 안에 들어가 있습니다. 그 가정 위에는 개인적 승리의 터전이 반드시 조성돼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족적 권내에 섰다 할 때는 반드시 개인적 탕감노정의 기반 위에 선 것이요, 가정적 탕감노정의 기반 위에 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개인과 가정과 종족이 하나된 권내에 섰다 할 때는 민족복귀를 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건 왜 그러냐? 그 사람의 과거가 사탄으로부터 침범받을 수 있는 내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중요성

하나님의 슬픔은 복귀섭리노정에 왔다 간 중심인물들이 과거에 사탄으로부터 침범을 받았기 때문에 생겨난 것입니다. 그래서 현재에도 싸우고 있다 이겁니다. 그러기에 언제나 지상을 중심삼고 복귀섭리의 터전을 마련해 가는 것입니다. 과거를 상실하지 않고 현재를 상실하지 않으면 내일의 승리는 거기에 같이한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병이 나지 않고 정상적으로 자라 나온 나뭇가지에는 꽃이 피게 됩니다. 봄이 되면 꽃이 피고 가을이 되면 열매를 맺는 것은 자연의 이치입니다. 이런 나무는 과거에 안전점을 확보하고 있음과 동시에 현재의 안전점을 확보하고 있으니, 내일에 대한 안전점은 여기에서 계승되는 것입니다.

탕감노정을 생각할 때 개인시대면 개인시대, 가정시대면 가정시대가 전부 따로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개인의 승리는 가정의 승리를 뒷받침하고, 가정의 승리는 종족의 승리를 뒷받침 하고,종족의 승리는 민족의 승리를 받침하고, 민족의 승리는 국가의 승리를 뒷받침하고, 국가의 승리는 세계의 승리를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언제나 그 터전이 점점 높아간다고 해서 과거가 무시되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를 더욱 공고화시키는 것이 됩니다. 나무를 예로 들어 보면, 나무의 줄기가 굵다고 해서 과거에 가늘었던 줄기의 인연을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의 인연을 그대로 계승해야만 정상적으로 자라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입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 지금 때는 어떤 때냐? 이것이 막연한 사람은 막연한 신앙자가 되는 것입니다. 막연한 사람은 해이된 입장에 안 있을래야 안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아무리 기운을 내려고 해도 기운을 낼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하늘이 함께하지 않습니다. 자기 스스로 설 수 있는 환경적 여건이 허락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교회가 스스로 설 수 있는 환경이 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자기 환경으로 계승해서 설 수 없는 것입니다.

만일에 과거가 자기와 상관없다 할 때는 어떻게 할 것이냐? 주류의 노정을 가고 있는 사람의 과거를 인계받아야 합니다. 오늘날 통일교회에 있어서 선생님이 지난날 걸어온 노정을 회상하면서 여러분들이 현실에서 왜 눈물짓고 가슴 아파 하느냐? 그것은 선생님이 걸어 온 노정에 동참하는 특권적 혜택을 받기 위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역사를 상고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 이것은 역사시대에 있어서 망하는 운은 피하고 애국지사들이 남긴 사상을 현실화시키는 책임자가 되기 위해, 또한 보다 가치있는 내용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역사를 회고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으로 말미암아 역사는 새로운 방향으로 나가게 되며, 그런 사람이 국민을 대표해서 나서게 될 때 국가의 방향이 새롭게 설정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주류의 노정을 걸어 온 사람의 과거를 인계받아야 합니다.

개인을 찾아 나온 탕감복귀역사

1960년 이후 우리는 횡적인 탕감노정을 걸어 나왔습니다. 종적인 역사를 횡적으로 탕감한다 이겁니다. 종적인 역사는 개인을 찾아 나오는 역사 입니다. 여기에 가정이 출발함으로 말미암아 횡적인 역사가 벌어진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걸 알아야 돼요. 지금까지 6천년 섭리역사는 하나님께서 한 개인을 찾기 위해 수고해 나오신 역사입니다. 개인 찾기 위한 싸움이 6천년 걸렸다는 것입니다. 한 개인을 찾기 위해 아벨시대부터 지금까지 역사가 계속 연결돼 나온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동원되었다 해도 그것은 외적인 세계를 중심삼은 개인, 가정, 종족, 민족, 국가, 세계를 찾기 위한 것입니다. 이러한 세계는 가인세계를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외적인 세계 앞에서 개인적으로 내적인 인연을 남기고 가정, 종족, 민족, 국가, 세계적으로 내적인 인연을 이어 갈 중심존재가 누구냐 하면 재림주님이라는 겁니다. 그분은 외적인 중심존재로 결정되어 가지고 개인으로부터 가정, 종족, 민족을 찾아 나와야 하지만 개인이 아직까지 승리의 결정을 보지 못했습니다. 소망의 결정은 보았지만 승리의 결정은 보지 못했습니다.

이 승리의 결정을 지으려면 가인 아벨의 원칙을 통해야 합니다. 소망적인 결정은 가인적인 입장이지만 승리적인 결정은 아벨적인 입장입니다. 그래서 개인적인 승리로 결정짓기 위한 것이 재림역사요, 그 일을 하시는 분이 재림주님이십니다. 가정을 중심삼은 소망적인 터전 위에 가정을 중심삼은 승리적인 결정을 짓는 것이 재림주님이 해야 할 사명입니다. 종족적이요, 민족적이요, 국가적이며, 세계적인 승리도 재림주님이 해야 할 사명 입니다.

이렇게 해서 외적 세계를 내적으로 탕감복귀하는 것입니다. 그 탕감복귀를 하는 데 있어서 개인 확정이 성립되지 않고서는 가정이 출발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재림사상을 남기게 됐고, 다시 와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오기 위해서는 신랑 신부의 터전을 가져야 된다는 문제가 벌어 지는 거예요.

우리 통일교회는 지금까지 어떠한 일을 하고 있느냐? 어떤 길을 가고 있느냐? 여러분이 이 일을 하고 있느냐? 여러분이 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하나의 중심을 중심삼고…. 중심은 이 길을 연결시키는 싸움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승리의 때, 가정적인 승리의 때, 종족적인 승리의 때, 민족적인 승리의 때…. 아무리 민족이 넓고 아무리 국가가 넓다고 해도 크다고 해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개인 가정 종족 민족을 중심삼고 싸움으로 말미암아 개인 승리, 가정 승리, 종족 승리, 민족승리를 확정지을 수 있는 터전에 섰다 하더라도…. 다시 말하면, 개인 승리, 가정 승리는 1차라 이거야. 가정은 개인이 중심입니다. 즉, 사위기대의 터전을 중심삼아 가지고…. 그러면 노아 가정-이 가정이 문제인데-의 문제가 해결되기 전에 노아라는 한 개인이 문제라는 거예요. 그렇잖아요? 아담 가정! 가정이 문제가 되는 거야. 그리고 가정의 문제가 해결되기 위해서는, 예를 들어 노아 가정이 해결되기 위해서는 아들이 중심이 되어야 된다 이거야. 아브라함 가정 하면 아브라함이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아브라함 가정이라 하면 아브라함 자신을 중심삼고 관계되어 있는 사위기대 터전을 말하는 것입니다.

대신자의 자리에서 주류를 계승해야

여러분이 흔히 개인복귀, 가정복귀, 종족복귀, 민족복귀, 국가복귀, 세계복귀를 해 나간다는 말을 하지만 막연해서는 안 됩니다.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했댔자 한 부분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통일교회에 여러분이 들어왔지만 여러분은 출발자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계승자의 혜택권내에 있는 것이지 출발자의 혜택권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계승받아야 됩니다.

때문에 통일교인들은 통일사상을 배워야 합니다. 통일사상을 배우기 위해서는 과거를 알아야 되고 과거를 계승해야 합니다. 통일교인이면 통일 교회 역사를 알아야 되고, 그러려면 선생님의 과거를 알아야 합니다. 선생님의 과거와 동떨어진 사람이라면 스스로 암만 통일교인이라 자처해도 통일교인이 아닌 것입니다. 통일교인은 통일교회를 중심삼지 않으면 과거가 없는 거예요. 그 과거를 이어받고서야 현재가 성립됩니다. 현재라는 것은 과거의 계승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현재는 과거에서 나오고 미래는 현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일직선에서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이게 이렇게 돼 가지고 만난다는 거야. '아 뜻이야 어떻게 되더라도 나 조금 있다 가도 괜찮지' 이러면 안 됩니다. '과거의 통일교회를 부정해도 현재의 통일교회는 부정하지 않는다. 주체적인 입장에 서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입장에 서는 것이다. 주류의 입장에 서는 것이 아니라 방계의 입장에 서는 것이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방계적인 자리에서는 계승되는 법이 없는 것입니다. 더구나 생명의 계승과 자기의 모든 환경의 계승, 생활의 계승은 대신자의 자리에 설 때 가능합니다. 아버지가 아들딸에게 계승하게 될 때는 반드시 그들 가운데 자기를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서 하는 것입니다.

대신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냐? 오늘의 생활로 말미암아 계승되는 것이 아니라 과거로 말미암아 계승되는 것입니다.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많은 아들 가운데서 어떤 아들이 과거에 나와 더불어 일치되어 나왔느냐가 현재를 계승시킬 수 있는 절대적인 잼대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가 있어야 합니다. 과거가.

아들은 아버지를 중심삼고 같은 입장에 서야 합니다. 제삼자의 입장에 서서는 안 됩니다. 상대적 입장에서는 계승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양자가 되든가 직계 아들이 되어야 합니다. 양자라고 하면 종살이 가운데서도 대표적인 종살이를 하고도 감사할 수 있는 자리를 걸어간 자이어야 합니다.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백을 상속받으려면 이백 이상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아들은 백만큼 감사만 하면 됩니다. 양자가 계승을 받으려면 백을 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양자와 직계 자녀는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통일교회에는 은혜가 없다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따위 수작 그만두라 이겁니다. 은혜가 사방으로 뻗어 나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보리를 심게 되면 잎이 무성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잎이 무성하더라도 거기에서 한 줄기 보릿대가 나오지 않으면 망하는 겁니다. 보릿대가 나오지 않으면 열매가 맺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영양소를 흡수하여 결실해야 하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왜 해이해지느냐? 이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것은 과거를 상속받을 수 있는 직계의 자리를 사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간단하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통일교회에서 특별히 지시하는 것을 실행하지 않고서는 절대 그냥 넘어설 수 없습니다. 제 1차 7년노정, 제2차 7년노정, 제 3차 7년노정을 넘어갈 수 없습니다. 절대적인 것으로 이 땅에 선포하는 것을 거치지 않고서는 절대 못 넘어갑니다.

이것이 절대 필요할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7년노정으로 갈 수 있는 것을 못 가게 되면 7년의 3배인 21년이 지나도 못 갑니다. 21년의 3배인 60년은 걸려야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것을 이루지 못하면 그렇게 어려운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안내자를 잃어버린 사람은 언제나 불안합니다. 그렇지 않아요? 저 사람이 틀림없이 안내자라고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안내자를 잃어버리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어디서 대신자를 구하느냐는 겁니다. 아무리 안내자를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그 사람은 믿을 수 없는 거예요. 왜? 과거가 없기 때문에. 그렇지 않아요?

그 사람은 과거를 계승한 신념적 기반이 희박하기 때문에 현재 안내자의 선생이라고 해도 믿을 수 없는 거예요.

관계와 발전

그러면 과거와 오늘이 무슨 차이가 있느냐? 과거 60년대 통일교회와 현재 통일교회는 어떤 차이가 있느냐? 선생님이 달라진 것이 아닙니다. 옛날에 선생님은 일방적인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사방적인 사람이 됐을 뿐입니다. 과거에는 여러분을 데리고 안방에서 일대일로 정성을 들였지만 이제는 사방으로 정성들이는 것입니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모르는 가운데 입체적인 역사를 하고 계십니다. 알고 보면 사방에서 가중된 은사를 받고 있다는 겁니다. 지금은 점적인 활동을 하는 때가 아닙니다.

개인적 복귀시대는 반드시 한 점을 통과해야 됩니다. 지금까지의 복귀 역사도 한 점을 통과했습니다. 이 세계도 한 점을 통과해야 됩니다. 가정, 종족, 민족, 국가 전부 다 개인에서부터…. 세계의 중심은 반드시 하나입니다. 그 하나는 개인입니다. 그러므로 개인섭리시대는 전체의 은사의 역사를 한 개인을 부활시키는 데 주력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머니 아버지는 자식이 다 자랄 때까지는 자식을 기르는 데만 주력합니다. 자식은 커 가면 커 갈수록 부모와 상대적 입장에 서게 됩니다. 그렇지요? 그것이 정상적입니다. 자식이 커도 '아! 나는 어머니 아버지 품에서 젖 먹는 것이 제일이다'며 젖만 먹습니까? 일을 해야 합니다. 상하관계가 상대적 관계로 변천해 가는 거예요.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상하관계에서 상대적 관계로 발전해 나가는 것입니다. 전후관계로 발전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폐단이 있습니다. 우리의 범위는 상대적 관계로 사방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개인 대 개인이 아니라 가정 대 가정이 아니라, 가정을 중심삼고 종족으로, 종족을 중심삼고 민족으로, 민족을 중심삼고 국가로 확대해 가야 하는 겁니다. 따라서 여러분 개인을 볼 때 발전하지 않은 것 같지만 통일교회는 발전하는 것입니다. 발견하지 못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후퇴하고 있는 것 같지만 도리어 통일교회는 발전합니다. 그러면 통일교회가 망하느냐, 개인이 망하느냐? 개인은 망할지 모르지만 통일교회는 망하지 않습니다.

오늘 대한민국을 중심삼고 볼 때, 이 나라가 앞으로 얼마나 발전할 수있느냐 하는 문제도, 저 지방의 골짜기에 사는 백성들이 얼마만큼 주권자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느냐를 보고 그 발전의 강도를 측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주권자에 대해 관심을 갖거나 정책에 대해 관심을 갖거나 둘 중의 한 분야에는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그 나라가 흥하느냐 망하느냐를 결정합니다.

오늘날 민주진영을 대표한 미국도 마찬가지 입니다. 닉슨을 존중하든지 닉슨 행정부가 세운 정책을 존중하든지 둘 중의 하나는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국민들이 그나마 존중하지 않으면 미국은 망합니다.

백성이 자기 나라의 행정수반을 얼마나 존중하느냐가 중요합니다. 그 존중하는 도가 과거보다 강하게 되면 아무리 여건이 나쁘더라도 발전합니다. 주권자가 펼치는 정책은 존중하지 않더라도 그 개인을 존중시하면 그나라는 망하지 않습니다. 또, 주권자 개인을 존중하지 않더라도 내세운 정책을 존중하는 데 있어서 그 강도가 과거보다 낫게 된다면 그 나라는 발전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여러분 자신이 뜻을 중심삼고 선생님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겁니다. 선생님에 대한 믿음이 절대적일수록 망하지 않습니다. 선생님을 주체로 삼고 상대적 입장을 취해 가지고…. 주체와 대상은 주고 받아야 됩니다. 이러한 원칙을 여러분 생활에 적용시킬 때 통일교회는 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에 대해서는 절대시하면서 자기 자신은 괜찮다고 '나야 뭐' 하면 망합니다.그렇게 하면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주체와 대상이 주고받지 않으면 번식이되지 않기 때문에 발전이 안된다는 것입니다. 창조원리가 그렇기 때문에, 이 철칙이 그렇기 때문에 하나되어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선생님과 하나되지 못한다면 선생님이 내세운 뜻의 방향에 대해서라도 일치되어야 합니다. 선생님이 여자들을 동원했습니다. 그렇다고 여자만 동원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대신 동원한 겁니다. 그들은 나라를 위해서 싸우는 것입니다. 그들을 위해서 점심을 걸러 가면서 한 푼이라도 더 모아 그들에게 보내주겠다고 노력하는 사람은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뜻과 더불어 일치된 자리나 뜻과 더불어 일치된 생활, 이 둘중의 하나라도 할 수 있는 자리에 서지 않으면 망합니다. 아무리 큰소리를 치더라도 안 됩니다.

선생님은 좋은데 뜻은 싫다고 하는 것은 둘 다 싫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다 좋은데 다 못하니 하나라도 할 수 있다고 하면 남아질 수 있습니다. 선생님은 좋은데 뜻은 싫다고 하면 망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앉아요? 선생님이 뭐 선생님을 위해서 있습니까? 둘 다 좋은데, 둘 다 해야 겠지만 둘 다 할 수 없으니 하나라도 해야지 하는 사람은 남아지는 겁니다. 그러나 그런 자는 주체의 자리에는 못 섭니다. 둘 다 하지 않으면 주체가 못 되는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계승자가 되려면 주인의 뜻과 마음을 맞춰야 하는 것입니다. 주체는 보다 더 나아야 되는 거예요. 그러므로 주인의 마음과 뜻을 대신하게 될 때 계승자가 되는 겁니다. 그러한 계승 자는 주체자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옛날과 같이, 옛날 이상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선생님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지 않고 뜻을 위해서도 관심을 갖지 않으면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망하는 거라구요. 하늘이 아무리 벼락 같은 은사를 내린다 하더라도 여러분은 하등의 관계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 감응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 통일교인은 하늘이 내 것이라고 주장할 아무런 무엇이 없어요. 그저 구경꾼에 불과하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돼요.

하나님을 좋아하든가 하나님의 뜻을 좋아하든가 둘 중의 하나는 좋아해야 합니다. 이것이 철칙입니다. 하나님을 모른다 하더라도 뜻을 중심삼고 적극적으로 나가게 되면 하나님이 떠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뜻과 보조는 못 맞추더라도 주체와 보조를 맞추게 되면 하나님이 같이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체라면 뜻은 상대입니다. 그래서 주체와 하나되든가 상대와 하나되면 주체와 대상 관계가 하나된다는 것이 원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둘 다 하나되면 주체를 대신할 수 있는 계승자가 되는 것입니다. 둘이 하나되기 어려우면 어느 하나와라도 하나되어야 합니다. 통일교회 선생님과 하나되든가 아니면 선생님이 제시한 뜻과 행동적인 면에서 하나 되든가 해야 합니다.

뜻은 어디까지나 상대입니다. 그렇지요? 여러분들 가운데는 매번 밖에 나가서 전도를 하는 사람만 전도합니다. 반면에 잠만 자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 가지입니다. 잠만 자는 사람은 독약을 먹고 자는 사람입니다. 뜻과는 벌어지게 되는 거예요. 차라리 몰랐으면 용서받고 넘어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알고도 행하지 않으면 용서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주체자와 하나돼야

이러한 문제를 71년부터는 어떻게 시정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선두에 서서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할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망합니다. 아무리 선생님과 한 방에서 자고 깨도 나와는 상관이 없게 됩니다.

여러분이 선생님과 보조를 맞추거나 뜻과 보조를 맞추거나 해야지, 둘중의 하나도 안 하면 망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그는 과거도 없는 사람 이요, 미래도 없는 사람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망하지 말라고 해도 망하게 됩니다. 공고한 과거를 갖지 못한 사람은 현재의 공고한 자리에 설 수 없고, 미래의 공고한 자리에도 설 수 없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뒷방살이하는 뒷방 영감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생명의 중심, 여러분의 자극적인 힘의 원천지가 되어야 합니다. 지난날 싸워 온 나의 역사가 생생히 여러분의 가슴에 살아 있어야 합니다. 싸우던 그 모습이 여러분에게 반응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대로 투영되어 여러분 앞에 언제나 자극적인 힘의 모체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동기가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선생님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안방에 가만히 앉아서 이마를 맞대고 기도나 하고 밤을 새우는 때하고는 다릅니다. 그때처럼 해 가지고는 뜻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때는 키우는 때입니다. 키워서는 뭘 하느냐. 언제까지나 젖만 먹이는 것이 아닙니다. 키워서 일을 시켜야 하는 거예요. 대역자를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불가피한 겁니다. 대역의 자리는 하늘이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이 그런 자리에 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과거를 이어받지 못할 것입니다. 선생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이것이 동떨어진 것입니다. 그러면 뜻과 동떨어지는 것입니다. 의욕을 가져야 합니다. 내일은 뜻과 더불어, 소망과 더불어 찾아오는 겁니다. 내일을 맞이하려면 현실에서 공고한 자리에 서야 하고 주체적인 입장에 서야 합니다. 미래의 주체가 되어야만 뜻을 이루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뜻 앞에 끌려가서는 안 되는 거예요.

내가 주체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을 붙들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주체이시니 하나님이여, 나는 죽더라도 당신의 뜻과, 당신과 하나되겠습니다'라고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맞이하려면 선생님을 중심 삼고 하나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원리가 가르치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일해야 되겠다고 애쓰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망합니다.

박대통령이 지방에 갈 때면 지방의 관서가 모두 하나돼 가지고 정성을 다해 맞이할 준비를 합니다. 그런데 이 엄청난 하늘 뜻을 수행해 가는 데 있어서 여러분은 얼마나 관심을 갖고 정성을 들이느냐는 것입니다. 아무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선생님을 중심삼고 뜻과 여러분은 관계 맺을 수 없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어쩔 수 없이 떠나가는 거예요. 앞으로 이러한 문제를 중심삼고 자체를 정비할 때가 불가피하게 온다는 것입니다.

아침 밥을 못 먹으면 먹을 밥이 없나 하고 눈이 벌개 가지고 돌아다니지만, 뜻에 대해서는…. 뜻을 아침 밥만도 못하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싸구려 뜻이 아닙니다. 밥 한끼는 못 먹는 한이 있더라도 하루 전체를 소모시켜 주체자와 일체가 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눈물과 피와 땀을 개의치 않고 하늘 앞에 정성을 들이는 터전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건달패들이 많습니다. 그런 패들을 중심삼고 뜻이 이루어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뜻을 책임지고 나왔기 때문에 이 길을 갈 수 있도록 본을 보여 주어야 되겠다고 생각하는데, 그때가 금년입니다. 이 3년노정 기간에…. 그래서 선생님이 지방에 갈 경우 될 수 있으면 지역장을 찾아보려고 하기 보다는 배치한 아주머니들을 만나려고 합니다. 그런 때가 이 3년 기간입니다. 이게 마지막 고비입니다.

1971년 2월의 마지막 날을 맞이하였습니다. 2월에는 통일교회를 중심 삼고 방대한 대사회작전이 벌어졌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교회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어요? 교회에서는 잔치날인데도 불구하고 밥 얻어 먹으러 다닐 수 있느냐 이겁니다. 부모와 형제들이 지금 마음을 전부 여기에 쓰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기와는 상관없다고 하는 패들이 무슨 식구예요? 그런 패들은 구경꾼입니다. 다 망하게 됩니다. 망하지 말라고 해도 망합니다. 망하는 것입니다. 선생님과 갈라지게 됩니다. 불쌍하지만 갈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안 갈라지면 선생님이 갈라치우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중심삼고는 뜻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렇잖아요? 이 말은 내가 지어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원리 원칙이 그렇습니다.

그러면 나 자신은 이제부터 어떻게 하느냐? 나는 어디를 가려고 나서게 되면 가는 길을 두고 기도합니다. 나는 창경원에 갈 때도 기도합니다. 정성은 보이게 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모래알을 모아 태평양 바다를 메우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결과가 나타나길 바라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보고하는 생활 관계 맺는 생활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해 종살이하고 남을 위해 머슴살이하는 것은 공적으로 하늘과 관계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난다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늘 것입니다. 다만 보고하고 정성들이는 것은 내 책임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나서는 길에 영계를 동원해야 합니다.

어제는 석포라는 곳에 갔다 왔습니다. 길이 험했습니다. 태백산맥을 넘으려니 눈이 왔습니다. 눈이 오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눈이 왔습니다. 눈이 우리 생활에 직접적인 투쟁의 목표로 나타나는 것을 보고 신앙 길도 마찬가지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높은 곳에 가는 사람들은 남모르는 개척자의 길에서 이런 싸움을 통하지 않으면 갈 수 없는 것이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고급차는 들어가지 못한다고 했지만 들어가라고 했습니다. 차가 문제가 아니라는 거예요. 갈 길이 더 바쁘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구보끼 일본 협회장이 와서 선생님이 6시에 도착한다는 소식을 보내고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가 선생님을 만나러 오는 것은 자기 개인적인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일본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내 개인의 목적을 위해서 가는 것이 아니다 이겁니다. 사고를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책임자로 온 것을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두 나라의 경제발전을 위해서도 상의해야 할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를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조건을 세워 놓고 올라왔습니다.

사냥을 하려고 총도 가져갔기 때문에 일행이 하루 이틀 더 머물고 가자는 것을 재촉해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선생님이 왜 그래야 되는지 같이 갔던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서는 꿈도 못 꾸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살아가는 생활관과 그들이 살아가는 관과는 천지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보고하며 주체와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선생님에게 찾아와서 선생님이 바쁜데도 불구하고 만나야겠다고 합니다. 선생님이 바쁠 때는 기뻐서 왔는지 슬퍼서 왔는지 표정으로 보고하라는 거예요. 선생님을 찾은 입장이 옛날보다 기쁜 일이면 어제보다 활짝 핀 얼굴로, 소망에 넘치는 모습으로 나타나 보고하라는 겁니다. 슬픈 사연이면 머리 숙이고…. 슬픈 그것이 보고라는 거예요. 간단한 겁니다. 좋은 것 아니면 나쁜 것 아니냐 이겁니다. 이건 그저 좋든 나쁘든 만나 뵙고 보고하겠다고 하니…. 바쁠 때는 바쁘게 넘어가라는 거예요. 기쁜 일이 있으면 기쁜 모습으로 보고하고 슬픈 일이 있으면 슬픈 모습으로 보고하라는 거예요. 나는 바쁜 사람입니다. 내가 가야 할 길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매일같이 나는 그런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하나님이 안 계신다면 외로운 사람입니다. 통일교회의 그 누구한테도 의논할 수 없다는 거예요. 의논할 대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주제에 입이나 다물고 있으면 좋은데 나발을 불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주체와 하나되어야 되고 대상과 하나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체와 대상이 하나되면 번식이 벌어집니다. 그렇지 않아요? 주고받으면 반드시 번식이 벌어집니다. 그 번식될 수 있는 자리는 기쁜 자리인 거예요. 하나님 자신도 성상과 형상의 이성성상으로 되어 있지요? 각자일 때는 주체가 아닙니다. 남자와 여자가 합해야 가정의 주체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둘이 합하면 주체가 되지 않으려 해도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

777쌍 여자들 동원할 때도 그래요. 자기 부인들 안 보낸 자 있다면 용서 못 받습니다. 차라리 관계맺지 않은 것이 낫습니다. 이런 못난 자식들처럼 살라고 부부로 맺어 준 거예요? 그런 자들 앞으로 두고 보라는 거예요. 몇 년 후 어떻게 돼나.

앞으로 이 못난 자식들을 중심삼고 싸워야 되겠어요. 여기는 결판장이라는 거예요. 누굴 위해 있는 거예요? 통일교회는 문선생 자신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뜻을 아는 여러분들이…. 70년대에 들어서면서 선생님 생활이 그런 거예요. 그러기에 여러분도…. 선생님이 어디 가든지 주체적인 입장에 서려면 어머니면 어머니와, 협회장이면 협회장과 하나되어야 합니다. 보고받고 보고해 줄 수 있는 환경을 갖춰야 합니다. 보면 협회장은 제 2의 대상, 뜻의 대상입니다. 선생님 가정의 어머니는 심정의 대상입니다. 그러기에 심정의 반응이 뜻에 나타나야 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협회장은 언제나 보고해야 되는 거라구요.

선생님은 항상 거기에 관심을 갖고 있는 거예요. 가정에 무슨 일이 있으면 보고하라는 거예요. 보고하는 데는 자기의 뜻, 자기 개인의 감정을 중심삼고 보고하는 것이 아닙니다. 솔직히 보고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해결짓지 못하면 선생님을 통해 해결해야 합니다. 뿌리에 가서 모든 것이 해결되기 때문입니다. 좋은 것이나 나쁜 것이나 전부 다 보고해야 합니다.

정석온 할머니가 보고하는 걸 들어 보니 유 협회장이 영적으로 나타나서 세상에 있을 때는 이런 줄 몰랐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자고 싶을 때 마음대로 자고 먹고 싶을 때 마음대로 먹었는데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더라도 보고하고 자고, 먹더라도 보고하고 먹어야 한다는 거예요. 생활 전체를 하늘과 더불어 관계를 맺고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유 협회장이 생전에 교회가 쓸쓸한데도 불구하고, 자기가 정성을 모아서 식구들을 거느리고 예배 한번 못 봤다는 것입니다. 한 생명이 죽고 사는 문제를 중심삼고, 식구들의 애절한 생명을 책임져야 할 협회장의 입장에서 밤을 새워 가면서 기도해 봤느냐 이겁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식구를 대해 봤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럴 줄 몰랐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심방을 해보았고, 교회에 나오지 않은 사람을 위해 얼마나 눈물을 흘려 봤느냐는 것입니다.

교회생활과 법도

그런 모든 원칙적인 문제를 두고 볼 때에 여기 본부에 있는 자리가 쉬운 자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선생님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사람이 제일 어려운 거예요. 밥도 마음대로 못 먹는 겁니다. 선생님이 있는데도 불구 하고 왔다갔다해 가지고는 안 되는 거예요. 이런 것 모두 정비해야 됩니다. 앞으로 선생님이 여기를 떠나게 되면 선생님 만나기가 어렵습니다. 법이 있는 거라구요. 선생님이 하나님의 내적인 배후를 갖고 있다면, 여러분은 그 배후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모르면 걸리는 게 많습니다. 그러니 조심해야 됩니다.

여러분이 교회 마루 한번 닦아 봤어요? 유리창 한번 닦아 봤어요? 교회 일에는 정성들이지 않고 자기집 일에만 정성들이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걸립니다, 자기 집 유리창이 깨지면 갈아끼우기 위해 별의별 일을 다하면서 교회 유리창이 깨지면 남의 집 일같이 생각하는 거예요.

선생님은 지금까지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어떠하든지 이 길을 위하여 수고해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지구장이나 지역장들은 선생님 지갑에 있는 것을 빼앗아 가려고 합니다. 자기 지구를 위해서 쓰는 데 선생님이 전체를 위해서 쓰는 것보다 가치있게 쓸 자신이 있느냐? 그러면 좋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함부로 날뛰지 말라는 겁니다.

또, 앞으로 여러분이 교회 물건을 함부로 가져 가면 벼락맞습니다. 두고 보세요, 몇 대 조상이 걸립니다. 교회 물건은 성물입니다. 이것에 손을 대면 사탄보다 더하다는 겁니다. 이것을 자기가 보관하겠다구요? 도둑질 해서 보관하는 것 봤어요? 제단 위에 놓은 기념이 될 만한 그릇 같은 것을 자기 집에 갖다 놓고 보관해도 되느냐는 거예요. 그것 때문에 화가…. 그 물건이 네 품에 있고 싶어하느냐, 선생님 가까이 있고 싶어하느냐? 물건으로부터 참소받게 되면 걸립니다. 가져 가는 놈들은 두고 보세요. 그런 녀석이 통일교회 교인이 되겠어요? 가져 가게 되면 선조들까지 걸려 듭니다. 알맹이는 다 빼앗기고 껍데기만 쓰고 나가게 됩니다. 그런 자들의 후손이 어떻게 되나 두고 보세요. 3대 이내의 후손이 어떻게 되나두고 보라는 거예요.

물론 생활에 관한 법을 다 만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법에 의하면 여러분은 여기에 함부로 들어올 수 없습니다. 그런 입장에 처한 여러분이 새벽에 여기까지 와서 졸아요? 데데하게 여기 와서 졸라고 이 장소를 마련한 것이 아닙니다. 또한 일요일 아침 예배 시간에 비판적인 입장에서 참석하게 되면 걸립니다. 자기는 잘난듯이 비판하지만 결국 그는 걸리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 가는 길에는 언제나 온유겸손해야 하는 거예요. 선생님 가정에 대해 비난하며 얘기하는 부인들 두고 보세요, 어떻게 되나. 그런 자들이 선생님 가까이에서 사나 보세요. 전부 흘러가 버리고 맙니다. 선생님은 인정을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니예요.

여러분이 원칙을 넘어가느냐, 아래에 있느냐, 옆으로 가느냐. 한 중심을 중심삼고 전후 좌우 상하가 어떻게 되어 가느냐? 정상적인 입장에서 전후 좌우 상하관계를 맺는 것이 문제입니다. 선생님은 그러한 등등의 문제를 중심삼고 언제나 살피고 있습니다. 전후 관계에서 걸리면 도리어 역적이 되는 거라구요. 여러분은 하늘의 법도를 중심삼고 자기 생활관을 세울 줄 알아야 됩니다. 그저 함부로 사는 선생님이 아닙니다. 선생님은 생활하는 데 있어서 모든 규범을 중심삼고 온 신경을 쓰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알아야 될 것은 어느 자리에 서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를 중심삼고 볼 때 과거를 상속받을 수 있는 나 자신이 됐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과거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현재도 마찬가 지입니다. 여러분의 현재 생활에서 부활의 특권을 만들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하늘이 어디로 가느냐 이거야. 통일교회면 통일교회의 주류가 어디냐? 선생님 자신도 거기에 보조를 맞추고 있습니다. 선생님도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생님이 마음대로 한다면 스스로 고생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한민국에 머물지 않고 미국 같은 외국에 가서 기반을 닦았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거예요.

뜻을 위해 수난길의 선봉에 서야

탕감노정은 수난의 길로 출발했기 때문에 수난의 길에서 열매 맺어야 되는 것입니다. 영광의 길로 출발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하고 고난의 길로 출발했기 때문에 나라가 인정할 때까지 고난의 길을 가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대한민국 3천만 국민이 통일교회 문선생이 수고하고 수난길을 갔다고 증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안이한 자리에서 편안히 잠을 잘지 모르지만 선생님은 가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기도하는 것도 그것을 위해 기도합니다. 여러분은 자기 자신을 위해 기도하고 교회를 위해 기도하지만 선생님은 교회가 문제가 아닙니다. 남한이 문제가 아닙니다. 남북한이 문제입니다. 민주주의가 문제가 아닙니다. 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가 문제입니다. 그런 문제를 중심 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원수를 중심삼고 해결할 문제입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원수를 굴복시키기 위한 동기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그런 문제를 중심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현재 통일교회가 주력하고 있는 움직임은 통일교회와 하등의 관계가 없습니다. 통일교회 자체의 발전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민족을 위한 것이요, 인류를 위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승공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 자체로 보면 이것은 출혈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뜻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이 일을 하는 것입니다. 보다 큰 것을 위해서는 우리가 수난길을 지금 닦아 나가야 합니다. 또한 탕감노정은 수난길을 통해서 연결되지 않으면 안 되겠기에 종족 이나 민족의 수난길을 탕감시키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의 수난길을 탕감하는 데 있어서 내가 선두에 서야겠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설 수 없습니다. 이것만은 틀림없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의 길을 아직까지 가고 있는 것입니다. 영광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언제나 신경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언제나 고달프고, 언제나 조심하고, 언제나 긴장하고 있는 거예요.

어느날은 눈이 피곤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놈의 눈 !' 그런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것을 생각하고 이것을 해야 하는데 눈의 방해를 받을수 없다 이거예요. 몸이 피곤하면 '이놈의 몸뚱이!' 하여 몸과 싸우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는 발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증거하지 않는다면 제삼의 종교를 통해서 증거할 것입니다. 본부에 있는 부장이나 간부들이 증거하지 않으면 불교인이나 유교인들이 통일교회를 증거할 것입니다. 자기의 체면과 위신이 깎이고 하늘의 권위가 양도되고 있다는 서글픈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선생님과 하등의 관계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자원해 가지고 선생님을 만나기를 고대했고, 자기들이 정성을 들여 가면서 통일교회를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하늘은 통일교회를 세계적으로 발전시키고 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움직이지 않고 있지만 외부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을 끌고 가다가 시간이 없게 되면 놔두고 가는 겁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나중에 오지 못하면 떨어지게 되는 겁니다.

우리는 2월 마지막 안식일을 맞이했습니다. 그러면 내일을 맞자…. 그런데 여러분이 내일을 맞이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느냐는 거예요. 과거를 착실히 맞이하지 못한 사람은 오늘을 확실히 맞이할 수 없고, 오늘을 확실히 맞이하지 못하는 사람은 내일을 확실히 맞이할 수 없는 거예요.

과거는 어디로부터 왔느냐? 나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하늘로부터 왔습니다. 우리 선조들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 모든 중심이 하늘로부터 왔기 때문에 하늘을 위해서 내 생명 이상 인연을 맺어야겠습니다. 나는 누구를 위해서 있느냐? 선조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선생님을 위해 있다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을 위해 있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아버지를 위해 있느냐 이거야. 아버지를 위해 있다면 아버지 뜻을 위해서 가야 합니다. 이 원칙은 불가피합니다.

금후에 우리가 해야 할 일

그러면 현재 여러분에게 뜻을 위하겠다는 의욕이 있느냐는 거예요. 의욕이 없다면 이미 병이 든 겁니다. 뜻이 눈앞에 다가오는 세계적인 경향을 통해 볼 때 통일문제를 해결해야 할 중대한 시점에 와 있는 것은 틀림 없는 사실입니다. 이런 때에 원리를 아는 사람으로서 여기에 의욕에 불타지 않는 사람은 가짜입니다. 지금까지 자기를 반대하며 원수시해 온 부모가 현재는 반대하지 않는다고 해서 천국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만 십자가의 고통거리가 해결됐다고 해서 '아, 이제 나는 됐다'고 안심할 수 없습니다. 자기 개체는 아무리 핍박을 받아도 좋다고 해야 합니다. 죽어도 괜찮다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늘이 피해를 입고, 뜻이 피해를 입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것은 통일교회 가는 길은 수난의 길에서 출발했지 영광으로 출발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통일교인들은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다. 언제까지 ? 이 민족이 책임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 민족을 넘어설 때까지 십자가를 지고 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기쁨을 맞아 새로운 봄날로 출발하자는 것입니다. 기쁨으로 출발할 수 있는 씨를 뿌려서 기쁨의 세계를 무대로 삼고 하늘 앞에 인연을 맺고 가야 하는 길이 통일신도들이 가야 할 길입니다. 선생님도 이 길을 필생의 목적으로 삼고 가야 할 운명의 길이라고 생각하고 가고 있습니다. 한국 기독교가 반대하고 한국 민족이 반대했기 때문에 선생님의 운명이 그런 것입니다. 다시 이 민족을 살려야 합니다. 민족의 역사 가운데 계승할 터전이 없기 때문에 하늘의 역사를 계승할 수 있는 터전을 만들어, 계승된 현재의 입장에 이 민족을 동참시키고자 하는 것이 통일교회가 하려는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남아진 사명이 이 민족 앞에 있어서의 십자가의 길인 것을 감수해야 됩니다. 여기에 보조를 못 맞추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로 말미암아 승리가 거두어지는 날 기쁨이 우리에게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그 기쁨은 여기에 동참했던 사람과 더불어 나누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부패상을 바라볼 때 그들을 믿고 나라를 맡길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허리띠를 졸라매고 수년간 싸우며 지금까지 어려움을 극복해 나온 것은 이러한 부패상을 깨끗이 정비하려는 거예요. 여야가 싸움을 하고 있는데 그들이 이것을 정비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없다 하면 그들이 아무리 싸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람이 그 사람이고 그 사람이 그 사람입니다. 우리가 기반을 닦아 그 일을 해야 합니다.

통일교회는 입이 없어서 말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이 지금까지 수천년 동안 말 못한 것은 한 번이라도 하나님이 받아주었다가 실패하면 하늘땅이 망신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 기반을 확보하여 대비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나라를 넘어설 수 있는 기반, 세계를 밟고 나설 수 있는 기반을 닦자는 것입니다. 억울하게 맞고 억울하게 몰리고 억울하게 이용당했지만, 결국에는 그렇게 이용하고 억울하게 몰고 간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굴복하게 되는 겁니다.

내가 감정이 격할 때도 있는데 이 감정은 누구의 감정이냐? 통일교회 문 아무개의 감정이냐? 그것은 하늘의 감정이요, 세계 인류의 감정이요, 민족의 감정입니다. 우리는 억천만 원수의 총칼이 앞을 가로막더라도 달려가야 합니다. 이것이 통일사상입니다. 내가 통일사상을 제창한 장본인 입니다. 지구장, 지역장들 어렵게 살라 이거야. 거 당연하다 이거야. 우리가 민족에 대해 책임을 못 했기 때문에 밥을 굶어야 합니다. 그게 사는길입니다.

해방 이후에도 보면 진정한 애국자는 말이 없었습니다. 나라를 위하는 마음, 그 마음을 더럽히지 않으려는 절개를 가지고 외로운 자리를 피하지 않고, 안팎으로 외롭게 산 사람일수록 그렇다는 겁니다. 처음에는 애국했지만 말기에 가서 알랑알랑한 사람일수록 애국자인 양했습니다.

내일을 맞기 위해 하나되어 싸워 나가야

여러분은 이것을 알고 내일을 계승해야 하겠습니다. 내일을 맞자! 내일을 맞을 수 있는 풍토를 나 자신이 조성하고 있는가?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 현재 공고한 터전을 갖고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금년에는 '통일기반확보'라는 표어를 정했습니다. 먼저 몸과 마음이 하나되라는 거예요. 과거에는 소원으로만 바랐지만 이제는 마음과 몸이 하나되라는 겁니다. 남자 여자가 하나되라는 것이요, 사위기대가 하나되라는 거예요. 가정을 중심삼고 종족이 하나되라는 것입니다. 또한 종족을 중심삼고 민족이 하나되라는 겁니다. 그렇게 하나되는 데 있어서는 기쁠수 있는 행동을 바라고 좋을 수 있는 행동만을 바라는 사람을 중심삼고는 절대 하나되지 않습니다. 희생하는 사람, 십자가의 수난길에 있어서 뭇사람을 위해 죽음의 피를 뿌리고 눈물을 뿌린 사람을 중심삼아야 하나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심은 대로 거두게 됩니다. 통일교회는 핍박으로 심었으니 핍박으로 거둔다는 거예요. 그러니 기쁨이 있다고 기뻐할 것이 아닙니다. 그 기쁨을 자기의 기쁨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의 기쁨으로 돌려 버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신 후에 기뻐해야 합니다, 이렇게 될 때 현재의 기쁨 이상으로, 하늘이 기뻐한 그 이상으로, 프러스 되어서 상속받게 되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언제든지 시대감각에 예민해야 됩니다. 정세에 예민해야 합니다. 이런 문제를 중심삼아 가지고 내일을 맞을 수 있는 풍토를 마련 해야 되겠습니다, 그 내일이라는 것은 현재와 과거가 벗어나서는 있을 수 없는 겁니다. 내일에는 반드시 현재와 과거가 연결되는 것입니다.

개인, 가정, 종족, 민족복귀를 위해 싸워 나가는 마당에 있어서, 여러분은 내 가정은 비록 이렇지만 이러한 가정이 있다 이거야. 내 자체는 이렇지만 이러한 개인이 있다 이거야. 세계 만민을 대신한 우주적인 가정을 중심삼고 내가 하나의 가지가 되어 거기에 닻을 내리고 있다는 감사의 마음을 갖고, 하늘이 바라는 민족복귀, 국가복귀, 세계복귀라는 이 엄청난 목적을 중심삼고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가면 아무리 어려운 자리라 해도 하늘이 같이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 기도할 때 '아버지 ! 내가 이런 어려운 자리에 섰으니 같이하여 주옵소서' 하는 시시한 기도는 하지 말라는 거예요. 민족과 국가를 위한 시련과 고통을 자신이 짊어지고 그것을 극복해낼 수 있는 강직한 성격과 강한 마음을 가진 자만이 하늘을 위한 대신자가 되고 후계자가 되는 거예요. 충효를 남길 수 있는 내 개체가 되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것이 문제입니다.

상은 받아서 뭘해요? 과정에서의 상은 필요없는 거예요. 칭찬은 받아서 뭐해요? 과정에서의 칭찬은 필요없는 겁니다. 맨 나중에 가서 칭찬을 받아야 합니다. 도리어 과정에서 받는 칭찬이 나를 망치게 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통일교회가 가는 길이 가면 갈수록 십자가의 길이요, 가면 갈수록 어려운 길이지만 통일교회 문 선생한테는 보람있는 길입니다.

후퇴의 길이 아니라 보람있는 길입니다. 과거에도 그렇게 싸워 나왔기 때문에 지금도 그렇게 가는 것입니다. 선생님의 한마디 말은 세계의 어떠한 정객들이 말하는 이상의 문제를 제시할 수 있는 말입니다. 선생님이 행동 하는 결과는 세계정세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배후의 원동력이 되는 거예요. 그런 신념을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선생님의 얘기를 들을 때는 엄청난 얘기 같지만 행동할 수 있는 환경을 하나님이 만들어 놓는 겁니다. 그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세계는 변천되어 가는 것입니다. 정치가들이나 역사가들이 역사를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가들은 역사를 기록할 뿐이요, 문인들은 사회 환경을 기록할 뿐입니다. 심정 세계를 발전시켜 가는 것은 하늘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람을 느끼는 것입니다.

해이해진 자신을 수습하려면

여러분이 해이해진 자신을 수습하는 방법은 통일교회의 주체적인 주류적인 방향을 감정해서 거기에 보조를 맞추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선두에 선 주체자가 있다면 그 사람보다 강력한 신념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도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하나님에게 '하나님 날 도와주소'할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기도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도와주게 돼 있습니다. 그러한 입장이 못 된다면 혼자는 못 가는 겁니다. 천 지 인(天地人) 아녜요? 사람만으로는 절대 안 되는 거예요. 천 지 인입니다. 하늘땅이 있어야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반드시 상대나 주체가 없으면 기쁨이 없는 거예요. 힘은 주체와 대상 관계에서 나온다는 것이 원리가 아니냐 이거야. 그래서 뜻을 주체로 하고 대상의 자리에서 행동으로 움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선생님을 주체로 하고 여러분은 대상의 입장에서 명령하는 대로 행동 하라는 것입니다. 간단한 거예요.

그것이 어렵거든 여러분이 뜻길을 출발하게 될 때, 어떤 때에 하나님이 은사를 주었느냐, 어떤 때에 하늘이 나를 구해 주셨느냐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자리보다 더 비참한 자리로 내려가라는 거예요. 내려 가면 하늘이 도와줍니다. 여자로 말하면, 한겨울에 남편에게 머리를 깎인채 맨발로 쫓겨나 눈 위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애달파서 하늘을 부를 때 하늘이 같이해 주시던 그 은사, 그 은사를 잊을 수 없거든 그 이상의 자리까지 내려가라는 것입니다. 이 나라 이 민족의 해방의 날을 위해 쫓겨 나는 한이 있더라도, 감옥살이를 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 자리를 오히려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은 망하지 않습니다.

은혜라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뿌린 대로 거두는 거예요. 십자가로 시작했으니 십자가로 거두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애달프게 누구를 사모하는 심정을 가졌으면 끝까지 사모하라는 거예요. 자기 몸을 중심삼고 봉사로 출발했으면 봉사로써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아무리 어려움이 있더라도 절대 후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열매맺힐 때가 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 고비를 극복하라는 거예요. 그래서 자신이 걸은 그 자체로 하여금 자기를 증거할 수 있는 재료가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시집을 간 후에는 남편을 중심삼고 절개를 지키라는 것이 무엇이냐? 처음 가졌던 마음을 죽을 때까지 가지고 가라는 겁니다. 그런 마음을 갖고 가면 자식이 없더라도 가정생활에서 아내로서 책임을 다하는 것입니다. 비록 애기를 낳지 못했다 하더라도 시집갈 때의 뜻은 변치 말라는 겁니다. 환경에 따라서 환경에 보조를 맞추는 그런 놀음을 나는 못 하는 사람입니다.

주체와 대상의 관계가 성립되지 않으면 힘이 나오지 않는 거예요. 그렇지 않아요? 힘이 없다고 편하게 낮잠 자면 안 됩니다. 그럴 때는 이방 종교인을 만나 보세요? 세상이 어떤지 한번 세상 구경 하라는 겁니다. 세상에 나가면 답답합니다. 그러니 나갔다간 다시 기어들어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극을 받아 자체적으로 보충 보강할 수 있는 스스로의 대비 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이 길을 못 가는 것입니다. 언제까지나 선생님이 여러분을 이끌고 갈 수 없는 거예요.

선생님이 맡은 바의 책임도 중하고 여러분보다 가중된 책임을 짊어지고 있으니 옛날처럼 시간을 내서 대할 수가 없습니다. 할 말이 있으면 길가에서도 하라는 것입니다. 방에 들어가 얘기할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점점 바빠지니 어쩔 수 없다는 거예요. 그렇다고 선생님이 여러분을 멀리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할수없다 이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있어서 여러분이 보조를 같이 맞추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내일을 맞지 못합니다.

아무리 선생님이 민족복귀, 국가복귀, 세계복귀를 하더라도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공식대로 가지 못한 사람은 또 가야 합니다. 공식을 거쳐 가야 합니다. 축복가정 여러분들 전부 세상 일을 태평하게 하지만 전부다 가야 합니다. 공식대로 해야 할 때가 오나 안 오나 두고 보세요. 하지 않고는 못 가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통일교회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연결시킬 수 있는 기반을 가져야 됩니다. 과거와 현재가 미래를 입증할 수 있는 공고한 기반이 되어야만 부끄럽지 않는 내일을 맞을 수 있는 것입니다.

내일을 맞기 위한 현실을 만들어야

엊그제 어떤 사람에게서 편지가 왔습니다. 아주 처량한 편지였습니다.

통일교회를 나간 사람이었어요. 통일교회를 나가서 갈 데가 있나요? 또 일본 청년 한 사람이 이러고 저러고, 구보끼 뭐 어떻고 어떻다고 하다가 제명처분을 당했다는 거예요. 이놈의 자식, 일본에서 제명처분당한 녀석이 본부에 와서 통과될 것 같아요? 내가 쫓아 버리라고 했습니다. 자기가 아무리 잘나고 무슨 학박사라고 하더라도 그런 사람은 필요없다는 것입니다.

과거를 무시하고서 현재를 이야기할 수 있는 법이 없습니다. 여기 아주머니들 가운데도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체면도 형편도 사정도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가 필요하니 나를 만나겠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무슨 장난거리예요? 선생님은 장난하는 사람이 아니라 심각한 사람입니다. 자기들이 주체예요? 너무 자기 자신을 높게 생각한 거예요.

자기가 아무리 높다고 해도 누가 그렇게 대해 주나요? 높게 되려면 하나에서부터 연결되어야 되는 거예요. 저 밑창까지 찾아가 하나의 조각돌에서부터 연결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남아져 꼭대기까지 연결되어야 내 것이 되는 겁니다. 과거에 누가 기반을 닦았는지 모른다고 해서야 되겠어요? 그런 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는 영통하는 사람들이 들어옵니다. 지금도 영통하는 사람이 들어 와서 이러구 저러구 합니다. 그러나 '정성들이는 법도나 정성들이는 과정에 대해서는 내가 공인하는 것이다. 여기에 잘못된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 잘못된 사람에 대해 참소하면 그럴 수 있다. 어느 기간까지는 책임할 수 있는 여유를 주는 것이다. 그 여유 기간까지 책임 못하면 처리하는 것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인정을 중심삼고 끌고 나가겠다는 생각 안 합니다. 하나님은 1차 2차 3차, 이렇게 단계적으로 끌고 나왔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뜻을 중심삼고는 내가 무얼 바라서는 안 됩니다. 뜻을 중심삼고는 대상의 입장에 서야 합니다. 뜻을 중심삼고 무한히 준다는 것은 주체를 점령할 수 있는 비법입니다. 내가 받겠다 받겠다고 하면 필요한 것 하나밖에 주지 않습니다. 둘 셋까지 안 주는 것입니다. 둘 셋 주면 망한다는 것입니다. 갈 길이 아예 막혀 버립니다. 하늘은 그런 일 안 합니다. 여러분은 이런 것을 알고, 내일을 맞기 위한 현실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1971년 이해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북괴와 혹은 아시아 정세를 볼 때 그야말로 밤잠을 자지 않고 가려 가야 할 때인 것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마음과 마음을 묶어 하늘 앞에 몽땅 바쳐야 합니다. 방심해서는 절대 안 되겠습니다. 교회가 냉랭하면 냉랭할수록 여러 분은 살아 움직여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 아침에 왜 여기에 왔습니까? 선생님을 보려고 온 것이 아닙니다. 왔다가 갈 때 무엇을 갖고 가느냐? 올 때 무엇을 바라고 오느냐? 이왕 오려면 시간을 지켜야지 늦게 오려거든 아예 오지 마세요. 가을에 낫을 들고 추수하는 농부가 되어야지 삯군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이 이삭을 주으러 온 사람입니까? 그런 사람이 사람되나 두고 보세요. 그런 사람에게 선생님은 소망도 두지 않거니와 의논도 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관심을 갖지 않는데 누가 관심을 갖겠어요?

교회가 어떻고 선생님이 어떻고 하는 사람이 있지만, 선생님이 그런 사람들을 위한 선생님입니까? 하나님 위한 선생님입니다. 그런 자들 다 떨어져도, 다 죽어 자빠져도 선생님은 망하지 않습니다.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렇게 나가려는 사람을 막지 않았습니다. 그래 해봐라…. 그거 갔다가 돌아올 수 있을 것 같아요? 돌아올 자신 있으면 해보라는 겁니다. 나갔다 돌아올 자신이 있냐고 내가 꼭 물어 봅니다. 진정 그러냐. 그러면 해봐라…. 가는 거야. 갔다 돌아올 때는 책망하는 거예요. 결과가 나빠지더라도 그것은 선생님이 잘못한 것이 아니예요. 하늘이 작전을 그렇게 하는 거예요. 죽어도 해보겠다니 해보라고 한 것입니다. 망하든 흥하든 해봐야 끝장나거든. 이걸 그냥 돌렸다가는 또 돌아가는 거야. 그럴 때는 해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미래를 맞으려면 과거와 현재를 상속해야 합니다. 주체와 대상관계에 있어서 여러분은 선생님과 뜻을 주체로 삼아야 합니다. 그러면 계승자가 되는 거예요. 뜻과 주체(선생님)와 행동적인 면에서, 심정적인 면에서 일체된 사람은 주체의 자리를 상속받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선생님을 다 좋아하지요? 어제께 점촌에 나가 있는 협회장 부인을 만났습니다. 뭐 정성들이고 기도해서 그런지 몰라도 집회를 끝내고 다 갔고, 자기도 가려고 버스 정류장까지 갔는데, 하도 가고 싶지 않아서 되돌아왔다나? 그래서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그렇다고 눈물 흘리고 좋아하는 거예요. 그렇다고 협회장은 섭섭해 하지 말라구요. '남편이나 자식보다 어머님 아버님 그리워 눈물짓는다나? 이제야 사람이 됐구나 그랬어요. 그거 깨달은 거예요. 그러나 객지에 나가 생활해 보고 나서, 부모가 죽은 후에 슬퍼해 봤자 효자가 안 되는 거에요. 그래도 그렇게라도 깨달았기에 이제부터 그런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그게 사는 길이예요. 자기 자식이나 자기 남편만을 생각하게 되면 불효입니다. 뜻 때문에 살아야 하는 겁니다. 선생님 자신이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통일사상이 바로 그런것입니다.

내가 어디 갔다 오더라도 어머니나 자식들 위해 무어 사 가지고 오지 않아요. 마음이 허락지 않아요. 약속을 했으면 할수없지만…. 점촌교회는 8만 원을 주고 방을 얻었다나? 돈이 없어서 조그만 방을. 그래서 내가 지역본부 확장하라고 가지고 갔던 돈을 주고 왔지만 말야. 임지에 나가 있는 아주머니들 이번에 다 이렇게 되지 않으면 다 망합니다. 임지에 내보낸 것을 고맙게 생각해야 합니다. 선생님도 사람인데 여러분들을 고생 시키고 싶겠어요? 그러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어요?

가정에 있어서 사위기대 복귀도 해야겠고, 또 가야 할 탕감노정이 남아 있고, 모자 협조노정이 남아 있기에, 이것을 여자가 안 하면 안 되겠기에 내모는 거예요. 그런데 남편들이 함부로 오라 가라 편지하고 있는데, 그거 다 걸립니다. 선생님에게 승락받고 편지하라구. 알겠어요? 아들딸이 죽게 되고 남편이 죽게 되었으니 오라….

책임을 다한 후 기쁜 내일을 맞자

이런 문제를 가지고 나한테 문의해도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네 맘대로 하라고 할 수밖에 없어요. 가겠으면 가고 말겠으면 말라는 거예요. 공식은 이미 결정돼 있는 거야. 선생님이 가정을 버리고 삼팔선을 넘을 때 생각 안 해 봤겠느냐는 거예요. 이북에서 선생님은 감옥살이를 하면서까지 해야 할 일이 있었기에 가정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남으로 내려와서도 집으로 편지 한 장 안 했습니다. 색시가 어떻게 되든 자식이 어떻게 되든 편지 한 장 안 했습니다. 못 한 것이 아니라 안 한 거예요. 하나님 앞에 바치고 하나님 앞에 약속했으니 아들딸들을 죽이겠으면 죽이고 말겠으면 말라고 해야 합니다. 그렇게 했을 때 그들은 절대 죽지 않습니다. 아무리 상거지같이 되어도 누군가가 도와주게 되는 거예요. 절대 안 죽습니다.

집을 떠날 때 애기들이 뭐 어떻고 하는 사람은 다 그만두라는 거예요. 내가 아는 하늘은 그런 자와는 상관없습니다. 애기들이 아파서 골골한다고 하면서 지방에 가서 활동 못 하고 애기 생각하며 눈물 흘리면 안 됩니다. 모든 걸 훌훌 벗어 버리고 나가 보라는 거예요. 잘 자란다는 거예요. 어머니가 없으면 불쌍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더 잘 자랍니다. 뜻을 위해 가는 길은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이번에 동원되지 않는 부인들이 있으면 앞으로 상대로 생각하지 마세요. 뜻을 위한 실질적인 여자 실질적인 남자가 아니면 쫓아 버려요. 뜻을 더 사랑하라는 거예요. 뜻을 위해야지 남편을 위해 ! 자기를 위하는 사내는 따라가지 말라구.

남자에게는 여자를 주관할 책임이 있는 거예요. 여러분들 같으면 싸움을 해도 괜찮습니다. 통일교회 문 선생은 그러면 안 되지만 말입니다. 장모들이 보내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공격해야 합니다. 대신 뜻을 위해서 남자들은 목을 걸어야 합니다. 별 수 없다는 거예요. 앞으로 여러분은 뜻을 위하는 데 있어서 미래를 맞이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기 도

​사랑하는 아버님 ! 오늘은 2월 마지막 날입니다. 국제정세의 혼란상을 아버지께서 잘 아시고 계시옵니다. 이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갈 길을 가깝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요, 아시아와 세계를 대하시는 아버지의 심정에 공명 공감할 수 있는 동참의 자리에 저희들을 내세우기 위한 아버지의 최후의 때요, 최후의 가려내기를 할 수 있는 이 시대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 대한민국이 금후에 가야 할 길을 보살펴 주시옵소서 .

인간은 언제나 무지하기 때문에 당신의 뜻과 섭리의 노정에 보조를 맞출 수 없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통일교회 신도들도 뜻을 안다고 하지만 보조를 맞추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아무것도 모르는 이 민족이 어떻게 하늘 뜻에 보조를 맞추겠습니까? 이런 지금까지의 역사적인 실례를 생각하게 될 때, 아버지여, 이 나라의 운명을 책임져 주시옵소서. 이 나라 이 삼천만 민족을 다시 한번 긍휼히 보아 주시옵고, 과거의 모든 것을 용납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필요한 것을 아옵니다. 지금까지 이 민족이 통일교회를 배반했었지만 우리를 필요로 할 때가 된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늘로부터 저 땅 끝에 이르기까지 아버지의 존엄하신 그 권위와 능력이 어떠한 존재물에도 벗어나지 않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이 한 민족의 금후의 장래까지 사랑의 손길로 같이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니다.

저희들은 아버지의 뜻을 놓고 이 나라 이 민족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나라의 주권자들은 자기를 중심삼고 나라를 생각하는 것을 볼 때, 자기의 힘이 아무리 강하고 자기가 아무리 우수하다 하더라도 때가 차면 기울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주권자들로부터 삼천만 민족이 그런 자리에 설 것이 아니라 하늘에 보조를 맞추어아 될 줄로 알고 있사옵니다.

제삼자의 입장에서 이것을 가르쳐 주고 영향을 미쳐야 하는 것이 통일교회의 입장임을 생각하고, 핍박을 받으면서도 나라를 붙들고 나왔고 서러움을 받으면서도 나라를 붙들고 나왔사옵니다. 통일교회는 위신과 체면을 생각하지 않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나왔습니다. 나라가 손상을 입고 상처를 입을까봐 수치와 체면을 버리고 나온 것은 이 민족과 하늘의 위신을 대신할 수 있는 하나의 국가를 바라보고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까?

저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여, 저희들이 체면을 세우는 것도 당신의 수고의 공적으로 말미암은 것이옵니다. 당신의 아들딸이 결과가 비참하여 사탄에게 조롱을 받을까봐 염려되오니 당신이 여기에 같이하여 주시옵기를 바라고 있사옵니다.

저희들은 악한 자리가 아니라 선한 자리, 선한 자리가 못 되거든 선을 위하는 자리에 머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기에 오늘도 내일도 아버지를 향하여 달려가야 되겠습니다. 아버지를 향하여 승리의 그날을 위하여 눈물과 땀과 피를 흘리며 이 길을 가야 할 것이 저희들의 책임인 것을 알고있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들은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야겠습니다. 사랑 하여야 할 아버지를 진정 알아야 하겠습니다.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사랑하여야 할 아버지의 사정을 알아 가지고 주체와 대상이 하나될 수 있는 그 자리를 소원하는 것이 부자의 인연이 아니겠습니까?

언제 아버지께서 이 환경에서 마음놓고 저희를 사랑해 보셨습니까? 온세계가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 딸 앞에 머리숙여 '존귀 찬양을 홀로 받으시옵소서' 하는 충성을 받으신 때가 언제 있었습니까? 기껏해야 한 집안, 한 교단밖에 없었던 불쌍한 아버지임을 저희들은 알고 있습니다.

이것을 민족과 국가와 세계까지 넓혀 드려야 할 것이 저희의 책임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희들에게는 죽더라도 세계를 향하여 가야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어려운 수난길을 가더라도 세계를 아버지의 안식의 터전으로 마련하여 드려야 할 저희들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온갖 정성과 온갖 수고를 기울여 충효의 도리를 다하여야 할 저희 타락한 후손인 것을 알고, 이 길을 가는 데 있어서 지치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강하고 담대하여 하늘 뜻을 붙들고 정성을 다하고 충절을 남기는 하늘의 아들딸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저희 손목을 붙들고 내가 가는 길을 같이 가자고 권고하고 사정을 할 수 있는 아들이 못 된 것이 한이었고, 딸이 되지 못 한 것이 한이었습니다. 당신의 손길을 뿌리침으로써 하늘을 눈물 흘리게 한 후손 이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다는, 이런 비통한 사연을 남기는 아들딸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과거에는 그랬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는 아들딸, 대견하다고 칭찬받을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겠다고 스스로 몸부림치는 자녀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오늘 2월 마지막 날을 맞이하였으니, 내일이면 삼일절을 맞이합니다. 3월이 오면 만물이 소생하는, 꽃 피는 봄을 맞이하게 되옵니다. 71년도는 저희 통일가가 소생의 한때를 맞이할 수 있는 축복의 한때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통일가의 봄날을 맞이할 수 있는 때가 되어야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수난노정을 넘을 수 있는 생명의 씨를 갖지 않으면 안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희들이 그럴 수 있는 자리에 서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내일을 맞이해야만 되겠습니다. 과거를 맞지 못한 한을 가지는 것보다 내일을 맞이하지 못할까봐 두려워해야 되겠습니다. 과거를 청산하지 못한채 내일을 맞을까봐 두려워해야 되겠습니다. 이제 내일을 맞이하는 길이 어떻다는 것을 알았사오니 여기에 강하고 담대한 마음을 갖게 해주시고, 모험이 필요하면 모험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시옵소서.

자기의 생명까지 내놓겠다는 결의를 해야 할 때는 결의를 할 수 있게끔, 아버지, 힘을 주시옵소서. 스스로 생의 승리의 업적을 남길 수 있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남한에 널려 있는 당신의 아들딸들 위에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하늘이 그리워 찾아오는 노정 위에도 영광이 깃들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자비와 사랑의 손길로써 당신의 자녀를 품고 위로해 주시는 하나의 은사의 터전이 오늘 이 안식일에 머물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일본에 있는 당신의 식구들과 한국에 있는 당신의 식구들이 하나되어야 하겠습니다. 아시아를 움직일 수 있는 통일의 역군이 되고 아시아의 새로운 기치를 드높여 하늘땅 앞에 신의 대열을 만들고 인류애에 넘쳐나는 새로운 사상으로 봉화를 들고 나설 수 있는 거룩한 움직임이 온 만민 앞에 드러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보고 원하옵니다.

세계에 널려 있는 통일의 자녀들을 축복하여 주시옵고, 가냘픈 그 모습 들이 씨가 되고 뿌리가 되어서 싹이 트고 나무로 자라나 세계를 덮고 남을 수 있는 그날까지 온갖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게 하시고, 하늘을 위할 수 있는 아들딸들이 되게 하시옵소서. 필승의 권(圈)을 이룩하여 세계와 더불어 찬양할 때까지 남아지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내일을 맞이할 수 있게끔 모든 생활을 정비하고, 주체와 대상 관계의 인연을 생활권에서 스스로 포섭하고 스스로 소화해 나갈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옵니다. 모든 말씀 참부모님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니다. 아멘.

[기 도]

아버님, 오늘은 1971년 3월 1일, 이 나라 이 민족이 잊을 수 없는, 새로운 국가의 이념을 중심하여 봉기하였던, 기념할 수 있는 날인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또, 봄철이 시작되는 새로운 달을 맞게 되었사오니, 이 달을 온 만물이 소생할 수 있는, 새로운 약속 가운데 계승될수 있는 날들로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3월은 저희 교회가 부모의 날을 맞이하는 중요한 달이기도 하오니 이 달을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 새해를 맞이하여 벌써 두 달을 지내고 세 번째 맞는 달의 첫 날이오니 이 날을 기하여 당신의 무한하신 사랑과 긍휼과 정성이 삼천만 민족뿐만 아니라 전 세계 인류에게 길이길이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이 자녀들은 당신이 남기신 복귀의 노정을 기필코 가겠다고 다짐하고 새로이 결의하기 위하여 이 자리에 찾아왔사옵니다. 아버지 이 자리는 세계 40개국에 널려 있는 성지를 대표한 중앙 성지이오니, 이곳을 향하여 정성들이고 있는 당신의 수많은 자녀들 위에 아버지 복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이 시간, 이곳을 중심삼고 연결되어 있는 성지에서 당신을 향하여 기도하는 무리들이 있사오면 축복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영계와 육계가 서로 접할 수 있는, 세상에 없었던 한 기점을 저희들이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설정하게 된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이 자리는 인간들로써 되어진 자리가 아니라 배후에 억천만세의 한을 풀기 위한 아버지의 소원이 있어서 설정된 자리임을 생각하게 되옵니다. 아버지, 이 자리를 그리워하고 이 자리에서 아버지 앞에 축수하는 수많은 자녀들 위에 무한하신 당신의 사랑이 길이길이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 이 통일교단을 세우시고 수많은 수난의 역로를 거슬러 나오시면서 오늘날까지 이끌어 주심을 감사드리옵니다. 이 교단이 비단 저희 일대에서뿐만이 아니라 역사의 운명과 더불어 방향을 같이하고 행동을 같이하여야 될 공동적인 터전인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아버님의 염려하심이 얼마나 컸겠사옵고, 조상들의 염려함이 얼마나 컸겠사옵니까? 오늘 저희들의 정성도 커야 되겠습니다. 과거보다도 현재에 아버지께서 보실 때에 기뻐하실 수 있고, 자랑하실 수 있는 승리적 터전을 우리 일대에서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될 역사적인 사명과 책임이 저희들 앞에 놓여진 것을 저희들은 절감하여야 되겠습니다.

아버지, 1970년대를 중심삼고 당신께서 허락하실 수 있는 승리의 때가 우리의 목전에 다가오고 있습니다. 만반의 준비를 다 갖추어 수고하셨던 당신의 공적인 실적의 결과가 오늘날 보잘것없는 저희의 눈 앞에 저희의 생활권내에 접어 들어오고 있는 것을 보게 될 때에, 이 모든 영광된 결과는 당신의 수고와 피어린 투쟁의 결과로 말미암은 것들임을 저희들이 진정으로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아버지, 3월 초하루인 오늘로부터 이 한 달을 지켜 주셔야 되겠사옵니다. 이 달을 중심삼고 저희들이 해야 될 책임이 많사오니 지금 이 시간에도, 아버지여,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아카데미 하우스를 중심삼고 교수들이 모여 움직이는 것이 한낱 사람들로 말미암아 연결되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아버님의 뜻으로 연결되어 움직인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지금까지 복귀섭리 역사 과정에 있어서 뜻과 관계 없던 무리들이 오늘날 아버님을 중심삼고 모여들었다는 이 사실을 놓고 볼 때, 이 기간은 역사를 대표하여 찬양할 수 있는 중요한 기간이요, 중요한 계기인 것을 저희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와 같은 모임을 통하여 민족을 연결하고 교회를 연결하여 세계에 하나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함으로써, 이 모임이 당신이 경륜하시는 뜻 앞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하나의 기원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 땅에서 움직이는 전부가 땅으로 말미암아 인연되어진 것이 아니라 하늘로 말미암아 인연되어진 것임을 생각할 때, 이 모든 결과가 땅의 결과인 동시에 하늘의 수확의 결과로서 당신이 기뻐하실 수 있는 승리의 조건들이 되기를, 아버지여, 재삼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여기에 모인 당신의 자녀들이 적은 정성이나마 모아서 하늘의 승리의 한날을 고대하며 나오던 과거지사를 생각하게 될 때, 슬프고 피어린 곡절이 많았던 생활이었습니다. 그러한 과거를 저희가 가졌으면 현재에는 과거 이상의 충효의 도리를 아버지 앞에 다할 수 있는, 빛날 수 있는 한때를 가져야 된다는 것을 이 시간 새로이 느끼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은 역사의 한 토막을 세월과 더불어 흘러가 버리는 과거가 되게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지난날의 한 터전이 있으면, 그것이 오늘 현실적인 생활권내에 있어서 하나의 기대가 되고, 내일의 출발과 현실의 보람있는 가치를 설정하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기반이 되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스스로가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과거보다도 오늘이 중요하고 미래보다도 오늘이 중요하다는 것을 스스로 느낄 줄 아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어야겠습니다.

아버지, 이곳을 위하여 정성을 들이고, 혹은 서울을 위하여 아버지 앞에 축수하는 무리, 더 나아가 한국 땅을 위하여, 아시아를 위하여 세계에 널려 기도하는 무리들을 당신의 일률적인 사랑으로 품으시옵고, 남기신 복귀의 한계점을 돌파하고 나갈 때까지 안팎으로 격려하시어서, 최후에 승리의 면류관을 차지하여 아버지 앞에 소망을 드릴 수 있는 당신의 종족과 민족과 백성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아버지께서 보호해 주시는 가운데 새해의 두 달을 보냈습니다. 이제 세번째를 맞이하는 이 달 위에도 아버지께서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다가오는 4월은 이 나라에 있어서 중요한 행사를 치러야 할 달이고, 5월도 그러한 달이옵니다. 이제 6월까지 저희들이 싸워 나가는 데 있어서, 아버지의 뜻을 중심삼고 이 나라 이 민족을 아버지 앞에 접근시키는 데 있어서, 저희들이 하지 않으면 안 될 중요한 책임을 감당해 낼 수 있게 하여주시옵소서.

1972년도까지를 설정하고 나가는 이 길 앞에 있어서, 이때에 생명을 지니고 살고 있는 자신들의 가치 있는 생애를 자랑스럽게 여기면서 아버지 앞에 정성을 다할 줄 아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일선에 나가 싸우고 있는 당신의 사랑하는 딸들을, 아버지,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이들 중에 정성들이고 서울을 바라보며 아버지 앞에 눈물 흘리는 이들이 있사옵거든, 천배 만배 복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한걸음 한걸음 옮길 때마다 외로운 길을 더듬고 과거를 회상하면서, 때에 대한 절박감을 느끼면서 아버지를 위하여 효성의 도리를 다하고자 하는 딸이 있거든 그들의 모든 행로를, 그들의 모든 생활권내를 당신의 직접적인 권한과 생명의 은사로 덮어 주시옵고, 보호하여 주시옵고, 이끌어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이제 이 한국을 지켜 주셔야 되겠습니다. 어려운 정세에 휘말려 들어가고 있는 이 나라 이 민족을 지켜 주셔야 되겠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이 나라를 사랑하사 크나큰 섭리의 뜻 가운데 세우신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불쌍한 역사를 엮어 온 이 민족을, 아버지, 지켜 주시옵소서. 부디 당신의 사랑과 당신의 소망 앞에 어긋나지 않게끔, 아버지, 이끌어 주시옵소서.

언제나 아버지 앞에 불충하고 책임 다하지 못하는 인간들인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하오나 이 민족 위에 당신의 사랑이 다시 한 번 머무시옵고, 이 민족의 과거의 잘못을 저희들을 보시고 용납하여 주시옵고, 하늘을 중심삼고 이 나라의 장래를 지켜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사방이 아무리 험하고 어렵고 더럽다고 할지라도 당신이 지켜 주시는 데는 승리의 판도가 넓어진다는 것을 저희들이 확신해야 되겠습니다. 저희들은 아무리 어려운 환경에 부딪친다 하더라도 극복해 나가야 되겠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안 될 사명이 통일의 무리들에게 있다는 것을 저희들은 절감하여야 되겠습니다.

아버지, 이 한 달을 축복하여 주시옵고 이곳을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부디 저희들이 아버지의 나라와 아버지의 뜻 앞에 도움이 되고, 저희들로 말미암아 수많은 선조들의 한을 해원성사할 수 있는 승리의 때, 승리의 시대가 어서 오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여기에 참석한 당신의 자녀들을 굽어살펴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이와 같이 아버지 앞에 정성들이는 것은 영원히 영원히 남아질 수 있는 승리의 터전을 넓히기 위한 것이요, 하늘과 땅을 연결시키는 데에 있어서 중요한 사명을 하는 것임을 스스로 느끼게 하여 주시옵고, 귀하고 가치있는 것은 이러한 길을 거쳐야만 이루어지고 남겨진다는 것을 절감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런 정성의 결과로 말미암아 만민이 복을 받고 수많은 인종이 해방을 받을 수 있는 승리의 터전이 마련되는 것은 물론이요, 자신의 직계 후손들까지도 복을 받는 것을 아옵니다.

저희들이 후대를 위하여 선조로서의 책임을 다하고 선한 조상들의 기반을 자신들로 말미암아 설정하겠다고 정성들이는 모든 간구와 노력이 아버지의 마음과 뜻과 이 방향에 일치될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이 한 달을 아버지께서 맡으시어서 친히 주도, 주관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영계에 있는 수많은 선조들, 땅 위에 있는 선한 후손들을 통하여 해원성사하고 예수를 위주로 한 12사도, 지금까지 왔다 갔던 수많은 조상들이 땅을 중심삼고 기독교를 복귀하는 데 중요한 책임을 할 수 있게끔 동원시켜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니다. 만민이 당신을 위하여 무릎을 꿇고 축수하면서 순응할 수 있는 거룩한 마음, 선한 마음을 갖게, 그런 마음이 본심으로부터 우러나오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전체를 당신이 맡아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참부모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사옵니다. 아멘.

말 씀

여러분이 알다시피 오늘은 3·1절입니다. 지금으로부터 55년전 이 날, 이 민족이 잊을 수 없는 일제의 탄압 가운데서 새로운 해방, 혹은 광복을 추구하기 위해 봉기했던 날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핍박과 고난이라는 것이 문명으로 보게 되면 그 당대에는 슬픈 것이고 비참한 것이지만, 그 핍박과 고난을 극복해내는 어떤 기점을 마련하게 될 때는, 극복한 모든 내용과 결과가 그 민족과 그 역사시대에 반드시 반응을 일으킬 수 있는 어떤 힘의 모체가 될 수 있고, 혹은 추모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에 받은 핍박과 고난으로 말미암아 그 민족이 그 당시 이상의 민족이 될 수 있는 기원이 설정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역사상에 있었던 사건들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3·1정신

이와 같이 생각할 때 3·1운동은 우리 민족에 있어서 참으로 잊을 수 없는, 정신적인, 혹은 이 민족이 새로운 이상의 나라를 향하여 전진하고 새로이 출발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3·1운동과 마찬가지로 복귀섭리 도상에 있어서도 하늘을 중심삼고 거국적으로 봉기했던 일이 역사상에 있었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그런 일이 없었던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기독교 역사를 두고 보더라도 기독교가 언제나 몰리고 쫓기는 입장에 섰지만 사탄국가를 전복시키기 위해서 그 전체가 동원된, 기독교 역사상에 있어서 찬양할 수 있는 때가 많지 않았던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 교회는 앞으로 하나님의 복귀섭리의 뜻을 중심삼고 세계의 수많은 국가 앞에, 혹은 하나님의 섭리의 전체 뜻 앞에 3.1운동과 같은 중요한 사명을 감당해야 할 책임이 있지 않나 하는 것을 느껴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금후의 통일교회가 가야 할 길에는 반드시 투쟁과 극복이 남아 있는 것을 우리는 다시 한 번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현재 우리 나라는 남북으로 갈라져 있습니다. 이 삼팔선이라는 경계선이 금후에 있어서 우리 민족이 가야 할 길 앞에 장애물로 가로막혀 있는 것을 생각할 때, 이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을 타개해야 하는데 해방 이후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왔던 태도와 생활방법 가지고는 이것을 타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시일이 지나감에 따라 북괴는 강력한 군사적인 시설을 갖추어 가지고 남한을 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실정에서 우리가 보다 강력한 정신적인 결합과 보다 강력한 투지를 갖추지 않으면 어려운 국운을 타개해 나갈 수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우리 민족만 소망해 가지고는 이 삼팔선이 해결될 수 없는 것입니다. 강력한 공산주의 사상으로 정신무장이 되어 이념화된 체제 밑에서 단결된 공산국가와 대결하고 있는 우리 한국은 그들 이상의 정신적인 단합과 정신적인 결합할 수 있는 내용을 갖추지 않고는 그들을 밀어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국이 단독적으로 대항해 가지고는 이것을 극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 민족이 대한민국 단독적인 입장에 있을 것이 아니라, 이 대한민국을 아시아 제국과 세계와 어떻게 연결시키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런데 지금 민주주의를 주도하고 있는 미국이 한국에서 후퇴하고 있는 시점인 것을 생각할 때, 우리 대한민국은 현재 긴박한 실정에 처해 있는 것을 생각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이 민족을 지키겠다는 자세를 가지고, 혹은 새로운 민족정기를 계발하고 새로운 터전을 마련해서 앞으로 더 큰 역량을 보강 보충할 수 있는 길을 걷겠다는 단체가 있다면 우리 교회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 통일교회 식구들은 일치단결해서…. 크나큰 위기면 위기요 시련이면 시련인데, 이 시련에 대해 우리가 후퇴할 것이냐, 투쟁 해서 극복해 낼 것이냐하는 문제를 놓고 볼 때, 우리는 금후의 섭리의 뜻과 보조를 맞추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보조를 맞추어 나가지 않으면 안될 중차대한 사명이 우리 자신들에게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3·1절을 맞이하는 의미를 깨닫고 반드시 이 난국을 극복 해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이 난국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극복할 수 있는 정신적인 자세가 밑바침이 되어 가지고 앞으로 어떠한 시련이 다가온다 하더라도 능히 극복할 수 있다는 신념에 불타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어떤 개인 혼자서 시련을 극복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국가의 운명을 타개할 수 없는 것입니다. 혹은 대한민국 한 나라가 시련을 극복했다 하더라도 공산체제와 공산국가를 중심삼아 가지고 연결 되어 있는 이 배후를 우리가 능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일국을 중심삼아 가지고 아시아 제국과 연결시켜야만 될 공동적인 책임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한국과 일본, 그리고 아시아 제국이 중심적인 가치를 중심삼고 하나의 이념화된 체제를 갖추어 중공과 소련을 중심한 공산체제에 어떻게 대항하느냐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주도적인 책임을 할 수 있는 하나의 국가가 있어야 합니다.

현재 대한민국이 그러한 주도적인 입장에 섰다고 한다면, 내적인 역량 이라든가 외적인 역량에 있어서 북한보다 강력한 힘을 갖고 북한이 손을댈 수 없는 공고한 터전을 갖추어 가지고 삼천만 국민이 북한을 막기 위한 정신적인 자세를 갖추어 일치단결했다고 한다면, 여기에서부터 새로운 동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현재 대한민국의 실정을 볼 때, 우리들의 책임이 얼마나 크고 무겁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1970년대에 통일교회에 맡겨진 책임

우리들이 투쟁이라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시련을 극복해 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말만 가지고 안 되는 거예요. 반드시 행동으로 극복하라는 겁니다. 극복했다 할진대는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승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투쟁 과정을 거쳐야 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극복하는 데 있어서 여러분이 언제나 생각해야 될 것은 정지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안일한 자리에서는 극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모든 정력을 그 하나의 목표를 위해 투입해야 됩니다. 천 사람이 있으면 그 천 사람 개개인의 목적이 달라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 한민족의 난국을 타개하고 극복해 내기 위해서는, 전체가 하나의 표준을 중심삼고 전역량을 하나의 목표를 위해 투입할 수 있는 정신적 자세를 갖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다가올 어려움을 능가할 수 있는 힘의 기준을 갖지 않고는 극복해 낼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1971년도와 1972년도가, 이 2년이 얼마나 중요한 기간이라는 것을 우리 들은 알아야 합니다.

1960년대에는 새로운 출발을 하는 도상에서 교단적인 많은 어려움을 겪고 나왔지만, 1970년대에는 국가적인 시련을 중심삼고 그보다도 더 극복해 나가야 할 때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1960년대의 10년 기간에는 우리가 교단적인 시련 극복이라는 문제를 중심삼고 투쟁해 가지고 극복해 냈다는 결과의 자리에 섰습니다. 극복하고 나면 반드시 승리의 환경이 허락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승리의 환경이 허락되었다고 해서, 교단적인 토대의 승리를 가져왔다고 해서 교단 자체가 안일하게 쉬는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국가적으로 더 큰 국면의 극복해야 할 무대가 접어들어오게 될 때는 교단적인 승리의 자리에 안일하게 있어 가지고는 이것을 극복해 낼 수 없는 것입니다. 교단을 넘어 범위를 넓혀 가지고 새로이 국가적인 체제를 중심삼고 우리가 갖추어 나가야 할 사명이 있는 연고로, 70년대는 60년대 이상의 시련을 극복해 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 때가 왔기 때문에 여러분이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우리 통일교회의 가정주부들이 전국에 동원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면 보기에는 미미한 것 같지만 1년 2년 지나 이 움직임의 배후에서 여러분이 보조를 맞추게 되면, 지금까지 우리가 관계되어 있는 그 모든 터전은 반드시 반응을 일으키게 될 것입니다. 반응을 일으키는 그 환경, 즉 이 나라가 가야 할 길은 우리와 같은 행동과 요소를 갖추어 가는 길입니다. 그런 길을 가지 않고는 살 수 없다는 것을 거국적으로 전국민이 느낄 수 있는 때가 반드시 오리라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후방에 있는 여러분은 일선에 나가 있는 아녀자들과 일치단결해야 되겠습니다. 그 사람들과 우리는 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자 우리, 우리이자 그 사람들이 되어 서로 호흡을 맞추어 공동 보조를 취해 가지고 이 국가적인 난국을 극복해 내지 않으면 안 될 중요한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1970년대에 우리 교회에 맡겨진 책임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그 책임을 한다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어제 일본 구보끼 협회장이 왔다 갔는데 내가 그에게 이런 내용을 중심삼고 지시했습니다. '대한민국이 현재 대치하고 있는 이북이면 이북, 김일성이면 김일성이가 대한민국만의 원수가 아니다. 일본의 원수임과 동시에 아시아의 원수요, 세계의 원수인 것이다. 이러한 것을 알고, 섭리적인 책임을 지고 있는 우리들이 안팎으로 일치단결해야 하며, 거국적으로 일본 민족을 동원해야 하는 것이다. 그 일본 자체를 동원하는 것은 물론이요. 점차적으로 아시아를 동원해 가지고 아시아 제국이 한국과 연결될 수 있도록 하는 활동체제를 갖추어야 한다' 이런 것을 지시한 바가 있습니다.

앞으로 한국이 살 수 있는 길은…. 금후에 일본과 아시아 국가들을 한국과 어떻게 연결시키느냐 하는 문제가 한국이 살아 나갈 수 있는 길과 한국이 현재의 체제를 극복해 낼 수 있는 중요한 계기를 결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일본이 현재 중공에 접근하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구보끼의 말에 의하면 일본의 아사히 신문사는 지금까지도 좌경화되어 있었지만 마이니찌 신문사나 요미우리 신문사와 같은 신문사들도 중국 북경에 특파원을 보내기 위해서 서로 경쟁하고 있다는 거예요. 전매스컴이 동원되어 이렇게 움직임으로 말미암아 거기에 관계되어 있는 수많은 언론기관과 관계를 갖고 보조를 맞추어 나가고 있는 수많은 경제인들이 여기에 휩쓸려 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이것은 우리에게는 절박한 정세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누가 일본의 저와 같은 움직임을 막아낼 수 있느냐? 일본 정부도 막아 내지 못합니다. 이것은 우리 통일교회 식구들이 아니면 막아낼 수 없다는 거예요. 선생님이 그런 것을 알기 때문에 일본 신도들에게 그러한 움직임을 막아 내는 활동을 하라고 지시를 내렸던 것입니다. 한국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안일한 생각을 버리라

한국은 여러분이 알다시피 반공국가로는 세계의 선두에 서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는 일본보다도 우위에 있습니다. 이러한 한국에서는 오늘날 우리가 반공의 선두에 서 있지만 국제승공연합을 중심삼고 거국적인 반공의 책임을 전면적인 입장에서 져야 할 단계에 와 있는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 있는 우리 자체내의 전체 식구들이 과연 반공에 대해 일원화되어 있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국제승공연합을 책임지고 있는, 직접 승공강의를 하는 사람들은 그런 면에 관심을 갖고 있지만 일반 식구 들은 관심이 희박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볼 때, 우리 체제를 대폭 재편성해 가지고 전체 식구들을 단련시키지 않으면 안 될 때가 되었다는 것을 재삼 느끼게 됩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국가를 중심삼고 1971년도와 1970년대에 새로운 국면을 타개하지 않으면 안 될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 환경을 극복해 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극복해 내야 되겠다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인간적인 것을 취해 나가서는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사상적으로 교체해 가지고 취해 나가야 되겠다는 거예요.

우리가 1970년도에 들어서면서부터 기성교회 목사들을 초빙하여 원리 공청회를 갖는 것이라든가 지금 교수들을 중심삼아 가지고 아카데미 하우스에서 원리 세미나를 여는 것은 이것이 1970년대에 있어서 국가적인 환경을 우리와 연결시켜 가지고 전면적인 방향을 타개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이런 작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 대학가를 위주로 하여 이런 작전을 강화시켜 나가야 됩니다. 그리고 앞으로 일본에 대한 사상무장도 우리가 책임지지 않으면 안 될 때가 곧 올 것이라는 것을 지금 예상하고 있습니다. 이런 입장에서 볼 때, 우리의 책임이 얼마나 귀중한가를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은 과거에 실행해 나오던 과정에서의 어려움이 지났다고 해서 안일한 환경을 바라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면 금후에 더 범위가 넓고 큰 상대적 여건을 우리가 타개하고 극복해 내기가 심히도 어렵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앞으로 다가오는 시련이 크면 클수록, 과거에 우리가 극복하지 못한 것까지도 극복해 내겠다는 신념을 갖추어야 함과 동시에 여기에는 많은 희생과 수난과 역경의 노정이 남아 있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 환경을 타개하고 극복했다 하게 되면, 그 극복은 대한민국적인 극복이 아니라 아시아적인 극복이 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 사상무장을 중심삼고 책임질 수 있는 입장에 서게 된다면 김일성은 반드시 놀랄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중공도 역시 문제가 될 것입니다. 따라서 한국과 일본과 중국을 어떻게 일원화된 사상체계로 만들어 나가느냐? 이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이런 문제를 중심삼고 볼 때, 국가적인 시련을 극복해 내지 않으면 안 될 사명이 통일교회에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지금은 정성의 도수를 가해야 할 때

뜻적으로 볼 때에 지금 이때는 지금으로부터 25년 전 해방 직후에, 우리가 뜻을 갖고 하늘의 사명을 짊어지고 나오던 그때에 하나님이 요구하시던 것을 이루어야 할 때입니다. 25년의 수난의 길을 거쳐 가지고 새로이 재봉춘하는 시기를 맞이한 거와 같은 무대를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국가적인 시련과정을 극복하여야 할 그때에 그 시련을 극복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이것이 25년이 지난 오늘에는 국가적인 것뿐만이 아니라, 아시아적인 시련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될, 극복할 양이 가중된 무대가 전개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맡겨진 뜻으로서, 우리 통일교회가 감당해야될 책임인데도 불구하고 만약 극복하지 못하게 될 때에는 어떻게 될 것이냐? 세계적인 극복의 노정이 남아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앞으로 복귀섭리의 뜻을 세워 나가야 할 통일의 무리가 얼마만큼의 핍박과 얼마만큼의 피의 대가와 희생의 대가를 치러야 될 것이냐 하는 것을 생각할 때, 이것은 우리가 소홀히 생각할 수 없는 중차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하나의 국가를 중심삼고 극복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아시아를 중심삼고 극복해야 할 재탕감노정이 남아지게 된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기서 만일 이 재탕감노정이 저끄러지게 되면, 즉 우리가 이러한 극복노정을 맞아 싸우는 데 있어서 이것을 극복해 내지 못하고 후퇴하는 입장에 서게 되면 아시아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시련을 극복해야 할 투쟁의 행로가 남아진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 한국의 정세를 보나 일본의 정세를 보나 힘의 기준에 있어서 우리가 아직까지 열세한 입장에 있습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하나님을 증심삼고 총동원하게 되면, 안팎으로 하나된 이 소수의 무리들이 이 단결된 힘을 중심삼고 하나님을 믿고 아시아의 제국가를 연결시켜 가지고, 대공전선을 강화시켜 극복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어 유지할 수 있는 기점만 마련하게 되면, 이것은 민주세계를 동원할 수 있는 계기가 되리라 믿고 있는 바입니다.

이런때인 것을 알고…. 여러분이 극복하지 않으면 안될 이 아시아적 책임을 섭리의 뜻과 더불어 감당해야 된다는 것을 생각할 때, 이것은 우리에게 막중한 책임이요, 벅찬 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약하고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은 소수의 무리이지만 때가 이런 때이므로 정성의 도수를 가하여야 되겠습니다. 정성의 도수를 가해야지, 스스로 안일한 생활 태도를 취해 가지고는 이것을 도저히 극복해 낼 수 없는 것입니다. 정성은 극을 꿰뚫는 자리에 서야 통하는 것입니다. 더우기 하늘의 섭리의 뜻이 발전하는 데 있어서는 역사과정에 흔히 있었던 정상적인 사건을 중심삼고 극복해 내던 그런 자리에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역사적인 사건을 초월할 수 있는 자리에서 극복해 내야만, 하나님이 밑받침이 되고 우리가 선두에 서서 하나님과 안팎으로 하나되어 가지고 움직이는 자리에 서야만 그 환경이 타개되는 것입니다.

만일에 어려운 문제에 부딪혀 가지고 약간의 희생이 있다 하더라도, 그 환경을 넘어갈 수 있는 정신적인 단합이 되어 있고 하늘이 여기에 개재되어 밀어 주게 되면, 그 제기된 문제와 환경은 다시 타개되는 것입니다. 시일의 차이는 있을는지 모르지만 반드시 하늘이 배후에서 협조하고, 하늘이 줌심이 되어 움직이게 되면 아무리 어려운 역사라도 타개하여 승리의 판도를 넓힐 수 있습니다. 그러한 역사를 하늘이 책임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이때야말로 국가적인 환경을 극복할 수 있는 때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국가적인 환경을 극복하는 데 있어서 누가 선두에 설 것이냐?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우리 통일교인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 자체만의 생각이 아닙니다. 원리연구회를 통해서 들었지만 대학교수들이 '금후의 한국에 있어서 희망을 안겨다 줄 수 있는 곳은 통일교회밖에 없다는 말들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듣게 될 때, 과연 우리의 책임이 얼마나 막중한가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통일교회에 모여든 수는 적지만, 그 내용은 역사적인 내용과 섭리적인 뜻을 갖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역사는 시대 앞에 점령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섭리의 뜻이라는 것도 그 어떤 시대 앞에 점령당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반드시 역사와 섭리는 그 시대를 움직여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 시대가 새로이 움직일 수 있는 대부흥의 터전을 마련해야 될 책임을 지고 있는 이상 그 책임을 반드시 완수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은 역사를 재현시키고, 섭리를 우리의 생활권내에 재현시켜야 됩니다. 그 재현된 역사와 섭리 앞에 현실적으로 부딪쳐 오는 모든 시련을 극복해 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것을 극복해 냈다 할 때는 인간이 방향성을 갖추어 찾아 나오던 역사적인 승리, 혹은 섭리적 승리뿐만이 아니라 역사와 섭리가 합한 이중의 승리의 결과로 나타날 것을 확실히 알고 일치단결하지 않으면 안 될 때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일선에 나가 있는 부인들과 하나되어야 합니다. 하나의 심정을 가지고 호흡을 맞추고 보조를 맞추어 가지 않으면 안될 때인 것을 알고 일치단결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제부터 내 나라와 내 민족은 우리가 지켜야 되겠습니다. 우리의 힘, 우리의 역량을 다 투입해서 들이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알고, 자기의 힘이 부족하면 하나님을 붙안고 결판지어야 할 때가 되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 민족의 시련을 극복하려면

그러면 여러분이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반드시 뜻을 사랑하든가 민족을 사랑하든가 해야 합니다. 그런 것을 느끼는데 있어서 안일하게 자리를 잡아 가지고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정상적인 환경에 처해 있는 그런 민족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생각을 한다면 비참한 민족이 됩니다. 지금은 비참하지 않지만, 금후에 비참한 민족이 될 것입니다. 불쌍한 민족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걸 잊어버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시야에 나타난 이 삼천만 민족의 군상을 바라볼 때, 지금 이민족의 가는 길은 빛나는 길이 아니라 반드시 앞에 함정이 있는 길이요, 헤어날 수 없는 비참한 운명을 품고 가는 걸음인 것을 바라볼 때, 여러분의 내심에 억제할 수 없는 사랑의 마음과 애국정신이 불타야 됩니다. 그러한 위험한 때가 되기 전에 우리가 가로막이가 되어 가지고, 이것에 대비 하여 극복할 수 있는 터전을 우리가 선두에 서서 마련하고 저들을 자극시킬 수 있는 기원을 만들어야 되겠다는 마음들이, 여러분의 생활 감정에 혹은 하루하루의 생활권내에서 솟구쳐야 될 것입니다.

또,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섭리를 중심삼고 볼 때, 하나님은 불쌍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수천년의 역사노정을 중심삼고 배후에서 섭리하여 기독교권 판도를 중심삼아 가지고 민주세계의 문화권을 형성해 나오셨지만, 거기에 있는 국가들 중에 하나님께서 자기의 사연을 통하고 자기의 주권을 회복하기 위해 대신 내세울 수 있는 국가가 있느냐 할 때 없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나라와 단체가 있지만 그런 내용을 중심삼고 봉기하거나 단결된 입장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바라는 단체라든가 국가가 있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그런 단체나 국가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국가는 없지만, 한 국가의 이념을 중심삼고, 혹은 한 나라의 터전을 중심삼고 하늘을 대신해 나가는 무리는 이 세계에 없지만, 우리 단체만이 전체를 책임진 입장에서 하나님 앞에 하나의 소망의 터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럴 수 있는 무리가 우리밖에 없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하나님이 얼마나 불쌍하신 분이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불쌍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섭리의 뜻을 받들어 나오기 위해 수고한 수많은 신앙자들도 불쌍하지만, 민족을 대신하고 세계를 대신해서 섭리의 뜻을 중심삼고 하나님의 불쌍함을 느꼈던 개인과 단체와 국가가 있었느냐? 억울하고 분한 하나님의 심정을 중심삼고, 혹은 뜻을 중심삼고 자기가 희생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알고서 극복해 내고 하나님의 해원성사를 위해 총궐기했던 민족이 어디에 있었으며, 주권이 어디 있었으며, 국가가 어디 있었느냐? 혹은 그런 종교 단체가 어디 있었느냐?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만이 그런 책임을 짊어졌다고 생각할 때, 아무것도 아닌 우리, 한줌밖에 안 되는 우리에게 이런 엄청난 기대를 걸고 계시는 하나님이 얼마나 불쌍하냐? 과연 하나님은 불쌍하신 분입니다.

세계 정세가 긴박해지고 인류가 가야 할 미래에 대한 희망이 사라진 절망상태에 부딪쳐 가지고 전후를 가리지 못하는 비참상을 바라볼 때, 이것을 책임지고 가려줘야 할 하나님께서 우리를 내세우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 된 것을 생각할 때, 하나님은 비참하고 불쌍한 분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느껴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끊임없이 불타야 되겠습니다. 내가 죽고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 당하는 시련 고통이 문제가 아닙니다. 한스럽고 불쌍한 하나님의 사연을 풀어 주고 불쌍한 이 민족에게 해방의 길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남아진 이 극복 도상을 당당히 걸어가야 합니다. 그런 투지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애국 애족의 사상과 애천사상, 하늘을 사랑하는 사상이 여러분의 마음 가운데에서 끊임없이 솟구쳐 나와야 됩니다. 그 솟구치는 힘이 강하면 강할수록 앞으로 마무리 어려운 시련이 다가온다고 하더라도 그 시련을 극복해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통일식구가 당면한 과제

여러분이 삼천리반도 어디를 가더라도 혹은 기차를 타고 어디를 여행할 지라도 시야에 나타나는 이 산야를 바라볼 때, 헐벗은 이 강토, 진정한 주인을 만나지 못한 이 강토, 박토화된 이 삼천리 강산을 불쌍히 여겨야 됩니다. 4천년, 5천년의 역사와 문화를 자랑하는 민족이 현재 갖추어 놓은 지방의 부락을 볼 때, 5천년 동안 우리 민족이 해 놓은 것이 이것뿐이냐?

우리가 이러한 현실을 보고도 아무런 감정 없이 흘러가 버리게 되면 우리 후손들도 우리를 대해서, 새로운 사상과 이념을 갖고 나왔던, 세계적인 복귀섭리의 뜻을 책임져야 할 사상을 들고 나왔던 선조들의 업적이 이것뿐이냐고 할 것이 아니냐? 우리는 후대에 그러한 비참한 비판의 요건을 남겨서는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생각해 볼 때, 70년대는 우리 통일교회가 국가적인 무대를 중심삼고 극복해야 될 시대이기 때문에, 비장한 마음을 가지고 행동을 개시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알았기 때문에 70년대를 맞으면서 여러분들의 아내들을 임지에 동원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밥을 먹더라도 나라를 위해서 먹어야 되겠고, 교회를 가더라도 나라를 위해서 가야 되겠고, 직장에 가더라도 그 직장을 위해서 일한다는 마음보다도 온 통일교회 식구들이 일원화되고 일체화된 마음을 가지고 국가의 모든 시련 무대를 극복해 나가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일해야 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라의 비참함을 느낄 줄 알고, 하나님의 비참함을 느낄 줄 알아야 합니다. 내가 힘이 없거든 나라를 위해서 하나의 봉화가 되고 깃발이 되어 때라도 알릴 수 있는 하나의 모습으로서 나타날 것을 결의하는 여러분이 된다 할진대, 하나님은 기필코 여러분을 통해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것입니다.

오늘날 통일교회가 개인 종족 민족 국가에까지 그 한계를 넓혀 가지고 민족을 대신하고 국가를 대신하여 난국을 극복하는 책임을 담당하는 입장에 섰다는 것은, 우리 교회에 있어서는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것으로 말미암아 어떤 국가나 어떤 민족도 들어갈 수 없었던 하늘의 특권적인 혜택권이요 은사권내에 오늘날 우리 교회가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새로운 긍지를 느낄 수 있는 일이요, 우리의 만세대의 후손들이 칭찬할 수 있고 만민이 추앙할 수 있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역사이래 단 한번 허락된 특권적인 혜택권내에 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이때를 우리가 놓칠소냐 ! 아무리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지는 희생의 운명길이 가해 오더라도 우리는 이것을 격파해야 되겠습니다. 그러나 정상적인 환경에서는 이것을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안일한 환경에서는 발전의 계기를 마련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지금까지 우리가 걸어온 과거지사를 회상하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과거는 지나가 버린 시대입니다. 금일에 있어서의 금후를 생각하면서 국가와 민족을 중심삼고 극복할 수 있는 한계를 넓혀야 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동지가 필요하고 식구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발판을 확대시켜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렇든지, 내적 외적인 기반을 확보할 때까지 비록 남에게 욕을 먹더라도 그것을 당연한 운명으로 알고, 당연한 일로, 팔자로 알고, 우리가 가야 할 정상적인 길로 알고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반대받고 몰리는 자리에서 억울함을 당하면 억울함을 당하는 그것으로 소화시키고 넘어갈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해 뼛골에 사무치는 잊을 수 없는 한을 가지고 이것을 극복해 낼 수 있는 동기의 힘을 유발하는 원동력으로 삼고, 극복을 위한 자극제로 삼아서 추진시킬 수 있는 추진력으로 전환시켜 나가야 할 것이 오늘 우리 통일식구가 해야 할일인 것을 알아야 됩니다.

시련을 극복하려면 실천과정을 거쳐야 돼

이 나라를 중심삼은 비참한 상황을 신문지상이나 소문을 통해서 알게 될 때, 그것을 겉귀로 들어 버리고 회피할 것이 아니라 이것을 내 손을 통하고 우리의 힘을 통해서 바꿔 놓아야 되겠습니다. 나라가 하지 못하는 일을 우리가 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일을 지금까지 해 나왔습니다. 일본이면 일본을 대해서 대한민국 정부가 하지 못하는 일을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것은 일본에서는 오늘부터 승공운동을 중심삼아 가지고 낮에는 전식구들이 동원되어 거국적인 활동을 시작할 것입니다. 또 밤에는 전국적으로 부흥회를 개최하게 될 것입니다. 전국 순회 부흥단에 의해 한 달에 한 번씩 부흥회를 할 것입니다. 또한 지구장 전원에게는 식구들의 원리실력과 신앙심을 향상시키기 위해 식구들을 이끌고 나가서 곳곳에 배치시켜 가지고, 지구장이 직접 선두에 서서 여섯시면 여섯시부터 일곱시 반까지 한시간 반 동안 전도해 가지고, 그 전도한 사람들을 한 장소에 집합시켜 놓고 강의를 하게끔 하라고 지시를 내렸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아시아 승공대회를 개최할 것입니다. 일본에 있는 화교와 한국 교포를 연결시켜 가지고, 또 일본에 와 있는 아시아 제국의 대사관을 중심삼고, 또 아시아 제국에서 일본에 유학 온 수많은 유학생들을 동원하여 이 대회에 참석시켜 가지고 아시아에서 승공연합의 기반을 닦게 할 것입니다. 특히 유학생들은 졸업 후에 본국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일본에서 이들을 교육시켜 가지고 아시아에 우리의 거점을 연결지을 계획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대회를 1차, 2차, 3차까지 계속한다면 그 기반이 닦아지리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지시를 했습니다.

한국 정부나 일본 정부가 하지 못하는 것을 우리가 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기에는 모험이 전개될 것입니다. 작년에 있었던 와클(WACL)대회를 중심삼고 볼 때, 그때 우리의 능력으로는 3천만 원 이상의 자금을 투입할 수 없는 실정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3억에 가까운 돈을 모금해 냄으로써 그야말로 20세기의 기적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금년에도 그와 같은 활동을 전개해서 거국적인 활동을 강화해 나가야 되겠습니다.

북괴가 우리 대한민국을 노리고 있는 이 국제적인, 아시아적인 정세에 우리가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여기에 브레이크를 걸 수 있는 하나의 배후적인 터전을 마련하는 것을 표준으로 하고 우리가 움직여 나가는 것을 여러분이 확실히 알고, 여기에 있는 정성을 다해 가지고 한국은 한국대로 그들 앞에 힘이 되어야지 그들에게 짐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여러분은 나라를 사랑하고 하나님의 섭리를 사랑하는 심정을 가지고 국가적인 문제를 극복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총동원해야 되겠습니다. 알겠지요?「예」

3윌 초하루, 이 민족이 봉기했던 이 날을 기념해 가지고 우리도 거국적으로 터전을 넓혀 국가적인 무대를 중심삼고 극복해 나가야 되겠습니다. 앞으로는 1군 2군까지도 접선되리라 보고 있습니다. 최창림이 왔나? 창림이는 조금 있다가 여기에 대해서 얘기 좀 하라구. 여러분은 그렇게 알고 극복해 내야 되겠습니다. 극복해야 되겠습니다. 극복은 실천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새로이 결의를 하고 출발해 주기를 바랍니다.

​기 도

​아버님, 저희에게 맡겨진 이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힘과 역량을 북돋우어 주시옵소서. 이 민족의 장래를 위하고 현재의 입장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저희들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상하 전후 좌우로 느낄 수 있는 때가 된 것을 감사드립니다. 이날이 오기를 저희들이 기다렸사옵니다. 저희들이 고대하던 때가왔습니다. 여기에 있어서 단 한 가지 문제는…. 이제야 저희들은 인재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실히 느끼게 됩니다.

아버지, 그동안 저희들 각자는 수련하고 연마하지 못한 것을 탄식하면서, 바쁜 이 시대 앞에 이중 삼중으로 겹쳐지는 저희들의 모든 책임을 우리가 안고 추지 않으면 안 될 당면과업으로 알고, 저희들은 밤낮을 쉬지 않고 총궐기해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통일의 시대가 저희 목전에 다가오게 하여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이제 이달부터 저희들이 새로이 출발할 수 있는 계기를 아버지께서 마련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은 쉬지 않고 바쁘게 움직여야 되겠습니다. 밤이나 낮이나 저희들은 노력해야 되겠습니다.

아버지, 저희들이 일상 생활권내에서 가는 도상에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모든 전체가 합동하여 당신께서 바라시는 통일의 뜻 앞에 보탬이 되고 승리의 기대가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재삼 부탁드리옵니다. 이 한 달도 아버지께서 맡아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을 참부모님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이번에 돌아가면 서울에 왔었던 교수들을 중심삼고 원리연구회를 빨리 강화시켜야 되겠습니다. 다음번에는 총장이나 차장 이상만 초대하려고 합니다. 될 수 있으면 지역사회에서 한번 해보도록 하십시오. 부산에서 한번 시도해 보세요.

​효과적인 전도 방법

​앞으로는 전도밖에 할 것이 없습니다. 전도대원(傳道隊員)들을 중심삼고 한 1년만 활동하면 교인들이 상당히 늘어나리라고 봅니다. 그러면 그들 가운데 처녀들은 처녀들끼리, 총각들은 총각들끼리 10명씩 팀을 짜서 부흥단을 만들어 전국에 배치해야겠습니다.

지금 활동하고 있는 전도대원 부인들은 2년만 지나면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부터 그 자리를 계승할 사람들을 준비해 놓아야 겠습니다. 그리고 각 교회는 부인대원들이 돌아갔다고 해서 그냥 있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언제든지 고정적으로 열 사람을 정주시켜서 전도활동을 시켜야 됩니다. 그러면 자연적으로 식구들이 불어날 것입니다. 식구를 늘리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습니다.

기동대원을 중심삼고 활동을 하면 비용도 얼마 안 들어가고 언제든지 활동하게 할 수 있습니다. 백명만 넘으면 상당히 쉬운 것입니다. 앞으로 그런 준비를 해야겠습니다. 본부도 그렇게 해야겠습니다. 지구장들은 대원들을 관리하고 식구들 가정을 순회하면서 식구들에게 전도를 시켜야 합니다. 식구들간에 중간 연락을 취하면서 이런 활동을 하게 하면 완전히 이중 효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기성교회에는 장로제도, 집사제도, 구역제도가 있습니다. 그리고 전도부 인들이 있어서 서로 관계를 맺어 순회를 하면서 전도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언제든지 한 목사의 계획을 밑에서 밀어 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에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오면 그저 원리강의나 해주는데, 그래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세부조직까지 만들어서 중앙에서부터 그 세부요원들까지 모두 관리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새 식구들이 교회에 들어와도 교회 내용을 모르면 활동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들을 납득시키기 위해서는 개인적으로 직접 대하는 시간을 많이 가져야 됩니다. 책임자들이 그런 일을 못 하니까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기동대원이 열 사람이면 열 사람이 전부 다 새로 나온 사람이 누구라는 연락을 받아 가지고 대번에 찾아가서 그 사람을 중심삼고 그 친척까지 연결짓는 것이 전도하는 데 제일 빠른 길입니다. 노방에서 전도하거나 개인 개인을 만나서 전도하는 것보다도 친척관계나 친구관계 등 연줄을 통해서 전도하는 것이 제일 빠르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왜냐? 친구관계이니만큼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란 것을 잘 압니다. 그러므로 '저 사람이 가는 곳이라면 틀림없을 것이다' 하면서 백퍼센트 믿고 따라온다는 것입니다. 서로 위하고 서로 신임하는 처지이니까 자기를 나쁜 곳으로 인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개별적으로 나가서 전도를 하면 좀 다릅니다. 아무리 통일교인 이라고 해서 전부 믿을 수 있어요? 믿을 수 없거든요. 원리 말씀을 듣고 말씀이 좋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믿고 따라오기까지는 1년 6개윌 이상의 시간이 소모되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만나서 한 사람과 인간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3개월 이상이 걸립니다. 자주 그의 집을 방문하여 신앙을 키워 준 연후에야 비로소 진리도 좋고 사람도 좋으니 한번 움직여 보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친구지간이나 친척지간에는 이미 인연이 맺어져 있기 때문에 강의만 해주면 금방 식구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친척이나 친구를 중심삼고 전도하는 것이 제일 빠르다는 것입니다.

일 1인 전도

그렇다면 전도대원들은 어떻게 전도를 해야 되느냐? 매일같이 무작정 돌아다닐 것이 아니라 백 집을 돌았으면 그중에서 열 집을 고르고 그 가운데서 다시 한 집을 골라서 집중적으로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한 달에 한 사람 전도하는 것을 목표로 움직여 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한 달 동안에 한 사람을 전도했다면, 그 사람이 한 달 동안 정성들이며 수고 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 한 사람이 전도되었으면 그 다음에는 전도된 그 사람에게 '너도 너희 친척들에게 내가 너에게 한것처럼 정성을 들여 가지고 전도를 하라'고 해야 합니다. 그런 전통을 세워 놓고 지도하면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 달에 한 사람씩을 전도하는 일률적인 방법으로 나가게 되면, 한 사람에서부터 그 다음 사람으로 이어지는 횡적인 전도가 벌어져 식구들이 무한정 늘어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부모가 모두 교회를 나오지 않다가 아버지가 나오게 되면 어머니는 자동적으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부모가 나오게 되면 자식들은 자연적으로 따라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또, 어머니가 우리의 사상으로 신념이 서 있으면 친척 친지들은 자연적으로 전도가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중심적인 기반을 확대시켜 나가면서 전도하는 것이 제일 빠른 방법인 것입니다.

지금 나가 있는 전도대원들은 무작정 돌아다녀서는 안 됩니다. 한 달 동안에 세 집을 정해 놓고 그 세 집만 중점적으로 방문하여 말씀을 전한다면 그 가운데 한 사람은 전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는 백 집 가운데 세집을 표준으로 뽑아서 방문하는 것입니다. 매일 갈 수 없으면 다른 집을 돌아다니다가 돌아올 적에는 꼭 그 집을 들려 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정성을 들이면 여러분이 안 가면 기다려지고 보고 싶어지는 그런 심정적인 유대관계가 맺어질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최초의 한 사람이 문제입니다. 그 한 사람을 두고 3년간 최고의 정성을 들여 보라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그 사람이 전도되면 세 배 이상의 결실이 거두어질 것입니다.

정성이란 한꺼번에 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설교할 때에도 대중을 앞에 놓고 설교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한 사람을 놓고 설교한다고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은혜를 받아 눈물을 흘리면 그것이 전체로 퍼져 나가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지구장이나 지역장들이 교회를 발전시키지 못한 이유는 뿌리도 없이 공중에 떠 있는 설교를 했기 때문입니다. 흡수될 수 있는 터전이 없으니 전도가 될 게 뭡니까? 지구장 자신도 자기의 발판은 자기가 닦아야 되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어떤 지시를 했을 때 지구장들이 생명을 걸고 움직이는 본을 보여야 일반식구들도 움직이는 것입니다.

한 달을 중심삼고 전도하게 될 때, 한 달 동안 백 사람을 대하더라도 그 가운데 어떤 사람을 통해서 수확의 결실을 맺을 것이냐? 한 사람을 정해 놓고 정성을 들여서 결실을 맺어 놓아야 합니다. 그래야 다른 아흔 아홉 사람이 다 떨어진다 하더라도 그 달 전도한 조건을 세울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작전을 세워 놓고 전도해야지 한 달에 한 명도 전도하지 못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밥만 먹으면 전도를 해야 되는 책임자들이 한 달에 한 사람도 전도하지 못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정성을 안 들였기 때문입니다.

전도대원들이 어느 지역을 동서남북으로 갈라서 가정 심방활동을 하는데 있어서 다 돌아다녔다고 해서 그 활동이 끝났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서로 지역을 바꾸어서 또 돌아보라는 거예요. 사람마다 성격이 다르고 배경이 다르고 선조가 다르고 현재의 자기 심정이 다르기 때문에, 갑이라는 사람이 그 집에 가서 배척받았다고 해서 을이라는 사람이 배척받으라는 법은 없습니다. 갑은 배척받았어도 을은 가서 환영받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지구장들이 와서 하는 말들이 이제는 전도할 곳이 없다고 하는데,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전도할 곳이 없다는 것은 전도하는 작전을 잘못 세웠다는 것입니다.

조별로 다 돌았으면 그 다음에는 개인별로 읍이면 읍 전체를 돌게 해야 합니다. 세 번 이상 돌게 되면 대충 읍민들의 사정을 파악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일 주일만에 찾아갈 사람, 한 달만에 찾아갈 사람, 석달만에 찾아갈 사람, 혹은 여섯 달만에 찾아갈 사람으로 분류를 해서 장기적인 전도계획을 세우라는 것입니다. 단번에 되지 않는다고 낙망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방식으로 한다면 왜 찾아갈 곳이 없겠습니까?

평소에 사람들을 잘 파악해 둬야 합니다. 매일 심방해야 할 사람, 일주 일만에 찾아가야 할 사람, 두 달 후에 찾아가야 할 사람, 혹은 쓱 지나가다가 목마를 때 물이나 한 모금 얻어 먹으러 찾아갈 사람 등, 천태만상의 사람들을 형태별로 분류해서 설렁설렁 기분을 돋구어 가며 전도를 해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스무 사람 가운데 열 사람을 추리고, 또 그 열 사람 가운데 세 사람을 추려서 결실을 맺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면 왜 전도가 안되겠습니까? 자기가 전도할 사람을 놓고 아침 저녁으로 정성을 들이면 자연히 끌려오게 되어 있습니다. 전도를 나갔다가 들어와서도 기도하면 선조가 걸려들어도 걸려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영계의 헙조

우리는 이러한 입체적인 배경을 활용하여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작전을 구사해 가면서 싸움을 해야 됩니다. 전투가 벌어지면 함포사격도 해야 되고 소총사격도 해야 되고 엄호사격도 해야 되듯이 전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입체적인 영계를 배경으로 하여 선조가 동원되는 영적인 분위기 가운데 전도를 해 나가면 얼마나 재미있겠습니까?

한꺼번에 열 사람씩 전도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한 사람 한 사람씩 전도할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그리하여 전도된 그 사람을 통하여 그의 친구까지 끌어들이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그 친구에게는 원리강의만 해주고 그 다음에는 전도한 친구가 맡아 지도하는 것입니다. 식구를 길러 보아야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자기가 하던 일들을 세부적으로 분담시켜 그 책임권을 확대시켜 나가면 자연히 식구가 많아지게 됩니다. 그런데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솔방울처럼 우리 식구들이 그냥 그대로 있다면 거기서 무슨 잎이 나오고 뿌리가 나오겠습니까?

선생님이 평양에 있을 때 사탄의 역사가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그러한 가운데에서도 선생님은 식구를 위해 정성을 들였습니다. 아침에 어떤 식구를 위해 기도를 하고 그 식구가 오는지 안 오는지 기다려 보면 틀림없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신령한 가운데에서 기도를 해보면 기도가 얼마만큼 가치가 있고 얼마만큼 효과를 나타내는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 일을 해도 재미가 있고 하나님이 같이한다는 신념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혜를 주어도 홀딱홀딱 까먹기를 세 번만 거듭하면 하나님도 그 사람에게서 떠나고 만다는 것입니다. 사람도 그렇지요? 주어 가지고 자기에게 이익이 돌아와야 협조하는 것입니다. 주어도 자꾸만 까먹는 사람을 누가 좋아하겠어요 ?

선생님이 지구본부와 지역본부를 도와준다고 하니까 전부 선생님을 바라보고 돈, 돈 하는데 그렇게 하게 되어 있어요? 그것은 하나님도 못마땅하실 것입니다. 자기 교회는 자신들이 발전시켜 가지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야 됩니다. 그런데 교회는 발전시키지도 못하고 지역본부만 지어 놓으면 무엇합니까? 어떻게 식구를 채울 것이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니 전도부터 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대개 슬퍼서 눈물이 나거나 좋아서 웃음이 나오기 시작하면 움직입니다. 슬프든지 기쁘든지 해야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생애 가운데 뜻과 더불어 눈물 흘리던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공적 사명을 하기 위해 뼛골을 녹여내는 듯한 고난을 극복하던 자본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도 부정할 수 없는 자신의 소중한 밑천인 것입니다.

그때 자신이 무엇 때문에 그렇게 했는가를 생각해 보면, 백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한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다면 열 사람을 구할 때에는 그것의 열 배의 정성과 노력으로 그들을 대해야 되는 것입니다. 만약 여기에서 자신이 없으면 지구장이라는 간판을 벗어 던지고 제일 불쌍한 말단의 자리에 서서 '나는 부족합니다.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하며 심각한 심정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게 현재 이하의 자리로 내려가면 하나님은 나를 끌어올려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심정을 유발해서 감정에 호소해야 됩니다.

공적인 입장에서 남을 위하여 희생하게 되면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동정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하여 심정이 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떠한 질문을 받더라도 당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면, 상대방이 입만 열어도 벌써 저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지 느낌이 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대인관계를 통해서 그러한 체험을 하게 되면 하나님이 그 자리에 같이하고 계시다는 것을 안느낄래야 안 느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들이치면 어느누구라도 꺾여져 나갑니다. 거기에는 벼락치는 것보다 더 무서운 압력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념을 가지고 들이 밀면 다 밀려나갑니다. 이것은 영적인 싸움이니만큼 영적인 힘의 비중에 따라 작용하는 차이가 납니다.

책임자의 정성

그러면 그러한 힘은 무엇을 중심삼고 유발시킬 것이냐? 심정적인 기준을 중심삼고 유발시켜야 합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슬픈 일은 피해 가려고 하고 기쁜 일은 찾아가려고 합니다. 이런 것을 중심삼고 과연 하나님이 나와 같이하시는가를 자기가 테스트해 보아야 합니다. 더구나 책임자들이 이런 것을 몰라 가지고는 아무것도 안 되는 것입니다.

부활은 일방적인 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사방적으로 몽땅 뿌리가 뽑혀야 부활의 역사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또 그래야만 하늘이 협조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원리적인 노정을 가는 데 있어서도 하루하루 도수를 맞추어 나가야 됩니다.

목회자는 사흘에 한번씩이라도 식구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어야 됩니다. 선생님은 흥남 감옥에서 3년 가까운 세월을 보냈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몇몇 식구들을 위한 기도는 밥 먹을 때부터 잠잘 때까지 매번 안 해준 적이 없었습니다. 설령 떨어져 나간 사람일지라도 그를 위하여 계속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러면 영적으로 선생님을 찾아와서 떨어져 나간 것을 처량하게 눈물을 흘리며 보고를 하는 것입니다. 육신이 약하여 어쩔수없이 선생님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인사를 하며 떠나는 그 비참한 정경은 동정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떠나갔어도 그 사람을 위해 계속 기도해 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왜냐? 그 사람이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갔기 때문에 그 계승자가 나올 때까지 기도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정성의 토대만 남아 있으면 아무리 식구가 떨어져 나갔다 해도 하나님께서 반드시 뜻있는 사람을 보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식구가 떨어져 나갔다고 해서 절대 낙망해서는 안 됩니다. 참으로 이상한 것은 한 식구가 떨어져 나가면 그 사람과 성격도 비슷하고 말하는 것도 비슷하고 걸음걸이까지도 비슷한 사람이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어떤 면으로 보더라도 신기할 정도로 떨어져 나간 그 사람과 너무도 닮은 사람이면서도 모든 면에서 월등히 나은 사람이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볼 때, 정성들인 것은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어느누구를 만나더라도 만난 그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더우기 하늘을 중심삼고 만난 사람이라면 절대 그 인연을 잊어버려서는 안됩니다. 그 사람이 교회에 나오다가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잘라 버리거나 저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떨어져 나갔다고 해도 그 사람과 맺었던 인연만은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통일교회가 한국을 위하여 들인 정성의 기준이 하늘이 공인할 수 있고, 세계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입장이 되어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렇게 되어 있으면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한 기준만 되어 있으면 사람이 없어도 세계적으로 수확을 거둬 들일 수 있기 때문에 절대 손해 안 본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책임자의 정성이란 무서운 것입니다. 선생님은 과거에 삼천만 민족을 앞에 놓고 이마를 땅에 대고 피눈물나는 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앞으로 선생님과 여러분의 정성이 하나님 앞에 인정을 받는 날에는 삼천만 민족은 틀림없이 우리들에게 들어올 것입니다. 그러면 한국의 운세는 하나의 주체자를 중심삼고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도(道)의 책임자인데 지금까지 도를 위하여 정성을 들여 보았어요? 반드시 정성을 들여야 됩니다. 전도는 정성이 비례하는 것이지 지식이나 실력에 비례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60년대에 이러한 체험을 다 해보지 않았습니까? 대학교를 나와서 왜 안다고 하는 사람보다 정성을 들이면서 전도한 사람이 더 낫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이 얼마만큼 동정해 주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한 사람을 놓고 목숨을 걸고 정성들여 보았느냐

지금 지구장들이 일편단심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이냐? 밥 먹는 일입니까? 아닙니다. 이 죄악세계에서 한 생명 한 생명들을 어떻게 하늘의 아들딸로 부활시켜 하늘나라로 옮겨 주느냐 하는 책임적인 사명감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일구월심 그러한 사명감을 가지고 나가 보십시오, 안 되는 일이 있는가.

완전한 주체 앞에는 완전한 대상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체는 대상을 위하여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기도를 하는 데는 대상이 새벽에 일어나면 그보다 먼저 일어나서 정성을 들여 주어야 됩니다. 사람은 자기를 위하여 정성들여 주게 되면 대번에 알게 되어 있습니다.

책임자는 자기 위치를 지켜 가며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여러분이 책임자라면 아침에 기도할 때에 20명 이상씩은 생각해야 됩니다. 그래서 하루에 70명 이상은 생각하며 기도해 주어야 됩니다. 식구들과 같이 먹고 식구들과 더불어 살라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심각한 시간은 밥 먹을 때와 잠잘 때입니다. 배가 고파서 밥을 먹을 때 그리고 졸음이 와서 잠을 자려 할 때는 모든 신경이 거기에 집중되기 때문입니다. 그와 반면에 깨어날 때는 모든 신경이 풀어진 상태이기 때문에 심각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루의 생활 가운데 세끼 밥 먹을 때와 잠잘 때가 제일 심각한 시간입니다. 뜻을 위해 그런 심각한 자리에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한번 하는 기도가 보통 때 몇 번 하는 기도 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항상 식구들과 밥도 같이 먹고 잠도 같이 잔다는 심정으로 식구들을 생각해야 됩니다. 그러면 누구누구는 어떻다는 감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감각이 예민해지면 멀리 있는 사람도 가까이 보이고 가까이 있는 사람은 더욱 가까이 보입니다. 척 보면 대번에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심령을 지도하는 사람들이 그 정도의 능력도 없이 맹숭맹숭해 가지고 어떻게 사람들을 지도할 수 있겠어요? 자신이 한 생명에 대해서 얼마나 정성을 들였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겠느냐(마 16:26)"고 하신 말씀의 뜻도 한 생명을 우주보다 더 귀하게 여기어 거기에 심정의 닻을 내리신 것임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세계를 망각하고 한 생명을 위해서 일대일로 싸우며 인간의 가치의 골짜기를 찾아 들어가시던 예수님의 심정적 경지에 도달할 때, 비로소 새로운 식구의 인연이 얻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뜻을 중심삼고 부모의 심정을 가지고 무엇을 해보았습니까? 여러분은 가까이 인연되었던 사람 가운데 뜻 앞에서 자신이 어려울 때 위로해 주던 사람들을 소홀히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일생 동안 언제든지 그 사람을 생각하고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언제나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러한 인연을 가지고 나가게 되면 이런 인연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오지 말라고 해도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식구들은 정성들여 기도하는데 책임자가 잠을 자서야 되겠습니까? 그것은 빚지는 생활입니다. 그래서는 발전하지 못합니다. 정성이란 한꺼번에 들일 수 없는 것이니 자기가 알고 있는 사람을 한 사람씩 차례를 정해 가지고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한 사람씩 붙들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실패한 것은 열두 사람을 데리고 다니면서 한 사람 한 사람을 놓고 기도하는 시간을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어느 한 사람에게도 자기의 뼛골에 사무치는 내적인 사연을 가르쳐 주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책임을 다할 때까지는 옆에서 누가 뭐라고 해도 밀고 나가야 합니다. 무엇을 놓고 정성을 들이고 기도를 했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정해 놓은 기도의 양은 다 채워야 됩니다. 만일 자기가 정해 놓고 정성들인 사람이 뜻 앞에서 떠났다고 하더라도 그를 찾아가서 여러분의 책임을 다해야 됩니다. 다시 말해서 빚을 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뜻을 따라 나오면서 하나님 앞에 한 사람을 걸어 놓고 이 사람이 떨어지면 내가 지옥간다는 심각한 심정으로 정성을 들여 본적이 있습니까? 이 사람이 내 말만 들으면 둘 다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까?

자신의 일생 전부를 걸어 놓고 6천년의 역사와 하늘 땅을 붙들고 뒤넘이치는 놀음을 해야 됩니다. 그러니 얼마나 징성을 들여야 되겠습니까? 여러분은 이러한 고비를 한 사람만 넘어가게 되면 몇백 명이 따라 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까?

종족 복귀

자기가 참부모를 찾고 또 그 참부모를 모셔야 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나님이 보잘것없는 사람을 참부모로 세워 가지고 참부모와 같은 가치의 인격자로 만든 다음, 여러분에게 그의 아들이 되어야 한다고 명령하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그럴 때는 그 참부모의 도리를 자기가 대신하여 그를 부모의 자리에 세우고 자기는 종의 자리에 설 수 있는 마음까지 가져야 됩니다. 복귀의 길은 그러한 길입니다. 여러분은 복귀노정에 있어서 천사장의 입장이니 그래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라보는 여러분의 신앙관념은 너무나 염려스러운 것입니다. 지금 선생님이 여기에 없으면 여러분 가운데 몇 사람이나 남아질지 의문입니다. 모르긴 해도 싸움이 벌어질 것입니다. 지금 선생님은 뜻을 위해 죽겠다는 사람이 얼마나 될 것이냐 하는 관점에서 여러분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심각한 자리에 들어가야 됩니다. 가정에서는 아내와 자식들을 위해서, 교회에서는 식구들을 위해서 내가 얼마나 정성을 들였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정성을 들일 때에는 여러 사람을 놓고 들이는 것보다 한 사람 한 사람을 놓고 들이는 것이 좋습니다. 여러 사람을 놓고 정성들이는 것과 한 사람 한 사람을 놓고 정성들이는 것은 판연히 다릅니다. 동서남북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체가 있으면 하나의 대상을 결정지어 가지고 그 대상을 중심삼고 금을 그어야 합니다. 그래야 사방이 그려지는 것입니다. 그 사방이 그려질 때까지는 대상과 절대적인 관계를 가져야 됩니다. 그래야 둥근 원이 그려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도들 가운데 과연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있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원리대로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한꺼번에 많은 사람을 전도하려 하지 말고 한 사람부터 전도할 생각을 하라는 것입니다. 제 1대상이 있어야 제 2대상이 생기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아버지 어머니 형님 누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 가운데 한 사람을 정해 놓고 정성을 들여 가지고 전도를 하라는 것입니다. 편지를 해서라도 전도를 해야 됩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전도를 하지 못하면 나중에 영계에 가서 그 사람들이 여러분을 참소할 것입니다. 자기 친척에게 참소받는 사람은 용서받지 못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과 부모 형제는 한 층입니다. 만일 어떤 집안에서 부자간에 혹은 형제간에 싸움을 했다고 하면, 그 집안은 망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어떠한 나라가 망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집안이 망하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영계에 가서도 자기 친척들이 참소하게 되면 곤란합니다.

가인과 아벨은 참소의 권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복귀가 안 되는 것입니다. 참소의 권을 넘어서지 못한 세계가 타락세계입니다. 참소의 권을 넘어서지 못했기 때문에 천국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부모 형제들이 참소하지 않을 것 같아요?

여러분들은 자신의 부모 형제가 뜻을 모른 채 죽는다면 지옥으로 가게 된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있습니까? 자기는 뜻을 알고 따라 나오면서도 자기 부모 형제가 뜻을 모르고 있다가 지옥에 간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뜻을 모르는 자기의 부모 형제가 틀림없이 지옥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들을 살리기 위해 별의별 일이라도 다해야 될 것 아닙니까? 부모 형제가 지옥으로 간다는 것을 안다면 가만히 있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발을 동동 구르고 매를 맞으면서라도 사정을 하여 그들을 붙잡아 주어야 하는 것이 부자간의 도리요, 형제간의 의리가 아니겠습니까?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문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여러분은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지금 기성교회 목사들은 교단적으로 볼 때 가인 대표자의 입장이고, 학자들은 국가적으로 볼 때 대한민국의 가인 대표자의 입장입니다. 그러면 왜 목사들의 집회를 갖느냐? 그것은 지금의 때가 그런 때이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이 해야 할 책임을 다했는데도 불구하고 기성교회 목사들이 신생님의 말을 듣지 않으니 빚을 짊어지면서도 이 일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생명을 책임지고 있으니 심각해야 한다

이번에 기성교회 목사들을 중심삼고 원리 공청회를 하는 데에 백 오만원이 들었습니다. 한 사람당 일만 구천 오백원이 든 셈입니다. 그것은 삼십만 원짜리 교회 네 개를 마련할 수 있는 돈입니다. 그 돈으로 지역 본부를 짓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고 할는지 모르지만 선생님은 그렇게 생각 하지 않습니다. 잎은 떨어져 버리기 때문에 잎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가지와 줄기가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에서 최고의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학자들이고 기독교에서 최고의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목사들이니, 첫째는 목사에 대해서 선생님이 해야 될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 정성을 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도 얻어먹기만 하고 그냥 있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도 양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우리 원리를 한 번 듣게 되면 문제가 안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번 할 때 다르고 두 번 할 때 다를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자연히 말려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20세기의 기적이라고 하지만, 이것은 기적이 아닙니다. 원리원칙의 입장에서 얼마만큼 철두철미하게 일을 해 나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런 입장에 서지 않으면 다 흘러가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정성을 들일 때에는 함부로 들이지 말고 불쌍한 사람을 놓고 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어떤 사람을 놓고 정성을 들일 때, 그 사람이 밥을 굶고 헐벗고 있다고 생각되면 추울 때에도 옷을 벗고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런 기준이 있기 때문에 오늘날 이만큼이라도 기반을 닦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남몰래 눈물도 많이 흘렸고, 불쌍한 사람들을 보게 되면 그들을 도와 주기 위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갖다 주고 싶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죄가 되겠습니까? 주고 싶은 마음, 도와주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욕심을 갖게 될 때에는 하나님도 찬양하시는 것입니다. 자기만 먹고 살겠다는 것이 아니라 전부가 좋게 하기 위해서, 현재에는 고통스럽더라도 미래에 잘살게 해주기 위해서 욕심을 내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의사가 수술을 하려고 메스를 들었는데 밤 12시가 되었다고 해서 졸겠어요? 그런 의사와 마찬가지로 생명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만큼 심각해야 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여러분을 보게 되면 전부 다 흘러가 버릴 사람들 같습니다.

지금 가정과 교회와 사회의 삼각권을 중심삼고 볼 때, 여러분은 가정을 중심한 생각이 강합니까, 교회를 중심한 생각이 강합니까? 아니면 사회를 중심하고 자기 출세하기 위한 생각이 강합니까? 여러분은 어떤 것이 더 강한지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협조해 주고 동정해 주겠습니까? 교회를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 대신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을 구해 주는 것입니다. 구하는 데는 참된 희생이 없어 가지고는 참된 사람이 구원되지 않는 것입니다. 악한 사람이 참된 사람으로 되기 위해서는 참된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는 참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리지 않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 길을 십년 이상 따라 나온 사람은 믿음의 자녀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여러분들은 팔 다리가 끊어진 사람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지역장과 전도대원들은 하나되어야

지역장은 전도대원들보다 더 많은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정성을 들이는 사람들이 금방 가짜인 줄을 알아 버려 불화가 생기게 됩니다. 아벨이 어떤 사람이냐? 편안한 자리에 있는 사람은 아벨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중심삼고 맨 앞에 선 사람이 아벨입니다. 그러므로 남편과 자식을 버리고 나온 전도대원들과 그냥 그 자리에 있는 지역장을 하늘이 비교해 볼 때, 지역장보다 전도대원들이 더 아벨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역장들은 더 많은 정성을 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역장들은 대원들을 모셔야 합니다. 선생님은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그래야 되지 않겠어요? 우선 자기 집에 찾아온 손님이니 대접을 해야지요. 그들은 거기서 살려고 온 것이 아니라 복을 빌어 주기 위해서 찾아온 것입니다. 그러니 손님을 대접해야 할 주인의 입장에 있는 지역장이 과연 대원들보다 더 큰 정성을 들이며 쓴 잔을 마시고 고통을 당해 보았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견지에서 볼 때, 선생님은 지역장들이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번에 선생님이 지방을 순회하면서 지역장들에게 협조하라고 지시했습니다. 모든 것을 주관하는 데에 본이 되어야 합니다. 아침에도 먼저 일어나서 사람들을 깨우고 전도에 앞장서야 합니다. 그러지 못하는 지역장은 쫓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전도 체제를 지구장 체제로 해야 된다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가인 아벨이 아니라 정성을 들이는 데 있는 것입니다. 가인이 아벨로 모신다고 해서 아벨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벨로 모시게 만드는 것은 내 것 뿐만이 아니라 남의 것까지도 내 것으로 만드는 놀음입니다. 아벨은 아벨대로 자기 것을 갖게 되고 가인 것까지 빼앗아 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작전은 온유겸손입니다. 온유겸손해서 절대로 손해보지 않습니다. 온유겸손하여 내 것으로 만들어 놓고 빼앗아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 손해보지 않습니다.

대접만 받겠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이 항상 선두에 서서 전도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식구가 많게 될 때, 그리고 대원들이 밖으로 나가지 말고 이제 교회에 계시라고 자리에 앉혀 놓을 때 비로소 관리해 나가야 괜찮지, 처음부터 가만히 앉아서 대원들에게만 전도해 오라고 해서는 안됩니다. 전도대원들이 우리 남편보다 낫다고 하도록 왜 못 만드느냐는 것입니다. 전도대원들이 열 시간 움직이자고 할 때, 지역장이 계획을 짜 가지고 열 다섯 시간 활동하자고 하면 전도대원들은 완전히 굴복할 것입니다.

지역을 발전시키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역장이 잘하고 대원들이 잘한다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을 대하는 데 있어서는 고충이 있게 마련입니다. 사람의 성질 가운데에는 고질적인 성질도 있기 때문에 상충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다만 그것을 어떻게 처리해 나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때는 직접적인 작전보다도 포위 작전이 제일 간단한 방법입니다. 말없이 1년만 그 작전을 하면 되게 되어 있습니다. 하늘의 일을 하는 데에는 자기와 친척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끌어들여서 하는 것이 제일 빠르다는 것입니다.

신앙길은 자기 스스로 개척해 가는 길

내가 뜻을 위했다면 얼마만큼 위했을까? 10년 전에 뜻을 위하던 나와 오늘의 나 가운데 어느 쪽이 더 뜻을 위하는가? 그것은 남에게 물어 볼 필요없이 자기 스스로가 잘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길은 자기 스스로 개척해 가는 길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신앙길을 가는데 있어서 누구의 명령을 받아 가지고 움직이면 안 됩니다. 그것은 일하는 것이지 신앙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신앙이 올라 가고 있는가 내려가고 있는가를 스스로 알아서 조절해 가지고, 하늘 땅을 붙들고 거기에 화해서 하나님 앞에 정성을 들이는 자리에 서야 됩니다.

전도하는 데는 비위가 좋아야 합니다. 남이야 욕을 하거나 말거나 자기가 할 일은 해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전도하려면 욕을 먹기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남이 하지 않는 일을 하면서 동네방네 돌아다니며 개를 짖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욕을 먹게 되어 있지요.

자기 남편을 맞이하려고 준비하고 있는데 전도대원이라는 사람이 떡 들어가면 얼마나 기분 나쁘겠어요? 눈살을 찌푸릴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분 나쁘게 하는 것도 한 번 가지고는 안 됩니다. 두 번이고 세 번이고 찾아가서 그쪽에서 내가 너무 지나치게 했구나 하는 마음을 갖게 되면 다음에 찾아갈 때는 그만큼 마음이 누그러지는 것입니다.

복귀역사가 다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 기분 나쁜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남으로부터 좋은 말만 듣고, 좋은 얼굴만 보려고 하면 술좌석에나 가야 하는데 그런 자리에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남을 녹이는데 뒷맛 좋고 좋은 말만 듣고 하려다가는 망합니다.

하나님은 반대 방향으로 이끄십니다. 침을 뱉고 주먹질을 하고, 이런 일을 당하지 않고는 복귀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이 도적같이 온다고 한 성경 말씀은 참 잘한 말씀이라고 생각됩니다. 그 말씀은 선생님에게 있어서 복음 중의 복음입니다. 지금까지 선생님은 그런 싸움을 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좋아할 게 뭡니까?

전도하다 핍박받더라도 감사하라

전도하러 다니다가 핍박받고 반대받고 매맞는 것이 일쑤인데 죽지 않는것만도 감사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뜻길을 처음 출발했을 때를 생각해 보세요. 죽을 마당에서 욕먹고, 욕먹는 마당에서 대면하고, 대면하는 마당에서 말하고, 말하는 마당에서 좋아하면서 발전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기성교인들을 욕먹는 마당에서 대면하는 때입니다. 기성교회 목사들을 초청 했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앞에 봄이 왔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오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우리 교회가 문제의 교단으로 등장하니 알아보려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앞으로 우리의 비중이 점점 더 커질 것 같으니까 거기에 동참해 보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빨리 커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크게 되면 무섭게 느낄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들보다 낫다고 생각되면 오지 말라고 해도 옵니다. 자기들이 살고 이익을 보기 위해서는 우리를 찾아올 것입니다.

뜻적으로 볼 때, 우리는 승공연합 활동으로 외적인 면에서 그들과 싸워 이겼기 때문에 이제는 내적인 종단을 중심삼고 싸워야 합니다. 그리하여 내적인 싸움에서도 이기게 되면 그 다음에는 국가 전체를 복귀시켜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기성교회를 공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전도대원들이 나가 싸우는 것은 바로 기성교회를 공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일반인보다 목사들이나 기성교회 교인들을 찾아가서 전도하라는 것입니다. 욕을 먹으면서도 목사들을 찾아가서 전도해야 합니다. 아침에 찾아 가고 저녁에 찾아가고 자주 찾아가서 이런 말 저런 말들을 인간적으로 주고받으면 처음에는 반대하다가도 나중에는 우리 교회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할 것입니다. 그럴 때 재림론을 잘 얘기해 주면 넘어오게 되어었습니다.

그래도 자꾸 반대를 하면 '우리가 당신네 교단에 서서 강의해 보고 또 당신들이 우리 교단에 서서 강의해 봐서 당신네가 옳은지 우리가 옳은지 한번 알아보자' 하며 자주 쫓아다녀야 합니다. 그러면 오지 말라고는 못할 것입니다. 옛날같이 반대하지는 않을 것이니 한번 해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목사들이 걱정이 생길 것이고, 걱정하는 목사 밑에 누가 붙어 있겠어요? 그럴 때는 떡 찾아가서 '목사, 집사들, 당신들의 근심과 걱정을 우리가 다 알고 있소' 하는 것입니다. 누가 가르쳐 주더냐고 하면 그냥 다 알고 있다고 넘겨 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들은 자꾸 얻어맞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일 무서운 작전입니다.

사탄은 믿는 사람의 뒤를 따라다닙니다. 그러므로 사탄보다 더 열심히 밤이나 낮이나 전도해야 됩니다. 선생님이 서울에서 목사들을 초청하게 되면 그때 같이 따라오면서 작전을 쓰는 겁니다. 그렇게 1차, 2차, 3차 전도작전을 하여 딱 맞아떨어지면 얼마나 신나겠습니까? 일주일 계획으로 시작한 일이 3일만에 맞아떨어져서 끝이 나면 얼마나 신나겠어요?

전도대상자에 대해 연구하라

전도를 할 때에는 함부로 얘기를 해주어서는 안됩니다. 그 사람이 음질인지 양질인지를 파악해서 거기에 맞추어 가지고 얘기를 해야 합니다. 사람 중에는 음성적인 성격을 지닌 사람과 양성적인 성격을 지닌 사람이 있습니다. 음성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에게는 절대 우울할 때 이야기해서는 안 됩니다. 그 사람이 양성적일 때, 즉 기분이 좋을 때 가서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기분이 나빠서 웅크리고 있을 때에는 절대 신나는 말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럴 때는 기분을 봐 가면서 동정해야 합니다.

또, 양성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에게는 양성적일 때에 이야기를 하면 안됩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반대로 음성적일 때 이야기를 해야 됩니다. 양성적일 때, 즉 기분이 좋을 때 이야기를 하게 되면 간직하지 못하고 모두 흘러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럴 때는 피하고 반대로 심각할 때에 이야기를 해야 됩니다.

전도를 하려면 사람들의 섭리를 연구해야 합니다. 표정이나 걸음걸이만 보고도 저 사람이 좋아하겠는지 싫어하겠는지 알아야 됩니다. 그 사람의 감정을 공식적으로 감정(鑑定)할 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 아내나 집에서 같이 사는 사람의 발걸음 소리만 듣고도 그에게 좋은 일이 있는지 나쁜 일이 있는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자기 아내가 방에 척 들어오면 '당신 왜 기분이 좋지 않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내는 언제 보지도 않았는데 벌써 남편이 다 알고 있으니 할 말을 못 하는 것입니다. 그런 잼대를 가지고 살아야 됩니다. 관심을 가지고 기도하게 되면 그 사람이 나에게 관심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전도는 생명을 접붙이는 일이기 때문에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을 놓고도 정성들이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일생을 걸어 놓고 몇 사람한테 정성을 들여 보았습니까? 또한 자기를 위해 정성들여 주는 사람이 많다고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 정성을 들이는 사람은 복을 받지만 정성들인 것을 받는 사람은 복을 받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내가 정성을 들여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정성을 들여 주었는데 그가 말을 안 듣는다고 외로와 하거나 슬프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천리 원칙이 그렇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복을 받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절대로 서럽거나 외롭지 않습니다. 때가 가까와 오기 때문에 봄바람이 불어올 것입니다. 그러나 정성을 들여 주었는데 그것을 받지 않은 사람에게는 가을바람이 불어올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의 때가 가까와 오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첫째는 심정, 둘째는 합심, 세째는 봉사

여러분이 어느 지역에 가서 전도를 할 때 맨 처음에는 질곡시대가 있습니다. 이 질곡시대를 타개해야 합니다. 그래 가지고 어느 정도까지 가게 되면 포화시대가 오는데 대개의 사람들이 이 포화시대에서 망해 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포화시대를 중심삼고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합니다. 그러지 못하면 포화시대가 자기를 심판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개인복귀, 가정복귀, 종족복귀, 민족복귀의 고개를 못 넘어갑니다. 개인이 탕감하게 되면 가정이 복귀되는 것이요, 가정이 탕감하게 되면 종족이 복귀되는 것이요, 종족이 탕감하게 되면 민족이 복귀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귀섭리는 탕감복귀섭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재미있는 자리가 아니라 비참하고 억울하고 눈물이 흐르는 자리에서 탕감이 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런 면에 중점을 두고 강력히 생활해 나가야 되겠습니다.

책임자는 불쌍합니다. 앞으로 활동하는 데 있어서 첫째는 심정이요, 둘째는 합심이요, 세째는 봉사입니다. 이 세 가지만 잘하면 됩니다. 지역장 중심이니 지구장 중심이니 하는데 오늘보다 더 정성들이고 활동한다면 누가 뭐라고 말하겠어요?

남편과 자식을 버리고 나온 여러분들이니 전도하는 데 열의를 다해야 합니다. 기성교회를 대하는데 있어서 전도가 안 되더라도 끈기있게 밀고 나가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통일교회를 이해하는 목사들을 연결시켜 가지고 더욱 강화해 나가면 결국은 좋은 결과가 올 것입니다.

기성교인들을 대할 때는 인간적으로 가까워진 다음에 전도해야 합니다. 처음에는 기성교회의 신앙 생활에 대해 서로 토론하다가 약점이 있을 때에 뼈 있는 말을 한마디씩 해주면서 이끌어 가지고 우리 원리강의를 듣도록 하면 됩니다. 사람을 전도하려면 먼저 그 사람이 나에게 호감을 갖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좋아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번 기간에는 기성교회를 위해 정성을 많이 들여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반드시 하나님이 역사해 주실 것입니다.

4월 10일부터 4월 20일까지 전국적으로 부흥회를 개최해야겠습니다 부흥강사는 그 도내의 지역장과 지구장이 서로 바꾸어 가면서 하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전국에 있는 각 지구에서는 원리연구회를 조직해서 활동해 주기 바랍니다. 앞으로 서울에서 거국적인 학생승공대회를 개최하려고 하니 빠른 시일내에 각 지구에 있는 대학을 중심삼고 원리연구회를 조직해야 되겠습니다. 이번에 전국 각 대학 교수들이 왔다 갔으니 그 교수들을 중심삼고 하라는 것입니다.

[기 도]

아버님, 오늘은 3월 7일, 이달 들어 처음 맞는 안식일 입니다. 당신이 소원하시는 뜻을 오늘 통일교단과 더불어, 이 민족과 더불어 성취하시옵소서. 당신이 바라시는 창조이상을 온 인류가 하나되어 성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를 이루기 위해서는 주역을 맡은 책임자들이 없어서는 안 될 것이고, 맡겨진 책임이 크면 클수록 그 책임을 하여야 할 중심적인 존재들이 거기에 대응하여 극복의 노정을 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생각하게 되옵니다.

계속되는 수난의 길을 피해 가고자 하는 것이 현재 인간의 본성인 것을 아옵니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은 타락하지 아니한 본연의 자리, 당신이 소원하시는 뜻을 스스로 이룰 수 있는 본연의 자리에서 가져야 할 성품이기에, 오늘날 타락한 우리에게 그러한 것을 부여할 수 없는 아버지의 딱하고 외로운 심정을 더듬어 살필 줄 아는 저희들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이제 저희들에게 맡겨지는 사명이 크면 클수륵 현재의 입장에서 공고한 터전을 닦아, 주위에서 어떠한 시련의 노정이 몰려 오더라도 이것을 극복하여 소화시키고 흡수시키고 제거시킬 수 있는 주체적인 힘의 모체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아버님, 그렇기 때문에 저희들은 아버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아버님께서는 역사과정을 거쳐 나오시면서 저희가 당하고 있는 수난과 환난보다도 더 어려운 수난의 고빗길을 참아 나오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 당신으로부터 교훈을 받으면서 당신께서 지시하시는 명령에 따라 당신의 목적을 승리적으로 이루어 드리기 위하여 살아가는 저희들이 환경에 치우칠 적마다, 저희를 주관하시고 관리해 주시는 아버지의 후대하신 사랑을 바라면서 따라 나가고 있사오니, 아버지, 이러한 자녀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이 아침 삼천리 반도에 널려 있는 당신의 외로운 딸들과 아들들을 긍휼히 보시옵소서. 한 곳을 향하여 조아리며 아버지 앞에 부복한 그 자리를 거룩히 보시옵소서. 그 누구도 모르는 당신의 내적 심정의 고통을 느끼면서 아버지 앞에 사연을 통고하는 무리들을 거룩한 무리로 간주하여 주시옵소서. 그들의 소원이 곧 당신의 소원이고, 그들이 가고자 하는 뜻 또한 당신의 뜻이기 때문에 당신께서 같이해 주시지 않으면 그들처럼 불쌍한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부디 그들이 머무는 곳곳마다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애정이 솟구치는 심정을 가지고 민족을 염려하고 세계를 염려한다는 일은 자신과 관계를 맺기에는 너무나 먼 뜻이요, 먼 거리에 있기 때문에, 그럴 수 있는 자리에서 진정한 의미의 눈물을 짓고 아버지를 향하여 호소 하는 자녀들이 있다면, 그들은 이 시대와 더불어 절대로 망하지 않을 것이요, 이 시대를 거쳐 새로운 시대를 창건하고, 이 땅에 나타나지 않은 새로운 복의 기원을 남겨 놓고 갈 것임을 아옵니다. 과거, 역사상에 왔다간 모든 사람들이 누구나 그러한 길을 가고자 하였지만 아무도 그것을 실천하지 못했사옵니다. 그러나 저희들은 현재 이와 같이 선두에 서서 당신이 소원하시는 행로와 일치될 수 있는 입장을 취하고 있사오니, 이것만이라도 당신이 자비로이 보시어서 이 자리에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 그와 같은 뜻을 당신이 명령하셨기 때문에 저희들이 오늘날 이만한 기반을 닦을 수 있었던 것이요, 당신이 임재하셨기 때문에 수많은 시련 가운데에서도 남아져 이만한 터전을 닦을 수 있었던 것을 생각할 때, 지금까지 당신이 후대하신 사랑으로 이끌어 주신 것에 감사드리오며, 금후에 가는 길도 더더욱 같이하시어 저희를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앞으로 다가올 시련무대가 작아지는 것이 아니라 점점 커지리라는 것을 생각할 때 저희들이 투입해야 할 힘의 비중도 커져야 할 것임을 아오니, 아버지여, 저희들이 가는 길에 당신의 크고 넓으신 사랑의 마음으로 당신께서 앞놓아 나가시며 긍휼의 마음으로 인도하여 주시옵기를 재삼 부탁드리옵니다.

아버님, 이 자리에 모인 소수의 자녀들, 이들이 진정한 당신의 아들이요 딸들이옵니까. 스스로 반문해야 되겠습니다. 어떠한 자리에 선 아들이 되고 딸이 되고 싶으냐고 묻게 될 때, 저는 이러한 자리에서 아버지를 모실 수 있는 아들이 되고, 딸이 되겠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아들 딸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흘러가는 세월과 더불어 자기의 위치를 잃어버리고, 흐르는 물결에 휩쓸려 가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흘러가는 물결이 아무리 세다 하더라도 그것을 헤치고 넘어갈 수 있는 하나의 반석의 터전이 되어서 모진 흐름 가운데서도 자기의 모습을 완연히 드러낼 수 있고, 정체가 확실한 당신의 자녀들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나는 이러한 결과를 맺기 위하여 이렇게 생애를 바쳐 싸우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오늘 하루의 승리의 결과를 다짐할 줄 아는 아들딸들이 되어야되겠습니다.

아버님, 저희 마음 마음에 친히 찾아오시옵소서. 부족한 저희 자신들을 바라볼 때 당신께서는 천번 만번 저희들과 격리되고 싶고 저희들에게서 떠나고 싶은 마음이 생기겠사오나, 이 땅 위에는 저희들만한 무리도 없는 것을 아시는 아버지시여, 부족한 저희들을 격려하시어서 저희들이 안 가려 하거든 채찍질을 해서라도 갈 수 있게 하시고, 행하지 않거든 아버지께서 끌어서라도 행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지 않고는 저희들이 달성해야 할 소기의 목적과 가야 할 길을 다 주파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일심단결하여 아버지가 남기신 뜻을 위하여 정도(正道)의 표준을 바라보면서 매일매일 개척자의 사명을 더디 하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시간 부복하였사오니 당신이 찾아오시어서 저희 생애에 잊을 수 없는 당신의 간절한 심정이 저희들의 마음에 어리게 허락하여 주옵시고, 당신께서 저희를 그리워하는 것과 같이 저희들이 당신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스스로 극복할 수 없어 눈물로 그 간절함을 펴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잃어버린 선의 자녀를 찾는 부모의 마음과 같은 애절한 마음을 가진 자신들이 될 수 있게끔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가 없어서는 안될 것을 확실히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천번 만번 죽더라도 이것만은 붙들고, 이것만은 갖고, 이것만은 남기고 죽지 않으면 안 될 자신인 것을 확실히 깨달을 줄 아는 저희들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그저 관념적으로 아버지를 생각하고, 관념적으로 아버지를 믿는 모습이 아니라, 실질 생활권내에 있어서 아버지와 더불어 심정적인 인연을 맺어 의논하고 사연을 토로할 수 있는 간곡하고도 간절한 생활의 일면을 갖추어, 그것으로 말미암아 그 누가 무어라고 하더라도 꾸준히 찾아갈 줄 아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봄이 오면 봄을 맞이하고, 여름이 오면 여름을 맞이하고, 가을이 오면 가을을 맞이하고, 겨울이 오면 겨울을 맞이하고도 남을 수 있는 생명력을 가지고 재차 새로운 탕감의 노정을 맞을 수 있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저희들은 확실히 알고 있사옵니다.

개인 탕감노정이 지나고 나면 가정 종족 민족 국가 세계적 무대까지 탕감노정을 가야 할 복귀의 운명길에 서 있는 저희들은 슬픈 마음으로 갈것이 아니라, 선조들이 탕감노정을 슬픔으로 갔기에 아버지의 한을 가했던 사실을 알고 있는 저희들은 기쁜 마음으로 가야 되겠사옵니다. 기쁜 마음에서 솟구쳐 나오는 그리움에 사무쳐 당신을 아버지라 부르지 않을 수 없는 자리에 서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아버지의 목을 끌어안고 사연을 열지 않을 수 없는 스스로의 간곡한 사무침이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를 대하는 데 있어서 머뭇머뭇하는 마음, 꺼리는 마음이 있어서는 안 되겠사오니, 자기를 중심삼고 이러한 관념에 처해 있는 자리를 떠나서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에 사무쳐 부족한 자기 일신의 모습을 잊어 버리고 당신께로 달려갈 수 있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며 주시옵길,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 이 자리에 찾아오시어 저희들이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당신의 높으신 인연권내에 동참할 수 있는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이 시대적인 사명을 책임진 당신의 딸들을 다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어려운 그 자리가 감사한 자리이고 복된 자리인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뜻 가운데 허락하신 자비의 은사를 스스로 찬양하고 맡겨진 한날 한날을 뜻의 길이 되게 하시어서, 복된 날들로 남겨 가지고 아버지 앞에 칭찬받을 수 있는 조건과, 칭찬받을 수 있는 인연을 갖추는 거룩한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 금후에 다가오는 모든 시련을 극복하고 남아질 수 있는 통일의 교단이 되고, 이 민족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니다.

악의 세력이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아버지의 마음과 아버지의 인연을 따라 간절한 심정이 있게 될 때는 그 심정으로 말미암아 악은 반드시 무너진다는 사실을 저희들은 절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버지, 현재 아시아의 정세를 굽어살피시옵소서. 저희 앞에 악의 세력이 준동(蠢動)하며 저희의 갈 길을 막으면 막을수록 저희들의 때가 가깝다는 것을 알고, 일심동체가 되어 아버지 앞에 생축의 제물로 묶어 바쳐 지기를 결심하고, 이 시대에 있어서 맡겨진 책임을 감당할 수 있게 허락 하여 주시옵길 재삼 부탁드리옵니다. 만만세에 당신의 은사와 당신의 긍휼과 당신의 사랑이 저희 모든 전체 위에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길 바라오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니다. 아멘.

말 씀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라는 제목을 가지고 잠깐 동안 말씀드리겠습니다.

인간의 행, 불행과 환경

소망이 없는 사람은 하루의 생활에 있어서 어떠한 어려움도 극복할 수없습니다. 반면 강한 소망을 가진 사람은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강하게 하루의 생활을 잘 넘길 수 있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사람 중에는 평범한 자리에서 소망을 가진 사람도 있겠지만 어려운 자리에서 소망을 가진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평범한 자리에서 갖는 소망과 어려운 자리에서 갖는 소망은 그 차이가 크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평범한 자리에서 소망을 갖고 나가는 사람은 그저 평범한 자극과 평범한 결의로서 소망을 향해 나갈 수 있지만, 어려운 자리를 중심삼고 소망을 가진 사람이 있다 할진대는, 그 사람은 그 어려움에 비례되는 극복의 요소를 투입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에 처하고 있는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넘을 수 있는 여력이 있어야만 어려운 그 자리에서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환난에 부딪힌다든가 고독한 자리에서 새로운 소망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당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그 사람이 지극히 불쌍한 사람이요 지극히 동정받아야 할 사람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런 사람을 동정하던 사람들과 그를 평하던 사람들이 오히려 불쌍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평범한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현재 동정받아야 할 수난의 자리에 있는 사람과 자리를 바꿔 서게 될 때는 대다수의 사람은 그 자리에서 물러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려운 자리에서 그 어려움을 극복하고, 극복한 여력을 갖고 조그마한 소망이라도 갖고 나가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는, 이런 사람은 미래를 계승할 수 있고 앞으로 다가오는 수난의 길을 극복할 수 있으며, 또 그 수난에 대처하여 싸워 전진할 수 있는 동기라도 가질 수 있으되, 비판하고 동정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은 그러한 자리에 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두고 볼 때, 현재 편하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한 것이 아니요, 현재 어렵고 외로운 자리라고 해서 반드시 불행한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헤아려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어느때든지 한 나라에 있어서 충신은 그 나라의 비상시에 나타나고, 한 가정에 있어서 효자는 그 가정이 파탄되려 하는 때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처럼 환경적으로 부정할 수 있는 극한상황에서 참은 증거되고, 참의 모습이 공고한 실체로 드러나는 것을 우리는 역사적인 사실을 통하여, 혹은 우리의 모든 생활 환경을 통하여 잘 알고 있는 바입니다.

충신과 효자의 위상(位相)

한 나라에 비운이 찾아들게 될 때, 그것은 군왕이 당하여야 할 운명이지만, 그것을 군왕이 당하여야 할 운명으로 남기지 않고 자기가 당해야 할 운명으로 알고, 생명을 바쳐 그 국가의 비운을 막기 위하여 죽음길을 자처하고 나서 가지고 국가를 살리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만고의 역사가 찬양할 수 있는 충신의 반열에 동참하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한 가정에 있어서 효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위에 널려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부모를 모시고 효도하는 그런 생활 환경에서 부모 앞에 효도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뭇사람이 전부 다 부모를 배척하고 자기 스스로 가야 할 길을 피할 때, 단 하나밖에 없는 자기 생명을 바치는 한이 있더라도 가야 할 그런 길에 있어서 부모를 위하려는 입장에 선다면, 그야말로 환경을 초월한 자리에서 효성의 도리를 했기 때문에 효자로 세워 놓을 수밖에 없는 사실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행복이 어디 있으며 불행은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오늘날 세상에서 아는 것처럼 현재의 입장에서 잘살고 뭇사람들이 보기에 좋은 자리에 선 사람들이 행복할 것이냐? 아무리 그러한 자리에 있다 하더라도 내일을 계승할 수 있는 소망과 더불어 현재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을 갖지 못한 사람은 두말할것없이 불행한 날이 찾아올 때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현재 뭇사람들이 보기에 불쌍한 자리에 있고 삼천만 민족이 모두 동정하는 자리에 있다 하더라도, 또 수난과 어지러운 환경 가운데 극복할 수 없는 최고의 어려운 자리에 처해 있다 하더라도, 극복할 수 없는 그런 무대에서 새로운 소망을 품고 진일보하겠다는 신념을 갖고 움직이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는, 국가와 민족의 장래는 그 사람으로 말미암아 새로이 개척이 되고 새로이 방향을 갖추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현재 행복하다고 하는 사람들로 말미암아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말할 수 없이 비참하고 불쌍한 처지에서도 소망을 갖고 진일보하겠다고 몸부림치는 사람들로 말미암아 그 나라의 운명은 새로이 개척되고 그 나라의 비참상이 해결되어 새로운 시대로 옮겨갈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인가

그렇기 때문에 대개 지혜로운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그 시대와 더불어 그 환경과 더불어 좋은 면만 짝해 가는 사람 가운데는 지혜로운 사람이 없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현재보다도 미래를 염려하고, 미래보다도 영원을 염려합니다. 대한민국을 중심삼고 본다면 현재의 입장보다도 내일에 올 수 있는 이 나라의 비운을 염려합니다.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금후에 되어질 세계적인 시대를 염려하고, 나아가 하늘땅까지 염려합니다.

오늘날 통일교회가 주장하는 천주주의면 천주주의의 미래를 염려하고 나아가 하나님까지, 더 멀고 더 크고 더 영원한 것을 염려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염려하는 기준이 영원한 기준이면 영원한 기준일수록 현실의 어려운 환경을 극복해야 하고, 극복한 거기에서 영원한 보장이 결정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의 환경과 보조를 맞추면서 뭇사람이 따라가고 뭇사람이 좋아하는 데 같이 어울려 살고, 그들의 환경의 인연을 따라가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라, 미래의 것을 위해서는 현재의 어떠한 어려움도 극복해 나가겠다는 마음을 갖고, 그런 뜻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인 것입니다.

또한 지혜로운 사람은 개인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환경을 맞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가정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고, 종족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고, 민족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고, 국가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고, 세계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환경을 맞이하기 위해 사는 사람입니다. 그 어려움이 전세계적인 어려움으로 남을지라도 내가 이끌고 가야 되겠다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다 할 때, 그 사람은 반드시 역사시대의 인물이 되지 않을 수 없고 역사는 반드시 그런 사람을 요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세계와 더불어 그 어려움을 극복해 가지고 내일의 희망의 동산을 창건하고 말겠다는 결의와 사상을 갖고 싸워 나왔다 할진대는 그는 인류 역사상 만민이 추앙할 수 있는 성인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걸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예수님은 지혜로운 사람 중의 지혜로운 사람

이러한 관점에서 지금까지 역사시대에 왔다 간 성현군자들을 생각해 보면, 그들은 자그마치 세계를 위해 현재의 수난길을 극복하려고 싸우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국가에 어려운 환경이 있다 할 때 자기의 생명을 투입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 어려움을 극복하겠다는 기준에서 싸우는 인격적인 내용을 갖춘 사람이 아니고서는 성인 현철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가 증명하는 사실입니다.

더구나 예수 같은 양반을 보게 되면, 그때 이스라엘 국민이 배반하고, 수많은 종교 지도자들이 반대하고, 그뿐만 아니라 로마제국이 그를 반대하는 자리에서도, 그런 시련과 환난 앞에서도 그들을 적으로 생각하고 대결한 것이 아니라 웃음과 소망으로 대하고, 오히려 그들을 동정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어리석다면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그에게 목적이 없었다면 그는 미친 사람이요, 머리가 돈 사람밖에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자기의 가슴에 창을 들이대고 죽으라고 못을 친 용서할 수 없는 원수들인데도 불구하고 그들에 대해 후덕한 마음을 가지고,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복을 빌어 줄 수 있었다는 사신을 두고 볼 때, 그는 무엇을 붙들고 원수들에게 복을 빌어 주었느냐? 망할 수 있는 그 시대를 붙들고 복을 빈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죽인 이스라엘 민족은 거기서 망국의 운세에 접어들어 세계의 유랑민족이 된 것을 우리가 역사적인 실증으로 아는 바이지만, 예수님은 그렇듯 망할 수 있는 이스라엘 민족을 붙들고 기도한 것이 아니요, 망할 수 있는 로마제국을 붙들고 기도한 것이 아니요, 망해 가는 유대교단을 붙들고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망해서는 안 될 미래의 나라와 미래의 세계를 붙들고 원수들을 위해 복을 빌어 주고 기도해 주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그 나라와 그 세계가 그를 알아주었느냐? 전혀 알아주지 못했습니다. 또, 그와 더불어 관계도 맺지 않았습니다. 현실적 환경에서는 누구도 그와 관계를 맺지 않은 지극히 고독한 자리요, 지극히 외로운 자리요, 지극히 한스럽고 원망스러운 자리에 있었지만, 미래의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컸기 때문에, 그들을 원망하면 그 나라의 한이 될까봐, 그가 슬픔을 품고 가면 후대에 한이 될까봐 죽음의 그 자리를 슬픔으로 넘지 않고 기쁨으로 싸워 넘었습니다. 그 나라와 세계를 생각하는 마음의 터전에서 죽더라도 기쁨으로 그 나라와 가고 싶고, 기쁨으로 그 나라와 인연을 맺어 가지고 자기가 그 나라에 하나의 희생의 씨로서 뿌려지고 싶은 고귀한 마음을 갖고 죽음길을 맞이했기 때문에, 그로 말미암아 세계는 새로운 세계로 발전해 나온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예수님은 그 시대에 있어서는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이요 지극히 무지하고 그 누구도 바라보지 않는 고독한 사람이었지만, 그는 그 고독한 입장에서 희망의 마음을 가졌고, 생명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생명보다 가치 있는 그 나라와 그 세계를 생각하는 마음을 갖고 간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나라와 그 세계에 예수님의 피가 뿌려졌고, 고독이 아니라 소망이 뿌려졌기 때문에 거기서부터 새로운 미래의 희망의 터전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이 있다면 거기서부터 횡적인 세계의 발전을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연의 이치인 것입니다.

그 시대에 편안함을 누리고 당당한 권위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예수 같은 일개인을 아무것도 아닌 것같이 취급했지만, 그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던 예수가 로마제국을 제압하고 이스라엘 교단을 넘어 세계를 제패할 줄이야…. 그건 그 누구도 몰랐던 것입니다. 그 시대에 권위를 자랑하고, 그 시대에 생사문제를 좌우할 수 있는 특권계급에 있는 모든 권위자들은 그러한 사실을 몰랐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와 같은 권위를 가지고 새로운 세계 문화를 창건할 수 있는 주체적인 인물이란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사람들이 꿈에도 생각지 못한 내용을 가지고 하늘의 대신자로 사라져 갔지만, 그가 마음속으로 다짐을 하고 그의 마음속에 철석같이 굳어 있는 소망의 결합체는 새로운 나라 창건의 동기가 되고 새로운 세계 창건의 동기가 되고도 남음이 있었습니다.

온 천지의 운세가 공인하지 않을 수 없고, 천지를 창조하신 주인이 있으면 그분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철두철미하고 확고부동한 내적인 실체로서 심어졌기 때문에, 그와 더불어 인연맺고 찾아오는 천운-새로운 세계를 모색하는 하나님-은 그 터전을 통하여 새로운 세계로의 발전을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이 나타나는 때

하나님은 어떠한 사람에게 시대를 책임지게 하시느냐? 시대의 흐름에 보조를 맞추어 희희낙락하면서 하루의 행복을 찾아가는 사람에게 시대를 맡기려고 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오늘날 학교에서 학급을 중심삼고 볼 때, 스승이 그 학급에서 소망을 두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고 놀기나 좋아하고 환경에 보조를 맞추면서 하루 하루를 보내는 학생에게 소망을 두는 것이 아닙니다. 그 환경을 극복하면서 내일의 목적을 위해서 현실을 부정하고 노력하는 학생에게 스승은 소망을 두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생활 가운데서 볼 수 있는 사실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시대와 더불어 흘러가는 사조와 보조를 맞추어 흘러가는 군상이 아니라, 세계의 흐름을 가로막고 새로운 세계로 끌고 올라갈 수 있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은 그 사람과 더불어 보조를 맞추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지혜로운 사람은 어느 시기에 나타날 것이냐? 오늘날 현실에는 나타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현실에서 세계를 차지할 수 있으되, 세계적으로 지혜로운 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현실의 환경 가운데서 비운만을 맞습니다. 지혜로운 모습으로 나타나 지혜로운 내용을 갖고 지혜로운 자신을 갖고 사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늘보다 내일을 보장할 수 있고 내일보다 후세를 보장할 수 있는, 보다 미래적이요, 보다 가치적이요, 보다 고차적이요, 보다 세계적이요, 보다 천주적인 내용일수록 그것은 현실세계와 거리가 먼 것입니다. 현실과 거리가 먼 그것을 현실무대의 외적인 환경에 대비하고 내적인 결실을 통하여서 외적인 환경을 소화시키고 극복해 나가는 사람들로 말미암아 미래의 세계는 보장되는 것이요, 미래의 세계의 이념은 남아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우리는 역사를 미루어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현재의 위치에서 좋은 것에 도취되어 사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

그러면 어리석은 사람은 어떠한 사람이냐 하면 현재의 자기 위치에서 좋은 것에 도취되어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미래를 보장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희망의 세계를 추구하는 사상이라든가 이상이 있다면 그러한 것들을 상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연 적인 이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종교는 어떤 표준을 중심하고 나가느냐? 현실과 더불어 야합하고, 현실과 더불어 타협하고, 현실과 더불어 상응할 수 있는 내용을 가르쳐 주는 종교는 없습니다. 종교는 오늘을 극복하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에 있어서 희생하라고 강조합니다. 자기 자신을 부정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런 것은 현실 생활권내에서 그 누구도 환영하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를 부정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스스로를 긍정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성인데도 불구하고 그 본성을 무시해 버리고 그것을 극복하라고 강조하는 것은 역리적인 수단과 방법이요, 역리적인 교훈인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것을 왜 따라가야 되느냐? 미래는 현실로 말미암아 계승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위하는 터전으로 말미암아 계승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미래는 현실에 도취하는 무리로 말미암아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극복하려는 입장에서 미래의 소망을 갈구하는 무리들로 말미암아 계승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현실을 극복하려 하는 자리는 좋은 자리가 아닙니다.

현실에서는 비참한 자리입니다. 그런 비참한 자리에서 보다 더 가치적인 내용을 추구하는 인연을 통해서만 미래는 계승되는 것이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은 이런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루 하루의 생활을 위해서 사는 사람에게는 미래가 없는 것입니다. 그저 오늘 먹고 살 수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하여 내일은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동물과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로써 만족하고 이제 죽어도 한이 없다고 하는 사람은 그것으로 끝장을 보는 거예요. 하지만 사람이 고귀하다고 하는 것은 그 환경의 물결에 휩쓸려 흘러가는 생활을 요구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서 그 물줄기의 원천을 찾아 거기에서 솟아나는 샘물을 마시고 싶어하는 본연의 욕구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타락한 인간이 세파와 더불어 보조를 맞추면 타락한 권내에서 흘러가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타락권내에 있는 인간임을 자인한다면 그 원천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이것을 거슬러 올라가는데 있어서는 현실을 부정하고 극복할 수 있는 인격을 어떻게 형성할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 됩니다. 여기서 극복한다는 것은 현재의 대한민국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요, 아시아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보다 가치 있는 것은 세계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오늘날 이 시대뿐만 아니라 영원을 보장할 수 있는 자리를 바라면서 어려움을 기쁘게 극복하는 것입니다.

언제 그 소원의 때가 올지 모릅니다. 그때를 기다리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으로 보일는지 모르지만…. 절대자가 있다면 그 절대자는 누구를 좋아할 것이냐? 자기 일신을 위해 수난길을 극복하겠다는 사람보다도 천년 만년 인류가 소망하고 내가 소망했던 것이 내가 죽더라도 남아질 수 있다는 마음을 가지고 수난을 극복해 가겠다는 사람을 절대자는 좋아하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를 제일인자로 선택할 것이냐 하면 영원을 위해서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수고하는 사람을 선택하실 것입니다. 절대자는 반드시 그러한 무리들과 더불어 생활하고 그들과 더불어 모든 인연을 맺고자 하실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수많은 종교인들은 영원을 추구해 나가는 것이요, 오늘날 우리 인간들도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고 영원히 행복하게 살수 있는 세계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세계의 인연을 오늘날 현실적 생활환경에서 찾는다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일같이 보이고 지극히 허황된 일 같아 보일 것입니다. 만일 신(神)이 없다면 그런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고, 그것이 허황된 일로 끝날지 모르지만 신이 있다면 그런 사람들은 누구보다도 지혜로운 사람이며 그들이 하는 일은 무엇보다도 지혜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이 원수를 위해 복을 빈 것은 지극히 지혜로운 행동

예수 그리스도가 원수를 위해 복을 빌어 주는 그 사실은, 지금까지 역사노정에 있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왔다 갔지만 예수 그리스도만이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원수에게 복을 빌어 주었다는 사실은 역사시대에 없었던 새로운 일을 만든 것이었습니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원수와 원수 사이의 간막이가 터져 나갔고, 이것은 고립된 역사시대에서 서로 서로 자기를 중심삼고 행복을 추구했던 사람들에게 큰 교훈을 주었습니다. 큰 뜻을 품은 사람일수록 그가 가는 길이 복잡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수많은 원수들과 싸워야 합니다. 그러한 노정을 거치지 않고는 그 소원을 성취할 수 없습니다. 뜻을 품은 사람들이 가는 길에는 작은 원수, 큰 원수, 여러 종류의 원수들이 많기 때문에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하는 방법을 몰라 가지고는 그 크나큰 목적을 달성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당하는 환경에 있어서는 원수가 많기 때문에 그 모든 원수를 원수로 갚으려는 사상을 가지고는 미래에 찾아올 그 세계 앞에 참된 길을 남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원수를 위하여 복을 빈다는 사실을 원수가 알게 될 때는 저절로 원수가 갚아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상은 앞으로 먼 길을 가는 도상에 있어서 수많은 원수가 있을지라도 그들과 대적하여 싸우지 않고 물리칠 수 있는 동기가 되는 것입니다.

응당 원수를 갚아야 될 텐데도 불구하고 원수를 갚지 않고 도리어 원수를 위해 복을 빌었다 하는 말을 원수가 듣고 '저 사람은 그런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하게 된다면, 그 사람에게 원수를 갚아야 할 일이 있더라도 그 사람에게는 원수를 갚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간적인 측면에서 보면 지극히 어리석은 일 같지만, 지극히 지혜로운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새 출발의 동기를 마련해 놓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

이런 점에서 볼 때 오늘의 행복된 여건을 중심삼고 거기에 도취해 사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 아닙니다. 왜냐? 역사는 흘러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흘러가는 역사를 중심삼고 그 역사 가운데 무엇을 남겼다면, 후대 사람들은 무엇을 계승하고 싶어하겠느냐 하는 것을 두고 볼 때, 그 시대에 도취되어 살다가 간 그 사람의 마음이나 그 업적을 계승하려는 후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어떠한 사람의 것을 계승하려고 하느냐 하면, 그 나라와 그 사회에 있어서 어려움을 극복하고 안 되는 것과 어려운 것을 중심삼고 자기 일생을 희생해 가면서 미래의 소망이 될 수 있는 내용으로서, 남겨 놓은 업적이 오늘 현실의 입장을 보장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내일의 입장까지 보장할 수 있는 것을 계승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이 강하면 강할수록, 크면 클수록 그러한 내용을 가진 사람을 현재의 우리들은 역사적인 인물로 추모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역사과정에서 대한민국이면 대한민국의 영원한 행복과 영원한 발전을 위해서 희생한 사람이 있으면 오늘날 우리들은 그를 추모하는 것입니다. 추모하는 것이 역사과정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 생활에 밑받침이 되고, 악한 세계에 있어서 중심 적인 인격을 형성할 수 있는 현실적 바탕이 될 뿐만 아니라, 내일의 바탕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내용이 많으면 많을수록, 크면 클수록 그 큰 내용을 가진 사람들을 추구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 인간들이 아니냐.

오늘날 사람들이 성인들의 가르침을 중심삼고 이 시대를 요리하고 이 시대를 극복하려고 하는 것도 그러한 내용이 성인들의 가르침 속에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성인들의 가르침은 오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넘어서서 내일의 희망을 보장할 수 있는 내용이 깃들어 있기 때문에 역사를 넘어 남아져 나왔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성인들의 가르침 가운데에 그 시대와 더불어 만족하라는 내용은 없습니다. 기독교 사상에서도 '반드시 끝날이 온다. 끝날에는 반드시 선과 악을 가르는 대심판이 있다. 그러므로 끝날이 다가오면 올수록 행복한 것을 요구하는 것보다 더 절박한 것을 추구해야 된다. 보다 심각한 내용을 중심삼고 시련을 극복하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끝날이 온다고 좋아할 것이 아니라, 끝날이 될수록 극복해야 할 어려운 시련이 더 많기 때문에 그에 대비해 가지고 오늘 현실에서 자아의 신념을 갖고 실행하라고 강조하는 것이 성서의 가르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뜻을 품은 사람에게 있어서 그 끝날이라는 것은 한스러운 날이 아닙니다. 뜻을 품은 사람에게 있어서는 이 끝날이 오면 그야말로 소망하던 관문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자의 소망은 끝날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끝날은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는 내용을 지니기 때문에 그들에게 있어서는 끝날이야말로 최후로 바라는 고비라는 것입니다.

그 고비를 타개하기 위해서 수십년 혹은 일생을 투입하고 자기 일신의 전력을 다해서 그 고비를 밟고 넘어서게 되면, 내가 망하든 흥하든 결정적인 무엇을 남기고 소망의 한 날을 맞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끝날을 바라며 나가는 사람들은 오늘날 이 시대, 즉 현실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래야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온 희망을 끝날에 걸고 끝날을 넘어서 벌어질 새로운 그때에 관심을 갖고 나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사람을 누가 알아줄 것이냐? 그 시대와 더불어 흘러가는 인간들은 알아주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서는 '모두가 잘사는 세상에서 저렇게 유난스럽게 살게 뭐야' 하는 평을 받게 됩니다. 이렇듯 역사과정의 성인들은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위함을 받지 못했습니다.

위인들이라든가 그 나라의 애국자들 앞에는 일면 반대하는 무리도 있고 반대하지 않는 무리는 인륜에 의해서 같이 눈물을 흘려 주고 아픔을 같이 느끼면서 동정하는 무리도 있었지만, 성인들이 가는 길 앞에는 그런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민족 가운데 어느누구 하나 동정하지 않는 외로운 자리에서 자기 생명을 이어간 대표적인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런 예수 그리스도에게 십자가가 다가온 그 시간은 일생을 결판짓는 최후의 순간이 아니라 새로운 소망이 출발하는 시간이요, 새로운 소망의 씨를 뿌리는 순간이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소망의 세계의 끝이 아니라 소망의 세계의 출발이 예수님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한 참되게 심어진 것은 반드시 참되게 싹이 나고 참되게 자라서 참된 열매로서 거두어지는 것이 천지의 이치입니다. 그러기에 그러한 사람은 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인 인물은 그 시대에 환영을 받고 산 사람들이 아니고, 그 시대에 쫓기고 비운의 역사와 더불어 사라져 간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역사가 지나 그 인격을 찬양하게 되는 역사적인 사실들을 두고 볼 때, 어떤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냐? 그 시대와 더불어 보조를 맞추어 살다 간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 아닙니다. 그 시대에 역행하는 이치를 따라서 그 시대에 역설적인 법도를 따른 입장에 섰기 때문에, 그 시대에는 환영을 못 받고 배척을 받아 가면서 비운아로서의 생애를 마치고 갔지만,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새로운 시대를 출발할 수 있는 동기를 마련해 놓고 간 지혜로운 사람들이라는 것을 우리가 아는 바입니다.

지혜로운 교단으로 남아져야 하는 통일교회

이렇게 볼 때, 통일교회는 어리석은 교단이 될 것이냐, 지혜로운 교단이 될 것이냐? 한민족은 어리석은 민족이 될 것이냐, 지혜로운 민족이 될 것이냐? 또 세계는 어리석은 세계가 될 것이냐. 지혜로운 세계가 될 것이냐? 이것은 개인에서부터 세계 전체에 적용되는 문제입니다.

우리 통일교회는 어리석은 교단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오늘날 현재의 사조와 보조를 맞추어 거기에서 행복을 찾으려고 하는 교단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천년 후, 만년 후의 행복을 위하여 오늘의 어떤 어려움도 극복하고 싸워 나가는 교단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런 교단이 가는 길은 외로울 것입니다. 하지만 외롭더라도 좋다는 것입니다.

종으로서 종들에게 인정을 받을 것이냐, 아니면 같은 입장의 종들로부터는 인정을 못 받더라도 주인에게 인정을 받을 것이냐 하는 것을 생각해 봅시다. 다시 말하면 같은 입장에 있는 동역자들로부터 인정을 받는 것을 좋아할 것이냐, 아니면 동역자를 지도하는 지도자로부터 인정받는 것을 좋아할 것이냐 할 때, 자기 동역자들로부터는 공인을 못 받아도 좋다는 것입니다. 그 지도자가 아무리 어리고 병신이라 해도 그에게 공인을 받는 것이 더 좋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많은 민족이 반대하고, 많은 민족 앞에 공인을 받지 못하더라도 앞으로 민족을 지도할 수 있고, 미래의 참된 민족의 지도자로서 설 수 있는 사람으로부터 공인을 받아야 합니다.

선한 나라는 아직까지 지구상에 나타나지 않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가 소망하는 선한 나라와 선한 주권은 지구상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선한 백성이 지지할 수 있는 생애를 위해 죽음길을 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결코 불쌍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역사를 창건하고, 그가 남긴 사상과 그가 생활환경에 남긴 인연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전통은 계승될 것이요, 새로운 세계는 창건될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그런 사람은 지극히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역사시대에 무가치하게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에 있어서 무한한 가치의 소유자로 공인받을 수 있는 사람으로서, 위대하다면 위대한 사람으로, 참된 사람이라면 참된 사람으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오늘날 보통 어리석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내용으로는 심어지고 거두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통일교회는 지금까지 외로운 길을 수십년 걸어왔지만 앞으로도 그런 외로운 길을 가야 되겠습니다. 현재 대한민국의 주권자들 가운데는 자기 자신의 향락을 위해서 국가와 민족을 속여 자기 배를 채우려고 하는 사람이 있을는지 모르지만, 그런 사람들은 흘러가는 것입니다. 여지없이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태산 같은 시련이 다가오더라도 극복하겠다고 해야 됩니다. 현재에 사람들로부터 비판을 받고 몰림을 받더라도 미래의 한국을 위하여, 미래의 세계를 위하여 말없이 그 어려움을 극복하는 무리가 있다면 대한민국과 세계의 운세는 그들로 말미암아 새로운 방향으로 흘러갈 것입니다. 세계의 민족 앞에 있어서 불쌍한 민족이지만 이 민족 가운데 인류가 가지 못하는 수난길을 가고, 세계 만민이 바라지 못하는 소망을 갖고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는 단체가 있다면 그 단체로 말미암아 이 나라도 살고 이 세계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단체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단체인 동시에 세계를 대표하는 단체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그러한 개인과 단체를 세워서 역사를 맡기고 역사를 상속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이 보다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친구를 사귈 때 그저 오늘 만나는 그것으로 끝나는 친구는 건성 친구입니다. 그 이상 소망이 없는 친구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길을 가고 수난길을 가더라도 오늘 만날 때보다 다음에 만날 때 그 무엇인지 모르게 자극을 받고, 그 무엇인지 모르게 충격을 받고, 그 무엇인지 모르게 좋은 결심을 하게 하는 내용을 가진 친구가 있다면, 아무리 어렵고 외로운 자리를 거쳐가더라도 그 친구를 따라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들은 오늘을 위하여 사는 길을 가지 않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오늘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거예요. 역사적인 위인들이나 성인 현철들을 볼 때, 그들은 그 시대를 위해 산 것이 아니라, 모두 내일을 위해 살았던 것입니다. 미래를 위하는 그 한계가 민족적이냐, 국가적이냐, 세계적이냐, 천주적이냐 하는 차이가 크면 클수록 그 소원은 멀어지는 것이고, 또 그만큼 막연해지는 것입니다. 그런 막연한 걸음을 수많은 뜻있는 사람들이 지금까지 걸어 나온 것입니다. 이 막연한 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사상체계가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날 통일교회의 통일원리와 같은 사상체계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서 이런 어려움을 극복할 경우 결과는 이렇게 될 것이다' 하는 식의 논리적인 법칙에 의해서 증명이 가능한 사상이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이런 점에서 볼 때 오늘날 통일교회가 가는 길은 세계의 어떠한 지성인이나, 어떤 훌륭한 뜻을 품은 사람보다도 높은 차원에 입각한 지혜의 터전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가는 과정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가고 난 후에는 행복할 수 있지만 가는 과정이 행복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가는 과정이 비참하면 비참할수록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이 되는 것입니다.

초민족적인 사상을 실천해야 할 통일교인들

오늘날 대한민국을 보면 남한과 북한의 극한 대립 상황이 점점 절정에 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어느 쪽이 승리를 거둘 것이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자타가 공인하듯이 대한민국은 위기일발에 사로잡혀 있다고 볼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위기감에 사로잡힌 상태로 끝날 것이냐? 이런 상황에서 대한민국으로 하여금 위기를 극복하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은 어떠한 사람일 것이냐? 현실 사회에 있어서 자기의 행복을 찾고, 안일을 모색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현실을 부정하고, 내일의 소망을 보장하기 위해서 스스로를 부정하는 입장에 선 사람, 그런 사람들로 말미암아 대한민국의 위기는 극복될 것이고 미래는 계승될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생각할 때, 오늘날 통일교단에는 대한민국의 그 누구도 하지 못하는 일을 해야 될 책임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그러면 사람에게 있어서 행복의 기준은 무엇이냐? 정서적으로 갖추어진 기반이 없이는 행복의 터전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서적인 모든 터전까지도 극복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1971년을 기해 축복가정 부인들을 동원한 것은 크나큰 의의가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 동원 자체만을 놓고 보면 가정의 파탄이며 현실의 부정입니다. 현실적으로는 손해입니다. 천만사에 마이너스를 가져올 것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것을 부정할 수 있는 동기가 무엇이냐? 이것은 과거를 위한 부정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부정입니다. 현실에 남아지는 것은 철두철미한 미래의 내용이 현실에 닻을 내리기 때문입니다. 이 현실은 미래의 터전 위에 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한민국이 현실과 더불어 망하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미래를 위한 닻을 갖고 있고, 미래의 터전 위에 서 있는 통일교단은 망하지 않습니다.

어려움을 피해 가려 하는 것이 타락한 우리 인간의 본성입니다. 어려움을 좋아하는 인간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어려움이란 누구의 어려움이냐? 그것이 나 자체의 어려움이라 할 때는 내가 그 어려움으로부터 도망을 간다고 해서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짓고 아무리 도망을 가더라도 그 어려움은 자기를 따라다니는 것입니다. 아무리 도망을 가서 산중에 숨어 있더라도 자기 어려움은 그 가슴 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자기를 넘어 국가적인 어려움을 붙안고 나가게될 때는, 미래가 있기 때문에 현재에 아무리 어려운 고난이 있고 수난이 있더라도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현재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괴로움을 극복하고 이것을 제압할 수 있는 것입니다.

현재의 어려움을 능가할 수 있는 사랑의 마음을 갖게 되면 애국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나라의 미래는 새로이 출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것을 알고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야 합니다.

그러면 오늘날 대한민국이 세계 앞에 필요한 국가로, 그리고 후대의 세계 만민이 필요로 하는 나라중에 최고의 나라로 등장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물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경제적인 분야에서 뒤떨어져 있으니까 '그럴 수 없다'라고 말할는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앞으로 세계 만민이 추구할 수 있는 사상을 우리나라의 사상으로 삼아 가지고 다가올 세계적인 수난을 극복할 수 있는 책임을 세계를 대신해서 지고도 남을 수 있다 할진대는, 앞으로 세계를 지도할 수 있는 국가와 민족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통일교회에서 주장하기를 '국경을 초월하자. 초민족적인 신념을 오늘날 생활무대에 집중시키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느냐?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한민족의 입장에서 볼 때 일본사람들은 원수입니다. 용서할 수 없는 원수입니다. 피로 맺힌 원수입니다. 그 원한은 피의 대가를 치르지 않고는 풀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원수 관계를 극복하여 사랑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능하겠습니까? 한국과 일본은 문화적 배경이 다르고, 역사적인 배경이 다릅니다. 그리고 주권자도 다르고 국민으로서 의무도 다릅니다. 사회체제에 있어서도 부딪히는 것이 많습니다. 그런데도 그런 어려움들을 극복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일본 민족을 중심삼고 생각해 볼 때, 일본 민족 가운데 한국의 전통이나 풍습을 따르는 입장에 선 사람이 있다면 일본 사람들은 그를 보고 '한국풍이다. 한국패다'라고들 할 것입니다. 그 패들 가운데 '나는 미스터 문이라고 하는 사람을 중심한 그런 사상을 갖고 있는데 그 사상은 이러이러하다' 하는 사람은 단일민족으로 천황을 위주로 한 국수주의 사상을 중심삼는 일본 민족에게는 배치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을 한편으로는 매국노와 마찬가지로 봅니다. 구보끼 협회장이 그런 평을 받고 있습니다.

이것이 점점 커가면 커질수록 반기의 기세는 상대적으로 커갈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럴수록 그런 어려운 환경을 극복해 내야 할 것이 일본 통일교회 신도들의 사명입니다. 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미국에서는 '통일교회 사상은 극우사상이다' 해 가지고 CIA에서까지 문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런 등등의 문제가 많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영원한 미래를 보고 사는 사람일수록 지혜로운 사람

현재에 있어서 환영을 못 받는다고 해서 나쁜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은 어차피 망해야 되는 것입니다. 청산지어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는 민주세계에서도 환영을 못 받고 공산세계에서도 환영을 못 받고 있습니다. 승공이라는 레테르를 들고 나왔기 때문에 공산당까지도 우리를 원수시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외로운 패들이 아닙니다. 외로운 무리가 아니예요. 또한 무용한 패도 아닙니다. 말은 없지만 무엇인가 하고 있는 패입니다. 아직 싹도 나오지는 않았지만 싹을 틔우기 위해서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지각을 터뜨리고 나오게 될 때에는 그 원천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 내용이 충실하면 충실할수록 세계적인 것이 안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 통일교단은 대한민국을 대표해 가지고 선두에 서서 싸워 나왔습니다. 우리에게는 원수가 많았습니다. 승공연합만 중심하고 보더라도 반공연맹이 그렇게 못살게 했습니다. 근 2년 동안 있는 힘을 다하여 반대했지만 실력대결에 있어서 결코 지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바라는 뜻이 영원한 미래의 뜻인데도 불구하고 오늘날 현실권내에서 우리가 촉감을 가지고 그것을 감지할 수 있고, 우리의 시야를 넓혀 응시할 수 있는 시대권내에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엄청난 사실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시대에 서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기 스스로의 정체를 확실히 알지 못하는 자는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절박한 사명이 우리 앞에 다가오는데도 불구하고, 현재의 이 시대와 더불어 흘러가 버리고, 흔적 자체도 남김없이 망할 수 있는 환경에 발을 디뎌 끌려가는 통일교회 패는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통일교회패가 못 되는 것입니다.

환경이 어지러우면 어지러울수록 우리의 때가 가까와 오는 것입니다. 들려오는 소문이 점점 절박할수록 우리의 끝이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때가 가까이 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장벽을 헤치고 나가는 날에는 세계는 우리로 말미암아 새로이 출발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미래를 위해서 사는 사람입니다. 왜 그러냐? 타락한 인간은 소망의 세계를 찾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역사는 하나의 세계를 추구해 나가면서 발전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어떻게 될 것이냐? 하나의 세계를 이룰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의 세계의 이념을 위해서 사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복잡한 환경 속에서라도 하나의 세계를 향하여 가는 것입니다.

현세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가정과 자기 사회를 중심삼고 살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 가정을 끊고, 그 사회를 끊고 미래를 위하여 살자는 것입니다. 그 미래의 세계를 이루기 위해서 현재를 부정하는 입장도 무난히 거쳐 갈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이중적 내용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미래를 위하여 사는 사람이고, 어리석은 사람은 현재를 위해 살면서 미래는 모르는 사람입니다. 배가 고프면 싸워서라도 빼앗아 먹는 그런 사람은 동물과 같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미래는 가까운 미래가 아닙니다. 영원한 미래를 바라보고, 큰 미래를 바라보고 사는 사람일수록 더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큰 사람이면 큰 사람일수록 그의 계획이라든가 그의 소망은 1년, 2년에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천년 만년이 지나가더라도 그 계획권 내에서 벗어나지 않는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위대한 사람이요, 성인입니다.

신념을 가지고 현실을 극복하라

미래라 하면 어떤 미래냐? 오늘 좋았으면 내일도 좋아야 되고, 10년까 지도 좋아야 되고, 영원히 좋아야 합니다. 통일교인 가운데 어떤 사람은 '내가 10년 동안 이 길을 왔는데 이꼴이 됐어? 라고 합니다. 이건 기가 막혀요. 10년간 왔는데 누구를 위해 왔다는 것입니까? 하늘을 위해서 왔느냐, 아니면 자기를 위해서 왔느냐? 자기를 위해서 왔다는 게 말이 돼요? 10년 동안 뜻을 위해 왔는데, 이제 와서 누구에게 불평을 합니까? 뜻을 중심삼고 불평하는 거예요? 그런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자기를 위해서 지금까지 왔다면 입교하지 않은 사람보다 더 나쁩니다. 왜? 믿지 않는 사람들은 불평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뜻을 위하여 나왔으면 불평없이 계속 뜻을 위해 나가야 됩니다. 뜻은 영원한 뜻이지 몇십년 나가다가 그만둘 뜻이야! 여러분이 이걸 알아야 됩니다. 사람이 어떤 목적을 위해 출발을 했으면 그 목적을 위해 죽을 수 있어야 됩니다. 가다 말고 자빠져 가지고 아이고 힘들다고 해봐야 누구도 동정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마라톤대회 같은 데 나가 달리는 데 있어서도, 코스를 따라 있는 정성을 다하여 선두에서 달리다가 죽으면 그를 동정하지만, 경기규칙을 어기면서 달리다가는 국가를 망신시키고 '그놈의 자식' 하는 욕을 먹게 됩니다. 법이라는 것은 조금이라도 어기면 그 조그마한 것이 그 사람의 형태와 인격 전부를 하늘이냐 땅이냐로 결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죽더라도 정의를 위해 죽어야 합니다. 망하는 데도 정의를 위해 망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망해도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불평을 가지고 죽으면 그 누구도 절대로 동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늘은 동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떨어지는 낙엽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낙엽을 붙들고 사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불평이라는 것은 신앙길에 있어서 장애물입니다.

소망과 더불어 사는 사람은 언제나 건설적이요, 언제나 새것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만나면 시시하게 지나간 날들을 가지고 어떻고 저떻다고 하는 것보다 내일의 소망을 중심삼고 뜻이 이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가야 된다고 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라야 만나도 맛이 납니다. 보따리 풀어 놓고 나쁜 것은 모두 갖다 쌓아 놓는 사람과는 만나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사탄보다 더 나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거렁뱅이입니다. 거렁뱅이예요. 그러한 사람들은 뜻과 상관없는 사람입니다. 나는 그런 사람을 제일 싫어합니다. 자기가 한 말을 책임지지도 못하고…. 말 한마디를 해도 뜻을 위하고 뜻을 생각하고 해야 합니다. 내가 이 말을 하면 뜻 앞에 플러스가 될 것인지 마이너스가 될 것인지를 생각해 가지고 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스스로 알 수 있습니다.

현실의 행복을 찾는 길이 소망의 길이 아니며, 현실의 안일을 추구하는 길이 소망의 길이 아닙니다. 현재 대한민국의 경제부흥을 중심삼고 볼 때도, 제1차 5개년 계획, 제2차 5개년 계획, 제3차 5개년 계획 등의 경제계획을 세워 현재의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것입니다. 극복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극복하면 그 이상의 자리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이상의 자리에 서게 되면 자기만 좋은 것이 아니라 후손까지도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극복하지 못하면 자기만 나쁜 것이 아니라 후손에게는 더 나쁜 것입니다. 이게 길이 남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혜로운 사람은 미래를 위해 사는 사람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미래의 후손과 미래의 나라와 미래의 인류를 위해서 사는 사람이고, 어리석은 사람은 현재의 자기를 중심삼은 가정과 아들딸과 어머니 아버지만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전체와 미래를 긍정하는 사람이요, 어리석은 사람은 전체를 위로하지 못하고 미래를 부정하고 현재 눈앞에 보이는 것을 절대시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자(智者)와 우자(愚者)라는 말이 생겨난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중심삼고 여러분 자신을 생각해 보세요. 통일교회에 들어올 때는 20년이면 20년 계획을 세워서 '나는 이렇게 나갈 것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이렇게 갈 것이다' 하는 신념을 가져야 됩니다. 그렇게 나가는 데는 이런 저런 일이 부딪칠 것입니다. 나중에는 선생님까지도 박차 버릴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 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내가 생명시하고 따라가던 선생님까지 나를 박차 버릴 때가 있을 것인데 그럴 때는 어떻게할 것이냐? '나는 이렇게 간다' 하는 신념을 갖고 나가다가 그런 때가 오거든 때가 왔다고 생각해야 됩니다. 만일 그릇된 자리에서 선생님이 여러분을 저버린다면 선생님은 망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저버림을 당한 그 사람은 후대의 기수, 후대의 대표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현실에서 결판난다

어떤 사람을 보게 되면 축복받기 위해서 뜻길을 간다고 합니다. 축복받기 위해서 뜻길을 간다는 거예요. 축복만 받으면 그게 전부입니까? 축복을 받으면 개인복귀, 가정복귀, 종족복귀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축복은 종족을 복귀하기 위해 받는 것입니다. 내용이 그렇습니다. 혼자는 종족을 복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종족을 복귀하려면 가정이 필요합니다. 종족을 복귀하는 것은 민족을 복귀하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민족을 복귀하는 것은 주권을 복귀하기 위함이요, 주권을 복귀하는 것은 세계를 복귀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축복만 받으면 됐지' 한다는 것입니다. 이래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축복가정 전체를 동원했는데, 축복가정 중에 지금까지 동원되지 않은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두고 보라는 것입니다. 말할수 없이 탄식할 때가 올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 후손들이 참소할 것입니다. 그러려면 차라리 축복을 받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

그런 가정은 가정 중에 지극히 어리석은 가정입니다. 개인 중에도 지극히 어리석은 개인이 있는 것처럼 가정 중에도 지극히 어리석은 가정이 있습니다. 또한 씨족 가운데도 그런 가정을 중심삼은 지극히 어리석은 씨족이 있습니다. 반면에 지극히 지혜로운 씨족도 있습니다. 이렇게 갈라지는 것입니다. 앞으로는 지극히 지혜로운 민족도 있을 것입니다. 지혜로운 민족이 없으면 세계는 망하는 것입니다. 또, 지극히 어리석은 민족도 있을 것입니다. 그 민족은 이미 망한 것과 같습니다.

세계 가운데에는 지극히 어리석은 나라들은 사라질 것이고 지극히 지혜로운 나라가 나타날 것입니다. 그것은 현재와 짝하여 사는 사람 가운데서는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왜? 인간은 타락하여 현재를 버리고 미래를 찾아가야 할 운명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재에 뿌리를 내린 사람은 현재와 더불어 흘러가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미래에 뿌리를 박고 사는 사람에게는 앞으로의 세계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찾아가기 때문에 가까와지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때가 오면 그 사람이 그 세계에 들어가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의 위치가 이런 입장에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러한 입장에서 자기 생애를 넘어 가지고 미래를 찾아갔습니다. 미래를 바라보고 사는 사람 가운데 뜻을 품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선생님 자신이 생애를 바쳐 가지고 여러분이 알지 못하는 청춘시대에서부터 지금까지 싸워 나온 것은 오늘날 통일교회 여러분을 만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은 지나가는 과정입니다. 아직까지 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쉬지만 나는 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정지하고 있어도 나는 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떨어질는지 모르지만 통일교회 문선생은 떨어진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습니다. 꿈에도 생각할 수 없어요. 그런 생각을 할 시간이 있으면 어떻게든 한 발짝이라도 더 가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어려운 때가 오면 올수록 여러분과 선생님과의 거리는 배가될 것입니다. 그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투입하여 가지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싸움을 계속해야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통일교회에 핍박이 없다고 해서 선생님이 가는 길이 평탄한 길이 아닙니다. 선생님은 계속적인 투쟁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핍박이 없는 만큼 선생님이 공세를 취하는 것입니다. 밤이나 낮이나 기습작전도 해야 됩니다. 여러분이 모르는 가운데 이러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디에 가서 그 결전장을 맞을 것이냐? 이 결전장을 몰라 가지고 왔다 갔다하는 사람은 통일교회 식구가 될 수 없는 것이요, 영광된 승리의 개선가를 부를 수 없는 것입니다. 눈을 똑바로 뜨고 지도하는 방향과 코스를 따라 행동하기에 급급해야만 최후의 승리의 한날을 맞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핍박을 받으면서도 지금까지 이만큼 끌고 올라온 것입니다. 누구도 환영하지 않는 무대에 나의 정성과 힘을 투입시켜 가지고 거기에 뿌리를 내려 오늘의 기반을 닦아 나온 것입니다. 현실을 위해서 싸워 나온 것이 아니라 미래를 위해서 싸워 나온 것입니다.

보다 미래를 위한 내용을 가지고 있다면 현실에서 가치와 보람을 찾지 못한다고 해도 망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남을 수 있고 영생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내용을 갖고 사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혜로운 사람은 강하게 사는 사람이요, 공익을 위해 사는 사람입니다. 공적인 이익을 위해서는 자기 일신을 희생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관(觀)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의 반열에 참석할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입장에 서지 못하는 사람은 역사와 더불어 흘러가 버리고 만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 여러분 자신들이 뜻을 품고 행동하는 데 있어서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입장에 서느냐 안 서느냐에 따라, 미래와 접근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문제가 현실 생활 무대에서 결정된다는 것을 알고, 이 현실이야말로 미래의 심판대요 과거의 심판대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주기 바랍니다.

​기 도

​사랑하는 아버님, 아버님께서 지금까지 싸워 나오신 그 싸움의 노정에 있어서 슬플 때나 외로울 때나 고통스러울 때나, 당신은 지나 가는 역사적 환경을 넘어서시기 위해 그 환경에 미련을 두지 않고 싸워 나오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오로지 미래의 한날만을 바라보시며 싸워 나오셨다는 것을 아옵니다. 싸우는 모든 동기도 미래 때문이요, 싸우는 과정도 미래 때문이요, 싸우는 목적도 미래 때문이라는 것을 또한 아옵니다. 그러한 자리에 계신 분이 아버지이신 것을 생각할 때, 아버지의 아들 딸이 되어야 할 저희들도 싸우는 것이 오늘날 현실을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위해 싸우고 미래를 위해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해야 되겠습니다.

모든 전부는 미래에 집중시키기 위한 것이며, 그 미래는 현실과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 상응될 수 있다는 것을 아옵니다. 당신은 끝날을 위하여 인류역사를 이끌어 나오신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이와 같은 섭리노정에 있어서 역사적인 섭리의 모든 정점이 통일교단 앞에 나타난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오늘날 통일교단이 따라 나온 수난의 길은 그 누구도 찬양하고 그 누구도 기쁨으로 맞을 수 없는 외로운 길, 어려운 길이었으나, 그것으로 끝장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어려운 과정을 거쳐 미래와 상응할 수 있는 상대적인 세계를 맞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옵니다. 이런 역사적인 한때를 맞이한 통일교단인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말세와 미래의 출발이 연결될 수 있는 한 시점에서 오늘 세계정세를 바라볼 때, 통일교단이 제시하는 내용과 상응적인 인연을 갖추고 연결되고자 하는 실상을 보고, 오늘 저희들은 각자가 해야 할 책임이 얼마나 지중한가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여기에서 저희들은 아버님이 기뻐하실 수 있는 심정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저희들은 현실적인 무대에서 세계와 더불어 살아야 되겠고 천지와 더불어 살아야 되겠습니다. 아버지와 더불어 현실 무대에서 살지 않으면 안되겠사옵니다. 그래야만 미래의 출발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기뻐하실 수 있는 자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심판을 받는 데 있어서 영영 사라져 버려야 할 현실적인 모든 것을 저희 앞에서 송두리째 벗겨내고, 미래의 전체적인 내용을 저희의 생활노정과 생애노정에 뚜렷이 나타내어, 세계의 끝날과 더불어 하나될 수 있는 진리를 갖추게 될 때에, 여기서부터 영원한 소망의 나라는 찾아질 줄 알고 있사옵니다.

그럴 수 있는 때가 우리의 시야에 다가온다는 것을 생각하고, 이때야 말로 우리가 있는 정성을 다해야 할 때라는 것을 스스로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전체 교단이 통합하여 그러한 때를 맞이할 수 있는 준비를 해야 되겠고, 전체 가정이 보조를 맞추어 그러한 때를 맞이할 수 있는 준비를 해야 할 때인 것을 알고 있사오니, 아버지시여, 저희 전체의 마음 마음을 수습하시어 최후의 장벽을 밟고 넘어서기에 부족함이 없는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니다.

이때에 책임을 못해 가지고 천만세에 한을 남기고 하늘땅 앞에 저주를 받는 무리가 되어서는 안 되겠사오니, 승리의 한날을 맞이하여 만세에 찬양을 받을 수 있는 지혜로운 왕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이제 스스로의 마음 가운데 결심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미래의 한날을 위해 오늘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동기로 삼았는지, 오늘의 모든 여건이 미래의 승리를 위한 방패의 조건으로 세웠는지, 스스로 반문하고 세우지 않았거든 다시금 다짐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시련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그 사정으로 내일을 위할 수 있는 보장자요, 현실을 청산할 수 있는 청산자로 설 수 있다는 자신을 가진 아버지의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니다.

오늘은 안식일이기에 남한 각지에 널려 있는 당신의 자녀들과 세계에 널려 있는 당신의 자녀들이 이곳을 흠모하면서 당신을 부르고 있을 줄로 아옵니다. 하오니 그런 곳곳마다 당신의 거룩함을 나타내 주시옵고, 내일의 소망의 실체가 될 수 있는 기원이 그들의 생활환경을 이끌어 나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그들이 현실적인 어려움을 극복하고도 남을 수 있는, 아버지께서 바라보시고 사랑하시고 믿으시기에 부족함이 없는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나이다.

금후에 가야 할 통일교단이 당신의 운명과 더불어 당신의 노정과 보조를 맞추게끔 채찍질을 해서라도 몰아 주시옵고, 당신과 더불어 일치할 수 있는 행동을 하여 승리의 그날까지 동참할 수 있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가 희생의 길을 가더라도 아버지와 더불어 갈 수 있는 있는 기쁨을 스스로 찾아 나갈 줄 아는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오늘의 전체를 맡아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이달과 이해에 계획하는 모든 것이 당신께서 뜻하신 섭리의 노정과 함께 일취월장하여 당신께서 기뻐할 수 있는 결과로 나타나, 그 기쁨을 아버지 앞에 돌려 드릴 수 있는 그날이 속히 오게 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나이다. 모든 전체를 아버지께서 맡아 주실 것을 부탁드리며 참부모의 이름으로 아뢰었사 옵나이다. 아멘.

[기 도]

사랑하는 아버님, 이달 들어 두번째 맞는 안식일 이 아침, 당신의 어린 자녀들이 이 자리에 모였사오니 당신께서 이 자리를 살피시옵소서. 백여 명의 심령을 귀히 보시옵소서.

각자의 모든 생활이 당신의 뜻과 언제나 상응하면서 당신께서 소원하시는 복귀노정 위에 자신들의 생활과 생애노정을 일치시켜야 할 사명이 있는 것을 생각할 때마다, 높고 귀하신 당신의 뜻 앞에 저희들은 언제나 낮고 천하고 부족한 모습들인 것을 잘 알게 되옵니다. 그 간격의 차이가 크면 클수록 그 간격을 메우기 위해서 저희들의 수고와 노력보다도 아버지의 수고와 노력이 얼마나 더 컸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내가 외로운 자리에 서게 될 때 아버지께서는 나 이상의 외로운 자리에 서지 않으면 안 되었고, 내가 지치고 괴로운 자리에 서게 될 때 아버지께서는 그 이상의 자리에서 극복의 생활과정을 거쳐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사실을 이 시간 저희들은 다시 한 번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아담 가정에서 타락의 한날을 만든 한을 인류역사노정에서 한 순간도 넘지 못한 연고로, 아버지께서 역사과정을 통하여 험난한 노정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되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가인과 아벨이 생활권내에 있어서 아버지를 중심삼고 순응해야 할 극복의 한 장면을 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역사과정에서 피어린 투쟁의 역사가 아직까지 꼬리를 물고 돌아가고 있는 것을 저희들은 또한 알고 있사옵니다.

그와 같은 운명에 연연하는 저희 생활과정과 생애노정에 이것이 고착되어 하루하루의 인생길을 막고 있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저희들은 이를 악물고서 이 운명의 악순환을 타파하지 않으면 안 될 책임이 있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과거의 조상들도 이 한 극복의 장면을 넘기 위하여, 노아 할아버지는 120년 동안을, 아브라함, 이삭, 야곱도 120년의 기간을 통하여 극복의 탕감노정을 넘기에 얼마나 많은 수고를 하였던가를 저희들은 알고 있습니다. 모세도 역시 80년의 수난길을 걸었사옵고, 또한 예수를 중심삼고 시대적인 극복의 환경을 넘어가야 할 이스라엘 민족이 그 환경을 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수천년 피어린 유랑의 민족으로서 수많은 민족의 조롱과 핍박을 받으면서 극복의 한 장면을 넘기 위해 나왔다는 것을 저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기독교 전체 역사를 통틀어 보게 될 때, 개인의 극복과 가정의 극복과 종족, 민족, 국가의 극복을 통하여 승리의 천국을 이 땅 위에 건설하시려던 아버지께서 그 소원성취의 한날을 보지 못한 연고로, 세계를 돌고 돌면서 그 한날을 추구해 나오셨다는 것을 저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개인이 나라를 대신할 수 있는 극복의 노정이 있고, 가정이 나라를 대신할 수 있는 극복의 노정이 있으며, 종족과 민족이 나라를 대신할 수 있는 극복의 노정이 있고, 승리의 권한을 가진 그 나라는 천주를 대신하여 극복하여야 할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저희들은 알게 되옵니다.

이런 모든 인생의 노정, 역사의 노정, 인류의 노정에 수난과 투쟁의 역사가 쌓이고 쌓여 있는 것을 저희들이 알면 알수록 그 모든 배후에는 아버지의 극복의 투쟁역사가 얼룩져 있는 것을 저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피와 눈물의 교차로가 여기에 엉클어져 있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수난길을 연이어 나오신 아버지의 복귀의 역사는 수많은 민족을 넘고 국가를 넘어 아시아의 이 한국땅을 찾아왔던 사실을 저희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피의 복귀의 노정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참고 또 참으면서 불쌍한 한민족을 찾아오신 아버지의 그 뜻을 이 민족은 알지 못하였으나, 당신께서는 저희들의 마음을 고이고이 더듬으시면서 얼마나 속아 왔고, 얼마나 간절히 기대해 왔는가 하는 사실을 저희들은 알아야만 되겠사옵니다.

아버지, 저희들이 정성어린 모습으로 아버지를 대한다 할 때, 그 정성은 자기 일대에 한한 어떠한 행위나 말로 하는 정성에 지나지 않사오나, 아버지는 복귀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천추의 심정을 다 기울인 정성으로 역사의 한의 고빗길을 걸어온 것을 생각하게 될 때, 그 길이 얼마나 지루하고 얼마나 괴로운 길이었겠는가를 저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부족한 자녀들이 오늘 여기에 모였습니다. 아버지께서 걸어오신 수난의 길 앞에, 아버지께서 걸어오신 피어린 투쟁의 노정 앞에, 아버지께서 걸어오신 십자가의 형극 앞에 저희 자신들은 무엇을 찾기 위해 여기에 나와 있사옵니까? 나 자신의 영광과 영달을 위해서 나온 것이 아니옵니다. 오직 당신의 불쌍하고 처량한 그 고빗길에 있어서 하나의 고임돌이 되고 길을 바로잡아 주는 사람이 되기 위해 저희들은 나가야 되겠습니다.

당신의 슬픈 행로에 있어서 저희로 말미암아 위로를 받으시옵소서. 힘없는 당신의 모습 앞에 사랑하는 아들딸의 모습으로서 희망에 가득찬 신선한 자극제가 되어야 되겠사옵니다. 하오니 불쌍한 자녀로서 머무는 모습이 아니라, 새로운 한날을 자각하고 내일의 소망을 다짐하면서, 이 아침 아버지 앞에 거룩한 역사적인 터전을 상속받을 수 있는 아버지의 아들의 모습이 되고 딸의 모습이 되게 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와 나, 나와 아버지와의 관계에 있어서 상하관계에서뿐만이 아니라 전후관계에서 일치점을 찾아 나오신 아버지의 수난길을 생각하게 될 때, 인간은 언제나 가증된 모습이옵니다. 언제나 자기를 중심삼고 생각하고, 자기를 중심삼고 결론을 짓고, 자기로 말미암아 복의 근원이 되기를 바라고, 자기로 말미암아 결실의 그 무엇을 찾는, 아버지께서 원치 않는 가증스러운 인간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타락한 후손이기 때문에, 인류의 조상이 그러했기 때문에 저희 자신들도 그러한 자리에 있는 것이 옵니다. 하오니 아버지께서 이러한 모든 악의 요소를 제거시키시옵고, 선과 일치될 수 있는 하늘의 마음이 저희의 몸과 마음에 스며들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 이 자리를 살피시옵소서. 찾아오신 당신의 소망의 뜻 앞에 환희의 얼굴을 가지고 아버지를 맞아들일 수 있는 아들이 있고 딸이 있거든 기쁜 마음으로 그 자식을 품어 주시옵소서. 허락하신 축복으로 그들에게 복을 내려 주시옵소서. 높고 귀하신 내일의 소망과 더불어 그들에게 환희의 한 시간을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니다. 만일 그렇지 못하거든 아버지께서 불꽃 같은 눈으로 살피시어서 각자의 마음속 깊이 살아 있는 죄악의 쓴 뿌리를 몽땅 뽑아 주시옵소서. 당신이 심판의 권한으로 제거하여 주시옵길,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온유겸손한 자는 복이 있다 했사오니, 저희는 온유겸손해야 되겠습니다. 어린 아이가 어머니의 젖을 간절히 사모하는 심정과 같이 저희 마음에도 간절한 흠모의 심정이 일어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이 그리워서 몸부림치면서 당신 앞에 부복한 이 자리가 거룩한 자리가 되게 하여 주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 통일교회의 역사를 지금까지 당신께서 엮어 오신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제단의 스승은 그 누구도 아닌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지도자는 오로지 아버지밖에 없사옵니다. 당신만이 여기에 중심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사람과 사람끼리 만나다 보면 실망을 하기가 일쑤요 서로 낙망의 요건을 남길 것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와 인간이 화합하는 데 있어서 높고 귀하신 것은 아버지요, 절대적인 권위의 중심도 아버지인 것을 언제나 믿는 마음을 갖게 하여 주시옵고, 천하고 외로운 존재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러한 자신을 느끼면서 아버님을 믿고 따라간다고 하는 마음을 저희들이 생활 환경권내에서 잊지 말고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에게 느껴지는 모든 감정을 통하여 보여지는 시야를 통하여서 일체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의 표시가 되고 상징이 되어서 그 일체가 그의 형용과 간절함으로 나타날 수 있는 아들의 생활이 되고 딸의 생활이 되게 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무릎을 꿇은 스스로의 모습을 저희 자신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자리에 있어서 나는 이렇게 왔다고 할 때, 현재의 내 마음은 아버지와는 상극적인 자리, 상거적인 자리에 있는 것을 스스로 알고 아버지 앞에 부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가 원치 않는 자신인 것을 스스로 깨닫게 될 때에는 자신을 아버지 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내어 회개의 심정에 사무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높고 귀하신 거룩한 뜻 앞에 긍휼과 자비의 손길이 찾아와 생명의 인연으로 연결하여 저희들을 매어 달라고 간절히 호소하며 사무칠 수 있는 이 한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길,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 3월도 이제 중순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저희들이 1971년도를 맞이하여 '통일기반 확보'라는 표제 밑에서 3월까지 해야 할 일들이 남아 있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님께서 만복을 지니시고 영광을 홀로 지니시어서 사랑하는 아들딸 앞에 찾아오시는 그 걸음이 도리어 찾아오지 않았으면 하고 후회하고 돌아서는 아버지의 발걸음이 되지 않게 해야 되겠습니다.

1971년도 이해에 있어서 찾고 찾아오신 당신의 발걸음이 여기에 머무르실진대는 영영 떠나고 싶지 않는 마음으로 머무르실 수 있는 발걸음이 되어야 되겠사옵고, 이 자리가 아버지께서 쉬실 수 있는 영원한 안식처로서 아버지께서 영원히 기뻐하시면서 축복할 수 있는 자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와 같은 아버지 앞에 저희들은 너무나 거리가 멀고, 너무나 부족한 것을 느끼고 아버지 앞에 용납받기를 고대하면서, 이제 이 시간도 저희들에게 맡겨진 책임을 다시 한 번 아버지의 명령과 더불어 결의할 수 있는 이 아침, 이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 이 아침에 서울 본부를 향하여 머리를 숙이고 아버지 앞에 경배드리는 당신의 자녀들, 이곳을 향하여 생명의 인연을 찾고자 하는 당신의 자녀들 위에 복을 빌어 주시옵소서. 이때는 과연 그 누가 붙들어 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스스로 가야 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때는 저희들이 온갖 정성을 다해야 할 때인 것을 알고 있사오니, 모든 정성을 다하여 아버지 앞에 바쳐 드릴 수 있는 저희들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미래에 찾아오는 그날들이 당신으로 말미암아 서게 되고, 당신의 명을 따라 그날을 맞을 수 있는, 망하지 않고 당신이 영광의 자리에 남아질 수 있는 무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당신의 사랑하는 딸들이 일선에 나가 싸우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애달프게 당신을 부여잡고 호소하는 사정을 들어주시옵소서. 민족을 대신하여 정성을 들이게 하여 주시옵고, 그 정성이 끝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그 정성 위에, 한달도 그 정성 위에, 일년도 그 정성 위에 72년도까지 저희들이 해야 할 책임이 있사오니, 아버지, 그들을 권고하시옵소서. 그들이 정성들인 보조를 아버지께서 맞추시옵소서. 사랑하는 아들딸과 더불어 같은 생활권내에서 아버지께서는 후방을 지키시옵고, 저희들은 당신의 영윈한 터전을 넓히기 위한 간절한 마음에 사무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때를 그저 흘려보낼 것이 아니라 당신께 영광을 돌리고 찬양드릴 수 있는 기원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될 때인 것을 저희들이 스스로 느낄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시아의 모든 운명을 아버지께서 맡으시옵소서. 한국이 가야 할 내일의 소망을 위해 불쌍한 저희들과 같이하시는 아버지께서는 더 불쌍한 것을 저희들이 알았습니다. 생애노정과 더불어 숱한 수난의 길이 이 민족과 저희들 앞에 엇갈려 남아 있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오늘날 저희들은 저희에게 맡겨진 바의 책임을 효자로서 감당하여야 할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하고, 내일의 후계자로서 부족함이 없는 자신 있는 아들딸이 되어야 할것을 알았사옵니다.

이제 악의 권한이 팽창하고 있는 이 시대에 있어서 악을 능가할 수 있는 하늘의 권을 결집하고 하나의 통일된 모습을 갖추어, 악 앞에 강하고 담대한 하나의 보루가 되어 아버지의 영광을 찾아 누릴 수 있는 기반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수많은 종교계를 바라보고, 수많은 민족을 바라보게 될 때, 저희들 앞에 부과된 책임이 가중되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오고 오는 날들이 슬픔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소원과 소망을 열고 갈 수 있는 날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오늘 이 아침 당신께서 저희와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오며, 모든 말씀 참부모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사옵니다. 아멘.

말 씀

인간들은 좋은 물건이 있다면 그걸 흠없이 만지고 싶어합니다. 혹은 가장 귀한 그 무엇이 있으면 그 가장 귀한 것을 찾아서 보호하고 싶은 것이 우리 인간의 마음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물건이 그러하다면 사람도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만약 이 세계 역사상에 참된 사람이 있다면 그 참된 사람을 찾아서 그분을 모시고, 받들고, 변치 않는 자리에 두기를 원하는 것이 우리 인간의 마음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신앙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

우리 인간이 그렇다 할진대 우리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 하나님도 역시 귀하고 거룩한 것은 이 천지간의 귀하고 거룩할 자리에서 보여 주고 싶어할 것은 두말할 것도 없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귀하고 참된 것이 있는 그 자리로부터 귀하고 참된 환경이 벌어지기를 우리 인간의 마음이 바라듯이 하나님의 마음도 그러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볼 때 우리 인간들은 참된 것, 혹은 귀한 것을 많이 바라고 있습니다. 좋은 것은 나와 더불어 같이하고 싶고, 나쁜 것은 나와 더불어 격리시키고 분리시키고 싶은 마음을 우리 일상생활에서 잘 느끼는 바입니다. 좋은 것은 자기와 더불어 길이길이 같이하고 싶어하고, 나쁜 것은 자기에게 있어서 '안 되겠다'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나쁜 것은 거부로 나타내기 쉬운 것이요, 좋은 것은 환영으로 받아들이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좋은 것은 남아지지 않고 나쁜 것이 내 생활권내에 침범하느냐, 그 원인은 어디에 있느냐 하는 문제를 생각하게 될 때, 그것은 나 자신이 선을 받아들일 수 있는 기반이 갖추어지지 않고, 또 나 자체도 물론이지만 내가 처해 있는 자리가 화합하고 혹은 기뻐할 수 있는 이런 환경이 아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귀한 것 혹은 선한 것이 있다 하더라도 그 터전이 되어 있지 않고 그 환경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에게 머무를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가 아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왜 그러냐 하면 귀하면 귀한 것일수록, 좋으면 좋은 것일수록 갖고 싶어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이 귀하면 귀할수록, 좋으면 좋을수록 그 안팎의 환경과 터전이 귀하고 좋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인 것입니다.

우리가 선을 추구하고 참된 것을 추구하는 데 있어서 그 추구하는 대상으로서 귀하고 좋은 것을 생각하지만 그 대상인 귀한 것과 좋은 것이 우리와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보다 귀하고 보다 좋을 수 있는 자신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상반된 입장이 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좋은 것을 그런 자리에 놓았다 하더라도 그 좋은 것은 반감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 자체가 아무것도 갖추지 못한 하나의 환경의 터전이 될때, 그러한 나 자체 앞에 백의 가치를 지닌 것을 놓아 둔다 하더라도 그 백의 가치를 지닌 좋은 것이 백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오십, 혹은 사십, 혹은 그 이하의 가치로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이와 같이 정상적인 가치의 기준마저 세울 수 없는 입장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결과가 나온다면 아무리 하나님이 좋은 것을 주고 싶고 귀한 것을 갖다 놓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천국이 어디 있느냐 할 때, 천국은 거룩한 곳에 있는 것이요, 참된 곳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거룩함과 참이 머물기 위해서는 먼저 거룩한 나 자신을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요, 귀한 나 자신을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가 우리 신앙자들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귀중한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 ;20--21)"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천국이 거할 수 있는 내 마음이 지극히 높고 지극히 거룩하고 지극히 귀할 수 있는 내적 인연이 갖추어지지 않고는 그 귀하고 선하고 높으신 하늘이 거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늘이 귀하다는 것을 찬양하기 전에 나 자신에게서 귀한 것을 발견하는 것이 보다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하늘이 높다는 것을 알기 전에 나 자신에게서 높은 가치를 스스로 어떻게 발견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하늘의 귀한 것을 알기 전에 하늘이 찾고 있는 대상으로서의 나 자신의 가치를 얼마만큼 발견하느냐 하는 것이 하늘을 점령하고 그 하늘을 지배할 수 있는 제일의 여건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크고 귀한 것, 높고 귀한 것 혹은 지극히 선한 것을 찾아 나가는 우리의 인생임을 생각해 보게 될 때, 인간은 누구나 그것을 다 원하지만 그 원하는 바를 찾지 못하고 그 원하는 바의 목적을 우리가 성취할 수 없는 것은 왜냐? 그것은 선이 나빠서가 아니고, 선이 나를 멀리 해서도 아니고 그 지극히 귀한 것이 나와 상반된 자리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그 귀한 것이 나와 관계를 맺고 싶지 않아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맺고 싶더라도 나 자체가 그럴 수 있는 내적인 인연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관계맺을 수 없는 입장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서는 아무리 선이, 아무리 귀한 것이 있다 하더라도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선과 귀한 것은 어떠한 자리에 머무느냐? 그것은 여러분이 일상생활을 통해서 알다시피 선은 선한 자리에, 귀한 것은 귀한 자리에, 악은 악한 자리에 머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 자신에다 귀한 자리, 선한 자리, 높고 거룩한 자리를 어떻게 만드느냐 하는 문제는 오늘날 우리 타락한 인간에게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선한 마음을 지속시킬 것인가

여러분 스스로가 내 마음에 귀한 마음이 있느냐, 내 마음에 선한 마음이 있느냐, 내 마음에 거룩한 마음이 있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그것이 있다고 자기 스스로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느냐? 그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살 수 있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정녕 일년을 그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살 수 있느냐? 혹은 그러한 마음을 갖고 일년 이상을 살 수 있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 사람이 십년을 하루와 같이 그런 마음을 지닐 수 있느냐, 십년만이 아니라 일생을 그러한 마음을 지니고 살아 나갈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있다 할 수 있는 사람이 이 땅위에는 없습니다. 타락한 인간이기 때문에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운명에 동반하고 싶어하는 본성의 그 마음으로 우리는 하늘을 바라고 나왔고, 또 우리의 본연의 마음이 자신의 생활 가운데 있어서 일시적으로 내 마음을 자극시키고 나 자체에 인식을 시키고 있지만 그 선의 바탕이 과연 며칠 동안 내 마음과 더불어 내 생활권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내적인 인연으로 남아질 것이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우리 타락한 인간으로서는 그럴 수 있다고 자랑할 수 없는 자신들임을 발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선한 그 마음 자체를 발견하였다면, 발견된 그 마음을 내 하루의 생활에서, 한 달의 생활에서, 일년의 생활에서 어떻게 반영시키고 보유할 것이며, 어떻게 여기에 상극되고 상반되는 모든 여건을 제거시키고 그것에 굴복당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극복하여 나갈 수 있는 자주적인 선의 모체를 나로 말미암아 심어 나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자에게 있어서 가장 어려운 문제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런 귀하고 선하고 거룩한 그 본성을 지녀 가지고, 나 자체에 품어 가지고 하루의 생활은 물론이요, 일년의 생활은 물론이요, 일생을 산 사람이 있다 할진대는 그 사람이 살아 나가는 생활에 있어서 선이 같이하지 말라고 해도 같이하는 것이요, 귀한 자리가 아니라 하여도 그것은 귀하지 않을 수 없는 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귀한 것을 악이 점령할 수 있느냐? 점령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럼 선한 것을 악이 소화시킬수 있느냐 할 때 아무리 악한 세상이 그 주위를 철옹성같이 에워쌌다 하더라도 그 선한 것과 귀한 것을 소화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성인이 선한 터전에 서 있고 선한 환경과 같이하는 자리에 서 있기 때문에, 선한 주체와 선한 대상이 하나되어 절대적인 선의 방향을 갖추어 나가기 때문에 이것은 새로운 역사를 빚어낼 수 있는 것이요, 그 사연은 새로운 인간으로 혁신시키는 동기가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 타락한 인간은 선에서 출발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선의 바탕을 가진 인간이었으나 타락으로부터 출발한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악으로부터 출발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한 바탕은 언제나 악에게 포위되어 있습니다. 포위한 악한 환경이 선한 환경 보다도 몇십 배 몇백 배 더 큰환경으로서 엉클어져 있고 고착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한 그 마음이라는 것은 일시에 내 마음에 작용하는 것입니다. 내 생활 환경을 통하여 느껴지는 거예요. 느껴지는 것뿐으로 흘려 버리기가 쉬운 것이지 이 느껴지는 것이 내 생활의 중심이 되고, 선의 실체가 되어 악의 환경을 제거시킬 수 있는 표본과 모체로서는 심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내, 외적인 선의 기반을 닦으려면

그러면 하나의 희생의 모체로서 형성되어 가지고 그 악을 제거시키기 위해서는, 내 마음 바탕에 있어서 선과 더불어 짝이 될 수 있고 선과 더불어 터전이 될 수 있는 내 스스로의 내적 기반과 외적인 환경의 기반을 어떻게 갖추느냐 하는 것이 신앙자에게 있어서는 가장 중요한 문제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를 점령하는 것보다도 자기 자체에 주어진 환경을 점령하기가 더 어려운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하겠습니다. 나라를 등에 업고 나를 반대하는 사탄이나 사회를 발판으로 하여 반대하는 그 사탄이 무서운 것이 아니요, 그 악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내 본심, 그런 본바탕을 에워싸고 선 앞에 직접적으로 부딪치고 있는 '나'라는 존재가 얼마나 무서운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따라서 이 '나'를 어떻게 극복하느냐 하는 문제가 신앙자에 있어서는 가장 중요한 문제인 것입니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소모전쟁을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이권 전쟁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천운이 돌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투쟁의 상대가 되어서 여기에 비례되는 희생의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희생을 치르지 않고는 제아무리 선을 추구한다 하더라도 그 선은 나와는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본심으로 기도하는 데서나 혹은 하늘을 향하여 정성들이게 될 때에는 마음속으로 울려오는 기쁨과 희열을 느끼고 또는 소망을 갖기도 하지만, 일단 인연되어진 그 환경이 끝나게 되면 그것이 삽시간에 사라지는 것을 여러분이 알고 있는 것입니다. 대인관계에 있어서도 말 한마디로 말미암아 그것이 영영 사라져 가는 것을 느낄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혹은 사회의 생활환경에 휩싸여 원치 않는 하루, 한 시간의 생활을 거치고 난 후에 그 본심의 마음 바탕, 자기 소성과 비교해 볼 때 여지없이 유린당하는 일들을 여러분은 일상생활에서 느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환경을 개척해야 할 사명자로서 이처럼 억센 사탄 마귀의 토대를 완전히 분석 비판해 가지고 악의 기반을 제거해야 하는 것이 신앙자의 태도입니다.

그러니 우리 신앙자들이 가야 할 단 하나의 길은 어디에 있느냐? 마음의 소리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갖춰지는 선한 마음을 어떻게 외형적으로 판도를 넓혀 나가느냐 하는 것이 천국을 소유할 수 있는 가장 선하고 가장 귀한 것을 소유할 수 있는 터전을 닦는 문제에 직결되기 때문에, 이것을 하루의 생활철학으로, 하루하루의 생활목표로 세워 투쟁해 나가는 것이 사회나 민족 또는 국가 앞에 영향을 미치는 것보다도 더 귀하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하겠습니다.

죄는 우리의 상대적 세계에서부터 나를 공격하여 점령해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 환경으로부터 내 마음속을 점령해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환경으로부터 점령해 들어오는 그 일선에서 내 마음의 선한 사상으로, 반대적인 요소로 나타나는 것을 여지없이 끊어 버릴 수 있는 용단을 내려 계속되는 피어린 정의의 투쟁의 무대를 거치지 않고는 영원한 선, 지극히 높고 귀한 것은 내 마음에 영원히 임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일시적으로는 기쁨을 남겨 주고 혹은 소망의 자극적인 터전이 될는지는 모르지만, 이것이 생활에서의 터전이 되고, 영생의 기원이 되고, 영원한 행복의 기원이 되고, 선의 누룩이 될 수 있는 그러한 입장이 되겠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이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심에 호소하고 나오는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환경과 싸워야 합니다. 그러나 싸우는 것은 그 누구도 원하지 않습니다. 그 누구도 원하지 않는 자리이지만 우리 자신들이 넘어야 할 책임과 의무로써 감당해야 할 이런 분야가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 분야를 현재의 입장에서 소망의 입장에까지 발전시켜 나감으로 말미암아 현재의 오늘이 내일의 소망의 터전을 상속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현재의 입장에서 내일의 소망의 터전의 환경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자주력이 없게 될 때에는 아무리 내일의 선한 소망이 있다 하더라도 현재의 나와 내일의 그 소망과는 상관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과 상관시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여러분의 환경에 있어서 본심이 요구하는 선하고 귀한 것, 우리가 요구하는 그 무엇을 중심삼아 가지고 그 요구에 대응될 수 있고, 상응될 수 있는 환경적인 요건을 어떻게 타개하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이것은 세상에서와 같이 총칼을 가지고 싸워서 타개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으로 이 소모전쟁을 방지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생각할 때 여기에는 수고와 정성이 아니면 안 됩니다. 정성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들여야 할 정성의 도수

그러면 그 정성의 도수가 어느 정도까지 가야 되느냐? 이 세상에서 가장 좋아할 수 있는 친구가 있다면 그 좋아할 수 있는 친구라는 것이 억천 만세까지라도 너와 나의 사이를 끊을 수 없다 하는 그런 좋은 자리의 친구냐는 것입니다. 값비싼 어떤 것보다도, 자기 부인보다도 좋다고 할 수 있는 친구가 좋은 친구입니다. 하루의 생활 감정의 말 한마디로 버릴 수 있는 그런 인연의 자리가 아닙니다. 생명 자체를 거두어 가더라도 끊을 수 없는 자리가 이러한 친구의 자리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동정의 자리가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자리가 선의 모체이기 때문에 오늘날 내 본심에 같이 하던 선과 인연되었던 모든 인연들은 영원히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갈래야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인연이 내 마음과 더불어 갖추어질 수 있는 환경이 됐느냐? 그 환경에 선 친구가 됐느냐, 그 환경에 선 입장에서 서로 정성을 들일 수 있는 하나의 단체가 됐느냐 하는 문제를 중심삼아 가지고 그것이 하나의 자리에 있어서 선의 주체가 되느냐, 혹은 모체가 되느냐, 그리고 창조적인 역사를 감당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가 여기에서 판결이 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그런 문제를 두고 내가 진정한 의미에서 하늘 아버지를 모셨다 할 때, 그 모시는 데는 말만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얼마만큼 정성어린 마음을 가지고 아버지를 모셨느냐? 우리의 오관을 통한 모든 느낌은 우리의 감정에 직결되는 것입니다. 오관을 통하여, 내가 보고 듣고 느낀 촉감을 통하여서 얼마만큼 아버지를 사랑하고, 얼마만큼 아버지의 귀한 가치를 깨닫고, 아버지의 거룩함을 사모하고, 찬양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것이 어떠한 청중과 더불어 기도하는 시간에, 어마한 은혜로운 시간에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생활권내에 있어서 시간 시간을 통하여 끊임없는 느낌을 받아야 합니다. 그 느껴지는 마음을 중심삼고 내 생활무대에서 일체 내보내질 수 없는 것으로서 하늘과 더불어 동감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결과적인 자신을 어떻게 발견하느냐 하는 것이 가장 문제되는 것입니다.

정성은 나를 구해 주는 요소

그러므로 여기에서 여러분이 다시 한 번 생각해야 될 것은 정성을 가지고 대해 나가지 않는다면 악과 더불어 싸우게 된다는 것입니다. 정성들이는 자리는 극복해야 할 싸움의 고비를 넘고 난 그 자리가 아니라 싸우지 않는 자리이어야 합니다. 오직 정성어린 마음과 행동만이 영원한 자리에 남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도를 하는 데는 무슨 기도를 하느냐? 자기를 제어하는 기도를 해야 됩니다. 자기를 극복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자기를 중심삼고 좀더 편하고 싶어하고 내가 좀더 행복하고 싶어하고 나의 모든 것을 중심삼고 동기를 삼고 싶어하는 이 모든 귀착된 환경의 여건, 그러한 스스로의 모습을 타개하고 이것을 부정하기에는 내 힘이 부족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힘을 보조받기 위해 몸부림치는 자리가 기도의 자리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를 통해서 환경을 극복하기 위한 정성을 들였을 때, 그 정성들인 선에 대한 가치가 크면 큰 만큼 그 악한 환경의 여건이 제거될 수 있는 비례적인 자리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즉, 선한 동기의 마음이 악을 제거시킬 수 있는 판도를 넓혀가는 그런 입장에 서기 때문에, 그 싸움에서 승리자로 서게 되면 마음이 자연히 기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기쁘냐? 내 본성이 이 선의 환경과 더불어 배양되어 가지고 주고받을 수 있는 터전이 벌어지고, 그것이 넓어짐으로 말미암아 지금 까지의 생애에서 느끼지 못하던 희열과 만족과 가치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쁨은 기도 시간에 따라 그 정도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권내에 얼마나 정성을 투입하느냐 하는 것에 비례해 가지고 그 정도가 달라진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 정성이야말로 우리를 구해 줄 수 있는 제일의 요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원리는 여러분을 구해 줄 수 있는 동기나 자극은 될는지 모르지만 자기가 구원을 받느냐 못 받느냐 하는 것은 원리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정성과 직결되어지는 자리에 서지 않고는 여러분 자체의 구원도 완성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정성은 어떻게 들여야 할 것인가

여러분, 타락은 실제로 누가 했습니까? 우리 인간은 타락한 혈통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인간은 하나님 앞에 용납받을 수 없는 악한 몸을 가진 존재입니다. 나 자신은 거룩하시고 귀하신 하나님 앞에 상응의 존재가 아닌 상반적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상반된 인연을 추구하고 나온 잘못된 모습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 타락한 인간이 높고 귀하신 하나님과 더불어 화합하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딸이 된다 할진대 그것은 말로만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냐? 그것을 자기 자신은 아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은 안다는 거예요. 제삼자의 설명을 듣지 않아도 자기 자신이 아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아들 딸이라면 아무리 환경이 부정하더라도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이다' 할 수 있는, '과거에도 이렇게 살았고 현재도 이렇게 살고 앞으로도 이렇게 살 것이다' 하는 철석같은 마음을 다지는 신념을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그 마음과 더불어 환경과 일치되었다. 환경은 그 느낌과 일치되었다' 할 수 있는 선의 환경과 선의 터전이 절대 필요하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만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행동을 해야 됩니다. 그럼으로써 여기에는 말과 행동을 한껏 전개시켜서 새로운 부활의 인연을 연결시키고 생애에 있어서의 그 투쟁의 여력을 보강, 보급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이 있는데 그것이 정성을 들이는 것입니다. 정성이 없으면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정성들이는 것이냐? 뭐 시장 거리에서 약 장수들이 약을 파는 식으로 들이는 것이냐? 반대라는 거예요. 그런 자리에서는 자기 자신이 원수라는 것입니다. 반목하고 질시하고 의심하고 서로를 파탄시킬 수 있는 요인이 되어 있습니다.

정성은 어떤 자리에서 들여야 되느냐? 아무도 없는 곳, 나만이 아는 곳에서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자기의 본심이 하늘을 그리워하게 될 때의 그 마음은 누구나 알아야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만이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나만 아는 그 마음을 중심삼고 나만의 터전을 해결하려니 누구나 아는 자리에서는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누구도 모르는 자리, 은밀한 자리에서 정성을 들여야 되는 것입니다. 정성을 들여서 갖추어진 것은 자랑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보게 되면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사년 전에 그가 세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고후 12 : 2-- 7)"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14년 동안 바울이 무엇으로 말미암아 살았느냐?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정성들인 은사로써 하늘이 보여준 삼층천의 이념을 두고 볼 때, 그 이념이 나와 더불어 직결되고 내 생활과 더불어 직결돼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내 환경을 다짐하기 위한 실천 과정을 성사시키고 난 후에야 비로소 바울이 그런 사실을 발표한 것이 아니냐는 거예요.

본 것은 본 것으로만 옮겨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본 것을 내것으로 순화시켜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천국이 크니만큼 큰 활동이 되도록, 그것이 세계적이면 세계적인만큼 세계 인류와 더불어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자기 일신의 모든 것을 부정하고, 어떤 환경도 기쁨으로 삼층천 이론을 중심삼고 모든 여건을 타개하기 위한 싸움을 해나온 여기에서 바울의 고귀한 인격이 형성된 것입니다. 바울이 한 행동을 보면, 바울에게는 고귀한 인격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울만이 가질 수 있는 정성의 터전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걸 알아야 됩니다.

정성을 들이는 데는 누가 알게 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 가운데 계시는 하늘과 내가 관계를 맺고 선한 것과 관계를 맺어야 되는 것입니다. '나'라는 존재는 개체적인 존재입니다. 그러니 절대적인 존재와 인연을 맺기 위해서는 누구도 동참할 수 없는 은밀한 자리에서 정성을 들여야 됩니다. 은밀한 자리에서 들여진 정성과 더불어 느끼는 기쁨은 대단한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늘이 기뻐하시는 그 기쁨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 기쁨이 포만하여 제삼자 앞에 감화를 주고 영향을 미치게 될 때 여기서부터 하늘의 명령을 대행할 수 있는 권한이 시작되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하겠습니다.

하늘을 모시려면 그에 상응하는 정성을 들여야

정성을 들이는 사람은 말이 없습니다. 정성을 들이는 그 골수에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내용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내용을 지니고 꾸준히 정성들이며 가는 사람의 가는 길은 올바른 길입니다. 정성은 은밀히 들여야 되는 것입니다. 정성과 더불어 몸 마음으로 맞이하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여러분이 소유하고 있느냐? 그러기에 여기에서 하나님을 보고 싶으면 내가 얼마나 정성어린 마음을 가지고 그리워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또 만나고 싶으면 얼마나 정성어린 마음을 가지고 정성들이며 만나고 싶어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늘 아버지의 착함과 귀함이 머무를 수 있는 자기 자체의 내적인 인연을 갖추고 하늘을 위주로 하늘의 가치를 대신한 입장에서 아버지를 얼마만큼 모셔드렸느냐? 여러분이 오관을 통해서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 있겠지만 내가 듣되 얼마만큼 정성어린 마음을 가지고 들어 봤느냐? 볼 때는 얼마나 그런 마음으로 보아 봤느냐? 또 내가 느끼되 얼마 만큼 정성을 다하는 자리에서 느껴 봤느냐 하는 것입니다.

'내가 정성들인 것이 이 정도면 되겠지' 해서는 안 됩니다. 지극히 선한 그분을 맞이할 수 있는 환경적 여건이 정성의 터전에 의해 되었느냐 할 때에 여러분이 '이 정도면 되겠지'라고 하는 것이 절대적인 정성의 기준에는 설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최고의 선의 주체 되시는 하나님께서 이런 정성을 상대적인 터전으로서 인정할 수 있겠느냐 할 때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눈물을 가해 가지고 정성을 다하는 자리에는 그 자리가 부족한 자리요 천한 자리일지라도 하나님이 찾아오실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감추기 위해 육신의 높고 영광된 자리를 바라보는 것보다도 지옥에라도 가고 싶다는 마음 가지고 여기가 도리어 부끄러움을 가릴 수 있다 할 수 있는 그런 자리를 찾아가서 눈물 흘린다면, 그런 자리에서 하나님과 인연이 되어지고 관계가 맺어진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필히 신앙생활을 통해서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만큼 정성을 들였으니, 아버지, 이제는 나를 도와주셔야 합니다. 내가 정성을 들일 만큼 들였는데 하늘은 무심도 하시지 내 사정을 몰라주시네' 그럴 수 있어요? 그럴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류시조 아담 해와가 죄를 범한 그날부터 죄를 범한 이것을, 마음대로 해결할 수 없는 이 심어진 죄의 뿌리를 뽑기 위해서 하나님이 지금까지 6천년 동안 수고해 온 것을 생각해 볼 때, 우리는 이 뿌리를 뽑지 않으면 안 될 사명을 짊어졌다는 것을 알아야겠습니다. 하나님께서 6천년 동안 걸어 나오셨으니 나도 어떻게든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성을 들이면서 가는 신앙길에는 눈물이 없을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자기가 아무리 미남 미녀라 하더라도, 자기 스스로 영광의 모습을 갖추고, 세상을 대하고 남을 수 있는 자신이 있다 하더라도 그 자신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도리어 정성을 들이는 데 방해는 될지언정 도움은 못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못나기를 나 이상 못난 사람이 없는 것이요, 세상의 죄인 중에 나 이상 죄인이 없다는, 역사적인 비참함을 느낄수 있는 자리에 서야 합니다. 내가 여기에서 일시에 꺼져 버린다 해도, 산산조각으로 파괴되어 버리고 만다 하더라도, 하늘이 계시다면 이왕 터트려 버릴 바에는 흔적도 없이 터뜨려 버리고, 남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모체로 해 가지고 다시 흩어진 것을 빚어낼 수 있는 당신의 은사가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다시 말하면 죽고 남아진 생을 중심삼고 부활의 혜택을 바랄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몸부림치는 자리에서 생명의 인연이 교차되고 생명의 인연이 결정되는 것이지, 스스로 당당한 입장에서 '내가 이만하면 됐지' 하는 자신을 가지는 거기에는 하나님이 같이하시지 않는 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깊은 기도생활을 통해서 느낄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아버지에 대해서 얼마만큼 정성을 들였느냐? 내가 아버지를 보고 싶다 할 때 얼마나 정성의 대가를 치르면서 보고 싶어했느냐? 아버지와 같이 가고 싶고, 같이 살고 싶고, 아버지가 원하는 나라와 아버지가 원하는 환경을 맞이하고 싶다 하더라도 내가 얼마나 정성을 들인 마음을 가지고 대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한 생명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정성들여 보았느냐

원수는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원수는 자기 자신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 15 : 13)"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무슨 말이냐? 무슨 인연도 없이 목숨을 버린다면 무슨 큰 사랑이 되겠어요? 친구를 위해서 생명을 걸고, 생명 이상 정성들이는 마음을 가지고, 그 사람을 구하지 않으면 지옥간다…. 이렇게 사망의 고통을 자신이 느끼며 대신 죽겠다는 것이 사랑입니다. 생각지도 않으면서 죽어 주는 것이 사랑이예요? 정성을 통하지 않은 희생이라는 것은, 더구나 자기를 위해서였다면, 그것은 무가치하다는 것입니다.

친구를 위해 목숨을 바쳤는데, 왜 바쳤느냐 할 때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그러면 그 사람은 천국에 못 가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버렸다고 하지만 그것은 결국 자기가 천국가기 위해서 친구를 이용해 먹는 것이 됩니다. 그 사람은 천국에 못 가는 것입니다.

영계에 가 보게 되면 순교한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죽어야 예수와 같이 천국에 간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천국에 못 가는 것입니다. '이토록 귀하고 높으신 분이 나를 위해서 죽었기 때문에 나는 응당히 그분의 하나의 몸이요, 하나의 살이요, 하나의 핏줄이다. 그러므로 그분의 죽음과 더불어 사라져야 되고, 그분의 삶과 더불어 부활되어야 된다. 나는 그와 더불어 하나이기 때문에 그가 걸으신 길은 내가 응당히 걸어야 할 길이다. 그가 만민을 위해 죽은 것처럼 나도 나를 위해서 죽는 것이 아니라 응당히 만민을 위해 죽는다' 이러한 생각으로 순교한 사람은 천국에 가지 말라고 해도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간단하다는 것입니다. 근본 문제는 여기에서 엇갈리는 것입니다. 사랑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가 여기에서 엇갈린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은 구원받기 위한 것이 아니고 어떤 축복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다. 내가 잘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그를 구해 주기 위해서 이렇게 하는 것이다'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를 위해서 그를 대신해서 정성들여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 생명을 중심삼아 가지고 생명을 걸고 기도하는 사람, 생명을 걸고 정성들이는 사람이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한 생명을 중심삼고 얼마나 정성을 들여 봤느냐? 이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오늘 인간 세상에 태어나 칠, 팔십 년 동안 영광스럽게 살았다고 자랑할 수 있는 외적 내용이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너는 사람을 사랑했느냐 할 때 '예 했습니다','어떻게 하였느냐'할 때'이렇게 했습니다'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의 죽음을 내 죽음으로 알고, 그의 고통을 내 고통으로 느끼고, 그가 흘려야 할 눈물을 내가 흘리고, 그가 당해야 할 고통을 내가 당할 때 나는 부활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기도를 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한 생명을 부여잡고 일년, 이년, 삼년 혹은 그 이상 몇년 동안을 정성들여 봤느냐? 이것이 문제되는 것입니다. 그 생명이 사망권내에 머물 것은 틀림없기 때문에 그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이렇게 이 땅 위에 사는 세계 인류 가운데 한 생명을 위해서 얼마만큼 정성들여 봤느냐 이거예요. 내가 그 누구를 위해 얼마만큼 이나 정성들여 봤느냐 이거예요. 그것은 내가 좋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를 구해 주기 위해서…. 이렇게 내 손길을 거치지 않으면 그는 영락없이 지옥에 간다는 정성어린 마음을 가지고 사람을 대해 봤느냐 하는 것이 여러분에게 있어서 문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더 정성들이고 계신다

개인이면 개인을 대해서, 가정이면 가정, 동네면 동네, 김씨 가문이면 김씨 가문을 중심삼아 가지고 그렇게 해 봤느냐? 내가 개인은 구했지만 가문은 못 구했기 때문에 가문을 구해야 된다 하면서 어떤 가문을 위해서 정성들여 봤느냐? 하나님은 그렇게 복귀역사를 해 나오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잃어버린 자식을 찾기 위해서 얼마만큼 정성들였느냐? 생명을 걸어 놓고 정성들이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 앞에는 면목이 없는 것이요, 얼굴을 들 수 없는 것이요, 어떠한 반발이나 반문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타락한 인간이 정성을 들였느냐, 하나님이 정성을 들였느냐 할 때 타락한 인간이 정성을 들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정성을 들여 나오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고마운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따라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귀한 것입니다. 내가 정성들이니 내가 귀하다고 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나보다 더 정성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더 귀하다는 것입니다.

정성들여 만든 물건은 귀한 물건이라고 합니다. 그렇지요? 내 일생에 있어서 귀한 물건이 뭐냐고 할 때는 정성을 들인 물건인 것입니다. 몇 시간이면 만들 수 있는 것이지만 일년 십년 정성을 들여서 만들었다 할 때는 아무리 내용적으로는 나쁠지 모르지만 귀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잖아요? 사람이 손으로 만든 것은 귀하나 기계로 만든 것은 귀하지 않다고 하지 않아요? 흔히 그렇게 말하지 않아요? 그건 왜 그러냐 이거예요. 모양은 더 좋은데 말이예요. 미국 같은데 가 보면 손으로 만든 물건은 비싸고 기계로 만든 물건은 쌉니다. 사실 모양이나 모든 면에서 기계로 만든 것이 더 낫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성이 없는 거예요, 정성에 비례해서 참된 가치는 드러납니다. 그것이 양심의 발로라는 거예요. 그것은 사람이 간사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천리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들보다 더 정성을 들이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개인을 위해서 정성들이고, 아들딸을 위해서 정성들이고, 그 다음에는 그런 아들딸들이 찾아 나가는 가정을 위해서 정성들이고, 그 가정이 찾아 나가는 종족을 위해서 정성들이고 계십니다. 가정을 찾아 주면 후손이 잘 되어야지요? 그러니 그 후손을 위해서 정성들이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의 가문을 이루었으면 그 가문을 위해서 정성들이시고, 그들이 합하여 한 민족이 되었으면 그 민족을 위해서 정성들이시고, 이렇게 앞놓아가며 정성들이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인류가 망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류가 망하지 않고 넘어가고 또 넘어가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그것은 하나님이 앞놓아나가면서 정성들이셨고, 참된 주체와 실체적인 권한이 하나님의 노정에 남아졌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발전의 일로를 거듭해 왔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하겠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정성 들였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정성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잘했다 하더라도, 자랑하고 싶은 것이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지금까지 세계의 사탄을 대해 싸워 가지고 승리의 터전을 마련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마음 졸이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러한 마음을 갖고 나오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러므로 우리가 정성들이지 않고는 그런 마음의 바탕을 이어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복귀도상에 있는 아들딸들로 하여금 해방된 자유로운 안식의 터전에서 살게 하기 위해서, 하나의 가정을 세울 뿐만 아니라 하나의 종족을 세우고, 종족뿐만 아니라 하나의 민족을 세우고, 민족뿐만 아니라 하나의 주권국가를 세우기 위해서 지금까지 수고해 왔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수고해 나오셨지만, 숙원이던 하나의 국가를 형성해 가지고 해원성사할 수 있고, 하나의 세계를 찾을 수 있게 정성들여 주었지만 이것을 이어받을 수 있는 한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어받을 수 있는 아들딸이 없었고, 이것을 이어받을 수 있는 가정이 없었고, 이것을 이어받을 수 있는 종족이 없었고, 민족이 없었고, 국가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어받게 하려고 했지만 들여야 할 정성을 못 들였다는 것입니다.

정성으로만 극복이 가능해

메시아가 오게 되면 자기 나라를 중심삼고 세계를 제패하여 영광을 누리려 했다는 거예요. 자기들의 행락만을 꿈꾸었다는 거예요. 비운의 역사에 있어서 슬픔과 더불어 사라질 수많은 인류를 생각지 못한 이스라엘 민족은 망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노정에 있어서도 극복이라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승리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극복은 무엇을 가지고 하느냐? 그것은 수단을 가지고는 안 됩니다. 무슨 재간 가지고도 안 됩니다. 오직 정성으로만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얼마만큼 정성을 들여 모셔 봤느냐, 얼마만큼 정성들이는 마음을 가지고 그리워해 봤느냐, 얼마만큼 정성들이는 감동을 통해서 느끼려고 했느냐, 또 그러한 체휼적인 아버지와 아들의 인연을 어떻게 찾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의 아들로서 그러한 체휼을 가졌으면 인간 대 인간으로서 어떻게 그러한 체휼을 하게 하느냐, 그 사람이 나를 대해 하나의 은사의 주체로서 믿을 수 있고, 그 사람이 나를 대하여 생명의 기원으로 느낄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정성을 들여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전도를 하러 나간다 할 때 그냥 가 가지고는 안 됩니다. 얼마만큼 정성을 들여 가지고 나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을 전도하는 데 있어서 일주일이나 한 달, 혹은 일 년 이 년 삼 년은 걸릴 것이다 하면 그 기간 동안 정성들여야 합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밥을 먹으나, 자나 깨나, 오나 가나, 혹은 쉬나 어떠한 행동을 하나, 일체의 마음을 가지고 그 사람 앞에 완전히 전부 주어 보라는 것입니다. 완전히 주면 완전히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 있어서 얼마만큼의 정성을 통해서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는 데 있어서 얼마만큼의 정성을 통해서 사랑하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이것이 영계에 가서 인격이 되는 것이요, 영광의 터전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 본부에 있는 교인들 중에 오래 되었다는 사람 '내가 먼저 교회에 들어왔는데' 할지 모르지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선생님도 그러지 않습니다. 선생님은 그런 생활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자식은 평등하게 키워야 되는 것입니다. 정성들이는 사람은 잠 잘 때는 따뜻한 아랫목에서 자지 않습니다. 제일 나쁜 자리에 가서 자는 것입니다. 정성은 세상에서의 좋은 것과 비례가 아니라 반비례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데는 정성이 안 들여지는 것이요, 나쁘다고 하는 자리일수록 정성이 잘 들여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정성은 반비례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는 이 민족을 위해 정성들일 수 있는 단체가 되고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지 않고는 민족의 운명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민족을 대표한 비운의 자리에서 행복하다는 사람들을 위해서 정성을 들여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단체가 되면 민족이 망하더라도 그 단체는 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게 천륜입니다. 이게 틀리면 하늘의 뜻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 수난의 종교라는 거예요. 그 수난의 배후에는 죽음의 교차로가 연결된 정성의 터전만이 남아져 있다는 것입니다. 제사장의 직분과 제단은 피어린 정성의 터전과 더불어 상속되어 나왔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기독교'라고 할 때 이 말은 무서운 말이라는 것입니다. 순교한 선열들의 피의 제단이 연결되어 공의의 심판권을 가지고 심판할 수 있는 거룩한 내용이 깃들어 있는 것이 기독교의 역사입니다.

선열들의 정성의 터전을 상속 받으려면

이것을 상속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교만해서야 되겠습니까? 절대 겸손해야 하는 것입니다. 선조들이 들인 그 정성에 꽃을 놓고 무늬를 놓아 주기 위해서…. 여러분은 다른 의미에서 그들을 위해서 기도를 하라는 것입니다. '당신은 이러한 자리에서 귀한 것을 찾고 가치 있는 것을 찾았지만, 나는 이러한 자리에서 귀한 것을 찾고 가치를 찾고 있습니다. 당신들의 정성은 내적 가치에 있어서 미달되어 있기에 나로 말미암아 보강되고, 나로 말미암아 완비될 것입니다' 하고 기도하라는 거예요. 사실이 그렇다면 그들이 얼마나 기뻐하겠느냐는 거예요. 그런 자리에서 기도를 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계승자는 뜻을 절대시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통일교회와 선생님에 대해서 이러고 저러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여러분이 이러고 저러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선생님을 세우기 위해 그 배후의 모든 정성어린 터전이 어떻게 상속되어 왔는가 하는 것을 모르고 선생님에 대해서 이러고 저러고 하다가는 문제가 심각하게 됩니다. 계승자는 뜻을 절대시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에 선생님이 잘못했다 하더라도 그것을 백 프로 잘한 것으로 소화시키며, 또 용서할 수 없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그것을 중심삼고 정성들이며 깊은 자리에서의 기도의 한 제목으로 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복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선생님이 잘못했다 하더라도 그 잘못함을 평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그 잘못함을 놓고 자기의 뼛골이 녹아나게 몸부림치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는 선생님이 인계해 나오던 그 뜻을 상속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입을 벌려서 종알종알 하는 사람은 전부다 폐품들 입니다. 이게 원수라는 것입니다.

정성어린 터전을 상속받았을 때는 그것을 절대시해야 됩니다. 그러지 않으면 전수가 안 돼. 그들이 피흘려 이루어 놓은 터전을 그들이 이루어 놓은 가치 이하의 것에 옮겨 주고 싶을 것이냐? 그렇겠어요? 어림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이상 절대시하는 사람한테 옮겨 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통일교회 문 선생이라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 아닙니다. 남이 정성들인 물건에는 절대 함부로 손대지 않아요. 여기 본부에 있는 사람들은 지방에 있는 사람들이 정성들여 가지고 보내준 예물에 함부로 손대지 말라는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정성들인 물건은 독약같이 무섭다는 겁니다. 무서운 물건이라는 거예요. 그런 예물에 함부로 손댔다가는 망하는 것입니다.

정성들인 것을 함부로 대하지 말라

본부에서 밥을 먹고 사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잘못 먹으면 병이 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와서 다 곯아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앙을 더 얻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팔아먹는 거라구요. 뼈다귀를 깎아 먹는 거예요. 여러분이 있는 본부교회 이 자리가 바로 정성들인 자리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들락날락하다가는 자기의 선조들이 지금까지 공들여 쌓아 놓은 복을 전부다 빼앗긴다는 것입니다.

참은 악과 싸워 가지고 지는 법이 없습니다. 그걸 알아야 합니다. 참이라는 것은 악과 싸워 가지고 지는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악과 싸울 때 처음에는 빼앗기니까 진 것 같지요? 처음에 이겼다고 날뛰는 사람은 이미 자기의 선조로부터 쌓아 놓은 공을 남에게 옮겨 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악의 싸움은 계속되는 것입니다.

내 손이 얼마나 정성을 가지고 하나님을 위해 봤느냐? 그렇게 정성들이다 상처가 생긴다면 그것은 영광의 훈장이 되고 뜻과 더불어 하늘이 함께하는 훈장이 되는 것입니다. 또, 얼마나 민족을 위해서 이 눈으로 눈물을 흘려 봤으며, 이 가슴으로 가슴이 녹아나는 그런 근심을 품고 얼마나 밤을 새워 가면서 하나님과 더불어 몸부림쳐 봤느냐? 나는 이렇게 민족을 사랑했다 할 수 있고, 그랬기 때문에 이 민족은 나와 더불어 있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민족도 사랑하는 사람과 더불어 있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민족을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을 사랑 하는 사람은 민족과 더불어 있을 수 있는 것이요, 그렇게 사랑하는 곳에 민족도 허물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권력을 가지고 막아 놓는다 하더라도 그 권력은 어차피 사라져 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때가 가까와 오는 것을 좋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때가 가까와 오면 거기에 따른 책임이 가중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감당하느냐 하고 걱정해야 하는 문제가 벌어집니다. 거기에 비례하여 그 이상의 정성을 어떻게 들여 가지고 그 때를 맞을 것이냐, 더 큰 때가 오면 여기에 비례될 수 있는 정성의 환경적인 여건과 그 바탕의 터전을 어떻게 만드느냐 하는 것이 걱정이라는 것입니다.

가까와 오는 때를 웃음으로 맞이하는 것보다도 조급한 마음으로, 스스로의 미숙한 것을 다짐하고 하늘의 긍휼을 바라는 마음이 앞서야만 다가오는 그때와 시운은 나를 찾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기쁨으로 맞이하려는 사람은 자기 것으로 이용해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가오는 때를 대해서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버림받고 쫓겨다닐 때는 기도하지 않아도 망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핍박을 받는 자리에서는 내가 무관심하더라도 하나님이 떠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영광의 날이 찾아오게 될 때에, 더 큰 것을 갖출 수 있는 환경과 터전을 못 만들게 되면 그 영광은 나에게 왔다가도 옮겨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를 발판 삼아서 지나가 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서글프고 무서운 일이 우리 신앙노정에 있기 때문에 정성을 들이는 데는 한이 없는 것입니다.

이 민족을 위해 얼마나 눈물을 흘려 보았느냐

여러분은 복귀노정에 있어서 개인복귀, 가정복귀를 위해서 얼마나 정성들여 봤느냐, 내 개인을 중심삼고 얼마나 눈물을 흘려 봤느냐. 내 아들과 딸을 위해 얼마나 정성들여 봤느냐, 자기 친족과 자기 민족과 자기 나라와 세계 인류, 하늘땅 만민을 위해서 얼마나 정성들여 봤느냐 하는 것입니다. 타락권에 삼켜져 있는 이 원한의 터전을 막아내고 소화시키기 위해서, 나 자신이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정성의 소모를 가져 가지고, 그 소모의 결과가 영광의 터전으로서 남아지게 할 수 있는 그러한 주체적인 내용을 얼마나 제시했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지 찾아오는 때가 문제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타난 그 나라가 문제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그 나라가 나타나고 찾아왔다 하더라도 내가 거기에 관계를 맺을 수 없는 그런 자리가 된다면 이것은 비통하고 비참한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지금까지 어머니 아버지를 중심삼고 살아왔는데 어머니 아버지가 진짜 지옥 가고, 천당 간다 하는 것을 느껴 봤습니까? 형제 들이 그렇다는 것을 진짜 느껴 봤느냐는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선생님은 지금까지 대한민국에 대한 책임을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을 붙들고 지금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이 나라 백성으로 태어나서 이 나라 이 민족을 대신하여 소망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책임을 다했느냐 할 때 책임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나는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거리를 남의 길거리로 보지 않았습니다. 삼천리 산야를 바라볼 때도 남의 산이 아니라고 느꼈습니다. '조금만 참아라. 내 손이 거쳐갈 수 있는 그날을 기다려라…. 눈물어린 마음을 가져가지고 네가 주인을 얼마나 고대했느냐'하면서 뼛골에서 울어나오는 마음으로 산하를 바라보고, 그것을 품고 싶어했고 서글픈 심정으로 위로해 주고 싶어했습니다. 삼천리반도에 깃들 수 있는 운세는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런 사람과 더불어 엉클어지고 이 민족은 하나님의 새로운 민족으로서 등장할 것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통일교단을 형성한 모체적인 사상이라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정성들인 이 모든 터전을 여러분 자신이 유린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이 그걸 느낀다면 이 청파동 골목에 들어올 때…. 통일교회가 과연 하나님의 6천년 역사를 거쳐온, 하늘의 뜻을 대해 온 교회요, 그런 청파동 골목이라면, 이 길을 거쳐오면서 흐느껴 가지고 눈물로 얼룩질 수 있는 걸음을 걷지 못하는 사람은 하늘의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나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이 마루바닥에서 눈물짓고, 이 마루에 엎드려 기도하게 될 때, 이 자리가 아버지께서 천년만년 고대하던 소원의 한 터전이란 것을 느껴 봤느냐? 뼛골이 울려나고 피살이 인연된 심정으로 자기 일신의 모든 의식을 잊어버리고 눈물만으로 시작하여 눈물만으로 끝낼 수없는 슬픔과 서글픔이 나를 점령해 봤느냐? 자기의 환경을 잊어버리고 호소한 때가 있었느냐? 그런 것이 여러분의 생활 가운데 있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선생님이 그 이상의 자리를 통해서 기반을 닦아 놓은 터전이 있다면 그 터전의 정성이 여러분을 참소할 것이 아니냐? 여기 이 문이라는 사람도 하나님이 억천만세의 수난길을 걸어오시면서 뜻을 위해 들인 정성이 나를 심판할 것이 아니냐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 정성을 중심삼고 내가 심판의 자리에 서는 것이니 이게 제일 무섭다는 거예요. 정성들인 아버지 앞에 어떻게 동정의 한 시간을 내 환경에 남기겠느냐 하는 문제를 중심삼아 가지고 지극히 몸부림치는 생활이 여러분이 믿고 따라나가는 선생님의 생활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동정의 마음이 변화를 일으킬 때, 이것은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동삼삭 절기보다도 더 잔인하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뜻을 알면 알수록, 가면 갈수록 가중된 책임을 느낄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때가 가까와올수록 하나님 앞에 책임을 새로이 다짐하는 이러한 길을 가야 할 것이 정상적인 하늘 길을 가는 사람의 길이 아니냐? 그 길이 하늘이 가는 길이요, 아버지가 가는 길입니다.

남보다 더 정성들여야 할 사람이 예배에 늦어서야 되겠느냐

효자가 가려고 하는 길을 막고 나서면서 '아들아 이젠 좀 그만 하라'고 걱정하시는 부모와 마찬가지로, 내가 민족을 위해, 세계를 위해 한 마음을 중심삼고 행동을 개시하려고 할 때 하나님이 '야 좀 쉬어서 가라'고 할 수 있는 그런 두터운 사랑이, 그런 아버지의 깊으신 후정이 남겨질 수 있는 터전을 어떻게 이 땅 위에 남기고 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내일생에 있어서 누구에게 그 무엇을 주고 가지는 못하더라도 이것은 내 일생의 최후의 종착점에서 남겨 줄 예물이 아니겠느냐 하는 마음을 가지고 가면 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그렇게 나왔기 때문에 망하지 않았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좋은 것은 좋은 곳에 두고 싶고, 귀한 것은 귀한 곳에 두고 싶은 것이 우리의 마음에서 느끼는 사실임을 부정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지극히 좋은 것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지극히 좋은 곳에 머무를 수 있는 환경과 터전을 나 스스로 어떻게 만드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타락한 내가 이것을 남기고 가기 위해서는 이 시련 고통을 극복해 가야 합니다. 극복을 제시하고 또 극복을 가중시키기 위해서는 거기에 비례되는 정성이 절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내 눈으로 민족을 위해서 얼마나 눈물을 흘려 봤으며 민족의 운명을 중심삼고, 하나님 뜻을 중심삼고 얼마나 가슴이 철렁철렁해 봤느냐는 것입니다. 아들이 죽고 딸이 죽고 부인이 죽었더라도 그것 이상의 마음을 가지고, 자식이야 죽겠으면 죽고, 집안이야 망하겠으면 망하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망하더라도 그것은 나라 안에 있는 것이 아니냐, 나라가 흥하고 망하는 것은 마지막이 아니냐, 국민으로서 소망의 터전을 잃는 것이 아니냐. 이런 마음을 가지고 세계가 망해서는 안 되겠기에 세계를 붙들고 호소하는 입장에 서게 될 때 세계를 점령하고 있는 원수들의 터전도 말없이 빼앗아 올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정성들이는 이러한 자리에 기도의 능력이 나타나고 하나님이 같이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같이하시는 것을 생활에서 느끼는 사람이 되어야만 비로소 그 느끼는 기쁨과 선한 것은 그 사람의 것으로서, 오늘 현실에서 하나님의 은사를 상속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는 자리에서 민족과 더불어 같이했으면 틀림없이 이 민족을 상속을 받을 것이요, 세계와 더불어 같이했으면 세계를 상속받는 것입니다. 사일에 관계없이 그 결과는 기필코 온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타락한 인간으로서는 정성이 아니고는 복귀의 길을 갈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정성들여야 할 사람들이 예배시간에 늦게 오면 되겠어요? 그런 사람은 부끄러워서 얼굴도 숙일 수 없는, 죄인 중의 죄인이라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시간을 잘 지키겠다고 다짐하고 남보다 더 많은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시간도 안 지키면서 '오 하늘이시여' 할 수 있어요? 정성은 남이 알게 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 와서 정성을 들이려면 차를 타고 올 것이 아니라 걸어야 합니다. 여기 와서 기도할 것이 아니라 기도를 한참하고 여기 와서 더 간절한 기도를 해야 됩니다. 정정은 이렇게 들이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바라는 환경과 그들이 추구하는 욕망과는 반비례하는 데에서 정성은 쌓아진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성과 극복은 상극적인 개념입니다. 이것은 서로가 원치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성을 들이지 않고는 극복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극복을 하려면 정성을 들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기 도

아버님, 통일교회란 이름은 불쌍한 이름인 것을 아옵니다. 또한 통일교회 책임자는 비참한 죽음의 자리를 넘어야 하는 것을 알게 되옵니다.

아버지, 민족과 더불어 세계와 더불어 하늘의 때는 저희의 목전에 다가온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놀라운 시대를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을 아버지께 감사해야 되겠습니다. 아버지의 은혜에 배은망덕한 불쌍한 무리들이 되지 말고 그 때가 오거든 자신의 있는 정성을 다 퍼부어, 영광의 자리에 있어서 만민에게 칭송을 받고, 누구보다도 죽음으로써 또다시 아버지 앞에 그 터전을 닦아 놓고 가겠다고 하는 무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러한 사람은 아버지께서도 무서워하는 사람인 것을 생각하게 되옵니다.

오늘날 통일교회가 남아졌다는 사실…. 통일교회 사람들은 비판의 눈이 높아가고 있사옵니다. 통일교회 간부에게 있어서는 자기 권한이 높아지는 것에 대하여….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스스로 느껴야 되겠습니다. 다른 사람의 눈에 있는 티는 볼 줄 알면서 자기 눈에 있는 대들보는 볼 줄 모르는 사람이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기를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선은 선한 곳에 머문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귀한 것은 귀한 곳에 머무는 것을 알았습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어떤 것이 귀한 것이냐고 할 때 자기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말없이 스며들고, 말없이 그늘에서, 말없이 스스로를 망각하는…. 이것은 전체를 너무 위하기 때문에, 전체를 너무 아끼기 때문에 안 그럴 수 없다는, 전체가 상처를 입을까봐 내가 안 그럴수 없다는 마음을 가지고….

아버지께서는 역사의 뒷면까지도 점령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버지께서 통일가에 허락하신 혜택은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인류가 흠모해 가야 할 놀라운 역사는 엮어지고 있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지의 그 깊은 사연을, 그 누구도 모르는 아버지의 마음을 부디부디 여기에 모인 자녀들의 마음에 연결시키시옵소서. 가을이 지나고 봄날이 오면 모든 초목이 푸른 옷을 입는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 통일가에 있어서도 새로운 봄날을 맞이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차원 높은 한날을 맞이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탕감의 역사시대에 있어서 서글픈 인연을 남겨 놓고 소원의 해원성사의 때가 오면 아버지를 붙들고, 아버지를 중심삼고 기뻐하지 않으면 안 되겠사옵니다. 교회를 붙들고 기뻐하지 않고는 안 되겠사옵니다. 하오나 이것을 몰랐던 저희들이었습니다. 이제 때가 되었기 때문에 교회는 싫다, 아버지는 싫다고 하는 사람은 망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사탄의 고차적인 시련권내에 말려들어가 있는 것을 알고, 아버지와 더불어, 교회의 운명과 더불어, 뜻의 운명과 더불어 내가 먹고 산다는 마음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그렇게 철석같이 자리잡힌 자리는 아무리 미운 자리라 하더라도 망하지 않을 것이오나 그 반대의 자리는 저희가 원하지 않는 자리이오니, 아버지, 만약 그 자리가 우리에게 있다면 제거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들이 어느 한때 정성을 들여 기도를 해 봤으며, 어느 한때 정성을 들여 당신의 말씀을 엮어 봤으며, 어느 한때 정성어린 마음으로 골수에 사무친 당신의 마음을 그리워하면서 아버지의 심정의 역사를 더듬어 보았습니까? 어느 한때 친구를 위하여, 민족을 위하여 피눈물 나는 자세를 갖추어 자기의 몸을 목석과 같은 자리에 넣고 아버님만이 꽃 피고 민족만이 해방받게 해 달라고 몸부림쳐 봤느냐는 것입니다.

그러지 못하였던 스스로의 모습을 반성하면서, 그런 자리에 서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하면서, 이 부끄러운 모습을 어떻게 감추겠느냐고 하면서 백주에 나타나지 말고 스스로 밀실에 들어가 가지고, 거기에서도 이불을 뒤집어 쓰고 또 쓰고, 스스로의 부끄러움을 용서받을 수 있는 그런 판결의 시간이 우리의 생애노정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선한 환경, 귀한 환경을 거쳐 가기 위한 노정에는 정성이 절대적인 요인인 것을 알았사옵니다. 정성들여야 할 몸, 정성의 내용을 갖추어야 할 자신을 귀하게 여길 줄 아는 생활을 하지 않고는 아버지의 아들이 되고 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여기에 서 있는 아들도 이제 가야 할 길이 남아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수고하신 아버지, 남아 있는 수난길도 아버지 앞에 짐으로 지워 드려야 할 것을 생각하게 될 때, 통일교회는 당신의 교회이기 때문에, 통일의 무리들은 당신의 아들딸이기 때문에 해야 할 책임을 다시 하시지 않으면 안 될 아버지이신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이 교회와 이 무리가 아버지 앞에 짐이 될까봐 두렵사오니, 아버님,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이 제단을 위해 아버지께서는 피어린 눈물의 골짜기를 걸어 나오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누구도 모르는 애절한, 뜻과 더불어 억천 만세의 울음을 가할 수 있는 내용이 깃들어 있는 것을, 아니 아버지의 눈물이 여기에 사무쳐 있는 것을 저희들이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눈물의 줄기를 타고 저희들은, 대한의 눈물 줄기와 세계의 눈물 줄기가 합해져 온 지구성에 눈물바다를 이루고, 회개의 바다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알았사오니, 그 눈물과 더불어 심정을 끓여 가면서 아버지의 아들딸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통일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사랑하는 딸들을 일선에 내보내서라도 이 일을 아니할래야 아니할 수 없는 사정이 있는 것을 당신은 잘 아시옵니다. 이렇듯 순회를 할때마다 느끼는 이 심정을 아버지께서는 아실 것이옵니다. 죄가 많기는 저에게 있는 죄가 많은 것을 느끼옵니다. 제가 죄가 많은 것을 느낌과 동시에 이 민족이 죄가 더 많은 것을 느끼오며, 이 세계가 죄가 더 많은 것을 느끼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이보다 더한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길이 남아 있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축복받은 무리, 당신을 따르고 있는 무리들은 불쌍한 자리에 서 있는 것을 알게 되옵니다. 그 길을 가기 싫어하는 무리는 가다 말고 떨어져 나가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하늘을 울리고, 하늘이 아니었다고 거부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아버지께서 아시기 때문에 저는 이 시간도 제가 서글픔을 당하는 것을 원망하고 싶지 않습니다. 오히려 당할 수 있는 최고의 한계선을 넘을 때까지 당하게 해달라고…. 그런 사람을 저주하지 않기로 결심한 것을 당신은 알고 계시옵니다. 그래서 통일가는 망하지 않을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그런 길을 걸어 나오면서도 망하지 않은 것은 아버지께서 계시기 때문이요, 세상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아버지께서 입증한 공의의 법도로써 세워졌기 때문에 남아진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세상의 부정을 받는 입장에 선 아들이라 하더라도 네 집안의 식구가 원수라 하였던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 지극히 착한 아들딸로 하여금 부정을 받는 자리에서도 아버지께서 한하시는 불효자식이 되지 않기를 아버지앞에 기도한 것임을 당신은 알고 있습니다. 그런 마음을 갖고 이 길을 개척해 나가는 저희들 중에는 불효자식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효자도 있는 것을 아버지께서는 발견하실 것이옵니다.

죽음으로 마쳐 버리는 것이 아니라 염려되는 마당마다 새로운 소망의 새싹의 터전은 줄기차게 뻗어 나가는 사실을 다른 면에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이 틀리게 되면 새로운 것을 통하여 아버지께서는 발전시켜 나오신 것을 아옵니다. 그러한 고비를 넘을 적마다 슬픔과 기쁨이 엇갈리는 역사를 엮어 오늘날 통일의 제단을 형성해 나오셨사옵니다.

이제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당신 앞에 맡기오니, 당신이 해야 할 책임으로 맡아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당신이 가는 길을 따라서 남길 수 있는 전통과 사명을 완수하게 해주시고, 천만 번 부정을 받고 욕을 먹을지라도 동원된 천 사람 가운데 그 뜻을 받들어 남길 수 있는 한 사람이라도 찾고 계신 걸 알고 있사옵니다. 금번 동원된 당신의 딸들 가운데 당신이 개체적으로 복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있거든 복을 주시옵고, 수많은 딸들이 책임하지 못한 것을 그로 말미암아 용서받았다 할 수 있는 그런 중심의 딸이 누가 되겠느냐고 할 때, 오래 전에 축복받은 가정이 아닌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하늘의 뜻을 말없이 책임지고 가는 그런 무리를 통하여, 자기 정체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일체를 감추고, 자기 스스로 한 것이 나타날까봐 부끄러움을 느끼는 그런 무리를 통하여 하늘은 말없이 일보 가일보 전진해 나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오늘날 통일의 신도들은 이러한 자리를 스스로 지키고 찬양하고 정성에 정성을 가하여서 이 민족 앞에, 이 인류 앞에 없어서는 안 될 무리가 되게 당신께서 역사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1971년도 3월 중반기를 넘어가고 있사옵니다. 앞으로 이 해에 계획하고 계시는 그 뜻을 아버지께서 맡아 주시옵소서. 이 뜻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눈물에 비례되는 대가가 요구되는 것을 알고 있사옵고, 피어린 투쟁의 대가, 희생의 대가를 치러야 될 것을 알고 있습니다. 먼저 사랑받고 먼저 책임자 된 자들이 이 대가를 치르기 위해 앞을 다투어 싸울 줄 아는 당신의 자녀들 되게 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남이 알지 못하는 일을 하고 있는 통일교회 위에 아버지께서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재창조의 인연을 찾아 나가기 때문에 그러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십년의 일을 일년으로 단축시키고 싶은 아버지의 마음과 같이 저희도 그런 마음으로 걸어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지금까지의 걸음을 아버지께서 지켜 보시면서 인도하여 주신 것에 감사드리오며, 금후의 모든 일체를 아버지의 뜻 가운데서 맡아 주실 것을 바라옵니다.

아버지를 모셔야만이 효자의 도리와 충신의 도리를 갖출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 이후에도 아버지께서 요구하신 바를 반드시 남겨 드리기 위해 맡기신 사명과 책임 앞에 자신을 가지고 나타날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게하며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모든 말씀 참부모의 이름으로 간절히 아뢰었사옵니다. 아멘.

[기 도]

사랑하는 아버님, 당신이 거하실 수 있는 나라가 이 땅에 어디 있으며, 당신이 거느릴 수 있는 민족이 이 인류 가운데 어디 있느냐고 묻게 될 때, 당신께선 아직까지 그러한 나라와 그러한 민족을 만나지도 못하고 거느리지도 못한 것을 저희들은 아옵니다.

나라가 있기 전에 먼저 민족이 있어야 되고, 민족이 있기 전에 종족이 있어야 된다는 것을, 종족을 편성하기 위해서는 가정이, 가정이 있기 위해서는 내 개인이 완성기준에 미달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원리를 통하여 알고 있습니다.

나라 없는 당신의 자녀들이 이 땅 위에 얼마나 있는가를 생각하게 될 때, 아버님을 대하여 아버지라 부르고 있는 사람은 땅 위에 많아도, 당신이 그리워하고 소망하는 그 나라와 백성을 찾기 위해서 자각을 하고, 애쓰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땅 위에 아버지의 나라가 없고 민족이 없고 씨족이 없고 가정이 없더라도, 그 나라를 대신하고 민족을 대신하고 씨족을 대신하고 가정을 대신할 수 있고, 당신의 마음속에 있는 모든 것을 대신 이어받을 수 있는 사랑하는 아들딸이 있다 하게 될 때에는, 그 수가 하나 둘 증가함에 따라, 당신이 소원하시는 나라는 아득한 꿈의 나라인 것 같지만 그런 아들 딸로 말미암아, 그런 개인이 연결됨으로써 당신의 마음 앞에는 소망의 나라가 시작되고, 소망의 민족과 소망의 생활적인 터전이 전개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영광의 자리에 설 수 있는 아들이 되고 딸이 되겠다고 이 시간 다시 한 번 다짐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는 수천 년의 역사과정을 거쳐 오시면서 어느 한날 사랑하는 자녀를 그리워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는 것을 알고, 그 자녀들을 영원무궁토록 당신의 영광의 나라의 백성으로 존속시키고 싶은 마음이 사랑하고 싶은 마음과 더불어 같이했다는 것을 저희들이 알게 될 때, 오늘날 보잘것없는 저희 자신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의 마음이 끊임없다는 것을 느끼게 되옵니다. 그런 것을 느낄수록 아버지께서는 이 몸과 이 마음을 통해서 그 나라와 그 백성을 찾고 계신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내가 아버지 앞에 목숨을 바친 것은 그 나라에 대한 충신의 도리를 다하기 위한 것이옵고, 소망의 백성을 편성하여 원수에게 농락받는 슬픔의 환경을 청산해 버리고 당신이 영광의 아버지로서 이 땅에 현현하실 수 있는 그날을 위하여 찾아온 것이오니, 이것을 실제로 느낄 줄 아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어야 되겠사옵니다. 그러하오니, 아버지, 여기에 모인 당신의 자녀들을 굽어 살피시옵소서.

이제 저희들은 저희 개체 개체의 마음이 어디에 처하여 있는가 하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당신이 이 자리에 찾아오실 때 찾아오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찾아오셨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무거운 마음을 갖고 찾아 오셨습니까? 저희의 부족한 것을 책하시고 내일의 소망을 다짐하게 하는 아버지의 발걸음이 이 자리에 머물러 주셔야 되겠사옵니다.

저희들은 선하지 않으면 악한 자리에 서는 것이요, 흥하는 무리가 되지 않으면 망하는 무리가 되는 것과 같은 그런 경계전에 처하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중간 입장에는 처할 수 없다는 것을 저희들이 알고 있사오니, 좌든지 우든지 결정하여 한 기준에 서서 스스로 전부를 정비하여 아버지의 뜻 앞에 바쳐 드리지 않으면 안 되는 자신임을 발견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무릎 꿇은 이 자리를 굽어살피시옵소서. 이 시간 이 자리에 참석한 스스로의 몸과 마음이 어디에 머물러 있는가를 알고, 하늘과 더불어 관계를 맺어 나오기까지 그 인연이 얼마나 비참한 사연 가운데 맺어져 있는가를 상기할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라 부르는 그 감정이 아버지와 나와의 관계에 어떠한 근거를 두고 느끼는 것인가를 다시 한 번 느껴야 되겠사옵니다. 아버지 것이 내 것이요, 아버지 일이 내 일이요, 아버지의 행함이 나의 행함이라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이 자리에 참석한 당신의 아들딸이 있거든, 아버지, 흠뻑 품으시어 사랑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그렇지 못한 마음을 가졌다면 그 마음을 제거시키시옵소서. 당신의 엄격하신 그 법을 통하여 스스로 다짐하고 스스로 아버지 앞에 회개할 수 있는 마음이 되게, 아버님, 이끌어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아침, 여기에 모인 당신의 자녀들이 바라고 나온 모든 소원은 당신을 향한 가없는 마음이요, 당신을 뵙기 위한 마음이옵니다. 그 일편단심의 마음을 가지고 나온 이 자리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 자리에 모인 소수의 무리를 아버지 앞에 묶어 바치오니 당신께서 이 전체를 품으시옵소서. 새로운 나라와 새로운 민족을 향하여 제 2차의 전진을 다짐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대견스러운 아들딸로서, 당신이 자랑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아들딸로서 세워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오늘은 거룩한 날이오니 여기에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전국에 널려 있는 자녀들이 이곳을 향하여 기도하고 있사오니, 그 곳곳마다 부디 당신의 사랑의 손길이 떠나지 마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금후의 이 나라와 이 민족을 지켜 주시옵소서. 사방에 에워싸여있는 원수들의 움직임을 바라보는 저희들은 외로운 고아와 같은 입장이지만 겸손히 흰옷을 입고 아버지 앞에 회개해야 되겠습니다. 선조들이 하늘 앞에 지은 죄상을 저희들이 대신 회개하여, 현재 이 나라 이 민족의 불쌍함을 저희들이 책임지고, 아버지 앞에서 소망을 세워 갈 줄 아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어야 되겠사오니, 이 나라를 지켜 주시옵시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무리 원수가 많다 하더라도 당신의 사랑권내에 있게 될 때에는 침범할 자가 없다는 것을 저희들이 알아야 되겠사옵니다. 외적으로는 이렇게 위로받을 곳이 없사오나 당신의 내정적인 심정을 통하면 위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이 민족이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니다.

이와 같은 처지에 있는 저희들은 단결해야 되겠습니다. 저희들은 하나의 목적을 향하여 총진군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알고 있사오니, 부족한 자신을 연마하여 내일의 희망이 되는 아들딸로서 바쳐 드려야 되겠사옵니다.

오늘이 문제가 아니라 내일을 위할 수 있는 아들딸이 되지 않고는 이 나라 이 민족을 당신이 기뻐할 수 있는 나라와 민족으로 창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옵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인 당신의 아들딸들만이라도 아버지 뜻 앞에 바쳐 드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아들딸들로 삼아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날 통일의 기치를 들고 세계에 널려서 활동하고 있는 당신의 자녀들을, 아버지,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소수의 무리들이 아버지의 뜻을 바라보고 싸우고 있는 곳곳마다 아버지께서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엄연하신 실존의 모습으로 나타나시옵소서. 살아 계신 아버님임을 증거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내일의 소망을 갖고 가는 그들의 길은 고독이 스며드는 자리요, 외로움과 서러움이 동반하는 자리이나 그들은 결코 망하지 않게 하실 줄 알고 있사오니 지켜 주시옵소서.

개척자의 책임을 완수하여 완비된 그 모습으로서 아버지 앞에 승리의 영광을 바쳐 드릴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시길,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 이 하루가 저희들에게 복된 날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새로운 아들딸의 인연을 맺을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고 원하옵니다.

이 시간 당신 앞에 부복한 자녀들의 마음 마음을 장중에 온전히 넣으시고, 마음 깊이 투시하는 생명력을 가지고 주관하시옵소서. 그리하여 최후의 한날을 위하여 부끄러움이 없는 아들딸로서 키워 주시옵고, 이끌어 주시옵길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이 한 시간을 당신 앞에 맡겼사오니, 친히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참부모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말 씀

여러분들은 이미 뜻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소원은 뜻을 위해 있어야 될 것이며, 우리의 매일매일의 생활은 뜻을 가려 가는 생활이 되어야 될 것입니다. 이것은 뜻길을 가는 사람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의무라고 보는 것입니다.

절대자의 소원

통일교회가 지금까지 싸워 나온 역사가 있었다면 그 역사는 어느 특정한 개인을 위한 싸움의 역사로 남아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 역사가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도 그것이 하늘땅을 대신할 수 있고 인류가 바라는 단 하나의 뜻을 중심삼고 어느누구라도 이 뜻과 더불어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대적인 뜻과 더불어 가야만 통일교회 역사는 빛날 것입니다.

오늘날 통일교회가 어떤 특정한 민족만을 위해 뜻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인류역사가 소망하였고, 현 시대에 살고 있는 만민이 바라고 있고, 나아가 미래의 후손이 추구할 수 있는 그런 단 하나밖에 없는 뜻을 중심삼고 나간다면, 통일교회는 결코 이 시대의 환경과 더불어 흘러 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통일교회가 미래세계에 있어서 행복의 기수가 되고, 새로운 역사를 창건하는 용사로서 나타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는 통일교회가 지닌 바의 소신이 인류가 바라는 뜻과 더불어 일치되는 자리에 설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이것을 중심으로 통일교회가 역사적으로 빛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가 결정된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이 뜻이라는 것은 인류만이 바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 인류를 지배해 나오는 역사적인 주인이 있다면 그 주인이 바라는 뜻이 아닐 수 없는 것이요, 현재의 역사를 지배하고 있는 어떤 절대자가 있으면 그 절대자가 바라는 뜻이 아닐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과정을 중심삼고 볼 때도 시대의 변천과 함께 흘러가는 인간의 군상은 우리가 볼 수 있을지 모르지만, 뜻을 중심삼고 볼 때는, 뜻과 더불어 가는 사람은 배후에서 절대자가 뒷받침이 되어 시대적인 중심으로 완연히 서 있다 할진대는 그 사람은 결코 망할 수 있는 입장에 서지 않을 것입니다.

절대자의 소원은 세계에 선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그것에 반대되는 모든 여건을 제거하여 승리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미루어 볼 때, 그 뜻과 더불어 가는 사람의 과정이 아무리 험하고 비참하더라도 그것은 하나의 과정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 그것이 전체를 대신할 수 있는 하나의 결정적인 모습이라고는 볼 수 없는 것입니다.

뜻길을 가는 사람은 아무리 비참한 환경에 떨어졌다 하더라도 오히려 그것이 자기에게 발전할 수 있는 하나의 자극이 되고 장차 소원의 터전을 넓힐 수 있는 하나의 기반이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어떠한 슬픔의 고비가 있다 해서 그것이 미래의 뜻을 방지시키고 뜻이 가는 길을 무너뜨리는 동기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오늘날 섭리역사노정을 보게 될 때 거기에는 굴곡이 많았던 것을 알고 있습니다. 어느 시대에는 발전했고, 어느 시대에는 후퇴했으며, 어떤 때는 올라가는 반면에 어떤 때는 내려갔던 사실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지금까지 역사가 그런 과정을 거쳐왔고 우리도 일생을 통하여 역시 그런 과정을 거쳐 갈 것입니다. 우리가 뜻을 중심삼고 하루하루의 생활을 두고 보더라도 신념을 스스로 다짐하는 강한 면이 있는가 하면, 그 반대의 입장에 서는 경우가 있음을 느낄 것입니다.

여기에서 올라가는 그때를 기뻐만 해서도 안 될 것이요, 내려가는 때에는 서러워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려가는 때가 있다면 거기서 내일의 희망을 다짐할 수 있는 하나의 안식기간으로 이것을 소화하고 흡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런 생활이념을 가진다면 아무리 저조한 입장에 있다 하더라도 자신을 더 저조한 자리에 끌어내리는 것이 아니라 내일을 위하여 다짐할 수 있는 하나의 밑거름으로서 하나의 터전으로서 그것을 흡수할 것입니다. 이런 놀음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될 것입니다.

밤이 있으면 낮이 있는 것입니다. 밤은 낮을 빛나게 하기 위한 준비의 기간이요, 휴식의 기간이요, 재차 연마하는 기간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미루어 보게 될 때, 수난의 과정에는 굴곡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발전할 수 있는 사람

그러면 망하지 않는 자리에 서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어느 위치에서 올라갈 수 있는 자리에 있을 때 내려갈 수도 있다는 것을 망각해 버린다면, 내려가는 입장에 서게 되면 올라갈 수 있는 길을 잃어버린 사람이 되기 때문에 내일의 소망을 향해 다시 출발할 수 있는 기틀을 잃어버리는 자리가 됩니다. 그런 자리에 서게 되면 거기에서 정지상태가 벌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정지상태가 벌어지면 자기 스스로 발전할 수 있는 길도 막혀 버리는 것입니다.

만약 막혀진 그 자리가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자리가 될 때 그는 거기에서 제거당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천리 법도 앞에 당연한 이치라는 것을 우리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내려가는 때가 되어 그 환경에 둘러싸이게 되더라도 낙심할 것이 아니라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그 내적 환경의 어려움에 부딪칠수록 우리의 내심은 뜻을 집약시켜 핵심적인 기준을 마음에 품고 소신을 가지고 외적 환경을 대하여 밀고 나갈 수 있는 끈기 있는 자신을 갖추어 나가야 합니다. 그런 기간이 1년, 10년, 혹은 일생 동안 계속된다 하더라도 끈기 있는 내적 마음을 가지고 밀고 나가는 그런 터전이 남아 있다 할진대는, 어느때라도 그 터전을 중심삼고 다시 뜻길을 향하여 출발할 수 있는 길이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렇지 못하고 외로움과 어려움과 시련에 부딪치게 될 때, 그 환경적인 여건에 휩쓸려 들어가서 뜻을 망각하고 뜻을 저버리고, 지금까지 걸어왔던 뜻 생활의 모든 것을 새로이 비판하면서 포기하는 입장에 서면, 거기에서 뜻에 대한 길이 끝을 맺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인들은 뜻길을 가는 데 있어서 망한다는 관념, 혹은 뜻길을 떠난다는 그런 생각을 절대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뜻을 대하게 될 때는 최고의 때가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보다 심령이 높은 사람이 있다면 그가 먼저 뜻을 대할 수 있는 때가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말하면, 안테나가 높으면 높을수록 먼 곳에서 발생하는 전파를 잘 받아들일 수 있는 거와 마찬가지로 심령이 높은 사람일수록 누구보다도 먼저 새로운 뜻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보다도 먼저 뜻을 알았더라도 먼저 안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뜻을 먼저 안 만큼 그 뜻을 중심삼고 얼마만큼 오랫동안 가치 있게 지니고 나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 뜻을 중심삼고 나가는 데 있어서 자신의 생활에 굴곡이 있다고 하여 내려갈 때는 그 뜻을 저버리고 내려가고, 올라갈 때는 다시 그 뜻을 품고 나가겠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올라갈 수 있는 때가 되었다 하더라도 내려갈 때에 뜻을 품고 나간 동기가 없으면 그때를 자기의 때로 맞아들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들어 보면, 춘하추동 이 사계절이 돌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봄이 지나가면 여름이 오는 것이요, 여름이 지나가면 가을이 오는 것이요, 가을이 지나가면 겨울이 오는 것이요, 겨울이 지나가면 다시 봄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때 생명을 지닌 씨라든가 생명을 지닌 풀이라면 다시 봄을 맞이하게 될 때에 그들은 지나간 봄보다도 크고 굵어진 자태로서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는 겁니다. 이와 같이 뜻길을 가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가을이 되었다 하여 완전히 죽어지는 입장에 서게 되면 그것으로써 끝나는 것입니다. 그 자체가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것입니다.

가을이 되어 외적으로 앙상한 가지만 남게 되었다 하더라도 그런 환경에 지배받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의 내심에 집약된 생명력을 스스로 지녀 가지고 외적인 환경을 극복할 수 있는 준비태세를 갖추었다면 그 나무는 다시 봄이 될 때 그 생명력으로 천지 앞에 새롭게 드러난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살아날 때는 작년보다 작아지는 것이 아니라 더 커진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새로운 하나의 연륜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하나의 까풀이 생겨서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확고한 방비의 기반이 닦아집니다. 이것은 우리가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련이라는 것은 인생행로에 있어서, 혹은 뜻길을 가는데 있어서는 반드시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행복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태어나는 그날부터 죽는 그날까지 행복한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반드시 굴곡이 있다는 것입니다.

흥하는 자리와 망하는 자리

그러면 여기에서 흥망의 분기점에 대해서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것은 무엇이냐? 망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 망하느냐? 망하는 사람은 선이면 선, 흥할 수 있는 길이면 그 길을 중심삼고 가다가 시련과 고통에 부딪치게 될 때 그것을 완전히 포기해 버리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그것으로 끝장이 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그것을 귀한 것으로 알고 소원으로 삼고 목표로 삼고 나가는 과정에 있어서 어떠한 시련과 고통에 부딪치더라도,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내정적인 집약점을 결집시켜 가지고 그 터 위에 출발을 다짐할 수 있는 스스로의 준비태세를 갖춘 사람 앞에는 망하는 길은 없을 것입니다.

선이 가는 길 앞에는 때가 되면 반드시 힘이 가중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한 길입니다. 선한 사람은 언제나 낙망하는 자리에 있지 않습니다. 한 고비를 돌아오면 반드시 재봉춘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때를 맞이 하면 하늘이 다시 선을 이끌어 주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슬프고 어렵고 고통스러운 때가 있다 하더라도 하늘이 가는 길, 뜻이 가는 길, 선이 가는 길은 반드시 재생할 수 있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찾아와서 나를 이끌어 간다는 사실을 언제나 명심해야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방심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를 위해서는 아무리 괴롭고 외롭더라도 마음을 모아 준비하고 그날이 어느 때에 올 것이냐 하고 바라는 마음이 간절해야 합니다. 아무리 낮은 자리에 있다 할지라도 그때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나가게 되면 반드시 그 선의 때를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오늘날 신비스런 체험을 해본 사람에 있어서나 우리 일상 생활에서 체험을 해볼 수 있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소망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자기가 사지에 들어가더라도 뜻을 대한 마음, 혹은 선을 대한 그 마음을 중심삼고 나가야 합니다. 만일 죽어서 희생되는 한이 있더라도 그렇게 나아간다면 그는 희생될지라도 그가 품은 뜻은 남아진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역사과정에 왔다 간 성인현철들은 세계에서 반목질시하는 불우한 환경에 몰리게 될 때, 그 어려운 환경 속에서 자기의 소신을 전부 포기해 버린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어려운 환경이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그 환경에 대비하여 내심에 집약된 마음을 가지고 내일의 소망이 이 시대에 오지 않으면 미래시대에 다시 온다는 확실한 신념을 가지고 나갔던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역사가 지나감에 따라서 역사에 위인이나 성인으로 등장했던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어려운 환경으로 내려가더라도 자포자기하는 자리에는 서지 말아야 합니다. 자포자기하는 자리에 서지 말라는 것입니다. 선은 영원한 것입니다. 선은 기필코 발전하는데 일방적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내려갔다 올라갔다 하면서 발전하는 것입니다. 한 고개를 넘으면 평지를 만나는 것이요, 평지를 지나면 또 새로운 고개가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전부가 올라갔다 내려갔다, 주고받으면서 발전해 나간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이런 모양으로 발전해 나간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되겠습니다. 직행하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생활에 있어서 상하관계나 좌우로 치우치는 관계가 있다 하더라도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환경이 치우치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내심으로 뜻을 대하는 마음이 변하지 않아야 하며, '내가 대하는 뜻은 기필코 이루어질 것이다. 내가 가는 뜻 앞에는 반드시 시련이 올 것이다' 하는 마음을 가지고 가야 합니다. 그러니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그 어려움에 대비해야 하고, 몰리면 몰릴수록 그 몰림에 비례하여 내심적으로 그 자리를 양보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 어려운 환경을 다시 한번 밀어낼 수 있는 때가 오게 되면 여러분은 새로운 출발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될 것입니다.

그러면 망할 수 있는 자리는 어떤 자리인가? 선을 중심삼고 나가다가 자포자기하는 자리입니다. 선의 길을 완전히 끊고 돌아서는 자리입니다. 그런 사람은 망하는 것입니다.

망하지 않는 자리는 어떤 자리인가? 아무리 어렵더라도 내가 행해 자온 것은 선이요 지금까지 살아나온 것도 참된 것임에 틀림없다고 자신하고 가는 자리입니다. 현재 부정하는 환경을 만나더라도 과거의 역사적인 실증을 품고 '내가 한 그것만은 틀림없이 참이다' 하는 신념을 중심삼고 나가야 합니다. 그렇게 나갈 때는 그 스스로 느끼지 못한 기쁨이라든가 스스로 느끼지 못한 행복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 것을 느끼던 때를 중심삼고 그 인연을 잃어버리지 않는 자리에서 정성을 들이며, 스스로 때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나가게 되면 반드시 봄이 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앞에 그런 굴곡의 때가 오기 전에 그것을 임의적으로 방지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우리의 신앙생활이나 우리의 일생 행로가 그런 굴곡을 따라서 발전하고 전진되어 나가는데, 그때가 오기 전에 임의적으로 방지할 수 있는 길이 없겠는가 할 때, 이것을 방지할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고심하는 자리에서 지금까지 내심의 인연을 중심삼았던 그것을 버리지 않고 극복하는 인연을 갖고 나가면 그때를 맞이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스스로 어려운 환경에 부딪치게 될 때에 그것을 넘어갈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무슨 방법일 것이냐? 동역자나 동지가 있어야 하며, 스승으로부터 지도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망하는 자리를 피해 갈 수 있는 길

나는 이러이러한 문제로 절벽에 부딪쳤으니,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이냐? 개인적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사람은 자기보다도 신앙면에 있어서 높은 사람, 자기보다도 위에 있는 사람을 찾아가서 솔직히 터놓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나는 나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를 따라 가는 사람으로 있겠다' 해야 합니다. 그가 우로 가라 하면 우로 가고, 좌로 가라 하면 좌로 가는 것입니다. 또 올라가라 하면 올라가고 내려가라 하면 내려가는 것입니다. '나를 위하는 것이 아니라 지도하는 사람을 대신하여 있겠다'하게 되면 그 환경을 피해 나갈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생활에 있어서 동지가 필요한 것입니다. 동지가 없는 사람은 외로운 사람입니다. 동지가 있으면 서로 보충하고 보호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럼으로 말미암아 환경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길도 생기는 것입니다. 만약에 동지가 없으면 독단적으로 다 해결해야 되는데, 그것은 전후관계를 혼자서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자기로서는 심히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굴곡에 부딪치게 될 때는 반드시 동지나 스승을 찾아가서 내 전체를 그 앞에 맡기고, 생명까지도 위탁할 수 있는 입장에서 완전히 그의 대신자로서 가게 될 때는 굴곡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외로울 때라든가 슬플 때, 혹은 고독할 때는 내가 대신자로서 갈 수 있는 사람을 찾는다든가 그 길을 해결해 나가기 위해서, 경서를 읽는다든가 유명한 사람의 설교를 듣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되는 것입니다.

어려운 길을 피해 가기 위해서 이처럼 지도자를 앞세우고 길을 가야 하는 것은 물론이지만, 그 다음으로 망하지 알고 피해갈 수 있는 길은 어떤 길이냐? 열만한 어려움에 부딪치게 될 때에 그 열만한 어려움을 중심삼고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열만큼의 어려움을 걱정하지 말고 백만큼의 어려움을 찾아서 돌진해 나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열만큼의 시련을 감수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이상 백만큼의 시련도 받고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문제를 점핑해서 뛰어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반작용과 같은 작용이 일어나게 됩니다. 열만큼의 힘을 가지고 가면 설 수 있는데 백만큼의 힘을 가지고 가서 부딪치면 거기에는 반작용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높은 데서 뛰어 내리면 그 높이에 비례하여 반작용 하는 힘이 있는 거와 같은 현상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심정에 타격을 받고 그 자리에서 낙심하고 자포자기했다가는 망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당한 문제보다도 더 큰 문제를 자진해서 맞이할 수 있는 행동을 제시하면 하나님은 그를 버리지 않습니다. 내가 응당히 운명적으로 가야 할 길인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중심삼고 참을 위하여 더 희생적인 자리로 나서게 될 때, 하나님이 붙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심령생활에 있어서 고갈을 느끼게 될 때, 이를 수습하는 방법은 지도자를 찾아가서 허심탄회하게 자기 자신의 모든 문제를 제시하고, 그의 대신자로 따라가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 다음의 한 방법은 자기가 가고 있는 자리 이상의 비참한 자리를 스스로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가 오늘날 통일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기준이 어떠한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저 교회나 왔다갔다했는지, 아니면 가족들로부터 시련을 받으면서 신앙생활을 했는지, 남편이라든가 아내, 혹은 자녀를 통하여 시련을 받은 것이 1년, 2년, 3년, 4년…, 계속됐다고 합시다. 여기에서 뜻이 가는 길이 이런지 저런지, 희미해질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완충지대와 같은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 자리, 그 자체, 그 모양, 그 꼴 가지고는 그곳을 헤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냥 그대로는 헤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곳을 헤어나기 위해서는 첫째로 뜻을 위한 간절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옛날에 뜻을 위하는 간절한 마음을 가졌었으면 그 마음을 다시 연장해 가지고 시련이 아무리 극하다 하더라도 그 환경에 마음을 절대 주지말고 누룩이 될 수 있는 씨를 남겨 놓으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 마음을 잃어버리는 날에는 수습할 도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후퇴하는 자리를 수습하려면

이러한 방법으로도 해결되지 않을 때는 자기의 생명을 책임질 수 있는 지도자, 혹은 스승을 찾자가서 직고하라는 것입니다. 가리지 말고 솔직이 얘기하라는 것입니다. 의논하는 데 있어서 내게 유리한 것은 말하고 내게 유리하지 않는 것은 말할 수 없다 해서는 안 됩니다. 솔직이 털어놓으라는 것입니다. '당신이 내 대신이 되어 주소. 내 것을 맡아 이끌어 주시오' 이렇게 솔직이 직고하고 그가 지도하는 대로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내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대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 길밖에 없는 것입니다.

만일에 그래도 안 되면 단행해 나가는 것입니다. 현재 있는 십자가 이상의 길을 자진해서 가라는 것입니다. 전도를 하다 타격받은 심정을 후방에 돌아와서 수습하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절대 수습이 안 됩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뜻을 위하여 일선에 나갔다가 하늘의 허락 없이 후퇴했다는 마음은 언제나 자기의 환경을 사로잡는 것입니다. 전도하러 나갔다가 자기가 심정에 타격을 받고 돌아왔다면, 그것을 수습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일까요? 다시 전도 나가야 되겠다 하는 그 마음을 유지해서 다시 가야 합니다.

그렇게 전도하러 나갔지만 수습할 도리가 없으면 어떻게 하느냐? 그 다음에는 전도 나가서 후퇴하지 않았던 사람에게 문의해 보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일선에서 전도하다가 후퇴하여 돌아왔으면, 후퇴하지 않은 사람에게 '당신은 어떻게 싸웠느냐? 나를 인도해 주시오'라고 해야 합니다. 이때의 문제는 간단합니다. 이렇게 이렇게 싸우라고 지시해 줄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에 절대 순종해야 됩니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해서는 답이 안 나옵니다. 그러니 자기를 부정해야 답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강하면 강할수록 수습할 수 있는 길이 가까와진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수습하는 방법은 무엇이냐? 갑이라는 지역이면 지역, 지구면 지구, 구역이면 구역으로 전도를 나갔는데 거기서 반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보다 더 악착같이 반대하는 사람, 몇 배 더 포악하고 악착같이 반대하는 사람을 자진해서 찾아가라는 것입니다. 그 방법 외에는 없습니다.

그러면 제일 지혜로운 방법이 있다면 무슨 방법이냐? 사람이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시련이 없을 수 없습니다. 어두운 밤과 같은 것이 반드시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방지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것이냐, 그러한 시련 굴곡이 오는 것을 피해갈 수 있는 방법이 없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 그럴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떤 방법이냐?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여 사는 방법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대신하여 사는 방법은 무엇이냐?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어떤 수난에 부딪쳤을 때 거기에서 벗어나려면, 내 스스로의 내심적인 신앙심을 품고 나가야 되겠고, 다음에는 지도자의 지도를 받아야 되며, 그 다음에는 그 이상의 십자가의 길도 자진해서 가야 됩니다.

그러면 그런 굴곡이 찾아오는 것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길은 없을 것이냐? 길이 있다면 단 하나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위해서 사는 길입니다.

열 사람이 있으면 그 열 사람을 위해서 사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자기 소견을 갖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 열 사람의 소견을 따라가는 사람인 것입니다. 따라가는 사람에게는 핍박이 없는 것입니다. 따라가는 사람은 치지 않습니다. 만약 열 사람을 위해서 희생을 했으면 열 사람이 다 걸리기 전에는 안 걸리는 것입니다.

남을 위해서 살면 망하는 법이 없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거느리고 3년 공생애노정에서 준비한 것이 무엇이냐? 예수님 자신이 위함을 받는 생활이 아니라 제자들을 위하는 생활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 열두 제자는 특별한 형(型)입니다. 인류역사 과정에 있어서 수많은 인류를 대표하는 특별한 열두 형인 것입니다. 이들은 그 시대에 있는 사람들이지만 시대를 넘어 종적 역사시대의 인류 전체를 대표할 수 있는 표준형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열두 제자를 세워서 3년 동안 모심의 생활을 했다는 것입니다. 3년 동안 모심의 생활은 어떤 것이냐? 씨를 뿌려서 나오는 싹을 가꾸는 생활입니다. 자기를 위하는 생활이 아니라 남을 위하는 생활입니다.

그렇게 위하던 제자들이 꺾여 나가게 되면 예수님은 낙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열두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나가게 될 때, 예수님은 자기 스스로 결단을 내려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자기를 주장하면서 하나님 앞에 십자가를 놓고 담판기도를 올렸던 것입니다.

그 전에는 어떻게 했느냐 하면, 세 제자를 위해 기도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기도하던 내용은 무엇이었을 것이냐? 먼저 이스라엘 나라의 미래의 흥망문제에 대한 기도였을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자기를 3년 동안 따르며 정성들여 나오던 그 제자들을 위해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세 제자를 위해 기도한 것은 여기에 대표되는 세 제자들이, 예수님과 같이 밤을 새우며 기도하는 세 제자들이 뜻을 중심삼고 망하는 자리에 들어가지 말기를 기도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자신을 위하여 기도한 것이 아니라 나라를 위하여 기도했고, 나라의 대표자격인 세 제자를 위해 눈물 흘리며 기도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다 틀어지게 될때, 십자가는 결정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책임으로서 십자가의 담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을 위해 사는 사람, 즉 열 사람을 위해 살았으면 아홉 사람이 반대하더라도 한 사람은 자기편을 들어줍니다. 열 사람 중 반이 자기를 반대하더라도 반은 자기를 편들어 준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울타리가 되어 준다는 것입니다. 내가 침략받는 일이 있으면 나를 보호해 줄 책임이 있는 것이요, 내가 대신 수고를 해주었으면 그것을 책임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 위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위하는 사람은 굴곡이 있다 하더라도 한꺼번에 푹 내려가지는 않는 것입니다.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사람이 있지만 그 가운데는 올라가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올라가는 사람을 붙들고 내가 그를 위하고 동조하게 되면 흑암의 때를 방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종교생활에 있어서 '온유 겸손하고 남을 위하여 희생하라' 하는 말은 내가 침범받지 않고 굴곡을 벗어나서 언제나 발전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해 주신 지극한 사랑의 도리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을 위해 살다가 망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동네에 자기는 일전한푼없는 불쌍한 처지에 있으면서도 동네 전체 사람들에게 은덕을 배푸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 사람의 하루하루 생활이 비참하다는 것은 동네 사람들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 비참한 사람이 만약에 외부로부터 더 비참한 침해를 받게 될 때는 동네 사람들은 단결하여 그 비참을 막아 준다는 것입니다. 인정을 중심삼은 우리의 생활권에서도 그런 일들이 벌어지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인간을 깨우쳐 오신 하나님

그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그런 사람은 외부로부터 침해를 받아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환경이 보호육성해 주고 선을 중심삼고 바라보는 소망이 되는 것이요, 남겨줄 수 있는 하나의 터전이 되는 겁니다. 이것은 스스로 다 알기 때문에 그런 마음이 발동하여 그 사람을 보호해 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남을 위해 사는 사람은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망하려고 해도 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왜 망하지 않느냐? 그것은 아버지와 같은 생활권에 동참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가는 길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전지전능한 하나님 자신도 인간을 대하여 '너희들은 나를 위하고 내게 절대 복종 하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반대인 것입니다. 인간들이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깨우쳐 주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길을 갈 줄 모르니 가르쳐 주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가르쳐 주고 지도하는 것이 쉬운 일일까요?

여러분은 자기 자식 하나 교육시키는 것도 힘들지요? 그 자식은 자기의 피살을 이어받은 아들딸입니다.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면 마음이 통하여 같이 눈물 흘릴 수 있는 아들딸입니다. 아버지가 눈물 흘리고 슬퍼하면 같이 슬퍼할 수 있는 마음이 자연적으로 동할 수 있는 아들딸인데도 불구하고 그들을 지도하고 육성하려면 지극히 어렵지 않습니까? 그것을 볼 때, 오늘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의 아들딸이 아니라구요. 하나님이 아무리 울어도 본체만체 합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슬퍼해도 본체만체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사탄의 혈육을 받고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슬퍼하는 것을 보고 찬양합니다. 망하는 것을 보면 좋아하며 웃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인간을 놓고 지도하고 개척의 방향을 가르쳐 주려니 얼마나 수고로우실 것이냐? 그러나 하나에서부터 백, 천, 만까지 위하시는 마음,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이 하나님에게 없었더라면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섭리역사를 붙들고 나오실 수 있었겠느냐는 것입니다.

오늘날까지 섭리역사를 이끌고 나오시는 하나님의 그 사연과 입장은 어떤 것이냐 하면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내가 아니면 그들은 망한다. 망하는 것이 본연의 인간에게 부여된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는 나로 말미암지 않으면 망한다'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는 당신이 절대 필요하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이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 지금까지 역사과정에서 수난길을 개의치 않고 개척해 나오셨고, 수많은 인류를 교육해 나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입장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남을 위하여 희생봉사하는 생활을 하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자는 것입니다. 애국자가 있다면 그 애국자는 민족이 압박을 당하고 고통을 당하는 것에 대하여 불쌍한 마음에 사무쳐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 그 백성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직결 하는 겁니다. 그 백성의 서러움을 자신의 서러움으로 대신하는 겁니다. 이런 마음이 없어 가지고는 그 나라에 남아질 수 있는 애국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남을 위해 희생하고 남을 위해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에도 '지극히 작은 소자에게 행한 것이 곧 나에게 행한 것이다' 또 '이웃 사랑하기를 내 몸과 같이 하라.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했습니다.

진정한 사랑

오늘날 통일교인들은 '나라를 사랑하고 뜻을 사랑하자' 하고 말은 잘합니다. 나라를 사랑하기 전에 개인을 사랑하라, 나라를 미칠듯이 사랑하려면 개인을 미칠듯이 사랑해 보라는 것입니다. 나라를 위하기 전에 개인을 위하라는 것입니다. 나라의 선은 큰 선이기 때문에 큰 선을 찾기 전에 개인적인 작은 선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개인과 개인의 선을 합하여 큰 선으로 규합하기 전에는 나라의 선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는 개인입니다.

여러분은 통일교회에 나오면서 그 누구를 얼마나 사랑해 보았습니까? 이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들이 몇 년, 몇십 년 동안을 교회에 다니면서 자신의 마음깊이 사무친 사랑을 가지고 아버지가 동조하는 심정의 자리에 서서 사람들을 얼마나 사랑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가 그대들이 저나라에 가서 하나님의 사랑을 얼마나 받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을 결정짓는 것입니다.

한 생명을 위해서 며칠 동안이나 금식을 해보았으며, 그 생명을 위해 몇 달 동안이나 피땀을 흘려 보았느냐? 문제는 거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말이야 '하나님을 사랑한다. 나라를 사랑한다'고 합니다. 그것이 나하고 무슨 관계가 있느냐 이겁니다. 그런 말은 공중에 뜬 말입니다. 사랑은 자기를 중심삼은 입장에서 하게 되면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을 대신하여 그 사람의 입장을 옹호하고, 그 사람의 입장을 받들면서, 그 사람의 입장을 세우는 데서 비로소 사랑이란 말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사랑하는 사람에게 '야 이놈아 ! 너는 내 종이다'라고 말합니까? 그를 누구보다도 높여 주고 누구보다도 위해 주고, 그로 말미암아 있고자 하는 자리에서 사랑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 나를 중심삼고 '너는 내가 하라는 대로 해라' 하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어린 아기를 사랑하는 부모의 사랑은 순결한 사랑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를 대하여 전체를 아는 부모가 아기보다 더 모른다 하는 자리에서 그 아기를 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열 사람을 위해 산 사람이 있다면, 그 열 사람이 복받게 될 때 그 복은 자기 복이 되는 것입니다. 동네의 옆집에서 잔치를 하게 될 때, 그 동네에서 가난하게 살면서 심부름하는 사람은 그 옆집의 잔치가 자기 잔치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기쁨의 터전이 되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열 사람이 복을 받게 되면, 열 사람을 위하던 그 사람은 복을 못 받는다 하더라도 복의 그림자는 맛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혜택받는 것이 있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을 위해 사는 사상, 이 사상이 무서운 사상입니다. 선은 전체를 위하고 전체의 중심이 됩니다. 전체를 위해 가지고 하나의 사랑으로 묶고자 하는 자리는 전체의 중심이 결정되는 자리이기에 선이 임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를 위해서 피땀을 흘리면 잠을 푹 자도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남을 위해서 피땀을 흘리면 가뿐히 잘 수 있습니다. 입체적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내가 나쁜 사람이 아니구나, 하나님이 계시다면 나를 버릴 수 없겠지' 하는 것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 나를 중심삼고 좋다 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오늘은 좋았다. 배부르다' 하면 거기서부터는 배고픔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서 좋았다고 하면 끝장이 나지만 남을 위해서 좋을 수 있는 길은 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악의 근성과 선의 본성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는 어두움이 찾아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어두움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위해서 살라? 위해서 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새벽기도 나와서 열심히 기도하는데 새벽기도를 못 나와도 좋으니 기도하는 그 시간에 신앙의 동지를 위하여 세 가정의 문전에서 기도하고 오라는 것입니다. 일 분이라도 좋습니다. 이것이 새벽기도를 몇 시간 하는 것보다 낫습니다. 그것이 복받는 것입니다. 이런 사상이 없으면 세계를 하나로 만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신앙길은 보다 높고, 보다 귀한 자리만 가려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오늘날 신앙생활을 하는 데는 막연하나마 이런 내용을 중심삼고 희생봉사 하라고 강조해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반드시 흑암이 오는데 희생봉사는 그 흑암을 방비하기 위한 자연적인 교두보요 하나의 요새적인 작용을 하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이러한 도리를 가르쳐 준 것으로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왜 흑암을 막는 길이 되느냐? 사탄의 본질과 반대되기 때문입니다. 악의 본질과 반대되기 때문입니다.

악의 본질은 어떤 것이냐? 자기를 위하라는 것입니다. 열 사람이 있다면 열 사람 전부를 자기의 발 아래 몰아넣고 이용하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한때는 따르겠지만 조금만 지나면 다 도망간다는 거예요. 도망갈 때는 그냥 가지 않습니다. 빼앗아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전부 훑어 가지고 가니까 망하는 겁니다. 떨어져 나갈 때는 전부 다 떼어 가니까 망하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을 위해서 사는 사람은 올 때마다 가져다 주고 싶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그렇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흥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흥망의 분기점을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에서 가장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심령이 어두울 때가 있더라도 자기를 중심삼고 '아버지, 나를 불쌍히 여기시어 내 어둠을 제거해 주시옵소서' 하는 기도는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도리어 남을 위해 봉사하라는 것입니다. 통일교인 가운데서 누가 제일 불쌍한가를 찾아보고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나보다 더 불쌍하구나 하는 마음으로 그를 위해서 눈물을 흘리면 어두웠던 심령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이런 조정 방법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결국 남을 위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동조하실 수 있고, 하나님이 지금 진행하고 있는 작전의 행보와 더불어 그 방향에 맞추어 같은 형태의 입장을 취할 수 있는 자리는 남을 위하는 자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을 위해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두고 볼 때, 한의학에서 사상(四象)이 있다는 것과 같이 양질 (陽質)의 사람과 음질(陰質)의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의 체질에는 동 서 남 북과 같은 것이 있고 또 중간 성질의 사람도 있습니다. 전부 다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저 사람 싫어' 하는데 어떤 사람은 '저 사람 좋아'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 사람을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나는데, 다른 사람은 보기만 해도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못난 여자들도 시집가고 못난 남자들도 장가간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 사람 싫다고 하지만 그것이 일방적이지 전체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그 사람을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사람이라는 것은 자기의 생각과 같이 전부 다 일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방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서로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방성을 중심삼고 위하는 자리에 있어야 됩니다.

예수님도 열두 제자를 중심삼고 위하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 위하는데 있어서 바깥에서 위할 것인가, 안에서 위할 것인가?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바깥에서 위하는 자가 될 것인가, 안에서 위하는 자가 될 것인가? 말하자면 사랑받으면서 위할 것인가, 사랑하면서 위할 것인가? 그를 긍휼히 여기면서 위할 것인가, 그에게 사랑받으면서 위할 것인가? 이것이 문제입니다. 긍휼히 여기면서 위할 것인가, 사랑받으면서 위할 것인가? 그런데 사랑받으면서 위하는 법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받으면서 위하는 것은 종입니다. 사랑받으면서 위한다는 말이 있습니까? 모양은 위하는 것 같지만 위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어떤 자리에서 위해야 하는가

그러므로 사람을 위할 때는 바깥에서 위할 것이냐, 안에서 위할 것이냐 이것이 다릅니다. 신앙생활을 하려면 바깥에서 하지 말고 안에서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중심삼고 너희를 위하는 것은, 내 좋은 것을 너희에게 나누어 주고 싶어서 그런다는 것입니다. 나쁜 것이 있으면 가려주고 슬플 때에는 위로해 준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들보다 더 수고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바로잡아 주는 겁니다. 이것이 부모인 것입니다. 부모는 자식을 위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위하는 것은 바깥에서 위하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위해 주는 것입니다. 그 자식들이 어려울 때 위해 주어야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높은 자리, 중심된 자리에 있으면서 위해 준다는 사실이 귀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인된 입장에서 통일교회 교인들을 사랑하는 겁니다. 하나님을 대신하는 자리에서 '내 손을 거치지 않으면 저 사람은 죽는다. 비틀비틀거리는 것을 보면 그냥 내쫓아 버리고 싶지만 쫓아 버리면 멸망하기 때문에 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귀한 것이 그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위하지 않아도 될 입장에 있는 그분이 위했기 때문에 거기에서 부모의 마음이 나오고 하나님의 마음이 싹트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이 아닙니다. 자기를 위한 마음이 아니라는 겁니다. 차원이 높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여러분이 생각해 봐야합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나오는 자리는 하나님이 움직이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을 대신해서 세계 인류의 중심에 서서 수많은 사람을 위해 주고 복을 빌어 주면서 만인이 좋을 수 있는 일을 해주기 때문에 만민이 그를 좋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을 대하다 보니 겨울이 되더라도 내 앞에는 춘 하 추 3시절에 해당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아무리 낙심한 자리에서도 그 사람만 보면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그렇다는 겁니다. 외아들을 잃은 부모가 있다면 그는 동네에서 누구의 위로를 받아도 위로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때는 김삿갓처럼 보따리를 싸 짊어지고 삼천리 반도를 여행하는 것이 제일 빠릅니다. 여행을 하면서 이 사람 사정, 저 사람 사정을 들어 보면 자기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나보다 더한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나는 돈이라도 있어서 삼천리 반도를 여행이라도 하지만, 나보다 더 비참하게 망해 가지고 쪼그라져 있는 사람을 보게 되면 자신의 슬픔을 위로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겨울철과 같은 때를 맞이했다 하더라도 봄이나 여름, 그리고 가을과 같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위안이 된다는 것입니다.

통일교회 전체를 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통일교회에 먼저 들어왔다는 사람들이 오히려 축 늘어져 가지고 '뜻이고 뭣이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새로 들어온 사람들은 '저거, 저거 좀 봐라. 선배들이 저러고 있다'고 합니다. 씨를 뿌리면 떡잎이 나옵니다. 통일교회에 처음 온 사람들은 떡잎입니다. 배추가 크려면 떡잎이 커야 되지요? 그렇잖아요? 마찬가지로 통일교회 자체가 크려면 그런 떡잎들이 많이 생겨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떡잎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보고 '나는 저 사람들 보니 못 믿겠다' 하면 그것은 떡잎보다도 더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중심이 되어 떡잎을 만들겠다' 하는 마음을 가지고 전체를 대신해서 나서야 합니다. 그렇게 나서게 될 때 그 사람은 떡잎과 같이 고충을 받는다 해도 그것이 문제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문제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한 면에서는 새싹이 돋아난다는 것입니다. 통일교회가 한 면을 보면 정지되어 있는 것 같지만, 다른 한 면에서는 여전히 새싹이 돋아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곳은 봄절기가 되는 것입니다. 새싹이 돋아나는 그 봄절기를 찾아갈 줄 알고, 거기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사람은 망하지 않습니다. 그것과 더불어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치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흑암권을 타개해 나가려면

통일교회 문선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식구들이 없어 쓸쓸할 때는 산에도 간다는 것입니다. 또 마음이 컬컬하면 옛날에 뜻을 위하여 걸어 나오던 때에 받았던 핍박과 오늘의 핍박을 비교하는 것입니다. 옛날의 고충과 오늘의 고충을 비교한다는 것입니다. 옛날과 비교하면 오늘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왜 아무것도 아닌 것 때문에 내가 기력이 빠져 있나? 그것은 자기 자신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자신 때문에 기력이 빠져 있다는 결론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자기를 수정해야 됩니다. 이런 등등의 문제를 맞이해서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에서 가려갈 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흑암이 오게 될 때는 반드시 뜻에 대한 마음의 씨, 즉 누룩을 잃어버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과거에 자신이 뜻을 위해 정성들였던 그 마음을 가지고 한번 때가 되면 틀림없이 뿌려서 멋지게 거두리라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준비하는 마음, 그것을 위해서 흑암을 뚫고 나가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면 뜻이 떠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흑암이 오게 될 때 어떻게 할 것인가? 자기 혼자는 힘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니 상대를 찾아 의논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의 동반자나 스승이 없으면 어떻게 할 것이냐? 자녀들에게 교훈을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세 제자의 경우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예수님이 외로울 때 눈물을 흘리게 되면 그들이 함께 눈물을 흘려 준다는 것입니다. 자기 혼자도 아니고 세 사람이 같이 눈물 흘리게 되면 안 됐거든? 그러면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회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그런 상대적인 동지가 필요하든가, 스승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언제나 명심해야 됩니다.

그 다음에는 내가 열만큼의 핍박을 받아 흑암이 왔으면, 백만큼의 핍박이 있는 자리에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모험을 단행하라는 것입니다. 열만한 수난의 자리에 있을 때 하나님이 나에게서 떠났다면 백만한 수난의 자리에 들어가면 하나님은 나를 다시 붙들어 준다는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불효자식이 집을 나가게 되면 부모는 '그 자식의 행실이 그러니까, 버릇이 그러니까 나갔다 다시 돌아오겠지' 하며 무심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자식이 죽으러 간다 할 때, '저 이제 나가면 틀림없이 죽어요'할 때, 그 부모는 그 자식이 나가는 길을 막아요. 안 막아요? 막지요? '아이구! 이 녀석아? 하면서 못 나가게 막으며 붙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열만한 핍박으로 말미암아 흑암에 들어갔다면 백만한 시련을 향해 죽든지 살든지간에 생명을 걸고 당당하게 나가면 회복되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여러분에게 흑암이 오는 것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방법이 없겠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그것은 간단합니다. 남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열 사람을 위하고 백 사람을 위해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해야 축복을 받고,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겠다는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가기 때문에 나도 그렇게 가야 될 것이 아니냐 하는 마음을 중심삼고 꾸준히 정성들이는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일생을 살다 맨손으로 영계에 간다 하더라도, 그에게 도움을 받은 열 사람이 천국에 갔을 때는 그를 지옥의 밑창에 있게 놔 둘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열 사람이 합동하여 하나님 앞에 '그는 우리들의 생명의 중심이요, 생명의 은인이요, 부모와 같은 분이기 때문에 그분을 우리보다 더 영광된 자리에 모셔야 되겠습니다' 하고 축수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영광이 내 영광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망하지 않는 사람이 되려면

이러한 길을 가는 통일교인이라면, 통일교회는 망하더라도 그 사람은 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가다가 전부 떨어져 나가고 한 사람이 남더라도 그 한 사람을 위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그 한 사람과 의논하고, 그 한 사람을 위해서 희생하고 그 한 사람과 더불어 관계를 맺고 나가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나가야 합니다. 그런 마음을 갖고 나가면 어떻게 되느냐? 통일교회가 망하더라도 남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망한 것을 전부 치다꺼리하고 다 처리하고 나가면 망한다고 해서 다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남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맨 나중에 가는 사람은 망한 그루터기를 자기 것으로 만들어 가지고 간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망했더라도 아직 돈이 남았다면 그것을 상속해서 가는 것입니다. 그런다고 해서 그 누구도 반대는 하지 못합니다. 가져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무서운 사람입니다. 그러나 중간에서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는 사람은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습니다. 끝까지 참고 견디는 사람은 복받는 것입니다. 망하는 자리에서도 복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피난을 가더라도 장사 밑천을 가져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망하지 않는 방법이 있다면 무엇이냐? 통일교회 문선생이 망할 사람이라면 통일교회 문선생보다 더 충성하라는 것입니다. 나의 사상보다도 더 선한 공적인 사상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통일교회 문선생이 만들어 놓은 모든 공적이 그 사람을 통해서 끝을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선을 위하는 마음이 절대적이라면 하나님도 '너만은 쓸 만하다' 하시면서 더 좋은 길로 안내한다는 것입니다. 나쁜 길로 안내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전체를 위해서 움직이는 사람은 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자기만을 중심삼고 나가게 될 때는 고독이 찾아올 것이요, 멸망이 찾아올 것입니다. 그러나 싸우더라도 남을 위해서 희생봉사하면 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희생봉사하면 반드시 흥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통일교회는 나라를 찾을 때까지 이런 작전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극히 지혜로운 작전입니다.

우리에게 무엇이 있는가

선생님이 근간에 아주머니들 지방에 나가 있는 경기도 일대와 경남 일대를 순회했습니다. 그곳에 가서 아주머니들을 만나면 눈물을 줄줄 흘립니다. '눈물 병이라도 났는지 어쩌자고 그렇게 눈물을 흘리냐'고 해도 우는 겁니다. 본부에서는 매일 아침에 보게 되더라도 인사도 안 하던 아주머니들이 반갑다고 우는 것입니다. 어머니를 보고 반갑다며 목을 끌어안고 우는 것처럼 그렇게 운다는 것입니다. 본부에서 매일같이 대하더라도 본체만체하고 치마꼬리 휘두르며 돌아서 가더니 무슨 야단이냐는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걸 볼 때, 하나님을 위하여 그렇게 기쁘게 반길 수 있는 그 시간 이라는 것은 금 주고도, 돈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알고 청춘시대, 장년시대, 노년시대를 거쳐 죽을 지경에까지 그런 마음으로 가게 된다면 틀림없이 죽어서도 나쁜 곳에 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주머니들이 임지에서 고생하는 것을 보면, 그 고생은 내가 시킨 것 같은데 나 보고 불평하고 '통일교회 문선생이 무엇인데 고생시키느냐'고 주먹을 휘두르며 불평하는 사람이 없이 눈물을 줄줄 흘리는 것입니다. 자기를 고생시킨 장본인인데도 불구하고 갈까봐 그저 가지 말라고 그럽니다. 그게 이상하다는 것입니다. 그걸 볼 때 그래도 내가 몹쓸 노릇은 하지 않는 거구나 하는 걸 느꼈습니다.

이 뒤끝은 내가 망하고 우리가 망하더라도 이 나라는 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망하더라도 이 나라는 남아진다는 것입니다. 망하겠어요? 눈물로 엮어진 통일교회의 전통만은 이 민족을 울릴 것이고, 세계인류를 녹여낼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는 믿기 힘들다고…. '아이고 통일교회의 말씀은 좋은데 통일교회를 믿는 것은 싫어. 통일교회 교인들이 하는 놀음은 나는 싫어' 하는 자식들은 망할 자식들입니다. 그런 자식 들은 망할 자식들인 것입니다.

여러분! 선생님이 지금까지 나오면서 언제 먹고 놀면서 살자고 하는 말 들어 봤어요? 언제 잘 먹고 잘 놀고 잘살자고 하는 말을 들어 봤느냐는 것입니다. 보세요. 잘살면 뭘 합니까? 감옥입니다. 잘 놀면 뭘 합니까? 보리밥 먹고 콩밥 먹게 됩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나라가 있어요? 우리에게 민족이 있고, 내 어머니 아버지가 있고, 내 친척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는 억만년 동안 고아가 아니냐는 것입니다. 나라 없는 백성은 불쌍한 사람입니다. 부모 없는 자식은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러한 무리들이 처량한 신세를 망각하고 행복의 콧노래를 부를 수 있겠느냐 이겁니다.

우리는 잃어버린 부모를 찾고 나라를 찾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잃어버린 나라와 부모를 찾아 가지고 '어느 나라에 지지 않는 내 나라를 가졌고, 모든 면에서 지지 않는 내 부모를 가졌다'고 자랑하면서 활개를 펴고 장단에 맞추어 춤을 추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편에서는 아무것도 없는 병신자식이 되고 고독단신인 고아가 되어 슬픔의 꼬리를 물고 들어가는 춤을 춰서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거기에서는 기쁨과 행복의 희열이 넘칠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그런 입장에서 밥을 잘 먹고 옷을 잘 입고 잘살면 뭘 합니까? 그것은 죄와 마찬가지입니다. 쫓기는 무리입니다. 피난민과 마찬가지의 신세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깨깨 피난살이를 해야 합니다.

피난살이를 하더라도 이 길이 마지막이 되도록 노력하고 후손에게는 피난길을 가지 않게끔 하겠다고 다짐하면서 간다면 그 피난살이가 복이 될 수 있고, 이 민족에게 새로운 길을 개방할 수 있는 기원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길만이 우리가 망하지 않고 갈 수 있는 길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며 선생님이 지금까지 여러분을 지도하고 나온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나라가 없습니다. 남북한이 갈라져 두동강이 나 있습니다. 북한 땅에 자리잡은 원수를 우리의 능력과 정성으로써 몰아내야 되겠습니다 남한에서의 부패상을 우리의 힘으로 제거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악의 소굴을 폭파시켜 버려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선전하며 가는 것이 아닙니다. 해가 아침에 떠오를 때 '나는 떠 오른다'고 선포하고 떠오릅니까? 해가 저녁에 질 때 '나는 지겠다'고 선포하고 집니까? 소란스럽지 않다는 것입니다. 시간은 자연스럽게 가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천지조화와 흥망성쇠는 엇갈려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우리는 자연스러운 입장에서 소리없이 올라가는 것입니다. 소리없이 하는 것입니다. 소리는 우리가 내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부산스러운 녀석들이 소란스럽게 만들어 놨다는 것입니다. 통일교회가 세상을 소란스럽게 만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온유겸손히 희생봉사하라

우리는 이렇게 못난 놀음을 하고 있습니다. 병신 놀음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병신이 아니며 못난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우리들이 자리를 잡고 판국을 가려 가지고, 사방의 모든 권위를 가지고 위세 당당하게 나타나게 될 때는 온 천지가 우리 앞에 머리를 숙이는 겁니다. 그럴 수 있는 날을 바라보고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특권적인 주권을 위해, 특권적인 세계의 행복의 이념을 위해서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런 과정은 개인에게 있어서 당연한 것이요, 단체에 있어서도 당연한 것이요, 앞으로 통일나라에서도 당연한 것입니다.

대한민국이 하나님이 바라는 통일된 나라가 된다면, 대한민국 자체가 세계 인류를 위해서 그렇게 된다면, 세계의 국가들은 자기 나라를 버리더라도 대한민국을 맞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세계는 대한민국으로부터 주관받고 싶어하고 대한민국은 세계 인류를 주관하고 지도할 수 있는 우수한 민족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당연한 이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계와 더불어 흥할 것이요, 세계와 더불어 발전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되었다 할 수 있는 자리란 어떤 자리인가? 그 자리는 종의 자리가 아니라 중심의 자리인 것입니다. 그 중심의 자리에 서면 세계가 자연히 받들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을 위해서 봉사하는 사람은 맨 끝에 서는 것이 아니라, 자연히 전체가 위하는 중심으로 결정 된다는 것입니다. 전체의 중심이 되면 모든 전체를 책임지고 주관하는 입장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자연적인 환경에서 만민이 서로 융합할 수 있는 생활적인 터전을 넓혀 나가려니 온유겸손히 희생봉사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길을 가게 되면 절대 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기 도

​사랑하는 아버님, 아버님은 불쌍한 분이신 것을 다시 한번 느끼옵니다. 인류를 대한 복귀섭리의 노정의 어두운 그늘 아래서 걸어 나오신 아버지의 역사인 것을 생각하게 될 때, 당신께서는 어느 한날 기쁨의 날을 맞이하여 당신의 영광된 모습을 만민 앞에 보여 주신 때가 있었사옵니까?

그러한 것을 모두 잃어버리신 채 슬픈 모습이 만민에게 보일까봐 감추고 감추셔서 나타내지 않으려고 하시는 아버지의 심정을 알게 될 때에, 과연 부모의 마음을 지니신 아버지인 것을 저희들은 느끼게 되옵니다. 이땅 위의 타락한 인간의 부모도 사랑하는 귀한 아들딸 앞에는 자기의 추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자식을 피합니다. 그러면서도 눈물을 머금고 그아들딸에게 복이 있기를 천만 번 기도하는 마음이 있는 것을 알게 되옵니다.

타락한 인간 세상에서도 그렇다는 것을 알게 될 때, 본연의 아버지 되시는 당신께서는 어떠할까를 생각하게 되옵니다. 아버지께서 저희들을 바라보실 때 찾고 있는 내일의 소망의 아들딸이 되지 못한 것을 바라보시면서도 당신이 시들고, 당신이 망하고, 당신이 상처를 입고, 당신이 남루한 옷을 입는 자리에 설지라도 아들을 위해서는 개의치 않으셨사옵고, 아들이 영광의 한날을 맞이하게 되더라도 아버지께서는 안방에 들어가 자신의 정체를 나타내고 싶어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저희들을 이처럼 사랑하시고 역사과정을 통해 지켜 주신 천주의 대주재이신 아버지가 계신 것을 알았사옵니다. 저희들은 그 아버지 앞에 진정 감사를 드려야 되겠습니다.

아버님, 당신의 거룩하신 마음을 저희 마음에도 어리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당신께서 참고 나오신 끈기 있고 강직한 인내력을 저희의 마음에 반영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사탄의 세력이 팽팽한 험상궂은 이 세상에 선이 가냘픈 신세로 서게 될때, 사방에서 몰아치는 악의 세력권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 세력권에 몰리고 세력권에 쫓겨 슬픔의 눈물과 더불어 사라져 간 우리의 선조가 얼마나 많았사옵니까? 뿐만 아니라 그 위세에 눌려 가지고 죽음길을 자처해 갔던 사람도 많은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스스로 생명을 아버지 앞에 바치고 싶은 마음으로 간 사람이 많지는 않지만 아버지의 슬픔을 동정하여 그 길을 자청해서 간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길을 안 갈래야 안 갈 수 없는 운명길로 알고 생명을 걸고 나가는 그 길에서, 반기를 든 원수의 총칼 앞에 쓰러져 가면서도 당신의 사랑을 위해서 간 사람도 있고, 당신의 마음을 조이던 수많은 사람들도 있었던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들이 눈물을 흘리고 피를 흘릴 때마다 당신도 눈물과 피가 엉기어졌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되옵니다. 그러기에 아버지께서는 어느 한날 쉴 사이가 있었으며, 어느 한때 소망의 아들이라고 바라보며 당신의 사정을 말씀한 때가 있었사옵니까? 그런 것을 생각하게 될 때, 그런 아버지의 아들이 되고 딸이 되겠다는 것이 무서울 정도로 불쌍하신 아버지인 것을 저희들은 알아야겠사옵니다.

그런 것을 느낄 적마다 아버지 앞에 효성을 다할 수 있는 세계적인 아들딸이 어느 시대에 나올 것이냐를 역사과정에서 염원하시던 그 염원의 역사는 지나가고, 오늘날 광명한 새아침의 여명이 당도하여 하늘의 뜻을 알 수 있는 이 시점을 맞게 하여 주신 것을 진실로 감사드리옵니다.

핍박받고 나오는 통일교회 무리들, 외나무 다리와 같은 외로운 길을 걷고 있는 통일교회의 발걸음을 지켜보시는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졸였는가를 저희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피눈물이 엉겨 있는 사연을 가지고 내가 바라는 소망의 아들이 되어 달라고 간곡히 고대하고 간곡히 부탁하는 아버지가 계신 것을 몰랐다면 모르지만, 그런 아버지가 계신 것을 알았다 할진대는 내가 찢기고 어려움을 당하고 억울함을 당하더라도 아버지의 한의 고비를 이어받아 아버지 앞에 기억될 수 있고, 아버지 앞에 서러움의 눈물 한 방울이라도 그치게 하려는 내가 있음에 감사한다는 위로와 말을 남기고 죽겠다는 그런 마음을 지닌 통일의 자녀들이 있다면, 당신의 후대 하신 사랑으로 그들과 같이하여 주시옵고 그들의 생명에 같이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들은 어린아이와 같아야 되겠사옵니다. 어린아이가 배고플 때는 어머니의 젖을 사모하듯이 저희들도 그렇게 아버지를 사모해야 되겠사옵니다. 생명줄이 없으면 이 땅 위에서 살 수 없는 고독한 무리의 인생인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신의 생명력이 없이는 살 수 없기 때문에, 앞을 바라보며 내일의 소망을 위해 싸워 나가는 통일의 역군들을 굽어살피시옵소서 .

통일교회의 문 아무개를 보고 굽어살피지 마옵시고, 불쌍한 대한민국을 위하여 굽어살피시옵소서. 미래에 아버님 앞에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는 이 민족의 운명이 될까봐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진 통일 역군들의 마음을 보고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그들이 거리 거리를, 혹은 마을 마을을 찾아 한걸음 한걸음 옮기는 행보는 당신의 슬픔과 당신의 사연이 엇갈리는 걸음인 것을 아시고 당신께서 친히 붙들어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그들이 수고하고 싸우는 것은 당신이 원하시는 나라를 위한 것이요, 당신이 원하시는 백성을 위한 것이요, 당신과 더불어 함께하기 위한 것이요, 당신 앞에 영광의 한날을 건설하기 위한 것이옵니다. 그런 그들을 아버지께서 몰라주시면 누가 알아주겠사옵니까? 밤을 새워 가면서 몸부림치는 당신의 아들딸이 있으면 거기를 찾아 주시옵고, 자기의 신세를 망각하고 남의 형제를 부등켜안고 눈물짓는 당신의 외로운 아들딸이 있거든 거기에 같이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제가 그런 날을 거쳐올 때마다 위로해 주신 아버지이신 것을 잘 알고 있사옵니다. 오늘까지 남아진 것도 당신의 위로의 힘이요, 당신이 함께 해주신 은사 때문임을 뼈저리게 잘 알고 있사옵니다. 하오니 그들이 외로운 눈물을 짓기 전에 당신이 외로운 눈물을 머금더라도 그들을 찾아가지 않으면 안 될 사정임을 알고 있사옵니다.

민족을 붙들고 당신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몸부림치는 자리마다 소망의 모습이라고 기쁘신 심정으로 대하고 싶어하시는 간곡한 마음을 가지고 계시는 아버지이심을 알고, 그런 아버지의 사정과 동반할 수 있는 심정의 인연을 가지고 산다는 사실이 얼마나 복되다는 것을 스스로 느낄 줄 아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가 나가는 데 있어서 흥망의 분기점이 어떠하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아야 되겠사옵니다. 신앙길에 있어서 원수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 원수인 것을 저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 여기에 모인 당신의 아들딸들, 3월을 중심삼고 저희들이 행하여야 할 모든 일들을 앞에 놓고 있사오니, 계획하고 있는 일들을 아버지께서 아시옵소서. 그것은 오로지 아버지의 나라를 위한 당신의 뜻을 살핀 연고였사옵고, 남한 각지에 아낙네들을 배치한 것도 당신의 나라의 슬픔을 가로막기 위함이옵니다.

그런 소수의 무리를 바라볼 때마다 당신의 북받치는 서러움이 이 민족 앞에 남아질 수밖에 없는 것을 알고 있으며 당신의 아들딸이 있는 한 이나라는 이들이 지킬 것이요, 이 나라는 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남이 가지 않은 이 길을 가는 저희들을 지켜 주시옵고, 저희들이 갈 길을 살펴 주시옵소서.

당신의 후대하신 마음과 당신의 눈물이 있기 때문에 그로 말미암아 망하지 않는 이 민족을 만들고 망하지 않는 나라의 국민들로 만들기 위해 나가 싸우고 있사오니, 그 자리가 소망의 천국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 슬픔의 눈물을 머금고 당부하시는 내용을 남기기 위한 것임을 알게 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1971년 3월도 후반기를 맞이했습니다. 이렇게 덧없이 흘러가는 역사의 흐름 가운데, 한번 가면 다시 찾아 세울 수 없는 뜻의 길은 지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 저희들의 생애가 다하기 전에 온갖 정성을 다 퍼부어 민족과 인류에게 해방의 한 날을 제시하지 않으면 안 될 통일 교회의 사명을 해야 할 무리들을, 아버지, 긍휼히 보시옵소서.

남북이 분단된 처참한 민족상을 당신이 굽어살피시옵소서. 이스라엘과 유대 나라가 10지파와 2지파로 갈라져 역사적인 한의 원수가 되었던 것을 저희들이 알고 있사옵니다. 그것은 하늘의 도리를 따르지 않은 연고요, 하늘을 위해 가는 길을 가려서 가지 못한 연고였음을 알고 저희들은 당신의 뜻 앞에 그와 같은 배신의 길을 가지 않고 충효의 도리를 다하고 갈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망해서는 안 되는 것이 당신이 소원하시는 뜻인 줄 알고 있사오니, 아버지여, 이 자리에 같이하여 주시옵고, 이 나라에 같이하여 주시옵고, 이 세계에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의 뜻을 위해 제물의 길을 가고 있는 당신의 아들딸 위에도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부탁드리옵니다.

남기신 당신의 뜻의 승리를 보잘것없는 저희들의 수고의 공적으로 말미암아 하루라도 빨리 당신 앞에 이루어 드릴 수 있는 날이 오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니다.

이 시간 저희들의 마음과 몸을 맡으시옵소서. 온유겸손하고 순결한 마음이 되어 당신의 부름 앞에 백 퍼센트 스며들 수 있는 마음의 방향을 가지고, 본성의 심정을 가지고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요, 나는 아버지의 딸이다'라고 내가 말하기 전에 내 마음이 말하고 내 몸이 거기에 스스로 응할 수 있는 당신의 귀염을 받고 사랑을 받고 보호를 받는 아들딸이 되어 남아질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니다.

오늘 이 하루를 당신 앞에 맡기오니 친히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일본에서 온 젊은이들이 여기 있사오니 받아 주시고 이끌어 주시옵소서. 일본과 미국과 독일을 중심삼고 금후에 해야 할 천적인 경륜의 뜻 앞에 충성의 길을 다짐할 수 있는 걸음걸이가 되게 하시옵소서.

국가를 넘어 세계를 움직여야 할 뜻 앞에 아버지께서 친히 임지하시어서 실천의 장을 개척하는 데에 협력하고 동사하여 주옵길 재삼 부탁드리옵니다.

남아진 날들이 기쁨을 촉구하는 날들이 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옵길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니다. 아멘.

오늘은 12회째 맞이하는 '부모의 날'입니다. 1971년에 들어서서 맞는 부모의 낱은 중요한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날에는 식구 전체가 한 자리에 모여서 축하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날은 세상의 그 어떠한 날과도 비교될 수 없는 날로서 타락한 인류가 오늘날까지 바라고 나온 날입니다.

​스스로 타락권을 벗어날 수 없는 인간

​6천년 복귀섭리노정을 두고 볼 때, 하나님께서 이 땅의 인간을 바라보시며 소망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그것은 어떠한 나라를 찾거나 혹은 이 세계를 당신의 손아귀에 넣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타락한 인간 세계를 수습해 가지고 하나님께서 치리하기 위해서는 먼저 누가 있어야 되느냐 하면 인류의 참된 부모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참부모를 맞지 못하게 된 것이 타락입니다. 인류의 시조가 하늘과 땅을 대표하여 창조이상적인 면에 있어서나 소망적인 면에 있어서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부모가 되지 못하고, 하늘과 땅과 만물의 소망 앞에 배척되고 상충된 반역의 입장이 되어 그 누구도 환영할 수 없는 자리에 떨어졌는데 그것이 타락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인간 가운데 참된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혹은 역사과정에 있어서 성인 현철이 왔다 갔다 하더라도, 그리고 아무리 그들이 모시고 받들었던 부모가 있다 하더라도, 그 부모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모두 타락한 혈통권내에서 태어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타락한 운명권을 벗어나야 할 입장에 있는 부모로서 자기의 아들딸을 낳아 길렀다는 것입니다.

그 아들딸이 인류 앞에나 역사과정에서 성현이나 현철이 되었다 하더라도 그 성현이나 현철은 인류를 대표할 수 있는 참다운 선의 부모를 대신한 입장이 아니라 타락권을 벗어날 수 없는 부모의 입장이므로 인류가 공히 모실 수 있는 부모의 입장이 못 되는 것입니다. 인류는 이런 거짓된 부모를 모신 한스러운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인류에게는 이 원한을 풀고 참부모를 맞기 위하여 지금까지 싸움의 역사와 개척의 역사가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뜻을 통하여 알고 있는 바입니다. 아담 해와가 타락하였다는 것은 곧 본래의 자리에서 이탈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 이탈한 자리는 완성급의 자리가 아니라 미완성급의 자리이기 때문에 완성단계로 재차 수습되어 나가지 않으면 인류가 바라는, 혹은 천지가 바라는 참된 부모의 자리를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아담 해와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환경적인 모든 여건을 갖추지 못한 부모와 인연을 계속 갖게 된 것입니다. 하늘로 보나 땅으로 보나 스스로의 부끄러운 모습을 감출 수 없고 자기 스스로 탄식하지 않을 수 없는 자리에 놓이게 된 인류의 시조인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지금까지의 인류 역사는 소망의 이상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역사가 된 것이 아니라, 절망과 탄식을 하면서 암흑의 세계로 떨어지는 역사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자리에서 인간들을 희생시키고 새로운 소망의 나라로 복귀시키기 위해 섭리의 방향을 제시해 주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복귀섭리는 이와 같이 절망과 탄식권내에 떨어져 있는 인간을 끌어 올리는 것입니다.

타락한 부모, 즉 거짓 부모로부터 태어난 인간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래야 맺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즉,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와 내연의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아무런 것도 갖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창조 원칙을 두고 볼 때 인간은 하나님이 지은 인연이 있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이 인간을 지은 목적은 인간을 타락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완성의 표준을 세워 놓았던 창조의 법도가 있는 고로 이런 인연을 중심삼고 다시 인간이 책임을 수행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 제 2차적 복귀섭리노정인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인간을 타락권에서 건지시려는 하나님의 수고

복귀섭리는 타락하기 전의 상태로 끌어올리는 노정입니다. 끌어올리는 데에 있어서는 더이상 떨어질 수 없는 최하 말단의 자리까지 떨어져야 합니다. 자기 스스로를 주장할 수 있고 또 무엇을 가질 수 있는 자리에 있어 가지고는 새로운 인연을 맺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무원리권의 세계로 떨어져 버린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원리가 없는 세계, 하나님이 간섭할래야 간섭할 수 없는 세계로 떨어져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체와 동기가 되지 않고는 인간 자체만으로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없는 한의 구렁텅이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원래 인간은 창조원칙으로 볼 때 하나님과 부자의 인연을 가져야 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은 떨어진 인간들을 다시 아들의 자리로 끌어올리려고 하시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차라리 다시 짓는 것이 쉬운 일이지 역사과정을 거쳐서 떨어지지 않았던 자리까지 수습해 놓는다는 것은 창조보다 몇 배 이상의 수난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되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지금까지 무엇을 해 나오셨느냐 하면 무원리권내로 떨어진 인간들을 사다리를 놓아 끌어올리는 역사를 해 나오신 것입니다.

무원리권내로 떨어진 인간은 하나님과 혈통적인 관계 즉, 부자의 인연을 갖고 출발한 것이 아니라, 원수의 혈통을 받아 가지고 출발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는 꿈속에서도 만날 수 없는 원수의 자리에 서게 된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소망을 가지고 대할 수 있는 그 어떠한 기준도 갖지 못한 채, 오히려 절망과 탄식과 고뇌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누구의 후손이 되어 버렸느냐 하면 하나님이 용서할 수 없는 사탄 마귀의 후손이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원수의 자식이 된 인간을 본래의 타락하지 않은 하나님의 자식과 같은 자리에까지 끌어올리기 위해서 수고하시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원수의 자식을 데려다가 자기의 혈육과 같이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는 자리에까지 끌어올린다는 것은 지극히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인간들을 두고 볼 때에도 사랑을 유린하는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사랑은 절대적이요 이상적인 요소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 인간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랑이라면 그 사랑은 절대적이요 이상적일 수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사랑의 주체이십니다. 그런 하나님 앞에 대적하는 입장에 선 것이 사탄마귀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용서해 주라.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한 예수의 도리, 또 그러한 예수님을 키워 나오신 하나님의 뜻, 그 뜻을 중심삼고 볼 때 여기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한 그 원수는 누구를 지칭하느냐? 사탄에게 예속되어 그의 도구로 사용되는 사람, 사탄에게 고통을 당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지 사탄마귀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사랑을 유린한 원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6천년을 거쳐 나오시면서도 인간들을 배척하지 못하고 용서해 나오신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에서는 인간이 선악과 하나 따먹은 것이 죄가 되어 수천년이 지난 지금까지 고생하고 있다고 하지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법도를 중심삼고 볼 때에, 하나님과 지극히 가까울 수 있는 천사장이 사탄마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인류의 시조를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혈통적인 인연을 가진 둘도 없는 직계의 아들딸로 만들려고 했는데, 나이 많은 종이 철모르는 해와를 타락시켰던 것입니다. 그 장본인이 바로 천사장이라는 것입니다.

아담 해와는 미래에 하나님의 가정을 이룰 하나님의 몸이었습니다. 고린도 전서 3장 16절에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라고 한 것과 같이 타락한 인간이라도 하나님의 구원섭리에 의해서 하나님 앞에 돌아올 수 있거늘 타락 하지 않은 선의 입장에 있는 아담 해와야 두말할 필요도 없이 하나님의 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하다면 하나님은 인간의 어디에 들어 앉아 계실 것이냐? 아담 해와의 마음에 임재하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담 해와가 완성하면 하나님을 내심에 모시고 하나님의 외적 실체로서 부부를 이루어 인류의 조상이 되었을 것인데, 타락으로 말미암아 이러한 조상이 되지 못했습니다. 이 사실을 오늘의 기독교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누구의 피를 받았느냐 하면 사탄의 피를 받았습니다.

만일 아담 해와가 성숙해서 하나님의 뜻 앞에 일치된 가운데 부부를 이루어 사랑했더라면 하나님은 인류의 아버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 아버지는 남의 아버지가 아닌 참아버지가 되는 것입니다.

무조건 원수를 용서하실 수는 없는 하나님

하나님은 최고의 중심존재이시기 때문에 인간은 누구나 다 최고의 가치를 지닌 그 중심존재를 소유하고 싶어합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인물이 못나고 외적인 조건을 갖추지 못했다 하더라도 누구나 다 세계를 내 것으로 만들고 세계의 중심이신 하나님과 사랑관계를 맺고 싶어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욕망입니다. 이 욕망은 불가능한 욕망이 아닙니다.

본래 인간은 고차적인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기준, 즉 절대적인 창조주와 일체될 수 있는 기준에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그 창조주는 인간의 아버지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바라는 최고의 자리는 하나님과 부자가 되는 자리이기 때문에 그런 자리를 표준하고 하나님을 주체로 하고 우리는 대상의 관계를 맺어서 그를 맞이해야 됩니다. 이러한 창조원칙이 있기 때문에 타락했을망정 창조원칙에 의해 인간의 마음은 항상 최고의 존재와 관계를 맺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소원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어 무엇을 할 것이냐? 그저 구경이나 하면서 살 것이냐? 아닙니다. 하나님 속에 있는 단 하나의 사랑을 중심삼아 이야기하고 그 사랑을 몽땅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어할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든지 소망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인간 최고의 행복의 기준과 최고 희망의 기준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론적으로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아버지로서 피가 통하고 감정이 통할 수 있는 실체적인 하나님으로서 등장해야 할 텐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그 자리에 누가 침범했느냐? 사탄 마귀가 침범했습니다. 그래서 사탄은 하나님 앞에 사랑의 원수가 되어버렸고, 원수가 되었기 때문에 조건 없이는 그를 용서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사랑의 원수를 무조건 용서하게 된다면 어떻게 되느냐? 천지가 뒤집어지게 됩니다. 차라리 자기의 아들딸을 죽이고 가산을 탕진하고 전부를 망하게 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용서할 수 있지만, 사랑의 원수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 사랑의 원수를 용서하게 되면 천도에 어긋난 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도 역사를 통하여 사랑의 원수를 갚는데 있어서 힘과 능권으로 원수를 갚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법도를 통해서 굴복시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원수가 자기 스스로 하나님 앞에 완전히 굴복하여 종의 자리에서 세계 인류에게 심판을 받더라도 감사할 수 있는 자리, 원수를 그런 자리에까지 끌고 나가려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그 죄를 탕감할 수 없습니다.

원래 천사장은 하나님이 사랑해야 할 종의 입장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종은 하나님을 참소한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절대적인 하나님이시라면 사랑도 절대적인 사랑이요, 약속도 절대적이요, 원리도 절대적이어야 하는데 당신이 언제 완성한 자리에서 나를 사랑해 봤소?' 하면서 참소하게 됩니다. 완전히 사랑하지 못했다는 조건, 즉 '나를 놓고 완성한 자리에서 사랑하지 못한 것까지 사랑하지 않고는 나를 칠 수 없을 것이요' 하는 조건을 걸고 하나님을 참소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완성한 자리에서 사랑해 주어야 하나님으로서 사탄의 그릇된 것을 비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원리원칙을 세워 놓고 그것을 실행하지 못하면 하나님도 완전한 자리에 못 올라가는 것이 아니요?' 할 수 있는 것이 사탄의 입장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도 당신의 전체 유업을 상속받아 가지고 당신을 대신하여 천하를 움직일 수 있는 중심존재가 되었지만, 그도 역시 완성한 자리에서 나를 사랑하지 않았고, 사랑해 보지 못하지 않았느냐' 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 위에 오신 예수님이기에 완성한 자리에서 사랑하지 못한 사랑을 해야 할 내적 사연이 있었기 때문에 십자가에 돌아가시면서도 원수에 대하여 용서를 비는 기도를 한 것입니다. 이 원수의 아들딸들이 바로 오늘날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인류인 것입니다.

메시아의 강림

세상 사람들은 아무리 권위가 있다 하더라도 전부 다 원수에게 지배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참감람나무가 되지 못하고 돌감람나무가 되었기 때문에 잘라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참감람나무에 접붙이지 않으면 구할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류역사는 종교와 더불어 출발하였고, 종교는 인류와 더불어 흘러가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소망의 길을 발견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타락한 그날부터 당신이 창조한 책임을 짊어지시고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섭리를 펴시기 위하여 역사과정을 거쳐 지금까지 수고해 나오신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되겠습니다.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헤아릴 수 없는 지경에 떨어진 인간은 사탄의 지배를 받고 있지만, 사탄을 중심삼고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사탄까지도 잃어버릴 수 있는 자리로 떨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복귀섭리를 두고 볼 때, 종의 종 이하로 떨어진 자리에서부터 구원역사를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수많은 종교를 통해서 종의 종의 도리를 가르쳐 나오는 섭리를 해 나오신 것은 그런 이유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를 위해 봉사하라는 것입니다. 종의 종 되는 입장에 있는 인간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없기 때문에 무조건 순종하고 복종하는 길밖에 다른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종의 종의 자리는 주인이 없고 종이 주인 노릇을 하는 자리입니다.

구약시대를 중심삼고 볼 때, 그 이전의 인류는 '종의 종'의 자리에 있었으나 구약시대에 들어와서 종의 자리에 서게 되었고, 그렇게 됨으로써 비로소 주인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종의 종의 자리에서 종의 자리까지 나오기 위해서는 인간 스스로 그 길을 개척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개척자의 사명을 해 나오셨습니다. 종의 종보다도 더 악한 족속들을 교육해야 했던 것이 하나님의 사정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무형으로 계시기 때문에 인간 앞에 나타나시더라도 보일 수 없는 입장이므로 특정한 사람, 즉 선지자를 세워서 교육하여 나오신 것입니다. 그 선지자는 하나님을 대신해서 이 땅 위에 왔지만. 인간으로서 하나님 명령에 따라 순응해야 하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러면 선지자는 인간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어야 했느냐?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려면 순종의 도리를 세워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는 섭리를 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탄 앞에 충성하는 그 이상으로 하나님을 위해서 충성하는 사람이 나와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도리를 누가 가르쳐야 하느냐? 하나님이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종의 법도를 세우고 하나의 편제를 갖춘 후에 개인 가정 종족 민족권을 형성하여 섭리의 뜻을 대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종의 입장에서는 이것을 세울 수 없기 때문에 새로운 메시아 사상을 제시해 주고 앞으로 구세주를 보내주겠다 하는 약속을 세워 역사를 해나 오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 민족을 중심한 섭리였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중심삼고 이 땅 위에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는 과거 역사시대에 인간이 종의 입장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했던 약속을 이루어 양자와 참아들의 인연을 갖출 수 있는 자리를 세우려 오신 것입니다. 종이 충신의 도리를 다할 때는 양자의 자리에 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귀섭리역사를 거쳐 오면서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여금 종으로서 충성을 다할 수 있는 터전을 닦아 가지고 양자의 인연을 맺어 나오도록 한 것입니다.

양자의 인연은 어떻게 맺느냐?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 위에 오기 전에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 위에 와야 되고, 그 아들의 명령을 듣고 거기에 순응해야 비로소 양자의 인연을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시대와 신약시대가 연결되는 역사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구약을 믿고 나오는 사람들은 종으로서 양자의 혜택을 받기를 바라는데, 그것이 바로 메시아가 오기를 바라는 이유입니다. 즉, 메시아로 말미암아 종의 서글픈 신세를 넘어 양자권의 자리에 나아가는 것이 그들의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양자의 자리는 직계 아들딸이 없게 될 때, 부모로부터 상속을 받을 수 있는 인연이 성립되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종의 입장을 초월해서 하나님의 뜻을 맞이할 수 있는 혜택을 받기를 바라면서 나오도록 한 것이 종의 구약시대를 지도해 나오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이 종의 신세를 면하고 하나님의 상속을 받을 수 있는 권내에 들어갈 수 있는 특권적인 한때를 바라고 나온 것이며 그것이 이스라엘의 선민사상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세계를 대표한 민족으로서, 외적 세계를 상속받을 민족으로서 약속해 가지고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를 지도하여 나오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아들과 양자가 하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종은 하나님의 아들이 오기 전까지 양자의 터전을 닦아 가지고 아들이 겪게 될 모든 어려움을 해결한 다음 아들을 모셔 들여 그 직계 아들과 하나되는 자리에 서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통일교회에서 말하는 가인과 아벨이 하나되지 않고는 하늘나라에 갈수 없다는 이유이며, 그러기에 아벨은 가인을 복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혈통이 아닌 사탄의 피를 받아 가지고 태어난 아들이 하나님 앞에 양자로서 공인을 받게 되면, 직계 아들은 아벨적인 입장에서 가인의 입장에 있는 양자를 복귀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역사적인 인연이 있기 때문에 세계적인 인연을 대표한 교단과 나라로서 양자권 입장에 서야 할 것이 이스라엘 나라와 유대교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직계적 권위에 서야 할 것이 하나님을 중심삼은 예수 그리스도가 제시한 기독교와 이것을 중심한 세계 국가였습니다.

이렇게 세계를 대표한 이스라엘 나라와 유대교를 예수 앞에 바치게 되면, 한 나라와 한 교단을 바침으로 말미암아 모든 나라와 모든 종교를 통합할 수 있는 권세를 갖고 오는 예수님과 연결될 수 있는 일이 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 나라와 유대교를 예수님 앞에 봉헌해야 예수님이 가지고 온 하늘나라와 지상천국을 이 땅 위에서 상속받을 수 있는 권내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나라가 종으로서 책임을 다하고 예수님을 정성껏 모셔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반대했기 때문에 그 길이 끊어지게 된 것입니다.

양자의 입장에 있는 기독교의 책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셔서 승천하신 후 기독교는 지금까지 재림 사상을 중심삼아 가지고 섭리를 연장시켜 복음의 터전을 닦아 양자권을 이어왔습니다. 이 기독교는 종의 입장인 유대교와는 달리 차원이 높은 자리에서 출발해 나온 양자적 종교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양자가 양자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으려면 다시 직계 아들을 맞아야 됩니다. 이것이 지금까지의 기독교의 운명이었습니다.

마태복음 26장 39절을 보면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한 예수님의 기도가 있는데 여기에서의 예수님은 양자의 입장에서 내 아버지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기독교 문화권을 중심삼은 오늘날의 민주세계는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의 혜택을 받지 않고는 안 될 자리에서 신음하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메시아가 이 땅 위에 재림해야 됩니다.

그러면 그 메시아는 무슨 사명을 하기 위하여 이 땅 위에 오시느냐? 아들의 사명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아들의 사명을 중심삼고 직계 아들이 오게 된 것이니, 그 직계 아들과 양자가 하나되지 못하면 부모를 복귀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알다시피 가인과 아벨이 하나되지 못하면 타락한 부모를 복귀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를 복귀하기 위해서는 양자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메시아는 어떤 입장으로 이 땅 위에 오느냐? 하나님의 직계 아들의 입장으로 오되, 그 입장에서 가인의 입장에 있는 양자를 횡적인 입장에서 완전히 굴복시켜 메시아의 사상이자 양자의 사상이고 하나님이 메시아의 아버지이자 양자의 아버지라고 하는 확고부동한 기반을 지구상에 세워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결정짓지 않고는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뜻을 성사시킬 수 없습니다.

이런 입장에서 볼 때 지금까지 양자의 입장에 있는 기독교가 양자의 도리를 넓혀 가지고 직계 아들의 인연과 연결시킴으로써 비로소 아들의 사명을 다했다 할 때 메시아, 즉 재림주님은 이 땅 위에 와서 나라를 수습하고 교회를 수습하여 굴복시킨 양자 앞에 그 나라와 교회를 상속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자기가 가지고 온 천국이념을 그 양자 앞에 남겨 줄 수 있는 아들의 도리를 성립시켜야 합니다. 이것을 못하게 될 때에는 하나님 앞에 돌아갈 수 없습니다. 이것은 공식입니다.

그러면 한꺼번에 수백 명이 하나님 앞에 돌아갈 수 있느냐? 아닙니다. 먼저는 하나님의 아들이 나와야 되고 그 다음에는 신부가 나와야 됩니다 그래서 재림주님은 신랑으로서 신부를 찾아 이 땅 위에 오시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는 천국문을 열 수 없으며, 직계 아들딸과 양자가 하나님께서 본래 허락한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는 문도 열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문을 닫히게 한 것이 누구냐? 아담과 해와 그리고 천사장입니다. 이들이 합해서 세상을 망하게 했으므로 복귀원칙에 의해서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양자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상속권을 추구하고 찬양할 수 있는 자리에서 천사장의 입장으로, 하나님의 직계 아들의 입장으로 온 아담을 자기 생명보다 더 귀하게 여기고 찬양하며 그 앞에 순종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땅 위에 신부를 찾아 세우게 되면 어떠한 일이 벌어지느냐? 참다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아들로서 하늘나라의 외적인 모든 사연을 찾은 외적인 아버지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양자의 입장인 것입니다.

하늘나라에서 누리던 모든 권한을 사탄이 빼앗아 갔습니다. 그러면 이것을 누가 빼앗아 와야 하느냐? 사탄의 아들의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빼앗아 와야 합니다. 그들은 종의 입장에 있지만 하나님은 양자가 되는 특권적 혜택을 주어 그 양자권으로 하여금 외적인 사탄 세계의 것을 빼앗아 다시 하나님의 아들 앞에 상속되게 하는 내적인 책임을 추구하는 의미에서 하나님은 양자를 사랑하시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양자는 사탄을 대표한 세계를 재림주님 앞에 봉헌해야 하고 절대 순종해야 합니다. 즉, 재림주님의 명령에 자기 생명을 바칠 수 있는 자리에서 재림주님과 하나될 수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양자가 나와 가지고 이스라엘 주권을 대표하고 유대교를 대표하던 대제사장이 하던 것과 같이 오늘날의 기독교를 중심삼아 가지고 그런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천국문을 열려면

그러면 오늘날 통일교회의 사명은 무엇이냐? 통일교회는 과거의 종교와는 달리 개인적인 구원만을 원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타락하지 않은 본연의 이상세계를 원하는 종교입니다. 본연의 이상세계는 인간이 완성해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부부의 인연을 맺어 아들딸을 낳아서 천국에 가는 것을 말합니다.

아버지는 지옥 가고 어머니는 천국 가면 그것이 무슨 천국입니까? 부모는 천국 가고 자식이 지옥 가면 그것이 무슨 천국이냐는 것입니다. 천국은 부모와 자녀, 종족, 민족. 국가가 다 들어가는 하늘나라입니다.

천국문을 열고 들어 가려면 인류가 거짓부모로부터 출발했으므로 참부모가 나와야 됩니다. 하나님도 스스로는 천국문을 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천국문을 열 수 있다면 그런 능력이 있는 분이 왜 안하겠습니까? 타락은 인간이 했기 때문에, 죄를 지은 인간이 벌을 받아야 합니다. 즉, 인간이 천국을 잃어버렸으니 인간이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6천년이나 걸린 것입니다.

그러면 천국을 개문(開門)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종의 종의 입장에 있는 사람에게 양자의 특권적 혜택을 주어 직계 아들과 인연맺게 하여 그 직계 아들에게 절대 복종하게 해야 합니다. 여기서 직계 아들 이란 누구냐 하면 타락하기 전 아담입니다. 또한 양자는 누구냐 하면 타락하기 전의 천사장입니다. 본래 양자는 종의 입장이므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아담 해와의 아들인 가인과 아벨은 두 종류의 사랑의 열매로 나타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둘을 다 구원하기 위해서는 양자와 아들의 인연을 묶어 주어서 부모를 맞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러한 섭리가 바로 하나님의 구원섭리입니다. 따라서 양자와 직계 아들이 하나되어야 비로소 부모를 복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한 국가를 중심삼고 보면 그 나라의 주권자와 교회가 예수님과 하나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교회는 예수님이 가지고 온 정신적인 이념과 국가관을 중심삼아 외적인 나라의 정신적인 지도를 책임져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서는 교회가 예수님 앞에 접붙임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을 접붙이기 위해서는 누가 있어야 하느냐? 아담만 있어 가지고는 안됩니다. 왜? 아담 해와 천사장이 삼위일체를 이루어 가지고 타락했기 때문에 복귀하는 것도 삼위일체를 이루어서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천사장과 같은 입장에 있는 양자는 아담과 같은 입장에 있는 아들이 올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놓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직계 아들이 신부를 찾아올 수 있는 외적인 기반을 닦아 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사명을 해야 하는 것이 바로 기독교입니다.

기독교는 목사나 장로들이 교회를 움직이지만 그들이 신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부는 남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종이나 양자밖에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부의 치다꺼리를 해줘야 되는 것입니다. 신부는 그들이 움직이고 있는 교회의 교인들 가운데서 나와야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목사나 장로들을 중심삼고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들을 중심삼고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을 사랑하며 눈물 흘리는 할머니들로부터 여자들을 통해서 내려온 것입니다.

메시아에게 접붙여야 하는 타락 인간

이제는 신부를 신부로서 인정하지 않는 교회와는 갈라질 때가 되었습니다. 오시는 아들, 즉 주님을 맞을 신부가 이 땅에서 찾아져야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땅에서 천사장과 관계되었던 타락의 인연을 땅에서 갈라놓아야 하나님께서 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오시는 주님 앞으로 돌려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과거의 인연에 집착되어 있는 교회는 하나님의 섭리로 볼 때 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첫아담이 실패했기 때문에 후아담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런데 후아담으로 온 예수님의 복귀섭리가 실패했기 때문에 또다시 완성한 아담이 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가 이 땅 위에 와서 무엇을 할 것이냐? 인류의 참된 아버지로 와서 참된 어머니를 찾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반드시 천사장을 세워 놓고 찾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타락할 때, 아담과 해와 두 사람과 천사장이 타락했기 때문에 이들이 우주적인 내용을 결정짓고 사탄을 완전히 굴복시킬 수 있는 승리적 기반을 닦지 않고는 인류가 바라는 소원의 기점을 가져올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역사적인 소원의 기점은 나라도 아니요, 세계도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이냐?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참부모입니다. 거짓부모가 씨를 뿌려 가지고 사망권내에서 신음하고 허덕이던 인간에게 소망의 기점이 되는 참부모가 오시는 것은 곧 돌감람나무 밭에 참감람나무가 하나 태어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접붙일 줄 아는 주인이 있어 돌감람나무를 전부 잘라 버리고 참감람나무의 눈을 따다가 돌감람나무에 눈접을 붙이면 그 밭은 참감람나무의 밭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인간들은 전부 다 돌감람나무이므로 밑등을 잘라 버려야 합니다. 그 어떤 사상과 생각을 부정하지 않고는 완전한 참은 출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부모를 사랑하던 그런 사랑 가지고는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사랑과 욕망을 전부 다 잘라 버려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새롭게 접붙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과거를 긍정하면서 출발하는 종교는 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의 아버지 어머니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해야 하고, 자기의 아내나 아들딸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기독교가 가야 할 길입니다. 즉,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자기의 아내나 남편을 버리고라도 예수님을 따라가야 하는 것이며, 자식을 버리고라도 하나님을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가 걸어가야 하는 십자가의 길이요, 하늘나라로 가는 길입니다. 이것이 천리원칙입니다.

통일교회는 사회로부터 일시적인 지탄과 온갖 모함을 다 당했지만 그것이 하늘나라를 가는 데 있어서는 원칙일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기 전에 하나님이 사랑할 수 있는 나라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나라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할 수 있는 아들딸이 안 나왔기 때문에 진실로 하나님이 사랑할 수 있는 나라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할 수 있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곧 나타나 있는 세계는 부정되어야 합니다. 개인으로부터 세계에 이르기까지 모두 청산지어져야 합니다.

이러한 부정적인 요소를 제거하기 위해 오시는 분이 메시아입니다. 그러므로 메시아가 이 땅에 와서 이 세계를 부정하고 심판하더라도 막을 길이 없습니다. 그때가 바로 우리가 말하는 심판날이며, 그날에는 자기가 세상을 중심삼고 사랑했던 모든 것이 심판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윤리가 파탄되는 것이 문제가 아니며, 낡은 세대에게 비판받는 것이 문제가 안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망해야 할 세상이 되었는데 그냥 망하도록 내버려두면 둘 다 망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할 수 없이 갈라 놓아 서라도 살 수 있는 길을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계를 갈라 놓은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하나님께서 섭리해 나오신 내용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는 현실 가운데에서 되어지는 것을 비판할 것이 아니라, 썩어진 세계를 밑거름으로 하여 소망의 뿌리를 박아 생명이 자랄 수 있는 토양이 되는 주체성을 가져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통일교회를 아무리 반대하더라도 봄날에 돋아나는 새싹처럼 자라나서 완전한 뿌리를 내릴 때에는 그 싹을 뽑을 자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원과 인류 희망의 귀착점

인류가 역사과정을 통해서 소망해 나오는 최후의 목적이 무엇이냐? 이상적인 나라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이상적인 나라가 있기 전에 이상적인 민족이 있어야 하고 이상적인 민족이 있기 전에는 이상적인 종족이 있어야 합니다. 또, 이상적인 종족이 있기 전에 이상적인 가정이 있어야 하고, 이상적인 가정이 있기 전에 이상적인 부부가 있어야 하며, 이상적인 부부가 있으려면 이상적인 아들딸이 있어야 합니다. 뿐만아니라 하나님도 이상적인 자유로운 존재로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영광 중에 계시는 하나님' 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전지전능하시고 영광 중에 계시는 하나님께서 왜 아들딸이 사지에 들어가도록 두었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도 자유로운 하나님이 못 되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종이 가야 할 길과 양자가 가야할 길을 닦아 오셨으며 앞으로 참부모가 와서 가야 할 길까지도 닦아 놓지 않으면 안 될 수난의 길을 걸어오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 앞에 동정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인류가 하나님의 그런 내적 사연을 알게 될 때 완전히 하나님 앞에 굴복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유로이 운행하시면서 '내 아들아, 내 딸아 사탄의 공포가 어디 있느냐?' 하는 자리에서 아들딸을 사랑하게 되면 만물도 기뻐하며 활동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한때, 이렇게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 있는 환경을 가져 보았습니까? 이런 일이 오늘날까지 한번도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유롭게 해방되는 날을 갖기 전에는 인류도 해방될 수 없습니다. 해방된 국가가 되려면 해방된 민족이 있어야 되는 것처럼, 해방된 세계가 되려면 해방된 국가가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은 욕심이 많습니다. 주님이 오시면 천국 간다고 하는데…. 그러나 그렇게 될 수 없는 일입니다. 천국에 가려면 미리 그 터전을 닦아야만 됩니다. 순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통일교회 교인들은 천국에 들어가기 전에 천국문을 개문하기 위한 터전을 먼저 닦아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천국을 망친 것이 누구냐? 거짓 부모로 말미암아 지옥이 되었으니 지옥에서 천국문을 열려면 참된 부모가 와야 됩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 교인들은 참된 양자가 되었느냐? 양자는 아들의 갈 길을 준비해야 되는데 아직까지 우리 통일교인들은 그 책임을 못하고 있습니다. 양자는 아들을 대신해서 나라를 준비해야 되고, 그 아들이 나라와 교회를 거느리는 데 있어서 환난이 있으면 막고 대비하여 아들이 승리할 수 있는 터전을 갖추어 놓고 예비해야 됩니다. 그래야 그 터전 위에서 아들이 뜻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소원과 인류의 희망의 귀착점이 되고, 신앙자가 승리할 수 있는 기점이 되는 하나의 터전이 무엇이냐? 하나님의 한의 기원은 인류가 거짓부모로부터 출발했기 때문에 참부모의 거룩한 인연을 중심삼고 그 앞에 순응하는 무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비로소 천지가 해방될 수 있고, 천국문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한을 해원성사할 수 있는 중심이 무엇이냐? 통일교회에서 말하는 참부모의 날입니다. 참부모를 맞이할 수 있는 그날이 나오지 않고는 역사적이고 엄청난 그 한을 풀 수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도 선한 가운데 나타나야 할 참된 부모의 혈연이 이 땅위에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날 인류는 고아와 같은 입장에 있습니다. 즉, 사탄의 아들과 딸이자 원수의 아들딸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의 법도를 보아서 인간은 하늘나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탄은 인간을 쇠사슬로 묶어 가지고 못 가게 유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정상(情狀)입니다. 그러나 그 쇠사슬을 끊어 버리고 최후의 생사결단을 지을 수 있는 인류의 소망의 기점이 '부모의 날'이라는 것입니다. 이날은 하나님도 지금까지 바라오셨던 최후의 한날 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통일교회는 기성교회와 같은 교회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억천만 세의 죽음의 피로써 호소하고 소망하면서 남아지기를 갈구하여 산 모습으로 세워진 터전이 통일교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에서 세운 이 날은 세상의 그 어떤 날에도 비길 수 없는 귀중한 뜻이 있는 날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새롭게 느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6천년 동안 소망해 오셨고, 타락한 인류가 찾아 세우려고 했던 이 '부모의 날'을 오늘날 타락한 인류는 물론 믿는다는 사람들도 모르고 있으며 통일교회 교인들까지도 '부모의 날'이 갖는 귀중한 의미를 잘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날을 찾아 세우시기 위하여 피나는 수난길을 통해서 선지자를 보내고 메시아를 보냈다는 것을 타락한 인간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오늘날 이 썩어진 종교계가 참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부패할 대로 부패한 모습을 보고 통일교인들은 의분을 느낄 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부조 리한 이 세상을 부정하고, 어서 속히 하나님이 소망하시는 선한 나라가 이루어지도록 열과 성을 다하여 하나님의 위업을 계승해 나가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고 하루하루를 새롭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깊이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기 도]

오늘은 1971년 4월 1일, 이해에 들어 석 달을 보내고 넉달째 맞는 새 아침이옵니다. 당신의 영광과 존귀와 사명과 힘이 경영하시는 전체 복귀섭리노정 위에 나타났사옵고, 당신의 수고로우심이 오늘날의 인간들로 이어져 나왔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에, 저희 한 개체 개체는 온 인류를 대표해서 당신의 수고로우심을 탕감하여야 할 모습이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느끼게 되옵니다.

오늘날 세계의 수많은 인간들에게는 당신이 가야 할 길을 지키고, 당신의 외로움을 대신 상속받고, 악의 세계에 남아 있는 모든 내용을 제거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불쌍한 이 한민족도 세계를 대표한 제단 국가의 민족으로서 당신의 외로운 뜻 앞에 제물이 되어야 할 입장에 처해 있는 것을 저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저희들은 감사히 생각해야 되겠사옵고, 이러한 입장과 위치에 당신과 더불어 같이 서 있사오니, 모든 것을 승리의 결과로 돌려 드릴 수 있도록 다짐하지 않으면 안 될 것도 알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중대한 책임을 지고 있는 삼천만 민족 위에 당신의 가호의 손길이 떠나지 마옵시길 바랍니다.

이 삼천만 민족의 미래를 지도하여야 할 오늘날의 통일가에는 보다 큰 사명이 남아 있는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습니다. 이 나라와 이 민족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권위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는 것을 생각할 때에, 당신이 믿고 바라보시는 그런 단체야말로 당신의 섭리와 더불어 당신이 주관하시는 뜻과 더불어 민족을 일치시키지 않으면 안 될 중대한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희들은 지난날을 추심하여 오늘날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개척해 나왔사옵니다. 오늘까지 같이해 주신 당신과 더불어 저희들이 찬양드리고자 하는 생활권에 승리가 있기까지에는 저희의 수고만 있었던 것이 아니오라 당신의 배가된 수고의 길이 얼마나 가중되었던가 하는 사실을 저희들은 진실로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저희들이 스스로 모습을 갖추어 가지고 아버지 앞에 어엿이 나설 수 있는 그 자체 하나만으로도 아버지 앞에 감사드릴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지금까지의 역사과정을 통하여 왔다 갔던 우리의 선조는 물론 아버지가 수고하신 그 터전으로 말미암아 이러한 입장에 서게 된것을 아버지 앞에 감사할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보잘것없는 저희들의 자세와, 보잘것없는 저희들의 면목을 세워 놓은 것이 눈물로써 피어린 투쟁의 행각을 참고 나오신 아버지의 수고하신 보람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사랑하기에는 저희들은 너무나도 초라한 모습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시간 저희들은 뜻 앞에 있어서 당신의 분부를 다시 받아야만 되겠사오니, 저희들을 강력히 권고하시옵소서. 사망의 절벽을 밟고 나가야 할 숙명이 저희에게 내려져 있는 것을 저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버님, 여기에 모인 당신의 자녀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이들은 아버지를 사랑하기에 생애를 바치려 하였고, 뜻을 위해 자기 몸과 마음을 다바쳐 온 힘을 투자하고자 하는 당신의 자녀들이오니, 아버지, 이들을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고행길이 아무리 험하더라도 당신의 뜻을 남겨야 될 것이고, 생활과 환경이 아무리 변하더라도 당신의 뜻을 위해서 상속받을 수 있는 아들딸의 자리를 남겨 두지 않으면 안 될 개체 개체의 사명이 있는 것을 저희들은 확실히 깨닫고 있습니다.

아버지여, 지금까지 보호하여 주신 은사를 감사드리오며 금후에 가는 길도 지켜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언제나 저희는 아버님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생활하고 있으나 당신은 저희를 잊지 않고 전후 좌우 행로를 갖추어 가지고 보호해 주는 그 은사를, 저희들은 지나고 나서야 아는 미련한 인간이었사옵니다. 아버님, 용납하여 주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들이 70년대를 향하여 새로이 출발한 이 1971년도이옵니다. 당신의 승리를 결정지을 수 있는 완숙한 십년 기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새로 한 달을 출발하고자 하옵니다. 이 해야말로 당신이 기쁨을 누리고 영광의 터전을 지닐 수 있는 승리의 해가 되게 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고 원하옵니다. 중차대한 시대적 사명, 역사적인 사명이 가로놓여 있는 한 해이기 때문에 저희들은 3월을 맞아 뜻을 중심삼아 가지고 결의해 나왔습니다.

그 자리 자리마다 아버지께서 같이하여 주신 은사 앞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여기에 승리로써 아버지 앞에, 혹은 이 나라, 이 백성 앞에 자랑할 것이 있사올진대 이 모든 것이 당신으로 말미암은 전체의 결론이 오니 당신께서 기쁨으로 받아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일사분기가 지나고 이사분기를 출발하는 오늘 이 시간이오니, 아버지께서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이 3개월이 지나고 나면 이한 해의 절반이 지나가게 되옵니다. 이것을 생각할 때 이 3개월 기간에 있어서 저희들의 맡은바 책임을 다 해결짓고, 이 한 해가 승리의 해로서 전체를 통과할 수 있는 거룩한 한 해가 되게 허락하여 주옵길,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아침에 남한 각지에서 서울을 바라보며 아버지를 위하여 정성을 다짐하고 있는 당신의 아들딸이 있사옵거든 같이하여 주시옵고, 더우기 일선에 나가 열심히 일하고 있는 사랑하는 딸들 위에, 아버지,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그들이 아버지를 위하여 정성들이며, 심정적인 입장에서 내일의 인연을 다짐하는 자리에 있다 할진대 그들을 아버지께서 무정하게 버리지 마옵소서. 외로운 환경과 어려운 문제에 처해 있사오니 당신이 위로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의 높고 귀하신 은사 가운데 저희들은 감사드리고 있사옵나이다. 승리하겠다는 결의를 함으로 말미암아 악의 세계를 제거해 나가고 승리의 터전을 아버지 앞에 돌려드릴 수 있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관계된 이웃 나라 일본과 중국과 미국과 독일을 위주한 노정 위에 아버지 같이하셔야 되겠습니다. 악의 세력이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당신 앞에는 굴복되어서 통과된다는 사실을 저희들이 알고 있사옵니다. 살아 계신 당신께서 악을 처단해야 되는 입장에 있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아버지, 저희들의 충성의 도가 미급한 것을 알게 되옵니다. 염려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날 이 땅에 살고 있는 수많은 인류 가운데 아버지를 향하여 충성하는 사람이 많지 못한 것을 저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탄을 위하여 충성을 하고 그 뜻을 따라가는 것을 볼 때에 아버지의 위신을 세우지 못하신 것을 저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사탄은 자기를 받드는 모든 악의 권한을 최대한으로 자랑하여 당신 앞에 선한 사람이 비례적으로 적은 것을 참소하고, 스스로 교만할 수 있는 입장에 서 있는 것을 저희들은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역사 과정 위에 충성의 도리를 다하고 당신으로부터 사랑받을 수 있는 귀한 아들딸들이 이 땅 위에 많이 나타나게 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전세계에 널려 있는 당신의 자녀들을 친히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통일이 되어 가는 곳에, 아버지, 승리의 깃발을 드높이 드시옵소서. 삼천만 이 민족의 수많은 협조를 받아 가지고 당신이 원하시는 해원성사를 온 지구상에서 성사시켜 드릴 수 있는 그날까지 통일을 다짐하며 나아갈 수 있는 당신의 자녀들 되게 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남아진 터전을, 아버지, 승리의 결과가 되도록 축복하시옵소서. 당신이 바라시던 최고의 승리의 터전을 이 땅 위에 창건하여 온 지상이 아버지 품에 품겨서 더 강한 승리의 권한을 아버지 앞에 봉헌할 수 있는 세계가 하루속히 다가올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러기 위해서는 아직 까지 저희들에게 눈물과 피와 땀이 요구되는 희생의 길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오니 오늘도 내일도 개척자의 사명을 포기하지 말게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이 성지와 연결되어 세계에 널려 있는 120개의 성지에서 당신의 자녀들이 모여 기도하고 있사오니 그 기도하는 곳곳마다 당신이 함께하여 주시옵고, 그들이 당신의 분부를 받을 수 있는 자녀가 되게 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그 자리가 당신이 지구상을 점령하기 위한 하나의 처소로서 온 영계의 협조의 터전이 되고 생명의 인연을 연결시킬 수 있는 약속의 터전이 되게 해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여기의 천사와 같은 자녀들 위에 하해와 같은 무한한 사랑이 떠나지 말게 하시옵소서. 내일 또 내일을 개척해 나가야 하는 생애노정에 있사오니 빛날 수 있는 승리의 권한으로 이들을 육성하시어 승리의 영광 앞에 서기에 부족함이 없는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당신 앞에 기쁘고 즐겁고 감사한 마음을 가짐으로 말미암아 아버지로부터 칭찬을 받고 사랑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당신께서 고이 기르시고 인도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오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말 씀

우리 교회를 가만히 보면 4월이나 5월 그리고 6월, 7월까지의 기간은 언제나 시련 기간에 해당되었습니다. 즉, 60년대부터 지금까지 본격적으로 싸워 나오는 노정에 있어서 이 기간은 언제나 탕감기간으로서 지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1971년에 있어서는 이기간을 어떻게 하면 보다 더 승리의 기간으로 구축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금년에 들어와서 1월, 2월, 3월에는 우리가 막대한 자금을 투자하면서 여러 가지 행사를 치러 나왔던 것입니다.

현재 통일교회의 입장과 우리의 신앙자세

그런 행사를 치르면서 우리가 완전히 이긴 것을 보면 이제 뜻의 때가 멀지 않았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는 드러나지 않는 도의 생활을 하고 그러한 활동을 하는 입장에 있었지만 이제는 안 드러날래야 안 드러날 수 없는 한계점에 다다른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지금은 우리가 과거보다도 드러날 수 있는 때입니다. 즉, 과거에는 자기 스스로가 수확을 거두었지만 이제부터는 우리 개개인이 통일 교회를 대표할 수 있게 되었고, 우리들의 생활이 통일교회를 증거할 수 있는 입장에 들어섰기 때문에, 참된 통일교인으로서 금후의 우리의 행동과 생활이 국민과 수많은 인류 앞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의 어느때보다도 더욱 나은 신앙의 자세를 갖추어 충성을 하고 하나님을 위해 모든 정성을 기울여 활동하지 않으면 안되겠습니다.

인간이 자기 스스로 모든 것을 계획하고 자기 스스로의 자질만을 갖고 목적을 성사하려 하면 반드시 실패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진행된 역사과정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인간 자신들을 중심으로 엮어 온 역사는 언제나 실패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위주한 성인의 도리를 따라서 한 행동, 자기만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선을 밑받침으로 해서 한 행동은 역사 속에 계승되어져 나온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악한 것은 지나가는 것이요, 선한 것은 남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선은 언제나 하나님과 더불어 성인의 도리를 중심삼고 나왔습니다. 이 성인의 도리는 세계적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개인적이 아니라 이겁니다. 자기의 한계점을 자기를 중심삼은 개인에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적인 관점에다 두고 있는 것입니다. 억조창생을 표준해 가지고 나온 것이 성인의 도리이기 때문에 그 중심사상은 반드시 하나님을 위주하고 있는 사실을 우리는 역사를 통하여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도리를 따라나온 선을 위주로 한 생활의 터전은 반드시 역사과정에 공헌을 하여 오늘날의 문화권을 이루어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미루어 보게 될 때 개인을 위주로 하는 것은 반드시 쓰러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왜 그러냐 하면 개인을 위주한 것은 악으로부터 시작하여서 악의 종착점을 향하여 아니 갈 수 없는 입장에 있기 때문 입니다. 자의로 계획하여 목적을 성사시켰다 하더라도 그것은 역사와 더불어 흘러가 버린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고차적인 하늘의 뜻을 품고 나아가는 우리들은 그야말로 공적인 입장에서 나가야 되겠습니다. 사적인 입장을 버리고 보다 공적인 입장에서 한국을 넘어 세계를 수습할 수 있는 모습을 가지고 나가야 되겠습니다. 우리 전체가 이러한 정신자세를 갖추어 가지고 나가게 될 때에는 반드시 그 나라의 환경과 체제에 크나 큰 영향을 미치게 될 것입니다.

통일교인 한 사람의 중요성

여러분들이 활동하는 것에 대한 보고를 들을 때 선생님은 섭섭할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개개인이 기관을 상대로 교섭할 때나 접촉해 나갈 때 개인적인 기준을 가지고 대함으로 인하여 전체에 좋지 못한 영향을 가져오는 사실들을 종종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식구들이 활동은 하지만 사회를 좀더 알고서 해야 되겠습니다. 어떤 환경에 처하더라도 언제나 주체적인 권한을 가지고 거기에 보조를 맞추면서 승리해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여러분이 어떤 환경에도 적응할 수 있는 역량을 강화해야할 것을 선생님은 느낄 때가 많습니다.

그리하여 좋은 결과를 대할 수 있는 곳이 많으면 많을수록 발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대하고 난 후에 거기에서 비판받고 그 사람으로 인하여 전체가 비판을 받고 살게 된다면, 우리가 수난의 길을 통하여 대가를 치러 가지고 한 시대에 나타날 수 있는 그때를 바라 나오던 목적에 지장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생각하여 볼 때 그러한 사람에게는 역사적인 책임추궁이라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이 민족을 대신한 어느 한 민족의 요구 앞에, 혹은 삼천만 민족의 소망 앞에 비판을 받아야 될 것입니다. 우리들은 영계에 있는 선조들로부터 이 땅 위에 수많은 종교인들이 바라고 있는 소망적인 뜻을 중심으로 하여 전체 앞에 비판받지 않으면 안 되는 중요한 입장에 서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여러분은 전반적인 문제에 있어서 자기 자신을 중심삼고 나타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어떠한 일을 하게 될 때 나 자신은 이런 식으로 하고 싶지만 만약에 하나님이 이 일을 하신다면 어떤 방법으로 하여 어떠한 결과를 낳을 것인가를 항상 생각하면서 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이와 같은 생활을 하지 않고는 지금까지 수고하여 쌓아올린 모든 공적이 한 사람으로 인하여 무너지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알아야 하며, 두려운 일이 여러분 앞에 찾아온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무관심한 입장에서 모든 것들과 관계를 갖지 않고 살아가면 모르지만, 관심을 갖고 바라보는 입장에서는 그렇게 살아가지 않으면 전체 앞에 치명적인 상처를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다른 사람 앞에 나타나기를 주저해야 하며, 대인관계에서 말할 때에도 조심스럽게 상대방의 안팎의 사정을 살펴 가면서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로부터 모심을 받거나 존경받을 수 있는 스스로의 입장을 취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옛날과 다른 것이 나타나는 현시대에 있어서 우리가 우리보다 먼저 걸어왔던 사람들과 같은 입장에 서지 않게 되면, 지금까지의 수난의 대가는 수포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러한 입장에 들어가게 된다면, 다시 말해 긍정적인 입장에 있기를 바랐는데 부정적인 입장에 있다면, 그것을 다시 긍정적인 입장으로 회복하는 데는 몇십 배 수고의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잘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의 자의를 중심삼고 주장할 때는 반드시 전반적인 분야로 시야를 넓힐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수많은 민족과 세계에 드러나는 우리의 움직임을 중심삼고 볼 때, 여러분들은 언제나 긍정적인 입장에서 뜻을 중심으로 주장해야 합니다. 현재의 생활을 소화시키고 환경을 이끌어 갈 수 있는 여러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금년에 들어와서는 더욱더 깊이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대학가를 책임진 사람들이나 승공연합의 책임자나 교회의 한 지구, 혹은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전반적인 조직을 움직이는 책임자들은 전부 다 하나님이 파견한 특정한 요원이라는 관념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는 하나님의 권위와 하나님의 위신을 세움으로써 하나님이 우리를 내세워 사랑할 수 있는 모습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여러 은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어저께 일본 학생들에게 이야기를 하였지만 여러분들이 한번 생각해 보세요. 36억 인류 가운데서 우리가 사망율을 100분의 1로 보게 된다면 1년에 3천 6백만 명이 지구상에서 지옥을 향하여 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를 두고 볼 때 오늘날 인간들이 지옥에 들어가는 수와 천상세계로 들어가는 수를 비교하여 보면 어느 쪽이 많을 것이냐? 3천6백만의 수가 어느 한 시간에 희생된다고 가정하여 3천 6백만 이상의 수가 1년에 하나님 앞에 복귀되어 들어 오느냐 하는 문제를 생각하여 볼때,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걸 볼 때 사탄은 아직까지 자기가 갖고 있는 권한을 가지고 하나님까지 참소하면서 하나님 앞에 악을 중심삼고 자랑할 수 있는 터전을 넓혀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에 우리 자신들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한 사람이 천 사람을 대신하고, 더 나아가 만 사람, 십만 사람, 백만 사람을 대신할 가치있는 한 사람을 어떻게 하나님 앞에 세우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악하고 나쁜 수많은 사람보다 선한 한 사람이 악의 전체의 수를 능가하는 것이기에, 이 사람이라면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이 필요한 조건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아직까지 수를 중심삼고 승리의 기준을 가질 수 없는 것이 선한 사람의 입장인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악한 사람의 수를 능가시킬 수 있는 터전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 통일가의 사명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여러분이 어떤 곳에 처할지라도 많은 민족을 대신한 전의 주동자가 되어야 하고, 선을 향한 도전자로서 선을 위한 개척 자의 사명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을 위해서 투쟁하는 투사라고 하는 신념을 갖고 나가는 생활이 되어야 하리라고 보고 있습니다. 더우기 이제부터는 한국뿐만 아니라 아시아를 거쳐서 세계로 뻗어 나가야 할 입장에 놓여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어제 샌프란시스코에서 전해 온 보고 내용을 보면 샌프란시스코에 와 있는 세계 명사들의 대답 속에서 소위 우리 통일교회가 거론되었던 모양 입니다. 미국무성에다 이 단체에 협조할 것이냐, 아니면 협조하지 않을 것이냐 하는 문제를 논의하게 되었을 때에 미국무성에서 통고한 내용이 이 단체는 선한 종교 단체이기 때문에 협조해도 괜찮다는 방안을 통과시켰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본부에 있는 사람의 책임수행 여하에 따라 전체가 좌우돼

이런 것을 볼 때, 우리의 문제는 이제 점차적으로 새로운 역사시대에 있어서 세계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런 사실적인 보고와 실증적인 환경을 통하여 우리들이 알 수 있듯이 한국의 본부에 있는 여러분들은 특히 책임이 큽니다. 더우기 한국에 있는 부장들, 한국을 대표한 기관장들은 각별히 주의해야 되겠습니다.

우리들이 외국 사람들을 대접할 때, 그들을 대하는 개인이나 교회가 스스로 책임을 하여야 합니다. 그들에게 어떠한 감동을 전해 준 것이 그 민족을 대표한 소망의 기준을 능가할 수 있는 입장에 있으면 모르겠지만, 도리어 책임을 못 하여 비판받는 입장에 있을 때는 그 민족을 대표하였던 역사시대의 수많은 선조들은 물론이요, 후손 앞에서까지 참소를 받는다고 하는 두려운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외국 손님 한 사람이 우리 나라를 방문했다면 그 한 사람은 우리 한국 사람과 입장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 민족을 대표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 사람의 선조들은 모두 그 사람을 주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결과가 영계로부터 기뻐할 수 있는 인연이 결정지어지면 지상의 선한 후손들을 통하여 부흥시킬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참소조건에 걸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할 때는 문제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책임자들은 각 분야에 각별한 주의를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하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일본으로 돌아가는 학생들에게 버스를 배치하는 데 있어서 한 사람 때문에 시간을 연장시키게 해서 고충을 느끼게 하는 결과를 가져온 사실이 있었습니다. 이것에 대해 간부들은 절실히 비판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를 책임진 책임자들이 그 책임을 감당치 못하여서 단체의 명예를 더럽히고, 혹은 한 가지를 보고 본부의 전체 간부가 평을 받는다면 그 한 사람으로 인하여 선생님 한 사람만이 아니라 휘하에 있는 전체 조직이 비판을 받는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을 생각해 볼 때에 행동이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개인의 행동이 개인의 행동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대신하는 것이며, 개인 생명의 터전이 개인의 생명만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체의 생명에 막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대하고 가중된 책임이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고 4월을 우리가 힘차게 움직여 나가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4월, 5월, 6월 이 3개월에는 1월, 2월, 3월보다 더 강력한 기준을 세워 가지고 우리 스스로가 결집해 나가야 되겠습니다. 민족이면 민족이라든가, 북괴면 북괴의 김일성 도당 앞에 우리의 정신적 자세를 더욱 공고히 다져 나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우리로 인하여 부러움을 느끼고 그 여파가 공산권까지 영향이 미치게 될 날이 멀지 않다고 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민주와 공산에 대비하여 새로운 방향을 열어 나가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한계점을 분명히 자각하여야 되는 것입니다. 남북이면 남북방향을 향하여 투쟁해 나갈 수 있는 위대한 사명감을 지니고 하나의 환경을 주도해 나가야 할 책임이 오늘날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 길은 주위환경에 접하여 왔다갔다하는 길이 아닙니다. 투쟁하는 길입니다. 따라서 세계에 일치할 수 있는 책임을 다짐하면서 나아가야 할 길이 오늘날 우리들이 가야 할 길인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되어 책임을 다해 나가라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은 언제나 공적인 이 책임을 해야 됩니다. 종교를 보면, 어떤 종교든 우선 부모님 앞에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며 다음에는 공적인 그 사회 앞에 선을 행하라고 합니다. 이런 3대 요건이 결합된 종교는 역사상에 지나가는 그런 종교가 아닙니다.

우리 교회를 중심삼고 볼 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부모 앞에 효도해야 됩니다. 우리에게는 이상적인 참부모를 중심삼은 새로운 가정적 전통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새로운 가정적 전통을 세우는 데 있어서는 어머니 아버지를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그 자녀들이 어머니 아버지와 일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부모의 전통이 가정의 전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가정의 전통이 종족의 전통으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그 가정이 하나 되어야 합니다. 가정이 하나되어야만 그 가정을 중심삼은 새로운 종족의 전통이 계승되는 것입니다. 그 종족이 완전히 하나되어야만 새로운 민족의 전통이 계승되는 것입니다. 또한 민족이 하나되어야만 국가의 전통이 계승되어 세계의 수많은 인류가 이것을 지속하여 새로운 문화의 세계를 창건할 수 있는 세계적인 전통이 결실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생각할 때에 여러분이 분립된 입장에 서면 전통이 서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식구들은 교회를 중심삼아 가지고 주체나 대상이나 모두 하나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를 중심으로 해서 하나되어야 상대적 관계에 있어 후대나 환경 앞에 새로운 사실을 제시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 비로소 이 민족의 새로운 소망이 결정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여러분들은 여러분 자신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안팎으로 하나된다 하여도 그것만 가지고는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주체가 되어 있으면 상대가 결정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완전히 하나된 주체가 상대적 환경을 하나로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로 만드는 데 있어서는 보다 나은 가치를 지녀야 된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이 원리를 통하여 알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자체가 하나되면 그 자체는 개별적이지만 전체를 대표합니다. 개별적인 존재가 전체를 대신하여 하나의 주체된 내용을 가지고 전체를 상대적 여건으로 삼고 수수관계로 새로운 환경을 넓혀 나갈 때, 이상적인 터전으로 발전된다는 사실을 원리를 통해 여러분들은 잘 알고 있는 바입니다.

4윌, 5월, 6월, 금년 71년도는 우리가 안 나타날래야 안 나타날 수 없고 안 드러날래야 안 드러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시대권내에 들어오는 것을 여러분이 알고 개인이 얼마나 귀중한 입장에 처해 있는가 하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또한 개인은 전체의 뜻을 위해서 하나의 손발이 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교회 전체의 발전 도상에 지장을 주지 않는 활동과 실적을 남겨 주길 부탁 드리는 바입니다. 알겠습니까?「예」

[기 도]

아버님, 당신의 영원하신 사랑과 더불어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 스스로 지금까지의 지난날을 생각하면서 이제 저희들 앞에 맡겨진 책임을 다시 한 번 다짐하는 이 마당에 있어서, 내일의 나는 이러한 내가 되겠다고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될 시점에 와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예년과 같이 봄은 이미 저희들 앞에 찾아왔습니다. 만물이 소생하는 자유의 동산이 저희의 목전에 전개된 것을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당신의 높고 귀하시고 아름다우신 본연의 심성을 발견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 이 4월을 승리의 달로서 다짐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역사노정을 통해서 볼 때, 이달로부터 8월까지는 저희들이 수난의 한때로서 지나던 것을 느끼게 되옵니다. 이해에 있어서 이달이야말로 아버지 앞에 탕감복귀해 드릴 수 있는 기간이 되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아버지, 지금까지 이 통일교단을 홀로 이끌어 나오시면서 지표도 없이 방향도 모르는 황량한 벌판과 같고 사막과 같은 곳을 개척하시기 위해 얼마나 수고하셨는가 하는 것을 저희들이 더듬어 알게 되었사옵니다.

저희 자신들에게 아버님이 계시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아버지의 심정과 일치될 수 있는 것을 체휼한 그 무엇이 있거든 당신의 무릎 앞에서 당신의 손길을 부여잡고 내일의 소망의 개척자가 되겠다고 결의하는 자신들이 되어야 할 것을 다시 한 번 발견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후대하신 아버지의 사랑은 저희들과 더불어 있었으나 저희들은 어려서 그것을 몰랐사옵니다.

저희들은 철부지한 과거를 저버리고 어른스런 자세와 당신의 존전에 세워야 할 스스로의 모습을 갖추어 당신께서 대견하게 생각할 수 있는 아들 딸의 모습이 되기를 두 손 모아 바라는 마음 간절하오니, 당신의 깊은 마음으로 저희들을 불러 주시옵소서.

소망의 천국이 어디 있느냐 하는 문제를 당신이 저희들에게 가르쳐 주기 전에 저희들이 그곳에 나아가 이것이 아니냐고 하며, 당신 앞에 내놓을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아버지, 저희들은 대한의 나라가 걸어온 역사적인 과정과 더불어 그 인연 가운데 태어난 한 개체로서 이 나라의 운명을 짊어져야 하는 소망의 실체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이 나라는 너무나 불쌍하고 비참한 역사를 엮어 왔습니다. 그 누구도 바라보지 못하고, 그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못하고 당신이 운행하시는 그 방향조차 잃어버린 채 스스로 허덕이면서 싸워 나온 이 민족의 처참한 역사를 당신이 굽어살피시옵소서. 당신의 그 뜻을 이 나라의 역사에 두시고 이 민족의 배후를 더듬어 오신 아버지의 후대하신 사랑이 있었다는 것을 저희들이 생각하게 되옵니다.

아침이 되어 광명한 햇빛이 저희들을 비출 적마다 저희들은 뜻 있는 우리의 선조들이 이 나라의 소망도 그와 같이 비춰질 수 있는 그날이 오기를 얼마나 고대했는가 하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사옵니다. 이 나라를 위해 애쓰고 염려하던 수많은 애국지사들은 당신의 소원이 비추어지기를 바랐지만 비춰 줄 수 있는 그날들을 안타깝게 보내면서, 눈물과 더불어 헤아릴 수 없는 캄캄한 심정으로 석양을 보내고 밤을 맞는 슬픔의 역사를 걸어나온 것을 아버지께서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이 밤이 밤으로 연속되는 것이 아니라 아침이 올 것을 알고 있사옵고, 지루하고 모두가 원치 않은 세월이 전부 다 가고 역사적인 새로운 광명의 때가 이 천지에 찾아올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이 나라를 지키시옵소서. 외적 기준을 다짐하는 현실적인 시점에서 새로운 정신적 혁신을 다짐하고 새로운 봄날을 맞이해야 할 때가 다가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이 민족의 내일을 아버지께서 책임져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당신이 책임지고 있는 것을 저희들이 중심된 기업으로 상속받기 위해서 아버지 앞에 맹세하고 선,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믿음직하고 바람직한 아들딸이 되어서 새로운 세계와 새로운 천국을 향하여 행진할 수 있는 대열에 설 수 있도록 하여 주시옵고,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상속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 이제 저희들이 모이는 자리는 외로운 자리가 되어서는 안 되겠사옵고, 슬픔이 깃드는 자리가 되어서도 안 되겠사옵니다. 아버지께서 언제나 계시는 곳, 아버지께서 언제나 상관하지 않을 수 없는 곳, 아버님과 더불어 살고, 아버님과 더불어 가는 운명의 한 제단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세상은 항상 습관과 풍습에 예속되어 하루하루의 생활에 시달리고 있지만, 아버지의 심정세계에 처해 있는 저희들은 습관화가 되어서는 안 되겠사옵니다. 매일 매일 새로움과 매일 매일 자체의 발견과 자체의 발전을 위하여 내적 외적으로 다짐하는 생활이 거듭되어야 될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이 아침, 이 자리에 저희들이 아버지 앞에 부복한 것은 단지 개인의 행복을 위한 것이 아니옵니다. 이 땅 위에 왔던 인간 전체를 대표해서 무엇 인가를 남기기 위해 그 표준을 바라면서 노력하기 위해 이 자리에 나왔사옵고, 소망의 결실로서 거두어 주시기를 바라서 나왔사옵니다. 저희 자신들은 승리의 실체가 되어야 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사오니, 긍휼의 아버님, 사랑의 아버님, 저희 자체에 부족한 것을 제거시키시옵고, 아버님과 일체화하고 아버님에게 화할 수 있는 자체를 그리워하고 있는 모습이오니, 당신의 후대하신 사랑의 손길이 떠나지 마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께서 저희의 마음 깊은 가운데서 심성을 밝히시어 자신을 찾고 자신에게 명령할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 바라보는 자기 자세가 어떻다는 것을 스스로 체휼할 줄 아는 이 자리가 되게 하시어서, 자신의 모든 것이 당신 앞에 드려지는 생축의 제물이 되고 분향의 향기가 되어서 당신의 자랑이 되고 당신의 소망이 깃들 수 있는 참다운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아침 전국에 널려 있는 당신의 자녀들 위에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지금 당신의 사랑하는 딸들이 일선에 나가 있사옵니다. 그들은 누구를 위해 일선에 나가 있는지 잘 알고 있사옵니다. 당신의 뜻을 위하여 시들어 가는 이 나라 이 민족의 내일의 운명을 위해 나가서 싸우고 있사오니, 가냘픈 여성들이 이 민족을 붙들고 호소하는 그 자리에 당신께서 같이하여 주시옵시고, 그들로 하여금 원수의 조롱으로 사라질 수 있는 탄식의 탕감 조건이 남아지는 자가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내일의 운명에 새로운 터전을 마련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고, 당신의 후대하신 동정적 사랑이 그 자리에 머물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들로 말미 암아 만민의 슬픔이 연결되어 삼천만의 한을 제거할 수 있는 거룩한 무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그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것들이로되 하늘의 소원을 그들의 마음과 연결시키어서 그들의 손길과 그들의 모습을 통하여 대하는 일마다 스스로 감명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 바라는 엄숙하고 고귀한 가치를 발견하여 민족적인 새로운 정기를 이어받을 수 있는 동기와 터전이 싹트게 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그들을 지도하던 책임자들이 지금 수택리 수련소에 모여서 수련중에 있사오니, 이번 기간으로 말미암아 아버지의 사랑의 품에 고이 품기게 하여 주시옵시고, 그들의 마음과 몸이 아버지와 일체되어 거룩한 화신이 되게 하시어서 아버지의 사랑의 본체요, 아버지의 말씀의 증거자요, 아버지를 대신하여 악에 대한 영원한 심판의 주인공으로서 나서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안팎으로 갖추어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번 기간을 통하여 갈라진 심정이 상봉하는 시간에는 다시 한 번 당신의 높고 귀하심을 드러내게 하여 주시옵고, 온갖 사연들로 갈라졌던 사정 들을 통합하시어서 통일기반을 확보하게 하여 주시옵오서. 간절한 마음으로 아버지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기 위하여 아버지의 제단을 붙들고 눈물 흘리는 이들로 말미암아 이 민족의 해원성사를 바랄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남북의 한을 분별시킬 수 있는 전통적 계기가 될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자리에 모인 당신의 자녀들을 당신의 따뜻한 품에 안기게 허락하여 주시어서 승리의 1971년도가 되도록 다짐해야 되겠습니다. 저희 각자는 통일기반확보라는 공고한 터전을 세워야 할 엄청난 책임을 맡은 자체임을 발견하고, 주어진 환경을 개척하여 당신이 기뻐하실 수 있는 충성을 세워 놓을 수 있도록 각자가 노력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부탁드리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이 시간을 당신께서 맡아 주시옵고, 부족한 저희 자신들을 살피시옵고, 저희 자신의 마음과 함께 이 모임 가운데 같이하여 주시옵기를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전체를 당신의 뜻대로 주관하여 주시옵길 바라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의 성호 받들어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말 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아직까지 봄과 같은 역사를 맞이하지 못한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또한 그런 역사를 맞지 못한 동기는 역사 자체에 있는 것보다도 역사를 움직여 나오고 역사를 형성해 나오는 인간에게 있다는 것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봄을 맞이하지 못한 인류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더우기나 인류 시조에게 있어서 천지가 바랄 수 있는 봄을 맞이하지 못한 문제를 두고 볼 때, 우리 인류 시조가 타락하였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타락이라는 그 자체는 모든 것을 부정한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목적하는 바를 향하여 전진해 나가는 입장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목적에 대해 후퇴하는 입장에 처해 있는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목적에 대하여 소망을 주는 입장이 아니라 목적에 대하여 반대적인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 역사적인 운명 가운데서 인류의 시조가 출발해 나왔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 그 출발이야말로 희망이 아니라 절망이 아닐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절망된 환경에서 자기 자신을 붙들고 희망의 길을 어떻게 찾아가느냐 하는 문제를 생각하게 될 때, 인류 시조도 갈 수 없었던 그 길을 우리 후손들이 타개해 간다는 것은 극히 어렵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시조의 한날의 실수로 말미암아 후퇴한 인간이 되어 그 목적하던 곳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인연을 가졌기 때문에 오늘도 그 운명권내에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설령 우리 인간이 어떤 목적을 향하여 갈 것인가를 짐작하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관찰할 수 있는 입장에 섰을는지 모르지만 소망의 기준을 영영 잃어버린 선조로부터 태어난 후손들로서 역사적 거리를 두고 현재에 처해 있는 우리들에 있어서는 우리 선조들이 잃어버린 소망의 터전을 다시 희생시켜서 그것을 하나의 목적으로 정할 수없는 그런 운명길을 걸어온 것입니다. 이런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인간만으로서는 도저히 이런 소망의 곳, 희망의 곳을 가질 수 없는 것이지만, 인간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이미 떨어진 자리에 있는 인간에게는 직선적으로는 가지 못하더라도 우회해 본래의 주권을 찾아 나가는 역사가 있어야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셔 가지고 이런 방향을 주도해 나오고 개척해 나오셨으며, 역사적인 모든 환경을 거쳐 나와서 수많은 종족의 분열상을 규명하고 민족의 분열상을 규명해 가지고, 이제는 세계가 분열된 운명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결정적인 시대까지 끌고 나온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한때의 세계적인 사조로써 민주주의나 공산주의라고 하는 문제가 인간의 생사를 판결하는 중심적인 역할을 할 줄 알았지만, 이것 조차도 우리 인류 앞에 희망의 조건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민주세계와 공산세계도 지나가야 됩니다. 이것을 타고 넘어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날의 세계는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타고 넘어가서 어디로 갈 것이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인류 시조가 타락하였으니 타락하지 않은 그 본연의 기준을 세워야 합니다. 그런데 그 돌파구를 어떻게 찾아서 넘어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우리 인류가 바라던 새로운 인간의 모습, 그 모습은 역사적인 종말시대에 있어서 세계 인류가 바라는 인간상이 될 것입니다. 인류 시조가 타락 하지 않은 본연의 선한 입장에서 걸어 나가는 가정의 모습이 오늘날 전세계에 널려 있는 현상권내의 인류가 바라는 참다운 가정의 모습이 될 것입니다. 인류 시조가 타락하지 않고 이뤄 놓은 민족이 있고, 국가가 있고, 세계가 있다면, 그 민족과 국가와 세계는 오늘날 세계 인류가 바라는 소망의 민족이 되고, 소망의 국가가 되고, 소망의 세계가 될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는 사실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인간이 가야 할 종착점

그러면, 그러한 세계는 어떤 세계냐? 그 세계는 하나의 세계일 것입니다. 그 세계는 완전한 하나의 세계로 시작되어 발전되어 나가는 세계상이기 때문에, 발전되는 그 내용은 완전한 개체를 중심삼고 전체의 동기와 관계를 맺어 가지고 발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완전한 인간조상의 출발로 말미암아 완전한 사회 형태가 나타날 것입니다.

그 방향으로 가는 데 있어서 이색적인 방향은 요구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그야말로 단 하나의 방향이요, 그 누구에게도 맞는 것이기에 그 시대에 있는 종족이면 종족, 민족이면 민족, 국가면 국가도 다른 방향을 생각할 수 없는 절대적인 방향으로 귀결될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가 소망하는 그런 터전이 오늘 이 세계에 다시 희생하지 않으면 안 될 때가 되어 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 세계를 바라보게 될 때, 그 하나의 세계의 귀결점을 찾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 하나의 귀결점은 어디가 될 것이냐? 이것은 몸부림 치다 말고 하나의 돌파구를 찾아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인류가 바라며 가야 할 곳, 우리가 찾아 나가는 소망은 어디에 있느냐? 그것이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뒤에 놓치고 오지는 않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류는 다시 돌아가 그 길을 찾아 허덕일 수도 있는 시점에 놓인 것을 생각해야 될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게 될 때, 만일 이 자리까지 왔던 인간들이 다시 흑암 세계로 돌아간다면 그야말로 비참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사랑한 나머지 우리 인류가 그런 세계로 돌아간다면 희망도 없을 것이고, 인간이 바라는 봄이라는 것은 꿈 가운데서도 지닐 수 없게 될 것을 염려해서 앞으로 인간들이 찾아 나가야 할 봄의 세계, 즉 인간이 찾아야 할 봄을 맞이하게 하고, 여름이 되게 하고, 다음에 가을이 되게 하여 인간을 통해 결실을 거둘 수 있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인류의 종말 때까지 이것을 방비하기 위하여 만반의 준비와 만반의 방어진을 강화시켜 나오셨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인류는 진정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될 것입니다.

이런 시점에서 오늘 우리 인류는 12, 13세기부터 인문사조가 발달하기 시작하여 16세기 후반기에 들어와서는 신의 실존을 부정하는 인본주의 사상까지 나오게 된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런 사조를 거쳐 나와서 현재는 신을 부정하는 단계를 넘어 신은 죽었다고까지 하는 결론을 짓는 절망적인 한계점에 도달한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옛날에 부정했던 신은 없는 것이 아니고, 오늘날 잃어버린 신은 죽은 것이 아닙니다. 신(神)은 인류에게서 영영 사라져서는 안 될 입장에 있기 때문에 한계선에서 추방을 당하고 완전히 부정을 당하는 입장에서도 그런 부정의 자리를 뚫고 나왔고, 그 한계선을 돌파하면서 역사해 나오셨습니다.

이러한 것을 생각할 때에 현시점에서 단 하나의 길을 모색해 주어야 할 것이 하나님으로서 해야 할 책임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문제의 실마리를 어디서 찾을 것이냐 하는 것을 생각할 때, 그것은 인문 사회를 통하여 이루어진 과학의 결과의 세계가 아닙니다. 신이 있다면 어디까지나 부정되었던 종교 기반 아래서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된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역사시대에 새로운 정신적인 이념을 어떻게 촉구시켜 재현시키느냐 하는 문제가 이제부터 종교가 해야 할 사명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 우리는 인간 본연의 가치를 찾기 전에 먼저 신(神)이 있다고 하는 신의 존재와 가치를 인정해야 될 것입니다. 신의 존재와 가치를 인정함과 동시에 신의 존재를 인식하고, 그 인식한 신으로 하여금 우리의 생활권내의 감정과 생활해 나가는 자기 인격에 영향을 미칠 수 있게 관계를 맺어 주는 새로운 종교의 세계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통일교회의 사명

이러한 의미에서 오늘날 신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조를 다시 부정할 수 있는 새로운 내용으로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종교의 터전을 갖추어 가지고, 사회가 신을 부정하는 그 부정의 환경을 다시 부정하여 그것을 새로운 긍정으로 돌이킬 수 있는 주체적인 힘, 주체적인 동기를 어떻게 발현 시키느냐 하는 문제가 현대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가 바라고 나가는 것은 천국에 들어가겠다는 사상이 아니라 천국을 창건하자는 사상입니다. 오늘날 현 시대에 세계 인류가 단말마적인 극단의 세계에 들어와 가지고 자기 자체의 일신조차 수습할 수 없는 현실에 처하여 있는 이 때, 새로운 의미로서 새로운 차원에서 새로운 이미지를 제시할 수 있는 사명을 해야 할 종교가 있어야 할 것이 확실합니다. 이런 종교의 입장을 확고히 세우는 책임을 지고 나가야 할 것이 오늘날 통일교회의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는 천국에 가는 것을 소망하는 종교가 아니라 천국을 실현시키려는 종교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을 증거하는 신앙을 해야 합니다. 역사적인 종말 시대에 이러한 운동이 일어나야 되는데, 그런 운동을 책임지는 통일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느끼는 바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을 믿고 가는 것보다 신을 증거하면서 가야 되겠습니다. 또, 신을 증거하고 가는 동시에 증거된 신과 더불어 살 수 있는 생활 터전을 개척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역사적 종말시대에 있어서 요구되는 새로운 종교가 제시할 내용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또, 이것이 인류가 지금까지의 한계선을 타파해 버리고 그 한계선을 넘어설 수 있는, 하나님이 찾을 수 있는 방안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떠한 문명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신(神)이 동기가 되어 가지고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마음에 새로운 기쁨을 주며, 자기의 모든 생활권을 넘고 어떠한 극난한 환경까지도 넘어서 기쁨과 영광을 누리게 할 수 있는 하나의 종교를 발견할 수 있다면, 거기서부터 우리는 인류가 희망하는 봄의 세계를 꿈꾸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시대를 초월할 수 있는 종교, 시대를 혁신할 수 있는 종교, 시대의 모든 감각을 새로운 면에서 자극시킬 수 있는 새로운 종교가 오늘날 이 현대인에게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되는것입니다.

고요히 앉아 명상하는 가운데 부딪히는 시련보다도 우리의 모든 생활 환경 가운데에서 부딪히는 시련 무대에 있어서, 혹은 교차점에 있어서 신의 실존을 스스로 대변할 수 있는 자체를 갖고 나타나는 신앙자의 대열이 오늘날 인류 앞에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오늘날 우리 통일교인들이 바로 그런 모습들이 되어야 될 것을 생각하고 나온 것입니다.

통일교회는 지금까지 20여년의 역사를 거쳐 왔습니다. 20여년간 바라던 소망이 풀리지 않은 그와 같은 길을 걸어왔지만 그 가운데서 우리가 신음 하면서 뒤넘이친 것은 무엇이냐 하면, 신과 나와의 관계를 어떻게 맺을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신(神)과 나와의 관계, 그 관계를 어떻게 맺을 것이냐가 문제입니다. 그 관계는 오늘날 사회의 어떠한 관계나 인연보다도 강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신에 대한 결의는 나라에 대한 충신의 절개보다도, 부모에 대한 효자의 절개보다도, 남편에 대한 열녀의 절개보다도 더 강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부딪쳐 오는 사방의 어려운 사회상을 바라보게 될 때, 거기에 부딪쳐 가지고 스스로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타개하고 전진의 일로를 가해 갈 수 있는 자체를 하나님은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현 사회에 휘말려서 스스로를 수습하지 못하는 자세가 아니라 현 사회 환경을 타개해 버리고, 일소해 버리고, 뚫고 나갈 수 있는 주체적인 자세를 필요로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지 않고는 새로운 봄날을 맞이할 수 있는 기수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세계적으로 어려운 환경 가운데 허덕이는 인류에게 새로운 소망의 목적, 혹은 어떤 희망의 좌표를 제시해 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수십년 동안 걸어온 그 역사적인 수난길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대 사회, 대 국가, 대 세계에 남아진 수난길을 대비해 가지고 그 이상의 수난의 길을 가져다 준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수난의 구렁에서 허덕이고 있는 이 세계를 타파할 수 있는 주체적인 인물을 만들기 위해 연단시키고 훈련시킨 것입니다. 수난길은 그런 한 기간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됩니다.

통일교회의 현재의 시점

우리는 그런 수난 가운데서 좌절될 것이 아니라, 내일의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다짐된 그 소망을 가지고 결의된 그 마음을 가지고 어떤 환경의 침식을 받을 것이 아니라, 침해를 받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격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수난기간을 새로운 개척의 역량을 키우고, 자제력을 키우고, 환경을 흡수하는 중요한 계기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5년, 10년, 혹은 그 이상의 신앙생활을 통하여 과거로부터 오늘날까지 걸어나온 걸음걸이라는 것은, 앞으로 세계적인 시련 무대에 여러분을 내세우기 위해 같은 생활권내에 있는 종족과 민족의 시련무대에 내세워 가지고 연단시킨 것이었음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 시련은 우리가 자국민을 넘어서 이국민의 시련무대에 나서게 될 때 우리에게 가중된 시련이 있을까 염려하셔서, 그 시련무대에서 쓰러지지 않는 무리를 만들기 위해서, 치열한 수난의 과정을 통하여 훈련시킨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이 있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생각하고 결의했다면 그야말로 지금까지 걸어온 걸음걸이는 다시 한 번 내일의 소망의 터전 앞에 빛이 될 수 있는 터전이 되는 것입니다. 현실을 중심삼고 볼 때 우리 앞에 다가오는 시련의 무대가 크면 클수록, 거기에서 좌절되는 것이 아니라 결의를 다진다면, 그것은 내일을 향하여 새로이 출발하는 데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절대적인 동기가 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기에서 하나의 국가면 국가, 하나의 민족이면 민족을 중심삼고 한 마디를 결정지어 놓고 새로운 세계 무대를 향하여 출발할 수 있는 동기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때를 맞아 노력하였다면 맞이한 그때야말로 통일교회에 있어서는 민족의 한계선을 넘는 때요, 세계를 향하여 나가는 새로운 봄절기와 같은 시대를 맞는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시대는 반드시 우리 앞에 찾아올 것입니다.

그러나 봄절기가 되었다고 해서 반드시 전체가 꽃이 피는 것이 아닙니다. 봄은 겨울의 연속이요, 겨울과 연결되는 때이기 때문에 어차피 한 기간에 있어서는 시련이 있습니다. 그 시련은 봄을 맞이하기 위한 시련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게 될 때, 내일의 소망 앞에 강하고 담대한 자세를 가지고 다가오는 시련을 기쁨으로 소화시켜 나갈 때, 다가오는 시련은 강한 시련 근 시련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점점 작은 시련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나간 하루하루를 생각해 볼 때, 통일교회가 대한민국권내에서 시련을 받던 그때는 겨울과 같은 때였습니다. 그러면 그 겨울이란 무엇이냐 할 때, 겨울이란 생명 자체가 완전한 생명으로 남아지느냐 못 남아지느냐를 판가름하는 시련기간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어떤 하나의 씨에 있어서 과거의 시련이 크면 큰 만큼, 그 시련 속에 남아진 생명력을 가지고 봄날을 맞이할 수 있는 생명의 실체가 되어 있다면, 그 자체는 땅이 높아지고 하늘이 낮아지는 봄날을 맞이하여 따뜻한 태양볕을 받으면 새로운 싹이 되어 나올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그 싹이야말로 봄의 주인이 될 것이고, 여름의 주인이 될 것이고, 가을의 주인이 될 것입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그 씨를 심은 주인으로부터 사랑받는 실체가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우리 통일교회의 현시점은 어떤 때냐? 이 민족과 국가를 대신 해서 시련과정을 넘어가는 때입니다. 이것을 절기로 말하면 입춘을 향하여 겨울을 넘어서는 경계선에 도달한 때가 아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과거에 연단되었던 여러분 자체는 이제 얼마나 늠름하며, 새로운 봄을 향하여, 새로운 여름을 향하여, 새로운 가을을 향하여 뻗어나갈 수 있는 자체가 되어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될 것입니다.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생명력이 여러분의 마음 가운데에서부터 한 방향을 향하여 무한정 뻗어 나갈 수 있고, 자의도 '그렇다'고 할뿐만 아니라 타의의 공인을 받을 수 있는 주체적인 자체를 어떻게 지니느냐하는 것이 봄을 맞이하는 데 있어서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자세가 아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봄을 맞는 바른 자세

그럴 수 있는 내가 되어 있다면 그 봄은 나를 위해 찾아온 것이요, 그 봄의 가치를 찬양한다는 것은 외적인 봄 자체보다도 하나의 새로운 생명체를 중심삼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봄이 왔다 하더라도 상대적으로 기쁨을 자극시키고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꽃이 피고 향기가 풍기지 않는다면, 그 봄은 도리어 여름과 가을보다도 못하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봄을 봄답게 아름답게 단장하고 봄을 봄답게 자랑할 수 있는 꽃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꽃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향기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향기를 풍길 수 있는 꽃이 되어야 하고, 또 그런 꽃이 되려면 먼저 생명력을 지닌 나무가 되어야 합니다.

앞으로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역사적인 봄이 우리 앞에 기필코 올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여러분 자체를 두고 볼 때 여러분 자체는 하나의 산 생명나무가 되어 가지고, 꽃을 피우고 향기를 풍길 수 있는 자체가 되어 있느냐? 만일, 그럴 수 있는 내 자체가 되었다면 강한 지난 겨울을 비웃을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 섬으로 말미암아 역사적인 수난을 심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역사적인 수난을 탄식의 요소로 흘려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기쁨의 요소로, 영양으로 섭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주체적인 힘을 가진 입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역사를 심판하고 시대를 새로이 맞이할 수 있는 자세를 갖고 나타나야만 봄을 맞이할 수 있는 생명체를 지닌 사람이 되지 않겠느냐 이겁니다. 이것은 자연적인 결론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내가 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우리가 뜻을 중심삼고 나가는 데 있어서, 더우기 오래된 식구들은 지금은 과거지사를 논의할 때가 아니라, 내일을 논의하고 내일의 세계에서 자랑할 수 있는 나를 발견해야 할 때임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춥고 추웠던 겨울이 지나가고, 입춘까지 지나가고 봄날이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꽃피고 향기 풍기고 생명력을 자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지난날을 회상하면서 연단기나 수난기를 흠모하고 자랑하는 것보다는 내일의 소망을 바라보고 준비하는 자기 자체의 모습을 자랑하고, 내일을 맞이하기 위해 감동된 자기 자체의 권위를 자랑할 수 있는 자신이 되지 않고는 봄날을 맞을 수 있는 자체가 되었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과거의 시련과정, 그런 겨울과정에 남아지는 자체만으로는 안 되겠습니다. 겨울을 지나서 봄을 맞이할 수 있는 자체가 되어 가지고, 내일의 희망에 벅차서 인류가 잃어버린 소망의 한때를 우리의 때로 맞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몸 마음이 활기에 넘쳐 가지고 사방으로 뻗어 나갈 수 있는 실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실체가 되지 못하면 봄을 맞이할 수 있는 하나의 생명을 지닌 실체라고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봄이 오게 되면 꽃이 필 것이고, 꽃이 피게 되면 향기가 풍길 것입니다. 그러면 천천만 성도나 천군천사는 물론이요, 하나님께서도 화동할 수 있는 자유의 출발이 벌어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과 더불어 기쁨의 동산과 같은 봄날을 맞지 못한 비참한 탄식의 소리가 인류역사에 스며든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이런 비참한 역사과정에 있어서 오늘날 새로운 역사의 목적을 지향하는 어떤 종교의 무리를 중심삼고 하나님의 이상을 꽃 피게 할 수 있는 봄절기의 무리들을 어떻게 세울 것인가를 고심하면서 수난과 역경을 타개하고 수고해 나오시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그러한 하나님의 수고를 이어받아 제물이 되어 가면서 싸워나왔던 것이요, 제물이 되어 가면서 그 목적을 계승해 나온 것이 아니었겠느냐, 또 그 목적을 계승해 나온 기쁨의 한때는 봄이 아니겠느냐 이겁니다.

이처럼 수많은 인간들이 그 봄을 그리워했지만 맛보지 못했던 그 봄을 우리들이 비로소 체휼하고 체득하면서 살 수 있게 해야 되지 않겠느냐? 이런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이제부터 통일교회는 그런 세계로 가야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기 때문에 기필코 우리를 그 세계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수난과 시련의 진정한 의미

시련의 고비가 길면 길수록,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시련을 거쳤으면 그 국가와 민족의 해방과 더불어 새로운 해방의 기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해방된 그때의 환경에서 환영받는 것이 아니라 해방된 이후의 역사를 맞이하는 자리에서 환영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복귀역사를 완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 시조가 타락하던 그 한계선에서 기쁨을 느낄 것이 아니라 타락하지 않은 경지, 타락선을 넘은 경지에서 기쁨을 느껴야 하겠습니다. 영원한 소망 가운데서 기쁨을 느낄 수 있는, 미래의 전체를 대신한 세계와 연결될 수 있는 기쁨의 경지를 체득할 수 있는 내용과 바탕이 되어 있어야 봄을 맞을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우리는 인간 시조가 타락했던 그 한계선 이하의 기쁨이 아니라 그 이상의 기쁨을 느껴 보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그런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냐? 편안한 자리에서 그냥 그대로 사는 사람은 그런 기쁨을 느끼지 못합니다. 배가 고플 때는 맛없는 음식도 맛있게 느껴지고, 배가 부를 때는 맛있는 음식도 맛없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반대적인 현상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고통을 당하는 사람은 조그마한 위안에도 더할 수 없는 눈물어린 기쁨을 느낄 수 있지만, 기쁨 가운데 있는 사람은 몇십 배 몇백 배의 기쁨이 온다 해도 고통 가운데서 작은 기쁨을 느끼는 그 기쁨만큼의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입장이 된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난과 시련이 어떤 의미에서는 나쁜 것만이 아닙니다. 나쁜 반면에 좋은 것을 더 자극시키고, 그것을 더 보람 있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평범한 것도 절대적인 가치의 기준에 올려 놓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수난의 경지에서만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옥중생활 가운데나 기근이 극심한 자리에 서게 되면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런 때에는 콩 한 알, 혹은 밥 한 알도 억천만금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가치있는 것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시련과 수난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시련과 수난 가운데 생명의 가치를 세워 나가는 힘과 소망과 욕구를 가진 사람에게 있어서는 그 시련과 수난의 어려 움이 어려움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기쁨의 자극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미래의 기쁨뿐만 아니라 소망의 나라를 찾아갈 수 있는….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소망을 갖고 있다면 그 자리에서부터 기쁨의 천국을 성사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어려움을 극복하지 않고는 어떠한 소망도 성사되지 않기 때문에,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앞으로 다가올 시련무대를 극복할 수 있게끔 연단시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연단과정이 연단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기쁨의 자극을 보다 가치 있게 느낄 수 있는 하나의 선물로서 준 수난길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그 수난이 나쁜 것이 아니요, 어려움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우리의 행복의 터전이 되고, 내일의 행복을 상속받을 수 있는 요인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역사과정을 두고 보게 될 때에, 역사의 주인공이 누구냐 하면 그 시대에 있어서 수난의 고비를 극복해 나가면서 그 나라의 소망을 붙들고 싸워 나온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역사의 주인공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성현들은 어떤 사람들이냐? 천의를 받들어 이 인간 세상에서 긍정하는 것을 부정하고 세상의 방향을 바꾸어 소망의 세계를 향하여 자기의 일신을 버리고 그 이념과 더불어 환경의 시련을 극복해 나온 사람이 성현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 성현의 삶은 비참한 것이로되 그 내심에서 받던 모든 고충이 도리어 기쁨의 세계와 인연맺을 수 있는 동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두고 볼 때, 오늘날 통일교회가 지금까지 수난의 길을 걸어온 것은, 통일 교회를 망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내일의 봄날을 맞이할 수 있는, 세계에 보다 빛 될 수 있는 통일교회로 발전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봄을 맞이할 수 있는 사람

그러면 우리는 그 수난 가운데서 얼마나 기쁨을 느꼈느냐? 우리가 수난을 헤쳐 버리고 수난을 깨쳐 버릴 수 있는 자제력과 주체적인 역량을 얼마나 가지고 소망의 천국을 흠모하였느냐? 그것이 사망권, 혹은 시련권을 극복할 수 있는 동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동기를 지니고 하루하루의 생활 속에서 시련과 부딪쳤을 때 그것을 밟고 넘어서서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싸움을 해왔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봄을 맞이하는 때에는 희망에 벅찰 것입니다. 그는 잘래야 잘 수 없고 앉아 있을래야 앉아 있을 수 없는, 그야말로 활개를 펴고 온천지에 봄이 온다고 자랑하며 스스로 준비하고 스스로 다짐하는 모습이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모습이 오늘날 통일교회들 믿고 나오는 수많은 사람 가운데 얼마나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소위 오래 되었다는 식구 가운데서 그런 모습을 찾을 수 있겠느냐? 그런 사람이 없는 것이 슬픔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싸움을 해 나왔다면 이때야말로 가일층 전진과 가일층 발전의 자세를 갖추는 자체가 되어야 할 텐데도 불구하고, 그런 시련에 부딪치던 그 한때를 추구하고 그 한때를 회상하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현재의 입장을 환희의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내일의 소망의 봄동산을 향하여 줄기차게 뻗어 나갈 수 있는 늠름한 기백과 자세가 넘쳐흘러야 할 텐데도 불구하고, 그 자체에 슬픔이 가득차 있고 절망이 깃들어 있다면 하나님은 그런 자들을 중심삼고는 봄날을 맞이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비록 내일은 망한다 하더라도 그 얼굴과, 그 마음과, 그 결의는 희망에 벅찬. 새아침을 맞이하려는 환희에 용솟음치는 기분, 그 기분을 중심삼고 하나님도 감동할 수 있는 생활적인 기반이 여러분 자신들과 연결되어야할 때가 아니냐 하는 것을 느껴야 될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 서 가지고 비로소 환희의 봄날을 맞이했다고 온 우주 앞에 두 손을 들고 찬양할 수 있는 모습이 어떻게 되겠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아버지 앞에 엎드려 기도드리는 모습, 그런 자리에서 아버지의 손을 붙들고 늘어질 수 있는 모습, 그런 자리에서 이제는 아버지를 놓지 않고 아버지와 같이 가겠다고 결의하는 모습이 오늘 통일교회에 맺어져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내일의 봄을 향하여 전진하는 통일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수난길을 도피해 가고 수난길을 부정한 입장에 선 과거가 있었음을 생각하게 될 때, 이것을 다시 한번 긍정적인 한때로 소화하기 위해서 그런 한 기간을 다시 한 번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1970년과 1971년도를 넘어서면서 축복가정의 부인들을 전국에 배치한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렇게 배치한 것은 그것으로 어떤 결말을 짓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또한 이 나라 이 민족 앞에 비판받고 있는 통일교단의 역사적인 서러움을 다시 남겨주어 이들로 하여금 어떠한 탕감적인 조건을 제거시키는 제물을 삼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이들이 새로운 봄날을 맞이할 수 있는, 옛날을 회상하면서 극복할 수 없었던 과거를 다시 한 번 극복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제시해 주는 하늘의 사랑이요, 긍휼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일선에 나가 있는 부인들로부터 전해 오는 편지를 받아보는 남편이 있거든 그 편지는 일대의 경종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것은 과거에 전도 나갔던 아내로부터 받았던 편지가 아니요, 권고가 아닌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 편지는 겨울 기간이 지나고 새로운 봄이 왔다는 희소식이요, 새로운 나라를 향하여 나가라는 하나의 소명의 청첩장임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거기에 감사하면서 자기 자체를 정비하기 위해 급급해 하지 않으면 다가오는 미래의 통일교단의 봄을 상속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런 때를 맞이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와 같은 명령을 내려 준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보다 더 사랑한다는 증거인 동시에 마지막 때를 알리는 예고임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그 부인들로부터 전해 오는 소식을 통하여 봄이 오는 것을 들을 수 있는 때가 온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전해 주는 소식이 1960년도와는 다른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또 그들의 움직임도 그렇지만 현재 통일교회의 입장이 달라진 것도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안팎의 모든 내용을 헤아려 볼 때 그야말로 이제 우리 앞에는 봄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류를 감화시킬 수 있는 사랑의 모체가 되라

그러면 이 봄이 어디까지 영향을 미쳐야 되겠느냐? 이 남한 땅뿐만이 아니라 북한 땅까지 이 봄의 영향이 미치게 해야 되겠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려면 적도선 이하로 내려갔던 태양이 적도선 이상으로 올라와야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남한의 힘과 영향이 이북으로 미칠 수 있는 운동을 개시해야 되겠습니다.

그 운동을 개시함에 있어서 물질적인 힘도 있어야겠지만, 정신적인 힘이 보다 강해 가지고 이북을 능가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것을 어떻게 제시하느냐 하는 문제가 남북한을 통일시킬 수 있는 봄이 대한민국 삼천리 반도 위에 찾아올 수 있겠느냐 하는 문제를 결정짓는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런 문제를 생각하게 될 때, 이제 우리는 과거처럼 남한만을 위하여 기도할 때는 지나갔습니다. 우리는 북한 5도에 있는 천 삼백만 이상의 북한 동포들 붙들고 우리의 힘과 역량으로 사랑하여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봄의 깃발을 힘차게 붙들어 얼어붙은 북한 땅을 녹여내고 그들이 봄을 맞이할 수 있게 주체적인 역량을 발휘해야 하겠습니다. 민족적인 주체뿐만 아니라 상대적인 북한 땅까지 합하고, 나아가 아시아의 주체의 모습을 갖추어서 일본과 중국을 중심삼고 아시아 전역에 봄을 맞게 해야 할 주체국가로서의 사명을 수행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대한민국의 외적인 무대에서부터 할 것이 아니라 내적인 정신적인 무대에서부터 해야 합니다. 여기에 강한 생명력을 지니고 무한히 뻗어 나갈 수 있는 하늘의 봄을 맞이할 수 있다면 틀림없이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은 성사될 것입니다.

우리 통일교회에서는 남한 땅을 중심삼고 극복해야 했던 시련과정이 있었지만, 이제부터는 북한까지도 봄날을 맞게 하기 위한 시련과정이 있는 것입니다. 북한 땅은 지금까지 겨울인데, 지금은 겨울과 봄이 맞서는 때입니다. 겨울과 겨울이 맞서는 때가 아니라 겨울과 봄이 맞서는 때이기 때문에 봄이 오면 올수록 겨울은 물러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봄이 무르익으면 익을수록 뜨거운 태양의 열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자체에 있어서도 통일교단을 중심삼고 그 내부에 결속된 힘은 인류를 감화시키고도 남을 수 있는 사랑의 모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거보다 더 크고 많은 시련이 부딪쳐 오더라도 그 시련을 극복하고 남을 수 있는 입장이 되어야 하며, 거기에 내적인 문제까지 영향받지 않아야 되겠습니다. 그 봄이 찾아오면 그 경계선에서는 침범 받을 수 있고 상충이 벌어질지 모르지만 내적인 자리에서는 영향을 받지 않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내적인 자리에서는 봄은 봄대로 남아질 것이고, 외적인 자리에서는 여름을 맞이할 수 있고, 가을을 맞이할 수 있는 입장에 서지만, 봄은 점점 더 확대되어 세계를 점령해 나가는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그럴 수 있는 하나의 주체 국가, 그럴 수 있는 하나의 주체적인 중심이 결정된다면 그 중심을 통해 인류역사과정에 왔다 갔던 수많은 선조들이 환희의 봄으로써 맞이할 것입니다.

모든 섭리의 뜻을 중심삼고 수천년, 혹은 수십만년 동안 수고를 해 나오신 하나님도 말할 수 없는 영광의 한날로서 그날을 찬양하며 맞이할 것입니다. 그 봄을 하나님은 얼마나 바랄 것이며, 영계에 있는 선지선열들은 얼마나 바랄 것이며, 또 통일교회 교인들은 얼마나 바랄 것이며, 북한에 있는 수많은 동포들은 얼마나 바랄 것이며, 세계 인류는 얼마나 바랄 것이냐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이 새로운 봄날의 운동을 세계 도처에 전개시킴으로써 지구성 전체가 꽃동산으로 화하게 하여 어디 가든지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자유 천국이 나타나게 해야 되겠습니다. 그런 봄을 이 지구성이 맞지 못하고는 소망의 여름과 가을은 물론, 우리가 소원 하는 본연의 때는, 결실의 문명시대는 오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온 봄을 세계에까지 연결시키자

새로운 봄을 제시하고, 새로운 봄을 출발시켜 그것을 성사시켜야 할 기원의 자리에 서 있는 우리의 책임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여러분 자체는 미래에 다가올 역사적인 운세에 밀려가는 사람이 될 것이 아니라 앞으로 다가올 역사적인 희망의 운세를 맡아 그것을 세계 끝까지 밀어낼 수 있는 주체적인 역량을 발휘하는 자신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여러분이 되지 못하고는 오늘의 생활권내에서 하나님이 환영하고, 온 세계가 환영하고, 온 인류가 환영할 수 있는 봄을 맞이할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제야말로 그런 경계선을 넘어 남한에 봄이 찾아오는 때가 다가온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 봄을 이북에까지, 이 봄을 아시아에까지, 이 봄을 세계에까지 연결시키고, 이 봄에 반대되는 일체를 부정해서 그것을 찾을래야 찾을 수 없는 때가 될 때, 그때야말로 하나님께서 소망하는 지상의 천국, 인류가 소망하는 지상의 천국이 이루어지지 않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싸움과 시련의 도상에 있지만 내 마음 가운데 봄이 있고, 내 마음 가운데 여름이 있고, 내 마음 가운데 가을이 있어서 그것이 상대적인 때로 나타나게 될 때는 내가 봄의 주체가 된 것이요, 여름의 주체가 될 것이요, 가을의 주체가 될 것입니다. 겨울이 찾아오는 한이 있더라도 생명력을 가지고 그 겨울을 무난히 넘고도 남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 겨울이야말로 참된 생명을 보호하고 그 겨울이야말로 참된 생명을 생명으로 지탱시키는 계절이라는 것입니다. 생명을 위협하기 위한 겨울이 아니요, 생명을 분립시키기 위한 겨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오히려 확실히 결속시키고, 그 존재를 완전히 보호하는 겨울은 될는지 모르지 만,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겨울은 못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겨울이 오더라도 뚫고 나갈 수 있는 자기 자체의 역량, 생명력을 지니지 않고는 아무리 봄을 맞고, 여름을 맞고, 가을을 맞는다 하더라도 해마다 새로운 봄날을 맞이할 수 있는 씨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 봄을 맞기 위한 시련과 그 극복의 노정이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그것을 뚫고 나갈 수 있는 하나의 생명체임에 틀림 없다는 자각과 스스로의 결의를 갖는 여러분 자신이 되지 않고서는 온 우주가 소망하는 환희의 봄을 맞이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기 도

​추운 겨울이 지나가면 봄이 찾아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봄이 온다는 것을 예감할 수 있는 생명의 민감한 촉각을 가진 자체가 되지 않으면 봄이 다가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을 우리는 자연법칙을 통해서 아는 바입니다.

여기에 모인 통일의 자녀들은 멀리멀리 남으로 갔던 태양이 북으로 돌아오게 될 때, 기쁨으로 봄의 출발을 맞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인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오늘날까지 우리 통일교회는 수십년의 역사를, 시련과 승리의 과정을 거쳐왔습니다. 그 과정을 거쳐오면서 망할 수밖에 없었던 저희들이 망하지 않고 지루했던 겨울을 지나 새로운 소망의 봄을 맞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봄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면 느낄수록 그 봄이 남한 땅의 봄만이 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것을 느껴야 겠습니다. 우리는 이 봄에 공고한 생명력을 지니고, 새로운 빛 새로운 광명과 같은 태양의 힘을 지닐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무한한 열과 무한한 빛과 무한한 생명의 인연이 깃들수 있는 주체적인 터전이 점점 공고히 되어 감에 따라 봄의 터전이 확정될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그 누구도 움직일 수 없는 내적 기준을 갖춘 터전이 됨으로 말미암아 삼천리반도 북한 땅 전역에까지 새로운 봄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저희들이 알아야 되겠사옵니다.

이제 저희들이 가는 데 있어서 북한 땅, 우리가 극복해야 할, 또다시 봄의 힘과 겨울의 힘이 맞서는 곳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사옵니다.

봄은 나약한 것 같지만 겨울을 극복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오늘날 보잘것없는 통일교회가 세계의 원수라고 하는 공산당들과 대결하여 그들을 녹여 낼 수 있겠느냐 하는 문제를 생각하게 되옵니다. 저희는 지극히 작고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봄의 주체지만 무지무지한 겨울과 같은 이북을 몰아내고 남을 수 있다는 사실을 저희들은 믿어야 되겠사옵니다.

찾아오는 하늘의 태양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자기 위치를 상실하지 말고 굳건히 지키며, 어떠한 환경에서도 봄을 봄답게 그 환경을 소화시킬 수 있게끔 역량을 발휘해야 된다는 것을 각자가 느끼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아시아 일각에서부터 전 아시아로, 나아가 온 세계에 미쳐질 수 있는 봄의 동산을 이루는 것이 아버지께서 바라시는 소원이요, 인류가 바라는 소원이요, 영계에 있는 선조들의 소원인 것을 생각할 때, 저희들은 그것을 이루어 드리는 기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스스로 느껴야 되겠사옵니다.

오늘 여기에 모인 당신의 아들딸들 이제 심각해야 되겠습니다. 어젯날을 자랑하는 자들은 흘러가 버리기 쉬운 것입니다. 오늘을 자랑하기에 모든 것을 잊어버리며 내일에 대한 욕망이 불타서 스스로 부정하는 자신이 되지 않고는 흘러가 버린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이런 경계선에 서 있는 저희들은 이자택일(二者擇一)하여 아버지만을 위하여 전진하고 아버지만을 위하여 봄을 맞을 수 있는 스스로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내적 외적으로 준비하는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다가오는 외적인 환경을 바라볼 때, 그것은 틀림없이 우리 통일교단에게는 봄입니다. 남한에 봄이 오면, 그 봄을 아시아와 연결시킬 수 있는 것이요, 민주세계를 휩쓸어 아버지의 뜻 앞에 결속시킬 수 있는 것이요, 공산세계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이 땅 위의 새로운 문화 창건에 없어서는 안 될 봄의 기수의 사명을 해야 한다는 것이 통일사상인 것을 저희들이 알고 있사옵니다.

이 길을 아버지께서 세우셨고, 아버지께서 가려 나오신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아버지께서 아직까지 낙심하지 않고 굳건히 서 계시는 한 저희들도 굳건히 서 있어야 되겠사옵니다. 아버지께서 이 세계를 향하여 가일보 전진하는 한 저희들도 전진해야 되겠사옵니다.

어떠한 힘이 저희 자체를 부정시킬 수 없다는 결의와 더불어 우리가 부정시킬 수 있는 자체를 발견하면서, 스스로의 역량을 외적으로 확대시켜 나가야 할 자체인 것을 자인할 수 있어야 되겠사옵니다. 그런 저희를로서 새로운 생명을 가진 자들이 되면 생명은 자라는 것이옵니다. 그 생명이 자라기 위해서 어려운 환경에서도 모든 영양소를 흡수하는 것이옵니다.

약자는 쓰러져 가더라도, 신념을 가진 사람들은 반대받고 부딪치는 시련의 환경에서도 생명의 영양소를 흡수하고 소화함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침식당하지 않는 한 길을 닦아 그 길을 하늘의 길로 남기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저희들이 남한 땅, 어떤 곳에 처하더라도 영양소를 섭취하지 못하는 그런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어떤 자리에 서더라도 지면 안 된다는 결의를 가질 때, 봄에 속한 자들은 반드시 승리하고 만다는 신념을 가지게 하옵시고, 그런 신념으로 나가 싸우는 딸들을 지켜 주시옵소서.

통일의 무리들 또한 그런 벅찬 마음을 가지고 자기들 앞에 허락된 한때의 봄을 잃어버리지 않는, 봄의 주인으로서 당당한 자세를 갖출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옵니다.

오늘은 거룩한 날이오니 모이는 곳곳마다 당신의 자비와 사랑으로 같이 하여 주시옵기를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니다. 아멘.

[기 도]

사랑하는 아버님 ! 오늘은 1971년 4월 11일, 음력으로는 3월 16일, 이달 들어 두번째 맞는 안식일이옵니다. 이 아침 당신이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흘러가는 세월 가운데 한 생명으로서 하나님을 모시고 뜻있는 생애노정을 걸어간다는 것은 무한한 가치의 인생길이 되는 것을 저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어제와 오늘이 다르듯이 오늘과 내일도 달라야 되겠습니다. 흘러가는 그날들이 인생행로에 있어서 보람된 날로 맞아지는 곳에는, 인간으로서 소망하는 일들이 시작된다는 것을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뜻의 노정에 있어서 새로운 날들을 맞이할수록 당신이 소망하시는 뜻이 이 땅 위에 넓혀지기를 얼마나 얼마나 고대하고 계시옵니까? 땅 위에 있는 자녀들도 그럴 수 있는 한날을 맞이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수난길을 극복하면서 나왔사옵니까? 아버지, 여기에 찾아와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날을 맞이하여 지나온 십년 세월을 다시 한 번 돌이켜보게 될 때, 때로는 아버지 앞에 염려를 남긴 슬픔의 날도 있었사옵니다. 그렇지만 아버님이 참아 나오신 것을 아옵니다.

아버님이 저희 교단을 이끌어 나오시기에 얼마나 수고하셨다는 것도 알고 있사옵고, 이 나라 이 민족을 보호하시기 위해 얼마나 수고하셨다는 것도 알고 있사옵니다. 보잘것없는 저희 가정을 아버지께서 지키시고, 오늘까지 당신의 은사 가운데 보호하여 주신 것을 감사드리옵니다.

금년에 있어서 아버님이 기뻐하실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많았고, 아버님이 슬퍼하실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많았는가 묻게 될 때, 기뻐하실 일보다 슬퍼하실 일이 많았던 것을 생각하게 되옵니다. 다시 한 번 아버지 앞에 용서를 빌어야 되겠습니다. 승리의 한날을 찾아오시는 당신의 발걸음이 얼마나 조심스러웠는가를 생각하게 될 때, 뜻의 길을 조심스럽게 따라 나오지 못한 자녀들이 여기에 모여 당신 앞에 부복하였사오니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 70년대를 맞이하면서 당신의 나라와 당신의 뜻과 당신이 소원하시는 모든 목적이 보잘것없는 인간들을 통하여 이루어져야 된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그 인간들이 바로 여기 모여 당신의 자녀들이라고 하는 저희들인 것을 아옵니다. 당신이 소원하시는 그 뜻 앞에는 부족한 모습이로되 저희들 자신이 그 부족함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마음으로 부족함을 느끼면서 겸손하고 스스로 희생하여 당신 앞에 고임돌이라도 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갖고 있사오니, 아버지, 긍휼히 보시어서 자랑삼아 주시옵소서. 이들을 세우시어서 축복하여 주신 그 축복을 더욱더 빛낼 수 있게 하여 주옵길,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아침 남한 각지에서 이곳을 바라보며 당신의 은사의 날을 맞아 감사 하는 자들이 있거든 복을 주시옵소서. 섭리의 한때와 남아진 역사노정에 있어서 가야 할 길을 다짐하고, 저희 가정과 교회와 나라를 위하여 축복 하는 자들이 있거든 만복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영계에 있는 수많은 영인들과 저희 조상들도 오늘날 이와 같은 때를 위해서 수고하고, 해방의 천국의 한날이 이 땅 위에 오기를 고대하고 있는 것을 저희들이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님, 수고의 노정을 다짐하지 않고는 이러한 날을 맞이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여기에 모인 당신의 자녀들, 부족한 무리를 강하게 하여 주시옵고, 부족한 모습이 아버지 앞에 자랑스런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여, 이 시간 저희들의 몸과 마음을 온전히 장중에 쥐시어서 당신이 찾고 싶었던 아들의 모습을 찾은 듯이 기뻐하여 주시옵고, 저희들에게 분부하시고 싶은 것을 은은한 가운데 분부하시옵소서. 저희에게 새로운 사명을 분부하시옵소서. 이 70년대에 있어서 보람있는 인생의 한 전성기를 이룰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셔야 겠습니다. 축복받은 가정들 위에 복을 베풀어 주시옵고, 더우기 일선에 나가 있는 어린 딸들을, 아버지, 지켜 주시옵소서. 그들의 모든 사정을 아시오니 복을 내려 주시옵소서.

아직까지 저희들이 아버지 앞에 행하여야 할 일들이 많은 것을 생각할 때, 저희들이 수행해야 할 책임이 얼마나 지중한 것인가를 느끼옵니다. 당신이 이 재단 위에 같이하여 주신 것을 감사하오며 계속 같이하여 주시기를 바라고 있사옵니다.

아버지 앞에 빚지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생애노정에 있어서 온갖 힘을 다하더라도 아버지 앞에 빚지지 않는 당신의 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고, 남모르는 가운데 여러 가지 고충을 느끼면서 염려하는 남편들과 자식들에게, 아버지, 복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1971년도에 있어서 저희의 있는 정성을 다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아버님이여, 불쌍한 이 민족을 지켜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고 원하옵니다. 아버님이 온전히 지키시어서 당신의 뜻과 더불어 이 민족이 살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남북이 분립된 책임이 누구에게 있느냐고 묻게 될 때, 이 백성에게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백성을 중심삼은 수많은 교단에게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교단들이 졌던 책임을 저희들이 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저희들은 자신하면서 내일의 개척자의 사명을 보람있게 다짐해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선구자의 행각노정에 있어서 스스로 낙심하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 되겠사오니, 아버님, 권면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남북이 통일되는 그날, 수많은 민족들이 찬양을 하고 당신이 기뻐하실 수 있는 그날이 어서 와야 되겠사옵니다. 삼천리 반도에 당신의 해원성사가 이루어지는 승리의 천국을 건설할 수 있는 날이 와야만 되겠습니다. 악이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당신을 위하는 효성지자가 남아 있고, 충성 지자가 남아 있는 곳에는 악이 침범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여기 모인 당신의 자녀들, 효성이 미달하고 충성이 미달한 것을 한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여러 사람이로되 한 몸과 같이 되어야겠고, 한 마음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뜻을 중심삼고 하나되는 날에는 흥하는 것이요, 분립 되는 날에는 망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통일이라는 그 이름이 지금까지 수난의 이름으로 불려왔지만 이제부터는 영광의 이름으로 남아져야 되겠습니다. 영광을 향하여 가야 할 길이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오늘날 저희 자신들이 통일의 기반을 확보해 놓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막중한 사명을 느껴야 되겠습니다.

이 교회가 하나되고, 남한 각지에 널려 있는 당신의 자녀들이 하나되고, 세계에 널려 있는 당신의 자녀들이 하나되어 최후의 교단으로서 통일 교회가 이 시대 앞에, 이 세계 앞에, 역사 앞에 부끄러움 없이 책임을 다할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이제 71년도 이후의 70년대를 맡아 주시옵소서. 80년대를 맞이하는 그때에는 저희들이 아버지 앞에 감사할 수 있는 그날이 되고, 그때 가서 지난날들을 회고할 때, 그야말로 감사할 수 있는 생애를 그릴 수 있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보람 속에 당신의 복을 받고 선한 자녀로서 부족함이 없는 아들딸들로 세워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니다.

이 4월에는 부활절을 맞게 되는 달인 것을 알고 있사오니, 모든 일들이 아버지의 영광 가운데 있게 하시고, 이 땅 위에 새로운 봄이 찾아들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니다. 모든 말씀 참부모의 성호 받들어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말 씀

오늘은 4윌 11일로서 4월 들어 두번째 맞이하는 주일입니다. 일반 교회에서는 부활절로 지키는 날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해결해야 할 복귀의 길

우리 타락한 인류에게 있어서 복귀, 즉 다시 돌아간다는 희망이 없다면 그야말로 절망이요, 그야말로 인간으로서는 소망의 세계를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타락은 인간에게 있어서 그 이상 없는 슬픔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배후에서 이 슬픔의 길을 해소해 주기 위해 우리의 길을 엮어 나오시면서 잃어버리지 않은, 쫓겨나지 않은 선한 본연의 자리를 더듬으며 이끌어 주고 계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우리 인간들은 감사를 드려야 되겠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인류를 빠른 시일내에 완전하게 구원하고 싶으실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인류 구원을 빠른 시일안에 성사시키고 싶겠지만 타락이라는 것이 심정 문제, 사랑 문제로 저끄러진 일이기 때문에, 외적인 문제만 가지고는 복귀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반드시 사랑을 중심삼고 인연맺지 않고는 안 되는 것이 복귀의 길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 사랑이라는 것은 부모의 사랑과 자녀의 사랑과 부부의 사랑을 겸한 사랑이어야 됩니다.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슬픈 일이 있다면 그것은 부모의 사랑을 잃고, 부부의 사랑을 잃고, 자녀의 사랑을 잃는 일입니다.

그 이상 슬픈 일이 없는 것입니다. 원통한 일이 있다면 거기에 있을 것이요, 비참한 일이 있다면 그 자리에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를 두고 볼 때, 인간이 이렇듯 가장 귀한 사랑을 잃어버림과 동시에 하나님도 우리 인간과 더불어 가장 귀한 사랑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타락은 인간 개체에 한정된 타락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 까지도 비참한 자리에 떨어지게 하였고, 모든 피조세계에 그 영향을 미치게 하였습니다. 그 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정에 못을 박게 됐고, 인류 역시 지루한 복귀노정의 수난의 십자가를 지고 형극의 노정을 가게 된것입니다. 그러한 것이 섭리의 때를 따라 지금까지 계속되어 나오고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복귀노정이라는 것은 개인을 복귀하고 나서 가정을 복귀해야 되고, 가정을 복귀하고 나서 종족, 민족, 국가, 세계를 복귀해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개인에게서 출발하여 세계 끝까지 혹은, 역사의 기원에서 출발하여 역사의 종말까지 이 복귀의 운세는 계속 남아져 있는 것입니다.

이미 과거에 이 땅에 왔다 간 선조들도 역시 타락의 후손권내에 있기 때문에 복귀의 길을 가야 할 운명에 놓여 있는 것이요, 현재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30억 인류도 역시 타락권내에 속해 있기 때문에 복귀의 운명길을 해결해야 할 입장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우리 시대를 넘어서 앞으로 찾아올 후손에게 있어서도 이 타락권을 격파하지 못하고, 청산짓지 못하게 될 때는 복귀의 길은 남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 길이 되풀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개인만이 승리해 가지고는 그 길이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 개인의 승리는 가정의 승리로 연결되어야 되고, 가정의 승리는 종족의 승리로 연결되어야 되고, 종족의 승리는 민족의 승리로, 민족의 승리는 국가의 승리로, 국가의 승리는 세계의 승리로, 세계의 승리는 하나님의 승리로 연결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승리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은 해방의 천국이 벌어져야만 모든 것이 끝나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사랑으로 인하여 맺혀진 복귀의 근원을 사랑으로 해결 짓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통해 가지고 이러한 길이 개척 되고, 이러한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인간관계에 있어서의 사랑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과 인간끼리의 사랑도 아니고, 인간과 어떤 특정한 영들이 있으면 그 영들과의 사랑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타락의 동기가 무엇이냐? 인간관계의 분립이 동기가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분립된 것이 타락의 동기인 것입니다. 본래 사랑은 인간으로 말미암아 출발해야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출발해야 했던 것입니다. 타락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사랑의 인연이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 말미암아 사랑의 인연이 출발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타락은 인간을 위주한 데서 출발했습니다.

인간을 위주한 이런 입장에서 본연의 입장으로 되돌아가기 위해서는 인간 위주한 사랑을 주장하여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자리에서는 되돌아갈 길이 없는 것입니다. 인간을 위주해 가지고 사랑하고, 인간을 위주해서 사랑을 제시하는 그런 자리는 복귀의 행로에 있어서 한 기업이 되고, 터전을 넓힐 수 있는 내적인 인연은 될는지 모르지만, 이것을 극복하고 다시 새로운 하나님의 심정의 세계와는 관계를 맺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타락의 원칙을 두고 볼 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맨 처음 이루어진 사랑이 무엇이냐?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는 부자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기쁨의 자리, 슬픔의 자리

하나님이 누구시냐? 하나님은 막연한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의 감각 중에 최고의 감각으로 느낄 수 있는 분이요, 우리의 의식기관, 혹은 우리의 모든 감각기관을 통하여 느낄 수 있는 전체의 주체자요, 중심적인 분입니다. 그를 대함으로 말미암아 만족이 시작되는 것이요, 행복의 요인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 외의 일체는 우리 인간 앞에 행복의 요인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자식 앞에는 부모가 전체의 기쁨을 대신하고 행복의 중심이 될 수 있는 것이요, 더 나아가서는 생명의 중심이 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 앞에 하나님이 그래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의 중심은 물론이요, 생명의 중심도 물론이요, 소망의 중심도 하나님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거쳐 나가고 움직이고 변하고 생활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으로만 느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체의 행동이 인간의 행동으로 상속되어야 하고 일체의 심정도 인간의 심정으로 상속되어야 합니다. 그 상속된 심정으로 말미암아 자란 남성과 여성이 합해서 부부의 정을 이루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인류의 선조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길리움을 받아 타락으로 인한 슬픔의 한날을 맞지 않고, 기쁨의 자리에서 성숙되어 가지고 소망의 한날을 맞이하여 하나님을 중심삼은 사랑권내에서 축복을 받았더라면, 다시 말해서 결혼식을 올렸더라면 그 부부는 악한 부부가 되는 것이 아니라 틀림없이 선한 부부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셨을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 기쁨은 생리적인 기쁨이 아니라 사랑을 중심삼은 환희 가운데 맞이하는 기쁨이었을 것이며, 그날은 우리 인류시조에게 있어서는 행복된 출발의 날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날이야말로 인간에게 있어서는 제일 기쁜 웃음을 웃을 수 있었을 날이요, 제일 기뻐할 수 있는 날이요, 제일 자랑할 수 있는 날이었을 것입니다. 온 정성을 다 들여 지어서 적자와 같이 키워 나오던 그들이 기뻐했을 그날은 부모와 같은 입장이 있는 하나님께도 기쁜 날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날은 인간의 기쁜 날임과 동시에 하나님의 기쁜 날이요, 그 기쁨 가운데 이루어지는 부부의 사랑은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 있는 사랑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쁨으로 말미암아 연결되고, 기쁨으로 말미암아 화합하고, 기쁨으로 말미암아 출발을 보아야 할 인류의 조상이 도리어 슬픔과 더불어 저주의 한 기원을 마련한 것이 타락인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품에서 떠난 것도 물론 슬픔이로되 그보다도 영원한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의 사랑권내에서 추방을 받았다는 사실이 더욱 슬픈 일인 것입니다. 이처럼 어떠한 개인의 노력으로도 되찾을 수 없는 슬프고도 원통한 타락권내에 떨어진 것이 인류의 비극의 동기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또 그러한 부모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 오늘날 인류의 비참상인 것을 우리들은 생각해 보아야 됩니다. 그러한 부부로서 엮어진 인연 가운데서 태어난 아들딸을 대하게 될 때, 기쁨의 얼굴로서 대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소망과는 상극된 입장에서 타락의 한을 품고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을 느끼는 입장에서 대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태어난 것이 아담 가정의 맏아들인 가인이요, 둘째 아들 아벨입니다. 아벨은 가인을 극복할 수 있어야 되고, 또 부모의 어려움까지 극복하지 않고서는 기쁨을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자리가 얼마나 비참한 자리인가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본연의 세계와 한의 세계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으로부터 부부의 인연, 자녀의 인연까지 흘러 나오는 이런 가정적 기틀이 마련되었다면 거기에서 이루어진 그 사랑이야말로 하나님의 사랑이자 부부의 사랑이요, 부부의 사랑이자 자녀의 사랑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부부의 사랑, 자녀의 사랑이 하나된 가운데서 화합하는 그 전체는 그야말로 하나님도 기뻐하고, 인류의 조상도 기뻐하고, 인류의 후손도 기뻐할 수 있는 행복스러운 자리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 자리를 하나님이 얼마나 고대했겠으며, 우리 인류시조가 얼마나 소원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타락으로 말미암아 그러한 자리는 아직까지 우리 인간 앞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 자리는 위로는 하나님이 계시고 아래로는 인류가 있어서, 하나님과 아담과 그의 아들까지 삼대(三代)에 걸친 종적인 역사노정이 하나님의 사랑권내에 안길 수 있는 터전이었습니다. 그것은 말할 수 없는 기쁨의 터전일 것이고, 하나님의 사랑의 터전일 것입니다.

아담 해와는 인류의 조상인 만큼 처음으로 부모된 자리에서 자식을 낳자마자 자랑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자랑할 상대가 누가 있느냐 할 때, 물론 아담 해와 부부끼리 서로 자랑도 하겠지만, 아담 해와를 창조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종들로 지어 주신 천사세계에 자랑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누구에게 자랑하고 싶었겠느냐? 하나님 앞에 자랑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자식을 낳았을 때 그 자식이 훌륭한 가계를 이어받은 자식이요, 혈통적으로 보나 인격적으로 보나 훌륭한 자질을 이어받은 그런 자식이라면 해와는 얼마나 행복했겠습니까? 그 아기가 귀여우면 귀여울수록 그 귀여움은 자기 일신만이 느끼는 귀여움이 아니라 하나님과 아담과 미래의 소망의 세계에까지 자랑하고 싶은 귀여움인 것입니다. 그런 장하고 놀라운 사랑이 맺힐 것인데도 불구하고 해와는 사랑하는 자식을 품고 하나님 앞에 면목없어 얼굴을 숙여야 할 입장이 되었습니다. 자기의 처신을 잘 갖추어 가지고 늠름한 자세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위축된 입장에서 스스로 땅을 바라보면서 자기 자체를 자탄하지 않으면 안 될 탄식의 요인이 그 마음속에 용솟음쳤다는 사실, 이것은 지극히 비참한 내용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가 엮어져 가지고 횡적으로 뻗어나와 민족을 형성하고, 국가를 형성하고, 세계를 형성하여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권이 이루어진 것을 알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 되돌아가야 됩니다. 되돌아 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되돌아가는 데는 그냥 되돌아갈 수 없습니다. 나쁜 조상을 가진 후손은 그 조상들이 이루어 놓은 선한 업적이나 악한 업적을 넘어서 되돌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계승해 가지고 되돌아가야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역사시대를 거쳐 30억 인류가 살고 있는 오늘날의 이 지구성 자체가 타락세계입니다. 여기에는 인류의 한이 있습니다. 전세계 30억 인류의 한이 있는 것입니다. 민족과 국가를 초월한 인류의 한이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인류의 한이 깃들어 있을 뿐만아니라 여기에는 수많은 국가와 민족과 씨족과 가정과 개인의 한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인류의 한에 한가닥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크나큰 인류의 한의 덩치에 하나의 끈으로 연결되어 한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노력을 하고 아무리 몸부림을 친다 하더라도 그 한의 끈을 끊고, 그 한을 극복하고 나섰다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한 입장에 처해 있는 인류 가운데 한 존재가 여러분이요, 오늘날 우리의 인생인 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그 한 줄기의 한의 길을 나 한 개체에서 끊었다고 해서 끊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한의 길을 나에게서 끊었다고 해도 또 가정에 달려 있는 것이요, 가정에서 끊었다고 해도 종족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종족에서 끊었다 하더라도 민족에 달려 있고, 민족에서 끊었다 하더라도 전인류에게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류가 공히 운명을 지고 비참한 복귀의 행로를 해결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할 개인이요, 가정이요, 종족이요, 민족이요, 국가요, 세계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종교와 철학이 해결해야 할 궁극의 문제

그러면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는 무엇을 요구하여야 할 것이냐? 우선 자기를 위한 요구는 생각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을 어떻게 극복하느냐? 인류의 한(恨)권내에서 초월적인 자아를 어떻게 발견할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를 위해 몸부림을 쳐 나온 것이 지금까지의 역사요, 철학이요, 종교가 분담해 온 사명이었습니다.

종교가 바라고, 철학이 바라고, 모든 진리가 탐구하여야 할 최후의 궁극적인 기점이 어디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지금까지 막연한 것입니다. 철학은 지금까지 인생의 문제를 중심삼고 그 존재의 가치와 기원을 찾기 위해서 몸부림쳐 나왔지만, 그 존재를 발견했을 때에는 어떻게 될 것이냐? 그 존재를 발견하는 자체보다도 발견하고 난 후에 수난의 길, 곤경의 길, 역경의 길에 부딪치게 될 때는 더 큰 문제가 되지 않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인간이 타락으로 말미암아 한의 권내에 사무친 일이 있었기 때문에 내가 이렇다 하는 기준을 세웠다 하더라도 그 후에 첩첩이 가로놓이고 엇갈려져 있는 것을 해결해야 할 중차대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자기 일생의 문제보다도 더 큰 우주에, 혹은 인류를 중심삼은 사랑입니다. 인간끼리의 사랑이 아니라 절대자 하나님과 상관되어 있는 사랑의 문제가 부딪혀 온다 할 때 그 해결의 기준을 어디에 두어야 될 것이냐 하는 문제를 놓고 볼 때, 인간 자체를 중심삼고 해결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아니겠느냐?

하나님은 인간에게 더 큰 책임을 지우게 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금후에 인류에게 찾아올 더 비참한 수난의 길을 생각하고 철학이나 종교를 세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자기 인생 자체의 생명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하나님은 아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먼저 어려운 문제를 책임져 나오시고 인간들이 최후에 찾아야 할 사랑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인류역사와 더불어 관계를 맺고 나오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종교를 세워서 하나님의 사랑을 제시해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많아서 그것을 자랑할 수 있다 해도 그 사랑 앞에 있어서의 자랑에는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자랑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가진 것은 육신과 더불어 사라질 것입니다. 그렇지만 인격을 중심삼고 볼 때에 세계적인 가치의 내용을 지닌 사람이 있다면, 그의 일생이 다하여 돌아간다 하더라도 그의 인격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남아지는 것입니다.

인격 가운데서도 보람있는 인격을 지탱시키고, 가치있는 인격의 내용을 연결시킬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이것은 사랑 문제에 귀결됩니다. 동포를 얼마나 사랑했느냐, 민족을 얼마나 사랑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민족을 위해서 살았다고 내세울 수 있는 사람이라 할 때, 위해서 살았다는 그 배후의 구체적인 내용이 애국자의 기준을 결정짓는 것입니다.

효자 중의 효자는 어떠한 효자냐? 대한민국적인 효자냐? 대한민국의 역사에 없었던 그런 효자가 있다고 합시다. 그 역사적인 효자는 대한민국에서는 제일이지만 세계무대에 연결시켜 볼 때, 그가 효자 중의 효자라는 것을 무엇으로 측정할 수 있겠느냐? 인기가 있고, 혹은 부모의 외적인 모든 사연에 응할 수 있는 입장이 있다고 할지라도 효자가 아닙니다. 심정문제에 귀일점을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평탄한 자리에서 부모에게 효도한 그런 효자였느냐, 아니면 모순되고 상충된 종의 자리에서 부모에게 효도한 효자였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인간으로서는 가히 측량할 수 없는 역경 속에서 인간의 희생적인 심정의 내용을 깊이 느끼면 느낄수록 세계적인 효자가 되는 것입니다.

수난을 극복할 수 있는 것

우주 가운데 슬픔만이 남아진다고 하면 인류에게 소망이니 희망이니 하는 것은 다 망상일 것입니다. 이 우주는 절망으로서 끝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희망은 전부 다 절망 속에 무너져 버릴 것입니다. 그런 희망은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행복의 요인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주의 슬픔도 지나가고 절망도 다 지나갔을 때 남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인간들이 원하는 경제문제냐, 아니면 우주적인 인격이냐? 사람이면 사람,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인격을 연결하고 있는 정서적인 면이 문제입니다.

슬픔을 극복할 수 있는 기쁨이 있다고 할 때, 그 기쁨은 무엇으로 말미암아 기쁨이 되느냐? 절망을 해결해 줄 수 있는 희망이 있다면 그 희망은 무엇으로 연결되느냐? 그것은 돈도 아니요, 사람도 아닙니다. 사람이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그들 각자가 지고 오던 수난을 넘었다 하는 보람을 느끼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인격이 문제가 아니라 그 인격 형성의 밑바탕이 되는 정서가 문제되는 것입니다.

자식을 잃어버린 부모는 수십년의 수난의 행각을 걸었다 하더라도 그 자식을 찾고 나면 기쁨만이 남아지는 것입니다. 어느때엔가 꼭 자식을 찾고 평안함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고 갈 때, 어떠한 수난의 길도 그 부모의 심정을 막아낼 수 없는 것입니다.

남편을 찾고 있는 아내의 걸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난의 길이 아무리 험하다 하더라도 남편을 만난 이후에 있을 정서적인 면을 아는 그 아내 앞에는 수난의 길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자기 생명보다도 더 가치있는 사랑이 있다는 것을 알고 가는 아내가 있다면 그에게는 수난의 길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참한 역사과정에서 탄식할 수 밖에 없는 오늘날 인류 앞에 최후로 남아질 것이 무엇이냐? 돈많은 사람도 아니요, 지식 있는 사람도 아닙니다. 철학자들이 찾고 있는 절대적인 존재가치도 아닌 것입니다. 절대적인 존재가치는 심정문제와 사랑문제를 해결하는 자리에서만 이야기가 되는 것이며, 그때에 비로소 나는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를 안고 있는 타락한 인류를 구하기 위해 하나님은 지금까지 사랑의 마음을 갖고 나오셨습니다. 사랑의 마음을 갖고 나온 하나님은 섭리의 출발 당시부터 인간들에게 지식의 내용을 가르치는 것보다도, 인간은 이래야 된다는 외적인 진리를 교육하는 것보다도, 사회와 세계에 대한 사정을 이야기하기 보다도 보다 가치있는 사랑에 대한 내용을 가르쳐 주어야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류를 대해 가르치는 데 있어서는 제일 중요한 것을 중심삼고 가르쳐야 됩니다. 사랑하는 자녀에게 아버지 입장에서 가르쳐 줄 수 있는 교육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이냐? 사랑밖에 없을 것입니다.

오늘날 종교의 경전은 사랑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지 못한 만큼 더 갈라짐이 있고, 더 고충이 있고, 더 수난이 깃들어 있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구체적으로 가르쳐 줄 수 있는 때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극복 해야 할 수난의 길과 탄식과 한의 길이 지나가야 할 그 자리를 가로막고 있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성경의 중요한 내용은 전부 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사랑을 제시하는 것들입니다. 성경 요한복음 3장 16절을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막 12:30)"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은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데 인간만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본래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사랑은 주면 반드시 돌아오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에 내가 무한한 사랑을 주었으니 너도 무한한 사랑을 돌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속적으로 주신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주었는데 돌아오지 않으면 천지의 인연이 끊어지게 됩니다. 반드시 주고받는 데서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웃을 때도 혼자 웃고 나면 그 후에는 허탈감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라 하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라 하는 그 말이 무슨 뜻이냐? 내가 너를 누구보다 더 사랑하겠다는 말입니다.

기쁨과 행복의 기준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이 우리 앞에 제시한 그 내용은 사랑으로 귀결됩니다. 막연한 박애주의를 중심삼은 사랑이 아닌 세계적인 사랑이 출발하는 곳은 어디냐? 민족의 사랑이 연결된 자리입니다. 민족의 사랑이 출발하는 곳은 어디냐? 종족의 사랑이 연결된 자리입니다. 종족의 사랑은 어디서 출발하느냐? 가정의 사랑이 연결되지 않고는 종족의 사랑이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이것은 남편과 아내를 중심삼은 사랑의 인연으로 나타난 것이 종족이기 때문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사랑하다 보니 그 역사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역사를 사랑하는 데 있어서 하나가 아닌 전체를 사랑하려니 결국 종족이 포함되는 것입니다. 그 종족의 사랑은 가정을 출발로 하지 않고는 인연지을 수 없는 것입니다. 또 그 가정의 사랑은 개인의 사랑을 중심삼지 않고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개인을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개인으로서 정서적인 문제를 중심삼고 요구하는 것이 무엇이냐? 여기에 결론적으로 부딪치는 것이 무엇이냐? 부모의 사랑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이 현실적으로 세계에 전개될 수 있는 형성체가 있다면 그것은 국가를 형성할 수 있고, 세계를 형성할 수 있는 가정이 아니겠느냐? 어떤 국가나 세계든지 가정을 기반으로 하지 않고는 형성되지 않습니다. 가정이 문제입니다.

그러면 가정은 무엇을 기반으로 해야 되느냐? 가정의 구성 요소인 개인의 사랑을 가장 필요로 하는데 그것은 부모의 사랑입니다. 부모의 사랑에는 아버지의 사랑과 어머니의 사랑이 있습니다. 부모의 사랑이 왜 귀하냐? 자기 생명보다도 더 높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사랑은 자기 생명도 잊어버리고, 자기의 행복과 소원도 포기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부모의 사랑이 없으면 아무리 행복하다 하더라도 그것은 자기들끼리 기뻐하는 것밖에 안 됩니다. 부모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무엇을 가지고 기뻐할 것이냐? 옷이나 잘 입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밖에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고아(孤兒)의 심정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내심 깊숙이 스며드는 정서적인 면에 있어서의 기쁨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부부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혼자서 아무리 사랑을 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쓸데없는 사랑입니다. 사랑의 제일보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부부는 반드시 상대적 관계이기 때문에 사랑에도 상대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은 종적인 사랑이요, 부부의 사랑은 횡적인 사랑입니다. 그 횡적인 사랑이 횡대로 퍼져 나가면 이것이 중심이 되기 때문에 횡으로 연결시켜서 또 하나의 종적인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이렇게 평면과 입체, 종횡(縱橫)의 관계를 연이어 하나의 가정의 형태를 다시 횡적으로 연결 지으면서 인류는 발전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자신이 행복하냐, 불행하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여러분들은 막연하게 하나님이 있으니 행복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문제가 아니라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과 얼마만큼 관계를 맺고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거기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행복의 속성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계시다고 내가 있다고 행복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나의 관계에 있어서 일체적인 기준이 있느냐 하는 데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 일체적인 중심의 핵이 뭐냐? 그 핵은 인격도 아니요, 어떠한 지식도 아니요, 어떠한 권위도 아닙니다. 사랑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통일교회가 부모의 사랑, 부부의 사랑, 자녀의 사랑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인간들은 그러한 사랑을 찾아가지고 거기에 정착 하여야만 비로소 안식할 수 있는 자리를 갖게 되는 것이며, 부모의 품에 안길 수 있는 행복한 아들딸이 되는 것입니다. 그 자녀가 행복하고 평탄한 환경에서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서 '남자와 여자는 이렇게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 아버지 어머니와 같이 우리도 그렇게 되고 싶다'는 부러움을 느끼며 그것을 소망의 기점으로 하여 성숙해 가지고 사랑할 수 있는 날을 갖게 될 때, 비로소 필생의 소원의 날이 될 것이며, 부모에게 받는 최고의 선물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성립된 자리가 부부의 자리인 것입니다.

사랑의 계승과 사랑의 확산

그것은 어머니 자리를 대신 이어받은 것이요, 아버지 자리를 대신 이어받은 것입니다. 이 사이는 부모와 자식간에 맺어진 정 이상의 정으로써 연결된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마음뿐만이 아닙니다. 생활권내에서 느끼는 모든 사랑은 부모들이 가지고 느끼던 모든 사랑을 그냥 그대로 이어받은 것입니다. 부모를 대한 기쁨이 나에게서 어우러져 기쁠 수 있는 상대를 갖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부의 인연입니다.

이런 부부의 인연 가운데서 자녀를 낳게 되면 그 부부와 자녀는 하늘과 땅의 관계입니다. 상하관계가 연결되는 것입니다. 부모는 하늘 대신이요, 자녀는 땅이라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듯이 자식들을 사랑해 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뿌리의 진액이 가지로 뻗어나가는 것과 마찬 가지로 그대로 계승되는 것입니다. 계승되어 끝에 가서는 돌아오는 것입니다. 돌아옴으로 말미암아 또다시 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 앞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인간은 후손에게 전통으로서 연결해야 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그러했으니 우리 후손도 그럴수 있고 자손만대 세계 끝까지 그럴 수 있는 사랑으로서 퍼지게 될 때, 나무에 달려 있는 하나의 잎이 그 나무를 떠나서는 살 수 없듯이 우리 인간도 그 사랑의 인연권내에서 떠나게 될 때는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사랑권내에 속해 있을 때만 생명의 기틀을 간직할 수 있고, 서로 주고 받는 가운데에서만이 하나의 형성체, 연결체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랑권의 세계에서는 하나의 잎이 상하게 되면 나무 전체에 피해가 옵니다. 전체의 피해는 전체의 슬픔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의 슬픔이 전체의 슬픔으로 나타나는 세계가 이상세계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 타락권내에서 그런 사랑을 찾아가려면 어떻게 가야 되느냐? 그 길을 가려면 어떻게 가야 되느냐? 복귀의 행로를 찾아가야 됩니다. 그러면 복귀해 나가는 길을 어떻게 찾아야 되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런 사랑이 있어야 될 것을 알았다면 그 사랑을 어떻게 찾을 것이냐? 이 타락권내의 것을 다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사랑, 그 사랑을 찾아야 됩니다.

사랑이라는 것이 제일 가는 최고의 것이라면, 그 최고의 것은 또 다른 상대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단 하나의 것이어야 합니다. 최고의 것을 찾았기 때문에 최고의 것을 가지려면 나도 단 하나밖에 없는 최고의 자리로 나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단 하나의 자리, 그 하나를 형성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은 백이 될 수 있는 요소를 남긴 자리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를 형성하는 데 있어서 보충되고 보강될 수 있는 요건을 원하여 그것이 투입될 수 있더라도 그 하나를 형성하는 데 있어서 반대되는 요건이 가해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들이 타락권내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타락권 형성의 요소가 남아 있는 그 자리에 가기 전에는 완전한 하나의 참이 형성된 자리를 맡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타락권내의 모든 것을 부정하고 단 하나의 참을 형성의 요건으로 거기에 대치시키지 않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인간 세상에서는 자기 욕망을 중심삼고 자기 울타리를 치려고 하는 것입니다. 본래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자기를 중심삼고 가정을 생각하고 종족을 생각하고 민족을 생각하고…. 점점 커 올라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나는 세계와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관계를 맺는 것이 본성인데도 불구하고, 관계를 맺고 난 후에도 타락권내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타락되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역사의 출발점

그러면 무엇을 중심삼고 복귀해야 되느냐? 돈도 아니요, 역사적인 어떤 성현의 가르침도 아닙니다. 무엇을 중심삼고 해야 되느냐? 하나님도 희구하고 인류도 희구하며, 하나님도 인류도 '바로 이것이다'라고 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절대적인 하나님이 '이것이다' 할 수 있는 것은 절대적인 사랑밖에 없습니다. 그 사랑을 인류가 '바로 이겁니다' 할 수 있는 그 자리는 타락세계의 심정적 요인을 부정하는 자리인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실례가 될는지 모르겠지만, 어떤 부인이 본 남편과 아들딸까지 낳고 살다가 다른 상대를 만나서 다시 시집을 갔다고 합시다. 다시 만난 그 상대가 본 남편보다 모든 면에서 낫다 할 때는 본 남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딸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본 남편과 관계맺었던 모든 인연을 끊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왜 그러냐 하면, 보다 나을 수 있는 사랑을 막는 자극제가 되기 때문에 그것을 전부 다 불사르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본 남편보다 더 못하다 할 때는 그가 하는 일체를 원치 않는 것입니다. 하면 할수록 끝이 가까와 오고 관계를 맺으면 맺을수록 완전히 거부하고 싶은 마음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인류가 타락한 세계에 애착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해서 행복이 있겠느냐? 현재 세계 인류가 찾아 나가는 정서적인 문제라든가…. 현재 청소년 윤리 문제가 세계적인 문제가 되고 있는데, 이런 문제들을 중심삼고 살펴볼 때, 사람의 행복이 무엇이냐? 쾌락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극단주의인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요, 인간 자체의 본연의 심정이 요구하는 것이요, 화동의 모든 박자가 맞아 가지고 그야말로 '이것이다' 할 수 있는, 긍정적인 내용의 상대 요건을 제시할 수 있는 바탕이라면 가면 갈수록 거기에는 신이 나고 가면 갈수록 자극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가면 갈수록 파탄이 벌어지고 가면 갈수록 부정이 튀겨 나온다면, 그런 사랑, 그런 정서적 밑바탕이 된다면, 그 자체가 타락세계임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보다 가치있는 사랑권, 가면 갈수록 좋고, 가면 갈수록 부정당할까봐 생명을 바쳐서라도 방비하고 싶은, 생명을 가진 인간이라면 부정할 수 없고 또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그렇지 않아요. 사랑의 세계는 그런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오늘날 인류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타락된 세계입니다. 인간들은 보다 나은 사랑의 세계, 보다 나은 사랑의 근원을 찾아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금후의 세계에 있어서 이것이 문제가 될 것입니다.

인간 앞에 신념을 제시하고, 어떻게 참된 가치를 상속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가치를 넘어서 가치의 내용을 집약시킨 사랑을 어떻게 형성 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 사랑이 개인의 사랑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역사가 소원하던 사랑, 극치의 사랑, 미래의 영원한 출발의 기원이 될 수 있는 사랑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의 기점이 인류의 역사과정에 나타났다고 할 때는 사람들은 그러한 자리에서 떨어질까봐 걱정을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그렇잖아요? 재미있게 잘살고 있는데 이것을 갈라놓으면, 서로 그 자리를 떠나지 않으려고 생명을 버리면서까지 투쟁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보다 가치있는 사랑에 의해 인연되어진 그런 행복의 터전을 지닐 수 있는 한 곳이 있다면 거기에서는 만사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까 말한 거와 같이 어떤 부인이 시집을 다시 가서 옛날보다 정서적인 관계가 나은 남편을 만났다 하게 되면 그 전실 자식까지도 좋아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타락권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그냥은 안 됩니다. 무엇으로 할 것이냐? 우리 인간의 생명의 힘 가지고는 못합니다. 왜? 우리의 생명의 근원이 파탄되어 있고, 생명의 뿌리가 악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보다 강할 수 있는 것이 있어야 됩니다. 생명보다 강한 것이 아니고는 타락권에서 빼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을 들고 나오는 것이 종교의 본질입니다.

사랑, 하나님의 사랑은 어디에 나타나야 하느냐? 내 개인 자체에 나타나야 합니다. 그 사랑이 오늘날 인간 세상에 있어서 내 부모에게 인연 되었던 사랑보다도 더 귀한 것이냐 할 때 '예', 부부에게 나타난 사랑보다도 더 귀한것이냐 할 때 '예', 자녀에게 나타난 것보다도 더 귀한 것이냐 할 때 '예', 오늘날 민족과 국가에 나타난 사랑보다도, 혹은 인류애, 박애주의 사랑보다도 더 귀하게 생각하느냐 할 때에 '예' 할 수 있는 그런 일변도적인 사랑의 힘이 우리와 생활에서부터 이 우주간에 형성되었다면 거기서부터 새로운 역사는 출발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슨 지식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 아니요, 무슨 과학 기반을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과학 기반을 안팎으로 움직여 낼 수 있는 길이 무엇이냐? 사랑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오늘날 통일교회에서 말하는 심정의 세계라는 말은 앞으로 세계 인류 앞에 소망의 닻이 되고, 기쁨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영원이나 절대란 말은 사랑에만 붙일 수 있는 것

여러분, 사람이 죽을 때 찾는 것이 뭐예요? 돈도 아니요, 인격도 아니요, 지식도 아닙니다. "내 돈 어디 갔어? 내 금괴 어디 갔어?" 그래요? 그때 찾는 것이 뭐냐? 사랑입니다. 아무리 병신 자식이라 하더라도 '야 !아무개야' 하고 찾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 자기가 제일로 갖고 가야 할 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최후로 해결짓지 않고서는 갈 수 없는 실체의 내용이 있기 때문에 죽을 때 사랑을 찾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떠할 것이냐? 만일 하나님이 죽게 되었다면 무엇을 찾을 것이냐? 하나님이 돈을 필요로 해요? 무슨 인격을 필요로 해요? 무슨 지식을 필요로 해요? 전부 필요없습니다. 오직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럴 것 아니예요? 여러분들이 '영원한 금전'이라는 말을 해요? 제일 멋진 말은 어떻게 쓰느냐? '영원히'라고 합니다. 길 영(永)에다 멀 원(遠)이지요. '영원'이라는 말은 최고의 말입니다. 또 '절대적이다' 하는데 돈이 절대적이 돼요? '영원한 돈이다' 그 말이 돼요? '불변의 돈이다' 말이 돼요? '영원한 인격'이라는 말도 어색합니다. '절대적인 인격' 그래도 어색하다는 것입니다. 다 어색하지만 여기에 제일 멋지게 맞는 것이 무엇이냐? 사랑입니다. '영원한 사랑, 절대적인 사랑' 이것이 제일 멋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못난 사람에게도 쓰일 수 있는 말입니다.

절대적이란 말은 최고의 형용사입니다. 그 말은 무엇에 쓰기 위해 생겨 났느냐? 생명에도 조금 쓰이기는 하겠지만 '절대적 생명' 하면 자기 혼자 만입니다. 혼자 있는데 절대라는 말이 무슨 필요가 있어요? 그렇지만 '절대적 사랑' 하게 되면 전체가 다 들어가는 것입니다. 사랑하게 되면 상대적 여건이 있기 때문에 그 사랑의 대표자는 전체를 대표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게 되면 절대적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절대적 사랑' 하면 좋아요. 안 좋아요?「좋습니다」 사람도 그런데 하나님은 어떠하실 것이냐? 우리 인간은 하나님 닮았습니다. 자식이 아비 닮지 별 수 있어요? 절대적 사랑, 유일한 사랑, 불변의 사랑, 영원한 사랑 전부가 들어맞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일 좋은 형용사는 사랑에 갖다 붙여야 하는 것입니다. 비둘기 같은 눈동자이니 하는 말도 무엇을 찬양하는 것입니까? 사랑을 두고는 우주만상에 있는 좋은 말은 전부 다 갖다 붙이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이 '절대적인 사랑' 하면 누구를 생각해야 되느냐? 절대적 사랑이 남자 여자를 생각하는 것이냐? '유일한 사랑' 하면 누구를 생각해야 되느냐? 자기 부모? 아니면 자기 아내? 자기 남편? 인간이 태어나서 칠팔십년, 길어야 백년 밖에 못 사는데 그것을 영원한 사랑이라고 할수 있어요? 결혼해서 평균 40년 살기도 힘드는데 그것을 영원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영원한 사랑' '불변의 사랑' 그 말들은 하나님을 중심삼고서야 쓰여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어디서부터 오는 것이냐? 절대적인 것으로부터, 유일한 것으로부터, 영원한 것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사랑이 영원한 것이기 때문에 그 사랑을 가지게 되면 영생하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말미암아 생명이 생겨났기 때문에 사랑은 생명의 원천입니다. 유일한 사랑으로 말미암아 유일한 생명이 생겨난 것이요, 절대적인 사랑으로 말미암아 절대적인 생명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제외하여 놓고 그런 말이 성립되느냐, 안 되느냐? 내가 스스로 절대적이라고 한다고 해서 절대적이 될 수 있어요?

사랑이 필요하다…. 오늘 여기에 처음 온 사람은 '아! 글쎄 통일교회에 갔더니 문 선생이란 양반이 아침부터 사랑 이야기만 하더라'고 할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실연을 당해서 사랑과는 상극권내에 있는데 사랑이 좋다니…' 그런 사람이 있으면 그는 실연당하길 잘했습니다. 그 이상의 사랑을 못 찾아서 탈이지 만일 찾아 보라는 것입니다. '아이구 잘했다. 아이구 잘했다' 할 겁니다. 남자들은 전부 도둑놈이라느니, 늑대 같다느니 하지요? 그것은 왜? 남자들은 더 큰 사랑이 있으면 인사도 안 하고 보따리 싸 가지고 도망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

그러면 세계에서 어느 누가 제일 가느냐? 누가 일등 갈 것이냐? 일등은 단 한 사람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길 '하나님은 내 아버지다' 라고 했습니다. 나는 참으로 잘 말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 '나는 독생자다'라고 했습니다. '독생자' 라는 말은 하나님의 사랑을 독차지했다는 뜻입니다.

그 다음에는 인류를 대해 '나는 신랑이요, 너희는 신부다'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너희는 형제'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맺어 가지고 하나님이 사랑을 중심삼고 인간 세계에 나타나게 될 때 거기에는 천지조화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만일 그러한 것을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사랑의 계보에 있어서 제일 조상이 되지 않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통일교회에서 가르치는 원리는 구체적인 것입니다. 막연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인류의 제문제를 들고 나와서 역사를 따지고 나서는 데 있어서는 세계적으로 통일교회가 둘째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 갈수 없으니 몇째 가는 거예요? 꼴찌 아니면 첫째 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별의별 욕을 먹어도 기분이 나쁘지 않습니다. 앞으로 세계 인류를 해방시켜야 할 그 길을 찾아가는 데 있어서 통일가의 전통적인 사상과 내용이 득세할 날이 올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뛰쳐 나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개가하는 아낙네가 옛날 신랑이 해준 손수건으로부터 그와 관계되어 있는 전부를 인정하고 뛰쳐나올 수 있어요? 모든 관계를 부정해야 됩니다. 시집갈 때 해가지고 갔던 금반지, 양단 저고리를 가지고 갈 수 있어요? 가지고 가면 안 됩니다. 그 모든 것 다 버리고 가야 합니다. 신랑도 외적으로 관계 되어 있는 것을 전부 끊어버리고 오라고 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이 우리를 대해 오라 할때 '옛날에 가졌던 것 다 보따리에 싸 가지고 와라' 그러겠어요? 다 버리고 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버리는 데는 무엇부터 먼저 버리느냐? 제일 사랑하는 것부터 버리고 오라는 것입니다. 제일 사랑하는 것이 뭐예요? 어머니 아버지입니다. 그 다음에는 남편이요, 그 다음에는 내 자식, 내 친척, 내 나라 전부를 버리고 오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도 네 아비나 네 남편이나 네 자식이나 누구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지 않으면 나에게 합당치 않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 말이 무슨 말이냐? 그것을 갖고 오라는 거예요. 갖고 오지 말라는 거예요?「갖고 오지 말라는 것입니다」 요전에 어떤 사람이 통일교회에 나가면 가정이 파탄된다고 했다는데, 통일교회에 잘 나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2천년 전에 그런 말을 하고도 사람들에게 당장 몰매맞아 죽지 않고 33세까지 살았다는 것이 용합니다. 그런 소리를 하고 다니는데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야 ! 이놈의 자식아, 뭐야' 나부터라도 그랬을 텐데….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에서는 좋다 하는 것을 다 싫다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할 때 할 수 있다면 환영하고 할 수 없다면 추방해야 됩니다. 그럴 수 있는 길이 있다 하게되면 다 할 수 있다고 할 것입니다. 다만 믿지 못하고, 모르기 때문에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종교에 그러한 내용이 없다면 종교인들은 최고의 사기꾼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복귀의 행로를 찾아가야 하는데, 어떻게 가야 하느냐? 찾아 나서는 데는 어떤 길이 빠른 길일 것이냐? 사람은 전부 다 높아지길 원하지요? 그런 세상에서 지금 살고 있습니다. 점점 높아져서는 어떻게 되느냐? 점점 높아져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는 최고 정상에 이르게 되면 내려 오게 마련입니다. 더 이상 갈 곳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본성을 두고 볼 때, 타락하지 않았으면 세계를 내 것으로 만들겠다고 해도 죄가 되지 않습니다. 원래 그렇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욕심은 하나님까지도 내 것 만들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타락의 동기를 분석해 보면, 낮아지겠다고 해서 타락한 것이 아닙니다. 타락은 떨어진 것이요, 떨어졌다는 것은 낮아진 것을 말하는데 우리 인간 세상에서 어디 가든지 자기의 입장을 남에게 양보하고 스스로 낮아지겠다고 하는 겸손한 자리에서 타락이 성립되는 법이 있어요?

온유겸손한 자리

호랑이 같은 시어머니 앞에서 며느리가 같이 싸우면 둘중의 하나가 죽든지 살든지 끝장이 납니다. 그렇지만 그 시어머니 앞에서 겸손하고 낮아 지게 되면 그 호랑이 시어머니를 잡을 수 있어요, 없어요?「있습니다」 그러면 호랑이 같은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잡혀 가지고 그 며느리를 미워 할까, 사랑할까? 며느리를 쫓아내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며느리에게 굴복한다는 것입니다. 며느리는 사랑받게 되고 결국 둘이는 사이좋게 지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그러니 환영받아 가지고 좋게 지낼 수 있는 길을 찾아가야 되겠습니다. 이런 입장에서 볼 때, 며느리가 시어머니한테 '시어머니 뭐야, 당신은 80여년을 살면서 지금까지 밥을 먹었어도 나보다 더 먹었고, 옷을 입었어도 나보다 더 입었으니 이제부터는 내가 더 많이 먹고, 내가 더 많이 입어야 겠소'라고 해서야 되겠어요? 그러다가는 이틀도 못 가서 쫓겨나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느냐? 당신이 지금까지 많이 먹었지만 더 먹어야 합니다. 자기가 못먹더라도 그래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꾸로 되는 것입니다. 주객이 전도되는 것입니다. 만일 여기서 맞서고 나섰다가는 국물도 없다는 것입니다. 가면 갈수록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사 인간에게 어떻게 가르쳐 주셨느냐? '내 아들딸이 되려면 교만해라'고 가르쳐 주셨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렇지만 악당들 앞에서 그렇게 가르쳐 주셨다가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꼭대기에 올라가서는 전부 다 전멸당하는 것입니다. 전부 다 물고 뜯고 싸우다가 마지막에 두 사람이 남게 될 것이고, 그들도 끝까지 싸 다가 둘 다 망하는 것입니다. 망하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모두들 안전하게 올라가게 하기 위하여 결론지어 가르친 것이 온유겸손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맨 나중에 가서 모두다 전멸해서는 안 되겠으니 이들을 구하기 위한 뜻에서 온유겸손한 길이 제일 안전 하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올라가고자 할 때 쉬워요, 힘들어요? 한 사람 거치고 나면 열사람 백 사람의 원수가 나타납니다. 올라갈수록 많아지는 것입니다. 천사람이 나타나면 그 뒤에 또 만 사람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점점 그 범위가 넓어집니다.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원수가 점점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냥 그대로 올라가는 것은 절대 어렵기 때문에 내려가야 합니다.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원수는 점점 없어지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내려가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여기 내려가기 좋아하는 사람 있으면 손들어 봐요? 내려가면 만사가 다 해결되는 것입니다. 어머니 아버지에게 나를 사랑해 달라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너 어디 가니? '내려갑니다', '내려가는 것도 좋지만 이만큼에서 그만하자', '아니예요. 조금만 더 내려가겠어요' 이렇게 하면 싸움 없이, 부작용 없이 전부 다 떼어 놓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를 저끄린 사탄까지도 내려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사탄이 내려가는 것을 좋아했다간 볼장 다 보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반대로 되는 것입니다.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어떻게 되어진다구요? 많아져 요, 적어져요? 이것을 여러분들은 똑똑히 알아야 합니다. 적어지니까 맨나중에는 어떻게 됩니까? 나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이 우주의 사랑의 주인은 누가 되겠습니까? 절대적인 우주의 주인인 하나님과 나만 남았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나만 남았느냐? 절대적인 사랑을 찾아서 가다 보니 이렇게 나 혼자만 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도 별수 없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나만 남았나이다' 할 때 하나님이 말씀하시길 바알 앞에 굴복하지 않은 칠천 무리가 남아 있는 것을 생각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뜻을 품고 나가는 사람은 외로운 사람입니다. 인간 앞에 저주를 받고 그들 앞에 부정을 받지만 당당히 인류를 위하고, 하늘의 공적에 일치될 수 있는 자리에서 '나만 남았나이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갈 데가 어디 있습니까? 삥 돌아가는 것입니다. 한바퀴 돌면 이만큼 잘라먹는 것입니다.

망하지 않고 남아질 수 있는 길

그렇기 때문에 복귀의 행로를 찾아가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올라가면서 해결하는 방법이요, 다른 하나는 그 반대로 내려가면서 해결하는 방법입니다. 어느 방법이 하나님께도 인간에게도 피해를 많이 입히지 않고 보다 효과적이고 보다 가치적인 결과의 내용을 가져 오겠느냐? 교만의 반대입니다. 즉, 온유겸손하라는 것입니다. 죽고 못사는 놀음을 해서 희생봉사하라는 것이 통일교회의 가르침입니다. 인류에게 행복을 줄 수 있고, 우리가 해방을 받을 수 있는 제일 가까운 직선 길이기에 그 길을 가르쳐 주는 것임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 길이 예수님이 가신 길이요, 수많은 종교가 가는 길입니다. 고해입니다. 수난의 길입니다. 위대한 역사와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동기와 사연이 여기에 깃들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복귀의 행로를 찾아가는 우리에게 있어서 희생봉사하는 것을 천명으로 알고 나가야 되겠습니다. 보다 빠른 복귀의 길은 개인적인 고통의 길을 극복하고, 가정적인 고통의 길을 극복하고, 종족적인 고통의 길을 극복하고, 민족적, 국가적 고통의 길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우리 통일교회에서는 개인적 수난사를 극복하라고 합니다. 우리 통일교회 식구는 통일 족속입니다. 통일민족 형성을 위해서 통일교회는 고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축복받은 부인들을 내가 다 빼내는 것입니다. 좀 미안하지만 할수없다구요. 이렇게 나온 통일교회가 망하겠어요, 흥하겠어요?「흥합니다」 만일에 삼천만 민족이 그러한 원칙을 알아서 '세계를 위해 죽자. 세계를 위해 봉사하자' 하는 운동이 벌어지면 이 민족은 세계를 지배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류가 갈 길은 이 길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길, 다른 방법이 있다면 내가 왜 이런 길을 가겠습니까? 어느 누구보다 못나서 일생을 욕을 먹으며 이 길을 가는 것이 아닙니다. 욕 먹는 것이 복입니다. 손가락질받는 것이 복이예요. 손가락질이 복을 갖다 주는 다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욕을 해라 이겁니다. 욕을 하면 욕하는 사람의 복은 나한테 빼앗긴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욕을 하더라도 욕을 하지 않으면 송두리째 걸려드는 것입니다.

자 그런 장사를 하겠어요, 한 푼 두 푼 편하게 모으는 장사를 하겠어요? 통일교회가 망하는 것 같지만 망하지 않습니다. 자꾸 떨어져 나가는데 또 뭐가 붙어서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공산당은 없는 것도 있는 것같이 선전하지만 하나님은 있는 것도 없는 것같이 보입니다. 성경에 하나님이 있다는 것이 확실히 되어 있어요? 있긴 있는데 없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있는 것 같기도 한데 잘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에서 통일교회는 선전을 할 줄 모른다고 하지만 선생님이 선전할 줄 몰라서 안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전을 했다가는 도둑놈들이 많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귀한 물건은 도둑이 다 떨어져 나간 다음에야 마음 놓고 내 놓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리에 들어가려니 복귀의 노정에 있어서는 희생봉사하는 길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 길이 싫다고 도망가는 사람은 다시는 못 들어옵니다. 여기에 왔다가 '아이쿠 못 가겠다' 하고 도망가면 다시는 못 들어오는 것입니다. 사탄이 꽁무니에 붙어 있기 때문에 돌아서는 날에는 살아남지 못합니다. 한번 돌아서는 날에는 통일교회에 다시 못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왜? 사탄이 있기 때문에 고생길을 가다가 못 가겠다고 돌아서면 그 길은 다시 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길은 고생스럽다고 생각해서는 못 가는 것입니다.

배가 고플 때 뭐가 제일 맛있어요? 불고기보다도 빈대떡이 더 맛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배가 고플 때는 보리밥이 더 맛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해 볼 때, 홀로 망하지 않고 영원히 남아질 수 있는 길은 아까 말한 거와 같이 하나님의 사랑권을 중심삼고 이상세계를 찾아 나가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 길은 올라가려고 하다간 갈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내려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인류역사의 깊은 골짜기를 더듬으며 인간들이 낙오자된 길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복귀의 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 길을 가는 데 있어서 절대적인 주인을 만나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상대의 입장에 서야 되는 것입니다. 그 절대자와 우리와의 상대적 관계가 결정되기 위해서는 타락권내에 있는 우리가 반대의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그 고생길을 달게 받고 갈 줄 아는 여러분들이 되어 주길 바랍니다.

​기 도

​사랑하는 아버님! 여기에 모인 통일의 자녀들, 이 길을 극복해야 할 것을 알았고, 사망권을 타파해야 할 운명에 놓여 있음을 알았습니다. 고착되어 있는 현실적인 모든 것을 극복하고 타파하지 않으면 안 될 역사적 갈림길에 서서 통일교단이 오늘날까지 걸어 나온 것을 아옵니다. 역사시대를 거쳐 나오면서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심정적인 내연을 살펴 가면서,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수난의 길을 생활철학으로 믿고 따라 나올 수 있는 역사적인 노정을 남겨 주신 아버지의 거룩하신 사랑 앞에 감사를 드립니다.

이 아침에 모인 당신의 자녀들이 이 말을 그냥 흘려 보내지 말게 하시옵고, 이 말과 더불어 내 스스로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인 것을 알게 하시옵소서.

나 자신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있어야 되겠고, 가정을, 종족을, 민족을, 국가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있어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통일교단의 가정들이 국가와 민족을 붙들고 몸부림치며 선두에 섰사오니, 아버님, 버리지 마시옵소서.

내일의 천국이 그립거든 오늘의 현실에 있어서의 가야 할 길을 달려가게 허락하여 주옵소서. 만일 내일의 행복을 꿈꾸거든 오늘 제사장의 옷을 입고 한숨과 절규의 수난이 있어도 하늘의 애절함에 불타 가지고, 내 스스로를 아버지 앞에 맡기는 최후의 담판노정이 있어야 되겠습니다. 철부지였던 과거지사를 다시 한 번 회상하며 아버님이 기뻐할 수 있는 최후의 결정적인 스스로의 모습을 그리면서 아버지 앞에 섰사오니, 아버님이여, 명령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두 갈래 길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다시 내려와야 하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 인류에게 수난의 길을 가라고 지금까지 수많은 종교가 가르쳐 나온 것을 생각하게 되옵니다. 이제 그 뜻을 알았기에 그렇게 살기를 바라는 통일가의 무리들을, 아버지, 긍휼히 보시옵소서.

세상이나 환경이 어떻든간에 이 두 길 가운데서 아버님이 가르쳐 준 길만은 틀림없기 때문에, 이 길 앞에 자기의 모든 것을 청산짓고 나갈 줄 아는 아버지의 아들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금후에 갈 길을 당신에게 맡기오니 맡아 주시옵소서. 오늘은 거룩한 날이오니 남한 각지에 널려 있는 당신의 아들딸들 위에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세계에 널려 있는 뭇 자녀들, 고향땅을 그리며 기도하는 모습 위에 아버지의 손길이 떠나지 마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옵니다. 전체 위에 당신의 긍휼이 같이하여 주시옵고, 우리 생애노정에 있어서 빛이 되어 이끌어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면서, 이 모든 말씀 참부모의 성호받들어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문선명선생말씀선집 제4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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