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님! 저희들은 인류를 창조하시던 아버지의 본연의 심정을 알지 못하고 있사옵고, 저희들의 슬픔을 몰아낼 수 있는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이제 저희들의 모든 것을 희생시켜서라도 아버지의 사랑을 찾아야 되겠사옵고, 아버지와 저희와의 본연의 인연을 회복하지 않으면 안 되겠사옵니다.
아버님! 여기에 모인 당신의 아들딸들, 이제 마음 문을 열고 열어, 당신의 심정이 무엇이고 당신의 사랑이 무엇인가, 스스로 찾을 수 있게 허락해 주시옵고, 또 귀를 열어서 아버지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하여 주시오며, 하늘이 허락하시는 은사를 받을 수 있는 아들딸을 찾고 계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을 뜨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으며, 저희들을 위하여 수고하신 아버지의 손길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참으심의 그 심정을 체휼할 수 있게 허락해 주시옵소서. 수고하며 참아 나오신 아버지의 심정을 저희도 조금은 알고 있사오니, 오늘 이 시간 저희들의 마음 몸을 온전히 아버지의 것으로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무지하여 사망권 내에 사로잡힌 아들딸들이 있사올진대는, 아버지, 친히 은혜의 손길을 다시 펴시어서 전체의 창조의 역사를 일으키시옵고, 본연의 호소의 심정을 대할 수 있고, 아버지의 마음 앞에 화동할 수 있는 이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마음을 다하여 섭리하신 아버지의 뜻이 있다는 것을 알았사옵고, 천정의 노정을 밟아 나오신 역사노정이 있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이것은 오직 하늘과 통할 수 있고 하늘을 대할 수 있는 가치관을 찾아 나온 사람들을 통하여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역사적인 모든 죄악과 시대적인 모든 죄악과 미래적인 모든 죄악의 원천을 근절시켜야 할 사명이 저희들에게 있다 할진대는, 죄악에 끌려 가책 받지 않고 아버지의 사랑 속에서 감사드리고 싶은 마음의 충동이 일어날 수 있는 아버지의 직접적인 사랑의 역사가 나타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의 저희들의 마음은 나를 중심삼고 움직이지 않고 있으며, 저희의 몸도 나를 떠나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내 마음도 나를 벗어났고 몸도 나를 벗어났다 할진대, 이러한 저희를 세워 섭리하셔야 하는 아버지의 심정이 어떠하실 것인가 하는 것을 느끼게 되옵니다.
천륜의 진리를 통하지 않으면 안 될 때가 되었고, 천륜의 인격을 통하지 않으면 안 될 때가 되었으며, 아버지의 사랑을 통하지 않으면 안 될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아버님, 모든 인류에게 아버님의 사랑을 소개할 수 있는 말씀이 나타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아버님의 사랑을 증거할 수 있는 인격자가 오늘 이 끝날의 뭇백성 앞에 나타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그 진리를 따를 수 있는 저희들의 마음적인 준비와 터전을 갖추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아버지의 뜻 앞에서 모든 것이 밝혀질 수 있는 그날이 역사 앞에 어서 속히 나타나게 역사(役事)하여 주시옵길,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이제 바울이 말한, 애달픈 아버지의 심정을 체휼하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고, 그가 마음으로 느끼지 못한 아버지의 사랑의 심정을 체휼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과 같이 이 백성 앞에 제물이 되어 전체의 제단을 쌓을 수 있는 자녀가 되게 해 주시고, 아버지의 사랑의 심정을 같이 지닐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 천륜을 향하는 길도 이 한 길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수고를 해원해 드리는 길도 이 한 길이요, 선지선열들의 죽음의 원한을 풀어주는 길도 이 한 길이라는 하나의 마음을 붙들고 하늘땅을 대신하여 아버지 앞에 속죄의 제물을 드릴 수 있는 이 한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모든 것을 당신께 맡기었사오니 다시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전하고자 하는 아버지의 말씀을 전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고, 주는 자의 마음과 받는 자의 마음이 둘이 되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하늘이 움직이면 저희의 몸 마음도 같이 동할 수 있는 이 한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사탄을 제거하여 주시고 모든 것을 친히 주관하여 주시옵길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여러분은 원리 가운데 천주(天宙)라는 말이 있는 것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무형세계(無形世界)와 유형세계(有形世界)를 총합한 말이라는 것도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피조세계를 창조하신 창조주나 그의 지음을 받은 피조물이나 모두가 사랑의 한 날을 찾아 나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필요하고 또 무엇보다도 시급하고 중대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소유하는 일일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참마음과 참몸을 갖춘 참사람이 되는 일일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참다운 물질을 갖는 일일 것입니다. 그 다음은 무엇일 것인가? 그것은 우리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 될 사랑을 지니는 일입니다. 이런 것들이 오늘날 타락한 인간들이 살아 나가는 데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일인 것입니다.
오늘날 내 한 자체를 보게 될 때 나에게는 나를 중심삼은 하나님과 나를 중심삼은 참사람과 나를 중심삼은 참다운 선의 물질이 필요하고, 더 나아가서는 나를 중심삼고 모든 것을 단합시킬 수 있는 하나의 사랑의 인연이 필요하다는 것을 여러분은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여러분 자체를 놓고 볼 때, 여러분이 필요로 하는 하나님이 어디에 계신지 알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필요로 하는 참사람, 참물질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습니까? 이러한 질문을 받게 될 때, 그것은 이러 이러하다고 자신(自信)과 실력을 갖추고 나설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여기 모인 여러분 자신 가운데 자랑할 무엇이 있다 할진 대는 새로운 마음, 새로운 의식을 갖추고 나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안 될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자신에게 필요한 모든 요소를 갖지 못한 연고로 생애노정을 걸어 나가는 데 있어서 평안과 안일의 생활을 할 수 없으며, 영원하신 창조이념을 대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체득하여 자기의 생애를 노래하며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지금까지 살아온 생애를 통하여 잘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온 천주 만상 앞에 자신을 내세워 자랑할 수 있는 무엇도 갖지 못한 것을 탄식할 때가 되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사실이 하늘의 서러움이요, 인간의 서러움이요, 만물의 서러움이라는 것을 바울은 역력히 피력하였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서러움을 해원해야 할 책임이 여러분에게 주어져 있으며, 이런 책임을 지고 가야 할 것이 복귀의 운명권 내에서 살고 있는 여러분들이 가야 할 생애노정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스스로를 권고하여야 할 입장에 처해 있는 자신인 것을 탄식하는 마음이 있다 할진대는 여러분을 연하고 있는 역사를 염려해야 할 것이요, 또한 여러분의 현실생활과 관련된 시대를 염려해야 할 것이요, 이 시간 이후의 미래를 염려해야 될 것입니다.
그런데 염려해야 할 자체를 두고도 생각없이 허덕이는 사람이 있다면 그 이상 불쌍한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천지 앞에 남겨진 탄식의 조건을 해원해야 할 사명을 짊어진 인간들이 자기의 위치를 깨닫지 못하고 온 만상 앞에 부끄러운 모습으로 나타나게 될 때, 그것을 바라보셔야 하는 하나님의 심정은 어떻겠습니까? 여기에서 여러분은 하나님께 탄식을 가중시켜 드리는 부끄러운 모습인 것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상충적인 환경을 밟고 올라가서 온 천주의 탄식을 대신 책임지겠다고 당당하게 나설 수 있는 그 하나의 충신의 모습은 어디에 있을 것인가! 인류에게 소망이 있다 할진대는 그럴 수 있는 하나의 충신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그러한 충신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하나님과 참다운 사람과 참다운 만물을 대신하여 이를 하나로 일치시키고, 하나님 앞에서 사랑을 의논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 인간들이 섭리역사 과정을 거쳐오면서 하나님께 여러 가지 기도를 해 나왔고 뜻을 받들어 나왔으나, 하나님의 마음속 깊이 사무쳐 있는 원한의 심정을 해원하고 사랑을 의논할 수 있는 자리에는 아직까지 한 사람도 나가지 못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겠습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지만 인간들이 그분을 통하여 실지로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분은 다시 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4천년 복귀의 역사를 완성시켜야 할 사명을 갖고 오셨지만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과 인연을 맺게 되었는가?’ 하고 반문하게 될때, 누구도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는 입장에 서 있지 못한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들이기 때문에 불쌍하다면 이 이상 불쌍한 일이 없을 것이며, 탄식할 일이 있다면 이 이상 탄식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세워 자랑할 무엇을 갖고 있습니까? 지식을 갖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갖고 있는 지식은 천지 만상의 원리원칙에 비교하면 지극히 미미한 것입니다. 오늘날 20세기 문명이 아무리 발달했다 할지라도 하나의 절대적인 원리원칙을 성립시킬 수 없는 권내에 머물러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자랑거리가 있다 하더라도, 이것을 재분석하여야 할 새로운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느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하늘이 역사적인 운명을 바라보고 시대적인 운명을 바라보고 미래적인 운명을 염려하면서 내 자신을 찾아 주셨으니, 이런 하늘 앞에 내 자신을 세우고자 하고, 또 내 자신을 자랑하고자 할진대는, 여러분들은 먼저 하늘을 소유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참다운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또 참다운 만물을 대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중대한 문제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지어 놓으시고 아담 해와에게 그것들을 주관하라 하시던 그 주관의 자격을 갖추어서 ‘아버님이 원하시던 것, 아버님이 축복하여 주신 것이 이것인 줄 아오니 저에게 당신의 천적인 사랑의 인연을 맺어 주시옵소서.’라고 할 수 있는 그 하나의 모습이 지금까지 섭리해 오신 하나님의 최고의 목적이요, 섭리의 뜻을 세우고 지금까지 수고하여 나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최고의 기준인 것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인간은 현재와 같은 지경에 이르렀는가? 그것은 인간의 타락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인간은 타락인간의 후손이기 때문에 타락된 모양과 형식을 벗어나서 생활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개인의 타락된 생활이 합해져서 세계적인 타락성을 이루어 나가고 있을진대 이것을 탕감하고 제거하기 위해서는 세계적인 타락성을 깨뜨릴 수 있는 하나의 원칙이 나와야 합니다.
타락과는 반대 방향으로 인간들을 인도할 수 있는 원칙이 나오기 전에는 인간들이 어떠한 선의 이념, 어떠한 진리를 주장한다 해도 그것은 우리 인간의 소망, 또는 근본적인 기쁨과 관계를 맺을래야 맺을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명심해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타락역사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타락의 후손인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온 천주의 이념을 대신할 수 있는 인격과 온 만물을 주관할 수 있는 가치를 지닌 참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고대한다 할진대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냐 하면 우리는 타락의 혈통을 이어받은 종족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자신의 마음속에 타락의 근성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면 지금까지 생각하지 못했고 헤아리지 못한 새로운 무엇이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피조물로서 혹은 전우주를 대신한 인격자로서 하나님 앞에 나가서 ‘나는 타락의 종족이로소이다.’라고 호소해야 되겠습니다. 이런 기도의 한 시간이 없다면 여러분은 아직까지 천주 앞에 남아져 있는 탄식권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담 해와의 타락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하나님을 버린 것이요, 본연의 이상적인 인간성을 잃어버린 것이요, 선주권의 환경을 잃어버린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잃어버렸고 참사람을 잃어버렸고 참물질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잃어버렸고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 이것이 타락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런 결과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런 것들을 반대 방향에서부터 수습하고 개척하기 위한 싸움을 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이런 투사가 되지 않는다 할진대는 역사적인 죄악권과 하늘의 섭리를 반대하던 사탄권을 벗어날래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인간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품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본연의 참된 인간성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참우주권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다시 회복하기 위한 역사가 하나님의 재창조의 역사요, 지금까지 수고해 오신 하나님의 섭리인 것입니다.
제1아담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원한이 맺혀지게 되었는데 제2의 아담, 즉 복귀된 아담격으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어떤 일을 하셔야 했던가? 먼저 예수님 자신의 마음에 하나님이 오시도록 해야 했고, 자신의 몸에 참사람의 뜻을 지녀야 했으며, 참다운 주관자가 되어야 했습니다. 이런 실체로 오셔서 천적인 사랑을 증거하고, 인간적인 사랑을 증거하고, 만물의 정까지도 증거하여 하나로 통합시킬 수 있는 하나의 주체로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마음의 천국을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신의 마음속에 있다고 하면서 하나님과 일체된 자신을 주장했습니다. 또 전우주가 자신의 주관을 받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온 인류를 대하여는 사랑의 표어를 내걸고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너희는 나의 친구요, 형제’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에 메시아로서의 예수님의 가치가 담겨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자기 자신을 중심삼고 가정을 움직이고, 사회를 움직이고 민족, 국가, 세계, 나아가서는 천주까지 움직여야 할 사명이 있었는데, 이스라엘 민족이 배반하고, 교회가 배반하고, 택한 세례 요한이 배반하고, 가정이 배반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친히 사도들을 세워 놓고 그들을 발판으로 세계적인 제2이스라엘을 형성하여 세계적인 가나안 복귀의 이념을 실현하고자 하셨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원리를 통하여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당시 예수께서는 12지파로 형성된 이스라엘 민족이 반대했기 때문에 12지파형이 깨어지게 되어 모세가 이루어 놓은 발판을 잃어버렸고, 야곱이 이루어 놓은 12형제를 중심한 발판을 잃어버리게 되어 12제자만을 데리고 다니셨던 것입니다.
제2이스라엘의 창설자로 선봉에 서야 할 예수님이셨으나, 야곱의 열두 아들과 같은 12사도가 깨져 나가니 다시 거슬러 올라가 노아가정의 형태를 취해야겠기에 노아의 세 아들형인 세 제자를 데리고 갯세마네 동산을 헤매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 제자마저 예수님과 하나되지 못하자, 예수님은 타락 당시의 아담 입장으로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처지였음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이것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 또 예수님이 무지한 인류를 위하여 기도하던 것과 예수님의 서러운 심정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계를 주관하는 주인공으로서 전세계 인류에게 하나님의 심정을 소개해야 할 예수님, 만물을 주관해야 할 예수님이었는데 그는 세례 요한으로부터 배척받고 자신의 가정으로부터 배척받았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세계적인 발판을 잃어버리게 되었고, 민족적인 발판을 잃어버리게 된 불쌍한 모습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타락한 해와로 말미암아 신부를 잃어버린 아담과 같은 입장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타락하지 않은 참부모를 잃어버린 인류 앞에 참부모로 오신 예수님이셨는데 가정을 잃어버렸고, 자녀로 세웠던 세 제자까지 잃어버림으로써 예수님은 해와를 잃어버린 아담의 입장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신랑 신부라는 명사를 남겨 놓으시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안타까운 사정에 처해 있었던 예수님이셨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세계를 통합할 수 있는 말씀과 이스라엘 12지파를 대신한 세계적인 제2이스라엘인 기독교 신자를 통합할 수 있는 말씀과 천륜 앞에 설 수 있는 개인적인 법도와 사회윤리와 가정의 제도에 관한 말씀을 다 전하지 못하고 가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가장 큰 서러움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인간들은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더구나 하나님을 믿는다는 기독교인들마저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들을 바라보시는 하나님께서 어찌 탄식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 당시에 유대민족을 제2이스라엘로 축복하여 제2의 가나안을 건설하려던 하나님의 계획이 깨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서러움은 더욱 가중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 땅 위에 다시 오신다면 어디의 누구에게로 오실 것인가? 예수님은 타락한 인간세계에 단번에 찾아오실 수 없습니다. 복귀의 노정을 거쳐서 오셔야 하는 예수님이기 때문에 노아가정과 아담가정의 단계를 넘어 오셔야 합니다. 이런 예수님의 사정을 맡아서 세계까지 나가야 할 역사적인 운명의 과정이 오늘날 신앙자들의 배후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신앙인들은 이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것을 모르면 예수를 잘 믿는다 하더라도 그분을 맞을 길이 없는 것입니다.
다시 오시는 주님은 세계의 주인공으로 오십니다. 그러나 다시 오시는 주님에게 먼저 하늘을 중심삼은 가정이 있어야 되고, 종족이 있어야 되고, 민족과 국가가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 세계의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칙입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세계를 복귀하려 하시는 주님의 이념을 대신하고자 할 진대는 세계적인 발판이 될 수 있는 예수를 중심삼은 하늘가정이 있는가 하는 것을 먼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예수를 중심한 하늘종족, 하늘교단을 갖추고 민족적인 관념을 초월할 수 있는 기대를 조성하여 세계적인 발판을 이루어 놓지 않고는 예수가 이 땅에 다시 오셔도 슬픔의 예수가 되지 않는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습니까? 역사적인 사실이 이것을 입증하고 있음을 여러분은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천지의 운세는 여러분 자신들을 거쳐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알든지 모르든지, 민족이 알든지 모르든지, 나라야 망하든지 흥하든지간에 온갖 곡절의 노정이 여러분을 거쳐가고 있습니다.
예수 이후 2천년 역사 과정을 섭리하신 하나님의 뜻은 어떤 것이었던가. 예수님을 통하여 전체의 천적인 이념을 대신할 수 있는 중심을 세우고 이 땅 위에 참사랑을 실현시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인해 그러한 뜻이 완결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 뜻을 완결시켜야 할 사명이 이 땅의 인간에게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여러분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예수님을 잃어버린 연고로 하늘 편에 속한 참사람, 참만물을 소유할 수 있는 참지도자를 다시 보내달라고 하늘 앞에 호소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제2아담격으로 오신 예수님을 죽인 연고로 인간은 또다시 하나님의 심중에 감추어져 있는 말씀을 갖고 오시는 주님, 천국의 인격을 대표하여 천국을 건설하려 오시는 주님, 만물을 주관할 수 있는 자격을 갖고 오시는 주님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인류의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인간을 세워 섭리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체면을 세울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이 이 땅 위에 다시 오신다 해도 우리는 그분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 다음에 여러분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예수님을 받들어야 할 인간들이 예수님을 돌아가시게 하여 제2차로 타락한 입장에 빠짐으로 말미암아 또다시 하나님을 버리고, 천국을 버리고, 참사랑을 버리고, 만우주를 버렸다는 것을 명심해서 항상 주님을 믿고 받들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믿는 신도들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의 사랑을 통하여 천국을 건설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천국은 어디서부터 비롯되는 것인가? 그것은 예수님의 사랑과 인격을 알고 예수님이 주관할 수 있는 만물의 주관권을 아는 데서부터 비롯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인격, 만물의 주관권을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을 찾을 수 없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이후 2천년 역사를 회고하여 보게 되면 수많은 기독교 신자들이 하나님을 다시 찾기 위한 운동을 해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극심하게 박해하던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하기에 이르렀고, 급기야는 로마에 교황청을 세워 교황권을 중심한 정치를 하게 되었고, 나아가 봉건사회를 형성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중세에 들어와 다시 교황청이 부패하여 인본주의 사상이 기독교에 들어옴으로 인해 중세 이후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을 잃어버리는 일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즉 많은 사람들이 인본주의 사상으로 흘러가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계몽사조를 거쳐 결국 유물사관(唯物史觀)이 나왔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이성을 중시하는 합리주의와 경험주의 철학사상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계는 지금 유물사관과 자본주의 사조로 인해 물질의 가치를 중시하는 물질만능주의가 성행하는 세계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뜻을 대신하여 전체의 섭리를 통합하는 사명을 짊어지고 제2의 아담격으로 이 땅에 오셨는데 우리의 선조들이 예수님을 배척함으로 말미암아 죄악의 역사노정을 벗어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찾지 못했고 참인간을 찾지 못했으며 참물질을 찾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참사람을 찾으려고 허덕여도 찾을 길이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중세의 봉건사회형을 누가 붕괴시켰던가? 하늘이 붕괴시켰습니다. 하나님은 로마 교황청을 중심삼고 뜻을 이루려 하셨는데 그 교황청이 부패되어 가니 그것을 깨뜨리신 것입니다. 하늘을 믿는 사람들이 오히려 천륜의 뜻을 배반하게 되니 인본주의 사상을 세워 놓고 그들을 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는 섭리의 기점을 잃지 않기 위해서 하늘을 염려하는 한 사람, 루터를 중심삼고 종교개혁을 벌였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한편은 깨뜨리고 한편은 세우는 섭리를 해 나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기독교를 통해 제2의 이스라엘형을 거치게 하고 문예부흥을 거쳐 일대 혼란을 겪게 한 다음, 인본주의적 이성철학을 중심삼은 계몽사조를 대적해 나설 수 있는 섭리를 해 나오셨던 것입니다.
계몽주의자인 볼테르나 루소, 몽테스키외 같은 사람들은 기독교가 파멸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독일에서 청렴한 인물들이 나와 신비성을 고취하면서 하나님의 실제적인 내적 체험을 주장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영국을 거쳐 요한 웨슬레 형제의 부흥운동을 일으키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퀘이커파를 일으켜 신비적인 내적 체험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한편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잊어버리고 인간을 사랑하는 이성도 잊어버리고 물질을 사랑할 줄만 아는 유물사조적(唯物思潮的)인 주의(主義)에까지 도달하였습니다. 타락한 인간일지라도 반드시 본연의 입장으로 돌아가야 되기 때문에 어느 때이든지간에 그 물질을 중심한 사조를 칠 때가 오게 됩니다.
오늘날은 신을 중심하던 중세도 지나갔고, 이성철학을 중심삼고 지배되던 시대도 사라졌으며, 18세기에 성립된 유물사조를 중심삼은 유물론적인 이념도 빛을 잃어가고 있는 상태입니다. 앞으로의 세계는 인간이 물질을 사랑해도 만족을 얻을 수 없고, 과거의 역사적인 사람의 가르침을 따른다 해도 현실의 문제를 타개할 수 없는 그런 비참한 세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물질적인 생산력을 통하여 사회의 번영을 지향하는 공산주의의 이념을 가지고는 도저히 세계를 지배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21세기를 계기로 하여 우리 앞에는 원자력시대를 맞이하여 물질문명의 세계적인 지배를 파괴시키는 시대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어떤 시대가 올 것인가? 사랑을 찾아 즐기는 시대가 찾아옵니다. 서로 위해 주는 시대가 우리 앞에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다가올 사랑의 시대에 우주만상 앞에 떳떳이 가슴을 펴고 나가기 위하여 역사적인 모든 가치를 종합하고 통합시킬 수 있는 중심적인 존재로서 사명을 감당하는 현명한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타락한 아담 해와의 노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인고로 개개인이 제2의 아담의 시대적인 사명을 계승해야 되는데 그럴 수 있는 자격을 갖추지 못하고 있음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나아가 오늘날의 역사는 인간의 타락으로 잃어버린 하나님과 참사람과 참물질을 찾아 나온 역사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아담의 타락은 어떻게 해서 된 것인가?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은, 좌우 옆으로 들어오는 불의한 사랑의 유혹에 끌려 들어가 천륜을 파괴한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데에는 에덴동산에서 벌어졌던 천사장적인 형태가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정도(正道) 아닌 것이 정도의 행세를 하는 시대를 거치고 있으니 이에 사랑의 혼란시대를 모면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반대경로를 거쳐서 거꾸로 역사해 나오고 있습니다. 6천년 역사를 오늘의 우리가 돌이켜보면, 구약시대는 물질을 찾는 시대, 즉 물질을 제물삼아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시대였고, 신약시대는 참다운 아담격인 예수님을 제물로 바치던 시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성약시대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 앞에 실체 제물이 되어 온 만물을 통합할 수 있는 기준을 넘어서서 사랑을 지배하는 시대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외적인 면은 쳐서 없애 버리고 내적인 면을 찾아 세우는 형태로 하나님의 섭리는 나타난다는 것을 오늘날 기독교 신자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역사의 외적인 면은 치고 내적인 면은 포섭하시는 하나님의 내적 섭리의 내용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6천년 동안 섭리해 나오시는 것은 무엇을 찾기 위해서입니까? 하나님과 인간과 맺은 영원한 약속의 말씀을 찾기 위한 것입니다. 그 말씀은 참다운 부자의 관계를 맺어서 하나되자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원리를 통하여 인간의 타락은 비법적인 불륜한 정조관계가 원인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끝날에 처한 여러분은 주의하여야 합니다. 어느 남자든지 까딱 잘못하면 두 여인을 상대하는 입장에 서게 되면, 여자는 여기에 휩쓸려 들어가기 쉽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수습하여 막아낼 것인가. 이 핸들을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 이것이 문제입니다.
무한동력을 중심한 물질문명의 시대는 오고 있습니다. 맨 처음 인간에게는 생식시대(生食時代)가 있었고, 그 다음에는 화식시대(火食時代)를 거쳤고, 다음에는 수식시대(水食時代), 즉 물의 영양을 취할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앞으로는 과학적 식량으로 우리의 건강을 넉넉히 보존할 수 있는 시대가 찾아올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노력이 필요한 시대는 넘어선다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그때에 남아지는 것은 예술 문화일 것이며, 우리는 미와 사랑의 길을 찾아 헤매일 것입니다. 그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인류가 천리법도를 벗어나서 그 길을 찾아 헤맨다면 결국엔 어디로 갈 것이며, 어떻게 될 것인가? 이것은 오늘날 종교를 숭상하는 사람들이 염려해야 될 일입니다.
현대의 문명은 세계의 진상을 알지 못하고 허덕이는 종교가 필요 없는 단계에까지 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종교는 인간들이 아니 갈래야 아니 갈 수 없는, 그러한 길을 인류 앞에 제시해야 할 사명을 짊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2천년 역사를 회고해 볼 때 수많은 혁명이 있었습니다. 인류는 그 혁명의 과정을 거치면서 하나의 통일세계를 지향해 나오고 있음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인간에게 지·정·의가 있는 것을 생각할 때, 인간을 지으시고 온 천지 만물의 주도적 주인공으로 계신 창조주께서는 더욱 고차적인 원리법도를 통할 수 있는 지·정·의의 주체이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역사를 살펴보면 개인으로부터 가정, 가정으로부터 종족, 종족으로부터 민족, 국가, 세계로 확대되어 가고 있습니다. 또한 그와 같은 외적인 형을 거쳐 내적인 사상 및 관념을 우선으로 하는 시대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인간 개체에 있어서도 외적인 면을 거쳐 내적인 정신면으로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신이 주도적이니 이 정신을 통일하여야만 하나의 가치성을 찾아 세울 수 있고, 그렇게 되면 통일적인 목적을 향하여 올바른 행로를 걸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계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세계에도 세계인식이 있기 때문에 하나의 귀일점인 정신통일을 위해 세계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세계 구조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민주와 공산이 대립하여 싸우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때는 영계와 천주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천주의 통일이념을 실현하고자 하시기 때문에, 영계의 이념과 지상의 이념이 상충되어 부딪치게 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지상에서도 지금까지 우세한 민족과 열등민족이 싸움의 역사 과정을 거쳐 하나의 세계관을 중심삼고 하나의 세계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앞으로 영계의 모든 영들이 전부 지상에 재림하는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지상에서는 큰 혼란과 온갖 상충과 싸움이 벌어질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여러분들은 이러한 것들이 하늘이 바라시는 방향으로 귀결될 수 있게 하는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하나님의 심정과 천륜의 이념을 대신할 수 있는 자격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역사의 종국에 바라시는 소망인데, 오늘날의 기독교로서는 그 소망을 이루실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역사 과정을 거쳐오면서 수많은 혁명이 있었지만 인간의 정적(情的)인 문제를 놓고 혁명한 일은 없었습니다. 사회와 국가의 모든 구성 체제는 시대를 거쳐오면서 혁명의 요소가 싹틀 때 그것을 몰아내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으로부터 혁명을 당하여 다 깨져 나갔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부자간의 정, 부부간의 정, 형제간의 정만은 아직까지 혁명을 당해 본 적이 없습니다. 어떠한 윤리나 도덕, 어떤 철학이나 이념은 혁명과정을 거쳐왔지만 정적인 사랑의 문제에 있어서는 혁명을 일으키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여러분은 그 정적인 문제를 갖고 하늘 앞에 설 수 있는 참다운 부모가 되었습니까? 참다운 부부가 되었습니까? 참다운 자녀를 갖고 있습니까? 그렇지 못하다 할진대는 천륜에 걸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이 땅 위에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와서 그 사랑을 소개하며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맺은 그 사랑의 인연은 오늘날까지 그 어느 누구도 깨뜨리지 못했습니다. 이 땅 위에 사탄의 세력이 아무리 강하다 할지라도 그것을 못 깨뜨렸다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너희는 나의 신부요 나의 형제’라고 한 그것을 깨뜨리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기반이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는 역사 과정을 통해서 발전해 나온 것입니다. 그리하여 기독교는 천국의 중추가 될 수 있고 하나의 인격을 통한 천정을 대신할 수 있는 가정형태를 이루기 위해 역사 과정을 통하여 발전해 나온 것입니다.
아무리 막강한 권세를 가지고 있고, 학박사의 지위를 가졌다 할지라도 하늘과의 정적인 인연을 갖지 못한 사람은 불쌍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원칙을 아는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그것을 주장하지 않았다면 인간세계는 어떻게 되었을 것인가. 암흑의 세계로 변했을 것입니다. 불신과 투쟁, 반목과 불화의 세계로 변모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땅 위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인간의 정적인 분야가 하나되어 새로운 실증적인 사랑의 세계가 건설되어야 비로소 화평의 시대가 도래할 것입니다. 따라서 이 우주 종말시대에 처한 여러분들은 이성적인 문제에 있어서 자기를 중심삼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리고 나보다는 가정을 더 사랑하고 가정보다도 민족·국가·세계를 더 사랑하고, 세계보다도 천주를 더 사랑하겠다는 마음을 지녀야 되겠습니다. 지금까지 역사 과정에서 찾아 나온 모든 인간적인 경륜과 천적인 경륜이 이 종말시대에 백 퍼센트 결부될 수 있어야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자신이 지금까지 지녔던 모든 정적인 문제를 버리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희소식이 들려오기를 바랄 때가 되었습니다.
2천년 전 예수님께서 누구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라고 하신 그 말씀이 이 종말시대에 다시 나타나야 되겠습니다. 인간의 이성을 존중하던 시대를 거치고 물질의 시대도 거쳤으니 이제는 사랑의 시대가 도래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인간의 정적인 문제, 사랑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하늘의 말씀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한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인간들은 역사 과정을 통하여 플러스적인 이념만을 추구해 왔는데 그래서는 아니 됩니다. 하늘은 플러스요 인간은 마이너스와 같습니다. 그래서 종교에서는 인간이 교만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또 자기를 사랑해서도 안 된다고 합니다. 자기의 모든 것을 부정하고 나아가 자기의 몸도 치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늘이 플러스이므로 인간은 마이너스가 되어야 서로 주고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플러스와 플러스는 상반입니다. 서로 반발하고 밀어내는 것입니다. 사탄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플러스 입장인데도 마이너스 입장에 서지 않고 플러스 입장에 서겠다는 것, 이것이 바로 사탄인 것입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도의 생활에서는 금욕주의를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탄 편, 즉 악에 속한 플러스적인 면을 쳐서 마이너스적인 입장으로 전환시키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몸을 치라는 것은 몸이 마이너스적인 입장에 서야 할 것이었는데 플러스 입장에 서려고 하므로 이것을 쳐서 마이너스적인 입장으로 돌리어 하늘(+)과 완전히 주고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도 자신의 몸을 위주로 한 모든 조건들을 제거하지 않으면 완전한 플러스인 하늘 앞에 완전한 마이너스로 설 수 없습니다.
온 천주는 그러한 존재가 이 땅 위에 어서 속히 나타나 하나님과 영원한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랑의 한 날이 오기를 고대하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아버님이 바라시는 승리의 한 날이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은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최후의 승리를 위해 오늘 이 시간까지 아버님께서 피 맺힌 싸움의 노정을 걸어오신 것을 생각할 때에 저희들은 몸둘 바를 모르겠사옵나이다.
저희들은 진리로 무장하여 아버지의 뜻을 옹위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선의 뜻을 펴기 위해서는 나의 모든 것을 다 바쳐 싸워 나가야 하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저희들의 마음 몸이 동원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이 땅에 널려 있는 성도들과 하늘의 천군천사들이 동원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아버님께 영광을 돌려 드릴 수 있는 날이 어서 속히 임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한 날을 찾기 위하여 우리의 선조들이 역사 과정을 거쳐오면서 지치기도 하고 괴로움을 당하기도 하면서 사무치게 주의 때를 기다려 왔사오나, 우리 인간들로 말미암아 아직까지 이루어지지 못한 서러움이 땅과 하늘에 사무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나이다.
부족한 저희들, 보잘것없는 저희들, 무능력한 저희들을 아버지께서 부르시어 소망하신 바 그 영광의 날을 찾기 위한 피 맺힌 곡절이 있었다는 것을 저희가 알게 하시옵고, 뜻을 위하여 마음과 몸을 다 바쳐 싸울 수 있는 각오와 결심을 갖게 해 주신 아버지의 은사 앞에 감사드리옵니다.
아버님, 이 시간 저희의 마음을 다시 성별시켜서 저희들을 제물로 받으시옵고, 사탄의 참소조건을 완전히 분립시켜 아버님만이 취하시고 아버님만이 자랑 할 수 있는 아들딸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제 원하는 뜻을 대하여 저희들이 마음과 몸으로 충성을 다하고, 저희의 마음으로 이 시간 새로운 은사를 느끼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몸과 마음에 넘쳐흐르는 아버지의 영광의 은사를 체휼하도록, 아버님,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아버님의 말씀을 전하고자 하오니 같이하여 주셔서 전하는 자의 마음이나 받는 자의 마음이 둘이 되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하늘의 심정과 통할 수 있는 이 한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지금까지 저희들이 생활했던 내용과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을 아버지 앞에 내놓고 부복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모순된 인간의 모순된 지식이 아버지의 진리를 대신할 수 없는 것을 자인한다 할진대는, 자신의 모든 것을 아버지 앞에 내놓고, 스스로 아버지의 은사에 사무치게 허락하여 주시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사탄이 일절 틈타지 않는 이 시간 되게 하여 주옵시고, 허락하신 은사를 대할 수 있는 귀한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오면서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하늘을 향하는 결심을 잃지 말자’ 이런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모인 여러분 가운데는 마음속에 어떤 결심을 가지고 있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또 사람 앞에서 자신 있게 ‘나의 결심이 옳다.’고 주장하며 나설 수 있는 사람들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지금 여러분은 자신의 결심이 누구를 위한 결심인가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즉 여러분이 갖고 있는 결심이 자신만을 위한 결심인가, 여러분과 민족, 혹은 세계,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까지도 위할 수 있는 결심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품은 결심이 하늘을 위한 것인가 아닌가 하는 것을 생각해 봐야 할 시기가 여러분 앞에 당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갖고 있는 결심은 천태만상입니다. 갑이 가진 결심과 을이 가진 결심이 다르고, 남자가 가진 결심과 여자가 가진 결심이 다릅니다. 또 이 민족과 저 민족이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각기 다른 결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각자가 주장하고 각자가 갖고 있는 결심이 최후에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인가. 자신을 세워 놓고 냉철히 반문하게 될 때 자포자기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임을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끝날에 처한 오늘날 우리들, 또는 땅 위에 살고 있는 인류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결심이 민족을 움직일 수 있는 결심이냐, 세계를 움직일 수 있는 결심이냐, 나아가 천상에 있는 천천만 성도들을 움직일 수 있는 결심이냐,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까지 움직일 수 있는 결심이냐라고 반문하게 될 때에 그렇지 못하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나, 그러한 우리들에게 하늘의 바람이 있다 할진대는, 우리들이 우리의 마음속에 무엇을 간직하고, 무엇을 소망하고 나아가야 할 것인가 하는 이 문제를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여기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역사 과정에 수많은 사람들이 어떤 주의(主義)를 갖고 그것을 주장하여 왔으나 그들이 주장한 주의가 오늘날 우리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어떤 요소를 갖지 못하고 있다 할진대는 그들의 주장, 즉 역사 과정에 왔다 갔던 수많은 성현 선철들이 주장하여 왔던 주의는 우리와 하등의 관계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인류역사는 무엇을 세우기 위하여 발전하여 왔던가. 이것은 인류의 행복을 위하여, 혹은 인류의 영원한 이념을 세우기 위하여 발전해 나왔음을, 하늘이 있다는 사실을 안다 할진대는 부정 못할 것입니다. 하늘이 있는 한 인간에게 행복의 동산이 어떻다는 것을 소개해야 하고, 인간으로 하여금 영원한 희락의 동산을 건설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 책임을 완수하기 위하여 오늘날 역사 과정을 섭리하여 온 하나님이라 할진대 역사의 종말단계에 처해 있는 우리들과는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늘이 동하면 자신도 동하고 하늘이 정하면 자신도 정할 수 있는 기준을 마음 바탕 위에 갖추지 못한 사람은 역사를 유린하는 자요, 하나님의 소망을 배반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온 우주의 운행의 법도는 천륜의 원칙을 따르게 되어 있고, 그 운행 속에 전체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섭리가 있다 할진대 하나님도 그 섭리의 운행 법도를 통하여야 되고, 또 인류도 그 운행법도를 거쳐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내 한 자신을 민족 앞에 세워 놓고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이 민족을 대하여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며, 이 민족을 각성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결심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여러분들은 생각해 본 일이 있습니까? 없다고 한다면 여러분은 민족을 천륜 앞으로 인도하는 것을 가로막는 입장에 서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들의 마음에 비통한 것이 있다면, 이 민족이 어차피 가야 할 길을 가기 위하여 하나의 이념을 중심하고 단결된 마음으로 투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 천륜을 대하여 온 세계 인류가 단결된 입장에 서지 못한 것이 하늘의 서러움이요, 인류의 서러움인 것을 여러분이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여러분은 자신이 어떠한 입장에 서 있는가 하는 것을 냉철히 분석하고 비판해 보아야 되겠습니다. 하늘은 여러분이 민족 앞에 자신 있게 나설 수 있고, 자신 있게 천륜을 대할 수 있는 마음의 터가 되어 있느냐 하는 것을 우리들에게 묻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대하여 최대의 소망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이 무엇이겠는가? 먼저는 이 땅에서 창조의 뜻을 성취시키겠다는 하나님의 결심을 인간들이 이루어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창조하기 전에 결심한 바가 있었고 그 결심에 의하여 만물을 창조하셨는데, 그 결심이 아직까지 이 피조세계에서 실현되지 못한 연고로 하나님은 슬픔의 역사를 거쳐 왔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이제 이러한 사실을 아는 우리들이 우주를 샅샅이 뒤져서라도 찾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결심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찾아서 이루어 드려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품으신 서러움과 슬픔을 풀어 드려야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뜻을 중심삼고 일대 혁명과정에 서야겠다는 결심과 주의 주장과 각오를 가져야 되겠습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슬픔을 해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알지 못하는 가운데 당신이 결심하신 뜻을 이 땅의 인간들에게 알려 주기 위한 수고의 역사 과정을 걸어 오셨으니 그것이 지금까지의 섭리역사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이 결심을 인간을 대신한 구세주가 땅 위에 나타내어야 하고, 모든 악의 세력과 대항하고 그들을 격멸시켜야 합니다. 그러한 사명을 수행하는 대표적인 사람이 이 땅 위에 나타나지 않는다 할진대는 하나님의 뜻은 성취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결심과 인간의 소망의 기준이 어느 한 날 연결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향하시는 그 뜻을 인간을 대신하여 이 땅 위에 성취하기 위한 하나의 중심존재로 보내진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께서 4천 년 동안 수고하여 모든 어려운 환경에서 싸움의 길을 걷게 하셨으니, 그런 길을 간 분이 바로 우리가 구세주로 믿고 있는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시조 아담 해와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성취되지 못한 하나님의 창조의 결심을 복귀하기 위하여 예수님은 오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이 속된 인간 세상에 제2아담격 인물로 세우시어 하나님의 결심을 만우주 앞에 나타내시기 위해 예수님을 이 땅 위에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런 연고로 예수님은 ‘나는 하나님과 한 몸’이라고 주장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말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는 조건이 조성되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또 예수님은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야. 이것을 반대하고 막을지라도 내가 느끼고 결심하고 있는 이 내용들은 아무도 빼앗을 수 없다.’고 말씀하실 정도로 자부심을 가지셨습니다. 즉 예수는 생명의 손상을 각오하고 이것을 과감하게 공표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결심을 오늘날 믿고 있는 수많은 신자에게 나타내는 것이 예수님이 2천년 동안 수고하신 목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시기 위해 6천년간의 기나긴 세월을 쉬지 않고 수고해 오셨다는 것을 오늘날 땅 위에 있는 우리들이 알아야 합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하늘을 대하고 나섰다 할진대는, 하나님의 뜻을 대신하여 결심하고 나섰던 그리스도의 성상을 여러분 자신의 성상으로 바꾸어 느낀 때가 있었는가를 하늘은 반문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30여 평생 동안 말로 다하기 힘든 고난의 삶을 사시다가 최후에는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비운의 생애를 보내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가졌던 중심만은 어떠한 무엇으로도 결코 깨뜨릴 수 없는 확고한 것으로 간직했습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은 하늘 대한 결심을 오늘날 우리들의 마음속에까지 심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죽음이 오더라도, 따르고 있는 제자들이 배반하더라도, 택한 민족이 배반하고 교회가 배반하더라도 그는 창세 전부터 아버지가 지니신 결심의 내용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변할 수 없는 입장을 지켰던 것입니다.
그러한 결심의 주인공이 땅 위의 인간 앞에 무엇을 세워 주기 위하여 왔느냐? 그것은 자신이 품고 있는 하나님의 창세 전 결심을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인계해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역사 과정에 나타난 수많은 성도들 가운데 예수가 가졌던 결심을 품고 하나님의 뜻을 이뤄 드리기 위해 싸운 사람이 몇 명이나 되었는가? 이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하나님의 슬픔은 불신자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의 이름을 의지하여 믿는다는 성도들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하늘을 대신한 확고한 결심이 없는 성도들을 보고 하나님은 슬퍼하신다는 것을 우리들은 깨닫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 위에서 자신의 결심을 알아주는 하나의 상대자를 찾지 못하였기 때문에 뜻을 완전히 이루지 못한 채 돌아가셨습니다. 이 세상에 예수님을 대신하고 하나님을 대신하는 결심을 가진 사람이 있었던들, 하나님은 그의 심정을 통하여 직접적인 권한을 행사하심으로써 통일의 불길을 붙일 수 있었을 것이었는데, 그러한 결심의 소유자가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지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고로 예수에게는 부활한 후에 이 땅 위에 왔던 목적을 대신할 수 있는 결심의 주인공을 땅 위에 다시 세워야 할 책임이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사명을 인계시킨 한 분을 보냈습니다. 그분이 누구였느냐 하면 인간 앞에 나타난 성신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하늘의 결심과 예수의 결심은 누구에게서 열매 맺을 것이냐? 하나님은 성신을 통하여 당신의 결심을 인간 앞에 재차 나타내게 됩니다. 이것을 뜻의 주인공 앞에 전하고, 그 주인공은 신부 앞에 전함으로써 이를 발판으로 그 뜻의 주인공이 이 땅에 임재하여 하나의 가정으로 옮기고, 가정을 중심삼은 친족, 친족을 중심삼은 민족, 민족을 중심삼은 국가, 국가를 중심삼은 세계에까지 옮겨 놓아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을 오늘날 인류는 모르고 있습니다. 오늘날 믿는 신도들조차도 이것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를 믿고 성신을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갈 수 있다고 자신하여 나설 수 있습니까? 어떠한 고난과 희생이 있다 할지라도 또 어떠한 유혹이 따른다 할지라도 그것을 박차고 밀어낼 수 있는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한 결심과 예수와 성신을 대신할 수 있는 결심을 가졌습니까? 이러한 질문에 나는 예수를 대신하는 심정과 결심을 소유하고 있다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되지 못한다 할진대, 예수를 배반하고 예수를 팔던 이스라엘 민족보다도 더 엄한 심판을 피치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뜻을 받들지 못한 민족이 있었기 때문에 성신을 수고시켰고, 성신의 뜻을 받들지 못한 제2의 이스라엘형인 오늘날의 기독신자들은 수많은 사도들을 수고시켰으며, 비단 사도뿐이 아니고 우리의 수많은 선조들을 수고시켰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수고를 시키고 있는 오늘날 우리들이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이 지니셨던 심정과 결심을 소유하지 못한다 할진대는 하나님 앞에 체면을 세워 설 수 없는 것이요, 예수와 성신 앞에서도 체면을 세워 설 수 없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때까지 수많은 희생의 제단을 쌓아 놓은 성도들 앞에서도 체면을 세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책임 못한 사람들이 자신을 개탄하는 때가 온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하늘은 오늘날 끝날을 당하여 우리에게 요구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과 성신도 우리를 향하여 호소하시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실체가 되고, 아버지의 결심을 소유한 사람이 되어 이것을 유린하는 사탄을 박멸시킬 수 있는 승리의 주인공이 될 것을 하나님은 이 시간도 고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의 뼈와 살에 사무치게 체휼해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하늘이 지니신 결심을 저에게 상속해 주시옵소서, 피 뿌리는 제단의 과정을 거치면서도 참아 나왔던 사도의 결심을 저에게 주시옵소서.’라고 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고서 천당 가겠다고 하니 그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우리는 재인식하지 않으면 안 될 때가 왔습니다.
현하 기독교를 각성시켜야 할 책임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의 결심과 예수님과 성신의 결심과 내가 연하여 하나의 실체가 되어 나타난다 할진대는 역사를 지배할 수 있는 권한을 행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앞에 읽은 성경말씀에는 소돔 고모라에 심판을 내려야 하는 하나님의 애달픈 심정이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도성을 향하여 심판하려 하셨을 때에 사랑하는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롯으로 하여금 심판을 피하게 해 주셨습니다. 롯이 잘나서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을 피하게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사랑하셨기에 아무 수고한 공적이 없는 조카에게까지 심판을 피할 수 있게 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롯의 가정 전체가 하나님의 심정을 알았느냐 하면 그렇지 못했습니다.
롯과 그의 두 딸은 하나님께서 피하라는 곳으로 피하였으나 롯의 처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가 하늘 뜻에 대한 결심이나 뜻을 대한 염려 또는 하늘을 대한 두려움보다도 자기들이 살던 가정집과 그 환경을 그리워하여 돌아선 것이 소돔 고모라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수밖에 없는 조건이 되었던 것입니다.
인간들에게는 반드시 걸어야 할 길이 있는데 그 길이 어떤 길이냐 하면 천륜의 뜻을 따라 어떠한 어려움도 각오하고 걷지 않으면 안 되는 길입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들이 걸어야 할 운명길인 것입니다.
롯의 처도 자기에게 속한 모든 것을 개의치 않고 나설 수 있는 결심이 서 있지 못하여 죽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 나선 자기의 남편을 하나님 대신자로 믿고 남편이 하라는 대로 하였던들 그녀는 결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섭리역사를 경륜해 나오시는 과정에 있어서도, 하나님은 당신의 심정을 대신한 사람을 세워 당신을 믿지 못하겠거든 그 사람의 말을 듣고서라도 결심할 수 있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조차 못하는 사람은 심판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보면 타락한 종족인 연고로 겪는 서글픔이 있습니다. 크나큰 하나님의 뜻을 대하여 최선을 다하고 싶고, 나의 몸 마음을 제물삼아 새로운 결심을 하고 행동에 옮기고 싶은 마음은 암암리에 느끼고 있으되 그 결심을 단행할 수 없는 까닭은 우리가 타락의 종족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아담 해와는 자신들을 창조해 놓고 ‘따먹지 말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그 말씀과 자신들은 뗄래야 뗄 수 없는 하나의 결합체라고 생각하면서 변치 않는 결심을 갖고 모든 만물을 주관하여야 할 책임이 자신들에게 있음을 실감했던들 타락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담 해와가 타락하게 된 것은 해와가 아담과 하나되지 못하였기 때문이요, 또 아담이 하나님과 하나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각자는 갈래갈래로 분립되었고, 자의자행·자유자재의 환경에서 자기 멋대로 행동하게 되어 창조이상의 동산을 망쳐 버렸던 것입니다.
끝날에도 역시 하나님을 중심한 결심을 세워 놓지 못하고 자유주의를 부르짖다가는 자유 진영도 깨어져 나갑니다. 천지의 이치가 그렇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신해야 할 아담이 어느 누가 뜻을 어기도록 유혹하더라도 자신은 절대로 그 뜻을 어기지 않겠다는 결심을 세워 해와를 주관하고 천사를 주관할 수 있었던들 타락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먼저 타락한 해와가 아무리 자신을 농락하려 해도 아담이 그 유혹의 말을 듣지 않았다면 아담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일 아담이 타락하지 않았으면 해와는 얼마든지 다시 창조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늘을 배반한 연고로 천륜과 멀어지게 되었고, 허락하신 말씀과 뜻을 자기의 마음에 하나의 중심으로 세우지 못한 연고로 아담은 아담대로, 해와는 해와대로, 천사장은 천사장대로 갈라지고 말았습니다.
이런 종족이 된 우리는 오늘 믿었던 것을 내일 믿지 못하게 되고, 이 시대에 믿는 것을 다음 세기에 믿지 못하게 되고, 다음 세기에 믿을 수 있는 것은 그 다음 끝날에는 믿을 수 없는 환경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염려가 무엇입니까? 하늘의 슬픔이 무엇입니까? ‘내가 6천년 동안 모진 역경과 고난의 과정을 거치면서 수고하여 이렇게 너 하나를 찾아와서 이제야 너를 만났으니 안식할 수 있겠구나.’ 하시면서 에덴동산에서 천사장에게 말씀하시지 못했던 그 내용을 믿고 안심하는 자리에서 말씀해 주실 수 있고, 당신의 심경을 토로하실 수 있는 하나의 사람이 없는 것이 하나님의 슬픔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들은 아버지를 찾고 있고,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이 안식할 수 있는 환경을 못 갖고 있습니다. 이런 입장에 있는 우리들은 가면 갈수록 마음의 조급함을 피할 수 없고, 아무리 잘났다고 뽐내고 있어도 끝날이 다가오면 올수록 마음의 불안감을 모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국가적으로, 그리고 세계적으로 어려운 입장에 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종말시대에 엄습해 오는 이 공포와 불안을 밀어낼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 있을 것인가. 인간을 대신하여 장담하고 나서지 않고 천륜을 대신하여 장담하고 나설 수 있는 결심의 주인공은 어디에 있을 것인가. 하늘은 이런 사람을 찾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이 아담가정을 잃어버림으로써 아담과 통할 수 있는 창조 본연의 가정을 잃어버렸고, 동시에 아담과 통할 수 있는 친족과 아담의 혈족을 대신할 수 있는 민족과 아담을 중심삼은 국민과 아담을 중심삼은 천국 백성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이 잃어버린 모든 것을 다시 찾아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민족 전체를 찾고 세계까지 찾기 위하여 먼저 한 개인으로부터 시작하여 가정·사회를 찾아 세우려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터로 하여 민족형에서 세계형까지, 나아가서 이 세계 전체를 찾기 위하여 하나님은 섭리를 해 오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일면에서는 싸우시고, 또 어떤 곳에서는 희생당하시면서 역사 과정을 통해 이것을 찾아나오셨습니다. 그런 이면에 개인적인 형태를 갖추어 아담을 대신한 가정·친척·민족·국가·세계를 이 지상에 건설하여 나오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담가정을 잃어버린 이 하나의 사실이 아담 일신만의 서러움이 아니요, 아담의 혈통을 통하여 천추만대의 전인류에게까지 미치는 서러움임을 여러분은 생활권 내에서 뼈저리게 느끼고 있을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안일을 바라고 안락을 누리려 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이런 안일과 안락된 생활이 계속 유지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공포의 관문을 앞에 놓고 이것을 넘어가야 할 처지에 있음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 시기를 소위 ‘심판의 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공포를 없애 주기 위해서 택한 한 사람을 세우신 후 그를 중심한 민족을 세우고, 그 민족을 다시 세계의 선두에 세우시기 위하여 오늘날까지 애달파하시면서 섭리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앞으로 하늘나라를 건설할 수 있는 민족은 큰 민족이 아닙니다. 오늘날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민족도 아닙니다. 천국 주권을 회복하여 제2천국을 건설하여야 할 민족은 큰 민족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난데없는 곳에서 은밀히 천국을 건설하는 작업을 하시고 있습니다.
그런 연고로 하나님의 뜻을 배반하는 사람들은 잘 먹고 잘 사는 데 하나님의 뜻을 받들고 나아가는 사람은 오히려 못 먹고 못 사는 이런 반대 현상이 벌어지고, 인류의 투쟁역사는 오늘날까지 계승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한 심정을 잃어버린 인간이기 때문에 다시 하나님이 믿을 수 있는 입장으로 복귀되기 위해서는 그런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6천년 동안 수고하신 그 고난이 일시에 나에게 부닥쳐 오더라도 이것을 타고 넘을 수 있는 자신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내 생명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이것 앞에 굴하지 않는 결심의 주인공이 되어 하늘이 대표하여 내세울 수 있는 한 존재로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럴 수 있는 세계적인 대표로 예수를 보내시었고, 그러한 사람을 세우기 위하여 수많은 우리 선조들은 고생의 길을 갔습니다. 아담이 잃어버린 가정을 찾기 위하여 아담 대신 불신의 마음을 가졌던 그 종족과 민족을 박차고 하늘을 대하여 믿음의 결심을 가진 하나의 사람이 택함을 받았으니 그 사람이 노아입니다.
노아는 120년 동안 하늘이 끌고 끌고 또 끌고 다녀도 변치 않는 결심의 마음을 가졌었는데 이것이 아담보다 훌륭하다는 것입니다. 아담은 미성년 일 때에 타락하였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아담이 하나님을 배반 하였던 연고로 하나님이 다시 믿으실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아담 이상의 수고를 해야 되며 몇백 배 수고하는 경우를 당한다 할지라도 이것을 뚫고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노아는 자기의 일신, 자기의 가족, 자기의 친척, 자기의 민족, 나아가서 자기와 인연된 어떠한 세계 만상이 반대할지라도 개의치 않고 한 순간의 결심을 끝까지 지켜 가면서 아버지를 붙들고 120년 생애기간 동안 싸워 나온 것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그때의 인류 앞에 세워질 수 있는 조건이 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홍수심판을 모면하여 하나님의 은사권 내에 있던 노아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지니고 있던 그 노아의 마음을 인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노아 자신도 이러한 사실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노아가 120년 동안 수고하고 그 애달프고 억울한 노정을 거쳐오면서 천륜을 염려하던 그 마음을 대신하여 노아의 손을 붙들고 ‘아버지, 무엇이든지 저에게 명령하여 주시옵소서.’라고 할 수 있는 하나의 아들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120년 동안 수고하여 마련한 제단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대하여 성심을 다하겠다는 결심을 가진 노아인 것을 노아의 여덟 식구가 알았다 할진대는, 죽든지 살든지 노아 앞에 절대복종하여 아버지가 죽으면 자기도 죽고, 아버지가 좋아하면 자기도 좋아하는 입장에 섰어야 했습니다. 그랬다면 다른 대수롭지 않은 내적 조건이 저끄러졌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중심하여 심정을 결속하게 되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입니다. 함은 아버지인 노아의 말을 들어야 했습니다. 형제들이 무슨 말을 하더라도 아버지의 뜻에 합당치 않다면 듣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가 들어야 할 말은 안 듣고 듣지 않아야 할 말은 들었기 때문에 노아의 120년 수고는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아브라함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브라함이 고향과 자기 소유를 다 버리고 갈대아 우르의 황막한 광야를 향하여 길을 떠나는 것 역시 수월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안 후 아브라함은 남모르는 결심을 품고 정든 고향산천과 자기의 친족도 다 버리고 가나안 땅을 찾아 나섰던 것입니다.
그 후 아브라함이 고향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 하나를 염려하던 그 마음을 끝까지 버리지 않고 온 정력을 다하여 제단을 지켰던들 여기에 실수란 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제물을 드리면서 자기가 어마어마한 입장에 있음을 알고 자기에게 있는 믿음의 전부와 있는 모든 정력을 다 기울여 하나님과 일체될 수 있는 결심을 가지고 나서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작은 제물이로되 자기의 이념을 세워 전체의 천륜의 뜻을 대신하는 입장에서 하나님을 대해 지성스러운 마음으로 제물을 드렸던들, 거기서 실수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제물에 실수한 아브라함이 다시 하나님의 뜻을 인계받기 위해서 제물 대신 이삭헌제가 필요하였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브라함의 마음과 하나될 수 있는 아들의 모습을 찾아야 하는 것이요, 노아의 마음과 하나될 수 있는 아들의 모습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자신의 마음과 자기 아들의 마음이 하나로 결실될 수 있는 입장을 찾아 나서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이삭을 모리아산상의 제단에 올려놓고 칼로 찌르려고 하는 마당에서 죽음의 제물을 대신할 수 있다는 하늘의 인정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삭도 아버지 앞에 복종하였고, 아브라함도 아버지 앞에 복종하여 그들은 천륜이 지향하는 방향으로 향할 수 있었습니다. 그후 이삭을 거쳐 야곱 때에 이르러서 야곱을 중심삼고 비로소 아담가정을 대신하고 노아가정을 대신할 수 있는 기준을 찾아 세웠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비로소 삼대(三代)의 친족 형태를 갖춘 70인이 가나안 땅을 떠나 애급으로 들어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들을 거쳐 손자까지 땅 위에 세 형태의 친족적인 형태를 갖춘 토대로 말미암아 그들은 사탄세계에 파송되어 애급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개인으로부터 가정, 그리고 친족적인 환경을 세워 놓은 후에도 그들은 평안한 길을 걸어간 것이 아닙니다. 친족적인 70문도를 대신하는 그들은 또다시 민족을 조성하기 위한 민족적인 싸움을 전개하며 하나님을 중심한 민족을 형성해야 할 시련의 무대에 올라섰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궁중 4백년의 고역기간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 고역기간에 택한 이스라엘 민족은, 옛날 자기의 선조들이 하나님을 원망하며 하나님의 뜻을 배반하였던 것을 후회하고, 다시 하나님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돌아갔어야 했습니다. 그런 마음이 강하면 강할수록 이스라엘 백성은 극심한 애급에서의 고역을 이겨내고 단결하여 60만을 몽땅 이끌고 가나안 복지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쉽게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애급에서 고난을 받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해야 했던 모세도 바로궁중에서 40년 동안 남이 모르는 심적인 고민을 하면서 민족을 사랑하는 민족정신에 불타 올랐던 것입니다. 그런데 애급 사람을 때려 죽인 것이 드디어 광야에서 처량한 목자의 생활을 하게 되는 동기가 되었습니다. 그러한 입장에 처한 모세는 애급 궁중의 호화로왔던 모든 영광을 다 버리고 도리어 미디안 땅에서의 고역생활이 닥친다 하더라도 변치 않는 마음을 품고서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보다도 하나님의 뜻을 염려하는 결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광야의 온갖 풍우에 시달리는 서글픔을 맛본다 할지라도 그것을 다 밀어제치고, 민족으로부터 몰림을 받을지라도 하나님을 붙들었던 모세의 변치 않는 결심이 있었던 연고로, 민족이 어려운 사정에 처하고 모세가 그런 고난의 환경에 들어갔을지라도 민족이 단결될 수 있게 되었던 것이요, 하늘은 모세를 세워 섭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민족을 다시 택한 국가로 세우기 위해서는 세계적인 시련 앞에 그 민족을 몰아넣어 놓고 공격전을 전개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의 한 방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중심한 하나의 국가 건설을 위하여 오시는 메시아는 택한 이스라엘 민족 앞에 반대받는 것입니다. 복귀 과정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담가정에 있어서 아담을 따라야 할 해와가 아담을 쳤고, 노아를 따라야 할 노아의 아들이 노아를 쳤고, 이스라엘민족 60만 대중이 모세를 따라야 할 것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모세를 미디안 광야로 쫓아냈습니다. 이러한 역사 과정을 거쳐왔던 연고로 예수님이 주인공으로 오게 될 때에 택한 백성은 예수 앞에 신부격이었으나 오히려 이들이 예수를 반박하였다는 것입니다.
천륜의 법도를 아시는 예수님은 이스라엘 민족한테 몰렸고, 유대교단으로 부터 몰렸습니다. 자기의 종족 앞에 몰렸을뿐만 아니라, 하늘이 택한 세례 요한 일당한테 몰리고, 따르고 있던 사도들로부터 몰렸습니다. 하늘땅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세 제자로부터 몰렸습니다. 그렇지만 이들을 붙들어서 하늘 앞에 끌어 주어야 할 예수의 사정이 있다는 것을 누가 알았느냐. 아담이 예수와 같은 사정에 처해서 해와의 갖은 흉악한 궤휼과 유혹이 있었다 할지라도 이를 꺾어야 할 입장에 섰던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의 입장도 민족을 찾아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 앞에서 몰리어 광야의 서글픈 생활을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가 민족 앞에 몰리게 되면 세계 앞에도 몰려야 할 입장에 놓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만일 이렇게 ‘민족이 배반하고 교단이 배반할지라도 내가 가진 아버지에 대한 일편단심을 어느 누가 빼앗아가랴. 내가 세운 결심 앞에는 하늘이 세웠던 세례 요한이 배반한다 하더라도 문제가 아니요, 나를 따르고 있는 제자가 배반하더라도 문제가 아니야. 더 나아가서는 내 몸뚱이가 문제가 안된다고 하는 이런 결심이 있었기에 서글픈 일이 있어도 서글퍼할 수 없었고 슬픔의 자리에서도 슬픔의 표정을 지을 수 없는 복귀의 운명을 책임 졌던 예수의 심정을 오늘날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늘을 대한 하나의 결심을 갖고 재물됨을 만우주 앞에 내세워 인간이 반박해도 깨지지 않고, 영계에 있는 천천만 성도와 오늘날 공중권세를 잡고 있는 사탄이 총동원하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이런 결심이 있었기에 여기에서부터 역사적인 전환점이 벌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리하여 영·육 아울러 실체적인 승리의 터전이 세계적으로 벌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부활한 예수를 중심으로 제2의 결심을 제자들에게 부여하여 영적 가나안복귀이념을 세워 나온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은 세계 인류를 위해서 이 땅에 찾아왔습니다. 세계의 사람들은 예수 앞에서는 아들의 입장, 즉 상대적인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해와가 아담을 유린하고,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를 쫓아내고, 제물이 아브라함을 참소하고, 노아의 아들이 노아를 쫓아내던 것과 마찬가지로 세계의 기독교는 가는 곳곳마다 세계 도처에서 몰림받는 처참한 노정을 모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에 널려 있는 제2이스라엘의 축복이 이스라엘을 중심삼고 성취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제2이스라엘로 택한 기독교인을 세워서 이 원한을 풀고 하늘과 땅을 복귀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천주복귀의 뜻을 성취하기 위하여 하나의 중심인물, 하나의 중심민족, 하나의 중심국가를 찾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6천년 동안 수고하면서 뜻을 대하여 나왔지만 예수가 죽은 연고로 노아도, 아브라함도, 야곱도, 모세도 실패한 형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한 분의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섭리가 완성을 보지 못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오늘날 낙원에 있는 영인들은 잃어버린 제1이스라엘을 회복하려 하셨던 예수님의 뜻을 위한 발판을 닦고, 더욱 회복의 뜻을 영적으로 성취한 형의 영인들인 것입니다. 택한 이스라엘 민족이 원래 제1이스라엘이 되어야 할 것이었는데 제1이스라엘이 깨짐으로 말미암아 제2이스라엘형이 영적 복귀의 과정에 머물러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잃어버림으로 맺혀진 하나님의 원한은 오늘날 제2이스라엘형에 속한 영계의 영인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풀어지는 것입니다. 제1이스라엘을 택하신 하나님의 뜻은 예수님이 이뤄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에게 맺혀진 원한의 심정을 풀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제2이스라엘을 동원하고 영계의 영인들을 동원하여 제2이스라엘 회복운동에 박차를 가하려는 때가 끝날임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세계에 널려 있는 기독교인들은 어떤 시대에 처하여 있는가? 모세의 광야 40년 노정에 맞먹는 시대에 처해 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석판을 받기 위해 기도하던 기간에 맞먹으며, 예수가 승천한 이후 2천년의 역사 과정은 모세의 40일 금식기간에 맞먹고 40년 광야기간에 맞먹는 것입니다. 또 모세가 없어진 것을 보고 이스라엘 민족이 안타까워하는 형상에 맞먹는 것입니다.
이 기독교는 다시 나타나는 모세를 맞아 무엇을 하여야 할 것인가? 광야의 이스라엘 민족은 옛날 구약말씀, 모세 십계명의 말씀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었는데 받아들이지 못하여 환희의 심정을 갖지 못한 민족이 되었습니다. 모세에게 있어서는 민족이 모세의 배반자가 되었지만 우리는 하늘이 원하는 길을 찾아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제3이스라엘의 자리를 찾아 승리하여 세계 가나안 복귀의 이념을 성취해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새로운 말씀을 받아들일 각오를 가져야 합니다.
모세의 결심이 60만 대중의 결심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세계에 널려 있는 제2이스라엘의 축복을 받아야 할 이 민족과 혹은 세계인류와 크리스천들은 예수의 결심을 인계받지 못했으니, 모세 때 광야에서 사탄이 이스라엘의 60만 대중을 농락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 이 시대도 그런 시대에 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라보게 될 때에, 오늘날 내 몸에 피 살이 뛰고 있고 내 마음에 무엇인가를 느끼는 여러분이라 할진대는, 여러분 자신들이 최선을 다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를 만나기 전까지는 먹는 것도 잊어버리고, 입는 것도 잊어버리고, 잠자는 것도 잊어버려야 할 것이었는데 그러지 못함으로써 이스라엘이 모세를 잃어버렸고 모든 뜻이 깨어져 나갔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예수 이후 2천년간은 광야시대입니다. 예수를 잃어버린 기독교 신자들은 먹는 것도 잊어버리고, 입는 것도 잊어버리고, 억울함도 분함도 참고 참아 이를 악물고 예수님을 만날 때까지 일찍이 모세의 발자취를 사수하지 못한 것을 반대로 탕감복귀하여 우리는 예수의 발자취를 사수하는 이스라엘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입장에 처해 있는 오늘날 기독교 신자들은 자기들에게 이런 사명이 지워져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제 때가 가까워 오니 이때를 준비하여야 할 과정에 있어서 택한 민족을 이방 나라에 넘겨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배워서 알고 있는 것과 같이 이스라엘 민족이 메시아 강림준비시대를 맞기 위해서 예수님 오시기 6세기 전에 준비하는 기간으로 바빌로니아 포로시대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재강림 6세기 전부터 문예부흥운동을 중심삼아 기독교를 파괴시키는 세계적인 공세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 싸움의 노정을 오늘날 세계 기독교 신자들은 어떻게 대처해야 하겠습니까? 이것을 막아내는 책임을 다 하기 위해서 우리들이 먼저 각성을 해야 합니다.
14세기에서 16세기에 이르는 시대에 있어서 문예부흥운동이 유발된 것은, 사람들이 옛날 희랍의 고대문명을 연구하고 새로운 복귀이념을 갖추려고 나섰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혁신적인 문화의 일면을 일으켜 놓았던 것처럼 오늘날 끝날을 맞이한 성도들도 역사를 회고하여 2천년 전 예수님의 심정을 체휼할 수 있어야 하고, 또한 타락 전 아담 해와와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하여 마음을 혁신하지 않으면 안 될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뜻을 대하기 직전의 아담 해와에게 천사장의 공격이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노아에게도, 모세에게도, 예수에게도, 뜻이 나타나야 할 끝날 성도들에게도 이런 공격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탄의 공격입니다. 먼저는 물질적인 공격이 있게 되고 그 다음에는 정적인 공격시대가 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대상이 오늘날 우리 앞에 전개되고 있습니다. 이런 기독교역사가 어느 국가, 어느 민족을 통해서 진전될 때 그 노정은 공식적인 원리원칙으로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세계가 기독교를 외적으로 반박하는 이런 시대가 됐습니다. 이 시대에는 옛날 이스라엘 민족을 반대하던 애급 민족형이 나타나고, 제2이스라엘 민족 앞에 모세와 같은 인물이 나타나게 될 때 민족이 단결하여 그를 몰아내는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종말시대의 신앙자들은 전부 다 어떻게 될 것이뇨? 우리의 주위에서는 애급 땅에서와 같은 일들이 벌어질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애급고역시대를 방불하는 상태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상적으로나 실제적으로, 혹은 신앙적으로 모든 면에서 침범당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상태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한 때 택한 선민의 지조를 갖고서 자기들끼리 붙안고 외부로부터 오는 서글픔을 밀어내기 위한 이스라엘의 단결운동이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도 이런 운동이 없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교파에 의존하는 자나 자기 교회의 연륜을 자랑하는 자는 가룟 유다의 일파가 될 것입니다. 모세의 명에 따라 가나안 정탐을 하고 돌아온 12지파 중에서 여호수아·갈렙을 반대한 10지파가 나왔던 것처럼 오늘날 그와 같은 형태가 벌어지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하겠습니까? 이러한 때가 우리의 목전에 당도한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제 자신의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나서야 합니다. 또 소돔 고모라가 받은 것과 같은 심판을 피하기 위해서는 롯의 가정이 걸은 발자취를 우리의 거울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야곱이 하란 땅에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올 때도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나섰듯이 우리의 발걸음도 야곱과 같은 발걸음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이스라엘 민족이 애급 땅을 떠날 때 모든 미련을 박차고 나섰듯이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할 것이요, 예수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십자가의 길을 홀로 넘어간 것과 같이 우리도 그런 길을 가겠다는 결심을 가지고 나가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각오와 결심을 모든 만물만상 앞에 내세울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사람이 있습니까. 하늘은 그런 자격을 갖춘 사람을 찾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세계에 널려 있는 신교가 구교에게 몰림을 받던 과정은 불쌍한 모세의 과정을 되풀이하는 것과 같은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광야와 같은 이 세상을 개척해야 할 새로운 사명자가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기독교로서 만족하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의 생활에서 모세의 신변을 보호해 주지 못했던 것과 마찬 가지로 신교의 출현 때도 그러했습니다. 신교가 나왔으나 광야생활의 형태에서 인정받지 못하였던 것이 모세의 사정과 마찬가지였습니다. 끝날에도 그러한 형태로서 하나님의 뜻이 진전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모세와 예수는 인간적으로 보면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모세와 예수를 생각하게 될 때에 여러분은 피 살이 통하는 것 같은 느낌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에 모세와 예수가 몸둘 곳을 모르고 허덕이며 걷던 걸음을 생각하는 일조차 없다 할진대는, 모세의 40일 시내산 금식기도 때 흘린 애달픈 서러움의 눈물을 팔아먹은 천륜의 배역자와 같은 것이요, 광야에서 쓰러진 이스라엘 민족과 같이 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의 서글픈 심정을 우리들이 체휼하여 제1이스라엘과 제2이스라엘이 이루지 못한 것을 성취해야 하겠습니다. 이런 것을 성취하러 오신 예수님의 서글픈 심정과 발걸음을 여러분은 아십니까? 오늘날 하나님이 우리들을 세워 놓고 바라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주적인 이념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영계의 영인들이여! 내가 그대들의 소원을 풀어 주겠다. 지상에 있는 만인간들이여! 그대들의 제물이 되겠다. 공중의 권세를 잡은 사탄들이여! 그대들을 포로로 하여서 하늘의 심판대에 끌고 올라가 참소하겠다.’라는 결심을 갖고 시대가 변하든, 세계가 변하든, 사람의 주의 주장이 모두 변하든 나는 변할 수 없다고 했던 예수님의 절개와 충절을 오늘날 여러분이 가져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시간성을 넘고 생애의 이념을 넘어서 천륜의 이념에 통할 수 있는 심적인 각오와 결심의 터가 되어 있지 않는다 할진대는, 하나님 앞에 무조건 순복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심판을 면치 못한다는 것입니다.
시내산에 올라가는 모세 앞에 이스라엘 민족이 무조건 순복하였던들 그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것입니다. 또 예수님 때에도 그러했을 것이고, 오늘날 끝날에도 그럴 것입니다. 여러분 앞길에는 생애 전체의 가치를 결정해야 할 시간이 찾아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죽어서까지라도 하나님의 뜻 하나만을 책임지고 가겠다는 마음으로 하늘을 대신하여 나서 주기를 아버지도 바라고, 예수와 성신도 바라고, 우리의 선조들도 바라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골수에 사무치게 느끼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앞에 놓고 우리 자신들을 돌이켜 보면, 나를 중심삼은 내 몸뚱이가 원수요 나를 중심삼은 내 가정이 원수입니다. 노아에게 있어서는 가정이 원수였고, 야곱의 가정에 있어서는 종족이 원수였으며, 그 다음 국가 형태에 있어서는 세계가 원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역사노정을 걸어오셨고, 지금도 수많은 고비고비를 돌고 돌면서, 어떤 중심인물이 쓰러지면 다른 사람을 세워서라도 또 거듭해야 하는 사정에 처해 있는데, 여러분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체면과 위신을 세울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어떠한 개인의 힘만 가지고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세계에 분산되어서 하나의 민족 형태를 찾아 세우는 포위작전을 해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개인에서부터 가정과 종족과 민족을 찾아 세워 하나님을 중심한 국가 형태를 갖추어야 할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전세계 기독교가 12지파를 재창건하여야 할 시기가 도래하고 있습니다. 광야에 널려 있던 이스라엘 민족에 반열이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세계 기독교인들이 반열을 편성하여 사탄에 대한 공격전을 전개해야 할 시대가 오고 있습니다. 이것을 모르고 있는 크리스천들은 광야의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가 인도하는 방향을 알지 못하던 것과 같은 입장에 서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들은 손에 손을 붙들고 가야 할 공동운명에 놓여 있습니다. 12 사도 가운데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은 12사 도를 깨뜨려 버리고 예수를 죽였던 것과 마찬가지의 운명에 놓이게 될 수 도 있는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 교회 식구들은 모두가 그대 의 결심이 내 결심이요, 그대의 마음이 내 마음이라고 하면서 뜻을 위해 하나될 수 있는 반열적인 형태를 갖추어 나가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홍해를 건너고 광야를 지나고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 7족을 무찔러야 할 우리의 싸움의 터가 남아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따라서 이제 우리들은 역사적인 사명을 지니고 이것을 탕감복귀하여 나가야 합니다. 이제까지의 제단에서는 하나님이 ‘바쳐라.’ 했으나 이제는 하나님께 ‘받으시옵소서.’ 할 수 있는 제물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천륜의 결심이 내적 외적인 결심의 실체로 나타나서 이 결심을 중심삼고 가정과 겨루어 그 가정을 복귀하여야 되며, 교회를 각성시키고, 국가 민족을 각성시켜 복귀해야 되겠습니다. 이런 마당에서 내가 살고 있는 가정, 사회, 국가, 교회가 그리고 내가 바라보고 소망하고 있는 이 세계가 우리를 원수시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입니다.
오늘날 여러분 자신들은 가정과 사회에서 핍박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핍박을 이겼다고 해서 즐거워하지 마십시오. 그 후 광야시대에 여러 가지 어려움에 휩쓸리게 되고 공격전이 벌어지게 될 때, 그 싸움터에서 여러분이 쓰러져서는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천륜의 운세는 한번 맞고 넘어 가야 할 때에 있는 연고로 세계적인 복귀 과정에서 기독교를 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외적으로 때리고 내적으로 때리는 이런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제2이스라엘을 동원하는 시대가 오기 때문에 영계가 동원되고 있습니다. 하늘에 있는 영계가 동원하여 세계적인 제2이스라엘을 세계적으로 널려 놓고 제3이스라엘 민족을 건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허덕이면서 남이 모르는 것을, 다른 나라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을, 어느 누가 상상치도 못한 생명의 양식을 먹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여러분들은 이런 시대에 하늘이 내려 주는 만나 양식과 메추라기 양식을 먹을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 앞으로는 메마르는 때가 오기 때문에 만나와 메추라기를 찾아 헤맬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이제 복귀동산을 건설하여야 할 때가 되었기 때문에 천신만고 내 몸이 찢기고 내 뼈가 가루가 되는 한이 있다 할지라도 천륜의 이 한 뜻을 위하여, ‘아버지여! 영계에 있는 천천만 성도들이여! 역사하시옵소서.’라고 할 수 있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영계를 동원하지 못하였지만 우리는 영계를 동원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에게는 영계의 협조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식구들은 영계의 영인들을 부르면 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신령역사가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내 한 자체를 세워 내 가정과 내 민족과 세계를 동원해야 하는 사명, 또 사탄을 아버지 앞에 굴복시켜야 할 최후의 사명이 우리에게 짊어지어져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언제 내 한 개체에 대한 시험, 가정에 대한 시험, 교회에 대한 시험, 사회에 대한 시험을 이겼느냐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험을 이기고야 말겠다는 마음의 각오를 가져야 천적인 사명을 완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호수아·갈렙에게 강하고 담대하라고 했듯이 이제 우리에게도 강하고 담대하라고 할 때가 왔습니다. 여러분은 손에 손을 붙들고 마음에 마음을 합하여 사탄과 싸워 승리를 쟁취해야 할 때가 온다는 것을 명심하고 강하고 담대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아버님! 이 시간 저희의 마음을 살피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저희의 몸을 헤아리게 허락하여 주시오며, 마음과 몸이 아버지의 심정에 어릴 수 있는 아들딸 되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천상의 모든 성도들은 섭리의 뜻을 받들어 나오면서 타락의 자손된 것을 놓고 아버지 앞에 머리를 들지 못하며 민망해 한다는 것을 저희들 알고 있사옵니다. 땅 위의 저희들, 아버지 앞에 머리를 숙이고 아버지의 마음을 지니기 위해 노력해야 할 저희들이오니, 저희의 마음속에 뻔뻔스러움이 없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저희의 몸가짐이 아버지께 불충됨이 없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앞에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사망의 손길에 붙들린 사람임을 깨닫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앞에 가까이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 없사옵고, 자신의 죄를 스스로 직고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을 느끼게 되옵니다. 이것이 천성을 향하여 간다고 하는 저희들의 모습이오나, 아버지의 뜻 앞에서 자기 몸둘 바를 알지 못하고 몸 가질 바를 알지 못하는 불충스러운 아들딸들 되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스스로 죄인인 것을 인정하여 아버지의 긍휼과 사랑의 손길을 기다리며, 머리를 숙여 아버지의 심정을 그리워할 수 있는 간절한 마음을 갖게 허락 하여 주시옵고, 저희에게 혹 어두운 죄악의 뿌리가 남아 있다면, 아버님이여! 그것을 제거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시간, 모인 사람은 여럿이지만 하나의 마음이 되게 허락하여 주옵고, 몸은 여럿일지라도 모두가 하나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저희들 이 시간 분부하시는 아버지의 명령에 의하여 새로운 길을 개척해 나갈 수 있게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새로운 권능을 받아 새로운 행동을 일으킬 수 있는 하늘의 원천적인 힘을 지니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이 시간 하늘이 보호하여 주시옵고, 사탄이 일절 틈타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갖고 있는 어떠한 이론이나 저희들이 알고 있는 어떠한 지식·주의·주장·관념이 있다면, 아버님, 이 시간 그것을 다 잊어버리고 오직 아버지를 그리워할 수 있는 동심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저희의 몸 마음에 지닌 모든 것을 제단 앞에 묵묵히 바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저희들을 새로운 말씀으로 다시 빚어 만들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오며, 아버지의 사랑의 품에 안기게 되는 직접적인 재창조의 역사가 여기에 나타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이제 말씀을 전하고자 원하오니 전하는 자의 마음이나 받는 자의 마음이 둘이 되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전하는 자와 받는 자의 마음이 간격이 크면 클수록 사탄이 넘볼 수 있는 기회가 많은 것을 알고 있사오니, 아버님, 이 시간 아버지의 안타까운 심정을 체휼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아버지의 염려를 풀어 드리고 아버지께 기쁨과 영광을 돌려 드릴 수 있는 아버지의 참다운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모인 전체 위에 아버지의 긍휼의 손길이 더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오면서,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니다. 아멘.
오늘 이 시간은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슬픔을 체휼하는 자가 되자’라는 제목으로 잠깐 동안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이 땅 위에서 제아무리 영광을 누리고 행복스럽게 산다 하는 사람일지라도 그 자신을 깊이 살펴보면 슬픔이 없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런 입장은 개인에게 있어서는 물론이요, 가정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더 나아가 이념을 세워 사회와 국가·세계·천지를 창조하시고 그 뜻이 이루어지는 한 날을 바라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 본체에까지도 슬픔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마음에 슬픔이 있다면 그 슬픔은 여러분 개체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자기의 환경을 넘어 전체의 환경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느껴야 됩니다.
오늘의 나는 지극히 미미한 존재이지만 내가 느끼고 있는 이 슬픔은 나에게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민족을 넘고 세계와 천륜과 천성을 넘어 창조주 본체에까지 연결되어 있다는 이 어마어마한 사실을 여러분 자신이 느끼지 않으면 안 될 때가 되었습니다.
자신이 당하는 슬픔은 민족과 세계, 더 나아가서는 하늘땅을 대신하여 당하는 슬픔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는 슬프다는 그 사실만을 놓고 보면 지극히 불쌍한 것 같지만 하늘 앞에 가까운 사람이라는 것을 우리들이 느껴야 할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일신의 슬픔을 혼자만의 힘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허덕여 왔지만 아직까지 이것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하늘이 있고, 그 하늘과 나와의 인연이 있고, 또한 역사를 통해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 할진대는 내 개체에 머물러 있는 이 슬픔을 역사 과정을 대신한 슬픔으로, 또는 역사를 섭리해 오신 하나님의 슬픔으로 여겨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슬픈 사람이지만 많은 친구를 갖고 있는 것이요, 그는 외로운 개체이지만 역사적인 배경을 가진 사람이요, 현실적인 모든 환경을 대신하는 사람이며, 미래의 천륜의 뜻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러한 자기의 입장을 찾아야 할 때가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이제 여러분의 마음 깊이 슬픔이 있다면 그 슬픔은 어느 한계에 머무는 슬픔으로 끝날 것인가? 여러분의 슬픔이 자극되어 땅이 서러워하고 민족이 서러워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아가 온 세계가 서러워할 수 있고, 하나님이 함께 서러워할 수 있는 그 한 날이 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개체의 서러움은 여러분을 위한 서러움으로 머물러 있고, 나아가 인류 앞에 방해요소가 되고 세계와 천륜 앞에 방해요소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서러움을 같은 처지와 같은 환경에서 하늘과 땅 앞에 반응시킬 수 있는 서러움으로 이 땅 위에 나타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보다 더 큰 서러움을 지니신 하나님의 심정이 세계로부터 국가·민족·가정을 거쳐 내 개체에까지 미쳐져 체휼될 수 있는 길이 막혀 버렸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들에게 최대의 서러움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내가 서러워할 때 하늘이 같이 서러워해 주지 못하는 입장과, 내가 서러워 할 때 가정 전체가 서러워하지 못하고 땅 위에 온 인류가 같이 서러워하지 못하는 입장에 있는 것이 무엇보다 큰 슬픔임을 오늘날 우리들은 느끼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그러면 내가 서러워할 때, 하늘과 땅 인류 전체가 서러워하는 슬픔을 어떻게 해야 느낄 수 있을 것인가? 나 한 개체를 중심 삼고 서러워하면 도저히 그러한 서러움의 입장을 찾아갈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가 서러워한다 할진대는 나를 떠나서 가정을 위하여 서러워할 줄 알아야 되겠고, 가정의 차원을 넘어 민족과 세계, 나아가 하늘을 위하여 서러워할 줄 아는 마음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의 서러움이 세계로부터 국가를 거치고 가정을 거쳐 나에게까지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복귀섭리를 해 나오시면서 먼저 인간에게 무엇을 믿게 하셨는가? 즉 재창조의 역사를 출발하시기 전에 먼저 무엇을 우리에게 체휼케 하셨는가? 그것은 기쁨이 아닙니다.
먼저는 우리 일신을 대하여 서러워하는 마음이 우러나오게 하셨습니다. 그 다음에 자기 가정·사회·종족·국가·세계, 더 나아가서는 천륜을 위하여 서러워하는 마음이 솟아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야만 우리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칙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의 진리는 슬픔의 눈물을 흘리면서 나아가도록 되어 있고 회개의 과정을 거쳐 나가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창세 이후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심중에 맺혀진 이 서러운 곡절은 어느 날에는 풀릴 것인가?
이것이 온 인류와 온 천주, 또는 천륜이 해결하여야 할 숙명의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에게 맺혀져 있는 이 서러움의 뿌리를 뽑아 버리기 전에는 인간 자체의 근본적인 서러움의 해결책은 마련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피조만물을 창조하시고 지금까지 6천년 섭리역사를 경륜해 나왔지만, 그 서러움을 풀어 버리고 온 피조세계 앞에 영광의 본체로 나타나시는 기쁨의 한 날을 가져보지 못하셨습니다. 이런 하늘의 서글픈 사정이 있음을 여러분은 느껴야 합니다.
우리가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심정을 느끼려 하는데 주위의 악의 요소와 사회 환경, 혹은 생활 환경은 몸으로 하여금 마음과 반대의 경로를 취하도록 하여 마음과 몸이 상반된 입장에 처하는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우리 일신을 두고 볼 때, 서러운 면도 둘이 있는 것을 체휼할 것입니다. 선을 흠모하며 서러워하는 것과 자기 일신의 욕망을 위하여 서러워하는 서러움이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의 욕망을 위하여 서러워하는 서러움이 있는 동시에 몸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서러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차피 서러움을 느껴야 하는 타락한 인간이라면, 우리는 어떤 서러움을 느끼며 이 타락의 권을 탈출해 나가야 할 것인가? 우리는 하나님의 심정에까지 미칠 수 있는 서러움을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모든 서러움의 권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땅 위에 살아가는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 편에 서서 하나님의 사정을 통하고 하나님의 심정을 통하여 하나님과 같이 서러워하는 환경을 갖출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서러움을 대신할 수 있는 예수님 한 분을 인간 가운데 보내시고 인간으로 하여금 그분을 믿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인간이 사탄세계의 서러움과 관계맺지 못하도록 하고, 그들을 서러움을 느끼시는 하나님의 상대적인 위치에까지 올려놓기 위해 오셨던 분이 바로 여러분이 믿고 있는 예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들이 믿고 있는 예수님께서는 이 땅 위에 무엇을 갖고 오셨던가? 사랑을 갖고 오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사랑을 세우기 위해서 서러움의 고개를 넘어야만 했었습니다. 그런데 이 서러움의 고개를 넘지 못한 입장에서 예수님은 30여년의 생애노정을 마치셨습니다. 예수님은 남이 모르는 심정을 품고 민족을 위하여 눈물을 흘렸고 유대교와 하늘을 위하여 염려하며 눈물을 지으셨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타락한 인간이 예수의 심정을 알고자 하더라도 그냥 그대로는 알 수 없습니다. 4천년이라는 기나긴 역사 속에 깃들어 있는 모든 죄악의 요소를 헤치고 나간 예수의 심정과 뜻과 그의 사명을 모두 내가 책임졌다는 입장에 서서 예수님을 주(主)로 모실 때, 비로소 예수의 서러움을 느끼는 입장에 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냥 그대로 믿고 있던 유대교 신자, 혹은 그냥 그대로 선민권을 자랑하고 있던 이스라엘 민족은 예수의 서러움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입장에 놓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 위에 오셔서 서러워한 것은 하나님 대신 서러워한 것이요, 기도한 것은 자기 일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 설 수 있는 이념을 대신하여 기도하였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탄식의 심정을 풀어 드리고, 하나님의 사랑의 동산을 성취하기 위한 심정을 갖추어 기도하였는데도 불구하고 그 당시 사람들 중에는 그 기도의 음성을 알아들을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복음(신약)의 중심을 어느 누구도 깨닫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품고 왔던 서러움을 인간 앞에 옮겨 줌으로써 인간이 예수의 서러움을 품고 하나님 대신 서러워할 줄 아는 환경을 만들어 놓아야 할 것이었는데, 이 전체적인 뜻이 인간들에게 옮겨지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은 천상에 가셔서도 서러워하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오셨던 목적이 성취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서러움은 아직까지도 섭리역사노정에 남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하나님의 서러운 심정을 체휼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서러운 심정을 체휼해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체휼한 서러운 심정을 갖고 하늘을 염려할 줄 아는 참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자기 일신을 중심삼고 서러워하는 서러움은 가졌지만, 천상의 인연을 대신하고 우리들이 소생할 수 있으며 복귀의 노정을 개척할 수 있는 서러움은 아직까지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세상적인 자기 개체의 모든 서러움을 다 포기하고 천상의 서러움과 하나님의 서러움을 느끼면서 눈물짓는 시간을 갖는다면 여러분에게서부터 새로운 소망의 출발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서러움을 붙들고 남모르는 눈물을 지으며 만민을 대신하여 그 서러움을 해원할 수 있는 하나의 참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 사람이 있는 곳을 중심삼고 땅의 운세가 움직인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제 하나님을 대신하여 서러워하지 못하는 민족은 망하게 됩니다. 하늘을 대신하여 서러워하지 못하는 교회·가정·사회·국가는 망한다는 것입니다. 이 나라도 상하가 일치하여 위정자로부터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천륜의 제단을 붙들고 눈물지으며 서러워하는 민족이 되었던들 오늘날과 같이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들이 새로이 각성할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눈물의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참다운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하게 될 때, 눈물 없이는 민족과 국가 그리고 세계와 하늘을 바라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 서야 할 인간인데도 불구하고 감동의 눈물을 흘리지 않고 있으며 나아가 하늘을 대하여 뻔뻔스럽고 천륜을 대하여 경거망동 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진정한 친구간의 정분도 눈물을 조건으로 하여 맺어지거늘, 타락한 인간들이 천륜의 심정을 체휼하는 이 마당에 있어서 어찌 눈물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예수를 믿고 죄인된 자기 자신을 깨닫는 자리에서는 무한한 눈물을 흘리는 한 때가 있어야 합니다. 거기에서는 자기의 몸둘 곳을 모를 것이며 천만번 벌을 받아 마땅함을 느낄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 앞에 머리를 들지 못하고 앉아 있어도 자기 위치를 잡지 못할 정도의 민망함을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진정으로 탄식하며 눈물 흘리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 개인의 가는 길이 막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 뜻을 붙들고 염려하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의 가정이 가는 길도 막힌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 살고 있는 타락한 인간들은 서러운 마음이 더하면 더할수록 서로 분열돼 나가고 있습니다. 자기를 중심삼고 서러워하면 악인들의 습성인 분열이 이루어지고, 선을 위하여 서러워하면 분열된 것이 합해지는 것입니다. 즉 갈라진 마음과 몸이 하나되어 천륜과의 통일의 합일점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찌하여 비참한 운명의 노정을 거쳐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인가?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면서 살 수 있는 이상동산을 잃어버림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무한한 슬픔을 안겨 드렸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이 하나님께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슬픔을 안겨 드렸기 때문에 그러한 노정을 거쳐 나가지 않으면 안 될 곡절이 남아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이 시대는 어떠한 때인가? 오늘날 이 시대는 끝날이기 때문에 개인을 위해 눈물 흘릴 때는 지나갔고, 가정을 위하여 눈물 흘릴 때도 지나갔습니다. 또한 나라를 위하여 눈물 흘릴 때도 지나갔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세계를 위하여 눈물을 흘릴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여러분은 세계를 위하여 눈물을 흘려야 될 뿐만 아니라 나아가 천륜과 영계를 위하여 눈물을 흘려야 되겠고, 하늘을 위하여 눈물을 흘릴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기쁨을 나의 기쁨으로, 하나님의 애달픔을 나의 애달픔으로 느껴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사람이 되어야만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아버지의 아들로, 온 세계를 주관할 수 있는 자격자로 나설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런 세계적인 서러움의 고개를 넘어서기 위해서 지금까지 개인이 희생되고, 교회와 사회가 희생되어 나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때는 세계를 위해 우리가 희생되는 과정을 거쳐야 할 때입니다. 앞으로는 세계적인 희생의 노정을 거칠 것입니다. 그 한 날, 바로 그때가 하나님의 내적 서러움을 알지 못한 것을 일대에 청산하기 위한, 오늘날 기독교에서 말하고 있는 끝날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오늘날 여러분들은 어떠한 환경에 처해 있는가? 어떠한 입장에 처해 있는가? 우리들이 믿고 있는 예수도 개인을 넘어 천륜의 심정을 대신하는 생애노정을 거쳐가셨습니다. 이것을 생각해 보면 오늘날 우리들은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흘리신 만큼의 눈물을 하나님을 위해 흘려 드리지 못한, 하나님 앞에 눈물의 빚을 진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여러분은 그냥 앉아 있어서는 안 됩니다. 가슴 속에서 자기도 모르게 서러움이 폭발되어 이 민족과 이 나라를 위하고 세계와 천주를 위한 눈물의 제단을 쌓아야 되겠습니다. 나아가 일신의 서러움을 다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염려하는 마음으로 기도하여 되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와 같이 ‘하나님이여! 나를 통해서 당신의 서러움을 푸시옵소서.’라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위로하고, 예수님을 위로해야 할 입장인데 그러한 기도를 하지 못했습니다. 자신만을 위해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자신에게 그러한 입장을 넘어서야 할 책임이 남아 있음을 알아야겠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자신의 모든 서러움을 하늘 앞에 던져 버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늘 앞에 바치고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에 비로소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위해 눈물 흘리시고, 세계를 위하여 눈물지으시는 아버지이신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또한 그와 같이 자신을 붙들고 눈물지으시는 아버지인 줄을 여러분이 알아야만 그 아버지가 여러분의 아버지가 될 수 있고, 예수님이 여러분의 주님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러한 입장에서 사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어떠한 환경에서 눈물짓고 계시는가를 알 게 될 것입니다.
원래 인간이 타락하지 아니하였다면 죄악의 혈통에서 나지 않았을 것이요, 먹고 살되 탄식하는 만물을 먹지 않을 것입니다. 또 죽되 하늘땅의 서러움의 보따리를 짊어지고 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그 모든 탄식의 조건을 짊어지게 되었고, 또한 그것을 인간 스스로 벗어 나가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인의 누명을 쓰고 돌아가셨지만 인류를 사랑하는 마음이 변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처럼 땅 위에서 하나님을 붙들고 서러워하는 사람, 사적으로 서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공적으로 서러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은 그를 죄악에서 건져 주시고 싶어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이 땅 위에서 죄악에 물든 물건을 먹고 죄악에 물든 물건을 입고 있는 인간들을 보시고 슬퍼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여러분이 사탄의 침범을 받을 수 있는 환경에 놓여 있는 것을 서러워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느껴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땅에서 3년 동안 만물을 성별한 일이 있으며, 성경에는 마음의 할례, 몸의 할례에 대한 기록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지극히 작은 만물 하나라도 온전히 당신의 것으로 취할 수 있는 환경이 이 땅 위에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유롭게 품고 사랑할 수 있는 한 사람의 아들딸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할 수 있다 하더라도 사탄을 좌우에 세워 놓고 사랑할 수밖에 없는 아버지의 애달픈 사정이 있음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아들딸은 합당치 않은 음식을 보면 자기도 모르게 그 음식을 먹기가 싫어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또 합당치 않은 옷이 있다면 그 옷도 입기가 싫어지는 것입니다. 합당치 못한 곳에 살게 되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을 원치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마음을 통해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위해 배후에서 염려하고 계시는데 인간은 그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안타까운 사정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체휼할 수 있는 하나의 사람이 되어 가지고 로마서 8장에 비유되어 있는 것과 같이 온 만물이 탄식하는 탄식권을 벗어난 환경에서 자신들에게 주어진 물건을 마음놓고 먹을 수 있고 기뻐할 수 있는 아들딸이 되어야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떠한 물질을 지니고 있다면 그 물질은 세계적인 서러움을 대신 탕감해야 할 물질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나에게 속한 물질뿐만 아니라 타락한 인간이 살고 있는 이 세계의 모든 것이 다 그러한 입장에 처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여러분에게 있는 물질이 여러분의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여러분의 몸도 여러분 것이 아닙니다. 생명과 물질의 근원이 어디입니까? 바로 하나님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속한 모든 것은 하나님을 통한 후에라야만 자기 것으로 인정될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몸 마음 다 하늘의 뜻을 위하여 희생하며 나아갈 수 있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공의의 길을 가기 위하여 몸부림쳤던 사람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저버리고 오직 전체를 위하는 마음으로 일생을 보냈습니다. 즉 그들은 자기에 속한 것이 하늘과 인류 앞에 어떠한 탄식의 조건이 된다 할진대 그것을 과감히 제거해 나갔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불의와 죄악의 요소를 제거하기 위해 수고해 나가는 그 길이 바로 도의 길이라는 것을 오늘 여러분은 다시 한번 느껴야 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 위에 오셨지만 그를 믿고 섬긴 사도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가진 것이라고는 하나님이 인정하는 하나의 몸밖에 없었습니다. 그 당시 유대교를 중심삼은 이스라엘 민족이 제일 먼저 예수님을 믿고 받들었어야 했는데 그러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세계가 예수님 앞에 굽혀야 되고 만물이 다 예수님 앞에 굽혀야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들이 자기를 중심삼고 자랑할 무엇을 가지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역사를 대신하여 혹은 시간성을 넘어서 어떠한 무엇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자신이 있습니까? 그렇지 못한 약자의 인간들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늘날 이 땅도 주인을 잃어버린 땅이 되었고 사람도 주인을 잃어버린 입장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여러분이 이러한 입장에서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가? 그 서글픔의 노정을 피하기 위해 자신을 위한 보따리를 챙겨서는 안 됩니다. 혹시 여러분이 우주를 주관하겠다는 마음을 지녔다면 그러한 마음을 버리고 나설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살기를 원할진대 산 생명을 바쳐야 합니다. 승리하고자 할진대는 죽음을 밟고 올라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길을 갈 때 여러분은 인간이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마음속에 스며오는 슬픔을 피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 슬픔의 고개를 넘어서서 온 몸 마음을 아버지께 바쳐 드려야 하고 다음에는 온 만물을 찾아 나설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제 갖고 있는 물질이나 모든 것을 아버지 앞에 드리고 하늘 대신 사탄 대하여 싸울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몸 마음이 아버지 것으로 온전히 바쳐질 때 사탄이 참소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개인을 찾아오시지만 그 개인을 중심삼고 가정과 사회, 나아가서 세계까지 찾기를 바라십니다. 그런데 이 길이 아직까지 막혀 있다는 것입니다. 하늘의 섭리역사노정은 나를 찾아 땅까지 내려왔습니다.
이제는 나를 중심삼고 다시 하늘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인데, 그 길이 막혀 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선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지금까지 세상적인 모든 것을 끊어 버리고 부정하면서 잃어버린 본연의 것을 하나님 앞에 다시 찾아 세울 수 있는 길을 찾으려 했지만 이런 길이 한계점에 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우리의 서러움은 하나님을 찾기 위한 서러움이었는데 모든 종교의 종말시대에는 어떠한 서러움이 남아 있는가? 하나님을 모시고 땅끝까지 나아가기 위한 서러움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 서러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겠다는 각오와 소명의식을 가지고 나서야 하겠습니다.
이제 여러분이 느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서러움입니다. 예수님의 서러운 심정을 체휼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6천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서러움 속에서 허덕이며 여러분 한 사람을 찾아오셨다는 사실을 실체적으로 느끼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시간도 인간을 위하고 인간의 자손만대를 염려하여 영원한 천국이 이 땅에 건설되기를 바라며 수고하고 계십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오늘날 인간은 그러한 사실을 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서러움 속에서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은 어느 곳에 머물든지 하나님을 눈물 없이는 바라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입장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분의 아들딸이 되기 위하여 싸우게 될 때 그와 뜻을 같이하는 동지가 있다면 하나님은 그 자리에 찾아오셔서 눈물을 흘리실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서러움은 어디에 있느냐? 우리의 일신에 있는 동시에 이 나라, 이 세계, 이 만물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청산 짓고 하나님의 기쁨을 복귀해 드리는 운동을 전개해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우리에게 있어서 생명의 중심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서러움을 체휼하는 자신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후에 인간들이 알지 못하는 영계의 영인들을 동원하여 증거케 할 수 있는 기준이 나에게 서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영계도 그런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영계는 하나님의 심정을 알고 있기 때문에 땅 위에 그러한 사람이 있어 호소하면 영인들을 동원하여 천국이념의 실현을 위한 지상의 일에 협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영계의 영인들이 이 땅에 오지 못하는 원인이 무엇인가? 그것은 이 땅이 탄식의 울타리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나 자신이 머물러 있는 환경이 탄식의 조건을 벗어날 수 있고, 자신의 몸을 통하여도 탄식의 조건을 벗어날 수 있고, 또 사탄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공포를 느끼지 않는 안식권 내에 들어섰다면 하나님은 나를 협조해 주시게 됩니다. 즉 하나님의 슬픔을 체휼하는 심정에는 사탄도 침범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위하여 슬퍼하고 염려하며 눈물짓는 사람을 붙잡기 위해서는 사탄도 그와 같은 입장에 서야 됩니다. 그렇게 되면 사탄의 세력도 근본적으로 붕괴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여러분은 수천년 동안 섭리해 오신 하나님의 서러움을 체휼하여 하늘땅 전체를 책임지고, ‘이 몸을 제물로 삼으시어서 사탄을 폭파시키는 폭탄이 되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하나님의 서글픈 마음을 풀 수 있게 하소서.’라고 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심정을 갖고 오신 분이 바로 예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골고다의 길을 가심으로써 새로운 생명의 부활을 일으킬 수 있는 폭탄이 되어 재창조의 역사를 일으켰던 것과 마찬가지로 여러분도 그와 같은 역사를 일으켜야 되겠습니다. 지금까지 섭리해 나오신 하나님의 서러운 심정을 체휼하여 이 세계를 위해 자신의 몸 마음을 바치겠다는 각오와 심정을 지닌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아들딸, 하나의 가정, 하나의 국가, 하나의 세계를 찾아 나오고 계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심정을 여러분이 체휼하며 하루를 산다 할진대 여러분은 하나님을 대해 무한히 서러워할 것입니다. 만일 그러한 사람이 있으면 하나님은 그를 즉시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제 여러분은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그런 사람이 되지 못했으면 그러한 사람 앞에 머리를 숙여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사람 앞에 머리숙일 수 있는 참다운 아들딸이 되어야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연후에야 천륜의 창조의 위업을 계승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아들딸이 이 땅 위에 있는가? 여러분이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러한 사람이 되지 못하면 하늘 앞에 감히 얼굴을 들 수 없는 죄인이 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명심해야 되겠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듣는 귀, 보는 눈, 말하는 입, 그 느끼는 감정은 모두 무엇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인가? 천륜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천륜의 뜻을 벗어나게 되면 언젠가는 반드시 심판의 한 날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사실을 알았으니 먼저 여러분 자신을 스스로 심판하고 다음에는 주위 환경을 심판하고 나설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여러분에게 있어서 십자가의 길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를 심판하는 것인데 먼저 자기의 생명을 심판하고 나아가 자기의 사망까지 심판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부활의 한 날을 거치고 난 후에야 비로소 하늘이 인정할 수 있는 참다운 아들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자신의 마음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식구들이 잘못한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 잘못으로 알고 눈물지을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민족이 잘못한 것이 있으면 그것을 책임지고 눈물 흘리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이 있다면 민족은 망하더라도 그 사람은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세계를 위하여 눈물짓고 하늘의 심정을 대표하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는 세계는 망하더라도 그 사람은 절대로 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하늘을 위하여 눈물짓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는 그가 비록 슬퍼하는 자리에 있을지라도 그 사람은 하나님을 위하는 자리에 있기 때문에 복된 은사 속에서 사는 것임을 여러분은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하나님을 대하여 눈물짓는 생활을 하게 될 때,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을 감지하고 하나님의 대신자의 사명을 다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심정에 사무쳐 사는 사람에게는 기도가 필요 없습니다. 신앙이라는 명사도 필요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기도하기 전에 이미 하나님의 심정을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여러분은 천륜의 슬픔을 체휼하고 만물의 탄식을 밟고 올라서서 하나님의 사정을 직접적으로 통할 수 있는 참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겉으로는 망할 것 같지만 절대로 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천대받고 쫓김받더라도 그런 사람에게는 반드시 후계자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은 남다른 길을 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누구를 대해서 원망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들을 위해 흘린 눈물을 통하여 탕감의 혜택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은 남보다 먼저 하나님의 서러움을 체휼하며 눈물 흘릴 수 있는 혜택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이 여러분을 위해 먼저 눈물을 흘리셨음을 알아야 합니다. 또 여러분은 그 모든 사람들이 식구라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이 땅 위에 손에 손을 잡고 하나님의 뜻, 천륜을 염려하면서 눈물짓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몸둘 바를 몰라 머리숙이는 하나의 양떼가 있다 할 진대 그들 앞에는 하늘도 머리를 숙인다는 것입니다. 그는 보이지 않는 하나의 제물이기 때문에 만민이 그 앞에 머리를 숙이게 됩니다. 옛날 아브라함이 드렸던 제물은 작은 것이었지만 그 제물 앞에 아브라함이 머리를 숙였을 뿐만 아니라 온 하늘땅이 머리를 숙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여러분의 생애노정에서 어느 환경을 대신하여 제물의 입장에 서게 될 때, 항상 여러분은 어떠한 제물의 조건을 세울 것인가를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그 자리에서 개인을 위한 제물의 조건을 세울 것입니까? 아니면 가정적인 조건, 사회적인 조건, 국가적인 조건, 세계적인 조건을 세울 것입니까? 여러분이 드린 제물의 조건에 따라서 천적인 가치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려운 환경을 개척하고 나선 우리들의 소원은 무엇인가? 하늘의 서러운 심정을 체휼하는 참아들딸이 되어 아버지 앞에 경배할 수 있는 것, 이 하나밖에 소망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아버지여, 저에게 하늘땅에 사무친 서러움을 느끼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만민을 대신한 제물이 되게 하시옵소서.’라고 항상 기도해 야 되겠습니다. 그러면서 눈물을 짓고 서러워해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심정과 사정을 통할 수 있고 그 서러움을 풀어 드리기 위한 싸움의 기치를 들고 나설 수 있는 통일의 식구들이 되지 않으면 아니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의 생활과정에서 하늘의 서러움을 느껴 이날까지 남겨진 우주적인 서러움을 풀고 또한 탄식의 조건에 사무친 만물까지 복귀해 나가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은 그러한 뜻을 이루어 나가는 개척자로 나섰다는 것을 알고 오늘 이 시간부터 새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되겠습니다.
사랑하는 아버님, 저희들을 굽어살펴 주시옵소서. 저희의 마음이 천태만상이오나, 저희들의 생활 가운데 아버지의 성품이 나타나게 하시고, 아버지께서 동하면 저희들도 동할 수 있고, 아버지께서 정하면 저희들도 정할 수 있는 의의 실체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연약한 저희들이 아버지 앞에 무릎을 끓고 천성을 향하고 있는 것을 아버지께서 아시오니, 비록 저희들의 몸이 속된 데에 사로잡혀 영원하신 아버지의 은사를 가로막고 있을지라도, 저희의 몸이 속된 바의 모든 것을 굴복시키어 당신의 형상을 저희의 마음 몸을 통하여 나타내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또 그러한 섭리의 뜻과, 섭리의 은사와, 섭리의 사랑이 저희들에게 연하고 있는 것을 마음으로 느끼고 몸으로 감지할 수 있게, 아버님,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저희의 마음은 오늘도 절대적인 선을 향하여 달리고 있사옵는데, 몸은 속된 것을 취하려고 마음을 대해 끊임없이 반격을 가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옵니다. 그러하오니 아버님, 저희의 마음 몸이 아버지의 뜻을 중심삼고 하나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아버지와 저희와의 심정의 간격을 타개하시어서 사탄이 운행할 수 있는 발판을 저희 몸 마음에서 완전히 제하여 주시옵길,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하늘은 오늘날까지 저희의 마음을 중심삼은 몸을 붙안고 사랑하고자 원했사오나, 아직까지 충정어린 아버지의 성상과 형상 앞에 완전한 미의 대상체로 나타나지 못하고 있사옵나이다. 이것이 역사적인 서러움이요, 탄식인 것을 저희들이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님 앞에 무릎 끓을 수밖에 없는 몸 마음이요, 죄악에 물들었던 몸 마음이요, 아버지의 충만한 은사를 바라는 부족한 몸 마음이오니, 이제 저희들, 가진 것이 없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몸 마음 전체를 아버지께서 붙들어 주시옵소서. 저희에게 베풀어 주신 모든 것이 저희의 것이 아니옵고 아버지의 것이었사오니, 아버지께서 함께 하여 주시옵고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아버님의 성상 앞에 기쁨을 돌려 드리고 아버지의 마음에 호응하는 하나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게 하시옵소서. 이제 저희들, 아버지께서 6천년 동안 소원하시던 그 소망의 기준을 갖추어 아버지의 존전 앞에 무릎을 꿇고 아버지께 영광을 돌려 드릴 수 있게 허락해 주시고, 아버지께서 안식하실 수 있도록 당신의 성상을 나타내 드리는 이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인간이 갖고 있는 모든 주의·주장과 인간이 갖고 있는 권리, 이 모든 것은 없어지고 만다는 사실을 아옵니다. 하오니 저희의 마음과 몸이 영원히 존재할 수 있는 근본 입장에 들어가 새로이 폭발되어 오는 힘과 부활의 눈을 저희의 마음에 갖출 수 있게 하시고, 자신을 중심한 생활을 버리고 천주를 중심한 생활로서 돌이켜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님, 저희들로 하여금 민족을 대신하는 개체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세계 인류를 대표하고 온 피조만물을 대신하는 대표자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아버지 앞에 머리를 숙여 경배함으로 말미암아 6천년 동안 사무쳐 있던 원한의 그 심정을 풀어 드릴 수 있는 모습이 되어 아버지께서 사탄 앞에 자랑할 수 있는 아들딸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님, 이날 아버님의 존전이 그리워서 모인 수많은 제단을 축복하여 주시옵고, 불쌍한 자리에서 탄식하고 있는 이 민족을 긍휼히 여기시옵소서. 이 민족이 설사 아버지의 뜻을 모르고 사망권에 사로잡혀 있더라도, 생명의 제단에 속해 있는 무리들도 많사오니, 아버지, 그들에게 은사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승리의 한 동산을 건설하여 아버지의 뜻을 이룸으로써 만우주가 기뻐할 수 있는 한 날이 어서 속히 임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저희의 모든 것을 다 드리오니, 아버지, 기쁨으로 받아 주시옵고, 아버지의 것으로 다 주관하시옵소서. 이 시간 전하고자 하는 말씀을 중심삼고 재창조의 은사를 허락하여 주시옵고, 전하는 자의 마음이나 받는 자의 마음이 둘이 되지 말게 하시옵소서. 저희의 몸을 중심삼은 천륜의 뜻이 급하다는 것을 알았을진대, 저희의 마음이 자동적으로 움직여 아버지의 뜻을 효율적으로 이루어 나갈 수 있게 함께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마음을 내 마음으로, 아버지의 심정을 내 심정으로 체휼할 수 있는 이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모든 것을 맡겼사오니 뜻대로 하시옵소서.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오늘 여러분 앞에 말씀드리고자 하는 제목은 '오, 아버지여! 어서 오시옵소서.'입니다. 이런 제목을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타락이 없는 동산은 하나님이 만물과 더불어 자유롭게 접촉할 수 있는 동산이요,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유롭게 찾아가서 의논할 수 있는 동산이라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동산은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사람을 위하여 지은 모든 피조만물도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영광의 동산이요, 인간이 하나님과 더불어 의논할 수 있는 기쁨의 동산입니다. 그런데 타락이라는 명사가 생겨난 그날부터 하나님을 대할 수 없는 인간이 되었고, 하나님과 함께 즐길 수 없는 만물이 되었다는 것을 또한 우리들이 잘 아는 바입니다.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길이길이 같이 거하시기 위해서 인간을 만물의 중심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피조만물이 인간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모든 피조만물이 인간을 통하여 하나님께 기쁨을 돌려 드릴 수 있어야 했는데, 그런 피조동산이 되지 못한 연고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되는 날을 역사의 종점으로, 하나의 소망의 표준으로 세워 놓고 섭리해 나오시게 되었다는 것을 오늘날 우리들은 새로이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그러면 타락의 혈통을 받은 오늘날의 수많은 인류와 타락의 종족권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여러분이 찾고, 그리워하며, 흠모하는 그 이상의 동산은 어떠한 동산일 것인가? 그 동산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동산이요, 창조주를 모셔 놓고 그 창조주의 기쁨을 내가 같이 느낄 수 있는 동산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기쁨을 우리 인간들을 통하여 만물에게까지 전달해 줄 수 있는 동산인 것입니다. 그런 동산이 되지 않는다 할진대 하나님의 모든 창조의 이념이 실패로 돌아가는 것이요, 인간이 역사 과정을 걸어 나오며 받들어 온 섭리의 뜻도 실패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을 바라보고 나오던 만물마저 탄식권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여러분이 뼈저리게 느끼는 한 날을 갖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내 마음이 이런 심정에 동하고 내 몸이 이런 느낌을 느껴야 되겠습니다. 그런 자리에서 하늘을 향하여 창조주의 모습을 그리워할 수 있고, 만물을 대해서 본연의 미를 갖춘 자체가 되어야만 아버지가 운행할 수 있는 부활된 실체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입장에서 창조주와 온 천주의 피조물 앞에 자기 자체를 드러내 놓고 분석할 수 있는 한 시간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러한 한 시간이 없다면 하나님의 심정이 여러분이 몸에 스며들 수 없을 것이요, 만물의 탄식이 여러분을 통하여 해원될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원래 하나님을 모셔 놓고 살아야 할 인간이요, 하나님을 모시고 즐거워해야 할 만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인간은 우리를 지으신 아버지, 우리를 주관해야 할 주인공을 잃어버린 상태에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고아와 같이 불쌍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깨닫는 그 순간부터 우리들은 새로운 섭리의 뜻을 찾아 나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 인간들이 옛날 에덴에서 잃어버린 창조주를 우리의 아버지라 부르고, 에덴에서 잃어버린 선의 동산이 원래 우리가 살아야 할 생활 환경이라고 느낀 때가 있었던가. 오늘날까지 수천년의 역사가 경과하였지만 그런 때가 아직까지 인간세계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갖고 있는 것으로는 절대 유일한 하늘의 선을 대신할 수 없고, 우리들이 아버지를 감히 대할 수 없는 타락된 죄악의 후손인 것을 인식한다 할진대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일으켜 세워 무엇을 해야 될 것인가. 우리는 아버지의 뜻을 찾아 드려야 하겠습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다 희생시키는 한이 있다 할지라도 우리들의 선조가 바라던 이념의 주인공인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 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여러분의 생활권 내에 나타낼 수 있어야만 여러분은 하나님의 아들로 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을 여러분의 생활권 내에서 나타내고, 만물 앞에 나타내는 그날을 갖지 못한다 할진대는 선조들이 역사노정에서 지금까지 걸어왔던 섭리의 노정은 실패로 돌아간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이제 여러분은 잠자는 마음을 일으켜서 무엇을 해원해야 할 것인가, 몸을 일으켜 무엇을 향하여 달음질쳐야 할 것인가. 오로지 에덴에서 하나님이 아담 해와에 대하여 가지셨던 간절한 마음을 해원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만물을 대해 창조의 미를 느끼면서 인간 대하여 즐거워 하시려던 그 아버지의 심정을 실체적인 시간권 내에서 여러분이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 이러한 마음이 없다 할진대는 아무리 역사적인 종말시기에 그 이념의 동산이 온다 할지라도, 아버지가 이 땅 위에 다시 현현하는 날이 온다 할지라도, 여러분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하나님과 나 사이의 간격을 누가 좁혀 줄 것이며 이러한 원한의 구렁텅이를 누가 청산해 줄 것인가. 이것이 역사적인 탄식이요 원한이었다는 것을 오늘날 우리들은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나와 하늘 사이의 간격을 누가 만들었는가? 인간조상의 타락으로 인한 죄악의 혈통이 이것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밟고 올라가 하늘의 혈통을 받음으로써 몸 마음에서부터 하늘과 관계 맺어야 하고, 자신을 중심삼은 가정과 사회·국가·세계·천주를 하늘과 관계 맺게 해야 할 사명이 여러분 앞에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이 자신의 과거를 반성해 보게 될 때, 스스로 천륜 앞에 죄의 혈통을 물려받은 모습이라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하늘이 지금까지 탄식하신 이유이며, 만물이 탄식한 원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이러한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한 수고의 역사를 거쳐 나왔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여러분 자신을 걸어 놓고 내적인 모든 담을 밟고 올라서서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을 대할 수 있었던, 타락하지 않은 아담의 형상을 대신하여 ‘아버지여!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과 복귀의 인연을 맺어 잃어버렸던 이상의 동산을 찾아 나오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을 복귀하여 옛날에 타락하지 아니한 아담 해와를 대하던 그 기쁨의 동산을 건설하고 하늘의 기쁨을 기점으로 하여 세계적인 이념을 창건하기 위해 섭리하시는 역사가 구원섭리역사요, 오늘날 우리들이 걸어 나가야 할 복귀역사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복귀의 노정을 걷고 있는 여러분이 자기 한 자체를 천륜의 노정 앞에 냉정히 세워 놓고 비판하여 보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 자신들이 어떠한 위치에 놓여 있는가, 어떠한 입장에서 허덕이고 있는가를 반성해 보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그 위치와 방향을 인간에게 가르쳐 주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인륜을 대표하는 종교가 세워졌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신앙이란 명사를 세워 역사 과정에 종교를 중심삼아 인간을 찾아 나오고 계십니다. 오늘 이 시간까지 하나님은 쉴 사이 없이 인간세계에서 인간과 같이 살기를 원하여 수고해 나오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형의 신이신 연고로 시간적인 거리를 초월한 심정을 갖고 오늘날까지 인류를 찾아 나오셨다는 것입니다.
역사 과정의 하나님은 자신을 배반하였던 인간들을 시간을 초월하고 공간을 초월하여 찾아 나오셨으나 그 하나님을 맞이한 인간들은 많지 아니하였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에, 우리는 타락의 후손된 입장에서 마땅히 하늘 앞에 채찍을 받아야 할 존재들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6천년 동안 섭리를 맡아 오는 수고를 하고 계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될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내 한 자체는 일개인이요 삼천만 가운데의 한 사람이로되, 내 한 개체가 하나님을 모실 수 있고 하나님을 이 땅에 임재케 할 수 있는 자녀가 된다 할진대는, 삼천만 이상의 가치를 가진 존재가 될 것이요, 24억 인류 전체 이상의 가치를 가진 존재가 될 것입니다. 또한 피조세계에 있는 피조물 전체 이상의 가치적 존재가 될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모습의 우리를 대하고 싶으셔서 수고하여 오신 아버지이심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 인간들은 자신에게 있는 중요한 부분의 가치를 망각하고 살 때가 너무 많습니다. 역사노정을 거쳐서 찾아오신 하늘이 항상 내 주위에서 운행하고 계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또 내 생활 환경에 하늘이 거하시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에, 여러분은 역사적인 노정 앞에, 시대적인 섭리의 뜻 앞에 머리를 숙여야 할 것입니다.
천륜의 뜻 앞에 머리를 숙여야 할 인간들인데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역사 과정을 거쳐오면서 섭리의 뜻을 잊어버리고, 자기들의 위신과 품위를 망각하고 나아갈 방향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들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괴로운 심정을 여러분은 느껴야 되겠고, 또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의 뜻을 염려하지 않으면 안 될 때가 왔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하나님, 이러한 창조주를 우리의 신앙의 주체로 모시기를 원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자신을 중심삼고 믿고 있다면 그는 하늘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개체를 본다면 24억 분의 1에 불과한 인간이지만, 하늘은 온 천주를 대신한 가치의 존재로서 우리를 믿으려 하시고, 우리를 사랑하려 하시고, 우리와 더불어 살기를 원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아버지의 마음을 오늘날 인간들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늘은 무한대의 소망을 갖고 나를 대하시는데, 나는 한계적인 소망을 갖고 하늘을 대하고 있으니 이 한계적인 소망과 무한대의 소망의 차이를 해소시키는 일을 누가 담당할 것인가. 이 차이가 크면 클수록 내 일신에 대해 사탄이 하늘 앞에 참소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와 같은 몰림 속에, 역사적인 죄악권 내에 들어와 있는 자신들을 인정하여 천륜 앞에 머리를 숙여야 합니다. 그리하여 회개의 심정을 가지고 자신이 다시 빚어질 수 있는 하나의 흙과 물과 같이 되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인간들은 자기가 가진 주장 때문에 천륜을 도외시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이 움직이고 저지르는 것이 한 개체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전민족, 혹은 전세계 혹은 온 천주에까지 연결된다는 이 한 사실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일을 하늘은 누구에게 맡길 것인가? 오늘날 여러분이 맡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처해 있는 입장에서 그 일을 맡아 섭리의 뜻 앞에 책임을 다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며,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우선 하나님의 소망의 기준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창세 당시에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즐거워하시던 그 아버지의 심정을 알아야 되겠고, 창조해 놓으시고 즐기시려던 창조의 이념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심정으로 이 세계를 창조하셨는가? 하나님이 무한히 믿어 줄 수 있는 만물이 되기를 바라는 심정, 무한히 믿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지으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구태여 신앙이란 명사가 필요 없는 일체적인 이념권 내에서 그와 우리가 몸과 마음의 관계와 같은 불가분의 일체성을 갖추어서 수많은 세월이 지나가도 하늘을 대해 변함없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과 일체적인 입장에 서서 믿음이라는 명사까지도 느끼지 않을 정도로 인간을 믿어 주려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영원히 믿어 주고자 하시려던 하나님의 그 마음이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인간에게서 떠나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또 인간에게 영원한 당신의 생명을 주입시켜 영생불사의 모습으로 이 땅 위에 세워 놓고자 원하셨으나 타락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살아 있어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영원히 하나가 되어서 일체적인 이념에 젖고 온 피조만상이 화동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터가,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깨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이 믿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고, 하나님의 생명의 흔적이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어릴 수 없게 되었고 우리들의 선조는 하나님의 창조이념의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겠습니다.
그런데 인간만 그렇게 된 것이 아니고, 피조만물까지도 하나님이 믿을 수 있는 권 밖으로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움직임을 만물에게서 찾아볼 수 없게 되었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미의 자극적인 충동을 나타낼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들은 하나님을 중심하여 사탄의 침범을 받지 않는 참부모가 되어야겠습니다. 인간시조가 하나님을 모시고 참부모가 되어 살았던들 그 자녀들은 영원히 하나님을 모시고 살 수 있는 가정적인 이념을 이루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그 후손들은 타락한 부모의 혈통을 받아 사탄을 하나님 대신 모시는 생활을 해 나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바라신 선의 동산을 우리의 선조들이 깨뜨린 연고로 후손인 우리들은 그 죄의 유업을 받아서 죄의 침범을 당함으로 말미암아 믿어서는 안 될 믿음을 가지게 되었고, 가져서는 안 될 즐거움을 가지게 되었으며, 해서는 안 될 사랑을 하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나 한 자체를 생각해 보면, 나는 하늘이 믿지 못할 나요, 하나님이 대할 수 있는 생명체가 되지 못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사랑의 심정을 지니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타락의 부모를 가진 후대의 인간들은 본연의 동산, 영원한 천국세계에서 하나님과 영원히 즐거워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갖고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권 내에서 하나님을 모시고 즐겁게 살아야 할 인간들이 그럴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세계가 죄의 세계가 되어 인간들은 믿지 말아야 할 것을 믿고, 가져서는 안 될 생명을 가졌고, 해서는 안 될 사랑의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와 같이 믿지 못할 세계가 됨으로 말미암아 믿지 못할 노정이 남게 되었는데 이것이 영계의 지옥이요, 지상의 지옥인 것입니다.
이러한 두 세계의 모순된 입장이 오늘날 나를 걸어 놓고 저울질하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한편으로는 지옥의 불신이 나를 대해 호소하고 있고,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대해 호소하고 있습니다. 즉 한편에서는 세상의 사망의 사랑권이 나를 대해 호소하고 있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나에게 영원한 신앙을 갖기를 호소하고 있으며, 영원한 사랑을 갖기를 호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입장에 처한 자신인 것을 여러분은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이 몸뚱이는 하나님의 탄식권 내에 있는 만물을 섭취하며 자라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탄식권 내, 즉 죄악권 내에 있는 내 몸 자체를 분석해 보면, 선의 요소보다도 악의 요소가 더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내 전체적인 생의 노정에서, 신앙의 노정에서, 사랑의 노정에서, 이 악이 더 강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창조주가 이 피조세계를 지으신 목적은 인간을 중심삼고 이루어질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타락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마음속 깊이 느껴지는 어떠한 상처, 어떠한 굴곡이 여러분에게 부딪치고 있는 것을 여러분은 느끼고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악한 살인강도라 할지라도 자신의 악한 행동에 대해서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됩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천륜의 법도가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천륜의 법도를 어기고 타락했을망정, 그 천륜의 법도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천륜의 법도를 어기고 악한 일을 했을 때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인간들은 이 땅의 어떠한 것도 믿을 수 없고, 땅 위의 어떠한 생명도 의지할 수 없고, 땅 위의 어떠한 사랑도 느낄 수 없어 만우주를 대해 탄식하고 원망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내 마음속에서 영원히 믿어 줄 수 있고, 내 마음이 영원히 즐길 수 있는 사랑을 갈구하면서 울며 탄식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은 선의 뜻을 위하여 염려하는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합니다. 그러한 입장에서 선과 악의 수효를 비교해 보면 악이 선에 비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수효를 갖추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것을 바라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인류의 서러움을 대신하여 선을 찾기 위한 간절한 서러움에 가득 차 있다는 것입니다. 인류를 믿어 주어야 할 하나님께서 믿어 주지 못할 입장에 계신 그 서러움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본래는 믿어 주어야 할 인간이었고, 사랑해야 할 인간이었고, 하나님의 생명체가 되어야 할 인간이었는데 그 인간을 믿을래야 믿을 수 없고, 생명을 같이할래야 같이할 수 없으며, 사랑을 같이할래야 같이할 수 없게 된 이 서러움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땅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슬픔이 남아 있는 땅이여! 하나님의 서러움의 담을 쌓고 있는 인류여!’라고 탄식하면서 그 하나님 대신 안타까워 할 하나의 사람이 역사적인 종말시대에 나타나지 않을 것인가 하고 유의해야 되겠습니다. 만일 그러한 한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수고의 역사도 수포로 돌아가고, 사탄의 참소조건, 즉 죄로 인한 탄식의 조건이 남아진 세계에서 살 수밖에 없는 입장에 처하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자신이 죄인된 것을 잊고, 앞길이 막혀 있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그 막힌 입장에서 소망을 갖겠다고들 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바라보시는 하늘의 심정은 더욱 처참한 입장에 처해 계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역사 과정에서 하나님을 배반한 선조의 혈통을 이어받았습니다. 그러면 오늘의 내가 이와 같이 죄악의 피의 결실체라면 이 몸을 무엇으로 폭발시켜 그 죄악을 없앨 것인가. 이제 여러분은 새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새로운 이념과 새로운 믿음, 새로운 생명과 새로운 사랑을 가지고 하늘의 형제가 되어야 합니다. 6천년 동안 나를 찾으시려는 하나님의 그 간절한 심정을 느껴 저희 또한 간절한 마음으로 ‘아버지여,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부르짖을 수 있는 자신이 되어 있는가 반성해 보아야 되겠습니다.
우리의 선조들은 지금까지 하나님의 뜻을 대신하고 어떠한 시대적인 사명을 감당하고자 이 땅 위에 나타났었으나 다 꺾여져 나갔습니다. 그러한 역사의 반복이 지금까지의 복귀의 역사라는 것을 여러분은 원리를 통하여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복귀의 원한에 사무친 하나님은 지금까지 안타까운 심정을 품고 참아 나오셨습니다. 즉 지금까지 하나님께서는 배척받는 가운데서도 참으셨고 배반당하는 노정에서도 참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우리를 세워 놓고 이날까지 소망하고 있는 하나님의 사정을 마음에 뼈저리게, 피 살에 사무치게 느껴본 때가 있었습니까? 여러분은 진정으로 지금까지 역사하신 아버지가 나의 아버지이시요, 나를 위해 수고하신 아버지이심을 자신의 몸 마음으로 느껴야 할 것입니다.
우리 한국 백성들이 가진 것이 없고 불쌍하다 할지라도, 우리 가운데 하늘의 소망을 대하고 하나님의 염려를 지니고 하나님의 믿음의 마음을 갖고 이 땅 위에 나타나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 또는 그러한 모임, 그러한 민족이 된다 할진대, 하늘의 전권적인 위업을 계승 못한다고 누가 단정할 수 있겠습니까? 불쌍한 이 민족, 의지할 곳 없는 이 민족, 소망할 곳 없는 이 민족이 이제 가져야 할 소망은 무엇인가? 죄악에 대한 회개의 마음을 가져야 하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하고, 하나님에 대한 소망을 가져야 하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가져야 합니다.
그럴 때에 비로소 이 민족은 천국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새로운 에덴동산에서 거할 수 있고, 창조이념의 목적을 대신할 수 있는 새로운 민족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버려야 할 타락인간을 버리시지 못하고 다시 찾으려 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과 인간은 원래 어떠한 인연이 맺어져 있었던가? 생명의 인연이 맺어져 있었고, 사랑의 인연이 맺어져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끝날에 세계 인류를 동원시켜서 우리들이 찾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과 인연맺었던 생명 그 자체, 사랑 그 자체를 찾아야겠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인류는 그것을 찾기 위하여 헤매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믿어 줄 수 있고, 영원한 하나의 가정을 이루어 영원히 의논할 수 있는 하나의 세계를 이루는 인간이 되기를 바라셔서 지금까지 역사하고 계십니다. 타락한 인간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인간을 지금까지 찾아오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영원히 믿을 수 있는 인간이 되지 못했는데 영원히 믿을 수 있는 그 심적 기준은 누가 갖고 있는가? 하나님이 갖고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심적 기준을 가진 인간이 되어야 할 것이었는데 인간이 하나님을 배반함으로 말미암아 그 생명의 심적 기준을 하나님이 갖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또 영원한 사랑의 심적 기준을 가진 인간이 되어야 할 것이었는데 인간이 하나님을 배반함으로 말미암아 그 사랑의 심적 기준도 하나님이 갖고 계십니다.
그러면 그 에덴동산의 이념을 건설할 수 있는 요소를 인간 앞에 제시하기 위하여 오셨던 분이 누구였느냐 하면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믿음과 생명과 사랑을 대신할 수 있는 하나의 기준을 이 땅 위에서 찾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오랜 역사 과정을 통하여 수고하였지만 찾지 못했습니다. 노아를 통하고 아브라함·야곱·모세를 거쳐 찾으려 했지만 그러한 기준의 인간을 찾지 못하고 4천년 동안 수고하여 비로소 찾아 세운 존재가 예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는 어떠한 분이었습니까? 그는 세상의 권세를 가진 분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적인 학식을 가진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시대적인 반역자로 몰림받은 분이었습니다. 죄악세상 가운데에 공의를 대신하여 몰림 받았던 대표적인 주인공이었습니다.
그와 같이 예수가 몰림받게 되었던 것은 그의 가치가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요, 무엇이 불비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전세계가 불신의 땅인 연고였습니다. 생명이 없는 세계였기 때문이요, 사랑이 없는 세계였기 때문에 배척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떠한 대표자였는가? 아담은 에덴에서 타락하여 믿을 수 있는 부모가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아담의 대신자로 예수님은 오셨습니다. 또는 영원히 믿지 않을래야 믿지 않을 수 없는 믿음의 주인공으로 오셨습니다. 에덴에서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생명을 다시 인연맺어 주기 위해서 오셨고, 에덴에서 잃어버린 하나님의 사랑을 인간의 심중에 다시 인연맺어 주기 위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대표하여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떠한 분인가? 그분은 믿음의 메시아요, 생명의 메시아요, 사랑의 메시아라는 것입니다. 즉 그는 믿음의 구주요, 생명의 구주요, 사랑의 구주로 오신 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4천년 동안 인류역사를 주관해 오시면서 자신의 생명과 사랑이 심적 기준을 이루기를 소망했는데 이것이 예수로 말미암아 실현되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비로소 하나님의 섭리역사가 이 지상에서 다시 시작되었으며 복귀의 새로운 뜻이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뜻을 지니고 온 예수님 앞에 그때 사람들은 실체적인 믿음을 가져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이념과 일체가 되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품고 있었던 무형의 신앙의 이념, 무형의 생명의 이념, 무형의 사랑의 이념이 표현된 하나의 화신체로 나타나셨던 분이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오! 당신은 하나님이 4천년 동안 수고하시며 찾아온 믿음의 결실체입니다. 4천년 동안 찾아온 하나님의 소망과 생명의 실체로소이다. 오! 당신은 하나님의 이념동산에서 즐길 수 있는 영원한 사랑을 갖고 온 주인공이로소이다.’라고 증거하지 않았습니다.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누구도 그의 심정을 헤치고 그의 비밀의 말씀을 이 땅 위에 밝혀 놓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2차적으로 인류에게 서러움을 빚어낸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예수님은 이 땅 위에 오셨지만 마음과 몸을 갖춘 하나의 실체로서 하나님의 믿음과 하나님의 생명,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지 못한 채 돌아가시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영과 하나된 믿음, 예수의 영과 하나된 생명, 예수의 영과 하나된 사랑이 오늘날 인간과는 거리가 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영적인 믿음, 영적인 생명, 영적인 사랑의 주인공이 되었다는 이 한 사실은 알고 보면 기쁜 일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하늘의 서러움이 맺혀져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즉 하나님은 자신의 이념을 대신한 실체를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실체로서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믿음을 가지고 오셨고, 하나님의 생명과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오셨는데, 그 실체를 인류가 파괴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서러운 하나님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오실 때에는 영을 통하여 실체를 찾아 나오십니다. 그리고 그 실체를 통하여 만물까지 찾아 나오십니다. 그런데 인간이 실체를 통할 수 있는 믿음의 자격자, 실체를 대신할 수 있는 생명의 자격자, 실체를 대신할 수 있는 사랑의 자격자가 되지 못하고, 이 일이 영적으로만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는 그것들을 영적으로만 느끼고 있습니다. 즉 오늘날 인류는 영적 구원의 이념을 찾아 들어가고 있고, 영적 생명을 찾고 있으며, 영적 사랑을 찾아 헤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4천년 동안 수고하여 인간이 그 실체적인 영광의 존재를 대신 이 땅 위에 모셔 놓고, 그를 영원히 믿을 수 있는 환경, 그와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는 환경, 영원히 사랑할 수 있는 환경을 영적으로 이루어 나오는 것이 낙원 구원섭리요, 신약성서를 중심한 구원섭리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영계에 있는 영인들이 믿고 있는 믿음, 바라고 나가는 생명, 소망하는 사랑이 실체로 나타나는 한 때가 이 땅 위에 찾아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에덴의 이념은 하나님을 중심삼고 인간의 마음과 몸이 하나되어 그 하나님을 모실 뿐만 아니라 만물과 하나되어 하나님을 모시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원칙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지금까지 수고의 역사노정을 거쳐 여러분과 하나되고자 하셨습니다. 이런 애달픔이 있었음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실체 성전을 이루고, 하나님의 이념을 대신할 수 있는 실체적인 가정을 이루어 놓고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출발이 이루어졌던들 오늘날 우리에게는 천년왕국이념이 필요 없습니다. 재림의 이념이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주 예수를 중심삼고 실체적인 믿음을 통과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실체적인 생명을 통과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실체적인 사랑을 통과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실체 부부로서 실체 자녀를 갖출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또 하나님의 실체적인 믿음의 인간이 될 수 있고, 실체적인 생명을 갖출 수 있으며 실체적인 사랑의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발판이 아직까지 지상에 나타나지 않은 것이 하나님의 서글픔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천국은 네 마음에 있느니라.’라고 말씀했습니다. 천국은 먼저 마음으로부터 찾아옵니다. 그런 다음에 ‘천국은 네 몸에 있느니라.’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즉 천국은 내 실체에 있다고 주장할 수 있는 한 날이 인류 앞에 와야만 비로소 나의 몸이 영과 하나되어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됩니다.
여기에 예수의 서러움이 있습니다. 마음의 천국을 대신할 수 있는 영적 천국은 이루어 놓았으나, 몸의 천국의 이념을 대신할 수 있는 그런 천국은 못 이루었기 때문에 다시 오셔야 할 입장에 처해 있으며, 역사 과정을 거쳐오면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인간들을 위해 기도하셔야 할 운명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끝날에 처한 오늘날 인류는 실체적인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지금까지 걸어온 자신의 신앙노정을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뜻을 불신했던 마음과 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영원한 하나님의 생명의 인연과 영원한 하나님의 사랑의 인연을 찾아 실체화하였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또 그러기 위해서는 ‘아버지여! 당신의 실체가 될 수 있는 저희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항상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인간들이 되지 못한다면, 인간은 지금까지 빚져온 역사를 벗어날 수 없고 잃어버린 천국의 이념을 복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지금까지 인류를 대해 염려하여 왔습니다. 특히 끝날에 처한 우리들을 대해 더 큰 염려를 하시며 찾고 계십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는 2천년 전에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실체를 대신할 수 있는 하나의 소망의 존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믿음에 대한 소망, 생명에 대한 소망, 사랑에 대한 소망의 모습으로 살고 있느냐를 항상 아버지 앞에 직고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옳소이다 아버지여! 나는 아버지를 믿겠나이다. 아버지는 날 못 믿는다 할지라도 나는 아버지를 믿겠나이다. 아버지는 나를 버려도 나는 아버지를 버릴 수 없나이다.’라고 할 수 있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생활해야 하겠습니다.
천륜이 변할지라도 천상의 어떠한 존재물이 나를 배반할지라도 나는 아버지를 배반할 수 없다는 마음을 가진 주인공, 천상천하의 어느 누구도 믿지 못할 자리에서 믿어 줄 수 있는 마음을 지닌 하나의 주인공은 없을 것인가. 하나님은 바로 그러한 인간을 찾을 수 있는 소망의 한 날을 바라셔서 지금까지 섭리해 나오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서글픈 아버지의 사정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습니까? 교회가 있습니까? 인간들은 이것을 몰라주는 불쌍한 존재들입니다.
하늘의 뜻을 품고 세상에 나타나는 사람은 버림을 받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모든 사람이 예수님의 원수였습니다. 버림받지 않는 사람, 원수 아닌 사람은 오히려 거짓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와서 가정에서 발붙일 곳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이 택하여 준비하였던 세례 요한 일파로부터 배척받았습니다. 4천년 동안 수고하여 준비해 놓은 교단으로부터도 배척받았습니다. 택한 이스라엘, 아브라함의 혈족으로부터 핍박받았습니다. 온 인류에게 핍박받았던 것입니다. 또 영계로부터도 버림받았던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라고 기록된 성경 말씀과 같이 비참한 입장에서 운명하셨던 것입니다. 그런 비통함을 느끼신 분이 우리의 구주요, 인류의 구주요, 우리의 지도자였다는 것을 여러분은 잊어서는 안 될 것이며, 그 예수님의 심정을 통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엘리야도 이스라엘 민족 앞에 배척받고 몰림을 당하여 쫓겨 나갈 때에 아버지여, 나만 남았나이다.라고 호소했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심정을 통할 수 있는 한 때를 가져 보았습니까? 3천만 민족이 모두 배척하더라도, 세계 24억의 인류가 모두 배척하고 천상에 간 모든 영들이 배척할지라도 ‘나만은 당신을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런 심정을 체휼한 사람은 지옥에 갈래야 갈 수 없고, 이 땅에서 망할래야 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무엇으로 깨뜨릴래야 깨뜨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이런 마음을 가지고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하고 호소했던 그 마음 하나가, 사망의 권한을 짓밟고 올라설 수 있는 하나의 중심적인 포인트가 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와서 민족으로부터 배척받았고, 교회로부터 배척받았고, 종족으로부터 배척받았고, 또 보이지 않는 영계의 사탄에게도 배척받았습니다. 즉 어느 누구 한 사람의 친구도 없는 예수였습니다. 그러한 예수님이 오늘날 인류의 구주로 나타날 줄 당시의 사람들이 꿈엔들 생각하였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에 새역사 창조의 기준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원 불변의 심정을 갖고서 아버지가 내 생명의 주인이요, 생활의 주인이요, 사랑의 주인이라는 마음을 품고 살았던 분입니다. 예수님의 믿음과 생명 그리고 사랑은 어느 누구도 자를 수 없었기 때문에 그로 말미암은 기독교는 어느 민족 국가에 들어가 두들겨 맞더라도 쓰러지지 않고 발전해 나온 것입니다.
오늘날 통일교회에 나오고 있는 여러분들, 여러분들이 인류를 위하고자 할진대는 예수님이 믿었던 신앙의 내용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망의 길을 무릅쓰고 생명을 바칠 수 있었던 신앙 기준, 즉 자신의 몸까지도 희생할 수 있었던 신앙 기준을 끝날의 여러분들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늘은 그러한 신앙의 기준이 끝날의 성도에게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구원을 받아야 할 우리들이, 영원한 생명을 찾아야 할 우리들이 아버지의 사랑 속에 품겨지기 위해서는, 갖은 고난과 모진 상처를 딛고 일어서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가정과 사회와 국가, 세계가 반대하더라도 그것을 밟고 올라가 오직 하나님의 뜻만을 붙들고 나섰던 예수의 입장에 서서 역사적인 사망의 종족을 향하여 돌진할 수 있는 하늘의 정병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늘은 우리들을 어떻게 찾아오셨습니까? 하늘 보좌에서 영으로 계신 하나님께서는 창세로부터 4천년을 기다려 예수님을 세우셔서 인간을 찾으려 하셨습니다. 또 예수님 이후 우리의 마음을 대신한 영적 세계에서 2천 년을 더 수고하여 오늘날까지 6천년의 수고의 발자취를 통해서 우리를 찾아오고 계십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아버님, 황공하옵니다. 아버님, 면목 없습니다. 아버님, 어찌하겠습니까? 라고 하면서 나를 찾기 위하여 수고해 나오신 아버지의 서글픔을 해원해 드리겠다는 아들딸의 효심을 가졌습니까? 이것이 하늘이 원하는 것임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이런 마음을 가진 아들딸이 되었다 할진대는 예수님께서 33년 동안 긍휼의 심정을 갖고, 사랑의 심정을 갖고 아버지의 마음을 붙들고 고난 속에서 부활의 역사를 일으키신 것과 마찬가지로, 여러분들도 그런 마음을 갖고 사망권을 밟고 올라서서 부활의 역사를 일으켜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여러분이 되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사망권을 밟고 올라서서 부활된 영광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제 하나님을 마음과 몸으로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머리로 알 때는 지나갔습니다. 하나님을 머리로 알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알아야 합니다. 지금은 마음으로만 알아서 안 되고 몸으로도 알아야 할 때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관념적인 신앙의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마음으로 믿으면서 몸으로 체휼하여야 할 때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끝날은 영원 불변한 믿음의 실체를 찾아 나오는 때요, 영원하신 사랑의 화신을 세우고자 하는 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실체가 나오면 내 몸에서 불신이라는 명사는 없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여러분은 아버지의 심정을 염려할 수 있는 아들딸의 모습이 되어 아버님을 모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은 불쌍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모른다면 모르거니와 안다면, 우리를 찾아 수고하신 하나님은 우리가 마음의 주인공으로만 모실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와 영원히 일체를 이루어 먹어도 같이 먹고, 살아도 같이 사는, 즉 영원히 동고동락할 수 있는 실체적인 주인공입니다. 영원히 변할 수 없는 사랑의 본체요, 영원한 소망의 화신체인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 앞에 예수님은 어떠한 변명도 조작도 없이 자기 자체를 잊어버리고 아버지를 대신한 뜻이라면 어떠한 행동도 할 수 있는 분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예수님의 발자취를 인계 맡는 아들딸이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예수는 30여년의 생애를 거치면서 복음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다가 굶주린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을 때에는 즉석에서 오병이어로써 5천여 무리를 먹이는 기적도 베풀었습니다. 줄 것을 다 주었습니다. 믿음도 소개하였고, 생명도 소개하였고, 사랑도 소개하였고, 인간이 요구할 수 있는 전체를 다 소개해 주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의 말씀을 예수의 실체와 같이 받아들인 때가 있습니까? 예수의 말씀을 통하여 그가 영원하신 하나님의 믿음의 실체라는 것을 느껴 보았습니까? 예수의 말씀을 통하여 그가 영원하신 생명의 실체라는 것을 느껴 보았습니까? 예수의 말씀을 통하여 그가 영원한 사랑의 실체라는 것을 느껴 보았습니까? 여러분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이런 것을 느끼지 못한다면 예수님은 슬퍼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30여 평생의 노정을 걸을 때, 이 마을 저 마을로 쫓기면서 말씀하시기를 어느 한 곳 발붙일 곳이 없어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 8:20)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외로운 심정을 붙들고 안타까워하신 그 예수님의 말씀이 4천년 천륜의 결실을 대표하였던 말씀인 줄 그때 사람들이 알았느냐 하면, 몰랐습니다.
재창조의 생명의 실체요, 영원하신 하나님이 소망하신 생명의 실체로서 4천년 동안 인류가 소망하여 왔던 그 뜻을 이루실 예수님인 것을 이스라엘 민족은 몰랐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믿음과 사랑과 생명을 가지고 나왔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몰라봄으로써 넘지 못했던 이 고개를 누가 해원해 넘어갈 것인가? 오늘 여러분이 비록 몰리고 있고 의지할 곳이 없는 불쌍한 무리라 할지라도 예수님의 뜻을 이어받는 인계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제 예수님이 걸었던 역사노정을 내가 다시 걷는다는 마음과 탄식하는 심정을 갖고 민족 앞에 나타날 때가 왔습니다. 세계 앞에 나타날 때가 되었습니다.
그러한 심정을 지닌 모습으로 민족과 세계 앞에 나타나야만 이스라엘이 배반하였던 역사를 가로막을 수 있고, 유대교가 배반하였던 역사를 가로막을 수 있고, 예수의 혈통적인 종족이 가로막던 그 모든 것을 가로막을 수 있고, 혹은 사도들이나 제자들이 배반하였던 것을 가로막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그 모든 것을 내 실체에서 풀 수 있는 하나의 모습이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2천년 전 예수님께서 뱃새다 근처에 있는 빈들에서 수많은 무리에게 떡을 나눠 주었습니다. 그런데 떡을 먹었던 무리들이 어찌하여 다 망하였던가? 말씀을 들었던 그 민족들이 어찌하여 예수를 배반하였던가? 3년 동안 같이 고생하면서 따르던 제자들이 어찌하여 예수를 배반하였던가? 그들이 배반한 이유는 말씀이 그날 그날을 위한 말씀인 줄로만 알았고, 주시는 떡이 그날 그 한 시간의 배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주시는 것으로만 알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주신 말씀이 자기 자신을 통하여 세상 끝까지 옮겨 주어야 할 말씀인 줄 몰랐습니다. 예수가 나누어 주는 떡이 자신을 통하여 세계 인류 앞에 나누어 주어야 하는 떡인 줄 몰랐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말씀과 떡은 자신의 실체이기 때문에 내 마음·몸·이웃·민족·국가·세계의 온 인류에게까지 옮겨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데 이 뜻을 몰랐기 때문에 다 망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여러분이 주 앞에 서거나 아버지 앞에 설 때에 ‘오, 나의 사랑하는 아들아! 이 말씀을 주노니 이 말씀을 간직하여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 되라.’고 부탁하는 것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또 ‘오, 사랑하는 아들 딸들아! 네가 살아생전 네 몸에 아버지가 임재할 수 있는 실체적인 성전이 되어다오.’라고 부탁하는 것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아버지만이 내 생명의 본체요, 아버님만이 내 사랑의 본체라고 느껴야 할 것입니다.
나에게는 친구도 없고, 가족도 없고, 아무도 함께하는 사람이 없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아버님의 말씀이 같이하여 아버님의 생명의 실체로서 아버님의 사랑의 심정에 사무쳐 천륜의 뜻에 따라 사는 사람이 되었다 할진대는 낙심하지 마십시오. 오늘날 우리는 몰리는 가운데 수많은 고난을 당할지라도 참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달픔을 참는 것은 민족을 위하고, 세계를 위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하늘땅의 탄식을 느끼면서 뼈에 사무치는 고난을 딛고 일어서서 기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예수님의 친구가 될 것이요, 민족의 친구가 될 것이요, 세계의 친구가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결국 그는 세계의 주인공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들 자신이 하나님 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심정을 통하여 당신의 소원을 풀려고 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들이 살아가는 것, 우리들이 머무는 것, 우리들이 억울함을 당하는 것 모두가 아버지를 위하는 것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에게 사랑이 끊기고 물질이 없다 해도, 친구가 없다 해도, 아버지를 위한 인연이 있다면 아무런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땅 위의 사랑보다도, 땅 위의 생명보다도, 땅 위의 사람보다도, 아버지의 믿음이, 아버지의 생명이, 아버지의 사랑이, 아버지의 소원이 나에게 같이한다 할진대는 한이 없게 됩니다. 아버지의 그 모든 것이 나와 함께할 때 나는 이 땅 위의 뭇생명을 대신할 수 있는 실체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누구보다도 민족을 위해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뒤를 돌아보면서 눈물지어야 할 생애를 걷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여러분은 아버지의 소망과 믿음의 실체로 영원한 아버지의 사랑의 실체로 서야할 아버지의 뜻을 알았으니 그 사명을 다해야 합니다.
이 민족은 믿어 주어야 할 친구를 서로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 자기 생명이 안착할 수 있는 하나의 참다운 가정도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 민족 앞에 무엇을 남겨야 할 것인가? 믿지 못하는 민족 앞에 믿음을 남겨 주어야 하고, 생명이 안착할 수 있는 가정이 없는 민족 앞에 생명의 가정을 남겨야 하고, 의지할 곳 없는 불쌍한 이 민족 앞에 사랑을 남겨야겠습니다.
여러분이 그러한 심정을 지니게 될 때는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님의 처지가 오늘의 나의 처지임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즉 그의 처지가 오늘날 우리의 처지이고, 천륜의 뜻을 위해 역사 과정을 거쳐 왔던 우리 선조들의 처지인 것을 느껴야 하겠습니다. 그런고로 여러분은 이제 역사적인 배척을 받아 이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어떠한 사탄과 싸우더라도 백 퍼센트 승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어떠한 사망의 권세라도 넘어서 그 사망세계를 가로질러 가나안 복지를 향하여 갈 수 있고, 아버지를 붙들고 6천년 동안 수고하신 그 서러움을 함께 나눌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아담 해와의 실수를 청산짓고 하늘의 마음을 가진 모습으로서 아버지를 대신하여 영광 받을 수 있는 여러분이 되어야 합니다. 하늘은 힘든 가시밭길도 무릅쓰고 슬픔의 길을 거쳐 나왔습니다. 여러분이 몰림을 받을 때 염려하시는 아버지를 바라보면서 참아 나가야 하며, 아버지께 안길 수 있는 한 날을 주시는 것에 대해 감사해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머리로 믿을 때는 지나갔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마음으로 몸으로 믿을 수 있는 믿음의 화신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생명된 예수님을 알되 머리로 알 때는 지나갔습니다. 마음으로 알고 몸으로 알아야 할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실체가 하나님의 믿음과 생명과 사랑을 대신하였다는 것을 여러분은 마음으로 몸으로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좌’ 하면 천륜의 역사를 대신한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가 ‘좌’ 하고, 여러분이 ‘우’ 하면 하나님의 생명이 ‘우’ 하고, 여러분이 ‘정’ 하면 하나님이 ‘정’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바로 이러한 사람을 잃어버리고 가정을 잃어버린 것이 에덴동산에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탄식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자신의 슬픔을 놓고 눈물 흘리지 마십시오. 언젠가는 그 눈물을 아버지께서 씻어 주시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자신이 억울하다고 불평하지 마십시오. 그 억울함도 아버지는 아실 것입니다.
이제 내가 아버지를 떠난 줄 알았더니 내가 아버지 앞에 선 것을 알았고, 내가 아버지의 사랑을 모르는 줄 알았더니 내 몸이 벌써 아버지의 사랑에 잠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아버지는 나의 아버지이심을 느끼게 됩니다. 내가 알려는 아버지는 관념에 붙잡힌 신앙의 하나님이 아니고, 실증적으로 체휼할 수 있는, 즉 나의 생활권 내에서 체휼할 수 있는 친아버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마 26:39)라고 기도했던 것과 같이 심각한 입장에서 아버지와 내가 하나 된 일체성을 여러분은 느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소망의 믿음, 소망의 생명, 소망의 사랑이 나에게 화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내가 동하면 만물이 동하고, 내가 움직이면, 모든 사람이 내 뒤를 따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런 경지에 들어가게 되면 모든 만물이 여러분을 대하여 환희하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또 그런 경지에 들어가게 될 때 남이 듣지 못하는 것을 듣게 되고,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되고, 남이 알지 못하는 것을 알게 되고, 남이 체휼하지 못하는 것을 몸으로 체휼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이 본연의 에덴에서 아버지를 모시고 살아야 할 인간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것을 느끼지 못하는 타락한 인간임을 여러분은 알아야겠습니다. 그리하여 6천년 역사를 대신하여 24억 인류를 대신하고 천추만대의 억조창생을 대신하여 아버님 앞에 자기 한 자체를 걸어 놓고 6천년 동안 서러워하신 안타까운 심정을 붙안고 ‘아버지의 안타까운 그 모든 심정을 우리가 책임지겠나이다. 아버지의 염려와 슬픔과 고통을 나에게 맡기시옵소서. 6천년 동안 수고하신 아버지를 위로할 수 있는 아들로서 효자가 되고 충신이 되겠나이다.’라고 맹세해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에게 이와 같이 안타깝게 아버지를 부르고 간곡히 호소한 때가 있었습니까? 없다 할진댄 여러분은 회개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신앙생활을 다시 한 번 돌이켜 보면, 하나님께서는 나 한 자체를 찾으셨지만 한 자체로서의 나를 찾으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느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함은 나 하나를 사랑하기 위함이 아니요, 하늘땅 전체를 사랑하기 위함입니다. 나를 부르심도 내 한 자체를 중심삼고 나를 좋게 하기 위함이 아니요, 하늘땅을 위해서인 것입니다. 나를 믿어 주려 함도 나 하나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나를 사랑하는 것도, 나를 생명의 실체로 세우고자 하는 것도 나 하나를 위하려는 것이 아니라 온 천주를 위하시고자 함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의 몸 마음은 영원히 여러분의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늘의 은사를 받아 뜻 앞에 감사한 때가 있었습니까? 여러분은 기뻐하기 전에 먼저 눈물지을 줄 알아야 합니다. 나는 기뻐하는데 이 땅의 만민은 어떠한가? 나는 높아지고 있는데 하늘의 영광은 드러나지 않고 있으니 하늘의 이 영광을 만민 앞에 어떻게 나타낼 것인가? 이것을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나만 즐거워하고 좋아할 것이 아니라, 나를 매개로 한 하나님의 우주적인 섭리가 남아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대하실 때, 천주를 창조하신 당신의 위신까지 망각하십니다. 그분은 창조주요, 하늘과 땅의 주인공으로서 섭리를 이끌고 계십니다. 하늘은 오늘날 사탄권 내에 있는 여러분을 하늘땅의 믿음과 생명과 사랑을 갖고 대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소원을 알아서 하나님의 믿음을 성취하고,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의 뜻을 이루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영원한 사랑과 영원한 생명의 불길이 여러분으로 말미암아 타오를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이것을 생활권 내에서 시간 시간 느낄 수 있는 여러분이 되어야 하겠고, 아버지를 모시고 고난의 길을 개척해야 할 사명이 타락한 후대의 인간 앞에 놓여 있다는 것을 깨닫는 여러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여러분은 모든 싸움을 다 싸워 놓고, 원수들을 무찌르고 무찌른 후 아버지께 승리의 경배를 드려야 하겠고, 여러분의 몸이 아버지의 안식의 보금자리, 여러분의 마음이 아버지의 안식의 보금자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창조 당시의 아버지에게 슬픔을 체휼시켰던 것을 회상하여 ‘나를 대함으로 말미암아 타락하지 않은 아담의 영원한 모습을 대하는 것과 같이 즐거워 하시옵소서. 아버지!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상실한 뜻을 나를 대하시어서 찾으시옵소서.’라고 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여러분이 되어야만 ‘오, 아버지여!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할 수 있는 아버지의 아들이 되고 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명심해야 되겠습니다.
사랑하는 아버님, 당신은 의의 선지선열들을 보내시어 우리를 찾아 주셨사옵고, 예수를 보내시어 우리의 마음의 터를 가꾸어 나오셨사옵니다. 이제는 저희의 몸으로써 아버지의 뜻을 실체적으로 이루어야 할 뜻이 남아 있는 것을 아옵니다. 내 한 자체는 가정을 통하여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 또한 만물까지도 아버지 앞에 세워 드려야 하겠사오니, 아버님, 함께하여 주시옵소서.
저희에게 머무는 천국만을 건설하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 만물권 내에까지도 아버지께서 임재할 수 있는 실체적인 천국을 건설해야 할 책임이 저희에게 남아 있는 것을 알게 되옵나이다. 이러한 천주적인 책임을 감당해야 할 저희들이 타락세계에 남아 있는 것을 아버지께서 보실 때에 저희들의 행로가 염려되고 안타까우실 줄 아오니, 부족하고 연약한 저희들을 아버지께서 다시 붙드시어서 영원한 생명을 가질 수 있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신다면 저희는 낙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희는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오니 아버지의 생명과 영광을 소유하기 위해 원수 사탄을 물리쳐서 아버지가 운행하실 수 있는 개체가 되고, 아버지가 운행하실 수 있는 교회와 나라, 세계와 천국을 건설할 수 있는 하늘의 용장들이 되게 인도하여 주시옵길,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제 저희의 마음으로는 아버지의 심정을, 저희의 몸으로는 아버지의 생명을 느껴서 만물권까지 아버지 앞에 세울 수 있는 아들딸이 되도록 인도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오늘의 수많은 인류 앞에도 당신의 기쁨의 소식이 들려지게 하여 주시 옵길 간절히 부탁하면서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창조의 이념은 특정한 개체만을 찾는 것이 아니라 온인류를 찾는 것이라는 사실을 아옵니다. 이 땅 위에 인류를 찾아오시기에 수고하신 아버지시여! 만우주를 선의 이념 가운데 찾아 세워야 할 섭리적인 뜻이 남아 있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저희들 천만번 죽어서라도 그 뜻을 이루는 거름이 되어 조금이라도 아버님께 도움을 드릴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니다.
아버지의 슬픔은 이 땅 위에 지으신 만물 때문에 있게 된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창조이념을 대신 이룰 수 있는 인간 개체가 없기 때문에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저희들, 이 시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저희에게 있는 마음, 있는 정성을 다 기울여 뜻을 위하여 싸울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이 피조만물을 지으신 창조주가 바로 당신이시요, 우리를 위하여 무한히 수고하신 분도 당신임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심정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아버지의 생명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요, 아버지의 심정을 체휼치 못하는 사람은 아버지의 사정을 알지 못하는 사람임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오늘 이 시간도 아버지께서 아버지의 마음과 동반하지 못하는 저희들을 바라보시고 서러워하고 계시다는 것을 깨닫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그리하여 저희의 마음이 완전히 아버지의 뜻과 하나되게 허락하여 주시어서 아버지의 친구처럼 살게 이끌어 주시옵고, 아버지가 운행하실 수 있는 저희들이 되어 생활할 수 있게 이끌어 주시옵소서.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뜻을 품고 유대 백성들을 위하여 나타나셨던 분이셨음을 저희들 이 시간 알게 되옵니다. 지으신 바의 인간도 그대로 남아 있사옵고, 지으신 바의 만물도 그대로 남아 있사온데 아버지가 임재하실 수 있는 실체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랑하는 아버님, 이제 저희에게 임재하시어서 그러한 저희가 될 수 있도록 저희의 몸 마음을 성별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아버지와 같이 즐길 수 있고, 아버지와 같이 창조의 이념을 이루어 나가는 새시대의 선구자들이 되게 이끌어 주시옵길,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옛날 예수님 때나 오늘날이나 또는 앞으로도 아버지께서는 일률적인 사랑으로 역사하실 줄 알고 있사옵니다. 사랑의 아버님, 이 시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안타까운 심정을 체휼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지상의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있는 아버지의 심정을 지니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만민을 품고 사랑할 수 있는 아버지의 성품을 닮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사랑의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 이 시간도 지방에 널려서 몰리고 쫓기는 당신의 아들딸이 많이 있을 줄 알고 있사오니 아버님께서 이들을 보살펴 주시옵고, 자신의 모든 것을 부정하고 오직 아버지의 뜻 하나만을 위해서 몸부림칠 수 있는 심정을 지니게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어떠한 십자가의 길, 탄식의 길이라도 뚫고 나가 아버지의 생명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아들딸들 되게 아버지께서 사랑으로 이끌어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남모르는 안타까운 심정을 품게 하신 분도 당신이오니, 아버님, 저희를 마음으로 위로하여 주시옵고, 몸으로 권고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끝날 최후의 싸움터를 사수하고 승리하여 사탄의 경배를 받을 수 있는 아들딸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모인 개체 개체는 각각 다를지라도 뜻을 위한 마음은 하나가 되어야 할 줄 알고 있사옵고 뜻을 위한 몸도 하나가 되어야 할 줄 알고 있사오니, 혹시 아버지의 뜻에 합당치 못한 탄식의 요소가 있다 할진대 그것을 제거하여 주시옵길, 사랑의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아버지의 말씀을 전하겠사오니 말씀을 받는 이들, 아버지 심정 앞에 자신의 모든 것을 직고하고 자기 자신을 분석하여 반성할 수 있는 아들딸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사랑의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 이 시간 마음에 여러 가지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 많이 모였사오니 저희의 마음을 주관해 오신 아버지시여! 상처받은 마음들을 어루만져 주시옵고, 저희의 마음에 옳지 못한 것이 있다 할진대는 그것을 제거하여 주시옵소서. 사탄이 침범할 수 있는 조건이 생기지 않는가 항상 반성해 보는 저희가 되게 역사하여 주시옵고, 혹 그러한 조건이 있다면 그것을 없앨 수 있는 저희가 되게 아버지께서 불꽃같은 눈으로 지켜 주시옵길,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 이제 말씀을 전하고자 원하오니 전하는 사람의 마음이나 받는 사람의 마음이 둘이 되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도 사탄은 간격을 노리고 있사오니 저희들이 아버지의 뜻을 중심하고 하나의 친구와 같이 움직이고 화동할 수 있는 이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사랑의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 삼천만 민족을 불쌍히 보시옵고, 이 땅의 모든 인류를 불쌍히 보시옵소서. 또한 영계의 모든 영인들이 요구하는 복귀의 탕감조건까지 찾아 세워 주시옵길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니다. 이 시간 지방에 널려 있는 외로운 식구들을 일률적인 은사로써 보호하여 주시길 다시 한 번 간절히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니다. 아멘.
이 시간은 ‘너는 누구의 것인가’라는 제목으로 여러분에게 말 씀드리겠습니다.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은 각기 어떠한 목적을 위하여 살고 있다고 자처하고 있습니다.
얼핏 생각하면 우리의 생애가 나를 중심 삼고 시작되어서 나를 중심삼고 끝맺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면, 나를 중심삼고 사는 듯한 이 생애는 곡절이 많은 생애요, 탄식과 비애와 슬픔이 많은 생애라는 것을 여러분은 지금까지 자신의 실제생활에서 많이 체험했을 것이라고 봅니다.
또한 자신을 중심삼은 생활을 하고 자신만을 위하는 생활을 하면 죄와 슬픔이 가득 차게 되지만, 자신을 잊어버리고 자신을 부정하는 생활을 하게 되면 어떠한 어려움도 무난히 넘어설 수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실제 생활에서 느꼈을 것입니다.
우리가 본질적인 면에서 인간을 더 깊이 생각해 보면 내 몸도 내 것이 아니고 내 마음도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부인하지 못합니다. 또 지음받은 전체의 피조세계, 온 우주도 그 주인이 피조만물 그 자체들인 것 같지만 더 깊이 생각하여 보면 창조주의 것임을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 지구는 주인이 지구 자체인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이 지구도 우주에 속하여 존재하고 있음을 부인 못할 것입니다. 또 지구 위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만물도 스스로가 주인이요, 스스로 생존하기 시작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만물 역시 지구의 인연을 벗어나서 존재할 수 없다는 것 또한 부인 못합니다.
이와 같이 모든 존재를 살펴보면 큰 것으로부터 작은 것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뗄래야 뗄 수 없는 인연을 맺고 있습니다. 지구를 살펴볼 때에도 우리는 이 지구가 스스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천체와 뗄래야 뗄 수 없는 인연을 맺으면서 자연법칙에 의해 운행할 때에만 지구로서의 존재요건을 완비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지구를 중심삼고 볼 때에도 지구의 원인자의 창조주가 있다는 것을 시인한다면 이 우주는 창조주이신 하나님에 의해서 생겨났고, 지구는 우주에 의해서 생겨났고, 이 땅 위에 존재하는 만물은 지구로 인해서 생겨났다는 것을 여러분은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이 땅 위에 존재하고 있는 만물의 근원자, 즉 인간의 부모와 같은 존재는 무엇인가? 지구라는 것을 여러분은 부인 못할 것입니다. 또 지구의 부모와 같은 존재는 무엇인가. 우주라는 것을 부인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주의 부모(근원자)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해명을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모든 만물은 이와 같이 반드시 부모의 인연과 같은 원인적인 과정을 거친 결과물로 존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세계 자체로서만 만족을 취하려 하는 것은 역사적인 모순이요, 현실적인 모순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이제 깨닫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입장에 처해 있는 우주 만상과 여러분에게 최후에 어떠한 해결책이 있어야 할 것인가? 이 모든 것을 해명할 수 있는 사람, 즉 모든 인연을 통할 수 있고 우주 전체의 가치와 전체적인 이념, 복음적인 이념을 대신할 수 있는 하나의 실체를 세워 우주를 대해 나설 수 있는 인격자가 이 종말시대에 나타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러한 존재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중심삼고 섭리하셨다고 단정지을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확실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오늘날 이 보이는 만물세계를 주관하고 있는 인간, 소위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처하고 있는 인간이 자신을 자신의 것인 줄 알고 있다면 그것은 오해입니다.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의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마음 또한 여러분의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것이라고 인정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이냐고 반문하게 되면 여러분은 대답할 수 없는 입장에 봉착하게 됩니다.
만약 이 문제가 해결되면 그것이 역사적인 하나의 기점이 되는 동시에 모든 문제를 풀 수 있는 해결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인간들은 이 문제를 망각한 채 그저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주를 잃고 슬퍼하시는 것보다도 이러한 인간들이 되었다는 사실을 더 슬퍼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하나님의 심정을 느끼고 체휼하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는 그로부터 근본적인 종교의 섭리가 출발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부터 하나님을 다시 찾을 수 있는 길이 개척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 땅 위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이 땅을 부모로 하고 있고 천체를 부모로 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서는 창조주를 부모로 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러분 한 자체도 여러분 한 자체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땅이 자신의 부모가 된다고 느껴 본 적이 있습니까. 우리의 몸은 땅의 모든 원소로 결합되어 있습니다. 땅이 우리의 근원이 됨을 부인할 수 없는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자신을 땅이 품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사는 때가 많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물질의 부모인 땅이 있음을 알게 되었는데 나아가 자신을 하나의 인격체로 낳아준 부모가 있다는 사실까지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인간은 어떠한 존재로 지음받았던가? 물질적인 모든 요소를 갖춘 존재, 하늘의 이념을 대신할 수 있는 실체 형상으로 세우기 위한 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흙과 물과 공기로써 지으신 이유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창조주의 이념을 통하여 지음받은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 자체에 하나님의 신성에 화할 수 있는 어떠한 요소가 없다 할진대는, 그 인간 자체에는 어떠한 이상도 희망도 소원도 있을 수 없는 것이 창조의 원칙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지으실 때, 모든 물질과 통할 수 있는 물질적인 요소의 결합체로서 육신을 빚어 놓고 그 육신에 육신을 주관하는 영을 불어넣어 인간을 지으셨습니다.
물질이 하나의 존재성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지구나 만우주와 통하는 인연을 갖고 있는 것과 같이, 인간도 땅을 부모로 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서는 이념적인 주체인 하늘을 부모로 하고 있음을 믿는 인간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인간은 무엇인가? 물질적인 모든 인연을 대신한 실체(육신)와 신령적인 모든 인연을 대신한 실체(영)가 결합된 하나의 실체로 빚어 만들어진 자체가 바로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치를 지닌 인간이기 때문에 창조주 앞에서 즐거워할 수 있고 창조주에게 경배할 수 있으며 창조주에게 송영드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인간 자체는 지극히 작은 한 개인이지만 온 우주를 대신하여 하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는 우주적인 가치를 지닌 존재인 것입니다. 또한 하늘은 그러한 가치를 지닌 완성된 인간을 대하기를 원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여러분은 자기를 세워 무엇을 주장하려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되겠습니다. 몸이 자기 것이 아니요, 마음이 자기 것이 아닌 입장에서 자기의 것을 주장하고 나서면 역사가 용납하지 않습니다. 과거의 역사에서 그런 개인, 그런 민족, 그런 국가가 망했던 사실을 여러분은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인간들이 필연적으로 이런 길을 가야 하기 때문에 하늘은 인간들에게 선의 도리를 찾아 세워 주고 선의 방향을 제시해 주면서 역사를 오늘날까지 끌어 나왔다는 것입니다. 씨족사회 시대에는 그 씨족의 관습, 민족국가 시대에는 민족주의나 국가주의, 오늘날은 국가의 차원을 넘어서 세계적인 주의를 중심삼고 살아왔습니다.
이제 여기에서 끝날 것이 아니라 최후에는 천도를 중심한 섭리의 뜻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자기의 주의나 자기의 국가이념을 지향하는 사람은 반드시 깨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걸 생각하게 될 때, 여러분은 어디에서 안정권을 찾겠는가? 여러분 스스로 행복을 느끼고, 여러분 스스로 만족하고, 온 피조세계 앞에 자신 있게 하나님을 대신하여 나타날 수 있는 안식권은 쉽게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인간들이 찾아 나온 공통적인 목표였습니다.
이제 마음은 천성을 대하고 몸은 만물을 대해야 할 입장에 서 있는 여러분들은 이 모든 만상이 나의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경지를 느껴 보았습니까? 혈통적인 인연으로 인한 씨족과 민족·국가, 그리고 세계의 인류를 향하여 그대들은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느낌을 가져 보았습니까? 더 나아가서는 지상의 인간들뿐만 아니고 영계에 있는 모든 영인들을 향하여 그대들은 나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어 있습니까?
이런 것을 생각하여 보게 될 때 그렇지도 못하면서 자만하여 자기의 무엇을 자랑하는 사람에게는 탕감이 있을 것입니다. 자기의 무엇을 세워 자랑하는 사람, 자기의 어떠한 주의 주장을 내세우는 사람, 그 사람은 반드시 깨질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여러분이 부인할 수 없다 할진대 여러분에게는 어떠한 표준을 지니고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될 것입니다.
원래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선의 가치를 지닌 하늘의 상대적인 입장에 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선의 부모와의 인연이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인간은 슬픔의 길을 걸어오게 된 것입니다. 인간은 죽음의 고개를 넘어서라도 이 선의 부모와 끊겨진 인연을 회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인연을 어떻게 맺을 것인가? 그 인연은 어떠한 세계적인 주의 주장이나 어떠한 국가이념, 사회적인 어떠한 체제로 맺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여러분의 마음에서 맺어져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의 마음속에서부터 그 한 사실이 결정되지 않는다면, 아무리 이 세계가 행복스러운 세계, 선의 세계가 된다 할지라도 여러분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게 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여러분의 욕망은 여러분 한 개체를 넘어서 국가, 혹은 세계를 향해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소유의 욕망을 지니는 그 자체도 귀하겠지만 그보다 더 귀한 것은 무엇일 것인가? 먼저 자신을 영원 불변의 주체에 속한 자체인 것을 인정하고 그 다음 우주적인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사람이 있다면 이 땅 위에는 그를 칠만한 어떠한 권세나 세력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인간들은 이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진정한 가치를 주장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만물을 취하고 우주를 주관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인간세계에 있어서 천주적인 이념을 나타내는 주의 주장이 있다면, 그것은 종교입니다. 종교 이상의 주의 주장이 없다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창조주를 대해 그분이 우리 아버지요, 우리는 그의 아들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관계, 그리고 뗄래야 뗄 수 없는 부자의 인연과 그 가치를 토대로 출발한 것이 종교입니다. 따라서 참종교는 단지 어떠한 민족을 지배하는 차원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미래의 국가, 미래의 세계, 더 나아가서는 천주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창조주의 이상을 통해 지음받은 땅과 인간이 삼위일체적인 관계로서 하나되고자 하는 목적을 향해 움직여 나오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을 찾아 회복하기 위한 것이 종교이기 때문에, 종교는 지금까지 주종의 관계를 중시하여 나왔습니다. 또한 무엇이 먼저이고 무엇이 나중이라는 선후의 관계 등으로 질서적인 인연을 맺어 나왔던 것입니다. 천륜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악이라는 것은 어디에서 출발되었는가? 천륜을 중심한 질서적인 인연을 벗어나는 것에서부터 악은 출발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늘은 여러분이 만우주의 것이요, 창조주의 것이요, 여러분 자신의 것이라 할 수 있는 그 한 기준을 세워 주기 위해 오늘날까지 수고해 나오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미래의 중심이 되고자 원합니까? 하나님과의 인연이 없이 세워진 인간세계의 중심은 영원하지 못합니다. 혹은 민족이 중심이 되고 싶습니까? 여러분의 뜻대로 민족의 중심이 되었다 하더라도, 여러분은 타락한 인간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한번 꺾일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세계 앞에 당당하게 나섰다 하더라도 한번 꺾일 때가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의 길, 즉 도의 길을 가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을 버리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그 말씀은 언제나 버리라는 것은 아닙니다.
타락한 인간이 선의 노정을 거쳐 나가는 데 있어서는 말할 수 없는 우여곡절의 노정을 거치고 혁명과 투쟁의 과정을 거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과정을 거쳐야 할 인간들이기 때문에 어떤 민족이든지 어떠한 주의에 치우쳐 고착되어 버리면 그것이 깨질 것을 아시고 그 모든 것을 버리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이 땅 위에 하늘을 운운하면서 나타나게 될 때에 말할 수 없는 핍박을 받은 것입니다. 또한 어느 시대에 있어서나 하늘을 내세운 개인이나 민족은 환영받지 못했던 것입니다. 2천년 전에도 예수님께서 신약의 복음을 들고 나섰지만, 그를 국가적으로 세계적으로 다 몰아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예수님 이후 지금까지 어느 시대에 있어서나 기독교를 핍박하지 않은 민족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땅 위에 기독교의 이념을 세우기 위하여 어떠한 국가의 정책적인 이념이든지 예수님께서 주장하는 내용과 일치되지 않을 때는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져야 할 민족을 갖지 못했고, 가져야 할 국가를 갖지 못했고, 가져야 할 세계를 갖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되찾기 위하여 지금까지 수고해 나오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면 그 뜻을 누가 성취시켜야 할 것인가? 그 뜻을 성취해야 하는 사람은 하늘도 아니요, 땅도 아니요, 바로 여러분 자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우주를 되찾기 위한 섭리를 하시면서 한번에 온 우주를 찾을 수 없기 때문에 먼저 하나의 사람을 찾기 위한 수고의 역사를 하셨으니 그것이 바로 아담 타락 이후 노아를 찾기 위한 1600년 기간이었습니다. 아담이 실수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노아를 세우셨으나 노아도 그 뜻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이것이 4백년 연장하여 아브라함·이삭을 거쳐 야곱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하나의 개인을 찾고, 하나의 가정을 찾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야곱가정을 중심하여 애급노정을 거치게 하셨고, 모세를 세우시어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민족을 중심 삼고 이스라엘 나라를 찾기 위해 오셨던 예수님께서 그 나라를 자기 것으로 찾지 못하시고 하늘 것으로 세우시지 못한 입장에서 돌아가시게 됨으로 말미암아 택한 이스라엘민족은 어떻게 되었던가? 세계를 유리하는 민족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이 오셨다 가신 이후 오늘날까지 하늘은 이 땅 위의 인간들 앞에 신약의 섭리노정을 세워 나오면서 무엇을 하고 계시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찾고자 하셨던 하나님을 중심한 민족과 국가를 건설하고 나아가 천주적인 하늘의 이념이 운행할 수 있는 세계를 건설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발판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오늘날 예수님을 믿고 있는 기독교 신자들에게는 아직까지 자신들이 찾아 세워야 할 국가의 이념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그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오늘날 이 시대에 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늘이 4천년 동안 수고하여 세워 나온 이스라엘 민족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 이스라엘민족을 대신할 수 있는 제2이스라엘의 사명을 오늘날 기독교가 감당하기를 바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또 기독교인들이 망각하고 있음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런 차제에 천성을 향하여 나아가는 여러분 자신들을 생각해 보면, 여러분은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인간이 천성의 도리를 바르게 전할 수 있는 모습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천성의 도리를 통할 수 있는 가정이 없고, 사회가 없고, 민족이 없고, 국가가 없고, 세계가 없습니다. 바로 이러한 입장에 처해 있는 자신들임을 여러분이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 모든 것을 찾아 세워야 하는 것이 최후의 목적이기 때문에 하늘은 지금까지 여러분이 그것을 찾아 세우기 전에는 어떤 것에 속하여 그에 의지하는 존재가 되지 않기를 바라 나오셨습니다. 즉 어떠한 민족, 어떠한 주의에도 속하지 않기를 바라 나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여러분은 그러한 것들을 마음속에 새기며 걸어가야 할 운명에 처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여러분에게 여러분의 몸이 이 땅을 대신할 수 있는 몸이 되어 있으며, 민족을 대신할 수 있는 몸이 되어 있으며, 영원한 생명을 대신할 수 있는 몸이 되어 있는가를 묻게 될 때, 여러분은 그렇게 되어 있다고 대답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여러분의 일신을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여러분은 옛날 야곱이 열두 자식을 중심한 70식구가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통치할 수 있는 나라의 것이 되어야 하겠으며, 그 나라는 하나님이 지배할 수 있는 세계의 것이 되어야겠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천상에 있는 모든 영인들까지도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이념권 내에 속할 수 있도록 해야 되겠습니다.
이걸 생각하게 될 때, 오늘날 여러분은 어떠한 입장, 어떠한 위치에서 택함을 받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또 여러분이 어떠한 입장에서 자신의 이념을, 자신의 욕망을, 또 자신의 행동을 어떻게 전개시켜 왔는가를 반성해 보아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날 여러분의 입장이 이와 같이 천륜의 전체적인 뜻, 창조적인 전체적인 섭리의 뜻 앞에 있어서 어떠한 위치에 처하여 있는가 하는 것을 여러분은 명백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독교에 대한 섭리의 뜻은, 하나님께서 즐거워할 수 있는 개인을 찾고 하나님이 지배할 수 있는 가정을 찾기 위한 것이요, 그 가정을 합하여 하늘의 민족을 이루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그 뜻을 이루는 책임을 선민 이스라엘이 완수했어야 했는데 그만 그들이 깨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세계 기독교인들을 동원하여 제2이스라엘을 건설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전세계 기독교인들이 하나로 단결하여 이 땅의 악을 대하여 진격할 수 있는 한 날, 기독교에서 말하는 최후의 심판날을 맞이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천륜의 뜻 앞에 완전히 화하여 천상의 인정을 받은 사람, 신비스런 체험을 한 사람은 알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대해 그대는 내 것이라고 인정하는 것을 느끼는 동시에 만물이 나를 대해 머리 숙이게 되는 것을 볼 것입니다. 온 피조만물이 그대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나님 것이라고 인정하는 날에는 영계에 있는 수많은 영인들은 물론 땅 위의 만물까지도 그에게 머리숙여 송영하게 된다는 사실을 오늘날 인간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정하고 만물이 인정할 수 있는 입장에 들어가게 된다 할진대는, 참다운 양심을 가진 사람들 역시 그 앞에 자연히 화하여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자신의 존재위치와 존재의식을 갖되 내 것이라는 소유 관념을 버리고, 내가 만물의 뜻을 대신하고 인륜의 뜻을 대신하고 천륜의 뜻을 대신하겠다는 생각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자신이 이런 이념을 갖고 나가는 것을 자각하는 사람이 왈(曰) 도인입니다. 여러분이 그러한 도의 길을 걸어 나가기 위해서는 이 지상에서 가질 것 다 가지고, 할 것 다하고, 누릴 것 다 누리는 생활을 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이 진정으로 천륜에 의한 존재의 가치를 찾아 세우고자 원할진대는 먼저 여러분 자신을 무자비하게 부정할 수 있어야 할 것이고, 자기의 가정이나 사회, 죄악된 이 세상을 대해 무자비하게 싸우겠다는 적개심을 갖고 나설 수 있는 각오가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완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봉사와 희생으로 죄악을 상대해 공격해 나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노정을 거치면서 하늘은 6천년의 기나긴 세월을 말없이 싸워 나오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면 그와 같이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인간을 다시 찾기 위해 수고해 오셨다는 것을 알게 된 여러분은 이제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가? 여러분 자신이 바로 이 우주의 것, 모든 인간의 것, 나아가 모든 만물의 것으로 화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또 하나님의 것으로 소유되어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것으로 소유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우선 이 모든 피조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아버지이신 것을 느낄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창조주 하나님은 영원불변의 절대자로서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부자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수고해 나오신 우리의 아버지이심을 알아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육신의 부모가 우리에게 혈육을 준 부모라면, 창조주는 어떠한 부모인가. 우리의 영원불변의 영적인 참부모이십니다. 내 마음의 부모인 동시에 영생을 주시는 영의 참부모라는 것입니다. 오늘날까지 인륜적으로는 혈육의 부모를 숭상하고 또 효도하라고 가르쳐 나왔으나 천륜의 창조주에 대해서는 어떠한 법도가 없었기 때문에 인륜과 천륜이 각기 다른 길을 걸어 나왔습니다. 그리하여 인륜을 대표할 수 있고, 천륜을 대신할 수 있는 창조주 하나님을 대해 천륜적인 참부모의 도리를 부르짖고 나서는 이가 있어야 했는데 그분이 왈 예수님이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창조주는 나의 아버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시요, 나와 일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부부일체요, 부자일체의 내용을 갖추고 예수는 그렇게 주장하셨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어떠한 주장보다도 천륜을 위하여 효자 효녀의 도리를 세워 나온 것이 위대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를 믿는 여러분들, 여러분은 역사의 종말기에 처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까지 나오기 위해서는 수다한 혁명과정을 거쳐왔습니다. 개인을 중심삼거나 혹은 종족을 중심삼고 주장하던 습관과 풍습은 더 큰 형태의 민족이 나타나게 되었을 때는 다 깨져 나갔습니다. 하나의 개별적인 국가는 역시 전체적인 통일의 이념을 추구하는 섭리에 의해 더 크고 강한 나라에 흡수되는 역사 과정을 거쳐왔다는 것입니다.
지구도 하나요, 인간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분이시니 최후에는 이 3자가 합석하여 기뻐할 수 있는 한 날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은 수고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어떠한 주도적인 권한을 갖고 명령하기 위한 하나님이 아니고 자신의 욕망을 갖고 주관하기 위한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6천년 동안 개인이 가정을 위하는 마음, 부모가 자식을 대하는 이상의 마음을 갖고 인간을 대해 나오고 계신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대해 효자 이상의 효성을 할 수 있는 마음을 지니고 자신을 아버지라 부르고 나서는 한 날을 찾기 위한 것이 인류를 대한 하나님의 수고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인간들은 이러한 사실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이 그러한 생각을 마음에 품고 기도하면 많은 기도가 필요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라는 그 한마디와 함께 수천년간 역사하신 아버지의 심정을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6천년 역사 가운데 하나님께서 투쟁의 과정을 거쳐오신 것도 오늘의 나를 찾기 위한 것이었음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하나님께서 자신을 대해 ‘사랑하는 아들아!’라고 불러 주시기를 원한다 할진대는, 여러분은 창세시에 지니셨던 아버지의 심정, 인간 타락으로 말미암아 느끼신 슬픈 심정, 다시금 온 세계 만민을 구원하시기 위한 그 심정을 느끼면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대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오늘날 여러분을 대해 섭리하시는 그 사실을 보고 만족하고 즐거워할 것이 아니라 아직까지 이 지상에 남아 있는 악과 대결하는 천신만고의 수고의 노정을 거쳐 가나안의 목적지까지 나아가야 할 인류를 염려하고 계시는 아버지의 심정을 느끼면서 사랑하는 아버지를 부른다 할진대, 그 아버지라는 한마디는 역사적인 전체의 뜻이 통할 수 있는 말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여러분들이 흔히 기도할 때에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는데, 세상에는 그 아버지의 이름을 더럽히는 사람이 많습니다. 아버지라고 부르는 말에는 6천년 역사의 피의 제단을 통해 왕래 했던 선지자들의 부르짖음이 함께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거기에는 십자가의 요소가 깃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선지선열들의 무한한 고통과 참혹한 역사적인 인연이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창조주가 나와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인연을 맺고 있는 아버지라는 것을 여러분이 인식했다 할진대는 그런 사람은 사탄이 아무리 강하다 할지라도 빼앗아갈 수 없습니다. 아무리 지옥의 불이 무섭다 할지라도 그런 사람은 녹여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메시아가 된 원인은 어디에 있었던가? 부모 앞에 효도할 수 있는 신념이 인륜의 역사를 대신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예수님은 자기 일신에서 인륜을 버릴망정 천륜을 대신하겠다는 각오를 지니고,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받들고, 즉 자기가 망하든지 흥하든지 자기의 위신과 체면을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나섰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가정에서 환영받지 못했고 자기의 종족으로부터 천대받았습니다. 또 세례 요한의 일당으로부터 환영받지 못했고, 나아가 유대교로부터 배척받고 이스라엘 민족으로부터 역적으로 몰림 받았습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맺힌 아버지의 원한의 심정을 풀어 드려야 할 사명을 깨달았기 때문에 인륜의 모든 것이 자신을 저버리고 또 그것들로부터 배척 받는다 할지라도 거기에서 낙망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예수님께서 메시아 될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인류 역사상 어느 누가 갖지 못했던 심정, 즉 하나님을 위하여 자기의 골육친척보다도 더 뼈와 살에 사무치는 심정을 예수님께서는 느끼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4천년 역사를 종결하여야 할 입장에서 모든 사람이 반대할 때, 자기 위신을 잊고 예수를 붙들고 눈물지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4천년 역사 속에서 수많은 선지선열들이 왔다 갔지만 하나님의 심정을 정말로 알아준 사람은 예수님 한 분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생애노정에서 인간 앞에 천륜의 법도를 소개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라는 심정에 나의 몸이 통하고 피가 통할 수 있는 그러한 자리에서 오관을 통하여 만상을 바라보게 될 때, 즉 하나님을 찾아 헤매는 인간과 천상의 인연을 맺고자 하는 만물을 바라보게 될 때, 예수님의 서러운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인류는 예수님과 하나님이 4천년 역사를 총결산하기 위해 한 순간에 상봉하였던 그 상봉의 심정을 느껴야 되는데, 이것을 오늘날 인류는 생각조차도 안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 흘려 기도하시던 때, 배반하는 민족, 불신하는 제단을 생각하시며, 세계의 섭리를 대신하여 나서려 하시던 예수님의 서글픈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교단과 민족, 나라와 세계가 반대하여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 컸기 때문에 인간으로서 느낄 바의 모든 심정을 지니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더 컸기 때문에 인간으로서 느낄 바의 모든 심정을 지니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지니신 모든 심정을 느낄 수 있었기에 골고다의 길을 자신 있게 나설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마 26:39)라고 기도하신 예수님의 심정에 동하여 기도한다 할진대는 지옥 갈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의 심정을 지니고 나타나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사랑의 심정을 알고 나서는 사람이 당시에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땅 위에 신랑 신부라는 명사를 남기고 갔습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기독교 가운데 막달라 마리아의 이름이 남아졌는가? 천추만대에 그의 이름이 전하여 내려오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예수님께서 그의 이름을 소개하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한낱 천한 여자의 몸으로서 3백 데나리온이나 되는 향유를 총각 예수의 발에 붓고 머리로 닦았다는 사실을 어느 누가 용납하겠습니까?
제자들까지 비웃고 가룟 유다가 항의하고 전체가 반대하는데 예수님은 어찌하여 복음이 소개되는 곳에 막달라 마리아의 이름이 기념될 것이라고 하셨던가? 예수님에게는 사랑하는 제자 또는 수많은 사람보다도 그 한 시간에 있어서의 막달라 마리아의 정성이 자신이 하나님께 있는 정성을 다 바친 것과 같은 조건이 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자 따르던 제자들은 다 도망갔습니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와 예수님의 모친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던 것입니다. 그들에게도 가정과 남편이 있었고, 고유한 구약사상을 중심한 유대교의 풍습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모든 것을 다 도외시하고, 즉 자신의 사회적인 위신이나 체면을 생각지 않고 죽은 총각 예수의 무덤을 찾아 헤매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만났던 것입니다.
그러면 천상의 심판은 어디에서 결정되어질 것인가? 여러분들이 하늘을 위한 공로와 수고가 많다고 해서 뽑낼 것이 아닙니다. 그것으로 결정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심정과 예수님의 심정이 여러분 자신의 몸에서 체휼되고 결실되어 그것이 하나님이나 예수님과 뗄래야 뗄 수 없는 인연이 된 그것만이 영생불사하는 조건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걸 생각하게 될 때 오늘날 온 인류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하나님을 통할 수 있는 진리의 말씀을 추구하고 영적인 체험을 추구하는 것도 좋지만, 하나님의 심중 깊이에 내가 머물 수 있는 사랑의 인연을 맺어 나가고, 예수님의 심정과 사랑의 인연을 맺어 나가야 되겠습니다. 그럴 때에 여러분이 예수님의 신부, 하나님의 아들딸로서 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은 슬픈 사람들입니다. 대한민국 삼천만 민족이 이스라엘 민족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사회에 교회가 아무리 많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교회가 없고, 믿는 사람이 아무리 많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아들딸이 아닌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이 땅 위에 무엇이 나와야 될 것인가? 이 민족을 살릴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딸이 나와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나와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민족이 나와야 되겠습니다. 따라서 이와 같이 눈물의 길, 버림의 길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할진대 우리는 거기에 감사할 줄 알아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족속이 하나의 민족을 건설하기 위한 애급고역의 4백년 기간에 하늘을 중심한 하나의 표준과 하나의 이념을 세워서 민족이 단결하여 변치 않는 믿음의 기간을 거치고 난 후에야 비로소 소망의 한 날을 맞이할 수 있었던 것과 같이, 오늘날 여러분도 그러한 입장에 처해 있습니다. 또한 오늘날 여러분은 애급 땅과 같은 그러한 땅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지 않으면 아니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여러분은 택한 이스라엘 민족을 업신여기는 바로궁중에 대해 적개심을 갖고 싸워 나오던 모세의 심정을 지니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한 날에 결심하였던 마음을 미디안 광야 40년 노정을 헤매면서도 변치 않았던 모세의 심정을 우리는 가져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여러분이 그러한 오랜 기간을 참아 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여러분의 무슨 진리, 무슨 운동, 무슨 주의 가지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늘의 심정을 대신하여 민족을 바라보아야 되겠고, 예수님께서 민족과 교회를 위하고 유대 나라의 망국된 사실을 청산하기 위해 기도하던 그 심정을 지녀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유대 나라의 초대교회와 같이 손에 손을 잡고 자기의 처지와 위신을 잊어버리고 하늘을 대신하여 나설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럴 때에 이 민족은 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반대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대하여 당장 저주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4천년 동안이나 참아 나오시면서 섭리하신 하나님의 심정을 느꼈기 때문에 오히려 그들을 위해 복을 빌어 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즉 겟세마네 동산에서 혹은 갈보리산상에서 또는 십자가상에서 원수들을 위하여 눈물을 흘리며 기도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고 그 나라의 모든 관습이나 법도를 준수했던 바울이 어찌하여 자신의 명예와 믿던 유대교를 박차고, 자기의 지식도 다 버리고 유대교로부터 몰림받는 입장에 서게 되었던가? 그것은 바울이 예수님의 위대한 사랑의 심정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어디 의지할 곳 없고, 몸둘 곳이 없고, 거친 세파의 풍랑에 휩쓸림을 당하면서도 자기 일신의 안락을 잊어버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전파하였던 것입니다.
바울이 사도의 직분을 다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인격 때문이 아닙니다. 그가 남들이 가지지 못한, 즉 하나님의 사랑을 대신하여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과 통할 수 있는 하나의 기준을 가졌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무리 학식이 많고 돈이 많다 할지라도 그것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여러분도 이러한 천적인 법도를 걸어 놓고 살아야 되겠고, 마음과 몸이 그것을 향하여 움직여 나가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하늘과 땅과 사람의 3대 부모의 인연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이 3대 부모의 은공을 무엇으로 갚을 것인가. 지금까지 빚진 인류·민족·백성은 다 망했습니다. 이런 이념을 찾아 세워야 할 섭리가 남아 있기 때문에 오늘날 세계적인 물질의 운세가 인간을 찾아 들어오고 있습니다. 물질이 인간을 때릴 때가 다가왔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자기 위치를 잊어버리고 만물 앞에 저지른 죄가 있어 이것을 끝날에 세계와 인간 앞에 탕감복귀해야 할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인간들이 세계적으로 물질적인 고통을 당해야 할 입장에 처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물질적인 고통을 밟고 올라설 수 있는 인간들이 나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초대교회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통할 수 있는 성도들이 나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선진국가인 미국도 민주주의적인 내용을 갖추어 움직이고 있지만 물질 만능주의만 부르짖는 입장이 되면 물질에게 얻어맞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물질을 전인류를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될 때가 되었기 때문에 미국 같은 나라에서는 다른 나라를 위해 원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원조하되 자기들의 이면의 이익을 취하기 위해서 원조한다면 이것은 천륜이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이념을 이루기 위해 인류는 민주주의 경제사회를 거쳐서 본연의 물질문화 경제사회를 지향해 나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물질의 본연의 가치를 주장하고 본성의 이념을 대신할 수 있는 실체의 기준자가 되어 가지고 물질과 인간과 하늘의 3자가 합석할 수 있는 형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오늘날의 모든 신앙생활을 헤아려 보게 될 때에, 우리는 물질에 예속된 신앙관념을 가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만일 그러한 종교단체가 있다면 하늘이 양심적인 인사들을 동원하여 그런 신앙관념을 수정할 것입니다. 그런 때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 천륜을 잊어버리고 자기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의식도 시정되어야 할 때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지구도 하나의 존재이기 때문에 의식이 있고 존재의 목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구도 피조물이기 때문에 하나의 주인이 있을 것입니다. 그 주인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계시는 한 하나의 이념하에 움직일 수 있는 세계는 반드시 성취될 것입니다.
또 인류의 모든 사상을 지배할 수 있는 통일적인 우주관이 나와야 됩니다. 하나님의 실존성을 중심한 이념이 인간세계를 지배할 수 있게 되고 인간들과 부자의 관계를 맺어 놓지 못한다면 하나님은 지구와 인류의 부모로서의 책임을 다 못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만물도 하나의 중심을 위주로 하여 움직이고, 땅도 우주의 이념을 중심삼고 움직이고, 인간도 역시 하나의 주의를 중심삼고 움직이는 그날이 와야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은 ‘나는 어떠한 사람이다.’, ‘나는 나라의 백성 이다.’라고 자랑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미국인들은 큰 나라의 백성이라고 뽐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 갖고는 영원하지 못합니다. 미국이 자기 나라를 위해서 살고 있는데 남의 나라를 위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옛날 희랍문명이 로마를 위하여 있었다는 것을 몰랐듯이 말입니다. 로마도 자기 나라의 문명이 영국을 거쳐 현대문명을 위하여 있었다는 것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미국 국민들은 자기 나라를 위해 일하는 것은 물론이지만 남의 나라를 위하여서도 일해야 된다는 것을 모르면 안 될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이것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일부 사람들이 자신들만을 위해 살 것이 아니라 천륜을 위해 일해야 한다는 이념이 서 있는 것은 불행 중 다행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여러분은 천성을 대신하여 세계적인 섭리 앞에 새로운 무장을 갖추어 가지고 나서야 되겠습니다. 지금까지는 물질문명이 인간을 지배하였고 인간의 이성을 통한 주의가 세계를 지배해 왔지만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천성을 통하고 예수님을 통하고 천적인 이념을 통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통할 수 있는 하나의 주의가 이 땅의 어느 한 곳에 나타나는 때가 반드시 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은 어떠한 주의도 가지고 있지 않고, 우리나라는 세계적인 선진국가도 아닙니다. 그러나 이 민족이 최후에 남아질 수 있는 천주적인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하여 하나님 것으로 바쳐 드릴 수 있고, 온 인류가 의지하고 소망하는 것, 하나님주의로 나타낼 수 있는 이념을 느낄 수 있는 곳에 서 있다 할진대는 여러분은 낙심하지 마십시오.
오늘날 통일교회에 모인 여러분들, 여러분은 비록 여기 조그마한 교회에 앉아 있지만 이것을 넓히면 세계를 대신할 수 있고, 나아가 천성을 대신 할 수 있다는 심정을 느꼈다면 문제는 해결될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해결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뜻을 대신한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이 세계의 주인으로 모시는 천국의 백성이 되어야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언제 어디서나 아버지의 뜻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되겠습니다.
아까 읽은 성경말씀 가운데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웃 사랑하기를 내 몸같이 하는 이것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 그리고 ‘원수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주장하신 것은 우리들이 세워야 할 법도이고, 영원하신 아버지의 민족이 자랑하여야 할 전통적인 풍습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주장하신 도리는 그 당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인류를 복귀시키는 데 필요한 천륜의 법도였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 여러분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하나님의 딸이 되려면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6천년을 참으시면서 사랑의 아들딸을 찾기 위하여 지금까지 싸워 나오셨으니 여러분도 싸워 나가지 않으면 아니 되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자신이 하늘의 것으로 자처하고 싶다 할진대는 먼저 눈물 흘리시는 하나님의 입장에 들어가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애달픈 역사과정을 거쳐온 것을 느껴 여러분도 눈물을 흘리게 될 것입니다. 듣고 있는 이 귀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먹고 있는 한 술의 밥도 넘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애달픈 하늘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었다 할진대 이 민족은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러한 사람을 찾아 나오고 계심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성경에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갈 5:22)를 말하였습니다. 이 성령의 아홉 가지 성품, 이것은 하나님이 주장하고 하나님이 건설하고 하나님이 세우려 하시는 그 나라의 표준이요, 그 사회의 제도요, 생활의 이념인데 이것을 여러분은 몸 마음에 사무치게 느껴본 적이 있습니까? 만약 여러분에게 그러한 사무친 마음이 있다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돌을 붙들고 말하고 싶은 것이 태산 같았는데 입을 다물고 참으셨던 그 심정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은 통일교회에 들어와 있는데 여러분을 위한 통일교회를 원하지 마십시오. 오늘날 우리가 있음은 이 민족을 위함이요, 오늘날 이 민족이 있음은 세계를 위함이요, 세계가 있음은 하늘을 위함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또한 여러분이 이 뜻을 위하여 수고하고 제단 앞에 무엇을 바치는 일이 있겠지만 하나님은 그것보다 이 뜻을 염려해 주는 것을 더욱 기쁘게 여긴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에게 편안한 잠자리를 마련해 주고 혹은 진수성찬을 베풀어 잔치하는 것보다도 예수님의 마음을 대신 염려하여 세계를 붙들고 눈물을 흘려주는 그것을 하나님도 예수님도 더 기뻐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또한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12제자가 자기를 받드는 것보다도 자기의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리고라도 유대 백성을 더 사랑하기를 요구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30여 생애노정이 그러했고 모세 역시 그러했으며, 하나님 역시 그러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효자·효녀·충신·열녀들이 되어야 할 여러분들은 하늘 앞에 변명할래야 변명할 수 없는 민망스러움을 느껴야 합니다. 또 내가 무엇을 했다고 주장할 수 없는 자신의 부족함을 느끼고 천성 앞에 송구함을 느껴야 되겠으며, 내가 내 것이 되지 않고 아버지 것이 되기 위해 싸워 나가야 되겠습니다. 만약 그러한 여러분이 되어 나선다 할진대는 역사는 민족을 거치고 국가 세계를 거쳐 천주주의시대로 넘어간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인간들이 주도적인 행세를 하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늘이 주도적인 행세를 할 때가 오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것인가! 하늘이 있는 한 하늘이 주도적인 행세를 하여야 할 때가 반드시 온다는 것입니다. 오늘날까지 인륜적인 하나의 기준이 서지 않았기 때문에 천륜이 간섭하지 못했지 인륜 앞에 천륜의 위신이 서는 날에는 그의 명령과 법도를 인간은 도저히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때는 이렇게 지나고 있는데 인간은 모르고 있으니 다시 한 번 반성하여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사랑의 관문에 자신을 통과시켜 놓고 ‘하나님을 절대 믿나이다.’할 수 있는 자신 있는 실력자들이 되어 영원하신 아버지를 모실 수 있는 참아들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아버님, 하늘의 뜻을 기필코 성취시켜야 할 역사적인 운명의 노정이 저희 앞에 가로놓여 있음을 알았사오니 저희에게 능력의 손길을 펴 주시옵소서.
저희의 몸 마음에 오직 아버지의 뜻만이 가득 차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이 땅 위에서 하늘의 어떠한 책임을 맡고 있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 하늘의 뜻을 인간적인 생각으로만 헤아리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마음의 움직임에 따라서 행동하는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몸이 먼저 움직이는 아들딸이 되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마음과 몸을 통하여 아버지의 영광의 심정을 느낄 수 있는 이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께서 정해 놓으신 천리법도와 부활의 이념이 저희들과 관계를 맺게 될 때에는, 역사 과정을 통해 섭리해 나오신 아버지의 심정을 체휼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사오니, 그 아버지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사랑의 마음을 지니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아버지의 복귀의 심정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이 땅을 대해 염려하시는 아버지의 심정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저희들은 부족한 모습들이오니, 아버지께서 붙들어 일깨워 주시어서 아버지의 백성으로 세워 주시옵길,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거지와 같은 불쌍한 저희들이오나, 아버지의 무한한 사랑의 손길을 느껴 노래하고자 하는 저희들이오니, 아버님, 저희에게 명령하시옵고 저희에게 운행하시옵소서.
오늘 이 시간 전체의 섭리의 뜻 앞에 바치고자 하는 마음이 저희에게 있사오니, 아버님이여, 저희의 부족함을 제하여 주시옵소서.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그리하여 저희들의 마음에 아버지의 심정만이 사무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저희의 몸이 아버지의 역사적인 모든 심정을 체휼하여 아버지 앞에서 탄식의 눈물을 흘릴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어서 아버지를 진정으로 섬기는 저희들 되게 인도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랫동안 사탄의 품에 안겨 살던 철부지한 저희들, 사탄과 관계된 모든 환경을 끊겠사오니, 아버님, 이 시간 긍휼히 보시옵소서. 또한 이 시간 저희를 다시 한 번 품으시어 생명과 부활의 권능을 나타내 주시옵소서. 아버지, 이 시간 모인 아들딸 위에 숨겨진 말씀을 나타내 주시옵고, 의심의 모든 조건을 헤치고 아버지의 원하시는 뜻대로 생명의 은사가 나타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의 마음이나 받는 자의 마음이 둘이 되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오직 아버지께서 친히 운행하시어 은혜의 시간이 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오늘 이 시간은 ‘모든 일을 복귀하여야 할 예수의 심정’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여러분들에게 잠깐 동안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원리를 통해서 아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6천년 섭리역사는 복귀의 섭리역사입니다. 그리고 복귀섭리역사의 목적은 잃어버린 인간을 찾는 것이요, 잃어버린 피조세계를 다시 찾는 것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원리를 배워 이미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또한 인간을 구원한다는 말도 이 하나의 목적을 성취한다는 것이요, 우주도 이 하나의 목적을 성취할 수 있는 조건을 갖고 있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습니다.
타락한 인간들이 천국이념을 바라는 것은 본성적으로 천국이념을 바라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내 자신을 두고 볼 때에, 내 자신의 생활에 행·불행이 교차되고 있는 것, 무한하고 영원한 세계도 행복의 천국과 불행의 지옥이 공존해 오고 있는 것도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라는 천국, 원치 않는 지옥의 공존은 타락한 우리 인간들이 복귀되는 과정에서는 필연적인 것임을 여러분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 만물을 지으시고 그 가운데 인간을 자기의 형상대로 빚어 만드셨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이 영원하심과 같이 영원할 수 있으며, 하나님이 행복을 느끼면 인간도 그 행복의 감정을 느낄 수 있게 지어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할 때 같이 기뻐할 수 있고, 하나님이 슬퍼할 때 같이 슬퍼할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 오늘날 여러분 가운데에는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 조차도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나님이 어떨 때에 기뻐하는지 슬퍼하는지 생각조차 못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또한 하늘을 위하여 슬퍼하고 수고한 사람들은 자신을 제물로 삼고, 자신을 희생하더라도 억울하고 분한 심정을 참아 나왔는데, 오늘날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인간들은 이런 사실을 상상조차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인간들을 오랜 역사를 참아 나오면서도 버리지 못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그 누가 알 것인가? 하늘을 한두 번 배반한 것이 아니었고, 6천년이란 기나긴 세월을 거쳐 나오면서 억천만번 반역하였던 인간들, 그런 선조들의 후손된 우리들은 하늘을 대하여 면목이 없고 머리를 들래야 들 수 없는 입장에 있는 존재들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심정 앞에 오히려 슬픔을 가하는 놀음을 하고 있는 인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느끼고 사는 사람은 심히 적습니다.
이런 인간들에게 어떻게 하여 하나님의 실존하심과 역사적인 아버지의 심정을 체휼케 하고 섭리의 노정을 알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이 타락 이후 인간을 대한 하나님의 안타까움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노아를 택해 세우셨고, 모세를 택해 세우셨던 것입니다. 나아가 하나님께서는 4천년이라는 역사 과정을 거친 다음에 비로소 예수님 한 분을 세우셨는데, 예수님은 이날까지 복귀섭리의 뜻을 붙들고 수고해 오신 아버지의 내적·외적 사정과 아버지의 내적·외적 심정을 인간들에게 알려주실 수 있는 한 분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만이 주관할 수 있는 분이었고 하나님만이 그와 더불어 의논할 수 있었으며, 또 하나님의 내적 사랑과 심정을 가장 잘 아신 분이었습니다. 그러면 인간의 타락이란 어떤 상태를 두고 하는 말인가? 하나님의 사정을 몰라준 것이 타락이었고, 하나님의 실정을 몰라준 것이 타락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정을 통할 수 있는 일 개인을 찾아 헤매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개인을 찾아 4천년 동안 수고하여 나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4천년만에 비로소 자기의 사정을 통하고 자기의 심정을 논의할 수 있는 한 분, 예수님을 찾아 세우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를 통하여 인류에게 자신의 사정을 알게 하고 자신의 심정을 알게 해야 할 간곡한 소원이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하나님의 간곡한 소원을 이루어 드려야 할 사명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었는데, 그들이 예수님을 배척함으로 말미암아 역사적인 비극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역사적인 흥망성쇠가 교차되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들은 하나님의 사정과 통할 수 있는 길을 걸어 나가야 되겠고, 하나님의 심정과 통할 수 있는 길을 걸어 나가야 되겠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심정과 사랑을 소유하여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서 하나님이 즐거워하면 인간도 즐거워하고, 하나님이 기뻐하면 인간도 기뻐할 수 있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의 참사람으로서, 하늘의 혈통으로 창조 본성의 모습을 갖추어 이 땅 위에 만민을 대표하여 나타나셨던 분이 바로 예수님이었음을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관계를 맺게 하기 위해 오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정을 대신하여 나타나셨고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하여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의 인간들이 예수님과 하나되었더라면 하나님의 심정과 사정을 알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친구도 될 수 있었는데, 그러하지 못했습니다. 이 한 사실이 역사는 흘러 왔지만 아직까지 이루어지지 못한 입장에 놓여있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죽음보다도 더 슬퍼한 하나님의 심정은 어떤 것이었던가? 하나님께서 4천년 동안 수고하여 예수를 보내신 것은 예수님을 죽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영적인 구원섭리를 완성시키는 것이 예수님을 보낸 목적이 아니라, 이 땅 위의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정과 심정을 알고 예수와 더불어 기뻐할 수 있는 한 날을 이루시고자 예수님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불신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게 되었고 하나님은 자신의 뜻이 좌절되는 비운을 맞았으며,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더욱 큰 슬픔에 잠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이 땅에 수많은 사람이 살고 있지만 사정과 심정이 각각 다릅니다. 천 사람이면 천 사람, 만 사람이면 만 사람의 생활 환경이 다 다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천가지 만가지의 목적지를 향해 갈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늘이 규정한 법도를 따라 천성이라는 한곳을 향하여 가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사정과 심정을 다 포기하고, 오직 천성의 사정과 심정을 대신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 하나의 주의와 하나의 심정과 하나의 사정을 갖고 인간들 앞에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각자 자신들의 천만가지 사정을 갖고 그를 대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인간들은 다 망했고, 그로부터 떨어져 나갔습니다. 하나님은 4천년을 수고하여 보낸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게 되자 다시 성신을 보내셨습니다. 이리하여 삼위신이 일체되어 하늘의 뜻과 하나된 사람들을 찾기 위해 수고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생각해 볼 때 2천년 전에 왔다 가신 예수 그리스도는 한 개인이로되, 그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대신할 수 있는 하늘의 주인공이었습니다. 이것을 그 시대 사람들은 몰랐습니다. 예수는 한 개인이었지만, 4천년 역사를 대신한 결실체요, 전세계 인류를 부활시킬 수 있는 생축의 제물이요, 천추만대까지 이어질 복의 기관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지상에서 누가 알았느냐 이거예요. 하늘의 심정을 소개하기 위해 인간 앞에 예수를 보내셨으나 이런 사정을 안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사정을 알아주어야 할 인간들이었고 하나님의 사정을 알아주어야 할 인간들이었는데도 인간들은 그와는 반대였습니다. 오히려 예수여! 나의 사정을 받아 주시옵소서. 하나님이여! 나의 사정을 알아주시옵소서.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늘의 섭리노정을 가로막았던 통탄스러운 행위였음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당시의 인간들이 하나님의 사정과 심정을 대신한 예수의 사정과 심정을 통했다면, 즉 예수의 심정이 이스라엘 민족의 심정이 되었던들 예수는 죽지 않았다는 거예요. 또 예수께서 최후의 죽음을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원대로 하옵소서.(막 14:36)라고 하신 기도가 필요치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심정 가운데 4천년의 서러움이 있었다는 것을 어느 누가 알았습니까? 만민의 애달픈 심정을 풀어 주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의 애달픈 심정을 어느 한때 알아준 사람이 한사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고, ‘오!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주님은 우리를 친구라 하셨나이다.’라고 뻔뻔스럽게 기도하고 있는데, 단순히 그러한 기도만 해서는 아니 됩니다. 실제로 전체복귀섭리 역사를 대신했던 예수님의 심정과 사정을 알고 기도해야 됩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으로부터 ‘그대의 마음이 내 마음이요, 그대의 몸이 내 몸이요, 그대의 사정이 내 사정이요, 그대의 심정이 내 심정이라는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와 같이 예수님의 심정을 안 사람이 당시에 있었더라면 이스라엘 민족이 반대하고, 교단이 반대하고, 문도와 사도가 다 외면하는 자리에 서 있었을지라도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이해하는 한 사람을 통하여 그 모든 것을 푸실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땅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심정과 사정을 위로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할말을 다하지 못하는 생활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자기 일신의 목적만을 위해 사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30여년 동안 목수의 일을 비롯하여 어려운 일을 하시면서 뜻을 위하여 묵묵히 제물의 노정을 거치셨습니다. 그리하여 때를 맞아 3년 공생애의 노정을 출발한 그날부터 골고다의 십자가에서 운명하신 그 시간까지 어느 한 시간도 자기 개인의 생애만을 위하여 생활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이 땅 위에 하나님의 사정을 소개하고 하나님의 심정을 소개하여야 할 역사적인 사명을 짊어지고 있음을 한 순간도 잊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자신의 마음을 당시의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하셨던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는 만물을 바라볼 때에 만물로부터 어떠한 느낌을 받았느냐 하면, ‘인간의 타락으로 맺힌 한을 해원시켜 주시옵소서.’ 라고 탄식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품을 떠남으로 인해 만물도 하나님의 품을 떠나 4천년 동안 탄식권 내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만물은 예수님 한 분을 간절히 고대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만물들이 자신을 대하여 ‘오! 주여, 우리들을 해원해 주시옵소서.’라고 탄식어린 호소를 하는 것을 느낄 수 있는 분이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4천년 동안에 수많은 영인들이 영계에서 신음하면서 자신들을 해방해 줄 메시아가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다는 것을 아셨고, 그 소원을 성취해 줄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는 것도 아셨습니다. 더 나아가 지옥 같은 지상세계에 살고 있었던 당시의 인류들, 사망의 철망에 갇히어 아우성을 치면서 비참한 환경에서 해방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었던 뭇생명들을 바라보게 될 때, 예수님은 이루 형용할 수 없는 불타는 심정을 가지고 사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믿고 있는 예수는 지상의 만민과 영계의 지옥에서 신음하고 있는 영인들을 위하여 눈물을 흘리셨고, 하나님의 역사적인 사정과 심정을 헤아리면서 눈물을 흘리셨던 분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을 바라볼지라도 그 한 사람을 개인으로만 여기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역사를 대신하고 온 천주의 이념을 대신하여 인간을 바라보았고, 한 인간에 대한 소망이 크면 큰 만큼 간절한 마음도 컸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느껴야 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반대의 아우성소리를 듣고 서러워하셨는데, 그 서러움은 자기 일신을 위한 서러움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이 4천년 동안 하나님을 대하여 사탄이 반대하던 것을 회상시켜 주는 장면이라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장면을 통해 하나님의 서러움을 느끼실 수 있었습니다. 민족이 아우성치는 소리를 들어야 하는 그 모든 사정을 통해 하나님의 서러움을 느끼셨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하나님의 이루 말할 수 없는 딱한 사정과 딱한 심정을 느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통하여 하나님이 위안받아야 되겠다는 것, 즉 자기 일신으로 말미암아 4천년 동안 애쓰신 하나님께서 기뻐하여야 할 입장에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을 느끼셨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을 통하여 증거된 예수는 믿기 쉽지만 예수님을 직접 대하는 입장에서는 믿기 어렵습니다. 후대에 높이 평가된 예수는 신뢰하기 쉽지만, 십자가에 달리고 이스라엘의 반역자로 몰리는 예수님을 믿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를 바라보시던 하나님의 슬픔은 어디에 맺혀 있었던가? 몰리던 그 장면에, 쫓기던 그 장면에, 못 박히던 그 장면에 맺혀 있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당시의 인간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만을 원했지 그 말씀을 세우기를 원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심중의 뜻을 실제의 생활노정에서 실천하고자 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하게 될 때, 그때나 지금이나 하늘은 서러워하여야 할 입장에 계시다는 것을 여러분은 느껴야 되겠습니다. 이제 여러분이 예수의 이름으로 몰림을 받아 보면 예수의 사정을 알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을 대신한 고난을 당해 보면 억울한 아버지의 심정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예수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홀로 기도할 때 세 제자마저 하룻밤을 같이 세우지 못하고 자고 있는 것을 보시고도 예수님은 왜 그들을 책망하지 못했습니까? 그것은 4천년 동안 당신을 배반하는 인간들이 많았지만 책망하지 못하시고 심판하지 못하신 하나님의 심정을 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이와 같은 제자들이 체휼하지 못한 예수의 심정을 체휼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채찍을 맞아 가면서 십자가를 등에 지고 골고다를 향해 나아갈 때 예수님은 하늘을 원망할 수도 있었으나, 하나님께서 4천년 동안 복귀의 섭리를 해 나오기 위하여 자기가 십자가를 지는 것 이상의 어려운 고비를 넘어오셨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예수님은 원망하지 못했습니다.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딴 것을 생각할 여지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십자가에 못박힘을 당할 때, 즉 양손·양발에 못을 박히고 머리에 가시관을 쓰이고, 옆구리가 창에 찔리고 생명이 끊어지는 입장에 있게 될 때에도 예수님은 불신하는 인간들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그러한 사정에 처한 것은 자신을 통하여 만민에게 하나님의 사정과 심정이 전달되기를 바라시는 아버지의 뜻임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뼈저리는 심정을 품고 하늘을 대하여 머리를 숙이고 황공한 마음을 가지셨던 것입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은 인류 앞에 메시아가 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무엇을 느끼셨던가? 예수님은 4천년 동안 하나님의 안타까운 서러움의 심정과 사정을 체휼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마음과 예수의 마음은 비로소 통할 수 있었다는 거예요. 또한 그와 같이 하나님과 예수님이 심정적으로 하나된 그 마음은 어느 누구도 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이 역사적인 섭리의 유업을 밟고 올라섬으로 말미암아 영계에 있던 영인들이 소생급 섭리에서 장성급 섭리의 부활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이요, 이것은 민족사적인 혁명이 아니라 우주사적인 혁명이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때까지 구약을 믿으며 행의적인 신앙을 하던 지상인들도 신약을 통하여 신의적인 신앙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대 변혁이었습니다.
실체의 세계에서 하나님의 마음과 예수의 마음이 하나의 화신체가 될 수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여기에서 예수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땅을 대신하여 하나님과 같은 심정을 갖고 같은 사정에 처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가 인간들을 중심삼고 직접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와 같이 천주적인 사명을 갖고 실체의 인간으로 오셨던 예수님을 다시 한 번 인식해야 되겠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던 그런 심정을 지니고 기도를 하여야 되겠습니다. 골고다 이상의 희생을 당해 마땅한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인간들은 자신들이 수고한 것이 조금 있으면 ‘오 하나님이여! 이 수고를 받아 주시옵소서.’라는 기도를 했고, 자신들의 사정과 애달픔이 조금만 있어도 ‘하나님이여! 나의 사정을 맡고 나를 위로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볼 때 하나님의 심정과 인간들의 심정은 그 느끼는 방향이 상극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이런 입장에 서 있는 신자들이 많습니다. 예수님 당시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은 예수님이 자기들 12제자만으로 만족하실 줄 알았고, 자기들이 예수의 소원의 전부인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은 엉뚱하게도 자기 민족만으로 하나님의 뜻이 다 이루어지는 줄 알았다는 거예요. 또 유대교단은 자기 교단만으로 하나님의 뜻이 완전히 이루어지는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중심으로 뜻을 이루어서 그것이 민족을 넘고 세계를 넘어 영원한 세계에까지 나아가겠다는 복귀의 이념을 갖고 계셨는데, 예수님 앞에 나타났던 12제자들은 자기들만으로 하나님의 뜻이 다 이루어질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적인 비운과 슬픔이 이것으로 말미암았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 자기 일신을 넘어 가정과 사회와 국가와 세계, 나아가 무한한 영계까지 복귀해야 할 사명이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개인을 찾아 헤매신 것은 민족을 찾기 위함이었고, 민족을 찾아 헤매신 것은 세계를 찾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세계를 찾기 위하여 오늘날까지 2천년 동안 수고하신 것은 온 천상천하를 하나님이 치리 하시는 곳으로 만들기 위한 수고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사람들은 몰랐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천주적인 계획을 실현하여야 할 자신 앞에 나타나는 그러한 무리들에게 하나님의 깊은 심정과 뜻을 말해 줄래야 말해 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딱한 형편에 처한 예수님이셨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요 16:12)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온 세계 만상을 복귀하여야 되는 하나님의 섭리를 대신한다는 천주적인 사명감에 불타서 하늘을 대하여 충성의 도리를 다하려고 했는데 당시의 인간들은 그러한 예수님을 몰랐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나는 예수를 수십년 믿었어. 나는 목사야. 나는 장로야. 나를 하나님이 몰라 줄 리가 없어.’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그러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 앞에 머리 숙여 눈물을 흘려야 됩니다. 4천년 동안 선민권을 자랑하던 이스라엘 민족이 망할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3년 공생애 과정에서 예수와 희노애락을 같이하던 12사도마저 예수를 불신할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아무도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이러한 모순의 역사가 벌어졌던가? 예수님의 관념이나 소망이 제자들의 관념이나 소망과 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불신한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예수님 당시에 만물의 아우성소리를 듣고 어둠 속에 있던 인간들이 하늘을 대하여 ‘저들을 해방시켜 주옵소서.’ 라고 기도하던 서글픈 심정을 느끼어 눈물을 흘려 본 적이 있습니까? 또는 저 영계에서 수천억의 영인들이 탄식하고 있는 아우성소리를 들어 봤습니까? 예수님은 들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류역사의 종말에 심판의 유황불이 내려 퍼부을 그 심판의 채찍을 아시고 눈물을 흘리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딱한 사정에 처하여 이리 끌려 다니고 저리 끌려 다니면서도 자기를 변명하지 못했던 예수의 그 사정을 느껴 보았습니까?
오늘날 기독교의 운명을 새로운 방향으로 인도하여야 할 끝날 이 시대에 있어서 우리는 가진 것이 없어도 좋습니다. 알고 모르는 게 문제가 아닙니다. 오늘 여기에 모인 여러분들! 단 한 가지, 이 몸이 찢기고 밟히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사정을 대신할 수 있고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만약 여러분 가운데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하기 위하여 죽는 사람이 있다면 전우주가 같이 눈물을 흘려줄 것입니다.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한 눈물의 인연을 맺고, 또 그 눈물의 심정을 체휼했다 할진댄 죽음의 길도 개의치 않을 것입니다. 예수가 이러한 슬픔의 심정을 대신하여 이 땅 위에 왔다가 쓰러지게 되었을 때 온 하늘땅은 어두워졌습니다. 하늘땅은 예수의 심정을 알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예수의 심정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피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여러분은 자기들의 아들딸을 위해 기도하기 전에 먼저 천상에 있는, 지금까지 수고한 역사적인 선조들을 위해 기도를 해야 되겠습니다. 자기가 잘 살기를 바라기 전에 이 땅 위의 인류가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내가 춤추기 전에 먼저 탄식권 내에 있는 만민을 바라보고 염려할 수 있어야겠다는 것입니다. 또한 기뻐도 기쁨의 표정을 취하지 못하고 즐거워도 즐거운 행위를 취하지 못했던 예수의 사정을 대신할 수 있는 마음을 여러분이 가져야 되겠습니다. 인류역사 종말시대에 처한 오늘날, 이 땅 위에 그러한 한 사람이 나타나 하나님과 예수의 슬픔을 막아 내고 이 우주의 서러움을 막아 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몰리고 천대받아도 ‘좋습니다!’ 해야 합니다.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 (요 19:30) 하시고 말없이 운명하시던 그 모습이 우리 주님의 모습이었고 우리 신랑의 모습이었습니다. 앞으로는 무슨 간판, 무슨 교파가 다 필요 없게 됩니다. 개개인이 달라도 관계없고 민족이 달라도 관계없는 참다운 이상세계가 온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소망은 온 천주의 이념을 대신한 소망이요, 예수의 사명은 온 우주만물을 복귀해야 할 사명이었습니다. 옛날 사도들이 이런 예수의 뜻을 몰라드렸던 것을 이제 여러분이 알아드려야 되겠습니다. 제1이스라엘인 유대민족이 예수의 심정을 위로해 드리지 못했던 것을 여러분들이 위로해 드려야 이 민족이 제2의 이스라엘 민족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 위에 오셔서 영원히 믿을 수 있는 개인을 찾았으나 그러한 개인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이 땅 위에 성신을 보내 그 성신을 중심삼고 제2차적으로 믿어 줄 수 있는 사람을 오늘날 기독교를 통해서 다시금 찾아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예수의 이름만으로 구원을 얻는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이념은 만민에게 통할 수 있으되 실체는 하나밖에 통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념을 믿었다고 하는 신앙자는 많되 실체를 믿었다고 하는 신앙자는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대의 마음이 내 마음이고 내 마음이 그대의 마음이며, 그대의 서러움이 내 서러움이라고 할 수 있는 신앙자는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날까지 맺혀진 하늘의 원한의 심정, 뼈골이 녹아지는 듯한 서러운 심정을 느껴 봤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어디를 가든 하늘을 대하여서는 자기의 정신을 잃어버리고 졸도할 정도의 심정을 갖고 이 땅 위에서 30여년의 세월을 보냈다는 것을 여러분은 잘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여러분들은 한 날을 중심으로 하여 심판의 관문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될 운명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면 이 심판의 길을 누가 보장하여 줄 것인가? 예수님이 보장해 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보장 못해요. 옛날 이스라엘의 가는 길도 예수님이 보장하지 못했고 하나님이 보장하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택한 선민이 망했던 것과 같이 끝날의 크리스천들이 가는 길도 예수님이 보장해 주지 못합니다. 하나님도 보장하지 못해요. 이것을 여러분은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보장받을 사람은 누구인가? 하나님의 사정과 심정이 통하고 예수가 온 인류를 품으시려던 그 외로운 심정을 느끼는 사람이 되어야만 비로소 하나님과 예수님으로부터 보장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를 믿고 있는 사람들이 자기가 믿는 정도에서 구원이 이루어지고 자기가 요구하는 전체의 천국이 건설되는 줄 알고 있는데 그것은 천부당만부당한 생각입니다. 영계에 가 보니 그렇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뭐 자기가 제일이라고 뽐내는 사람들이 영계에 가 보니 불쌍한 자리에 처해 있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찌된 곡절인가? 오늘날 여러분이 올바른 길을 가는 것 같지만 영원한 생명의 종점을 향하여 나아가는 노정에서는 출발지에서 머리카락의 두께만큼만 틀려도 끝에 가서는 수천만 리의 거리가 생겨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겠습니다.
그러면 이것을 연결시킬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의 논리적 지식도 아니요, 어떠한 주의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심정입니다. 하나님의 심정이 내 심정이요, 내 심정이 하나님의 심정이라고 할 수 있어야 하고, 서로 끌어당기는 심정의 인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최후의 심정적인 중점과 내 심정적인 중점이 통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사랑을 중심삼고 알파요 오메가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우리 일생을 걸어 놓고 예수의 소원을 풀어 드릴 때입니다. 2천년 전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한을 풀어 줄 수 있는 개인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개인들로부터 배척받았고, 가정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가정으로부터 배척받았으며, 사회와 교회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사회와 교회로부터 배척받았고, 국가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국가로부터 배척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와 같이 배척받고 몰림받으면서도 개인과 가정·교회·국가를 넘어 오늘날 세계의 무대에까지 하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싸워 나오고 있음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지금까지 선교 초기에는 어떤 국가로부터도 환영받지 못했고, 어느 민족으로부터도 환영받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신 길이 배척받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여러분이 성경책을 옆에 끼고 편안히 앉아서 찬송가나 부르고 기도하면 천당 갈 줄 알고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이런 자리에 머물면서 하늘의 은사를 대할 수 있는 것도 하늘이 2천년 동안 배척받고 유린당하면서 돌고 돌아 여러분을 찾아오신 수고의 덕분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세우기 위하여 역사상의 많은 신앙의 선조들이 배척을 당하면서도 개척해 나온 덕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끝날을 맞이한 오늘 기독교 신자들에게는 희생을 당하더라도 세계를 구원해야 할 사명이 남아 있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체휼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비록 지나간 역사 과정은 일일이 다 모른다 할지라도 오직 하나 가져야 할 것은 온 우주만상을 복귀하기 위해서 오셨던 예수의 심정입니다. 그리고 예수의 심정을 알아 가지고 세계를 붙안고 싸우겠다는 이런 각오를 가져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이 6일 동안 창조했던 만물이 원수들로부터 농락을 당해도 참으신 것은 하나님에게 원수라도 사랑으로 품어줄 수 있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길이길이 참으시면서 6천년이라는 기나긴 역사 과정을 거쳐오신 것입니다. 6일만에 창조했던 그 기간을 다 거쳐 나올 때까지는 하나님이 참고 품어 나오신다는 것입니다.
엿새만에 지은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6천년 동안 서러움의 눈물을 흘리시면서 사람 하나를 찾아 사랑할 수 있는 그날까지 수고해 나오고 계십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인간이 나타나 역사적 원한을 해소해 줄 수 있는 그 한 시간을 바라서 오늘날까지 참아 나오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하나님의 그러한 심정과 뜻을 받아 감당할 수 있는 한 존재가 이 땅 위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왔다 가신 지 벌써 2천년이 경과하였지만 6천년 역사를 대신하여 천상에서 지금까지 싸우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심정을 대신할 수 있는 존재가 이 땅 위에 다시 와 가지고 인간을 대표하여 하나님과 인연을 맺게 되는 그날이 왈 재림의 날이라는 것입니다.
멀지 않은 날에 모든 만상이 심판권을 벗어날 수 없는 원한에 사로잡히게 될 때, 인류의 아우성소리가 여러분들에게 들릴 것입니다. ‘오! 나를 구해 주시옵소서. 복귀의 원한을 우리들에게서 제거하여 주시옵소서’라는 기도의 음성을 들을 것입니다. 만물뿐만 아니라 땅 위에 있는 24억의 인류가 그 아우성소리를 들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영계의 수천억의 영인들이 ‘오! 땅 위에 있는 형제 자매 들이여, 우리들의 역사적인 원한을 해원하여 주시옵소서.’라고 하는 기도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여러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6천년 동안 인간을 찾아 나오며 수고하신 하나님의 사정을 알아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여러분은 무엇을 복귀해야 될 것인가? 탄식권 내에 있는 만물을 복귀해야 되겠고, 인류 전체를 복귀해야 되겠고, 지옥에 있는 영인들까지도 복귀해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는 무엇을 복귀해야 될 것인가? 하나님의 슬픈 심정을 기쁨의 심정으로 복귀해 드려야 할 것입니다.
6천년 동안 상처받은 아버지의 서러운 심정을 누가 찢어 놓았습니까? 갈래갈래 찢긴 아버지의 심정을 누가 아물게 하여 하늘의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아들딸이 되느냐가 문제입니다. 바로 여러분이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심정에 6천년 동안 상처를 냈던 인류이며 6천년 동안 하나님의 심정을 유린하던 인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인류가 이 천성을 대하여 그 모든 원한의 심정을 해원하여 주기를 이 시간도 호소하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선한 하늘 편 사람들은 땅을 대해 또는 모든 만물을 대해 말할 수 없이 서러운 심정, 갈래갈래 찢기는 슬픈 심정을 갖고, 하늘의 뜻을 붙들고 굶주리면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2천년 전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사셨습니다.
옛날 야곱이 이스라엘의 기반을 이루기 위하여 형 에서를 피해 외삼촌인 라반의 집에 가던 도중, 광야에서 돌베개를 베고 잠자던 때와 라반의 집에서 목자의 생활을 하던 때가 있었는데, 그때 야곱은 어떤 마음을 가졌던가? 야곱은 하나님이 혈족을 사랑하던 것과 같은 사랑의 마음을 가지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2천년 동안 혈족을 사랑하고 염려하던 심정을 상속 받아 살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맺히고 맺혀 온 하늘의 한의 심정을 풀어 드리기 위하여 애썼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서러운 마음을 야곱에게 인계시키기 위한 고난의 기간이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들은 시련의 노정이 있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을 반대함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민족이 4천년 동안 닦아 놓은 복의 터전이 후대에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옮겨졌습니다. 오늘날 여러분이 하나님의 심정을 갖고 나섰을 때 반대받는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반대는 결국 조금 지나면 지나가지만 반대하는 자의 복이 여러분에게 옮겨집니다. 예수가 이 땅에 왔을 때에도 거짓 것이 참된 것을 해치려 하다가 다 깨지고 갈라져서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참을 쳐서 승리한 예는 역사노정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여러분은 마음과 몸에 자신감과 여러분의 행동에 신념을 갖고 신앙생활을 하여야 되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아플 때 여러분을 위로해 주실 것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참다운 사랑을 느끼는 여러분이 될 것입니다.
사탄의 권세가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삼키지 못하고 소화시키지 못합니다. 소화시키려 하다가 소화시키지 못하는 날에는 도리어 넘어갑니다. 세계에 제아무리 크다 하는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하늘 뜻을 중심 삼은 이념과 신념으로 실천하여 사탄의 권세를 소화시키고 삼킬 수 있는 어떤 교파가 나오지 못하고 멈춰지는 날에는 세계가 사탄에게 넘어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가 주장하던 주의였습니다. 사탄이 예수를 삼킬 수 없는 그러한 조건이 땅에 남아 있었기 때문에 예수는 부활하였던 것입니다. 이제는 천주의 이념까지 흡수할 수 있는 아들딸들이 나와야 된다는 거예요. 모든 일을 복귀하여야 할 예수의 심정을 안 후에는 이 땅에 있는 나무 뿌리 하나까지라도 사탄에게 양보해서는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내 몸뚱이와 내 생명이 아버지의 것이요, 내가 갖고 있는 모든 물질까지도 다 아버지의 것이요, 이 나라 이 세계 이 하늘땅이 다 아버지의 것입니다. 따라서 타락으로 잃어버린 모든 것을 여러분이 아버지께 찾아 드릴 수 있는 하늘의 용자들이 되어야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 위에서 천년 동안 왕 노릇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 통일교인들은 지금까지 어떠한 신앙자가 갖지 못한 각오를 가져야 되겠습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나아가야 되겠습니다. 하늘의 뜻을 향하여 나아가는 과정에 있어서 역사적인 모든 섭리의 뜻을 알았다 할진대는, 역사상 어느 누구도 할 수 있는 환경에서 했다 하는 조건을 가지고는 안 됩니다. 할 수 없는 환경에서 했다 하는 조건을 만들어 놓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남 못하는 일을 하여 후대 사람들이 어떤 조건으로 말미암아 하늘 뜻을 이루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만들어 주어야 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세에게 들렸던 지팡이가 홍해를 쳤던 것과 마찬가지로 당신의 생애를 깊이 느끼어 지팡이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이 나오기를 바랐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피눈물이 쏟아지는 수난과 역경 속에서도 참고 견디신 것은 하늘의 뜻을 염려했음이요, 여러분을 위해서였고, 천추만대에 자랑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반대하는 민족을 바라볼 때의 그의 심정은 갈래갈래 찢어지는 듯한 비통한 심정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예수가 2천년 동안 전세계적으로 염려하여 나오던 모든 것을 우리들이 맡아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그 염려를 점점 줄여 나감으로써 세계를 주관하려던 예수의 뜻을 다 이루어야 되겠습니다. 나아가 예수 자신이 자기를 생각할 수 있는 한 날을 우리들이 찾아 이루어 드려야만 비로소 하나님께서 자신을 생각하고 예수님께서 자신을 생각할 수 있는 때를 갖게 된다는 것이에요. 인간을 위하여서 사시는 것보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몸소 즐기면서 살아갈 수 있는 한 날을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소원이 있다는 것을 오늘날 인간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 남이 싫어하고 아니라고 부정하는 길을 찾아 나왔고, 높은 울타리담을 쳐놓고 방해하는 것을 넘어온 여러분들! 이제 여러분은 가진 것이 없어도 좋습니다. 여러분을 하나님이 알아주느냐 알아주지 않느냐가 문제입니다.
여러분 자신들에게는 예수와 하나님을 안식시켜 드릴 책임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안식시켜 드리고 아버지여!라고 부를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인간들을 참소하는 사탄을 가로막고 싸워 원죄 없는 인간들로 만들어 줄 수 있는 자격자가 되어 가지고 아버지 이제 쉬시옵소서!해야 되겠습니다.
이래 가지고 ‘주님이여! 오시옵소서. 아버지여, 오시옵소서.’ 해야 그 분이 오신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인간을 대하여 하나님이 즐거워할 수 있는 한 날은 시험의 조건을 넘어서야 되기 때문입니다. 공포의 환경을 가지고는 안 돼요.
창조이념을 놓고 즐길 수 있는 환경에 도취하는, 그러한 동산에서 인간을 중심삼고 동거하기 위한 것이 창조의 목적이었습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이 그러한 자리까지 이루어 놓아야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의 전체섭리를 대신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고, 또한 만민이 그런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비로소 온 천주가 그를 중심삼고 완전한 해원을 향해 움직여 나갈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단단히 명심해야 되겠습니다.
사랑의 아버님! 예수님이 땅 위에 오신 것이 나 하나를 찾기 위하여 오신 줄 알았더니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사옵고, 내 가정을 위하여 오신 줄 알았더니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사옵고, 택한 이스라엘만을 위하여 오신 줄 알았더니 그것이 아니었사옵니다. 어떤 교파를 위해서 오신 분도 아니었사옵니다.
예수님은 온 피조세계의 소망이신 동시에 그 모든 가치를 대신하여 오셨다는 것을 저희가 알았사오니, 아버지! 그와 같이 전체를 복귀하여야 할 사명을 지닌 예수님 앞에 오늘날 저희들은 어떠한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까? 내 가정을 붙들고 죽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되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내 민족, 내 나라, 내 세계를 붙들고 죽겠다는 사람이 되지 않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내가 살아도 천지를 대표하고, 내가 죽어도 천지를 대표하여 죽는, 즉 천주의 생사의 문제를 걸어 놓고 살 수 있는 모습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날 이 피조만물 가운데 예수님께서 복귀해야 할 뜻이 이루어지지 않아 탄식의 아우성소리가 남지 않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혹 그러한 것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 할진대 저희들로 말미암아 그것을 제거하게 하시어 예수님과 아버님까지 안심시켜 드리고 그 심정까지 통과하여 아버지와 영원한 인연을 맺을 수 있는 참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그리하여 역사적인 모든 원한을 해원하고 해원의 위로를 받을 수 있도록 아버님 협력하여 주시옵고, 같이 나아갈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 만사를 잊고 하늘을 찬양해 드릴 수 있는 참효자 효녀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오며,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였사옵나이다. 아멘.
여러분들에게 이 시간 말씀드리려 하는 제목은 ‘하나님은 몰림받는 인류를 어떻게 할 것인가’입니다. ‘하나님은 몰림받는 인류를 어떻게 할 것 인가’ 이러한 제목을 가지고 잠깐 동안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여기에 모인 여러분 가운데에는 자기 스스로 행복하다고, 기쁘다고 자랑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과 몸이 여러분의 마음과 몸 같지만 여러분의 마음된 자리에 또는 몸된 자리에 못 서 있다는 것을 각자가 자인할 것입니다. 즉 내 마음이 영원한 마음의 입장에 서 있지 못하고, 내 몸은 마음이 영원히 거할 수 있는 몸이 되어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자신의 마음을 중심삼고 자신 있게 살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 우주 안의 인생행로에 있어서 성공자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역사에서는 어느 한 사람도 자기 마음대로 다 해보고 살았다고 주장한 사람, 장담하고 나선 사람, 확신을 가진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마음과 몸이 무엇인가와 인연을 맺어야 할 것인데도 불구하고 인연을 맺지 못하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은 마음과 몸을 믿어 줄 수 있고 알아줄 수 있는 환경을 못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가정과 사회, 세계, 더 나아가서는 하늘과 땅에 있는 것도 여러분 것이 못 되어 있음을 느낄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하게 될 때, 땅 위에 살았던 모든 인간들은 몰리고 쫓김받던 인간인 것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옛날 우리의 선조가 사랑의 동산을 이루려 했던 에덴에서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의 품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사랑의 품에서 쫓겨난 인류는 지금까지 6천년의 역사가 경과하였지만 그것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지금 이 시간도 몰림받고 있고 쫓기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느끼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들은 인륜이라는 법도를 통하여 인간끼리 질서를 세워 나오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이것 가지고 안 되니 여기에 종교를 세워 천리법도대로 살 것을 주장하고 있음을 여러분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인간 세상에 있어서 영원히 변할래야 변할 수 없고, 영원히 갈릴래야 갈릴 수 없는 하나의 완전한 의리를 완성하여 하늘과 땅 앞에 자랑할 수 있는 그런 의리의 관계를 맺은 사람이 있느냐 할 때에 없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종교를 세워 놓고 그 도리 앞에 영원히 갈라질 수 없는 자신을 세웠느냐 할 때, 이도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없는 자신인 것을 깨달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천륜 앞에 역시 영원히 하나될 수 있는, 어떤 무엇이 가를래야 가를 수 없는 하나된 입장에 서 있느냐 할 때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여러분은 느낄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 세상에서 의리가 떠났고, 인간에게서 도리가 떠났고, 천륜이 떠난 것을 스스로 자인한다 할진대는, 오늘의 여러분이 마음으로 믿고자 하는 것, 여러분이 몸으로 찾고자 하는 것, 그것들이 천륜을 대신할 수 있으며 도리를 대신할 수 있으며 혹은 인륜을 대신할 수 있겠느냐 할 때에 역시 그렇게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여러분은 느낄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누구를 위하여 있는가! 나는 누구의 것에 귀결시키기 위하여 지금 살고 있는가, 나는 왜 하나의 사랑과 하나의 생명과 이념을 찾아 허덕이고 있는가?’하고 반문하게 됩니다.
이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여러분은 이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여러분 자신들의 처지를 재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심각한 입장에서 이 모든 것을 재발견하게 되었을 때에 자기 마음속에 스며드는 고통을 피할래야 피할 도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심령의 모든 문제, 나아가 인생의 모든 궁극적인 문제, 그리고 인생과 천륜과의 관계를 명확히 알아서 자기 생애의 가치를 실현시키고자 할진대 여러분은 이 혁명적인 일을 위하여 죽음을 불사하고 싸우겠다는 각오와 결심을 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러한 각오와 결심을 하고 실천한다면 하늘의 섭리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할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앞으로의 세계는 어떻게 될 것인가? 즉 다가오는 종말시대는 어떻게 될 것인가? 종말시대는 말씀을 통하여 보더라도 인간 세상에 의리가 없는 시대가 됩니다. 도리를 벗어난 시대가 될 것이에요. 천륜을 벗어난 시대가 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끼리에도 물론 그렇게 되지만 하늘이 인간을 대해 그러한 입장으로 몰아내는 한 때가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종말시대에 그것을 맞아 가지고 천륜을 붙들고 설 사람은 누구인가? 하늘의 도리를 붙들고 설 사람은 누구이며, 인륜을 대신하여 의리를 붙들고 설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여러분이 이것을 반문하여 보고 스스로 자신이 없다는 것을 느낄진대는 천륜 앞에 죄인임을 직고해야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천륜 앞에 용납받을 수 없는 죄를 저지른 죄인이요, 혹은 도리와 인륜 앞에 용납받을 수 없는 자신인 것을 깨닫게 될 때, 여러분은 거기에서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바로 이러한 입장에 처해 있는 여러분 자신임을 자인하지 않는다 할진대는, 여러분은 앞날의 심판의 고개를 넘어설 수가 없게 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앞으로는 여러분이 갖고 있는 생명까지도 이 땅에서 몰아낼지 모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지금까지 갖고 있는 주의 주장까지도 시험할 때가 올 것입니다.
인간이 타락함으로써 천륜을 배반하였기 때문에 인간의 종말시대에 있어서도 개인은 물론 세계도 역시 천륜을 배반하는 자리에 나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배반하게 되면 하나님도 역시 인간을 버리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이런 역사적인 노정을 거쳐온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겠습니다.
옛날에 아담이 하나님 앞에서 몰림받아 쫓겨났을 때, 그 한 사람만이 쫓겨난 것이 아닙니다. 그가 쫓겨나게 되어 인류는 6천년 동안 쫓김받아 오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계 인류를 복귀해야 할 때가 와야만 된다는 것입니다. 전인류를 복귀하기 위해서는 먼저 인간이 의리로부터 쫓김 받을 것이요, 도리로부터 쫓김받을 것입니다. 그것을 여러분이 넘어서야 되겠습니다. 또한 그럴 때에 여러분이 이 땅 위에 참다운 의리와 참다운 도리와 참다운 천륜을 세울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것들이 개인에서 쫓기고 가정에서 쫓기고 국가에서 쫓기고 세계에서 쫓기어, 이 땅 위의 모든 규율이 혼란상태를 이룰 것입니다. 나아가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세계에서 쫓김받고, 천륜과 온 천주로부터 쫓김받을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성경 말씀에도 써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인간들이 믿음과 의리의 노정을 찾아 나서도 인간은 그것을 영원히 지닐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도리의 길을 찾아 나서도 이것을 영원한 것으로서 가질수 없다는 것입니다. 천륜의 길을 찾아 나섰다 할지라도 이도 역시 영원한 존재로서 하늘 앞에 설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서로 믿어야 할 하나의 상대를 찾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처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 자신을 믿어 줄 수 있으며 내 자신이 믿어 줄 수 있는 하나의 존재가 있어야 되는데, 끝날에 가서는 그가 나를 오히려 치는 입장에 선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역사 과정을 거쳐와 가지고 이제는 어떠한 시대가 되었느냐 하면, 사랑하는 부모도, 자녀도, 형제도, 친구도, 사회도, 교회도, 국가도, 세계도 믿을 수 없는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세계의 종말시대에 있어서 인간이 취해야 할 것은 개인적인 이념이 아니고 우주적인 이념인데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그것을 취하지 못하게 하고 개인으로부터 사회, 국가, 세계까지 몰아내는가? 이와 같이 개인적으로 믿을 수 없고, 가정적으로 믿을 수 없고, 사회적으로 믿을 수 없고, 국가적으로 믿을 수 없는 입장을 어떻게 맞을 것인가? 이것이 지금 인류가 염려해야 할 크나큰 문제인 것이며, 바로 이러한 입장에 오늘날 우리는 처해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찌하여 이러한 섭리를 해 나오시는가? 여러분들이 믿는 그 믿음이 영원성을 대신하여 하늘 앞에 설 수 없고, 여러분이 믿고 나가는 도리가 영원성을 대신하여 하늘 앞에 설 수 없고, 여러분이 믿고 나가는 인륜도 역시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크게 혁명하여야 할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옛날 애급문명을 중심삼고 볼 때에도 애급문명의 사명이 다 끝난 후에는 그것을 때리는 역사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반대파가 나와 가지고 때리는 역사가 있었다는 거예요. 그리하여 이것이 그리스 문명을 거쳐서 어떤 새로운 문명의 형태를 갖추게 될 때에 또 새로운 것이 나와 가지고 그 문명을 때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로마를 거치게 되는데 로마에 들어온 기독교를 때리는 역사로 말미암아 기독교가 이것을 인수해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래 가지고 기독교 봉건사회를 건설한 것입니다. 그런데 후에 기독교 봉건사회도 스스로 영원한 생명력을 유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때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혁명하는 과정을 거치게 되고 인문주의 사상을 통한 과학 문명이 대두하게 됩니다. 그리고 영국에서 새로운 신앙혁명의 봉화를 들었던 무리들이 어디로 쫓겨났느냐 하면 지금의 남북미대륙으로 쫓겨갔습니다. 쫓아낸 사람들이 잘 되는 줄 알았지만 쫓김받는 그들이 쫓아낸 사람들의 모든 복을 인계해 갔다는 것을 오늘날 인간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이제 책임을 못 하면 하나님께서 미국이나 민주주의 권내에 있는 국가들을 다시 한 번 때릴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가진 바의 사명이 세계적인 사명을 대신할 수 없는 시기가 올 때는 결코 그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하늘이 채찍을 가하여 몰아내게 될 때는 새로운 무엇이 나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체에서 새로운 무엇이 나오지 않는다면 외부로부터 그 뜻을 나타내게 하기 위한 형태가 나타나는데, 바로 그러한 사명을 갖고 나온 것이 오늘날 공산주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공산주의 자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사명을 다하면 반드시 둘 아니면 셋으로 갈라진다는 거예요. 거기에서 하나의 우주통일의 이념이 이루어질 때까지 하늘은 그것을 끊임없이 몰아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몰림받는 역사 과정을 거쳐온 인간들은 그 결과만을 보고 알 따름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탄식의 덩어리였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기독교를 중심삼은 하나님의 섭리역사노정을 회고하여 보게 될 때 반드시 그랬습니다. 아브라함 한 사람을 세우려 할 때에도 개인적으로 그가 살고 있는 가정에서 그를 몰아냈습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버리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 했습니다. 하늘은 한 개인을 하늘 앞에 세우고, 또는 지금까지 닦아 왔던 터 가운데 하나의 새 것을 세우기 위하여서는 그 터전을 몰림받는 운명에 처하게 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몰림받는 환경에서 조금도 섭섭하게 생각지 않았습니다. 어떠한 핍박과 어려움이 올지라도 그 핍박과 어려움보다 더 강한 심정을 지녔고, 하늘을 대신하여 변할래야 변할 수 없는 의리의 법도를 세웠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늘을 대신하는 도리의 법도를 찾았고, 천륜을 대신 할 수 있는 하나님을 알았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을 버리고 갈대아 우르를 떠났습니다.
이리하여 아브라함에 의해 하나님의 제2차적인 섭리를 출발시킬 수 있고 새로운 형태의 이념을 세울 수 있는 개인적인 기준이 잡혔는데, 그 토대 위에 또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야곱이 가정적인 복귀의 사명을 인계맡아야 할 뜻이 있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가정에서부터 이삭, 야곱에 이르기까지 모두 쫓김을 받았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라반이 사는 하란땅으로 쫓아냈습니다.
그러면 가족과 친척으로부터 쫓김받고 거부당하는 입장에 선 야곱이 어떻게 그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던가? 하늘 앞에 축복받은 그 축복을 잊지 않고 세상이야 변하든 어떻게 되든 나는 변할 수 없다는 하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야곱은 하늘이 믿어 주지 않아도 나는 나의 가정이 모두 믿도록 하겠다, 또 축복의 유업을 찾아 이루어 가지고 하늘이 섭리할 수 있는 터전을 만들어 드리겠다고 하는 믿음을 제시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야곱은 아브라함의 가정을 통하여 세우려 했던 그 천륜의 뜻을 계승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21년만에 믿음의 가정을 이루어 가지고 돌아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또 그 다음에는 가정 단위의 기준이 잡혀졌던 이 토대 위에서 민족형으로서의 범위로 다시 나아가야 할 사명을 짊어진 모세가 그 민족 앞에서 쫓겨났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민족 앞에 몰림받는 운명에 처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늘이 몰아내고 민족이 몰아내고 또는 어떠한 사람이 몰아낸다 할지라도 하늘을 대신한 신의의 심정, 그 바라는 소망, 천륜을 대신한 그 간절한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모세가 어떠한 환경이 자기 일신을 몰아치더라도 천성을 대하여 불변의 마음으로 미디안 광야 40년 목자생활을 거칠 수 있었습니다. 그런 후에야 비로소 민족을 이끌어낼 수 있는 하나의 기준이 잡혀졌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민족의 기준이 잡혔으니 세계 기준을 세워야 할 때가 옵니다. 그 사명을 짊어지고 오신 분이 누구였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예수 역시 이런 민족 기준 앞에 나타나게 될 때에 민족이 갖고 있는 사상과 민족이 갖고 있는 신앙과는 배치된 입장에서 몰림받아야 할 운명에 처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를 민족이 몰아냈습니다. 민족이 몰아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세계 인류가 몰아냈습니다. 그리하여 기독교는 이 몰림받는 운명의 노정을 거쳐 오늘날 전세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입장까지 나왔다는 것을 여러분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세계를 움직이고 있는 기독교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이 기독교도 역시 끝날에 하늘의 이상세계가 오는 것이 틀림없기에 그때가 되면 하나님이 몰아낸다는 것을 알아야 될 것입니다.
그러면 몰아내는 데 어디로 몰아낼 것인가? 예수를 중심삼고 세계 무대로 몰아냈으니, 이제는 온 세계 무대를 중심삼아 가지고 하늘과 땅의 세계로 몰아낼 때가 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평면적인 세계의 이념을 가지고서는 설 수 없는 때가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제아무리 과학문명을 자랑하여도 과학문명이 인류의 행복을 소개해 줄 수 없고, 아무리 논리적인 체계를 갖춘 철학이 있다 할지라도 그 철학이 인류의 모든 생명문제, 이념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모든 분야를 연구하고 나니 오히려 그것이 자기를 친다는 것이며, 나아가 그것이 지금 인류를 구해주지 못하는 입장에 봉착하고 있습니다. 엄청난 힘을 가진 원자력을 연구하여 인류의 평화를 건설하리라고 기대하였지만 결국은 이것으로 말미암아 세계는 손들어야 할 때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어떤 학자가 자기가 사랑하는 학문을 중심삼고 일생을 바쳤다 할지라도, 그 학문이 영원한 생명문제와 영원한 이념문제를 천륜을 대신한 입장에서 보장해 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이때는 배우고 있던 그 학문이 나를 쫓아내는 때입니다. 철학이면 철학, 과학이면 과학이 인류를 쫓아내고, 종교면 종교가 우리를 쫓아낸다는 것입니다. 또 더 나아가서는 주의와 사상이 한번 더 쫓아내야 할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하게 될 때 오늘날 인간들이 허덕이면서 믿고 있는 이 사실들이 불안한 자리에 처해 있는 것을 여러분은 인식하지 않으면 아니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학자들은 자기들이 주장하는 학설을 중심삼고 싸우고 있으며, 종교가는 종교를 중심삼고 싸우고 있습니다. 정치가는 정치가끼리 싸우고 있고 가정은 가정을 중심삼고 싸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믿을 수 있는 하늘의 발판을 갖출 수 없는 인간이기 때문에 앞으로 나갈래야 나갈 수가 없고 돌아서려니 흑암의 권세가 가로막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입장, 즉 이렇게도 못 하고 저렇게도 못 할 입장으로 온 세계 인류는 쫓겨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망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에 평면적인 세계의 이념을 밟고 올라서 가지고 이 세계 인류를 무한한 영계에까지 인연맺어 주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을 오늘날 인류는 알아야 할 때가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섭리를 하시기 때문에 오늘날 인류의 종말시대인 끝날에 온 세계는 공포권 내에 처해 있습니다. 아무리 세계의 선진국가권에 처해 있는 국가라 할지라도 그들도 마음을 못 놓고 자기의 주권을 믿지 못하는 그러한 공포권 내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입니다.
그 권내에 처해 있는 모든 종교도 또 사회적인 모든 것이 우리들을 행복의 입장에 세워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하는 곳곳마다 짜증이며, 믿을래야 믿을 수 없고, 의리가 파괴되고, 도리와 법도가 없어지고 천륜의 이념이 설 수 없는 환경이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2천년 전에 이 땅 위에 오셔서 선언하셨습니다. ‘나중에는 너희 부모가 원수요, 너희 자녀가 원수요, 너희 사랑하는 집안 식구가 원수라’고. 그것은 왜 그러냐? 그것은 인간이 지금까지 믿고 바라며 나오던 모든 것들을 다 끊어야 새로운 하늘의 섭리와 관계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이 모든 것과 관계를 끊어야 할 때를 피하도록 하기 위하여서 하나님은 인간 앞에 복된 소식을 전해 주었는데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가 전한 신약복음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나를 누구보다도 더 사랑하라.’는 엄청난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이 말씀은 그 시대에 용납될 수 없는 말씀이었지만 예수는 천륜의 길을 가야 할 인간이 다 한번은 버림 받아야 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어차피 2천년 후에 다시 한 번 버림받아야 할 것을 알았기 때문에 2천년 전에 버림을 받은 사람은 거기에서 천적인 이념의 가치를 얻게 되어 2천년 후의 시대에 그것으로 말미암아 다시금 제2차의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와 같이 역사의 현실과는 모순된 선언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여러분 자신들은 어느 누가 분리할래야 분리할 수 없는 친구, 역사를 대신한 의리를 주고받을 수 있는 친구를 가졌습니까? 또 그러한 부부, 그러한 부모, 그러한 자녀를 가졌습니까? 영원히 서로 믿어야 할 인간이요 서로 의지하여야 할 인간인데 그렇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서로 영원히 믿을 수 있고 의지할 수 있는 이런 발판이 점점 무너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에 있어서 우리의 문제는 무엇일 것인가? 인간세계에 있어서 이 모든 인간의 의리와 도리와 천륜의 법도를 깨뜨리기 위한 것이 하나님의 섭리일 것인가? 이와 같이 보이는 듯하나 그 배후에는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선한 마음이 잠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아셨기 때문에 그것을 예시시켜서 ‘누구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나아가 ‘너희가 땅에서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으리라’고 역설적인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진리가 아니라면 인류가 왜 이 말씀을 믿어야 할 것인가? 만일에 진리라 할진대 이 말씀은 어느 한 때에 가치를 발휘할 때가 올 것입니다. 오늘날이 바로 그러한 때이기 때문에 이 성경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은 부모가 자식을 배반하고. 자식이 부모를 배반하고, 부부끼리 배반하고, 형제끼리 배반하고, 친구끼리 배반하는 입장에 처해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개인, 가정, 사회, 국가, 세계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세계를 만들기 위한 것이 하나님의 뜻일 것이냐? 아닙니다. 부모가 자식을 믿고 자식이 부모를 믿을 수 있는 세계를 건설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부부끼리, 형제끼리, 자녀끼리 서로 믿을 수 있는 세계를 만들고자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친구, 사회, 국가, 세계 역시 영원히 믿을 수 있어서 인간이 편안한 자리에서 모든 것을 잊고 안식할 수 있는 터전을 이루고자 한 것이 하나님의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그런 소망과는 거리가 먼 세계가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러한 세계를 심판할 수 있는 자리에 두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해도 믿을 수 없는 사람이요, 믿을 수 없는 땅이요, 믿을 수 없는 세상의 주의라는 것을 뼈에 사무치게 느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인간으로 하여금 이 땅 위의 어떠한 무엇을 중심삼고 움직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우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따라서 땅 위에서 남을 많이 믿은 사람은 많은 타격을 받을 것입니다. 땅 위에서 많은 소망을 품었던 사람은 도리어 큰 낙망을 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인간은 이런 실정에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런 섭리를 하시는 것은 이 모든 것을 파멸시키기 위해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인간들이 세계를 자기들 뜻대로 만들려 하고 있고 기존의 주의 주장과 제도를 고집하고 있는데, 이것들을 그대로 놔둔다면 인간의 영은 부활할 수 없기 때문에 세계적인 범위에서 이것들은 하나 하나 잘려 나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는 세계적인 단위에서부터 내 개인 단위에 이르기까지 믿을 수 없는 입장에 세워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런 것을 보게 되면 인간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불행한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들은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이런 평면적인 입장에서 마음을 돌이켜 가지고 영원하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고, 나아가 어떤 외부적인 불신의 조건들로부터 자극을 받는다 할지라도 그 자극에 비례하여 하나님을 찾아올 수 있는 한 길을 가르쳐 주기 위한 것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사회의 부패를 바라보게 될 때에 이것은 무엇으로 해결될 것인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참다운 한 사람을 세우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역사 과정을 통하여 수고해 나오고 계십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기독교를 중심삼고 볼 때에 개인과 인류 앞에 몰리고 하늘 앞에 몰린 분이 누구였느냐 하면 바로 예수님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인간이 영원히 동거동락할 수 있는 하나님의 외아들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세계에서 가장 몰리는 입장에 서셨던가? 또 하나님이 모른다 하는 입장에 서셨던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 :46)라고 하면서 하늘을 향하여 호소하셨던가? 이것은 인간이 천륜을 배반했기 때문에, 다시 말해 개인적으로 아담이 배반한 것을 탕감복귀하여야 할 사명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하늘로부터 개인적으로 버림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버림받았지만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라고 하였습니다. 자신 앞에 어떠한 죽음과 고생이 닥쳐오더라도 그것을 소화시키고 하나님과 하나될 수 있는 이런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어떠한 원수들도 그를 지배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이 배척하고 민족이 배척하여 죽음의 자리까지 나아가서도 변치 않음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부활의 문이 열리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개인적으로 그리스도가 배척받음으로 말미암아 섭리의 뜻 앞에 부름받은 제자들이 배척받았고, 제자들이 배척받음으로 기독교단이 로마 제국으로부터 국가적인 배척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로마 제국이 그들을 쫓아냈지만 나중에는 도리어 그들에게 굴복했습니다. 또한 중세기에 교황청이 부패하여 루터가 개혁운동을 제시하자 그를 쫓아냈지만 루터의 개혁사상은 그들보다 더 많이 세계에 전파되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민주주의를 중심삼은 이 세계도 공산주의의 침략이 있는 동시에 하늘이 공세를 취하는 때가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세계 앞에 또는 교회 앞에 쫓김받는 어떠한 무엇이 나와야 할 것을 우리는 역사 과정을 통하여 한번 생각하여 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인간은 역사적으로 시달려 왔지만 오늘날 끝날에 와서는 형태는 외적 세계형으로 벌어졌으나 내적으로 하나님이 세계를 붙들 수 있는 때가 다가옵니다. 외적으로는 통일이념의 세계형을 갖추는 반면 내적으로는 오늘날 이 땅을 향하여 영계가 접근하여 들어오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겠습니다.
그러면 이제 여러분 하나를 중심삼아 가지고 헤아려 보더라도 여러분은 2천년 기독교 섭리사에 비교될 수 있는 그러한 반대를 받아야 합니다. 외적으로는 사회상의 모든 조건들이 여러분을 반대하여야 할 입장에 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그 모든 조건을 밟고 올라설 수 있는 사람은 어떠한 사람일 것인가? 죽어도 천륜을 위해서 죽고, 살아도 천륜을 위해서 살겠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한 각오를 가져야만이 그 모든 조건을 밟고 올라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말씀에도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눅 17:33)라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여러분은 하늘이 여러분을 배척하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끝까지 아버지를 붙들고 섬길 수 있는 각오를 지녀야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남기신 부활의 은사권 내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 야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땅 위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인륜을 통하여 의리를 찾아 세워야 되겠고, 신앙과 종교를 통하여서는 도리를 찾아 세워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영원한 소망을 성취할 수 있는 천륜을 찾아 세워야 할 입장에 서 있다 할진대는, 의리를 통할 수 있고 인륜의 도리를 통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명을 의탁해 놓고도 안심할 수 있는 하나의 주인공, 천륜을 대신할 수 있는 하나의 주인공이 필요하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인륜을 세우려면 본연의 도리가 필요하고 본연의 도리를 세우려면 천륜이 필요한데, 그 천륜은 무엇을 중심하고 나타날 것인가? 이는 절대적인 사랑을 중심삼고 나타날 것입니다. 본연의 도리는 무엇을 중심삼고 나타날 것인가? 이는 생명의 권한을 가지고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인륜을 대신한 의리는 무엇을 갖고 나타나야 하느냐 하면 영원한 신의를 중심삼은 것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이 천륜을 대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있다 할진대 여러분은 진정 마음으로 하나님 대신 믿을 수 있는 하나의 친구를 가져야 됩니다. 나아가 하나님 대신 믿을 수 있는 하나의 형제, 부모, 부부를 가져 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가정을 넘어 사회, 국가, 세계적인 무대로까지 뻗어 나가야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바라신 소망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개인의 입장에서 몰아내 가지고 믿을 수 없는 입장에 세워 놓고 인간세계의 어떠한 소망도 다 끊어 놓은 가운데에서 인간으로 하여금 하늘을 믿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 믿는 사람이 합하여, 즉 형제 형제끼리, 친구 친구끼리 하나님 대신 서로 믿어 줄 수 있는 관계를 맺기를 하나님께서는 바라셨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늘이 바라는 최고의 희망인 것입니다.
나아가 예수님께서 천륜을 대신한 사랑을 중심삼고 인륜의 도리를 세워 오늘날 기독교를 통하여 이룩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의 가정이라는 것입니다. 곧 예수를 중심삼은 하나의 가정, 하나의 친구, 하나의 부모를 세워 놓자는 것임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여러분들은 도리와 천륜을 따라 나선 사람들이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버리라는 것입니다. 가정을 중심삼고 즐거워하기 전에 하늘의 이념을 중심삼은 가정의 이념을 느껴야 되겠고, 내 자녀를 사랑하는 대신 하늘을 위하는 이들을 내 자녀보다 더 사랑하는 마음을 지녀야 되겠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친구지간에도 그러해야 되겠고, 교회, 국가, 세계도 그러한 이념 밑에서 관계가 맺어질 수 있도록 만들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늘의 섭리가 이러하고 역사적인 노정도 이러한 길을 거쳐 나온 입장에서 오늘날 우리가 대한민국을 다시 바라보게 될 때, 이 민족은 신라시대와 고려시대에는 불교가 지배하였는데, 지배했던 그 불교를 이 민족은 쫓아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조시대에 와서는 유교가 지배했는데 이 민족은 이제 또 유교를 쫓아냈습니다. 이런 역사적인 노정을 헤아려 보게 될 때에 오늘날 기독교의 입장에 있는 이 민족이 여기에서 기독교를 쫓아내면 어디로 갈 것인가? 이 민족을 염려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이제는 끝 날이 되었기 때문에, 즉 이 민족이 세계의 운명과 공통적인 보조를 취하여야 할 때가 왔기 때문에 전세계 기독교가 새로운 이념의 시대를 거치기 위해서는 이 민족을 한번 치는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민족이 세계 인류 앞에 불쌍한 민족으로 나타나야 할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 할진대는 이 민족은 세계 어느 민족보다 쫓김을 받아야 됩니다. 그래서 이 민족은 지금까지 이 나라의 주권을 중심삼고, 한 세기에도 몇 번씩 쫓김받는 역사 과정을 거쳤던 것입니다. 믿을래야 믿을 수 없는 비참한 노정을 거쳐왔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안식의 터전 속에서 마음놓고 살지 못한 민족으로 지금까지 흘러와 가지고 이제는 양대 사조에 휩싸여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고 있습니다.
조그만 한반도지만 종교적으로 볼 때, 불교가 지배했었고, 유교가 지배했었고, 지금은 기독교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3대 종교가 지배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양대 사상이 여기서 혼선을 빚어 가지고 이 민족은 혼란에 처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 민족을 천륜이 망하게 하기 위한 뜻이 아닌 것입니다. 역사의 흐름이 이러했기 때문에 이 민족도 최후의 종말시대에 와서는 민족끼리 서로서로 신의가 다 깨질 수 있는 현상이 나타나고, 또 그러한 때에 예수님이 다시 재림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이 역사를 이렇게 지배해 나왔듯이 이 민족에게도 기독교를 대신하여 배척받을 수 있는 하나의 모임이 나오기를 나는 아버지를 대하여 기도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세계적인 운세 앞에 농락을 받는 이 민족을 세계주의가 삼키지 못하면 이 민족이 이 세계를 삼켜 버릴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삼켜야 될 것인가. 이 세계의 인간들이 지니고 있던 것, 즉 지금까지 이 땅 위의 주의를 삼켜야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민족이 천성을 대신한 천륜을 소화할 수 있는 아량을 가지게 된다면 이 민족은 세계를 지배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이러한 사회에 처해 있는 여러분들 낙망하지 마십시오! 믿지 못할 사회의 실정을 바라보고 하늘을 대하여 안타까운 마음으로 나의 하나님 아버지시여!라고 부르며 나아갈 수 있는 간절한 마음이 있습니까? 그러한 마음이 있으면 산다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로마에서 무참한 학살을 당하였지만 나중에는 도리어 로마를 삼켜 버렸습니다. 기세 당당한 로마가 기독교를 여지없이 삼켜 버릴 줄 알았지만 그보다 더 강력한 하나의 입체적인 힘을 가진 기독교였기 때문에 로마를 삼켰다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든지 자신의 반대세력을 다 삼켜 소화시키지 못하는 한 그 자체보다 더 강력한 힘 앞에는 삼킴을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여러분들! 민족을 대신하여 크나큰 사명이 있다는 것을 여러분 자신들의 입을 통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또 그러한 사명을 감당하겠다고 여러분 자신들이 장담하고 나섰습니다. 분명코 그렇다 할진대 여러분은 세계로부터 배신받는 입장에 섰지만 하늘만은 여러분을 저버릴 수 없는 위치에 서야 되겠습니다. 그럴 때에 여러분은 결코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기독교는 어느 국가에 들어가든지 그러한 신념을 갖고 그 민족을 위해 피를 뿌리는 노정을 거쳤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들도 그러한 신념을 갖고 자신의 생활권 내에서 서로서로 믿을 수 있고 생사를 같이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은 하나님이 변하기 전에는 우리가 변할 수 없다는 이런 신념을 가진 모임을 찾아 헤매야 할 때입니다. 그러한 모임이 어디 있는가, 그러한 교회가 어디 있는가 하고 찾아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모임, 그러한 교회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땅 위에 그러한 교회, 그러한 모임을 이룰 수 있는 한 개인을 찾아 세우기 위해 수고해 나오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 땅은 사탄세계요, 하늘의 권한이 미치지 못하는 세계이기 때문에 하늘은 개인으로부터 빼앗아 나오는 섭리를 전개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원리에서 배운 가인과 아벨의 역사였습니다. 먼저 악한 것이 나와 선한 것을 치게 되지만 나중에는 선한 것이 악한 것을 누르고 승리해 나오는 역사였다는 것입니다. 즉 선한 것은 먼저 얻어맞는 과정을 거쳐왔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떠한 분이었는가? 개인으로부터 얻어맞은 분입니다. 나아가 제자들로부터 얻어맞았고, 교회로부터 얻어맞고, 국가로부터 얻어맞고, 세계로부터 얻어맞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모든 것에 굴하지 아니 했습니다. 어떤 개인에게 굴하지 아니 했고 교회 앞에 굴하지 아니했으며, 민족과 국가 세계 앞에 굴하지 아니 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역사적이고 내적인 파란곡절을 거치고 난 후에도 하늘 대해 불변의 충성심을 지녔기에 부활의 역사를 일으킬 수 있었음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이 민족을 중심삼고 보게 될 때에도 이 민족이 살 수 있는 길은 인류를 대하여 진리를 중심삼고 억천만년 갈라질 수 없는 민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서로 믿을 수 없는 환경에 살고 있다 할지라도 의리를 중심삼고 생명을 바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고, 천륜을 대신한 교회를 붙들고 충성의 도리를 다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날 여러분이 바로 그러한 뜻을 나타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만일에 그러한 뜻이 나타나 있고 천륜을 대신할 수 있는 그러한 곳이 있다 할진대는 여러분은 그곳을 간절히 소망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분은 그러한 천륜의 도리를 중심삼은 뜻이 나타난다 할진대는 그 뜻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각오할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하늘의 사랑의 실체로 모든 인류의 신랑으로 서기까지 세상의 모든 사랑을 다 잊어버리고 하늘의 사랑에 취해 사신 것과 같은 사람이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뜻이 한민족에게 나타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뜻이 이 민족 위에 나타난다면 여러분 자신들은 개인적으로 몰리게 되고 나아가서 세계 앞에 몰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몰림의 기간이 그리 길지 않으리라고 나는 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여러분은, 여러분이 몰리는 입장에 서는 것은 나를 망치기 위한 것이 아니고 개인에 연하여 있는 복을 나에게 인계하여 주기 위함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가정에 연하여 있는 세계적인 복을, 사회가 가진 세계적인 사회의 복을, 교회가 가지고 있는 세계적인 교회의 복을, 국가가 가진 세계적인 국가의 복을, 더 나아가서는 천주에 간직되어 있는 천륜의 복을 인계해 주기 위하여 그러한 서글픈 자리에 놓이게 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끝날에 천륜의 법도까지 밟고 올라서 하나님의 뜻 앞에 서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 할진대는 생사를 넘어설 수 있는 각오를 가져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어찌하여 원수에게 복을 빌었던가? 하늘 편에서 원수인 사탄에게 복을 빌어 주면 원수인 사탄일지라도 하늘편에 무엇을 내주어야 됩니다. 응당 모셔야 할 하나님인데도 불구하고 천리를 배반하고 자기 주권을 내세워 가지고 하나님을 대신하겠다는 자가 사탄이었지만 인간이 원수를 사랑한다는 마음만 있으면 사탄들은 근본적으로 파멸되어 버리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대해 오히려 복을 빌어 주었던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개인적으로 배척받고, 사회적으로 배척받고, 국가적으로 배척받고, 세계적으로 배척받았지만 그들을 저주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지니셨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외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또 어찌하여 그러한 말씀을 하셨던가? 사탄권 내에 있는 원수까지 빼앗아 오자니 그러한 말씀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원수들이 때릴 때, 오히려 그들을 위하여 하늘을 대신하여 손을 들어 복을 빌어 줄 수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까지도 하늘이 임재할 수 있는 안식의 터전이 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정신이 그와 같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오늘의 기독교 신자들은 일대일의 억울함을 참지 못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혼자서는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가정의 십자가와 핍박을 참지 못하면 가정보다 작은 천국에 갈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사회의 핍박을 넘고 국가와 세계의 핍박을 넘어설 수 있어야만 보다 차원 높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당시 인류에게 또는 후대에 믿는 성도들에게 소개해 주기 위해서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여러분의 마음은 어느 단계에 고착되어 있습니까? 오늘날 우리들은 새로운 우주의 창설자이기 때문에 낡은 것을 가지고서는 안 됩니다. 여기에는 새로운 것을 가져야만 된다는 것이에요. 우리들은 이런 신념을 가지고 한 마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생활하는데 있어서 내가 말하는 것이 내 개인을 위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고, 먹고 마시는 것도 내 자신을 위해서 먹는 것이 아니라 24억 인류를 위해서 먹는다는 신념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만일 그러한 뜻을 지닌 무리가 많다면, 그들이 세계를 뒤집어 놓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계를 넘어 우주적인 통일의 이념을 가지고 섭리해 나오시기 때문에 바로 그러한 이념을 가진 민족이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민족을 세계에서 제일가는 민족으로 세우실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물질이나 명예, 이 모든 것을 영원히 가질 줄 알고 있어서는 아니 됩니다. 지금까지의 철학이나 정치, 경제 등 모든 것은 일대 변혁을 일으키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2천년 전 예수가 말하던 것이 공론이 아니라 할진대는 오늘날의 이 모든 것은 새 시대의 것으로 유지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여러분들이 우주적인 이념을 대신하여 하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전체적인 섭리의 뜻을 대신하지 못한다 할진대는 다시 오시는 예수님 앞에 신부로 설 수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여러분은 여러분 개인의 욕망을 채우고 이 민족만을 위해서 살려고 하는 입장에 서서는 안 될 것입니다. 민족과 국가, 세계, 더 나아가서는 천주를 위해서 싸울 수 있는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아니 되겠습니다. 그러한 사람을 찾아 세우기 위해서 예수님도 하나님도 오늘날까지 섭리해 나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개인을 희생시켜 가지고 그 개인을 제물삼아 가정을 찾고, 가정을 희생시켜 가지고 그 가정을 제물삼아 민족을 찾고, 민족을 희생시켜 가지고 그 민족을 제물삼아 세계를 찾아 세우기 위해 지금까지 섭리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까지의 것은 이제 비료가 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여러분들은 새로운 역사 창설의 선봉자가 못 되겠거든 그 뜻을 이루어 나가는 데 힘을 북돋아 줄 수 있는 비료라도 되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이 그러한 비료가 되려면 생명 앞에 흡수당할 수 있는 구성 요소가 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무한히 흡수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만 하늘의 비료로서 생명을 북돋을 수 있는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뜻 앞에 자기 일신의 억울함과 분함을 참지 못하는 사람은 불쌍한 처지에 놓여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개인과 가정을 부르시지만 우리가 살 수 있는 준비를 다 갖춰 놓고 부르고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늘땅의 통일의 이념된 발판을 갖춘 그 끝에서 우리를 부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많은 생명들이 억울함과 희생의 피를 흘려 가면서 이 뜻을 이루기 위해 참고 나왔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여러분들은 이 뜻을 인계맡아 소망의 그곳까지 나아가 하나님과 관계맺어 나갈 수 있는 신념이 있습니까? 그러한 신앙관이 서 있습니까?
그러면 오늘날 믿는다는 사람에게는 이제 하늘의 모든 이념을 통하여 몰아내게 되는데 그 몰아내는 방향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 자는 이제 역사적인 반역자요 천륜의 섭리 앞에 반역자인 것입니다. 그런 자는 세계에서 배척받아 마땅하고, 이 땅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저나라로 데려간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에서 말하는 공중잔치에 들린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적 견지에서 개인이 몰리면 사회가 용납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고, 국가에서 몰리면 세계가 용납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어서 지금까지 세계가 나왔는데, 이제 앞날의 세계에서 몰림받으면 어떻게 될 것인가? 거기에서 하늘의 협조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세계적인 종말시대에 우리는 어디를 향하여 나갈 것인가? 일대 비약을 통해서 새로운 탈출의 이념을 향하여 나아가야 할 우리가 준비할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세계에서 추방당하더라도 하늘과 영계와 관계맺을 수 있는 하나의 기점은 어떻게 이룰 수 있겠는가? 이런 뜻이 오늘날 우리 앞에 놓여져 있기 때문에 기독교에 심판의 한 날이 있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소망의 한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운명의 노정이 이와 같았으니 이제 여러분의 나아가는 노정에도 개인적으로나 가정적으로나 민족적으로 혹은 세계적으로 어떠한 핍박이 있더라도 참고 나설 수 있어야 되겠으며, 아무리 그 핍박이 크다 할지라도 그것을 넘어서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세계적으로 몰아낼 사람이 없습니다. 인간은 아무리 살아보아야 70, 80년밖에 못사는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을 하는 사람들이 하늘을 붙들고 있는 한 전세계적으로 몰아내 봐야 영원히 몰아낼 사람이 이 땅 위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예수님은 아셨기 때문에 2천년 동안 싸움의 생활에 있어서 굽히지 아니하고 수고해 나오셨던 것입니다.
오늘날 신앙생활하는 여러분들, 자기의 억울함과 자기의 분함이 있다고 이미 관계 맺은 신의를 저버리고 돌아서지 마십시오. 그런 사람은 하늘의 뜻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오늘날 세계사적 견지에서 인류 앞에 또는 악한 세상 앞에 몰림을 받아 이 땅에 발붙일 곳이 없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 길을 가겠다고 하는 사람은 이 땅에서 추방당할 각오를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을 중심한 최후의 승리를 쟁취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명심해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지상의 원수들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계의 원수들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이것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여러분 스스로 타개하여야 할 중대한 과업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한 문제가 부딪치는 세계가 기필코 올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 우리 앞에는 영적 세계의 침공시기가 가까워 오고 있습니다.
오늘날 지상에서 우리들이 이해하지 못할 기이한 현상이 많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여기에 자신의 영력을 갖추어야 되겠는 데, 그렇지 못한 사람은 밀려 나갈 것입니다. 밀려 나가는 사람은 자연히 심판당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심판시기인 것을 여러분은 명심해야 되겠습니다.
아버님! 2천년 전에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여 놓으시고 그들로 하여금 마음으로 몸으로 아버지의 심정을 체휼하게 하려 하였으나 그 뜻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을 저희들은 잘 알고 있사옵나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것이 옳은 것인지, 저것이 옳은 것인지를 분별하지 못한 사실을 저희들이 느끼지 않을 수 없사오니, 아버님께서 허락하신 말씀을 중심삼고 옳고 그름을 확실히 분별하며 살아갈 수 있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아버지의 심정을 통하고 나서는 저희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마음으로는 아버지의 심정을 통하고 나서는 저희가 되어 말씀을 따라가려고 하오나, 항상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고 있는 저희들이오니 이 시간 이것을 느끼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이 저희를 택할 때에는 저희만을 위해 택한 것이 아니었사옵고, 민족을 위하여 세계를 위하여 택하였다는 것을 저희들이 알고 있사오니, 아버지 뜻대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여, 지금까지 타락한 불신의 사회 환경과 그 실정을 바라보시면서 참아 왔사옵고, 이제 이 세상을 염려하사 저희들을 택하여 세상이 악하면 악할수록 부단히 하늘 앞에 설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신 은사 감사하옵나이다. 이스라엘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슬픔을 당할 수밖에 없게 되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그는 하늘의 슬픔을 대신하여 말씀하셨으며, 그가 하는 행동은 믿음에 의한 것이었으며, 아버지를 중심한 것이었음을 저희들이 아옵니다.
이제 끝날에 있어서 저희들이 인류의 죄를 탕감복귀하여 아버지의 심정과 연결되어 저희의 몸 마음에 아버지를 모시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이 땅 위에는 수많은 믿는 사람들이 있사오나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아버지를 진정으로 따른 사람이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 새로운 이스라엘을 대신하여야 할 기독교는 아버지의 뜻을 알지 못하므로 섭리의 전체의 뜻을 맡지 못하게 되었사옵나이다. 아버님이여, 그 뜻을 저희들이 이루게 하시옵고, 저희들을 인도하여 주시어서 아버지의 소명을 받아 영원히 남아질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뭇매를 맞고 찢기며 핍박을 받을지라도 아버지가 기대하시는 하나의 생명을 가질 수 있다 할진대는, 언제까지나 참아 나가 아버지께 승리를 안겨 드릴 수 있는 저희들 되게 인도하여 주시길,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불신하는 사람은 많았사오나 섭리의 뜻을 대하는 하늘의 생명을 갖고 있는 사람은 없었던 것을 저희들이 아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하늘의 생명을 나타내려고 원하셨으나 그를 따르는 사람이 없어 홀로 가셨사온데, 오늘 저희들이 온 인류의 등불이 되어 예수님의 사명을 이어받을 수 있고, 예수님의 뜻을 이어받을 수 있는 무리들 되게 인도하여 주시옵길,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오늘 여기에 모인 당신의 아들딸들, 하늘의 사정을 알고 뜻을 명심하여 자기가 진정 하늘의 뜻을 위해 나섰는가, 자기가 교회를 위해 얼마나 힘을 기울였는가를 반성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고, 오로지 정의를 위해 내 마음과 몸을 바침으로써 역사적인 뜻을 성취하고, 주님의 사정을 마음에 새겨 생명의 주인이 되게 인도하여 주시옵길,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님, 이제 저희들의 심정을 하늘의 심정에 연결하여 아버지 뜻을 이루어 드리고자 맹세하는 귀한 시간 되게 하시옵고, 섭리의 뜻을 허락하여 사랑을 가지고 아버지 뜻을 책임져 나갈 수 있도록 허락하시옵고, 하늘의 심정을 체휼하여 오직 뜻길만을 갈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의 뜻이라면 죽으나 사나 아버지를 붙들고 저희 마음은 당신의 생명을 찾고 저희 몸은 당신의 생명의 길을 찾아 오직 아버지의 뜻을 중심삼고 살아갈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여기에 모인 당신의 아들딸들, 아버님의 말씀과 아버님의 뜻을 받들어 온 인류를 부활시킬 수 있고, 아버지 앞에 충효의 심정을 바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저희들의 마음을 인도하셔서 아버지의 뜻을 위해 미련없이 따라갈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시길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니다.
이 시간 말씀을 전하는 시간이오니, 전하는 자의 마음과 받는 자의 마음에 간격이 없게 허락하셔서 사탄이 일체 틈타지 말게 하시옵고, 아버지의 본연의 동산을 복귀하고자 하는 참생명이 솟아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 저희에게 임재하셔서 은사와 사랑을 내려 주시옵고, 뜻을 중심 삼고 살아갈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부탁하면서,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오늘은 여러분에게 ‘참목자와 참된 양무리, 거짓 목자와 거짓된 양무리’라는 제목을 가지고 잠시 동안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여기 앉아 있는 여러분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몰라 방황하고 있는 것을 바라보게 될 때, 이들의 마음 몸을 하나되게 하여 한 방향으로 이끌어 가기가 어렵다는 것을 느끼고 있을 것입니다. 심지어 여러분 개인을 중심삼고 볼 때에도 마음이 지향하는 방향과 몸을 일치시키려면 대단한 결심과 각고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의지하여 몸이 따를 수 있으며, 몸을 의지하여 마음이 응할 수 있도록 하는 이 일이 역사적인 큰 일이요, 우리 인간에게 지극히 중요한 과제라는 것을 여러분들은 잘 알아야 하겠습니다.
땅 위에 살고 있는 어떤 사람도 자기의 소망을 이루기 위해 생활면에서나 다른 어떤 면에서 마음에 배치되는 행동을 하고자 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인간이 마음을 중심하여 몸과 하나되어 움직이고자 하는 것은 역사노정에서 인간의 간절한 소망이 되어 왔고 하늘땅으로부터 재촉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을 위해 다행한 일이지만 그렇게 된 사실 자체는 슬퍼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비록 사회적으로는 권세와 영광을 누리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마음을 중심하고 자기의 몸을 하나로 만들지 못하는 사람이면 그는 불행한 사람인 것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무형의 하늘과 관계를 맺고 있고, 우리의 몸은 유형의 땅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인정치 않을 수 없으니, 내 자체는 지극히 작은 존재로되 우리가 가진 마음과 몸은 지극히 크고 넓은 세계와 인연을 맺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 자신들이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이 몸과 마음이 비록 작은 것이지만 지극히 큰 것과 인연을 맺고 있기 때문에 마음은 천륜의 세계와, 몸은 종말시대에 찾아올 역사적인 이상세계와 관계를 맺으라고 여러분의 주위 환경은 여러분을 재촉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각자 그러한 입장에 있다는 것을 알고 특히 생각해야 할 것은, ‘나는 하늘땅 앞에 어떠한 존재인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마음에 평안이 있고 기쁨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영원하기 위해서는 여러분 각자가 영원한 기쁨과 행복된 환경을 하늘땅 위에 만들어야 하는데, 그것을 여러분은 이루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난관을 타개하고 내 몸과 마음이 하나될 수 있게 하여, 내 마음이 바라는 선의 이념에 의지하여 내 몸이 소망하는 이념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기쁨을 찾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여러분은 천상에 가서도 영원한 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천륜이 요구하는 마음의 중심이 천륜을 대할 수 있도록 천륜의 중심과 어떻게 인연을 맺을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 문제를 여러분이 해결해야 됩니다. 하나님은 이 문제를 항상 염려하고 계십니다.
이제 여러분들의 마음이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 먼저 여러분 자체에서부터 몸과 마음이 하나되어 하늘을 대신하고 땅을 대신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설령 그러한 실력을 가졌다 하더라도 자기의 행복만을 구가해서는 안 되고, 전체의 행복을 구가해야 합니다. 그렇게 못했다 할진대는 여러분은 과거를 반성하고 비판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또한 미래에 대해서도 자신을 분석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내 개인을 중심삼고 마음과 몸이 하나를 이루고, 섭리의 뜻을 이룰 수 있는 하나의 기준에 도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길을 알아서 섭리의 뜻을 따라 살아간다 할진대는 여러분은 행복감을 느낄 것입니다. 내 몸을 마음에 반영시켜 몸의 움직임이 마음을 따라갈 수 있음으로써 천륜을 대신 할 수 있다고 자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여러분으로 인정받는다 할 진대 여러분은 천륜을 중심삼고 여러분의 몸과 마음이 천하를 대할 수 있어 기쁨을 누리게 하고 하나님과 사랑의 인연을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마음을 위주로 하여 마음과 몸이 하나되어 땅 위의 어떤 요소와 부딪치더라도 그것을 능가할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어떤 처지에서도 안전한 위치에 처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합하여 가정을 이루고 교회를 이루고 국가를 이룬 다음 세계를 하나로 만들고,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 자신과 관계를 맺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여러분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은 돈이 없어 울 때가 아니고 명예와 권세가 없어서 울 때도 아닙니다. 그러한 외적 조건이 아무리 완비되어 있다 할지라도 이것이 여러분을 영원히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조건은 못 됩니다. 그런데 역사노정을 돌이켜 보면, 그런 외적 조건을 갖추기 위하여 눈물을 흘리며 생명을 내걸고 싸운 사람은 많이 있었지만, 내적인 조건을 위하여 눈물 흘리며 생명을 걸고 싸운 사람은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분이냐? 예수님은 그런 외적인 조건을 가로막아 정지시키고 내적인 조건을 세우기 위하여 눈물 흘리고 생명을 내걸고 싸워 나왔던 분입니다. 여러분이 종교를 믿게 될 때에 먼저 느끼는 것이 무어냐 하면, 마음 가운데 싸움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싸움에서 무엇이 원수냐 하면 몸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개체를 중심삼은 투쟁에서 승리하여 천륜과 하나됨과 같이, 천륜과 하나된 마음을 위주로 하여 그와 하나된 몸을 소유하였다 할진대는, 그 사람은 우주적인 성공자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천리법도가 불변의 법도인데 이 천륜의 법도와 화합할 수 있는 마음이 되고, 그 마음의 기준 앞에 몸이 화하여 하나되었다 할진대는 이렇게 된 화신을 변경시킬 존재는 땅 위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땅 위에서는 외적 조건을 세우기 위해서도 말할 수 없이 치열한 투쟁을 전개시켜 왔는데, 이 외적 조건의 중심이 되는 내적 조건을 세우기 위한 투쟁이 없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러 할진대 복귀섭리역사에 있어서 오늘날 외적 조건에 비할 수 없는 치열한 투쟁이 없고서는 내적인 혁명을 일으켜 외적인 이 모든 사실을 시정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제 우리들이 염려하여야 할 것은 외적 세계에 대한 염려가 아니고 내적 세계에 대한 염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지금까지 우리 자신의 생애노정에서 어떠한 외적 조건을 찾기 위해서 지도자를 구했고, 외적인 분야에서 친구를 구했고, 외적인 환경에서 자기 이념을 세우려고 했는데, 이것들은 다 영원한 것이 못 됩니다.
내 한 자체는 하나로되 외적인 조건을 추구하는 세계와 내적인 조건을 추구하는 세계, 이 두 세계 사이에서 갈등을 겪는 입장에 처해 있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하늘은 이러한 것을 알기 때문에 여러분이 서러운 입장에서 만민을 위하여 남이 좋아하는 길을 피하는 반면 남이 싫어하는 길을 걸어야 하는 이런 역사노정을 개척하면서 나왔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자체는 개인이로되 개인이 아닙니다. 여러분 자체에 이런 형태의 사실이 들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마음과 몸이 하나되어 하늘을 대해 요구할 수 있는 그 한 날을 가졌습니까? 하늘은 여러분 앞에 이것을 추궁할 것입니다.
외적인 조건을 세우는 세계에서 내적인 조건을 세우려니 세상에서 몰림 받는 역사노정을 거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 끝날에는 자신도 알지 못하는 세기말적인 공포의 시대에 휩쓸리게 될 것입니다.
이런 현상이 왜 벌어지느냐 하면, 외적인 중심을 쳐서 내적인 중심과 하나로 화하게 하려면, 여기에 사회적인 조건, 습관적인 조건, 혹은 인식적인 조건, 관념적인 조건들이 내적인 조건 앞에 위협을 당하게 되어 무자비하게 버리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고로 자신도 알지 못하는 공포에 싸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때에 있어서 예수님은 끝날의 성도들에게 무엇을 요구하느냐 하면, 외적인 조건을 가로막고 내적인 조건을 세워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에게 세상의 친구나 스승이 있다 할진대는 외적인 이념을 중심삼고 찾아 드는 친구 혹은 스승이냐, 내적인 이념을 중심삼고 찾아 드는 친구 혹은 스승이냐를 분석해 봐야 합니다. 또 교단이나 국가나 세계도 외적으로 인연을 맺는 방향으로 흐르느냐 내적으로 인연을 맺는 방향으로 흐르느냐를 주시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제 이러한 끝날을 맞이하여 이 땅에서 어떤 도주(道主)를 찾기 전에 먼저 본연의 마음을 찾아야 합니다. 이것을 찾기 위하여 기독교에서는 기도를 통해 외적인 모든 것을 끊어 버리고 하나님의 심정을 찾아 들어가고, 불교에서는 참선을 통해 6천년 전의 인간 본연의 마음을 찾아 들어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야만 되는 것이 인간에게 있어서는 역사적인 비애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여기에 있는 여러분들! 혹시 몸을 중심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이는 천륜 앞에 역적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인간은 아직까지 몸과 마음이 합하여 만우주 앞에 자랑한 일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즉 마음과 몸이 하나되고 사람과 창조주가 하나된 적이 이제껏 한 시간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마음 몸이 하나되고 창조주와 내가 하나되는 이런 시간을 갖지 못한 존재로서 몸을 중심삼고 산 자신을 어떻게 감히 하늘 앞에 자랑할 수 있습니까? 하늘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천륜이 자랑해 주지 않는 것을 자랑하는 사람도 심판에 걸립니다. 원래 하늘이 먼저 자랑하는 참마음과 몸이 되어야 하고 그 다음에 만물만상이 자랑하는 것이 원칙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여러분은 하늘을 찾아 나섰고 진리의 길을 찾아 헤맸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늘과 땅을 대신한 진리가 있다 해도 여러분이 그 진리와 관계를 맺으려면 먼저 여러분의 마음과 몸이 하나되어 마음이 슬퍼할 때에 몸이 슬퍼하고 몸이 슬퍼할 때에 마음이 같이 울어 주는 그 한 날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것을 신앙생활 노정에서 체휼하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결코 천륜 앞에 서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제 천륜의 뜻을 이룰 때가 가까워 옴에 따라, 인간의 마음은 천륜의 뜻과 관계를 맺고 있는 관계로 자기도 모르게 조급함과 갈급증이 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 같은 나라가 아무리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풍부한 생활을 한다 해도 마음의 컬컬함과 조급증에 의하여 자살하는 사람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나는 내 마음을 위주로 하고 무엇을 찾아야 할 것인가? 여러분의 마음속에 그 무엇인가 까닭없는 슬픔이 일거든, 그것이 여러분의 스승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끝날의 심판이 가까워 옴에 따라 마음이 그것을 감지할 수 있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슬퍼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마음으로 자신도 모르게 고독함과 조급함을 느끼거든 그 마음의 친구가 될 수 있는 몸이 되기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개인을 중심삼고서도 그렇지만 민족을 중심삼고도 그렇습니다.
이 땅 위에 천륜의 뜻을 대신할 수 있는 민족이 있다고 하면, 그 민족에게는 어떤 민족보다도 비참한 환경에 몰아넣게 되는 현상이 있게 되고, 또 개인에 있어서도, 그런 사람이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그런 입장에 처해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현상이 세계적으로 벌어지는 동시에 여러분 개체를 두고 볼 때에도 마음을 위주로 하여 몸을 반드시 세 번은 쳐야 할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타락인간은 영적인 오관이 둔해서 이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은 인간에게 반드시 천륜의 때를 알려주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의 마음을 통해서든지, 계시를 통해서든지 세 번은 알려주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몸은 마음과 반대의 입장에 있습니다. 마음은 내적이요 몸은 외적이니, 마음이 거짓이고 몸이 참이라고 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마음을 중심삼고 나의 몸을 쳐서 굴복시킨 사람만이 새로운 이념의 세계를 체휼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내 개체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교단을 중심삼고도 벌어집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종교와 교단이 있지만 하나님의 뜻 앞에 온전히 부합되는 교회는 하나도 없습니다. 하늘이 있다 할진대는 반드시 진리의 중심을 세워 그곳을 위주로 하여 내적인 분야와 외적인 분야와의 관계를 맺는 일이 벌어지게 될 것입니다. 또한 세기말적인 현상으로서 교파와 교파간의 투쟁이 일어날 것입니다. 어떤 종교이든지 다른 무엇이든지 이것이 개인에게서 출발하여 가정·교단·국가·세계의 차례로 벌어집니다. 나라도 안과 밖의 양면성을 가지고 있고 세계도 좌편(左便)과 우편(右便)으로 갈라져 있습니다. 본래는 이것이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본연의 세계를 염원하고 하늘의 이념을 소망하는 여러분들은 다른 사람들이 어떠한 환경에서 핍박하더라도 그 어려움에 부딪쳐 이기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역사를 망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여러분은 마음을 중심삼고 단결하여 먼저 내적인 기반을 쌓고, 다음에 외적인 기반을 찾아 나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중심삼은 내 개체를 넘어 가정·사회·국가·세계를 찾아 나가야 하겠고, 나아가서는 하늘 땅까지도 찾아 나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하나의 세계, 하나의 이념을 찾아 나오는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무엇이냐? 한 때에 있다가 없어지는 국가와 세계의 이념이 문제가 아닙니다. 권세가 많고 지위가 아무리 높다 해도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두 세계를 하나로 만들 수 있는 이념과 주인공이 문제입니다.
인간을 놓고 볼 때, 마음을 중심한 내적인 세계와 몸을 중심한 외적인 세계가 있습니다. 세계가 이와 같이 두 세계로 되어 있는 것과 같이 영계도 하늘이 지배하는 선권(善圈)의 영계가 있고, 사탄이 지배하는 악권(惡圈)의 영계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6천년 섭리의 종결점이 내 한 몸에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몸과 마음을 통일할 수 있는 하나의 원칙을 갖지 못한 사람은 세계 인류를 지도할 수도 없고 지배할 수도 없습니다. 이것이 문제 중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어서 문제가 아니고 예수님이 없어서 문제가 아닙니다. 제일 먼저는 내가 하나되지 못한 것이 문제입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를 막론하고 두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세상으로 나가는 길이요, 하나는 세상을 버리고 천륜을 향해 나가는 길입니다. 이것이 반영 되어 외적인 이념을 표방하는 유물사관이 있고, 내적인 이념을 표방하는 유심사관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 두 사관(史觀)이 언제 하나가 될 것인고? 이것을 하나되게 할 수 있는 조정을 어디서부터 할 것이냐? 이것이 큰 과제입니다.
하나님이 이 피조세계를 대해 섭리하실 때에도 두 세계를 대하시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대하는 마음의 세계가 있고 몸의 세계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께서 두 가지 방향에서 섭리하시는 것을 하나로 결합시킬 수 있는 한 사람이 이 땅 위에 나타나기를 바라고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도 내적인 분야를 통해 요구하는 것이 있고 외적인 분야를 통해 요구하는 것이 있는데, 내적인 분야의 세계가 외적인 분야의 세계를 흡수하는 날을 어느 한 때 맞이하여서 이 두 세계를 통일시키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의 목적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섭리의 뜻을 받들어 나오는 종교에 있어서 혁명이 있으면 있을수록 발전해 나오고 있습니다. 때리면 때릴수록, 부딪치면 부딪칠수록 오히려 번영해 나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늘의 탕감복귀역사라는 것입니다. 먼저 치는 자가 지는 것이 천리법도입니다. 1차 세계대전에 있어서도 먼저 때리는 편이 졌고, 2차 세계대전에 있어서도 먼저 치는 편이 졌습니다. 따라서 3차 세계대전에 있어서도 먼저 때리는 편이 질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흔히 남을 먼저 때리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먼저 때리는 자는 하늘이 용납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교계에서도 서로 남을 욕하고 비난하기를 좋아하지만 먼저 치는 자는 하늘이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 중 세상에 대해 염려한다 하는 사람은 많아도 내 일 개인의 마음을 중심삼고 몸이 하나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염려하는 사람은 적습니다.
여기 모인 통일교회 식구들! 여러분은 이제 나라와 세계를 위해서 염려해야 할 것이지만 먼저 여러분 개체 개체가 마음을 중심삼고 몸이 하나되지 못한 것을 염려하십시오. 마음을 중심삼고 몸이 하나된 사람이 모이고 모여 나라를 이루고 세계를 이루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진정으로 바라시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소원이 이런 것이라 할진대 세계를 염려해도 이런 사람이 모여서 염려하기를 바라고, 나라를 대하여 염려하더라도 이런 사람이 모여서 염려하기를 바라실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믿는 사람의 진정한 태도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예수님이 오셨는데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셨으니 다시 오셔서 그 뜻을 이루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다시 오셔서 이루실 뜻은 무엇이냐? 다시 와서 이 세상을 불로 심판하려 하시느냐? 아닙니다. 아니에요. 불로 심판하는 것은 예수님이 오시지 않아도 하나님이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오시느냐? 예수님은 하나님의 내적인 섭리와 외적인 섭리를 대행할 수 있는 중심으로 오셔서 통일의 귀일점을 갖추어 평면적인 관계를 맺고자 다시 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기말적인 종말기에 당도한 오늘에 있어서 여러분이 이런 하나님의 뜻을 대신 책임지고 나섰다고 할 때, 인간의 마음이 몸에 의해 여지없이 유린되어 온 것과 같이, 또 과거에 내적인 면을 개척해 나오던 모든 인물이 외적인 것에 의해 유린되고 반대당해 오던 것과 같이, 여러분이 주장하는 주의가 세계를 위해 나선다면 세계로부터 얻어맞을 것이요, 국가 민족을 위해 나선다면 국가 민족으로부터 얻어맞을 것이요, 교단을 위해 나선다면 교단으로부터 얻어맞을 것입니다.
타락한 세상에서는 세계를 위해 눈물짓는 사람을 몰아내기 쉽고, 국가 민족을 위해 눈물 흘릴 때 국가 민족은 그런 사람을 몰아내기 쉽고, 교단을 위해 눈물짓는 사람을 교단에서 몰아내기 쉬운 것이 그 속성입니다.
이런 내적인 분야의 세계와 외적인 분야의 세계를 통일시켜 본연의 세계 형태를 갖추어 가지고 오시는 분을 기독교에서는 재림주라 하고, 불교에서는 미륵불이라 하며, 유교에서는 진인이라 하는 등 각 종교마다 다른 이름을 붙여 부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실 이것은 모든 종교가 오시는 재림주 한 분을 놓고 말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면 과거의 예수님은 어떤 분이냐? 개인을 중심삼고 볼 때는 아담을 대신하였고, 종족을 중심삼고 볼 때는 야곱을 대신했고, 민족을 중심삼고 볼 때는 모세를 대신했고, 나아가 세계를 중심삼고 볼 때는 온 인류를 대신하는 책임을 지고 오셨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세계뿐만 아니라 하늘의 서러움까지도 그 마음에 지니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불쌍하게 왔다 간 예수님을 붙들고 개인적으로 눈물을 흘리며 일생을 보낼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은 그런 사람을 찾을 것입니다. 하나님도 그런 사람을 찾으실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태어날 때 기쁨 속에서 태어난 것 같지만 갈 때는 눈물을 흘리며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불쌍한 민족을 붙들고 우는 사람은 민족의 복을 받을 것이요, 불쌍한 교단을 붙들고 우는 사람은 교단의 복을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불쌍한 세계를 붙들고 우는 사람은 세계의 복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대한민국! 이 불쌍한 민족, 해방 후에 분립되어 지금까지 통일을 바라고 나왔지만 아직 통일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같은 민족끼리 서로 믿지 못할 관계로 벌어졌습니다. 그러면서도 가을의 낙엽과 같이 떨어질 심판의 한 때를 알지 못하는 불쌍한 민족입니다. 그러면 그럴 때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가을이 되어도 변하지 않는 뿌리를 찾아야 하겠습니다. 거기는 이제까지 보아 온 세계와는 모양도 다르고 색도 다르고 모든 것이 다를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무엇이 되어야 하느냐? 여러분은 하나님의 양떼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과거 6천년 동안 하늘과 땅이 즐거워할 수 있는 참양떼를 부르며 찾아오셨습니다. 또 오늘도 그 양떼를 찾고 있으며 내일도 그 양떼를 찾을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예수님이 찾아와 즐거워할 수 있는 양떼는 어디 있느냐? 만일 여러분이 진정한 양떼가 되고자 할진대는 진정한 목자의 음성을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내적 외적 이념을 대신하는 두 세계가 있는 것과 같이, 여기에도 내적인 세계를 대표하는 진리의 호소와 외적인 세계를 대표하는 진리의 호소가 있습니다.
그러면 내 한 자체가 참다운 목자를 대할 수 있는 양이 된 것을 무엇으로 아느냐, 여러분 자신들이 마음속에 들려오는 목자의 음성을 들었느냐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들려오는 양떼의 음성을 들었느냐는 것입니다.
눈물이 없는 지도자를 만나는 교단, 민족, 세계는 망할 것입니다. 망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예수는 교단을 부둥켜 안고 울었으나 교단으로부터 쫓김 받았습니다. 민족을 품고 울었으나 민족으로부터 배반당했습니다. 세계를 걸머지고 피땀 흘리며 울었지만 세계는 몰라주었습니다. 참목자란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그리고 참친구, 참스승이란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참목자를 찾았다 할진대는 바로 그의 말에 정성을 기울여 몸과 마음을 기울일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대신하여 내적인 이념과 외적인 이념을 통일적인 형태로 만들어 내세워야 할 때가 있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그런 때가 되면 내적인 음성을 외적인 형태로 나타내야 할 것입니다. 또 여러분은 여러분의 마음과 몸이 모든 것을 잊고 전체를 묶어 바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하겠습니다. 나 자신을 조건없이 바쳐서 의지할 수 있고, 내 마음과 영원히 떨어지지 않고 의지할 수 있으며, 자신을 전부 맡기고도 안심할 수 있는 하나의 목자를 지상에서 맞아야 되겠습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천상의 심정을 알 도리가 없습니다. 이것을 인간 앞에 직접적인 관계로 맺어 놓은 것이 부자의 관계입니다.
사람에게는 내적으로 부모가 있고, 외적으로는 스승이 있는데, 타락으로 인하여 참부모 참스승을 갖지 못하였으니 부모와 스승을 대신하여 내 마음과 몸을 의지할 수 있고, 내 성의를 다 기울여 모실 수 있는 참목자를 찾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가시면서도 원수를 위해 복을 빌어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과 같은 마음을 가진 목자를 땅 위에서 맞아야만 비로소 지상에 하나님을 모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내적 외적 심정의 기준을 하나로 통합하여 나타낼 수 있는 인간이 땅 위에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분의 마음이 어디에 의지할래야 의지할 수 없고, 여러분의 몸이 의지할래야 의지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말기를 당하여 하나님의 마음과 통할 수 있고 하나님의 내적 외적인 심정 기준을 대신할 수 있는 한 사람이 나와야 할 것입니다. 이때가 재림의 날이요, 오시는 그분이 참목자시요, 재림하시는 주님이심을 여러분은 분명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여러분께 말씀드릴 제목은 ‘예수의 몸을 붙들고 울어 줄 수 있는 자가 되자’입니다. 여러분들이 믿고 있는 예수, 또 하늘이 만유를 회복하셔야 할 전체의 사명을 맡겨서 천륜의 대언자로 보내셨던 예수는 만물과 인간과 하늘이 다 같이 오시기를 고대하던 소망의 중심이었음을 여러분은 다시 한 번 느껴야 되겠습니다.
또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에 왔다 가신 예수님은 그 당시 유대 백성에게만 필요했던 분이 아니요, 그후 2천년의 역사 과정을 거쳐오면서 인류가 필요로 했던 분이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오늘을 살고 있는 여러분 개체 개체에 있어서도 필요한 분입니다. 그리고 비단 여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고 땅 위에 하나님이 바라시는 평화의 동산을 성취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민이 다시 오시는 예수님을 중심삼고 하나되어 승리의 개가와 더불어 아버지 보좌 앞에 나타나 영광의 송영을 드리기를 모든 만민 만상은 지금도 고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하늘 앞에 필요한 존재요, 땅 위의 인간 앞에 필요한 존재요, 지으심을 받은 모든 피조만물 앞에 필요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여러분은 하나님의 뜻 혹은 역사적인 이념을 여러분 한 자체를 중심삼고 승리의 표적으로서 예수님 앞에 나타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만일 그러한 여러분이 되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오늘날까지의 6천년 투쟁역사 속에서 전인류에게 안겨준 탄식과 슬픔의 모든 내용을 벗겨낼래야 벗겨낼 수 없게 됩니다.
지금까지 많은 인간들이 오랜 역사 과정을 거치면서 예수를 믿어 나오고 있습니다. 한편 예수님은 하늘의 뜻을 대신하여 땅을 위하고 만민과 만물을 위하여 사탄 대하여 싸워 나오고 계신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이 땅 위에 오셔서 하늘과 땅을 대하여 바라셨던 목적을 완전히 달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영계에서 안타까운 심정을 품고 싸워 나오고 계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따라서 그 싸움이 끝나지 않는 한 하늘의 싸움이 끝나지 않을 것이요, 지상의 싸움도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의 소망을 성취하지 못하는 한 온 피조만물도 소망의 한 날을 가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여러분이 믿고 있는 주님, 나아가 모든 믿는 이들이 신랑으로 모셔야 할 주님, 여러분의 참아버지로서 모셔야 할 그 주님을 생각해 보게 될 때에, 그 예수님과 여러분이 하고 있는 생활을 비교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하고 있는 생활이 과거 역사와 모든 종교의 전체의 뜻을 대신한 입장에서 어느 정도 예수님과 하나되었느냐가 문제가 될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이 땅 위의 인간을 위해 오셨고 인간을 위해 가셨는데, 그러한 예수님과 땅 위의 어느 누가 하나되어 있었느냐?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예수님과 영원히 즐길 수 있는 하나의 이념권 내에 여러분이 처해 있느냐, 이것을 따져 묻게 될 때에 아직까지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사람을 찾지 못하였고, 예수님께서 영원히 주관하고 믿을 수 있는 어떠한 사람도 갖지 못하였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도 예수를 중심삼고 영원히 안식할 수 있는 어떠한 하나의 기준도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원리를 통하여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 위에 오실 때에 택한 이스라엘에 대하여 바라신 소망은 무엇이었던가? 4천년 동안 섭리해 나오신 하나님의 뜻이 그들을 통하여 이루어지길 소망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당시의 만민과 만대의 후손들이 즐길 수 있는 행복의 안식처를 건설하기 위해 새로운 복음을 선포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새로운 이념을 실현하기 위하여 4천년 역사를 대표하여 나타나신 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목수의 아들이요 배우지 못한 일개 청년이었지만, 그를 통하여 하늘의 모든 이념과 소망의 뜻이 이루어지길 바라고 있었는데, 이것을 그때의 인간들이 알았느냐 하면 아무도 알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이 역사적인 결실체로서, 하늘의 섭리적인 중심체로서 인간 앞에 나타나게 될 때에, 그는 마음과 몸으로 느끼는 느낌이 무엇이기를 바랐던가? 먼저는 하늘을 대할 때 하늘과 통할 수 있는 느낌과, 인간을 대할 때 인간과 통할 수 있는 느낌을 갖고 나타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천상천하의 모든 피조물이 타락의 원한에 사무쳐 있는 것을 느끼면 느낄수록, 이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슬픔이 피조만물에 스며있는 것을 알면 알수록 심각한 마음을 가지시게 되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30여 생애를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자라면서 만민의 메시아로서의 모습을 나타내지 못한 채 무언의 생활을 하시면서 하늘의 뜻을 선포하기 위한 준비를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하늘을 향한 일편단심의 마음과 만인류를 위한 마음을 지녔습니다. 하늘과 인류를 사랑하는 마음이 간절해지면 간절해질수록 그의 마음은 어느 누구에게도 표현할 수 없는 근심이 더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누구에게 나타낼 수 없는 근심과 걱정이 컸었다는 것을 그때 사람들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나아가 요셉가정 식구들 역시 예수님의 그러한 각오와 심정을 하늘의 안타까움으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하늘의 심정으로 느끼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그러한 생활 환경 가운데서도 이스라엘 민족 앞에 복음의 말씀을 듣게 하여 새로운 혁명의 봉화를 들어야 할 사명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마음과 하나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택한 이스라엘 민족을 대표한 유대교를 중심해서 천륜의 방향을 제시해야 했고, 인륜의 도리를 다시 세워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앞에 하늘의 심정을 대신하고 인류의 역사적인 심정을 대신할 수 있는 마음을 갖춘 사람이 없었던 것이, 무엇보다도 그가 하나님의 구원섭리를 완성시킬 수 없었던 중요한 요인의 하나였습니다.
나아가 하나님께서 4천년의 수고를 거쳐서 이루어 놓은 유대교단, 이 제단은 예수 앞에 없어서는 안 될 제단이 되어야 했고 또 예수는 이 제단 앞에 없어서는 안 될 대제사장의 입장이 되어야 했는데, 그만 예수와 유대교단이 갈라지고 말았습니다.
예수는 구약섭리의 결실 제단인 유대교를 중심하여 새로운 신약섭리의 봉화를 들고 나서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받들도록 준비시켜 놓았던 유대교 자체가 예수님과 하나될 수 있는 환경이 되지 못하게 될 때에, 그 예수님의 서글픈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또한 사방을 둘러보아도 자신의 사정을 놓고 주고받을 수 있는 하나의 참다운 친구가 없었던 예수님이었음을 여러분들은 오늘 이 시간 새롭게 느끼지 않으면 아니 되겠습니다. 그와 같이 외로운 사정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남과 같이 편안한 자리에 설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 자신에게 슬퍼하는 일이 있게 되면 이 슬픔으로 인하여 후대 인류가 단죄받는 일이 있게 되는 것을 알고 있는 예수는, 뜻을 성사시키기 위해 택함받은 유대교단이 자신을 반대하는 것을 보면 볼수록 더욱 더 심각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예수였지만 남과 같이 슬퍼할 수 없는 예수였습니다. 자신이 슬퍼하면 그것이 하늘 앞에 더욱 큰 슬픔을 돌리게 된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의 슬픔이 역사상의 슬픔으로서 남아질 것을 아시고 슬퍼하지 못했던 그 당시의 예수의 심정을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고로 역사 과정을 거쳐 내려온 인간들 가운데 지금까지 어느 한 사람도 알지 못했던 이 예수의 슬픔을 여러분이 알아주어야 하겠고, 이스라엘 민족이 몰아내던 이 외로웠던 예수를 여러분이 대신 위로해 주어야만 예수에 대한 하늘의 슬픔을 풀어 줄 수 있고, 역사노정에 스며있는 예수의 슬픔을 풀어 줄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 이 눈은 무엇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이 귀는 무슨 소리를 듣습니까? 이 마음은 무엇을 향하고 있고, 이 몸은 어디를 향하여 움직이고 있습니까? 여러분 자신들이 냉철히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될 때가 다가왔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들은 예수님을 지나간 과거의 인물로만 볼 것이 아니라 현실의 예수로서 찾아 모시어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이 이 마을 저 마을에서 핍박받으며 돌아다닐 때, 이리 가도 원수요 저리 가도 원수요, 가면 갈수록 험준한 길이었으며, 하나님께서 4천년 동안 길러 나온 민족 가운데 기쁘게 맞아 주는 친구 한 사람을 갖지 못했던 이 예수의 사정을 여러분은 지금 느껴야 할 것입니다.
수많은 교단이 기다렸고, 수많은 사람, 수많은 제사장들이 메시아를 기다렸으나 정작 그가 나타났을 때 어느 한 사람 예수를 맞아 주는 사람이 없었던 것을 보시는 하나님의 심정은 어떠했을 것인가? 오늘날 여러분들 자신이 2천년 전 예수 당시에 있었다면 과연 여러분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같은 사람이 안 되었을 것인가, 스스로 반문해 보아야 되겠습니다.
또한 여러분은 예수가 과거 역사상에 오셨던 예수요, 현실적인 예수요, 미래적인 예수라 할진대는 과거 재세시(在世時)의 예수의 심정을 알고 그의 심정을 통할 수 있어야 현재의 예수, 미래의 예수를 맞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은 예수가 이 땅에 와서 그저 30여 생애의 슬픈 노정을 지나 십자가에 돌아간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니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 여러분은 예수가 이 땅에 와서 그저 죽어야 했던 것으로 알고 있는 무지한 사람들을 깨우쳐야 하겠습니다. 지금 우리는 2천년 전의 예수가 다시 찾아오기를 바라고 있지만 그 2천년 전의 예수가 나를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2천년 전의 예수를 찾아 올라가야 합니다. 즉 여러분은 2천년 전의 예수의 슬픈 사정과 외로웠던 사정을 알고, 그 2천년 전의 예수와 현실의 내가 간격이 없는 자체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를 붙들고 울 수 있는 내가 되면, 결코 다시 오시는 주님은 나를 버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2천년 전에 오셨던 예수를 죽여놓고 그 죽은 예수가 2천년 후의 나를 찾아와 주기를 바라는 신앙의 태도를 가진 사람은 결코 다시 오시는 주님을 만나지 못한다는 거예요. 그러면 지금으로부터 10년, 100년, 2천년을 거슬러 올라가, 슬픈 예수를 부등켜안고 울 수 있는 크리스천들이 과연 이 땅 위에 몇명이나 있느냐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는 돌아가신 예수를 붙들고 하늘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던 시대가 지나가고 살아 계신 예수님을 환희의 눈물로서 위로해 드릴 수 있는 시대에 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살아 계신 예수님은 어디에 계신가? 그 예수를 찾아 세워야 할 것이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중대한 사명입니다.
그러면 이제 여러분들이 입을 열어 하늘에 계신 예수를 불러 보았습니까? 아무리 불러 봐도 여러분은 그분과 쉽게 관계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만민의 구주요, 그는 나를 위하여 돌아가신 구주이기 때문에 나는 그분과 영원한 인연을 맺지 않으면 아니 될 것입니다. 그런데 나의 눈이 과연 예수님을 보았고, 나의 귀가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으며, 나의 입이 예수님 대신 말씀을 했는가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예수님과 나와는 아직도 거리가 멀다는 것을 여러분은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그러한 예수를 붙들어야 할 운명의 역사, 비운의 고개를 뚫고 넘어가야 할 이때에 여러분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역사적인 예수를 현실적인 예수로 자신의 생활권 내에서 실증할 수 있는 인연을 맺고 살아야 되겠습니다. 만일 그러한 여러분이 되지 못한다면 6천년 동안 역사하신 하나님의 수고의 뜻도 여러분과 인연을 맺어 안식의 한 날을 맞이할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예수를 회상해야 되겠습니다. 2천년 역사 과정의 모든 인류를 대한 섭리의 뜻을 개척하기 위하여 복음을 들고 나섰던 예수, 2천년 동안 그 복음의 말씀이 어느 국가, 어느 민족에게 들어가든지 그 말할 수 없는 핍박의 노정을 거치는 것을 보시면서 참아 나오신 이런 역사적인 예수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당시에 택한 이스라엘 민족 앞에 배척받던 예수의 서글픈 사정을 아는 여러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한 예수를 과거의 기정사실로 된 예수로 대할 것이 아니라 오늘 이 시대에 살아 계신 예수로 대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나의 생활권 내에서 예수님의 서글픔을 체휼하고 느낄 수 있어야, 비로소 그를 붙들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이러한 예수는 어떠한 분인가? 그를 볼 때 그의 눈은 창세 이후 4천년 역사를 거쳐온 하나님의 성상을 바라보는 눈이요, 인간의 잘못으로 인하여 영계의 지옥에 있는 뭇영인들을 바라보는 눈이요, 낙원에 있는 영인들의 원한을 풀어 주어야 할 책임감을 느끼면서 바라보는 눈이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슬픔을 대신하여 땅을 바라보게 될 때, 택한 이스라엘 민족과 온 세계 인류가 그와 하나된 인연을 갖지 못하고 반대하는 것을 바라보게 될 때, 예수님의 바라보는 시선은 아담 해와의 타락 이후 4천년간 슬퍼하시던 하나님의 슬픔을 대신한 시선이었다는 것입니다.
택한 이스라엘은 하늘의 축복을 받아야 할 선민으로서, 예수와 영원히 동거하여야 할 식구로서 또는 가정으로서의 입장을 취해야 할 이들이 오히려 반대함은 어떻게 된 일인가? 오늘날 여러분은 반대하는 이스라엘을 붙들고 말씀하시지 못했던 예수, 성전을 붙들고 그들의 무지함에 슬퍼하시던 예수의 친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대들의 눈이 예수가 바라는 눈이 되어 있는가? 예수의 눈은 하나님의 슬픔의 성상을 대신해서 바라보는 눈이었고, 낙원과 지상의 복귀의 해원을 해야 할 사정에 처해 있는 것을 바라보는 눈이었으며, 지옥도 자신에 의해 혜택을 받지 않으면 아니 됨을 바라보시는 눈이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자신의 귀가 뚫려 있습니까? 예수의 귀는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수많은 영인들의 비애의 울음소리를 들었습니다. 그 비탄의 소리와 비명의 소리가 예수 한 분을 두고 울부짖는 것을 듣게 될 때에 예수님은 편안한 한 날을 가질래야 가질 수 없는 자리에 처할 수밖에 없었음을 여러분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또 이 땅을 바라보게 될 때에 악이 동하여 선을 유린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하늘을 배반하고 나서는 민족의 아우성소리를 들은 예수였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는 하늘의 원한을 해원해 드려야겠다는 사명감을 느꼈을 뿐만 아니라, 반대하고 있는 무리까지도 회개시켜야 한다는 사명감을 느끼신 분이었음을 여러분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나아가 그는 자신의 입으로 무엇을 말씀하셨던가? 낙원과 지옥의 중간에서 새로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낙원의 영인들을 이끌어 천국에 들어가게 하려 했고, 또 지옥에 있는 영인들까지 변호해 주셨던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 낙원에 있는 영인들을 천국에 들여보내기 위한 말씀, 즉 낙원급의 영인들을 부활시키기 위한 말씀을 외치셨던 것입니다. 또 지옥의 영인들까지, 즉 사탄까지도 변명해 주는 말씀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하시는 말씀은 영계의 원한을 해원해 주는 조건으로서의 말씀이었고, 또 땅에 있는 인류, 사탄의 사망권에 얽매여 있는 인류를 해방시키기 위한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해방의 말씀을 땅에서는 응당히 환영을 해야 했는데 환영은 커녕 반대하고 말았으니 이것이 어찌된 일이었던가? 그리하여 그들은 하늘과 인연을 맺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또 그의 손과 발은 어떠했습니까? 병든 사람에게 얹어 주던 그 손! 죽은 사람을 살려 주던 그 손! 그리고 굶주린 사람에게 빵을 나눠 주던 그 손이었습니다. 또 그의 발은 반대하는 이스라엘 민족과 사탄에게 몰림을 당하여 이 마을 저 마을, 이 골짝 저 골짝으로 몰려 다니시면서도 원수를 위해 기도해 주시던 발걸음이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원수를 대하여 복을 빌어 주던 손이요, 사지에 못박힘을 당하여 십자가에 달리셨던 그 발과 그 손이었습니다.
또 예수의 몸은 어떠했습니까? 그의 몸은 어디를 가든지 안식의 한 날을 갖지 못하던 몸이었습니다. 앞에 보이는 모든 것이 천륜과 부합되지 않고, 들리는 모든 것이 천륜과 부합되지 않는 환경이어서 어디를 가든지 그는 몰림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머리 둘 곳을 찾지 못하고, 안심하고 지낼 수 있는 안식의 한 날도 갖지 못했던 예수의 일신, 어디를 가든지 환영을 받지 못했던 예수의 일신이었음을 여러분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할 말이 많았어도 다하지 못했습니다. 땅의 말을 해도 모르는 그들 앞에 하늘의 말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예수는 민족 앞에 반역자의 낙인이 찍혔습니다. 교단 전체가, 당시의 정권이 그를 반가워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러나 그는 모든 대중과 하나될 수 있는 작전을 전개했던 것입니다. 하늘은 이렇게 양면의 작전을 전개해 나오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선에 있어서는 양보하는 듯했지만 결국은 사탄까지도 자신을 위하여 일을 해 주었다는 결과를 가져오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연고로 세상 역사는 먼저 친 사람이 8할 이상 패배했습니다. 1차 대전, 2차 대전에서도 먼저 친 편이 패배했습니다. 이런 원칙을 알게 될 때 오늘날 2대 진영 중에 어느 것이 사탄 편이냐 할 때, 대번에 알 수 있다는 거예요. 무엇을 위해서 하는가 하는 것을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전체를 위해서 하지 않고 나를 위해 하거나, 나를 위하여 전체를 희생시키려고 하는 것이 사탄 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분이냐? 위하고 보면 내가 제물된 것 같지만 나를 위하여 제물되어 주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거예요. 인간이 하늘을 위해 주면, 하늘은 온 우주의 이념을 인간에게 전부 넘겨주겠다는 것입니다. 사탄세계는 위하고 보면 내 모든 생명까지도 빼앗고 나중에는 갖다 준 이념까지도 빼앗아 영원한 지옥에 이끌어 간다는 거예요. 그러나 먼저 사탄의 참소를 받아 가며 싸워 나오면 하늘 편의 소득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당 가는 무리가 생겨났습니다. 사탄은 나가면 나갈수록 돌아설 수 없는 입장에 서 있기 때문에, 사탄은 여기에서 양보해 주지 않으면 안 될 이런 입장에 처해진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전면적으로 싸워야 했습니다. 그런데 1차적인 섭리에 실패함으로 말미암아 2차적인 뜻을 세워 가지고 희생과 봉사적인 제단을 중심삼고 섭리해 나왔습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몰리고 쫓기면서도 낙원을 건설해 나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끝날은 그것들이 사탄의 일선이자 하나님의 일선이 되어 너도 나도 알래야 알 수 없는 혼선을 일으켜 가지고 혼란된 세계가 될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여기에서 제1차적인 하나님의 일선을 찾을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하늘의 권한을 갖고 사탄을 쳐부술 수 있어야 거기에 새로운 일선으로서 출발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가 이 땅에 와서 책임을 못 다하고 가심으로 말미암아 성신을 보냈습니다. 성신은 무엇이냐? 제2선을 책임지고 오신 분입니다. 십자가의 진리를 책임지고 오신 분이 성신입니다. 그러면 제1선은 누가 책임지고 있느냐? 사탄과 대결하여 예수가 책임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들이 예수와 성신을 따라가 가지고 이것이 서로 하나로 결속되어 들어가게 될 때에는 예수와 성신도 역시 새로운 일선을 갖추어 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 인간들은 성신 대신 새로운 제2선을 갖추어 가지고 사탄을 막아낼 수 있는 권한을 갖춰야 하나님의 참다운 정병의 자격자가 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사탄을 이길 수 있고 그 정체를 밝혀낼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도 예수도 성신도 못해 줍니다.
그렇게 되면 이런 자격자는 하나님의 마음의 친구가 될 수 있고, 타락하기 전 아담의 친구가 될 수 있으며, 천사장과 만물을 주관할 수 있는 자격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하나의 사람을 찾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각자 각자가 서 있는 위치에서 맡은 바의 사명을 다해야 합니다. 종교면 종교, 과학이면 과학, 이런 입장에서 참된 하나님의 아들로 설 수 있는 사람을 하늘은 부르고 있습니다.
끝날에는 남을 대해서 이러고 저러고 못 합니다. 내가 죽느냐 사느냐 하는 이런 생사의 기로에 서 있기 때문에 내가 어디로 가야 하늘의 인정을 받을 수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양심적인 인사들이 모여 가지고 성벽을 쌓아 ‘하늘을 대신하여 싸우겠나이다.’라고 할 수 있는 민족을 이룬다면, 그 민족은 하나님의 전체적인 주권을 대신할 수 있는 민족이 될 것입니다.
오늘날 미국 같은 나라를 보고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큰 문명국가가 있다고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천륜의 원칙을 알아 그 원칙적인 권내에서 얼마만큼 천상과 지상 앞에 인연을 맺고 있는 민족이 되느냐가 문제입니다. 아무리 외적인 조건이 좋다 하더라도 이것을 한번 청산할 때가 옵니다. 하나님은 지극한 공분의 심정을 지닌 분이지만 그 공분의 심정만 지닌 하나님이 아닙니다. 공분의 심정 깊이에는 사탄이 헤아릴 수 없는 어떤 의(義)의 발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탄이 굴복할 수 있음도 공분의 심정과 의의 발판의 기준이 있기 때문에 나중에는 굴복한다는 것이에요.
인간의 마음도 역시 그렇습니다. 오늘날 인간은 속된 죄악 세상에 있어서 무한히 휩쓸리고 무한히 혼돈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여러분은 마음 깊이 역사의 발판과 하나되고 미래의 발판과 하나되어 변할래야 변할 수 없는 하나의 원칙을 세워 나가지 않으면 아니 되겠습니다. 또한 자신의 내적 기준과 생활의 기준이 어떤 비애의 사실에 부딪쳤을 때 그것을 극복하고 나갈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천적인 역사와 하나 되고, 오늘날 현실적인 섭리의 뜻과 미래적인 섭리의 계획과 하나되어야 하겠고, 또한 그것을 중심삼고 모든 것을 요리할 수 있는 자격자가 되어야만 여러분은 비로소 하나님의 심정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돌아가신 주님이 나타나기를 고대하다가 만나게 되었을 때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리고 그 마음에 휩쓸려 들어갔던 것과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오늘날까지의 역사적인 비애의 모든 심정을 다 잊어버리고 하나님이 오늘날까지 애달프게 섭리해 오신 서러움의 심정을 체휼할 수 있어야 거기에서부터 비로소 새로운 하늘의 역사는 전개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은 무한하신 심정을 갖고 인간을 대하시는데 인간은 한 방면, 즉 자기를 중심한 각도내에서 헤아리고는 마치 그것이 하늘의 전체, 즉 360도인 양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차이를 가리는 때가 바로 심판날입니다. 또 예수가 메시아가 된 것도 역사 과정의 모든 곡절의 노정을 거치면서도 하늘과의 일직선상에서 불변의 충절로써 하늘을 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 하늘의 사랑은 어떻게 이 땅 위에 나타날 것인가? 하나의 정적인 이념과 우리 마음이 영원히 하나되어 탈선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360도를 영원히 돌 수 있어야 되겠고, 둘이 아닌 하나의 이념권 내에서 하나될 수 있어야만 하나님이 안심하고 안식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럴 때에 거기에서부터 제2차적인 섭리의 뜻이 이 땅 위에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는 이 죄의 세계를 밟고 올라서서 하나님의 심정과 통할 수 있는, 즉 정적인 제2창조의 세계를 건설해야 할 책임을 져야 되겠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외적인 세상의 욕망을 저버리고 내적인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천 사람, 만 사람을 대한다 할지라도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심정을 느낄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즉 어떠한 사람에게서도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심정을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것입니다.
진정 그러한 여러분이 되려면, 이때에 여러분들은 슬픔을 당하더라도 제일 큰 슬픔을 넘어설 수 있어야겠고, 분함을 당하더라도 하늘땅 이상의 큰 분함을 극복해 내야 되겠습니다. 또 사탄 대한 공분의 심정이 폭발될 때에 언젠가는 그 사탄을 붕괴시키겠다는 마음을 품고 하나의 사람이나 하나의 동지라도 더 많이 확보하기 위해서 참아야 할 것입니다. 또 그런 마음을 갖고 하늘 앞에 기도하게 될 때에 하늘이 죄의 역사를 초월하여 새로운 이념적인 입장에서 나와 인연 맺을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 날은 2천년 전에 왔다 가신 예수님이 부활하신 부활의 날입니다. 오늘날까지 이 세계에는 기독교인들이 많이 있었지만, 예수님이 부활하셨던 그 한 날도 알지 못하고 내려온 것을 생각할 때, 여러분은 이 부활의 한 날을 알지 못하는 인간을 대하는 하늘의 심정이 얼마나 답답하며 얼마나 서러울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있는 여러분들만은 하늘과 온 만민을 대신하여 누구도 모르는 이 한 날을 축하하여야 할 것이며, 이 시간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을 느끼는 그의 내적·외적 친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여러분이 앉아 있는 이 한 장소는 하늘과 땅과 온 만물이 주시하는 귀한 장소임을 느껴야 할 것입니다. 지금부터 23년 전 오늘, 예수께서 나타나 오늘이 당신의 부활의 날임을 밝혀 주던 일이 기억납니다.
예수는 과연 만민을 대하여 어떤 사람이 되어 주기를 바라셨던가? 그리고 하늘은 어떤 사람이 되어 주기를 바라고 있는가? 예수는 이 땅 위에 신랑으로 오셨지만 땅에 있는 만민이 신부의 입장에서 받아 주지 못한 연고로 신랑과 신부는 떨어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안다고 할진대는,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말 못하는 심정을 만민 대신 느끼는 신부가 되어 주기를 하늘은 바라고 계시다는 것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하나님의 4천년 섭리의 목적을 성사시켜야 되는 책임과 성심 성의를 다하여 4천년 동안 쌓여 내려온 인류의 죄악을 탕감해야 할 큰 책임이 있음을 알았기 때문에, 역사상의 어느 누구보다도 내·외적인 슬픔과 고난의 생애를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이 바라신 것은 피조세계의 복귀요, 말씀해 주려는 대상은 그 일을 함께 이루어야 할 세상의 인간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인간에게 하나님의 간곡한 심정을 토로하고, 그 뜻을 이루어 드릴 것을 호소하셨으나 그 당시 사람들은 받아 주지 않았고 알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대상은 제한된 범위를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거기에다가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마음놓고 말씀하지 못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환경에서 애쓰시던 예수님의 심정을 우리는 동정하고 슬퍼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런 고난의 3년을 거쳐, 온 만민 앞에 환영을 받아야 할 때가 되었었으나 어느 한 사람도 그분을 하나님의 뜻을 대신한 하나님의 아들로 받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마땅히 알아주어야 할 요셉의 가정이나 친척들조차도 알아주지 않았고, 알아주어야 할 유대교단과 이스라엘 민족, 나아가서는 세계가 알아주지 않고 반대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모두로부터 반대받는 입장에 계실 때에도 오히려 불신의 땅을 바라보며 슬퍼하는 하늘을 위로해 드려야 할 입장에 계셨고, 땅을 대하여도 염려해야 할 입장에 계셨습니다. 또한 불신의 인간들을 대해 십자가에서 죽어 가는 순간까지도 복을 빌어 주셨던 예수님이었습니다. 이런 예수의 심정을 여러분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진정한 예수의 신부가 되기를 원한다 할진대는 이렇게 왔다 가신 예수의 심정을 알아야 하고, 지금까지의 선조들의 죄를 홀로 탕감해야 하며, 주님의 심정을 가슴에 품고 생활에서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의 슬픔과 예수의 슬픔을 알고 그러한 이념과 심정을 가진 사람이 이 땅에 없다고 한다면 여기에 있는 여러분이 그 이념과 심정을 지니려고 힘써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이 땅 위에 예수님이 품으셨던 심정을 소유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몸둘 곳을 모르고 설움에 복받쳐 울게 될 것입니다. 그런 사람과 예수와는 비록 2천년이라는 시간적인 간격이 있으나 그는 2천년 전 예수의 심정을 위로해 드릴 수 있는 신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안다 할진대, 여러분은 예수의 생애와 자신의 생애를 비교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만약 여러분의 생애와 예수의 생애에 너무나 현격한 차이가 있다면 여러분은 예수의 친구가 될 수 없고, 그의 신부도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예수의 부활 후에 베드로가 지녔던 그 부족하고 황공했던 마음이나마 가져야 할 것이요, 허덕이며 헤매던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심정이나마 닮으려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를 질 때까지 이러한 친구나 동지 한 사람을 얻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활하신 직후 예수의 심정은 어떠했던가? 3일만에 부활한 그의 심정은 하늘 앞에 면목없는 기도를 드리지 않을 수 없는 서글픈 심정이었습니다. 4천년 동안 수고하신 아버지와 많은 수고를 한 선지선열들을 대하게 될 때 한편으로는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무한히 슬펐고, 하염없는 눈물을 흘려야 했습니다. 이러한 예수의 심정을 여러분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하늘의 성도들은 기뻐했으나 예수는 슬펐으며, 하나님께서도 기쁜 일면 슬픈 마음도 가지셨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이런 예수의 심정을 아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은 이것을 알고 새로이 마음에 결심을 해야 하겠습니다.
결심을 하되 무엇을 결심할 것인가? 예수가 이렇게 된 원인과 동기는 민족 때문도 하늘 때문도 아닙니다. 오직 사탄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는 이 사탄을 짓밟고, 잃어버린 사도들을 찾기 위하여 나섰던 것입니다. 한 때는 생명을 걸고 맹세까지 했던 사도들이 예수의 시체와 무덤까지도 악한 무리들을 통해 지키게 했던 것을 생각할 때, 예수님이 보통 사람이라면 그들을 다시 찾아 나서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오직 원수 사탄에 대한 분개심과 원수 사탄의 품에 있는 제자와 민족과 인류를 찾아야 하겠다는 일편단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들을 찾아 나섰던 것입니다. 또한 4천년 동안 배신하는 인간들에 대한 분함을 참고 또 참으면서 섭리해 오신 아버지를 바라보게 될 때에, 불쌍한 인간들을 찾아야 하겠다는 비장한 결심을 품고 예수님은 그들을 찾아 나섰던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의 비장한 결심을 오늘날 여러분들이 품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또 남아 있는 사도들에게 다시 한 번 사탄 대해 싸워야 한다는 마음의 결심을 고취시킨 예수는 언제까지나 그들과 함께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뜻을 인계받아 오랜 역사노정을 가야 할 제자들, 말할 수 없는 피의 노정과 골고다의 십자가의 고비를 넘어야 할 제자들을 바라보는 예수의 서글픈 심정과 고충은 십자가를 넘을 때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는 40일이 경과하자 사랑하는 제자들을 원수의 땅에 남겨 놓은 채 가야 할 슬픈 심정을 품으시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땅에 있던 성도들은 과연 어떤 마음을 가졌었느냐? 오신 예수의 슬픔과 가셔야만 하는 예수의 슬픔을 알았어야 했는데, 그들은 다만 사랑하는 선생과 헤어지는 것만을 슬퍼했으니, 이것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심정은 말로 다 형언하지 못할 만큼 비통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어떤 마음을 가져야 되느냐 하면, 예수님이 가신 뒤의 일을 내 스스로 인계받아 사탄과 생사를 건 싸움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한치의 양보도 하지 않겠다는 각오하에 철석같이 변치 않는 마음의 소유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돌아가시면서까지 마음을 못 놓아 근심하시던 그 심정을 여러분이 직접 체휼하여 대신 풀어 드려야 할 것입니다.
만일 그 당시의 사도들이 한결같은 마음을 가지고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렸다면 하나님은 예수 한 분만을 부활시킬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다면 전사도가 부활하였을 것이고, 오늘날과 같은 기독교는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여러분은 이런 사도들이 남긴 사명을 여러분 자신이 인계 받아 사탄 대하여 분개하던 예수님의 마음을 여러분의 마음으로, 십자가를 넘던 예수의 결심을 여러분의 결심으로 하여야겠습니다. 그리하여 십자가를 죽지 않고 살아서 넘음으로 말미암아 부활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제2의 사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6천년 동안 하나님을 괴롭히던 사탄을 일조에 무찔러 버릴 수 있는 사도들이 되어야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비장한 결심을 갖고 죽음의 길을 걷게 되더라도 사탄과 싸워 이겨 그 흔적을 남길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 모인 여러분들! 그 마음 그 세포 하나 하나가 하나님과 화할 수 있는 자체들이 되어 있습니까? 여러분의 그 마음 그 세포가 하나님과 화할 수 있어야만 예수가 부활 후에 사도들을 찾아가신 것처럼 하나님이 여러분을 찾아오실 것입니다. 이런 사도들이 모이고 모여 예수님을 대신하여 세계 인류를 찾아 나설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까지의 사도들은 예수를 죽으러 오셨다고 믿으면서도 그런 비장한 결심을 하고 나왔는데, 예수는 죽으러 오신 것이 아님을 아는 여러분은 더욱더 비장한 결심을 하지 않으면 아니 되겠습니다.
과거 베드로가 예수 앞에 죽기를 각오하고 따르겠다고 한 그 맹세를 지키지 못하고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두 번째 맹세를 함으로써 이를 탕감했고, 그것을 조건삼아 하늘은 오늘날까지 역사해 나왔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여러분은 예수 한 분 앞에서만 맹세하고, 또 베드로와 같이 죽은 후의 예수 앞에서만 맹세를 할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늘과 땅과 주님을 놓고 맹세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베드로가 이루지 못한 죽기 전의 그 맹세를 여러분이 이루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만 그것을 조건으로 하여 천주의 원한이 풀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의 자녀의 입장과 예수님 앞에서의 동생의 입장에서 그 소원을 풀어 드려야 하겠습니다. 과거의 사도들은 예수와 사제지간이었으나 오늘의 여러분은 예수와 형제지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의 입장에서 하나님과 예수를 똑똑히 바라보고 그의 억울함을 탕감해 드려야 할 책임이 있음을 느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고통을 참으시면서 가셨듯이 여러분도 그러한 고통을 참으면서 역경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될 큰 사명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끝날에 어떤 음성이 들리는가 항상 귀를 기울여야 되겠고, 하늘땅의 소원을 알아 그 소원을 이루어 드려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에 여러분은 하나님의 아들딸로 설 수 있음을 확실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하나님이 바라는 참된 아들이 되자’라는 제목으로 여러분에게 잠깐 동안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이 참을 찾으려 할 때에는 참을 찾을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껴야 될 것이며, 하늘과 땅이 즐길 수 있는 진리를 찾고자 원할진대는 여러분의 몸이 스스로 참된 몸이 될 수 있는 참의 상대 기준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을 여러분은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이런 것을 우리가 생각하여 보게 될 때에 참되신 하나님과 참된 진리와 참된 인간은 각각 그 존재방식이 다르지만 내적 기준에 있어서는 같은 방향을 향해 움직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과 진리는 같은 방향을 향해 영원히 실존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바라보며 누구든지 이 세상이 참된 세상이 되지 못한 것을 한탄하고 있습니다. 또 자기 자신을 반성해 보며 참된 자신이 되지 못한 것을 한탄하고 있으며, 우리가 신앙의 길을 걸어 나가면서 참된 하나님을 찾고자 원하되 참된 하나님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을 또한 탄식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자들의 고통인 것을 여러분은 잘 알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고 참된 진리는 어떤 것이며, 참된 인간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된다는 것을 제시할 수 있는 사상, 여러분이 찾고자 원하는 그런 사상이 어느 때나 나타날 것인가? 이것을 확실히 알지 못한 채 미궁에 처해 있는 여러분인 것을 깨닫게 될 때에 오늘날 여러분은 무엇을 원해야 되겠습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을 중심삼고 무엇을 헤아려 주장하기 이전에 그것이 자신의 참된 개체를 대신할 수 있는가를 먼저 살펴봐야 될 것이요, 여러분 자신이 먼저 참된 입장에 처해 있는가 살펴봐야 될 것입니다. 나아가서는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앞에 참된 자체로 설 수 있는가를 살펴보지 않으면 아니 되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오늘날 우리들은 참된 세계에 살기를 원하나 참된 세계에 들어갈 수 없고, 참된 사람이 되기 원하나 참된 사람이 될 수 없으며, 참된 하나님을 찾고자 원하나 참된 하나님을 찾을 수 없는 자리에 처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인간의 슬픔이요, 무엇보다도 큰 인간의 비애인 것을 여러분은 느껴야 되겠습니다. 만일 이러한 중요한 사실을 여러분이 느끼지 못한다 할진대는, 여러분은 참된 사람과 참된 진리와 참된 하나님과 인연을 맺을래야 맺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날 이 세상이 타락된 세상이라는 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습니다. 속된 세상이요, 죄악된 세상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이 죄악된 세상을 갈라 헤치고 영원히 즐길 수 있는 선의 세계, 영원히 화할 수 있는 하나의 참된 사람, 영원히 믿을 수 있는 하나의 주인공을 찾기 위하여 이 날 이 시간까지 허덕이며 나오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끝날이 가까워 오면 가까워 올수록 이 세상을 박차고 새로운 세계를 찾아 나서야 할 시간이 가까워 온다는 것을 여러분은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입장에 처해 있는 나 자체를 헤아려 볼 때, 한쪽에서는 악이 지배하려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선이 지배하려고 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아직 악의 지배권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느끼는 반면 선이 나를 인도하려 하고 있다는 것을, 양심이 맑아지면 맑아질수록 예민하게 느끼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악의 주관권 내의 자아를 박차고 선의 이념으로서 자신을 주관하려는 그 세계를 찾아 나서고자 할 때에는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이 고충의 과정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 본문 말씀을 보아도 타락한 아담으로 말미암아 오늘날 전인류는 죄의 혈통을 물려받은 타락의 후손이 되고 말았습니다. 2천년 전도 그렇고 4천년 전도 그렇고 6천년 전도 그러했다는 것입니다. 창세 이후, 아담 해와가 타락한 이후 오늘날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모든 인간들은 사탄이 주권을 잡고 있는 환경 하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내 개인뿐만 아니라 가정도 역시 그렇고 사회나 국가, 세계가 모두 그런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을 여러분은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면 오늘날 이와 같은 악의 주도적인 권한이 어디까지 미쳐 가고 있는가 하면, 창조의 하나님이 계시다 할진대는 그 창조의 하나님 무릎 밑까지, 또 하늘 보좌가 있다 할진대 그 하늘 보좌까지 사탄은 자기의 권한을 나타내려 하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죄악의 사건이 벌어진 그날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하나님도 악에 대한 고충을 느끼고 있는 동시에 인간도 악에 대한 고충을 느끼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참된 섭리의 뜻이 있다 할진대 그 섭리의 뜻은 무엇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악을 심판할 수 있는 한 날, 인간 스스로도 악을 심판할 수 있는 한 날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깨닫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수십억의 인류가 이와 같이 죄악의 주권하에 허덕이게 된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의 사랑권에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이념을 인계받아 전체 후손 앞에 이것을 유업으로 남겨 줘야 할 아담이 실족한데 그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래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의 세상이 되었고 오늘날까지 인류는 죽음의 역사를 엮어 나오게 되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망의 역사가 이 땅 위에 시작된 그날부터 이 땅은 평화의 땅이 아닌 고통의 땅이 되었고, 사망이 이 땅 위에 부식된 그날부터 인간들이 처하는 곳곳마다 평화가 아닌 싸움의 역사노정을 거쳐 나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개인에 있어서는 개인적인 싸움이 있었고, 가정에 있어서는 가정적인 싸움이 있었으며, 또 이 싸움이 민족적인 싸움 혹은 세계적인 싸움으로 넓혀져 세계의 어느 한 곳에서도 싸움이 없는 곳이 없는 역사를 엮어 왔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싸움의 역사 과정에서 먼저 몰리고 찢기며 제물되어 나온 사람들은 누구였는가? 땅 위에 사는 사람들 가운데 악을 쫓는 사람들이 아니라 참을 찾아 나온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원리를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의 역사노정을 생각할 때, 이 땅에 가득 차 있는 악을 대한 분개심과 적개심이 여러분의 몸에 체휼될 때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이 땅을 밟을 때, 이 땅이 악의 피로 물든 땅이 아니라 선의 피로 물든 땅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가 있습니까? 그러한 때가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하늘을 중심삼고 싸우는 역사 과정에 드려야 할 제물들은 응당 악에 속한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인데도 불구하고 먼저 제물 되어 나온 사람들은 선을 찾아 나온 고달픈 무리였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역사과정을 통하여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한 사람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인간은 어떻게 되었는가? 인간들은 1600년 후 노아 때에 내린 하늘의 홍수심판을 면할 수 없었고, 하나님은 홍수심판을 하였으나 노아가정에서 완전히 죄의 뿌리를 근절하지 못해 하나님의 서러움은 역시 완전히 끊어질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노아심판 이후에 아브라함을 불러 세우시고 또 야곱을 불러 세우셨습니다. 이들 역시 이 땅 위에서 불쌍한 제물의 노정을 걷게 하신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모세도 역시 제물의 생애노정을 거쳤고, 예수도 역시 이 땅 위에서 제물의 생애를 거쳐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의 세계를 흠모하면서 선한 세계를 이루려 했던 사람들, 즉, 개인이면 개인, 가정이면 가정, 혹은 사회면 사회, 국가면 국가가 먼저 제물의 노정을 걸어갔다는 것입니다. 이제 아벨과 가인을 중심삼은 아담가정의 싸움이 오늘날 세계적인 규모로 나타날 때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벌어지게 될 세계적인 선과 악의 싸움에서 선을 위한 희생의 제물이 될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 참을 찾아 나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런 세상에 처해 있으면서 세상 것을 다 잊어버리고 누구보다도 인간들을 위하여 눈물의 제단을 많이 쌓고, 하늘의 심정을 본받아 살고자 원했던 사람들이 역사 과정에 이렇듯 학대를 당하며 싸워 나왔다는 것을 오늘 마음 깊이 생각하는 한 시간이 없다 할진대, 여러분은 섭리의 뜻을 붙들어 나온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는 인연을 맺을래야 맺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악은 외적으로 나타나는 권한을 갖고 세계를 지배해 나왔습니다. 그런데 사람에게 마음이 있는 것과 같이 세계의 역사에도 마음이 있습니다. 역사의 방향이 악을 향하여 나가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이 자신의 마음을 중심삼고 몸을 억제하여 새로운 각오와 새로운 결심을 갖고 나아갈 방향을 취하듯이 역사도 역사 자체로써 지향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한 때와 시기, 세기를 역사 배후에 계시는 하나님이 간섭하고 지배해 나오는 과정을 거쳐 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겠습니다.
그러면 이것을 한 시대를 중심삼고 살펴볼 때, 어떤 한 시대에 하나님의 뜻이 나타날 때나 그런 하늘의 뜻과 땅의 뜻이 만나게 될 때에는 하늘과 땅의 대표되는 한 주인공이 나왔습니다. 나아가 어떠한 역사 과정에 있어서 하나님의 섭리의 뜻에 연결될 수 있는 때가 되면, 그 주인공으로 말미암아 시대적인 혁명을 일으키게 되고, 또한 그것이 세계적인 혁명 단계를 거쳐 우주적인 혁명 단계로 역사는 발전하여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타락한 이 인류역사를 돌이켜 보면 악이 땅을 지배해 나온 것을 알게 됩니다. 창세기의 말씀과 같이 천지 만물을 엿새 동안에 지었는데 아직까지 그 지음받은 만물들은 안식의 한 날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안식의 날은 지금까지 모든 인간들 앞에 소원으로 남아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날로서 남아질 수 있는 안식의 날, 이 안식의 날을 인간들이 지니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이 피조세계, 즉 온 실체세계는 안식의 한 날을 찾기 위한 싸움의 역사노정을 거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6일 창조의 이념을 파괴한 인간이 6천년 역사 속에서 유린을 당하는 고비를 넘어 하늘의 실체적인 선의 역사를 흠모해 나오는 이 역사가 하나님의 섭리역사인 것입니다. 이 6수는 사탄에게 빼앗겼으나 어느 한 부분은 하나님이 간섭할 수 있는 조건이 남아 있기 때문에 비록 한 시대가 부패하고 모든 것이 썩어 들어갈지라도 시대 시대를 거쳐 나오면서 이것을 어느 한 때에 치고 새로운 섭리역사를 제시하는 혁명을 일으켜 나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섭리의 뜻을 대하고 선을 지향해 나왔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던가? 그들은 반드시 제물되어 나왔음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 해와를 창조한 후 축복하시기를, 온 피조만물의 주인공이 되어 하나님 대신 만물을 주관하라 하셨습니다. 오늘날 인간세계에는 그와 같은 천적인 축복의 이념이 부여되어 있는데, 이 이념을 실체적으로 이룬 사람은 아직까지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역사노정은 이 우주를 지배할 수 있는 지배적이고 주관적인 이념을 찾아 나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를 하늘은 고대로부터 중세를 거쳐 현대까지 시대 시대마다 섭리해 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늘이 인간들에게 이러한 섭리의 뜻을 책임지우고 내세우게 될 때에는 중심인물을 내세우는 것입니다. 그가 처해 있는 시대 전체를 지배하여 하늘의 이념권 내에 결부시키기 위하여 어떤 한 사람을 세워 나오고 있다는 거예요.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이 땅을 대해서 시대와 세기 혹은 역사 과정을 통해서 무엇을 찾고자 하시는가? 시대를 대표할 수 있는 사람, 전세계를 대표할 수 있는 한 사람, 세기를 대표할 수 있는 한 사람을 하나님은 찾아 나오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하늘땅을 대신하여 주장할 수 있는 하나의 하늘의 사람을 찾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전체 인류가 끝날에 처해 있다 할진대는 그 끝날은 어떤 때인가? 역사적인 하나님의 섭리로 볼 때, 시대성을 대신하고, 세계와 우주의 섭리를 대신하고, 앞으로의 세계와 천주적인 섭리권을 향하여 인간의 이념이 움직여 나가는 때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악의 통치의 그늘에 처해 있는 우리에게 하늘이 요구하는 것이 있다 할진대, 무엇을 요구할 것인가? 여러분 개체개체를 대하여 물을 것입니다. 끝날에 처한 여러분 한 자체가 역사 과정 혹은 어느 시대적인 대표자의 입장을 갖출 수 있느냐, 혹은 세계적인 어떠한 사명을 대신해서 하늘 앞에 나타날 수 있느냐, 나아가서는 오늘날 이 세계를 대표한 참된 하나의 사람으로서 나타날 수 있겠느냐, 더 나아가서는 영계와 육계를 합한 하늘과 땅 앞에 있어서 속죄자로서의 자격자가 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그를 찾으실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지금 이 시대를 끝날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이념을 통해서 보게 될 때 심판의 한 날, 즉 말세가 우리의 목전에 당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말세란 무엇이냐? 세계적인 종말기에 있어서 그 모든 사명을 짊어지고 하늘을 향해 부르짖고 나선 하나의 사람이 개인에서부터 세계 인류 나아가 하늘과 땅까지 합하는 그날이 바로 심판날임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살고 있는 죄악세계에서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이념을 개척해 나갈 때 하나님께서는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지음을 받은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마음속에 남아질 수 있을 것인가! 내 마음과 몸이 하나되어 가지고 하나님 앞에 자신을 주장할 수 있어서 아담에게 해 주신 축복을 완성한 사람, 즉 제2아담격으로 하나님 앞에 화할 수 있는 사람으로 나타나야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러한 여러분이 되지 못한다 할진대는 여러분은 하나님과 심정적인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끝날에 세계를 대신해 가지고 하나님의 법도를 지니고 타락의 침범을 받지 않았으며, 죄악역사와 인연이 없는 참된 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결국 이 세계가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들이 기대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참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하늘의 사랑을 소유한 참사람이 되는 것이 우리의 소원인데, 참다운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 우리들이 생각해야 할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들이 이 땅 위에 태어날 때에 난 목적과 살아야 할 목적과 하여야 할 목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무엇을 하여야 하며 무엇을 위하여 살아야 할 것인가를 모르고 있으니, 하나님이 있다 할진대 그 하나님은 통분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느 한 시대 어느 한 시간도 쉬지 않고 하늘과 땅을 대표할 수 있는 한 사람을 찾고 계시며 고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것을 모르는 인간들이기에 자신들의 죄상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느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그것마저 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또한 뻔뻔스럽게 하늘을 대하고 있는 인간들을 볼 때에, 이들을 단번에 심판하고 싶으신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의 씨가 될 수 있는 그 한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섭리역사는 이렇게 지연되어 나왔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은 역사 과정에 수많은 사람을 희생시켜 가면서도 그것을 조건으로 참다운 한 사람을 찾기 위하여 나오고 있는데, 인간들은 뻔뻔스러운 마음으로 하늘을 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지으신 인간을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복귀섭리를 해 나오시면서 하나님은 자신이 계획했던 뜻을 기필코 성취하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의 선에서부터 번식되어져야 할 것이 악으로부터 번식되어졌으므로 이것을 거꿀잡이의 역사로 좁혀 들어가 하나의 선의 기점을 만들어, 하나의 결실점으로 연결시키는 섭리를 해 나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슬픔은 무엇인가? 온 천지만물을 창조하시던 그 창조 이념을 대신하고 그 이념을 소유할 뿐만 아니라 그 이념의 주도적인 권한을 갖고 하나님 앞에 나설 수 있는 참된 사람이 없는 것이 슬픔입니다. 신령한 기도를 하는 사람은 끝날을 맞이한 하나님의 소원이 잃어버렸던 선의 주인공을 세우고자 하는 것이라는 음성을 들을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역사 과정에는 완전한 선이 없었습니다. 도의 생활이나 신앙생활에 있어서 선을 자처하는 듯 행동을 한 사람은 있었지만 완전한 선과는 관계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다만 오늘날까지의 역사 과정은 악이 악과 서로 싸우고 있는 것 같지만, 거기에는 보이지 않는 또 다른 내적 싸움도 벌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도의 생활이나 신앙생활은 영원한 승리를 보장할 수 있는 선을 소개해 주기 위한 생활이 아니고, 악을 대하여 선을 제물삼은, 즉 탕감의 생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상에서 30여 평생 고난의 길을 통해 그의 내적인 이념은 세울 수 있었으나, 생활적인 측면에 있어서는 완전한 선을 세우지 못했습니다. 사탄세계에 처하여 악과 대립하여 탕감적인 희생으로써 선을 소개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오늘날까지 참된 사람이 나오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악과 대립하여 싸우기 위해 지금까지 낙원에서 기도하고 계십니다. 이제 여러분은 내가 무엇을 했다고 자랑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행한 선은 악을 탕감하기 위한 조건은 될 수 있지만 영원한 선의 세계의 발판이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세계에서 어떠한 권한이나 지위를 가졌다하여도 그것을 자랑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늘의 황태자요, 만우주의 주인공이요, 만왕의 왕으로 오셨지만 자신을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악을 대한 싸움이 끝날 때까지는 자신을 자랑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자랑하지 않고 참으신 것은 어느 한 날 하늘의 법도를 완전히 세우기 위한 것이었음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은 악이 주관하는 세계에 처해 있었지만 선을 중심한 이념의 세계가 앞으로 나타날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선의 세계가 이 악한 세계 깊숙한 곳 버림받은 무리 가운데 있다는 것을 알고 말씀하시기를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마 11:5)고 하셨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양심적인 자리에 있기 때문에 하늘이 서글퍼하시는 것을 누구보다도 쉽게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독교가 피의 제단을 거치면서 버림받은 역사 과정을 거쳐 나온 것은 끝날의 한 날을 위해서였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이나 예수가 인간과 교단을 대하여 명령해본 때가 없었기 때문에 자기의 주의나 주장을 자랑하는 사람, 또는 교단을 붙들고 자기 것인양 자랑하는 사람은 반드시 깨집니다. 지금까지 십자가를 통하여 세워 놓은 기독교를 하나님이나 예수가 완전히 지배해 본 적이 없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천신만고의 고난길을 헤치시면서 모든 인간을 완전히 지배할 수 있는 그 한 날을 바라고 수고해 나오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자기를 주장하는 사람은 반드시 깨집니다. 천륜이란 순서적인 원리원칙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천지 만물을 지었다 할진대 먼저 하나님이 천지 만물을 주관하고 나서야 인간이 주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순서를 무시하고 인간이 먼저 주관하게 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깨져야 할 운명에 놓여 있는 것이 필연적인 것이라면 싸움의 노정을 거쳐 그 목적지를 찾은 후에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제2의 선의 이념을 창조해야 합니다. 이런 일이 오늘날 다시 필요하다는 거예요. 오늘날 인간들은 이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암암리에 고대하면서 신앙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한 뜻이 이루어지는 날이 바로 신앙적인 부활의 날이요, 혹은 세계적인 재림의 날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까지 하나님이 잃어버린 것을 찾아 나오심도 인간을 주관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오늘날까지 사탄의 참소를 받아 가며 싸우심도 하나님이 권능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원리원칙을 찾아 세우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은 사탄을 앞에 세워 가지고 사탄이 이루는 것을 다시 정리하는 역사를 해 나오고 계십니다. 사탄이 먼저 지배했던 것을 정리하는 것은 사탄이 참소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일 지혜로운 사람은 사탄까지도 세워 가지고 심부름시킬 줄 아는 사람입니다. 오늘날 그러한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는 최후의 승리자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계를 지배하여야 할 지도자로 오셨지만 맨 밑창에 서서 모든 사람을 다 앞에 세워 나아가려고 하셨습니다. 보기에는 낙오자 같았으나 실제로는 무한한 지혜의 소유자이셨습니다. 사탄이 먼저 행한 것을 시정해 나오셨다는 것입니다. 사탄을 앞에 세워 제일선에서 싸우게 하고 하나님은 후방에서 싸움을 정리하여 나오고 계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작전입니다. 사탄은 선두의 한 면만 갖출 수 있지 양면을 모두 갖출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발판을 세우기 위해 죽지 않고 부활하신 예수 앞에 거부당하던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그런 신자 말고, 부활하신 예수를 모시고 길을 안내할 수 있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그 당시에 있었던들 오늘날 우리들은 미지의 이 성경만 붙들고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미지의 신앙세계에서 허덕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수고한 것은 여러분 자신이 구원받기 위한 수고였지 인류의 모든 죄를 완전히 탕감하여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는 수고는 아니었습니다. 그러한 수고를 한 사람은 지금까지 사탄세계의 역사적인 인물 가운데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러면 역사적인 모든 빚을 탕감하고 하나님의 원한을 풀어 드리고 위로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자신의 죄의 인연을 아버지 앞에 염려의 대상으로 남기지 않고, 자신의 모든 움직임이 하늘권 내에서 오직 선의 뜻을 위하여 수고하였다고 할 수 있는 새로운 역사의 선봉자들일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을 많이 가진 민족은 하나님의 전권적인 이념을 차지하여 세계를 지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의 길을 갔지만 그 구원의 뜻을 이루어 놓고 하나님을 위로하고 즐거워해 보지는 못했습니다. 끝날의 우리는 그러한 생활을 이 몸을 쓰고 있는 동안에 이루어야만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끝날의 성도들을 대하여 고대하는 것이 무엇인가? 천적인 내적 기준까지 찾아 들어가 6천년 동안 우리를 위로해 주신 하나님을 오히려 위로해 드리는 사람, 2천년 동안 인류를 위해 수고하신 예수 대신 수고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이 되어야 비로소 하늘의 모든 빚을 탕감한 자격자로서 하늘 앞에 떳떳이 설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 위에 오셔서 하고 싶은 말을 다 못 하고 가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요 16:12)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역사적인 전환기에 있어서 그러한 크나큰 전체적인 빚을 탕감하여 환희와 영광의 자리에서 세계 인류를 축복할 수 있고, 이 민족을 축복할 수 있고, 이 교단을 축복할 수 있고, 개개인을 축복할 수 있고, 더 나아가서는 영계에 있는 수많은 영인들을 축복할 수 있는 참다운 사람들이 나오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따라서 이제 여러분은 그러한 크나큰 인연을 오늘날 지극히 작은 자신이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고, 하늘과 땅 앞에 하나의 제물로서 나설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비로소 역사적인 모든 빚을 탕감했다는 조건을 갖춘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자기 자신이 역사적인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을 느껴야 할 때가 있어야 된다고 봅니다. 우리는 이 땅에 태어날 때에 먼저 부모의 혈육을 받고 그 후 땅의 혜택을 받아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마음을 중심삼고 보면, 영원하신 하늘이 나와 인연을 맺고 있고 내 생명을 보호해 주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겉으로 보기에는 뭇사람들이 행복한 자리에 서 있는 것 같은데 어찌하여 실제로는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가? 그 원인은 그 사람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어떤 것과 인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인간의 불행의 원인은 무엇인가? 인간들은 지금까지 이 불행의 원인을 해명하여 완전히 기뻐하고 행복해 할 수 있는 한 때를 맞기 전에 행복이란 명사를 사용해 왔습니다. 그러나 행복이란 명사를 사용할 수는 있었으나 실제로 행복한 생활을 해 보지 못했다는 것은 역사적인 과정을 통하여 잘 체험해 온 바입니다.
그러면 인간들이 어찌하여 행복과 만족을 얻지 못하고 있었던가? 그것은 우리가 말할 수 없는 빚을 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핵심적인 문제입니다. 우리에게 부하(負荷)된 빚을 우리가 청산하지 않는다면 개인과 교단, 국가, 세계에 행복은 찾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여러분은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태어나기 전부터 상상할 수 없는 슬픔의 역사, 투쟁의 역사가 전개되어 내려왔다는 것을 여러분은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또 자기 일생을 중심삼고 볼 때, 그 마음과 몸을 중심삼고 무한한 싸움의 교차로를 거치면서 살고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나아가 내 전후, 좌우, 상하를 헤아려 보게 될 때에 하늘땅 앞에 말할 수 없는 빚을 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선조가 하늘땅 앞에 남겨 놓은 짐을 탕감하지 못하고 있고, 죄악의 혈통을 인계받아 살고 있는 서러움의 한 존재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늘은 우리를 이상적인 세계로 이끌기 위하여 수고하는데,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우리는 손을 들어 하늘과 온 만상 앞에 빚진 자인 것을 인정하여야 되겠습니다. 또 온 만상 앞에 진 빚을 갚을 도리가 없다는 것을 자인하여야 되겠습니다. 내 한 자체를 분석하여 보게 될 때, 나의 몸과 마음, 그리고 내 가정도 나의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삼라만상 앞에 불변의 모습으로서 이것들이 내 것이라고 자랑할 수 있는 그날은 언제일 것인가? 이것이 온 인류가 공통적인 이념 아래 해결해야 할 역사적인 문제입니다. 우리는 빚을 지고 있으되 3대 부모의 빚을 지고 있습니다. 즉 혈육의 부모와, 우리의 몸을 구성시켜 준 땅과, 하늘로부터 받은 생명의 인연에 대한 빚을 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3대 부모의 인연을 벗어나서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애를 분석해 보면, 우리는 물질적인 면에서 땅 앞에 빚진 사람들이며, 혈육의 부모 앞에 그리고 하늘 앞에 말할 수 없이 많은 빚을 진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여러분은 자기 일신을 중심삼고 과연 하늘 앞에나 땅 앞에, 그리고 부모 앞에 빚진 자인 것을 뼈저리게 느껴 봤습니까? 이것을 생각할 때에 여러분은 땅을 대해 머리숙여야 할 자신인 것을 인식할 때가 있어야 될 것입니다. 또 부모가 끼쳐 준 빚을 생각할진대는 그 앞에도 머리 숙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심정을 중심삼고 영원한 이념을 찾게 하기 위한 하늘의 수고의 빚이 내 마음과 접하여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은 여러분에게 하늘의 수고에 대해 머리를 숙이고 황공한 마음을 가져본 때가 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길러준 부모들도 물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런 입장에 처하게 될 때 ‘나와 나의 후손에게 미쳐진 빚을 다 갚고 나왔습니다.’라고 하면서 자신 있게 나타날 수 있는 자신이 되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환경적인 빚을 짊어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은 그러한 사람을 깨우치기 위해, 또는 인간이 짊어진 역사적인 모든 빚을 청산해 주기 위해서 수고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여러분들이 짊어지고 있는 그 빚은 청산하여야 할 빚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짊어진 그 빚을 청산하고 하나의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기 위해, 인간은 미처 생각지도 않고 꿈도 꾸지 않지만 그러한 염려를 가지고 오랜 역사 과정을 섭리하여 나오셨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는다 할진대 여러분은 어떠한 마음을 갖고 감사하여야 되겠는가를 더듬어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내가 생각지 않는 시간에도 하늘은 우리들을 위하여 염려하셨고, 내가 내 일신을 사랑하고 일신의 향락을 위하여 허덕이고 있을 때에도 하늘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 해와가 타락한 이후, 하나님은 6천년의 기나긴 세월 속에서 인간으로 하여금 혈통적으로 짊어진 죄악사와 사회적으로 뻗어 나온 죄악사와 또 천상적으로 맺어진 죄악사를 끊게 하기 위하여 지금까지 쉬지 않고 수고해 오고 계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역사 과정의 수많은 선조들이 하늘을 배반하고 거역하였기 때문에, 응당히 하나님은 인간들을 응징하고 처벌하여야 할 입장인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인간에게 배척받는 서글픔을 당해 왔습니다. 또 그 인간을 어느 한 때도 놓지 못했으며 그 인간을 위해 수고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늘은 어찌하여 인간들을 대하여, 우리 선조들을 대하여 수고하는 역사 과정을 거쳤느뇨? 인간이 짊어진 그 짐과 빚을 인간으로 하여금 탕감복귀하게 하지 못한다 할진대는 6천년 동안 수고하신 하나님의 수고는 허사가 되는 것이요, 인간이 찾아 나온 도의 이념도 다 헛수고로 돌아가겠기 때문이었습니다. 손을 안 댔으면 모르되 손을 댄 이상 하나님은 6천년 동안 인간들이 이 땅 위에서 져 온 역사적인 빚을 탕감하고 청산할 수 있는 사람을 찾으시고야 말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인간들에게 역사적인 빚을 탕감하고 청산할 수 있도록 해 주기 위하여 하나님은 오늘도 내일도 수고하실 것이며, 그리고 지금까지 수천년 역사를 참아 나오시면서 택한 민족을 세워 놓고 어떠한 하나의 다리를 놓아 가지고 역사적인 죄와 빚을 청산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러한 한 민족을 찾아 헤매고 계십니다. 더 나아가서는 한 교회를 찾아 헤매는 동시에 한 개인을 찾아 헤매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인 것을 여러분들은 마음으로 느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기쁨과 영광에 취하여 만우주를 지배하여야 할 하나님의 입장이 이런 곡절의 입장으로 변한 것은 누구 때문인가? 이것은 두말할 것 없이 오늘날 인류 때문에 이렇게 됐다고 생각하게 될 때에, 여러분은 그 하나님을 붙들고 위로해야 되는데 개인 차원의 위로 가지고는 하늘의 마음을 위로해 드릴 수 없습니다. 역사적인 서러움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마음과 전인류적인 차원에서 체휼할 수 있는 몸 마음을 갖지 않고서는, 하나님 속에 사무쳐 있는 역사적인 슬픔과 현실적인 슬픔을 청산할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하늘은 어차피 이런 사명을 갖춘 한 사람을 교회와 민족을 대신하여 세워놓지 않으면 안 될 역사적인 기준이 있기 때문에 그러한 개인을 찾아 세우기 위하여 수고해 나오셨습니다. 그리하여 4천년 수고하여 찾아 세운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한 개인이로되 그의 배후에 역사적인 인연이 어리어 있고, 그 당시의 시대적인 인연이 그의 배후에 있으며, 미래적인 인연이 그의 배후에 어리어 있었는데, 그 사실을 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자기 마음의 행복과 자기 일신의 향락을 위하여 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또 자기 한 개체의 영광을 위한 소망을 가지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다 떠나, 4천년 동안 인류가 져 온 역사적인 전체의 빚을 어떻게 청산할 것인가 하는 걱정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서러움을 자아내고 있는 사탄과 그 사탄의 인간 대한 참소조건을 가로막아 가지고 인간을 하늘 앞에 승리적인 하나의 모습으로 찾아 세우고자 했던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생애를 걸어 놓고 역사적인 그 모든 빚을 청산해 주기 위하여 나섰다는 것을 여러분은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하신 말씀은 그 당시의 말씀이로되 4천년 역사에 왔다 갔던 모든 사람들, 즉 영계에 있는 수천만의 영인들까지도 들어야 할 말씀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전하신 말씀은 그때 당시는 물론이거니와 그 이후 영원을 걸어 놓고 천추만대 후손까지라도 들어야 할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신념을 갖고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말씀을 하고 있는 예수 앞에 그의 심정을 통하여 친구 되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는 갈 길을 찾아야 할 이스라엘 민족이 갈 길을 찾지 못하고, 하늘 품에 안겨야 할 택한 선민들이 하늘 품을 배척함으로 말미암아 말할 수 없는 서러움의 심정에 부딪쳤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눈물짓는 것은 4천년 동안 수고하신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한 서러움의 눈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4천년 역사 과정에 왔다 갔던 수많은 선지자들이 고대하던 소망의 실체였기 때문에 그가 눈물을 흘리면 영계에 가 있는 수많은 선지자들도 눈물짓지 않을 수 없는, 이런 입장에 서 있었던 예수 그리스도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하게 될 때, 이 땅 위에 와서 공생애노정을 거쳐간 그 예수 앞에 우리의 선조들이 책임을 다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오늘날 그 후손인 우리들에게 그 책임을 다 하여야 할 역사적인 사명이 남아져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예수의 우주관은 4천년 역사를 통할 뿐만 아니라 그 당시의 세계관과 더 나아가서 미래에까지 연결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따르고 있던 그 당시의 사람들은 자기를 중심삼은 생활관을 갖고 자기를 중심삼은 세계관을 갖고 살려고 했습니다. 이 한 사실을 비교해 볼 때, 예수님과 그 당시의 사람들과는 생활에 있어서나 생애에 있어서나 생각에 있어서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런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예수는 온 인류의 죄와 짊어진 빚을 탕감해 주기 위해 수고하셨지만, 그 모든 죄악의 빚을 탕감받아야 할 사람들과 밀접한 인연을 맺을래야 맺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대하여 4천년 동안 수고해 나오신 하나님의 그 고통의 심정을 느끼지 않으면 안 되는 비통한 자리에 놓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고충이 우리와 예수님 사이에 있어서 해결되었느냐 하면 아직까지도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진정 예수의 심정이자 우리들의 심정으로서 귀결될 수 있는 한 시간을 찾고 있는 것이 오늘날까지 수고해 나온 하나님의 소원이요, 예수님의 소원이요, 오늘날 우리들의 소원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여러분은 자신의 세포 하나하나에까지도 역사적인 비애가 깃들어 있음을 느껴야 합니다. 또 여러분은 시대성을 무시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여러분 자체에는 시대적인 슬픔이 잠재하여 있고, 더 나아가 미래에 대한 해원의 책임이 여러분 자체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느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눈물을 흘린 것도, 인간이 짊어진 빚을 탕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눈물의 길, 배반의 길까지도 죽음을 무릅쓰고 헤쳐 나가지 않으면 아니 되었습니다. 또 죽어 부활한 후에까지도 땅 위의 인간을 위하여 역사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이 땅 위에 생명을 갖고 태어난 이상, 인간의 역사적 서러움의 심정까지도 해원시켜 주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이 땅 위에 무엇을 남기고 가려 하셨던가? 사탄에게 유린당하던 선한 사람들의 눈물자국을 자기 일신에 체휼하여 이 원한의 심정을 걸어 놓고 또는 하늘과 땅과 사탄 앞에 있어서 그 모든 역사적 서러움을 청산할 책임을 짊어질 각오를 가진 하나님의 아들딸을 남기고자 하셨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참다운 아들딸이 나오지 않으면 하나님은 영원히 불쌍한 자리에 계실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를 따르던 제자와 오늘날까지의 2천년 동안 순교의 길, 피의 골고다의 길을 걸을 사람들도 역시 불쌍한 입장에 처해질 것을 아셨기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미래를 책임질 사람은 누구일 것인가? 오늘날 여러분 개체입니다. 하나님은 책임을 못 진다는 거예요. 만약에 하나님이 책임질 수 있다면 6천년이란 긴 세월이 필요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책임과 사명은 하나님이 다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하여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인간을 대표하여 이 땅 위에 와 가지고 영과 육을 중심삼고 4천년 역사의 빚을 전부 청산해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 이후 모든 인류는 사탄 앞에 참소받아야 할 그 어떠한 빚도 없어야 할 것이었는데 예수님이 뜻을 다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인류는 다시금 그 모든 빚을 그대로 유업으로 이어받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돌이켜 볼 때에, 예수님은 지금까지 하나님 앞에 머리를 들지 못하고 속죄의 제단을 쌓아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런 입장에서는 아무리 자기 일신을 위하고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하여도 행복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만족을 하고자 하여도 만족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늘에 있는 천천만 성도들과 이 땅 위의 만인류들은 다 같이 기뻐할 수 있는 그 한 날을 고대하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따라서 내 손길은 피곤해질 수 없는 손길임을 알아야 되겠고 내 손길의 배후에는 역사적으로 피 흘린 과정이 어리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또한 내 몸은 생생한 몸 같으되 이 몸은 찢기고 찢겨진 흠점 투성이로 얼룩져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고, 나에게 어떠한 기쁨이 있다고 해서 그저 기뻐할 것이 아니라 그 기쁨은 역사적인 희생의 댓가로 말미암아 생성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또한 하늘이 흘린 눈물이 이 땅을 채우고, 하늘이 흘린 피의 희생이 이 땅의 골짜기를 메울만한 희생의 과정이 나로 말미암아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실체적으로 느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일생에 어리어 있는 슬픔도 풀어 드리지 못한다 할진대는 역사적인 하나님의 심중에 사무쳐 있는 슬픔을 장차 누가 책임질 것인가? 도의 길을 찾아 나가면 나갈수록 인간은 하늘을 대해 황공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각기 자체적으로 빚진 것을 갚아야 할 입장에 놓여 있기 때문에 주는 데 있어서는 개인을 위하여 주어야 되겠고, 나아가 하늘을 위하여 줄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노정이 여러분에게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 여러분은 더욱더 멀리 뻗어 나가고 싶은 마음의 방향성을 느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마음을 억제하여 자기 개인을 위하여 움직이며 살려고 하는 사람, 내 가정을 중심삼고 나아가는 사람은 용납받지 못합니다. 자기 민족을 위주한 주의를 중심삼고 나아가는 사람 역시 맞는다는 것입니다. 국가 역시 그렇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들이 나아갈 방향은 하늘의 이념을 중심한 개인이 되어 가정과 국가, 세계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이제 내 개인을 넘어 종족과 민족, 국가, 세계를 위해서 살아야 되겠고, 더 나아가서는 맺혀진 6천년 역사를 위하여 살아야 되겠습니다. 하늘은 이런 개인과 가정, 민족, 국가를 찾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하나님은 온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분으로서 온 하늘 땅을 통치하여야 할 주인공이지, 어느 한 지역을 주관하여야 할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대하여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려면, 하나님이 지향하는 세계에 대하여 생각이라도 해야 됩니다. 또한 그럴 때 하나님과 인연을 맺을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주의와 사상은 변천되어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땅 위에서 하나의 이념형태를 거친 후에는 이 우주의 근원자이신 하나님과 합할 수 있는 천주주의적인 형태를 이루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필연적인 역사적 귀일점으로 남아져야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아버지의 뜻이라고 하는 것은 과거, 현재, 미래의 이념은 물론이거니와 창조 이전의 이념까지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개인을 위하여 주고자 할 때 어떠한 한 개인이 막으면 그 개인을 끊어 버렸습니다. 가정을 위하여 잘 주고자 할 때 어떤 가정이 막으면 그 가정을 끊어 버렸고, 사회를 위하여 주고자 나설 때 사회가 막으면 그 사회도 끊어 버렸고, 나라를 위하여 주고자 할 때 나라가 막으면 그 나라를 끊어 버렸습니다. 따라서 하늘땅을 위하여 주고자 하는 시대가 올 때에 이것을 막는 것이 있으면 그것을 끊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날 우리들이 그러한 하늘의 전체의 뜻을 탕감하고 하늘의 이념세계를 소망하고 나섰다 할진대는, 하늘이 우리들을 6천년 동안이나 길러 나오시고 사랑을 주신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그러한 마음의 소유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늘은 바로 그러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고 계시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하여야 되겠습니다.
세상의 원칙은 주고받는 이치입니다. 따라서 세계를 위해 주는 민족은 세계를 지배할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이 생애노정의 종말을 고할 그때, 즉 운명시에 여러분은 어떠한 말을 남기고 갈 것인가? 예수님께서는 이단의 괴수로 몰려서 십자가에 못박히어 죽으면서도 하신 말씀이, '다 이루었다.' (요 19:30)고 하셨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세계를 위하여 얼마만큼 염려하셨던가 하면 죽음을 각오하고 사탄과 싸워 나가면서 세계 인류를 염려하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 자신들도 이 땅 위에서 생명을 거두는 날 '아버지여, 다 이루었나이다.'라고 기도할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예수는 이 땅 위에서 어떠한 사람을 찾을 것인가? 자기의 사명을 인계받아 가지고 제2차적으로 ‘아버지여! 예수여!’라고 부르며 ‘다 이루었나이다.’ 할 수 있는 하나의 주인공을 찾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마음을 헤쳐 놓고 오늘날의 이 민족을 위하여 염려하는 사람이 아니라 내일의 이 민족을 위하여 염려하고 나설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고, 오늘의 이 세계를 위하여 염려하는 사람이 아니라 내일의 이 세계를 위하여 염려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우리는 한 단계 앞서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먼저 하늘의 뜻을 알았기 때문에 땅의 인간들이 모르는 하나의 세계적인 이념을 찾아야 되겠습니다. 따라서 그런 마음을 갖고 현실을 박차고 나설 수 있는 하나의 모습이 나와야겠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현실적인 하늘의 서러움을 탕감하고 역사적으로 모순된 모든 것을 밟고 올라설 수 있어야 역사적으로 얽힌 모든 것에 대한 탕감적인 조건을 세워 청산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신비스러운 경지에 들어가 보면, 끝날의 성도를 대해 하늘에 있는 예수가 부러워하고 천천만 성도와 하나님까지도 부러워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 땅도, 역사 과정의 모든 인간들도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서 이런 사람을 찾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여러분은 이때가 세계를 대하여 섭리하는 때인가, 개인을 대하여 섭리하는 때인가, 민족을 대하여 섭리하는 때인가를 분별해야 되겠습니다. 또한 내 개인을 위하여 살아야 할 때인가? 아니면 다른 어떠한 무엇을 위하여 살아야 할 때인가를 분별하여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세계를 넘어서 앞으로 천주적인 천국이념을 대해서 살 수 있는 그런 때에 있어서 하나님을 부르면 하나님이 온 세계의 축복을 여러분에게 내려 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인간들은 새로운 세계를 창건하여야 할 비약적인 이러한 고개를 남겨 놓았는데도 불구하고 역사와 지금까지의 습관적인 환경에 지배받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넘을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은 누구일 것인가? 이제 우리들이 가는 걸음에 있어서는 십자가의 길도 좋습니다. 고난의 길도 좋습니다. 어떠한 길도 넘고 넘어가야 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남기신 길, 최후의 골고다의 길을 죽지 않고 넘어서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붙잡으려 했지만 거부당하던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사람이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만일 그때 당시 예수를 붙들고 길을 안내할 수 있는 한 사람, 또는 그의 제자가 이 땅 위에 있었던들, 오늘날 우리들이 잘 모르는 이 성경을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미지의 신앙세계에서 허덕이지 않았을 것이라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지금까지 수고한 것은 자신이 구원받기 위한 것이었지 하나님을 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죄를 완전 탕감하여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이 아직까지 역사적인 인물 가운데 한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하나님의 역사적인 모든 빚을 탕감하여 놓고 하나님을 위로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 것인가? 자신의 죄를 놓고 아버지가 염려하지 않도록 하며 스스로 하늘의 선권에 속하여 수고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늘의 선의 뜻을 위하여 수고하는 그러한 새로운 시대의 선봉자들이 어느 한 민족 가운데 많이 나오면 많이 나올수록 그 민족은 하늘의 전권적인 이념을 차지하여 세계를 지도할 수 있는 민족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도 구원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십자가의 길을 갔지만 구원의 뜻을 다 이루어 하나님을 위로하고 즐거워하는 일은 못 해 봤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끝날에 처한 오늘날의 우리가 이 육신을 쓰고 있는 동안에 그러한 일을 이루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끝날의 성도들이 그러한 심적 기준까지 찾아 세우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수고하신 예수님 대신 수고해 드릴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되어야 비로소 역사적으로 빚진 모든 것을 탕감한 자격자로서 하늘 앞에 설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 위에 와서 하고 싶은 말을 다하지 못하고 갔습니다. 예수님이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요 16:12)고 하셨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역사적인 전환기인 오늘날에 있어서 이러한 크나큰 빚을 탕감하고 하나님과 함께 환희와 기쁨에 넘쳐 손을 붙들고 개인을 축복할 수 있고, 교단과 민족과 세계 인류를 축복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는 영계에 있는 수많은 영인들을 축복할 수 있는 사람들이 나오기를 하늘은 바라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따라서 이제 여러분은 이와 같이 크나큰 하늘의 인연을 오늘날 지극히 작은 여러분 자체가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고, 하늘과 땅 앞에 남겨진 빚을 청산하는 하나의 제물로서 나설 수 있는 자신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비로소 역사적인 모든 빚을 탕감했다는 조건을 갖출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버지, 저희들이 생명을 가졌다고 할진대 그 생명의 원동력이 나 하나에서 제한되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말씀의 능력을 가졌다 할 진대 그 말씀이 저희 한 개인에 머물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나아가 그 말씀과 생명의 힘이 민족을 넘고 세계를 휩쓸어 하늘땅을 움직여낼 수 있는 힘이 되게 할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지금까지 저희들은 편안한 가운데에서 예수를 맞으려 하였고, 편안한 가운데에 있는 예수를 찾으려 했지만 십자가에서 피 흘리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예수를 바라보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음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이제 아버님을 찾아 나선 저희들, 아버님은 그저 저희가 생각하는 것처럼 영광의 아버님으로만 계시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고비도 넘기고 계시는 아버님인 줄 저희들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영광의 주를 고대하는 사람은 많사오나 고난의 주를 따라 나가겠다는 참뜻을 지닌 사람은 없사오니, 아버지, 불쌍한 인간들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혹시 오늘날 저희들이 영광의 주를 만났을 때가 있다면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생각하고, 그 고통을 당하신 주님의 몸을 저희들이 맡을 수 있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골고다의 길에서 민족 앞에 배척받고 쫓김받아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아가던 예수의 보호를 받을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부활의 주를 만나 기뻐하길 바랐는데 그 부활의 주와는 상관이 없는 입장에 섰던 어리석은 사도들과 같은 모습이 되지 말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부활의 주를 맞아 하늘을 위로할 수 있는 아들딸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또 그러한 사명을 다하고도 남음이 있는 아들딸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 오늘 여기에 모인 보잘것없는 무리들에게 아버지께서 함께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제물의 고개를 넘어야 할 저희들이지만 아버지께서 저희를 찾아오시기 위해 먼저 이루 말할 수 없는 수고를 해 오셨음을 알게 될 때, 저희들은 이 길을 아니 갈래야 아니 갈 수 없음을 느끼게 되옵니다.
남아진 역사적인 모든 빚을 탕감해야 할 전체적인 사명이 오늘날 저희에게 있음을 아버지께서 아시오니, 저희에게 부족함이 있다 할진대 그것을 제거하고 부과된 바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 민족을 위하여, 혹은 세계를 위하여 혹은 하늘땅을 위하여 먼저 이 민족을 아버지 앞에 세울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또 그리하고도 남을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옵길,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6천년의 역사 과정에서 남겨진 죄악의 아우성소리를 듣고 있는 저희들, 금후에는 아담 해와의 입장을 거쳐 새로운 선의 선조들로서 넘어가야 할 입장에 서 있다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현실의 모든 것을 밟고 올라서 새로운 세계를 창건하는 하늘의 역군으로 세워 주시옵길, 사랑의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지금까지 저희들을 위로하신 아버지를 찾았사옵고, 위로받기 위하여 찾았사오나, 이제는 위로하여 주시는 그 아버지를 대신한 주님을 오히려 모실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애썼던 저희의 모든 힘과 능력이 저희의 마음에 그 소망이 이루어 질 때까지 남아 있을 수 있도록, 아버지, 인도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 여기에 모인 형제들, 모두 아버지 품안에 안겨 아버지의 애달픈 심정을 체휼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모든 것을 체휼한 사람의 심정을 지니고 그 아버지를 위로할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사랑하는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였사옵나이다. 아멘.
오늘 여러분들과 잠깐 생각해 보고자 하는 말씀의 제목은 ‘그 어딘가를 찾아가야 할 우리’입니다.
오늘날 여러분들은 개인을 근거로 하여 사회 또는 세계와 인연을 맺어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 한 자체를 생각해 보게 될 때, 마음이 있고 몸이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나아가 마음이 있고 몸이 있는 동시에 우리들이 살고 있는 땅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이것만으로써 우리들이 가야 할 노정과 우리들이 찾아야 할 환경이 되어 있느냐 하면 그렇게 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마음은 더 높은 이념을 지향하여 찾고자 하고 있습니다. 그런 분야가 또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몸을 중심삼고 볼 때, 마음과 상충되어 있으면서 몸 역시 어떠한 이념을 향하여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잘 체험하는 바입니다. 또 그 다음에 내 한 자체를 벗어나서 살펴보게 될 때, 이 땅도 역시 그 어떤 크나큰 이념을 향하여 움직여 나오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것으로써 모든 것이 끝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나아가 하늘이 있고 땅이 있고 사람이 있다 할진대 하늘과 땅과 사람은 셋인 것 같지만 하나의 이념권 내에서 하나의 목표를 향하여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 우주만상을 창조하실 하나님이 분명히 계실진대, 그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 하늘은 나와 상관이 없는 입장에 계시고 자신도 나와의 일체적인 이념을 대하여 하나의 상관적인 입장에 놓여 있지 못하고, 더 나아가서는 이 땅도 역시 하늘의 전체의 이념을 성취시킬 수 있는 땅으로 되어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오늘날 실제 사회상을 보든지 또는 세계사조를 볼 때 잘 알 수 있는 바입니다.
이런 모든 것이 원래는 하나의 목적을 향하여 하나의 귀일된 노정 위에서 통일적인 행동과 방향을 취해 가지고 움직여야 할 창조주의 이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뜻이 이루어지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이것이 오늘날 인간들이 해결해야 할 문제가 되었다는 것을 뭇사람들은 생각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들이 하루 하루를 사는 데 있어서나 스스로가 찾는 데 있어서 마음과 몸은 각각 그 무엇인가를 찾아 헤매고 있음을 느낄 것입니다.
또 오늘날 내 생명을 중심삼고 세계를 바라보게 될 때, 이 세계도 역시 그 무엇을 찾아 허덕이고 있다는 것은 여러분들이 자신의 생활권 내에서 잘 체험하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보이는 이 땅 위의 인간만의 것으로써,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느냐? 그렇게 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있고 만물을 창조하신 주인공이 있는 한, 그 주인공은 인간을 대해서든지 혹은 피조물을 대해서든지 자신이 어떠한 크나큰 하나의 이념을 두고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이미 아는 바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여러분 한 자체를 보게 될 때, 여러분 앞에는 어떠한 조건들이 남아 있느냐 하면, 하나님이 찾아 나가야 할 이념의 세계, 즉 여러분의 마음과 몸을 중심삼은 이념의 세계입니다. 그 세계를 향하여 나가야 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인정치 않을래야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내 자체를 바라볼 때 나는 하늘을 대하고 있고 땅을 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여러분은 천륜의 이념에 의해 이 땅을 대한 전체적인 섭리에 비추어, 자신의 마음이 떳떳이 하늘을 대할 수 있으며 통일적인 하나의 이념을 대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반성해 보아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자신이라고 여러분은 자신 있는 답변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있다 할진대 하나님이 바라는 전체적인 이념의 통일세계가 있어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섭리해 오셨다 할진대 이 땅 위에 통일적인 이념을 성취시키는 한 때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필연적인 사실입니다.
그렇다 할진대 하늘의 이념과 땅의 이념이 하나될 수 있는 그 목표에 대하여 여러분 자신은 어떠한 자리에 있는가, 여러분 자신은 어떠한 환경에 처해 있는가, 여러분이 오늘 대하고 있는 생명은 어디에 위치해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일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마음은 자기도 모르게 하늘을 의지하려 하고 몸은 자기도 모르게 땅을 의지하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하나 같으나 두 갈래 길에서 허덕이고 있는데, 이것은 인간의 타락에 기인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여러분은 마음을 통하여 천륜이 바라는 이념과 하나되어야 하겠고, 몸을 통하여는 세계가 지향하는 하나의 통일의 이념과 하나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 과정에 그러한 사실을 소개하여 줄 어떠한 이념이 나와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세계상을 바라보게 될 때, 그 무엇인지 모르게 통일적인 형태를 향하여 움직이고 있고, 또 이런 추세에 따라 내 마음 역시 무엇인지 모르게 세계적인 뜻을 품고 하나의 개인으로서, 하나의 형제로서, 하나의 식구로서 동거하려는 크나큰 이념이 내 마음을 통하여서 수시로 감응되고 있는 사실을 우리들은 잘 체험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것이 오늘날 우리들이 이룰 수 없는 망상에서 오는 어떤 관념적인 인식에 지나지 않을 것인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심적 경향이라는 것은 반드시 내 한 자체로서는 그것을 일으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무엇인지 나도 모르는 가운데 천륜의 크나큰 섭리의 뜻이 내 마음과 인연을 맺기 위하여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날 이 땅 위의 사람들 앞에 미쳐지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누구든지 천륜에 이끌려 아니 나갈래야 아니 나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의 양심은 서로 차이가 있고 그 느끼는 감정도 차이가 있습니다. 또 몸이 바라는 세계가 있고 마음이 바라는 세계가 따로 있습니다.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하여야 하늘 앞에 접근시킬 수 있겠는가? 또 무엇을 위주하고 주종의 관계를 맺어야 하겠는가? 이것이 오늘날 인간으로서 해결해야 할 중대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인간 개개인이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세계에 어떠한 이념이 이루어지고, 아무리 이 땅 위에 천륜의 뜻이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그 사람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간격의 싸움은 몸이 마음을 위주하여, 즉 몸이 마음을 따라가는 입장에서 순응하지 않으면 해결될 수 없습니다. 또 마음과 몸이 하나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된 그 자체가 마음만 위주할 것이 아니라 마음과 몸이 하나된 연후에는 몸도 위주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럴 수 있는 가치적인 마음과 몸을 자신의 생활권내에 세워 놓아야 합니다. 만일 그러한 여러분이 되지 못한다면, 오늘날 이 땅 위에 섭리의 뜻과 이념이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여러분은 그 섭리의 뜻과 이념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게 됩니다.
이제 우리 앞에는 심판의 때가 닥쳐오고 있습니다. 이 심판의 시대를 넘기 위하여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가? 이 이념적인 권내에 있어서 하나님이 있고 땅 위에 어떠한 최고의 이념이 있다면 그 하나님과 이 땅 위의 최고의 이념과 통일된 하나의 형태를 내 몸 마음이 체험하여야 되겠고, 내 한 자체가 하늘과 땅을 대하여 부끄럽지 않게 설 수 있는 하나의 중심을 지녀야 되겠습니다. 만일 그러한 여러분이 되지 못한다 할진대 여러분은 심판의 날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날까지 수많은 인류의 양심을 움직여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지향하는 방향과 양심이 지향하는 방향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백 정도로 움직인다면 양심이 그 백 정도의 상대적인 입장에 서느냐 하면 그렇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살아가고 있는 시대와 습관, 역사관, 혹은 문화적인 모든 조건들로 말미암아 인간의 양심이 좌우되고 있고 영향받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정도에 따라 많은 차이를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이 갖고 있는 양심도 천륜이 지향하는 그 이념적인 세계와 반드시 일치되는 것은 아닙니다. 양심이 지향하는 그 이념적인 세계가 천륜과 같은 방향을 취한 듯하나 여기에는 현격한 차이를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도의 길을 찾아 들어서게 될 때에는 자신의 양심까지도 쳐서 하나님의 뜻 앞에 굴복시키는 싸움을 하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처하여 있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도 이념을 향하여 움직이고 있고, 오늘날 우리 인간의 양심도 그 이념을 찾아 나가고자 원하지만 이 두 갈래가 일치해서 나아가지 못하는 데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라시는 대로 내 양심이 가기를 원하면서도 가지 못하는 것은 인간이 넘어야 할 두려움의 한 고개가 남아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이 두려움의 고개를 뚫고 넘어서지 못한다 할진대는 여러분은 영원한 이념의 천국과는 인연을 맺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 나의 마음과의 관계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서기 위하여서는 내 마음과 몸이 그런 관계를 맺어야 하겠고, 나아가 내 마음과 몸이 뜻 가운데 서야 하겠으며, 내 마음과 몸을 중심삼고 앞으로 이 뜻의 이념과 그러한 관계를 맺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늘과 여러분의 양심이 하나되고 양심과 몸이 하나되고 몸과 환경이 하나되어 모든 것을 하나로 규합시켜야 되겠고, 나아가 그 중심을 대표하여 서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하늘세계에 있어서든지, 양심세계에 있어서든지, 몸의 입장에 있어서든지, 어느 면에 서더라도 여러분이 자신 있게 설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럴 수 있는 여러분을 찾아야 할 운명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인간들은 어딘지는 모르지만 가야 할 운명에 놓여 있고, 무엇인지는 잘 모르지만 그것을 찾아야 할 운명에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마음은 천륜을 향하여 나아가려 하고 몸은 나를 중심하고 땅을 향하여 나아가려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늘은 기나긴 역사 과정을 거쳐오면서 수많은 인간들을 희생으로 몰아넣어 땅을 지향하는 이 몸의 지향성을 바꾸어 천륜을 지향시켜 온 세계 인류의 몸뚱이를 하나의 통일의 세계로 이끌어 나오고 있습니다. 나아가 양심도 여러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것을 때려 몰아 가지고 하나의 방향, 하나의 이념세계를 향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오늘날 이 땅 위의 사람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중심삼고 하나님의 뜻과 그 방향을 올바로 세워주기 위한 싸움이 벌어지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양심을 중심한 하나의 이념을 찾기 위한 사탄과 하나님과의 싸움이요, 보이는 실체세계에서는 가인 편과 아벨 편의 분쟁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내외적인 싸움을 거치며 역사는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지·정·의를 가지고 계시는 인격적인 분이시고 또 모든 느낌을 갖고 계신 분임에 틀림없을진대, 하나님은 반드시 통일된 어떠한 하나의 창조이념을 갖고 계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념은 하늘을 위한 것도 되고, 나아가 오늘날 이 땅 위의 모든 인류와 만물을 위한 것도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필연적인 사실이 되어지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창조의 이념은 우리와 관계가 없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이런 전체적인 이념을 대하여 하나님 자신이 즐거워할 수 있는 동시에 온 피조만물도 다 즐거워하지 않을 수 없도록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타락한 인간이 된 연고로 오늘날 인류에게는 그러한 이념의 세계가 아직까지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고, 몸이 지향하는 그런 근본적인 이념의 세계도 아직까지 자리를 못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런 입장에 처해 있는 오늘날 인류를 내적으로는 양심에 가까운 길로, 외적으로는 또 다른 주의를 찾아 세워 세계적인 종말시대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즉 오늘날 여러분은 자신의 마음이 지향하는 그 무엇, 즉 마음을 통하여 몰아내고 있는 그것이, 어디인가를 향하게 하고 있는 것을 생각해 볼 때, 나를 연하여 이 세계 인류가 어떤 이념적인 세계로 아니 갈래야 아니갈 수 없도록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그러한 자리에 처해 있는 여러분 자신들은 지극히 작은 존재이지만 결코 작은 존재가 아닙니다. 새로운 우주사를 창조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먼저는 내 마음이 그러하고, 내몸이 그러하며, 내가 살고 있는 주위 환경이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내적 양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지금까지 외로운 길을 개척해 나오고 계신 것입니다. 즉 인간의 양심의 어느 한 기점을 통해서 섭리의 뜻을 이루시고자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 양심의 기점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양심의 기점을 잃어버린 인간을 위하여 도를 세워가지고 그 기점을 찾게 하기 위한 뜻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수많은 선지선열을 통하여 자신이 고통을 느끼면서도 인간을 그 양심의 기점에 연결시키고자 노력해 나오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 노력이 보이지 않는 무한한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본성의 심정은 자기도 모르게 그것을 향하여 움직이고 있습니다.
앞으로 끝날이 오면 올수록 마음의 기준을 완전히 잡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좋은 조건을 많이 구비하고 있다 할지라도 마음이 편안하지 않게 됩니다. 방향을 바꾸어 잡아야 할 입장에 처하여 있는 오늘날이요 현실세계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도를 세워 자기를 중심한 모든 권한과 지향하는 이념을 끊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하나님께서는 이런 모순된 조건을 인간 앞에 제시하였더뇨? 그 원인은 먼저 하나의 기준을 찾아 세워야 할 것이 인간의 마음이었으므로 마음과 몸이 한꺼번에 자리를 잡을래야 잡을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그러한 방향을 취하여 내려오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이것을 통하여 역사를 거쳐오면서 마음을 의지한 이념의 세계가 나와야 하는데, 그 마음을 의지한 이념은 온 세계 온 인류가 움직여야 할 이념입니다. 따라서 그 이념의 중심이 잡혀질 때까지는 버리는 역사 과정을 거치는데, 이것이 어느 과정을 지나오면 버렸던 그 역사를 다시 찾는 역사로서 바뀌어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는 처음에 고난의 길로 출발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것으로부터 유린당하며 몰림받는 데에서부터 시작되었지만 있는 것을 다 버리고 나오다 보니 민족을 이루었고, 이것이 오늘날 국가를 형성하고, 나아가 세계적인 형태를 갖출 수 있는 때가 되었습니다. 즉 오늘날은 하나님께서 어떤 하나의 중심을 통하여 그 뜻을 세울 수 있는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는 세계에 흩어졌던 물질을 다시 찾을 수 있는 기준을 세워야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모든 국가는 세계적인 이념을 통한 동맹국 시대를 거쳐 연합국 형태를 거친 다음, 이것이 3대 블럭을 거쳐서 하나의 통일적인 이념의 세계로 들어가지 않으면 아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끝날에 있어서 자기의 마음은 의지하되 세상의 모든 외적 조건은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어찌하여 버리라고 하셨느냐 하면, 그것을 완전히 우리의 것으로, 우리의 소유로 만들어 주기 위해서 그랬습니다. 언제나 버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에 우리 선조들이 버렸던 것을 한꺼번에 끝날에 처한 이 땅의 인간들이 복귀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선조들이 버렸던 이 땅과 이 땅의 만물까지도 찾아 세워야 할 섭리의 뜻이 아직까지 남아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수고해 나오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때는 하나의 주의를 중심삼고 민주주의 국가형태를 구성하여 나오고 있으며, 나아가 이 주의가 세계적인 추세로 나타날 수 있는 때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주의를 중심삼고 세계적인 규모의 물질문명과 제도가 결부되어 하나의 통일적인 형태를 갖추어 나오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외적인 모든 조건들이 통일적인 형태를 갖추어 나가는 것과 같이 이 세계를 찾아야 할 우리 자신들도 이런 섭리의 추세에 맞추어 마음과 몸의 통일을 자기 자체에서 이루어 나갈 수 있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한 때가 기필코 오기 때문에 여러분들의 마음과 몸에 싸움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마음은 하늘을 향하여 달리기를 원하는데 몸은 세상을 향하여 탈선적인 방향으로 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은 이념을 향하여 즐기면서 가려고 하는데 몸은 그것으로부터 도망치려 한다는 것입니다.
이 싸움에 있어서 여러분은 영원을 표준하여 승리해 나가야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야 비로소 잃어버린 하나님이 여러분의 하나님이 될 것이고, 잃어버렸던 여러분의 마음과 몸을 승리의 일신으로 또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마음과 몸으로 찾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분 자신의 입장에서 하나의 창조의 세계를 건설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하늘이 바라는 이념과, 우리의 양심과 몸이 바라는 이념과, 영계가 바라는 이념이 갈래갈래로서 방향을 취하지 않고 하나의 목표와 하나의 방향과 하나의 결과를 향하여 돌아갈 수 있는 때를 언제나 맞이할 것인가? 이것이 우리들이 찾아야 할 최후의 목표인 것입니다.
오늘날 이 목표를 향하여야 할 우리 자신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될 때, 나라는 존재는 어디서 나왔으며, 어디서부터 출발하여 어디를 향하고 있고 어디까지 가야 할 것인가? 이것이 우리가 기필코 해결하여야 할 문제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념은 어디서부터 출발하여 어디를 향하여서 어디까지 갈 것인가? 또 오늘날 내 마음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갈 것인가? 내 몸도 그렇고 이 땅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와 같이 원인과 결과를 알 수 없는 입장에서 그 역사적인 문제를 무엇 가지고 원인이요 결과라고 할 것인가? 원인과 결과는 하나인 것입니다. 내 몸과 마음이 귀결되는 하나의 기준을 세워 놓을 수 있는 그 한 날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내 몸과 마음을 통하여서 세계로 통할 수 있는 때가 와야 합니다. 하늘은 인간을 통하여 이 세계와 모든 천지운세가 화동하여 돌아갈 수 있는 한 날이 오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그러한 뜻에 여러분 자신을 세워 놓고 보면, 여러분의 마음과 몸은 하나님의 뜻과 세계의 이념 앞에 비판받을 수밖에 없는 입장에 처해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은 그 이념으로부터 결과에 연할 수 있는 역사적인 모든 조건들을 해결해 주어야 할 책임이 있고, 인간은 그 뜻을 이루어야 할 책임이 있으므로 종교를 세워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여러분은 자신이 생활하는 모든 형태가 진리를 벗어날 수 없는 상태가 되어야 세계의 이념과 자신의 이념이 하나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하늘이 내가 있기 전부터 있었고, 땅도 내가 있기 전부터 있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 것인가? 또 내가 있기 전의 역사적인 모든 사실을 어떻게 알 것인가? 오늘날 인간들은 이것을 모르는 것으로 돌려 버리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것을 모르는 입장에서 어떻게 우리가 완전히 하늘과 땅을 대신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본질적인 이념 앞에 설 수 있겠는가? 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나의 위치를 밝히려면 우주적인 원인과 역사적인 원인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필연적인 사실입니다. 이것을 생각하게 될 때, 그것을 찾아 자아의 회복운동을 제시하는 세계적인 운동의 때가 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즉 어떠한 주의나 이념을 중심삼고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위치를 제시하고 자아회복운동을 이끌어 갈 수 있는 하나의 주의가 나오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데 그 원인을 모르는 입장에 서게 될 때에는, 그 원인의 결과가 이루어져도 여러분은 그것을 요리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그러한 생애를 걸어 나가야 할 우리들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우리는 자신을 회복하는 운동에 참여할 수 있는 자신들이 되어 있는가? 오늘날 내 생명은 우연한 자체로서, 돌발적인 존재로서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내 한 개체는 우주적인 필연성, 혹은 세계적인 필연성, 미래적인 필연성을 소개하기 위해서 생겨났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한 나라의 백성도 그 나라의 역사를 대신할 수 있는 전통 앞에 서야 되고, 그 시대 앞에 하나의 법도적인 조건을 따라야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세계적인 미래의 전체 이념 앞에 새로운 무엇을 남겨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들이 살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러할진대 오늘날 우주적인 세계 이념을 찾아 나가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거예요. 따라서 우리들은 나를 회복하기 위한 지극히 작은 일부터 거쳐야 하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 앞에는, 앞에서 말한 세계적인 문제가 놓여 있으니, 먼저 나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 자기를 해결하는 동시에 이제는 결과적인 세계가 눈 앞에 와 있으니, 그것과 내 자신이 관련을 맺어야 되겠습니다. 따라서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결할 수 있는 하나의 기점, 즉 하늘과 땅 그리고 인간의 마음과 통하는 이념을 찾아 세워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것이 하나의 목적을 지향시켜 주는 자극적인 충격으로 남게 될 때에, 인간은 과거의 역사적인 슬픔과 시대적인 서러움을 잊어버리고 환경적인 공포를 넘어서서 손을 들고 하늘땅과 온 만상 앞에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이념의 근본을 해결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인간들을 인도하려고 했던 세계가 바로 도의 세계였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수많은 도인들이 그 원인을 추궁하였으나, 아직까지 해명된 그 어떤 중심을 이 땅의 인간 앞에 제시하지 못한 채 역사는 흘러오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지금까지 그 근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흘러온 역사, 인류의 선조들이 가진 그 역사가 바로 오늘날 여러분이 물려받은 역사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이 문제를 해결치 못하면, 지금까지의 인간의 원한의 역사가 후대까지 서러움의 역사로 남아진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 이후에는 하나님께서 이 문제를 해결지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내 한 자체라는 것은 무엇인가? 나 일 개인은 세계이념과 하나님이 원하는 이념의 세계를 가로막을 수 있는 자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미래를 향하는 발걸음을 내딛기 전에 과거로 되돌아 올라가 과거의 어떠한 조건들이 천륜 앞에 상충을 일으켰고, 하늘의 이념과 모순된 어떠한 역사 과정을 거쳐왔느냐 하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되겠습니다.
지난 역사 과정의 슬픈 조건을 놓고 하늘 앞에 탕감조건을 세우기 위하여 허덕이며 싸우고 있는 신자는 이 땅 위에 몇 명이나 되는가? 자기 자신의 과거를 망각하고 미래의 이념을 찾아 헤매는 사람은 많습니다. 저끄러진 모든 악의 근거를 찾아 그것을 해결하기 위하여 지금까지 참된 도를 찾아 헤매는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의 정상에 올라서 그 이상의 원인적인 조건을 추구하는 역사적인 사람은 아직까지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미래의 세계를 소개하는 이념이 변하지 않는 이상 미래의 세계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도 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 흘러가고 있는 세계의 종말에 대한 공포를 모면할 수 없고, 혼돈된 세계사조를 피할 수 없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미래의 새 이념에만 취하여 사는 사람들은 완전한 이상주의자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계의 종말의 한 단계를 넘어서야 이상세계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심판날이 무엇이냐 하면 모든 것이 스톱되는 날이에요. 그런데 지금까지 인간들은 자기가 가지고 나오던 주의와 사상과 이념을 갖고 모든 것을 통과시켜 나왔습니다.
그러면 그 통과의 조건을 해결할 수 있는 제일의 방법은 무엇이냐? 인간과 하나님과 천륜이 이 땅의 피조만물과 그 원인적인 상충을 해소할 수 있는 어떤 조건이 없다면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무슨 주의, 무슨 사상 하는 것들이 모두 다 자취를 감춰 버리고, 미래를 운위하는 사조도 한 때 자취를 감추고 말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들 모두 자취를 감추지 않으려면 원인과 결과를 통일시킬 수 있는 조건을 찾아 세워야 합니다. 그리하여 내 한 개체에서 그 근본 원인과 결과를 통일시킬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럴 때에 비로소 내 한 자체가 6천년 역사를 대표할 수 있는 증거적인 실체의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오늘의 현실세계를 일소해 버릴 수 있어야, 즉 일체를 부정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지금까지 갖고자 원하는 모든 욕망까지도 전부 다 일소해 버릴 수 있는 나, 모든 것을 통합해 가지고 행할 수 있는 그러한 나 자신이 되었느냐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기원은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미래에는 심판의 관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우리가 자신들을 복귀시킬 수 있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 피조물에 얽혀 있는 모든 곡절의 원인을 해결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마음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기도할 때에 ‘하나님이시여! 이 땅 위에 긍휼의 뜻을 이루어 주시옵소서. 하나님이시여! 세계 인류가 평화를 누리게 하시옵소서.’라고 하여도 여러분에게 평화스러운 마음이 없으면 여러분이 아무리 기도해도 그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분들은 이제 성경을 파고 들어가 아담 해와의 타락의 원인도 해명할 뿐더러 만물을 창조하던 하나님의 내적 심정까지 해명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러야 하겠습니다. 2천년 전의 예수, 6천년 전의 하나님의 심정과 동반할 수 있는 입체적인 관계를 가지게 될 때에, 여러분 자체는 비록 오늘의 현실에 있지만 2천년 전 예수님의 심정과 6천년 전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역사는 6천년을 지나왔지만 오늘날 여러분은 그러한 심정을 지녀야 합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과 아담 해와의 곡절의 심정을 찾아 들어가 그 심정을 안 후에 하나님을 대하여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그 권내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 그 6천년 역사는 오늘의 나의 역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는 내가 끌려 들어갔는지 6천년 역사가 끌려 내려왔는지 모를 정도의 혼연일체 된 자리입니다. 이런 경지에서 오늘날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지을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체험을 통하여 알 수 있는 세계인 것입니다.
영적 세계를 체험한다는 것은 왈 4차원의 세계를 통한다는 말이에요. 또한 그럴 때에 몇천년 전에 왔다 갔던 선지선열들도 오늘의 나와 인연을 맺어 대화도 할 수 있고 의논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오늘날 실제 생활적인 시간권 내에서 내가 경험할 수 있고 또한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세계 인류는 불교나 유교 혹은 기독교 등 제종교를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믿고 있는 각 종교 그것으로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종교를 믿게 했던 동기의 주인공, 또는 그 동기의 주인공으로 나타난 진리의 말씀만을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에요. 그 말씀을 밟고 올라서 그 내적 심정을 알아야 합니다. 즉 현상 속에 숨겨져 있는 내적 심정이 무엇인가를 해부하여야 한다는 거예요. 성경 말씀을 그저 절대적 구원의 표준으로만 세워 놓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것 만으로서는 하나님의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이것을 뚫고 넘어갈 수 있는 용사들이 어디 있는가 하고 찾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는 어떤 보수적인 사상에 지배받을 것이 아니고 어떤 도주(道主)의 지배를 받을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뚫고 올라가 어떤 도주를 내세우신 하나님과 직접적인 담판을 하여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도 자체의 모순된 문제를 해결지어 놓고 하나님의 내적 심정의 기준을 찾아 세워야 합니다. 그러한 기준을 세우고 나설 수 있는 무리는 없겠는가 하고, 하나님은 지금도 찾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런 무리가 있다고 하면, 하나님은 그들을 외면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세계의 모든 것을 전부 들춰 놓고 재감정할 때가 왔습니다. 어떤 신학서적, 불경, 어떤 경서는 물론하고 전부 나열시켜 재분석하고, 거기에 실제 체험을 통하여 해결할 수 있는 하나의 기준, 즉 예수의 내적 심정이나 하나님의 내적 심정이 어떤 것인가를 찾아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섭리가 이렇게 된 곡절의 원인을 해명할 수 있는 신앙의 용자들이 나오기를 하나님은 소망해 왔음을 여러분은 알아야겠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해결돼야만 이 원리를 중심삼고 전체적인 원리의 해결점을 찾을 수 있는 것이요, 끝날에 이것이 다시 제2의 원리로 세워지고 제2의 이념으로 인정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한 것이 지상을 대한 하나님의 섭리의 뜻임을 알아야겠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입증시키기 위해 이제 여러분은 아니 갈래야 아니 갈 수 없는 사선을 넘어야 합니다. 이 길을 가기 위해서는 세상에 있는 아무리 가까운 친구도 아무리 가까운 부모도 다 뒤에 두고 나서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그 어느 누구와도 동반할 수 없는 외로운 자리에 서 있고 무한한 공포가 엄습하는 곳을 향하여 끊임없이 달려야 할 과정에 있음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무한히 달리는 이런 역사 과정에 있어서 하나의 중심을 잡지 못한다면 어느 한 때 이 우주의 보이지 않는 세계에로 추방되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런 때가 반드시 오는데 그런 것을 가리켜 종교에서 쓰는 용어를 빌려 말한다면 ‘지옥 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2천년 전에 오셨던 예수님께서, 그렇게 자신 있고 늠름했던 예수님께서 왜 미래와 현실을 자랑하지 못했던가? 완전한 원리적인 해결점, 역사적인 해결점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현실과 미래를 자랑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이제 우리 기독교인은 통분한 심정을 갖고 현실을 자랑할 수 있는 예수를 나타내어야 되겠고, 미래를 자랑할 수 있는 예수를 나타내어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미래를 자랑할 수 있는 예수를 맞을 때가 와야 할 텐데 어찌하여 오지 않는가? 역사적인 곡절의 조건들이 예수를 이렇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싸우던 목표는 역사노정을 청산키 위한 싸움이었지 이 현실만을 해결키 위한 싸움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현재 기독교의 싸움은 미래만을 위한 싸움이 아니고, 역사적인 조건을 해결키 위한 싸움권 내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현실 기독교의 입장입니다.
예수님께서는 30여 생애의 수고의 노정을 통해서 선지선열들의 저끄러뜨린 모든 역사적인 조건을 다시금 딴 길로서 개척하여야 할 방향을 취했습니다. 그런데 이 딴 길로 방향을 취하려는 데서 오해가 생겨났습니다. 그 딴 길을 이 땅 위에 만들어 놓지 못했으므로 영계에서 다시 그 딴 길을 찾아 현실적인 형태의 세계에로 연결시켜 나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영계에 가셔서 현실과 미래적인 이념을 찾아 오늘날 땅을 위한 곡절의 내용을 다시금 제2차의 노정을 통해 섭리해 나온 역사가 2천년이 지났습니다. 예수가 이 땅에서는 배척받았으나 영계에서는 환영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가 그와 같이 영계에서 환영받는, 즉 그저 역사적인 예수로서 환영받는 그런 예수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시대적이고 미래적인 예수는 언제 이 땅 위에 올 것인가? 그분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찾는 재림주이심을 여러분은 알아야겠습니다. 미래적인 예수를 찾기 위하여서는 반드시 역사적인 과정을 먼저 찾아가야 됩니다. 또한 역사적인 원인을 통하여 예수가 영계에서 환영받던 제2환경시대를 통하여서 현실적인 과정까지 체휼하여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날 예수가 바라던 소망의 한 날을 기하여 가지고 그때 자랑하고 싶은 현실과 자랑하고 싶은 미래의 심정을 대신할 수 있는 내가 되어야 하겠고, 또 그러기 위해서는 오늘날 자신의 위치를 찾을 수 있는 내가 되어야겠습니다.
* 이 말씀은 제목이 없는 것이나 편의상 편집자가야외예배에서라는 제목을 붙였음.
예수님은 이 땅 위에 오셔서 남들이 알지 못하는 하늘의 심정을 부둥켜안고 이스라엘 민족과 영계의 영인들을 대신하여 안타까움에 사무쳐 있었습니다. 그때에 메시아를 맞기 위한 준비를 한 사람은 많았으나 오신 메시아를 영접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또 그 당시의 유대교단과 유대민족이 바라는 소망은 컸었으나 그 소망을 이뤄 주기 위해 오신 예수님과 먼 거리에 있었고, 하나님과 먼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것을 해소하기 위하여 말할 수 없이 서글픈 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흉금을 터놓고 의논할수 있는 동지와 제자들을 한 사람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남 모르게 겟세마네 동산이나 감람산이나 변화산상과 같은 한적한 곳을 찾아 다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하게 될 때, 우리는 슬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런 산상에 올라, 이스라엘 나라와 이스라엘 민족을 바라보시며 느끼신 슬픔과 염려의 마음을 같이 공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변화산상에 올라간 것은 영광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십자가를 앞에 놓고 최후의 담판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멀지 않아 십자가에 달려야 할 것을 놓고 모세와 엘리야와 의논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사랑하는 제자들은 택한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의 심정을 알지 못하는 것을 보시는 하나님이 한없이 슬픈 자리에 계시리라는 것을 알았어야 했습니다.
여러분은 황홀한 영광에 취하는 것보다 안타까운 예수님의 심정을 체휼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누리는 이만한 환경을 가지게 된 것도 하늘이 이런 환경을 이루기 위하여 수천년 동안 수고해나왔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적인 환경권 내에서 즐거워하고 만족하는 사람은 하늘과 먼 거리에 놓여 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에게 주어진 좋은환경을 즐거워하는 것보다 그 기뻐할 수 있는 환경이 나타날 때까지에는 하나님의 염려와 수고의 심정이 말할 수 없이 컸다는 것을 먼저 알아야 되겠습니다. 사도된 사람이 진정으로 주목해야 될 것은, 변화산상에서 벌어진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우주적인 담판의 기로에 서지 않으면 안 되었던 예수님의 사무친 서글픈 심정입니다. 우리들은 외적 환경에서 기뻐했던 제자들과 같은 사람이 되지 말고 예수님의 심정과 하나님의 심정을 위로해 드릴 수 있는 참다운 아들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민족적인 판도에서 하늘의 선봉자로서 사탄과 싸워야 할 하늘의 정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가졌던 그 결심과 각오를 우리도 가져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의 내적 심정을 세 제자는 몰랐으나 엘리야와 모세는 알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것을 결심하게 될 때 하늘에서 "이는 나의 아들."(눅 9:35)이라는 음성이 들렸고, 하늘이 예수님에게 십자가의 길을 갈 것을 제시할 때에 예수님은 황공한 심정으로 머리를 숙이셨습니다.
변화산상에서 세 제자가 예수의 심정과 하늘의 내적 심정을 느꼈던들, 골고다의 길을 혼자 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변화산상의 베드로나 요한, 야고보와 같은 그런 후계자가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심정과 사정과 생활을 계승하는 후계자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변화산상에서 예수님이 가졌던 결심을 다시 가져야 할 때가 왔습니다.
우리는 생활에서 기쁜 일이나 어려운 일을 당할 때에 자기를 나타내기 쉬우나 예수님은 기쁨이나 슬픔을 자기를 중심하여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어려움이 있을 때 그 어려움을 하늘로 돌리지 않고 자기 스스로 책임지고 사셨으며, 역대의 선조들도 역시 그러하였습니다. 또한 예수는 하늘 앞에 면목없음을 느끼어, 자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로되 자기 일신이 죽음의 길을 가는 것보다 하늘을 더 염려하였습니다. 이런 예수님과는 정반대로 자기를 중심삼고 영광을 취하려는 사람은 어려운 일을 당하는 자리에서는 하늘과 분리된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변화산상에서의 예수는 즐거워하지 않았습니다. 이 변화산상에서 있었던 사건과 장면은 하나님 또는 인간의 어느 누구도 모르는 비장한 장면이 아닐수 없었습니다. 오늘날 여러분들은 이 사실을 자기를 중심하고 헤아려서는 안 되겠습니다.
변화산상의 세 제자들은 찬란히 빛나는 예수님의 모습을 바라보고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눅9:33)라고 하면서 거기에서 영원히 머물자고 말했습니다. 이와 같이 세 제자는 나타나는 환경에서 즐기려고 했지만 예수님의 심정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때 나타난 변화산상의 환경이 좋은 환경이었지만, 그 환경을 대하는 예수님의 심정은 역사적인 내적 서러움과 미래의 서러움에 사무치는 심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세 제자는 예수님이 이런 서러움의 심정에 젖어 있었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여러분들은 과거의 역사적인 서러움에 젖어 있는 배후관계의 모든 것을 넘어 최후에는 예수를 다리 놓아 하나님을 붙들고 담판할 수 있는 자리까지 나아가야겠습니다. 또 슬퍼하는 이 민족의 배후에는 민족을 대신하여 숨은 제단을 쌓아 놓고 정성들이고 있는 무리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교단을 대신하여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제사장과 같은 직분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이 21년간 남 모르는 기도를 한 것도 하나님의 섭리가 아브라함에서부터 3대에까지 연결지어진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민족을 위한 탕감의 노정을 묵묵히 걸었습니다. 모세도 역시 민족을 위해서 바로궁중에서의 40년 생활과 미디안 광야에서의 40년간의 기도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민족을 대한 슬픈 기도를 하는 교단과 눈물 흘리는 사람이 있다할진대, 그들에겐 이미 제사장적 직분이 주어진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하늘이 여러분에게 절박한 심정으로 하늘 앞에 담판의 기도를 해 본 일이 있는가 하고 물을 때, 여러분은 어떤 대답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라도 그런 결심을 갖고 끝날을 책임질 수 있는 역군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있는 자리가 그런 환경이 못 되었다 할지라도 머무는 환경에서 실천해야겠습니다. 지역 지역을 책임진 변화산상의 예수와 같은 성도들이 많이 나와야 그리스도의 해원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옛날의 세 제자보다 더 많은 것을 알아 예수님의 심정과 하나님의 서글픈 심정을 해원해 드릴 수 있는 참다운 자녀가 되어야겠습니다.
그때와 지금과는 시대적으로는 먼 거리에 있으나 예수님의 심정과 직접적인 인연을 갖고 위로해 드릴 수 있는 후신자가 되어야 통분한 예수님의 심정을 해원해 드릴 수 있습니다. 만일 그런 사람이 있다 할진대 변화산상의 영광을 그 사람에게 인계시킬 것입니다.
사탄 대한 하늘의 정병으로 내세워 가지고 민족과 교단과 종족을 대신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되어 그런 사람으로 구성된 민족 국가가 되어야 하나님의 한 뜻이 실천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이런 모임이 우연한 모임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선지 선열들이 역사 과정에서 수고한 공로의 제단 위에 나타난 우리인 것을 알고, 마음을 가지되 예수님 이상의 마음과 세 제자 이상의 마음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그런 무리를 하늘은 찾고 있습니다.
우리는 몰리고 쫓기는 한이 있더라도 내 개인의 구원보다 민족과 세계를 위하는 투사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모인 이곳을 세제자와 영계의 영인들이 바라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을 중심삼고 역사적이고 우주적인 결심을 품은 사람이 있다면, 이런 인물에게 하늘땅의 뜻이 계승될 것이고 이런 인물을 통하여 그 뜻을 이루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 앞에 변할 수 없는 중심 기준을 세운 연고로 하늘도 예수님을 저버릴 수 없었습니다.
오늘날 내 한 자체는 말할 수 없이 귀중한 존재입니다. 그런 까닭에 나 하나가 잘못하면 후대의 천추만대에 원한의 흔적이 영원히 남아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역사를 두고 또 미래의 영원한 시간까지 변치 않는 중심 기준을 소유한 자격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품으셨던 뜻을 계승하여 역사와 시대와 미래적인 증거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승리의 인연을 맺고 나온 것을 어떤 시대나 어떤 환경에서도 입증시켜 드리는 여러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의 손과 몸과 발이 민족과 세계를 대신하여 움직여 본 일이 있습니까? 광야에서 헤매는 이스라엘 민족 같은 세계 기독교인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2천년 전의 예수님의 심정을 다시 한 번 느껴야 될 것이며, 하늘은 안팎의 양면을 보시기 때문에 더 슬퍼하고 계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슬픔과 역경이 문제가 아니라 현실과 미래까지 연결시킬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며, 생사의 결정을 지어야 할 때 도망가 버린 그런 제자들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만약 여러분에게 변화산상의 권고가 있다면 그것을 생명의 도화선으로 하여 무한한 세계의 뜻을 생활적인 면에서 이루어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생명을 책임질 역사적인 선봉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변화산상에서의 예수의 심정이 여기에 나타났다면 혁명의 불길은 일어났을 것입니다. 즉 하늘적인 심정을 생활권 내에서 세워 놓았느냐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기도를 하되 구체적인 내용을 갖고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하늘의 무한한 심정과 서러움과 무한한 고충과 그 소망을 느낄때에 여러분은 역사와 시대와 미래적인 경륜과 인연을 맺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늠름히 넘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만의 슬픔과 애달픔의 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고, 또 그 때문에 민족과 전인류와 사탄까지라도 위해서 복을 빌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수천년 동안 수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심정을 찾아 헤매었으나 오직 예수 한 분만이 그것을 알았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역사와 시대와 미래적인 이념을 포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인 모든 죄악성을 오늘날 우리들이 탕감해야겠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런 하나님의 숨은 내적인 심정을 알게 되면 한 달, 혹은 일년 내내 울어도 눈물이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늘의 심정을 체휼하여야 되겠습니다.
우리들이 민족 앞에 판가리 싸움을 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하는 사람은 민족을 대표하여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렇듯 사명이 크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무한한 세계와 인연을 맺을 때에 예수와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역사하여 주실 것입니다. 이 피조만물도 우리들의 손을 거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므로 만물을 지으시며 기뻐하시던 하나님께서 아담 해와에게 내리신 축복을 여러분이 이루어야 하겠습니다. 이런 마음을 갖고 변화산상에서 고민하셨던 예수님의 친구, 골고다에서 고난받으셨던 예수님의 친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 위에 오셔서 남들이 알지 못하는 하늘의 심정을 부둥켜안고 이스라엘 민족과 영계의 영인들을 대신하여 안타까움에 사무쳐 있었습니다. 그때에 메시아를 맞기 위한 준비를 한 사람은 많았으나 오신 메시아를 영접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또 그 당시의 유대교단과 유대민족이 바라는 소망은 컸었으나 그 소망을 이뤄 주기 위해 오신 예수님과 먼 거리에 있었고, 하나님과 먼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것을 해소하기 위하여 말할 수 없이 서글픈 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흉금을 터놓고 의논할 수 있는 동지와 제자들을 한 사람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남모르게 겟세마네 동산이나 감람산이나 변화산상과 같은 한적한 곳을 찾아다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하게 될 때, 우리는 슬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런 산상에 올라, 이스라엘 나라와 이스라엘 민족을 바라보시며 느끼신 슬픔과 염려의 마음을 같이 공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변화산상에 올라간 것은 영광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십자가를 앞에 놓고 최후의 담판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멀지 않아 십자가에 달려야 할 것을 놓고 모세와 엘리야와 의논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사랑하는 제자들은 택한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의 심정을 알지 못하는 것을 보시는 하나님이 한없이 슬픈 자리에 계시리라는 것을 알았어야 했습니다.
여러분은 황홀한 영광에 취하는 것보다 안타까운 예수님의 심정을 체휼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누리는 이만한 환경을 가지게 된 것도 하늘이 이런 환경을 이루기 위하여 수천년 동안 수고해 나왔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적인 환경권 내에서 즐거워하고 만족하는 사람은 하늘과 먼 거리에 놓여 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에게 주어진 좋은 환경을 즐거워하는 것보다 그 기뻐할 수 있는 환경이 나타날 때까지에는 하나님의 염려와 수고의 심정이 말할 수 없이 컸다는 것을 먼저 알아야 되겠습니다. 사도된 사람이 진정으로 주목해야 될 것은, 변화산상에서 벌어진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우주적인 담판의 기로에 서지 않으면 안 되었던 예수님의 사무친 서글픈 심정입니다. 우리들은 외적 환경에서 기뻐했던 제자들과 같은 사람이 되지 말고 예수님의 심정과 하나님의 심정을 위로해 드릴 수 있는 참다운 아들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민족적인 판도에서 하늘의 선봉자로서 사탄과 싸워야 할 하늘의 정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가졌던 그 결심과 각오를 우리도 가져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의 내적 심정을 세 제자는 몰랐으나 엘리야와 모세는 알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것을 결심하게 될 때 하늘에서 이는 나의 아들.(눅 9:35)이라는 음성이 들렸고, 하늘이 예수님에게 십자가의 길을 갈 것을 제시할 때에 예수님은 황공한 심정으로 머리를 숙이셨습니다.
변화산상에서 세 제자가 예수의 심정과 하늘의 내적 심정을 느꼈던들, 골고다의 길을 혼자 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변화산상의 베드로나 요한, 야고보와 같은 그런 후계자가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심정과 사정과 생활을 계승하는 후계자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변화산상에서 예수님이 가졌던 결심을 다시 가져야 할 때가 왔습니다.
우리는 생활에서 기쁜 일이나 어려운 일을 당할 때에 자기를 나타내기 쉬우나 예수님은 기쁨이나 슬픔을 자기를 중심하여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어려움이 있을 때 그 어려움을 하늘로 돌리지 않고 자기 스스로 책임지고 사셨으며, 역대의 선조들도 역시 그러하였습니다. 또한 예수는 하늘 앞에 면목없음을 느끼어, 자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로되 자기 일신이 죽음의 길을 가는 것보다 하늘을 더 염려하였습니다. 이런 예수님과는 정반대로 자기를 중심삼고 영광을 취하려는 사람은 어려운 일을 당하는 자리에서는 하늘과 분리된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변화산상에서의 예수는 즐거워하지 않았습니다. 이 변화산상에서 있었던 사건과 장면은 하나님 또는 인간의 어느 누구도 모르는 비장한 장면이 아닐수 없었습니다. 오늘날 여러분들은 이 사실을 자기를 중심하고 헤아려서는 안 되겠습니다.
변화산상의 세 제자들은 찬란히 빛나는 예수님의 모습을 바라보고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눅 9:33)라고 하면서 거기에서 영원히 머물자고 말했습니다. 이와 같이 세 제자는 나타나는 환경에서 즐기려고 했지만 예수님의 심정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때 나타난 변화산상의 환경이 좋은 환경이었지만, 그 환경을 대하는 예수님의 심정은 역사적인 내적 서러움과 미래의 서러움에 사무치는 심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세 제자는 예수님이 이런 서러움의 심정에 젖어 있었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여러분들은 과거의 역사적인 서러움에 젖어 있는 배후관계의 모든 것을 넘어 최후에는 예수를 다리 놓아 하나님을 붙들고 담판할 수 있는 자리까지 나아가야겠습니다. 또 슬퍼하는 이 민족의 배후에는 민족을 대신하여 숨은 제단을 쌓아 놓고 정성들이고 있는 무리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교단을 대신하여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제사장과 같은 직분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이 21년간 남모르는 기도를 한 것도 하나님의 섭리가 아브라함에서부터 3대에까지 연결지어진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민족을 위한 탕감의 노정을 묵묵히 걸었습니다. 모세도 역시 민족을 위해서 바로궁중에서의 40년 생활과 미디안 광야에서의 40년간의 기도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민족을 대한 슬픈 기도를 하는 교단과 눈물 흘리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들에겐 이미 제사장적 직분이 주어진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하늘이 여러분에게 절박한 심정으로 하늘 앞에 담판의 기도를 해본 일이 있는가 하고 물을 때, 여러분은 어떤 대답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라도 그런 결심을 갖고 끝날을 책임질 수 있는 역군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있는 자리가 그런 환경이 못 되었다 할지라도 머무는 환경에서 실천해야겠습니다. 지역 지역을 책임진 변화산상의 예수와 같은 성도들이 많이 나와야 그리스도의 해원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옛날의 세 제자보다 더 많은 것을 알아 예수님의 심정과 하나님의 서글픈 심정을 해원해 드릴 수 있는 참다운 자녀가 되어야겠습니다.
그때와 지금과는 시대적으로는 먼 거리에 있으나 예수님의 심정과 직접적인 인연을 갖고 위로해 드릴 수 있는 여러분이 되어야 통분한 예수님의 심정을 해원해 드릴 수 있습니다. 만일 그런 사람이 있다 할진대 변화산상의 영광을 그 사람에게 인계시킬 것입니다.
사탄 대한 하늘의 정병으로 내세워 가지고 민족과 교단과 종족을 대신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되어 그런 사람으로 구성된 민족 국가가 되어야 하나님의 한 뜻이 실천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이런 모임이 우연한 모임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선지선열들이 역사 과정에서 수고한 공로의 제단 위에 나타난 우리인 것을 알고, 마음을 가지되 예수님 이상의 마음과 세 제자 이상의 마음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그런 무리를 하늘은 찾고 있습니다.
우리는 몰리고 쫓기는 한이 있더라도 내 개인의 구원보다 민족과 세계를 위하는 투사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모인 이곳을 세 제자와 영계의 영인들이 바라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을 중심삼고 역사적이고 우주적인 결심을 품은 사람이 있다면, 이런 인물에게 하늘땅의 뜻이 계승될 것이고 이런 인물을 통하여 그 뜻을 이루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 앞에 변할 수 없는 중심 기준을 세운 연고로 하늘도 예수님을 저버릴 수 없었습니다.
오늘날 내 한 자체는 말할 수 없이 귀중한 존재입니다. 그런 까닭에 나 하나가 잘못하면 후대의 천추만대에 원한의 흔적이 영원히 남아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역사를 두고 또 미래의 영원한 시간까지 변치 않는 중심 기준을 소유한 자격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품으셨던 뜻을 계승하여 역사와 시대와 미래적인 증거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승리의 인연을 맺고 나온 것을 어떤 시대나 어떤 환경에서도 입증시켜 드리는 여러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의 손과 몸과 발이 민족과 세계를 대신하여 움직여 본 일이 있습니까? 광야에서 헤매는 이스라엘 민족 같은 세계 기독교인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2천년 전의 예수님의 심정을 다시 한 번 느껴야 될 것이며, 하늘은 안팎의 양면을 보시기 때문에 더 슬퍼하고 계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슬픔과 역경이 문제가 아니라 현실과 미래까지 연결시킬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며, 생사의 결정을 지어야 할 때 도망가 버린 그런 제자들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만약 여러분에게 변화산상의 권고가 있다면 그것을 생명의 도화선으로 하여 무한한 세계의 뜻을 생활적인 면에서 이루어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생명을 책임질 역사적인 선봉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변화산상에서의 예수의 심정이 여기에 나타났다면 혁명의 불길은 일어났을 것입니다. 즉 하늘적인 심정을 생활권 내에서 세워 놓았느냐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기도를 하되 구체적인 내용을 갖고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하늘의 무한한 심정과 서러움과 무한한 고충과 그 소망을 느낄 때에 여러분은 역사와 시대와 미래적인 경륜과 인연을 맺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늠름히 넘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만의 슬픔과 애달픔의 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고, 또 그 때문에 민족과 전인류와 사탄까지라도 위해서 복을 빌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수천년 동안 수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심정을 찾아 헤매었으나 오직 예수 한 분만이 그것을 알았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역사와 시대와 미래적인 이념을 포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인 모든 죄악성을 오늘날 우리들이 탕감해야겠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런 하나님의 숨은 내적인 심정을 알게 되면 한 달, 혹은 일년 내내 울어도 눈물이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늘의 심정을 체휼하여야 되겠습니다.
우리들이 민족 앞에 판가리 싸움을 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하는 사람은 민족을 대표하여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렇듯 사명이 크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무한한 세계와 인연을 맺을 때에 예수와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역사하여 주실 것입니다. 이 피조만물도 우리들의 손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만물을 지으시며 기뻐하시던 하나님께서 아담 해와에게 내리신 축복을 여러분이 이루어야 하겠습니다. 이런 마음을 갖고 변화산상에서 고민하셨던 예수님의 친구, 골고다에서 고난받으셨던 예수님의 친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지금 이때는 2천년 전 이스라엘 민족이 혼란되었던 그때와 같은 때여서 메시아가 오시지 않으면 안 될 때이옵니다. 이런 때에 저희들이 처해 있사옵고, 참이 어느것인지, 거짓이 어느것인지 분별하기 어려운 때에 저희들이 처하여 있는 줄 아옵니다. 지금까지는 과거의 역사과정에서 수고한 많은 스승이 있었고 또한 많은 지도자들을 모시고 있었사오나, 오늘날 저희들은 의지해야 할 마음의 중심을 잃어버리고 있사옵니다.
오늘날의 인간들이 혼란된 생활 환경에 처해 있는 것을 아버지께서는 아실 줄 알고 있사오니, 아버지여! 저희의 생활을 수습하고, 저희의 마음을 수습하고, 저희의 이념을 수습하여 천성 앞에 의지하고 살 수 있는 행복된 시간을 갖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 한 날을 찾는 사람은 많사온데 아직까지 ‘찾았다’ 하는 사람은 없사옵니다.
그 한 날을 증거하는 사람은 많사온데 진정으로 아버지를 기쁘게 하는 사람들은 지극히 적사옵니다. 오늘날 이와 같이 혼란된 세상에 살고 있는 저희들, 저희의 마음 몸이 펴 나가야 할 이념을 저희의 생활에서 몸으로 증거할 수 있으며, 저희의 마음으로 감사할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아버지의 원하시는 아들딸이라고 칭찬받을 수 있으며, 복귀의 사명을 완수한 아들딸이라는 축복을 받을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님, 아버님께서 저희의 마음을 감찰해 주시옵소서. 저희의 마음은 어느 누구보다도 저희의 갈 길을 더 잘 알고 있사옵나이다. 저희의 마음은 본연의 참된 길을 가기를 바라고 있사오니, 아버님, 저희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줄 수 있는 진리와 종교를 허락해 주시어서 구원섭리의 뜻을 이룰 수 있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사랑하는 아버님, 불쌍한 이 민족을 긍휼히 보시옵소서. 길을 잃고 헤매는 당신의 아들딸들을 긍휼히 보시옵소서. 승리의 그날을 향하여 전진하여 나가는 저희들을 긍휼히 보시옵소서. 아버지의 뜻을 저희들이 이루어드릴 수 있게 함께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역경에 부딪친다 할지라도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야 할 때가 저희 앞에 다가왔사옵니다. 하오니 그 역경을 넘어 아버지의 영광을 바라보는 자신의 마음 몸을 갖출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홀로라도 역경을 이겨내어 아버지의 심정을 염려하면서, 남 모르는 숨은 제단을 쌓아 놓고 아버지의 마음을 닮기 위해, 아버지의 심정을 체휼하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많이 나오게 인도하여 주시옵길,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여기에는 어떤 교단도, 어떤 모임도, 어떤 교파도 문제가 아닌 것을 알고 있사오니 아버지께서 알아줄 수 있는 내적인 심정, 아버지 마음을 체휼할 수 있는 간절한 심정을 갖고 나가는 것이 진리의 요체요, 진리의 전부라는 것을 저희들이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수많은 교파로 갈리어 전교계가 혼란되어 있사오니, 아버님, 긍휼히 보시옵소서. 여기에서 몰림받는 아버지의 아들딸이 있사옵니까? 그들을 아버지께서 격려하여 주실 줄 믿사옵니다. 저희들이 그들의 심정을 체휼하여 아버님의 뜻을 증거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옵시고, 외로운 무리들이 모여 아버님의 참아들딸로 설 수 있는 기쁨의 한 날이 어서 속히 이 땅 위에 임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 이제 모인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딸들을 긍휼히 보아 주시옵소서. 여기에 모이게 하신 것도 당신이었사오니, 아버님, 이들을 책임져 주시옵소서. 이제 변치 않는 저희들의 마음을 거두어 주시옵고, 정성을 다하여 본연의 아버지의 심정을 통하여 느껴지는 충동을 이 시간 각자가 마음 몸에 느끼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스스로의 갈 길을 찾을 수 있도록 아버지의 직접적인 역사를 허락하여 주시옵길,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2천년 전에 오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저희들이 느끼고 그 예수님의 서러움을 저희들이 마음으로 동정할 수 있는 아들딸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어린이와 같은 심정을 갖고서, 아버지의 마음에 슬픔이 있다 할진대 그 슬픔을 저희 마음에서 느끼고, 기쁨이 있사올진대 그 기쁨을 저희 마음에서 느껴 아버지의 참아들딸의 모습이 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제 저희들이 갖고 있는 모든 주의와 주장과 인습적인 조건들을 전부 다 아버지 앞에 내어 놓고, 어린이와 같은 심정으로 아버지의 사랑을 구하는 이 시간 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전하는 사람의 마음이나 받는 사람의 마음이 둘이 되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사탄은 항상 전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마음의 간격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원하시는 뜻대로 저희 스스로 어린양의 모습을 갖추어 아버지의 분부하시는 말씀에 의하여 재창조함을 받을 수 있는 이 시간되게 허락하여 주옵시고, 첫시간부터 끝시간까지 오직 아버님만이 주관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나이다. 모든 말씀 주님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오늘 여러분에게 드릴 말씀의 제목은 ‘참고 견디는 자가 되자’입니다.
봉독한 성경 말씀 가운데 끝날의 징조에 관한 말씀이 있었습니다. 끝날에는 신앙을 중심삼고 살아 나가기가 어렵다는 사실이 여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어려운 혼란기를 극복하여 승리자가 되려면 끝까지 참고 견디는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여러분 자신들이 알고 먼저 마음으로 느껴 은혜받는 이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어느 누구나 하나님을 생각하게 될 때에 영광의 주인으로 계신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또 하나님은 능력이 많으셔서 만민의 전체의 행동을 파악하고 계실 것이라고 쉽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6천년의 기나긴 세월을 지나오면서, 하나님은 아직까지 영광의 한 날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들을 통치할 수 있는 권능의 행사도 아직까지 해본 날이 없었습니다. 이것을 생각할 때에, 하나님에게는 어느 누구도 알 수 없는 깊은 염려와 깊은 고난과 깊은 고통이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생각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온 천지 만물은 우리들이 쉽게 생각할 수 있듯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지음받았고, 권능의 행사를 위해서 지음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 드리고 권능의 상대적인 입장에 서야 할 인간이 그 자리에 서지 못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영광을 얻지 못하였고 권능의 행사를 하지 못한 채, 지금까지 그러한 소망의 한 날을 이루기 위해 섭리하여 나오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잘 아는 것입니다.
아담을 지어 놓고 기뻐하시던 하나님께서 타락한 아담을 바라보게 될 때에 여러분이 상상할 수 없는 슬픔이 하나님의 심정에 찾아 들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중심삼고 창조의 이념을 세운 뜻이 크면 클수록 아담의 실수로 말미암은 슬픈 심정은 더더욱 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에게 말할래야 말할 수 없고 사정을 통할래야 통할 수 없어 하나님 홀로 서러운 심정에 사무친 그 내적 심정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 슬픔에 더하여 고통과 역경을 겪으시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서셨던 하나님, 즉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역경을 겪으셔야 했던 하나님이셨습니다. 이와 같이 서러운 입장에서도 인간을 대하여 구원섭리를 하시지 않으면 안 될 하나님은 인간들이 상상할 수 없는 이중의 고통의 심정을 느끼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처해 계시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하겠습니다.
타락한 아담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신 하나님이지만 그 쫓아낸 인간을 그냥 두지 못하시고 다시 사랑의 손길을 펴신 것은 바로 하나님이 사랑의 심정을 갖고 계신 분이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오늘날 우리들은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그러나 천륜의 창조이념을 파탄시킨 아담 해와의 가정을 중심삼고 다시 제2의 소망을 품고 나오셨던 하나님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하나님의 이 심정을 여러분들이 알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버린 자식을 다시 미련을 가지고 대해야 할 하나님의 사정을 아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는, 그는 하나님의 안타까운 심정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과연 하나님이 어떤 입장에 계신가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 해와를 붙들어 복귀섭리를 시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가인과 아벨을 택하였고, 노아를 택하였고, 또 그밖의 수많은 가정을 택해 세우셔서 복귀섭리를 해 나오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섭리역사를 이끌어 나오시는 하나님의 심정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이 안타까운 심정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심정을 억제하면서 오늘 이 시간까지 참고 견디어 나오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참고 견디어 나오신 그 안타까운 심정을 느껴 하나님을 붙들고 눈물 흘리는 사람이 오늘날 이 땅 위에 몇 사람이나 있겠습니까? 만약 이 땅 위에 이러한 하나님의 심정을 알고 눈물짓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는, 그는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실 때에 즐거움이 있었던 반면 인간의 타락으로 인한 하나님의 서러움이 온 천지 만물을 덮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땅 위에 이때까지 참고 견뎌 나오신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한 사람, 또는 하나님의 서글픔을 같이하여 울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 하나님도 창조주의 체면을 잊어버리고, 창조주의 영광이나 권세나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그와 함께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실 것입니다. 이런 사정에 사무친 하나님의 심정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안타까운 심정을 갖고 배반한 아담과 노아, 아브라함을 세워 다시금 섭리하시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또 고난과 역경 속에 사로잡혀 신음하고 있는 이스라엘민족을 버리지 못하시고 모세를 세워 축복의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던 하나님의 심정을 여러분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수많은 선지선열들을 택하셔서 그들로 하여금 서러운 노정을 거치게 하면서 섭리역사를 전개해 나오셨습니다. 그래서 4천년 역사가 경과한 때, 즉 지금부터 2천년 전에 새로운 역사를 전개시켜 4천년의 서러움과 분함을 풀기 위하여 이 땅 위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까지도 잡아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했던 이스라엘 민족을 버리시지 못하시고 섭리하셔야 하는 하나님의 서러움을 아는 사람이 어디에 있었던가. 그런 교회와 민족이 어디에 있었던가! 하나님은 그러한 개인과 교회와 민족이 나오기를 바라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늘의 길이 좋은 줄 알고 찾아 들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심정을 헤치면 헤칠수록 눈물의 고개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영광 가운데 사무쳐 있는 줄 알았고 권세와 능력으로 계시는 하나님이신 줄 알았더니 슬픔의 요소를 지니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이심을 여러분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하나님의 서러움 대신 서러워하는 하늘의 아들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주위의 몰림을 받고 주위의 배척을 받는 어떠한 어려움이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슬픈 심정을 위로해 드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안타까움을 잊어버리고 하나님께서 이제껏 참고 견뎌 나오신 뜻을 본받아 하나님의 슬픔과 고통을 대신 지고 나가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참아 오셨고 교회를 위해 참아 오셨고, 또한 배반한 이스라엘을 위해서 참아 나오셨으며 배반한 세계를 위해서 참아 오셨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심정을 오늘날 끝날에 남아진 성도들은 눈물을 머금고서라도 본받아야 하겠고,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위로해 드려야 하겠습니다. 이런 참아들딸이 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하늘이 4천년 동안 견뎌 나오며 참아 온 뜻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낼 때 이스라엘 민족이 믿어 주기를 바랐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민족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을 때, 땅을 대한 하나님의 소망은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바라신 뜻을 이루어야 할 입장, 즉 천륜의 한 때를 기약해야 할 입장인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가장 사랑하는 독생자까지 잡아 죽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아버지라 부르는 그 아버지는 6천년 동안 슬프고 서러운 노정을 참고 견디어 나오신 아버지인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나의 아버지는 6천년 동안 참고 견디어 나오셨다는 것입니다. 또 이와 같이 6천년간 참아 나오신 아버지는 그저 명목상의 아버지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6천년 동안 참고 견디어 나왔으나 당신이 주관할 수 있는 땅이 아직까지 복귀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제 온 땅을 탕감복귀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은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고 새로운 이념을 찾아 나가야 하겠습니다. 따라서 이런 입장에 놓여 있는 여러분은 무엇보다 먼저 참고 견디는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아니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참다운 종교를 찾아 나서야 되겠습니다. 참다운 하늘의 아들딸을 찾아 나서야 하겠습니다. 참고 견디는 신앙자를 찾아 섬겨야 되겠습니다. 참고 견딜 줄 아는 교단을 찾아 헤매야 되겠습니다. 참고 견딜 줄 아는 민족, 국가를 찾아 헤매야 할 사명이 오늘날 하늘을 향하여 나아가는 신앙자들에게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까지 모든 종교는 참고 견딘 사람이 창설해 나왔습니다. 이제 앞으로도 역시 참고 견딘 종교가 세계를 인도할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를 더듬어 보더라도 역시 참고 견디는 사람이 승리해 나왔다는 것입니다. 하늘에서는 물론 땅에서도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도 이 땅은 하나님을 염려하고 절개를 세워 줄 수 있는 인물을 맞기 위해 탄식하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종교를 보게 될 때에, 오늘날 기독교가 세계적인 종교가 된 것도 역시 기독교가 더 참고 견디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4천년간 견디어 나오신 하나님의 심정을 느끼게 될 때에, 또 만민이 역사적으로 참고 견디어 나온 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골고다산상에서 자신의 몸이 십자가에 못박히더라도 아니 참을래야 아니 참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양손과 양발이 못박히면서도 예수님은 그들을 위하여 ‘하늘이여, 저들을 긍휼히 보시옵소서.’ 라고 기도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참고 견디어 나오신 그 심정을 만민과 사탄 앞에 보여 주었기 때문에 이로 말미암아 참을래야 참을 수 없고 견딜래야 견딜 수 없는 사탄은 그 심정 앞에 굴복해 들어가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보여 준 표본적인 참고 견딤의 길이었습니다. 또 이 땅의 인간은 물론 어떠한 물건이라도 지금까지 6천년 동안 참아 나왔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영계에도 그 영향이 미쳤고 천사세계에도 그 영향이 미쳤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는 만물은 물론 영계에까지 사무쳐 있는 탄식과 6천년 동안 참아 나온 하나님의 사정을 책임져야 할 사명이 남아 있습니다.
따라서 이제 여러분은 그러한 외적인 근심과 우주적인 책임을 대신 마음에 품고 참고 견딜 수 있는 각오와 결심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만일 그러한 각오와 결심을 갖지 못한다면 오늘날 여러분은 하늘의 노정에 동반해 나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여러분은 먼저 하늘의 복과 하늘의 영광을 바라기 전에 하늘의 피맺힌 심정, 서러운 심정을 풀어 드려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참으심은 온 우주를 품고도 남음이 있는데, 오늘날 우리들은 죄악된 환경에서 죄악된 자신을 갖고 살고 있습니다. 이런 입장에서는 우주를 대하여 참고 견디어 나오신 하나님을 모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6천년 역사를 섭리해 나오신 하나님을 모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여러분은 오늘날까지 역사를 지배해 나오셨던 하나님의 심정과 뜻을 알아야 되겠고, 하나님을 모실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6천년 동안 섭리해 나오시면서 참고 견디어 나오신 그 심정을 지녀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즉 오늘날 끝날에 처한 여러분에게는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어 들이고 그분을 만민에게 증거해야 할 사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6천년 동안 참아 나오시던 하나님의 심정을 닮아 하나님을 모시고 위로해 드릴 수 있는 참아들딸은 누가 될 것인가? 바로 이러한 아들딸이 나타나기를 하나님은 기다리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늘을 배반하고 천사장인 사탄의 유혹에 빠져 타락한 인간을 버리지 않으시고 다시금 구원하시기 위해 6천년 동안 참아 나오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은 그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나아가 오늘날 여러분들! 이 민족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오늘 여기 모인 사람들, 진정으로 하늘의 품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민족의 고통을 대신 짊어질 수 있는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어떠한 고통과 역경에서도 참고 견딜 수 있는 각오와 결의를 지녀야겠다는 것입니다. 참고 견디는 사람이 되지 아니하고서는 민족을 책임질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또 여러분이 세계를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 할진대는 먼저 세계의 슬픔과, 세계의 어려움을 그 몸에 짊어지고 참고 견딜 수 있는 각오와 결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만일 여러분이 그러한 각오와 결심이 없다면 세계의 어느 한 부분에도 하늘의 이념을 남길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탄세계와 지옥세계까지 품을 수 있고 또 거기에서도 참고 견딜 수 있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지옥에 있는 사탄들까지도 그 앞에는 머리를 숙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최후의 승리자, 최후의 아버지의 아들딸이 되고자 원한다 할진대는, 여러분은 하나님의 참으심을 여러분의 참음으로, 하나님의 견디심을 여러분의 견딤으로 여러분의 마음 몸에서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날 기독교도 참음의 도리와 견딤의 도리를 가르쳤기 때문에 세계적인 종교가 되어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유대 백성들이 땅 위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민족은 하나님의 뜻을 배반한 민족인데 어찌하여 이들을 하나님께서는 버리시지 못합니까? 물론 유대 백성들이 곁길로 갔지만 하나님의 택한 선민으로서 하나님을 위하여 변치 않는다는 마음을 갖고 나왔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반대 되는 입장에 처해 있으나 어느 한 때 하나님을 찾아 들어가게 될 때에는 어느 민족보다도 하나님의 참으시는 일, 견디시는 일을 맡을 수 있는 민족이기 때문에 섭리의 길을 배반하였지만 버리시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역사 과정에서 어떤 역경이 부딪쳐 올지라도 하늘을 위하여 섭리역사를 붙들고 나서는 민족이 있다면 그 민족은 세계를 지배할 것입니다. 가령 자기들이 가진 결심과 각오가 하늘을 위하는 마음에 근거되어 있는 한, 한때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사탄의 심부름꾼 노릇을 했다 할지라도, 끝까지 참을 수 있는 절개를 갖고 나간다면 사탄은 결국 굴복하고 마는 것입니다.
사탄은 참을래야 참을 수 없고 견딜래야 견딜 수 없습니다. 사탄이 참을 수 있고 견딜 수 있다면 하나님을 배반하여 6천년 역사를 거슬러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중심한 민족이 어떤 역경에 부딪쳐도 자기의 민족이 하늘의 선민이라는 것을 주장한다면, 그 민족은 세계에서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날 유대 백성이 세계의 경제권을 쥐고 있고, 그외 여러 분야에서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는 것도 일리가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역사과정도 역시 그렇습니다. 과거 어느 시대나 역경에 부딪치어 혼란과 혼돈 속에 처하였을 때, 참고 견디는 마음을 영원한 이념에 결부시켜 나온 사람들이 새로운 역사를 전개해 나왔다는 것을 우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민족도 그렇고 역사도 그렇고 종교도 그랬습니다.
그러면 끝날에는 이것들이 어떻게 될 것인가? 끝날에는 민족 가운데서 중심민족이, 종교 가운데서 중심종교가, 역사 가운데서 중심역사가 나온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계 22:13)고 했습니다. 그러나 끝날에는 종교 중에서도 더 참고 견딘 종교, 기독교 가운데서도 더 참고 견디는 교파가 승리할 것입니다. 또 민족 중에서도 더 참고 견디는 민족이 승리할 것입니다. 하늘은 이와 같이 더 참고 견디는 무리를 찾아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런 원칙이 있음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4천년 동안 이스라엘 민족을 택해 열과 정성을 다해 이끌어 오신 섭리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이 땅 위에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는 기독교인들이 역사를 거쳐오면서 믿고 모신 것과 같은 훌륭한 입장, 존경받는 입장에 서시지 못했었습니다. 배반자요, 이단자요, 민족의 반역자란 명패를 받고 돌아가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찌하여 새로운 섭리의 이념을 세우려 할 때 참고 견뎌야 하는 그러한 환경에 예수를 내세우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가? 그것은 인류역사가 타락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타락역사를 종결짓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성경과 역사적 기록으로 남아 있는 예수와 그때 당시의 예수와는 말할 수 없는 차이를 갖고 있습니다. 그때 당시 유대교단이 오늘날 기독교 신도들이 믿는 만큼 예수를 믿었다면 예수는 십자가에 돌아가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죽여 놓고 찾으며 후회하는 민족이 타락한 민족입니다. 당시 천륜의 한 때를 기다리며 참고 있는 예수를 반대한 이스라엘 민족은 지옥에 들어갔습니다. 유대교인들은 자신들이 진리형을 대신하고 있다고 장담하고 나섰지만 역사 과정을 거치고 보니 비진리형처럼 보였던 예수가 진리를 대신하였고, 오히려 유대교가 비진리형의 입장에 처하였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늘의 움직임은 역사 과정에서 모순된 것처럼 흘러 나왔던 것입니다. 당시 유대교인들은 예수를 중심삼고 이념적인 사실은 알았으나, 실증적인 사실과는 거리가 먼 민족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한 국가의 운명에 있어서 어떠한 비운이 찾아온다 할지라도 그것에 대해 서러워하지 않고 천륜의 섭리를 알아 그 가운데에서 단결하여 참고 견디는 민족이 된다면 그 민족은 망하지 않고 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4천년간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 세웠던 유대교가 하늘의 내적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제물이 되어야 했는데, 오히려 유대교단이 부패하고 형식주의적인 관념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이것을 통탄하고 슬퍼하는 사람은 많았으나 예수를 따르는 사람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끝날이 온다고 예고하셨습니다. 온 만민이 대심판의 한 날을 피치 못하리라고 예고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와 같은 하나님의 섭리역사를 분석해 볼 때, 무엇을 근거로 하여 그러한 역사적인 섭리의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되었는가? 하나님께서 참고 견디어 나아가는 입장에서는 사탄과 상반적인 입장에 처하기 때문에 사탄세계가 하늘 편으로 전환될 때에는 반드시 참고 견디는 과정을 거쳐서 새로운 역사가 창조되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충신의 자식은 망하는 법이 없고 열녀·효자·효녀의 아들딸은 무너지는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이 민족은 역사적으로 남아져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 민족은 4천년이나 되는 기나긴 역사를 갖고 있지만 이 민족에는 고유한 민족성이 없습니다. 그러면 이 민족에 대한 섭리를 생각해 볼 때, 이 민족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 민족에게도 한 때가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 민족은 같은 민족 앞에 또는 세계 앞에 고난받는 입장에 서 있는데, 이것은 오히려 이 민족에게 행복의 터전이 될는지 모릅니다. 이러한 입장에 이 민족은 처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여러분들은 마음을 크게 가져야 되겠습니다. 대한민국을 위하여 다른 나라 사람들이 이 땅 위에 와서 희생했습니다. 그리고 이 나라는 지금도 역시 남의 나라의 원조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그 사람들 머리 위에 손을 들어 축복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또한 여러분들은 이 민족을 대한 하나님의 내적인 모든 사정이 사람들에게 통하지 않는다고 낙망하지 말고, 앞으로든 뒤로든 어떤 방향을 통해서든지 축복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만일 그러한 여러분이 된다고 하면 새로운 이념을 중심삼고 이 민족을 통하여 새로운 섭리역사가 전개된다는 것입니다. 민족도 그렇거니와 기독교 사회도 역시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민족은 세계 앞에 혹은 우주 앞에 몰림받을 수 있는 민족이 되어야 합니다. 실제 앞으로 이 민족은 24억 인류 앞에 몰림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실 때 오른편 강도는 하늘을 위하려 했지만, 왼편 강도는 하늘을 불신하는 입장을 취했습니다. 이와 같이 오늘날 세계는 양대 세계로 갈라져 있습니다. 즉 오른편 강도와 같은 입장으로 형성된 우익 세계와 왼편 강도와 같은 입장으로 형성된 좌익세계로 갈라져 있습니다, 그래서 왼편 강도형인 좌익세계는 하나님을 모른다 하는 세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세계에서 증거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참사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예수의 이름을 의지하여 증거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앞으로는 하늘을 찾아가는 종교적 형태를 갖춘 국가가 나와 가지고 참사랑을 증거해야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예수님 자신의 이념이 안 나왔지만 이제는 예수님의 이념이 나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끝날에 어떠한 새로운 무엇이 반드시 나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끝날에 전인류가 원하는 것은 무엇일 것인가? 예수가 주장하던 진리가 아니라 주장하지 못하던, 주장하던 그 진리의 배후의 심정을 넘어설 수 있는 무엇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끝날에는 반드시 그것이 나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가 바로 세계적인 이념시대입니다. 그러한 때가 기필코 와야 될 것입니다. 성경에 고착되어 그것만을 사수하는 인류, 또는 자기들의 고유한 사상만을 주장하는 민족은 맞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여러분은 ‘아버지여! 저희들로 하여금 세계 민족 앞에 몰리는 무리가 되게 하시옵소서. 아버님을 붙들고 죽는 무리가 될지언정 아버님을 버리는 무리가 되지 말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제 우리 교회 식구들은 몰리는 무리가 되었다고 남을 욕하지 맙시다. 남의 결점을 들어 비방하고 자기의 이익을 취하려고 한 민족은 망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여러분은 자신의 마음과 몸에 진리를 갖지 못했다고 탄식해서는 아니되겠습니다. 내가 아는 것이 없고 가진 것이 없다고 탄식하지 말고, 권세와 세력이 없다고 탄식하지 말고, ‘아버지, 나의 모든 것을 빼앗길지라도 예수의 길을 사수할 수 있는 하늘의 정병들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저희가 최후의 승리의 방편이 되게 허락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부모도 잃어버렸습니다. 친척도 잃어버렸습니다. 자기의 교파도, 자기가 주관해야 할 민족도 다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것을 잃어버렸지만 탄식하지 않았습니다. 더 큰 하늘의 심정을 부둥켜안고 하나님의 참으심을 본받아 죽음의 자리에서도 견디셨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순교자의 영들이 저나라에 갔지만 자기만이 구원받기 위해 죽은 사람은 좋은 곳에 못 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 같은 죄인은 천만번 죽어 마땅하다고 한 사람은 천당의 높은 자리에 가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세계가 복받게 될 때 세계만을 위하여 일한 사람은 세계를 넘어 천주세계에 있어서는 떨어지게 됩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들에게는 새로운 마음을 갖고 새로운 출발을 전개하여 조그만 이 삼천리강산을 중심하여 세계를 뒤흔들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공론이 아니고 망상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탄에 대한 분한 마음, 불신의 민족에 대한 분한 마음을 품을 수도 있었으나 하나님이 사랑하는 민족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분한 마음을 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러한 사정에 처할 때, 즉 분한 마음이 일 때, 그것을 넘어 오히려 기도해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쓰러졌던 선조들이 일으키려던 교단을 다시 일으키는 식구들이 되어 이 민족을 움직이고, 나아가 세계적인 기독교를 혁신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사명이 우리들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특히 젊은 남녀들, 여러분은 죽을 때 어디서 죽을 것이며, 어느 분야에서 하늘 앞에 조건을 세워 놓고 죽을 것인가. 또 여러분은 지금까지 누구를 위하여 살았는가? 그 이념에 있어서, 그 양심에 있어서, 그 생활에 있어서 누구를 의지하고 살았는가? 만약 여러분이 지금까지 자신만을 위하여 살았다면, 스스로 반성하고 채찍질해야 되겠습니다.
영원한 이념을 중심삼고 움직일 수 있는 무리는 그 이념적인 주체가 없어지지 않는 한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야곱도 하나님의 뜻 하나를 붙들고 21년간 라반의 천대와 멸시를 받았습니다. 아버지의 뜻 하나를 품고, 아버지의 축복의 뜻을 잊지 않고 21년을 하루같이 생활하였습니다. 아브라함 역시 그러했습니다. 모세 역시 택한 백성을 염려하면서 바로궁중에서 40년,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동안을 참고 견디었고, 또 예수님 역시 그러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끝날에 처해 있는 오늘날 우리들이 사탄세계에 품겨 있었던 인류, 하나님의 서러움의 조건을 지니고 있는 불쌍한 인류를 구하기 위해 싸움을 전개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이 싸움에서 인류를 구하기 위하여 희생되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무덤은 하나님이 세워 줄 것이며, 그의 죽은 뒤의 발자취는 하나님이 드러내 줄 것입니다. 이제 막다른 길에 봉착한 여러분은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눅 17:33)는 성경 말씀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사탄의 조건을 걸어 놓고 예수를 배반했던 무리는 모두 망했습니다. 우리 민족도 왜정 하에 있었을 때, 자기의 불리한 입장을 피하기 위해 신사참배하며 교단을 팔아먹던 사람들은 다 망했습니다. 눈물이 없는 교단과 민족과 세계는 전부 망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이 민족에게는 하나님의 섭리 앞에 어느 민족보다 빨리 옮겨지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숨은 섭리의 뜻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여러분이 예수의 사정을 알고 하나님의 입장을 대신할 수 있어야, 하나님의 이념의 시대가 오게 될 때, 이 땅 위에서 제2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인계받는 하늘이 허락한 생명의 아들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명심하지 않으면 아니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는 민족에 대한 책임이 있고 수많은 교단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밥을 먹거나 옷을 입거나 잠을 잘 때, 이 민족을 위하여 또는 하늘땅을 대하여 무한한 근심을 해 본 적이 있습니까? 만일 이 세계를 대하여, 하늘땅을 대하여 염려하는 아들딸이 있다 할진대, 그런 사람은 새로운 시대의 주인공이 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섭리적인 역사 과정을 헤아려 보게 될 때, 우리는 흐르는 눈물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거기에서 머물지 말고 그것을 거울삼아 오늘의 참아야 할 환경, 견디어야 할 환경에서 패배자가 되지 말고, 하늘이 기뻐할 수 있는 하늘의 아들딸로 세움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 성경 말씀에 예수님을 돌로 비유했습니다. 또 버림받은 돌이 집 모퉁이의 요긴한 돌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예수의 이런 사정은 가정과 교단과 이스라엘 민족, 심지어 사랑하는 세 제자까지도 몰라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택한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원수들에게서 빼 내어 길러 나오셨고, 이 민족을 통하여 하나님의 큰 뜻을 이루려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은 이 하나님의 뜻을 이념적으로나 역사적인 입장에서는 바라보았으나 그 뜻을 생활면에서는 이루어 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소망의 한 존재를 찾으시기 위해서 각자에게 하나님의 뜻을 체휼시키기 위한 수고의 노정을 거쳐 나오셨습니다. 즉 4천년 동안의 수고를 통하여 생활권에까지 찾아 나왔으나 이것을 안 사람은 하나도 없었으며, 마음으로는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었으나 정작 나타난 메시아를 환영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안나는 일생을 통하여 성전을 떠나지 않고 금식을 해가며 메시아를 고대하였으나 정작 나타난 메시아를 증거는 하고 모시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이도 역시 하늘의 뜻과는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늘의 서러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섭리하신 4천년의 결실체로 오셨습니다. 그 당시의 예수님의 부모나 친척들이 예수님을 자기 민족을 구원해 줄 메시아인 줄 알았더라면 그 예수를 마굿간에서 탄생케 하지 않았을 것이며, 유대민족이 메시아로 알았더라면 목수의 아들로서 30년 사생애 기간과 3년 공생애노정에 있어서 이 고을 저 고을로 쫓김을 당하게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을 보신 하나님께서도 슬퍼하셨으며 예수 자신도 슬퍼했었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예수를 반역자로 몰았으므로 하나님의 뜻과 유대민족이 고대했던 소망과는 아무런 인연을 맺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또한 하나님도 인연을 맺지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하늘과 예수와의 간격을 메꾸지 못하게 되니 예수는 다시 이 민족의 과거 역사와 그 시대의 현실과 미래의 영원한 시간을 놓고 염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를 알지 못하여, 즉 그를 이 나라의 구세주요 메시아로서 받들지 못하였으므로 피조세계의 만물이나 이 땅의 인간들은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과 하등의 직접적인 관계도 맺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목수의 아들로서 나무를 깎을 때, 민족의 죄와 허물을 깎아내는 것으로 생각하고 일을 하셨으며, 언행심사에 있어서도 선을 중심한 천적 이념을 세우기 위한 준비의 생활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런 사정과 심중을 안 사람이 당시에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말하고 싶어도 어느 누구에게 터놓고 말할 수 없는 사정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가정에서도 그의 뜻을 알아주지 못하고 반대하여 마침내 집을 버리고 떠나게 된 예수님은 이때 교단을 찾아 들었으나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알지 못한 교회로부터 또한 버림을 받게 되었으며, 나중에는 민족의 반역자로 몰리게까지 되었으나 그보다 더 큰 골고다의 길이 남아 있음을 아신 예수는 여기에서 하늘과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자체가 되어야겠다고 굳게 각오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우주와 인연을 맺은 사람만이 우주적인 가치와 세계적인 가치성을 부여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는 가정, 교회, 민족, 지상세계, 천상세계의 영인과 지옥에 있는 영인들까지 자신과 인연이 맺어져 있다는 것을 느꼈던 연고로 가정과 교회에서 버림을 받았으나 그것에 의해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유대 백성들은 예수가 민족의 반역자로 몰려 십자가에 달림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끝날 줄 알았는데, 12제자를 비롯한 남은 무리의 불꽃이 있었기에 예수님께서 그들을 통하여 역사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과 같이 기독교는 세계적으로 확대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끝날의 우리들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인간에게는 지(知), 정(情), 의(意)의 3요소가 있고, 지와 의를 발판으로 하여 정적(情的)인 천정(天情)을 이루어야 할 부분이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의 정적인 흐름이 있고 우리 한민족에 대해서 천적인 섭리가 있기 때문에, 우리 한민족은 어느 누구보다도 하늘에 대한 간절함과 충효의 마음이 강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심정과 진리를 아는데는 어떤 지도자가 필요치 않습니다. 예수는 십자가에 달릴 때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하신 이 사실, 이 한 마디의 말씀으로 인하여 역사의 새로운 전환점은 싹트게 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가 죽은 후 피와 살이 통할 수 있는 수명의 부녀자들의 모임을 계기로 하여 온 우주를 움직여냈다는 이 한 사실을 알아야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이 민족이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마음 속 깊은 핵심을 가져야겠습니다. 이 민족은 모든 것을 다 빼앗겨도 하나님의 심정만은 빼앗기지 않는 민족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이 민족이 하늘땅을 위한 피 뿌림의 제단이 되고 하늘과 땅의 만민 만상을 보고 울 수 있다 할진대 여기에는 살길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진노의 채찍을 들어 치시면서도 눈물짓는 분이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보고 기뻐하는 사람은 심판의 조건에 걸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여러분은 과거에 버렸던 예수를 다시 찾아, 그 예수 앞에 친구가 되어야만 다시 오시는 예수님 앞에 신부로 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영원하신 것과 같이 피조물도 영원한 이념을 두고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개인과 민족과 인류, 그리고 만물이 영원한 피조물로서 남아지지 못한 연고로 하나님은 그것들을 오늘날까지 슬퍼하며 찾아 나오고 계십니다. 즉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창조이상의 동산을 잃어버린 하나님께서는 그래도 피조세계에 대한 소망을 포기하시지 않고 원대한 창조의 이념을 이루시기 위하여 오랜 역사노정을 거치면서 사탄과 치열한 싸움을 전개하여 나오셨고, 오늘날까지 참아 나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에게는 이런 크나큰 소망이 있지만 반면 지극히 작은 것부터 찾아야 할 서러움이 있습니다. 이 크나큰 소망이 개인에서부터 이루어져야 할 것이었는데 개인이 타락하여 전체의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전체 인류와 만물의 소망이 이루어지기 전에 일 개인에게서부터 하나님의 소망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남모르는 사정인 것입니다.
개인을 중심삼고 소망을 이루시고자 가인과 아벨을 세우셨으나 이것이 무너지니 1600년이란 세월을 거쳐서 겨우 노아가정을 찾아 세우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에 남아져야 할 노아의 가정도 함의 실수로 말미암아 깨지고 아브라함, 모세를 거쳐 예수에게까지 연장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많은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이념을 개인에서부터 이루어야 할 것이었지만 이루지 못하여 독생자 예수에게까지 이 소망이 남아져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예수는 개인으로 오셨지만 평범한 개인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4천년간 참고 또 참아 오신 하나님의 인내심과 소망해 오신 이념을 통하였고, 심정을 통하였던 분입니다. 그리고 4천년의 역사노정 가운데 왔다 간 선지자들이 이루려다 이루지 못한 모든 소망까지도 일신에 짊어지고 4천년의 선의 결실체로서 개인을 거쳐 민족, 국가, 세계, 천주적인 차원에서 천륜의 한을 풀어 드려야 할 이념을 가지고 오신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지상의 인간들은 하나님의 크나큰 이념을 갖고 오신 예수님을 예수 한 분의 이념으로만 머물게 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과 인류 개개인의 심정에까지 머물게 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여 그 크나큰 하나님의 이념이 예수 한 분에서 머무는 이념으로 끝을 맺었고, 또한 예수 한 분이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 그 큰 이념은 땅의 이념으로 머물지 못하고 영계의 이념으로만 머물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땅에 살고 있는 인간들은 영원히 지상에 남아져야 할 이념을 찾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고, 예수는 이 이념을 땅에 남기기 위하여 다시 오지 않으면 안 되는 입장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지상의 인간들이 고대하는 이념, 땅에 영원히 남아지는 이념을 가진 개인, 가정, 민족, 인류는 어느 때 어느 곳에 나타날 것인고! 우리들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가실 때에 그의 말씀과 소망은 남겨 놓고 가셨지만 그의 이념은 남기지 못하고 가셨으니, 그 이념이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끝날에 그의 이념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 것인가? 그 사람은 먼저 예수의 소망과 뜻을 가져야 할 것이요, 소망과 뜻을 가진 그 위에 이념을 가질 수 있는 마음과 역사노정의 설움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창조의 이념을 통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 할 것입니다. 예수는 이 지상에 와서 복음의 말씀을 전하게 될 때에 간절하게 바란 것은 누구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라.(마 10:37)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과연 ‘누구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라.’고 하신 예수님 말씀의 진정한 뜻을 깊이 깨달아서 이를 실천한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없었다는 것입니다. 3년간 따라다니면서 함께 생활하던 제자들 중에서도 그의 말씀 그대로 다 실천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또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형제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또 그는 부활 후에 제자 베드로에게 나타나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요 21:15)라고 세 번이나 거듭 물었으며, 베드로가 대답하니 내 어린양을 먹이라.(요 21:15)고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다시 올 터이니 준비하며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땅에 계실 때에 하신 말씀 가운데 중요한 말씀을 추려 본다면 이 두 가지 내용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가 남기신 간곡한 말씀은 누가 이룰 것인가? 이 남기신 말씀을 이루는 사람은 끝날의 심판을 피할 것이요, 예수를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일생에 예수를 사랑해 보았습니까? 그리고 그 사랑하는 정도가 부모나 처자나 세상의 그 누구보다 컸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까? 이것을 여러분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늘에 있는 예수가 이 땅을 대하여 간곡히 바라는 것은, 어느 누구보다도 자신을 더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만일 이 땅 위에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하나님의 창조의 이념을 안 사람이요, 하나님의 6천년 수고와 예수의 쓰린 심정을 알고 동정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창조원리적 가치를 대표한 분이요, 모순 상충이 하나도 없는 하늘의 창조의 법도권 내에 있는 분입니다. 예수는 이런 자리에 있기 때문에 그 육신과 마음이 하나되어 그 자신도 비록 아담으로부터 4천 년의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었으되 시간성과 공간성을 초월하여 계셨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는 4천년 전의 아담에게 하나님의 창조이념이 깃들어 있었음을 직감해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 예수님에게는 어떠한 사명이 있었던가? 영원한 하나님의 사랑과 인연맺어야 할 인간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인연맺지 못하였으므로 이 하나님의 사랑을 인간들에게 맺어 주어야 할 사명이 예수님에게 있었고, 또한 인간과 만물 사이에 사랑을 맺어 주어야 할 사명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예수님이 왔던 연고로, 하나님을 대신하여 온 자기를 세상의 누구보다 더 사랑하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에 세상의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더 사랑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우리의 마음을 가다듬어 역사노정을 살펴보게 될 때, 우리는 죄악의 혈통을 물려받은 개체요, 창조의 이념을 갖고 있지 못한 자신이요, 신랑으로 오신 예수님을 신부의 입장에서 모시지 못한 개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는 환경을 맞이하였으되 예수님을 사랑하지 못했던 연고로 지상의 인간들에게는 끝날에 세계적으로 예수님을 누구보다 더 사랑해야 할 조건이 남아지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 있는 여러분은 역사상에 없었던 사랑을 가지고 충신된 입장에서 만왕의 왕 되시는 예수님, 신랑 되시는 예수님 앞에 취해 본 사람이 있습니까? 그렇지 못하였다면 누구보다도 하늘을 더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자처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6천년 동안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어리석은 죄인들을 찾아오셨는데, 내가 이런 하나님을 사랑으로 맞지 못한다면 나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이념은 나로 인하여 중단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때를 맞이하여 여러분이 가정을 대해서 기도할 때에는 누구보다도 하나님과 예수를 사랑하는 아들딸들이 있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이요, 나라를 대해서 기도할 때에는 어느 민족보다도 하나님과 예수를 더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이 나오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또 인류에 대해서 기도할 때에도 세계의 기독교인들이 어떤 종교인들보다도 하나님과 예수를 더 사랑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과 예수를 누구보다도 더 사랑하지 못한다면 이런 기도나마 해야겠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피조된 삼라만상이 인간들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의 이런 간곡한 부탁, 즉 누구보다 나를 더 사랑하라고 하신 부탁을 이루어 드릴 수 있는 존재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존재가 나타나기를 만물이 바라고 있는데 이런 존재가 나타나지 않았으므로 만물이 탄식하고 하늘이 탄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 탄식은 무슨 탄식인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이념과 인연을 맺어야 할 아담과 해와가 타락으로 인하여 올바른 관계를 맺지 못했기 때문에, 이것을 다시 회복하여 하나님의 이념과 사랑과 인연을 맺기를 고대하는 탄식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탄식을 풀어 주지 못하는 사람은 끝날의 심판에 걸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심판에서 남아질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이는 하나님과 예수의 심정을 어느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또한 그를 누구보다도 더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심정을 알아야만 그 심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이념에 통할 수 있고 그럼으로써 원수를 이 천지간에서 몰아낼 수 있는 힘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십자가상에서도 원수를 위하여 복을 빌어 줄 수 있는 담대한 마음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심정이 그의 가슴 속에서 언제나 강하게 용솟음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앞에 두고서도 늠름한 태도를 보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신랑과 신부라는 말씀을 남기고 가셨습니다. 그러면 신랑과 신부는 무엇인가? 예수가 가신 후 2천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누구보다도 하나님과 예수님을 더 사랑한 신부가 있었느냐 하면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에 대한 말을 하고 예수로 말미암은 역사를 이야기했으나 하나님의 창조의 이념을 인류 앞에 나타내지 못한 예수의 심정을 아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예수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그 역사를 이야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의 심정을 체휼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심정과 나의 심정이 하나되어야만, 하나님의 이념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끝날에 남아질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는 제자들을 자신 이상으로 사랑했습니다. 하늘의 슬픔이 있다면 그 슬픔은 어떤 것인가? 예수님은 하나님의 창조이념을 땅 위에 남기시기 위하여 자신의 몸 이상으로 제자들을 사랑하셨으나 제자들은 자기들을 사랑해 주시는 예수님의 사정과 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른 생각을 가지고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것입니다. 그 사랑을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에 제대로 받아 감당하지 못하고, 땅 위에 그 사랑의 열매가 맺어지지 못한 것이 하늘의 슬픔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예수의 사랑의 심정을 제자들은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에야 비로소 느꼈으며 그때부터 예수님이 해 주신 말씀의 의도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소망하시며 찾으시던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던가? 자신을 누구보다도 더 미워하고 버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을 누구보다 더 사랑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찾아 다녔습니다. 고로 끝날에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사람은 누구보다도 자신을 미워하고 버리면서라도 사랑의 마음을 갖고 하늘을 찾아 헤매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께서 오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시기만을 바랄 것이 아니라 주를 찾아 헤매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 스스로가 역사노정에서 하늘이 겪은 슬픔의 고개를 넘어야 하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던 어려움의 고개를 넘어가야 합니다. 그래 가지고 섭리역사의 기간을 단축시키고 시공을 초월하여 2천년 전 예수님이 품으셨던 쓰라린 심정을 체휼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돌아가신 예수의 무덤을 찾아간 사람은 누구였던가? 그 사람은 비록 인간들이 보기에는 미약한 존재였던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이 고을에서 쫓기고 저 고을에서 비난받고, 가는 곳곳에서 조소를 일신에 받고 다니던 총각 예수를 누구보다도 더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따르던 마리아였습니다. 이런 간곡한 마리아 앞에 예수는 부활의 몸으로써 나타났으니 이는 끝날에 전세계 기독교인들에게 그들의 갈 길을 보여준 표상인 것입니다.
그 막달라 마리아는 어떤 생활을 했던가? 예수를 사랑하기에 입을 것 먹을 것 전부를 잊어버리고 일편단심 그만을 위하여 살았습니다. 생사를 초월하고 체면을 생각하지 않고 따르던 그녀의 행로는 끝날의 성도들이 걸어야 할 노정이었던 것입니다. 만일 지금도 이 땅 위에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심정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 있을진대는 그 사람의 눈에는 하나님의 6천년 섭리에 어린 눈물이 감돌 것이요, 하늘 앞에 무한히 빚진 자신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또한 자신의 몸을 불사르더라도 받은 사랑에 대해 보답할 길이 없음을 알 것이요, 죽음의 길로 가야 할 자신임을 알 것입니다. 이런 심정을 여러분은 어느 한 때라도 가져본 적이 있습니까? 이런 사람이라면 창조시대부터 과거·현재·미래를 통하여 전체를 다 버리고 찾아 주시는 하늘의 심정을 알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하늘 앞에 얼굴을 못 들 것이니 그것은 하늘 앞에 무한히 빚진 자신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런 심정을 느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하늘만을 따르는 사람이라야 끝날에 남아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고 편안한 것을 바라는 사람은 예수의 심부름꾼은 될지언정 그의 친구는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를 믿어도 그의 심정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그의 친구는 될지언정 그의 신부는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이 바라고 예수가 바라는 것은 심부름꾼도 아니요 친구도 아니요 신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역사상의 어느 누구보다도 하나님과 인류를 사랑하고 창조의 이념을 통한 실체로서의 자격을 갖추어 하나님을 부르게 될 때, 하나님이 창조주로서의 위신과 체면을 다 잊으시고 예수를 붙들어 주시던 일순간의 장면이 있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나아가 하나님께서 예수를 창조주인 자신보다도 더 높은 자리에까지 세워 주고도 남을 수 있는 심정을 가지고 대하셨던 것을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택한 민족 앞에 배척을 받고 몰리는 환경이었으나, 4천년간 하나님의 참으신 심정을 알았기 때문에 참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4천년간의 모든 것을 다 희생하시면서 아들 하나를 찾고자 노력하신 것을 아는 예수는 땅에서 신부를 찾기 위해서는 어떠한 희생과 배척이 있어도 참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원수처럼 대하는 민족을 저주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의 그런 심정을 조금이나마 알았던 막달라 마리아였지만 부활한 예수에게 손을 대려고 할 때 만지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지상에서 온전히 받들어 모실 수 있는 신부의 자격을 갖춘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 한, 성신의 심정과 예수의 심정, 하나님의 원한의 심정은 풀어질 수가 없다는 것을 보여 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끝날에는 하나님을 대신한 실체로서 나타난 한 존재를 찾아 그를 누구보다도 더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하고, 그를 대신할 수 있어야 하며, 나아가 그러한 사람들이 모인 교회가 있어야 하고 민족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교회, 이런 민족, 이런 인류는 천정을 중심삼고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인간들이 이런 천정을 느낄 수 없는 한, 끝날에 남아질 사람이 못 되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자신이 역사적인 죄인임을 알고, 남을 욕하고 남을 비판하기 전에 나를 먼저 알고 기도할 줄 알아야겠으며, 민족과 인류를 생각하고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창조이념의 세계를 이루어야 할 인류를 대하면 인류는 무한히 환영할 것이요, 만물을 대하면 자신들을 위하여 희생하고 버림받았던 것을 알고 위로하며 환영할 것입니다. 또한 이런 사람들이 하늘 앞에 나타날 때에 하늘은 그의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이요, 그의 수고를 위로하실 것이니, 이런 사람이라야 끝날에 남아질 사람입니다. 또한 이런 사람을 하늘과 예수와 만물은 바라고 있음을 여러분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주일날 교회에 나오는 것을 습관적으로 또는 상습적으로, 오늘은 일요일이니 아버지 전에 나와서 예배를 드린다는,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을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이 앉아 있는 이 장소가 그러한 차원에서 생각되어지고 또 이루어질 자리가 아님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즉 여러분이 이렇게 모이게 된 것은 여러분이 모르는 어떠한 배후의 인연을 통하여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 인연은 내 개체를 중심삼고 볼 때에 전후 좌우와 관계가 된 인연이요, 또 상하와 관계가 된 인연이라는 것을 깊이 명심해야 되겠습니다.
역사노정에 예수 한 분이 나타난 사실은 그저 우연히 되어진 사실이 아니라 정하신 천륜의 뜻이 있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즉 역사적인 인연과 시대적인 인연과 미래적인 인연을 이루어 놓기 위하여 예수님은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만일 그 당시에 안 사람이 있었다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비록 한 개인에 불과하였으나 예수님이 맺고 계신 인연을 전체에 연결시켜서 끌고 나오게 될 때에는 인류의 역사적인 인연이 딸려 들어오고, 그 당시의 시대적인 인연과 미래적인 인연까지 딸려 들어오게 되어 있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그 당시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지상과 천상에 있는 천천만 성도와 하나님 아버지까지도 그와의 인연을 중심삼고 움직여야 하는 중심적인 사명을 가지고 오신 분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하는 무지한 유대 백성은 그때까지 하늘이 약속한 하나의 뜻을 찾아 나와 가지고 뜻 가운데 선 것으로 자부하고 있었지만, 예수님을 반대함으로 말미암아 뜻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고, 역사적인 교단을 세워 나왔지만 그 교단이 하늘 편 것이 되지 못하는 입장에 처하고 말았습니다. 또 선민권을 자랑하던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끝날의 약속의 축복을 이루어 주실 것이라는 민족적인 소망과 교단적인 소망이 있었지만 천주적인 이념의 주체인 예수를 몰라봄으로 말미암아 여지없이 파탄되는 입장에 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인류의 역사노정 위에 대비극이 벌어지는 자리에서 예수는 서글픔이 어린 눈물과 희생의 피로써 이에 대응하였던 사실을 그때 사람들은 미처 몰랐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외치신 말씀은 그의 간곡한 심정에서 우러나와 부르짖은 진리였습니다. 또 그가 걸으신 30여년의 생애는 자기 일신의 욕망을 달성하기 위한 생애가 아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소망은 자기 한 개체를 위한 소망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알아야 할 유대 백성들은 알지 못하고 자기 자신을 잊고 하늘의 뜻을 이루려고 했던 예수님만이 알고 계셨던 것인데, 이 서러움이 오늘날 우리들의 서러움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또한 여러분은 신앙자의 입장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님이 가신 걸음이 내가 가야 할 걸음이요, 예수님이 염원하는 이념동산이 내가 이루어야 할 이념동산임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축복권내에서 지낼 수 있는 하나의 신랑 신부의 이념을 그리워하고 소망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축복을 이룰 수 있는 어린양 잔치를 중심삼아 14만 4천 무리를 품고 이들과 더불어 환희의 노래와 영광을 아버지 앞에 돌리기를 바라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간절한 염원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결국 유대민족의 불신으로 그러한 본래의 소망을 성사하시지 못하고 도리어 갈보리산정에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 흘리며 기도하신 것은 하나님의 간절하고도 비통한 심정을 대변한 간곡한 기도였습니다. 그 간곡한 기도는 자기 일신의 해결책을 세우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무지하여 잠들어 있는 백성(민족)과 사탄과 사랑하는 세 제자를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망을 가슴에 붙안고 무지한 백성을 이끌어야 할 책임을 진 예수님, 천륜을 가로막는 유대민족은 심판받아 마땅한 배역의 종족이었지만 재차 하늘을 향하여 용납의 손길을 바라는 기도를 하셔야만 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은 어떠했겠는가? 더 나아가 십자가의 고난의 노정을 감에 있어서 원수와 같은 무리들을 향하여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는 간곡한 호소를 한 그리스도의 기도는 인간 앞에나 섭리노정 앞에, 또는 천성의 심정 앞에 어떠한 인연을 맺기 위함이었던가!
오늘날 우리들은 다시 거슬러 올라가 예수의 심정을 헤쳐 놓고 그 심정을 대하여 머리숙일 수 있어야 되겠고, 주가 걸으신 걸음을 내가 걷고, 주가 가신 발자취를 내가 따르고, 주가 돌아가신 제단에 내가 충성을 다하여 아버지의 원한을 대신 품을 수 있는 하나의 모습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나아가 우리들은 천정의 인연을 붙들고 온 인류와 역사적인 인연을 대신한 예수의 심정을 붙들 수 있는가를 반성해 보아야 되겠습니다. 즉 예수의 역사적인 인연, 시대적인 인연, 미래적인 인연을 대신할 수 있는 예수의 친구가 될 수 있겠느냐를 자신에게 반문해 봐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자기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내가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을 확실히 해명하는 데 있어서 내가 맺고 있는 상대적인 관계를 제해 놓으면 도저히 해명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복귀섭리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하나가 있으면 둘이 있게 되고 하나의 모임이 있으면 전후·좌우·상하로 연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하나의 존재가 역사성과 시대성과 미래성을 통과할 수 있는 하나의 주체성을 갖추게 될 때에 거기에서부터 새로운 역사가 출발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이 점점 더 떨어져 내려갈 때마다 끌어올리고 올려서 때와 장소를 넘어서 섭리를 전개시켜 나오고 계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여러분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예수를 얼마나 믿었느냐고 질문 받게 될 때에 즉각적으로 ‘10년 믿었어.’ ‘20년 믿었어.’ 또는 ‘몇 해 믿었어.’라고 대답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인연의 역사를 살펴보게 될 때에 여러분은 6천년의 역사가 가산되어 들어가는 입장에 선 자신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즉 자기 신앙의 위치를 찾을 줄 알아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인간은 인연의 역사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오늘날 여러분은 시대적인 인연권 내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신앙의 중심을 가졌다고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이제부터 여러분이 세운 믿음의 터전을 천추만대의 후손이 본받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러한 미래적인 인연의 토대를 여러분의 현실의 신앙권 내에서 어떻게 갖추어 나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이런 입장에 선 여러분은 6천년 역사를 대신하여 하나님 앞에 자신 있게 나타나 ‘6천년 동안 수고하신 나의 아버지여!’라고 부를 수 있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또 오늘날 27억의 인류를 한품에 품기 위하여 수고의 노정도 개의치 않고 참아 나오신 아버지를 나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더 나아가서 오늘의 내가 부르짖는 믿음의 호소로 억천만대의 후손까지도 울려 내겠다는 신념과 각오를 갖고 하늘 앞에 서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영원한 섭리의 운행법도를 따라 움직여 나오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미래를 끌어들여 현실과 과거를 통합하여 하나님 앞에 증거할 수 있는 내가 되었느냐, 또는 그러한 나를 대해 증거할 수 있는 다른 하나의 사람이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4천년 역사가 지난 후에야 비로소 예수님께서 그러한 사명을 짊어지고 현실적인 노정을 개척하기 위하여 이 땅 위에 오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여러분은 관념적인 신앙을 해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역사적인 인식을 통하여 알려진 지식적인 관념에서 미처 헤어나지 못하는 신앙을 해서도 아니 되겠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거기에 처하여 갈 길이 막혀 버렸다 할진대, 여러분은 역사노정을 다시 돌이켜 보고 재분석하여야 할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까지 신앙의 길을 거쳐 나온 수많은 교회, 혹은 자기의 이념을 자랑하던 수많은 종교들이 끝날에 이르러 나아갈 길이 막혀 버렸다는 사실은 역사적인 인연이나 시대적인 인연, 또는 미래적인 소망의 인연을 맺을 수 없는 입장이 되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들은 어떠한 신앙자를 찾고 있는가? 역사적인 인연과 시대적인 인연과 미래적인 인연을 대신하여 나와 관계를 맺어 줄 수 있는 신앙자를 찾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여러분은 자신의 가슴으로부터, 몸으로부터, 또는 생활로부터 스며 들어오는 어떠한 무엇을 느끼고 있습니다. 즉 우리는 오관을 통하여 무엇인가 느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오관의 감각을 통하여 마음의 세계를 격려할 수 있는 어떤 진리는 없을 것인가 하는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러한 진리는 오늘날 우리들의 생활 환경과 하등의 관계가 없고 새로운 분야에서 출발한 진리인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생활과 백 퍼센트 부합시킬 수 있는 인연을 가진 진리인 것입니다. 오늘날 소망으로 바라던 이념을 잊어버리고 몽롱한 가운데 처하게 될 때, 즉 흑암의 장벽이 가로막혀 자기 마음의 중심을 헤아려 세울래야 세울 수 없는 입장에 놓여지게 될 때 필요한 진리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여러분은 지금까지 역사노정에 나타나지 못했던, 미래를 꿰뚫어 가지고 과거를 연결시킬 수 있는 진리를 기필코 찾아야 되겠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여러분들은 자신의 어떠한 수고와 희생과 고난을 무릅쓰고라도 그러한 진리를 찾아 이 땅에 심어 놓아야 할 세계적인 사명을 짊어지고 있음을 명심해야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인연을 맺고 온 한 사람이 있다는 이 말은 인류 역사노정에 있어서 그야말로 복음 중의 복음입니다. 이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오늘날 여러분은 예수가 주장하던 진리를 추구하여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 자신이 역사적인 인연, 또는 시대적인 복된 믿음의 인연을 갖추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심정을 통하여 흘러나오는 역사적인 인연에 하나된 자신이 되었습니까? 못 되었다 할진대,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역사적인 노정을 계승하여 오늘날까지 인연맺어 나오던 그 인연을 범한 죄인인 것을 알고 무조건 머리숙일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또 시대적인 인연을 대신하여 복음의 말씀을 전하셨고 시대적인 책임을 감당하기 위해 실천적인 노정을 걸으셨던 예수님의 30여 생애노정을 유린한 자신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연을 통하여 소개하였던 그 복음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이런 인연을 알지 못하는 사람, 그는 빚 중의 큰 빚을 진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인연을 통한 예수 그리스도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기독교의 진리인데, 그 진리 앞에 오늘날 우리들은 빚진 사람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늘 앞에 예수가 나설 때까지는 4천년이라는 하나님의 수고가 있었고 하나님의 심정과 역사 과정의 수많은 선조들의 피가 여기에 얼룩져 있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다시 한 번 느껴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이제 여러분이 이념의 인연을 찾기를 고대하고 그 인연에 의한 자기의 위치를 찾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 할진대, 전후 좌우와 양 어깨에 짊어진 큰 빚의 무게를 여러분은 느껴 본 때가 있습니까? 천륜을 움직여 나가는 인연과 법도는 오늘날 이러한 분야에서 우리를 재촉하고 있으나 우리들은 나 하나를 중심한 개인적인 인연에 머물러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러한 인연에만 머물러 산다면, 그리고 그 인연에서 헤어나지 못한다면 여러분 앞에는 천정을 통한 심판이 기다릴 것입니다. 혹은 역사노정에서 순교한 수많은 선열들의 피가 호소할 것입니다. 그런 권내에서도 하늘을 대하여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었던 예수님의 심정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마음이 통할 수 있었고 역사 과정에서 수고하신 아버지의 전체의 심정이 예수로 말미암아 위안받을 수 있었습니다. 또 예수 한 분으로서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전체의 소망을 대신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는 이와 같이 역사노정에 있어서 그 어느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단 한 분밖에 없는 어마어마한 존재였음을 그때 당시의 사람들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리하여 몰랐던 역사적인 서러움을 해원하고 영광과 기쁨의 모습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는데 그 뜻이 반대로 슬픔의 모습으로, 십자가의 제단으로 나타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바라보셨던 아버지의 심정을 오늘날 여러분들이 무엇으로 해원해 드릴 것인가? 이것이 문제 중에 제일 큰 문제입니다. 그래서 예수가 왔다 간 이후 영적 복귀역사는 우리의 심령복귀의 노정에 있어서 뒤집혀지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오늘날 천주적인 인연의 사명을 감당하여야 할 사명적인 분야에 있어서 상하의 관계는 물론이고 심령도 통일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생명체의 한 세포도 통일된 심정에 의해 움직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런 사실이 역사 과정을 거쳐서 내 마음에 통할 수 있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역사적인 책임을 지고 우시던 예수,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시던 예수, 밤을 새워가며 기도하시던 예수, 십자가에 돌아가시던 그 예수와 어떠한 부분의 인연을 갖고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아버지여! 저는 미약하오나 예수의 한 부분의 짐이라도 맡겠나이다.’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비통한 심정을 어느 누구와도 의논하지 못하고 우시던 그 안타까운 심정을 느끼어 같이 울 수 있는 비장한 심정을 가져야 하고 그런 마음으로 예수의 어려운 사정의 한 부분이라도 맡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여러분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예수님을 붙들고 밤을 새워 가며 기도하는 무리가 교회에 적어도 세 사람은 있어야 망하는 자리에 들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교회, 그런 교단은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전한 복음이 이 지구상에 전파되어 수많은 교단을 이루고 있지만 예수의 뜻을 벗어난 기독교를 바라볼 때, 오늘날 우리들은 다시금 반성하여 3년 공생애노정에서 허덕이던 예수의 발자취를 뒤따를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심정과 역사적인 심정을 통하여 그때 당시의 유대교인들을 바라보고 사람 앞에 나타날 때는 늠름하고 자신이 넘쳐 있었으나, 돌아서서는 남 몰래 눈물을 흘리며 우시던 분이었습니다. 형식과 의식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심정의 인연에서 뿐만 아니라 정도에서 벗어나는 인간들을 바라보게 될 때에 채찍을 들어 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들은 우리들의 심정과 생활의 인연을 통할 수 있는 예수의 마음을 찾아야겠습니다. 또 그런 무리는 어디 있는가 하고 찾아야 되겠습니다. 또 그러한 마음을 갖지 못했다 할진대, 이것을 다시 누구에게 유업으로 넘겨줄 것인가를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이런 입장에 처해 있는 우리라 할진대, 과거에 저끄러진 역사적인 모든 과오를 내가 대신 짊어져야 하겠습니다. 나아가 지난날의 슬픔만 알아 가지고는 안 됩니다. 그것을 넘어서 앞으로 소망하는 심정까지 알아 가지고 ‘이 모든 것을 내가 책임지겠사오니 쉬시옵소서.’라고 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이런 마음에 불타가지고 이루어 놓은 어떤 생애의 일편이나 혹은 생활의 일편도 없다 할진대 회개하여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이 세계는 어떠한 시대를 향하여 움직이고 있는가? 현재는 물질을 중심삼고 싸우고 있는 시대인데 앞으로는 사상을 중심한 투쟁시기가 다가옵니다. 즉 인간의 몸을 대신할 수 있는 물질주의 시대를 넘어서 마음을 대신할 수 있는 사상주의 시대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몸과 마음이 있고, 마음 위에 영이 있으며, 영 위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과 완전히 하나되어야만이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비록 작은 하나의 개체지만 전체의 역사를 대신한 존재요, 미래의 모든 인연을 대신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천주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러면 인류역사는 무엇을 이루기 위하여 지금까지 흘러내려 오는가? 수많은 우리의 선조들, 우리의 선지 선열들은 무엇을 바라고 나왔는가? 타락한 인간이었기 때문에 먼 곳으로 부터 인연되어 가지고 중심으로 찾아 들어오고 있습니다. 즉 씨족주의 시대로부터 부족, 민족을 거쳐서 국가시대와 국제시대, 세계적인 연맹시대를 거쳐나오고 있는데, 여기에서 하늘은 하나의 대표적인 사람, 즉 역사적인 인연과 시대적인 인연과 미래적인 인연을 겸한 그 터전 위에 하나님의 심정을 결부시킬 수 있는 하나의 사람을 찾아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명심해야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1차대전 당시에는 물질을 중심한 투쟁시기였습니다. 즉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마음을 걸어 놓고 물질을 찾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세계가 물질만능주의를 부르짖는 때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떤 시대나 다 통하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은 자기 생애의 인연을 찾아가는 데 있어서 자기의 마음을 앞에 모시고 나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천륜의 철칙입니다. 마음의 명령에 복종치 않는 자는 하늘이 때립니다. 지금까지 하늘은 역사노정에서 인간에게 자신의 마음을 중심으로 선 편에 속하여 양심대로 살되 어떠한 물질적인 악의 조건에 걸리지 말고 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인간의 양심 기준은 천륜의 심정을 백 퍼센트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어 있는가? 그렇게 되어 있지 않고 수많은 장벽이 가로막혀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바라는 희망봉, 즉 천국의 관문 앞에 곡절의 문이 가로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심판의 관문입니다. 오늘날의 사조는 공포와 불안과 혼란의 시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즉 중심을 잡을래야 잡을 수 없는 시대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물질을 많이 가지고 있어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을 지을 때 물질인 몸뚱이를 먼저 지은 후에 영을 불어넣어 지으셔서 영과 육으로 되어 있는데 영이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계가 물질적인 권한을 중심삼고 하나로 움직일 때 무슨 투쟁시기가 나타날 것인가? 사상투쟁시기가 나타날 것입니다. 실제로 그러한 현상이 2차대전 이후로 농후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을 중심하는 사상의 시대가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면 사상은 어떠한 사상이어야 할 것인가? 물질을 뚫고, 마음을 뚫고 영을 중심한 사상이어야 할 것입니다. 영을 중심한 사상의 시대를 찾아 나가는 것이 복귀노정입니다. 인간들은 이것을 잃어버린 상태에 아직도 머물러 있고, 영과 양심과 몸의 조화를 잃어버린 상태에 아직도 머물러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양상이 이 세계에 상징적으로 벌어졌다는 것입니다. 즉 오늘날의 세계는 민주와 공산의 양대 진영으로 대립하여 싸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싸움은 하나님과 사탄도 대결하는 싸움이요, 인간끼리는 종교를 중심삼고도 투쟁하는 싸움입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세계를 움직이려는 종족이 있다 할지라도 자기들의 방편과 수단을 가지고는 세계를 지배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상의 판도는 현상황으로 보면 둘이지만 원칙은 둘이 아니라 넷이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제3세계의 나라들이 사탄 편적인 종교형식을 갖추면서 좌익진영과 손잡고 있듯이 민주진영에서도 새로운 종교형태를 갖추어 세계 사람들과 손잡을 수 있는 어떠한 무엇이 나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기독교를 중심삼은 세계적인 종교운동이 나타나리라고 봅니다.
다시 말하면 세계 기독교는 민주진영 안에서 양심적인 권내에 해당되는 분야에 있기 때문에 상대적인 진격전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두 마음이 있어 싸우는 것과 같이 두 세계의 충돌이 있으리라고 보는 것입니다. 인간이 바라는 것은 하나의 기점입니다. 둘이 하나로 합해지는 기점, 그 기점은 인연의 출발이요, 인연의 종합이요, 인연의 결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체적인 인연을 통할 수 있는 내심적 기준을 세워 그것을 생활의 중심으로 하여 살아야 합니다. 그러한 하나의 생활의 무대를 지상에 이루어 가지고 그 가치가 전체 인류의 심정을 통하는 공동적인 가치로 나타날 수 있는 입장이 조성되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면 세계는 심판의 때를 맞이할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긴박한 역사 과정에 처하여 있는 오늘날 청년 남녀들은 자신의 결심을 정비해 가지고 하늘을 향하여 새롭게 전진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우리가 세계의 근세사를 돌이켜보면 문예부흥 이후 불란서의 정치혁명과 1차대전 이후로는 물질문명이 극도로 발달하였습니다. 그런데 산업혁명이 있을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느냐 하면, 증기와 가솔린의 힘을 이용할 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증기와 석유를 발판으로 산업혁명이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그후 이 단계를 넘어서 20세기의 전반기에 들어오면서부터는 전기문명으로 전환되었습니다. 물과 석유는 물질이지만 이제는 보이지 않는 전기의 힘을 이용한 전기문명시대가 왔습니다. 그리하여 물질을 움직여 빛을 발하게 한 단계 이후에는 무엇이냐 하면 열의 문명시대, 즉 원자력시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지막 시대입니다. 이와 같이 역사는 3단계의 산업혁명 과정을 거쳐 나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역사노정에 나타난 경제체제나 다른 무엇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어떤 자극적인 계기를 만들 수 있는 민족과 백성이 있다 할 진대, 그 민족과 백성은 세계를 지배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영국이 그런 사명을 짊어지고 나왔는데 그것을 자기들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물질문명이 발전해 나가는 데 있어서 그 시대시대를 깨뜨릴 수 있는 조그마한 불꽃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한 사람의 움직임이 세계를 움직여 낼 줄을 누가 알았던가? 아무도 몰랐습니다. 오늘날 물질문명의 최후 단계에 있어서 원자력이 나와 가지고 하나의 불꽃을 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불꽃을 누가 인계할 것인가 하는 이것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러면 물질단계가 지난 후에는 어떤 단계에 들어갈 것인가? 사상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찾아 들어가야 할 섭리가 있기 때문에 문예부흥 이후의 사조를 중심삼고 17, 18세기를 계기로 하여 지금까지 급격한 변화의 시대를 겪어 나오고 있습니다. 사상의 교차가 몇 번씩이나 거듭된 이후 지금에 와서 이루어진 것이 좌우의 2대 주의입니다.
그런데 끝날인 이 시대에 있어서 이 두 주의에게 요구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것은 마치 물질문명을 자랑하는 여기에 원자력이 나와 하나의 불꽃을 던진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가 서로 우월성을 자랑하는 이 시대에 있어서 하나의 불꽃이 될 수 있는 새로운 주의라는 것입니다. 만일에 그러한 하나의 불꽃이 될 수 있는 새로운 주의를 찾고자 하는 심각한 마음으로 불타는 청년 남녀가 있다 할진대 잠을 못 자고 그 문제를 해결짓고자 할 것입니다.
어차피 싸움은 붙었으니 판결짓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처해 있습니다. 훌륭한 주의가 나오게 될 때에 물질을 지배했고 마음이 완전할 때에 그 몸을 지배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사상적인 주의가 나와 가지고 세계적인 경제력을 휩쓸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도 2차대전까지는 경제적으로 자꾸 번영하더니, 이제는 주의를 찾아야 할 시대가 되었기 때문에 물질적으로 얻어맞고 있습니다. 이것은 일면 생각하면 고맙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버리는 데는 멋있게 버리라는 것입니다. 원조니 뭐니 하지 말고 버릴 줄 아는 국가답게 과감히 버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앞으로의 시대에 있어서 우리들이 제시하여야 할 문제입니다.
나아가 여기 민주주의에 있어서 무엇이 문제인가? 사상의 불꽃을 튀겨낼 수 있는 이 힘이 어디서 나올 것인가, 또 그 힘이 우리 마음에서 이루어진다 할진대 폭발할 수 있는 그 불꽃은 어디서 타오를 것인가 하는 이것들이 문제입니다. 이러한 문제는 여러분의 마음으로써 해결이 안 됩니다. 이것들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영입니다. 따라서 영적인 불꽃을 일으킬 수 있는 혁명을 일으키는 사람이라면 그는 과거에 하늘 뜻을 위해 수고한 어떤 도인보다 또는 오늘의 주의 주장, 혹은 어떠한 세계적인 이념보다 더 귀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을 중심한 경제체제의 불꽃을 던져 가지고 세계의 경제를 흡수하자는 것입니다. 또 영적인 사상과 주의 형태의 불꽃을 던져 가지고 세계를 움직이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계는 두 갈래의 길로 나타나 있습니다. 즉 공산주의는 버려야 할 물질을 버리지 않고 찾아 들어가서 자멸해가고 있는데 반면 민주주의는 고마운 것이 하나님을 찾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두 세계가 분기되는 기로에 서 있음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인간은 복귀노정에 서 있기 때문에 몸은 마음에게 굴복하고 마음은 영에게 굴복하고 영은 하나님에게 굴복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천륜이 세워준 절대적인 인연의 법도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을 어기고 존재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양심에서 호소하는 것을 ‘네 이놈!’ 하면서 굴복시킬 수 있는 용기를 가졌습니까? 지금은 마음에 굴복하지 않지만 죽는 날에는 굴복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여러분은 물질을 박찰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는가 반성해 보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까지는 주의의 시대였기 때문에 양심적으로 살면 된다고 하는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종교생활하는 사람이 오히려 타락되어 떨어지고 있습니다. 또 ‘종교고 무엇이고 간에 그저 양심적으로 살면 되고, 천당이고 무엇이고 다 쓸데없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원칙적인 노정은 그렇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주의 사상을 거쳐서 마음이 마음으로서의 권세를 갖고 몸을 칠 때에, 그때 마음의 권세는 어디에 나타날 것인가? 마음의 주관, 권한이 쓰러지는 날에는 어떠한 세상적인 주의 가지고 마음의 권세를 다시금 나타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신앙자들은 대부분 고집을 갖고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오직 영에만 굴복하겠다는 이념적인 조건을 갖고 있기 때문에 누가 뭐라 해도 말을 안 듣습니다. 그러면 그런 사람을 붙들고 내 마음이 그런 사람을 주관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느냐 하면 못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못 가진 마음을 혁명시킬 수 있는 불꽃은 어디서 나타날 것인가? 여러분은 시야를 높이어 민족을 넘고 세계를 넘어 종교와 교권을 넘어 항의할 수 있는 배포가 있습니까? 귀로 들어오는 천만번의 설교보다도 마음을 울려 주는 한마디의 말에 머리 숙일 줄 아는 사람이 참다운 종교인입니다. 오늘날 구원이 천당에 있는 줄로 알지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마음을 비쳐 줄 수 있어야 참된 구원의 역사를 일으키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날 주의가 정착지를 못 찾고 있듯이 우리의 마음도 정착지를 못 찾고 떠돌고 있는데 그래서는 안 되겠습니다. 만일 이런 마음을 갖고 편안한 잠을 자는 사람은 말단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은 여러분 자신들의 생명과 선조들의 생명을 구해야 할 각성시대입니다. 이것을 생각하게 될 때, 내 한 자체는 이렇게 자유롭게 움직이고 살 자체가 아닙니다. 우주적인 인연권 내에서 나의 실존가치를 세우기를 이 모든 존재세계는 고대하고 있다는 것을 실체적으로 느껴야 합니다. 마음으로 느끼고 머리로 느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는 정적으로 느낄 수 있는 자리까지 나아가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오늘날 인간들을 바라보고 ‘너무 불쌍합니다. 아버지여! 그러나 아버지께서 양심을 가진 인간 앞에 물질을 줘야 할 책임과 참다운 마음을 가진 자의 몸을 주관하여야 할 뜻을 아옵고, 참다운 영 자체가 아버지의 주관을 받아야 할 것을 저희가 아옵니다.’라고 하면서 자기 자신에게 태산 같은 황금과 보물을 갖다 주더라도, 그것이 마음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할 진대는 그것을 과감히 버릴 수 있어야겠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와 같이 크나큰 물질적인 고통을 훌쩍 넘어설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 몸의 가치는 우주보다도 더 크니 이 우주보다도 더 큰 몸뚱이를 내 마음이 굴복시킬 때 내 마음은 우주적인 가치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오늘날 종교적인 모든 문제가 여기에서부터 일어납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불교를 바라보면, 불교도 역시 마음을 찾는데 주력하는 종교입니다. 마음 하나 밝히면 만법에 통하느니라(明一心通萬法). 이것이 불교 교리의 총결론인 것입니다.
오늘날 연결되어 들어오는 물질은 역사적인 죄악의 담을 쌓던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그 물질 앞에 머리 숙여서는 안 되겠습니다. 마음이 원치 않을 때는 무자비하게 자를 수 있는 그런 무리를 하늘은 요구하고 있음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 민족이 불쌍한 가운데 있지만 이런 원칙에서 헤아려 보게 될 때에 한 가지 소망을 갖게 됩니다. 우리는 대체로 물질에 궁한 백성입니다. 여기에 살길이 있다 할진대는 이제는 마음을 합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붙안고 마음의 굶주림을 호소하며 허덕이는 무리가 나오기를 하늘은 바라고 있다는 것입니다. 굶주리고 허덕인 이 마음과 합하여 영적인 불꽃이 일어나야 될 때가 왔기 때문에, 이 나라 이 민족은 경제적으로 또 마음적으로 궁핍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들이 염려하여야 할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을 찾아 영적인 불꽃을 일으킬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모든 문제는 거기에 귀결될 것입니다. 과거 혼란시대에 있어서 피가 튀고 살이 찢어지는 골고다의 죽음의 고개를 웃음으로 넘을 수 있었던 초대 기독교 신자들이 새로운 불꽃을 던져 가지고 세계적인 혁명을 일으켰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여러분도 그러한 영적인 최후의 불꽃을 던져 새로운 역사를 일으켜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지금까지 믿고 있던 주의와 신앙의 내용까지 전부 밀어내고 마음의 혁명을 일으킬 수 있는, 즉 새로운 불꽃을 일으켜야 할 사명이 최후에 남아져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울부짖는 최후의 소리가 있다 할 진대, 그것은 ‘이 메마른 마음과 몸의 동산에 하늘이 던질 수 있는 영원한 불꽃을 주시옵소서.’라는 소리일 것입니다. 그 불꽃이 이 민족을 구하는 날에는 세계 전체가 그 불꽃을 일으킨 사람에게 머리숙일 날이 온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인연권이 나타나면 지금까지 역사시대에서 보지 못하던 모순된 현상이 벌어집니다. 그때에는 미지의 수수께끼와 같은 사건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그 해명은 내 마음으로는 안 됩니다. 어느 누가 내 생명을 끌어간다 해도 아니라 할 수 있는 어떠한 새로운 충격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것은 평면적인 작용이 아니라 입체적인 작용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이런 역사 과정을 내적으로 어떻게 거쳐왔는가?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오기 전까지는 먼저 물질을 통하여 대속하는 시대를 거쳐 나왔습니다. 몸뚱이를 잃어버린 인간이 아버지 앞에 나가기 위해서는 먼저 물질을 아버지 앞에 내놓는 시대를 거쳐야 합니다. 즉 제물시대를 거쳐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물시대의 열매로서 예수가 맺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를 중심삼고 영적인 불꽃을 이루어 놓았기 때문에, 그 후 예수를 중심삼은 신령적인 주의 형태로써 역사가 이루어져 나오고 있습니다. 또한 그것이 금일에는 수많은 형태로 나타났다가 다시 두 갈래로 규합되고 있고 나아가 이제 세계는 기독교를 중심삼고 통합운동이 벌어질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상상하지 못하던 천정을 느끼게 하고 양심과 몸이 조화를 이루게 할 수 있는 새로운 무엇을 제시해야 할 섭리가 오늘날 기독교에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작은 규모의 흥망이 거듭되다가 나중에는 점점 크게 벌어지게 됩니다. 그리하여 크게 올라간 하나와 크게 내려간 하나, 즉 이 양극의 흐름을 합류시키기 위하여 역사적인 전환점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배후적인 기점과 미래적인 기점을 중앙에 귀일시켜야 할 때가 ‘이념복귀 완성시대요, 역사복귀 완성시대요, 복귀섭리 종결시대’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또 개인에 있어서 외적인 세계관과 내적인 섭리관을 자기에게 결부시켜야 할 때입니다. 인간은 원칙적인 인연의 세계에서 탈선한 존재이기 때문에 기필코 한번 청산해야 합니다.
인간은 영이 있고, 마음이 있고, 몸이 있습니다. 또한 주위에는 생활 환경이 있고 만물이 있으며 땅이 있습니다. 그런데 먼저 땅이 생겼고 그 다음 만물이 생겼고 그 만물을 우리 인간이 먹으며 살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몸이 자라고 마음이 자라고 영을 성장시킵니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칙적인 법도입니다. 어떤 혁명을 일으킨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 법도를 탈선하여 산 사람은 아직까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탈선하지 않은 직선상의 인연적인 조건을 세워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여러분은 세계를 찾아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그런 욕망이 있습니까? 모두 그런 욕망이 있을 것입니다. 이 땅을 내 땅 만들려고 하는 것, 온 만물을 내 만물 만들려고 하는 것, 그것은 욕심이 아닙니다. 원칙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참아들딸이 되면 하나님의 것이 내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의 아버지 집이 부자라면 그것들이 자동적으로 내 것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 원칙이라는 것입니다.
또 존재계 전체를 분석해 보면, 물질 배후에는 사람, 사람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런 기준에 들어가야 세계적인 이념과 세계적인 물질을 찾을 수 있는데, 먼저 세계적인 사람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도 세계적인 사람을 찾기 위한 운동을 전개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세계적인 인연을 찾은 연후 천주적인 인연을 맺고자 하셨다는 것입니다. 즉 한 단계씩 높아지는 것이 하늘의 섭리입니다. 따라서 이런 복귀의 운명을 벗어날 수 없는 인간임을 여러분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알고 보니 주의와 섭리와 역사가 이렇게 된 이 마당에 있어서, 여러분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공산주의는 물질주의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반드시 깨집니다. 민주진영은 하늘을 찾아 올라가야 하는데 누구를 중심삼고 올라갈 것인가? 이것이 우리들이 해결해야 할 사명분야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이제까지의 주의 사상에서 기대하던 이상의 참다운 사랑과 그 가치를 나타낼 수 있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물질을 넘어서고 영을 넘어서 하나님 앞에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세계적으로 보면 지금은 마음을 넘어서 가지고 영적 시대로 들어가는 때이기 때문에, 오늘날 길거리에 광인이 많이 나옵니다. 양심이 예민하고 양심대로 살겠다는 사람에게 영계가 습격해 들어와 그러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내 양심 위에는 악한 영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내 몸이 사탄주관권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 양심이 한 단계 올라서면 그 위에는 악령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런고로 내 몸을 지배하는 악령을 무찌르고 그 대신 선령을 나타내야 할 것이 최후의 영적인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양심적인 사람들 중에서 정신이상자가 많이 나옵니다. 공포증 같은 것이 많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세계적인 공포증이 생기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내 양심을 중심삼고 그 공포증과 싸워 나갈 수 있는 열정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중심이 잡혀진 사람은 세계의 어떠한 혁명도 그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하늘땅을 움직여낼 수 있는 하늘적 혁명이 아니고는 그를 움직여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사람들이 가진 결심은 영원한 결심인 것입니다. 어떠한 원자폭탄이나 또는 여하한 것이라도 돌고 있는 그 궤도와 법도를 변하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변치 않는 양심을 중심삼고 하나의 원칙을 세워 가지고 천리원칙의 이념과도 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 가치를 내 실체의 마음과 몸의 이념권 내에 있게 해서 하늘과 일직선상의 관계를 맺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그 모든 것을 생활적인 무대에 백 퍼센트 실천할 수 있는 가치를 만물세계와 인간세계 앞에 제시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있다 할진대는, 여러분은 바로 그것을 찾은 사람이요, 모든 것을 소유한 사람일 것입니다. 이러한 이념의 목적을 거쳐 나가야 할 사명이 우리들에게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문제는 무엇인가? 세계를 대하여 부르짖는 어떠한 주의가 있어도 나와 인연이 되지 앉으면 관계가 없고 세계를 대하여 벌어지는 어떠한 심적인 혁명의 불꽃도 나와 인연이 되지 않으면 하등의 관계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그러한 관계를 맺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나의 가치를 우주적인 가치로서 알고 이 세상에 비할 수 없는 몇천만 배의 가치로 알게 될 때에 이 지구의 모든 원한을 풀 수 있게 됩니다. 나아가 여러분은 또한 만민을 품어 그들의 모든 심적 기준을 맞춰 줄 수 있어야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마 16:26)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우주시대에 들어와 있다 해도 마음의 세계에는 그 어느 것도 미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어마어마한 이념을 땅의 이념으로 삼고 노래하면서 살아야 할 것이 인간임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제 여러분이 그러한 심적인 인연의 섭리를 거쳐 나타날 때에 여러분 한 개체는 하나님도 어쩔 수 없고 사탄은 더욱 어쩔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악이 어떻다 해도 돌 아니라 무쇠라도 소화시킬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주의, 어떠한 사상도 여러분을 삼켜 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이러한 큰 인연적인 개인의 선의 가치를 알아야 되겠고, 또 그 큰 인연적인 가치에 귀결될 수 있는 다리를 놓아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나와의 다리를 놓아 가지고 과거에 남겨진 단위 중에서 소수의 부분을 통해 가지고 전체의 가치를 세워야 되겠습니다. 이것이 결정적인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여러분은 자신의 개인의 인연에서 나아가 대우주적인 인연을 맺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것을 현실에 맞혀 떨어뜨려야, 즉 제로(0)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비로소 내가 하나님적인 하나의 존재로 서게 되고, 온 우주의 하나님도 하나의 존재로 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큰 하나님과 작은 하나님이 서로 천적인 가치를 노래할 수 있는 그 세계가 우리들이 소망하는 인연완성 세계요, 지상천국세계인 것을 여러분들은 명심해야 되겠습니다.
아버님! 아버지를 모시고 겸손히 경배드리고 싶은 마음이 없는 사람은 영원한 저나라에서 아버지와 인연을 맺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이제 저희들, 마음의 문을 열고 찾아가게 될 때 그 마음의 중심에 아버지의 심정을 느껴서 내 마음의 주체적인 명령에 내 몸이 따라 줄 수 있는 그리운 그날을 찾고 있사오니, 오늘 저희의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당신의 음성을 들어서 잃어버렸던 자신의 몸을 찾을 수 있고, 아버지께서 나 하나를 찾기 위하여 내 배후에서 환란과 수고의 역사 과정을 거쳐온 것을 느껴 스스로 머리숙일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아버지에 대한 황공한 마음을 스스로 몸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을 찾아오시는 아버지는 언제나 영광의 아버지로서만 찾아오시는 줄 알았는데 아버지는 슬픔의 주인공으로, 혹은 고통의 주인공으로 찾아오시었고, 비운의 표정으로 찾아오시었습니다. 이런 아버지인 것을 몰랐던 연고로 저희가 저희의 슬픔을 아버지께 맡기기를 원했었고, 저희의 어려움을 아버지께 맡기기를 원했었으며, 저희의 비운을 아버지께 떠맡기기를 원했었던 것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이런 역사노정을 걸어오시면서 슬픔을 가누시고 탄식하며 찾아 주신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없는 타락의 종족임을 저희가 깨닫고 천만년의 아버지의 수고를 덜어 드리려 한다 할진댄, 아버지의 슬픔의 노정을 모르는 아들딸이 없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나의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나이다.
이날 저희들을 불러 주셨사오나, 모인 저희들 무슨 면목이 있겠사옵니까? 원하옵건대, 아버지의 사정을 풀어 드릴 수 있는 무리들이 이 한 마당에 모여지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그러한 일들이 이 한 청중들의 몸 마음에서 넘쳐 흐르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나이다.
이 한 시간 아버지, 저희들을 품어 주시옵고, 잃어버렸던 아버지의 은사를 다시 회복하여 저희들의 죄를 청산하는 이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이 한 시간 맡아 주관해 주시고, 아버지! 당신의 말씀을 전하고자 원하오니 주는 자의 마음과 받는 자의 마음이 둘이 되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고, 이것을 공격하는 무리는 저희들이 아니옵고 사탄임을 아옵니다. 저희의 속된 마음이 악한 사탄과 교류하는 것을 원치 않사오니, 오직 아버지의 뜻만 믿게 해 주시옵소서. 엎드려 아버지 앞에 회개하게 해 주시고, 저희가 천명이 지시하는 길을, 아버지와 다른 마음을 갖고 가는 일이 없게 해 주시옵소서. 만약 그런 마음의 간격이 조금이라도 있다 할진대는 그것을 타개하기 위해 전체가 합심하여 이를 넘어설 수 있는 간절한 마음을 갖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이날은 거룩한 날이오니 뜻을 알지 못하는 불쌍한 만민을 축복하여 주시옵고, 불쌍한 자리에 처해 있는 삼천만 민족에 복을 내려 주시옵고, 이 민족을 위하여 수많은 아들딸들이 무릎을 꿇고 경배하는 곳곳마다 축복의 손길과 사랑의 손길을 펴 주시옵길 바라옵나이다. 고성 지르고 싸우는 민족을 긍휼히 보시어서, 아버지! 서로서로 용납하고 참을 수 있는 관용심을 가지도록 허락하여 주시옵길 바라옵니다.
땅을 붙들고 울어야 할 이때, 당신의 사정을 붙들고 울어야 할 이때에 아버지의 심정을 가진 자들이 있다 할진대 이들을 하늘 편에서 수습할 줄로 믿사옵니다. 저희들의 모습을 아버지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하늘을 따라 나간다고 하면서 원수를 따라 나가는 불쌍한 무리들, 원수 아닌 자를 원수로 알고 치기에 급급하고 있는 어리석은 무리들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이들의 생명을 누가 지키겠습니까? 이들의 갈 길을 누가 밝혀 주겠습니까? 아버지의 말씀을 받아 감당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민족의 운명을 염려하시는 아버님의 뜻이 있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민족의 갈 길을 염려하시는 아버지시여! 세계적으로 몰리는 이 민족을 불쌍히 보시옵소서. 이 민족을 대표하여 하늘을 우러르며 정성의 제단을 쌓고 있는 수많은 무리를 기억하여 주시고, 끝날 심판의 채찍이 이 민족 앞에 내려지지 않기를 마음 다하여 호소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제 저희들, 아버지 앞에 먼저 호소하고 나아가야 할 책임이 저희들에게 있다는 것을 알았사옵고, 저희들이 이 책임을 위하여 살고, 이 책임을 위하여 기도하고, 이 책임을 다하기 위하여 하늘을 향해 호소하고, 아버지를 중심삼고 산다 할진댄 기필코 아버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질 것으로 알고 있사옵나이다. 하오니 이 무리들을 그런 자리에 세워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이 한 시간 친히 주관하여 주시옵기를 부탁드리며,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이 시간은 ‘사랑하는 아들딸이 되어 인침을 받는 자가 되자’라 는 제목을 가지고 잠시 동안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떤 소망의 세계를 바라는 마음이 있을 때 그 소망과 인연된 자리에 있을 수 있다면, 그 소망의 중심 가운데 남아지기를 바라는 것은 오늘날 인간들이 갖고 있는 공통된 심정일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소망이 있다 할진대는 그 소망 가운데 여러분 자신들이 남아지기를 바라는 것이 또한 여러분들의 마음일 것입니다. 한 가정을 보더라도 그 가정에는 그 가정을 통솔해 나가는 주인이 있는데 식구들이 그 주인의 마음에 남아지기를 바라는 것도 같은 마음에서일 것입니다. 국가도 그렇고, 세계도 그렇고, 천지 만물을 찾아 나오신 아버지의 섭리의 뜻도 그러하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여러분이 섬기는 지도자의 마음에 기억될 수 있어야 될 것이고, 어떤 종교를 믿는다면 그 종교의 교주의 마음에 기억될 수 있어야 될 것이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이 있다 할진대 그 하나님의 마음에 기억되는 여러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일시적으로 기억되는 여러분이 아니라 아버지의 소망과 사정을 걸어 놓고 또 아버지의 심정을 걸어 놓고 영원히 기억될 수 있는 그런 아들딸이 있다 할진대, 하늘은 그 아들딸을 붙들고 모든 사정을 얘기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6천년 수고의 섭리로써 찾아 모아 나오신 전체의 복을 무조건 넘겨주려고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심정임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 부모의 혈육을 받아 하나의 존재로 태어난 여러분은 결코 무심한 존재가 아닙니다. 역사적인 종교를 지배해 나오는 하늘이 있고, 하늘의 운세를 따라 움직여 나오는 세계가 있고, 세계의 운세를 연하여 소망을 갖고 나가는 국가가 있고, 국가의 법도를 따라 나가는 가정이 있고, 인륜을 따르는 내 개인이 있음을 인정한다 할진대는, 하늘은 세계를, 세계는 국가를, 국가는 사회를 거쳐 가정으로, 가정은 나에게까지 원만한 인연이 맺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계가 설정되어 있음을 여러분은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입장에 선 나, 부인할래야 부인할 수 없는 환경적인 인연을 갖고 있는 우리는 지금 누구를 위하여 움직이고 있는가! 여러분의 가정은 어디를 향하여 가고 있는가! 이 나라와 이 세계는 어디를 향하여 가고 있는가! 이것들은 우리가 깊이 생각하여야 할 중대한 문제들입니다.
인간시조의 타락 이후 하나님은 인간들을 대하여 슬퍼하셨다고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슬픔은 어디로 흘러가고 있겠습니까? 즉 어디에 머물기를 고대하여 흐르고 있겠습니까? 또 하나님의 고통은 어떤 역사 노정을 거쳐, 어떤 민족을 거쳐, 어떤 혈족을 거쳐 어떤 사람에게 전달돼 왔겠습니까? 하나님의 소망은 또 어떤 역사노정을 거쳐서 어떤 것과 관계 맺기 위하여 움직여 왔겠습니까? 그것은 세계도 아니요, 국가도 아니요, 가정도 아니요, 바로 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망은 나 하나에서부터 결정지어져야 된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고로 하나님이 인정할 수 있는 하나의 발판을 갖지 못하였다 할진대 하늘이 아무리 좋다 하더라도 관계가 없고, 내가 내 자신에서 결정지을 수 있는 하나의 기준을 세우지 못했다 할진대 아무리 세계적인 이론이 나타났다 해도 그 이론은 나와 하등의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나 하나를 기점으로 역사적인 서러움이 좌우되고 역사적인 고통과 어려움이 좌우되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 자신의 심정으로, 몸으로, 혹은 뼈와 살에 사무치게까지 느껴 본 적이 있었습니까? 없다 할진대는 피눈물을 머금고 혈투전을 거쳐 죽음의 길도 불사하던 선조들이 여러분을 참소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역사적인 신앙인들이 남겼던 전통과 인연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그 인연을 망각해 버리는 무리가 있다면, 그들은 온 세계 천륜, 인륜을 총합한 우주 앞에 배은망덕한 자가 될 것입니다. 이제 이것을 깨달아야 될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개개인이 내면적인 신앙을 함에 있어서 천륜 앞에 먼저 느껴야 할 것은 무엇이며, 먼저 찾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기쁨이 아닙니다. 행복이 아닙니다. 결코 영광이 아닙니다.
인간이 하늘로 하여금 슬픔을 느끼게 한 연고로, 먼저 찾아 나서야 할 것은 이 땅을 지배해 나온 천적인 슬픔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도의 길을 가고 있는 사람들은 어느 시대 어느 세계를 막론하고 하늘의 눈물을 거두게 하기 위하여 고통의 십자가를 넘는 자요, 억울한 탄식의 자리에서 하늘 앞에 호소의 제단을 쌓고 있는 무리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다면 하늘은 어찌하여 사랑하는 아들딸을 이런 십자가의 길로 내모는가? 그것은 하늘의 인연이 이 세계와 국가를 거쳐, 민족을 거쳐, 사회를 거쳐 가정을 거쳐 나에게까지 인연되어지고 세계의 인연이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통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늘의 사정을 대신한 하늘 편 아들딸이라는 위신을 세워 주기 위하여 6천년 역사의 슬픔을 한 순간의 생애에서 느끼도록 하셔야 했던 하늘의 심정을 느낄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을 지어 놓고 거기서 영원히 행복을 누리기를 바라셨는데, 그 에덴의 복이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이 복을 잃어버린 하나님은 행복한 하나님이 아니라 슬픔을 떠맡은 하나님이 되었고, 나라와 만민들로부터 홀로 맞고 맞으면서 민족을 찾아 나오고, 온 우주의 복을 찾아 나오셨다는 것입니다.
이같이 인간들을 대한 비극적인 사정으로 엉클어진 역사노정을 거쳐오신 것이 하늘의 탄식의 노정이라 할진대, 그 탄식과 사정이 여러분과 깊이 결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책임이며 하늘의 책임인 연고로 인간이 하늘을 찾아 나가는 데 있어서는 하나님의 슬픔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고통과 슬픔과 억울함을 갖고 억만 사탄을 대해 싸워 이길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렇지 않고 그런 역사적인 심정을 체휼하지 못한다면 원수와 싸울래야 싸울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 땅에는 많은 재산을 갖고 있다가 그것을 잃어버리게 될 때 통분해 하는 사람은 있습니다. 혹은 자녀를 가졌다가 그 자녀를 잃어버리게 될 때 통분해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땅에 어떤 귀한 것을 가졌다가 잃어버리고 슬퍼하는 사람은 많으나 나를 잃어버리고 하늘을 잃어버리고서 슬퍼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온 우주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내 자신을 잃어버리고, 우주와 비할 수 없는 영광의 실체인 하늘을 잃어버리고 슬퍼하는 사람은 심히도 적습니다.
오늘날 도의 길을 가는 사람에게는 모으던 재산을 잃어버린 것이 슬픔이 아니고 나를 잃어버린 것이 슬픔이요 하늘을 잃어버린 것이 슬픔입니다. 하늘을 찾아가는 도의 길은 슬픔을 찾아 나가는 노정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네 등에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슬퍼하는 것으로 하늘의 슬픔을 대신할 수 있고 우리의 고통과 분함이 하늘의 고통과 분함을 대신할 수 있어야만이 아버지 앞에 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6천년 동안 걸어 나오신 걸음 걸음이 그러하기에 역사적인 섭리와 인연을 갖고 있는 여러분이 역사적 섭리의 주인공이신 아버지와의 인연을 맺으려면 그러한 슬픔, 그러한 고통, 그러한 억울함을 감당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천륜의 길이기에 역사노정의 각 시대 시대에 슬픔이 깃들었지만 계획하신 뜻을 이루어야겠기에, 즉 만물을 찾고, 백성을 찾고, 자녀를 찾고, 그리고 하나님 자신을 찾아야 되겠기에 하늘은 이런 길을 거쳐오신 것입니다.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천지를 잃어버리신 하나님은 하나님 노릇을 다 못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능력과 위신과 권한을 잃어버리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회복하기 위한 복귀운동이 오늘날 선을 지향하여 나가는 인륜의 지도이념의 기준이요, 도를 찾아 나가는 도인들의 심적 기준인 것입니다. 우리는 잃어버린 우주를 기필코 찾아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하늘이 인정하는 나 개인을 찾고 하늘이 인정하는 가정, 하늘이 인정하는 사회, 하늘이 인정하는 국가, 하늘 이 인정하는 세계, 하늘이 인정하는 우주를 찾아서 하나님의 뜻을 해원 성사해 드려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권한을 갖고 만물을 통치해야 하고, 하나님을 모실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이것이 생애노정을 걸어 놓고 찾지 않으면 안 될 중대한 문제인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렇게 하나님을 대할 수 없다 할진대, 아무리 하나님이 이 세계에 나타나도, 국가에 찾아와도, 아무리 하나님이 사회에 나타나도, 가정을 찾아와도 여러분 자신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역사 과정을 살펴보면, 어떤 시대에서든지 모든 주의나 이념이 천운을 향하여 움직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많은 이념이 규합되었고, 이제는 하나의 이념, 세계적인 이념의 시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주의든지 둘이 부딪쳐 싸우면 반드시 하나는 깨지는 것이 원칙입니다. 이제 우리는 인간을 중심삼았던 평면적인 싸움이 아니라 하늘을 중심한 입체적인 싸움의 시기에 영계가 우리를 습격하기 위하여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세계 도처에서 말세의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즉 정신병자가 많이 나타나고 있고, 신경 계통의 공포증 현상들이 생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아담이 타락 직후에 공포심을 가졌던 것과 같이 이 세계는 천륜을 배반한 피로 인해 말할 수 없는 공포를 느끼는 사람들로 가득 찬 세계로 되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이념을 잃어버린 세계가 됩니다. 이러한 때에는 나의 어떤 고집을 세운다 해도 통하지 않습니다. 이리 몰리고 저리 휩쓸려 그야말로 모든 것이 혼돈하여 중심을 갖지 못하는 우주의 종말시대에 처한 여러분은 이런 역사적인 전환점을 앞에 놓고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쓰러져가는 이 세상과 이 민족을 바라보고 여러분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늘이 나를 세워 민족 앞에 자랑할 수 있고, 나를 세워 이 우주 앞에 자랑할 수 있게 되려면, 하나님과 부자의 관계를 맺어야 하고 하나님이 만물을 주관할 수 있는 이념을 세워 놓았기 때문에 만물을 주관할 수 있는 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앞을 바라보아도 막혀 있고, 뒤를 돌아보아도 알 수 없고, 옆을 바라보아도 원수들이 있습니다. 좌우건 중앙이건 온통 내 한 자체를 파괴시키려는 사탄들로 꽉차 있습니다. 이런 때에 우리는 자신을 지키고, 하늘을 지키고, 천륜을 지키고, 그리고 좌우의 사탄들을 막아 낼 수 있는 자신들이 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이 우주와 천지 만물의 주인공이 하늘이라 할진대 그 하늘의 어떤 이념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한 사람을 세워 그 이념을 이루어 나가기를 원할 것입니다.
하늘을 찾아 나선 사람에게는 그 과정에서는 행복이 없습니다. 만족도 없습니다. 과정에서 만족하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는 진실로 하늘을 찾는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먼저 슬픔이 찾아드는 것이 원칙이요, 고통을 받게 되는 것이 원칙입니다. 즉 종으로 횡으로 그리고 좌우로 슬픔과 고통과 억울함을 당한 연후에야만 기쁨이 찾아 든다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기독교에서는 6천년 역사를 다 쓸어버리는 그날을 심판의 날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늘이 슬픔과 고통을 갖고, 억울함을 갖고 오시어서 우리에게 그것을 믿게 해 주시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여러분을 망하게 하기 위함이 결코 아닙니다. 여러분을 하늘의 아들딸로 삼기 위함인 것입니다. 아들딸이라면 피와 살이 통합니다. 그리고 사상이 통해야 하고, 이념이 통해야 합니다. 그런 상대 기준을 조성하여 움직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늘과 우리와의 부자의 관계를 누가 파괴시켰던가? 이 관계는 하늘의 힘만으로도 회복할 수 없고 우리의 힘만으로도 회복할 수 없는 서글픈 입장에 처해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이상 분한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자녀를 사랑하시는 아버지를 잃어버린 슬픔, 영원히 모시고 살아야 할 그 부모를 모실래야 모실 수 없고, 만날래야 만날 수 없고, 따라갈래야 따라갈 수도 없는 사정에 얼크러진 그 슬픔, 그 고통, 그 억울함을 느낄 줄 아는 아들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비운의 노정을 거쳐오시면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맺어 나의 아들딸이라고 기뻐할 수 있는 자녀를 찾고자 하셨는데, 우리는 전혀 하나님의 슬픔을 몰랐었습니다. 자식을 자식이라 할 수 없고 아들을 아들이라 할 수 없는 타락의 혈통을 이어받아 사탄 주관권 내에 있는 연고로, 이념적으로는 뗄래야 뗄 수 없는 혈육의 관계를 갖고 있는 아들이로되 실제생활에서는 천만가지 원수의 조건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두 가지의 서러움을 갖게 된 것입니다. 아들을 잃어버린 것이 하나의 서러움이요, 다시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있는 것이 또 하나의 서러움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이런 서글픔을 자아낸 우리는 죄인 중의 죄인이요, 빚진 자 중의 빚진 자라는 것을 느껴야 될 것입니다. 하늘 대하여 6천년의 역사적인 수고를 끼쳐 온, 회개하고 수고해야 될 빚쟁이 중의 빚쟁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녀인 우리들을 자녀라 할 수 없는, 누가 거부해서 그 마음에서 사라지게 할 수 없는, 심정으로 맺어진 부자의 관계, 영원한 사랑을 중심삼은 인연은 하나님 자신도 거부할 수 없는 정적인 심정으로 흐르고 있는데, 그런 심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아들딸이라 마음놓고 부를 수 없고 대할 수 없는 것이 비극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슬픔은 하나님의 슬픔에 비하면 슬픈 게 아닙니다. 돈이 많다고 기뻐하지 마십시오. 자기가 원했던 모든 행복스런 외적 조건을 구비했다고 해서 그 마음이 기쁜 것이 아닙니다. 물질을 가진 만큼 거기에 비례한 탕감의 조건이 나를 더욱 침체시킨다는 것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지상 타락세계에 있어서 ‘모든 것을 청산하고 나섰으므로 하늘의 아들딸이 될 수 있노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는 하늘을 바라보며, 하늘이 흘려온 눈물자국 앞에 엎드려 아우성치는 인류의 서러움과 하나님의 눈물어린 심정과 탄식에 사무쳐 아우성치고 있는 만물의 슬픔을 느낄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또 아버님의 슬픔을 체휼해야 되겠습니다. 아버님의 고통을 체휼해야 되겠습니다. 아버님의 억울함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하늘의 이념을 갖고 하나님 대신 땅을 주관할 수 있어야만 아버지의 뜻을 이룰 수 있는 것을 알아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이 땅이 타락세계인 연고로, 여러분이 하나님을 만날 수 없고, 하나님도 천적인 창조의 원칙이 있고 우주적 천법의 기준이 있으므로, 그 원칙을 벗어나서 인간을 직접 찾아오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시대에는 제물을 걸어 놓고 그것을 조건으로 하여 인간과 만물이 연결되었고. 신약시대에는 예수님이 제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통해서 인간과 만물, 예수님과 인류가 인연맺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가 지극히 슬픈 자리로 올라감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축복의 기준이 이루어져서 예수님과 인류가 인연맺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맺어져야 할 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인연입니다. 그 인연을 맺기 위해서는 아들을 위해 아버지가 맞아야 됩니다. 그리하여 만민으로부터 백성으로, 백성으로부터 아들로, 아들로부터 하나님까지 인연을 맺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행복과 이념, 그리고 영광을 찾아 복귀해 나오시는 하나님의 법도입니다.
그러면 그 인연은 어디에서 맺어져야 할 것인가? 영계에서가 아니라 지상에서 맺어져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은 신랑이요 땅은 신부라고 강조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어길래야 어길 수 없는 인연입니다. 그리고 인간들이 그것을 느끼는 심정은 변치 않습니다. 천년 전 사람이나 만년 이후의 사람이나 그 심정을 초월할 수는 없는 연고로 하나밖에 없는 절대적인 기준을 세워 놓고 신랑은 신부의 이름을 세워 그것을 조건으로 하여 아들딸까지 인연을 맺어 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땅을 찾고 백성을 찾고 자녀의 실체를 찾아 세우고 부모를 찾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물과 인간과의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만물을 제물로 드리고, 백성과 아들과의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아들을 죽여 제물로 드리고,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아버지가 십자가를 짊어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이념의 과정을 두고 볼 때, 오늘 우리에게는 역사적인 이념의 과정을 한꺼번에 탕감복귀해야 할 사명이 있는 연고로 이제는 아버지를 세워 나를 찾아야 할 끝날이라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백성들의 대신자인 제사장을 세워서 제물을 드리고, 조상을 숭배하고 율법을 행하면 나름대로 구원을 얻을 수 있었고, 신약시대에는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었지만, 앞으로는 하나님을 믿어야 됩니다. 피와 살이 얼크러지고 손이 얼크러져서 영원히 거부할래야 거부할 수 없는 그런 기준으로 인연된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을 믿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6천년의 섭리의 역사가 거듭되는 서러운 노정에서 마음만이 아니라 몸뚱이까지 ‘이것이 내 아들이다.’라고 하늘이 인정할 수 있는 하나의 아들딸들이 태어나야만, 생겨나야만이 하나님이 땅을 위하여 흘리신 눈물에 대해 깨닫게 되고 무지몽매한 사람들을 깨우치게 될 것입니다. 또한 역사 이래 많은 사람들이 알지 못한, 눈물 흘리는 하나님의 사정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땅의 백성과 아들을 위하여 눈물 흘리는 하나님의 사정을 알지 못하는 온 만민, 온 하늘땅을 대신하여 그 심정을 알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 것인가?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 시간성을 초월하여 영원하듯이 천만리 거리를 초월한, 한계성이 없는 그런 천적인 심정을 알아서 오늘날 역사적인 아버지를 붙들고 ‘아버지의 서러운 마음이 내 마음이요, 아버지의 안타까운 심정이 나의 심정이오니, 저에게 십자가의 짐을 지워 주십시오.’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여러분은 고통의 십자가를 또다시 지지 않으면 안 될 처지에 있는 하늘의 사정을 아십니까? 오늘날 우리는 이 민족을 대한 하나님의 심정과 하나님의 뜻을 따라 허덕였던 선조들의 땅을 대한 모든 역사적인 심정, 백성을 대한 심정, 아들을 대한 심정, 나아가서 하나님을 대한 심정까지도 느낄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고통 가운데 있었던 바울은 탄식하며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롬 8:35)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도 하나님 앞에서는 신부격이라는 것이에요. 우리에게 신랑이 되시는 예수님에게까지도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신랑 신부의 격위는 외적입니다. 완전한 복귀는 만물복귀에서부터 시작하여 자녀복귀까지 완성해야 합니다. 그래서 신랑 신부의 관계를 거쳐 성신을 만나고 예수를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머물 것이 아니라 ‘아버지여! 에덴동산에서 잃어버린 아들딸 대신 축복해 주시옵소서’라고 할 수 있어야 됩니다. 타락의 원한을 느끼지 아니했던 축복, 인류의 참조상 될 수 있는, 타락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 참부모의 아들딸로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아들딸이 되어야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원한이 무엇이겠습니까? 백성을 붙들고 우셨고 땅을 대해 우셨었으나 하나님이 바라시는 승리한 아들을 붙잡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지 못한 것이 하늘의 원한이라는 것입니다. 즉 하늘로부터 ‘너는 승리한 아들’이라고 인정받을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것이 하늘의 원한이요 슬픔입니다. 뿐만 아니라 잃어버린 아들딸을 찾기에 그토록 헤매이신 하늘을 붙들고 울어 본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자녀를 가진 부모가 아무리 일국의 수상이라 할지라도 잃었던 자식을 찾게 되는 그 마당에 있어서는, 일국의 수상으로서의 염치나 체면이 문제가 아닙니다. 체면을 무시하고 위신을 무시하고, 그 아들이 거지가 되었든 무엇이 되었든 손을 붙들고 몸을 붙들고 통곡할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사이에서 그러한 장면이 창세 이후 지상에서 한 번도 벌어지지 않았던 것이 하나님의 서글픔이요, 온 만물의 서글픔이요, 인간의 슬픔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제물시대에는 제물을 드려서 올라갔고, 민족을 세울 때는 지도자의 말을 믿고 그 지도자를 따라서 올라갔습니다. 그때는 지도자의 말을 따르는 그것이 곧 제물이었습니다. 그 다음엔 독생자 예수를 믿어서 올라갔습니다. 이제 앞으로는 참부모님을 믿어야 됩니다. 참아버지의 아들딸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그 길을 찾아 나가려고 발버둥치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6천년 역사의 이념이 있었다 할진대 이제 앞으로는 그 이념의 이론적인 결실이 이 땅 위에 나타나야 되는데, 땅을 붙들고 울 줄 아는 하나의 책임자, 백성을 붙들고 울 줄 아는 하나의 책임자, 예수의 사정을 붙들고 울 줄 아는 하나의 책임자는 어느 때에 이 땅 위에 나타날 것인가?
갈래갈래, 단계단계 끊겨진 역사를 오늘 하나의 실체가 나타나 연결시키고, 우주의 총합적인 역사의 이념을 대신한 실체가 나타나서 아버지와 신랑 신부의 심금을 울리고, 만 백성과 인연맺을 수 있는 심정을 가진 책임자가 나타나 땅을 붙안고 울 수 있는 마음을 일으켜서 그 마음을 유지시킬 수 있게 되기를 인간들은 바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한 존재를 우리는 하늘 대신 모시고, 예수 대신 모시고, 만민 대신 모시고, 땅 대신 모셔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이 땅을 붙들고 울고 땅을 사랑하고, 백성을 붙들고 울고 백성을 사랑하고, 그 다음엔 하나님을 붙들고 울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어야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서러운 심정이 기쁨의 심정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런 여러분을 보고 아버지는 물론이요, 삼위신이나 천천만 성도나 사탄세계의 사람들까지 ‘옳소이다.’라고 할 수 있어야 하고, 6천년 동안 탄식하며 소망하던 참부모의 자식으로서 역사적인 심정을 대신하여 하늘의 사무친 슬픔을 해원하는데 누구보다 대표적으로 나서서 싸움으로써, 사탄을 복수한 아들로 세워져야 하며,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의 자녀라고 증거함을 받아야만 인침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14만 4천 무리……, 말은 좋습니다. 하늘의 인침받은 아들딸……, 말은 좋습니다. 해원복귀의 조건 조건을 조성하고, 천륜의 섭리를 대행하는 하늘의 아들딸이 그들의 말대로인가! 알고 보니 하늘이 인칠 수 있는 아들딸은 하늘 대신 땅을 대하여 울 수 있는 심정을 가져야만 되게 돼 있습니다.
백성을 붙들고 울 수 있고 고통을 당하고 억울함을 당할 때에도 천륜을 대신해서, 하늘을 대신해서 참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만, 역사적으로 사무쳤던 하나님의 슬픔, 인간들이 잘못했던 모든 것을 다 회복하고 모든 시련을 극복할 수 있는 아들딸이라야만 인침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들은 어디서부터 인침을 받아야 되는가! 반드시 하나님과 더불어서야 됩니다. 하나님의 심정에서부터 인침을 받고, 하나님의 사정에서부터 인침을 받고, 오늘날 내 가정으로부터, 사회로부터 인침을 받아야 합니다. 아버지를 붙들고 울 수 있는 역사적인 심정의 귀일점을 찾는 그때에야만 하늘의 인침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버님! 가고 가는 길이 험하다 하오리까? 저희들의 마음을 아버님의 그 심정의 애달픔에 비할 수 없사옵고, 저희의 억울함을 첩첩이 가로놓인 사탄권을 걸으신 아버님의 그 발자국에 비할 수 없음을 알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험한 길을 가면서도 하늘 뜻을 책임지기 위한 사명감이 저희의 마음에 용솟음치게 허락하여 주시고, 슬퍼하면서도 아버님의 슬픈 역사의 친구가 되어 당신의 노정에 동반할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역사적인 고통을 같이 느끼어 고통받는 심정의 친구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분한 심정에 동반하여 친구가 될 수 있고, 아버지의 내적 슬픔의 친구가 되는 동시에 외적 슬픔의 친구가 되어 영원한 아버지의 기쁨의 대상이 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날 모든 것이 문제되기 전에 복을 받기 위해 헤매는 내 자신이 문제라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그러나 저희의 마음속에 있는 슬픔을 깨닫지 못하는 인간이라 할진대 행복의 길을 찾을 도리가 없다는 것도 알았사옵고, 고통의 길을 걸어야 하는 인간이 그 고통의 길을 피하려 한다면 그들은 결코 고통의 길을 피할 수 없다는 것도 알았사옵니다. 분함과 억울함을 이겨낼 인내를 잃어버린 수많은 사람들, 그 인내가 아니고서는 어떠한 고통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우칠 수 있게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슬픔의 고개를 넘고야만이, 고통의 고개를 넘고야만이, 분한 심정의 고개를 넘고야만이 그날의 복이 결정되는 천륜의 원칙을 저희들이 알았사옵니다. 이제 아버지의 심정을 붙들고, 땅을 붙들고, 만물을 붙들고 눈물 흘리며, ‘아버님의 슬픔이 내 슬픔이요, 아버님의 고통이 내 고통이요, 아버님의 고난이 내 고난이오니 그 모든 고통을 제게 맡기시옵고, 아버님은 행복한 자리에 서시옵소서.’라고 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뗄래야 뗄 수 없는 고통과 정과 다른 모든 것이 동할 수 있는 부자의 관계의 인연이 있는 줄로 알고 있사오니 아버지의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시간으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천태만상의 사람 중에 승리한 아들들을 내세워서 만우주를 복귀하고 싶어 하시는 아버지의 심정을 알았사오니, 그 심정을 내 한 몸에 지니어 나타낼 수 있게 인도하여 주시옵고, 어떤 제물로 희생되는 것도, 또는 어떤 죽음의 길도 감사하며 아버님의 길을 지켜 나갈 수 있는 아들딸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아버지와의 인연을 끊어서 배반하는 자들 되지 않고 기필코 아버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저희들 되게 인도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오며,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오늘은 여러분에게 ‘남겨진 아버지의 사랑을 소유하는 자가 되자’라는 제목을 가지고 잠깐 동안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날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 인간들이나 존재하고 있는 모든 피조물은 어떤 것을 막론하고 서로 관계를 맺고 존재하는 이 세계를 벗어나서는 그 자체를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관계 지어진 세계에서는 동기와 목적을 벗어나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 인간들은 이런 관계의 세계를 벗어나서 살 수 없는 피조물인 연고로, 생명을 영위해 나가는 마당에 있어서나 일생의 생애노정을 허덕이면서 찾아나가는 데 있어서 모든 것이 다 관계의 세계에서 움직여 나가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학은 이 관계의 세계를 실험을 통해서 해명하려고 노력해 왔고, 철학은 이 관계의 세계를 논리적인 측면에서 해명하기 위해 지금까지 노력해 나오고 있으며, 역사학은 이 관계의 세계를 사실 그대로 설명하기 위해 노력해 나오고 있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한 걸음 더 나아가 종교는 이 관계의 세계를 해명하기 위해 어떻게 움직여 나오고 있는가? 지금까지 종교는 마음을 바탕으로 하여 절대자의 동기와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찾아서 해명하기 위해 움직여 나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여러분 개체 개체는 지극히 작은 존재로되 지극히 큰 가치의 이념을 향하여 달리고 있는 것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또 여러분은 자신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생애노정을 거쳐 나가는 데 있어서 여러분의 본심은 더 큰 생명의 노정을 바라고 있고, 더 큰 이념을 바라고 있고, 더 큰 사랑과 정을 바라는 것을 부정할래야 부정할 수가 없는 것을 알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우리 인간은 공통적인 관계의 기준을 바라고 있음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내 생명이 있으되 이 생명보다 더 큰 생명, 오늘 내가 생각하는 소망이 있으되 그보다 더 큰 소망, 이념이 있으되 더 큰 이념, 오늘날 내 생활에 있어서 심정을 통하여 느껴지는 정보다 더 큰 정의 경지를 찾아 헤매는 내 자신인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될 것입니다. 어찌하여 우리는 이와 같이 더 큰 생명과 더 큰 이념과 더 큰 정의 경지를 요구하게 되는고!
그런데 이와 같이 더 큰 것을 요구하는 이 땅 자체가 관계적인 환경에 처해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못할진댄 우리들의 생명의 동기가 되는 더 큰 어떠한 생명체, 이념의 동기가 되는 더 큰 어떠한 이념체, 또는 우리의 정적인 것보다 더 큰 어떠한 정의 본체가 있다는 사실을 또한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내 생명의 힘이 뻗어 나가 마침내는 우주의 만상을 꿰뚫을 수 있는 그 한 날을 어느 때에야 찾을 수 있을 것인가. 또 내 이념의 욕구는 온 피조만물을 천리법도에 따라 주관하는 것인데, 그럴 수 있는 소망의 존재는 어느 날에야 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하나님까지도 녹여낼 수 있는 심정의 힘은 어느 날에야 회복할 수 있을 것인가. 여러분은 오늘 이 시간에 이런 문제를 다시 한 번 상고해 봐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존재하는 내 생명의 힘은 오늘을 넘어 내일에도 존재할 것입니다. 즉 영원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내 이념의 힘도 역시 마찬가지요, 심정의 힘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해 주는 존재가 반드시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존재는 관계를 중심하여 동기와 목적을 설정해 주셨는데, 우리는 그 관계를 중심한 동기와 목적을 이루는 영원한 가치의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여러분이 인식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자신이 느끼고 있는 생명의 힘, 이념의 힘, 심정의 힘이 절대자의 이념과 절대자의 심정과 절대자의 생명력과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만일 그러한 관계를 맺고 있지 않은 존재가 있다고 한다면 그 자체는 생명의 가치를 갖고 있는 듯하나 이 존재세계에서 아무런 가치를 인정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이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과학이나 철학 혹은 역사학이나 종교를 통하여 최후로 만인간들에게 공통적으로 해명해 주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역사적이요 시대적이요 미래적인 공통문제점이며,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에게도 공통된 문제점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하늘이 움직이면 나도 움직이고 하늘이 정하면 나도 정할 수 있는 불가분의 일체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그 기준을 오늘날 여러분의 생활권 내에서 세울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우주적인 생의 가치를 자랑할 수 있는 인간이 되느냐 못 되느냐가 결정되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와 같은 역사적이고도 시대적이며 미래적인 공통의 문제점은 무엇이냐? 그것은 옛날 사람이나 지금 사람이나 미래의 어떤 사람이나 자신의 생명에 대한 욕구와 이념에 대한 욕구와 사랑(심정)에 대한 욕구를 가지고 있고, 이 세 가지 욕구는 인류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인데, 이 생명과 이념과 사랑(심정)의 욕구를 한 날의 생활과정에 있어서 일시에 느끼게 해 줄 수 있는 그런 하나의 진리면 진리, 그 하나의 주의면 주의, 그 하나의 사람이면 사람이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오늘날 역사는 총동원하여 움직이고 있고 종교도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고의 역사 과정을 거쳐왔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여러분은 자신이 살아갈 수 있는 생명의 힘과 모든 존재 세계를 대하여 움직일 수 있는 자동적인 힘을 갖고 있느냐? 이 모든 인연의 세계, 즉 관계의 세계와 소망의 인연을 맺게 하며 소망의 자극을 일으켜 줄 수 있는 어떤 하나의 동기가 있어야 될 것인데, 그것을 여러분은 갖고 있는가? 또 여러분은 그 하나의 동기와 내가 맺은 관계의 권내에서 세계만상을 움직일 수 있는 생명력을 갖고 있는가 하는 것을 여러분 자신에게 반문해 보아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온 우주의 모든 이념을 자신의 심정에, 하나님의 창조의 전체의 이념을 자신의 마음에 옮겨 가져야 되겠습니다. 그리하며 하늘이 틀림없이 이렇게 움직이니 어떠한 존재물, 어떠한 물건이라도 망각할 수 없다는 그런 심정과 그러한 느낌을, 그러한 직관 또는 직감을 가져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러한 것을 갖지 못했다면 여러분은 자신들이 오늘날 찾아 나가는 소망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마음에 사무치는 어떤 크나큰 사랑을 흠모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날 인간들이 찾아가고 있는 인간적인 어떠한 사랑이 아니라 내 마음에 있는 본심이 바라는 천적인 사랑인 것입니다. 영원을 노래할 수 있고, 영원한 생명력과 이념을 꿰뚫어서 움직일 수 있는 그런 사랑을 흠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생각하고 움직이는 것과 동시에 그 자체 전부가 사랑의 심정으로 화하여 나타나야 합니다. 그리하여 내가 생활하는 환경과 내가 살고 있고 바라보고 있는 이 우주를 품을 수 있으며,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을 품을 수 있는 이런 사랑의 경지와 인연을 맺는다 할진대는 여러분은 인생행로에 있어서의 최대의 승리자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하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창조주라 말하고, 절대자라 말하고, 또는 능치 못함이 없는 분이라고 시인하면서 어찌하여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절대적인 선을 사모하는 마음이 오늘날 속세에 살고 있는 인간들의 사랑의 마음보다도 낮아지게 되었느냐? 이것이 오늘날 하늘의 탄식입니다. 인간들이 자기 자식을 사랑하는 그 이상의 사랑의 주체로 계시는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그렇게 대해 주지 못하는 자리에 계시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무엇으로 인간을 대하실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생활권 내에서 하나님께서 내려 주시는 사랑을 받고, 그 사랑의 충격으로 인해 모든 것을 다 잊고자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가슴에 맺혀 있는 모든 비애를 녹여낼 수 있는 그 사랑의 힘과 인연을 맺는다면 하늘을 배반할래야 배반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 인간들이 선을 계획하고 가르치고 하는 이런 문제가 필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찌하여 이런 절대적인 사랑과 선과 인간이 관계를 맺게 하지 못하셨던가. 그 문제를 놓고 저 역시 많이 생각하고 고심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본래부터 그런 하나님이었느냐? 아닙니다. 타락이 없었다면 인간이 하나님의 존재성에 대하여 생각하기 전에 그 하나님을 느낄 수 있고, 바라기 전에 내 속에 소망의 실체로 임재하고 계시는 것을 알 수 있고, 그리워하기 전에 먼저 내 앞에 나타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정적이고 이념적이며 생명적인 그 기준까지 도달하지 못한 것이 타락이요,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그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슬픔이었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는 진리와 생명을 찾아 헤매고 있고, 이념을 찾아 또는 하나님의 사랑을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최후의 내 자신의 생명력과, 내 자신의 이념과, 내 자신의 정적 심정 기준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래야 아니할 수 없고, 나아가 하나님이 전체의 이념의 중심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천주의 생명의 중심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러한 느낌을 갖고 자신의 생활권 내에서 자극시켜 주는 관계와 인연을 맺었다 할진대는, 하나님이 영생이면 여러분도 영생이요, 하나님이 움직이면 여러분도 움직이고 하나님이 정하면 여러분도 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소망의 기준임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역사를 회고해 보면, 인간들은 자기들이 갖고 있는 어떠한 힘을 통하여 이 세계를 움직이려 했습니다. 생명력을 통하여 세계의 모든 것을 움직이려 했던 시대가 있었는데 그런 시대가 다 지나갔습니다. 그러면 그러한 시대가 다 지나간 오늘날은 어떠한 시대가 되었는가? 이제는 예수의 이념을 계승한 사상이 세계를 움직이는 시대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것이 지나간 후에는 어떠한 시대가 올 것인가, 또 그 후에는 어떠한 시대가 올 것인가. 생명력의 기준을 지나고 이념적인 기준을 지나선, 절대자의 사랑과 인연을 맺을 수 있는 하나의 통일된 중심이 인류 앞에 나타나는 시대가 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역사는 그저 하나의 소망과 이념을 소개해 주는 역사에 그쳤을 뿐입니다. 그래서 인간 각 개인의 심정을 통하여 새로운 창조와 새로운 부활과 새로운 소망과 새로운 생명력을 일으킬 수 있는 사랑의 종국인 정적 천국을 찾지 못했습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인간이 바라고 있는 최후의 소망의 기준은 무엇일 것인가? 정적인 역사관, 정적인 인생관, 정적인 우주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는 이를 한마디로 표현하여 성경의 중심은 예수요, 예수의 중심은 사랑이요, 사랑의 중심은 신랑 신부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 한 사실이 이때까지 허덕여 온 전인류 앞에는 무엇보다도 복된 희소식이었음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러한 심정이 이 세계에 꽉차 가지고 그 심정의 동함을 통하여 여러분이 혈육을 통해 가지고 혈통적인 죄악의 근원을 밝히게 될 때, 오늘날 인류는 평화를 근본적으로, 본질적으로 소망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오늘날 여러분은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고, 남편이 부인을 사랑하고,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 그 자체가 절대적이 아니지만 그것들은 모두 관계적인 이념을 통하고 동기를 통하여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더 큰 부모의 사랑의 원칙이, 더 큰 부부의 사랑의 원칙이, 더 큰 자녀의 사랑의 원칙이 본래부터 인간과 인연이 되어 있고, 관계가 맺어져 있었는데 이것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이것을 칭하여 신랑 신부, 즉 사랑을 중심한 신랑 신부라 하였습니다. 오늘날 신앙자들이 찾고 있는 사랑은 인간들이 자기 자식을 사랑하는 그런 정도의 사랑이 아닙니다. 그보다 더 높고 더 큰 생명을 움직여 갈 수 있고, 더 큰 이념과 화합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서 빨리 이 땅 위에 시간성을 초월하여 어떠한 무엇이라도 소화하고 감화시킬 수 있는 생명력과 소망의 힘과 사랑의 힘을 볼 수 있는 날이 와야 되겠습니다. 그럴 때에 악이 선에 흡수되어 뒤따라올 수 있는 세계가 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관계의 세계를 통하여 절대자로서 실존하는 하나님을 헤아려 보아 그 하나님의 실존을 부정할 수 없다 할진대는, 그 하나님도 역시 우리와 같은 생명력의 움직임을 갖고 있고, 이념적인 움직임과 정적인 움직임을 갖고 있다는 것을 느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로 말미암아 태어나고 그의 이상적인 존재로 지음받은 우리이기 때문에 그가 갖고 있는 전체적인 모든 속성을 우리가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러면 하나님도 그렇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이 실체를 가지고 있는 우리들 자체 앞에 생명의 주체로 나타나야 할 텐데 안 나타나고, 소망의 주체로 나타나야 할 텐데 안 나타나고, 사랑의 주체로 나타나야 할 텐데 안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인간의 탄식이요 인간의 서러움인 것입니다.
이것을 대신해 주고 보충해 주기 위해서, 이 곡절을 풀어 주기 위해서 하나님은 인간과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관계와 인연을 맺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인간에게 그 고충을 해명해 주기 위해 이념의 주체가 되는 실체, 정의 주체가 되는 실체, 생명력의 주체가 되는 실체를 보내주셨는데, 그분이 누구냐 하면 오늘날 우리들이 믿고 있는 예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형의 실체로 계시지만 그 관념의 세계에 있어서 직관적인 어떤 우주관이 있을 것이고, 직감적인 동시에 직각적으로 느끼는 원칙의 세계를 대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절대적인 생명권은 무엇을 통하여 느낄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은 과학도 아니요, 철학도 아니요, 인간의 어떤 지적 분야에서 느낄 수 있는 사실도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통하여 이것을 해명지어야 할 책임이 있기 때문에 종교를 세워 관계와 인연을 중심삼고 인간의 마음의 터전을 움직여 가지고 하나님, 즉 절대자의 동기와 목적을 해명시켜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동기와 목적을 해명시키는 데는 논리적인 설명으로는 통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힘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념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는 있으나 논리적으로 이념 그 자체를 완전히 설명할 수 없듯이, 사랑 그 자체도 완전히 설명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생명에 대한 관을 세울 수 없습니다. 생명관, 역사관, 종교관, 무슨 관 등을 세우려 하지만 세울 수 없고 사랑을 대해서도 어떤 관을 세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여러분은 어떠한 관이라는 것을 세울 수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을 해명할 수 있는 상대적인 기준을 가질 수 없습니다. 또한 상대적인 기준을 가질 수 있을 만한 해명의 조건을 찾아 세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관보다도 앞서는, 그 무엇이라도 해명할 수 있는 관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직관이라는 명사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직관 또는 직감이라는 말 혹은 직각이라는 말, 이것은 오늘날 오관을 통하는 인식의 세계에서 해명할 수 없는 문제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 직관, 직감, 직각이라는 것은 어디를 통하여 움직이고 느껴지는 것인가? 외부로부터 오관을 통하여 느껴지는 감각과 느낌이 아니라 마음을 통하여 들어오는 감각과 느낌인 것입니다. 그 직관적인 감각은 시간을 초월하여 순식간에 원인과 동기를 해명할 수 있는 것으로서 어떤 실존적인 존재성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들은 그러한 문제를 우리들의 마음을 위주하고 풀 수 있습니다. 즉 초자연적이고 법칙적인 어떤 직관 또는 느낌을 통해서만이 이를 해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문제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인연과 관계의 문제로 되어 있고, 이 관계와 인연은 또 어떤 동기로부터 목적을 향하는 과정에 머물러 있는데, 그 과정에는 역사성이 내포되어 있고, 시대성이 내포되어 있으며, 미래성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런 전체적인 모든 느낌을 오늘날 우리는 종교를 통하여 체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체득한 그것이 하나님이 갖고 있는 생명의 속성, 이념의 속성 또는 사랑의 속성과 같은 그러한 힘의 자극을 여러분 자체에 일으켜 줄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종교라야만이 오늘날 우리들이 믿을 수 있는 종교일 것입니다.
그러한 종교를 오늘날 우리들은 찾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관계의 성향을 통하여 논한다는 입장에 서서 보게 될 때, 틀림없이 그러한 종교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체득해야 할 것이냐 하는, 이것이 문제입니다.
오늘날 여러분 한 자체가 종교를 통하여 무한한 존재의 세계를 추구하고 있는데, 즉 여러분 자신이 있는 노력을 다 기울여 그 세계를 찾고 있으나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여러분이 그 세계를 추구하지만 인식할 수 없는 원인은 어디에 있을 것인가? 그것은 관계를 중심삼고 볼 때 동기와 목적이 어긋나 있는 데 있고 그 결과적인 가치와 여러분이 관계를 맺을 수 없는 데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한 개인이 있으면 개인의 어떠한 소원이 있고, 또 가정이 있으면 가정, 나아가 민족과 국가, 세계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가 각기 처해진 각 분야 분야에 있어서 그 바라는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각 존재물의 목적이 천륜의 목적과 다르다면 영원한 존재의 세계는 도저히 느낄래야 느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늘은 오늘날 종교를 세워 인간에게 그러한 세계를 느끼게 하는데 어떤 진리적인 조건을 통하여 느끼게 하지는 않습니다. 최후의 정적인 문제를 가지고 사랑의 표어를 세워서 그 세계를 접촉시킨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도 이 사랑이라는 것을 가지고서만 우리를 찾아오시고 우리도 그 사랑을 가지고서만 하나님을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소망이 없는 인간에게 소망을 주고, 생명이 없는 인간에게 생명을 주고, 사랑을 받을 수 없는 인간에게 사랑을 주기 위하여 오늘날까지 무한히 노력하시면서 우리를 찾아오고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먼저 생각해야 될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생각하기 전에 우리를 먼저 생각하시고, 우리가 있기 전에 먼저 계셨으며, 우리가 움직이기 전에 먼저 우리를 위하여 움직이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존재 가치보다도, 우리의 이념에 의한 가치보다도, 우리의 정적인 가치보다도 더 큰 존재가 우리들 자신보다 먼저 존재하여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마음으로 느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날 사랑을 조건으로 하여 인간을 찾아오시는데 어떻게 찾아오시는가? 봉독한 성경의 말씀과 같이 하나님은 우리에게 계명을 허락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마 22:37―38) 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계명을 하늘은 인간들이 지키기 이전에 먼저 지키셨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기억해야 되겠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오늘날 타락한 인간이 지켜야 할 첫째 계명임을 확실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그 말씀을 듣게 될 때에 그 말씀이 나에게서부터 인연되어 시작되는 줄 알면 그것은 큰 오해입니다. 이 말씀을 인간 앞에 나타내기 위해서 인간의 생명의 주체이시며 이념의 주체이시며 사랑의 주체되시는 하늘이 먼저 인간을 위하여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한 역사 과정을 거쳐왔다는 것을 여러분은 느껴야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그 계명을 지키기 전에 우리를 대하여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는 입장에서 인간을 붙잡고 사랑하여 나왔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기억하여야 되겠습니다.
또한 하나님 자신이 그것을 지키셨기 때문에 계명으로 세우실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들이 하나님의 생명의 이념을 찾는 데 있어서도 그 생명의 이념의 주체이신 하나님을 우리가 사랑하기 전에 벌써 하나님이 우리를 찾기 위하여, 우리를 사랑하기 위하여, 우리의 생명을 살리시기 위하여, 우리를 이념적인 존재로 세우시기 위하여 크나큰 사랑과 크나큰 이념과 크나큰 생명을 갖고 대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첫째 계명의 뜻을 세워서 인간을 찾아오셨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기억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4천년 동안 수고하시면서 그러한 뜻을 인간 앞에 제시했으나 인간이 무지하여 그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런고로 그 계명의 말씀을 실체적으로 완성하고 그 계명의 법도를 찾아 세우기 위하여 나타나신 분이 바로 예수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을 대해 ‘마음을 다하라.’ 하기 전에 먼저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서 마음을 다했고, ‘뜻을 다하라.’ 하기 전에 먼저 뜻을 다했고,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기 전에 먼저 이 계명을 실천하여 그 계명의 실체가 되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무지한 인간을 대신하여 하늘의 사명을 띠고 이 땅에 나타나신 예수님께서는 위대한 하나님의 생명력을 말씀으로 증거하였는데 듣지 않으니 손을 들어 이적과 기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생명력을 증거하기도 하였습니다. 자기 종족, 자기 민족을 중심삼아 행복을 바라는 민족 앞에 세계와 천주적인 이념을 소개하였던 것입니다.
개인적이고 민족적인 그런 이념의 하나님으로 믿고 있는 유대민족 앞에 우주적인 사랑, 자기 민족을 넘어 이방 사람들까지도 사랑하여야 한다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고 들을 수 있게 증거하고 실천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예수 앞에 그 위대한 생명력의 감촉을 받은 사람은 누구였던가? 이는 사망을 이긴 사람이었습니다. 위대한 소망의 힘을 느낀 사람이 누구였느뇨? 이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위대한 사랑의 힘을 느낀 사람이 누구였느냐? 이도 역시 사망을 이긴 사람이었습니다. 살아생전에 예수를 믿어 그 사망을 이길 수 있는 생명력을 지니고 사랑의 힘을 갖추어야 할 인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실체를 보내 놓고 나서 부활하신 후에야 비로소 그들은 예수님이 자기들의 이상의 생명체요, 이상의 이념체요, 사랑의 본체인 것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사망의 고개도 두려워하지 않고 늠름히 넘어서게 되었던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오셨던 예수를 믿는 자체로서 또는 가신 예수를 믿는 자체로서, 예수를 소망의 대상으로 믿는 자체로서, 어떤 단계에 위치해 있습니까? 여러분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 인간 앞에 실체적인 이념의 존재, 사랑과 생명의 본체로 나타났으나 당시 알아보지 못했던 제자와 같은 그러한 입장에 처해서는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러한 입장에 처한다면 여러분은 역사적인 범죄를 다시 범하는 것이며, 예수님 이후 2천년 동안 섭리하신 하나님의 서러움의 본체가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는 사람의 소망으로 오시는 그 예수님 대신 오늘 여러분은 자신의 생명력을 과거를 위해서, 현재를 위해서, 미래를 위해서 바칠 수 있어야 될 뿐만 아니라 하늘을 위해 생명까지 바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러한 각오를 가지고 믿고 있는 사람은 어디 있을 것인가? 이것이 큰 문제입니다. 오늘날 여러분 자신들이 믿는다고 하고 있는 데 그 신앙의 기준이 어디에 서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접하여 무한한 생명의 감촉을 받고 무한한 창조의 이념세계를 바라보니, 또 무한한 사랑의 힘을 감촉하고 바라보니, 예수님이 가신 발자취는 예수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원수를 대하여 원망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원수를 녹여낼 수 있는 사랑의 불꽃을 일으켰던 분이었습니다. 원수들의 과분한 욕망으로 말미암은 그들의 어떤 분풀이를 다 당할지라도 그 이상의 것으로써 포용하셨을 때, 즉 더 큰 이념과 더 큰 생명력의 심정으로 폭발시켜 나가셨을 때, 세계는 모두 그의 품으로 휩쓸려 들어오게 되었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생명력과 이념과 사랑이 있다 할진대, 그 하나님의 생명력과 이념과 사랑을 중심삼고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죽음의 고비에 있는 사람이나 생명권에 있는 사람 등 전세계에 널려 있는 모든 사람을 통일할 수 있는 사랑과 생명의 본질적인 실체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또한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예수님이 오셨다는 사실과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수 있다는 사실이 인간에게는 복된 소리, 왈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알면서도 여러분은 자기를 중심삼고 생각해서는 아니 됩니다. 여러분은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한 것을 느껴야 합니다. 또한 실체를 갖고 우리를 위하여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신 분이 있었다는 것을 여러분이 느껴야 되겠습니다. 그 실체가 누구였느냐 하면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걸으신 발자취는 어떠한 발자취였던가? 인간을 위하여 마음을 다하신 발자취였고, 뜻을 다하신 발자취였고, 자기의 성품을 다해서 인간을 붙들고 사랑하시기 위한 발자취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설명을 넘어서 직감적으로 체휼할 수 있는 심정이 되어 있느냐 안 되어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나아가 그러한 심정의 유무에 따라서 하늘은 여러분과 인연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느냐 없느냐를 결정짓는다는 것을 여러분은 명심해야 되겠습니다.
심정의 세계는 시간성을 초월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은 어떤 위대한 혁명가도 혁명을 못 했고, 시대적인 변천 속에서도 그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세계에서 되어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식이 부모 앞을 떠나게 될 때에 어떠한 권력자가 나타나 서로 사랑해서는 안 된다고 아무리 가로막아도 사랑의 세계를 찾아가는 움직임은 막을 수 없습니다. 태산 아니라 온 우주와 같은 것으로 가로막아도 그것을 넘어서 왕래할 수 있는 움직임은 정적인 세계의 움직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심정적인 체휼을 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심적 기준을 통하여야 됩니다. 2천년 전 인간을 구원하려 하셨던 예수를 오늘의 우리 앞에 필요한 예수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 하나의 조건을 세움에 있어서도 그것은 심정의 세계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부르는 데 있어서도 하나님의 천태만상의 사정이 있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사정을 넘어 그 사정 밑에 있는 심정이 무엇인가를 헤아릴 줄 알아야겠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데는 생명을 초월하고 있습니다. 사랑 그 자체가 완전한 해답이요 완전한 동기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명력과 이념과 사랑의 주체자로 인간의 중심으로 오시는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그 한 날이 하늘이 기뻐하는 날이요, 만우주가 기뻐하는 날이요, 온 인류가 기뻐하는 날입니다. 또 인간은 잃어버린 하나님을 회복하는 날이요, 하나님은 잃어버린 인간을 회복하는 날이며, 잃어버린 땅을 회복하는 날입니다. 이와 같이 메시아가 오시는 날은 세 조건이 일시에 찾아져서 하나의 마음을 통하여 동하고 정할 수 있는 하나의 실존세계가 이루어지는 날인 연고로 그날이 바로 하나님의 소망의 날이요, 인간의 소망의 날이며, 만물의 소망의 날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소망의 기준은 무엇인가? 그것은 전체를 표상한 사랑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제 6천년의 끝날에 처해 있는 내 한 자체를 세워서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하나님의 생명을, 하나님의 이념을 소유해야 할 시기는 가까워 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와 성신의 생명시대를 거친 하나님의 생명시대, 예수와 성신의 이념시대를 거친 하나님의 이념시대, 예수와 성신의 사랑시대를 거친 하나님의 사랑시대는 어느 때일 것인가?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 39)고 하였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사랑을 위하여 오셨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믿는 신자들은 예수님의 사랑이 종국인 줄 알고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 예수님의 사랑을 토대로 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인연된다는 것입니다. 또 그 사랑의 과정을 거쳐 들어가게 될 때에야 비로소 참부모의 사랑을 알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명심해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땅 위에 있는 타락한 부모, 우리의 육신의 부모는 참부모가 아닙니다. 우리는 타락한 혈통의 부모를 다 갖고 있습니다. 암만 외모가 잘났다고 해도 타락의 후손인 고로 타락의 혈통을 받은 종족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인간들은 타락하지 않은 본연의 참부모의 사랑, 이것이 하나님이 지금까지 인간들에게 주기 위해 남기신 마지막 사랑의 결실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이 사랑을 소개해 주지 못하고 가셨던 것입니다. 이 사랑을 느낀 후에야 어떤 원칙이 필요한 것입니다. 부모가 있은 연후에 자녀가 있고, 그 자식이 장성하여 부부가 되고 다시 부모가 되는 것이 원칙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의 이념은 어떤 것입니까? 신랑 신부의 이념은 무엇입니까? 그것들은 참부모의 사랑을 찾아 세우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참부모의 사랑과 혈통적인 인연의 관계를 갖고 장성한 후에야 우리들로서 가질 수 있는 참부부가 있을 것이고 참자녀가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타락한 이 땅 위에 하나님의 원한이 있다면, 그것은 참부모가 없고, 참부부, 참자녀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늘의 탄식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타락한 인간들이 양자의 모양으로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양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잘났다고 해도 양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슬픔은 무엇인가? 그것은 직계의 자녀가 변하여 양자가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는 하나님의 직계 자녀를 회복하기 위한 서글픔의 역사노정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적인 서글픔의 심정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을 가까이 모실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세상에서 자식을 낳아 기르며 사는 부모는 자식을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심정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부부의 사랑을 느끼는 사람은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본연의 사랑을 느낄 수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한 기준이 이 땅 위에 나타나면 우리에겐 선에 대한 이념이 필요하게 됩니다. 내 자체가 선의 본체이면서도 오늘날 내 자신은 그 중심에 의한 상대적인 생활관밖에 갖고 있지 못합니다. 모든 것의 주체로 설 수 있는 가치의 중심, 생명의 중심, 이념의 중심, 사랑의 중심이 될 수 있는 것은 참부모의 사랑의 심정에서만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확실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하늘이 타락한 인간을 대하여 이것을 조성시키려 하나 제각기 사정이 다릅니다. 또한 그 사정은 단순한 사정이 아니라 역사적인 사정입니다. 이 사정이 역사 과정의 인간들에게 나타남으로 말미암아 지금까지의 인류역사는 무지무지한 투쟁의 역사, 무지무지한 혈투극을 낳은 비극적인 역사였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사정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여러분 하나를 찾기 위해서는 여러분의 가치만큼 먼저 사탄으로부터 맞는다는 것입니다. 세계의 가치 만큼 하나님은 먼저 맞고서야 세계를 빼앗아 온다는 것입니다. 찾는 만큼 대가를 지불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작전법이었고 하나님의 사정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생명의 자리에 세우기 위해서 먼저 죽는 자리를 거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죽을 자리에 처해 있는 사람이 있으면 그를 살리기 위하여 죽을 고비를 찾아 넘으셨다는 것입니다. 무한한 절망 가운데에서도 소망을 갖고 무한한 슬픔과 고통의 고개를 넘으셨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 한 개체가 소망했던 사랑의 이념을 소개하기 위하여 6천년의 서글픈 역사노정을 거치셨으며, 오늘도 나 한 개체와 인연을 맺고자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계시다는 것을 느낄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 마음이 느껴질 때 비로소 여러분은 역사적인 모든 선지선열들의 사정, 또는 옛날 노아와 같은 심정을 공통적으로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옛날의 아브라함을 중심한 생명역사와는 거리를 갖고 있으되 심정의 세계에서는 거리를 초월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내 심정으로 통할 수 있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모세시대와도 역시 마찬가지고, 예수시대와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여러분은 예수와 성신을 세워서 2천년 동안 섭리하신 하나님의 그 곡절의 심정과 오늘의 내가 인연맺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하나의 심정의 귀일점을 세운 사람으로서 서게 될 때에 비로소 예수님께서는 그를 세워 신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사람들을 ‘너희는 종이 아니라 나의 형제’라고 말씀하신 사실을 여러분은 기억해야 되겠습니다. 또한 여러분은 이것을 알게 될 때에 나에게 슬픈 일이 있어 내가 슬퍼하기 전에 아버지가 먼저 슬퍼하신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내가 분하고 억울할 때에는 아버지의 분함과 억울함이 먼저 있었고 내가 낙망할 때에도 아버지가 먼저 낙망한 자리에 계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자식된 도리로 슬퍼하는 아버지를 대하여 ‘아버지! 나를 대하여 슬퍼하지 마시고 기뻐하십시오.’라고 위안할 수 있는 그런 참아들딸이 되어야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억울함을 당하는 것도 나를 위한 것으로 할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위한 것으로 해야 되겠고, 우리의 몸 마음을 대하여 슬퍼하는 아버지를 위로할 줄 아는 참아들딸의 심정을 가져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런 심정을 지니고 있다면, 십자가의 죽음길에 나간다 할지라도 ‘아버지! 내 오늘의 죽음의 고통이 비장하오니, 이 슬픔의 길을 피하게 하시옵소서!’라고 감히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자기 한 몸의 죽음의 고통을 피하려고 혹은 염려하여 공포에 싸여서 기도한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4천년 동안 예수 하나를 찾아오시기 위하여 십자가의 고비고비를 넘으시던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하게 될 때에, 자기 일 개인의 죽음 같은 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라고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심정에서만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 식구 여러분들! 자신의 사정을 붙들고 울지 마십시오! 각자의 사정은 천태만상이로되 오직 아버지의 심정을 붙들고 울 줄 아는 아들딸이 되어야 하겠고, 나를 위하여 먼저 우신 아버지를 눈물로써 위로할 수 있는 효자 효녀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라고 기도하게 될 때에 부활의 은총을 받아 하나님권 내에 품기운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이 고개를 넘어서야 되겠습니다. 즉 여러분이 죽지 않은 실체를 쓰고 부활권을 넘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실체세계에서 참아버지를 대신하여 모든 만민을 사랑해 주고, 또 만민이 아버지 대신 그러한 여러분을 모시고 살 수 있는 그때가 되어야 오늘날 하나님이 땅을 창조하신 그 이념의 종결을 볼 수 있고, 오늘날 인간을 대한 섭리의 종결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오늘날 우리들이 지금까지 소망 했던 그 소망도 종결을 볼 수 있고 내 사랑과 생명에 대한 섭리도 종결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세계가 이루어져야만이 나를 찾기 위해 수고하신 하나님의 심정, 고통당하신 하나님의 심정, 억울하고 분하고 서글픔을 당하신 하나님의 심정을 알게 됩니다. 또한 오늘날 슬픈 사정의 손길을 붙들고 우시던 아버지의 사랑을 알게 되고, 기뻐하시는 아버지의 사랑의 심정까지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붙들고 이 땅 위에 하늘의 이상을 완성하고 기뻐하려던 그 하나님의 사랑은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역사상의 수많은 인간들이 하나님의 막혀진 슬픔을 위로하기 위하여 사랑의 손길을 붙들고 나왔지만, 붙들린 자식과 붙드는 아버지가 환희에 넘쳐 본연의 꽃동산을 이루어 놓고 노래하고 춤추며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그 장면은 인간세계에 아직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이 슬픈 아버지의 심정을 어찌 알 수 있을 것인가? 내가 그런 자리에 처해야만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슬프고 기쁜 아버지의 심정을 느끼는 사람이라야만, 남겨진 하나님의 사랑을 차지하여, 하나님의 양자가 아니라 직계의 자녀로 설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명심해야 되겠습니다.
아버님! 이 자리에 부복한 당신의 아들딸들을 버리지 마시옵고, 몸 마음 전체를 아버지께 드리기에 주저하지 않는 아들딸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보시기에 부족하고 불충스러운 점, 합당치 못한 점이 많사오나, 아버님께서 저희를 찾기 위하여 수고해 나오신 역사적인 심정에 의지하여 저희의 몸 마음 다 바치오니 친히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미비한 부분을, 아버지, 성령의 불길로 사르시어 성별시키시사 아버님께서 취하시기에 합당한 저희들이 되어 몸 마음 전체를 하나로 묶어 바쳐드릴 수 있는 이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 당신의 아들딸들이 이 자리까지 따라 나온 험한 발자취는 아버님의 눈물자국을 대신한 걸음이었사옵고, 서글픔이 배인, 피 살을 떼어 내는 것과 같은 아버지의 노정을 대신한 걸음이었사오니, 아버님, 저희가 마음으로 각오한 것과 몸을 움직여 행동하는 것을 아시어서 이 시간 저희들을 당신의 깊은 사랑의 심정으로 친히 품어 주시옵고, 사탄의 참소조건에 걸리는 생명이 하나도 없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를 세우시어서 이 민족 앞에, 아버지, 새로운 말씀을 전하시려는 뜻을 저희들이 알고 있사오나, 저희의 불충과 미비함으로 말미암아 아버지가 원하시는 사명과 책임을 감당하지 못하여 아버님께 서러움을 끼치지 않을까 하는 초조한 마음을 갖고 있사오니, 아버지의 뜻을 대해 온 지금까지의 미비한 사실들을 살펴 주시옵고, 그것을 보충할 수 있는 아버지의 생명의 힘과 사랑의 힘을 가하여 주시옵고, 어떠한 사명과 책임이라도 감당해낼 수 있는 직접적인 은사를 저희에게 내려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저희들이 나가는 노정에는, 그 길을 막기 위하여 억만 사탄들이 준동할 것이오니, 이것을 대비한 저희의 몸 마음의 결심이 온전하여, 저희가 아버지 앞에 생명의 제물이 되고, 끝까지 참고 견디어서 사탄과의 싸움에 실패하지 않게, 아버지, 이끌어 주시옵소서.
처음 가졌던 각오와 결심으로 전진하여 오직 아버지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노력하며 싸워 나갈 수 있는 아들딸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제 이 자리에 모인 자녀들을 긍휼히 보시옵고, 아버지의 사랑의 품에 안기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어둠의 모든 요소와 조건을 제거하시옵고, 생명의 권한을 갖고 하나의 묶음으로서 아버지를 모시고, 영광의 찬송을 드리며 영광의 은사 앞에 감사할 수 있는 이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첫시간부터 끝시간까지 사탄이 이 한 모임에 나타나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오직 아버지의 영광만이 저희의 마음과 몸을 통하여 나타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오면서, 주의 이름으로 호소하였사옵나이다. 아멘.
여러분과 같이 생각하고자 하는 말씀의 제목은 ‘하나님이 찾으시려는 자유와 해방과 통일’입니다. 이러한 제목을 가지고 잠시 동안 말씀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려는 자유와 해방과 통일’ 이것을 신앙적인 견지에서 말씀드리려 합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시어서 못하시는 일이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능력 많으신 하나님이라 해도 하나님의 심정을 헤치고 들어가 그 마음이 과연 자유한 입장에 있는가라고 묻게 될 때, 저는 그렇다고 대답할 수가 없습니다. 또 하나님의 본심은 소망에 찬 섭리를 앞에 놓고 해방의 기쁨 가운데 계시는가 하고 묻게 될 때, 이도 역시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이 지으신 인간과 모든 만물세계가 하나님의 심정이 동기가 되어서 움직이고 있는가, 즉 하나님의 마음이 동하면 인간도 동하고 온 만물세계가 함께 동할 수 있는 통일적인 위치에 있는가 하고 묻는다면, 그도 역시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우리들은 단정짓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도 자유롭게 되기를 바라시는 것이 본성이요, 본연의 심정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해방된 입장에서 만우주를 주관해야 할 아버지이십니다. 그런데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슬픔이요, 온 피조만상의 슬픔이요, 역사상의 슬픔의 원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온 피조세계를 하나의 통일이념으로 묶어 지배해야 할 하나님이로되 그러한 입장에 계시지 못한 것이 하나님의 슬픔이요, 하나님의 고통이요, 하나님의 억울함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 모든 피조물을 창조하실 때의 본래의 이상향은 자유의 동산이요, 해방의 동산이요, 통일의 동산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상이 실현되지 못하게 된 어떤 곡절이 있었으니,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인간과 온 피조만물세계에까지 슬픔의 원천이 되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 슬픔의 원천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의 타락이라는 것을 오늘날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타락한 인간을 구하시는 하나님이 이 사회에 바라시는 이념이 있고, 우리가 찾아 나가는 이념이 있을진대 그 이념의 기준점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한 자유, 하나님의 사정을 중심한 해방, 하나님의 이념을 중심한 통일이 하나님의 소원이요, 나아가 우리들의 소원인 동시에 그 이념의 기준점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합니다.
주의 신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다.(고후 3:17)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데, 오늘날 자유의 신이요 해방의 신이요 통일의 신이신 우리 아버지, 그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여러분 자신의 심정에 어떤 시련도 초월할 수 있는 자유의 심정이 어떻게 해야 스며들 것인가, 이 모든 시련의 장벽을 넘어갈 수 있는 해방의 기점은 어떻게 해야 찾아질 것인가, 우리의 이념의 중심이 바라는, 즉 전체가 통일된 안식의 시간은 언제쯤 찾아질 것인가 하는 것이 여러분이 생각해야 할 중요한 문제입니다.
아직까지 하나님도 자유스런 입장에 계시지 못하고 해방의 자리에 계시지 못하고 통일된 위치에 계시지 못한 연고로, 오늘날 이 땅에서 자유를 부르짖고 있으되 그 자유는 우리가 누려야 할 참된 자유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해방을 말하고 있으되 그 해방은 완전한 해방이 아닙니다. 통일을 주장하고 있으되 그 통일 역시 온전한 통일이 아닙니다. 인류사회는 씨족으로부터 시작하여 부족, 민족을 거쳐 국가로 통일해 나왔지만, 그런 부분적인 통일은 진정한 통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그러한 연고로 하나님에 의하여 지음받은 우리들에게 있어서도, 우리가 바라는 완전한 자유, 우리가 바라는 완전한 해방, 우리가 바라는 완전한 통일은 하나님이 자유할 수 있고, 하나님이 해방과 통일의 주인공이 되는 날이 와야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유와 해방과 통일이 바로 인간들이 바라는 자유와 해방과 통일의 기준이라는 것을 우리는 논리적인 견지에서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역사노정을 회고해 보면, 중세 봉건사회 이후에 인문주의를 중심삼고 자유와 평등과 박애의 사상을 고취해 나왔습니다. 그러면 본래의 자유와 본래의 평등, 본래의 박애, 이 모든 속성은 누구의 속성인가? 그것들은 바로 하나님의 속성이라는 것입니다.
중세의 기독교가 하나님의 이념을 중심삼고 하나님의 심중과 통할 수 있는 자유의 입장에 세워졌던들, 혹은 해방된 입장에 서 있었거나 통일된 입장에 서 있었던들, 이 땅에 혁명이나 혁신이란 명사는 필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기독교가 하나님을 중심하고 완전한 자유와 완전한 해방을 구가할 수 있는 위치, 완전한 통일이 이룩된 그 기준을 취하지 못한 연고로, 자유와 해방과 통일의 움직임이 외적 세계로 옮겨졌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문예부흥운동이었다는 것입니다.
그후 자유사상을 내세워 군주국가를 혁명했고 다시 제국주의 국가와 맞서면서 자유사상을 고취했으나 다 깨져 나갔습니다. 자유를 찾기 위하여 혁명을 일으켜 나왔으나 제국주의 국가형태를 완전히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깨져 나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의와 사상, 혹은 정치적 이념을 세워 가지고 지금까지 나오고 있으나 이도 역시 점점 깨져 나가고 있습니다.
자유를 갈망하는 우리 인간들이 완전한 자유의 이념을 찾아 그것을 소유할 수 있는 입장에 서지 못하고, 외적인 자유만을 주장함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점점 진정한 자유를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즉 국가적으로 사회적으로 가정적으로 더 나아가 개인적으로 자유를 주장했지만 완전한 자유를 찾지 못하고 잃어버리는 역사를 거듭해 오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인간들이 주장하고 있는 자유는, 인간이 본성적으로 영원히 즐길 수 있는 자유가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한 자유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지나친 개인주의로 흘러 점점 고립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고로 하늘과 통할 수 있고 하늘의 이념과 상통할 수 있는 완전불변의 자유의 이념을 세우지 못하는 한, 또 그 자유가 천지가 바라는 자유와 부합되지 않게 될 때에는 자유를 찾기 위해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오히려 부자유의 정점을 향하여 나아가게 된다는 것을 현시대의 움직임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유를 찾기 위해 나선 우리의 심중을 더듬어서 판단해 볼 때, 과연 우리의 마음에, 이 모든 만상 앞에 화할 수 있는 자유의 심정이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일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유하심의 입장에 선다면, 우리의 그런 자유의 심정은 온 천하 만민과 더불어 즐길 수 있는 그런 기준이 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인간들은 그러한 자유의 입장을 취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유를 주장하되 자기에게 미쳐지는 범위내에서, 자유에 대한 관점을 정립해 나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참된 자유에 대해 논의해 본다면, 원칙을 떠난 자유는 참된 자유가 아니고, 책임을 벗어난 자유는 참된 자유가 아니며, 실적을 남겨 놓지 않는 자유는 참된 자유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자유행동이든지 원칙을 벗어나서는 안 되고, 책임을 져야 하며, 그 행동의 실적이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도 이러한 조건을 구비하지 못한 자리에서 자유하려고 한다면, 자연히 천륜과는 먼 거리에 놓이게 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인식하여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중세 이후에 제국주의가 나왔지만 깨져 나갔고, 오늘날까지 사상적인 형태를 갖추어 나온 모든 것이, 앞으로 참된 자유를 주장하는 사상이 나오면 깨져 나가는 때가 불원하여 오리라고 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경향이 점점 개인에게까지 미쳐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 자체를 중심삼고 보아도, 여러분이 자유를 주장하다 보면 사회도 혁신하여야 되겠고, 가정도 혁신하여야 되겠다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역사는 이제 내 마음 몸까지도 분리하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민주진영을 우리가 생각해 보면, 그 이념은 기독교에서 취하려 하고 있지만 실생활은 과학을 중심삼은 개인주의 사상에 젖어 있습니다. 그래서 민주주의 이념은 자유를 기초로 하고 있지만 기독교 사상과는 근본적으로 대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이념은 자유를 주장하되 온 천주의 자유를 주장하고 있고, 해방을 바라보되 전체의 해방을 이룰 수 있는 해방을 바라보고 있고, 통일을 주장하되 전체가 하늘의 심정을 대신한 통일, 즉 하늘이 기뻐하면 세계도 기뻐할 수 있는 그러한 관점에서의 통일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자유를 주장하는 민주진영의 사람들은 개인주의적인 사상에 중심을 두고 자유를 논의하기 때문에 나중에 이들은 국가도 부정하고, 사회도 부정하고, 단체도 부정하고, 가정이나 부부관계까지도 부정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결국은 자신의 마음의 중심까지도 부정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에게 최후로 남아지는 것은 무엇일 것인가? 고독이 남아질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고독이 극치에 달하는 경지에 들어가게 될 때에는 너도 믿지 못하고, 나도 믿지 못하는 불신의 자신들이 되어 버릴 것입니다. 그리고 고독과 불신의 자신이 될 때 우주적인 공포가 휩쓸게 될 것이고, 결국에는 자멸을 초래하고 말 것입니다. 오늘날의 역사는 이런 추세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자유를 부르짖으려면, 과거에 부르짖던 자유나 오늘날 부르짖고 있는 무책임한 자유가 아닌 하나님의 사랑의 이념이 동반된 참된 자유를 부르짖어야 되겠고, 이념적인 동시에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자유를 부르짖어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그것이 여러분의 생명력과 더불어 변할 수 없는 철칙과 같이, 아니 움직일래야 아니 움직일 수 없는 자유 법도적인 무엇을 갖고 움직이는 세계가 되지 않으면 안 되리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들이 공통적으로 누리고자 하는 행복의 원천은 어디에 있으며, 자기 스스로 나는 모든 죄악에서 해방되었다고 자부할 수 있고, 시간성을 초월하여 해방의 기쁨을 느낄 수 있는 행복의 원천은 어디에 있을 것인가? 또 민족을 초월하고, 국가를 초월하고, 종족을 초월하고, 모든 사상을 초월하고, 관념을 초월한 통일의 원천은 어디에 있을 것인가?
오늘날 역사적인 종말기에 처해 있는 우리들은 마땅히 취해야 되는 이상을 한 번도 취한 일이 없습니다. 그런고로 이런 이상을 찾아 헤매지 않는다 할진대는 아무리 역사적인 종말시대에 이상세계가 오고, 혹은 자유의 동산이 이루어지고, 해방의 동산이 이루어지고, 통일의 동산이 건설된다 하여도 그것들은 여러분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의 소망이 이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소망도 이렇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소망과 우리의 소망이 내 한 자체에서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할 수 있는 심적 기반을 조성하여 하나님이 나를 대하여 느끼고 소망하는 그 자유와 해방과 통일을 내 한 자체에서 발견할 수 있는 때는 어느 때일 것인가? 이것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역사적인 비애와 더불어 심판의 제물이 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까지 세계 인류는 자유의 세계를 건설하기 위하여 투쟁해 나왔습니다. 자유를 얻기 위해서 투쟁해 나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이 생각하는 것과 같은 작전법을 쓰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해방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투쟁의 과정을 거치지 않을 수 없었지만, 그 방법에 있어서 하나님은 오늘날 세상의 역사를 엮어 나온 민족들이 혈투극을 전개했던 그런 투쟁방법과는 다른 방법을 취하여 왔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인류의 역사노정을 보면, 개인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또는 개인을 살려내기 위해서 어떠한 주권자들과 투쟁해 나왔지만, 하나님이 자유를 성취시켜 나오는 데는 남을 치는 투쟁방법을 취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인류역사를 보면, 개인이 개인을 치고, 민족이 민족을 치고, 국가가 국가를 치는, 그런 노정을 거쳐 하나의 자유의 이념을 찾아 나왔지만, 하나님은 이와 반대입니다. 개인을 찾기 위해서 개인을 치기 전에 먼저 맞으셨고, 민족을 찾기 위해서 그 민족을 치기 전에 민족을 해방할 수 있는 수난의 노정을 하나님이 먼저 친히 걸으셨으며, 세계를 찾기 위하여 세계를 치기 전에 먼저 수고의 노정을 하나님이 친히 걸어 나오고 계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앞으로 자유의 주인공이 될 사람은 어떠한 사람일 것인가? 이는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유를 성취시키는 작전법이 이러하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들이 하늘과 같이 느낄 수 있는 자유의 이념을 찾고자 할진대는 하늘의 작전법에 따라야 할 것입니다. 즉 가정을 찾기 위해서는 가정을 해방할 수 있는 가치만큼 먼저 자기를 쳐야 하고, 민족과 국가 세계를 찾고자 한다면, 먼저 그 가치만큼 자기를 칠 줄 알아야 하며, 하늘을 위해서도 역시 그에 해당하는 만큼 먼저 자기를 쳐야 하고, 맞으면서도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자유의 심정을 가진 사람만이 오늘날 역사의 종말시대에 반드시 남아지지 않을까 하는 것을 여러분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자유의 주인공, 해방의 주인공, 통일의 주인공이 그 실체의 가치를 갖고 땅 위에 한 개체로 나타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자유와 하나님의 해방과 하나님의 통일의 이념이 인간과 관계맺어질 수 없겠기에, 이것을 실천하기 위해서 실체를 가진 자유 그 자체, 해방 그 자체, 통일 그 자체로 하늘을 대신해서 오신 분이 오늘날 여러분이 믿고 있는 예수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예수를 붙들고 하나님의 심정에 사무쳐 있던 자유를 붙든 가치의 심정, 해방을 이룬 가치의 심정, 통일을 이룬 가치의 심정을 느껴야 하겠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 하나를 붙듦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 모든 것을 제쳐놓고도 스스로 기뻐할 수 있는 그런 심정을 갖지 못한다 할진대는, 하나님이 인간과 더불어 즐길 수 있는 자유의 경지, 해방의 경지, 통일의 경지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에서 찾고 있는 자유와 하나님이 찾고 있는 자유는 방향이 다릅니다. 세상은 자유를 찾기 위하여 생명을 걸고 민족이 민족을 공격하고, 주권은 주권대로 서로 대결하여 싸워 나왔습니다. 그러나 하늘은 스스로가 맞으면서, 스스로 책임지고 스스로에서부터 해결점을 세워서 전체의 범위에까지 확대시켜 나오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유회복운동의 비법임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 여러분 한 자체를 중심하고 볼 때, 여러분이 여러분의 생명을 포기할 수 있는 입장에 서더라도 그 자리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자유의 마음을 여러분이 소유했다 할진대, 여러분은 최고의 자유를 소유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복귀섭리의 노정에 비추어서 이것을 생각해 보면, 지상에서 해방운동이 있었던 동시에 영계에서도 해방운동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 땅의 인간들을 하나님의 대신자들로 혹은 자녀로 생각하고 직접 대하실 수 없기 때문에, 인간들은 심부름꾼에서부터 올라가 가지고 자녀의 자리를 거쳐 직접 하나님을 대할 수 있는 자리까지 올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역사노정을 거쳐왔다는 것입니다.
구약시대를 중심삼고 보면, 천사들을 심부름꾼으로 세우시어서 하나님의 자유의 동산, 해방의 천국을 건설해 나왔습니다. 그러한 종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해방되는 은사권에 들어가려면 생명을 잃으면서도 즐거워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자유의 심정을 가진 사람만이 종의 자리를 넘어서서 아들의 자리를 찾아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하나님의 섭리를 받들어 나온 역사적인 선조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잃으면서도 즐거워할 수 있는 자유의 심정을 가질 수 있었으며, 온갖 시험을 늠름히 넘을 수 있었고, 죽음까지도 넘어설 수 있었습니다. 이런 심정의 기준이 잡힘으로 인해 종의 자리에서부터 아들의 자리를, 종의 시대에서부터 자녀의 시대를 바랄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기준이 세워짐으로 말미암아 하늘은 친히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아들의 자리에서 아버지의 자리까지 올라가야 했던 것입니다.
예수는 이 땅에 와 가지고 아버지의 인정을 받을 때까지 자신의 죽고 사는 것까지도 하나님을 위하여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자리에 섰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영원한, 변할래야 변할 수 없는 독생자의 이념을 완결지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날까지 만민 앞에 서 가지고 종의 자리에 있었던 인간들을 자녀로 해방시켜 나왔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잘 아는 바일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가 이 땅에 와서 죽음을 당하는 고난의 노정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내적 심정과 일체된 기준을 세움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이 예수를 믿게 될 때에는 자녀의 자리에 갈 수 있는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마음으로 하나님이 찾으시려는 자유와 해방과 통일을 바라고 있다 할진댄, 여러분 자신에게 그것이 연결되어질 수 있도록 종의 시대에서부터 자녀시대, 자녀시대에서부터 부모를 모시는 가정의 시대까지 자기 스스로 찾아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자유의 원칙에 의해야만 결정지어진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어떤 명령이나 어떤 제재나 어떤 강압 밑에서 성취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죽고 사는 문제까지 넘어서서 하나님을 생각하고, 예수를 생각하면서 기쁨과 자유의 심정이 교류될 수 있어야만 하나님의 이념과 우리 자체가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복귀섭리역사도 이렇게 해방의 역사를 거듭해 나왔습니다. 지금까지는 종의 시대를 거쳐 예수와 성신을 통해서 자녀로 해방되는 노정을 거쳐왔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은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어야 하고, 하나님 가정에서 하나님의 유업을 상속받을 수 있는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하나님을 중심삼고 영원히 뗄래야 뗄 수 없는 생명의 기준을 세우려면, 사망까지도 자유로이 주관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아들딸로서 하나님의 유업을 상속받을 수 있는 권한을 가질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이 땅도 자유를 찾아 헤매고 하나님도 자유를 찾아 섭리하십니다. 예수가 하나님을 위하여 죽음을 개의치 않고 싸웠던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그 이상의 어려움을 개의치 아니하시고 예수를 위하여 역사하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종의 입장에 있는 인간들이 하늘을 위하여 죽음을 개의치 않는 자유의 심정으로 산다면, 최후에는 하나님이 인간을 대하여 죽음의 고비도 자유로이 넘을 수 있는 심정으로써 찾아오신다는 것을 여러분은 명심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찾아 주시고 주관하시지 않아도 어떤 고난도 기쁨으로 넘을 수 있는 자유의 기준을 세우면, 지금까지의 공포나 분노나 슬픔이나 억울함도 이길 수 있으며, 사망권까지도 하나님의 생명권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근본적인 중생의 문제점을 해결지을 수 있는 그런 때가 와야만, 우리가 하나님을 자유롭게 위할 수 있고 하나님도 우리를 자유롭게 위해 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우리가 둘이 아닌 하나가 될 때, 하나님의 자유와 해방의 심정과 통일의 이념이 우리들의 자유와 해방의 심정, 그리고 우리의 통일의 이념으로 화한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하나님을 위하여 생명까지 바쳤으되, 예수와 하나님이 통할 수 없는 부분이 남아 있습니다. 예수는 또 우리를 위해 죽음의 길까지도 자유로이 갔으되, 성신과 예수가 하나될 수 없는 부분이 남아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는 하늘에 있고 성신은 땅에 있어서 땅이면 땅, 하늘이면 하늘, 이렇게 한 곳에만 있을 수밖에 없는 간격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와 성신을 중심삼고 자녀의 입장을 바라보고 나가는 우리와도 간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와 하나님 사이에 벌어진 이 간격을 없애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이 땅에 있는 모든 인류를 자녀와 같이 사랑할 수 있고, 하나님이 자유자재로 인류를 붙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한 날이 와야만 하나님과 예수 사이에 막혀진 모든 담을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예수를 따라 하나님을 위하여 죽음의 길까지도 자유자재로 넘고자 원할진대 실제로 이것이 관념이나 생각에만 그쳐서는 안 됩니다. 어떤 고난도 자유로이 넘을 수 있는 하나의 기준, 죽음의 고통도 잊어버릴 수 있는 해방의 기준이 오늘날 우리들로 말미암아 세워져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서 비로소 하나님과의 자유로운 인연이 맺어지고, 해방의 인연이 맺어지고, 통일의 인연이 맺어지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을 찾아 헤매고 있고, 하나님의 뜻을 찾아 신앙해 나가고 있는 우리들은 하나님의 자유와 해방과 통일의 이념권 내에서 하나님 대신한 자유의 주인공이 되어야겠고, 하나님 대신 만민을 해방시킬 수 있는 주인공이 되어야겠으며, 통일을 이룩할 수 있는 자격자가 되어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련의 고비를 넘어가더라도 이것을 고통으로 느끼지 아니하고, 슬픔으로 느끼지 아니하고, 억울함으로 느끼지 아니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늘을 대하여 사무치는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죽음의 고개도 넘어가는 자유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있다 할진대 하늘은 자신의 고통이나 시련도 개의치 않고, 모든 권위나 위신을 포기하면서까지 그를 붙들어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서만이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될 수 있고 우리도 하나님의 아들딸이 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이후 오늘날까지 수많은 선지자들이 왔다 갔지만 시련을 넘으면서 고통을 느끼지 않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잃어버린 사랑하는 자녀를 찾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위신과 고통, 혹은 시련과 슬픔도 넘어설 수 있는 심적인 기준을 갖고 계셨는데, 그런 하나님의 심정과 동일한 심정을 가진 사람을 이제까지 만나지 못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크나큰 탄식의 조건이 되고 있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붙들고 그런 사망권을 넘을 수 있는 자리, 하나님이 우리들을 붙들어 주심으로써 사망권을 넘어설 수 있는 자리에서 연결되어지는 사랑의 힘이야말로, 거기에서 연결되어지는 해방의 은사야말로, 거기서 하나되는 통일의 원칙이야말로, 이 전체 존재세계에 자유의 기준이 될 수 있고, 해방의 기준이 될 수 있고, 통일의 기준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경지에서 하나님이 찾으려 하는 그 아들은 한 개인이로되 역사상의 모든 슬픔을 청산한 아들, 모든 죽음을 청산한 아들로서 우주 전체의 가치 이상의 존재라는 것입니다. 하늘과 지상,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그런 인연은 어느 날에나 연결될 것인가? 이것이 연결되지 않는다면 예수님도 자유의 자리, 해방의 자리에 설 수 없습니다. 통일의 이념도 성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아직까지 저나라에서 늘 기도해야 할 입장에 계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기독교 신자들에게 이런 하나의 기준이 세워져야만, 하나님의 심정에 사무쳐 있던 자유의 원칙, 하늘의 심정에 사무쳐 있던 이 모든 악과 사망에 대한 해방의 원칙, 하늘의 심정에 사무쳤던 통일의 원칙이 여러분 자체에 변치 않는 기준으로 세워질 수 있습니다.
그러한 기준이 세워졌다 할진대는, 여러분들이 이 세계를 바라보게 될 때에, 하나님이 6천년 동안 섭리해 나오면서 바라보시던 그 심정을 대신해서 바라볼 수 있고, 하나님이 수많은 슬픔과 고통과 역경을 참아 나오면서 사랑하는 아들을 찾기 위해 나오실 그 간절한 심정을 갖고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하나의 개체가 나와서, 그 개체를 중심삼고 가정이 이루어지고, 사회가 건설되고, 국가와 세계가 건설되어질 때, 하나님의 자유의 동산을 여러분의 생활권 내에 건설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소망하던 해방의 동산도, 혹은 통일의 세계도 그런 기준에서부터 출발되어 나간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지금까지는 사탄세계가 자유 아닌 자유형의 주권을 세워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것이 자유인 것 같지만 아닙니다. 개인에서 시작하여 종족을 거쳐 민족, 국가를 넘어 세계를 통합해 나오는 것 같지만 실상은 자유를 떠나 있고, 해방의 원칙을 떠나 있고, 통일의 원칙을 떠나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세상에서 바라는 기준 위에서, 하나님과 대치되는 자리에서 통일과 자유와 해방의 형태를 갖추면 갖출수록 내적으로는 불안과 불평과 공포에 휩쓸리게 됩니다. 외적으로는 이루어져 가는 것 같지만 내적으로는 붕괴돼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외적으로는 통일의 형태를 갖추어 나오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내적으로는 갈래갈래 갈라져 나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와 같이 내적으로 붕괴되어 들어가는 것을 무엇으로 보충할 것인가? 이것을 보충하는 역사를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만일 이러한 하나님이 안 계시다면, 오늘날 인간들은 절망한 나머지 모두 자포자기 상태에 이르러 결국 사망권에서 숨지게 되고 말 것입니다.
미국 같은 나라의 사람들, 그들에겐 부모도 없습니다. 자식도 없습니다. 친척도 없습니다. 이런 세상이 되었기 때문에 나라도 포기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심지어는 자기들이 믿고 나온 종교까지도 순전히 자기들의 이익을 추구하다가 소득이 없게 될 때는 전부 포기해 버리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계는 일 개인을 위해 생겨난 것이 아니고 세계 전체를 위하여 생겨났기 때문에 자기의 이익만을 위해 생존하는 사람은 세계적인 이념을 위해 존재하는 세계 앞에서 자기의 이익만을 위해 산 것에 비례한 고충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개인주의 사상이 만연된 사회, 자기를 중심삼고 생활하는 사회는 나중에는 고립과 불신과 공포의 사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끝내는 자포자기하여 자멸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이러한 운명의 역사적인 종결시대에 우리는 접어들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이러한 실정을 바라보고 있는 오늘날 우리들은 자유와 해방과 통일의 이념을 가져야 할 텐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이것을 성취시킬 수 있을 것인가?
여러분이 알고 있는 그 개인적인 사상으로부터 시작하여 주장하여 나가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세계를 잃어버리고, 이 세계에서 이탈되는 입장을 피치 못할 것입니다. 오늘날 이것을 총합시켜서, 본연의 개인에서 본연의 가정으로, 또 본연의 사회로, 본연의 국가로, 본연의 세계로 회복시킬 수 있는 그 무엇이 인간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 할진대는, 하나님에게도 우리 인간에게도 큰 문제입니다.
하나님에게는 오늘날 세기말적인 이 시대에 자유와 해방과 통일의 이념을 인간과 더불어 성취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외적 세계는 분열형태를 갖추었지만 심중의 근원적인 하나의 힘을 세상에 내세워 사망의 요인이 침범할 수 없는 절대적인 자유의 원칙, 절대적인 해방의 원칙, 절대적인 통일의 원칙의 기준을 세우기 위해, 그리고 그런 기준을 갖춘 하나의 사람, 그런 사람들이 모인 가정, 그런 사람들이 모인 종족, 그런 사람들로 말미암은 국가와 세계를 이루기 위하여 섭리해 나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 예수는 만왕의 왕으로 오신 분이요, 우리의 생명의 주인공이요, 천주의 주인공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생명의 주체요, 이념의 주체요, 사랑의 주체로 오신 분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주체인 예수와 나와 영원한 관계를 맺고, 맺어진 그 관계가 다시 하나님과 영원히 관계맺을 수 있는 그 단계까지 나가기 전에는 하나님과 예수와 우리들 사이의 간격을 메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앞에 어떠한 불신의 사회, 혹은 고독의 사회, 공포의 사회가 찾아 들어와 휩쓸게 될 때에도 이것을 내 죽음에 대비시켜서 늠름히 넘어갈 수 있는, 사망까지도 자유자재로 넘을 수 있는 생명력이 여러분 자신에게 있다 할진댄, 어떤 심판세계, 파괴의 세계가 벌어진다 해도 여러분의 생명력은 파괴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기준이 남아 있는 한, 여러분은 사망의 공포권 내에서의 심판의 제물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이런 기준이 이념적으로만 세워질 것이 아니고 영과 육이 실체적으로 하나되어 그 기준을 세워야 합니다. 여러분 자신이 그 기준을 소유하느냐 못하느냐에 의해 여러분이 앞으로 남아질 수 있느냐 없느냐가 결정됩니다. 그런 기준을 소유해야만 하나님이 가지신 모든 것을 투입하여 생명을 걸고 우리를 찾아오는 마당에서 내가 생명을 걸어 놓고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자격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나를 찾아 세워 놓고 비로소 자유로운 생활 형태를 건설할 수 있고, 하나님이 나를 찾아 세워 놓고 자유와 해방의 이념, 통일의 이념을 찾아 세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런 자격자가 된다 할진댄 하나님이 영존하는 한 우리와 사망의 권세는 하등의 관계가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여러분 개체로 돌아와 여러분 자신에게 반문해 보게 될 때, 여러분의 마음에 참다운 생명을 중심삼고 즐길 수 있는 자유의 심정과 자유의 생명과 자유의 이념이 있습니까? 문제는 여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심정, 그런 생명, 그런 이념을 갖고 있는 한 어떠한 죽음의 길도, 어떠한 사망과 고통이 따르는 길도 자유롭게 소화시켜 넘어서 가지고 생명의 요소를 복귀할 수 있는 자격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자유의 세계에서, 하나님의 해방의 동산에서, 하나님의 통일의 동산에서 영원히 살 수 있는 존재가 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겠습니다.
자유의 길을 찾아 나선 우리를 시험도 해보고 고난도 당하게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사무친 심정, 솟구쳐 오르는 자유의 그 심정을 어느 누가 막을 것인가? 아무도 못 막습니다. 모든 것은 다 깨뜨릴 수 있어도 그것만은 깨뜨릴 수 없습니다. 솟구쳐 오르는 그 심정은 사망권이 아무리 강하다 할지라도 막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와 영원히 하나될 수 있는 생명의 연결이 여러분의 생활을 중심삼고 이루어질 때에 영원한 하나님의 자유와 하나님의 해방과 하나님의 통일이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비로소 이룩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그런 기준이 세워지지 않는 한, 상대적인 이념으로서 바라는 자유, 바라고 있는 해방, 바라고 있는 통일이 아무리 이루어진다 할지라도 여러분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6천년 동안 수고하신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하여 소망하고 있는 그 자유, 그 해방 그 통일을 하나님과 같이 지닐 수 있고, 느낄 수 있고, 이룩할 수 있는 하나의 모습을 찾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영원히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원히 변할래야 변할 수 없는 기준이 결정되어 있어야만 그런 이념의 세계가 여러분 앞에 찾아온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심적 기준을 여러분이 갖지 못한다면 아무리 외적 세계가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즉 아무리 외적으로 자유와 해방과 통일의 세계가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이것은 완전한 통일의 세계가 아니요, 완전한 해방의 세계가 아니며, 완전한 자유의 세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의 마음에 생명력이 약동하고, 이념의 힘이 약동하고, 사랑의 힘이 약동하고 있는데, 약동되는 그 힘의 확고한 기준이, 6천년 동안 고생하신 하나님을 대한 정성의 기준이 여러분 자신에서 세워지지 않는 한, 6천년 동안 하늘을 대해 싸워 나오던 어둠의 권한, 사망의 권한이 여러분의 생애를 뒤덮을 때 여러분은 남아질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대하는 경지에서 자신의 생명력, 자신의 이념, 자신의 사랑의 힘을 갖추어 가지고 그것을 기반으로 하여 구가하는 자유야말로 완전한 자유요, 그런 원칙에 입각한 해방이야말로 완전한 해방이요, 그런 원칙에 입각한 통일이야말로 완전한 통일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의 기준을 갖추지 않는다 할진대는 세계가 혼란과 혼돈, 공포에 휩쓸리면, 여러분은 그것을 막아낼 수 없습니다. 그것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생명력이요, 이상의 힘이요, 사랑의 힘입니다. 이것을 넘을 수 있는 기준을 세우지 못하면, 아무리 수고한 하나님의 섭리역사가 있다 할지라도, 섭리역사를 통하여 찾으려 하셨던 그 자유도 해방도 통일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아버님! 자유의 동산을 잃어버린 인간, 해방의 동산을 잃어버린 인간, 통일의 동산을 잃어버린 인간들을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잃어버린 모든 것들이 외적 세계에서 해결되는 줄로만 알았는데, 외적으로는 일정한 기준을 갖추어 나오면서도 내적으로는 분열되어 온 역사적인 슬픔을 저희들은 알았사옵니다.
이제 문제가 되는 내적인 자유의 세계, 내적인 해방의 세계, 내적인 통일의 세계를 쟁취할 수 있는 하나님을 대한 생명의 힘이, 사랑의 힘이, 이념의 힘이 저희에게 넘치어서 사망까지도 비웃어 고통과 슬픔과 억울함을 다 딛고 넘어설 수 있는 하나의 심정의 기준이 저희의 마음에 세워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심정의 세계에서는 전체 성도의 자유함을 느낄 수 있고 전체의 환경도 느껴질 수 있고 전체의 생명까지도 움직여낼 수 있다는 것을 저희들이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 오늘의 역사적인 세계를 바라보게 될 때에, 내적으로는 분열을 조장하면서 외적으로는 그럴듯하게 통일의 형태를 갖추어 물질을 중심삼고 움직여 나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옵니다. 그러나 내적으로 보면 그와 반대로 정신의 궁핍을 피하기 위하여, 생명의 궁핍을 피하기 위하여, 사랑의 궁핍을 피하기 위하여 역사가 흘러 나왔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오늘날 저희들은 생명의 시간을 보충해야 할, 이념의 시간을 보충해야 할, 아버님의 사랑을 보충해야 할 시기에 당도했사오니, 내가 사망선을 넘어서면서 기뻐할 수 있는 마음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를 아버지라 할 수 있는 마음의 충정을 구해야 되겠사옵고, 나를 대하여 염려하고 싸우신 아버지인 것을 내가 알아야 되겠사오니 그 수고함이 오늘날 저희들의 천만 배의 죽음 이상의 가치로써 나를 찾아온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심적인 변화가 일어나야만이, 정신력이나 영의 궁핍을 보충할 수 있는 생명의 힘이 생겨난다는 것을 저희들이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 오늘날 이 땅에 살고 있는 인간의 마음 마음에 이제 물질적인 기근과 기갈만이 아니라, 물질적인 추궁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기갈과 정신적인 추궁을 당하고 있사오니, 이것을 채워 줄 수 있는 성령의 불길, 아버님의 생명, 아버님의 사랑의 힘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그것이 폭발되는 곳에서만이 얻을 수 있는 내적인 모든 생명, 추구하던 자유의 이념까지도 소화할 수 있는 아버님의 자유의 심정, 아버님의 해방의 심정, 아버님의 통일의 심정을 저희들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 아버님은 오늘날 저희를 찾기 위해서 하나에서부터 전체까지 모든 것을 그런 자리로 몰아내고 있다는 것을 저희들이 알고 있사옵니다. 또한 저희는 오늘날 같은 아버님의 이름을 가지고 세계로부터 국가로부터 민족으로부터 나 개인까지 그러한 자리로 몰아내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사옵니다.
이제 내적으로 최후의 그때를 항하여 흘러가고 있는 오늘날, 아버님의 전체의 힘을 영원히 잃지 않는, 세계와 모순된 나를 연결시킬 수 있는 기준이 없사오니 이것을 찾아 연결시킬 수 있는 보다 큰 심정을 저희들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의 실존성, 아버님의 생명, 아버님의 이념, 아버님의 사랑, 내적으로 움직여 나온 자유와 해방과 통일이 모두 나 하나에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야만 머나먼 하나님도 내 것이요, 머나먼 하늘나라도 내 나라요, 머나먼 이념과 통할 수 있는 심정도 내 심정이라 할 수 있는 자격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마음에 그런 심정을 가진 사람에 한해서 천국을 소유할 수 있고, 그런 사람이 천국의 이념을 성취시킬 수 있는 자격자인 연고로 아버님도 우리를 대하여 ‘네 마음에 내가 있다.’ 하였고, 예수도 우리를 대하여 ‘네 마음에 내가 있다.’ 하였나이다. 이와 같이 천국도 우리 마음에 있다고 믿는 심적 기준에서만이 모든 해결점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 이제 원컨대 저희들에 있어서 내 몸보다도 귀하게 느낄 수 있는 아버님의 심정, 내 자유보다도 귀하게 느낄 수 있는 아버님의 심정, 오늘의 내 생애보다도 더 귀하게 느낄 수 있는 아버님의 심정을 알고, 이 세계 전체의 죽음 이상으로 아버님의 슬픔을 안타깝게 느낄 수 있는 하나의 심정을 회복하고, 그걸 이해할 수 있는 내 한 개체를 갖추어 아버지 앞에 나설 수 있는 아들딸 되게 허락해 주시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찾고 헤매신 수고의 역사노정 앞에, 이제 저희들의 심정에 아버님의 심정이 폭발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아버님의 생명력, 아버님의 이념, 아버님의 사랑을 중심삼은, 생명을 기반으로 한 자유, 이념을 기반으로 한 자유, 사랑을 기반으로 한 자유, 그리고 또 그것들을 기반으로 한 해방과 통일이 이루어진 그 전체를 소유하여 ‘아버님이여! 이제 위로받으시옵소서! 당신의 마음이 이것인 줄 알았사옵니다.’라고 하면서 역사 과정에서 수고하신 아버지의 소원을 해원해 드릴 수 있는 심정적인 기반을 갖추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아버님을 모시고 영광받을 수 있는 생명과 이념과 해방을 노래할 수 있는 입장에서, 복귀의 서러움과 복귀의 고통과 한탄을 해원하는 자유의 회복운동을 섭리하신 아버지의 마음까지도 전부 다 해원하여, 세계의 전체 인류가 아버지를 모시고 자유를 노래할 수 있고, 해방을 노래할 수 있으며, 통일을 노래할 수 있는 아버지의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날 저희들에게 자유의 심정이 있다 할진대는, 해방의 심정이 있다 할진대는, 억만 사탄, 억만 원수가 있다 해도 그들이 우리를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또한 이념에 구애받지 아니하는 것을 알았사옵고, 이런 자유와 해방의 자리에서 아버님과 저희들의 심정이 하나로 통일된 기준에서 움직이는 날에는 하늘땅은 자동적으로 통일된 기준에 화하여 움직일 것을 알았사오니, 그러한 기준을 저희들의 마음에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생명과 이 소망을 위해서 저희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아버지 심정과 하나될 수 있는 기준을 세울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고, 아버님을 심중에 모실 때까지 원수들의 농락에 빠지는 자들이 되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원수의 핍박을 넘어 아버님의 심정이 저희 마음에 깃들 때까지 변치 않는 아들딸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공포를 넘어설 수 있는 아들딸 되게 허락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올 때,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기도 올렸사옵나이다. 아멘.
오늘 저희들이 아버지 무릎 앞에 다시 모였사오나 서러운 아버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지 못할까 봐 두렵사옵고, 아버지께서 바라시는 뜻 앞에 망령된 허물을 나타낼까 봐 두렵사오니, 아버님이여! 합당치 못한 저희들이거들랑 스스로 낮은 자리에 처하여 아버지의 긍휼을 바랄 수 있는 간절한 마음이라도 갖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 돌보아 주시지 않으면 저희가 어찌 이 땅 위에서 아버지의 영광을 바라볼 수 있사오며, 아버지의 심정에 남아지는 저희가 되지 못한다면 저희가 어찌 허락한 동산의 뜻을 바라보오리까? 아버님이여! 당신의 마음속에 남아질 수 있는 무리, 당신의 심정에 화할 수 있는 무리, 당신과 더불어 생활할 수 있는 무리가 되기를 저희들은 애초부터 마음에 그렸고, 또 그 뜻을 바라보고 나왔사옵니다.
처음엔 아버지의 심정을 체득하여 아버지를 노래하였사오나, 과정에 있어서 상처받은 심정을 지닌 사람들이 많은 줄 알고 있사오니, 아버지, 이들의 모든 어려운 사정을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처음에 아버지 앞에 각오하던 그 결심이 끝날의 복귀의 동산 가운데서 남아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저희들은 복귀의 노정을 통하여 배우게 되었사옵니다.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광야노정에서 쓰러지지 않은 무리가 있었던 것은, 애급의 바로궁중을 박차고 나올 때 아버지를 대했던 간곡한 심정이 광야 40년노정에서도 변치 않았기 때문임을 알고 있사옵고, 나아가 아버지를 대해 충의 심정을 남긴 무리가 제2이스라엘의 축복을 받았다는 것도 저희들 너무나 잘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지 앞에 맹세했던 저희들, 아버지 앞에 결심했던 저희들, 그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는 저희들 자체가 되어 있는가 스스로 반문해 보는 이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끝날은 다가오고 있사온데 아버지를 위하여 책임질 무리가 없음을 보시고 아버지께서 탄식하고 계실 줄 알고 있사옵니다. 저희들, 아버지를 찾아 아버지의 영광을 바라보고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마음으로 자처하고 있지만, 아버지의 남기신 뜻, 아버지의 허락하신 섭리, 아버지의 싸움의 노정에 있어서 어느 한 분야를 책임지고 나타날 무리가 없는 것을 보시고 아버지께서 탄식하고 계시다는 것을 아오니, 아버님이여! 저희들 이 시간 다시 아버지 앞에 속죄의 제단을 쌓아 통회의 눈물을 흘릴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광야노정에서 안식을 바라는 마음을 갖고 아버지를 원망하며 광야에서 쓰러진 이스라엘의 무리를 저희들이 알고 있사옵니다. 오늘날 저희는 그러한 모습이 되지 않기 위해 이 시간 아버지의 손길을 불들고자 모였사오니, 아버지의 영광에 참여하는 무리들이 되게 이끌어 주시옵길,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이제 이 삼천만 민족을 긍휼히 보시옵소서. 아버지, 이 민족을 긍휼히 보시옵소서. 이 민족을 위하여 모이는 수많은 제단들이 혹시 민족과 먼 거리에, 하늘의 뜻과 먼 거리에 있을지 모르겠사오니, 그들을 통하여 이루어야 할 섭리의 뜻이 있는 한 아버지께서 직접적으로 간섭하여 주시옵고, 아버지의 권고를 듣지 않으면 채찍을 들어서라도 그들의 갈 길을 가르쳐 주시옵길,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잠들어 있는 이 민족을 깨우쳐야 할 사명을 짊어지고 끝까지 남아지는 무리가 있어야 할진대는, 아버지, 한 생명이라도 더 아버지의 사랑의 심정에 화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6천년간 탄식하신 아버지를 붙들고 아버지 앞에 통회하고 아버지 앞에 복종하여 사탄 대해 싸워 나갈 수 있는 아버지의 아들딸들 되게 이끌어 주시옵길,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께서 역사하시고 섭리하셨사오나 인간들의 잘못으로 인해 후회와 탄식과 원한이 쌓인 줄 아오니, 저희들을 통하여 그 원한을 푸시옵소서. 아버님, 저희들이 당신의 이상의 동산을 찾고자 하오니 간곡한 심정으로 역사하여 주시옵고, 직접적으로 역사해 주시옵소서. 성별할 것이 있으면 성별해 주시어서 아버지 앞에 영광의 제물로 바쳐지고 아버지의 허락한 제단이 깨끗해질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길, 사랑의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땅을 대해 수고하는 아버지의 아들딸을 찾고 있는 이때, 그저 아버지를 대하여 자신만을 붙들고 머무는 자들이 되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스스로 부족함을 느끼는 저희들, 아버지의 제단 앞에 나타날 수 없는 부족한 자체들이지만 뜻을 위해 골고다의 길을 끝까지 사수할 수 있는 당신의 아들딸 되게 허락해 주시옵고, 끝까지 남아지는 무리들 되게 허락해 주시옵기를,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시기와 허락한 뜻은 오늘날 저희들을 통해 나타나고 이루어져야 되겠사오나, 저희들이 뜻을 대하지 못할 때에는 아버님이 준비하신 무리를 세우시어 저희들을 부끄럽게 할 수 있는 때가 온다는 것을 염려치 않을 수 없사오니, 아버님이여! 저희들을 통해 영광의 한 날을 나타내시옵고, 아버지의 원한의 심정을 해원하시옵소서.
그리하여 기쁘심의 한 날을 세워 즐거워하시는 그 한날에 저희들도 같이 즐거워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 오늘 여기에 모인 무리들이 아버지 앞에 나타나고자 원하지만 아버지께서 심히 거리끼실 것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사오니, 아버지의 허락하신 소망의 뜻을 향하여 주저하지 않고 나서서 아버지께서 명령하시는 대로 움직여서 마음놓고 서로 믿을 수 있는 그 한날이 어서 속히 이 민족 앞에 나타나게 허락해 주시옵길,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허락하신 뜻을 대하여 아버지의 심정을 갖지 못하고, 아버지께서 슬퍼하는 자식들이 될까 봐 두렵사오니, 오늘의 저희의 마음이 아버지의 마음을 닮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저희의 사정이 아버지의 사정과 일치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저희의 소원이 아버지의 소원을 닮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죽으나 사나 아버지를 중심삼게 하여 주시옵고, 죽든지 살든지 아버지 것으로서 소유되어 살아가는 저희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오며, 남아진 이 시간을 아버지께 맡겼사오니 합당하신 뜻대로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이날도 지방에 널리어 간절히 기도하는 외로운 무리들이 있사오니, 아버지, 그들에게 일률적인 은사의 손길을 펴시옵고, 권고의 은사를 가하시어 하늘의 영광을 체휼하게 허락해 주옵시길 간절히 부탁하오며,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오늘 여러분과 같이 생각하려는 말씀의 제목은 ‘누가 골고다의 친구가 될 것인가’입니다.
골고다라는 뜻은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해골곳이란 뜻이고, 따라서 죽음의 곳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골고다의 친구가 된다는 것은 죽음길의 친구가 된다는 말입니다. 기독교 신도들은 골고다의 주님을 믿고 있습니다. 골고다라고 하면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연상하게 되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면 예수님의 성상을 연상하게 되고, 또 그 예수님의 성상을 생각하면 예수님의 돌아가심과 더불어 하늘이 슬퍼하셨다는 것을 연상하게 됩니다.
그런데 돌아가시는 예수 한 분을 놓고 하늘은 슬퍼했고 땅은 기뻐했습니다. 땅을 위하여 오셨던 예수였고 하늘을 위하여 오셨던 예수였습니다. 그런데 하늘과 땅을 위하여 가시는 예수를 하늘은 알아주었으나 땅은 몰라주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역사적인 서러움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만약 이스라엘 민족이, 하늘이 보내신 예수를 하나님이 아시는 것과 같이 아는 입장에 섰던들, 오늘날 인류역사는 이와 같이 판이한 역사를 빚어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는 진리의 대표자요, 생명의 대표자요, 이상의 대표자요, 사랑의 대표자로 오셨지만 그가 주장한 진리와 생명, 이상, 사랑은 인간을 기준으로 한 것이 아니라 하늘을 기준으로 한 것이었고, 타락한 인간이 소망으로 찾아야 할 진리, 타락한 인간이 가져야 할 생명, 타락한 인간이 찾아야 할 이상, 타락한 인간이 영원히 소유해야 할 사랑이었습니다. 그러한 진리와 생명, 이상, 사랑을 갖고 오신 예수였는데 그 예수가 땅에서 돌아가시고 나니 인간이 찾고 있던 진리를 찾을 수 없게 되었고, 인간이 찾고자 하던 생명과 이상, 사랑을 찾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인간들은 방황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우리들은 다시 한 번 깨닫지 않으면 아니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예수의 심정에서 우러나오는, 즉 그의 가슴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진리의 말씀을 소유한 사람이 이 땅 위에 없었고, 예수의 뼈와 살에 사무친 생명을 지닌 사람이 이 땅 위에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또 예수의 몸 마음이 합하여 소망으로 바라던 이상, 만민을 품고 하나의 목적을 향하여 달려나갈 수 있게 할 수 있는 예수의 사랑을 오늘날 땅 위의 인간으로서 예수님 대신 소유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늘의 진리와 생명과 이상과 사랑을 갖고 오셨던 예수님은 땅의 인간을 중심삼아 그 하늘의 이념과 사랑의 뜻을 이루려 했고, 창조주인 하나님과 통일적인 목적을 성취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선조들이 불신하고 배반했기 때문에 그 후 역사노정에서 하나님이 세우시려던 진리가 간 곳이 없고, 하나님이 세우시려던 생명과 이상과 사랑이 모두 간 곳이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고로 타락의 인연에 파묻혀 있는 인간은 참다운 말씀을 찾아 헤매야 되었고, 참다운 생명을 찾아 헤매야 되었고, 참다운 이념과 참다운 사랑을 찾아 헤매야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끝날의 인간으로 하여금 역사 과정에서 슬픔에 사무친 투쟁의 노정을 거쳐와 가지고 하나의 생명을 찾게 하는 때가 와야 됩니다. 하나의 생명의 움직임이 세계를 움직이고 하나의 이념이 세계 인류를 포괄한 가운데 공동적인 목적을 성취시킬 수 있는 때가 와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전세계 인류가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하나로서 화하여 어느 것이든 녹여낼 수 있는 통일적인 사랑의 움직임이 끝날에 벌어지기를, 뜻을 이루기 위해 왔다 갔던 수많은 선지선열들, 또는 뜻 있는 사람들은 소망해 나왔습니다. 또 그들이 그러한 한 날을 이루기 위해 죽음을 개의치 않고 투쟁해 나왔다는 것을, 오늘날 역사적인 종말시기에 슬픔과 원망과 공포 속에서 살고 있는 전세계 인류는 다시 한 번 느껴야 할 절박한 시기에 처하여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들은 느껴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지만 완전히 망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에 오히려 그의 말씀, 즉 진리가 남아졌고, 생명이 남아졌고, 사랑이 남아졌습니다. 그러면 이 남아진 말씀과 남아진 생명, 남아진 이상, 남아진 사랑을 오늘날 인류는 어떻게 찾아낼 것인가? 이것이 인간들이 공동으로 해결해야 할 최후의 문제인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을 품고 왔던 예수 자신의 슬픔은 무엇인가. 억울함이 무엇이었으며 분한 것이 무엇이었던가. 고통 중의 고통이 무엇이었던가. 인간을 위한 생명적이고 이념적이고 사랑이 넘치는 천적인 말씀을 지닌 자신인 것을 알면서도, 말씀을 다하지 못하고 가는 예수의 그 심정, 생명을 다 주고 가지 못하는 예수의 그 심정, 인간이 즐거워할 수 있는 이상을 주고 가지 못하는 예수의 그 심정, 천적인 사랑을 주고 가지 못하는 예수의 심정이 그에게 있어서는 가장 큰 슬픔이었음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수천년의 역사 과정을 거쳐오면서 우리의 선조들을 세워 천륜의 뜻에 협조하게 했지만, 우리의 선조들은 시대시대마다 하늘을 배반하였습니다. 따라서 하늘을 배반한 선조를 가진 우리들이기 때문에 오늘날 끝날에 처해 있는 우리 자신들도 또다시 역사적이고 우주적인 배반의 무리가 되기 쉬운, 이런 어마어마한 기로에 서 있음을 느껴 알지 않으면 아니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한 사람으로부터 모세를 거쳐, 즉 수천년 동안의 수고를 거쳐 비로소 하나의 말씀의 중심체, 생명의 중심체, 이상의 중심체, 사랑의 중심체로서 택한 이스라엘 백성 앞에 약속하여 보내신 분이 바로 메시아인 예수였습니다. 그런데 이 메시아 한 분이 오시기를 수천년 동안 고대하고 준비하였던, 즉 역사적인 공적 위에 섰던 유대 백성들은 정작 오신 메시아를 모시지 못했습니다. 역사 과정의 수많은 선조들이 소망하던, 그 역사적인 주인공으로 모셔야 할 예수였는데, 그를 모신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베들레헴의 말구유에 누우셨던 예수를 자랑하는 무리가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때 당시 베들레헴에 메시아가 나타나리라는 예언이 있었는데, 그 예언에 따라 메시아를 맞기 위하여 초막 한 칸이라도 지어 놓고 기다린 무리는 그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당시 베들레헴에 주님이 불시에 오시지 않을까 염려하고 그때와 시기를 심중에 품고 준비한 어떠한 초막의 주인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정작 메시아가 나타났을 때 모시려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예수가 태어나실 때 예루살렘 온 성중이 소동하였습니다. 베들레헴에서 메시아가 난다는 소문이 쫙 퍼졌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성중이나 베들레헴 성중의 어느 한 사람, 메시아의 탄생을 준비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하늘의 황태자요 만민의 메시아이어야 할 예수님께서 말구유에 누우신 가련한 모습이었다는 것을 오늘날 믿고 있는 크리스천들은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또 하늘의 사정을 말하고 증거했던 메시아인 예수를 이스라엘 민족이 몰라보았기 때문에 오늘날 이스라엘이 하늘 앞에 설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메시아도 땅에 오시면 입을 것이 있어야 하고 살아야 할 집도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하늘을 믿고 있던 바리새교인, 믿고 있던 사두개인, 또는 온 유대교인 가운데는 나타난 메시아를 모시기 위하여 방 한 칸이라도 준비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망령되이 하늘을 믿고 나왔던 우리 선조들이 저끄러 놓은 죄상을 놓고 오늘날 우리는 슬퍼하여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그러한 역사적인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 마음으로 염려하며 하늘 앞에 호소하는 무리가 되어야겠습니다.
하늘이 4천년 동안 메시아 한 분을 보내기 위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준비하였는데, 예수의 사정이 그렇게 될 줄이야! 4천년 동안 준비한 수고는 어디 갔던가. 하늘이 약속한 하나의 택한 아들을 보냈는데 당시 아무것도 모르고 깊은 잠 가운데 처해 있는 유대 백성이요, 깊은 잠 가운데 처해 있는 예루살렘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주권을 대신할 수 있는 자기들의 교단을 자랑하던 무리였습니다. 또 그러면서 하늘의 뜻을 받들려고 하던 유대교단이었습니다. 이러한 백성 앞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시게 된 것은 하나님의 뜻을 대해야 하는 인간과 뜻을 섭리해 나가시는 하나님 사이에 가로놓여진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여러분은 잘 모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30세에 이르기까지 목수생활을 했습니다. 만일 신령한 영적 체험을 한 사람이 있다 할진대는 예수의 30년 생애의 일단을 알 것입니다. 그것을 아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는 좋은 밥을 먹을 때도 가슴이 아플 것이고, 좋은 옷을 입을 때도 가슴이 아플 것이며, 좋은 환경에 처해도 가슴이 아파 서글픈 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요셉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마리아를 데려올 때에는 하나님이 함께했습니다. 그런데 그후 요셉가정에서 자라난 예수는 의붓자식으로 천대를 받습니다. 요셉의 아들딸이 많아짐에 따라 예수는 점점 고립된 입장에 처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자기의 사정과 심정을 말하지 못하고 더벅머리 총각으로서 30여 평생을 톱과 대패를 들고 남의 문짝을 짜면서 지냈습니다. 이런 예수의 사정을 어느 누가 알았느냐는 것입니다.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때 당시에 예수는 오늘날 여러분들이 믿고 있는 역사적인 예수로서, 역사적으로 평가받는 인격을 가진 그리스도로서 나타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끝날에 나타나는 메시아를 맞을 사람은 누구일 것인가? 역사적인 예수의 인격을 모시는 사람이 아닙니다. 시대적인 예수의 인격을 모시는 사람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될 것입니다.
천륜의 뜻을 마음에 품고 이 땅을 대해 염려하는 예수였는데, 자기 부모가 자신을 몰라보고, 형제 역시 자신을 몰라보는 이러한 서러운 입장에 처한 예수였음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그러한 예수를 믿어야 되겠습니다. 우리 통일교회 신자들은 믿되 그런 예수부터 믿어야 되겠고, 알되 그런 예수부터 알아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예수, 죽음길을 걸어가신 예수님을 알고 있지만, 사실은 살 길을 찾아오신 예수였다는 것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저 돌아가신 예수님을 붙들고 우는 무리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기 이전에 죽음을 바라보고 준비하던 그 심정을 어느 누구에게도 토로할 수 없었고, 하늘땅의 염려와 하늘땅의 슬픔과 하늘땅의 원한에 사무쳐 있는 자신의 심정을 어느 누구에게도 토로할 수 없는 처참한 사정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러한 입장에 처한 예수를 붙들고 울 수 있는 무리, 그 예수의 사정을 통할 수 있는 무리, 그 예수와 친구될 수 있는 무리가 있었다면, 그들이 예수님의 사도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웬일이뇨? 갈릴리 해변가에서 고기잡이하던 어부인 베드로가 어찌하여 예수의 수제자가 되었던가? 이것이 복통하여야 할 사실이었습니다. 유대교는 어디 가고, 택한 민족은 어디 가고, 하늘의 뜻 가운데도 없던 난데없는 이 베드로, 또는 어부들이 예수의 제자가 되다니 웬일이뇨? 예수는 분한 마음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환영하는 유대 백성이 없어서 서러워하신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여러분은 주를 믿되 죽어 간 예수만을 믿지 말고, 살아서 일하셨던 그 예수를 믿어야 하겠습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만을 믿을 것이 아니라 30여 평생을 통하여 하늘 뜻을 염려하신 그 예수를 믿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의 생애노정에는 뜻을 위한 한숨의 생활이 가해 있고, 서글픔의 심정이 가해 있으며, 그 위에 또한 십자가의 슬픔이 가해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골고다에서 고난당하던 예수의 심정을 아는 사람이 땅 위에 어디 있습니까? 그의 친구될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에게는 가정에서부터 친구가 있어야 하고, 형제 가운데 친구가 있어야 하고, 모든 아버지를 대신하고 어머니를 대신할 수 있는 친구, 교회를 대신할 수 있는 친구, 예수님이 질 십자가를 대신 질 수 있는 친구, 더 나아가서는 세계의 십자가의 길, 골고다의 길을 대신 갈 수 있는 친구가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그러한 뜻을 알고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곤 한 사람도 없습니다.
역사적인 뜻을 위하여 오셨던 예수가 육신을 쓴 인간으로 나타나셨으나 시대적으로 불우한 환경 가운데서 활동하시다가 쓰러짐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남기신 뜻을 따라 역사노정을 걷고 있는 인간들 역시 불우한 시대적 환경에 처하여 예수를 부르짖게 되었습니다. 또 예수가 골고다의 십자가를 진 거기에는 전우주가 걸려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골고다의 친구를 찾아 헤매는 하늘의 심정인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즉 골고다의 심정을 알아줄 친구를 하늘이 찾아 헤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신랑으로, 성도들을 신부로 비유하셨는데 예수의 신부가 될 사람은 어떠한 사람일 것인가? 골고다의 노정에서도 친구가 되어 드릴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악이 강해지면 선은 약해졌습니다. 악이 강하여 선이 악을 인도하지 못할 때는 악이 선을 점령하면서 흘러 왔습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 작은 선이 나와 그것보다 더 큰 선을 이루어 선의 목적을 향하여 전진해 나왔습니다. 그러면서 점점 선이 위로 올라가고 있는 이런 역사 발전과정을 거쳐오고 있는 것이 오늘날까지의 역사노정임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역사는 개인으로부터 출발하여 가정을 거쳐 사회성을 띠고 흐르고 있습니다. 집단적인 씨족의 형태를 거쳐 가지고 부족을 거치고, 민족을 거쳐 국가형태를 거쳐 세계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나아가 역사는 보이는 세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우주의 세계까지 진전되어 나갈 것입니다.
인류역사에 있어서 개인은 개인을 중심삼고 주장하는 선의 시대, 씨족은 씨족을 중심삼고 주장하는 선의 시대, 부족은 부족을 중심삼고 주장하는 선의 시대, 민족은 민족을 중심삼고 주장하는 선의 시대, 국가면 국가를 중심삼고 주장하는 선의 시대, 세계면 세계를 중심삼고 주장하는 선의 시대를 거쳐 나오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역사는 작은 선이 점점 큰 선으로 전개해 나왔습니다.
따라서 싸움에 있어서도 개인의 싸움이 가정의 싸움, 가정의 싸움이 씨족의 싸움, 씨족의 싸움이 사회의 싸움, 사회의 싸움이 국가의 싸움, 국가의 싸움이 세계의 싸움을 거쳐, 영계가 있다면 그 영계와 이 지상과의 싸움까지 거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있다면 그 하나님과 땅의 이 무수한 악한 영들과의 싸움이 끝나야 이 우주에 평화시대가 옵니다. 이런 원칙적인 과정을 통해서 섭리해 나오시는 하나님의 사정을 여러분은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이 사탄과 이 땅의 악한 무리와 싸워서 모든 문제를 해결지어 놓아야 우주적인 평화시대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싸움은 개인의 싸움이 씨족, 부족, 국가, 세계적으로 커오고 있는 데 앞으로 세계는 어떻게 될 것인가. 영계가 있고 하늘이 있다면 그 영계와 싸워야 됩니다. 끝날에 처한 여러분들, 마음으로 찾아 드는 공포를 어떻게 피할 것인가. 앞으로 원자탄 이상의 공포를 느끼는 시대가 옵니다. 즉 외적으로 벌어지는 원자시대의 공포만이 아니라, 마음으로 찾아 들어오는 공포의 물결이 여러분을 침범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인간은 공포심이 많습니다. 또 정신병자가 많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사탄과의 싸움에 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싸움을 끝내 가지고 선한 하나님과 내가 하나되어 하늘 아버지의 싸움을 내가 붙안고, 아버지의 슬픔을 내가, 아버지의 고통을 내가 책임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그 고통, 그 슬픔, 그 억울함을 대신 책임을 맡기기 위한 그 한 날이 예수가 다시 오는 재림의 날이요, 인류가 당하여야 할 대심판의 날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역사노정을 거쳐온 오늘날은 어떻게 되어질 것인가? 이때는 국가투쟁시대를 지나 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가 세계적인 투쟁과정을 거쳐 나갈 때이니, 앞으로 어차피 하나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 기독교 역사가 어찌하여 이런 과정을 거쳐 나오게 되었느냐, 예수님께서 골고다에서 십자가를 지실 때에 오른편에 있던 강도와 왼편에 있던 강도의 형태가 오늘날 세계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오른편 강도는 하늘 편을 대신한 세계적인 민주주의 형태로 나타나고, 왼편 강도는 하늘을 반대하고 물질과 인간을 중심삼은 세계적인 형태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나타날 것은 무엇이냐? 예수의 죽음과 더불은 부활의 고비가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즉 개인적인 왼편 강도가 출발하여 가정적으로 벌어졌고, 이것이 씨족을 거쳐 부족과 민족, 국가, 세계를 형성하게 되었고, 오른편 강도형도 역시 세계를 형성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 한 자체가 땅에 뿌려짐으로써 그 결실이 끝날에 있어서 이렇게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우리가 염려할 것은 민주주의가 어떠한 입장에 세워졌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돌아가실 때의 예수님의 심정을 알아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 자신을 찾아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심정을 대신할 수 있는 하나의 이념을 갖지 못한 이 민주주의의 말로는 어떻게 될 것인가를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민주진영에 속해 있는 우리들은 자기는 천만 번 죽어 마땅한 것으로 알고, 예수님의 죽음을 붙들고 울어 줄 수 있는 오른편 강도와 같은 사람이라도 되어야겠습니다. 그러한 여러분이 되어야 할 때에 와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현상들을 기독교적으로 보면, 그것들은 역사의 결론적인 현상들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이 결론을 맞추기 위하여 어떠한 역사과정을 거쳐왔는가를 기도해 보아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아버지여! 이 민족이 택한 민족으로서 세계의 복을 받게 하시옵소서. 유대교를 심판하시옵고 불신의 반열을 심판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할 수밖에 없었던 이것이 예수가 겪으셨던 사정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가 죽을 때 품은 그 분함은 무엇이었던가? 택한 유대교가 예수의 가슴을 아프게 했고, 택하신 백성들이 예수를 못박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분하고 원통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슬픔이 컸지만 4천년 동안 피눈물의 제단을 쌓는 과정을 걸어오신 하나님의 사정을 생각하고, 4천년 동안 택하여 길러 오셨던 유대 백성이었음을 생각하게 될 때, 자신의 죽음도 잊고 그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의 정신을 오늘날 흩어져 있는 세계 기독교인들은 다시 한 번 느껴야 되겠습니다.
만일에 예수가 손을 들어 기도하지 않았더라면 유대 나라가 먼저 심판을 받았을 것이요, 유대교인이 먼저 심판을 받았을 것입니다. 하늘이 여유의 과정을 남겨 놓아야 죽어 가는 자신의 발자취를 따라 넘어올 것을 바라서 복을 주고 가신 예수인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나는 이 오른편 강도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볼 때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납니다. 서럽고 서럽습니다. 4천년의 하나님의 슬픔이 여기에 있는 것을 몰랐던 민족……. 이건 슬픈 장면이었습니다. 그때 당시에 예수님 앞에 그저 널려져 있는 수많은 민중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와 살에 같이 동하고 정하여야 할 무리가 바로 유대교인이고 유대 백성이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에 피를 같이 흘려야 할 것인데 오히려 여기에 살인강도가 동반한 것이 웬말인가. 예수님은 만민의 구주로되 불쌍한 구주였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의 동반자가 살인강도밖에 없었다는 사실은 지극히 민망한 사실입니다.
골고다의 친구가 베드로가 되었던들, 12제자가 되었던들, 하늘의 한은 없었을 거예요. 그렇게 되었으면 예수님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일 12제자가 단결해서 예수님의 죽음에 같이 죽고자 했으면 기적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은 안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33년 동안 택한 민족을 바라보고 서러워하시던 예수, 3년 공생애 기간에 이 땅의 인류를 위해 우시던 예수, 그 예수에 소망을 걸었던 민족은 어디 갔던가? 바라보고 있던 교회는 어디 갔던가? 3년 공생애 기간에 희로애락을 같이하며 따랐던 제자들은 어디 갔던가? 그들은 자신이 좋고 즐거울 때는, 나는 예수의 친구요 예수의 제자라고 하였습니다. 누구보다 예수의 입장에 서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끝에 가서는, 예수의 가는 길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입장에 처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새로운 역사의 출발의 뿌리가 되어 그러한 모양으로 역사는 발전되어 오늘의 끝날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의 복을 누가 받았느냐? 따르고 있던 12제자도 아니요, 하늘을 믿고 있던 유대교인도 아니요, 축복을 하여 택해 세운 이스라엘 백성도 아니었습니다. 십자가상에서 같이 피를 흘리면서 죽어 간 오른편 강도가 역사적인 축복을 받아 가지고 수제자보다 먼저 낙원에 임하였습니다. 이 사실이 비극 중의 비극입니다. 만일에 살인강도 중 한 사람이라도 예수님의 죽음의 날에 동참을 하지 않았던들 구원섭리는 좌절되었다는 것입니다. 살인강도의 뿌려진 피가 예수님의 심정을 대신하여 지상에서 복지 낙원을 건설하는 조건을 천운과 더불어 세울 수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여 땅 위에 다시 나타나 불신했던 백성을 대할 수 있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한 분을 죽음의 자리에서 신랑으로 맞이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그 터전으로 말미암아 선의 열매가 반드시 지상에 나타날 것입니다. 예수 대신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사탄의 세력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선을 치는 데 있어서 그 선의 씨알맹이까지 쳐서 없앨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선을 위한 희생과 죽음의 자리에서 설 뿐만 아니라 그 선을 붙들고 쓰러지는 충절의 사람이 있다 할진대는, 쓰러진 그 한 자체로 말미암아 몇 배로 선이 번식되어 나온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이것이 철칙입니다.
그 당시 반대하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면 망할 줄 알았습니다. 예수를 따르는 무리가 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에 사탄권에서 다 빼앗은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죽은 오른편 강도를 조건으로 하여 부활의 역사를 일으킨 것을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사탄은 예수와 오른편 강도를 치고 또 열두 제자를 쳤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열두 제자를 쳤습니다. 하늘은 열두 제자도 다 사탄 앞에 내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쳐야 했는가? 예수의 노정은 개인적인 골고다의 노정이로되 예수님이 골고다의 노정을 가심으로 말미암아 열두 제자도 골고다의 노정을 가야 했고, 유대 백성도 골고다노정을 가야 했고, 이스라엘 민족도 골고다노정을 가야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전세계 기독교인들도 이 골고다노정을 가야 하는 것이요, 온 인류도 이 골고다노정을 넘어가야 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 민주세계는 민주주의를 중심삼아 예수가 넘던 세계적인 골고다의 고개를 넘어야 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예수님께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라고 기도하셨던 것은 자기 일신이 죽는 것이 슬퍼서 그런 것이 아니라, 내가 이렇게 죽으면 나로 말미암아 온 세계 인류도 십자가의 골고다 노정을 넘어야 할 것을 염려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마 26:39)라는 기도를 하셨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이 골고다노정을 넘지 않으셨다면 세계적인 골고다노정은 없었을 것입니다. 세계적이고 우주적인 사명자로 오셨던 예수님께서 골고다노정을 넘고 나니 그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 즉 개인에게는 개인적인 골고다노정이 남아졌고, 가정을 중심삼은 섭리적인 때와 시대에 있어서는 가정적인 골고다노정이 남아졌습니다. 또 가정시대를 지나가지고 섭리의 뜻이 점점 확대되어 사회의 단계로 올라갔을 때에는 가정의 십자가의 길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십자가의 길도 남아졌었습니다.
또 국가적인 섭리의 뜻을 믿고 받드는 국가적인 섭리시대에 있어서는 가정의 십자가, 사회의 십자가, 국가의 십자가의 길을 가야 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세계적인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온다면 세계에 대한 십자가, 국가에 대한 십자가, 사회에 대한 십자가, 가정에 대한 십자가, 개인에 대한 십자가 전부를 지고 넘어가야 합니다. 이러한 운명의 고개가 남아 있다는 것을 오늘날 세계 기독교인들은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어떠한 주를 맞고자 하느냐? 하늘이 있다 할진대 예수를 어디서 만날 것이냐? 십자가의 고개를 넘어가 가지고 부활한 자리에서 만나야 됩니다. 이것이 재림부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왔다 간 이후 오늘날까지의 역사노정은 개인과 가정과 사회와 국가와 세계를 향한 골고다의 노정을 걸으면서 밀치고 때리고 맞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는 민주진영이 공산진영에게 맞는 때입니다. 그러면 이 세계적인 골고다를 어떻게 넘을 것인가?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서로 이 민족을 위한 사무친 심정을 품고 이 민족 전체가 한 몸과 같이 움직여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이 민족이 되기 전에는 넘기 어려운 세계적인 골고다의 길이 막혀 있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지극히 악한 자리에서 하나의 선의 뿌리 또는 선의 결실을 찾아 세워야만 악한 죄인으로부터 선한 사람까지 하나 만들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부활하신 예수님의 권한을 의지하여 잃어버린 12제자를 다시 찾아야겠다는 것입니다. 당시 개인이 예수를 대신하고 12제자가 예수를 대신하여 맞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지 못했으므로 12제자가 대부분 다 학살을 당하였습니다. 12제자가 죽음의 길을 나서게 될 때, 제자 끼리끼리 몰아낸 사람이 한 사람 있었는데 그가 바로 사도 요한이었습니다. 그리고 강도 한 사람은 유대교가 몰아내고 이스라엘 민족이 몰아내고 배반한 12제자가 몰아내는 가운데 처하였습니다. 하늘이 세우신 민족 가운데 예수님 한 분을 세웠고, 또 그분의 부활로 12제자를 다시 세웠습니다. 나아가 하늘은 그 12제자를 대신하여 예수님과 같이 몰림뱅이 한 사람을 세우셨는데 그 사람이 바로 바울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은 바울이 하늘을 사랑했고 하나님의 뜻을 알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당시에 바울은 12제자한테 몰렸습니다. 사도라고 하여 복음을 전파하였지만 바울은 12제자들로부터 몰림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 하늘의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배반한 사도가 아닌, 배반하지 않은 산 사도의 입장에시 이방 나라인 로마에 가 핍박을 받으면서 복음을 전했던 바울이었습니다.
바울이 12제자의 순교를 대신하여, 세례 요한의 죽음을 대신하여 주를 찾았기 때문에, 땅 위에 있어서는 섭리적인 궤도가 이방 나라로 옮겨졌습니다. 거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이리하여 바울은 로마 제국에 들어가 혼자 몰림을 받게 됩니다. 종교적으로 환영받지 못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님께서 정하신 섭리의 뜻 하나를 품고 인류의 십자가인 골고다의 길을 가신 것과 같이, 로마의 어떠한 핍박의 화살에도 굴하지 않고 꿰뚫고 나아갔습니다. 하늘의 뜻을 위하여서는 죽음도 개의치 않고 나가는 모습이 예수의 모습을 방불케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바울을 중심삼고 기독교는 움직여 하나의 가정형을 거치고, 부족형을 거쳐 민족, 국가, 세계형으로 거쳐 나옵니다. 예수가 골고다의 길을 간 것같이 바울이 하늘의 사명을 짊어지고 12제자 대신 사탄세계를 대하여 죽음의 골고다의 길을 자진해 나섰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로마의 네로 황제시대의 극심한 핍박과 학살의 과정을 거쳐왔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또 개인적인 바울의 희생이 그때의 부족들, 또는 12제자와 같은 사람들, 이스라엘과 같은 무리를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개인으로부터 전체가 하나로 뭉치어 죽음의 자리를 넘어 싸웠기 때문에 로마 나라를 빼앗아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약 4세기를 지내는 동안 기독교는 번창하게 됩니다. 중세 봉건사회시대에 있어서 로마 교황청을 중심하여 기독교는 전성시대를 이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전세계를 기독교인들이 지배해 나옵니다.
그런데 이 로마 가톨릭이 나아가야 할 하나의 방향, 즉 국가적인 골고다의 길을 넘어서 세계적인 무대를 개척하여야 할 사명이 있었는데, 이것을 모르고 국가적인 이념의 욕망에 사무쳐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하늘이 치는 것입니다. 문예부흥을 통하여 들이칩니다. 종교개혁을 통하여 고루한 의식을 깨뜨리고, 나아가 법황청이 근본적으로 몰림을 당하게 합니다. 그리하여 점점 몰락되어 들어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기독교의 신앙자들 가운데 새로운 혁신세력이 나타납니다. 이것이 루터를 중심한 반항자들이고 신교도들입니다. 구교를 중심삼은 무리를 들이치는 과정에서 그 맞는 무리 가운데, 몰림받는 무리들이 루터를 중심한 신교, 즉 프로테스탄트를 형성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정신을 이어받은 퓨리턴들이 미국에 가 신대륙문명을 일으키고 세계적인 기독교 왕국을 건설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계적인 역사가 이렇게 흘러 나왔지만 이제는 하늘이 세계를 들이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에서 인간들 가운데 몰림받는 무리가 어디 있을 것인가 살펴볼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민주진영 가운데 제일 몰림받는 무리, 민주진영 가운데 제일 불쌍한 나라가 어느 나라인지 찾아보아야 되겠습니다.
이것은 예수가 피 흘리는 십자가상에 있어서 강도가 친구되었던 것과 같이 세계적으로 들이치는 골고다의 노정을 거쳐갈 그때에 있어서 배반하였던 유대민족과 친구가 아닌 하나의 무리, 하나의 국가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무리, 그러한 국가가 나와야 한다는 것은 역사적인 섭리관에 비추어 볼 때에 타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세계를 바라볼 때에 하나님을 불신하는 공산주의가 나왔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없다고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를 들이치는 죽음의 마당에 예수의 편이 되었던 오른편 강도가 나타났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공산주의가 자기들의 모든 야망을 실현시키기 위해 학살주의로 나가고 있는데, 그 학살이 민주진영의 편 될 수 있는 조건의 제물이 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오늘날 세계적으로 이렇게 온 인류를 골고다노정으로 몰아내는 데, 이 길을 넘어야 할 오늘날 기독교인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 세계 앞에 골고다의 길을 먼저 나서는 무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온 기독교의 선봉에서 몰림받는 무리, 사도들 앞에 몰림받았던 바울, 유대인 앞에 몰림받았던 강도, 로마 교황청 앞에 몰림받았던 신교가 있었듯이, 오늘날 세계적인 신개혁파의 입장에서 몰림받는 무리들이 나오지 않을 것인지 항상 살펴보아야 되겠습니다. 이것은 역사가 입증하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이제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 교인들은 20세기의 새로운 개혁종교 단체로서 20세기의 모든 주의와 사상으로부터 몰림받아야 합니다. 민주진영, 교파주의적 상황의 이 세계에서 몰림받는 무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하늘의 이념을 갖고 나온 국가가 있다면 그 국가도 역시 세계 앞에 강도와 같이 피를 흘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은 3․8선을 중심삼고 6·25동란을 통해 세계의 생사 운명을 걸어 놓고 좌익과 우익이 부딪쳐 피를 흘리는 입장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걸 생각할 때, 오늘날 민주주의의 골고다노정이 오른편 강도의 신세와 비슷하지 않다고 말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한민족 앞에 한이 있다고 할진대는, 이제 무엇을 붙들어야 할 것인가? 주님의 사상을 붙들고 싸울 때가 아닙니다. 돌아가신 예수의 골고다의 심정을 지녀야 되겠고, 뜻을 알고 민족이 배반한 심정, 역사적인 배반의 심정, 세계적인 배반의 심정을 지니고, 당신이 고난길을 가지 않게끔 내가 대신하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이 민족이 예수의 영광을 찬양하겠다는 심정을 지니던 오른편 강도와 같은 일면의 심정을 지닌다 할진대는, 골고다의 죽음길에서 다시 사신 예수를 맞아 가지고 부활의 영광시대에 들어가지 않겠느냐 하고 생각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통일교회의 여러분들, 핍박받는다고 슬퍼하지 마십시오. 몰리고 몰리다 보니 예수의 심정을 알겠고, 예수를 만나고 보니 죽음의 골고다를 앞에 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 간절한 기도를 드리던 심정까지 알게 됩니다. 예수께서 몰림의 극단에 서 가지고 하늘과 일치하여 부활의 은사를 일으켰던 것과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몰림받는다면 여기에서부터 새로운 역사가 시작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계적인 이념을 가졌다 할진대, 세계적으로 몰리고, 국가적으로 몰리고, 교회적으로 몰리고, 사회적으로 몰리고, 가정적으로 몰리고, 개인적으로 몰리지만, 여기에서 남아지는 무리가 되어야만 우주적인 부활시대에 우주적인 골고다의 길을 넘어가지고 오시는 주 앞에 신부의 자격을 갖고 부활의 권능을 대신할 수 있는 하늘의 본연의 아들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여러분들은 참다운 친구를 찾아 헤매었습니다. 참다운 가정과 참다운 스승을 찾아 헤매었습니다. 참된 주의, 참된 국가, 참된 세계를 찾아 헤매었으나 아직까지 찾지 못했습니다. 예수를 중심삼고 보면, 여러분은 그 목적을 성취할 수 있는 입장을 상실하였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내가 참된 친구를 찾고자 원할진대는, 친구의 골고다에 있어서 참된 친구가 되어 주어야 하겠고, 참된 가정을 찾고자 할진대는 가정의 골고다를 책임지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나아가 국가 또는 세계적인 골고다의 노정에 있어서도 여러분은 예수와 같은 심정을 품고 골고다의 길을 책임지고 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자기의 영원한 생명문제를 맡기고 의탁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감당할 수 있으며, 나아가 세계적인 문제를 감당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세계적인 골고다의 노정에 있어서 하늘 앞에 친구가 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명심해야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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