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아버님, 오늘은 11월 8일, 이달을 맞이하여 두번째 맞는 안식일이옵니다. 이 아침에 여기에 모인 자녀들 위에 당신의 무한하신 사랑과 긍휼과 자비의 은총이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전국에 널려서 이곳을 사모하며 당신을 흠모하고 하늘을 향하여 축수하는 수많은 자녀들 위에 당신의 가호의 손길이 더더욱 같이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니다.
중앙에서 뜻을 위하여 정성의 간절함이 지방에 있는 수많은 자녀들 앞에 미쳐서 그들로 하여금 새로운 세계와 인연을 맺을 수 있는 동기와 계기를 언제나 갖고 지내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이번 달도 아버지의 경륜 가운데서 저희들의 일체를 맡아 주시옵소서. 당신과 더불어 영원한 목적을 공동적으로 책임성사시켜야 할 사명이 있다는 것을 저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 이 민족은 저희들이 가는 뜻에 협조하지 않지만 이 민족을 위한 저희들의 책임만은 언제나 남아 있는 것을 알고, 누가 도와주지 않고 누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당신이 남기신 뜻을 위하여 갈뿐이라고 감사하면서 굳건히 싸우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이때를 맞이하여 전국에 있는 당신의 자녀들이 10일부터 아버지의 뜻 앞에 새로운 부흥회 기간으로 설정하였사오니, 이 기간이 당신 앞에 기쁨을 돌려드리는 기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번 기간이 저희들에게는 1970년도를 유종의 미로 거두는 중요한 계기가 되어야겠습니다.
수난의 길을 엮어오던 저희들의 행로가 슬픔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오라, 당신의 보호와 사랑 가운데 새로운 희망과 목적을 중심삼고 벅찬 때를 맞이한 것을 아옵니다. 이것을 생각하면서 지금까지 저희들의 슬펐던 사연을 풀어 놓고 하늘과 가까운 자리에서 공고한 인연을 맺을 수 있는 중요한 이번 기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저희들에게는 서울에 있는 수많은 자녀들을 중심삼아 가지고 새로운 깃발을 들고 행군하지 않으면 안 될 전체의 책임이 있사오니, 아버지, 지켜 주시옵소서. 주위에 널려 있는 기독교단들이 당신을 위하고 당신의 뜻 앞에 충성을 하여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길을 가는 저희들의 앞길을 백방으로 막으려고 하고 있사옵니다. 그렇지만 저희들은 이 길을 가려 가며 승리의 절정을 향하여 나아가야 할 아버지의 뜻이 남아있는 것을 생각하면서 당신 앞에 온갖 감사와 충성으로 보답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들이 아무리 하늘의 길을 막는다 해도 하늘은 기필코 승리의 터전을 마련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저희 통일교회의 소수의 무리들이 다른 수많은 교단과 당신의 이름을 부르고 당신의 뜻을 따라가는 수많은 사람들과 비교하게 될 때, 정성에 있어서나, 심성에 있어서나, 심정에 있어서나, 간절함에 있어서나, 사모하고 흠모하는 열의에 있어서나, 그들보다는 높고 충만해 가지고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저희들이 언제나 기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날 저희 한 자신이 언제나 하나의 자신으로서만 남아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저희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저희 한 자신은 전체를 대신하는 자로서 높고 귀하신 아버지의 아들로서 칭찬받을 수 있고, 아버지의 딸로서 칭찬받을 수 있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들이 70년도의 마지막이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제부터 해야 할 일들이 많사옵니다. 아버님이여, 이번 기간에 저희들이 움직이고 행하는 것 모두가 아버지의 뜻 앞에 보탬이 되고, 뜻을 통하여 당신의 세계적인 발판을 닦는 것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이것은 이번 기간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저희들이 확실히 알고 상하가 일치되어서 당신이 남기신 뜻만을 성사시킬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여기에 모였사옵니다. 남다른 이 길을 가겠다고 몸부림쳐 나오던 과거를 회상하면서, 현재 자아의 중심이 어디에 머무르고 있으며 내일의 소망과 일치되어 있느냐 하는 것을 비판하고, 새로운 방향을 스스로 모색하고 자각하여 내일의 소망을 인계받을 수 있는 당신이 바라고 당신이 찾아 나오던 아들딸들이 기필코 되어야 되겠사옵니다.
부디부디 이들의 마음에 당신의 마음이 어리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이들의 생활이 당신이 살피는 생활에서 벗어나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이들의 생애 노정이 당신의 소망의 뜻을 인계받기에 부족함이 없게끔 아버지께서 늘 가는 방향을 갖추어 주시어 당신이 소원하시는 뜻 앞에 일치될 수 있도록 안팎으로 권고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당신이 그리워 당신이 남기신 뜻만을 위하여 충성을 하고도 부끄러움을 느낄 줄 알고, 효성을 다하고도 그것을 스스로 잊어버릴 줄 아는 저희들이 되어, 당신 앞에 칭찬받고 당신 앞에 기억될 수 있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이제 저희들이 이달에 여러 가지 행사를 준비하고 있사오니 친히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경륜하는 모든 전체가 아버지의 뜻 앞에 일치되고 영광의 터전이 되어 아버지께서 70년도의 기쁨의 한때로서 자랑할 수 있는 이달이 되고 이번 기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나이다.
이 시간 전국에 널려 있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복을 빌어 주시옵고, 세계에 널려 있는 뭇 자녀들에게도 당신의 뜻 가운데서 칭찬하여 주시옵소서. 지켜 주시옵소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최후의 승리의 절정에 도달할 때까지 지치지 않고 떨어지지 않고 달려갈 수 있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될 수 있도록 품어 보호하여 주시옵기를 재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오늘 당신의 이름을 중심삼고 모이는 곳곳마다 당신의 거룩함이 같이하여 주시옵고, 당신의 자비의 손길을 부디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의 뜻 앞에 있어서 저희들이 최종적으로 세움을 받고 자랑받을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면서, 이 모든 말씀 참부모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사람의 일생에 있어서 태어나는 때와 결혼하는 때, 그리고 죽는 때는 중요한 때인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한 개인이 태어나 가지고 성장하여 결실을 맺기 위해서는 반드시 상대적인 인연을 맺어야 되고, 그 다음에는 반드시 최후의 길을 가게끔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나라도 반드시 창건기가 있고, 그 다음에는 번성기가 있는 것입니다. 다음에는 이 번성기를 통해 가지고 저녁 때와 같은 기간을 반드시 거쳐 나가는 것입니다.
그 저녁 때와 같은 기간에는 어떤 문화면 문화, 혹은 나라면 나라 자체가 모든 전체를 수습하고 새로운 출발을 모색할 수 있는 중요한 기간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기간에는 새로운 미래의 생명의 터전, 씨로 말하면 새로운 씨로서 미래의 새로운 생명의 요인이 될 수 있는 제반 내용을 갖추어야 합니다. 이러한 씨를 추수할 수 있는 가을절기와 같은 때가 저녁 때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인생이 가는 길에도 그와 같은 날이 있고, 그와 같은 한시기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루 동안에 일을 하는 데 있어서도 아침은 어떤 일을 준비하는 때이고, 낮은 일을 하는 때입니다. 또한 저녁은 그 일을 마치기 위해서 모든 것을 수습하여 청산지어 놓고 내일의 일을 준비하는 터전이 되게끔 가려 놓지 않으면 안 되는 때인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 개인도 그렇고,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의 생활도 그런 과정을 거쳐 나가는 것을 보게 될 때, 우리 통일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통일교회가 자체에도 소생적인 출발기가 있는 것입니다. 그 출발기에는 생명의 여력을 지니고 그 환경의 모든 여건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없어 가지고는 그 환경 앞에 생명체로서 남아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생명체로 남아졌으면 새로운 생명의 결실을 이어받아서 자체내에서 그 생명의 결실과 더불어 관계된 내용을 언제나 갖추어서 준비하고 있어야 됩니다. 그러지 않고는 아무리 결실의 때가 온다 하더라도 그 자체로서는 결실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태어나서 그 환경을 극복해야 됩니다. 뿐만 아니라 미래에 결실될 수 있는 모든 여건을 이어받고, 그 결실의 모든 내용에 동기가 될 수 있는 자체력을 지닐 수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만 결실의 과정을 거쳐 가지고 새로운 역사과정이라든가 인류 사회에 있어서 필요로 할 수 있는 하나의 결실체로 남아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걸 생각하게 될 때에, 사람은 태어나서 반드시 그 자체로서 환경을 극복해야 됩니다. 그렇다고 그것을 극복하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새로운 생명을 이어받아 가지고 결실의 내용을 지닐 수 있는 과정을 거쳐 나가야 됩니다. 이 과정을 거친 후에는 올바른 자리에 서서 실효를 나타낼 수 있는 한 자리를 차지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말하면, 곡식이 씨가 뿌려져 가지고 싹이 터서 자라 열매를 맺어 주인의 손길에 의해 거두어져서 창고에 저장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반드시 어떠한 목적 앞에 필요해서 거두어질 수 있는 과정을 거쳐야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통일교회를 두고 볼 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통일교회가 새로운 사명을 가지고 섭리사 앞에 새로이 출발하게 될 때, 그 섭리사가 지니는 내용도 있겠지만 그 섭리사가 가야 할 방향에는 환영하는 여건보다도 반대하는 여건이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안팎의 모든 것이 다른 환경에서 새로운 하나의 실체로 존속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무자비한 투쟁의 과정을 거쳐 나가야 됩니다. 이 투쟁을 통하여 개인으로부터 가정, 종족, 민족, 국가, 세계에까지 남아져야 됩니다.
이러한 결실이 한 민족에게 하나의 결실로써 남아지기 위해서는 민족의 반대와 생명력에 대항해 들어오는 모든 시련들을 극복할 수 있어야 됩니다. 또한 이것이 민족뿐만 아니라 세계를 향해 나갈 수 있는 새로운 길이라 할진대는 그 세계의 환경을 극복할 수 있는 자체력을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것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면서도 그 자체내에 미래의 소망에 대한 결실의 내용을 보유하지 않고는 미래의 소망을 상속받을 수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의 시련보다도 미래에 다가올 그 소망의 내용을 인계받아 올 수 있는 그 자체의 내적인 구비 조건이 더욱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환경과 싸움을 해서 승리를 했더라도 기뻐할 것이 아니라, 이 싸움을 통해서 미래에 상속받을 수 있는 내용을 보강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보강하느냐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큰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한 과정을 거쳤다고 해서 기뻐하기보다 그 과정에서 승리의 인연을 다짐했으면 다짐된 그것이 내일의 소망을 상속받을 수 있는 내용으로 자극이 되고, 거기에 보다 보탬이 되는 입장에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입장에 서지 못한다면 미래의 소망의 자리에서 인류역사 앞에 거두어질 수 있는 결실체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과연 1970년대는 어떠한 때냐? 이때부터는 우리에게서 시련의 과정이 지나가는 때입니다. 지금까지의 시련의 과정을 우리는 모두 극복해 나왔습니다. 이런 자신을 두고 볼 때, 시련을 극복했다는 사실을 두고 기뻐하는 것보다도 당장에 갖추어야 할 결실의 내용을 충당하기 위해 그 내용을 보강하는 것이 더 큰 문제라는 사실을 우리가 망각해서는 안 되는것입니다.
이 내용의 미래의 소망을 상속받을 수 있는 중요한 요인이 되기 때문에 이 요인을 스스로 갖추고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우리가 70년대를 수확의 때, 결실의 때로 맞이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이걸 볼 때, 이 기간은 각자가 해결하여야 할 중요한 기점인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그러한 것을 상속받을 수 있는 요인을 갖추지 못했다고 한다면, 이 70년대가 아무리 우리 뜻에 도움이 되고 우리 교회가 발전할 수 있는 때라고 할지라도 그 때를 여러분의 때로서 맞이할 수 없는 것입니다.
70년대를 두고 볼 때 지금까지 많은 제반 행사를 거쳐왔습니다. 누차에 걸쳐 실시한 국제적인 행사를 통하여 우리는 사회에 새로운 방안을 제시하고 모색하면서 지금까지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11월에도여러가지 행사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이런 전체과정을 통해서 아무리 많은 행사를 했다 할지라도 그것은 미래의 내용과 결부되고, 미래의 발전에 동기와 요인이 될 수 있는 기회로 포착하여 거기에 전력을 투입시킬 수 있는 자신이 되지 않고는 70년대가 우리의 결실의 때, 수확의 때로 다가온다고 해도 무의미한 때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를 우리는 언제나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때는 앞으로 찾아올 새로운 시대를 우리가 상속받을 수 있고 결실할 수 있는 좋은 때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자체내에 결실할 수 있는 내용을 지녀야 되는 것입니다. 나타난 것보다도 자기의 자체내에 있어서 끊임없는 기쁨과, 끊임없는 희열과, 끊임없는 생활력이 스스로 충천하는 생활환경을 갖지 못하는 자는 지금이 새로운 결의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때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런 입장에 우리가 서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내적인 요인만 가지고 되느냐? 안 됩니다. 내적인 요인을 중심삼고 외적인 요인과 결부시켜야 됩니다. 반드시 외적인 입장과 결부시켜야 됩니다. 우리의 이 뜻이 통일교회만의 뜻이 아니라 한국의 뜻이요, 세계의 뜻이라면 반드시 내적인 요인을 유지해 가지고 외적인 환경과 연결시켜 놓아야 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과거에 반대받으며 환경을 개척해 나오던 극복시대와는 다릅니다. 이제는 자기의 갖추어진 내용을 제시해 가지고 그 가치를 평가받아야 할 시대인 것입니다. 이것이 수확의 때, 결실의 때를 맞이한 시대에 있는 우리의 입장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여기에서 반드시 평가를 받아야 됩니다. 비교를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어느 것이 참이고, 어느 것이 훌륭하고, 어느 것이 보다 가치 있느냐 하는 것을 평가받아야 된다는것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평가를 받기 위해서는 70년대에 제반 행사를 해야 되겠습니다. 국가적 분야에 적응할 수 있는 행사도 물론이지만, 아시아에 있어서도 우리를 평가해 줄 수 있는 행사를 해야 되겠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행사도 해 나가야 되겠습니다. 왜 그래야 되느냐? 우리 단체와 다른 단체를 비교하게 될 때 다른 단체는 비교도 안 되는 내용이 반드시 우리에게 있어야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가치적인 면에서 볼 때, 그 누구도 함부로 평가할 수 없는 가치적인 것으로 평가될 때 여기에서 세계적인 뜻은 하나의 중심을 통해 가지고 자동적으로 연결될 것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여러분은 여러분 자체내에 그런 희망과 소망을 인계받을 수 있는 내적 요인을 공고화시켜 가지고 그 공고화된 내적 요인을 중심삼고 외적 환경에 다시 적응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입장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되겠습니다. 이것은 수세의 입장이 아니라 반드시 공세적인 입장에서 드러내야 됩니다.
감나무를 보게 되면 봄에 꽃이 핍니다. 감꽃은 다른 꽃처럼 유난스럽게 울긋불긋하지 않습니다. 또, 감꽃은 잎사귀의 빛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얼핏 보면 꽃이 있는지 없는지 잘 모릅니다. 또, 열매 맺어져서도 잎사귀에 싸여 있을 때에는 열매가 있는지 없는지 잘 모릅니다. 그 이파리가 너무나 청청하기 때문에 열매가 있는지 없는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름을 지나 가을이 되면 빛깔이 변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완숙하게 될 때는 안팎이 전부다 붉어집니다. 그래 가지고 잎은 다 떨어지더라도 그 열매만이 유난히 빛날 수 있게끔 남는 사실을 여러분이 볼 것입니다.
여기서 완숙된 그 열매 자체가 그 환경에 있어서 모든 전체의 평가 기준이 될 수 있는 것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어느 누구든지 그 열매를 보고 반가와하지 않는 사람이 없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통일교회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통일교회 자체를 두고 볼 때 70년대가 그야말로 결실의 시대라고 한다면 잎과 같은 모든 요인은 전부 사라져야 할 것입니다. 앙상한 가지에 하나의 결실의 가치를 지닌 열매가 전체의 가치로서 드러나는 그러한 감나무의 열매와 같이 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런 열매는 선전이 필요없습니다. 그 자체를 보고 안팎으로 갖추어진 그 가치를 어느 누구든지 백 퍼센트 평가할 수 있는 가치적인 존재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그 감나무면 감나무 자체가 일년 동안 얼마나 꾸준하게 싸움을 했겠습니까? 그 열매로서 완성할 때까지 얼마나 수고의 과정을 거쳤겠습니까?
수많은 가지에서 피어난 꽃들 가운데 보다 나은 완숙한 열매로 되기까지 그 열매 자체는 어떠한 꽃의 열매보다 더 투쟁을 했고 더 노력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됩니다. 여름을 거치면서 바람이 불고 비가 오는, 폭풍우가 몰아치는 그런 험난한 환경과 영양이 부족하여 미숙한 자리에서 열매가 떨어질 수 있는 여러가지의 환경을 다 극복했다는 것입니다.
그 나무가 열매를 많이 지니지 못하여 하나의 열매만 남겼다면 그 열매는 그 나무의 전체 진액을 대표하여 그 나무의 종합된 내용과 외적인 투쟁력을 가진 열매라는 것입니다. 그런 열매만이 남아질 수 있는 것입니다. 나무에 단 하나의 열매가 남았다면 그 하나의 열매가 그 나무의 가치를 대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감나무라면 그 한 알의 감으로 말미암아 가을을 맞을 때 스스로의 보람과 위신과 권위를 세울 수 있을 것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나무에 꽃도 많이 피었고 열매도 맺혔었지만, 그러한 것들이 전부다 떨어져 버리고 가을이 되었는데도 하나의 결실도 맺지 못하고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무라면 얼마나 처량하고 얼마나 슬프겠습니까? 그렇지만 많은 열매는 맺지 못했다 하더라도 어떤 나무의 열매와도 비교할 수 없는 완숙한 하나의 열매를 가졌다면, 그 한 알의 열매를 가지고 수천 수만의 열매 앞에 당당히 자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현사회에 수많은 종교가 있습니다. 기독교면 기독교를 중심삼고도 수많은 종파가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 가운데 결실의 시대를 맞이한 통일교회 자체를 중심삼고 보게 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결실을 요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아까 말한 것과 같이 한 나무에 많은 열매가 맺혀야 되지만 그렇지 못하고 하나의 열매만을 남겼다 할 때, 그 열매가 그 나무로서는 그 이상 낼 수 없는 완전한 열매라면 그 나무는 그 열매로 말미암아 가을을 맞이한 가치와 권위와 위신을 세울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통일교회를 하나의 나무로 비유한다면 반드시 결실이 있어야 됩니다. 통일교회가 출발해 가지고 지금까지 모진 풍파와 시련과정을 거치며 하나의 결실을 향해서 나가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그 결실 자체가 어떤 결실이 될 것이냐 하는 것이 크나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입장에서 여러분 스스로가 과연 나는 정상적인 봄을 맞이했느냐, 정상적인 여름을 맞이했느냐, 그리고 정상적인 가을을 맞이해서 완숙한 열매가 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을 비판해 보아야 되겠습니다.
그 열매 한 자체를 두고 보면 거기에는 나뭇가지도 있는 것이요, 나뭇잎도 있는 것이요, 뿌리도 있는 것이요, 또 씨도 있는 것입니다. 그 열매를 땄다고 하는 것은 그 나무 전체를 가졌다 하는 것과 같은 입장입니다. 도리어 그 열매에는 씨가 많기 때문에 그 열매를 중심삼고 수십 혹은 수백 그루의 나무를 가질 수 있는 입장에 섰다는 것입니다.
한 나무의 열매는 그 나무를 대표해 가지고, 그 나무가 십년이 지났든지 이십년이 지났든지 역사적인 그 연륜의 모든 요인 가운데서 생명력을 가지고 인계해 주고 싶었던 전체적인 요인을 상속받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완전한 열매로 거두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열매가 자라는 과정에 그 요인을 한번이라도 절단해서는 안 됩니다. 끊임없이 자라도록 놓아 두어야 합니다. 생명이 시작된 그날부터 열매로서 거두어져 주인의 손을 거쳐 창고에 들어가 저장될 때까지 그 요인이 어느 한때라도 끊겨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바람이 불 때나 혹은 그보다 더한 폭풍우가 몰아치는 때나 어떠한 시련의 과정이 있더라도 이 요인이 끊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요인은 시종일관 연면하여 그 자체에 보유되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게 될 때, 여러분 자신들은 신앙의 길에 들어와 가지고 자신의 새로운 생명이 발생하는 것을 느끼고, 희열을 느끼고, 새로운 희망을 느낄 것입니다. '나는 이런 나무가 되고, 이러한 인격자가 되고, 세계 앞에 이러한 존재가 되겠다' 하는 결심을 하고 나선 그날부터는 그 희망과 가을의 수확기를 위해서 준비하는 모든 내적인 요인이 끊어짐이 없어야 됩니다. 시일이 가면 갈수록 다짐하고 거기에 플러스시킬 수 있는 내용을 적재시키는 과정이 없어 가지고는 완숙된 결실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70년대는 우리의 때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때라는 것은 무엇이냐? 우리의 때라고 해서 싸움을 해야 할 때냐, 아니면 결실을 거두어야 할 때냐? 사람은 누구나 싸움의 때보다는 결실의 때를 바랍니다. 싸움을 하는 것은 싸움의 때보다도 승리하여 영광받기를 바라기 때문에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즉, 싸워서 이기고자 하는 것은 영광을 바라기 때문이지 싸워서 이기고도 영광이 없으면 싸울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그 영광은 싸움에서 승리의 결과를 거둘 때 가능합니다. 모든 일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70년대를 중심삼고 볼 때, 우리의 통일교회의 때라는 것은 어떤 때냐? 결실을 거두어야 하는 때입니다. 결실을 거두는 데는 우리 통일교회에 소속한 교인들을 중심한 이 자체를 중심삼고 거둘 것이냐, 우리가 좋아하는 열매만 거둘 것이냐? 그렇지 않으면 대한민국이 좋아하는 열매로 거둘 것이냐, 세계가 좋아하는 열매로 거둘 것이냐? 입장은 모두가 다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며 사랑할수록 우리 교회내의 가치로서 열매가 거두어지는 것을 바라시지 않을 것입니다. 이 나라가 우러러보는 데서 거두어지고, 세계가 우러러보는 데서 거두어지기를 바라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러한 결실의 열매로 거두어질 수 있는 요인을 자기 스스로 시종일관 끊임없이 지니고 나왔느냐 하는 것이 문제되는 것입니다.
결실의 요인을 시종일관 지니고 왔다 할진대는 이것을 어떤 곳에 결실시켜야 될 것이냐? 교회에 파묻혀서 결실시킬 것이냐? 그 결실의 환경과 결실의 터전을 어떠한 곳에 맺어 주고 싶은 것이 하나님의 소원이요 우리의 소원이겠습니까? 이 물음에는 너나할것없이 교회내의 결실로 거두어지기를 바라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러니 하나님도 그럴 것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그 열매가 가치가 있으면 있을수록 최고의 정상에 있는 존귀한 분이 차지할 세계 앞에 거두어지기를 바랄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 보면 그범위와 입장은 넓고 크고 높고 귀한 범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지의 대주재가 되시는 하나님이 통솔하시고 통찰하시고 주관하시는 세계 앞에 보다 귀한 것으로 거두어지기를 바라는 것은 모두의 소망이요, 바람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 오늘날 그 결실을 통일교회의 결실만으로 바라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것을 통일교회에서 중요시하는 이상으로 나라에서 중요시할 수 있고, 나라에서 중요시하는 것보다도 세계가 더 중요시할 수 있고, 그 세계가 중요시하는 것보다도 천지의 대주재이신 하나님이 더 중요시할 수 있는 결실이 되기를 반드시 바랄 것입니다.
그러면 세계보다 더 귀하게 여길 수 있고, 나라보다 더 귀하게 여길 수 있고, 우리 교회보다도 더 귀하게 여길 수 있는 그러한 최상 최고의 자리가 어떤 자리이겠습니까? 그런 최고의 자리에 서게 될 때에 그것은 역사적인 결실이 되는 것입니다.
과거에 그런 결실이 없었기 때문에 오늘날에 그러한 결실이 나오게 되면 오늘에 거두어진 그 결실 하나로 말미암아 과거가 빛나게 되는 것입니다. 또 그 결실체가 거두어짐으로 말미암아 미래의 소망을 다시 연장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금년에 그런 결실을 가져왔기 때문에 후세에도 그런 결실을 가져올 것이 아니냐? 거두어질 결실체의 가치를 중심삼고 미래에 대한 소망도 그 가치 앞에 기대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러한 문제를 두고 볼 때, 현재는 우리의 때라고 할 수 있는 수확의 때입니다. 수확의 때는 완숙된 결실의 가치를 두고 말하는 것인데, 그 가치가 통일교회내의 가치로만 거두어져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이 결실의 가치를 어디에 심고, 어디에서 거두어야 될 것이냐? 나라에서 거두어야 되고, 세계에서 거두어야 됩니다. 우리가 그 결실체를 보다 가치있는 것으로 드러내고, 보다 가치있는 것으로 공인시키고 평가되게 하려면 나라를 중심삼고 빛낼 수 있는 환경을 개척해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나라보다도 세계 앞에 이것을 빛내야 되기 때문에 세계와 인연을 맺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 교회의 행사, 우리 교회의 움직임은 통일교회의 예식으로만 끝날 것이 아니라, 만민이 국가의 예식이나 세계의 그 어떠한 예식보다도 더 추앙할 수 있는 결실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합니다. 세계 앞에 복귀섭리의 책임을 담당한 교회가 우리 교회라면 우리 교회가 그것을 어떻게 드러내느냐 하는 것이 금후에 가야 할 방향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것은 갑자기 시작하고 갑자기 출발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동기의 내용을 중심삼아 가지고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행사가 그냥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살이 되어 가지고 그것이 다시 제2의 환경 앞에 하나의 요인이 되어 점점 넓게 퍼져 나가야 됩니다. 우리 개인의 요인이 된 것을 교회의 요인으로서 연결시키고, 교회의 요인이 된 것을 나라의 요인으로서 연결시키고, 나라의 요인이 된 것을 세계의 요인으로서 연결시켜 가지고 이것이 완전히 결실을 향하게 될 때에 거기에 새로운 문화세계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를 생각해 볼 때, 우리는 이제 그러한 가치적인 결실체가 되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들어 교회에서 평가받을 수 있는 하나의 결실체가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여러분 자신을 세워서 평가받을 수 있는 자체가 되어야 합니다. 자주적인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평소에는 아무것도 안 하다가 수확기에 들어와 가지고 내가 너희들에게 지지 않는다고 하면서 갑자기 해서는 안 됩니다. 완숙한 결실은 꽃피는 전부터 단련되어서 그 내용이 완전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완숙되는 과정에서 시련에 부딪치면서 익은 것입니다. 피해 다니는 입장에서 남아졌다면 또다시 그런 시련의 자리에 부딪치면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정면적인 입장에 서서 시련에 부딪치고 거기에서 끈기 있게 남아져야 됩니다. 그러면서도 내적인 힘을 길러야 하고, 필요로 하는 결실의 요인과 더불어 흡수력이 강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흡수력으로만 끝날 것이 아니라 외적인 대항력으로서 자신을 방위할 수 있는 자체가 되지않고는 결실을 가져올 수 없는 것입니다.
모든 면에서 우수해야 주인이 쓸 수 있는 씨가 된다.
이런 것을 두고 볼 때, 현시점에서 여러분들은 어떠한 입장에 있느냐? 여러분을 통일교회의 개인으로 볼 때에 '아, 나는 따라가는 사람이다' 했을 때 그러한 사람은 훌륭한 주인에게 거두어지지 않습니다. 제일 좋은 씨를 구하는 그런 주인에게 있어서는 절대 거두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오히려 제거될 것입니다. 단 한 분의 주인이 있어 가지고 단 한곳에 필요한 단 하나의 참된 가치를 지닌 하나의 열매를 찾고 있는 그런 주인 앞에 서려면 따라가는 사람이 되어 가지고는 안 됩니다. 다 우수해야 됩니다. 모든 면을 고루 갖추어야 합니다. 안팎으로 갖추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보면 교회생활을 잘하는데 사회생활을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사회생활은 잘 하는데 교회생활을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에, 사회생활은 잘하지만 교회생활을 못하는 사람은 앞에서 말한 열매를 갖출 수 있는 요인과 그 내용이 없습니다. 교회생활은 잘하지만 사회생활을 못하는 사람과 사회생활은 잘하지만 교회생활을 못하는 사람 중에 어떤 사람이 더 나으냐 할 때, 사회생활을 잘하는 사람보다 교회생활을 잘하는 사람이 낫습니다. 결실의 요인을 갖춘 사람은 내일의 희망을 가지고 움직여 나갈 수 있지만 결실의 요인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결실과 관계를 맺을 수 없는 것입니다.
결실되기 위해서는 시종일관된 환경적인 요인을 갖추어야 됩니다. 그것은 돌발적으로 거두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갑자기 충성을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입장에서 두고 볼 때, 외적인 생활보다 내적인 생활의 공고화를 중요시하는 사람은 외적인 생활을 자랑할 수 있는 사람보다 더 나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완전한 결실의 요인을 안팎으로 갖추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내적인 요인을 중심삼고 외적인 모든 환경을 흡수 흡착해 가지고 안팎이 하나가 되어 뗄래야 뗄 수 없는 가치를 드러낼 수 있는 생활적인 터전을 가진 사람은 발전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교회 안에 들어와도 친구가 있고, 교회 밖으로 나가도 친구가 있기 때문에 외롭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언제나 외로움을 느끼기 쉽습니다. 그것은 내적 생활에 결핍을 느끼기 때문에 외로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또, 외적 생활에 결핍을 느껴도 외로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 두 분야를 완전히 보강하지 않고는 미래에 대한 새로운 소망을 아무리 가지려고 해도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 젊은 사람들은 '아, 나 공부해야지. 통일교회의 뜻이 좋아. 내가 이 뜻을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실력을 길려야 되겠다'고 합니다. 그러면 실력을 길러 가지고 뭘 할 것이냐? 외적 생활을 대비하려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실력을 길렀다 하더라도, 그 실력을 끌고 가고 촉구시켜서 외적인 인연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내용을 가졌다 하더라도 내적인 내용을 갖지 못하면 그 실력은 실현을 보지 못합니다. 아무리 실력을 가졌더라도 안팎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내적인 인연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내용이 강하면 강할수록 실현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범위가 넓고 클수록 불어날 것입니다. 이것은 자연적인 이치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이제 우리의 때가 점점 다가오는 것을 느껴야 됩니다. 요전에는 우리 교회를 중심삼고 사회에 큰 물의가 빚어졌습니다. 더구나 기성교회에서는 큰 문제가 벌어졌습니다. 기성교회에서는 지금까지 우리 통일교회가 발전해 온 발전상을 보고 위협과 공포를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성교회 최고 간부들이 이마를 맞대고서 어떤 대책을 강구해야 되겠다고 지금 야단들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런 환경을 바라보고 좋아해서는 안 됩니다. 이 환경을 자기의 영양소로 흡수할 수 있는 자체력을 갖추어야 됩니다. 그것을 소화시킬 수 있는 내적인 요인을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괜히 공중에 둥둥 떠다녀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여러분들은 통일교회에 대하여 모르는 사람이 통일교회를 알아보려고 '통일교회가 뭐요' 하고 물어보면 뭐라고 할 거예요? 청파동에 통일교회라고 간판 붙이고 있는 그 교회가 통일교회라고 하겠습니까? 통일교회가 뭐냐고 묻는 그 말 가운데는 통일교회의 과거와 현재는 물론이고 미래까지도 알고 싶다는 뜻이 내포돼 있습니다. 따라서 통일교회에 대해서 설명할 때는 연혁부터 설명해야 됩니다. '통일교회는 언제 누구에 의하여 시작되어서 이러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나왔고, 현재는 이러이러하고, 앞으로는 이러할 것이다' 하는 식으로 답변을 해줘야 합니다. 이러한 답변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통일교회가 뭐요?'하고 묻는 것은 통일교인이 무엇이냐고 묻는 것이 아닙니다. 그 물음 자체에는 반드시 역사성을 띠고 물어보는 것입니다.즉, 과거 현재 미래를 내포한 물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대한민국이 앞으로 소망이 있는 민족이냐 없는 민족이냐 하는 것을 보려면 어떻게 보아야 됩니까? 현재에 잘사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들이 어떠한 역사적인 과정을 거쳐왔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역사적 과정을 거쳐온 현재가 이렇기 때문에 미래는 이럴 것이다 하는 것입니다. 즉, 과거와 현재가 확실해야 미래에 대한 예견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통일교회 자체는 어떠냐? 통일교회 자체에도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그 역사는 어떤 역사와 교차되어 가지고 서로 잡아당기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노끈을 서로 걸고 잡아채면 한쪽이 끊어지기 마련입니다. 그럼 여기서 어느 것이 끊어지느냐? 소홀히 된 것이 끊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약한 것이 끊어진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는 역사적인 고삐요, 또 하나는 현대적인 고삐입니다. 이것이 둘다 강하면 아무리 잡아당겨도 끊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모든 출발과 과정과 끝이 그렇고, 동기와 내용과 결과가 언제든지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의 역사를 두고 통일교회의 현재를 중심삼아 가지고 어떤 역사를 걸고 잡아채더라도 끊어지지 않고 남아질 수 있느냐? 여러분이 역사를 강력히 주장할 수 있고, 현시대를 강력히 주장할 수 있는 자체의 자신력을 갖고 있느냐? 현대의 어떠한 사상과 어떠한 전통을 통해 가지고 있는 그런 주의와 사상보다도 더 강한 신념의 소유자가 되어 있느냐? 이것이 되어 있다면 남아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신앙생활하는 데 있어서 '내가 통일교회에 나가는 것은 그저 내가 교회에 다녀야 되니까 할 수 없이 나가는 것이다' 해서는 안 됩니다. '역사를 빛내고 시대를 단장하기 위해서 교회에 나간다'하는 신념이 필요합니다. '내가 교회 나가는 것은 역사를 빛낼 수 있는 역사의 결실로서 나가는 것이다. 오늘의 시대를 단장하기 위한 것이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 하는 자주성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내가 나가는 데 있어서 그 누가 반대를 하더라도 '내가 옳은가 네가 옳은가 두고 보자. 내가 너보다 나은 결과를 반드시 가져오게 할 것이다' 이런 신념이 필요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자기 남편한테 반대받고, 자기 아들딸한테도 수난을 받으며 나오는 아주머니들을 보게 될 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반드시 어느때까지는 더 반대받고 수난받아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지금까지 뜻을 따라 나오면서 가정을 소홀히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가정을 대해 소홀히 한 것이 아닙니다. 어느 한때가 되면 가정에 있어서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소임을 다할 수 있는 입장이 되는 것입니다.
선후관계에 있어서 이자택일해야 할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가정을 버리고 뜻을 세우기 위하여 뜻을 따라 나온 것입니다. 뜻은 내용이 되고 가정은 외적인 환경이 되기 때문에 내적인 내용을 먼저 세워야 됩니다. 이론적으로 그렇다 하는 원칙을 세워 놓고 결과적인 생활을 수습해야 되는 것입니다. 즉, 내용을 확립한 후에 결과를 수습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내용이 확립되게 될 때는 가정에 들어가서도 그 환경을 전부다 수습할 수 있는 자체가 되어야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를 생각해 볼 때, 참이라는 것은 언제나 과거의 열매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인정한 것이 결실된 열매입니다. 이것은 모든 문제의 비판적인 기준이 되는 것이요, 현재의 중심이 되는 것이요, 미래의 출발 기점이 되는 것입니다. 미래는 참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이것이 먼저 앞서는 것이지 다른 것이 앞서지 않습니다. 미래의 출발은 참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나무의 열매 자체는 그 나무가 일년 동안 지내온 역사적인 결실입니다. 그것은 역사적인 열매인 동시에 현실의 열매로서 보다 가치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 열매의 가치가 높으면 높을수록 그것을 미래의 출발로서 남기고 싶은 것입니다. 여러분이 종자를 구하려 할 때, 제일 나쁜 것을 취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상지상(上之上), 귀한 것 중에서도 제일 귀한 것을 취하려 할 것입니다. 그래서 참을 가리켜 유일성을 갖춘 미래의 출발 기점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된 결실이라는 것은 과거의 결실인 것입니다. 그것은 현재의 중심이 되고 미래의 출발 기준이 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참이라는 것은 그 자체에는 과거가 떠난 것이 아니라 살아 있으며, 현재가 떠난 것이 아니라 집착되어 있고, 미래가 흡수되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참이라는 것은 과거 현재 미래의 가치를 종합한 주체적인 하나의 유산이 되는 것입니다.
6천년의 복귀섭리역사를 두고 볼 때, 그 6천년 역사는 복귀섭리의 완성기를 찾아나온 것입니다. 그 완성기 안에 전부 들어가 살아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아브라함도 사는 것이요, 모세도 사는 것이요, 예수님도 사는 것이요, 역사적인 모든 미완성의 요인(요인)이 여기에서 전부 부활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소원하던 전체의 가치를 완숙하게 완결시키는 자체가 완숙된 결실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그 결실자체가 완전하기 때문에 현재에 있어서 전체의 생명의 요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계를 비판하고 평가하는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부터 미래는 출발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서게 되어 있지 나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리는 최후에 남아지는 것입니다. 참된 것은 최후에 남아진다는 것입니다. 최후까지 남아질 뿐만 아니라 새로운 시대에 새로이 출발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일시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에서부터 현재를 거쳐 미래에 이르기까지 3과정의 종합적인 요인이 되어야 됩니다. 과거가 거기에 끊임없이 연결되어 그것이 과거의 환경을 극복하는 요인으로 남아져야 되고, 시대적인 모든 요인으로서 남아져야 되고, 미래의 요인으로서 영속적으로 남아질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수 있는 것이 하나의 완숙한 결실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런 입장에 서게 될 때에 하나님은 세계를 버리고라도 여러분을 찾아오십니다. 나무를 베어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그 열매 하나를 간직하실 것입니다. 나무가 불타고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 나무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 씨를 품고 보관하려고 하실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마 16:26)"라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나무를 가졌다 하더라도 완숙한 열매가 없는 나무라면 그 나무가 무엇에 필요하겠습니까? 나무를 잃어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결실된 생명, 열매를 지니는 것이 보다 가치있는 일입니다. 나무는 후대에 생명을 연속시킬 수 없지만 결실은 후대에 생명으로 연속시킬 수 있기 때문에 보다 가치있는 것은 결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입장에서 말씀하셨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지금까지 지나간 역사를 나를 위한 것이었고, 현재의 이 시대는 나를 세우기 위한 것이고, 앞으로 올 역사는 나로부터 시작된다는 관점에서 하나님을 모시고 나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안 받을래야 안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물론 그 사람이 가는 길에는 곡절이 많을 것입니다. 중심에 서 있으면 곡절이 많은 것입니다.
산이 높으면 높을수록 그 봉우리는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다 맞습니다. 그것은 그 지형을 종합한 하나의 중심 물체로 나타났기 때문에 사방의 모든 시련에 부딪치는 것입니다. 그 부딪치는 시련을 모두 극복해야 됩니다. 그 모양이 아무리 싫다 하더라도 그 시련을 극복하고 남아진 그 자체는 역사가 길면 길수록 비례적으로 그 가치가 커지는 것입니다. 그 환경이 외로우면 외로울수록 그 외로움에 비례되는 가치가 여기에 대두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소망은 자동적으로 깃들게 됩니다. 여러분이 높은 산정에 오르기를 바라는 것도 그런 의미의 가치가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 통일교회는 결실을 통일교회의 것으로만 남겨서는 안 됩니다. 우리 통일교회가 주장하고 통일교회가 가르치는 내용이 어떻게 되어 있느냐 하면 반대로 되어 있습니다. 가정을 위하는 것보다도 종족을 위하라는 것입니다. 가정의 결실을 요구하느냐, 종족의 결실을 요구하느냐 할 때 가정을 통하여 종족의 결실을 세워야 합니다. 종족보다는 민족을 위하고, 민족의 중심이 될 수 있는 결실보다는 나라의 중심이 될 수 있는 결실을 요구하고, 나라의 결실보다는 세계의 결실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우리 통일교회가 주장하는 것을 하나의 완숙한 결실을 추구하는 입장에서 보다 나은 가치의 내용을 요구하는 입장에서 보아도 이것은 응당하고 올바른 주장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은 공적인 입장에서 살라는 것입니다. 공적인 입장이라고 하는 것은 개인보다도 가정을 위하고, 가정보다는 종족을 위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더 큰 분야가 공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살라고 하느냐? 그것은 보다 가치적인 결실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1970년을 중심삼아 가지고 12월 1일부터 축복가정 부인들을 총동원하라는 것입니다. 남자들이 '이번에는 부인들만 동원하니 나와는 상관없다' 하고 생각한다면 부인하고는 아무 관계 없는 사람이 됩니다. 아무개의 부인을 동원하고 아무개의 어머니를 동원한다는 것은 어떤 입장에서 동원하는 것이냐? 그 가정을 대표해서 동원하는 것입니다. 가정을 대표할 뿐만아니라 교회를 대표해서 동원하는 것입니다. 나아가서는 대한민국이 책임을 못 하고 있으니 대한민국을 대표해서 동원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세계를 대표해서 동원하는 것입니다. 세계뿐만 아니라 영계의 영인을 대표하고, 수많은 조상을 대표해서 동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번 동원에 보람을 느껴야 됩니다. 틀림없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내가 가는 길 앞에는 수많은 가정들이 나를 본받으려고 합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통일교회에서 축복받은 가정으로서 출발하지 못한 주부가 있다면, 그 주부는 이 기간이 끝날 때까지 자기의 내심의 고충을 아무리 모면하려고 해도 모면하지 못합니다. 설령 그것을 모면해 가지고 국가적인 입장에서 승리했다 하더라도 자기보다도 가정적이요, 종족적이요, 민족적인 입장에서 승리한 사람이 있다고 하면 자기가 먼저 나설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통일교회에 이제 들어온 젊은 사람들이 '아이구, 10년 전에만 들어왔어도 좋았을 텐데' 한다는 것입니다. 대학을 나오고 학박사의 학위를 가진 사람이라도 통일교회에 들어와서 탄식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10년 전에만 들어왔어도 좋았을 텐데'한다는 것입니다. 10년 전에 들어온 아가씨나 국민학교밖에 안 나온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부러워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자기가 국가적 기준에서 승리를 가져왔다 하더라도, 민족적 승리를 거쳐 국가적 승리를 한 사람은 당할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민족적 승리와 국가적인 승리를 가졌다고 하더라도 종족시대의 승리까지 겸한 사람에게는 당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 아무리 종족시대의 승리를 했더라도 가정적인 시대의 승리를 겸한 사람에게는 당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결과는 같지만, 보다 믿을 수 있고 보다 가치적인 내용은 역사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그 내용이 복잡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역사가 길수록 같은 입장에서 승리가 나타났다 하더라도 그 가치의 비중을 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대학을 졸업해 가지고 교회를 위해 일시에 천배 만배 충성하겠다고 하는 사람과 국민학교밖에 못 나왔지만 교회 창설 때부터 꾸준히 이 길을 개척한 사람과 비교해 보면 어떤 사람이 귀하냐?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대학을 나온 사람이 아니라 국민학교밖에 못 나온 사람이 귀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통일교회 교인들은 교회를 위하여 움직인다 하는 사상을 초월해야 합니다. 물론 이 뜻이 교회의 뜻이지만 이것을 만민의 뜻으로 세우기 위해서는 먼저 이 교회의 뜻을 민족의 뜻으로 세워야 합니다. 그래야 민족이 복귀될 것이 아닙니까? 민족의 뜻은 세계의 뜻으로 세워야 합니다. 그래야 세계가 복귀될 것이고, 세계의 뜻은 천주의 뜻으로 세워야 천주가 복귀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그 뜻을 하나님의 사랑의 뜻으로 받들어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는 때가 목적을 완성하는 때인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지금 우리의 때라는 것은 중간 시대에 머물러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결실의 때를 찾아 나왔습니다. 그 결실의 때가 언제일 것이냐? 결실은 과거에 되는 것도 아니요, 미래에 되는 것도 아니요, 오직 현재에서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현실이 바로 결실을 찾을 수 있는 때라는 것입니다.
이때는 역사시대에 결실의 때를 찾아 나왔던 수많은 사람들이 바라던 때입니다. 이때는 선지선열들이 바라던 때이며, 하나님이 지금까지 6천년 간의 섭리역사를 해 나오시면서 바라시던 때입니다. 또한 오늘이 이시대가 바라고 있는 그 중심의 때입니다.
이때가 누구의 때냐? 우리의 때입니다. 우리의 때인 동시에 우리의 때로 종결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때, 세계의 때, 천주의 때인 것입니다. 이때에 거두어질 수 있는 결실은 내 자체에만 제한된 그런 결실이 아니라 천주사적인 가치의 내용을 지닌 것입니다. 그러한 내용의 인연을 가지고 있는 자체 앞에 아무리 어려운 환경의 요인이 부딪쳐 온다 하더라도 그 자체는 부정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세계적인 환경 앞에 새로운 씨의 모체를 지녀 가지고 생명의 발원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을 아프리카의 어떤 오지에 갖다 놓아도 이것을 적용시킬수 있어야 됩니다. 홀로 어떤 산 속에 들어가 감독하는 사람이 없더라도, 그 속의 동물과 새와 친구하더라도 그들 앞에 이것을 적용시켜야 된다는 것입니다. 누가 보고 안 보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 열매의 본질적인 색깔이면 색깔, 권위면 권위를 모른다고 해도 아니 갈래야 아니 갈 수 없는 그 자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열매가 눈치를 보아 가면서 밤에는 새까맣게 되고 낮에는 새파랗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밤에는 빛이 없어서 새까맣게 보이지만 빛을 비추어 보면 언제나 새파란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때라고 하는 이 때는 역사시대의 종합적인 가치를 지닐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그 열매가 못 되었으면 그 열매를 보호할 수 있는 사람이라도 되어야 합니다. 내가 열매는 못 되더라도 그 열매를 보호하고 그 열매를 지켜볼 수 있는 사람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를 열매가 못 되었으면 열매와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관계를 맺을 것이냐? 주인의 명령에 의해 열매를 지켜보고 보호하고 그것을 감시감독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됩니다. 열매가 되지 못하면 그러한 사람이라도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열매를 지켜본 그 내용을 중심삼고라도 열매의 영광에 동참할 수 있는 간접적인 자격이라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못 하겠다는 사람은 열매가 어디에 있는지라도 알아 가지고 구경이라도 해야 됩니다. 그러면 구경 안 한 사람보다는 낫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떠한 사람이 되겠습니까? 열매가 되겠습니까, 지켜보는 사람이 되겠습니까, 구경하는 사람이 되겠습니까?
기성교회에서는 옛날부터 우리 통일교회를 문제시했지만 옛날에는 이까짓것 뭐냐 하는 의미에서 우리를 멸시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위압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자기 생활 전체를 동원하고 자기의 최대 형편을 동원해 가지고 대기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요전에 서남동 교수가 통일교회에는 혁명적인 내용이 없고 정치적인 내용이 없다고 하는 평을 했습니다. 이걸 생각해 볼 때, 우리는 주먹을 가지고 싸우는 것보다는 새것을 내놓자는 것입니다. 과거에 있던 것이 아니라 새것을 제시하자는 것입니다.
새것을 제시하기 때문에 노랗지 않다는 것입니다. 노란색이 아니고 빨간색입니다. 그 자체는 두고 보면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지금 말없이 혁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한계점에서 어떻게 해야 될 것이냐? 우리는 서로 손을 잡아야 되겠습니다. 여기에서 결실될 수 있는 열매가 나무의 동쪽가지에 열려 있다고 할 때에 이 열매가 완숙하는 데 있어서 '나는 동쪽 나무가지의 진액만 필요하다'고 해서는 그 나무를 대표할 수 있는 열매가 못 되는 것입니다. 이 동쪽가지의 열매가 나무를 대표하기 위해서는 서쪽 남쪽 북쪽가지는 물론이고 꼭대기에서부터 뿌리의 진액까지 전부다 빨아들여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여러분이 하나의 연결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로가 전부 결실의 생명력을 보강하는 하나의 원소요, 하나의 요소라는 것입니다. 절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절대시할 수 있는 인연을 존중시한다고 공인받는 입장에 서지 못하고는 완숙한 열매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여러분은 식구의 가치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습니까? 자기 생명 이상의 가치를 그들로부터 협조를 받아 가지고 완숙한 결실이 될 것이 틀림없기 때문에, 횡적인 면에서 전체가 하나되어야 합니다. 결합체가 되어 가지고 자신이 조금 두드러진 입장에 서서 그것을 중심삼고 발전하는 것입니다.
내일 모레부터는 부흥회를 할 것입니다. 협회장, 이번에 강의를 누가 하기로 했나?’「제가 하기로 했습니다」 강의도 해야 되겠지만 강의하는 환경도 만들어야지.
가을절기에는 외적으로 열매에 필요없는 것은 전부다 떨어집니다. 그렇다고 해서 잎들이 첫번째 떨어지는 잎하고 함께 한꺼번에 쫙 떨어진다면 그 나무의 열매는 익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잎이 하나 둘씩 떨어져야만 그 떨어진 잎으로 가던 진액이 열매로 모이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잎이 떨어지고 또 떨어지고 하면서 열매가 익어가는 것입니다.
우리 통일교회 자체도 그렇습니다. 통일교회를 보면 지금까지 가을절기를 당해 나왔습니다. 이제는 재차 봄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되겠습니다. 봄을 맞이하려면 1972년도까지의 고비를 넘겨야 됩니다. 열매가 생명있는 씨가 됐느냐 안 됐느냐 하는 것은 극악한 겨울절기를 지나야 알 수 있습니다. 이 생명이 그 악한 겨울과 부딪쳐 가지고 '내가 강하냐 네가 강하냐' 하는 싸움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싸움에서 밀려나면 죽는 것입니다. 지금 이와 같은 입장에서 싸우고 있습니다.
어제는 내가 수택리에 갔더니 어떤 사람이 와 가지고 '아이들을 전부다 집에 두고 동원을 하라는데 어떻게 해야 됩니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내가 아나? 어떻게 해야 되는지는 임자들이 알지' 하고 대답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되는지는 여러분들이 더 잘 안다는 것입니다. 그 길은 내가 갈길이 아닙니다. 내가 가야 할 길은 이미 다 지나갔습니다. 내가 가는 길에도 환란시대가 있었고, 풍파가 있었지만 모두 지나갔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여러분들이 씨가 되어 봄절기를 맞이하여 심어져야 됩니다. 열매가 되기 위해서는 그 환경을 전부 다 정리해야 될 것 아니예요? 앙상한 나무에 붙어 있는 하나의 열매는 시시한 것이 아닙니다. 시시한 것이 붙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붙어 있기 싫다면 열매가 되지 말아야 됩니다. 순수한 것을 심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가정이면 가정에서 제일 귀한 것을 뽑아다 심어야 됩니다. 가정에서 제일 귀한 것은 아버지도 아니고 아들딸도 아닙니다. 가정에서 제일 귀한 것은 어머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머니들을 동원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와 가지고 '아이구 우리 남편이 어떻고, 우리 아들딸이 어떻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은 반드시 꺼꾸러질 것입니다.
60년대는 개인적 결실을 중심삼고 해 나왔지만, 70년대는 가정적 결실을 해야 되겠습니다. 복귀섭리에 있어서 지금까지 하나님의 소원이 무엇이냐? 예수 시대에 개인적 결실은 볼 수 있었지만 가정적 결실은 못 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우주사적인 비운의 환경을 극복하고도 남을 수 있고 가정의 어려운 십자가도 넘을 수 있는 가정적 결실을 바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정의 여자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나 가정에만 머물 수 있는 여자 가지고는 안 됩니다. 나라를 위하여 가정에 머물 수 있는 여자가 되어야 합니다. 나라만이 아니라 세계를 위할 수 있고 하늘땅을 대표할 수 있는 여자, 이런 여자가 하나님의 딸이 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불가피한 사실입니다.
지금까지의 역사는 횡적인 기준이 아니었습니다. 이제는 가정을 중심삼고 나갈 때가 되었습니다. 여기에는 별의별 일이 다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여러분이 알고 이번 기간에 선생님이 축복해 준 가정으로서 하늘 앞으로 입적하느냐 못 하느냐 하는 문제가 벌어집니다. 입적할 때는 남편만 입적해서도 안 되고 아내만 입적해서도 안 됩니다. 남편과 아내가 같이 입적해야 됩니다. 통일교회는 아직까지 호적이 없습니다. 호적은 주권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호적을 갖게 하기 위해서 그 길을 향해서 무자비하게 때려 모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당한 지도입니다.
여러분 대(代)에 이것을 하지 않으면 수십 수천 대의 후손을 걸고 넘어가게 됩니다. 이렇게 긴 역사시대를 희생할 것이냐 아니면 짧은 시대를 희생할 것이냐? 짧은 시대를 희생시키는 것이 정당한 지도 방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제물은 현재를 희생시켜 나온 것입니다. 미래의 모든 장기적인 희생을 방비하기 위해 현재에 조건적인 제물을 세워 희생시킨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것을 타당한 도리로서 세워 놓은 것입니다.
우리의 때라는 것은 통일교회가 만든 때가 아닙니다. 역사가 찾아 나온 때, 하나님의 섭리가 세워질 수 있는 때, 대한민국이 지금까지 비운의 역사를 거치면서 참아 나오던 모든 역사를 수습할 수 있는 때, 절망적인 인류역사 가운데 새로운 소망의 기치를 들고 나설 수 있는 때, 과거의 모든 것의 열매가 될 수 있는 때, 시대의 중심이 될 수 있는 때, 미래의 출발의 기치를 들 수 있는 때, 이런 때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그것은 어느 자리에서 결정되어질 것이냐 할 때, 세계를 터전으로 어떤 나라를 중심삼고, 어떤 종족을 중심삼고, 가정 위에 기반을 닦은 데서 결정되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정을 빼놓은 복귀섭리는 있을 수 없습니다. 개인을 빼놓은 복귀섭리는 있을 수 있지만 가정을 빼놓은 복귀섭리는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개인을 빼놓은 복귀섭리가 어디 있겠느냐?' 하고 묻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만약 노아 가정에서 노아 할아버지가 120년 동안 하나님을 배신하지 않으면서 실수하지 않고 나오다가 중간에서 죽었다면 어떻게 되었겠느냐? 그때는 노아 가정을 중심삼고 수습하는 것입니다. 그 아들이 대를 이어 후계자가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귀섭리는 가정을 위주로 하는 것입니다. 가정 기반을 가져야만 후계자가 나올 수 있는 것이지 혼자는 안 됩니다. 혼자서는 계대를 못 해 나간다는 것입니다. 누가 예수님의 대를 이었습니까? 못 이었습니다.
복귀섭리의 뜻은 가정을 위주로 한 섭리의 터전으로서 가정 기반을 어느 시대나 닦아 나오는 것입니다. 개인이 중심이 아니라 가정이 중심이라는 것입니다. 개인은 가정을 찾아 종적인 탕감의 과정을 거쳐 나가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가정을 중심삼고 종적인 출발을 해야 됩니다. 이 종적인 출발을 파괴시킨 것이 여자인 해와였기 때문에 여자를 내세우는 것은 원리적으로 타당한 견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아들딸이 어머니를 찾아가고, 남편이 아내를 찾아가야 복귀되는 것입니다. 그 아내가 나라를 위해서 고생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남편도 나라를 사랑하고 아들딸과 나라를 사랑하는 사상을 탕감적인 과정에 세워야만 복귀된 가정으로서 새로이 수습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1970년대는 가정이 자리잡는 때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때가 가까이 왔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신구약 성경 66권의 주류적인 사상이 무엇이냐? 예수님과 성신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가정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가정을 횡적인 기반에서 상속받아 가지고 대행하여 성사시켜 완결시킬 수 있는 결실의 자리에 섰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체요, 성신의 부활체가 되어 실체로서 상봉할 수 있는 천적 가정의 기반의 터를 닦는 것입니다.
그러니 가정에 있어서 새로운 원리법도의 과정을 거쳐야 되는 그런 절대적인 과정이 70년도부터 72년도까지의 3년 기간입니다. 지금은 가정적 결실의 때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알겠어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때는 개인적 결실의 때가 아니라 가정적 결실의 때입니다. 가정이 과거 현재 미래의 중심입니다.
그러면 가정에서 사탄세계 앞에 분별할 수 있는 자체력, 자주력을 누가 세워야 되느냐? 여러분의 아내, 즉 부인들이 세워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인들을 때려 모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통일교회 문선생은 무자비하다는 것입니다.
아기를 낳을 어머니에게 '힘이 들면 조금 참아라' 이렇게 말한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어머니와 아기를 다 죽이는 것입니다. 힘이 들어 괴로운 데도 '더 힘을 줘라. 더 힘을 줘야 된다'고 하면서 눈을 부릅뜨고 고함을 질러야 합니다. 해산 때는 눈을 부릅뜨고 무자비하게 힘을 주라고 벼락같이 고함을 지르는 사람이 진짜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아야 하는데 그런다면 죽일 놈이지. 그렇기 때문에 지금 때는 선생님이 여러분에 대하여 최대로 무자비한 입장을 취할 때라는 것입니다.
나도 가정이 있고, 애기들이 있는데 이번에 부인들을 동원하면 우리 애기들은 집에 있고, 축복가정 애기들을 고아원에 보낼 패들도 있을 것이고, 엄마를 잃어버리고 찾는 애기도 있을 것이고, 별의별 요지경 판이다 벌어질 것입니다. 통일교회 문선생이 양심의 가책을 안 받겠나? 내가 그런 생각 안 했을 것 같아요?
원리적 견해로 본 선생님의 입장은 어떠냐? 나도 그런 일을 다 당해 봤습니다. 선생님은 명령을 받아 가지고 하기보다는 자진해서 하려고 했습니다. 아기를 임신할 때부터 미리 청산할 준비를 했었습니다. 그러나 한 고비를 넘어 평지에 와 가지고 다시 올라가는 사람은 미친 녀석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선생님이 그렇게 갔으니 여러분도 그렇게 가야 되는 것입니다.
이제 선생님은 자리를 잡고 여러분은 고생을 시키는 이런 역설적인 방법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을 오해하는 사람 있어요? 그것을 오해하는 사람이 못된 사람입니다. 그렇게 해야 여러분들이 고개를 넘고 넘어 가지고 선생님의 뒤를 따라오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여러분을 고생시키지만, 몇 해 이내에 고생한 사람들에게 자리를 잡아 주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가야 할 책임감을 느낍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예」
만일에 내가 이런 책임을 하지 않고 여러분에게 이런 것을 하라고 한다면 하늘 앞에 내가 얼굴을 들 수 없을 것입니다. 선생님은 그렇게 비양심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양심적인 사나이이기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대외적인 입장에 나서지 않는 것은 가정이 자리잡지 못한 입장에서는 통일교회를 대표할 수 있는 선생님의 위신이 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공석에 안 나타나는 것입니다.
수많은 군중을 대하여 말도 할 수 있고, 통일교회에 대해서 선전도 할 수 있는 좋은 찬스입니다. 이번 결혼식 때만 하더라도 내가 한 시간 반만 얘기를 한다면, 거기에 온 사람들을 얼마든지 납득을 시키고 통일교회에 대해 관심을 갖게 할 수 있는 그런 무엇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통일교회 교인들은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눈물 콧물을 흘리며 사정을 하고 다니는데, 선생님은 몰려든 수많은 군중을 왜 그냥 흘러보냈느냐? 그들에게 할 말이 없느냐? 물론 있지만 내가 할 일을 스스로 다 하지 못하고 그들에게 말할 수 없습니다. 자기 아들딸들의 터전을 이루어 놓지 못하고 큰소리를 하면 하늘 앞에 부끄러움밖에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선생님은 교회를 지어 여러분의 자리를 잡아 주고 나서 공석에 나설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때, 우리의 때라는 이때는 70년도에 그냥 흘러온 때가 아닙니다. 공식적인 과정으로 엮어 온 때입니다. 이것이 절벽과 같이 딱 끝날 때가 돌아가는 때라는 것입니다. 연장되는 때가 아니고 돌아가는 때라는 것입니다. 그때는 세계의 정세도 끝이라는 것입니다. 마지막 이별을 고하고 돌아가는 역사적인 처량한 고비, 즉 겨울 절기의 동지 안으로 이날을 맞아 영원히 이별하고 새로운 봄을 맞이하여 환희의 출발을 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경계선에 가 가지고 한발짝한발짝 힘있게 내디딜 수 있는 이런 의의 있는 아낙네들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러지 못하고 할 수 없이 질질 끌려가 가지고 콧물 눈물을 흘리는 비굴한 자세를 가져서는 안 되겠습니다. 나는 그런 것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 이런 때를 의의 있게 맞아야 됩니다. 여기에서 여러분이 어떠한 자세로 이것을 해결짓느냐 하는 문제가 선생님이 축복해 준 가정에 대한 흥미거리입니다. 가만히 두고 볼 것입니다.
그렇게 알고 이제부터 3년만 허리띠 졸라매고 달려가 보자구요. 그 다음은 어떻게 될 것이냐? 흥하든 망하든 통일교회가 드러나게 되고 수평선에서 들려 올라가든가 내려가든가 하게 되어 있지 그냥은 안 끝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역사적인 전환시대에 여러분이 가질 수 있는 한때, 그 길은 딴 길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남아질 수 있는 길입니다. 그렇지않아요?
저울추가 저울대를 따라 올라가든지 내려가든지 해야지, 그것을 벗어 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다른 데 가야 갈 길이 없습니다. 이번 기간에 가지 못하면 여러분의 생애를 두고 탄식하며 가야 되는 것입니다. 축에 못 들어간 것처럼 불쌍한 것이 없는 것입니다.
야목 수련회 때의 얘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저수지에 개연이 있었는데, 가시가 있어서 무섭게 생겼습니다. 그 시퍼런 가시에 독이 있어서 살짝만 찔려도 전부다 곪는 것입니다. 이런 곳에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전부다 들어가서 고기잡이를 하는데 선생님이 앞장서서 전부 끌고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아이쿠, 저기에 어떻게 들어가나. 감기 걸리면 어떻게 하나' 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래서 '너 좋을대로 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한 사람은 지금도 기억됩니다. 이름은 얘기하지 않겠습니다. 그 사람에게 야목에서의 일이 생각나느냐고 물으면, 다시 그런 때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미 때는 지나갔습니다. 다시 열번이 아니라 백 번을 해서 탕감을 한다 해도 진짜가 안 되는 것입니다. 진짜는 하나입니다. 둘이 아닙니다. 아무리 기세가 등등하던 사람도 야목 수련회 말만하면 양심은 있어서 부끄러워합니다. 양심은 참 좋고도 훌륭한 것입니다. 부끄러운 것을 알기는 알거든요. 그것이 부끄러운 구원입니다.
부모가 고생을 할 때에 살살 빠져나가던 사람이 효자의 가명을 받아 효자들을 표창하는 자리에 앉아 있으면, 그 이상 지옥이 어디 있겠습니까? 자기를 보는 사람마다 욕하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영계가 이렇데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영계는 누가 가라 마라 하지 않습니다. 앞으로 통일교회의 축복받은 가정들 가운데도 천태만상의 형태가 벌어질 것입니다. 그렇다고 누가 오라 마라 하지 않습니다. 더우기 아주머니들 중에는 '남들을 고생 좀 시켰으면 좋겠는데… 복귀섭리가 왜 여자를 중심삼고 못 살게 굴어' 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자를 중심삼고 탕감해야 됩니다.
통일교회 여자들을 보게 되면 옷을 잘 입기를 했나, 다 그을려 가지고 지쳐 있으면서 할 수 없이 따라오는 패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나가다가는 몇 사람이나 남겠습니까? 한 사람도 안 남게 되면 선생님은 어머니를 내세워서라도 재차 할 각오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때가 왔기 때문에 여러분 자체가 뜻을 중심삼고 안팎의 모든 내적인 요인을 수습해야 합니다. 강한 신념을 가지고 외적인 환경을 밀고 나갈 수 있고, 국가와 세계를 밀고 나갈 수 있는 자체력을 가지고 새로이 출발할 수 있는 결의를 해 가지고 이 때를 맞이하여 결실된 입장에 서게 되면 하늘 앞에 있어서 자랑할 수 있는 입장인 것을 알고 각자가 결의해 주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여자들이 그렇게 하는데 남자들은 구경만 하느냐? 남자들도 여자들에게 지치지 않게끔 노력해야 합니다. 여자들이 나가서 밤을 새워가면서 노력하는데도 불구하고 낮잠만 자는 남자가 있으면 벼락을 맞습니다. 남자라면 남자로서 여자보다 나라를 더 사랑해야 되고, 뜻을 더 사랑해야 되는 것입니다.
남자가 여자와 떨어져 있지만 하늘의 위신을 세워야 합니다. 주체는 남자이기 때문에 여자의 모든 터전을 전도시켜서 훈계하고 치리해야 할 책임을 지고 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남자들의 입장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70년대를 보람있는 때를 여러분의 빛날 수 있는 수확의 시기와 결실의 시기를 맞아 주기를 부탁하는 바입니다.
사랑하는 아버님, 이렇게 저렇게 몰리는 한스러운 나그네의 신세인 저희들을 아버지께서 오늘 이 자리까지 이끌어 주신 은사를 진실로 감사드리옵니다.
이 단에 서서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 앞에 '우리의 때'라는 말씀을 하였습니다. 이 말씀이 얼마나 엄청나고 얼마나 어려웠다는 사실을 알고 저희들은 진정으로 아버지 앞에 감사를 드려야 되겠습니다.
저희가 알지 못하는 자리에서 당신은 아셨사옵고, 저희가 수고하지 않는 자리에서 당신은 수고하셨사옵고, 저희가 슬프고 외롭고 고통을 받지 않을 때에 당신은 슬픔과 외로움과 고통을 당하셨사옵니다. 그러면서도 저희들의 죽음길을 지켜보시면서 부활의 한날을 약속해 나오신 아버지가 계시다는 그 사실을 전혀 모르는 불효자식들이 또다시 아버지 앞에 나왔사옵니다. 이리 보나 저리 생각하나 모든 것을 살피면 살필수록 여전히 죄인의 모습인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사옵고, 부족한 저희 자신들이 당신 앞에 면모를 갖출 수가 없음을 느끼는 것을 발견해야 되겠사옵니다.
아버지, 이 70년대에 저희들이 이루어야 할 사명이 얼마나 크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절감하게 해주시옵소서. 우리의 때라는 것은 오늘날 자기 일생을 통해서 찾아진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인간이 타락한 그날부터 지금까지 연면히 흘러나온 역사의 고빗길을 지켜보면서 친히 싸우셨고, 수많은 선조들이 아버지를 배반할 적마다 그들이 소원하던 것을 친히 인계받아 가지고 대역의 행사를 몇천만 번이라도 해 나오신 아버지의 노고의 터전으로 말미암아 찾아진 저희들임을 아옵니다. 이러한 아버지의 은덕에 저희들은 진심으로 감사드려야 되겠습니다.
이와 같이 빛날 수 있는 한때를 연결시키시어 당신의 뜻이 저희 가정에 연결될 수 있는 역사적인 놀라운 기원이 저희들 앞에 찾아온 것을 아옵니다. 그러나 나라와 사회가 혼란한 환경에 들어가기 때문에 이러한 자리에서 믿을 것은 나라도 아니요, 세계도 아닌 것을 알고 오직 아버님만을 믿고 아버지만을 알라고 저희들에게 이런 때를 맞이하게 해주신 것을 절감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은 나라를 사랑하기 전에 당신을 사랑해야 되겠사옵고, 세계에 대하여 욕망을 갖기 전에 아버지의 뜻에 대한 욕망을 가져야 되겠사옵니다. 그러한 아들딸이 되게 하기 위해서 모든 환경에 신의의 조건으로 파탄시켜 놓은 것은 아버지의 뜻이요, 아버지의 사랑인 것을 저희들이 알면 알수록 당신의 깊으신 뜻과 심정 앞에 사로잡힐 수 있는 포로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아들딸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당신의 사랑 앞에 포로가 되면 그 포로는 절대 망하지 않는 것을 저희들이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숱한 시련과 숱한 수난의 역경을 거치고 난 후에는 당신의 사랑을 전부 퍼붓기 위한 아버지의 뜻이 있는 것을 알고, 아버지의 사랑 가운데 포로가 된 것이 얼마나 복된 것인가를 느끼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통일교회를 믿고 나오는 저희 자신들도 그렇습니다. 자기의 모든 소신을 전부다 제거시켜 버리고 아버지의 일념을 따라서 살고, 아버지의 뜻을 위하여 살아가는 저희들은 뜻 앞에 사로잡힌 포로와 같사옵니다.
그렇지만 저희가 모든 환경을 잃어버리고 아버지께서도 모든 환경을 잃어버리더라도 그 가운데에서 맺어진 사랑의 인연이 훗날 자신의 영광의 기대가 되는 것이요, 삶의 보람의 터전이 된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 어려운 곡절이 부딪쳐 오고 어려운 환경이 다가오는 것은 영원히 저나라에 당신의 사랑의 인연을 두터이 드러내기 위한 것이요, 자랑의 조건을 세우기 위한 당신의 입체적인 보응을 저희들에게 허락하여 주신 단 한번밖에 없는 은사인 것을 느낄 줄 아는 아들딸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가중된 십자가의 도상에 있어서나, 핍박받는 환경에 있어서나, 죽음길을 더듬어 가는 자리에 있어서나 당신의 사랑의 인연이 그런 자리에 스며들 때는 당신이 나와 더불어 그랬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드러내기 위한, 내적인 소유를 저희에게 부여하기 위한 당신의 사랑의 유업을 상속하는 방법이 이와 같은 십자가의 길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저희들은 보람과 가치를 느끼고 당신의 은사에 스스로 감사드릴 수 있는 아들딸이 되지 않고는 이와 같은 시련의 과정을 극복해 낼 수 없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자기의 눈 앞에 눈물이 어릴 적마다 그 눈물이 자신을 위하는 눈물이 되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자기 생활이 궁핍하고 시련과 고통이 몰아치더라도 그것이 자기 자신으로 말미암아 시련을 당한다고 절대 생각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렇게 된 것은 아버지로 말미암은 것이요, 이렇게 사는 것은 아버지를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이처럼 아버지를 위주로 해서 살고, 아버지를 중심삼고 따라가는 사람은 결코 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저는 알았습니다.
오늘까지 엮어 온 통일교회의 비운의 역사는 그와 같은 과정을 통하여 보람있는 역사를 창건할 수 있는 동기가 되고 모체가 되었다는 사실을 느끼고 저희들의 슬펐던 과거가 영광의 한때로서 생애를 통하여 자랑의 조건으로 지닐 수 있는 가치인 것을 느낄 적마다 당신이 저에게 가져다 주신 무한한 은사에 대해 다시 한 번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통일교회에 있어서 슬픈 역사가 없었다면 통일교회가 세계적인 종교가 되었다고 해도 세계에 있어서 어떤 새로운 섭리적인 인연을 맺고 넘어갈 수 있는 시련과정을 남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아옵니다. 이렇게 세계 무대에 있어서 저희가 시련을 받는 것보다도 저희 민족 앞에, 혹은 가정에서 사랑하는 아내 앞에, 자식들 앞에, 남편들 앞에 이와 같은 시련을 당하는 이상의 시련이 없다는 것을 아버지는 아셨기 때문에, 저희들에게 집안의 원수가 나라와 세계의 원수보다도 더 무서운 원수라는 것을 다짐시켰던 아버지의 놀라운 사랑을 저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가정을 중심삼고 아버지를 사랑하고, 가정을 잃어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거룩한 입장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통일교회가 지금까지 역사과정을 거쳐오면서 이런 시련의 노정을 극복하게 하여 주신 은사를 감사드리면서 자기의 영원한 소유권을 아버지 앞에 바쳐드릴 수 있는 아들이 있고 딸이 있다 할진대는, 그는 하늘의 무한한 복을 받을 자인 것을 저희들이 알면서 나가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이제 저희들은 이 나라를 앞에 두고, 이 세계를 앞에 두고 행군해야 되겠습니다. 힘차게 행군해야 되겠습니다. 아버지의 권위를 세워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드러내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아들딸의 산 모습을 증거해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사오니, 부디 하늘의 권위와 위신을 상실하는 아들딸들이 되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께서 1970년도에는 1970년대의 전통적 사상, 전통적 기반을 닦아야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1970년도도 이제 기울어 가고 있습니다. 이제 2개월을 남기고 있사오니, 아버님, 이 기간에 저희들을 격려하여주시옵소서.
저희들이 당신 앞에 충효의 도리를 다짐하면서 1970년대에 세속적인 운세를 상속받을 수 있는 개체가 되겠다고 가는 곳곳마다 아버지 앞에 맹세하는 무리가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나라를 잃어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당신을 잃어버려서는 안 되겠습니다. 민족을 잃어버리고 자기 가정을 잃어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당신의 뜻과 당신의 상속을 잃어버려서는 안 되겠습니다. 이것만을 위해서 태어났고, 이것을 위하여 사는 보람을 느낄 줄 아는 당신의 딸들이 되고, 아들들이 되고, 그런 가정들이 되어야 할 때가 저희 앞에 다가오고 있사오니, 부디 부디 그럴 수 있는 때를 맞이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스승이 가는 길 앞에 있어서 여자로서 책임을 하지 못한 한이 남아 있는 것을 이번 기간에 탕감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 조건을 탕감함으로 말미암아 민족이 한의 조건에서 벗어나 승리의 터전을 이루게끔, 아버지, 복을 베풀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렇게 모든 일을 청산할 수밖에 없는 복귀의 한스러운 길을 알았습니다. 축복받은 가정들이 시련 도상에 있어서 안 될 것이었으나, 기성교회가 반대하고 나라가 반대하는 자리에 서 있기 때문에 다시 올라가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그 시련 고통을 거쳐야 할 입장에 있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원리가 추구하는 것이 그렇기 때문에 그 과정을 대하는 이때에 아들딸과 그 남편을 제물로 바칠 수 있는 하나의 제물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새로운 제물을 서로서로가 바치는 기간이 되게 허락하여주시옵소서.
사위기대가 제단이 되고 제물이 되어야 하는 것이 복귀섭리의 터전을 닦아온 통일교회의 역사인 것을 알고, 이제 스스로 하늘의 전통을 이어받을 수 있는 엄숙한 책임을 수행하는 이번 기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번 기간에 있어서 이와 같은 사명을, 이와 같은 뜻을 분부받지 못하는 가정이 있다면 이것이 얼마나 한스러운 일인가를 느낄 줄 아는 참다운 축복받은 가정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이제부터 이들이 나가기 위하여 준비하는 그 마음 앞에 여러 가지의 곡절이 없을 수 없다는 것을 제가 알고 있습니다. 눈물어린 장면에 부딪치게 될 때마다 죽음의 자리에 내모시는 아버지의 사정도 알고, 잃어버린 아들이 당신의 가정을 파탄시킨 외로움을 체험하면서 스스로 아버지의 친구가 되고, 아버지의 아들딸의 친구가 될 수 있는 좋은 기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사위기대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다시 찾기 위하여 참고 수고해 나오시는 아버지를 생각하게 될 때, 저희들이 다시 만날 수 있는 그날의 기쁨과 희열을 중심삼고, 나라를 중심삼고 만날 수 있는 그날을 위하여 노력하는 가치있는 때를 맞이한 것을 저희들은 천상을 대하여 감사하고 지상을 대하여 감사하면서, 오늘의 책임을 다할 수 있는 주부들이 되고, 남편들이 되고,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오늘은 11월 8일, 이달 들어 두 번째 맞는 안식일이옵니다. 남한각지에서 이날을 찬양하며 경배하는 수많은 아들딸들 위에 당신의 무한하신 사랑과 자비의 손길이 떠나지 마시옵소서. 이제 이들이 준비하는 모든 환경을 지키시어서 이번 기간에 당신의 위로가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고, 내연의 사정을 나눌 수 있는 거룩한 기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이제부터 엮어지는 모든 전체를 당신 앞에 맡기오니, 믿고 의지하고 바라보고나가는 이들의 외로운 걸음을 지키시옵고, 이들의 처량한 생활을 아버지 관리하시어서 당신과 더불어 살고, 당신과 더불어 원하고, 당신과 더불어 활동할 수 있는 것만을 남기고 돌아올 수 있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모든 전체를 당신이 맡으시옵소서. 1971년, 1972년도까지 모든 것을 맡아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국가를 세우시어서 당신의 뜻 앞에 승리의 깃발을 들고 이 민족이 하늘땅을 대신하여 만방에 자랑할 수 있는 민족의 권한을 갖출 때까지 저희들은 거름이 되어 십자가를 대신 지고 끌고 나가지 않으면 안 될 책임을 절감할 줄 아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남아진 그 때와 그 시대를 위하여 저희들이 바쳐질 것을 다짐하오니 모든 전체를 아버지 뜻 가운데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참부모의 성호 받들어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사악한 이 땅 위에 당신의 뜻을 펴시고 경륜하시면서 당신의 생활권을 찾아 나오시는 아버지의 수고 앞에 감사를 드립니다.
아버지께서 저희를 앞에서 이끄시고, 뒤에서, 좌우에서 저희를 위해 수고해 나오신다는 사실을 저희들이 하루의 생활 가운데에서 얼마나 체득하고 있사오며, 생애노정에서 그 고마우신 은사 앞에 얼마나 감사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볼 때, 저희들은 언제나 자기 자신을 생각하는 시간은 많았지만 아버지께서 이렇듯 수고하고 계신다는 사실은 생각하지 못하고 지냈사옵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참으시며 부활권으로 저희들을 이끄시기 위하여 수고해 나오는 아버지의 은사 앞에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아버님, 오늘 이 아침을 당신이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1970년도도 이제 40여일을 남기고 있사옵니다. 오늘은 이달 들어 세번째 맞는 안식일이오니, 이 아침에 당신의 거룩하신 은사를 저희 개개인의 마음과 환경에 내리시어서 역사적인 수고의 보람을 한 개체 개체로부터 거두시옵소서. 당신의 소원을 이룰 수 있는 개인, 그러한 환경, 그러한 교회, 그러한 나라를 아버지께서는 얼마나 고대해 나오셨사옵니까? 아버지와 인간이 자유롭게 합해질 수 있는 인연이 되어 있지 못한 것을 아버지께서 얼마나 원통해하셨는가를, 저희들이 다시 한 번 느낄 줄 아는 이 시간이 되어야 되겠사옵니다.
이와 같이 고마우신 아버지가 계신 것을 만우주를 대신하여 감사하옵니다. 진정으로 뼛골에 사무치는 감사의 심정을 가지고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나 자신이 되어 있는가를 생각할 때, 아버지께서 우리를 위하여 환경을 개척해 주시려고 갖은 치욕을 당하며 수고해 오신 것을 알지 못하고, 또한 그 수고에 대하여 진정으로 감사드리며 고맙게 생각하지 못한 저희 자신들인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아야 되겠사옵니다. 아버지, 이와 같이 빚을 지고 있는 수치스러운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하늘을 바로 볼 수 없사오며, 땅을 바라보게 될 때도 부끄러움을 느낄 줄 아는 죄인된 모습을 스스로 자각해야 되겠사옵니다. 이것이 타락한 후손으로서 지금까지 아버지를 수고시켜 나오는 저희들의 처량한 사정인 것을 깨닫는 이 시간이 되게 하여 주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들의 마음 깊은 데에서는 이 시간에도 생명의 호소가 당신과 더불어, 끊임없는 역사의 인연과 더불어 움직여 나오는 것을 저희들은 알아야 되겠사옵니다. 그러기에 양심은 언제나 하늘편에서 선을 위하여 가라고 이 시간에도 재촉하고 있사오며, 대립되는 악이 나타날 적마다 하늘이 거기에 대결하고 있다는 사실을 저희들 앞에 직고해 주고 있사옵니다. 그 양심의 소리와 양심의 움직이는 방향 앞에 두려운 줄 모르고 행동하였던 과거지사를 진정으로 아버지 앞에 뉘우치고 회개할 줄 아는 자신들이 되어야 되겠사옵니다.
아버지, 이 시간 간절히 간구하는 저희들의 마음속 깊은 가운데 임재하시옵소서. 당신이 분부하시는 것과 당신이 소원하시는 세계를 향하여 모든 것을 저버리고 따라갈 수 있는 강한 마음을 주시옵고, 자기 자체를 발견함과 동시에 새로운 세계를 향해 당신의 걸음을 본받아 따라갈 줄 아는 저희 자신들이 되어야 되겠사옵니다.
아버님께서는 당신이 마음으로 찾으시고 그리워하는 아들의 모습은 이러해야 되고 딸의 모습은 이러해야 된다는 표준을 지금까지 한번도 잊어 본 적 없이 수많은 인류의 뒤를 따라오셨사옵니다. 또한 당신을 따르는 수많은 무리들을 인도하여 그 소원의 기준을 향하여 이끌고 가시는 아버님이심을 생각할 때, 당신이 가시는 그 길은 저희들이 상상할 수 없는 고난의 길이요, 수욕의 길이요, 한스러운 복귀의 길인 것을 알게 되옵니다. 저희들이 자기 자신을 중심삼은 생각은 많이 하면서도 아버님을 중시삼고 생각하기를 주저했던 사실들을 발견할 적마다 이제 저희들은 개인뿐만이 아니라, 개인들이 합한 가정과 사회와 국가와 세계를 구하여야 할 아버지의 처량한 사정을 동정해 드려야겠다고 다짐하게 되옵니다.
이 세계를 두고 당신이 그리워하는 것은 당신이 소원하는 나라요, 당신이 소원하는 민족이요, 당신이 소원하는 가정이요, 당신이 소원하는 수많은 인류인 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그 인류를 몽땅 품고 한 나라의 백성처럼 사랑하고픈 당신의 마음이 있는 것을 느끼옵니다. 저희들은 개인으로 있으되 개인을 넘어서 아버지께서 찾고자 하시는 가정을 그리워해야 되겠고, 가정을 넘어 종족, 종족을 넘어 민족, 민족을 넘어 국가, 국가를 넘어 세계까지 그리워해야 되겠습니다. 언제나 그리움의 표준을 바라보고 그 개인으로부터 그 나라까지 추구하시는 당신의 거룩하신 모습과 그 마음을 본받을 줄 아는 자신들이 될 것을 이 시간 다시 한 번 다짐해야 되겠사옵니다.
생명이 없는 목석과 같이 되어서 이와 같은 자신들의 불쌍함을 한탄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저희의 마음에 감정이 있고 느낌이 있다면 아버지께서 이렇듯 놀라운 내용을 가지고 찾아오신 것을 직시하여 체휼할 줄 아는 아들딸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어려움을 당할 때도 그 가운데 나만이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같이 외로와하시는 것을 깨닫고, 슬픔을 당할 때도 나 혼자만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같이 슬퍼하심을 느끼며, 억울하고 분한 자리에 홀로 떨어질지라도 나만이 그런 자리에 떨어진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도 그런 자리에 계시다는 것을 느껴야 되겠습니다. 이것이 효의 길을 가는 자들이 느끼는 마음이요, 효자의 자리를 찾아가는 아들로서 가질 수 있는 마음인 것을 저희들이 알아야 되겠사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체휼신앙을 강조하였습니다. 아버지께서 살아 계시다는 것을 매일 매일 감정적 과정을 통하여 체득하는 생활이 필요하다는 것을 저희들이 이 시간 다시 한번 체휼하게 허락하여 주옵시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저희 자신을 아버지 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내 놓아야 하겠습니다. 내 마음의 사람은 이러하고, 내 몸의 사람은 이러하고, 내가 바라는 사람은 이러하다 할 때, 그 내 마음의 사람, 내 몸의 사람, 내가 바라는 사람이 삼위일체가 되어 아버지의 형상을 닮아야 되겠습니다. 아버지의 실체를 대신할 수 있는 대역자가 되어야 되겠사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형상과는 너무나 거리가 있는 자신임을 발견하게 될 때, 그 간격이 크면 클수록 그러한 자신에 대한 자탄의 마음이 커야 되겠고, 자신을 책하는 마음이 커야 되겠사옵니다.
저희들이 이러한 자신을 가지고 하늘에 반대되고, 선에 반대되는 생활을 얼마나 많이 했사옵니까? 뿐만 아니라 오늘 이후에도 그럴 수 있는 자신임을 생각하게 될 때, 아버지 앞에 배반자요, 아버지 앞에 슬픔을 더해드리는 무리인 것을 느끼옵니다. 아버지, 그러한 원수의 걸음을 따라가지 않기 위해 새로이 각오하고 결의하는 이 시간이 되어야만 되겠사옵니다.
아버지, 고요히 저희의 뭇심성을 두드리시옵고 마음의 문을 여시옵소서. 은은한 가운데서 권고하시고, 은은한 가운데서 공의와 공사를 의논하고자 하시는 아버지 앞에 엎드려, 아버지의 분부하심을 바라는 겸손한 아들딸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저희 자신의 부족함을 넘어서서 찾아오실 거룩한 시간을 바라야 되겠습니다. 죄악된 세상을 찾아오신 아버지이시기에 죄의 짐을 지지 않을 수 없고, 죄인된 개인을 인도하시는 아버지이시기에 죄에 대한 탕감을 홀로 치르지 않을 수 없는 아버지의 입장인 것을 알고, 불쌍한 아버지이심을 느껴야 되겠습니다. 그런 아버지 앞에 효도는 하지 못할지언정 십자가를 가중시켜 드리는 저희들이 되어서는 안 되겠사옵니다.
아버지께서 그러한 입장에 놓여 계심을 알고, 이 모든 어려움을 내가 책임지겠다고 자기 자신을 잊고 몸부림치며 나설 수 있는 아들딸이 이 땅위에 얼마나 있느냐 생각할 때, 처량한 땅이요, 불쌍한 땅임을 저희들이 다시 한 번 느껴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세상이기에 당신은 내정적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아들과 딸의 모습을 그려 나오셨사옵고, 나아가 그 아들과 딸이 하나되어 이루어야 할 새로운 가정을 추구해 나오셨사옵고, 그 가정을 중심삼고 새로운 나라를 창건하기 위하여 당신이 저희들을 찾아오신 사실을 느껴야만 되겠습니다. 그러기에 이 통일교회는 교단을 세우셨음을 저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버님이여! 이제 아버님이 전체의 중심이 되셔야만 되겠습니다. 저희들이 바라는 소원의 중심도, 저희들의 생활 환경의 중심도, 내 개인의 생활과 인격의 중심도 당신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이렇듯 수고하시는 아버지를 앞에 모시고 그 뒤를 따라갈 줄 아는 겸손한 어린양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어떠한 수고의 길을 가라고 하실지라도 오히려 은은한 가운데 보호하시는 당신의 은사를 더더욱 감사하며, 막힌 환경을 넘어가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라도 갈 수 있는 아들과 딸의 무리를 고대하고 계신 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그러한 아들과 딸이 없다는 사실을 알면 알수록 그것이 얼마나 복통스럽고 얼마나 통탄스러운 일인가를 느낄 줄 아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벌거숭이로서 아버지의 품에 다시 품길 수 있는 그 한날을 그리며, 당신의 후대하신 사랑의 마음으로부터 당신의 생명의 인연을 보급받으면서, 모든 것을 잊고 당신을 그리워하고 당신 앞에 감사할 수 있는 어린애와 같은 자신들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았사옵니다. 이 시간 여기에 당신이 현현하시어서 저희들을 당신이 고대하던 사랑하는 아들딸로서 품어 주시옵소서. 당신이 자비로운 얼굴과 후덕하신 사랑의 손길로 어루만지는 그 순간, 당신이 저희를 위하여 역사를 두고 한탄하고, 현재를 두고 소원하며, 미래를 두고 너는 이렇게 자라라고 복을 빌어주셨던 그 사랑 가운데 품길 수 있는 아들이 되고 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렇듯 아버지의 사랑의 품에 안기어서 아버지께서 저희를 두고는 떠날 수 없는 인연을 가진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는 그렇게 자라고, 그러한 마음을 엮어 인연을 맺고 살 줄 아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기 위하여 이 자리에 모였사옵니다. 저희들이 흘러가는 세월을 따라 움직이는 속된 세상 사람들과 같이 움직여서는 안 되겠사옵니다. 이 아침에 여기에 나온 자신들이 그리워하고 바라고 찾는 것이 무엇이옵니까? 세상에 나타나는 그 어떤 부도 아니요, 그 어떤 가치도 아니옵니다. 아버지의 사랑권내에 안기겠다는 그 마음만이 저희들 전체의 소망이오니, 아버지께서 찾아오시어서 저희들의 마음과 몸을 꼭 안아 주시옵고 이끌어 주시옵소서. 당신의 높고 귀하신 그 사랑의 심정을 체휼할 수 있는 거룩한 시간이 되게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하나님이라는 말이 저희와 먼 거리에 있는 말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아버님이라는 말이 저희와 인연맺지 못하고 흘러가는 말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뼛골에 사무치고, 내 소원의 일념과 일치된 자리에서 모실 수 있고, 먼 거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대화 가운데 있어서 살아 있는 주인으로 모실 수 있고, 생활하는 가운데 잊을 수 없는 흠모의 대상으로 모실 수 있는 아버지를 가진 자가 복된 자임을 저희들은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그럴 수 있는 길을 추구하는 자는 땅은 망하더라도 망하지 않고 남아질 것이며, 아버지는 이런 사람을 붙들고 당신의 사연을 말씀하실 것을 아오니, 그러한 아들과 딸이 이 땅위에 많게 하여 주시옵소서.
악한 세상이 되면 될수록, 하늘의 사정적인 모든 내용이 점점 식어가고 당신의 뜻이 점점 멀어져 가는 사실을 알면 알수록 저희는 모든 것을 잊고 당신의 뜻을 위한 하나의 마음에 사로잡힌 포로가 되어야겠사옵니다. 그러지 않고는 험악한 이 땅위에 아버지의 위신과 체면을 세울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느끼는 아들딸이 많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아침 남한 각지에 널려 있는 당신의 자녀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당신 앞에 충효의 도리를 다하겠다고 자신의 몸을 다 바치고도 부족함을 느낄 줄 아는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수고하시는 아버지의 상한 모습 앞에 십자가를 가중시켜 드리는 아들딸이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어떠한 일을 걸어 놓고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자 하는 그런 아들딸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아버지께서 내 아들딸이라고 하시며 격한 마음으로 달려와서 모든 사연을 잊어버리고 전체를 주고 싶고 화하고 싶어하실 수 있는 모습, 또한 그러한 부모의 마음 이상의 마음을 가지고 찾아오시는 아버지를 향하여 쌍수를 들고 환영하며 뛰어나갈 수 있는 아들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런 흠모의 마음에 불타는 아들딸의 모습, 그리움에 사무친 표정을 갖춘 아들딸의 모습이 되어야 복귀의 길을 갈 수 있다는 것을 아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길,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 이날까지 통일교단을 이끌어오시기 위하여 얼마나 수고하셨사옵니까? 저희들 스스로가 자랑할 무엇을 가지는 것보다도 깊은 자리에서 당신의 옷깃을 부여잡고 당신의 더 크고 놀라우신 사정을 들을 줄 아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어야 되겠사오니, 부디 겸손히 당신의 분부의 명령을 바랄 줄 아는 아들딸이 되게 하시옵소서. 찾아오신 아버지를 슬프게 돌려 보내는 불효막심한 자녀들이 되어서는 안 되겠사옵니다. 그와 같은 선조의 뒤를 잇는 후손이 되어서는 안 되겠기에 오늘 통일의 새로운 길을 찾아온 저희 자신들을, 아버지 긍휼히 보시옵소서.
아버지여! 저희들이 있는 정성을 다하여 이 자리에 엎드리게 될 때에 엎드린 이 자리가 내 생애에 잊을 수 없는 귀한 자리가 되게 하여 주시옵고, 아버지 앞에 간구하는 이 자리가 내 생애를 다해서 한번밖에 없는 귀한 자리가 되게 하시옵소서. 당신의 거룩한 명령을 고대하는 겸손한 아들딸, 아무것도 아버지 앞에 내세울 수 없는 오로지 당신만을 의지하는 아들딸의 모습으로서 당신 편으로 몽땅 돌아갈 수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이 시간 되어야 되겠사오니, 아버지, 찾아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오늘날 저희 자신들이 스스로의 모습만 가지고는 안 되는 것을 잘 알고 있사옵니다. 여기에 새로운 채찍을 가해서라도 당신의 마음과 당신의 뜻 앞에 일치될 수 있는 하나의 모습을 이루어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남한 각지에 널려 있는 통일의 자녀들을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으로 얽어매어 주시옵소서. 서로서로 아버지를 사랑하는 고귀한 가치를 추구함과 동시에 흠모의 심정으로서 이들을 인연맺게 하시어서 만나지 않으면 안되고 서로 협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느끼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만이 여기에 화하고 아버님만이 중심이 되시어서 봄 동산에 아버지를 모셔 놓고 환희에 넘칠 수 있는 아들딸의 모습을 갖추어, 사막과 같은 이 땅 위에 아버님의 위로의 대상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통일의 무리들을 그러한 무리로 만들기 위하여 찾아오신 아버지의 수고의 뜻이 있는 것을 알았사오니, 이 교단을 책임진 당신의 자녀들을 긍휼히 보시옵고 그 가야 할 길을 지켜 주시옵기를 재삼부탁드리옵니다.
이제 분부하시는 새로운 말씀을 받아 새로운 날, 새로운 자아를 갖추어서 새천지를 향한 새로운 사명을 책임지고 활발하게 나서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게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의 성호 받들어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우리들은 지금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선의 세계가 못 되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 개인을 두고 보더라도 개인이 평화의 모체가 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생활 가운데에서 잘 느끼고 있을 것입니다. 즉, 마음이 가고자 하는 방향과 몸이 가고자 하는 방향이 다른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 한 개체가 통일된 모습이 되지 못하고, 서로 분쟁하고 분립되어 대립된 선악의 터전이내 자신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자체가 생활해 나가는 환경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스스로 어떠한 안식의 자리라든가 행복의 요인을 추구할 수 있는 자체가 못 된다는 것입니다. 내 개인이 그러함으로 인하여 내가 살고 있는 사회가 그러하고, 나라가 그러하고, 세계가 그러한 것입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결과적인 이 세계는 선한 사람이 있는 동시에 반드시 그 반대되는 악한 사람이 있는 세계가 된 것을 우리가 잘 아는 바입니다.
사람은 본래 악을 피하고 선을 추구해 나가고자 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선한 세계를 세우고 악한 세계를 제거하기 위하여 언제나 달려가고 있지만, 그 반면 내 자신 속에서 악한 마음이 선한 마음을 향하여 강하게 작용하는 것을 우리가 자신의 마음을 통해서 잘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선한 마음을 강하게 들고 나오면 나올수록 거기에 비례해 가지고 악한 마음이 언제나 대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 선한 마음은 어떠한 목적을 향하여 나가더라도 그 목적하는 바를 확실히 알수 없고, 목적하는 그 세계를 향하여 가는 데 있어서도 선의 마음을 자극시킬 수 있는 과정이라든가 인연을 발견하기 어려운 반면에, 악한 것은 그 과정에 꽉 차 있고, 그 과정을 거쳐 끝까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바라볼 때, 참을 추구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고독한 생활, 슬픈 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에 몰리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선을 들고 나가는 사람의 길은 평탕한 길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남다른 선의 인격을 추구하는 개인이 환경을 가려가고자 할 때, 그 개인을 환영하는 사람은 이 땅에 많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선한 개인이 선의 가정을 그려 나가는 데 있어서도 환경이 환영해 주지 않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될 때, 선의 가정이 선의 종족을 그리면서 가는 길 앞에 있어서는 더더욱 어려운 악의 여건이 그 환경에 에워싸고 있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더 나아가 선의 종족이 선의 국가를 그리며 간다 할진대는 더욱 엄청난 악의 세력이 반기를 들고, 그 종족이 가는 길을 막으려 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또, 선의 나라가 있어서 선의 세계를 추구해 나간다 할진대는 이 세계가 선한 세계가 못 되기 때문에 악한 나라들이 그 선의 나라가 가는 길을 협조하는 것이 아니라 백방으로 반대하고 나설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에 왔다간 성인 현철들, 즉 선을 위하여 어떠한 주의 주장을 가지고 왔던 수많은 선지자들을 그 누구를 막론하고 그 시대와 환경 앞에 환영을 받았던 사람이 없습니다. 어떠한 개인이 그런 주장을 할 때에는 그 개인을 매장하기 위해서 수많은 개인들이 대립했던 역사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또 선을 추구하는 가정이 나왔을 때는 수많은 가정들이 여기에 대결해서 싸웠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어떤 선한 종족이 가려고 하는 길 앞에는 수많은 악한 종족들이 반기를 들고 나와 싸웠고, 필연적으로 선한 국가를 요구하는 인류 앞에 선의 나라가 있다 할진대 그 나라는 모든 나라로부터 환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반대를 받았던 것입니다. 선의 나라와 악의 나라가 대결하여 선이 남아지느냐, 악이 남아지느냐 하는 판가리 싸움을 거치지 않고는 선의 나라로 남아질 수 없기 때문에 이러한 싸움의 역사과정을 거쳐왔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생각해 볼 때, 하나님의 소원이 무엇이겠느냐? 그것은 나라를 초월한 하나의 세계를 이루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하나의 세계를 이 땅 위에 성사시켜야 할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기필코 그 하나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있는 수많은 민족들이 되어야 하고, 그 민족들을 구성할 수 있는 수많은 가정들이 되어야 하고, 그 가정을 구성할 수 있는 개인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바라는 하나의 세계를 완전히 상속받을 수 있는 개인이 있다 할진대, 그 개인이 가야 할 운명의 길이 얼마나 처량할 것이냐? 혹은, 그러한 가정이 있다면 그 가정이 가야 할 시련의 노정이 얼마나 클 것이냐? 그런 종족이 있다면, 그 종족이 가야 할 투쟁의 노정이 얼마나 클 것이냐? 그러한 나라가 가야 할 그 노정을 생각하게 될 때, 그 나라는 그 나라만의 개별적인 입장에서 모든 시련을 짊어지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상속받기 위해 세계적인 악과 대결해서 책임을 할 수 있는 국민성을 지닌 나라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생각해 볼 때, 하늘나라를 추구해 나가는 것이 종교의 길이요, 하나님의 뜻을 세우고자 하는 것이 종교인들의 생활 표준이라 할진대, 과연 악과 대결하여 그런 나라를 상속받을 수 있는 인격을 갖추기 위해 하루의 생활 가운데서 그러한 내적 내용을 가지고 준비하는 종교인들이 얼마나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개인을 요구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러한 개인이 없는 이 땅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우리들의 양심이 추구하는 모든 소원, 매일같이 자신의 몸과 투쟁하여 양심의 흔적을 남겨 나오는 그 소원 앞에 있어서 이 세계는 얼마나 적막강산이냐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들 개인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습니다. 개인의 어떠한 능력이나 수단 가지고는 가려갈 수 없기 때문에, 여기에 필요한 것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고 선의 중심이 될 수 있는 절대자인 것입니다. 우리들은 절대자를 후대의 한 나라를 주관하는 절대자로서 모시는 것보다 현실에 있어서 나 개인을 중심삼은 절대자로 모셔서 절대적 인연을 맺어 놓아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이 사악된 환경과 사악된 세계를 밀고 넘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문제를 두고 볼 때에, 개인으로서 관계를 맺어야 할 하나님과 나 사이에는 제3의 인연을 거치지 않고, 그 누구도 끊을 수 없는 강력하고 절대적인 인연을 갖추어야 합니다. 이것을 갖추지 않고는 아무리 공상적인 세계를 추구한다 할지라도 우리가 소원하는 그 세계를 맞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믿어라, 절대적으로 믿어라!' 하시는 것입니다. 어떠한 사연이나 조건을 제시하고 전후를 가려 가지고 믿으라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믿으라는 것입니다. 어떠한 사연을 통해서 가려 가지고 믿는다면 하나님이 소원하시는 그 나라의 뜻을 받드는 개체가 될 수 없습니다.환경에 좌우되어서 자기 스스로 믿고 자기 스스로 알았다고 하는 그런 내용은 절대적인 하나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있는 내용이 못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어디에도 미칠 수 없는 미급한 내용이기 때문에 오늘날 신앙계에서는 우리 인간 앞에 절대적인 신앙을 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절대적인 신앙이라는 입장에서 보게 되면 상대적인 요인은 허락될 수 없습니다. 상대라는 말은 절대기준이 확정된 후에 성립되는 말인 것입니다. 절대가 결정되지 않고는 상대라는 명사는 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 자체가 완전히 일치될 수 있고, 세계가 한꺼번에 휘몰아쳐 오더라도 밀고 나갈 수 있는 심혈의 기준을 갖지 않고서는 대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시는 하나님이기에 우리 인간들에게 절대적인 신앙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신앙이 확고하게 자리잡히게 되면 하나님은 무엇을 명령할 것이냐? 절대적인 행동을 요구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것이 없다고 하는 말도 이러한 행동을 기원으로 해서 나온 것입니다. 내가 하는 행동이 나 자신만의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된 행동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행동해야만 거기에서 새로운 창조의 역사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타락한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새로운 창조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옛날에 창조하신 것이지만 사탄의 침해를 받고 더럽힘을 받아 부활을 요구하는 물건이요, 환경입니다. 그러기에 재창조될 수 있는 내용과 그럴 수 있는 기원을 갖지 않고는 새로운 내 개체의 부활이나 가정의 부활을 이룰 수 없고, 천국에서 필요로 하는 종족 민족 국가의 부활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절대적인 신앙과 절대적인 행동을 통하여 새로운 것을 창조하겠다며 확실한 결과를 추구해 나갈 수 있는 자신이 되어야만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사탄권내에 그냥 그대로 있기 때문에 절대적인 선이 여기에 관계를 맺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선악이 대립되는 세계에서 개체라고 하는 것은 김씨면 김씨 가문의 아들로 태어나고, 딸로 태어난 그런 개체가 아닙니다. 선과 악이 갈라져 있는 여기에 우리 인간이 떨어진 것입니다. 여기에서 마음과 몸을 갈라 놓고 선과 악이 서로 끌어당기는 놀음을 하고 있습니다. 악은 악대로 끌어당기고 선은 선대로 끌어당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이 살고 있는 환경을 두고 보면, 우리가 악한 여건과 감정권내에 살고 있지 선한 여건과 감정권내에 살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대립된 환경 가운데 우리 인간이 처해 있는 것입니다. (이하 판서하시면서 설명하심) 여기에서 중심된 자리를 정해 놓고 경계선을 이렇게 넘으면 악한 것이 되는 것이요, 이렇게 넘으면 선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러한 입장에서 방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경계선이 여러분의 몸과 마음 가운데 그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 경계선이 개인에서부터 점점 넓어질수록 어떻게 되느냐? 그 경계선은 언제나 자기 개인을 중심삼고 가지고 가려 갑니다. 그러므로 나를 중심삼은 개인은 물론이지만 나를 중심삼은 가정도 이 싸움에 걸려 있습니다. 나를 중심삼은 종족도 이 싸움에 걸려 있고, 나를 중심삼은 민족도 이 싸움에 걸려 있으며, 나를 중심삼은 국가, 즉 대한민국이면 대한민국도 이 싸움권내에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세계 인류를 중심삼고 볼 때에 세계 인류도 이 싸움권내에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이 세계는 끝날이 되면 될수록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의 둘로 갈라지게 된다는 말이 성립됩니다. 따라서 한 시대의 사회 현상은 그 시대의 이념이나 철학을 중심삼아 가지고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영적 육적, 혹은 내적 외적인 이면에 있어서 반드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영적 육적, 혹은 내적 외적인 이면에 있어서 반드시 그 기원을 달리하고 있는 상반된 내용 가운데 엮어진 개인이요, 사회요, 세계가 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타락권내에서 선악의 환경을 가려가야 할 자신인 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자기 자신이 가야 할 운명길은 이 세계적인 두 갈래 길을 거쳐 그중 하나를 청산짓고 돌아서서 자신있게 세계를 정비해 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수 있는 하나의 개인, 하나의 가정, 하나의 종족,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가, 하나의 세계 형태가 나타나지 않고는 이 세상에 새로운 복지의 천국이 올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오늘날 유물과 유심의 두 철학사조가 이 세계를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 우리의 생활이 위협을 받고 있는 것도 그러한 철학사조와 이념 때문입니다. 세계도 마찬가지로 이 철학사조로 말미암아 위협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기원이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지를 알아야 되겠습니다.
'나'라는 한 사람은 선만을 붙들고 갈 수 없습니다. 이것이 세계적으로 해결되어 가지고 선이 차지하든가, 악이 차지하든가 하게 됩니다. 선이 차지할 때는 살지만, 악이 차지할 때는 망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 세계는 죽느냐, 사느냐 하는 흥망의 길을 달음질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개인은 역사적 소산물입니다. 가정도 역사적 소산물이요, 국가, 세계도 역사적 소산물입니다. 그런데 그 역사의 소산물 가운데 선의 소산물이 얼마나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내 개체를 두고 비중을 따져 볼 때 선의 소산물이 얼마나 되느냐? 여러분이 살고 있는 생활환경 가운데 선의 소산물이 몇 퍼센트나 되며, 여러분 개체의 인격 가운데 몇 퍼센트 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악에 접할 수 있는 요인을 많이 가지고 있느냐, 선에 접할 수 있는 요인을 많이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을 보게 될 때에, 전체가 악에 접할 수 있는 요인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악이 가는 길에 있어서는 교육이 필요없습니다. 교육을 받지 않고도 누구든지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악으로부터 시작된 역사이기 때문에 교육을 받지 않고도 누구든지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악의 길을 가게끔 교육할 필요성이 있어요? 스스로 그렇게 됐기 때문에 오늘날 인륜도덕을 중심삼고 양심의 표준 앞에 가려 가라고 교육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중심한 교육이냐? 선을 중심삼고, 양심을 중심삼고 교육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 교육의 표준에 입각한 사람이 얼마나 되느냐? 악한 것은 배우지 않고도 누구든지 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다 만점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환경 가운데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양심은 언제나 선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언제나 선한 사람이 되라고 쉬지 않고 나를 자극시키고, 나에게 권고하는데도 불구하고 선한 내가 되었느냐? 이런 문제를 생각해 볼 때에 오늘도 탄식이요, 내일도 탄식이요, 이해도 탄식이요, 청춘시대도 탄식이요, 중년시대도 탄식이요, 노년시대도 탄식이니, 탄식으로 일생을 마치는 것이 아니냐? 다시 말하면 악한 것으로 끝장을 보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런 결론을 지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악에서 났기 때문에 악에서 꿈틀거리다가 악으로 가는 것이 지금까지 이 세상에 왔다 간 수많은 인간들의 생애요, 지금 이 땅에 살고 있는 수많은 인류의 행로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종교를 두고 볼 때, 통일교회는 무엇을 하는 곳이냐? 악하게 되라고 가르쳐 주는 곳이냐? 그렇다면 통일교회는 필요가 없습니다. 악은 가르쳐 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악의 길을 가르쳐 주지 않아도 잘 가는 것입니다. 통일교회는 이 세계가 악한 세계이기 때문에 이 악한 세계 전체를 거부하고 선하라고 하는 것이요, 직행할 수 있는 선의 길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 선의 길을 가르쳐 주는 선의 주체자가 누구냐? 누가 가야 할 길이냐? 선의 절대자가 가야할 길이요, 선의 절대자가 주체 될 수 있는 길입니다. 이러한 선의 주체가 될 수 있는 절대적인 길을 그려 가기 위한 생활노정과 생애노정을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어떠한 생활이 되어야 하고, 어떠한 생애가 되어야 하느냐? 그 생활이 역사과정을 통해서 심판받을 수 있는 생활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과거의 성인 현철들은 그들이 소원하던 그 세계와 인격관을 이루지 못하고 갔습니다. 그러한 과거의 도주면 도주, 종교 지도자면 지도자들 앞에 지도받아야 할 사람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 그들이 세운 종파를 통해서 그런 세계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사실을 보게 될 때 그렇습니다. 그 이상의 내용을 제시할 수 있는 종교가 아니고는 미래의 세계에 바랄 수 있는 소원의 뜻을 상속받는 종교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문제되는 것이 무엇이냐? 개인에게서 악을 완전히 청산지어야 하는 것입니다. 청산짓고 나서도 악에 접붙일 수 있는 요인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악의 요인을 완전히 구별하여 정리한 입장에서 선의 요인, 즉 본래의 모습과 일체될 수 있는 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내가 되어야 선의 절대자와 하나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지옥과 같은 흉악한 사망의 세계에 살고 있더라도 그 양심이 절대적인 선의 주체와 하나되고, 그 선의 요인을 통하여 환경을 포괄할 수 있는 주체성을 가진 선한 사람이라 할진대, 그 개인으로부터 세상은 구별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을 긍정하고 나오는 종교는 이 악한 세상에 절대적인 종교가 되지 못한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가정이나 학교에서 가르쳐주는 것도 물론 잘 들어야 되겠지만, 그 환경 자체가 어떤 결정적인 판결을 내려서 절대적 기원에서 가르쳐 줄 수 있는 가정이 아니요, 학교가 아닌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자체도 악한 세상에 물들어 있는 것입니다. 경계선을 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삼팔선 이북에 있는 입장이지, 삼팔선 이남과는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나라가 가까와지고 그 뜻을 이루어 나간다 해도 삼팔선 이북을 넘었느냐, 넘지 못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흔히 나는 양심의 가책을 안 받는다고 말합니다. 양심적으로 살면 되지 않느냐고 하지만, 그 양심의 한계가 어디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양심적으로 살아야 할 개인권이 있고, 가정권이 있고, 종족권이 있고, 더 나아가서는 민족권, 국가권, 세계권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세계를 그리워하고, 하늘땅을 하나 만들기 위해 그리워하는 양심권을 중심삼고 살았다고 할 때는 당당한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이 도의적인 면에서 치우치지 않고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 가운데 빠지지 않는 양심을 가지고 살아왔다고 해도 그런 양심 가지고 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어떠한 신념을 가지고 산다 할 때, 그 신념이 세계를 넘어 유일의 세계를 보장할 수 있는 신념이냐, 절대자가 공인할 수 있는 신념이냐, 그런 생활관, 그런 국가관, 그런 세계관을 보장할 수 있는 신념이냐 묻게 될 때, 그렇다고 할수 있다면 괜찮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그 양심 가지고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는 부정을 들고 나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부정해라! 네 자신을 부정해라, 네 가정을 부정해라, 네가 살고 있는 사회를 부정하고 국가를 부정해라, 더 나아가서는 세계까지 부정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모든 것을 틀림없이 부정했다고 할 수 있는 결정적인 이념을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그 이념을 위해서는 천번 만번 죽더라도 응당히 갈 수 있는 사상적인 배경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의 때는 어떤 때냐, 개인을 복귀하는 때입니다. 사람은 직고하게 되어 있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잠을 잘 때 꿈 가운데서라도 말을 하는 것입니다. 순전한 양심의 반응은 말로써 드러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말을 할 때도 그렇잖아요? 무엇을 느꼈는데 그 느낀 것이 옳다 할 때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 양심의 밑바닥에 가서 부딪히게 될 때는 직고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익이니 좌익이니 하는 말을 쓰는데, 그런 말을 누가 붙였어요? 그것은 직고한 말입니다. 왼편이니 하는 것은 그릇되었다는 말입니다. 양심은 인륜을 통할 수 있는 바탕과 천륜을 통할 수 있는 바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바탕은 진지한 자리에 가게 되면 자체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의의 법도, 즉 하나의 완성된 천륜이 나오게 되면 그 천륜 앞에 모든 것은 나는 이러한 것이라며 자신을 100퍼센트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선한 것이면 선한 것으로 100퍼센트 드러내는 것입니다.
여러분, 좌익이니 하는 것을 보십시오. 전부다 기만이요, 위장전술을 쓰고 있습니다. 그들의 전략전술에서 주요한 표제가 무엇이냐 하면 위장전술입니다. 사실을 그렇지 않은데 그런 것처럼 위장한다는 것입니다. 악한 바탕을 분석해 보면 악은 사실은 그렇지 않은데 사실처럼 나타내는 것입니다.
사람은 솔직해야 합니다. 솔직한 사람은 양심적인 사람입니다. 솔직하다는 말은 동기적인 말이요, 양심적이라는 것은 결과를 보고 판정을 내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솔직하다는 것은 양심적이라는 것입니다. 솔직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자기를 은폐하고 이중인격을 구사하는 사람입니까? 자기 자신을 감추고 대해 주는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런 사람을 본심으로 좋아할 수 있어요?
상하관계를 두고 볼 때에, 올라가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산도 올라가는 것은 어렵지요? 그러나 내려가는 것은 쉽습니다. 마찬가지로 영점 맞는 것은 쉽습니다. 누구나 영점은 맞을 수 있습니다. 영점 맞기로 한다면 전부 다 1등을 차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백점을 기준으로 하면 전부 1등할 수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악한 사람은 전부 지옥 밑창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들이 생각해야 할 아주 심각한 문제입니다.
여러분이 기도할 때도 그렇습니다. 기도를 할 때 어느 경지에서 기도하느냐? 지금 여러분이 살고 있는 세상은 여기입니다. (판서하심) 그러면 어디에서 기도하느냐? (칠판을 가르키시며) 여기쯤에서 기도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여기쯤 들어와서 기도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요, 이곳을 지나 가지고 몸과 마음을 갖추어서 기도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여기는 시간권을 초월한 곳이요, 여기는 시간권에 막혀 있는 곳입니다. 몸과 마음이 하나되어 시간권을 초월한 경지에 들어가게 되면, 나자 하나님이요 하나님이자 나라는 입장이 되는 것입니다. 앞뒷집과 같은 것입니다. 거리가 멀지 않은 위아래 관계에 있다는 것입니다. 위아래의 경계선을 넘어 내적으로 잡으면 잡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머무를 수 있는 곳이 어디냐? 그곳은 세상의 어떤 공중의 누각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그러면 사람의 어디에 머물 것이냐? 그 머무는 경계선이 사람의 몸뚱이는 될 수 없습니다. 바로 사람의 마음인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 깊은 가운데 고리가 되어 가지고 상하 관계와 전후 좌우 관계가 인연 맺어져야 하는데, 그것이 안 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맺어지기 위해서 상반된 대립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냥 그대로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고 하는 사람이 선한 사람입니까? 그런 사람은 결국 이래도 죽고 저래도 좋기 마련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한국동란 때에도, 빨갱이면 어떻고 자유주의면 어떠냐 하면서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던 사람들은 오다 가다 다 죽었습니다. 그런 사람은 남아질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사탄도 미워하고, 하나님도 미워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그 사람이 잘못할 때에는 사탄이 그 가운데 들어가서 악하게 만드는 놀음을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 자체가 선의 바탕은 없어지고 악의 집이 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좌우로 갈라진 사람은 어느 한때 판가름을 짓기 전에는 악의 도구가 될 수 없습니다. 좌편으로 경계선을 넘어야만 악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왔다갔다하는 회색분자는 언제나 악의 도구라는 것입니다. 그 생활 전체가 악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끝날에는 둘중의 하나를 판가리해야 됩니다. 심판이 뭐냐? 악하냐 선하냐를 판가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싸우고 있습니다. 자기의 일생을 중심삼고 포를 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을 대하기 전에 여러분 자신의 몸과 마음이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평화롭게 하느냐? 이 싸움에서 몸이 이기느냐, 마음이 이기느냐? 여러분은 몸이 이겨요, 마음이 이겨요? '나는 틀림없이 마음이 이깁니다'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마음이 이기는 사람은 선한 편이요, 몸이 이기는 사람은 악한 편입니다.
그러면 몸과 마음이 싸우고 있는 전장에서 마음이 몸을 쓰러뜨리고 이길 수 있는 비법이 무엇이냐? 또는 몸이 마음을 때려잡는 비결이 무엇이냐? 그 전법이 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 무기와 모든 장비가 어떠한 방향을 거쳐서 동원되느냐 하는 문제가 선하게 되느냐, 악하게 되느냐를 결정짓는 것입니다. 그럼 이 대립을 해결할 수 있는 요인이 무엇이냐? 이것이 중요합니다. 악한 세계에 살고 있는 인간 앞에 선이 성립될 수 있는 필요 요건이 무엇이냐, 악이 성립될 수 있는 필요 요건이 무엇이냐? 이것을 알아 가지고 취하거나 제거하자는 것입니다. 이 필요 요건은 알고 보면 간단합니다.
타락한 인간으로 태어난 나라는 개체는 악한 세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나 자신은 한 개인으로 태어났지만 세계의 대표자가 되고 싶어합니다. 여자로 태어났으면 세계적인 여성 대표자가 되고자 합니다. 여러분, 그래요, 안 그래요? 여자들, 그래요, 안 그래요? 틀림없이 그렇지요? 남자들은 십대만 되어도 세계 제일의 대표자가 되려고 합니다. 겉모습은 초라해도 내용으로는 세계의 대표자가 되려고 합니다. 여러분, 그렇지요? 세계적인 대표자가 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계는 어디에서 나오느냐? 세계에서 내가 나온 것이 아니라 나에게서 세계가 나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세계로 말미암아 개인들이 태어난 것이 아니라, 개인들로 말미암아 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여러분, 어떻습니까? 세계로 말미암아 내가 태어난 거예요, 나로 말미암아 세계가 되어진 거예요? 어떤 것입니까? 나로부터 세계가 태어났지요? 나는 인간 조상 아담, 즉 종지조상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하나에서부터, 한 사람으로부터 세계가 형성되었지, 많은 사람이 줄어들어 가지고 나 자체가 된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로부터 세계가 시작된 것이지, 세계로부터 내가 시작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좋은 이상세계도 결국은 나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악한 세상도 누구로부터? 나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살고 있는 이 세계는 이미 형성되어 있는 세계입니다. 그렇지만 그 동기를 따져 보면 결국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그 한 사람의 종지조상이 누구냐?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은 그가 곧 아담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담은 어떠한 사람이냐? 여러분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처럼 몸과 마음이 싸울 수밖에 없었던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 왜 싸우게 되었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렇게 싸울 수밖에 없게 된 그의 계대를 받아 수천대에 이른 모습이 오늘의 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들이 횡적인 형제의 형태로 연결되다 보니 세계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 세계를 이기기 전에 누구를 이겨야 되느냐? 다시 말하면, 세계를 정복하기 전에 누구를 정복해야 되느냐? 나를 정복해야 됩니다. 나를 정복하는 데는 어떻게 정복하느냐? 선과 악이 대립된 나를 어떻게 정복하느냐? 이것은 간단합니다. 나 자신이 선한 편으로 가면 됩니다. 나 자신이 선한 권내에 있으면 정복되는 것입니다. 나는 이 세계 앞에 정복되어 있는 것입니다.(판서하심) 여러분, 그렇지요? 이 세계권내에 휘몰아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세계를 정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상반된 입장에 서야 됩니다. 대립적인 입장에 서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탈출해야 됩니다. 이 탈출시키는 놀음을 지금까지의 역사과정에서 해 나온 것입니다. 그러려면 탈출로가 있어야 됩니다. 그 탈출로가 바로 종교인 것입니다. 역사에 그런 사명을 담당한 종교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세계가 악한 세계라면 반드시 그런 놀음을 해서 이겨야 됩니다. 세계적인 기반을 갖고 역사성을 띠고 내 개인의 생명을 초월하고 내가 태어난 그 부모의 기원을 초월할 수 있는 탈출행로가 있어야 됩니다. 알고 보니 그것이 역사적인 종교더라는 것입니다.
내가 기원이 아닙니다. 기원도 나를 초월한 것이어야 되고 목적도 나를 초월한 것이어야 됩니다. 그러지 못하고서 이 세계와 대립되는 자리에 들어갈 수 있어요? 나의 생명은 부모나 사회나 민족, 국가를 통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초월한 하나의 기원, 즉 절대자인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해야 합니다.동기를 절대적인 입장에 있는 초월적인 동기와 결부시켜야 합니다. 시대적인 인연이라든가, 환경적인 인연, 혹은 사회적인 여건에 결부시켜서는 안 됩니다. 초월적인 원인에 결부시키고, 초월적인 목적에 결부시켜야만이 비약하고 초월하고 탈출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 생명을 초월적인 동기에 결부시켜야 합니다. 내 생명의 출발은 나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절대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출발되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초월적인 동기에 결부시키게 되면 죽더라도 초월적인 과정에서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죽게 되는 것입니다. 환경에 좌우되는 뜻이 아닙니다. 인연으로 말미암은 세계를 위한 뜻도 아닙니다. 초월적인 동기와 초월적인 인연을 통해서 초월적인 결론을 향하여 나아가는 과정에 있는 것이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초월적인 동기는 하나님이요, 초월적인 과정은 뜻이요, 초월적인 목적은 세계를 위해서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동기를 가지고 모든 것을 초월해야 됩니다. 그러한 동기의 내용으로써 새로운 것을 모색하고 그 과정의 인연을 새로이 엮어야 합니다. 참된 동기를 가지고 가정을 통해서, 종족을 통해서, 민족을 통해서 역사적인 기반을 닦고 그 과정을 엮어 가지고 하나의 세계를 추구해 나가는 움직임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움직임이 이 타락한 세상에 없다면 하나님이 없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종교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의 역사에서 수많은 국가가 멸망하였고, 정권이 교체되어 나왔지만, 종교는 수천년 역사의 전통을 중심삼고 절대적인 신의 경륜을 따라서 지금까지 발전해 나왔습니다. 요즈음 보면 스튜던트 파워(student power)라든지, 릴리져스 파워(religious power)라고 하는 것들이 세계를 움직이고 있습니다. 아무리 위대한 정치가라도 이것을 요리하지 못하면 하나의 세계를 완성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걸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 이러한 초월적인 동기를 추구할 수 있는 종교는 어떠한 종교이며, 그러한 초월적인 신은 어떠한 신이냐? 나와 분립된 막연한 신이 아니라 내 생활을 주도하는 신이어야 됩니다. 또한 그 동기는 목적 성사에 있어서 필수적인 것이요, 그 과정에도 필요한 자극적인 요인이라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떠나 가지고는 목적을 성사할 수 없는 것이 자연적인 이치가 아닙니까? 신과 생명의 기원에 결탁된 그 인연을 중심삼아 가지고 그 과정의 어디에 갖다 맞추더라도 적용될 수 있는 사회가 되면 그것이 이상 천국입니다. 여기에 상충이 많으면 많을수록 악한 세계입니다. 그러나 과정에 있어서는 상충이 없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된 종교는 악한 세상에서 피를 흘려 나오는 것입니다. 피를 흘린다고 해서 도망하지 않습니다. 생명이 끊어지더라도 가는 것입니다. 초월적인 생명은 초월적인 동기요, 초월적인 동기는 초월적인 과정을 통해서 초월적인 목적을 이루어 나가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세계를 이루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생명을 가져야 합니다. 절대적인 생명은 절대적인 세계와 연결되어야 하는데, 절대적인 생명이 절대적인 세계와 연결되는 과정에는 절대적으로 고난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반대되는 요인 앞에 절대 굴복해서는 안 됩니다. 목이 잘리더라도 굴복하지 않아야 합니다. 종교의 위대함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탈출운동을 해야 됩니다. 무슨 뭐 칸트 철학이니, 헤겔 철학을 따르면 되지, 할지 모르지만 그런 것은 아무리 노력해도 절대와 관계 없습니다. 중간 입장에서 하나님이 있느냐, 없느냐? 이것이 아직까지 실제적인 문제가 되어 있습니다. 유심사관이냐, 유물사관이냐, 이것을 아직까지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을 해결지어야 됩니다. 공산세계도 밀어내고, 민주세계도 밀어내야 됩니다. 전부 다 여기에 굴복해서 돌아 들어와 가지고 자리잡아야 되는 것입니다. (판서하심)
그렇기 때문에 참된 성인은 세계적인 분이어야 됩니다. 최후에 남은 싸움이 뭐냐? 참을 추구하는 종교가 궁극적으로 그 세계적인 싸움을 담당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종교통일을 이루어야 되기 때문에 여기에 통일교회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종교를 통일해야 합니다. 종교는 민족을 초월합니다. 그래서 통일교회는 합동결혼식을 하는 것입니다. '한군데 모여 결혼식을 하자' 하면 '예 옳습니다'하고, 같이 살자고 할 때는 전부다 자기 보따리 싸 가지고 와서 사는 것입니다. 자기의 고질된 환경에 지배를 받는 피동적인 종교가 되어 가지고는 앞으로 세계를 요리할 수 없습니다. 고질된 환경을 초월할 수 있는 주체적인 능동성을 지닌 종교 운동이 벌어져야 합니다. 국경을 넘어 세계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그런 종교로 말미암아 악한 사람들이 선한 사람이 되고, 선한 사람들이 출현하면 그들로 말미암아 선한 세계를 형성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해결점은 세계가 아닙니다. 세계는 결과입니다. 동기가 나쁘면 결과를 가지고 아무리 노력해 봐야 안 되는 것입니다. 예를들어 보면 병이 나는 동기가 간단합니다. 한 세포에서부터 부작용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결과적으로 4백조개의 세포가 한꺼번에 쓰러져서 죽음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한 세포에서 동기가 된 것이 전체를 잡아 먹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 사람들이 이 세포와 마찬가지입니다. 한 사람의 실수로 말미암아 전부가 망해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동기를 바로잡아야 됩니다. 이것을 수습하자는 것이 초월적인 신의 경륜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흥하는 패, 망하는 패, 선한 패, 악한 패가 어떻게 결정되느냐? 그것이 실감이 안 나고 막연하다는 것입니다. 악은 대개 어디에 소속하느냐? 사적인 것에 소속합니다. 여러분, 사적인 것 알지요? 악의 근거지는 사적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선의 근거지는 어디냐? 간단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에 나온 사람들, 통일교회를 믿는 사람들은 사적인 인격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종교를 찾아 나가는 사람들은 사적인 목적을 위해 나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러면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은 어떻게 다르냐? 사적인 것은 뭐고, 공적인 것은 무엇이냐? 사적이라는 것은 나를 중심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세계가 나를 위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시작입니다. 나를 중심삼고 세계가 있다면 나 이상 발전할 수 있어요, 없어요? 여러분이 절대적인 주체라면 절대적인 세계를 형성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절대적인 사람이야? 되먹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소위 안다는 사람들이 '하나님이 어디 있어? 세계가 어디 있어? 나라가 어디 있어?'합니다.
미국에 히피족이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사회, 국가, 세계가 어디 있으며 부모가 어디 있겠어요? 자기가 필요로 해서 절대적 관계를 맺고 있다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개인주의 사상을 가진 사람들에게 있어서 최후의 선물은 그것밖에 있을 수 없습니다. 개인이 절대적 한계선을 영원히 주관할 수 있고, 그 자리를 확보할 수 있느냐? 그들은 휴머니즘의 절대적인 극치를 모두 포기해 버립니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선물입니다. 개인주의 사상이 좋다고 하는 사람들이 세계를 향해서 '나를 위해라' 한다고 해서 위해요? '나를 위주한 세계가 되어라'한다고 해서 돼요? 그렇게 안 되기 때문에 그런 사람은 고립됩니다. 동네 개도 안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개인주의자들에 대한 선물이 그것입니다. 결국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모두가 나를 위해라,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자유지…' 세상에 그럴 수 있어요? 자유의 한계가 어디냐? 진정한 자유가 무엇이냐? 진정한 자유는 뿌리를 안고 나무 전체를 안는 것입니다. 진정한 자유는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잎사귀가 그것을 다 집어치우고 나 하나만 제일이다고 하는 것이 자유입니까? 그것은 방종 중에도 파탄적인 방종입니다. 그런 녀석들은 다 '부모가 어디 있고, 나라가 어디 있어? 나라가 있으면 뭘해, 나하고 무슨 관계야! 그 나라가 나에게 무슨 필요가 있느냐' 이런다는 것입니다. 자기만을 위한 가정이 있을 수 있겠어요? 자기만을 위한 상대가 있을 수 있겠어요? 결국은 그런 사람은 고립될 수밖에 없습니다. 별수없다는 것입니다. 사적인 삶의 결과가 가져다 주는 최고의 선물은 그렇게 귀결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남의 등이라도 쳐 가지고 내 멋대로 살자 하는 사람을 누가 좋아합니까? 어떤 사람이 친구에게 여기 가서도 이용당하고, 저기 가서도 이용당하고, 세 번만 이용당하면 그 친구를 가만두지 않을 것입니다. 누가 이용당하려고 합니까? 친구에게도 이용당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세계가 나에게 이용당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어요? 어림도 없습니다. 이렇게 나를 중심삼고 세계를 내 맘대로 하려는 것이 사적인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세계로부터 고립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독재자는 나중에 가서는 고립될 뿐만 아니라 망하게 됩니다. 다 찢어먹고 독식하는 것이 독재자입니다. 독재자는 모든 것을 제 마음대로 하며 다른 사람들은 생애의 가치라든가 소망의 가치가 없다고 여깁니다. 자기 마음대로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래 갑니까?
사적인 존재한테는 세계를 맡기더라도 그 세계를 지탱시키지 못합니다. 개인도 지탱하지 못하거니와 가정도 지탱하지 못하고, 사회도 지탱하지 못하고, 국가도 지탱하지 못하고, 세계도 지탱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엄마, 아빠 앞에서, '엄마와 아빠는 나를 위해 있지' 하고 한 마디 해보라는 거야. 그럴 수 있어요? 형제간에도 '형님은 나를 위해 태어났으니 내가 하자는 대로 해요, 동생도 나를 위해 태어나지 않았어? 내가 하자는 대로 해' 그래 보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지탱해 나가나… 자기만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움직이면 자멸입니다. 망하지 말라고 해 도망합니다.
우리 아가씨들 그래요, 안 그래요? 여러분들 중에 개인주의 사상이 농후한 사람을 친구로 삼겠다는 사람 있어요? 자기만을 위하려는 사람이 좋은 친구예요, 나쁜 친구예요? 젊은 사람들, 대답해 보라구요. 「나쁜 친구입니다」 왜 나쁩니까? 갈라 놓기 때문입니다. 개인과 가정과 종족으로부터 모두 갈라 놓습니다. 칸막이로 막듯이 막아 놓는다는 것입니다. 왜 나쁜지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악은 무엇이냐? 악은 사적인 것과 통합니다. 본래부터 악을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 씨알맹이도 없습니다. 여러분도 선한 친구를 원하지요? 나쁜 친구는 싫지요? 그러면 선한 친구는 어떤 친구예요? '밥도 먹지 말고 학교도 가지 말고 나와!' 그런 친구가 좋은 친구예요? 친구가 밥을 먹을 시간에 밥을 먹지 않았으면 밥을 먹이고, 학교에 안 가겠다고 하면 학교에 가게 하는 이런 친구가 좋은 친구입니다. 나쁜 친구는 이와 반대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선악이 갈라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의 생활감정에다 접붙여 가지고 표시를 하자면, 사적인 것은 악에 속하는 것이요, 공적인 것은 선에 속합니다.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적인 역사는 사탄의 역사요, 망하는 역사입니다. 공적인 역사는 하나님의 역사요, 선의 역사입니다. 여러분이 교육을 할 때도 그런 관념으로 교육을 해야 합니다. 눈으로 볼 때도 사적으로 보느냐, 공적으로 보느냐? 코로 냄새를 맡게 될 때에도 사적으로 맡느냐, 공적으로 맡느냐? 귀로 듣게 될 때에도 사적으로 듣느냐, 공적으로 듣느냐? 일할 때에도 사적으로 하느냐, 공적으로 하느냐? 걸을 때에도 사적으로 걷느냐, 공적으로 걷느냐? 이 기준에서 모든 문제를 해결해야 됩니다.
친구가 '오늘 어디 가자!' 할 때, 진탕 먹고 놀기 위해서 간다면 이것이 사적입니까, 공적입니까? 그렇게 되면 파탄이 벌어지고 싸움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보다 공적인 것은 어떤 것이냐? 공적인 것은 자기보다 큰 것입니다. 나보다도 가정을 위해 움직이는 더 보다 공적이요, 가정보다도 종족을 위해 움직이는 것이 더 공적입니다. 공적인 노정에 대해 여러분이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종족보다도 민족을 위해 움직이는 것이 더 공적이요, 민족보다도 국가를 위해 움직이는 것이 더 공적이요, 국가보다도 세계를 위해 움직이는 것이 더 공적입니다. 통일교회에서는 하나가 더 있습니다. 세계보다도 천주를 위해 움직이는 것이 더 공적이라는 것입니다.
천주라는 것은 영육을 합한 세계입니다. 우리들은 영계의 영인들을 해방하는 운동과 육적인 세계를 해방하는 운동, 즉 두 세계를 해방하는 운동을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한 세계가 더 있다는 것입니다. 통일교회가 주장하는 이념을 중심삼고 볼 때, 어디가 더 공적이냐? 한 차원더 높은 것이 공적입니다.
그 다음에 최고의 공적인 것은 뭐냐? 절대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서도 모든 것을 다 떼어놓고라도 제일 공적인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첫째 계명이니라' 했습니다. 계명이 뭐냐? 경계하라는 명령이라는 말입니다. 경계하는 명령대로 안 하면 어떻게 되느냐? 벌을 받는다는 겁니다. 죽는다, 망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경계하는 명령대로 하면 어떻게 되느냐? 흥하는 것입니다. 얼마만큼 흥하느냐? 세계를 점령하고 하나님을 점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첫째가는 계명이라 했는데, 하나님이 욕심이 많아서 자기를 사랑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욕심장이여서 자기만 사랑하라고 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 왜 그랬느냐? 그 사랑의 인연을 갖지 않고는 세계를 상속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부모와의 사랑의 인연을 갖지 않고는 부모의 소유를 상속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부모를 사랑하는 사람은 부모 자신까지도 상속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부모의 상격이나 부모의 성품을 본받아 가지고 태어나려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한 말은 하늘땅 전체를 상속해 주기 위한 비결로서 준말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만을 위해 살라 하는 것이 공적입니까? 어때요?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만을 위해라 하게 되면 공적입니까? 사적입니까? 그것은 사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는 말은 하나님의 사랑이 지니고 있는 그 가치에 천지의 전부가 달려 있기 때문에, 그 전체를 만민 앞에 주고 싶어서 하는 말인 것입니다. 주고 싶어서 사랑하라는 것이 사적입니까, 공적입니까? 주고 싶어서 사랑하라는 것은 공적인 입장입니다. 그러나 받고 싶어서 사랑하라는 것은 사적인 것입니다.
여기 앞에 앉은 학생 몇학년인가? 중학생인가, 고등학생인가? 「고등학교 1학년입니다」 그럼 고등학교에 들어갈 때에는 무엇 때문에 들어갔어요? 사내로 태어났으니 공부 잘해서 좋은 색시 얻어 가지고 잘살기 위해 들어갔어요? 그렇게 자신을 위해 들어갔다면 망하는 거야. 안 망하려고 해도 깨깨 망하는 것입니다. 망할 수 있는 길이 훤합니다. 그렇게 자기만을 위해 공부하는 녀석은 그 나라가 망할 때 같이 망하는 것입니다. 그 나라가 안 망하더라도 그 종족이 망할 때는 망하는 것입니다. 망할 길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세계를 위해서 공부한다면 망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나라가 망한다고 해서 세계가 망합니까? 또한 그 나라가 망하려면 개인이 망해서 가정이 망하고, 가정이 망해서 종족이 망해야 됩니다. 그래야 나라가 망하지요? 그러면 나라가 망하는 것은 어디에서 볼 수 있느냐? 개인들이 사적인 내용을 중심삼고 살며, 가정들이 나라는 생각지 않고 자기 가정만을 위해 살며, 그 종족들이 모두 자기 종족만을 위해 사는 것이 완전히 포화상태가 되면 그 나라는 망하는 것입니다. 개인이 그 나라의 재산을 탈취하면 망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이 부패하면 그것이 망할 징조입니까, 흥할 징조입니까? 어디 여자들,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들에게 물어봅시다. 그것이 망할 징조예요, 흥할 징조예요? 그렇게 되면 망하는 것이 철학입니다. 이 공법에 의해서 하나의 세계는 가고, 하나의 세계는 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럼 망하지 않는 비법이 무엇이냐? 공적인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여자들은 시집을 가게 될 때에 아무개의 여편네로서 시집을 가는 것이 아니라, 그 나라의 여성을 대표하여 그 나라의 어머니로서 시집을 가는 것입니다. 남자들은 그 나라의 아버지로서 장가를 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라를 사랑하고 나라를 위하는 부부가 되면 그 나라의 어머니가 되고 아버지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 나라의 대통령, 혹은 주권자를 대신할 수 있는 입장이 된 모든 남자 여자들이 그들의 대표로 선출한 사람이 그 나라의 주권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나라는 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 가정이 못살더라도 내 나라를 잘살게 하겠다고 하는 그런 국민성을 가진 나라는 흥하여 남아지는 것이요, 그 국민 또한 흥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래요, 안 그래요? 그래서 보다 오래 남아지고, 보다 흥하는 길을 가고자 하는 단체가 있다면 그들은 세계를 위하여 희생하고, 세계를 위하여 제물될 수 있는 운동을 일으켜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이 세계까지 전부다 망하더라도 그 후에 새로운 세계를 차지할 수 있는 주인들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는 사적인 욕망에서 출발된 이 세상이 망하기를 소원합니다. 공적인 세계를 추구하며 하나로 통일된 평화의 세계를 고대해 나오면서, 그런 주의 주장을 수천년 전부터 부르짖어 나온 것이 종교입니다. 오늘 이때에 와서 부르짖기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이러한 것을 몰랐습니다.
그러면 종교인은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자기 부부가 재미있게 사는 것보다 더 재미있게 살 수 있는 것은 이 역사적 거리를 단축시켜 세계와 연결시키고 천주와 연결시켜서 사는 것입니다. 개인으로 살지만 세계를 넘어서서 사적인 기원을 통하여 이루어진 세계에서는 고를 수 없는 그런 가정이 해방된 가정인 것입니다. 또한 그 가정은 절대적인 가정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명동거리를 지나다 보면 젊은 남자 여자들이 깨가 쏟아집니다. 그거 누구를 위해서 그러는 겁니까? 누구긴 누구야, 젊은 청춘시대인데 한번밖에 없는 이 시대를 즐기기 위해서 그러지. 좋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즐기는데 있어서 주인이 누구냐, 이게 심각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느 때부터 즐길 수 있어요? 20대부터라면, 어느 때까지 즐길 수 있어요? 나이가 60, 70, 80이 지나가게 되면 별 수 있나?
그러나 통일교회식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먹는 것도 무엇 때문에 먹어요? 살기 위해서 먹습니까? 통일교회 패들, 무엇 때문에 먹는 겁니까? 세계를 위해서 먹는 것입니다. 악한 세계를 없애기 위해 먹는 것입니다. 보는 것도 악한 세계를 소탕하기 위해서 보는 것입니다. 악의 편이 되기 위해서 보는 것이 아니라 악을 소탕하기 위해서 보는 것입니다. 듣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걷는 것도, 행동하는 것도 전부다 세상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대립된 선악의 세계를 어떻게 통일시키느냐? 통일사상을 가지고 통일시킵니다. 악은 나를 위하라 하며 자기를 들고 나오는 것이요, 선은 남을 위하고 너희들 잘되어라 하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식을 대해서 선해요, 악해요? 「선합니다」 왜 선하냐? '우리는 못되더라도 너희들은 잘 되어라, 너희들을 위해 나는 희생한다' 이렇게 살기 때문입니다. 이게 공식에 맞다는 것입니다. 모르긴 해도 자식에게만은 그 공식이 적용되더라는 것입니다. 그 공식을 사회에 적용하고 세계에 적용하게 된다면, 세계가 잘될 것입니다.
아무리 악한 부모라 할지라도 자식들에게 '내가 살인강도였으니까 너희들도 살인강도가 되어라' 하는 부모가 있습니까? 자기는 악하더라도 자식에게 교육을 시킬 때는 절대 나쁜 사람이 되지 말라고 합니다. 자식 대해 '너는 나쁜 사람이 되지 말아라' 하는 것은 부모된 자신은 나빴다는 말입니다. '너는 잘 되어라' 하는 것은 나는 못 되었다는 말인 것입니다.
자식을 위해서는 자기를 잊고 완전히 투입시키는 것이 선이요, 그래야만 남아진다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육의 만고의 원칙입니다. 이것을 사회화시키고 세계화시키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부모 나쁘다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얼마 전에 어떤 부모가 자기의 아들을 고아원에 보내 놓고 세계 유람에 나섰다는 보도를 본 적이 있는데, 그렇게 하기 때문에 그 자식들이 나빠지는 것이지 어디 가든지 부모가 자식과 함께 다니는데 자식이 나쁘게 되는 것 보았어요?
남들이 자신을 위해 주기를 바라면서 사는 사람이 선한 사람이예요, 남을 위해 주면서 사는 사람이 선한 사람이예요? 결론을 지읍시다. 어떤 사람이 선한 사람이예요? 위해 사는 사람입니다. 말없이 위해 주는 사람이 선한 사람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우리 통일교회를 괜히 미워합니다. 통일교회가 밥을 달라고 합니까, 떡을 달라고 합니까? 나라를 위하고, 인류를 위하고 세계를 위하여 살자고 하는데 괜히 미워하거든요. 무엇 때문에 미워합니까? 우리가 도적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도적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들어가면 자기들의 바탕을 모두 빼앗긴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상속자가 누가 되느냐는 것입니다.
동네에서도 그렇잖아요. 동네에서 무슨 문제가 벌어져서 누가 좋고, 누가 나쁘냐를 이야기할 때, 누가 마을을 위하고 마을 사람을 위했느냐, 즉 공적이었느냐, 사적이었느냐를 중심삼아 가지고 좋다 나쁘다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젓가락을 들고 밥을 먹을 때도 이 먹는 것이 공적이냐 사적이냐를 생각해야 합니다. 대한민국 삼천만 민족을 위하여 밥을 먹고, 세계의 인류를 위해 밥을 먹어야 합니다. 대한민국을 위한 세계를 만들겠다고 하면 대한민국은 망합니다. 미국을 위한 세계를 만들겠다고 하면 미국은 망합니다. 세계를 위한 미국이 되어야 흥하는 것입니다. 닉슨 대통령의 시대에 들어와서 아시아를 위한 미국이 되었을 때는 소망이 있었지만, 아시아로부터 후퇴할 때에는 망하는 것입니다. 그 갈 길이 어디인가를 두고 보라는 겁니다. 무엇이든 전부 다 참패를 당해 망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런 것을 벌써부터 이야기했습니다. 미국이 원조정책을 감소시키면 그 대통령 때부터 후퇴하게 되는 것입니다. 케네디 대통령이 그랬습니다. 그래서 거기서부터 비운의 역사가 시작되었고, 그 또한 제명을 다하지 못하고 죽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죽더라도 망하지 않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냐? 죽어 가지고도 세계에 공헌할 수 있는 무리들이 어떤 무리냐? 공적인 사람들입니다. 공적인 생활을 한 사람들입니다. 그렇지요? 공자. 석가. 예수는 무엇을 위해 살았느냐? 그들은 국가주의자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계를 위해서, 미래의 세계를 위해서 살다가 간 사람들입니다. 이상적인 세계를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잃더라도 현실의 모순된 모든 것에 적극적으로 부딪히며 그 세계를 존중시해서 살아갔기 때문에 성현의 반열에 동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현의 도리라고 하는 것은 하늘을 빼고서는 안 됩니다. 예수도 공자도 석가도 마호메트도 하늘을 업고 나갔습니다. 혼자서 자기가 제일이라는 째째한 녀석들이 있는데 그런 녀석들을 전부 소탕하자는 것이 통일주의입니다. 소탕을 하는 데 있어서 강제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을 위해 주는 것입니다. 방법이 세상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그렇습니다. 잘한 것도 자꾸만 잘했다고 하면 싫어하고, 못한 것을 못했다 하면 더 싫어합니다. 못했지만 잘했다고 하면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수습방법이 다릅니다. 못한 것도 잘했다고 추켜 세우면서 달래야 합니다. 철이 없는 어린애들은 추켜세워 줘야 좋아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을 보게 되면 전부 자기 중심삼고 생각합니다. 좋은 것이 있으면 자기가 가지려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육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 세계는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이 대립된 입장에 서 있습니다. 사적인 것을 추구해 나가는 이 세계에 공적인 흐름이 없으면 망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종교권을 중심삼아 가지고 공적인 것을 추구해 나오는 것입니다. 대학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이 나라를 위하고 세계를 위할 수 있는 생각은 하지 않고, 자기만을 위해서 공부한다는 사상을 가지면 망합니다. 그 나라는 망하는 것입니다. 그에게 있어서는 세계가 없어지고, 나라가 없어지고, 가정 종족이 없어져서 그 혼자 고립되고 마는 것입니다.
민주세계에서 자유가 좋다고 하는데, 그 자유는 전체를 품을 수 있고, 전체를 소유할 수 있는 가치적인 자유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분립된 입장에서 논한다면 그 자유는 방종이며, 파탄의 요인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미국이라든가 민주세계가 이러한 사상을 해결하지 못하면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청소년 문제가 사회 윤리 문제로 등장하면 된 원인도 거기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나라를 생각하지 않고 세계를 생각하지 않는 그런 무리들이 세계를 파탄시킵니다. 이것을 전부 청산지어 가자는 것이 통일사상입니다.
자, 그러면 공적인 입장, 즉 하나님의 입장에 한번 들어가 봅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로다'고 말하는데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데 있어서 이제 다 되었다 할 수 있습니까? 사랑이 끝이 있어요? 다 되었다고 하는 끝을 느낄 수 있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사랑을 받게 될 때 상대적인 사랑을 받아요, 절대적인 사랑을 받아요?
여기 아주머니들도 옛날에 사랑하는 남편에게 '당신은 나를 사랑하오? 그래 얼마만큼 사랑하오?' 하고 물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남편이 얼마만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어요? 얼마만큼만 사랑한다고 말한다면 그만큼 기쁜 것입니다. 사랑에는 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지 못한 것이 한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아요? 사랑은 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끝없는 사랑이 어디에 있느냐? 사랑은 끝이 없어야 하는데 자기만을 위하는 입장에서 사랑을 하는 사람들의 사랑이 끝이 있겠느냐, 없겠느냐를 생각해 보십시오. 자기만 위하여 사는 사람들의 사랑은 하루도 못 가서 끝납니다. 한 달도 못 가는 것입니다. 부부가 왜 부부싸움을 하느냐? 서로가 사랑을 받겠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서로가 사랑을 받겠다고 하는 패들은 오래 갑니까, 못 갑니까? 오래 갈 수 없습니다. 오래 가면 그것은 원리가 아닙니다. 서로가 사랑을 받겠다고 하는 가정은 깨집니까, 안 깨집니까? 깨집니다. 그럼 서로가 사랑하겠다고 하는 가정은 어떻습니까? 서로가 상대를 더 사랑하겠다고 야단하는 가정은 깨지라고 제사를 지내도 안 깨집니다. 서로가 위해 주려고 하는 사랑은 영원한 것입니다. 알겠어요?
서로가 위하는 친구는 2년이 가고 3년이 가도 안 깨집니다. 영원히 갑니다. 서로가 위하려고 하는 형제간의 우애는 영원히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서로가 자기만을 위하라고 하는 우애는 며칠 가지 못합니다. 만나면 싸우는 것입니다. 어떤 물건이 생기면 서로 갖겠다고 잡아당기며 싸웁니다. 그렇게 세 번만 대결하게 되면 영원히 이별하게 되는 것입니다. 원칙이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의 방안이 어디에 있느냐? 위해 주는 데 있습니다. 그럼 남북이 통일하는 데 김일성이 하자는 대로 할 것이냐? 김일성이 하자는 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 깃든 것은 무엇이든지 받고 싶은 좋은 것이기 때문에 그 좋을 수 있는 입장에서 영원히 줄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되면 이북도 통일되는 것입니다. 현재 이북 백성들이 사는 이상의 입장에서 영원히 줄 수 있는 기반만 잡게 되면 공산당의 선전 따위는 먹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사는 만큼도 못살면서 주겠다고 하면 안 됩니다. 그들이 받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남한에서 김일성이를 무서워하고, 김일성이를 걱정하고 있는 입장에서 주겠다고 하면 그들이 받겠습니까? 필요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주는 데는 더 좋은 입장에서 주어야 됩니다. 대한민국이 살 수 있는 길은 간단합니다. 대한민국이 경제 분야, 생활 분야, 지식수준 등의 모든 분야에서 월등해 가지고 영원히 줄 수 있는 입장에 서게 되면 완전히 하나되는 것입니다. 하나되지 말라고 해도 하나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리까지 가려면 우리가 그 사람들보다 더 노력해야 됩니다. 그 사람들이 밤을 새워 가며 일하면, 우리는 그들 이상 밤을 새워 일해 가지고 주려고 하고, 그 사람들이 백점이라면 우리는 백점 이상을 갖춘 자리에서 더 좋은 것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입장의 세계는 자꾸 발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분이냐?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랑을 주시게 될 때 얼마만큼 주고 싶으실 것이냐? 이만큼이면 됐다 하는 한계를 두고 그런 사랑이 아닙니다. 무한정으로 주고자 하시는 사랑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몽땅 주고도 너로 말미암아 네 가운데 살고 싶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질 수 있는 그 본질이 무엇이냐? 그것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사랑 가운데 들어가서는 종살이를 해도 좋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아버지는 사랑하는 아들이 자신의 밥상 위에 기어 올라가 똥을 싸도 그것을 바라보고 기쁨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법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금까지 이 세상을 대하여 사랑을 주었다고 해서 인간에게 '나는 완전히 다 주었는데 너는 왜 안 주느냐?' 이럴 수 있겠습니까? 절대적인 사랑을 가진 하나님이라면 아직까지도 주고 싶은 사랑을 다 못주어 안타까와하시는 것입니다. 자아를 주장할 수 없는 하나님입니다. 완전한 사랑을 주고자 했던 것이 인간을 대한 창조의 원칙이라면, 하나님은 지금까지 완전한 사랑을 주지 못했으니 사탄세계에 대하여 사랑을 주고 나서도 부끄러움을 느끼는 입장이 아닐 것이냐? 더 좋은 것을 주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이기에 생각할수록 좋은 것입니다. '나는 다 줬으니 이제는 네가 가져 와라' 하는 하나님이라면 내쫓아 버려야 합니다.
무한히 주고 싶어하시는 하나님께서 오늘날 악한 세계에 있는 인류를 바라보시며 사랑을 줄래야 줄 수 없는 그 고통이 얼마나 클 것이냐? 좋은 자리를 마련해 주고 나서도 부족함을 느끼는 하나님인데 아무리 주고 싶어도 받을 수 있는 사람을 못 가진 하나님은 얼마나 원통하겠느냐는 것입니다. 홀애비나 독신자가 행복해요? 나라를 다 가지고 세계를 다 가졌다 하더라도 혼자 사는 독신이라면 행복한 사람입니까?, 불행한 사람입니까? 어떤 사람이예요?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행복한 사람은 하나님을 중심삼고 영원히 주고받을 수 있는 그러한 사랑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죽어도 그 사랑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눈물을 흘려 준다면 최고의 눈물을 흘려 줄 수 있고, 정의 인연을 완전히 맺을 수 있는 그런 분은 하나님이 아니면 없기 때문에 그러한 하나님의 품에서 죽는다는 것은 최고의 행복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아요? 여기 여자들도 그렇지 않아요. 사랑하는 사람의 품에서 죽으면 한이 없다고 하지요?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을 볼 때, 앞으로 통일교회가 가야 할 길이 어떤 길이냐? 내 개인을 다 희생하고도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어야 합니다. 왕왕 통일교회에 들어와서 망했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사람은 전부 다 자기를 위해서 살았던 사람입니다. '통일교회 때문에 망했어! 꽃다운 청춘 다 바쳐 가지고 축복도 못 받고 이 모양 이 꼴이 됐어! 50이 됐어. 뭐 사위기대 빨리 내놔' (웃음) 그런 패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선생님 앞에 '내가 이렇게 되었는데 왜 내 사정을 몰라줘요? 왜 축복 안 해줘요?' 그러는 사람들은 누구를 위해서 산 것입니까? 나라를 위해 산 거예요, 아니면 세계를 위해 산 거예요? 결국 자기를 위해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의 공식적인 법도를 중심삼은 책임자가 그런 말을 듣고 '네 그렇습니까? 당신의 사정을 절대 봐 드려야 되겠습니다.' 해야 되겠어요, 아니면 보따리 싸 가지고 도망가야 되겠어요? 어떻게 해야 됩니까? 여러분, 대답해 보십시오. 거저 붙어 가지고 '그래 그래' 해야 되겠나, 안 된다고 보따리 싸 가지고 도망가야 되겠나? 「도망가야 됩니다」 알기는 아는구먼.
여러분이 앞으로 공사를 가리는 데 있어서 이 원칙을 모르고서는 안 됩니다. 이 원칙을 모르고 대중을 지도하게 되면 내가 꺾여 나가고, 통일교회가 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매정한 사람입니다. 그 어떠한 사람이라도 이 원칙에 걸릴 때에는 '언제 알았더냐? 너를 언제 알았더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 그냥 거기에 말려들어가면 전체가 망하게 됩니다. 이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만 고생했습니까?선생님은 일생 동안 이 놀음을 했습니다. 감옥으로, 어디로 별의별 놀음을 다 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하나님, 지금 내 나이가 50이 넘었는데 이 모양 이 꼴이 되어서 되겠소?' 한다면 망해야 됩니다. 망해야 된다구요. 그러나 나는 이 원칙을 알았기 때문에 망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망하고 통일교회를 따르던 사람들은 망하더라도 나는 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만일 망하더라도 그것을 알고 망했다면 그 무덤가에 꽃을 심어 놓고 만민이 추모할 날이 올 것입니다. 예수님이 만민을 위해서, 앞으로 다가올 하늘나라를 위해서, 세계를 위해서 죽었기 때문에 이 땅 위에 그 자체의 흔적이 없더라도 온 세계는 그를 받들고 모셔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칙입니다. 여러분은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이 희생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알아야 합니다. 나라와 세계를 살리기 위해서는 개인은 가정의 길을 따라가야 하고, 가정은 종족의 길을 따라가야 하고, 종족은 민족과 국가를 바라보며 민족을 사랑하고 국가를 사랑하고 넘어가야 됩니다. 그러지 않고는 갈 길이 없기 때문에 현재의 네 이웃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 했습니다. 이런 입장에서 통일교회보다도 대한민국을 더 사랑하라. 이것이 통일교회의 가르침입니다.
요즈음 통일교회 때문에 말썽이 많습니다. 통일교인이라 하면 무서워하는 패들이 많습니다. 저렇게 나가다가 무슨 대통령이라도 하려는 것 아니냐며 별의별 말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통일교회를 위한 대한민국을 원하지 않습니다. 대한민국을 위한 통일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만민이 좋아하고, 우리 선조가 좋아하고, 우리의 후손이 좋아할 수 있는 대한민국을 바라면서 그러한 나라를 위한 통일교회가 되어 나가자는 것이 통일교회의 주장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의 정부가 옳지 않은 것이 있으면 그것을 시정해야 됩니다. 통일교회가 시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개인은 나라를 위하고 세계를 위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 나가야 합니다. 그 다음엔 가정이 그 길을 모색해 나가야 됩니다. 그래서 축복가정부터 나가라고 한 것입니다. 가정이 나라를 사랑하는 길을 가야 합니다. 남편만 나라를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아내도 아이들도 사랑했다는 조건을 세워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위기대가 갖추어야 할 조건입니다. 언제 가정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해 보았느냐? 못해보았기 때문에 사위기대적 사랑의 한 기원을 마련하기 위해서 통일교회는 할 수 없이 통일 운세의 시대가 목전에 다가오는 이때에, 축복가정 전체를 동원하는 놀음을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만일에 갑이라는 사람이 '선생님이 무엇인데, 남편도 가고 자식도 갔는데도 또 가기를 바라느냐? 아이고 우리 집안 망했구나' 하게 되면거 망하는 것입니다. (웃음) 진짜 망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집안은 망해도 좋습니다' 하면서 복을 빌고 축수하는 그 가정은 망하라고 제사를 지내 보십시오, 망하나. 지금까지 기성교회 목사들이 나 망하라고 얼마나 많이 기도를 하고 별의별 짓을 다 했습니까? 그렇지만, 나는 망하지 않았습니다. 왜냐? 이 원칙을 따라 나왔기 때문입니다. 이 원칙에 위배되면 망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생각하면,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나 3대를 통해서 하나님께 충성할 수 있는 기반을 갖지 못한 것이 한입니다. 할아버지, 아버지, 손자 3대가 함께 모여서, 손자가 아버님을 부르면 '오냐' 할아버지를 부르면, '오냐' 해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우리 다 함께 비밀회의를 합시다' 하면 '응, 응, 그렇게 하자' 그럴 수 있는 조상들을 가졌으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여러분이 그것을 잘 생각해야 됩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은 아들딸에게 그런 교육을 시켜야 됩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아버님, 이 나라를 일으켜야 되고 세계를 일으켜야 되니 아버님과 제가 생명을 바쳐 싸워 나가야 되겠습니다' 했을 때, 그 아버지가 아들에게, '얘야, 죽으면 되느냐? 살아야지' 그러면 그 영감은 망한다는 것입니다. '그래 그렇게 하자!' 그러면서 부자가 서로 목을 껴안고 하늘을 위해 죽음의 길도 첨벙 들어갈 수 있는 가정이 되면 그 가정에서 역사를 상속받고, 세계를 지도할 수 있는 후손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통일교회를 중심삼고 선생님과 여러분의 입장을 생각해 볼 때에, 뭐 참부모니 뭐니 하며 수작들을 잘하지만, 언제 그렇게 살아 보았느냐는 거예요? 그 집안이 잘되려면 아버지를 교육해야 합니다. '아버지, 나라와 세계를 위해서 이렇게 해야 되겠습니다' 할 때 '오냐 그렇게 하자' 하며 그 아버지가 기뻐할 수 있는 그런 자식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수 있는 여러분의 되면 통일교회는 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가 '이놈의 자식이, 나를 망하게 하려고 그래?' 한다면 그는 아버지가 아닙니다. 선생님이 앞에서 '이래라. 저래라' 하면서 나가는데 여러분이 꽁무니 빼면 망하는 것입니다. 그런 무리들은 다 흘러갑니다. 흘러가지 않겠다고 아무리 버티고 서서 '나는 통일교회 협회원서 냈는데…' 해도 다 흘러가는 것입니다.
통일교회의 가는 길은 세계를 위하여 가는 길입니다. 여러분은 그 세계가 되고 난 후에 상속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이 시간에 마음속으로부터 받아 나가야 합니다. 그러려면 하나의 나라를 위하고 하나의 세계를 위할 수 있는 전체의 대열을 갖추어 가지고 총진군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루 속히 그런 때가 오기를 기다리며 안팎으로 준비하고 명령을 기다리는 가정은 하늘의 상속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투덜거리는 사람은 두고 보십시오. 그 가정은 갈라지는 것입니다. 종족도 왜 우리 종족만 수고시키느냐 하게 되면 앞으로 갈라지게 될 것입니다. 세계를 찾기 위해서 민족을 동원하라 할 때, 왜 하필 수많은 민족 가운데 대한민국의 한 민족을 동원하느냐 하며 거부한다면 이 민족은 망하는 것입니다. 나라가 움직여야 할 때에 그것을 거부하고 돌아서면 그 나라는 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통일교회를 믿는 것도 세계를 위해서 믿어야 됩니다. 가는 것도 세계를 위해서, 인류를 위해서 가야 됩니다. 보다 큰 목적을 위해서 현실의 모든 생활을 소화할 수 있는 입장에 서야 진전되고 발전되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후퇴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침에 직장에 출근할 때나 그밖에 어디에 가게 될 때에는 '아버지, 내가 가는 길에는 지금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그 길에 있어서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셋이 되어 당신이 그리워하는 그 나라의 필요한 요건을 갖출 수 있을 때까지 가겠습니다. 나로서 안 되면 내 자손만대를 통해서라도 가게 하겠습니다. 하는 이런 마음을 가지고 가야 합니다. 그래야 천리 만리 떨어져 있을지라도 그 세계를 위한 사람으로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 수위실을 두고 보면 이 수위실은 세계적인 수위실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볼 때에도, 내가 여기에 온 것은 세계를 대표해서 왔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역사상의 성인도 이러한 생활을 못 했고 역사상의 그 어떠한 선조도 이러한 생활을 못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그렇게 산다면 역사를 부활시키고, 뭇 생명들을 부활시킬 수 있는 훌륭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여러분은 조상들이 추앙하고, 조상으로부터 위함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여자가 시집가서 못 살고 소박맞아 쫓겨 나오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간단한 것입니다. 시어머니보다도 맛있는 것 먹겠다고 하고, 시아버지보다도 맛있는 것 먹겠다고 하는 며느리는 대번에 쫓겨나는 것입니다. 시누이들이 있는데도 까짓것 모르는 체하면서 내가 맛있는 것 먹겠다고 하고, 좋은 옷이 있으면 입고 거울에 비추면서 '이 옷 좋구먼, 내가 입어야지, 시누이들이야 무슨 상관 있어?' 하면서 그 옷을 입고는 좋아하면 쫓겨나는 것입니다.
시어머니, 시아버지보다도 못먹고, 못입으면서 말없이 그들을 위해 주는 며느리는 3년 이내에 그 집안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주인이 되느냐? 마음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시누이들이 자기 어머니, 아버지 앞에는 이야기 못할 비밀 보따리를 올케 언니한테 풀어 놓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래요, 안 그래요, 그렇게 되어 있죠? 그렇게 되면 며느리가 소박을 맞을 것은 감추어 주고 칭찬해 주고 자랑해 주고 싶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중심삼아 가지고 대립된 선악의 세계를 여러분이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어차피 대립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체를 두고 하나님도 잡아당기고, 사탄도 잡아당기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어디로 끌려갈 것이냐? 마음에 몸뚱이가 달려가는 것이 종교생활입니다. 마음이 하자는 대로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악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몸뚱이를 앞세우고 마음이 뒤따라 가면 악입니까, 선입니까? 「악입니다」 악이라는 것입니다.
젊은 사람들 보면, 이 몸뚱이를 따라가면서 희희낙락하고, 뭐 트위스트가 어떻고 하는데, 그것이 악을 위해 가는 거예요, 선을 위해 가는 거에요? 「악을 위해 가는 겁니다」 여러분 그렇게 해보라구요. 뭐 대학교 다닌다고 모자를 쓰고 꺼덕거리고 다니고 하는 것을 부모니까 보아주지, 가정생활하면서 그렇게 하면 좋아할 아내가 있어요? 그것 좋아할 아들딸이 있느냐 이겁니다. 그 가정은 파탄이 벌어지고 결국은 망하게 됩니다. 망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몸뚱이에 끌려 다니는 사람은 망하는 것이요, 몸뚱이보다 마음이 앞장서 가는 사람은 어떻게 된다구요? 흥한다는 것입니다. 양심적인 사람은 여기에 적용되는 것입니다. 나아가 마음보다도 하나님의 뜻을 중심삼고 따라가는 사람은, 하나님이 절대적이기 때문에 절대적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죽는 자리에서 발전해 나온 것입니다. 핍박받고, 죽으면서 발전한 것입니다. 그것이 참입니다. 통일교회도 지금까지 욕을 먹으면서 발전해 나왔습니다. 여러분이 이걸 알아야 합니다.
대립된 선악의 세계라는 입장에서 볼 때, 몸뚱이에 끌려가면 악한 세계가 되는 것이요, 마음에 끌려가면 선한 세계가 되는 것인데 여기에서는 마음이 몸뚱이를 완전히 지배할 수 없습니다. (판서하심) 언제나 완충지대에서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종교권을 중심삼아 하나님의 뜻을 절대시하고 세계관을 중심삼은 권내에서 하나님의 뜻을 절대시하게 되면 사탄세계와 분립된 자리에 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대립된 선악의 세계이기 때문에 분별된 자리에서 선을 위주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런 개인의 생활을 거친 사람은 영계에 가서 선주권의 세계에서 영원히 살지 말라고 해도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늘나라는 어떠한 세계냐? 여러분, 영계가 어떠한 세계인지 모르지요? 하나님의 사랑은 공기와 마찬가지입니다. 영계에 가면 여러분들이 뭐 이러구 저러구 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연히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히 주고도 더 주고 싶은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나도 거기에 호흡을 맞추고 빙빙 돌아가면서 박자를 맞추어야 됩니다. 박자가 틀리면 그 힘을 전부 잃게 됩니다. 영계에 지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 반대적인 요인을 가지고 영계에 간 사람들은 상충되기 때문에 하늘과 멀리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인연을 맺지 못하고 하늘과 멀리 떨어지게 되는 것이 지옥이라는 것입니다.
주면서도 부끄러움을 느끼는 그 길이 참된 도인들이 가는 길입니다. 알겠어요? 진정으로 참된 것을 주고 나서도 눈물을 흘리며 부끄러움을 느끼는 그 자리는 영원한 평화의 경지가 되는 것입니다. 부모가 사랑하는 자식에게 옷을 잘해 입혔다고 해서 부모의 책임을 다했다고 하는 부모가 있으면, 그 부모의 사랑은 거기서 끝나는 것입니다. 옷을 잘해 입히고 나서 스스로 장함을 느끼는 부모는 끝나는 것이요, 더 잘해 주고 싶은데 못 해주어서 부끄러움을 느끼는 부모라면, 그 부모는 영원한 유업을 상속받을 수 는 부모가 되는 것입니다. 주면서도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는 세계가 천국입니다. 알겠어요? 주면서도 머리를 숙이고, '받아주니 고맙습니다' 하는 이러한 세계가 천국인 것입니다. 지옥은 어떤 곳이냐? '가져 오라, 바쳐라!' 하는 세계입니다. 이걸 여러분이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아버지여,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했습니다. 죽어가면서도 하나님께 항의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더 크기에 더 큰 희생도 응당 바치겠나이다' 이런 자세였습니다. 이 자리는 영원히 깊이 들어가는 자리이기 때문에 영원히 하나님과 더 가까운 자리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 앞에는 하나님도 꼼짝 못하십니다. 그런 사람을 치는 사람은 즉시 망합니다. 하나님이 친히 제재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그랬습니다. 그랬지요?
어느날 누구에게 몇 천만 원을 주었으니 그에 대한 이자를 얼마 가져와야 할 텐데 하면서, 준 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천국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준 것을 잊어버려야 합니다. 부모가 자식을 기를 때 몇 냥 몇전을 투자했으니 그 이자를 받겠다고 하는 그런 부모 있어요? 주고도 다 잊어 버리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준 것을 잊어버릴 뿐만 아니라 더 좋은 것을 주지 못해 안타까와하는 것이 부모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영원히 계속되기 때문에 부모 없는 사람을 고아(孤兒)라고 하고 고아가 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앞으로 통일교인들은 옛날에 자기가 전도 나갔던 곳으로 다시 전도를 나가게 될 것입니다. 그곳에 가게 되면, 그 사람 통일교회 반대하더니 어디 망했나, 흥했나? 하는 이런 감정 가지고 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옛날에는 주고 싶었던 것을 다 주지 못하고 떠났지만 이제 진정한 입장에서 줄 수 있는 때가 왔구나. 모든 사람을 위해 주고 싶고, 부락 전체를 위해서 다 주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그때는 반대했던 사람들이지만 그 사람들도 살아 남았으니 이제는 내가 다 줄 수 있도록 기쁜 마음으로 대해 주었으면…' 이런 마음을 가지고 가면 다시 반대를 받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여러분이 이 마음을 알아야 됩니다. 주고 나서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고 나서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이 하늘의 법도라는 것입니다.
통일교회 문선생이 이제 줄 만큼 줬으니 내가 잘먹고 잘살겠다고 하면 통일교회는 여기서 망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여러분들을 위해서 내가 수고했습니다. 여러분이 기도를 해 봐도 그렇다고 인정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수고한 것으로 됐다 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을 고생시킨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준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줘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더 좋은 것을 주려니 지금 잘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를 위해서 수고하게 하고, 세계를 위해서 수고하게 하는 것입니다. 만민이 찬양할 수 있고 만민 앞에 자랑할 수 있는 자리에 세워 하늘과 땅, 하나님의 사랑까지도 전부 상속시킬 수 있는 승리의 한날을 위해서 최고의 것을 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현재의 입장에서 여러분을 고생시키는 그 몇 배 이상으로 잘살게 해주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나 자신이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움직임은 발전할 것입니다. 이것이 천적인 공식을 통해서 보는 관입니다. 여기에 어긋나게 될 때에는 후퇴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통일교회 교인들이 원리는 배웠지만 원리적으로 생활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지금의 때가 어떠한 때인지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가정을 대표해서 국가를 위해 주고 세계를 위해 주어야 할 때가 왔으니 거기에 가담하지 못하게 되면 원통한 중에도 원통한 것이요, 분한 중에도 분한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내가 동원하라고 하니까 '또 왔구만, 뭐 60년대에는 내 개인이 뼛골을 훑어 먹더니, 이제 70년대에 와서는 내 자식과 여편네까지 훑어 먹으려고 해!' 이렇게 불평하고 있습니다. 만일 그래 가지고 그 집안이 망하는 놀음이 벌어지게 되면 이것이 대한민국에 있어서 새로운 풍조가 될 것입니다.
이제 1972년도까지 몰아대려고 합니다. 과연 몇 가정이 남느냐? 몇 가정이 진정으로 나라를 사랑하고, 세계를 사랑하는 입장에서 뜻 앞에 남아 지느냐? 이런 문제를 지금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선악의 분별기준을 거치지 않고서는, 두 세계를 분립시켜 가지고 하나의 선한 결과의 세계를 가져 올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이 아시기 바랍니다.
선은 공적인 입장에서 가는 것이요, 자기 자체를 드러내지 않고 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지금까지 역사과정에서 '내가 이렇다'하는 광고를 내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을 지금 알 수 있어요? 어느 시대에도 하나님은 내가 이렇다고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절대적인 권능을 가지셨지만 그 권능을 나타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있는지, 없는지… 그러나 있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그렇게 나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사탄까지도 완전히 사랑할 수 있는 그때, 아담 해와를 통해서 천사장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그때를 바라보며 참고, 극복해 나가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일진대 그 하나님이 제일 불쌍한 분입니다.
이러한 것을 알고 그 도리와 법도를 따라서 앞으로 하나의 세계를 추구하는 데 있어서 이러한 공적 노정과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역사과정을 거쳐 나온 그 입장을 생각하며 나갈 줄 아는 여러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여러분은 틀림없이 선한 세계의 주인이 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들딸에 대한 십자가가 있으면 그것은 아내의 것이 아니면 남편의 것이기 때문에, 그 십자가를 누구에게 맡길 것이 아니라 남편들이 책임지고 아이들을 맡고, 이제 뜻을 위하여 공적인 입장에서 제물로 바쳐야 할 때가 되었다는 것을 통고하였사오니, 이번 기간이 흘러가는 기간이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번 기간을 통하여 통일교회에 재편성이 벌어진다는 사실을 그 누구도 모르고 있사오니, 아버지께서 이러한 엄중한 때와 시기에 분별점을 통하여 우리들을 찾아오고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 이제야말로 아버지를 사랑하고, 아버지의 뜻을 사랑하는 가정적인 횡적 터전을 이룰 수 있는 결정적인 찬스가 목전에 다가오는 것을 아는 축복받은 남자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가정의 주인들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자기를 의지하고 아버지를 부정한다면 천사장의 후손이 되는 것이요, 천륜을 가로막는 배반자가 된다는 사실을 알고, 당신의 거룩한 섭리의 손길 앞에 눈물로써 보답하고, 제물로써 보답해야겠습니다. 그분의 뜻을 자기의 뜻으로, 그 나라의 소원을 자기의 소원으로 스스로 상속받을 수 있고 인계받을 수 있는 아담의 입장에 선 주인들이 되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그리하여 자주적인 주관권을 복귀하여 새로운 하늘의 국가가 넓어질 수 있는 거룩한 때가 되게 하여 주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제 777가정을 중심삼고 10개 국을 연결시킨 것은 세계적인 터전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요, 가정을 중심삼고 세계적인 인연의 때를 연결시킨 것입니다. 이러한 인연들을 통하여 한국이 세계 앞에 주체적인 사명을 감당해야 되겠기에 그들에게 명령을 하였사오니, 가정적인 입장에서 그 명령을 받고 나서는 철부지한 딸들을, 아버지,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가정을 중심삼고 정착하는 것보다도, 가정을 뒤에 두고 당신을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이것이 실감이 나지 않거든 밤을 세워 가며 몸부림을 치면서라도 남편보다도, 자식보다도 그 나라를 사랑하고, 그 뜻을 사랑할 수 있는 가정주부로서의 마음의 기틀을 마련해야겠습니다. 그리하여 승리의 가정적 제단을 쌓아 남편과 자녀들을 모아 놓고 제물을 드릴 수 있는 하나의 승리적 터전을 마련하지 않고는 타락의 조상이 되었던 해와의 한을 풀 수 없다는 사실을 철저히 아는 이번 기간이 되어야 되겠사옵니다. 이러한 것을 당신은 이미 알고 이때를 바라보고 나오셨사오니, 이때에 배반자들이 되지 않게 하여 주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나이다.
어린 딸들이 70년대의 운세와 더불어 나가는 전체의 행로 위에 당신의 사랑과 가호가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을 그 누구보다도 사랑하며 자진해서 일을 하겠다고 나설 수 있어야겠습니다. 북괴가 남침의 때를 노리고 있는 현시점에 있어서 그들 앞에 자랑할 수 있는 그 무엇을 내세우지 않고는 한국이나 세계에 도사리고 있는 공산세력을 막을 길이 없다는 것을 저희들이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가정과 자식을 제물삼아서라도 나라를 구하고 세계를 구하여야 하라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자진하여 참다운 승리의 제물로써 탕감의 내용을 갖출 수 있는 입장에 선 남편들이 되게 하여 주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제 악한 세계에 처하게 되면 망하는 것이요, 선을 따라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을 알았사오니, 이 길 위에 당신의 축복의 손길을 영원히 같이 하여 주옵길 간절히 바라옵나이다. 선의 길을 따라가는 사람들은 망하는 것 같지만 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해주시고, 이 원리 원칙에 입각하여서 힘차게 내일을 다짐하고, 내일을 보장시킬 수 있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옵길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오늘 남한 각지에 있는 당신의 자녀들이 이날을 추구하며, 앞으로 다가올 많은 일들을 앞에 놓고 준비하고 있사오니, 그 어린 자녀들의 갸륵한 마음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부디 허망한 세계로부터 한 생명이라도 더 지키시고 고이 단장하시어서, 수많은 백성 앞에 참사랑을 주고도 부끄러움을 느끼며 죄된 자신을 책망할 줄 아는 그런 마음, 그런 자리를 지킬 줄 아는 통일의 무리들이 되게 하여 주옵길,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당신의 만만사의 섭리의 뜻이 저희들이 가는 길을 언제나 염려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제 저희들 앞에 남겨진 모든 일들과 처리해 나가야 할 행사를 중심삼고 자의보다 천의를 따라, 모든 것을 맡기고 있는 힘을 다하여 따라가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찾아오는 소망의 나라와 세계의 부르짖음을 저희들이 직시하면서, 주체적인 사명을 가지고 아버지 대신 주고도 부끄러움을 느끼고, 행하고도 스스로를 감추고, 스스로 행한 자체를 부정할 수 있는 자리에 선 아들딸이, 이 통일교회에 많아야 되겠사옵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로 말미암아 세계가 굴복되어 들어오는 것이요, 하늘땅이 굴복되어 들어온다는 것을 아오니, 그런 아들딸들이 많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그런 아들딸이 될 수 있는 훈련의 과정으로서 이번 기간을 세워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당신의 소원과 뜻이 어떠한 수난의 길을 가더라도 저희들을 통하여 승리하고 성사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옵길 재삼 부탁드리면서, 이 모든 말씀 참부모의 성호 받들어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사랑하는 아버지, 오늘은 11월 22일, 이달 들어 네 번째 맞이하는 안식일이옵니다. 이제 저희들은 당신이 지금까지 저희들을 위하여 경륜하신 모든 것이 드러나야 할 때가 가까와 온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전체의 복귀의 뜻을 중심삼고 그러한 때가 가까와 온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최후의 결실을 바라보고 수고하시는 아버지 앞에, 또한 당신의 소원과 노고 앞에 저희 자신들이 얼마나 보람있는 소망의 실체가 되었느냐 하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옵니다. 과거의 자신은 이러이러하였고, 오늘의 자신은 이러이러하니 내일의 자신은 이러이러해야겠다는 입장에서 스스로를 비판하고 반성하는 이 시간이 되어야만 되겠사옵니다.
흘러가는 역사시대의 한 기간을 담당하고 있는 저희들의 모든 생활은 나 하나를 완성시키기 위한 생활이 아니면 안 된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 보람을 느끼는 참된 나를 얼마나 흠모하였고 스스로 자신을 거룩한 자리에 머물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얼마나 간절한 생활을 했는가를 생각하면서, 다시금 아버지께서 요구하시는 그 모습이 될 것을 다짐하는 저희들이 되어야만 되겠습니다.
아버지, 이 아침에 모여든 당신의 자녀들을 그냥 버려 두지 마시옵소서. 이들을 불러 모으신 배후에는 당신의 높고 귀하고 보람있는 생의 가치가 깃들어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의 영원하신 생명이 연결되어 있고, 당신의 무한하고 후덕하신 사랑이 생명의 줄로 감아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오니 저희들을 그 높고 귀하신 당신의 터전 위에서 태어나 그 가운데서 존속하고 그 가운데서 당신과 인연 맺을 수 있는 아들이 되고 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아버님께서는 많은 날들을 통하여 저희들이 새로운 결실을 추구하기를 바라 나오셨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 저희는 하루를 지내고 나서는 아버지 앞에 면목이 없음을 느끼고, 한달을 지내고 나서는 부끄러움을 느끼는 자신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저희들을 위하여 수고하며 슬픔을 품고 오신 아버지가 계시다는 생각을 하게 될 때, 저희 자신들이 아버지 앞에 영광의 실체가 되지 못하고 거룩한 아들딸의 모습을 갖추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해야 되겠사옵니다. 당신에게는 그러한 저희들을 버릴래야 버릴 수 없는 딱한 사정이 있다는 것을 아는 아들이 되고 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부복한 저희들의 무릎이 거룩한 무릎이 되게 하락하여 주시옵고, 저희의 몸 전체가 아버지의 사랑의 품에 안기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저희가 태어난 것도 아버지의 사랑 때문에 태어났고, 사는 것도 그 사랑을 위하여 살고 있사오니 죽을 때도 그 사랑을 다시 찾기 위하여 죽을 수 있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자녀들이 되어 당신의 사랑과 칭찬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게 하여 주시옵고, 더 나아가 당신이 기뻐할 수 있는 자녀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이 아침에 남한 각지에 널려 있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당신을 위하여 더욱더 간절한 심정과 사정에 사무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누구의 권고로 따라가는 길이 아닌 것을 알았고 그 누구의 뒤를 따라가는 길이 아닌 것을 알았기에 스스로 솔선 궁행(躬行)하지 않으면 안 되고, 스스로 당신 앞에 나타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발견하며 나아가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을 위하여 정성을 다하고, 당신을 흠모하는 심정이 가득찬 아들딸이 있거든, 그에게 당신의 무한하신 사랑이 깃들게 하시옵고, 후덕하신 당신의 은사가 그 생명의 골짝 골짜기까지 머무르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당신의 생명의 힘과 더불어 새로운 생명체로 부활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고, 그 부활된 모습을 보시고 감격하는 당신의 즐거움이 저희들 앞에 머물게 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이들이 바라고 있는 그 길은 당신의 소원이 길이요, 이들이 싸우고 있는 그 길은 당신이 지켜주시는 길이 되어서 이들이 사는 생활이 당신의 사랑과 은사가 넘쳐 흐르는 사랑의 생활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러한 것을 바라면 바랄수록 넓고 높고 깊으신 당신 앞에 인정받고 사랑받고 칭찬받을 수 있는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들이 엎드려 아버지를 부르는 것은 물론 저희 자신의 부활을 간곡히 원하는 것이겠지만, 저희들의 배후에 있는 사랑하는 형제와 종족과 민족의 부활도 간곡히 원해야 된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아버지가 저희들을 사랑하시는 것은 저희가 살고 있는 나라를 구하기 위함이요, 저희가 땅을 위하여 태어났기 때문에 그 땅을 위함이요, 저희가 당신으로 말미암아 인연되었기에 당신을 위함이라는 것을 아는 당신의 자녀들이 많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들이 어린애와 같은 마음을 갖지 않으면 아버지 앞에 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것을 다 바쳐 당신의 품에 안기는 것만이 저희의 소원이며, 당신의 곁에 있는 자신만이 무한히 행복된 자신임을 아는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외국에 널려 있는 당신의 자녀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이 땅을 사모하며 눈물짓는 외로운 자리에 아버지의 깊으신 심정이 나타나게 하시옵고, 그들 개인을 찾아가셔서 당신의 내적인 인연을 통고시키시어 당신의 아들이 되고 딸이 되었다는 것을 증거하여 주시옵소서. 아니 움직일래야 아니 움직일 수 없고, 아니 사모할래야 아니 사모할 수 없는 당신의 인연이 여기에 개재되어야 되겠사옵니다. 아버지를 중심삼고 동서고금의 역사가 연결되고, 개인 개인이 연결되고, 사정 사정들이 연결되어 사망의 세계가 광명의 빛을 바라볼 수 있는 승리의 땅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곳 수택리에는 일본에서 찾아온 수백 명의 당신의 자녀들이 오늘 이 아침에도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있사옵니다. 이들이 조국에 온 보람을 느끼면서 이 땅을 그리워하고 있던 마음을 다 풀어 놓고 아버지를 부를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들이 아버지의 은사에 흠뻑 잠길 수 있게 당신의 사랑과 은혜를 가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번에 왔다 가는 걸음이 헛된 걸음이 되지 않게 하여 주시옵고, 이번 기간이 기필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기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들을 보내 놓고 염려하는 일본식구들 위에도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한국과 일본이 합하여서 앞으로 아시아에 새로운 빛이 되고, 새로운 영광의 터전을 넓혀야 하는 중차대한 책임이 저희들에게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과거의 역사적인 일을 넘고, 사망의 혈육적인 한의 관계를 넘어서 당신의 고귀하신 사랑과 당신의 고귀하신 인연으로 묶여진 인연을 존중하면서 이 영광의 사명을 감당하고 남음이 있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여기에 모인 당신의 자녀들을 굽어살피시옵소서. 여기에는 뜻 앞에 있어서 전진 또 전진하기 위하여 몸부림치는 자도 있을 것이고, 스스로 고독 앞에 사로잡힌 자도 있을 것이며, 스스로 자탄 가운데 머물러 있는 자도 있을 것이옵니다. 그뿐만 아니라 식구들의 염려의 대상이 되는 자도 있을 것이며, 당신의 염려의 대상이 되는 자도 있을 것이옵니다. 이러한 모습들을 일체가 될 수 있게 모든 것을 당신의 사랑으로 메우시옵고, 당신의 은사로서 메우시어서 하나의 기쁨의 자리에 안길 수 있는 당신의 아들이 되고 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길,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저희들이 누구를 만나기 위해 이 자리에 왔는가 생각하게 될 때, 아버지의 존전이 그리워 이 자리에 오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의 성상 앞에 기억될 수 있으며, 당신의 성상을 대하여 엄숙하고 고귀하신 아버지의 가치를 느낌은 물론 그러한 자신의 가치도 느낄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후의 시간도 아버지의 은사 가운데에 있게 하여 주시고, 저희의 전체를 맡아 주시옵소서. 남아진 전체의 시간 시간들이 자랑이 되고 생명의 인연이 될 수 있게끔 보호하여 주시옵고, 지켜 주시옵고 지도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부탁드리면서, 이 모든 말씀 참부모님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사람은 누구나 오늘보다는 내일이 낫기를 바라고, 과거보다는 미래가 낫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을 두고 보더라도 처한 환경이 과거보다는 현재가 낫기를 바라고 오늘 현재의 입장보다는 미래가 낫기를 바랄 것입니다. 얼마만큼 나아지기를 바라느냐 하면 시간을 초월하고 공간을 초월하여 무한까지 미쳐지길 바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소원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가치하게 전진할 것이 아니라 무한히 빛날 수 있는 가치와 더불어 전진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이러하므로 인간을 지으신 절대자가 계시다면 그 절대자도 현시점보다 미래의 시점을 더 빛내고 싶으실 것입니다. 또한 우리 모습을 보시면서도 오늘의 우리 모습보다 더욱더 빛나는 내일의 우리의 모습을 요구하시리라는 것을 우리는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전진을 하고, 보다 나은 결과를 대하게 될 때는 기쁨을 느낄 것이지만 현재보다도 환경적인 여건이 낙후되는 입장에 서게 될 때는 슬픔을 느끼실 것입니다.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우리 인간이 그가 관계되어 있는 모든 내용과 사정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을 분석해 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절대적인 중심이 되시는 하나님도 우리 인간의 모습을 넘어서는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나은 가치를 추구하는 마음은 우리 인간은 물론 하나님도 갖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도 보람있는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는 생각을 할 때, 오늘보다 나을 수 있는 내일, 지금보다 나을 수 있는 금후를 어떻게 형성하고 개척하여 보람있는 세계와 보람있는 인생길을 걸어가느냐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정지 상태에서는 보람있는 나를 추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됩니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가 아무런 차이가 없다면 거기에는 진전이나 발전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제보다는 오늘이 낫고, 오늘보다는 내일이 나은 자아를 발견할 수 있고, 진전해 나가는 자아의 가치를 스스로 느낄 수 있는 자리에 서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제보다 오늘이 못하고, 오늘보다 내일이 못하다면 정지가 아니면 후퇴의 운명을 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라면 어느누구를 막론하고 현재의 자기보다 더 낫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더 낫다는 것은 반드시 현상태에 덧붙이는 것을 말하는 것이요, 못하다는 것은 현상태보다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낫다는 것은 흥한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의 추가 좌우를 가름하고, 전후를 가름하는 것처럼 우리 인생도 나를 중심삼아 가지고 우로 기울어지느냐 좌로 기울어지느냐, 혹은 앞으로 기울어지느냐 뒤로 기울어지느냐에 따라 바뀌는 운명길에 서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생길에서 자신이 우로 기울어지거나 앞으로 기울어지기 위해서는 어떠한 힘의 작용이 있지 않고는 그렇게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보다도 내일이 빛나기를 바란다면 가중된 그 무엇을 플러스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서만이 진전이 성립되는 것이며 그래야 현재의 정지된 입장을 극복하고 새로운 방향으로 행진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전진을 한다는 것은 운동을 한다는 것이므로 그 자체내에 있어서 힘이 소모됩니다. 이러한 현상이 벌어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인 것입니다. 어떠한 작용이 벌어지려면 반드시 거기에는 힘의 소모가 있게 되는데, 그때에 소모되는 힘을 자체내에 유지되어 있는 힘으로만 사용하여 다 소모한다면 정지된 환경을 움직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3의 힘을 끌어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 제3의 힘으로 말미암아 정지된 현재 입장보다 나아진다면 스스로 노력해야 한다는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때의 노력은 자기 자체를 중심삼고 목적을 추구하는 노력이 아니라 제3점의 목적 추구라는 시점에서부터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새로운 목적의식을 자극할 수 있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된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국민학교 1학년은 1학년에 머물기 위해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2학년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공부하는 것이요, 2학년은 3학년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공부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인생도 현재의 자기 가치를 보다 보람되고 가치있게 하기 위해서 현재의 자기 입장보다 차후의 보다 나은 자기 입장을 생각하면서 그것을 추구하는 자리에 서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생활 환경에 선다면 전진하는 양상이 배가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전진은 어디서부터 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현재의 정지되어 있는 상태보다 제3의 목적에 대한 추구력이 얼마나 가중해 나가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것이 자기의 입장을 변모시키는 동기가 된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정지된 현재의 입장에 그냥 있을 것이 아니라 새로운 모습을 지니기 위해 노력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 자신의 모습을 변모시키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끊임없는 열의가 필요합니다. 열의가 문제가 됩니다. 열의가 없어 가지고는 안 됩니다. 무엇보다도 열의가 문제가 됩니다. 목적을 정해 놓고, 그 누가 말하지 않더라도 가야 할 것을 아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노력에 앞서서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열의입니다. 열의에 찬 노력, 이것이야말로 현재 입장을 변모시키는 중요한 요인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열의가 있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열의는 상대적인 열의이기보다는 자주적인 열의이어야 되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열의에 찬 사람이 무한한 세계를 추구하고, 빛날 수 있는 인생의 가치를 추구하는 가치있는 사람으로 등장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얼마나 환경을 제압할 수 있고 얼마나 현재의 고착된 입장을 타파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여러분 자신에게 사무쳐 하나님이 필요로 하는 열의로 나타나게 될 때에는 그것이 여러분이 생각하지도 못했던 제3의 목적에 도달하는 거리를 단축시킬 수 있는 요인이 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이러한 열의를 가진 사람을 동경하는 것입니다. 열의를 가지고 직행하려는 사람은 그 앞길에 모험이 가중되어 오더라도 그것을 타파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열의가 없는 노력은 중단되기 쉬운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진을 바라는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필요한 것은 내 자체가 어떻게 영속적으로 전진을 지속시킬 수 있는 열의를 보급받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열의가 없으면 자극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열의가 없는 자극은 필요없는 것입니다. 강한 자극이라는 것은 강한 열의에 의해 인연되어진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 열의에 찬 환경, 열의에 찬 개체, 열의에 찬 상대를 추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완성된 인격, 무한한 인격을 추구하는 우리 인간에게는 무한한 열의가 없어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무한한 인격을 추구하는 우리 자체를 두고 볼 때, 언제나 연속적으로 그 열의를 추구할 수 있는 자체가 되어 있느냐, 그렇지 않으면 그러한 열의를 갖고 목적을 달성시키려 하는 내 자체가 되어 있느냐가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러한 두 입장 중의 어느 한 입장을 취하지 않고는 완성된 인격을 추구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추구하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신앙생활을 중심삼고 볼 때에 신앙길에는 반드시 모험이 뒤따릅니다. 그것은 환경과 더불어 이것을 해결지어야 할 싸움의 노정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길을 강한 신념을 갖고 간다면 그 신념에 비례되는 만큼 소모전이 벌어지게 됩니다. 그때에 그 소모전을 극복해 내고도 남을 수 있는 열의가 없게 될 때는 그 환경에서 전진은 커녕 도리어 후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그러한 열의를 보급시킬 수 있는 힘이 자체내에 있든가 아니면 상대적으로 그러한 모체가 되는 하나님과 인연을 맺어 그 열의를 보급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전진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언제나 그러한 열의에 사무칠 수 있는 자리에 계시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응당 하나님은 그러한 자리에 계셔야 합니다. 그래야 그러한 자리에 있지 못한 인간을 그 길로 몰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요, 능치 못함이 없는 주체이시기 때문에 열의에 있어서도 주체가 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하나님이 열의의 주체가 되어 계신다 하더라도 나 자체가 스스로 열의를 받아들일 수 있는 바탕이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열의를 보급받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나님은 순수하기에 우리 자체도 순수해야 되겠습니다. 여기에서 제3의 목적을 추구하게 될 때, 그 목적은 나와 더불어 영원한 인연으로 맺어지는 것을 우리는 절감해야 되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삼각관계에 있지만 내 안에 있을 수 있는 것이요, 나와 더불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체 내에 있는 그 목적의식을 얼마만큼 자각할 수 있느냐 하는 그 자각의 감도가 열의로 화하여 열의의 본체 되시는 하나님을 유도할 수 있는 도화선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나 자신이 무력하여 열의의 도화선이 되는 길이 없게 될 때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일치화시킬 수 없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의 동맥이 있으면 하나의 정맥이 있어야 되고, 한 곳에서 주면 한 곳에서 받아야 되며, 백을 주면 백을 받아들일 수 있는 나 자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열의를 유발시킬 수 있는 그 동기는 무엇이냐? 순수해야 합니다. 사(邪)된 것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백이 들어오게 되면 백으로써 순수하게 반영시킬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이것이 문제 되는 것입니다. 또 그 열의라는 것은 어디서부터 발생하느냐? 순수한 것을 터전으로 해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 순수한 터전을 중심삼아 가지고 열의를 얼마나 추구하느냐, 얼마나 필요로 하느냐 하는 것에 따라서 발생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얼마나 사모하고 얼마나 흠모하여 나 자체가 그 무한한 열의의 주체 앞에 나타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 문제된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그리움이 앞서야 되고, 간절함이 앞서야 되는 것입니다. 간절함이 있는 그 이면에는 반드시 열의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그 주체가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을 보고 싶고, 만나고 싶고, 같이 있고 싶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싶고, 사랑을 받으면서 그 사랑 가운데에서 살고 싶고, 그 사랑 가운데에서 끝을 맺고 싶은 흠모의 심정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바람의 마음이 간절한 데서부터 순수한 바탕을 중심삼아야 하나님의 그 사랑의 인연이 나와 더불어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될 때, 우리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을 그리워하느냐 하는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얼마나 하나님을 흠모하고 사모하였느냐? 현재의 내 입장을 전부다 잊어버리고 하나님 앞에 몽땅 바쳐드릴 수 있는 입장에 서 있느냐 하는 문제, 다시 말하면 완전한 플러스 앞에 완전한 마이너스가 될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 완전한 마이너스가 완전한 플러스 앞에 대할 수 있는 그런 경지에 들어가게 되면 완전한 플러스는 완전한 마이너스에 대해서 직행해 오는 것입니다. 순수한 직행의 행로를 통하여서 그 완전한 플러스는 완전한 마이너스를 향해 돌진해 온다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마이너스는 새로이 후방에서 밀어주는 반대의 작용을 일으킬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직행하는 힘을 정지의 모양으로 만들려면 직행하는 힘에 반대되는 하나의 힘이 있음으로써 직행하는 힘을 밀어내는 작용체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완전한 플러스가 나를 향하여 직행하여 내 순수한 바탕 앞에 부딪치게 될 때, 내가 완전한 마이너스의 입장을 지니게 된다면 그 방향은 그 마이너스의 뒤를 따라올 것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 제3의 힘의 작용이 미쳐짐으로 말미암아 현재 입장에서 전진적인 상태로 나아갈 것입니다. 이것은 작용체에 있어서나 운동법칙에 있어서 불가피한 현상인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우리가 이런 자리를 추구하지 않고는 새로운 열의에 접할 수 있는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기도가 필요한 것이요, 정성이 필요한 것입니다. 기도라는 것은 자기 자체의 무한한 가치를 정지시키거나 고착시키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정지된 입장에서 연속적인 전진을 추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절대자 앞에 기여하는 바탕을 추구하자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리가 기도하는 자리요, 정성들이는 자리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 자체가 절대적인 힘 앞에 있어서 끌려들어가든가 밀려들어가는 자리에서만이 전진의 현상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인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정성들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정성들인다는 것은 나 자체를 무의 경지에 몰아넣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완전한 플러스라면 그 존재 앞에 완전한 마이너스의 형태로 몰아넣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알게 되는 것입니다.
고기압권에 하나의 저기압권이 생겨나게 되면 거기에 있던 고기압은 다른 곳으로 옮겨지게 됩니다. 저기압권에 의해 고기압은 다른 어딘가에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 어딘가에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저기압권이 커지면 커질수록 고기압권은 이에 비례하여 다른 곳에서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저기압이 진공상태에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한편으로는 끌어들이는 작용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방출 현상이 벌어지는 동시에 흡수현상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흡수되고 보급 보충되면서 여기에서 전진적인 결과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에서 희생 봉사하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무한한 인생의 가치를 추구함에 있어서 인간은 누구나 마찬가지 입장이지만 희생하고 봉사하라는 것은 기압으로 말하자면 저기압권 형성을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희생 봉사하는 데 있어서 나 자체를 완전히 주고 나면 저기압의 경우와 같은 진공상태가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진공이 생겨나면 우주는 내가 지녔던 양에 비례한 만큼의 가치를 반드시 보급해 주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자, 즉 하나님이 계시느냐 안 계시느냐를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참다운 모습으로서 줄 수 있는 환경을 갖추게 될 때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보충 보급을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라고 하신 것입니다.'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라'는 말씀은 누구에게 해당하는 것이냐? 하나님께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다하는 것이 극에 달하게 되면 결과가 어떻게 나타날 것이냐? 상대 앞에 있어서 사랑의 힘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상대를 자극시킬 수 있는 하나의 작용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런 작용이 하나님 앞에 미치게 될 때는 하나님의 사랑이 나에게 미쳐 오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신 대로 그 사랑을 다하게 되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마음도 영이요, 뜻도 영이요, 정성도 영일 것입니다. 그러면 영의 자리에서 사랑하라는 말이냐? 아닙니다. 영되는 입장에까지 나가게 되면 더 큰 사랑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사랑의 작용의 요인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우리에게는 오늘날 얼마나 하나님을 사모했느냐 하는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사모하는 데, 자기의 인격관을 중심삼고 그 관을 채우기 위해서 사모한다면 자기의 영속적인 발전을 상실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스스로 그 한계선에 머물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 자신을 잊어버리고 무한하신 하나님을 추구하면서 무한히 정성들이고, 무한히 그리워하고, 무한히 흠모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심정이 가중되는 자리에 들어가게 되면 반드시 하나님으로부터 인연되어 오는 자극적인 열의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 열의를 가지고 작용을 하게 되면 하나님의 사랑이 나에게 미쳐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힘으로 나타나는 것이요, 환경을 타개시킬 수 있는 절대적인 요인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리에 있는 사람은 틀림없이 전진 발전할 것입니다. 이것이 힘이 존속하는 원칙이며, 힘이 작용하는 원칙이라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야 될 것입니다.
자동차를 두고 볼 때, 자동차가 달리는 그 이면에는 달릴 수 있는 힘을 보급시키는 영속적인 그 무엇이 있다는 것입니다. 받고자 하는 일면에 주고자 하는 작용을 계속해야 자동차가 달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피스톤이 한번 흡입작용을 하게 되면 진공상태가 되어 연료를 보급받게 됩니다. 그렇게 하여 피스톤은 왕복운동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작용을 통해 엔진이 움직이고 그 움직이는 엔진을 통하여 새로운 열의에 찬 진전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개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열의로 말미암아 자극을 느끼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제2의 목적이 현실보다도 크다면,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자극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이 자극을 어떻게 영속적으로 보급받아 자신을 유지시키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이 목적한 바를 성사시키느냐 못 시키느냐 하는 결과가 좌우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얼마나 순수한 바탕 위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희생하였고, 또한 하나님을 흠모하고 사모하였느냐 하는 것이 문제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리워 나 자신을 망각할 수 있는 자리, 눈물을 흘리되 내가 눈물을 흘리고 싶어서흘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입장을 망각한 입장에서 하염없이 눈물흘릴 수 있는 자리, 그 자리는 나와는 관계가 없는 자리같지만 나를 형성할 수 있는 절대적 요인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 자기가 태어나고 싶다 하는 의식이 있어서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의식 이전에 하나님의 힘으로 말미암아 태어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발전도 그 자체의 의식기반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스스로를 망각하는 자리, 의식이전의 작용적인 결과가 다짐되는 거기에서 보람있고 가치있는 내 자체의 형성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의식에 앞서 하나님이 여기에 먼저 존재(存在)할 수 있는 동기의 바탕이 인연됨으로써 보다 나을 수 있는 내 자체가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 자기 자체가 '나는 이걸 느끼기 위해서 기도하였더니 느낀다'고 하는 자리는 정지되고 고착된 환경을 넘어서지 못한 자리입니다.
스스로 정성을 들이면서도 자기가 정성들이는 것을 잊어버릴 수 잇는 자리, 나 스스로 기도하면서 감사의 눈물을 흘리더라도 스스로 감사하다는 생각을 해서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지 모르게 생각하기 이전에 오관이 먼저 작용을 해서 눈물지을 수 있는 자리, 그러한 자리에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식하기에 앞서서 목적을 추구하는 것보다도, 의식에 앞서 목적을 추구시켜 주는 인연이 나와 더불어 관계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사람은 발전하게 될 것입니다.
만일 예언하는 사람이 자기의 의식 기관을 중심삼아 가지고 예언을 한다면 그것은 자기의 한계선을 넘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자기를 바탕으로 하되 무한한 힘의 모체가 그 사람의 오관을 통하여 나온다면 거기에는 새로운 예언이 등장할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자기를 동기로 해서는 그러한 가능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의 은사에 접하는 경지에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나'라는 관념은 쇠약해지는 것입니다. 그런 무아의 자리에 들어가야 되는 것입니다. 무의 자리에 들어가서 유의 입장에서 느끼던 이상의 힘의 자극을 받게 된다면 거기에서 재창조적인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가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서만이 강한 자극을 느낄 수 있는 것이요, 현실의 나보다 전진되는 나를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위 환경을 의식하는 자리에서는 신비스러운 기도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과거의 인상이 또렷또렷하게 남아지는 자리에서는 아무리 열심히 기도를 하더라도 현재의 환경을 초월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무아경을 찾아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순수한 자아를 발견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거기에는 사된 모든 요인을 제거시키고 순수한 선의 요소만이 존재해야 합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선의 본 방향에 일치될 수 있는 요인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이러한 바탕을 마련하는 것이 기도하는 사람들이 모색해야 할 중요한 요인이라는 것을 느껴야 됩니다.
안테나를 예로 들어본다면 안테나는 스스로 찾아가 진동하는 전파를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주위에서 오는 전파를 느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도 신의 무한한 감각을 흠모하며 그 선의 감각을 받을 수 있는 완전한 자리에 설 때 진동하는 감각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감각을 느끼게 될 때 진동하는 현상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이와 마찬가지의 입장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고요한 자리에서 무한히 신의 감각을 받을 수 있는 안테나와 같이 자기의 입장을 잊어버리고 신으로부터 오는 감각을 느껴야 합니다. 무한히 높고 높은 데에 장치되어 있는 안테나와 같이 높이고 높여서 무한히 순수하고, 무한히 가치있고 보람있는 자아를 인식하면서, 천길 만길 무한한 경지의 자리로 나아가게 될 때는 거기에서 자기도 모르는 제3의 힘이 자기에게 접속해 들어온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경지를 찾아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나의 생각이 사된 생각이었으면 그것을 회개해야 됩니다. 또 내 과거의 인식이 남아져 들어오거든 그 인식을 완전히 포착해서 그것이 사된 것이냐, 혹은 옳은 것이냐를 가려내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것이 옳은 인식이었다면 그것을 현재에 플러스시킬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이 사적인 인식이었면 그것을 완전히 제거해 버리는 방법을 모색해야 합니다. 이렇게 보람있는 과거의 인연을 현재에 플러스시키지 못한다면 아무리 과거의 좋은 인연이었다 할지라도 그 인연은 자기가 추구하는 미래상에 하등의 관계를 맺을 수 없는 것입니다.
또 현재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사실, 의식이 선하냐 악하냐 하는 문제를 중심삼고 볼 때, 그것이 선 앞에 있어서 보탬이 되지 못하는 의식이면 완전히 회개하여 청산지은 후에 순수하고 선한 인연으로 남아질 수 있는 것만을 보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전진적인 요인이 될 수 있는 것이지 그냥 그대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미래에 대해서도 자기가 생각하는 것이 순수하냐, 순수하지 못하냐, 선하냐, 악하냐 하는 문제를 두고 자기가 의식하는 미래상에서 선한 요소만을 가려서 거기에 보람되고 진일보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보다 나은 전진을 추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선으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채워 선으로 충만된 자리에 들어가야 합니다. 이러한 자리에 들어간다면 무한한 힘의 그 중심에 존재 한다는 것을 체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때에 새로운 신비의 창조적 역사는 나타나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무한히 선으로 충만되었다 할진대 그 중심은 반드시 선의 주체 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나 자체가 그런 자리에 들어간다면 마음 가운데 하나님이 임재하고 계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과함과 동시에 그 충만하게 차 있는 선이 내것이라는 인식을 느껴야만 새로운 우주관을 체휼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과거의 의식에 고착되어 있고, 현재의 의식에 집착되어 가지고 자기 나름대로 구상한 미래의 의식을 가진 그 자리에서는 하나님을 모실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선한 의식만을 남기고 악한 모든 요인을 제거할 수 있는 선의 바탕이 되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반사경에 90도로 빛을 비추면 빛이 왔던 방향으로 그대로 반사됨으로 말미암아 빛을 보냈던 주체가 그 빛을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이 90도 된 반사경에 직행해 오는 빛은 반발하는 것입니다.
빛은 입사된 각도에 비례해 가지고 반사되는 것이므로 빛이 수직의 각도를 이루며 반사경에 부딪치게 될 때는 그 부딪친 것이 그냥 그대로 반사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사경이 순수해야 됩니다. 만약 어떠한 불순 부분이 남아있게 될 때는 그것이 순수하게 반사된 빛으로서 그 모체를 자극하지 못할 것입니다. 완전한 반사경일 때는 순수하게 반사된 완전한 빛으로서 그 모체를 자극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순수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기뻐할 것입니다.
발전은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발전을 추구하기 전에 자기 자체내의 순수성을 어떻게 조성하느냐 하는 것이 더 문제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는 기도하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요, 정성들이는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정성은 그냥 들여서는 안 됩니다. 과거를 청산하고 들여야 됩니다. 과거의 의식이 남아 있다면 그 의식이 나를 어디로 끌고 가겠느냐 하는 생각을 해야 됩니다. 과거의 의식에 내가 도취하여 얼마나 강한 입장에 서 있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과거가 순수했느냐고 비판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순수한 입장에 처했었다면 선했느냐 하는 것을 비판해야 되고, 현재 그런 입장에 서 있느냐 하는 것을 비판해야 됩니다. 또 내가 바라는 소원이 순수하냐 하는 것을 비판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순수한 선의 입장이란 무엇이냐? 자기를 위하는 데 있어서는 순수한 선은 존속할 수 없습니다. 선은 자기를 강화시키는 데는 존속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 존속하지 않느냐? 선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모시기 위한 하나의 바탕이기 때문입니다. 선 가운데서 하나님을 모신다는 것은 선의 주인으로 하나님을 모시는 것입니다. 선의 주인은 타락된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선을 중심삼고 볼 때, 나를 높이고 나를 빛내기 위한 자리에서 선을 추구하면 그것은 하나님에게 반역하는 자리이지 하나님을 모셔드리는 자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는 '나'라는 것이 도착해 있는 자리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선의 중심으로 임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선은 보다 큰 것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고자 할 때에도 내 개인이 부활되는 은혜를 받고자 해서 원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구하고도 남을 수 있는 은혜를 받고자 해서 원해야 하는 것입니다. 보다 큰 선을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자기의 의식이 고착된 자리에 있어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자기 의식 자체가 선을 중심삼고 이동할 수 있는 보다 가치적인 입장의 자체가 되어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를 희생시켜야 합니다. 자기를 완전히 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해야만 새로운 보급로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완전한 마이너스가 생겨나면, 이 마이너스를 작용시킬 수 있는 완전한 플러스는 벌써 임재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은혜의 자리에 나가게 되면 하나님이 언제 오셨느냐 하는 것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같이하는 자리에서 여러분은 하나님이 벌써부터 계셨다는 것을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나로서는 미칠 수 없는 인연을 갖고 계신다는 것을 인정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의식관념을 초월한 자리에 하나님이 임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을 추구하는 데 있어서 제한된 한계선에서만 충족시킬 것이 아니라 그 한계선을 넘은 자리에서 충족시키라는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하나님은 내적인 자리를 잡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형태와 형상으로 나타나지는 않지만 만약 형태와 형상으로 나타나게 된다면 그것은 절대적인 인격을 형성하는 요인으로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인간은 의식기관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기에게 임재해 계시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순수해야 되겠습니다. 얼마나 순수해야 되느냐 하면 거울로 말하면 평면경처럼 순수해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순수한 울음은 어떠한 것이냐? 세포와 모든 신경기관이 일치되는 자리에서의 울음이 순수한 울음입니다. 일치되었다는 것은 충만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울음에는 기쁨으로서 충만될 수 있는 인연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또 기쁨을 느끼면 그 기쁨으로 충만할 것이 아니라 기쁨을 자극시킬 수 있는 슬픔도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항상 기쁨만을 자극시켜 주면 나중에는 기쁨을 못 느끼게 됩니다. 기쁨이 있는 반면 그 기쁨을 자극시킬 수 있는 슬픈 일면도 내재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슬픈 일면이 빠르게 이동됨으로 말미암아 우리 의식기관으로는 잘 느끼지 못하지만 절대적인 선자체 앞에, 기쁨 앞에 있어서는 슬픈 일면은 넘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빛이 있으면 어두움이 있고, 높은 곳이 있으면 낮은 곳이 있는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기쁨만을 느낄 수 있는 경지는 기쁜 경지가 아닙니다. 그런 경지가 방향을 바꿔 가지고 반대의 현상이 될 때에는 슬픔을 느끼는 것입니다.
웃는 모양은 우는 모양과 비슷합니다. 여러분, 웃는 모양과 우는 모양에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생각해 보세요. 어떤 사람은 웃는 모양이 꼭 우는 것 같습니다. 얼굴 변화를 보면 웃을 때도 눈이 작아지고 얼굴에 주름살이 잡히고, 울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웃을 때는 공적인 것을 드러내는 것이요, 울 때는 사적인 것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웃을 때에는 공적인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옛말에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웃는 사람에게 나쁘게 하면 벌 받는다는 말이요, 웃음을 반대하는 사람은 용서를 못 받는다는 뜻입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것은 바로 그런 노릇을 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웃는 것은 무한히 공적인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웃고 계실 것이냐, 울고 계실 것이냐 하는 것을 생각해 볼 때, 하나님은 공적인 분이기 때문에 울고 계셔서는 안 됩니다. 웃고 계셔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나 입을 벌리고 웃고 계시는 것은 아닙니다. 충만한 웃음을 웃고 계셔야 하는데, 까딱하면 폭소가 벌어질 것이요, 까딱하면 폭소의 반대되는 폭비(爆悲)가 벌어질 것입니다. 그러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슬픈 면을 알게 되면 그 슬픔 앞에서는 내 슬픔은 사라지기 때문에 기쁨이 나오는 것입니다. 슬픔이 지나면 기쁨이 오는 것입니다. 은혜의 자리도 그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할 때는 눈물 콧물을 흘리고, 창자가 끊어지고 숨이 끊어지는 듯한 경지까지 들어가야 됩니다. 이렇게 한바탕 울고 나면 기쁨이 오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냐? 기쁨에 충만해 계시는 반면, 무한한 슬픔이 폭발되어 나올 수 있는, 안팎으로 두루 충만함을 갖춘 분입니다. 그래서 그 슬픈 일면을 찾아 들어가 끝에 가게 되면 기쁨으로 화하는 것입니다. 또 기쁜 일면을 찾아 들어가게 되면 슬픔의 경계선이 점차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차되어 하나를 이루고 만족을 느낄 때 폭발적인 만족을 느낄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여러분, 뜨거운 것과 찬 것이 부딪치게 되면 어떻습니까? 폭발되지요? 그렇지요? 그러나 뜨거운 것끼리 부딪치면 폭발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조화를 이루며 형성되어 있는 절대적인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여러분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사람들은 친구를 원할 때 눈물이 있는 친구를 원합니다. 그렇다고 하루 종일 울고, 찔찔 짜는 그런 친구를 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눈물이 있는 반면 웃음이 충만한 사람을 원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언제나 찡그린 얼굴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넘치는 희열을 발견할 수 있어야만 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받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남이 울 때 같이 울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복 받는 사람입니다. 그런 거예요. 복이라는 것은 영원히 떠나고 싶지 않는 자리에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어요?
그 복받는 자리는 어떤 자리냐? 영원히 떠나고 싶지 않은 자리에 복은 찾아오기 때문에 복받을 수 있는 자리는 부자의 관계와 같은 자리일 것입니다. 어떤 부모가 자식이 슬퍼하는 데 자기와는 관계없다고 하겠습니까? 아무리 그렇게 다짐하여도 다짐하는 그 의식을 넘어서 먼저 눈물이 앞서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이 부모의 심정인 것입니다.
그러면 부모의 사랑과 자식의 사랑의 차이는 어디에 있느냐? 부모의 사랑은 주고 나서도 잘못 줬다고 후회할 수 있는 마음이 바탕이 되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효도하는 자식이 있다 하면 '나는 부모 앞에 효도하고 있다' 하는 것을 생각하는 입장이 됩니다. 이것이 부모에 대한 자식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이렇게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효도하고 있다는 것을 자기 자신이 안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식의 사랑은 부모의 사랑보다 낮은 것입니다. 낮은 것이기 때문에 부모의 사랑을 필요로 하고, 부모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찾아가는 사람, 무한히 순수한 바탕을 찾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눈물이 없어 가지고는 그 자리에 못 들어갑니다.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면 자기의 과거를 생각하며 어떠한 형벌을 받아도 당연하다는 자신을 발견함과 동시에 그런 자신을 미워해야 합니다. 그 후에 기쁨의 소리가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순수한 목적을 추구해 나가는 사람들은 앞으로 가더라도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이요, 뒤로 가더라도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선한 자리는 앞으로 가나 뒤로 가나 어디나 천국입니다. 우리 인간들이 그런 자리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 바탕을 다시 회복해야만 영원한 진전과 발전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여러분은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할 때는 과거를 회개하고 현재를 회개해야 합니다. 솔직해야 된다는 거예요. '나는 과거에 이러이러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때도 있었고 이러이러한 때도 있었습니다'라고 회개해야 됩니다. 그리고 이런 죄악된 내가 오늘 이 자리에 세워진 것에 대하여 감사의 마음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과거의 잘못된 것을 생각할 때, 감사의 눈물이 앞서 가지고 자기 자체를 자책하면서 하나님의 가혹한 심판의 채찍이 있더라도 그것을 달갑게 받고 자기 스스로를 하나님 앞에 제물로 바쳐 드리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이러한 자리에서만이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과거를 용서받고, 현재를 용서받고, 미래를 보장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과거의 악이 끌어당기는 양이 많고, 현재의 악이 얽어매는 그 구속이 많아 가지고는 진정한 해방이 맛볼 수 없습니다. 과거가 선으로 영위되고, 현재가 선으로 영위되고, 미래에도 선으로 남아질 수 있는 자신이 되기 위해서는 선을 영위하기 위한 자기 자신의 욕구가 강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 강한 것이 무엇으로 나타나야 하느냐? 흠모의 마음 바탕을 중심삼은 열의로 나타나야 됩니다. 그 열의가 환경에 부딪쳐 갈 때, 그 환경에서는 재창조의 현상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자체에서는 인격이 완성되는 것이요, 내 자체의 인격을 중심삼고 상대적인 목적의 세계를 향하여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극을 받아 가면서 나아가면 기필코 선한 결과가 창조될 것이며, 필연적으로 진전의 현상이 나타날 것입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지금까지 생활하던 그대로의 모습 가지고는 안 됩니다. 여기에는 보다 순수하고, 보다 순결한 바탕을 만들어 놓을 수 있는 작용이 있어야 됩니다. 이 작용을 무엇으로 하느냐? 이것이 기도라는 것입니다. 순수한 기도가 필요합니다. 여러분들이 순수한 마음으로 기도하면 힘이 나오는 것입니다. 자기의 욕망을 중심삼은 자리에서는 하나님은 절대 움직이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해보면 알겠지만 자기 욕망을 중심삼아 가지고 기도하면 하나님은 절대 움직이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와 우주를 위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와 우주에까지 미쳐 나갈 수 있는 인연이 없어 가지고는 무엇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말은 거짓말이 됩니다. 위하려고 존재한다면 그 위할 수 있는 힘이 보급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순수하고 선한 인간을 중심삼고 보급되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그리움에 사무치게 될 때는 그러한 경지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일생에 언제 한번 신경이 굳어지고 눈이 굳어지듯이 하나님을 보고 싶어하고 그리워해 봤느냐는 것입니다. 그 이상 감각적일 때 그것은 나의 의식적인 감각이 아니라 초의식적인 감각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양전기면 양전기, 음전기면 음전기의 수억 볼트가 합해지면 그 힘이 커지는 것입니다. 커진 힘끼리 합해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도 모든 신경기관이 산만해 가지고는 안 됩니다. 통일이 되어야 합니다. 완전히 하나되어야 높아질 수 있는 정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정상은 자기를 위주한 정상이 아닙니다. 더 높아질 수 있는 정상이기 때문에 자기가 있어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순수한 공적인 바탕에서 시작되는 그런 경지를 모색해야 하고, 나 자체를 그런 경지의 순수한 바탕으로 유입시킬 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하지 않고는 영원한 생명의 인격을 갖출 수 없고, 보다 가치적인 인격을 추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는 어디에 있느냐? 상대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삼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놓고 눈물 흘릴 줄 모르는 사람은 상대를 위해서도 눈물 흘릴 줄 모르는 사람이요, 자기를 놓고 웃을 줄 모르는 사람은 상대를 위해서도 웃을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가 웃었다 해도 그 웃음은 순수한 웃음이 아니요, 만민에게 필요한 웃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를 내세우기 위해 웃는 웃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나 자신을 중심삼고 우주주관을 바라기 전에 자아주관을 완성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말하기를 '천국은 네 마음에 있다'고 한 것입니다. 현재 입장을 자극시켜 가지고 미래의 입장을 변혁시킬 수 있는 그런 요인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 바탕은 어디까지나 순수해야 됩니다.
기도할 때 선령과 악령은 어떻게 가리느냐 하면 자기의 마음이 수직으로 비추는 빛을 반사하는 순수한 반사경처럼 되어야 합니다. 자기 마음이 그래야 된다는 것입니다. 선악이 가려야 할 입장일 때는 절대 자기의 욕망을 먼저 생각하여서는 안 됩니다. 아무것도 없는 영의 자리에 들어가야 됩니다. 순수한 자리에 들어가 가지고 '나는 참에서 태어났고, 참에서 살고, 참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하는 경지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 경지에 들어가게 되면 선악을 대번에 알게 되는 것입니다. 설명이 필요없다는 거예요.
악과 선의 바탕은 언제나 서로 반발하는 요소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악은 자기 자체에서 또 다른 자체를 세우려 하기 때문에 선은 여기에 반발하는 것입니다. 악은 파탄시키는 작용을 하기 때문에 순수한 마음을 갖게 되면 자기에게 악이 침범해 들어온다는 것을 대번에 아는 것입니다. 기분으로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심령상의 전진을 가져오기 위해서는 보다 순수한 마음을 갖추어야 됩니다. 제일 기준이 되는 그 경계선은 순수한 바탕입니다. 순수하다는 것은 순수한 자기를 중심삼고 시대를 넘어서 누구나 좋아할 수 있는 공적인 것입니다. 어린애와 같은 자리가 순수한 자리입니다. '누구든지 어린애와 같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이 거기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그것을 여러분은 흠모하고 그리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배고플 때 먹을 것을 그리워합니다. 선생님은 옛날 감옥에 있을 때 그런 경험을 많이 해봤습니다. 육신이 배고플 때는 얼마나 먹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지 모릅니다. 그럴 때 먹을 것을 바라는 그 간절한 마음보다도 하나님을 더 간절히 그리워할 수 있는 마음을 어떻게 발견하느냐, 그것이 문제입니다. 아무리 어렵고, 서럽고, 억울하고 배고픈 자리에 있더라도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면 자기 완성이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렵고 서럽고 억울하고 배고픈 것들을 바탕으로 해 가지고 그 이상의 것을 어떻게 느낄 수 있느냐? 서럽고 어려운 일을 아무리 무시해도 그것은 나한테서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더 높은 곳을 위하는 마음을 보충시켜 가지고 그 마음으로 서글픈 자리를 전부 채우고 남아 기쁨을 느끼는 자리에 서야만 기쁨이 영주하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할 때 슬픔으로 시작해서 슬픔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슬픔으로 시작해서 무한한 기쁨으로 끝나는 자리, 즉 전진하는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또, 기쁨으로 시작했으면 자기 자신을 중심삼고 기뻐할 것이 아니라 더 큰 나를 중심삼고 그렇게 되지 못한 것에 대해 슬픔을 느끼는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자리는 새로운 열의를 갖고 출발해 나오는 자리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지금 자기를 중심삼고 기쁨으로 출발했다 하더라도 그 자리는 더 큰 문제를 중심삼고 본다면 말할 수 없이 슬픈 자리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그 슬픔을 붙안고 나오는 데는 상상도 못할 열의에 충천되는 새로운 출발의 동기를 안고 나와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런 자리는 하나님과 더불어 짝을 이루는 자리가 아니면 안 됩니다.
인간은 제한된 존재입니다. 여러분의 인격은 제한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무한한 작용의 영역에 어떻게 들어가서 접선하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볼 때 고착된 의식 관념을 가지고는 자아주관이 불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를 믿는 사람들은 참선을 통하여 무의 경지로 들어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람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생각하기 전에 마음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먼저 자각해야 합니다.
내가 무엇이냐 하는 것보다도 마음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 더 큰문제입니다. '나'라고 하면 몸과 마음이 합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나' 가운데서 몸을 떼어버린 마음은 무엇이냐? 그러나 그것이 무엇이다 하는 인식이 나로 말미암아 의식된 것이라면 완전한 것이 아닙니다. 무아경인 순수한 자리에서 '내가 이렇다'라고 인식된 것이어야 완전한 것입니다. 그런 초자아적인 경지에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갈 수 있는 사람은 예언을 할 수 있는 것이요, 미래를 투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타락한 자리에 갖다 놓아도 스스로 뛰쳐나와 생명을 주관해 가지고 기쁨의 자리에 생명을 이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무한히 진전할 수 있는 인격관이 있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 바탕은 순수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곳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열의가 있어야 합니다. 그 열의는 지금까지의 그런 열의가 아니라 새로운 열의의 내용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걸 길러야 되겠습니다. 그것은 무엇으로 말미암아 길러지느냐? 기도로써 길러지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내가 어제 저녁 수택리에 가서 이요한 목사가 하는 말을 들었는데, 이요한 목사가 하는 말이 오전에 강의할 때는 은혜가 있는데 오후에 강의할 때는 은혜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정성을 덜 들였느냐 하면, 오전과 마찬가지의 정성을 들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오전과 오후의 입장이 다르다는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은사의 계열이 다르다는 것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후에는 '하나님, 오전과 다른 어떤 은사를 주십시오?' 라고 기도를 했어야 했습니다. 많은 기도를 안 해도 하나님께서 무엇을 주실 것인가를 사모하고 그리워하며 강의를 했다면 그 자리는 은사의 분위기로 화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심령생활에서 많이 체험을 해야 됩니다.
설교를 할 때도 제목을 정해 가지고 나와서 설교해서는 은혜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생명을 새롭게 변혁시킬 수 있는 설교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한계권내의 하나님으로밖에 활동할 수 없는 입장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그것은 자기 계획대로 했기 때문입니다. 설교를 할 때는 어디까지나 순수한 안테나와 같은 입장에서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에서 땡하고 치면 같은 소리를 내는 공명체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음차를 보면 땡 하고 치는 것이 있으면 그 치는 것에 자극되어 윙 하는 소리가 나는데, 그것과 같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하는 사람은 순수한 안테나처럼 되어야 합니다. 설교자가 사심없이 단에 나설 때, 그 자리에서부터 하나님은 임재해 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공적인 지도자 생활을 하게 되면 이것을 많이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는 얼마나 심각해야 되고, 얼마나 공적이어야 되고, 얼마나 순수해야 되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그 자리는 그야말로 초조한 자리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하나님과 연결되면서부터 새로운 인간의 재창조가 벌어진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런 자리에서 자신의 입을 통하여 나오는 말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음성으로 들리는 것이며, 자신이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가 필요하다는 것을 기도생활을 조금이라도 한 사람들은 아는 것입니다.
여기 원생금씨 왔어요? 원생금씨가 엊그제 수택리에 가서 수련생들에게 강의를 했다고 합니다. 무뚝뚝하기가 이를 데 없고 말의 조리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볼 때 말이 안 되는 것 같아도 거기에는 사랑이 있더라는 거예요. 그러므로 기도 많이 하는 사람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자기만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꼬리가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 꼬리가 휘젓기 시작하면 심령이 커질 수도 있고 작아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도 그것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없어 가지고는 발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서 신념을 다하여 열심히 기도를 하면 기도하고 나서 자기가 어떤 내용으로 기도했는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그 기도는 자기가 한 기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기도를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입장에 들어와서 했지만 그 기도는 아무개가 땅에서 했기 때문에 땅 위에 은사권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본래 사람은 하나님의 몸입니다. 복귀역사는 하나님의 몸을 복귀하는 역사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임재하셔 가지고 복귀되는 것이 원칙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기도생활을 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어떤 사람을 놓고 '그놈의 자식' 이렇게 욕이 나올 때가 있습니다. 또 '그놈의 자식 안되겠는데' 라고 욕이 나올 때는 욕의 대상이 되는 사람에게 벼락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오래 못 간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누가 한 것입니까? 자기가 한 것입니까? 그것은 자기 의식을 초월해서 한 것입니다. 그렇게 욕하는 것은 하늘이 예고해 해주고, 통고해 주는 것입니다. 마이크 장치와 마찬가지로 내가 관계되어 있으니 나를 통해서 알려 주는 것입니다. 방언도 마찬가지 이치로 벌어지는 것입니다. 방언이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자리에 가려면 나 자신이 직선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진동폭이 순수해야 합니다. 여기에 오나 저기에 가나 90도 각도로 수직이어야 됩니다. 순수하면 자연히 수직이 되는 것입니다.
양심을 바르다고 합니까, 찌그러졌다고 합니까? 순수함은 기구(氣球)와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가스를 가득 채운 기구의 줄은 똑바로 되지 말라고 해도 똑바로 되는 것입니다. 자연히 곧아지는 것입니다. 기구의 줄은 구불구불할 수가 없습니다.
수직이 된 거기에는 반드시 무한한 음파, 영적인 파장이 조성되어 가지고 영파를 일으킵니다. 그 영파를 인간이 오관으로 느끼는 것, 그것이 영감(靈感)입니다. 그런 경지에 들어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한 자극을 끊임없이 받는 데서만이 진전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통일교회 자체가 그런 자극을 어떻게 보급받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러한 열의를 어떻게 불러일으키느냐 하는 것입니다. 열의를 불러일으키기 위해서는 자신을 자아의 인생관보다 우주관에 접선시켜 놓아야 합니다. 그러면 자동적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적의식에 철두철미하라는 것입니다. 일상생활에 철두철미한 사상을 불어 넣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는 길만 알게 되면 거기에는 반드시 열의가 차 들어오는 것입니다. 가고 싶다, 해야 되겠다, 하고 싶다 하는 마음이 자기 생활을 넘어서 움직이는 것이요, 자기 자체를 넘어서 움직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동적인 활동으로 벌어져야만 하늘에 공적인 실적으로 남아지는 것입니다. 명령에 따라 할 수 없이 끌려가는 사람은 아무리 해봤자 하나님과 관계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들 중에는 전도를 나갈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언제나 공적이고 순수한 입장에서 '나는 세계를 위하고 아버지를 위하여 이 생명을 다 바치겠다'며 나가는 사람에게는 발전이 있을 것입니다. 하늘은 그들을 밀어줍니다. 자기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발전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오늘날 원리를 많이 알고, 통일교회 교인으로서 틀이 박힌 사람이 전도를 나가서 아무리 얘기를 해도, 사람들은 그 얘기를 흘러가는 말로밖에 안 들을 것입니다. 아무리 해봐야 사람들의 마음에 움직임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순수한 소년 소녀들이 자기를 망각한 자리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의 뜻을 중심삼고 전도를 하면 부흥이 벌어지고, 발전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대학을 나온 사람들을 전도 보내면 갔다가 그냥 돌아오는 일이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남을 위해서 주고 남을 위해서 희생하게 되면 그 공적의 터전이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지만 안테나가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안테나권내에서 벌어지는 그 음파는 다 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환경의 상대적인 세계는 그 자장권내에서 전부다 놀아난다는 것입니다. 그 자장권내에 있는 전체가 은혜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을 갖추어야 합니다. 이러한 내용을 갖추지 않고는 전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후퇴하는 것입니다.
통일교회 교인들이 맨 처음 통일교회에 들어왔을 때는 누구나 한바탕 좋아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왠지 모르게 교회에 오고 싶어서 죽겠다. 교회 가고 싶어 죽겠다' 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교회 문을 닫아버려도 문을 타고 넘어 오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교회 구석에서라도 하룻밤 자는 것이 소원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들을 쫓아내면 엉엉 울며 쫓겨나가 가지고 대문을 닫아 놓으면 죽어도 못 가겠다고 하며 대문을 타고 넘어 오는 것입니다. 대문을 타고 넘어오는 사람들은 만약 도둑놈인 줄 알고 때려서 죽였다면 그 사람은 분명히 천당으로 직행할 것입니다.(웃음) 그런 때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또 교회에서 밥을 먹으면 밥이 왜 그렇게 맛있는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도깨비가 붙은 것도 아니고 다른 밥과 똑같은 밥인데 별미라는 것입니다. 시금털털한 김치 깍두기도 입체적인 맛이 난다는 것입니다.(웃음) 교회에 와서 밥을 먹으면 맛있다는 것은 왜 그렇겠습니까? 사랑하는 부모가 정성들여 지은 밥이 맛있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거기에는 그리움이 넘쳐서 상대적 존재까지도 거기에 결실될 수 있는 자체로 있기 때문에 나쁜 것도 좋은 것으로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나하고 관계를 맺어 상대적인 가치로 등장하기 때문에, 좋은 것으로 나타나고 맛없는 것도 맛있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 신경작용입니다. 그렇지요? 맛이라는 것은 신경작용에 의해서 알게 됩니다. 그런데 하늘의 신경작용은 초자연적인 작용입니다. 전체를 합해 가지고 주관하는 입장에 있기 때문에, 거기에는 나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은혜에 취해 보세요. 세상이 왕궁으로 보인다는 겁니다. 시궁창 안에 들어가 있어도 그 자리가 왕궁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구더기들이 노는 것을 봐도 그것이 세계의 일등 무희들이 춤추는 것같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게 보인다는 거예요.
그것은 오늘날 인간 자체의 감정 가지고는 그렇게 느낄 수 없지만, 초자연적인 감정의 주체성을 가졌기에 그렇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서 보이는 것은 모두 희열의 대상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계에는 나쁜 것이 없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에 가봐야 그저 그렇지, 오늘은 또 누가 설교를 하겠구나' 하면서 집에 있고 싶다고 한다면 국가 복귀가 되겠습니까? 될 수 있어요? 그 사람이 해야 할 일은 한 나라를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 해와에게 하늘땅을 주관하고, 나라 이상의 것을 주관하라고 축복해 주었지만, 그들은 축복의 자리에 나가지 못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한나라를 찾아야 할 사명이 있는 여러분들이 주일에 교회를 안 가고 안방에 앉아서 나라를 구할 수 있습니까? '교회 가고 싶지 않으니 차라리 집에 있는 것이 낫다' 이러는 사람은 망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구할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집에서 자는 것보다 교회 가는 것이 낫다' 이렇게 생각하고 교회에 와서 친구를 만나면 자극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극을 필요로 합니다. 설교를 통해서 책망을 받고 분함을 느끼기도 해야 합니다. '저 설교는 나 때문에 하는구나'라는 자극을 받아야 합니다. 이렇게 자극을 받아 분해 죽겠다고 그러다가도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 오면 간접적인 자극이 아닌 직접적인 자극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집에 있는 것보다 교회에 가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공부하고 싶어서 학교 가는 학생이 어디 있겠습니까? 전부다 처음에는 할수없어서 다니는 것입니다. 더우기나 국민학교 학생들은 엄마 아빠 무서워서 할수없이 다니는 것이지, 공부하고 싶어서 다니는 애들이 있습니까? 맨 처음에는 다 그렇다는 것입니다. 할 수 없이 다니다가 보면 나중에는 그 맛을 알아 가지고 배우기 위해서 다닌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엄마 아빠가 놀라게 되는 것입니다. 그 맛을 느낌으로 말미암아 그런 자극적인 내용이 거기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는 공부하는 데에 재미를 붙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 재미라는 한 자체를 두고 볼 때는 나쁜 것입니다. 그렇지만 상대적으로 공부해 보니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범위가 넓어지기 때문에, 거기에 맛을 들여 가지고 공부하는 것입니다. 공부하는 것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잠자기 좋아하는 사람은 있어도 처음부터 공부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공부함으로써 자기가 활동할 수 있는 범위가 넓어지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통일교회 믿는 것이 재미있습니까? 아무 재미도 없을 것입니다. 싫은 것이 원칙입니다. 싫은 것이 원칙이지만 믿어 보면 점점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옛날의 친구들이 자그마하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옛날에 자신이 꼴등할 때 일등하던 그 친구를 만나 보면, 옛날에는 하늘같이 느껴졌는데 이제는 통일교회 사상을 알고 얘기해 보니 높게만 느껴졌던 친구가 저만치 뒤져 있더라는 것입니다. 이런 맛이 있기 때문에 통일교회를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조금 더 들어가서 하나님께 '여보!' 하면 '그래 그래' 라고 대답을 듣는 듯한 기분이 된다는 것입니다. 세계의 대통령이라 하더라도 우리 손아귀에서 놀아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기분이 좋아서 믿는 것입니다. 선생님 자신도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핍박받는 것이 좋아서 이 일을 한 것이 아닙니다. 욕먹는 것이 좋아서 이 일을 한 것이 아닙니다.싫지만 싫은 맛보다도 더 좋은 맛이 있기 때문에 이 일을 해온 것입니다.
영계에 한번 행차하게 되면 어느 누구도 부럽지 않은 그런 맛이 있기 때문에 이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 뜻의 맛을 알고 이 세계를 몽둥이로 치면 산산조각이 나고, 왕창왕창 깨지는 실감이 나기 때문에 이 일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항상 기분 나쁜 걸 참을 수 있습니까? 여러분들은 선생님은 본래 몸이 철같이 태어났기 때문에, 건강하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천만에요. 싫은 일을 어떻게 합니까? 일년이나 이년만 해보라는 것입니다. 죽고 말 것입니다.(웃음) 그렇게 하더라도 그것이 좋기 때문에 견뎌 내는 것이지, 피곤하고 못 살겠다 할 것 같으면 견뎌 낼 것 같아요? 이것을 다하고 나면 멋진 그 무엇이 있기 때문에 이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장사를 해서 손해를 보면 끝장이 나지만 이익을 남기면 끝장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선생님도 십년, 이십년, 일생을 두고 계속 이 일을 하면서 손해 안 보고 이익을 보았기 때문에 끝장이 안 난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이 일을 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렇지 않아요? 모든 것이 다 장삿속이라는 겁니다, 장삿속.(웃음) 장사를 할 때 원금이 천원이면 천원을 자기 것이라고 투자하지 않는 사람은 그 천원으로 말미암아 죽고 사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장사하려는 사람은 그 천원을 투자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것이 더 많은 이익을 남겨 가지고 돌아올 수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 자체에도 장삿속이 있는 만큼, 현재 그대로에 만족하여 투자를 하지 않는 사람은 망한다는 것입니다. 장사가 안 됩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원금은 투자해야 이익이 남는 것입니다. 현재의 나 자체보다도 미래에 이익되는 나 자체가 틀림없다 할 때는 투기사가 되어 생명까지 집어 던지고 해보는 겁니다.
눈이 쌓인 산 꼭대기에서 솔방울 하나를 굴리게 되면 눈이 뭉치고 뭉쳐져서 큰 바위처럼 되어 집도 무너뜨리는 일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도 이 솔방울처럼 계속 구르게 되면 남의 것이 내 것이 되고, 내 것이 남의 것이 될 수 있는 동기가 되어 전체가 나로 말미암아 있다는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자체를 보게 된다면 다 장삿속이라는 것입니다. 손해나면서 이런 일을 할 사람이 있겠어요? 선생님을 보세요, 그렇게 생겼는가 보라는 거예요?
여러분도 상당히 피곤한 때가 있을 것입니다. 낮이고 밤이고 돌아다니다 보면 피곤에 취할 때가 있습니다. 피곤에 취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술을 마셔보지 않은 사람이 술에 취한 맛을 모르듯이 피곤에 취한 그 맛이라는 것은 피곤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뜻을 위해서 살아온 생애노정에서 피곤함을 느낄 때는 그 취한 가운데서 하나님이 얼마나 가까운 가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취하는 자리가 있든 거예요, 그런 자리가 있기 때문에 이 일을 하는 것입니다.
통일교회에 들어왔던 사람이 통일교회 안 나오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람은 징역을 살고 있는 죄수라도 감방에만 있는 것보다 외출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성공할 사람은 집에 붙어 있지 않습니다. 외부 출입이 잦습니다. 물론 외부 출입이 잦아서 욕을 먹기도 하고, 혹은 몽둥이 들고 따라와 가지고 파탄시키는 사람도 있긴 하지만, 자기 집에 자기보다 나은 사람들이 드나들게 되면 그 사람은 성공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통일교회를 다니다 교회를 안 나오고도 사는 길은 무엇이냐? 교회와 보조를 맞추는 것입니다. 교회가 하지 못하는 것을 자기가 집을 중심삼아 가지고 하는 사람은 교회가 망하더라도 그 사람은 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는 길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안 하고 자기 집에 틀어박혀 있는 사람은 이미 망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있던 것도 까먹는다는 거예요. 만원어치 은혜를 받았는데 그것을 꼭 쥐고서 '이것 가지고 먹고 살아야지' 하면 되겠어요? '아이구, 백원어치라도 없어지면 안 되는데' 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마음이 자꾸 그러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진 것마저 빼앗긴다는 것입니다. 장사 밑천까지 까먹는다는 거예요.
그렇게 일년쯤 지나고 보면 밑천이 떨어지게 됩니다. 그때에 식구를 찾아가도 옛날에 반겨 주던 그런 맛이 없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맛이 없게 되어 있습니다. 옛날에는 좋아하던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의 모습을 한번 훑어보고는 산송장이 왔다고 하니 기분이 나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가 변한 줄은 모르고 통일교회 교인들은 변덕도 많다고 하는 것입니다.옛날에는 좋아하더니 이제 와서는 문전박대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 반성하라는 예고인 줄 모르고 토라져 가지고 통일교회 사람만 나쁘다고 자꾸 깎아 내리다가는 모가지도 잘리고, 사지도 잘리고, 자기 몸뚱이만 남아 가지고 천당간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가긴 어딜 가겠습니까? 뒤죽박죽 살다가 망해 버리는 겁니다.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정지 아니면 후퇴입니다. 그런데 정지가 오래되면 쓸 수 있는 물건이 없습니다. 후퇴되는 것이 기정 사실입니다. 그러니 전진이 필요합니다. 사람이 사는 길은 의욕이 있어야 합니다. 열의가 있어 가지고 자극을 시켜야 됩니다. 정지된 입장에 있어서는 안 되겠기 때문에 선생님이 몽둥이로 후려쳐서라도 전진시키려는 폭탄 작전을 지금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니 그 자리에서 더 이상 붙어 있을 수가 없기 때문에 그 자리를 떨쳐버리고 할 수 없이 보따리 싸 가지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억울함도 당하고, 천대도 받는 것입니다. 그때는 '내가 잘못했구나. 옛날의 그 좋던 은혜를 놓쳐 버렸구나' 하며 거기서 비로소 잃어버린 그 자리를 다시 찾으려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서부터 다시 회생의 길을 찾아 나간다는 것입니다.
회생의 길은 서럽고 외롭게 탄식하는 지경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아이구 아버지, 제가 이제 죽게 되었습니다. 힘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렇게 지극히 서러워하며 회개하면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눈물 콧물 흘리며 입은 옷이 다 벗겨지더라도 '아이고 나 죽소' 하고 매달리면 살 길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저 사람은 미쳤다. 낮도깨비다' 하는 소문이 날 정도로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전도하면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이집 저집 분주스럽게 돌아다녀 보라는 것입니다. 은혜가 떨어지면 은혜를 높이는 데 기도보다 더 좋고 빠른 방법이 있습니다. 두 집을 왔다 갔다 하던 것을 은혜가 떨어졌다면 네 집을 왔다 갔다 해보라는 것입니다. 네 집을 다니며 전도해 보라는 거예요. 떨어진 은혜가 다시 올라갈 것입니다. 그 방법이 기도보다 더 낫다는 것입니다.
또 네 집 다니던 사람은 여덟 집을 돌아다녀 보라는 것입니다. 다리가 아프고, 욕을 먹고, 매를 맞았더라도 그것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고 남을 위해서 했기 때문에 할 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때 기도하게 되면 '옛날에는 자기만을 위해 살더니, 이제는 남을 위해서 매를 맞았으니 나아졌구만' 하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웃음) 결국은 그것이 다 자기를 위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그런 자극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36가정, 72가정을 내보내려고 합니다. 이 가정들이 자리잡아 가지고 어제도, 오늘도 그냥 무의미하게 보내는 것같아 이번에 내보내기로 했습니다. 내가 한번 이들이 어떻게 사는지 구경가려고 합니다. 3위기대가 오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여자 셋만 모여도 싸움이 벌어지는데, 여자들 열이 모여 싸움이 벌어지게 되면 모두 망하는 것입니다. (웃음) 이번에 36가정, 72가정은 모두 보따리 싸 가지고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문화는 이동하는 데서 발전하게 되어 있습니다. 새로운 혁명은 현재 입장을 파탄시키면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겠어요? 이것은 언제나 그렇습니다. 선생님도 보통 생각하기에 엉뚱하다고 하는 일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야 힘이 보충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늘땅을 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그래야만 합니다. 누구나 순수한 입장에서 공적인 목적을 바라면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힘이 나는 것이요, 힘이 보충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천하가 뒤집어 지더라도 한번 휙 잡아채면 나가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힘과 그러한 작용이 우리 배후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매일 매일이 다르게 보입니다. 기분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그렇다는 거예요.
그러한 것은 현재의 여러분 자체의 입장에서는 안 되겠으니 여러분은 고착되고 정지된 입장을 타파할 수 있는 일을 해야 됩니다. 후퇴는 하지 말아야 됩니다. 그러니 그런 일을 하기 위해서는 별다른 행동을 계속해야 되겠습니다. 순수한 입장을 찾기 위해서 기도를 한 후에 행동을 하게 되면 여러분에게는 열의가 그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도 예배가 시작될 때에는 몇 사람 안 왔더니 시간이 좀 지난 후에야 많이 왔습니다. 이왕에 오려면 일찍 오지, 왜 늦게 오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조금만 부지런하면 되는 것입니다. 늦을 것 같으면 그 시간만큼 일찍 자면 되잖아요. 그것도 생각하지 못해요? 일찍 온 만큼의 시간은 하나님을 위해 바친 시간이기 때문에 천금 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 시간만큼은 하나님께 바치는 시간이기 때문에, 그 시간에 늦게 나온다는 것은 하나님을 도둑질 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시간에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그만큼 못 잔 것을 탕감할 수 있고 하나님 앞에 면목도 세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제보다도 나은 마음을 가져 가지고 하늘 앞에 가까이 갈 수 있지만, 늦게 오게 되면 기도할 때도 눈을 끔벅끔벅거리면서 선생님이 무슨 말씀 하실까 하고 앉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앉아 있는 모습을 보면 처량하기 짝이 없어 보입니다.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은 차분하고 얌전한 사람이 아니라 열의에 찬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주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건 틀림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현재에 정지되어 있는 사람은 망하는 것입니다. 정지된다는 것은 '망운(亡運)'이 나하고 결혼한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전진하느냐 정지되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전진하고 있다 하는 자신이 없는 사람은 정지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망도깨비와 결혼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정지해 있는 사이에 일년, 이년, 세월을 보내는 동안 뜻은 개인적인 섭리시대에서 가정적인 섭리시대, 종족적인 섭리시대, 민족적인 섭리시대로 자꾸 올라갑니다. 그렇게 되면 따라갈 수 있어요?그리고는 하는 말이 '통일교회 들어온 지는 제일 오래 되었는데 나의 가치를 몰라 준다'고 하는 것입니다. 가치는 무슨 가치입니까,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말입니다. 썩은 냄새만 난다는 거예요. 그런 사람은 내버려도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그런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선생님은 지금도 나 자신을 통일교회 선생님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통일교회를 새로 찾은 식구와 같은 감정을 가지고 매일같이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발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여러분이 정지하게 되면 무엇과 결혼하는 거라구요? 「망도깨비하고 결혼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갈 곳이 어디겠어요? 천당이겠습니까, 지옥이겠습니까? 안 가려고 해도 자꾸 지옥으로 끌려갈 것입니다.
그러면 통일교회에 들어오기 전보다 후퇴했느냐 전진했느냐 할 때 여기 아주머니들은 어떻습니까? 「전진했다고 생각해야지요」 그 말은 어쩔 수 없어 하는 말이고 (웃음) 전진했어요, 후퇴했어요? 「전진했습니다」 (웃음) 여러분, 나무로 말하면 살아 있는 나무는 자꾸 크는 것입니다. 다른 나무는 다 크는데 크지 않는 나무가 있다면 그 나무는 죽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죽어 간다는 것은 시간이 지나게 되면 죽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우리가 이동하는 운명권내에서 싸우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구를 탓하며 교회에 안 나오는 시시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유효원 협회장이 영계에 갔지만, 유효원 협회장 눈을 보면 소 눈 같아서 보기 싫어 못 나오겠다는 둥 별의별 소리를 다 들었습니다. 보기 싫은 사람들이 버티고 앉아서 뭐가 어떻고 뭐가 어떻고 하는 것이 보기 싫어 교회에 잘 안 나오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통일교회 문선생님 보기 싫어서 안 나오겠다는 사람은 없지만, 까닭없는 유효원 협회장을 걸고서 보기 싫어서 못 나오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 핑계는 좋습니다. 자기 잘못은 모르고 다른 사람에게 핑계만 대는 것입니다.
살인강도도 형무소에 들어가면 '내가 왜 살인강도야. 나는 새사회를 계획하고, 내 나름대로 세계를 만들기 위해서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인데 이해 부족이라구. 나라가 작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지 내가 왜 죄인이야' 그러면서 당당하게 헌법 뜯어고칠 생각을 하고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웃음) 마찬가지로 통일교회에서 나간 사람들이 통일교회를 뜯어고칠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내가 생각한 대로 이렇게 교회를 고치면 교회 나가지' 하지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자기만큼 생각 못해서 이 일을 하는 줄 알아요?
이제 통일교회에서 전도하려 나간다 하는데, 나간다 하는 것은 후퇴예요. 전진이예요? '전도 나간다' 하는 것은 앞으로 나간다는 말입니다. '나간다' 하는 것은 발전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요, 전진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도 나가지 않고는 발전도 없고, 전진도 없는 것입니다. 전도 나가서 일하는 사람을 흉보며 앉아 있는 사람은 망합니다. 그렇게 흉보다가는 비렁뱅이가 되어 손을 벌리게 될 것입니다. 그런가 안 그런가 두고 보라는 것입니다.
예전에 이북 사람들이 서울에 와서 벽돌담을 쌓아 놓고 살고, 물장사를 해서 살았습니다. 이들을 보고 서울 사람들이 '아이고 오랑캐 사촌, 함경도 평안도 갈 밭고랑에서 닭이나 잡아먹던 패들' 이라고 흉을 보았습니다. 평안도 여자들이 말하는 것을 보면 정줄 데가 하나도 없다고들 했습니다. 여자가 몸빼를 입고 다니면서 고기 장사를 안 하나, 머리에 이고 다니는 장사를 안 하나, 아뭏든 그들을 보면서 서울 사람들은 저 사람들은 벌받아도 싸다고 말했습니다. 심지어는 '저런 사람들이나 그런 일을 하지, 우리같은 양반집 아주머니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나. 밥을 얻으러 오면 동냥이나 주지'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6·25동란이 일어나 후퇴하고 보니 결국 그들은 앞선 사람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평안도나 함경도 이북 사람들이 전진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다같이 후퇴는 후퇴인데 후퇴하고 나서 같은 입장에서 보니 그들은 전진해 있었고 서울 사람들은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에는 별 수 있겠어요? 그 사람들을 찾아가서 장사를 어떻게 하느냐고 하며 배웠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욕을 하고 주먹질을 해도 참고 따라갔다는 것입니다.이처럼 보따리가 바뀌어지는 운세가 벌어졌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활동하는 사람은 전진하는 것이요, 활동하지 않고 가만히 정지해 있는 사람은 후퇴한다는 것입니다. 활동하는 사람은 흥하고 정지되어 있는 사람은 망한다는 거예요.
이런 원칙을 볼 때 통일교회 문선생님이 식구들에게 '영원히 영원히 그곳에 정지해 가지고 콧노래만 부르면서 살지어다' 한다면 좋겠어요? 그 콧노래가 무슨 노래인지 알아요? 망조가 들 노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발길로 차서라도 활동을 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통일교회의 지도 방법입니다. 알겠어요? 할머니들도 활동을 시켜야 되겠습니다. 70, 80세가 되는 노인들도 전도 활동을 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입회원서를 받을 때는 방 안에서만 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입회원서를 받기 위해서는 산꼭대기에라도 가라는 것입니다. 이웃의 이 집 저 집을 다니면서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머니들이 다니면 그들이 미안해서라도 입회원서를 써 주고 교회에 나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연히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집안에만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이번 12월부터 전도 내보내려 하는 것이 잘 하는 거예요, 못하는 거예요? 개인적으로 볼 때는 못 하는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장마로 인한 홍수로 곱게 기른 한송이 꽃이 꺾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홍수로 말미암아 메마른 땅에 물이 채워져 그것에 의해 농사짓는 방법을 개혁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내가 이번에 여러분의 부인들을 전부다 빼앗아 오려고 합니다. 빼앗아 오기는 무슨…. 내가 얻어 주었으니 빌려 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발전하기 위해서 그러는 것이겠습니까, 후퇴하기 위해서 그러는 것이겠습니까? 「발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해 가지고 발전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예」 그럴 수 있다면 가야 됩니다. 그러면 그게 선생님에게만 좋고 여러분들에게는 안 좋은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여러분도 좋고, 선생님도 좋고, 신랑들에게도 좋은 것입니다. 자식들에게도 좋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다 좋기 때문에 사정 보지 않고 내모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의 할머니가 배가 고파 허기증이 나서 길을 못 가고 앉아 있다면 어떻게 하겠어요? 할머니를 모시고 가야지요? 그럼 모시고 가는데는 어떻게 모시고 가느냐? 길잡이가 되어 가지고 모시고 가야 됩니다. 그런데도 못 걸어가시면 업고서라도 가야 합니다. 이것이 효도라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예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고개를 넘어가는 데 있어서 업고서라도 그 고개를 넘게 되면, '고맙다' 이렇게 얘기하지, '이놈의 자식아 할머니를 업고 가는 법이 어디 있어?' 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 가지고 고개만 넘어 가면 다 좋아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싫다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낫습니다.
여러분들은 정지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자동적인 자극과 자발적인 열의를 갖지 못하고 있으니, 피동적인 자극과 피동적인 열의라도 갖게 하기 위하여 선생님이 때려 모는 것입니다. 내몰아 가지고 민족이 따라오지 않을 수 없게 될 때, 이 민족은 날로 발전할 것입니다. 한나라의 주권자가 선두에 나와 가지고 자극을 받지 못하면 그 민족은 부끄러운 내일을 맞는 겁니다. 주권자가 새로운 활동 체제를 거국적으로 전개시키면 그 나라는 부흥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만약 새로운 활동 체제를 반대하는 주권자가 나와 망하게 되면 사람들은 혼자 망하려고 안 합니다. 주권자를 깔고 망하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통일교회가 망하게 된다면 자기 혼자 망하려고 안 할 것입니다. 선생님을 깔고 망하려고 할 것입니다. '통일교회를 몰랐으면 안 그랬을 텐데 통일교회를 알았기 때문에 이렇게 됐다. 통일교회 문선생이 안 나왔으면 내가 이렇게 안 되는데, 통일교회 문선생이 나와서 내가 이렇게 됐다'고 하면서 선생님을 깔고 망하려고 할 것입니다. 선생님은 그런 입장에 서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은 여러분을 내모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전도하러 나가겠어요, 안 나가겠어요? 「나가겠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할 수 없으니까 '나가지요'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할 수 없어서, 마지못해서 나가겠다고 하지만 그 길을 가고 나서는 '아이고, 내가 살 길이 이 길이구나. 이 길이 좋은 길이구나'고 할 것입니다. 그러니 피동적인 결과를 통하고, 간접적인 자극을 주어서라도 현재의 입장에서 벗어나 이동시켜 놓는 것이 여러분을 살려주는 방법입니다.
나가서 그렇게 하다가 죽은 사람들은 후회를 안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마저 못해본 사람들은 죽을 때 '한번 해볼껄'하고 후회한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하다가 죽으면 '하다 죽으니 할 수 없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갈 곳을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번 해볼껄' 하다가 죽어서 후회하는 사람은 갈 곳을 가지 못하여 유리(流離)하는 영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니 통일교회 문선생님이 필요합니까, 필요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다 되어 있다면 선생님이 필요없습니다. 그렇게 되어 가지고 선생님은 안방에서 할아버지 노릇하면서 살고 싶은데, 팔자가 사나운지, 여러분들을 잘못 만났는지,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하가 잘못하게 된다면 임금이 어질 수 있습니까? 따르는 사람이 잘해야 되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가만히 있다가는 망하겠으니 여러분들을 몽둥이로 때려서라도 일을 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찬성합니까? 찬성이요, 찬성 아니요? 「찬성입니다」
나는 지금까지 감옥살이 등 별의별 경험을 다했습니다. 그것들을 지금 지내고 보니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나 하나를 키우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렇게 수고하셨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거친 그 과정들은 절대로 나한테 마이너스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얻은 것이 많았습니다. 배가 고플 때의 밥 한알이 얼마나 귀한지 지금도 정신이 번쩍듭니다. 밥 한알이 그렇게까지 온 신경을 자극할 수 있다는 것을 느끼고 그것에 대한 무한한 가치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배가 고파 그 밥을 그리워하면서도 그것을 잊으려고 애쓰면서 하나님을 더 그리워하고자 눈물을 지었습니다. 또 불쌍한 사람들을 보면 남이 모르는 가운데 눈물지으며 그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이러한 마음에는 하나님이 같이하시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지금도 그때가 그립습니다.
선생님은 평범한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사람에게는 자극이 필요합니다. 자극을 보급받기 위해서는 어떠한 충격적인 방향성을 갖추어 가지고 자기가 움직여 나갈 수 있는 열의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친구들도 칭찬해 주는 친구보다 책망도 하고 미래의 나에 대한 새로운 목적관을 제시해 주는 친구를 좋아했습니다. 그저 놀자고 하고 맛있다고 먹자꾸나 하는 친구는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의논을 하다가 얼굴을 붉히며 싸워서라도 문제를 해결하는 놀음을 좋아했지, 얌전하게 앉아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자극이 없으면 발전을 못 합니다. 사람에게는 자극이 필요한 것입니다. 현재 입장에서 자극을 못 받는 사람은 발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극을 받으려면 새로운 열의가 있어야 하는데, 그 열의는 혼자 있으면 안 생겨납니다. 상대적 관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안 생겨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걸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주체와 대상의 관계를 갖지 않고는 열의를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처녀 총각이 서로 사랑을 속삭이게 될 때는 열의를 갖지 말라고 해도 열의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애착심을 갖지 말라고 해도 애착심을 갖는다는 거예요. 그것은 왜 그러냐? 상대적인 관계, 즉 '그와 나는 하나이며, 그와 나는 뗄 수 없는 필연적인 운명이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도 '이것은 필연적인 운명이며 천적인 운명이다' 하는 입장을 갖추지 않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뜻을 위해 전진해야지 후퇴나 정지는 할 수 없습니다. 전진을 위한 일시적인 정지는 있을 수 있고 정비하기 위한 정지는 있을 수 있으되, 정지하기 위한 정지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전진해야 되겠습니다. 통일교회는 전진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금년은 참 복잡한 해였습니다. 금년 들어서 통일교회는 상당히 발전했습니다. 그럼 12월이 되니 이제 그만 둘 것이냐? 아닙니다. 또 전진해야 합니다. 지금 기성교회가 통일교회 때문에 죽겠다고 야단하고 있습니다. NCC(기독교협의회)를 중심삼고 통일교회 때문에 야단났다고 빠득빠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후퇴하라는 거냐? 아닙니다. 통일교회 때문에 기성교회가 모두 자극을 받아 가지고 전진하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선생님은 하나님과 기성교회 앞에 공헌하고 있다는 것을 자부하고 있습니다.
또 종교협의회가 이단 통일교회를 가입시켰기 때문에 사회 문제가 벌어졌다고 그러지만, 기성교회는 나와 통일교회에게 자극받았기 때문에 옛날의 종교보다도 새로운 종교로 전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경제적인 소모는 있었지만 좋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떠들어 보라는 것입니다. 귀한 손님이 올 때는 개가 더 짖는 것입니다. (웃음) 그러기에 기성교회가 떠들어댄다고 정지할 것이 아니라 더욱 더 전진해야 합니다.
이번 26일부터 아카데미하우스에서 열리는 원리공청회에 서울에 있는 기성교회의 이름있는 목사 이백여 명에게 통일교회 협회장 이름으로 초청장을 보냈습니다. 그 사람들은 통일교회라고만 해도 나가자빠질 텐데, 통일교회 협회장 김아무개의 이름으로 보냈으니 나가자빠지지나 않을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만나보게 되면 너나 나나 마찬가지입니다.
요전에 어느 대학의 학장을 만났는데, 그 사람이 말하기를 통일교회 문선생님을 만날 생각을 해 보니 착잡한 생각이 앞서서 마음을 진정할 수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선생님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은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그런 사람을 만나면 평범해집니다. 농담도 잘하고, 말을 할 때도 앞뒤를 가려 가지고 합니다. 그러니 그 사람이 소문으로 듣던 것과는 다르다는 겁니다. 만나고 나서는 들리는 말과는 전혀 다른 맛이 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루에 몇 번이라고 전화로 불러서 만나고 싶다는 것입니다. 십년지기처럼 가깝게 느껴져 앞으로 사냥하러 가게 되면 같이 가자고 부탁까지 하는 것입니다. 다 그런 것입니다. 사람은 다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별나게 굴지 말자는 것입니다. 평범한 데에서 특수한 것이 생기는 것이지 특수한 데에서 평범한 것이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안전한 작전이 평범한 작전입니다. 자기 스스로 잘났다고 꼭대기에 버티고 서 있는 사람은 오래 못 가는 것입니다. 잘났지만 평범한 사람이 오래가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더우기나 난시(亂時)나 전시(戰時)에 있어서는 어디서나 환영받는 사람이 그 나라를 수습할 수 있습니다. 알겠어요? 한편에 치우쳐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도 좋아하고 저기에서도 좋아할 수 있는, 그러면서 더 좋은 것을 모색할 수 있어야만 새로운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 기성교인들 모아 가지고 원리공청회를 하는 것입니다. 앞으로는 이화여대 대강당을 빌려 가지고 집회를 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으면 좋겠지요? 그럴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 이화여대를 원조해 주고 있는 미국의 감리교 재단의 총회장을 불러다가 통일교회 부흥회를 시키면 되는 것입니다. 못 할 것 같지만 나는 그것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할 것입니다. 하는 것은 정해진 이치인데 시간적 차이는 남아 있는 겁니다.(웃음) 그 마음은 변치 않아요. 십년이 지나고 이십년이 지나도 그 마음은 변치 않을 것입니다.
나는 대한민국의 신세를 지면서 살지 않습니다. 이것이 나의 철학입니다. 내가 대한민국에서 신세를 지우고 산다는 것입니다. 신세를 지우는 통일교회가 되었으면 되었지, 대한민국의 신세를 지고 살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요전에 문공부에서 예산편성을 해 가지고 통일교회에 배정해 주었습니다. 고맙기는 고맙지만 받고 싶어서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주고 싶어서 주는 것을, 그 성의를 안 받으면 벌받을까 봐 받았다는 것입니다. (웃음)
선생님 사고방식이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도움받았다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번에 경기도를 중심삼아 가지고 수련회를 할때도 경찰국에서는 예산이 부족하다고 하며 싫어하더라는 것입니다. 진짜 나라를 사랑한다면 돈이 문제가 아닙니다. 돈이 없으면 내가 돈을 돌려줄 수도 있습니다. 간접적으로나마 자극을 주면 그 사회는 그냥 안 있는 것입니다. 형제 중에 공부를 못 하는 사람이 있으면 독려해 주고 자극을 주어야 됩니다. 형제들이 새벽에 일어나 가지고 공부를 속닥속닥 재미있게 하게 되면 공부 못하는 녀석도 후다닥 일어나 가지고 새로운 결심을 하고 공부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이젠 간접적인 자극을 한꺼번에 보급받을 수 있게끔 몸둥이로 쳐서라도 현재의 입장에서 이탈시켜야 되겠습니다. 현재의 환경을 바꾸는 것이 여러분은 훈계하는 방법입니다. 그것이 이치에 맞습니까, 안 맞습니까?(맞습니다) 여기 아주머니들 맞아요, 안 맞아요? 이치에 안 맞는다고 생각되면 죽으라는 겁니다. 전부 다 산송장이라는 거예요. 휘발유를 붓고 불에 타 죽으라는 거예요.
우리는 전진해야 되겠습니다. 정지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전진하기 위해서는 여러분 자체에 열의가 있어야 하고 자극을 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없게 될 때는 간접적인 열의와 자극이라도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가야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순수한 입장에서 기도를 많이 해야 됩니다. 어떠한 부락에 전도하려고 하면 새벽에 일어나 그 부락을 바라보면서 그 부락이 죽어가는 어린애와 같고 누이동생과 같고 자기 아들딸과 같이 느껴져야 합니다. 그리하여 밤새도록 그 부락을 붙들고 통곡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전도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했는데도 전도가 안 되면 선생님이 책임을 지겠습니다. 선생님이 과거에 이 길을 나올 때 그렇게 했습니다. 청소년 시절에 서울을 바라보며 많은 눈물을 흘린 사람입니다. 지금은 내가 한국을 위해서 기도할 때가 아닙니다. 한국을 위해서 기도 안 한다는 겁니다. 이제는 한국에 대해서는 책임을 다 했습니다. 한국에 대해서 염려를 안 해도 내가 바라던 기준, 하나님이 바라던 기준을 기필코 넘어갈 것을 알기에 다른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번에 일본식구가 왔는데 그들을 보면 '너희들 일본식구지? 왜정 때 우리들을 고문하던 사람의 후손이 왔구만, 복수해야지'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꿈에서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원수를 사랑해야 하기 때문에 한국에 있는 통일교회 교인보다 이들을 더 사랑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선은 자기를 희생시켜 가지고 남을 위하는 것입니다. 한국을 희생시켜서 다른 나라를 위하는 것은 국가적인 선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라를 위하여 통일교회를 희생시키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여러분, 선생님이 휴양이나 하고 유람이나 하면 좋겠습니까? 아니면 뜻을 위하여 여러분의 꽁무니를 따라 다니며 때려몰면서 못살게 굴면 좋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선생님 생각 같아서는 전부다 꽁무니에 줄을 달아가지고 휘발유를 뿌려서 불붙이면 좋겠습니다. 또한 몇 만년 코를 꿰어 가지고 끌고 다니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벌받을 짓이요, 좋은 일이요? 그것은 나를 위해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뜻을 위해, 결국 여러분을 위해 전진하자는 뜻에서 그러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뻔히 알면서도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알 만한 사람들이 머뭇거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통일교회는 껄렁껄렁하고 시시한 사람들이 아예 나오지 말라는 것입니다. 귀찮습니다. 와 가지고 자리나 채우고 냄새나 피우는 것이 싫다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부인들을 전부다 전도 내보내고 남자들은 동원하지 않으려고 생각했습니다. 그랬더니 남자들은 안 나간다고 배만 내밀고 있는 걸 보니 기분이 영 나쁩니다. 그러나 두고 보라는 겁니다. 아주머니들이 전부 다 전도 나가고 나면 울어 대는 애기도 봐야 하고, 엄마가 해야 할 뒷치닥거리를 전부 다 남자들이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부터는 '야! 우리 마나님이 이런 힘들 일을 하는 줄 몰랐구나'하며 그때서야 부인이 훌륭하다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울어 대는 애기를 한번 달래 보라는 것입니다. 기가 막히고 환장한다는 것입니다.(웃음) 남자들은 참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나는 모르겠다'고 할 수 있어요?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돈의 팔촌 아주머니라도 전도해서 모셔 들이게 될 것입니다. 틀림없이 모셔 들인다는 것입니다. 걱정 안 해도 그리 된다는 것입니다.(웃음) 40일 이내에 이 일이 완전히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일년 미만 된 아기가 있는 가정에는 매달 천 오백원씩 대준다고 말했지만, 그거 안 대줘도 괜찮은 것입니다. 내가 미안하니까 대준다고 그랬지만, 한 달쯤 줘 봐 가지고 안 대줘도 괜찮을 것 같으면 그 다음부터는 안 대줄 것입니다. 그 돈으로 전도하러 나간 엄마들을 도와주면 더 좋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들딸이야 어떻게 해서라도 먹고 살 수 있는데, 돈을 대주면 버릇만 나빠지고, 공돈 생긴다고 자기가 해야 할 일은 안 하고 공상만 하게 됩니다.
40일만 지나고 나면 전부 다 깨끗이 정비될 것입니다. 애기를 자기의 모친에게 데려다 주든지, 외가집에 데려다 주든지, 사돈의 팔촌 아주머니한테 데려다 주든지 해서라도 다 해결한다는 것입니다.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걱정이 되면 아들딸과 함께 얻어먹으라는 겁니다. 돈벌이를 못하겠으면 동네를 돌아다니며 얻어먹으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싫으면 자기의 할 일을 하라는 겁니다. 다 하게 되어 있습니다. 40일 이내에 다 해결되는 것입니다.
해결하고 난 다음에 남자들을 동원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부인들도 했는데 동원 안 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되면 여자가 전진함과 더불어 남자도 전진하는 것입니다. 여자는 서부로 가게 하고, 남자는 동부로 가게 해서 여자와 남자중 누가 이기나 한 번 싸움을 붙여 보자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둘이 안 지겠다고 서로 싸움하게 되면, 이것은 망하는 싸움입니까, 흥하는 싸움입니까? 전쟁은 전쟁인데 망하자는 거예요, 흥하자는 거예요? 「흥하자는 것입니다」 알기는 아누만. 이렇게 해서 서로가 자극받게 되면 자신들에게도 좋은 것입니다.
남자들은 선생님이 그런 작전하는 것을 기분 나쁘게 생각할 지 모르지만, 지금 우리에게는 열의와 자극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직접적 자극을 못 받으면 간접적 자극이라도 보충받지 않고는 발전하지 못한다고 누차 말했습니다. 직접적 자극은 기도하는 방법이요, 간접적 자극은 돌아다니면서 식구들과 같이 은혜의 말씀을 듣고, 또 들은 것을 베풀어 주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데에서 자극을 받고 발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오랜 신앙 생활에서도 체험했을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여러분 자체의 발전을 위해서 자주적인 입장을 보강할 수 있기 바랍니다.
아버님, 당신의 높고 귀하신 은덕에 진실로 감사를 드립니다. 저희들이 가야 할 최후의 종착역이 오늘의 이 자리가 아닌 것을 저희들은 아옵니다. 저희들이 나아갈 길은 개체의 완성을 표방하고 가정의 완성을 바라고, 가정 완성을 표방하여 종족의 완성을 바라고, 종족 완성을 표방하여 민족의 완성을 바라고, 나아가 완성될 국가와 세계를 바라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바라고 나아가는 저희들의 행로에 당신이 함께 하여 주실 것을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개인 완성을 하더라도 가정을 위한 십자가를 지지 못하면 정지 아니면 후퇴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승리의 터전을 쌓아 가정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정을 위한 메시아적 사명을 감당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아버지께서 무한한 사랑과 끊임없는 열의로써 자극시켜 줄 것이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정지의 길 위에 서서 자기 스스로의 모습을 자탄하는 입장에 떨어지고 만다는 이 엄연한 천륜의 공식을 저희들은 느끼게 되옵니다. 하오니 오늘의 자기 자신을 잘 알아 가지고 내일의 소망에 머무를 수 있는 자아의 보람있는 그 노정 앞에 어떠한 어려운 환경이 가로놓여 있을지라도 헤치고 나갈 수 있는 열의에 찬 사나이들이 되고 아낙네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날 통일교회의 많지 않은 무리들을 규합하여 민족복귀와 국가복귀라는 엄청난 과제를 걸어 놓고 모든 정성과 지성을 다하고, 내적인 결의와 외적인 자극을 통하여 가야 할 길을 정진해 나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이제 12월 초하루를 중심삼고 저희들이 동원하고자 하오니, 이러하나 모든 계획이 전진도상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인이 되고 터전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 저희들은 정지하거나 후퇴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후퇴하면 사망이 깃드는 것이기에, 우리에게는 후퇴와 정지와는 인연이 없고, 오직 전진과 인연이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전진의 인연만이 있는 곳을 찾아 나서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또한 거기에서 보람을 느끼고 자극을 느끼면서 내일의 소망의 중심이 되기를 다짐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은 안식일이오니 남한 각지에 널려 있는 당신의 자녀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시고, 부디 후덕하신 은덕으로 그들을 품어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당신이 소원하시던 본연의 동산에 서서 승리의 월계관을 상속받을 수 있게 하여 주시옵고, 그리하여 당신이 사랑하고 칭찬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옵니다.
다가오는 국운과 아시아의 운세 전체를 당신이 가려서 지켜 주시옵소서. 통일의 역군들이 가야 할 행보 앞에 전체의 운세가 상충하는 입장에 있어서는 안 될 것이오니, 당신이 전후좌우를 옹호하시어서 저희의 갈 길을 지켜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아시아에 있어서 해방의 기치를 드높이 들고 만민 앞에 세운 등대의 그 빛을 높이어, 만민이 하나로 수습되는 소망의 그 세계가 빨리 오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기 위해서는 저희가 희생해야 되겠으며, 온갖 지성을 다하고 충성을 다하여 저희가 가야 하는 노정을 달려가야 되겠사오니, 이러한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옵니다.
전체가 당신의 사랑에 인연 맺게 하여 주옵기를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님 이름으로 간절히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타락한 우리 인간은 탕감복귀의 노정을 가야 됩니다. 탕감복귀라는 것은 잃어버리기 전의 상태로 다시 찾아 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반드시 제물드리는 조건을 세워야 돌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 시조의 타락을 중심삼고 볼 때, 타락의 동기는 천사장에게 있지만 천사장은 영적인 존재요, 우리 인간은 실체적인 존재이므로 책임은 실체적 존재인 인간이 져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실체적인 존재와 영적인 존재와의 관계에서 타락이 빚어졌지만, 실체적 존재인 아담 해와가 중심인 연고로 그 중심된 아담 해와가 타락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타락의 경로를 보면 천사장으로부터 해와, 해와를 통해서 아담에게까지 미쳐졌습니다. 이것을 탕감복귀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타락은 천사장이 부모의 입장, 즉 아버지의 입장에서 해와를 유인하고 그 해와를 통해서 아담을 유인하여 아담을 천사장 자신의 아들 입장으로 몰아넣은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으로 타락이 되어졌기 때문에 복귀역사에 있어서는 반드시 여자를 앞에 내세워서 탕감역사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리적인 견해입니다.
우리 통일교회는 1954년에 창설됐지만 1960년까지는 준비기간이었습니다. 그 이후부터가 실전노정인 것입니다. 그러면 그 개척의 역사에 있어서 탕감될 수 있는 제일선에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나님과 해와가 하나될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해와가 일체가 될 수 있는 자리를 모색해야만 사탄과 해와가 하나되었던 그 기준과 맞먹는 입장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하나되었다는 조건을 세우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나가 되지 못하게 방해하는 사탄을 대해 반드시 승리하고 넘어가야 됩니다. 여기에 있어서는 사탄세계의 여자로서 자기가 지니고 있는 환경적 요건이 십자가입니다. 즉, 남편이 있으면 남편이 십자가요, 자녀가 있으면 자녀가 십자가입니다. 이렇듯 실체적인 가정을 중심삼은 십자가도 십자가지만 여기에 무형의 사탄까지 가담하여 남편을 사랑하고 아들딸을 사칭해서 통일교회 부인들이 가고자 하는 길을 백방으로 막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길을 걸어온 것이 1960년대의 통일교회 역사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자들이 하나님을 중심삼고 하나님과 하나되는 일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와가 타락했던 것과 같은 입장에서 타락하지 않아야 되고, 승리하여 타락될 수 있는 모든 요인들을 넘어설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야 됩니다. 여자들이 이런 기반을 마련하지 않으면 남자들의 갈 길은 잡혀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원리적인 견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1960년도에 들어서면서 우리 통일교회는 여자들을 중심삼고 풍파를 겪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중심삼고 선생님을 보게 되면, 하나님을 대신한 입장에서 여러분 앞에 서면 횡적인 아버지의 입장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종적인 아버지의 입장이라면 선생님은 횡적인 아버지의 입장입니다. 아버지의 입장인 선생님을 중심삼고 여러분은 하나되었다는 기준을 세워야 됩니다.
여기에는 반드시 영육을 중심삼고 종적 내적인 것과 횡적인 외적인 것, 즉 안팎이 하나된 아버지라는 이름을 중심삼아 가지고 여러분이 하나될 수 있는 기준을 이루어 놓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실체를 중심삼고 승리적 기점을 성립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것은 하나되고자 할 때, 여기에는 남편이나 자녀, 그외의 모든 혈통적 관계가 있는 사람들이 전부다 여러분의 가는 길에 동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하고 나선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다 영적으로 사탄까지 가담하여 반대하고 나서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 통일교회에서 영적인 하나님이 실체인 선생님을 위주로 하여 하나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탄도 영적으로 여러분 가정의 남편과 하나되어 가지고 여러분들이 가는 그 길 앞에 핍박의 노정, 십자가의 노정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어려운 환경을 타개하고 이러한 모든 환경의 어려운 고비를 넘어서서 하늘의 아버지와 땅의 아버지와 같은 입장에 서 있는 중심과 하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됨으로 말미암아 사탄 부모로부터 벗어나 하늘 부모를 모셨다는 기준으로 복귀하여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렇게 여러분 개인들을 중심삼고 역사를 하던 때가 1960년대였습니다. 선생님은 그보다 앞서 선생님 가정을 중심삼은 싸움을 해 나왔던 것입니다.
이렇게 1960년대는 여자들을 앞에 세워 가지고 탕감의 역사를 제시하면서 개척역사를 해 나온 것이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여자들이 개척해 놓은 승리의 터전 위에서 여자들이 닦아 놓은 그것을 남자들이 인계받아 가지고 비로소 하늘의 남성으로서 설 수 있는 자리를 세운 때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슨 말이냐 하면, 타락한 해와가 아담을 꼬여 가지고 타락권 내에 세웠던 것을 탕감복귀하기 위해 여자들이 타락하지 않고 개척해서 승리의 기반을 닦은 터전 위에 남자들을 세운 입장으로 복귀하는 것이었습니다. 교회를 중심삼고 보면, 이것이 교회의 복귀의 터전을 가려 나오는 역사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1960년대는 여자들이 앞서 가지고 탕감을 하고, 그 다음에 남자들이 개인 개인으로 탕감의 역사를 해 나온 때였습니다. 이렇게 1960년대의 우리 통일교회는 그 개척노정에 있어서 여자들이 먼저 개척한 것을 남자들이 인계받는 놀음을 하면서 가정을 밀고 나왔습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그러한 가정 형태를 이루면서 밀고 나온 기준은 뭐냐? 그것은 예수님이 개인적으로 승리하여 이스라엘 나라와 유대교를 중심삼고 요셉 종족을 중심삼은 기준 위에 가정권을 이루어 가지고 승리의 터전을 만들었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을 탕감복귀하는 것입니다. 탕감복귀역사는 어디까지나 예수님이 하지 못한 기준을 탕감복귀하는 것이므로, 여러분이 개인적으로 승리하여 사탄 앞에 분별된 입장에 섰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이 찾지 못한 가정적 기반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여러분들이 세계적인 도상에 서서 가정을 중심삼고 탕감할 수 있는 가정적 터전을 결정지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선생님 가정은 제1차 7년노정을 중심삼고 앞으로 여러분에게 가정을 중심삼은 종족적인 기반을 인계해 줄 수 있는 터전을 준비했던 것입니다. 이런고로 이 타락한 세계의 권내에서 하나님의 날, 부모의 날, 자녀의 날, 만물의 날을 책정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부모의 날, 자녀의 날, 만물의 날, 하나님의 날은 에덴 동산에서의 본연의 부모를 중심삼은 부모의 날, 자녀의 날, 만물의 날, 하나님의 날이 아닙니다. 이러 날들은 어디까지나 타락권내에 포위되어서 그 주위에는 사탄의 나라가 있고 사탄의 세계가 연결되어 있는 제한된 권내에서의 하나님의 날, 부모의 날, 자녀의 날, 만물의 날인 것입니다. 이런 날들이 이 세계에서 중심이 될 때까지는 세계적 사탄의 참소 요건을 넘어서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개인적으로 싸우던 그 기간에 선생님은 가정적인 싸움의 노정을 전개시켜 나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선생님은 제1차 7년노정 동안 여자들이 일선에서 기반을 닦을 때 사탄의 참소조건에 걸리지 않도록 배후에 서서, 때로는 아버지의 입장에서 인도해 주었고, 때로는 남편의 입장에서 주위를 수습해 주는 일을 해 나왔습니다. 다시 말하면 앞에서는 하늘을 대신해서 인도하는 입장이요, 배후에서는 타락한 남자들이 복귀할 수 있는 길을 갈 수 있도록 치다꺼리를 해주는 입장이었습니다. 이렇듯 안팎으로 사명을 완수해 나온 기간이 선생님 가정의 제1차7년노정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뭘 하자는 것이냐 하면 개인적으로 승리의 터전을 닦은 여러분들이 가정적으로 가야할 노정에 있어서, 예수님이 요셉 가정을 중심삼고 이루지 못한 탕감조건을 여러분 부부를 중심삼아 가지고 넘어설 수 있는 기반을 닦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기반을 닦아 놓아야만 예수님이 이루지 못한 모든 내적 슬픔을 해원성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제1차 7년노정을 중심삼고 지금은 제2차 7년노정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의 제2차 7년노정은 무엇을 해야 하는 때냐? 선생님이 제1차 7년노정을 중심삼아 가지고 했던 것처럼 자녀들을 양육하고 가정기반을 닦아야 하는 때입니다. 즉, 가정적으로 하늘 앞에 설 수 있는 기반을 닦아야 하는 때라는 것입니다.
가정은 반드시 종족적인 울타리 권내에 서야만 안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의 기반을 닦은 후에 그 가정은 무엇을 해야 되느냐? 가정의 기반을 닦아 가지고 3년노정을 거친 후에 종족적 기반을 닦아야 됩니다. 종족을 구하기 위한 가정적 아벨 생활을 해야 됩니다. 이것을 할수 있는 시점이 이 시대, 즉 1970년대인 것을 여러분은 원리를 통해서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가정으로서 종족인 메시아와 같은 입장 , 즉 종족을 대표해서 중심적인 가정으로 서기 위해서는 복귀노정의 원리원칙을 지키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면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해결되어야 하느냐? 가정이 승리하기 위해서는 먼저 부녀(父女)의 협조가 이루어져야 하고, 그 다음에는 가정이 하나되어야 합니다.
1960년대는 부녀(父女), 부자(父子) 입장의 시대였지 축복받은 가정을 중심삼은 탕감시대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때까지 선생님이 아직 자리를 잡지 못했기 때문에 여러분의 가정도 자리를 잡을 수 있는 입장에 서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은 있되 가정이 아닌 입장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1968년도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선생님이 자리를 잡은 기준에 들어섰기 때문에 여러분들도 가정을 중심삼고 자리를 잡고 출발은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출발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탕감노정을 벗어나야 됩니다. 그래서 3년노정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3년노정이 1968년, 1969년, 1970년도까지 연결되어 나온 것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 해와가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하나님과 아담 해와는 부자협조가 이루어짐과 동시에 부녀협조가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부자협조, 부녀협조가 이루어져 일체가 되어 가지고 사랑을 중심삼은 부부협조가 이루어졌더라면 그 기반 위에 자녀의 터전이 벌어져 사위기대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창조원칙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복귀도상의 6천년 역사를 보게 되면 모자협조밖에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까지는 모자협조의 기준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기 전까지는 모자협조의 기준밖에 세워 나오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써 지금까지 2천년이나 연장된 복귀섭리의 노정도 순전히 모자협조였습니다. 모자협조의 기준만을 중심삼고 지금까지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까지의 복귀역사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그것은 복귀섭리과정의 한때를 바라보면서 그때를 찾아 나가기까지 하나님의 특정한 명령을 받아 모자협조 과정을 거쳐 나온 노정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종적인 역사입니다. 종적으로 올라가는 때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세계를 대표한 기준에서 부녀협조의 기준을 완전히 이루어 사탄의 참소조건에서 완전히 벗어나 가지고 부녀가 일치가 되고 부자가 일치가 되고 모자가 일치가 될 수 있는 기준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복귀가 완결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6천년간 모자협조의 기준이 남아져 왔다고는 하지만 그것 역시 번번이 실패해 왔습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셨지만 그 명령과 일치되는 모자협조의 완성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지금 이때에도 무형의 하나님이 아버지로 계시는 입장에서 인간끼리 모자협조만 해 가지고는 복귀가 안 됩니다. 무형의 아버지의 입장을 대신한 실체의 아버지가 오셔야 됩니다. 그리하여 실체 아버지가 무형의 아버지 입장에 서 가지고 종적인 기준과 평면적인 기준을 연결시켜야 됩니다. 이것이 복귀의 원칙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 해와가 타락하지 않은 입장으로 귀결되어야 하는 것이 본연의 기준이기 때문에, 그 기준으로 복귀하기 위해서는 영적인 하나님과 실체적인 아버지, 즉 실체적으로 완성한 아담과 일체가 되어 가지고 해와와 더불어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부자일체가 된 다음에 부녀일체를 이루어 복귀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역사에는 부자협조가 없었습니다. 모자협조의 기준을 통해 가지고 아들을 길러 나왔던 것입니다. 어머니가 하늘편의 아들을 길러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던 것을 예수님을 중심삼아 가지고 그것을 대신할 수 있는 상대권을 만들어 성부 성자 성신의 영적 기준을 세워 나온 것입니다. 따라서 이와 같은 기반을 실체적으로 지상에 결정지어 놓지 않으면 복귀의 완성은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기준을 한때에 완결지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그저 맹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타락의 순서에 따라서 해야 되는 것입니다. 먼저 영적인 하나님과 실체적인 아버지를 중심삼아 가지고 부녀협조의 기준을 갖추어야 됩니다. 이것은 천사장, 즉 영적 아버지 입장인 사탄과 실체적인 아담이 일치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잃어버렸던 해와를 찾을 수 있는 본연의 주관권을 다시 찾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본연의 아담이 하나되어 가지고 해와를 주관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비로소 거꾸로 되어 있는 주관권을 바로잡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영적인 하나님과 실체적인 부부가 하나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실체 부모의 입장은 어떻게 성립되느냐? 애초에 아담을 중심삼고 해와가 창조되었습니다. 아담을 중심삼고 해와가 창조되었지 해와를 중심삼고 아담이 창조된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적인 하나님과 실체의 아버지 입장인 완성한 아담으로 말미암아 해와를 다시 만들어 내는 역사를 통해 해와의 기준을 결정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입장에 서기 위하여 가정기반을 출발하는데 여기에는 반드시 부녀의 일치 기준을 성립시켜야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역사적으로 영적인 하나님과 실체 아버지를 중심삼고 연결시킬 수 있는 시점을 설정해야 되기 때문에 금번에 축복가정 부인들을 동원시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부녀가 일치된 다음에는 모자가 일치되어야 합니다. 즉, 부녀가 일치되는 동시에 모자가 일치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지방에 나가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 남편과 아들딸을 떼어놓고 나감으로써 여러분 가정에 있어서의 사위기대는 어머니를 중심삼고 갈라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의 아들딸은 어머니를 사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아버지는 지방에 나간 어머니가 활동하는 것을 중심삼아 가지고 아들딸에게 교육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너의 어머니는 나라와 하늘의 뜻을 위해 나가서 싸우고 있다'고 하며 자녀들에게 어머니를 존중하게 하는 새로운 방향으로 교육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여자를 중심삼아 가지고 모자일치의 기준을 결정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인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부부가 서로 협조하고 완성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가정의 사위기대가 일시에 협조목적을 완성할 수 있는 기회는 이때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늘은 6천년 동안 모자협조 기반을 위해서 수고해 나왔지만 여기에서는 모자협조 완성은 물론이요, 부부협조 완성까지 하여 사위기대 완성의 협조기반을 결정지을 수 있는 기회인 것입니다.
이것은 여자를 중심삼고 한다는 것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해와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부녀 분립, 모자 분립, 부부 분립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해와가 하늘의 뜻을 배반함으로 말미암아 벌어진 일이기 때문에 해와가 하늘의 뜻을 중심삼고 하늘에 대하여 순응할 수 있는 길에 서서 모자일체, 부녀일체, 부부일체가 될 수 있도록 탕감복귀를 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반드시 나라의 문제가 개재되는 것입니다. 에덴 동산의 아담 해와를 중심삼고 볼 때, 그들은 부부로서 가정은 물론이요, 종족·민족·국가의 기반 위에서 만물을 주관할 수 있는 특권적인 자리에 있었습니다. 아담 해와가 그러한 자리에서 타락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나라가 문제되는 것입니다.
나라가 크든 작든 간에 문제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나라를 기반으로 하여 사위기대를 이루어 가지고 부녀 협조의 일체 이념을 완결짓기 위해서는 여자를 중심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나라를 기반으로 한 사위기대가 여자를 중심삼고 깨어졌으니 여자를 중심삼고 다시 전부 규합시켜야 된다는 것입니다. 나라를 찾아 넘어가는 복귀도상에서 그러한 일이 없어 가지고는 나라를 수습할 수 없습니다. 나라를 수습할 수 없는 동시에 민족을 수습할 수 없고 종족도 수습할 수 없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 통일교회는 종족적 기반 위에서 민족을 거쳐 나라를 복귀할 수 있는 시대권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통일종족을 형성한 것입니다. 통일종족이 주체성을 띠고 한민족 앞에 나서 가지고 민족을 복귀시키면 나라는 자동적으로 복귀되는 것입니다.
종족을 편성하는 것은 민족을 살리기 위한 것입니다. 이 종족적인 입장의 선두에 가정을 대표한 아녀자들을 서게 하는 것은 종족적인 입장에 있는 해와가 실수함으로써 고난이 생겼기 때문에 그 고난에서 해탈시키기 위해서 불가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있어서 여자가 사위기대 심정 일체권을 만들기 위해서는 선두에 나서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집안에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일선에 나가서 사탄세계와 하늘세계, 사탄나라와 하늘 나라를 가름해 놓아야 합니다. 일선에서 반드시 결정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위기대의 협조적인 심정기반을 해결짓기 위해서 여러분들이 가정을 버리고 일선으로 나가는 것은 불가피한 일입니다.
이렇게 여러분들이 가정을 중심삼은 십자가의 노정을 가는 것은 예수님이 가정을 중심삼고 찾으려다 실패했던 모든 것, 즉 사위기대의 기틀을 살아서 완결지을 수 있는 단 한 번의 기회인 것입니다.
이 노정을 앞으로 1972년도까지 3년을 잡고 있는데 이 3년노정을 넘어가게 되면 국가를 중심삼은 우리의 터전은 대한민국에 반드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국가가 거기에 순응하고 국가가 상대적 기준에 설 수 있는 기반이 닦여지게 된다면, 이러한 활동의 터전을 가진 사람은 하늘을 중심한 새 시대에 있어서 나라를 위했던 가정으로서, 나라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가정으로서 입적될 것입니다. 나라가 없어 가지고는 입적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주권이 없어 가지고는 입적을 못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명을 완결짓기 위해서 여러분들은 일선에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을 내보내는 것은 예수님이 요셉 가정을 중심삼고 유대교를 포섭해야 하고, 이스라엘 나라를 포섭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 이루지 못했던 것을 이때에 이루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중심삼고 사위기대를 완성함으로 말미암아 완결지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사위기대 완성이란 요셉 가정의 협조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요셉 가정이 협조했더라면 자동적으로 유대교가 협조하고 이스라엘 민족이 협조하는 길이 트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실패했기 때문에 우리는 반대적인 입장에서 개인복귀노정과 가정복귀노정을 통해서 지금까지 투쟁하여 찾아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 통일교회 자체가 요셉 가정을 대신하고 유대교를 대신할 수 있는 입장의 권을 만들어 재탕감노정을 거쳐 가지고 아벨적 교단이 된 것입니다. 그렇지 못한 기독교는 가인적 교단입니다. 이것을 보게 되면 유대교와 예수님이 새로 선포한 복음의 입장과 맞먹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유대교가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새로 선포한 복음의 기준이 위에 설 수 있었던 입장을 탕감해 들어가는 시점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가정을 중심삼고 새로운 마음으로 나서서 사탄세계에 완전하고 공고한 사위기대를 중심삼은 기반을 닦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이 실패함으로써 2천년 동안 수고해 나온 모든 것을 초월하여 예수님이 살아 생전에 이루지 못한 사위기대를 그냥 그대로 이루어서, 하나님 앞에 저끄러졌던 예수님의 모든 심정적 요건들을 풀 수 있는 단 하나의 터전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이것만 결정되는 날에는 기성교회나 나라는 문을 열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리적으로 보는 견해입니다.
이렇듯 국가와 민족을 중심삼아 가지고 여성으로서 하나의 고빗길을 개방할 수 있는, 이런 역사상에 없었던 새로운 은사의 시대가 되었기 때문에 여러분이 이 민족을 대하여 이런 길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이것이 되어 가지고 대한민국이 어느 정도 뜻을 환영할 수 있는 입장에 서게 되면, 그 다음에는 또 하나의 고개를 넘어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개인적인 입장에서 여자가 나서서 가정적인 십자가를 졌지만 이제는 민족적인 십자가를 져야 하는 때가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벨 민족은 가인 민족을 복귀해야 합니다. 가인 민족을 복귀하는 데에 있어서도 가정주부가 또 앞장서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면 삼팔선을 철폐해야 하는 하나의 고비가 남는 것입니다. 이 고비를 넘어 남북통일을 해야만 비로소 아담 국가로 등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지 못하면 대한민국은 가인 아벨 국가이지 아담 국가가 아닙니다.
대한민국이 아담 국가가 될 수 있는 때가 되면 해와 국가가 있어야 되고 천사장 국가가 있어야 됩니다. 해와 국가와 천사장 국가를 준비하기 위해서 일본과 중국에 대한 작전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을 위해 이것을 미리 준비하는 것이 일본에 대한 섭리요, 중국에 대한 섭리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한국이 아담 국가로서 등장하게 되고 여기에 상대되는 일본과 중국이 해와 국가, 천사장 국가로 나타나 하늘편의 3대 국가 형태를 갖추게 되면 거기서부터 세계는 천운에 따라 굴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불가피한 것입니다.
이것을 가정적 기준으로 본다면, 가정에도 아담이 있고 해와가 있고 천사장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현재 여러분의 남편은 천사장 입장입니다.여자를 빼앗아 가도 가만히 있어야 하는 입장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생님이 부녀자를 동원하는 데에 있어서 남편들은 자기 부인들을 도와 주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이번에 동원되어 나가는 데 본부에서 물질적인 면으로 보리쌀 한 가마니씩을 사준다는 말이 있지만, 본부에서 전부다 대주면 안 됩니다. 남편들이 협조해 주어야 합니다. 협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협조하지 않으면 땅의 인연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일선에 나가 싸우게 되면 하나님도 하나되고, 남편도 하나되고, 자녀도 하나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일선에서 승리함으로 말미암아 천국의 기본이 되는 승리의 가정적 사위기대를 터전으로 해서 국가 해방의 터전이 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리의 견해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6천년 역사노정을 보게 되면 모자협조노정에서 번번이 실패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모자협조뿐만 아니라 부녀협조, 부부협조의 기반까지 이루어져 이 평면적인 도상에서 사위기대 형태를 갖출 수 있다는 것은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 놀라운 은사에 친히 감사하고, 거기에 어떠한 핍박과 어려움이 몰아치더라도 감사로 소화시킬 수 있는 심정의 여왕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이 눈물 흘릴 수 있고, 남편과 아들이 과거와 현재에 미래를 대신한 승리의 부활체로 감사의 눈물을 흘릴 수 있게 하는 그런 여성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민족 복귀와 국가 복귀라는 이 엄청난 과정의 문을 개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런 일에 기수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자로서 가정을 대표한 십자가의 노정에서 선도적인 입장에 설 수 있다는 것은 역사상에 처음 있는 일입니다. 역사에 오직 단 한번밖에 없는 기회인 것입니다.
지금까지 여자들은 가정에서 핍박을 받았고, 종의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는 운명이었습니다. 그렇게 비참하게 밟혀 오던 여자들이 비로소 하나님의 공인을 받고, 남편의 위함을 받고, 아들딸에게 높임을 받을 수 있는 단하나의 승리적 터전이 오늘날 하나님에 의해 허락되었으니 그 은사에 진정 감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번에 동원되지않은 가정들은 앞으로 정리할 것입니다.
이러한 중차대한 문제가 여기에 개재되어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하늘이 바라보고 땅이 바라보고, 과거 현재 미래의 선조들이나 후손들이 바라보게 될 때에 부끄러움이 없는 여러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사의 혜택을 감수하여 일신의 몸 마음이 하나되어 하나님 앞에 몽땅 바쳐 드림으로써 승리의 실체로 공인받을 수 있도록 모든 정성을 다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눈물을 다하고 피땀을 다하여 살아서 십자가를 밟고 넘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한의 조건을 제거하는 책임을 지고 나간다는 사명감으로 그것을 감당해야만 역사적으로 찾아온 이 한때에 소명받은 자기 입장을 탕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하면서 여러분들은 민족을 위하고 국가를 위하여 힘차게 개문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여자가 남자와 동등한 자리에 서게 되는 것이요, 남자보다 높은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여자가 남자보다 먼저 서 가지고 남자 앞에 은혜를 갚을 수 있고 은혜를 베풀 수 있는 이런 때는 한번밖에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힘차게 나가야 되겠습니다. 남자들에게 규탄을 받는 일이나 앞으로 올 후손들에게 규탄을 받는 일을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선생님도 여러분을 내세워 가지고 자랑할 수 있고, 하나님께서도 여러분을 내세워 '통일의 아낙네들을 본받으라'고 하시며 자랑할 수 있는 그런 여러분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사랑으로서 가는 그 길을 사탄세계의 가정이나 사탄세계의 아낙네들과 사탄 자체에게까지도 참소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응당히 그래야 된다고 공인을 받을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때가 그런 한때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는 그 길은 그저 놀러 가는 길이 아닙니다. 가정의 생사의 판결을 놓고 나가는 중차대한 시점과 기준을 거쳐 나가는 길임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 있어서는 남편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식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나라를 위해서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21-33)"는 말이 있습니다. 그의 나라만을 구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의 의란 무엇이냐? 나라의 사위기대를 이루어 천륜의 원칙을 수행할 수 있는 터전을 닦는 것입니다. 이것을 완결짓고 돌아와야 할 책임이 여러분에게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되겠습니다.
이 과정에 있어서 여러분들의 정성이 남편이나 자녀들에게 끌려서는 안되겠습니다. 선생님이 성진이 어머니와 성진이를 떼어놓고 길을 떠나던 때와 마찬가지 입장입니다. 이 기간은 여자로서 한번밖에 없는 입장을 찾아 넘어가는 때입니다. 선생님이 자식을 생각하고 아내를 생각했더라면 이 개척행로에 있어서 지금까지 남아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반드시 사탄에게 말려 넘어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도 남편과 자녀들을 염려하면 염려할수록 그들은 좋지 못할 것입니다. 사탄들이 침범해 들어올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직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고 마음과 뜻을 다해서 주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온갖 정성을 하나님 앞에 결속시켜 하나님과 하나된 그 터전 위에서 하나님과 관계된 사랑의 인연을 중심삼아 가지고 여러분의 아들딸에게 그 사랑이 전해질 수 있어야 합니다. 또, 여러분 남편에 대해서도 하나님이 긍휼히 여겨 하나님의 사랑이 미쳐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정상적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번 동원되는 것은 2차 입니다. 3차 때는 남북통일을 위하여 일할 것입니다. 기성교회가 들어오게 될 때는 기성교회 여성들을 전체 동원해 가지고 거국적으로 남북통일을 위한 책임을 질 때가 오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가정적 기준에서 소수의 무리를 동원하는 것은 어떤 면에 있어서는 유리합니다. 그렇지만 앞으로 남북통일을 하는 시대에 있어서는 거국적으로 동원되어 일해야 하는 것입니다. 반드시 그런 때가 올 것입니다. 그런 때가 오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그때가 오면 여러분들은 또 동원해야 합니다. 그래야 국가를 중심삼아 가지고 세계 앞에 나설 수 있고, 세계의 여성권을 대신해서 만민을 지도할 수 있는 하늘의 여성권을 세울 수 있는 터전을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에 여성들의 개척노정에 있어서도 소생, 장성, 완성의 3단계의 노정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것은 왜 그러냐? 하나님은 지금까지 6천년 동안 복귀섭리를 해 나오시는데 있어서 남성을 중심삼고 세 차례 해 나오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성을 해방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종적인 면에서 남자들이 탕감해 나왔기 때문에 여자들은 횡적인 면에서 앞장서서 탕감해야 합니다. 종적인 탕감을 횡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3차 노정을 통해 가지고 개인을 복귀하고, 가정을 복귀하고, 종족·민족·국가를 복귀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복귀노정까지는 여성들이 3차의 개척노정을 거쳐 나가지 않으면 탕감원칙의 노정이 완결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것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지금은 제2차 개척노정입니다. 그래서 가정을 중심삼고 나가는 것입니다. 이때가 제일 중요한 때입니다. 언제나 두번째가 문제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여러분은 나라를 더 사랑하느냐 가정을 더 사랑하느냐 하는 시험대 위에 올라가는 것입니다. 자기 자녀와 남편을 더 사랑하느냐 뜻을 더 사랑하느냐 하는 시험대 위에 올라가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와 가까운 입장을 사랑했기 때문에 타락한 것입니다. 자기를 높이려 했기 때문에 타락한 것입니다. 나라를 높이고 뜻을 높이는 입장에 섰더라면 타락하지 않았을 것인데 자기를 위주로 하는 입장에 섰기 때문에 타락한 것입니다. 때문에 여러분은 여기에 있어서 자기와 자기 일체의 가정환경을 부정하고 나설 수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만 아담 해와를 중심삼고 내려온 타락의 혈통적인 인연을 완전히 청산할 수 있고, 하나님을 중심삼은 여러분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차원의 입장으로 거듭날 수 있는 터전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나깨나 밥을 먹으나 남편과 자녀들이 생각날 것입니다. 눈만 감으면 젖을 먹이다 떼어놓고 온 아기가 어른거릴 것입니다. 남편이 아침 저녁으로 이야기하던 것이 귓가에서 맴돌 것입니다. 혹은 꿈에도 나타날 것입니다. '왜 나를 버리고 외로운 자리에 가 있느냐. 나는 외롭다' 라고 하는 모습이 꿈 가운데 보여질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환경이 닥쳐 오더라도, 또 그러한 환경에 몰리더라도 단연코 나라와 뜻을 위해서 그 모든 것을 이기고 나가야 됩니다. 에덴 동산에서 여자가 뜻을 따르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하늘나라를 파탄시켰으니 여러분이 뜻을 존중함으로 말미암아 하늘나라를 창건해야 됩니다. 하늘나라를 창건하는 데 있어서 선도적 책임을 해야 할 여성의 고귀함을 결정지을 수 있는 때가 바로 이번의 동원기간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1970년도에 있어서 축복가정 주부들이 동원된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 예수님이 3년노정을 가다가 여자로 말미암아 뜻을 이루지 못하여 민족을 잃어버렸고, 국가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여성된 여러분들은 예수님의 3년 공생애노정의 한을 풀어 드리기 위해 3년노정을 채워 가면서 그가 잃어버린 민족과 국가를 찾고, 세계까지 찾아 드릴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 놓아야 됩니다.
그래야만 예수님이 소원하고 고대해 나오던 신부의 기준을 결정지을 수 있는 입장에 서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자유분방한 자리에서 해방을 노래할 수 있고, 하늘을 중심삼은 평면적인 기준 앞에 새로운 가정의 출발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리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1972년도까지 3년 동안 개척의 길을 가야 되는 것입니다.
지금 이때는 선생님이 이북에서 3년 동안 감옥생활을 했던 것과 마찬가지의 기간입니다. 선생님은 감옥살이를 했지만 여러분은 감옥살이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자유스러운 남한 땅에서 선생님이 북한 땅에서 2년 10개월간 감옥생활을 했던 것과 같은 길을 가는 것입니다. 이 기간은 하늘이 축복해줄 수 있는 기독교와 기독교 여성들이 선생님을 받들지 못했기 때문에 선생님이 수난노정을 가야 했던 것을 전부 다시 풀고 넘어갈 수 있는 중요한 시기인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뜻을 중심삼고 나라를 위하여 온갖 충성을 다하는 여러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번에 부인들이 동원되는 데 다행스러운 것은 혼자만 가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본래는 혼자서 가야 되는 길이지만 세상이 워낙 험악하다 보니 여러분의 동지인 형제들과 같이 가게 하는 것입니다.그러니 여기에는 스스로 환경에 침범받을 수 있는 여건이 완전히 없어지는 것입니다. 오직 뜻만을 위하여 협조할 수 있는 서로서로의 기대가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여기서 자기를 위주로 하다가 서로 싸움이 벌어지거나 어떤 문제가 벌어진다면 그것은 큰 문제가 됩니다. 더구나 36가정, 72가정, 124가정 가운데 조장이 되는 사람이 싸움을 하게 되면 문제는 더욱 큽니다. 그것에 대한 전체의 책임은 조장이 져야 됩니다. 더구나 이번에 축복받은 777가정은 요번에 21일 수련을 받았기 때문에 심정적으로 상당히 고조되어서 나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지금까지 자기 멋대로 살던 생활 습관을 그냥 그대로 해 나가다가는 그들 앞에 반박을 받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그들의 본이 되어야 하는데 본이 되기 어려울 것입니다. 만일 본이 되지 못하면 큰일납니다.
여러분들은 먼저 택함을 받고 먼저 축복을 받았다고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통일교인은 같은 형제요, 같은 한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일 먼저 일해야 하는 사람은 조장입니다. 조장으로서 먼저 해야 할 일은 열사람의 조원을 어떻게 하나 만드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열두 제자가 분열되었던 그 입장을 오늘날 여러분들이 탕감해야 되겠습니다. 남자들이 하지 못한 것을 여자들이 대신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뜻을 중심삼고 완전히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10수는 12수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원래는 한 조를 12명으로 구성하려고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의 제자들이 분열되었던 그러한 환경을 여자들이 대신하여 일체된 환경을 갖추어 가지고 하늘 앞에 하나되기 위한 것이요, 하나되지 못하고 분열되었던 이스라엘 족장 편성의 기반을 대신할 수 있는 터전으로서 완결짓기 위한 것입니다. 이러한 이중적인 사명이 여러분에게 있다는 것을 알고 먼저 하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되지 못하면 문제가 큰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단체생활에 있어서는 누가 나쁜 것을 먹고, 나쁜 것을 입고, 나쁜 곳에 자면서 더 뜻을 위해 일을 많이 하느냐에 따라 중심적인 사명을 하는 사람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조장이라고 해서 시키려고만 하다가는 이틀도 못 가서 문제가 벌어질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발을 씻겨 준 것과 마찬가지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야말로 넓은 어머니의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그러한 어머니의 심정으로 밤낮 그들을 위해서 사랑하고 화동의 중심이 되어서 하나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전도하는 데 많은 지장이 있을 것입니다. 만일 하나만 되는 날에는 선생님이 계획한 목표는 틀림없이 달성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12지파와 같은 형태로 구성된 이 열 사람을 중심삼고 3개월 내지 4개월 내에 120명은 규합될 것입니다.
완전히 하나만 되십시오. 완전히 하나만 되는 날에는 생소한 땅에 나가서 전도를 하더라도 3개월 내지 4개월 내에 반드시 백 명이 넘을 것입니다. 이것이 뜻으로 본 선생님의 견해입니다. 여기에서 3개월은 3년에 해당하는 기간입니다. 따라서 이 기간은 예수님의 120문도를 복귀할 수 있는 기간과 같은 기간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능합니다. 열 사람이 한 달에 각각 한 명씩만 전도하면 첫달에 20명이 될 것입니다. 이 20명이 다시 한 명씩 전도한다면 다음달에 40명이 될 것이며, 이 40명이 다시 한 명씩 전도하면 그 다음달에는 80명이 될 것입니다. 이 80명 중에는 가정주부도 있을 것입니다. 이 가정주부들은 가정적인 기반이 있기 때문에 그 가정에 있는 사람까지 전도하면 백 명은 훨씬 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3개월 내지 4개월이면 120명은 되지 않겠느냐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약 3개월, 즉 100일을 잡은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120조가 3개월만 활동하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지방에 있는 우리 교회들은 지금까지 외적으로는 국가가 존경하고 기성교회가 위압을 받을 수 있는 터전을 닦았지만 내적인 면에서는 큰일이 났습니다. 내적인 살림살이가 형편없다는 것입니다. 세계의 운세는 목전에 다가왔는데 우리는 이것을 포섭할 수 있는 내적인 터전이 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기간을 통해서 1972년도까지는 어떻게 해서든지 20만 명의 식구를 확보해야 됩니다. 그러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됩니다.
이렇게 여러분을 중심삼아 가지고 천 명만 일선에서 움직이게 되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할 것이냐? 모자협조를 해야 되는 것이니 처녀 총각들을 동원할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여러분들이 나가서 몇 개월 동안 전통을 세우고 나면 반드시 처녀 총각들을 동원할 것입니다. 또 그 다음에는 남편들을 동원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처녀 총각들을 규합해서 120조를 만들고 남편들도 규합해서 120조를 만들면 모두 합해서 360조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이들이 전도를 하여 한 교회에 120명씩을 확보한다고 해도 천 개 교회면 12만명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우리가 얼마나 다급하고 시급한 입장에 있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앞으로 2년 동안 오로지 뜻만을 생각해야 됩니다. 남편이고 자식이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선생님이 아내와 자식 생각을 했으면 어떻게 이북에 갈 수 있으며 어떻게 뜻길을 갈 수 있었겠습니까? 선생님이 가는 길 앞에는 감옥이라는 길밖에는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가는 길은 그러한 감옥길이 아닙니다. 나라를 위해서 갈 수 있는 길이니 영광된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번의 이 중요한 시점을 놓치지말아야 되겠습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이 시점에서 잘 못 가게 되면, 옛날 아담 해와가 실패하여 지금까지 참소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천추만대의 후손들에게 잘못한 조상으로 영원히 참소받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일치단결해 가지고 이 1970년대를 중심삼은 하나님의 경륜 앞에 있는 정성을 다 들여 예수님의 한을 해원해 드리고 하나님의 한을 해원해 드려야 되겠습니다. 그럴 수 있는 여성적 권한, 즉 여권을 하나님 앞에 인정받을 수 있는 절대적 기준을 세우는 선봉자라는 것을 자인해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결심을 해 가지고 간다면 자유스러운 남한 땅에서 이제 우리가 가는 길 앞에는 핍박이란 없습니다. 이렇게 일치단결한 우리를 핍박하게 되면 오히려 핍박하는 상대방이 얻어맞게 되는 것입니다. 운세가 도리어 핍박하는 쪽에서 맞도록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 새로운 입장에서 여러분들도 자신을 가지고 당당한 기수가 되어 삼천리 반도를 우리의 힘으로, 여성의 힘으로 새로운 역사를 창조한다는 결의 아래 동원해 주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확실히 알겠지요? 「예」
사랑하는 아버님, 한 많은 복귀도상에 있어서 그 누구도 알지 못하였던 이 노정에 오늘날 저희들을 인도하심으로써 저희들이 엄청난 자리에 서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될 때에 진정으로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지금까지 역사시대에 있어서 남자들에게 유린당해 오기만 했던 여성들이 복된 기반을 닦을 수 있도록 해주신 아버지의 사랑에 감사를 드리옵니다. 지금까지의 역사는 모자협조의 노정을 근근이 끌고 나온 역사라는 것을 아옵니다.
아버지께서는 모자협조의 기준을 한 국가의 기준에서 결정지을 수 있는 한때를 마리아와 예수 앞에 허락했지만, 그들은 이것을 결정짓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부녀의 자리도 결정짓지 못하였고, 부부의 인연도 결정짓지 못한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따라서 오늘날의 저희들은 이 원한의 근거지를 격파해 버리고 이것을 아버지 뜻 앞에 새로이 일치화시키기 위해 나가야 되겠사옵니다.
저희들은 그러한 사명을 인계받아 가지고 지금까지 뜻 세계를 따라 나왔사오니 이제 아버지께서 부여한 사명을 깨닫고 해와가 잃어버렸던 모자협조, 부녀협조, 부부협조를 할 수 있는 일체적 사위기대의 협조기반을 비로소 해와 자체의 몸으로서 찾아 드릴 수 있는 하늘의 때를 맞이한 것을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아버지 앞에 온갖 정성을 묶어 바칠 수 있는 이번 기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제부터 출발하겠사오니 1972년도까지의 행로를, 아버지, 지켜 주시옵소서. 모든 생명을 다 기울여 죽든지 살든지 뜻만을 세우겠다는 결의를 가지고 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갈 때에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라며 당신의 분부하신 말씀에 응하여 죽음길을 달갑게 갔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들도 그런 사명을 감당하고 나설 수 있음으로써 당신의 사랑받는 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그리하여 남편과 자녀들 앞에 당신을 대신하여 하늘 뜻을 교육시킬 수 있는 아내의 마음으로, 어머니의 마음으로 설 수 있게 하여 주시고, 충과 효의 도리를 다할 수 있는 대표적인 딸들로서 설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지금까지 수천년 동안 복귀도상에서 여성들이 선두에 서 가지고 아버지의 뜻 앞에 봉헌하지 못하였사오나 오늘날 이 평면적인 시대권내에 있어서 여성들이 비로소 책임할 수 있게 하여 주심을 감사드리옵니다. 이 고귀한 은사를 잃어버리지 않고 각자 앞에 거두어 들여 가지고, 아버지 앞에 바친 그 가치가 자기들 사위기대의 터전으로서 나누어 가질 수 있는 은사의 기준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번에 움직이는 모든 전체를 당신이 기쁘신 가운데 받아 주시옵고, 가는 곳곳마다 당신께서 같이하여 주시옵고, 영광의 은사가 거기에 나타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의 움직이는 모습을 대하는 모든 민족적인 심정 심정이 거기에 화동하고 순응할 수 있는 도리를 가지고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일 수 있게끔, 아버지, 직접적으로 역사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옵고 원하옵니다.
이들이 나가 있는 곳곳마다 당신이 분부하신 새로운 역사가 창조될 수 있고, 당신이 고대하시던 섭리의 기쁨이 거기에 열매맺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다시 만날 때까지 아버지의 기쁘심이 같이하여 주시옵기를 재삼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의 이름으로 축원하였사옵나이다. 아멘.
수많은 날들을 눈물과 더불어 죽음길을 걸어 나오시면서 이제까지 참아오신 아버님께 저희들은 진정으로 감사를 드리옵니다.
이제 자유의 천지를 향하여 행군하는 이 무리들을 아버지께서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이들이 가야 할 목적지는 어디이겠습니까?
자비와 사랑으로 생명이 넘치는 자유스러운 세계를 준비하시고 그 세계를 이루기 위하여 달려오신 당신임을 느끼게 되옵니다. 그럴 때마다 저희들은 당신의 뜻과 더불어 화합될 수 있는 마음을 갖기를 원하였사옵고, 하나에서부터 천만사에 이르기까지 당신의 참된 품에 흡수되기를 원하였사옵니다. 거기에 화합될 수 있기 위하여 온갖 지성을 들일 줄 아는 저희들이 되게 하시옵소서.
저희는 아버지의 본연의 세계를 그리워하고 있으며, 아버지께서 찾고자 하시는 하나의 세계를 향하여 직행해 가기를 바라고 있사옵니다. 저희들의 마음은 환경에 얽매여서 처처에 있는 고난의 장벽을 처리하고 나가기에는 역부족인 것을 알게 됩니다. 이것을 극복해 나가려면 새로운 용단과 결의가 있어야 된다는 것을 생각할 때마다 자신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때문에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것을 생의 목표로 삼지 않을 수가 없사옵니다. 저희들은 수많은 싸움의 행로 위에 있을 때마다 부추겨 주고 지켜 주어야 할 아버지의 입장을 생각할 때 아버지가 불쌍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옵니다.
이제 저희는 가련한 저희 모습을 그냥 버려두지 않기 위해 수고하시는 아버지가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지께서는 기필코 승리의 한날을 맞이하실 수 있는 아버지시요, 아버지의 소원은 기필코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철석같이 믿고, 저희들은 금후의 자기의 일생을 스스로 개척하는 자녀가 되어야겠습니다. 그리하여 아버님이 사랑하지 않을 수 없고 자랑하지 않을 수 없는 아들의 모습들이 되고 딸의 모습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소수의 무리가 아버지의 존전에 무릎을 끓었사오니, 아버지, 이들 앞에 운행하시옵소서. 저희들의 마음에 충열(忠烈)의 마음을 빚으시고, 아버지의 성품을 닮게 하여 주시옵시고, 오직 아버지를 생각하는 일념을 접붙이시어서 악으로부터의 모든 침범을 극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마음을 저희들에게 상속하시어서 저희들로 하여금 본연의 인간의 가치를 자랑할 수 있는 자들이 되게 하시옵소서.
전체를 아버지께 맡기고, 아버지로 말미암은 존재가 되기를 결심하였사오니, 아버지의 권내에서 아버지의 원대로 저희들을 움직이시어서 승리의 세계로 직행하는 모습들이 되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당신이 기뻐하시는 아들딸이 될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진실로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들은 한 해, 한 날을 보내고 다시 새로운 한 해, 한 날을 맞이할 적마다 당신 앞에 더 가까이 가기를 새로이 결심하였사옵니다. 저희들은 당신을 사랑의 아버지로 모시고 생명의 원천으로 모시며 꿋꿋이 자라도록 허락받은 모습들이었사오나 당신이 배후에서 많은 수고를 하신 후에야 그 사실을 느꼈사옵니다. 이와 같이 언제나 부족한 저희들을 이끄시는 아버지께서는 위로의 대상을 찾을 수 없는 슬프신 존재요, 또한 슬픔을 위로받을 수 없는 입장이었으므로 기쁨의 자리를 찾지 못한 아버지였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사망의 자리에서 허덕이며 구원을 호소하는 인간들을 대하시며 이 세계를 바라보시는 아버지께서는 스스로 해방의 한 날을 맞이할 수가 없으신 줄 아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만사 모두를 홀로 책임지시는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감사의 눈물로써 위로해 드릴 줄 아는 아들이 되고 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가 슬픔을 당할 때 같이 슬퍼할 수 있는 인연을 갖추는 가정이 있다면 그 가정에는 기필코 승리의 터전이 찾아온다는 것을 아옵니다. 이러한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저희들이 아버지를 대한 특정한 자리에 서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되옵니다.
세계 만민을 바라보시며 그들을 한 아들 한 딸같이 구하시겠다는 사랑을 가지고 일일이 대하셔야 할 아버지의 사정을 저희가 분명히 알았사옵니다. 저희들은 그러한 아버지의 염려를 덜어 드리기 위해 세계 인류 앞에 승리의 참부모가 되겠다고 몇 번이고 결의한 무리였사옵니다. 그렇게 결심하고 맹세하였으면서도 가야 할 길을 찾아가지 못할 적마다 아버지 앞에 송구스럽고 죄송한 마음을 직고하지 않을 수 없사오니, 용서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아버님, 여기에 모인 당신의 자녀들은 자신으로 말미암아 여기에 온 것이 아님을 알아야겠습니다. 위로는 수많은 선조들의 공적이 맺혀 있는 것이요, 좌우로는 수많은 민족과 수많은 선영인들의 생전의 인연을 터로 해서 이 자리에 와 있다는 것을 저희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오니 저희들은 그들이 바라는 소원의 뜻 앞에 앞으로 다가올 희망의 세계를 향해 전진할 수 있는 하나의 모체가 되고, 아버지가 기뻐할 수 있는 상징적 실체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렇지 못해 후손 앞에 면목이 없는 모습들이 될까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사오니, 긍휼의 아버지시여, 저희들을 모으셔서 통일교회와 일치시키시옵소서. 또한 사망의 흑암세계를 당신의 품에 품으시옵소서. 또한 저희들이 만민에게 아버지의 자녀된 인연을 맺어 주기 위하여 충성을 다하는 개체들이 되고, 힘을 다할 줄 아는 승리의 역군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남한 각지에 널려 있는 당신의 외로운 자녀들을 이 시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1970년도 한 달 남짓 남았사옵니다. 이 한 해 동안 아버지께서 저희의 갈 길을 위해 수고하여 주신 것에 대하여 감사드리옵니다. 이제는 세계로 찾아갈 수 있는 형제들이 되어야겠습니다. 금년에 통일교회가 이루어야 할 사명을 아버지께서 천신만고의 노고 끝에 저희들 앞에 세워 주신 것에 대하여 감사드리옵니다.
한 가지 두 가지 저희가 대하는 일들을 바라볼 때 아버지의 은사가 저희 앞에 찾아 온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옵니다. 저희들은 오늘의 이 감사한 마음을 간직하여 앞으로 1970년대에 올 아버님의 은사를 받아 감당할 수 있는 선한 아들이 되고 딸이 되어야 되겠사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늘을 대신한 개혁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이 시간 다시 한 번 깨닫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여, 저희들은 죽어가는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되겠사옵니다. 저희들이 스스로 죽겠다 하는 입장에 서서는 안 되겠사옵니다. 오직 아버님의 전진과 더불어 저희들도 전진해야 되겠사오며, 아버님의 사랑과 더불어 개척해야 되겠사오니 일시라도 초조한 마음이 없어지지 말게 하옵소서. 아버님이 남기신 뜻을 염려하는 마음이 사무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는 당신이 원하시는 모든 뜻을 이루시옵소서. 당신의 아들딸을 세우시어 4천만 민족 앞에 찾아가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이제 내일 모레는 새로이 초하루를 맞이하여 당신의 사랑하는 딸들이 뜻을 위해 남한 각지 각처에 나가겠사오니 이들의 갈길을, 아버지, 지켜 주시옵소서. 이들을 위해서 당신이 미리미리 준비하시고 분부하시던 결정적인 날이 다가오고 있사오니 이들의 갈 길을 당신이 맡아 주시옵기를 간절해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날을 중심삼고 새로운 하늘의 운세가 이 나라에 찾아오게 허락하여 주시어서, 외로운 통일의 무리들이 찾아갈 수 있는 하나의 계기가 마련되게 하시옵소서. 이들이 활동을 하다가 몰리고 쫓겨 혼자 남게 되더라도 아버님 앞에 진정으로 감사와 영광과 찬양을 돌려드릴 수 있게 하시어서 그 기간이 거룩한 기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남들이 잠잘 때 가정을 뛰어넘어 적군을 향하여 나서는 그 걸음을, 아버지, 지켜 주시옵소서. 이들이 외로운 자리에 처하는 것은 당신의 외로움을 대신하기 위함이요, 이들이 처량한 자리에서 싸우는 것은 당신의 싸움터를 상속받아 당신과 가까울 수 있는 안식의 한 곳을 찾고자 함이오니 이들이 외로울 때 친구 되시옵고, 이들이 서러울 때 동행하시옵소서. 그리하여 이들이 아버지의 뜻을 성사할 수 있게끔 매일 안팍으로 지켜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들은 평화의 나라를 상속받으려는 여성들로서 새로운 깃발을 드높이고 하늘 나라의 광복을 위하여 피눈물을 흘리면서도 아버지께 감사할 수 있는 당신의 사랑스런 딸들이오니 당신이 붙들고 역사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들이 거쳐가는 곳곳마다, 이들이 떨어뜨리는 피와 땀과 눈물의 자국이 남아지는 곳곳마다 생명이 부활할 수 있는 원천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당신의 은덕으로 승리의 터전을 획득하여 빼앗김을 당하던 무리들로 하여금 이렇게 사랑을 받을 수 있는 한 날이 있다는 것을 만천하에 자랑할 수 있는 기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들은 불쌍하다면 불쌍한 자리에 섰사옵니다. 나라를 갖지 못한 불쌍한 저희들이옵고, 민족을 갖지 못한 불쌍한 저희들이옵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종교인들이 민족을 가려 나오기 위해 갔던 처참한 최후의 장벽을 결판짓고 이 땅 위에 천국을 창건해야 할 엄숙한 사명을 짊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땅 위의 것을 위해서도 목숨을 바치는 이 땅의 실상을 목격할 수 있는 이 때이오니, 생명을 바치고 자기 가정을 제물로 바치더라도 하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몸부림칠 수 있는 거룩한 아낙네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들이 전국을 누비는 걸음걸음에 당신의 슬픔을 근절시키기 위한 마음이 스미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이들이 바라는 표준은 승리의 깃발을 들고 하늘을 향하여 승리의 개가를 부르는 것이오니 아버지의 이름과 더불어 그럴 수 있는 사무친 마음을 가지고, 그런 마음에 묻혀질 수 있는 생활이 되고, 그렇게 하는 것을 신조로 삼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나의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아버지를 사모하던 걸음걸이가 아버지의 나라를 위하여 한없이 울 수 있는 걸음걸이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아버지의 무릎과 옷자락을 붙들고 생애를 걸고 나아가야 되겠사옵니다. 그리하여 지난날에 엮어 온 잘못된 역사를 아버지 대신 한칼에 베어 복귀해 드릴 수 있는 승리의 날을 갖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나라에 대한 아버지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날이 저희 앞에 가까이 오는 것을 알게 되오니, 흰옷을 입고 무릎을 꿇고 세계를 아버지 앞에 인도하기 위해 성심성의를 다하는 통일의 역군들이 되게 하여 주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1970년을 마지막으로 보내는 이때를 중심삼고 외로운 딸들을 임지에 내보내는 당신의 마음을 알아야겠사옵니다. 당신이 이들의 마음을 정화시키시어 그 환경의 터전 위에 머물 수 있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슬펐던 날이 기쁨의 날로, 외로왔던 날이 환희의 날로, 몰리고 상심했던 날이 해방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날로 바꾸어질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들이 수고한 공로로 말미암아 이제 하늘의 운세가 저희 목전에 다가오는 것을 알 수 있사옵니다. 그 운세를 직시하면서 승리를 바라시는 아버님이 사랑과 보호와 긍휼 가운데 인도하시는 행로를 따라, 거룩한 해방의 몸이 되어 최후의 승리의 동산에 나설 수 있을 때까지 지쳐서는 안 되겠사옵니다. 죽어서도 안 되겠사옵니다. 하오니 당신께서 지켜 주시옵고, 승리의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이 아침에도 남한 각지에 널려 있는 당신의 자녀들 위에 함께 하시옵고, 수많은 나라에 흩어져 있는 통일의 가족들 위에도 당신의 사랑을 내리시어 당신이 기뻐하시는 승리의 한 날을 이룰 수 있게 허락하시옵소서. 아버지여, 온 천하를 대신하여 만민을 구하기 위하여 제단을 묶어 아버지 앞에 속죄 제물을 드리오니 받아 주시옵고, 당신의 거룩한 손길로 주관 주장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날도 거룩한 날이오니, 당신을 찬양하기 위해 외로운 무리들이 무릎을 연하여 정성들이는 곳곳마다 당신의 은혜를 받을 수 있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이 아침도 당신이 온전히 주관하시어 전체가 하나로 묶어질 수 있게 해주시기를 바라며, 이 모든 말씀을 참부모의 이름으로 간절히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우리는 타락한 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 세계는 하나님이 전폭적으로 환영할 수 없는 세계요, 지지할 수도 없는 세계인 것입니다. 우리가 태어난 이 세계는 하나님과는 아무런 인연이 없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과 반대적인 입장에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개인이 되었고, 그러한 가정이 되었으며, 그러한 나라가 되었으며, 그러한 세계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처해 있는 세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역사를 거쳐 나오면서 지금까지 개인과 참다운 가정과 참다운 나라와 참다운 세계를 찾아오셨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악한 권내에 살고 있는 개인을 통하고, 민족을 통하고, 나라를 통하여, 혹은 세계를 움직여 가지고 새로운 개인으로부터 새로운 세계를 형성하기 위해 하나님은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하나님에게 배반되는 역사노정을 엮어 나온 인류의 배후에서 선한 개인을 수습하고 선한 가정과 선한 나라를 세우시어 그 나라를 이끌어 나가시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과정에 있어서 선을 중심삼은 개척운동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두말할 바 없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선을 중심삼은 개척의 사명을 짊어질 수 있는 터전이 오늘날까지 역사과정을 움직여 나온 한 국가의 주권이겠습니까, 아니면 그 주권의 치리를 받고 있는 한 개인이나 어떠한 단체이겠습니까? 그 터전은 이 역사시대에 남아져 온 한 나라의 주권도 아니요, 어떠한 단체도 아니요, 어떠한 개인도 아닙니다.
이렇게 생각해 볼 때 새로운 개인과 새로운 단체와 새로운 국가의 형성을 주장하는 운동이 이미 벌어졌어야 되는 것입니다. 역사와 시대를 거쳐 나오면서 하나님이 찾고자 하는 세계를 이루기 위한 운동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뜻을 가진 개인과 가정이 뜻을 밝혀 나오면서 하나의 종족과 민족을 편성하는 운동을 벌여 나왔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기독교에서는 선민사상이 있습니다. 그러나 새롭게 선별된 민족, 새롭게 가른 구별된 민족이 있기 전에 먼저 구별된 개인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구별된 가정이 있게 되는 것이고, 그 가정을 통하여 종족, 그 종족을 통하여 민족, 그 민족을 통하여 하나의 국가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런 운동이 일어나야 되는 것입니다.
그 운동이 세계 역사과정에 휩쓸려 나가는 것이 아니라 타락한 세계를 지도해 나가고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 나가는 주동적인 역할을 해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섭리적으로 볼 때 사상적인 면에서 주도적인 기반을 닦을 수 있는 운동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해 볼 때, 지금까지의 종교가 이런 역사적 운동의 터전으로서 그 사명을 해 나오고 있었다는 것을 역사를 통하여 엿볼 수 있는 것입니다.
새로운 문화라든가 혹은 문명이 형성되는 데는 반드시 정신적인 결합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정신적인 결합을 통해서 개인이 규합되고, 가정이 규합되고, 씨족·종족·민족이 규합되어 가지고 하나의 환경을 형성하면서 새로운 문화를 창조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 배후에는 반드시 그 시대의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 종교, 그 사회의 사람들이 환영하지 않는 종교가 밑받침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 종교는 그 나라의 역사와 그 민족이 요구해서 심어진 것도 아니요, 역사과정을 거쳐온 수많은 사람들이 원해 생긴 것도 아닙니다. 또한 종교가 역사과정을 거쳐 오는 동안 그 나라의 주권자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원치 않는 역사의 환경을 뚫고 나왔으며, 흘러가는 역사를 가로막고 그 역사과정에 문제를 제시하게 된 것은 결코 그 민족이 원해서 된 것이 아닙니다. 어떠한 큰 힘이 역사와 더불어 뒤넘이치면서 역사의 방향을 새롭게 이끌어 나왔기에 어떠한 세력도 여기에 도전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역사에는 반드시 선을 위주로 새로운 세계를 형성하기 위한 어떠한 힘이 역사를 넘어서서 규칙적으로 움직여 나온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큰 힘의 주체를 우리는 하나님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역사과정을 통해서 볼 때 종교는 핍박을 받아왔습니다. 그렇지만 참된 종교는 핍박받는 가운데에서도 점점 발전해 나왔던 것입니다. 종교가 핍박을 받는 것은 어떠한 개인에게 진정으로 지지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요, 어떠한 민족에게도 전적으로 지지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요, 혹은 어떤 국가나 세계에서도 전적으로 지지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종교는 반대받는 입장에서도 역사과정을 거쳐오면서 멸망하여 후퇴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투쟁하며, 환경을 극복하며 발전해 나온 것입니다.
오늘날 종교인들은 자기들 스스로의 힘으로 말미암아 종교의 판도가 세계적으로 넓어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 배후에는 세계의 운세와 보조를 맞춰서 밀어 주시는 하나님이 계셔서 세계적인 문명권을 형성하는 정신적인 바탕이 되어 주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환경을 넘고 지역을 넘어 동서고금에 사상을 연결시킬 수 있는 교량 역할은 어떠한 정치권력을 중심한 국가를 통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반드시 하나의 통일된 사상과 선한 나라를 추구하는 이념을 통해서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까지의 역사과정을 두고 볼 때, 동양은 정신문명을 중심삼은 길을 찾아 나왔고, 서양은 물질문명을 중심삼은 길을 찾아 나왔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이렇게 상극된 양면의 방향으로 발전해 나가는 것만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서구 문명을 아시아의 동양 문명에 접선하여 새로운 종교 이념에 연결될 수 있는 한때를 찾아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있다면 틀림없이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아시아를 볼 때, 아시아에서 주도적인 책임을 해야 할 나라는 어떤 나라이겠습니까? 그 나라는 아시아에 있어서 정신문명을 중심삼고 아시아에 공헌한 나라가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중국에서는 유교가 형성되었고, 인도를 중심삼고는 불교가 형성되었으며, 이스라엘을 중심삼고는 히브리 사상, 즉 기독교 사상이 형성되었습니다. 이렇게 아시아 지역에서 나온 종교들이 세계적인 종교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이러한 종교들이 아시아인들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어 있다는 것이 사실인 것입니다.
이 종교들은 아시아의 제약된 한 지역과 특정한 민족만을 위한 종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아시아의 전체 민족을 규합하여 하나의 새로운 아시아를 창건할 수 있고, 새로운 세계의 표상을 제시할 수 있는 사상적인 밑받침을 가지는 종교의 형태를 갖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유교면 유교, 불교면 불교, 기독교면 기독교, 그리고 회회교면 회회교 같은 종교들 중 어떠한 종교가 초민족적이요, 초국가적인 입장에서 세계 만민을 중심삼고 하나의 형제의 인연을 주장하고 나왔느냐? 어떤 종교가 하나의 동기와 하나의 나라와 하나의 국민, 하나의 조국을 그리워 하는 강한 이념을 가지고 나왔느냐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볼 때, 여기에 가장 가까운 것은 기독교 사상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 사상은 만민을 중심삼고 자기들 스스로를 고취시키면서 지금까지 발전해 나온 것입니다. 지금까지 악한 사탄세계에서 기독교 역사가 엮어 나온 역사과정을 보게 될 때, 기독교는 선열들이 피뿌린 순교의 인연을 거치면서 터전을 다져 온 것입니다. 사회 앞에 비판을 받고 사회 앞에 지탄을 받으면서도 반항없이 죽음의 대가를 치르면서 발전해 나온 것입니다. 물론 기독교 외에 다른 종교도 있겠지만 역사의 전체적인 흐름 가운데 그러한 종교는 기독교뿐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몰리고 핍박받고 멸시받던 기독교가 오늘날에는 명실공히 세계적인 종교로서 민주세계를 움직이는 사상적인 뒷받침이 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해볼 때, 이것은 기독교 자체의 힘만으로는 되어진 것이 아닙니다. 죽음의 고개를 밟고 넘어갈 수 있었던 그 힘의 모체는 기독교 자체의 힘보다도 배후에 계시는 하나님의 힘인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힘에 의해서 기독교가 세계적으로 발전해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기독교가 금후에는 어떻게 될 것이냐? 이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독교를 세웠다면 그 목적은 새로운 나라를 찾기 위한 것이요, 새로운 세계를 형성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이 땅 위에 없었던 선을 대변할 수 있고, 선의 입장을 옹호할 수 있고, 선의 환경을 지켜 줄 수 있고, 선의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선의 조국이 이루어지기를 원했으며 승리의 한때가 이루어지기를 원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 사상은 반드시 종말시대가 온다는 것을 예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세가 되면 기독교 전성시대가 되어 새로운 세계를 만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때는 악의 세력을 중심하고 기독교를 반대했던 나라는 망한다고 단적으로 결론짓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선을 대변한 것이 기독교라면, 기독교를 반대한 사회와 세계는 악의 구렁텅이일 것이므로 종말시대에는 반드시 이것을 해결짓기 위해 한 나라는 가고 한 나라는 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가야 할 나라는 악의 나라요, 와야 할 나라는 선의 나라일진대 선과 악이 투쟁하여 판가름을 짓지 않으면 안 될 종교적인 문제가 세계적으로 남아져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정치세력을 중심삼고 국가나 사회를 조정해 나왔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군사력을 강화함으로써 외침을 대비 방어할 수 있는 면모를 갖추어 나왔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정치적 세력이나 군사적 세력이 강화되어 있지만 그것이 개인의 인생을 지탱시켜 줄 수 있는 자유로운 환경을 가져다 주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월남전쟁을 중심삼고 보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미국은 국력으로 보나, 정치적으로 보나, 경제력으로 보나 모든 면에 있어서 세계의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는 선진국가의 자리에 서 있지만 월남 전쟁에 있어서는 후퇴하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보면 정치적으로나, 경제·문화·군사적으로 아무리 배경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그것들이 지배하고자 하는 나라의 민족, 또는 그 국민에게 주장할 수 있는 사상적 뒷받침이 못 된다는 것을 여실히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에 정치를 중심삼고서는 세계를 지배할 수 없고, 경제를 가지고도 세계를 지배할 수 없으며, 현재의 민주주의 제도로도 세계를 지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앞으로 하나의 주체성을 가지고 세계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판도와 그러한 환경과 터전을 닦을 수 있는 것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요즘에 와서는 학생들을 중심한 대학가의 문제가 세계적으로 생겨나고 있는데 과연 그 학생들이 새로운 방향을 형성해 갈 수 있는 모체가 될 수 있을 것이냐?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몇 년의 교육기간을 거쳐서 사회에 나오게 되면 사회가 좋아하는 방향을 따라 흘러가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사회에 나오면 변천해 버릴 수밖에 없는 스튜던트 파워로는 사회에 영향을 미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떠한 기반이 새로운 사회를 형성하는 데 있어서 터전이 될 수 있겠습니까? 이 사회에 대결하는 역사성을 지닌 공고한 터전을 가지고 있는 종교 단체만이 앞으로 이 사회를 새롭게 형성하는 데 뒷받침이 될 수 있으리라 예상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 인구 비례를 보게 되면 3분의 2가 넘는 인구가 종교인들입니다. 이들의 대부분이 민주세계에서 유심사관을 중심삼고 직결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종교의 명분을 갖춘 인구가 18억에서 20억에 가깝게 형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들이 가야 할 그 세계와 이루어야 할 그 본연의 터전을 자기들의 종교를 중심삼고 이루려고 합니다. 자기 종교를 중심삼고 세계화, 즉 세계 재패를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세계화는 군사력과 정치력과 경제력을 중심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공익과 공분의 심정으로 악의 세력과 대결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런 힘의 모체를 형성해야 하는 고빗길에서 신음하고 있는 것이 현재의 종교계입니다.
세계의 수많은 종교들이나 그 종교인들이 새로운 나라와 세계관을 모색하여 거기에 규합돼 가지고 하나의 민족을 넘어 아시아면 아시아에 있어서 새로운 형태를 이루게 되면, 이것이 세계적인 분화구가 되어 세계가 일시에 여기에 규합할 수 있는 새로운 시대권이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는 어떠한 길을 갈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우리가 통일교회를 위주로 한 주장을 만국에 적용시켜야 되겠다고 생각할 때에는 통일교회가 지니고 있는 내용이 다른 종교보다 참다운 가치를 지니고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보물을 좋아합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누구나 보물을 가지게 되면 마음이 기뻐지게 되어 있습니다. 마음이 흥분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중심삼고 행동의 집중화를 이루게 됩니다. 이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가 수많은 종교인들이 찾고자하는 보화와 같은 내용을 지니고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종교가 찾아 나가는 최고의 보화가 무엇이겠습니까? 물론 자기들이 지니고 있는 새로운 종교를 보화라고 할는지 모르지만, 종교 자체가 보화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가장 가치적인 중심적 보물은 종교도 아니고 개인도 아닌 가정입니다.
정성을 들여서 형성된 가정이 있다면, 그 가정은 사회에 있어서나 수많은 종교에 있어서나 어느누구든지 따라가지 않을 수 없는 보화와 같은 존재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가정이 있다고 해서 그 종교가 세계적인 짐을 질 수 있는 모체가 될 수 있을 것이냐?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그 가정은 천적인 가정이 되겠지만, 하나님 입장에서 본다면 그 가정 하나에 머물 것이 아니라 새로운 집단인 종족을 편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종교를 중심삼고 가정을 규합하여 혈족을 넘는 인연을 맺으면 그 인연은 어떠한 종족의 인연보다도 강한 것이 됩니다. 이렇듯 종교운동을 중심삼고 종족을 새롭게 편성할 수 있다면 지금까지 수많은 종교들이 찾아 나온 어떠한 개인이나 가정보다도 더 큰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종족을 편성하면 자기 씨족만을 중심삼아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어 김씨면 김씨 씨족만을 위주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씨족을 넘어서서 민족편성을 하여 그 기반을 공고해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것이 수많은 종교인들이 바라는 것이 모체라고 주장할 수 있는 내용이 결정되게 되면 역사시대를 거쳐온 수많은 종교계나 종교인들은 새로이 편성되는 그 민족을 참다운 가치로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그 민족이 그들 앞에 빛이 될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런 민족편성을 해야 하는 것이 종교가 가야할 길이라면, 이것을 찾아 세운 종교는 현시대에 있어서나 미래에 있어서 면목을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민족을 편성한 후에는 그 민족의 종교를 중심삼고 반드시 하나의 국가를 세워야 세계 앞에 자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국가를 찾고자 하는 것이 지금까지 종교가 찾아 나온 목적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렇듯 종교를 중심삼고 찾아 나오는 국가가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강한 내용을 지니고 있어서 다른 나라들이 본받지 않으면 안 될 그런 국가관을 갖고 있을 때 그 국가는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모체가 될 것입니다. 종교적으로 볼 때 그런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그런 것입니다.
그러면 앞으로 종교가 나가야 할 길은 어떤 길이겠습니까? 수많은 종교들은 사회와 분리된 역사과정을 거쳐 나왔습니다. 그러나 사회와 동일한 입장에서 새로운 시대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사회와 격리된 입장에서 부르짖는 종교의 세계관을 가지고는 안 됩니다. 이 테두리를 헤쳐 버리고 눈 앞에 현재 벌어져 있는 세계를 이끌어 갈 수 있는 주체적 역량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금후의 종교인들이 추구해야 할 사명인 것입니다.
새로운 세계관과 새로운 국가관을 제시할 수 있고, 새로운 민족과 새로운 종족과 새로운 가정과 새로운 인격을 형성할 수 있는 내용을 제시할 수 있어야 가정, 종족, 민족, 국가, 세계간의 문제도 서로 해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세계관으로 편성된 가정과 종족과 국가라야 현재의 가정, 종족, 국가보다 더 가치적인 내용을 지닐 수 있는 것이요, 그래야 구시대의 때가 자동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할 것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종교가 탕감하면서 찾아 나온 그 조국, 즉 각 종단을 중심삼은 그런 조국은 건설되어 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건설되어 있다면 그 조국은 하나일 것입니다. 왜냐? 하나의 문화권을 형성하기 위한 목적을 추구해 나온다 할진대는 하나님이 피조세계를 창조하신 목적도 하나요, 사람 앞에 주어진 목적도 하나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민족이나 종족, 혹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하나의 목적에 의해서 태어났고 하나의 목적을 중심삼고 인생길을 가야할 존재라 할진대는, 종족을 넘고 민족을 넘고 오색인종을 초월하여 추구하는 하나의 목적에 귀일시킬 수있는 사상이 없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하나의 목적으로 귀일시킬 수 있는 사상은 무엇이냐? 그것은 자기를 위주로 한 세계관이 아닙니다. 그 사상은 세계를 위주로 하는 세계관이요, 만국을 위주로 하는 세계관입니다. 이것이 하나의 목적으로 귀결시킬 수 있는 사상입니다. 이것은 세계와 분리된 입장에서 자기의 종족을 자랑하는 사상으로 이루어진 세계를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본연의 인간을 존중시할 수 있는 환경조건은 물질문명 권내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오늘날 물질문명 세계에서는 인간의 본성이 바라는 유일신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그런 환경은 오늘날과 같은 자유주의를 통하여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자유가 팽창하게 되면 가정도 망해 버리는 것이요, 사회나 민족자체도 망해 버리는 것이요, 국가도 망해 버리게 됩니다. 전체를 밟고 올라서서 자기를 주장하는 자유주의를 중심삼고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세계를 위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자유주의 사상은 남아질 수 있으되 전체를 부정하고 자기 위치만을 지키려 하는 자유주의 이념은 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오늘날 미국이 주도하고 있는 민주주의 이념은 진정한 자유주의를 떠나고 있습니다. 그 자유주의는 세계를 일원화하는 자유주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자유를 망각하는 개인 위주의 자유주의는 멸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기 자체의 인격적 가치를 부정할 수 있는 자리까지 나가게 되면 자기가 처해 있는 기반을 상실하게 되기 때문에 자기 자신도 유야무야한 존재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일고 있는 청소년 문제가 이러한 입장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종교는 개인구원을 주장하고 나왔습니다. 세계를 구원하는 것을 목표로 해 나왔지만 개인구원을 표방하며 나왔습니다. 역사가 발전해 나가는 목적은 세계구원인데 역사 가운데 세계를 지도해 나오고 있는 민주주의는 개인을 위주로 해 나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종교가 취해 나온 입장과 일치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민주주의 세계의 표본이라 할 수 있는 미국 같은 나라가 개인주의 사상 속에서 방탕하고 있는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 그것은 개인구원을 강조해 나온 기독교 사상의 영향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개인주의적인 환경을 타파시키는 신앙관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내가 구원받을 것이 아니라 가정을 구원해야 되겠고, 가정을 구원받게 하는 것보다는 민족을 구원받게 해야 되겠습니다. 또 민족을 구원받게 하는 것보다 민족을 희생시켜서라도 국가를 구원해야 되겠고, 국가를 희생시켜서라도 세계를 구원해야 되겠다는 신앙관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야 할 것이 아닌가? 이러한 사조는 많은 무리가 번민하고 있는 이 시대에 필히 나타나야 할 새로운 사조요, 만민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될 새로운 사조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내 개인을 하나의 씨로 하여 가정을 결실되게 해야 되겠고, 또 그 가정을 씨로 하여 종족을 거두어야 되겠으며, 종족을 씨로 하여 민족을, 민족을 씨로 하여 국가를, 국가를 씨로 하여 세계를 구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운동을 중심삼은 새로운 종교가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종교가 가지고 있는 보화가 무엇일 것인가? 그것은 교리가 아닙니다. 어떠한 예식도 아닙니다. 그 교리와 예식을 따라 다듬어진 인격인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인격이 그 종교를 대표해서 나타나게 될 때 세계인이 추앙할 수 있는 인격이 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한 사람이 온다면 그 사람은 자기 개인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인격을 후대에 물려줄 수 있는 인연을 지어 놓고 가야 합니다. 그럴 수 있는 터전이 가정입니다. 개인보다도 더 원해야 할 것은 가정입니다. 그러므로 가정구원 완성의 표준이 될 수 있는 종교 이념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까지의 종교는 자기 개인구원을 위주로 하여 나왔습니다. 개인구원을 위해서는 나라도 부정하고 사회환경까지도 부정해 나왔습니다. 기독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종교이념을 세계화시키고 세계적인 조국을 바라보고 나가야 할 주체적인 입장에 서야 한다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개인구원만을 위주한 종교관념에서 벗어나야 되겠습니다. 자기를 희생시켜서 가정을 구원하는 것이 바로 자기까지 구원할 수 있는 보람된 가치를 추구하는 것임을 알고 희생할 수 있는 종교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또한 가정을 위주한 것으로서 끝을 볼 것이 아니라, 가정을 희생시켜서 새로운 종족을 탄생시킬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운동을 유발시킬 수 있는 내용을 가진 종교가 있다면 그 종교는 발전할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종족을 희생시켜 민족을 탄생시키고, 민족을 희생시켜서 국가를 탄생시키고, 국가를 희생시켜 가지고 세계를 탄생시킬 수 있는 새로운 환경을 갖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환경을 이 땅에 연결할 수 있는 사상적 밑받침을 가진 종교가 앞으로 세계를 주도할 수 있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것이 한꺼번에 이루어질 수 없다면, 개인구원을 목적하는 종교보다는 가정구원을 목적으로 하는 종교가 나와야 됩니다. 그 다음엔 자기 종족을 구원하고 민족을 구원하기 위한 종교가 나와야 되고, 또 국가를 대신하여 세계국가를 형성할 수 있는 종교가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한꺼번에 개인·가정·종족·민족·국가를 구원할 수 있는 사상 체계를 갖추어야 합니다. 그런 종교는 최고의 종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하나 분립된 종교의 형태를 가지게 된다면 그 종교는 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시점에 있어서 개인구원을 해야 하는 사명도 필요하지만 그것을 벗어나서 가정을 구한다든가, 종족을 구한다든가, 민족을 구한다든가, 국가를 구하고 세계를 구한다고 하는 사명이 더욱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 사명을 하지 못하게 되면 금후의 종교의 갈 길은 막히고 마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우리 통일사상에서 제시하는 개인구원 완성은 가정을 표방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요, 가정구원 완성은 종족을 표방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요, 또 종족구원 완성은 민족을 표방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요, 민족구원 완성은 국가를 표방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요, 국가구원 완성은 세계를 표방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듯 세계, 국가, 민족, 종족, 가정을 표방하는 사상은 어떤 사상이냐? 그것은 새로운 사상입니다. 다시 말하면 새로운 세계관, 새로운 민족관, 새로운 종족관, 새로운 가정관, 새로운 개인관을 가진 사상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통일교회의 사상은 구원의 목표를 개인에 두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의 나라와 하나의 세계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나라가 구원이 되어 태평왕국이 되면 그 나라의 백성은 태평한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세계가 평화의 세계가 되면 그 세계권내에 속해 있는 수많은 민족 국가들도 평화로운 국가권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상충권이 있어 가지고 투쟁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통일조국의 광복을 세계화시키고 그 세계화된 권내에서 보편적인 생활문화를 창건할 수 있는 내용을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을 갖는 것이 현재 난국에 봉착한 세계정세를 새로운 국면에서 타개할 수 있는 방편인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이 통일사상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통일교회가 가는 길은 개인을 희생시켜서 새로운 가정을 찾아 나가는 것입니다. 여기에 지금까지의 어느 종교보다도 가치 있는 내용이 있는 것입니다. 개인을 희생시켜 가정을 형성했다면 그 가정을 투입시켜서 새로운 종족을 편성해야 됩니다. 본래 가정이 남아지기 위해서는 종족을 위한 길을 가야 되기 때문에 그것을 예상하고 출발해야 합니다. 또한 종족도 민족이 있어야 남아지는 것이므로 미래의 그 터전을 예상하고 준비해야 됩니다. 그리고 민족도 미래의 주권국가를 위해 남아져야 하는 것이므로 그것을 예상하고 준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영원히 남아지기 위해서는 영원한 세계의 터전을 준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통일사상이 제시하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일치된 입장에서 이러한 노정을 가도록 부르짖는 교회가 통일교회인 것입니다.
오늘날까지 종교인들은 역사과정에서 탄압을 받아 왔습니다. 탄압뿐만 아니라 피의 제사를 드려 왔습니다. 희생의 피를 뿌려 왔습니다. 그 피에 대한 보수와 희생의 대가를 어디서 찾을 것이냐? 자기들이 믿고 있는 종교에서 찾을 것이 아닙니다.
누구 때문에 그런 피를 흘렸습니까? 그 피는 세계 때문에 흘린 것이고 새로운 나 때문에 흘린 것입니다. 새로운 인연 때문에 피를 흘렸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흘린 그 피의 대가는 목적 성사의 한 날을 통하여 청산지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그 한 날을 생각하며 말세를 기다린 것입니다.
현 사회와 현 시대권에서 생을 유지하고 있는 인간들이 탄압받는 환경을 극복하면서 바랐던 것은 미래의 세계에 대한 소원이었습니다. 그러한 소원의 한 날이 와서 자기들이 소원하는 주권자와 통치자가 오라고 그러한 사람이 다스리는 하나의 세계가 나타나 달라고 고대해 나온 것이 종교가 추구하여 나온 목적이 아니겠습니까?
이제 현시대에는 새로운 축복의 과정을 통하여 새로운 총아, 새로운 해방동이가 태어나야 됩니다. 종교의 세계에 해방동이가 태어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내일을 위한 심정적 인연이 천국을 향하여 새로운 행렬을 갖출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대열이 현재의 종교 체제내에 싹이 트고, 체계화하여 정통의 내용을 갖출 수 있는 운동이 벌어져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끝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새시대는 구시대가 끝난 다음에 오는 것이 아닙니다. 구시대 내에서부터 새시대가 형성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어머니의 복중에서부터 생명의 밑받침이 될 모든 요소를 흡수해 가지고 아기가 태어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태어난 아기는 알맞는 인격을 형성해 나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렇게 변해 가는 사회 환경 가운데에서 새로운 세계를 향한 준비체제를 갖추어야 합니다. 이 역사권내에서 종말시대를 살아 본 사람이 이 세상이 절박하든 안 하든 문제를 제시할 수 있는 새로운 운동이 벌어져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오늘날 한국의 교회들 가운데에서 통일교회가 새로운 시대를 위하여 내적으로나마 각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자명한 것입니다. 내일의 세계를 상속받을 수 있는 총아로서 어떻게 등장할 것이냐 하는 문제가 금후에 우리가 가야 할 노정인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개인을 희생시켜 가지고 이상적인 가정을 편성하고, 그 가정을 희생시켜서 종족을 구하고, 그 종족을 희생시켜서 민족을 구하고, 민족을 희생시켜서 국가를 구하고, 국가를 희생시켜서 세계를 구하자는 사상을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상을 두고 볼 때 어떤 것이 선한 사상이겠습니까? 선과 악이란 어떤 것입니까? 선한 사상은 하나님께서 같이하시는 사상이요, 악한 사상은 이 세상과 같이하는 사상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한 사상을 강조하시기 때문에 선한 사상은 단계적인 발전을 가져온다는 것을 훤히 짐작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악한 사상은 악이 전진하더라도 퇴보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설사 진전하는 과정에 있어서 발전의 흔적이 있을 지라도 결과적으로는 퇴보의 말로를 고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사상의 조류는 선악을 중심삼고 발전과정을 거치는 가운데 종교권과 사회권으로 분립된 현세계에서 찾아보기 전에 개인에서 먼저 찾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나라에서 찾아보기 전에 한 가정에서 먼저 찾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사회악이 무엇입니까? 사회악은 부패한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부패한 것입니까? 또 이렇게 부패하게 된 원인은 무엇입니까? 나라를 잊어버리고, 사회의 모든 공적인 터전을 망각하고, 가정의 모든 기대를 망각해 버리고 자기 위주의 망상에 들어가면 거기에서부터 악의 뿌리는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 악의 뿌리는 사회에 있는 것도 아니요, 가정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너와 나에게 있는 것입니다. 나라는 남자 여자가 부패의 모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만 살려고 하는 것이 부패의 모체라는 것입니다.
부패되었다는 것은 어떤 입장을 말하느냐? 바로 자기 개인을 위주로 한 생각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를 위주로 나라를 끌어들이려 하는 것은 나라를 부패하게 하는 것입니다. 나를 위주로 가정을 흡수하려는 것은 가정을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부패는 곧 망하게 하는 것임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대한민국이 부패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자신은 대한민국을 위해서 잘한 것이 있습니까? 대한민국 행정부가 부패했다는 것은 그 행정부에 있는 사람들이 부패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는 괜찮고 상대방만 부패했다구요? 천만에요. 부패의 터는 국가도 아니고 사회도 아닌 것입니다. 부패의 모체가 되는 것은 바로 자기를 위주로 하는 것입니다. 자기 위주로 가정과 사회와 나라와 세계를 이용하려는 것이 바로 악입니다. 악은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나쁜 사람이라고 말할 때 어떤 사람을 나쁜 사람이라고 합니까? 자기만을 위주하고 걱정하고 생각하는 사람을 나쁜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사회에서는 나쁜 사람으로 낙인찍히게 되는 것이요, 가정에서는 나쁜 자식이 되는 것이요, 친구 사이에서는 나쁜 놈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사람은 자기 주장하면서 살게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보다 가치 있는 것이란 자기를 위주로 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친구가 백 명 천 명이 있다고 해도 자랑할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친구가 많이 있다 하더라도 여러분이 자기 주장만 했다가는 다 떨어져 나갈 것입니다. 떨어지지 말라고 아무리 제사를 드려도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자식아, 너 이거 해' 이런 꼴을 세 번만 당하게 되면 다 도망갈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자멸하게 되는 동기입니다. 소위 안다고 하는 패들이 전부다 자기 위주로 살기 때문에 모두가 그들 편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돼먹지 못했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 혼란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공산주의가 세계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세계가 반대했지만 개인보다 나라와 세계를 형성한다는 사상적 기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계 재패를 위해서는 개인을 희생하라는 법칙이 있기 때문에 공산주의가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하나님도 인류도 없습니다. 오직 공산당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결국엔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이 그걸 알아야 됩니다.
대한민국이 망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은 대한민국이 망하기 전에 먼저 망할 것입니다. 내 배를 채우기 위해서는 형제든 친척이든 다 희생시키는 것이 자기를 위한 것입니까, 형제를 위한 것입니까? 그들이 주장하는 대로 살면 남아지는 것은 부패밖에 없습니다.
내 형제를 위해서 굶주리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형제 앞에서 눈물을 흘릴 수 있어야 굴복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방법대로 한다면 뭉치자고 할 때 억지로 뭉치기는 하겠지만 자기를 위해서 핏대를 올린다면 나중에는 분립되고 말 것입니다.망하는 원인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생사문제의 흥망의 관건이 여기에 있든 것입니다.
그러면 제일 무서운 사상이 무엇이겠습니까? 사탄이 지금까지 수고해서 만들어낸 사상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자유주의 사상입니다. '나라도 없고, 가정도 없고, 부모도 없다. 우리마음대로다' 하는 이 몹쓸 놈의 사상이 지금 세상을 휩쓸고 있는 것입니다. 목적 체제를 갖추지 못한 자유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방종인 것입니다. 아니 방종도 못 되는 망종인 것입니다.
사람이 태어날 때는 태어난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의 물건도 그물건이 만들어진 목적이 있는 것처럼 사람에게도 목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목적을 알지 못하고 그 목적과 화합하지 못하는 것은 자기 자체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요즈음 젊은 사람들 중에는 어디에 코를 대고 사는 지도 모르고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통일교회 내에도 이러한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루 동안 무엇을 하고 지냅니까? 서울에 있는 통일교회 패들은 학교에 다니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래 무얼 하고 지냅니까? 흥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공적으로 살아야 하지만, 망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사적으로 살아도 됩니다. 여러분은 공적으로 살겠습니까, 사적으로 살겠습니까? 망하고 싶으면 사적으로 사십시오. 자기 마음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하는 그것은 상대를 생각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처럼 마음대로 하게 되면 망하는 것입니다.
나를 중심삼고 생각하니 남을 흉보게 되고, 좋은 것이 있으면 빼앗아 쓰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 따위 생각을 하는 사람은 망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중심삼고 생각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그런 면에 있어서 잘 하고 있어요? 이렇게 볼 때 사람은 다른 누구에게 기대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오늘날 통일교회가 문 아무개 때문에 욕을 먹었다면 통일교회는 망했을 것입니다. 문 아무개는 욕을 먹어도 좋지만 문 아무개가 가는 길이 공적인 길이라 한다면 욕하는 사람은 망하는 겁니다. 그 길을 나라가 막으면 나라가 망할 것입니다. 또, 세계가 그런다면 세계가 꼬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상대가 자기 마음에 맞는다고 한다면 그 상대에게 어떻게 하는 것이 잘해주는 것이겠어요? 사람은 내 마음에 맞고 안 맞고 하는 그 기준을 세계적으로 설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조그만 밭뙈기 가지고도 아웅다웅하지요? 마음은 세계적이어야 합니다. '세계가 마음에 맞는데' 할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 세계가 마음에 맞아야 평화로운 생활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친구가 좋다고 해서 그 친구의 지갑에 있는 돈을 내 맘대로 쓸 수 없는 것입니다. 내것이 내것이고 네것도 내것이라고 한다면 그런 사람은 공산당과 같은 사람입니다. 좋아하는 친구라면 어떤 조건이 있으면 그것을 빼앗으려 하는 그런 친구가 좋은 친구입니까? 좋다 나쁘다 기준이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공적이냐 사적이냐에 따라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좋은 친구란 어떤 친구냐? 그저 뭔가를 해주고 싶고 희생하면서 위해 주고자 하는 친구입니다. 그러면 누구나 좋아하게 되는 것입니다. 전부다 자기 기준에 따라 좋고 나쁜 것을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희생하고자 하는 터전 위에 선의 중심이 있는 것입니다. 이걸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쉬지말고 남을 위해 희생하라는 것입니다. 망하려면 자꾸 떨어져 나가는 것이요, 흥하려면 자꾸 붙게 되는 것입니다. 자꾸 붙으면 흥하는 것이요, 자꾸 떼어가면 망하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잘 붙는 사람, 붙임성이 좋은 사람은 어디를 가든지 덮어 주기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모든 것을 탕감하려는 사람이 아닙니다. 어디 가든지 위해 주려고 하고 남의 치닥거리 해주기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입니다. 선은 희생과 봉사에서부터 판도가 넓어지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오늘날 이렇게 발전하게 된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이 일생 동안 그 종교를 믿으면서 남을 위해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동네면 동네의 이익을 위해서 10년, 20년을 자기를 희생하며 사니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를 나쁘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는 이런 기독교인들을 박해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로마는 망한 것입니다.
요즘 세상에서도 돈푼깨나 있다고 못되고 사나운 영감이 배를 내밀면서 그 동네에 사는 착한 사람들을 멸시 천대한다면 합심해서 순리대로 때려잡자고 하지요? 선한 사람을 못 살게 하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공적으로 그렇게 처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통일교회의 지도이념이 뭐냐? 망하는 쪽이냐, 흥하는 쪽이냐? 어느 자리에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또, 통일교회가 가지고 있는 사상은 어떤 사상이냐? 망할 사상이냐, 흥할 사상이냐? 그것을 아는 것은 간단한 것입니다. 그 사상이 통일교회만을 위주로 한 사상이라면 망할 것입니다. 종교만을 위주로 한 세계관을 주장한다면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통일교회는 새로운 세계를 위한 종교입니다. 다른 종교와 내용이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는 망하더라도 통일교회가 바라는 나라는 망하지 않습니다. 통일교회는 백 번 망하더라도 통일교회가 주장하는 나라가 망하지 않는 한 통일교회는 영원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또 통일교회가 바라는 그 나라는 망하더라도 통일교회가 찾아 세워야 할 세계가 망하지 않는 한 통일교회는 영원히 남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통일교회가 바라는 나라가 건설되게 되면 통일교회 간판을 떼어내야 합니다. 그리고 통일교회가 바라는 세계가 형성되면 통일교회가 세워 놓은 나라는 없애야 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한민족을 중심한 문화와 인격만을 위하여 종교는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세계를 위한 종교라야 금후에 남아지는 종교가 될 것입니다.
이제 결론적으로 말해서 우리는 조국을 찾아야 됩니다. 조국을 찾으려면 조국을 위해서 살아야 됩니다. 조국을 위하여 살지 못하는 사람은 조국을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조국을 위해서 사는 것이냐? 세계를 자기의 조국으로 삼고 세계를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조국을 창건할 수 있습니다. 먹고 자고 걸어가는 모든 생활과 행동이 조국창건을 위하는 것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공산당에게 백주에 칼침 맞을 각오를 하고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이 민족이 하지 못할 때는 우리가 해야 합니다. 이 민족이 가지 못하기에 우리가 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누구보다도 조국을 사랑해야 합니다. 통일교회 용어로 조국이라 함은 대한민국이라는 하나의 나라가 아니라 세계적인 나라를 말하는 것입니다. 세계적이라는 말은 타락한 세계권에서 쓰여지는 말이므로 기분 나쁩니다. 이러한 조국을 찾아 나아가는 주의를 통일교회에서는 천주주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선은 무엇 때문에 움직이는 것이겠습니까? 나 때문이 아닙니다. 밥을 먹는 것도 나 때문에 먹는 것이 아니라 천주 때문에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장가가는 것도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뜻을 위해서 가야 하는 것입니다. 세계를 목표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경험을 하는 것도 세계를 중심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은 멋이 없는 사람 같지만 멋이 있는 사람입니다. 70년 내지 80년의 눈깜짝하는 일생을 넘어서면 영원히 사는 길이 있는데 인간은 그것을 모르고 사는 것입니다. 영원히 사는 세계의 시간권내에 들어가서 그 세계와 연결시킬 수 있는 길을 안다면 그 영원은 내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밥을 먹어도 조국을 위해서 먹고, 시집 장가를 가도 조국을 위해서 가라는 것입니다. 우리 조국을 위해서인 것입니다. 그 조국은 대한민국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조국은 대한민국이 아니요, 미국도 아니요, 공산국가도 아닙니다. 그 조국은 하나님이 원하는 조국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새로운 그 조국의 문화를 이루어야 하고, 그 조국의 역사를 이루어야 됩니다. 그 다음에는 사위기대를 이루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이상적인 조국을 세우기 위하여 기준을 새롭게 정해야 합니다. 우리의 생활을 바꿔야 합니다. 그 세계는 지금 이 세계와 전부 다르다는 것입니다. 말도 다른 것입니다. 원리주관권이니 상대기준이니 상대기대니 복귀기대섭리니 하는 중요한 말을 세상 사람들이 압니까? 그러니까 다르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조국을 찾아나서야 할 용사(勇士)입니까, 아니면 망하게 하는 망사(亡士)입니까? 용사란 나라를 대표해서 다른 사람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사람을 용사라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병사(兵士)입니다. 동료들이 하지 못하고 후퇴할 때 그 일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용사입니다. 용(勇)자가 날랠 용 자거든. 누구보다도 빨리 뛰고, 총알까지도 피할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사람을 용사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럴 수 있는 통일의 용사입니까? 저기 영감도 통일의 용사입니까? 쓰레기를 치우는 모습이라 할지라도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용사인 것입니다. 세계에서 빗자루질 하는 사람들의 대왕님이 되는 것입니다. 용사가 되려면 무엇을 줄 때도 제일 열심히 주고 싸울 때도 제일 열심히 싸워야 합니다. 무엇이든지 제일로 하라는 것입니다.
통일교회에는 제일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것입니다. 통일교회는 제일이 되고자 하는 교회입니다. 지독한 교회입니다. 지독하지 않으면 일등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통일교회는 지독한 것입니다. 어렸을 때 마을에서 말썽피우기로 일등 하는 놈도 지독한 놈입니다. 지독하기 때문에 일등을 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지독하지 않고는 일등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독의 반대는 무엇이겠습니까? 멍청이라고 할까요?
그렇다면 통일교회는 지독해야 되겠어요, 멍청해야 되겠어요? 지독해야 됩니다. 통일교회 문선생도 지독한 사람입니다. 내 눈을 좀 보라구요, 순해 보이지요? 사실은 겁이 없는 사람입니다. 잘 아는 사람이 나가 자빠져도 눈하나 까딱 안 합니다. 그런데 겁이 제일 많은 사람이 또 나입니다.(웃음) 한번 까딱 잘못했다가는 영계의 수많은 영인들에게 걸려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종교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얼마나 희생되어 나왔습니까? 수많은 주권자들로부터 얼마나 배척받고 몰림을 받았으며, 또한 기독교 조류를 타고 있는 사회 환경으로부터도 얼마나 비참한 몰림을 당했습니까? 통일교회가 몰렸어요, 안 몰렸어요?
대한민국이 얼마나 우리를 미워했습니까? 자유당 때부터 민주당, 혁명정부가 우리를 정말 좋아했습니까? 어느 정부도 우리를 좋아한 적이 없었습니다. 지금은 할 수 없어서 우리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들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요, 그들도 우리를 좋아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아니면 안 되겠기에 우리를 좋아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요즘에도 기독교인들이 우리를 미워하지요? 예수 찌끄러기 같은 사람들이 말이예요. 옛날에는 개인들이 믿었는데 이제는 제일 꼭대기에서 밀어주고 있으니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작은 나무가 쭉쭉 커 올라올 때는 다른 작은 나무들이 시샘을 하지만 큰 나무를 비집고 솟아오르면 욕하던 사람들이 보따리 싸고 도망가듯이 그 시샘이 없어집니다. 전에는 우리가 욕을 먹고 천대를 받았지만 이제는 기성교회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된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 만만히 사라질 것 같으면 아예 처음부터 시작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 자로 재보고, 돌려보고, 심사숙고해 보고서 이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선생님이 이 놀음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욕을 왜 먹겠어요? 욕을 먹으면 수가 나기 때문입니다. 욕을 먹으면서도 좋아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욕을 먹음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수 있고, 잘 될 수 있는 수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선은 욕을 먹으면 더 잘 되어가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선한 사람 중에 욕을 안 먹은 사람 있어요? 다 욕먹고 죽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욕했던 자들의 후손들이 그 무덤 앞에서 회개해야 됩니다. 선은 욕을 먹어도 남아지는 것이지만 악은 욕을 먹자마자 자취를 감추는 것입니다. 그런데 통일교회는 욕을 먹으며 커왔으니 나쁘지 않다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조국을 찾아야 하겠는데, 지금 그 나라가 있습니까? 우리 통일교회가 바라는 그 나라가 있어요? 있어요, 없어요? 하나님이 찾으시는 나라, 하나님이 찾으시는 그 조국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있는 아들딸로서, 그 아버지가 찾으시는 조국이 없는데 그 아들딸들이 조국을 가질 수 있겠어요? 조국이 없으니 국적도 없는 것입니다. 국적이 없기 때문에 지금까지 천대를 받아 온 것입니다.
그러면 기독교인들은 국적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국적이 없으니 개죽음을 당하지 별 수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이스라엘 선민이라는 독특한 민족을 세워서 당신만이 주관하실 수 있는 개인, 당신만이 주관하실 수 있는 가정, 당신만이 주관하실 수 있는 종족, 민족, 나라를 만들고 후손을 만들고자 하신 것입니다. 악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세계가 덮치고 덮치더라도 죽지 않고 영원히 살아 남을 수 있는 국가를 바라고 나오시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섭리역사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민을 만드시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민 개인으로부터 선민 가정, 선민 종족, 선민 민족, 선민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세웠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말은 승리했다는 뜻입니다. 선민으로 택해서 이기게 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이겼다는 뜻이냐? 선을 이긴 것이 아니라 악을 이겼다는 겁니다. 선에는 이기고 지고 할 것이 없습니다. 싸움이 있어야 이기든지 지든지 하지요. 선끼리도 싸웁니까? 그러므로 악에 대해서 이겼다는 것입니다.
악을 대하여 이긴 나라는 하나님을 중심삼은 일들을 더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러한 일을 다하지 못하고 왔다갔다하다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수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본연의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기 위해 보낸 메시아를 추방했습니다. 그 메시아는 만민의 아버지요, 나라 중의 나라의 왕이요, 부모 중의 부모로 오신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분을 죽였기 때문에 용서받을 수 없는 죄로 2천년 동안 유리방황하는 민족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과 일치된 선민사상을 가지고 있기에 지금 인구 3백만으로 30배에 가까운 1억이 넘는 아랍권 세력에 버티고 있는 것입니다. 그 버티고 있는 힘은 국민의 수가 아니라 사상입니다. '우리가 수천년 동안 탄압받아 왔지만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계시니 최후의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싸우자' 하는 신념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강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통일교회사상은 이스라엘 민족 사상보다 강해야 되겠어요, 약해야 되겠어요? 「강해야 되겠습니다」 강하게 되어 있어요, 약하게 되어 있어요? 「강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총칼 밑에서 한번 싸워 보자구. 김일성이 모가지를 자르자구요. 때가 되면 통일교회를 없애려는 악한 녀석들의 목을 자르자구요.
우리에게는 아직 조국이 없습니다. 이 자리에 서 있는 나를 여러분들은 선생님이라고 하면서 따라나오고 있지만, 선생님은 아직 그리던 조국을 보지 못했습니다. 이 조국을 위하는 신뢰감, 조국을 위하는 애국정신을 가르치는 도(道)가 이 사탄세계에 얼마나 많았습니까? 이것을 방지하고 침식시키고 제재시킨 악의 무리들은 사라져 갔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총칼을 들고 싸워서 이기자는 것이 아닙니다. 선의 판도는 희생과 봉사로 넓혀 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욕을 먹으면서 세계적 기반을 닦았고, 쫓기면서 국가적인 기틀을 닦아 나온 것입니다. 이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이제는 아무도 통일교회를 치지 못합니다. 내가 있는 한 치지 못합니다. 지지리 힘든 통일교회의 고빗길을 내가 중심이 되어 넘어왔습니다. 이것을 부정하고 설 자는 없습니다. 이것을 인정하고 계승할 자는 있을지 모르지만 부정하고 설 자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전통이 서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 종단을 희생시켜 나라를 구하자는 입장에 서서 소모의 활동을 해 나왔습니다. 이것이 우리 통일교회의 자랑입니다. 병석에 누워 최후의 길을 가는 그날까지 애국하는 충신의 인연을 남기게 될 때는 만민이 머리 숙여 찬양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를 위해 가는 사람은 이 나라를 위해서 가야 하겠습니다. 남한 땅의 동포만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삼팔선 이북의 동포도 함께 구하기 위해서 가야겠습니다. 또한 한국만을 위해서 갈 것이 아니라, 일본과 중국을 중심하고 공산권을 타파하여 새로운 아시아를 창건해야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시아를 중심삼고 세계 인류를 해방하자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통일사상권내에서 어떠한 독재자의 권위를 내세우고 가자는 것이 아닙니다. 선하고 영원하신 하나님, 만대의 양심으로 추구할 수 있고 영원한 이상세계의 중심으로 모실 수 있는 성군 되시는 하나님을 중심삼고 가자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독재자가 아닌 아버지의 가치를 지니신 하나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정치철학에서는 압박자와 피압박자, 지배자와 피지배자와의 관계를 어떻게 해결하느냐 하는 것이 최고의 문제로 남아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해결하느냐?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부자의 인연을 중심삼은 사랑으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압박하고 고통의 자리로 몰아넣는 것은 보다 귀하고 절대적인 이상을 상속해 주기 위한 아버지의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될 때에 바로 세계의 난문제를 타파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문제의 기원을 알고 출발했습니다. 그러기에 통일교인들은 선생님이 가라고 하면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안 되어 있어요? 「되어 있습니다」 선생님이 가라고 할 때는 가야 합니다. 대학교도 집어치우고 가자 하면 가야 하는 것입니다. 학박사 되는 것도 포기하고 가야 하는 것입니다. 어머니 아버지도 자신만을 위하는 어머니 아버지라면 뿌리치고 가야 하는 것이요, 색시도 짤라 버리고 가자면 가야 하는 것입니다.
선의 길은 개인을 희생시키고 가정을 위해서 가는 것입니다. 가정을 위해서 개인이 희생했을 때 그 가정이 선을 중심삼고 서게 되면 희생된 개인을 부활시켜 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을 위해 희생한 개인을 진실로 모시는 것이 가정을 위해 희생한 것에 대한 대가입니다. 또 가정이 종족을 위해 희생하게 되면, 그 종족이 남아 있는 한 희생된 가정을 모시게 되는 것입니다.
민족을 구하기 위해서 종족이 희생되었다면 그 종족의 모든 정신을 민족이 이어받아 전통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희생되어 죽었더라도 부활된 입장에 서는 것입니다. 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민족이 나라를 위하여 희생했다면 그 민족의 사상은 그 나라에 영원한 사상으로 남아지는 것이며, 한 나라가 세계를 위하여 희생했다면 그 나라의 사상은 수많은 세계 국가 앞에 영원한 사상으로 남아질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은 죽어도 살아 남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했는데 이것이 무슨 말이겠어요? 선을 중심삼고 사는 사람은 죽어도 죽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개인이 가정을 위해 죽으면 가정이 사는 것이고, 그 가정이 종족을 위해 죽으면 종족이 사는 것입니다. 종족이 민족을 위해 죽으면 민족이 사는 것이요, 민족이 국가를 위해 죽으면 국가가 사는 것이요, 국가가 세계를 위해 죽으면 세계가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통일사상입니다. 그러나 악은 반대입니다. 국가고 무엇이고 다 집어치우고 우리끼리 잘살자고 하는 것입니다. 나만 잘살자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조국을 찾으려고 아무리 노력해야 소용이 없습니다. 통일교회를 희생시키지 않고는 조국을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통일교회를 희생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교회를 중심삼고 재미있게 살며 서로 격려해 주고 자기 집처럼 서로 왔다갔다하게 하는 것입니까?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통일교인들이 사는 것은 북쪽 사람이 남쪽으로 가고 남쪽 사람이 북쪽으로 퍼져 나가서 삼천리 반도를 활동무대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일반 기독교인들은 교회 울타리 안에서만 왔다갔다하겠지만, 우리 통일교인들은 적어도 삼천리 반도를 무대로 뛰어야 하는 것입니다. 삼천리 반도를 하나님의 나라로 찾아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삼천만을 믿어 줘야 하겠습니다. 믿지 못할 일도 믿어 주자는 것입니다. 속기도 하고, 떼이기도 하고, 욕을 먹으면 분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또 믿어 주자구요. 한 번 속이면 한 번 속아 주고, 두 번 속이면 두 번 속아 주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꾸 속아 주면 속이는 사람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처음 속일 때는 미안한 생각이 없었어도 자꾸 속이다 보면 미안한 감이 드는 것입니다.
사람의 눈을 보면 속이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자꾸 속이면 들통이 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만 속아 주면 세 번째에는 이실직고 하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만사가 그렇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악한 사람은 눈을 크게 뜨고 보기만 해도 꼬챙이로 꼭꼭 찌르는 것같이 괴로워 도망갑니다. 모른 척하고 있으면 나중에는 자기가 걸려 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악한 사람들은 그렇게 대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들이 정신을 차리게 되는 것입니다.
한국 사람은 상당히 질긴 사람들입니다. 나도 무척 질긴 사람입니다. 일생 동안 이 길을 버티어 나오면서도 아직까지 지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온 사람 중에 씨름으로 나를 둘러메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내가 전부 넘어뜨릴 자신이 있습니다. 이제는 나이가 많아서 물론 해봐야 알겠지만. (웃음) 지금도 누구에게 지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내가 고생을 했어도 여러분들보다 많이 했습니다. 왜정시대에 왜놈들과 싸우는 것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싸워 나오는 것을 보면 참으로 질긴 사람입니다. 왜정 때는 지하운동도 했습니다. 또, 뜻을 위해서 지금까지 지하운동을 해 나오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어디에 제대로 광고를 붙이고 선전 한번 해봤어요? 반대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떠들어대는지 가만히 있어도 대신 떠들어 준다 이겁니다. 아마 북쪽에서 총칼을 들고 쳐들어 온다 해도 그렇게 떠들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대신 우리는 '언젠가는 봄날이 올 것이다' 하며 속으로 뿌리를 내려 온 것입니다. 미욱하게 여름이 되었는데 뿌리를 내놓으면 말라죽고 맙니다. 뿌리가 튼튼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대 맞으면 다른 데 가서 또 위해 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다 보니까 욕을 먹으면서 세계적인 기반을 닦은 것입니다.
이제 통일교 문선생은 부러운 것이 없습니다. 비록 이렇게 살고 있지만 내가 명령만 내리면 높은 빌딩도 지을 수 있고, 벤츠 같은 고급 승용차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세계 수십개 국을 돌아다녀 보니 황제니 뭐니 하는 사람들이 별의별 큰 궁전을 다 지어 놓았더라구요. 그런 곳에 돈을 왕창 썼으니 전부 다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이 토굴집 같은 여기서 세계를 향해 호령하고 있다는 겁니다. 눈깔이 뒤집어진 녀석들은 와 가지고 통일교회 본부가 이러냐고 하지만 그것은 모르는 소리입니다. 사기꾼들은 간판을 근사하게 달지만, 진짜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알려질까봐 가려 놓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수택리 수련소를 지을 때 한 달 정도 작정해 가지고 지었습니다. 돈을 쓸 데다 써야지요. 우리는 통일교회를 위해 쓰는 것이 아니고 나라를 위해 쓰고 있습니다. 이제는 나라도 통일교회를 알게 됐기 때문에 함부로 하지 못할 것입니다. 나라가 알지 못하면 나라가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종교도 세계를 위하지 않고는, 즉 세계적 종교가 되지 않으면 망해야 됩니다. 천운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볼 때 기독교도 망해야 되고, 회회교도 망해야 되고, 유교도 망해야 되고, 불교도 망해야 되는 것입니다. 종교는 세계를 위해서 있는 것이니, 세계를 살리는 책임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 이번 12월 초하룻날부터는 축복받은 아주머니들이 보따리를 싸들고 팔도강산으로 유람차(?) 떠나야지요.(웃음) 나는 그것을 기분좋게 생각합니다. 비록 돈은 안 가졌지만 씩씩하게 나설 수 있어야겠습니다. '삼천만이여! 이 여장군이 행차하신다. 아무개 사또는 내 뒤를 돌봐 줄지어다. 영계에 가 있다면 나를 치하할 지어다' 하며 당당하게 나설 수 있어야 합니다. 암행어사 뒤통수를 따라다니면 이 나라의 부패상을 잘 알게 되는 것입니다. 알려고만 하면 교회 다니는 사람을 통해서 누구는 어떻고 누구는 어떻고 하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지방에 나가서 그런 사정도 알아봐야 합니다.
아무리 통일교회 문선생이 못났다고 여자들을 내세워 가지고 일을 하게 하겠습니까? 남자들을 세워서 해야 하는데 여자들을 내세워 가지고 뭘 하겠다는 거냐고 뒤에서 그러는 것 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자가 없으면 자녀를 낳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나가서 삼천만 민족을 해산하기 위한 힘을 주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해산의 함성을 지르게 되면 새로운 대한의 총아가 태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실 수 있는 아들딸을 해산할 수 있는 길로 내가 인도하겠어요. 알겠어요? 알겠어요, 모르겠어요? 여러분들이 선생님을 잘못 만난 것 같구만.
여러분, 통일교회 부인네들이 왜 지금까지 붙어 있는 줄 알아야? 통일교회 문선생을 위해 희생을 하라고 했다면 모두 도망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나라를 위하고 세계를 위해서 일하다 보니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가 손해날 곳에 절대로 가지 않으려 합니다. 그게 사람의 심리입니다.
오늘날 통일교회 교인들을 보면 지지리 고생을 해서 그런지 눈치가 참 빠릅니다.(웃음) 비록 어수룩하게는 생겼지만 쪼들려 말라빠져 남아진 패들이니 얼마나 눈치가 빠르겠어요? '짝' 하면 '윽' 할 정도로 눈치가 빠릅니다.(웃음) 그런 사람들이지만 그래도 선생님이 가자 하면 벌써 보따리를 준비하고 못 나가게 할까봐 남편 눈치를 보고 아저씨 눈치도 봅니다.
자, 이래 가지고 무엇을 하자는 것입니까? 여러분만 천국가면 뭐합니까? 여러분 아버지 어머니가 지옥에 가 있는데 천국에 가서 살 수 있을것 같아요? 또, 대한민국 사람들이 너만 좋다고 천국갔느냐고 큰소리 치는데 혼자 천국에 가서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자 이겁니다. 그 놀음을 하자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통일교회 본부는 초라해도 나라를 살리기 위해서는 할 수 없이 이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2천년 전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통해서 4천년 동안 바라나오던 소원을 이루시려 했으나 일시에 파탄되었습니다. 이것을 제3 이스라엘로서 새로운 전통을 이어받아 하나님을 배반하는 민족이 되지 말고 충신의 도리를 세우고 충신의 절개를 남기자는 것이 통일교회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나라가 위급한 때일수록 우리의 생활을 새롭게 해야 하겠습니다. 어려운 때일수록 허리띠를 졸라매고 한몫을 기꺼이 해 낼 수 있는 준비를 갖추어 총총걸음으로 달려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통일사상을 가진 통일교인들의 사명인 것입니다. 이 통일 족속이 족속으로만 남아져서는 안 되겠습니다. 민족을 형성해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제2의 해방을 삼천리 반도에 촉진시킬 사람은 누구냐? 이 나라의 위정자들이 아닙니다. 또한 어떠한 종교 책임자도 아니며 공산주의자들도 아닙니다. 남북한 민족을 자기의 형제보다도 귀하게 여길 수 있으며, 이 나라 이 민족을 세계의 어떤 나라, 어떤 민족보다도 더 귀하게 느낄 줄 아는 사상을 가진 사람인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고 통일사상을 중심삼고 그런 면으로 방향을 갖추기 위해서 선생님이 지금까지 생애를 바쳐 나온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내가 하루 하루를 지내면서 염려하는 것은 통일교회의 발전이 아니라 이 나라의 발전과 이 나라의 운명의 종단이 천운과 상치되는 것이었습니다. 천운과 상치되어 천운의 공판정에 피를 부르는 일이 있게 되면 뒷전에 머물다 사라지는 죄인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생각할 때에 우리는 내일을 향하여 슬픔과 외로움을 가슴에 안고서 전진해야 되겠습니다. 조국 광복이라는 엄청난 뜻을 중심삼고 강인한 신념만이 승리를 결정한다는 것을 알고 전진해 나아가 하는 것이 통일교회의 활동인 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합니다.
선생님은 감옥에서 여러가지 고문을 당하면서 지금까지 나왔습니다. 수많은 형사들에게 지독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나는 '오냐! 지금은 너희들이 놀아나는 붓대에 의해 곤욕스러운 입장에 처해 있지만, 너희들의 칼에 절대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언젠가 너희들이 나에게 천만 사연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사죄하는 승리의 한날이 올 때까지 너희들이 자극시킨 모든 슬픔은 내 가슴속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하면서 지금까지 나온 것입니다. 내 가슴속에 그것이 아직까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왜정 때에 제국주의자와 담판짓던 환경에서 내일에 희망의 세계를 남기기 위해서 싸우던 그 열정과 그 결의, 그때 몸서리쳤던 그 환경이 아직까지 내 마음에서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또한 공산당과 싸우던 투쟁의 행로에서 비참히 투옥되어 영어의 몸이 되었을 때 마음에 결의했던 내용도 잊을 수 없고, 대한민국 팔도강산을 위해 통일이라는 새로운 깃발을 들고 나선 때를 세 정권이 몰아내던 때의 내적 심정도 아직까지 사라지지 않고 맺혀 있습니다.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세계가 끝을 보이게 될 때는 나라의 운명도 끝이 될 것입니다. 나는 그날을 알고 있기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여 가지고 하는 것입니다. 이 방향대로 이제부터 움직이면 통일교회는 승리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해야할 일은 스승의 전통사상을 올바로 본받아 이 나라가 직행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어야 합니다. 만민이 항소하고 항의하는 길이 아니라 만민이 찬양할 수 있는 길을 올바로 남겨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역사과정에서 세계적으로 남아질 것입니다.
이렇게 선생님의 과거지사를 얘기할 때에 여러분은 뼛골에서 피눈물이 우러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무력의 압력을 받아서 느끼는 것도 아니요, 개인이 어떤 영화로운 대접을 받아서 느껴지는 것도 아닙니다. 흐르는 물이 되어 비참한 환경을 거쳐 나왔기 때문입니다. 물은 흐르면 흐를수록 대양에 가까와지는 것이요, 대양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흐린 물은 맑아지면서 환희의 얼굴로 대양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그러한 사연을 알게 될 때에 거기에 머리 숙여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의 삶이 그런 엄숙한 전통을 따라 살아서 여러분의 조상들과 후손들, 또한 역사 시대의 조상들이 숭배할 수 있는 전통과 인연을 남기게 된다면 여러분의 사상은 천추만대 후손 앞에 길이길이 남아질 것입니다. 이렇게 남아진 전통이 국가를 초월하여 세계 만민이 소원하는 세계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한 심정세계를 접붙이게 되면 몇천 년, 몇만 년후에도 눈물로 감사하며 이에 순응하는 하나의 움직임이 벌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기필코 그러한 세계를 창조해야 되겠습니다. 조국이념을 품고 세계인을 사랑할 때가 올 것입니다. 그러면 환희를 찾는 그들로 인해 하나님을 중심삼은 주권국가가 이 지구성에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세계가 내 일생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여 화를 내서는 안 됩니다. 당대에 이룰 수 없더라도 하나의 씨로서 후대에 계승할 수 있는 생명의 여력을 지니고 있어야겠습니다. 그래야 다시 찾아오는 봄날을 지나 여름날의 폭염 속에서도 썩지 않고 오히려 그 폭염을 생명의 요인으로 흡수할 수 있는 요소를 남겨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지금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을 생각하여야 하겠습니다. 그 일을 위해 죽는 사람은 죽어도 죽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는 내 나이가 50이 넘었습니다. 여러분과 같은 20대의 청춘시대에 이 길을 나섰는데 이제는 50대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뜻을 대하는 마음이 간절하고, 뜻을 중심삼고 세계 만민을 구하기 위한 마음이 간절한 입장에서 보면 역사 앞에 죄스러운 생각이 듭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지나온 20여 년 동안 선한 세계를 찾아가야 할 하늘 나라의 백성이 얼마나 많은 악한 지옥권내로 떨어졌는가 하는 것이 원통할 뿐이지 나 자신이 비참하게 살아온 것을 원통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세계 인류를 35억으로 보고 일년의 사망률을 백분의 일로 보더라도 일년이면 3백 5십만이요, 10년이면 3천 5백만이요, 20년이면 7천만이라는 인류가 지옥행을 했다고 생각할 때, 역사기대에 책임 맡은 사명을 다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죄책감을 느낄 뿐 자신이 지내 온 생의 노정에 대해서는 슬픔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단 하나의 목적은 전도를 위해 종횡무진하여 삼천리반도의 모든 백성은 물론이거니와 그 산하에 자라고 있는 모든 초목들까지도 이 뜻 앞에 머리를 숙이게 함으로써 전체가 하늘과 더불어 화합할 수 있는 한 날을 하루빨리 오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기에서 만국 해방의 빛을 꺼내어 가지고 만국이 소원하는 만민 해방의 출발을 보게 된다면 이 민족은 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나라가 없는 것을 탄하지 말고, 국권이 없는 것을 탄하지 말고, 민족이 없는 것을 탄하지 말아야겠습니다.
금후에 공산세계와 민주세계를 넘어 25세기, 30세기에 필요로 할 수 있는 민족적인 가치를 지닌 개체로 남아져 그 시대가 필요로 하는 사상과 이념체제를 갖춘 주의를 제시할 수 있다면, 그 종족은 새로운 한국을 세계에 심어 놓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여러분은 지금부터 내일의 조국 광복을 위해서 끊임없는 투쟁을 해 나가야 되겠습니다. 밥을 먹는 것도 조국 광복을 위해서 먹고, 잠을 자는 것도 조국 광복을 위해서 자고, 불행한 환경에 몰리더라도 조국의 광복을 위해서 참아야 하겠습니다. 눈물도 그것을 위해 흘리고, 정열도 그것을 위해 투입해야 하겠습니다. 자기 생애를 조국 광복을 위해 바쳐야 하겠습니다.
어느 누가 자기 생애를 희생하면서 가고 싶어하겠는가? 내일의 자아발전을 꾀할 수 있고, 미래의 행복의 터전을 만민과 연결시키기 위해 현재 입장에서 희생하겠다는 심오한 마음으로 나가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이렇게 나아가야 하는 것이 통일사상을 지닌 우리의 입장인 것입니다. 이런 것을 알고 여러분들은 지방에 나가 전도를 해도 결과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하여 쉽게 낙심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심거들랑 참되게 심고, 뿌리거들랑 참되게 뿌려야 합니다. 눈물로 정성을 들여도 끝장이 날 때는 '아버지, 내 힘을 다하여 힘이 없기에 눈물로 당신의 힘을 바랍니다'라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거룩하게 할수만 있다면 여러분은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누구에게도 사정할 수 없는 외로운 자리에 몰릴지라도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 자신에게 반문하여 볼 때 양심의 가책을 받을 일이 있다든지 민족의 지탄받을 무엇이 있다면 부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상적인 기준이 역사시대에, 후대의 만민 앞에 지탄받을 내용이라면 이것을 검토하고 비판해 봐야 합니다. 그리하여 아버님의 뜻을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책임, 내가 할 수 있는 온갖 노력,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정성을 다 들였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망하더라도 당신 것은 당신께 돌려 드리오니 이것을 받아 주시옵소서' 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쓰러지더라도 선한 것을 하나님 앞에 위탁하고 죽어야 할 것이 내 사명이라는 것을 알 때 하나님은 나와 같이하시는 것이요, 거기서부터 새로운 내일을 다짐할 수 있는 출발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절망이 사망권을 이루는 것이 아니요, 낙망이 내 환경을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일의 해방의 터전이 될 수 있고 부활의 터전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통일사상을 중심삼고 내일을 향하여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정성을 다하지 못한 가슴을 붙안고 통곡해야 하겠고, 민족을 사랑하는 붉은 피를 갖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해야 하겠습니다. 호흡과 맥박을 통하여 나타나는 모든 감정이 민족과 더불어 머물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해야 되겠습니다. 민족을 찬양하기 위해 정성을 다하지 피눈물을 흘린 정성의 기준을 갖추고 있다면 비록 갖추지 못하고 외로운 자리에 몰려 있다 하더라도 결코 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길을 가는 사람은 외로운 사람 같지만 외로운 사람이 아닙니다. 역사의 낙오자 같지만 낙오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역사적인 새로운 것을 보장받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알고 여러분들은 여러분을 슬픈 길로 내몰아야 하는 스승의 입장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세상은 망하더라도 우리는 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세상은 기쁘다고 장단에 맞추어 춤을 추고, 노래로 천지를 울리고 있지만 어느 한 때 주인이 오면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그들은 생명의 근원을 갖지 못하였기 때문에 제2의 부모를 맞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모든 것이 추풍낙엽같이 사라지는 환경에 있더라도, 동삼삭 시베리아의 설한풍에 꽁꽁 얼어붙은 자리에 있더라도 생명력을 집약시켜 그 환경을 제압할 수 있는 생명의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 힘이 있다면 다시 오는 봄날에는 희망의 새싹이 튼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오늘날 여러분들이 동원되는 것은 가정에 있어서의 비참사입니다. 남편에게 있어서의 비참사요, 생활적인 비참사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민족을 살리고 남편을 살리고 후손을 살리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제물된 입장에서 거룩한 모습으로 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환경적인 기반을 닦기 위해 여러분은 보내는 것이기에 나 자신은 아버지 앞에 먼저 기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죄인이기 때문에 죄인된 행로를 개척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길에는 선생님이 있고, 하나님이 계심을 믿고 절망과 낙심으로 사라지는 자가 되지 말고 절망의 고개를 넘어야 하겠습니다. '만일 나 자신이 이 길에서 죽게 되면 영계의 수많은 선지 선열들과 우리의 선한 선조들이 무릎을 꿇고 찬양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는 마음을 갖고 활동하는 사람은 죽어도 사는 것이요, 살아서 이 길을 가는 사람은 영원한 승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믿고 나가야 되겠습니다.
선생님에게는 나라가 없습니다. 부모도 없고 형제도 없는 외로운 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통일교회는 친구도 없었습니다. 통일교회를 증거하는 종교도 없습니다. 통일교회를 환영하는 민족도 없었습니다. 내가 그런 길을 걸었기 때문에 여러분들도 그런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이 외로운 자리에서도 죽지 않고 남아져서 이 스승을 중심삼고 환희할 수 있는 세계적인 그때가 오면, 그 영광을 여러분의 영광으로 남겨 주고 싶은 것이 이 스승의 소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어서어서 나라를 되찾아야 하겠습니다. 제2의 조국광복을 위해 삼팔선을 타파하고 만민 앞에 자랑할 수 있는 아시아의 새로운 결실로서 나타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한민족의 역사적 처참사를 딛고 새로운 문화를 창건해야 할 사명이 우리에게 있든 것을 알고 약한 손을 서로서로 맞잡고 약한 몸을 움직여 하늘을 향하여 쌍수를 들어 맹세해야 되겠습니다.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라는 것을 알고 여러분은 자중하는 마음으로 내일을 준비해야 되겠습니다.
국가를 사랑해야 되겠고, 세계를 사랑해야 되겠기 때문에 환경을 개척해야 되겠습니다. 아들딸과 남편을 찾아가고 싶은 불쌍한 입장에 서게 되더라도 '하나님이시여! 내 아들딸보다도 이 나라를 사랑하시옵소서. 내 남편보다도 이 나라를 더 사랑하시옵소서'라고 이를 악물고 기도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나라를 위하여 사랑하는 아들딸을 뒤에 남기고 가야 하는 것이 바로 애국자들이 가는 걸음일진대 그렇게 가는 여러분 앞에 절망이 찾아오더라도 그 절망이 여러분을 구속하지 못할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이 자신을 희생하더라도 고독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한숨과 절망이 있는 고아의 입장에 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는 데에는 눈물의 대신자가 나타날 것이요, 나라를 위할 수있는 선봉의 용사들이 모일 것입니다. 천년한을 풀기 위해 눈물을 흘리며 아들딸을 보내시고 선민을 희생시키신 아버지의 억울함을 해원성사하기 위해 가냘픈 아내의 손을 붙들고 걸어가는 남편이 있다면 그집에는 천세 만세 만민이 추앙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는 후손이 남아질 것입니다.그러므로 우리는 참고 또 참아 보람있게 한계선을 넘어서야 하겠습니다.
통일교회가 이처럼 피를 흘리고 밟히면서 나오는 길이 최후의 제물된 노정이라는 것을 알고 가정 전체가 합하여 심정을 모아 하늘 재단을 지킴으로써 해방의 주인이 되는 기록을 남겨야 되겠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이번에 1970년도의 마지막을 기하여 총진군하는 것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 무리를 위해 기도함으로써 이들이 가는 길이 열려지게 해야 하고, 자기의 생애를 염려하는 것을 넘어설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런 사람은 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무리로 말미암아 이 민족이 구원받을 것이요, 남과 북이 통일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믿지 않더라도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인도하여 그렇게 믿게 해주실 것입니다.
이 길만이 우리의 갈 길이요, 이 길만이 세계를 구원해야 할 하늘의 용사들의 전쟁터라는 것을 알아야겠습니다. 여러분이 이 길에서 슬픈 환경에 당면하거든 하나님을 원망하는 마음을 갖지 말고 선생님을 원망하고, 외롭거든 남편을 원망하지 말고 선생님을 원망하기 바랍니다. 생활하면서 화를 당하고 저주를 받더라도 선생님을 잘못 만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서 이 길을 달려가기 바랍니다.(울음)
1971년도에는 하나님께 약속한 그 기준을 넘지 않으면 민족 해방의 기틀을 마련할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고 온갖 정성을 다 투입하여 이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이 같은 생명을 상속받는 길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는 갈 수 없는 길입니다.
만약 우리 한국 통일교회가 책임 못하면 일본에 있는 통일교회를 내세워야 하고, 일본의 통일교회가 책임하지 못하면 미국에 있는 통일교회를 내세워서라도 대신하게 할 것입니다. 이러한 섭섭한 일을 당하지 않으려면 이 민족이 결합하여 하나님을 모시고 가야 하겠습니다.
인연되었던 역사와 더불어, 인연되었던 사정과 더불어 느끼기 어려운 눈물어린 심정을 느낄 적마다 하나님의 심정을 붙안고 몸부림쳐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조국의 광복과 세계 해방의 터전을 우리의 손으로, 우리의 정성으로 결정짓기 위해 싸움터를 향해 힘차게 싸워 나가야 되겠습니다. 그런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찾아야 할 희망의 조국을 찾는 여러분이 되어야겠습니다. 이 사명을 여러분들이 상속받아 12월을 힘차게 출발해 주기를 진심으로 부탁하는 바입니다.
사랑하는 아버님, 지금까지 보호하여 주신 당신의 은사에 감사드리옵니다. 당신을 붙안고 나오던 한 아들이 진심으로 이 길을 걸어 나왔습니다. 여기 따르고 있는 이들도 외로운 무리들이옵니다. 황량했던 과거의 핍박의 환경을 다시 찾아가야 할 당신의 아들딸들이 이제 며칠 후면 남한 각지에 널려지겠사오니 이들의 갈 길을 지켜 주시옵소서. 이들의 입장을 당신의 입장과 같이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내가 외로울 때 아버지께서 위로하여 주셨듯이 저들을 위로하여 주옵소서. 내가 가야 할 앞길이 막혔을 때 아버지께서 염려해 주시고 인도하여 주셨듯이 이들도 도와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후는 녹음이 되어 있지 않음)
이제 이달 31일이면 이해는 다 지나가게 됩니다. 연초에 승리적 통일전선이라는 엄청난 표어를 세워 가지고 우리들이 지금까지 싸워 나왔습니다.
이해가 1970년대의 기반을 닦고, 6천년 역사를 탕감할 수 있는 중요한 기간이었기에 안팎으로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본부교회 건립기금 문제를 비롯하여 1970년대를 중심삼고 여러 가지 준비할 과업들이 남아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달 12월이 지나고 나면 어느 한계선을 넘어가지 않나 생각됩니다.
뜻을 중심삼고 볼 때 승리는 우리편에 있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영적인 분야에서 지금 우리의 움직임을 증거하고 있는 사실들을 보더라도, 국내의 움직임을 보더라도, 국가기준에서의 승공이념을 중심삼고 보더라도 이제는 어느 한계점까지 왔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외적인 모든 환경은 하나님께서 수고한 공로로 인해 어느 한계점까지 왔으나, 지금 문제되는 것은 내적인 정비와 확장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지난 1960년대를 살펴보면, 1960년대는 우리 자체가 소모전을 한 연대였습니다. 그것은 우리 앞에 크나큰 장벽이 놓여 있었기 때문에 이 장벽을 무너뜨리기 위한 싸움이었습니다. 이 장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1960년대에 온갖 지성을 다하여 희생을 무릅쓰고 싸워 나왔기 때문에 1970년대에 와서는 이러한 장벽들이 어느 정도 무너져서 평지와 같은 기분이 느껴집니다.
1970년대는 우리가 외적으로 나타나는 것보다 내적인 정비를 강화함으로써 뿌리를 공고히 하여 가지고, 이 민족과 세계 앞에 맡겨진 천적인 사명을 완결짓지 않으면 안 되는 중요한 시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자신에 대해 원리에 입각해서 재검토를 해야 되겠습니다.그리고 우리의 활동에 대해서도 재비판을 해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지내온 역사과정의 모든 내용을 다시 한 번 검토하고, 비판하여 체계화해야 되겠습니다.
현시점에 있어서 하나님이 바라시는 최후의 승리를 다짐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체가 문제인 것입니다. 그래서 내적인 재정비 문제가 시급히 요구되고 있기 때문에 금년에 들어와서 전반적인 교육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는 것입니다.
명년에 있어서는 외적으로 활동을 하되, 극소수의 사람에 한해서 활동을 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 식구들을 동원하여 활동하게 해서 최후의 어떤 한계선을 넘겨 놓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여러분도 다 알다시피 이번 기간에는 축복받은 부인들이 총동원하게 되었습니다. 더우기 이 기간은 지금까지 정성들이고 노력해 온 모든 것을 투입해서 최후의 한계선을 넘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의 승패를 결정짓는 중요한 기간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인들이 10명을 1조로 편성하여 120곳의 전도임지로 출동하게 됩니다. 각 지구본부로부터 지역본부, 구역본부까지 출동해 가지고, 적어도 1972년까지는 우리 교회의 내적인 정예식구를 12만 이상 확보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때 현재 있는 식구들이 한 달에 한 명씩만 전도하게 된다면, 지금보다 배이상의 숫자를 실질적으로 확보하리라 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우리 교회가 기성교회와 유대관계를 맺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여기에 반드시 중간 단체의 활동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성교회와 교량역할을 할 새로운 것을 만들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최고의 기준까지 나아가기 위해서는 어차피 안팎으로 여러 가지 형태의 조직을 갖추어 가지고 확대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되리라 봅니다.
이제는 여러분 자신이 문제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한 단체를 끌고 나가는 책임자가 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1972년도까지 총력을 경주해야 되겠습니다.
이번에 나가서 활동하는 부인들을 중심삼고 3, 4개월 동안 지역본부와 지구본부에서 적어도 120명 이상의 정회원 확보를 위해 밀고 나갈 것입니다. 그 뒤를 따라서 청년과 남편들도 동원될 것입니다. 이렇게 순차적으로 동원해 가지고 1972년까지는 기성교회와 연결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려고 합니다.
이번 26일에서 28일까지 2박 3일 동안 아카데미 하우스에서 목사 26명이 우리 원리강의를 들었습니다. 강원용 목사는 초청을 해도 한 사람도 응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지만 우리의 초청에 응하겠다고 한 사람이 한 40명쯤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기간 중에 추수감사절이 끼었기 때문에 인연이 감소되어 26명이 참석한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 우리에 대한 기성교회의 인식이 그만큼 달라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협회장의 이름으로 초청했는데도 불구하고 다수의 젊은 목사들이 참석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에 대한 기성교회의 관심이 커졌다는 사실과 금후에 그들이 우리를 알기 위해서도 우리 원리를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될 시점에 놓여 있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활동을 대대적으로 전개시켜 그 범위를 넓혀 나갈 것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원리연구회 활동을 어떻게 공고화시킬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인적 자원을 발굴하는 데에 있어서는 뭐니뭐니해도 대학가를 중심한 활동을 중시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번에 일본 원리연구회 회장에게도 그런 면에 중점을 두고 지시했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1, 2학년생을 회원으로 확보하여 내적으로는 원리이념을, 외적으로는 승공이념을 무장하게 한 후 그 이론을 중심삼고 강의할 수 있는 실력을 어떻게 길러 주느냐 하는 문제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기간 동안 학생들에게 강의를 시켜 보고 강의의 결과가 어떠한가 그 반응을 보고 거듭 연습하게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한 사람 한 사람이 점점 불어 나가는 것을 볼 때, 그것이 얼마나 가치있는 일인가 하는 것을 그들로 하여금 느끼게 해야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이 졸업한 후에도 우리 체제 안으로 흡수되는 것이 사회로 나가는 것보다는 낫다는 것을 실감하게 해야 됩니다.
그래도 제일 순수한 것이 대학가의 학생들이기 때문에 이들을 중심삼아 가지고 3, 4학년 때부터는 학교에서도 강의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한 2년 동안 실력을 닦으면 대외활동을 하는 데 지장이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길을 모색하지 않고서는 내적인 인적 자원을 확보할 수 없습니다.
이런 것을 계기로 수택리에 신학대학을 세우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런 전반적인 문제를 앞에 놓고 계획하고 있는 것은 내적인 정비를 공고화하기 위함입니다. 지금까지는 산발적으로 게릴라 전법을 해 나왔지만, 이제부터는 집중적인 전법을 써서 하나의 근거지를 확보해 나가는 그런 전투 태세를 갖추고 출발할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여러분이 알고, 정성을 들이고 기도를 많이 해주어야 되겠습니다. 물론 하늘의 뜻이 있어서 책임을 지고 나가는 길이지만 여러분이 배후에서 정성을 들여 줌으로 말미암아 안팎으로 그 자세를 갖추는 데 총력을 경주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후방에서 그들에게 지지 않도록 활동체제를 강화해야 되겠습니다. 이런 활동과 더불어 이제 본부에서는 부흥단을 조직할 것입니다. 이것은 한 40일 지나면 결과를 대충 알 것이라고 봅니다. 40일 후면 부흥단을 편성해 가지고 각 도면 도를 중심삼고 활동하는 사람들을 횡적으로 연락해서 그들이 평균적인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보조를 해주리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전반적인 문제를 여러분이 알고 정성들여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제 뜻은 우리의 목전에 다가왔습니다. 이런 것을 보아 승리의 한때가 우리 앞에 다가오는 것을 여러분이 알고 한 3년 동안 안팎으로 총단결해서 협조해 주기를 부탁하는 바입니다.
오늘은 12월 들어 처음 맞이하는 안식일이옵니다. 이 아침에 당신의 긍휼과 자비와 사랑의 마음이 여기에 모인 자녀들 위에 함께 하시옵고, 전국에 널려서 이 시간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있는 자녀들 위에도 일률적으로 같이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옵니다.
당신의 뜻을 살펴보게 될 때, 여기에 머리를 숙인 자녀들 중에 어느 누가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이 되고 딸이 되겠는가를 염려하는 마음으로써 저희를 찾고 계신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자녀 중에서도 당신의 슬픈 심정의 인연을 가려서 역사적인 사연을 통감할 줄 아는 자녀를 찾고 계신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 시점에서 분부하고자 하시는 간절히 마음을 가지고 당신의 모든 사정을 털어놓으실 수 있는 당신만을 위한 자녀가 있기를 고대하시며 다시 찾아오신 아버지가 계신다는 사실을 저희들이 느낄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저희들이 당신을 위하여 태어났다면 당신을 위하여 가는 효성스러운 아들이 되고 딸이 되어야겠습니다. 아버지의 무한한 자비와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무한히 높고 무한히 귀한 가치를 지닌 아들이 되고 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당신께서는 과거의 모든 섭리의 사연들을 털어놓고, 현시대에 남겨 주어야 할 당신의 간곡한 인연을 몽땅 남겨 주면서 기뻐할 수 있는 효성스러운 자녀들이 있기를 얼마나 고대하셨는가를 생각하게 될 때, 당신이 바라시는 절대적 기준과 저희들이 찾고 있는 기준이 너무도 많은 차이가 나는 것을 느끼옵니다. 안팎의 간격이 너무나 공허하고 크다는 것을 느낄 적마다 당신은 높고 귀하신 분이오나 인간은 낮고 천한 존재라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당신과 인간과의 사이에 있는 구렁텅이를 메우기 위해서 당신은 이 시간도 수고하지 않을 수 없는, 전체의 책임을 짊어진 중심된 주인으로 계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당신이 얼마나 외로우시며 얼마나 슬프신가를 저희들은 측량도 할 수 없사옵니다. 당신의 뜻이 저희의 마음에 옮겨지고 당신이 이 시점에서 간곡히 바라는 애절한 그 사정이 저희들의 마음에 옮겨지게 하시옵소서. 인류세계가 당신을 바라고 느끼는 감각들은 당신으로 말미암은 것들이오니 그 모든 것들을 당신 앞에 바쳐드리면서 오히려 감사할 줄 알아야겠사옵니다.
아버지, 복이 있고 은사가 있다 할진대 이것은 저희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당신으로부터 시작된 것이기 때문에, 복이 거쳐 나가고 은사가 거쳐 나가는 곳곳마다 저희들은 이것을 가로막고 도둑질하는 자리에 서서는 안 되겠습니다. 아버지 앞에 감사하고 보답하는 마음으로 하나라도 보태어 드리지 않으면 안 될 자신의 위치를 잃어버려서는 안 되겠사오니, 이 시간 저희들을 긍휼히 보아 주시옵소서.
저희가 이렇게 걸어 나오고, 이렇게 살아가는 동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10년, 20년, 50년의 세월을 덧없이 흘려보내 버렸습니다. 저희가 당신을 잃어버릴 적마다 당신이 얼마나 서러워하셨겠는가 하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사옵고, 자신이 거쳐온 생의 노정을 뒤돌아 볼 적마다 아버지 앞에 빚을 졌다는 것을 저희들은 느껴야 되겠사옵니다.
아직 젊은 몸을 지닌 저희들은 자신의 생의 울타리를 중심삼고 당신 앞에 빚을 져서는 안 되겠다는 온갖 정성을 다해야 되겠습니다. 정성을 다하는 데는 어떠한 시점내에서만이 아니라 자기의 전 생애는 물론이고 후손에게까지 계승될 수 있는 정성의 터전을 남겨야 되겠습니다. 이를 위해 남모르는 가운데 마음을 죄어 가면서 아버지 앞에 호소하는 아들딸이 있거든, 이 시간 그들을 당신의 깊으신 사랑의 심정으로 품으시옵소서. 고요한 마음, 심정의 그 길을 따라 아버지의 온전하심이 거기에 같이하시옵고, 사랑의 인연이 거기에 싹트게 하시어서 부활의 새 아침을 맞이할 수 있는 은사의 자리를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그 누구도 헤아릴 수 없는 당신의 애절한 마음과 그 누구도 가질 수 없는 당신의 간곡한 심정을 저희에게 상속시켜 주시옵소서. 민족을 바라볼 때 이 민족은 남이 아니라 자기의 형제인 혈육이라는 감정으로 바라볼 수 있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어야만 되겠사옵니다. 세계 만민을 대할 때 나 자신이 고립된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 만민이 같이 있다는 것을 느껴서 당신을 대하신 사랑의 실체로서 만민을 품에 품어 사랑해 줄 수 있는 아들이 되고 딸이 되기를 당신은 고대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할 줄 알아야 되겠사옵니다.
당신께서는 소원 가운데 인간을 지으셨사오나 사랑의 실체가 되지 못한 저희 자신들인 것을 생각할 때, 아버님은 언제나 슬픔과 낙망과 고독을 피치 못한 자리에서 인간을 대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옵니다. 이것을 생각할 때 고독하신 당신을 위해서, 외로우신 당신을 위해서 친자가 되지 못하겠거든 종이라도 되겠다고 몸부림치며 가야 하는 것이 타락한 인간들이 가야할 복귀의 길인 것을 저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버지, 저희들은 종의 종의 인연도 맺지 못하고 한가운데 흐르고 흘러가 버려야 할 인간이었사오나, 당신의 깊으신 사랑으로 말미암아 종의 종의 인연이라도 맺을 수 있었사옵니다. 이런 자리를 허락하여 주신 것을 정말 감사드리옵니다. 그리하여 다시 주인을 만나 주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종의 자리에 설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신 은사에 진심으로 감사드리옵니다. 또한 당신이 노고의 실적과 탕감의 조건을 제시하여 쌓은 공적의 터전으로 말미암아 저희들을 양자의 인연에까지 올라서게 하신 역사시대에서의 아버지의 한스러웠던 고생길을 저희들이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외롭고 한스러웠던 당신의 사정들을 저희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핏줄이 다른 원수의 종족들을 붙안고 양자로 대해 주어야 했던 부모의 심정의 얼마나 고독하였고, 얼마나 슬펐고, 얼마나 처량했겠는가 하는 것을 저희들은 다 알 수 없사옵니다. 그런 마음을 품으시고 역사시대를 거쳐오신 아버지를 저희들이 후대하지 못한 것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이와 같이 양자의 인연의 길을 저희에게 남겨 주시기 위하여 당신만이 희생을 당하셨사옵고, 당신만이 외로움을 당하셨사옵고, 당신 홀로 십자가의 길을 걸어 나오셨다는 사실을 생각할 적마다, 또 그 양자의 자리에서 직계의 아들로 후사를 잇는 아들과 딸로 세우시기 위해서 아버지께서 죽음의 갈림길을 몇 번이나 뒤넘이쳤다는 사실을 생각할 적마다, 저희 자신들 가운데 아버지의 한의 마음이 깃들어 있을 것을 알아야 되겠사옵고, 아버지의 간곡한 사연이 저희들의 뼛골에 사무쳐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사옵니다.
저희의 모든 감정이나 촉감에도 저희를 위하여 부활의 한날을 바라시는 아버지의 소망의 일념이 엉크러져 있음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내가 말하고 느끼는 생활권내에는 당신의 핏자국이 어려 있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내가 가는 길과 내가 처해 있는 환경에는 당신의 슬픔의 눈물이 젖어 있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버지, 오늘 저희들은 당신과 인연된 그 자리를 다시 갖지 못한 타락의 후손인 것을 느낄 적마다, 눈물이 아니고서는 당신을 대할 수 없고, 당신의 슬픈 사정을 알지 못하고는 당신을 모실래야 모실 수 없는 자신들인 것을 발견하게 되옵니다. 이것을 생각할 때 천만 번 죽어 마땅한 저희들이요, 홀로 외롭게 죽어간다 해도 한할 수 없는 저희 자신들이옵니다. 이것을 깨달을 적마다 높고 귀하신 당신의 은사의 손길이 늘 저희에게 같이 하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옵니다.
고독한 길을 가는 사람이 불쌍한 자의 사연을 잘 아는 것은 그런 자리에서 생활을 하면서 느껴 보았기 때문이옵니다. 슬픔의 자리를 박차고 민족의 슬픔을 가로막기 위하여 몸부림치고, 인류의 슬픔을 가로막기 위하여 몸부림치는 개척자의 길을 가는 사람들은 불쌍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저희들은 알아야 되겠사옵니다. 우리의 아버지께서 그런 길을 가셨기에, 저희들이 아버지의 아들이 되고 아버지의 후사가 되기 위해서는 그러한 길을 가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버지, 이 시간 저희들이 여기에 나온 것은 자기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이옵니까? 가야 할 운명의 길을 개척하기 위해서이옵니까? 아니면 자기의 가정을 위해서, 자기의 종족을 위해서, 자기의 민족을 위해서, 자기의 나라를 위해서, 이 세계를 위해서 나왔습니까? 어떠한 사명을 가지고 어떠한 목표를 향하여 이 자리에 나온 자신인가를 다시 한 번 응시해야 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산만했던 모습과 허위와 가증으로 꾸며진 자신을 자탄할 줄 모르던 과거를 다시 한 번 비판하여 과거에 있어서 자기의 정체를 적나라하게 아버지 앞에 드러내어 아버지로부터 비판과 판정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자신이 그런 불쌍한 자리에 처해 있다는 것을 깨달을 줄 아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어야겠습니다.
아버지, 이 시간 찾아오시어서 저희들에게 권고하시고 싶으신 사연이 있거든 그 모든 것을 권고하여 주시옵소서.
저희의 마음에 그려지고 마음에 느껴지는 모든 것을 당신의 심정과 일치되게 해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당신이 소원하시는 뜻 앞에 부족함이 없는 모습을 갖추어서 뜻 앞에 직행할 수 있는 아들딸이 되어야 하겠사옵고, 당신이 신임하실 수 있는 아들딸이 되어야 하겠사옵니다. 아버지께서는 그러한 아들딸이 되어 주기를 얼마나 고대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저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찾아진 저희들이 아니면 갈 수 없는 복귀의 행로와 복귀의 노정에 있어서 책임을 짊어지고 가 주기를 고대하시는 불쌍하신 아버지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되시는 아버지께서 그러한 비참한 자리에 서 계신 것을 생각할 때, 이것은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원통한 사실인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 저희들은 옷깃을 여미고 수고하시는 아버지라고 불러 볼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무한한 세계의 가치의 본체 되시는 아버지라는 것을 저희는 그려 봐야 되겠습니다. 당신의 무한한 사랑의 내용은 생명을 품고도 남음이 있는 영원한 것임을 저희가 알아야 되겠습니다. 저희가 가는 길이 어려운 길일지라도 아버지 앞에 결실되어 질 승리만을 바라보며 이 길을 따라가야 되겠습니다.
아버지, 금년 한 해도 기울어져 가는 이 시점에 있어서 금년을 아버지 앞에 자랑의 해로 돌려 드리지 못한 것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12월 6일, 아버지, 이 아침을 찾아오시옵소서.
아버지, 정초에 '승리적 통일전선'이라는 엄청난 과제를 주시면서 세계의 통일전선을 찾기 전에 여기에 있는 저희의 마음과 몸을 중심삼고 통일의 인연을 찾으라고 권고하신 때가 어제 같은데 벌써 일년이 거의 다 지나가고 있사옵니다. 덧없이 흘러간 세월을 놓고 한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다시 맞이하게 될 새해에는 맡은 바의 책임을 다하는 모습이 되겠다고 다짐하면서 기뻐할 수 있는 아들딸의 모습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아버지, 이제 저희의 심신에 고요히 아버지의 은은한 명령의 음성이 들리게 해주시옵고, 부활의 새로운 생명의 맥박이 저희의 마음 가운데 용솟음치게 하여 주시옵소서. 새로운 인연을 스스로 체휼할 줄 아는 승리의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나의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아침 당신의 아들딸들이 모인 곳곳마다 당신의 긍휼의 사랑으로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더우기 외로운 자리에 있는 무리들을 지켜 주시고 지금까지 이들을 버리지 않고 참아 오시는 아버지 앞에 감사드리옵니다. 지금까지 참아 오신 아버지여, 이들의 생애에 있어서 석양을 맞이할 때가 가까이 오면 올수록 고독이 깃드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이들 앞에 친히 같이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당신의 고요하고 깊고 넓으신 그 품으로 품어 주시사, 한밤이 지나면 새 아침을 맞이하듯이 내일의 세계 앞에 천하의 사명을 가지고 있다는 긍지를 느끼면서 천의를 중심삼은 분부를 받아 책임을 질 줄 아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남아진 오늘 하루 전체도 당신의 은사로써 친히 보호하여 주시옵시고, 대하는 사람 사람마다 없어서는 안 될 사람들인 것을 느껴서 나만이 제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저희들과 인연되어진 모든 환경의 터전과 상대적인 가치의 밑받침이 없어 가지고는 저희들의 가치를 찾을 수 없는 것을 알아야겠습니다. 그것은 모든 민족에 필요한 것이요, 모든 국가에 필요한 것이요, 세계에 필요한 것이므로 그 가운데에서 자기의 가치를 세우지 않으면 안 될 것을 느끼면서, 현시점에서 자기가 대하는 개인이나 자기가 대하는 백성들이나 자기가 대하는 세계 인류를 바라보며 책임을 느낄 줄 아는 자녀가 되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지방으로 파송되어 외롭게 활동하고 있는 당신의 딸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이들은 남편을 뒤에 두고, 자식을 뒤에 두고 뜻길을 따라 나섰사옵니다. 이들이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던 마음을 느껴야 되겠습니다. 야곱이 고향 산천을 떠나던 그 마음을 느껴야 되겠습니다. 요셉이 애급땅을 향해 가던 그 마음을 느껴야 되겠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바로의 궁중을 떠나던 그 마음을 느껴야 되겠습니다. 마리아가 느꼈던 그 마음을 느껴야 되겠습니다. 흘러간 역사의 고비고비마다에 얽혀진 그 원한을 생활의 터전을 통하여 풀고 가지 않고는 갈 수 없는 운명이오니 이 길을 다짐하고 나선 딸들을 강하게 이끌어 주시옵소서.
강하고 담대한 마음으로 민족의 운명을 헤쳐 가면서, 내일의 승리를 다짐하는 흰옷을 입은 거룩한 딸들로서 승리를 위해 그 흰옷에 피를 뿌리며 가는 당신이 기억할 수 있는 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부끄러움을 느끼는 통일의 딸들이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축복의 은사를 받은 딸로서의 위신을 세울 수 있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지탄을 받고 비판을 받으며 나왔던 과거 지사를 청산짓고 새로운 사망과 희망의 축복을 받아들일 수 있는 당신의 딸들이 되게 하시옵고, 이들로 말미암아 이들의 가정이 새로운 소망과 영광의 터전이 될 수 있는 거룩한 이번 기간이 되게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1970년이 저물어 가는 이 시점이오나 다가올 1971년과 1972년에도 이 가정, 이 민족, 이 나라를 지켜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원수의 도성이 아무리 높다 하더라도 아버님이 지켜보는 자리에서는 무너져 굴복할 것이요, 원수의 능력, 원수의 힘이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아버님과 부딪치는 날에는 초개와 같이 쓰러질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습니다. 여기 연약한 무리들의, 아버지를 향하는 그 믿음이 어떠한 힘보다도 강하고 어떠한 환경의 인연보다도 두텁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런 믿음을 갖고 나가게 될 때에 저희들 앞에는 승리만이 남을 것이요, 새로운 영광의 터전에 있어서 해방의 한날이 온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지여, 이들이 그런 크나큰 은사와 영광을 상속받을 수 있게끔 이들을 강하고 담대하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분단된 남한과 북한을 규합하여 통일된 한반도에 승리의 깃발을 올리고 이것을 이 민족의 전통으로 세워 모든 터전을 아버지 앞에 바쳐 드릴 승리의 그 한날을 맞이할 때까지 싸워 나갈 것을 저희들이 맹세하고 나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사명을 다하기 위해 개척자로서 나가 싸우고 있는 당신의 딸들에게 당신의 무한하신 사랑과 자비로 같이하여 주시옵고, 이들로 하여금 이 한국에 새로운 하늘의 풍토를 만들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이 민족이 가야할 새로운 터전을 만들어야 되겠습니다.
저희들도 알다시피 이북에서는 여자들도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총을 멘 군인처럼 싸울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이들을 대해, 통일의 딸들은 그보다도 진취적이고 자원적인 입장에서 하늘 정병을 대신할 수 있어야 되겠사오니, 이번에 나선 당신의 딸들이 걸어가는 그 길에 있어서 믿을 수 있는 딸로서 기억하여 주시어서, 이 민족 앞에 승리의 터전을 세우고 승리의 조건의 기반을 조성할 수 있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어려운 나날을 생활 가운데서도 불편함을 느끼지 않고 당신의 영광을 찬양할 수 있게 해주심을 진심으로 감사드리옵니다.
당신의 사랑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딸들이 되게 하시옵고, 지금까지 인연된 수많은 사람들 위에 당신의 무한하신 지혜와 무한하신 은총으로 부활의 은사를 가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오늘 이 아침도 당신의 친히 주관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의 성호 받들어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우리 인간들은 시간을 초월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하루의 생활이 있고 한 생애가 있습니다. 하루 하루의 날들을 지나 한 해를 거치게 되고 한 해를 거쳐서 10년, 20년, 그리하여 일생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우리 개인을 중심삼고 보면 개인에게는 청년시대가 있고, 장년시대가 있고, 노년시대가 있습니다. 그러면 인간으로 태어난 자기 자신을 두고 볼 때, 어느때가 자기의 일생에 있어서 제일 귀한 때일 것이냐? 그 때가 있을 것입니다. 젊은 청춘시기가 자기 일생에 있어서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때가 되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장년시기가 자기 일생에 있어서 전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때가 되는 사람도 있을 것이며, 혹은 노년시기가 그런 때가 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그런 전성의 시기가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또, 청춘시기면 청춘시기에 있어 그런 중심적인 전성시기가 있을 것이요, 장년시기면 장년의 시기, 혹은 노년시기면 노년시기에 있어서도 그런 전성시기가 있을 것입니다. 그 전성시기가 무엇인가를 알고 시기를 간추려 보게 될 때, 그 시기가 한 시점에 놓여지게 되는 것을 우리들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높은 산이 있으면 그 산에는 제일 높은 꼭대기가 있을 것입니다. 전체의 산맥이 이어져서 모두 한 점에 이르는 곳이 있는데 그곳이 최고의 정상인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또, 산의 분수령을 두고 볼 때에도 이 분수령이 하나의 선처럼 되어 가지고 안팎으로 경계를 이루게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일생에 있어서도 그러한 한 점과 같은, 한 선과 같은 때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두고 볼 때, 인간의 일생에 있어서 그런 때는 과연 언제일 것이냐? 우리 인간은 그것을 모릅니다. 우리 개인이 그러하듯이 한 국가의 운명도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이면 대한민국이 5천년 역사를 거쳐왔지만 역사를 거쳐오는 그 행로 가운데에는 내려가는 때가 있으면 최고로 내려가는 그 고비의 때가 있었을 것이고, 그리고 올라가는 때가 있으면 최고로 올라가는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금후에도 이렇게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진행해 나가는 것이 그 나라에 있어서의 역사의 운명길이라는 것을 생각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나라의 운명이 이렇게 오르락내리락하면서 흘러가는 가운데에서 어느때가 그 나라에 있어서 정상의 때일 것이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그것은 그 나라 자체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 국가를 넘어서 세계를 두고 보면, 세계도 천운을 중심삼고 운세의 길을 엮어오는 것이 틀림없습니다.그 운세가 어떠한 지역으로부터 시작되어서 어떠한 운세권의 행로를 따라 이동하면서 발전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틀림없이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운세권은 수많은 국가권을 거쳐갈 것입니다. 운세가 거쳐가는 데도 올라가는 때가 있으면 반드시 내려가는 때가 있을 것이요, 내려가는 때가 있으면 올라가는 때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듯 역사는 점점 그 높이를 더해 가고 그 깊이를 더해가고, 또한 그 폭을 넓혀 가면서 하나의 목적을 향하여 전진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해 볼 때, 세계의 역사과정에 있어서도 하나의 전성시기가 있을 것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그 세계적인 운세를 두고 볼 때, 이 지상의 수많은 나라들은 그러한 세계적인 전성시기에 가담할 수 있는 그 한때를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한때와 연결짓기 위한 과정적인 국가의 사명을 지니고 나온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그 나라가 과거에 어떠한 전성시기를 가졌다 하더라도, 세계적인 전성시기에 반대되는 자리에 섰다면 그 나라의 운명은 비참한 것으로 끝날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두고 볼 때, 우리 인류의 역사에도 반드시 그러한 운명의 길이 찾아온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만일에 하나님을 중심삼고 역사과정을 지내 나오는 때가 있다면 그때에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섭리사를 중심삼고 그런 때를 살펴볼 때, 어느때가 정성시대일 것이냐?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 섭리를 중심삼은 통일교회는 종의 종의 시대에서부터 종의 시대, 양자의 시대, 친자의 시대, 부모의 시대를 거쳐 하나님의 시대까지 나아가야 된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이런 과정을 볼 때, 종의 종 시대에 있어서의 전성시대가 있었을 것입니다. 전성시대 중에서도 한 점과 같은 최고 정상의 자리가 있었을 것입니다. 선과 같은 경계선이 있었을 것입니다.그러면 그 때가 어느때일 것이냐? 이것은 그 종의 종의 시대권내에 살고 있는 인류 중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를 가름하고 그때를 결정지을 수 있는 책임자가 있을 것인데, 그 책임자는 누구일 것이냐? 그 시대의 운명권을 스쳐 지나가는 인간이 아닙니다. 그 시대의 운명권을 쥐고 그것을 전체적으로 요리하는 하나의 절대자가 있어서 그 절대자가 이런 모든 것을 책임지고 나간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인간들에 대하여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이냐? 하나님을 흠모하는 인연이 생겨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흠모하는 그 마음이 어디에 가서 귀의하고 어디에 가서 귀착될 것이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그 시대가 종의 종 시대면 종의 종 시대에 있어서 최고의 정상 지점에 가서 귀착해야 될 것입니다. 한 선을 중심삼고 최고의 정상에 올라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시대에 있어서 아무리 한때를 고대하며 정성을 들인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정상의 자리에서 결정을 짓지 못하면 비참한 자리에 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종의 시대를 거치는 때는 있어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때에 있어서도 정상이 있을 것이며, 경계선이 있을 것입니다. 그때도 역시 그 정상을 향해 가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그 경계선을 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정상을 차지할 수 있는 한 때, 그 경계선을 넘을 수 있는 한때를 반드시 찾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종의 시대를 넘기 위해서는 그 정상을 정복하고 분수령과 같은 그 선을 넘어야만 합니다. 그래야 새 시대가 열리는 것입니다. 그때를 상속받고 나서야만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양자의 시대를 상속받을 수 있으며, 양자의 시대에 있어서의 지상에 군림할 것입니다.
그러면 양자시대에 있어서의 전성시대는 어느때이겠습니까? 거기에서 한 점에 귀결되어서 하나의 경계선을 중심삼고 좌우로 판가름하지 않으면 안 될 운명길이 그 시대권내에서 섭리를 대하는 인류에게 있어서는 불가피하게 당도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 시대에 살고 있는 인간들에게는 그것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가 있을 것이냐? 자기가 어떻게 태어났는가도 알지 못하고 자기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도 알지 못하고 사는 이 세계의 인류들이 이와같은 정상의 때를 안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입니다. 그간은 누구나 그러한 정상의 자리에 올라서고 싶고 그러한 경계선을 넘어가고 싶은 마음은 가지고 있지만, 그 길을 알지 못하고 또 어떻게 찾아갈 것이냐 하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양자의 때를 지내고 나면 자녀의 때가 올 것입니다. 그 자녀의 때에도 역시 정상의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때를 지난 후에는 부모의 때가 올 것입니다. 참부모를 잃어버린 인류가 그 참부모를 찾아 새로이 모시는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 부모의 때도 역시 일시에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 부모의 때에 있어서도 역시 정상을 오르는 데는 그것이 있는지 없는지를 아무도 모르는 그런 자리, 한 점, 한 줄기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거기에서 하나의 인연이 맺어지는 것이고, 큰 산맥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산맥을 중심삼고 정상을 갖출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정상의 때가 오는 것을 그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알 것이냐?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 인연권내인 국가권내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알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에 왔다 가신 예수님은 4천년 역사의 열매로서 그시대의 메시아로 오신 세계적인 중심 인물이었습니다. 그 시대에 있어서 하나의 초점이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때 그를 알아본 사람이 얼마나 되었습니까? 그와 제일 가까운 입장에 있던 마리아가 진정으로 그의 가치를 정상으로 알고, 그 정상 위치에 서야할 자신의 사명을 다했느냐? 못했습니다. 그의 부친인 요셉이 했느냐? 못 했습니다. 그러면 요셉 가정을 중심삼은 그 종족이 했느냐? 못 했다는 것입니다.
그 정상에 서야 하는 것이 요셉과 마리아를 중심한 그 가정과 요셉 종족의 사명인데도 불구하고 그 사명을 다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그 정상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그때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님의 가치를 알고 정상에 올라서게 되었다면 그 자리는 세계적인 정상이 되었을 것이요, 그 민족은 세계적인 민족이 되었을 것이고, 그 나라는 세계적인 나라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정상을 차지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 백성은 유리고객하는 방랑의 운명을 지닌 처량한 백성이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 민족이 가야 할 미래의 행로에 가로놓여 있는 피의 죽음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되었고, 수많은 원수의 발굽 아래 밟히지 않으면 안 될 그런 행로를 거쳐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 2천년의 역사적인 사실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럼 이스라엘 민족이 왜 그런 길을 가야 했느냐? 그들은 세계적인 한 정상을 위하여 준비된 민족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정상을 차지하지 못한 민족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그 정상을 차지하지 못한 모든 책임을 누가 져야 되느냐? 준비된 그 민족이 져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민족은 그것은 탕감하기 위해 지금까지 비참한 길을 걸어 나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됩니다.
이것을 두고 볼 때, 세계에 하나의 성인이 찾아오고, 섭리의 운세가 이 지상에 찾아오면 정상의 한때를 마련하여 그 한 점을 중심삼고 귀일될 수 있는 그 인간을 맞아야 합니다. 그 한 인간의 가치를 중심삼고 하나님의 가치와 상대적인 입장에 세우기 위해서도 찾아오는 역사적인 운명길이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그러면 누가 과연 이런 시기를 사명을 다해 가지고 상속받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어떠한 역사의 전성시기가 왔다고 자랑하는 것보다는 그 역사의 전성시기를 움직일 수 있는 중심에 나 자체를 찾아 세워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고는 아무리 자신이 그 전성시대권내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 정성시기와 자신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선진국을 자처하고 있는 미국을 두고 볼 때, 미국은 경제적인 분야에 있어서 세계적인 정성시기를 맞고 있습니다. 그 정성시기에 있어서 틀림없이 하나의 초점이 있을 것이고, 하나의 경계선이 있을 것입니다. 어떠한 단체를 중심삼고 볼 때도 거기에 반드시 초점이 있을 것입니다. 나라를 두고 볼 때에도 반드시 중심이 되는 초점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 초점은 무엇이 될 것이냐? 사람일 것이냐 물질일 것이냐 할 때, 물질은 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물질을 위해 있느냐 물질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냐 할 때, 어느누구도 사람이 물질을 위해서 있다고는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물질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사람이 물질을 위해서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서의 초점은 당연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미국에 1억 8천만 명에 가까운 국민이 살고 있는데, 그 사람들이 몇 년뒤에 전세계 인류를 대신할 수 있으려면 그 사람들 가운데 최고의 초점이 될 수 있는 한 사람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한 사람입니다. 1억 8천만 명에 가까운 미국 국민을 대표하여 정상의 자리에 설 수 있는 사람은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을 수 있어야 됩니다. 그 나라를 지도하는 대통령이 그러한 자리에 서게 되면 그 나라는 복을 받겠지만, 그 대통령이 그러지 못한 자리에 서게 되면 그 나라의 국운은 뒤넘이치게 되는 것입니다.
제일 충성하는 사람이 정상의 자리에 서게 됩니다. 그 정상의 때를 맞기 위해서는 낮아져야 합니다. 높아지고자 하면 낮아지게 되고, 낮아지고자 하면 높아지게 되기 때문에 낮은 자리에 들어가야 됩니다. 그러한 시기를 찾지 못할 때에는 정상의 때를 맞지 못한다는 사실을 역사를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나라를 대표해서 정상의 자리에 설 수 있는 그때는 언제냐? 그것은 그 누구도 알지 못할 것입니다. 그 시대권에 서 있는 사람들도 알기 어렵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틀림없이 하나의 초점이 있는 것입니다. 그 초점이 되는 사람은 앞으로 미국이면 전 미국 국민이 가야 할 방향을 제시할 수 있고, 새로운 시대에 있어서 미국이 갖추어서 세계적인 사명을 완수할 수 있는 국가관을 지니고 있다는 것 또한 그 누구도 알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떠한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냐? 그것을 알아보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또 어떤 사람이 복받은 사람이냐? 그와 더불어 인연을 맺고, 그와 더불어 관계를 맺는 사람이 복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면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자리가 어디일 것이냐 할 때, 만민이 흠모할 수 있는 정성기, 꽃을 피우는 자리가 아닙니다. 그러한 정성기를 맞게 하는 그 정성기의 터전이 되고 밑받침이 될 수 있는 골짜기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골짜기에서부터 연결된 사람이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가운데 그것을 인정하고, 그것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가운데 그런 가치의 내용을 중심삼고 자기의 모든 것을 투입하는 그 기준이 보다 높고 보다 넓을수록 그 사람은 누구보다도 큰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만일에 그 중심 되는 초점이 쓰러지게 된다면 그 사람이 대신하여 초점을 세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 국가의 운명이 그러한데, 격동해 들어오는 세계의 운세는 어떨 것이냐? 우리 눈앞에 다가오는 격동하는 이 세계의 정세가 어떻게 전개될 것이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그 위치와 방향이 다르게 되더라도 그 초점을 내세우기 위하여 경계선을 가름해야 됩니다. 그런데 그냥 그 자리에서는 그런 때를 맞을 수 없기 때문에 천운은 반드시 이것을 가려 놓아야 할 시대권내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대권이 격동의 시기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격변하는 세계의 모든 정세는 역사의 종말시대가 오기 전에 이 시대 앞에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것을 우리는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나라의 운명을 알 수 있는 사람이 있느냐? 그 나라의 주권자도 알지 못하는 것이요, 그 나라의 백성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 그러한 세계의 운명권을 누가 알 것이냐? 그 누구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 운명을 모르면서도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들이 최후의 때를 맞이하려면 반드시 결판을 지어야 됩니다. 결정을 지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결정을 짓는 데는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는 양자 택일, 혹은 열이 있다면 그 열 가운데서 하나를 택해야 하는 놀음이 벌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때가 기필코 올 것입니다.
그 자리는 택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택하여야 되는 것입니다. 이미 결정되어진 자리가 아니라 결정해야 되는 자리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누가 해야 되느냐? 내가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때를 결정해 놓고서 오십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을 어느누구도 모르기 때문에 그 사실을 사실로써 공인시키기 위해서는 내가 결정해야 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복귀의 노정을 되돌아보면 아담 가정에 있어서 아벨이면 아벨에게도 전성시대가 있었습니다. 그 정성시대를 놓치지 않고 꽃을 피웠으면 영광이 천지에 드높여질 것이었지만 꽃을 피울 수 있는 그런 시대를 놓침으로써 그냥 쓰러져 버릴 것입니다. 그래서 전성시대가 도리어 회한으로 남아지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역사적으로 추궁하게 될 때에는 그 역사적인 추궁이 인류세계 앞에 새로운 문화를 창조할 수 있는 동기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이 역사시대에는 수많은 문화권이 변천하면서 발전해 나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1970년대는 어떠한 때이냐? 역사사대에서 전환기로 들어가는 시대입니다. 이미 전환시점에 들어와 있습니다. 하나의 민족이 그러한 운명에 봉착하는 것이요, 아시아면 아시아, 세계면 세계가 그러한 운명권에 봉착한 것입니다.
그것은 일면으로 보게 되면 인류 앞에는 말할 수 없이 비정상적인, 혹은 비참한 운명의 길로 내려가는 것으로 보이기 쉽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운명일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것은 바꿔치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높았던 것이 낮아지고 낮았던 것이 높아지는 때라는 것입니다.
이건 왜 그러냐? 정상적인 정상이 나오지 않았고 정상적인 경계선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비정상적인 것이 정상의 자리에 서서 정상의 권위를 갖고 있으므로 이것을 그냥 둘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것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비정상으로써 정상의 권위를 자랑하는 이 모든 요건들을 갖고 있는 국가들의 정상은 반드시 뒤넘이쳐야 되는 것입니다.비정상이 아닌 정상이 정상의 자리를 찾아나설 수 있는 역사적인 판가름이 벌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비정상과 정상이 교차되는 일이 반드시 벌어질 것입니다. 그러면 옛날에 여러분이 존경하던 그 존경의 표준이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옛날에 부정했던 것이 반대로 존경의 표준으로 나타날 수 있는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공산주의를 보면 그들은 반세기라는 짧은 기간에 전세계의 삼분의 일을 점령하였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역사에 없는 일입니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인류역사에 있어서 획기적인 일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공산주의가 지금 세계 적화를 꿈꾸고 그 한계선까지 세계를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바라볼 때 이것이 우리가 바라는 기준이 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은 절대로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렇게 될 수 없다면 그 반대로 급변하는 새시대의 정세를 이끌어 갈 수 있는 새로운 단체가 나와야 됩니다. 즉, 세계적인 격변을 일으킬 수 있는 새로운 이념이 나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반드시 내일의 새 아침을 맞이하기 위해 밤시간을 통하여 그런 역사는 뒤넘이쳐야 될 것입니다.
그 과정의 일면을 보면 암흑의 시대와 같아 보이고, 혼란의 시대와 같아 보이고, 굶주리고 파탄된 극한 상태같이 보입니다. 부정적인 인연을 거쳐가는 것 같지만 그 가운데에서 새로운 아침의 햇살이 은은히 비추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이것을 누가 아느냐? 이게 문제입니다. 이것을 전후에서 감지할 수 있고, 감촉할 수 있고, 적발할 수 있고, 그 중심을 설파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그 누구도 몰랐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역사시대권내에서 태어나고 역사시대권내에서 살다가 죽으면서도 역사시대권내에 찾아오는 천운을 바로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누구도 천운을 감지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이것을 아는 것이 최고의 소망이고, 이것을 표준으로 삼아 인간들을 구원해 가지고 그와 더불어 인연을 맺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최고의 희망인 것입니다.
역사시대에 있어서는 이것을 상대로 노력하고 정성들이기 위해 하나의 조직이 나타나야 됩니다. 그것은 과학이 아닙니다. 교육도 아닙니다. 어떠한 충신이나 열녀, 혹은 유명한 위인도 아닙니다. 역사권을 초월할 수 있는 하나의 이념을 가지고 최고의 정상, 하나의 초점을 향하여 총진군하는 그러한 조직이 오늘날의 역사과정에 없다 할진대는 그 시점과 인연을 맺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면 하나님은 그 시점을 인간과 관계를 맺어주기 위하여 준비한 조직이 있을 것입니다. 그 준비된 하나의 조직이 역사를 배경으로 해서 이 사회에 기필코 나타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교입니다. 그러면 종교 가운데에서도 어떤 종교가 중심이 될 것이냐, 종교 가운데에서 최고의 정상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종교는 어떤 종교냐? 이것이 문제인 거예요.
어떠한 정상이 있으면 그 정상에는 줄기가 남아져 있는 것입니다. 그 정상이 높으면 높을수록 그 줄기는 긴 것입니다. 이러한 줄기를 면면히 연결시켜 가지고 하나의 뿌리를 가져야만 높고 큰 정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종교사에 있어서도 과거의 역사시대로부터 이어온 맥박을 현시대와 미래에까지 연면히 뻗칠 수 있는 그런 종교가 아니면 안 됩니다.
그러면 그 종교의 맥이 어디에서 풀리고 어디에서 맺어질 것이냐? 역사의 모든 중심이 인간이라면 그 인간에 있어서 이 최고의 정상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식도 아니요, 돈도 아니며, 어떠한 외적인 조건도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이 정상이 될 것이냐? 그 정상은 심정을 중심삼은 새로운 인연의 발판이 되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에 종교 중의 종교가 되기 위해서는 인간의 사랑뿐만이 아니라 천의를 대해,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은 역사적 인연을 중요시해 나온 종교가 있어야 할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분명히 있어야 할 그 종교의 사랑의 기원, 사랑의 발판은 어디일 것이냐? 그것은 한 개인을 중심삼은 동시에 한 가정의 초점을 중심삼아야 할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그 내용과 구비 조건에 일치된 종교가 바로 기독교입니다. 기독교가 미래를 바라보며 환경을 극복해 나온 싸움의 행로가 얼마나 처절했더냐. 기독교는 세계적으로 대표적인 선한 역사의 중심을 남겨야 되는 것입니다. 이 길에서 생사의 결판을 지을 수 있는 핏줄기가 없으면 역사의 중심으로 남아질 수 없는 것이요, 그러한 연유로 연결된 사실을 갖지 않고서는 그러한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순교의 종교로서 종교 가운데서도 왕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기독교만이 가야할 특권적인 하나의 정상이 남아 있는 것을 바라볼 때에 그 주위에는 여러 개의 산맥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현 기독교가 바라는 소원은 무엇이냐? 그것은 지금까지 타락한 세계권내에서 지내온 세계를 복귀시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현 20세기는 물론 앞으로 다가올 21세기, 22세기는 현재의 시대가 그대로 전승된 역사적인 터전 위에서 그 표준과 그 정상을 바라보고 나갈 것입니다. 구시대의 종말을 결하고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한계선이 있어야 되는 동시에 경계선의 중심에 초점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 경계선의 초점이 무엇이냐? 바로 재림사상입니다.
그러면 기독교의 한계선은 어디냐? 한계선에서 중심 되는 점은 과연 어디냐? 재림의 때라는 것입니다. 이때를 위하여 기독교인들이 수천년 동안을 수원하며 준비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재림의 때는 언제일 것이냐? 이 재림의 때는 먼저 어떠한 제한된 민족을 중심삼고 오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민족을 중심삼고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세계 인류를 대표해야 하고, 천운과 역사시대를 대표해야 하기 때문에 어느 한 시대를 기점으로 찾아 올 수밖에 없는 것이요, 어느 한 민족을 중심삼고 찾아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천운도 여기에 초점을 맞추어 가지고 상대될 수 있는 하나의 기점이 마련될 것이 아니냐? 이러한 때가 역사시대에 한번만이라도 나타났었더라면 거기에 하나님이 함께하시어 역사시대의 수많은 인간들이 바라는 최고의 인격자가 나타났을 것입니다. 그가 나타나서 역사적인 열매가 되고, 시대적인 열매가 되고, 미래의 기원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과 인류의 사랑이 하나의 꽃을 피울 수 있는 본성의 가치를 들고나올 수 있는 한 점이 있어야 되는데 그 점이 어느때가 될 것이냐? 바로 재림의 때가 그때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때는 과거의 사람도 소원했던 것이요, 현재의 사람도 소원하는 것이요, 미래의 사람도 소원하는 것입니다. 그때는 3시대를 주관하고도 남을 수 있는 정상의 때입니다. 거기에서 새로운 빛이 발하고 새로운 인연이 벌어진다 할때는 그 인연은 역사적인 교훈이 되는 것입니다.
재림의 때에는 역사시대의 어떠한 문화가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시대의 모든 것을 표현하고, 소화시키고도 남을 수 있는 기준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이 바라는 전체 가치의 중심이 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재림의 때는 반드시 와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에서는 재림의 때가 언제 올지는 모르나 언젠가는 온다고 믿고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난 뒤 지금까지 바라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한번 생각해 보세요. 어제와 오늘이 확연히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동녘에 솟아오르는 태양도 언제나 마찬가지의 모양입니다. 계절을 살펴봐도 봄이 지나가도 그 이듬해에는 반드시 봄이 다시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하루가 가고 이틀이 지나가는 가운데 젊은 청춘시대는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장년시대를 거쳐 노년의 시대를 거쳐갑니다. 언제 왔다가 언제 가는지 모르게 스치는 바람처럼 일생이 지나가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지나가는 일생 가운데에서 인연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 인연은 부모로부터 타고난 인연이 아니라 찾아오는 세계와의 인연입니다. 이 인연을 어떻게 결정짓느냐 하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앞으로 여러분이 어떻게 출세를 한다느니, 역사적인 인물이 된다느니 하며 동경하는 이상도 전부다 이러한 환경을 중심삼고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러한 정상의 한때를 위해 어떻게 해 나왔고, 앞으로 우리 통일교인들은 어떻게 해야 되느냐? 이때는 혼자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산맥이 연이어 나가면서 점진적으로 높아지듯이 현상태에서 점점 높은 정상을 향해서 연결되는 인연을 거치지 않으면 바라는 그때는 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시대를 복귀섭리의 시대권을 중심삼고 볼 때, '종의 종'의 시대라는 것입니다. '종의 종'의 시대란 어떤 때이냐? 주인이 없는 시대입니다. 종의 새끼들이 종의 종을 대하여 주인의 행세를 하는 때라는 것입니다. 진짜 주인이 주인의 행세를 하는 것이 아니라 가짜 주인이 주인의 행세를 하는 때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종의 종의 시대가 복귀섭리 시대에 들어오면서 종의 시대로 들어가고, 종의 시대에서 다시 양자의 시대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또 양자의 시대로부터 직계 자녀의 시대로 들어가며, 직계 자녀의 시대로부터 부모의 시대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부모의 사랑을 중심삼고 하나님의 시대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 과정이 복귀의 세계로 가야 할 역사의 진전과정입니다.
그러면 인간에게 있어서 최후의 목적은 무엇이냐? 그것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랑을 직접 주고받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참부모를 만나야 됩니다. 그 참부모가 청춘의 시대에 나타났다 하더라도 그의 청춘시대는 개인의 청춘시대가 아닙니다. 그가 서 있는 청춘시대의 자리는 양자의 시대를 거치고 자녀의 시대를 거친 역사적인 운명을 지닌 자리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의 가치를 개인적으로 볼 때는 너와 나의 일대일의 입장이지만 그로 말미암아 전체와 개체가 인연을 맺을 수 있고, 절대자와 상대될 수 있는 인연을 맺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가릴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참부모님을 모시게 되면 종의 종으로 왔던 사람이나 종으로 왔던 사람이나 양자로 왔던 사람이나 다 직계 자녀로 그 가치가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참부모와 연결될 수 없으며 인연을 맺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한 그루의 나무가 춘하추동을 거치면서 아무리 잘 자라고, 봄을 맞이하여 꽃을 아무리 아름답게 피우고, 열매를 아무리 많이 맺었다 하더라도 그 모든 것이 가을에 남아질 수 있는 하나의 완숙된 결실로서 주인에게 거두어지지 못한다면 그 나무의 풍성한 잎이며, 꽃이며, 맺힌 열매 등은 모두 수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역사의 모든 가치를 종합한 한 중심을 중심삼고 새로운 문화의 출발을 보기 위하여 지금까지 거쳐온 역사의 발자취를 생각하게 될 때, 인류는 그야말로 엄청난 한 시대를 맞이할 수 있는 전환기에 있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런 때를 슬기롭게 맞이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이런 운명을 거쳐온 것입니다. 오늘날까지 6천년의 역사를 남기면서 이렇게 걸어온 것은 그 한때를 맞이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는 그러한 시점을 바라보고 나가는 것입니다. 아무리 참부모의 가치를 찬양하고 따라가더라도 그 때를 맞이해 놓고 찬양을 해야 됩니다. 부정을 하는 가운데에서의 찬양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과정에 아무리 위대한 성인이 왔다 하더라도 그 가치를 찾지 않는 자리에서는 그의 가치를 결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 가치가 높다 하더라도 그 가치를 기준삼아 가지고 그 자리를 결정하지 않으면 그는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잘했더라도 자기의 가치를 결정하지 못하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세례 요한을 보게 될 때 표면적으로는 형제입니다. 예수님이 세례요한의 동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례 요한과 예수님이 다른 점이 무엇이냐? 세례 요한은 사회적으로 당당한 제사장 사가랴의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모든 친척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으면서 자랐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자기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자랐습니다. 사생아로 태어난 예수였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요셉 가정에서나 부락에서 의붓자식 취급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친척 중에서도 어느누구 하나 동정하는 사람이 없는 고독한 환경에서 자라난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에 비하여 세례 요한은 당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세례 요한이 아무리 당당하다 하더라도 정상의 자리에서 당당하면 모르지만, 그렇지 못한 자리에서 당당한 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 자신이 정상의 자리에 서야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정상의 자리가 아직 남아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심판이란 무엇이냐? 참과 거짓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참과 거짓을 결정하기 위해서는 잼대가 있어야 됩니다. 그 잼대는 웬만큼 갖추어 가지고는 안 됩니다. 점수로 따져 보면 몇 점을 중심삼고 결정해야 되느냐 하면 백 점을 중심삼아 가지고 결정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뜻을 품은 사람, 혹은 한 나라의 애국자, 혹은 성현들의 발자취를 보면 그들은 자기를 위하여 산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이 바라는 소원이 무엇이었느냐 하면 나라를 위하여 살고, 세계를 위하여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살려고 했기 때문에 충신의 반열에 동참할 수 있었고, 세계 성현의 반열에 동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을 볼 때, 이러한 한 무리나마 최고의 정상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 정성을 들이는 생활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시대에 있어서 종의 종의 시대를 정상에 연결시키고, 양자의 시대를 정상에 연결시키는 초점이 나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들은 그러한 역사적인 성현의 도리를 표준으로 삼아 가지고 하나의 목표를 향해 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운명권에 있다는 것입니다.
수천년 전에 왔다 간 성현들은 지금의 우리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남긴 사상과 교훈은 영원한 것입니다. 그것은 정상의 자리로 점핑해 들어온 것입니다. 종의 자리에서 양자의 자리로 타고 넘을 수 있는 것이요, 양자의 자리에서 직계 자녀의 자리로 타고 넘을 수 있는 것이며, 자녀의 자리에서 부모의 자리로 타고 넘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남긴 정신적인 사상을 올바로 인계받고자 하는 것이 우리 민족의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그 목적의 중심에 도달하고자 하는 통일교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정상을 향하여 점핑해 가지고 최고의 정상의 자리에 들어가야 됩니다. 이것을 바라고 뚫고 들어가는 그 순간은 어렵지만 이것만 통과하면 어디든지 다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비록 내 한 개체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서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그 정상의 자리에 도달하기만 하면 우주적인고 천주사적인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잘나고 못나고가 문제가 아닙니다.
그 가치를 지닐 수 있는 정상은 역사시대에 기필코 올 것입니다. 그것은 광명한 새 아침에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밤 12시가 되어 땡 하고 울리는 시계의 음이 없어지기 전부터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그의 아들밖에는 모르는 것입니다. 그가 나타날 때까지는 그 누구도 모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일 두려운 것입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일출이 되면서 둘이 대할 수 있을 때가 되면 인연을 찾아오던 사람들은 비로소 거기에서 자연히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통일교회는 어떤 내용을 가졌느냐? 여러분들 생각해 보세요. 통일교회가 역사에 길이 남기고자 하는 내용을 가지지 못하였다면 그런 자리에 못 갈 것입니다. 통일교회는 역사의 인연을 통해서 그런 내용을 감아 쥐고서 역사를 발전시킬 수 있는 내용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거짓 부모를 섬기는 타락한 인간들은 참부모의 길을 찾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참부모는 개인적인 참부모가 아니라 세계적인 참부모의 입장인 것입니다.
그러면 참부모를 모신 자식으로서 효의 도리를 다할 수 있는 자리는 어디일 것이냐? 개인적으로만 참부모를 모시는 것이 효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자리는 세계의 정상을 중심삼고 효의 도리를 다해야 하는 자리입니다. 이것이 참부모를 중심삼은 참다운 효의 도리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참다운 충의 도리는 무엇이냐? 세계를 대표할 수 있는 자리에서 충을 다하는 것이 참다운 충의 도리인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앞으로 소망의 주의는 어떠한 주의라야 되느냐? 과거로 돌아가기를 희망하는 이런 요건을 지닌 주의를 가진 사람은 망하는 것입니다. 과거를 딛고 미래의 문화세계를 소망하면서 나아갈 수 있는 섭리의 기준을 가지고 그 세계를 향하여 당당히 나설 수 있는 무리가 되어야 합니다. 역사시대의 암울한 분수령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문제삼지 않고 최고의 정상의 자리를 향하여 갈 수 있는 내용을 지닌 자만이 앞으로의 새로운 시대에 있어서 기수가 될 것이요, 책임자가 될 것입니다. 인간은 타락으로 인하여 그 정상으로 올라갈 수 있는 토대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세계적인 기준을 남겨야 하는 그 마음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통일사상을 배워 나왔습니다. 여러분이 이 통일사상을 중심삼고 정상에 올라가는 것을 소망하고 가다 보면, 발전하는 데 있어서 어떤 때는 내려갈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때가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거기에서는 최고의 정상을 드러낼 수 없는 것입니다. 참사람은 이러한 정상의 길을 통과했기 때문에 부름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그 가치를 높여 가야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지금까지 역사시대를 거쳐오면서 이러한 흐름을 타고 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통일교회는 높은 것을 바람과 동시에 낮은 것도 중요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세계를 인연지으려면 낮은 곳을 가면서도 높은 곳까지 드러낼 수 있는 마음이 솟구쳐야 됩니다. 이런 사상을 지니고 세상을 중심삼아 가지고서 새로운 세계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때가 있어야 되는데 그 때가 어느때일 것이냐? 우리 통일교회가 그러한 때를 바라고 나왔다면, 통일교회 자체가 그러한 역사를 갖고 있느냐? 협회 차원에서 볼 때, 그때가 바로 정상의 때일 것입니다.
그러면 어느때가 최고의 정성시대일 것이냐? 이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원리를 배웠다고 해서 그것을 감지할 수 있느냐. 즉, 어느때가 제일 정성시대인가를 아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정성의 시대와 인연을 맺어야만 타락의 인연을 끊을 수 있습니다.
그러지 않고 이 정성시대의 인연을 망각하거나 상실해 버리게 되면 아무리 중요한 사명을 가졌고, 아무리 중요한 가치의 내용을 지녔다 하더라도 그 자신은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과거와 같은 역사를 만들 뿐이며, 그가 생활해 나가는 생애노정도 변함없는 내용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은 그러한 역사를 중심삼아 가지고 더욱더 높은 길 낮은 길을 가려 가야 된다는 것을 알아야 돼요.
여러분 자신들은 지금 얼마나 심각해야 되느냐?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정에서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얼마나 심각했겠느냐? 노아가 120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방주를 만들라고 하는 명령을 받고 그 수난길을 나오면서 얼마나 심각했겠느냐? 또한 야곱이 21년 동안 하란 땅에서 고생하다가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얼마나 심각했겠느냐는 것입니다. 얍복강에서 수많은 재물과 자녀와 종들을 먼저 건너게 하고, 자기 혼자 남아 밤을 새워 가며 천사와 싸울 때에 자신의 환도뼈가 부러져 나가도 천사를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쓰러져 죽더라도 놓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야곱이 얼마나 심각했겠는가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면서 기도하는 그 자리가 얼마나 심각했겠느냐? '아바 아버지여, 만일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시오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원대로 하시옵소서'라고 한 기도가 얼마나 심각한 기도였겠느냐? 여러분은 이러한 사실을 잘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우리 통일교회는 오늘날의 역사가 있기까지 조심스러운 정성의 길을 달려오면서 얼마나 심각했겠느냐? 쓰러져 가는 이 세상 가운데에서 망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부딪쳐 가지고 이것을 좌우로 살피면서 최후의 심각한 결의를 가져 가지고 달려 나온 운명의 갈림길이 얼마나 많았겠는가를 여러분은 생각해야 됩니다.
앞으로도 이 길을 가는 데 있어서 때로는 최고로 비참한 고비도 있을 것이고, 이 고비를 기반으로 해서 나타날 수 있는 하나의 정상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는 정성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자기가 최고의 위치에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정상에 올라갔다 하더라도 발전의 터전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정상에 있기 전에는 계곡, 즉 골짜기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걸 알아야 됩니다. 정상에 오르기 위해서는 골짜기를 지나야 되는 것입니다. 그 골짜기에서 승리가 다져지지 않고서는 정상을 바라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안팎으로 다짐하고 결의하지 않는 사람은 정상에 올라갈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정상에 갈 수 있는 환경 시대와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아무리 그 과정이 좋고, 자기 스스로 자랑할 수 있는 가치를 지녔다 하더라도 그 정상의 가치와 인연을 맺지 못하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조심하면서도 심각하게 걸어가야 하는 길입니다. 개척자의 길을 가는 데 있어서 핍박을 받고 몰림을 당하고, 자기의 운명이 죽음길로 내몰리는 자리에 있다 하더라도 절대 경거망동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심각한 길을 조심조심 하나님과 더불어 헤쳐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동맥이면 동맥, 정맥이면 정맥을 통하여 그 맥박이 같은 맥박의 고통으로 울려내는 것처럼 하나님과의 감정이 그런 자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피가 동맥으로 내보내지면 반대로 정맥으로 다시 들여보내짐으로써 같은 맥박에 같은 고동으로 움직일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같은 맥박에 같은 고동으로 움직일 수 있는 내용을 가져 가지고 같은 맥박의 인연을 가져올 수 있어야만 상대적으로 하나의 인연이 결정될 것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리를 중심삼고 볼 때 오늘날 우리는 과연 위대한 사명을 가졌다고 주장할 수 있느냐? 이러한 자리를 결정지어 놓았다고 해서 위대한 사명을 다했다고 주장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리를 결정짓지 못하고는 어떤 위대한 사명을 가졌다 하더라도 그 사명은 흘러가 버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하나님이 전성시대로서 찾아올 수 있는 우주사적인 현시대에 있어서 그러한 자리를 결정할 수 있는 시각 우리 앞에 다가왔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나 자신이 그 시기를 중심삼고 정상에 올라설 수 있는 경계선을 넘기 위하여 어떤 내용과 인연을 가졌느냐는 것입니다.
옛날 사람이나 오늘날 사람이나 정상에 선 사람은 복귀의 사명을 짊어지고 있습니다. 정상의 가치를 중심삼고 충성을 하게 되면 그는 억천만대에 이르러도 변하지 않고 남아지는 것입니다.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정상에서 상속을 못 받는 날에는 또다시 골짜기에서 투쟁이 벌어지게 될 것입니다. 새로운 시련과 투쟁의 역사가 가해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또 다시 투쟁의 역사를 거쳐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상에서 인연이 되고, 정상에서 관계를 맺고, 정상에서 그 인연을 상속받아야 할 뜻을 알았다면 우리는 생애노정을 어떻게 넘을 것이냐? 이것이 우리가 바랄 수 있는 첫째 희망인 것입니다. 이러한 사명을 전수받아 가지고 실천하는 데 있어서는 꼭대기를 거치게 될 때도 있을 것이고, 골짜기를 거치게 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떠한 입장에 있든 자기의 입장에서 정상의 내용을 중심삼아 가지고 골짜기면 골짜기, 정상이면 정상을 드러낼 수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만 여러분을 중심삼은 종족적 천국 이념이 벌어질 것이요, 종족적 정상의 기원이 벌어질 것이며 세계문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행로를 스스로 다짐해 가고, 이러한 뜻을 중심삼고 생애노정을 갈 때에 정상과 경계선을 드러낼 수 있는 하나의 뚜렷한 산맥과 같은 그런 고비를 넘기지 않으면 그 일생은 영영 돌이킬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을 연결시켜 상속시키는 데 있어서 사명과 보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의 가정들은 생각해 보세요. 어느때는 축복을 해주더니 지금은 서로 떼어 놓는다고, 어떤 가정들은 축복이고 뭐고 다 부정하는 자리에 있다는 겁니다. 선생님은 1970년도를 중심삼고 잘살라고 축복을 해주시더니 이제 와서는 전부 떼어 가지고 지방으로 활동을 내 보낸다고 불평을 한다는 거예요. 이렇듯 어떤 면에 있어서 통일교회는 비참합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잘 생각해야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그 비참을 비참으로 인정하느냐, 아니면 영광으로 돌리느냐? 영광으로 돌린다면 그 동기가 어떤 것이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비참으로 돌릴 수밖에 없는 비참한 배경을 갖고 그것을 영광으로 돌릴 수 있는 영광의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을 지금까지 그러한 길로 걸어 나오게 한 것은, 여러분이 복귀시대에 있어서 정상을 향해 넘어가는 과정에서 필요한 가정들이기 때문입니다. 축복가정들이 최고의 정상의 자리를 걸어가야 됩니다. 골짜기를 거쳐가지고 정상의 자리를 넘어야만 비로소 메시아의 사상을 이어받을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이 골짜기를 가는 데는 누가 앞장서야 되느냐? 여자가 앞장서야 됩니다. 여자가 앞장서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왜 하필 여자가 온 인류 앞에 앞장을 서야 되느냐? 지금까지 정상의 길을 닦아 나온 것은 남자였습니다. 지금까지 6천년 동안 복귀의 길을 남자가 닦아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 길에는 여자가 단 한 명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남자가 이 길을 닦아 정상에 올라왔으니 내려갈 때에는 누가 내려가야 되느냐? 여자가 내려가야 됩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남자들은 어떻게 해야 되느냐? 남자들은 정상의 인연을 가지고 그것과 연결지어야 됩니다. 이걸 두고 볼 때 우리 통일교회의 축복받은 가정들에게 있어서 비참상이 벌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이러한 자리에서도 내일의 소망을 위해서 급진적인 진격을 해야 됩니다. 그리하면 최후에는 희망의 한때가 찾아온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자들이 혼자 내려간다고 하지만 내려갈 때에는 혼자 내려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누가 같이 따라 내려가느냐? 마음으로 남편이 따라가고, 아들딸이 따라가는 것입니다. 통일의 딸이 내려가는 데는 누구를 중심삼고, 누구를 바라보고 내려가느냐? 정상에 계신 하나님을 중심삼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내려가면 아무리 내려가더라도 그녀는 다시 올라올 수 있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이 길을 내려가는 것은 하늘의 갈 길을 닦기 위한 것이요, 남편의 갈 길을 닦기 위한 것이요, 아들딸의 갈 길을 닦기 위한 것입니다. 여자들은 이러한 마음을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여자는 하늘을 망하게 했고, 나라를 망하게 했고, 가정을 망하게 했고, 또 남편을 망하게 했고, 아들딸을 망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타락의 기원이 여자이기 때문에, 가정의 인연과 사랑의 인연을 가지고 망하게 했던 것들을 다시 복귀해야 할 운명이 여자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불가피한 것입니다.
아담과 해와가 어떻게 타락했느냐? 해와는 혼자서 타락했습니다. 아담은 타락하지 않았는데 아담 몰래 먼저 타락을 했던 것입니다. 그 타락은 아담과 아무런 관계도 없이 했으며, 하나님과도 관계가 없이 했고, 그 나라와도 아무런 관계가 없이 혼자서 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해와는 혼자서 저질렀던 그 타락의 한을 복귀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혼자서 사랑의 인연을 다시 재현시켜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과의 인연을 복귀하고, 남편의 사랑을 복귀하고, 부부의 사랑까지 복귀해야 됩니다. 이것을 불가피한 것입니다. 이것을 터전으로 해서 복귀해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어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두고 볼 때, 우리 통일교회에 있어서 이제는 올 때가 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럼 이때가 슬픈 때냐 기쁜 때냐 할 때, 남자에게는 말할 수 없이 슬픈 때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세상에서 가정을 중심삼은 남자에게는 말할 수 없이 슬픈 때이지만, 여자에게는 말할 수 없는 희망의 때라는 것입니다. 이때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남녀평등권을 주장할 수 있는 역사적인 한 시점이 마련되는 것입니다. 이때가 여자에게 있어서 역사적인 최고의 전성시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전성시대라고 해서 간판을 붙이고, 정상이라고 해서 나발부는 이런 때가 아닙니다. 오는지 가는지도 모르게, 그 내용을 중심삼고 천지를 뒤넘이치면서 절대적인 운명으로 알고 받들고 가야 하는 때인 것입니다. 여러분들 중에 아내를 가진 남성들이 아내를 희생시킬 때가 옵니다. 그 남편들에게는 영광의 한때가 올 것입니다. 세계 인류 가운데 남성으로서 자랑할 수 있는 남성의 권위를 가질 수 있지 않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남성의 염원이 무엇이냐? 자기의 사랑하는 아내가 세계적이요, 천주사적인 참된 인연을 가진 여성이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남편이 이럴 때 부인은 어떻게 해야 되느냐? 어떤 부인은 '통일교회 문선생님이 명령을 했기 때문에 이렇게 고생을 하는구나. 아이구, 죽겠다'라고 하면서 선생님을 원망합니다. 그 자리를 피해 도망가 버려도 난 상관없습니다. 여자가 잘못해서 아담 후손들이 얼마나 죽을 고생을 했는데 뭐 어쩌고 어째요?
예수님도 죽을 자리에 들어가 '아바 아버지여,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나에게서 지나가게 하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기도를 했었습니다. 이래야 됩니다. 여러분이 결혼해 가지고 떨어져서 활동을 하는 것은 역사에 한번밖에 없는 역사적인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는 축복해 주더니 이제는 남편과 떨어져서 지방으로 전부다 내몰고… 이게 어디 남편인가? 남편도 아니고 무슨 편도 아니고. 이게 뭐냐 이거야' 한다는 거예요. 그것도 모르고 그렇게 말하는 법이 세상에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 문제가 심상치 않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남편들은 무엇이냐 하면, 천사장의 후손입니다. 다시 말하면 종의 자식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종의 자식이 주인이 와서 사랑을 해주는데, 왜 그러느냐고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 아내를 데려다가 다른 데로 팔아먹지 않는 한 어떠한 일을 시키든지간에 왜 그러느냐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심부름을 시키든지 무엇을 시키든지 언제든지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따라서 천사를 전부 다 파탄시켜 버리고 와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가 종의 입장이기 때문에 싫더라도 그래야 되는 것입니다. 무섭게 하자는 겁니다. 그래 가지고 종의 입장을 교체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실적을 남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종의 입장으로서 하늘의 특권적인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아무런 내용도 가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원리를 보아서도 그런가 안 그런가 생각해 보세요. 여기 남편되는 사람들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을 청산짓기 위해서는 쉴 사이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남편이라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면 아내가 세계적으로 공인받는 한때가 있는 것을 알고 아내가 동원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해야 됩니다. 여자로 말미암아 축복이 이루어지게 되어 있으므로 여자가 공인받지 못하게 될 때는 남자도 공인을 못 받는 것입니다. 아내가 공인을 못 받게 될 때에는 남편이 있어도 그 남편을 대할 수 없으며, 자식이 있어도 그 자식을 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내가 임지에 나가 있으면 남편도 아내를 사랑하면서 밤낮으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당신의 괴로움이 곧 나의 괴로움이요, 당신의 외로움은 곧 나의 외로움이라고 할 수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 남편들은 임지에 나가 활동을 하고 있는 아내에게 최소한 한달에 2천원씩 돈을 보내 주라는 것입니다. 만약 '아이구, 나는 그것 반대해요' 하고 못 하겠다는 사람은 그만두라는 것입니다. 뜻이 다 이루어진 다음에 가서 손발을 빌면서 '아이구 잘못했습니다'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남자 노릇을 못 했다고 탄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숨이 넘어가 자빠지는 한이 있더라도 아내를 위해 돈을 보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자세한 이야기는 안 하겠습니다. 오늘 여기 온 사람들은 틀림없이 보내 주겠지만 말입니다. 만약 안 보내 주면 어떻게 되는가 보라는 것입니다. 그런 내용을 내가 다 밝혀 줄 것입니다. 자기 아들딸이 '아버지, 그때 엄마가 이런 일을 할 때 엄마에게 돈을 보내 주었습니까? 참말로요' 또 엄마에게도 '엄마는 나가 활동했어요? 참말 했어요' 하면서 참소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때는 천지가 진동하는 말로 들릴 것입니다. 여기에는 무슨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엊그제 지구장회의 때 지구장들이 본부에서 절반을 보내 주고 남편들이 절반을 보내 주면 좋겠다고 하는데 도둑놈 자식들이라는 거예요. 본부에서 그렇게 해주면 여러분은 그 마지막 고비를 어떻게 넘어가겠습니까? 그러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자기 부인들이 동원되는 남편들 손들어 보세요? 아내에게 생활비를 전부 다 보내 주어야 되겠어요, 안 보내 주어야 되겠어요? 보내 주겠다는 사람은 손을 들고 있고, 안 보내 주겠다는 사람은 내려요. 다시 안 보내 주겠다는 사람은 손들어 보세요. 때라는 것은 모르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걸 알아야 됩니다.
선생님은 지금까지 이 길을 걸어 나온 참 불쌍한 사람입니다. 모든 일을 전부 다 혼자 선두에 서서, 선생님이 여러분에게 시키는 일들을 내가 다 실천해 나오고 있습니다. 이미 10년 전부터 해 나온 것입니다. 그때에는 왜 선생님이 그렇게 하나 하고 의문시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다 지내고 보니 안 그렇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언제 그것을 알았느냐? 10년 전에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이 놀음을 한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도 모르고 지지리 시간을 끌다가 이제야 눈을 뜨고서 '아이구, 그래서 선생님이 그랬구나' 합니다. 기가 막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이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한때가 왔다는 겁니다. 여러분은 남자로서 그러한 일을 할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차 7년노정에 가담한 사람들은 복받은 사람입니다. 이번 777가정까지는 어떻게 해서든지 이 1차 7년노정에 가담시켜 주기 위한 작전을 한 것입니다. 여기에 가담한 사람들은 공의로운 사람입니다. 이제는 내 책임을 다했습니다. 나는 내가 말한 책임을 다 했다고 할 수 있는 자리에 서기 위해서 790쌍을 결혼시켰던 것입니다. 알겠어요?
그런데 이러한 사실도 모르고 이건 뭐 장가가자마자 벼락이라며 아내를 임지로 내보낸다고 불평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서산으로 해가 진 줄 알았더니 아침이 지나 뙤약볕이라는 것입니다. 시키는 대로 하지 않고 부부 사이에 서로 죽자살자 사랑만 하려고 하면 그 순간부터 굶어 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못 하면 탕감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에 없는 이런 놀음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 통일교회가 하는 이 일은 후대의 어떤 사람도 못 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이 배가 고프다고 해서 이런 일을 할 수 있어요? 당장 자기 배가 고픈데 이런 일을 시키면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싫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통일교회 여러분은 원리를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불평하게끔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여러분을 전부 수련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수련을 받는 데에는 여기 본부에 있는 사람들까지 7백쌍이 다 와가지고 수련을 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수련을 받고 나면 그때는 가지말라고 해도 가겠다고 할 것입니다. 만약에 아내가 안 나가겠다고 하면 남편들은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아내가 안 나가겠다고 하면 어떻게 해서라도 나가게끔 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김점례씨 왔어요? 「안 왔습니다」 그 사람 얘기하려고 했는데 잘됐구만. (웃음) 뭐 자기가 몸이 약해서 그러니 임지로 나가기 전에 조금 쉬었다가 나가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쉬었다가 나가면 도움이 될 게 뭐가 있습니까? 임지로 떠나기 3일 전에 목욕을 하다가 쓰러졌다나요? 한번 쓰러지면 며칠 동안 쉬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 남편한테 전화를 해서 '아이구 아빠, 나 이렇게 되었으니 전도 못 나가겠어요'라고 하니 남편까지 '아이구, 이거 큰일났다'고 하면서 여기에 동조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남편이나 아내나 둘 다 똑같다는 것입니다. 남편이 선생님에게 와서 큰일났다고 하면 선생님이 동정해서 들어줄 것 같아요? 그러면 얼마나 기분 나쁜지 몰라요. 그런 사람은 사탄이 기가 막히게 좋아하는 기준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또 부인이 뭐, 거리에 나가서 전도도 잘 못 하고, 차를 못 타기 때문에 차를 타면 힘이 들어서 십리도 못 간다는 것입니다. 그러길래 선생님이 바래다 준다고 했더니 부끄러워서 그런지 당장에 갔습니다. 갈 때 멀미를 하지 않고 잘 갔다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핑계만 대는 것은 동정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전도를 못 나가기는 왜 못 나갑니까? 전라남도 장흥 골짜기까지 갔는데 잘 갔다는 겁니다. 거기까지 남편이 데려다 주었다는 거예요. 그러니 그 여자에게는 남자가 충신이라는 것입니다. (웃음)
복귀섭리에 있어서 남자들이 꼭대기에 올라서기 위해서는 여자들이 골짜기에서 협조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통일교회의 역사인 것입니다. 1970년도를 중심으로 3년이라는 기간을 통하여 이 일을 하라고 한 것도 이러한 과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골짜기의 길을 걸어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아들딸이 있듯이 하나님에게도 아들딸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딸을 찾기 위하여 섭리를 해 나오고 계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해와를 찾기 위한 섭리를 해 나오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 일을 하나님은 6천년 동안이나 해 나오셨는데 그래, 여러분은 3년도 못 하겠습니까?이일은 반드시 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일을 하게 되면 여기서부터 전통적인 종교의 원칙이 세워지는 것입니다.
남편들은 아내가 임지에 나가고 없으니 아이들만 데리고 아침에 밥을 먹을 때면 자신이 처량한 느낌이 들 것입니다. 그런 때는 아이들에게 '엄마는 세계에서 제일 훌륭한 일을 하는 거란다. 나라를 위하고 하늘을 위해서 추운 겨울에도 밖에 나가서 고생을 하고 있다'고 이야기를 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부인들이 그 길을 안 가려고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남편은 아내에게 예수님이 지금까지 실체대상을 찾기 위해서 얼마나 수고했느냐 하는 것을 생각하게 하고, 그것을 다시 맞을 수 있는 해방의 한 가정을 위해서 나가라고 해야 됩니다. 남편은 아내를 안심시켜 주어서 가게끔 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상의 아내가 되어 달라고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편은 책임을 다 했나 반성해야 됩니다. 남편은 남자로서 경제적인 책임을 지고 아내는 여자로서 남편과 자식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 가지고 아버지의 사랑을 중심삼고 여기서 새로운 세계를 위하여 내적인 기반을 닦아야 됩니다. 내적인 기반을 닦아 놓지 않고서는 사탄의 참소권을 벗어날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새로운 가정의 출발이 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녀들이 우리 아빠 엄마는 참으로 훌륭하다고 할 것입니다. 다른 집에서는 엄마가 하루만 다른 데서 자고 와도 그 집 아빠가 때리고 욕하며 야단이 벌어지는데, 우리 아빠는 엄마가 3년 동안이나 집을 나갔다가 왔는데도 아무 일도 없으니 얼마나 훌륭하신 분이냐고 할 것입니다. 이러한 시기가 오늘날 이 땅을 중심삼아 가지고 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세상에서는 모르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아무 뜻도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가 대하고 있는 사람이 어떤 사명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 년, 혹은 수십 년이 지나 그들도 그런 때를 당하게 되면 그때에야 비로소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그들은 후회하는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그만큼의 차이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때를 위해서 우리 통일교회의 축복받은 가정들은 이러한 역사의 노정을 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하나님의 아들딸로서 영광 중의 영광인 것을 알고 천의의 심정으로 하나님을 모셔야 되는 것입니다.
하늘이 안팎으로 우리에게 주신 거룩한 초석을 함부로 흐트러 버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뭉개 버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한 팀으로 구성되어 가지고, 즉 남편과 부인은 세상에 둘도 없는 하나가 되어서 사위기대의 기준을 이루기 위해 맨 밑창에서부터 시작하여 최고의 정상까지 올라가라는 것입니다.
통일교회의 여러분은 하늘의 뜻을 중심삼고 선생님의 명령에 따라서 새로운 가정을 붙들고 정성들여야 됩니다. 이렇게 해서 때가 되어 얼굴을 들게 되면 가정적으로 올라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종족적인 메시아의 사명을 완수할 수 있는 자리에 설 수 있는 기회는 단 한 번밖에 없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알겠어요? 「예」
그렇게 알고 여러분은 세계를 위해서 정성을 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여러분은 예수님이 신부를 찾기 위하여 정성들이던 마음과 하나님이 아들딸을 찾아 나오시던 그 마음을 가지고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과정을 통틀어서 회고해 볼 때, 지금까지의 6천년 역사는 어떤 역사이냐? 모자 협조의 기준을 찾아 나온 역사입니다. 지금까지의 6천년 역사는 모자협조의 길을 터 나온 역사였다는 것입니다. 이 역사는 아벨 때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해와가 아벨에 대하여 어떻게 모자의 협조를 해야 하는지 그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해와는 타락하였지만 어머니로서의 자격은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타락으로 말미암아 아들을 대하는 그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그런 보이지 않는 내적인 마음을 가지고 나온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노아 때에 와 가지고 모자협조의 기준이 결정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실체적인 모자협조의 기준은 어디에서부터 벌어졌느냐 하면 야곱 때부터입니다. 그렇지요? 그것은 야곱이 조상 복귀의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6천년 역사를 보면, 모자협조의 기반이 없어 가지고는 뜻을 못 이루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야곱 때부터 모세 때, 예수님 때까지도 모자협조를 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 때에도 해야지요? 그것은 왜 그래야 되느냐 하면 아담 해와가 타락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중심삼고 아담이 있고, 해와가 있고, 천사장이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타락이 어떻게 되었느냐 하면 천사장이 해와를 꼬여 가지고 되었고, 그 다음에는 타락한 해와가 아담을 꼬여 가지고 하나님을 저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타락의 경로입니다. 이렇게 해서 천사장이 사탄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복귀의 원칙은 반대의 길을 가야 되는 거예요. 하나님도 이와 같은 무리들과는 관계를 끊어 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약혼한 것은 아담과 해와와 약혼단계에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 입장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약혼한 관계에 있는 마리아와 요셉 사이에서 하나님이 마리아를 빼앗아야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마리아를 빼앗아야 하는 것은 잃어버린 해와를 복귀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 요셉은 누구의 입장입니까? 「천사장 입장입니다」 요셉은 원래 아담의 자리에 서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요셉이 천사장 입장입니까? 타락한 후손이므로 씨가 달라서입니다. 즉 뿌리가 다르다는 거예요. 요셉은 타락의 씨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그러므로 이것을 뒤집어엎으려면 부정해야 됩니다. 그렇지요? 그러면 그 씨는 어디에서 나와야 됩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야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에게는 아들의 씨가 있어요, 없어요?(없습니다) 그러니 아들이 필요합니다. 타락하지 않은 아들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타락한 천사장은 사탄이고 요셉은 타락하지 않은 천사장형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려면 아들이 없어 가지고는 안 되는 겁니다. 왜 아들이 없으면 구원이 안 되느냐? 창조원칙을 보면 누가 먼저 나왔습니까? 「아담입니다」 그러니 복귀하는 데에도 아들이 먼저 나와야 됩니다.
그런데 요셉이 하나님의 아들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오기 위해서는 어머니가 있어야 됩니다. 어머니가 없으면 아들이 못 나옵니다. 그러니까 아들을 낳을 수 있는 터전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자 협조의 기반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아들을 낳더라도 그냥 그대로 낳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복귀의 공식을 통해서 낳아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말을 알지요? 다말이 누구의 품에 들어가서 애기를 낳았어요? 「시아버지입니다」 시아버지도 아버지죠?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 해와, 하나님과 마리아는 무슨 관계입니까? 부녀관계지요? 유다와 다말과는 무슨 관계입니까? 부녀관계입니다. 그래 부녀지간인데 세상에 그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자기 시아버지와 관계를 가져서 애기를 낳는 법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그랬을까요? 이것은 어디에 가서도 안 풀립니다. 아무리 머리를 싸매고 일생 동안 역사책을 연구해도 안 풀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윗왕에게는 우리아라는 신하가 있었지요? 그 우리아의 아내는 누구였나요? 밧세바였습니다. 그런데 우리아가 전쟁에 나간 사이에 다윗왕은 밧세바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왕은 밧세바를 빼앗기 위해서 우리아를 어떻게 했어요? 죽였지요? 죽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안 죽여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로 배은망덕입니다. 사랑의 원수를 죽이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의 후손이 6백년 동안 벌을 받은 것입니다.
이런 원칙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그 원수는 무슨 원수냐? 사랑의 원수입니다. 알겠어요? 원수 중의 원수가 무슨 원수예요? 사랑의 원수입니다. 그러니 그 원수를 죽이면 되겠어요? 안 되는 겁니다. 만약 죽이면 천지가 모두 원수가 되기 때문에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2천년 전 로마 제국을 보게 되면 그때는 전부 다 원수의 이념을 가진 사람들뿐이었습니다. 그 원수는 사랑의 원수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그 아들딸이 태어날 수 있는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니 장래에는 그 원수를 통해 내 아들딸이 태어날 수도 있다는 거예요. 그렇지요? 이런 원칙이 있기 때문에 기독교 사상에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역설적인 논법이 세워진 것입니다. 그것은 원리를 알면 다 풀리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 원리를 통일교회 문선생이 지어낸 것입니까? 내가 지어낸 것이냐는 말입니다. 선생님이 원리를 지어낼 수 있겠어요?
다윗이 우리아를 죽이고 밧세바를 취했기 때문에 솔로몬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원칙적으로 보게 되면 음란입니다.
아들을 낳으려면 어머니가 있어야 됩니다. 어머니가 필요하기 때문에 모자 협조가 있어야 됩니다. 모녀 협조는 아닙니다. 모자 협조는 무엇을 하자는 겁니까? 아들을 낳자는 것입니다. 창조원칙에 따라 아들을 먼저 세우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귀역사는 무슨 역사라고요? 재창조역사지요? 「예」 재창조 역사이기 때문에 누구를 먼저 창조해야 된다고 했습니까? 먼저 아들을 창조해야 된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누가 필요해요? 「어머니가 필요합니다」 엄마입니다. (웃음) 한국말을 보면 엄마라는 말이 더 실감납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가 없으면 어머니가 먼저 복귀되어야 합니다. 원리가 그렇다는 거예요. 그러므로 아들딸 가진 여자들은 어머니 노릇을 잘해야 합니다. 못 하면 큰일납니다.
여자가 아들을 낳으면 자연적으로 사탄의 혈통을 받습니다. 사탄의 혈통을 이어받았으면 누구의 아들입니까? 사탄의 혈통을 통해서 나왔기 때문에 사탄이 내 자식이라고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혈통을 전환시켜야 되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혈통적으로 사탄과 관계가 없다 할 수 있도록 전환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무슨 일이 벌어져야 합니다.
사람은 어머니 뱃속을 통하여 세상에 태어납니다. 태어날 때는 혼자 태어나는 사람도 있고, 쌍동이로 태어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쌍동이로 태어난 사람이나 혼자 태어난 사람이나 할 것 없이 전부 혈통을 갈라놓았다는 조건을 세워야 됩니다. 그러려면 개인들끼리도 싸워 가지고 갈라놓는 일이 벌어지고 쌍동이끼리도 갈라놓는 일이 벌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아담 가정을 보면 아담 가정에는 가인과 아벨이 있습니다. 이들은 형제입니다. 그들 중에 누가 형이냐 하면 가인이 형입니다. 그런데 사랑을 중심삼고 보면 사랑은 한 원리이지 두 원리가 아닙니다. 사랑에 두 원리가 있어요? 원리강론에는 무엇이라고 되어 있어요? 비원리적인 사랑이라고 되어 있지요? 타락은 비원리적인 사랑의 입장에 선 것입니다. 그렇지요?이렇게 하다가는 원리강의를 해야 되겠구만.(웃음) 사랑을 중심삼아서 하나가 되어야지 어떻게 둘이 될 수 있어요? 아무개씨 아들이 백명이라고 한다면 그 아들들이 한 형제이지 두 형제가 될 수 있어요? 그런데 비원리적인 사랑을 가지게 되면 그 아들들은 누구의 차지입니까? 사탄의 차지입니다. 그렇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아담 가정에서 가인과 아벨을 각각 누구 편에 세웠다고 했습니까? 가인은 사탄편에 세웠고 아벨은 하나님편에 세웠다고 했습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입장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래 가지고 되겠어요? 이 위치가 맞아요? 안 맞으니 순서가 거꾸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원래 사랑의 열매를 하나님이 먼저 가져야 되겠어요, 천사장이 먼저 가져야 되겠어요? 하나님이 먼저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도 하나님이 먼저 했다는 입장에 서야 됩니다.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을 복귀해 나오는 과정에 있어서 사랑받을 수 있는 입장에 세운 사람이 아벨입니다. 복귀역사노정에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관계를 맺어 기고 부름 받은 사람들은 장자가 아니고 차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보면 맏아들을 죽였던 것입니다. 나도 맏아들들을 앞으로 7년 동안 고생을 시킬 것입니다. 여기에 맏아들은 손들어 보십시오. 여러분은 준비하고 있으라고요. 여러분은 선생님이 그렇게 하더라도 고맙다고 해야 됩니다. 그래서 애급에서도 맏아들을 죽였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차자는 하늘편이고 장자는 사탄편입니다. 그럼 이 사탄편을 어떻게 해야 되느냐? 사탄의 피를 없애야 됩니다. 사탄의 혈통을 끊어버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가인이라고 해서 전부 다 죽이면 되겠어요? 안 되겠지요?「예」 그러니까 하나님은 접붙이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접을 붙여 하나님의 모든 생각과 생활관을 완성한 입장에 서게 하기 위하여, 즉 하나님의 사상을 그냥 그대로 접붙여 주기 위해 사람을 보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메시아 사상입니다.
2천년 전에 오셨던 예수님은 그 사상을 지닌 왕자로 오셨던 분입니다. 예수님은 오셔 가지고 사탄세계의 나라가 된 이스라엘을 하늘 세계의 국가로 만들어야 되고, 그 나라의 백성을 선민으로 만들어야 했습니다.
원리에 있듯이 가인을 찾지 못하면 아벨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요? 반드시 가인이 있어야 아벨이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가인 가정이 있어야 아벨 가정이 나올 수 있고, 가인 국가가 있어야 아벨 국가가 나올 수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볼 때에 사탄은 수많은 사탄편 국가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아벨적인 개인은 아벨적인 국가를 만들어야 됩니다. 국가가 한계선입니다. 그렇지요? 아벨을 중심삼고 아벨 국가권을 만들려니 이스라엘이라는 칭호를 얻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승리했다는 뜻인데 누구에게 승리했다는 것이냐면 사탄한테 승리했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중심삼고, 핏줄을 중심삼고 승리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국가는 그렇게 되었어야 했습니다.
여러분은 유다가 누구입니까? 야곱의 네째 아들입니다. 야곱이 몇 대만에 승리했느냐면 3대만에 승리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의 조상인 예수님이 왜 유다 지파여야 합니까? 유다는 야곱의 네째 아들입니다. 그를 평면적으로 보면 야곱의 마지막 아들입니다. 춘하추동 사계절을 완결지을 수 있는 입장에 네째 번입니다. 사위기대의 원칙에 있어서 평면적으로 완결지을 수 있는 입장이 네째 번이라는 겁니다.
유다의 혈통이 어떻게 해서 이스라엘의 혈통으로 이어져 나왔느냐 하면, 혈통의 문제를 복귀적인 내용을 중심삼고 새롭게 전환점을 만들어 나왔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혈통으로 이어져 나왔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담 때부터 형제를 중심삼고 바꾸려고 했습니다. 동생이 형이 되고, 형이 동생이 되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니 누구의 사랑이 먼저 결실되어야 합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먼저 결실되어야 하는데 순서가 거꾸로 되었으니 순서를 바로 잡아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동생이 형의 자리로 올라가야 되고 형이 동생의 자리로 내려가야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할 수 있어요? 그렇게 할 수 없었으니 싸움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 싸움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참것이 나오기 전에 거짓것이 먼저 나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중심한 하나의 사상적인 세계가 올 것을 미리 알고 사탄이 먼저 공산당을 등장시킨 것입니다. 또, 사탄편인 이북에서는 김일성을 아버지라고 합니다. 그것은 참아버지가 나오기 전에 거짓 아버지가 먼저 나오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갈라진 나라에서는 반드시 세계적인 역사가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 판문점이 세계에서 한 곳입니까, 두 곳입니까? 「한 곳입니다」 그곳에서 하나님편과 사탄편이 서로 대치하면서, '이것은 내편이고 그것은 네편이다' 이런 놀음을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한국은 세계적인 국가가 됩니다. 전후(戰後) 21년 동안 경제부흥을 해서 자립할 수 있게 된 겁니다. 그것은 배후에 이런 내용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입니다. 공화당과 정부가 잘해서 이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공화당은 부패했습니다.
앞으로 아시아 태평양 지역 일대를 총괄하는 기수가 나와야 됩니다. 그 기수가 누가 될는지 모르지만 기수가 나오려니, 진짜가 나오기도 전에 가짜가 먼저 나오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이런 것을 전부다 얘기하자면 한정이 없습니다. 지금 세계가 그냥 주먹구구식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전부 다 원리원칙에 따라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통일교회의 원리만 알면 만물박사가 됩니다. 대학교의 무슨 학박사들은 문제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것을 알아요? 모른다는 겁니다. 근본된 내용을 알아야지 형편없는 결과만 알고 있으니까 나가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순서가 거꾸로 되었기 때문에 바로잡아야 되는 것입니다. 순서를 바로 잡아야 되겠으니 이런 일을 한다는 겁니다. 순서를 바로잡는 일은 야곱 때에도 벌어졌습니다.에서가 야곱을 죽이려고 기다리고 있을 때 야곱이 제물을 모두 에서에게 주었던 것입니다. 그래서에서는 결국 야곱한테 굴복했습니다. 만약 그러지 않고 야곱이에서한테 굴복했으면 문제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아담 가정에서는 가인은 아벨이 자기에게 굴복하지 않는다고 때려죽였습니다. 그렇지요?
그리고 노아 시대에도 형제가 하나 안 되었던 것이 아브라함 시대에 와서야 에서가 야곱에게 굴복함으로써 하나가 된 것입니다. 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싸움을 했습니다. 야곱과에서는 쌍동인데 동생 야곱이 형에서에게 팥죽으로 장자의 자리를 바꿔치기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결국 형에서가 동생인 야곱한테 굴복했습니다.굴복함으로 말미암아 장자의 자리가 바뀐 것입니다. 나이 40이 되어 가지고 굴복을 시켰습니다.
그런데 본래 바꿔치기 놀음은 어디서부터 해야 되느냐? 복중에서부터 해야 됩니다. 핏줄이 복중에서부터 시작됐으니 복중에서 바꿔치기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그래서 다말의 아들 베레스와 세라를 중심삼고 복중복귀가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세라는 형이고 베레스는 동생입니다. 복중에서 형의 손이 먼저 나오는데 동생이 그 형을 밀치고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베레스란 말은 '밀치고 나왔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형 세라의 손이 먼저 나올 때 그 손에 홍사를 맨 것은 앞으로 빨갱이의 공산당이 나올 것을 보여 준 것입니다.(웃음) 이렇게 먼저 나오는 형을 동생이 밀치고 나왔습니다. 서로 먼저 나오려고 복중에서 형제끼리 싸운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리브가에게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창 25:23)"고 하신 것입니다. 두 나라로 나뉜다는 겁니다. 한 나라는 하늘 나라이고, 또 한 나라는 사탄 나라인 것입니다. 여기에서부터 싸워 가지고 혈통복귀를 하자니 3대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복중에서 싸워 뒤집어 가지고 복중에서부터 혈통을 계승했다는 기준을 세워야 되는 것입니다. 야곱이 3대만에 외적으로 승리했지만, 내적인 승리의 기반은 다말의 복중에서 태어난 베레스로부터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복귀원칙입니다.
이러한 원칙을 세워서 누구를 먼저 찾아야 되느냐 하면 아들입니다. 사랑받아야 할 아들을 먼저 찾아야 하기 때문에 거꾸로 복중에서부터 찾는 놀음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천륜의 도리입니다. 베레스와 세라는 이러한 승리의 실적을 역사적으로 보여 준 것입니다. 그리고 복중에서 동생이 승리함으로써 혈통이 복귀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싸움에서 승리하기 전에는 사탄의 혈통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요? 그렇지만 복중에서부터 싸움을 해 가지고 승리한 기준, 즉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한 전통을 받아 가지고 태어난 아기에 대해서는 사탄이 참소할 조건이 없습니다. 알겠어요? 이와 같은 입장에 선 분이 예수님입니다.
요셉은 천사장의 입장이고 예수님은 아버지의 입장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복중에서 태어났습니다. 마리아는 어떤 입장이냐 하면 다말과 같은 입장입니다. 그때의 다말의 행동을 보게 되면, 그게 말이나 될 일입니까? 창녀의 모습을 해 가지고 시아버지를 꼬인 것입니다. 창녀의 모습을 해 가지고 길가에 있다가 시아버지를 유혹해서, 관계를 가져 가지고 아기를 낳았습니다. 그것은 왜 그랬느냐?
다말이라는 여인은 유다의 아들에게 시집을 갔는데, 그 가정은 유다 지파로서 하나님이 혈통적으로 축복해 준 가정입니다. 그러기에 다말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으로부터 축복받은 혈통을 남긴다는 보다 중대한 입장에 서야만 했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사탄의 후손으로서 혈통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축복받은 혈통을 남기겠다는 뜻에서 볼 때, 자기 생명이 희생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체면과 위신과 생사 문제까지도 전부 다 초월할 정도로 하나님의 혈통을 존중시했습니다. 이것이 귀한 것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혈통을 계승할 수 있는 어머니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마리아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마리아가 처녀의 몸으로 있을 때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나서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눅 1:31)"라고 했을 때 마리아는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이까(눅1:34)"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천사가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눅 1:37)"고 하니 마리아는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 1:38)"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에서의 계집종이란 말은 죽든지 살든지 하나님의 뜻에 절대 복종한다는 말입니다. 마리아는 반드시 메시아가 올 것을 믿었던 사람입니다. 밤이나 낮이나 '그런 주님이 어떤 여성을 통해서 태어나겠나?' 생각하면서 소망에 가득찬 인연을 추구하던 여성입니다. 그러한 마리아는 '하나님이 나와 같은 이런 보잘것없는 여성을 찾아와 가지고 말씀하셨는데 내 어찌 모시지 않겠는가' 하고 생명을 내걸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처녀가 잉태하면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렇지요?「예」 처녀가 간음하면 돌로 쳐서 죽이는 시대였습니다. 그런 시대에 자기 가문의 체통, 자기 체면, 자기의 생명을 다 초월하여 처녀의 몸으로서 임신한다는 것이 될 일입니까? 변명도 할 수 없이 죽을 운명이었습니다. 하지만 마리아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위하는 마음, 메시아가 올 것을 추구했던 마음이 누구보다도 간절했습니다. 다말과 마찬가지로 숙명적으로 시련이 일치됐다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그렇기 때문에 그런 순수한 마리아의 몸을 통해 역사적인 내용을 인계받은 예수님이 잉태되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다말의 복중에서 형제가 싸워 가지고 장자를 복귀한 승리적 기반 위에서 전통적 인연을 계승한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하여 낳았기 때문에 거기에는 사탄의 참소할 수 있는 조건이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탄이 참소할 수 없는 입장인, 타락하지 않은 아담의 입장에서 예수님이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예」 예수님은 이런 분입니다. 이것은 통일교회 문선생이 지어낸 말이 아닙니다. 사실입니다. 이것이 이치에 맞지요?「예」
그러면 모든 사람이 왜 기독교를 믿지 않으면 안 되느냐? 혈통이 그릇된 인간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는 그 혈통을 바꾸지 못합니다. 혈통을 바꾸지 못하면 천국에도 못 들어갑니다. 왜 그러냐 하면 사탄의 인연이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잘났다고 꺼드럭거리는 세계적인 대통령이라고 하더라도 혈통이 바뀌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는 것입니다. 무슨 종교의 도주라 하더라도 예수님을 안 믿으면 천국에 못 간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고 한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복중에서부터 사탄의 참소를 받지 않고 태어났지만 여러분은 복중에서부터 사탄의 참소를 받고 태어났기에 사탄의 참소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사탄권내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탄권내에서 벗어나기 위해 구약시대에는 장자를 잡아 죽였습니다. 그런데 신약시대는 은사의 시대이므로 장자를 죽이는 것 대신 예수님에게 접붙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접붙이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잘라야 됩니다. 감나무를 접붙이려면 감나무 밑둥을 잘라야지요? 그럼 사람을 접붙이려면 어디를 잘라야 되나요? 목을 잘라야 됩니다. 알겠어요? 목을 자르면 눈도 죽고 코도 죽고 다 죽습니다. 이 말은 다 부정하라는 말입니다. 부정을 거치지 않고는 긍정의 축복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종교는 부정하라고 가르칩니다. 현실을 부정하라는 것입니다.
통일교회에서는 더 합니다. 통일교회에서는 무엇까지 부정하라고 하느냐 하면 아버지 어머니까지 부정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통일교회에 다니는 아들딸의 부모들이 통일교회 문선생은 자기만 알라고 가르친다고 합니다. 내가 언제 나만 알라고 그랬어요? 가만히 있어도 여러분 마음이 스스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마 영계의 영인들이 여러분을 들이쳐서 기합을 줄 것입니다. 그렇지요? 세상에서 이렇게 하는 곳은 지금 통일교회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통일교회식대로 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다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게 접붙이려면 목을 잘라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보는 것도 예수님같이 보고 생각하는 것도 예수님같이 생각하고 사는 것도 예수님같이 살아야 됩니다. 예수님의 사상이 무엇이냐? 예수님은 부모이니까 세계를 위해서 살고, 세계의 아들딸을 전부다 자기 아들딸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래야 됩니다. 그러니까 '부모의 심정을 지니고 종의 몸을 쓰고, 땀은 땅을 위하여, 눈물은 인류를 위하여, 피는 하늘을 위하여 뿌리자'라는 표제가 통일교회에 걸려 있는 것입니다. 인류를 위해서 이런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을 아무나 할 수 있어요?
어머니가 없으면 아들이 태어나지 못하기에 하나님은 이러한 어머니를 찾아 나오신 것입니다. 알겠지요? 그러한 가운데에 마리아를 통해 예수님은 하늘 왕자로 태어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종의 몸뚱이를 빌려 가지고 태어나게 한 것입니다. 알겠습니까? 아버지가 종과 관계를 맺어 가지고 아들을 태어나게 했다면 종의 몸뚱이에서 태어난 그 아들은 누구의 아들입니까? 종의 아들입니까, 아버지의 아들입니까?「아버지의 아들입니다」 마찬가지로 마리아는 종의 입장입니다. 그러니 주인은 시집가지 않은 종을 마음대로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첩을 얻는 것이 죄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얘기를 한다고 해서 통일교회 문선생은 터무니없는 말을 한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구약시대에는 주인의 마음대로 종들을 시집보내고 안 보내고 했었습니다. 마리아는 하나님 앞에 종과 마찬가지 입장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종의 몸을 빌려서 태어난 아들이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태어난 아들의 상대가 누구냐? 아내가 될 여자가 누구냐는 것입니다. 꼭 있어야 되는데 어디에서 찾느냐는 거예요. 요셉 가정과 사가랴 가정은 상대적인 가정으로서, 아벨 가정과 가인 가정의 입장입니다. 만일에 사가랴 가정의 세례 요한에게 여동생이 있어서 예수님이 세례 요한을 처남으로 삼았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해 보십시오. 가정적인 입장에서 이런 일을 누구보다도 먼저 했어야 합니다. 알겠어요? 세례 요한은 외적인 아담형입니다. 천사장의 입장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례 요한만 예수님과 하나되었으면 예수님이 죽긴 왜 죽어요? 배신을 당했으면 당했지 죽긴 왜 죽어요? 죽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도 기독교에서는 예수님이 죽으러 왔다고 믿고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 기가 막히다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기독교인들이 천국에 갈 수 있겠어요? 천국에 못 간다는 겁니다. 이념적으로 딱 걸리게 되어 있는데 어떻게 가겠어요?
통일교회 교인들에게 이런 내용을 너무 자세하게 가르쳐 주어야 하기 때문에 나는 기분 나쁠 때가 많습니다. 다이아몬드와 같이 귀한 내용인데도 가만히 보면 그 가치를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보이는 데도 모르고 있다는 거예요. 이유만 많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믿던 기독교인들에게 내가 말을 하면 그 내용을 대번에 이해하는데 말입니다. 통일교인들 중에 기독교를 믿던 사람들이 얼마나 됩니까? 기독교를 믿지 않던 이방 사람들을 끌어모아 가지고 암만 얘기해 주니 '그게 그런가?'하고 앉아 있는 것입니다. 귀가 꽉 막혀 가지고 눈만 껌벅껌벅하니 기가 막히다는 거예요. 그런 사람들에게 내가 이런 내용을 다 가르쳐 주려니 뼛골이 녹아납니다. 여러분도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선생님을 얼마나 속을 썩히고 얼마나 고생시켰는지….
창조원칙을 보면 아담을 먼저 지으시고, 그 아담을 중심삼고 해와를 지었습니다. 그러기에 마리아는 아들과 협조해 가지고 아들의 신부를 찾아야 되는 것이었습니다. 마리아는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는 물론이요, 마리아도 협조해 가지고 신부를 찾아야 된다는 겁니다.
이런 것을 볼 때에 마리아가 책임을 못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느날 마리아는 갈릴리 가나의 잔칫집에서 예수님에게 포도주가 다 떨어졌다고 하자 예수님은 '여인이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했습니다. 그 말은 남이 장가가는 데 무슨 상관이냐는 거예요. 즉, 예수님이 장가갈 때가 되었는데도 왜 마리아는 모르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결국 마리아가 책임을 못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장가를 갔으면 예수님의 아들딸은 하나님의 손자이자 손녀가 됩니다. 하나님의 존속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거룩한 하나님이라고 하는데 그야말로 미친 놈들입니다. 그들이야말로 사교 중의 사교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세인으로 와 가지고 장가간다는데 뭐가 어째요? 그것에 대해 '오, 우리 거룩한 하나님이 장가를 가다니' 하며 실망한다는 거예요. 왜? 장가를 가면 거룩하지 않아요? 남자나 여자나 제일 거룩한 것이 장가가고 시집가는 것입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장가를 가서 아들딸을 낳았다면 교황은 누가 되겠어요? 베드로와 같은 사람이 되어야 되겠어요?(웃음) 예수님의 직계 아들딸들이 로마의 교황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계의 왕은 자연히 되었을 겁니다.
이렇게 땅 위에 기반을 갖추려고 했던 예수님이 죽었기 때문에 이스라엘권을 잃어버린 기독교는 영적 이스라엘권만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에게는 기반을 갖출 수 있는 땅덩이가 없습니다. 교회가 예수님이 차지할 수 있는 왕국입니까? 그러니 쫓김을 당하고 나온 것입니다.
통일교회가 이런 비밀을 밝혀 가지고 나오니까 종과 같은 기독교인들이 무서워서 지금 우리를 반대하는 것입니다. 반대하겠으면 해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만히 있어도 됩니다. 마치 공산당이 조직을 만들어 부르조아를 타도하자고 나서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두고 보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밀려나나 내가 밀려나나 두고 보라는 것입니다. 누가 밀려나게 될 것 같아요? 그 사람들이 밀려나겠어요, 통일교회 문선생이 밀려나겠어요? 그 사람들이 밀려나게 되어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문제가 아닙니다. 단 한 사람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통해 가지고 해와를 지었습니다. 그렇지요? 「예」 구원섭리 역사는 재창조역사이기 때문에 원리대로 해야 됩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예수님의 신부를 맞이해 주기 위해서 준비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책임을 못 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할 수 없이 집을 떠난 것입니다. 집을 떠나서 거지떼 같은 사람들을 모은 것이 열두 제자입니다. 집안에서 예수님의 신부를 찾아 주었더라면 그 일가 사람들이 열두 제자가 되게 됩니다. 그렇지요? 예수님은 가만히 앉아 가지고 '이것은 네가 하고 저것은 네가 해라' 이렇게 다 맡겨 주면 되는 것입니다. 시시하게 나돌아다니면서 그렇게 힘들게 제자를 구하는 일은 안 한다는 거예요. 당신의 유대인들은 대제사장 사가랴 가문의 세례 요한의 말이라면 전부 다 따르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꺼번에 다 끌려 온다는 거예요.
그렇게 되었으면 예수님은 유대교인과 교법사 제사장들과 하나되어 그들에게 사탄편 국가인 로마 제국에 대해 반기를 들라고 했을 것입니다. 세계적인 아벨 국가인 소(小) 이스라엘을 중심삼고 세계적인 대(大) 사탄 국가인 로마를 굴복시키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때의 로마는 사통팔달한 세계 문화의 중심지이기 때문에 로마만 굴복시킨다면 기독교와 이스라엘을 중심삼고 그때에 이미 뜻은 다 이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죽은 예수님이 4백년만에 로마를 정복했는데, 만약 예수님이 살아 있었다면 40년 동안에 로마를 정복하지 못했겠느냐는 것입니다. 아무도 예수님이 80살 되기 전에 로마를 다 요리했을 거예요. 요리만 해요? 구워 가지고 간장 찍고 소금 찍어서 나누어 먹었을 것입니다. (웃음)
가인이 아벨을 지배한 것을 복귀원칙에 의해 반대로 복귀해야 하는 데, 큰나라에 있어서는 작은 동생 나라와 같은 입장에 있는 것이 교회입니다.야곱 가정을 놓고 볼 때는 요셉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요셉은 열 한째 아들입니다. 마리아의 남편인 요셉이 아니라 애급에 팔려갔던 야곱의 열한째 아들인 요셉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요셉이 야곱의 열 한째 아들인데, 이 11수는 10수를 중심한 재출발수입니다. 알겠어요? 재출발수이기 때문에 요셉이 애급에 가서 총리대신이 된 것입니다. 요셉은 나라 없는 외로운 이방인의 자식과 같은 자리에서 이스라엘의 축복을 거두어들인 중심존재가 됐습니다.
지금 통일교회가 요셉과 마찬가지의 입장입니다. 그때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죽이려고 온갖 계락을 다 짜냈던 것처럼 통일교회도 시련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이방과 같은 한국에 와 가지고 자꾸 커 올라가는 것입니다.
이제는 통일교회 교인들이 전도를 할 때 문 아무개 하면 자연히 다 알게 됩니다. 통일교회 그 양반 하게 되면 모르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판도가 대단히 커졌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이렇게 해가지고 그 판도가 대한민국보다 커지게 된다면 대한민국도 따라오지 별수 있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통일교회를 믿든가, 그러지 않으면 죽든가 도망가든가 해야 합니다.(웃음) 웃을 일이 아닙니다. 이런 배포를 갖고 있기 때문에 천하가 다 반대해도 가만히 있는 것입니다.
동네 친구에게 한 대 맞았다고 해서 대들었다가는 둘 다 망한다는 겁니다. 참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생님도 아무것도 모르는 그들을 붙들고 싸움을 하지 않는 거예요. 이것은 잘나서 그런 거예요, 못나서 그런 거예요? 「잘나서 그렇습니다」 아니예요. 어이가 없어서 그러는 거에요, 어이가 없어서.(웃음) 상대가 되어야 싸움을 한번 하지요. 싸우더라도 싸울 만해야 싸울 것 아니예요? 어디 한번 반대해 보라는 거예요. 10년이고, 20년이고 어디 반대할 테면 반대해 보라는 겁니다. 나를 이기겠나 해보라는 겁니다. 그렇게 하다가는 교인들은 전부 다 도망가고 자식들은 다 거지가 되어 깡통 차고 앉을 테니까. (웃음)
통일교회 문선생은 도망다니면서도 이렇게 세계적인 기반을 닦아 나오고 있습니다. 주객이 전도되면 보따리도 바뀌어진다는 말이 있지요? 그렇다 그것이 자랑할 일이냐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들을 전부 다 때려 잡아 벌받기를 바라는 것도 아닙니다. 요셉이 자기 열 한 형제를 살려 준 것과 같이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우리를 반대하던 그들이 앞으로 굶어 죽게 될 지경이면 우리에게 얻어 먹으러 올 것입니다. 옛날에 통일교회를 반대하던 목사들이 와서 통일교회의 원리는 안 들었지만 조금 도와주시오 하며 나타날 것입니다. 그때에 그들은 누구를 데리고 오느냐 하면, 요셉의 형제들이 자기 부모를 모시고 요셉에게 온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도 하나님을 모시고 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애급에 흉년이 들어 7년 대환난에 굶어 죽게 되어 가족이 요셉에게 찾아온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먹을 것을 찾아서 통일교회에 올 것입니다.
그때 요셉이 얼마나 분했겠어요? 자기를 죽이려 했던 열 한 형제들이 자기에게 먹을 것을 얻으러 왔으니…. 그러나 요셉은 그들을 전부 다 용서해 주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그런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요셉이 형제들에게 그렇게 한 것은 누구를 위해 그랬느냐? 부모 때문이었습니다. 요셉이 없을 때 사랑하는 아버지 어머니를 모시며 나온 형님들이 아니냐 하는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자기 혼자만 생각했더라면 용서할 수 없었겟지만 부모의 심정으로 사랑해 주어야 되겠기 때문에 형님들을 용서해 줬든 것입니다. 알겠어요?「예」
그러면 기성교회는 통일교회의 원수입니까, 원수가 아닙니까? 내가 원수라고 하지 않아도 여러분들이 잘 알 것입니다. 그렇지요? 원수는 원수인데 형님입니다. 그러니 열 한째 동행인 요셉의 입장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끝에 가서 누가 중심이 되었어요? 지금까지 이단으로 몰리고 배척받는 통일교회가 초교파 운동으로 교회 일치운동을 펴 나옴으로써 그래도 기독교 이념을 계승해 나오고 있습니다.
내가 기성교회 망하라고 기도합니까? 그러나 그들은 통일교회 문선생 죽으라고 기도합니다. 빨리 죽으라고 기도하지만 그런다고 내가 죽느냐는 거예요? 오히려 자기들이 걸려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런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상대를 결정했더라도 죽었겠어요? 이 가정을 중심삼고 보면 울타리 안의 종족은 사촌간입니다. 이렇게 되었으면 예수님의 제자는 누가 되었겠어요? 세례 요한은 열두 제자 중에서 수제자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형제들이 전부 다 열두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70문도는 친척이 되는 것이고 120문도는 요셉 일가와 그 종족이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종족이 4천년을 걸쳐 준비되고 선택된 혈족이 아닙니까? 그러니 예수님이 정상적인 가정을 이루었다면 그렇게 되었을 겁니다.
그렇게만 되었더라면 다른 곳에 가서 제자들을 구하려고 했겠어요? 그렇잖아요? 거기에서 대번에 그렇게 되었더라면 요셉은 유대 나라, 유대교단의 선지자들을 묶어 나올 수 있었을 것이고, 세례 요한도 세례받으러 온 수많은 유태인들을 예수님에게로 인도하는 일이 벌어졌을 것입니다. 이랬으면 오죽이나 유대교가 잘 돌아갔겠어요? 유대교가 이렇게 돌아가게 되면 교법사나 제사장이 예수님 앞으로 돌아갔을 것이고, 그렇게 되었다면 그때에 빌라도를 쫓아버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는 로마가 부패해 들어가는 때였습니다. 고개를 넘어서 골짜기로 들어가는 때이기 때문에 쫓아버릴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유대 나라를 통일해 가지고 로마로 가서 새로운 이념을 중심삼고 로마를 찾으려 했으면 문제없이 찾았을 것입니다. 이런 형태가 벌어졌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한국을 보게 될 때, 한국은 지금까지 민주세계의 나라 가운데 제일 불쌍한 나라였습니다. 한국 동란 때에는 세계의 많은 나라가 원조해 주었습니다. 만일 미국이 한국을 원조 안 해주면 미국은 망합니다. 한국에 원조하기를 싫어하면 망한다는 거예요.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이 왜 죽었는지 알아요? 한국에 대한 경제원조를 삭감할 계획을 세웠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아무도 모릅니다. 그때 한국을 원조 안 하게 되면 미국은 망하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리고 닉슨 대통령도 아시아에 대한 정책을 내 말대로 잘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큰일난다는 거예요. 어찌 되었나 생각해 보십시오. 민주당이 어떻게 됐어요? 한국이 아시아에서 제일 강력한 국가로서 일본까지도 우러러볼 수 있는 중심국가가 될 때까지 대책을 세워 주어야 되는데, 그러지 않고 여기에서 후퇴하는 날에는 망하는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안다는 거예요. 공식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틀림없습니다. 통일교회 문 선생님이 이런 일을 하면서 지금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통일교회가 망해야 되겠어요, 망하지 말아야 되겠어요? 통일교회를 지도하고 있는 문선생이 망하게 지도방법을 쓸 것 같아요, 흥하는 지도방법을 쓸 것 같아요? 어떤 방법으로 지도할 것 같아요? 흥하는 방법으로 지도합니다.
그러면 흥하게 하는 지도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국가와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대통령과 싸우는 것도 아닙니다. 민족과 싸우는 것인데, 민족의 나쁜 것과 싸우는 것입니다. 나쁜것과 싸우려니까 나쁜 얘기 나쁜 소문을 듣고, 나쁜 일을 당하며, 험난한 길을 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신 십자가를 지고 괴로운 길, 외로운 길을 가더라도 그것을 기쁨으로 소화시키고 소망으로 감싸 가지고 자기 허물을 가리고 나라의 허물, 세계의 허물을 덮어줄 줄 아는 아량이 없어 가지고는 안 됩니다. 이런 일을 하자는 거예요.
이것은 자기 자신을 버리고 자기 일족을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선생님의 일족은 뜻길 때문에 망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형제가 다 망했습니다. 내 일족을 망하게 해 가지고 반대받는 여러분들을 사랑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그것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통일가의 여러분이 부정했다가는 용서받지 못합니다. 자기 일족을 망하게 함으로써 난데없는 원수의 가족들을 사랑하고, 또 그들에게서 자기 일족을 희생시킨 대가를 찾고자 하는 것이 통일사상이요, 하나님 사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기의 아들딸, 자기와 제일 가까운 민족을 망하게 해 가지고, 원수의 나라와 원수의 민족을 사랑하기 위해서 바꿔치기 놀음을 해 오시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그렇게 바꿔치기를 함으로 말미암아 동생인 아벨이 형님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형님이 나중에 가서 강제 굴복이 아닌 자연 굴복을 하여 머리 숙이며 '천년 한을 저로 말미암아 푸시옵소서, 억울했던 한을 제가 탕감할 수 있도록 하시옵소서' 해야만 거기에서부터 자리를 잡고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전법을 쓰자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망하지 않는 전법과 전술이 이것입니다. 그런데도 통일교회가 망하겠어요? 망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는 맞으면서 발전합니다. 이상하지요?
이름난 선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어느 동네에 사기를 쳐서 돈을 버는 불한당 같은 부자가 이사와 가지고 선한 사람을 때리고 밟게 되면, 동네 사람들이 데모해서 이사와 가지고 선한 사람을 때리고 밟게 되면, 동네 사람들이 데모해서 그를 때려 죽인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그것을 조금 더 나아가 생각해 보면 기성교회가 통일교회를 반대하다가는 나라가 망하기 때문에 이제는 나라가 기성교회를 가만히 두지 않을 것입니다. 요즈음에 통일교회가 많이 올라갔지요? 이제는 경찰서 서장들을 비롯하여 여기저기에 통일교회편이 많이 있습니다. 오히려 기성교회의 장로 목사들의 비밀을 나한테 말해 주는 서장이나 형사들도 많습니다. 벌써 이런 자리까지 올라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기성교회들 함부로 큰소리치지 말라는 거예요.
이제는 내가 팔다리를 펴고 코를 골면서 낮잠을 잘 때가 더러 있습니다. 선생님은 지금까지 낮잠을 자 본 적이 없지만, 이제는 좀 쉬어야 되겠어요. 그렇지요? 선생님 대신 여러분이 다 맡아서 하면 이제는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하겠습니다」 하고 싶으면 한번 해 보십시오. 만약 여러분들이 못 하겠다면 일본 식구들을 데려다가 할 것입니다. 일본 사람이 못하면 미국 사람을 데려다가 할 것입니다. 그럴 준비가 다 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부르면 언제든지 오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여러분을 그러한 목적으로 이만큼 끌고 왔는데 넘어야 할 고개 앞에서 세 발걸음을 남기고 후퇴하겠어요? 전도기간 3년이 세 발걸음입니다. 세 걸음을 앞에 놓고 후퇴할래요? 어떻게 하겠어요? 대답해 보십시오. 후퇴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안 하겠습니다」 그래 가겠어요, 안가겠어요? 「가겠습니다」 이제는 여러분이 해야 합니다. 3년 기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런 때를 넘어가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기성교단이 부럽지 않습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모자협조를 해 나온 것은 아들을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마리아는 어떤 존재라고 했습니까? 「종입니다」 아들을 낳긴 했지만 종의 몸으로 낳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신부가 있어야 됩니다. 창조원칙에 따라 여자를 창조해야 됩니다. 예수님은 아담 입장이므로 잃어버린 해와를 찾아야 됩니다. 그래야 결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해와를 찾았어요? 못 찾았습니다. 찾다가 죽었으니 예수님은 다시 와야 됩니다. 다시 와서는 장가를 가야 됩니다. 그렇지요? 장가가려다 죽었으니 장가가려고 다시 오셔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장가간다는 사상이 기독교의 사상입니다.(웃음)
그렇기 때문에 재림주님이 오실 때에는 무슨 잔치를 한다고 했어요? 「혼인잔치요」 혼인잔치가 뭡니까? 혼인잔치는 시집 장가간다는 뜻입니다. 혼인잔치는 결혼 잔치입니다. 그렇지요? 「예」 이런 말을 한다고 이단이라고 야단입니다. 괜히 배가 아파서. (웃음)
혼인잔치, 즉 어린양잔치를 하려면 예수님을 중심삼은 신부가 있어야 됩니다. 신부를 찾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신부가 누구냐 하면 해와입니다. 타락하기 전 아담 앞에 있었던 그 해와입니다. 재림주님은 3차아담입니다. 예수님은 2차 아담이고, 앞으로 오시는 주님은 3차아담입니다. 그래서 3차 아담이 타락하기 전 아담처럼 와 가지고 타락하기전 해와를 찾아야 됩니다. 타락하지 않은 해와를 찾아서 어린양잔치를 해야 됩니다. 결혼함으로써 인류의 부모가 되는 것입니다.
인류의 부모가 되어야 할 아담과 해와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악한 부모가 됐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타락하기 전의 선한 부모를 가지게 되면 복귀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에게는 선한 부모가 있어야 합니다. 어린양잔치를 하는 것은 선한 부모로 등극하기 위해서입니다. 기독교사상은 간단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사상의 골자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구름을 타고 와요? 여기에도 그렇게 믿고 있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지요. 정신을 어디에 두고 그런 황당무계한 말을 믿었어요? 또 어떤 녀석은 예수님이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입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면 왜 기도할 때에 '아바 아버지'라고 기도했겠습니까? 이렇게 이론적으로 맞지 않는 것을 가지고 그래도 꺼드럭거리면서 이런 말하고 저런 말 하고 다닙니다.그런 사람은 앞으로 모조리 추방당할 겁니다. 내가 명령만 하게 되면 추방당합니다. 그래서 우리 사람들을 이만큼 만들어 놓았습니다. 통일교회를 믿는 사람이 그리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통일교회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부지기수입니다. 지금 모든 것이 이렇게 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북에서는 김일성에게 아버지라고 하지요? 그들이 말하는 아버지는 가짜 아버지입니다. 통일교회에서도 아버지라고 합니다. 딱 들어맞는다는 것입니다. 공산당도 세계를 자기들 식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민주세계도 세계를 자기들 식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그렇지요? 통일교회도 통일교회 식으로 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세계의 주인은 무엇으로 결정되느냐? 누가 세계를 더 사랑하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입니다. 누가 세계를 더 사랑하고 누가 더 세계를 아끼느냐에 따라 주인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세계를 사랑해야 되겠어요, 사랑 안 해야 되겠어요? 「사랑해야 되겠습니다」 또 세계를 아껴야 되겠어요, 안 아껴야 되겠어요? 「아껴야 되겠습니다」 그럼 대한민국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대한민국을 누구보다도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통일교인들이 누구보다도 대한민국을 아끼고 사랑하게 되면 주인이 되지 않으려 해도 이 민족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그렇게 해야 평화의 시대가 오는 것입니다. 강제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하거나, 돈을 써 가면서 얼렁뚱땅하려고 한다면 애착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에 소망을 두고 가다가는 망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지금까지의 역사는 모자협조의 역사였습니다. 그런데 해와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부모의 협조가 끊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마리아에게 예수님의 잉태 사실를 왜 직접 전하지 않고 천사를 시켰겠습니까? 그것은 천사가 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천사를 복귀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것입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상대 관계에 있으면서 마리아는 예수를 낳아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그 예수님은 후아담의 입장입니다. 그럼 마리아와 요셉이 같이 살아야 되겠어요, 안 살아야 되겠어요? 「안 살아야 됩니다」 예수님이 상대를 결정하면 결혼하게 되면 예수님이 주인이 되는 겁니다. 부모가 다는 거예요. 요셉과 마리아는 종과 마찬가지의 입장이기 때문에 예수의 말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부모가 종을 부릴 수 있어요, 없어요? 그런 후에 아버지 어머니로서 그들을 축복해 주면 그때에는 그들이 같이 살아야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 전에는 같이 살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천주교에서는 마리아를 무엇이라고 부릅니까? 성모라고 하지요? 그런데 이런 원칙을 놓고 본다면 마리아가 책임을 다했어요, 못 했어요? 책임 다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천국에 갔겠어요, 못 갔겠어요? 천주교 믿던 사람들 있으면 손들어 봐요. 천주교 믿던 사람들, 어때요? 이 원칙으로 볼 때에 마리아가 천국에 갈 수 있겠어요?
이제는 통일교회가 전부다 심판하는 것입니다. 통일교회의 원리, 진리가 심판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선생님이 꾸민 얘기가 아닙니다. 원리가 그렇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예수님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베드로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모세가 무엇을 잘못했고 마리아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고 있었다는 거예요. 모르고서는 크게 걸리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통일교회는 탄탄합니다.
서남동 교수는 통일교회를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신앙단체라고 하지만, 그게 아니라 우리는 하늘땅이 낳은 세계적인 교회입니다.(웃음) 또 선생님을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인물이라고 하는데 그것도 기분 나쁘다는 거에요. 한국사람이면 지금까지 한국에서 욕을 먹었을까요? 한국말을 하고 있지만 사람은 다릅니다.
지금도 한국의 교회가 선생님을 미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나에게 나라가 있어요, 친척이 있어요? 전부 다 선생님을 원수시했고 쫓아버리려고 만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대한민국에서 통일교회를 도와주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도와주고 싶어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안 도와주면 자기들이 망하겠으니까 할 수 없이 도와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이 얼마나 멋진 때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2천년 동안 모자 협조의 길을 찾아 나온 것은 예수님 한 분을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지요? 그러면 오늘날의 통일교회는 무엇을 협조하자는 것이냐? 여기에서 통일교회의 가치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모자 협조를 할 때 어머니는 종의 입장이었습니다. 종의 자리를 못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런 어머니의 협조를 받아서 되겠어요? 안 됩니다. 여기에 있어서 부모 협조를 이루려면 종의 기준을 넘어서 부모의 기준을 만들어야 되고 부부의 기준을 만들어야 됩니다. 알겠어요? 가정 기준을 만들기 위해서 그래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부모인데 해와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부모협조의 기준이 깨져 나갔어요, 안 깨져 나갔어요? 또한 부부협조의 기준이 깨져 나갔어요, 안 깨져 나갔어요? 그러면 부자협조의 기준은 깨져 나갔어요, 안 깨져 나갔어요? 다 깨져 나갔습니다. 그리하여 6천년 동안에 고작해서 모자협조 기준밖에 닦지 못했다는 거예요. 그러므로 통일교회는 해와가 사랑의 인연을 잘못 맺어 실수함으로 말미암아 부모·부부·자녀, 즉 직계의 협조 기준이 깨어져 버린 것을 몽땅 한꺼번에 복귀하자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그럼 복귀의 책임을 누가 다해야 되느냐? 남자가 해야 됩니다. 남자는 요셉과 마찬가지의 입장입니다. 그래서 마리아가 나와야 됩니다. 알겠어요? 여자가 마리아와 같은 입장에서 여러분을 복귀해 주어야 됩니다. 마리아와 같은 입장에서 여자로서의 책임을 해야 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여자들은 마리아의 입장이요, 마리아는 해와의 입장입니다. 그렇다면 해와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다 잃어버렸기 때문에 마리아 대신 되는 여자들이 해와를 대신해야 됩니다. 여기에서 남자들은 아담의 입장을 복귀해야 합니다. 이것이 장성기 완성급을 넘어서는 입장입니다. 그러나 완성기까지는 못 올라간 입장입니다. 알겠어요?
그런 입장에 있기 때문에 본연의 기준으로 돌아가려면 본연의 가정의 기틀을 마련해야 됩니다. 즉, 하나님의 사랑인 부모의 사랑과 부부의 사랑, 자녀의 사랑이 평면적으로 하나로 연결된 터전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이것을 위해 해와를 중심삼고 역사적 과정을 통해서 모자협조를 단계적으로 해 나왔습니다. 알겠어요? 이것들을 일시에 하나로 연결시키려니 여러분들이 축복받았던 입장에서 부모의 협조 과정을 다시 거쳐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자협조를 거쳐서 그 다음에 부부협조를 하라는 뜻에서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6천년에 걸쳐 나온 오늘날의 이 평면적 도상에서 부모협조, 부녀협조, 부자협조의 인연이 갖추어지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그리하여 모자협조, 부부협조의 인연을 일시에 탕감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해와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혼자서 그런 자리를 잃어버린 동기가 되었으니 혼자의 자리에서 그런 인연을 다시 찾아 맺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선생님과 여러분의 아내들과는 부녀의 관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영적이기 때문에 인간과 종적 기준은 세웠지만 횡적 기준은 세우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에서부터 종적인 자녀의 기준만을 중심삼고 나왔지 횡적인 자녀의 기준을 갖추고 나오지는 못했습니다. 알겠어요?
그러기에 종적인 역사를 횡적으로 탕감복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니 횡적 부모의 기준과 횡적 부부의 기준과 횡적 자녀의 기준을 결정지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새로운 조상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이것을 결정하기 위한 때입니다. 그러기에 지금 갓 축복받은 부인들을 동원시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다른 사람을 가담시키지 않습니다. 가담하겠다면 한 40일 후에나 가담시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12월 초하룻날을 중심삼고 이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여러분의 동원을 중심삼고 선생님도 갔어요, 안 갔어요? 동조했어요, 안 했어요? 「했습니다」 그러면 부모협조의 기준이 복귀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됩니다」 또 부부협조의 기준이 됩니까, 안 됩니까? 「됩니다」 여기에 여러분도 관심을 갖습니까, 안 갖습니까? 「갖습니다」 그 다음엔 모자 협조의 기준이 됩니까, 안 됩니까? 「됩니다」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평면적으로 소(小) 가정적인 기준을 결정하여야 넘어갈 수 있습니다. 이것은 불가피한 원리적인 견해입니다.
그러면 이와 같이 6천년에 걸친 모자협조의 종적인 행로를 통해 섭리해 나오신 하나님의 복귀섭리역사를 두고 볼 때에, 횡적인 기대, 즉 부모·부부·자녀의 인연을 몇년 동안에 일시에 복귀할 수 있는 시대적인 운세를 가진 우리 가정은 얼마나 복이 있는 가정입니까? 이것은 그 누가 정성을 들여서 되는 것도 아니요, 그 어떤 사람이 돈을 주어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러한 시대적 혜택권내에서 여러분의 가정이 천운이 함께하는 거룩한 세계사적인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이런 긍지를 지니고 새로운 세계를 창건하는 데 있어서 주체적인 조상이 될 수 있는 여러분은 이 거룩한 은사 앞에 무엇으로 보답할 것입니까?
그러니 여러분은 기도를 하더라도 가정적인 기도를 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했던 것처럼 '아바 아버지여, 우리 가정의 뜻대로 마옵시고 당신 가정의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해야 됩니다. 알겠어요? 그렇게 하여 가정적인 십자가를 넘어서야만 타락한 가정으로 말미암아 벌어졌던 한의 고개를 넘어서서 해방권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이래야만 여기에서 영원한 천국의 문이 열려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리의 결론입니다. 알겠어요? 「예」 단단히 알아야 합니다.
너, 색시 나갔어? 「예, 나갔습니다」 안 나갔다면 건달패들이야. 틀림없이 12월 초하룻날 나갔어? 「예, 나갔습니다」 잘 나갔어, 못 나갔어? 「잘 나갔습니다」 만일에 그 날짜에 안 나갔다면 앞으로 곤란할 것입니다. 임신하여 7개월 넘은 사람은 조금 늦게 나가도 되지만 그 외 사람은 그 기간에 안 나가면 벌받을 것입니다. 앞으로 기막힌 일이 벌어질 거예요.
이런 기준을 세웠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우리 통일교회에 족보가 생겨나게 됩니다. 알겠어요? 「예」 족보를 편성하는 거예요. 족보를 편성하려면 나라가 있어야 됩니다. 이 소망의 나라가 우리 눈앞에 다가오고 있으니 우주적인 족보를 편성해야 됩니다. 이 3년 기간을 넘기고 나면 무슨 일이든 벌어지겠지요. 김일성이 망하든가, 우리 북녘의 김일성을 쫓아내든가 무슨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그렇지요? 해와로 말미암아 저끄러졌던 심정적 인연을 복귀해야 하는 일이 평면적인 도상에 벌어지기 때문에 여러분이 부모를 협조함으로써 춤을 출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지금 서로 떨어져서 산다고 외롭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이 이 민족과 더불어 기쁜 날을 맞기 위해서 가는 것이요, 이 민족을 품고, 민족을 앞에 세워서 전체가 춤을 출 수 있는 그날을 위해 간다고 생각하십시오. 그리하여 이 거룩한 한 때를 맞아 억천만세 역사과정에 있었던 그 누구보다도 놀라운 혜택을 받는 3년 기간으로서 의의있게 지내 주기를 선생님은 당부하는 거예요. 그리하여 하늘이 분부한 사명과 책임을 다한 승리의 자리에 참여하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아버님, 통일가의 가야 할 운명길을 당신 앞에 맡기옵니다. 오늘까지 이와 같은 인연을 맺기 위해서 수난의 길을 걸어올 수 있었던 것은 당신의 노고와 당신의 피어린 투쟁이 있었기 때문인 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당신 앞에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지금까지 저희들을 사랑하기에 얼마나 급급하셨고, 저희들이 망할까봐 얼마나 마음 졸이셨는가를 저희들은 잘 알고 있사옵니다. 저희들이 외로울 때마다 중보자를 세우시어서 격려해 주셨고, 쓰러질까봐 염려하시면서 길을 닦아 나오신 아버지인 것을 아옵니다. 저희들은 이러한 아버지를 모시고 있다는 긍지를 가지고 천세 만세 자랑해야 되겠사옵니다. 해방의 나팔소리가 삼천리 반도에 드높이 울릴 수 있도록 기수의 사명을 다하여야 할 통일의 무리 앞에 당신의 긍휼의 손길과 자비의 손길이 영원히 떠나지 마시옵소서. 저희들은 가야 할 행로를 정통적으로 따라가야 되겠사옵니다. 하오니 그 행로를 따라 순응하기를 다짐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길, 나의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 이 자리까지 참고 나오시면서 저희들로 하여금 남이 알지 못하는 길을 가려 나오게 하심으로써 터전을 닦게 해주신 아버지의 은사 앞에 감사드리옵니다. 그 누구도 하지 못하는 것을 저희들은 실천하고 있사옵니다. 그 누구도 가지 못한 길을 저희들이 가고 있사옵니다. 이리하여 역사의 한때를 중심삼고 힘차게 찬양할 수 있는 때가 올 것을 생각하게 되옵니다. 여기에서부터 세계적인 정상이 판가름나는 것이요, 이러한 세계적인 분수령에서 선과 악이 영원히 분립된다는 사실을 저희들은 오늘날 말씀에 비추어 볼 때에 긍정할 수 있사오나, 세계 사람들은 깊은 잠 속에 빠져 스스로 깨어나지 못하는 자리에 있사옵니다. 그들에게 경종을 울려야 할 책임이 통일교회에 있는 것을 알아야 되겠사옵니다. 종을 울리는 종지기가 되어야 할 사람은 저희 통일교인이라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미명의 어둠을 헤쳐 가면서 불을 밝히는 길잡이가 되어야 할 것이 저희의 사명인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남들은 자더라도 저희들은 잘 수 없고, 남들은 쉬더라도 저희들은 쉴 수 없사옵기에 당신의 사랑하는 딸들이 최일선에 섰사옵니다. 이제 일선을 바라보고 기도하는 이들이 남북을 통일하는데 있어서 기수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이제 이들로 하여금 사탄세계의 남자들을 무색하게 하고, 사탄세계의 나라를 무색하게 할 수 있게 하여 아버지께서 자랑하시는 딸들이 되어서 돌아올 수 있게끔, 아버지, 그들의 내심을 불러일으켜 다짐시켜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이들을 보낸 남편과 자식들이 그야말로 하늘 가정으로서 보람있는 가치를 세워 가지고, 내일의 소망을 그리워할 수 있는 아버지의 가정으로 바쳐 드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가정이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바라시던 사위기대의 터전을 이룸으로써 복의 기원인 안식의 터전을 마련하여 영원무궁토록 하늘 부모를 모시고 안식할 수 있는 선의 조상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옵길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이 시간 같이하여 주신 것을 감사드리옵니다. 오늘은 거룩한 안식일이오매 당신의 이름으로 외로이 모여 당신 앞에 머리 숙이는 자녀들 위에, 아버지,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이들이 임지에서 자기 가정을 생각하고, 자식을 생각하고, 남편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이 전통을 확실히 알고, 그 전통을 지키고 돌아올 수 있는 딸들이 되게 하여 주옵길 간절히 바라옵니다.
오늘 첫 주일을 맞는 이들의 마음을 당신께서 위로하여 주시옵고, 이들이 새로운 각성과 새로운 자각과 새로운 각오를 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해외에 널려 있는 외로운 무리들도 자기의 나라를 위해 대신 책임지고 있사오니 그들 위에도 당신께서 안위의 손길을 가하여 주옵길 간절히 바라옵니다.
저희들이 내일의 소망을 갖고 가는 길 앞에 당신께서 은사의 손길을 가하여 주시고, 저희가 발전할 수 있게끔 협조해 주신 것을, 아버지, 감사드리옵니다. 영광은 당신께서 받으셔야 하는 것이요, 외로운 수난의 노정은 저희들이 책임져야 하는 것이기에 그 길을 가겠다고 뜻을 위해서 몸부림치고 있사오니, 승리의 결과를 가져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모든 전체를 당신 앞에 맡기오며 참부모의 성호 받들어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이 달 위에 당신의 사랑의 가호가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오늘은 이 달 들어 두 번째 맞이하는 안식일이옵니다. 이 아침 당신의 소망과 안위가 여기에 모여 있는 당신의 자녀들과, 전국에 널려 있는 자녀들과, 세계에 널려 있는 자녀들 위에 임하시옵소서.
높고 귀하신 당신의 성상을 흠모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을 당신 앞에 모두 묶어 바치면서 과거를 반성하고 현재를 비판하고 내일의 참된 모습을 그리워하오니, 당신의 아들이 되고 딸이 되는 증거를 아버지께서 부여해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 찾아 나오신 아들의 모습, 소원하시고 소망해 나오신 아들의 모습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저희가 만우주 전체의 가치를 대신하고 중심의 가치를 대신하는 존재가 됨으로써 당신이 그리워할 수 있고, 당신전체의 모든 감정과 감각, 당신의 입을 통하여 저희를 아들이라고 하고 딸이라 할 수 있는 참다운 자녀의 모습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보잘것없는 저희를 통하여 당신이 그런 아들딸들의 모습을 느끼기를 저희들은 바라고 있나이다.
은은히 저희들을 사랑하시는 아버지, 저희 생명의 터전을 개척하기 위하여 수고하시는 아버지, 참다운 아들과 딸을 만나기 위한 한 날의 소원으로 기나긴 세월을 참아 나오신 그 모습 앞에 저희들은 감사를 드리옵니다. 저희의 마음은 오로지 당신으로부터 근원되어 있기 때문에 당신의 마음이 가는 곳을 따라서, 당신이 소망하시는 세계에 있어서 하나의 가치를 지닐 수 있는 참다운 아들의 모습, 딸의 모습이 이 시간에도 그리워하나이다.
저희들은 거룩하시고 자비로우시고 존엄하신 아버지 앞에 불리워지는 아들딸이 되기를 원하여서 여기에 나왔사옵니다. 아버님의 은은한 부탁의 말씀과 권고 앞에, 내일의 소망과 내일의 사명을 다짐하는 결의에 찬 당신의 아들이 되고 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해도 덧없이 흘러가고 있사옵니다. 저희들이 당신의 뜻 앞에 '승리적 통일전선'이라는 엄청난 과제를 걸어 놓고 온갖 정성을 다하고 있노라 하면서 이 자리까지 나왔사옵니다.
금년 한해를 지내는 가운데 저희의 심성에는 갖가지의 모양이 그려졌을 것이옵니다. 이 한해 동안 당신을 위할 수 있는 시간을 얼마나 가져 보았으며, 얼마나 당신을 찬양하는 날들로 지냈는가를 반문해 볼 때, 부끄러운 일년이었던 사실을 깨닫게 되옵니다. 하오니 이해를 중심삼고 아버지 앞에 가일보 전진하는 희망찬 새해를 그리워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지난날을 후회하고 회개하는 마음이 저희를 사로잡게 하여 주시옵고, 소망의 71년도를 그리워하면서, 진전된 자신의 가치를 아버지 앞에 들여놓기 위하여 해산의 수고도 달갑게 받는 아들딸이 되겠다고 다짐하는 이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한 생명이 이 땅에 태어나는 것도 자기가 원해서가 아니오라 당신의 창조원칙에 따라, 아버지의 무한하신 능력의 손길이 가해진 인연을 따라서 태어난다는 것을 아옵니다. 그렇게 태어난 생명이기 때문에 그 생명은 당신이 소원하시는 곳에 귀결되어야 될 것이고, 그 소원의 가치와 일치되어야 되겠사옵니다. 창조 본연의 가치는 아버지로 말미암아 완결되는 것이 아니오라, 아들과 딸들로 말미암아 완결되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자녀의 명분을 지닌 한 생명으로 태어난 것이 얼마나 엄청나고 놀라운 사실인가를 저희들이 알게 되옵니다.
자기 자신을 볼 때에, 아버지께서 같이하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없고, 세상에서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같이 느끼게 되오나 본연의 인연을 회고해 볼 때, 이렇듯 놀랍고 무한한 가치의 내용을 지니고 출발된 자신인 것을 깨닫고 한 생명이 당신께서 찾아오고 더듬어 온 가치 있는 모습인 것을 스스로 깨닫게 되옵니다. 그러니 흠없고 순수하고, 순진한 어린양의 모습으로서 아버지 앞에 고이 바쳐질 수 있는 아들의 모습과 딸의 모습이 되어야 하겠사옵니다. 아버지, 당신께서 소망하시며 찾아 나오시는 민족의 중심이 되고, 국가의 중심이 될 수 있는 가정의 기틀이 저희들로 말미암아 이루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는 아버님의 기쁨 속에서 태어나고 부활되기를 원하고 있사옵니다. 당신이 저희를 그리워하기 전에 저희들이 먼저 당신을 그리워해야 되겠사옵고, 당신이 저희를 사랑하시기 전에 저희들이 먼저 당신을 사랑해야 되겠사옵니다. 당신 앞에 모든 사정을 고하기 전에 당신께서는 이미 저희의 사정을 알고 계시다는 것을 아니 느낄래야 아니 느낄 수 없고, 아니 체휼할래야 아니 체휼할 수 없는 그런 아들딸이 되어야만 하겠사옵니다.
아버님, 불쌍한 저희를 버려 두지 마시옵소서. 저희는 아버지의 아들의 자리가 어떻다는 것을 알고 있고, 아버지의 아들로서 지녀야 할 내용이 어떻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사옵니다. 과거의 자기 모습, 혹은 현재 기울어져 있는 자기의 모습, 쭈그러진 자기 모습을 보게 될 때, 저희들은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해 몸부림치는 자리에 서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되겠사옵니다.
아버지의 불꽃같은 눈앞에 나 자신을 무엇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낼 수 있으며, 언제 존엄하신 당신 앞에 인연되는 환경에 처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게 될 때, 당신의 거룩하심을 더럽힐까봐, 당신의 깨끗하고 존귀하심이 그늘질까봐 마음을 졸이게 되옵니다. '무한히 높으시옵소서, 무한히 귀하시옵소서, 무한히 가치있으시옵소서'라고 마음으로 기원하면서, '나는 천번 만번 망하더라도 당신의 거룩하심에 상처를 입혀서는 안되겠다'고 하며 당신이 찾아오는 것을 두려워할 줄 아는 그런 마음이 오늘날 저희에게 더더욱 필요한 것을 알게 되옵니다.
긍휼의 마음이 머무는 곳에 당신이 운행하시고, 당신의 자비의 마음이 인연되어진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놀랍고 엄청난 당신의 성상 앞에 저희는 무한히 감사하고, 무한히 찬양하고, 그리운 마음에 사무쳐야 되겠사옵니다. 존경하는 마음에 사무쳐야 되겠사옵니다. 깊고 고요하고 순전한 그 자리에서 당신의 은은한 맥박을 통하여 생의 힘이 생동하는 창조의 묘미가 당신의 이름과 더불어 저희들 앞에 연결되어야 할 불쌍한 타락의 후예가 된 것을 탄식해야 되겠사옵니다.
배가 고파서 몸을 가눌 수 없는 극한 자리에서도 자기 의식이 한 초점에 집중되어 기울어지는 그 순간보다 더 강하게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에 사무쳐야 되겠사옵니다. 오늘날 타락한 후손에게는 모든 세포가 한 곳에 집중되고, 모든 감각이 아버지 앞에 집중되어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최고의 소리, 아버지라고 외치는 절규 가운데 아버지를 붙들고 혁명과 더불어 아버지의 실재를 느낄 수 있는 체휼이 타락한 후손들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옵니다.
아버지여, 저희들을 긍휼히 보시옵소서. 오늘날 저희의 모습이 얼마나 추하고, 얼마나 부끄러운 모습이옵니까? 병중의 오만가지의 병이 올라서 쪼들어지고 꼬드러진 모습으로 아버지라 부르는 이러한 모습을 대하여 피의 인연과 생명의 인연을 가진 아버지께서는 부정할 수 없기에 저희와 같은 자식들을 사랑하여야 하는 불쌍하신 아버지를 저희들은 동정해야 되겠습니다.
저희들은 어쩌다가 이런 모습이 되었으며, 아버지께서는 어쩌다가 이런 저희들을 아들이라고 딸이라고 부르게 되었사옵니까? 천년 한의 길을 넘나들면서 소원의 아들딸을 품고 살아가고 싶었던 아버지 앞에, 슬픔과 서러움의 눈물과 더불어 붙안고 통곡할 수밖에 없는 아들이요 딸이 된 것이 얼마나 비참하고 얼마나 억울하고 얼마나 처량한가를 스스로 느낄 줄 알아야 되겠사옵니다.
오늘날 이 통일의 무리를 이끌어 오신 아버지, 그 누구를 다 집어던지더라도 사랑하겠다고 약속하시던 아버지, 세상을 다 버리더라도 너는 버릴 수 없다고 토로하시던 아버지, 그렇게도 귀하시고 그렇게도 가치 있으신 아버지께서 이렇게도 천하고, 분뇨속의 미물보다 못하고 만물의 때보다 못한 인간의 모습을 찾아오시면서 수고하신 것이 얼마나 분하고 원통한 것인가를 저희들은 느껴야만 되겠사옵니다.
흘러가는 물결과 더불어 머무를 수 없는 가치의 그 길을 더듬어 오신 아버지의 노고의 행로를 생각할 때, 저희들이 천년 만년 옷깃을 여미고 무릎을 꿇고 몸을 숙여 아무리 아버지 앞에 감사의 생활을 바치더라도 생각할 수 조차 없는 아버지의 그 은덕을 다 갚을 수 없다는 것을 저희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버님, 당신을 사랑하기 전에 자기를 사랑하기에 미친 인간이옵고, 당신의 가치를 찬양하기 전에 자기의 가치를 찬양하는 인간들이옵고, 당신의 수고를 자랑하기 전에 자기의 수고를 자랑하고 싶어하는 인간이옵니다. 아버지, 이제 저희들은 어린 아이의 심정으로 돌아가야 되겠사옵니다. 오직 당신의 생명의 품을 그리워해야 되겠사옵니다. 모든 것을 잊어 버리고 이것에만 사무쳐 가지고 어린 아기가 엄마의 젖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순수한 당신의 피살을 다시 공급받아야 되겠사옵니다. 순수한 당신의 사랑의 심정을 저희들이 상속받아야 되겠사옵니다.
아버지, 이 시간 저희들을 버려두지 마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통일교단을 당신께서 맡아 주시옵소서. 당신의 아들딸들이 지금까지 천대받고 조롱 받아온 것은 당신의 이름을 부른 연고요, 당신이 남기신 복귀의 길을 가고자 했기 때문이었사오니, 아버지여, 그것만이라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이 길을 가는 데 있어서 때로는 자식을 버려야 할 때도 있었사옵고, 때로는 사랑하는 남편을 버려야 할 때도 있었사오며, 때로는 사랑하는 부모를 뒤에 두고 모르는 자와 같이 냉정해 돌아서야 할 때도 있었사옵니다. 친구는 물론이요, 자기 환경도 물론이요 자기 나라에 대해서도 그러했었습니다.
이러한 것을 생각해 볼 때, 당신과 바꾸기 위하여 가졌던 것을 사탄에게 빼앗겨 버린 저희들이 당신을 잡지 못하고 당신과 인연을 맺지 못한다면 빼앗겨 버렸던 것을 다시 찾아가야 할 것이옵니다. 그렇게 되면 사탄 앞에 얼마나 조롱받을 것이며, 또 아버지의 한은 얼마나 가중되겠는가를 생각하고 전진해야 할 운명의 행로를 놓고 주저하고 몸부림치는 불쌍한 무리가 있는 것을 생각할 적마다 당신은 슬프신 분, 당신은 괴롭고 외로우신 분, 당신은 땅 위의 그 누구에게도 사정할 수 없는 고독하신 분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사옵니다. 그러니 당신을 위하고, 당신으로 말미암아 살고자 하는 통일의 무리들이 많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이 삼천만 민중을 대하여 소망하시는 그 내용보다도 소수의 통일의 무리를 대하여 사정하고 싶고, 통하고 싶은 내용이 크다 할진대는 이 통일의 무리는 결코 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사옵니다. 망해서는 안 되겠사옵니다. 당신과의 인연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당신이 저희들과 더불어 수고하신 그 가치의 역사가 있었기 때문에, 저희 자신을 위하기보다도 당신을 위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원하는 이들의 행로를 지켜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초목도 봄이 오면 생명의 결실을 바라보고 준비하는 것을 보게 되옵니다. 저희들은 인생 행로에 있어서 봄절기를 맞지 못하는 인간이 되어서는 안 되겠사옵니다. 봄을 맞은 후에는 여름 절기를 맞이할 수 있어야 하겠사옵니다. 한때밖에 없는 무성한 여름 절기를 맞이하여 생명의 가치의 근원과 더불어, 뻗어날 수 있는 내용과 더불어 활짝 꽃을 피우고 일년 동안에 모든 영양을 집약시킨 하나의 결심을 맺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하나의 가치로서 거두어야 추운 겨울이 다가와도 그 무엇에 침범받지 않는 생명력을 지니게 될 것이옵니다.
이렇듯 아무리 험하고 얼어붙는 자리에서도 생명의 권위를 자랑하고 그 무엇에도 사로잡히지 않는 생명력이 남아져야만 후대에 다시 봄을 맞이하여 생명의 싹을 피울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오늘 저희 자신들도 봄을 맞이하여 생명의 싹을 피울 수 있는 순수한 하나의 생명체가 되어야 되겠사옵니다.
여름을 맞이하여 꽃이 피고 향기가 진동하는 가운데 천군천사가 찾아와 생명을 노래하고 생명의 가치를 찬양하며, 그 무엇을 주고도 바꿀 수 없고 무엇과 부딪쳐도 깨지지 않는 자기 자체가 되어 뚜렷한 주체적인 생명의 내용을 지니지 않고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사옵니다. 아무리 차디찬 바람이 몰아친다고 하더라도, 아무리 냉랭한 고드름이 얼어 붙는다 하더라도 그것을 넘고 녹여서 다시는 생명의 위협을 받지 않는 그런 권위를 지니고 있어야만 재봉춘할 수 있는 소망의 천국의 상속자가 되는 것을 저희들이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이 시간 당신이 저희를 부르셨기 때문에 저희는 여기에 왔사옵니다. 하오니 당신과 인연맺어 주시옵소서.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수많은 군상들 가운데에서 남이 생각하지 않는 길, 남이 보기에는 무미건조한 길을 더듬어 나오는 저희들의 걸음 위에 당신의 후대하시고 두터운 사랑으로 같이 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의 끊임없는 소망의 마음이 이들의 생명의 인연 가운데 깃드시옵소서. 내일을 위하여 현재의 노정을 가겠다고 다짐하면서, 결실의 가치를 당신 앞에 봉헌하면서, 전진에 전진을 거듭하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 저희의 마음속에 당신의 깊고 높으신 성품과 역사의 수난 가운데에서도 지치지 않는 당신의 풍부하신 사랑과 내일의 소망을 위한 현재의 투쟁의 행로에 있어서 비장한 당신의 성상을 새기며 당신을 대신할 수 있는 아들이 되고 딸이 되기 위하여 참석하였사오니, 자비의 아버지시여, 저희들을 그냥 남겨두지 마시옵고 높고 귀하신 당신의 영광이 저희들 위에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 말미암아 천상세계의 천천만 천군천사들은 물론 앞서 간, 선조들, 이 땅 위에서 생명의 인연을 갈구하고 있는 수많은 인간들, 또한 앞으로 올 후손들까지도 그리움과 사모함으로 당신과 맺어진 자녀의 인연을 통하여 결속시켜 주시옵고, 새로운 출발과 새로운 인연이 여기에 나타나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전국에 널려 있는 뭇자녀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더우기 당신의 사랑하는 딸들이 역사적인 사명을 짊어지고 제일선에 나가 싸우고 있사오니, 그들이 외로울 때에도 인간적인 생각을 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없는 가운데에서 창조하신 아버지의 능력을 믿고, 아버지의 외로우신 복귀의 생애를 회상하면서, 저희 자신이 그럴 수 있는 한날과 그럴 수 있는 환경에 처해 있음을 무한한 영광으로 찬양할 수 있는 마음을 갖게 될 때 사랑의 창조의 인연을 연결될 줄 알고 있사옵니다.
당신을 대신하여 민족을 그리워하고 사랑해야 되겠사옵니다. 한 사망권내에서 영원히 원수의 쇠사슬에 얽매인 그 모습들을 직시하면서 그들을 해방시키기 위한 간절한 마음에 자기의 위신마져 망각하는 자리에 서야만 아버지께서 엮어 오신 개척의 행로가 여지없이 벌어진다는 것을 저희는 알고 있사옵니다.
자기만을 생각하는 자리에서는 아버지와 멀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저희들이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자기를 잊고 아버지를 몸 전체로서 느끼고 몸 전체로서 믿고 생활할 때, 재창조의 봄날이 찾아온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저희들을 배반하던 민족을 다시 사랑해야 할 아벨의 입장이 불쌍하옵고, 저희들을 죽음길로 내몰던 기성교인들을 다시 찾아 만나서 목을 안고 통곡하여야 할 아벨의 책임을 짊어진 이 무리들이 불쌍한 것을 알게되옵니다.
그런 자리에 설 때마다 사람들은 몰라주더라도 영계의 천사세계와 천천만 성도들은 몇백 배 몇천 배의 간곡한 사무친 마음을 가지고 저희들을 대한다는 것을 생각할 때, 저희가 비록 세상에서는 나라를 갖지 못하였더라도 영계의 나라가 저희의 나라가 된 것을 저희들은 감사를 드려야 되겠사옵니다. 세상 사람들 앞에 조롱을 당하더라도 하늘에 있는 선지선열들과 우리의 조상들 앞에 환영받는다는 것에 대해 감사드려야 되겠사옵니다.
역사상에 한 때밖에 없는 이 엄청난 분야를 책임진 그 가치를 마음으로 흠모하면서, 내가 이렇게 처량한 자리에서 처량한 행로를 가면서 뭇사람의 주목의 대상이 되면서도, 하루의 생활을 엮어가면서도 허락하신 이 기간 동안 마음으로 다짐하고 정성들이는 자녀들 위에 당신의 후덕이 넘쳐 흐르게 하시옵소서.
제가 찾아오던 노정 위에 당신이 권고하셨듯이, 당신의 풍부한 사랑으로 안위하셨듯이 그들 앞에도 그런 은사를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저들이 부끄러움이 있는 해와의 정욕을 망각해 버리고 소망과 희망 가운데에서 내일을 다짐할 수 있는 해방된 딸의 모습을 갖추어 민족 앞에 굳세고 강하고 담대하게 하시어서 맡겨진 책임 수행에 전심전력하게 하여주시옵소서.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사옵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나라를 사랑하고 세계를 사랑하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마음이 있사옵기에 아버지와 먼저 인연맺어야 되겠사옵니다. 당신이 분부한 말씀의 내용을 알고, 자기의 일신을 망각하면서 민족을 미칠듯이 사랑하는 자는 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한 자리에서 한정된 한날을 아버지 앞에 무한한 가치의 영광으로 수놓아 바쳐드릴 수 있는 거룩한 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훗날에 할 말을 하고, 보람있는 삶을 갖추기 위해 가야 할 운명길이기에, 그 누구에게도 이것을 넘겨 줄 수 없는 오늘의 통일교단의 사명인 것을 절감하옵기에, 이들이 지키고 있는 이 자리를 아버지께서 직시하시사, 고요히 인연맺은 그 인연을 영원히 이들과 더불어 남기시옵고, 영원히 이들과 더불어 같이하시옵소서. 승리의 결과를 이 불쌍한 무리들과 더불어 맞이할 수 있게끔 아버지께서 지켜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옵고 원하옵니다.
이 시간에도 외로운 자기의 사정을 살펴가면서 이 본부를 향하여 기도하고 있는 무리가 많을 줄 알고 있사옵니다. 저희들은 그 이상의 마음을 가지고 그들 앞에 제사장으로서의 책임을 다하고, 제단을 지키고, 거룩한 지성소를 옹위하며 하늘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간곡히 고대하는 정성어린 무리들이 되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옵니다.
해외에 널려 있는 뭇자녀들을 아버지께서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내일의 소망의 천국 앞에 부끄러움이 없게 하여 주시옵고 민족적인 사명을 감당하는 데 있어서 온갖 정력을 다 기울이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옵니다.
이 시간을 아버지께서 맡아 주시옵소서. 아버지 70년도가 기울어져 가는 오늘 이 거룩한 날을 지키기 위하여 참석한 자들 위에 만복이 깃들게 하여 주시옵고, 이날을 자랑할 수 있는 날로서 그들과 더불어 인연맺어 주옵기를 재삼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의 성호 받들어서 아뢰었사옵니다. 아멘.
사람들은 흔히 자기를 중심삼고 생각합니다. 누구든지 자기는 선하고 참되다고 인정하는 자리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려고 하는 것을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많이 느끼게 됩니다.
좋은 일이 있으면 자기가 앞장서려 하고, 기쁜 일이 있어도 그러합니다. 혹은 어떤 무한한 가치의 내용이 있다 할 때도 자기와 먼저 인연을 맺고자 하는 것이 우리 인간의 성품입니다. 여기에서 과연 그 좋아하는 것을 소유할 수 있는 나 자신이 되어 있느냐 반문하여 볼 때, 그 어느 누구도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발견하게 됩니다.
아무리 좋은 환경이 있다 하더라도 그 좋은 환경을 찬양하기 전에 먼저 그 환경이 자기와 얼마나 관계맺어져 있느냐를 생각하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 환경이 자기와 더불어 인연되고, 그 환경이 자기와 더불어 결과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 환경이 좋으면 좋을수록, 그 환경이 영원하면 영원할수록 자기와 인연맺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 인간은 자기 개체를 중심삼고 엮어 나가는 생활이 되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 자신이 어찌하여 스스로 이와 같은 자리에 서게 되었느냐? 생각도 하지 않고 무료함도 느끼지 않고 비판도 하기 전에 스스로 그렇게 당당하게 나서서 관계를 맺고자 하는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 이것은 본래 인간이 그런 자리에 있어야 된다는 것을 그 마음이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귀한 것이 있다면 자기가 그것과 더불어 관계를 맺고 싶어합니다. 만명이면 만명 모두가 그것과 관계를 맺고 싶어하고, 30억 인류가 있으면 30억 인류가 그 하나밖에 없는 귀한 것과 더불어 관계를 맺고 싶어하는 것이 우리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30억 인류가 그 하나를 그리워하고, 그 하나의 가치 앞에 집약되고자 하는 이런 마음 바탕을 가졌다 할진대는 오늘날 30억 인류가 그것을 가지려면 그 하나를 놓고 투쟁의 행로를 거쳐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생활권을 냉정히 직시해 볼 때, 이 무한한 가치의 것을 지니려면 수천 수만의 군상과, 혹은 인류 전체와 투쟁하여 승리해야만 된다는 문제가 생깁니다. 오늘날 우리가 최고의 가치 있는 그 하나와 관계를 맺고자 하는 마음의 바탕, 본성 그 자체는 모순된 것이 아니냐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만민이 그런 가치 있는 것을 공히 가질 수 있게 되어 있다면 어떠한 내용을 가지고 이것을 연결시킬 수 있느냐? 그것과 관계를 맺어 무한한 나의 소유물로서, 무한한 나의 인연을 찬양하는 것으로서 남길 수 있느냐? 뿐만 아니라 그것을 내 것만으로서가 아니고 만민의 것으로 돌릴수 있는 보다 가치 있는 내용을 자극시킬 수 있는 환경권을 어떻게 갖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오늘날 나를 중심삼은 욕망의 기준과 절대적인 가치의 선한 것을 중심삼고 만민이 기뻐하면서 갖기를 바라는 기준과는 그 방향이 다르고 입장이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중의 어느 하나를 규명하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놓여 있습니다.
누구든지 무한한 가치를 지닌 것을 갖고 싶어하는데, 그 마음은 나 자신이 그렇게 되기를 바라서 갖는 마음이 아니고 만민이 본성적으로 갖고 나온 마음임에 틀림없을진대는 그 마음으로 찾아나가는 가치의 그 길, 가치 있는 내용을 대하는데 있어서,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 환경과 대할 수 있는 그때의 환경과는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좋은 것도 나를 중심삼고 시작하여 끝을 맺고 기쁜 것도 나를 중심삼고 시작하고 끝을 맺고자 한다면 이 우주에 귀하고 참되고 가치 있는 내용이 있다할진대 여기에 나 외에는 같이 참여하기를 부정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 각자의 마음이 요구하는, 나를 중심삼고 전체의 가치를 추구하고 인연맺고자 하는 그 자체가 모순이라고 결론지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보편화시키고 일반적인 가치의 내용으로 드높이 찬양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냐? 어떠한 입장에서건 이 내용을 결정짓지 않고는 해결방안이 없는 것입니다. 만일에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타락한 인간이 자기 생리와 생태를 중심삼은 모습을 가지고 그 가치를 추구했다 할진대 그 사람은 역사상에 없는 최고의 모순된 환경에 돌입될 것입니다.
그러면 만민이 공히 그와 같이 무한한 가치의 것을 내 것으로 지니고 그 가치의 기준으로서 상속받으려면 무엇이 필요하냐? 현재의 우리 자신을 중심삼고 있는 이런 인연을 통하여 최고의 절대적인 가치의 것은 하나밖에 없을 것이니 이 하나밖에 없는 가치의 것 앞에 내가 연결될 때, 상충이 없는 전체의 가치인 동시에 개체의 가치로서 찬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 길이 있어야 될 것이어늘 그 길이 도대체 무엇이냐? 이것이 문제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생각할 때 오늘날 여러분은 자신을 망각하기 쉬운 입장에서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나라는 개체는 독자적으로 태어날 수 없는 것이요, 계승할 수도 없습니다.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나라는 존재는 부모의 혈통을 통해서 태어나 살고 있고, 이렇게 살고 있는 우리의 인생이라는 것은 그 누가 1세기 이상 살 수 있다고 장담한다 하더라도 1세기 이내에 생의 종말을 맞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인류 역사는 1세기로서 끝을 맺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이 역사를 연장시켜야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반드시 계대 문제가 벌어집니다. 즉, 상속 문제, 계승자 문제가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나 대신 나보자 더 빛날 수 있는 가치를 지닌 내용으로 계승할 수 있는 상속자가 있어야만,그 인격을 중심삼고 내일의 소망의 세계, 내일의 절대적인 가치의 세계로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내가 미래에 가치적인 내용을 계승해 주지 못하고, 나 자신의 가치를 감퇴시키고 희생시키는 입장에 선다면 현실이 그를 거부하고 그의 갈 길을 막는 것입니다.
그러면 미래의 세계에 남아질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전체의 이익을 자기를 중심삼아 가지고 현시대권내에서 소모시키는 입장에 선 사람을 미래의 세계가 환영하겠느냐? 이런 사람은 절대 환영하지 않습니다. 오늘의 가치적인 것을 오늘에 고착시키는 것보다도 미래의 것으로 남겨주고자 하는 데서만이 미래의 가치적인 것과 우리가 더 가까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오늘보다도 내일 앞에 가치적인 내용을 플러스시켜야 됩니다. 그 길만이 절대적인 소망의 세계에까지 도달할 수 있는 결정적인 요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운명에 처해 있는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들은 자기도 모르게 선하기를 바라고, 자기도 모르게 좋은 것을 흠모하고, 가치 있는 것을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가치 있고 좋은 것이 나와 그냥 그대로 관계맺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거기에 대비되는 희생의 대가를 치러야만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나쁜 것은 대가를 치르지 않아도 얼마든지 연결되지만 좋은 것은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만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냥 흘러가 버리거나 어떤 사람에게는 필요하지 않은 그런 대가를 치르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과정에 있어서 누구에게나 필요한 대가를 치러야만 연결되고 남아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구에게나 필요한 대가가 되는 것이 무엇이냐? 그것은 바로 생명입니다. 둘도 없는 생명력이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그 생명을 지닌 인간이 추구하는 고귀한 가치가 되는 것이 무엇이냐? 상대가 되는 존재입니다. 그 상대되는 존재와 인연 맺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할 때 이것은 사랑밖에 없습니다. 고귀한 생명과 고귀한 사랑의 내용을 심고 투입하는 자만이 만민이 공히 취할 수 있는 내일의 절대적인 행복의 가치권에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외의 길은 있을 수 없다는 결론을 지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 선한 사람, 선의 길을 가는 사람, 영원하고도 무한한 그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 생명과 인연된 세계, 절대적인 사랑과 인연된 세계를 흠모하며 다짐하는 사람은 현재 생활권내에서 자기 생명력을 미래를 위하여 투입할 수 있고, 그 생명과 더불어 자기의 사랑 전체를 미래를 위하여 투입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보다 가치 있는 상속권이 넓혀져 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뜻을 품고 새로운 이념을 추구해 나온 사람들을 보면, 자기의 생명력을 소모시키고자 자기가 지녀야 할 사랑의 모든 요소를 소모시키면서 그런 일을 해 나왔습니다. 이러한 사람들만이 역사를 계승하여 상속해 나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왜 그러냐?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태어난 그때가 봄날이고 자라는 그때가 여름날인 것입니다. 내리는 비는 생명을 촉구하게 되고, 내리쬐는 태양은 생명의 요소를 흡수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고, 불어오는 바람은 청신한 내일을 약속해 주는 환경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선한 환경에 존재하여 있고 거기에 관계되어 있는 일체의 내용은 인간에게 상충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발전을 촉진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오늘날 이와 같이 비참한 자리에서 우리 자체의 소모가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 소모되는 우리 자체의 소모로서 끝나버리는 것이 아니라 자체에 보탬이 되는 것이요, 자체의 발전과 성장에 밑거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절대적인 선과 관계를 맺으려면 희생의 대가를 치러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타락권내에 접하여 있고 타락의 운명권내에 얽매어 있는 연고로 불가피한 일입니다.
여러분이 생애 노정에서 좋은 것과 관계맺고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 것과 관계맺으려면, 현재 자기의 모습 그대로를 찬양하고 좋아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에는 마음이 원해서 관계맺고자 하는 것과 몸이 원해서 관계 맺고자 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만물을 지으실 때 절대적인 목적을 갖고 지으시지 않았다면 하나님은 절대적인 분이 될 수 없습니다. 오늘날 타락한 우리 인간들도 하나의 목적을 중심삼고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물건을 만들어 나가고자 합니다. 이것을 보게 될 때, 오늘 우리 인간 자체 내에 각기 다른 두 개의 목적을 추구하는 몸과 마음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모순된 것입니다.
절대적인 하나님이 지은 피조물로서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기 때문에 그 분이 지은 피조물도 하나의 목적을 지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의 목적 가운데서 하나님의 자녀의 명분을 가지고 태어난 인간이라면 하나의 목적에 인연을 맺고 일체가 그 목적을 중심삼고 관계를 맺어야 할 텐데도 불구하고, 내 개체에 있어서 제일 가까운 몸과 마음의 상충이 웬말이냐? 이것은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생명이 찾아가는 목적의 귀착점, 생명과 더불어 영원히 같이하여야 할 하나밖에 없는 사랑의 귀착점은 반드시 하나의 목적권내에서야만 이루어지는 것이지 두 목적권내에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서는 절대적이라는 말은 성립될 수 없습니다. 자체 내에 상대적인 권을 갖고 있는 입장에서는 절대적인 가치를 찾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절대적 가치를 찾아 나가는 데 있어서 출발의 기점은 무엇이 되어야 하느냐? 참을 찾아 가지고 가야 합니다. 내가 참을 뚜렷이 의식하고 그것을 부정할 수 없으며 마음속에서 솟구치는 인식이라든가 자극을 통해 그것이 나의 생활에 끊임없이 인연되기를 바란다면 현재 내가 처해 있는 자리를 정비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부모의 혈육을 받아 태어나 살고 있는 국가나 혹은 세계에 있어서 그냥 그대로는 참을 찾을 수 없습니다. 참을 찾기 위해서는 어느 한계점을 세워 가지고 반드시 부정이라든가 긍정이라든가 판가름을 해야 합니다. 이자택일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건 불가피한 일입니다.
여기에서 마음이 선한지 몸이 선한지 알 수 없지 않느냐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또는 몸을 중심삼고 마음을 부정할 수는 있지만 마음을 중심삼고 몸을 부정할 수는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보편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내가 잘 했느냐 못 했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볼 때 양심의 가책을 받느냐 안 받느냐, 마음에 부끄러움이 있느냐 없느냐 하고 스스로 묻게 될 때 그것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부정할 수 없습니다.
내 양심의 가책을 안 받는다고 할 때는 당당합니다. 천하가 뭐라 하더라도 굽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주에 단 하나밖에 없는 어떤 최고의 위협적인 존재가 내게 직접 부딪친다 하더라도 거기에 굴하지 않습니다. 양심의 가책이 없을 때에는 무한히 강하다는 것입니다.
그 무한한 한계점은 어느 권까지 갈 수 있느냐? 대한민국의 어떤 중심 존재가 부정하라고 해서 '예' 라고 할 수 있느냐? 아닙니다. 세계의 어떤 중심존재라가 부정하라고 해도 '예' 할 수 없습니다. 더 나아가서 이 천지의 중심존재가 부정하라고 하더라도 '예' 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러더라도 '아니오'라고 하게 됩니다. 하나님보다도 더 높은 분이 있다고 하면 그분 앞에 가서도 당당하다는 것입니다. 그 권은 절대적입니다.
마음이 잘못을 하지 않았다면 아버지든 선생님이든 어느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굽히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토벌해 버리고 싶은 것입니다. 거기에 반하고 나서면 이놈들이라고 합니다. 아버지도 이놈이요, 스승도 이놈이 되는 것입니다. 모두 이기려고 합니다. 마음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 순수한 자리는 아무도 없는 것 같은데 거기에는 절대적인 권한이 내재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내재되어 있는 권한이 찾고 있는 가치는 어떠한 가치일 것이냐? 절대적인 가치를 추구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그러한 사연을 가질 수 있는 바탕이 내 몸이냐, 마음이냐 묻게 될 때 몸이라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것이 중심이냐? 그것은 마음인 것입니다.
우리가 좋은 친구라고 하는 것은 양심적이기 때문에 좋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친구가 미인이기 때문에, 미남이기 때문에 좋다고 하는 사람 있어요? 양심적이기 때문에, 순수하기 때문에, 희생적이기 때문에 좋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좋다고 할 수 있는 바탕, 혹은 그 내용이 무엇이냐? 순수하고, 솔직하고, 거짓이 없고, 희생적이기 때문에 좋다고 하는 것입니다. 교만하고, 자기만을 위하고, 강압적이고, 개인주의적이기 때문에 좋다고 하는 사람이 있어요? 친구를 위해서는 어떤 희생도 달게 받기 때문에 좋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사실은 사람에게 교육이 필요없는 것입니다. 대학교의 교양이니 뭐니 하는 것들 다 필요없다는 것입니다. 다 알고 있는 것입니다. 양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나쁜 짓을 할 때는 '야, 너 왜 나쁜 일을 하니'하고 양심의 가책을 받게 됩니다. 그 이상의 교육이 있습니까? 본래는 교육이 필요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는 세계의 끝에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서부터 해결됩니다. 여러분의 생활권내에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 백 퍼센트 구비되어 있고 다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좋은 것은 어떻게 하고 싶느냐? 좋은 것은 집어 던지고 나쁜 것을 남겨 두고 싶어하는 사람 있습니까? 이런 녀석은 때려잡아도 됩니다. 몹쓸 녀석입니다. 여기에 아무리 못났다 하더라도 '좋은 것은 집어 던지고 나쁜 것은 남겨야지' 하는 사람 있어요?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것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결론이 자연적으로 나옵니다.
영원한 것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것은 영원히 남아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남기고 싶어합니다. 그러면 이것을 남겼다가 누구한테 주고 싶어하느냐? 자기 사랑하는 아들에게 남겨 주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그 아들은 또 누구한테 주고 싶으냐? 역시 사랑하는 아들한테 주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그 아들이 세계를 지배하게 되면 그것은 세계적인 보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우리 인간은 제일 좋은 것을 남기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제일 좋은 것이 뭐냐 할 때, '금덩이요' 한다면 그것을 남기고 싶어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금덩이보다 더 좋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사랑을 중심삼은 생명체입니다. 그러면 나에게 있어서 사랑을 중심삼은 생명체가 뭐냐 할 때, 이 관계가 제일 귀하다는 것입니다.
나를 중심삼고 볼 때, '나'는 어디에서 왔느냐? 그냥 날아온 사람이 아닙니다. 부모가 있기 때문에 자식이 있는 것입니다. 부모는 과거를 상징하는 것이요, 나는 현재를 상징하는 것이요, 자식은 미래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가 하나의 선에서 상봉하는 그 초점, 그것을 규합시키고 연결시키는 결정적 요인이 누구냐? 그것이 오늘의 '나'라는 것입니다. 나는 과거 없이 생겨날 수 없는 것이요, 미래 없이 존속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누구나 역사적인 가치를 상속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에 좋은 골동품이 있으면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어합니다. 그러면 국보 제1호인 남대문은 누구의 것이냐? 대한민국의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것은 곧 누구의 것이냐 하면, 내 것이라는 실감이 나지 않겠지만, 내 것입니다. 대한민국에 나 혼자 살고 있다고 할 때는 내 것이라는 실감이 날 것입니다.
그러면 대한민국의 국보 제1호인 남대문은 누구로부터 시작되느냐? 나 하나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이 곧 '나'라고 할진대 그 국보는 대한민국의 것인 동시에 내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관리하는 데에 있어서도 나 혼자만 관리하면 좋을 텐데 삼천만이 관리하니 싫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혼자서는 관리를 못 합니다. 국보 전체를 자기 혼자서 관리할 수 있어요? 전체가 협력해서 관리해야 됩니다. 좋은 것은 그렇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좋은 것이 있으면 자랑하고 싶습니다. 그래요, 안 그래요? 선전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선전하고 싶다는 것은 뭐냐? 관계를 맺어주고 싶다는 것입니다. 선전이나 자랑은 왜 하느냐 하면 너도 이와 같은 관계를 맺어라 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제일 좋은 것은 무엇이냐? 부모가 제일 좋고, 그 다음은 나이며, 그 다음에는 자식입니다. 이렇게 해서 역사는 계승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이 집약된 것이 무엇이냐? 즉, 우리의 생명을 연결시키고 생명에 연결된 그 환경을 중심삼고 사랑의 이념이 꽃필 수 있는 그런 환경의 터전이 무엇이냐? 이것이 가정입니다.
가정을 중심삼고 볼 때, 자식은 '어머니는 영원히 내 것이다' 합니다. 그 어머니는 자식에게 자기의 피살을 나누어 주면서 좋아합니다. 이것을 볼 때 좋은 것은 뭐냐? 남을 위해 희생하는 것입니다. 친구가 좋다 하는 것도 곧 희생하기 때문입니다. 남한테 주면서도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좋아하는 것은 남을 위해 희생하면서 자기에게 제일 귀한 것을 주고도 더 주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주고 나서 그것을 다시 받겠다고 하면서 주는 것이 아니라, 주면서도 너무 적어 부끄러움을 느끼며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모의 사랑입니다.
그러나 자식의 사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모의 사랑과 자식의 사랑은 다릅니다. 부모는 주면서도 더 좋은 것을 못 주어서 한이고, 자식은 '나는 효자다' 하면서 만족하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의 사랑과 자녀의 사랑이 다르다는 거예요. '내가 이렇게 했는데 엄마 아빠는 뭐했어요?' 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자식의 사랑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자기라는 한계선을 못 넘는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부모의 사랑은 자기라는 한계선을 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이 무슨 사랑인가? 이 사랑이 곧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내용이 인간 앞에 나타난 것이 부모의 사랑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냐? 부모를 중심삼고 생각해 볼 때, 부모보다 나아야 됩니다. 우리 부모는 자식만을 사랑하지만 하나님은 세계 인류를 전부다 부모가 나를 사랑하는 것과 같이 사랑하신다는 거에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나를 낳아 주신 어머니 아버지는 나만을 사랑하지만 하나님은 만민을 나와 같이 사랑하시는 어머니 아버지 이상의 자리에 계시는 분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냐 할 때, 천년 만년 주고도 또 주고 싶은 그런 마음을 끊임없이 갖고 계신 분입니다. 그런 분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 것이지, 주고 나서 '야, 요거 몇냥 몇전이다'라고 하시는 장사꾼 하나님이라면 그런 하나님은 필요없습니다.
만민은 왜 하나님을 좋아하면서 따라가야 하느냐? 하나님을 왜 좋아해야 되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하나님은 만년을 위하여 모든 것을 주시고 또 주시면서도 부끄러워하시며 '지금은 이것밖에 안 되지만 조금만 더 기다려야, 몇백 배 몇천 배 더 좋은 것을 줄 터이니…' 하시면서 오늘 현재에 주신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주면서도 미래에 더 좋은 것을 주겠다고 약속을 하시며 주실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갖고 계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분과 더불어 있으면 비록 못먹고 못살더라도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못먹는 자리에 들어간다면 미래의 소망된 자극이 현실권 내에서 충격적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도리어 새로운 결심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면서도 부끄러워하는 자리, 그런 부모를 가진 자식이 '엄마'하고 끌어안게 되면 몸만 끌어안겠습니까? 얼마나 고맙겠습니까? 그 자리는 미래를 위해 서로 위로의 눈물을 같이 흘릴 수 있는 자리입니다. 절망이 같이하는 것이 아니라, 내일의 소망을 현재의 자극으로 여기고 서로 결의하고, 서로가 맞부딪쳐 가지고 격려할 수 있는 폭발적인 자리가 바로 그런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거기에서 나타나는 현상은 비참한 것이 아닙니다. 미래에 대한 자극을 끌어들여 가지고 현실권내에서 가치를 찬양할 수 있는 자리는 그러한 사랑권내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랑권내에 사는 사람은 불행이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러면 예수님이 만민 앞에 메시아의 사명을 하기 위해서 오셨는데 그러한 분은 어떤 분이냐? 깍쟁이 메시아는 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기 어머니 아버지도 메시아가 못 되는데 그 어머니 아버지보다 못한 그런 메시아는 필요없다는 거예요. 부모보다 높아야 합니다. 좋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좋은 것은 뭐냐? 자기 생명을 희생해 가면서 천년 만년 복을 빌어 줄 수 있어야 됩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면 만민의 메시아가 못 됩니다. 그런 내용을 가졌기 때문에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운명하기 직전에 원수를 위하여 눈물로써 '저들의 죄를 용서하소서'라고 했던 것입니다. 부모가 아니고서는 이렇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불한당 같은 자식, 최고의 형을 받아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야 하는 자식이라도 부모의 마음은 천번 만번 용서해 주고 싶은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간에는 용서 못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불한당 같은 자식이 절망 가운데서 회개와 더불어 회생할 수 있는 길이 거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국가의 법이 있어서 그렇지, 부모와 자식간에는 용서 못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통이 되었다면, 그러한 사랑권내에서 그런 사랑을 알고 자란 자식이 불효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절대 불효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의 인연을 가진 부모의 품에서 자라난 자식이 부모 앞에 복종할 수 없는 것이요, 형제간에도 화합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진짜 참다운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아까 말한 것처럼 희생하고 봉사하는 사람입니다. 현재의 자기가 소모되는 것을 보고도 기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소모되는 자신은 소모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수확의 동기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뿌리는 것이 망하는 것이 아니라 흥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추구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자기 일신을 던져야 됩니다. 일신을 뿌리라는 것입니다. 순수하게 뿌리라는 것입니다. 뿌리는 그 자체가 희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 자체는 씨가 떨어지는 것입니다. 자기 부정입니다. 원만하게 자기를 부정해 나간다면 긍정의 새로운 생명력이 발생해 가지고 내일의 수확을 다짐하는 동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사람은 자기를 위주로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지요? 이것은 절대적입니다. 자기 위주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좋은 사람은 전체를 위주로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그 전체의 한계점이 어디냐? 대한민국이냐? 대한민국을 훨씬 넘는 것입니다. 그럼 세계적이냐? 세계도 훨씬 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세계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사상가라든가 위인이라든가 성인들은 어떠한 사람들이냐? 만약에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오 만민이여! 우리 나라의 주장을 들으라'하고 주장하는 사람은 국수적인 나라는 창건했을는지 모르지만 세계 앞에는 공언을 못합니다. 성인의 반열에 동참했다는 사람들은 적어도 세계적인 내용을 가지고 주장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이 아니고는 성인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인 중의 성인은 어떤 사람이냐? 그는 세계적인 것보다도 더 큰 것입니다. 이 땅만 위한 것이 아니라 하늘을 개재시킨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의 지도자나 종교의 도주들이 성인의 왕좌에 올라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도 그렇고, 석가도 그렇고, 공자도 그렇고, 마호메트도 그렇습니다.
최고의 가치를 지닌 성인은 어떠해냐 되느냐? 막연하게 하나님만 소개해서는 안 됩니다. 하늘이 어떻다는 것을 소개해야 됩니다. 하늘 사람이 어떠하고, 하늘의 물질이 어떻고, 하늘의 조직이 어떻다는 것을 세밀히 소개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늘의 생활권, 하늘의 생애권, 하늘의 국가권, 하늘의 세계권이 어떻다는 것을 소개야 되는 것입니다. 그가 주장하는 세계는 자기를 위주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좋아할 수 있는 내용을 위주한 세계입니다. 그런 세계는 자기 위주한 세계가 아닙니다.
여기에서 사람은 본래 자기를 위하여 태어나지 않았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좋은 것을 찾고자 하는 사람은 나를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를 위해서 태어난 사람에게는 좋아하는 내용이 있을 수 없습니다. 개인이 위주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강압적인 탈취 주의가 되는 것입니다.
좋은 사람은 자기와는 관계없이 희생하는 사람입니다. 희생은 생리적인 요구와는 반대로 전부 부정하는 데에서 출발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뭘 말하는 것이냐? 좋은 것은 나를 위주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중심하느냐? 남을 중심삼는데, 백년 동안 살고 마는 그런 것을 위주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남아질 수 잇는 것을 위주하는 것입니다.
그 영원이 뭐냐? 나라는 망하더라도 세계는 남아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세계주의가 국가주의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왜 그러냐? 보다 큰 것이 보다 오래 남아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랑은 하되 대한민국 사람끼리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 만민을 사랑하자는 것입니다. 세계 만민이 같이 살자는 것입니다. 종교인들은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종교인들이 한 가지 발견 못 한 것이 있습니다. '예수 믿고 천당가자'하는 그 목적은 큰 것인데 그 내용은 개인주의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믿고 천당가자 할 때, 예수님이 개인을 위주하여 찾아옵니까? 예수님의 목적은 세계를 찾아오는 것입니다. 세계권내에 나라가 있고 나라권내에 종족이 있고 개인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했지 그 사람과 그 생활을 구하라 했습니까? 여러분이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종교인들은 모두가 목적은 크고 먼데에 두었는데 내용은 전부 다 개인적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천국 가기 전에 세계 만민을 천국에 보내고 가겠다고 해야 됩니다. 그러면 그 종교가 망하겠습니까? 내가 잘되기 전에 자식을 잘되게 만들고 나중에 내가 잘 되어야 되겠다 하는 것이 부모의 사랑입니다. 내가 천국 가기 전에 세계 만민을 천국에 보내겠다고 해야 됩니다.
내가 잘되기 전에 나라를 잘되게 만들고 죽겠다고 해야 됩니다. 그런 사람이 애국자이지요? 내가 고생하더라도 부모를 편안한 길로 가시게 해야 겠다고 하는 것이 효자의 길입니다. 나는 희생하더라도 남편을 위해야 되겠다고 하는 것은 열녀의 길입니다. 그러면 열녀의 길은 뭐냐? 열남이라는 말은 없지요? 이것을 보면 한국말이 계시적입니다. 여자가 잘못하여 여자가 먼저 책임을 해야 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여자가 책임을 다하게 되면 그 다음에는 남자가 해야 할 책임이 남는 것입니다. 이 열남 주의는 통일교회 시대에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야 여편네야, 너는 나를 위해서 태어났지' 하는 사내 녀석들은 다 필요없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절대시하는 데에 선이 존속할 수 있느냐? 존속할 수 없습니다. 자기를 절대시하면 전부 다 도망가는 것입니다. 자기보다 더 큰 것을 절대시하는 데에 선이 달려드는 것입니다. 사적인 것은 망하는 것입니다. 선이 도망가면 악밖에 남지 않으니 심판받게 되는 것입니다. 사적인 것을 주장하면 흥합니까? 망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공적인 것을 주장하면 흥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적인 나는 공적인 것 앞에 어떻게 해야 되느냐? 흡수되라는 것입니다. 개인보다도 가정이 더 공적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형제를 사랑하라, 부모를 사랑하라 하는 것입니다. 네 몸 바쳐서 사랑하라 하고 교육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세상에는 자기 집안을 위해서 돈을 벌고 자기 집안을 위해서 출세도 합니다. 자기 어머니 아버지 형제를 위해서 출세하는 것보다도 종족을 위해서 출세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앞으로 대한민국을 움직일 수 있는 종족은 어떠한 종족이냐? 그 문중에서 아무개 머리가 좋다 하게 되면 문중회의를 열어서 자기 아들보다도 그 아이를 공부시키자 하는 결단된 종족이 나오면 그 종족은 대한민국을 지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됩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면 이론은 거짓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운동이 벌어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통일교회가 그래야 되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통일교회는 망하지 않습니다. 통일교인만 위하고 통일교회만 제일이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제일인 동시에 기성종교도 제일이라고 인정해야 합니다. 형제는 같은 사랑권내에 있는 것입니다.
통일교회면 통일교회, 김씨면 김씨만 위주하면 되겠습니까? 그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 가운데에서 자기 아들보다 더 훌륭한 아들이 있으면 데려다가 자기 아들딸보다 더 사랑해 주고 공부시킬 때, 그 종족은 대한민국의 내적인 종족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종교로 말하면, 통일교회가 앞으로 세계를 통일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는 그 누구도 사랑하지 못하고 있는 오색의 인류를 사랑하느냐 사랑하지 못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사랑하는 데는 개인을 희생시켜서 종족을 사랑하고, 종족을 희생시켜서 민족을 사랑하고, 민족을 희생시켜서 국가를 사랑하고, 국가를 희생시켜서 세계를 사랑하고, 세계를 희생시켜서 하늘땅을 사랑할 수 있느냐? 철두철미하게 그럴 수 있다고 결론지을 수 있으면 이런 운동은 세계적으로 영원히 남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통일교회가 천주주의라는 말을 하게 된 것입니다. 통일교회가 새로운 말을 많이 만들어 놓았습니다. 천주주의라는 것은 세계를 하나의 집으로 만들자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집에는 어머니 아버지가 있어야 하는데, 여기에서 하늘은 아버지요, 땅은 어머니입니다. 그 다음에 형제가 있어야 됩니다. 부모는 천지(天地)이고, 형제는 인(人)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인들의 가는 방향은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선생님도 나 자신을 위해서 움직이면 망하게 됩니다. 밥을 먹는 데 있어서도 나를 위해서 먹으면 망하게 되고, 보는 데 있어서도 나를 위해서 보면 망하게 됩니다. 냄새를 맡는 것도 나를 위해서 맡으면 망하게 되고, 듣는 것도 나를 위해서 들으면 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내일을 위하여, 보다 공적인 것을 위해서 보고 듣고 냄새맡아야 하는 것입니다. 보는 데에도 두 가지가 있습니다. 즉, 사적으로 보느냐 공적으로 보느냐? 냄새를 맡는 데에도 두 가지가 있습니다. 공적인 냄새를 맡느냐 사적인 냄새를 맡느냐?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몸과 마음이 두 목적을 지향한다는 것은 모순입니다. 하나를 부정해야 됩니다. 절대적인 하나의 긍정의 가치를 추구해 나가려면 반드시 하나를 없애야 합니다.
그러면 이 몸과 마음 둘 중에 어느 것이 사적입니까? 「몸입니다」 먹을 것이 있으면 마음은 나누어 먹으라고 하는데, 몸은 눈감고 먹는 거야 하면서 깨물어 버리고는 깨물었으니 할 수 없고 하는 조건을 걸어 가지고 그냥 먹어버리는 것입니다.(웃음) 이것이 생활철학에 있어서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젊은 사람들이 이것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마음은 이렇게 좋은 것을 원하는데, 몸은 왜 그렇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을 정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생명을 다하고, 그 생명과 관계된 사랑을 하게 되면 되어 있습니다.
참은 세계의 끄트머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알겠어요? 참을 찾기는 뭘 찾아요? 다 있는 것입니다. 개발하면 되는 것입니다. 참을 가르치는 선생님이나 대학 교수가 다 필요없습니다. 사실 통일교회도 필요없는 거예요. 여러분이 나를 따르면서 선생님 선생님하고 부르지만, 나보다도 여러분이 더 잘 안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아요? 이런 것은 마음이 다 아는 것입니다.
내가 옳은가, 그른가 하는 것은 3분도 안 걸려서 다 알게 됩니다. 벌써 판결이 다 끝났는데 공판이 무슨 필요가 있어요? 내가 아는 것을 다 이야기해 주고 일면을 다 보여주고 누가 옳느냐 할 때 나 자신이 안다는 것입니다. 압니까, 모릅니까? 좋은 녀석인지 나쁜 녀석인지 알아요, 몰라요? 「압니다」 안다는 것입니다. 전부 다 알면서 사기치지 말라 이겁니다. 이놈의 사기꾼들. 사기가 다른 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까딱하면 사기꾼, 도둑놈이 뛰쳐 나오고 까딱하면 성인, 성자가 뛰쳐 나옵니다. 왈카닥 왈카닥, 여러분이 이 놀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참을 찾아서 출발해야 되겠습니다. 참을 찾아 가야 되겠지요? 남들 다 잘 자는 새벽에 모여서 이게 무슨 짓입니까? 잘 되려고 이 놀음하는 거예요, 못 되려고 이 놀음하는 거예요? 잘 되려고 이러는 것입니다. 이것은 희생이요 소모입니다. 소모 중에도 이런 소모는 없는 것이라구요. 남들은 단꿈을 꾸면서 자고 있을 시간에 무엇 때문에 이렇게 나옵니까? 청파동 여기까지 올라오기도 힘이 들 텐데 무엇 때문에 모여드느냐? 왜그러느냐? 이것이 모두 소모입니다. 무엇을 위해서 소모하느냐 하면 나라를 위해서 소모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를 위해서 소모하면 망하는 것입니다. 정성들이는 데에 있어서도 내일의 나라를 위해서, 내일의 세계를 위해서, 내일의 천국을 위해서 정성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통일교회의 선생님인 내가 50평생을 그렇게 했는데, '아이구 분해라, 아이구 분해라, 아이구 원통해라' 그러겠어요? 나는 지금 몸뚱이 하나밖에 없습니다. '아이구 분해라, 통일교 믿고 병신만 되었구만' 하는 사람은 병신이 되게끔 외롭게 지내 왔기 때문에 병신이 된 것입니다. 주고 나서도 더 못 주어서 눈물을 흘리고, 앞으로 보고 뒷동산을 바라보면서 '저것이 내 살과 같고 피와 같으면 삼천만 민족에게 실컷 줄 텐데, 그럴 수 있는 피와 살을 갖지 못한 것이 한스럽구나' 하면서 주고 나서도 탄식해 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망하려고 해도 망하지 않고, 죽을 병에 걸려도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자들을 보면 '꽃다운 청춘시절 다 넘기고 이게 뭐야? 스물 다섯, 스물 여섯, 스물 일곱만 넘으면 올드 미스로 들어가는데, 통일교회에 들어와 가지고 3년 이상 지나지 않으면 축복을 못 받는다 해서 스물 네 살 때 들어 왔으니 아이구 스물 일곱 살! 이렇게 자기만 생각하게 되면 망하는 것입니다. '서른 살이면 어떻고 마흔 살이면 어떠냐? 내 꽃다운 청춘을 이 민족을 위해서 희생하면 죽어도 한이 없다. 더 못 주는 것이 한이다' 해야 합니다. 이러는 사람의 후손은 망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통일교회 선생을 대한민국 사람이 전부다 욕하지 않았어요? 그런데도 무엇 때문에 선생님을 따라가려고 합니까? 그런 점에 있어서 통일교회가 가는 길은 뚜렷하다는 거예요.
그러면 통일주의는 무엇이냐? 삼천만 민족에게 이 통일사상을 심어주자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이 망하더라도 세계를 위해 심자고 하는 것이 통일주의입니다. 이것이 망할 주의인지 흥할 주의인지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망할 주의입니까, 흥할 주의입니까? 흥할 주의입니다. 앞으로 이상국가를 창건할 수 있는 국민으로 만들려면 어떠한 사상을 지니게 해야 하느냐? 통일주의입니다. 그래야 세계의 것으로 남아지는 것입니다. 보다 큰 것을 위해서….
둘 중에서 더 좋은 것 하나를 갖기 위해서는 나쁜 것 하나는 집어던지게 되지요? 같은 것을 가지고 있던 사람도 바꿔 가집니다. '가정을 가질래, 나라를 가질래?' 하면 미욱한 사람들은 '어이쿠, 가정을 가지지. 내 가정을 가지지' 그럽니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입니다. 나라에도 그 안에 가정이 몇만 개 들어가 있습니다. 또 '세계를 가질래, 나라를 가질래' 할 때 '우리 나라가 제일이니 나라를 갖지'하면 '이 미욱한 자식아! 생각 부족한 자식아! 세계 가운데에는 대한민국이 몇백 개도 들어갈 수 있다'하고 꾸짖지요? 그래요, 안 그래요?
그렇기 때문에 장삿속이라는 것입니다. 장사 중에도 그런 장삿속이 없다는 것입니다. (웃음) 장사꾼들은 이익을 남기면 좋아합니다. 여기 오면 매일 천 원씩 준다면 행렬을 지어서 올 것입니다. 아마 '통일교회 가자' 하면서 청량리 끝에서부터 싸움이 벌어질 것입니다. 다 장삿속입니다. 이런 말을 해서 안 됐지만 별것 아닌 거예요.
종교를 갖는 것도 장삿속인데, 그 장사라는 것이 혼자 잘살자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장사해서 돈 벌면 같이 잘살자는 것입니다. 황인, 백인, 흑인 할 것 없이 모두 합하여 합동 주식회사를 만들자는 것입니다. 서로가 '황인도 좋다. 흑인도 좋다. 백인도 좋다'할 수 있는 주식회사를 만드는 것입니다. 주식회사가 다 같을 수 있습니까? 사람의 얼굴이 다 같습니까? 얼굴은 다르지만 내용은 하나의 결정체입니다. 이 정도 설명했으면 이제 다 알 것입니다.
그러면 참을 찾아서 가야 하는데, 참이 어디에 있느냐? 참이 대관절 어디 있느냐? 어디 있긴 어디 있어요. 내 속에 있지요. 나에게 있는 것입니다. 나에게 있는데 섞여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나는 부패하지 않았는데 사회가 악하고 대한민국이 부패했다고 규탄한다고 데모를 하는데 자기네들은 부패 안 했습니까? 이놈의 자식들. 전부다 반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기 데모부터 먼저 해야 됩니다, 자기 데모. 지금처럼 데모한다고 해서 대한민국이 잘되고 세계가 잘될 것 같아요? 끄덕끄덕하다가는 공산당의 코에 걸려서 그들의 선전에 놀아나 자기도 모르게 함정에 빠져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이 어디에 있느냐 할 때 상대적 세계는 문제 되지 않습니다. 내 속에 있는 참과 거짓의 삼팔선이 문제입니다. 내 속의 삼팔선을 무너뜨리고 해방되어 노래를 부를 때, 대한민국의 삼팔선이 트여 나가는 이상의 기쁨을 노래할 수 있는 주인이 못 되어 가지고는 삼팔선을 쳐부술 수 없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내 속에서 솟구쳐 나오는 해방의 소리가 어떠한 원수의 장벽도 무너뜨리고 남을 수 있는 의기충천한 해방의 권위를 가지고 나타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해방을 찬양할 수 있는 무리가 되지 않고는 삼팔선 해방은 맞이할 수 없으며, 더 큰 삼팔선만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은 자기를 위주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선생님의 생활철학입니다. 좋은 것이 나타나면 그것은 원수입니다. 그것은 나를 걸기 위한 미끼라는 것입니다. 누가 좋은 것을 가지고 나타날 때'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을 통일교회의 것으로, 대한민국의 것으로, 세계의 것으로 남길 수가 없다'하게 될 때는 예외가 없이 망하는 것입니다. 세계든 나라든 뭐든지 다 내것이라고 하면 망합니다. 망하게 되어 있다는 거예요. 그것은 가만 두어도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세계의 것으로 할 때는 가만 두어도 흥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통일교회의 병패가 무엇이냐? 여러분의 사상적인 기원이 자기를 위주로 하는 통일교회관을 꿈꾸는 사람은 통일교회의 원수입니다. 본질적으로 틀렸다는 것입니다. 일을 하고 나서 '왜 나를 몰라주느냐? 갑은 저렇게 해 놓고 난 이렇게 해 놓았는데, 나에겐 왜 이렇게밖에 해 주지 않느냐?' 하고 따지는 사람은 망하는 것입니다. 오래 가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큰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큰 사람은 일하고 나서도 칭찬해 줄까봐 두려워서 그 자리를 피해 가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도망가는 사람이 있으면 잡으라는 명령을 하는 것입니다. 도둑질을 하고 도망가는 것이나 좋은 일을 하고 칭찬받을까 두려워서 도망가는 것이나 도망가는 것은 둘 다 같습니다. 그런 사람 잡으라는 명령도 같습니다. 그러나 내용이 같습니까? 서로 극과 극입니다. 하나는 망하는 것이요, 하나는 흥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서는 이런 것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예수를 사랑하고 어떻게 하는데 그런 많은 것이 필요없습니다. 여러분의 생활환경에서 이 경계선이 문제입니다. 이 경계선에는 하늘이 왔다갔다합니다. 경계선 이쪽으로 가면 성인의 길이요, 그 반대쪽으로 가면 망인의 길입니다. 악당이 가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그런 길을 가고 있습니다. 한 발만 잘못 디디면 곤두박질치는 것입니다. 여지없이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옳은 길을 가라는 것입니다.
우리 통일교회에서 하는 기도의 내용이 뭐냐? 밥을 먹더라도 어제 먹은 밥보다도 오늘 아침에 먹는 밥이 더 가치 있기를 바랍니다. 밥에게 그렇게 물으면 그렇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먹는 사람이 히죽 웃으면 밥도 기분이 난다는 거예요. 여러분이 좋아하면 밥도 좋거든요. 만물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시계를 두고 보더라도 이왕 채워지려면 대통령이나 성인의 손에 채워지고 싶지, 살인 강도의 손에 채워지고 싶겠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같으면 어떨 것 같아요? 살인 강도의 손에 채워지면 아침 저녁으로 얼마나 소름이 돋겠습니까? 시계가 살아 있는 물건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섬뜩하겠어요? 찬 물건에 뜨거운 열이 닿으면 폭발되는 것입니다. 찬 것이 따뜻한 것에 들어가면 파고 들어가 뜨거워집니다. 모든 것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은사에 잠겨 있으면 세상에 원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우주만물이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결론을 지읍시다. 여러분들이 알아야 할 것은 참을 찾아가는 길입니다. 모든 사람이 좋은 것을 바라는 것은 틀림없는데, 세계 최고의 가치, 절대적인 가치의 것은 둘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요? 오직 하나입니다. 오직 하나예요.
여러분 마음은 좋은 것이 있으면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어합니다. 그렇지 않아요? 좋은 것은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것이 나쁜 것이냐? 나쁜 것이 아니라 좋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조금 전에 말한 것과 다르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타락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타락했기 때문에 부정 선상을 거쳐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타락하지 않았으면 여러분들의 세계니 무슨 나라니 하는 것이 없습니다. 자기가 태어난 그 가정이 세계적인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그 가정이 나라의 출발점이요, 종족의 출발점이요, 개인완성의 출발점이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한꺼번에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타락권내로 이것이 떨어져 나갔기 때문에 무슨 후진국이니 선진국이니 수작들을 하는 것입니다. 선진국이면 다 선진국이 되어야지 후진국이 있을 게 뭐냐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타락하지 않았으면 이미 통일된 세계입니다. 이미 이와 같은 세상에 꽉 잠겨 있는 세계라는 것입니다. 교육과 전통이 이렇게 되어 있는 세계이기 때문에 선을 지향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선이 생활의 바탕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본래의 바탕을 잃어버리고 타락의 바탕이 되었기 때문에 오늘날 이런 싸움이 벌어지는 것이고 부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정과 긍정의 교차로에 서 있는 존재는 처량한 존재입니다. 이런 세계는 믿을 수가 없습니다. 아침에는 부정이요 저녁에는 긍정, 이렇게 돌아가다가는 바꿔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활이 그렇지 않아요? 이랬다 저랬다한다는 거예요. 그래요, 안 그래요? 「그래요」 그거 왜 그래요? 이게 한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탈피해야 되기 때문에 참을 추구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 절대적이고 유일한 참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참된 길을 찾아 나간다는 것입니다.
그 본성의 마음은 절대적인 가치의 것은 전부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내 것 만들어 가지고 발길로 차 버리고 천대하자는 것이냐? 내것 만들어 가지고 미워하고 시기하자는 것이냐? 아닙니다. 내 것 만들어서나 혼자 사랑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구나 좋아할 수 있는 것은 하나밖에 없으니 모든 사람이 붙들면 안 되기 때문에 하나님은 전부가 붙들고 좋아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할 것입니다. 그렇지요?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도 큰일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내놓은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 사랑 단지를 가져다가 풀어 놓았다는 거예요. 그것은 불가피한 것입니다. 사랑이 아니고는 화합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끈을 만들어 가지고 전부다 여기에 취하면 맞붙게 되는 것입니다. 좋아한다는 거예요. 이것이 없으면 전부다 타관을 좋아하게 되지요? 그렇지만 사랑줄을 만나면 끈을 달아 가지고 좋아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이래서 만민은 이것으로 인해서 통일의 역사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타관을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자식들은 그 부모를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어합니까, 만들고 싶어하지 않습니까?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통일된 사랑의 경지, 그 사랑이 무엇이냐? 부모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경지는 어떠하냐? 주고도 또 주고 싶고, 주고도 그것이 적어서 부끄러움을 느끼는 사랑입니다. 여기에 화할 수 있는 세계적인 가정이 생기면 천국이 오지 않을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형제를 나라와 바꿀 수 있느냐? 고독단신, 8대독자라 할 때 병신 여동생이라도 하나 있으면 좋겠어요, 안 좋겠어요? 병신 중에서도 눈도 없고 코까지 전부다 병신이라고 할 때 그렇다고 해서 그 8대독자가 나는 '병신 동생 필요없다. 차라리 고독단신이 낫다'고 그러겠습니까? 없는 것보다는 병신 동생이라도 있는 게 나아요, 안 나아요? 낫다는 것입니다.병신 동생이라도 있어야 나도 동생을 가졌다는 말이라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형제를 가진 사람 축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축에 들어가지 못하면 괴롭지요? 형제가 있어야 형제의 사랑이 어떻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을 하는 데에 있어서 얼마만큼 사랑할 것이냐? 거기에 비례적인 사랑을 하느냐, 반비례적인 사랑을 하느냐가 문제입니다.
병신 동생일수록 반비례적인 사랑을 하게 됩니다. 그렇지요? 병신 동생을 사랑하는 그 형은 누구보다도 형제를 사랑할 수 있는 자리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있어야 평등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야 '아하, 불행도 올 수 있는 거구나'하고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곧 사랑은 아닙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에 불과합니다. 통일성과 보편성을 중심삼고 원활하게 해주는 것이 사랑이기 때문에 거기에서 모든 것이 완성으로 끝을 맺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해도 하나님이 섭섭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내 남편은 김 아무개인데 내 남편은 사랑이다 할 때는 김 아무개가 곧 사랑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김 아무개의 사랑이 절대 필요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현재 처해 있는 입장을 보면 참과 거짓의 경계선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현재의 위치가 어떤 위치냐? 이런 입장이 못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가야 할 목적지는 어디냐? 이 인격의 최고의 완성은 어떠한 것이냐 할 때, 만민을 대해서 부모의 사랑을 체득할 수 있는 그런 인격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천세 영원한 역사시대의 추앙받을 수 있는 성인, 즉 왕성인이 되는 것입니다. 성인 가운데에서도 왕성인(王聖人)이 되는 것입니다. (칠판에 쓰심) 이런 말은 잊어버리지 말라고 써주는 것입니다. 무슨 성인이 된다구요? 「왕성인」 왕성인입니다. 하나님은 왕성인이십니다. 그렇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모든 성현과 군자들은 세계적인 내용을 중심삼고 만민을 위한 희생의 도리를 가르쳐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 목적이 어디에 있느냐? 그것은 통일의 세계, 하나의 세계를 중심삼은 절대적인 가치의 기준을 해결짓기 위해서 불가피한 요구였던 것입니다. 사랑을 중심삼고서 만이 가능합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첫째 되는 계명이다'고 했습니다. 누가 지켜야 할 계명이라구요? 우리 인간이 지켜야 할 계명인 것입니다. 그러면 반대로 하나님의 첫째 되는 계명은 무엇이냐? 하나님 자신이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너의 아들딸을 사랑하라. 이것이 하나님의 첫째 되는 계명이니라'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될 수 있는 첩경이 뭐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하겠습니까? 그러니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그 이상으로 보이는 세계 사람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틀림없이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요, 안 그래요?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 만민을 위하여 미치고, 세계 만민을 위해 희생하고, 세계 만민을 위해 자기의 사지백체를 나누어 주고 죽은 사람은 천국 가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일등하게 되면 천국의 왕이 되는 것입니다.
통일교회 문선생이 가르쳐 주는 도리는 통일교회 문선생을 사랑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고 싶은 것을 사랑하려니 선생님으로부터 사랑하는 것을 배우기 위해서, 누룩을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계 사람을 위해서 그들을 사랑하기에 미쳐야 합니다. 이것이 하늘 나라로 가는 길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그런 놀음하면서 살아도 망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은 이 통일교회를 이단 괴수라고 하고 기성교회에서는 죽이겠다고 야단하지요? 오늘 통일교회를 따라오는 사람들이 '아이구 선생님이 가르치는 원리 말씀은 좋지만 위험이 너무 많습니다. 고생하라고 하면 나는 싫습니다' 하고 꼬리를 빼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은 망하는 겁니다. 그들이 통일교회의 선생님이 가는 길을 못 따라가겠다고 보따리 싸서 도망간다고 해도 나는 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망합니다.
그들이 왔다가 보따리 싸서 가는 날에는 밑천을 털어 놓고 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몽땅 빼앗기고 가는 것입니다. 왔다가 갈 때는 그냥은 못 갑니다. 자기 선조로부터 쌓아 놓은 선의 공적은 통일교회의 창고에 들여 놓고 가야 됩니다. 그렇게 하고 나가서 돌아다니다가도 복받을 길이 이 길밖에 없으니까 할수없이 눈이 부예 가지고 또 들어오게 됩니다. 그렇게 되어 있는 거라구요. 내가 여러분보다 몰라서 이런 일을 하겠어요? 일생을 여기에 걸고 욕을 먹으면서도 가는 것입니다. 이 목은 가만히 있지만 사지는 움직입니다. 지금까지 기성교회가 망하게 하려고 하고 대한민국이 망하게 하려고 잡으려 해도, 나는 잡히지 않고 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망하게 하려고 하면 그들이 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살림살이를 생각해야 되겠지요? 하나님이 살림살이하는 방법이 무엇이냐? 욕을 먹는 무리들에게 살림살이를 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무리들만 있으면 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이런 무리들을 망하게 하면 하나님도 망하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해서 안됐지만, 하나님도 장삿속이지요? 하나님이 망하지 않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습니다.
내가 여자들을 축복해 주었더니 '아이구, 선생님이 잘살라고 축복해 주셨는데 우리 재미있게 살자' 하면서 꼬물꼬물 단지도 사다 놓고 살림을 차리고 사는데 그런 것 모두 누구를 위해서 사 놓았습니까? 자기를 위해 사다 놓은 것은 깨뜨려 부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잘하는 거예요, 못하는 거예요? 「잘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대한민국을 위해서, 나라를 위해서 사는 것이라면 선생님도 찬동합니다. 또한 교회를 위해서 사는 것도 좋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을 뒷받침한 것이라면 남아지지만 그렇지 않으면 망하기 때문에 털어내야 하는 것입니다. 뭐 울고불고 하면서 부작용이 있네 어쩌네 그럽니다. 내가 그것을 모르겠어요?
세상 사람들은 통일교회 문선생은 인간의 정서적인 사리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그럴 것입니다. 그렇게 말해도 좋다 이겁니다. 내가 모르긴 왜 몰라요? 너무 알아서 걱정이지.(웃음) 내가 자식에 대한 정을 모릅니까, 아내에 대한 정을 모릅니까, 부모 형제에 대한 정을 모릅니까? 남편에 대한 애정도 다 알고도 남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다 비교하고 계산해 보았습니다. 아무리 부작용이 벌어져도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잘먹고 난 다음에는 부작용이 일어납니다. 트림이 나오고, 또 시간이 좀 지난 후에는 뒤로 가스가 나옵니다. 그것이 싫다고 해서 입 다물고 있으면 죽지, 별수 있습니까? 해가 나고 구름이 있으면 그림자가 생기는 것입니다. 해가 나지 않으면 그림자가 안 생깁니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은 세상이라면 부작용이 없는 것입니다. 태양 빛이 쬐는 세계는 그림자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부작용이 생기는 것은 자연적인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암만 떠들어도 나는 갑니다. 우리는 한다는 거예요.
이 남편들 여편네를 잊어버리고서 눈만 껌뻑거리고 있으면 처량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반대한다고 데모하는 녀석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축복가정 외에는 동원시키지 않으니 누가 반대하겠어요? 내가 축복해 주지 않은 사람은 동원시키지 않았습니다. 축복가정이라면 해야 됩니다. 혹을 떼려고 왔다가 혹을 붙인 격입니다. 부인이 반대하는 남편을 찾아보았어요? 내가 들이댈 것입니다. 보았어요? 찾아봐요? 여기 있다고 하며 나타나는 녀석은 여러분들한테 모진 매를 맞아 죽을 것입니다.
이제 결론을 지읍시다. 선이 가는 길은 어떤 길이냐? 공적인 것을 찾아가는 길입니다. 이제 알겠습니까?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의 말을 들으면 '아이구, 자유사상이 제일이지. 자유를 막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라고 합니다. 자유라고 해서 어머니 아버지 눈알을 빼고 싶다고 빼겠어요? 그것이 자유입니까? 자유라고 해서 남이 자기의 눈알을 빼겠다고 하는데 가만히 있겠습니까? 그것이 자유입니까? 입이 있는데도 말하지 말라고 꿰매는 것이 자유입니까? 자유는 원칙 아래서 성립되는 것입니다. 이 원칙을 알아야 됩니다.
공사에 대한 원칙, 선악을 가려 가야 하는 것입니다. 선을 남겨야 할 인생길에 있어서 선은 공적인 것입니다.
그러면 너와 내가 같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둘 다 망하지 않는 길은 무엇이냐? 그것은 서로 양보하고, 서로 위해 주는 것입니다. 틀림없지요? 그러면 둘 다 망하는 길은 무엇이냐? 서로 물어뜯고 서로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화합할 수 있는 내용을 지닌 것은 남아지는 것입니다. 선한 것이기 때문에 남아진다는 것입니다. 악한 것은 망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서도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마 5:9)"고 한 것입니다. 자기를 위주해 가지고 화평케 할 수 있습니까? 사이가 좋지 않는 두 사람을 화해시키는 사람은 두 사람의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갑이라는 사람과 을이라는 사람이 싸움을 해 가지고 서로 양보할 수 없는 역대 원수라고 할 때, 이들을 화해시키려면 제삼자인 병이라는 사람은 두 사람의 입장을 다 알아야 합니다. 다 알고 나서 화해를 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두 사람의 고충을 다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는 화해를 못 시킵니다.
악한 세계를 선한 세계로 만들려면 악한 세계에 있어서 악에 대한 고충 이상의 고충을 느껴야 합니다. 또한 선을 이루기 위한 고충 이상의 고충을 느끼지 않고는 선을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그런 놀음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런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스스로가 선이 가는 길이 어떤 것인가를 다 안다는 것입니다. 가르쳐 줄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학교에서 학생이 교칙을 따르지 않고 자기들 마음대로 하면 그 학교는 망합니다. 학교를 위하려면 학교의 규칙을 따라야 합니다. 대한민국을 위하려면 대한민국의 법을 따라야 하고, 하늘땅을 위하려면 천륜을 따라야 합니다. 그것을 거슬러 간다면 위할 수 있어요? 하나님도 이 천륜을 따라야 됩니다. 모든 만물이 이 법도에 따라 순응하고 있는데 이것을 파탄시키면 우주가 추방합니다. 자동적으로 망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보다도 가정, 가정보다도 종족을 위해야 합니다. 종족을 위해서 희생하는 가정이 있으면 그 가정은 종족의 족장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틀림없습니다. 희생을 다 했다고 공인받으면 족장이 안 되려고 도망가도 그를 데려다가 족장으로 모신다는 것입니다. 또한 민족을 위해서 희생하는 그런 종족이 있으면 그 종족 앞에 민족을 맡기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종족을 민족의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민족을 중심삼고 주권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그 나라가 찾아지는 것입니다.
그 나라가 세계를 위해서 희생할 수 있는 입장에 서게 되면 이상세계권 내에서의 새로운 세계를 위해서 희생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것은 전통적 사상이 되고 길이길이 남아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원한 것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를 자가 없다는 겁니다. 이것을 거부할 자가 없다는 거예요. 여러분이 이것을 거부하겠어요?
현재 학생들이 구시대 사람이 어떻고 하는데 자기들은 얼마나 신시대 사람이예요? 신시대라는 것이 망할 시대입니다. 그들은 망하는 것입니다. 요즘 히피족들을 보세요. 이런 세상인데 갈 데가 있습니까? 물질을 위주한 세계관을 추구하면 갈 데가 없는 것입니다. 몸은 고깃덩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고깃덩이는 갈 데가 없다는 거예요. 막혀 버린다는 겁니다.
그렇지만 마음세계를 중심삼은 것은 무한히 퍼져 나갑니다. 마음 그 자체가 무한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유한권내에 있고 싶어하지 않는 것입니다. 즉, 제한받게 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마음을 물질세계에 들이박아 놓으니 그 사람에게 희망은 있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래 못 가는 것입니다. 마음은 무한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무리 모신다고 해도 부족함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하겠습니다.
참이라는 것은 세계의 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자체내에 있다는 것을 알고 좋은 것을 그려 가는 입장에서 좋은 바탕을 이루어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생활환경에서 상충되는 일면을 거쳐가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타락에 대한 보응이기 때문에 불가피하다는 것입니다.상충이 없는 그 세계를 향하여 가는 길이 곧 인생이 찾아가야 할 참된 길인 것입니다.
이 참된 길을 가고자 하는 것이 통일교회가 주장하는 길이기 때문에 이 길을 가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수를 위하여 소수를 희생시키고, 공적인 것을 위하여 사적인 것을 희생시키는 것은 당연지사입니다. 이것은 의당 그래야 합니다. '내가 의당 그래야지' 하면서 갈 수 있는 사상적인 바탕을갖고 있는 사람들은 참된 세계의 참된 자리에서 사는 사람이 틀림없습니다. 그러한 자리에서 관계맺고 사는 사람은 그 결과가 자기와 관계맺는 것이요, 그 내용은 영원한 세계의 소유권을 결정할 수 있는 동기가 된다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버님, 이 아침, 당신의 자녀들을 긍휼히 보시옵소서. 저희의 마음에 그려 가던 그 길은 순수한 길이 아니었사옵니다. 거기에는 슬픔과 곡절과 몰림의 환경이 남아 있사옵니다. 저희들이 가야 할 순수한 길은 나 혼자서 갈 수 있는 길이 아니라, 당신이 협조해야 갈 수 있는 길인 것을 아옵니다. 그런 부모를 아는 자식이 있다 할진대 그런 자식이 눈물짓는 자리에는 부모의 가중된 눈물이 가해진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수 없사옵니다.
그러한 자리일수록 결심할 수 있는 자리요, 그런 자리에서부터 자기의 생명을 내놓고 결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아는 사람은 망하는 세상에서도 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저는 아옵니다.
이런 사람의 생활 밑바탕에는 당신의 후대하신 사랑이 흐르고 있는 것이요, 아무것도 아니고 잃어버린 것과 같은 결과지만 만사의 인연을 결부시킨 아버지의 놀라우신 승리적 터전과 닦여져 나온다는 것을 알게 되옵니다.
이 길은 자기만이 사는 것이 아니라 후대 만민에게 해방의 기틀이 된다는 것을 생각할 때, 생애 노정에서 이와 같은 은사의 자리에 선 것을 자기 스스로 환호하며 감사드려야 할 통일의 무리들인 것을 알아야만 되겠사옵니다.
이 아침에 저희들은 참을 찾아가는 길이 다른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 앞에 있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여기에는 자신이 비장한 마음으로 해결을 지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한 부분은 비수를 가해야 되고, 한부분은 끌고 가야 할 처량한 행로가 있는 것을 알게 될 때, 여기에 눈물과 고통과 서러움이 가중된다 하더라도 하나는 파괴되고 다른 하나는 여기에 건설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내일의 힘찬 자아를 발견하고 미래의 행복의 터전에 영원히 인연맺기 위한 스스로의 터전이 오늘의 이 현실적 기반인 것을 알고 그것을 무한히 가치있게 찬양할 수 있는 무리들이 되게 허락하여주시옵소서.
아버지여, 인간은 자기도 모르게 태어나 자기도 모르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가는 그 길이 절망과 원한의 길이어서는 안 되겠사옵니다.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는 길을 가야만 자기가 태어난 것을 찬양할 수 있는 것이요, 산 것을 찬양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아버지, 그런 세계적인 환경을 어서 빨리 만들어야 되겠사옵니다. 이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첨단에 서서 이것을 수확하기 위해서 싸우는 무리가 세계의 어떠한 무리 가운데에도 없었사오나, 오늘날 그것을 하기 위해 새로운 무리로 등장한 것이 통일의 무리인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저희들이 절규하고 울부짖으며 바라보는 세계는 오늘날 이 땅 위의 세계가 아니라, 당신의 사랑을 중심삼고 만민이 공히 하나될 수 있고, 스스로의 가치를 자랑하며 즐거워할 수 있는 세계입니다. 오늘 저희들은 그러한 세계를 향하여 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단 한 분밖에 안 계신 아버지를 부모로 모시는 이 자리는 전체 가치의 내용을 좌우로 결정할 수 있는 사랑의 인연을 중심삼고 연결될 수 있는 부자의 인연의 사랑을 받고 있는 자리인 것을 알았사옵니다.
이 자리를 흠모하면서 손상된 모습으로 참가하지 않겠다고 하며 미리 더러운 것을 청산짓고, 그 날을 깨끗이 맞이하기 위하여 어떠한 어려움과 수고의 행로가 있다고 하더라도 극복하며 감사히 가겠다고 몸부림치는 아들딸이 있거든, 아버지여, 그들에게 굳건함과 강함과 담대함을 허락하시옵소서.
그들이 생활을 부정하는 일이 있더라도 그 길을 넘을 수 있는 자신을 갖게 하여 주시옵고, 생활을 부정하는 일이 있더라도 용맹으로써 타개할 수 있는 힘을 가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부탁드리옵니다.
오늘 이와 같은 시간을 허락하여 주심을 감사드리옵니다. 전국에 널려 있는 당신의 자녀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이들이 미래의 계승자라서, 미래의 상속자로서 과거와 현재의 새로운 지축을 대신할 수 있게 주체적인 형제들로서 긍지와 가치의 내용을 가지고 흑암된 세상에서, 암흑의 환경에서 보람된 삶의 길을 개척할 수 있는 무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나이다.
세계에 널려 있는 자녀들을 기억하여 주시옵고, 앞으로 올 소망의 자녀들을 축복권내에서 양육하시어서 이들이 통일의 족속과 통일의 민족과 통일의 국가와 통일의 세계를 형성할 수 있게끔 아버지께서 직접 영광된 자리에 서시어서 주도하여 주시옵기를 재삼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의 성호 받들어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무한하신 자비의 아버지여, 이 아침, 어리고 철부지한 당신의 자녀들 위에 영원히 계시옵고, 새로운 생명의 인연을 흠모하는 자녀들 위에 후대하신 생명의 은사로 저희들을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악하고 험한 세상에서 성별된 자체로서, 선에만 속할 수 있는 아들딸로 양육하시옵고 주관하시어서 승리의 한날을 맞이하게 하여 주시옵기를 재삼 부탁드리옵니다.
높고 위대하신 당신의 영원한 사랑이 이들과 길이길이 같이할 것을 바라오며, 참부모의 성호 받들어서 축원하였사옵나이다. 아멘.
아버지, 저희들은 고난과 역경 속에 지금 가고 있는 수고의 행로와 앞으로 다가올 시련과 핍박의 행로를 극복하고 가야 할 자신들인 것을 생각하면 할수록 아버님과 인연을 맺을 수 없는 자신이 되는 것처럼 불쌍한 것이 없다는 것을 느껴야 되겠사옵니다.
부모는 사랑하는 자식을 바라보며 자식의 소원이 그의 일생을 통하여 이루어지기를 바라옵니다. 이것이 변함없는 부모의 사랑이라는 것을 저희들은 아옵니다. 하오나 그와 같은 부모의 사랑 가운데서 자라고 있는 자식들은 부모가 소망의 마음을 가지고 자기들을 위하여 생활을 염려해 주신다는 것을 잘 모르고 있듯이, 저희들도 아버지께서 무관심했던 자신인 것을 느끼게 되옵니다.
저희 생애노정은 물론이요 미래의 생애노정까지, 더 나아가 저희뿐만 아니라 후손에게까지 세계를 통할 수 있는 인연을 중심삼고 크고 높으신 당시의 소원이 같이하고 있음을 알고 사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 과거에서부터 수고의 행로를 개척해 나오신 아버지요, 현재의 고심 가운데서 승리의 한 기점을 모색하고 계시는 아버지요, 다가오는 시간 시간에서 미래의 승리의 기점을 찾고 계시는 아버지인 것을 알고, 마음을 다하여서 그 아버님의 심정과 일치화시키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 저희들은 무심했사오나 아버님은 무심할 수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되옵니다.
외로운 가운데 내일의 희망이 절벽에 부딪쳐 하루하루를 고난 속에서 살더라도, 그 배후에 잊을 수 없고 버릴 수 없는 사연과 미래의 소원을 붙들고 걸어오시는 한스러운 아버님이 계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는, 그 사람은 당신이 기뻐하실 수 있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요, 그렇지 못한 사람은 당신 앞에 슬픈 결과를 가져 온다는 것을 저희들이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이 아침 여기에 참석한 자녀들을 긍휼히 보시옵소서. 저희들은 아버지께서 부르신 뜻 앞에 어떤 입장에 처해 있는 모습인가 하는 것을 알아야만 되겠사옵니다. 아버지, 이 자리에 모인 소수의 무리들, 이들은 각자가 처해 있는 위치도 다르고, 앞으로 거쳐 나가야 할 인연도 다르다는 것을 저희들이 알고 있사옵니다. 내가 남보다 못한 자리에 있다고 하여 낙심할 바도 아니요, 현재 남보다 좋은 자리에 있다고 해서 자랑할 바도 아니라는 것을 저희들은 알아야만 되겠사옵니다.
역사는 상호 좌우로 순환하면서 발전한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오늘의 기쁨은 영원한 기쁨이 될 수 없고, 오늘의 슬픔 또한 영원한 슬픔으로 고착되지 않는다는 것을 느껴야 하겠사옵니다. 그러므로 저희들은 생애노정에 있어서 아버님의 슬픔과 염려와 더불어 동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되겠사옵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는 결코 불행한 사람이 아닐 것이옵니다. 그 사람의 마음 가운데는 언제나 아버님께서 같이하시는 것이요, 그 사람의 생활을 언제나 아버님께서 붙들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사는 저희들이 되어야만 되겠사옵니다.
아버지, 이 아침 여기에 모인 당신의 자녀들을 굽어살피시옵소서. 당신이 부르고 싶은 마음대로 부르시옵소서. 당신께서 소망의 마음으로 사랑하는 내 아들아, 내 딸아 부를 수 있는 자녀들이 있다 할진대는 이 자리는 결코 외로운 자리가 아니옵니다. 이 자리는 황무지와 같은, 음산한 사탄의 골짜기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여기에는 새로운 희망이 깃들 것이요, 아버지의 은혜가 맺혀질 것을 아옵니다. 이와 같은 입장에 처해 있는 한 식구와 친분을 갖고 있는 사람들도 그로 말미암아 당신과 인연을 맺을 수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저희들은 알아야만 되겠사옵니다.
아버지, 저희들은 이 아침에 적나라한 저희 자신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발견해야 되겠습니다. 과연 아버지가 나를 사랑했느냐 안 했느냐, 오늘 이 시간에도 아버지께서는 나를 사랑하고 있느냐 하는 것을 느껴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과연 미래의 내 행복을 위하여 아버지께서 가호의 손길로 같이하고 있는가, 오늘보다도 더 큰 은사의 손길로 같이할 것인가, 내일의 소망의 터전을 중심삼고 아버지께서 나를 크게 고대하고 계시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비록 오늘과 나 자신이 부족할지라도 낙심하지 않고 내일의 소망의 가치를 그리면서 희망에 벅찬 하루의 생활을 더듬어 나가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한 아들딸이 있다 할진대 그에게는 남이 알지 못하는 전진이 있을 것이요, 그는 오늘 갖지 못하는 인연을 가질 것이옵니다. 또한 그는 내일의 창건자로서 아버님과 더불어 동행할 수 있는 거룩한 자녀가 될 것이옵니다.
아버지, 이 자리에 부복한 저희들을 긍휼히 보시옵소서. 마음속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마음이 당신의 방향과 일치되게 하시어서 개인은 물론이요, 나라와 세계와 뜻이 지향하는 목적지와 일치되게 하시옵소서. 그런 자리에서 당신을 모셔야 되겠사옵니다. 생활을 수습하기 위해 책임을 진 자리가 아무리 어렵다 하더라도 원망하지 말아야 되겠습니다.
아버지, 저희 각자를 친히 지켜 주시옵소서. 저희들은 알지 못하였지만 저희들의 배후에는 지금까지 지켜 주신 아버지의 사랑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또한 저희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도 아버지께서 지으신 만물의 혜택권내에서 신세를 졌기 때문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부모의 보살핌 밑에서 나라의 국민으로서 살아온 자기 자신을 다시 한 번 돌아보고 앞으로 자기가 가야 할 행로에서 뜻과 더불어 결과적인 인연을 찾아 나갈 수 있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되게 축복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은 1970년 12월 20일, 이달 들어 세번째 맞는 안식일이옵니다. 이해도 다 기울어 가고 있사옵니다. 남은 열흘 동안에 저희들은 새로이 반성해야 되겠고, 앞으로 남아진 날들을 저희들이 지켜야만 되겠사옵니다. 1970년도는 남들은 알지 못하지만 당신의 뜻을 중심삼고는 지극히 귀한 해였습니다. 하오니 저희들은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내적 인연이 이해에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저희들은 정초에 '승리적 통일전선'이라는 엄청난 과제를 걸어 놓고 지금까지 지내왔습니다. 저희들은 먼저 내 몸과 마음이 하나될 것을 바라고 나왔습니다. 예수님이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하고 말씀하신 것처럼, 무엇에도 비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 생명은, 사탄세계를 통하여 빚어진 것이 아니라, 당신이 수고한 복귀의 터전 앞에 불리워진 아들딸의 가치를 두고, 무한한 영광 가운데에서 자랑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이러한 아들딸의 가치를 두고 말하는 것임을 아옵니다.
저희들은 그러한 가치를 지닌 모습을 그리워하면서 이 자리까지 나왔사오니, 아버지여, 각자 불러서 일으켜 주시옵소서. 이 아침을 다시 한번 마음 깊이 새로이 약속하는 계기로 삼게 해 주시옵소서.
저희들은 과거를 반성하고 현재를 직시하면서 미래의 개척자로서의 소명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아들딸이 되겠다고 아버지께 새로이 다짐하는 이 시간이 되어야만 되겠습니다. 세월은 덧없이 흘러가나 그 흘러가는 세월 가운데에 남아지는 천륜의 가치와, 무한하신 아버지의 사랑과 더불어 인연맺을 수 있는 인격을 추구해야 된다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저희들의 모든 것을 아버지 앞에 바쳐 드리는 이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당신께서는 지금까지 사랑으로 저희들을 지도해 나오셨사옵기에, 저희들은 무한히 후덕하신 당신의 사랑권내에 있는 이 자리가 귀한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또한 이 자리에 있는 저희들의 마음 가운데에 아버지께서 바라시는 소망의 한계점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저희들은 어떤 자리에 처해 있더라도 그 한계점을 중심삼아 오늘의 생활과 내일의 생애를 준비하고, 또한 그 자리가 어떤 자리인가를 직시하면서 스스로 분별하고 스스로 개척하여 나가는 참다운 아들의 모습, 딸의 모습을 갖추어서 아버지 앞에 바쳐질 수 있는 생축의 제물들이 되어야만 되겠습니다.
아버지, 1970년 12월 20일, 이날은 뜻을 중심삼고 전국에 널려 있는 당신의 딸들이 새로운 개척지를 향하여 출발하는 날이옵니다. 하오니 저희들은 남이 모르는 가운데 뜻을 염려하고 아버지와 깊은 사연을 나눌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 아침, 남들은 어떠한 자리에 있다 하여도 나는 당신이 명령하시는 곳을 향하여 가겠다고 스스로 마음과 몸을 준비하는 사람이 있거든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당신은 언제나 외로운 자리에서 개척자의 실적을 거두어 오신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남 모르는 가운데 눈물 흘리며 아버님을 염려하는 마음을 갖고, 그 생활을 스스로 책임지며, 죄없는 모습들이 죄 있는 자들을 대신하여 아버지를 위해 정성들이며 나가는 그 길 앞에는 당신이 소원하는 천국이 그들과 같이하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그럴 수 있는 자리에서 뜻을 위하겠다고 다짐하는 당신의 아들딸이 있거든,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후덕하신 당신의 사랑이 이 자리에 임하여서 당신께서 소원하시는 그 세계를 이루어 찬양할 수 있는 하늘 나라의 충신 충녀들이 될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더우기 당신의 사랑하는 딸들이 가정을 비우고, 자녀들을 떼어 놓고 일선에서 뜻을 품고 싸우고 있사오니, 그들 위에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지금까지 자기 자신이 어떤 자리에서 아버님을 모셔왔는지 스스로를 완전히 알 수 있는 때가 왔습니다. 남편을 사랑하듯이, 자녀를 사랑하듯이 아버님을 사랑하였는가를 스스로 저울질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그들은 아버님의 사연을 중심삼고 눈물지어야 겠습니다.
남편이 그리울 적마다, 예수님을 중심삼고 신랑 신부의 재회의 한 날을 소원하시던 아버님의 심정을 체휼하게 하여 주시옵고, 자녀들이 그리울 적에는 6천년 동안 자녀를 그리워하면서 찾아 나오신 아버님이 계시다는 것을 망각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오늘의 내가 있는 것은 역사를 지탱시키고, 역사를 재건시키기 위하여 있는 것임을 깨닫게 하여 주시옵고, 아들딸을 품고 남편을 모시면서 살지 못하고 이런 자리에 서 있는 것은, 나라를 잃어버린 망명객의 아내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잊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그 나라를 찾아야만 남편과 안식할 수 있는 것이요, 자녀들이 무한한 희망 가운데서 자랄 수 있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에덴 동산에서 해와가 간곡한 사모의 심정을 가지고 당신을 향해 아버지라 부르지 못할 사연이 있는 것을 아오니, 이번 기간을 통하여 당신의 사랑하는 딸들이 눈물어린 사모의 심정에 사무쳐 아버지라 부를 수 있고, 아버지의 그 깊은 심정을 더듬어 살필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 누구도 갖지 못하는 감사의 심정, 그 누구도 갖지 못하는 흠모의 심정으로 흘리는 눈물이 있다면 그 눈물은 당신의 위로를 받을 수 있는 눈물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또한 외로운 모습이 있거든 당신이 찾아오셔서 자비와 긍휼의 위로를 베풀어 주실 수 있는 딸의 자리에 서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럴 수 있는 아내, 그럴 수 있는 어머니의 자리에 선 딸들이 있거든 당신이 부모의 입장에서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그 자리가 위로할 수 있고 위로받을 수 있는 자리가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1970년도는 다 기울었습니다. 1971년도가 저희 앞에 다가오고 있사오니, 이제 저희들이 70년대를 새로이 출발하여 이 10년간을 어떻게 당신께 바쳐 드릴 것인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해야 되겠사옵니다. 그리하여 슬펐던 1960년대를 회고하면서 기쁠 수 있는 1970년대를 맞이해야 되겠사옵니다. 하오나 저희들이 기쁘기 전에 그 기쁨을 아버지 앞에 돌려드리는 마음으로 효성을 다하겠다고 몸부림치는 통일의 무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기쁨의 때가 왔다고 자기 자신을 단장하고 자기 자신을 높일 것이 아니라, 오직 아버지의 나라와 아버지의 세계를 단장하고 아버지를 단장시켜 드리기 위해서 자신의 피곤함도 잊은 채, 이것이 내가 바라던 소원이라고 하며 아버님을 높이고 모든 것을 아버님을 위하여 바치며 감사할 수 있는 효자 효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니다.
가중되는 채찍 아래서, 눈물이 연결되는 자리에서 마음을 졸이시던 당신의 사정을 다 잊어 버리고, 소원하시던 천국, 승리의 한날을 맞아 당신을 모시고 찬양할 수 있는 저희들이 되어, 아버지와 더불어 기뻐할 수 있고 아버지를 위로해 드릴 수 있는 승리의 70년대가 되어야만 하겠습니다.
아버님, 특별히 이 민족을 지켜 주시옵소서. 민족을 위하여 사명을 다하지 못했던 유대교, 이스라엘 나라를 대신하여 예수님의 일족이 거친 슬픔과 비애의 운명길, 십자가의 행로, 있어서는 안 되었던 탄식의 행로를 걷어차고, 이 한민족이 수많은 종교인들과 하나되어 소망의 천국을 향하여 승리적인 제 3 이스라엘권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이러한 엄청난 뜻을 아는 통일의 무리들은 강하고 담대해야 되겠습니다. 여기에서 새로운 결심을 해야 되겠습니다. 여기에서 새로운 자아를 다시 한번 발견해야 되겠습니다. 하오니 내일의 건설자로서 가져야 할 위신을 잃지 말게 하여 주시옵고, 당신의 상속의 인연이 같이한 거룩한 이 시간임을 잊지 말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여, 이 시간을 지켜 주시옵소서. 이곳을 향하여 기도하는 수많은 자녀들이 있사오니 그들 위에도 당신께서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수많은 나라의 자녀들이 아시아의 일각에 있는 한국을 향하여 기도하고 있는 줄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니 이 자리가 얼마나 두터운 자리인가를 저희들은 느껴야 되겠습니다. 세계에 널려 아버지를 부르는, 사무친 심정과 더불어 본향 땅인 한국을 그리워하면서 눈물짓는 당신의 자녀들을 지켜주시옵소서.
개척자의 외로운 길을 가고 있는 당신의 자녀들도 있사오니, 당신께서 외로울 때 친구가 되어 주었던 그 사연과 더불어 그들을 지켜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이 길을 개척하는 과정에서 당신께서 지켜주신 은혜를 가치화시켜서 살아계신 아버님을 증거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본부에 있는 무리들이 빚을 져서는 안 되겠습니다. 정성을 들이는 그들 앞에 부끄러운 조건을 남기는 수치스러운 무리들이 되어서는 절대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이 자리를 지키고 이 자리를 거룩하게 만들 수 있는 자신이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임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조그마한 행동 하나라도 아버지의 그 소원 앞에 거슬리지 않게 조심하고, 아버님을 모신 사람으로서 말 한마디라도 예법을 갖춘 말을 해야 하겠습니다. 생활 전체가 당신을 모시는 사랑의 아들이요 사랑의 딸이라고 자랑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생활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옵고 원하옵니다.
이 시간도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기를 바라오며, 오늘 하루도 아버지의 거룩한 뜻 가운데서 보호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옵니다. 모든 말씀 참부모의 성호 받들어서 아뢰었사옵니다. 아멘.
이 세상에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한국에만 하더라도 3백만 신도가 있다고 말을 합니다.
예수님의 뜻은 하나이기 때문에 그를 믿는 사람들도 그의 뜻과 더불어 하나되어야 합니다. 아울러 예수님이 바라던 그 나라도 그를 믿는 사람들이 바라는 나라가 되어야 할 것이며, 예수님이 소원하던 그 세계도 역시 그를 믿는 사람들의 소원이 되어야 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에 소원하던 나라와 세계가 있었을 것이고, 또 하나님을 모시고 살고 싶은 생활환경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생활환경은 예수님이 이스라엘 나라에서 30여년간을 살던 그런 환경이 아닌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그 환경에서 그냥 그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그 환경을 거쳐 나가 새로운 소망의 터전이 될 수 있는 새로운 환경을 그리워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러한 생활환경을 개척하기 위해서, 그 당시의 생활환경과는 반대되는 행동과 반대되는 선교 활동을 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 당신의 고착된 사회 환경에서 자리잡고 살기 위한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당신의 환경을 혁신하고 내일의 소망의 터전이 될 생활환경을 갖추려고 했던 예수님이었던 것을 우리들은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은 언제나 외로운 생활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눅 13:34)"하는 말씀을 통해 보더라고 그 당시의 예수님의 환경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 당시의 이스라엘 나라와 하나님을 신봉하는 유대교의 소망은 메시아를 맞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입장에서 예수님을 소원의 결실로 맞아들여야 할 유대교와 이스라엘이 예수님의 생활환경과는 하등의 관계도 없는 입장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거기에서 벌어지는 환경이 처참하면 처참할수록 그 환경은 예수님에게 위안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일의 개척자인 예수님 앞에 큰 짐이 되었던 것이요, 어려운 환경을 타개하기 위한 내적 결의를 다짐하지 않으면 안 될 내적인 고충의 환경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입장에 있던 예수님이기에 자기 일신의 행복을 바라는 그러한 기도를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에 예수님이 살던 환경, 즉 로마의 속국으로 있는 이스라엘 나라와 유대교를 예수님은 소망의 터전으로 삼지 못하고 안위의 한 터전으로 삼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내심으로 몸부림치며 결의했다 할진대 그 내용은 현재 환경을 어떻게 헤쳐 나갈 것인가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때의 환경을 타파해 버리고 미래에 상속시켜 줄 수 있는 새로운 터전을 거기에 제시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그 당시의 예수님의 생활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예수님은 이스라엘을 속국으로 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박해하고 피를 빨아먹는 로마의 악정권과 지도자 입장에 있었던 유대교의 교법사들에 대해서 제어할 수 없는 분함과 반항의 마음이 폭발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뿐만 아니라 유대 나라를 다스리고 있던 모든 족장들에 대해서도 어떤 미련을 갖고 대한 것이 아니라, 어느 한 계기에 그들을 모두 타파해 버리고 후손들에게 새로운 환경을 물려주기 위한 터전을 마련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새로운 내일의 환경을 개척하기 위하여 순간 순간 내적 결의를 다짐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성서의 기록으로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철이 들면서부터 모든 생활환경에서 혁명을 해야 된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의붓 아버지인 요셉과 마리아를 중심한 그 가정이 예수님이 소원하던 가정이 되지 못했기에, 그 가정에서 부모를 대하는 예수님은 안위의 심정을 갖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어렸을 적부터 내적인 고충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마리아나, 요셉, 혹은 요셉에게서 태어난 그의 동생들을 통해서라도 안위받을 수 없었고, 부딪치는 모든 일들이나 생활 환경을 통해서도 안위받을 수 없었습니다. 때문에 아무리 자신의 가정이라 해도 타파해 버리고 새로운 혁명의 기준을 제시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느꼈던 것입니다. 그러한 책임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예수님인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됩니다.
개인적으로는 부모를 모신 가정이요, 어릴 적부터 대해 온 사회요, 교회요, 이스라엘 나라였지만, 예수님에게는 안위의 마음을 가질 수 없었고 소망을 둘 수 없었던 이스라엘 나라요, 유대교요, 가정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환경에 몰리면 몰릴수록 이것을 밀고 나가기 위한 힘이 필요하고, 자극이 필요하며, 결의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힘과 자극과 결의를 어디에서 보급받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것들을 보급받을 수 있고, 스스로의 자각과 더불어 내적 의지의 기반, 그리고 힘의 기반을 어떻게 유지시키느냐 하는 것이 예수님 자신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목수일을 하는 요셉의 조수로서, 생활을 협조하는 협조자로서 살아 나온 예수님의 30여 년의 생애는-예수님은 비록 묵묵히 입을 다물고 사는 초라한 모습이었지만-남이 알지 못하는 내적 결의를 다짐한 생애였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예수님은 그가 바라보는 이스라엘 나라는 이런 나라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몇 번이고, 몇백 번이고, 몇만 번이고 다짐했던 것입니다. 이런 숨은 준비기간이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이스라엘 나라뿐만 아니라 부패한 유대교를 바라보면서도 저들과 대결하여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던 것입니다.
오직 때가 오기만을 바라며 남모르는 가운데에서 내적인 정성을 다하던 준비 기간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가정이 협조하지 않을 것을 생각했을 것이며, 또한 종족은 물론이요, 민족 국가 전체가 반대할 것이라는 것도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셉의 조수로서 생활하는 가운데 어려움이 가중되어도 그 가중되는 어려움은 예수님에게 문제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오직 이스라엘 나라와 유대교를 혁신하고, 이스라엘 민족이 중심이 되어야 했던 축복받은 요셉 가정의 모든 비행을 타파해 버리고, 새로운 민족과 더불어 새로운 국가를 창건하고 새로운 세계를 창건하는 것이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런 세계를 마음으로 바라면서 예수님은 참기 어려운 시간 시간들을 보내며 준비하고 다짐하며 나갔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됩니다.
예수님은 까뀌질이나 대패질, 혹은 끌질을 하면서도 한낱 나무토막을 만지는 일만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모든 도구를 통해서 하는 일자체를 이스라엘 나라를 대신하여 앞으로 이루어질 소망의 세계, 소망의 나라, 소망의 교회를 만든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는 일은 비록 나무를 깎는 일이요, 나타난 환경은 처참한 환경이라 할지라도 그 일자체는 거룩한 이스라엘 나라와 유대교를 대신하여 정성들이던, 이런 기간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30년 준비 기간은 덧없이 흘려 버린 기간이 아닙니다. 누구보다도 심각한 기간이었습니다. 뼛골에 사무치는 슬픔의 교차로에서 다짐하던 기간이요, 부모 앞에 사정도 못한 채 땀을 흘리며 묵묵히 일하는 자리에서 다짐하던 기간이었습니다. 어려움이 가중되는 환경과 부딪칠 적마다 그 이상의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도 민족과 세계를 개척하기 위해 이것과 대결해나가야 할 자신이라는 것을 발견하는 둘도 없는 귀한 기간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처한 환경은 하나님께서 바라보실 때 기뻐하실 수 있는 환경이 이었지만 예수님의 내적인 생활태도와 마음으로 결의하는 그 자체에 대해서 하나님은 미래의 모든 소망을 걸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 자신의 입장이요, 예수님이 생활하고 있던 환경인 것을 알아야 됩니다.
예수님에게는 목수의 조수로서 일하는 그 자체가 생활의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그 일을 통해서 이스라엘 나라와 유대교를 혁신하여 바라던 새로운 나라를 이루겠다고 다짐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다짐과 목수일과는 상관이 없었지만 그 일을 통해서 내적인 것을 다짐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 일도 어여삐 볼 수 있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는것입니다.
예수님은 눈을 뜨는 순간부터 잠자리에 드는 순간까지 어느 한때도 이스라엘 나라와 유대교를 잊어본 적이 없었고, 이스라엘 민족을 대신한 요셉 가정이 뜻 앞에 일치되지 못하고 배치(背馳)된 입장에 서 있는 것을 염려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단 한 시간이라도 뜻을 잊은 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 수없이 부딪쳐 오는 어려움은 어려움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건국하고 유대교를 혁신해야 할 새로운 시대를 위해서 자신의 힘을 배양할 수 있는 하나의 동기와 자극이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내심으로 그리던 이스라엘 나라와 유대교, 그 이스라엘 나라와 유대교를 수습하기 위해서 제자들을 규합하던 예수님의 진지한 태도를 그 당시에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배에서 그물을 깁고 있던 베드로에게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 4:19)"고 말씀하여 베드로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지만, 예수님은 단지 베드로 한 개체를 두고 부른 것이 아닙니다. 그를 바라보면서 이스라엘을 그리워하며 불렀던 것이요, 그를 바라보면서 유대교를 회상하며 불렀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를 부른 것은 유대교를 사랑하고 싶고 이스라엘 나라를 사랑하고 싶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를 부른 목적은 미래에 남아지지만 부름 그 자체에는 유대교와 이스라엘 나라를 대신하여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불렀다는 사실을 그때의 베드로 자신은 몰랐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은 개인의 생활을 중심삼은 내용이 아닙니다. 내가 살아야 할 나라는 이런 나라가 아니다, 내가 찾아야 할 교회는 이런 교회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예수님이었습니다. 즉, 그 시대의 환경으로부터 환영받는 교회가 아니고 그 시대의 환경에 안주하는 이스라엘 나라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교회와 새로운 이스라엘 나라를 바라고 있었던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관점에서 제자들을 교육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있음은 오늘의 이스라엘 나라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요, 부패한 유대교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온 것은 현재 교회의 한 일원으로서 온 것이 아니다. 나는 미래의 소망하는 이스라엘 나라와 유대교와 요셉의 족속을 위해서 있다'는 것을 어느 한 순간에도 잊은 적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관점에서 말씀을 했고, 그런 감정을 제자들에게 느끼게 해주려고 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모시고 있던 제자들은 그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동문서답하는 생활을 계속해 나갔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나라를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면 간절할수록 유대교를 혁신시켜서 아버지께서 기뻐할 수 있는 제단으로 만들 것을 다짐하였습니다. 그럴수록 예수님의 내심은 그 누구에게도 비할 수 없이 초조했을 것입니다. 그러한 예수님의 안타까움을 당신의 무지몽매한 제자들은 알지 못하였습니다.
성경 가운데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이 문답한 내용을 보더라도 제자들의 목적이라든가, 생활환경이 예수님과 상충된 것이 많이 있었음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요한의 형제들은 예수님을 중심삼아 가지고 자기들이 출세할 것을 말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얼마나 기가 막혔겠습니까? 혁명의 기치를 들어 현재의 입장을 폭파시키지 않고는 바라던 새로운 이스라엘 나라를 형성할 수 없다는 것을 느끼고 있는 예수님이 자기들의 출세를 꿈꾸는 그들을 바라볼 때에 얼마나 기가 막혔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한 제자들을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예수님은 외로움에 사무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물론 요셉 가정에서 서러움을 겪었을 때도 억울하였지만 소망의 뜻을 펴기 위한 하나의 동지로, 하나의 위안자로 불러서 키워 나온 제자들의 그러한 모습을 바라보게 될 때는 더 기가 막혔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3년이라는 기간 동안 그들이 행하여야 할 모든 시범을 보였던 것입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면서 서로서로 사랑하라고 권고하는 장면은 얼마나 기가 막힌 장면입니까?
베드로는 베드로 나름대로, 다른 제사들은 그들 나름대로 자신들을 중심삼고 예수님을 생각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여기에서 열두 파로 갈라진 것을 느낀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래 가지고는 이스라엘 나라를 새로이 세울 수 없고, 유대교를 새로이 형성할 수 없다는 것을 느꼈고, 그러한 것을 느끼면 느낄수록 대하는 사람들이 안위의 대상이 아니라 기가 막히게 하는 비참의 대상이었다는 것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 적마다 예수님은 '내가 베드로 야고보 등을 사랑하는 것은 어느 개인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나라, 유대교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다'라고 몇 번이고 몇번이고 다짐했을 것입니다. 그들을 사랑하다 보면 그들이 예수님의 마음에 말할 수 없는 타격을 주는 때도 많았을 것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한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그 누구도 느끼지 못하는 슬픔을 느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런 슬픔을 느껴도 그 분풀이를 제자들에게 할 수도 없는 것이 예수님의 사연이었습니다. 그 분한 마음을 억제하고 도리어 그들을 위로하지 않으면, 그들 나름대로 현재의 입장마저도 취해 나갈 수 없다는 것을 예수님은 얼마나 가중되는 괴로움과 외로움을 느꼈을 것인가? 우리들은 이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됩니다.
이렇듯 그들을 위로해 주고 권고해 주어야 할 예수님이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예수님보다 불쌍한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철이 들면서부터 뜻을 펴기 위해 그 누구한테도 말할 수 없는 외로움을 품었었고, 제자들을 규합하여 가르치는 과정에서 정성을 다 들였지만, 스승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번번히 상반된 행동을 하는 제자들을 바라볼 때에, 내심으로 말할 수 없는 괴로움이 사무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그러한 어려움을 무엇으로 극복할 수 있었느냐? 틀림없이 '미래의 이스라엘 나라를 이루고 사랑해야 할 사람들로는 그래도 이들이 저들보다 더 낫지 않겠느냐' 고 생각하며 그 어려움을 극복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눈물 흘릴 때면 같이 눈물을 흘리는 시늉이라도 하고, 산고개를 넘어갈 때는 같이 따라가려고 하고, 외로운 표정을 짓게 되면 말로라도 위로해 주려고 하는 그러한 제자들을 생각할 때, 그래도 가야할 길은 이 길밖에 없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또, 그러한 것을 느낄 적마다 무지한 제자들을 바라보면서 하나님 앞에 얼마나 많은 기도를 했겠습니가?
예수님은 제자들을 어느 한 개인으로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대하는 마음으로 사랑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는 외로운 마음이 맺혀져 있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가기를 바라는데 제자들은 저렇게 가기를 바랐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과 제자들이 바라는 것이 상치되고 상반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것을 수습해서 자신이 바라는 방향으로 돌이키기 위해 끊임없는 생각을 했고, 또 생활을 통해서 그들을 감화 감동시키기 위해 얼마나 노심초사했겠습니까?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자기 자식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판국인데 아무런 인연도 없고 관계도 없는 사람들을 제자로 모아서 자기와 더불어 생사를 나눌 수 있는 자리에까지 이끌어 가지고, 하나님께서 소원하시던 교단과 하나님께서 소원하시는 나라를 형성해야 하니, 그 길이 얼마나 망망한 길이요, 외로운 길이었겠습니까?
그렇지만 4천년 동안 하나님께서 참고 참아 나오신 이스라엘 민족, 하나님을 믿어야 할 그 이스라엘 민족이 하늘을 배반하고 불심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얼마나 애달퍼하셨는가 하는 그 역사적 사실을 생각하고, 하나님이 지금까지 참아오신 것을 표준삼아 스스로 위안받으며, '내가 이것이 싫다고 하게 되면 새로운 이스라엘은 어떻게 세울 것이며, 새로운 유대교를 어떻게 형성하겠느냐'고 생각하며 예수님이 얼마나 참아 나왔던가를 우리들은 생각해 보아야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알 수 있게끔 백방(百方)으로 가르쳐 주었고, 암시해 주었으며, 직접 행함으로써 제자들에게 새로운 뜻을 깨우쳐 주려 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러한 예수님의 내심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 당신의 환경은 원수의 환경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잘못을 저지르면 전체의 책임을 져야 하는 입장에서 제자들을 거느린 예수님은 비정상적인 환경에 둘러싸인 원수권내에서 새로운 인연을 조성하려고 했습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예수님은 가중된 핍박의 환경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렇듯 예수님의 생활은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고충을 느끼는 생활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됩니다.
성경 가운데 예수님께서 '화 있을진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라고 말씀하신 내용을 보더라도 예수님의 심정에 외로움과 괴로움이 얼마나 사무쳤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3년 공생애 기간 동안 찾아 놓은 제자들까지도 예수님의 그런 마음을 위로해 주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마저도 예수님을 위로해 줄 수 있는 대상이 못 되었기 때문에 결국 십자가의 길을 가게 될 때에 다 배반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랑하는 제자들도 예수님의 사정을 몰랐지만, 예수님을 사랑하는 부모도 예수님의 사정을 몰랐습니다. 요셉도 몰랐으며 요셉 가정을 중심삼은 종족도 역시 예수님의 사정을 몰랐습니다.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까지도 역시 예수님의 사정을 몰랐습니다. 이러한 입장에 처한 예수님이기에 사연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요 16:21)",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요 3:21)" 하는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통하여 보더라도 말할 수 없이 고독한 예수님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그러한 고독의 자리에 몰아넣은 장본인이 누구냐? 그것은 유대교인들임에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유대교인들을 대표하는 족속, 곧 사가리아 가정이요, 요셉 가정이라는 것입니다.
괴로움이 사무칠 때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반항심이 스쳐갔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나라에 대한 반항심, 유대교인에 대한 반항심, 사가리아와 요셉 가정에 대한 반항심, 더 들어가서는 자신이 태어날 때 하나님이 보내시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가지고 와서 경배했던 동방박사 세 사람에 대한 반항심과 예수님의 탄생을 찬양했던 천사들에게까지도 반항심을 가졌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반향의 대상으로 남아질 수 있는 고독한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는 것을 성경을 통한 그 당시의 환경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그 당시는 오늘날과 같이 자기 마음대로 말할 수 있는 민주주의 시대도 아니요, 자신의 정견을 발표하여 정당을 편성할 수 있는 시대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누구한테 말을 하지 못하고 혼자서만 마음속으로 하나님의 뜻을 다짐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예수님이었으니 얼마나 비참했겠습니까?
예수님이 이루려 했던 뜻은 일조일석에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의 타락된 환경에서 먹고 마시고 놀면서 동반자를 규합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런 환경을 분별해 가지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수 있는 환경으로 만들어 동반자를 규합해야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입장에 처해 있던 예수님의 괴로움은 역사시대에 있어서 어떤 성현의 괴로움보다 더 컸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예수님은 그런 환경에 몰릴 때마다,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단 한 사람이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또 4천년 동안 괴로운 개척의 노정을 거듭해서 걸어오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느끼면서 자신이라도 효성의 도리를 다해야겠다고 다짐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예수님은 외로움에 사무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세상에 대한 원망이 가중되면 가중될수록 하나님을 위해서 더욱 더 효의 도리를 하지 않으면 안 될 자신이라는 것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효의 도리를 다한다는 것은 나만 가지고는 안 되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이 나를 보내신 것은 한 개인으로서 남아지게 하기 위하여 효의 도리를 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를 거느리며 효의 도리를 하도록 보내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아는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 있어서 자신의 고독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 앞에 체면을 세울 수 없는 입장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신 것은 예수님이 이스라엘 나라와 유대교를 규합해 가지고 새로운 이스라엘 나라와 유대교의 터전을 마련하고,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하나의 목적의 세계를 향하여 투쟁의 대열을 지어 길을 출발하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소원이요, 기대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상충되고 고립된 입장에 선 예수님의 외로운 심정을 그 누가 알아주었느냐는 것입니다.
이 어려운 환경을 개척해 나가기 위한 힘을 하나님에게서 밖에 보강받을 수 없었던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를 부를 때마다, 하나님 앞에 면목없는 자신이요, 세상에 대해서는 책임을 못한 자신인 것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예수님은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슬픈 눈물을 흘려야만 하는 생활을 계속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됩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아침을 맞을 적마다, 어제는 외로운 입장이었지만 오늘은 새로운 일이 벌어져서 내가 가야 할 길의 동조자가 되고 내가 개척해야 할 행로에서 시범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을 바랐지만 예수님의 막막한 사정을 모르는 철부지한 제자들은 그런 사람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기가 막혔을 것입니다. 그들은 배가 고프면 사막이나 어디거나 배가 고프다고 투정을 했고, 목이 마르면 목이 마르다고 투정을 했으며, 옷이 남루하면 옷이 남루하다고 투정을 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따르던 3년동안 그러한 투정을 얼마나 많이 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마다 예수님은 기가 막혔을 것입니다. 당신의 인간들은 하나님의 왕자로 이 땅위에 왔던 예수님을 그렇게도 고독하게 해서 보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행로였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뜻을 품은 예수였기 때문에 뜻 때문에 외로와 했고, 뜻 때문에 눈물을 흘렸고, 뜻 때문에 죽음길도 각오했던 것입니다. 뜻 때문에 부모를 배척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뜻 때문에 형제를 원수로 취급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예수님의 사정을 우리들은 알아야 됩니다. 사랑하는 어머니 마리아에게까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요 2:4)"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던 예수님의 딱한 사정이 무엇이었겠습니까?
예수님의 의붓 아버지 요셉은 예수님의 소원과 기대를 저버렸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동생들도 예수님에게 '아 형님이 세상에 드러나기를 바란다면 초막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왜 올라가지 않습니까?'하고 빈정댔습니다. 이와 같이 동생들까지도 예수님 앞에 빈정거렸다는 것은 요셉 가정에 있어서 요셉이 책임 못했음을 말하는 것이요, 마리아가 책임을 못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해야 할 부모를 배신하고 원수의 입장에 서서 반항의 언사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고독한 예수님이고, 유대교를 사랑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유대교를 지도하는 교법사들을 대하여 '화 있을진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하고 책망하지 않을 수 없는 예수님이었던 것입니다. 사랑해야 할 입장에서 그런 입장으로 변한 것은 무엇 때문이냐? 뜻이 무섭기 때문입니다. 뜻을 안 예수님이었기 때문에, 그 뜻길을 따라가야 할 예수님의 행로였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에 대하여 반항하지 않을 수 없었고 저주를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해줘야 할 이스라엘, 그 이스라엘 나라를 대신한 예루살렘에 대하여, 그 나라의 모든 교권과 주권의 중심지인 그 도시를 향하여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네가 하늘까지 이르고 싶으냐, 음부에 떨어질까봐 조심하라'고 저주의 발언은 해야만 했던 예수님의 딱하고 처량한 사정을 그 누가 알았습니까? 이는 죽기보다도 더 괴로운 일이요, 죽는 것보다도 더 어려운 일이지만 그러지 않을 수 없었던 예수님의 품은 뜻을 누가 알았으며, 그러면 예수님의 사연을 그 누가 알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무엇 때문에 민족의 반역자로 몰리게 되었느냐? 뜻 때문이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을 몰랐다면 십자가의 고난이라는 말은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없었더라면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을 못 받는 자리, 친척들에게 바알세불 신이 씌웠다며 몰림을 받는 곤욕스런 자리에 서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 그런 비참하고 곤욕스러운 자리에 몰리게 되었느냐?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을 품었기 때문입니다. 그 뜻은 이스라엘 나라를 주고도 바꿀수 없는 뜻이요, 유대교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뜻이요, 사랑하는 어머니 아버지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뜻입니다. 자기의 친척은 물론이요, 당시의 세계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뜻이었기에, 예수님은 뜻을 이룬 승리한 자신의 모습이 되기를 언제나 그리워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다는 말씀은 예수님 자신을 중심삼고 한 말입니다. 뜻을 중심삼고 볼 때 예수님은 의인이 못 되었던 것입니다. 뜻을 중심삼고 볼 때 고독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땅을 원망하고 저주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뜻을 중심삼고 성경을 다시 음미해 보아야 하고, 오늘날 기독교를 다시 바라보아야 됩니다. 예수님의 뜻은 둘이 아닙니다.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오직 뜻 때문에 몰림을 당했고 항상 외로왔으며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며 죽음길을 갔습니다. 뜻을 중심삼고 그 죽음길을 가면서도 다시 오겠다는 약속의 말씀을 남기고 갔던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뜻이 없었다면 이러한 모든 일들은 예수님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뜻은 어디에 남아지고, 어디에서 거두어져야 되느냐? 기독교를 통해서 남아져야 되고 기독교를 통해서 거두어져야 됩니다. 이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부르짖으며 찾고자 하던 뜻, 예수님이 중심삼고 싸워 나왔던 그 뜻을 오늘날 예수님을 믿고 있는 기독교인들 가운데서 찾을 수 있느냐? 오늘날 기독교가 예수님을 그리던 유대교와 같이 되었느냐 하면 못 되었다는 것입니다. 또,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이 찾고 있던 이스라엘 나라를 가졌느냐? 못 가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워하던 그런 가정을 가졌느냐 할 때 못 가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축복해 주고 싶었던 부부, 부모, 신랑 신부의 인연을 가졌느냐 할 때 못 가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랑하고 싶었던 그런 동생과 누나 형제들을 가졌느냐 할 때 못 가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부모를 가졌느냐 할 때에도 못 가졌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재 기독교의 입장을 볼 때 오늘날 통일교회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예수님이 품었던 뜻과 더불어 사랑할 수 있는 형제와 가정을 가져야 되고, 사랑할 수 있는 종족을 가져야 되고, 사랑할 수 있는 교회를 가져야 되며, 사랑할 수 있는 나라를 가져야 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중심삼아 가지고 예수님이 기뻐할 수 있는 나라와 교회와 가정을 가져야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오늘날 예수님이 소원하시던 뜻의 결실을 거둘 수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추구해야 할 입장에 있는 기독교가 오늘날 그럴 수 있는 마음자세를 가졌느냐 하고 묻고 싶은 것이 하나님과 예수님의 마음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의 죽음길로 몰아냈던 이스라엘 민족의 죄상을 넘어서 가지고 예수님을 시봉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것이 우리의 소원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예수님 앞에 나아가 '당신이 찾던 가정이 이런 가정이 아닙니까? 당신이 찾던 교회가 이런 교회가 아닙니까? 당신이 사랑하고 싶었던 나라가 이런 나라가 아닙니까? 이 모두를 거두어 당신에게 드리오니 받으시옵소서'라고 할 수 있어야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수억의 사람들보다 그럴 수 있는 한 사람이 자랑스러운 것입니다. 믿는 사람의 숫자가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결실을 맺는 사람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수많은 기독교인들 가운데에는 그런 사람이 없었습니다.
오늘날 성경을 그냥 그대로 믿고 있는 기독교인들의 소원은 천국에 가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소원이 '아버지여, 내가 당신을 믿고 천국가겠습니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까? 그것이 예수님의 소원이었어요? 예수님의 소원은 천국가겠다는 사람들을 천국에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지옥가야 할 불쌍한 무리들을 붙들어 가지고 천국에 보내려고 한 것이 예수님의 소원입니다. 예수님 자신은 지옥에 가더라도, 죽음길을 가더라도 인류를 천국에 보내야 되겠다 하는 것이 예수님의 소원이었다는 것입니다. 인류를 살려 주는 것이 예수님의 소원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길을 통하지 않고서는 예수님이 바라던 나라와 예수님이 자라던 교회는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차제에 신앙의 본질을 다시 한 번 규명하여 기독교의 전통적인 사상이 어떻게 분열되어 왔느냐 하는 것을 분석 비판해 보아야 됩니다. 즉, 오늘날의 기독교인들 가운데에 예수님을 따르던 사도들과, 예수를 배척하던 그 나라와 유대교인 그리고 교법사들을 넘어서서 예수님 앞에 안위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신자들이 얼마나 되느냐는 생각을 해 보자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의 기독교에 예수님의 뜻이 남아 있느냐?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은 '오! 주여 오시옵소서', '신랑 되신 주님이여! 나를 찾아 오시옵소서' 하는데 실제로 오신다면 어떻게 하겠다는 것입니까? 그 당시에 뜻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다시 오시는 것인데, 다시 오시는 주님이 즐거워하실 수 있는 오늘의 환경과 생활 터전이 되어 있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모시기 위한 준비를 했느냐, 내가 하나님의 뜻을 통해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느냐 아니면 나를 통해서 예수님을 모시려고 했느냐, 내 이용물로서 하나님을 모시려고 했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 통일교인들은 뜻을 품은 예수의 사정을 알아야 됩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나라를 이렇게 사랑하고 싶었을 것이다. 유대교를 이렇게 사랑하고 싶었을 것이다. 자기의 가정과 족속을 이렇게 사랑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는 내용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아버지와 어머니까지 규합해 가지고 유대교와 이스라엘 나라를 사랑하게끔 하는 것이 예수의 소원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당신의 아들로서 아버지와 어머니와 집밖에 모르는 아들이 되겠습니다'가 아닙니다. 가정을 저버리더라도 이스라엘 나라와 유대교를 구하겠다고 하는 것이 예수님의 주의였습니다. 그래야 될 게 아닙니까?
'하나님의 뜻이고 뭐고 다 저버리고 살고 있는 그대로 아버지 어머니에게 효도나 하면 된다' 하는 것이 예수님의 뜻이예요? 예수님은 처해 있는 생활 환경을 버리고 그 자리에서 새로운 나라를 이루겠다는 뜻을 품었기 때문에 생활 환경 전부가 예수님과 상치되고 상반되는 자리에 부딪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집을 구해서 수리해 가지고 그냥 살려고 한 것이 아니라 전부다 허물어 버리고 다시 새로운 집을 지어서 살려고 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마 10:36)"고 하셨던 것입니다. 가정을 중심삼고 볼 때는 부모가 원수요, 나라를 중심삼고 볼 때는 그 나라의 주권자가 원수요, 교회를 중심삼고 볼 때는 교법사들이 원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원수는 남편이요, 주권자요, 교역자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통일교회 교인들을 두고 볼 때에 누가 원수냐? 부인이 통일교회를 믿으면 남편이 원수가 되고, 남편이 통일교회를 믿으면 부인이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나라가 원수요, 기성교회가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 부분이 원수가 될 수 있는 자리에 서지 않으면 기쁨의 길을 나오지 않습니다. 심은 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심었으니 거둘 때에도 그러한 자리에서 거두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세 가지를 볼 때 통일교회는 합격입니다. 부인이 통일교회에 다닌다고 남편이 얼마나 반대를 했습니까? 선생님은 별의별 것을 다 봤습니다. 머리가 깨지지를 않나, 다리가 부러지지를 않나, 얼굴이 터져 오지를 않나, 옷이 찢겨 오질 않나, 별의별 것을 다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도 교회에 와서 선생님에게 사정을 하는데, 선생님이 욕을 할 수 있겠어요? 뜻의 길을 가는 데는 그런 일도 겪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런 길을 갔기 때문에 우리도 그런 처지에 부딪치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는 안 될 운명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중심삼고 벌어진 일들을 수습해야 할 책임을 하다 보니 이제는 통일교회가 훌륭하다는 소문도 많이나 있습니다.
가정이 반대하면 반대할수록, 나라가 반대하면 반대할수록, 교회가 반대하면 반대할수록 거기에 부각되는 것은 예수님의 뜻, 예수님의 뜻입니다. 나라를 잃어버리더라도 '예수님의 뜻!', 교회를 잃어버리더라도 '예수님의 뜻! ', 부모와 가정 전체를 잃어버리더라도 '예수님의 뜻!'이라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뜻에 귀결됨으로 말미암아 잃어버렸던 가정의 기반을 다시 찾을 수 있는 것이요, 잃어버린 교회를 다시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나아가 나라와도 새로운 인연을 맺고 출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런 자리에 몰아넣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그런 자리에 서지 않고서는 뜻길을 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통일교인들은 자진해서 그 길을 가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몰아내서 가는 것보다도 자진해서 가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책임을 못해서 서러웠으므로 우리는 자진해서 책임을 하자는 것입니다. 자진해서 가정을 떠나고, 자진해서 교회를 떠나고, 자진해서 나라를 멀리하게 되면 그것이 곧 뜻을 위해 싸우는 일선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의 이 나라를 위하고, 이 교회를 위하고, 이 가정을 위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나라와 새로운 교회와 새로운 가정을 위해서 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일생을 통해 그런 자리에 서게 되면 뜻을 품은 예수님의 사정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자리에 서려면 오늘날의 이러한 교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지금까지 내가 믿던 신앙 가지고는 안 됩니다. 뜻을 중심삼고 부락을 사랑하고, 뜻을 중심삼고 새로운 교회를 편성하고, 뜻을 중심삼고 새로운 제자를 규합하는 그러한 운동이 벌어져야 합니다. 그렇게 되어야 예수님의 사정을 잘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아이를 낳아서 길러 봐야 부모의 심정, 어머니의 심정을 느끼는 것처럼 자신이 당해 봐야 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다른 교회에게 배척을 받아 보고, 부모에게도 배척을 받아 보고, 나라에게 쫓김도 받아 봐야 '아, 예수님의 외로움이 이렇구나'하고 실감한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통일교회가 걸어온 수십년의 고난과 핍박의 역사는 통일교회를 망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 기간 안에는 마이너스가 되었을는지 모르지만, 정상적인 전통을 세우는 데에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고난과 핍박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합니다.
그 동안 여러분들이 뜻을 중심삼고 얼마나 눈물지었느냐 하는 것이 예수님과 가까와질 수 있는 조건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에 죽자 살자 믿고 따라나오던 제자들이 전부 다 도망갔던 거와 마찬가지로 여러분도 여러분을 통하여 전도되어 죽자 살자 뜻을 믿고 따라 나오던 사람이 일조일석에 뜻을 버리고 가면, 가슴이 메어지고 뼛골에 사무치는 서러움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런 것을 느끼면 그저 떼 눈물이 쏟아질 것입니다.
그거 이상하지요? 그들과 하등의 상관도 없는데 왜 눈물이 나오느냐 하면 뜻을 중심삼았기 때문입니다. 뜻을 중심삼아 가지고 그를 붙들고 사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과 같이, 나라님과 하나님을 모시는 것같이 모시겠으니 제발 이 길을 같이 가자고 사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원수의 입장에서 용서를 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런 마음으로 그 한 사람을 붙들고 사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때는 부활 후 40일 동안을 사정하며 제자들을 다시 찾아갈 수밖에 없었던 예수님의 사정을 알게 됩니다.
자식을 많이 길러 본 부모는 악한마음을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그런 자리에서 하나님에게서 자신이 죽더라도 원수를 맺어 놓고 갈 수 없는 심정적인 사연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은 갔지만 하나님의 뜻은 간 것이 아닙니다. 역사가 흐르면 흐를수록 그 뜻은 이루어져 나올 것입니다. 그 이루어져 오는 뜻을 우리는 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그 뜻을 여러분들이 뜻으로 대해서는 안 됩니다. 어디까지나 예수님의 뜻을 그대로 세워서 성취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신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에서는 통일교회 선생님을 놓고 '문 예수'어쩌고 저쩌고 하는데, 여러분들도 전부다 예수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씨앗입니다. 씨를 뿌리면 열매를 맺는 것처럼 여러분은 예수님의 씨를 뿌려서 거둔 열매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그래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옛날 유대교 앞에 배척받던 그러한 예수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배척받던 예수의 자리에서 우리들은 환영받는 자리까지 나아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슬퍼하면서 갔지만 우리들은 기뻐하면서 가야 됩니다. 뜻의 성과를 놓고 볼 때 예수님이 보지 못한 것을 우리들은 보고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들은 예수님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민주주의 시대입니다. 그러니 통일교회 교단을 만든다고 해서 반대하는 사람 있어요? 내가 지금 나가서 전도를 한다고 해서 내 생명을 노리는 사람이 있어요? 이런 환경을 두고 볼 때 지금은 예수님이 복음을 전하던 그 시대보다 나은 시대입니다. 우리들은 예수님보다 훨씬 나은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시대적인 혜택을 받고 있는 우리들은 심정적으로 맺힌 것을 반드시 풀고 넘어가야 됩니다. 예수님이 품었던 그 뜻을 여러분 자신들이 상속받아야 됩니다.
예수님은 형님, 오빠와 같은 입장에서, 혹은 아버지 어머니와 같은 입장에서 뜻을 품었기 때문에 여러분은 예수님의 뜻을 상속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모와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형제들의 대표자요, 가정의 대표자이며, 그 나라의 대표자입니다. 결국은 우리 인간이 갖추어야 할 모든 요건을 갖춘 분이기 때문에 그분의 뜻을 그냥 그대로 인계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인계받지 않고서는 그 나라에서는 상속자가 못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은 예수님이 30년의 사생애 노정, 3년의 공생애 노정을 거치면서 십자가를 지고 뜻길을 가던 처량한 장면을 다시 한 번 상상해 봐야 됩니다.
예수님은 당시에 사랑하지 못했던 이스라엘 나라를 사랑하기 위하여 사랑할 수 있는 한날이 오기를 얼마나 기다렸던가? 또 교회를 사랑하지 못했기에 그 사랑을 실현시키기 위해 얼마나 기다리고, 형제를 사랑하며 살 수 있는 한날이 오기를 얼마나 기다렸던가?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이 그렇게 바라던,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거침없이 사랑할 수 있는 교단도 갖고 있고 또한 통일교회 식구라는 이름을 가진 형제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통일교회는 대한민국이면 대한민국의 어느 누구보다도 선두에 서서 사랑할 수 있는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제 3 이스라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있는 새로운 제 3 이스라엘 교단, 이 교단이 새로운 가정을 편성할 수 있는 놀라운 자리에 우리들이 서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지금이 최고의 정성을 들여야 할 때입니다. 이것은 모든 것을 미루어 보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이때를 놓치게 되면 다시는 이런 때를 갖기가 어렵습니다.
삼팔선을 넘어 보지 못한 사람은 삼팔선이 어떻다는 것을 모릅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이런 시점에 처해 있는 것을 알고, 예수님이 품었던 그 뜻을 중심삼고 이 시대에 탕감복귀할 수 있는 가정적인 환경, 종족적인 환경, 교단적인 환경, 국가적인 환경을 안팎으로 얽어매 가지고 넘어가야 됩니다. 즉, 예수님이 고대하던 것을 이룬다는 기쁨을 가지고 현재를 잘 수습해서 예수님의 뜻을 상속해 나가는 여러분들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버님, 자기가 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 순간에도 죽음은 엄습해 올 수 있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죽는다 죽는다 하다가 죽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저희들이 알고 있습니다. 하오니 죽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에 죽음이 엄습해 오더라도 당황하는 저희들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 14:36)"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뜻과 아버지의 뜻과는 상거(相距)가 있었다는 것을 저희들이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정을 바라보고, 제자들을 바라보는 입장이었지만 당신의 뜻은 세계와 이스라엘권을 바라보는 입장이었으므로 여기에는 상거가 있었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습니다.
사는 것이 현재의 괴로운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미래의 이스라엘 나라와 세계를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아시는 예수님이었기에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 그런 기도를 했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습니다.
아버님이여, 여기에 모인 통일의 자녀들도 그와 같은 운명길에 들어섰사오니, 저희의 뜻대로 마시옵고 당신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통일교회의 뜻대로 마시옵고 당신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저희들이 자칫 잘못하다가는 통일교회의 뜻이 있을 수도 있사오니, 통일교회의 뜻이 있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의 뜻을 위주로 하여 따르는 통일교회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자리에 서지 않고서는 통일교회도 흘러가 버린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여, 여기에 모인 당신의 자녀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현재 저희들은 주류와 비주류를 생각하게 되옵니다. 그러므로 내가 어느 길로 가야 되느냐가 문제되는 것이옵니다. 아버님, 당신께서 수십년 동안 이 교단을 붙들고 싸워 나오신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사옵니다. 제가 눈물짓던 장면 장면마다 당신의 외로움을 풀어 드리는 길은 이 길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극복해 나왔나이다.
아버지여, 대한민국을 사랑하여 주시옵소서. 이북에 있는 5도를 아버지의 품에 품을 수 있는 날이 어서 속히 와야 되겠습니다. 통일의 새로운 방안은 오늘날의 어떤 정치인의 손을 통해서 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옵니다. 아버지의 사랑, 아버지의 손에 의해서만 된다는 것을 아옵니다. 저희들이 남북을 넘어서 사랑할 수 있는 승리의 아들딸의 모습을 갖추어 이 나라 이민족을 넘을 수 있게 되면 통일이 이루어질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지여, 가인 아벨의 분립의 역사가 오늘날 대한민국을 중심삼고 남북으로 갈라지는 운명으로 나왔습니다. 이스라엘 나라와 유대교가 갈라졌던 그 비운의 역사가 오늘날 대한민국에 재현되었사옵니다. 세계적인 발판을 총합한 대한민국의 판문점을 중심삼고 민주세계와 공산세계로 갈라져 있사옵니다. 즉 사탄이 하나님과 담판하여 참소의 조건을 제시하는 곳으로서 세계적인 선이 그어져 있는 곳이 오늘의 판문점인 것을 저희들이 알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에 이제 대한민국은 마치 아폴로 11호가 지구를 기지로 하여 달나라에 갔던 것처럼 이 지구를 기지로 하여 솟구쳐 올라가 새로운 세계의 창건자가 되고 새로운 역사의 기수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한 사명이 이 민족에 있는 것을 이 민족은 알지 못하오나 보잘것없는 통일의 무리들은 잘 알고 있사옵니다.
이제 저희들은 아버지의 거룩한 성상 앞에 엄숙히 엎드려 진정한 의미에서 아버지에 대해서 알고 나서 아버지를 불러야 되겠습니다. 저희들은 참된 아버지의 이름을 불러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심정이 통할 수 있는 참된 효자가 되고, 효녀가 되어야 하겠사옵니다. 저희들은 양자 양녀가 되기를 원하지 않사옵니다. 당신의 슬픈 심정을 뼛속 깊이 체휼할 수 있는 당신의 직접주관권내에 서기를 바라고 있사옵니다.
그럴 수 있는 아들딸이 되기 위하여 저희들은 가정도 버렸고, 교회도 버렸으며, 나라도 버려 아무것도 없는 공수(空手)로써 당신의 뜻만을 품고 나왔사옵니다. 저희가 아버지의 뜻을 품었기 때문에 하늘에는 개인이 있는 것이요, 가정이 있는 것이요, 종족·민족·국가·세계가 있다는 것을 저희들이 알았습니다. 당신과 하나됨으로 말미암아 거기에서 빚어질 수 있는 새로운 개인, 새로운 가정, 새로운 종족, 새로운 민족, 새로운 국가, 새로운 세계의 주체자가 되기를 바라며 나아가는 과정에 있는 저희들이옵니다.
아버지여, 이들이 서 있는 자리를 공고히 지키게 하여 주시옵소서. 처해 있는 환경에 지배를 받을 것이 아니라 주체성을 가지고 그 환경을 지배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뜻을 중심삼고 나아가야 할 통일의 무리인 것을 저희들은 알았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신의 뜻을 품은 사람으로서 여자 남자 할 것 없이 강하고 담대한 자리에서 민족의 새로운 얼을 중심삼고 자주성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주력을 가져야 되겠고, 새로운 개척자가 되어야 하겠고, 새로운 일선의 장병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을 결의하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열두 사도와 같은 비굴한 모습이 아니라, 누가 명령하지 않아도 스스로의 길을 가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스스로 지켜야 할 장소를 지키고, 개척지의 책임자가 될 수 있는 아들딸이 되어야겠사오니, 그런 자리에서 당신의 뜻을 품고 실천하는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은 뜻을 바라보면서 죽어갔습니다. 오늘 저희들은 저희들이 뜻을 중심삼아 실천하지 않고서는 예수님의 한을 풀어 드리지 못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러므로 저희들은 뜻의 실천자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이제 저희들은 소망의 제 3이스라엘 나라를 흠모할 수 있는 무리가 되고, 제 3이스라엘의 교단을 사랑할 수 있는 예수님의 소원의 실체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에게 당신의 모친과 동생이 찾는다고 할 때에 '내 모친과 동생이 누구냐,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모친이요 동생이다'라고 말씀하시던 예수님의 입장을 넘어서서, 내 모친과 동생이 여기 있노라고 자랑할 수 있는 통일의 무리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아버지, 그러기 위해서는 민족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해야 되겠습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그러한 자리에 서지 못한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제 남편은 아내에게 나를 사랑하기 전에 이스라엘 나라를 사랑하고, 이스라엘 교단을 사랑한 다음에 나를 사랑해 달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뜻인 것을 저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또한 아내도 남편에게 이스라엘 나라와 이스라엘 교단을 사랑한 다음에 나를 사랑하는 것이 예수님의 소원이 아니냐고 물을 수 있는 그러한 아내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더 나아가 부모에게도 아버지 어머니는 이스라엘 나라를 사랑하고, 이스라엘 교단을 사랑한 다음에 저희들을 사랑해 달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아들딸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자리에 서지도 못하면서 사랑을 요구하고 아버지의 간호를 바라는 것은 자기를 중심삼고 하늘을 규합하고자 하는 것이 되어 아버지께서도 그러한 사람을 원치 않는다는 것을 저희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의 뜻을 이룬 자리에서 나라와 민족을 품고 자기의 가정을 자랑하고, 자기의 상대를 자랑할 수 있는 무리가 되기 위해서는 개척자의 길을 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당신의 딸들이 이 길을 가고자 하옵니다.
저희가 외로움을 느끼며 아버지 앞에 호소할 수밖에 없는 운명길에서 이 하늘의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생각할 때마다, 이것이 바로 당신이 바라는 소원의 한때를 맞이하기 위한 것이라고 아버지께서 분부하신 것을 알게 되옵니다. 그러한 자리에서 끝까지 싸우는 사람은 망하지 않을 것이며, 그의 남편과 자녀들 또한 결코 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저희는 알고 있습니다. 당신께 맡겼기에 염려하지 않아도 당신께서 더 큰 사랑으로써 그들을 보호해 주신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이번 기간을 중심삼고 1972년도까지 민족의 운명을 결정지어야 할중차대한 시점이 저희들 앞에 다가오고 있습니다. 남북이 새로운 아시아의 정세에 휘몰아 들어가고 있는 이 때, 당신이 기뻐할 수 있는 새로운 터전을 마련해야 할 이런 시대적 사명을 저희들이 이 기간에 결정짓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하오니 앞으로 통일교단이 해야 할 책임이 얼마나 큰것인가를 저희들이 잘 알아야 되겠습니다.
저희들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 민족을 위하여 제물되는 한이 있더라도 이것을 완수하지 않으면 안 될 통일교단의 길인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이 민족이 뭐라 해도, 기성교단이 뭐라 해도, 아버지를 믿는다는 사람들이 뭐라 해도 가짜 사람이 아니라 진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저희들은 이 길을 가야 되겠습니다.
저희들은 뜻을 품은 예수님의 후계자가 되고, 또 상속자의 도리를 다하기 위하여 몸부림쳐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바라보면서 도망갔던 열두 제자와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목숨을 걸어 놓고 예수님 앞에 날아오는 화살을 대신 맞고 창칼을 대신 맞겠다고 하며 나설 수 있는 책임을 다하는 아들딸이 되어야 하겠사옵니다. 그런 절개와 지조를 가지고 우리나라를 사랑하고, 우리 교회를 사랑할 수 있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되어야 하겠사옵니다.
저희에게는 이 시대뿐만이 아니라 앞으로의 후손도 사랑해야 할 세계사적인 거룩한 인연이 있기 때문에, 이 터전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싸워 나가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되어야겠사옵니다.
이제 1970년도 마지막 고비에 접어들었습니다. 남은 기간 동안에 저희들이 무엇을 바라겠사옵니까? 뜻 앞에 불충했던 것을 회개하고, 자신을 중심삼고 뜻을 받아들였던 사실에 대해 애통해 하며 회개하야 되겠사옵니다. 그리하여 새로운 마음으로 역사적인 1971년도를 맞이하여 이 1971년도를 기쁨의 해로서 아버지 앞에 영광을 돌려 드리기 위해 효성의 도리를 다하여야 하겠습니다.
저희들은 만민을 대신하여 희생을 함으로써 아버지의 영광을 찬양하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안 될 통일의 무리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 슬픔을 품고 가슴 조이는 하루 하루의 생활을 겪어가는 이들 앞에 자유와 해방의 날이 있어야 되겠습니다. 자유스런 모습으로 우리 아버지가 바라던 한날이 왔다고 목놓아 감사의 눈물을 흘릴 수 있는 날이 와야만 되겠사옵니다. 그러한 날이 바로 민족의 통일을 이루는 날이요, 승리의 영광을 다짐할 수 있는 날이기 때문에, 그러한 때가 오기까지는 저희들이 십자가를 벗을 도리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또한 그러지 않고서는 이 나라가 세계복귀의 터전이 되지 못한다는 것도 알아야 되겠습니다.
저희들은 아담 국가를 이루어야 된다는 원리의 가르침을 알고 있사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희들은 있는 힘을 다하여 일편단심 정성을 모아 가지고 아버지께서 내디딜 수 있는 이스라엘의 창건자로서 사라질 수 있는 통일의 무리가 되기를 바라고 있사옵니다. 지금까지 이런 마음을 가지고 싸워나왔습니다. 여기에 공이 있다면 당신의 공밖에는 없는 것이요, 자랑할 것이 있다면 당신밖에 자랑할 것이 없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나, 가야 할 길이 남아 있기 때문에 지친 다리를 끌고라도 기어이 가야 되겠사옵고, 피곤한 몸을 가누면서라도 제사장의 자리를 지켜야 되겠사옵니다. 이것을 잊을 때에는 당신이 채찍을 가해서라도 경책(警責)하시옵소서.
민족과 세계의 소원에 있어서 당신으로부터 받는 선물을 더럽게 받는 무리들이 되지 않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공손히 받아서 깨끗한 것으로 후대에 남겨주고, 역사적인 전통을 세우는데 있어서 새로운 기원을 마련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늘의 마음과 땅의 마음이 연결되고, 아버지와 자녀의 마음이 연결될 수 있는 거룩한 승리의 제단을 만들어야 되겠사오니 당신이 주관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저희들이 수는 적더라도 먼저 당신의 참다운 아들딸이 되어야 되겠사옵니다. 세계에 널려 있는 당신의 가정들을 지키시옵소서. 사정과 환경 가운데서 지탄을 받고 있는 이들을, 아버지, 긍휼히 보시어 친히 인도하시옵소서. 당신이 소망하시던 천국의 행로를 따라 직행할 수 있는 무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나라를 사랑하지 않고는 가정을 사랑할 수 없으며 나라를 찾지 못하고서는 교회를 사랑할 수 없는 운명길이 저희들 앞에 남아 있사오니, 이것을 다해야 충의 도리, 효의 도리를 했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그 길을 가기 위해 굳건히 다짐하면서 하늘의 용자로서의 모습을 갖추어 개척자의 사명을 더디하지 말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부탁하옵니다.
오늘은 거룩한 날, 이곳을 위하여 기도하고 마음 모으는 무리들이 있사오니, 당신의 뜻을 위하여 염려하는 그들의 마음 위에 당신의 자비가 같이하여 주시옵고, 동정의 마음이 같이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옵니다.
이 시간에 친히 같이하여 주심을 감사드리오며 모든 말씀을 참부모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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