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일생 동안 살아가는 데에는 많은 고개가 있습니다. 하루를 생활하는 데에도 고개가 있는 것이요, 젊은 청춘시대면 청춘시대에도 고개가 있는 것입니다. 또 가정을 가져서 가정을 이끌고 나가는 데에도 고개가 있고, 사회생활을 하는 데에도 역시 고개가 있습니다. 즉, 개인에서부터 사회 그리고 국가가 가는 길 앞에는 그 운명을 결정지을 수 있는 고개가 있다는 것입니다. 세계를 두고 봐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인류 역사의 성공과 실패가 결정되는 기준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만사는 하나의 정상이라는 고개를 중심삼고 인연지어 나간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누구는 성공했고, 또 누구는 실패했다는 말을 합니다. 그러면 성공했다고 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자기가 목적한 고개를 넘은 사람입니다. 실패했다고 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그 고개를 넘지 못한 사람입니다. 우리의 일생을 두고 봐도 생애노정에서 자기가 목적한 바를 성취하면 인생에 성공한 사람이요, 그것을 성취하지 못하면 실패한 사람인 것입니다.

이것을 역사에 적응시켜 볼 때, 역사노정을 통해 역사가 바라는 목적 기준에 도달하지 못할 때는 실패하게 되는 것이요, 그 기준을 넘어설 때는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두고 보면, 하나님 자신이 목적하시는 바를 성사시키게 될 때는 승리권에 처할 수 있는 것이요, 성사시키지 못하게 될 때는 실패권에 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복귀섭리 즉, 다시 돌아가는 섭리는 실패권에서 필요한 것이지 승리권에서 필요로 하는 명사가 아닌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이란 무엇이냐? 이는 패자의 후손들입니다. 그러면 이 후손들이 패자의 서러움을 어떻게 극복하느냐? 이 문제는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생명이 다할 때까지 투쟁하여 극복해야 할 생활의 과제요, 생애의 과제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만큼 이것을 더 크게 보면 사회의 과제요, 국가의 과제요, 세계의 과제요, 또한 인류가 영원을 두고 해결해야 할 과제인 것입니다. 이 과제를 해결하느냐, 못 하느냐에 따라 인류 역사가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섭리의 뜻을 이루느냐, 못 이루느냐 하는 문제가 좌우된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6천년 복귀의 고개를 오늘 우리는 어떻게 넘을 것인가

오늘날 우리 개체를 두고 볼 때에, 우리 개체가 어떠한 입장에 처해 있는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성10회로서 수료증을 받는 이 마당에 있어서 나는 뜻이 지향하는 목표에 비추어 볼 때에 어떤 입장에 처해 있느냐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뜻이 지향하는 정상을 바라보며 달리고 있지만 그 길은 천태만상입니다. 혹자는 이렇게 가고, 혹자는 저렇게 가고, 또 나와 제일 가까운 친구는 저렇게 가려고 하고, 나는 이렇게 가려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벌어진 환경을 두고 볼 때, 정상을 향해 달려가는 노정에 있어서 나는 어떠한 길을 가고 있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비판해 보아야 됩니다.

그런 길을 가는 데 있어서 가야 할 방향을 명시함과 동시에 자기가 처해 있는 입장을 확정짓지 않는 사람은 지극히 위험한 존재입니다. 그런 사람은 앞으로 다가올 정상의 고개를 대해 보지도 못하고 패자의 서러움을 당할 것입니다. 또 어디로 간다는 목표도 알지 못한 채 쓰러져 버릴 것입니다.

그러면 그 정상의 고개를 어떻게 넘을 것이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 고개를 돌파함으로 말미암아 통일교회를 믿고 따라 나온 그 목적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수년 동안 수고한 공적의 터전 위에 서서 오늘 이 날을 맞이한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여러분 자신이 지금 어떠한 입장에 있느냐 하는 것을 회고해 보고 제3자의 입장이 아닌 자기 자신의 입장에서 다시 한번 자세를 확정지어야 합니다. 이러한 중대한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선열들이 넘지 못했던 고개가 우리 앞에 다가오고 있다

복귀섭리 노정을 관찰해 볼 때, 여기에는 개인이 넘어야 할 고개가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6천년 역사는 잃어버린 아담 하나를 찾기 위한 역사입니다. 하나의 완성한 남성을 찾기 위하여 6천년이 걸려 나온 것입니다. 이렇게 나오면서 한때를 결정하여 한 개인이 완성하고 개인적으로 승리했다는 그 고개를 넘어야 비로소 새로운 인연을 맺을 수 있는 때를 맞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때가 바로 오늘날 인류가 바라는 소망의 시대입니다. 또한 하나의 완성한 남성으로서 이 땅에 오셔야 할 분이 만민이 바라는 구세주요, 이런 사상이 구세주 사상, 메시아 사상이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역사노정을 통하여 온 복귀도상에 있어서 개인이 넘어가야 할 고개가 얼마나 많았는가? 종의 종 시대로부터 종의 시대, 양자의 시대, 아들의 시대를 거쳐서 이 땅 위에 예수님이 오셨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가셨습니다. 가신 그날부터 2천년 동안 피눈물나는 투쟁이 계속되어 나왔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피를 뿌리지 않고는 개척할 수 없는 죽음의 행로를 더듬으면서, 개인이 가야 할 고개를 넘기 위해서 하늘과 땅과 인류가 총동원되어 나왔습니다. 그런 길을 걸어나오는 데 있어서 정상을 바라보는 기막힌 순간을 찾아야 할 인류의 운명길이 얼마나 심각하겠는가?

이 고개는 인간들이 좋거나 싫거나 역사를 걸고, 영원을 걸고 넘어가야 할 정상의 고개입니다. 이 고개를 못 넘게 될 때에는 천년 만년의 한이 내 앞에 가로 놓일 것이요, 또 내가 소망하는 것에 비례되는 흑암권세가 나를 억누를 것입니다. 이렇게 무서운 역사적인 고개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고개의 정상을 향하여 수많은 선지선열들은 자기의 정체를 감추고 피를 뿌리며 죽음의 혈투 가운데에서 자기의 존재를 잊어가면서도 오직 그 일념을 갖고 외치고, 혹은 죽어갔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남긴 그 고개, 그 고개가 우리 앞에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6천년 동안 넘고 싶으셨던 그 고개가 역사의 종말시대인 오늘날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정 구원을 표방하는 통일교회

지금까지의 종교는 개인을 구원하기 위한 종교였습니다. 이것이 역사 이래 지금까지 종교가 넘고자 한 하나의 고개였습니다. 그러면 이 개인의 고개를 넘고 나면 어떤 고개가 있느냐? 가정의 고개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통일교회는 어떤 교회냐? 통일교회는 개인구원을 목표로 하는 교회가 아닙니다. 6천년 동안 개인 구원을 위주로 하던 종교 형태에서 벗어나 가정을 구원하기 위한 종교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금후에 통일교회가 해결해야 할 역사적인 과제입니다.

오늘날 국가에서는 개인을 표창하고 있습니다. 충신열녀나 효자효녀를 표창하는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을 표창하는 것이지 가정을 표창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가정을 중심삼고 표창한 국가는 없었습니다. 종교도 마찬가지로 가정 구원을 목표로 삼고 나온 종교가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역사과정을 거쳐 나온 수많은 종교는 국가를 세울 수 있는 자리에 올라서지 못했습니다. 왜? 구원의 목적이 개인 구원이었기 때문입니다. 사회 구원을 목적으로 한 것도 아니요, 국가 구원을 목적으로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단지 개인 구원을 종교의 목적으로 삼고 나왔던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종교는 6천년 동안 개인을 중심삼은 승리적 고개를 넘기 위해서 노력해 나왔습니다. 하지만 우리 통일교회가 가야 할 길 앞에는 가정의 고개가 있습니다. 이 가정의 고개를 넘는 데는 자기 혼자 넘어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둘이 같이 넘어가야 합니다. 같이 넘어가는 데에는 전후관계에서 가는 것이 아니라 좌우관계에서 가야 됩니다. 왜냐하면 따라감으로 말미암아 타락이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해와는 천사장을 따라가다가, 아담은 해와를 따라가다가 망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따라가는 입장에서는 구원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좌우로 같은 입장, 평등한 입장, 동등한 입장에서 가야만 상대적인 구원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남성으로 오시는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해야 할일이 무엇이냐? 자기를 따라올 수 있는 상대를 구해 가지고 천국 이념을 펼치는 것이냐? 그것 가지고는 안 됩니다. 상대와 동조동고해 가지고 좌우의 평행선상에서 둘이 하나님 앞에 나서서 같은 보조로 나가야 합니다. 그럴 수 있는 일남일녀가 나오지 않고는 본연의 자체로 복귀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런 인간 즉, 남성과 여성이 나오지 않으면 가야 할 정상의 고개를 넘어설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는 신랑이요 너희는 신부다' 라고 하신 것입니다.

어떠한 대열을 갖추어 탕감고개를 넘어야 하는가

신랑 신부는 전후관계로 가는 것이 아니라 좌우관계로 가는 것입니다. 혼인식을 거행할 때에는 반드시 주례자가 있습니다. 신랑 신부는 그 앞에 평행하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랑신부가 가는 길입니다.

지금까지의 역사도상에서 하나의 남성과 하나의 여성이 하나님 앞에 평행하게 간 시대가 있었느냐? 없었습니다. 이것이 역사도상에 비로소 다시 나타났으니 바로 오늘날 남성과 여성이 넘어가야 할 최후의 고개인 것입니다. 이 고개를 넘고 나면 역사상에 없었던 평화로운 가정, 역사상에 없었던 새로운 가정이 출발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정을 이루게 되면, 다음에는 부부를 중심삼고 가정이 갈 길을 가야 합니다. 그 가정에는 부부를 중심삼은 아들딸이 있을 것입니다. 이 아들딸들도 역시 부모를 따라가는 입장에 있어서는 안 됩니다. 아버지 편, 어머니 편으로 갈라서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데에도 평행을 갖추어서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바라시는 창조의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이렇듯 개인이 넘어가야 할 고개, 부부가 넘어가야 할 고개, 가정이 넘어가야 할 고개가 있는 것입니다. 가정들 전체가 그 고개를 넘어 완성한 가정이 된다면 세계의 수많은 가정들이 하나님을 중심삼고 좌우관계를 맺어 횡적인 대열을 갖추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앞에 각자 주장할 수 있는 가정들이 생겨날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은 그 가정들을 같은 축복, 같은 환희로써 맞이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전후관계에 있을 때에는 반드시 그 차이에 해당하는 만큼 슬픔이 개재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금후에 이상적인 가정을 이루려면 하나님을 중심삼고 횡적으로 맞춰 갈 수 있는 남성과 여성이 필요하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그런 부부가 자녀를 어떻게 좌우의 횡적인 직선상에서 거느리고 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들이 하나의 가정을 이루고, 하나의 종족을 이루고, 하나의 민족을 이루고, 하나의 국가를 형성해야 합니다. 세계 만민이 이와 같은 입장에서 가게 된다면 그런 나라가 하나님께서 이상하셨던 나라가 아니냐? 모든 사람이 직선상에 같은 모양으로 나타나는 것이 하나님께서 이 땅 위에 창조하신 최고의 목적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들의 마음과 몸을 보더라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이 몸을 끌고 가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서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은 탕감역사를 이루지 못합니다. 그러면 내 마음과 몸을 횡적인 직선상에서, 좌우의 입장에서 거느리고 갈 수 있는 자신을 어떻게 만들 것이냐? 이러한 자신을 만들기 위한 싸움을 해야 합니다. 이 싸움이 여러분들이 개인 노정을 개척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싸움이 아니겠습니까? 그러기에 그 고개를 어떻게 넘을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하나님께서 선생님을 이 땅 위에 보낸 뜻이 있다 할진대, 선생님 뒤에 일직선으로 따라오는 무리를 맞기 위한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겠느냐? 아닙니다. 그런 무리들은 어느 한때에 이리떼와 같은 무리들에게 습격당할 것입니다. 그들은 관찰할 수 있는 시야에서 이미 벗어난 것입니다. 내가 직접주관할 수 있는 곳은 뒤가 아닙니다. 뒤는 주관 못하는 것입니다. 뒤를 주관하려면 다시 돌아서야 됩니다. 돌아서려면 방향 전환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180도 권내에 서야 보호권이 생기게 됩니다. 180도에서부터 관리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손을 보더라도 180도 권내를 주관하게 되어 있습니다. 눈도 뒤를 바라보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눈이 정면을 바라볼 때는 그 각도가 점점 좁아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콧날도 그렇습니다. 이 모든 것은 정상으로 직행할 수 있는 선을 표시한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통일교회를 믿는 신자, 더우기 오늘 성10회를 수료하는 여러분 자체를 두고 볼 때, 여러분들은 어떻게 가고 있느냐? 뒤를 따라가고 있느냐? 평행선상에 서서 가고 있느냐?

8단계의 고개를 넘어야 할 우리

인격자는 누구와 약속한 것이 있으면 그것을 이행하고 실천합니다. 이것은 네가 주장해서 약속한 것이기 때문에 나는 이것을 따라가지 않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는 인격자가 아닙니다. 법은 공적인 기준을 중심삼고 약속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법의 약속권내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그 법을 지켜야 합니다. 약속한 사람이 그 법을 못 지킬 때에는 공동적인 법도에 의해서 제재를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법을 준수해야 할 사람들의 책임입니다.

누가 주장했든지 간에 세워 놓은 약속은 실천해야 합니다. 실천하지 않으면 낙오자가 됩니다. 약속이라는 것은 약속한 기준, 즉 선이면 선, 점이면 점을 중심삼고 모든 것이 일치되어야 합니다. 거기에는 전후관계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몇 시 몇 분에 회합을 한다' 할 때 몇 시 몇 분 그 자체에 전부 통일되어야 합니다. 그 정점에서는 누구든지 같은 입장에 서야 합니다. 거기에서부터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전후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통일교회를 중심삼고 볼 때에, 통일교회가 넘어가야 할 고개가 많습니다. 개인으로 넘어야 할 고개가 있는 것이요, 가정으로 넘어가야 할 고개가 있는 것이요, 종족으로 넘어가야 할 고개가 있는 것이요, 민족으로 넘어가야 할 고개가 있는 것이요, 국가적으로 넘어야 할 고개가 있는 것이요, 세계적으로 넘어야 할 고개가 있는 것입니다. 천주 복귀라는 엄청난 뜻 가운데에는 개인에서부터 8단계의 고개를 넘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고개를 어떻게 넘어갈 것이냐? 여러분 자신들이 넘어갈 수 있는 자세를 얼마나 확실히 갖추고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가라 가라 해도 못 가는 사람은 결국 못 가는 것입니다. 또 와라 와라 해서 못 오는 사람도 역시 못 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믿고 있는 이 통일교회는 누구의 교회냐? 이것은 선생님의 교회가 아닙니다. 여러분의 교회요, `내' 교회입니다. 통일교회의 이념은 누구의 이념이냐? 선생님의 이념이 아닙니다. 이것이 선생님만의 이념이라면 만민 앞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이것은 만민의 이념인 동시에 대한민국 국민의 이념입니다. 따라서 그런 이념을 추구하는 나라는 자기 할아버지만의 나라가 아닙니다. 자기 아버지의 나라도 되는 것이요, 내 나라도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평행적인 것입니다. 그 누구의 것이 아닙니다.

이런 관점에서 여러분들은 현재 젊은 사람으로서 통일교회에서 어떤 입장에 서 있느냐 하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간다 하는 입장이냐? 가정을 대신해 간다 하는 입장이냐? 가정을 대신해 간다면 그 가정을 수습해 가지고 직선으로 갈 수 있게끔 해야 됩니다. 혹은 자기의 문중을 위해서 간다 할 때는 그 문중을 수습해 가지고 같은 방향을 향해 가야 합니다. 도리어 가정이면 가정, 문중이면 문중을 자기 앞에 내세워 가지고 넘어가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양치는 목자, 혹은 선한 목자로 비유하는 말을 들었을 것입니다. 평화시기에는 목자가 양을 몰고 갈 때 선두에 서서 이끌고 가지만, 위험한 시기에는 양을 앞세워서 몰고 갑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사탄 세계를 뒤에 두고 싸우기 때문에 그들을 앞에 세워 몰고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럴 수 있는 입장에 서지 않는 사람은 결코 하늘편이 될 수 없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개인이 넘어야 할 고개를 넘어야 되겠고, 가정이 넘어야 할 고개를 넘어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통일교회는 무엇을 위해 가느냐? 개인적인 고개를 넘고, 가정적인 고개를 넘고, 종족적인 고개를 넘고, 민족적인 고개를 넘고, 국가적인 고개를 넘자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어떠했느냐? 종족을 규합해 가지고 민족적인 고개를 넘고, 국가적인 고개를 넘자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자신들이 거기에 보조를 맞출 수 있는 방향을 갖추고 있느냐? 만일 여러분이 이 길을 가다가 못 가고 패배하게 될 때에는 개인적인 패자의 서러움만 당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적인 패자의 서러움까지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영계에 가게 되면 차라리 몰랐던 것보다도 나쁘고, 후회막심할 것입니다. 지옥에 가 있는 영인들은 아예 몰랐기 때문에 단념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국가적인 탕감복귀의 고개를 넘어갈 수 있는 최후의 때로 마련해 놓았는 데도 불구하고, 책임을 못하고 이 때를 놓쳐 버린다면 큰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통일교회는 아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국가적인 탕감의 고개를 넘어가기 위해 전체가 노력하고 있고 자기도 거기에 협력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가담하지 않았을 때는 그에게 있어서는 국가적인 고개가 마지막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충성하여 국가적인 고개를 넘는 자리에 서게 되면 그 교회가 가는 길, 그 뜻이 가는 길이 세계의 노정을 넘어 천주의 노정을 가더라도 따라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국가적인 고개를 넘어야 할 시기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못 가게 되면 세계나 천주로 갈 수 있는 길을 개척할 수 없습니다. 혜택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여러분은 교회에 들어온 연한이 길면 길수록 더 많은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에 들어온 연한이 긴 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보조를 덜 맞추게 되면 책임감이 점점 희박해져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차라리 새로 들어온 사람보다도 못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살다가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국가적인 섭리시대에 있어서 이 섭리의 뜻을 알고, 하나님께서 제시한 그 책임을 수행해야 할 이런 환경에서 넘어야 할 고개를 못 넘고 죽게 된다면 그것으로 마지막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국가적인 고개 이상의 세계로 갈래야 갈 수 없는 것입니다. 국가의 울타리권내에서 막혀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자고로 수많은 사람들이 평면적인 입장에서 살다 갔지만 그들이 공적인 것을 중심삼고 살다가 갔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공적이라는 것은 나라만을 위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라만을 위하는 공적인 기준은 나라가 망하게 되면 없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현의 도리를 따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떠한 사람들이 성현이냐? 나라보다도 세계를 위해 사는 사람이 성현입니다. 또 성현의 도리, 성현의 가르침은 뭐냐? 세계적인 공적 기준을 중심삼고 사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왜? 나라가 망하더라도 세계는 남아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우리 통일교회는 하늘과 땅을 위해서 살자는 천주주의 교회입니다. 역사를 대표한 교회입니다. 통일교회가 지금까지 그렇게 살았다 할진대는 문제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 세계 가운데는 나라도 들어가 있는 것이요, 그 세계 가운데는 민족도 들어가 있는 것이요, 그 세계 가운데는 종족도 들어가 있는 것이요, 그 세계 가운데는 가정도 들어가 있는 것이요, 그 세계 가운데는 개인도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계를 위해서 산 사람은 전체를 일시에 자기의 가치기준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떠한 등산가가 많은 산을 오르지 못하고, 많은 고개를 넘지 못했다 하더라도 세계에서 최고 높은 에베레스트 산 정상을 오르게 되면 그 하나로써 모든 것은 해결되는 것입니다. 그가 지금까지 많은 산을 올라 보지 않았더라도 그 한 번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세계의 많은 산을 오른 수많은 등산가들과 동등한 자리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 22:37)" 하셨으며, 그 다음에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마 6:31-32)"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그 나라는 어떠한 나라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나라, 하나님이 사랑하고 싶은 나라입니다. 그 나라는 세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의는 무엇이냐? 정해진 노정에 어긋나지 않게 사는 도리입니다. 그러면 이런 복귀도상에 있어서, 또한 여러분들의 인생행로에 있어서 넘어야 할 고개가 많은데 이 고개를 어떻게 넘을 것이냐? 이것이 금후에 여러분들에게 주어진 과제입니다.

지금은 마지막 결단을 내려야 할 때

오늘날 우리 교회가 지향하는 입장은 어떤 것이냐? 한 번밖에 없는 최후의 결전을 하는 입장입니다. 그런데 그런 한때를 앉아서 잃어버리고, 자기 생각을 중심삼고 살다가 잃어버리고, 자기 나름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잃어버려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것을 잃어버린다면 이 역사과정에서 무한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현재의 시점을 무의미하게 상실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영광된 승리의 한날을 차지하지 못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섭리노정에서 고개를 넘은 승리의 용자로서 하나님으로부터 세움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목적관이 뚜렷해야 됩니다. `나는 죽더라도 이 길을 가다가 죽는다. 이 길을 가고야 말 것이다. 세상이 아무리 뭐라 해도 옆에서 그 누가 뭐라 해도 나는 갈 길이 바쁘다'하며 가야 됩니다. 밤이나 낮이나 쉴새없이 가도 갈지 말지한 길입이다. 그러니 바쁜 길입니다. 피곤해도 가야 합니다. 지쳤더라도 또 가야 합니다. 자기만 가는 것이 아니라 환경에 영향을 미쳐 가지고 자기를 따르는 사람을 거느리고 가야 합니다. 그런 책임을 짊어진 사람일수록 하나님께서 기억하는 사람이 될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고개를 개인만이 넘는 것으로써 끝나는 것이냐? 아닙니다. 개인만 넘었다면 그 사람은 외로운 사람입니다. 가정을 넘겨 놓아야 되는 것입니다. 복귀의 운명길을 남기고 있는 우리들은 어차피 그 고개를 넘어가야 합니다. 남이 대신 넘어 주지 않습니다. 누가 구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넘어가야만 되는 것입니다. 주어진 5퍼센트의 권한을 자신이 결정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 고개를 넘어가서 내게 속한 것을 찾아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구원을 못해 주셔서 돌아가신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예수님이 넘어 가야 할 고개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게는 신부를 택하기 위해서 자신이 넘어야 할 고개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신부를 맞이하여 하나의 가정을 이루었다면 그 가정이 넘어가야 할 고개가 또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정이 하나님 앞에 세움을 받았다면 가정을 중심삼고 종족을 연결하여 넘어가야 할 고개가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가중적인 탕감의 환경이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여러분들 가운데 지금까지 놀이삼아 구경거리삼아 가고 싶으면 가고 말고 싶으면 마는 입장에서 복귀섭리의 정상의 고개를 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선한 편에 서려면

여러분들은 비장한 각오를 해야 됩니다. 왜 그래야 하느냐? 선악이 무엇이냐? 선은 하늘편이요, 악은 사탄편입니다. 오늘날 복귀도상에서 하나님을 따라가는 우리들은 선한 편에만 서야 됩니다. 그렇게 되어야만 합니다. 악한 편에 서서는 안 됩니다. 오늘날 타락한 이 땅을 두고 볼 때에, 내가 태어나기를 선에서 태어났느냐? 아닙니다. 내가 살기를 선에서 살고 있느냐? 아닙니다. 먹고 사는 모든 동작, 언행심사 모든 일체가 악을 동기로 하는 여기에 생애를 묻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선의 기준은 얼마나 크냐? 티끌만합니다. 하늘편에 선 사람이 되려면 선의 기준이 악의 기준보다도 커야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관리하실 수 있는 때는 어느 때냐? 선이 작을 때는 하나님께서 관여 하실수 없습니다. 그러니 완충지대권내에 선과 악의 비중이 비슷해야 하나님도 관리하실 수 있는 권리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리의 가르침입니다.

선악과는 해와요, 해와는 두 세계의 모체가 되었습니다. 그건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 선과 악의 중간 입장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선악의 방향을 누가 결정해야 되느냐? 자기 자신이 결정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악을 쳐부수고 사탄을 쳐부수고 하나님을 붙들어야 합니다. 사탄을 치는 것보다 몇 배 이상 강하게 하나님을 붙들어야 합니다. 악을 치기 위해서는 전신의 힘을 기울여야 됩니다. 그와 동시에 그 이상의 힘으로 하나님을 붙들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귀노정은 탕감노정이요, 탕감노정은 소모전입니다. 사탄이 백을 요구하면 백에 해당하는 힘을 가해서 쳐야 됩니다. 친 다음에는 백 이상의 힘으로 하나님을 붙들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데는 우리 인간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절대적인 하나님께서 95퍼센트 협조해 주시는 은사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모험이 있어야 합니다. 모험을 해 가지고 이 길을 돌파하고 나가야 됩니다. 이것이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생명을 던져서 사탄을 치고 나아가는 그 자리에 하나님은 언제나 같이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것을 모를 것입니다. 마지막에 모험을 하는 최후의 종결점에 다다랐을 때에 하나님은 반드시 같이하십니다. 그런 자리가 아니고는 하나님께서 같이하시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리로 보는 관입니다.

오늘날 한반도는 삼팔선을 중심해서 남북으로 갈라져 있습니다. 여러분 이박사 시대에 포로를 해방한 사실을 알지요? 중간 입장에 세워 놓고 너희들 마음대로 선택해 가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 선택권을 누가 가지고 있느냐? 이북도 아니고 이남도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자기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그와 같이 한 세계에 더 비중을 차지할 수 있는 자신들이 되어 있느냐? 지금 여러분 자신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닙니다. 이런 자신을 수평 저울에 올려 놓고 선이 되는 오른쪽이 강한가, 악이 되는 왼쪽이 강한가를 달아봐야 합니다. 왼쪽이 무거우면 사탄편입니다. 또 내 눈이 세상을 바라보느냐, 하늘을 바라보느냐?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면 그것도 사탄편입니다. 그 눈은 썩어져야 합니다. 그 몸뚱이도 썩어져야 합니다. 사탄의 밥이 되어야 합니다. 하늘을 바라보는 내가 이겨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고개를 넘자 하는 데 고개를 넘는 출발의 기준는 어디냐? 그것은 선의 비중이 크냐 작으냐 하는 것에서부터 출발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아직까지 이것을 가리지 못한 사람은 전부다 사탄편입니다. 그것은 문제도 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러면 여러분들은 어느 자리에 서 있느냐? 이걸 생각해 봐야 됩니다. 어느 자리에 서 있느냐?

물질을 중심한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에 완전부정에서부터 출발해야 하는 것이 종교가 가야 할 정상적인 길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무엇을 완전부정해야 하느냐? 자기 부모에서부터 자기 형제, 사회, 나라, 세계까지 전부 부정해야 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탄과 분립시킬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를 완전히 부정하게 될 때 선편에 설 수 있는 제2의 내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야 합니다.

출발과 정상 정복

사랑하는 부모를 끊을 수 있는 그 이상의 가치를 느끼고 나서게 될 때에는 하나님과 그만큼 가까워진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나라를, 이 세계를, 자신을 위한 모든 욕망을 하나님을 위한 욕망으로 바로잡을 수 있는 입장에 서야만 하늘편이 출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는 넘어야 할 복귀의 정상을 향해 갈 수 없습니다. 출발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출발했다 하더라도 나아가지 못하고 돌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관념을 생활권에서 확실히 해야 됩니다. 내가 무엇 때문에 학교에 가느냐? 무엇 때문에 공부하느냐? 목적이 확실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대학을 간다면 자기의 생활을 해결하기 위해 가는 것이요, 자기가 세상에서 출세하기 위해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목적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좀더 많이 알아 가지고 뜻을 위하고, 이 나라와 이 민족을 복귀시키기 위한 하늘의 용사가 되기 위해서 해야 합니다. 하늘의 용사로서 안팎을 방비하기 위해서 공부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돌보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놀고 싶은 것 다 놀고, 하고 싶은 것 다 하면서 흥청거리고 이것도 좋다 하고 저것도 좋다 하면 둘 다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둘 다 품고 노는 자리에 있는 사람에게는 절대 협조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양자 가운데 택일해야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사리 판단을 잘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통일교회 교인들은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원리를 알면 각자가 가야 할 길을 확실히 알게 되어 있습니다. 이 때가 어떤 때인가를 확실히 알게 됩니다. 막연하게 아는 것이 아니라, 공식적으로 확실히 알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서 있는 이 자리는 시시한 자리가 아닙니다. 이렇게 확실히 알고 나서 새로운 출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출발했으면 하나님이 지항하는 목표를 향하여 직행해야 합니다. 다른 길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지 않고는 넘을 수 없는 고개들이 많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됩니다.

만일에 여러분이 뜻길을 가다가 실패하면 다시 준비해 가지고 가겠다고 생각한다면 그 생각은 틀린 생각입니다. 최후의 결전장에 나선 선수가 어떤 대회에서 낙오했다면, 그 대회가 세계적인 대회일수록 그 다음에는 누구도 그 선수를 추천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단 출발했다 하면 심각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생명을 걸지 않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들이 앞으로 살아가는 데 있어서, 또는 신앙길을 가는 데 있어서 다가올 고개를 어떻게 넘을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개를 넘어야 되겠습니다. 넘는 데는 따라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명령을 해야 움직이고, 욕을 해야 궁둥이를 들고 일어나는 사람들은 저나라에 가서도 다를 바 없습니다. 그저 바라만 보고 사는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개인복귀노정, 가정복귀노정, 종족복귀노정, 민족복귀노정, 세계복귀노정이 남아 있습니다. 만일 우리 앞에 나라를 위해 충성할 수 있는 길보다도 세계를 위하여 충성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세계를 위하여 충성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선교사들은 세계적인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여러분들이 앞으로 어떤 고개를 넘어갈 것이냐? 또 지금 어떤 고개를 넘고 있느냐? 어디에 도달해 있느냐? 아니면 그 고개를 바라보고 있느냐? 아니면 그렇지도 않느냐? 과연 내가 어떤 입장에 있는가를 확실히 명시해야 합니다.

고개를 넘기 위해 출발하려면 선악을 분립하지 않고는 안 됩니다. 선악을 분립해 가지고 `나는 죽어도 선한 입장에서 하늘편인 오른쪽에서 죽겠다'할 수 있는 자아의 생활 기반을 닦고 결의를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여 새로운 목표를 가지고 나서게 될 때에, 하나님이 제시한 개인이면 개인적인 고개를 정상적으로 넘어갈 수 있는 것이요, 가정이면 가정적인 고개를 넘어갈 수 있는 것이요, 민족이면 민족적인 고개를 넘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자기가 정한 결의 여하에 따라 그 고개를 넘을 수도 있고 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여러분들이 그 고개를 어떻게 넘어갈 것이냐 하는 문제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성화 출신자로서 그 사명을 다하라

여러분들이 물론 지금까지 뜻을 따라 나왔지만 금후에 나아가야 할 길이 더욱 중요합니다. 성화학생이라는 말 자체가 우리 교회의 역사를 대신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기반이 크면 클수록 문제가 크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가고 있는 그 모습이 후대에 따라오는 수많은 사람들 앞에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고개를 넘어야 할 입장에 있는 데도 불구하고 넘지 못하고 책임을 수행하지 못할 때에는 십 배 혹은 천 배의 가중된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생님도 지금까지 성화출신이라도 낙오자, 문제의 인물들은 믿지 않습니다.

성화출신들은 교회를 대표한 사람들입니다. 이번 축복 대상자들 가운데에서도 성화 출신자냐 아니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여자나 남자나 서로가 성화 출신이냐고 묻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래도 성화 출신자를 믿으려 하는 사람이 많은 것을 볼 때에, 여러분이 처해 있는 자리가 얼마나 심각한 자리인가를 재인식해야 합니다.

앞으로 교회가 넘어가야 할 고개에 짐이 되지 않고 교회에 보탬이 될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여러분에게 앞으로 민족과 국가, 혹은 세계로 갈 수 있는 길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짐이 되었다 할 때에는 국가와 세계의 고개를 넘어가는 사람들이 짐을 달고 가고 싶어 하지 않을 것입니다. 고개를 넘어 가는 데 있어서 짐이 되는 사람은 떼어 놓고 가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가야 할 각자의 고개를 넘는 여러분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뜻이고 복귀노정이니만큼 이제부터 여러분 각자가 새로운 결심을 하고, 자기가 어떤 입장에 있는가를 명시해 가지고 재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기억해 주길 바랍니다. 알겠지요? 「예」 기도합시다.

기 도

아버지, 오늘도 당신의 섭리의 뜻은 지나가고 있사옵니다. 당신의 뜻을 세포에 느끼고, 그 누가 뭐라 해도 당신이 원하시는 정상을 향하여 참다웁게 한걸음 한걸음 걸어가야 할 책임을 짊어진 자기 자신이 되어야겠사옵니다. 이러한 자신이라는 것을 망각할 때가 많은 것을 저희들이 아옵니다.

아버지, 성10회 수료자 40여 명이 여기에 참석하였사옵니다. 이들 중에 아버지 마음 가운데 꼽을 수 있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옵니까? 저 사람만은 믿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시는 사람이 있사옵니까? 자기 자신마저도 믿을 수 없는 처량한 모습으로 이 자리에 참석했다면 그 자체가 비참한 것이요, 우리 교회에 있어서도 지극히 불쌍한 일인 것을 저희들이 느끼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아버지,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필시 인간은 가야만 되는 것이옵니다. 개척의 노정을 거치지 않고는 갈 수 없는 복귀의 길이라는 것을 저희들이 아옵니다. 이제 남기신 개인의 고개, 가정의 고개, 종족의 고개, 민족의 고개, 국가의 고개까지 죽을 힘을 다해서 넘어가야 할 통일교회의 식구로서 그 사명을 감당하는 데 있어서 이들이 짐이 되지 말고 보탬이 될 수 있는 입장에 서게 하여 주시옵소서. 교회가 `가자'하기 전에 먼저 나서서 가야 하는 것이 정상적인 행로의 걸음걸이인 것을 알고 뜻 앞에 순응하는 자녀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지금까지 참고 남아진 당신의 자녀들을 기억하시사, 그 마음 가운데 내일의 소망을 위해 다시 다짐하게 하여 주시옵고, 인생행로에 있어서 앞으로 다가올 고개 고개를 뜻과 더불어 힘차게 넘을 수 있는 아버지의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옵니다. 그리하여 최후의 승리의 자리에서 다시 상봉하여 아버지의 기쁨이 되고, 아버지께서 내세워 놓고 자랑할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게 복을 빌어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오늘의 모든 것을 당신이 맡아 주시옵고, 금후의 모든 생애 또한 당신이 맡아 주시어서 당신께서 주도하시는 역사적인 그 고개를 넘어 갈 수 있는 자녀로 삼으시옵기를 부탁하올 때, 모든 말씀 참부모의 성호 받들어 아뢰었사옵니다. 아멘.

[기 도]

지금까지의 수많은 인간들은 역사노정을 거쳐오면서 방향도 모르고 흘러왔습니다. 이 땅을 거쳐간 선지선열도 한의 노정을 남기고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아버지의 사랑의 마음을 붙들고 아버지의 사정과 더불어 가야 할 인간들이었지만 그런 인간들이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아버지의 입장은 고통을 피할 수 없는 입장이요, 땅 위에서 그 무엇을 잃어버린 것 이상의 처량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는 사실을 저희들이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들을 잃어버린 서러움을 당하지 않은 사람은 아들을 잃어버린 부모의 마음을 알 수 없는 것이요, 딸을 잃어버린 서러움을 당하지 않은 사람은 딸을 잃어버린 부모의 서러움을 헤아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도 `아버지여! 나를 부르시옵소서'하는 자식이 되어야 되겠사옵니다. 그런 생각, 그런 자식을 잃어버린 서러움은 일시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옵니다. 그것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세월과 더불어 이 땅 위에 남아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그런 딱한 사정에 얽매여 가장 비참한 자리에 계신다는 것을 느끼게 되옵니다.

오늘날 이 땅에는 아버지를 따르고 믿는다는 사람이 많사옵고, 아버지를 모신다는 종교는 많사오나, 그 아버지와 더불어 살기를 바라고 아버지와 고통을 같이하기를 바라는 자는 없사옵니다. 자기의 모든 고통을 아버지에게 넘겨 주고 자신은 고통으로부터 해방된 자리에서 아버지를 모시겠다는 이런 철없는 마음을 갖고 종교를 믿고 있는 무리가 많은 것을 저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저희들은 그와 같은 무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이 시간 다시 한번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상한 마음을 붙들고, 아버지의 목을 끌어안고 아버지를 위로 할 수 있는 아들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러한 딸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이런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아버지는 외로운 분, 불쌍하고 처량한 분, 어느누구에게도 의지할 수 없는 마치 막바지 가을절기와 같은 자리에 계신 아버지요, 절망의 기로에서 그 누구도 동정하지 않는 처절한 자리에 계신 아버지요, 생사가 엇갈리고 피를 토하는 그런 비통하고 억울한 자리가 바로 아버지가 처해 있는 자리가 아니겠느냐고, 그 누가 묻더라도 그렇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는 아버지인 것을 저희들이 알게 되옵니다. 그 아버지의 아들이 되고 딸이 되겠다고 자처하는 무리가 이 땅에 있어야 하겠습니다. 아버지를 대함에 있어서 눈물없이 대할 수 없는 것을 알고 나가야 할 것이 자녀의 명분을 갖추고 가는 모습이 아니겠사옵니까?

진정으로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뜻을 알아서 앞으로 주어진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준비하는 자녀와 현재의 자리에서 아버지가 처한 입장을 대신하여 해결방안을 찾는 자녀를 대하여 명령하고 싶은 아버지의 마음이 있다 할진대, 그렇지 못한 인간을 볼 때 얼마나 비참하고 처절하옵니까? `얘 아무개야 아무개야 이 일을 어쩌면 좋으냐' 하시면서 이 일을 감당하고, 이 일을 원수와 싸워 승리하여 해결지어야 할 한 사람을 이 땅 위에서 찾지 못한 불쌍한 아버지를 이 시간 저희들이 위로해 드려야 하겠습니다.

그 아버지 앞에 승리의 이념을 세우겠다고 다짐하는 그런 무리가 땅 위에 있었사옵니까? 못다 이룬 하늘의 뜻을 이루어 내기 위해 원수의 세계에서 십자가를 지고 선두에 서서 싸우는 하늘의 용사와 아들딸들이 있사옵니까? 역사시대에 이러한 일을 감당할 수 있는 무리가 없었사옵니다. 이제 이를 감당할 수 있는 무리가 통일의 무리인 것을 아옵니다. 이를 바라보는 당신의 소원이 이들과 같이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요, 당신이 소망하시는 그 나라가 이들과 같이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을 알게 될 때, 아버지가 얼마나 불쌍한 분인가를 다시 느끼게 되옵니다.

그 일을 인간들에게 맡기시고 바라보시며 안위의 한 날, 사랑의 한 시간을 가질 수 없는 아버지의 신세가 얼마나 처량하고 불쌍하신 처지였겠습니까? 저희들은 그러한 과거가 있음을 알았사옵고, 그러한 현재와 그럴 수 있는 미래가 다가오고 있음을 알았기에 아버지 앞에 면목없는 모습들이나마 드러내기에 부끄러움을 느껴야 되겠사옵니다. 아들이라는 생각, 딸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아버지 앞에 자세를 갖추고 나설 수 없는 부족한 모습이요 불효의 모습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살필 줄 아는 자가 되어야 되겠사옵니다.

아버지, 저희들의 마음을 아시고 저희들이 가야 할 길을 지켜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소망하는 그 나라를 찾으시옵소서. 이것이 당신의 목표요, 당신이 가야 할 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기관차와 같은 것이 있어야 되겠사옵고, 석탄과 같은 것이 있어야 되겠사옵고, 기관사와 같은 것이 있어야 되겠사옵니다. 그러나 이러한 길에서 지금까지 기관사가 되겠다는 사람은 많았사옵니다. 기관차가 되겠다는 사람도 많았사옵니다. 그러나 석탄이 되겠다는 사람이 없었사옵니다. 오늘날 저희들은 이 세 가지가 다 되어야 되겠사옵니다.

연료가 되어야 할 자기 자신을 어떻게 찾을 것이냐? 이 땅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희생되는 연료와 같은 자녀들이 필요한 것을 알았사옵니다. 그 자체가 하나의 목적이 되어 방향을 알아 가지고 가는 기관차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기관사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그 누가 무엇을 가지고 이것을 감당할 것이냐를 생각할 때, 오늘날 암흑 같은 이 사망의 세계에 궤도를 깔아야 하겠고 그 궤도 위를 달려갈 기관차를 만들어야 되겠습니다. 또 한 기관사를 찾아야 되고 연료를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통일교회의 사명인 것을 저희는 이미 알았사옵니다.

아버님, 여기에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저희 자체가 궤도가 되어야 되고, 연료가 되어야 되고, 기관차가 되어야 되고, 기관사가 되어야 된다는 사실을 알았사옵니다. 이런 자리가 아버지와 하나될 수 있는 자리인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는 그러한 자리를 찾아오신다는 것을 저희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버님, 사망의 세계에서 저희들이 가야 할 길을 닦기 위해 얼마나 수고하셨사옵니까? 준비한 궤도를 달려갈 수 있는 기관차와 같은 기독교를 세우기 위해 얼마나 수고하셨사옵니까? 여기에 인류의 희생과 피땀이 사무쳐 있다는 사실을 저희들이 망각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은 그것을 잊지 아니하시고 이 모든 것을 움직이시기 위하여 선각자를 보내셨사옵니다. 그러나 이 땅에 살고 있는 인간들은 그들이 이끄는 데로 가지 못하였습니다. 궤도는 궤도대로, 기관사는 기관사대로, 기관차는 기관차대로 갈라져 나왔다는 사실을 저희들은 알았습니다. 이제 이것을 규합할 수 있는 통일교단을 세우셨사옵니다. 그러니 저희 통일교단 가운데에는 아버지께서 갈 수 있는 궤도가 되어 있어야 되겠습니다. 연료가 저장되어 있어야 되겠습니다. 완전한 기관차가 되어 있어야 되겠습니다. 기관사가 되어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이 모든 종교를 움직여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목적지를 향하여 힘차게 달려갈 수 있는 통일교회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시간부터라도 내일의 목적지를 향하여 멈출 줄 모르고 달려가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한국과 일본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연결시켜 주시옵소서. 오늘도 여기에 참석하지 않은 형제들의 마음에 싸움이 벌어지고 있사옵니다. 아버지, 지켜 주시옵소서.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한국이 갈 길과 저희들이 갈 길을, 아버지, 지켜 주시옵소서.

저희들은 포로와 같은 입장에 놓여 있사옵니다. 저희들이 가야 할 운명길을 가기 위해서는 영육을 다하여 싸워야 할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또 다른 뜻 세계의 행로를 개척하지 않으면 안 될 운명길이 저희들 앞에 놓여 있사오니, 이 길을 다 갈 수 있게끔, 하늘이여! 힘을 가하여 주시옵소서.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저희들이 제물된 자리에서 넘어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아버지께 모든 것을 맡기고, 모든 것을 의지하고, 모든 것을 다하고, 모든 것을 믿고 따라갈 줄 아는 당신의 자녀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은 잊을 수 없는 한날이옵니다. 1960년도에 그날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역사의 분기점을 마련할 수 있었고, 그 분기점을 넘을 수 있는 한날이 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이날은 잊을 수 없는 역사적인 한 수난의 고비였던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그때부터 만 10년을 맞는 오늘까지 당신이 얼마나 수고하셨습니까? 이제 다시 후반기를 맞는 70년대를, 아버지, 지켜 주시옵소서.

이 나라의 운명과 아시아의 운명이 직결되어 있다는 것을 아옵니다. 원수가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그 원수의 팔다리를 꺾고 저희들의 갈 길을 마련해 주신 아버지를 저희가 아옵니다. 이래도 아버지를 믿고, 저래도 아버지를 믿고 오직 아버지의 뜻을 위하여 아버지와 일체를 이루어 행동하고 의논하면서 가는 길만이 저희들의 살 길인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므로 저희들은 아버지와 하나되어야 되겠사옵니다. 저희들을 통하여 아버지는 안식할 수 있는 가정을 찾기를 바라시고 종족과 민족을 찾기를 바라시고 계신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지금까지 싸워 나온 당신의 자녀들이 지쳐 떨어지는 무리가 없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통일교회 스승을 대하여 자기를 또다시 구원해 달라고 하는 불쌍한 무리가 없게하여 주시옵고, 이왕 나선 길, 그 걸음을 옮길 때마다 아버지와 더불어 가야 된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은 부모의 심정을 지니고 종의 몸을 쓰고 피와 땀과 눈물, 모든 것을 인류와 이 천주, 하늘땅을 위해서 이 길을 가겠다고 통일교회에 들어온 몸들이오니, 어떠한 기점에서 출발하였으며 어떠한 과정을 거쳐 어떠한 결과를 맺어야 하는가를 여기서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가야 할 방향에 어긋나 있거든 스스로 방향을 갖추어 가지고 희망찬 내일을 위해 달려갈 줄 아는 당신의 자녀들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4월달, 저희들이 갖추어야 할 모든 준비를 다 해놓게 하시옵고, 이해에 저희들이 원리원칙을 중심삼고 행군하는 모든 곳을 지켜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니다. 금년에 아시아를 중심삼고 세계를 향하여 가야 할 길을, 아버지, 지켜 주시옵소서.

남아진 그날까지 저희들이 온갖 정성과 충성을 다바쳐 당신의 뜻을 이룰 수 있게 하시옵소서. 저희들이 가지고 있는 잘못된 것을 제거해 주시고 오로지 아버지의 뜻을 중심삼고 기쁨의 날만을 남기기 위해 일취월장(日就月將)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1971년도까지 넘어가야 할 국가의 운명길이 남아 있고, 저희들이 넘어가야할 운명길이 남아 있는 줄 알고 있사오니, 아버지, 지켜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옵니다.

5월부터 저희들이 새로이 담판기도를 해야 되겠습니다.

아버지, 저희들에게 힘을 주시옵소서. 정성을 합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가 바라시는 제물된 자리에서 나라를 위하여 있는 정성 다 들이고 당신의 깊은 심정 가운데서 절대순종하는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은 거룩한 날이옵니다. 아버지, 이곳을 흠모하는 당신의 자녀들 위에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더우기 남한 각지에 널려 있는 형제들과 일본, 미국, 독일을 중심삼고 세계 각국에 널려 있는 자녀들을 친히 기억하여 주시옵고, 아버지의 은사를 느낄 수 있는 자녀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부탁드리옵니다. 모든 말씀 참부모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말 씀

사람들은 생활해 나가는 가운데서 어떠한 날도 우연히 맞는 날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보람있는 하루를 맞기 위해서는 아침이면 아침에 그날의 계획을 하고 그 계획을 실천해야 합니다. 계획을 실천하려면 자기의 뜻과 일치시킬 수 있는 환경을 가져야 합니다.

일생을 승리로 이끌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국가, 세계는 내 뜻에 부합되는 환경이 돼 있지 못하기에 여기에는 온갖 고충이 벌어지는 것이요, 선악의 분기점이 엇갈리게 된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내가 나가고자 하는 그 방향을 따라서 어느누구도 나를 대신해서 가줄 수 있는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백이면 백 사람 전부가 각기 자기 나름대로의 하루의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 환경과 투쟁하지 않으면 안 되고, 그 환경을 밀고 나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기에 아침에 계획한 하루의 일을 그 누구도 자신할 수 없는 것을 우리는 하루의 생활 가운데서 잘 느끼게 됩니다.

더우기나 그 환경이 자신의 하루의 생활을 가로막고 있는 것을 느끼면 느낄수록, 또 그 환경의 범위가 사회라든가 세계와 같이 크면 클수록 자신의 하루의 생활을 승리로 결과짓기 위해서는 그것에 비례해서 그 큰 기준을 넘어설 수 있는 결의와 추진력을 가져야 됩니다. 그러지 않고는 그날이 승리의 날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들은 일상생활에서 잘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 하루하루가 더해져서 한 달이 되는 것이요, 한 달 한달이 더해져서 일년이 됩니다.

그 한 달을 중심삼고 볼 때에, 한 달은 하루를 30번 더하면 한 달이 되지요? 그 한 달도 우리가 계획한 대로 살 수 있는 환경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한 달의 승리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그 한 달의 환경에 갖추어진 복잡한 모든 사연들, 계획한 갈 길을 가로막고 있는 모든 여건들을 타파할 수 있는 추진력과 결의가 있어야 됩니다. 그것이 없어 가지고는 한 달의 계획을 승리로 끝맺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일년을 중심삼고 볼 때에, 일년은 열 두 달, 365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러한 일년의 승리를 다짐하기 위해서 어떤 목표를 그 해의 원단(元旦)에 정한 사람이 있다 할 때, 그 일년 동안의 모든 시련과 기타 사정을 헤쳐 나갈 수 있는 여건이 자기와 일치 안 되면 거기에 반발적이요, 배척적이요, 파멸적인 환경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러한 일년을 밀고 나가기 위해서는 삼백 예순 날 이상을 극복할 수 있는 투지력, 혹은 추진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일년을 승리로 장식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런 1년에 10년이 가해지고, 20년, 혹은 30년이 가해진 날들을 지나가고 있는 것이 우리들의 인생길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누가 승리자라고 자신할 수 있는가

일년을 두고 볼 때, 거기에는 벗어날 수 없는 어려움이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일년과 마찬가지의 일생을 살아 가지고 `나는 이렇게 해서 승리했다' 할 수 있는 날을 가졌느냐? 그런 사람이 역사상에 없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성현이나 위인들도 그들이 자기들의 생애 가운데서 `내가 인류 앞에 개척자의 입장에 서서 승리했다' 혹은 `희생의 자리에서 승리했다. 온 인류가 소망하는 것이 이것이다'하는 인생을 가졌느냐? 아직까지 그 누구도 갖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역사과정을 거쳐왔고, 오늘날 우리도 그러한 역사시대에 접어들어 그런 역사를 엮어 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우리가 싸워 나가야 하는 생애노정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하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우리가 계획을 세워 가지고 승리를 다짐하고 나서는 걸음 앞에서 이 역사적인 패자의 서러움, 역사적인 미완성의 환경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나서는 그 모습이 현실적으로 얼마나 초라하고 불쌍한 것인가를 알게 됩니다.

여기에서 어떤 사람이 새로운 결의와 새로운 희망을 품고 `나는 이렇게 가겠다'고 하며 나선다면 지금까지의 역사는 그를 비웃을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네가 과연 그럴수 있겠느냐. 네가 그렇게 해낼 수 있겠느냐? '고 묻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역사의 물음 앞에 `억년을 두고 나는 자신 있습니다' 할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 인간세계의 그 어디에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절대자 외에는 없을 것입니다.

아직도 개척자의 길을 가시는 하나님

그러면 절대자이신 하나님의 복귀섭리노정을 두고 볼 때, 복귀섭리노정의 하루, 몇 년, 혹은 세기 세기를 거쳐오면서 하나님 자체와 그 명령하신 모든 뜻이 승리의 한날을 가졌느냐? 이렇게 묻게 될 때에, 하나님도 역시 역사적 운명을 거쳐간 수많은 선조들과 같은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절대자이신 하나님도 역사시대에 승리의 한 기점을 마련하지 못한 것을 오늘날 우리가 상속받아 가지고 가야 된다는 것은 너무도 엄청난 일입니다.

여러분의 일생을 놓고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6천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거쳐오셨습니다. 성경상으로 보아서 6천년이지 이것은 수백만 년, 수억 년에 해당할 수 있는 기나긴 세월입니다.

하나님이 지금까지 그런 역사를 엮어 나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어느 한날 승리하고 싶지 않은 날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원수와 싸워 가지고 그 진영을 격파하고 거기에 승리의 초석을 쌓아 안식할 수 있는 한날을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추구하셨겠습니까? 그러나 아직까지도 그날을 갖지 못하고 싸움의 행로를, 개척자의 행로를 가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오늘날 그 뒤를 따르고 그 사명을 상속받아 나서겠다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는, 얼마나 결의해야 되고 얼마나 맹세해야 되겠습니까?

지금까지의 과거를 돌아보면 시련의 역사가 엮어져 왔고, 현실을 바라보면 삭막한 세계가 광대하게 펼쳐져 있습니다. 이러한 시점에서 미래의 암담한 세계를 바라보게 될 때, 자신의 옷깃을 여미고 `하나님이시여, 저를 믿으시옵소서' 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없는 하나님의 입장이요, 필시 이것을 해결지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을 아는 하나님이시기에 이 길을 어떻게 돌파하여 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지금까지 하나님은 기뻐하며 걸어 나온 날이 없었습니다. 왜 그러냐? 패자의 서러운 마음을 품고 나오신 걸음이기 때문입니다. 제1차 약속도 인간들로 말미암아 실패했고, 제2차 약속도 인간들로 말미암아 실패했으며, 제3차, 제4차, 혹은 역사시대를 거쳐오면서, 수많은 민족들의 배후를 더듬어 오면서 인간들로 말미암아 실패를 거듭하신 입장에 계신 하나님입니다. 오늘은, 이해는 내가 승리한다고 다짐할 수 있는 하나님의 입장이 되지 못한 것을 생각할 때에, 이 전체의 책임을 짊어진 하나님이 얼마나 불쌍한 분인지를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보아서 알 수 있느냐? 우리들의 하루의 생활을 보아서 알 수 있고, 일년의 생활을 보아서 알 수 있으며, 또한 일생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날 영생을 희구하고 있는 수많은 인간들을 이끌고 있기에 영생의 노정을 향하여 나가는 하나님의 고통은 거기에 비례되는 고통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것을 찾아가야 할 하나님에게 영생적인 고통, 영생적인 슬픔이 개재되어 있지 않겠느냐 하는 문제를 우리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점점 가중된 십자가를 지셔야 하는 하나님

그러면 오늘날 우리들의 일생을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간다는 입장에서 두고 볼 때, 내가 하나님 앞에 짐이 된 입장에 있느냐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짐을 내가 대신 맡을 수 있는 입장에 있느냐? 이런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오늘도 번번이 하나님께 짐이 되는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는 그 수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기쁨보다 슬픔이 더 가중될 것이 아니겠느냐?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이 없다'는 격언이 있듯이 자식이 많은 부모는 쉴 날이 없습니다. 그와 같은 책임을 가진 하나님에게 있어서도 그 수가 많아짐에 따라 얼마나 비참하겠습니까?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 자체를 보면 10년 역사를 지내 왔습니다. 그 10년 역사 가운데는 평탄한 길이 없었습니다. 눈물의 골짜기에서 다짐하던 그런 때만이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우리의 기억에 남는 것은 눈물을 흘리던 그때, 처량하고 심각하던 그때뿐입니다. 그 외의 것은 전부다 망각해 버리는 것입니다. 천 사람이면 천 사람이 심각하던 때가 있었으면 그날들이 전부다 같지 않습니다. 심각하던 한날이 있을 것입니다. 그 한날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날이 우리 개체에게는 한날이로되 하나님에게는 천 날이 아니겠느냐?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에, 우리의 수가 많아짐에 따라 하나님에게는 기쁨보다도 슬픔이 더 가중된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개체의 수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그 모양이 점점 더 알록달록해지는 것입니다. 이런 모양도 생기고, 저런 모양도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합하여 하나의 형태를 갖춘다 하더라도 그 형태가 전부 하나님의 소망의 실체가 될 수 있느냐? 될 수 없습니다. 그 실체가 되기 위해서는 가중된 십자가를 짊어지고 하나님이 고난의 길을 넘든가 인간이 고난의 길을 넘든가 해야 됩니다. 어느 한편이 이것을 넘지 않고는 수가 많은 것이 기쁨으로 나타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누가 책임져야 될 것이냐? 하나님이 책임져야 되느냐, 우리가 책임져야 되느냐? 하나님은 아무리 힘이 들더라도 책임을 져야 되는 것입니다.

왜냐? 하나님은 부모의 입장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힘들다고 자식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부모는 없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힘이 들면 들수록 그것을 하나님이 책임질 것입니다. 만일에 책임진 것을 해내지 못할 때, 하나님은 자신을 두고 자탄할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쳐야 할 입장에 계신 하나님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어려움이 있으면 `하나님이시여, 저의 어려움을 맡아 주시옵소서. 제가 어려운 길, 개척자의 노정을 가고 있사오니 제 아픈 모든 사연을 맡으시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우리는 번번이 이런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니냐? 우리들은 그 기도의 이면에 하나님의 슬픔이 가중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아버지라는 말이 얼마나 두려운 말인가를 여러분들은 느껴야 되겠습니다. 아버지라는 그 말 가운데는 천지의 사연이 엉클어져 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저희들과 같이하시옵소서' 라는 이 말은 하나님께서 수천 수만의 십자가를 우리와 같이 져 달라는 말이요, 나를 위하여 종의 자리에 서달라는 말이요, 나를 위하여 죽어 달라는 말이라는 것을 우리들은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효자

하나님께서 주체적인 입장에서 책임을 짊어지고 지금까지의 역사를 수습해 나오셔서 그나마 오늘날과 같은 역사를 맞이할 수 있게 됐습니다. 이 역사는 미래를 향하여 나아가야 될 입장에 있기 때문에 현시점에서 정지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오늘도 그렇거니와 미래도 그럴 수 있는 하나님의 십자가의 길을 누가 대신 책임질 것이냐? 여기에 내가 책임지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하나님의 한도 책임져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년의 십자가도 극복하기 어려운 것을 알고, 일년의 생활 가운데서도 수많은 한을 체험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6천년의 역사노정을 거쳐오셨습니다. 그간 얼마나 많은 슬픈 사연이 맺혔겠으며, 외로운 고빗길이 많았겠는가? 인간으로는 헤아릴 수 없고, 상상할 수도 없는 불쌍한 처지에 계신 하나님이 아니겠는가? 이런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기도하기가 무서운 것입니다. 아버지라는 이름을 부르기가 무서운 것입니다. 내가 가중된 십자가를 남겨 놓게 된 입장에서 아버지를 부른다는 것이 체면이 없는 일임을 발견할 수 있을 때에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아버지 앞에 당당코 자세를 갖추어 가지고 `하나님이여! 저를 자랑하고, 제가 모든 책임을 짊어지고 있으니 이 책임과 더불어 저를 지켜 주소서' 하는 자리에 있기 보다는, 그 내심적인 십자가를 염려하면서 하나님 앞에 나타나기를 부끄러워할 줄 아는 자신이 되어야 합니다. 입을 가지고도 자신의 사연을 통고할 수 없고, 자기 모습을 드러낼 수 없는 부끄러운 자신이라는 것을 알고 마음속으로 열 번을 부르다가 자기도 모르게 입으로 튀어나온 아버지라는 그 한마디가 평범하게 기도하는 천만 가지의 기도보다도 더 귀하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 자리에서만이 하나님은 `내가 짊어진 십자가가 있더라도 네 십자가라면 내가 책임지고 해결하겠다' 하실 것입니다. 오로지 그 길만이 하나님이 나설 수 있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가 아버지의 뜻을 대해 가지고 나가는 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그런 자세를 갖추었다고 아버지 앞에 나아가 뻔뻔스럽게 `당신이 사랑하는 통일교회 교인이요, 당신이 사랑하는 통일교회가 아닙니까?'라고 기도하는 자신이 된다면, 그 자리는 하나님께서 임할 수 있는 소망의 자리가 못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통일교회를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있거든 가중된 십자가를 지고 나오시는 아버지를 헤아리고 자식된 도리를 다하는 입장에서야 합니다. 자기를 위하여 수고하시는 부모 앞에 효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서는 먼저 눈물로써 부모를 위로하고, 짊어진 십자가를 당당하게 지고 가야 합니다. 당신이 걸어온 십자가의 길은 자식을 위하기에 비참하였다는 사실을 통고하는 마음을 가지고 `아버지여, 더 이상 고생하지 마시옵소서. 아버지여, 저를 위하여 더 이상 염려하지 마시옵소서'할 수 있는 자리에 서야 합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슬픔을 당하면서 나오신 부모되시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효자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것을 생각할 때, 오늘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 너무나 뻔뻔스러웠고 너무나 도도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도도했던 인간들

오늘날 우리가 도도하고, 자신을 가진 이 자리는 아직까지 하나님과 같이 갈 수 없는 자리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나를 바라보는 하나님 앞에는, 즉 아버지와 나 사이에는 메꾸어야 할 구렁텅이가 남아 있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저 나라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또다시 시련 고통을 당하지 않으면 안 될 개척자의 노정이 남아 있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어떤 개척자보다도 복귀섭리역사에서 개척자의 사명을 거듭하셨다는 사실을 오늘 인간세계에서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영계에 가면 그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지만, 현실에서는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땅에서 그 누가 세계를 위하여, 혹은 역사를 자기가 책임져 가지고 자기 자체를 본받으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는 망령된 사람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 보다도 하나님을 본받으라고 통고해야 된다는 거예요.

예수님도 그와 같은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아버지, 내 뜻대로 마시옵고 당신의 뜻대로 하시옵소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내 뜻은 이스라엘 민족을 중심삼고 당장에 아버지 앞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지만, 아버지의 뜻은 그것을 돌이키기 위해 십자가의 길을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앞에 놓고 가려 가는 데에 하나님을 염려한 나머지 자기 일신을 투입하여 해결할 수 있는 위로의 터전이 있다면, 자기 일신을 찢어 버리고, 자기 일신이 십자가에서 사라지는 한이 있더라도 응당 가야겠다고 결의한 자리가 겟세마네 동산이었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이 땅 위의 한 나라면 한 나라에는 그 나라를 개척한 개척자가 있고, 혹은 지역이면 지역에도 그 지역을 개척한 개척자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무엇을 개척하는 데 인간 자체가 주동이 되었던 것같이 보이지만, 그 배후에는 하나님이 관계되지 않은 일이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세상만사가 하나님권내에서 하나님의 주관을 받아야 하고, 역사가 그러해야 하고, 시대가 그러해야 하기 때문에, 시대에 남을 수 있고 역사에 남을 수 있는 새로운 일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 시대에 그 분야의 개척자이지만, 그 개척자가 나타나기까지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개척자의 행로를 수없이 왕래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천 번 개척해 놓고 한 번 내세우기를 주저하는 하나님인 것을 알아야 됩니다. 천 번 수고하여 쌓은 승리의 터전을, 한 번 잘못 내세우면 천 번 수고한 것이 일시에 다 깨어져 나가 버리고, 이것을 다시 수습하려면 몇 천 번 가중된 개척자의 행로를 다시 더듬어 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이 땅위에 한 가지 일을 맡겨서 개척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수없이 가중된 십자가의 길이 하나님 앞에 놓이게 된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이런 개척자의 노정을 걸어오셨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개척자, 혹은 선각자로서 선두의 자리에 섰을 때 여러분 자신이 섰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그 자리에 서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서 몇백 번 몇천만 번 섰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개척자의 입장에 서기 전에 하나님이 몇천만 번 개척자의 입장에 섰고, 내가 선각자의 입장에 서기 전에 하나님이 몇천만 번 선각자의 입장에 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한 날 개척자로서 승리를 했다고 자랑해 보지 못한 하나님이요, 선각자의 입장에서 새로운 시대를 앞놓아 가지고 그 척도를 좁혀 나오며 싸웠지만 자랑해 보지 못한 하나님이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선각자적인 입장에서 생각해 보게 될 때, 오늘날 타락한 세상의 인간들은 너무나 도도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이라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인내와 극복

개척자는 인내심이 없이는 그 길을 갈 수 없습니다. 오늘이라는 이 시점 자체가 모험이 필요한 시점이기 때문에 거기에서 부딪치는 모든 것은 전부다 생소한 것들이요, 전부다 새로운 손길을 가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역사와 문화를 헤아려 가지고 어떤 나라나 민족이 문화민족이라고 칭송을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민족이 남겨놓은 유물이나 유적들을 보면, 그것은 수많은 모험을 거쳐 가지고 이루어진 것이요, 수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서 만들어진 유물들이요 유적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이와 같이 이 땅에 역사시대의 한 문화권을 형성하는 데에도 그러하거든 하물며 하늘세계를 창건하기 위해 인류 구도의 노정을 개척하시는 하나님의 노정은 얼마나 엄청나겠습니까? 그 길을 개척하기 위한 하나님의 입장은 말할 수 없는 인내를 가지고 고난을 극복하지 않고는 이 길을 갈 수 없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 길이 얼마나 참아야 하는 길이냐? 죽음의 고비가 연이어 나가는 한이 있더라도 이것을 참고 극복해야 할 길이 하나님께서 걸으신 길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원수가 없으면 모르거니와 원수가 있어 가지고 공격하고 있다는 사실, 어느때 원수의 습격을 받아 지금까지의 천년 공사(千年功事)가 일시에 파탄을 당할지 모르는 길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초초한 심정을 지니고 수난의 길을 극복해 나오는 이 순간에도 원수들은 칼을 들고, 화살을 겨누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그야말로 하나님은 기진맥진한 자리에서 흑백을 가릴 수 있는 소망의 한때를 바라보면서 나오고 있는 때까지도 원수들은 하나님을 향해 총칼을 겨누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지칠 수 있는 자리요, 쉬고 싶은 자리에서도 원수를 맞아 가지고 최후의 결단을 내려야 할 입장이니, 어느 한날 마음놓고 안심할 때가 있었겠느냐? 그러기에 하나님이 불쌍하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인내와 극복이 그 분의 생활의 전부요, 희생이 그 분의 생활의 전부가 아니겠느냐. 그 투쟁은 습관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되풀이되는 투쟁이 아니라 범위가 넓어짐에 따라 더욱 더 복잡다단하고 광범위한 투쟁이 사방에서 가해져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런 역사시대를 거쳐 오시는 하나님이 얼마나 힘드시겠는가를 여러분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우리 동양이 밤이 되어 쉬는 시간이면 서양은 낮입니다. 동양 사람들이 밤이 되어 쉬는 시간에 서양 사람들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하나님을 중심삼고 투쟁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지구를 바라보시는 하나님께서 24시간 어느 한 순간이라도 쉴 수 있겠는가? 하나님을 배제하고는 이 세상의 일이 해결될 수 없다고 볼 때, 한 가지에서부터 천만사에 이르기까지 전부 관여해 가지고 선의 결정권을 내려야 하는 입장에 계신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지극히 불쌍한 분이 아니겠느냐?

그런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자기를 중심삼은 복잡한 문제를 놓고 기도하려다가 기도할 수 없어 입을 다물고 눈물을 흘리는 자리, 그러한 자리가 여러분의 신앙생활 가운데 몇 번이나 있었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소원하는 아들딸

`내가 어려움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을 위해 당하는 어려움이니, 그 대가를 반드시 내 아들딸들 앞에 돌려주소. 내가 이렇게 수고하는 것은 통일교회를 위해 하는 것이니, 그 수고의 대가를 통일교회에 돌려주소!' 하는 입장에서 믿고 일하는 사람은 많지만, 진정으로 하나님의 내심을 부여안고 수난의 노정을 극복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투쟁의 역경을 품고 내일의 소망을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고 몸부림치는 신세가 지금까지의 역사를 지탱해 온 하나님의 신세가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 무겁고 힘든 십자가를 짊어지고 역사를 지탱하면서 나온 하나님의 생활이 얼마나 역경의 생활이었겠는가? 그렇지만 이것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은 잃어버린 아들딸을 찾아야 할 부모의 심정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전지전능하기에 나만이 책임질 수 있다고 하며 하나님만이 다짐할 수 있는 길이 복귀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제한된 시대권에 있는 한 사람이 자기의 일생노정을 통하여 이 일을 책임져 줄 것인가 하는 것을 하나님은 꿈에도 생각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이 일은 하나님만이 전지전능하기 때문에 역사의 시작부터 끝까지 하나님 자신만이 책임질 수 있는 일이지, 인간은 그 누구도 책임질 수 없다는 것이 하나님께서 알고 계시는 복귀의 노정인 것입니다.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인간 자신이 그런 입장에 계신 하나님이신 것을 알고도 일생을 사는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 십자가를 가중시키는 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음이 비참한 것이요, 불쌍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 불쌍한 것이 왜 생겨났느냐? 인간시조의 타락 때문에 생겨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넘어가야 할 것은 선을 중심삼고 원수가 침범할 수 있는 악의 요소를 어떻게 박멸할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살아가는 데에는 잘사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못살더라도 하나님께 자기의 십자가를 남겨 주지 않고가는 그 자체가 하나님 앞에 효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 왔다 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일생 가운데에서 하나님 앞에 가중된 십자가의 행로를 남기고 가지만, 나만은 내 일생에서 아무리 수난의 길을 가고, 아무리 어려운 역경에 부딪친다 해도 하나님 앞에 내십자가를 남겨 놓지 않겠다'고 하며, `내 것은 내가 책임지겠다'고 몸부림치는 아들딸을 하나님은 보고 싶어하시는 것입니다.

`내 십자가는 내 것이기에 하나님 앞에 남겨 두지 않고 내가 책임지겠다'고 하는 그런 아들딸이라도 하나님은 그들을 효자라고 할 것입니다. 또한 `당신이 짊어진 짐은 우리 인류를 위한 짐이요, 우리 조상들이 잘못하여 짊어진 짐이니, 내가 그 짐을 책임지겠다'고 말이라도 그렇게 하고 행동이라도 그렇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그 일을 못 하여 그 사람에게 책임을 지울 수는 없다 하더라도 그 사람을 붙들고 역사적인 사연이 담긴 말을 하고 싶은 것이 하나님의 내심이 아니겠는가?

오늘날 우리들은 철부지한 과거의 신앙노정을 다시 회상하면서 1960년 이전부터 지금까지 습관적이거나 관례적으로 하나님을 위주로 해 나왔던 신앙관을 벗어버리고 70년대에는 우리가 체면만이라도 지켜 가지고 하나님 앞에 자기의 십자가를 남겨 주지 않는 자신이 되고, 통일교회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이것만을 책임지고 간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지금까지 인류 역사 과정에서 그 누구도 행하지 못했고, 감당하지 못했던 개척자의 사명을 하고 있다고 칭찬하실 것입니다. 그러고 싶은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두 가지 십자가를 책임지고 있는 나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역사과정의 모든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오셨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잘못해서가 아니라 인류가 잘못해서입니다. 그 인류는 우리의 조상이요, 우리와 친척의 인연을 갖고 있습니다. 나는 그 인연을 집약할 총합실체로서 태어난 것입니다. 결국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대신 짊어진 역사적인 모든 책임을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정성들이는 무리가 있다면, 그들은 먼저 어떤 기도를 해야 되느냐? 회개의 기도를 해야 됩니다. 선조로부터 이어 나온 잘못된 역사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되지 않고는 안 된다는 거예요. 눈물과 피땀으로 메워 나오시던 골짜기를 청산하지 못해 한이 맺힌 하나님을 회개의 눈물로서 위로해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한때를 갖지 못하고는 현실 세계에서 하나님 앞에 자기가 책임을 다한다고 할 수 없는 입장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 통일교인들은 자기 자신을 중심삼고 회개하기보다 역사를 놓고 회개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통일교인들은 역사를 책임졌기 때문에 역사를 놓고 회개해야 되고, 또한 현시대를 책임졌기 때문에 이 시대를 놓고 회개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과거와 현재의 모든 인류를 대신한 입장이기 때문에 제물된 입장에 서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 자리는 지금까지 실패의 역사를 거듭해 왔던 수많은 선조들과 실패의 역사를 거듭하고 있는 현재 30억 인류를 대신한 서글픈 자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연을 알고 하나님 앞에 실낱 같은 위로의 길이라도 개척하여 땅 위에, 혹은 역사시대에 관계를 맺게 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은 그에게 감사해야 되고 또한 역사시대에 왔다갔던 수많은 선지선열들도 기필코 그에게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일생에서 그럴 수 있는 한때를 어느때에 남길 것이냐? 그 일생을 통하여 그런 한때를 남길 수 있을 것이냐, 없을 것이냐 하는 문제가 현재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들이 해결해야 할 중대한 문제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나는 역사의 배반자냐, 아니면 역사의 지휘자냐? 또 시대의 배반자냐 시대의 지휘자냐? 이런 생각을 해 볼 때, 하나님은 역사를 지휘하기 위해서 싸워 나왔고, 시대를 지휘하기 위해서 싸워 나오셨습니다. 그런 하나님 앞에 내가 지지를 받기 위해서는 먼저 역사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한 순간, 시대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한 순간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한 한 기점을 갖지 않고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자신이 못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는 내가 이러이러한 각오를 하고 이러이러한 입장에 섰기 때문에 응당 이렇게 해야 된다고 하면서 자기 자신을 나타내는 자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순간이요, 한때 밖에 못 되는 것입니다. 그 순간을 연속시켜 일년을 거쳐야 되고, 일년을 연속시켜 10년, 그 10년을 연속시키기 위하여 일생을 가야 하는 것이 신앙길입니다. 그런 순간의 승리의 기점을 하루로, 그 하루를 한 해로, 그 한 해를 10년으로, 그 10년을 생애로 어떻게 연결시키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여기에서 마음을 공고화시키고 심정을 공고화시켜 가지고 나아가는 길이 신앙자의 길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자기를 중심삼고 자탄하는 자리에서는 신앙길이 성립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내게 어려움이 가해져 온다 해도 피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에게 가해져 오는 십자가를 피하려 하면 이중의 십자가가 남아진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내 자신이 역사의 산물이요, 시대의 산물이기 때문에 과거의 선조들이 책임하지 못한 짐들이 나에게 가중되어 오는 것이요, 현시대가 책임하지 못한 짐이 나에게 가중되어 오는 것입니다. 이처럼 나는 두가지 짐을 짊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내가 그 십자가를 피하게 되면 나에게 상속되었던 역사적 십자가, 시대적 십자가를 하나님 앞에 돌려 버리는 결과가 됩니다. 그런 고로 이중적인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는 놀음이 오늘날 우리들의 신앙길이 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나'라는 존재는 역사를 지탱하고 시대를 지탱하고 있기 때문에 나 자신은 역사를 탕감해야 하고 시대를 탕감해야 하는 입장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이런 관계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재림역사가 가능하다는 거예요. 현실은 이중적인 역사성을 띠고 있기 때문에, 현실의 승리는 역사적인 승리를 가져올 수 있으며, 현실의 실패는 역사적인 실패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책임을 회피하게 되면 우리가 지고 있는 이중의 십자가를 하나님에게 가중시키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돌려 버려서는 안 될 사실이요, 하나님으로 하여금 당하게 해서는 안 될 사실입니다. 그것이 부모의 참상이 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생각하고 자기 일대에 이것을 막아내는 싸움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바른 자세

그러면 이러한 입장에 있는 우리 자신들은 어떻게 하나님을 대해야 하는가? 언제나 하나님으로부터 긍휼을 받을 수 있는 자세를 갖추어야 됩니다. 내가 뜻을 이루기 위해 책임을 졌다 해도 `하나님이여, 왜 당신은 내가 책임진 것을 몰라줍니까?'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나는 그런 기도를 해보지 못했습니다. `내가 이만큼 기도했고 노력했기 때문에 앞으로 다가올 상급은 내 것이다' 하는 이런 마음을 갖고 출발해서는 안 됩니다. 문제는 어떻게 하나님의 동정을 받을 수 있게 하느냐, 어떻게 하나님이 나를 생각해 줄 수 있는 자리에 임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이 갖추고 있는 것을 드러내어 자랑하기 보다는 너무나 부끄러움을 느끼면서 얼굴을 들지 못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언제나 하나님 앞에 자기를 내세울 수 없는 입장인 것을 알면 알수록 하나님의 심정적인 동정을 받을 수 있는 자리가 넓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왜? 하나님이 수난의 길에 처해 있는 것을 알기에 하나님께 우리의 사정을 통고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질 수 있는 십자가의 길이 이만하다면, 민족이 질 수 있는 십자가의 길은 이보다 훨씬 크지 않겠는가? `그 십자가를 제가 지겠습니다' 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면 현재의 편안한 자리가 도리어 고통으로 느껴지는 자리가 아니겠는 가? 이렇게 느끼고 생활하는 사람들이 가는 길은 하나님이 가실 길을 대신해서 가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편안한 자리에서 무엇을 이루었다고 그 하루를 좋다고 찬양하고, 기쁨의 날로 여기기 보다 더 어려운 미래의 자리가 남아 있는 것을 알고, 그 자리에서 미래의 십자가의 길을 걸어 가지고 미래의 십자가를 감소할 수 있는 조건으로 받아 달라고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 하늘길을 가는 사람이요, 하나님과 동고(同苦)하며 가는 사람입니다. 이런 것을 두고 보면,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을 위한 길을 가는 사람들은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결론이 나오는 거예요.

웃음이 자기 가슴을 헤치고 나오려 할 때에도 세계적인 웃음을 바라는 마음이 앞서지 않으면 안 됩니다. 또한 하나님이 기뻐하며 웃을 날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내 웃음보다도 세계가 웃을 수 있는 날을 바라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임을 알게 될 때, 웃고 나서 좋아하던 것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며 가는 길이 신앙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승리를 다짐할 수 있는 자리에 있더라도 미래의 승리를 위해 다시 결의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이렇게 미래의 승리를 위해 다시 결의하며 가는 길이 하나님을 모시고 가는 정상적인 신앙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길을 가는 사람은 눈물의 개척자요, 고통의 개척자요, 제물의 개척자인 것입니다. 그런 마음이 앞서 가는 자리가 인간 세상에서 하나님이 인정할 수 있고, 인간 세상에서 하나님 대신 개척자의 명분을 갖고 나타날 수 있는 자리입니다. 이런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기도할 때 번번이 개척자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리고 선각자라는 인식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선각자나 개척자는 이제 말한바와 같이 자신이 영광된 자리에 서더라도 도리어 송구함을 느끼고, 민족이 영광의 날을 맞이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을 그날을 위한 재료로 삼으려는 사람입니다. 또 자기가 어떤 승리를 다짐하는 싸움터에서 어떤 책임을 느낄 때에도 이것을 미래에 어떤 책임을 지기 위한 훈련이라는 마음을 가지고 임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라야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개척자의 행로를 걸을 수 있다고 인정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입장에 서게 되면 틀림없이 하나님께서 같이하십니다. 그가 죽음의 교차로에 봉착하게 되더라도 그에게는 그것이 죽음길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 대신 승리의 길을 개척해 주신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는 거예요. 이것이 신앙자가 가야 할 본질적인 행로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정상적이고 본질적인 신앙길

여러분이 일생 동안에 편안한 날을 갖기를 원합니까? 그것은 꿈에 지나지 않는 거예요. 나는 일생 동안 행복할 것이다고 생각합니까? 그것은 공연한 꿈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행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기가 행복했다가는 행복한 것이 도리어 하나님의 채찍을 맞을 수 있고 하나님과 멀어질 수 있는 동기밖에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는 자는 받는 자보다 복되다, 즉 받는 자보다 주는 자가 더 복되다고 하는 거예요. 내가 좋아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받는 자리요, 내가 희생하려고 하는 자리는 어디까지나 주는 자리입니다. 그러기에 희생하는 자리가 복받는 자리라는 것입니다. 그럼 왜 희생하는 자기가 복받는 자리냐?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희생해 나오셨기 때문이요, 그 자리가 하나님편에 설 수 있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비참한 개척자의 행로를 걸어오셨습니다. 때문에 그러한 하나님 앞에 당당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자기가 쌓은 실적이 있더라도 그것은 더 큰 실적을 위한 재료요, 미래에 하나님과 더불어 기뻐할 수 있는 재료로 삼을 수 있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그러한 태도가 신앙의 본질적인 태도요, 신앙자가 가야 할 행로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기도 가운데 부르는 `아버지'라는 말은 제일 부르기 어려운 말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 아버지라는 말 가운데는 역사의 사연이 깃들어 있고, 역사의 슬픔이 깃들어 있고, 역사상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그 모든 수난을 극복해 온 곡절이 서려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버지 앞에 기도할 때, 그런 마음을 어떻게 체휼해야 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새로운 역사를 창건하는 개척자가 되라

오늘 우리는 새로운 역사를 창건하는 개척자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자신만만해 한다거나 `내가 아버지의 뜻을 위해서 이렇게 하지 않았습니까, 왜 나를 몰라주십니까?' 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사람은 개척자가 될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앞에 십자가를 가중시키는 사람이요, 자기 스스로의 십자가도 감당 못 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는 개인이 가야 할 길을 가야 하고, 가정이 가야 할 길을 가야 하고, 종족, 민족, 국가가 가야 할 길을 가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통일교인들이 가야 할 길입니다.

이처럼 개인이 가야 할 생애노정에 남아 있는 십자가의 단계가 많은 데도 불구하고 그 노정에서 나 개인이 한 것을 칭찬해 달라고 하는 사람, 칭찬을 안 해주면 얼굴을 찡그리는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믿겠느냐? 어떻게 믿겠느냐는 거예요. 엄청난 역사를 책임지고 나오시는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그런 사람들은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역사시대에서 그 누구도 하나님의 내적 사연을 알지 못하고 갔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생각하는 현재의 입장에서는 개척자의 책임을 할 수 없습니다. 왜? 이것은 사탄편에서 태어난 자신의 인식권을 넘어서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탄의 피와 뼈와 살을 받아 태어난 몸이기에 그 몸자체가 어느 한계선을 넘지 못한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습관적인 생활을 하면서 통일교회에서 하나님의 뜻길을 간다고 `내가 하나님의 아들딸이다'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사람은 소용없습니다. 그런 자리는 어디까지나 하나님께 자기의 십자가를 더 가중시키는 자리라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절대 빚을 안 진다. 내 책임은 내가 지겠다. 그 누구의 협조도 원치 않는다'하는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러분은 어려울 때 번번이 자기를 몰라준다고, 통일교회 교인들이 나를 몰라준다고, 기성교회보다 못 하다고 원망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뜻길을 몰라서 그래요. 각자가 가야 할 길이 바쁩니다. 자기가 가야 할 길이 바쁘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십자가를 가중시키는 이런 생활에서 어떻게 벗어나느냐? 이것이 급선무입니다.

그러므로 내 집안이 당하는 십자가는 내가 짊어져야 되겠습니다. 내 민족이 당하는 십자가는 내가 짊어져야 되겠습니다. 나라가 당하는 십자가를 내가 짊어져야 되겠습니다. 내가 그것을 책임지고, 내가 당해야 되겠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를 그 나라의 제1 소망자로 인정하실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그 나라를 맡기고 싶어하시고 그 나라와 인연맺고 싶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오늘 여러분 각자가 정상적인 편안한 자리에서 뜻길을 간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위한 길이 아닙니다. 그 자리는 오히려 하나님 앞에 자기의 십자가를 가중시키는 자리라는 것을 여러분이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을 생각할 때, 하나님 앞에 얼굴을 들 수 없고 미안하고 황송한 마음, 어떻게 자기의 심정을 가눌 수 없이 부끄러운 마음, 이러한 마음이 여러분들의 주위를 휩쓸어 여러분의 생활을 이끌고 나가야 합니다. 그런 자신이 되지 못한 자리는 하나님 앞에 십자가를 짊어지우는 자리임이 틀림없습니다. 이러한 자리에 자신이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몰라준다, 나를 알아봐 달라' 하니 그 얼마나 경거망동한 일이요, 얼마나 큰 불효예요? 그러니 하나님께서 이 사망세계에서 새로운 개척자가 나오기를 얼마나 고대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고난의 자리에 세우시는 이유

그러면 어디서부터 이러한 비극이 벌어졌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따라서 `내가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지내온 역사시대를 책임지고 하나님 앞에 승리해야 되겠다. 승리는 내 것이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라는 존재는 역사적인 죄의 인연을 가지고 있으니, 그것을 벗어나려면 역사를 대신해서 회개해야 합니다. 또한 이 시대의 산물이니 시대를 대신하여 회개해야 합니다. `과거의 아담 가정, 노아 가정, 아브라함 가정, 모세노정에 있었던 잘못된 모든 사실들이 저희 자신에게 있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저는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다. 저희 가정만은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다. 하나님께서 협조해 주시지 않아도 저는 그런 길을 안 가겠습니다. 하나님이 저를 불쌍하게 생각하셔서 협조해 주신다고 해도 저의 짐은 제가 지겠습니다'라고 하는 다짐을 해 봤어요?

하나님은 그런 조건을 세우시기 위해 여러분을 십자가의 노정으로 몰아 내는 것입니다. 3일노정은 어느때나 있습니다. 이 3점이라는 것은 반드시 중심을 가운데 세워야 합니다. 직선은 안 됩니다. 꺾어져서 넘어가야 합니다. 이 자리는 하나님의 협조 없이 혼자 가야 됩니다. `아버지, 저만이 갑니다' 해야 합니다. 이것이 새로운 역사시대의 출발을 예고하고 나서는 신앙길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협조를 받아 가지고 가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의 신앙길은 그랬습니다.

그래서 이중의 십자가를 짊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아담 해와가 하나님을 배반하고 나온 걸음이 아니냐? 그러니 `하나님이여, 저를 배반하시옵소서'라고 해야 합니다. 그래야 탕감복귀하는 거예요. `저를 모른다 하시옵소서. 최후의 수난의 때까지 당신이 저를 몰라본다 하더라도 저는 효의 도리를 다하겠습니다. 이 길은 응당 제가 가야 할 길입니다'라고 하는 결의로 나서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이 그를 안 도와주더라도 그의 후손은 영원히 도와주고 싶은 거예요. 심정의 세계가 그렇다는 거예요.

여러분은 어려울 때면 번번이 `아버지!' 하고 매달립니다. 그러면 이 책임을 어떻게 해야 될 것이냐? 여러분은 어려움을 당하면 당할수록 입을 다물고 나를 용서하시는 아버지 앞에, 내 환경을 지켜 보시는 아버지 앞에 수치스러운 꼴을 어떻게 보이겠느냐 하면서 `제가 이것을 책임지고 가겠습니다' 할 수 있는 자신이 되어야 합니다. `담판을 지어서라도 틀림없이 가겠습니다. 꼭 갑니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오냐 너 갈거야? 그럼 어디 가 봐라!' 하실 겁니다. 사탄의 공격을 받아라 이겁니다. 그런 자리에서 극복하고 가야 합니다. `응당 받아야지요' 하면서 가야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복귀도상에서 아들딸을 책임지고 나오셨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응당 내가 받아야지요. 하나님이 우리를 협조하기 위해서 그렇게 책임지고 나오셨으니,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 위해서는 응당 사탄의 공격을 받아야 됩니다. 원수의 고문틀에 매여 채찍을 맞는 자리, 그러한 자리에 들어가도 `아버지여, 걱정마시옵소서. 제가 참아 남아지는 날에는 이것을 천배 만배 갚아 드리겠습니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깊은 심정의 골짜기를 거쳐 새로운 결의와 새로운 교육을 받는 자리에서도 `아버지 걱정마시고 진정하시옵소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길을 넘지 않고는 인간 세상에 새로운 개척의 동기가 나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그냥 그대로 해결 안 된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인간들이 신앙을 통해서 나온 것입니다. 이런 신앙의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 수많은 종교는 반드시 끝이 와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세우시는 개척자

그러면 오늘날 통일교회가 이런 말세를 맞이한 신앙행로에서 어떻게 해야 되느냐? 새로운 길을 향해 저편으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우리의 생활태도가 달라져야 됩니다. `나는 새로운 개척자로서 개척의 자리에 들어가 성공하겠다'고 다짐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은 어려우면 도와 달라고 아우성쳤지만 통일교회가 가는 길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승공연합을 창설할 때, 기관에 있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왜 저렇게 미욱할까? 슬쩍슬쩍해 가지고 다 앞에 내세우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데….' 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것을 원하지 않아요. 하나님께서 수고하신 기반 위에 내가 가야 할 개척노정이기 때문에 내가 책임을 지고 하겠다는 거예요. 있는 정성을 다 투입하겠다는 것입니다. 밤이든 낮이든….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정력을 다 기울인다는 것입니다.

제1차 계획에서 실패하면 제2차 계획을 세우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배가의 노력을 할 것입니다. 제2차 계획도 실패하면 또다시 제3차 계획을 세워서 하는 것입니다. 3배의 가중한 노력을 할 것입니다. 실패를 거듭하면 할수록 그 실패의 요인으로 말미암아 내가 낙오자가 되고 패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여기서 더 가중된 결의와 각오를 하고 나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지상에 천국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지상에 천국이 오는 것이 아니라 지상에 천국을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새로운 개척자가 되어 이 땅을 움직여야 합니다. 하나님도 이 땅에 개척자를 내세우려 하시는데 어떤 개척자를 세우느냐? 하나님 앞에 짐을 지우는 그런 자는 쓸데없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짐은 물론 하나님의 짐까지 맡아 질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걸어 나온 것은 개인 구원받기 위해서였습니다. 여러분 개인을 위해서였지 국가를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전부가 개인의 테두리 안에서 시시하게 편협한 인생관을 가지고 꺼떡꺼떡하고, 뭐가 어떻고 저떻고…. 메스꺼운 패들이 많다는 거예요.

여러분에게 얘기했는 지 모르지만, 내가 감옥에 들어가서 매를 맞아 피를 토하고 쓰러지는 자리에서도 나를 위해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이것보다 몇백 배의 수난을 당하며 나오신 하나님이시기에 그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할 수 없었습니다. 미래의 수난길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이 현재 고난을 당한다고 해서 얼굴을 들고 기도할 수 없었습니다. `응당 맞아야지요! 응당 몰려야지요! 응당 죽어야지요!' 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자기의 십자가는 자기가 책임져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하나님께 맡기겠다고 하면 하나님께서 동정을 안 해주십니다. 오늘날까지 대부분의 신앙자들은 자기의 십자가를 하나님께 맡기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무엇을 남겨 드릴 것인가 하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뼈까지 깎아 먹으려고 하는 기생충과 같은 신앙자들이었습니다. 그러면 천국에 못 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즉 하나님의 집에 못 간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부모 앞에 불효하는 자식이라 하여도 자기 부모가 죽도록 고생한 것을 알면 돌아서서 통곡을 하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자식이 그러한 자리에 서게 될 때 효자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은 아직까지 그러한 자리에 서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역사시대에 없었던 그러한 효자의 모습, 하나님이 동정할 수 있는 모습이 되어 하나님께서 소망을 가지고 `내가 너에게 바랄 수밖에 없구나' 할 수 있는 한때를 내가 언제 마련할 것이냐? 지금까지의 종교 형태를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형태를 모색해야 돼요.

여기에서 통일교회가 보는 관은 다르다는 거예요. 내가 기도해 가지고 내 자신이 복받겠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짐을 덜어주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복을 돌려드리기 위해서, 하나님의 어려움을 내가 책임지기 위해서 기도하자는 겁니다. 또한 수난을 당하더라도 그 수난이 내게 과중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적어 하나님 앞에 부끄럽다고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뿐 아니라 `당신은 저를 염려하기 보다도 먼저 나라를 위해 짊어진 십자가를 벗어야 할 입장이 아닙니까? 저는 죽더라도, 이 나라, 이 민족은 망하는 한이 있더라도 세계를 위해 짊어진 십자가를 벗어야 될 당신의 입장이 아니겠습니까?' 할 수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이 이러한 입장에 계시기 때문에 자기의 자식, 일족, 종족을 고생의 자리, 굶주리는 자리, 헐벗는 자리로 몰아내더라도. 그러한 자리에 서서 나라를 위하는 사람이 충신이 아니겠느냐는 겁니다.

새로운 개척자의 길을 모색해야 할 우리

여러분은 새로운 효의 길을 모색해야 되고, 새로운 충의 길을 모색해야 되고, 새로운 개척자의 길을 모색해야 됩니다. 그 기원이 어디에서부터냐? 그 자리는 자기를 인식하고 자기를 중심삼아 `하나님이시여, 나를 알아주시옵소서' 하고 자기를 주장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그것을 알아야 돼요.

여기에서부터 새로운 개척자의 길이 다시 시작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도와주는 하나님에게 민망한 마음을 갖고 개척자의 길을 가야 합니다. 그런 여러분이 어떠한 자리에서 기도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같이했다면 하나님이 얼마나 불쌍하시냐? 얼마나 불쌍하시냐 이겁니다. 영계와 수많은 투쟁을 하여 길을 트고, 이제까지 관계를 맺고 찾아가는 그 마음이 여러분의 신앙생활 가운데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민족을 위하여 고생하는 길을 가야 합니다. 세계를 위하여 고생하는 길을 가야 합니다. 내가 살아있는 동안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는 가야 합니다. 내 일생에 있어서 개인 복귀, 가정 복귀, 민족복귀, 국가 복귀, 세계복귀를 해야 할 운명이 남아 있는 것이 아니냐? 그러기에는 너무 짧은 인생이 아니냐? 70, 80년밖에 살 수 없지 않은가?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축소시켜 오늘 이 세계를 위하여, 이 나라를 위하여, 이 민족을 위하여 살 수 있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버지, 제가 당하는 이 시련을 이 민족과 세계를 위하여 맞는 것으로 인정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가 당하신 시련이 그런 시련이었기 때문에 그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싶어하는 것이 자식의 도리가 아니겠습니까?'라고 하는 자신이 되어 가야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언제 기뻐해 보셨습니까? 오늘날 신령한 사람들이 기도해 보고는 선생님이 불쌍하다고들 하지요? 그렇지만 선생님은 불쌍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불쌍하십니다. 나보다 몇천만 배 더 불쌍한 분이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나는 불쌍하지 않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여러분의 동정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동정보다는 민족의 동정을 원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을 희생시키는 것입니다.

그것은 왜? 민족적인 여러분이 되게 하려고 그럽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복귀의 길을 개척할 수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 앞에 가까운 통일교회라 할진대 짊어질 수 있는 십자가를 지고도 `하나님이시여, 저를 세우시옵소서' 할 수 있어야 됩니다. 이것이 효의 자리입니다.

그러기에 다리를 펴고 편히 잠을 잔 사람이 있다면 눈을 뜨는 그 순간부터 부끄러움을 느껴야 되겠습니다. 옷을 입고 나서는 때에도 부끄러움을 느껴야 되겠고, 밥을 먹고 나서도 부끄러움을 느껴야 되겠습니다. 눈물의 길을 버리고 떠날 수 없는 것이 신앙길이라는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하나님이 제시한 개인 복귀의 노정을 개척해야 하는 것이요, 가정복귀의 노정, 혹은 통일가의 개척노정, 민족 복귀의 개척의 노정, 국가 복귀의 개척노정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날이 가면 날이 갈수록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내가 망하면 하나님도 쓰러지는 거예요.

심정세계의 개척자가 되어야 할 통일교인

여러분, 그렇지요? 아무개에게 아들이 몇 있는데 그 중의 한 아들이 먹을 것이 있으면 그저 형제들에게 나누어 주기 일쑤고, 그저 부모를 염려하고 그러는데, 잘못하여 그 아들이 죽었다면 그 부모의 마음이 어떻겠어요? 그 부모는 말할 수 없이 슬플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런 심정의 자리에서 살고 죽자는 것이 통일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심정세계의 개척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 개척자가 가는 길은 극복과 인내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것이 생활철학입니다. 그런 자리는 누구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힘들고 고달픈 자리예요. 기진맥진할 정도로 고달플 때가 많다는 겁니다. 그렇지만 `저 개인 하나 쓰러지는 것은 좋지만, 아버지여! 이 땅 위에 저와 같은 사람이라도 없다면 당신은 얼마나 불쌍하시겠습니까? 제가 제1의 소망이 되지 못할 때, 제2, 제3의 소망이 될 수 있는 그러한 아들딸이 없는 것을 느끼면 느낄수록 당신은 얼마나 불쌍하신 분인가를 알게 되옵니다.'라고 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그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하여 통일교회라는 새로운 종교를 중심삼고 개척자의 깃발을 세워야 하겠습니다.

그런 개척자의 사명을 하고 나서도 부끄러움을 느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또 같이하셨구나' 하는 것을 느껴야 된다는 것입니다. 사지(死地)의 교차로를 거칠 적마다 나는 이미 버려진 몸이라 생각하는데 하나님은 그런 나를 더 염려해 주시고 가누어 주십니다. 여러분이 기도하는 것보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더 염려하신다는 거에요. 그러니 기도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심정의 세계에서는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효도하는 길은 부모에게 요구하는 길이 아닙니다. 가는 그 길이 효를 증거하는 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자리가 어떤 자리냐? 지금까지의 잘못된 신앙태도를 버리고 자기의 십자가를 하나님 앞에 돌리지 않고 자기가 감당하는 자리입니다. 자기의 힘이 부치지 않으면 민족의 십자가, 세계의 십자가로 연결시킬수 있는 그 길을 내가 책임지겠다고 몸부림치며 가야 합니다. 그런 입장에서 `아버지여! 저를 보내주시옵소서. 저를 치시옵소서. 저를 보아서라도 이 민족을 구하여 주시옵소서. 제가 이 민족을 생각하는 것은 아버지께서 이 민족을 구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라고 해야 합니다. 이런 심정을 가지고 기도하면 그 기도는 하나님 앞에 상달될 것입니다.

그런데 전부다 뭐 개인을 위해 기도해요, 개인을 위해…? 여러분이 뭐 선생님을 위해 기도해요? 말도 하지 말아요. 나를 위한 기도는 내가 원하지 않아요.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도 기도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이 무엇을 해 놓고 내가 뭘 했는데 선생님이 몰라주고, 협회장이 몰라준다고 합니다. 몰라주는 것이 정상적입니다. 알아주는 것은 무서운 거예요.

선생님은 이 길을 개척하면서 가장 어려운 때에 부딪치더라도 누구한테 그 어려움을 얘기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내가 가야 할 길은 협회장과도 의논하지 않아요. 내가 가는 길이 첫번째 가는 길이기 때문에 내가 가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맞고 가는 것입니다. 나는 아직까지 쉬어 본 적이 없습니다. 외적인 입장에서 보면 엣날보다 나을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여기에서 안심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복귀섭리를 이끌고 오신 하나님 앞에 타락한 인간이 갖추고 나가야 할 본연의 자세인 것입니다. 가다가 쓰러지는 사람이 있으면 그것까지 지고 가야 합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를 져주려 하는 것이 부자의 관계를 가진 부모의 마음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그런 하나님의 동정과 인연을 가지고 내 길은 내가 가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내가 가야 할 길은 어디냐? `야 아무개야! 이런 내 십자가를 네가 대신 짊어질 수 있느냐? '하고 부탁받을 수 있는 자리가 더더욱 선한 가치의 자리인 것을 알고, 책임을 지기 위해 충성을 다하겠다고 맹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부터 이 땅 위에 새로운 개척자의 길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온 사람은 역사에 남지 않으려 해도 기필코 남게 됩니다. 여기서부터 새로운 종교, 새로운 민족, 새로운 세계가 형성되는 것을 알아야 되겠어요. 아시겠어요? 「예」

기 도

아버님, 세상의 많은 사람들을 대할 적마다 저는 아버님앞에 지극히 못난 모습이었사옵니다.

오늘도 아버지의 모습을 생각하게 될 때, 저 자신을 내세우기에 부끄러운 모습인 것을 느끼게 되옵니다. 그런 자리에서 시련과 은사를 대할 적마다 아버지 앞에 통고할 수 없어 몸부림치는 모습을 보고 천만번 눈물로써 대해 주신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 인생에 있어서 축복된 자리는 그 자리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오늘 통일가를 기억하시는 아버지여, 지금까지 저희들을 기억하여 주신 것을 감사드리옵니다. 저는 그들의 행복보다는 민족의 행복을 위하여, 아버지, 공을 들이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들이 자기를 위하여 당하는 시련을 극복하는 것보다도 그들을 내세워서 민족과 세계의 시련을 극복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신앙의 전통적인 노정이 이와 같은 길에서 개척되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저희들이 깨달아야 되겠사옵니다.

과거와 현재를 통해서 아버지 앞에 십자가를 남기고 나온 역사적인 슬픔, 시대적인 슬픔이 있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선조들이 책임 못한 개척의 길, 복귀의 길을 저희가 아버지를 대신하여 사탄세계에서 헤쳐 나가면서 눈물의 골짜기를 메워 나가야 되겠사옵니다. 이 시대 가운데 피할 수 없는 현실을 바라보며 심판의 비수를 가해야 할 자신의 입장을 느끼면서 아버지가 없더라도 저희가 책임지겠다는 마음을 갖고 나오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바라지 않는 그 자리가 말할 수 없이 어려운 자리인 것을 생각할 때마다, 저희가 맞고 있는 자리가 죽을 수 없는 자리라는 것을 생각할 때마다, 당신은 죽는 자리에 저희를 내세울 수 없었다는 것을 저희가 알았사옵니다. 망하는 자리에 내세울 수 없는 것이 아버지인 것을 저희가 느꼈습니다. 체험하였습니다. 아버지, 황공하옵니다.

금후에도 아버지께서 통일교회를 사랑하고 싶거든 저희에게 채찍을 가하여 내몰아 치시옵소서. 거기에서 아버지를 보고 기뻐하는 무리가 되면 사랑하여 주시옵기를 바라는 것이 스승의 마음인 것을 이들이 알고, 기념할 수 있는 날, 즉 10년 전 이때를 그리워하면서 다시 한번 이들이 마음속으로 이 말씀을 기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10년 전 성혼식을 한 그때에도 저는 가정을 위한 남편이 되겠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가정의 행복을 위해서 복을 비는 자가 되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지금까지 싸워 나왔습니다. 또한 민망하고 부끄러운 자세를 감추지 못하고 아버지를 대할 적마다 가슴을 졸이는 날들을 보냈다는 사실을 당신은 알고 계시옵니다.

제게 어려움이 있다면 그 모든 어려움은 아버지의 거룩함과 인연맺기 위한 것이요, 아버지의 지고하신 성품과 인연맺기 위한 것입니다. 또한 거기에 당신의 사랑이 깃든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저는 그것을 원망하거나 불평하는 마음을 갖지 않습니다. 과거나 현재에도 그런 마음을 갖지 않은 것을 당신은 아시옵니다.

여기에서부터 통일가의 심정적인 전통이 갖추어져야 되겠습니다. 여기에서부터 통일가의 개척자의 사명이 시작되어야 되겠습니다. 세계의 복을 받기 위해서 자신의 입을 벌리고, 팔을 벌리고 몸부림치는 사람보다도 자기 스스로가 당할 수 있는 십자가를 홀로 지고 민족의 십자가까지 책임지겠다고 입을 벌리고, 팔을 벌리고 몸부림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런 사람이 나오기를 당신은 얼마나 바라셨습니까?

자기를 중심삼고 아버지를 이용하기 위해 당신의 제단 위에 머리숙인 무리가 있다면 그 무리들은 언젠가는 민족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는 사람들에게 흡수된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이제 하늘의 분기점, 하늘의 정상의 자리를 향해 나선 저희들, 이 70년대를 맞이하여 이 국가와 민족, 아시아의 정세를 바라볼 적마다, 저희들앞에 또다시 십자가의 노정이 가중되어 들어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럴때일수록 탕감시대가 가까와 오기 때문에 `나만 남았나이다' 하는 자리에 서서 자기 스스로의 책임을 어떻게 하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다시 반문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알아야 되겠사옵니다.

너는 민족을 위하여 무엇을 생각하였으며, 너는 아시아를 위하여 무엇을 생각하였으며, 너는 세계를 위하여 무엇을 생각하였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민족관념을 초월하여 아버지의 심정을 민족간에 연결시켜야 할 사명이 저희에게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지금까지 이 사명을 다하겠다는 마음을 먹고 싸워 나왔기 때문에 원수의 나라들과 서로 손을 잡고 형제의 인연을 맺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을 생각할 때, 그 아버지의 공로를 찬양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통일가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은 문선생이 잘나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옵니다. 아버님께서 가시는 심정길이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었습니다. 저희가 죽더라도 아버지의 심정길을 따라 오는 수많은 후손들은 이와 같은 인연의 역사를 창조해낼 것이요, 시대를 넘고, 환경을 밟고, 죽음길을 넘어서라도 그러한 역사는 재건될 것이옵니다. 그런 역사시대의 개척자의 실권이 다시 출발된다는 사실을 아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의 비참함을 밤을 새워 생각하면서 흐느껴 울어도 울어도 끝이 없는 서글픈 자리, 그러한 자리에서 기진맥진하여 잠이 든다면 거기가 하늘왕궁에 들어가 무한한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인 것을 이들은 몰랐습니다. 아버지, 이번 기회를 통해 그러한 내용을 이들이 체험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한 길을 전통적으로 본받을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 가하는 그 채찍은 자식에게 드높은 미래의 희망을 약속하기 위한 부모의 채찍이요, 직선을 긋는 사랑인 것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통일가에서 십자가의 노정을 가지 않겠다고 한다면 망한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통일교회가 가는 길 가운데서 이 민족의 짐과 세계의 짐을 벗어나겠다는 무리가 있다면 그 무리는 멸족된다는 사실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민족을 위한 짐, 세계를 위한 짐을 지겠다는 무리가 많이 나와야 되겠사옵니다. 그것이 충의 길이요, 효의 길이라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한 무리가 아버지가 기억할 수 있는 무리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그런 무리가 되기를 바라고 있사오나 따라오는 무리들은 그렇지 못한 것을 볼 때, 아버지, 역사시대에 찾아온 무리들의 모습과 같다는 것을 다시 느끼게 되옵니다. 그러나 불쌍하신 아버지의 심정을 제가 알았기에 이와 같은 일을 바라보며 낙망하지 않고 아버지의 심정을 위로할 수 있는 한때를 위해 가겠다고, 지금까지 아버지 앞에 간구하면서 나온 것을 당신은 알고 계십니다. 그런 처지를 거쳐온 아버지이시기에 그런 처지에서 짧은 생애를 살아 나온 저의 모습을 동정하시는 것을 생각할 때에 황공하고 망극할 따름이옵니다.

당신의 거룩한 옷깃을 붙들고, 당신의 영광되고 찬란한 모습을 바라보게 될 때, 웃음과 기쁨으로 만복을 가지고 세계 인류를 품고 축복할 수 있는 그날이 오기를 얼마나 바라셨습니까? 그것이 아버지의 소원인 것을 생각할 때, 저희들은 그 나라와 세계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겠다고 몸부림쳐야 되겠습니다. 피투성이의 몸이 되더라도 그 싸움을 책임지겠다고 나설 수 있는 무리가 되어야 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희들은 3년전도라는 깃발을 들고 나섰습니다. 저희들은 벌거벗은 몸으로서 홀연히 나선 어린애와 같은 모습이옵니다. 이것을 자처하고 나선 것은 모험 중의 모험이옵니다.

그러나 저는 이 판가리 싸움에서 저희들이 승리할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당신의 소원대로 하시옵소서. 저희들이 흘릴 바의 눈물을 다 흘리고, 충성할 바의 충성을 다하고, 이것을 저희 자신들의 책임으로서 얼마나 감수했느냐는 문제가 승패의 관건이 된다는 사실을 저희들이 잘 아옵니다. 그러기에 승리를 바라면 안 되는 것이옵니다. 이것을 자기의 책임으로 알고 노력하면서도 얼마나 부끄러운 마음이 가중해 있느냐? 아버지가 달려와서 책임지고 해결하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가중되느냐? 그러한 환경이 되어 있느냐 그렇지 못하야 하는 문제가 승패의 요인이 된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 여기에 참석한 자녀들이 무엇을 가지고 돌아가겠사옵니까? 이런 마음을 가지고 돌아가야 되겠사옵니다. 처량한 아버지를 모시고 아버지앞에 불효의 모습이 되지 않겠다고, 아버지 앞에 불충의 모습이 되지 않겠다고, 아버지 앞에 남아 있는 짐을 저희가 대신 책임지겠다고 몸부림치며 생애를 다바쳐 이 길을 가는 것이 저희들의 본분인 것을 알고 그러한 길을 가겠다고 결의할 수 있는 이 아침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새로운 민족의 개척자, 새로운 세계의 개척자가 될 수 있게 하시옵소서.

아버지, 이러한 통일가의 자녀들이 아버지께 기억되고, 세계에 기억되어, 우리가 가는 길을 보고 세계 사람들이 자청해서 따라올 수 있는 무리들이 많게 하시옵소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그날까지 저희들은 가야겠사옵니다. 지칠래야 지칠 수 없고, 쉴래야 쉴 수 없는 고달픈 이 노정, 그러나 아니 갈래야 아니 갈 수 없는 인생길이기에 그 길을 가려 하는 이들 앞에, 아버지여, 동정의 마음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이제 이 4월을, 이해를, 그리고 생애를 아버지와 더불어 같이하고 싶어하는 이들이 책임진 것을 잊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자기의 책임은 자기가 짊어지겠다고 선두에 서서 몸부림치며 싸워 나가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오며, 모든 말씀을 참부모의 성호 받들어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기 도]

이 통일교회의 무리를 특별히 사랑하사 수난의 역사시대를 거치게 하신 아버지의 깊으신 경륜을 생각할 때에, 그 모든 지난날들에 대해 감사드리옵니다. 아직도 이 민족이 뜻을 알지 못하는 가운데 오늘도 수난의 길을 걸어가는 당신의 자녀들을 기억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아버님, 저희들이 금후에 가는 길 앞에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그 길을 헤쳐 갈 수 있게 허락해 주시옵소서. 영계의 수많은 영인들과 현재의 영통인들과 연결시키시옵고, 이 나라가 나갈 참된 길과 참된 모습을 바라며 나온 무리들을 축복하여 주시옵기를 갈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와 같은 역사적 인연을 수습하기 위해서 보잘것없는 저희들을 불러 모으신 당신의 거룩하신 뜻이 있음을 아옵니다. 저희들은 자신들의 모습이 아무것도 아닌 것같이 보이지만, 이 역사적이고 시대적인 사명 앞에 아버지께서 특별히 자신들을 불러 주신 것을 감사할 줄 아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 저희들은 아버지 앞에 벌거벗은 어린애와 같아서 당신께서 입혀 주셔야 되겠고, 당신께서 먹여 주셔야 되겠사오며, 당신의 품안에 품어서 키워 주셔야 되겠사옵니다. 하오나, 저희들은 아직까지 그러한 아들딸의 모습으로서 아버지를 대할 수 있는 한때를 갖지 못하였사옵니다. 이러한 저희들의 마음과 몸이 그런 자리에 서게 해주시고, 저희들이 아버지의 아들이 되고 딸이 될 수 있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은 이 세상에서 가진 것이 없고, 무엇 하나 갖춘 것이 없는 모습이요, 그 무엇을 들고 자랑할 것이 없는 모습들이지만, 당신의 품에 안겨 자랄 수 있는 아들과 딸의 인연을 갖고 있는 것을 감사합니다. 이러한 인연은 승리의 권한을 대신할 수 있는 특권인 것을 알고, 여기에 감사할 줄 아는 저희 자신이 되어야 하겠사옵니다.

저희들은 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닌 모습이지만, 아버지께서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고 귀하게 느낄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저희가 어려운 길을 가더라도 아버지와 더불어서 가고, 슬픈 일을 당하더라도 아버지와 더불어서 당하면서 어려운 자리에 서더라도 아버지를 위로할 수 있게, 아버님, 이끌어 주시옵소서. 희망과 소망의 한날을 더더욱 저희 가슴 깊이 품고, 내일을 향하여 전진에 전진을 가할 수 있는 아버지의 참다운 아들들이 되고, 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저희가 가는 길이 아무리 험하다 하더라도 당신이 가야 할 길 앞에 절대로 짐이 되지는 않겠다는 새로운 결의를 갖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은 아버지를 알았고, 아버지의 가시는 방향을 알았습니다. 때문에, 상처를 입고 가중된 십자가의 길을 간다고 하더라도 당신을 위로해 드릴 수 있는 때는 한때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정성을 다 모아 가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시아의 일각에 있는 불쌍한 이 민족을 지금까지 수많은 시련을 거쳐 오면서도 망하지 않게 아버지께서 특별히 지켜 주신 것을 감사드리옵니다. 이제 이 민족이 금후에 가야 할 길을 알도록 아버지께서 일깨워 주시옵소서. 사방에 둘러싸인 국가적인 난시(難時)가 저희 앞에 다가오고, 어려운 시점이 이 민족 앞에 다가오는 것을 염려하게 되옵니다. 저희에 대한 아버지의 경륜의 인연을 연장해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꿋꿋한 모습을 갖추어 흰옷을 입고 제단을 쌓아 경배를 드리면서 아버지 앞에 복귀의 사명을 다하여야 할 엄숙한 책임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되옵니다. 이것은 누구에게 맡길 것도 아니요, 그 누구에게 부탁할 것도 아니요, 오로지 심혈을 다하는 모습으로서 내 마음을 다 바치고 내 몸을 다 바치고 내 뜻을 다바쳐서 책임 다해야 할 것이옵니다. 그래서 아버님의 사랑과 동정이 나타날 수 있게 해야 되겠습니다. 그런 인연을 중심삼아야만 이 민족이 넘어야 할 골고다의 어려운 난관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사옵니다. 지금이 그러한 때인 것을 저희들이 알고 있사옵니다.

오늘 4. 19를 회상하고, 이 민족이 걸어온 모든 수난의 길들이 아버지의 뜻으로 말미암은 길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할수록 아버지께서 남기신 역사적인 사명을 책임지겠다고 선서하고 나선 저희들은 아버지가 바라시는 모습들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또한 세상에 자랑하실 수 있는 모습들이 되기를 바라는 아버지 앞에 또다시 슬픔을 가중시키는 불쌍한 무리들이 되지 않게 하여 주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역사과정에서 그 누구도 아버지를 알지 못했사옵니다. 당신의 소원이 무엇이고, 당신의 뜻이 무엇이고, 당신의 심정이 무엇이고, 당신의 사정이 무엇이며, 당신의 이념이 흥할 수 있는 방향은 어느 방향인가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럴지라도 오늘날 저희는 아버지의 모든 것을 헤아릴 수 있고, 긍휼과 자비의 심정을 갖고 계신 아버지를 그리워할 줄 아는 참다운 아들 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옵소서.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아침, 삼천리 반도에 널려 있는 외로운 통일의 무리들이 무릎을 꿇고 아버지 앞에 간구하고 있을 줄 알고 있사오니 그곳에 같이하여 주시옵고, 두터우신 아버지의 사랑의 인연을 그 가운데에 연결시켜 주시옵소서. 시련의 줄을 묶어 잡아당기더라도 당신과의 인연만은 끊기지 않아야 되겠사옵니다. 모든 것은 제해 놓더라도 당신의 사랑만은 남겨 주시옵고, 모든 것은 제쳐놓는 한이 있더라도 당신의 권능만은 남겨 주시옵소서. 그러한 날을 갖지 못하는 저희들이라 할진대는 이 민족 앞에 찾아오는 해방의 날을 아무리 맞으려 해도 맞을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내일의 희망의 한날을 품었다고 할지라도 뜻 앞에 결코 세워지지 못한다는 사실을 아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 아침에 저희의 마음을 아버지 앞에 다 터놓고, 자신이 더듬어 온 발자취를 다시 한번 면밀히 비판해 보아야 되겠습니다. 자신이 누구에게 속하여 있었으며, 누구를 위하여 싸워 나왔는가를 비판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지금까지 살아온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여서는 안 되겠사옵니다. 어디까지나 출발이 아버지로 말미암아 되어졌기에 결과도 아버지 앞에 귀속시켜 드려야 할 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죽어도 아버지요 살아도 아버지라는 생각을 가지고 움직여야 되겠습니다. 이렇게 모든 인연을 아버지앞에 결속시켜 갈 줄 아는 자신이 되어야 되겠사옵고, 내일의 희망을 다짐해 나가야 되겠사옵니다. 그런 자리에 서야만 아버지께서 같이하시는 것이요, 아버지와 인연이 맺어진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 자신의 미숙함을 스스로 깨닫게 될 때, 아버지 앞에 자신의 모습을 보여 드릴 수 없는 부끄러움에 사무쳐 한없이 땅을 치며 통곡하고, 심정을 다하여 속죄의 눈물을 흘릴 수 있는 모습이라도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느끼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들은 아버지를 수없이 불러 왔습니다. 이제는 아버지가 기쁨의 아버지인지 슬픔의 아버지인지 확실히 알고 그 아버지를 부를 줄 아는 성장한 자녀들이 되어야 하겠사옵니다. 저희들은 지금까지 복을 주시는 아버지, 위로해 주시는 아버지, 자신을 어려운 시련 가운데서 구해 주시는 아버지로서 알아왔사옵니다. 하오나, 아버지를 위로해 드리고 구해 드리고 아버지 앞에 세상을 맡아 드려야할 책임이 저희에게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어렵고도 불쌍한 입장에 계신 아버지를 바라볼 적마다 동정의 눈물을 흘리고, 외로운 아버지를 동정하기에 자기 스스로를 잊어버릴 줄 아는 자녀들이 되어야 하겠사옵니다. 이것이 자신의 생활철학이요, 자기의 생애노정이라고 인정하면서 갈 줄 아는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러한 아들딸이 있거든 당신의 깊고 후덕한 사랑을 가하여 주시옵고, 남은 복귀의 사연을 나눌 수 있는 아들딸이라 칭송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지금까지 저희들은 슬플 때에 자신을 중심삼고 슬퍼할 때가 많았사옵니다. 그러나 이제는 자신의 슬픔이 극하거든 자신의 극한 슬픔을 대신하여 아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내일의 소망이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현재의 입장에서 아버지와 나 사이에 맺어진 공고한 인연이 없다고 하면 아무리 좋은 소원과 아무리 좋은 이념을 갖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만 가지고 저희들이 앞으로 소망을 걸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나를 찾아오신 아버지에게 슬픈 사연이 있고 나와 아버지와 맺어진 인연이 있다면, 그 아버지의 슬픔의 십자가를 나 자신이 대신 져야 된다는 사실을 아는 당신의 아들들이 되고, 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이제 1970년을 맞이했사옵니다. 아버님, 이 해를 맡아 주시옵소서. 이 해를 수난의 해가 아니라 영광의 해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를 앞서가신 당신의 뜻은 높고 귀한 줄 알고 있사오니, 70년대 이 기간에 어떠한 시련도 극복할 수 있도록 심정을 다하는 동시에 최후의 힘과 생명을 다하여 적진을 격파하여야 할 사명이 저희가 분부받은 사명인 것을 알면서 가고 또 갈 수 있게 하시옵소서. 그러한 자기 자신을 정비하기에 모든 것을 아끼지 않는 자녀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 당신의 이름을 찬양하고, 당신의 무릎을 그리워하고, 당신의 깊은 심정의 품을 그리워하는 당신의 아들딸들을 부디 버리지 마시옵고 품어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영광의 한날, 영광의 한시간, 은사의 한시간, 부활의 한때를 이룰 수 있는 거룩한 날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지금 때가 봄절기인 것과 마찬가지로, 70년대는 통일교회의 봄절기가 되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영광이 무성할 여름절기를 향하여 전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것을 위해 새로운 각오를 갖는 자녀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소수의 무리들이 모여 있습니다. 이들은 그 누구를 위하는 길을 가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옵고, 당신께 가까이 나가고 당신의 남은 사명을 분담받기를 원해서 모였사오니, 이들을 축복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해외에 널리어 수고하는 자녀들도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부디 역사적인 크나큰 책임을 짊어진 일본 교회가 가는 길을 인도해 주시옵소서. 금후에 일본에서 치러야 할 여러가지 행사와 이곳에서 저희들이 계획하는 전체의 행사 위에 당신의 가호의 손길을 같이하여 주시옵길 부탁드리오며, 모든 말씀을 참부모의 성호 받들어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말 씀

우리 타락한 인간들은 하나님이 보내 주신 부모로부터 태어나지 못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타락세계의 부모들은 하나님과 상응할 수 없는 입장에 있고, 그 자녀들 역시 하나님과의 인연을 따라갈 수 없는 입장에 서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타락의 응보요 결과라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자아 해방을 위해 우리가 찾아야 할 것

하나님께서는 온 천지를 인간을 위해 지으셨고, 하나님이 기뻐하시기 위해서 지으셨습니다. 그렇지만, 지으신 이 온 천지는 우리 인간과 하나님의 뜻이 일체화할 수 없는 입장에 있습니다. 이것이 비참한 사실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물이 탄식해 왔고 인류 역사가 비참하게 엮어져 나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유산, 하나님이 원치 않은 유업을 상속받은 입장에 있는 것이 현재의 인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입장에 있는 나라는 존재를 존중시하고 있지만 자기를 생각하는 입장에 서면 설수록 가치적인 나가 아니요 도리어 슬픔과 원한을 하나님 앞에 돌린 나라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이러한 것을 느끼면 느낄수록 역사적인 사명 앞에 분발해야 되겠다는 것을 생각하기 보다는 오랜 역사를 거쳐온 수난의 노정을 회상하면서 도리어 자기의 위신과 체면을 세울 수 없는 부끄러움에 잠겨야 할 자신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그러한 부끄러움을 모르고 살고 있는 것이 오늘의 인류요, 그러한 생애 노정을 걸어온 우리의 생활이었다는 거예요. 또 이와 같은 입장에서 아직까지 그런 환경을 청산짓지 못한 우리 자신인 것을 생각해 볼 때에, 자기라는 관념을 갖고 일체를 생각하는 그런 주관적인 관념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체면이 없고 부끄러운 것인가를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 자신들이 이제 찾아야 할 것은 무엇이냐? 무엇보다도 역사적인 가치의 존재를 찾아야 하겠습니다. 또, 우리에게 소원이 있다면, 인류를 대신해서 미래를 걸어 놓고 그 소원 이상의 것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역사를 대신해서나 미래를 대신해서 현재의 입장을 결정지을 수 없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것을 생각하게 될 때 `나'라는 존재가 얼마나 엄청난 존재인가를 느껴야 되겠습니다. 좋은 의미에서가 아니라 슬픈 의미에서 얼마나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있는 자신인가를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자고로 수많은 선지 선열들이 자아 해방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수고를 해 나왔는가를 알고 있습니다. 또, 선의의 뜻을 품고 왔다 갔던 성인 현철들이 역사적인 자기를 발견하기 위해서 수난의 길을 걸어갔고, 당대에 있어서 승리하고, 미래에 있어서 세움받을 수 있는 자기를 추구하는 도상에서 온갖 심혈을 기울이며 희생해 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과거 현재 미래를 놓고, 또 천주 앞에 당당히 나를 세워 주장할 수 있고, 나를 중심삼아 가지고 역사와 더불어 같이 사랑을 나눌 수 있고, 현재와 더불어 같이 사랑을 나눌 수 있고, 미래와 더불어 사랑의 인연을 맺고 살 수 있다고 주장할 만한 사람이 역사상에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인 현철들 가운데에도 그러한 사람이 없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그러한 역사의 인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시대의 환경 가운데 에워싸여 있는 자신을 주장한다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를 우리는 알아야 됩니다.

나 하나 때문에 하나님과 선열들이 수고하셨음을 알아야

우리가 오늘 복귀섭리 역사를 진지하게 관찰해 볼 때, 과거의 역사는 세계를 복귀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의 역사였지만 그 세계를 구하는 기점은 우리 각 개인입니다. 이 개인을 상실하고서는 세계를 구할 수 없는 것이 원칙입니다. 세계를 구할 수 있는 하나의 기점이 나 자신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나에 대한 소망의 기준이 얼마나 큰 것인가? 우리들은 이것을 원리를 통해서 알고 있습니다.

나 하나 때문에 하나님은 지금까지 수난의 길을 걸어오셨고, 나 하나 때문에 이스라엘 나라는 역사적인 제물이 되어 나왔습니다. 그것은 누구를 위해서 희생한 것이 아니요, 그 어떤 무엇을 위해서 희생한 것이 아닙니다. 결국은 `나'라는 하나의 존재를 결정적인 승리의 기반 위에 올려놓기 위해서입니다. 이를 위해 섭리의 뜻을 좇아 수많은 사람이 수고해 나왔고, 하나님도 수고해 나오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두고 볼 때, 그러한 희생의 기반 위에 서 있는 내가 어떻게 선의 선조들과 하나님 앞에 체면을 세우느냐 하는 것이 지극히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은 그런 역사와 천의에 의한 사명을 짊어지고 지금까지 해방의 한날을 추구해 나왔지만, 하나님이 뜻하시고 인류가 소망하는 기점에 서 가지고 스스로를 자랑할 수 있는 자신이 되었느냐고 할 때에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우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 못한 나 자신인 것을 깨닫고 사람은 이렇게 살아야 된다고 과거의 사람들을 비판도 하고, 현재의 인류 앞에 새롭게 가야 할 하나의 목적과 방향을 제시해 줄 수 있는 내가 되었다 하더라도, 나를 내세워서 자랑할 수 있는 자신이 되어 있느냐 하면 못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왜 그러냐? 인간은 무엇을 가지고 자랑해야 할 것이냐? 외적으로 자기의 얼굴이 잘났다고 그것을 자랑한다는 것은 가당찮다는 것입니다. 또, 자기 스스로 어떤 특정한 환경에서 몇 사람의 추앙의 대상이 된다고 해서 복귀섭리역사 앞에, 혹은 천주앞에 자랑하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것은 왜 그러냐 하면, 우리 자체가 자랑할 수 있는 가장 귀한 것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내가 가야 할 방향을 알았다 하더라도 아는 것으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가야 할 방향을 알고 인간으로서 가야 할 길을 다 가야 합니다. 그래야 나의 가치를 천지가 영원히 앙모하고, 혹은 그 가치 앞에 자기 스스로 끌려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럴 수 있는 경지에까지 나가야 됩니다. 그런 가치의 내용이 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에, 우리의 외적인 모습이라든가 환경에 접해 있는 모든 인연은 자랑할 것이 못 됩니다. 이것들은 그런 가치와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다는 겁니다.

인간이 바라는 구주는 어떤 분인가

그러면 그러한 귀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불쌍한 입장의 자기를 구해 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을 내가 동경하는 것입니다. 또, 지금까지 종교를 믿고 나오는 사람들은 메시아나 구주라고 하는, 자기의 생명과 재산 그밖의 모든 인연을 구해 줄 수 있는 하나의 중심존재를 앙모해 온 것입니다. 그러한 분을 우리는 심정의 중심되는 절대적인 가치의 중심존재로 믿고 신봉하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신봉하고 싶은 그 절대적 가치의 존재는 어떤 분이냐? 우리가 원하는 그분과 나와의 관계를 따져 볼 때에, 나는 타락한 입장에 있고 그분은 타락하지 않은 정상적인 입장에 있기에 나를 구해 줄 수 있다고 할 수 있는 구주냐? 아닙니다. 우리는 이보다 더 깊은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입장에 선 구주를 요구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일가친척과 같은 구주보다도, 자기 혈족의 어떤 형님보다도 더 가까운 입장에서 자기를 위해 줄 수 있는 구주를 요구할 것입니다. 이런 구주를 찾고 싶은 심정을 가진 우리 인간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관점에서 모든 가치의 내용을 상실한 우리가 구원을 받기 위해 원하는 구주의 모습은 어떠한 가치의 중심으로 나타나기를 바라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인간이 찾아 들어가는 최후의 종착점은 부모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부모 이상 귀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친척이나 형제,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귀한 것은 부모입니다.

부모는 어머니 아버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수난을 당하는 입장에 처하면 반드시 길이 필요한 것이요, 그 모든 억센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부모가 필요한데, 어머니보다도 아버지가 더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가 절감하게 됩니다. 즉, 홍수가 나거나 자신의 몸이 소용돌이치는 탁류에 휘말려 들어가려 하는 순간에, 자신의 생명이 경각에 달리는 순간에 자신을 구해 줄 수 있는 분으로 다급하게 부르는 소리는 대개 `아버지'입니다. 어머니를 부르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자리에서는 대개 아버지를 부를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의 부모도 자신을 구해 줄 수 없을 때는 어떻게 하느냐? 하나님을 부를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지금까지 역사과정에서, 비참한 운명길에서 구도의 마음, 구도의 심정을 가지고 최후의 유언으로 남길 수 있었던 말이 무엇이냐? `아버지!' `하나님!' 하는 말입니다. 이 이상 더 필요한 말이 없을 것입니다.

안타까우신 아버지에 대해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

우리는 그런 입장에 처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러한 입장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지 못한 채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생명이 경각에 달려 있고, 자신이 위태로운 운명길에 처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런 시점에 서 있는 자신을 자랑하고 중요시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됩니다.

아버지로부터 부양받아야 할 우리는 `당신의 사랑을 저에게 베풀어 주시옵소서' 라는 말을 할 필요가 사실을 없는 것입니다. `당신의 손길이 필요합니다' 라는 말이나 서로의 인연을 따지는 그런 말은 필요치 않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아버지와 우리는 함께 살아야 할 관계요, 아버지께서 내 아들이라고 하면서 직접 대해 주실 수 있는 관계인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천만사의 사연이 담겨 있는 것이요, 그 누구도 벗어 날 수 없는 슬픔의 구렁텅이가 엇갈려 있는 것입니다. 현재의 우리 자신을 제삼자의 입장에서 직관해 볼 때, 어머니도 만날 수 있고 아버지도 만날 수 있는 인연을 갖고 있는 우리인데도 불구하고, 경각에 달린 자기의 운명을 중심삼고 손도 내밀 수 없는 하나님과 우리 자신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떠한 입장에 서야 하는가? 만일에 역사적인 죽음의 인연을 갖고 나온 그 모든 구렁텅이를 다 메우지 않으면 나를 구할 수 없는 입장에 선 아버지이신 것을 느낀다면, 나를 위하여 간곡한 마음을 가지신 아버지, 자기의 생명이 경각에 달렸을 때 갖는 시급한 마음보다 몇배나 더 초조한 마음을 가지고 나를 구하고 싶어하시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여러분은 어떠한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인가? 보통 사람들 같으면 어서 와서 구해 달라고 하겠지만, 생각이 깊은 사람은 염려하지 마시고 걱정하지 마시라고 도리어 하나님을 위로해 드릴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효자 효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비록 타락한 후손일망정 아버지께서 구원의 손길을 펼래야 펼 수 없는 딱한 사정을 이해하고, 부디 자신에 대해서 염려하지 마시라고 위로해 드릴 수 있는 아들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런 아들딸이 있었느냐? 죽어가는 아들딸을 보면서도 손도 벌리지 못하고 바라만 보고 있는 부모가 있다면, 천 사람이면 천 사람, 만 사람이면 만 사람이 다 그 부모의 딱한 사정을 모르고 그 부모를 대해 반박하고 욕할 것이며, 부모가 아니라고 결단을 내리고 결국에는 이별할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타락한 인간들이 해 왔던 습관이 아니겠습니까? 복귀의 행로에는 그러한 일이 많았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게 될 무렵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그러한 사정을 헤아릴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최후로 `아버지시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할 때, 얼굴을 돌릴 수밖에 없었던 하나님의 그 입장이 어떠하겠느냐? 또, 하나님이 그런 자리에 계시다는 것을 아시는 예수님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그렇게 죽음의 길을 가는 아들의 마음보다도 그 아들의 손을 펴서 구해 주고 싶은 마음이 천만 배나 더 강렬하게 솟구치는 것이 어버이의 마음인데도 불구하고, 동정하고 싶지만 동정할 수 없는 역사적인 사연의 구렁텅이가 남아 있고, 심정의 골짜기가 엇갈려 있는 것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마음, 아들을 죽음길로 보내는 아버지의 마음은 얼마나 아플 것이냐! 죽음을 당하는 아들보다도 몇천 배 더 딱한 입장에 설 것이 아니겠어요?

통일교회를 믿고 따른다고 하는 무리 가운데에서도 그런 입장에 부딪치게 되면 번번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따라온 길을 후회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아버지와 함께할 수 있는 그 자리가 어디냐 하는 문제가 대두됩니다. 아버지와 함께 할 수 있는 아버지의 딸이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내 자신이 언제 아버지와 함께 할 수 있는 진정한 인연을 맺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심각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오늘 타락한 나 자신은 아버지와 함께 갈 수 있는 인연을 되찾아야 됩니다. 그 인연을 되찾아가는 길은 슬픔의 길도 아니요, 고통의 길도 아닙니다. 그리고 낙망이라든가 절망이라든가 비애라든가 역사의 모든 환멸을 느끼지 않는 길입니다. 그런 것을 느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의의 요건들이 나를 에워싸고 있고 내가 천애의 고아의 신세에 처하게 된 것은 아버지와 함께 있지 못하게 하려는 악의 세력 때문입다.

하나님을 부모로 섬기려면

우리는 이와 같은 환경을 타파해 버리고 아버지와 함께 있을 수 있는 귀한 자리가 있다면, 세상의 그 무엇을 하더라도 찾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타락한 인간이 해방받을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수의 피를 받은 타락의 후손인 우리는 죽음의 길을 거슬러 올라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도 한 번만 죽음의 길을 거쳐서는 안 됩니다. 세 번 이상 죽음을 당하는 것 같은 시련을 거치지 않고는 부모를 부모로 섬길 수 없습니다. 이것이 복귀의 길입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세 번이냐? 이것은 역사과정에 있어서 구약시대를 거치고, 신약시대를 거쳐서 성약시대를 맞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것은 아담의 죽음의 길을 격파하기 위한 것이요, 예수님의 십자가의 수난길을 부정시키기 위한 것이요, 오시는 주님이 지금까지 걸어온 수난의 행로를 정상의 행로로 바꾸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류가 가야 할 길입니다. 이렇게 3시대의 죽음길을 일생을 걸어놓고 생애를 바쳐 걸어야 할 것이 끝날에 처해 있는 우리 인간입니다.

묵시록에도 나와 있는 것과 같이 이때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처음 사랑이 점점 식어가는 때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처음 사랑을 붙들고 참아 나가는 사람은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참음으로 남아지는 자리는 어떤 자리냐? 끝까지 아버지와 함께하는 자리입니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어렵게 말하지 않더라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이, 즉 아버지와 아들, 아버지와 딸이 함께 심각한 자리에 들어가게 되면 끝까지 남아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식에 대해 사랑을 버리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타락한 부모도 자식에 대해서는 사랑을 버리지 않습니다. 여든살된 노모가 예순살된 아들에게도 유아를 대하던 심정으로 대하는 것이 인간세계의 상정이 아니겠습니까? 그러한 관점에서 미루어 볼 때, 부모는 자식을 한시도 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버릴 수 없는 거예요. 사랑의 마음은 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끝까지'라는 말은 누구에게 해당되는 말이냐? 하나님에게 해당되는 말이 아닙니다. 부모에게 해당되는 말도 아닙니다. 자식들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말은 오늘날 심판받아야 할 전인류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제시하시는 제물

앞으로 인간들은 생사의 교차로에서 부딪칠 것입니다. 자기는 아버지라고 알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 그 아버지께서는 자기의 사연을 들어줄 수 없고, 자기의 아버지가 되어 줄 수 없는 그러한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 오늘날 우리는 이 구렁텅이를 메워 갈 수 있는 하나의 방안, 이러한 구렁텅이를 해소시킬 수 있는 하나의 대책을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그런 때가 올 것인데 부모의 입장에 계신 하나님은 이것을 무책임하게 수수방관하시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준비하기 위해서 오랜 행로를 거쳐 나오셨습니다. 이러한 행로가 곧 복귀의 행로입니다. 이것을 수습하는 데 있어서의 조건물이 무엇이냐 하면, 제물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탕감복귀의 내용이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이러한 사망의 구렁텅이를 메울 수 있고 이것을 밟아 치울 수 있는 역사적인 제물, 현재적이며 미래적인 승리의 기점이 될 수 있는 하나의 방편으로 제시된 것이 탕감의 제물입니다. 다시 말하면 탕감조건입니다. 탕감의 조건이예요.

그러면 탕감조건은 무엇으로 나타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그 조건을 무엇으로 나타나게 하시겠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마음대로 취급할 수 있는 제물이 아닙니다. 원래 양을 잡아 놓고 제물을 드리는 데 있어서, 여기에 참여한 사람들은 죽은 한 마리의 양 앞에서 정성을 다 기울여 속죄의 경배를 드려야 합니다. 완전굴복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 완전굴복의 한계점은 무엇이냐? 내가 죽더라도 불평하지 않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죽음까지 극복할 수 있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제물이 취해야 할 자세인 것입니다. 자세를 그렇게 가져야 됩니다.

그런데, 오늘날 하나님이 탕감조건으로 제시하고자 하는 제물은 어떤 물건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이냐? 현재의 인류와 후손들이 필요로 하고 후대에 등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구원의 사연을 맺어 가지고 서로서로 손에 손을 붙들고 호응하게 할 수 있는, 그런 인연을 맺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아버지 어머니의 손길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즉, 참부모의 인연입니다.

이 참부모는 오늘날 통일교회에서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역사과정에서 잠깐만 생각하게 되면, 타락이라는 것을 긍정으로 생각하게 되면 이것은 그 누구도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자기의 생각의 근원을 파헤쳐 들어가 고민하는 입장이 되면, 우리에게 참다운 부모는 왜 없느냐 하는 것을 여실히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쉬운 일이지만 지금까지 오랜 역사를 거쳐오면서도 해결하지 못하였던 그 문제를 오늘 통일교회에서 들고 나온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있기 전에 있었던 문제입니다. 또한 우리가 그러한 인연 가운데서 살 수 있는, 생명의 근원이 되는 심각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참부모는 인류가 찾아야 할 참된 부모입니다. 그 참부모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참된 선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참부모는 어떤 분이냐? 아버지와 함께 갈 수 있는 하나의 발판이 되는 분입니다. 하나의 제물의 입장에 선 분이 참부모입니다. 즉, 제물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참부모는 인간과 하나님과의 간격과 구렁텅이를 메우기 위한 하나의 제단이요, 사망세계를 넘어설 수 있는 다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그 자리는 하나님과 내가 같이할 수 있는 자리요, 하나님과 부자의 인연을 맺을 수 있고, 하나님과 일체를 이룰 수 있는 하나의 초점입니다. 즉, 타락으로 말미암아 갈라졌던 하나님과 다시 하나될 수 있고, 갈라졌던 두 경계선이 일치될 수 있는 하나의 기점이 되고, 탕감제물의 입장에 서신 분이 누구냐? 참부모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절박한 입장에 서 가지고 하나님을 부를 때, 하나님이 천년 사연을 다 잊어버리고 나와 인연을 맺을 수 있는 자리가 있다면 그 자리는 세상의 그 무엇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자리입니다.

구원이 필요한 우리 자신에게 있어서 아버지와 함께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인연, 아버지와 함께할 수 없고 아버지와 인연맺을 수 없는 인류가 자유스러운 환경에서 아버지와 인연맺을 수 있게 되기 위해 아버지께서 보내 주신 인연이 무엇이냐? 참부모의 인연입니다.

참부모와의 인연에 대해 얼마나 감사드렸는가

그러면 참부모의 인연이 하나님으로부터 나 자신에게 무조건 주어진 이 영광을 무엇으로 감사할 것이냐? 여러분은 얼마나 감사를 드렸습니까? 그리고 여러분이 구원받을 수 있게 해 준 그 은혜에 대해 환희의 모습을 갖추어 가지고 천지에 승리를 다짐할 수 있게 된 자신이란 것을 얼마나 생각해 보았습니까? 무한한 소망을 가지고 무궁한 가치를 지니고 재출발 한다는 생각을 얼마나 해 보았습니까?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면 아버지께서는 어떠하셨느냐? 아들딸을 찾아 나오신 아버지의 역사적인 소원이 이 땅에 오시는 참부모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아시는 아버지께서 그 참부모를 얼마나 동경해 오셨던가! 그런데, 아버지께서 동경하시는 그 기준과 사망세계에 있는 여러분이 구원을 받기 위하여 동경하는 기준을 비교해 본다면, 우리는 아버지보다 더 소중히 생각하고 아버지보다 더 귀하게 여기고 아버지보다 더 가치있게 느껴야 할 텐데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러한 우리 자신들이라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우리는 반성해야 되겠습니다.

아버지와 함께할 수 있고, 아버지와 인연맺어질 수 있고, 아버지와 상봉할 수 있는 자리를 인간이 기대하듯, 하나님도 얼마나 기대하시겠습니까? 그런 자리를 내가 가겠다고, 그런 승리의 기반을 내가 닦겠다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그 어려움을 극복하고 그 자리를 내 모든 생애의 가치를 좌우하는 전환점으로, 또 그 인연을 내 생애의 원동력으로 만들겠다고 얼마나 다짐했느냐가 중요합니다. 이런 견지에서 볼 때에, 오늘날 우리의 신앙의 자세가 얼마나 거짓되고, 흘러가는 바람결처럼 자리를 못 잡고 방황했는가 하는 사실을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아버지와 함께할 수 있는 우리들이 되어 있느냐? 아버지께서 함께할 수 있는 내가 되어 있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구주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구주는 어떤 분이냐? 참부모의 인연을 갖춘 분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 참부모의 인연이 얼마나 놀라운 인연입니까? 참부모로 말미암아 내 참다운 일생이 시작되는 것이요, 새로운 생명의 인연이 출발되는 것입니다. 이 생명의 인연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가정이 출발되는 것이며, 새로운 우리의 사회와 국가와 세계가 출발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2천년의 모든 생사의 길을 해결지을 승리의 요건이 시작된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다시 한번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거기에는 내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타락한 세계를 구하기 위해 수난의 길을 걸어와야 할 분이 아닙니다. 타락한 세계를 대해야 할 하나님이 아닙니다. 새로운 사랑의 인연을 들고 나오시는 분입니다. 새로운 희망과 새로운 복귀의 터전을 마련해 가지고 오시는 분입니다. 그러한 자리에서 아버지와 나와의 인연이 맺어지는 것입니다. 사방이 일치화될 수 있는 인연이 한 기점에서 연결되어 가지고 사망의 세계를 폭파하고 새로운 광명의 천주의 기반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모와 자식간의 인연이 실현됨으로 말미암아 세계는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승리의 결정적 기반이 되는 참부모

참부모와 여러분과 맺어진 인연은 그 어떠한 칼이나 어떠한 권력을 가지고도 끊을 수 없고 사탄의 힘으로도 끊을 수 없습니다. 왜? 이 인연은 순간적인 오늘의 모든 문제를 돌파하여 인간들을 구할 수 있는 승리의 특권을 갖고 있는 인연이요, 인간들이 역사적으로 소망해 온 힘이 결집되어 있는 본거지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어느 한 시대적인 힘을 결집시켜 가지고는 역사적인 힘이 결집된 이 관계를 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악한 것을 제거하고 새로운 인연을 갖추어 승리의 출발을 하기위해 하나님이 역사적인 제물로 내세운 분이 참부모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기도하는 가운데 그냥 천국에 와 있는 것과 같은 입장에서 아버지를 불렀지만, 아버지가 심각한 자리에 계시고 아버지가 딱한 사정에 계시듯이 나도 딱한 사정에 있어야 하고, 서로서로가 마음에 표현은 못하지만 아버지의 딱한 사정이 나의 사정으로 느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 내게 어떠한 슬픔이 있더라도,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걱정 마시옵소서'라고 하면서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다해 위로해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한 사람이 이 땅 위에 나오지 않고는 역사적인 문제를 해결할 길이 없습니다.

우리는 지극히 어려운 입장에 서더라도 하나님 앞에 동정을 바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동정해 드릴 수 있는 입장에 서야 합니다. 그러한 인연을 따라 역사시대를 거쳐서 쌓고 쌓아 나온 결정체가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이 뜻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다시 오시는 주님이 그 뜻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오시는 주님이 가야 할 길도 그 길입니다. 즉, 참부모의 길입니다. 참부모는 역사적인 소원의 집약체입니다. 하나님이 전체를 대신한, 역사적인 조건적 실체로 내세운 분이 참부모인 것입니다.

아버지와 인연이 맺어지는 자리

이제 앞으로 여러분은 막연하게 기도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 앞에 직접 갈 수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하나님도 여기에 응해야 되고, 인류도 여기에 응해야 되고 해결 기점도 여기에 응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 3자가 일치될 수있는 기점이 참부모라는 것입니다. 참부모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이 깃들어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생각도 하지 못하고,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던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이 깃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부자의 인연이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기도하는 데에 있어서는 하나님을 직접 부를 것이 아니라 참부모를 통해야 됩니다. 여러분이 기도할때 마지막에 참부모의 이름으로 기도한다고 하는데, 그것이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습관적으로 느끼는 그런 간단한 내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참부모는 어떻게 사랑하기를 바라겠습니까? 역사적으로 사랑하지 못했던 것을 해원하고 싶은 역사적인 소원의 진액을 집약시켜서, 수난길을 몸부림치며 싸워 찾아 나온 그 모든 해원성사의 마음을 다 뽑아 가지고 흠뻑 취하여서 사랑하기를 바라십니다. 또, 그 사랑 가운데에 한번 흠뻑 빠져 들어가고 싶은 것이 오늘 타락한 인간의 절대적인 소원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내용이 이루어지는 하나의 기점은 천상이 아니고 지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상에서 새로운 천지가 벌어진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참부모와의 인연은 영계와 같은 막연한 세계에서가 아니라 지상에서부터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참부모는 실체를 갖추어 지상에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부모는 내가 부르면 대답을 할 수 있고, 내가 어려운 자리에 있으면 동정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평면적인 도상에서 참부모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인간들에게는 얼마나 복된 일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역사시대에 어떠한 어려움이 있었어도 그 모든 것을 극복하여 이런 내용을 중심삼고 결정적인 승리를 하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나 자신을 놓고 볼 때 내가 하나의 승리의 왕자가 되느냐 못 되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그 심정 앞에 일체가 되어서 뗄래야 뗄 수 없는 나 자신이 되었다고 할 수 있어야 됩니다. 다시 말하자면, 아버지와 같이 있다고 하는 신념, 참부모와 더불어 있다고 하는 신념이 여러분의 생애 노정의 축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가는 방향에서 동요함이 없이 천년 만년 지탱할 수 있는 자아가 되어야만, 지상천국과 천상천국이 연결되는 것입니다. 곧, 천상의 주인으로 임하는 것이요, 지상의 주인으로 임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비로소 천상천국과 지상천국이 열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인연은 편안한 자리에서 맺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제일 극난한 자리, 그 이상 없는 심각한 자리, 죽느냐 사느냐 하는 와중, 가일층 모험하는 자리에서 맺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보면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시대착오적인 말을 한 것 같지만 이렇게 사는 것이 복귀의 길을 가는 데에 있어서, 심정의 세계를 밟아가는 데 있어서 정상적인 자세요, 정상적인 태도라 하겠습니다. 이러한 경지를 추구해 가는 자신임이 분명할진대, 그 길은 참된 노정이 되는 것입니다.

선생님의 책임

여러분, 오늘이 4월 19일인데, 4·19의거가 일어난 때가 10년 전이지요? 이 나라가 수난의 길을 걸어온 지난 10년을 놓고 여러분에게 한 가지 말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통일교회가, 또 선생님이 지금까지 세계사적인, 천주사적인 책임을 짊어지고 나오면서 고심하던 것이 무엇이냐면, 이 민족과 기성교회와 우리가 하나되는 그 한날을 어떻게 맞을 것이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민족과 기성교회와 우리는 하나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복귀섭리에 있어서 하나님이 시대적 사명을 짊어진 사람들을 보낼 때는 항상 어떻게 기성종교와 나라를 수습하여 하나되는 기점을 세울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들은 언제나 기성종교로부터 핍박을 받았습니다. 또는 기성세력으로부터 핍박받았습니다. 그러면, 신흥종교가 그 기성종교로부터 핍박받지 않을 수 있는 길은 무엇이냐? 기성종교 앞에 환영받을 수 있는 하나의 방향을 모색해 주어야 됩니다. 그래서 하나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자리에 서지 않고는 기성세력이나 기성주권 앞에 절대로 환영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 통일교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기성교회가 우리를 환영했더하면, 우리는 기성세력을 무난히 흡수할 수 있었습니다. 기성세계를 무난히 흡수할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간단한 것입니다. 말로는 몇십 초 이내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역사가 증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중심삼고 이스라엘 나라와 유대교가 예수님과 하나되어 예수님의 길을 따라갔더라면, 오늘날 이 세계는 이같이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기독교는 죽음의 길을 이어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2천년 동안에 세계를 이렇게 발전시켜 놓았는데 예수님이 죽지 않고 뜻을 이룰 수 있는 기반을 닦아 놓았더라면, 세계가 얼마나 빨리 복귀되었을 것인가. 당시에 로마를 굴복시키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선생님도 역시 큰 사명을 짊어지고 있습니다. 선생님도 가인을 굴복시켜야 됩니다. 기독교가 바로 선생님의 가인의 입장에 있습니다. 기독교와 하나된 입장에서 보면 가인의 입장에 있는 것이 이방종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와 이방종교와 나라를 목표로 해서 가야 합니다. 이방종교를 규합해 가지고 아벨의 입장에 선 다음에 국가를 규합해 가지고 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그때에 예수님이 해결해야 할 사명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의 선생님에게도 똑같은 책임이 있습니다.

그런데 국가는 물론이요, 전체의 종교가 반대했습니다. 옛날의 요셉과 같은 입장, 죽으라고 원수에게 팔아 넘겨진 것과 마찬가지의 입장, 백방으로 길이 막혀진 입장에 섰었고, 한군데도 뚫린 데가 없이 사방을 다 밀폐해 버리고 뚜껑을 해 덮어 내리누르는 것과 같은 운명길을 갔습니다. 그러한 이 나라 이 땅 위에서는 살 길이 없으니 딴 곳으로 가야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날 때의 운명이 그러하였고, 자랄 때도 그랬고, 그의 생애 전체가 그랬습니다. 사방을 막고 뚜껑까지 덮어 가지고 내리누르는 것과 같은 입장에 처하기 때문에 감쪽같이 피신하지 않으면 안 되는 운명길을 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귀를 책임지고 왔다 갔던 사람들이 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의 길이 편하냐, 이 길을 가는 것이 편하냐를 두고 볼 때에, 뜻을 성사해야 된다는 문제를 제거한다면 오히려 죽음길이 편하다는 것입니다. 살 길보다 죽음길이 편하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짊어진 책임이 있기에 죽을래야 죽을 수 없습니다. 죽으래야 죽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성을 얼마나 들여야 되겠는가? 죄악 역사의 수많은 사탄과 격투를 해야 됩니다. 촌음도 방심할 수 없는 자리에 서서 해방의 문을 열기 위해 필생의 힘을 경주하여 틈을 넓혀 가야 됩니다. 복귀의 책임을 짊어진 사람들은 그렇게 걸어왔다는 것입니다.

초교파 운동은 원수를 사랑하자는 운동

여러분의 입장이 그렇다는 거예요. 아직도 반대받는 우리 통일교회는 이 민족 앞에 겹겹이 싸여 있습니다. 오늘날 국가가 우리를 반대하고 있고, 모든 종교가 그러하고, 수많은 가정이 그러하고, 수많은 개인이 그러하여 어디에 얼굴을 들고 마음놓고 갈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는 입장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뚫고 나가야 합니다. 그러니 거지의 입장에서부터 출발해야 됩니다. 친구가 누구냐? 전부다 세상 사람들로부터 눈밖에 난 사람들입니다. 눈밖에 난 사람들 외에는 우리와 더불어 출발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우리들은 수난의 길을 걸어 나왔습니다. 이 길은 얻어먹는 길에서부터 출발했다는 것입니다. 남루한 옷을 빌려 입는 자리에서부터 출발했다는 것입니다. 거지의 가정에 찾아 들어가 귀하다는 옷을 선물로 받아 입고, 어서 내 대신 싸워 달라는 부탁을 받고 나온 대표자로서 나서서 걸은 걸음이 지금까지 이 길을 개척해 나온 걸음이 아니겠습니까! 오늘날 통일교회는 지금까지 수십년의 역사를 거쳐왔지만 갇힌 자와 몰리는 자들의 편에 서서 싸워 나왔습니다.

그러면 최후의 문제는 무엇이냐? 우리들이 원수를 찾아가서 복귀시키는 것입니다. 수난을 당하던 역사적인 그 모든 한을 풀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해 가지고, 한 칼을 높이 뽑아 들고 원수들을 찾아나서는 우리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원수앞에 복수심을 가졌던 것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이 복귀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 취해야 할 입장입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놀아나던 그 원수들은 기진맥진하여 안팎으로 몰리게 됩니다. 원수들은 이제 갈래야 갈 수 없고,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절박한 궁지에 몰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옛날에 쫓김받던 사람과 쫓는 사람의 자리가 바뀌는 것입니다. 주객이 전도된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시점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러한 개인, 그러한 가정, 그러한 사회, 그러한 교파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나가고 있는 것이 지금의 한국의 실정입니다. 그러한 때가 올 것을 알았기 때문에 지금 초교파 운동을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초교파 운동은 모든 교회를 때려잡자는 운동이 아닙니다. 원수들을 만났으니 복수를 해야 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들을 구해 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 옛날에 동생을 쳐 죽인 인연을 복귀해야 합니다. 즉 가인을 복귀해야 합니다. 아벨이 잘못 치면 또 망하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품어 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통일교회 운동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빚을 지면서까지 그 운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종교를 어떻게 규합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과제입니다. 여기에는 여러분이 모르는 고충이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돈이 필요하게 되면 내가 빚을 져서라도 발판을 닦아야 됩니다. 그리고 나의 자녀를 사랑하기 전에 그들을 사랑으로 굴복시켜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나의 자녀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는 자식을 뒤로 하고 원수를 위해 주어야 됩니다. 나의 자식보다도 원수를 더 사랑했다는 입장에 서야 합니다. 그러면 사탄이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서 반박을 하겠거든 하나님이 사랑하던 거와 같이 네 아들딸을 사랑하라는 조건이 사탄에게 제시되는 것입니다. 사탄이 자기권내에 있는 아들딸을 진실로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 편으로 돌아가야 됩니다. 진실로 사랑하는 날에는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본심의 작용이 끌고 간다는 것입니다. 해방의 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통일교회는 지금까지 이것을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우리 교회는 지난 4월 15일을 기해서 종교협의회에 가입하였습니다. 물론 우리가 종교협의회를 만드는 데 많이 노력했지만 여기에는 7대 종교가 가입해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처음에 3개 종파가 분열되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반대하겠으면 반대하라는 식으로 쭉 끌고 나오다 보니 반대했던 종파들 전체가 돌아오게 됐습니다. 그래서 7대 종교와 인연을 맺게 되었고, 우리 교회는 여덟번째로 들어가게 됐습니다.

이것이 이번 1970년 4월 15일 오후 4시에서부터 6시 사이에……. 우리는 이 협의회를 어떤 일이 있어라도 부각시켜서 이 협의회를 통해 대사회 활동을 전개시켜 나가야 되겠습니다.

새로운 출발을 아버지와 함께

4월 16일은 우리 통일교회와 경기도가 수택리 중앙수련소의 준공식을 중심삼고 상봉하는 새로운 한때를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본래는 17일이 부활절이기 때문에 그날 준공식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을 중심삼고 기도하는 중에 16일에 해야 된다는 것을 알아 가지고 부랴 부랴 16일에 했습니다. 알고 보니 하나님은 이렇게 하루를 두고 외적 내적으로 즉 나라와 교회와 만나게 하셨습니다. 그런 다음에 부활절을 맞이하였습니다. 모든 것이 이렇게 들어맞을 수 있는 한 기간이 우리 교회 역사에 있었다는 사실은, 이것이 세계사적인 기간이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선생님은 그렇게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번 부활절에 일본 식구들에게 말씀을 해 주었습니다. 원래는 그전에 간다는 것을 내가 못가게 해 가지고 동구능에 데리고 가서 얘기를 해 주었습니다. `오늘은 이러한 날이다'하는 것을 역사적으로 비판하고 분석해 가면서 얘기를 쭉 해 주었습니다.

이러한 때가 우리에게 왔다는 사실은, 대한민국과 여러 종파와 70년대를 맞아 하루 이틀 사흘 기간에 모일 수 있는 인연이 갖추어졌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수리적인 하나님이요, 원리적인 하나님임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또, 그날의 사흘 후가 오늘인 4월 19일입니다. 그리고 내일 4월 20일을 중심삼아 가지고는 특별수련회가 개최됩니다.

지금까지는 4월이 수난의 기간이었습니다. 4월, 5월, 6월은 언제나 핍박의 달이었습니다. 통일교회에게는 공식적이었습니다. 이 기간 중에서도 4월은 더욱 수난의 달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4월 20일 이후 역사적인 새로운 소망의 세계가 도래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오늘 아침에도 얘기했지만, 이제 우리가 돌보아야 할 것은 우리 자신입니다. 여러분은 재물과 더불어 가려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과 더불어 가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도 필요하겠지만, 재물과 더불어 가려고 하기 전에 아버지와 함께 가려고 해야겠고, 사랑하는 사람과 가려고 하기 전에 아버지와 함께 가려고 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새로운 출발이 벌어지게 됩니다. 통일교단에서부터 새로운 출발이 벌어집니다.

아버지와 함께 가자는 것이 선생님의 생활철학의 기초입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에게 `아버지와 함께'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와…….

그 아버지와 함께 가다 보니 한 순간이나마 수많은 종교와 나라와 더불어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나로서는 넘어가야 할 고개를 넘은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럴 수 있는 자신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한 입장에서 하나님 앞에 인정받으려 하고, 공인받으려 하는 것은 이중의 수치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그야말로 아버지와 함께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참부모의 인연을 중심삼고 천지를 조화시켜서 새롭게 출발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기도할 때도 선생님의 심정을 통해서 기도하려고 하면 하늘이 도와줍니다. 이것이 제일 빠른 길입니다. 그와 더불어 몸부림치고, 그를 대할 때에 내 가슴이 녹아지고, 그의 사연을 생각할 때 죽음도 개의치 않고 나설 수 있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마음을 가지고 움직인다면 세계를 요리할 수 있는 문이 열린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이 땅위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하나밖에 없는, 역사 시대에 그 누구도 가질 수 없었던 귀한 선물 중의 선물이요, 생명의 원천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기 도

아버님, 흘러간 역사를 생각하게 될 때에, 그 누구도 헤아릴 수 없는 당신의 사연을 더듬으면서, 지금까지 굶주리고 쫓기는 신세를 피하지 않고 그 인연을 따라 이날까지 남아지게 된 것도 당신의 수고와 은덕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의 통일교회가 있는 것은 당신이 살을 찢고 뼈를 깍아 희생한 대가인 것을 기억해야 되겠사옵니다. 오늘 통일교회가 지닐 수 있는 품위가 있다면, 그것은 수많은 선지선열들이 흘린 피의 대가인 것을 알아야 되겠사옵니다. 그것을 생각할 때에 몸서리가 쳐지는 이 자리인 것을 느끼게 되옵니다. 그러기에 지금까지 몸부림쳐 왔고, 참고 참아왔고, 하고 싶은 말을 하지 않고, 혀를 깨물어 튀쳐 나오는 말을 막으며 통분의 역사시대를 거쳐 나왔사오나, 아버지, 보잘것없는 저희를 품기 위해 찾아오신 아버지의 그 수고 앞에 그 무슨 할말이 있겠사옵니까?

`아버지시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하던 예수님의 그 비참한 자리가 오늘 우리의 자리인 것을 느끼옵니다. 비록 힘든 자리에 간다고 할지라도 아버지 앞에 인정받을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한 그날부터 지금까지, 아버지 앞에 온전히 저희의 모습을 드러내어 담판짓지 못하고 기도하지 못하는 입장에서 나왔습니다. 하오나 당신이 저희 대신 막아 주시고 싸워 주신 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아버지 앞에 감사를 드릴 뿐이옵니다.

아버지, 이제 대한민국을 사랑하여 주시옵소서. 대한민국의 내적인 사명을 하여야 할 수많은 성도들을 사랑하시옵소서. 그들이 통일교회 앞에 하나되어 통일교회와 손을 잡고 형제의 인연을 맺은 것을 자랑하고, 같은 민족이라고 자랑할 수 있는 자리에 선 것을 볼 때에, 이때는 아버지께서 찾아와 주셔서 한때를 맞는 역사적인 봄절기인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지금까지 꽃을 피울 수 없는 사연이 있었다는 사실을 놓고 볼 때에, 금년의 이때가 피울 수 없었던 꽃이 피는 봄절기인 것을 연상하게 되옵니다. 당신의 경륜과 더불어 활짝 피어날 수 있고, 참의 향기가 풍길 수 있는 봄날이 삼천리 강산에 찾아오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만민의 마음 가운데 새로운 봄을 맞을 수 있는 거룩한 자세를 갖추게 하시어서 이 민족과 수많은 종단들이 아버지를 향하여 저희와 함께 나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70년대를 그러한 기간으로 받아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기간을 사탄세계를 대하여 영원한 승리를 했다는 기간으로 세워 주시옵길,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내적인 제2의 4·18의거를 필요로 하는 이 민족에게 해방의 한날을 허락해 주시옵고, 내적인 제2의 5·16혁명이 필요한 이 민족에게 해방의 한날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가야 할 길 앞에 당신의 보호를 바라기에 앞서, 저희들이 당신을 위하여 충효의 도리를 할 것을 다짐하고, 죽음의 길을 가기 위해 스스로를 잊어버릴 줄 아는 아들딸의 모습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이 70년대를 힘차게 맞아 그 무엇에도 지침 없이 수난의 길에서 승리하겠다고 다짐하고, 그 누구보다도 내가 이것을 책임지겠다고 솔선수범하여 하늘의 상을 받을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이 무조건 사랑을 주었기 때문에, 무조건 그 위업을 받아야 할 저희들은 무조건 자기의 생명을 던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나설 줄 아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옵길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오늘 이 하루를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삼천리 반도에 있는 자녀들, 세계에 널려 있는 자녀들, 뜻을 위하여 외로운 자리에서 온갖 풍상을 겪어 가며 선교의 책임을 짊어지고 있는 그들을, 아버지, 나를 지키시듯 지켜 주시옵소서.

하늘과의 깊은 인연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정녕 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내가 알고 있사옵니다. 내 마음 가운데 아버님이 임하여 왕래하는 그 오고 가는 두터운 인연이 가중될수록 민족 해방의 터전이 넓혀질 것이라고 생각하게 될 때, 이제 70년대로부터 통일의 역군을 부르시옵소서. 여기에 세계적인 `승리적 통일전선'을 펼치시옵소서.

하늘의 정병들을 모집하여야 할 때는 되었사옵니다. 거룩한 승리를 찬양할 때도 되었사오니, 당신이 뜻하신 경륜과 더불어 받아 주시옵길 간절히 부탁드리옵니다.

아버지, 지금까지 보호해 주신 것을 감사하옵니다. 같이 싸워 주신 것을 더욱 감사드리옵니다. 이 자리에 남게 하여 주신 것을 또한 감사드립니다. 이제야 말로 저희가 아버지께 효성을 할 수 있는 때가 오도록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자기의 혈족을 거느리고 아버님이 추구하신 환경을 찾아 놓고, 또다시 저희가 아버지 앞에 효도할 수 있는 한날을 그리워한다는 것을 당신이 알고 있을 줄 아옵니다. 탕감의 사연 가운데 있어서 그늘 아래 사는 사나이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지, 그럴 수 있는 환경과 그럴 수 있는 조건으로 지금까지 아버님을 슬프게 만들었던 사탄세계를 칠 수 있는 때가 온 것도 알고 있사옵니다.

나로 말미암아 수많은 사람이 채찍을 맞고, 원수의 철망과 올무 가운데 갇혀 있는 사람이 있을까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버지, 이제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때가 왔음을 알고 있사옵니다. 양지가 변하여 음지가 되었던 타락으로 인한 원한이, 이제 그 음지가 변하여 양지가 될 수 있는 최후의 한날이 우리 통일시대 앞에 가까이 온 것을 생각할 때, 저희는 아버지께 효도하기 위해서 피눈물을 개의치 않고 계속 충성을 해야 되겠사옵니다.

탕감복귀 도상에서의 수고가 아닌 기쁨과 소망에 넘치는 내일을 위한 수고를 해야 할 날이 저희 앞에 다가오고 있기 때문에 또다시 바쁜 길을 가겠다고, 이러한 생애를 살겠다고 약속하는 이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남아진 생애를 아버지 앞에 드리오니 후손들이 당신의 품에 품길 수 있는 자유의 천국으로 당신이 직접 인도하여 주옵기를 바라옵니다. 저희의 모든 것을 맡기오니 맡아 주시옵소서. 참부모의 성호 받들어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말씀 요지]

자기 자신이 살아온 일생을 두고 보면, 자신의 옳고 그름을 판결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운명은 `새로운 조상'을 중심삼고 새로이 시작됩니다. 후손을 중심삼고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 결혼문제입니다. 대개 운명은 조상을 중심삼고 결정됩니다.

사탄세계에서는 선한 사람들이 비참한 생활을 하고 갔습니다. 선한 선조의 후손들은 외롭고 비참한 자리에서 살다 갔습니다.

통일교회 사람들의 생활과 일반 사회 사람들의 생활을 비교해 보기 바랍니다. 통일교인들의 생활은 비참합니다. 그러나 악한 사람들은 환경적인 여건을 갖추어 살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그들과 다른 것은 제물된 입장에서 탕감조건을 세워 간다는 것입니다. 탕감조건을 세우지 않으면 제물이 되지 않고, 제물이 되지 않으면 하늘의 판도를 넓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외적인 면으로 보면 불행한 것같지만 사실은 불행한 것이 아닙니다.

선한 조상을 가진 남자는 악한 조상을 가진 여자와 합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선한 후손이 많이 납니다. 세상적으로 보아 외적으로 좋은 면을 많이 가진 사람에게는 실상은 악한 면이 많습니다.

선한 조상을 가진 사람은 희생해야 합니다.

창조목적은 사위기대 완성입니다. 훌륭한 남편과 훌륭한 아내는 외적인 면에 의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선조로부터 이어받은 선한 핏줄입니다.

환경적인 면에서 탕감역사를 엮어 나가다 보면 병신과 같은 자식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탕감은 사탄도 필요로 하고 하나님도 필요로 합니다.

복을 받는 시기에는 탕감이 되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사탄이 필요로 하는 자리에서만 탕감이 벌어집니다. 하늘의 섭리역사는 완전한 기반 위에서 탕감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세상에 상 중 하가 있듯이 탕감역사도 상 중 하로 나타납니다. 즉, 세계적 제물, 국가적 제물, 환경적 제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선한 조상의 후손도 탕감을 받을 때는 비참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고개만 넘으면 천년 고개를 일시에 넘을 수 있습니다. (중략)

세상에서 좋은 것을 찾던 자신들을 보세요. 얼마나 찾았는가? 실패의 역사를 낳았습니다. 좋은 것만을 바라보며 가다가는 낙망하고 말 것입니다. 낙망할 때에는 더 큰 파탄이 오는 것입니다.

자신의 생애를 두고 볼 때 지금이 엄청난 시점입니다. 운명을 자신이 결정하면 비참해집니다. 여러분은 운명을 판결받아야 할 입장에 있는데 운명을 판결해 주는 주인의 판결을 받아야 합니다.

판결은 절대자만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판결을 받기 위한 자세를 갖추어야 합니다. 판결은 응당히 받아야 하는 것이므로 어느누구든지 판결을 받겠다는 입장에 서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공적인 입장에서 동정받을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항상 심적 자세가 문제입니다. 결정적인 조건을 제시해는 안 됩니다.

누구나 좋은 상대자를 만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기를 바라거든 회개하는 심정으로 `당신 뜻대로 하시옵소서' 하는 마음으로 천번이고 만번이고 죽을 수 있는 입장에 서야 합니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자기 운명을 판가름합니다.

제물된 입장에서 대한다는 마음의 자세를 취해야 합니다. 나로 인하여 모든 것을 용서받아 가지고 후손에게는 영광을 물려줄 수 있도록 자신을 탕감의 입장에 세워야 합니다.

이 자리를 대할 때 함부로 대하면 벌을 받습니다. 배운 만큼의 실적을 갖지 못하면 도리어 부끄러운 존재가 됩니다.

하나님의 동정을 받을 수 있는 심적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자기 분수를 넘어서면 파탄이 벌어집니다.

참된 마음, 공적인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고 좋아하실 수 있는 마음, 모든 것을 다 줄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욕심이 과한 것은 원리원칙에 벗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동기가 되어 맺어지면 순리적인 것이 됩니다. 우리는 탕감복귀의 반대 입장을 취해서는 안 됩니다.

서로 서로 위하는 입장에서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이상적인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판결은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자신을 좀 더 정비해야 합니다. 자신의 마음을 움직여 무한히 사랑할 수 있는 자신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서로가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을 다했다 하는 입장에 서게 되면 사랑을 다 받을 수 있습니다. 탕감복귀 원칙은 서로 사랑하겠다고 싸우는 것입니다. 사랑은 유형세계와 무형세계, 두 세계를 점령합니다. 진지한 입장에서 살아야 합니다. 경거망동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은 나그네의 신세입니다.

누이동생처럼 키워서 아내와 같이 사랑하고 어머니와 같이 섬겨 주겠다는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사랑은 누이동생으로부터 즉, 누이로 사랑하기 시작해서 아내로 사랑해야 합니다. 동생, 누나, 신부, 어머니와 같이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하나님이 다 못하신 사랑을 복귀할 수 있습니다.

[말씀 요지]

땅 위에 있을 때 모든 것을 직고하여 탕감받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늘의 법적 조건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양심의 가책을 받는 내용을 가지고 있으면 축복이 안 됩니다.

감추는 것은 타락의 모양입니다. 감추고 있는 것은 전부 하나님께 직고하여 탕감받아야 합니다. 직고하여 용서받지 않고는 끝날에 하늘나라에 갈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과거의 타락의 씨를 갖지 않겠다고 맹세해야 합니다.

감추는 것은 사탄이 주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솔직히 고백해야 합니다. 외적인 죄, 내적인 죄, 남녀 문제는 확실히 가리고 가야 합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직고하여 사죄의 조건을 성립시키게 되면, 그것이 제2의 출발의 동기가 됩니다.

복귀는 본연의 사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축복은 원래 남녀관계가 있는 자는 받을 수 없습니다.

아담 가정, 노아 가정, 예수 가정 입장의 36가정을 택했기 때문에 그 가정의 문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정체를 알려야 합니다.

뜻 가운데에도 구별이 있습니다. 순수한 처녀 총각의 입장에서 하나님 앞에 순정의 인연을 자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타락은 횡적으로 인연이 맺어진 것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하려는 사람은 절대로 결과가 좋지 못합니다.

예수가 부활할 때는 이미 이스라엘의 범위를 넘어선 것입니다.

부모가 제2차 7년노정을 갔으니 자녀도 가야 합니다. 기독교가 아무리 반대하더라도 우리는 이 노정을 넘어가야 합니다.

이 나라와 우리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외적 환경에서부터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죽고 사는 문제를 초월해서 부모님과 완전히 같이해야 합니다. 생사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고, 생활 감정이 부모의 심정과 일치되어야 합니다.

축복의 관문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모든 참소 조건을 보고를 통해서 깨끗이 탕감을 해야 합니다. 또, 부자의 인연을 갖지 않고는 넘어가지 못합니다. 생명을 걸어 놓고 이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이 원리적인 가르침입니다.

선생님과 일대일로 의논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사탄적입니다. 여러분은 사탄의 조건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사랑은 아담이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일생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문제를 결정짓는 마당에 있는 지금 이때를 섣불리 보내서는 안 됩니다.

나에게는 원수 사탄의 칼자국이 남아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축복받은 후에는 과거의 모든 죄를 탕감한 입장이기 때문에, 부부 서로가 과거에 대하여 물을 권리가 없습니다. 묻는다면 그는 강도입니다.

천사장은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할 때부터 아담에게 머리 숙여야 했습니다.

믿음의 아들딸은 가인입니다. 믿음의 아들딸 없이는 사탄을 대해 승리했다고 하지 못합니다. 믿음의 아들딸이 없으면 실체의 아들딸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3년노정은 믿음의 아들딸과 복중의 아기가 하나되는 기간입니다.

사탄은 주먹구구식으로 해서는 분립되지 않습니다.

선생님에게 있어서도 믿음의 아들딸이 완전히 세워지지 않았을 때는 성진이와 희진이가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했습니다.

믿음의 아들딸을 사랑했다는 조건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믿음의 아들딸이 여러분의 애기를 금지옥엽같이 보호해 주어야 합니다.

부모가 될 사람은 3년 이상 참부모를 모셔야 합니다. 그러니 아들의 입장에서 수고해야 합니다.

이제는 자기 친족을 전도할 때가 되었습니다.

천하는 앞으로 선생님의 손안에서 녹아날 것입니다.

[기 도]

아버님, 복귀노정을 걸어오는 동안 수많은 당신의 자녀들이 희생당하였사옵니다. 당신은 시대와 더불어 얼마나 싸워왔사오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시달려왔사옵니까? 기나긴 세월 동안 당신께서 슬픔과 한을 남기신 것을 생각하면 할수록 가진 것 없는 저희들이지만 남겨진 복귀의 사명 앞에 더욱더 충성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느끼게 되옵니다.

아버지, 이 세상의 모든 만상은 당신의 수고와 은혜로 말미암아 지어졌사오나,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만상이 당신에게 슬픔의 기점으로 남아졌다는 사실을 저희들이 절실히 느끼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그런 슬픔 가운데에 처해 있는 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요, 나라요, 민족이요, 종족이요, 가정이요, 개인인 것을 저희들이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나'라는 한 개인을 위해 세상을 지으신 아버지의 수고 앞에 저희들은 면목을 세울 수 없고 체면을 세울 수 없사옵니다. 아버지께서 저희에게 얼마만한 인격체가 되었느냐고 묻게 된다면 저희들은 면목을 세우고 체면을 세워 나갈 수 없는 모습이옵니다. 이러한 모습인 것을 발견하면 할수록 불쌍한 분은 아버지밖에 없다는 사실을 저희들이 알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은 안식일이옵니다. 전국에 널려있는 당신의 자녀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시고, 세계에 널려 있는 뭇 자녀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최후의 싸움이 저희의 목전에 다가오면 올수록 행보를 맞추고 대열을 갖추어 최후의 승부를 종결지어야 할 때라는 것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내적으로는 물론이요, 외적으로도 그럴 수 있는 나 자신이 되게 하옵소서. 아버지께서는 이 엄청난 사명을 감당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자녀의 모습을 간절히 고대하고 계신다는 것을 저희들이 깨닫게 하여 주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여, 저희들은 금년에 계획하는 이 엄청난 섭리의 뜻을 받들기 위하여 온갖 충성을 다해야 되겠습니다. 부족한 자신들을 거룩한 성소에 바치어 승리의 깃발을 드높이 들고 온 우주가 해방될 수 있게 되었다고 자랑할 수 있고, 찬양할 수 있는 시간이 어서 속히 오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저희의 처지와 사정을 돌보지 마시옵소서. 저희들은 당신께서 믿으실 만한 아무런 내용도 갖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희들은 아버지의 처지와 사정을 알아야 할 텐데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아버지의 처지와 사정을 알지 못하고 있었사옵니다. 하오나 그 입장까지 가기 위하여는 수많은 수난과 고생의 노정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사오니, 이 싸움터에서 지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전면적인 싸움터에서 아버지의 보호를 받아 가면서 최후의 격전지를 향하여 총진군하고 총출동하기에 바쁜 당신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남한 각지에 널려서 이곳을 바라보며 경배하고, 하늘의 은사를 바라는 수많은 당신의 자녀들 위에 만배의 복을 가하여 주시옵소서. 또 세계에 널리어 당신이 남기신 섭리의 뜻을 위하여 충성을 다하는 통일의 자녀들에게도 당신의 깊으신 가호의 손길을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그들이 어려울 때나 외로운 때나 항상 당신이 친히 보호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금년에는 저희들, 국가 이상 가는 목표를 이루어야겠사옵니다. 국가를 지키기 위하여 일본을 세운 후, 거기에 당신이 축복의 손길을 펴시어서 싸움을 시켰사올진대, 그들이 끝까지 싸워 거둔 유종의 미가 아버지의 영광 가운데 있게 하여, 그 승리를 찬양할 수 있는 날을 가질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통일의 족속들이 아시아에서 당신의 뜻을 들고 나올 수 있고, 당신의 섭리의 뜻이 이러하였기 때문에 우리가 승리할 수 있었다고, 자랑할 수 있는 날이 어서 속히 오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날 모여서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는 곳곳마다 당신의 거룩한 은사를 베풀어 주시옵고, 그들을 통하여 당신의 승리의 터전을 넓혀 나가시어서 통일의 족속들이 상속받을 수 있는 기반을 갖추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개인을 위하여 찾아오시는 아버지가 아니고, 전체를 위하여 찾아오시는 아버지의 그 깊은 뜻을 저희들이 알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시간 이후의 모든 전체를 친히 주관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말 씀

땅 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보다 좋은 것을 찾아 나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왜 좋은 것을 요구하느냐 하면 그것이 보다 큰 가치를 지니고 있는 동시에 보다 더 영원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귀섭리에 가장 필요한 것

사람은 보다 선해지기를 원합니다. 그것은 자기 개체가 가지고 있는 어떤 형보다도 과거와 현재와 미래와 더불어 남아질 수 있는 내용을 갖출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선한 사람은 어느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견고한 기반 위에 서기 때문에 인간들은 선한 사람이 되기를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악이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악은 한 순간에만 대항하는 것입니다. 또한 시대권을 초월하여 역사를 창건할 수 있는 내용도 지니지 못하고 있습니다. 역사라는 것은 영원을 두고 연속하는 것이요 그것을 연속시킬 수 있는 동기는 순간 순간인 것입니다. 그런데 악한 과정을 통해서는 영원한 역사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우리 인간들은 악한 사람이나 악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이 선한 것을 바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선한 것을 바라고 계신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이 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변하지 않는 어떤 견고한 터전이나 확고한 기초가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로, 복귀섭리의 뜻 앞에 있어서도 이것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복귀섭리의 뜻 앞에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외적인 어떤 물질 보다도 견고한 터전 위에 선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물질을 추구하는 것보다 먼저 중요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어떠한 사람이냐? 복귀 역사도상에 있어서 변치 않는 견고한 기반 위에 설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으로 말미암아 역사가 시작되었고 지금까지 움직여 온 것입니다. 아무리 외적인 여건이 모두 갖추어져 있다 하더라도 그런 사람이 없으면 그 여건은 선한 기반이 될 수 없기에 선한 목적에 사용될 수 없으며, 선한 목적을 이룰 수도 없으며, 선한 곳에 머물 수도 없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미루어 보아 복귀섭리를 해 나가는 데에 있어서 사람이 문제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되겠습니다.

한 집안을 바로잡아 견고한 터전을 갖기 위해서도 사람이 중심이 되는 것처럼 복귀섭리에 있어서도 역시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한 나라 역시 사람들로 형성되어 있고 사람들로 유지되어 나가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그 사람들이 개인의 목적보다도 전체의 목적과 일치되는 기반을 갖춘 국가관을 갖고 있다면 그 국가는 무한히 발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을 추구하는 우리에게는 변하지 않는 견고한 기반 위에 선 사람이 무엇보다도 귀하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공고한 기반 위에 선 사람의 가치

우리가 어떤 사람을 중심삼고 `그 사람' 하면 그 사람의 언행심사를 보게 됩니다. 그 사람의 말, 그 사람의 행동, 그 사람의 마음가짐, 그 사람이 하는 일이 확고한 기반 위에 서 있는가를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이 모든 것이 전부 확고부동한 기반 위에 서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때에 따라 변하고 환경에 따라 변하는 사람은 국가나 민족, 혹은 가정이나 개개인에 대해서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이 못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공고한 기반 위에 서 있는 사람의 행동과 마음가짐, 그리고 하는 말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인격자라 할 때, 인격자의 모습에서 나타나는 말이나 행동은 공고한 기반 위에서 하는 것이기에 그 누구도 그것을 움직일 수 없는 것입니다. 친구일지라도, 혹은 어떠한 권세를 쥐고 있는 사람일지라도, 또 아무리 가까운 사이의 사람일지라도 움직일 수 없는 확고부동한 말을 하게 될 때 거기서부터 새로운 인연이 벌어지고, 거기서부터 만사가 시작된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행동도 마찬가지입니다. 변치 않는 확고한 자리에서 행동을 하게 될 때, 그것이 일시적인 행동이라 해도 그것은 역사를 움직일 수 있고, 시대를 대신할 수 있는 행동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개인들의 수가 더하여져 하나의 행동으로 나타나게 될 때, 그것은 국가를 변혁시킬 수 있는 운동도 되는 것이요, 또 새로운 국가를 창건할 수 있는 기원도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공고한 기반 위에 선 개인들로 형성된 종족이면 종족, 민족이면 민족이 있다면 그 종족이나 민족은 어떤 시한권내에서 시작되었다가 그 권내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시한권을 초월한 자리에서 시작되어 영원을 향하여 뻗어 나갈 수 있는 종족이나 민족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두고 볼 때, 과연 우리들은 그런 개인의 모습을 얼마만큼 추구하였느냐 하는 것이 현시점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문제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필요로 하는 사람

우리는 하나님께서 6천년 동안 복귀섭리를 해 나오셨지만 아직까지 한 남자와 한 여자를 찾지 못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 세상에는 남자도 많았고, 여자도 많았으며, 부부도 많았습니다. 또한 민족과 국가, 세계의 형태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영원하고 변치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응할 수 있고, 하나님의 영원하신 위업을 상속받아 영속시킬 수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슬픔이라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어떠한 가정이면 가정이 이름 있는 가정으로서 역사를 움직일 수 있는 내용과 민족의 전통을 지녔는데, 그 가정에 그러한 것들을 상속받을 수 있는 자식이 없다면 슬픔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 가정에 자식이 있다면 그 가정에 갖추어진 모든 내용은 더욱 빛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정과 관계되어 있는 모든 인연도 빛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가정의 깊은 내용을 상속받을 수 있는 자식이 없다면 그 가정은 거기서부터 쇠퇴해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도 우리의 이런 환경적인 내용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중심삼고 영속적인 뜻을 상속받을 수 있는 참다운 사람이 있다면, 미래의 영광을 향하여 출발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것이지만 그런 인간이 없을 때에는 아무리 공고한 입장에 계시는 하나님이라 하여도 우리 인간에게나 역사 앞에 무력할 수밖에 없으며, 하나님의 모든 위업 또한 상속해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의 공고한 터전 위에 서 있는 인간이 얼마나 귀한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그러한 개인을 찾기 위해 수고해 나오신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나 자신은 하나님께서 찾고자 하시는 그 뜻 앞에 있어서 그런 공고한 자리를 취하였느냐? 이것은 우리가 다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될 중대한 문제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뜻과 더불어 같이할 수 있는 확고부동한 개인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지 못하게 될 때에는 아무리 뜻이 크고, 그 뜻을 성사시킬 수 있는 때가 왔다 하더라도 그 뜻과 그 시기는 아무 소용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세계사적인 사명을 짊어졌다고 하는 우리 통일신도들 개체 개체는 과연 뜻과 더불어 그 누가 변화시키려 해도 변하지 않고, 변경시키려 해도 변경되지 않은 자가 되었으며, 가중한 힘을 가해 가지고 어떤 내용을 더 보충해줄 필요가 없는 완전한 자가 되었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하게 됩니다. 만약 그런 사람이 여기에 있다면 그는 하나님의 기쁨이요, 오늘날 수많은 인류들의 소망의 중심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이 이 지구상에 나타나게 될 때, 인간이 비로소 복귀섭리의 터전 앞에 공고한 하나의 기점으로서 출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언제 그런 기준 위에 서고, 언제 그런 입장에 서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 선 개인이 역사를 대신하여 동기가 될 수 있는 내용을 지니고 나서게 되면 그 역사는 그것을 상속받을 수 있는 것이며, 또 그 동기와 더불어 어떤 실천 방안을 갖고 나가게 될 때, 그것을 통하여 새로운 실천의 결과가 역사상에 나타날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문제를 두고 볼 때, 확고부동한 자리에 선 개인이 얼마나 필요한가 하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공고한 기반 위에 서야 할 통일교인들

오늘날 여러분은 삼천만 민족을 대신한 사람들입니다. 삼천만 민족을 대신한 남자면 남자, 여자면 여자인 여러분들은, 이 민족 전체를 대신한 하나의 기반 위에 설 수 있는 자신을 얼마나 동경했습니까? 여러분은 삼천만을 사랑하는 데 있어서 어떠한 중간적 입장에 설 것이 아니라, 공고한 기반 위에, 즉 하나님이 출발할 수 있는 기점에 서야 합니다. 그리하여 삼천만을 책임지고 싸워 나가겠다고 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을 뜻에서는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연결되어 가정을 이루고, 그 가정들이 연결되어 종족이 편성되고, 그런 종족들이 연결되어 하나의 민족이 편성되었다 하면, 그 민족을 통해서 비로소 새로운 세계가 하나님의 뜻과 더불어 힘차게 펼쳐 나가게 될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도 공고한 기반 위에 선 자아가 얼마나 필요하다는 것을 여러분이 느껴야 되겠습니다.

예수님 때까지의 4천년 역사를 하나님의 섭리의 뜻을 중심삼고 볼 때, 그 역사는 요동하는 역사였습니다. 일정한 정착점을 잡지 못한 역사였다는 것입니다. 하나의 반석으로서 공고한 터전이 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인간은 거기에 두 발을 딛지 못하였고, 그럼으로 말미암아 행동하는 모든 것이 역사 앞에 새로운 모색방안이 되지 못하였고, 그 시대를 좌우할 수 있는 기반 위에 서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입장에서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사명이 2천년 후인 지금까지 연장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날 대한민국이면 대한민국을 중심삼고 그 사명을 재차 수습하여야 할 책임을 느끼고 그 책임을 수행하겠다는 무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무리는 얼마나 심각하겠습니까?

오늘날 세계 정세는 요동하고 있습니다. 국가적인 운명도 요동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정세 가운데에 있는 국가와 세계를 수습하여 그것을 기점으로 공고한 터전을 만들 수 있는 개인이나 가정, 혹은 종족이 이 시대에 나타난다면 거기에서부터 새로운 세계는 창건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럴 수 있는 `나'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나를 바라고 나오셨기에 하나님의 뜻은 우리 자체가 없어서는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뜻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 사람에게 닻을 내릴 것입니다. 하나님은 정지라든가 또는 시발의 동기를 그 터전 위에서 찾을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두고 볼 때 우리는 견고한 기반 위에 서야겠습니다. 견고한 기반 위에 선 개인, 견고한 기반위에 선 가정, 견고한 기반 위에 선 종족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무리가 그러한 기반 위에 서는 종족이 되어야겠느냐? 오늘날 우리 통일교인들이 되어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기반 위에 서는 민족도 우리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또 그러한 기반 위에 서는 국가도 제3차 이스라엘의 사명을 감당하여야 할 대한민국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그러니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어디까지나 견고한 기반 위에 선 개인으로부터 시작해야 됩니다. 그런 개인이 되려면 `내가 행동하는 것은 틀림없는 행동이요, 말하는 것도 틀림없는 말이다. 그러므로 내 말과 행동은 역사를 대신한 것이니 내 말을 믿고 내 행동을 보고 따라와야만 역사적인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결정될 수 있다' 할 수 있는 신념 위에 선 개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하는 말은 일시적인 말이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가 그럴 수 있는 결과로 나타날 때까지 지속할 수 있는 말이 되어야 합니다. 행동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나아가는 과정에 있어서는 `아무리 어려운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견고한 기반 위에 선 우리에게는 그것이 문제되지 않는다' 하는 입장에 서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통일교회도 이런 입장에 서서 나아간다면 우리가 가는 길이 아무리 어렵다고 하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 어려움이 우리가 서 있는 견고한 터전 이상의 자리가 아닐진대 우리는 거기에 굴하지 않고 기필코 승리의 결과를 다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문제는 우리 각자의 책임으로 해결되는 문제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믿음이 약한 자에게 권고하기를 `믿으라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믿으라'는 말씀은 막연하게 믿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공고한 기반 위에 서고 반석 위에 서서 흔들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기반 위에서 누구의 간섭이나 침범에 좌우되는 입장에 서지 말라는 것입니다.

공고한 기반 위에 서려면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가 스스로 주체성을 갖추어 주도적인 권한을 세우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막연한 자리에 있는 여러분에게 절대적인 신앙을 강조하는 것도 일시적으로나마 절대적으로 공고한 터전을 필요로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얼마나 불쌍하신가 하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기반 위에서 만유의 존재와 만세계를 하나의 목적을 향하여 끌고 나가야 하는 입장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주체적인 입장을 상실해 버리고 임시변통으로 상대적 기준을 갖추어 동기를 찾아 들어겠다는 입장에 서서 섭리의 뜻을 펴나오시는 하나님이 되신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불쌍한 하나님인가를 우리들은 다시금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에게는 원리가 필요한 것입니다. 원리원칙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원리원칙은 어느 누구에게 간섭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역사권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초월하여 역사를 움직일 수 있는 기점에 있는 것입니다. 역사적 결과의 입장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원리는 어떤 조상이나 후손도 간섭할 수 없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조상도 순응해야 되고, 후손도 순응해야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역사도 순응해야 됩니다. 원리라는 그 자체가 절대적인 주체성을 지닌 원칙적인 내용이기 때문에 우리 통일교회는 원리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원리의 길은 공고한 기반을 빛내기 위해서, 공고한 기반을 넓히기 위해서, 공고한 기반을 드러내기 위해서 주장하며 가는 길입니다. 이 점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그러기에 원리의 길은 쉽게 넘어갈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어떠한 수단과 방법으로 쉽사리 밟고 지나갈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원리의 길은 하나 하나 밟아 넘어가야 하는 길입니다.

열 사람이 간다면 가는 그 모양이 모두 같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길을 갔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백 사람이라도 가는 모양이 모두 같지 않으면 이 길을 갔다고 할 수 없는 것이며, 천만 사람이라도 그 가는 길이 모두 같은 모양의 행로를 거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원리의 길이라는 것은 열 발자국 되는 거리의 길을 가더라도, 역사를 초월하여 형태를 남기고 가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우리의 조상도 가감할 수 없는 것이요, 우리의 후손도 가감할 수 없는 것이며, 하나님까지도 가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길이 원리의 길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탕감의 길은 그렇지 않습니다. 10분의 1이면 10분의 1, 100분의 1이면 100분의 1이라도 조건적인 형태를 갖추면 탕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길이 탕감복귀의 길이라는 것을 우리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탕감복귀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원리입니다. 이 원리가 있어야 비로소 거기에서부터 역사적인 기원이 벌어지는 것이요, 이 원리에 입각하게 될 때에 비로소 견고한 기반 위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기반 위에 선 자아를 얼마만큼 드러내느냐 하는 것은 원리와 얼마만큼 일치된 생활을 하느냐 하는 것을 중심삼고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통일교인들이나 이번 축복 특별수련생들을 두고 보더라도, 그들을 평가하는 기준은 그가 뜻을 알고난 후의 생활이 과거의 기간보다 짧더라도 뜻을 알고 난 후에 얼마나 원리적 내용과 일치된 생활을 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통일교회에 들어온 지 한 시간, 혹은 1년, 3년, 10년이라는 그 기간 동안 자신이 얼마나 원리적인 입장과 공고한 터전 위에 서서 나왔느냐 하는 문제가 금후에 자기의 생애의 가치를 빛나게 할 수 있고 생애의 문제를 좌우할 수 있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왜 그러냐? 원리적인 기준에 섬으로써 절대적 기준에 가까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원리에 생활 기준이 일치되면 거기서부터 그 생애는 영원한 뜻과 일치되는 것이요, 그 기준에 일치된 내용으로 영원한 자기의 생사 문제가 좌우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원리를 중심삼고 생활하는 것이 하나의 견고한 기반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리를 떠난 생활은 지극히 위험합니다. 그러나 원리에 의거하고, 원리에 보조를 맞추는 생활을 했을 때는 견고하고도 공고한 기반이 우리 생애노정에 남아진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원리와 더불어 말하고, 원리와 더불어 생활하고, 원리와 더불어 실천해야 합니다. 그것을 통해서만이 역사를 일깨울 수 있고, 역사를 이끌고 갈 수 있으며, 새로운 시대를 창건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철저한 원리 생활을 해야 할 우리

이런 기반 위에서 내적 생활이나 외적 생활, 혹은 경제적 생활이나 신앙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정된 생활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그런 입장의 원리화된 생활은 우리의 생사 문제까지도 좌우할 수 있는 것입니다. 현세의 그런 생활은 현재만이 아니라 영원한 세계에까지 남아지는 터전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통일교회가 주장하는 원리인 것을 알고, 여러분은 이 원리에 입각해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일생에서 요구하는 모든 목적도 원리와 일치되는 생활에서부터 영원히 남아 질 수 있는 하나의 확고한 터전이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가면서 그 내용을 음미하고 그 내용을 투입하면서 착실히 생활해 나가는 사람은 지칠래야 지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생활을 해 나가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함께해서 행동하게 되면 보다 공고한 기반이 되어서 내일의 새로운 역사를 창건하는 동기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러한 생활을 계속해 나간다면 스스로의 횡적인 발전과 종적인 발전의 기원이 된다는 것을 알고 보다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이것이 현재 우리 통일교회 교인들이 취해야 할 입장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여러분들은 오늘날 한국의 정세가 위기일발의 시점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리라 봅니다. 그러면 이 시점을 어떻게, 그 누구의 힘으로 변경시킬 것이냐? 그것은 어떠한 국책으로도 변경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민족의 운명을 세계의 운명에 연결시킬 수 있는 확고한 신념을 가진 사람이 그 민족 가운데 얼마나 있느냐에 따라 변경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나라의 위급한 운명을 구할 수 있는 동기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시점에서 통일교회의 원리에 입각한 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 통일교회의 신앙자들의 태도, 혹은 그 입장이 얼마나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나를 여러분들은 더욱더 절감해야 되겠습니다.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이 세계의 만민이 모여들게 할 수 있는 하나의 기원과 기초가 어디 있느냐 할때 그것을 다른 곳에서는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원리를 중심삼은 우리의 생활권내에서 이루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우리들이 처해 있는 입장이 얼마나 엄숙하고 엄청난 자리인가를 느껴야 합니다. 우리 개체가 세워야 할 공고한 기반, 가정이 세워야 할 공고한 기반, 민족과 국가가 세워야 할 공고한 기반이 원리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겠습니다. 그러기에 원리생활의 철저화를 더욱더 강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기 도

아버님, 저희들은 복귀원리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저희가 배우고 있는 그것은 세상의 물리학이나 화학의 정의도 아니요, 공식도 아니요, 원리도 아닙니다. 이것은 타락한 인생이 아버지편으로 귀의하기 위한 하나의 탕감법칙인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편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무모한 행동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저희는 알고 있습니다. 또한 천만 사람의 의로움을 합하여 새로운 의의 권한을 마련해야 할 것도 저희들은 알았습니다.

수천년 동안 기독교 역사를 엮어 오신 아버님은 내심의 변치 않는 공고한 기반으로 역사를 대해 나오셨습니다. 그 과정에 복잡한 단계들을 탕감의 대가를 치르며 축소시켜 나오신 것이 아버지가 지금까지 섭리해 나오신 역사적인 사연인 것을 저희들은 잘 알고 있사옵니다.

역사를 축소시킨 하나의 기점에서 `이것이다' 할 수 있는 기원을 마련하기 위하여 수천년 동안 선한 사람들을 희생시켜 나온 것이 아버지의 뜻의 길인 것을 헤아리게 되옵니다. 그 길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렸지만 `이것이다' 할 수 있는 자리에 서서 피를 흘린 사람이 없다는 것을 저희들이 아옵니다. 그것이 아버님의 한이었기 때문에, 아버님께서는 그 결정적인 기점을 해결짓기 위하여 예수님을 보내셨사오나 예수님마저 땅과 영계를 중심삼고 그 기점을 찾지 못하는 슬픔을 갖고 죽었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역사를 연장시켜가며 섭리하신 아버지의 노고의 역사는 가중된 십자가의 비참한 길로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래서 아버님은 다시 한번 역사적 끝날에 이것을 해결짓기 위하여 통일가를 세우시어 이런 엄청난 하나의 기점을 마련하신 줄 아옵니다. 그런데 그 기점은 무모한 자리에서는 절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저희들이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공고한 어떠한 원칙을 따라 변치않는 내용을 갖추어야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아야겠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생각하게 될 때에, 지금까지 저희가 원리와 일치하는 생활관을 얼마나 중요시했느냐 하는 것을 다시 한번 반성해 보면 아버지 앞에 불충한 자신임을 깨닫지 않을 수 없습니다. 원리는 원리대로 두어두고 생활은 생활대로 하고, 자신은 자신대로 간다고 하는 입장에서 지금까지 걸어 나온 것을 생각하게 될 때, 나 자신을 위해 수고하신 아버지 앞에 불충이었고 불효이었음을 저희들 각자가 다시 한번 자인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원리와 자신의 생활이 일체된 자리에서 아버지와 일체될 수 있는 주권을 갖지 못한 과거의 슬픔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이러한 현재에 처해 있는 저희 자신을 폭파시켜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아버님께서 하나의 기점상에 머무를 수 있음과 동시에, 저희가 영원히 아버님을 대신하는 데 대해 자신감을 가지는 원리적인 내용의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고 원하옵니다.

그 누구도 움직일 수 없는 공고한 기반 위에 섰다고 자각하는 한 순간이 없어 가지고는 자기 일생에 영원한 승리는 있을 수 없는 것이요, 자기에게 있어서 영원한 아버지의 뜻의 출발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저희들이 확실히 알게 하여 주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들은 1960년부터 1970년까지 10년 기간을 싸워 나왔습니다. 70년대를 즈음한 이 시점에서 아버님께서 저희들에게 무엇을 요구하실 것인가를 생각하게 될 때, 그것은 외적인 세력 기반을 넓히는 것이 아니라 공고한 터전 위에서 원리화된 하나의 개인과, 하나의 가정과, 하나의 종족을 형성하는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옵니다. 그 운동이 무엇보다도 귀하다는 사실을 저희들은 알아야 되겠사옵니다.

아버님, 이제 4월도 지나가고 있습니다. 이달을 보내면 일년의 3분의 1이 지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저희들은 이 세월을 덧없이 무의미한 날들로 흘려 보내서는 안 되겠사옵니다. 원리원칙과 일치화된 자리에서 이날들을 수습하고 소화하여 공고한 터전을 결정짓는 하루 하루가 되게 하며 아버지를 향하여 전진하는 저희들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저희들의 하루 하루의 생활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의 하루 하루의 생활이 얼마나 얼마나 헛된 생활이었으며, 부평초와 같이 뜬 생활이었는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 견고한 기반 위에 선 자아의 모습을 아버님 앞에 자랑하는 것이 저희의 간절한 욕구가 되게 허락하여 주옵소서. 그런 자리에서 자아를 수습하여 저희들의 모든 생활이 아버님의 동기가 되게 만들어야겠다고 몸부림치는 자들이 되어야겠습니다. 그곳이 아버님께서 주관하고 천지가 소생하는 자리인 것을 느껴서 생활에서 승리하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들은 지금까지 말을 하였으되 무의미한 말을 하였고 행동을 하였으되 무의미한 행동을 하였습니다. 또한 인연을 갖추었지만 흘러갈 인연을 갖추어 나왔습니다. 한마디 말이나, 한 번의 행동이나, 하나의 인연을 공고한 터전 위에서 쌓으면 쌓을수록 아버님의 것이 되고, 넓히면 넓힐수록 아버님의 터전이 되는 것이옵기에 그런 견고한 기반 위에 선 사람들이 지금 필요한 것을 생각하게 되옵니다.

그런 입장에서 오늘날 통일가의 역사를 다시 한번 더듬어 볼 때, 당신 앞에 남겨진 인물이 얼마나 있으며, 그런 재산이 얼마나 있으며, 또한 당신이 관리할 수 있는 기일이 얼마나 되는가를 생각하게 되옵니다. 저희들 자신이 그렇지 못하다는 심정을 느끼면 느낄수록, 자기 자신을 확고한 기반위에 세우기 위하여 이것을 수습하고 비판할 줄 아는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이 시간 다시 한번 느끼게 하여 주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그럴 수 있는 역사적인 하나의 기점을 저희는 바라보아야 되겠습니다. 그럴 수 있는 가정적 승리의 기반을 저희들은 추구하여야 되겠습니다. 그럴 수 있는 개인적인 승리의 기점을 저희들은 쟁취해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개인과 가정이 나오지 않고는 이런 종족이 나올 수 없는 것이요, 이런 종족이 나오지 않고는 이런 민족이 나올 수 없는 것이요, 이런 민족이 나오지 않고는 이런 나라가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아옵니다.

그런데도 아버님이 이루어야 할 성업의 목표는 국가 복귀이기에, 이 엄중한 책임을 이루기 위해 한의 역사를 더듬어 온 아버님이 얼마나 슬픈 입장에 계신가를 저희들은 다시 한번 느끼게 되옵니다.

언제나 변하기 쉬운 자신, 언제나 생활이 요동하기 쉬운 입장에 있는 저희 자신, 이러한 저희의 마음과 몸의 자세를 놓고 볼 때, 아버지의 영원한 기반 위에 설 수 있는 자신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이러한 저희들에게는 영원히 찾아올 수 없는 아버지요, 영원히 인연을 맺을 수 없는 아버지인 것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아버지께서 얼마나 불쌍하신가를 이 시간 다시 한번 느끼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역사는 변하더라도 변하지 않는 공고한 기반 위에 서고, 역사의 흐름은 사방으로 퍼져 나가더라도 나는 중심이 되어 역사를 인도하고 수습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큰 문제라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한 개인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한 나라와도 바꿀 수 없는 것이요, 이 세계와도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저희들은 그런 공고한 터전 위에 서는 모습을 그리워하며 저희들 자체를 풀어야 하는 데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한 생활을 연속해 나왔사옵니다. 그런 과거를 부끄러움으로 깨달을 줄 아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역사를 주고도 바꿀 수 없고, 시대를 주고도 바꿀 수 없으며, 세상의 그 무엇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절대적 기원과 일치되는 공고한 자아의 모습을 그리워하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그럴 수 있는 한 사람이 문제였습니다. 그럴 수 있는 하나의 남성이 문제였고, 하나의 여성이 문제였습니다. 이런 남성과 여성이 손에 손을 잡고 나설 수 있는 가정이 문제였습니다. 그러한 가정이 통일가 가운데 있느냐, 그러한 가정이 이 민족 가운데 있느냐, 그러한 가정이 이 세계 가운데 있느냐는 물음에 아직까지 그런 가정이 없다고 할 때, 암담한 흑암의 권세가 이 천지를 뒤덮을 것입니다. 그때에 어려움을 어느 누가 극복할 것이겠사옵니까? 인간 중에 그러한 사람이 없기 때문에 책임져야 할 입장에 서셔야 할 아버님은 제일 불쌍한 분이옵니다.

아버님은 안일한 곳을 찾아가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저희들이 처해진 환경을 미루어 볼 때 느끼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그러므로 아버지 앞에 짐을 지우는 저희들이 아니라 오히려 아버지를 먼저 염려하고 동정해야 하는 저희들인 것을 발견하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해 바라옵니다.

자신을 구하기보다도 공고한 터전 위에서 아버지를 구해 드리는 저희들이 되어야겠사옵니다. 저희들은 지금까지 이러한 책임이 인간에게 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지금까지는 인간이 아버지를 따라가야 한다고 믿고 나왔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인간을 따라가야 된다는 입장에서 생각하게 될 때, 움직일 수 없는 견고한 터전 위에 선 인격자가 얼마나 귀하며, 천지가 그 사람을 겨누어 나오고 역사가 그것을 겨누어 나오고 있으며, 섭리가 그것을 겨누어 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저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기반 위에 선 사람은 비록 인간의 신체의 모습을 다 갖추지 못했다 하더라도 아버지에게는 그 무엇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존재라는 것을 저희들이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생명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오'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공고한 터전 위에 절대부동의 자리에 선 개인의 가치를 두고 하신 말씀이라는 것을 저희들이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기반 위에서 아버님도 해원성사할 수 있는 것이요, 거기에서 아버님께서 승리할 수 있는 방패도, 도성도, 모든 국가의 권한도 생긴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은 저희들 앞에 남겨진 원리의 길이 아니고는 안 된다는 것을 더더욱 깊이 깨닫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아버님은 원리의 길을 남기기 위해 얼마나 수고하셨습니까? 그런데 원리를 안다는 무리가 원리의 길을 이탈하게 될 때, 그 얼마나 비참하고 그 얼마나 원통한 사실이 되는 가를 저희들이 다시 한번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원리를 통한 인격, 원리를 통한 생활, 원리를 통한 심성을 갖추어 아버지앞에 경배하는 모습을 아버지께서 보시고 동정하고, 아버지께서 보시고 찾아올 수 있는 그런 아들딸이 이 통일교단에 남아지지 않으면 세상을 그 누가 지도할 것이냐고 자문자답할 때, 아무도 없다는 결론이 자동적으로 나오는 것이옵니다.

그러기에 오늘날 저희들이 이 엄중한 책임을 수행하는 것이 역사적인 것이요, 천주적인 소원이라는 것을 알아야겠습니다. 이런 것을 바라볼 때, 초조하고 절박하고 비통하고 애절한 자리에 서서, 이 모든 문제를 저희들이 해결지어야 된다는 것을 스스로 발견할 줄 아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원리와 일치된 생활의 터전을 갖추어 생의 목적을 이룰 수 있는 귀한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고, 당신의 법도에 순응하는 아들딸이 이제부터 많이 나오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남아진 내일에는 다른 어떤 문제보다도 견고한 기반 위에 서는 것이 가장 절박한 문제임을 깨달으면서, 당신의 품에 안기기를 그리워하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옵니다. 견고한 기반을 원리를 통하여 저희 자체 앞에, 이 교단 앞에, 이 민족 앞에 다 바치게 허락하여 주시길 재삼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의 이름 받들어 아뢰었사옵니다. 아멘.

[말씀 요지]

이제 통일교회의 식구들이 정성들여야 할 때가 왔습니다. 탕감은 평면상에서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반드시 경계선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70년대에는 우리가 반드시 경계선에 나가야 합니다. 즉, 일선에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제물은 평화스러운 자리에서 드리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최일선에서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귀섭리의 원칙이기 때문에 뜻 성사의 때가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우리는 내적으로 단결해야 합니다.

우리는 전세계에서 외적으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보고 그냥 기뻐해서는 안 됩니다. 기뻐할 수 있으려면 거기에 대한 구체적인 자각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루어져 있는 그 환경을 보고 우리가 현시점에서 기뻐하는 그것으로써 끝나서는 안 됩니다. 거기에는 발전할 수 있는 가중적인 노선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 기쁨을 넘어서서 거기에 배가해 가지고 투쟁해야 할 노선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기뻐할 수 있는 환경이 벌어지면 벌어질수록 우리의 때가 가까와오는 것을 느끼고 더더욱 정성을 가중시켜야 되는 것입니다.

앞으로 대한민국과 일본은 하나되어서 일본이 좌경화하는 것을 막고 우경화시켜야 합니다. 이 문제는 국가도 손을 대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우리가 그 때를 예상해서 지금까지 준비해 온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대한민국이나 일본에 영향을 미치지 않으면 안 될 시점에 이르렀습니다. 우리는 그럴 수 있는 기반을 닦아 놓았고 그것을 위정자들도 인정할 수 있는 권내에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협조하는 무리들도 있겠지만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패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앞으로 세 가지 형태의 투쟁이 벌어질 것입니다. 세상과 우리가 가인 아벨로 나누어지고, 우리 자체내에서도 가인과 아벨로 나누어질 수 있고, 사탄 세계도 가인과 아벨로 나누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때일수록 우리 자체내에서 가인과 아벨이 갈라져서는 안 되겠습니다.

인간이 제물을 드리는 때마다 하나님이 지극히 염려하는 것은 제물 앞에 상충되는 사람들이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거룩한 제물을 드린다 하더라도, 그 제물 앞에 상충되는 사람들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외적인 가인을 대할 시점이 절박하면 절박할수록 내적으로 일체화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언제나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를 반대하는 움직임에 대한 반대의 움직임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움직임들을 우리가 좌우해서 수습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우리가 둘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5월부터 10월까지 6개월 동안을 기도기간으로 정해 놓고 기도하려는 것입니다. 이 기간은 70년대에 있어서 중대한 기간인 것입니다. 그 기간 중에서도 5월부터 7월까지 3개월간은 그야말로 고개를 넘어가는 기간입니다. 그러니만큼 여러분은 다른 생각을 하지 말고 더욱 내적으로 일치화되어서 전력을 다하여 외적인 가인세계를 굴복시켜야 됩니다. 우리가 단결하면 단결한 만큼 외적인 가인세계는 분열되는데 이것도 우리는 수습해야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이 기도기간이 중요한 의의가 있음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지금 한국과 일본이 뜻 가운데서 어떻게 하나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한국 정부도 일본의 우리 국제승공연합에 대해서 자못 큰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WACL(세계반공대회)이 일본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가? 현재 한국의 정세를 두고 볼 때 1972년도까지가 중요한 시점입니다. 그러니 뜻을 아는 우리로서는 거기에 대비해서 금년에 더더욱 확고한 기반을 닦아야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WACL대회는 중요한 사명을 띠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먼저 선생님을 중심삼고 내적인 단결을 해야 하고, 그 다음은 외적으로 한국 식구와 일본 식구가 단결하여 하나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공동 운명에 놓여 있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우로 돌리는 내적인 힘이 좌로 돌리는 외적인 힘보다 강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우리는 천배 만배 정성을 들여야 하겠습니다. 우리를 반대하는 수많은 수의 힘을 능가해야 되는데, 우리의 부족한 힘만으로는 안 되겠기 때문에 하나님의 협조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기간이 그러한 하나님의 힘을 협조받기 위한 기도 기간인 것을 알고 더욱 정성을 들여야 되겠습니다. 특별히 그런 문제를 중심삼고 기도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는 금년 1970년부터 1972년까지 3년 동안에 결판을 내야 하겠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이 목적하시고 가시는 길에 동참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표준 앞에 정성의 도를 가하는 날에는 우리는 역사에 없는 비약적인 발전을 할 것이요, 우리 앞에 기적적인 놀라운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그러니 그러한 때가 오기를 바라기 전에 그러한 때를 맞을 수 있는 자신의 모습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결국 우리 자신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제사장에게는 자기가 정성들인 것을 제사날을 통하여 어떻게 하나님 앞에 연결시키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지금이 우리에게 있어서 그러한 중차대한 시점인 것을 알고, 때를 맞을 수 있는 자세를 가지고 여기에 일치될 수 있는 제물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리하여 민족과 아시아를 끌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될 중요한 시점인 것을 알고 특별히 정성을 기울여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번 기도기간 중 낮 12시에는 전국에 있는 우리 식구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직장에 있거나, 자기가 어떠한 환경에 처해 있더라도 그 시간만은 시간을 내어서 기도를 해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아침이나 저녁에는 각자가 기도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해 주길 바랍니다.

우리는 외부로부터 우리를 반대하는 세력을 기도로써 물리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강제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원수를 치기 전에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귀섭리가 그렇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원수를 쳐서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보여 주어서, 그것을 그들에게 인식시켜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이 인식하지 못할 때는 하나님이 그 원수들을 제거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종교를 중심한 복귀섭리의 노정입니다. 지금까지 종교인들이 선을 중심삼고 희생한 것은 그러한 섭리적인 뜻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역사과정에 왔다 간 수많은 선한 사람들이 희생을 당하면서 섭리역사를 담당해 나왔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원수가 망하기를 기도하는 것보다도 그들을 위해 사랑으로써 눈물을 흘려 줘야 합니다. 선은 이렇고 악은 이런 것이기 때문에 선과 악은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을 깨우쳐 주고, 악한 자를 망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악을 수습해서 선화시키는 것이 아버지의 뜻인 것을 알게 해주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그들이 반대하는 그 이상의 정성을 들여서 악을 수습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알고 정성을 들여 기도하여 주기를 바랍니다.

[기 도]

온 천지 만민과 온 피조세계 위에 영원히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오늘 서울에 있는 당신의 자녀들이 이 한 장소에 집합하였사옵니다. 아버지, 이곳을 거룩한 지역으로 성별하시옵소서. 이곳이 남아진 복귀의 뜻 앞에 당신의 섭리의 터전이 되고 초소가 되는 영원하고 거룩한 땅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곳이 당신의 새로운 경륜의 빛발과 섭리의 손길에 의해 만민에게 접촉할 수 있는 거룩한 승리의 터전이 되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여기에 모인 당신의 자녀들이 굽어 살펴 주시옵소서. 어느 한사람도 당신의 인연을 벗어난 가운데서 태어난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저희들이 그런 인연 가운데 태어났기 때문에 인연된 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한 인연의 세계에 살고 있으므로 당신의 영광과 존귀를 찬양하여야 할 자체인 것을 느끼오니, 이 거룩한 날을 맞이하여 여기에 모인 당신의 자녀들을 거룩하다고 하시옵소서.

저희들이 당신의 존전에서 자랑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모습을 그리며 여기에 모였사오니 긍휼히 보아 주옵기를, 아버님이여,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1970년도를 맞이하여 3분의 1을 보내고 3분의 2를 출발하는 첫달의 첫번째 성일을 맞이하였사오니, 당신께서 이들을 축복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남한에 널려 있는 당신의 어린 자녀들이 이날을 그리워하면서 이 서울을 바라보고 마음을 다하여 축수하고 있사오니, 그들 위에 당신의 무한하신 자비와 사랑이 같이하여 주시옵고, 남아진 동정의 은사도 가하시어서 최후의 날까지 남아지게끔 축복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를 위하여 정성을 다하고, 민족과 세계를 위하여 온갖 충성을 다하는 이들이 있거든 그들에게 천만배의 은사를 가하시어서 아버지의 거룩한 은사권내에 세워 주시옵소서. 또한 이 종족 앞에, 민족 앞에, 인류 앞에 자랑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아들딸로서 세워 주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저희들은 이미 아버지 앞에 바쳐 제물되기를 각오한 몸들이오니, 자신을 위하여 사는 자들이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나 자신이 먹고 살고, 오고 가고, 자고 깨는 모든 일체를 당신의 뜻으로 말미암은 원리에서 시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그 결과를 위해 내 전체를 바칠 수 있어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아들이 되고 딸이 되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이들의 마음 가운데 찾아오시어서 오직 당신의 소원, 즉 당신이 바라는 세계와 당신이 바라는 인류와 더불어 당신이 찾고 있는 이상세계인 통일의 세계를 위하여 갈 수 있는 아들딸로서 세워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이지 못한 당신의 자녀들도 있는 줄 알고 있사오니, 그들의 처지와 형편에 따라서 당신의 무한하신 은사를 고루 내려 주시옵고, 최후의 한날까지 동행하시어서 아버지의 뜻 앞에 기억되는 무리들로 세워 주시옵기를 재삼 부탁드리옵니다.

오늘 이 자연스러운 환경을 중심삼고 나타나는 일체가 당신의 경륜에 보탬이 되고, 섭리의 뜻 앞에 즐거움의 상징이 되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기뻐하실 수 있는 이날이 되고, 자녀들도 생애에 잊을 수 없는 기록을 남겨 그리워할 수 있는 한날이 되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이 시간 일체를 아버지께 맡겼사오니 친히 주관하여 주시옵기를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의 성호 받들어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말 씀

여러분들이 봄날에 자연을 찾아 나와 예배드리는 것이 1970년을 맞이하여 처음입니다. 이 장소를 중심삼고 우리들의 모임과 더불어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될 줄 믿으면서 오늘을 즐겁게 지내 주기를 부탁드립니다. 오늘 잠깐 말씀할 제목은 `봄철과 인간'입니다. 이런 내용을 가지고 잠깐 말씀해 보려고 합니다.

절기와 인생

`봄철' 하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꽃을 연상하게 됩니다. 또 나비와 벌을 연상하게 됩니다. 그 다음에는 새로운 것이 소생되는 계절을 연상하는 것입니다. 또 봄철은 일년 중에 영광을 상징한다는 것도 연상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봄을 즐거워하지 않는 만물이 없다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한때를 위해서 준비했던 것을 드러내 보이는 잔치의 계절이라고 볼 수 있는 때도 봄인 것입니다.

이러한 봄날과 우리 인간과의 관계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것입니다. 봄은 봄 자체로서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봄이 생겨나기 위해서는 봄이 있기 전에 반드시 겨울이 있어야 되고, 겨울이 있기 전에 가을이 있어야 됩니다. 또한 가을이 있기 전에 여름이 있어야 되고, 여름이 있기 전에 봄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거꾸로 올라가서 생각해 볼 때, 봄은 언제나 순환해서 다시 찾아오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단 한번밖에 없는 잊을 수 없는 봄절기는 언제냐? 여기에서 말하는 봄절기는 오늘 우리가 맞는 계절적인 봄절기가 아니라 인생 자체를 중심삼고 보는 봄절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인생을 중심삼고 볼 때 봄절기는 사춘기 시대를 지나가는 과정에 있는 청년시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인간의 행로는 청년시대, 장년시대, 노년시대로 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모든 사람의 일생에 있어서도 봄절기와 같은 청년시기가 있고, 여름 절기와 같은 장년시기, 가을절기와 같은 노년시기, 겨울절기와 같은 침울한 죽음길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보더라도 인간의 일생 자체가 춘하추동과 같은 행로라는 것을 우리들은 연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것을 좀더 범위를 넓혀서 인류역사를 중심삼고 본다면, 오늘 우리 인류가 살아나오는 생활에서 과연 봄절기는 어떠한 때냐? 우리 인간은 그 범위를 모르고 있습니다. 또 봄절기가 있었으면 여름절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여름절기가 언제냐고 할 때 그 여름절기를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가을절기가 언제냐고 할 때에도 가을절기를 예상할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어느 때가 가을절기인지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봄이 가고, 여름이 가고, 가을이 가면 반드시 겨울이 올 것입니다. 또 겨울이라는 고개를 넘어서야만 다시 봄이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우리 인생 행로나 인류의 역사와 더불어 생각해 보게 될 때, 오늘날 봄이라는 기쁨의 환경을 맞으려면 그것을 맞이하기까지의 노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 봄이 나오기 위해서는 반드시 겨울절기를 지내야 되고, 겨울절기를 지내기 위해서는 가을 절기를 지내야 됩니다. 또한 가을절기를 지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봄절기와 여름절기를 거쳐와야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운명길을 타개한 권위를 갖지 않고는 봄절기를 맞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미루어 볼 때, 과연 우리 인생의 봄절기가 어느때일 것인가 하는 것을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 생활에서나 혹은 인류 역사상에 인간의 봄을 노래한 때가 있었느냐? 또 여름을 찬양하는 때가 있었으냐? 그러한 때가 없었던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 다음엔 봄으로부터 소생해서 장성해 가지고 결실을 자랑하면서 가을을 찬양할 때가 있었느냐 할 때, 우리는 그런 때가 있었는지조차 확실히 모르고 있습니다. 이처럼 역사상의 수많은 인간들이 그것을 모르면서 운명길을 더듬어 왔기에 이제는 최후의 공포의 때를 맞이하는 시점까지 왔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이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가 있다면 그는 반드시 봄절기에서부터 인간을 출발하게 하셨을 텐데 그 봄절기는 어디에 있는가? 오늘날 인간들은 이것을 찾지도 못할뿐더러 생각하지도 않고 있습니다. 또 여름 절기는 어디에 있으며, 가을절기는 어디 있느냐? 또 가을을 맞이하여 다시 새로운 봄을 맞이할 수 있는 생명력을 갖춘 하나의 인생으로서 결실된 그 자체는 어디에 있느냐? 이러한 문제를 반문해 볼 때, 인류역사 노정에서 그것을 찾았다거나, 또는 그것을 알았다는 입장에 서 있었던 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이 천지를 창조한 창조주가 인간에게 필히 주어야 할 봄절기는 어느때일 것이냐? 아니면 이런 때가 있었느냐, 없었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매년 변함없이 찾아오는 봄절기를 맞을 수는 있으되, 우리의 인생의 봄절기를 맞을 수 있는 자신이 있다고 할 사람이 있느냐? 이런 문제를 놓고 볼 때에 자신있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이 땅 위에 있겠느냐? 이것을 종교적인 입장에서 우리 인류가 타락한 존재라는 것을 규정짓고 살펴보면 그런 사람이 없다는 결론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봄절기의 문명을 맞으려면

그러면 어떤 것을 가지고 타락이라고 하느냐? 우리 인간을 창조한 주인이 피조물과 더불어 최고의 행복을 노래하고, 최고 은사의 시기라고 찬양할 수 있는 봄절기를 주기 위해 지으셨는데도 불구하고 그 봄절기를 맞지 못한 것이 타락이라는 것입니다. 봄절기를 맞은 기쁨에 더하여 그 기쁨과 함께 무한히 발전하고, 무한히 무성할 수 있는 여름절기를 가져야 했던 인간들이 타락으로 말미암아 여름절기마저도 잃어버렸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 무성한 여름절기를 통해서는 무엇을 요구하시느냐? 하나의 결실을 요구합니다. 그 결실은 다시 봄절기를 맞을 수 있는 하나의 생명력을 보유하고 있는 결실인 것입니다. 그 결실이 앞으로 다가올 겨울절기를 넘을 수 있는 생명력을 지녀야만 또다시 봄절기를 맞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오늘날 인간도 반드시 하나님과 더불어 봄을 맞이하고, 여름을 맞이하고, 가을을 맞이하여 무한한 생명력을 지닐 수 있는 하나의 생명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자기의 생명 앞에 반대되는 그 무엇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제압하고 넘어갈 수 있는 생명력을 지닌 결실체가 되지 않고는 또다시 봄을 맞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모든 것이 갖추어진 이 봄날을 즐겁게 맞이할 수 있는 환경에 있으면서 생각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본래부터 인간이 가져야 했던 봄날은 어떠한 곳에서 이루어졌어야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종교적 관점에서 타락 사건을 중심해서 볼 때, 타락 전의 시대가 아닐 것이냐? 만일 그것이 인간 타락 전의 시대라면 어떠했겠느냐?

그 시대는 우리 인생에 있어서 말할 수 없는 영광의 때였을 것입니다. 말할수 없는 소생의 힘이 온 천주에 충만하여 드높이 뻗어나갈 수 있는 때이기 때문에 거기서부터 새로운 인연이 맺어질 것입니다. 나비와 벌과 같은 천사세계의 인연이 우리 인간과 더불어 화동하는 계절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또 하늘과 땅이 화동할 수 있고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 만물이 인간과 하나님을 중심삼고 화동할 수 있는 계절일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런 계절을 잃어버린 것은 바로 타락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이 그러한 계절을 맞이하였다면 하나님의 기쁜 은사의 터전을 중심삼고, 인간 세계에서도 무한히 발전할 수 있는 여름절기와 같은 문화세계가 창조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세계가 이 땅 위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세계는 두 세계가 아니라 하나의 세계, 즉 통일을 표상하는 세계인 것입니다.

봄을 맞이하게 되면, 봄은 통일된 환경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모든 초목이 봄을 맞이해서 전부 다 푸른 빛으로 통일된 환경을 제시하는 것을 우리는 바라보게 됩니다. 오늘날 인류의 문화세계에 있어서 이런 절기와 같은 통일된 문화의 세계를 이루었다면 그 문화는 인류역사에 남아졌을 것이고, 그 남아진 인류역사는 변천과 후퇴와 멸망의 운명을 지니지 않고 영원히 계속되었을 것입니다. 인류의 문화와 문명이 이런 인연 가운데에서 남아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인류역사과정에서 이것은 번번이 생겼다가는 망하고 망했다가는 또 발생하면서 지금까지 역사는 발전돼 나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20세기의 문명은 어떠한 시점에 처해 있느냐? 이 시대는 문화역사노정에 있어서나, 혹은 인류역사노정에 있어서 가을절기와 같은 시대권내에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나 다 예상할 수 있습니다. 그럼 가을은 무엇을 예고하느냐? 끝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종교든지 인류역사의 종말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비단 기독교뿐만이 아닙니다. 고차적인 사상계를 지배하고 있는 수많은 종교들도 인간의 종말시대를 예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을절기를 넘어설 수 있는 한계선에 와 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가을절기를 맞이한 20세기의 문명권내에 살고 있는 인류들에게 있어서 문제점은 무엇인가? 생활적인 면에 있어서 결핍을 느끼고, 환경적인 면에 있어서 위협과 공포를 느끼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앞으로 가을절기가 지나고 종말적인 겨울절기가 타락한 우리 인류 앞에 필시 찾아올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이 겨울절기를 넘어설 수 있는 하나의 생명력을 지닌 결실이 되었느냐 못 되었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들이 알아야 합니다.

생명력을 지닌 결실체가 돼야 할 인간

오늘날 종교가 인류역사와 더불어 지금까지 싸워 나온 하나의 목적이 어디에 있느냐? 끝날에 종말세계를 넘어설 수 있는 하나의 생명력을 지닌 개인, 하나의 생명력을 지닌 단체, 하나의 생명력을 지닌 문화적 세계권을 형성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종교가 수고하며 찾아나온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권내에 있는 개인이라는 그 자체는 앞으로 다가올 겨울절기와 같은 공포의 시대에 생사의 결판을 지을 수 있고, 이런 운명권을 넘어설 수 있는 생명력을 지닌 결실체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을의 모든 것을 흡수한 요소를 지니고, 여름의 모든 진액을 흡수한 내용을 갖추고, 봄의 소생의 힘을 완전히 흡수해서 종합이 된 하나의 결실체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총합된 결실체가 바로 생명력을 지닌 하나의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결실체가 된 하나의 단체, 그런 결실체가 된 하나의 민족, 그런 국가, 세계가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러한 세계 국가 민족 가정 개인이 없다 할진대는, 앞으로 다가올 공포와 위기의 세계에서 봄을 맞이할 수 있는 소망의 터전이 끊어진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런 문제는 오늘날 자연의 봄을 맞고 있는 우리로서 지금까지 걸어온 인류역사나 자기의 지난날을 두고 볼 때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해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을을 지내고 겨울의 모든 위협을 극복하고 넘어설 수 있는 생명력을 가진 실체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 실체가 춘하추동의 모든 요소의 집결체로서 남아져야만이 겨울을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봄절기와 여름절기와 가을절기의 모든 힘을 가해야만 겨울절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인간역사에 있어서 봄절기의 문명권을 대신할 수 있는 내용, 여름절기의 문명권을 대신할 수 있는 내용, 가을절기의 문명권을 대신 할 수 있는 내용을 갖춘 한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 한 사람을 중심한 하나의 이념, 하나의 국가관, 하나의 세계관, 하나의 인생관을 갖추어야 합니다. 이러한 관을 철두철미하게 갖추는 결정적인 결실체가 되지 않고는 앞으로 인간에게 찾아올 공포와 사망의 경계선이 되는 겨울 절기를 극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과연 여러분의 마음 깊은 가운데에 봄절기의 내용이 깃들어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또한 여름절기가 상징하는 내용, 즉 무한히 발전할 수 있고 무한히 무성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이 깃들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가을절기와 같이 자기의 모든 가치를 종합하여 개성이 뚜렷한 자체의 생명력을 직결시키는 기간이 필요합니다. 이런 기간이 열매를 중심삼고 경과해야 되는 것처럼, 여러분은 자기 개체를 중심삼고 나는 나로서 완전히 결실할 수 있는 인격을 갖추겠다고 해야 합니다.

그 인격의 가치는 하나의 결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봄날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환경이나 어떠한 세계 앞에서도 자기 자신을 부끄러움이 없이 드러내어 새로운 봄날의 영광을 맞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자체가 되어야만 소위 기독교에서 말하는 천국을 맞이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요,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사계절을 주관해야 합니다. 우리는 봄절기를 주관할 수 있는 심정적인 내용을 가져 가지고 여름절기를 기대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름절기의 무성함 이상으로 무성하여 가을의 소망을 향하여 찾아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영원한 세계의 한 거점까지 밀치고 넘어갈 수 있는 폭발적인 소망에 벅찬 자신을 여러분이 찾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자기 자체의 결실을 중심삼고서 우주와도 바꿀 수 없는, 즉 무한한 가치 평가를 할 수 있는 이런 생명의 진가를 지닌 자아를 가져야만 춘하추동 사계절을 주관할 수 있는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역사시대에서 봄절기와 여름절기 그리고 가을절기를 정상적으로 갖지 못한 인간들이 새로이 찾아오는 본연의 춘하추동 사계절을 순리적으로 맞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봄절기를 맞았더라면

이러한 문제를 두고 볼 때, 오늘날 환경이 정상적으로 갖추어진 봄날의 이 한 자리가 얼마나 중차대하고 절박한 자리인가 하는 것을 다시 한번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이 바라셨던 것은 우리 인간이 본연의 봄절기를 맞이하는 것이었음을 우리는 다시 한번 상기해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봄절기를 맞이할 때 자연 가운데 꽃이 만발해 있는 것을 연상하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중심삼은 인간 자체는 온 천하만상에 있어서 하나의 꽃과 같은 존재들이 아니었겠느냐? 그런 꽃과 같이 되었어야 할 인간이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되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꽃이 있다면 그 꽃은 아름다워야 할 뿐만 아니라, 그 아름다움 가운데는 짙은 향기가 깃들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인간도 꽃과 마찬가지로 무한한 아름다운 미를 갖춤과 동시에 무한한 향기를 내포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방으로 발산하는 향기를 맡고 나비와 벌들이 자연히 날아들 수 있는 하나의 주체적인 기반을 가진 자체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모든 피조세계의 봄동산 가운데에 하나의 꽃과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이처럼 인간이 꽃의 구실을 하기 위해서는 나비와 벌의 활동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간세계를 지음과 동시에 천사세계를 지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천사세계는 어떠한 세계인가. 인간이 하나의 결실을 위해서 꽃과 같은 존재로서의 미를 갖추고 향기를 풍기며 나타나게 될 때에, 비로소 사랑의 보금자리가 갖추어지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생명력은 거기에서부터 출발하게 되고, 모든 생명의 인연을 가진 존재들이 거기에서부터 화동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화동할 수 있게 되는 기원이 바로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인간을 중심삼고 하늘에 있는 천군천사들이 나비와 벌같이 인간과 서로 주고 받을 수 있는 화동의 주체권을 이루게 되면, 그야말로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인간이 기뻐하고 천사가 기뻐하며 온 피조만물이 사랑에 잠긴 화동의 꽃동산이 되었을 것이고 봄잔치가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 수 있는 인간의 가치는 어디에 갔는가? 만일 그러한 인간이 되었더라면 얼마나 영광스러울 것이며, 무한한 가치를 지닌 자기 자신을 얼마나 존중시할 것인가?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런 본연의 자세를 잃어버린 우리 인간은 역사시대에 있어서 탄식과 절망과 자포자기의 역사노정을 지금까지 끌고 나온 것입니다. 그래도 인간은 미래의 실낱 같은 소망의 한 점을 바라보면서 선이라는 거룩한 푯대를 세워 가지고 싸워 나왔습니다. 지금까지 그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석양길을 향하는 만추의 계절을 맞이한 역사적인 종말시대에 처한 인간들의 운명이 얼마나 비참한가 하는 것을 우리들은 다시 한번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사랑의 품에 안기어서 어머니의 젖을 흠뻑 먹고, 어머니의 마음속 깊이에 있는 심정을 뼛골에까지 느끼며 영원한 생명력을 일생 동안 지니고 살아야 할 내 모습은 어떻게 되었는가? 우리 인간은 그처럼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애정적인 터전을 갖지 못한 불쌍한 인류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의 형제끼리는 부모의 혈육과 인연맺고 태어나서 한 종족이 되어야 했는데 그 반대의 결과를 이루어 놓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수천년 역사과정에서 서로 서로가 골육상쟁으로부터 민족 국가를 넘으면서 전쟁을 통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가고 망해 갔던 것입니다. 피를 흘리게 하며 피를 흘렸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두고 볼 때에, 우리 인간은 이런 역사의 배후에 있어서 하나님 앞에 충을 드릴 수 없는 인연을 거친 비참한 인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당장이라도 내일의 소망을 품고 인간으로서 갖추어야 할 무한한 내적인 가치를 자랑할 수 있는 입장에 있지 못합니다. 현실의 입장은 스스로 믿을 수 없는 시점에 놓여 있고, 내일의 소망을 가질 수 없고 앞으로 가야 할 길에 있어서도 두려움이 우리를 가로막고 있습니다. 이러한 처지에 놓여 있는 자체인 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만일 이러한 자리에서 인간이 스스로 탄식하고 자포자기해 가지고 스스로를 부정하는 자리에 들어가게 된다면 이 이상 비참한 일이 어디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생각하게 되면 하나님도 없는 것이요, 이 자연은 왜 생겨났으며, 또한 이 우주는 무엇 때문에 있느냐 하는 문제를 생각하는 것이 도리어 귀찮을 것입니다. 또한 인간이 슬픔의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타나는 모든 환경, 보여지는 세계의 모든 정경은 반박의 대상이요, 혹은 규탄의 대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무한한 탄식의 조건으로 우주가 생겨났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하나의 목적이나 하나의 결실을 향하여 움직이는 이 계절의 형태를 바라보게 될 때에 그러한 결론을 가져 가지고는 이 자연과 환경을 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날 인간들의 모습이 정상적인 모습이 아니라, 비정상적인 모습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봄절기를 찾아 나온 종교의 길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부모의 품에 안길 수 있는 무한한 정의 줄을 다시 찾아 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류 앞에 소개하기 위한 것이 종교의 길인 것입니다. 먼저 부모의 정의 줄을 찾아 들어가야 되고, 그 다음에는 신랑 신부의 정의 줄을 찾아 들어가야 되고, 다음은 형제의 정의 줄을 찾아 들어가야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갖추어야만 부모에게 사랑받는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정상적으로 장성해서 신랑 신부로 등장했다면, 즉 자기의 가치를 가진 정상적인 입장에서 출발을 했다면 오늘날 인류는 이러한 결과의 세계에 부딪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이런 절망 가운데에 있는 우리 자체에 문제 되는 것이 무엇이냐? 본연의 심정 기준을 어떻게 찾아 들어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봄절기와 같은 인연을 맞이해 가지고 출발하는 것을 보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보시지 못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탄식이 되어야 할 것이고, 인간의 탄식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여름절기같이 무한히 뻗고 무한히 신록을 찬양할 수 있는 권내로 인간이 가기를 바라셨던 것이 하나님의 소원이었습니다. 인간이 무한히 번성하고 무한히 발전해서 무한한 생명력을 가진 가치 있는 하나의 결실체가 되어 인류역사를 이루고 문화의 세계를 이루어야 할 텐데도 불구하고 그러한 역사와 세계를 이루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실정을 볼 때에, 여기에서 우리가 다시 한번 상기해야 할 것은 본연의 세계를 결실할 수 있는 관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절망과 탄식과 사망으로만 종결을 보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인간 앞에 하나의 소망의 줄로 미래를 연결시켜 주어야 합니다. 그런 길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 길을 소개하기 위하여 지금까지 나온 것이 종교입니다. 또한 이 길을 제시하기 위한 사람들이 지금까지 왔다 갔던 종교 내지 도(道)의 책임자들입니다. 우리들은 그들이 세운 공적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겨울절기의 참된 의미

오늘날 우리 앞에 다가오는 세계는 공포심을 갖게 하는 세계일 것입니다. 그러한 세계가 등장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가을이 점점 짙어가면 짙어갈 수록 그 앞에 무엇이 찾아오느냐? 겨울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인류의 종말의 절박한 내용이 위협과 더불어 우리의 생활권내에 침투해 들어오는 것을 볼 때에, 우리 앞에 겨울절기가 온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겨울절기를 맞는 데 있어서 이 공포의 환경을 피하자는 것이 아니라, 이것과 대결하여 결단지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가을을 극복하고 겨울을 극복할 수 있는 생명력을 지닌 하나의 불변의 생명체, 불변의 결실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면 새로운 소망으로 찾아 오는, 천지가 준비한 봄절기를 맞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인간 앞에 한번도 갖추어지지 못하였던 봄날을 우리는 맞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여러분이 생각해야 됩니다.

하나의 결실된 씨앗을 보면, 그것은 지극히 연약하게 보입니다. 그렇지만 설한풍이 몰아치는 동삼삭을 거치는 과정에서 그 누구도 용납하지 못하는 기간과 자기의 환경을 조금도 양보하지 않는 시련의 기간을 보내야 합니다. 그 기간이 겨울절기인 것입니다. 생명을 위협하는 최후의 경계선에 접하는 때가 겨울절기라는 것입니다.

비근한 예를 들면, 잣씨에게는 겨울이 자기의 생명을 위협하는 공포의 대상이지만, 그 씨앗의 생명을 파괴시키는 시기가 아닙니다. 잣 그 자체가 새로운 생명을 탄생하기 위해서 잣껍질을 까는 시기인 것입니다. 이것을 볼때, 계절이 상충되는 것은 다른 계절을 부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계절의 출발의 터전을 마련하기 위한 것임을 우리가 알아야 되겠습니다.

만일에 잣 자체에 생명력이 없다면 잣 자체가 깨어지지 않습니다. 아무리 공포와 위협이 부딪쳐 오는 겨울이라 해도 그 잣 가운데 생명력이 없다면 껍질을 깰 수 없는 것입니다. 생명력이 버티고 있으므로 말미암아 내일의 봄을 맞이할 수 있는 힘, 즉 사방으로 밀어내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부딪치는 힘과 그 자체가 지니고 있는 새로운 힘과 더불어 새출발할 수 있는 동기가 새로운 방향을 갖추고 나온다는 것입니다.

지난날의 역사를 우리가 모순적인 것이라고 비판만 할 것이 아니라, 그것은 보다 가치있는 생명력을 출발시킬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이런 입장에서 볼 때에 겨울절기는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나쁜 계절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봄절기도 좋고, 여름절기도 좋고, 가을절기도 좋지만, 겨울절기는 보다 좋습니다. 내 자신이 지닐 수 있는 생명의 대가, 내 자신이 가질 수 있는 생명의 가치가 내일의 영광을 맞이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에 더욱 좋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겨울은 전체의 가치를 평가할 수 있는 최후의 결단을 하는 순간인 것입니다. 이런 것이 겨울절기라는 것을 생각할 때에 역사는 그렇게 돌아가면서 발전한다는 것을 우리가 인정하고 역사시대를 다시 한번 관찰해 보아야 합니다. 오늘날 20세기의 세계 문명이 절박한 환경에서 신음하는 겨울을 맞이할 수 있는 운명권내에 있다고 스스로를 부정하고, 전체를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이 권내에 있는 사회환경에서 한 가지 문제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나 자신이 봄절기와 여름절기와 가을절기를 정상적으로 흡수하여 거기에 생명력을 투입하고 집약시켜서 하나의 본연의 생명체의 결실을 어떻게 갖추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갖추어졌다 하면 모든 사회악이나 사회 환경의 반대적인 여건과 부딪쳐서 그것의 외각을 타파시켜 가지고 새로이 출발하는 개문(開門)이 벌어진다면 그때부터 인류의 새로운 봄적인 역사가 출발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날 우리 식구들이 지녀야 할 긍지와 우리 식구들이 갖추어야 할 자세는 무엇인가? 최후의 단말마적인 입장에 있는 인류의 운명을 판가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네 힘이냐? 내 힘이냐? 자신의 생명력을 내포한 힘의 영향력을 갖고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버지도 간섭할 수 없는 것이요, 어머니도 간섭할 수없는 것이요, 그 어떠한 형제도 간섭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 자체만이 생명력을 지니고 해결 할 수 있는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면 어머니 복중에 있을 때에 근본적인 생명력을 잘 받고 태어났느냐? 형제들이 받지 못한 것을 잘 받았느냐? 계절따라 받을 수 있는 진액을 원만히 흡수했느냐? 봄·여름·가을의 3계절을 거쳐오면서 인연되어 있는 생명력을 얼마나 원만하게 흡수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생사의 결판을 지을 수 있는 역사적인 시점이 우리 인류 앞에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런 숙명적인 노정을 미루어 볼 때에 그런 절기를 거쳐갈 자신을 가진 내가 되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인류에게 봄절기를 가져다 줄 메시아는 누구인가

인류가 지나온 과거 역사가 이러이러했기 때문에 인류가 가져온 봄절기의 그 과거 역사시대를 비판하고, 인간들이 거쳐 나온 여름절기의 시대를 비판하고, 가을절기의 시대를 비판해야 합니다. 비판하는 데는 생명력을 내포한 권위를 지닌 입장에서 비판해야 합니다. 또한 앞으로 올 수 있는 겨울절기의 위협을 내 자체가 갖춘 영향력으로 대결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일의 새로운 생명의 출현을 바라며 백방으로 뻗어나갈 수 있는 생명의 주체성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통하여 이루고 싶으셨던 소원이 있다면, 필시 그러한 사람을 통하여 이룰 것이 아니겠는가? 그 사람은 새로운 인류의 봄절기와, 새로운 인류의 여름절기와, 새로운 인류의 보다 나은 가을절기를 그 사람에게 소개하실 것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땅 위에 이럴 수 있는 내용을 갖춘 하나의 실체가 없다면 이 세상은 죽은 열매같이 썩어지고 말 것입니다. 가을에는 죽은 열매의 모양이나 생명력을 지닌 열매의 모양이나 별 차이가 없습니다. 겉으로 보면 모릅니다. 타인은 모르는 것입니다. 제삼자는 모르지만 그 자체는 아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내가 죽어 있느냐 살아 있느냐 하는 것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를 놓고 볼 때에 적도 이북에 봄날이 찾아 오면 적도 이남 23도 이상 되는 곳에는 가을날이 찾아옵니다. 이 지구상에는 춘하추동의 형태가 벌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인류 역사에 있어서 세계적인 무한한 봄날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개인적으로 봄과 여름과 가을을 연속시켜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새로운 봄날을 맞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앞으로 끝날 이후에 다시 찾아올 역사적인 봄절기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봄의 인연을 가질 수 있는 생명력, 여름의 인연을 가질 수 있는 생명력, 가을의 인연을 가질 수 있는 생명력, 겨울을 극복할 수 있는 생명력을 가져야 됩니다. 그런 생명력을 가진 자체는 춘하추동의 인연을 다 갖추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다 갖춘 한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세계적으로 일시에 봄을 맞이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세계의 30억 인류에게 오랜 역사과정의 배후를 중심삼고 어떠한 개인이면 개인을 통하여 봄절기의 은사의 역사를 하셨던 시대가 있었음을 여러분이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개인이라도 거기에 생명력을 연결시켜 가지고 그 내심에서 여름절기의 인연을 잃어버리지 않고 하나님과 더불어 인연 맺고 나오는 사람이 있어야 됩니다. 또한 여름절기와 인연된 사람 중에 단 한 사람이라도 이 천지를 대표할 수 있는 생명력을 지닌 가을절기와 인연을 맺어 나오는 사람이 있어야 됩니다. 그리하여 그 한 사람에게라도 하나님이 함께하시어 새로운 생명력을 갖추어서 지상에 출현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출현해야 할 그 자체가 타락한 인간이기 때문에 생명력을 지닌 그 자체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생명의 근본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인류 앞에 메시아 사상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메시아는 어떠한 분인가? 인간이 가졌어야 할 봄절기의 문화세계의 내용을 갖고 오시는 분이 아니겠느냐. 무한히 발전하고 무한히 번창할 수 있는 여름절기의 문명의 내용과 그러한 세계관을 가지고 오는 세계적인 인물이 아니겠느냐. 또 가을절기의 결실의 내용을 알려 줄 수 있고, 개인적이 아닌 세계적으로 그 가치를 대신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겠느냐.

그런 내용뿐만 아니라 겨울절기를 극복하고 세계적으로 미흡한 것을 극복하여 세계적인 봄날을 맞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내적인 섭리의 손길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야 됩니다. 그런데 오늘날 그것을 모르고 암중모색하는 타락권내의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만일에 메시아와 같은 사람이 있다면, 이 이상 기쁜 마음으로 환영해야 할 귀빈이 어디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세계 인류가 위기에 처한 이 세계정세 가운데에서, 새로운 세계적인 지도자를 모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자체가 바로 인류가 간접적이나마 메시아 사상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인간이 타고난 절기의 공평성

봄에는 여러 가지 꽃이 있고, 여러 종류의 나무가 있고, 수많은 종류의 초목이 있습니다. 이것을 보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보는 거와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바라보게 될 때에 봄절기가 돌아오면 봄을 맞이하지 않는 것이 어디 있고, 생명을 지니지 않은 그 무엇이 어디 있습니까? 미물인 곤충에서부터 작은 풀 한 포기, 큰 나무, 날고 있는 모든 조류, 그리고 인간에 이르기까지 지음받은 피조만물 전부가 생명의 인연을 갖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모든 피조만물들은 이 봄절기의 인연 가운데서 하나의 인연을 가지고 출발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 우리 세계 가운데 그런 봄날이 찾아올 것입니다. 그 봄날을 맞이하여 나 자신이 그 봄 동산에서 어떠한 나무가 될것인가? 여러분은 개성을 지니고 있는 입장입니다. 그러기에 어떤 사람은 풀 한 포기, 어떤 사람은 어떠한 나무 한 그루의 입장이 될 것입니다. 이렇듯 종류가 각각 다른 분야에 있어서 생명체를 가진 개인·종족·민족이 될 것입니다. 절개를 상징하는 송죽과 같은 개인과 민족도 있을 것이고, 꽃과 같이 그 품에 모든 인연을 총합시킬 수 있는 개인과 가정과 종족 민족 국가도 있을 것입니다.

춘하추동의 사계절이 엇갈리는 것과 같은 인연이 역사시대에 있어서 시발점에서부터 연결되어 나왔습니다. 여러분 일생의 운명도 그렇듯 뒤바뀌며 꼬리를 물고 나오는 것입니다. 왜 어떤 사람은 잘 살고 어떤 사람은 못사는가 하는 문제도 이런 관점에서 생각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사람이 잘사는 것은 그 사람의 선조들이 이미 겨울절기를 지냈기 때문입니다. 봄절기를 맞이할 수 있는 권내에 들어왔기 때문에 잘산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은 왜 무성하냐? 여름절기를 맞이할 수 있는 봄절기의 기반을 닦아 나왔기 때문에 여름절기같이 무성한 것입니다. 무성하게 되면 반드시 결실을 맺게 됩니다. 모든 것은 차게 되면 반드시 기울어지기 때문에 가을절기를 맞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을절기를 맞이했다고 낙망하거나 절망하는 개인이나 민족은 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가을절기를 맞이했다고 거기서 절망하면 망한다는 것입니다. 가을절기에서부터 출발하는 사람들은 생활해 가면 갈수록 시들어 가기 마련입니다. 그렇다고 `아이고 우리는 벌받았다.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하며 탄식하는 사람들은 불쌍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가을절기를 맞이하였다면 내일에 다가오는 겨울절기를 극복할 수 있는 생명력을 지녀야 됩니다. 아무리 험난한 시련에 부딪친다 하더라도 `우리는 간다' 할 수 있는 신념을 갖고 그 겨울절기를 개척해 나가고 극복해 나가야 합니다. 그 겨울절기를 극복하는 민족이 있다면 또다시 찾아오는 봄절기를 맞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에, 여러분 자신은 역사시대에 있어서 춘하추동절기의 연속적인 인연을 벗어날 수 없는 운명길에 있습니다. 여러분 자체의 생명체도 그러한 인연 가운데 태어났기 때문에 여러분은 운명의 실체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 가운데는 봄날부터 태어난 사람도 있고 재수없이 겨울날부터 태어난 사람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부호의 아들이요, 군왕의 아들로 태어나서 모든 영광이 드높이 들리우는 여름절기에 태어난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가을절기에 태어난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알고 보면 이 우주 역사는 공평하다는 것입니다.

겨울절기에 태어났다고 나쁜 것이 아닙니다. 겨울에 태어났다 하더라도 거기에 조금도 침해를 받지 않고 더욱 힘차게 전진하여 봄날을 맞이하게 될 때에는 누구보다도 빨리 생명의 출발을 볼 것입니다. 누구보다도 힘차게 성장할 것입니다.

겨울절기를 극복하려면

그러면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의 교인들은 자체 내에 지니고 있는 역량을 무엇으로 비교할 것인가? 여러분들은 타락의 한의 고빗길도 느꼈을 것이요, 슬펐던 문화의 세계, 교만했던 탄식권의 세계도 느꼈을 것이요, 시들어 가는 문화가 절망적인 환경에 부딪침도 느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모든 것이 나를 지배하지 못한다. 어떠한 절기라 하더라도 나를 지배하지 못한다' 이럴 수 있는 여러분이 되어야 됩니다. 그래서 생명력으로 계절을 연결시켜서 가을까지 생명의 결실체가 되어 겨울을 무난히 극복할 수 있는 자신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런 인생관을 가진 사람은 역사가 망하고, 그 시대가 망하고, 세계가 망하더라도 망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이 되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한 길을 자처해 나왔습니다. 민족이 우리에게 핍박을 가하는 도상에 있어서나, 종족이 반대하는 처참한 환경에 있어서나, 혹은 이민족이 총칼을 들고 우리를 극난의 절정으로 몰아넣는 환경에서도 우리는 이제까지 나왔습니다. 그러기에 외로움이 부딪치고 탄색의 권(圈)이 나를 휘몰아친다 하더라도 그 권을 도피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말세가 되면 될수록, 끝날이 다가왔다는 것을 절감하면 절감할수록 정면으로 맞아들이자는 것입니다. 격파하자는 것입니다. 네가 깨어지느냐, 내가 깨어지느냐 결판을 내자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꺼풀 벗고 재생하여 내일의 희망을 가져다 주는 하나의 터전이 될 수 있는 생명력을 지녀야 합니다. 그러한 생명력을 지닌 결실적인 자아의 모습을 찬양할 수 있는 신념, 그것이 문제되는 것입니다.

그런 자기 자체를 세워서 `나는 봄날을 맞이할 수 있는 늠름한 자신이다'라고 자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봄을 맞이하여서 그것을 자기의 터전으로 삼아 가지고 무한히 발전할 수 있는 스스로의 권한을 가져야만 만민을 하나로 결실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의 씨를 뿌리면 30배, 60배, 100배의 소득이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자기가 하나를 이 땅 위에 뿌리고 갔을 때, 그 결과는 1,000만분의 1이라도 결실이 맺어져야 합니다. 인류가 그것을 보고서 내일의 승리를 다짐할 수 있도록 해야 되겠습니다. 선두에서 당당히 수난의 겨울절기를 책임지고 나설 수 있는 무리의 수가 늘어가면 늘어갈수록 세계는 부활의 새 봄날을 맞이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런 입장에서 힘차게 바라보고 힘차게 행군하는 대인이 있다 할진대는 역사는 여기에서부터 되돌아선다는 것입니다. 또한 겨울절기로 영원히 흘러가서 사망권내로 굴러 떨어질 운명길이 변하여 새로운 봄절기로 전환될 수 있는 순간이 거기서부터 시작된다는 것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들은 흔히 말하기를, 우리들은 역사적인 열매라고 하고 있습니다. `하늘이여! 우리는 육천년 역사의 열매입니다' 라고 자처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육천년 역사과정에 있어서 종합된 시련이 한꺼번에 부딪쳐 오는 그 겨울절기를 극복할 수 있는 생명력을 지닌 자신이 되었는가? 이것이 문제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승패를 가름할 수 있는 결정적인 요인인 것을 알아야 됩니다.

끝날에 찾아드는 봄절기와 같은 새로운 세계문화사 앞에 내 가슴의 문을 활짝 열어 놓아야 됩니다. 이렇게 자기의 모든 품을 벌려 놓은 그 동산 가운데에 세계 인류가 무한히 피어날 수 있고, 무한히 지배할 수 있는 특권적인 자아의 인격을 찬양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렇게 될 때에 본래의 인간이 바라던 최고의 인간으로서 성공한 자리에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신다면 그러한 가치의 존재로 지으셨을 것입니다. 오늘날과 같이 탄식과 절망 가운데서 최후의 운명의 경각에 놓여 신음하도록 지은 인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존재가치를 나타낼 수 있는 내일을 위하여, 그럴 수 있는 자체를 발견하기 위하여, 그럴 수 있는 미지의 자체를 개발하기 위하여 오늘날 우리들이 이 길에 들어섰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내 자신이 가는 길에 있어서 개인으로부터 가정 종족 민족 국가 세계가 한꺼번에 내 앞에 정면으로 충돌할 수 있는 내일이 와라 하면서 그것을 맞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그럴 수 있는 한때를 맞기 위해 지금까지 나왔습니다. 그 가운데서 많은 것을 결실할 수 있었지만 또한 많은 무리들이 떨어져 갔습니다.

시련 극복과 결실

우리는 지금까지 인류역사의 봄절기보다도 여름절기보다도 가을절기보다도 지금이 좋다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생명이 발발될 수 있습니다. 그 겨울절기의 깊은 절정과 경계선에서부터 환희의 새로운 출발이 벌어져야만 봄날이 정상적으로 찾아온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놓고 봐도 은사가 오기 전에는 반드시 시련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봄을 은사의 시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봄이 온 것을 반기기 전에 지금까지 봄이 다가올 수 있었던 과거를 생각해야 됩니다. 그래서 이 봄날의 역사적인 생명의 인연을 동경하면서 봄을 맞이해야 합니다. 또한 봄은 내일 맞이해야 할 여름절기와 가을절기에 우주적인 인연을 결합시킬 수 있는 하나의 가치있는 생명의 씨를 모색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이 봄의 출발인 것입니다.

봄의 출발을 맞는 수많은 종류의 꽃을 바라볼 때에, 여름 이후에 오는 가을절기의 어려움을 극복하여 결실을 추구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다짐해야 합니다. 이렇게 판결지을 수 있는 여러분 자체로 남아지지 않고는 앞으로 인류가 공히 추구하는 희망의 봄절기를 여러분은 맞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자신들은 과연 이 은사의 시대를 중심삼고 하나님의 뜻을 아는 그 입장에서 봄날을 가졌느냐, 또한 여름을 가졌느냐, 가을날을 가졌느냐, 겨울날을 가졌느냐 하는 것입니다.

봄과 같은 은혜가 임하게 될 때는 전부 주고 싶은 것입니다. 누구에게든지 전부다 화동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다가 여름이 되면 자기 개체를 중심삼고 무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말하면, 봄절기가 보리 잎이 무성해지는 시기라면 여름절기는 줄기가 자라는 시기입니다. 잎이 무성하게 자라는 목적은 하나의 줄기를 세우기 위한 것인데, 여름절기에 그 줄기가 생겨나지 않는 보리는 결실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줄기 가운데에서 새로운 변화가 벌어져야 됩니다. 꽃과 같이 자체의 미를 대신하여 만상 앞에 찬양받을 수 있는 입장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자체를 느낌과 동시에 하나의 결실의 자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마음의 터전 위에서 여름절기를 거쳐 가을절기를 중심삼고 과정적인 시대의 인연 가운데 끊임없는 생명의 진액을 흡수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 거쳐가고 부딪치는 모든 것에서 손해를 볼 것이 아니라 생명의 진액을 플러스시켜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에서는 교회에 들어온 지 며칠 안 되는 사람도 은혜 받으면 홀로 외롭게 지방으로 개척을 내보냅니다. `은혜를 받았으니 개척을 나가라, 잎이 무성하게 자랐으면 한 줄기로서 자라날 수 있도록 나가라' 하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자체의 개성을 중심삼고 천지의 무한한 결실의 가치를 특권적인 인연 가운데서 독특한 내용을 지니고 결실시키라는 것입니다.

많은 시련이 부딪쳐 올 것입니다. 자기의 생명력과 반대되는 요소와 진액이 안팎으로 흘러나와 자체의 생명 앞에 반역할 것입니다. 그 반역하는 환경을 흡수해서 겉은 죽은 모습으로 보일지라도 속으로는 생명력을 지녀야 합니다. 그것을 소화시킬 수 있는 무한한 주체적인 능력을 가지게 되면, 그 환경에서 자기 자체는 자라는 것입니다.

봄의 인연, 여름의 인연, 가을의 인연을 통해 가을이 깊어가면 갈수록 나무의 잎은 종말에 다다르게 됩니다. 그 나무 빛이 달라지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이와 같은 길을 가면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보고 `저 사람은 저런 면에서는 어느누구도 따를 수 없는 원숙한 하나의 결실을 갖추고 있구만' 하고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가을절기에 있어서는 자기의 결실된 모습을 봐 달라고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서 탄식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체가 그 가치의 내용을 전부다 완결할 수 있는 때에 들어가게 되면, 모든 만상은 자기를 보호하고 자기를 위해서 있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가치의 존재가 들어나는 가을절기가 되면, 스스로가 앞날에 새출발할 수 있는 소망의 자체로 하나님께 보관될 수 있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끝까지 전진하여 모든 절기의 주인이 되라

이와 같은 은혜의 시대는 누구에게나 다 있습니다. 여러분이 처음 교회에 들어왔을 때를 봄절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은 홀로 가는 때입니다. 홀로 생명의 진액을 가해서 결실할 때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는 믿음의 자녀니, 무엇이니 하는 복잡한 내용이 전개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앞으로 다가올 환경에 있어서 시련과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생명력을 지녀야 합니다. 하나의 결집된 자체를 중심삼고 봄의 총합, 여름의 총합, 가을의 총합된 생명력을 가진 실체가 되어 가지고 가을절기를 넘어설 수 있도록 통일되어야 됩니다. 갑이나, 을이나, 병이나, 누구나 할 것 없이 전부다 하나의 생명력에 집결해야 합니다. 이래가지고 가을절기를 극복하고 넘어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통일교회라는 말이 귀결적인 의미에서, 역사시대의 변천과정을 중심삼고 가을절기에서 겨울절기로 넘어서는 경각도상에 있어서 필요한 명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의 근본인 씨와 더불어 하나의 생명체가 되어서 미래에 다가올 공포의 겨울절기를 극복해 내고 내일의 봄절기를 맞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새로운 봄동산의 주인이 애호할 수 있는 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꽃같이 영광의 극상에 오를 수 있는 하나의 개인이 필요한 것이요, 하나의 가정이 필요한 것이요, 하나의 종족이 필요한 것이요, 하나의 민족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 민족이 제3 이스라엘이라는 특권적인 민족인 것을 알고, 그럴 수 있는 그날을 위하여 우리는 단결하자! 하나되자! 하나되자는 것입니다.

세계사적인 종말의 미명이 찾아오는 찰나에 칠흑같은 어둠의 한때가 거쳐갈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박차고 광명의 새 아침의 햇빛을 향하여 동으로 동으로 전진할 수 있는 사명을 짊어져야 합니다. 이러한 새 아침과 같은 통일문화의 봄절기인 중화문명(中和文明)을 요구하고 나가는 통일교회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대한민국에 있어서 제일 어려운 문제, 세계에 있어서 제일 어려운 문제를 피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그것과 직접 대결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시대에 있어서 봄절기시대를 그냥 지나갔던 사람들, 여름절기시대에 망해갔던 사람들, 가을절기시대에 타락했던 사람들을 다 제쳐 놓고 전체가 통합된 승리의 권한을 갖추어 가지고 나가자는 것입니다.

우리 인류가 바라는 하나의 이상세계를 향하여, 하나님의 통일된 세계를 향하여, 하나의 심정을 이어받고 승리의 왕자로 등장할 수 있는 그 나라를 위하여 택한 개인, 택한 가정, 택한 종족, 택한 민족에 택한 주권을 세워야 합니다.

그리하여 영생무궁토록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서 봄절기의 주인이 되고, 여름절기의 주인이 되고, 가을절기의 추수꾼이 되어서 겨울절기에 잔치하며 안식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어야겠습니다. 이것을 위해 출발한 길이라는 것을 알고, 최후까지 단결하여 그 고개를 극복하는데 게을리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기 도

사랑하는 아버님! 저희들은 하나님이라는 그 거룩한 말의 진정한 의미를 몰랐습니다. 하늘이 있으면 땅이 있고, 또 인간 세상에서 남자가 있으면 여자가 있는 줄 알았습니다. 지금까지 이런 상대적인 인연, 서로 주고 받을 수 있는 화동의 인연을 벗어나서 살아왔기 때문에 통일의 인연이 없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러니 역사시대에 슬펐던 모든 인연을 져버려야겠습니다. 인연의 본체되시는 아버지께서는 언제나 역사와 더불어 화동하고 싶었던 주체적인 근본으로 남아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주체적인 근본으로 계시온데 상대적 권인 이 인류의 문화세계는 그 주체 앞에 상극되고 상반된 입장에 서서 지금까지 운명을 거듭해 왔사옵니다.

이제 영원한 주체 되시는 아버지 앞에 춘하추동의 인연을 거칠 수 있는 실체를 갖추어, 봄절기의 문화세계를 그 가슴에 흠뻑 추구하면서 내일의 승리의 영광을 찬양하는 승리의 왕자 왕녀를 아버지께서 찾고 계신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이 거룩한 숙명 앞에 부름받은 자기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거룩한가를 자각할 줄 아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길,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사람은 한번 왔다 죽어가는 것입니다. 이 생이 아무리 귀하다 해도 청춘시기에 비할 수 없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여, 저희가 장년이 되면 짐을 짊어지게 되고, 장년시기에 싸워서 지탱하지 못하게 될 때에는 그 결실된 후손이 비참하게 되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장년시대를 힘차게 지내고 노년시대를 거쳐서 새로운 봄을 맞이하고 새로운 여름절기를 볼 수 있는 후손을 자기 품안에 가진 가정이어야만, 그 후에 다가오는 겨울절기를 무난히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아옵니다. 이것이 인생 세계의 역사시대에 있어서 상징적인 현상인 것을 바라보게 될 때에, 아버지의 뜻앞에 있어서도 역시 마찬가지인 것을 알게 되옵니다.

타락으로 인한 절망의 구렁텅이 앞에 30억 인류가 이제 최후의 운명을 저울질 하는 선상에 서 있는 것을 알면 알수록, 여기에는 내일의 봄을 대신 하고 내일의 여름을 대신할 수 있는 하늘의 왕자 왕녀가 있어야만 이 인간 세상에서 겨울절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옵니다. 이 사실을 미루어 볼 때에 하나님의 섭리는 여기서부터 인연에 인연을 연결시키어 사망권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결정적인 기원을 이룬다는 사실을 저희들이 알게되었사옵니다.

아버지, 저희 자체가 오랜 역사노정에 슬픔을 남기고 간 선조들의 한을 박차고, 타락으로 말미암은 운명 가운데서 신음하는 인류의 원한 맺힌 이 원수의 근거지를 박차고 내일의 희망을 품을 수 있는 모습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은 봄절기와 여름절기를 거쳐 가을절기의 결실적인 실체이오니 미래의 소망세계를 상속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모습들이 되어야 겠습니다. 그리하여 다가오는 겨울절기를 무서워하지 않고 아버지의 승리의 좌표로 남아질 수 있는, 하늘의 왕자 왕녀의 모습을 갖춘 아들딸이 되어야 하겠사옵니다. 여기에 모인 보잘것없는 무리들이 그러한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금후에 나타날 민족의 운명을 바라보면 절망이 감돌고 있습니다. 내일의 아시아의 운명 가운데에 최종의 사명을 결단지어야 할 선상에 놓여 있는 것이 오늘 한국의 운명인 것을 생각할 때 저희들의 운명이 세계 인류가운데 최고로 비참하더라도, 여기에 찾아온 역사적인 가을절기의 한계선을 넘어 내일의 희망에 벅차 봄을 맞이할 수 있는 생명력을 갖고 새로이 살아갈 수 있는 역사적인 생명력을 지닌 하나의 결실체가 이 땅 위에 나타났다 할진대는, 저희들에게 절망이 있는 것이 아니요, 내일의 새로운 아침을 맞이할 수 있는 희망에 벅찬 거보의 출발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슬픔과 기쁨, 죽음과 생명이 교차되면서 타락세계가 지금까지 역사적으로 엮어져 내려온 것을 미루어 볼 때, 이 민족이 처한 비참한 운명을 비참으로 이어지게 할 것이 아니라, 기쁨의 역사로 연결시킬 수 있는 내일의 총아의 모습을 그려야 되겠습니다. 지금까지 몰리고 쫓김받는 가운데서도 참아 나온 무리, 싸움 노정에서 남아진 무리가 이 한국에 모여든 당신의 자녀들이요, 통일의 용사들인 것을 생각하옵니다.

저희들에게는 민족을 위하여 흘렸던 눈물이 있사옵고, 세계를 위하여 흘렸던 눈물이 있사옵고, 미래의 세계를 위하여 염려하는 눈물이 있사옵니다. 아버지가 그러하셨기 때문에 주체이신 아버지 앞에 대상의 가치를 지닐 수 있는 자기 모습임을 자부할 수 있는 실체의 권한을 가지고, 우리가 아니면 안 된다는 자아의 신념을 자각하고 재천명할 수 있는 이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지금까지 지내온 역사를 회고해 보면 슬픔의 역사가 아닌 아버지의 보호의 역사였사옵니다. 저희들의 슬픔 이상으로 아버지의 슬픔이 남아진 것을 느끼면 느낄수록, 내일의 희망 앞에 자신하고 나서기 위해 아버지를 모시고 가지 않으면 안 될 저희들의 입장이옵니다. 그 입장은 원수의 화살을 맞는 입장이요, 슬픔의 싸움이 감도는 자리이기에 아버지를 영광 가운데에 맞지 못하고 탄식하고 있사옵나이다.

그러나 아버지 참으시옵소서. 내일의 소망의 터전을 위하여 겨울절기를 극복하고 넘어야 할 운명길에 섰사오니, 저희 자체가 결합하여 생명의 대가를 손상시키지 않고 고이 단장하고 고이 결집해야겠습니다. 이러한 저희들이 봄절기의 한계선을 넘어설 수 있는 그 순간을 위하여 생명력을 집결하여 가지고 외적인 실력을 갖추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의 생명을 결합하여 그 경계선을 넘어야 하늘과 땅이 보장할 수 있는 주체적 기반이 되듯이, 그런 기준을 갖추어 새로운 봄날의 기원을 소원할 수 있는 무리들이 되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그러한 모습이 되어 봄맞이를 가게 된다면 아버지께서 나비와 벌과 제비, 그리고 기어다니는 곤충에 이르기까지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을 집약시키시어서 하나의 통일된 봄절기의 문화세계를 창건하게 하시옵소서. 이 엄숙한 과제를 무성한 계절이 찾아오는 5월의 봄날을 맞이하여 결의하고 다시 결합할 수 있는 거룩한 이 시간이 되게 하여 주옵시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시작되는 5월, 이제부터 정성을 모아 6개월 동안 아버지 앞에 기도하고자 하오니, 이 기간 동안 정성을 다 들이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자리를 넘어 민족과 세계의 가을절기를 지나 겨울절기의 고개를 넘기고, 1971년도부터는 봄절기 문화를 맞이할 수 있는 거룩한 날을 저희들이 준비하기 위해 생명력을 집결하여 이 타락한 세상에 대항하고 투쟁하는 거룩한 모습들이 되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금후의 시간과 이번 달과 금년의 일년 계획이 당신의 뜻과 더불어 일취월장(日就月將)하게 하시옵소서.

70년대를 개문하는 승리의 터전이 1970년 봄을 중심삼고 공고한 기반이 마련되어 거룩한 이 한 해가 될 수 있게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만만사의 은사로 저희들을 보살펴 주신 것을 감사하옵니다. 내일의 싸움터를 향해 걸어가는 저희의 생활 배후에 오셔서, 당신의 무한한 심정을 가일층 저희들에게 인연맺어 주시옵소서. 그래서 그 인연 가운데 살고, 그 인연 가운데 자라고, 그 인연 가운데서 죽을 때에 망할 수밖에 없는 운명길에서도 흥할 수 있는 결속된 자체로 남아진다는 것을 아는 무리들이 되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이 자리에 참석하지 못하고 남한 각지에서 이날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는 당신의 자녀들과 세계에 널리어 외로운 노정에서 싸우고 있는 당신의 아들들을 거룩되게 지켜 주시옵시고, 거룩한 통일의 기치를 들기 위해, 당신의 숨은 터전의 눈물의 대가를 수용하기 위해 노력하는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가을절기의 생명체로 결실된 이 무리들이 썩어져 가는 암흑 세계의 생명 전체를 휘몰아 파국에 직면해 있는 인류 앞에 생명의 기치가 되고, 생명 도상에 있어서 계명성이 되고, 암흑 행로에 있어서 하나의 등대의 사명을 할 수 있는 거룩한 무리가 되게 복빌어 주시옵고, 지켜 주시옵고, 격려해 주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옵니다.

당신이 경륜하시는 전체의 뜻이 일취월장하기를 다짐하는 이 시간으로 맞아 주시옵고, 기억하여 주시옵기를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의 성호 받들어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말씀 요지]

복귀섭리역사는 아벨이 가인을 굴복시켜 나가는 역사입니다.

가인을 구하려니 아벨이 탕감을 해야 하는 것이고, 탕감을 하려니 십자가를 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가인을 구하는 일을 함으로써 사탄세계를 정복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왜 지방 개척 전도를 내보내느냐? 부락을 찾아가는 것은 부락에 있어서의 가인적인 책임자를 찾아가는 것이고, 면(面)을 찾아가는 것은 면에 있어서의 가인적인 책임자를 찾아가는 것이며, 도(道)를 찾아가는 것은 도에 있어서의 가인적인 책임자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찾아가서 무엇을 해야 하느냐? 제물이라는 조건을 걸어 놓고 빼앗는 역사를 해야 합니다. 여기에는 희생이 필요합니다. 즉, 피를 흘려야 하는데 피는 아벨이 흘려야 합니다.

이제 통일교회는 종단적으로 아벨의 사명을 할 수 있는 시대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기성교회 목사와 장로에게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기성교회 교인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관심을 갖는 데는 그들을 원수시할 것이 아니라 기성교회 목사보다도 우리가 그들을 더 위해 준다는 공인을 받을 수 있는 기준까지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가인과 아벨은 6천년 전에 헤어졌던 형제가 아닌가! 그런데 이들의 만남이 6천년간 개인적인 싸움, 가정적인 싸움, 국가적인 싸움을 거쳐 우리 시대에까지 연장되어 왔는데 이제는 싸움이 절정에 달해 가지고 화합할 수 있는 찬스, 즉 다시 만날 수 있는 때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 여기에서 가인을 굴복시킬 수 있는 아벨의 작전, 즉 야곱이 에서를 굴복시키기 위해 썼던 것과 같은 작전을 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본 공산당과 대결하기 위해 우리가 일본의 창가학회를 적극적으로 후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놀라워하고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반대했는데도 저들은 우리가 궁지에 몰렸을 때 도와주는 구나' 하면서 감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여러분은 지방에 돌아가면 기성교회 목사들이 자기 교인들을 위하는 것보다 우리가 더 위한다고 할 정도로 기성교인들에게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 교인들 전체를 동원해 가지고 기성교회를 옹호해 주고, 그들이 부흥회를 할 때는 가서 전도도 해주어야 합니다. 6개월의 이 특별기간 동안에는 기성교회를 적극적으로 두둔하는 교역자들을 이해하고 동정해 주어야 합니다.

기도할 때에도 기성교회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나는 형님을 알아보는데 형님은 나를 몰라보고 원수처럼 대하는 구나. 이 사실을 형님에게 깨우쳐 주어야 할 텐데 어떻게 깨우쳐 줄 것이냐…' 그러기 위해서는 무언의 실적을 가지고 그들을 위해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결국 형님은 깨닫고 사죄하며 돌아올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한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기성교회를 이끌고 나라를 위해 일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국가가 복귀되는 날이면, 즉 남한이 하나님을 중심삼고 하나되어 통일사상으로 완전무장하는 날이면 북한 공산당은 자동적으로 굴복하게 됩니다. 왜? 일본과 기타 아시아 지역에서 싸워 나온 실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들을 어떻게 하지 않아도 이미 그들이 무너질 수 있는 자료가 다 갖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세계 복귀의 길은 자동적으로 풀려나갑니다.

[지시 사항]

• 요원생활 문제

아무리 어려워도 식구들에게 신세지지 말아야 합니다. 주지 못해 한이라는 입장을 취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식구들에게 명령하여 도와주게 할 것입니다.

• 요원 수련 문제

요원들을 재교육시켜야겠습니다. 요원이 부족합니다. 인재확보는 중대한 문제입니다. 고등학교 출신들에게 더 중점을 두고 활동하여 매달 고교 출신 3명씩 전도해서 수련회에 보내기 바랍니다. 하늘의 일은 작은 사람에서부터 출발합니다. 밑창에서부터 올라온 우리가 밑창에서 온 사람들을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일대일 작전에 주력해야 합니다.

• 3·7장학기금 조성

7백쌍 합동결혼식을 계기로 하여 장학기금을 조성해야겠습니다. 그것을 위해 백방으로 힘을 쓰기 바랍니다.

• 기타

지구장들은 원리강의를 계속하고, 강의할 때는 땀을 흘리면서 해야 합니다.

승공강의를 한 다음에는 조직을 편성해 주어야 합니다. 연세대에서 발행하는 `현대와 신학', `기독교사상' 등의 잡지를 적극 활용하기 바랍니다.

거듭 말하거니와, 승공강의를 들은 사람들에게는 각각의 형편에 따라 `승공동지회'식으로 써클을 조직해 주기 바랍니다. 또 그 후원회도 조직하여 실효성을 계속 유지하도록 해야 합니다.

5월부터는 주로 일대일로 만나서 개인선전에 힘쓰기 바랍니다. 그 대상은 핵심요원 양성을 위한 대상이어야 합니다. 5월부터 8월까지의 주요 표어는 일대일 설득 선전입니다.

[기 도]

사랑하는 아버님, 5월 24일 안식일 아침을 맞이하였습니다. 남한 각지에 널려 있는 자녀들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 당신의 존전에 정성들이는 곳곳마다 당신이 충만하신 은사로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 남기신 복귀의 노정을 온갖 충성을 다하며 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한 생의 인연과 더불어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기준과 전체적인 사명을 짊어진 외로운 무리들을 친히 권하여 주시옵고 위로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험한 세파와 더불어 당신이 최후에 남기신 하나의 목적을 향하여 가일보 전진하는 자녀들 되게 하시옵소서.

뜻을 받드는 일에 충성을 다할 수 있게끔 저희들의 마음에, 혹은 몸에 당신이 친히 감동감화를 허락하시사 최후의 판결을 지을 때까지 참고 싸워서 당신 앞에 기억될 수 있는 무리들로 남아지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역사과정의 수많은 인간들은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믿음 하나를 중심삼아 가지고 그 목적을 향하여 세상을 더듬어 왔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오늘날 저희들의 목적은 너무나 뚜렷하고 저희들이 개척해야 할 미래의 노정은 너무나 확실하다는 것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은 과거에 선조들이 걸었던 신앙노정 앞에 부끄러운 자신들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저희들의 생활은 아버지를 대신한 생활이 되어야겠고, 저희들의 행동은 아버지를 입증할 수 있는 행동이 되어야겠고, 저희들의 마음은 아버지와 일체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수많은 생명을 감화감동시킬 수 있는 아버지의 아들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고 딸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하오니 아버지, 저희들의 마음과 몸이 온전히 당신에게 사로잡혀 당신의 감화를 받으면서 살 수 있는 자녀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지금까지 싸워 온 행로가 아무리 험하다 할지라도 남아진 싸움의 터전을 바라보면서 지금까지의 과정을 하나의 연습과 같이 생각하고 내일의 소망의 터전을 향하여 힘차게 다시 출전할 수 있는 하늘의 정병들이 되어야되겠습니다.

이 민족의 운명을 책임질 수 있는 참다운 아버지의 아들딸이 없는 것을 느끼게 될 때, 저희들이 이 민족을 책임지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또한 아버지의 아들딸의 사명이 얼마나 엄청난 역사성을 띠고 있고, 얼마나 엄청난 시대성과 미래성을 띠고 있는가 하는 사실을 각자가 명심하면서 내일의 총화를 위하여 온갖 정성을 다 들이는 저희들이 되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아버지의 마음속에 잊혀질 수 없는 무리가 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아침에 아버지를 향하여 사모의 심정과 흠모의 심정이 극하여 아버지 앞에 모든 것을 애원하는 자녀들이 있사옵니까? 그 자리에 당신의 무한하신 사랑을 나타내시어, 아버지의 이 땅에 대한 섭리의 내용이 그들의 마음으로부터 폭발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한 사람을 연결시키기고, 한 환경을 연결시키시어서 천국의 건설을 위해 온전히 충신의 도리를 다하고 효자의 도리를 다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당신께서 내세우기에 부족함이 없고 자랑하기에 흠이 없는 자녀들로서 남아지는 무리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아침 소수의 무리가 당신의 존전에 모일 적마다 얼마나 정성된 모습으로 나타났는 가를 생각하게 되옵니다. 아버지를 만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과, 아버지께서 여기에 감동하시어 함께하고 싶으신 마음이 서로 교류되어서 저희가 아버지 앞에 감사드리고 아버지께서는 저희들을 보고 기뻐하시는 자리에서 저희들이 영접할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은 어떠한 형식에 따라 모이는 무리가 되어서는 안 되겠사옵니다. 아버지의 마음으로부터 인연된 생활을 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말씀을 통하여 저희들이 생활환경을 개척하는 데 아버지 앞에 기억될 수 있는 무리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벨된 저희들 입장에 얼마나 엄중한 책임이 있는가를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저희들이 가인을 이끌고 가야 되겠습니다. 가인과 아벨이 하나되는 자리가 승리를 결정짓는 자리인 것을 저희들이 아옵니다. 하오니 저희들이 그 승리의 권을 넘어서서 저희들의 목적을 위해서 또 하나의 주체성을 이룬 가인적인 자리에서 범위를 넓혀 나가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역사적인 사명이 가중되어 있는 것을 느끼면서 부족한 자신임을 탄식하는 자들이 있사옵니까? 아버지, 그 마음을 긍휼히 보시옵소서. 내일의 희망 앞에 스스로 비굴함을 느끼는 자들이 있사옵니까? 그들에게 힘을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그 누구 앞에서도 부끄러움이 없는, 강하고 담대한 용사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게끔 그들을 붙들어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니다.

일체가 아버지를 중심삼고 나타나고 아버지를 증거하기 위해 달려가는 그 길에는 아버지의 가호의 손길이 같이할 것이거늘 그러한 생활권내에 사로잡혀 살 수 있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금번 저희들이 특별수련기간을 통하여 배운 것이 무엇이며, 아버지께서 이때에 저희에게 요구하시는 사명이 무엇인지를 저희들은 느끼고있사옵니다.

아버님, 오늘이 이번 수련기간의 마지막 날이옵니다. 저희들은 아버지를 좀더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버지와 나와의 관계가 어떤 것이며, 나와 아버지와는 어떤 인연이 있는 가를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무슨 일이든 아버지와 저희들이 합동공작을 해서 성취해야 된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저희들이 나를 위한 내가 아니라, 아버지를 위한 내가 되고 역사적인 승리의 왕자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 당신의 성호를 찬양하는 곳곳마다 친히 군림하시옵소서. 이들을 당신의 휘하에 두시고 지도하시어서 최후의 승리를 하는 자리까지 인도하여 주시옵기를 바라옵니다.

저희들에게는 수많은 형제들을 당신의 품에 품기게 해야 할 책임이 있사옵니다. 또, 그 책임을 하기 위해서는 모진 투쟁의 행로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이것은 총칼을 들고 하는 투쟁이 아니라 사랑의 혈투전이므로 눈물로써 그들을 끌어내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이런 엄청난 복귀의 책임이 저희들 앞에 남아 있는 것을 바라보게 될 때, 저희들은 아버지를 모시고 아버지로 말미암은 감동의 인연을 저희 자신을 통하여 모든 사람들과 접속시킬 수 있는 생활을 하기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 그 목적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통일의 무리는 진군의 행보를 늦출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여기에 아버지께서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이 나라와 이 민족을 불쌍히 보시옵고, 남북한을 당신의 품에 품으시옵소서. 한국의 삼천리 반도가 당신이 기억하시는 땅, 당신이 찾아오시어서 승리를 다짐하는 땅, 평화의 기틀을 마련하여 온 세계에 새로운 선전포고를 할 수 있는 땅이 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이 아침에도 친히 같이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의 성호 받들어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말 씀

오늘 이 땅에 살고 있는 인간들은 시간성을 못 벗어납니다. 어떠한 사건도 반드시 시간내에서 이루어집니다. 어떤 사건에도 반드시 전후 관계가 있습니다. 그 사건이 나기까지의 과거가 있고 그 사건이 일어난 현재가 있습니다. 또, 그 사건이면 사건이 일어난 자리가 있고 그 이후의 자리가 있습니다. 인류 역사를 두고 봐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인 가정 종족 민족 국가 세계도 그와 같은 시간권내에서 움직여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목적 성사에 필요한 조건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는 반드시 달성해야 할 목적이 있습니다. 그 목적을 중심삼고 10년, 20년, 30년, 70년, 일생 동안 가야 되는 것입니다. 목적이 크면 클수록 내적으로 더욱 강하게 다짐하여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그 목적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시간이라는 과정을 통하여 그 목적을 능가할 수 있는 내적인 결의를 계속하지 않는 한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 개인이 목적을 달성하는 과정에 있어서도 천태만상의 인연이 부딪쳐 오는 것입니다. 목적성사를 위하여 일을 추진해 나가는 데 있어서는 자기가 가는 길을 환영하는 환경도 있겠지만, 도리어 그 목적 앞에 반대되고 지장이 되는 요건이 몇 배 몇십 배로 나타나는 환경이 더 많은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생활에서 느끼게 되는 사실입니다. 그리하여 부딪치는 환경을 극복하지 못하고 견디다 못해 쓰러지게 될 때에는 좌절과 더불어 실패라는 서러운 결과를 가져 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는 생활 가운데에서나 이 사회 가운데서, 이 세계 가운데에서 많이 보게 됩니다. 이렇듯 우리는 생활 가운데에서 자기가 가는 길을 환영하는 여건보다도 반대하는 여건이 비례적으로 많은 것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위대한 사람이 있어 가지고 그가 어떤 큰 목적을 향하여 달려가려 한다면, 그 목적이 크면 클수록 위대하면 위대할수록 거기에는 국가를 내포하고 세계를 내포한 사건들이 깃들어 있을 것입니다. 그 사건이라는 것은 그 위대한 인물이 가는 도상에 환영의 조건이 아니라 상충과 반대의 조건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 나타나는 반대의 요인이 크면 클수록 낙망의 요인도 될 수 있는 것이요, 실패의 요인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사건들이 나타나게 될 때, 사건을 맡는 사람은 그 사건보다 큰 결의와 강력한 내용이 결집된 힘의 핵심체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리하여 어려운 환경과 부딪치지 않고는 그 사건을 해결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러한 환경에 처하여 결의해야 하는 사람의 입장은 지극히 심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러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목적을 대하여 보다 강한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외적으로 다가오는 시련 조건을 능가할 수 있는 내적 충동을 어떻게 발현시키느냐 하는 것이 그 문제를 해결짓는 중요한 열쇠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들은 인생노정에서 이러한 문제에 부딪칠 때마다 그것을 극복하려 했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 생활의 상례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아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가? 재차 결의와 다짐을 해 나가는 것을 바라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앞으로 반드시 시련의 고비가 다가올 것이거늘, 우리는 그 시련의 고비에 대비하기 위해 재차 결의해야 되겠습니다. 외적인 환경과 부딪쳐서 승리하여 하나의 위대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다가오는 시련보다 강한 힘과 자극을 도입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것은 하나님만이 염려하시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 자신들도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될 중요한 문제인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 부딪치게 될 때, 사람들은 보다 강한 힘을 필요로 합니다. 보다 강한 자극적인 요인이 필요하기 때문에 제 3의 힘을 요구하게 됩니다. 위대한 인물이면 인물일수록 평범한 사회 환경에서 평범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시련의 고비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을 보강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위대한 사람들이라면 제3의 힘을 필요로 하는 일이 불가피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인간을 통하여서는 나올 수 없기 때문에 자기 자신보다 강한 힘과 현재 자기가 느끼는 이상의 자극을 추구하는 것이며, 그때마다 그들은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는 위인전을 통하여 많이 보게 됩니다.

시련을 극복하려면

여러분은 그러한 환경, 그러한 생활, 그러한 한때를 대비하여 정성을 들여야 됩니다. 다가오는 시련의 여건이 큰 것을 알고 온갖 지성을 다 들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다가올 시련의 내용이 어떠한 것인지 모르고 그런 시련이 언제 올지 모를 때에는 언제나 조심스러운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과 하나될 수 있는 자리에서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그런 생활을 계속하여 다가오는 시련의 고비를 넘길 수 있는 힘을 보강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신앙생활하는 사람의 목적은 개인이 승리하는데 있기보다 세계가 목적이기 때문에 그 크나큰 목적을 바라보고 가는 길에서 그 세계의 한계점까지 가기 위한 신앙인의 행로는 고달픈 수난의 길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각자가 앞으로 가야 할 길은 평탄한 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길은 수많은 인간들의 결심이 실패로 나타날 수 있는 환경이 가로놓인 것을 느끼면 느낄수록 필사적으로 걸어가야 할 길입니다. 이 길은 어려운 시련의 노정이요, 비참한 노정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시련을 극복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비결을 무엇이냐? 다가오는 시련에 비해 내적인 결의를 할 수 있는 자체의 능력이 크면 됩니다. 즉, 외적인 시련의 고비에 대처할 힘을 창조해 낼 수 있는 주체적인 입장에 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힘을 보강할 수 없는 입장에서 신앙길을 가는 사람이라면 그는 언제나 하나님과 일치된 태도를 취해야 합니다.

내가 가는 이 시련의 노정은 나만 가야 할 노정이 아니라 하나님도 필히 가야 할 노정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을 통하지 않고는 갈 수 없는 연고로, `나'라는 사람을 세워서 가야 하는 것이요, 내가 아니면 다른 누구를 통해서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여기서 수많은 사람들을 대표해서 정성을 들이고 하나님의 뜻이 내 뜻이라고 하며 있는 정성을 다들여 호소하는 그 자리에 서야만 하나님과 인연을 맺을 수 있고, 그럼으로 말미암아 지금까지 자기 환경에 없었던 새로운 힘을 보강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자의 생활인 것입니다.

역사를 책임지고, 세계사적인 사명을 책임진 위대한 사람일수록, 시대적인 시련과 환난을 극복하기 위한 내심의 결의보다는 자기가 목표하는 이상의 시련, 그것이 세계적인 것이면 세계적인 차원의 시련을 넘을 수 있는 결의가 필요합니다. 그 결의를 연속시키기 위해서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가운데 하나님과 내적인 관계를 맺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정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어려운 문제가 있으면 인간을 통하여 의논하는 것보다도 하나님과 의논하고 싶어해야 합니다. 그리고 어떠한 개인과 자기의 사정을 털어놓고 의논하는 것보다도 하나님과 더불어 그 사정을 토로하고 의논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가치 있다는 것을 느껴야 합니다. 그런 체험이 없어 가지고는 어려운 사명을 감당해 낼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역사를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의 뜻길에 선 여러분들이 개인적으로 가야 할 길 앞에는 개인적인 탕감노정이 남아 있습니다. 개인적인 탕감노정이 어느 한때에 가서 종말을 보아야만 비로소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터전이 마련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터전을 중심삼고 공적인 책임을 짊어지고 나설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를 탕감시킬 수 있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공적인 탕감의 노정을 책임질 수 없다는 말입니다. 공적인 탕감노정을 책임지기 위해서는 자체의 탕감노정을 거쳐야 된다는 말입니다.

자체의 탕감노정을 분석해 보면 모두가 역사성을 띠고 있는데 이것은 과거의 선조로부터 이어받은 유전적인 것입니다. 여기서 자기의 수많은 선조들이 선한 조상이면 모르지만, 선하지 못한 조상일수록 자신에게 부가되어 있는 탕감의 조건은 비례적으로 큰 것입니다.

탕감조건을 청산하려면

그러한 사실을 알게 될 때, 공적인 탕감노정을 출발하기 전에 나 자체의 탕감의 한계선을 어떻게 넘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개체적인 탕감노정을 생각할 때, 자기 개체가 넘어야 할 탕감의 양이 얼마나 될 것이냐? 혹자는 열, 혹자는 백, 혹자는 천, 혹자는 만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천태만상의 인간상을 보면 그 배후에 각자에게 지워진 탕감의 모양도 천태만상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어느누구를 표준하여 `그는 행복한 사람이다'라고 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가 행복하다고 할 때의 그 행복은 개인으로부터 연결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역사적인 것입니다. 즉, 그 선조들의 선한 공적을 통하여서 나타난 것입니다.

그의 선한 선조들은 선한 공적 생활을 하면서 행복한 생활을 못 했습니다. 그의 조상들 중에는 일생의 노정에서 자기 개인을 중심하고 행복한 생애를 거쳐간 것이 아니라, 공적인 입장에 서서 불행한 생애노정을 간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런 불행한 길을 가면서 남긴 공적인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미래의 소망을 위해 자신의 현실을 소모시키고 생을 소모시킨 공적의 터전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선조들의 공적의 터전 위에 세움을 받은 사람들, 다시 말하면 미래의 희생의 대가를 선조들이 이미 치러 놓은 터전 위에 태어난 후손들은 미래의 어느 한계점까지 가서야 있게 되는 탕감의 기간이 찾아올 때까지 어떠한 사회의 그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살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복받을 수 있는 생활권내에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탕감요인을 자기 선조가 탕감지은 입장에서 태어난 사람일수록 현시점에 있어서 행복한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을 보고 아직 탕감의 내용이 남아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나도 저와 같이 행복하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바란다 해도 그들은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아무리 바란다 하더라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바라면 바랄수록 그 소망 앞에는 가중된 시련과 가중된 탕감의 내용들이 찾아올 것입니다. 그런 행복이 빠른 기간내에 이루어지기를 바라면 바랄수록 거기에 비례하여 가중된 탕감요인이 자기 앞에 부딪쳐 온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공적인 자리에 나가기 전에 자신이 청산지어야 할 탕감이 얼마나 되느냐 하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 탕감이 얼마가 남아 있다는 것을 짐작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을 1년에 탕감하느냐 혹은 한달에 탕감하느냐 할 때, 아마 그것을 1년 동안에 탕감하려고 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마음으로는 한달에 그것을 모두 탕감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한달에 탕감하려고 하면 10배로 가중된 시련이 닥칠 것이기 때문에 그 시련을 감수할 수 있는 자체가 되어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탕감조건을 한달에 청산지으려면 그냥 그대로의 입장에서는 안됩니다. 여기에는 반드시 맹세를 하여야 하는데 맹세를 하는 데는 반드시 조건이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속된 사람들도 맹세를 할 때는 칼을 꽂고 하든지, 혹은 다른 무엇을 걸고 맹세를 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자기가 가야 할 길 앞에 있는 탕감의 기간을 단축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기에 해당하는 내적인 맹세와 결의를 하여야 하는데 거기에는 탕감조건에 대비될 수 있는 조건을 걸어야 합니다.

제물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내가 새로운 약속을 하는데 있어서 하나의 조건으로 내세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제물을 드릴 때는 무엇을 위해 드리느냐? 여기에는 목적관이 뚜렷해야 됩니다. 목적이 없는 맹세가 없듯이 목적이 없는 제물도 없는 것입니다.

탕감의 길을 거쳐 나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시간이 소모되어야 합니다. 또한 단지 시간의 소모뿐이 아니라 자기 자체의 소모가 벌어져야 됩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체의 소모를 방지하기 위해서 조건물로 제시하는 것이 제물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사적 탕감노정과 공적 탕감노정

여러분들에게는 이러한 신앙길을 개척해 가야 할 각자의 책임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여기에 얼마나 시간을 소모했으며, 얼마나 자기 자신을 소모했느냐? 이것이 탕감의 요인을 제거시키느냐, 못 시키느냐를 좌우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해 볼 때에 오늘날 신앙길은 무슨 길이냐? 여러분이 알기로도 희생의 길일 것입니다. 그러면 이 희생은 무슨 희생이냐? 자기 생애의 희생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가 행복할 수 있는 모든 요인을 투입하는 길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의 육신도 여기에 말려 들어가야 됩니다. 다시 말하면 전체를 중심삼은 희생과 자기 자체를 중심삼은 희생의 대가를 치러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시간이 길고 자기 자체의 희생의 양이 많으면 많을수록 자기 일대에 대한 탕감의 양을 비례적으로 청산지을 수 있는 것은 정당한 이치입니다.

여러분이 탕감하기 위해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 탕감이 사적인 것인지 공적인 것인지 확실히 구별해야 됩니다.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 신도들 앞에도 엄연히 그와 같은 탕감노정이 남아 있습니다. 평범한 인간들은 자기의 탕감의 길을 모릅니다. 자기가 치러야 할 탕감의 노정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인간들도 막연하게나마 탕감될 수 있는 길로 인도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실 때, `너 개인을 위하여 희생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남을 위하여, 혹은 가정을 위하여 희생하라'고 하십니다. `가정을 위하여 희생하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자기 개인의 탕감조건을 청산하라는 것이 아니라, 한 단계 높은 자리에서 탕감조건을 청산하라는 것입니다. 즉, 그가 가는 길에서 오늘의 갈 길을 위하여 탕감하지 말고,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위하여 탕감하라고 권고하시는 것입니다.

앞으로 다가올 시대를 위한 탕감을 치른 사람은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을 위하여 탕감하는 사람은 내일에 남아질 수 없지만 미래를 위하여 탕감하는 사람은 오늘에 남아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슨 말이냐 하면 미래를 위하여 탕감하는 자리를 책임진 사람은 오늘의 탕감과정까지 넘어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역사의 흐름을 생각해 보게 될 때, 그 주류적인 사상이 무엇이냐? 희생입니다. 오늘날 인륜도덕은 희생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가정을 중심삼은 희생 봉사, 나라에 대한 희생 봉사는 어떠한 개인이나 민족이 가는 보편적인 행로입니다. 그래서 가정에서는 부모님께 효하고 나라에 충이 되는 길을 가라고 합니다. 그것은 나 자체가 짊어진 탕감의 내용을 미래에까지 연장시켜 가지고 청산하라는 것입니다.

미래를 위해 충성하는 것은 수많은 군중을 위해서 충성하는 것입니다. 내가 정성들이는 그 정성은 나 한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비록 정성을 들이기는 한 사람이 들이지만 그 정성의 영향은 그 나라 전체에까지 미쳐집니다. 그러니 그 나라의 백성이 만 명이면 만 명 다 나에게 보답해야 됩니다.

그 만 명 가운데는 나보다 더 위대한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그 위대한 사람들이 상대적인 입장에서 나를 위하여 축수(祝手)해 주고, 나를 우러러보고, 나에게 복 받으라고 권고해 주는 자리에 가인 아벨의 조건을 큰 무대로 연결시킬 수 있는 자연적인 환경의 자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 개인의 정성은 나 자체에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와 관계되어 있는 환경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미쳐집니다. 그 군상 가운데에는 지금 내가 걸어가는 이상의 탕감노정을 거쳐간 선한 선조의 후손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면서 머리를 숙이고 칭송하는 자리에 서면 하나님께서 기억하시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나를 기억하는 사람을 열 사람, 백 사람, 천 사람 지니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기억하시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을 위하여 복을 빌어 주고 그들을 탕감시키기 위하여 수고한 나에게 그들이 도리어 복을 빌어 주게 된다면, 나 개체의 탕감조건은 그들의 기도로 말미암아, 그들의 위함으로 말미암아 자동적으로 청산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실 수 있는 정성의 기대

하나님께서 역사노정에 이런 환경을 표준하고 수많은 인간들을 이끌고 나오신 것은 인간들에게 화를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시대권내에 있어서 누구보다도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권한을 각자에게 넘겨 주기 위한 사랑의 작전이었습니다. 그러한 작전이 바로 공적인 입장에서 희생하도록 하는 것임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를 위해 기도해 주고, 정성들여 주는 사람이 많이 있으면 많이 있을수록 그 사람은 복된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 한사람을 위하여 정성들이는 사람을 많이 갖기 위해서는 먼저 내가 가진 모든 복을 많은 사람 앞에 넘겨 주어야 합니다. 그러기 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복받으라고 축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한 사람을 위하여 열 사람이 정성들이면 그 한 사람은 하나님이 기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정성을 들이는 환경을 수습하여 `서로가 서로를 새로운 단계로 자극시킬 수 있는 환경의 터를 넓히자' 해 가지고 하나의 단체를 구성한 것이 교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책임자는 자기를 위하여 정성들여서는 안 됩니다. 수많은 무리를 위하여 정성을 들여야 됩니다.

그 수많은 무리가 가야 할 곳은 자기 가정뿐만 아니라, 그 나라와 세계까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역자의 시선이 자기 가정과 자기 교회의 교인들에게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그 교인을 통하여 나라와 세계로 향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향해 `제가 들인 정성과 교인들이 들인 정성을 합하여 세계로 나갈 수 있는 길을 닦아 주시옵소서' 해야 됩니다. 이렇게 교역자와 교인이 하나되어 주고받으면 거기에는 반드시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되어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때는 자기 교회의 부흥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라의 부흥을 위해서 하나될 때인 것입니다. 그러면 그 교회는 나라가 하나되기 전에는 망하지 않습니다. 나아가 세계가 하나되게 하기 위해 정성들이는 교회가 있다 할진대 그 교회는 세계가 하나되기 전에는 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세계사를 개척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이냐?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죽어가는 그 운명길에서도 `아바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피하게 하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옵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아버지의 뜻, 그 아버지의 뜻의 한계선이 어디인가? 세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세계를 위하여 사선을 넘고, 피흘리는 모든 수난의 길을 넘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중심된 그리스도를 따라 나오는 신앙자들이 그리스도의 마음을 본받아 `나도 세계를 위해서 죽어간 그리스도의 목적을 위하여 가겠다. 그리스도가 죽음의 길을 간 것처럼 내가 그렇게 죽어갈지라도 나는 하나님 앞에 충효의 도리를 다하고 가겠다'고 결의하고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충신의 피땀을 대신 흘리고, 효자의 피땀을 대신 흘리겠다고 결의하는 무리가 세계적이면 세계적일수록 세계는 혁신되어 하나의 발전적인 역사가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한한 희생의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희생의 피가 흘려진 곳곳마다 그 희생의 한계점은 어디냐? 자기교회의 발전을 위해서 호소해 나왔다면 그 교회는 한계점, 즉 세기말 시대에 가 가지고는 끝날 것입니다. 그렇지만 인류와 세계를 위해 역사적인 순교의 제단이 된 교회는 역사를 지배하고 끝날을 청산짓고도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오늘날 기독교가 정성들여 나온 것을 보면, 그들 가운데에 세계적인 기독교권이 승리할 수 있는 한날을 표방하고 기도하는 무리가 많을는지는 모르지만 끝날에 심판받을 원수들까지도 구원하기 위해 정성을 들이고 죽음의 길을 간 기독교 신자들이 얼마나 있느냐? 그 수는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오늘날 기독교의 종말 현상을 보고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천주주의를 주장하는 통일교회

그러면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는 어떠해야 되느냐? 통일교회를 위한 통일교인은 필요없습니다. 우리 통일교회가 나라를 위하는 입장에 서야만 나라가 발전할 때까지 남아질 것이요, 세계를 위해 정성들이게 될 때에는 세계가 남아질 때까지 남아질 것입니다. 세계 이상의 곳을 향하여 정성을 들이면 세계를 소화시키고 그 이상의 자리에 남아질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통일교회는 세계주의가 아닌 천주주의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막연한 얘기가 아닙니다. 이런 내용을 오늘 우리들의 생활 가운데에서 탕감의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저울질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사실을 느끼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느냐? 이것을 실감나게 느끼면 느낄수록 그 사람은 위대한 인물일 것입니다. 어찌하여 그가 위대한 인물이냐? 세계 앞에, 천주 앞에 다가올 시련과 부딪쳐 투쟁하겠다고 맹세한 입장에 섰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의 소망하는 때가 천년, 혹은 2천년 후가 될는지도 모르고 그가 오늘날 순교하여 희생의 제물이 될 지도 모르지만 그렇다 해도 그는 시간성을 초월해서 세계를 지배하고 계시는 하나님 앞에 역사시대의 승리의 기점을 닦아 놓고 가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 교인들은 생각해야 됩니다.

그러면 지혜로운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개인의 탕감만을 위해서 수난의 길을 가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어차피 개인의 탕감노정은 가야 됩니다. 청산지어야 해요. 그러나 개인 가운데에는 그 선조들로부터 내려온 죄로 말미암아 탕감의 양이 많아서 일대를 통해서는 청산지을 수 없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자기 개인을 위해 정성을 들인다면 그 정성은 미래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자기 개인을 넘어 가지고 희생을 각오하고 `나는 제물입니다 내 생애 자체가 제물입니다. 내 생애 자체가 역사를 대신한 맹세의 조건입니다' 하고 나서게 되면 비록 그 자체는 부족하지만 그것으로 인해 그는 역사의 한계를 넘어 미래의 세계를 중심삼고 하나님과 맹세의 조건을 세울 수 있는 것입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나서는 곳에는 맹세하지 못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생명을 걸고 나서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생명을 걸고 나서서 세계를 중심삼고 피의 호소를 하게 되면 그건 세계를 향하여 호소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명을 걸고 `내 생애를 인류를 위해, 세계를 위해, 우주를 위해 제물로 바칩니다.'라고 하나님 앞에 맹세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자기 생명을 온전히 목적을 위하여 투입하겠다고 맹세하면서 제물로 등장하는 사람은 아무리 비참하고 악한 조상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그 탕감의 요인을 일대에 청산하는 것은 물론이요, 선조를 포함한 일족의 탕감의 요인까지도 자동적으로 청산하고 넘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는 그들의 피의 대가로, 그들의 순교로 인하여 맑아져 왔고 오늘의 시대권내까지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이런 사실을 생각할 때, 오늘날 우리 통일교인들이 가는 길 앞에 탕감의 길이 없을 리가 없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개인의 탕감노정이 있습니다. 그 개인의 탕감노정을 거치고 나서야 공적인 탕감노정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늘이라는 거룩한 곳을 중심삼고 보는 정당한 관이 아니겠는가?

우리 인간은 거룩한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타락의 후예로 거룩한 자리에 서기는 지극히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섭리의 뜻을 추진해 나오시는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아들딸들을 죽음길로 내모는 것은 잔인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그들에게 복을 줄 수 있는 하나의 비법이기 때문에 그런 길로 내몰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정을 우리들은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우리가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은 입장에서 가는데도 불구하고 시련이 부딪쳐 오는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 시련을 피해 가지 말자는 것입니다. 자기가 맹세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자기 단체면 단체의 책임자가 맹세했을 때는 그 단체의 책임자가 제시한 시련의 조건에 걸려 들어서 탕감에 말려드는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슨 말이냐? 그 단체의 장이 망하게 되면 자기도 망할 수 있는 운에 부딪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탕감조건을 세운 사람은 책임자인데 왜 생각지도 않은 내가 탕감의 영향을 받느냐? 그것은 한 나라의 주권자가 그 나라의 운명에 탕감조건을 세워 탕감하고 간다고 할진대는 그 나라의 백성도 주권자와 더불어 그 탕감에 해당하는 고난길을 가야 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날 한국이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중심삼고 발전도상에 있는데, 정부가 계획한 대로 국민은 거기에 가담해서 따라가는 것입니다. 정부가 어려움을 당하면 국민도 반드시 어려움을 당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 목적을 달성하는 데 있어서는 따로따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국민은 생활권내에서 정부의 영향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의 탕감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아시아를 바라보고 세계를 바라보게 될 때, 하나님이 아시아를 중심삼고 탕감시대로 넘어가게 된다면 아시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아시아권 탕감시대의 영향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더우기나 그 나라의 주권자들은 직접적인 영향을 받습니다. 또, 세계가 탕감시대로 들어가게 된다면 인류 전체는 세계의 탕감시대권 영향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탕감되어 넘어간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어떤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냐

그러면 지혜로운 사람이란 어떤 사람이냐? 역사시대의 승리적인 인연을 상속받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보다 가치 있는 것을 상속받는 사람입니다. 보다 가치 있는 것을 상속받기 위해서는 생활 가운데에서 보다 큰 탕감의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탕감길은 우리들이 가지 않으면 안 될 운명길인 것을 알아야 됩니다.

오늘날 통일교회를 중심삼고 생활하고 있는 모든 식구들은 선생님이 제시하는 탕감조건을 중심삼고 해결할 수 있는 시대적 과정을 거쳐 나가야되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외적인 입장에서 하나님이 지시한 그 방향으로 가지 않으면 내적으로라도 탕감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뜻이 지향하는 곳을 향하여 보조를 맞추게 될 때는 반드시 내적으로도 소모전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외적으로 소모전이 벌어짐과 동시에 내적으로도 소모전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나'라는 존재의 승리는 안팎이 하나되어야 결정되는 것임을 알아야 됩니다. 내적인 것을 소모했을 때는 외적인 소모를 겸하여 가지고 하나의 인연을 맺어 놓아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탕감노정을 넘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위해 행동을 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통일교회는 여러분 앞에 행동을 강요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강요하는 것은 비참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비참한 것으로 끝나지 않고 도리어 극복하게 되면 오늘의 자기 자체의 탕감노정만 가는 것이 아니라, 내일의 공적인 탕감노정 앞에 맹세했던 제물의 노정을 갔다 하는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기간이 3년을 넘게 될 때에는 거기에 남아질 수 있습니다.

3년 이상 넘어가게 되면 이것이 4수권내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3수 권내를 넘어서게 되면 사각형 권내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3수를 넘어서야 됩니다. 3수는 4수를 찾아가는 과정에 있는 수입니다. 그래서 거기에서부터 경계선이 벌어집니다.

반드시 4수에서부터 하나님이 간섭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원을 그리면 이 원에는 반드시 한 자리가 있는데 이 자리가 하나님의 자리요. 이것을 최대로 벌여 놓은 것이 아담 해와요, 땅 위에 중심으로 결정한 것이 자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의 소망은 자녀에게 있는 것이요, 하나님의 소망도 자녀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아담의 타락보다도 그 아들딸의 타락이 역사를 결정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삼각권을 넘어서야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3수를 넘어야 하는 것은 탕감에 있어 절대적 요인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원리에서 알게 됩니다.

이 3수를 내세우는 데 있어서는 나를 중심삼고 3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 3일에 실패하게 되면 3년이 되는 것이요, 3년에 실패하면 30년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통일교회에서는 3년노정을 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3년노정은 여러분 개개인을 위한 노정이 아니라 역사적인 뜻을 가진 3년노정인 것입니다.

역사시대에 맺어진 탕감의 인연을 중심삼고 우주사적인 결판장을 넘는 데 있어서 제시할 수 있는 탕감기간이라는 것은 매우 중요한 기간이 아닐 수없습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자는 이 기간에 심혈을 다 기울여서 세계와 인연맺을 수 있는 하나의 제물로서 그 노정을 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가 지녔다는 것은 역사를 지배할 수 있는 위대한 점이 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영원히 선하고 흥하고 복받는 자리

공적인 탕감노정이 천년 만년 계속되어 그 목적을 향하여 가야 될 텐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자기의 사적인 생활권내에서 탕감해 가지고 자기 일대에 공적인 목적의 세계를 맞을 수 있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역사적인 위인이 된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이런 역사적인 위인의 자격과 권위를 가지고 나타나는 분이 메시아입니다. 또, 그 메시아와 동반할 수 있고 그를 대신할 수 있는 무리는 인류 앞에 세계사적인 소망의 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통일교회가 제시하는 탕감기간, 그 탕감기간에 제시해야 하는 탕감조건, 그 탕감조건과 하나되는 `나', 그 중의 `나'라는 것은 지극히 위대한 존재입니다. 여러분이 그걸 알아야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그러한 것을 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탕감노정의 한계점에서 남아진 때입니다. 그러면 이 남은 때에 어떻게 정성을 들여야 할 것이냐? 그 정성은 자기 일신을 위해 들이는 정성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세계사에 미쳐질 수 있는 정성을 들여야 됩니다. 거기에는 말할 수 없는 시련이 닥칠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바라보는 세계가 여러분의 눈 앞에 다가와 부딪칠 것입니다. 그 순간을 휘어잡아 가지고 밀려오는 큰 파도를 타고 도리어 거꾸로 전부를 밀고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6천년 역사 이래 처음 나타나는 찬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찬스를 부각시켜 우리에게 부여하는 것은 위대한 사랑에서 연유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랑받을 수 있는 시기를 상실하는 자는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을 중심삼아 가지고 예수님도 3년이란 기간을 걸으신 것입니다. 이 3년 기간에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니 3일 기간이라도 세워야겠기에 목숨을 걸어 놓고 3일간 담판기도를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가신 길임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계사적인 기간, 공적인 3년의 탕감노정을 상실해 버렸기 때문에 사적인 3일 기간을 어떻게 하여 세계적 인연과 연결시키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몸부림치면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라는 기도도 한 것이요, 원수를 용서해 달라는 기도도 했으며, 그러고 나서 다 이루었다고 한 것입니다. 그것은 무슨 뜻이냐? 예수님 일대의 탕감은 물론이요, 역사적인 탕감의 인연에 그것을 연결시켜 놓기 위한 그의 소원이 이루어졌다는 뜻입니다.

자, 그러면 여러분은 사적인 탕감을 위해서 자기 일생을 투입하겠습니까? 아니면 공적인 탕감을 위해서 자기 일생을 투입하겠습니까? 일생을 투입하기는 마찬가지인데 어때요? 공적인 탕감을 위하여 공적인 환경에 일생을 투입하겠다고 생명을 걸고 나서는 사람은 위대한 인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한 무리들로 말미암아 새로운 역사는 창건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순간을 앞에 놓고 있는 우리는 남아진 때를 어떻게 메울 것이냐? 이것이 이제부터 여러분이 가야 할 시련노정입니다. 그래서 자체의 생활을 해 나가는 데에 있어서 개인적인 생활을 하느냐, 공적인 생활을 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거예요. 자기 자신의 생활에서 내가 무엇을 먹고 입고 사고 팔고 하는 모든 것이 누구를 위한 것이냐? 나를 위한 것이냐, 하나님을 위한 것이냐? 또,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이 공적인 생활이냐 사적인 생활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감정이 사적인 감정이냐 공적인 감정이냐 하는 것도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공적인 길을 가기 위해 맹세할 수 있는 자리를 찾아 나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역사를 탕감시켜야 할 사명을 짊어진 사람이면 누구나 소원하는 자리까지 나아가야 됩니다. 그런고로 생활 속에서 사적인 감정을 초월하여 공적인 감정을 어떻게 체득하느냐 하는 문제가 신앙자가 중요시해야 할 문제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죄라는 것은 무엇이냐? 죄는 사적인 곳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망하는 것도 사적인 기준에서 벌어지는 것입니다. 악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적인 것이 도수를 넘게 되면 악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적인 것에는 한계가 있는데 그 한계를 넘으면 악하게 되고, 망하게 되고,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원히 선할 수 있고, 영원히 흥할 수 있고, 영원히 복받을 수 있는 자리가 어디냐? 망하는 것을 피할 수 있는 자리, 죄 되는 것을 피할 수 있는 자리, 악해지는 것을 피할 수 있는 자리가 어디냐? 그것은 바로 공적인 자리입니다. 밥을 먹어도 공적인 자리에서 먹어야 합니다. 일을 해도 공적인 일로, 말을 해도 공적인 말로 소화해야 합니다. 이처럼 일체를 공적인 것과 연관지어 살아야 됩니다. 그런 사람은 지옥에 갈래야 갈 수 없는 것입니다.

천국 가는 비결

그러면 여러분은 얼마나 공적이냐? 여러분이 공적인 무대에 서도록 다리를 놓을 수 있는 측근자가 누구냐? 그것은 형제입니다. 복귀섭리의 길은 공적인 길을 개척하는 길이기 때문에 공적인 입장에 선 아들딸이 갈 길은 형제를 수습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공적인 길을 가기 위해서는 형제가 서로를 위하는 길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벨적인 입장에 있는 사람은 형제를 위하는 데 있어서 모범이 되어야 됩니다. 그리하여 가인적인 입장에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을 따르도록 해서 그와 하나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형제가 모두 공적인 입장에 서기 때문에 선하게 되고 흥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전부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보다 공적인 존재가 아벨입니다. 통일교회 교인들 중에 먼저 들어왔으니 아벨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먼저 들어왔어도 공적인 입장에 서지 못하면 가인입니다. 가인도 자기가 먼저 태어나긴 했지만 아벨보다 공적인 입장이 못 되었기 때문에 아벨을 따라야 했던 것입니다. 통일교인 가운데에도 먼저 들어왔다고 떡 버티고 앉아서 `내가 먼저 들어왔으니 아벨이다'라고 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나중에 들어온 사람보다 공적인 자리에 서지 못하면 무엇이라고요? 「가인입니다」 가인이에요. 아벨이라고 하는 사람은 도적이에요. 아벨적인 존재는 보다 공적인 입장에 선 사람입니다.

그러면 공적인 길을 가려면 어떤 관계를 가져야 되느냐? 형제의 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공적인 길을 가기 위해 협조를 구하는 데 있어서 `아버지, 이것 합시다' 그래 가지고는 안 됩니다. 그러나 `형님, 이것 합시다 아우님 이것 합시다' 하는 것은 되는 것입니다. 공적인 길을 가는 데는 횡적인 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천국을 가는 데에 있어서도 하나님과 하나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 가는 비결은 공적인 길을 가는 것입니다.

이 공적인 길을 가는 데에는 형제가 필요한 것입니다. 형제와 손을 잡고 가지 않고는 보다 공적인 환경을 넓힐 수 없기 때문에 형이나 아우가 죄인이라고 해도 용서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 공적인 길은 절대적으로 가야 되기 때문에 그 앞에 죄인밖에 없고 원수밖에 없어도 그들을 용서하고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지 않고는 공적인 길을 갈수 없습니다. 공적인 길을 가는 데에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것이 사랑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원칙을 알고 원칙대로 생활해야 합니다. 원리는 원리대로 알고 생활은 생활대로 하면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원리는 남아지더라도 여러분 자체는 남아지지 못합니다. 원리와 함께 나도 남아져야 되겠다는 마음으로 원리적 생활을 해야 합니다. 심정과 몸이 하나되어 원리적으로 움직여야 됩니다. 그리하여 그렇게 움직인 것이 공적인 것으로 인류 앞에 남아져야 되고, 역사시대에 남아져야 되겠습니다.

여러분,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까? 그렇다면 공적인 입장에 서십시오. 사적인 입장에서 잘되기를 바라면 망합니다. 자기 동네에서 자기 욕망을 중심삼고 일하면 그 동네에서 들이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요, 안 그래요? 미워하지 말라고 해도 미워합니다. `저놈의 영감 언제 자빠지겠나. 저놈의 할머니 언제 쓰러지겠나'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동네 사람들이 모두 그러면 그 사람은 벌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남을 위해 희생하는 길은 내가 복을 받는 길입니다. 지금까지 종교는 그것을 가르쳐 주었고, 인륜도덕도 그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역사를 망하게 하고, 인간들을 망하게 하기 위해 심판을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들에게 복을 주기 위해 찾아오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원수를 사랑하지 않고는 갈 수 없는 길이 원리의 길이라는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끝날에 심판을 통해 세계 인류를 망하게 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을 대해서는 부모의 입장인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에서 말하는 소위 불심판이라는 것이 말 그대로 불심판이 아닌 것입니다.

자식도 공적인 입장에서 사랑하라

오늘날 세계는 여러 국가와 손을 잡고 가야 됩니다. 대한민국이면 대한민국, 일본이면 일본 등의 아시아 국가와도 손을 잡고 가야 합니다. 이것을 최고로 강조할 때가 되거든 세계사적인 공적 시대가 우리 눈 앞에 온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이런 원칙을 중심삼고 볼 때, 하나의 국가의 사연이 그 나라의 시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세계적인 시련이 되어 소용돌이치는 날이 오면 공적인 평화의 나라가 찾아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때에는 세계 인류가 하나되느냐, 못 되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데 모든 나라의 국민들이 전부 자기 나라를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위해서 살겠다는 결의를 가지고 서로를 위하기만 하면 세계는 흥하게 됩니다.

여러분, 물이 빙글빙글 돌면서 소용돌이칠 때는 하나의 길잡이가 필요합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세계가 휘휘 돌아가며 소용돌이칠 때 하나의 길을 찾아야 합니다. 그런 와중에서 하나의 갈 길을 제시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단결하라, 하나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천주주의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천주의 공법을 따라가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통일교회의 주장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은 지금 아무 생각없이 그냥 가고 있는 것 같지만 실지는 탕감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뜻을 알고 난 여러분이 아무것도 안 하면 편안할 줄 알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선생님을 보면 미안하지요? 옛날에는 자기 멋대로 살고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었는 데 뜻을 알고 보니 그렇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선생님이 무슨 지시를 내리면 감사하게 생각해야 됩니다. 그러면 마음이 탕감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옛부터 한국 사람들은 어른 앞에 갈 때에는 반드시 두 손을 단정하게 하였습니다. 그것이 상례였습니다. 원리 원칙에 따를 때 편안한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여러분, 복 받기를 원합니까? 영생하기를 원합니까? 그러려면 공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식을 교육하는 데 있어서 내 아들딸로만 사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계인을 위한 제물적인 아들딸로서 사랑하는 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식을 품에 안고 젖을 먹일 때는 이 지구성의 인류를 대표한 어머니의 입장에서 인류를 대표한 어린 아이에게 젖을 준다는 마음으로 먹여야 됩니다. 그리고 자기 자식에게만 이쁘다고 젖을 먹일 것이 아니라, 남의 자식도 내 자식 같다는 심정으로 대하는 어머니가 되어 보십시오. 그런 어머니의 젖을 먹고 자라나는 애기들은 반드시 위대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당장에는 안 되더라도 1대 2대를 거쳐 나가는 동안 반드시 그 후손 가운데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인물이 탄생될 것입니다. 이것은 공식입니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복을 받겠다고요? 복이 내 치마 안에 들어와서 놀아나고 그 바람에 하나님이 내 치마 안에 들어오고 그러겠습니까? 그게 그렇게 되겠어요? 우리들이 하나님의 품에 안겨야지, 하나님이 우리들 품에 안기시겠어요?

탕감길을 피해 갈 수 있다고 자신하는 사람, 손들어 보세요. 한 사람도 없는 것입니다. 한 마리도 없다는 것입니다. 없으니까 마리라고 해도 됩니다. 누구나 다 탕감길을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왕지사 탕감길을 가려면 어떻게 가야 할 것이냐? 개인적인 탕감길을 가겠다는 사람은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이지만, 공적인 탕감길을 가겠다는 사람은 지극히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것은 공적인 길을 가면 세계를 유업으로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을 여러분이 생활과정에서 확실히 느껴 보십시오. 공적인 마음을 가지고 정성을 들여 탕감하고 난 후의 후련함이란 천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술을 먹고 춤을 추는 것에 비할 것이 아닙니다. 알겠어요? 그 맛, 거기에서 느끼게 되는 그 자극이라는 것은 그 무엇을 가지고도 느낄 수 없는 것입니다. 그 경지는 우주와 호흡을 같이할 수 있는 경지입니다. 거기에서 하나님 앞에 정성을 들이고 하나님 앞에 내일을 위하여 맹세하고 나서는 걸음에는 언제나 강한 힘의 자극이 복원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사람 앞에 닥치는 시련은 하나의 연단이 될 수 있는 것이요, 재산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위인들이 가는 노정입니다.

남은 때를 어떻게 극복하여 빛나게 할 것인가

이런 관점으로 볼 때, `때'라는 것은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잠깐입니다. 남은 기간이 얼마 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통일교회를 중심삼고 현재의 세계정세를 바라보면 세계는 지금 회오리 바람이 불어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마당에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이냐? 세계 인류를 붙들고 탕감해야 됩니다. 아시아뿐만 아니라 세계를 붙들고 탕감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통일교회는 소수의 통일교인에 불을 붙여 가지고 국경을 넘어 아시아를 거쳐서 나아가는 데 첨단에 서서 역사의 흐름과 미래의 세계를 바라보면서 그 중간 입장에서 세계를 위한 탕감의 짐을 져야 합니다. 그러는 것이 하나님 앞에 기억될 수 있는 아들딸이 되고, 하나님 앞에 충신이 될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선생님이 생각하는 것이 그런 것이며, 선생님이 가는 길도 그런 길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을 지도하고 있는 선생님의 입장입니다.

그러면 이 남은 때를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이 남은 때를 어떻게 극복하여 빛나게 하느냐? 이 문제의 해결점은 막연한 곳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여러분이 처해 있는 오늘 이 시점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이 시점에서 탕감의 운명길을 가는 데 있어서 보다 공적인 자리에 서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자기가 공적이면 공적일수록 반드시 거기에 비례하는 시련과 고통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보다 공적인 입장에 서서 시련당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 시련에 비례하는 힘을 가지고 대해 주실 것이다' 하는 마음을 가지면 내일에 찾아오는 불행의 여건, 파탄의 여건, 비참의 여건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공적인 입장에서 공적으로 모든 생활을 체휼하는 입장에 서게 되면 반드시 거기에 비례하는 힘을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럴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도 미리 준비를 하셔야지요. 하나님은 앞으로 올 것을 예상하시고 그런 사람들을 통해 준비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특별한 기도를 하는 사람들은 압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는데 그것은 보다 공적인 한때를 넘기 위한 하나님의 작전입니다. 이럴 때는 언제나 정성을 다 들여야 됩니다. 그 정성은 자기 자식을 위해서 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가정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성들일 때는 남편도 피하고 자식도 피해야 됩니다. 알겠어요? 부잡스럽고 더러움 탈 수 있는 것들을 피하라는 겁니다. 깨끗한 곳에서 깨끗한 것을 먹고 깨끗한 옷을 입고 깨끗한 마음 자세로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그런 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공적인 노정을 가는 가정이 되어야 한다

결론을 짓자면 크나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거기에 비례되는 힘이 언제나 보강되어야 되는데 그 힘은 사적인 자리에서는 절대로 보강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적인 자리에는 절대 관계를 안 맺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앞으로 닥칠 시련 고비를 타개할 수 있는 힘을 어떻게 보강하느냐? 다가오는 시련 이상의 공적인 입장에서 하나님 앞에 정성들이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백만한, 혹은 천만한 혹은 세계만한 목적을 향해서 가는 데는 반드시 거기에 비례되는 시련이 다가옵니다. 10개월의 탕감기간을 요구했는데 1개월에 탕감하겠다 하면 10배 이상의 시련이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일시에 탕감하려면 세계적인, 공적인 마음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이것만 갖추게 되는 날에는 세계에 아무리 큰 시련 고비가 다가온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나를 방어선으로 이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거기에는 위대한 힘이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죽음의 고비가 앞에 놓여 있을 때 그곳을 도피하려는 약자가 되지 말아야 됩니다. 역사적인 죽음과 결투하여 한 생명의 죽음을 넘어 역사적인 죽음을 살리겠다고 한다면 그는 죽더라도 역사적인 부활을 하는 때에 다시 소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의 고비가 앞에 놓여 있을 때에도 생명을 걸고 덤벼드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목을 내놓고 덤벼드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거예요. 알겠어요?

자기 개인의 목을 내걸고 탕감길을 가고, 가정의 목을 내걸고 탕감길을 간다 할진대, 그 가정은 세계의 왕궁을 차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지금까지는 개인적인 제물시대를 거쳐왔습니다. 그러니 뜻을 위해서 허락한 그 길 위에 서서 `하나님 앞에 저희들의 피와 살을 고이 뿌리고 고이 바쳐 드린다면 한이 될 것이 무엇이냐' 하며 손에 손을 잡고 보조를 맞추어 행보하는 부부가 있다 할진대, 그 부부는 천주적인 가치를 지닌 부부인 것입니다. 이 놀음을 하기 위해서 통일교회는 지금까지 싸워 나왔습니다.

개인적인 정성을 능가할 수 있는 가정적인 정성을 들이면 개인적인 역사 가운데 지금까지 거듭된 탕감기간을 일시에 넘을 수 있는 것입니다. 부부가 생명을 내걸고 제물되겠다고 나서게 되면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생각할 때, 그러한 기반을 갖출 수 있는 현시점에 놓여 있는 우리들이 얼마나 엄청나고, 얼마나 위대하고, 얼마나 가치 있는가를 알아야 됩니다.

그러니 아내를 생각하는 것도, 남편을 생각하는 것도, 자식을 생각하는 것도 이와 같은 입장에서 생각하여야 합니다. 또 옷을 입고 먹고 자는 것도 이와 같은 입장에서 입고 먹고 자야 합니다. 사랑을 하더라도 이와 같은 입장에서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 가정이 있다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얼마나 좋으시겠습니까? 지금까지 세계에는 그런 가정이 없었습니다. 만약 그런 가정이 나타난다면 하나님의 복이 그런 가정으로 들어가겠어요, 안들어가겠어요? 하나님을 오시지 말라고 해도,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사 내게 오소서' 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그 가정을 찾으실 것입니다. 그런 문제를 완결짓고 넘어가야 됩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천도를 받들고 하나님을 해방시켜 드리기 위해서는 가정에서부터 그런 부부의 인연을 갖추어서 이와 같은 탕감의 한때를 거치는 길을 가야 됩니다. 그래야만 아담 해와가 하나님을 구속했던 것을 탕감복귀의 원칙대로 한 부부에 의해서 세계적으로 해방시켜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론적으로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 이것을 탕감하여 넘어갈 수 있는 하나의 부부를 중심삼은 가정, 가정을 중심삼은 종족, 종족을 중심삼은 민족, 민족을 중심삼은 국가가 되면 세계는 그 국가를 통해서 하나로 통일되는 것입니다. 그건 자동적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금후에도 통일가의 여러분을 이 민족을 향하여, 이 세계를 향하여 내몰 것입니다. 이것은 비참한 것입니다. 혼자 고생하는 것보다 가슴에 멍이 더 드는 일입니다. 옛날에 혼자 고생할 때는 횡적인 멍이 들었는데 이제는 종적인 아픔을 느껴야 할 입장입니다. 자식을 사랑해야 할 부모가 자식을 사랑할 수 없는 자리에 있어야 하니, 그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나 역시 아픔을 느끼며, 눈물을 흘리며 가야 됩니다.

그리하여 역사시대에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하나님을 중심삼은 가정을 오늘날에 세워야 됩니다.

사적인 가정은 망해도 공적인 가정은 흥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공식화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 가정이 가는 길에 있어서는 아무리 험난한 고난의 길이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그것을 넘을 수 있는 반대되는 힘으로 그 가정과 같이하시기 때문에 그 가정이 가는 길에는 승리만이 남아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탕감노정에 있어서 하나님이 가시는 길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역사적 운명을 상속받는 자가 되자

이 남아진 때에 선생님 가정은 물론이지만 여러분 가정도 복귀를 해야 됩니다. 그리하여 국가와 세계를 복귀한 후 천국을 창건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1970년도부터 1972년도까지의 3년 기간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 기간에 책임을 다하는 날에는 세계가 돌아갈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예」

남편과 아내와 자식이 손에 손을 잡고, 가정을 통하여 이런 거룩한 천명으로 받은 과업을 이루어야 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먹고 입는 것도, 오고 가는 것도 공적이어야 합니다. 장사를 하든지 무엇을 하든지 돈이 한푼이라도 생기거든 보다 공적인 곳에 써야 됩니다.

옛날 뜻을 모르던 시절의 그런 부부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은혜를 받을 수 있고 하나님으로부터 상속을 받을 수 있는 길에 있어서는 내 재산을 다 소모시키더라도 그 이상의 가치가 있으니 가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나가야 됩니다. 재산을 한쪽에 감추어 두었다가는 당장에 벌을 받습니다. 그것은 제물을 도둑질하는 것과 같습니다. 알겠어요? 제물을 도둑질한 도둑놈은 벌을 받는 것입니다. 이게 제일 무서운 겁니다. 범죄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통일교인들은 자기에게 무엇이 있으면 보다 공적인 것으로 어떻게 남기느냐를 생각해야 합니다. 생활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보다 공적인 것을 어떻게 남겨야 하느냐를 생각해야 합니다. 세상에서는 우리 통일교회를 보고 돈이 많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돈이 없어 빚을 진 통일교회입니다. 오늘이 문제가 아니라, 내일의 수난을 방지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런 길을 모색하기 위해서 돈과 사람을 투입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소모전이지만 공적인 일이기 때문에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알고 남은 때를 잘 다스려서 이 현실에서 역사적 운명을 상속받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 도

아버님, 이제 저희들이 갈 길은 막연한 길이 아니옵니다. 보다 공적인 길을 찾아가는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역사를 지배할 수 있는 승리자가 된다는 것을 아옵니다. 이 땅 위에서 주권을 지배하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영원한 역사를 두고 지배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진다는 것을 아옵니다. 이러한 엄숙한 시간 시간들이 저희의 생활무대에서 결정지어진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오늘 저희들이 서 있는 자리가 무섭고 떨리는 자리요, 저희들의 일생 또한 무섭고 떨리는 행로인 것을 느끼게 되옵니다.

아버지, 오늘날 저희들은 공적인 탕감노정을 가야 하겠습니다. 개체를 던져 버리고 공적인 탕감노정을 가야 되겠습니다. 당신께서는 저희들로 하여금 최대의 승리를 할 수 있는 길만을 남기게 하기 위해서 공적인 길을 가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이 공적인 길을 가기 위해서는 환경을 초월해야 되기 때문에 서로서로가 봉사하고 위하면서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을 아옵니다. 이런 저희들이 성경을 볼 때, 그것이 과연 들춰 보면 들춰 볼수록 위대한 아버지의 말씀인 것을 더더욱 느끼게 되옵니다.

아버지, 통일교회가 가야 할 남아진 때가 멀지 않은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찾으시는 가정의 모습은 영광 중의 영광의 모습이오나 그러한 가정이 되기 위해서는 눈물을 흘리는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축복가정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고 가는 가정들은 망할 것이요, 이것을 알고 가는 가정들은 남아질 것임을 아옵니다.

역사를 빛내고, 역사를 움직일 수 있고, 역사에 보탬이 될 수 있는 가정들을 아버지께서 찾아 나오신다는 것을 아옵니다. 아버지께서 수많은 가정들을 축복해 주신 것은 그런 가정이 되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도 아옵니다. 하오니 그렇게 되지 못하는 가정이 없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런 가정의 주인이 되고 부부가 되기 위해서는, 그런 가정의 어머니가 되고 아버지가 되기 위해서는 그런 내용을 확실히 알고 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아침에 저희들이 이와 같은 말씀을 놓고 목적을 향하여 가는 필연적인 과정에서 핍박과 수난의 길을 만난다 할지라도, 저희들이 보다 공적인 입장에 서게 될 때는 아버지께서 반드시 보다 강한 힘을 주시어서 그것을 극복할 수 있도록 해주신다는 것을 아옵니다. 저희에게는 그런 영원한 후방이 있고 영원한 일선이 있다는 것을 저희들이 망각하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저희가 죽더라도 천배 만배 영광의 가치로 묻어 주시고 품어 주실 아버지이신 것을 알았사옵니다. 이렇게 저희들의 미래에는 승리할 수 있는 길만이 있다는 것을 알 때,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 통일가 전체가 규합하여서 남아진 이 민족의 운명과 세계의 운명을 대신하여 최후에 공적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거룩한 무리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렇게 나가는 저희가 날이 갈수록 힘이 쇠진해지는 것이 아니라 내일의 소망 앞에 가중된 힘을 갖는 무리가 되어야 할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시고, 그렇게 되지 못하는 것은 자기를 돌보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혹자는 통일교회를 비판하기도 합니다. 또, 통일교회를 따라 나오는 사람중에도 비판하는 사람이 있을는지도 모릅니다. 하오나 아버지여, 저는 비판받는 자가 되지 않겠다고 몸부림치며 나왔습니다. 따라 나오는 사람들은 망하더라도 통일교회 선생은 망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통일교회 선생은 망하더라도 아버지께서는 망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때문에 아버지께서 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보다 공적인 길을 가면서 눈물을 흘리며 투쟁하고 있사옵니다.

이러한 현실을 거쳐 나가는데 소홀히 하지 않고 자신을 찾아 나가는 길이 여기에 있다면 통일교회는 어느 한때 이 세계 앞에 드러나서 득세할 수 있는 날이 온다는 것을 저는 아옵니다. 저는 이런 원칙을 거쳐 실험한 결과 승리하여 감사한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 통일교인들도 그럴 수 있는 무리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그러기에 이들이 선생의 생활과 하나되고, 선생의 가정과 하나되기를 아버지께서는 요구하고 계신 줄을 아옵니다. 세계를 망칠 수 있는 것도 통일교회 교인이 아니라, 통일교회 선생과 선생의 가정인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먹고 입고 기도드리는 것이 자기의 안일을 위해서가 아니라 만민의 해방을 위하여 보다 공적인 것이 될 수 있도록 몸부림치는 생활이 오늘날 통일교회 스승이 가는 길이라는 것을 이들이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내 하루의 편안함이 오히려 고통을 가져다 준다는 것을 알고, 내 하루 하루의 안식이 천륜을 저끄러뜨린다는 것을 알고 마음을 가다듬고 가는 사람은 결코 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옵니다.

아버지, 저희로 하여금 지금까지 남아지게 해주신 것을 감사드리옵니다. 금후의 역사시대에 있어서 인류와 더불어 탄탄히 남아질 수 있는 길을 가야 하는 것이 아버지의 아들딸인 것을 아옵니다. 저희들이 그 길을 사수하겠나이다. 여기에 모인 아들딸들이 민족을 대신하여 이 길을 사수하고, 세계를 대신하여 이 길을 사수하겠다는 무리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스스로 맹세하고, 스스로 다짐하면서 아버지의 힘에 통제받을 수 있는 거룩한 길이 저희 앞에 있는 것을 압니다. 저희가 재산이 없고 명예가 없다 하더라도 이 이상 가치 있는 자리는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 숙명적인 과제 앞에 엄숙한 모습으로서 봉헌할 수 있는 가정을 어떻게 갖느냐 하는 것이 금후에 축복가정들이 몸부림치면서 해결해야 할 중요한 문제인 것을 이 시간 여기에 모인 당신의 아들딸들이 마음 깊이 명심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성공도 여기에서부터, 희망도 여기에서부터, 행복도 여기에서부터, 천국도 여기에서부터 이루어진다는 것을 저희들이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 이때가 남아 있음을 감사드리옵니다. 이때가 남아지지 않았다 할진대 저희들은 갈 곳이 없게 되었을 것이옵니다. 때를 바라보고 가는 무리는 희망에 벅찬 무리인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가중된 핍박이나 시련도상이 문제가 되지 않는 다는 것도 저는 알고 있습니다. 하오니 저희들 그런 길로 또다시 내모시는 아버지의 채찍이 있음을 감사하고갈 줄 아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겠다고, 이 아침에 결의하게 하여 주시옵기를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전체를 맡겼사오니 맡아 주시옵시고, 저희들이 내일의 총아가 되고 내일의 희망을 아버지로부터 상속받아 인류 앞에 나눠줄 수 있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게 하시옵소서. 그러기 위해서는 보다 제물된 생활, 보다 제물된 생애의 노정을 가야 되겠습니다. 거기에는 생명을 걸고 행동하는 무리만이 가담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실히 깨닫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을 참부모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기 도]

아버지, 5월의 마지막 날이자 5월 들어 다섯 번째 맞이하는 안식일의 이 아침을 당신께서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통일교회가 지금까지 수많은 수난의 과정을 거쳐오면서도 언제나 맞는 안식일이오니 이 시간 당신께서 친히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5월 31일을 마지막으로 하여 새로이 6월을 맞게 되는 내일부터는 이 나라와 이 민족 앞에 새로운 인연을 작정해야 할 중대한 시점이 저희 앞에 놓여 있사옵니다. 이제 역사를 가름하여 새로운 시대의 관문을 넘어서야 하는 최후의 달을 맞이하려는 이날을 당신이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타락한 이후 지금까지의 세월을 더듬어 볼 때에, 아버지께서는 얼마나 외로우셨으며 얼마나 억울하셨으며 얼마나 분통하셨겠느냐 하는 것을 저희들이 알게 되옵니다. 하오나 아버지께서는 그러한 마음을 억제하시면서 한날을 소원하고 찾아 나오셨기에 이제 그 소망의 기점이, 오늘 이 통일교단을 중심삼고 이 민족과 더불어 담판지어야 할 최후의 순간이 분기선상에 찾아오고 있사옵니다. 하오니 아버지여 모든 것이 당신께서 경륜하신대로 되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지극히 어리석고 부족한 자를 세워 지혜롭고 풍부한 자를 부끄럽게 하려 한다'는 말씀과 같이 아버지께서는 이 땅 위에 통일교단을 세우시어 아무것도 아닌 저희들에게 사명을 주시고 몰아내시어 삼천만 민족을 지도하게 하셨사옵니다. 지혜롭다고 하는 수많은 무리 앞에 한줌의 흙밖에 안 되는 저희들을 세우시어 당신의 뜻을 증거하게 하시고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걸어 나오신 자초지종을 증거할 수 있게 하여 주신 놀라운 당신의 은사 앞에 진정으로 감사를 드리옵니다.

당신께서는 천년 만년을 갚는다 하더라도 다 갚을 수 없는 은사를 저희에게 주셨사옵니다. 만우주의 모든 역사의 인연을 총합하더라도 그 가치와는 바꿀 수 없는 귀한 은사이기에 몸 마음 아울러 감사드려야 할 저희들임을 깨닫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아버님, 불쌍하였던 이 민족이 내일이 없는 절망 가운데서 소망의 민족으로 세계에 드러나게 된 것도 당신의 생명이 저희에게 깃들어 있었던 연고이옵니다. 또한 새로운 시대로 연결시키려는 당신의 천적인 수고가 있었기에 불쌍하였던 이 민족은 내일의 소망을 품고 일어섰사옵니다.

이러한 내적인 기반을 중심삼고 이제 저희들은 국가의 부흥을 위하여 나가는 입장에 있사옵니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내적인 부흥을 전개시킬 수 있는 새로운 기점이 외적 기반 위에 연결되지 않고는 이 나라의 금후의 운명을 결정지을 수 없다는 사실을 저희들은 잘 알고 있사옵니다.

그것을 알고 있는 저희들은 뼈중의 뼈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골수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생명의 모든 전체에의 근원을 찬양하고 천주의 가치를 스스로 갖추어야 할 골수의 사명이 저희에게 있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이제까지 저희들은 누가 알아주나 몰라주나 이 나라의 뼈가 되고 이 나라의 골수가 되려고 그늘 속에서 살아 나왔습니다. 짓밟히는 자리도 마다하지 않고 당신이 바라는 소망의 한 점을 향하여 나왔사옵니다. 당신의 뜻에 어긋나는 조건을 남길까봐 슬픔과 외로움의 곡절을 가지고 나온 저희의 발걸음을 아버지께서 지키시고 보호하여 주신 은혜에 감사드리옵니다.

하늘에 영광된 날이 있다 할진대는 거기에 만민을 세워 만민의 영광된 날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버지의 마음인 것을 아옵니다. 또 지나간 수난의 노정에서 죽어진 자들까지 부활시켜서 자랑하고 싶으신 당신의 마음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나 부활된 개체만을 가지고는 자랑할 수 없다는 당신의 창조원칙이 있었기에 보잘것없는 저희들을 부활시키려고 또다시 수고하시는 아버지의 은사에 감사드리며, 개인의 부활권을 가정의 부활권, 종족의 부활권, 민족의 부활권, 국가의 부활권으로 확대하여 찾아나오신 아버지의 노고에 진정 무엇으로 감사드려야 할지 모르는 저희들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그러한 것들이 얼마나 당신을 슬프게 하였던가를 생각하며 다시 한번 사죄드리고 용서를 바라는 저희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지금까지는 6천년 역사의 큰 담벽이 저희를 가로막고 있었으나 이제는 다 무너졌습니다. 이제 저희들은 내일의 새로운 소망의 물결을 타고 망망한 대로를 향해 힘차게 포구를 떠난 배와 같사옵니다.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본향의 포구를 향하여 새롭게 항해를 해야 할 때가 저희 앞에 다가온 것을 바라보게 될 때, 70년도는 수난의 한때인 동시에 소망의 한때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시점은 새로운 출발을 위하여 기동을 해야 할 출발의 시점이기에 모든 일이 어렵사오나, 이 시점에서 결의하고 나서야 할 때가 또한 70년도라는 것을 저희들이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은 통일교회가 갖추어야 할 자세가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당신께서 이 교회를 세우시고 바라시는 소망의 기준이 어떻다는 것도 알고 있사옵니다. 기성교회를 두고 통일교회를 통해서 이 나라 이 민족을 당신 품에 품고자 하시는 당신의 거룩한 소원 앞에 제물될 수 있는 아벨을 부르고 계신 것도 알고 있사옵니다.

아벨적인 개인을 찾는 역사적인 흐름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아벨적인 가정은 어디에 있느냐고 찾으시는 당신은 얼마나 초조한 마음으로 지금까지의 역사노정에서 싸워 나왔는지를 저희들이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 가정을 통하여서 아벨적인 종족과 아벨적인 민족과 아벨적인 국가를 찾고, 그 찾은 종족 민족 국가를 중심삼고 아벨적인 세계를 만들기 위하여, 즉 동양과 서양을 연결시키어 최후의 결판으로 연결해야 하는 수고의 노정에서 아버님이 저희들을 부르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아야겠습니다. 개인이 수고해야 하는 이러한 노정에서 절망하는 통일의 무리가 없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는 절망에 빠진 개인을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아벨적인 개인들을 세워 그들에게 아벨적인 가정을 찾아오라고 부르시는 것이요, 가정에 있어서는 아벨적인 탕감의 노정을 걸어온 그들을 통하여서 종족을 찾아오라고 권고하신다는 것을 저희들은 아옵니다. 또 종족적인 십자가의 노정에서 책임을 다하려고 몸부림치는 아들을 향하여 민족을 찾아오라고 권고하시는 것이며, 나아가 아벨적인 민족으로서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전체를 책임지고 싸우는 노정에서 우왕좌왕하며 방향을 가리지 못하는 자들에게 아버님은 또 다시 아벨적인 입장에 있는 국가를 찾아오라고 권고하시는 것을 아옵니다.

이와 같이 저희들에게는 국가를 넘고 세계와 천주를 거쳐 아버지의 사랑의 세계까지 가야 할 길이 남아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오늘날 여기에 모인 저희들이 아벨적인 개인이 되기 위한 싸움의 노정에 있어서 승리적 가치를 지닌 무리가 되어 있사옵니까?

개인의 주체적인 권한과 주체성을 완결하기 위해서는 개인적 가인을 굴복시켜야 되는 것이요, 개인적 가인을 굴복시키지 않고는 복귀될 수 없는 필연적인 운명에 처해 있는 저희들임을 알았사옵니다. 개인적인 이 한의 고개를 넘어야 아벨적인 가정을 이룰 수 있는 것이요, 아벨적인 가정의 고개를 넘기 위해서는 가인적인 가정을 굴복시켜야 되는 것을 아옵니다. 그러지 않고는 아벨적인 종족으로서의 환경을 갖지 못한다는 것을 저희들이 알았사옵니다.

아벨적인 종족의 인연을 갖춘 통일의 축복가정들이 민족을 대신하여 제물을 드려 속죄의 사명을 하지 않고는 더 이상 전진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축복가정들이 속죄의 사명을 다하여야 되겠사옵니다. 그렇게 되면 민족 전체가 머리를 숙이게 되어 하늘을 향하여 아벨적인 국가를 바라보고 나아가는 길이 열린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한 나라가 남과 북으로 갈라져 있사옵니다.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대결의 기점이 되어 있사옵니다. 하오니 대한민국이 필연적으로 가야 할 운명의 길을 당신이 지켜 주시옵소서. 저희들은 아버지의 피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야 할 수난 길에 들어섰사옵니다. 먼저 맞는 자리에 서서 슬픔과 외로움을 품고 몸부림치면서도 내일의 승리를 앞에 놓고 있사오니 아버지여, 이 민족에게 강함과 담대함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낙망과 절망 같은 것은 한순간도 허용치 않는 긴장된 시점이 70년도부터 3년 동안이라는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외적으로 전국적인 정세가 그러하거와, 내적으로 교회의 뜻을 중심삼고도 그러한 시점이 저희 눈앞에 보이고 있사옵니다. 저희가 가인 국가를 굴복시키고 아벨 국가의 사명을 다하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사오니, 이러한 운명길을 가는 저희들을 아버지여, 지켜 주시옵소서.

나라 없는 백성처럼 불쌍한 것은 없습니다. 부모가 없는 사람 이상으로 불쌍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인연을 넘어 나온 통일의 무리들에게 있어서는 이제 고아의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부모를 가질 수 있는 시대를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 시대 또한 지나가고 이제는 종족의 인연, 민족의 인연, 국가의 인연을 가져서 내일의 새로운 국가를 형성하기 위하여 염려하고 애국애족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사옵니다.

민족적 정기가 타락한 세계를 벗어나 당신의 심중에 묻혀 있던 애국애족의 심정을 가지고 드러나야 할 때가 저희에게 가까이 왔사옵니다. 그러나 아버님의 마음을 이어받아 애국애족하는 아들이 몇 명이나 되느냐고 묻게 될 때, 저는 아버지 앞에 눈물을 흘리며 회개해야 함을 느껴야 하옵니다. 아버지여, 용서하시옵소서.

지금까지 수많은 피어린 도상에서 민족의 한을 풀겠다고 선두에 서 가지고 나가는 그 걸음을 따라 나오는 무리들을 바라볼 때, 아버지의 염려의 대상이 되는 수는 많사오나 아버지의 염려를 책임질 수 있는 자는 많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옵니다. 이러한 이들을 바라 볼 때에, 내가 가야 할 앞날에 십자가의 길이 또 남아 있다는 것을 느끼옵니다.

내가 안주하고 영위하여야 할 십자가의 길이 남아 있기에, 금후의 노정에서 힘찬 걸음으로써 민족을 대신하여 싸움길을 개척해야 되겠사옵고, 이들이 가야 할 운명길을 개척해야 되겠사옵니다.

민족이 남과 북으로 갈라져 있어 민족 분열과 더불어 슬픈 심정의 인연을 가질 수밖에 없는 한이 있사오니, 이 한을 풀어 남과 북을 규합해야 할 책임이 뜻을 아는 저희에게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시옵소서. 삼팔선 이북은 가인이요, 삼팔선 이남은 아벨의 입장이기 때문에 남한 국민이 먼저 당신께 충효의 도리를 갖추어야 할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먼저 믿음의 기대를 세워야 하는 것이 이 나라 이 민족의 사명이기 때문에, 이 민족은 민족을 사랑하는 것보다 먼저 하늘을 사랑하여야 되겠사옵니다. 청산지어야 할 세계적인 인연이 연결되어 있기에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민족이 되어야 하겠사옵니다. 이것이 이 나라 이 민족의 생사를 판결짓는 요인이 된다는 것을 그 누구도 모르고 있사옵니다.

그러기에 민족을 대표한 불쌍한 통일교단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에 있어서 선두에 서야 되겠사옵니다. 원수의 명령에 억지로 굴복하고 따라가는 이북의 그 누구보다도, 백배 천배로 자연스러운 환경에서 누가 하지말라고 해도 스스로가 하지 않을 수 없는 마음을 가지고 맡은 바 책임을 다하여 그들을 능가해야 되겠사옵니다. 그렇게 하여 그들을 능가하고, 애국애족하는 충신 열녀의 도리를 세우지 않고는 이 나라가 하늘편에 복귀될 수 없다는 엄연한 사실을 저희들은 똑똑히 알아야 되겠사옵니다.

아버지! 교단을 중심삼고 필연적인 운명길을 결판지어야 할 한 시점이 저희 앞에 놓여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사옵니다. 지금까지의 역사를 거쳐 나온 모든 인연과 당신의 수고의 공적과 최고의 위정자들 앞에 하늘의 은사를 허락하는 기쁨의 날들이 6월에 벌어지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옵고 원하옵니다.

지금까지의 역사노정에서 당신은 얼마나 수고하셨사옵니까? 이러한 때를 준비하기 위하여 움직여 오신 아버지의 노고에 진정으로 감사를 드리옵니다. 그 누가 뭐라 하거든 당신께서 수고한 것을 자랑하게 하여 주시옵고, 그 누가 비난하거든 당신의 피어린 투쟁사를 듣게 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럴 수 있는 사사건건을 당신의 품 가운데 간직하시사 만민의 심정 위에 옮겨 줄 수 있는 위업으로 삼으시고 애국애족할 수 있는 만민 평등의 심정으로 만민을 품어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이 시간 이곳을 향하여 축도를 드리는 무리들을 거룩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당신 앞에 쌍수 합장하여 분향의 실체로서 제사장의 책임을 다하는 아들딸이 있거든 그들의 후손에게까지도 천만 배의 복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또 자기 자신을 잊고 자기 가정을 제물로 삼아 민족을 위하여 해원성사의 뜻을 고대하는 가정이 있거든 뜻을 품고 가시는 당신의 발걸음을 멈추시어서 그들에게 만복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당신께서 저희들을 지도하는 것이 사랑의 마음인 것을 제가 알았사옵니다. 하오니 당신께서 그들을 기억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또한 세계 도처에 널려서 외로운 길을 가고 있는 스승의 길을 따르느라고 고통을 당하고 있는 수많은 자들 위에도 아버지의 축복의 손길을 펴시옵소서.

그들은 외로운 무리이옵니다. 나라는 있으되 나라 없는 백성이 되었사옵니다. 수많은 친척이 있으되 친척이 없는 무리가 되었사옵니다. 그들은 외로운 자리에서 하늘편의 나라를 건설하여야 할 건국의 용사들이옵니다. 외로운 족속이지만 승리의 이스라엘 민족이 되어야 할 무리이옵니다. 하오니 흐르는 세계 역사의 가운데를 가로막고 승리의 방패를 세워 새로이 이스라엘권을 창건하여야 할 하늘의 용사들인 것을 기억하시사, 시대와 더불어 매장되고 역사와 더불어 흘러가는 무리가 되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오히려 당신께서 흘러가는 역사를 역행하시어서, 당신의 거룩함을 드러내고 만민의 새로운 전통을 세우는 데에 있어서 보람을 가지는 선각자들이 되고 개척자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지금까지 자랑한 모든 것에 있어서 나를 중심삼고 자랑한 것은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었나이다. 처음도 당신이요, 과정도 당신이요, 끝도 당신이거늘 저희들이 그러해야 할 책임을 못한 것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당신을 슬픔의 마음으로 염려시켰던 사연 사연들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민족의 해방을 위하고, 세계 만민의 해방을 위한 당신의 거룩한 노정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그 해방의 자리까지 가지 못하였사오니, 저희들 앞에 쉴수 있는 일순간도 허락지 마시옵소서.

과중한 책임의 십자가를 이제 아버지의 분부를 받아 온 국민에게 연결시켜야 할 순간이 다가온 것을 느끼는 이 때, 저희들은 쉴래야 쉴 수 없다는 마음 자세를 가져야 되겠사옵니다. 안식의 한날을 바라보며 수고의 노정을 개척해야 할 발걸음을 진심으로 흠모하는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여기에 모인 당신의 자녀들이 누구를 위하여 모였사옵니까? 당신이 남기신 뜻을 위하고, 당신의 나라를 이루기 위하여 모였사옵니다. 그러나 당신의 나라에 가기 위해서는, 그 승리의 곳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정녕 수고의 노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면서, 이 모든 말씀 참부모의 성호 받들어 기도했사옵니다. 아멘.

말 씀

여러분도 알다시피 오늘은 5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5월이 오늘로써 마감되고 내일부터는 6월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어느덧 절기도 봄절기는 지나가고 여름절기가 우리 앞에 다가왔습니다. 이 여름절기가 지나면 가을절기가 우리의 앞에 찾아오게 될 것이고, 가을절기가 지나면 겨울절기, 그 다음에 다시 봄절기가 찾아오며 일년이 지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덧없이 지나가는 것이 세월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해산하는 여인과 같은 인류 역사

우리가 뜻을 중심삼고 볼 때, 이 뜻과 흘러가는 시간과는 어떤 관계를 맺어야 되겠습니까? 한 사건을 두고 볼 때, 그 사건이 일어나기까지는 동기가 있고 과정이 있고 결과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나타나야 좋으냐 나쁘냐 하는 문제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출발 당시에 세워 놓은 목적의 달성여부가 나타난 결과로서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100이라는 결과를 바라던 사람이 100이상의 결과를 얻었다면, 그 결과를 얻기 위하여 지낸 모든 날들, 즉 동기로부터 과정으로 흘러간 모든 시간이면 시간, 세월이면 세월은 비로소 절대적인 가치를 갖게 되고 그 사람은 거기에 대한 주장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에 100이라는 결과를 목적하였는데 이것이 100이 되지 못하거나 혹은 실패의 결과를 가져 오게 되면, 그 동기부터 과정의 모든 시간은 원한의 시간이요, 슬픔의 시간이요, 회상하기조차 싫은 시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흘러가는 역사시대를 뜻을 중심삼고 볼 때도 역사가 남겨놓은 결과가 뜻과 더불어 어떤 내용으로 결정되느냐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뜻이 크면 그 큰 것에 비례되는 시간의 소모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뜻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더불어 인간의 노고가 거기에 투입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시간이 투입된 것은 물론이요, 인간의 많은 노력이 투입된 그것이 오히려 소모의 결과를 가져왔느냐, 아니면 거기에 투입된 내용을 총수습하고 보답까지 할 수 있는 만큼의 결과를 가져왔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흘러간 그 기간에 투입된 시간과 인간의 수고가 슬픔이 되었느냐, 아니면 기쁨이 되었느냐 하는 문제가 대두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승패는 몇십 년의 기간을 두고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일순간에 결정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생을 두고 보더라도 여러분이 태어나는 그 순간은 긴 시간이 아닙니다. 물론 태어나기 전까지의 복중의 시기가 있지만 그 복중의 10개월이라는 기간은 출생하는 한 순간을 위한 준비기간인 것입니다. 그런데 10개월 동안 아무리 잘 준비했다 하더라도 결정적인 한 순간을 잘 넘기지 못하면 태어나는 그 아기는 비운의 운명을 맞게 되는 것입니다.

10개월의 기간을 안전한 생명체로서 꾸준히 길러 나온 것은 탄생하는 그 한 순간을 장식하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하면 출생을 바라보는 목적의 한순간을 위해서 복중시대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복중시대가 아무리 훌륭했다 하더라도 태어나는 한 순간에 잘못하게 되면 비운의 결과가 아니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해산하는 여인은 고통을 겪습니다. 해산하는 순간은 극복하기 어려운 수난중의 수난의 고비입니다. 한편으로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이 따르지만 또 한편으로는 말할 수 없는 기쁨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수난의 극치에서 신음하던 산모도 태어난 아기를 바라보며 기쁨의 얼굴로 새로운 소망을 품는 것입니다. 거기에서부터 새로운 출발이 벌어지는 것처럼 인류 역사도 해산의 한때를 다짐하고 그것을 계승하면서 발전해 나왔다는 것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중심삼고 인류 역사는 하나의 목적을 지향해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원리적인 가르침을 통하여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야 할 뜻의 행로

개인의 목적을 완성하면 완성한 그 결과가 가정의 목적을 위한 동기가 되고, 가정의 목적을 이루게 되면 그것은 또 하나의 목적을 지향하는 새로운 종족적인 목적의 동기가 됩니다. 거기서 종족적인 목적을 이루면 그것을 새로이 민족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한 동기로 삼고, 민족적인 목적을 이룬 다음 새로이 하나의 목표를 지향해서 국가적인 목적을 이루는 것입니다. 국가의 인연을 거쳐서 세계에 하나의 승리권을 마련해야 되는 것이 우리가 가야 할 뜻의 행로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세계적인 하나의 목적권을 중심삼고 볼 때에, 자기 일대에 세계적으로 승리한 하나의 목적권을 성취하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먼저 개인적인 승리의 목적권을 갖추어야 되고, 가정적인 승리의 목적권을 갖추어야 되고, 그것을 다시 종족 민족 국가 세계적인 승리의 목적권으로 연결시켜야 합니다. 이러한 것을 다 갖추지 못하면 세계적인 목적의 시대에 동참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개인이 있다면 그 개인의 역사는 세계사적인 내용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내용이라는 것은 민족사를 초월하는 승리적인 내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뜻 앞에 승리의 결과를 상속받아 나아간 역사적인 선지자들인 것입니다.

그들이 종적으로 세워 놓은 그 공(功)을 끝날에는 횡적으로 탕감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종적인 역사과정에서 수천 수만의 선조들이 다 이 일을 했다 할진대, 그것을 오늘날의 수많은 사람들이 횡적으로 탕감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그렇게 되면 좋겠지만 그렇게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역사시대에 수많은 사람들이 개척의 행로를 거쳐왔지만, 목적이라는 것은 전체를 집약시키지 않고는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의 열매라는 것이 춘하추동의 사계절을 두고 나무와 씨에 보유되어 있던 생명력을 집약한 실체적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우주의 목적, 역사의 목적 혹은 인류의 목적을 두고 볼 때도 그 목적 자체에는 역사노정의 모든 내용을 집약시킬 수 있는 삶이 개재되어 있어야 합니다. 능동적인 주체권을 가진 존재는 어떤 시대권내에 흡수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시대의 권을 흡수할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합니다. 즉, 자체력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선지자들한테 끌려 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선지자들이 쌓아 올린 것들을 흡수하여 집약할 수 있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는 열매, 즉 목적은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종적인 역사노정에 왔다간 수많은 선지 선열들, 또는 공신들이 추구해 나왔던 것들을 결실할 수 있는 시대를 맞이한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수많은 사람을 중심삼고 종적인 역사시대를 횡적으로 탕감할 수 있느냐 할 때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의 결실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 결실은 역사노정의 선지선열들을 집약시킬 수 있는 생명적인 주체성을 지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주체성을 지닌 존재가 나타나면 중심이 결정됩니다. 그 중심은 춘하추동의 모든 시련의 요건을 초월한 것이며, 부딪치는 모든 수난의 여건을 흡수하고 극복할 수 있는 자신력을 가진 것입니다. 그러한 입장에 서지 않고는 새로운 결실의 존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합니다.

마찬가지로 역사적으로 결실이 되어야 할 하나의 목적에 있어서도 그 목적을 이루어야 할 실체가 이 땅 위에 나타나야 합니다. 이것은 불가피한 것입니다. 그 주체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세계사적인 결실을 대신 할 수 있는 하나의 결과인 것입니다.

지금까지 거쳐온 역사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씨를 심고 이것을 가꾸어온 공적이 있다 해도, 그들이 이룩한 전체의 공적을 집약시켜서 하나의 결실로서 규합할 수 있는 역사적인 목적의 실체가 나타나면, 그 누구도 그 실체 앞에서 자랑할 수 없습니다. 그 실체는 지금까지의 역사노정에서 세워졌던 어떠한 개인이나 가정도 흡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는 그 어떠한 종족이나 민족이나 국가도 흡수할수 있어야 하며 세계를 하나로 만들 수 있는 주체적인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순간을 맞기 위한 인류역사

그럴 수 있는 시대는 흘러가는 역사과정에 있어서의 한때이며, 이것은 지극히 짧은 기간인 것입니다. 그런 한때를 맞이할 사람이 있을 것이되, 그 사람은 평생을 그 한때에 저울질하여 맞춰야 됩니다. 이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입니다. 수억 수천만 년의 역사를 거쳐온 인류사를 논의하는 이 시점에서 70평생의 짧은 생애를 가지고 완전히 기준을 갖추어 그 때에 맞춘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그러나 나만이 그 때를 맞추기 위해 바라나온 것은 아닙니다. 지금까지의 역사노정에서 왔다 갔던 수많은 사람들, 사색할 수 있는 수많은 인간들이 그 때를 생각한 것입니다. 막연하나마 한 기준을 중심삼아 가지고 그 기준 앞에 자기 생애를 절충시키고 그 기준에 조정을 당하기 위해 지금까지 수고하며 정성들여 나온 것이요, 혹은 싸우며 나온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미루어 보게 될 때, 역사는 간단히 투쟁사요 전쟁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 무엇 때문에 인류역사가 전쟁사가 되어 나왔느냐? 어떤 독재자나 위인, 혹은 어떠한 혁명가가 제시한 역사적인 이념이나 투쟁의 역사노정은 모두가 그 한때를 자기 수중에 넣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전쟁사는 그 한때를 얻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비운의 전쟁 가운데 사라진 수많은 애혼들도 결국은 이러한 목적의 기점을 세우려고 싸웠던 것이요, 그런 승리를 얻기 위하여 싸웠던 것이며, 어떻게라도 자기를 절충시켜 한때의 인연을 결정짓겠다고 싸웠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각 개인을 중심삼고 우주가 동원되어 한때를 맞이하기 위하여 투쟁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개인이 그러한 때를 찾는다고 해서 전부다 그 때를 맞을 수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특정한 한 사람만이 맞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출발은 최고의 출발이 될 것이요, 그 사람이 남긴 결과는 최후의 결과 될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한 사람이 맞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인연을 맞이할 수 있는 그 한 사람도 생존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70년이면 70년이라는 생애가 전부다 인연지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생애 가운데 어느 한 순간이 역사적인 순간과 인연지어지는 것이요, 그 한 순간에 해결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사람과 하나님이 제시한 때가 연결되는 때를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그 사람과 그 때의 일치는 순간에 이루어집니다. 짧은 생에에서도 짧은 하루, 그 짧은 하루에서도 전체가 아니라 24분의 1도 못되는 짧은 순간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주사적인 승패를 결정할 하나의 정상이 있을 것이되, 그 승패의 결정은 며칠도 아니고 몇 시간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로 똑딱하는 순간에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역사는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오늘날 세계는 국제적인 위정자나 정치가들 몇 사람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습니다. 미국이면 미국, 소련이면 소련을 중심삼고 불과 몇 사람 안 되는 세계적인 위정자들이 인류가 흥하느냐 망하느냐 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회담을 하고 있습니다. 그 회담이라는 것은 오랜 기간을 두고 역사적인 인연을 중심삼은 것이지만, 그 결정은 순간에 되는 것입니다. 만남도 결별도 똑딱하는 순간에 이루어지고, 승리도 똑딱하는 순간에 결정되는 것입니다. 일순간에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자들이 가는 길

오늘날 어리석은 사람들은 고지보다 평지를 좋아하지만 뜻있는 사람들은 고지를 찾아 올라갑니다. 그것이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도의 길을 갔던 사람들은 평지를 중심삼고 정성들인 사람들이 아니라, 높은 산을 중심삼고 정성들인 사람들입니다. 고지를 찾아 올라간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누구의 침범도 받지 않고, 누구도 관여할 수 없는 독자적인 길을 찾은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특별한 곳에서 특별한 사람을 중심삼고 하나님도 기억하고, 인류 전체도 기억하며, 온 우주도 기억할 수 있는 특별한 사건을 추구했던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여러분에게 제시한 문제가 생사의 분기점입니다. 그것은 흥망의 분기점이요, 선악의 분기점인 동시에, 여러분에게 있어서는 생애의 분기점이 될 것입니다. 가정을 중심삼고 볼 때, 가정의 분기점도 그와 같은 것입니다. 순간을 통하여 희비(喜悲)가 교차되는 한때가 있을 것입니다. 국가의 운명에도 이와 같은 분기점이 있는 것이요, 세계의 운명에도 이와 같은 분기점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혜로운 사람은 어디를 찾아 가느냐? 여기에서 지혜로운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고지를 향하여, 모험을 무릅쓰고 정상을 바라보며 나가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시대를 지배할 것이요, 역사를 지배할 것입니다. 세계적인 모든 것을 지배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 한 순간을 위하여 생명과 재산을 전부다 투입할 수 있는 자신이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역사의 모든 인연을 종합해서 폭발시킬 수 있는 자체력을 가진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를 지배하는 사람은 용단을 내릴 줄 알아야 합니다. 생사를 좌우할 수 있는 권을 갖지 못한 사람은 국가를 지배할 수 없는 것입니다. 평소에는 지배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난세에는 국가를 지배할 수 있는 새로운 방향을 가려 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그러한 순간, 결정적인 한 초점, 그 정상을 향하여 얼마만큼 도약할 수 있느냐? 만약 개인적인 세계사적 기준을 통과하여 가정적인 세계사적 결정권을 넘어선 사람이 있다면 그는 지금까지의 역사상 가장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왜 가정 구원을 해야 하는가

지금까지의 종교는 개인적인 문제의 해결을 중심삼고 싸워 나왔습니다. 모든 종교가 하나의 완전한 사람을 모체로 하여 개인적인 구원을 표준삼아 나왔지, 가정의 구원을 중심삼아 나온 종교는 없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통일교회는 역사적인 종교가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통일교회는 개인적인 구원뿐만 아니라 가정적인 구원을 모색해 나왔습니다. 모든 가정이 완전구원되어 일체화될 때 종족적인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요, 그것이 형태를 갖추어 벗어날 수 없는 하나의 인연권이 성립되어 넓어지게될 때, 민족편성은 자동적으로 되는 것입니다. 나아가 그 민족이 책임을 다하게 되면 국가 형성의 과정을 거쳐 세계가 자연히 복귀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회의 구성에 있어 기본적인 것은 참다운 가정, 즉 하나님이 찾아오실 수 있는 가정인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통일교회에서는 천주주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역사에 없었던 새로운 종교관입니다. 왜 가정을 강조하느냐? 세계를 복귀하기 위해서는 먼저 참다운 가정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종교는 개인적인 구원을 중심삼은 섭리시대권내에서 가정적인 구원을 중심삼은 섭리권내로 도약해야 합니다. 이것은 역사가 증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것도 가정을 찾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이 있지만 크게 둘로 나누어 보면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됩니다. 이들이 하나될 수 있는 비법을 모색하는 것이 우리의 근본목적인 것입니다. 이제까지 그러한 하나의 결실적인 가정의 기원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모색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한 기원이 나타나 씨를 뿌리면 새로운 나무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통일교회의 축복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개인적인 정상에서 가정적인 정상을 어떻게 뛰어넘느냐를 생각합니다. 또한 가정적 정상에서 종족적 정상을 어떻게 뛰어넘느냐를 생각합니다. 그것을 위하여 가는 사람이 있어야 가정이 구원되고, 그런 가정이 있어야 그 종족이 구원되는 것입니다. 또 그 종족은 민족의 정상을 넘어가야 하는 것이요, 민족은 국가적 정상을 넘어가야 합니다. 그 다음에 국가가 세계적인 정상을 타고 넘으면 세계복귀는 간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개인 가정 종족 민족 국가 세계 천주의 7단계를 넘어가야 합니다. 이 7단계를 넘어 8단계에 올라서면 하나님과 교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8수는 재출발수입니다. 그러므로 탕감복귀노정에 있어서 점핑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개인적인 승리의 기반에서 가정적인 승리로 연결시키는 목적은 무엇이냐? 그 연결시키는 목적은 내 가정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내 가정이 잘살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통일교회의 축복을 받는 것은 자기의 가정만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남자 여자가 서로 좋아하기 위해서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관성이 없는 가정은 망합니다. 축복 가정을 세우는 것은 에덴을 향하여 발판을 일시에 연결시키기 위함입니다. 그러기에 가정을 찾아 나서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개인적인 존재에서부터 가정적인 존재, 종족적인 존재, 민족적인 존재, 국가적인 존재를 거쳐 세계적인 존재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자기의 일생을 한 점에 연결시켜서 일치되었다 하는 날에는 이 천지는 그 권내에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우주적인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통일교회 식구가 필연적으로 가야 할 길

참다운 개인이 있을 때에 참다운 가정, 참다운 종족, 참다운 민족, 참다운 국가, 참다운 세계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세계에서 새로운 인생관을 갖고 새로운 생활의 터전을 갖추어 새로운 국가를 형성할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형성되는 국가는 개인의 어떠한 목적이나 욕망을 중심삼고 형성되는 국가가 아닙니다. 그러기에 지금까지 개인적인 욕망을 중심삼고 이루어진 가정이나 나라는 좋아할 것이 못 되는 것입니다.

참다운 종족, 민족, 국가, 세계를 이루는 길은 누구나 쉽게 갈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그것들이 요구하는 내용을 충족시키고, 그 내용과 일치되어야만 됩니다. 그래서 새로운 소망의 터전과 새 역사의 내용과 일치된다는 것을 인식할 때, 그 가는 길이 어렵더라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길을 거쳐가지 않으면 참다운 종족, 민족, 국가, 세계와 인연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통일교회도 개인적인 구원 완성, 가정적인 구원 완성, 종족적인 구원 완성, 민족적인 구원 완성, 국가적인 구원 완성, 세계적인 구원 완성의 길을 가야 합니다. 그 길은 어차피 우리가 가야 할 필연적인 길입니다.

그런데 그런 운명길을 가는데 있어서 모든 것을 종합해 가지고 하나의 씨로서 심을 수 있는 그 주체가 누가 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은 개인의 책임관에 의해 결정되는 것임을 여러분은 알아야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개인이 잘 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가정이 망하느냐 흥하느냐 하는 문제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정이 잘 가느냐 못가느냐에 따라서 앞으로 올 수많은 가정들이 망하느냐 흥하느냐가 결정되며, 지금까지의 역사노정을 거쳐온 가정들과 현재의 가정들이 부활하느냐 사망하느냐도 결정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 종족 민족 국가 세계까지도 잘 가느냐 못 가느냐 하는 문제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의 가정은 하나의 씨와 같은 것입니다. 그 씨는 땅에 심어져서 봄 여름 가을 겨울절기를 거친 다음에 봄을 맞아 다시 뿌려질 수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주사의 정상에 설 수 있는 사람

그러면 우주사적인 하나의 정상은 어떠한 사람이 먼저 만나게 되느냐? 지금까지 말한 중심적인 책임자가 먼저 만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떠한 자리에서 만날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행복스러운 자리에서 만날 것이냐 비참한 자리에서 만날 것이냐? 지금까지의 역사의 흐름은 행복보다는 비운을 중심삼고 흘렀기 때문에 말할 수 없이 비참한 자리에서 인연될 것입니다.

비참한 자리에서 무엇을 중심삼고 인연될 것이냐? 기쁨을 중심삼고 인연될 것이냐? 아닙니다. 비장한 결의와 맹세를 중심삼고 인연될 것이요, 시련과 사건이 교차되는 자리에서 결정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은 그것을 위하여 서두를 일이 있다면 최고로 서둘러야 합니다. 또한 최고로 긴장해야 할 것입니다. 생사가 결정되는 최고의 경각 중의 경각에서 여러분들은 걸어야 할 것입니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순간, 맥박이 끊어지려고 하는 순간이 결정적인 요인이 된다고 할 때, 오늘날 통일교회도 그러한 자리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쓰러지고 말 것입니다. 통일교회에 인연된 하나를 잡아당길 때, 거기에 전체가 끌려오고 하나님까지도 끌려올 수 있는 내용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없으면 통일교회는 흘러가 버릴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여기에 근거를 두고 살아간다면, 어떤 세력이 여러분의 꽁무니를 잡아당기겠습니까? 만약 어느 누가 잡아당기더라도 여러분은 `나는 떨어질 수 없다'고 하며 끌려가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끌려가면 전체가 끌려간다 할 수 있는 결탁점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자기를 끄는 존재를 굴복시켜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그 세력 앞에 굴복당할 것입니다.

사탄은 반드시 이런 놀음을 하여서 여러분을 잡아떼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은 어느 순간을 중심삼고 한번 결정적으로 판가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는 뜻길을 갈 수가 없습니다.

우주를 부활시키려면

여러분은 탕감원리를 배웠습니다. 그러기에 통일교회의 원리에서 배운대로 가야 합니다. 그러면 사탄은 여러분을 잡아떼려고 할 것입니다. 그 힘은 여러분의 힘보다 강합니다. 여러분이 원리에 결탁되었다 하면 마구칠 것입니다. 여자들도 사정없이 칠 것입니다.

여기에서 여러분은 자신의 손이 빠지고 허리가 끊어져도 놓지 말고 달라붙어야 합니다. 다리가 부러져도 달라붙으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놀음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놀음을 하려면 배후에 강력한 힘을 갖고 있든가, 다른 곳에서 빌려 오든가 해야 합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야 됩니다. 이처럼 통일교회의 뜻을 따라가는 길에 있어서는 겨울절기의 얼음처럼 꽝꽝 달라붙어야 하는 때가 있을 것입니다. 달라붙을 수 없는 환경이지만 붙어야 하는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통일교회에 나오려면 수난의 길을 가야하고, 겨울절기와 같은 핍박시대를 거쳐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여기에 달라붙어 있는데 사탄이 끌고 가서 죽인다면 그때는 하나님과 더불어 죽는 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죽이려 하면 하나님이 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먼저 맞는 것입니까? 누가 먼저 맞는 거예요?

여러분의 아버지 어머니가 여러분의 양다리를 붙잡고, 형제들이 양팔을 붙잡고 잡아당길 것입니다. 사탄세계도 사탄을 중심한 사위기대로부터 출발했기 때문에, 그것을 탕감하려니 여러분의 양다리와 양팔을 사탄세계의 부모형제들이 붙잡고 힘을 합하여 한꺼번에 잡아당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되는 것입니다. 선생님도 그런 과정을 거쳤습니다.

이런 원칙을 중심삼고 성경에 네 집안 식구가 원수라는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 그런 말이 어디 또 있어요? 이것은 성경에만 있는 내용입니다. 자신의 집안 식구가 원수이니, 부모도 원수요, 자식도 원수라는 거예요. 그러므로 성경은 위대한 섭리의 핵을 갈파한 경서라는 것입니다.

자, 여러분! 여러분은 통일교회 교인입니까? 여기에 통일교회 문선생이 있지만 나도 예외가 아닙니다. 내 생명과 재산 전부를 걸고, 세계의 모든 소망을 걸고 나섰는데 떨어져 나가겠습니까? 남자라면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고 세계적인 내용을 이루기 위하여 욕도 할 것이고, 별의별 작전도 다할 것입니다.

여러분이라면 그저 입을 벌리고 혀를 날름날름거리며 끌려가겠습니까? 죽음의 교차로가 천지에 가로놓여 있고, 뼈를 깎는 듯한 고통이 있는 그곳으로 갈 거예요? 못간다고 하다가는 다 말아먹고 말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내 목이 끊어지든지 네 목이 끊어지든지 당겨보아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누구도 못 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끊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죽더라도 하나님과 더불어 죽었다 하는 자리에 서야 합니다. 하나님편을 치는 자는 망합니다.

하나님이 동참하실 수 있는 환경적 유대를 가져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도 `아바 아버지여 만일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피하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아버지의 뜻은 우주를 부활시키는 것입니다. 우주를 부활시키는 과정에서 누가 나를 잡아채더라도 끝까지 남아져야 합니다. 남아지기 위해서는 사탄세계의 작전법 이상의 작전법을 써야 되고, 사탄세계 이상의 생명력을 길러야 합니다. 사탄세계 이상의 죽음길도 갈 수 있어야 됩니다.

역사는 이러한 하나님의 노력을 통해 내려 주신 삶의 원천과, 승리의 조건과, 악에 대한 절대적인 방패의 기준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세계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통일교인이 가는 길

그러면 통일교회 문선생의 노정에 있어서 분기점은 어디냐? 여러분, 그것을 생각해 보았어요? 그것은 어느누구도 모를 것입니다. 설명을 해도 알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확증적인 신념과 더불어 확증적인 내용을 갖추고 있느냐, 또 그것이 세계사의 흐름을 역행시킬 수 있느냐, 그것이 깨지느냐 전체가 깨지느냐 하는 문제가 대두되나 전체를 깨뜨릴 수 있어야합니다.

하나님의 심정세계에도 분기점이 있습니다. 그러면 시간을 중심삼고 볼때 하나님이 찾아온 최후의 분기점, 그 한 순간의 초가 언제냐, 그 초를 맞이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냐, 그 사람은 어느때 어떤 심정을 갖고 오느냐 하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 때는 똑딱하는 한 순간이요, 호흡까지 멈춰지는 절박한 심정의 순간입니다. 망하느냐 흥하느냐 하는 것을 세계와 역사와 더불어 주시해야 됩니다. 그리하여 천륜의 맥박과 역사의 맥박, 그리고 세계의 맥박이 하나로 합쳐져 동맥이나 호흡으로 연결되어 내쉬느냐 들이쉬느냐 하는 것을 주시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똑딱하는 한 순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기에서부터, 즉 생의 원천, 생의 맨 밑바닥에서부터 돛을 달고 출발하여 구원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지 않으면 사탄이 다시 침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깊은 골짜기의 근거가 어디냐 하는 것이 금후의 통일신도들이 알아야 할 문제입니다.

선생님은 나타나는 모든 현상에 대해서 잘 압니다. 또한 개척해 나온 탕감역사의 내용도 잘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 내용을 알아서 그 내용을 뒷바라지 하고, 그 내용의 방패가 되고, 그 내용의 기틀이 되어서 악을 소탕하고 나갈 수 있는 모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모체가 되기 위해서는 그 모체가 어떻게 되어 있느냐 하는 것을 생명을 투입해서라도 알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무엇인가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해결하는 데에서부터 통일교회는 발전합니다.

그 길이 눈물의 길이냐, 기쁨의 길이냐? 통일교회의 역사에 기쁨의 길은 없었습니다. 항상 내몰리고 쫓기는 비참한 가운데서 가는 수난의 길만이 있었습니다. 한 고개를 넘어 한숨을 쉬면 또 한 고개를 넘어야 하는 슬픔의 길, 수난의 길이었습니다. 내 일생에 아직까지 들어서지 못한 기쁨의 길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개인을 중심삼고 넘어야 할 고개, 가정을 중심삼고 넘어야할 고개, 종족 민족 국가를 중심삼고 넘어야 할 고개의 정상에 다다를 수 있는 때에 왔습니다. 여기에는 누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나라를 누가 더 사랑하느냐? 어떠한 사람이 나라를 더 사랑하는 애국자냐. 현재의 위정자가 나라를 더 사랑하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나는 그들 앞에 머리를 숙이며 애국애족하는 당신의 정열을 본받겠다하는 입장에 설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통일교인은 지금까지 말없이 별의별 수난길을 다 겪어 나온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자리에 나오기까지 통일교회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 하는 얘기를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뭐 통일교회가 세계적인 기반도 닦았고, 지금은 어떻게 되어 간다는 등의 얘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상부에서는 통일교회를 상당히 문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알고 보니 꿈같은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을 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가치와 사명

그러면 지금까지 수난을 인내로 극복하는 생활을 연속시킨 목적이 어디에 있느냐? 내일의 국가라는 하나의 총아를 해산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기어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누가 낳느냐? 이 민족을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어 새로운 세계를 향하여 진군하고 행진할 수 있는 국가를 누가 낳느냐? 사람이 낳을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박대통령이면 박대통령 자신이 낳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람과 하나님이 합해야 되는 것입니다. 사람과 하나님이 합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과 하나님이 하나되는 데는 무엇이 문제가 되느냐? 물질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물질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문제입니다. 물질을 주관할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에게는 온 만물이 굴복합니다. 그러니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문제되는 것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문제되는 것은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어떻게 완수하고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어떻게 완수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완수한다 하더라도 사람이 망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것을 주관하고도 남을 수 있는 여력을 가진 사람, 즉 사람 중에 참다운 사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정부에서 가르치는 국민교육헌장이 외적인 모든 윤리 형태는 갖추었는지 모르지만, 심정세계에 있어서의 인격을 갖추지는 못했습니다. 이것이 역사적인 슬픔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그들은 모릅니다.

사람은 사람 위에 서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뒷받침 내에 서있는 것입니다. 물건이나 물질 보다는 사람이 귀한 것이요, 그런 사람보다는 하나님이 귀하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하나님을 찾아 나오는 길에서 사람을 제물로 드리는 일을 했던 것입니다. 사람을 위하여는 물질이 희생되어야 하고, 하나님을 위하여는 사람이 희생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역사를 지배할 수 있는 주의를 가진 종교는 하나님을 위하여 많은 피의 대가를 치렀습니다. 그런 종교는 세계를 움직일 수 있고 세계를 상속받을 수 있습니다. 물질세계와 세계 인류를 지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기독교가 세계적인 기독교 문화권을 형성하여 세계를 지배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냥 흘러가는 기독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식물의 표피와 같이 퇴화해 버리는 기독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뿌리와 직선으로 연결된 열매 같은 기독교가 되지 않고는 흘러가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역사의 소용돌이를 헤치고 나와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새 우주에서 새로운 봄을 맞아 새로운 잎과 꽃을 피워서 결실맺을 수 있는 기독교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는 사람의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제물을 드렸던 것입니다. 피조세계는 물질을 위주한 세계가 아닌 사람을 위주한 세계입니다. 그래서 사람 때문에 수많은 제물이 희생됐습니다. 그러나 그 중심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기 때문에 수많은 인류가 제물의 과정을 거쳐 나온 것입니다.

제물되는 과정을 거쳐 가기 싫어하는 무리들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지 않겠다고 하는 무리입니다. 그것은 결정적입니다. 그런데 이 지구성의 혼란되고 세속적인 환경, 이 소용돌이치는 사조권내(思潮圈內)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제물이 되겠다는 무리가 있느냐 할 때, 이것이 문제입니다.

종말시대에 인간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나님은 우리에게 역사적인 종말시대가 온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제 종말시대를 사방으로 맞아들여야 하는 시점이 우리의 목전에 다가온 것입니다. 그러한 순간을 앞에 놓은 여기에서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새로운 빛이 필요합니다. 이 암담한 시대에서 새로운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사탄세계의 모든 것과 부딪쳐야 합니다.

부딪치는 데는 강한 것하고 강한 것이 부딪쳐야 하는 것입니다. 차돌을 바위에다가 부딪치게 되면 거기에서 불이 튀기는 것입니다. 차돌끼리는 더 불이 잘 나지만 그것도 어영부영하다가는 아무것도 안 되는 것입니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아서는 안 됩니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우주말적인 시대권내에 있어서는 하나님을 위하여 생명을 걸어 놓고 사탄과 결투하여 승리권을 가질 수 있는 무리가 있어야 되고, 또한 그러한 나라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온 세계가 소용돌이치더라도 그 가운데가 홀로 버텨 가지고 난 안 죽는다고 할 수 있는 개인과 단체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그러한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 놓고 최후의 결말을 맺습니다.

그러한 나라는 자기를 중심삼은 자들로 구성되어 있지 않습니다. 자기를 중심한 자들의 나라는 흘러가 버리게 됩니다. 그 나라가 소용돌이 속에 섰으면 그 소용돌이의 중심에 국민 전부가 인연되어서 돌아가야 합니다. 혼자 따로 돌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떨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끝날에는 그 중심을 단단히 붙잡아야 합니다.

그 때에는 일대 위기가 옵니다. 즉, 소용돌이의 중심에서 뚫고 나가야 할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단단히 붙잡아 떨어지지 말아야 합니다. 옆에서 잡아당기는 힘이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그 힘을 제거해 버리고 자기의 방향을 향해서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새로운 혁명의 노선을 꽃피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입장인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옆에서 여러분을 잡아채려 할 때, 그대로 잡혀 갈 것이 아니라 아무리 힘들더라도 나아가는 그 방향을 계속 따라가야 합니다. 사탄이 여러분의 양 다리를 묶어 놓고 때리면 때릴수록 더욱더 그 방향을 따라가야 합니다. 맞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생명이 부지되는 한 놓지 말고 따라가야 합니다. 죽어서 떨어지는 것이야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성경에도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라(눅 17:33)"고 했습니다. 죽고자 하는 자가 산다는 것은 금방 부활한다는 뜻입니다. 3일만의 부활이 아니라 죽자마자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렇게 죽은 사람은 죽자마자 천국을 마음대로 드나들수 있는 것입니다. 가고 싶으면 가고, 안 가고 싶으면 안 간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 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나만 살겠다고 눈을 번뜩이다가는 떨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떨어지겠어요, 달라붙겠어요? 달라붙어 있는 여러분을 사탄이 잡아떼려 할 때 여러분은 고무줄처럼 늘어났다가 다시 오무라들 수 있어야 합니다. 늘어난 채로 그냥 있으면 망하게 됩니다. 늘어났다가 다시 돌아올 수 있는 탄력적인 주체성을 가지고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세상으로 멀리 나갔다가도 휙 다시 달려 들어올 수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요, 안 그래요? 그렇게 된다면 여러분의 몸은 가더라도 마음만은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통일교회가 가는 골수 분야의 길이 있습니다. 또 선생님이 가는 골수의 길도 있습니다. 아까 말한 것과 마찬가지로 개인으로 최고의 길을 가려 하는 자는 개인적인 정상의 시대를 가정적인 정상의 시대로 이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 기점을 몸을 바쳐서라도 찾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길은 모험 없이는 갈 수 없습니다.

개인적인 기준에서 가정적인 기준으로 점핑할 때는 세계적인 개인의 한을 탕감해야 합니다. 죽을 고비를 거쳐야 된다는 것입니다.

죽음을 걸어놓고 달려가는 무리가 되라

축복가정들 중에도 소위 건달가정들이 많습니다. 여러분을 가만히 보게 되면 그렇습니다. 밤송이에도 숫밤송이와 암밤송이가 있습니다. 모양은 비슷하지만 숫밤송이가 덩치가 큽니다. 그놈은 놀고 먹는 것입니다. 결실이라는 것은 수난의 집약체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즉, 결실이란 수난을 극복한 내용의 집약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숫밤송이는 수난의 깊은 내용, 생명력을 중심삼고 집약된 실체를 갖지 못하고 비어 있습니다. 모양은 암밤송이와 비슷하지만 속은 밤송이가 아닙니다.

여러분 밤송이 알지요? 보기에는 가시가 돋아 쌀쌀해 보입니다. 그렇지만 그 가시 돋힌 껍질을 헤집고 들어가서 떡 벗기고 나면 알밤이 나옵니다. 밤은 세 겹의 껍데기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겉껍질을 벗기게 되면 속껍질이 있고 두번째 껍질을 벗기고 나면 세번째에는 떫은 맛이 나는 막이 나옵니다. 그것을 벗기고 난 다음에야 진짜 알밤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한 알밤이나 맛이 기가 막히다는 것입니다.

사탄세계는 밤송이 같이 여러겹의 천막을 두르고 있습니다. 그래야 누구든지 대번에 못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밤송이를 살랑살랑 밟아서 벗길 줄 모르는 사람은 알밤을 먹을 수 없듯이, 그 천막을 벗길 줄 모르는 사람은 그냥 침범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밤송이를 벗길 때도 밤송이의 눈을 찾아서 요령껏 해야 대번에 벗겨지지 요령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리 해도 안되는 것입니다. 사탄세계도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선생님은 이런 뜻을 알기에 때가 오면 통일교인들을 모두 몇 천 길 되는 철창 속에 다 집어 넣어 놓고 쳐닫아…. 뭐, 뜻을 위해 죽어요? 뜻을 위해 죽겠다고 생각해 본 사람 손들어 봐요. 생각이야 다 해봤을 테니까 지금이라도 뜻을 위해 죽겠다는 사람은 손들어 보세요? 없잖아요. 지금 용광로에 구멍을 뚫어 놓고 `차렷! 앞으로 가!' 한다면 그 속으로 들어 가겠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뜻을 위해서는 그렇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통일을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마르지 않은 나무처럼 시시하게 연기나 피우며 탈 것이 아니라 화약이 폭발하듯 타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폭파해 버리자는 것입니다. 영광로를 터뜨려 버릴 수 있는 화약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은 어떻겠습니까? 그런 사람이 있다면 용광로에 불이 달기 전에 다 폭파시켜 버릴 것입니다. 그래야만 사탄에게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통일교회 교인들은 도피노선을 취할 것이 아니라 정면노선을 취해 가자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면 국가 앞에 있어서 최고의 수난길을 가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길이 통일교인들이 가야 할 정상적인 노정입니다. 그 길에는 수많은 낙오병, 즉 수많은 참패의 무리들이 보따리를 지고 돌아다니고 있으며 시체도 널려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런 너저분한 길을 넘어가야만 되겠습니다.

지금까지 여러분 그런 길을 왔는데 또다시 그런 길을 가자 하면 가겠어요? 선생님이 보면 지금까지 여러분이 자기 자신이 구원을 받고 축복받기 위해서 싸워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언제 한번이라도 나라를 위하여 싸워 보았습니까? 우리가 이 길을 나선 것은 나라를 세워서 세계를 찾자는 목적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 목적을 향하여 서행해야 하겠습니까, 급행해야 하겠습니까? 천천히 가야 되요, 빨리 가야 되요? 「빨리 가야 됩니다」 그러면 무엇을 위해서 빨리 가야 합니까? 죽기 위해서 빨리 가는 것입니까? 살기 위해서 빨리 가는 것입니까? 죽기 위해서 빨리 가는 무리가 있으면 이 세상에서는 막을 도리가 없습니다. 수십만의 적을 무찌르기 위해 단 열 명만이라도 죽기를 각오하고 서로 빨리 가겠다고 다투며 나선다면, 적들은 그 싸움을 보고 다 도망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다이아몬드가 이 책상만한 것이 있다면 그 다이아몬드를 구경한 사람들은 모두가 그것을 갖고 싶어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가지라고 했을 때에 서로 갖겠다고 싸우면 서로 망하는 것입니다. 서로 갖지 않겠다고 싸움해 보라는 것입니다. `이녀석아 이것을 네가 가져가라' 하고 싸워 보라는 것입니다. 망하나 안 망하나. 그러한 싸움을 본다면 어떤 나라의 어떠한 원수라도 보따리 싸 가지고 도망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싸우는 것을 보았어요? 그런 싸움을 하는 무리만 나타나면 세계는 순식간에 녹아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는 `모든 십자가는 내가 짊어지게 하고,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에게 복을 주소서'라는 기도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서로 죽겠다고 싸우지 못했기에 아직까지 악한 세상이 남아져 있는 것입니다.

악을 제거하기 위한 각오

그러면 통일교회가 민족의 수난길을 넘어설 수 있을 것이냐? 넘지 못하면 최고의 승리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계적인 수난의 길은 내가 책임져야 합니다. 미국이 세계를 책임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선생님이 백안관 앞에서 기도했던 것입니다. 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닌것 같은 이 사나이가 책임을 진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미국과 한번 부딪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이 나라의 정세와 아시아의 정세, 나아가 세계 정세에 관심이 많습니다. 통일교회 선생님은 통일교회를 지도하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세계를 책임질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어떤 수난길이라도 돌파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분을 구덩이로 몰아넣기도 하고 산정으로 몰아 올리기도 해야 됩니다. 여러분이 가지 않겠다면 때리고 발로 차서라도 몰아 넣을 것입니다. 들어가지 않으려는 사람들은 목을 자르고 다리를 잘라서라도 가게 해야 합니다. 그래도 못간다면 다른 사람들이라도 가게 할 것입니다. 그러한 일을 하는데 죄인입니까? 그게 죄를 짓는 일이에요, 선한 일이에요? 여러분은 이런 일을 위해서는 전부다 망해도 좋다는 배포를 가졌습니까? 통일교인은 그런 배포를 가져야 됩니다.

선생님은 강원도에 가서 절벽 사이를 뛰어넘으면서 사냥을 했습니다. 그리하여 노루도 잡고 새도 잡았습니다. 그 총으로 악당들을 잡아서 세계를 살릴 수 있다면 그것 이상 잔혹하게 몽땅 잡아 죽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악당을 잡아서 세계를 살릴 수 있다면 어떤 짓이라도 할 것입니다.

선생님은 내 다리를 잘라서 아버지 앞에 제물로 드려서라도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겠다는 각오를 한 사람입니다. 통일교인들은 이렇게 악착같아야 합니다. 선생님은 아직 지치지 않았습니다. 내일의 새로운 힘을 배양하기 위한 재료를 다 써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선생님은 그늘에서 살며, 그늘에서 생각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정의의 판단은 그늘에서 되는 것입니다. 내놓고 선전하는 것은 전부다 이중 목적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깊은 골짝의 그늘에서 정의를 판단하지 않고서는 하나의 세계를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그러한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통일교회에 처음 온 사람은 선생님을 알아보기가 힘들 것입니다. 선생님도 이러한 차림으로 대중 앞에 나서면 실례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또 한국 식구들도 두루마기도 입지 않고 조끼만 입고 쫓아옵니다. 그러니 조끼만 입고 있다면 통일교회의 식구다 이겁니다. (웃음) 그렇지만 나름대로의 예를 갖추는 것입니다.

개척시대에 있는 우리들에게 두루마기는 오히려 걸리적거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팬티만 입고 예배드릴 때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 않아요? 전쟁터에서는 팬티만 입어도 그만이다 이거예요. 전쟁터에서 총을 들고 한창 싸우는데 군복을 다 챙겨 입고 말고를 따질 수 있어요? 그것도 최후의 격전지, 마지막 판인데 말이에요. 이래저래 죽을 바에야 너저분하게 걸쳐 입을 필요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저 시원하게 팬티만 입고 격전지에서 싸우면 좀 어때요. (웃음) 그렇다고 죄가 돼요? 군기에 어긋난다, 전법상 그러면 안 된다고 따질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통일교회가 가는 길을 연구해야 됩니다. 대관절 선생님은 어떤 사람인가를 연구해야 합니다. 선생님이 일본의 구보끼를 모(某) 기관에 보내 어떤 이야기를 하라고 코치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이 30분이내에 우리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일본에서 일약 유명해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선생님 말을 잘 듣습니다. 선생님이 종교적인 줄만 알았는데 알고 보니 선생님에게는 비상한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재치도 있지만 재치뿐만이 아니고 선생님이 논증을 세워 가르쳐 준 것은 어디에 적용해도 적중하기 때문에 그는 자신을 갖고 바쁜 중에서도 어려운 일만 있으면 선생님에게 물어 보려고 오는 것입니다.

앞으로 일본을 어떻게 요리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지금까지의 대한민국의 그 누구도 하지 못했습니다. 현재의 그 누구도 그렇게 못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늘에 있던 사나이가 일본으로부터 미국 서독까지 요리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그래서 방선을 긋는 것입니다.

왜 고생을 해야 하는가

이제는 선생님의 작전에 모두 나가 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간단한 것입니다. 선생님은 사탄을 녹여 먹던 역사를 가졌고, 또 그만한 실력을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내가 못나서 여러분을 고생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을 고생시켜야 되겠기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여러분이 세상에서 힘들게 아기를 낳았는데 낳고 보니 팔방병신이라면 기분이 좋겠어요, 나쁘겠어요? 아마 생각만해도 끔직하리만큼 나쁠 것입니다. 그 아이를 볼 적마다 끔찍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한 십년이상 죽도록 고생한 끝에 낳고 보니 천하의 명장이요, 천하의 미인이라면 어떻겠어요? 여러분이 그러한 옥동자를 낳았다고 하면 지난날의 힘들었던 것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렇게 힘이 들었기에 그런 아들의 어머니가 되었으니 그 힘들었던 것이 오히려 자랑의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힘들었기 때문에 그 아들이 아무리 위대해지더라도 부모의 말을 들으라고 명령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줏어 온 자식이라면 그렇게 명령할 수 있겠습니까?

힘들여 낳았더라도 그 자녀가 잘났으면 잘났을수록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은 커서 언제나 잊을 수 없는 인연이 되는 것입니다. 힘들게 낳았기에 눈을 뜨나 감으나 그 자식을 잊을 수 없고, 어디를 가나 오나 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그러한 인연을 맺기 위해서 여러분을 힘들게 하는 것이니, 그것은 사랑 때문입니다. 지금까지의 역사에 없었던 부자의 관계로 인연을 맺으려니 누구보다도 고생스럽게 자녀를 낳으려 하는 것이 하나님의 작전이 아니겠느냐,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통일교회가 가는 길 앞에 있어서 선생님이 가정을 만들기 위해서, 가정을 하나 찾기 위해서 그만큼 고생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역사상에 선생님만큼 고생한 사람이 없습니다. 어떠한 소설의 주인공이라도 선생님만큼 고생한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도 공인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선생님을 그렇게 고생시키셨느냐? 선생님에게 지금까지 역사상에 없었던 가정의 가치를 알게 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역사 이상의 것을 알게 하시려고 역사 이전의 고생까지 체험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행복한 가정을 이루어 콧노래를 부르며 천상세계나 지상세계에서 자랑할 수 있는 때가 되면 남성세계에서 최고의 행복을 누리는 총아가 되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배후에 숨겨진 내용을 생각하면 천신 만고하여 닦은 기반 위에 세워진 영원한 가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기반이 닦여진 가정에게는 천만금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애국자나 충신은 평시에는 잘 알 수 없습니다. 애국가와 충신은 비상시대에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비상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때에 나라를 위하여 생명을 걸어 놓고 싸운 사람들이 나중에 나라를 지배하는 것이요, 세계를 위해 생명을 걸어놓고 싸운 사람들이 세계를 지배할 것입니다.

인류에게 그늘을 제공할 수 있는 나무가 되자

통일교회에서는 이 나라를 위한 주의뿐만이 아니라 엄청난 천주주의를 들고 나왔으므로 천주주의 세계를 건설할 수 있는 책임자가 누구냐 하면 통일교회의 미스터 문일 것입니다.

여러분이 역사에 없는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는 비운의 역경을 거쳐야 합니다. 모진 풍상, 모진 억울함, 모진 슬픔의 사연을 다 끌고 다닐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고통의 보자기를 벗어 버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봄날이 찾아올 때까지, 동삼삭을 지낼 동안 그 보자기는 나를 덮어 주는 피난처가 되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다시 말해서 통일교회를 반대한 사탄의 모략 중상이 통일교회가 피난할 수 있는 보자기가 되는 놀음을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무슨 신문, 무슨 신문하여 7대 신문을 전부 동원해 가지고 아무리 두들겨도 통일교회의 문선생은 까딱없습니다. 이제는 그들이 아무리 두들겨도 맞지 않을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맞아준 것은 그것이 누더기이지만 겨울시대에 우리들을 덮어 주는 보자기 노릇을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탄이 아무리 그러한 일을 했다 하더라도 결국은 우리들의 일을 도와준 결과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생님의 작전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욕을 먹어도 조금도 섭섭하지 않습니다. 욕을 하려면 하라는 것입니다. 욕 먹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욕을 먹고 망하느냐 안 망하느냐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망하지 않고 그것을 뚫고 올라가 사막과 같은 광야에서 새싹을 내고 자라 나무가 되었을 때, 그래서 이 민족이 쉴 수 있는 단 하나밖에 없는 그늘이 되었다 할 때, 그들은 오지 말라고 해도 세금이라도 내면서 오겠다고 할 것입니다. 그럴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말라 죽겠으니 오게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 그럴 수 있는 나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나 자체가 염천하에 그늘을 가질 수 있는 나무가 어떻게 되느냐 하는 것이 문제이지, 현재가 문제 되지 않습니다. 이러면서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과정에서 별의별 요지경, 별의별 사기꾼, 별의별 장면, 별의별 인간상을 다 보았습니다. 여기 모인 여러분들 중에도 `앞으로 통일교회가 전망이 있을까? 통일교회를 통해서 출세나 하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통일교회는 이용당하지 않습니다. 문이라는 사람은 이용당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여러분은 역사시대의 한 순간에 그 한 중심과 연결될 수 있는 심정적 내용, 인격적 내용, 투쟁적 내용을 지녀 하나의 대승리의 기점을 마련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 기회를 어떻게 포착하느냐 하는 것이 지극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선생님에 대해서 연구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선생님은 지칠 줄 모르는 사람이냐? 아닙니다. 선생님도 지칩니다. 단지 회복되는 시간이 여러분보다 빠를 뿐입니다. 아무리 지치더라도 정신을 집중하여 회복하는 시간이 빠르다는 것입니다. 그 회복하는 방법이 여러분과 다를 뿐이지 지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또 외롭고 슬픈 일을 당해도 슬퍼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문제의 해결점은 부자의 관계를 어떻게 회복하느냐에 달렸다

이제 국가 복귀라는 거대한 문제를 놓고 생각해 볼 때, 앞으로 이 나라에 어떻게 영향력을 주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어느 시대든지 그 국가에 영향력을 미치는 것은 충신이었습니다. 지금까지는 개인적인 충신이 많았지만 앞으로 통일시대에 있어서의 충신은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충신 가정이 나와야 합니다. 충신 가정이 나오지 않고는 충신 종족이 나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표창을 받을 수 있는 이스라엘 민족, 하나님의 표창을 받을 만한 이스라엘 국가가 나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들은 가야 할 길을 확실히 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론을 맺겠습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문제의 해결점은 어디에 있느냐? 즉, 승패의 분기점을 어디에 두느냐, 생사의 기점을 어디에 두느냐, 흥망의 분기점을 어디에 두느냐, 우주적인 존재로서의 기준점을 어디에 두느냐. 나에게 두느냐, 아니면 다른 어디에 두느냐 하는 문제를 해결하자는 것입니다. 남들이 다 해주겠지 하면 망합니다. `나라에서 다 해주겠지' 하는 민족을 가진 나라는 망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승리할 수 있는 계획이 있다고 하더라도 직접 관계를 맺지 않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지배자와 피지배자와의 문제가 벌어집니다. 지배자는 피지배자를 위해 있는 것이요, 피지배자는 지배자를 위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로 결속되었다는 내용을 갖지 않고는 금후의 세계관을 수습할 수 없습니다.

통일이념에 있어서의 세계관은 부자의 인연을 맺는 것입니다. 즉, 주권자는 아버지요, 국민은 자식과 같은 입장이기에 주권자가 고생하는 것은 자식과 같은 입장인 국민을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자식을 착취하는 부모는 추방당해야 하는 것처럼 국민을 착취하는 주권자는 지옥으로 추방당해야 됩니다. 거기에서 선군이니 악군이니 하는 역사가 벌어졌던 것입니다. 자기만을 위해서 나라를 이용하겠다는 무리는 망합니다. 그런 군주는 망하는 것입니다. 제거되는 것입니다.

정치철학에서 최고로 문제삼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지배자와 피지배자가간의 융화 문제입니다. 이것이 역사적인 모든 문제를 해결할 최후의 관건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문제를 볼 때, 백성을 위해서 주권자가 있는 것이요, 주권자를 위해서 백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자의 관계와 같은 입장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승패의 기점을 어디에 두어야 하느냐? 선생님에게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아무리 승패의 기점을 가졌다 하더라도 그것은 여러분과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각자에게는 5퍼센트의 책임분담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선생님에게 말씀을 받고서 그냥 그대로 있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누룩이 되어야 합니다. 누룩은 새로운 누룩을 만들어 전체가 누룩이 되게 합니다. 여러분들도 어디에나 떼어 놓아도 거기에서 누룩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러한 세계관을 가져서 어디를 가든지 그러한 결실 작용을 할 수 있는 개인이 되고 가정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날에는 세계는 통일이 될 것입니다. 교회가 없더라도 될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부모의 전통을 이어받아 부부가 되면, 부모의 가정에 소속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자신이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언제 하나님을 중심삼고, 혹은 선생님을 중심삼고 결실적인 인연을 가져 보았느냐, 내 생명을 기울여 다 퍼붓더라도 그 인연 속에 파고들겠다는 나 자신을 가져 보았느냐, 이러한 것이 문제가 됩니다. 결국 내가 죽을 때는 그 속에 묻혀서 죽을 것이며, 그런 나 한 개인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전체가 소생할 수 있는 하나의 요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것을 실감해 보았습니까?

상대적인 가치는 스스로 찾아야 한다

거대한 하나님이지만 인간은 소우주이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 안에 들어감으로 말미암아 그 거대한 하나님이 내 속으로 들어온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한 느낌을 받아야만 하나님 안에 내가 있고, 내 안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그런 얘기를 했던 것입니다. 무한히 크신 하나님이지만 인간이 그 속에 흠뻑 들어 가야만 하나님도 작용하신다는 것입니다.

힘의 작용은 상대적인 극이 있어 그 자리에서부터 돌아가고 돌아오는 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 자리가 엇바꾸어지며 나오는 것입니다.

부부 사이에서 남편이 하는 일을 간섭하지 말라고 했다고 아내가 간섭을 안 하면 됩니까? 아내도 남편과 대등한 자리에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남편이 없을 때는 아내라도 그 자리에 나설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여러분들은 승패의 기점을 어디에 둘 것이냐? 교회에 두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선생님에게는 선생님 자신이 가야 할 길이 있습니다. 그 길은 여러분이 가야 할 길과는 다릅니다. 선생님이 국가적 기준에서 나가면 여러분은 민족적인 기준으로 나가야 합니다. 한 단계 떨어져서 극복해 가야 하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세계를 향하여 진군하면 여러분은 나라를 위해서 진군해야 합니다. 이러한 상대적 가치를 지녀야 하는 것입니다.

상대적인 가치란 어떻게 만들어 지느냐? 그것은 주체가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완전한 주체 앞에는 자연히 그 상대가 생겨나고 그 가치도 자연히 생기지만 스스로가 대상의 기준까지 올라가서 찾아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체와 대상의 관계를 맺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정상적인 마음 바탕을 지니고 하나님과 선생님이 정성들인 그 기준을 따라가야만 아무것도 없는 여러분 자신이라 하더라도 재창조의 원칙에 의해서 완전한 주체로 서게되며, 그런 여러분 앞에 완전한 대상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은 정성들이는 길을 아니 갈래야 아니 갈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거기에 연결되어 하나의 횡적인 발판을 넓혀 나가는 것이고 그것이 복귀의 원칙입니다. 또한 이것이 원리에서 나오는 주체와 대상의 수수작용의 원칙이요, 법도입니다. 승패의 기점은 선생님에게도 있지만 여러분에게도 있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에게는 선생님 자신이 가야 할 길이 있습니다. 주체적인 입장에서 전체를 대신하여 민주적 기반을 이룰 수 있는 길을 가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 각자는 반드시 선생님을 중심삼고 생사의 결투를 해야 되는 입장에 있습니다.

선생님을 중심삼아 가지고 생활해야 되는 여러분이기 때문에 여러분은 선생님이 지금 뭘하고 있으며, 무엇을 지향하여 가고 있으며 어떤 곳에 갈 것이며, 무슨 일을 하고 있느냐? 하는 문제를 알고 그것을 본받아 거기에 보조를 맞춰 나가야 합니다. 그것이 여러분이 서야 할 세계적인 입장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 가지고 선생님이 기뻐하면 여러분도 같이 공감하여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지금 선생님의 심정에 얼마만큼이나 공감하고 있습니까?

하나된 부부가 서로 좋다는 것도 같은 동기에서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니 선생님과 하나되었다는 심정적인 체휼감이 여러분이 생활권내에서 하루를 지배하고, 일년을 지배하고, 일생을 지배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바로 이것이 천하의 충신이 되느냐 못 되느냐에 직결되는 것입니다.

통일교회가 만들고 있는 중화문화

하루 24시간에는 아침 낮 저녁 밤이 있습니다. 이것에 일년을 대비해 보면 아침에 해당하는 절기가 봄이고, 낮에 해당하는 절기가 여름이고, 저녁에 해당하는 절기가 가을이요, 밤에 해당하는 절기가 겨울입니다. 하루의 운세와 기운을 연장시켜 해(年)를 지었기 때문에 해도 창조원칙에 의해서 지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탕감복귀원칙에 의해서 절대 위치와 같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루에는 4계절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렇지요? 역사는 이러한 일년을 닮아야 됩니다. 역사에도 봄절기의 시대, 여름절기의 시대, 가을절기의 시대, 겨울절기의 시대가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역사상에 봄절기의 문화시기가 있어야 했는데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사탄세계의 봄절기 문화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사탄세계의 봄절기의 문화시대에서 여름절기의 문화시대인 열대권 문화가 되었고, 그 다음에 가을절기의 문화시대인 온대권 문화가 되었다가 지금은 겨울절기의 문화시대가 되었습니다. 공산주의가 지배하는 한대권 문화가 세계를 통제할 때에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그거 어지간하게 맞지요?

역사는 사탄세계의 봄절기 문화시대에서부터 남아진 것입니다. 그래서 고대의 문명이 열대권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20세기의 가을절기의 문명도 지나가고 있습니다. 민주주의가 무엇이냐 하면 어린아이를 찾아 나가는 주의입니다. 백성을 찾아 나가는 주의라는 것입니다. 백성을 찾아서 하나의 개체적 자유를 중심삼은 기준을 찾는 것입니다. 자유 중에 최초의 자유는 어린아이의 자유입니다. 지금 인류는 어린아이의 자유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이런 세계가 된 것입니다. 누가 먹든 말든, 누가 죽든 말든, 어디가 뒤집히든 말든 상관하지 않는 난장판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트위스트는 어린아이들의 춤입니다. 성인들의 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제 구르고 울면서 추는 춤이 나왔습니다. 이것은 통일교회 문선생이 고안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기만 하면 됩니다. 어린아이가 하는 것과 같으니까요.

지금까지의 기성제도와 기성 윤리도덕이 간섭할 수 없는 끝날의 주의가 있느냐? 그 주의는 춘하추동의 어디에도 물들지 않고 고루 모든 문화의 내용을 뽑아 요리한 하나의 결실을 들고 나올 수 있는 제도를 말합니다. 겨울절기의 문화인 공산세계를 뚫고 넘어가서 새로운 봄절기의 총아로서 등장할 수 있는 문화가 있느냐? 그러한 새로운 우주사적인 봄절기의 문화를 지금 통일교회가 만들고 있는데 이것을 중화문화(中和文化)라고 합니다. 이 문화는 모든 문화를 다 포함하고 있기에 봄절기도 환영하고, 여름절기도 환영하고, 가을절기도 환영하고, 겨울절기도 환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화문화라고 합니다.

그 한 문화권을 가진 통일교인들은 지옥까지 흡수할 수 있어야 합니다. 통일의 이념은 거대한 것입니다. 현대신학을 하는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학장도 통일사상은 아주 거창하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거창하지요. 새로운 봄절기와 같은 문화권을 가진 곳이 통일교회라는 것입니다.

순간에 최선을 다하라

역사는 사람에 의하여 창조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나서 사춘기 때까지가 봄절기에 해당하는 것이요, 40대까지가 여름절기요, 60대까지가 가을절기이고 그 이후는 겨울절기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내일의 봄날을 위하여 남겨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 남겨야 할 것이 뭐냐? 그것은 하루하루의 생활권이 전체 생애가 집약된 하나의 결실체가 될 수 있도록 인격을 갖추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봄절기, 여름절기, 가을절기, 겨울절기를 지내고 새로운 봄동산으로 등장하는 영계로 가는 것입니다. 7, 80여년의 생애에 영원한 봄을 어떻게 잘 맞이하느냐 하는 문제가 걸려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상생활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하루를 잃어버린 사람은 열흘을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그래요, 안 그래요? 하루를 소홀히 하는 사람은 열흘을 소홀히 하는 사람이요, 열흘을 소홀히 하는 사람은 한 달을 소홀히 하는 사람이요, 한 달을 소홀히 지내는 사람은 일년을 소홀히 하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하루를 잃어버리면 열흘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요, 열흘을 잃어버리면 한 달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요, 한 달을 잃어버리면 일년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고, 일년을 잃어버리면 십년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십년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곧 생명을 잃어버렸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문제는 자기 자신에게 있습니다. 일생을 중심삼고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가 하루에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하루의 한 순간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참사람이 되느냐 못 되느냐 하는 것은 일생을 두고 봐야 안다고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 말은 선생님에게는 통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는 이랬지만 이제는 안 그럴 것입니다 하며 용서를 비는 경우에도 선생님은 용서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두고 보는 거지, 용서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선생님의 사고방식이 그렇다는 거예요.

이 순간에도 선생님은 싸우고 있습니다. 오늘 새벽 여러분이 자는 시간에도 일어나서 기도를 했습니다. 여러분에게 새로운 생명력을 보급하여야 할 책임이 있기에 피곤을 무릅쓰고 가야 할 생사의 경계선에서도 싸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목적을 향하여 직시하고 직행할 수 있는 자체의 힘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보강하느냐? 시간 시간을 투쟁해야 합니다. 어느 한 시간 쉴 사이없이 투쟁해야 하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어느 한 순간도 마음 놓고 다리를 펴고 코를 골면서 잠을 자는 때가 없다는 것입니다.

한 순간에 전체를 파탄시킬 수 있는 요인이 내 주변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보지 않아도 때가 되었는지 안 되었는지 대번에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정적인 순간들을 연결시켜 생사의 분기점에서 흥은 세우고 망은 버리고, 선은 세우고 악은 제거할 수 있는 가치적인 내 인격을 어떻게 남기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것은 시간권내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이 생명력을 흡수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생명력을 흡수하는 시간이 촌시(寸時)라도 끊어지는 날이면 사망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한 순간의 분기점을 망각하여 패자가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사계절과 같은 기질을 갖고 있는 인간과 민족

그러한 순간 순간을 중심삼고 생명을 투입하여 미래의 봄절기를 향하여 나갈 수 있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하늘의 왕자 왕녀가 되기 위해서는 이땅 위에 있는 모든 분야의 영양소를 흡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악한 것까지도 소화시켜서 내 생명력으로 만들 수 있는 자체의 힘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선한 세계는 물론이고, 악한 세계에서도 시련을 극복하며 나갈 수 있습니다.

악한 세계에서 방황하고 있는 사람들은 전부다 통일교회를 반대합니다. 기성교회에서도 통일교회에 가지 말라고 반대합니다. 동료들도 반대하고, 부모들도 반대합니다. 통일교회 갔다 오자마자 `또 거기 갔었소?' 하며 여러분에게 창피를 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에게는 그런 것까지도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욕을 먹더라도 그것을 소화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각자는 지금 어느 절기에 해당되는지를 알아야 됩니다. 자기의 기질을 생각해 보면 자기가 봄절기에 해당되는지, 여름절기에 해당되는지, 가을절기에 해당되는지, 겨울절기에 해당되는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참 아름답고 정적인 면에서 아주 포근하여 무엇이든 잘 흡수하는 사람은 봄절기에 해당합니다. 또 아주 정이 많고 눈물이 많은 사람은 여름절기에 해당하고, 쌀쌀하고 깨끗이 생기고 흠잡을 데가 없는 사람은 가을절기에 해당합니다. 그 다음 겨울절기에 해당하는 사람은 꽝꽝 달라붙어 뗄래야 뗄 수 없는 요소를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자기 자신이 어느 절기에 해당하는 사람인가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가을절기에 해당하는 사람은 상대적인 사람을 만나야 합니다. 즉, 봄절기의 사람을 찾아야 되는 것입니다. 여름절기의 사람은 겨울절기의 사람을 만나야 합니다. 너무 뜨거워 걱정이 되는 사람은 차가운 사람을 만나서 식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은 눈을 보면 알 수 있고 또 그 생김새를 보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주사적인 종자들을 규합할 수 있는 통일교인이 되라

이것을 민족적으로 봐도 마찬가지입니다. 민족중에도 봄절기에 해당되는 민족이 있으며, 여름절기에 해당되는 민족이 있으며, 가을절기에 해당되는 민족이 있으며, 겨울절기에 해당되는 민족이 있다는 것입니다. 봄도 좋고, 여름도 좋고, 가을도 좋고, 겨울도 다 좋다고 할 수 있는 민족이 있다면, 그 민족은 미래에 봄날을 맞이할 수 있는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민족인것입니다.

식물은 봄에 싹이 터서 여름에 꽃이 피고 가을에 열매를 맺습니다. 그래 가지고 그 열매는 생명력을 지닌 채 벼락이 치더라도 깨지지 않게 단단한 껍질로 추운 겨울 동안 보호를 받다가 이듬해 봄이 되면 껍질을 벗고 새로운 싹으로 트는 것입니다. 잣같은 것이 좋은 예입니다. 모든 생명체에는 생명을 보호하려는 악착같은 능력이 있습니다. 이런 입장에서 볼 때, 여러분은 천상천하의 참생명을 가지고 하나님의 아들딸의 입장에서 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살아 있다고 생각합니까, 죽어 있다고 생각합니까? 살아 있어요, 죽어 있어요? 여러분은 지금 살아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상은 죽어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딱딱하게 여물지 않은 것은 종자가 될 수 없습니다. 밤을 보더라도 여물어서 탱탱하게 터질 정도가 되어야 종자가 되는 것입니다. 덜 여문 것은 종자가 될 수 없습니다. 벼도 눌러보아서 단단히 여문 것을 종자로 쓰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들은 우주사적인 종자로 규합될 수 있는 단단하게 여문 통일교인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그러한 종자가 될 자신이 있어요? 대답해 봐요. 자신이 있어요, 없어요? 한 사람도 없어요? 「있습니다」 자신 있다고 얘기한 사람은 뭐가 자신 있어요?

어디를 가더라도 조건만 갖추어 있으면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아프리카에 가서도 전도할 수 있습니다. 입을 벌리지도 않고 할 수 있습니다. 감옥에 있을 때도 말하지 않고 전도했습니다. 선생님은 아무말 하지 않아도 그들의 선조들이 해주었습니다. 선조들이 망하지 않기 위해 밤잠 안 자고 한 것입니다. 사탄 이상으로 열심히 해 주었습니다. 그건 왜 그러느냐? 봄날이 왔으니 주인이 못 하면 종을 시켜서라도 씨를 심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는 망할래야 망할 수 없는 인연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기쁜 것인가를 알아야 되겠습니다.

통일교회는 지금 어느 시대에 있는 것이겠습니까? 겨울절기입니까, 봄절기입니까? 통일교회는 지금 역사적인 겨울절기를 맞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 생명력으로 외적인 힘, 역사적인 방해 여건을 제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생명력을 가진 나무는 돌이나 바위도 뚫고 나가는 것입니다.

사실 지금까지 통일교회 문선생님이나 통일교회는 생명력을 발휘해 보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물러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견디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겨울절기에 뿌리를 길러서 세계적인 기반을 닦는 것입니다. 이제 겨울이 지나면 뭐가 오는 거냐? 봄이 올 것입니다.

순간을 빛낼 수 있는 무한한 가치의 사람이 되라

기독교를 중심삼고 볼 때, 기독교의 봄절기는 예수가 왔다 갔던 시대였습니다. 역사적으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7세기를 지나면서 봉건주의적인 여름절기 문화가 시작되었으며 14세기까지 그 봉건주의 문화는 말할 수 없이 부흥했습니다. 그리하여 가을절기에 해당하는 시대에 진입해 20세기 말에서부터는 공산주의에 의한 겨울절기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니 얼어 붙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를 인계받아야 하기 때문에 통일교회가 수난의 고비를 겪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수난의 한때를 기독교가 맞아야 했는데 기독교가 그 수난의 겨울절기를 맞이하지 못했기 때문에, 통일교회가 지금 그 겨울절기를 맞아 가지고 봄절기를 향하여 넘어가는 것입니다.

금년 70년도부터 우리는 봄절기를 맞이했습니다. 지나간 60년대는 겨울절기로 탕감시대였으나 이제부터는 봄절기입니다. 봄에는 꽃이 피고 춘풍이 불어오는 것입니다. 이 나라 이 민족이 전부다 그런 봄을 맞이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그러한 이치를 중심삼고 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과정에서 남아져야 할 것은 무엇인가? 여러분이 생명체가 되고 열매가 되고 씨앗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즉, 여러분 자신이 기독교를 중심삼은 예수의 봄절기 시대 이후로 지금까지 수많은 기독교 신자와 충신 열녀들이 찾아 나오던 뜻을 이어받아 모든 것을 대신할 수 있는 생명의 가치를 지녀야 합니다. 그리하여 이 시대에 결실될 수 있는 생명력을 지니고 겨울절기를 넘어가야 합니다.

겨울절기가 나쁜 때가 아닙니다. 오히려 빛이 날 수 있는 때입니다. 즉, 새로운 봄, 활짝 꽃 피울 내일을 약속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완전히 결실된 씨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개인, 그러한 가정, 그러한 종족을 만들기 위해서 선생님이 축복가정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가정이 그럴 수 있는 가정이 됐어요? 그렇게 되지 못했다면 다시 수습해야 될 것입니다. 금년에 해야 할 모든 일이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봄절기에 살고 있기에 `나는 이런 절기에 살고 있으니 너희들은 나를 무시하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는 때인 것입니다. 또 겨울절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나는 당신들의 생명력과의 관계에서 먼 것이 아니다.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조건이 되어 있기에 나는 당신들과 관계 맺을 수 있다'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분의 생애가 그럴 수 있는 생애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생활 전체가 영양소를 흡수할 수 있는 발판이 되지 않고는 생명체를 완성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연적인 현상세계에서 벌어지는 것입니다. 생명의 분기점은 어떠한 긴 기간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한 순간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순간을 무시하는 사람은 왕권을 가질 수 없습니다. 대성할 수도 없고, 위대한 사람도 될 수 없고, 또한 하나님의 왕조와 왕관을 물려받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순간을 빛내기 위해서 여러분은 말 한마디, 행동 하나를 주시해야 하고, 생각하는 것도 주의해야 됩니다. 자기의 생활에서 벌어지는 모든 내용이 세계와 관계되는 현상으로 남는 다는 신념을 가지고 해결짓는 데에서만이 승리권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승리권이 결정되는 것은 순간입니다. 따라서 역사적인 승리권, 천주적인 승리권도 순간에 결정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순간을 빛낼 수 있는 무한한 가치를 느끼며 생활하는 사람은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요, 성인도 될 수 있는 것이며, 하나님의 아들딸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생사의 분기점은 순간에 달렸다는 것입니다. 알겠지요?「예」

기 도

아버님, 맹세를 하지 말라는 말씀이 성경에 나와 있사옵니다. 생사가 결정되지 못한 역사시대를 살아오면서 응당히 아버지를 따르겠다고 맹세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당신께 절대 순응하지 못한 역사를 인간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맹세하지 말라고 하신 사연을 저희들은 알았사옵니다.

생사의 분기점은 긴 시간이 아니라 순간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호흡을 할 때 들이쉰 숨을 내쉬지 못하면 죽는 다는 것을 아옵니다. 들이쉬고 내쉴 수 있는 자체력을 가졌기 때문에 생명이 지속되는 것이니 생명은 결국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한 순간에 달려 있는 것을 아옵니다.

우리의 모든 생활이 똑딱하는 한 순간에 결정되는 것처럼 생명 자체도 한 순간에 끊겨지는 것이 아니옵니까? 모든 것이 결정되는 것은 연속적인 과정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순간의 중요한 기점에서 결정되는 것인데 이것을 인간들은 쉽게 망각하고 있사옵니다.

아버지시여, 오늘날 저희들이 저희 자신을 다시 한번 주시하게 될 때, 미래에 부풀어 오를 수 있는 개체의 인격을 주시하는 것보다 흘러가는 현실의 이 시간을 중심삼고 이 시간권내에서 승리하여 우주사적인 내용을 가지고 순간을 빛내겠다고 다짐할 수 있는 자체의 인격이 얼마나 고귀하다는 것을 느끼게 하여 주시옵소서.

한 시간을 승리의 기점으로 하지 못하면 하루를 승리할 수 없는 것이요, 하루를 승리의 기점으로 하지 못하면 일년을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을 아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루를 패하면 일년 이상을 패하는 치명적인 상처를 가져오게 되어 생명 자체에까지 파탄이 벌어진다는 것을 저희들은 생활을 통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하오니 저희가 순간의 싸움에서 양보할 것이 아니라 거두어 들일수 있는 흡수력과 주체력을 가진 입장에서 생활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확정짓고 사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통일교회 무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 오늘을 자랑하지 못하게 되면 내일을 자랑할 수 없는 것이요, 오늘의 귀한 가치를 찬양하지 않고는 내일의 희망을 찬양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온 인류가 순간적인 싸움의 과정에서 패자의 서러운 자리나 낙망의 자리에 설 것이 아니라, 희망찬 내일을 개척하는 용자의 모습으로서 `아버지여, 저를 믿으시옵소서' 할 수 있는 자리에 서서 하늘 땅에 믿을 수 있는 권을 만들어 자아를 순간 순간 거기에 연결시키는 인격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 이 시간 저희들은 새로운 각성을 해야 되겠습니다. 천주적인 한때가 저희들을 향하여 다가오는 것을 알아야 되겠고, 뜻이 저희에게 한때를 바라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뜻이 바라는 것이 저희의 한 순간과 연결되어 가지고, 크고 먼 역사시대가 교회와 인연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것을 위하여 저희들 각자가 순간을 중심삼고 스스로를 생활권내에서 하늘화시킬 수 있는 주체적인 입장에 서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실히 깨닫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 전국에 널려 있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자기의 자리를 사수하는 것은 자기의 인격적 기반을 남기기 위한 것입니다. 또한 아버님과 나와의 인연된 기준을 가지고 흑암세계에 뿌리를 막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방위권을 만들기 위해서도 생활을 제어시킬 수 있는 자리를 갖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확실히 깨닫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세계에 널려 있는 통일교인들이 수난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은 결코 망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총아로서 당신의 아들딸이 되기 위한 것임을 아옵니다. 허물을 벗고 새로이 탄생하기 위해 이 길은 없어서는 안 될 필연적인 운명길인 것을 알고 있사오니, 감사한 마음으로 소화시키어 넘어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역사를 붙들고 내일의 희망을 이루기 위해서 책임을 지고 나서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옵고 원하옵니다.

이 시간, 당신이 보호하여 주신 것에 대하여 감사드리옵니다. 생활 전체를 하늘화하는 운동에 있어서 이 시간 이후에는 순간 순간을 모심으로 기뻐하는 권내에서 생활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런 생활권내의 한 순간을 중심삼고 무한히 정성들이는 당신의 아들딸이 될 때, 천국은 그 생활권내에서 자동적으로 자리잡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저희가 열만큼의 수난의 길을 순간 순간 승리의 기준으로 닦아 나가는 데에는 아홉만큼의 천지의 내용이 깃들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서, 저희 모두가 생활의 승리권을 갖추어 가지고 선한 결실체로서 아버지께 몽땅 바쳐져야 되겠습니다.

저희의 생애가 아버지의 자랑이 되어 아버지께서 잊을 수 없는 아들딸이 되게 될 때는, 천상세계의 왕자 왕녀가 되는 특권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하여 주시옵고 각자의 생애노정을 소홀히 생각하는 어리석은 아들딸이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옵고 원하옵니다.

내일을 위하여 오늘 한 순간에 모든 정력을 다 기울이고, 내일을 점령할 수 있는 핵을 만들기 위해 무한히 노력할 줄 아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니다. 아멘.

[말씀 요지]

복귀하는 데는 반드시 탕감을 통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탕감복귀는 개인으로부터 가정, 종족, 민족, 국가, 세계의 순으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가인 아벨의 결정은 죽고 사는 자리에서

탕감을 하려면 반드시 가인과 아벨이 있어야 합니다. 탕감복귀역사는 종의 시대를 거친 후 양자의 시대를 거치고, 자녀의 시대를 거치고, 형제의 시대를 거쳐야 됩니다. 2차대전이 끝나면서 강대국들이 모든 식민지를 내놓고 약소민족을 해방한 것은 바로 평화적인 관계, 즉 형제의 관계를 이루는 외적인 현상이었습니다.

민주진영도 둘로 갈라지고 공산진영도 둘로 갈라지게 되면 형제의 시대가 왔다는 증거입니다. 그런 후에 부모의 자리에 나가는 것입니다.

미국이 원조를 끝내고 후퇴한다는 것은 하늘편에서 장자권이 성립되어 차자편을 도와주는 때가 되었다는 표시입니다.

형제의 인연은 직계의 아들이라야 맺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역사적인 결실체입니다. 그 말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상대가 되는 존재로 결정되었다는 뜻입니다.

탕감원칙은 3시대권의 원칙입니다.

형제의 인연을 갖추지 않고는 탕감복귀가 안 됩니다. 가인이 있어야 되며, 아벨이 제물을 중심삼고 하나님과 하나되어야 합니다. 제물과 사람이 하나되어야 합니다.

탕감조건은 죽느냐 사느냐 하는 고개에서 반드시 피를 봐야 세워집니다. 여기서 제물은 죽고 사람은 살아남아야 합니다. 이것이 십일조의 원칙입니다. 이 조건에 부합되면 하늘편이요, 부합되지 않으면 사탄편입니다.

여러분이 돈을 다루는데 있어서는 인격이 있어야 하고, 언행심사가 일치해야 합니다. 즉, 공적인 입장에서 다루어야 합니다. 제사장의 물건은 공적인 것입니다.

아벨은 반드시 가인보다 나아야 합니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자리에서 아벨이 침범받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가인적인 사람으로 삼위기대를 세워서 하나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탕감없이 넘어갑니다. 나를 대신해서 나가 싸워 승리할 사람이 있으면 됩니다.

개인 앞에 세 사람, 세 가정, 세 씨족이 있어야 하고, 교회 앞에 세 교단, 세 종파가 있어야 합니다. 책임자가 직접 선두에 서는 것이 아니라 천사장 입장의 3인을 앞에 세워 일해야 합니다.

죽고 사는 자리에서 가인 아벨이 결정됩니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일선에서만 탕감됩니다.

제사 드리는 자리에는 제물만 가지고 나가 그 제물과 하나되어야 합니다. 다른 것 가지고는 안 됩니다.

믿음의 기대를 통해서 누가 낫다 하는 것이 결정됩니다. 거기서부터 실체 기대가 성립됩니다. 메시아를 위한 기대는 아벨만 있어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라 가인도 있어야 합니다.

완전히 아벨이 되어야

애국애족하는데 있어서도 대통령보다 우리가 더 나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 이상의 자리에서 극복해야 합니다. 사탄이 머리 숙일 수 있는 자리까지 나가서 나라를 사랑해야 합니다.

내가 사는 군이면 그 군에서 내가 몇째 가느냐? 우리가 이렇게 못사는 것은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나라를 위해 살기 때문입니다. 최고의 충(忠)의 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통일교회 교인은 국가의 누구보다도, 어느 교회의 누구보다도 그런 면에서 나아야 합니다.

기성교회나 이 나라의 잘못된 것을 치리하면서 나가지 않으면 실체기대를 세울 수 없습니다. 그때까지는 투쟁의 과정이 남아 있습니다.

대한민국(남한)이 완전히 아벨이 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려면 무엇이든지 남한이 북한보다 나아야 합니다. 북한이면 북한에 가라고 해서 가면 안 됩니다. 국가를 위해서 자발적으로 삼팔선을 넘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남한의 민족대표로 섰다 하는 사람이 나오지 않으면 안 됩니다.

북한 땅의 어느 누구보다도 정성을 들이는 데 있어서 나아야 합니다. 외적으로는 못한 것 같지만 내적으로는 우리가 그들보다 낫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강제적으로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동적으로 사탄이 굴복합니다.

일본이 한국을 돕게 되면 일본나라가 하늘 앞에 빨리 복귀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성교회와 하나되면 국가에 대해 아벨이 되고, 대한민국과 하나되면 대한민국이 북괴에 대해 아벨이 됩니다. 우리가 대한민국과 완전히 하나되기 전에 하나의 국가인 일본과 하나되어도 북괴는 무너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북괴가 제일 무서워하는 것은 우리와 일본이 하나되는 것입니다. 하나되기 위한 대표적인 일이 국제결혼입니다.

아담형 국가인 한국과 해와형 국가인 일본, 그리고 천사장형 국가인 중국만 하나되면 아시아권의 에덴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천사장형 국가는 미국입니다. 그런데 미국이 사명을 못하면 독일이 대신 입장에 서게 됩니다. 기성교회가 일찍이 이 뜻에 협조했더라면 원래 해와형 국가는 일본이 아니고 영국이 되었을 것입니다.

통일교회가 종교를 넘고 국가를 넘어 인정받는 것은 믿음의 기대를 완결지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교단적으로나 국가적으로 실체 복귀를 하기 위하여 주고 용서하면서 야곱과 같은 입장에 서야 합니다.

기성교회에 대하여 미워하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미워하는 것보다도 오히려 감사하게 느끼며 `이제는 잘사소서' 하고 축복해 줄 수 있는 자리에 서야 합니다. 그러면 그것은 혼자 잘 살라는 것이 아니라 같이 잘 살자는 것이 됩니다.

기성교회의 장로이면서 국가기관의 부장직에 있는 사람이 대통령에게 보고하여 우리를 납득하게 했다는 것은 가인의 역할을 잘한 것이고, 이 일에 열심히 협조한 국장은 천사장의 역할을 잘한 것입니다. 때가 되면 표창이라도 해야 합니다. 괜히 신이 나서 돕게 된다는 것입니다.

일본에서 구보끼(久保木修己)가 와서 도왔다는 것은 한국과 일본이 내적으로 하나되었다는 증거입니다.

나라를 사랑한 실적을 남기자

지금은 가정을 중심한 탕감시대입니다. 불효자와 역적은 자기 혼자 되지 않습니다. 부모 처자가 관련되어 있습니다. 즉, 정적인 동기로 인해서 되는 것입니다.

이번 7백쌍 합동결혼식은 우리 교회에 있어서의 일곱 번째 축복에 해당되는 것으로 하늘의 특별한 은총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세계적인 잔치입니다. 그래서 7년노정에 참가하는 것이 귀하다고 하였습니다.

매일매일 되어지는 일, 자기가 한 일을 부모님께 보고하여 기쁘게 해드리려고 해야 발전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본부에 올 때는 예물을 가지고 와야 합니다. 예물이란 다른 것이 아니고 나라를 사랑한 실적입니다.

기성교회를 위하여 초교파운동을 합니다. 그리고 전체 종교를 위하여 종교협의회운동을 합니다. 또 국가 민족을 위하여 승공운동을 합니다. 초종파적인 종교협의회의 기반을 닦아야 합니다.

원리연구회를 승공활동을 하는 학생회로 만들어야 합니다. 각 대학에서는 방과 후에 반드시 강의를 해야 하기 바랍니다. 승공이념은 통일사상을 배경으로 하였습니다. 승공학생회를 조직하여 통일사상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매 지구당 남자 3명, 여자 1명씩의 공작요원을 뽑아 보내기 바랍니다.

생활면에서 심정을 배양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느냐? 기도를 많이 해야 합니다. 몽시를 통해서라도 선생님의 지도를 받아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선생님의 지도를 받는 사람이 있으면 그런 사람을 전체 앞에 현창(顯彰)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적어도 한 지구에 두세 사람씩은 있어야 합니다. 자신이 못 통하면 그런 사람에게 하늘에서 가르쳐 주는 것을 물어봐 가면서 운영해야 합니다.

거기에는 직통형, 중간형, 반대형의 종류가 있습니다. 계시나 지시는 받는 사람의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종합적인 생활입니다.

기 도

아버님, 오늘은 여덟 번째 맞이하는 만물의 날입니다. 이 만물의 날은 실체적인 아버지의 역사에 의해 제정된 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저희들이 만물을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사옵니다. 또 인간이 만물을 사랑하여 만물을 되찾음으로써 인간과 만물이 하나되어야만 아버지께 돌아갈 수 있는 승리의 권한이 결정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이 만물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알아야 되겠습니다.

저희들이 아버지께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인간의 상대적 권(圈)인 만물을 수습하여 필연적인 예물로서 갖추고 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이 만물의 날을 설정하게 되었사옵니다.

부모의 날, 자녀의 날, 만물의 날, 그리고 아버님이 임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날이 나오기까지 아버님께서 수천년의 역사를 거쳐 나온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그리고 인류는 피의 제단과 눈물의 고빗길을 걸어 나왔음을 알고 있사옵니다. 그 모든 수난의 길은 만물의 날을 통하고, 자녀의 날을 통하고, 부모의 날을 통하고, 하나님의 날을 통하여 이 땅 위에 선주권을 세우기 위한 것임을 생각하게 되옵니다.

아버님,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참다운 인간이 나오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아버님과 관계맺은 아들딸이 나오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만물의 날이 나올래야 나올 수 없었던 역사적인 서러움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서러운 역사과정에 왔다 간 수많은 애혼들, 이 땅에 와서 섭리의 뜻을 받들다 죽어간 선지선열들, 이런 날이 나오길 얼마나 고대했고 자기의 정성을 그 한계선까지 미치기 위해 얼마나 몸부림쳤사옵니까? 그러면서도 이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영계로 간 불쌍한 영혼들이 많은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지,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영계에 간 그들에게 축복을 내리시옵소서. 해원성사할 수 있는 내용을 갖춘 이러한 날들로 인해 그들이 은사를 받을 수 있도록 특권적인 혜택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들의 후손인 땅 위에 남아 있는 수많은 인간들은 아직도 이와 같은 뜻을 모르고 있사옵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들이 만물과 인연맺어 아버지 앞에 돌아가야 할 운명에 처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사옵니다. 만물을 자기들이 관리하고, 자기들을 중심삼고 사용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아버지를 중심삼고 관리하고 아버지를 중심삼고 사용해야 한다는 원칙적인 기준을 모르고 있사옵니다. 이러한 인류 앞에 당신께서 자비와 긍휼과 사랑의 손길을 허락하셔서 그럴 수 있는 하나의 세계를 형성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대한민국을 두고 볼 때, 대한민국이 아버지 뜻에 안길 수 있는 국가가 되지 못했사옵니다. 하나의 종족은 물론 이 민족, 이 국가 전체가 그렇게 되지 못했사옵니다. 그리고 한반도는 남북으로 갈라져 있사옵니다. 이렇게 하나되지 못하고 남북으로 분단된 제물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을 바라보게될 때에 이것은 서러운 사실이 아닐 수 없사옵니다.

그러므로 오늘 만물의 날을 맞는 저희들은 아버지의 것과 지상의 것으로 갈라 세우는 자리에 설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것이자 지상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이자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자리에 서야 되겠사옵니다. 이러한 내용을 갖추어 생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은 이 땅 위에 계실 때에 겸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것을 중요시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것을 중요시하는 입장에 아버지를 높인 후에 만물을 자기 품에 품고 사용하는 것이 원칙인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를 높일 수 있는 만물권을 갖추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탄식권에 처하였사오니, 이것을 해소시킬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여, 한국에 물질적인 축복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이 한국에 있는 통일의 자녀들이 가는 길에 만물의 날의 해수가 가해짐에 따라 사방으로 축복의 길이 트이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만물의 날의 인연은 대한민국 뿐만이 아니라 아시아와 세계 전체, 이 땅만이 아니라 영계에까지도 연결되고, 이 한날의 운세와 더불어 전체가 아버지 앞에 부복하여 하늘의 참된 가정과 연결됨으로써 아버지의 영광을 중심삼은 아버지의 사랑권이 이 땅 위에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하오니, 금후에 있어서 저희들이 살아갈 수 있는 물질적인 축복의 권(圈)이 넓혀지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나라가 통하고 세계가 통할 수 있는 길을 가르치시어 나라와 세계를 위해 수고하는 당신의 자녀들이 많게 하여 주시옵고, 당신의 영광 앞에 나서기에 부족함이 없게 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니다. 그들이 물질로 말미암아 곤고한 자리에 서더라도 아버지 앞에 슬픔을 가져다 주고 아버지를 배반하는 자리에 서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아버지의 뜻을 중심삼고 아버지 앞에 돌아가는 데 있어서 자랑할 수 있는 불변의 실체가 되도록 축복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이날을 축하하고 있는 수많은 당신의 자녀들 위에도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국내외를 막론하고 당신의 뜻을 위하여 이날을 기념하고 있는 수많은 당신의 자녀들의 앞날에 무한한 축복을 허락하여 주시옵고, 그들의 생활권내에서 나라와 민족 앞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하늘의 갖추어진 존재임을 드러내시옵소서. 그들은 당신의 귀한 자녀들이오니 그 자녀들 앞에 모든 물질을 일체화시키어서 전체가 그들과 합하여야만 영광이 된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하여 주시옵고, 또 주위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여기에 모여 있는 당신의 자녀들을 기억하여 주시옵고, 불초한 정성들을 모두어 아버지 앞에 놓고 봉헌하는 이 시간을 친히 맡아 주관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니다.

뜻을 알고 나가는 이제부터는 물질을 대할 수 있는 참사랑의 모습을 갖추어 아버지께 바치기 위해 온갖 정성과 지혜를 다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오며, 모든 말씀 참부모의 성호 받들어 축원하였사옵나이다. 아멘.

말 씀

오늘은 제8회 만물의 날입니다. 부모의 날, 자녀의 날이 설정되고 난 후에 이 만물의 날이 설정된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개인이나 가정, 혹은 국가에서 기념하는 날들이 많이 있습니다. 국가는 국가 나름대로 기념하는 날이 있고, 가정은 가정 나름대로 기념하는 날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날들은 각각의 민족이나 가정을 중심삼고 기념하는 날이라는 것입니다. 즉, 국가가 다르고 민족이 다르면 그 기념하는 날들도 각각 다르다는 것입니다.

만일 아담 해와가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지금까지 역사를 거쳐오면서 세계적으로 기념하는 날들 가운데에는 어떤 국가의 특정한 사건을 중심삼고 기념하는 날은 없지만, 크리스마스처럼 특정한 사람을 중심삼고 기념하는 날은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온 세계가 하나되어 기념할 수 있는 참된 날은 나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크리스마스도 크리스찬에 한하여 기념할 수 있는 날이지 온 세계가 하나되어 기념하는 날은 아닌 것입니다. 더구나 세계뿐만 아니라 하늘과 일체화되어 기념할 수 있는 날은 지금까지 없었다는 것입니다.

인류 역사에 타락권이 생겨났기 때문에 그 타락권의 한계선을 넘을 때까지는 하나님을 중심삼고 온 인류가 희망의 한날로 세울 수 있는 때를 갖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러한 날들을 기념하고 축하하면서도,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을 대신하고 인류를 대신하고 역사를 대신하고 현시대를 대신하여 기념할 수 있는 날을 갖지 못한 것, 이 자체가 서럽고 슬픈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만 하겠습니다.

만일, 아담 해와가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아담 해와가 태어난 그날은 세계사적인 기념일이 되었을 것이요, 또는 천주가 기념할 수 있는 날이 되었을 것입니다. 아담 해와가 태어난 날 말고도 그들이 성혼식을 올린 날이나 그들이 이 땅에 왔다가 돌아간 날 등은 시대를 거쳐 오면서 인류역사가 계속되는 한 온 세계 만민이 우러러 축하하는 날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날들을 생각하는 사람이 지금까지 한 사람도 없었다는 사실을 두고 볼 때, 이것은 말할 수 없이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담이 태어난 날과 성혼한 날, 그리고 돌아간 날을 기념하는 세계적인 통일권이 형성되었더라면, 그러한 날들을 기념하는 인류는 한 형제가 되고, 한 백성이 되었을 것입니다. 즉, 하나의 세계에 사는 인간이 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더라면 아담이 생활하던 모든 풍습은 인류 역사에 계승되었을 것이며, 그때 형성된 문화는 영원히 계승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 세계를 횡적으로 바라볼 때, 대한민국에는 대한민국의 특정한 문화의 배경이 있습니다. 수많은 국가들은 각기 다른 역사와 전통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참한 사실인 것입니다. 원래 하나의 부모로부터 번식되고, 하나의 목적을 중심삼고 서로 통할 수 있는 하나의 생활권을 이룬 종족, 하나의 자녀의 인연을 존중하고, 하나의 부모의 인연을 존중시하는 하나의 종족권이 형성되었더라면 그 종족권의 문화는 아담 때에 형성된 것이 뿌리가 되어 계승되었을 것입니다.

아담이 생활하던 생활 풍습, 즉 언어라든가 예절이라든가 하는 모든 것이 그대로 계승되고, 이 세계의 언어와 문화는 일원화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각양각색으로 나타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각양각색으로 나타난 이유가 뭐냐 하면 싸움이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즉, 아담 가정에서 가인과 아벨간에 살육전이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때서부터 갈라지게 되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역사의 전통을 이어받은 인류는 시대를 거쳐오면서 아무리 같은 형제끼리라도 대판 싸우고 나면 그가 좋아하는 것은 나는 무조건 싫다 하는 입장에서 갈라져 나왔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인류의 문화는 여러갈래로 갈라져서 형성되어 나왔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형님이 `밥'이라고 하면 동생은 `밥'이라고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밥을 대할적마다 형과의 나빴던 일이 회상되기 때문에 자기 나름대로 밥을 다른 말로 표현했던 것입니다. 또, 그래서 생활도 달리 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런 적대감에 의해서 문화가 분열되어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온 인류가 한 민족이 되지 못하고 여러 민족으로 갈라지게 된 근본 원인은 어디에 있느냐? 물론 바벨탑을 쌓다가 그렇게 되었다는 성경 말씀이 있기는 하지만, 서로서로가 자기를 위주한 목적을 제일시함으로써 분열이 벌어졌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온 인류가 남길 수 있고 온 인류가 가질 수 있는 본래의 문화권, 본래의 생활권을 갖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타락으로 인한 응보입니다.

하나의 세계를 찾아 나오신 하나님

오늘날 한국 사람이 일본이나 미국, 서구 등 다른 나라에 가면 곤란한 일을 많이 겪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부여해 주신 자연환경은 어려움 없이 접할 수 있지만, 그 환경을 주관하고 있는 사람들과는 쉽게 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역사과정을 통하여 탕감복귀된 세계, 즉 하나의 세계를 추구해 나오셨습니다. 모든 것을 융화시켜 가지고 하나의 문화권, 하나의 생활권, 하나의 주의와 사상권을 이루어 하나의 세계를 모색해 나오셨습니다. 그러기 위해 역사과정에서 많은 희생의 대가를 치르셨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갈라진 것을 다시 합하려면 갈라지기 전에 들이면 될 힘 이상의 힘이 든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하나의 집을 지을 때에도 먼저 터를 잘 닦아야 되는 것입니다. 집터를 제대로 닦지 않고 집을 지으면, 오히려 새로운 땅을 정비하여 집을 짓는 것보다도 두 배 이상의 수고를 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 번 실수로 말미암아 지끄러진 것을 수습하려면 말할 수 없는 가중된 희생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이 희생의 대가를 누가 치러야 되느냐? 이 희생의 대가는 악한 편이 치르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과 같이 갈라진 환경을 개척하여 하나의 세계로 수습해야 할 책임을 짊어진 주인이 치러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주인이 누구냐 하면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지상에서 수많은 희생의 대가를 치러 나오시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늘편 사람을 중심삼고, 하늘편 만물을 중심삼고 갈라진 문화와 이 세계를 수습하기 위해 많은 희생의 대가를 치러 나오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볼 때, 어떤 민족이 그 대가를 가장 많이 치렀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가장 많이 대가를 치른 민족이 금후에 새로운 세계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는 민족으로 결정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새로운 역사시대를 개척하기 위해서 가장 많은 대가를 치른 민족이 어떤 민족이냐 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민족이 대가를 치름과 동시에 그 민족이 지니고 있는 물질도 대가로 치러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대가를 치르는 데 있어서는 반드시 사람과 물질이 함께 투입되어야 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그 대가를 치르는 방법은 무엇이냐? 지금까지 기독교는 제물의 형식을 취해 대가를 치러 나왔습니다. 그보다 먼저 유대교를 중심삼은 이스라엘 민족은 제물의 형태를 갖추어 가지고 그 제물과 사람이 하나되어서 대가를 치렀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어떤 민족이 하나의 세계적인 목적을 위해서 공통적인 생활권을 표준해 가지고 나왔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만일 실제로 그런 길을 걸어 나온 민족이 있으면 그 민족의 문화가 새로운 역사시대의 문화가 되고, 새로운 세계의 생활의 기원이 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의 민주주의 문화는 결국은 기독교 문화란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전세계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영국과 미국을 중심삼은 기독교 문화를 세계 만민이 가야 할 소망의 세계의 터전으로 인식하고 그 문화를 받아들이기에 급급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로 인한 필연적인 귀결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세계를 수습하려면 무엇을 중심삼고 수습해야 하느냐? 기독교를 중심삼고 수습해야 되는데, 현재의 기독교 자체는 보다 고차적인 입장에서 현시대를 수습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이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기독교 자체도 새로운 부활의 형태를 갖추어야 하고, 또한 이 세계도 새로운 부활의 형태를 갖추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하나의 세계로 넘어갈 수 없습니다.

뜻이 지향하는 길

하나의 세계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하나의 특정한 민족을 새로이 형성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새로이 형성된 하나의 특정한 민족을 중심삼아 가지고 전통적인 기독교 사상을 이어받아 새로운 문화권을 형성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형성된 문화권이 금후에 세계 인류가 공히 세워야 할 문화권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가 이 시대에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사상을 상속받아 가지고 하나의 세계와 단일문화권 형성을 위하여 책임지고 나갈 수 있는 하나의 특정한 민족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특정한 민족이 있기 위해서는 특정한 단체가 있어야 하고, 특정한 단체가 있기 위해서는 특정한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특정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특정한 단체를 이루고, 그 단체로 말미암아 특정한 종족을 이루고, 그 종족으로 말미암아 특정한 민족을 이루고, 그 민족으로 말미암아 특정한 국가가 형성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즉, 특정한 민족을 중심삼고 특정한 국가를 형성하여야만 세계의 문화권을 주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러한 민족과 국가의 형성을 표방하고 나선 것이 우리 통일교회입니다. 따라서 대한민국 백성들에게 선민사상을 심는 것이 우리의 뜻이 지향하는 길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세계에 있어서의 생활관이라든가 인생관, 세계관, 우주관은 하나님을 중심삼은 생활권, 인생관, 우주관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인간과 만물이 하나된 그런 특정한 권, 인류가 바라는 국가와 인류가 바라는 세계로 나갈 수 있는 특정한 권을 이루면, 그 권을 이룬 국가는 틀림없이 20세기 이후의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주체적인 문화국가가 될 것입니다. 이것은 원리적인 관점에서 볼 때 당연한 결론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날 이 세계에는 수많은 국가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국가들은 영원히 고정되거나 분리되어야 할 나라가 아닙니다. 여기에는 특정한 나라가 선한 입장에서 우위권을 가지고 하위권에 있는 나라들을 흡수해야 되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전쟁이라는 방식을 통해서 그런 일이 되어져 나왔지만, 그 전쟁에 승리하는 것은 항상 선한 편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자도 `위선자(爲善者)는 천보지이복(天報之以福)하고, 위불선자(爲不善者)는 천보지이화(天報之以禍)'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즉, 선한 편은 반드시 복을 받고 악한 편은 반드시 화를 입는 다는 것입니다.

선악의 결정 기준

지금까지 인류는 수다한 전쟁을 치러 왔지만 그 모든 전쟁의 해결 원칙이 무엇이었느냐? 조금이라도 더 선한 편이 이겼다는 것입니다. 왜 선한 편이 이겼느냐? 악한 편보다 선한 편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기 때문입니다. 편드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쉽게 이긴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정이나 이웃을 보게 되면, 혹은 같은 형제를 보더라도 그 형제 가운데는 선한 형제가 있고 그렇지 못한 형제가 있습니다. 그러면 선하다고 하는 것은 어떻기 때문에 선하다고 하느냐? 다시 말해서 어떤 사람을 착한 사람이라고 하느냐 하면, 자기를 희생하며 공적인 일을 위해 애쓰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의 형제들도 다 착하다고 칭찬합니다. 동네에 있어서도 어떤 사람이 인격자냐 하면, 자기를 위주한 인격관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동네를 위주한 인격관을 가진 사람입니다.

만약 그러한 인격자가 어떤 침범자로부터 침범을 받게 되면 모든 사람이 그 침범자에게 달라붙어 가지고 들이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마음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하늘 나라는 이러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로 이루어진 나라입니다. 따라서 하늘 나라 사람들은 한 마음을 가지기 때문에 한 사람의 마음이 전체를 대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나라들을 합한 것이 하늘 세계이기 때문에 하늘 세계도 한 사람의 마음이 전체의 마음을 대표하는 것입니다.

한 집안에서 형제가 서로 의견이 달라서 싸운다고 할 때 부모는 어느편을 드느냐? 주먹질을 먼저 하고 자기 욕심을 위해 싸우는 자식의 편을 드는 부모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역사과정에서 교육과 인륜도덕의 표준은 `선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선악을 어떻게 결정하느냐? 여러분은 이것을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선은 보다 공적인 입장에 있는 것이요, 악은 사적인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충신이나 열녀도 전부 다 이 기준에 의해 결정되는 것입니다. 보다 큰 것을 위해 살면 살수록 더욱더 선해지는 것입니다. 악은 개인을 위주로 하는 것입니다. 선은 보다 큰 것을 찾아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가정을 위주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남자면 남자로서 결혼을 해서 가정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가정을 찾은 다음에는 그 동네에서 칭찬받으려고 합니다. 이렇게 개인이 가정을 찾은 다음에는 종족을 찾아야 하고, 민족을 찾아야 하고, 국가를 찾아야 하고, 세계를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큰 것을 위해서 가면 갈수록 선편으로 가게 되는 것이요, 작은 것을 위해서 가면 갈수록 악편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개인을 위해서 가정을 이용하는 자는 가정에서 추방당합니다. 그런 사람은 악하기 때문에 때려 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자기 개인을 위해서 동네를 이용하는 자는 동네에서 쫓겨나게 되고, 자기를 위해서 민족을 이용하는 자는 민족의 반역자가 되어 쫓겨나는 것입니다. 나라를 팔아먹으면 역적이 되는 것이요, 세계를 팔아먹으면 하늘땅 앞에 용서받을 수 없는 천지의 강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이에요. 이러한 점에서 여러분은 선이 무엇이고 악은 무엇인가를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위대한 사람이냐? 보다 큰 선의 자리에 선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무엇을 위해 사는 사람이냐? 선을 위해 사는 사람입니다. 가정을 위해 사는 사람은 그 가정에서는 위대한 사람인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가정만을 중심삼고 나간다면 뭐가 위대합니까? 자기의 가정만을 중심삼고 살다 보면 다 마찬가지입니다. 세계 모든 사람들이 자기의 가정을 위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까? 여기에는 위대한 것이 없습니다.

여기에서 한 단계 올라가서 종족을 위해 사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종족권에서는 위대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렇지요? 김씨면 김씨 문중을 위해 사는 사람은 가정만을 위해 사는 사람보다는 나은 사람이라는 거예요.

민족은 여러 종족이 합쳐서 된 것입니다. 그런데 민족을 사랑한다고 하는 사람에게 `당신 진짜 민족을 사랑하느냐' 할 때의 그 진짜는 둘이 아니라 오직 하나여야 됩니다. 진짜 사랑은 하나라는 것입니다. 진짜 사랑은 하나이기 때문에 민족을 진짜 사랑한다고 하면 몽땅 사랑해야 합니다. 절반은 자기 가정을 사랑하고, 그 나머지 절반으로 민족을 사랑한다면 그것이 진짜 사랑입니까? 그것은 사랑이라 하더라도 진짜 사랑이 아닙니다. 완전한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자, 충신은 자기의 가정을 치고서라도 가는 사람인 것입니다. 나라를 살리기 위해서 가는 길을 막는 자기의 사랑하는 아내의 목을 베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악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왜 악이 되지 않느냐? 선을 위해서, 공적인 일을 서로 하겠다고 싸우다가 사람을 죽였다고 한다면 그것을 치리할 수 있는 법이 세상에 있습니까? 선의 길을 가는데 있어서 서로가 희생하겠다고 싸우다 사람을 죽였을 때 그것을 치리하는 법이 있습니까? 있어요, 없어요? 선을 행하겠다고 자기가 가진 재산전부를 팔아 남에게 주었다고 했을 때 그것을 다스릴 수 있는 법이 있습니까? 세상에는 이러한 것을 다스릴 수 있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것을 다스릴 수 있는 법은 무슨 법이냐. 그것은 인간법이 아니라 천법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천법의 치리를 받고 싶습니까, 인간이 만든 법에 의한 치리를 받고 싶습니까? 말할 것도 없이 여러분은 천법의 치리를 받고 싶어할 것입니다.

공적 법도의 주관권내에 있는 만물

세계를 통일하고 세계를 몽땅 사로잡겠다고 하는 주의가 바로 천법주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삼천만 국민으로 하여금 죽음길을 먼저 가겠다고 일시에 달려가도록 하는 주의, 이런 운동이 나타나게 하는 진리는 영원한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좋은 것은 내가 갖고 나쁜 것은 남을 주었다면 그것은 선한 행동입니까, 악한 행동입니까? 선입니까, 악입니까? 악입니다. 그것은 악한 행동인 것입니다.

온 만물은 공적인 법도의 치리를 받는 것입니다. 공적인 법도의 주관권내에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도 공적 법도권내에 속해 있는 것이요, 만물도 공적 법도권에 속해 있다는 것입니다. 국가도 공적 법도권내에서만 존속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사적인 내용이 개재될 때는 존속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악한 나라, 악한 세계를 움직이려는 입장에서 세워진 나라는 망합니다. 세계를 자기 나라의 것으로 만들겠다고 하는 나라는 반드시 망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원칙에 의해서 보면 공산주의는 망하게 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미국이 오늘날 20세기의 문명국가로서 첨단을 걷고 있는 것은 그 나라 국민성이 기독교의 박애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 사람들을 대해 보면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미국이 지금 세계의 살림살이를 하고 있지만 그들의 여성 단체나 남성단체를 보면, 전부다 아시아와 연결하고 또 미개한 나라와 연결하여 활동하고 있습니다. 즉, 세계와 유대관계를 맺기 위해서 정성들이는 입장에서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들은 남보다 먼저 정성을 들였기 때문에 세계에서 주체적인 입장에 서게 된 것입니다. 미국은 외국 사람에게 물질적인 원조나 육영사업 등 봉사적인 일을 하기 때문에 세계 어떤 나라보다도 앞설 수 있는 것입니다. 미국과 같이 선한 일을 하는 나라는 공적인 관리권을 가지기 때문에 세계의 문화권을 지배할 수 있는 것이요, 세계의 물질을 지배할 수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치에 맞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계에서 제일 무서운 주의는 무슨 주의냐? 제일 무서운 주의는 사적 주의가 아니라 공적 주의입니다. 또, 세계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하면 사적 주의자가 아니라 공적 주의자입니다. 개인보다 공적인 것은 가정이요, 가정보다 공적인 것은 종족이며, 종족보다 공적인 것은 민족입니다. 나아가 민족보다 공적인 것은 국가요, 국가보다 공적인 것은 세계입니다. 세계보다도 더 공적인 것은 하늘땅입니다.

하늘땅을 위해서 공적인 뜻을 받들어 나온 것은 남아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종교는 어떠한 입장에 서 왔느냐? 공적인 세계를 표방하고, 한때를 기다리면서 희생하는 입장에 서 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가 세계의 문화권을 형성해 왔고, 주류로서 하나의 세계를 형성하는 데 이바지해 나왔다는 것은 틀림없는 역사의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종교는 사적인 입장이 아닌 공적인 입장에서 소망을 추구해 나왔기 때문에, 역사가 망하고 혹은 그 시대가 망하고 국가가 망하고 모든 사조가 변하더라도 종교만은 수천년의 역사과정을 면면히 이어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알겠습니까?

여러분 가운데 장사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공적인 장사를 하느냐, 아니면 사적인 장사를 하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장사도 공적인 것입니다. 국가에는 장사에 대한 법이 있습니다. 상인이 어떤 물건을 놓고 천만 원에 팔겠다고 할 때, 사는 사람이 `좋소' 하고 기쁘게 사겠다고 하면 천만원짜리 거래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계약을 하든 그것은 당사자들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상거래에도 상법이 있고 상도가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어긋나면 국가로부터 제재를 받고 양심의 가책을 받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여러 국가와 더불어 결정한, 세계적으로 통할 수 있는 기준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기준에서 벗어나지 않는 입장에서 하는 장사라야 공적인 장사가 되는 것입니다. 알겠습니까?

십일조의 의미와 만물 관리 방법

기독교의 십일조를 보게 되면 거기에는 참 무서운 내용이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십일조를 내야 한다는 성경 구절도 있습니다. 열 가운데 하나를 하나님께 바치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보이느냐. 십일조가 무엇이냐'고 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십일조는 무엇이냐 하면 하나만큼만 가고서 열까지 가겠다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여러분의 부모님의 생일 잔치나 환갑 잔치, 혹은 상감마마의 탄신일을 맞아 축하해 드리기 위해서 소도 잡고 돼지도 잡고, 있는 것 없는 것 다 만들어 바친다 했을 때, 그분들이 그것을 전부다 먹습니까? 아닙니다. 받기는 다 받지만 다 먹지를 못하고 극히 조금밖에는 먹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듯 조금만 드셨지만 다 드셨다고 하는 조건이 세워지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십일조는 내가 소유하고 있는 물질 중에서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바침으로써 전체를 바친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께 전체를 바치지는 않지만 그 가운데서 하나를 정성들여 바친다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를 바침으로써 남는 아홉도 거룩한 물건으로 취급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십일조를 바치며 사는 사람은 절대 망하는 법이 없는 것입니다. 날이 가면 갈수록 그의 창고가 불어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더더욱 공적인 사람은 모든 만물을 공적인 세계의 치리법으로 관리할 수 있고 주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내용이 바로 천법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이런 원칙을 알고 나면 말을 하나 어떤 행동을 하나 주먹질을 하더라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악을 제거하기 위한 일은 죄가 안 됩니다. 세 번 이상 일러주었는데도 불구하고 말을 듣지 않을 때에는 들이쳐도 법에 걸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항상 선과 악을 가려서 보다 큰 것을 위해 살아야 되겠습니다.

하늘땅을 위해 사는 사람들처럼 무서운 사람은 없습니다. 하늘땅을 위해 사는 사람들은 종교인들인데 그들은 지금까지 사탄세계, 세상 사람들로부터 핍박과 조롱과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몰리고 쫓김받았습니다. 그런 우주 공법에 비추어 볼 때 그러나 사람들이 보다 공적인 것입니다.

아무 까닭없이 몰리고 쫓김받는 것이 좋은 것이에요, 나쁜 것이에요? 대답들 해 보세요. 그러한 입장에 처하는 것이 당장에는 나쁘겠지만 결과는 좋게 된다는 것입니다. 시작은 나쁘지만 결과는 좋다는 것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세상의 모든 사적인 것은 시작은 좋지만 결과는 나쁘게 된다는 것입니다. 망한다는 거예요. 악은 처음에는 흥하는 것같이 보이지만 결국에는 망하는 것이요, 선은 망하는 것같이 보이지만 결국에는 반드시 흥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적인 것은 처음에는 망하는 것같지만 결국에는 흥한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물질을 주관할 수 있는 사람과 국가와 세계를 주관할 수 있는 주의가 이 땅위에 나와야 됩니다. 그러한 주의를 내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화적 환경이나 사회적 환경, 역사적 배경이 다르지만 어떤 국가에든지 반드시 그 민족을 내외로 발전시키고 치리해 나오는 종교라는 형태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법이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국가든지 이것들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보다 공적인 목적에 가까이 가기 위해서는 이것들이 불가피하기 때문입니다.

천법과 양심 작용

여러분이 시장엘 가서 보더라도 자기의 욕심만 부리는 사람에게는 손님들이 물건을 사러 가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의 욕심만 부리면 누구나 싫어한다는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공적인 일이나 사적인 일을 중심삼고 보더라도 이렇게 치리할 수 있는 방법과 비결을 모르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몰라서 천국에 못 가게 되었다고 핑계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 공적이냐, 사적이냐 하는 것을 반드시 여러분에게 가르쳐 줘야만 압니까? 그것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안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의 어머니가 여러분의 누나와 여러분에게 맛있는 떡을 똑같이 나누어 주었는데, 여러분은 여러분의 몫을 다 먹고 누나는 먹지 않고 정성껏 보관해 둔 것을 잠을 자다가 살짝 일어나 혼자 먹을려고 하면 여러분의 마음이 `이놈아! 이 자식아!'라고 할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이 그래요, 안 그래요? 그런 것이 느껴져요, 안 느껴져요? 그런 마음이 들지 않는다면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야 되는 겁니다. 왜냐? 여러분의 마음은 공적인 것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사적인 것을 따라가면 망하는 것입니다.

본래 천법의 도리를 따라가는 인간에게는 자기 자신이 망하는 것을 방비해 주고 보호해 주려는 마음이 있는 겁니다. 본래 있다는 것은 뭐냐? 이것은 하나님에게 본래부터 그러한 마음이 있기에 인간에게도 본래부터 있게 된 것입니다. 자기가 만든 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양심아, 내가 이렇기 때문에 이런다' 그럽니까? `내 생각이 그렇기 때문에 그래야 한다'고 명령한다고 해서 양심이 작용합니까? 어디인지 모르지만 다른 데서 명령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 감정이 자기를 지배하는 것을 볼 때, 이것은 공사문제를 중심삼고 지배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자, 그 떡을 먹으라고 하는 것은 공적입니까, 사적입니까? 사적입니다. 그렇게 되면 여기에는 싸움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싸움이 벌어져요, 안 벌어져요?

누나가 `이 녀석아 왜 떡 먹었어?' 하더라도 꼼짝 못하는 것입니다. 그건 왜 그러냐 하면 떡을 먹었어도 훔쳐 먹었으니 당당하게 나서지 못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대꾸를 하면 훔쳐 먹은 녀석이 무슨 큰소리냐고 하면 꼼짝 못하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이와 같이 공사의 분기점을 중심삼고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 국가를 두고 보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그런 감정을 일일이 느끼며 생활을 하는 사람은 선한 길을 안 갈래야 안 갈 수 없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지금 여러분에게 말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공입니까, 사적입니까? 통일교회 문선생을 선전해서 선생님의 배를 채우기 위해서 이러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추대받기 위해 말하겠습니까? 여러분을 복받게 하기 위해서 말하겠습니까? 선생님이 복받기 위해서 말한다면 그것은 사적인 것입니다. 알겠어요? 여러분을 복받게 하기 위해서 말하는 것은 공적인 것입니다. 보다 공적인 말을 할때는 여러분이 감동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공적인 말은 조금만 들어도 식은 마음 보따리가 끄떡 끄떡 흔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이상하지요?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최고의 공적인 생활이란?

오늘날 사람들은 자기의 생활을 중심삼고 선악의 분기점과 공사의 분기점에서 안팎으로 뒤넘이치고 왔다갔다하다가 결국에는 사적으로 빠집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과거는 사적인 생활이었다고 회개하며 다시 공적인 생활을 이를 악물고 합니다. 그러다가 참지 못하고 또다시 사적인 생활을 하고……. 이렇게 왔다갔다하다가 사적인 쪽으로 들어서는 때가 많게 되고, 그러다 보니 공적인 선과는 멀어지는 생활을 합니다. 이것이 지금까지의 신앙생활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적인 생활을 하는 모든 사람들은 회개해야만 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최고의 공적인 생활은 천주를 위해서 일하는 것입니다. 우리 통일교회는 천지주의(天地主義)가 아니라 천주주의(天宙主義)입니다. 그렇지요? 천주의 `주'는 집이라는 뜻입니다. 천주주의는 사람이 주인이 아니라 집, 즉 가정이 주인입니다. 국가 형성의 기원도 사람이 아니라 가정입니다. 가정이 없으면 세계가 형성될 수 없는 것입니다. 가정이 잘못되면 그 나라는 망합니다. 그래서 가정교육은 그 나라가 금후에 복받을 수 있는 운명을 좌우하는 것입니다. 나라를 위한 공적인 법리에 의해서 살고 있는 가정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나라는 흥하는 것이요, 사적인 기준에서 사는 가정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나라는 망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이 부패하면 망한다고 하는 것은 무슨 말이냐? 공적인 입장에서 나라를 위해 사는 사람을 중심삼고 하는 말이에요, 아니면 자기 배통과 자기의 아들딸과 가정을 중심삼고 사는 사람을 말하는 거예요? 어떤 거예요? 나라를 이용하여 자기 가정을 위해 사리사욕을 취하는 사람은 부패하는 거요, 망하는 것입니다. 그 분량이 크면 클수록 크게 다치는 것입니다. 그것은 폭약 보따리를 지고 다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사실을 확실히 알고 이 기준을 확실히 세워야 되겠습니다.

무엇을 보았다고 할 때 공적으로 보았느냐, 사적으로 보았느냐? 또한 무슨 말을 할 때 공적으로 했느냐, 사적으로 했느냐? 여러분은 어떤 일을 하든지 항상 공과 사의 경계선에서 우왕좌왕 싸운다는 것입니다. 인격자일수록 보다 공적인 입장에 서는 것입니다.

우리 통일교회는 천주주의를 주장합니다. 여기에는 가정이 있고 종족이 있고 또한 나라가 있고 세계가 있습니다. 가정을 중심삼은 새로운 주의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 우리 통일교회입니다. 그러면 아까 말했듯이 세계를 보면 만물이 있고, 인간이 있고 하나의 생각, 즉 이상이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세계는 하나의 세계, 하나의 인류, 하나의 사상으로써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생활권, 혹은 문화배경 전체가 사적이냐 공적이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생활권이나 문화는 그 국가의 특정한 입장에 의해서 생겨나는 것이지만, 세계 만민이 공통적으로 추구해야 할 주의와 사상을 토대로 국가 체제를 갖춘다면 그 국가는 역사적이고 세계적인 국가가 되는 것입니다. 몇 세기가 지나게 되어 다른 나라는 다 망하더라도 그 나라만은 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공적인 것이 무엇이냐? 천도(天道)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은 확실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오늘날 이 세상에 있는 만물을 보고 `너는 공적인 법에 의해 치리받기를 원하는가, 사적인 법에 의해 치리받기를 원하는가' 하고 물으면, 보다 공적인 법에 의해 치리받고 싶다고 할 것입니다. 그건 왜 그러냐? 사람이 최고의 선권(善圈)에 나가고 싶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만물도 최고의 선권에 나가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의 모든 만물과 모든 사람들은 누구에게 치리받고 싶어하느냐? 보다 공적인 존재에게 치리받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이에요. 또한 보다 공적인 나라를 따라가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전쟁이라는 방법과 수단을 통해서 보다 사적인 나라는 망하게 하고, 공적인 나라를 흥하게 하여 보다 사적인 나라는 그 나라에 주관받게 해 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목적 때문에 일어나는 싸움을 사람들은 침략이니 공격이니 하는 말로 표현해 왔지만 사실은 그 내용면에서 볼 때, 보다더 선하고 공적인 국가에 치리받기 위해서 그런 싸움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이렇게 역사는 하나의 선한 권, 공적인 법도권(法度圈)을 향하여 발전되어 나온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통일교회의 주의와 사상

미국이 약소국가에 대해 원조를 해주고 있는데 왜 그러느냐? 물론 공산주의가 있기 때문에 그들을 대비해서 원조해 주는 것이지만, 그렇더라도 지금 당장 남을 위해서 무조건 원조해 주는 것은 공적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이 지금까지 발전해 나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미국이 원조를 중지하게 되면 그 순간부터 미국은 내려가게 됩니다. 알겠어요? 미국은 케네디 대통령 때부터 한국에 대한 원조를 삭감해 오면서 그 운세가 꺾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원칙을 두고 볼 때, 미국이 망할 때까지 세계를 위하여 봉사하고 계속 원조한다면 그로 인해 설사 미국이 망한다 하더라도 미국은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는 국가가 될 것입니다.

세계 인류사 가운데 새로운 국가 체제와 새로운 이상세계의 한 모형을 제시해 놓는 다고 하면 그 나라는 망했다고 해도 흥하는 것입니다. 망했더라도 망하는 것이 아니라 심어지는 것입니다. 한 알의 씨앗이 땅속에 들어갈 때에는 망하는 것 같지만 결국은 심어지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천 배 만 배의 열매가 거두어지는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제시하는 민족, 제시하는 주의, 제시하는 사상이 이 세계의 어디에 있느냐? 이것을 찾아가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상이 박애주의요, 세계 대가족주의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는 세계 대가족주의를 주장합니다. 그리고 세계 대봉사주의를 주장하고 나선 것입니다.

세상 사람이 볼 때 통일교인들은 일을 시키면 잘한다는 것입니다. 일시켜 먹기 좋다는 것입니다. 일년 동안 일을 시켜 보니 잘하거든요. 그래 1년 동안 일을 더 시켰는 데 역시 잘합니다. 그래서 또 1년 동안 일을 시켰는데 땡땡이도 부리지 않고 점점 더 열심히 잘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10년만 열심히 일하면 종살이로 들어간 사람이 사장이라는 명함을 달고 나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그게 망하는 겁니까, 흥하는 겁니까? 흥하는 것입니다.

그 회사 사장이 회사에서 누가 제일 충성하는가, 누가 제일 회사를 위하는가를 보았을 때, 처음에는 못나고 보기 싫은 사람이 재수없게 우리회사에 들어왔다고 생각했는 데, 한 일년 지내 보니 힘든 일을 혼자 다하고 일을 잘하니까 나중에는 달리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 5년쯤 하다보니 사장으로부터 신임받던 전무보다도 몇 배 낫다고 인정받고, 그렇게 회사에 계속 남아 있기만 하면 그가 그 회사의 주인이 될 것은 틀림없습니다. 알겠지요? 기독교가 세계를 정복할 수 있었던 원인이 어디에 있었느냐 하면 종살이를 하고 심부름을 하면서도 오래 계속해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10년, 20년, 나아가 천년이 흘렀어도 망하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은 지금까지 공석에 나서면 망하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공적인 입장에 서라는 것입니다. 공적인 입장에서는 용서가 없습니다. 또한 사적인 일을 해줄 때는 고맙다는 인사를 받지만, 공적인 일은 해주고 나서도 인사도 받을 수 없습니다. 공적인 것은 따먹었는지 뭐했는지 흔적도 없습니다. 나라를 위하여 몇 십년을 일했어도 상대도 안 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그 기가 막힌 것이 돌아서면 정말 기가 막히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섭섭해서 기가 막히고, 나중에는 좋아서 기가 막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통일교회는 선생님이 욕을 먹을 만큼 먹고 나왔지만 이러한 법칙을 다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20세기의 새로운 문명시대에 있어서 대한민국에 새로운 사상권내에서 나라를 사랑할 수 있는 종이 누가 될 것이냐? 종 중에서도 똥구루마를 끌고, 똥지게를 지고 활보할 수 있는 종이 누가 될 것이냐? 똥지게를 진 사람이 만일 상감마마의 친척이라 했을 때에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나라의 백성이 똥구루마를 서로 끌겠다는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민족 모두에게 똥구덩이에 들어가라고 하더라도 불평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주의로써 세계적인 기반을 닦아 모든 것을 흡수하게 되면 온 천하가 그런 자리에 들어가더라도 감사해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당연지사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배후에 개재된 힘과 능력을 일시에 동원해 하나의 목적을 향해 나갈 때에는 세계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지금 대한민국에서 경제부흥을 위해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하고 있는데 그것과 비교가 되겠어요?

만물의 해방시대를 맞으려면

여러분이 선생님 앞에 설 때 숙연해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선생님이 주먹질을 해서입니까?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공적인 그 무엇을 가지고 쌓은 터전이 자기보다 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생님 앞에 서면 자기도 모르게 자연히 숙연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공사의 문제가 생사권을 좌우하는 것이요, 승패를 결정하는 요인이 되는 것이며, 또한 선악을 분리시키는 기준이 된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대인관계에 있어서, 만물관계에 있어서, 국가관계에 있어서, 그리고 세계관계에 있어서 개인으로부터 가정, 종족, 사회, 국가, 세계, 천주까지 일관된 생활관을 중심삼고 생애 노정을 선권 세계와 연결시키는 생활을 한 사람은 천국에 가지 않겠다고 뒤로 도망가더라도 코를 끌어당긴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예수 믿고 천당 가지고 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천당에 갈 수 있습니까? 그런 수작들 부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도리어 예수 믿고 지옥을 해방하자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통일교회는 지옥을 해방하자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통일교회가 지옥을 해방한다고 하니 지옥이 해방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때 가서 구원받으면 되지 그 힘든 통일교회를 무엇하러 가느냐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가지않고 여러분의 아들딸이 가지 않고 그래서 3대만 안 가게 되면 여러분의 집안은 망하는 것입니다.

자 이제 결론을 짓습니다. 나 자신은 공적인 만물을 가졌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공적인 물건을 가졌느냐, 사적인 물건을 가졌느냐?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사는 동안에 내 것이라는 관념을 초월해야 합니다. 이것이 금후의 세계 인류에게 가르쳐야 할 가장 큰 교훈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내 것이란 관념을 부정하고 공적인 것이란 관념을 가지고 나가야 되겠습니다.

자, 이 건물 이거 영원히 통일교회의 것이 됩니까? 통일교회가 망하지 않으면 그리고 팔지 않으면 영원히 통일교회의 것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지 않으면 남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피조세계의 모든 만물은 어떤 특정한 개인에게 고착되어 있는 소유물이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자기 땅이라고 해서 그것이 좋다고 지나치게 자랑하면 망하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그것은 공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다만 그것을 관리하고 있는 겁니다. 그 치리법에 따라 내가 공적인 관리인으로서 관리하게 되면 영원히 관리할 수 있지만, 관리법에 따르지 않으면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공적 관리법, 만물에 대한 공적인 관리법을 이 땅 위의 어느누구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공적인 물건인 만물을 개인은 어떻게 관리하고 있고, 가정은 어떻게 관리하고 있는가? 또한 종족은 어떻게 관리하고 있으며, 국가와 세계는 어떻게 관리하고 있는 가? 만물에 대한 진정한 가치를 설정하는 때가 되어야 비로소 성경에서 말하는 만물의 해방시대를 맞게 될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 만물을 대하는 것은 관리가 아닌 겁탈입니다. 따라서 만물에게는 참다운 주인이 필요한 것입니다. 만물은 지금에까지 공적인 권한과 가치를 부여받지 못했습니다. 이제 만물은 그런 입장에서 치리받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만물은 참사랑의 관리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참이란 것은 자기를 중심삼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애국자는 가정도 사랑하고 그만큼 나라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지금까지 사람들이 통일교회를 비판하는 것은 통일교회를 믿다가 망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 망한 겁니다. 그 망한 것이 세계를 위해 망한 것이라면 그렇게 3대 이상 망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흥하게 됩니다. 여기서 망한다고 하는 것은 글자 그대로 망하는 것이 아니라 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심을 때에는 제일 좋은 것을 심어야 좋은 것이 나오지, 나쁜 것을 심으면 나쁜 것이 나옵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그 나라는 망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라의 국민들이 무엇을 어떻게 심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 나라 국민들이 천 배, 만 배 좋은 종자를 심어서 창고가 좁을 정도로 수확하게 되면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그러지 않는 나라는 자연히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 비로소 그 판도가 넓어진다는 것입니다.

만물을 공적으로 주관하는 사람이 되라

여러분은 만물을 공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밥을 먹을 때, 밥한테 고맙다는 인사도 없이 무작정 먹는다고 세상의 밥들이 전부 동원해서 데모하는 날에는 어떻게 하겠느냐는 거예요. 인간의 입이라는 입에는 전부 안 들어가기로 동맹파업을 한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런 생각 해 보았습니까? 식물이라서 그럴 수 없으니 다행이지만 만약에 그럴 수 있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인간이 그런 상황에 있다면 동맹파업을 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만물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밥을 먹을 때에는 그 밥의 가치를 알고 먹어야 합니다. `너는 어떤 사람의 입에 들어가기를 원하느냐. 너는 어떠한 얼굴을 가진 사람의 입에 들어가 뼈가 되고 살이 되고 에너지가 되어 가지고, 선한 세계를 위하여 무엇을 남기고 싶어 하느냐?' 이런 생각을 하면서 밥을 먹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밥이 도둑놈 뱃속에 들어가기를 원하겠습니까? 밥이 배에 들어가는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단 한 알의 밥풀이라도 선한 사람에게 들어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보다 공적인 것을 원한다는 것입니다.

공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공기가 총단결하여 5분 동안만 세계적으로 파업을 일으킨다면 세계 인류는 일시에 공기에게 복종할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세계를 강제적으로 굴복시키려면 공기로써 굴복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공기를 빼내어 이 세상을 진공상태로 만들어 `1분, 2분, 3분, 5분만 있게 하면, `죽어도 항복이오' 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공기가 무서운 것입니다. 공적인 것은 무서운 것입니다. 공적인 것은 개인을 죽일 수 있습니다. 요즈음 도시의 공기를 오염시키지 말자고 하는데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입니다. 깨끗이 하지 않으면 침범당합니다. 또한 물도 깨끗이 해야 합니다. 이렇게 만물은 전부다 공적인 것입니다.

태양은 생명의 근원이며 무한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태양 빛을 공짜로 받고 있습니다. 태양 빛을 사먹겠다고 돈을 마련해서 들고 다니는 사람을 봤어요? 또, 태양 빛을 받았다고 한 푼이라도 낸 사람을 봤어요? 이 태양 빛을 판다고 하면 사겠어요, 안 사겠어요? 몸뚱이를 주고라도 살 것입니다. 물이라든가 공기라든가 빛이라든가 하는 모든 자연물은 여러분 개인의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만물을 자기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도둑놈입니다.

만물의 주인은 하나님이자 인간

이 만물은 누구의 것이냐? 내 것이기 전에 나라의 것이요, 나라의 것이기 전에 세계의 것입니다. 왜 그러냐? 그렇지 않은가 봅시다. 우리나라 시조인 단군이 나타나기 전에 이 땅은 누구의 것이었습니까? 주인이 있어요, 없어요? 공적인 법도에서 볼 때 주인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사람만을 놓고 볼 때는 주인이 없지만, 공적인 법도에서 보면 주인이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 주인입니까? 하나님이 주인이십니다. 그 주인은 세계의 주인이냐, 대한민국의 주인이냐? 그 주인은 대한민국의 주인이시기 전에 세계의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세계의 주인은 누구냐? 이 세계의 주인이 미국입니까? 미국이 있기 전에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 세계의 주인이신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이 땅을 지배해야 됩니까? 당연히 이 세계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께서 지배하셔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으로부터 앞에 제일 사랑받는, 주인을 대리하는 사람이 지배해야 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제일 많은 사랑을 받는 아들이 있어서 그에게 미국이라는 나라는 누구 것이냐고 묻는다면 자기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세계는 누구 것이냐고 물어도 자기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하나님의 사랑을 더 받는 사람은 이 세계는 자기 것이라고 당당히 주장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의 애국자라고 자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미국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충성하는 사상을 가진 사람이 세계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미국 사상을 중요시해서 그 사상을 국민사상으로 삼고 나가면 미국은 망합니다. 인류를 영존하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주인으로 삼아 하나의 세계, 다시 말하면 보다 가치있는 하나의 세계, 보다 영원한 하나의 세계를 이루겠다는 주의를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무슨 주의냐 하면 하나님주의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아들딸이 되면 세계는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대한민국에서 제일 좋은 집을 샀는데 그의 조그만 아들이 달랑달랑 와서 그 집을 보고 `아빠, 우리 집 참 좋다'고 할 때, `이 녀석아, 왜 우리 집이냐? 내집이지' 하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우리라는 것은 아버지 것이 절반이고 내 것이 절반이란 말이지만, 그런 말을 듣고 기분 나빠하는 부모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어느 부모든지 `그래, 우리 집이다. 너 잘 아는 구나' 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느냐? 사랑은 일체를 만들기 때문입니다. 부모와 자식간에는 사랑이라는 인연으로 맺어져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랑을 꺾을 수 있는 아버지가 없고, 그 사랑을 꺾을 수 있는 자식이 없는 것입니다. 사랑만이 그 둘을 지배하기 때문에 사랑을 중심삼고 인연된 물건은 부모의 것이자 자식의 것이 틀림없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라는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핍박하고 십자가에 죽이라고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 귀중한 물건이 놓여 있는데, 그 물건을 다른 사람들이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해서 여러분들이 자기 집으로 가지고 간다면 그것이 공적인 행동입니까, 사적인 행동입니까? 「사적인 행동입니다」 그것은 사적인 행동입니다. 사적인 행동이라면 도둑이죠? 그 곳에 그 물건을 놓아야 할 가치가 있으니까 놓아 둔 것입니다. 가치 있는 장소에 그 물건을 놓았는데도 그것을 사적으로 생각하여 가치가 없다고 취급할 지 모르지만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왕궁에는 왕이나 왕후 왕자가 사는데, 왕자가 왕이나 왕후를 보고 대왕님, 왕후님이라고 부릅니까? 그들도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 형님, 누나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지만 왕자라고 해서 백성의 물건을 마음대로 가져갈 수 있느냐?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왕자라고 해서, 백성들이 가져가지 않는다고 해서 마음대로 가져갈 수 있느냐? `여기에 있으면 쓸데없을 것 같군. 내가 가지고 가면 그 이상 사랑하고 더 가치 있게 여길 텐데 이거 여기 두면 안 되겠군'이러며 가져갈 수 있습니까? 그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환경이 다르고, 있어야 할 자리가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통일교인들도 이걸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 통일교회에서도 좋은 물건이 번번이 없어진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죄입니다. 모든 것은 있어야 할 자리가 다 있는 것입니다. 본부니까 그럴 수 있지 지방에 가서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여러분이 물건에 대한 공적 관리를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새로운 마음으로 만물을 대하고 그 가치를 인식하라

우리는 이런 관점에서 만물을 대해야 합니다. 솟아오르는 태양을 바라볼 때도 `억천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태양아. 너는 나라는 사람이 길이길이 생명을 지탱해 가도록 나를 비쳐 주기 위해 잘도 솟아오르는구나. 야! 힘차고 대견스럽구나' 이렇게 보라는 것입니다. 물을 보더라도 `네가 졸졸 흘러가는 모양은 처량하지만 천하의 대장부라도 목이 마르면 체면을 불구하고, 흙을 핥는 한이 있더라도 너를 마시지 않느냐. 놀라운 물줄기로구나' 이렇게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또한 많은 나무 가운데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으면 `너는 왜 많은 나무 가운데 재수없이 혼자 남아 가지고 간들간들하느냐? 이놈의 소나무야' 그러지 말고 `아이쿠, 다 죽었는데 홀로 종자로 남았구나'라고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각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길을 가더라도 그런 마음을 가지고 가고, 생각을 하더라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나라를 사랑하지 않을래야 사랑하지 않을 수 없고, 세계를 사랑하지 않을래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참사랑한다. 진짜 사랑한다'라고 할 때 그 진짜 중의 진짜는 무엇이냐?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대한민국을 더 사랑하시겠어요, 세계를 더 사랑하시겠어요? 세계를 더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세계를 더 사랑하시겠어요, 하늘땅을 더 사랑하시겠어요? 하늘땅을 더 사랑하신다는 겁니다. 더 큰 것을 사랑하십니다. 더 큰 것이 보다 공적이기 때문에 더 큰 것을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라를 사랑하고, 세계를 사랑하고, 하늘땅을 사랑하겠다는 주의와 사상을 지니고 사는 민족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당장 헐벗고 쫓기고 몰림받고 산다고 낙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비록 조밥이나 꽁보리밥을 먹고 소금이나 된장을 찍어 먹는 한이 있더라도 그 된장통을 보고 `거룩하신 된장통이요'라고 한다면 그 된장통은 세계 제일의 된장통이 된다는 것입니다.

새까맣게 때가 묻고 이빨이 빠진 접시라 하더라도 `너를 대하는 주체는 다른 사람이다' 그러라는 거예요. 그러면 그 가치는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 접시 위에 담긴 음식물은 보잘것없는 음식이지만 `오늘 이 시간에 거룩한 음식물로서 내 몸에 들어가 가지고 힘이 될 것이다. 이 힘은 나라를 위해, 세계를 위해 쓰여질 것이다'라고 한다면 그 접시가 기분 나빠 하겠습니까? 얼마나 기뻐하겠습니까? 여러분은 신비로운 경지에 들어가 그 물건이 기뻐하는 것을 감지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한 경지에 도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물건을 자기보다 더 사랑한 사람, 즉 더 공적인 사랑을 한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에게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기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 때 자기가 갖고 있는 반지나 보석이라도 그에게 줘야 되겠어요, 안 줘야 되겠어요? 통일교회 아주머니들이 기도를 하게 되면 영계에서 `네가 지니고 있는 금붙이 같은 것들 전부 다 선생님께 갖다 드리라'고 명령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하나님이냐, 문선생이 요술해 가지고 악신을 시켜서 빼앗아 가려고 하는 짓이 아니냐 하고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그게 아닙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은 보다 가치 있는 것을 인정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생님이 여러분 보다는 조금 낫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물건이 나라를 위해 쓰일 수 있다면 자기 자식을 위해 쓰지 말고 나라에 보내야 됩니다. 세계를 위해 쓸 수 있다면 세계로 보내야 됩니다. 이것이 정의입니다. 이것이 물건에 대한 옳은 관리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애국애족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나라를 위해 바칩니다. 물건을 바치고 자기 가정까지도 전부다 바친다는 것입니다.

공적 생활의 어려움

선생님은 여러분에게 통일교회 문선생을 위해서 살라고 절대 가르치지 않습니다. 선생님과 여러분이 합해서 나라와 더불어, 세계와 더불어 살자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릇된 가르침은 망하게 하는 것이니 전부다 보따리 싸 가지고 나가 버린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 가르침이 그릇되지 않았다면 보따리를 싸서 나갔더라도 돌아오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나갔던 사람들이 지금 되돌아오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까지 선생님이 이런 길을 반세기 이상 걸어오면서 몰리고 쫓겼지만, 어느 한때 나를 핍박하던 그 사람들에게 `너희들이 핍박한 것의 천 배, 만 배로 배상하면 해방될 수 있다'고 하게 되면 강제로 명령하지 않아도 너도나도 그런 일을 하려고 할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고생으로 인해 공적인 가치를 보다 드러내게 되었다면, 그 환경도 가치있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환경은 중심 앞에 자연히 흡수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물건을 팔아 돈을 벌면 십일조를 해야 하는데, 이것을 하기가 얼마나 힘이 듭니까? 힘들어요, 힘들지 않아요? 힘들다는 거예요. 공적인 일중에 쉬운 일이 있어요, 없어요? 「없습니다」 없다는 것입니다. 또 새벽에 일어나 새벽기도를 하라고 합니다. 자다 말고 기도하려면 솔직이 말해 선생님도 힘듭니다.(웃음) 언제나 새벽 4시경에 일어나 기도를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늘은 만물의 날이기 때문에 새벽 1시경에 눈을 떴습니다. 영계에 대한 체면이 있으니 기도드리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졸린 눈을 껌벅껌벅하며 `아이쿠, 오늘은 만물의 날이니 기도해야지' 이렇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힘든 겁니다. 남들 다 자는 아닌 밤중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안 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힘들더라도 그렇게 해야 편하다는 것입니다. 기도 안 하면 여러분한테 이런 얘기 하기도 아주 어색하다는 겁니다.

선생님은 아침 경배시간에 조금만 늦어도 그날 하루 종일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합니다. 선생님은 그런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시계를 보아서 단 일분이라도 늦게 되면 기분을 잡치는 것입니다. 그 하루 종일, 그 일주일 내내 마음이 안 잡힙니다. 그러면 그 다음 주에는 일찍 일어나서 열 배 백 배 정성들여 가지고 지난주의 잘못을 탕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조건을 세워야 마음이 편안합니다. 나는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불쌍합니까?

선생님이 여러분에게 이야기를 할 때 타입이나 모양이 근사하게 보일는지 모르지만 그것 때문에 몇 주일, 혹은 몇 달 동안을 꼼짝없이 구속당하고 사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적인 생활입니까, 공적인 생활입니까? 공적인 생활이라는 것입니다. 마음대로 살면 얼마나 좋겠느냐는 것입니다. 만일 선생님이 마음대로 산다면 여러분보다 더 멋지게 살고 있을 것입니다. 내가 춤을 추어도 누구에게 지지 않습니다. (웃음) 소질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남에게 사기를 치더라도 시시한 것은 아예 하지도 않습니다. 한다면 그래도 한국에서 알아주는 사람들의 주머니를 털어 가지고 `나한테 굴복해야 돌려주겠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놀면 이렇게 놀지 시시하게 안 한다는 거예요.

사실 이 종교지도자의 자리가 얼마나 힘이 드는 자리인지 여러분들은 모릅니다. 온 동네 사람들의 눈치를 봐야 하고, 지지리 못난 죄인의 눈치도 봐야 합니다. 물론 잘난 사람의 눈치도 봐야 됩니다. 눈치 독 안에 들어가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찍해도 짝해도, 찍짝해도 큰일난다는 대원군 시대의 말이 있지만 이건 그보다 더하다는 것입니다. 밤낮이 없습니다. 밤이라고 해서 하나님께서 보시지 않습니까? 밤낮 찍짝, 이게 못살 놀음이라는 겁니다. 이렇게 못할 노름을 하고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살고 나면 수가 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수는 처량한 수라는 겁니다. 관리인밖에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여러분이 그렇게 살았다고 하면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통해 나가시느냐? 그런 사람을 통해 나가시는 것입니다. 보다 공적인 세계를 향해서 가는 민족에게 하나님이 왔다갔다하시는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나님은 보다 공적인 길을 가는 민족이 있으면 그 민족한테로 보따리를 싸 가지고 가시는 것입니다. 또, 그보다 더 공적인 민족이 있으면 그 쪽으로 방향을 갖추어 가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왔다갔다하시는 것입니다.

공적 관리법을 알아야 한다

여러분은 통일교회에 남보다 먼저 들어왔다고 큰소리치면서 자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가인 아벨법 원칙에 있어서, 아벨은 가인보다 나아야 됩니다. 가인보다 공적인 자리에 서야 아벨이 되는 것입니다. 먼저 들어왔다고 젊은 청춘시대부터 지금 60살이 넘을 때까지 모든 것을 바쳐 나온 이 교회 할머니인데, 육신을 다 바쳤는데 몰라본다고 불평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만물에 대한 공적 관리법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사랑에 대한 공적 관리법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부모보다 공적 관리법을 먼저 알게 될 때에는 그의 자식을 빼앗아 올 수 있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통일교회 문선생이 지금 그런 일을 하고 있습니다. 남의 아들딸을 데려다 선생님 마음대로 결혼을 시켰습니다. 36가정을 축복해 줄 때 그들 부모가 와서 세상이 그런 법이 어디 있느냐, 우리 아들딸의 청첩장을 누가 냈느냐고 야단이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냈다고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그들의 부모보다 선생님이 더 공적인 입장에 섰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그때 `당신들은 지금 모를 것이다. 그러나 조금만 지내 보라. 그러면 당신들이 얻은 사위나 며느리보다 나은가 안 나은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통일교회 문선생이 다른 것은 다 잘못했는데 자기들 사위나 며느리는 잘 얻어 주었다고 인정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적인 물질을 어떻게 관리하느냐? 개인을 어떻게 관리하느냐? 가정을 어떻게 관리하느냐? 사회를 어떻게 관리하느냐? 국가를 어떻게 관리하느냐? 나아가서 세계를 어떻게 관리하느냐? 이러한 공적인 관리법을 중심삼고 새로운 사상, 새로운 세계주의를 정립시켜 나가야 됩니다. 그 주의는 인간주의가 아닙니다. 통일교회 문선생주의도 아닙니다. 그런 주의라면 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주의와 일체가 되느냐, 안 되느냐 하는 문제가 생사를 결정짓는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보다 공적인 자리에 서는 것만이 보다 가치적이요, 보다 영원한 것이며, 보다 비중이 크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국가가 어떤 것보다 공적인 자리에 선다면 그 나라에는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는 천운이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이제 대한민국에 천운이 찾아왔다는 것을 여러분은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친구들과 같이 밥을 먹을 때, 어떤 친구는 `세 번이나 점심을 얻어 먹었으니 이번에는 내가 돈을 내야 한 텐데' 하면서도 눈치만 봅니다. 다른 친구들은 그 친구의 얼굴을 보고 돈을 낼 것인가, 안 낼 것인가 하는 것을 점칩니다. 그렇게 마지막 숟가락을 놓을 때까지 버티고 있다가 어느 한 친구가 돈을 내면 `내가 안 내길 참 잘했지' 하고 좋아합니다. 그 녀석은 참으로 못난 녀석입니다. 그 순간에는 돈을 손가락으로 움켜쥐고 좋아했지만 그 손가락은 무엇이냐? 사망의 낙인을 찍기 위한 준비를 한 것입니다. 그의 후손은 틀림없이 몇 대 후에는 종의 자식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개인을 위해 쓰는 돈은 꾸물거리며 아꼈지만 그 돈을 나라를 위해 썼다면 그 사람은 절대 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에도 그런 말이 있잖아요? 돈은 막 벌어서 잘 쓰라는…. 큰 것을 위해서는 개인 하나쯤 속여서 돈을 벌더라도 괜찮은 것입니다. 한 사람 희생시켜 돈을 벌어서 나라를 살리기 위해 썼다면 걸리지 않습니다. 이것은 공적인 치리의 법도입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은 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에 물의를 일으키는 사람으로 소문났는데, 나 때문에 그렇게 됐습니까? 그렇게 되도록 한 장본인들이 여기에 있는 여러분입니다. 선생님이 하지 말라 한 것을 부득부득 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자기들이 잘못해서 욕을 먹게끔 만들어 놓고 전부 다 도망을 가 버리고 선생님 혼자 남았으니 할 수 없이 선생님이 전부 뒤집어쓰고 지금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웃음)

선생님이 잘못해서 욕먹은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전부다 여러분이 하지 말라고 한 것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놈의 입이 원수입니다. 여자들이 재잘재잘거리며 우리 선생님이 어떻더라고 하며, 어디 가서 얘기하지 말라고 한 것까지 다 얘기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을 듣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통일교회를 망치는 것입니다.

영계를 통해 보면 여러분은 선생님과 상당히 가깝습니다. 아버지와 아들딸과 같은 입장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선생님의 말을 듣지 않으면 영적으로 선생님이 들이 패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나 엊저녁에 선생님한테 두들겨 맞았어. 그런데 그 몽둥이는 사랑의 몽둥이래' 이러면서 좋아합니다. 이렇게 몽시에 맞아도 좋아하고 실제로 선생님 앞에서 맞아도 좋아하니까 남들이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별의별 소문이 다 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얘기를 안 해서 그렇지 소문 내고 다녔던 사람들 여기에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여기 양윤영 하나만 보더도 이화여대를 나왔을 때 선생님이 그래서는 안 된다고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안 돼긴 뭐가 안 돼요? 내가 은혜받은 것인데요 뭐'라고 하며 떠들며 돌아다녔습니다. 그런데 은혜받은 그것은 필시 지금까지 기독교에서 말하지 않은 것을 선생님이 말했기 때문이지 다 알고 있는 것을 말했으면 은혜 받았겠어요? 그런 것 가지고 `통일교회에는 선남선녀들이 다 모였으니 따르지 않으면 큰일난다'고 대포를 놓고 돌아다니니 기성교인들이 뿔이 나 가지고…. 그러던 사람이 요즘에 와서는 잘한 듯이 `내가 어려우니 후원을 좀 해주십시오' 하며 오히려 선생님에게 와서 땡깡을 부립니다. 그래도 여러분은 땡깡이라도 부릴 수 있으니 얼마나 행복합니까? (웃음) 제일 불쌍한 사람이 통일교회 문선생입니다. 선생님은 땡깡부리는 법을 배운 적이 없습니다. 그런 것은 생각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그런 사람들을 보면 `위대하구나. 혁명적인 일을 벌이고 있구나'라고 생각하면서 감상을 합니다.

선생님이 여러분을 등쳐먹거나 뼈를 갉아먹는 그런 일은 하지 않습니다. 절대 그런 일은 안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기에 여러분에게는 선생님이 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여러분은 대한민국의 그 누구보다도 애국해야 되겠고, 세계의 그 누구보다도 인류를 부여안고 천사의 인연을 맺어 주기 위해 살 길, 죽음길을 가리지 않고 가야 합니다.

그런 역사적인 기반이 남아질 때 누구든지 생명을 걸고 그 길을 따라올 것입니다. 개인으로부터 세계까지 갈 수 있는 길이 닦여진다면 역사는 돌아가는 역사이기 때문에 만민은 오다가다 다 걸려서 한 골수로 살 길을 찾아갈 것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이 통일교회의 가르침입니다.

웃음소리를 듣고 싶어하는 만물

여러분은 만물을 공적으로 관리하고 공적인 인간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우리 공장은 전에는 십 칠 팔시간 동안 일을 시켰습니다. 요즈음은 12시간 정도 일을 시킵니다. 그러면서 월급도 많이 주지 않으면서 희생봉사하라고 합니다. 선생님이 이 얘기를 하게 되면 `아이구, 선생님도 또 그 얘기 하시는구먼. 희생봉사? 작년에도 들었는데 올해도 듣는구먼' 이러면서 불평을 합니다. 그렇게 3년을 넘긴 녀석은 `피--' 합니다. 선생님은 그걸 대번에 안다는 겁니다. 그래서 마음으로 아무개 저러면 안 되겠는데 하고 생각하고 있으면, 아니나 달라 얼마 안 있어 스스로 물러나는 것입니다. 전부다 집합시켜서 감별해 보는 겁니다. 점수를 매겨 본다는 것입니다. 그런 녀석들에게 뜻을 중심삼고 안 할 수 없도록 딱 얘기하면 다시 열심히 일을 합니다. 또, 선생님은 척 보면 벌써 누가 졸 녀석인지 대번에 골라내는 것입니다.

이렇게 공장을 경영해서 돈을 벌면 어디에 쓰느냐? 선생님을 위해 쓰느냐? 선생님은 지금 집 한 채 없습니다. 지금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돈이 생기면 선생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집을 먼저 구해 주고 나서 선생님 집을 마련하려는 주의고, 또 이 나라 이 민족 앞에 기억될 수 있는 조건을 세워 놓고 선생님이 자리를 잡으려고 하는 주의이지 누가 알겠으면 알고 모르겠으면 말라는 주의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원칙을 알아요? 이것이 틀렸다고 하는 사람 손들어 보세요. 이러한 원칙이 남아 있는 한, 어긋나지 않는 한 여러분이 아무리 반대하고 아무리 죽으라고 해도 안 죽고 안 망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날이 가면 갈수록 흥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선생님은 반대를 받으면서도 세계적인 기반을 닦고 있습니다. 내가 이제는 부러운 것이 없습니다. 지금이라도 당장 독일 식구들에게 벤츠 한 대 보내라고 하면 보낸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특명만 하게 되면 못할 것이 없습니다. 그건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나라를 위할 수 있는 기반을 먼저 닦아서 그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놓아야 부작용이 없는 것입니다.

이렇듯 만물을 공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시대가 와야 합니다. 그 시대가 오면 땅에 거름을 주지 않아도 만물이 잘될지도 모릅니다. 만물도 매일같이 웃음 소리를 듣고 싶지, 우는 소리는 듣기 싫어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우는 소리 듣고 싶어하는 사람 손들어 봐요? 선생님은 싫은데 여러분은 모르겠습니다. 우는 소리는 듣기 싫은 모양이군요. 나 닮았군요. 그러면 웃는 소리 듣기 좋아하는 사람 손들어 보세요. 전부 드는 구만. 그러면 하나님은 어떠하시냐? 하나님께서도 역시 웃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모두가 웃고 살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하시다면, 선은 어디에 있느냐? 웃고 사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웃음으로 소화시킬 수 있는 영원한 권한을 가진 주체로 계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나쁜 것도 선한 것으로 소화해서 그 나쁜 것을 좋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천지의 이치가 달라진다고 할는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지금 세상의 이치는 전부다 좋게만 살게 되어 있지 않다고 얘기합니다. 그러나 안 그렇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그렇게 주장합니다.

세상은 상응성과 상극성으로 되어 있습니다. 상응성만 있으면 세상은 하나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다 달라붙게 됩니다. 그러나 상극성이 있기 때문에 개성진리체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존재의 분별적인 기준을 확정짓기 위해서는 여기에 상충성이 있어야 됩니다.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 상충이라는 것은 상충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상응적인 존재를 대할 수 있는 상충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람들은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에 있어서 철학사상적인 면에서 통일교회의 이론이 앞으로 새 시대에 크게 공헌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물의 참된 주인이 되라

이러한 모든 것을 생각해 볼 때, 여러분은 공적인 관리를 존중시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물건이면 물건을 존중시해야 합니다. 선생님이 어렸을 적에 공책을 쓸 때에는 줄이 쳐진 부분부터 쓰는 것이 아니라 맨 꼭대기부터 썼습니다. 어떤 때는 한 장에 두 번씩 쓰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공책 한 권을 더 쓸 수 있는 것입니다. 물건을 아껴 써야 됩니다.

선생님은 선생님 자신에 대해서는 참 깍쟁이입니다. 지금까지 양복 하나 선뜻 맞추어 입어 본 적이 없습니다. 옆에서 자꾸 하라고 해야 해입었습니다. 자기가 선뜻 들어가서 해입으면 옷 해 입는 맛이 없습니다. 옆에 서 자꾸 해입으라고 하고, 맞추어 입으면 옆에서 칭찬도 하고 멋있다고 감상이라도 해주어야 좋은 것입니다. 혼자 해입고 잘 되었냐고 물어보는 것은 스스로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런 시시한 일은 선생님은 하지 않습니다. 선생님의 생리가 아예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좋아하느냐? 공적인 입장에서 공적 관리를 생활철학으로 삼고 나가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만물에 대해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천지의 이치요, 천법이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은 대학을 다녔다고 해서 자기를 중심삼고 거만스럽게 누구는 어떻게 저떻고 하지만 선생님은 어색해서 그런 놀음 못합니다. 죽으면 죽었지 어색해서 못한다는 겁니다. 통일교회 선생님이라고 해서 여러분들이 인사하러 오지만 그렇게 거드럭거리는 사람이 오면 그 자리에서 후다닥 도망가고 싶어집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어떤 때에는 인사하는 사람의 마음이 직감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인사를 받아도 기분 나쁘게 받는 것입니다. 인사하는데 기분 나빠한다고 섭섭하게 생각할는 지 모르지만 그 사람이 인사하면 기분 나쁘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선생님은 정성들이는 사람에게는 꼼짝 못합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통일교회를 거느려 나오면서 두 사람이 있으면 그 두 사람 가운데 누가 잘 났느냐 하는 문제를 해결해야 할 때에는 얼굴이 잘난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어디로 향하느냐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즉, 사적이냐 아니면 공적이냐 하는 것을 본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러한 원칙을 중심삼고 공적인 길을 걸어가게 되면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절대 망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물건을 공적으로 관리하고 사람을 공적으로 대하며 하늘을 공적으로 모시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잘하는 사람들이 모여 부부를 이루었다면, 그 가정을 중심삼고 새로운 민족과 새로운 세계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보다 공적인 생활을 하는 여러분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만물의 날을 맞이할 때마다 만물들이 역사를 거쳐오면서 얼마나 이 한날을 고대했겠느냐를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만물에 대해 감사히 생각하고, 만물을 귀하고 보다 가치있게 여기면서 사랑하고 품을 수 있는 여러분이 되어야 참된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되겠다는 마음으로 이날을 기념해야 하나님께서 찾아오신 이날의 의의를 알고 이날을 맞을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알겠지요?

기 도

아버님, 지금까지의 모든 날들이 슬픔을 품고 다 흘러갔사옵니다. 그러기에 저희들은 앞으로 다가오는 날들을 슬픔을 품고 흘러가게 해서는 안 될 책임을 짊어졌사옵니다. 저희들은 이 나라에 비운이 깃드는 이때에 그 비운을 걷어버리고 소망과 희망을 심어 주어야 할 사명을 지닌 통일교회의 무리들이옵니다.

절망과 낙담과 비애와 탄식이 감도는 현 역사사조에 있어서 이것을 극복할수 있고 새로운 소망과 희망을 남겨 놓을 수 있는 통일의 주의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 길을 가기 위해서는 보다 공적인 가치를 찾아 생활해야 한다는 것을 아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지금까지 통일교회가 당신의 경륜의 뜻을 따라 나오는 과정에는 슬픈 사연도 많았사옵니다.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딱한 사정에 몰려 가지고 발을 동동 구르면서 아버지가 없다고 저주하고 싶은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사옵니다. 이러한 지난날들을 생각할 때마다 말할 수 없이 초조하고 조급하게 시간 시간을 거쳐 오신 아버지가 얼마나 불쌍하신 분이신가를 저희들이 다시 한번 느끼옵니다.

저희를 위해 얼굴을 상하셨고, 저희를 위해 손발을 상하신 당신이었사옵니다. 뿐만 아니라 천만번 수고로운 공적인 인연을 갖추시고 저희를 위하여 눈물과 피와 땀을 흘리신 아버지인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이렇게 아버지께서 저희들의 생활권내에서 저희들과 더불어 살고 계시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 아버지의 손을 붙들고 영원히 놓고 싶지 않은 간절함이 저희들의 마음에 복받쳐야 되겠사옵니다. 아버지의 목을 붙들고 산길이나 어떤 길이나 따라가고 싶은 마음에 복받쳐야 되겠사옵니다. 그런 인연을 갖추어 힘이 부족하더라도 어버이를 업고 가는 생활을 해야 되겠다는 마음이 나를 지배하고 생애에 넘치게 될 때, 비로소 효와 충의 도리를 다한 입장이 된다는 것을 아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이 만물의 날이 설정될 때까지의 1960년대를 중심삼아 가지고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싸움의 분기점에서, 좌로 갈 것인지 우로 갈 것인지 탕감의 인연을 결정지어야 했던 그때를 다시 한번 회상하게 되옵니다. 그때 축복하던 자리, 그때 인연맺던 그 자리는 초초한 자리요, 골짜기 중의 골짜기였사옵니다. 그 자리는 사랑하는 부모가 반대하고 형제가 반대하고 사랑의 인연을 가진 친족들이 반대하던 자리였사옵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골짜기에 서서 아버지를 모셔 놓고, 대신 찾은 가치를 지니고 아버지를 중심삼은 소망 가운데에서 통일교회의 가정의 역사가 시작되었사옵니다.

그 인연을 따라 부모의 날, 자녀의 날, 만물의 날이 책정되었사옵니다. 이러한 날을 기반으로 하여 세워진 날이 하나님의 날이옵니다. 이 하나님의 날이 곧 만물의 날이 되고, 자녀의 날이 되고, 또한 부모의 날이 되어야 할 것이었는데도 불구하고, 한날에 이루어져야 할 영광의 날이 간격을 두고 누덕누덕 꿰매어 가지고 갖추어졌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되옵니다. 이런 날을 맞을 적마다 그 배후에 있는 인류의 시조가 실수한 것을 마음으로 회개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아버님,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전폭의 비단을 그냥 그대로 마름질하여 만든 옷과 같이 말할 수 없이 가치로와야 함에도 불구하고, 누덕누덕 기운 옷과 같이 되었다는 것이 부끄러운 사실이라는 것을 저희들은 느껴야 되겠사옵니다.

이날을 맞을 적마다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면서 불쌍하신 당신을 마음으로 동정하고, 다른 사람은 효를 하지 못하더라도 나만은 효를 다하겠노라고 이를 악물고 혀를 깨물면서 맹세할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하시옵소서. 이날을 맞을 적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맹세를 하는 데에 이날을 기념하는 본의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길,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옷깃을 한번 붙들면 영원히 놓지 않겠다고 결의한 아들딸이 있사옵니까? 옷깃뿐만이 아니라 손목을 붙들면 자신의 손이 빠지고 자신의 몸이 일그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놓을 수 없는 아버지의 손목이라고 하면서, 생명을 다하여 그 손목을 붙들고 가겠다고 하는 아들딸이 있사옵니까?

당신의 목을 끌어안고 당신의 품에 안기어 영원히 떠날 수 없다며 죽은 길이나 망하는 길이라도 그것을 잃을까봐 두려워하면서 허덕이고 가는 아들딸이 있사옵니까? 세상적으로 보면 불쌍하고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일지라도 누구도 갖지 못하는 기준의 가치를 지녀 천지의 인연을 몽땅 사로잡은 채 그 내용을 모조리 움직여 갈 수 있고, 모든 가치의 근거가 거기에 깃들어 있다는 것을 알고 그것만을 위하고 그것만을 자랑하고 그것만을 높이고 그것만을 위하여 사는 아들딸이 있사옵니까? 세상만사는 흘러가고 사회환경은 변하더라도 마음은 변하지 않고 반드시 역사를 창조하고 환경을 창조한다는 사실을 확실히 아는 당신의 아들딸이 많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저희 통일교인들이 가는 길을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은 지금까지 전부다 벌거숭이 몸이었사옵니다. 저희들이 벌거숭이가 된 것은 아버지를 위해서였사오니 벌거벗은 몸이 얼어 죽는 운명에 처하더라도 저희들은 감사해야 되겠사옵니다. 얼어붙은 몸으로 원수의 창끝에 찔려 쓰러지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그러한 자리가 저희 앞에 나타나지 않은 것을 감사할 줄 아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이 자리에 모인 당신의 아들딸들이 만물의 날을 문자대로만 알지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만물이 문제가 아니라 만물이 따를 수 있는 사람이 문제요, 그 사람이 아버님을 따를 수 있는 것이 문제인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럴 수 있는 참된 사람에게 치리받고 싶고 관리받고 싶은 것이 만물이라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세상을 사랑하고 만물을 사랑하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누구보다 만물의 가치를 깊이 깨닫고 만물을 관리할 수 있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이날 모인 당신의 아들딸들을 축복하여 주시옵고, 세계에 널리어 선교에 임하고 있는 아들딸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그들이 흘린 눈물을 천배 만배로 당신이 갚아 주시옵고, 그들을 보호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저희들이 한스러운 기아선상에 부딪치더라도, 휘몰아치는 환경에 부딪치더라도 당신을 찾아가게 해주시고, 저희들이 그런 자리에 있을때, 아버지, 긍휼하신 손길로 같이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감정이 통하지 않는 이방 민족이오나 아버지와 연결시키어 부자의 인연을 맺게 하시옵소서.

외로운 신앙길을 가야한다는 것을 생각할 때에, 원수의 총칼이 겨누고 있다 하더라도 복귀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고, 미리 지도하여 주시옵소서. 이 나라를 아버지께서 같이하시는 나라와 민족으로 남겨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날을 찾으려 했지만 실체를 쓰고 이 땅에서 찾지 못하여, 한을 품고 영계에 가서 지극히 고통당하는 영인들이 많이 있는 줄 아옵니다. 그들에게 선을 위해 협조할 수 있는 특사를 부여하시옵고, 지상에 선한 풍습을 세우는 데 협조할 수 있는 영광의 은사를 부여하여 주시옵소서.

이 땅 위의 온 인류가 선의 뜻을 세우기 위해 생명을 아끼지 않고 신앙길을 달려갈 줄 아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들의 갈길을 밝겨 주시옵고, 인도해 주시옵고, 그들에게 당신의 생명의 노선을 가리어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끝날에 이르러 환희에 넘쳐 당신을 맞이할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길을 가다 지친 아들딸이나 떨어진 아들딸을 붙들어 주시옵소서. 그들의 발길을 수습하시어서 패자의 쓴잔을 마시더라도 복수의 심정으로 내 일을 바라보는 사람이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고, 희망을 가지고 재기의 기회를 바라보면서 나가는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대한민국의 수많은 사람들, 더구나 기독교 신도들은 지은 죄가 많사옵니다. 지금까지 통일교회에 대하여 불신과 핍박을 가해 왔던 것은 그들이 몰라서 한 것이오니 용서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날을 맞이함에 있어서 원수를 앞에 놓고서는 기쁜 날로 맞이할 수 없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세상이 이날을 맞이하여 용서를 빌고 아버지께 경배드릴 수 있는 거룩한 날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바라옵니다.

남아진 날들과 이 세계가 당신의 영광 가운데 당신의 자비와 당신의 사랑권내에 머물 때까지 온 인류가 망하지 않게 하여 주시옵고, 여기에 모인 아들딸이 그날을 맞이할 수 있는 승리적인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의 성호 받들어 아뢰었사옵니다. 아멘.

여러분의 가정을 중심삼은 활동을 보면 시정할 것이 많습니다. 여러분 가정에는 축복받기 전에 낳은 아들딸도 있을 것이고, 축복받은 후에 낳은 아들딸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축복받은 후에 낳은 자녀들이 우리 교회에서 모범이 되어야 할 텐데도 불구하고 모범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체적으로 그런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배가의 충성을 해야 할 기성축복가정

결국 그 부모들이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부모들이 가정생활에 있어서나 교회생활에 있어서 자녀들에 대해 부모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결과가 그들의 신앙길에 상당한 지장을 가져오지 않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가 시정되지 않는 한 금후에는 기성가정의 축복 문제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요.

그러한 문제를 두고 볼 때, 여러분들은 부모가 된 이상 자기 자녀들에게 뜻생활에 대한 것을 책임지고 가르쳐 주지 못한 것을 어디까지나 책임져야 된다는 거예요. 축복가정은 뜻을 중심삼고 믿음의 아들딸을 세우는 책임도 해야 하지만, 자기 아들딸에 대한 책임도 수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축복가정은 이중의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믿음의 아들딸, 축복받기 전에 낳은 아들딸, 축복받고 난후에 낳은 아들딸이 있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소생, 장성, 완성과 같은 형태를 이루고 있는데, 이 아들딸들을 어떻게 교육하느냐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복잡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앞으로 이 문제를 모범적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금후에 기성축복을 받게 될 수많은 가정들과 그들의 아들딸 앞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지 않겠습니까? 이 문제는 여러분들이 감당해야 할 중요한 책임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런 입장에서 생각해 보게 될 때, 여러분은 여러분의 아들딸들이 전부 교회생활에 충실하도록 만들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 중에 기성축복을 받기 전에 낳은 아들딸의 나이가 15세 이상 되는 부모들은 손들어 봐요. 아마 대다수일 거예요. 여러분은 축복받은 가정이니만큼 여러분의 자녀들은 앞으로 공직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기성가정 축복을 받고 난 후에 그 자녀들이 앞으로 우리협회 조직권내에서 공직생활을 하는 데에 모범적인 아들딸이 얼마나 되느냐 하는 문제를 구체적으로 검토해 봐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그 아들딸 가운데서 공직생활을 한 적이 있는 사람 손들어 보세요. 몇 명 안 되는 군요. 그 아들딸들이 15세 이상이면 중학생도 있을 것이고, 고등학생도 있을 것이고, 대학생도 있을 것입니다. 중학생이나 고등학생이면 우리 협회 기구내에 있는 중·고등학생들을 중심삼은 활동요원으로 길러 내야 될 것이 아니냐? 또, 그 이상의 연령이 된 아들딸이 있으면 우리 협회의 지역장 혹은 구역장의 책임을 할 수 있는 요원으로 많이 길러 내야 될 것이 아니냐? 또, 그 이상의 연령이 된 아들딸이 있으면 우리 협회의 지역장 혹은 구역장의 책임을 할 수 있는 요원으로 많이 길러 내야 될 것이 아니냐? 기성가정이 250가정이면 그 250가정의 3분의 1만 잡더라도 80가정이 넘는데, 적어도 이 80가정에서는 구역장급에 해당하는 사람을 배출할 수 있어야 될 게 아니냐? 그것은 굳이 아들이 아니고 딸이라도 될 수 있는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두고 볼 때, 기성가정이 지금까지 가정을 중심삼고 뜻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얼마나 철저했느냐 하는 문제를 재평가하지 않으면 안 될 시점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더우기나 여러분은 기성가정이기 때문에 다른 가정들 앞에 본이 되어야 합니다. 기성가정은 일반 축복가정과는 다르니만큼 처녀 총각이 축복을 받아 가지고 이룬 가정보다도 뜻 앞에 배가의 충성을 해야 됩니다. 반대로 되어 있어요. 배가의 충성을 해도 처녀 총각으로서 축복받은 가정과 대등할까말까한데 활동하는 데 있어서나 가정의 모든 규범생활이 그들의 2분의 1도 안 된다는 것은 시정해야 할 문제입니다.

먼저 자녀들 앞에 본이 되어야

이런 관점에서 지금 기성가정들은 자라고 있는 자녀들의 뜻생활에 대하여 전면적으로 책임을 강화해야 할 시점에 놓여 있지 않느냐 하는 것이 선생님의 생각입니다. 이것은 단지 선생님뿐만 아니라 협회 간부들이나 전국에 널려 있는 책임자들도 그렇게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기성가정으로서 앞으로의 가정생활에서 자녀들을 중심삼은 뜻생활을 공고히 하는 데 더더욱 주력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차후로는 여러분들이 그런 면에서 비판받는 입장에 서지 않기를 부탁하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모들이 뜻생활에 있어서 모범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가정에서의 기도생활이라든가, 가정예배라든가 어떤 면으로든지 기성교회에 지지 않는 신앙생활을 자녀들에게 보여야 할 것입니다. 또, 경배시간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인식시켜 주어야 하겠습니다. 그 시간에는 경배식만으로 끝낼 것이 아니라 뜻을 중심삼고 부모로서 자녀들을 교육시켜야 합니다.

자녀를 교육하기 위해서는 부모가 먼저 실천해야 됩니다. 부모가 본이 되어 뜻 앞에 충성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부모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자녀들이 일언반구도 대꾸하지 않고 부모를 경외할 수 있는 입장에 세워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자녀들이 따라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자기가 알고 있는 뜻과 원리를 중심삼고 볼 때, 교회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부모들이 본부에서 지시하는 원칙을 등한시하고 그 지시에 따라 생활을 하지 않으면서 자녀들에게만 원리원칙대로 생활하라고 하면 코웃음을 친다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 실질적인 생활의 재검토라는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성가정이 어떻게 해야 되느냐? 먼저 교회생활에 철저해야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식적인 예배시간을 엄수해야 되겠습니다. 공식적으로 참석해야 하는 시간에 모범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 다음에는 공식적 활동에 있어서 모범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뜻생활 중에서 탕감복귀노정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자기가 가지 않으면 안 될, 운명을 걸고 가야 할 노정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잘 알고 있듯이 여러분의 자녀들도 잘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녀들이 볼 때, 부모가 가야 할 길을 못 가면 자녀들이 그것을 비판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부모들이 자녀들 앞에 영향을 줄 수 없는 것입니다. 부모가 책임수행을 못했다는 약점이 있어 가지고 자녀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면 그것은 부모가 뜻생활에 있어서 소홀했다는 문제에 결부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의 공식집회 참석여부가 문제가 될 것이요, 그 다음에는 공식활동에서의 책임 수행 여부가 문제가 될 것이요, 그 다음엔 가정생활에서 자녀들 앞에 부모로서 모범이 되었느냐 못 되었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될 것입니다.

공식적으로 예배를 드리는 주일날이 되면 예배시간을 맞이하기 위하여 새벽부터 정성을 들여서 그날을 하나님 앞에 바쳐 드리는 것을 생활화하는 것을 자녀들한테 교육해야 할 텐데 불구하고, 자기들이 할 것을 다 하고…. 뜻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기도를 하나, 정성을 들이나, 원리 공부를 하나, 전도를 하나 아무것도 안 해 가지고서 주일날 예배시간이 10시 30분이면 10시 30분, 그 시간에 맞게 참석하기 위해서는 9시 30분이나 10시에는 출발을 해야 예배시간 전에 도착할 텐데, 시간이 다 된 다음에 집에서 출발해 가지고 예배 중에 들어와서 슬그머니 앉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반드시 비판받는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부모의 입장에서 자녀를 교육했댔자 먹혀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공적생활에 있어서의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생활에 철저해야 되겠고, 공식활동에도 철저해야 되겠습니다. 이 두 가지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동네면 동네의 어떤 반에 소속되어 살 것입니다. 거기서 여러분이 생활하는 데 있어서 그 반 전체를 뜻 앞에 흡수시키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하느냐 하는 것이 자녀 교육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것입니다. 뜻을 중심삼고 살고 난 후의 생활적 차이, 즉 동네에서 얼마만큼 모범적인 생활을 하고, 대인관계에 있어서 얼마만큼 모범적인 관계를 맺느냐 하는 것이 자녀들의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적인 생활을 공고히 해야 하겠습니다.

그 다음에는 여러분의 사적 생활입니다. 부부가 가정에서 뜻생활을 할 때, 축복받기 전이나 축복받은 후나 다른 것이 뭐 있느냐 이겁니다. 남편은 남편대로 배짱을 부리고, 부인은 부인대로 짜증을 내고 바가지 긁는 것이 옛날보다 더하다면 자녀들에게 본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옛날과는 달라야 됩니다. 현격히 달라져야 됩니다. 달라져서 자녀들에게 존경받을 수 있는 여건을 어떻게 만드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사적 생활에 있어서도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공적 생활의 철저화, 사적 생활의 모범화

뜻을 알기 때문에 옛날보다는 대체로 낫다고 보고 있지만, 자녀들에게는 그들 나름대로 바라보는 표준이 있을 것입니다. 15세 이상이면 벌써 그들 나름대로의 비판기준이 서 있기 때문에 어머니 아버지의 잘잘못을 다 안다는 것입니다. 열 살만 되어도 어머니가 잘하는지 잘못하는지 다 아는 것입니다. 15세쯤이면 벌써 사회에 대한 눈이 떠집니다. 친구들의 가정에 대해서도 어떤 친구네 가정은 어떻고, 그 부모는 어떻다고 하는 것을 전부다 비판할수 있는 기준이 서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식들이 옛날에 바라보던 부모와 현재에 바라보는 부모가 아무런 차이가 없다면 그 부모들은 자녀들을 교육시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과거와는 현격히 달라져야 합니다. 가정생활이나 그 동네에서의 대인관계에 있어서 이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자식은 자기 나름대로 뜻을 중심삼고 가는 사람은 이래야 된다는 관을 가지고 부모를 바라보며 점을 찍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점 찍고 있는 이상의 부모가 될 때는 자녀들은 말없이 그 부모 앞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부모가 부모의 권한을 가지고 `야, 이래야 되겠다'고 하면 `예' 한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불응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자식이 부모는 이러이러해야 한다고 점을 찍고 있는 기준 이상의 부모가 되지 못하고 그 기준 이하일 때에는 부모를 불신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기준의 차이가 열만큼이라면 열뿐만 아니라 그 3배 이상 부모를 불신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등등의 문제가 내재하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고 사적인 생활에 있어서 모범적인 가정생활을 영위해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축복가정들 중에 주일날 예배시간 전에 먼저 나와 가지고 준비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는지 생각해 보세요. 찬송가를 다 부르고 설교하는 시간이 딱 되면 그때 맞추어 가지고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뜻을 따라가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런 사람들은 아무리 변명해도 공적 생활을 하지 못하고 사적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는 어떠한 소망을 걸고 기대할 아무런 내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금번 집회를 통해서 새로이 뜻 앞에 각성하고, 공적 생활의 철저화, 사적 생활의 모범화를 결의하고 가야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축복가정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예배시간 전에 와 가지고 예배에 참석하는 수많은 생명들에게 은혜의 분위기를 만들어 주고, 은혜를 끼쳐 주어야 됩니다. 그리하여 지구장이면 지구장, 지역장이면 지역장이 단에 나서기 전에 그러한 심정적 기반을 만들어 뒷받침해 주게 되면 교직자가 설교를 하는 데 있어서 식구들의 간절한 표정을 바라보고 자극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요원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교회는 발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체제내에서 누가 그런 요원이 되어야 되겠습니까? 축복받지 않은 가정이 되어야 되겠어요, 축복받은 가정이 되어야 되겠어요? 그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축복받은 가정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앞으로 축복가정 여러분들은 소속된 지역이면 지역, 지구면 지구의 교회에서 책임자를 중심삼아 가지고 결속되어야 합니다. 아직까지 이런 것이 체계화 되어 있지 않은 전체 지방교회의 실정이 아닌가. 물론 그렇게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전체가 그래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예배시간에 대한 문제나 활동에 대한 문제를 두고 볼 때, 앞으로 기성가정들도 동원되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딱한 사정이 있으면 안 되겠지만……. 여자들이 동원되면 남자들은 전부다 여자가 하는 일을 책임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번 집회를 통해 교회생활, 공적 생활을 철저히 할 것을 결심하고 가야 되겠습니다. 그것이 물론 교회를 위하는 것도 되지만 여러분 가정에서의 자녀 교육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자녀에 대한 신앙지도를 책임져야

여러분 자녀들도 어차피 원리 말씀을 들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으로 내버려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10대의 청소년으로서 원리 말씀을 들었다면, 듣고 나서 원리의 범위와 내용을 말로서는 인정할는지 모르지만 대 사회관계에서 영향을 미칠 수 있을 만큼의 내용은 모릅니다. 그때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시간적 과정을 거쳐야 됩니다. 못해도 20세는 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십오륙세 때 원리 말씀을 들은 아들딸들에게 무관심하다가 그들이 20세를 넘어가게 되면 그 중간 과정에서 원리 내용과는 동떨어진 생활 형태를 모색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더우기나 우리는 지금 가정을 위주로 활동하는 것이 아니고, 사회를 위주로 활동하고 있어서 젊은 아이들이 거기에 대해서 비판하고 등한시하기 쉬운 활동 체제를 갖고 있습니다. 이런 실정에 있는 만큼 부모된 여러분들이 자녀들을 책임져야 됩니다.

그러므로 자녀가 10대에 원리 말씀을 들었으면 들어서 아는 것으로만 내버려 두지 말고, 가정에서 아버지 어머니가 아들딸을 친구처럼 여기고 토론도 하라는 것입니다. 한 주일이면 한 주일, 한 달이면 한 달에 한 번씩 신앙생활에 있어서의 어떤 문제를 중심삼고 아들딸은 부모한테, 부모는 아들딸에게 서로 묻고 대답하면서 토론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가정에서 10대의 청소년 시기에 들어 둔 그 말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20대로 넘어가서는 그 원리 말씀을 생활 환경에 적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게끔 여러분이 뒷바라지를 하여 발판을 닦아줘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이것을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 나오는 것으로만 끝날 것이 아니라 가정에 들어가서도 보편화를 시켜야 할 텐데 이것을 등한시함으로 말미암아 이런 결과가 초래되었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와서는 이러고 저러고 하지만 가정에 들어가서는 이러고 저러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가정이 다른 가정의 모범이 되어야 할 텐데 그러한 자극을 줄 수 있는 동기는 누가 만들어야 하느냐? 아들딸이 만들 수 없습니다. 부모가 만들어야 됩니다.

사람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극을 받아야 합니다. 백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백만큼의 결심이 있어야 되고, 그만한 시간적 거리를 통해야 됩니다. 즉 어떤 기간을 거쳐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 시간을 거쳐 나가는 데는 추진력이 있어야 됩니다. 그 추진력은 시시때때로 자극을 주어야 생깁니다. 자극을 안 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극을 누가 주어야 되느냐? 교회에서의 공식적인 생활은 임시로 대치할 수 있는 자극은 될는지 모르지만, 직접 생활권내에 밀접한 관계를 맺고 들어가 자극을 줄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모들이 책임을 지고 그 목적을 이룰 수 있는 자극을 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은 기정사실입니다.

이런 내용을 중심삼고 여러분이 새로운 각도에서 자녀 교육을 시키고 생활전반에 신앙을 보편화시켜 나가야 합니다. 축복받지 않은 식구의 자녀들보다도 축복받은 가정의 아들딸들이 더 철저해야 된다는 관점에서 여러분은 앞으로 새롭게 자녀들을 지도해 주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축복을 받은 후에 자기 아들딸이 430쌍 축복을 받았든가, 아니면 이번 칠백쌍 축복 대상자로 결정된 사람 있으면 손들어 봐요. 하나, 둘, 셋, 넷, …… 스물 넷, 스물 다섯, 스물 다섯이구만. 이 숫자면 여러분의 10분의 1입니다. 그리고 축복받을 연령에 해당하는 아들딸이 있는 사람 손들어 봐요. 하나, 둘, 셋, 넷, …… 서른, 서른 하나, 서른 둘, 더 많구만. 그리고 아들딸은 있는데 교회와 관계를 맺지 않고 있는 아들딸이 있는 사람 손들어 봐요. 내려요.

여러분의 자녀들이 20세가 되기 전에 교회와 관계를 맺어 신앙의 자리를 잡아 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다시 말하면 고등학교 3학년이 되기 전까지, 중학생때부터 고등학교 1, 2학년 때까지 자리를 잡아 주지 못하면 그 아들딸은 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우리 협회에서 낸 통계에 나온 것입니다. 17세까지 가정에 있어서나, 교회에 있어서 자리를 못 잡아 주면 그 아들딸들은 사회로 흘러가 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이건 중대한 문제입니다.

하늘의 격식에 맞추어 생활하라

여러분이 앞으로 영계에 갈 때도 자기 아들딸을 데리고 가지 못하면 그것은 영원히 십자가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낙원시대에는 낙원에 갈 때의 심령기준에 따라서 가족들이 전부다 헤어지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앞으로 가정형태로 영계에 가게 되면 그 가정만 쑥 빠져 나가게 됩니다. 이렇게 부모 형제가 다 천국에 가는데 거기서 빠진 자식이 있으면 그 자식에 대해 부모가 책임감을 느끼지 않겠어요? 이처럼 자녀에 대한 문제는 이 땅에서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영원한 세계를 중심삼고 중차대한 문제가 개재되어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하든지 아들딸을 위해서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외부에 나가 믿음의 아들딸을 찾는 이상의 마음을 가지고 정성을 들여야 됩니다. 믿음의 아들딸 한 사람을 전도하기 위해서 들이는 정성의 3배 이상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그런데 가정의 울타리 안에서 밥을 먹이고 학교에 보내는 자기 아들딸을 전도하지 못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만일 자기가 부모로서 이 이상 할 수 없다 할 정도로 책임을 다 했는데도 그 아들딸이 복귀되지 않으면 그 아들딸과 관계를 끊는 겁니다. 그런 아들딸은 공부시킬 필요도 없다는 거예요. 차라리 믿음의 아들딸을 공부시키는 게 낫다는 겁니다.

이런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부부가 철두철미하게 사상을 일치화시켜 나가면 그 가정은 영원히 뜻 앞에 서고도 남음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번 집회를 마치고 지방에 돌아가면, 이런 문제에 있어서 `기성가정이 이번 집회에 갔다 오더니 새로와졌다, 모범적으로 혁신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하는 결과를 가져 오도록 노력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들 중에 주일 아침에 밥을 먹지 않는 사람 손들어 봐요. 얼마 안 되는 구만. 그러면 주일 아침에 밥을 먹는 사람 손들어 봐요. 더 많구만. 이러니 벌써 틀렸다는 거예요. 또 주일 새벽에 가정에서 경배식을 하는 사람 손들어 봐요. 여러분 보세요. 경배식은 일요일 아침에만 하는 것이 아니예요. 본래는 매일 해야 하는 거예요.

여러분, 탕감복귀를 하기 위해서는 가정을 중심삼은 효의 도리와 나라를 중심삼은 충의 도리를 탕감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들이 그런 일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부모 앞에는 효도를 해야 되고, 나라 앞에는 충성을 해야 됩니다.

한 나라의 군왕과 신하 사이에 있어서도 반드시 매일 아침 조회가 있는 것입니다. 한국 가정을 보면, 아침에 부모가 일어나면 며느리가 이부자리도 개드리고 방 청소도 해드리고, 밥도 해드리고, 부모가 들락날락할 때 부모님께 인사를 드립니다. 이런 것이 한국의 법도가 아니예요? 여러분은 법을 탕감해야 합니다. 한국의 모든 역사시대를 탕감하기 위해서는 법중의 법, 효도하는 법이면 효도하는 법 중에서도 최고의 법도를 세워야 하고, 국가에 있어서도 최고의 기준을 넘어설 수 있는 법을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같이 해 가지고 될 것 같아요? 매일같이 지구면 지구장, 지역이면 지역장을 중심삼아 가지고 본부를 향해서 경배식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공식적인 예식입니다. 그러나 매일 그렇게 하다 보면 부작용이 있겠기에 부작용을 피하려니 그 조건을 걸어 놓고 주일 새벽에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원래는 매일 해야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부모가 죽어서 3년상을 치를 때에는 매일 아침 저녁으로 상식을 올리고, 나갈 때나 들어올 때 영좌에 고하여 인사하는 법도가 있지 않느냐 이겁니다. 여러분은 그 이상 해야 됩니다. 여러분이 지금 하는 것이 뜻적으로 볼 때 하늘의 격식에 딱 맞춘 생활이냐? 아닙니다. 어림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농촌에 나가 일할 때에도 혼자 나가서 그냥 일하게 안 되어 있습니다. 부처가 함께 그날의 일을 하나님 앞에 보고하고 나가서 일을 시작하고, 마치고 돌아와서도 하나님 앞에 보고하고 나서 밥을 먹게 돼 있습니다. 그런 것을 모두 규범화시키는 하나님을 표준한 생활이 얼마나 엄격한가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자에게도 여자로서 지켜야 할 가정생활의 규범이 있고, 남자에게도 남자로서 지켜야 할 가정생활의 규범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엄청난 천적인 규범을 체계화시켜 가지고 생활하는 것이 여러분들이 가야 할 노정인데도 불구하고 그 노정을 못 가게 되면 어림도 없다는 거예요. 이런 문제에 있어서 여러분이 일반가정들 앞에 모범이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 말예요.

그러면 여러분 아들딸들도 그 자리에 참석하기를 싫어할 것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유도해 나가느냐 하는 문제를 알아야 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가정에서 부모들이 동화책도 읽어 주고, 신앙을 갖추어 가지고 여러가지 재미있는 이야기도 해주고, 가정에 대해 건설적인 면에서 비판도 하고 의논도 하고 해서 자녀들이 가장 가까운 친구보다도 자기 부모와 더 가까이 대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자녀들에게 신앙적인 자리를 잡아 주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종족적 메시아가 되라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 기성가정이 처해 있는 현재의 입장이 정상적인 자리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가정 수련회를 하려고 합니다. 앞으로 문화생활을 할 때는 한 백 가구 지을 수 있는 땅을 매입해서 아파트를 지어 가지고 전부 다 모여 살면서 수련을 시켜야겠다는 것입니다. 그저 막 살아가는 모습 그대로 두어서 되겠습니까? 이제 여러분은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가정에 대하여 바라시는 내적 외적 기준과 여러분들 가정의 생활을 일체화시키는 문제를 심각히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공식적인 기념일이라든가 혹은 무슨 집회가 있으면 그것을 생명시하고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그러지 않는 가정은 축복가정으로서 낙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축복가정의 사명이 크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알겠지요?

여러분은 자기 아들딸한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부모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이것이 첫째 사명입니다. 그러려면 교회생활이나 공적 생활을 철저히 해야 되고, 사적 생활에 있어서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자녀로 하여금 금후에 뜻길을 갈 수 있게끔 교육하는 데 절대 필요한 것입니다. 알겠지요?

그 다음에는 1968년도에 430가정을 축복할 때에 선생님이 지시한 바와 같이 종족적 메시아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 사명을 해야 합니다. 선생님을 중심삼고 협회에 36가정이 조직되어 있듯이 김씨면 김씨 가문에서 먼저 축복받은 가정을 중심삼고 김씨 가문의 36가정형이 있어야 됩니다. 알겠어요? 36가정이 못 되면 여러분이 12가정형의 조상이라도 되어야 합니다. 그건 여러분이 부모니까 여러분의 아들딸을 중심삼고, 삼위기대를 이루어서 그 기준을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여러분들이 여러분 씨족의 조상이 되어 여러분 가정을 중심삼은 새로운 지파 편성을 해야 될게 아니예요? 그것이 12지파형인데 그것을 형성하면 그 12지파권내에 전부 들어가는 것입니다. 12지파 형태와 마찬가지로 12제자가 있어야 되고, 12제자가 중심이 되어 70문도가 되고, 나아가 120문도와 같은 형태를 갖추어 나가야 됩니다. 이것이 직계 종족입니다.

이 종족이 하나되어 신약시대까지의 역사를 탕감하는 사명을 여러분들이 대신했다 하게 될 때, 여러분들은 아들의 입장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앞에 아들의 입장을 결정하기 위해서 나가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가셨기 때문에 여러분이 자기 종족을 중심삼고 빨리 그와 같은 입장에 서야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축복받은 가정을 중심삼고 김씨면 김씨 종회를 만들고, 박씨면 박씨 종회를 만들고, 문씨면 문씨 종회를 만들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이냐? 문씨 종회를 상속받아야 됩니다. 그리고 이 종회가 다른 종회 앞에 아벨 종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앞으로 종회를 수습하는 작전을 어떻게 할 것이냐? 김씨면 김씨 전체가 합해 가지고 김씨 종회를 살리기 위해서, 김씨 종회를 발전시키기 위해서 갖은 노력을 다해야 되겠습니다. 교육기관도 만들어야 되겠고, 다른 여러 가지 일도 해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문중이 사회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야만 천상세계에 있는 조상들이 땅 위에 재림할수 있는 발판이 넓어진다는 것입니다.

영인들이 지상에 재림해 가지고 협조하는 데 있어서 김씨 조상이 박씨 가문에 가서 협조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통할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여러분에게는 영계와 육계를 연결시켜 탕감복귀해야 할 중차대한 책임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기성가정들이 잘하면

여러분들이 비록 한 시대에 살고 있지만, 3시대의 사명을 귀결지어 놓아야 됩니다. 왜 그래야 되느냐? 본래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과거 현재 미래가 한 점에서 시작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이것이 따로따로 동떨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에게는 과거에 사건이 있었고, 현재에 사건이 발생되어, 미래에 사건이 발생할 수 있는 발판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전부다 통합시켜 가지고 하늘의 한 가정을 중심삼고 해결지었다는 조건을 세우지 않고는 선조로부터 지금까지 남아진 종족을 그 후손들이 지상에서 탕감복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김 아무개가 축복받았다면 그 김 아무개의 한 가정을 구원하기 위해서 축복받았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 종족 전체를 대표하여 축복받은 것이기 때문에 그 종족과 연관된 책임이 있습니다. 그 책임은 종족으로는 과거 현재 미래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여러분들이 일시에 탕감복귀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종적인 역사를 횡적으로 탕감복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3시대의 사명을 여러분 당대에 해결짓고 가야 합니다. 이것이 축복받은 가정들의 책임입니다. 여러분이 잘못하면 영계에 있는 조상들이 걸려들어가는 것입니다. 자기 조상뿐만 아니라 현재의 종중(宗中)이라든가, 친척 전부에게 지장을 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축복받은 가정의 책임이 얼마나 중합니까? 이런 문제를 생각해야 합니다.

축복받은 가정의 자리는 예수님을 중심삼고 보게 되면 예수님의 소망을 대신 이룬 자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 때에 예수님에 의해 구약시대의 모든 영인들이 재림부활하여 장성급에 올라갈 수 있는 특혜를 받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여러분의 조상들이 지금까지 복귀섭리의 노정에는 하등의 관계가 없었지만 축복받은 여러분을 통해서 그런 특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축복을 받음으로써 조상들과 관계지을 수 있는 내적 승리의 조건을 갖추어 놓았기 때문에, 그 조상들이 복귀섭리의 도상에서 협조하지 않았지만 이 길만 타고 오면 여러분이 열매된 가치를 표준으로 해 가지고 뜻 앞에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6천년의 인연을 거쳐서 맺는 열매입니다.

선생님을 중심삼고 관계되어 맺어진 열매가 아벨적인 열매라면 그들은 가인적인 입장에서 상대적 관계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상대적 관계를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아벨적 열매의 인연을 가인적 열매의 가치 기준으로 내세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선조들이 뜻 앞에 협조한 사람들도 아니요, 탕감복귀 섭리시대에 있어서의 공신도 아니지만, 그들은 여러분의 활동 여하에 따라서 옛날 뜻앞에 협조한 공신들과 대등한 가치를 가지고 지상을 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예」

다시 말하면, 아브라함의 직계 혈통을 이어받은 자들만이 지상에 재림할 수 있는 것이지만, 여러분이 축복을 받음으로써 여러분의 조상들이 여러분을 통하여 재림할 수 있는 특권적인 혜택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즉, 여러분의 선조들이 예수님이 올 때까지 뜻 앞에 충성했던 충신의 반열에 동참한 자격을 가지고 여러분의 가정을 통해 횡적으로 재림부활의 역사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막연한 말이 아닙니다. 사실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아무런 수고도 하지 않았는데 수천년 역사를 거쳐온 이스라엘 전체의 축복의 권한을 상속받을 수 있는 실체가 되었다는 사실, 이 얼마나 엄청난 일입니까? 그런 것을 알면 움직이지 않을래야 움직이지 않을 수 없고, 잘못하라고 해도 잘못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바람에 흔들흔들하고 왔다갔다하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런 뜻을 알고도 책임을 못 하게 되면 여러분의 조상들이 야단한다는 것입니다. 조상들이 여러분을 대하여 야단친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뜻을 알고도 뜻 앞에 책임 못 하는 사람들은 앞으로 이름모를 병이 많이 나게 될 거라고 봅니다. 그 조상들이 와서 못살게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3시대의 중간 입장에 처해 있기 때문에 오늘 여러분의 가정을 표준해 가지고 여러분들의 가정이 잘하면 역사를 살리고, 현재를 살리고, 미래를 살리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여러분들의 가정이 잘못하면 역사를 망하게 하고, 현재를 망하게 하고, 미래를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즉, 잘하면 3시대를 살리는 것이요, 잘못하면 3시대를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엄청난 3시대의 책임을 하느냐 못 하느냐 하는 것이 여러분에게 달려 있기 때문에 귀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상들이 여기에 굴복하는 것입니다.

기성가정의 위치

이런 입장에서 볼 때, 여러분 가정들에게는 종족을 복귀해야 하는 엄청난 사명이 부과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종족을 복귀하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옛날에 사랑했던 사람이라든가 친구에게 편지했던 것 이상으로 편지를 해야 됩니다. 배 이상의 정성을 들여야 됩니다. 여자들도 자기 어머니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그 이상의 그리운 마음을 가지고 자기 친족에게 정성을 들여야 됩니다. 그래야 복귀된다는 겁니다. 그들을 대하여 사랑의 심정을 재유발시키지 않으면 복귀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지 안 그런지 영계에 가 보세요.

선생님은 지금까지 뜻길을 걸어 나왔지만 종족 복귀의 사명을 못 했습니다. 이것은 국가기준을 넘기 전에는 안 됩니다. 예수님이 국가기준에 걸려 넘어갔기 때문에 그 기준을 넘기 전에 자기 가정을 먼저 사랑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요셉 가정을 중심삼고 사랑할 수 있는 기반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이것을 다시 찾기 위해서는 국가에 몰렸던 것을 탕감복귀하여되 되돌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반을 선생님이 닦아 놓았기 때문에 여러분은 그 기반 위에서 여러분 당대에 축복과 더불어 종족적 기반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영광입니까? 이것을 알고 감사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 책임을 감당하지 못하게 되면 그 가정이 책임추궁을 안 받겠느냐 말입니다. 책임추궁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가정의 책임도 책임이지만 이제는 그 가정이 종족적 메시아의 사명을 감당해야 됩니다.

여러분 부부는 옛날 예수님과 성신의 입장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되어 가지고 하나님을 중심삼고 생명들을 붙들고 통곡하면 반드시 번식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런지 안 그런지 해보라는 거예요. 그렇게 되지 않으면 내 말이 거짓말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뜻 앞에 자기 생명을 걸고 남겨야 할 후대의 영광을 위해, 뜻의 영광을 위해서 일치단결하고 일심으로 통일되어 하나님과 주고 받을 수 있는 기반을 만들라는 것입니다. 완전히 주고 받으면, 완전히 수수작용을 하면 번식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리입니다. 그와 같은 원리적인 생활을 여러분의 실체생활에서 가꾸어 보라는 것입니다. 되나 안 되나. 그것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까지 이러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성축복을 받은 가정하고 처녀 총각이 축복받은 가정하고 같겠어요, 다르겠어요? 다릅니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연계조직으로 보자면 여러분은 소생기에 해당합니다. 그러면 앞으로 여러분의 아들딸들은 어떻게 결혼을 하느냐? 이것이 문제가 되는 거예요. 기성가정도 축복가정이라고 해서 36가정이라든가 다른 가정의 자녀들과 결혼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원칙적인 질서를 따라서 결혼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축복가정에도 3단계가 있어야 됩니다. 세 가지 유형의 가정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 가정들을 중심삼고 앞으로 전국적으로 지파 편성을 해야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디에 속하는지 알아요? 여러분들은 어디까지나 아담 가정을 중심삼은 제1가정에 소속되는 가정들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언제 가서 전부다 보편화시키느냐 하는 것이 금후의 크나큰 문제입니다. 이런 등등의 문제들이 벌어져 있는데, 앞으로 여러분이 정성들이지 않으면 아들딸한테 참소를 받게 됩니다. 선생님이 지금까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 하는 것을 중심삼고 많은 고민을 해 나왔습니다. 그것은 시간이 걸려야 해결되는 문제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이런데도 불구하고 기성가정들이 움직이는 데 있어서 제일 꼴찌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이제 제일 꼴찌에 서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원칙을 알았으면 달리는 데 있어서 누구보다도 희생적이고 순교해야 할 일이 있으면 여러분들이 순교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죽을 일이 있으면 여러분이 죽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제3가정에 속하는 처녀 총각들로서 축복받은 패들이 죽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뜻적으로 보면, 두 세계에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은 천사장형입니다. 본래 기성 가정들을 처리해 주는 것은 선생님의 책임이 아닙니다. 완성기준에서 축복이라는 기준을 세운 선생님입니다. 그렇잖아요? 그래요, 안 그래요? 「그렇습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 말이 아닙니다.

본래 참부모는 처녀 총각을 중심삼아 가지고 축복해 주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기성가정을 축복해 주는 것은 세상을 구해 주기 위해 다리를 놓는 놀음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세상을 구하기 위한 다리입니다. 그런데 세계 사람들이 다리를 건너올 때 이 다리가 무너지고 뭉그러지면 되겠습니까? 여러분이 다리의 책임을 못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녀들을 축복시키기 위해 필사의 정성을 들이라

지금 전세계를 두고 보면 가정과 가정이 아닌 세계로 되어 있습니다. 또 우리 교회를 두고 보면 기성가정과 기성가정이 아닌 가정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전부다 흡수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야 됩니다.

선생님이 여러분에게 말하기를, 선생님을 반대한 기성교회 목사의 2세들은 앞으로 선생님 앞에 주관을 받는다고 했지요? 그들의 2세들은 내 주관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1세들은 반대해도 2세들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애급에서도 하나님이 장자는 전부 다 쳤지만 차자는 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느냐? 장자는 1세 입장이지만 차자는 2세 입장이기 때문에 직계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교체시키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런 문제를 여러분이 생각이나 해봤습니까?

앞으로 여러분을 무지무지하게 고생시켜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고생길이 싫어 가지고 담 너머로 내다만 봐서야 되겠어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볼 때, 앞으로 자녀교육을 잘 시켜야 되는 것은 물론이고, 빨리 축복을 받게 해야 합니다. 여러분 가정의 3대가 축복을 받으면 얽어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여러분들이 죽기 전에 3대가 축복을 받아야 됩니다. 그래 가지고 넘어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도 아담 가정, 노아 가정, 아브라함 가정, 이 세 가정을 중심삼아 가지고 전부다 연결된 것과 마찬가지로, 여러분들도 3대의 기준을 연결시켜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여러분 자신들도 그와 같은 조건에 해당하는 아들딸과 친척을 중심삼고 씨족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 씨족을 중심삼고 양보할 수도 있고 양보받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거기에서 비로소 평균화 기반을 닦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목적을 수행하려니 여러분들에게 종족적인 메시아의 사명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 메시아의 사명은 120명을 중심삼아 가지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종족 중에는 기성가정도 있을 것이고, 약혼했다가 파혼했다든가 연애관계에 걸려 가지고 사랑을 못 맺었다든가 하는 문제가 복잡한 중간패들도 있을 것이고, 또 순수한 처녀 총각도 있을 것입니다. 이들을 묶어 가지고 종적인 역사를 횡적으로 탕감해야 하는 것입니다. 3대를 중심삼고 하나되었다 할 수 있는 입장에 세워 가지고 맨 마지막 대의 맏아들, 즉 완성급에 선 손자가 대신 제물을 바쳐서 속죄의 제를 드려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하나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알겠어요, 모르겠어요? 「알겠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종족적 메시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기성가정에게는 종족적 메시아라는 말이 얼마나 고마운 말인지 모릅니다. 그것이 없으면 일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부 다 아들딸을 길러서 필사적으로 축복을 받게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아들이 낳은 여러분의 손자는 하나님 앞에 완성형이 되는 것입니다. 이 아들딸을 중심삼아 가지고 조상들의 용서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그랬지요? 이것이 3대 하나님의 입장입니다. 이것이 어디서 열매 맺느냐 하면 4대째 유다 지파입니다. 그 유다 지파를 중심삼고 예수님이 출현한 것입니다. 그래서 4대째 가정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예수님이 유다 지파에서 태어났느냐? 이것은 천리원칙이 사위기대 4수를 중심삼고 되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3대를 제사를 지내 주는 것입니다. 3대를 해방시키는 놀음을 해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하나님과 관계를 맺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리적 견해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것을 알게 되면 지금까지 살던 것처럼 그렇게 살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종족적 메시아의 사명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기성가정에게는 이런 이중적인 사명을 감당해야 할 중차대한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기성가정의 사명

기성가정의 아들딸이 축복받으면 그것이 얼마나 복인지 모릅니다. 지상에서는 종적인 역사를 횡적으로 탕감하지요? 여기서 여러분들이 소생급이면 아들은 장성급이요, 그 아들을 통해서 완성급의 아들도 나올 수 있으니, 지상에서 주고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종족인 관계에서는 이렇게 주고받을 수 있어요? 없습니다. 주고받는 것은 횡적인 관계로서 주고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역사를 횡적으로 탕감복귀해 나가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3대가 걸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처녀 총각으로서 선생님한테 축복받은 가정은 선생님과 연결될 수 있는 기준이 세워져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가정적 기대에 있어서의 중심은 처녀 총각으로 축복받은 가정입니다. 이런 것을 알고 여러분이 앞으로 가정의 질서를 세워 나가야 합니다. 36가정을 두고 볼 때도 제1가정, 제2가정, 제3가정 중에서 제3가정이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 여러분이 필히 해야 할 중요한 책임은 종족적인 메시아의 사명을 하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더우기나 제1가정에서 이 사명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아들딸은 어떻게 할 것이냐? 죽은 후에는 결혼시킬 수 없습니다. 선생님이 살아 생전에 이런 문제를 해결해 놓고 가지 않으면 여러분과 여러분 아들딸은 영원히 영원히 갈라지는 것입니다.

영계가 삼층천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탕감의 조건을 세워야 됩니다. 그러기 전에는 못 만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해주느냐? 지금까지는 안 했지만 이제는 그것을 이야기해 줄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중요한 입장에 있는 것을 알고, 공적 생활이나 사적 생활에 있어서 그리고 종족에 대해서 여러분이 가중된 책임을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알겠어요? 「예」

그러면 종족적 메시아로서의 책임을 하는 것이 그 종족에만 국한되는 것이냐? 아닙니다. 종족을 내세워서 나라에 계승시켜야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와서 해야 할 사명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명 분야를 탕감복귀했다는 조건을 세우지 않고는 하나님의 아들딸이 못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는데 어떤 기준이 있어야 될 게 아니예요? 그 기준이라는 것은 요셉 가정이 유대교회를 업고 넘어가 이스라엘 나라에 충성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족과 민족과 국가를 위해야됩니다.

교회는 민족 편성의 축소체입니다. 거기에는 여러 성씨가 들어가지요? 여러분의 가정이 모범이 되어 가지고 자기의 문중을 움직이고, 그 문중이 합하여 나라에 충성할 수 있도록 해 가지고 그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로 설정될 수 있게끔 해야 됩니다. 지금은 통일교회가 내적으로 세계적으로 뻗어 나가야 하느니만큼 여러분은 국가기준을 빨리 조성해 가지고 넘어가야 되는 것입니다.

나라를 찾지 않고는 천국에 못 들어갑니다. 천국은 누가 만들어 주어서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만들어 가지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선생님의 자리를 누가 만들어 준 거예요? 선생님이 만든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핍박받지 않는 입장입니다. 선생님은 영적 사탄과 실체 사탄을 대하여 싸워 나왔지만 지금은 그러지 않아도 되는 입장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자유로운 환경에서 선생님과 같은 수고를 하지 않고 국가를 중심삼아 가지고 종족복귀의 사명만 하면 됩니다. 앞으로 뜻이 이루어져 감에 따라 이것은 그 범위가 점점점점 축소되는 것입니다.

그런 환경을 전국적으로 확대시키려고 지금까지 적은 무리를 전국에 배치해 가지고 희생하면서 소모전을 해 나온 것입니다. 아무 실적도 없는 이런 놀음을 지금까지 해 나왔다는 거예요. 그건 왜냐? 여러분이 한때에 그 조건을 세울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 주기 위해서 입니다. 그래서 이런 놀음을 해 나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종족적 메시아의 사명을 하기 위한 외적 터전을 닦아 주기 위해서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공적인 가정이라는 것을 알고 정성을 들이면서 나가야 되겠습니다.

정성은 하나님과 일체된 자리에서

여기에 있는 부인들한테 한 가지 물어 봅시다. 몽시나 기도 가운데 선생님을 가끔 만나는 사람 손 들어 봐요. 내리세요. 특히 여자들은 전부 다 선생님의 지도를 받아야 됩니다. 여러분이 정성을 들이면 가르쳐 주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선생님과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마음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기도하면 반드시 가르쳐 주게 되어 있습니다. 부부가 일심동체가 되어서 기도하면 반드시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보고 싶어서 눈물짓고, 본부에 가고 싶어서 애태우는 마음, 여러분이 사춘기에 느꼈던 것과 같은 그런 마음이 생활권내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 그런 가정이 돼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가정에 하나님이 같이하시는 것입니다.

부인 식구들은 반드시 선생님의 지도를 받아야 됩니다. 그리고 남자 식구들도 가끔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는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아야 됩니다. 그러지 않고는 하나님의 가정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려면 기도하고 정성들여야 됩니다. 정성들이는 데는 하나님의 심정을 중심삼아 가지고 하나님께서 복귀섭리를 하는 데는 어떤 면에 치중하시느냐 하는 것을 알고서 정성을 들여야 됩니다. 정성을 들여도 하나님께서 가르쳐 줄 수 있는 방향과 일체된 자리에서 정성을 들여야지 동떨어진 자리에서는 암만 정성을 들여도 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부에서 일어나는 소식을 빨리 알고 싶어하는 마음이 누구보다도 간절한 사람은 하나님과 가까운 자리를 찾아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가정들이 지금까지 본부를 멀리하는 생활을 했다면 그건 잘못된 생활입니다. 뜻을 중심삼고 생활하는 사람이라면 언제나 자기 남편보다도 자기 아내보다도 뜻과 일치되어서 선생님 가정을 중심삼고 가야 됩니다. 그러면 선생님이 직접 지도해 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른 교회와 다른 점입니다. 국가와 민족을 초월해 가지고 그런 일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세계적으로 발전하는 것입니다.

일본 식구들은 절반 이상인 약 65퍼센트가 영적으로 선생님의 지도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면 심령생활에서 그들이 여러분보다 앞서 있다는 겁니다. 기도생활을 여러분보다 많이 했고, 안타까운 마음이 여러분보다 많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여러분이 그들보다 떨어집니다. 그것이 없어 가지고는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앞으로 여러분이 가정생활에 있어서 중요시해야 할 것이 무엇이냐? 선생님이 아내나 아이들의 몽시 가운데 나타나서 무엇을 가르쳐 주었다면 그것을 믿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 딸이 가르침을 받았다면 그딸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과 같이 존중시하고, 그 가르침을 절대시하고, 그 말씀에 하나되어 가지고 따라갈 수 있는 가정환경을 만들어야 됩니다. 남편이 그 가르침을 받지 못하면 아내를 중심삼아 가지고 반드시 가르쳐 주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 가정에 하나님이 가까이해 주신다는 것을 알고 아내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과 마찬가지로 여기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두고 보면 알게 될 것입니다.

그것을 교회 구역장에게 가서 감정해 보면 대번에 알게 됩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어떤 표정을 하니까 기쁜 일이 생기더라 하는 것을 연구해 나가야 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가르쳐 주게 되어 있습니다. 몽시나 기도 가운데 선생님이 나타날 때 기쁜 표정을 하면 왜 기뻐하실까 슬픈 표정을 하면 왜 슬퍼하실까를 감정해야 합니다. 슬픈 표정도 정면에서 나타날 때하고 옆에서 나타날 때하고 다릅니다. 또, 오른쪽에서 나타날 때하고 왼쪽에서 나타날 때하고 다르고, 위에서 나타날 때하고 아래에서 나타날 때하고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전부 다 감정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일들이 있게 되면 그것을 중심삼고 통계를 내서 거기에 맞추어 나가면 지금 하나님이 자기 가정을 대하여 어떻게 움직이고 계시고, 앞으로 자기 가정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다 알고 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가정에 선생님으로부터 그렇게 가르침을 받는 식구가 있으면 그 식구를 중심삼아 가지고 밤을 새워 가면서라도 식구 전부가 그 얘기를 듣고, 무슨 일을 어떻게 어떻게 해 나가야 한다는 것을 결정짓고 다짐하며 쌓아 올라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정성들여 은혜받으면 가정이 화목해진다

이렇게 한 사람을 중심삼고 거기에 동조하게 되면 그 사람이 반드시 가르침을 받는 다는 것입니다. 완전한 플러스가 있으면 완전한 마이너스가 생겨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이 그 가정에 한 번 두 번 세 번만 맞아 떨어지면 남편이라든가 혹은 아들딸이 그것을 제일 궁금스럽게 생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영적 기반을 넓혀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지금까지 그런 꿈도 안 꾸고 나왔지요? 그러니 기도해야 됩니다. 정성들여야 됩니다. 그런 경험이 있어야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도 알고 신앙생활도 잘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 있는 거예요.

이걸 아는 여러분들이 이제부터는 증거해야 됩니다. 그러려면 기도를 해야 됩니다. 기도하는 데 있어서 남자와 여자가 같은 날, 같은 시간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자와 여자의 성격이 상대적인 경우에는 같이 하면 좋지만 상대적이 아닐 때에는 기도 시간을 달리해야 됩니다. 기도시간을 정할 때에는 새벽에 해 보고, 아침에 해 보고, 점심때 해 보고, 저녁에도 해 보고 밤에도 10시에 하든지 12시에 하든지 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다년간 기도 생활을 해 봐서 몇 시에서 몇 시까지 기도하는 것이 자기에게 제일 맞는 시간인지를 알아야 됩니다. 그것을 알아 가지고 자기에게 맞는 시간에 정성을 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될 수 있으면 은혜의 기준이 높은 사람을 중심삼고 그 사람이 기도하는 시간에 다른 사람들도 같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으로 말미암아 은혜받는 것입니다. 만일 남편이 자기보다 은혜의 기준이 높고 신앙생활에서도 모범이 되면 그 남편으로 말미암아 은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은혜를 받게 되면 남편이 세상에 없는 미남으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또 남편이 아내를 통해 가지고 은혜를 받게 되면 그 아내가 그렇게 미인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 어머니보다도 반갑고 자기 누나보다도 반갑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여자 중에 제일이라는 것입니다. 원래 부부는 그래야 됩니다.

그래서 눈만 뜨면 바라보고 싶고, 밤을 새워 가면서 속닥속닥 얘기하고 싶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망하는 일이 아니라 흥하는 일입니다.

이런 가정적 환경에 하나님이 찾아오신 그 기반을 어떻게 소화시키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리고 소화시킨 그것을 어떻게 보편화시키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을 해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가정을 하나님이 외면하실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딸이 아버지에게 `아버지, 잘못하셨어요', 또 아들이 어머니에게 `어머니 잘못하셨어요' 하는 역사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지금은 옛날과 다릅니다. 옛날에는 종적인 시대였습니다. 종적인 관계를 중심삼고 종적인 것을 발전시킬 때였기 때문에 심령이 발달되었습니다. 과거에는 기독교를 발전시키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러한 터전 위에 오랜 역사를 거쳐 기독교가 세계적으로 발전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다릅니다. 동에서 번쩍 서에서 번쩍 한다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선생님이 지금 여기에 있지만 세계 각국을 지도하고 있습니다. 어떤 나라는 지금 이 시간이 밤인 나라도 있을 것입니다. 동에서 번쩍 서에서 번쩍 한다는 말이 맞다는 거예요. 이런 역사를 지금까지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세계를 평균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 공평하게 역사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시대권내에 들어왔기 때문에 한국에 있는 가정들은 세계 어떤 나라에 있는 가정들보다도 높은 영적 기반을 갖추어야 할 텐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반대라는 것입니다.

앞으로 여러분들은 생활 가운데에서 기도 생활을 중요시하면서 선생님에게 직접 지도받을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나가야 되겠습니다. 이런 영적 분위기를 어떻게 만드느냐 하는 문제를 부부끼리, 혹은 자녀들을 모아 놓고 서로 의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게끔 노력해야 되겠습니다. 만일 그러한 인연을 가진 사람이 있거든 그 사람을 존중시하라는 것입니다. 아들이 그렇다면 아들을 존중시하고, 딸이 그렇다면 딸을 존중시해 보라는 겁니다. 신앙을 중심삼고 그를 자기 집안에 있어서 믿음의 조상처럼 여기고 협조해 나가면서 키우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제일 정성들인 사람한테 다 주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기도는 신앙의 뿌리

여러분이 이런 영적 생활 분위기를 갖추어 가지고 아까 말한 공적 생활과 사적 생활에 있어서 모범을 보이고 종족적인 메시아의 책임을 해 나가야겠습니다. 이것은 영적 기반 없이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반을 갖기 위해서는 체험을 해야 합니다. 그 체험을 존중시해서 생활에 적용하고 분석하여 통계를 내 가지고 그것이 좋은지 나쁜지, 또는 발전하겠는지 후퇴하겠는지를 가려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또 대인관계에서도 영적으로 가려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여러분이 분석하다 보면 오늘 좋은 일이 있을지 나쁜 일이 있을지를 영감으로 다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가 꽉 차서 사탄권내로 넘어가는 데도 그것이 좋은지 나쁜지를 모르고 있으면 언제 어떻게 망해 떨어질지 알아요? 그렇기 때문에 이런 것을 가려 가기 위해서는 정성을 들여야 되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예」

정성을 들이는 데는 `절대 믿습니다' 하는 자리에 들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절대 믿습니다' 뜻이면 뜻을 대해 `절대 믿습니다' 하는 자리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 자리에서만 하나님이 협조하시는 것입니다. 기도하면서도 시시하게 기도가 이루어질지 안 이루어질지 의심해 가지고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여! 나만 남았나이다. 내가 아니면 이 나라가 없어지고, 내가 아니면 이 세계가 없어질 것이온데, 아버지여, 당신이 6천년 동안 수고해 오신 이 한 경지에, 이 경계선에 나 혼자 남았나이다. 당신이 성취시킬 뜻 앞에 가까이 있는 자가 나밖에 없잖습니까? 나라는 존재가 이렇게 중요하지만 저는 아직 갖추지 못하였사옵니다. 그래도 그러한 저에게 명령하셨으니 제가 그럴 수 있는 조건, 그럴 수 있는 기반을 갖추어 가지고 전체 이 민족을 대신하겠습니다. 이것이 복귀섭리가 아니옵니까?'라고 할 수 있어야 됩니다.

여러분이 지금부터라도 눈물을 흘리며, 뼛골이 녹아나는 심각한 경지에 들어가서 일대일로 판가름을 지으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내가 눈물지을 때 하나님이 눈물짓고, 하나님이 눈물지을 때 내가 눈물짓는 그런 놀음을 하여 순종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과 주고받을 수 있는 경지에 들어가야 됩니다. 그래야 될 게 아닙니까? 그래야 된다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든 그래 가지고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도를 해야 됩니다. 뿌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뿌리는 기도입니다.

뿌리는 밖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나무가 크면 클수록 그 나무의 크기에 비례해 가지고 뿌리가 깊게 폭을 넓혀 나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선생님이 이런 공식석상에서 언제나 새로운 말을 하지만 이 새로운 말은 그때그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부다 뿌리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모르는 것도 많습니다. 큰 나무는 보통 나무들이 미칠래야 미칠 수 없는 깊은 뿌리를 갖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축복받은 가정으로서 뿌리가 얼마나 깊습니까? 뿌리가 깊어야 그 아들딸들이 튼튼하게 자라는 것 아니예요? 그렇지요? 원리로서의 풍부한 뿌리를 가지고 옥토에 심어진 환경에 하나님이 비료까지 주게 되니 자라지 않을 수 있겠어요?

이런 점을 두고 볼 때 문제는 무엇이냐? 하나님과 더불어 일체된 경지에서 한 남편을 중심삼고 한 여인이, 한 부부를 중심삼고 한 가정이 정성을 들이느냐 안 들이느냐 하는 것이요, 영적인 뿌리를 중심삼고 접붙이느냐 접붙이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가정에 좋은 일이 있으면 반드시 하나님과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것이 여러분에게는 떨어지지 않고 남아질 수 있는 신앙의 기반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개인적인 입장이지만 가정과 연결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 놓아야 그 이하는 안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정이 올라갈 때 따라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걸 맺어 놓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같이하시는 가정이 되라.

옛날 충신들 가정에서는 좋은 것이 생기면 먼저 나라님 앞에 드렸습니다. 이것이 한국의 충신들의 생활법입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볼 때, 한국의 예법은 그 어떤 나라에도 없는 천국의 중심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유교에서는 공자의 가르침을 따르는데 그 공자의 가르침을 중심한 예법을 보면 천법에 가까운 것이 많습니다.

앞으로 여러분들 후손들이 여러분들을 대해서 제사 지내게 해야 합니다. 아직까지는 생활규범이나 장사지내는 절차 등이 우리 원리를 중심삼고 정해지지 않았지만 앞으로 그 예법이 나오게 되면 그때부터는 아무렇게나 해서는 안 됩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은 무슨 내용이든 하나님이 같이해 주신다는 마음을 중심삼고 자신의 환경을 극복하고 뿌리를 깊이 박아 어떤 풍상에도 자랄 수 있는 생명력을 지녀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는 하나님께서 법을 세우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안 될때는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기성가정들이 금후에 해야 할 책임이 얼마나 지중하다는 것을 이번 총회를 통해서 가일층 각성해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내일의 후배 기성가정들 앞에, 축복받은 어린 가정들 앞에 본이 되고 울타리가 되고 담이 되어 가지고 그들이 잘 자랄 수 있게끔 보호해 주고 바람을 막아 주는 책임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여러분들을 좋아하고 여러분을 품고 데려가겠다고 해야 여러분들이 앞으로 교회의 평준화 수준에 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문제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뿌리 깊은 기도생활을 많이 하라는 것입니다. 뜻에 사무친 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가시는 길과 본부교회가 가는 길에 자기가 얼마나 호흡을 맞추어 사느냐 하는 것을 항상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본부 소식이 궁금해 죽겠다고 하면서 직접 찾아가지 못하면 편지라도 해서 알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마음을 앞세워 가지고 사는 가정이면 하나님이 같이하지 않는 법이 없습니다. 그런가 안 그런가 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뿌리도 없이 심어 놓으면 죽어 버리기 때문에 심지 않은 것만 못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러한 원칙을 알고 생활을 재정비해서 그러한 기반을 닦아 주기를 부탁합니다.

[기 도]

아버님, 당신이 사랑하는 기성가정을 축복하여 주셨사오매 이 한 모임을 가졌습니다. 여기에 있는 아들딸들이 이 땅 위에서 아버지의 인연을 몽땅 계승할 수 있는 모범적인 가정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을지라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이 70년대부터는 가정복귀시대로 재정비할 때가 온다는 걸 알게 될 때 가정이 얼마나 엄청난 자리에 있는가를 깨달아야 되겠사옵니다. 한 종족을 찾아 세울 수 있는 것도 가정이요, 일체의 안팎을 가릴 수 있는 것도 가정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기성가정의 책임이 얼마나 지중한가를 알았사옵니다. 이제 이걸 알았사오니 뜻을 대하여 새로운 가정이 되기 위해서 노력하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이와 같이 뜻 있는 날을 저희에게 허락하여 주신 것을 감사드리옵니다. 저희들이 개별적으로는 뜻을 이룰 수 없기 때문에 이와 같은 시간을 자주 가져야 했사오나 그러지 못한 것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과거에는 그럴 수 있는 때가 아니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이와 같은 시간을 자주 갖고 가정 자체가 아버님을 중심한 원칙적인 생활을 하기 위해 결심하고 그 기반을 공고히 다져야 되겠사옵니다. 그러하오니, 아버지, 이런 시간을 많이 갖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이날 이후의 모든 전체를 아버지께서 맡아 주관하여 주실 것을 간절히 부탁드리옵니다.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뜻 앞에 일치될 수 있고, 당신의 사랑과 당신의 생활과 당신의 소망에 일치될 수 있는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님의 성호 받들어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기 도]

타락한 후손이기 때문에 복귀의 길을 거슬러 올라가 아버님을 상봉해야 할 자신인 것을 느끼게 되옵니다. 수많은 우리 조상들이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리며 그곳을 향하여 걸어 올라갔고 지금도 그곳을 향하여 싸우며 올라가고 있사옵니다.

이런 노정에 있어서는 어느 한때 한 개인이 자기 종족의 관계를 중심삼고 귀결점을 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옵니다. 저희들의 생애에 대한 모든 애착도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함임을 깨닫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역사와 더불어 흘러가는 저희 자신들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과거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당신과 더불어 상면상답(相面相答)할 수 있는 그곳을 찾아가는 저희들은 그 길에 있어서 언제나 충효의 도리를 다하지 않고는 갈 수가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많은 당신의 자녀들은 이 길을 가기 위해서 죽음의 길, 수난의 길, 몰림의 길, 슬픔의 길, 고독의 길을 걸어 나오면서도 아버지와 관계 맺는 곳이 어디인가를 몸부림치며 지금까지 더듬어 찾아왔다는 사실을 저희들은 역사를 통하여, 오늘 저희들의 신앙생활을 통하여, 종적인 과거를 통하여 알고 있사옵니다.

저희들은 이것을 현실 생활을 횡적 무대에 연결시켜야만이 저희들의 마음에 평화가 온다는 사실을 신앙생활을 하면서 체험하게 되옵니다. 이것을 느끼면 느낄수록 이것이 역사 전체에 연결될 수 있는 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옵니다. 과거의 우리 선조들에게 그와 같은 인연을 맺지 못한 슬픔의 시기 시기가 얼마나 많았는가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러한 역사에 대하여 회개하고, 오늘 이 시대에 책임 다할 것을 다짐하면서 힘과 자비와 긍휼을 바라야 할 자신의 모습들인 것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내가 내가 아닌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아야 하겠사옵니다. 나는 누구일 것이냐? 부모를 통해 태어났지만 부모의 것이 아니었사옵니다. 종족을 통하여 태어났지만 종족의 것이 아니었사옵니다. 민족을 통하여 태어났지만 민족의 것이 아니었사옵니다. 오로지 세계를 넘어 아버지의 것이라는 이 엄청나고도 고귀한 사실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천주의 대주재 되시는 분이 우리의 부모라는 것, 영원히 영원히 무한한 가치를 지닌 분이 우리의 부모임을 알게 될 때, 그 무한한 존재이신 아버지의 가치를 내가 어떻게 평가하였으며, 얼마나 음미하였는가를 생각하며 아버지앞에 머무르기에 부족한 자신인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저희들은 당신의 거룩한 존전에서 부족하고 참담한 자신을 슬퍼하지 않을수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되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저희를 슬픔으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칭찬과 기쁨으로 맞아 주시는 아버지가 계신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저희들이 외로운 환경에 휩싸여 들어가더라도 그 심정이 외로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옵니다. 뜻을 향하여 가는 저희들앞에, 하늘을 대하여 가는 그 길 앞에 슬픔과 고독과 비참함이 몰려온다 하더라도 그 자리는 처참한 자리가 아닌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를 위해 가고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가는 발걸음 앞에서는 그 비참한 모든 전부에 비례하여 아버님은 사랑의 마음, 긍휼의 마음, 순교의 마음으로 저희에게 더 빨리 다가오신다는 사실을 느끼게 되옵니다.

생명이 살아 있는 순간에 아버님을 대한다고 할 수 있는 그 한때가 올수 있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아버지와 저희 사이에 있어서 사탄세계의 모든 혈연적인 인연을 타파해 버리고 하나의 생명의 빛과 더불어 스쳐갈 수 있는 이 우주사적인 한 순간이 각자의 생애노정에 필연적으로 오게 하시옵소서. 이러한 것을 다시 한번 깨달으면서 오늘도, 내일도, 일년, 십년, 아니 생애를 바쳐 그 길을 향하여 달려갈 줄 아는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시간 남한 각지에 널려서 이곳을 그리워하는 당신의 아들딸들을 긍휼히 보시옵고 부복한 그 모습들을 아버지의 사랑으로 품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세상이 아니다 하고 세상이 이해하지 못하는 환경적 기준을 타파하기 위해 저희들은 많은 눈물의 고비를 넘겼사옵니다. 서글프고 한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복귀의 노정을 가던 그때의 일들은 과거지사로 모두 흘러갔사옵니다. 그러나 남아진 우리 자체는 아버지의 사랑의 실체로서, 그런 결실체로서 남아져야 할 것이옵니다. 흘러가는 역사와 더불어 민족의 비판을 받아 쓰러지고 없어지는 무리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을 저희들은 확실히 깨달아야 되겠사옵니다.

오늘의 `나'는 나를 위한 `나'가 아닌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나는 역사를 짊어져야 할 나요, 세계사를 개척해야 할 나요, 천정(天情)의 인연을 책임지고 증거해야 할 나인 것을 생각하게 되옵니다. 부족한 모습이지만 아버지여, 당신께 드리기 위한 예물로서 고이 바쳐져야할 `나'라는 것을 깨닫는 당신의 아들이 되고 딸이 되어야 되겠사옵니다.

그런 나의 손길은 당신의 손길과 같이 거룩한 손길이 되어야 하겠고, 나의 용모는 당신이 기쁨을 헤아릴 수 있는 용모가 되어야 하겠으며, 나의 태도는 당신이 천년 만년 자랑할 수 있는 태도가 되어야 하겠사옵니다. 또한 나의 행적은 하나님이 눈물로써 맞으며 내 아들이라고 칭찬할 수 있는 환경을 그려내는 것이어야 되겠습니다. 이것을 생각하게 될 때, 아버지께서 소원하시고 뜻하시는 최후의 능선 앞에 가는 저희 자신들이 얼마나 부끄러운가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되옵니다.

찾아오시는 아버지의 발걸음 앞에 낙심의 조건과 슬픔의 조건을 가해 드리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는 소망과 생명의 인연을 가하시어 아버지께서 기뻐하실 수 있는 자녀, 아버지의 영광을 찬양하며 기필코 후대에 무한한 복을 계승해 주고자 온 세계앞에 충성하는 아들, 그러한 딸을 그 마음으로 얼마나 얼마나 고대하고 계시옵니까? 이것을 느낄 줄 아는 저희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저희들이 아버지를 부를 때 무미건조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피가 끓고 마음이 감겨 들어가는 아버지의 부름을 들어야 하겠습니다. 그 아버지를 바라는 저희는 비장함을 가져야 할 것이며, 저희의 모든 간절한 표정은 아버지의 심정을 집중시킬 수 있는 것이어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것을 깨달을 줄 아는 자신들이 되어야 하겠사옵니다. 그리하여 아버지에게 쌍수 합장하는 자리에 아버지께서 달려올 수 있게 해야겠사옵니다. 그런 순간을 생애노정에 얼마나 남기느냐 하는 것이 영광스러운 아들이 되느냐 못 되느냐 하는 문제를 결정짓는 절대적 요인이 되고 조건이 된다는 것을 깨닫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들은 사망세계의 그늘 아래서 슬픔과 고독과 탄식의 실체를 가지고 생에 대한 애착심을 갖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그러한 자리에 있더라도 자기의 생을 걸고 아버지에 대해 애착심을 가지고 아버지의 뜻을 남기기 위하여 가는 사람들을 찾고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여기에 모인 자녀들이 누구를 위하여 있는가를 다시 한번 생각해야 되겠사옵니다.

아버지, 당신은 저희들의 마음과 마음이 연결되어 아버지의 마음 바탕이 되기를 얼마나 고대하고 계시옵니까? 저희들 중 한 개인을 위시해서 또 다른 개인과 개인을 연결시키시옵소서. 아버지의 마음이 동에서 서로, 남에서 북으로 연결되어 사방성을 갖춤으로써 아버지께서 얼마든지 현현하실 수 있는 개인과 가정과 종족과 민족이 생겨나기를 바라시는 아버지인 것을 생각하게 될 때, 통일교단에 모인 통일종족 전체가 아버지의 마음에 들 수 있는 종족적 환경이 되었는가를 생각하게 되옵니다. 그렇지 못하거든 종족을 이끄는 족장의 책임, 제사장의 책임을 져야 할 저희들이요 나라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아버지여, 긍휼히 보아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들은 망하는 무리가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원수의 하는 일을 구경하고 감상하기만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원수와 싸워야만 되겠습니다. 그들을 치고 그들과 원수가 되어야 망할래야 망할 수 없는 자리에 서게 된다는 것을 아옵니다. 악을 용서하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 악에 속해 있는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이 악을 제거시키기 위한 아버지의 뜻임을 저희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하오니 저희들의 책임이 얼마나 지중한가를 다시 한번 느끼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의 나를 자랑하기 전에 내일이 어떻게 될 것이냐 하는 것을 염려하면서 내 일생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보다 영원한 세계의 영광을 어떻게 세우느냐 하는, 보다 가치있고 보다 크고 보다 보람있는 것을 추구해 나가야겠사옵니다. 그것을 지적으로 판단하여 보다 나은 인간의 가치를 깨닫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참은 영원을 입증하는 것이요, 참은 영원과 같이하는 것이요, 참은 영원한 아버지의 모든 것을 상속한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께서는 지금까지 참된 사람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참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참된 말을 해야 되겠습니다. 참된 오관을 통하여 느끼는 감정 전체가 아버지 앞에 바쳐 드릴 수 있는 참된 제물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러지 않고는 안 된다는 것을 원리를 통하여 배운 저희들이기 때문에 지난날도 그러했고, 현실도 그렇고, 미래도 그렇게 바쳐 드릴 수 있는 길을 저희들은 따라가야 되겠습니다.

자기 혼자서도 슬픔을 깨달아 외로운 심정을 가지고 아버지를 위로해야 한다는 것을 느끼는 아들딸, 자신의 슬픔이 있다 하더라도 아버지의 슬픔이 있음을 알고 자기의 슬픔을 감추며 부끄러움을 느낄 줄 아는 자녀들이 있다면, 이는 하늘의 것으로 남아질 수 있는 자녀들이요, 아버지의 복을 가지고 천추만대에 아버지의 인연을 뿌리 깊게 뻗어나가게 할 수 있는 개인들인 것을 깨달을 줄 아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어야 되겠사옵니다.

이 자리에 모인 당신의 아들딸들을 굽어살피시옵소서. 이들이 여기에 무엇을 위해 나왔사옵니까? 지나가는 세월과 더불어 한때의 인연을 맺기 위해 나온 것이 아니옵니다. 영원한 때를 세우고 영원한 인연을 세우기 위해 나왔사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중심삼고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이 놀라운 아버지의 사랑은 온 역사의 기쁨일 것이요, 온 시대의 기쁨일 것입니다. 또한 거기서부터 미래의 새로운 출발이 벌어지게 되는 것을 알게 되옵니다.

인간은 아버지의 사랑을 위해 태어난 존재이기에 사랑을 떠나서는 살 수가 없사옵니다. 사랑을 위해 태어났고 사랑으로 아버지를 모셔 드려야 하며, 주체이신 아버지 앞에 상대로서 서로서로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어야 된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 그 무한한 가치 때문에 여기에 나온 당신의 아들딸인 것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와 상관없는 만남은 쓸데없는 것이옵니다. 매일 습관처럼 출석하는 것은 아버지 앞에 보탬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허락하여 주옵소서.

아버지의 옷자락을 붙들고 아버지의 목을 안고 간절한 마음으로 흐느끼면서 아버지의 품에 안기는 한때를 맞게 해 달라고 절규하고 마음속에 사무쳐 들어오는 아버지의 생명의 맥박을 간직할 수 있는 자녀가 되기 위해서 찾아온 무리라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당신의 사랑이 저희의 깊은 마음속에서 은은히 흘러나와 심정과 심정을 이을 수 있고, 당신의 마음 바탕에 흐르는 그 피의 맥박이 저희의 마음을 일으키게 하시옵소서. 본질적인 사랑의 맥박에 저희의 온 피를 사무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당신의 용기와 더불어 분노심을 가지고 싸우게 하여 주시고, 아버지의 원한의 맥박이 나에게 뻗쳐 나와 생애의 순간순간을 넘어갈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될 수 있도록, 아버지, 은은한 가운데 자신을 돌이키게 하여 주옵고 인연맺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존귀하신 당신 앞에, 무한하신 사랑의 주체 앞에, 무한한 생명의 원천이신 당신 앞에 부족한 모습들 가운데 연약한 모습이 있사옵니까? 있다면 그 자신의 존재의 가치를 잊어버릴 만큼 전체 앞에 아버지의 인식을 표면화시키는 자리에서 쓰러지면서 아버지를 고대하는 마음을 가진 자가 되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여, 오늘날 통일교회의 갈 길을 지켜 보아 주시옵소서. 어디로 가야 하옵니까? 후퇴해야 하는 가운데에서 서러움의 눈물을 지으며 아버지 앞에 구해 달라고 소리치는 무리가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당신은 무한한 축복을 준비해 놓고 이 땅에 오는 아들을 맞아 주고 싶고 품어 주고 싶은 간절한 소망을 가지고 나오셨습니다. 이러한 아버지를 만나 가지고 생애를 마치고 아버지 앞으로 가야 할 것이 저희의 필연적인 인생길이라고 생각하게 될 때, 그 길이 쉬운 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옵니다.

그러한 자리에 저희들을 불러 주시옵소서. 그럴 수 있는 자리에 저희들을 참석시키기 위해서는 수만 배의 수난의 길이 있더라도 저희들을 몰아쳐 주시기를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이 땅 위에 뿌리 박아 그것을 중심삼고 하나의 사랑의 나무가 되고 사랑의 줄기가 되고 사랑의 가지가 되고 사랑의 꽃이 된 후 사랑의 결실을 맺어 천년 원한을 풀어야 할 자가 저희들임을 알았사옵니다. 그럴 수 있는 실체로서 생긴 모양이 어떻든간에 아버지의 마음을 우려내어 아버지의 슬픔을 위로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아들딸이 이 땅 위에 있어야 된다는 이 엄연한 사실을 저희들의 골수에 사무치게 느낄 줄 아는 사랑의 아들딸이 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사회환경을 바라보면서 바라볼수록 원한의 함성이 높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러한 세계의 흐름을 책임지고 아버지의 슬픔을 가누어 드릴 수 있는 아들딸이 없는 것을 생각해볼, 저희들은 고독함을 느끼옵니다. 저희들이 고독함을 느낄 적마다 아버지의 고독함은 얼마나 크겠느냐고 하면서 자기의 고독을 잃어버리고 아버지의 고독을 위로하고, 자기의 일신을 전체를 위해 희생하며 아버지를 위로하는 제물이 되겠다고 몸부림치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런 자들이 다른 곳에는 없을지라도 통일교단에는 있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민족의 운명을 가려 가야 할 생사의 판결이 저희들의 두 어깨에 걸려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이와 같은 책임을 다짐하며 그 책임을 지고 사는 사람들은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옵니다. 하늘을 봐도 하늘은 오늘의 하늘을 원하는 것이 아니옵니다.

민족을 봐도 오늘의 민족을 원하는 것이 아니옵니다. 밥을 먹으며 사는 것도 오늘의 이 환경을 원하는 것이 아니옵니다. 내일의 하늘땅을, 내일의 민족을, 내일의 새로운 생활환경을 고대하는 사람들은 자기의 민족을 가지고 있다 해도 불쌍한 사람들이옵니다. 그런 자들은 가정을 가졌다 하더라도 외로운 자들이옵니다. 그러한 자리에서 땅 위의 잘못된 것들을 해소시키고 생활과 심중을 통해 아버지의 인연을 남기기 위하여 몸부림치는 거룩한 무리들이 되게 하여 주옵길,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은 6월 7일이옵니다. 아버지, 이 달은 복되어야 하겠습니다. 근자에 주위에서 들러보고 주위로 번져 나가는 사연들을 보면, 통일교회가 문제 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내용을 바라볼 때에 오늘 이 민족 앞에 저희들이 무엇을 남겨 주어야 하겠사옵니까?

과거에는 슬픔과 괴로움과 저주의 대상이 되었던 통일교단이 근자에 와서는 신문 지상에 오르내리고 있사옵니다. 그러나 이것을 통하여 전해지는 모든 내용이 아버지의 걱정을 덜어 주고 이 민족에게 경각심을 일으키게 하는 것일진대, 이 민족이 그것을 읽어 볼 적마다 놀라우신 아버지의 뜻이 통일교단과 같이한다는 것을 깨달아 자신들도 모르게 마음을 고취시킬 수 있는 하나의 자극제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 겪어 나오신 환경을 거쳐야 하겠사옵니다. 하오니 저희들에게 그러한 순간 순간을 허락해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니다.

아버지, 저희들이 이 나라, 이 민족을 일깨워 줘야 되겠습니다. 그러나 울부짖는 사자와 같은 악의 환경을 저희들이 맞이할 때에 갖추지 못하고 준비하지 못한 초조함은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옵니다.

아버지, 이제 민족자결이 필요한 때가 왔습니다. 삼천만 민중이 무릎과 무릎을 합하고 마음과 마음을 합하여 천성의 인연을 고대할 때는 왔사옵니다. 오늘 이 민족이 당신의 영광을 받드는 존전에서 제물이 되든가 제물을 드리든가, 둘 중의 하나를 택하지 않으면 아시아에서 제일 불쌍한 민족이 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옵니다. 오늘 이 민족이 그러한 것 모두를 못 하기 때문에 저희들이 제물이 되어야 할 책임을 느끼게 되옵니다. 하오니 제사장은 아버지가 되어 주시옵소서.

이제 이사명을 감당해야 할 저희들은 정성들여 당신과 하나되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이 민족을 구하기 위한 필연적인 것임을 알고 있사오니 아버지, 이 민족의 앞날을 지키시옵고 아시아와 세계의 앞날을 지키시옵소서.

슬픔 가운데 나오신 아버지의 그 슬픔을 해결해 드려야 할 중차대한 사명이 가중되어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되옵니다. 이것이 거짓이 아니라 사실이니 이 책임을 바라보는 저희의 마음이 얼마나 초조하겠사옵니까? 초조하지 못한 자신들은 거짓된 자이옵니다. 애달파하지 않고 몸부림치지 않는 자들은 거짓된 자이옵니다. 망운에 놓여 있는 민족을 바라보고 사망권내로 휩쓸려 가는 세계를 바라보면서 아버지의 마음을 스스로 체휼하고 염려하며 아버지 앞에 제물이 되어 제단을 지킬 줄 아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경지에서 자기의 생사의 경계선을 넘나들며 `아바 아버지시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나에게서 피하게 하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절규하였사옵니다. 그 간곡한 한마디, 그 처량하고 슬픈 예수님의 표정이 아버지의 마음을 거머쥐게 했으며, 새로운 결심을 다짐하는 소망의 세계를 그 마음과 인연지어지게 하였사옵니다. 그러한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 저희들은 생애 노정에서 민족 앞에 기억될 수 있는 조상들이 되어 수많은 민족으로 하여금 눈물로써 따라오게 할 수 있는 생애노정을 남겨야겠사옵니다. 이것이 이 땅 위에서 뜻을 아는 저희들이 가야 할 운명길인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도와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해외에 나가서 외로운 제단을 붙들고 동녘 하늘을 바라보며 눈물로써 기도하는 수많은 무리들이 있사옵니다. 이곳을 날마다 그리워하며 정성들이는 그들 앞에 천배 만배의 복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여기에 있는 저희들은 그들 앞에 빚을 지지 않으려 하고 있습니다. 그 마음 앞에 주체적 입장에서 주어야 하기 때문에 오히려 그들을 위로해야 할 될 줄로 아옵니다.

남아진 날들을 저희와 더불어 기쁨으로 찬양하고 아버지의 승리를 안고 가는 영광의 자녀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모든 것을 아버지 뜻 앞에 맡기오며, 이 나라 이 민족이 아버지의 뜻과 하나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참부모의 성호 받들어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말씀]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 가운데는 인간이 타락되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중에서도 우리 통일교회 사람들은 그 타락이 어떤 내용을 빚어냈으며, 그 인연이 우리와 어떠한 관계를 남기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또, 그 남겨진 자체는 하나의 개인으로부터 세계에까지 모두 걸리는 크나큰 문제를 형성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들이 알고 있습니다. 즉, 타락권이 우리의 생활권내에, 우리의 세계 앞에 전개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고충

이 타락한 세계를 거쳐 나가야 하는 우리들은 지극히 불쌍한 자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타락권을 벗어나려는 입장에 설 때, 미래의 소망을 향해서 현실을 타개해 나가려는 입장에 서게 될 때 나타나는 모든 환경은 그와 같은 길을 가고자 하는 사람 앞에 편이 될 수 없고, 협조할 수 없고, 위로할 수 없는 환경이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러한 길을 가야 할 인생 행로이기 때문에 이것을 보편적으로 고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슬픈 바다요, 외로운 바다요, 처량한 바다요, 무서운 바다입니다. 생사의 모든 판정을 결정하고도 남을 수 있는 위협과 절박감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기 때문에 고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고해의 길을 가려는 한 사람이 있다 하고 그 사람을 제삼자의 입장에서 생각해 봅시다. 고해와 같은 환경에서 배를 타고 출항하는 그의 앞에는 폭풍우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며, 수많은 생명을 삼키던 노도가 가로막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에 일엽편주와 같은 형상을 지닌 한 개인의 생명체가 있다고 할 때, 그가 가는 길이 얼마나 고독하고 얼마나 처량하고 얼마나 비참하겠습니까? 그런데 그러한 길을 알지 못하고 떠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을 아는 사람은 그 일을 천번 만번 말릴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그 일을 말려 끝이 날 일이냐? 말릴래야 말릴 수도 없는 입장에 선 것이 타락한 인간의 운명이라는 것입니다.

그 길을 아는 사람의 배후에는 그러한 길을 떠나려 하는 사람에게 어서가라고 그가 가는 길을 축복하기 전에 염려의 마음과 걱정의 마음과 지극히 안타까운 마음이 깃들어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보게 될 때, 하나님께서 타락된 이 세계, 칠흑같이 어두운 암흑 가운데 사로잡힌 이 천지, 방향도 없고 갈 표준도 없는 인류의 행로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은 어떻겠습니까? 인간이 어떻게 가야 된다는 것을 알지만 가르쳐 줄 수 없는 하나님입니다. 그렇다고 가지 않으면 안 될 운명에 처해 있는 것이 우리 인간들입니다. 지금까지 이 둘 사이에는 형언할 수 없는 비참함과 서러움과 슬픔과 고충이 깃들어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 고충이 얼마나 컸을 것이냐? 여러분의 생애를 다 지내고도 느낄래야 느낄 수 없는, 여러분의 고충의 한계선 이상의 고충이 있었을 것입니다. 고통과 억울함과 공포가 있었다면 그것 또한 우리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공포와 억울함과 슬픔은 아무 근거도 없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떠한 근거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 근거가 될 수 있는 주체가 누구냐? 그것은 하나님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그런 입장에 서 가지고 인간의 부모로서 인간에게 방향을 제시해 나왔던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와서 방향을 제시하며 명령하게 될 때, 하나님은 소망을 가지고 우리가 승리할 줄 알고, 기필코 갈 줄 알고 우리에게 명령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하나님이 되었느냐? 이것을 생각해 볼 때, 복귀섭리도상에서 뜻을 알고 따라나온 수많은 의인들은 출발과 더불어 실패의 인연을 거쳐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러니 그것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은 얼마나 더 고통을 느꼈으며, 얼마나 더 외로움을 느꼈겠습니까? 이런 문제를 우리들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에게 가라고 명령했는데 그 사람이 그 길을 못 갔을 때에는 세 사람을 동원해야 하고, 그 세 사람마저 못 갈 때에는 수많은 사람들을 동원해서라도 가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필연적인 운명입니다. 한번 하려고 했던 것을 실패하게 되면 또 해야 되고 그래도 실패하면 또다시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명령은 한 번밖에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실패했다고 해서 하늘이 또 명령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따라가는 길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를 거쳐 가면 갈수록, 때가 가까이 오면 올수록 역사시대의 수많은 선지들 앞에 많이 가르쳐 주어야 할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절대적인 위치에서 절대를 향하여 명령할 수 있는 때는 한 번밖에 없습니다. 하나님도 절대적이기 때문에 재차 가르쳐 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명령을 인간이 실천하지 못하면 하나님은 어떻게 해서라도 이루어야 합니다. 또, 그것을 이룬다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것으로 남아지는 것이지 인간의 것으로 남아질 수 없기에 하나님은 인간과 상관하기 위해서 또다시 다리를 놓아야 됩니다. 이 다리를 놓기 위해 하나님은 개척자의 행로를 가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사망의 물결을 극복하는 문제와 기도

한 사람이 사명을 다하지 못하면 그 한 사람으로서 사명은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절대적으로 책임지어진 문제이기 때문에 그것이 어느 한때 한 사람을 통하여 이루어질 때까지 하나님은 묵묵히 천번이고 만번이고 거듭해 역사를 끌고 나오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생각해 보게 될 때, 역사시대의 어려운 환경, 공포의 환경을 타파할 수 있는 참다운 사람이 있었느냐? 그러한 참다운 사람이 없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참은 하나님밖에 없었습니다. 참은 둘일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만이 참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선지자들이 참을 위해 산다고 하였고 참을 위한다고 하였지만, 그들이 위하는 것이 참이 못 되었고 그리워한 것이 참이 못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역사를 남기고 갔다는 사실을 우리는 생각하게 됩니다.

여러분들은 고독한 항해를 떠나는 일엽편주와 같은 입장입니다. 그러기에 각자의 환경에 따라 노도도 만날 것이고, 폭풍도 만날 것입니다. 그런 환경을 밀고 나갈 수 있는 신념이 서 있느냐? 어떤 항구를 향하여 간다 하는 목적관이 뚜렸하냐? 그 환경에 들어갈 수 있다는 신념, 다시 말하면 몰아치는 모든 슬픔의 여건들, 모든 사망의 여건들을 극복할 수 있는 자신과 신념을 갖고 있느냐?

그러기에, 나에게 얼마나 큰 위협이 다가올 것이냐? 또 내가 그 위협을 제거하고 일어설 수 있는 하나의 모습으로서 이것을 극복하고 돌파하고도 남을 수 있는, 제삼자의 입장에서 찬양할 수 있는 그 모습을 얼마나 그리워해 봤느냐 하는 것이 문제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적인 신앙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한 번 믿었으면 그 누가 간섭할 수 없는 절대적인 신앙을 가져라. 그리고 한 번 결심하고 한 번 말한 것은 절대적으로 실천하라. 이것이 지금까지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의 목적을 향하여 가는 신앙세계가 인류 앞에 제시했던 내용인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됩니다.

절대적인 신앙과 절대적인 실천으로서만이 이것을 극복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만일 가는 과정에서 절망하게 되면 목적의 세계, 소망의 때를 맞지 못할 것입니다. 다가오는 환경을 극복하지 않으면 소망의 한때를 맞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적에 도달하는 원인이 될 수 있는 것은 절대적이 신앙과 절대적인 신념을 가지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것만이 사망의 물결이 휘몰아친다 하더라도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내용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실천하는 데는 앞을 바라보면서 여유 있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의 최후의 순간을 맞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촌각 중의 촌각을 다투는 자리에서 생명을 걸고 나서는 모범적인 실천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어려운 고비를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을 것이로되 그렇지 못하면 가능성마저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이런 염려의 역사노정을 우리 생애에 남기고 있음을 여러분이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입장에 있는 여러분은 하나님이 틀림없이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하며, 또한 필요한 것이 기도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여기서의 기도는 습관적으로 경을 읽듯이 하는 것이 아니라 판정짓고 판가리하기 위한 기도인 것입니다. 내 생명의 맥박이 연장되느냐, 안 되느냐 하는 문제를 결정지을 수 있는 해결의 요점으로 제시하는 것이 기도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를 여러분들이 생각해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그러한 순간을 걸어 놓고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담판 기도를 해보았느냐 하는 것이 여러분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각자가 남겨야 할 중대한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영원한 생명의 발판이 되는 것

이 땅 위에 왔다가 운명의 순간을 맞이하는 최후의 자리에서 과거를 뉘우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마음에는 과거의 모든 사실들이 영상으로 지나갈 것입니다. 이러이러한 사람이라는 것을 그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스스로 알 것입니다. 선조로부터 이어받은 생명체를 가지고 지금까지 인연된 환경과 남겨 놓은 사연 등, 지난날의 모든 것이 일생의 최후의 순간에 자기의 마음에 영상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 가운데 `참이 있었다, 내 생명보다도 귀한 그 무엇을 남겼다'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는 비록 이 땅에 왔다가 가더라도 보람있는 한때를 남기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왔다 가는 이 인생 행로가 행인과 같이 그냥 지나가는 것이었다' 하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의 모든 과거의 사연을 회상해 볼 때, 그 모든 사연이 머리를 흔들며 회상하고 싶지 않은 과거를 가졌으면 그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과거를 회상하면 회상할수록 자기 얼굴에 환희가 넘치며 자기의 모든 문제가 이상에 잠길 수 있다면 죽음의 공포도 그에게는 위로의 한 장면으로 장식될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볼 때, 과거를 회상하는 순간이 공포의 순간이 아니고 다른 그 무엇을 남겼다면 그의 과거도 죽지 않은 것이요, 현실도 죽지 않는 것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과거를 지닌 사람은 반드시 민족이 따라올 수 있는 인연을 가진 사람이요, 세계 만민이 따라오지 않을 수 없는 인연을 남긴 사람이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어떠한 사연일 것인가를 생각해 봅시다. 어떠한 민족에게 당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비참하고 비정한 때가 있을 때 그 문제를 자기가 책임지고 해결하기 위해 생명을 걸고 거기에 부딪친 때가 있었다면 그것은 그의 과거지사에서 잊을 수 없는 한때일 것입니다. 생애노정에서 자기를 위해 죽음의 자리까지 가는 것보다 형제면 형제, 친족이면 친족, 남이면 남을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다 바쳐서 그들을 구했다면, 그들을 구하기 위해 부딪친 때가 있었다면 그러한 사실들이 최후의 운명의 자리에서 그의 마음 선상에 영상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이 될 것입니다. 아무리 자기를 중심삼은 행복한 때가 있었고, 수많은 군중으로부터 환영받고 자기가 영광스럽게 찬양받는 거룩한 때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 순간에는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선하였느냐, 참되었느냐, 하나님 앞에 홀로 설 수 있었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볼 때, 참과 선은 자기로부터 시작하여 자기에게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로부터 시작하여 남에게서 결과를 맺게 하든가, 남에 의해서 시작되어 나에게 결과를 가져올 수 있어야만 선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원리에서 천지의 모든 존재는 주고 받는 인연을 거쳐야 된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의 생활이 주는 생활이었으면 죽음길에도 공포가 없을 것입니다. 남을 위해 모든 것을 다 주었고 남을 위해 희생했으며, 참에 가까운 생활을 하면서 눈물도 남으로 말미암아 흘렸고, 내 생명도 남으로 말미암아 투입했고, 내 소원도 남으로 말미암은 것이기에 내 맥박에서 흘러나오는 모든 생명력을 끌어모아 남을 위해서 투입했다고 할진대는 그 과거는 빛날 수 있는 과거일 것입니다.

그런 과거를 그리워하면서 민족을 생각하게 될 때, 소망의 민족은 이런 민족이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올 것입니다. 그가 그런 과거를 그리워하게 될 때, 남을 위해 희생하며 소망하는 본연의 선은 이래야 된다는 결정을 지을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내가 그것을 위하여 싸워 온 과거가 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그럴 수 있는 미래가 있어야 된다'는 내용을 지니고 하나님 앞에 간다고 할 때, 그 내용은 자기의 영원한 생명의 발판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성현이 가는 길과 범인(凡人)이 가는 길은 다릅니다. 성현은 역사와 더불어 살려고 했고, 세계와 더불어 살려고 했고, 미래와 더불어 살려고 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범인은 자기로 말미암아 살려고 했고, 세계도 자기로 말미암아 있게 하려던 사람입니다. 범인은 과거를 생각하면 흑암이지만, 성인은 과거를 생각하면 광명입니다. 그 광명은 무엇이냐? 그것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소망의 민족을 그려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망의 천국이 있다면 그 천국은 그들로 말미암아 출발을 봐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천국입니다.

여러분은 험상스런 환경을 갖춘 이 타락권내에서 여러분 자신이 가는 모습을 도표로 그려 보게 될 때, 1년은 이렇게 가고 1년은 저렇게 갈 것이다, 혹은 10년은 이렇게 가고 10년은 저렇게 갈 것이다 하며 자기 나름대로 자기의 일생 행로를 계획하면서 높고 낮음을 예측할 것입니다. 그 높고 낮음이 자기를 중심삼아 가지고 높아졌다 낮아졌다 하는 사람은 최후의 운명을 맞이하게 될 때, 자기를 위해 살면서 남을 희생시킨 그 모든 것이 자기를 얽어맬 것입니다.

양심의 가책이란 자아를 속박하는 것이 아닙니까? 양심의 가책을 받는 생애를 반평생 이상 남겼으면 그것이 자기를 절반 이상 꽁꽁 얽어맬 것입니다. 이러한 생애를 남겼다면 최후의 운명길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비참한 자리에 설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 그 생애의 도표가 선을 위해서, 남을 위해서 그려져 있다면 그것이 아무리 내려갔다고 하더라도 슬픔이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이 이와 같은 인생행로를 추구해야 하기 때문에 인륜 도덕도 그런 길을 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 모순된 환경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남을 위해서 가는 길이 쉬운 길이냐? 쉽지 않습니다. 쉬운 길이 아닙니다. 자기를 위해 가는 길도 쉽지 않거늘 하물며 남을 위해 가는 길이 쉽겠습니까? 이건 더더욱 쉽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기에 오늘날 타락인간이 그냥 그대로 간다면, 타락세계에서 그 환경을 벗어 나지 못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냥 그대로 자기를 위해 가는 생활을 해서는 타락권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타락한 환경권내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자기를 중심삼고 살다가는 그냥 사라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이 권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몸부림을 쳐야 된다는 것입니다. 필연적으로 벗어나기 위해서는 혁명을 해야 됩니다. 투쟁을 해야 됩니다.

거기에는 갖은 여건들이 개재될 것입니다. 그 일들은 고개를 끄떡이며 환영할 수 있는 내용들이 아닙니다. 이 길은 손을 설레설레 흔들고 몸을 비틀면서 가야 할 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길은 고통의 길이요, 슬픔의 길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처한 타락권내의 환경은 모순된 환경입니다. 모순된 환경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그 모순된 환경을 타개해야 합니다. 그 환경에 돌입하라는 진격 명령을 받을 수 있는 돌격대의 사명과 개척자의 사명을 해야 합니다. 그런 명령을 받아 움직여야 할 우리들의 인생행로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고로 인간들은 자기를 위주로 하는 생활에서 떠나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현의 도리는 자기 개인의 생활과 부모와 처자를 위한 생활이 아닙니다. 거기에서 떠나서 사는 생활, 자기의 종족을 위해 사는 생활에서 떠나 사는 생활, 자기의 국가를 위해 사는 생활에서 떠나 사는 생활, 더 나아가서는 타락된 이 세계를 떠나 사는 생활인 것입니다.

그러면 떠나서는 어디에 가서 살 것이냐? 떠나 가지고는 살 곳이 없습니다. 이 세계 외에는 살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방법이 있다면 선한 세계를 이루어 선한 세계의 주인과 같이 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을 부르고 참을 고대한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야겠습니다. 그러려면 이 세상과 타협하고 거래해 가지고는 안 됩니다. 세상의 경계선을 돌파해 가지고 넘어선 경지에서부터 그 인연이 맺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까지의 역사시대를 두고 볼 때, 어느 한때 그 경계선을 돌파한 때가 있었으냐?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슬픈 조건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역사는 아직까지도 밤중이요, 자정을 넘기지 못한 권내에서 미명을 바라보고 나오고 있기 때문에 비애와 슬픔이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지금이 이러한 역사시대라는 것을 깨달아야겠습니다.

지금까지 역사를 헤아려 볼 때, 인간들은 가야 할 방향을 몰랐습니다.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그 방향을 알지 못한 채 그 환경권내에서 우왕좌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서 스스로 몸부림치는 것이 개인에게서 그쳐지는 것이 아니라 환경에 미쳐지고 세계에까지 미쳐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싸움의 역사를 종결지어야 할 운명을 남기고 있는 현실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갈림길에 있는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되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우리에게는 이 갈림길을 타파하고 넘어서 고귀한 생명을 흠모하기를 원하는 내적인 욕구가 있습니다. 이 욕망은 버릴래야 버릴 수 없는 것이지만 이 욕망을 이루려면 힘이 들기 때문에 인생을 고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뜻이 있는 사람들은 자기의 생명을 넘나들면서 새로운 인연을 찾아 나왔던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생활이요, 사고방식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철학이니, 종교니, 절대자니, 하나님이니 하는 문제가 나왔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이 요인이 되어 거기서부터 문화가 형성되었고 전통적 기원이 마련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들이 잘 아는 바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생각해 보게 될 때, 여러분은 역사시대를 초월할 수 있는 인간이 못 됐습니다. 역사시대를 붙들고 뒤넘이치는 내가 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어떠한 힘을 의지해서라도 이것을 돌파하고 초월해야 됩니다. 이것을 극복하고 넘어서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도인들이 가는 도의 길입니다. 종교가 필연적으로 있어야 한다면 그 종교는 최후의 운명과 더불어 이러한 문제를 해결짓고 가야 할 중대한 책임을 지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자기 초월의 경지를 체험해야

그러면 여러분은 개인을 초월했느냐? 가정을 초월했느냐? 사회를 초월했느냐? 나라를 초월했느냐? 세계를 초월했느냐? 이러한 것을 한 순간에 몰아서 느끼고 자극받을 수 있고 체험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심각한 자입니다.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게 되면 반드시 심각하리만큼 고독해집니다. 그 자리는 누구나 동정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누구나 친구가 되어 줄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누구나 같이 운행해 줄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이처럼 나만이 살아서 결단하고 해결지어야 할 사망의 구렁텅이가 여러분 앞에 놓여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명심해야 되겠습니다.

이 사망의 구렁텅이에서 해방될 수 있는 한 순간을 어떻게 생활권내에서 모색하느냐 하는 문제를 생각하게 될 때, 이 방법을 찾기 위하여 연구하며 찾아 나서는 길이 도의 길인 것입니다. 이 도의 길을 들어서는 사람이 있다면 그 길을 들어서는 그 순간부터 그는 얼마나 심각할 것이냐? 아무렇게나 가고 오는 걸음이 아닐 것입니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판가리의 고개를 넘는 걸음일 것입니다. 그의 실체는 이러한 절박한 심정으로 고개를 넘기 위한 결의에 찬 마음 자세를 가지고 행동하는 실체일 것입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입니다. 그런 고개를 넘어서는 그 순간은 생명의 맥박이 고도로 움직이는 순감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거기에서는 생애의 비참함을 알고 생애의 모든 사연과 고통의 짐을 다 버려야 합니다. 그 순간은 새로운 절규를 들을 수 있는 순간일 것이며, 그 자리는 몸부림치는 내정적인 사무침이 있어야 되는 자리입니다. 또한 그 사무침과 더불어 `하나님이시여! 아버지이시여!' 하는 부르짖음이 여러분의 생명선을 넘고 새로운 세계에 가서 맞부딪치는 경각에 다다랐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심정을 가지고 아버지를 불러 보았습니까?

그런 자리에 서지 못하면 참된 종교의 문이 팔방으로 열려졌다 하더라도 그 문을 통할 수 없습니다. 그 문은 그러한 과정을 통해야 열려지기 때문에 그 문을 통해 가려면 그 이상의 절박한 생명의 심정을 가지고야만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통일교회에서는 희생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또한 깊다면 무한히 깊은 곳을 찾아들어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고요한 밤에, 모든 세상이다 없어진 듯한 그런 고요한 순간에 자기 맥박 소리만이 들리는 것을 느끼게 될 때가 있을 것입니다. 맥박이 자기의 온 세포의 생명력을 움직이고 격려하는 것을 느끼는 경지에 도달해야 됩니다. 나아가서는 그 맥박까지 잊어버리고 내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사무친 심정으로 쏘아진 포탄같이 한 표적을 향하여 무한히 달려가 자기의 마음에 생명의 인연을 결속시킬 수 있는 경지, 떨어지면 무한히 떨어지고 끌려가면 한없이 끌려가서 타락한 세계와 부딪쳐 그 세계를 산산조각으로 부수어 버릴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해야 합니다. 그러한 경지에 도달하지 않고는 이 사망권을 격파시키고 초월할수 있는 승리의 새로운 세계에 이르지 못한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 경지는 복잡다단하고 험난한 오늘날의 사회환경과 생활감정에 찌들은 이 육적 자극을 통하는 권내에서는 있을 수 없습니다. 깊다면 무한히 깊고 고요하다면 무한히 고요한 경지에서 간절한 심정으로 무한한 생명력을 갖고 하나의 대상을 찾아 들어가야만 그러한 경지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무한히 가다가 그것이 없다고 느껴지게 되면 천지에 어떠한 것보다도 큰 가치의 존재에 부딪쳐 보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내가 없어지더라도 있다고 할 수 있는 신념을 가지게 될 때, 지금까지 살아오던 내가 아닌 다른 나로서 그 실체가 거기에서 소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는 오늘날의 이 복잡다단하고 험악한 사회 환경에서는 있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밀실에 들어가서 하라는 거예요.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밀실에 들어가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그러한 체험을 한 사람은 기도의 가치를 알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통의 3일노정

그 누가 타락하라고 해도 타락할 수 없는 길, 아니 갈래야 아니갈 수 없는 길, 당연히 흠모할 수 밖에 없는 길, 그 길만이 내 생명의 원천이요, 그 길만이 내 생명의 주체입니다. 이러한 것을 스스로 갖고 싶고 인연맺고 싶어하고 그런 생활을 그리워하는 사람만이 오늘날 사망권을 넘어 가능성이 있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아바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나에게서 피하게 하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하는 기도의 순간은 평상시와 같은 순간이 아니었습니다. 눈에는 눈물이 흘렀을 것이며, 온 몸에는 골수에서 솟아나는 땀이 흘렀을 것입니다. 힘을 주더라도 죽느냐 사느냐 하는 이상의 힘을 주었을 것입니다.

아버지 앞에서의 짧은 몇 마디의 말이었지만 그 말은 뼛골에서 우러나온 최후의 음성이 아니겠습니까?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말하는 그 자리는 보통 자리가 아닙니다. 정성을 다 들이면서 아버지와의 인연을 찾아온 자신인데도 불구하고 버리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아버지의 뜻이 무엇이냐고 간곡히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 배후에 숨겨진 실낱 같은 소망의 한 빛이 바로 마음에서 솟아난 울부짖음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 우리는 그런 경지를 필히 찾아가야 되겠습니다. 거기에서 잡아지는 것은 없는 것 같지만 절대로 없을 수 없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한번 잡은 것은 천년 만년 놓고 싶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에서 잡은 것은 무엇이 될 것이냐? 그것은 아버지의 어깨가 될 수도 있는 것이요, 아버지의 팔굽이 될 수도 있는 것이요, 아버지와 인연된 어떠한 옷자락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잡고 잡아당길 때는 내가 끌려가지 않으면 그가 끌려올 것이니 하나님과 더불어 뒤넘이칠 수 있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이런 시간이 개인들 앞에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도의 길을 간 사람들이 입산수도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은 먹고 놀기 위해서 한 것이 아닙니다. 정성을 들이기 위해서 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정성은 얼마만큼 들이느냐? 그 정성의 한계점이 어디냐? 그것은 먼저 무아지경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무아경지는 정상적인 자리에서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제일 밑의 골짜기에 떨어진 입장에 서 가지고 어려운 세상의 짐을 졌다면 누구보다도 큰 짐을 졌고 불쌍하다면 최고로 불쌍한 자리에서, 최고의 절박감을 느끼는 그러한 자리에서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탐지해 나가야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은 뒤 3일 동안 고통을 당했다는 사실은 무슨 뜻이냐? 하늘땅이 사망권에 남아 있고 지옥도 사망권의 인연을 갖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하늘땅을 주관하기 위해서는 이 사망권을 밑으로도 넘고 위로도 넘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옥과 같은 맨 밑바닥의 경지에 가서 고통을 당하더라도 그것을 넘어 가지고 생명의 인연을 추구하고, 하나님을 위로할 수 있는 소망의 길을 가야 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지옥과 같은 그 환경을 거침으로 말미암아 소망의 천국을 향하여 재출발할 수 있는 길이 마련되었으며, 지상에서도 버림받고 몰리고 죽음의 길을 갔지만 소망의 길을 남겨 놓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이 3일노정을 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됩니다.

3일 동안 예수님은 지옥을 구경하러 간 것이 아닙니다. 지옥을 모르는 그가 아니었습니다. 그곳에 가서 판결을 내려 가지고 사망세계에서 생명 세계로 갈 수 있는 길을 터 놓았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망의 지옥 세계인 이 지상에 승리의 기반을 닦아 놓았으며 천국에 갈 수 있는 기원을 이루어 놓았던 것입니다.

기도의 효력

예수님 혼자 3일 동안 무엇을 했느냐? 뼛골에 사무친 기도를 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자리에 둘이 갈 수 있느냐? 아닙니다. 그 자리는 둘이 갈 수 없는 자리입니다. 절대의 상대는 하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절대자 앞에 절대의 상대는 하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절대적인 경지에서 자리를 잡고 우리를 부르고 있는 하나님이 얼마나 불쌍한 분인가 하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그런 자리에 들어가서 `아버지!' 하고 부르면 천년사를 넘나든 아버지를 배우지 않고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가 바로 아버지의 수고와 괴로움을 배우지 않고도 일시에 체휼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겠습니까? 그 순간이 바로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아버지의 심정을 내 마음에 몽땅 움켜쥘 수 있는 순간이 아니겠느냐? 아버지라고 부르는 그 마음이 영원히 남아질 수 있는 인연이 맺어지는 순간이 아니겠느냐?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는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잃었던 아버지를 찾은 그 마음, 그 태도가 최후의 기도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인류에 대해서 구원의 역사를 해 나온 섭리의 최고의 목적이 무엇이냐? 아버지로서 아들을 찾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내 아들 아무개야!' 할 수 있는 그 자리, 그것만이 최후의 목표였던 것이요, 그것만이 최후에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시점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 자리는 기도 없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런 자리로 나가는 데 있어서는 절대세계와 사망세계가 교차되는 점이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냥 그런 경지에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려면 그 교차점에 가 가지고 거기에서부터 직행할 수 있는 하나의 길과 접선해야 하며 거기에서 하나님의 심정을 느끼고 하나님의 종적인 슬픈 심정이 있으면 그것을 풀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입장에서 부활의 환희를 느낄 수 있고 해방의 한 순간을 맞을 수 있는 사람이어야만이 천국의 상속자가 될 수 있는 것이요, 천국에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공포에 휩싸인 사망권을 어떻게 극복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 사망권 안에서 노력하고, 뒤로 떨어지고, 내가 이러고 저러고 하고 혹은 더 깊은 환경의 골짜기에 들어가더라도 하나님과의 인연의 줄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 줄을 붙들어 줄 수 있는 주인이 있고, 나를 위해 주는 사람이 있고 또 나를 붙들고 어려움을 극복해 넘어갈 수 있는 사람을 가져야 됩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과 인연될 줄이라도 가지고 이 땅 위에서 살고 있느냐? 이 땅 위의 환경을 초월하여 살고 있느냐? 이런 문제를 생각해 보면 여러분들은 모두 껄렁패들입니다. 그럴 거 아니예요?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은 기도와 정성입니다. 내가 스스로 부활된 자리에 섰느냐? 서지 못했다면 간절히 구할 수 있는 자리에라도 섰느냐? 신앙을 하면서 환경을 책임질 수 있는 자신이 되었느냐?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생사의 기준을 움직이게 할 수 있는 능동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기도를 하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내가 넓은 탑을, 천길 높은 탑을 쌓는다면 얼마나 바쁘겠습니까? 넓고 높은 탑을 쌓으려면 얼마나 바쁘겠냐는 것입니다. 그것을 50년이면 50년 동안에 다 쌓아 올려야 되겠다고 다짐했다면 쉴 새가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주위로부터 공포가 들이닥칠 것입니다. 자연의 공포, 환경의 공포가 있을 것입니다. 이 타락한 세계에서는 정성의 탑을 쌓기만 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쌓아 놓으면 사탄은 번번이 그것을 무너뜨립니다. 하나를 쌓으면 둘을 무너뜨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탄과 싸우면서 쌓아야 합니다. 그러한 운명 가운데에 있는 우리들이 쉴 새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과 사탄이 쉬지 않고 대적해 나오는 중간 입장에서, 사탄과 대결하고 하나님을 받들어 모시면서 이것을 쌓아 올려야 할 사명을 짊어진 우리들인데 언제 쉴 새가 있겠어요? 일생을 다 마칠 때까지 한 순간도 마음 놓고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럴 게 아니예요? 공포의 바다를 건너 목적지에 이르기까지 마음을 놔서는 안 됩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

하나님을 위해 죽는 길이 있다면 죽어도 행복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죽는 길이 있다면 내 생명을 끊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당하면서 느꼈던 안팎의 시련을 뒤돌아보게 될 때, 이 길을 끝까지 갈 수 있는 가치있는 자가 된다면 죽음길이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자,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 여러분들은 현재 그러한 입장에 있습니까? 천국길은 그런 길로서 쭉 연결되어 있어요. 알겠어요? 6천년 역사를 죽 거슬러 올라가 그런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과 더불어 생활해야 합니다. 절대와 통할 수 있는 상대적인 자리는 단 하나입니다. 사탄세계와 하늘세계가 하나되려면 먼저 교차되어야 합니다. 그 자리에서 하늘세계를 넘어가려면 현실의 인연을 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던 것입니다.

우리 통일교회 교인들은 완성하면 기도가 필요없다고들 하고 있습니다. 통일교회 패들 이거 참, 틀려 먹었다는 거예요. 말이야 잘하지, 완성하면 기도가 필요없다고. 사실이 그렇다는 거예요. 그렇지만 그 완성의 기준은 국가를 복귀하는 것입니다. 그 자리가 바로 예수님이 소원을 성취하는 자리입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나라를 유대교와 합해 가지고 세계의 중심국가로 등장하게 하려 했습니다. 그런 자리가 완성의 자리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개인완성을 하면 개인으로는 설 수가 있지만 가정의 사탄이 남아 있습니다. 또한 가정이 완성하면 종족 사탄이 남아 있고, 종족 완성을 이루면 민족 사탄이 남아 있고, 민족 완성을 이루면 국가적인 사탄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도어 있는데 통일교회에 들어오자마자 다 완성이예요? 완성하려면 절실히 기도해야 합니다. 선생님이 기도하는 대로 해야 합니다. 때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선생님은 담판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이 얼마나 절박한 때인지 모를 것입니다. 복귀섭리의 첨단에서 책임을 짊어지고 가는 사람들은 그 누구도 모르는 가운데 뼛골에서 우러나오는 그것을 절감하게 됩니다. 그러한 때인 것을 절감했다면 그 다음엔 멍청하게 세월을 보내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담판기도를 해야 합니다. 잠이 문제가 아니라는 거예요. 나무가 잘 자라려면 뿌리가 깊어야 합니다. 뿌리가 깊어지려면 아무도 모르는 괴로움을 겪어야 되고 수고의 길을 걸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어 가지고는 안 됩니다.

우리 통일교회 식구들은 조금만 좋아도 자랑하려고 합니다. 또, 몰라준다고 이러고 저러고 합니다. 그런 사람은 뿌리가 못 됩니다. 잎밖에 못됩니다. 잎은 조금만 돋아나면 드러나게 되지만 뿌리는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깊을수록 안 드러납니다. 깊은 뿌리를 간직해야 큰 나무가 되는 것입니다. 통일교회의 뿌리는 깊습니다. 여러분들은 통일교회를 수십년 믿어도 아직 선생님을 모르고 있습니다. 너무 모른다는 거예요. 선생님은 깊은 뿌리를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지금 어떤 자리에 있습니까? 줄기에 해당되겠습니까? 통일교회에 들어와 선생님을 만나서 순수한 마음을 갖고 이런 길을 가려는 사람이 있다면 먼저 들어온 사람들이나 잘 하는 사람들을 대해 부끄러워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똑바로 가려고 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옆으로 가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가면 갈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 망합니다.

자기가 이만큼 왔더라도 떨어져 나가면 그만입니다. 나갔다가 다시 들어올 때는 큰 고통을 느껴야 되는 것입니다. 옛날보다 3배 이상의 충성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책망하시는 그 경지를 지나서 모든 것을 용서하시는 자리까지 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완전히 하나된 후에 자기의 잘못을 회상할래야 회상할 수 없는 자리까지 넘어가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에 다시 들어온 사람들은 대개 고충이 참 많습니다. 거꾸로 넘어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고충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가만 있는데도 자기 자신이 저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생각이 자기의 마음속에서 자꾸 들락날락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비참합니까?

탕감과 부활

도의 길에 들어서는 사람은 죽을 때까지 죽음길을 가야 합니다. 죽어서 할 고생을 살아서 탕감하려니 그런 길을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죽어서 억천만년 고생할 것을 이 땅 위에서 생전에 축소시켜 가지고 탕감해 버리자는 겁니다. 여러분 그걸 알아야 돼요. 이처럼 도의 길은 영원히 수난의 노정을 가야 하는 것을 이 땅 위에서 수난의 길을 걸어감으로써 탕감하자는 것입니다.

여러분, 탕감이라는 말 알지요? 탕감에는 조건이 필요합니다. 오늘날 통일교회에서 말하는 조건, 그 조건이 없으면 여러분이 구원받겠어요? 여러분은 조건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니 큰소리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랑하긴 무엇을 자랑하느냐는 것입니다. 축복도 조건축복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죽음의 길을 넘어가야 됩니다. 여기는 사망세계이기 때문에 이 사망권을 전부 끊어 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세계의 것은 전부 사탄과 가까운 것입니다. 전부 반대입니다.

이제까지는 통일교회가 그저 나쁘다고만 소문나더니 요전에는 신문에 통일교회가 나쁘지 않다는 기사가 났지요? 어떤 사람들은 통일교회 문선생이 돈도 많고 외교수단도 좋다고 합니다. 또, 머리가 좋기 때문에 쓱싹해 가지고 통일교회를 위해 돈을 무진장 많이 썼을 것이라고 합니다. 선생님이 점심 사 먹을 돈도 없는데 쓰긴 어디다 쓰겠습니까?

이 자리에 올 때까지 수난의 고개가 있었습니다. 그 고개의 십자가를 누가 졌느냐? 이 십자가를 통일교회의 문선생이 짊어지지 않았으면 하나님이 짊어졌을 것입니다. 미래의 세계를 바라보면서 크게 회개해야 할 순간이 가까이 왔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크게 청산지어야 할 순간이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효를 결정하고 충을 결정하여 선포할 순간이 다가오기 때문에 지극히 초조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탄에게 `내 사랑하는 아들의 권위와 그 수고의 길을 너는 아느냐?'라고 물으면서 천세 만세의 영광과 함께 축복을 내 아들에게 준다 할 수 있는 조건을 지녀야 합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내용을 지녀야 합니다. 그러면 세계가 여러분을 잡아당길 것입니다.

여러분은 현재 어디에 처해 있습니까? 통일교회를 중심삼아 가지고 어디예요? 통일교회 교인들은 밤이나 낮이나, 언제 어디 가든 선생님과 더불어 보조를 맞추어야 됩니다. 지금까지 선생님은 이 머리 가지고 살아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하나님이 가는 방향에 보조를 맞추면서 모든 생명을 다 투입하며 살아온 것입니다.

이제는 삼합(하나님, 선생님, 여러분)이 일치되어야 합니다. 보조를 맞추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생사의 결정적 내용이 달려 있기에 삼자가 일치되는 점에서 하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점에 생명의 부활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점이 아버지와 선생님이 하나되고 선생님과 여러분이 하나되어 일치될 수 있는 연결점입니다. 거기서 일심통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뜻과 일치된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뜻이 어떤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모르니까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반드시 선생님이 나타나서 가르쳐 줍니다. 알겠어요?

여러분이 뜻과 일치된 생활을 하려면 옛날과는 달라야 합니다. 옛날에는 종적으로 내려온 역사이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책임해야 했습니다. 그 명령을 받아 책임을 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이 땅에 내려오지 않습니다. 알겠어요, 무슨 말인지? 옛날에는 종적 역사이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가지고 그 일을 이루었다 해도 그 일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내려오실 수 없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에게 올라가서 바쳐 드려야 했습니다. 바쳐 드리고서야 그 일을 책임질 사람이 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래서 지금까지 교만하지 말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칭찬을 받으려면

자기의 일을 위해서 자신의 것만 생각하는 사람은 망합니다. 왜 망하느냐? 하나님은 그런 일에 대해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일을 이루었다 하더라도 하나님께 올라가 가지고 그 일과 하나되어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다시 새로운 시대에 보냄을 입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종적 역사시대에 하던 하나님의 섭리의 내용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든지 하나님을 모셔 나오는 데 있어서는 반드시 바쳐야 됩니다. 복귀역사는 제물을 바치는 역사입니다. 그렇지요?

그렇기 때문에 전도상을 받기 전에 먼저 하나님 앞에 바쳐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 자신으로 돌아와 나는 얼마나 바칠 수 있느냐? 나라를 바치고, 세계를 바쳐야 합니다. 그 바치는 길을 책임지고 달려가는 사람은 세계에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100을 명령했다고 실지 하나님이 나에게 그 100만을 원할 것이냐? 나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의 120퍼센트를 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바라는 것에서 조금이라도 더 바쳐 드리면 `오냐' 하고 칭찬할 것입니다. 여기에서 가치가 달라집니다. 하나님이 명령을 하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단 하나의 목숨을 바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종의 자식과 같은 입장에 있으니 칭찬받을 수 있어요? 하나님께 100이라는 명령을 받으면 여러분은 그 이상을 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최선의 방법입니다. 만약 그렇게 했다면 그것은 개인에게 있어서는 영광이요, 하나님이 자랑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하라는 대로 백만 했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들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어요?

여러분, 기록이라는 것이 있지요? 올림픽 기록이니 무엇이니 하는 기록이 있지요? 그 기록은 깰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러기에 우리가 백만큼만 한다면 사탄은 `하나님, 그것은 아무나 다 할 수 있습니다. 백이라는 것은 누구든지 다 할 수 있습니다' 하고 참소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누구나 다 노력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00이상으로 노력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역사시대를 중심삼고 볼 때, 하나님은 수많은 사람들을 내세워 왔습니다. 어떤 사람은 100퍼센트를, 어떤 사람은 90퍼센트, 어떤 사람은 80퍼센트, 어떤 사람은 20퍼센트, 어떤 사람은 10퍼센트, 어떤 사람은 0, 어떤 사람은 마이너스 10퍼센트, 어떤 사람은 마이너스 20퍼센트, 어떤 사람은 마이너스 100퍼센트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됐을 것 아니예요? 이처럼 책임한 내용이 다 다를 것입니다. 이것(100퍼센트)은 천국의 높은 자리요, 이것(마이너스 100퍼센트)은 지옥의 높은 자리입니다. 그렇다는 거예요.

선생님이 통일교인들에게 무엇을 하자고 했을 때에 가만히 보면, 그렇게 못난 사람들도 없는 것 같아요. 여러분이 그 일을 100퍼센트 하지 못하니 그 중에서 선생님이 제일 못났습니다. 내가 명령을 하였으니 결국은 내가 제일 못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하자고 할 때는 누구 때문에 하자고 하겠어요? 임자들 때문에 하자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것을 알아요? 여러분이 하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손해보느냐? 아닙니다. 왜냐하면 선생님이 하자고 하는 것은 여러분이 할 수 있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온 여러분은 상대적인 환경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여러분의 선조들이 남긴 누더기 보따리를 팔아먹기 위해 온 것입니다. 가치평가를 받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조상이 선한 조상이면 선한 조상답게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안 하면 지금까지의 여러분의 그 조상의 자리를 전부다 내가 거둔다는 것입니다. 독차지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손해볼 것이 없습니다. 다 거둔다는 것입니다.

곧 추수의 계절인 가을이 오니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겁니다. 선생님이 하라는 대로 하면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열매가 되지 못할 것 같으면 정성을 들여야 됩니다. 이런 일을 해야 합니다.

선생님은 죽을 죄를 지은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무슨 특권으로? 수많은 조상의 특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이제까지 수많은 도인들이 나한테 보따리를 많이 빼앗겼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 선생님이 도적이죠? 도적 같은 놈이다 그말이에요. 도적 중에 제일 큰 도적입니다. 이건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안 됐으면 이미 망했을 것입니다. 계약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종적인 시대에서는 언제든지 어디든지 왔다갔다할 수 있어요. 세계의 어디라도 갈 수 있어요. 그렇지요? 그러나 이 시대가 그냥 그대로 넘어 갈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적인 역사를 횡적으로 탕감할 수 있는 때에 들어섰다는 것입니다. 이때에는 후퇴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통일교회 문선생이 가는 길에는 후퇴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친자녀가 되라

사람들 중에는 통일교회 교인이 60년대보다 적어졌지 않았느냐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적어져도 좋다는 것입니다. 나무의 잎사귀는 가을이 되면 여름보다 더 적어집니다. 그렇지요? 많아져요, 적어져요? 바람이 불면 잎이 떨어져 나뭇가지는 벌거숭이가 됩니다. 그것이 정상입니다. 나만 남으면 내가 발벗고 나설 것입니다. 그러는 날에는 지금 임자들이 수고한 몇십 배로 거둬들인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자신을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알겠어요?

여러분이 옛날같이 심각한 자리에서 기도하게 되면 하나님은 역사하실 것입니다. 선생님은 그럴 자신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미국이면 미국, 구라파면 구라파, 외국 어디를 가더라도 그러한 작용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청중이 많더라도 내 손안에 잡을 수 있습니다. 그러한 방법을 내가 지니고 있습니다. 저 아프리카의 식인종이 사는 섬에 가더라도 절대로 잡혀 먹히지 않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선생님에게 그런 무엇이 있다는 겁니다. 감옥에 들어가서도, 사지에서도 영계의 협조를 받아 전도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여러분은 원래 부자 관계입니다. 신약시대에는 인간이 하나님의 양자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부자의 관계이기 때문에 아들이 하는 것은 아버지가 하는 것이며, 아버지가 하는 것은 아들이 하는 것입니다. 같이 하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것이 아들의 것이요, 아들의 것이 아버지의 것입니다. 통일교회가 무서운 것은 이러한 부자의 인연을 가르쳐 주기 때문입니다. 이게 제일 무서운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저 공짜로 입만 벌리고 받아먹으려고 그러지요? 하나님이 진짜 아버지인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아들딸이지요? 여러분은 하나님의 진짜 아들딸이 되어야 합니다. 안 되어야겠어요, 되어야겠어요? 아들딸은 누구를 닮느냐? 아버지 어머니를 닮습니다. 부모를 닮는 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와 함께 사느냐? 부모와 함께 삽니다.

여러분은 부모와 천리 만리 떨어져 있어도 부모를 닮아야 됩니다. 여러분, 닮았어요? 자식이 뛰는 모양이나 걸음걸이가 부모와 비슷하지요? 그렇지요? 부모와 똑 같지는 않지만 비슷하다는 거예요. 눈을 깜박거리는 것도 그렇고, 웃는 소리도 그렇고, 몸을 봐도 그렇고, 밥 먹는 것도, 자는 것도 다 비슷합니다. 부모는 자기 닮은 것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세상에서 아무리 못생긴 추물이라도 딸이든 아들이든 자기처럼 생겼으면 그 자식을 더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것입니다.

오늘 통일교회에서는 종이 주인하고 닮을 수가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하자'고 할 때, `안 하겠다'고 하게 안 되어 있습니다. 안 하겠다면 그것은 사탄입니다. 하나님이 `하자'고 할 때 `예' 하는 것 하고 `우' 하는 것 하고 어떤 것이 더 좋겠어요? 눈만 껌벅껌벅한다면 좋겠어요? 그렇기 때문에 종도 있고, 양자도 있고, 아들딸도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있다고요? 종이 있고 다음에는 양자가 있고 다음에는 아들딸이 있다는 것입니다. 복귀되는 기준이 이렇다는 것입니다.

하나님편에서 책임을 지고 있는 입장에서도 종의 권이 있고, 양자권이 있으며 아들의 권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여기에도 종의 패가 있는 것입니다. 종이 양자에게 `못난이는 할 수 없어'라고 하는 것은 똥묻은 개가 재 묻은 개를 나무라는 경우입니다. 또, 양자가 아들에게 `아이구 저게 무슨 상속자야, 그 집안 망했다'라고 하는 것도 같은 경우입니다.

그러면 부모가 `가자'라고 하는 말이 나오기도 전에 단숨에 가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아들이겠어요, 양자겠어요, 종이겠어요? 부모가 `가' 하기도 전에 벌써 나서는 사람이 있으면 그는 아들인 것입니다. 그 다음에 어물쩍하다가 나중에 가는 사람은 양자라 볼 수 있습니다. `에이, 자기들이 뭐라고 먼저 가고 저 야단이야' 하는 사람은 종입니다.

자, 여기 종 되기를 원하는 사람 손들어 봐요? 양자 되기 원하는 사람? 아들딸 되기를 다 원하지요? 그렇게 되려면 아버지를 닮아야 합니다. 행동에 있어서나 모습에 있어서나 집안 살림을 하는 데에 있어서나 부모를 닮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상속받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통일교회 문선생은 여러분에게 하나님을 닮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양자밖에 안 됩니다.

하나님이 영원히 잊지 못할 사람이 되라

내가 지금까지 죽을 고비를 넘겼지만 하나님을 한 번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왜 이렇게 저를 고생시킵니까? 축복해 주신다고요?'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선생님하고 얼마나 약속을 많이 했겠어요? 얼마나 많이 했는 줄 알아요? 수십만 번 약속을 했습니다. `너는 요렇게 될 것이다' 하고 말입니다. 그때에 내가 그것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은 증거 자료를 갖다가 이것이 무엇이라고 하면서 약속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얼마나 많이 속았습니까? 그렇지 않아요? 하나님을 속인 종자와 인연맺은 타락권내의 미스터 문이니 별 도리가 있겠어요? 하나님이 얼마나 선생님을 염려했겠어요? 그러니까 내가 믿지 못할 까봐 별의별 사람을 다 선생님 앞에 증거시켰던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믿고 나오면서 이제까지 고문을 당하고 별의별 서러운 자리에 들어가게 되었어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은 인간이 가야 할 길을 가는 사람, 즉 하나님이 바라는 사람, 하나님이 동정할 수 있고 하나님 앞에서 지금까지 흘려 보지 못했던 새로운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사람이 내 생애에 어떻게 되느냐 하는 것을 생각해 나왔습니다. 이제까지 흘려 보지 못한 새로운 눈물을 흘리고 죽자 하는 것이 선생님의 생활철학입니다. 예수님은 얼마만한 심정을 가지고 죽었느냐? 선생님은 그 이상의 심정을 가짐으로써 하나님께서 `너는 누구보다 낫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버지를 위해 죽은 사람이 있다면 아버지는 천년 만년 세월이 흐르더라도 그를 잊지 못할 것입니다. 죽더라도 그러한 심정과 내용을 갖고 그러한 자리에서 죽어야 할 것이 아닙니까? 매를 맞아 피를 토하며 죽는 것이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하나님은 이보다 더 슬픈 눈물을 짓고 안타까와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 하나님은 역사시대의 그 누구에게보다도 나를 통하여 애석한 사연을 남길 것이 아니겠습니까? 선생님은 지금까지 이것을 필생의 소원으로 삼고 나왔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는 이와 같은 길을 가는 사람이 세계 만민 가운데 많다 하더라도 통일교회의 문선생만큼 되겠느냐?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만은 틀림없을 것입니다.

나는 복귀노정을 다 알고 하나님에게 `당신이 가야 할길이 이 길이 아닙니까? 이것은 이렇게 되어야 될 것이 아닙니까?' 하는 기도를 합니다. 시시하게 지나간 것에 대해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는 아버지께서 같이하실수 있는 이 길을 지켜나갈 것입니다. 십년, 아니 백년, 혹은 천년 후에 이루어져야 할 것을 이 시대에 어떻게 인연을 맺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또, 어떻게 그때를 위해서 피땀 흘리고, 그때를 위해서 어떻게 수고의 조건을 세우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선생님이 모색해 나온 것입니다. 이렇게 나온 선생님인데도 불구하고 선생님이 여러분에게 `가자' 하는 데에 반대하는 사람은 망합니다. 망하는지 안 망하는지 두고 보라는 겁니다.

자기의 욕심대로 하는 사람에게는 하늘이 참소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욕심장이의 정성에 지배받지 않습니다. 정의라는 것은 폭군의 칼날 앞에 굴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길이 어디에 있느냐? 어떤 길이냐? 어디를 향해 가는 길이냐? 하나님을 따라가야 되는 길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은 인간에게 이런 길을 가게 하기 위해 수많은 작전을 해 나왔습니다. 마음은 하루만에 가고 싶지만 6천년이나 걸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루에라도 갈 수 있는 길을 닦자는 것입니다. 6천년의 종적인 역사를 하루권내로, 한 시간권내로 좁혀 타락했다는 그 기준을 탕감시키려면 얼마나 정성을 들여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 길을 가기 위해 통일교회를 따라 나오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선생님 앞에 짐을 짊어진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고 저렇고 하며 별의별 비판을 합니다.

뜻을 대하는 사람이 취해야 할 자세

한 나라를 놓고 섭리하는 데 있어서도 비밀이 많습니다. 조그마한 가정에도 말 못할 비밀이 있습니다. 하물며 천지를 복귀하기 위한 노정에 비밀이 없겠습니까? 여러분 앞에 한마디도 털어 놓을 수 없는 비밀이 있습니다. 그것을 털어 놓으면 그 누구도 이 길을 가겠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비밀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을 한꺼번에 털어 놓지 못하는 하나님의 비밀이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선생님을 따라 나오면서 이렇고 저렇고 하며 말을 해 가지고 지금까지 선생님이 욕을 먹고 있습니다. 내가 잘못해서 욕먹는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잘못해 가지고 내가 욕먹은 것입니다. 그저 여러분의 입 때문에 그랬다는 것입니다. 뭐, 어떻고 어떻고…. 그것이 여러분의 입이에요. 가야 할 길이 천년의 사연을 담고 있는데, 이러고 저러고 별의별 얘기를 다하고 다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이제까지 핍박을 당해 왔던 것입니다. 누더기 보따리를 쓰고 놀음을 해 왔던 것입니다. 따른다는 사람들의 십자가까지 짊어지고 나온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모아 이끌어 나오면서 복을 베풀어 주어야 하는 하나님은 억울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십자가를 지우고 싶지 않기 때문에 어려운 일이 있으면 그 일을 책임진 자에게만 지워서 그들에게는 어렵지 않은 환경을 개척해 주십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도적 같은 패들이 야단입니다. 전부다 망해야 됩니다. 망해야 될 패들이 많아요. 하나님은 인간 전부에게 알려 주는 것이 아닙니다. 책임을 지고 갈 수 있는 사람만이 그것을 알고 가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대한민국을 중심삼고 배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압니까? 모르지요? 솔직이 말하면 전쟁준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자들은 그것을 모를 것입니다. 온 세계가 전부다 그렇습니다. 그러면 민주주의가 영원히 성립 안 됩니다. 원수가 있는 한 민주주의는 패합니다. 작전상 언제나 지게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캄보디아나 월맹이 강력히 나갔다가 후퇴한 적이 있기 때문에 그들은 무슨 짓이든 다 할 것입니다. 민주주의는 지금 지극히 잘못된 작전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잖아요? 전쟁할 때 포를 쏜다고 예고하고 쏩니까? 전쟁에도 민주주의가 있어요? 있어요, 없어요? 원수 앞에서도 민주주의가 있습니까? 원수의 칼날과 독재자 앞에도 민주주의입니까?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지금까지 모든 비밀을 가르쳐 준 적이 없었습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선생님을 따라 나가는 여러분은 선생님 앞에 방해자냐, 협조자냐? 지나치게 말하는 사람들은 방해자입니다. 수난을 직접 체험하지도 못한 입장에서 이렇고 저렇고 하면서 말하는 사람들은 심판받습니다. 그렇게 되면 생명을 내어 놓고 탕감해야 할 한때가 있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천기누설(天機漏洩)이라는 말이 있지요? 첩보작전을 하는 중 정보가 누설되면 문제가 크다는 것입니다.

높은 분을 모시면 모실수록 그 앞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가려야 할 문제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머리를 숙이라고 하고 조심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조심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뜻을 대한 여러분은 누구나 그래야 합니다.

여러분이 선생님을 대할 때는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을 가지고 대해야 합니다. 선생님이 이 기준을 통해서 천주의 인연을 가려 가지고 나오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선생님 앞에서 항상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언제나 그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철없는 말들을 막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와 같은 입장에서 사망권을 귀결시켜 가지고 생명권으로 맞아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나면서 생명이요, 죽을 때까지도 생명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살다 가야 합니다. 천주에서 나서 천주에서 살고 천주를 품에 안고 죽음을 맞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도를 통해서 가야 하는 것입니다.

통일교인들이 세워야 할 신앙 기준

우리 통일교인들은 완성이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선생님 자신도 아직까지 완성의 자리에 서지 못했습니다. 완성의 자리에 서려면 나라를 완전히 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나라는 남북으로 갈라져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 나라를 어떻게 통일시키느냐를 생각하며 그때를 위해 하나님과 담판하면서 기도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은 물 속에 들어가지도 않고 뜻이 다 이루어져 간다고 생각하고 골수도 알지 못하면서 물가에서 놀고 있습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열심히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면 통일교회 교인이 기성교인과 다른 것은 무엇이냐. 지금까지의 종적인 역사를 중심삼고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리며 결사적인 기도를 해 나왔습니다. 이제는 아버지가 아들을 찾아갈 수 있는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알겠지요? 그러기에 여러분이 조금만 노력하면, 일주일만 그 경지에 들어가 가지고 정성을 들이면 다 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자식이 부모를 모시는 것같이 선생님을 모시고 선생님으로부터 직접 지도를 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직접 지도받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에서 어머니가 기도해서 그런 계시를 받는다면 그 어머니를 위주해서 정성을 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식구가 어머니에게 기도 가운데서 받은 내용이 무엇인지를 물어보아야 합니다. 그들에게는 그 소식이 제일 기쁜 소식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그것이 예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그 집안이 망하느냐, 흥하느냐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정에서 어머니가 기도하면 하나님은 그 가정에 대한 것을 가르쳐 준다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선생님을 대하게 되면 선생님이 가르쳐 준다는 겁니다. 기뻐서 그렇게 하면 무슨 일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두고 보라는 겁니다. 그것이 하루에 안 되면 3일, 3일에 안 되면 7일, 7일에 안 되면 3개월, 3개월에 안 되면 3년, 이렇게 넘어갑니다. 3년에도 안 되면 7년으로 넘어가는 거예요. 원리적으로 그렇게 넘어가게 되어 있다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자기들이 기도 가운데 있었던 것을 감정해서 불화가 오기 전에 이를 막을 수 있게 되는 겁니다. 기쁜 일이건 슬픈 일이건 일이 생긴다는 겁니다. 그것은 사람에 따라 다 다릅니다. `이럴 때에는 좋은 일이 생기더라. 이럴 때에는 어려운 일이 생기더라' 하고 다 아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틀림없이 가르쳐 준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때 좋은 길로 가는지 나쁜 길로 가는지 그것을 알아 가지고 갈 길을 가려서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인들은 기도나 몽시 가운데서 선생님으로부터 지도를 직접 받아야 됩니다. 우리 식구들 가운데는 어디를 가더라도 그 자리에서 선생님의 지시를 직접 받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님 때 이상으로 실감나는 일이 많이 벌어집니다. 우리 통일교인들은 선생님을 직접 모시고 산다는 것입니다. 통일교회에서는 예수님 때보다 더한 일이 종종 있다는 겁니다. 그런 일이 있기 때문에 세계가 통일교회와 하나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사망권을 지나가려면 결사적인 기도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를 하는 데에는 한 순간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24시간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런 자유로운 시대에 그러한 체험을 하지 못하고 직접 모시면서 살지 못하는 사람은 불쌍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축복받은 사람은 본래 그런 기준과 경험이 있어서 그런 내용에 전부다 결부되어 있어야 합니다. 원래는 선생님과 영적으로 접붙여 가지고 하나되어야만 축복대상자로서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과거가 현실과의 인연에서 벗어나는 것이 복귀의 원칙이 아닙니다. 과거의 사실이 현실무대에 그냥 그대로 전개되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에 대한 것을 가르치는 통일교회 교리는 진리가 아닐 수 없다는 것입니다.

특히 여자들에게는 100이면 100 다 기도 가운데 선생님이 직접 가르쳐 주게 되어 있습니다. 선생님을 모시고 살아야 됩니다. 그러면 몽시로 가르쳐 주게 되어 있습니다. 몽시를 통해 선생님을 보지 못한 사람은 축복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몽시 가운데 선생님이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일본 식구들이 몽시 가운데 선생님을 대하는 수는 여러분보다 70배나 더 많습니다. 이걸 볼 때, 일본 식구들이 여러분들보다 심정적으로 더 간결하다는 것입니다. 간절하면 기도하게 되고, 그러면 가르쳐 줍니다.

통일교인들이 가져야 할 심정 기준

그러면 어느 정도 간절해야 하느냐? 세상에서 아내가 남편을 사랑하는 이상, 애인을 사모하는 이상으로 간절해야 됩니다. 이것이 문제라는 겁니다. 이렇게 간절한 심정을 갖고 살면 영계에 가 가지고도 이 심정의 한도에서 머물게 되기 때문에 사탄세계에서 사는 것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통일교회에 들어오기 전에 재미있게 살던 아주머니도 교회에 들어와 정코스를 밟아서 영적 세계를 실제로 체험하게 되면 옛날에 가깝던 남편이 자연히 멀어지게 됩니다. 그러니 면박당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심령체가 사탄을 넘어서서 힘차게 운동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은 사탄의 세계이기 때문에 사망의 세계를 물리치지 않고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지 못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을 위해서 선생님이 기도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선생님이 맨 처음에는 은사지요? 그리고 아버지같이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담 해와가 아버지의 품에서 자랄 때와 같은 것입니다. 다음에는 오빠같이 느껴지며 그 다음에는 상대적 관계로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한 여인으로서 이 세 가치를 느끼지 못하면 복귀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 여자들도 선생님이 아무리 끊으려고 해도 이런 것을 느끼면 끊을 수가 없습니다. 절대로 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끊어지는 것은 가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강한 체험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아버지와 같은 시대, 그 다음에 내 일을 해 달라고 의논할 수 있는 오빠와 같은 시대가 있습니다. 아담이 무엇이냐? 하나님을 대신한 영적인 입장에서의 아버지입니다. 그는 해와를 대해서 내적으로는 아버지와 같고 외적으로는 오빠와 같은 것입니다. 그 다음에 그들이 하나되어 상대적 관계를 맺으면 부부가 되는 것입니다. 아담 해와가 그렇게 하나되어야 했던것입니다.

통일교회에 다니는 부인들이 선생님을 따르니까 남편들이 자기 옆에 안 온다고 야단하고 이와 반대로 여자들도 남편들이 선생님을 따르니까 자기 옆에 안 온다고 야단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남자들도 선생님이 보고 싶으면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통일교회 천국시대에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느끼지 못하고 눈물로 갈라진 아담이기 때문에 눈물로 합해야 하고, 눈물로 갈라진 가인과 아벨의 원한을 눈물로 풀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길이 아니면 합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세계적으로 남자들중에도 선생님을 보고 싶어하면서 우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그러한 사람 있어요? 이 엉터리들…. 옛날에는 다 그렇게 나왔습니다. 초창기에도 다 그렇게 했습니다.

통일교회가 그러한 조건을 세우지 않고는 복귀의 책임을 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아무리 남자라도 선생님이 보고 싶어서 못 견뎠습니다. 상사병이라고 있지요? 그 병에 걸렸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그 어떤 것이라도 다 귀찮아했습니다. 선생님에게서 뭘 하라는 명령을 받고 일을 해야 몸이 풀리고 힘이 나지, 그러지 않으면 힘이 안 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그렇습니까? 가짜들…. 먼저 그래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할 수 있는 동기를 갖고 있고 그런 작전을 하는 통일교회 문선생이란 사람은 하나님을 얼마만큼 사모했겠느냐? 눈을 뜨지 못할 정도로 사모했으며, 햇빛을 보지 못할 정도로 눈물을 많이 흘렸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그리워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돼요. 이러한 사람에게 이단이니 뭐니 하고 있습니다. 이놈의 자식들, 누가 망하나 보자. 누가 이기나 보자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선생님에 대한 내용을 알면 할말이 없을 것입니다. 영계에 가 봐도 할말이 없다는 거예요. 그러기에 여러분들은 선생님에게 진 빚을 갚아야 합니다. 부모에게 진 빚을 갚아야 됩니다. 또, 하나님 앞에 있어서의 선생님의 입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도상을 타는 여자들을 가만히 보면, 그의 배후에는 선한 조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종종 그런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들은 조상과 같이 기도도 하고 산보도 합니다. 영적으로 그렇게 하는 거예요. 심정적인 문제를 중심삼고 그런 과정을 거쳐야 되는 것입니다.

가정 복귀 시대

지금 이 시대에 있어서는 완성한 아담 해와를 세워서 인류를 복귀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랑 신부의 인연을 들어서 사랑의 법도를 세워야 하는 것이며 거기에 따라 지켜야 할 하늘의 법도와 규범도 엄청나게 많다는 겁니다. 여러분들, 그래 가지고 천국 가겠어요?

이제는 이것을 가정적으로 세워야 합니다. 가정에 부모를 모시고 그 아버지가 아들에게 가르쳐 주어야 하는 때입니다. 통일교회는 무슨 목적을 중심삼고 나가고 있느냐? 가정교회입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이 사탄세계에 한 여자를 세우기 위해 싸워 나왔습니다. 하나님이 남자를 중심삼고 여자를 지으셨으나 천사장으로 말미암아 타락했기 때문에, 이 타락세계를 복귀하는 노정에 있어서는 여자를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천사장은 아담을 위해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천사장으로 말미암아 비극적인 세계가 된 것입니다. 신랑 되신 예수님도 이 땅 위에 여성을 위해서 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미스 코리아니, 미스 월드니 하는 대회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 이러한 내용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끝날에는 여자들이 출세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렇게 딱 들어맞는다는 거예요. 그렇지만 세상 사람들은 내적인 그런 핵심적인 내용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적인 하늘과 외적인 땅, 즉 안팎으로 사연이 벌어지는 이때 가정을 중심삼아서 온 천하를 하나의 이념세계로 만들어야 될 게 아니겠습니까?

대한민국은 복귀섭리에 있어서 세계의 운명을 좌우하는 중심국가입니다. 이북에서 김일성을 아버지라고 하지요? 그리고 통일교회에서도 선생님을 아버지라 하지요? 이것은 가인과 아벨의 입장입니다. 그러면 통일교회는 무엇을 할 것이냐? 하나님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여러분을 훈련시키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선생님이 훈련시키면 받겠어요, 안 받겠어요? 남자들, 받겠어요? 「받겠습니다」 받겠다는 사람 손들어봐요? 내려요. 여러분에게 내가 불철주야 가르쳐 줄 것입니다. 하늘의 법도가 있고 하늘의 세계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지혜를 주지 않으면 알지 못합니다. 역사를 통하고 시대를 통하여 세상의 법도를 반증해 나가야 합니다. 그러니 얼마나 바쁘겠어요? 여기에는 공산당도 걸려들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하여 한국에서 통일교회가 국가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시대로 돌입해야 합니다. 여기에는 많은 사람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한 300명 정도면 됩니다. 여러분들은 올라갔다내려갔다하고 있지만 선생님은 지금까지 어떠한 환경에 처해서도 계속 발전해 나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 방법을 가르쳐 준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횡적인 시대이기 때문에 여러분이 하나님의 심정을 중심삼고 법도를 지켜 나가야 합니다. 알겠지요? 가정의 어머니면 어머니를 중심삼고 하나되라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제일 잘 듣는 사람이 아벨입니다. 어려운 문제가 있으면 기도하라는 겁니다. 담대하게 기도하라는 거예요. 그 얼마나 좋아요?

이제는 가정적인 생명권을 갖추어야 되기 때문에 가정에서 하나의 주체를 중심삼고 거기에 절대 따라야 되겠습니다. 어머니가 하늘편이면 아버지도 하늘적인 생활권을 지니고 어머니를 따라야 합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새벽같이 일어나 궁금해하면서 어머니에게 하나님에게 받은 새로운 소식이 무엇이냐고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되어 끊임없이 기도하라

선생님이 지금은 남에게 물을 필요가 없지만 하늘과 통하는 사람들이 세 사람 이상 증거를 해주어야 됩니다. 천법이 그렇습니다. 세 사람 이상 증거를 받고 일을 해 나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게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하늘과 통하는 사람을 불러다가 물어봅니다. 그거 뭐 물어볼 게 있어요? 내가 다 아는 것인데. 그러나 그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때가 절박하고 상대적 환경을 거쳐 가지고 나가야 하기 때문에 선생님 혼자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교회의 기반을 닦기 위해 할머니 세 분을 세워 기도시키는 것입니다. 기도하며 하나되라는 것입니다. 하나되지 못하면 큰일난다는 겁니다. 성격이 뾰죽해서 하나 못 되는 할머니들이지요. 성격이 깍쟁이 중에 상깍쟁이어서 세상에서는 사흘도 못 갈 사람들을 모아 놓았습니다. 그들이 하나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나되어야만 이런 저런 모든 문제를 하나님과 인연을 맺어 심정을 중심삼고 해결해 가는 것입니다. 부자의 인연을 갖춘 통일교회이니만큼 여러분은 단결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누구를 닮아야 되겠습니까? 선생님이 여러분을 닮아야 되겠어요, 여러분이 선생님을 닮아야 되겠어요? 여러분이 선생님을 닮아서 손해볼 것이 없습니다. 선생님은 나를 위해서는 살지 않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인격적으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지금 제일 시급한 문제가 무엇이냐 하면 교육기관을 만드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이것이 제일 시급한 문제입니다.

후대 사람의 인격 기반을 닦아 주는 인적 자원을 어떻게 확보하느냐? 유치원에서부터 대학까지 세계에서 제일 가는 학교를 어떻게 만들 것이냐? 그래서 선생님이 서울대학교의 부지 120만 평보다 한 40만평이 더 넓은 160만 평을 확보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생각지도 않지만 그 일을 지금 선생님이 준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아들딸이 있지요? 지금 여러분은 고생을 하지만 그것은 미래에 여러분을 대신할 여러분의 아들딸을 위한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이 고생하고 희생하더라도 그것은 여러분의 아들딸을 위한 것으로 자랑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의 아들딸을 위해서 여러분을 죽도록 고생시키는 것입니다. 이게 사랑입니다. 그러기에 내가 여러분을 아무리 때려 몰더라도 양심에 가책을 받지 않습니다. 이게 정도(正道)입니다. 여러분이 싫다고 꼬리를 빼 보라는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아들딸이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뜻을 중심삼고 나가 보라 이겁니다. 개인을 중심한 주도권은 개인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가정적인 권내에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천하를 화합시킬 수 있는 가정을 어떻게 이루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6천년 동안 가정적 기반을 닦아 나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교회생활을 해 나가는 데에 있어 그 환경을 조정하고 절충하여 일체를 이루어야 합니다. 이러기 위해서 여러분에게는 끊임없는 노력과 끊임없는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아시겠지요? 「예」

[기도]

아버님, 한 많은 역사를 돌이켜 보면서 `나'라는 존재를 세우시어 사지에서도 남겨 주신 아버지의 은사를 생각하게 되옵니다. 아직까지 남아 있는 문제들이 많사오니 충효의 도리를 다하게 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부탁드리옵니다.

충신이 남길 수 있는 최후의 승리의 한 날을 어떻게 맞을 것인가? 어느 한때 아버님을 모셔 볼 것인가? 저희들은 그것을 이루겠다고 첫밤부터 다짐하고 나왔사옵고, 지금도 그것을 향해 달리고 있사옵니다. 청춘시대에 이 나라 이 민족을 아버님 앞에 봉헌하여 후세에 자랑할 수 있는 민족의 운세를 다 잃어버리고 이제 50이 넘어 이 나라 이 민족과 더불어 재봉춘할 수 있는 시대권이 저희들 앞에 다가왔사옵니다. 원수들이 다 물러간 평화의 자리에서 새로이 옷깃을 여미고 아버지 앞에서 춤을 추며 아버지를 찬미하며 기쁘게 모실 수 있는 끝날이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원수들이 가로막고 있기에 최후의 싸움의 고개를 남겨 놓고 아버지를 대하고 있는 오늘이옵니다. 5천년 역사의 인연이 오직 당신이 하나의 목적을 위해 쓰시고자 이끌어 나온 것인 줄 아옵니다. 하나의 민족의 기점을 마련하기 위한 일이 그것인 줄 아오니, 이 민족의 앞날에 있게 될 처참한 피의 노정을 가리지 않고는 그 일을 해결할 수 없는 줄 아옵니다. 당신의 사랑만이 이것을 해결할 수 있사오니 새로운 운동이 이 땅 위에 벌어져야 하겠사옵니다. 그리하여 이 땅위에 국가 부활의 역사가 벌어져야 되겠사옵니다.

이것을 위해서는 국가 부활권을 대신할 수 있는 가정이 나와야 되겠습니다. 그것은 이 민족과 국가의 한계선을 가정에 집중시켜 가지고 가정에서부터 불이 붙어 이 민족과 국가의 한계선을 넘어야 할 사명이 있기 때문이옵니다. 더우기 1970년서부터 1972년도까지는 제일 중요한 시기이기 때문에 저희는 5월에서 10월까지를 특별기도기간으로 선포하였사옵니다.

저희가 진정 나라를 사랑해야 할 때가 왔사옵고, 민족을 위할 수 있는 최후의 고빗길에 이르렀사옵고, 이 민족을 붙들고 이 나라를 붙들고 저희들이 아버지 앞에 담판을 지어야 할 때가 왔사옵니다. 아버지와 저희가 하나되지 못하게 되는 모든 여건을 제거시켜 주옵소서. 사탄이 참소할 수 있는 모든 여건이 어떻게 맺혀 있나 하는지를 알고 해결하려는 것이 이 나라의 최후의 운명을 판결지을 수 있는 요인이 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그것을 위해 싸워 나갈 수 있는 아들딸이 얼마나 되며 그럴 수 있는 가정이 얼마나 되옵니까? 그러한 가정, 그러한 아들딸이 없으면 없을수록 여기에 서 있는 외로운 아들이 이것을 책임져야 된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되옵니다.

아버지, 한없이 슬펐던 역사의 고빗길에서 목을 놓아 울면서 찾아오신 딱한 당신의 심정을 제가 알았사옵니다. 제가 그러한 아버지의 사정을 느끼며 제가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게 될 때, 그 감동의 인연이 슬픔의 환경을 넘어 도리어 기뻐할 수 있는 환경을 세우게 될 줄 아옵니다. 오늘날까지 나오시던 아버지의 길 가운데 안타까운 사연이 아주 많았다는 것을 제가 알고 있사옵니다.

금후에 저희들이 이 나라 이 민족을 책임지겠다고 나설지라도 아버님은 저희들에게 마음대로 맡길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할 때, 과연 불쌍하신 아버지라는 것을 알게 되었사옵니다. 그런 아버지를 동정할 수 있는 사람이 이 땅 위에는 없사옵니다. 그 아버지를 붙안고 위로해 드릴 수 있는 아들을 찾고 있는 아버지 앞에 통일교단이 있지만 이 교단 가운데에 그런 아들이 있사옵니까? 그러한 아들이 있사오면 그에게 천배 만배 복을 베풀어 주시기를 바라옵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이 없기 때문에 저 자신이라도 이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할 책임을 느끼고 있사옵니다.

아버지, 저는 제가 가는 길에서 아버지께 염려를 끼쳐 드리지 않고 아버지께서 기뻐하실 수 있는 환경을 갖추기 위해 지금까지 몸부림치며 나오고 있사옵니다. 하오나 민족이 하나되지 못하고 교회가 하나되지 못하여 아버지 앞에 염려를 남기고 눈물만 가지고 아버지 앞에 아뢸 수밖에 없는 때가 있었던 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때가 다가올수록 더더욱 조급한 마음이 앞서는 것을 용납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니다. 그것은 당신을 믿지 않음이 아니요, 당신의 그 뜻을 모름이 아니옵니다. 가고 난 후에 염려의 요건을 남기지 않을까 하는 두려운 마음이 앞서기 때문이오니 용납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당신의 아들딸로서의 갖추어야 할 생명의 인연을 저희에게 연결시켜 주옵길 간절히 부탁드리옵니다. 오늘 여기에 모인 당신의 아들딸중에 그런 가정을 가진 아들딸이 있사옵니까? 축복받은 가정이 되어 있사옵니까?

꿈에도, 생시에도, 죽어도 아버지의 뜻, 그 뜻을 위해 미쳐야 할 것이 우리의 축복받은 가정인 줄 알고 있사옵니다. 민족을 대신하여 제물이 되든가 제사장이 되든가 둘 중의 어느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이 우리 가정들인데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한 가정이 많사옵니다. 그러한 것을 생각할 때, 축복을 해준 제가 책임을 다시 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느끼게 되옵니다. 또한 아버지께서도 그 책임을 지셔야 할 입장에 선 것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 이들을 거두어 수습하여 주시옵소서. 미래의 복된 세계를 위하여 면목이 없지만 할수없이 그 상처와 허물을 가리고 아버지 앞에 내세울 수밖에 없는 입장인 것을, 아버지, 용납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옵니다.

금후의 이 나라 이 민족을 아버님이 지키시옵소서. 이 절박한 정세 가운데 악의 세계로 방향을 갖추느냐, 선의 세계로 방향을 갖추느냐의 기로에 선 이 민족을 선의 세계로 방향을 결정지어야 할 통일의 무리들 위에 당신의 후대하심을 잃지 마시옵고, 사랑의 손길로 가호의 은사를 길이길이 내려 주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옵니다.

오늘 이날을 그리워하고 이곳을 위하여 경배하고 정성들이는 자녀들에게 당신의 지극한 내적인 사랑의 심정이 공고히 맺어지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아버님이 같이하실 수 있는 승리적 생활권을 이루게 하시어서 뭇 무리 앞에 존경을 받고 생명을 책임지고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무리들로 삼아 주시옵길 재삼 부탁드리옵니다.

아버님, 이 하루를 받아 주시옵고 이 한 달과 이 한 해를 아버지의 달과 아버지의 해로 받아 주시옵길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의 성호 받들어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문선명선생말씀선집 제31권

책을 불러오는 중입니다...

테마
글꼴
글자 크기  1.1re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