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지금 이 시간은 전국에 널려 있는 당신의 자녀들이 당신의 제단 앞에 예배드리는 시간이옵니다. 미래와 현실을 책임지고 이 나라, 이 민족을 대신하는 세계를 대신하여 당신께 경배드리는 시간이오니 당신만이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이 복잡다단한 세계에 처해 있는 저희들, 진정 당신이 좌정하시고 싶은 자녀들이 되어 있습니까? 저희들은 당신과 함께하기 위해 얼마나 가까운 자리에 처해 있습니까? 그런 자리에 서지 못한 저희들을 보시고 슬퍼하시는 아버지인 것을 이 시간 느낄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은 아버지의 명령을 받고 하나의 목적지를 향하여 나아가는 노정에 있어서 하늘의 입장을 취하지 않으면 안 되겠사옵니다. 이 시간은 수많은 천군천사와 천천만 성도들이 당신의 존전에서 당신의 영광을 찬양하는 시간이옵고, 저희들이 남겨진 복귀의 사명을 완수하겠다고 다짐하면서 아버지 앞에 기도하는 시간이옵니다.
아버지, 영원토록 승리의 찬양과 존귀와 영광이 같이하시옵소서. 당신이 주관할 수 있는 승리의 터전은 이 땅의 인간을 통해야만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그 누구도 알지 못하나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저희들이 이것을 목표로 삼고 수고하는 싸움의 노정에서 승리하지 못하게 될 때에 영계의 수많은 영인들이 불쌍하다는 것을 저희들은 느끼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땅 위의 인간들은 이것을 극복할 수 있는 한날을 갖추어서 세계를 붙안고 나가야 할 것이요, 이것이 우리가 청산지어야 할 최후의 사명인 것을 절감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래야 당신이 소원하시는 한날이 올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이런 결과적인 터전을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하여 심정적인 인연으로 연결시키지 않고는 성취될 수 없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았사옵니다. 이와 같은 입장에 있는 저희들은 그 사명이 얼마나 지중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껴야 되겠습니다.
남이 알지 못하는 복귀의 길을 더듬어 오시면서 수고하신 아버님, 피어린 투쟁의 역로를 더듬어 온 영계의 수많은 선열들이 제시한 그 길을 반겨 줄 수 있는 내 마음이 어떠한지 스스로가 발견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탄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저희들은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아버님이여, 저희들은 이제 당신이 원하시는 목적을 향해 나가는 무리가 되어 이 땅에 남아져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이 안식할 수 있는 한날을 마련하여 선의 이름과 참의 이름으로 당신 앞에 영원히 찬가를 불러 드릴 수 있는 하늘의 실체와 하늘의 가정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래야 된다는 사실을 저희들은 배워서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실체가 다름 아닌 저희 자신임을 느끼게 될 때에 저희들은 저희 자체를 이겨야 되겠습니다.
그런 자신의 모습을 저희들은 마음으로 흠모하고 소망하였습니다. 아버지 앞에 승리의 터전을 마련하기 위한 하나의 발판이 되는 가정을 저희들이 얼마나 그리워했습니까? 그 나타나는 모습이 비록 초초하고 비참한 자리에 섰다 하더라도, 저희들은 당신으로 말미암아 출발하였으니, 당신과 더불어 인연 될 수 있는 하나의 개체와 가정적인 터전으로 이 땅에 남아져야 되겠습니다.
이 땅이 당신이 임재하실 수 있는 발판이 되고, 당신이 거동하실 수 있는 공고한 터전이 될 때에는 망해도 이는 망하는 것이 아니요, 슬픈 자리나 비참한 자리에 처한다 하더라도 이는 비참한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저희들은 아옵니다. 그 슬픔과 비참은 아버지의 위로의 대상이 되고 힘의 원천이 되어 금후에 뜻을 위하여 달려갈 수 있는 기틀이 된다는 사실을 저희들은 아옵니다.
아버님께서 찾아오신 노정의 해결점이 여기서부터 풀리기 시작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여기에서 망하더라도 쌍수를 합하여 아버지 앞에 생축의 제물이 될 뿐만 아니라 부활의 생명체가 되기를 원하옵니다. 그리하여 거룩한 역사의 제물이라고 천지가 머리 숙일 수 있는 저희들의 모습이 되겠사옵니다. 하오나 그러지 못한 자신인 것을 저희들은 발견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아버님, 그러지 못하였던 저희들, 이 시간 다시 한번 그럴 수 있는 자신들이 되겠다고 마음의 결의를 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는 불쌍한 저희들을 버릴 수 없는 인연 때문에 지극히 처참하고 지극히 처량한 길을 걸어오셨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았사옵니다. 저희들은 이 땅 위에서 아무리 억울하고 아무리 비참하더라도, 그 도를 느낄 수 없는 한계선에 계시면서도 승리하신 기쁨을 가지고 지금까지 지내오신 아버지 앞에 자발적으로 겸손하게 엎드리고 경배드리는 모습들이 되어야겠사옵니다.
저희들의 마음이 울적해서 눈물로써 아버지를 부르며 경배하게 될 때에, 당신은 얼마나 마음으로 그리워했던 하늘의 아들딸이라고 눈물로써 대하고 싶었사옵니까? 당신의 품에 안고, 당신의 손에 잡고, 당신의 사정을 말할 수 있는 아들딸을 얼마나 그리워하셨습니까? 천명을 받아 이 원수의 세계에서 본되는 가정이 되어 달라고 하는 것이 아버님의 소원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천국에 가기 위해서는 가정을 통하지 않고는 가지 못한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씨족과 종족을 거치고 민족과 국가를 거쳐서 세계의 노정까지 나아가 아버지의 사랑의 동산, 영원한 세계인 천국으로 가야 할 저희들이옵니다. 이 모든 단계적인 과정을 거쳐야 되겠습니다. 저희 앞에 고행의 길이 가로막혀 있다 하더라도 그 고행의 길을 개의하지 않고 여기에 동참하는 무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아무리 험한 가시밭길이 있다 하더라도 아버지가 가시는 그 길을 따라가야 할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다해야 되겠사옵니다.
저희들은 발바닥을 상처가 나서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개척자의 입장에서 가야 할 길을 대신 더듬어 헤치고 나가시는 아버님을 격려해 드리고, 아버님을 염려하고, 아버님을 위로해 드리면서 눈물을 흘리며 아버님의 뒤를 따라가야 할 자신들인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원수들이 북적거리는 세상의 환경 가운데서 모든 것을 저희들에게 찾아 주시기 위하여 아버지께서는 사탄과 싸우고 계신다는 것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불효막심한 저희들이라는 것을 느끼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께서 사탄세계와 싸우는 데 있어서 지치고, 또한 수난을 당하셨사옵니다. 그러했기에 저희들을 찾아오셨던 그 걸음이 더욱 험하였겠지만 저희들은 그렇게 찾아오시기까지의 아버지의 서글픈 심정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참으로 어리석은 저희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옵니다.
아버님께서 그런 운명길에 계신 것은 당신이 잘못해서가 아니라, 저희들의 잘못 때문이옵니다.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원통하고 분한 자리에 선 것이 아버지의 실수가 아니라 인간이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되었다는 것을 저희들은 아옵니다.
저희들은 그에 대해 몇 백 배의 책임을 감당하면서 몇 천 배의 희생의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 잘못을 타개해 버리고 저희들이 가야 할 본연의 동산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그날까지 가야 되겠사옵니다. 거기에는 생명의 터전이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이제 저희의 마음이 누구를 향하고 있으며 저희의 몸이 어느 곳에 처하여 있는지 스스로가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아버지를 향하여 가고자 하는 애달픈 마음에 사무쳐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저희들의 심정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앞에 전부 죄인된 위치에서 사무친 마음으로 아버지를 부를 수 있는 저희의 모습이 되어야겠사오며,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마음에 사무쳐 가지고 엎드려 눈물 흘려야 되겠사옵니다. 수난길을 가신 아버지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십자가의 행로에서 처참하게 피 흘리는 예수님을 치는 채찍을 가로막고 대신 맞을 수 있는 저희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죽음의 고빗길을 넘어가는 아버지의 운명 앞에 내 생명을 발판으로 삼아 아버지를 모실 수 있는 자리에 서야겠사옵니다. 그리하여 천상세계를 이루어 가야 할 저희들에게 기념할 수 있는 역사를 남기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저희들은 물질을 다 버리고서라도 세계를 책임져야겠사옵니다. 아버님이 현현할 수 있는 길을 만들고 스스로 아버님의 품에 안기어서 아버지께서 걸어가시는 그 길을 동참해야겠사옵니다. 하오니 수고하신 아버지 앞에 저희들이 현재 어떤 위치에 있는 것을 알고, 지금까지 저희들을 위하여 참아 나오신 아버지의 심정이 얼마나 외로웠고, 얼마나 비참하였는가를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앞에 저희의 몸을 맡기고 자신을 잊어버릴 수 있는 저희들이 되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저희들은 아버지를 몇 번이나 배반했습니까? 너무나 당돌하였습니다. 너무나 가인적인 입장에서 아버지를 불렀사옵니다. 이런 것을 생각해 볼 때, 저희들이 아무리 잘났다고 하더라도 위신과 체면을 세울 수 없는 자신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은 거룩한 안식일이옵니다. 아버님이여, 이곳에 모인 당신의 아들딸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하늘을 위하여 뜻길을 가는 길이 외롭고 슬프지만, 당신의 뜻길을 가서 하늘의 전통을 세우겠다고 몸부림치는 당신의 자녀들이 있사오니, 그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그들의 외로움과 그들의 어려움을 당신께서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그들의 외로운 자리에서 싸울 때 당신이 같이 싸워 주시고 격려해 주신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남 모르는 세계에서 외롭게 가는 그들을 위해 당신이 얼마나 수고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저희들은 알지 못하였사옵니다.
아버지! 세계에 널려서 한국을 향하여 참부모님이 사는 나라라고 하면서 무릎을 꿇고 정성을 들이는 자들이 있사오니, 그들을 부디 잊지 마시옵소서. 이것이 참사랑의, 정의 터전이라는 것을 확실히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아버지, 그들이 비참한 자리에 처해 있다는 것을 저희들은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부끄럽게 생각할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통일교회 본부에 있는 저희들이 그 길을 가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지만, 민족과 나라와 세계를 넘어야 할 안타까움에 몸부림치는 자신들이 불쌍하옵니다. 그러나 지금 외국에서 뜻을 위해 싸우고 있는 그들 앞에 면목없는 자신인 것을 느낄 줄 아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은 거룩한 안식일이옵니다. 지금부터 만 2년전 잊을 수 없는 추억의 한날이 남아져 있는 것을 저희들이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저희들을 이땅에 세우시기 위하여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시련의 도상에서 수고하셨던 분이라는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습니다. 오늘 이 한 시간, 역경의 그 노정을 생각할 수 있게 해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저희들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날을 기념할 수 있고 지금까지 저희들을 찾아 주신 아버지의 수고하심과 그 은사에 감사할 수 있는 이 시간을 갖게 하여 주심을 아버지 앞에 진실로 감사드리옵니다.
당신이 주신 교훈이 흘러가는 것 같지만 이 땅 위에 남아져서 역사 위에 쌓이고 쌓여 이 민족과 세계 앞에 승리의 터전이 된다는 것을, 아버님께서 친히 주장하신 것을 이 시간에 다시 한번 감사드리고, 쌍수를 들어 만세를 불러드립니다. 당신의 뜻을 전하고자 눈물 흘리며 기도하는 이 시간, 복을 빌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사람은 언제나 자기를 중심삼고 생활하기 쉽사옵니다. 외로운 길을 피하고자 하는 것도 자기를 중심하기 위한 것임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나를 생각지 않고 남을 생각할 수 없는 인간이지만 나를 생각하지 않는 자리에 서 가지고 아버님을 생각해야 되겠사옵니다. 아버님과 거리가 있고, 처지가 다르지만 저희들은 언제나 아버지 앞에 전체적인 입장에 서기를 간절히 원하옵니다.
저희들이 뜻 앞에서 부끄러운 모습을 가릴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할 때마다 반성할 줄 아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날이 새로운 한날을 탄생시키기 위하여 필요했듯이, 오늘날 우리도 새로운 한 세대를 원하면서 세상이 필요로 하는 실체적인 무리가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옵고 원하옵니다.
오늘도 전세계에 널려서 활동하고 있는 당신의 아들딸들에게 친히 같이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니다. 아멘.
이 땅 위에서 살고 있는 사람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자기 일생에 있어서 환경이나 혹은 나라와 세계를 두고 자랑할 수 있는 한 때를 남기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땅 위에 살고 있는 인간의 상정인 것입니다.
철이 안 든 어린아이에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그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인간생활의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가 가질 수 있는 추억의 날들이 과연 어느 때에 생길 것이냐? 그것은 지극히 비참할 때, 괴로울 때, 기쁠 때 등 여러 순간에 나타날 것입니다.
세계를 위하여 수난의 길을 가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길을 가는 과정에서 비참한 일이 일어난 날이 그 사람에게는 추억의 날로 남게 될 것입니다. 또, 행복한 생활을 하는 사람에게는 그 행복한 생활 가운데 가장 행복했던 날이 그 사람의 추억의 한날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일반 사람들은 수난의 날들을 추억의 날로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기 생애에서 기쁨과 행복의 순간들을 잊을 수 없는 추억의 날로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이 땅에서 살고 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앞으로 살아가야 할 사람들도 그런 입장일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추억의 날을 남기기 위해서 노력을 한다고 하지만, 타락한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새로운 세계를 모색해야 할 현세의 입장에서, 과연 기쁨의 터전을 남길 수 있는 추억의 날을 가질 수 있겠는가? 이것은 흘러가는 시조를 두고 보더라도 불가능한 것입니다.
현재의 세계가 혼란된 세계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인간은 가야 할 방향을 잃어버리고 자기 자체까지도 확실히 규명할 수 없는 현실에 처해 있습니다. 이런 것을 보더라도 오늘 이 현실 무대에서 자기 생애를 통하여 기쁨으로 남길 수 있는 추억의 날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이런 환경에 처해 있다는 사실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 역사적인 이 시점에 있어서 아무리 좋은 환경을 자랑하는 한날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그날을 기쁨을 중심으로 한 추억의 날로서 세계무대나 국가무대에 남기기에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이 가야 할 행로 가운데 있어서 오늘날의 인류가 공히 맞이할 수 있는 추억의 날이 있다면 그날은 어떤 날일 것이냐? 행복의 날을 노래하는 것보다도 전체가 하나되어 비참한 한날을 맞아야 할 환경에 처해 있는 것을 우리들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 비참한 날이 누구를 위하여 맞이할 수 있는 추억의 날이 되어야 할 것이냐?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날을 대한민국을 위한 추억의 날로 맞이할 것이냐, 수많은 국가를 위한 추억의 날로 맞이할 것이냐,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중심삼은 추억의 날로 맞이할 것이냐?
작게 봐서는 나를 중심삼고 추억의 날이 남아질 것이지만, 나를 중심한 추억의 날이 남아졌다 해도 그날은 국가가 추억할 수 있는 날이 있다 하더라도 그날은 세계가 추억할 수 있는 날 앞에는 자랑할 것이 못 된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세계가 자랑하는 추억의 날이 있다 하더라도 그날이 하나님을 중심삼고 천주가 추억할 수 있는 날 앞에서는 아무런 가치도 없이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우주 가운데에서 지금까지 흘러나온 역사는 한때를 제시하고 한때를 남기고 가야 할 운명에 처해 있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남길 수 있는 추억의 날은 어떤 날이 되어야 하겠는가? 이런 문제를 생각할 때, 자기를 중심삼은 추억의 한 인연을 세계에 남기고 싶은 사람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나 자신을 중심삼은 추억의 날을 남겼다 하더라도, 그날을 국가와 세계와 천주가 가지고 있는 엄청난 추억의 날과는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 자신을 중심삼은 추억의 날을 가지려고 하는 사람은 세계적인 추억의 날을 모색하는 과정에 있어서는 도리어 슬픔의 조건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 자기 자신만을 중심하고 무엇을 남기고 추억의 날을 갖고자 한다면 그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역사시대에 있어서 혹은 이 세계와 우주 가운데 있어서 온 인류와 하나님이 그야말로 합작으로 승리를 기념할 수 있는 날이 있다면 그날은 어느 때일 것이냐? 영원토록 귀한 그 추억의 한날은 어느 날 대번에 올 것이냐, 아니면 어떤 인연의 과정을 통하여서 올 것이냐? 그날은 대번에 오지 못합니다.
하루의 추억을 가하고, 일년의 추억을 가하고, 십년의 추억을 가하고, 혹은 자기 일생의 추억을 가하고, 더 나아가 수많은 종족의 추억, 민족의 추억, 국가의 추억, 세계 만민이 추억을 가할 수 있는 터전을 넘어서야 만이 영원히 역사를 대표하고, 시대를 대표하고, 미래를 대표할 수 있는 추억의 날이 천지에 남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날이 누구를 중심삼고 인연 맺어져야 되겠느냐? 인간만 중심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현시대에 살고 있는 30억 인류를 중심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세계 30억 인류가 공히 기뻐할 수 있는 추억의 날을 결정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역사성을 띠지 못하는 한 그냥 흘러가 버리게 되고 맙니다. 역사적인 추억의 날로 할 수 없는 날을 추억의 날로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 무리들은 도리어 역사적인 추억의 날 앞에 심판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됩니다.
오늘날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역사와 더불어 추억의 날을 남겨야 된다는 것입니다. 일개의 민족을 중심삼은 추억의 날이 아니라 세계와 더불어, 뿐만 아니라 흘러가는 역사를 중심삼은 추억의 날을 남겨야 되겠습니다. 이런 문제를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역사와 더불어 추억의 날을 남길 수 있는 길을 따라가야 한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인류역사가 기념할 수 있는 추억의 날을 남기는 것이 뜻을 따라가는 우리의 운명길입니다. 그러면 인간만을 중심한 추억의 날이 영원히 남아질 수 있는 추억이 될 수 있느냐? 여기에는 절대적인 어떤 주체자가 있어야 합니다. 그 주체자가 하나님이라 할 때 그 하나님은 오늘날 인간을 중심삼고 흘러가는 역사 앞에 반드시 개재하신다는 것입니다. 나타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역사에 남을 수 있는 추억의 한날을 가졌다 하더라도 그것이 절대적인 하나님을 중심삼고 역사적인 시대와 연결시킬 수 있는 내용을 갖지 못하고서는 영원히 남아지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제아무리 인간을 대표하여 역사적인 추억의 한날을 가졌다고 자랑하더라도, 하나님과 관계 맺는 추억의 한날 앞에서는 심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것은 개인이나 가정에 있어서 혹은 사회, 국가, 세계에 있어서 하나님을 중심삼고 맺어질 수 있는 추억의 터전을 남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지 않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터전을 남길 수 있는 한날을 추구하기 위해서 자기의 생애를 걸고 싸워 나온 사람이 역사상에 나타난 성현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가르침은 하나님을 소개하고 하나님의 품격을 소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소망을 하나님의 소망에 연결시키기 위해서 수고의 길을 간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성현의 반열(班列)에 남아질 수 있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 추억의 터전을 닦아 나아가는 길은 오늘날의 사업도 아니요, 정치나 문화도 아닙니다. 종교입니다. 종교라 하면 사람들이 대개 싫어하지만, 그 종교의 배후에 있는 터전을 찾아 나오는 것이 하늘땅이 기념할 수 있는 추억의 한 날로 남아지는 것을 우리는 생각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가정을 두고 볼 때, 집이 좋고 그 주위환경이 좋다고 해서 좋은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아무리 환경이 나쁘고 집이 초라하더라도 그것을 안식처로 삼고, 거기에 자기의 사연과 생애와 생활의 모든 기준을 인연 맺고자 하는 가정이 좋은 가정인 것입니다. 거기에는 부모와 자식간에 서로 위해 주는 심정이 있습니다. 이것이 추억의 본향이요, 모든 생활의 동기가 되기 때문에 우리 생활에서 행복을 좌우하는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왜 그러냐? 부모와 자식간의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단 하나의 사랑과 인연과 부모와 자식간의 단 한번밖에 없는 혈통적인 사랑의 인연이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부모와 형제의 사랑이 동기가 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의 생활에 그리움의 대상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사랑을 동기로 하는 거기에서는 기쁘면 그 기쁨이 전체의 기쁨으로 나타날 것이요, 슬프면 그 슬픔이 전체의 슬픔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일시에 전체 분위기가 통일될 것입니다. 그런 자리가 모든 사람이 추구하는 대상인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자리에서 기뻐하고, 그런 자리에서 슬퍼하고, 또한 그런 자리에서 새롭게 결심한 그 결심이야말로 그 사람에게 있어서 새로운 결과를 빚어낼 수 있는 동기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비참한 시련의 도상에서도 원수에게 승리할 수 있는 터전을 넓힐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사실은 우리가 역사시대를 거쳐오면서 사회에 나타난 현상과 생애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가정은 외적으로, 즉 환경적으로 추구할 수 있는 추억의 내용을 갖고 있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추억의 동기가 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냐? 부자의 관계를 중심으로 한 사랑의 인연이 추억의 동기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가정에서의 기쁨은 나 홀로의 기쁨이 아니라 전체의 기쁨이요, 비참한 것이 있다 할 때 그 비참은 전체가 청산짓고 넘어가야 하는 비참인 것입니다. 그것이 영원히 남아질 수 있는 추억의 요건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부모에게 원수가 있으면 자식이 일생을 통하여 그 원수를 갚기 전에는 자기가 가야 할 길을 가지 못하는 것이요, 자기 자신의 생활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생활을 한 것이 심정에 가장 가까운 터전으로 맺어진 추억이라는 것입니다. 비록 하나에서 맺어졌지만 전체의 운명과 생애를 좌우할 수 있는 내용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 하나님과 우리 인간과의 관계를 중심삼고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의도에 부딪치고 있습니다. 이런 자리에서 나라와 세계를 대표하여 하나님의 이념을 가지고 눈물 흘릴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하나님이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요, 인간들도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을 중심삼아 가지고 목적의 세계를 추구해 나가는 그 과정에는 필시 그런 사람이 걸어온 역사가 추억의 날로 남아질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종교라는 것은 무엇이냐? 오늘날 이 세계에 있어서 가정의 형태를 대신하기위해서 나타난 것이 종교입니다.
여러분은 성경에 탕자의 비유를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불효를 하는 자식들을 많이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런 불효 자식들이나 탕자를 회개시킬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 길은 무슨 길이겠느냐? 부모가 돈을 많이 가지고 탕자를 그 돈 앞에 굴복하게 해서 회개시킬 수는 없습니다. 탕자가 회심을 할 수 있고, 새로운 인간으로서 개심할 수 있는 하나의 길이 무엇이냐 하면 끊임없는 부모의 사랑에 부딪히게 하는 것입니다. 끊임없는 그 사랑이 하늘땅보다 더 높고 깊다는 것을 느끼고, 부모가 살아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 거기에서 사랑의 본연의 가치를 느끼게 될 때, 비로소 탕자가 회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운행되는 사랑은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새로운 인간으로 모색되는 것이요, 여기에서 새로운 가정이 출발할 수 있는 것이요, 새로운 국가와 새로운 세계가 현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의 새로운 운동이 일어남으로 말미암아 하나의 새로운 가정을 이룰 수 있는 동기가 되는 것이요, 그 새로운 가정이 생겨나면 하나의 종족이 되고, 그 종족이 커지면 민족이 되고 국가가 되며, 국가가 커지면 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인연을 오늘날 이 현실에 나타난 정치사회가 인간의 역사에 남긴 것이 아니라 종교가 인간의 역사에 남기게 한 것입니다. 자기 개인의 생명을 넘어 동지를 위하여 죽음길을 가더라도 먼저 달려가고, 뜻을 위하고 교회를 위해서 죽음의 길도 자처하고 나설 수 있는 것은 종교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역사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종교라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인간 행로의 동기가 되어 주었고, 새로운 문화창건의 기원이 되어 주었습니다. 이렇게 모든 역사적인 사실을 미루어 볼 때 종교는 모든 것의 동기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 문화사의 배경을 보더라도 종교사상을 중심삼아 가지고 그 나라의 역사를 창건해 나왔고, 그 나라의 역사를 지탱해 나왔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심정적인 추억의 인연의 내용이 여기에 깃들어 있음으로 말미암아, 역사는 이 터전 위에서 세계형태를 갖추어 나왔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세계 만민들은 종교 지도자들이 진리의 길을 추구하다 당했던 그 비참함을 참된 희생으로 알고, 또 그날을 세계의 날로 모시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간에 있어서 부모의 뜻을 위해서 희생한 아들이나 딸이 있다면 그 부모에게는 아들딸의 희생을 추억의 한 장면으로 얼마나 남기고 싶어하겠습니까?
하나님에게도 그러한 마음이 있고 그러한 요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종교가 역사과정에 있어서 추억과 추앙의 대상으로 남아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더욱이나 기독교는 다른 종교보다도 순교하는 역사의 길을 엮어 나왔습니다. 순교하는 데는 무엇을 중심삼고 순교를 했느냐? 자기를 중심삼고 순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중심삼고 순교한 것입니다. 인간이 최후에 모색해야 할 하나의 세계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이 땅에 평화의 닻을 내릴 수 있는 터전을 위하고 본연의 인류 평화를 위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순교의 피를 흘렸던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이 종교역사 가운데에서 추억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 종교의 목적을 위하여 죽어간 수많은 충신열사들입니다. 이것에 의해서 종교가 발전해 나오는 것이요, 그 목적을 이루어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발전해 나오는 그 과정에 있어서 희생된 그들을 추억으로 남기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로 두고 볼 때, 스데반은 무식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누구도 예수님을 따를 수 없는 시대였습니다. 그런 환경에서 쫓기고 몰리는 예수를 위해서 단 하나밖에 없는 자기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스데반의 죽음 그 자체는 위대한 것이 아닙니다. 그 생명의 핏줄이 끊어진 것은 아무것도 아니지마는 그 죽음이 하나님의 심정과 결부되었고, 역사와 연결되었다는 점에서 스데반의 죽음이 위대한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역사적 인연과 심정적 내용을 중심삼아 가지고 피를 흘림으로 말미암아 그것이 역사에 물들게 되었고, 하나님의 심정에 물들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피를 씻지 않고는 가지 못할 인간이므로 하나님께서도 이 길을 보여 주고 땅의 인간도 이것을 추모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세계사에서 추모할 수 있는 하나의 사람을 가졌느냐, 혹은 하나의 나라를 가졌느냐, 하나의 가정을 가졌느냐? 그렇지 않으면 그럴 수 있는 하나의 개인이 되어 있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추억을 남길 수 있는 자리를 원해야 되겠습니다. 나 개인보다도 가정을 붙들고 추억을 남길 수 있다면 그는 보다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가정보다도 민족을 중심삼아 가지고 추억의 한 시간을 남길 수 있다면, 그는 가정에 추억을 남긴 사람보다 더 위대한 사람인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국가를 넘고 세계를 넘어 하늘땅이 인정할 수 있는 추억을 남긴다면, 그는 성현의 반열에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이 땅위에서 아무리 비참하게 쓰러져 간다고 하더라도, 또 아무런 근거를 남기지 않고 간다 하더라도 세계와 더불어 있게 되면 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는 갈릴리 해변에서 어부와 같은 입장에 있었습니다. 그는 마을 마을을 거쳐 다니면서 얻어먹는 생활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동네의 뭇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고 좋지 않는 평을 받는 사나이였습니다.
그가 갈보리 산상에서 십자가에 죽는다는 것은 있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그런데 그가 죽은 것이 어떻게 되었기에 오늘날 20세기 문명을 지배하는 민주세계를 이룩하는 데 있어서 하나의 터전이 되었느냐? 이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누구라도, 피 뿌리며 죽는 사람은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있어서 단 하나 다른 것은 예수님이 인류가 공히 추모하는 하나의 추억의 결정으로서 죽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심정을 그 누구보다도 많이 가지고 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이 피를 흘리며 죽어갔으나 그가 남긴 길을 찾아보니, 하나님을 중심삼은 예수님의 이념의 내용이 역사성을 띠고 있다는 사실이 여실히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예수님의 심정적 터전이 역사의 원천이 되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인간들이 그 원천을 그리워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역사의 누룩이 될 수 있는 터전으로 남아졌기 때문에 이후에 하나님을 중심삼고 한 방향으로 가는 인간이 그 터전에 접하게 되면 자동적으로 감화를 받게 되었고, 그 목적을 재차 수습하는 일이 개인에서 종족, 종족에서 민족, 민족에서 국가의 형태로 넓혀졌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오늘날 기독교를 중심한 예수님의 사상이 세계적인 문화권을 창조했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됩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그로 인해 예수님은 역사상에 없었던 하늘땅을 연결시킬 수 있는 심정의 최고봉에 서시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자기의 아버지라 했고, 자기는 하나님이 독생자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위대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들된 도리로서 아버지의 뜻을 위하여 효(孝)를 다하고 그 나라를 위하여 충(忠)을 다하고 갔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인류역사상 하나님 앞에 있어서 더할 수 없는 효자요, 하나님께서도 비로소 독생자라고 선포할 수 있는 주인공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효라는 것을 통하여 승리의 출발을 하겠다는 일편의 이념을 남겼던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2천년 전에 이 땅에 왔었는지 안 왔었는지를 알려고도 하지 않지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애도하고 그의 생애를 추모합니다. 주님이 인류를 위해 희생하였다고 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그를 진정으로 추모하는 현실이 아닌가!
그러면 예수님은 왜 역사가 미치지 못하는 자리, 혹은 시대가 미치지 못하는 자리에 서시게 되었던고? 다시 말해서 그 국가의 주권자도 나가지 못하는 자리에 서셨던고? 그것은 단 한 가지 하나님을 아버지라 하였고 자기는 그의 아들이라고 하면서 하늘 가정을 추구하는 자리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뜻과 더불어 추억의 내용을 남겨 놓았습니다.
모든 종교에는 그와 같은 추억의 터전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느 한 종교의 추종자가 그 뜻을 위해서 자기 몸을 바쳐 희생할 수 있는 내용이 깊고 넓고 클수록 그 종교는 세계적인 종교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전세계 인간들은 삶의 역경이 휘몰아치는 경각에 처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계는 그렇더라도 우리 인생에는 추억을 남길 수 있는 하나의 기점이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복잡다단한 사망의 물결이 소용돌이 치는 경계선에 처해 있는 이 현실세계에서는 깊은 마음의 터전에 안식을 바랄 수 있는 종교가 있어야 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 인간인 우리들은 앞을 바라보는 그 과정에 있어서 어차피 현실을 부정하지 않으면 자신의 존재를 찾을 수 없는 입장에 처해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환경에 있는 청소년들도 앞길의 행복을 이루기 위해서는 현실을 부정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면 부정하는 데는 가치있는 것을 위하고 추억의 한 내용을 남기기 위해서 부정하느냐? 아닙니다. 이들은 방향을 모르는 메뚜기 떼와 같습니다. 초원에서 날지 못하고 사막에서 사막으로 날으는 메뚜기 떼와 마찬가지입니다. 뜻 앞에 있어서 안내자가 없으면 초원을 발견하지 못하고 날다가 한꺼번에 다 쓰러지는 메뚜기 떼와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살고 있는 그 자리에서 추억이 될 수 있는 그 무엇을 남길 수 있고, 금후의 세계에 있어서 추억을 남길 수 있는 터전을 만들기 보다는 그런 현실을 모두 부정하는 입장에 서야 된다는 것입니다.
종교인들은 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 현실을 부정해 왔습니다. 자기 나라도 부정해 왔습니다. 자기의 종족이 있더라도 그 종족을 자기 종족으로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자기 가정이 있더라도 그 가정을 자기가 안식할 수 있는 터전으로 만들 수 없었습니다. 또한 자기 한 개인의 인격으로 하여 온 우주를 지닐 수 있는 권위를 갖추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는 완전한 부정에서부터 출발한 것입니다.
그러나 종교인은 그 부정과 인연을 맺지 못하였습니다. 그 부정에서 이상의 가치를 찾아 거기에서 행복의 요인을 모색해야 할 텐데도 불구하고, 습관적인 부정권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행복의 터전과 하나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부정을 하고 나설 수 있는 기준만 세워지면 종교에서는 새로운 방안이 모색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 통일교회는 현실적인 이 세계에 공헌을 해야 되겠습니다.
오늘 이 추억의 날이라는 제목을 두고 생각해 볼 때, 지금부터 만 21년전 5월 20일이 생각납니다. 이날은 어떤 날이냐 하면, 평양 내무서에 잡혀가서 재판을 받고 흥남감옥으로 이송되어 간 날입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여러분은 뜻을 아는 사람이니 여러분이 뜻과 더불어 선생님과 일치되기 위해서는 무엇을 찾아 들어가야 되느냐? 보통의 생활이나 평범한 생활에서 나온 이념으로 찾아가면 그것은 그냥 흘러가 버리게 되고 맙니다.
통일교회가 지금까지 통일교회로서 나타날 수 있는 하나의 기원을 남겼다면 그 배후에 깃들어 있는 그 추억의 날이라는 것은 어떤 날이냐? 여러분들이 통일교회에 들어와서 남긴 추억의 날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이 추억의 날은 반드시 통일교회와 더불어 남을 수 있는 날이어야 합니다. 자기를 중심삼은 추억의 날이 아니라 통일교회와 더불어 남을 수 있는 추억의 날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통일교회가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할 때, 그 역사의 배후가 어떻게 되어 있는가? 그 배후에 어떤 입체성이 있으며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추억의 내용을 가졌는가? 이것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여기에 금후의 세계를 움직일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가 달려 있는 것입니다. 또 아무리 제한된 환경일지라도 어떤 대표자가 그 제한된 환경을 넘어서서 세계를 하나님 앞에 어떠한 내용으로 결속시키느냐 하는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앞으로의 통일교회 후대들 앞에 추억의 모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행복한 통일교인으로 걸어갈 것이냐?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통일교회 자체를 생각할 때 통일교회에 들어오면 잘먹고, 잘살고, 누구보다도 복을 많이 받고 산다고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인류의 심정을 밝히고 새로운 인간으로 재창조할 수 있는 폭발적인 원동력을 보여줄 수 있는 추억의 역사를 지닐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개인에게 인연됨으로 말미암아 그 개인이 새로운 결심을 하고 새로운 다짐을 하여 새로운 목적을 향하여 갈 수 있는 하나의 모체가 되어야 합니다.
통일교회에는 언제나 푸르른 봄날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여름이 가면 가을이 오고, 가을이 가면 겨울이 오는 것입니다. 봄날에는 새싹이 나고 여름에는 꽃이 활짝 피게 되는데,이것 자체가 완성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옆으로 뻗어나가는 가지가 있다면 그것을 꺾어 놓아야 합니다. 뻗어나가는 운세를 꺾어 놓아야 결실과 더불어 가을절기가 오는 것입니다. 퍼져나갔던 것을 부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사위기대를 이루어야 합니다. 존재세계는 번식을 해야 합니다. 또, 발전을 했으면 반드시 축소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가을이 가면 추운 동삼삭 같은 동절기를 맞는 것과 같습니다.
통일교인은 외적으로 침범해 들어오는 그 어떤 것도 몰아낼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천지의 권한을 품고 천지의 조화와 더불어 봄날을 맞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생명을 이룰 수 있는 힘을 다지게 될 때에는 내적인 모든 아픔을 터뜨리고 외적인 승리를 할 수 있습니다. 통일교회가 기쁠 수 있는 이 한날의 추억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고맙게 생각하는 것은, 지금까지 통일교회가 걸어온 길이 비참하였지만, 이 비참한 극에 도달하는 자리에서도 이것을 회피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고생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그냥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천지와 더불어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부자관계의 자리에서 눈물을 머금고 새로운 나라를 위해 서로서로 붙들고 결의하였습니다. 이 자리는 망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내일의 희망이 찾아들고 새로운 생명이 출발하는 자리입니다. 통일교회가 가는 노정이 비참하다 해도 통일교회는 망하지 않습니다. 그 자리에 비참함이 가중된다 하더라도 이 나라, 혹은 세계를 붙안고 내일의 희망을 결속할 수 있는 제물이 됨으로써, 여기에 생명력이 개재되어 우리들은 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무엇이 없다고 해서 비관해서는 안 됩니다. 역사는 그런 자리에서부터 새로운 방향으로 출발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수천년의 역사를 거쳐왔지만 인류에게는 마음 놓고 기뻐할 수 있는 날이 없었습니다. 자기가 행복하다고 기뻐 춤출 수 있는 한날을 못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역사를 움직일 수 있는 추억의 모체를 남겨야 하겠습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 우리들은 기쁨의 내용보다도 슬픔의 내용 가운데서 하나님의 가슴을 부여안고 하나님의 내심으로 들어가 몸부림치면서 금후에 인류가 가야 할 길 앞에서 결의를 해야 합니다. 원수의 세계가 망해 가는 현실을 응시하면서 내일의 희망인 천국을 향해 가는 것이 통일교회가 가지고 있는 사무친 추억될 인연이요, 또 그 자리는 천지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고귀한 자리인 것입니다. 이 인연이 없어 가지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천지를 주셔도 우리는 상속받을 수가 없습니다. 이렇듯 이것은 무엇보다도 귀한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지금까지 걸어 나오면서 역사상에 어떠한 추억을 남기기를 원하느냐? 어떤 한 여인이 있다면 그 여인과 더불어 기뻐할 수 있는 추억을 남길 것이냐? 혹은 형제와 더불어 기뻐할 수 있는 추억을 남길 것이냐, 아니면 인간 끼리끼리의 평면적인 추억을 남길 것이냐? 아닙니다. 입체적인, 영원을 중심삼고 영원을 모색할 수 있는, 그 한 가지 목적만을 위한 추억을 남기기를 원해야 합니다. 내가 이날을 잊어버리고 기억하고 있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 이날을 기억하라고 할 수 있는 추억의 날을 남겨야 합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자기 생애의 모든 날들을 다 잊어버리더라도 하나님이 자기를 통해서 그날을 기억해 달라고 권고할 수 있는 그 한날을 남겨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망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천만을 지배하고 있는 군왕보다 더 위대한 사람입니다. 그것은 군왕은 지나가더라도 그런 사람의 역사는 남아지기 때문입니다. 그 나라의 군왕은 지나가더라도 역사에 남을 수 있는 추억을 가진 애국자는 남아져 역사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천지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 혹은 만왕의 왕이 되시는 하나님 앞에 있어서 기념할 수 있는 추억의 한날을 가진 한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은 그 사람을 역사과정에 남게 할 것입니다. 그 사람은 역사상에 기념될 수 있는 하나의 중심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은 영원히 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망할 수 있는 요건이 있다 하더라도 반대로 흥할 수 있는 요인으로 바꿔진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통일교회 신도인 여러분들은 여러분의 생애 가운데에 있어서 여러분 자신이 자랑할 수 있는 추억의 날을 남길 수 있느냐? 이것은 지극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남기는 데에는 하나님께서 기념할 수 있는 추억의 날로 남아지게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많은 날을 여러분 스스로 추억의 날로 기념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여기에 협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날은 그냥 흘러가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여러분 자신이 잊어버리더라도 하나님이 그날을 추억의 날로 세워 줄 수 있는 날을 남겼다면, 여러분은 그날과 더불어 절대 망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지금까지 걸어오면서 어떠어떠한 것을 축하하고 기념하는 날들을 맞아 염려하는 것은 무엇이냐? 이날들이 그냥 흘러가 버릴 날들이 아니라 진정으로 내가 기념하기 전에 하나님이 기념할 수 있는 날들일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기쁜 자리에 계시지 못했습니다. 비참한 역사를 엮어온 하나님은 누구보다도 비참한 자리에 계셨습니다. 그러기에 여러분이 하늘길을 가는 데 있어서 추억의 한날을 남기려면 그보다 더 비참한 자리에서 남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앞으로 어떤 시련과 고통이 다가오더라도 응당 그것을 물리치고 가야 합니다. 부딪혀야 할 그 길이 타고난 본연의 운명길로 알고 그것을 전면적으로 맞아 줄 수 있는 여러분이 되어야겠습니다. 여러분이 가는 생의 노정에서 부디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추억의 한 날을 남길 수 있기를 부탁하는 마음에서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중심삼은 아버지의 아들딸로서의 사명을 느껴야만 남길 수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기쁜 날이 있으면 그날을 아들의 기쁜 날로 세워 주고 싶고, 아들이 기쁜 날이 있으면 그날을 아버지의 기쁜 날로 돌려 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그날은 몽땅 아버지의 것도 아니요, 아들의 것도 아닌 우리 만민의 것으로서 추억의 한날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천국을 창건하는 그날까지 부딪쳐 오는 시련과 고통을 극복해야 합니다. 그러면 땅에서 죽더라도 여러분은 이 땅과 더불어 영원히 남아질 수 있는 것입니다. 역사와 더불어 길이길이 남아진다는 것입니다. 이런 길이 우리 앞에 국가적으로 가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우리는 승리의 때를 하나님과 더불어 남길 수 있는 추억의 날이 복귀의 길에 남아져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버지, 삼천리 반도에 삼천만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사옵니다. 이 사람들을 줄이고 줄이고 또 줄이게 될 때에 삼천만 대표하여 하늘 앞에 설 수 있는 사람은 두 사람도 아니요, 단 한 사람인 것을 알게 되옵니다.
교파들이 무수히 많지만 그 교파 가운데 어느 교파가 당신이 가장 바라시는 교파입니까?
아버지께서 세운 민족으로서 주고 싶은 참된 민족이 두 민족이 아니라 한 민족이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저희는 한 사람이 그립고, 하나의 혈통을 정상적으로 이어 받을 수 있는 역사적인 하나의 민족이 그립사옵니다.
그리하여 아버지를 모실 수 있는 참된 민족을 맞기 위해서는 모험과 투쟁을 무릅쓰고 준비를 해야 되겠습니다. 그런 가운데 아버지의 모습을 사모해야 되겠고, 무한히 그리워해야 되겠사옵니다. 그곳을 향해 돌아가기를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거기에는 첩첩 태산준령이 남아 있고, 십자가의 고빗길이 가로놓여 있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이것을 정상화시키려면 아버지가 원하시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저희들은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한 사람, 한 가정, 한 민족, 한 국가를 대표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저희들이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은 번번히 그곳으로 돌아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가는 데에는 나를 중심삼고 평화를 찾고 나를 중심삼고 행복을 찾으려 했사옵니다. 그러나 행복이나 평화로 돌아가는 길은 나타나지 않았사옵니다.
국가를 대표한 그 하나의 삼천만을 대표한 하나이기 전에 가정의 중심도 될 수 있는 것이요, 어떤 단체의 중심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중심은 오로지 하나밖에 없는 것이므로 그 자리에 설 수 있는 것도 하나라는 것을 저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지금 아버지의 마음은 어떠한 것이며, 아버지께서 처한 환경은 어떠한 자리인가를 생각할 때, `이러한 마음이여, 이러한 자리일 것이다'라고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당신과 더불어 행복을 찾아 나서는 자녀들이 되어야겠사옵니다. 저희들이 아버지의 아들이 되게 위해 아버지 앞에 불효의 인연을 남기지 않으려면, 불행했던 당신보다 더더욱 불행한 길을 찾아가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아버지의 자리에 대신 서서 아버지의 매를 대신 맞을 수 있는 자녀가 되어 아버지와 같이 남을 수 있는 추억을 가질 때, 그것이 효 중의 효요, 충 중의 충이 아니겠사옵니까? 그러한 길을 향하여 저희들은 직행해야 되겠습니다.
아내가 이 길을 막거든 아내를 버리고라도 가야 되겠으며, 자식이 이 길을 막거든 자식을 버리고라도 가야 되겠습니다. 또한 친척, 종족, 민족, 국가가 이 길을 반대하더라도, 이들을 버리고 가는 저희들이 되어야 하겠사옵니다.
통일교회가 역사적인 승리의 날을 찾게 될 때, 저희들은 아버지 앞에서 수없이 감사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저희들은 이 길을 위해서 죽을 것을 각오하고 나왔습니다. 그런 저희들을 지금까지 이끌어 온 아버지의 은사 앞에 감사를 드립니다.
이제 망할래야 망할 수 없는 터전을 이미 아버지께서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런 아버지의 수고의 터전 위에 나를 중심삼은 불행으로 말미암아 아버지의 마음에 짐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저희들, 당신 앞에 있사오니, 이 자리에서 당신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들리 수 있는 추억의 조건을 남겨야 하겠사옵니다. 당신이 십자가를 지면 그 십자가를 대신 지겠다고 몸부림칠 수 있는 효의 모습과 충의 모습을 갖추게 하여 주시옵고, 자신의 생명을 잃어도 감사하는 자리로 연결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저희들은 생명을 바쳐 아버님 앞에 효를 하겠다고 하는 자리에 있었고, 아버지께서는 그런 효하는 아들딸을 찾겠다고 지금까지 몸부림쳐 오셨사옵니다. 저희들이 아버지를 대하여 충의 도리를 다하겠다고 생명을 바치기를 원하면 아버지께서 그 길을 개척해 주신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 죽음의 고비에서 저희들을 이끌어 주시기에 저희들도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저희들이 스스로 제물 되는 자리에 나가 주기를 원하시옵니다. 저희들은 그 자리가 부자의 관계에서 사랑을 붙들고 나오는 나리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자식이 죽을 자리에 있을 때 아버지가 먼저 죽고자 하는 것이 사랑의 도리인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한 자리에 남아지게 될 때, 아버지께서는 그런 추억의 날을 영원히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한날이 통일교회 무리를 중심삼아 가지고 이루어질 것이니 남아진 그 날을, 아버지여, 잊어버리지 마시옵소서.
추억의 날로 남기기 위해 싸움을 하는 이들은 그날이 길이길이 남아지기를 바라고 있사옵니다. 그 아들이 나가는 길을 전통삼아 상속받고자 하는 당신의 자녀들도 있사옵니다. 그 자리의 인연을 상속받을 수 있는 아들과 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복귀노정에 있어서 영원히 아버지와 함께 할 수 있는 추억의 날을 아버지 앞에 바쳐 드리지 않고는 충신의 인연으로 아버지의 나라에 가지 못하고, 아버지의 아들딸로 결정될 수 없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하오니 효의 도리를 세워 가지고 아버지 앞에 추억의 한날을 남길 수 있는 아버지의 아들이 되고 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런 자리에서 저희들이 추억의 인연을 남길 수 있다면, 객사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 자리는 기쁜 자리요, 아버지 앞에 보탬이 될 수 있는 자리인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어떤 자리가 인간으로서 생각해야 할 자리이며, 어떤 길이 인간으로서 확실히 가야 할 길인가를 저희들이 깨달았사옵니다.
이제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된 추억의 인연을 세계보다도 더 높일 수 있는 추억의 날로 한 자리에 길이 남길 수 있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의 성호 받들어서 아뢰었사옵니다. 아멘.
현실적인 자리에서 안주해서는 새로운 역사를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존 세계의 사조라든가 그 풍조에 일치되는 자리에서는 새로운 혁명이나 새로운 혁신운동이 일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기존 세계의 사조나 풍조를 완전히 부정한 자리에서 새로운 미래에 대한 소망을 갖고 새로운 실적을 갖추어야만 새로운 발전을 엮어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역사과정을 살펴볼 때 이러한 사실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타락한 세계의 역사발전이 그렇듯이 우리의 섭리노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섭리노정은 사탄세계와 방향이 같고 내용이 통하는 입장이 아니라, 방향도 내용도 모두 반대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볼 때 새로운 기점을 갖고 새로운 체제를 갖추어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환경을 재건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역사를 거쳐 오면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어느 한 기준을 이루기까지는 드러낼 수 없는 내적인 투쟁의 시기가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됩니다. 그 내적인 투쟁이 시대적인 모든 요인(要人)들과 그 국가를 움직이는 위정자들 앞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기반을 갖게 될 때는, 그 국가 전체를 새로운 분야로 혁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좁은 범위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면 하나의 마을도 될 것이요, 하나의 가정도 될 것이요, 더 나아가서는 하나의 개인도 될 것입니다.
복귀섭리를 두고 볼 때, 지금까지 하나님이 이러한 혁신운동을 악의 세계에 제시하였지만 그 영향이 사회와 국가에 바로 미쳐진 적이 없었습니다. 언제나 개인이 먼저 그 영향을 받아 가지고 거기에서 가정을 규합하는 운동을 하여 지금까지 역사를 발전시켜 나온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섭리사의 과정에 있어서 개인이 걸어가야 할 전통적인 노정인 것입니다.
이렇게 개인을 통하여 가정으로부터 씨족·종족·민족·국가·세계 기준까지 나온 오늘날의 종교세계를 바라보게 될 때, 어떤 종교든지 투쟁의 역사를 엮어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역사를 엮어 나오는 데는 공공연히 나타나서 투쟁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은신시켜 가면서 환경에 몰리거나 또는 제약된 환경을 벗어나지 못하는 자리에서 발전적인 요인을 이용하지 못한 채 하나의 공적인 자세를 갖추어 나왔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에, 책임을 짊어진 섭리적 책임자의 입장은 언제나 자유스러운 몸이 아닌 것입니다. 자기를 드러낼 수 있는 입장이 아니요, 자기 주장을 내세울 수 있는 입장이 아니요, 자기 행동을 함부로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기 본래의 모든 행동 요건을 전부 다 감추어 두고, 새로이 그 사회 환경과 접하여 대하는 사람들 앞에 현실의 사회 환경보다 더 유익한 여건을 제시해야 됩니다. 그 사람들과 어떻게든지 관계를 맺어 가지고 내심이 통할 수 있는 자리에 서서 자기 정체를 연결시켜 발전해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나온 것이 복귀섭리 역사노정입니다.
과거의 역사적인 선조들을 회고해 볼 때 그들은 어느 때든지 밀사의 입장 즉, 자기 정체를 드러내지 못하고 감추는 입장에 있었습니다. 그러한 환경에서 자기의 발판을 개척하기 위해 무한히 애쓰고 간 사람들이라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 사탄이 이 세계를 점령하여 수많은 주권국가를 갖고 있는 이런 무대 앞에 있어서 이 국가와 세계를 몽땅 하늘 것으로 전복시키려는 것이 하나님의 복귀섭리요, 구원섭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섭리의 뜻을 가진 한 모습이 나타날 적마다 어떤 국가, 어떤 사회든지 반대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반대받는 입장에 들어선 사람, 다시 말하면 섭리를 책임지고 나서는 사람은 언제나 밀사와 같은 심정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원수의 국가에 파견된 밀사, 즉 그 나라의 주권을 책임지고 그 주권이 갈 수 있는 운명을 판가리하는 밀사의 사명을 해 나왔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로마에 들어간 기독교도 역시 그러한 역사과정을 거쳐 나왔습니다. 개인적인 밀사의 행동이 가정적 범위, 종족적 범위, 민족적 범위로 제시되게 될 때, 이것이 그 사회에 있어서 새로운 혁명의 봉화가 되어 가지고 새로운 국가를 이루어 놓을 수 있었다는 것을 역사를 통하여 볼 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볼때, 지금까지 종교 자체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그 배후에 밀사의 책임이 막대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원수의 국가에 파송받은 밀사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 거기에 하늘편 종족을 남기고 간 사람들은 그 시대에 있어서 하늘 앞에 책임을 다한 사람이요,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하늘 앞에 책임을 다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 통일교회도 하나님의 복귀섭리의 전체적인 책임을 짊어진 입장에서 역시 마찬가지의 운명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또한 그러한 책임을 제시하고, 그 전체를 책임진 선생님 자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대한민국이라는 한 터전 위에 태어났고 같은 배달민족으로 태어났지만 이 나라 이 민족의 신임을 받는 자리에서 출발할 수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외로운 자리에서 자기의 내심적인 모든 사연을 감추어 두고 사회활동을 해 나왔습니다.
하늘이 작전을 세우고 전개해 나오는 데 있어서의 고충이 되는 환경을 극복하여 자기의 발판을 발전시키지 못하게 된다면, 조국의 운명을 가름하는 크나큰 책임을 완수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국을 위한 크나큰 사명을 바라볼 적마다 밀사의 사명을 띤 자기 개인의 태도와 행동이 심각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말하면, 지금 북괴가 간첩들을 남한에 내려보내고 있습니다. 이 간첩들이 남파되기 위해서는 먼저 간첩 생활을 하기 위한 훈련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훈련을 받을 때에 무엇을 먼저 습득해야 되느냐? 남한의 모든 풍습을 습득해야 됩니다. 말도 남한의 말을 해야 되고, 생활도 역시 남한의 생활방식을 익혀야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남한의 생활에 얼마나 잘 적응하느냐에 따라 자신의 생사 문제가 좌우되는 그런 운명이 걸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활환경으로부터 모든 전문적인 분야에까지 흡수될 수 있는 자신을 어떻게 만드느냐 하는 것이 간첩 훈련의 원리로 되어 있습니다. 말이나 생활적인 습관에 있어서 지금까지 남한에서 살아온 사람들 앞에 조금이라도 어색하거나 이상해 보이는 면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평범하고 보편적인 환경을 그냥 그대로 자신의 생활 가운데서 표현화시키며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북에는 이북 사람들의 풍습이 있고, 이북 사람들의 생활 습관이 있고, 이북 자체의 사회적인 제도가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 자기도 모르게 어느 환경에서 나타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을 제거해 버리고 다른 나라의 사람 또는 다른 지방의 사람으로 행동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2중 3중의 신경을 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행동을 한 번 하는데 있어서나, 혹은 말 한마디 하는 데있어서도 반드시 두 번 세 번 생각하고 주의해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간첩들의 입장인 것을 우리는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 행동이나 말투가 남보다 조금 다르다든가, 생활습관이 조금 다르다 할 때는 그것이 자기 정체가 탄로날 수 있는 하나의 실마리가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자기가 살아왔던 생활 환경과는 다른 곳에서 살아야 하는 것이 첩자의 생활인 것입니다. 그러한 생활을 하려면 내심적인 면에 있어서 얼마나 고충이 크겠는가? 또, 그런 생활에 젖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훈련을 해야 되겠는가? 이런 생활을 우리들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지방에 있는 우리 통일교회의 책임자는 지금은 조금 나온 입장에 있지만, 옛날 초창기에는 그야말로 첩자와 같고, 특명을 받은 밀사와 같은 입장에서 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 그러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자기 주장을 내세워 가지고 그것을 그 지방의 전체에 적용시키려는 태도를 가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 책임자들이 지금까지 걸어온 모든 과거지사를 헤아려 보게 될 때에, 이런 생활을 했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지방에 가자마자 자기의 소신대로 내심에 있는 것을 전부다 드러내 놓고 주위의 사람이야 어떻게 생각하든지간에 자기만이 독주하는 입장에서 말씀을 전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행동이 우리의 활동에 크나큰 지장을 초래한 것을 우리는 다시 한번 회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모든 희생의 대가를 다 치르고, 지금에 와서는 대한민국의 위정자들에게도 인정받을 수 있는 기반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기반에 서게 될 때까지 여러분 자신은 무책임한 자리에서 나왔을는지 모르지만 전체를 책임진 선생님에게는 무한한 고층이 있었고, 고심 또한 많았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은 지방에서 자유롭게 행동을 하고 있지만, 중앙에서 전체를 책임지고 있는 선생님은 지금까지도 밀사의 사명 기준을 넘지 못하는 그런 생활 테두리 안에서 싸움을 전개하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1960년대를 보내고 새로운 1970년대를 맞이했습니다. 이제 대한 민국을 하나님의 뜻 앞에 세워야 되겠고, 하나님이 바라시는 조국을 광복해야 되겠습니다. 새로운 인류의 조국을 광복해야 되겠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책임 수행을 앞에 놓고 냉철히 비판해 보게 될 때, 지금까지 우리들이 엮어온 생활태도는 어떤 의미의 생활이었는가를 반성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늘의 밀사로서의 사명을 짊어졌던가? 그렇지 않으면 특사의 사명을 짊어졌던가? 원수의 세계라는 것을 망각해 버리고 그 나라 전체를 대신한 특사의 임무를 책임지듯이 지금까지 우리들이 마음대로 행동해 나왔기 때문에 여기에서 말할 수 없는 희생의 대가를 치렀던 것입니다.
이제부터 대한민국 전지역을 중심삼고 아시아까지 미칠 수 있는 섭리의 뜻을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될 것이냐? 이것 역시 드러낼 수 없는 밀사의 사명을 띤 책임의 길을 거치지 않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앞으로 나아가는 길에 있어서 이처럼 지극히 어려운 문제들이 가로놓여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방비할 것이냐? 이것을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 이러한 문제를 두고 볼 때, 나 자신이 그 사회에서 생활할 수 있는 인격을 어떻게 갖추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또한 어떠한 하나의 새로운 사명을 짊어진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사명의 목적을 어떻게 달성하느냐가 문제입니다. 여기에 해결점이 있습니다. 따라서 아무리 큰 사명과 큰 책임을 맡았다 하더라도 그 책임 수행이 전후 좌우에 미쳐져 효과적인 결과를 맺지 못하게 될 때는 사명을 짊어졌던 사람들도 비판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이제 뜻을 중심삼고 새로이 70년대를 맞이해서 이 아침에 각오해야 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밀사의 특명을 받고 있는 내 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행동 하나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그 환경에 미쳐지는 영향은 자기 하나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조국이라는 광대하고 엄청난 내용에 연결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의 책임자들 즉, 지구장, 지역장, 구역장, 교회장등 세상에서 볼 때 소위 통일교회의 핵심 요원이요, 정예 요원이라 할 수 있는 사람들 가운데 과연 조국 광복을 위한 하늘의 특사의 사명을 하기 위하여 부름을 받았고, 짊어진 책임을 현지에서 감당하는 하나의 존재라고 자인할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느냐?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 우리들은 70년대의 첫해에 이런 간부 수련회를 거치는 마당에 있어서 다시 한번 과거를 반성하고 새롭게 다짐하여 자신의 정신을 공고화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그래야 70년대에 행복의 터전을 무난히 엮어 나가기 위한 길을 개척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행동이라든가 모든 면에서 이런 생활태도를 갖추지 못하게 되면, 또다시 70년대에도 수난의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될 운명이 놓여지게 될는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한 지구를 책임진 사람이라면 지구 자체가 앞으로 조국을 대신할 수 있는 하나의 모체가 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또, 삼천리 반도에 있는 우리 지역이 다 없어지고 자기 지역하나만 남더라도 여기에서 지구를 대신하고, 나라를 대신해서 조국 광복을 위한 하나의 기틀을 마련하겠다고 하는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영원한 세계를 이루기 위해 여기서부터 새로운 기틀을 세워 삼천리 전역에 미쳐질 수 있는 영광의 기원을 만들겠다는 신념을 가지고 나가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밀사의 사명시대를 거치지 않고는 안 됩니다. 밀사의 사명이 완결될 때, 다시 말하면 그 환경에서 증거를 받고, 그 환경이 자기를 신봉하고, 자기를 믿고, 자기와 의논할 수 있는 입장에 서게 될 때 비로소 하늘을 대신한 특사의 사명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환경이 자기를 믿지 않는 입장에서 자기 권위와 자기 국가면 국가의 권위를 앞세워 그 환경에 나서면 나설수록 반발이 가중되고 배척의 화살이 날아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이번 수련회를 통해서 앞으로 어떤 마음을 가지고 지역에 가야 되느냐? 새로운 밀사의 사명을 분부 받기 위해서 여기에 부름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내심적으로 깊이 다짐해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자기 지역에 가서 밀사의 사명을 완결지어야 합니다. 환경을 개척해 놓고 자신이 절대적인 권한을 이룰 수 있게 될 때, 거기에서 동역자들과 같이 비로소 하늘의 특사의 사명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통일교회의 책임자들은 밀사의 사명시대를 망각해 버리고 특사의 사명을 하려고 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우리 교회가 발전하는 데 있어서 많은 핍박을 받아 왔던 것입니다.
여러분을 지도하고 있는 선생님도 지금까지 밀사와 같은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국가면 국가의 권력 앞에 신봉받을 수 있는 기반을 어떻게 닦느냐? 그러한 때가 되어야만 특사의 사명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기반을 닦지 못하고 밀사의 사명 단계를 거치지 않고 행동하다가는 반드시 파탄이 벌어지게 됩니다. 자기 생명은 물론이요, 자기의 모든 전후 관계와 국가의 운명이 여기에 가로놓여 가지고 전체 앞에 참사의 결과를 피할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을 언제나 염두에 두고 행동해야 되는 것입니다. 밀사의 사명을 하는 과정에 있어서는 특사의 사명보다도 더 엄숙하고 이중삼중 내심으로 더 다짐하면서 자기 정체가 그 환경에 노출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거기에서 그들 앞에 이익을 줄 수 있는 하나의 조건을 제시함으로써 그들이 자기 앞에 순응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야 합니다. 직접적인 작전보다도 간접적인 작전을 펴야 되는 것입니다. 즉, 개체 개체를 검토해 가지고 연결시키는 싸움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작전을 전개하고 난 후에는 그들을 자기와 더불어 생사를 같이 나눌 수 있는 기준까지 끌어올려야 합니다. 그러한 입장에서 자기의 소신을 피력하고 공동의 목적을 성사시키는 것이 밀사로서 해야 할 책임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 통일교회 식구들 가운데는 그런 책임을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관계를 맺지 못하였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가는 걸음이 언제나 허술하고, 디디고 설 수 있는 발판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번 수련회를 통하여 생각해야 할 것은 대한민국을 중심삼은 이 민족이 우리를 신임하고 있는 그 기준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여기에서 하나님이 아직까지 펴지 못한 내적인 심정의 사연들이 많은 것을 알고 이것을 발전시키고 전개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밀사의 사명분야를 아직까지 거치지 못한 우리 자신들이라는 것을 망각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우리는 첩자의 생활을 하듯 그 환경에서 말 한마디도 동화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행동하는 데 있어서도 동화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때를 놓고 그 환경에서, 또한 그 부락이면 부락, 지역이면 지역, 지구면 지구 등 전체 앞에 무엇인가를 남겨 줄 수 있고, 이익 될 수 있는 많은 문제를 제시하는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밀사로서 책임져야 할 사명분야 이상의 기준을 세워 놓아야 합니다. 그런 입장에서 분부하고 결의하고 약속하여 새로운 운동을 전개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알면서도 가르쳐 주지 못하는 입장에서 자기를 중심삼고 지금까지 관계 맺었던 사람들을 다 날려 버려야 합니다.
그러면 밀사가 취해야 할 태도가 무엇이냐? 자기가 살고 죽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밀사는 언제나 생사의 위협을 받고 있고, 죽음이 언제나 그 앞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그러니 생사의 경계선에서 죽음을 밟고 넘어선 자리에 있는 하나님의 대신자인 것입니다. 삼팔선을 넘어 본 사람은 그 기분을 알는지 모르지만, 밀사는 국경선을 넘는 것과 같은 그런 모험의 세계에서 죽음의 발판을 밟아 치울 수 있는 확고한 생활태도를 취해야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가 새로운 말씀을 전하는 데 있어서 말씀 하나만을 전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먼저 인간적인 면에서 본이 되고, 생활적인 면에서 본이 되고, 행동적인 모든 면에서 본이 되어야 합니다. 즉, 그 동네에서 상하관계나 모든 것에 그들 앞에 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느 면에서도 그들보다 못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저 사람은 우리 동네에서 정말 필요한 사람이다' 할 수 있고, 자신이 떠나려 할 때는 부락이 일치단결하여 그냥 그대로 살아 주기를 원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기반을 닦지 않고는 우리의 입장에서 목적을 성취하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여러분들은 그런 생활을 해봤습니까? 자기가 태어난 민족 앞에서 2년, 3년, 10년 세월을 하루같이 그런 생활을 해봤느냐는 것입니다. 밀사의 사명을 완수하는 것으로써 책임이 다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민족이나 국가에 있어서 조국의 목적을 달성시키기 위한 특명을 받고 파견된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 사명을 10년이나 20년 걸려 가지고는 달성하지 못할 것입니다. 또한 자기 일대에 있어서 그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대신자를 세워 사명을 물려주고 가야 할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특명을 중심삼아 가지고 언제나 마음 졸이면서 그야말로 산 제물과 같은 입장에서 자기의 책임을 수행해야 합니다. 그 책임을 전개시킬 수 있고 수습할 수 있는 하나의 책임자가 되지 않고는 밀사로서의 목적을 이룬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생활태도나 다른 모든 면에서 달라야 되는 것입니다. 그 부락에 있어서 그 누구도 책임지지 못한 것을 당연히 자신의 책임으로 알고 책임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부락을 대신해서 맞을 일이 있으면 맞는 것이 밀사로서 책임을 완수할 수 있는 제일 빠른 길입니다. 부락을 위해서 맞고 죽지 않고 나서게 될 때에 부락이 전부 굴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하늘을 위해서 가는 사람들은 사탄세계에 파송받은 밀사입니다. 개개인에 있어서 크고 작고, 넓고 좁고, 높고 낮은 차이가 있을는지 모르지만, 각자가 처해 있는 생활 자체는 밀사의 생활을 떠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언제나 생사의 위협이 개재되어 있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영원한 생명 문제가 좌우되는 이런 입장에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지탱시킬 수 있고, 영원한 생명을 보호해줄 수 있는 우리의 조국을 찾겠다는 관념이 그 환경보다 몇 백 배 강하지 않고서는 밀사의 생활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조국의 영광을 바라보는 마음을 가지고 조국의 원한을 풀었을 때에 온 만민이 기뻐한다고 하는 것을 생각하고, 새로운 역사를 창건하여 조국광복의 한날을 맞는 그 때에 자기의 공로가 드러날 것을 생각하면서 현재의 입장을 무시해 버릴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런 마음이 앞서지 않고는 밀사의 사명을 수행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조국 광복을 위한 소망이 현실의 소망보다 천 배 만 배 강할 수 있는 마음이 되어야만, 오늘의 생명을 바꿔치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을 극복하고 밀사의 사명을 수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에 그렇게 책임하다가 불의의 사고로 희생이 된다 하더라도 그 자리에는 새로운 책임자를 다시 파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는 이미 죽었을망정 그의 친구가 될 수 있고 그의 편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이 생겨날 것입니다. 그가 모범이 되는 입장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비록 그가 희생되었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그의 편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이 남아지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남아 있는 한 하나님은 그 터전 위에 대신자를 보내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입장에서 죽게 될 때에는 거기에서 그가 아무리 수고했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여러분들이 이제 70년대라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여 어떠한 자세를 갖추어야 되느냐? 조국 광복을 위한 신념이 무엇보다도 더 높이 가슴속에 불타고 있어야 되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6천년 동안 하나님이 고대하던 조국을 건설하는 기수가 되고, 선봉에 선 정예부대의 한 일원으로서 개척자가 된다는 이 엄청난 사명을 책임진 자부심을 느껴야 되겠습니다. 왔다 간 수많은 사람들이 갖기를 소망하였지만 가질래야 가질 수 없었던, 하나밖에 없고 이 한 때밖에 없는 특권적인 사명을 짊어졌다는 엄숙한 책임감을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먹고 자고 가고 오는 모든 생활 전체가 조국창건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히 파송받은 밀사로서 늠름하고 멋지게 이 사명을 수행하겠다고 하며 나서 주기를 하나님이 얼마나 고대하시겠습니까? 지금까지는 지지리도 몰리고 지지리도 쫓겨 다녔습니다. 국가의 발판을 갖추어 가지고 전체의 내용을 제시하여 한번도 펼쳐 보지 못한 하늘의 그 뜻, 조국을 세울 수 있는 그러한 뜻을 세워야 합니다. 지금까지 그 뜻을 한번도 세우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러한 조국을 세울 수 있습니다. 그 조국에는 주권이 있고, 그 조국에는 국토가 있고, 그 조국에는 국민이 있습니다. 또, 거기에는 단일민족의 혈통이 인연되어 있고, 다른 민족이 가질 수 없는 역사가 있습니다. 이러한 조국을 위해서 우리는 밀사의 사명을 수행해야 합니다. 그러한 사명을 자기 스스로 빠른 시일내에 완수해 내면 해낼수록 조국 광복의 터전이 자기로 말미암아 점점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오늘 수고의 대가를 치르는 것이 조국 광복의 한날을 가까이 맞이할 수 있는 터전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생각하면서 여러분은 살아서 밀사의 사명을 완수하겠다는 결의를 갖고 나가야 됩니다. 그러지 않으면 70년대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져다 줄 수 있는 세계사적인 축복과 천운을 우리의 것으로 맞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국가를 중심삼고, 국민을 중심삼고 그들로부터 환영받을 수 있는 통일교회가 되어야만, 거기서부터 아시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입니다. 일본에서 우리 통일교회가 발판을 닦고 출발하게 될 때, 일본 정부에서는 대번에 `이것이 도대체 어디서 왔느냐? 한국에서 왔다면 어떻게 왔느냐?' 하며 문제를 삼고 나왔던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잘한 내용은 생각지도 않고 잘못한 내용만을 가지고 문제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 잘못한 내용이 어디서 나왔느냐? 이것은 우리가 책임을 다 못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책임수행을 무책임하게 하다 보니 그런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이번에 여러분들이 알아야 할 것은 `밀사와 조국`이라는 신념입니다. `밀사와 조국`이라는 이 신념을 갖고 돌아가야 됩니다. 한 동네를 책임졌으면 그 동네를 빨리 복귀시키기 위해서 그 동네의 유지를 찾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영향을 미칠 것이냐? 그 사람에게 지금까지의 어떤 친구보다도 더 귀한 친구가 되지 않고는 그를 움직일 수 없습니다. 그 동네를 위하여 누구보다도 염려하는 자리에 서지 않고는 그 동네의 책임자를 움직일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동네의 풍습을 지키는 데 있어서도 그 동네의 누구보다도 제일 잘 알아서 지켜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그 동네를 움직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의 경계선을 넘을 수 있는 기회가 오면, 그때에는 특사의 사명을 해야 됩니다. 그야말로 권위를 갖추어 가지고 사리를 따져 가면서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여 옳은 것을 그들 앞에 인식시키는 놀음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이런 생활을 못 했기 때문에 우리가 지나온 과정에 부작용이 많았던 것입니다. 부작용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이와 같이 발전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밀사의 사명을 대행해 주셨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한 사람의 식구가 오면 그 사람을 위해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심시켜서 돌려 보냈습니다. 이제 다시는 통일교회에 안 가겠다고 맹세하다시피 하는 그런 사람이 되게 했습니다. 그렇게 했을 때 여러분을 대신하여 영계에서 밀사의 사명을 다시 했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자기 하나의 잘못으로 말미암아 영계가 동원되어 협조하게 되면 절대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협조하면 반드시 사탄세계에 탕감의 내용이 남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협조하는 것이 오늘날 섭리도상에 나타난 은혜의 역사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이 중대한 책임을 감당하지 못하게 될 때는 여러분 대신 하나님께서 몇 배의 탕감조건을 세워 놓으시고, 여러분들로 하여금 밀사의 사명을 완결짓고 그 환경을 수습하게 하기 위하여 재물의 역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현재의 여러분들을 보게 되면 자기라는 관념이 앞서 있습니다. 지구장들도 일을 하면서 불평하고 있습니다. 그런 마음이 싹트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밀사가 취해야 할 입장이 아닙니다. 밀사는 자기가 드러날까봐 무서워하고, 자기가 드러날까봐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 계획이 백 퍼센트 드러날 수 있는 환경이 되지 못했는데도 불구하고 계획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생명의 위협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 여러분에게 부여된 것이 조국을 위한 밀사의 사명이 아니라 자기가 성공하기 위한 사명이라고 알고 있다면 여러분은 망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념을 여러분이 느껴서 여러분의 피에, 여러분의 살에 새겨야 합니다. 선생님은 나타나기를 싫어합니다. 왜? 아직까지 넘어가야 할 고개가 첩첩이 남아 있고, 역사상에서 마지막 고개를 넘지 못하고 죽은 선조들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심정을 갖고 지도하고 있는 스승을 대해 인사이동이 이렇구 저렇구 하는 사람들은 하늘의 역군이 아닙니다. 말없이 자기 스스로 심적 기반에 깊은 뿌리를 내려서 봄날을 기다려야 합니다. 봄날이 오면 한꺼번에 무성하게 자랄 수 있는 뿌리 깊은 생의 가치를 위해, 또한 자체의 역량을 뜻에 도입시키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시간을 투입하고, 노력을 투입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자신이 드러나기를 바라는 것은 마치 뿌리가 없는 나무와 같습니다. 뿌리가 없이 심어진 나무는 그냥 말라 버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를 중심삼고 여러분은 재차 자신을 분석 비판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그 지방의 책임자로서 일을 하게 될 때, 책임자의 권한을 가지고 함부로 이래라 저래라 하게 되면 수많은 사람의 비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런 비판의 화살을 어떻게 피하느냐? 이것이 어떠한 직책을 맡고 있는 책임자에게 있어서 제일 먼저 초월해야 할 중대한 문제인 것입니다. 그 순간에도 밀사의 사명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때에는 자기 정체를 드러내지 말고 파묻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관계되어 있고, 대하고 있는 환경에서 불쾌하더라도 상대방에게 불쾌한 인상을 주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 사람이 언제 원수가 될지 모릅니다. 원수가 될 수 있는 사람과 정들어야 됩니다. 정들기 위해서는 돈이 문제가 아닙니다. 돈과 내 생명을 바꿀 수 있겠습니까? 그 무엇을 준다 하더라도 생명과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울타리를 쳐야 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편안하게 앉아 남을 심부름시키면서 나를 추대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밀사의 사명 그 자체가 중요합니다. 본연의 생활태도로 그 환경에 백 퍼센트 적응하여 백 퍼센트 이상의 모습을 갖추어 가지고 그들 앞에 중심적인 태도를 보일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려면 먹는 데 있어서도 남보다 잘 먹어서는 안 됩니다. 입는 데 있어서도 남보다 잘 입어서는 안 됩니다. 사는 데 있어서도 남보다 잘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 동네사람들이 전부 다 외적으로 부러워할 정도로 잘산다고 해도, 그것을 중심삼고는 그 환경에 적응할 수 없는 것입니다. 특권 계급과는 연결이 될지 모르지만 밑창에서부터 전체가 여러분에게 순응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원수는 상하고저를 막론하고 어디서나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특권계급하고만 연결되어서는 안 됩니다. 전체가 원수이기 때문에 전체에 적응할 수 있는 입장에 서서 방비태세를 갖출 수 있는 생활태도를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일 한 지역을 2년 동안 책임진다고 하면, 그 기간의 3분의 2는 그런 생활을 해야 됩니다. 그러지 않고는 그 부락, 그 환경을 수습할 수 없는 것입니다. 책임수행을 소생 장성 완성의 3단계로 나누어 놓고 볼 때, 소생 장성단계에서는, 즉 3분의 2는 불행한 자리에서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중심삼고 비판해 보게 될 때, 여러분이 뜻을 알고 60년대를 거쳐 오면서 지금까지의 생활태도와 관념을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자신이 하나의 밀사의 사명을 중심삼고 조국 광복을 위한 역군으로서 나왔느냐? 그렇지 않으면 통일교회를 중심삼고 자기 자체의 출세를 목표로 하고, 자기 권위의식을 나타내기 위해서 나왔느냐? 이것이 큰 문제입니다.
자기를 위하는 것은 당장은 좋은 것 같지만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밀사의 사명을 다하는 것 같지만 반드시 하늘주권이 그와 더불어 같이하기 때문에 망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밀사가 가는 길은 하늘주권의 직접적인 명령을 받고 가는 길이지만, 그런 행동권을 우리가 벗어나게 될 때에는 사탄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이같이 사탄의 지배를 받게 될 때는 하나님이 바라시는 조국의 권위를 가지고 나타날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그렇습니다. 일반적인 나라나 그 국민 앞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잘사는 위치를 중심삼아 가지고 자기의 권위 의식과 자기 주장을 내세우는 입장에 서게 되면 반드시 그 주위에서 권위 의식과 자기 주장을 내세우는 입장에 서게 되면 반드시 그 주위에서 치게 됩니다. 그렇지만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그들을 위하여 보조를 맞추고, 순리적인 환경에서 그들 앞에 이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그 무엇을 남겨 주게 되면, 오지 말라고 해도 따라오게 되는 것입니다. 밀사가 가야 할 길이 바로 이러한 길입니다.
그 나라와 그 동네의 풍습을 중심삼고 내가 거기에 무슨 이익을 줄것이냐? 어떻게 이익을 줄 수 있는 내가 될 것이냐? 또한 그 동네의 책임자 앞에 내가 무엇으로 이익을 줄 수 있겠느냐? 그런 부락을 지도하고 있는 책임자 앞에 제일 가까운 자로서 이익될 수 있는 어떠한 형태를 갖추어 가지고 나타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통일교회는 이런 길을 닦아 나오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지금까지 지도하는 목적도 우리가 비록 대한민국에서 반대를 받고 있지만, 무엇이든지 그 앞에 이익을 줄 수 있는 자들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반드시 이익을 줄 수 있고, 이익이 된다고 그들이 인정할 수 있는 입장에만 서게 되면 그들을 우리가 취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정말 잘못했으면 머리를 숙여야 하고, 또 잘했어도 머리를 들지 말고 가만히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그들은 자연히 우리편이 되는 것입니다. 동네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동네에 착한 사람이 있으면 누가 뭐라고 해도 동네 사람들은 그 사람 편을 드는 것입니다. 동네 사람들이 그를 인정하고 판별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사람들이 우리편이 될 수 있는 환경을 어떻게 수습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는, 우리가 밀사의 입장에 중심삼아 가지고 환경을 어떻게 개선시켜 나가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생활 태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에 대해서 좋지 않은 소문이 나게 된 것은 선생님이 잘못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전부다 배신자들로 말미암아 그렇게 되었습니다. 밀사로서 가는 그 길을 중심삼아 가지고 자기가 희생했던 것을 소문 낸 사람은 전부다 역적입니다. 역적의 반열에 동참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새로운 밀사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새로운 명령을 받아서 새로운 세계 앞에 나선 여러분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심각해져야 합니다. 위신 가지고 마을 사람들을 대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의 생사문제가 걸려 있고, 지금까지의 세계 문제가 걸려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심각한 마음을 가지고 새로운 운명과 더불어 내 기반을 닦으며 밀사의 소임을 다해야 합니다. 사탄세계에 무너질 수 없는 기반을 닦기 위해 자기처신을 잘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옛날 그대로의 습관을 지니고 새로운 명령이야 했건 말건 내 하고 싶은 대로 한다 하는 마음 가지고는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습니다.
새 옷과 헌 옷은 다릅니다. 명령과 옛날 명령은 다른 것입니다. 새로운 현재의 시점과 과거의 시점이 서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과거의 단계와 현재의 단계와는 판이하게 다른 것입니다. 이것이 발전적인 단계라는 것입니다. 새로운 자각과 새로운 기분과 새로운 결의를 가지고, 새로운 환경의 기반을 갖추지 않고는 새로운 뜻을 이룰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섭리의 단계도 1단계 2단계 3단계 이렇게 단계적으로 올라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차기 단계로 올라가기 위해서 스스로 실천할 수 있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하여 실천한 것이 환경에 적응되게 될 때 이것은 어떻게 열매로 거둘 수 있는 개체가 되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 여러분들은 아직까지 잘 모르고 있습니다. 10년 전에 들어올 때의 그 마음이나 현재의 마음이나 선생님을 대하고 하나님을 대하는 데 있어서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지금의 마음이 그때의 마음보다 못하게 되면 밀려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이 복귀해 나오시는 과정에는 하늘의 질서라든가 예의 예법이라든가 하는 모든 것이 가중되어 나오고 있습니다. 가중된 이런 시대권에 자신이 서 있는데도 불구하고 옛날에 철부지하던 그때의 마음보다 더 못한 마음을 가져서야 되겠습니까? 부락에서의 밀사의 사명과 도에서의 밀사의 사명은 다릅니다. 사정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또, 한나라의 주권을 중심삼고 밀사의 책임을 할 때에도 다른 것입니다. 과거와 같은 능력을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명령과 새로운 지시가 있게 될 때는, 그 명령에 따라 가지고 자기의 생명을 투입하여 재출발을 해야 됩니다. 과거에 했던 그 기반 가지고는 안 됩니다. 재투입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70년대는 60년대와 다릅니다. 다르기 때문에 민족과 종족을 위하여 재투입해야 됩니다. 그러기에 70년대를 중심삼고 강력히 새로운 체제를 갖추어서 명령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옛날에는 실패하고 쫓김받던 입장이었지만, 지금은 환영 받을 수 있는 입장에 있습니다. 이제부터 특사의 사명을 준행하게 되면 거기에서부터 하나님의 뜻적인 횡적인 진전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통일교회는 발전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수난의 길, 이러한 지루한 길을 내적으로 수고하며 가는 것이 밀사의 생활인 것입니다. 그런 생활은 누구나 할 수 없습니다. 날이 맑아도 걱정이요, 날이 흐려도 걱정이요, 비가 오고 눈이 오고 계절이 바뀌어도 걱정이라는 것입니다. 지나가는 동네의 개 짖는 소리 하나에도 자기의 생사문제를 중심삼고 생각해야 됩니다. 혹시라도 자기 집 문간을 찾아드는 사람이 있으면 그 한 사람을 위해서 자기 생명을 겨누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땀을 요구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처럼 모든 문제를 자기 생사문제와 결부시킨 자리에서 생각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특사나 밀사의 사명을 책임진 사람들의 내적인 생활입니다. 그 누구도 체험하지 못하는 내적인 생활인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사형을 선고받은 사형수가 죽음의 때가 언제 올지 몰라서, 온 촉각을 예리하게 곤두세우고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혹 형을 집행하기 위해 자기를 부르는 소리는 아닌가 하는 이런 위협을 느끼면서 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단지 행동을 동서남북으로 할 수 있을 뿐이지, 그 자체가 하나의 감옥생활과 마찬가지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선생님은 이러한 사명을 중심삼아 가지고 지금까지 나왔던 날들을 한시도 잊어버릴 수가 없습니다. 어디를 갈 때에도 목적지를 말해 주지 않는 것이 습관이 되었습니다. 눈치를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건 왜 그러느냐? 원수가 언제나 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싸움의 역사를 거쳐서 대한민국이 인정할 수 있는 현재의 입장까지 통일교회를 끌어올려 놓았습니다. 이것은 그냥 된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수많은 사연이 있었고 생사의 고비를 넘으면서 싸워나온 터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하늘 것으로 넘기고 넘긴 것이 쌓이고 쌓여서 지금의 실적을 이룬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될 때에 여러분의 책임과 사명은 무거운 것입니다.
지금까지 6천년 복귀섭리역사에서는 수많은 사연과 더불어 선지선열들이 희생되어 갔습니다. 이처럼 피의 제단을 연결시켜 나온 것을 이 순간에 해원성사 할 수 있느냐? 아니면 한을 더 맺히게 하느냐? 이러한 문제를 다루고 있는 심각한 자리에 우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동정을 받을 수 있는 마음자세, 하나님의 동정을 받을 수 있는 생활자세, 하나님의 동정을 받을 수 있는 공의의 자세를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밀사는 언제나 조국을 위해서 사는 사람입니다. 본연의 주권자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아버지여, 아버지만이 계시옵소서` 하는 생활과 그 자체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입장이니 내가 죽더라도 아버지와 더불어, 죽고, 몰리더라도 아버지와 더불어 몰리고, 쫓기더라도 아버지와 더불어 쫓기고, 싸우더라도 아버지와 더불어 싸운다 하는 마음이 밀사의 생활권내에서 떠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비밀이 있으면 마음을 모아 그 주권자 앞에 보고해야 할 책임을 지고 있는 사람이 밀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마음을 갖고 나가는 데에 있어서 죽음의 길을 열 고비 넘었다 할진대는 열 고비 이상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맺지 못할 때는 하나님 앞에 배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공산당들이 간첩교육을 받고 이남에 내려와서 남한의 실상을 바라보고도 왜 자수하지 못하느냐? 그 배후에는 남모르는 밀사의 생활 가운데에서 지금 자기가 살고 있는 남한의 생활보다 몇 백 배 더 치열한 어려운 고비를 극복하고 넘은 것이 있기 때문에 환경적인 현실이 문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자수하지 않고 다시 북으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시냐? 하나님은 밀사의 대왕이십니다. 조국 광복을 위하여 사탄세계에 나타나는 밀사의 대왕이요, 총사령관이십니다. 그러면 그러한 하나님께서 이 땅을 대하여 `내가 하나님이요, 내가 가르칠 수 있는 진리는 이것이다'라고 6천년 동안에 한번이라도 주장한 때가 있었느냐?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맑은 양심을 통해 지시하고 인연맺기 위해 수고해 나오셨습니다. 우리의 마음 바탕을 넓혀 가지고 일치화 될 수 있는 자유로운 세계로 끌고 나온 것이 6천년 복귀섭리역사입니다.
이러한 것을 총책임지고 이 땅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에게는 밀사의 사명을 외적으로 내적으로 연결시켜야 할 사명이 있기 때문에, 외적으로 부딪치는 원수와 같은 환경의 어려움은 내적인 면에 있어서 하나님과 일치될 수 있는 자극적인 내용이 되는 것입니다. 어려운 환경이 분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밀접한 내용으로 하나될 수 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곳에는 반드시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축복하고, 하나님이 같이 싸워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이번 수련회를 통해서 이러한 것을 실감하고, 책임을 수행하기 위해서 맹세를 하고, 삼천리 반도에 새로운 기수가 되겠다고 다짐하고 나서게 될 때 대한민국은 우리 품에 들어올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광채 나는 눈빛을 가졌다면 그 눈빛은 영광된 조국을 직시하는 눈빛으로 화해야 됩니다. 재능과 힘이 있다면 이것을 조국 광복을 위해 쓸 수 있는 용사가 되어 여러분 자체가 당당한 모습으로 조국광복을 위한 성별된 책임자를 대신한다는 신념을 느끼면서 갈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은 조국을 세우고, 조국을 빛내고, 조국과 더불어 살고, 조국 안에서 죽을 수 있는 자신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하늘 앞에 그 누구도 책임지지 못했고, 한때에 한번밖에 할 수 없는 이 엄숙한 책임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한번 듣고 열 가지를 생각하고, 한번 들은 것을 가지고 열 가지 이상과 비교하면서 나가야 합니다. 하늘의 운세를 여기에 나타내기 위해서는 자신이 천 번을 망신당한다 해도 그것을 개의치 않고, 또는 백번의 죽음길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개의치 않고 가겠다는 신념을 갖고 나가게 될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가는 길을 지켜 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선생님이 지금까지 걸어나온 생활 속에서 그런 때마다 하나님이 버리지 않으셨던 것을 체험했기 때문에 여러분도 하나님이 보호해 주실 것이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국광복을 위한 하나의 주체적인 사명자로서 자기가 맡은 한 도면 도, 일개 부락이면 부락에서 이 책임을 수행할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신념을 갖고 절대 물러서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배신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천명에 부합될 수 있는 책임을 하지 못해서도 안 됩니다. 책임의 뒤안길에 있어 가지고는 이 길을 넘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잠을 못자도 해야 되고, 먹지 못해도 해야 되고, 쫓기면서도 해야 되고, 죽더라도 결정을 내리고 죽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이러한 결정적인 사명을 수행하겠다고 새로이 결심하고 나서게 될 때, 여러분의 갈 길은 당연히 열릴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게 될 때는 선생님이 여러분을 내세워서 믿고 바라본 희망의 세계, 광명의 세계가 도리어 어둠의 세계가 될 것입니다. 선생님은 이러한 문제를 염려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앞에 이 시간 남겨 주고자 하는 것이 `밀사와 조국` 이라는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나라를 찾아오신 그 목적을 달성해 놓고 온 민족이 거국적으로 당신의 이름을 찬양하면서 영광의 한날을 만세에 자랑할 수 있는 그때가 언제일 것이냐? 이 사명을 잃어버리지 않고, 이것을 찾는 것이 내 생애의 목적이라고 다짐하면서 갈 수 있는 여러분이 될 때에 여러분의 앞날에 조국 광복의 희망의 날이 다가올 것입니다. 그렇지 못할 때는 여러분 앞에 수난의 길이 있게 됩니다. 또한 여러분이 책임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그 결과가 삼천만 민족 앞에 넘겨지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밀사는 그 모습이 잘나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또, 능력이 많아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밀사의 사명은 하나님과 심정이 일치된 입장에 서서 그 나라의 풍속을 바로 세우는 동시에 절대적으로 충성하여 그 환경을 수습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만 하는 날에는 하늘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직접적인 명령을 받은 대행자의 입장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책임 안 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밀사의 책임을 지게 된다면 그 일은 반드시 성사된다는 것을 선생님은 다년간의 체험을 통해서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이러한 생활을 해 나가기를 바라기에 오늘 `밀사와 조국` 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잠깐 말씀드렸습니다.
아버님, 어느 한때에 외국에 나가는 한 사람을 세워 놓고 하늘나라의 밀사가 되라고 분부하던 것이 생각나옵니다. 사람들은 세상의 환경에서 하늘을 잊어버리고 당신의 이름을 저버리면서 불행하게도 뜻과 멀어지는 생활을 하고 있사옵니다. 이러한 사실이 이 타락한 인간 세계에서는 너무나 개관적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저희가 하늘의 밀사의 사명을 저버릴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될까 염려되옵니다.
자기 자신 앞에 다가오는 환경의 여건을 원수같이 대할 수 있는 마음을 지니고, 명예도 권위도 모든 전체적인 위신도 완전히 저버려야 되겠습니다. 세상이 다 아는 사람이 되었다 하더라도 밀사는 미급한 사람이 될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모심을 받던 왕자라 할지라도 천민을 왕자같이 모실 수 있는 자세를 갖추지 않고는 밀사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버님께서 나를 섬기라 하신 그 말씀의 배후에 이러한 엄청난 뜻이 있는 것을 저희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의 이면에는 그러한 애절한 사연이 있었던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버지, 남한 각지에서 수고하던 당신의 아들딸들이 여기에 왔습니다. 이들이 누구를 위하여 수고하였습니까? 아버지를 위해서였습니까? 스승을 위해서였습니까? 대한민국을 위해서였습니까? 누구를 위해서였습니까? 누구를 위해서 눈물짓고, 누구를 위해서 그 고생을 하였습니까? 혹 자기를 위해 눈물 흘린 어리석은 자가 있었습니까? 자기의 출세의 방편으로 길을 가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불원한 장래에 반드시 실패한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사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자신이 망할 수 있는 자리에서도 조국을 생각하면서 조국의 주체 되시는 아버지와 더불어 책임져 나오면서 `제가 이런 경계선을 넘사오니, 아버지여, 승리의 흔적을 여기에 남기시옵소서'라고 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모든 민족과 심정을 통하지 못하고 연결짓지 못하는 이런 애절한 자리에서도 이것을 극복하고 민족을 위해서 봉사할 수 있는 아들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가 그러한 자리에 서게 될 때, 그 누구도 받을 수 없는 전체의 심정을 몽땅 인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와 같은 내적인 인연을 통해서만이 아버지 앞에 축복을 받고, 보호를 받고,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입장에 설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자기가 그런 자리에 섰다 할지라도 선조의 역사적인 공적의 터전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자리에 섰다는 것을 아는 저희들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선조가 그러한 사명을 못 했거든 저희들이 대신 천만 배 그 사명을 감당하겠다고 몸부림칠 줄 아는 당신의 아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길,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제 1960년대는 다 지나갔습니다. 그 기간은 원한의 기간이었사옵고,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사연들이 너무나 많았사옵니다. 60년대를 보내는 아버님께서 얼마나 서러워하셨다는 것을 똑똑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60년대를 보내고 이제 70년대를 맞이했사오니, 아버지여, 정월부터 저희들이 계획한 모든 일에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께서 저희들 앞에 각자의 사명을 남겨 주신 70년대인 것을 명심하면서, 이제 저희들이 하늘의 권위를 들고 나왔지만 하늘의 위신을 세우지 못하는 자리에 설까봐 염려하시는 아버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특사라는 승리의 이름을 지니고 보낼 수 있는 한 시간을 맞는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기쁘시겠습니까? 이제 밀사시대의 사명을 종결짓고 승리의 환경을 만들어 특사의 사명을 갖추어 아버님 앞에 소명을 받아야겠습니다. 밀사의 사명을 온전히 수행하여 아버님 앞에 특사의 사명을 받게 되면 그 나라의 누구도 그를 막아내지 못하고, 그 앞에 어느 누구도 대항할 수 없다는 것을 저희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버지, 그럴 수 있는 사람을 얼마나 고대하셨습니까? 대한민국에서 통일제단이 나가는 길 앞에 있어서 지금까지 밀사의 진로를 개척해 나오는 사랑하는 아들의 사정을 아시는 아버지여, 당신께서 그동안 얼마나 초조히 마음졸여 오셨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습니다.
아버님, 저희는 생명을 걸고 생각지 않을 수 없는 때가 많았습니다. 자연의 미묘함을 바라보면서 네가 나의 말을 들을는지 모른다는 그런 마음으로 탕감의 길을 거쳐 왔습니다. 이러한 것을 생각하게 될 때, 나보다도 역사시대에 아버님이 위신을 세우지 못하고 그와 같은 자리에서 얼마나 수고하셨는가를 알게 되옵니다. 백년이 못 되는 이 생애를 역사시대를 거쳐온 아버님의 희생에 비할 바가 못 된다는 것을 알게 되옵니다. 저희의 행복의 여건이 아무리 높다 하고, 일상생활 전체가 밀사의 사명으로 시작하여 절대적인 자기의 희생으로 끝나더라도 응당 그래야 할 자신인 것을 알고 아버지 앞에 더욱더 충효의 도리를 다하겠다고 몸부림치며 마음 졸일 줄 아는 당신의 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먹는 것도 이것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하늘 앞에 원수의 조건을 남길까봐 염려하고, 호의호식을 못 해도 아버지의 일을 생각하며 걱정하지 말라고 기도하는 모습이 있다면 아버님께서 보시기에 얼마나 얼마나 사랑스럽겠습니까? 그렇지만 사랑할 수 없는 밀사의 행로권내에 있는 아들인 연고로 그 사랑을 천상세계에서는 드높이 나타내어도 인간 세상에서는 감출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지금까지 통일교회가 걸어온 길이 그러하였습니다. 아버지, 당신의 수고하신 공적으로 말미암아 대한민국에 사랑하는 아들을 내세우고 싶은 때가 오거든, 과거에 내가 책임 못함으로 말미암아 슬퍼하시던 아버지의 마음을 깊이 되새겨 마음 자체에서 한이 될 수 있는 요건을 완전히 뽑아버리고 아버님을 모시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늘에서 살아 나온 사나이의 모습도 처량했지만, 아버님이 그토록 고생하실 때 아버님을 위하여 충효의 책임을 못다 한 것을 다시 한번 가책 받을 수 있는 이 시간이 되어야겠습니다. 역사적인 이 시간이 있기까지 아버님께서 개척해 주신 것을 생각해 볼 때, 오늘 우리가 서 있는 이 자리는 그 누구도 갖지 못한 복된 은사의 터전인 것을 알게 되옵니다.
아버지, 60년대까지 얼마나 수고하셨습니까? 이제 새로운 70년대를 맞이하여 새로운 자녀들에게 새로운 계획을 지시하여 민족을 다시 알고, 교회를 다시 알고, 스승을 다시 알고, 아버지를 다시 알고, 앞으로 저희들이 찾아 세워야 할 책임을 다시 알아야 할 이 시간이옵니다. 이 기간을 통하여서 자기를 다시 한번 반성해 보아야 되겠습니다. 책임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자신을 완전히 비판할 수 있는 한 시간을 갖지 않고는 내일의 새로운 결의를 다짐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시옵소서.
아버님, 사랑하는 아들들에게 밀사와 조국이라는 내용을 중심삼고 말씀을 전하였사옵니다. 아버지가 엮어 나오신 이 모든 역사적인 전통 앞에서 저희들은 머리 숙여야 되겠습니다. 원수 앞에 화살을 맞아 가면서라도 아버지를 붙들고 나아가 사명을 인계해야 하는 수고의 길이 있을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선조들의 아픔을 느끼고 자기의 후계자를 염려하면서 갈 줄 아는, 그런 아들이 되겠다고 몸부림칠 수 있는 아들들이 여기에 있다면, 세상은 망하더라도 저희들은 망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밀사의 사명과 책임을 인계받아 가지고 국가와 세계를 향하여 그 책임을 다할 수 있는 아들이 되겠다고 다시 한번 아버지 앞에 깊이 언약하는 이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번 기회로 말미암아 각자의 가슴 가슴에 새로운 결의를 하고 돌아갈 수 있게 주시옵고, 아버지의 인정을 받고 돌아가는 아들들이 되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제 시종일관 저희들은 이 심정에 사무쳐서 살 수 있는 무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더라도 저희들은 스스로 안팎을 갖추기에 바쁜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어떠한 시간이라도 그것이 추억에 남을 수 있는 시간이 되게끔 하여 주시옵고, 그것이 70년대를 움직일 수 있는 하나의 모체가 되고 동기가 될 수 있는 이번 기간이 되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여기에서 동기가 된 이 모든 결의가 70년대의 결과가 되어져서 민족 해방을 촉구하고도 남음이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시아의 새로운 등불로서 세계 만방에까지 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하나의 기원을 이번 기회에 갖추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지방에 각각 흩어져 있다가 오래간만에 다시 만났다고 마냥 흘러가는 잡담만 하지 말고 묵묵히 그 스스로의 내심과 더불어, 속사람과 더불어 인연 맺게 하시옵소서. 수많은 사람들의 말을 듣고 그들은 어떻게 살아왔으며 그들의 내면은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고, 이번 기회에 자기의 갈 길을 바로잡을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아버지 앞에 인연 맺고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는 당신의 아들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럴 수 있는 아들들을 삼천만 민족이 바라고 있사옵니다. (이하는 녹음이 안 되어 있음)
'승부' 하면 경기가 연상됩니다. 승리는 경기라는 승패의 결정과정을 거쳐야 거두어집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신앙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승리를 목표로 하여 경기장에 나서서 경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에서 경기라 함은 어떤 체육 경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일상생활을 중심삼고, 혹은 자기의 생애나 국가의 역사를 중심삼고 경기장에 나서서 하는 경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선진국들은 전체의 국민들이 한데 뭉쳐 다른 나라 국민들보다 많은 노력을 했기 때문에 선진국가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대한민국이 왜 후진국가가 되었느냐? 대한민국이 지금 후진국가가 된 것은 국민전체가 여러 나라와 경쟁하는 역사과정에서 등한히 했고 노력을 덜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연적으로 후진국가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두고 볼 때 역사나 세계의 운세는 이런 과정을 중심삼고 진행되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범위가 큰 세계를 떠나 가지고 우리 개체로 돌아와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비판해 볼 때, 나는 지금 어떠한 입장에 서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여러분은 전부다 하나님과 인간, 다시 말하면 아버지와 나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하여 복귀의 도상에서 경주하는 입장에 서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이 `우리는 경주장에 선 사람들이요, 하나의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는 사람들` 이라고 말했듯이, 우리도 하나의 목표를 향하여 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경기 중의 하나가 마라톤입니다. 모든 국가는 마라톤 대회에서 일등을 하고, 신기록을 내는 것을 최고의 영광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것은 왜 그러느냐? 마라톤은 보통 사람들은 완주할 수 없는 경기이기 때문입니다. 마라톤의 거리는 굉장히 멉니다. 우승하려면 그 먼 거리를 극복해야 되는 것입니다. 또, 마라톤 대회에서는 우승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새로운 기록을 어떻게 내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승만 해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지난 대회만큼의 기록은 못 내더라도 우승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라톤대회에서 모든 국가들이 바라는 것은 우승뿐만 아니라 새로운 기록을 어떻게 내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종전의 기록을 깨고 신기록을 세우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지금까지 마라톤 대회에 참석했던 모든 선수들이 노력한 것 이상의 노력을 해야 하고 어려움을 극복해야 합니다. 이런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은 종전의 기록을 깰 수 없습니다. 설사 우승은 했다 하더라도 신기록은 세울 수 없는 것입니다. 또, 아무리 열심히 노력을 했다 하더라도 작전을 잘못하면 신기록을 낼 수 없습니다. 신기록은 내려면 작전을 잘해야 합니다. 마라톤에서 작전을 잘 하는 것이란 뛰는 사람 스스로가 자기 자신을 잘 아는 것입니다. 달린 시간과 거리에 따라서 변화되는 몸의 상태를 스스로가 잘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즉, 일정한 시간과 거리를 두고 변화되는 자기 몸의 체력과 기량을 잘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어느 수준 이상 무리했다가는 정상적인 몸의 상태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백 퍼센트 자기 체력에 맞게 자신의 몸을 조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기록을 낼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자기가 잘 뛴다고 해서 맨 처음부터 일등으로 달려서도 안 됩니다. 정해진 거리에 적응할 수 있도록 자신을 조정해야 합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리하여 최후의 결승점에 가까울 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처음의 속도를 얼마만큼 지탱할 것인가, 최후의 결승점을 돌파할 수 있는 여력을 어떻게 남기고 달리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을 조정하지 못하면 우승을 할 수도 없거니와, 설사 우승을 한다 하더라도 신기록을 낼 수 없는 것입니다.
우승은 순간에 결정되는 것입니다. 결승점에 골인하는 그 순간은 1분, 아니 1초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짧은 시간에 우승은 결정되는 것입니다. 백리나 되는 거리를 같이 달려 왔을지라도, 일등과 이등으로 나뉘는 것은 불과 1미터 안팎에서도 결정되는 것입니다. 아니 10센티미터, 1센티미터, 0.5밀리미터 차이에 의해서도 우승은 결정되는 것입니다. 신기록이 결정되는 것은 단축한 시간이 길고 짧음에 있지 않습니다. 1초를 단축했더라도 신기록은 신기록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역사적인 기록은 아주 짧은 거리에 의해서도 깨어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가는 복귀의 도상에서도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통일교회의 중심 목표는 물론 세계복귀입니다. 그 목표를 향하여 달려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달리는 데에는 무엇을 중심하여 달리느냐? 지금까지의 종교, 즉 1960년 이전까지의 종교는 개인을 중심하여 달렸습니다. 그러나 통일교회는 복귀섭리의 목적을 중심삼고 가정적인 경기를 해나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통일교회는 가정적인 경주권내에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통일교회와 이전의 종교와 다른 점입니다.
지금까지의 섭리역사노정을 살펴보면 잃어버린 아담 하나를 찾기 위해서 하나님이 많은 수고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담 하나를 찾았다고 해서 승리의 기록을 낼 수 있느냐? 아닙니다. 누가 그것을 증거하느냐? 예수님입니다. 예수는 이 땅에 와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책임을 다하겠다는 입장에 섰지만, 그것만 가지고 복귀섭리 도상에서 승리하여 새로운 기록을 세울 수 있었느냐?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아담이 우수하다 하더라도 아담 혼자서는 기록을 깰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왔다 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편에서는 신기록을 세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실패의 기록을 세우게 된 것입니다. 복귀섭리의 도상에 2천년의 간격이 생겼습니다. 승리자로서 새로운 기록을 낸 것이 아니라 패배자로서의 기록만 세운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통일교회가 신기록을 내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먼저 하나의 남성과 하나의 여성을 중심삼아 가지고 복귀섭리의 공식을 통한 하나의 가정을 세워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목표를 향해 나아가 우승과 함께 좋은 기록을 내야 합니다. 그래야만 거기에서부터 새로운 기원이 이룩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엄청난 목표를 중심삼고 가는 것입니다.
오늘 수련이 끝나면 여러분은 동서남북으로 흩어져 갈 것입니다. 전부 다 흩어져 갈 것입니다. 거기에는 응원하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응원은 고사하고 반대와 핍박 등 별의별 일이 다 벌어질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여러분은 경기장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이 인식을 잊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달리는 사람이다, 가야 할 사람이다, 목표를 향하여 이 시간도 뛰어야 한다는 것을 잊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이 입장과 처지가 달라서 전부 다 산지사방하게 되더라도 단 하나 변함없이 간직해야 할 것은 `나는 경주하는 사람이다` 라는 생각입니다. 여러분은 목표를 중심삼고 달리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달릴 때는 천지가 주시하며 여러분을 소리없이 응원하고 있습니다. 이런 우주적인 경기장에서 여러분은 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달리는 데는 여러분 혼자만 달려서는 안됩니다. 개인적으로 혼자만 뛰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도 이런 달리기는 계속 있어 왔지만 아직까지는 국가적인 대회가 되지 못했습니다. 부락이나 면에서만 왔다갔다하는 조그마한 경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 경기는 도(道)적인 경기나 국가적인 경기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부락이나 면의 대회에서 주름을 잡고 기록을 세웠다 하더라도 국가적인 대회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뛰긴 뛰었어도 그것은 그 부락이나 면에 국한되는 것입니다. 그 대회는 도민들도 주시하지 않았고 국민들도 주시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러니 한 교회나 한 학교를 중심삼고 이루어진 경기에서 나온 신기록만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국가나 혹은 세계적인 대회에서 경주하여 승리를 하고 기록을 내야만 그 기록이 세계적인 신기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통일교회가 경주하자는 대회는 어떠한 대회냐? 이 대회는 대회 중에서도 엄청난 대회입니다. 이 대회에는 과거에 왔다 갔던 조상들도 동원되고, 현재의 인류도 동원되면 앞으로 올 수많은 후손들도 동원되는 대회입니다. 이렇게 3시대가 결속되어 동원되는 초점상에서 여러분은 지금 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문제는 달리는 여러분들의 자세입니다.
여기에서부터 여러분에게 문제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달리는 데에는 무조건 달린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목적지를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목적하는 그곳이 어디이며, 그 거리가 얼마인가를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세가 아무리 좋다고 해도 달려야 하는 코스를 몰라서는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코스는 복귀의 원칙으로 되어 있으니 그것을 중심삼고 뛰어야 됩니다.
지금 이 자리에는 한 70여 명이 있는데, 여러분들이 달리는 데에는 모두가 일등을 할 수는 없습니다. 이 가운데는 한 명의 우승자가 있을 뿐입니다. 누가 일등을 하느냐 하는 문제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무엇을 바라느냐? 하나님은 이등을 바라보시지 않습니다. 일등을 바라보십니다. 많은 수(數)의 사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을 바라보십니다. 그래서 그 개체가 최선을 다해서 달리게 되면 하늘과 땅은 하나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그 거리가 얼마나 되느냐에 따라서 문제가 벌어집니다. 오늘날까지 인간들이 복귀섭리노정에서 국가면 국가를 중심삼아 가지고 밤낮으로 그 한날을 소원하고 노력해 나왔지만, 어떤 기준에서 소원하고 노력하였느냐가 중요한 문제인 것입니다. 국가를 복귀하기 위해서는 먼저 개인이 복귀되어야 하고, 나아가 가정 종족 민족 국가로 복귀돼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각 단계에 따라 그 범위가 커지면 커질수록 그에 대한 관심도도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예를 들어 군(郡)을 대표하는 선수가 아무리 좋은 기록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도(道)를 대표하는 선수 앞에서는 인정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의 기록이 아무리 좋다 해도 도를 대표하는 선수에게 인정 받으려면 다시 시합을 해서 이겨야 됩니다. 또, 도(道)선수의 기록이 국가 선수의 기록보다 월등히 좋다 하더라도 그 기록이 국가적으로 공인된 대회에서의 기록이 아니면 그를 대한민국의 신기록 보유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국가적인 경기에서 자신이 갖고 있는 기록보다도 몇 초 떨어졌다 할지라도, 국가 기준의 기록을 깼다면 그는 신기록을 세운 영광을 차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계 기록을 깨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한민국내에서 세계적인 신기록을 세웠다 해도 그것은 인정을 받지 못하지만 세계적인 경기에 참여하여서는 기록을 세우면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개인적으로는 아무리 잘 뛰었다 하더라도 이제 무대가 넓어졌기에 넓인 무대에서 뛰어야 합니다. 면을 대표하여 뛰는 것과 군을 대표하여 뛰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또 군에서 뛰는 것과 도에서 뛰는 것은 다르며, 도에서 뛰는 것과 나라에서 뛰는 것은 다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때를 잘 맞춰야 됩니다. 여러분은 그때를 중심삼고 책임을 지고 경주장에 나선 선수라는 것을 자각해야 됩니다. 여기에서 달리는 데에는 때가 다른 동시에 환경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달라진 환경과 자신의 기량을 잘 조화시켜서 가는 도중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현상을 잘 수용해야 됩니다. 원수가 나타날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달리는 데에는 누가 응원해 주느냐? 안 해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응원단이 없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원수들이 달리는 여러분을 꺾고 넘기 위해 별의별 놀음을 다할 것이니, 이것이 문제입니다. 보이지 않는 귀퉁이에 숨어서 화살을 쏘는 녀석도 있을 것이고, 담벽을 타고 숨어 있다가 다리를 꺾고 놓으려고 하는 녀석도 있을 것입니다. 별의별 녀석이 다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험한 환경에서 여러분은 그것을 직시하여 침범 당하지 말아야 합니다. 원수에게 걸려 넘어지면 큰일이라는 생각을 가지고서 험난한 환경에 대비하여 자기 자신을 방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응원자는 전부다 자기편의 사람들만 주시합니다.
이런 입장에서 오늘날 우리는 세계복귀라는 간판을 내 걸었습니다. 그러면 세계복귀의 시대를 맞이한 여러분에게 있어서 제일 큰 문제는 무엇이냐? 세계를 복귀하려면 지금까지와는 달리 개인적으로 달려서 세웠던 기록 가지고는 안 됩니다. 종족적으로 세웠던 기록으로도 안 되고, 민족적으로 세웠던 기록을 가지고도 안 됩니다. 세계적인 무대에 등장하여 신기록을 세울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최상의 기준에서 복귀섭리를 해 나오셨습니다. 사탄세계의 기록을 깨는 입장에 서지 못하면 인류를 복귀해 나오신 하나님의 권위와 위신과 체면이 서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입장입니다. 그러므로 뜻을 앞세워 나오는 우리의 사명은 복귀의 도상에서 사탄세계의 모든 것을 굴복시켜서 최상의 영광과 권위를 하나님께 돌려드리고, 세워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지금 세계적인 경기장에 나선 것입니다.
그러면 나서는 데에는 그 나라의 백성과 모든 가정이 전부다 나서야 되느냐? 아닙니다. 국가면 국가를 대표해서 한 사람만 내세우면 되는 것입니다. 신기록을 세울 수 있는 한 사람을 대표로 내보내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섭리과정에 있어서 여러분은 여러분의 가정을 중심삼고 새로운 가정의 기원을 만들어 새로운 생명을 출발시켜야 합니다. 새로운 생명이 출발하지 않으면 새로운 이상이 출발할 수 없고, 새로운 사랑이 출발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기준을 중심삼고 볼 때, 그 출발점이 어디가 되어야 하느냐를 알아야 합니다. 여기에서의 승리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그 승리가 사탄세계에 하나라도 걸리는 승리가 되어 가지고는 하나님의 권위와 체면을 세워서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승리는 역사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가정적으로 달려나가고 있습니다. 달려나가는 데에는 천지의 섭리의 뜻에 관계되어 있는 수많은 배후의 인연과 하나님을 중심삼은 심정을 터로 하여 달려나가야 합니다. 달리는 경기 도중에는 아무리 뒤떨어졌다 하더라도 최후의 결승점에서는 한 발이라도 앞서서 들어가야 됩니다. 그냥 앞서는 것만이 아니라 신기록을 낼 수 있게 앞서야 합니다. 이래 가지고 모이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귀섭리의 노정입니다.
여러분이 달려가는 이 길은 1년을 중심삼고 뛰는 것이냐? 아닙니다. 1대(代)에서 안 되면 2대(二代), 2대(二代)에서 안 되면 3대(三代)에서 하는 한이 있더라도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복귀섭리는 지금까지 아담, 예수, 재림주의 3대를 거쳐서 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으로 3대를 거쳤던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는 몇 대째에 있느냐? 마지막 3대째에 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3대째이면 골인할 수 있는 결승점이 얼마만큼 남아 있느냐? 3분의 1을 지났느냐, 5분의 4를 지났느냐? 이것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있는 저력과 여력을 총동원해서 최후의 결승점을 향하여 달려가야 합니다.
그러면 통일교회가 최후의 결승점을 향하여 총진격해야 할 때는 언제냐? 1970년도부터 1972년까지입니다. 날짜로 하면 천일 정도 되는데, 이 3년동안 얼마나 열심히 뛰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나는 져도 괜찮아, 일등하여 상을 받는 것이나 신기록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어. 지쳤으니 잠깐 쉬었다 가지, 꼴찌를 해도 가기만 하면 됐지` 하는 식의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이런 처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가담한 이 길에는 여러분의 조상들이 가담하여 응원할 것입니다. 이 길은 김씨면 김씨 문중이 언젠가는 반드시 가야 할 운명의 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나중에 이겼다 하게 되면 김씨면 김씨 종족이 전부 머리를 수그리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어차피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되게끔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과거의 선조는 물론이요, 씨족과 종족이 동원되게 되어 있으며 또한 미래의 후손도 동원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이 달리는 것이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그것이 문제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세계복귀라는 목표를 향하여 달리는 통일교회에 있어서 김이면 김, 박이면 박, 문이면 문씨를 대표한 사람들이 와서 뛰는 데는 언제나 문제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종족을 중심삼으면 언제나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여러분은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 종족 중에서 내가 몇째로 뺏김을 당하는 사람이냐` 하는 것을….
여러분은 1등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면 관심이 누구에게 쏠리겠습니까? 사람들은 우리 종족 가운데 `그 사람! ` 할 것입니다. 또 `우리 종족 가운데에서 빼앗긴 사람들이 많지만 그 가운데서 누구는 그렇지 않다. 1960년대에는 누구고, 1970년대에는 누구다'라고 할 것입니다. 이렇듯 여러분이 종족의 대표자가 되어야 과거 현재 미래가 연결되는 소망을 중심삼고 `야 있긴 있구나. 이 경주장에 우리 종씨가 등장했구만` 할 것입니다.
우리는 현재 대한민국을 중심삼고 신기록을 세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역사 이래 통일교회와 같은 모임이 있었느냐? 또, 국가에서 문제가 되는 그러한 교단이 있었느냐? 없었습니다. 나라를 사랑하고 국가를 위하는 대에 신기록을 세운 단체는 없었습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데 있어서 신기록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대통령의 자리를 꿈도 꾸지 말아야 됩니다. 국가 앞에, 세계 앞에 자랑하는 것을 꿈도 꾸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세계의 신기록을 깨고도 남는 실력을 가져서 자타가 공인하는 권위를 가진 사람이 되었을 때는 세계 인류가 굴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대한민국이라는 무대에서 10여년쯤 달려 왔습니다. 지금까지 달린 것을 교훈으로 삼아서 우리는 이제 아시아로 달려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세계의 무대로 달려야 하는 것입니다.
세계의 여러 나라는 국가마다 민족적인 배경이 다르고 역사적인 배경이 다릅니다. 또한 민족에 대한 관념이 다릅니다. 이처럼 제각기 다른 입장에 있는 국가와 국가가 서로 겨루는 것입니다.
이제 통일교회 내에서 올림픽이 열린다면 일본 사람, 미국 사람은 물론 포르투갈 사람도 참가할 것입니다. 우리의 선교본부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경기의 규모는 점점 더 커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문제의 초점이 되는 것이 무엇이냐? 최고의 기록자가 누구냐는 것입니다.
그 기록은 그리스의 한 병사가 마라톤 평야의 싸움에서 이겼다는 것을 전하기 위해 죽음을 걸고 달려와서 `승리했다'는 한마디의 말을 남기고 죽은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그때 목숨을 걸고 달려서 세웠던 기록과 요즘 선수들이 세운 기록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는 세계 역사에 마라톤 출발의 깃발을 든 것입니다. 비록 승리했다는 말을 남기고 쓰러져 죽었더라도 그가 세운 기록은 영원한 것입니다.
대한민국도 그와 같은 입장에 설 수 있습니다. 올림픽 대회에서 새로운 기원을 이룩할 수 있는 입장에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뜻이 이루어져서 우리가 세계 무대에 나가서 달렸으면 좋겠다고 하는데 그렇게 쉽게는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신기원이라는 말은 새로운 기원이라는 뜻입니다. 신기록의 기원을 중심삼고 어떤 나라면 그 나라에서 싸워 나오던 역사가 올림픽 대회의 역사와 통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올림픽 대회를 중심삼고 쌓아진 전통을 상속받고 또 상속시켜 주는 그런 역사의 중심자리를 이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 통일교회가 하자는 것이요, 또 그러한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활동하고 있는 것은 모두가 좋은 기록을 낼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하여 연구한 그 길, 그 코오스로 달리자는 것입니다. 그것이 국가에 영향을 미치고 아시아, 더 나아가 세계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어야 됩니다.
이제부터 결승점이 다가올 것입니다. 그것을 통일교회 원리로 보면, 가정복귀라고 하는 것입니다. 가정복귀란 사위기대가 이루어진 가정으로 완성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국가 기준에서도 사위기대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러면 사위기대를 이루는 데 있어서 어느 나라가 일등할 가망성이 있는 역사를 가지고 있느냐? 이것이 세계의 관심사입니다. 그런데 이 일이 대한민국을 중심삼고 벌어졌던 것입니다.
세계를 중심삼고 볼 때 대한민국은 아담 국가요, 일본은 해와 국가입니다. 그리고 미국과 독일은 천사장 국가입니다. 독일은 가인형으로 타락한 천사장 국가요, 미국은 아벨형으로 복귀된 천사장 국가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아벨형 국가와 가인형 국가를 하나되게 할 수 있을 것이냐? 이런 내용을 중심삼고 달리는 국가는 복귀되는 것입니다.
앞으로 아시아는 어떻게 될 것인가? 새로운 문화를 이루어 천국을 이룩해야 됩니다. 그렇게 하려면 한국과 일본과 중공이 연결되어야 합니다. 한국을 중심삼아 가지고 이루어야 합니다.
그러면 대한민국은 어떻게 해야 되느냐? 국가 기준을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종족과 민족적인 기준을 이루어야 합니다. 여기에는 반드시 어느 단체면 단체가, 혹은 어떤 종파면 종파가 문제가 되기 때문에 통일교회는 수많은 종파분쟁을 수습해야 합니다. 또한 어떻게 해서든지 사위기대 기준을 세워야 합니다. 그 기반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되겠기에 그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작전으로서 선생님은 초교파 활동을 해 나온 것입니다. 이것을 동기로 삼아서 모든 종교가 어떻게 하면 평면적으로 하나의 사위기대 형태를 갖출 것인가 하는 생각을 중심으로 싸워 나왔습니다. 그렇게 되면 나라를 복귀하고 공산당을 때려잡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계로 가는 길을 닦자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그러한 기준을 중심삼고 애국애족을 해야 합니다. 거기에서도 신기록을 내야 합니다. 여러분은 좋은 기록을 내서 앞으로 국가적으로나 세계적으로나 영예로운 자리에 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여러분들은 영예를 가진 권위자로서 국가면 국가 앞에, 그리고 세계면 세계의 인류에게 가르쳐 줄 수 있는 자리에 섰느냐?뛰려면 이렇게 뛰어야 된다고 할 수 있고, 그 의견에 아무도 이의를 내세울 수 없는 실력 기반을 갖추었느냐? 신기록을 가진 사람으로서 그 분야에 있어서 국가면 국가 앞에 세계면 세계 앞에서 이 분야는 나 이외에는 다른 사람이 책임질 수 없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절대적인 자리에 설 수 있어야 합니다. 절대적이고 권위적인 자리에서 책임지고 지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오늘날 통일교회가 그렇게 되어 있느냐? 혹은 지방의 책임자가 그렇게 되어 있느냐? 아직까지 선발되지 않았지만 앞으로 국가적인 선수로 발굴될 수 있는 자세와 내용을 갖추었느냐는 것입니다. 어차피 여러분들은 그것을 위해 달려가야 됩니다. 앞으로는 국가를 중심삼고 영예의 한때가 반드시 통일교회에 찾아올 것입니다. 그때가 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해야 되느냐?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과거는 이렇게 했으니, 현재는 이렇게 하고, 미래는 이렇게 해야 한다고 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책임 못한 사람은 영광의 시대가 온다 해도 그 영광과는 하등의 관계가없는 사람이 됩니다. 오히려 그 영광 앞에 부끄럽고 자신의 창피가 드러나 고개 숙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승을 해서 모든 사람에게 추앙의 대상이 되어야지 꼴찌를 하여 부끄러운 입장에 서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아이구, 저 사람은 1등을 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꼴찌 했다` 고 하는 놀림을 받게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모두가 그럴 수 있는 소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통일교회의 뜻을 따라가는 사람들 중에는 1등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요, 꼴찌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요, 낙오자도 있을 것입니다. 통일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내에서도 차이가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 경기장에서 벌어지는 현상이 여러분의 가정이나 혹은 활동하는 터전에서도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국가면 국가, 단체면 단체에서 잘 달리는 선수를 어떻게 만드느냐 하는 것입니다. 즉, 어떻게 교육을 시키고 어떻게 훈련을 시켜 우수한 선수로 만드느냐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 사명이 여러분에게 달려 있는 것입니다.
선수들을 교육시키고 훈련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여러분 자신들이 그만한 실력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지도를 받는 후배들이 여러분의 기록을 능가하도록 훈련시킬 수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통일교회의 뜻을 중심삼은 마라톤 경기에서 국가를 대표하여 세계에 내세울 수 있는 사람을 키워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을 길러낸 지도자는 그와 더불어 역사적으로 남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살고 있는 군을 중심삼고 보더라도 역사적으로 그 군을 움직이던 사람은 수없이 많았지만 그 군을 대표하여 나라 앞에 충성하는 신기록을 낸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그러한 사람을 배출하게 된다면 죽더라도 그러한 기록을 내게 한 지도자로서 역사에 남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세계적인 무대를 중심삼고 달려야 할 때입니다. 통일교회의 문선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선생님은 달려가는 데 있어서 누구의 신세를 지며 가겠다는 생각은 없습니다. 선수들이 피곤해하면 권고하여 끌고 갈 수는 있어도, 선수들에게는 신세지지 않습니다. 달리는 데에는 경주자로서 촌음을 아끼고 온갖 정성을 투입해서 달리고 있습니다. 한 발자국도 늦추지 않고 밤이나 낮이나 쉴새 없이 가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최후로 골인하는 그때에 있어서는 선생님이 맨 먼저 승리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세상에 없었던 신기록을 세우기 위해서는 국가와 세계 앞에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여러분들은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복귀섭리 과정에서 나로 말미암아 빚어진 승리를 어떻게 만드느냐, 혹은 세계인류와 후손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기록적인 기준을 어떻게 세우느냐는 것이 중요합니다. 즉, 지금까지의 역사과정의 기록, 앞으로 세워질 신기록보다 더 나은 기록을 만들어 내야 된다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신기록만 결정이 된다면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다 이 기준을 중심삼고 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선수들이 이것을 중심으로 움직이게 되고 또한 이것을 중심삼고 통일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준을 갖고 나타난 그 자체는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이어집니다. 그러한 신기록의 기원이 바로 통일교회에서 말하는 참부모입니다.
참부모의 영예를 차지하려면 심정의 기록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 기록은 절대적이어야 하기에 과거에도 없었고 현재에도 없고 미래에도 없어야 됩니다. 다시 말하면 상대적 기준과는 비교될 수가 없는 절대적인 기준이 참부모의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참부모는 둘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하늘의 부모인 하나님과 땅의 부모와는 어떻게 되어야 하겠는가? 하나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동적으로 하나되어야지 둘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참' 자(字)를 붙인 부모는 하나뿐입니다. 하늘과 땅이 둘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늘과 땅의 부모가 어떻게 하나되느냐? 이것을 해결하려면 하늘을 중심삼고 관계 맺어야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하나님과 인간은 하나되어야 됩니다. 이처럼 내적인 부모와 외적인 부모가 하나되어야 비로소 참부모가 규정되는 것입니다. 참부모는 절대적인 기준의 자리이기 때문에 참부모를 중심한 자리에는 우주사적인 신기록이 영원히 따릅니다. 어느 누구도 그 기록을 따를 수가 없습니다. 참부모의 가르침은 절대적입니다. 그러기에 참부모의 가르침을 받아서 새로운 기록을 내고자 하는 사람은 참부모에게 절대 순종하고, 절대 복종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다시 사는 권내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절대 순종하고 절대 복종하는 자리에서 비로소 통일의 역사가 벌어지고, 하나의 세계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자리는 어떤 상대와 싸우는 것을 초월한 자리, 즉 경기를 초월한 자리입니다. 경기를 해서 신기록을 내겠다는 그런 상대적인 자리가 아니라 완전히 정착한 안전한 자리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나빠하는 자리가 아니라 누구나 다 좋아하고 따르는 자리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 통일교회는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는 데에는 참부모를 중심삼고 달려가야 합니다. 내가 발견한 위대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지금까지 수천년의 역사를 통해서 찾지 못했던 참부모의 자리를 찾았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은 그것을 제일로 생각하고 하루에도 열 번씩 축하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참부모의 신기록을 상속받으려면 선생님한테 와서 인계 받아야 합니다. 더 이상의 기록을 가진 사람이 나오기 전에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내용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만일 여러분의 가정이라는 경기장에서 문제가 생기면 전부다 그 기준에서 해결해야 합니다. 그 기준은 과거와도 통하고 현재와도 통하고 미래와도 통합니다.
신기록이라는 것은 영원으로부터 영원까지 통하는 것입니다. 그 기준을 중심삼고 반드시 상대적 관계가 맺어져야 합니다. 달리는 경기자들은 그 기준을 중심삼고 달러야 합니다. 지금까지 인간들은 이상을 말하게 되면 앞만을 향해 뛰어가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상은 앞날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계를 다 돌고 돌아서라도 선생님에게 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출발도 거기요, 목적도 거기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타락한 세계는 미래의 소망을 중심삼고 가는 길이었지만 통일교회 시대는 신기록을 중심삼고 나가는 시대이기 때문에 출발도 그 점이요. 목적도 그 점이니 세계가 그곳으로 달려가야 하는 것입니다. 내용면에 있어서도 그것은 지금까지 세상에 있었던 그런 경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심정의 세계에서 부자의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경기 중에는 그 이상의 것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누구나 이 원칙을 알게 되면 통일이 안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길을 달리는 데는 그 목적이 뚜렷해야 합니다. 달리는 데는 개인의 목적을 중심삼고 달릴 것이 아니라 국가의 목적을 중심삼고 달려야 합니다. 그리고 갔다가 돌아와야 합니다. 국가로부터 출발해 가지고 돌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기정사실입니다. 섭리과정에 있어서 여러분은 지금 돌아오는 코스, 즉 복귀의 코스를 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달리고 있는 이 길은 보통 코스가 아니라 복귀의 코스라는 것입니다. 복귀의 코스를 달리는 여러분은 나름대로 모두가 중요한 사람들입니다. 여기에서 일등한 사람은 절대적인 챔피언이 되는 동시에 상대적으로도 책임을 지는 지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통일교회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무어냐? 절대적인 기록을 세운 참부모의 전통을 이어받을 수 있는 선수를 배양하자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선생님이 이 노릇을 해 온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여러분에게는 면에서 하는 대회에서 챔피언이 되느냐, 아니면 군 또는 도에서 하는 대회에서 신기록을 세우는 챔피언이 되느냐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여러분들은 이제 선생님이 없더라도 참부모가 세운 신기록을 중심삼고 살아야 합니다. 늘 생활에서 그 기록과 비교하면 보며 몇 퍼센트나 되어 있는가, 그 기록에 얼마나 가까워졌는가를 확인하며 그 기록에 가까와지려고 해야 합니다. 이것이 여러분이 천상세계에 들어갈 때 여러분의 권위와 위치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그 기록에 3등으로 도달한 사람은 아무리 잘났다 해도 3등 자리에 가야 되고, 10등은 10등 자리에 가야 됩니다. 아무리 대통령을 한 사람이라도 꼴찌했으면 꼴찌의 자리에 가야지 별 수 없습니다. 미국 대통령이라 하더라도 꼴찌했다면 천상세계의 꼴지 자리에 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선생님을 중심삼고 여러분 자체의 사명을 느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선생님 가정을 중심삼고 상대적 가정으로 기준을 갖춰야 됩니다. 예를 들면, 문씨면 문씨를 중심삼고 상대적 종족으로 기준을 맞춰야 됩니다.
일본식구들이 한국은 아담 국가이고 일본은 해와 국가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고 할는지 모르지만 만약 천사장인 미국이 침입하려고 한다면 그 침입을 막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되느냐? 그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침해가 크든 작든 원리원칙을 중심삼고 아담 국가와 하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되지 않으면 야단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미국보다도 잘 뛰어야 됩니다. 그리고 아담 국가인 한국과 하나되기 위해 전심전력 해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국가간에 주체와 대상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주체의 입장에 있는 국가에서 이렇게 해라 하면 그 상대적 입장에 있는 국가는 따라가야 되는 것입니다. 모두들 따라와서 이 방법을 배우라고 하는 것입니다. 뭐, 미국이 잘났다고 큰소리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우리 선교사들에게 할 일을 했더라도 큰소리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제 선생님이 지나가면서 한번만 길을 잘 닦아 놓으면 따라오지 말라고 해도 따라올 것입니다. 왜냐? 따라오지 않게 되면 내가 대해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경기장에 참석할 길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세계적인 기반을 닦아 놓았더라도 경기장에 내세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계적인 챔피언도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기록을 세우려면 통일교회의 참부모를 따라와야 합니다. 알겠어요?
우리는 여러 개의 단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통일교회를 비롯하여 승공연합 등 번듯번듯한 여러 단체들이 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앞으로도 더 많은 단체를 만들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경기종목도 많아질 것입니다. 원리경기 종목과 승공경기 종목이 있으며, 또한 초교파 종목도 있고, 각 분야에 걸쳐 여러 가지의 경기종목이 있다는 것입니다. 앞으로는 더 많은 종목이 나타날 것입니다.
이러한 단체들은 대한민국을 중심삼고 달릴 것입니다. 대한민국을 중심삼고 달리기 위해서는 공화당하고 경기를 해야 하는데, 거기에서 져서야 되겠어요? 「이겨야 합니다」 우리가 경제적으로나 수(數)적으로도 열세이고 환경적으로도 불리합니다. 그러나 역사는 적은 데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정보부에서 무슨 꼬투리를 잡으려고 교회에 들락날락하고 있지만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공화당이 이 나라 이 민족을 살릴 수 있다고 생각해요? 꿈 가운데서도 이 나라를 살릴 수 있는 것은 공화당이라고 생각해요? 「아닙니다」 그럼 누가 이 나라를 살릴 수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요」 정말이예요? 괜히 하는 말이 아니겠지요? 「예」
이 나라를 살릴 수 있는 것은 공화당이 아닙니다. 그 자리는 절대적인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시간이 문제입니다. 그러면 문제의 해결점은 무엇이냐? 사람과 돈입니다. 만약 통일교회에 사람이 없다 할 때는 돈이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경제복귀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통일교회는 지금 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통일교회가 달릴 때 대한민국 사람들이 잘해라 하니까, 안 합니까? 그러나 대한민국 삼천리 반도 전지역에서 잘해라 잘해라 잘해라 하는 응원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편`이라고 하는 것은 경기할 때만 응원하는 편이 아닙니다. `우리편`이라고 한다면 경기를 시작하기 전부터 그 경기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하고, 뛸 때에도 그 선수와 같이 뛴다는 마음을 갖는 입장에 서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수가 경기장에 나가면 그때서야 그래, 너 우리편이지. 잘 뛰어라 한다면 그 사람을 우리편이라고 할 수 있어요? 선수가 대표로 나가서 뛸 때에는 바싹 긴장해서 주시하다가 차츰 결승점에 가까와지면 같이 뛰는 입장에 서야 하는 것입니다. 응원하다가 굴러 넘어져도 좋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뛰는 선수들도 신나게 뛴다는 것입니다. 같은 편이라면 선수들이 뛸 때 그럴 정도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실적을 갖고 있어요? 여러분이 지금 지역장으로 뛰고 있는데, 자기에게 관심을 가져 주는 사람, 즉 자기편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있는 것 같지만 없다 할 때는 독불장군인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뛰기는 뛰지만 나라를 대표할 수 없습니다. 나라도 없는데 나라의 대표선수로 뽑힐 수 있습니까? 나라가 없으면 개인자격에 불과합니다. 나라가 없으니 나라를 대표해 출전할 수도 없고 따라서 일등할 수도 없습니다. 나라의 대표로 뽑히려면 어느 나라든지 자기가 소속된 나라가 있어야 됩니다. 남의 나라의 감투를 쓰든가, 아니면 억지로 달라붙든가 해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디에 소속을 둘 것입니까? 기성교회에 붙을 것이냐, 아니면 공화당에 가서 붙을 것이냐?
가정을 중심삼고 아버지가 `얼` 하면 아들도 `싸`, 아들이 `얼` 하면 아버지도 `싸` 할 수 있는 기반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자식이 있다 한들 나라가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나라가 없으면 일등이고 뭐고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하면, 선생님이 좋아하겠어요, 좋아하지 않겠어요? 좋아한다면 얼마나 좋아하겠어요? 선생님이 체면을 생각하며 좋아하겠어요? 체면은 잊어버려도 좋다는 것입니다. `아이구 통일교회의 문선생이 어디 저렇게 생겼나. 아이구 저것은 뭐야. 체신머리없게…' 하겠지만 선생님에게는 체면보다 챔피언이 되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소원인 것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이 얼마나 체면을 잃어버렸습니까? 번번이 싸움에서 지는 바람에 하나님의 체면이 말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이 훈련시켜서 내세운 챔피언들의 꼬락서니를 보라는 거예요. 전부다 사탄에 의해 나가 자빠져 위신은커녕 죄다 잡혀 죽어 마음대로 못 했으니 하나님의 체면을 생각해 보세요. 그때 하나님이 당한 창피를 여러분은 생각해 봐야 됩니다.
여러분은 조금만 더 달리면 신기록을 세울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곁에는 하늘을 중심삼고 자신의 일생을 걸어 놓고 신기록을 세우는 데 심혈을 기울이는 선생님이 있습니다. 하늘과 땅의 심정을 거쳐서 모든 책임을 직접 의논할 수 있는 선생님이 여러분 곁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책임을 하기 위해서 역사적으로 수많은 인물들이 정성을 들였습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노아, 모세, 예수, 선지자의 사도들이 챔피언이 되려고 했지만 전부다 실패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들이 세워 놓은 정성의 기록을 깨기 위해서는 그 경계선을 넘어야 됩니다. 알겠어요? 노아가 120년 동안 방주를 지을 때 겪었던 시련과 고통이 닥친다 하더라도 문제없이 넘어야 하고, 아브라함이 고향 산천을 떠날 때 당했던 고통도 넘을 수 있어야 합니다. 겁낼 것이 없어야 합니다. 경계선을 돌파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또 응당 그래야 된다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신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챔피언이 반열에 동참할 수 없고, 신기록을 낼 수 없습니다. 역사과정에 왔다 갔던 수많은 책임자들은 전부 새로운 기록을 세우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예수는 챔피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예수가 `아바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소서` 하면 순종하는 자세를 보이는데 하나님이 `야 이 녀석아, 뭐가 그러냐? ` 하겠어요? 하나님께서 그때의 상황을 잘 알고 계시는데도 그럴 수 있겠어요? 하나님께 `그런 아들 있는 것이 좋습니까, 싫습니까?' 하고 묻는다면 싫다고 하겠어요? 만일 싫다고 하면 하나님 그만 두라고 해야 합니다. (웃음) 망할 자리, 십자가의 죽을 자리에서도 주장해야 할 것을 주장하면 챔피언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벌받아 죽더라도 주장할 것은 주장해야지 괜히 시시하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이미 그러한 기준을 다 세워 놓았습니다. 그러니, 선생님이 여러분을 내보낸다 해도 불만이 없지요? 나라를 원한다면 나라에 보내주고 세계를 원한다면 세계에 보내줄 것입니다.
챔피언이 되려면 누구보다 많은 생각을 해야 되고 아무도 하지 못했던 작전을 해야 됩니다. 그래야 신기록을 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참부모의 기준이 최고의 기준인데 다른 곳에 챔피언이 있겠어요? 있으면 찾아봐도 좋습니다. 만약에 또 다른 챔피언을 찾아낸다면 선생님이 후원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아들로서의 챔피언입니다. 그것은 상대적인 것이지, 절대적인 챔피언이 아닙니다.
선생님은 지금까지 뜻을 중심삼고 나왔습니다. 여러분이 추대받는 챔피언의 후계자가 되려면, 챔피언의 생리와 감정까지도 분석해야 됩니다. 그리고 성질이 비슷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데 챔피언의 호랑이처럼 팔팔한데 여러분은 황소처럼 느긋하다면 후계자가 될 수 없습니다. 챔피언이 호랑이 같은 성질이라면 여러분도 호랑이 같은 성질이 되어야 한다는 거예요. 성질이 비슷해야 되고 성격도 닮아야 하며 사물을 보는 관도 비슷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통일교회에 입교할 수 있습니다.
이런 가정이라면 앞으로 선생님의 사돈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럴게 아니예요? 이런 내용을 생각해 본 사람이 있습니까? 챔피언이 되고 나면 그 가족과 집안은 뭐가 되겠어요? 이런 큰 자리가 준비되어 있는데 여러분은 여기에 대해 관심을 가져 봤어요? `챔피언을 닮기 위해서 기도를 할 때는 지성으로 하자. 앞으로 1년 동안 선생님의 가정을 보고 본받는 계획을 짜자. 누구를 만났을 때는 인사라도 이렇게 해야겠다. 인사를 백 번하는 사람이 있으면 나는 천 번 해야겠다. 천 번 하는 사람이 있으면 만번 해야겠다'는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런 실적을 쌓는다면 챔피언이 될 가망성이 있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이 챔피언 국가라 하면 그 상대적인 국가는 어떤 나라냐? 일본입니다. 그러기에 많은 일본 식구들이 대한민국 사람과 결혼해야 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선생님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 있는 사람과 결혼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파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 길밖에는 없기 때문에 결국은 국제결혼이 자동적으로 성황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 통일교회가 가는 길이 가장 가까운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는 여러분들 나름대로 계획을 세워서 뛰어나가야 합니다. 지구장도 지역장도 전부 뛰어야 합니다. 모두다 뛰지만 지구장이 뛰는 것과 여러분이 뛰는 것과는 다릅니다. 지역장들이 자기 임지에서 도(道)로 올라가게 되면 지구장의 강의를 듣게 되는데 그때 `지구장 당신은 그것밖에 모르지요? 난 당신보다 하나를 더 알고 있소`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지구권내에서 챔피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야욕이서는 안 되고 야망이어야 합니다. 즉, 발전적인 승리의 야망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챔피언이 되려면, 챔피언으로 인정될 수 있는 조건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도 대할 수 있는 내용을 갖추어야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여러분은 나름대로의 신기록을 세워야 합니다. 지구장, 지역장 가운데에서의 신기록자가 되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중앙 무대에서 기록을 가지려고 마음 먹게 되면 아무리 태산준령 절벽강산이 가로막혀 있어도 넘어가야 합니다. 여러분은 `나는 평생 경기장에서 뛰어야 하는 사람이다'라는 생각을 해야 됩니다.
통일교회 여러분은 신기록을 세우겠다고 결심하고 집을 떠난 그날부터 챔피언이 되기 위해 훈련하는 과정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기어이 새로운 기록을 세워 여러분의 가정은 세상에 다시 없는 가정이 되어야 됩니다.
통일교회의 문선생은 세상에 없는 기원을 남길 것입니다. 통일교회가 하는 일은 지금까지의 세상 사람들이 따라가지 못하는 기원이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이 손을 댔다 하면 국가에서도 문제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요 몇 년간 우리가 얼마나 천대를 받았습니까? 지금 내가 하는 일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반드시 새로운 기원을 만들고 나설 것입니다.
통일교회는 이런 희귀한 패들이 모인 교회입니다. 그리고 통(統)이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거느린다는 뜻입니다. 지배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지배해서 뭐 하자는 것이냐? 하나되게 하자는 것입니다. `하나되자`는 것은 `신기록을 가진 절대 신앙자를 닮아야 된다`는 뜻입니다. `교회` 라는 말은 `가르치는 모임` 이란 뜻입니다. 그러면 `교회` 하면 무엇이 모이는 곳이냐? 사람이 모여 가르침을 받는 곳입니다.
이제 통일교회는 지파편성을 해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나가서 세 사람 이상을 전도해야 합니다. 그것을 기반으로 하여 하나님을 중심삼고 사위기대를 이루어야 합니다.
흉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비록 우리들이 거적대기를 쓰고 다니더라도 10년, 20년만 지나면 깔본 그들을 종살이 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자신 있지요? 「예」 (녹음 불량으로 일부분 중략함)
남편이 마라톤 선수가 되어 신기록을 내기 위해 전력을 다하여 뛰면 아내는 그 남편을 따라가며 응원해야 합니다. 그런 응원자는 세상에 한 사람밖에 없습니다. 한 사람이지만 세계 수억의 사람들이 응원하는 것보다 더 효과적인 것입니다. 여러분이라면 많은 관중들이 `야` 하고 환호성을 지르며 응원하는 것을 원하겠어요, 아니면 `잘하소, 잘하소` 하며 후원하는 자기 아내의 응원을 원하겠어요? 많은 사람이 소리지르며 하는 응원은 순간적인 응원입니다. 그러나 아내의 응원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럴 수 있는 응원자를 가진 가정이 하늘가정입니다.
거기에 아들이 따라와서 아버지를 응원할 수 있는 사위기대가 완성되었다 할 때는 천상천하 유아독존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자기가 뛰는데 어머니 아버지까지 같이 뛰며 응원할 수 있다면 그것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그만한 가치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만 되면 심정의 세계는 세계적으로 복귀될 것입니다. 복귀된 가정은 절대적인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신기록을 내어 국가적인 챔피언이 되었을 때는 세계적인 챔피언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정만 되는 날에는, 그 가정은 충신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충신 부부라는 말은 아직 없지만, 앞으로는 이 말을 새로 만들어야 될 것입니다. 또, 성씨가 전부 `통`씨로 같아져야 되고, 하나의 선민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가정은 그런 가정이 되어 있어요? 만일 그런 가정이 되었다면 동네방네 소문이 나서 모든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 그렇게 사노?'라고 물어보고 싶을 것입니다. 본받고 싶어하고 교육받고 싶어 할 것입니다. 그렇겠나, 안 그렇겠나? 여러분은 모두가 챔피언의 가정이 되어 세계 사람들이 옳다고 인정할 수 있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까지의 축복가정 중에는 한국을 비롯한 일본 독일 등 세계의 10개 민족이 가담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여러 민족이 가담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서 한국 가정이 일등이 되어야 하겠어요, 꼴찌가 되어야 하겠어요? 당연히 일등을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지역장은 본부를 위해 새로이 정성들이며 기도해야 합니다. 60년대보다 70년대는 더 나아야 되겠어요, 못해야 되겠어요? 더 나아야 되겠습니다. 60년대는 통일교회의 뜻을 중심삼고 활동하였지만, 70년대는 결승점이 한 걸음 더 가까와졌으니 여러분은 계속해서 달려 우승해야 되겠습니다. 허리띠를 졸라매서라도 우승과 함께 신기록의 영광을 차지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힘차게 출발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아버님, 당신이 가고 싶어하시는 곳에 저희들이 가기 위해서는 참부모라는 절대적인 존재가 이 땅 위에 나타나야 된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그분이 신기록을 세운 분인 것을 저희들이 알게 하여 주옵소서.
어느 한 부락이면 그 부락에 아버지께서 찾아오시기를 바라거든 아버지 앞에 상대적 존재가 되어야 하고, 전국을 대표하는 권을 넘어서야만, 당신이 찾아오신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옵소서. 한 지역에 처해 있다고 서러워하거나 염려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전국을 대표하는 챔피언의 기준을 갖추어 아버지 앞에 충성을 하게 될 때는 절대적인 당신이 그 자리에 머무신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도(道)면 도 혹은 교(敎)면 교, 그 각 처소에 있어서 남아지는 운명길을 가겠다고 다짐하는 저희 통일교단이 되어야겠습니다. 이 민족과 세계를 대표하여 챔피언의 권한을 갖출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저희가 일치단결하여 나가는 모든 것이 목적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게 하시옵고, 절대적인 내용으로서 투자하였사오니 절대적인 인연을 기필코 거둘 수 있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오늘 이 자리를 중심삼고 내일의 새로운 날을 저희들이 맞이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나라 이 민족이 해방의 기치를 들고 나서던 때가 40여 년이 되었사오니, 역사적인 그 한을 청산하고 당신을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남기신 복귀역사노정 앞에 뜻을 실천하며 살아갈 수 있는 하늘가정을 이룰 수 있게 허락하여 주옵소서.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뜻을 중심삼고 저희들이 새로운 역사를 창건할 수 있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니다.
저희 모두가 뜻을 위해 반세기 이상을 살아온 스승의 기준을 중심삼고 나감으로써 새로운 구원의 역사를 일으킬 수 있는, 상대적인 조건을 만들 수 있는 가정의 주인이 되게 하여 주옵길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남겨진 사명 위에도 역사하여 주시옵고,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가는 길이 험하더라도 아버지와 더불어 평화의 기점을 만들 수 있는 입장에 서게 하여 주시옵고, 죽더라도 이것을 위해 죽는 모습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올 때, 모든 말씀 참부모의 성호 받들어 간절히 아뢰었사옵니다. 아멘.
학문이면 학문을 중심삼고 볼 때, 어느 분야의 권위 있는 자리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그 분야에 대한 전문적인 과정을 이수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사업도 역시 그 분야에서 전문적인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큰 성공을 거둘 수가 없는 것입니다. 국가도 마찬가지로 하나의 정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그 분야의 전문요원들이 지식을 통합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그 국가의 정책수행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들은 압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이 복귀섭리라는 문제를 푸는 데 있어서도 여기에는 반드시 하나님이 바라시는 전문가가 필요하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 통일교회를 중심삼고 볼 때에도, 우리가 가는 길에는 반드시 전문가가 있어야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어떠한 정신을 가져야 되느냐? 자기가 소속한 부서, 혹은 자기가 목적하는 분야에 전심전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자기의 모든 생명력을 투입하고, 온갖 정성을 쏟아 부어야 됩니다. 성경에도 `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 즉, 사랑하는 데 있어서도 전심전력을 다해 사랑해야 합니다. 심정의 일치가 되지 않고는 사랑의 전문가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복귀섭리를 중심삼고 볼 때, 복귀섭리의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수행해 나가는 과정에 있어서 최고의 전문가가 누구냐 하면,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최고의 전문가라는 것입니다. 만물을 창조하신 분도 하나님이요, 인간이 타락한 후에 재창조 역사를 해 나오신 분도 역시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자기가 목적했던 바를 달성하기 위해서 수고해 나온 존재 중의 존재는 하나님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처럼 자기의 전문분야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역사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동원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각자가 동쪽이면 동쪽, 서쪽이면 서쪽, 남쪽이면 남쪽, 그리고 북쪽이면 북쪽, 이렇게 사방에서 360도를 중심삼고 자기 분야의 한 방향을 설정하여, 그것을 자기가 맡은 바의 전문적인 분야로 생각하고, 온 생애를 바쳐 그 분야에서 책임을 수행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지금까지 연결되어 가지고 역사적인 섭리를 발전시켜 나왔다는 것을 우리들은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지금까지 거쳐 나오신 역사적인 터전과, 현재 움직여 나가시는 방향을 아는 전문가가 있었느냐? 그리고 미래의 목적에 대한 일치점을 찾아 그것을 해결짓기 위해 전문가의 입장에서 백방으로 노력한 사람이 있었느냐 하면 없었습니다. 오늘날까지의 역사과정에서 자기 시대의 책임을 짊어지고 왔다 갔던 사람들도 과거 현재 미래를 중심삼고 하나님이 섭리해 나오신 전반적인 문제를 하나님 대신 전문적인 입장에서 책임진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 이후 4천년의 역사과정을 거친 후에 비로소 이스라엘 민족을 중심삼고 예수님을 세우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해 나오시는 전체적인 분야를 대표한 하나의 전문적인 상속자요, 맡겨진 그 사명을 지상에서 완전히 실천할 수 있는 한 존재가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가 맡은 전문분야인 만민을 구원하는 책임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어떠한 입장에 서야 하느냐? 그분도 역시 전심전력하는 입장에 서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자나깨나 일구월심, 자기의 모든 것을 여기에 투입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어떠한 명령을 받는 입장이나, 혹은 강요당하는 입장에서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그것을 통하여 자기의 희망이 싹트는 것이요, 행복의 여건이 제시되는 것이요, 그럼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승패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만민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자기의 전 생애를 투입하고, 더 나아가서는 자기의 생명을 바쳐서 책임을 수행해야 할 입장에 있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대하는 자리, 혹은 만민을 대하는 자리에 서게 될 때 예수는 하나님의 후계자로서 군림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후손들에 대해서는 자기의 전문 분야를 상속해 주어야 할 입장, 즉 후계자를 세워야 할 입장에 있었던 것입니다.
참되신 하나님의 전문적인 분야를 상속받기 위해서는 참된 자리가 아니면 안 되는 것입니다. 정성을 다하여 상대적 기준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노력하는 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상속받을 수 있는 합당한 자리에 서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전문가로서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 하나님께서 이는 나의 대신자라고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입장에 서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알고 계시는 만큼, 우리도 하나님을 알기 위해 노력해야 됩니다. 또, 하나님께서 앞으로 해야 할 책임을 중심삼아 가지고 결의하고 계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결의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소원하시는 그 목적 관념이 철저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목적 관념이 철저해야 됩니다. 비록 역사적 배경과 시대적 환경은 다른 입장에 있지만, 그 뜻을 중심삼고 역사와 더불어 동반하고, 시대를 대표해서 그 시대의 중심적인 자리에 서야만, 하나님이 그를 대하여 기쁜 마음으로 전체를 상속해 주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 서 있는 예수님은 하나님과 어떻게 다르냐 하면, 하나님은 내적인 입장이요, 예수님은 외적인 입장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주체적인 입장이요, 예수님은 대상의 입장인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종적인 입장에 서 있고, 예수님은 횡적인 입장에 서 있는 것입니다. 서로가 서 있는 자리는 다르지만, 전문적인 분야에 있어서는 하나될 수 있는 동기와 모든 여건을 갖추어서 일체되어 있는 것이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내적인 아버지라면, 예수님은 외적인 아버지인 것입니다. 이 내적 외적 아버지의 인연이 하나될 때에, 비로소 분립되었던 하늘과 땅이 통합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을 통합시킬 수 있는 주체적인 역할은 내적인 입장에 계신 하나님이 하시지만, 외적인 입장에서 결정짓는 일은 예수님이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복귀섭리의 역사적인 책임을 짊어진 전문가 예수님에게는 반드시 자기의 제자나 아들과 같은 상속자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전문분야를 놓고 따져 볼 때, 예수님은 개인 중에서도 세계적인 개인입니다. 가정 중에서도 예수님이 태어난 가정은 세계적인 가정입니다. 종족도 수많은 종족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예수님을 모실 수 있는 종족은 역사적인 종족인 것입니다. 또 예수님이 섭리노정을 통해서 추구해 나가는 국가가 있다면, 그 국가는 다른 어떤 시대의 국가보다도 가치있는 입장에서 있는 국가입니다. 그분이 모색하는 세계도 역시 최고의 세계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복귀섭리라는 전문분야를 두고 볼 때, 어느 시대의 그 누가 섭리의 뜻을 세워 역사적 사명을 짊어지고 나왔다 하더라도, 그 사람보다 더 전문적인 입장에 서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한 입장에 있는 예수님이 바라는 대상의 자리에 설 수 있는 제자가 되려면 제자 중에서도 최고의 제자가 되어야 하고, 아들이 되려면 아들 중에서도 최고의 아들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과 내정을 통할 수 있는 입장에 있는 사람으로서, 자기가 전문적인 분야에 이르기까지의 관계된 일체의 사연을 대할 수 있는 상대자, 즉 수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사람에게 자기의 모든 것을 상속해 줘야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적인 심정문제를 두고 보나, 외적인 가정문제를 놓고 보나, 혹은 복귀노정에서의 하나의 소망을 놓고 보나, 이것을 전폭적으로 상속받을 수 있는 전문분야의 후계자가 필요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예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대표해서 온 세계를 대하고 나설 때에 이 복귀도상에서의 최고의 권위자로 나타났지만, 그 자신의 위치를 상속해 줄 수 있는 후계자가 누구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나라 가운데 그런 입장에 설 사람이 누구냐 하는 것을 예수님 자신이 생각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이런 후계자를 찾기 위해서는 모든 생활에서 실천적인 행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러나 주위에 이런 대표적인 기준에 설 수 있는 후계자가 없을 때에는 전국을 돌면서 합당한 사람을 찾아야 했습니다.
이렇듯 예수님의 모든 것을 상속받을 수 있는 후계자를 세우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4천년의 역사를 엮어 오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후계자가 없었다는 사실은 하나님은 슬픔이요, 역사적인 슬픔이 되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슬픔이요, 세계적인 슬픔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4천년의 역사를 통해 수난의 역로를 거듭 걸으시면서도 앞으로 예수님의 뜻을 상속받을 수 있는 세계적인 터전이 되기를 바라시면서 이스라엘 선민을 키워 오셨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이스라엘 선민은 전문가 되시는 예수님 앞에서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입장에 서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자신이 전문가로서의 권위를 가진 입장에 서기는 했지만, 그러한 자신을 대할 수 있는 상대가 없었기 때문에, 이것을 지상에서 새로이 모색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을 다시 교육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입장에 서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무어냐 하면, 예수님이 가야 할 공생애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길을 통해서 후계자를 길러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예수님은 맨 처음부터 자기 전문분야에 대해서 가르쳐 줄 수 있는 입장이 못 되었기 때문에, 자기가 직접 그럴 수 있는 전문가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역사적인 과업을 빠른 시일 내에 어떻게 상속해 줄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전문분야에 있어서나 자기의 분야가 아닌 문제까지도 상속해 주기 위해서 제일 빠른 길을 갖추어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입장이었음을 우리는 알아야 됩니다.
이것을 금년에 못 하면 내년에 하고, 혹은 20대에 못 하면 30대에, 30대에 못 하면 40대에까지라도 연장시켜 가면서 일생 동안 해도 된다면 별 문제가 없겠으나, 이것을 어느 한정된 기간내에 계승시켜야 할 입장에 있었던 예수님의 심정은 얼마나 초조했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리를 통해서 배운 바와 같이, 여기에는 반드시 조건물과 기간이 필요하고, 아담을 대신할 중심존재가 필요합니다. 복귀섭리도상에 있어서는 이와 같은 3대요건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예수님 앞에 조건적인 존재가 되느냐? 그 조건적인 기간을 해결한 터전 위해서 조건적인 실체로 나타날 수 있느냐? 이 조건적인 존재와 아담적인 존재인 예수님이 어떻게 합하느냐? 이러한 복귀섭리의 문제는 탕감내용을 중심삼고 결정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믿음의 기대니, 실체 기대니 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면 아벨적인 존재와, 그 아벨적인 존재 앞에 나타난 조건을 어떻게 일치시키느냐? 그것이 일치되기 위해서는 안팎의 관계인 주체와 대상이 일치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일치되지 않고서는 상속이니 탕감이니 하는 구원섭리는 성사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주적인 책임을 짊어진 예수님 앞에 과연 일치될 수 있는 하나의 조건적인 존재가 누구냐? 없었습니다. 없었기 때문에 길러야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가야 할 길은 멀고, 바라는 소망은 큰데도 불구하고 그러한 인물이 없었기 때문에, 무지몽매한 어부들을 상대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예수님의 처량한 신세가 얼마나 외롭고 슬펐겠는가를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이 3년 공생애노정을 통하여 가르쳐 주어야 할 사명은 어떠한 것이었느냐?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상속받았기 때문에, 그 전통적인 내용을 중심삼고 하나님을 가르쳐 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다음에는 자기를 가르쳐 주어야 하고, 그 다음에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어떤 존재들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과연 예수님은 하나님을 가르쳐 줄 수 있었느냐? 또한 자기 자신을 가르쳐 줄 수 있었느냐? 예수님은 3년의 공생애노정을 거쳐오는 동안 그 생활 가운데서 하나님의 전체를 가르쳐 주지 못했고, 예수님 자신의 전체도 가르쳐 주지 못하였으며, 그의 제자 베드로, 야고보 등 12제자에 대해서도 다 가르쳐 주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섭리적인 책임을 진 하나의 전문가로서 가야 할 때를 확실히 아는 입장에서, 그러한 것을 상속해야 할 대상이 되는 존재를 갖지 못한 예수님의 고독이 얼마나 컸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요 3:12)",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요 16:12)" 하는 성서의 내용을 중심삼고 볼 때에, 예수님은 권위 있는 전문가로서 기필코 땅과 하늘에 인연을 맺고 가야 할 자신인데도 불구하고, 그럴 수 있는 상대적 요건과 상대적인 후계자가 없었으니 얼마나 비참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떠한 전문 분야에서 세계적인 발명을 했다고 가정합시다. 자신만이 알고 있는 이것은 천적인 인연과 천명에 의해서 밝혀진 사실이기에 이것을 어차피 세상에 밝혀 놓아야 할 텐데도 불구하고, 밝혀 놓을 수가 없는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그것을 기록으로만 남겨 놓아 가지고는 그것을 전수받아 대행할 수 있는 사람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가르치되, 실체로 가르쳐야 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하나 부딪히는 자리에서 실체로 해결지어야 하는 것이 복귀노정이기 때문에, 기록으로만 남겨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당대에 이것을 해결지으려고 몸부림치면서 공생애노정을 거쳐 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소원 성취의 한 날을 맞지 못하고 십자가의 길을 간 것입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볼 때, 2천년 전에 복귀의 사명을 수행해야 할 책임을 지고 왔던 예수님이 이 땅에서 책임을 다 이루지 못한 채, 후계자를 세우지 못하고 가신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오늘날 그 분야에 있어서는 다시금 전문적인 존재가 이 지상에서 나타나든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그런 존재를 보내 주시든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분이 누구냐 하면, 재림주님입니다.
그러면, 다시 오시는 그 주님은 이 땅에 와서 무엇을 해야 되느냐? 이 복귀섭리의 도상에 있어서 전문적인 내용을 수습해야 됩니다. 역사적인 내용과 시대적인 내용, 그리고 미래적인 내용을 감정할 수 있는 감정사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 시대 환경에 있어서 주체가 되어야 했으며, 또 주체적인 입장에서 상대적 존재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상속해 주어야 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상속해 주시려던 그 사연은 어떤 것이냐? 예수님은 종적인 계승자입니다. 그러나 횡적인 입장에서 그 사명을 계승해 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재림주님이 그것을 재차 재현시켜야 할 책임을 지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가르쳐 주고, 예수님 자신을 가르쳐 주고, 또한 제자의 도리를 가르쳐 주어야 했던 거와 마찬가지로, 복귀도상에 전문적인 책임을 지고 다시 오시는 주님도 하나님에 대하여, 예수님에 대하여, 그리고 자신에 대하여 연결된 내용을 가르쳐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제자들은 재림주를 믿어야 되고, 예수님을 믿어야 되고, 하나님을 믿어야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내용을 결속시켜 가지고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국가적인 환경, 세계적인 환경이 이루어져야 됩니다. 이것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 6천년 복귀역사입니다. 예수님이 왔다 가신 이후 지금까지 2천년 동안 수난의 노정을 통해 가지고 세계적인 기반을 닦아 나온 기독교도 이것을 위한 것입니다.
오늘의 기독교는 세계를 대표하여, 예수님으로부터 그분의 모든 것을 상속받을 수 있는 전문가, 즉 그럴 수 있는 후계자의 입장으로 나타나야 됩니다. 많은 사람이 아니면, 한 사람이라도 나와야 됩니다. 그러한 기준을 이루기 위해서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나라를 사랑하고, 국가와 더불어 하나되고, 민족과 더불어 하나되고, 그 다음에는 국가 이념을 중심삼고 하나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공인할 수 있는 한 사람을 만나야 됩니다. 그런 준비를 하기 위해서 요셉의 가정을 택했는데, 요셉의 가정이 그럴 수 있는 입장에 서지 못했습니다. 제자 중에서도 전폭적으로 예수님의 전문적인 사명을 인계받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이상의 것을 연구해 가지고, 그것을 내가 책임지고 수행하겠다고 나타난 사람이 없었습니다. 요셉 가정에도 없었고, 그 시대의 유대교인 중에도 없었으며, 또한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지상에 와서 상속해 주어야 할 역사적인 사명을 글로만 남겨 놓아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사명은 글만 가지고서는 상속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심정이라는 것은 글만 가지고서는 연결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떡이 맛있다든가, 혹은 꿀이 달다고 하는 것을 글로는 실감나게 표현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영원한 친구라는 요건을 결정지을 수 있는 근본문제는 실체끼리 부딪혀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글로써 가르쳐 주는 것은 외적인 표현과 외적인 기준은 될는지 모르지만, 그 전통적인 사상을 안팎으로 전부다 갖추어 `하나 됐다'고 하는 기준을 연결시키기에는 너무나 거리가 먼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 통일교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선생님이면 선생님을 중심삼고 복귀도상에서 전문가가 되려면,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고 싶은 내면적인 분야, 즉 심정적인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그 당시에 원수들로부터 수치와 모욕을 당하면서도 책임을 수행하기 위해 뒤넘이치던 입장을 토대로 그 문제를 처리해 나갈 수 있는 전문적인 섭리의 대행자로서 당시의 미완결 부분, 혹은 미완성 부분을 보충시킬 수 있는 전문가의 수준에 올라서 있느냐, 또 예수님 앞에 염려의 대상이 되었던 제자들보다 더 믿을 수 있는 계승자를 발견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환경적으로 갖추어지지 않았을 때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계승자를 길러야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길러야 하느냐? 전문가가 대하는 태도, 전문가의 연구라는 것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대하여 그렇게 했느냐? 하나님을 대하여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사랑했느냐? 그리고 그 나라와 세계에 대하여 내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사랑했느냐? 이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런 상대적인 존재가 없을 때에는 길러야 됩니다. 기를 때에는 어느 기간을 중심삼고 단시일내에 길러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능한 전문가로서의 후계자를 기르기 위해서는 보다 더 마음과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 기간은 장기적인 기간이 아닙니다. 제한된 기간내에 이것을 수행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온갖 정성을 다 들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상대를 세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완전한 과거 현재 미래의 집약체와 같은 입장에 세워 주기 위해 모든 정성과 심정을 통한 최고의 자리에서 정성을 주입시키지 않으면 안됩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전문가들이 걸어 오던 분야, 즉 학문적인 분야라든가 사업 분야에서 그들이 자기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서 정성을 들인 것 이상의 정성을 투입해야 됩니다. 그러지 않고는 오늘날 복귀섭리의 도상에서 그 책임을 다 할 수 없습니다.
앞으로 계승해 주어야 할 후계자를 보게 될 때는 냉정하게 비판할 줄도 알아야 됩니다. 자기와 어떤 부분은 맞고 어떤 부분은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리하여 전체의 책임을 완전히 상속해 줄 수 있는 적격자가 못 되면, 몇 사람을 세워서라도 이 전체를 가르쳐 주어야 됩니다. 가르쳐 줄 때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갑이 가야 할 길, 을이 가야 할 길, 병이 가야 할 길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각자 해당되는 분야를 중심삼고 교육을 해야 됩니다. 교육을 해 가지고 하나될 수 있는 과정을 거쳐야 됩니다.
전체적인 분야를 상속시킬 수 있는 대상자가 있으면 문제가 없지만, 그런 대상자가 없게 될 때는 이것을 부서별로 연결시켜 끌고 나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의 목적을 한 사람이 계승했다고 하는 기준을 거쳐 나가야 됩니다. 그렇게 되려면 반드시 시간이 필요합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을 동원해서 그 많은 사람 각자가, 한 사람이 전체를 계승해야 할 것을 대신 계승했다는 조건적인 방편을 취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 길이 복귀도상에서 전문적 책임을 수행하는 사람 앞에 전제되는 상대적인 임무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여러분은 우리 통일교회를 중심삼고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알고, 스승을 알아 가지고 그 앞에 있는 여러분 자신을 알아야 됩니다. 자신이 어떠한 자리에 있는가를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선조로부터 이런 인연을 맺어 왔기 때문에 내가 오늘날 이런 입장에 서게 되었고, 내가 오늘 이런 입장에 서 있기 때문에 이런 목적을 수행하고 이를 계승시켜야 한다` 이렇게 여러분은 제 2차적인 전문가의 입장에 있다는 것을 깨닫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복귀섭리의 도상에 있어서 지방이면 지방, 혹은 지역이면 지역을 책임진 입장에서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소개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의 내정적인 심정문제에도 전문가가 되어야 합니다. 인격을 중심삼아 가지고 말로만 소개해서는 안 됩니다. 실체로서 어떠한 환경에도 일치시킬 수 있는 주체력을 가져야 됩니다.
또, 예수님의 대신자로서의 인격을 갖추어 가지고 어버이와 같은 입장에 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선생님을 대신해 가지고 `이 지방에서는 그밖에 없다. 그를 통하지 않고는 갈 길이 없다`고 그 지방 사람들이 증거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각자가 맡은 분야의 범위는 다르지만 그 분야에서는 전문가가 되어야 합니다. 하늘 길을 따라가는 데 있어서는 그렇게 가야 됩니다. 생활하는 데에도 철저해야 됩니다. 그러한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이렇듯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여기에는 계승해 줄 수 있는 내용이 필요합니다. 내가 전체를 계승해 줄 수 있는 내용만 갖추게 되면, 이 전문 분야에 해당하는 과거 현재 미래를 계승해 줄 때가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현재에는 그 모든 것을 한 사람에게만 계승해 주기에는 너무나 부족하기 때문에, 이것을 순차적으로 방향을 달리하면서 계승해 줄 수 있는 여러 사람을 길러 나가야 됩니다.
만일 이것을 한 사람에게 한꺼번에 계승해 주었다가 그 사람이 꺾여 나가게 될 때는, 내 자체의 갈 길마저 완전히 막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섭리역사를 해 나오고 있기 때문에, 지금까지 복귀섭리노정에서 전체를 가르쳐 주지 못했던 것입니다. 시대를 따라 그 입장을 봐 가면서, 진전되는 그 내용을 분석해 가면서 그것이 보다 가치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입장이 될 때에, 그 분야에 해당하는 내용을 제시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체적인 분야가 아닌 일방적인 방향을 맞추어 가지고 360도 방향으로 전개해야 합니다. 이것을 세계적으로 전개해 나가야 하는데, 한 분야가 책임수행을 못 하면 다른 분야를 보충하면서 한 곳으로 나가되, 횡적인 면을 조정하면서 지금까지 발전시켜 나온 것이 바로 복귀섭리역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러한 활동을 해야 됩니다. 만일 내 대신자로 세울 수 있는 사람을 찾지 못했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현재 책임을 수행해야 할 분야가 종족적인 차원이라면, 그 종족적인 차원에서 사명을 완결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상속받을 수 있는 종족적인 대표자가 있어야 됩니다. 그러나 그러한 대표자가 없을 때는, 가정적인 조직을 많이 만들어 끌고 나가서 그들로 하여금 전부 종족적인 기반을 거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승리적 터전을 나와 더불어 결정한 후에, 비로소 종족적인 대표자로 세워 나가는 일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복귀섭리노정을 추진하고 있기 때문에, 개인복귀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가정적인 십자가를 대신 지라는 것입니다. 또한 가정적인 안식처를 찾기 위해서는 종족적인 십자가를 대신 지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벌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가정적인 책임을 짊어지고, 가정적인 목적을 절대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절대적인 대상자들이 있다면, 종족적인 십자가는 지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종족적인 십자가를 맡기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타락한 인간 중에는 그런 대상자가 없었습니다. 지금까지의 복귀섭리노정이란 것은 먼 거리를 두고 내려왔기 때문에, 아무리 수고했다고 해도 그 수고한 대가가 당장에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천년 후에, 혹은 수천년 후에 재림주님이 오신 그 세계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 투입한 공적과 실적이 당대에 평면적인 도상에서 나타나기를 바라며 섭리노정을 거쳐 나왔기 때문에, 번번이 시작은 잘했지만 종말에는 좋지 못한 결과를 가져왔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정적인 책임을 짊어지고 섭리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종족적인 사명까지 한다는 입장에 서야 됩니다. 그리하여 그것을 다했다고 하는 승리의 기반을 닦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그 승리의 결과가 얼마나 가치 있는 내용이 되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것을 자기 것으로 영원히 갖고 싶다는 입장을 인식시켜 가지고 계승시켜 나와야 합니다. 그러한 놀음을 하지 않고서는 완전복귀의 터전을 남길 수 없는 것입니다. 즉, 승리적 기준을 남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귀섭리의 도상에 있어서 하나님이 수고하시며 이중적인 십자가를 짊어지고 싸워 나오신 작전인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종족적인 승리의 기대 위에 민족적인 노정을 개척하기 위해서는, 개척하는 자신과 상속받을 사람이 합해서 민족적인 개척자의 노정을 가야 됩니다. 그렇게 하여 승리의 터전을 만들었다면 그 민족적인 승리의 터전이 얼마만큼 가치있는 것인가 하는 것을 알게 해야 합니다. 그 결과를 스스로 확인시켜서 알게 함으로 말미암아, 거기에 하나될 수 있는 요건이 성립되면, 비로소 상속받을 수 있는 권한을 세워 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를 복귀섭리노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학문적인 분야라든가, 혹은 어떤 전문 분야도 인계되고 상속되는 과정을 거침으로써 발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이 있기 때문에 책임진 사람이 어떻게 목적을 수행하는가 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정에서 종족을 탕감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가정을 기반으로 종족을 구하기 위해서는 한 가정만 구해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열 가정이면 열 가정, 백 가정이면 백 가정 모두에게 사방으로 영향을 미쳐야 됩니다. 복귀도상에 있어서 이러한 것을 상속받아 가지고 가야 하는데, 상속받을 후계자가 없기 때문에 이러한 것을 전문적으로 책임질 사람에게 후계자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고, 그 터를 닦아 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런 역사적인 노정을 걸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개인이 완성하기 위해서는 가정복귀노정을 거쳐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아담이 타락할 때, 개인이 타락한 이후에 가정을 통해서 타락이 완결되었기 때문에, 여러분이 완성하는 데도 개인만 완성해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가정이 완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정은 어떻게 해야 완성되느냐? 가인적인 가정과 아벨적인 가정 사이에서 문제가 벌어지는데 여기에서 하늘을 중심삼고 승리해야 되고, 그렇게 승리하여 두 가정이 하나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되어 움직일 때 여기에는 반드시 아벨적인 종족과 가인적인 종족의 문제가 결부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귀도상에서 책임을 짊어진 전문가로서 목적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는, 언제나 안팎으로 작전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어느 때에 하나님이 후계자가 되고,어느 때에 예수님의 대신자가 되어야 하느냐?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계승해 줘야 될 것이고, 예수님을 대신한 입장에서는 계승받아야 할 입장입니다. 따라서 계승해 주는 사람은 계승받는 사람에게 이익을 가해 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세상의 전문분야의 권위 있는 사람들이 처해 있는 입장과, 하늘의 섭리를 책임진 전문가의 입장과의 다른 점입니다.
세상에서는 어떠한 분야에 권위자가 되어 그 분야에 있어서 전문적인 권위를 갖고 나타나게 될 때에는, 그 권위를 중심삼고 환경이 수습됩니다. 그렇지만, 복귀섭리역사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수습되는 것이 아니라 수습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소받지 않는 완전한 터전 위에서 상속해야 되는 것입니다. 참소받는 입장에서는 상속이 안 된다고 하는 것을 여러분은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솔선수범해야 됩니다. 뿐만 아니라, 전반적으로 어려운 가정의 십자가를 자기가 짊어지고 책임을 수행하겠다는 결의를 해야 합니다. 이러한 결의를 하지 않고서는, 복귀도상에서 전문적인 책임을 수행하는 실체적인 인물이 될 수 없습니다.
종적인 문제를 두고 보더라도, 여러분은 이중적인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먼저 여러분은 아담이 실패한 것을 탕감복귀해야 됩니다. 탕감복귀해 가지고 이번에는 실체적으로 가야 할 책임이 남아 있습니다. 그 책임은 뒤에 오는 사람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축복가정이 종적인 면에서 하늘 앞에 상속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모든 미완성 분야를 오늘날 내 자신이 완성시켜야 하기 때문에, 종적인 분야에 있어서는 우리가 우위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역사적인 선조들보다도 우위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보다 전문적인 입장에 서야 됩니다.
그 다음에는 시대적인 사명을 중심삼고 내 자신이 보다 앞서야 됩니다. 과거의 선조들보다도 앞서야 되고, 현재의 입장에서도 앞서야 됩니다. 이렇게 내 자신이 앞선 입장에 서지 않고서는 하늘이 요구하는 전문가의 위치에서 탕감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뒤를 돌아볼 때에는 역사적인 승리자가 되어야 하고, 지금까지 지나온 복귀섭리의 도상에 있어서는 하나님과 예수님이 바라는 소원을 중심삼고 일치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바라는 후계자로 결정될 수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으로 하여금 내가 할 말이 많지만 못했다는 입장이 아니라 다 했다는 입장에 서게 해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과의 관계를 보면, 예수님은 부모의 입장에 있고 제자들은 아들의 입장에 있습니다. 따라서 아들이 사탄의 참소를 받을 수 있는 자리에 있기 때문에, 부모는 그 아들 자체의 기준까지도 세울 수 있는 책임을 져야 됩니다. 상속받는 데 있어서는 사탄의 참소를 받지 않는 환경을 결정지어야 됩니다. 아들들이 가는 길을 책임져야 할 그 자리는 오늘날까지 복귀섭리의 노정을 걸어온 하나님의 입장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제자들과 하나되어야 됩니다. 여러분을 중심삼고 볼 때도, 여러분과 앞으로 여러분에게 지도받을 사람과 하나가 되면, 여기에는 하나의 새로운 역사가 전문적인 입장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언제나 자기 1대의 사명만을 할 것이 아니라 2대의 사명까지도 해야 됩니다. 평면적인 입장에서 볼 때, 1대의 사명뿐만 아니라 2대의 사명까지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입체적인 입장에서 볼 때에는 3대의 사명까지도 해야 됩니다. 그리고 종적인 입장에서 보면 여러분은 아버지의 입장이기에 아들의 사명까지 완결지어야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볼 때는 내가 아들이 되는 것이니, 아들이 되어 가지고 아버지를 복귀해야 됩니다. 그러한 아들이 되어 하나님을 해원해 드릴 수 있는 승리적 기반을 세우게 된다면, 아들의 승리적 터전 위에 아버지가 출발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입장이 되는 것입니다.
아들로서 승리하고 아버지로서 승리하는 자리에 서게 되면, 예수님 자신이 비로소 하나의 중심이 되어 가지고, 천적 유업을 상속시킬 수 있는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초가 세워지면, 예수님 혼자만 상속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상속받을 수 있는 아들로 결정되면 하나님도 아버지 입장에서 상속해 주어야 됩니다. 그런데 상속받을 수 있는 아들로 결정되기까지, 즉 아버지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키워 주고 보호해 주는 책임을 누가 져야 하느냐? 아버지가 져야 되는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섭리의 뜻을 책임지고, 생사의 문제를 취급하는 전문가가 가야 할 공식적인 길은 무엇이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은 자기가 맡은 분야의 책임을 다 했다고 해서 가게 되는 길이 아닙니다. 상대적인 목표의 책임까지도 완결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비로소 너와 나의 인연이 맺어지는 것이요, 또한 상속권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갖추어지지 않고서는, 섭리의 노정에 있어서 상속받을 수 있는 대신자를 세울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세상에서는 자기가 어떤 분야에서 권위자가 되면 제자들이 많이 생기기 때문에, 자기가 할 일을 제자들에게 시켜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길에서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이 길에서는 어떤 분야든지 그 분야의 전반적인 책임을 제자들이 지는 것이 아니라, 전문가로서 책임을 진 자가 져야 되는 것입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여러분 자신이 식구들에게 존경받고 대접을 받는 입장에 서고, `나를 위하라'고 할 수 있는 부모의 입장에 서기 위해서는 자식을 잘 길러야 된다는 것입니다.
자식을 키울 때에는 자기 이상 사랑해야 됩니다. 부모가 자식을 위해서 희생하고 자기 이상 자식을 더 사랑하며 기르는 것은 자식을 잘 키우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자기 이상 사랑했기 때문에 자식이 그 사랑을 인계받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물론 자기 이상 사랑의 인연을 나타냄으로 말미암아 자식은 크는 것이요, 발전하는 것입니다.
나무가 크기 위해서는 점점 더 주고받는 작용이 잘 벌어져야만 됩니다. 그래야 더 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자식을 기를 때는 자기를 사랑하는 이상의 사랑과 심정을 가지고 키워야 됩니다. 그렇게 부모의 책임을 다하게 되면, 그 자식이 부모의 사정을 알고 그가 또 자기 자식을 가지게 되면 그렇게 키울 수 있는 것입니다.그렇게 될 때에 비로소 그는 부모의 슬픔이 자기의 슬픔이요, 부모의 기쁨이 자기의 기쁨이요, 부모의 할 일이 자기가 할 일이요, 부모의 책임수행이 자기의 책임수행이라고 할 수 있는 자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부모가 명령하지 않더라도, 그 부모의 원수를 자기의 원수로 대하고, 부모의 일을 자기의 일로, 부모의 책임을 자기의 책임으로, 부모의 사정을 자기의 사정으로서 감당해 나가겠다고 나서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식을 세우는 것이 창조의 원칙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리의 주관권을 정해 놓으시고 바라셨던 것은 `이렇게 해라' 하고 명령을 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가만히 있더라도, 그것을 스스로 알아 가지고 자동적으로 나설 수 있는 아담 해와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창조원칙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원리결과주관권에서 벗어난 아담 해와와 만나려고 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부모가 하라고 명령을 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의에 의해서 하고, 부모의 마음을 알고서 그 이상까지도 책임을 다 하겠다고 나설 수 있는 자식이 나타나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온 인류의 아버지로서 복귀섭리 전체를 책임진 하나님의 비밀을 상속시킬 수 있는 기반이 땅 위에 세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상속시킬 수 있는 동기는 누가 마련해야 되느냐? 상속의 터전을 닦을 때 까지는 부모가 하는 것이지만, 상속받는 순간에는 자기가 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5%의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원수를 갚고 승리하는 것은 하늘이 전부다 마련해 주더라도, 승리는 자기가 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내 책임을 대신하여 짊어지고 나를 길러 주신 부모의 심정을 깨달아 가지고, 그 심정적 인연과 일치된 가운데 그분의 슬픔은 나의 슬픔이요, 그분의 싸움은 나의 싸움이요, 그분의 원수는 나의 원수라고 할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둘도 없는 아버지께서 뜻과 더불어 수고한 인연을 가지고 찾아 온 것을 감사하면서 그 이상의 자리를 내가 이룩하고 죽을 수 있는 길이 있다면, 내가 먼저 죽어야겠다고 작심하고 나설 수 있는 기준을 세워야 비로소 상속의 인연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생애 노정에서 이러한 기준을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사람을 통하여 소망하고 나왔지만, 그들은 다 깨어져 나갔습니다. 예수님의 원수를 자기의 원수로 여기지 못했고, 예수님의 슬픔을 자기의 슬픔으로 체휼하지 못했으며, 예수님의 외로움을 자기의 외로움으로 알고 같이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예수님은 그 누구보다도 외로웠고 슬펐으며, 또한 그 누구보다도 원수 앞에 몰리는 초조한 입장에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그 상황에서 잠을 잤습니다. 그 누구도 예수님이 고독하고 비참하고 생명의 위협을 받는 자리에 있을 때 보호자가 돼 드리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대신해서 서러워하고, 예수님을 대신해서 외로워하고, 예수님을 대신해서 슬퍼하며, 예수님 대신 죽을 수 있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죽음의 길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상속받을 수 있는 인연을 갖추었더라면, 그러한 영적 기반을 중심삼아 가지고 모든 것을 상속받을 수 있는 평면적인 기반이 성립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기준이 끊어져 없어짐으로 말미암아 횡적인 기반을 갖지 못하고, 종적 관계에서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신을 중심삼아 가지고 지금까지 역사를 해 나온 것입니다. 그러한 평면적인 기반이 없음으로 말미암아 복귀섭리의 도상에서 얼마나 많은 지장을 받았겠는가 하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만약에 평면적인 기반이 세워졌더라면, 그 기반 위에 수많은 종적 기준을 세울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기준을 세우지 못했기 때문에, 하늘의 역사는 종적인 길만을 통해서 지금까지 수천 수만대의 수난의 길을 거치면서 복귀섭리를 해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을 대신하는 하나의 전문가로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이냐? 그 일을 알고 수행할 줄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알고 복귀섭리해 오신 사정을 알아 가지고 체휼하는 단계에서 그 뜻을 수행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선조로부터 이어받은 가정의 모든 전통과 유업을 나 자신이 후손에게 고이 상속해 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할 여러분은 예수님과 같은 입장에 있느냐? 그런 입장에 있어야 되는 것은 예나 다름이 없다는 것입니다. 범위와 때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는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자신들을 중심삼고 볼 때 상속받을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느냐? 여러분이 잘 믿어서 영계에 가자마자 모심받을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으면, 거기에서부터 상속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은 그러한 것을 준비해 나왔다는 것입니다.
내가 개인적인 복귀의 노정을 가는 데 있어서는 가인적인 울타리가 될 수 있는 사명을 기독교면 기독교, 기성 종교면 기성 종교가 해 주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능하면 개인적인 복귀의 터전을 넘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둘이 협조해야만 가정이 상속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또 가정이 종족을 거쳐 나가기 위해서는 두 가정, 즉 아벨 가정과 가인 가정이 협조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가는 길 앞에 있어서 철칙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여러분 자신들이 그렇게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가인적인 존재가 없을 때에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나님이 천사와 협조해서 아담을 창조했던 거와 마찬가지로 온갖 정성을 다해야 됩니다. 아담과 해와를 지을 때, 하나님도 기뻐하고 천사장도 기뻐하는 가운데 밤과 낮의 모든 시간과 모든 정성을 투입시켜 가지고 창조의 인연을 쌓아 나왔던 것과 마찬가지의 입장에 서야 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업고 하나님 대신 천사장을 부리는 생활을 하면서, 그것을 실체와 연결시킬 수 있는 일을 해야 됩니다. 다시 말해서, 재창조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복귀역사란 무엇이냐? 재창조 역사입니다. 그러면 재창조 역사는 무엇이냐? 제 2의 창조를 말하는 것입니다. 제 2의 창조를하려면 가인적인 입장에 서야 됩니다. 그래 가지고 무엇을 해야 하느냐? 아벨을 대신해서 하나님이 지향하는 모든 문제를 자기의 생명 이상 중요시했다는 기준을 세워야 되는 것입니다. 밤이나 낮이나 그 어느 때라도 명령만 있으면 거기에 일치될 수 있는 심정을 갖추어 가지고, 자기의 모든 것을 상속받을 수 있는 후계자를 창조해야 됩니다. 그렇게 하여 자기를 닮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전도를 하면, 그 전도된 사람은 자기를 닮아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전도한 사람이 뜻을 다 알게 되면, 제자된 입장에서 자기를 닮아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눈물 흘릴 일이 있으면 대신 눈물 흘릴 수 있고, 내가 죽을 입장에 있으면 대신 죽을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러나 그러지 못한 것이 타락인 것입니다.하나님의 슬픔을 자신이 대신하여 당하더라도, 타락은 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고수해야 할 것이 아담의 입장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앞으로 그러한 입장에서 가야 하니 그 길이 힘들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효도하라고 가르쳐 주어 가지고 효자를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효도하겠다는 마음이 우러나오게 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것은 하루 아침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랜 기간을 두고 영향을 미쳐야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영향을 미친다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 아버지가 하는 대로 자식이 따라올 수 있도록 생활로써 자식에게 본을 보여 줘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실천하는 뜻 대한 전문가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자식이면 자식, 전도된 사람이면 전도된 사람을 중심삼아 가지고 주위에 울타리를 만들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울타리를 만들어서 그 울타리권내에서는 어떠한 비밀도 자유자재로 논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죽어도 우리를 사탄세계로 옮길 수 없다고 할 수 있는 절대적인 권이 이루어져야만 하나님은 여기에서부터 절대적인 뜻을 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으로 여러분들이 전문가로서 책임을 지고 실천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분야이기 때문에 잘 알아야 됩니다.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를 중심삼고 볼 때, 우리는 개인적인 시대와 가정적인 시대와 종족적인 시대를 거쳐 민족적인 시대로 넘어가는 단계에 놓여 있습니다. 이 단계에서는 먼저 종족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통일교회면 통일교회 전체가 하나되어야 합니다. 종족을 복귀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나되어 가지고 외적인 종족과 대결을 해야 됩니다.
누가 가인이고 누가 아벨이냐 하는 것을 결정하기 위해서는 제물을 드리는 준비기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기간을 중심삼아 가지고 정성을 드려 아벨이라는 권위를 세우는 일을 해야 되겠다 이겁니다.
민족을 복귀해야 할 종족적인 책임자는 민족적인 십자가를 지고 민족이 복받을 수 있는 터전을 만들기 위하여 정성을 드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정성을 드리는 데는 얼마나 드려야 되느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여 지금까지 사탄세계에서 받은 은혜와 행복보다도 더욱 은혜롭고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 만큼 드려야 합니다. 그러한 정성으로 말미암아 봄절기와 같은 환경을 만들어 놓아야 됩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지금까지 어떠한 환경에서도 느끼지 못하던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그러한 환경을 우리가 만들어 놓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봄날과 같은 환경이 이루어지면, 모든 것은 여기에 화해 버리는 것입니다. 거기에서는 왠지 모르게 떠나고 싶지가 않습니다. 이러한 인연의 동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창조 본연의 터전을 중심해 가지고 새로운 종교를 만들어야 됩니다. 그리하여 만인이 하나에서부터 백까지 우리의 움직임과 말과 행동과 그 밖의 모든 것을 생명력으로 흡수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의 생명체가 되어서 자기를 알고 자기와 하나될 수 있는 기준까지 끌고 나가야 됩니다.
복귀의 길이 이렇기 때문에, 우리는 부모의 심정을 지니고 종의 몸을 쓰고 땀은 땅을 위하여, 눈물은 인류를 위하여, 피는 하늘을 위하여 뿌려야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인류를 위한다는 것은 무엇이냐? 자기가 속해 있는 동네의 어느 한 사람만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닙니다. 땅을 위한다는 것은 무엇이냐? 자기가 처해 있는 그 환경에서 이 세계의 땅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피는 무엇이냐? 한 생명을 구원하기 위하여 나의 눈물과 땀을 전부다 투입시켜도 안 되었을 때, 내가 피를 뿌려서 하나의 제물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지 않아요?
자기 자식을 위하여 희생할 수 있는 부모의 심정을 가지고 세계를 대신하여 죽게 된다면, 그는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천국에 갈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이냐? 자식을 위하여 희생하듯이 뜻을 위하여 희생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식이 부모를 위하여 희생하듯이 보다 더 큰 세계를 위하여 그렇게 희생할 수 있는 사람만 된다면 천국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지금까지 부모의 심정을 지니고 종의 몸을 쓰고 눈물과 피와 땀을 흘리는 것은 무엇을 위한 것이냐? 세계를 위한 것입니다. 자기의 아들딸을 위하여 살 줄 모르는 사람이 세계를 위해서 산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세계를 위해서 살 수 있어야 사탄세계에서 뽑아온 대표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실감하는 자리에서 천국을 이루는 하나의 본이 되고, 표본이 될 수 있는 그 기준을 결정하는 일을 내가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기준이 무엇이냐? 가정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나라를 이룰 수 있는 표본은 무엇이냐? 그것도 역시 가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중심삼고 자식을 위해서 희생하고, 온갖 대가를 치르면서도 보수를 원치 않는 자리에 설 수 있어야 합니다. 오히려 계속 주지 못하는 것을 한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을 가지게 될 때, 그 자식들이 그것을 본받아 부모가 그렇게 해주었던 것에 감사하고, 자기도 그렇게 해야겠다는 입장에 서고, 부모의 어려운 길을 자신이 대신 책임지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에덴 동산에서 타락하였던 그 한의 기준을 뛰어 넘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길이 이제부터 여러분이 가야 할 길인 것입니다. 말로는 세계를 위해서는 무엇을 어쩌고 저쩌고 하지만, 그 세계는 나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나를 중심한 가정에서부터 사방으로 벌어지는 것입니다. 나를 중심한 가정에서부터 사방으로 확대된다는 거예요. 즉 단 한 자리의 기준이라도 사방성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세계가 출발할 수 있는 기원이 마련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하늘의 실무를 책임진 전문가로서의 책임을 해야 됩니다. 다시 말하면 부모의 심정을 중심삼고 자식들의 수난의 길을 막아 줄 수 있는 부모의 책임을 해야 하고, 그것을 사탄의 참소에서 벗어난 자리에서 자식에게 상속시켜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식 앞에 모든 위업을 기쁨 가운데 상속시킬 수 있는 방법이며, 또한 원칙적인 순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가정을 중심삼아 가지고 기반을 닦아야 됩니다.
그러면 한 가정을 중심삼고 그 부락과 인연을 맺는 일은 누가 해야 되느냐? 그것은 여러분이 해야 됩니다. 또한 가정을 중심삼아 가지고 종족을 복귀하기 위해서는 먼저 부모가 시범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내가 이렇게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너도 이러이러한 길을 가야 된다는 시범을 보여 주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가정의 승리적 기반이 닦여집니다. 그래서 종족적인 승리를 책임져야 됩니다. 그러면 민족적인 책임은 어떻게 지느냐? 민족적인 책임을 하려면 하나의 중심존재가 세워져야 됩니다. 중심존재가 결정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국가적인 책임도 역시 중심존재가 결정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 이 땅에 오시는 주님은 어떠한 분이어야 되느냐? 그분의 인류 역사 과정의 그 누구보다도 수난의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탕감노정에 있어서 말할 수 없이 어려운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분이 아니면 안 됩니다. 개인적인 십자가는 물론이요, 가정적인 십자가, 국가적인 십자가, 세계적인 십자가를 지고 천주복귀라는 사명을 완료할 때까지 책임을 다 하면서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이러한 전체적인 책임을 한 몸에 지녔기 때문에, 맨 밑에서부터 맨 위까지 복귀섭리에 있어서 최대의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의 사명 전체를 책임질 수 있는 전문가들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렇게 못 되었기 때문에 각 분야마다 각자 다른 책임을 결속시켜 가지고 자기의 목적을 끌고 나가시는 것입니다. 그분이 바로 복귀섭리를 이끌고 가시는 분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떤 분야에서 전문가로서의 책임을 지겠습니까? 그 한계를 정하라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 어느 분야에서 책임을 할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책임의 한계를 정해야 합니다. 개인이냐 가정이냐, 아니면 씨족 민족 국가 세계 천주의 어디까지 책임을 질 것인가? 여러분이 천주를 책임지겠다고 하더라도, 이 단계를 거치지 않고도 못 가는 것입니다. 아무리 자기가 나는 이렇게 해야 되겠다 하더라도, 이 길을 거치지 않으면 넘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자기의 전공분야에서 일생 동안 어느 분야까지 책임을 지겠다 하는 기준을 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기준을 갖추지 않으면 목적지에 못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문가는 늘 연구해야 됩니다.
원리적인 견해로 보자면, 개인이 복귀되어 안식하기 위해서는 가정이 3대이상을 거쳐야 됩니다. 3대 이상을 거치기 위해서는 자녀를 낳아 사위기대를 복귀해야 합니다. 이 사위기대는 아들딸만 낳았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아들딸이 부모를 대신할 수 있는 자리에 서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완전히 하나되어 가지고, 그 가정이 아벨적인 가정이 되어서 가인적인 3가정을 복귀해야 합니다. 그 3가정은 믿음의 아들딸로서 번식되어야 합니다. 그 3가정을 중심삼아 가지고 12수, 12방향을 갖춘 12가정을 만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다시 이 12가정을 만들어야 됩니다. 이 120가정이 무엇이냐 하면, 세계의 터전을 향하여 갈 수 있는 씨족적인 기반인 것입니다. 그러한 기반을 통해서 세계를 향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예」
통일교회에 120가정이 있습니다. 이 120가정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의 씨족의 대표입니다. 이들은 민족을 위해서 희생해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을 젊은 시절에 지방으로 내쫓아 민족을 위해 희생하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 3년 전도 기간은 예수님이 걸었던 공생애노정으로 알고 가라고 한 것이기 때문에, 임지에서 어떠한 핍박을 당하더라도 보따리 싸가지고 도망을 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3년 동안 나가서 전도를 많이 하든 적게 하든 그것은 상관 없습니다. 하다못해 땅굴을 파더라도 뜻 가운데로 그들을 인도해 주면, 여러분이 전도 나갔던 그곳은 반드시 우리의 초소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민족적인 탕감기준을 세워 가지고 민족과 하나를 이루어서 민족이 여러분을 스승처럼 모셔 주고, 또 여러분이 명할 수 있는 복음의 자리를 위해 그 부락이 전체를 동원해 여러분과 관계를 맺었더라면,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가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기반 위에 선 430가정은 무엇이냐? 이 430가정은 전체의 평면적인 기준입니다. 그러니 이것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이제는 국가를 중심삼고 그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에 세계로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43수를 세워 선생님의 40년 생애를 복귀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계적으로 조건을 세워야 하는 거예요.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역사는 지금 통일교회 시대권으로 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 문제가 뭐냐 하면, 씨족이 일치단결해 가지고 민족복귀를 위해 나가는 것입니다. 민족이 복귀되는 날에는 국가는 자연 굴복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예」
지금까지 지상권에서는 땅을 중심삼고, 또는 주권을 중심삼고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됩니다. 백성을 중심삼고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민족을 중심삼은 실체복귀를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국가적인 믿음의 기대는 이미 세워져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적인 실체복귀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우리는 무엇을 바라고 나가야 되느냐? 돈을 바라고 나가야 되느냐, 아니면 다른 무엇을 바라고 나가야 되느냐? 무엇 바라고 나가야 됩니까? 백성을 바라고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무엇을 바라고 나왔습니까? 돈을 바라고 나왔지요?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반대로 해야 됩니다. 백성을 바라고 나가야지, 돈을 바라고 나가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에, 기성교회는 우리가 활동할 수 있는 돈을 다 대주어야 됩니다. 뿐만 아니라, 이 나라도 돈을 대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돈을 그들이 대주지 못하였기 때문에, 우리가 이중의 십자가를 짊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왜 그러냐? 책임자가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며, 그들을 대신해 경제적 복귀 무대의 선두에 서서 나가야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금후에 있어서는 이런 요건을 절대적으로 만들어 주어야 됩니다. 다시 말하면, 책임진 전문가가 그런 환경적 터전을 전부다 갖추어 가지고 사탄의 참소를 받지 않는 입장에서 상속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외적 분야에서 경제문제를 중심삼아 가지고 밤낮없이 이런 일을 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이번의 제 1차 수련회에 대하여 관심이 많습니다. 여러분을 어떻게 본 궤도에 올려 가지고 남한 전체를 복귀시키느냐? 그럴 수 있는 심정적 기준을 어떻게 일치시키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이것은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선생님을 대신하면 되는 것입니다. 잠을 자지 않고, 먹을 것을 먹지 않고, 자기의 일체를 잊어버리고, 오직 뜻 하나만을 위해서 일심으로 전념해야 하는 것입니다. 뜻을 위하여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그리하여 뜻을 위해서 나는 났고, 뜻을 위하여 나는 죽는다고 할 수 있는 신념이 있어야 됩니다.
그러면, 그러한 신념을 어떻게 가지느냐? 그런 신념을 가지기 위해서는 선생님과 여러분 사이에 얼마만큼의 간격이 있어야 되느냐? 절대로 간격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니만큼 여러분을 중심삼아 가지고 국가를 복귀할 수 있는 기준이 누가 복귀하여야 하느냐? 여러분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생님이 선두에 서서 싸워 나가는 것입니다. 세계 복귀를 위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냐? 하늘의 선민으로서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늘의 가정으로서 살아가는 원리원칙이 있어야 합니다. 축복가정은 자기가 속한 씨족을 위해서 고달픈 생활을 해야 한다는 거예요. 알겠어요? 자기 주위에 있는 가정들이 잘 때 같이 자면 안 되는 것입니다. 또 그들이 무엇을 먹는다고 같이 먹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축복가정은 그 씨족 내의 가정을 키워야 됩니다. 자식을 키우는 부모와 마찬가지 입장에서, 그 가정들이 어려우면 자기의 어려움 이상의 어려움을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동네에 아무개가 밥을 굶고 산다 하면 차라리 내가 굶는 것이 낫지 그 사람을 굶길 수 없다, 도저히 나만 먹을 수 없다는 심정을 갖고 그 사람에게 갖다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통일교인들 중에서는 나만 잘 살면 된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건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전부다 떨어져 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럴 게 아니겠어요? 원리가 그렇게 되어 있으니, 그래야 될게 아닙니까? 그러면 가정을 중심삼아 가지고 민족을 어떻게 책임질 수 있을 것이냐? 그러기 위해서는 가정에 대한 십자가, 씨족에 대한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여러분이 이 고개를 넘어야 합니다. 그리고 지역적인 경계선, 즉 도 경계선을 넘어야 합니다. 그러면 민족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민족복귀운동을 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도를 중심삼고 도민들을 어떻게 포섭해야 할 것이냐? 도지사는 도민들을 포섭한 뒤에 필요한 것입니다. 주권국가에 있어서 각료라는 것은 그 나라의 국민이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즉, 각료는 국민이 선발하는 것입니다. 국민이 선발하지 않으면 각료는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문제는 국민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각 도가 모여서 국가가 되기 때문에, 각 도의 부인들은 각 도면 도 전체를 통합하기 위해서 조직적인 활동을 해야 합니다. 선생님의 작전은 점프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강원도에서 반공강의 한 것이 전체 도에 인연맺어지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언제 어디에 투입되더라도 선생님을 본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걸 만들어 놓기 위해 전도 나가 새로운 분야에 뛰어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민족복귀의 사명을 책임져야 할 시대에 들어왔습니다. 알겠어요? 통일가라는 씨족에게는 민족복귀라는 목적을 수행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바로 그것을 책임져야 할 시대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어떻게 하면 선생님이 진 책임을 상속받느냐? 선생님이 책임을 지고 가는 외로움과 누구에게도 말 못 하는 서글픈 사연을 여러분이 어떻게 감지해야 되느냐? 어떻게 하면 이것을 비밀리에 상속받을 수 있느냐? 이러한 것이 앞으로 여러분들이 구해야 하는 길이요, 동시에 여러분들이 복받을 수 있는 길인 것입니다.
지역장이면 지역장, 지구장이면 지구장 가운데 전국을 대표해 가지고 이 제단 앞에서 보다 더 전문적인 책임을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느냐? 그러한 사람이 150명이면 150명, 170명이면 170명이 있으면 그 요원들이 매일같이 연구하고 노력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새로운 분야를 제시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 제시된 새로운 재료를 흡수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 가지고 이 시대 이후의 전문적인 상속자로서 책임을 져야 됩니다.
전문가가 되려면 역사적인 자료를 수집해야 되고, 현실적인 자료를 수집해야 됩니다. 또 현실적인 자료보다는 미래적인 자료를 수집해야 합니다. 그러면 미래적인 자료란 무엇이냐? 탕감복귀의 원칙에서 볼 때 미래적인 자료란 무엇이냐? 그 원칙은 마찬가지입니다. 부자의 관계를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의 가정을 중심삼고 볼 때, 통일가라고 해서 뭔가 색다른 모양이 있습니까? 가정의 모양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통일가에 있는 여러분의 가정을 중심삼아 가지고 뭘 해야 하느냐? 전문가적인 부모의 입장에서 자식을 키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전도를 해서 믿음의 아들딸을 만드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알 것입니다. 자기가 전도한 아들딸에게 나쁜 것부터 주겠다고 하는 부모는 가짜입니다. 부모는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것을 먼저 주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알겠지요?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지만 주지 못하는 것은 관리를 못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주면, 그것을 받은 자가 해를 입는다는 것입니다. 시퍼렇게 날이 서 있는 썩 잘 드는 칼을 주고 싶더라도 잘못 주었다가는 그 자체가 망하고, 집안이 망하고, 전체가 망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안 주는 것입니다. 부모의 마음은 언제나 최고의 것을 주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부모의 이런 입장을 알아 가지고 본을 받아서 부모가 전도 나가라고 하기 전에 본인이 알아서 나가고 싶어하는 입장에 서야 됩니다.
1957년도에 120개 지역에 전도를 나갔을 때 선생님이 근 4년 동안 가만히 두었습니다. 왜 그런지 알겠어요? 한번쯤 가만히 내버려 두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내가 말씀을 알았으니 말씀을 전했으면 좋겠는데, 전도를 한번 나갔으면 좋겠는데` 합니까? 그렇다면 한번 나가서 이 나라를 휘둘러 보고 부딪혀 보라는 것입니다. 민족을 이룰 수 있는 한 때를 바라보고 부딪혀 보라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지금 한국에서 여러분과 함께 활동을 하고 있는데, 한국에서 여러분이 고생을 한다고 해서 그것을 일본이나 미국 등 외국식구들에게 공문을 보내서 `본부교인들이 이렇게 움직이고 고생하니, 너희들도 우리처럼 이렇게 해야 한다` 고 지시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알겠어요? 그렇게 하지 않아도 소문은 듣게 되어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빙 돌아 다 알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외국 식구들, 너희들 한번 들어와 봐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역사하자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우리가 보리밥을 먹거나, 또는 굶어가면서 맨발로 전도하는 것과 심지어 낭하에서 자는 것까지 시범을 보여 주어서, 그들도 돌아가서 그렇게 출발하도록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선생님 만날 수 있는 때를 위하여 본부에 있는 식구들 이상 밤낮으로 기도하면서 전도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한 때를 염두에 두고 이 시대를 맞춰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겠다는 느낌이 스스로 일어나야 거기에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정성을 안 들인 제물과 하나되어 가지고 탕감의 역사가 벌어지겠어요? 안 벌어지지요?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정성을 좀 드려라. 제물을 드려라` 그러시겠습니까? `검정 소면 검정 소, 누런 소면 누런 소의 뱃속에서 이러이러한 송아지가 나올 것이니, 그거 전부 다 제물 드릴 준비해라` 그러시겠습니까? 제물을 들리 때에는, 이것은 모두 주님 것이니 다 드리겠다고 내심으로 결심하고 성전에 가서 `제물을 뜻맞게 드리려면 어떻게 드려야 되겠습니까` 하고 물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이렇게 이렇게 하라고 가르쳐 주시는 대로 제물을 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명령을 해 가지고는 세계 복귀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예」
하늘의 섭리가 이러한 역사이기 때문에, 선생님이 어머니를 맞이하는데 있어서도 절대 선생님이 동기가 되어서 맞이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왜 그러냐? 타락은 주체가 동기가 된 것이 아니라 상대가 동기가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담과 천사장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누가 동기가 되느냐? 천사장이 동기가 되는 것입니다. 부자의 관계로 보자면, 여러분이 잘못된 동기를 가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선생님과 여러분과의 관계를 부자의 관계로 보며, 여러분은 선생님보다 한 단계 떨어지는 것입니다.
개척의 동기는 내가 되더라도 결정적 동기는 내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결정적 동기는 누가 되느냐? 상대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이 이런 일을 해 나오는 데 있어서는 반드시 선생님이 필요로 하는 상대가 나타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내가 가짜가 아니라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만 나타나게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제1후보, 제 2후보, 제 3후보까지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후보들을 몽땅 다 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각자가 3분의 1씩 상대적 책임을 하도록 해 놓고, 얼마만큼 기간이 지나면 시기를 봐서 결정하는 것입니다.그렇게 해야 원리적으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 원칙을 떠나서는 하나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디로 가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의 목적지는 어디입니까? 여러분은 자신이 무슨 사명을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됩니다. 여러분은 애국자가 되겠어요, 효자가 되겠어요? 충신이 되겠어요, 효자가 되겠어요? 어떤 것이 되겠어요? 「충신이 되겠습니다」 효자가 안되고? 「효자도 되겠습니다」 충신은 나라를 위해서 몸을 바칠 것을 각오해야 됩니다. 그러면 통일교회의 현재 식구들 중에서 충신이 나올 수 있겠어요, 없겠어요? 똑똑히 대답해 봐요. 나올 수 있겠어요, 없겠어요? 「없습니다」 왜? 나라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충신은 말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되고자 하는 것은 효자가 아니라, 충신인 것입니다. 물론 효자의 공인서를 받아낸 다음, 충신의 공인서를 받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충신의 도리를 할 수 있는 길이 없으니 원통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 길을 가기 위해 통일교회의 신도들이 기도하고 있고, 희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까지 인간들이 어버이 앞에서 효도를 했느냐? 그 어버이는 어떠한 어버이냐? 그 어버이는 나라의 주권을 대신할 수 있는 하늘의 왕자요, 하늘의 군주였습니다. 또한, 땅의 왕자요 군주였습니다. 그러나 그 군주가 추방을 당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위치를 복귀하려니 내가 그 어버이의 아들로서, 그 족속으로서 태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효도 좋지만, 충을 어떻게 가르칠 것이냐? 앞으로 자녀를 가르치는 데 있어서는 효도하는 것만 가르쳐서는 안 됩니다. 그것보다도 충성하는 것을 가르쳐 주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의 아들딸들이 이 땅 위에 충의 역사를 남길 수 있는 온전한 국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국민이 되려면 충을 가르치는 하나의 가정이 되어야 하고, 또 그러한 가정이 되어야만 비로소 그 가정을 중심한 사랑을 하나님께 영원히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하나님 앞에 충신이라는 말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순신이나 유관순 같은 사람이 애국자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이 나라의 애국자라 할진대, 그들 이상으로 충성을 하겠다고 하는 마음은 가지고 있으되 지금까지 그럴 수 있는 실질적인 기준을 갖지 못하였으니 이제부터 여러분은 충성의 길을 걸어야 되겠습니다. 나라를 찾기 위한 해방의 선봉자가 되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길을 가는 데 있어서 당파적으로 몰리고, 쫓기고 혹은 투옥당한다 하더라도 투쟁을 해야 되겠습니다. 이 투쟁에서 대적할 적수가 누구냐 하는 것을 결정해 가지고 나가야 됩니다. 이것이 통일교회가 가야 할 길입니다.
자기가 아버지 앞에 효를 했다고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효는 충의 도리를 다하기 위한 하나의 터전인 것입니다. 아버지를 대신하여 충의 도리를 다할 수 있고, 한 가정의 부모를 중심삼고 사랑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내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나라를 중심삼고 영원한 사랑을 축복해 주시려는 아버지의 소원 앞에, 그 기준을 내가 어떻게 돌파해 가지고 성취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을 필생의 사업으로 알고, 국민된 도리로써 그 책임과 사명을 다해야 됩니다.
여러분, 나라가 없는데 효자가 될 수 있어요? 나라가 없으면 효자가 되고 싶어도 못 되는 것입니다. 부모가 나라를 위해서 밤잠을 못 자고 신음하고 있으면, 자식도 그 나라를 위해서 희생할 수 있어야 됩니다. 나라를 위해서 죽음을 각오하고 뛰쳐나갈 수 있는 입장에 서 가지고, 어버이와 더불어 그 나라의 상속권을 받을 수 있는 아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전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효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렇지요? 「예」
그러면 여러분들은 지금까지 무엇을 했습니까? 하늘의 효자가 되고 나라의 충신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고 생각합니까? 여기에 해당하는 정신이 곧 하나도 효와 충이요, 둘도 효와 충이요, 열도 백도 천도 만도 효와 충이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죽더라도 어떻게 이러한 자리에 올라와 죽느냐 하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섭리의 뜻을 짊어지고 나오는 사람들의 생활이었습니다. 충의 자리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가정이 책임을 해야 하고, 종족까지 책임을 해야 된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예」
그러면 그 책임을 어떻게 해야 되느냐? 왜 예수님이 십자가를 져야 되느냐? 문제가 거기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효는 가정에서 할 수 있는 것이지만, 충이라는 것은 국가적인 단계에서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국가를 위한 공적인 입장에 서야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원칙을 붙들고 나가게 될 때, 나는 비록 환경의 지배를 받았지만 효를 하였고 충을 하였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눈을 감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원칙을 통하여 이루어진 국가는 그 원칙에 따라 간 사람을 효자로 또는 충신으로 공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일제시대에 유관순이 나라가 있는 상황에서 싸웠습니까? 또 주권이 있는 상황에서 싸웠습니까? 아닙니다. 그렇지만 잃어버린 나라를 찾기 위하여 어떤 충신보다도 더 큰 충성을 할 수 있는 입장에 섰던 것입니다. 그녀의 가정에서 효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 나라에 충성할 수 있는 입장에 섰다 이겁니다.
그 충으로 인하여 종족적인 승리가 이루어지면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 가정을 다시 찾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가정을 다 잃어버렸더라도, 산지사방에 있더라도 종족이 승리하는 날에는 그 씨족이 감명을 받아 가지고 가정을 수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만 하면 잃어버렸던 가정이 다시 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그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어떠한 책임자든지 자기를 희생해 가지고 안팎의 모든 것이 자기로 인하여 수습될 수 있는 터전을 닦아 나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승리가 결정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씨족을 위해 살아야 되겠습니까, 민족을 위해 살아야 되겠습니까? 「민족을 위해서 살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김씨면 김씨의 씨족적인 메시아가 되었다면, 그 메시아 된 책임은 민족을 필요로 하고 민족을 사랑하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또한 민족을 위해서 충성하는 것은 국가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며, 국가를 위해서 충성하는 것은 세계를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세계를 위해서 충성하면 거기에서 세계와 국가와 민족이 연결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여러분들은 면이면 면, 군이면 군, 도면 도를 중심삼고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생명을 책임진 전문가로서 가야 할 길이란 바로 효할 수 있는 길이요, 충할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통일교회의 여러분들은 이론적인 입장에서나, 실제적인 모든 면에 있어서 책임을 짊어진 중심적인 기둥이기에, 결코 불행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알겠어요? 절대로 불행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선생님의 사랑과 보호를 받아 뒤넘이치는 험난한 환경을 넘어서 축복을 받았으니, 여러분은 정녕 복받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축복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가인이 아벨에게 자동적으로 굴복해야 된다고 그랬지요? 그러면 여러분은 선생님한테 자동적으로 굴복합니까? 합니까, 안 합니까? 「합니다」 자동적입니까, 권고적입니까? 자동적인지 권고적인지 한번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언제나 뜻이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지난날은 이런 것을 요구했지만, 오늘은 무엇을 요구하고 있으며, 미래는 무엇을 요구할 것인가 하는 것을 항상 생각해야 됩니다. 그러한 준비가 되어 있어야 됩니다. 요구하는 기준이 곧 자기의 주체의식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들은 모두가 자기를 위주로 해 가지고 `아이구, 나만 잘 살면 됐지`라고 하는 이기주의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이기주의를 버리고 사랑을 나누어 주어야 됩니다. 가정도 그래야 됩니다. 행복한 가정은 남편이 나갔다 들어오면 밖에서 있었던 모든 일을 아내와 더불어 상의하고 새롭게 개척할 수 있는 요인을 발견해야 합니다. 서로가 힘을 합하여 연구하는 가정이 행복한 가정이라는 것입니다. 부모가 그렇게 되면 자식들도 거기에 힘을 보태며, 우리도 이러한 가정을 만들자고 동조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러한 길을 가려니 서로가 협조를 해야 됩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3년 동안 활동을 시키는 것입니다. 이 길을 가려면 고생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고생해서 망할 것 같으면 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절대로 고생해서 손해보지는 않는 것입니다.
세상이 밀가루와 같은 세상이라면 여러분은 누룩이 되어야 합니다. 누룩은 밀가루보다 부풀리는 요소가 더 들어 있습니다. 그렇지요? 그러므로 누룩은 밀가루에다 무엇인가 플러스(+) 시켜 놓은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들은 어떻게 해야 하느냐? 동네 사람에게 플러스될 수 있는 행동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밀가루와 같은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들은 자기를 중심삼아 가지고 자기만 잘 살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나 혼자만 잘 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를 중심삼고 죽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과는 반대라는 것입니다.
나라는 나를 위해 있어야 되지만, 나도 그 나라를 위해서 있어야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 라는 개인을 중심삼고 나라가 있어야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연결되게 되는 것입니다. 앞으로 통일교인 중에 국회의원이 돼 보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10년 이상은 나서서 자기 선전을 하지 말아요. 통일교회 식으로, 밤이나 낮이나 남을 위하여 살고, 그들에게서 칭찬받을 수 있는 일을 하십시오. 그리하여 뭇사람들의 마음을 점령하게 될 때는 국회의원이 되지 않겠다고 도망다녀도 그들이 끌어다가 시키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자동적으로 되는 것입니다. `자연굴복` 되는 것입니다. 원리가 그렇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절대 `강제굴복'이나 `수단굴복'이 아닙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기 자식들이나 믿음의 아들딸들도 강제로 굴복시켜서는 안 됩니다. 알겠어요? 「예」
그러면, 여러분들은 선생님에게 자연굴복합니까? 아니면 가르침을 받아서 굴복합니까? 어떤 것입니까? 여러분이 자연굴복하지 않으면 가인적인 입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즉 아벨적인 입장을 상속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자연굴복하여 인정받지 않는 사람은 아벨적인 계승자가 못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탄이 먼저 굴복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탄편이 가인이기 때문에, 가인은 아벨편에 굴복해야 됩니다. 가인이 굴복하지 않으면 아벨적인 책임을 못 하는 것입니다. 이 원칙이 확실하기 때문에, 앞으로 통일교회의 이념을 중심삼아 가지고 이 권내에 들게 되면, 세계는 틀림없이 일시에 통일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국가를 책임지려고 할 때에도 역시 아벨 앞에 자연적으로 굴복해야 됩니다. 이 말은 아까 말한 거와 같습니다. 여러분은 먼저 사탄편 가인을 자연굴복시킬 수 있는 아벨이 되어야 됩니다.
자기가 굴복하는 것이 부모의 위업을 상속받는 길이기 때문에 굴복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앞으로 여러분이 믿음의 생활을 실천하고 아벨적 생활을 전면적으로 실천하게 되면, 그 노력의 대가로 하늘의 뜻이 발전한다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예」 다시 말하면 여러분은 이중적인 위치에 있다는 것입니다.
축복가정들이 식량이 없어서 밥을 굶게 되면, 식구들은 어디 가서 쌀을 좀 구해 주라는 것입니다. 쌀이 있는 사람의 손을 붙들고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울기는 하늘을 위해서 울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이러한 고생의 길을 걸어 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길을 얼마나 많이 걸어왔겠습니까? `불초한 저희 부부가 이런 일을 당하는 것이 합당함에도 불구하고 당하는 이 자리가 아버지께서 염려하시는 자리요, 아버지께서 직접 이와 같은 수난의 길을 걸어 나오신 것을 알 수 있는 자리이니, 이러한 자리에 서게 해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기도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은 내가 배가 고파서 하는 기도가 아니라, 오히려 쌀이 있는 이들을 위해서 이러는 것이니 `아버지여, 나 대신 이들을 축복하소서. 나를 따뜻하게 맞아 주고 동정할 그 무엇이 있으면 나 대신 이들을 동정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할 줄 알아야 됩니다. 매를 맞았는데도 불구하고 매를 맞은 사람이 오히려 맞지 않았다고 변명하면 때린 사람이 굴복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요?
예수님이 원수를 대해서 흘린 눈물은 그런 의미에서 구원하기 위한 전법일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이 말 믿겠으면 믿고 말겠으면 말아요. (웃음) 사실은 그래서 고통의 십자가를 지고 간 것입니다. 이렇듯, 내가 가정을 구원하는 것은 나라를 구원하기 위해서이니 이중의 십자가를 져야만 되는 것입니다. 내 가정이 이보다 더 불쌍하고 비참한 길을 가더라도 나를 알고 있는 젊은 사람들은 나를 동정하려거든 이 나라, 이 민족을 불쌍히 여기라고 할 줄 알아야 됩니다. 그래야 탕감이 되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예」
여러분은 공적 분야에서 하나님과 똑같은 슬픔을 느껴야 됩니다. 돈을 버는 데 있어서도 자기를 중심삼고 벌면 안 됩니다. 그렇게 하면 벌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에도 아나니아 부부가 하나님을 속였기 때문에 벌을 받았다는 내용이 있지요? 선생님은 돈을 벌어서 혼자 쓰지 않습니다. 불쌍한 사람을 동정하고, 번 돈을 전부다 그들에게 보태 주었습니다. 그 모든 일들이 추억으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새것이 있으면 이것을 누구에게 줄까 하는 사람은 망하지 않습니다. 그래야 주위 사람들에게는 더 좋은 것을 주고 싶은 마음이 남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자연굴복은 명령을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자신이 숨겨진 자리에서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 통일교회의 책임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그 지구면 지구, 지역이면 지역을 책임진 자리에서 승리할 수 있는 전문가로서 하나님 앞에 갈 수 있어야 됩니다. 그리하여 자기가 바라던 천국이 세워질 수 있는 자리에 서서, 그 전문적인 권위를 영원히 그 환경에 남기는 것이 하나님 소원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알겠어요? 「예」
그러면 여러분은 어떻게 살겠어요? 공장에 가서 가정을 위하여 돈을 벌면서 살겠어요, 선생님의 지원을 받지 않고 욕을 먹으면서라도 국가를 위해 살겠어요? 여러분 중에는 `우리 통일교회도 돈이 있으면 월급을 주면서 시켜야지 왜 월급도 주지 않고 시켜 먹나' 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이 여러분에게 월급을 주면서 일을 시키면, 여러분은 선생님한테 미안해 할 것입니다. 미안하겠어요, 미안하지 않겠어요? 그렇게 되면, 여러분의 수고는 물질과 더불어 흘러가 버리는 것입니다. 영원한 것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되느냐? 어떠한 고생도 진정으로 감사할 수 있는 기준을 갖고 나가야 됩니다. 앞으로 우리의 뜻이 다 이루어지면, 여러분에게 나라를 주고 세계까지 몽땅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무슨 밭이 필요하고 논이 필요하겠습니까?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예」
물질이 필요하면 공장에 가서 일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체제를 보게 되면, 공장보다는 교회가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공장이 있는 사람들의 월급은 올려 주면서 여러분에게는 아무것도 안 주니, 그것이 무슨 모순이냐고 하겠지만, 그것은 잘 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줄 더욱더 귀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물질적인 기준이 아니라, 생명적인 기준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물질적인 축복을 받겠습니까, 영원한 생명적인 축복을 받겠습니까? 어떤 것을 받고 싶어요? 여러분은 월급 받아 가지고 자기를 위해 사는 사람들을 보면 `어디 뜻이 이루어지거든 너희들 두고 보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다른 친구들이 공부한다고 해서, 지역장들 중에 지금 나가서 공부하고 싶은 사람 있으면 당장 인사조치해 줄께 손들어 봐요. 없어요? 「예」 항상 때를 위하여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금을 딱 그어서 기준을 세워 놓고 자기의 말은 분야의 길을 가야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복귀의 길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예」
내가 참다운 가정을 이루고, 참다운 씨족을 이루었다 할 때에는 참다운 민족을 이루기 위한 책임을 다해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도면 도를 중심삼고 돌파해야 됩니다. 그러면 통일교회 책임자, 즉 지구장이면 지구장이 언제 그 기준을 돌파할 것이냐? 이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통일교회가 흩어진 식구를 모을 수 있으면, 국가적인 책임을 맡을 수 있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나라를 사랑하는 것과 통일교회가 나라를 사랑하는 것과 비교해 보면, 어느 쪽이 더 나라를 사랑하겠습니까? 그것은 민족이 결정할 문제입니다. 그 판단하는 기간은 몇 십 년이고 오래 동안 끌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날뛰지 말라는 것입니다. 알겠지요?
큰 집을 지을 때, 지혜로운 사람은 기반을 튼튼히 하기 위해 땅을 깊이 파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빌딩을 짓고 싶어요, 모래 바닥 위에 하꼬방(판자집) 같은 것을 짓고 싶어요? 판자집 지을 돈이 있으면, 땅을 파라는 것입니다. 남들이 미쳤다고 욕을 하더라도 파라는 것입니다. 땅을 파는 사람이 미쳤습니까, 그 사람을 욕하는 사람이 미쳤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욕하는 사람이 똑똑한 사람이라고 하겠지만, 우리가 볼 때는 욕을 하는 사람이 미친 사람입니다. 그 집이 아직 지어지지 않아서 저런 욕을 하지, 집을 짓고 난 후에는 어떻게 되나 두고 보라는 것입니다.
집을 지으려 할 때에는 욕하던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 위치가 바뀔 것입니다. 우리를 반대하던 3천만을 그 구덩이 속에다 몰아 넣고는 콘크리트를 해버리는 것입니다. 거기에다 전부 묻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면 우리만 남는 것입니다. 그 몰아넣는 데 있어서도 강제로 끌고 오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들이 거기에 들어가겠다고 스스로 고개를 숙이고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죽을 지경이겠지요.
죽으러 가자니 끄는 사람도 죽을 지경이고, 뒤에서 끌려가는 사람도 죽을 지경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죽지는 않아야 합니다. 죽으면 큰일납니다. (웃음)
선생님은 이 일을 몇 살까지 하겠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가 지금 나이가 50이 넘었지만 아직까지 마음이 해이해지거나 방심해 본 적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많은 모험을 해 왔지만, 앞으로 더욱더 많은 모험을 할 것입니다. 그때에는 여러분을 방패로 세울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에게는 뜻을 위하여 분신 자살할 수 있는 기준이 서 있어야 됩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100명 가운데 90명쯤은 나올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자신 있어요? 남들은 나라를 위해서 분신자살을 하는데, 여러분도 뜻을 위해서 한번 해보라는 것입니다. 해보고 싶어요?
선생님이 이것을 끝까지 지켜 봐 가지고, 여러분이 그러한 행동을 취하게 되면 구원해 줄 것입니다. 그러니 한번 해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100명 가운데 90명만 된다면 선생님이 신경 쓰겠습니까? 죽을 때까지도 신경 안 씁니다. 알겠어요, 무슨 말인지? `아이구, 처자식을 두고 어떻게 죽을꼬` 하는 사람은 충신이 못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충신은 죽음길에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은 외롭더라도 지역적인 대표자가 되어 민족을 대표하고, 통일교회를 대표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가인보다 어떤 면에서도 못해서는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데도 너만 못하겠느냐` 는 악착스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러한 실질적 기반을 갖추지 못했으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영통하는 사람들은 선생님에게 대한민국에서 하나님이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레테르가 붙어 있다는 것을 압니다. 알겠어요? 그러니 통일은 문제없는 거라구요.
세상의 모든 것은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면서 자꾸 변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앞으로 여러분들은 이중작전을 해야 합니다. 이중의 십자가를 짊어져야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가정의 십자가와 공적인 십자가가 있다면, 그 두 십자가를 한꺼번에 질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먼저 공적인 십자가를 져야 되는 것입니다. (이하 기도의 앞부분까지 녹음이 끊겼음)
아버님, 예수께서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했을 때, 아버지 뜻과 내 뜻이 같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깨닫지 못했사온데 그 순간처럼 슬픈 일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옵나이다.
이제는 `아버지 뜻대로 태어났으니, 아버지 뜻대로 하시옵소서` 할 수 있는 자식이 어떻게든 나와야 되겠사옵니다. 아버지 뜻과 내 뜻을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아버지보다 더 큰 이중적인 책임을 지겠다는 마음으로 나가야 되겠사옵니다.
아버지께서 가정을 찾으시고 종족을 개척해 나오실 때에, 나는 가정을 대신하여 협조하고 종족을 대신하여 협조할 줄 알고 민족을 위하여 가야 할 책임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러한 책임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나게 될 때, 비로소 과거 현재 미래의 결실체가 나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사옵나이다.
아버님, 오늘날 통일교회의 지방에 있는 책임자들은 이 선생보다도 더 몸부림치고 있사옵니다. 과거 현재 미래가 한 어버이로부터 시작한 것이기 때문에, 이제 저희는 미래까지 연결된 역사적 실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사옵니다. 아버지께서 소망의 실체이시듯 저희는 미래의 열매인 것을 알아야 되겠사옵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보면, 저희들은 뜻적으로 미완성한 입장에 있는 서기관의 실체라는 것을 스스로 느낄 줄 알아야 되겠사옵니다. 또한 여기에 모여든 이들은 통일신도들을 지도할 수 있는 책임자가 되어야 하겠사옵니다. 이러한 원칙적인 기준에서 볼 때, 저희들은 뜻과 멀리 있었고, 뜻과 일치될 수 없었던 자들이옵니다. 저희들이 이러한 불효막심한 사실들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들이 몰리는 자리에 있을 때에, 아버지께서 저희를 용서하시고 보호하여 주신 것을 저희들이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 이 세상의 악한 것을 없애기 위하여 모든 것을 책임지시고 얼마나 몸부림치셨는가 하는 사실을 저희가 알아야 되겠사옵니다. 저희들이 진정 이러한 사실을 깨달아 눈물 없이는 아버지를 대할 수 없고, 눈물 없이는 하늘을 바라볼 수 없으며, 눈물이 아니고서는 자식들을 키울 수 없는 자신들임을 발견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눈물과 피와 땀을 흘리며 정성을 다하겠다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를 사랑함에 있어서도 사랑의 실체가 되어서, 아버지께서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지도자가 되겠다고 몸부림치는 자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은 사랑받을 수 있는 대상이 되기보다는 그 사랑의 주체가 되어서, 저희를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을 저희가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자신이 되겠다고 몸부림쳐야만 되겠사옵니다.
그리하여 저희가 과거 현재 미래를 연결시킬 수 있는 십자가를 짊어지고, 아버지가 걸으신 십자가의 길을 대신하겠사옵니다. 그리하여 탕감복귀노정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승리하여서 아버지의 사랑만을 받는 아들인 것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이렇게 공적인 노정을 염려해 가지고 오늘날 횡적인 제 1기반을 연결시킬 수 있는 역사적인 초점에 머물 수 있는 아들과 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럴 수 있는 가정이 되고, 씨족이 되고, 종족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저희들이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아버님의 내정적인 인연을 헤아려 볼 때, 저희들이 얼마나 민망스러운 자신들인가를 재차 발견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은 뜻을 위해서 산다고 하면서 오히려 뜻을 팔아먹고 살았습니다. 뜻을 따라간다고 하면서 뜻을 밟고 다녔습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선 저희들은 목을 놓아 울어도 용서 받을 수 없는 자신들인 것을 알기에, 죽여달라고 호소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저희들은 복귀섭리의 도상에 있어서 사탄을 산 채로 때려잡을 수 있는 전문가가 되어야 하겠고, 사탄세계의 아들들을 산 채로 끌어당길 수 있는 하늘의 왕자들이 되어야 하겠사옵니다. 사탄을 굴복시킬 수 있는 하늘의 권위를 가진 늠름한 아들딸이 되어야 하겠사옵니다. 그럴 수 있는 하나의 씨족이 되어야 하겠고, 하나의 민족이 되어야 할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럴 수 있는 길을 만들어야 할 통일교단인 것을 생각할 때에, 아버지, 당신께서 천만리 길을 행차하신다 해도 걱정되지 않을 공고한 콘크리트 바닥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앞으로 달려가는 데 있어서 고속도로같이 아무런 장애물이 없는 통일제단이 되어야 하겠사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저희들이 전부다 자기 자체를 낮추어야 되겠사옵니다. 자기 자신을 낮은 자리에서 결속시키지 않으면 이 길이 닦여지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 저희들이 세상의 밑창에 들어가서 공고하게 다져 가지고 평면적인 반석과 같은 구조를 갖춤으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그 길을 왕래하시게 될 때에, 이 길이 아니고는 왕래할 수 없다고 할 수 있는 그러한 길을 닦아야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버님, 이 길은 과거에도 따라와야 했고, 현재는 물론이요, 미래에도 따라갈 수 밖에 없는 길이니, 오늘 여기에 있는 이들은 대한민국 전역에서 이 길을 연결시킬 수있는 모체들이 되어야 하겠사옵니다.
아버님, 이제부터 저희들은 뜻을 책임지고 모든 것을 상속해 줄 수 있는 책임자로서 이중의 십자가를 짊어져야 되겠고, 아버지께 효와 충의 도리를 다하여 아버지를 위로해 드릴 수 있는 자신들이 되어야 하겠사옵니다. 여기에 참의 길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저희가 충을 다하고 효를 다할 수 있는 내정적인 십자가를 짊어져야 되겠기에, 외적으로는 맞고 몰리는 십자가를 책임져야만 되겠사옵나이다. 이 상징적인 십자가를 딛고 아버님을 위로해 드림으로써 기뻐하시는 아버지 앞에서 자식도 기뻐하고, 그 자식의 자식도 기뻐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러한 환경이 되도록 해야 되겠사옵니다. 아무쪼록 아버님이 기뻐하시고 인류 전체가 기뻐할 수 있는 천국의 인연을 땅 위에 펼쳐서 천년 행복을 노래할 수 있어야 되겠사옵니다. 이러한 조건을 남겨야 할 것이 타락의 후손으로 태어난 저희들의 사명인 것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저희들이 아버님 대신 전문가가 되어서 모든 문제를 원리 원칙을 중심삼고 해결할 수 있는 주체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아버지 앞에 칭찬받고, 승리의 실체로서 추앙받을 수 있는 무리들이 될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면서, 이 모든 말씀 참부모의 성호 받들어서 간절히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모든 작용은 혼자 시작되는 법이 없습니다. 작용을 하게 하는 그 무엇이 있어야 합니다. 반드시 상대적 관계가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 상대적 관계를 조성하기 위해서는 주체와 대상이 있어야 하는데, 이 주체와 대상은 서로 관계를 맺기 위한 어떠한 결정적인 요인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상대적 관계를 맺지 못합니다.
태양계를 보더라도 태양 자체가 주체적 입장에 있기 때문에 그 상대적인 입장에 있는 유성들이 작용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만유의 존재물도 역시 그러한 주체와 대상의 기준을 결정할 수 있는 기반이 조성되어 있지 않으면, 질서나 조직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주체가 확정되고 상대가 확정되어야 모든 질서와 조직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현상계나 만물세계도 이렇게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자연은 모두가 그와 같은 원칙에 의해 되어져 있습니다.
인간의 몸도 심장을 중심으로 모든 지체가 움직이며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놓고 볼 때 마음에도 중심이 있습니다. 그 중심은 인간 상호관계에 있어서 절대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인격이라는 것입니다. 그 인격을 중심삼아 인간은 지금까지 생활해 나온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을 인격자라고 하는가? 어떤 사회의 제도 가운데에서 중심적인 위치에 설 수 있는 사람을 인격자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어느 동네에 존경을 받는 인격자가 있다고 하면 그는 그 동네 안팎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생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중심적인 작용을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야만 그가 존경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국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국가도 역시 국가의 대표자, 즉 하나의 인격자를 중심으로 국가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 인격자를 중심으로 국민이 상대적 관계를 맺음으로써 실체적인 조직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볼 때, 범위가 넓은 세계에도 역시 하나의 중심적인 인격자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인격자라고 해도 외적으로, 즉 육체적으로 보면 보통 사람과 별다른 차이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내적으로 보면 사상적인 면이라든가 정신적인 면이 보통 사람과는 다릅니다.
이렇게 볼 때, 인격자를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사람의 외적인 면이 아니라 정신적인 면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정신적 분야를 중심삼아 가지고 인격을 논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정신적인 분야를 넓히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마음의 세계를 알아야 합니다. 마음은 무한대로 접할 수 있는 능동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에, 사람이 갖고 있는 욕망은 몸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부터 일어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음은 끝없이 작용하면서 무한한 욕망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또 우리의 인격을 중심삼고 보더라도, 그 인격이라는 것은 어떠한 사회나 국가나 세계의 한계권에 한정지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더 나아가 과거 현재 미래까지도 넘어설 수 있는 절대적인 최고의 기준을 바라보면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절대적인 자리까지 나아가고자 하는 내심의 작용을 볼 때, 마음의 세계는 무한과 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마음이 정신적인 세계에서 절대적인 기준으로 자리잡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문제가 되어 왔습니다. 마음이 그런 자리를 잡았다 할 때는 인간이 주인될 수 있는 기점이 마련되는 것입니다. 그 기점이 어떠한 자리일 것이냐? 인간이 요구하는 최고의 행복의 요건과 절대적 가치의 요건이 결정될 수 있는 중심적인 자리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자리에 선다고 하더라도 또 그 자리에서 보이는 최고의 존재가 있을 것이고, 최고의 가치를 지닌 것도 있을 것이고, 최고의 보물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자리에서 최고의 상대적인 요건을 갖추어 행복을 노래할 수 있는 인격이 어디에 있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절대적인 요건을 세워 놓지 않고는 사리를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절대적 기준을 세웠다면 시간성과 공간성을 초월하여 문제될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절대적 중심이 될 수 있는 인격의 기준이 무엇이냐? 그것은 인간 개체만을 중심삼은 인격 가지고는 그 기준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이나 절대자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절대자와 나는 어떠한 관계가 되어야 하느냐? 인간은 상대적인 자리에서 절대자이신 하나님과 하나가 되지 않고는 주체적인 자리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되는데 있어서는 외적인 면보다 내적인 면에서 하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절대자와 하나되려고 할 때에는 내적인 면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즉, 상대적 관계에서 외적으로 하나되기를 원하지 말고 내적으로 하나되고자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절대적인 최고의 기준을 찾아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 하나님을 중심삼고 하나되기를 원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외적 분야에서 하나되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내적 기준의 최고의 가치와 연결될 수 있는 자리에서 하나되기를 원할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과 하나되려고 할 때에도 생활에서 하나되려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세계, 즉 사랑의 세계에서 하나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절대자와 하나되고 싶어하는 것은 그 자체가 중심적 입장에 서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원리에 의하면 주체 가운데는 내성과 외형이 있고, 성상과 형상이 있고, 상하관계가 있습니다. 모든 것의 근본인 주체자가 통일의 이념과 하나의 목적관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그 주체 속에 상하관계가 있어야 하고 전후 관계가 있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인간의 마음을 통하여 미루어 볼 때 그러한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존재는 주체를 중심삼고 상대적인 자리에서 방향을 바꾸어 가면서 360도로 작용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주체가 운동하는 방향과 처해 있는 환경이 변하는 자리에서는 고정적이고 무한한 행복을 느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그 자리는 어디냐? 주체적인 기준 위에서 주체와 일체적인 내용을 가진 절대권내의 자리입니다. 그 자리는 모든 것을 통솔하고 주관하는 자리입니다. 그런 자리에 있게 될 때 비로소 행복의 요건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사람은 만물의 중심이 되어 그 만물을 주관할 수 있는 자리에서 자기가 동기가 되어 만물이 상대적 요건을 갖추게 될 때 행복을 느낍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우주의 중심되는 절대자와 안팎의 관계, 상하의 관계를 총동원한 절대적인 기준 앞에서 중심의 자리를 결정지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최고의 행복을 느낄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러한 관계를 어떻게 맺어야 되느냐? 부자관계의 사랑을 중심삼고 맺어야 됩니다. 사랑을 중심삼은 부자의 관계는 종적인 관계요, 부부의 관계는 횡적인 관계입니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아내보다 자식을 더 믿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상하관계를 중시한 말입니다.
인간이 근본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절대자의 자리에 들어가 그 자리에서 주체와 일체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 들어가면 상하관계가 형성됩니다. 여기서 상대관계가 형성되면 횡적으로 플러스 마이너스, 즉 주체와 대상의 상대적 관계가 벌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간에게 부부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제일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이 추구하는 최고의 중심, 즉 절대자와 하나되는 것입니다. 절대와 상대라는 명사를 추구해 가는 데 있어서 인간은 상대적 기준을 넘어 절대자와 하나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상하관계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렇게 상하관계의 자리까지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모든 존재의 기원인 절대자와 더불어 하나되어 절대적인 내용을 지녀야 합니다. 그렇게 절대자와 하나되는 자리에 서게 될 때에는, 그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 될 수 있고, 그의 이상이 나의 이상이 될 수 있고, 그의 사정이 나의 사정이 될 수 있고, 그의 모든 관계와 인연이 나의 관계와 인연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완전한 부자의 관계가 맺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은 본래 그러한 자리에서 출발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화동의 중심체입니다. 그런데 화동하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중심기준이 결정되어 있어야 합니다. 마치 여러 사람이 박자를 맞추려면 지휘자를 중심으로 상하관계가 잘 연결되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 우주의 화동의 중심체가 인간이라는 것을 우리는 원리를 통하여 배웠습니다. 이러한 인간은 절대적 기준과 일치된 자리에 있기 때문에 그 인간이 머무는 곳에 우주가 머무는 것이요, 존재세계가 그를 중심삼고 작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작용으로 말미암아 존재세계에 힘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탄식했던 내용이 무엇이냐? 하나님은 영적이며 마음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은 몸과 같은 존재와 하나되기를 원하십니다. 이 몸과 같은 존재가 바로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마음과 같은 존재인 하나님과 하나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지금까지 탄식하고 계시는 이유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하나되는 날에는 우주는 자동적으로 하나될 것입니다. 왜 자동적으로 하나되느냐? 하나님에 의해 지어진 우주는 인간을 주체로 삼아 가지고 그 대상의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인간과 하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창조권내에서 서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하나되면 만유의 존재물도 하나님과 인간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의 관계는 서로 반대적인 입장이 아니라 상대적인 입장으로서 주고받을 수 있는 관계입니다. 그 관계의 범위는 초우주적입니다. 이처럼 절대자를 중심삼은 상대적 관계는 절대권내에까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 권내를 벗어난 존재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절대자와 만물을 연결할 수 있는 존재, 즉 인간이 절대자와 하나되면 우주는 자연히 통일되는 것입니다.
역사 시대에 인간들이 바라는 인격적인 중심체가 결정되었더라면 반드시 화동의 세계가 되었을 것입니다. 중심체가 결정되면 반드시 화동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원리에서 말하듯이 완전한 중심은 완전한 상대를 창조합니다.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들은 상대적인 요인을 벗어나서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존재하는 데에는 반드시 주체와 대상이 있기 마련입니다. 다시 말해서 완전한 주체가 있으면 상대가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는 하나님의 속성을 지니고 우주 가운데에 존재하기 때문에, 창조의 원칙에 의해 상대적으로 존재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6천년 역사 과정을 통해 하나의 중심된 인격을 추구해 나왔습니다. 이것을 찾기 위해서 수많은 선조가 수고의 길을 걸어 나온 것입니다. 인간은 수많은 시대를 거치면서 그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하나의 인격과 그 인격을 중심삼은 이상세계를 추구해 나왔습니다. 인간은 반드시 상대와 더불어 주고받아야만 하나의 온전체가 됩니다. 인격자는 상대를 지배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 상대는 국민이 될 수 있고, 국토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세계적인 인격자라면 세계적인 국민을 가져야 되고, 세계적인 국토를 가져야 됩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 자신도 우주적인 백성을 가져야 됩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늘땅을 합한 것을 통일교회에서는 천주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주인이 될 수 있는 사람은 천민입니다. 그리고 이 천민이 설 수 있는 기반은 천국 국토입니다. 하나님도 이러한 기반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이 절대적 자리에 들어가 주체적 입장에 서게 되면 아무것도 원하는 것이 없는 사람이 될 것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절대적 자리에 서게 되면 반드시 제 2의 욕망을 추구하게 됩니다. 그것은 상대적인 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절대적인 자리로 접근해 들어가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절대적 주체를 중심삼고 상대적인 것과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그 범위가 크면 클수록 절대권내에 가까워 질 수 있는 입장에 서야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라를 치리할 수 있는 입장이라면, 그 나라를 중심삼고 절대권내에 가까이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역사시대를 초월하여 국가 앞에 대표적인 지도자가 되면 국가를 넘어서 세계적 권내에 틀림없이 들어갈 것입니다 이렇게 세계적인 권내에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그 범위가 넓어집니다. 그렇게 되면 절대권을 중심삼고 하나의 세계권을 만들려는 욕망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인간은 절대기준 그 자체로서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상대적 요건이 필요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상대적인 인격의 기준을 결정짓고, 그 인격을 중심삼은 상대적인 세계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는 행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에게 행복을 돌릴 수 있는 사람이 되면 그 사람은 역사시대에 있어서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6천년 역사 과정에서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중심한 절대적인 목적과 절대적인 존재와 절대적인 사랑을 소망하고 추구해 나왔습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목적과 존재와 사랑을 연결시킬 수 있는 자리에 서지 못했습니다. 역사적인 거리를 지냈지만 이 시대에 그러한 존재가 되려면 절대적인 존재로부터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지금까지 그런 사람은 예수님 한 분 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다` 고 하신 말씀 이상 절대적 존재와 자신과의 관계를 나타낸 분명한 말은 없습니다. 그리고 모든 상대적 관계를 칭하는 말 가운데 `나는 주체요, 너희들은 대상이다. 나는 신랑이요, 너희들은 신부다'라고 하신 것보다 더 나은 말은 절대로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관계가 실제로 온 인류에게 연결되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연결하는 데 있어서는 물질적 가치를 중심삼고 연결하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의 육적인 인간을 중심삼고 연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을 중심삼고 연결해야 하느냐? 사랑을 중심삼고 연결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절대적인 존재를 확정하고, 아무리 절대적인 목적을 확립했다고 하더라도 거기에서 기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살고 생활하는 것이 기뻐야 합니다. 생활하는 것은 목적 성취를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 목적을 성취했다 할 때 거기에는 존재 그 자체 이상의 새로운 무엇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남자면 남자, 여자면 여자를 중심삼고 볼 때에 이들에게 무엇보다도 가장 귀한 것이 무엇이냐? 사랑입니다. 사랑만이 이것과 연결시킬 수 있는 행복의 요인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목적을 아무리 잘 세웠다고 하더라도 그 목적을 주관할 주체적인 사랑의 권위를 세우지 못하게 될 때에는 또다시 새로운 목적을 추구해야 됩니다. 목적의 한계점이 사랑보다 위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까지의 역사시대에 있어서 절대자에 대한 확인, 절대자의 사랑에 대한 확인을 했다는 사람이 있었느냐? 그런 기준을 세웠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절대자와의 관계를 어떻게 확정지었느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확정지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목적은 무엇인가? 선의 세계를 이루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원하는 새로운 선의 세계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 세계는 아버지와 아들이 절대적으로 연결되어야 이루어질 수 있는 상대적인 세계입니다. 아버지와 아들과의 절대적인 인연이 관계되어 있지 않으면 그 세계를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버지에게는 아들이 있어야 됩니다. 그 아들의 자리가 어떤 자리냐? 절대자이신 하나님의 상대적 존재로 확정지으신, 하나님의 상대가 될 수 있는 자리입니다.
그러면 아버지와 아들이 공통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냐? 둘이 절대적인 모체가 되고 이 모체와 절대적인 관계가 맺어져 서로 통할 수 있는 세계입니다. 그 세계 외에는 다 가짜 세계입니다. 그러한 세계와 관계를 맺는 데는 수단과 방법 가지고는 안 됩니다. 돈 가지고도 안됩니다. 사랑이 있어야 됩니다. 사랑을 중심삼고 조직도 서야 되고, 질서도 서야 되는 것입니다.
인류의 공동적인 목적을 위해 사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인류애를 중심삼고 하나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국민이 조국애를 갖고 있다면 애국사상을 중심삼고 하나될 것입니다. 애국하는 마음이 강하면 강할수록 국가를 이루기 위해 애국사상을 중심삼고 종적으로 하나될 것입니다. 애국운동을 혼자서 할 수 없는 입장이라는 것을 알면 횡적인 인연을 연결시켜야 합니다. 이것이 동지규합이라는 것입니다.
동지를 규합하여 3·1운동을 한 것도 나라를 찾아서 온 국민이 행복해지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나라를 찾지 못한 우리 민족은 불쌍한 민족입니다. 그러므로 행복하기 위해서는 나라를 사랑하는 입장에서 전체가 하나되어 나라를 찾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나라를 찾아야 합니다. 가정도 행복하기 위해서는 사랑하는 가정을 찾아야 하는 것이요, 세계도 행복하기 위해서는 사랑하는 세계를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와서 설파한 내용이 무엇이냐? 세계를 하나로 연결할 수 있는 영원한 소망의 모체가 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사랑입니다. 사랑이 없는 곳에는 희망도 없고, 목적도 없고, 행복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제시한 인격관, 즉 우리 인간이 절대자의 대신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절대자의 대신자로서 절대적인 사랑과 영원한 주체성을 가져야 됩니다. 어떠한 고난이 있더라도 이러한 주체성을 가지고 가야 합니다. 이것이 메시아의 사상입니다. 예수님이 바라신 세계는 절대적인 세계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바라는 세계도 영원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한 세계를 이루기 위해서는 사랑해야 됩니다. 어떠한 사랑을 해야 합니까? 원수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합니다. 이 사랑에는 온 우주가 안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역사시대를 대표하여 그런 사랑을 해야 할 입장에 섰던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온 인류는 이러한 권내로 들어가기 위해 하나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떠한 시대든 중심을 결정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화동의 중심체가 될 수 있는 주체자가 문제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하나님 자신을 위해 지은 것이 아닙니다. 인간을 위해 지은 것입니다. 인간을 존재세계의 중심적인 존재로 지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존재세계의 모든 요소와 성품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타락한 인간이 완전한 중심으로 결정되었다 할 때는 천지가 공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은 우주의 화동의 중심체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권내에까지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만우주와 주고받는 자신을 발견하느냐가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타락한 인간으로서 도의 세계의 인격을 찾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여러분은 도의 세계에서 인격을 결정지을 수 있는 중심의 자리에 들어가야 합니다. 석가모니도 이런 자리에 들어가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상대적인 피조세계는 누구 때문에 생겨난 것이냐? 그것은 나 때문에 있는 것입니다. 누구 때문에 있는 것이냐? 우리 때문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인간은 스스로 동기가 되어 가지고 얻은 결과를 놓고 행복을 느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합니다. 여기에 고차적인 사랑의 이념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뜻이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만물을 사랑하고 만물은 인간에게 미를 돌리는 경지에 들어갈 때, 인간은 화동의 중심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리에 인연된 인간은 그 중심을 어디에 두어야 하느냐? 여러분이 지향하는 생활, 소망하는 생활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현재 생활에서 그 중심을 찾아야 됩니다. 그러면 어떠한 방법을 통하여 그 중심을 찾을 수 있느냐? 화동의 중심체 자리를 잃어버린 타락한 나 자신이 그 자리를 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는 문제가 현실적으로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모든 존재물과 비교해 가지고 그보다 커야만 주체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자신감, 다시 말하면 너보다 나아야 된다는 자신감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봄을 맞아 동산에 만물이 소생할 때 꽃이 핀 것을 보고 여러분은 `아! 꽃좋다` 라고 감탄하면서 그것들보다 나아야 된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새로운 희망에 벅찬 모습을 보면서도 그 이상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또한 날아가는 새가 노래 부르며 자연과 더불어 화동하는 것을 볼 때 여러분은 그 새보다 나아야 한다는 자신감을 가져야 합니다. 대해를 바라볼 때도 넓고 큰 바다보다도 나아야 하며, 산에 혼자 있더라도 태초에 하나님께서 만물을 지으실 때에 기뻐하셨던 내적인 심정을 어떻게 하면 내가 표현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야 됩니다.
주체는 절대적이어야 됩니다. 온 우주가 절대적인 주체와 더불어 하나되어 화동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그런 자리, 즉 만물을 통합시킬 수 있는 자리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한 권내에 들어가려면 하나님으로부터 작용하는 그 동기가 반드시 개입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되면 `하나님께서 만물을 지을 때 얼마나 재미있게 지었을까? 하나님이 나를 위해 지어 주셨구나` 하면서 우주에 대하여 지금까지 느꼈던 것을 비판하면서 새로운 감동을 느껴야 됩니다. 길가의 씀바귀 하나를 바라보면서도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지으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계를 지으실 때 아버지께서 어떠한 마음을 가지고 지으셨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절대적인 중심으로 삼고 그와 상대기준을 조성하여 일치되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본연의 요구요 소원이기에, 인간이 그러한 자리에 들어가면 하나님이 느끼셨던 본연의 모든 미와 창조의 기쁨을 충만하게 느낄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만물을 지으실 때에 기뻐하셨던 그 심정을 어떻게 느껴야 되느냐? 또 인간을 위해 만물을 지으신 수고가 얼마나 컸느냐?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셨다는 것을 알면 인간이 좋아할 것이라는 심정으로 지으신 그 심정을 어떻게 느껴야 되느냐? 여러분은 그러한 하나님의 심정을 체득해야 합니다. 싫은 물건이든 좋은 물건이든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심정을 체득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이러한 것을 체휼하려면 동산에 앉아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해가 지도록 사색을 해야 할 것입니다.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는 권내에 빠져야 할 것입니다. 거기에서 숨을 길게 들이쉬면 이 우주의 공기가 생명력을 가지고 쑥 몰려올 것입니다. 이렇게 우주의 생명력과 더불어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나 자신이 숨을 내쉬면 모든 존재가 새롭게 각성하고, 깊이 잠들면 만물이 상대적으로 화동할 것입니다. 이러한 자리가 만유를 통치할 수 있는 절대자의 자리입니다.
그런 자리에 서게 되면 만물과 상대적인 관계를 갖추어야 여러분이 숨을 내쉬면 만물이 받아들이고, 들이쉬면 만물은 내줄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을 중심삼고서 만물과 주고받는 관계를 맺으면 이 우주가 서로 주고 받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관계에서 멈추지 말고 화동의 중심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하여 아름다운 자연의 형태와도 같고 우주 자체와도 같을 수 있는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게 될 때에 거기에서 비로소 우주의 화동의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상대와 주체가 하나된 자리에 만물도 하나되어야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비로소 하나의 세계를 창조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인간은 지금까지 이러한 세계와 관계를 갖지 못하고 동떨어진 생활을 해 나왔습니다. 자신의 생각만을 중심삼고 생활하면서 그것을 추구해 나왔습니다. 그것은 허무한 것이 되어 버립니다.
여러분이 화동의 중심체가 되면 새가 날아가는 것도 복귀섭리를 위해 날아가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우리의 마음 가운데에 그러한 전도체가 있어야 합니다. 전기가 통하려면 반드시 전도체가 있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속에 전도체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우주를 중심삼은 화동의 중심체가 되고자 하는 욕망이 있는 동시에 자기를 중심하고 살려는 욕망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후자를 뿌리까지 빼어 버려야 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거기에 새로운 무엇이 채워지게 되어 있습니다. 마치 저기압이 형성되면 고기압 세력이 저기압쪽으로 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치가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의 관념을 전부 빼어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반드시 새로운 무엇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빼 버린 힘에 비례되는 그 무엇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새로운 것을 전달해 주는 존재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전달해 주는 존재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것을 채워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저기압권을 만들어 놓으면 고기압권에서 바람이 불어오듯이 인간도 자기의 관념을 뽑아 버려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선이 있다면 그렇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저기압권내에 그 기반만 벌어지면 고기압권에서 폭풍우 같은 것이 출발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탄, 이 세상과 하나님은 상반된 입장에 있습니다. 그러기에 세상적인 욕망을 완전히 빼내야 됩니다. 이것을 몰라서는 안 됩니다. 빼는 데는 천천히 빼면 안 됩니다. 갑자기 확 빼 버려야 합니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아요? 한꺼번에 확 빼 버려야 합니다.
선생님은 이제 마흔이 훨씬 넘었지만 몇 천 년이 지나갔다는 입장에서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서 보이지 않는 힘과 더불어 일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는 우주적인 힘이 필요합니다. 몸과 마음이 하나되고 목적이 있으면 그런 힘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걸 알아야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은 화동의 중심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타락권내에 있는 자신들의 세상적인 욕망이나 모든 사욕을 빼어버려야 합니다. 또한 인간에게는 생리적인 작용, 즉 번식하고자 하는 본능적인 욕망이 있는데 그것이 자기를 중심한 것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을 자기 울타리로 만들려고 합니다.
그러면 잘못된 내 존재를 어떻게 부정하느냐? 자기를 중심삼고 생각하는 것은 남을 희생시키고 내가 잘 되겠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자기 밑에다가 두고 그들의 보호를 받겠다는 생각을 어떻게 부정할 것인가? 잘못된 생활권내에 있는 것을 어떻게 부정할 것이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 다음에 문제는 먹고 입고 쓰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것은 간단한 것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부정하느냐가 문제입니다.
자기의 생활이 잘못되었다면, 이에 비해 참이 있다면 그릇된 것을 완전히 제거시켜야 합니다. 여러분은 그런 경지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 경지에 들어가서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경지에 들어가면 심장의 고동소리가 기적소리보다 더 크게 들릴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심장소리가 기적소리보다 더 크게 들릴 정도의 경지까지 들어가야 화동의 중심체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 결국 주체의 입장에 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체적인 입장에 서기 위한 화동의 중심체가 되는 경계선을 어떻게 넘어설 것이냐? 존재에 대한 새로운 자각과 새로운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중심삼고 인격을 형성해야 합니다. 결국은 심정 문제인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에게는 무엇보다도 말씀이 필요합니다. 우리들이 말씀과 하나되어야 하나님과 같이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말씀과 하나되면 그 경계선에 연결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타락한 인간으로서는 기적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러면 천지창조를 누구 때문에 하였느냐? 사람을 대상으로 하여 중심이 되기 위해서 지은 것이 아닙니다. 기쁘기 위해서 지었습니다. 기쁘기 위해서는 무엇이 있어야 하느냐?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목적이 없이는 기쁨이 없습니다. 목적을 중심삼고 환경을 이 목적에 연결시켜야 합니다. 그러지만 이 환경에는 지켜야 할 법이 있습니다. 이 법을 지키면서 목적을 이루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하는 말은 사된 말이 아닙니까? 전부다 타락권내의 사된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이 하는 말을 하나님이 싫다고 하면 되겠습니까? 여러분은 화동의 중심체로서 할 수 있는 말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절대자가 계시다면 `그 절대자가 공인할 수 있는 자리에서, 그 절대자와 관계 맺을 수 있는 자리에서 어떤 말을 할 것인가? 처음에는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이러한 것들을 생각해 봤어요? 절대자 앞에 어떤 말을 하겠습니까? 돈 얘기를 하겠어요? 내가 남자니 색시를 구해 달라고 하겠어요? 어떤 말을 하겠어요?
여러분은 부모에 의해서 태어났습니다. 그러기에 태어나서 말할 수 있는 대상이 누구겠습니까? 부모입니다. 부모. 그렇지 않아요? 내가 태어나서 가장 먼저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뭐냐? 아빠 엄마입니다. 그 이상 뭐가 있겠어요? 내가 부르는 아빠 엄마는 옛날 인간이 본연의 자리에서 부르던 아빠 엄마입니다. 재미있는 일입니다. 여러분, 아빠 엄마를 천번 만번 불러 보십시오. 아빠 엄마의 맛이 어떤가를 알아보십시오. 그 맛이 무궁무진할 것입니다. 아빠 엄마를 부르는데 그 아빠 엄마가 대답하지 안겠습니까? 부르면 대답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체와 대상이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대상이 있으면 완전한 주체가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이것이 원칙이라면 아빠 엄마를 부르면 반드시 대답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서로 좋아하게 되는 것입니다. 수없이 불러도 대답이 없는데 좋아하게 됩니까? 하나님을 찾아가는 데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린아이가 아빠 엄마와 지내는 것과 같은 입장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가야 합니다. 엄마의 품에서 젖을 먹고 무릎에서 똥을 싸면서 자라지만 부모는 모든 것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아버지` `어머니`라는 말이 참된 말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 다음으로 참된 말이 무엇입니까? 그 다음에는 `형님' `누나'입니다. 이런 단계를 지난 다음에는 대상을 찾을 수 있습니다. 상대를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태어났기에 사랑으로 완성해야 합니다. 그래야 완성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중심삼고 세계를 품고 사랑해야 합니다. 만물을 주관해야 합니다. 사랑을 중심삼은 하나의 목적의 세계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러한 세계가 있겠어요, 없겠어요? 그러한 세계는 반드시 있습니다.
경계선을 넘어가는 길은 한 길밖에 없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길이 두 길입니까? 한 길밖에 없는 것입니다. 시간적으로 6천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갔지만, 그 사랑은 역사적인 시간과 공간을 초월할 수 있어요, 없어요? 옛날 2천년 전의 부모의 사랑과 지금 부모의 사랑이 다른 게 있습니까? 다른 게 없습니다. 이 사랑은 절대적인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은 절대적인 것입니다.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이나 식물도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동물이나 식물도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이 있기 때문에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랑에는 인간이나 동물이나 식물이나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보이지 않는 그 자체가 무엇이냐? 사랑입니다. 부자간의 사랑, 형제간의 사랑, 동족에 대한 사랑은 차원은 다르지만 절대적인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이러한 사랑을 중심삼고 지금까지 역사를 이끌어 나왔습니다.
이제 우리는 타락한 세상을 버리고 본연의 세계로 넘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버리는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더 좋아하는 것이 있어야 전에 있던 것을 버리게 됩니다. 더 좋아하는 것을 갖지 않고 버리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생명을 버린다면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을 얻어야 합니다. 그래야 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보다 더 귀한 것을 위해서 무엇을 버릴 것이냐? 귀한 것을 얻기 위해서 동생을 버리고, 형을 버리고, 아버지 어머니를 버려야 할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예」 이러한 일이 벌어진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겠습니다. 버리는 데는 보다 귀한 것을 갖고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형님보다 더 사랑할 수 있는 것을 어떻게 가질 것이냐? 동생보다 어머니보다 더 사랑할 수 있는 터전을 어떻게 마련할 것이냐?
지금 타락한 인간들은 그러한 터전을 갖지 못하고 보다 못한 것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여러분들은 사랑을 중심삼고 전체를 위할 수 있는 보다 완전한 세계를 위해 잘못된 환경을 박차고 나가야 합니다. 그 길이 더디더라도 생명을 걸고 가야 합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사랑의 세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여러분이 통일교회를 믿고 있는데, 통일교회에 나와서 집을 버렸어요? 버렸어요, 안 버렸어요? 진짜 버렸어요? 무엇을 위해 버렸어요? 인류를 위해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마음으로 버린 사람이 변하겠어요? 그런 마음으로 가정을 버리고 부모를 버린 사람이 변하겠어요? 어차피 우리들은 버려야 합니다. 보다 귀한 것을 얻기 위해 버려야 합니다.
이제 이 민족을 찾지 않으면 심정세계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의 모든 것을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했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려면 자기를 부정해야 합니다. 여기서 부정하라는 말은 맹목적으로 부정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버렸으면, 그 나라를 버렸으면 그것보다도 위대한 그 무엇을 발견해야 합니다. 가정을 버렸으면 그 이상 귀한 것을 발견해야 합니다. 생명을 걸고 모든 것을 버렸으면 그 이상 가치 있는 것을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내용을 발견했으면 후회없이 가야 합니다. 당당코 가야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통일교회 때문에 쫓겨 나온 사람 손들어 봐요? 손들어 보세요. 있긴 있을 것입니다. 귀한 가치를 발견한 경지에 들어가서 앞으로 나아가면 내일의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 내일의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여러분은 아직까지 주체의 입장에 서지 못하였기 때문에 뜻에 절대복종하며 주체가 되는 길로 가야 합니다.
이러한 길을 걸어 나온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 기독교 신자들이었습니다. 그러면 사탄이 이제까지 무엇을 했느냐? 이러한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에게 주체가 되지 못하게 반대했습니다. 사탄인 자기를 주체로 삼으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그저 남들처럼 먹고 자고 그냥 그렇게 살면 되지 얼마나 살려고 그러느냐? 고작해야 7,80년 사는 짧은 인생인데 뭘 그러느냐? 하나님을 봤느냐? 이 세상에서 그냥 사는 것이 제일이다` 하는 식으로 반대해 나왔습니다.
현재의 입장을 버리고 더 나쁜 데로 가면 악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중심삼고 더 좋은 데로 가면 선입니다. 버리기는 마찬가지지만 어디로 가느냐가 문제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중심삼고 버려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중심삼고 보면 자격자가 될는지 모르지만 하늘을 중심삼고 보면 부자격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현재의 입장을 버리고 참선의 경지에 들어가게 되면 무아지경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얻어지는 게 뭐냐? 인격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터전이 여러분에게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통일교회에 들어와서 통일교회가 원하는 인격을 갖추었느냐? 말씀을 통하여 인격을 갖추었느냐? 통일교회가 원하는 인격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지금까지 갖고 있는 인격관을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3대심판이 있는 것입니다. 끝날에는 3대심판을 통과하지 않고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내가 하는 행동이나 나의 모든 것을 부정할 수 있느냐? 일시에 부정할 수 있느냐? 무엇으로 부정시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알면 부정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앎으로써 경계선을 넘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화동의 중심체의 자리에 서야 하는데, 무엇으로 그런 자리에 들어선 것을 느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이제는 신앙세계에 있어서 어느 정도에 올라와 있다. 이제는 아무렇게나 살아도 지옥에 안 간다. 이제는 어느 기준을 넘어섰다. 경계선을 넘어섰다` 하는 사실을 어떻게 느낄 수 있을 것이냐? 하늘을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를 쓸 수 있고, 강물을 보고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글을 쓸 수 있어야 합니다. 꽃을 보면서도 그 꽃을 애인같이 대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문학작품을 쓸 수 있는 경지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 경지에 들어가면 대번에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적인 그냥 그대로의 마음을 갖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절대로 안 됩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과 더불어 말씀을 주고받을 수 있고, 하나님의 심정에 접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정에 접하면 접할수록 제 2의 절대적인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을 중심삼은 가정의 토대 위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 선 사람이 제일 좋은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 선 사람을 보게 되면 왠지 모르지만 좋아 보입니다. 여러분도 그런 걸 느꼈을 것입니다. 그건 왜 그러냐? 본성의 인연이 그 사람에게 투입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의 옆 모습이나 앞 모습을 본성의 인연을 통해서 보았기 때문입니다. 내적 세계에서 실재적인 요인을 중심삼고 내가 주체의 자리에 섰든가 그가 상대적인 자리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내용을 지녔기에 본심의 작용을 통해서 좋아 보이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오시는 주님은 어떻겠습니까? 본심의 작용을 통해서 본다면 모든 사람이 다 좋아해야 하지만, 타락세계에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될 것입니다. 사람 가운데는 역사적으로 인간을 대표할 수 있는 역사적인 존재도 있고, 그 시대를 대표하는 시대적인 존재도 있을 것입니다. 역사적인 성인들을 들춰 보면 공자도 있고, 예수도 있고, 석가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여러분들은 공자보다도 낫고, 예수보다도 낫고, 석가보다도 낫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 마음이 우러나와야 합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내에 접근하면 접근할수록 좋게 되어 있습니다. 왜 좋으냐? 절대적인 가치의 자리에 서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금광을 찾아 일확천금을 노리는 사람들이 돌산에서 금맥을 발견하여 좋아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가까이 가면 기쁜 것이요, 멀어지면 슬픈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과 가까운 자리에서 역사적인 결실, 시대적인 결실을 맺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과거에 왔다 갔던 선한 사람들이 좋아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이 땅에 있는 양심적인 사람도 좋아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라면 사탄세계의 자기 아버지보다도 낫고, 형보다도 낫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받지 않고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후회가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일년을 가도 후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십년을 가도 후회되는 것이 아닙니다. 일생을 그렇게 살면 영원히 보장 받을 수 있는 자신이 됩니다. 이러한 인격을 갖고 오시는 분이 주님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분은 인간세계의 화동의 중심체입니다.
여러분들은 모든 사람들이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기준을 갖추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좋아할 수 있는 사랑의 주체성을 갖추어야 합니다. 인격의 주체성, 심정의 주체성, 말씀의 주체성을 갖추어야 합니다. 알겠어요? 맨 처음엔 말씀의 주체성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 다음엔 인격의 주체성을 갖추어야 하고, 마지막으로 심정의 주체성을 갖추어야 합니다. 이와 같은 일이 통일교회의 말씀을 중심삼고 이루어진다면, 그 무엇보다도 가치 있는 그 말씀을 절대시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 있는 축복가정들, 부부끼리 서로 얼마나 절대시했습니까? 말씀으로 인해 인연 맺어졌기에 부부는 서로 절대시해야 합니다. 서로 심정을 중심삼고 하나되면 하나님의 소원이 여러분 개체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담 해와가 세우지 못한 기준을 세워야 할 축복가정이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서로 얼마나 절대시했습니까? 서로 절대시하여 절대적인 사랑을 해야 합니다. 이러한 사랑을 중심삼고 하나되어 화동의 중심체가 되어야 합니다.
부부끼리는 앞산을 바라보면서도 저 산이 생겨난 것이 누구때문인가를 물어 보고, 온 우주를 생각하면서도 이 우주가 생겨난 것이 누구 때문인가를 물어 봅니다. 그러면 나 때문인 동시에 너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부부는 바로 이런 것입니다. 이 우주가 생겨난 목적을 성사시키는 것이, 주체적인 목적을 중요시하는 것이 부부가 하나되는 길입니다. 부부는 마음을 중심삼고, 인격을 중심삼고, 사랑을 중심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부부는 같은 길로 가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시골뜨기 아가씨라도 장관하고 결혼하면 어떻게 됩니까? 같은 길로 가는 것입니다. 같은 길로 가요, 안 가요? 그 시골뜨기 여자가 국민학교도 못나왔다 할지라도 모든 사람이 장관 사모님이라고 하면서 머리를 숙여야 하는 것입니다. 숙여요, 안 숙여요? 숙입니다. 이렇게 부부는 같이 가는 것입니다. 부부에게 그대 사랑이 따로 있고 내 사랑이 따로 있습니까? 그대 사랑이자 내 사랑인 것입니다. 네 사랑이자 내 사랑인 것입니다. 부부가 서로 당신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느냐고 물어 볼 때 요만큼 사랑한다면 기분이 좋아요? 제일 많이 사랑한다고 해야 기분이 좋은 것입니다. 그렇지요?
참사랑을 중심삼고 서로서로 권고해 주고 위로해 줄 수 있는 절대적인 인격, 절대적인 심정, 절대적인 사랑이 어디서부터 벌어지느냐? 가정입니다. 가정의 부부를 중심삼고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 부부가 자식을 낳아 사위기대를 이루어야 합니다. 가정이 절대적인 인격과 심정과 사랑으로 하나되면 하나님을 중심한 사위기대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가정은 모든 것의 화동의 중심체가 됩니다. 만민을 대표하고 만가정을 대표한 화동의 중심체요, 종족의 화동의 중심체요, 수많은 민족이 화동의 중심체요, 수많은 국가의 화동의 중심체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국가 기준까지 복귀되면 세계는 자동적으로 통일되는 것입니다. 이론적으로 볼 때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통일교인들은 심정일치, 이념일치, 생활일치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러한 입장에서 절대성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세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세계를 위해 가려면 무엇이 필요하냐? 국가가 필요합니다. 국가와 결합하기 전에 무엇이 필요하냐? 민족이 필요합니다. 민족이 필요하기 전에 무엇이 필요하냐? 종족이 필요합니다. 종족이 필요하기 전에 무엇이 필요하냐? 가정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가정이 필요하기 전에 무엇이 필요하냐? 개인이 필요합니다. 결국은 내 개인이 문제입니다. 개인이 문제라는 겁니다. 가정을 품을 수 있는 나, 종족을 품을 수 있는 나, 민족 국가 세계를 품을 수 있는 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내가 되지 않고는 세계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권내에 있는 세계와 상관없는 내 개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통일교회에서는 절대적인 인격관을 모색하고 절대적인 가치관을 인류에게 제시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구원섭리가 통일교회를 중심삼고 이루어진다면 이 우주의 통일은 자동적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게 원칙입니다. 알겠어요? 하나님을 중심삼은 국가와 세계를 이루려면 가정보다도 국가를, 국가보다도 세계를 위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를 살리기 위해서 대한민국을 제물로 삼아야 합니다. 대한민국을 살리기 위해서 통일교회가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새로운 국가를 이루기 위해 자신을 부정하고 광명의 세계로 넘어가야 되겠습니다. 알겠습니까? 그러한 세계로 돌진해야 합니다. 그런 세계로 돌진하는 데 있어서 선두에 서지 않고는 그 이상의 권한을 가질 수 없습니다.
선생님이 지금까지 작전을 펴는 데는 목적이 있습니다. 화동의 중심체가 되기 위해서 이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극복해 나가야 하고, 가정적으로 극복해 나가야 하고, 종족적으로 극복해 나가야 하고, 국가적으로 극복해 나가야 하는 것이 통일교회가 가야 할 길입니다. 우리는 종적인 중심국가로 결정될 때까지 그 사명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필생의 사명으로 생각하고 나가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는 절대적인 저리에 서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가정도 절대적인 자리에 서게 되고, 선생님도 절대적인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나라도 절대적인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절대적인 종적관계가 횡적으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종적인 사람이 국가에 나타나면 그 자리가 국가를 대표한 자리가 되고, 종족에 나타나면 그 자리가 모든 종족을 대표한 자리가 되고, 가정에 나타나면 그 자리가 수많은 가정을 대표한 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의 중심이 나타나야 평화의 천국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어떻게 해야 화동의 중심체가 되느냐? 현실의 모든 것을 부정한 후 하나님을 중심삼고 새롭게 다시 긍정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잘못된 현실을 수습해 나가야 합니다. 그렇게 나가지 않고는 통일교회가 가고자 하는 길을 갈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만 됩니다.
아버님, 정말로 원하옵니다. 저희들을 당신 앞에 세워 주시옵소서. 저희가 태어나서 먼저 무슨 말을 하오리까? 영원히 아버지의 품에서 살면서 아버지를 불러야겠습니다. 이러한 본성의 인연을 갖고 태어난 저희 인간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인연을 저희의 몸 마음에 맺을 줄 아는 자신이 되어야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수고하심으로 말미암아 이 인류가 지금까지 남아진 것을 알고 있사오니, 맺어야 할 인연이 있거든 아버지께서 연결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오늘날 이 땅에는 절대적인 것이 없기에 목적성사에 있어서 혼란을 가져오고 있사옵니다. 하오니 절대적인 것이 있어야겠습니다. 절대적인 것이 있는 자리가 행복이 깃드는 자리요, 세상의 모든 문제점이 풀려지는 자리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담과 해와는 절대적인 아버지와 하나된 자리에서 절대적인 권위를 갖추어 선한 인류의 조상이 되어야 했사오나, 흘러가는 역사와 더불어 타락한 조상이 되어 타락한 후손을 남겼사옵니다. 그러기에 7년이라는 기간을 정하여 희생의 대가를 치르면서 복귀의 길을 모색해 나오고 있사오니, 저희의 책임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알아야 하겠사옵니다. 아버님, 저희들이 원하는 것은 절대적인 말씀과 더불어 아버지와 관계를 맺는 것이옵니다. 그리하여 아버지를 중심삼은 인격의 실체가 되는 것이옵니다. 아버지의 심정을 중심삼고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을 저희들이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렇지 않으면 죽음의 운세를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을 저희들이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사탄세계를 갈라 놓지 못하면 그만큼 슬픔이 깃든다는 것을 세상 생활을 통해서도 알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시옵소서.그리하여 슬픈 역사를 지내온 아버지를 느낄 수 있어야 되겠사옵니다.
저희들은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살기 위해 노력해 나왔지만 그런 과거지사를 자랑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과정이 비참하더라도 밤이 지나가면 반드시 아침에 온다는 것을 알고 참고 나가야 되겠사옵니다. 그렇게 해야 새로운 이념이 필연적으로 이 땅 위에 등장한다는 사실을 저희들이 알아야만 되겠사옵니다.
오늘날 통일교회를 따라 나온 당신의 자녀들을 축복하시어서 그들이 진정한 의미의 가치 있는 것을 갖추어 나갈 수 있게 하시옵소서. 이것을 잃어버리면 저희 개체의 모든 것은 다 파탄되오니 이것만은 저희의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고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당신의 귀한 자녀들이 되어야 하겠사옵니다. 이러한 인연이 여기에 모인 당신의 자녀들의 가슴 가슴에 싹트게 될 때에 통일의 방안은 여기서 모색될 것이요, 1970년대가 전체의 운세를 연결시킬 수 있는 시점이 된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저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일체를 부정하고 아버지로 말미암은 생명과 인격과 심정의 절대적인 가치를 알아 그것을 찬양하고 감사하며 그 가치를 높이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한마디로 감사하는 신앙을 할 줄 아는 자신을 발견하게 해주옵소서. 그러한 자리에서 자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버리면 버릴수록 당신의 권한이 투입되는 것이요, 당신의 무한한 가치가 접해진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이여, 저희들이 이와 같은 뜻, 이와 같은 사정과 목적을 위하여 발을 들여놓은 것을 후회하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것이 저희가 인생으로 태어난 목적이요, 이것이 저희가 생애를 통하여 가야 할 운명길이라고 생각하고 그 운명길에서 진실한 삶의 목적을 추구하고 노력하는 자들이 되게 하시옵소서. 그러한 삶을 통해 아버지의 가치와 아버지의 목적을 드러낼 수 있도록 역사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화동의 중심체인 개인으로서 절대적인 인격을 갖추어 세계를 대신하고, 가정으로서 역사를 대신하고, 종족으로서 우주를 대신할 수 있는 절대적인 믿음을 갖추어야겠습니다. 그리하여 종족을 편성하고 민족을 편성하고 국가를 편성해야 되겠사옵니다. 그렇게 되면 그 국가는 이 세계의 그 어떤 나라가 망하더라도 망하지 않는 하나의 중심적인 영원한 국가가 된다는 것을 알게 허락하여 주옵길 간절히 바라옵니다.
그런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 저희들은 출발하였사옵니다. 우리에게는 나라와 백성과 땅도 없지만, 저희 자체가 백성 대신이요, 저희 자체가 나라 대신이요, 저희 자체가 그 나라의 중심인 주권자 대신이요, 저희 자신이 전체를 대신한 실체인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절대적인 자리에 계신 아버지께서 우주를 창조하신 것과 같은 입장에 있는 창조의 역군으로서 자신감을 가질 수 있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니다.
이들이 이번 수련기간을 통하여 무엇을 가슴에 안고 가야 되겠사옵니까? 오늘의 모습이 과거의 모습과는 그 기준을 달리해야 되겠습니다. 과거의 기준과 오늘의 기준이 달라져야 되겠사옵니다. 여기에 모인 자녀들이 뜻을 대하는 방향이 하나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확실히 깨닫고 가야 되겠사옵니다.
내가 대상을 미칠 듯 사랑하고 나서도 또 사랑하고 싶은 마음에 몇번이라도 미칠 수 있는 사랑의 동기를 갖지 못하였기 때문에, 결정적인 사랑의 권한을 가질 수 없는 자신이라는 것을 자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밤을 새우고 날을 이어가면서 하늘을 흠모한 그 한날을 갖지 못했던 자신을 개탄하며, 그러한 동기를 가질 수 있도록 나를 붙들어 달라고 호소하며 달려가는 아들이 되고 딸이 되고 가정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들이 세상의 가정을 바라보고 세상의 나라를 바라보고 세상에 있는 부모와 처자를 바라보면서, 그 이상의 가치를 지녀서 그들을 기쁨으로 축복해 주는 자녀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더 높은 것을 새롭게 창조하는 자녀들이 될 때 만사가 형통한다는 사실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을 대신한 부모의 입장으로 나타나는 자리에는 영계가 동원된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저희가 세계의 중심이 되어 주체적 권한을 가지고 상대적인 환경을 움직여 내는 사명을 다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라 부를 때도 오늘날 세상 사람들이 간절한 마음으로 아버지라 부르는 것보다 몇십 배 더 간절한 마음으로 천만번이라도 아버지를 부르고 싶사오니, 전보다도 지금이 더 간절하고 지금보다도 이후가 더 간절하게 하시어서 아버지의 내정을 체휼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의 아들이라는 자리에 들어갈 수 있게 하시옵소서. 탕자도 아들이요, 충신도 아들이지만 여기에 있는 저희들은 아버지의 위업을 계승할 수 있는 아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으로부터 모든 위업을 고스란히 상속받을 수 있는 효자라고 모두가 공인하는 아들이 되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모습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그리하여 당신으로부터 `네가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하는 인정을 받을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런 관점에서 남자로 태어난 것을 감사드리옵니다. 맡은 책임이 지중하다는 것을 느끼는 당신의 아들들이 되어서 지구장이면 지구장으로서, 지역장이면 지역장으로서 책임을 다해야 되겠사옵니다. 그런 이름을 갖춘다는 것이 지극히 어려운 것임을 알았사옵고, 전체를 한 곳에 귀결시킬 수 있는 권한을 갖지 아니하면 전체의 장이 될 수 없는 입장인 것을 확실히 알았사옵니다. 그러한 권위를 지녀야 이들이 나가 있는 군 전체의 사람들을 전도할 수 있는 것이요, 그러한 책임자가 되어야 아버님이 공인하는 책임자가 된다는 것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처럼 저희가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부정하도록 할 수 있는 능동적인 심정과 인격과 말씀을 가져야 된다는 사실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는 그런 입장에서 오늘날 이 사회에 큰 파동을 일으키셨습니다. 수많은 가정 가정을 파탄시키는 섭리도 하셨고, 저희로 하여금 동네를 버리고 나오게도 하셨고, 혹은 자기의 군과 도를 버리고 나오게도 하셨사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 나라보다도, 어떤 도보다도, 어떤 군보다도, 자기의 부락이나 부모보다도 더 귀한 당신의 뜻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희들이 그 가치를 알고 모든 것을 버리고 나섰사오니 뜻이 얼마나 귀한가를 알고 하나님과 완전히 하나되어 상대적인 자리에 설 수 있는 책임자의 인연을 지녀야 하겠습니다. 또한 세상 사람들을 규합해서 취할 수 있는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야 하겠사오니, 저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절대적인 내용을 나누어 줄 수 있는 하나의 대상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런 사람이 되겠다고 몸부림치는 당신의 아들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내일의 희망의 세계가 저희 앞에 다가오고 있습니다. 내일의 이 나라는 어떤 선진 국가도 하지 못하는 것을 하는 나라요, 역사를 통틀어 자랑할 수 있는 나라로 저희 앞에 찾아온다는 것을 알아야만 되겠사옵니다. 또한 이 나라의 국민은 세계적인 해방의 기치를 들고 만국, 만민 앞에 승리를 다짐하는 국민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사옵니다.
해방의 그날을 흠모하면서 그날을 촉구하고 제시하려는 무리들이 바로 통일교인인 것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은 그 가운데서도 책임자인 것을 느끼게 될 때에, 전인류역사에 한번밖에 없을 그러한 책임을 갖고 태어난 것을 만우주 앞에 감사해야 되겠사옵니다. 또한 부모의 인연을 가진 것을 감사해야 되겠습니다. 저희들은 갈 길을 모르던 무리였지만 새로운 가치의 기준을 남길 수 있는 시대에 태어난 것을 감사해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눈물로써 모든 가치를 결정지어야 할 역사적이요 우주사적인 사명이 저희의 어깨에 짊어져 있다는 것을 알고 힘차게 행군할 수 있는 자신의 모습을 갖추는 이번 기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인격체가 되고 화동의 중심체가 되어야 할 이 엄청난 사명을 저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럴 수 있는 인격자가 되고, 그럴 수 있는 사랑의 실체가 되는 자리에 서게 되면 아버지의 뜻이 내 뜻이요, 내 뜻이 아버지의 뜻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렇게 아버지와 저희가 일치되어 안팎으로 인연을 갖추는 날에는 온 우주에 해방을 줄 수 있는 권한이 이루어진다는 이 엄청난 사실을 알아야 하겠사옵니다.
저희를 중심삼고 천지를 지으셨고 저희를 잘살게 하기 위해서 아버지께서 만물을 지으셨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그 만물을 사랑하고 그 만물을 보면서 기뻐하는 참된 인연을 갖춘 당신의 아들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1970년대에는 통일교회가 세계적인 운세를 맡기에 부족함이 없어야 되겠습니다. 그런 사명을 책임지고 수행할 수 있는 책임자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1970년대에는 1960년대보다 더욱더 새로운 우주사적인 계획을 세워서 세계를 향하여 힘차게 활보하는 당신의 아들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 길을 가는 데 있어서 저희가 화동의 중심체가 되어 당신 앞에 효의 도리를 다하고 충의 도리를 다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하나님께서 만일 이 땅의 만물을 자신만을 위해서 창조하셨다면, 그런 입장에 계신 하나님은 행복하실 수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만물을 자신의 것으로만 영원히 보관하고자 하신다면, 행복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무엇인가를 정성스럽게 만들었다면 그 물건을 자신이 갖겠다는 마음보다도 환경적인 인연을 중심삼고 누군가에게 주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처럼 누군가를 위하여 만든다는 것에 더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군가를 위하여 물건을 정성스럽게 만든다고 할 때 그 누구는 어떠한 사람이냐?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만들 때에는 사랑하는 그 가치 이상의 것을 만들고 싶고, 그 가치 이상의 것을 주고 싶은 마음이 앞서게 됩니다. 그러한 마음에서 물건을 만들 때 우리는 행복감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께서도 천지만물을 하나님 자신을 위하는 마음을 가지고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주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창조하셨다는 데 더 큰 의의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것은 누구를 위해서였느냐? 사랑하는 아들딸을 위해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는 인간을 어떤 자리에 세워 놓고 주고 싶어하실 것이냐? 그 자리는 아들의 자리요, 딸의 자리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들딸에게 모든 창조물을 고스란히 넘겨 줌과 동시에 자신의 사랑하는 마음까지 플러스(+) 시켜 가지고 주고 싶어하는 마음이 부모의 마음이 아니겠어요? 또한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아니겠어요?
사랑하는 사람끼리 작은 손수건이면 손수건 하나를 주고 받았을 때, 그 하나의 손수건이 귀한 것이 아니라 그 손수건을 통하여 전달되어지는 사랑이 귀한 것입니다. 그 손수건에 전체적 가치를 대신한 사랑이 연결되어 있기에 그것은 무한한 가치를 지닌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하나님께서 기쁨 가운데에서 이 우주를 창조하셨다고 해도 그것을 사랑하는 자에게 주지 못한다면 하나님은 불쌍한 입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들을 세워 그들에게 당신의 생명 전체와 사랑을 첨부시켜서 창조하신 만물을 몽땅 주려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대하실 수 있는 한때가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게 될 때,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성들여 지어 주신 만물을 받았느냐? 또,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의 품격을 대신할 수 있는 실체 즉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실체의 기준을 이루었느냐? 또,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시고자 하셨던 사랑을 받았느냐? 이러한 문제를 두고 볼 때에 오늘날 타락한 우리 인간들은 이 세 가지를 전부 받지 못한 자리에 있습니다. 즉, 우리 인간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세계를 상속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피조세계의 중심으로 지어진 우리 인간이 하나님께서 소원하시던 완성의 기준을 넘어서서 하나의 완전한 남자가 되고 하나의 완전한 여자가 되면, 그 인격 앞에 서로를 상대적인 존재로 세워 주고 싶으셨습니다. 그와 동시에 영원히 끊어질래야 끊어질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첨부시켜 주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인간은 이 모든 것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이 한이 되었기 때문에 이것을 수습하기 위해서 우리 인간은 탕감의 조건을 세워 나오는 것입니다. 만물을 받지 못한 인간이었기에 이것을 다시 수습하여 받으려니 제물적인 조건으로 물질을 세워야 됩니다.
그 다음에는 인격적인 조건을 세워야 됩니다. 아담이 타락함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피조세계를 완전히 상속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아담을 대신한 존재가 나와야 됩니다. 그런데 이것을 상속받는 데는 그냥 받을 수 없습니다. 탕감조건을 세워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오셔서 인류를 대표하여 탕감의 제물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그 다음에는 인간 조상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이 땅 위에 참부모로 오시는 분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 제물을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책임이 남아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됩니다.
우리들은 만물을 상속받고, 실체를 상속받고, 상대적인 인격을 갖추어서 하나님의 사랑까지도 상속받아야 할 텐데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을 상속받지 못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상속받지 못한 것이 우리의 서러움이요, 원통함인 것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차피 이것을 상속받아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이것을 상속받을 수 있는 자리를 찾아가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영광 가운데에서 기쁘게 주고 싶고, 당신의 사랑을 첨부시켜 주고 싶어하는 그 자리를 찾아가야 되겠습니다. 그 자리를 찾지 않고는 상속을 받을 수가 없기 때문에 그 자리를 찾아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자리를 찾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만약 그 자리가 기쁜 자리라면 우리도 기쁜 마음을 가지고 찾아가야 되는 것이요, 그 자리가 슬픈 자리라면 우리 자신도 슬픈 자세를 갖추고 찾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는 그 자리를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고 싶어하시는 그 마음 앞에 받을 수 있는 한 상대자를 찾아 기쁨으로 주고 싶어하셨지만 받을 수 있는 한 상대자가 없어 그 자리가 슬픔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 우리가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 슬프게 했던 그 이상의 기쁨의 조건을 제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지 않고는 받을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생명의 가치를 자랑하면서 스스로 살아가는 만물을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상속해 주고 싶은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그런 자리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만물도 쪼개야 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만물을 상속받는 그 실체는 만우주의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주체인 남성 앞에는 그의 대상으로서 여성까지도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주고받는 자리는 최고의 기쁨의 자리요, 그 부부는 말할 것도 없고 만물까지도 전부 기뻐하는 자리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자리를 우리 인간은 상실해 버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 인간은 그 자리에서 느낄 수 있는 기쁨에 비례되는 슬픔, 그 이상의 슬픔을 느끼지 않고는 받을래야 받을 수 없는 운명에 처해 있습니다. 이것이 한스러운 복귀노정인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무한히 기쁜 자리에서 받아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이것을 무한히 슬픈 자리에서 받지 않으면 안될 운명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기뻐하는 자리에서 받고 기뻐하는 자리에서 서로 감사하면서 관계를 맺어야 할 인연을 상실한 우리는 그 자리를 찾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 자리는 그 반대의 입장에서 찾아가지 않으면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나긴 역사과정에 있어서 그 시대시대마다 인간 앞에 나타났던 수많은 제물이 있었습니다. 그 제물들은 어떻게 되었느냐? 그 제물들은 비참하게 희생되어 갔던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제물을 바치는 사람이 제물과 하나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제물을 바치는 그 자리에서만 하나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제물을 둘로 쪼개어 바치는 그 자리에서 뿐만 아니라 제물이 나서 자라 가지고 죽는 그 자리에서까지 완전히 하나되어야 됩니다. 제물이 당하는 아픔, 죽음의 고통을 자기가 당하는 고통으로 느끼지 않고는 제물과 하나될 수 없습니다. 제물을 중심삼고 그 제물이 느끼는 모든 고통을 느끼는 자리에 서지 않고는 자신이 제물되어 고통받았다는 조건이 세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고통을 받아 하나님 앞에 승리의 제물로 바쳐지는 자리가 제물의 자리인 것입니다.
예수님과 인간을 두고 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 위의 인간을 대신하여 제물되어 갔습니다. 그러니 오늘날 우리 인간이 제물된 예수님을 중심삼고 구원을 받느냐 못 받느냐 하는 것은 예수님이 제물될 때까지의 노정 전체를 우리가 체휼하느냐 못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이것을 체휼하느냐 못 하느냐에 따라 완전한 제자가 되느냐 못되느냐, 또는 완전한 믿음의 아들딸이 되느냐 못 되느냐 하는 문제가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아픔을 예수님의 아픔으로만 받아들일 뿐 자기 자신과는 관계없는 분립된 입장에 서서 감상만 하는 자들은 자신이 제물되었다는 입장에 서지 못하기 때문에 완전히 구원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제물되신 예수님의 아픔을 자기의 아픔으로 느끼고 제물과 하나된 자리에 선 자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사랑을 유린당하셨던 하나님의 아픔을 생각하게 될 때, 우리가 하나님의 그 아픔, 그 사랑의 심정을 체휼해야만이 그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복귀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연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예수님을 중심삼고 신앙생활을 해 온 수많은 기독교신도들을 두고 볼 때, 과연 서럽게 태어나서 십자가의 길까지 갔던 예수님의 심정을 체휼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상에서 만민을 대신하여 피를 흘리면서도 원수를 대하여 복수의 심정을 갖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그 심정의 아픔이 얼마나 컸겠어요?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고 싶었던 것을 완전히 우리가 받으려면 반드시 예수님이 가졌던 아픔 이상의 자리에 서야 됩니다. 그러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가 그러한 자리에 서지 않고는 그것을 받을 수 있는 존재가 못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려고 했던 것을 우리가 받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원한에 사무쳤습니다. 그러면 이것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이 무엇이냐? 그것은 원한에 사무친 그분에 대한 동정심입니다. 그럴 수 있는 인연을 자아내지 않고는 받을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죽음을 중심삼고 볼 때에, 예수님이 누구를 위해서 돌아가셨는가? 만민을 위해서 돌아가셨습니다. 오늘날 우리 자신을 위해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면 그분이 우리를 위해서 돌아가시게 된 동기는 무엇이냐? 배반의 역사를 엮어 왔고 천륜 앞에 용납 받을 수 없는 입장에 선 우리이기 때문에 그런 우리를 대신해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 대신 돌아가신 그분의 아픔을 우리는 동정해야 할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 우리가 지은 죄를 넘고 나서 그분을 동정할 수 있고, 또 죄를 넘고 나서 우리가 동정 받을 수 있는 자리가 어디냐? 제물이 되지 않고는 승리의 자리, 기쁨의 자리는 우리 앞에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자들이 넘어야 할 고개요, 제물 드리는 자로서의 가야 할 내정적인 일치점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은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 축복가정을 중심삼고 볼 때, 부부는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아 가지고 하나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부부로 축복해 주신 것은 사랑을 중심삼고 연결된 것, 하나님이 줄 수 있는 최고의 것을 주신 것입니다. 이런 것을 두고 볼 때에, 그것을 완전히 우리의 것으로 받을 수 있는 자리는 어떠한 자리인가?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기쁜 마음으로 주고 싶었던 그 자리는 어떠한 자리인가?
아담 해와가 타락한 것이 기쁨으로 줄 수 없었던 동기가 된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우리는 그들 이상의 자리에 나가서 `너희는 아담 해와보다 낫다'는 말을 들을 수 있는, 동정을 받을 수 있는, 긍휼히 여김을 받을 수 있는, 다시 생각할 수 있는 인연을 그 가정에서 이루어 놓아야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이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을 재차 유발시킬 수 있는 동기가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신앙이라는 문제를 앞에 놓고 복귀의 길을 더듬어 가야 하는 오늘날의 우리들은 종적인 역사를 횡적으로 탕감해야 합니다. 6천년 역사를 한 시대의 시점에서 일시에 탕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소생 2천년, 장성 2천년, 완성 2천년의 3단계로 이어온 종적인 역사를 오늘날 우리 시대에서 횡적으로 탕감해야 합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종적인 역사를 횡적으로 탕감해야 합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종적인 역사를 횡적으로 탕감할 것인가? 이것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6천년 역사는 하나님을 중심삼고 제물을 드리기 위한 역사입니다. 만물을 제물 드리게 했고, 아들을 제물 드리게 했고, 자신의 실체를 제물 드리게 했던 그런 역사입니다. 이러한 일을 6천년 동안 거듭해 왔기 때문에 평면 도상에 있는 오늘날의 우리 자신과 우리 가정을 어떻게 아담 개체와 아담 가정과 같은 입장의 인연으로 결속시키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반드시 가정을 가져야 됩니다. 가정을 중심삼고 보면, 가정에는 부모가 있고, 자식이 있고, 물질이 있습니다. 그러면 구약시대, 신약시대, 성약시대에 있어서의 종적인 역사 전체를 횡적으로 전개시켜서 대신할 수 있는 실체가 무엇이냐? 만물과 자녀와 부모입니다. 즉, 부모와 자식과 그들의 소유물입니다. 이것들은 가정의 울타리 안에서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역사과정에서 하나님 앞에 바쳤던 제물 전체를 총합한 그 이상의 제물을 어떻게 바쳐 드릴 것이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다시 말하면 여러분 자신이 지금까지 소유하고 있는 물건을 어떻게 구약시대로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바쳤던 제물 전체를 총합한 그 이상의 가치로서 하나님 앞에 바쳐 드리느냐? 우리가 있기 전부터 역사를 통해 제물을 드려 나오던 그 이상의 제물을 우리가 하나님 앞에 돌려 드리지 않고는 그것을 다시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 인간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이것을 잃어버리게 되셨기 때문에 드려 가지고 다시 받아야 됩니다. 드리지 않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어떻게 자신의 몸뚱이를, 혹은 자기의 아들딸을 하나님이 만민을 구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 위에 보내어 희생시킨 것과 같은 입장에서 바쳐 드리느냐 하는 것입니다. 또, 지금까지 역사상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도의 길을 가기 위해서 제물적 입장에서 희생되어 사라져 간 그 이상의 가치로서 하나님 앞에 바쳐 드리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자기 가정 자체를, 자기의 아들딸을 그렇게 바쳐 드릴 수 있는 자신들이 되어야 합니다. 뜻을 위해서 바칠 수 있는 아들딸을 만들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에덴에서 아들딸을 키우던 것과 마찬가지의 입장에서 자기의 아들딸을 키워야 됩니다. 그 아들딸이 타락할 때의 아픔이 얼마나 컸겠는가? 자기 생명의 대신이요, 자기 전체의 존재 가치를 대신하는 아들딸인데 그들이 꺾여 나갔으니 그 비참과 억울함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이런 모든 사연을 전부 해원성사하겠다는 심정과 하나님께 그 해원의 실체로서 바쳐 드리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 아담 해와가 실체를 드리지 못하였던 것을 탕감하겠다는 마음으로 자기 부부를 실체로 바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불륜의 사랑으로 부부의 인연을 맺은 것이 원한이 되었으므로, 오늘날 우리는 새로운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부부의 인연을 갖추어서 그 실체를 하나님 앞에 다시 바쳐 드려야 할 운명에 서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물질과 자기의 아들딸과 자기 부부가, 즉 가정 전체가 6천년 동안 하나님이 찾아오시던 소원 전체를 부활시킬 제물적 실체가 되어야 합니다. 이 실체의 가치는 현재적인 중심 가치를 대신한 제물이 아니라 역사시대를 대신하고, 미래를 대신한 것입니다. 전체의 제물적인 중심 가치를 대신해서 이 모든 것을 일시에 몽땅 하나님 앞에 바쳐 드릴 수 있는 가정이라야 합니다. 그래서 그러한 가정을 어떻게 만드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만들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이 땅 위에 보내셨던 것이요, 이러한 가정을 이루어 하나님께 바쳐 드렸다 하는 한날을 결정짓기 위해서 지금까지 섭리해 나오신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오늘날 여러분들이 통일교회를 대표해서 지방에 나가 어떠한 책임을 해야 되느냐?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다시 세워 놓아야 됩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확실히 알고 다시 세워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한때 자기의 소유물을 만유를 대신한 제물적인 가치의 것으로 생각하고 아버지 앞에 바쳐 드렸습니까? 하나님이 지금까지 가인과 같은 인류를 구하기 위해서 자기 아들딸을 희생시켰던 것처럼 여러분의 아들딸을 잡아서 제물 드리는 자리에 섰었습니까? 그뿐만 아니라 여러분 자신이 제물이 될 수 있었습니까? 남자면 남자, 여자면 여자로서 각각 제물이 되는 것이 아니라 부부가 함께 제물 될 수 있었습니까? 가정 전체가 책임을 중심삼고 하나님 앞에 `저희 가정 전체를 아담이 타락한 것을 해원성사 할 수 없는 것이요, 가정적으로 타락한 것을 해원성사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탕감의 원칙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어느 한때에 이런 내용을 가지고 가정을 아버지 앞에 바쳐 드렸습니까? 이러한 문제를 두고 볼 때에 아직까지 바쳐 드리지 못했습니다. 제물로 바쳐 드리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제물로 바쳐 드리는 그 자리는 어떤 자리라야 되느냐? 아담 해와가 타락하던 당시 하나님이 느꼈던 슬픔 이상의 슬픔을 느껴 하나님으로부터 동정받을 수 있는 내용을 만들어 놓는 자리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자리에 서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그 가정이 돌아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칙 아니겠습니까?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 축복가정들이 그러한 입장에 서 있느냐? 또 참부모의 자녀로서 참부모에게 소유권이 있는 그 나라와 그 세계를 위하여 기쁨으로 바쳐질 수 있는 제물이 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들이 지방에 나가 전도할 때도 자기를 위하여 전도해서는 안됩니다. 왜? 여러분은 제물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인생길을 가는 우리 인간이므로 자기라는 것을 생각해 가지고는 안 됩니다. 자기 관념이 개재하면 하나님이 절대 임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참부모 앞에 설 수 있는 자녀가 되기 위해서는 그 가정 전체가 어떠한 입장에 서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 가정의 범위가 개체 중심이냐, 민족 중심이냐, 국가 중심이냐, 세계 중심이냐 하는 것을 중심삼고 볼 때에 부자의 인연은 세계성을 띠었을 때 맺어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자기 자신은 `참부모를 중심삼은 자녀의 입장` 에 서기 위한 제물을 입장에 서 있다는 것을 어떻게 자각시켜 나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이 자기 자신을 앞세우는 자리에 서게 되면 부모를 배반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제물이 되는 자신의 입장을 생각하게 되면 제물 드리는 사람을 배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을 생각하지 않는 절대적인 자리는 어디인가? 죽는 자리입니다. 희생하는 자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물의 입장에 서려면 죽는 자리에 서야 합니다. 예수님도 제물이 되어 죽었습니다. 누구를 위해서 죽었느냐? 자신을 위해 죽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죽은 것입니다. 이 자리가 십자가의 자리입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라고 기도했습니다. 여기서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라고 한 것이 위대하다는 것입니다. 자기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이런 자리에 섰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제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기준이 세워진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것을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에게 혹 어려움이 있거나 외로움이 있거든 혼자서 눈물 흘리지 말아야 됩니다. `아버지는 어찌하여 이와 같은 한스러운 입장에 서게 되셨으며, 나를 깨워 이 비참한 자리에 세우고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는 운명에 서 계시는가` 하고 생각해야 합니다. 또, 여러분이 어렵고 분한 자리에 들어서면 `어찌하여 하나님은 이렇게 분한 자리에 들어서지 않으면 안 되었던고?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되었던고? 아들 때문에 그렇게 되었으니 결국은 나 때문에 그렇게 되지 않았는가? ` 이렇게 생각하면서 전체의 책임을 짊어지고 하나님을 모시고 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아담 해와의 사명을 대신하여 탕감하는 자리에 설 수 있는 인연이 아니겠느냐? 여러분들은 이러한 생각을 해야 됩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여기를 떠날 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3월 초하루부터 재출발해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가는 길에 누구를 모시고, 어떤 모습을 지니고 갈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개인을 중심삼고 보면 지금까지 6천년 역사는 아담을 복귀하는 역사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개인은 제물의 입장에 서야 됩니다. 자기가 제물의 입장에 서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뜻길을 가는 데에는 자기의 피와 땀과 눈물을 다 투입해서 가야 됩니다.
여러분이 과거에 사탄 세계에 있을 때 사랑하는 사람과 선물을 교환한 일이 있으면 그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또 자기 조상으로부터 귀한 것이라고 상속받은 것이 있다면 그것도 부끄러운 상속입니다. 그렇찮습니까? 그것은 도둑질해다가 나누어 준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가 도둑질해 온 물건을 자기가 상속받아 가지고 좋아할 수 있어요? 그러므로 이것은 부끄러운 상속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을 몽땅 불살라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도 시원치 않은 물건을 뜻을 알고 나서도 `이것은 우리 아버지 어머니로부터 상속받은 건데` 하고 귀하게 여기면서 꽁무니에 달고 다니고 자기 품에 품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것에 대해서 확실히 모르고 있습니다. 엄벙덩벙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소유물이 문제가 되지 않으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무엇이 문제가 되겠는가? 그러니 우리 자신들의 소유물은 응당히 뜻을 위하여 몽땅 바쳐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부모가 자기에게 상속해 준 물건이 도둑질한 물건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그 물건을 그 부락이면 부락, 마을이면 마을의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기라도 해야만 용서의 길이 열릴 것 아니겠어요?
여러분은 소유관념을 초월해야 됩니다. 오늘날의 이념권내에 있어서의 개인 소유를 완전히 부정시키고 공동소유를 완전히 부정시켜서 그것을 하늘의 소유로 돌려드리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 일을 위해서 누가 와야 되느냐? 진실된 사람이 와야 됩니다.
오늘날 민주주의는 개인 소유를 말하고 공산주의는 공동 소유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것들을 하늘의 것으로 바쳐 드려야 할 텐데도 불구하고 하늘은 제쳐 놓고 사람 앞에 바치고 있습니다. 사탄에게 바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소위 공산주의인 것입니다. 개인 소유를 부정하는 입장에서, 진실된 자리에서 하늘 앞에 바쳐 드려야 할 텐데 공산주의는 여기에 반대입니다. 개인 소유를 부정하기는 하지만 진실된 자리에서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거짓된 자리에서 부정하면서 공동 소유를 요구하기 때문에 공산주의는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망하게 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진실된 자리에서 개인 소유를 부정하고 세계 인류를 위한 공동 소유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있게 될 때, 그때부터 천국화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자리에 서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부모는 누구냐? 아담입니다. 우리 자신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죄를 지은 장본인인 아담의 아들딸로 태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벨의 입장에 처해 있습니다. 부모를 복귀시켜 주어야 할 입장에 있는 우리이기 때문에 아벨의 사명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아벨의 사명은 가인의 책임을 다시 해야 하는 것입니다. 가인이 피를 뿌렸기 때문에 피를 뿌린 자리로 나가야 합니다. 그러려면 존재의식을 부정하고 소유관념을 초월해야 됩니다. 이것이 원리적으로 본 제물된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은 존재의식을 부정하는 자리에 찾아가야 됩니다. 부정하는 자리뿐만 아니라 피를 뿌리는 자리에까지 가야 됩니다. 즉, 제물되는 자리에까지 가야 됩니다.
하나님이 채찍을 들고 우리의 몸을 치고 나서 받아들이게 되면 우리는 동정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살길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우리가 제물된 입장에서 잡히게 될 때에 하나님이 쳐서는 동정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쳐야 되느냐? 사탄이 치는 자리에 서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하늘의 제물로서, 사탄이 치고 사탄이 받는 자리에 들어가게 되면 하나님께서 부활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사탄이 때려 죽인 이상의 가치를 첨부하여 부활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그 예가 예수의 부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친 것이 아니라 사탄이 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이 부활된 제물로 등장한 것과 같이 부활된 제물로 바쳐진 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해야 되느냐? 자신을 제물삼아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이삭이 아브라함에게 잡혀서 제물로 드려진 것과 같은 입장에서야 합니다. 여기에는 동정이 없는 것입니다. 제물이 되어서 부활될 수 있을는지는 모르지만 당장에 살아날 길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물이 되어 바쳐지기 전에 하늘을 위하여 사탄에게 우리가 맞는 자리에 들어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사탄세계는 무너지는 것입니다. 즉, 탕감조건을 세우기 전에, 조건적인 제물을 바칠 때가 되기 전에 사탄이 손을 대면 사탄세계는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는 어떤 작전을 하자는 것이냐? 여러분이 하늘 앞에 제물로서 완전히 바쳐지기 전에 사탄세계로부터 맞는 놀음을 하자는 것입니다. 사탄은 하늘편의 제물을 받을 도리가 없고, 잡을 도리가 없기 때문에 만약에 이것을 침범한 것이 부락이면 부락이 걸려들고, 나라면 나라가 걸려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기독교 역사는 기독교를 희생시켜서 전체를 복귀해 나오는 역사입니다.
타락의 동기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닙니다. 타락한 장본인이 사탄이므로 복귀를 할 때도 사탄편에서 동기를 만들어야 됩니다. 그래서 이 일을 하자니 고생시키는 것입니다. 그 일을 실체 아담을 대신한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못 했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후부터 기독교를 중심삼고 세계를 빼앗아 오는 싸움을 해 나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러면 이런 싸움을 하는 데에 누가 도구가 되었는가? 기독교인들입니다. 그들이 죽음길을 걸어서 순교라는 거룩한 피의 대가를 치름으로 말미암아 이 온 세계를 빼앗아 찾아올 수 있고, 사탄세계를 무너뜨릴 수 있는 동기가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됩니다.
오늘날 통일교회도 이와 같은 작전을 해야 되겠습니다. 어찌 여러분들을 사지(死地)에 내보내서 숱한 수난길을 걷게 하고 싶겠습니까? 그렇지만 선생님이 그러한 원칙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여러분이 제물로서 바쳐질 그날이 다가오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날은 제물로서의 잃어버렸던 모든 면을 찾게 되는 날입니다.
그 한날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축복이라는 한 날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제물적인 과정을 거쳐야 됩니다. 그 자리는 어떠한 자리냐 하면, 무한히 외로운 자리입니다. 왜냐? 하나님이 무한히 외로운 자리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통일교인들이 전부 다 외로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가진 것이 없거든요. 돈이 있으면 복잡한 것입니다. 지갑에 든 백 원이 총재산이고 십 원이 총재산이면 거기에 생명을 걸게 됩니다. 어려우니까 하나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가진 십 원을 자기 소유의 전체로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입장이지만 하나님과는 부자지간이라는 신념을 가지게 될 때 하나님을 대해서는 무한한 가치를 지닌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져야지, 시시한 기준을 바라 가지고는 탕감의 제물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가진 것이 없는 자리에서 적어도 3년 동안은 지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3년 공생애노정을 걸을 때 모인 무리들이 배고파하자 제자들에게 가진 것이 무엇이냐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 뿐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지갑에 돈을 넣어 두고 그런 말씀을 하셨겠습니까? 만일 지갑에 돈을 넣어 두고 그렇게 말씀을 하셨다면 예수님은 메시아가 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기까지 예수님은 지갑을 털어 보면서 이때 돈이 있었으면 하고 얼마나 바라겠습니까? `내게 돈이 있다면 이때에 쓸 수 있을 것을….` 하면서 얼마나 안타까와 했겠습니까? 과거에 돈을 쓴 데가 있었으면 그 돈을 썼던 과거를 후회하면서 이러한 때에 쓰지 못하는 것을 얼마나 안타까와 했겠습니까? `이런 때에 돈을 쓰지 못하면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영원히 후회될 것이다` 하는 그런 한스러운 마음을 품고 하나님 앞에 호소했기 때문에 거기에 새로운 역사가 벌어졌던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제 여러분도 이적의 역사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한 조각의 빵을 대해서도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어떻게 인연을 맺게 할 것이냐?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굶주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예수님이 40일 금식을 하는 동안에 사탄이 나타나 `만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돌로 떡이 되게 하라'고 한 것은, 물질의 가치를 얼마나 아느냐, 네 자신의 가치를 얼마나 아느냐, 너를 대하는 하나님과 너와의 관계의 가치가 얼마나 되어 있느냐 하는 것을 시험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려면 물질도 초월해야 하고 자기도 초월해야 됩니다. 다시 말하면 상대적인 모든 요건을 완전히 부정할 수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만을 사랑해야 복귀의 원칙을 통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하나님과 예수와의 인연이 맺어졌던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 자리는 배고파 굶주릴 때에 떡을 요구하던 그 간절한 마음을, 에덴 동산에서 아담 해와가 타락하던 그때의 욕망을 넘어선 자리라는 것입니다. 또 아담과 해와가 타락하던 당시에 애탔던 그 마음을 넘어선 자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온 신경이 곤두서 가지고, 온 몸과 마음이 거기에 견제를 받기 때문에 정신이 아찔할 정도로 심각한 자리에서 40일 금식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 입장이 얼마나 심각했겠습니까? 빵 한 조각이 세상의 그 무엇과 비할 것인가? 여러분들도 금식해 보았으면 알겠지요?
그러니 사탄이 이러한 외적인 모든 환경을 중심삼아 가지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아들의 특권으로서 무한한 가치와 절대적 권한을 갖고 있지 않느냐' 할 때, 죽음길 망할 길도 응당히 가야 할 자기 앞에 있어서 빵이 무엇이며 자기 자신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 앞에 자신이 어떻게 서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사탄이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어떻게 하라` 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그렇게 하지 말아라` 하는 말인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돌로 떡을 만들어 먹어라` 하는 그 말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안 할 수 있겠느냐고 한 것이 시험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여러분은 자신의 가치와 물질에 대한 가치를 두고 어떻게 할 것이냐?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나, 하나님과 부자의 관계에 있는 자기 실체와 물질을 놓고 어떻게 할 것이냐는 것입니다.
굶주림 앞에 돈 십 원, 빵 한 개는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빵 하나를 놓고 아버지 앞에 눈물을 흘리며 기도할 것은 뭐냐면, `아버지께서 복귀의 도상에서 인류를 찾아 나오시기에 얼마나 얼마나 서러우셨사옵니까? 그 물질이 제물의 입장에 있사오니 그것을 제가 먹고 제가 대신 제물된 입장에서 제 실체를 바치니 이 몸뚱이를 아버지께서 받아 주시옵소서` 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물은 인간을 위해서 있는 것이요, 인간은 아버지를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닙니까? 하오니 제가 이렇게 물질을 좋아하듯이 아버님도 그렇게 제 몸뚱이를 좋아하시옵소서. 잘 자라서 아버님이 원하시는 힘의 원천이 되어 가지고 그 모든 소망을 성취하는 데 원동력이 되기 위해 저 자신을 몽땅 바쳐 드려야겠사오니 그럴 수 있게 하시옵소서` 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굶주릴 때에 빵을 그리워하는 그런 마음으로 하늘이 나를 그리워할 수 있는 자리에 내가 서야 합니다.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이 아담 해와에게 주시고자 하셨지만, 그들이 타락함으로서 받지 못했던 그 사랑 이상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자리에서 내가 출발하게 될 때, 비로소 복귀의 사연이 맺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를 찾아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이 내가 가야 할 길이요, 고빗길입니다. 내가 배고플 때에 빵을 그리워하는 그 이상으로 하나님이 나를 그리워할 수 있는 자리에 서야 됩니다. 그렇지 않고는 복귀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아버지를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내가 과거에는 죄인이 아니었는가? 그렇지만 자식을 사랑하시는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이 불효자식을 대하는 그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겠는가? 아버지의 그 아픈 마음을 하염없는 눈물로 적셔 드리면서 이제 다시는 그런 아들이 되지 않겠다고 다짐할 때, 아버지의 아픔은 없어질 것입니다.
과거에 지었던 모든 죄상을 잊어버릴 수 있는 동기를 만들지 않고는 아버지와 아들의 인연을 다시 맺고자 하는 그 소망은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 세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타락의 후손으로 태어난 우리 자신이 복귀의 길을 가는 데 있어서 옷을 잘 입지 못한다고 슬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잘 먹지 못한다고 슬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원수에게 채찍을 맞는다고 슬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모든 여건이 처량하고, 엄청나게 반대적인 것이면 그럴수록 그것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엄청난 하나님의 심정과 관계맺는 유발점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슬픔을 당하는 일이 없으면 하늘의 기쁨과 관계를 맺을 수가 없는 것이요, 그런 십자가의 길이 없으면 평화의 왕자로서 갈 태평로가 생겨나지 않는 것입니다. 전부 이렇게 반대의 현상으로 인해 인연이 맺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자신들도 어느 한 때에 자기 몸 전체를 제물로 드리지 못하였거든, 어떻게 하면 내 자신의 한 가지 한 가지를 제물로 바치는 자리를 거쳐갈 것인가를 생각해야 됩니다. 제물의 길을 거쳐가야 하는 것입니다. 내 손을 어떻게 제물로 만드느냐? 내 발을 어떻게 제물로 만드느냐? 내 머리를 어떻게 제물로 만드느냐? 뜻을 생각하기를 머리가 깨지도록 생각해야 되고, 무엇을 연구할 때는 그것을 위해 자기가 정성들이던 이상 머리가 터지도록 심각하게 생각해야 됩니다. 이 몸이 뜻을 위해서 얼마나 제물 되었는가? 내 이 미모가 뜻을 위해서 어떻게 제물 될 것인가? 이렇게 내 개인의 한 가지 한 가지를 전부다 드려도 부족하거든 한꺼번에 몽땅 바쳐 드릴 수 있는 자리는 없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런 자리가 있거든 만민들을 대표해서 그런 것을 알고 있는 내가 먼저 자신을 제물로 드려야 합니다. 그런 자리에 서게 될 때에 여기에서부터 역사적인 새로운 세계가 창조되고, 새로운 하나님의 섭리역사가 발전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이것이 오늘날 탕감복귀섭리의 뜻을 아는 통일의 신도들이 가야 할 노정이요, 하늘의 아들딸이 가야 할 정상적인 노정인데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들이 살아온 생활 기준과 하늘이 걸어가는 길이 얼마나 먼 거리에 있는가 하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늘 앞에 내 자신을 몽땅 바쳐 드리자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부부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진 것이 없다고 한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바라보는 하나님은 더 안타깝고 더 한스러워하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누구 때문에 못사느냐? 네가 힘이 없어 못하는 것이 아니요, 능력이 없어 못하는 것이 아니요, 노력을 안 해서 못사는 것이 아니다. 그 능력과 노력을 오직 나를 위해서 바치며 살기 때문에 못하는 구나! `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복이요, 이것이 무한한 가치입니다. 이것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동정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늘의 동정을 받지 않고는 복귀의 길을 갈 수 없습니다. 그러니 1970년 3월부터 출발해야 할 여러분의 생활노정에서는 어떻게 하면 하늘의 동정을 받는 자리에 찾아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 자리를 찾지 못하면 아버지와 아들의 인연을 맺을 수 없습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 동정의 인연으로 말미암아 한 도(道)에 있어서 하늘의 운이, 혹은 국가의 운이 찾아오게 되면 그 동정의 인연을 남긴 사람을 통하여 그 도민들은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이 아니겠습니까? 한 나라의 운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한민국이면 대한민국을 수습해 가지고 삼천만 민족을 이끌고 갈 수 있고, 하늘로부터 삼천만 민족이 받는 동정 이상의 동정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으로 말미암아 삼천만 민족이 구원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온 세계 30억 인류를 다 잃어버리더라도 거기에 대표적인 한 사람이 있어서 하늘로부터 30억 인류가 받을 수 있는 동정 이상의 동정을 받는다면 그때부터 30억 인류는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메시아가 가는 길, 아담의 사명을 책임진 사람들이 가는 길은 이러한 책임, 이러한 사명을 하기 위해 수고하며 가는 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난의 길을 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그래서 우리를 아벨이 죽은 경계선까지 몰아넣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120년간 수난의 길을 걷게 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왜? 노아의 전체의 생애 가운데 어느 때 보다도 귀중한 하나의 동정심을 남기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수난의 길을 내몰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도 정든 고향 산천 갈대아 우르를 떠나게 해서 나그네 신세로 내몰았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어젯날의 행복을 노래하기 이전에 오늘 최고의 불행한 기점에서 서서, 그 행복의 여운을 하늘 것으로 받들고, 그 가치와 더불어 스스로 길을 개척해 가지고 행복을 노래하는 것에 일치화시키는 싸움의 노정을 감사히 가겠다는 아브라함이었습니다. 이 노정에서 비로소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으로 결정되었던 것입니다. 동정의 내용이 그만큼 많았다는 것입니다.
국경을 넘나드는 외로운 자리에 서게 되었을 때에 나라를 잃어버린 하나님의 외로움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요, 외국 땅에서 나그네 신세가 되었을 때 하나님이 사탄세계인 외국 땅에서 섭리하시는 서글픔을 느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그런 노정을 걸어 나오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그런 자리에 나서는 것을 보게 되면 자기를 걸어 놓고, 명예를 걸어 놓고, 당신의 모든 이념을 걸어 놓고 여기에 동정심을 가지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부모의 입장에 선 하나님의 책임의식인 것을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수난의 길로 내모는 것은 결코 우리를 망하게 하기 위함이 아니요, 우리의 모든 것을 빼앗아 버리기 위함도 아닙니다. 그것은 동정의 인연을 공고히 하여 그 위에 찾아올 영원한 위업을 상속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수많은 우리의 선조들은 당시의 살아 있는 순간적인 과정만을 중심삼고 생각한 나머지 하나님 앞에 패배의 길을 남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순간적인 역사과정을 넘어 몇 천 년, 몇만 년 이전의 역사를 바라보실 뿐 아니라 그 이후의 역사과정까지 바라보시고 영원한 복을 준비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망각했던 수많은 조상들은 하나님을 배반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타락한 조상의 자손된 우리는 우리가 가는 길에 동정의 길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내가 물질을 가졌더라도 하나님께서 `내게 물질이 있으면 더 주고 싶다` 고 할 수 있는 입장에 서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가 소유한 것을 다 투입하고, 빚을 지면서라도 하나님의 뜻을 위하고 싶어해야 합니다. 수단 방법을 따져서가 아니라 진정으로 빚을 졌더라도 그 빚은 하나님이 갚아 주시는 것입니다.
자기의 일신을 중심삼고 볼 때, 어려움을 극복하려고 몸부림치고 있고 쓰러질 자리에 있더라도 하나님은 이 이상의 비참한 자리에서 참아 오셨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오히려 그 불쌍한 아버지를 위로해 드리고 해원해 드리겠다고 몸부림쳐야 됩니다. 또한 쓰러지는 자리에서도 한 발자국이라도 더 나가고자 몸부림칠 때에 하나님께서 거기에 현현하시게 된다는 것입니다.
동정이 크면 행동이 전개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행동을 전개할 수 있고 출동할 수 있는 경계선이 어디냐? 최고의 동정을 받는 자리에 있으면서도 침범받고 희생당하는 자리에 서게 되면 하나님은 그 자리에 붙들려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그자리에서 하나님께서 부탁을 하시는 거예요.
통일교회의 초창기 역사는 그런 역사였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반대했습니다. 나 홀로 남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반대하면 할수록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내가 하나님을 위로해 드리겠다고 몸부림쳤습니다. 그랬는데도 그 자리를 사탄이 침해하려 할 때 하나님께서는 승리의 역사를 일으켰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생애노정을 가면서 얼마만큼이나 동정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자기 동네를 넘어서 가지고, 하나님의 동정을 받는 입장에 선 사람은 그 동네를 지도할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요, 면이면 면, 군이면 군을 중심삼고 하나님으로부터 그 면, 그 군을 넘어서서 동정받는 입장에선 사람은 그 면민, 그 군민 모두가 그를 스승으로 모시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을 중심삼고 볼 때에 하나님께서 `대한민국을 다 잊어버려도 너만은 잊어버릴 수 없다. 삼천만 민족을 다 미워하더라도 너만은 미워할 수 없다` 하는 동정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삼천만 민족이 구원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늘땅을 다 저주하고 싶은 입장에서도 하늘땅을 대표하여 하나님의 동정을 남기겠다고 몸부림치며, 최후의 자리에서 제물이 되어도 좋다고 하면서 춤을 추며 달려가는 아들이 있다면 그 아들은 이 모든 천지를 구하고도 남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그런 동정의 인연을 어떻게 만드느냐? 그것을 하려면 도면 도를 편답(遍踏)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살아 있는 동안 자기가 책임지고 있는 지역의 방방곡곡, 골짝골짝을 가지 못하면 한이 됩니다. 혹 몸이 피곤하여 쉴 때는 `아버지여! 제가 가야 할 곳이 많아 바쁜데 피곤하여 할 수 없이 쉬고 있는 것이 원통합니다` 하고 눈물 흘리며 기도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 보십시오. 그러면 그 사람이 가는 길은 일취월장(日就月將)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가는 길에는 사탄이 절대 침범할 수 없습니다. 침범했다가는 몇 배로 배상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견지에서, 70년대를 맞이한 여러분은 금년 3월부터 이 일을 시작해야 되겠습니다. 우리 인간은 부모를 배반했던 타락한 탕자의 모습이기에 부모 앞에 동정받지 않고는 돌아갈 수 없는 것이 복귀의 운명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여러분은 필히 그런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래 가지고 하나님의 동정을 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자리에서 주고 싶어하시는가? 인간이 행복해하는 자리에서 주고 싶어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본래의 소원입니다. 에던 동산의 아담 해와가 타락하지 않았다면 천지가 화동하는 영광의 자리에서 우주의 상속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몽땅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타락하여 하나님과 인연이 끊겨 버린 우리 인간은 어디서부터 하나님과 인연을 맺어야 되는가? 영광의 자리에서는 절대 안 됩니다. 아담 해와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눈물로 헤어졌기 때문에 눈물로 상봉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 자리는 눈물로 헤어지는 자리요, 또 삶과 죽음이 교차되는 자리였습니다. 그러므로 만나는 데도 삶과 죽음이 교차되는 자리에서 만나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 흘려 기도하던 것과 같이 피땀을 흘리고 피눈물을 흘리면서 만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 회개의 마음을 가지고 역사적으로 지어진 모든 죄상을 전부 폭로시키고 그 이상의 죽음길로 달려가겠다는 마음으로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담 해와는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죽게 되었지만 후손인 우리들은 아담 해와의 십배 백배 이상의 죽음길도 피하지 않겠다는 마음을 갖고 나가야 합니다. 그러면 빨리 복귀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생각해 볼 때, 예수님이 `아바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나에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라고 기도했지만, 이 죽음을 기쁨으로 맞이하겠다는 그런 아들이 되었다면 어떻게 기도했을까? 선생님은 이것을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런 아들이 되었다면 마땅히 죽어야 할 몸을 놓고 ‘나에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는 그런 기도를 할 수 있었겠느냐?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뜻을 위해서 태어난 몸, 뜻을 위해 가고 뜻을 위해 죽어야 할 몸이오니, 제가 무슨 이의가 있겠습니까? 저는 이 죽음길을 기쁨으로써 맞기 위해서 태어났고, 이 죽음길을 가기 위해서 생활했습니다. 이 길을 가기 위해 이 자리에 서 있지 않습니까?` 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짐으로써 하나님의 동정의 인연을 남겼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랬다면 과연 무슨 일이 벌어졌을 것인가? 하나님께서 그런 입장에 서 있는 아들을 대할 때 어떠했을 것인가? 기가 막혔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바라보시면서 `오냐 내 뜻을 몰랐던 에덴의 아담에게 본이 되는구나. 처음도 아버지요, 중간도 아버지요, 끝도 아버지라고 하는 너, 오직 아버지밖에 모르는 너는 타락권과의 절대적인 인연이 끊어진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더냐? 그러니 사탄세계의 침범을 받아서는 안 돼` 하셨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다면 거기에서 가룟 유다 일당을 하늘이 칠 수도 있었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까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이런 자세를 가지고 나가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간절하겠습니까? 에덴 동산에서 아담 해와가 타락하기 전에 주고 싶었던 그 마음과 타락하고 난 후에 주고 싶었던 그 마음에 거리가 있었다면 복귀를 못 합니다.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 해와가 타락하기 전에 주고 싶었던 그 마음보다도 타락하고 난 후에 주고 싶은 마음이 오히려 더 강해졌다는 것입니다.
인간들도 그렇지 않아요? 부잣집 자식이 불효해서 상속을 받을 수 없는 입장에 떨어졌다면, 그 부모는 `네가 이러지만 않았더라면 이 모든 것을 몽땅 너에게 상속해 줄 수 있었을 것인데...'하는 마음이 더 솟구친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너보다 더 나은 아들이 나오면 그 아들 앞에 더 멋지게 상속해 주겠다` 는 마음이 솟구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에서의 아담 해와에게 자율적인 법도를 통해서, 순리적 법도권내에서 모든 것을 주려고 하셨는데, 아담 해와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그보다도 더 심각한 자리에서, 더 빛난 자리에서 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부모의 마음속에서 그 불효자식에 대한 생각을 잊어버리게 할 수 있는 효자를 찾아 지금까지 나오셨습니다. 그 불효자식 이상의 아들을 맞기 위해 모든 역사과정에 있어서 억센 사탄의 시련도, 하늘에 대한 반대도 개의치 않고 그 모든 것을 극복해 나오셨던 것입니다. 그러한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면 그런 아들이 될 것인가? 틀림없이 불효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여건을 만들어 놓고, 나에게 아무리 불효를 하라고 하더라도 그럴 수 없다고 해야 합니다. 백 번을 그런 자리에 몰아 넣어도 그럴 수 없다고 해야 합니다. 만 번을 그래도 그럴 수 없다고 해야 합니다. 제아무리 사랑이니 무엇이니 하는 것을 전부 갖다 준다고 하더라도 천륜을 배반할 수 없다고 해야 합니다. 혹은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빼앗아 간다 하더라도 그럴 수 없다고 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럴 수 있는 자리는 어떤 자리냐? 하나님을 믿는 자리입니다.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사랑의 보물을 갖다 준다고 하더라도 `나는 천륜앞에 어긋날 수 없습니다` 할 수 있는 그런 자리가 타락한 아담을 부정하는 자리요, 천사장을 치는 자리인 것입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모든 것을 몽땅 빼앗아 간다 해도 천륜을 배반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리가 그런 자리입니다. 온 천지를 다 빼앗아 가고 아들딸을 다 빼앗아 가도 아버지만은 거기에 끌려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럴 수 없다 하는 아버지의 그 마음을 어떻게 체득하느냐? 여러분은 이것을 체득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사랑하는 부모를 빼앗아 간다 하더라도 내 사랑하는 처자를 다 빼앗아 간다 하더라도, 나에게서 그 무엇을 빼앗아 간다 하더라도 나는 그럴 수 없다고 해야 합니다. 천지가 무너지고 천지가 바뀐다 하더라도 나는 오직 하늘을 위해 태어났고 하늘을 위해 죽어가겠다고 해야 합니다.
그런 나를 하늘이 알아주든 몰라주든 상관하지 않고 가겠다고 해야 합니다. `다행히 하늘이 알아주면 영광의 자리에서 죽을는지 모르지만, 하늘이 알아주지 않는 가운데 어느 시궁창에서 객사하는 몸이 될지라도 그런 길을 찾아가겠습니다` 할 수 있는 아들이 있으면 하나님은 그를 축복해 주시는 것입니다. 영광의 왕국, 에덴의 왕국 뜰에 그 아들의 무덤을 남기고 싶어하실 것입니다. 그것이 부모의 마음 아니겠습니까?
어떤 일이 있다 해도 천륜을 배반할 수 없다고 해야 합니다. 아버지가 그럴 수 없는 운명을 지니고 나오셨기 때문에 자식된 우리들도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주고 싶은 것이 아버지의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그러한 아버지의 마음 앞에 사랑받을 수 있는 아들의 모습을 그려 나가기 위해 오늘날 복귀도상에서 효의 도리와 충의 도리를 찾아가겠다고 몸부림쳐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들이 취해야 할 바른 태도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 자리에서 주고 싶어하시는 것입니다.
주신다면 무엇을 주실 것인가? 아버지의 모든 것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버지의 모든 것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 앞에 과거의 슬픔을 말하려 하면 아버지께서 먼저, `얘, 그런 말은 그만 둬라. 내가 너의 사연을 다 알고도 남지'하시면서, `이제는 미래에 있을 좋은 일만 얘기하자. 네가 어떻게 해야 내 아들의 자리에 서고, 네가 어떻게 해야 아버지를 잘 모실 수 있는지 알겠느냐' 하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아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자리에서 선 사람은 망하지 않습니다. 하늘이 남아지는 한 그는 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를 죽으라고 감옥에 몰아넣으면 몰아넣은 사람이 도리어 죽는 것입니다. 나라가 그를 치게 되면 그 나라가 망하지, 그는 망하지 않습니다. 세계가 그를 몰아치게 되면 그는 망하지 않고 오히려 세계가 망하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그의 자리는 하늘을 대신한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을 대신한 자리이기 때문에 그는 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가 망하면 하나님의 운세, 하나님의 복귀섭리는 이룰 수 없다는 결과가 초래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도 그런 아들딸이 되어야 합니다.
선생님이 이 길을 걸어오면서 피를 흘렸지만 아직도 피는 남아 있습니다. 아직 선생님의 기력은 남아 있습니다. 선생님은 하나님께 `타락한 불효자식과 불충한 천사장을 맞이하였던 아버지의 서글픈 마음을, 천사장과 효자를 일시에 잃어버린 아버지의 그 원한을 제가 어떻게 풀어 드려야 하옵니까? 제가 충신의 반열에 서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죽어서 충신이 나올 수 있다면 그것을 위해 저는 죽겠습니다' 라고 했던 것입니다. 충신을 낳고 싶어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갖지 않으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지금까지 효의 마음, 충의 마음을 갖고 나온 아버지였기 때문에 우리도 그러한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이렇게 될 때에는 하나님께서 동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불쌍한 처지를 말하는 사람을 붙안고 목놓아 우는 것이 인간의 정이 아니었던가? 그러니 불효와 불충으로 말미암아 슬펐던 아버지의 사정을 내가 대신해서 그 슬픔을 이기겠다고 나서면 아버지가 그의 목을 안고 자신의 모든 것을 나누어 주시며 기뻐하시지 않겠습니까?
`저는 효도할래야 효도할 수조차 없고 충성할래야 충성할 수조차 없는 몸이오나, 할 수만 있다면 아버지를 위해 죽겠습니다` 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은 지친 자리에서도, 혹은 아버지가 아들의 자리에 내려오고 아들이 아버지의 자리에 올라간다 해도 좋아하신다는 것입니다. `저는 당신을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할 때, 아버지는 `나는 너를 위해서 있다` 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버지와 아들의 그 심정이 교차될 수 있는 인연을 여러분은 갖추어야 되겠습니다.
아버지는 그런 자리에서 우리에게 주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지금까지 섭리해 나오신 것입니다. 그러한 아버지의 내정적인 심정을 알고 아버지가 슬퍼하기 전에 내가 슬퍼하고, 아버지가 기뻐할 일이라면 내가 기뻐하기 전에 아버지를 먼저 기쁘게 해드릴 수 있는 아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런 입장에 서게 되면, 하나님이 비록 타락으로 인한 원한에 사무쳐 있을지라도, 주고 싶을 때 줄 수 있는 환경이 벌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주고 싶을 때 줄 수 있는 환경이 벌어지면 그때 비로소 행복을 느끼실 것입니다. 또, 나는 하나님이 주는 것을 받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주고 받을 수 있는 터전을 잃어버렸던 인간 세상 앞에 주고 받을 수 있는 제 2의 터전이 마련됨으로 말미암아, 여기에서부터 새로운 천국이 인연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여러분이 알고 주고받을 수 있는 자리를 찾아가야 합니다. 아버지는 그런 자리에서 주고 싶어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자리에 서서 아버지에게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내가 받은 그것을 내 것으로 갖고 있을 것이 아니라, 사탄세계에 있는 내 형과, 내 동생, 모든 가인적인 사람들, 원수세계에 있는 사람들에게 주어야 합니다. `아버지여, 당신이 저를 사랑하시어 저에게 기쁨으로 주신 것을 제가 다시 그들에게 기쁨으로 주겠사오니, 이 물건이 가는 곳곳마다 기쁨의 인연을 맺어 주시옵소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복음의 도리요, 우리 통일교회가 남겨야 할 사상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을 영원히 남기고 가야 됩니다. 내가 받았던 이 기쁜 것을 남기고 가야 됩니다. 이 세계가 복귀되어서 모든 한이 풀릴 때까지 후대 손손에까지 이것을 남기고 가야 됩니다. 내가 받은 복을 고스란히 줘야 합니다. 거기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만이 아니라 내 사랑까지도 첨부해서 줘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준 것을 보관할 수 있는 터전이 무엇인가? 통일 종족이 되고, 통일 민족이 되고, 통일 국가가 되고, 통일 세계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통일의 무리가 가야 할 길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것을 이루어 놓음으로 말미암아 아버지의 슬픔이 다 탕감하고, 한으로 점철돼 온 인류역사를 탕감하고, 아벨의 책임을 다 하게 되면, 그러한 나로 말미암아 자손 만대에 승리의 기점이 마련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적이고 우주사적인 책임이 우리의 어깨에 지워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두 세계를 대신하여 그 십자가를 슬픔으로 질 것인가, 기쁨으로 질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기쁨으로 질 것인가, 슬픔으로 질 것인가? 우리는 예수와의 달리 십자가를 기쁨으로 질 수 있는 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생명을 걸고 아버지를 모시겠다고 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통일교회는 절대 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선생님이 지금까지 이런 신념을 가지고 나왔기 때문에 여러분이 뜻을 받들지 않을지라도, 선생님이 영계에 가는 한이 있더라도 땅 위에 인연을 재차 세울 수 있는 터전이 마련되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주체가 있으면 절대적인 상대를 창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법칙이 있기 때문에 절대적인 심정의 인연을 이 땅 위에 세워 놓고 가면, 이 땅 위에서 아무도 안 믿는다고 하더라도 믿지 않는 세상을 믿게 하여 상대적 여건을 만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뜻을 알았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선생님이 사랑하는 뜻, 그 뜻을 중심삼고 참부모의 인연을 전수해 나가려면 참부모의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몽땅 주고 싶어하는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여러분에게서 그런 마음이 떠나는 날에는 통일교회는 망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발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자신의 생명과 재산과 전체를 다 투입해서 여기에 가해 줘야 한다는 책임을 느껴야 합니다. 그러려면 그의 가치를 어떻게 받느냐, 또 받은 다음에 여러분의 후손 앞에 남기는 데는 어떻게 남기느냐가 문제입니다. 귀한 것을 가하고 내 사랑의 살을 붙여서 남겨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살로 커 가는 것이 통일교단이요, 통일교회 여러분인 것을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이 죽어갈 때 여기에 자기의 피와 땀을 다 기울이고 뼈와 살을 다 기울이고 사랑까지도 붙여 가지고, 한 점이라도 더 살이 되고 세포가 될 수 있게 하여 키워 놓고 가지 않으면, 하늘의 백성이 될 수 없고 하늘나라와 인연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받기 위한 책임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만일 하나님이 받기 위해서 섭리해 나오셨다면 이 땅은 망하는 것입니다. 주기 위해서 나오신 아버지 앞에 설 수 있는 아들을 고대해 오신 아버지의 심정을 풀어 드려야 합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 우리가 죄 지은 자를 어떻게 동정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가 지은 죄를 나무라기보다 그를 동정하는 마음이 앞서서 그 죄를 잊어버리는 자기까지 어떻게 나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저 여자는 무엇을 잘못했다'고 말하거나 `저 남자는 어떻지` 하고 결점을 들추기 전에 먼저 불쌍한 마음이 앞서는 심정적 자세가 갖추어지면 하늘의 역사는 발전합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이것이 인류를 대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이기 때문에 여러분도 그런 마음으로 불쌍한 자를 구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책임자의 사명입니다.
구해 줄 때에는 구원받는 사람의 힘보다도 내 힘을 더 소모시키고, 그 사람의 소원보다도 내 소원을 더 가중시켜야 합니다. 그리하여 구해준 후에 내가 보람을 느낀 것을 상속해 주어야만 구원받은 사람도 산 보람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족적인 메시아의 사명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선생님이 부탁하고 싶은 것은, 어떠한 자리에 가든지 부디 아버지의 아들딸이라는 것을 명심하라는 것입니다.
아들이 타락하여 효의 자리를 잃어버린 것과 천사장이 타락하여 종의 자리를 잃어버린 것을 동정하는 마음을 가지고 수습해서 이것을 다시 복귀시키는 여러분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여기에 여러분 자신들의 사랑의 마음과 하나님이 지금까지 사랑할 수 없었던 그 사랑의 마음을 가중시켜서 하늘 것으로 바쳐 드리겠다고 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이렇게 가는 여러분이 되면, 여러분은 앞으로 정상적인 발전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인연을 맺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알겠지요? 「예」
아버님, 지금까지 아버지 앞에 걸어 온 걸음이 면목없는 것이었사옵니다. 아담이 남긴 죄가 후손들을 통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걸고 아버지의 마음에 못을 박게 했사옵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죄상을 저희들이 도맡아 가지고 70년대를 맞이했습니다.
이것을 청산하기 위해서 저희들은 어떤 길을 가야 되겠사옵니까? 인간 조상인 아담이 효의 자리를 잃어버렸으니 효의 길을 가야 되겠사옵고, 충의 자리를 잃어버렸으니 충의 길을 가야 되겠습니다. 저희들은 먼저 나라를 위해 희생해야 되겠습니다. 지금까지 저희들은 나라를 위해, 세계를 위해 싸워 왔습니다. 이제는 부모를 모시고 있기 때문에 효할 수 있는 길이 생겨났습니다. 아버지, 효를 다하고 난 그 길을 계승하여 충의 인연을 세울 수 있는 저희들이 되어야겠사옵니다.
저희들이 형제들을 위해 가는 길은 불행한 길이 아니옵니다. 저희가 가진 것이 없어서 세례 요한과 같이 약대 털옷을 입는 신세가 되더라도 불쌍한 사람이 아니옵니다.
저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언제나 아버지 앞에 바쳐 드릴 수 있는 것이옵고, 저희들은 몸도 언제나 아버지 것으로 바칠 수 있는 것이옵니다. 저희들의 이런 자리가 기쁨의 자리인 것을 알고 과거를 살펴 보니 저희들이 너무나 부족하였습니다. 철부지한 저희들을 떼어버리지 않고 이끌어 주신 은사를 진심으로 감사드리옵니다. 하오나 복귀의 고개를 넘기 전에는 가르쳐 줄 수 없는 사연들이 너무도 많은 것을 생각하면, 정말 아버님은 불쌍하신 분인 것을 아옵니다.
오늘날, 타락한 이 땅 위에서 저희들이 이만큼이라도 헤아릴 수 있는 입장에서 당신을 대하여 아버지라 부를 수 있고, 남모르는 당신의 심정을 느끼면서 눈물지을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신 은사에 어떻게 감사드려야 할지 이루 다 말할 수 없사옵니다.
수많은 죽음이 제물되어 이루어진 터전 위에, 수많은 원한의 피를 모아서 이루어진 터전 위에 서 있는 저희들인 것을 생각할 때, 무섭고도 두렵다는 것을 느껴야 되겠습니다. 저희가 망하면 저희 하나만 망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이 망하고 세계가 망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어느 한 초점, 어느 한 실체를 중심삼고 한 순간이라도 자기 자신의 위치를 잊어서는 안 될 저희들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 여기에 모인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들은 이런 중심적인 사명을 책임지고 있는 지구장이요, 지역장들이옵니다. 그들 각자의 그 중심이 변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중심이 사탄세계 앞에 뭉그러지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중심이 사탄에게 점령당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를 위한 효의 일편단심, 나라를 위한 충의 일편단심이 민족을 위한 중심이요, 세계를 위한 중심이요, 더 나아가서는 아버님의 사랑을 위한 중심이라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아 딸아 하실 수 있고, 만세계에 자랑하실 수 있는 가정을 저희들이 마련해야 된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축복의 손길을 거친 저희 가정들이 그 사명을 다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길,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들이 미래의 일을 중심삼고 이 70년대에 처음 가진 모임이옵니다. 이들이 이 모임을 마침에 있어서 그간의 모든 것을 다 잊어버려도 좋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의 인연만은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다른 것은 다 잊어버리더라도 이것만은 잊어버리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여, 불초한 모습이 아버지를 대하는 마음을 따르는 이들도 이어받아서 충의 도리, 효의 도리를 다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마가복음 14장에 쓰여 있는 것처럼 기도하시던 예수님의 내정을 제자들은 몰랐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저희들은 예수님의 그러한 내정적 심정을 말할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된 것을 생각하면 옛날 사도들보다도 행복한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들은 우리보다 불행한 자리에 있으면서도 십자가의 죽음의 길을 기쁘게 갔거든, 행복한 자리에 있는 우리들은 이 복을 나누어 주기 위해서 찢기고 밟히는 길을 가더라도, 죽음길을 가더라도 기쁨으로 갈 수 있어야 되겠사옵니다. 저희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예수와 같이 `아바 아버지여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나에게서 옮기시옵소서`라는 기도는 하지 않고 이 길을 기쁘게 가겠다고 몸부림치는 당신의 아들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이여, 이 자리를 찾아올 적마다 나라와 세계를 찾고자 하는 이들의 마음이 변함없게 하여 주옵길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들을 생각할 적마다 세계를 동정하시는 그런 마음으로 이들을 동정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은 이들을 넘어 나라를 부르고 계시며, 나라를 넘어 세계를 찾고 계시며, 세계를 넘어 당신의 사랑을 세우고자 하시옵니다. 그러한 당신이심을 생각하면, 저희들은 그 동기를 마련하기 위한 제물적인 과정을 감사히 맞아들여야 되겠습니다. 감사히 소화시켜야 되겠습니다. 그럴 수 있는 아들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이들은 어디로 가야 합니까? 이들이 갈 수 있는 길은 아버지께로 가는 길과 자기를 중심삼은 사탄세계로 가는 길, 단지 두 길밖에 없습니다. 나를 위한 길은 사탄편에 속한 길이요, 나를 버리는 길은 하늘편에 속한 길입니다.
이 원통하고 비참한 사실이 어찌된 일이옵니까? 타락의 동기가 그러하였사옵기에 저희도 그것을 달게 받고 넘어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자신과 자신의 가정을 제물삼고 하늘을 위하여 감사의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순간을 추구해 나오는 이 무리들은 거룩한 무리가 아니옵니까? 아버지, 당신의 사랑의 심정을 몽땅 퍼붓고 싶은 동정의 터전이 아니옵니까? 여기에 축복받은 가정들이 있거든 그런 가정을 사모하고, 그런 가정을 사랑하고, 그런 가정을 위하여 태어났고, 그 가정에서 태어나는 아들딸을 보기 위하여 살고 있는 자신임을 발견하게 해주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이제 아버지와 아들의 인연을 맺고 억천만세를 두고 잊을 수 없는 한 때를 각자가 가져야 되겠사옵니다. 이 기간이 그랬습니까? 그럴 수 있는 인연을 갖고 돌아가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남아진 모든 생애는 이미 아버지 앞에 바쳐진 것이오니, 불평하지 않고, 원망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걸어가면서 충성하고 효도하는 생애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후대에 사랑의 행로를 유물로 남기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시키면서라도 몸부림치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오며, 이 모든 말씀 참부모의 성호 받들어 아뢰었사옵나이다.아멘.
우리에게는 지금까지 실천할 수 있는 터전이 없었기 때문에, 그때그때 마다 혁신적인 활동을 전개해 나오는 데 그쳤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활동 체제로는 전체를 움직이고 전체 개인개인들을 여기에 연결시키는 데는 지장이 있습니다. 우리가 금번에 실시한 아시아 승공대회에도 수만명이 참가했지만, 우리 체제에 실질적으로 플러스된 요원이 얼마나 되느냐 할 때 지극히 섭섭한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대회를 함으로 말미암아 우리 교회가 널리 선전은 되지만, 실제적으로 발전하는 데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언제나 느낍니다. 통일교회가 지금까지 활동해 나온 것은 중간적인 입장에서 선전을 위주로 한 것이었습니다. 즉, 대중심리를 이용해서 우리와 이 사회에 가로막힌 장벽을 제거하는 작전을 지금까지 해 나왔습니다.
그러나 이 1970년대에 들어와서는 그런 것을 능가해야 되겠습니다. 그런 시대상을 지나가야 되겠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금년에는 `승리적 통일전선` 이란 표어를 내걸었지만, 그에 대한 전반적인 계획과 구체적인 내용을 아직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몇몇 지구장들을 통해서는 거론되었지만 실천면에서는 구체적인 내용을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설령 제시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실천하기 위한 경제적 뒷받침이 안 되어 있기 때문에 실천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문제를 두고 볼 때, 협회를 중심삼고는 계획한 대로 실천을 못하고 있지만, 여러분 자신에게서는 그런 때가 지나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군(郡)이면 군, 도(道)면 도의 책임자로서 자기가 현재 소속하고 있는 범위내에서 승리적인 통일전선을 확보하기 위한 계획을 자기 나름대로 세워 성취하지 않으면 안 될 시점에 놓여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이러한 작전으로 수확해야 하는 것은 무엇이냐. 그것은 통일교인의 수적인 증가입니다. 물론 질적인 증가도 필요하겠지만 수적인 증가를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절박합니다. 왜냐하면 국가에서 통일교회를 보게 될 때, 수적인 문제를 중심삼고 현재 우리가 닦아 놓은 모든 공적과 실적을 평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 다년간 국가를 위해 희생하고 활동한 결과 국민 대다수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효율적인 기반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기반 위에서 능동적으로 일을 추진하기에는 수적으로 너무나 적은 입장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일 큰 문제는 수적인 확보를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통일교회가 금후에 해결해 나가야 할 중대한 문제입니다. 이것을 해결하지 못하면 1970년대에 점점 다가오는 천적인 운세에 보조를 맞출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급한 시점에 놓여 있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 다음에는 뭐냐? 경제적인 요건이 문제입니다. 많은 사람이 우리 체제내에 연결되어 들어오더라도, 이들을 관리하고 이들과 같이 활동할 수 있는 조직체계, 계획적인 형태가 갖추어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핵심요원이 있어야 되고 또 경제적인 뒷받침이 있어야 됩니다.
지금까지 우리 통일교회가 발전하지 못한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 첫째 원인은 지역이면 지역본부가 확정되어 있지 못한 데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역본부가 도시나 마을의 중앙에 세를 얻어 있다가도 계약기간이 지나면 이사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경제적인 실정을 두고 볼 때에 해가 바뀜에 따라 돈의 가치는 점점 떨어집니다. 그러므로 30만원에 얻었던 것이 일년 후에는 50만원이 아니면 그와 같은 곳을 못 얻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마다 한 번씩 방세가 올라가니 경제적인 부담이 가중되고, 그러다 보니 지역본부를 옮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옮겨 가는 장소가 더 좋으면 다행이지만 시내에서 변두리로 나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시내에 있을 때 식구들을 확보했다가도 변두리로 이사하면 따르고 있던 많은 식구들이 떨어져 나가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가 발전하지 못한 첫째 원인입니다.
둘째는 뭐냐? 여러분들의 실력부족입니다. 다시 말하면 지도자로서 계획성 있는 생활 체제를 갖추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처해 있는 군에 10개 면이 있으면 그 10개 면을 중심삼고 자기 나름대로의 계획이 있어야 합니다. 또 면이면 면에 소속된 부락을 중심삼고 계획이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군이면 군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면, 혹은 면이면 면에 영향을 하기 위한 계획을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그 계획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계획을 실천하는 방법이 무엇이냐? 첫째는 원리강의입니다. 우리의 말씀을 선포해야 되겠습니다. 또한 승공강의를 해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여러분들이 강의하는 것을 보면 부락 부락에 가서 부분 부분 조금씩 강의를 하고 있는데 대다수의 사람이 강의하는 범위가 한정되어 있습니다. 즉, 여러분이 원리강의하는 것을 보면 전편의 창조원리를 약간 강의하고 종말론과 재림론을 약간 강의하는 식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가 계획한 작전을 수행하기 위하여 어느 곳에 가서는 어떤 강의를 한다 하는 계획을 짜 가지고 원리강론 전후편 전부를 강의할 수 있도록 해야 되겠습니다. 이런 계획을 짜서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들에게 전반적으로 되어 있지 않은 것입니다.
일년이면 열두 달, 그 중 한 달이면 30일, 그 30일 내에 여러분이 열 곳이면 열 곳, 열 곳이 안 되면 일곱 곳이라도 좋습니다. 하여튼 자기가 계획한 곳에 가서 원리강의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강의를 하는데 내용을 서로 바꾸어 가며 강의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일년 열 두 달 한 곳에서 같은 강의를 하지 않아도 되고, 딴 곳에서 딴 강의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서로 수차를 엇바꿔 가며 강의를 하면 원리강론 전체를 강의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원리강론 전 후편을 12편이면 12편으로 나누어서 계획 세우고 그 계획에 맞추어 쭈욱 강의를 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여러분의 원리실력은 상당히 붙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습관적인 방법과 태도로 강의를 하고 있어요. 자기가 자신 있고 능숙한 분야만 강의하고 그 외의 분야와 연결하여 강의하지 못했기 때문에 고루 발전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러한 결여된 분야를 채우기 위해서는 군이면 군, 특정지역을 중심삼고 계획을 짜 가지고 강의해야 되겠습니다. 원리를 선포하는 데 있어서도 작전계획을 세워서 해야 되겠습니다. 원리 한 대목으로 전체를 응용할 수 있는 강의 방법을 모색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원리 전후편에 대해서 능통해야 됩니다. 그러려면 강의를 많이 해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승공강의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제나 같은 말만 해서는 안 됩니다. 강의할 때 대하는 상대나 그 지역이 다르면 거기에 대한 제목을 정해 가지고 이야기하는 내용도 달리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거기에 관련된 모든 책자를 구입해서 연구해야 됩니다. 그래서 거기에 대한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어떻게 보강하느냐 하는 문제를 중심삼고 계획을 세워 나가면 자동적으로 발전합니다. 이렇게 계획적인 방법으로 강의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대다수의 사람들이 발전하지 못하고 정지 상태에 있습니다. 이렇게 수년 내지 십여 년을 지내오지 않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번에 돌아가서는 과거에 활동하던 방법이나 인식 관념을 완전히 새롭게 해야 되겠습니다. 지역장들은 그 군의 지도를 보고 군내에 자기가 가야 할 곳이 몇 부락이 되는가를 파악해야 합니다. 대개 2백 부락, 많으면 3백 부락까지 될 거예요. 그런 다음에 계획을 세워서 부락 부락에 말씀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부락에는 하나님께서 미리 준비하여 둔, 선조의 공적으로 이루어진 터전 위에 우리의 뜻 앞에 연결될 수 있는 준비된 사람이 필시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사람을 하나님 앞에 세우기 위한 책임을 짊어지고, 여러분들이 그곳에 재임하고 있는 동안 반드시 세 번 이상은 가 봐야 되겠습니다. 이런 작전을 세워 놓고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시간을 내어 순회강의를 해야 됩니다.
그리하여 1차 순회강의를 하고 나면, 다음 2차 순회강의는 1차 순회강의 때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2차 순회강의는 1차 순회강의 때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2차 강의부터는 구체적인 내용이 필요합니다. 조직을 편성하는 것입니다. 즉 강의를 듣고 반응을 일으키는 사람이 있거든 돌아와서 그 사람들에게 편지를 보내는 거예요. 편지를 통하여 관계를 맺은 다음, 내가 요전에 가서는 신세를 졌는데, 이번에는 언제 갈 테니까 동네 사람들을 모아 달라고 부탁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다시 강의할 때에는 요전에 강의한 내용을 강의하지 않고 다른 내용을 가지고 강의하는 겁니다.
여러분이 그런 강의를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원리를 공부하고 가야 됩니다. 두 시간을 강의한다면 두 시간 이상 공부해야 됩니다. 기도는 2배이상 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청중을 감동시킬 수 없습니다.
여기에는 강의하는 것도 목적이 있지만 자기가 발전해야 되겠습니다. 강의의 회수가 늘어남에 따라 나 스스로 공고한 기반을 닦고 천적인 심정의 인연을 더욱 공고화시켜야 되겠습니다. 그 터전을 중심삼아 가지고 전체에 영향을 줄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럴 수 있는 원천과 원동력이 증진되는 것에는 보람을 느끼고 활동의 가치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활동을 계속하면 할수록 상대적으로 대하는 범위도 점점 넓어지고, 자신의 실력도 향상되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말씀을 전하고 나서 허전함을 느낄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말씀을 통해서 내게 얻어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냥 그대로 전에 한 방식대로 강의를 하는데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얻겠어요? 그러나 말씀을 전하고 나서 자신이 흐뭇해지고 자신이 발전한다는 것을 느끼고, 자기에게 이익이 증진된다는 것을 느껴야 합니다. 그래야 계속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3년 후에는 내가 이런 수준이 될 것이다. 5년 후에는 틀림없이 이런 수준에까지 갈 수 있을 것이다` 라는 확신이 생겨야 하는 겁니다. 이렇게 자기가 발전하는 데 필요한 책자는 얼마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이러한 환경의 터전을 중심삼아 그들과 관계를 맺고 활동하게 되면, 우리의 뜻을 따르는 인원이 늘어날 수 있는 기반이 됨과 동시에 자신도 발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결과를 생각하게 될 때는 절대 지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은 지금까지 그것이 결여된 채로 활동해 왔기 때문에 몇 해도 못 가서 낙심하는 겁니다.
그러기에 여러분은 이번에 돌아가면 시간을 최대 한도로 활용해 가지고 계획을 세워서 부락이면 부락, 면이면 면의 중요한 곳부터 활동하기 바랍니다. 10개 면에 가더라도 같은 말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원리강의를 창조원리 이성성상에서부터 시작했으면, 다음에는 거꾸로 이성성상(二性性相)이 결과를 되도록 강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수수작용(授受作用)을 중심삼아 가지고도 이성성상을 끌어내어 가지고 강의할 수 있습니다. 또 3대상 목적을 중심삼아 가지고도 주체와 대상을 중심삼고 이성성상을 강의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다각적인 면으로 강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창조원리면 창조원리의 한 타이틀을 가지고도 전체를 활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강의를 듣는 사람에게는 새로운 것을 줄 수 있고, 자기 자신에게는 그만큼 다각적인 면에서 원리강의를 응용할 수 있는 활용력이 얻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전후 좌우 상하 관계가 높고 깊고 넓어지게 될 때 만족감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원리강의를 한 번보다 두 번, 두 번보다 열 번, 열 번보다 백 번 하면 강의한 횟수에 비례해서 통쾌함을 느끼게 됩니다. 또한 원리의 어떤 부분을 가지고라도 어느 누구와도 대결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게 된 것을 알게 되면 누구나 기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활동의 결과를 통해서 자신의 실력이 증진되는 기쁨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활동하고 싶은 의욕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군이면 군, 어느 대상지를 선택하여 계획을 세워 실천하는데 있어서 자기의 실력을 증진시키고 배양한다는 입장에서 노력하면 여러분은 무한히 발전할 것입니다.
그런데 강의를 하다 보면 반드시 문제점이 나올 것입니다. 그것을 해명하고 싶은데 원리책에 없다면 지구장한테 물어 보십시오. 지구장이 지금까지 원리를 중심삼고 그렇게 활동했다면, 반드시 그런 문제에 부딪혔을 것입니다. 만약 부딪히지 않았다면 지구장으로서의 책임을 못했다는 결과가 벌어집니다. 그러면 지역장 이상의 책임을 못 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전부 통일교회에 들어온 지 10년이 넘은 사람들인데, 어디에다 세우더라도 원리의 전편을 강의하나 후편을 강의하나 탁 틔여 가지고 막히지 않아야 합니다. 그것 자체가 하나의 공식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모든 현상세계에 공식으로 활용할 수 있는 사람이 되면 얼마나 방대한 지식권을 갖출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원리가 재미있어서 밤을 새워 가며 책을 보고 거기에 취하여 내재적인 면에서도 발전을 가져와야 하며 생활면에서도 발전을 가져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이런 기반을 상실해 버린 것이 여러분에게는 막대한 손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활동해야 할 면이나 군을 중심삼고 계획을 세워서 활동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강의를 할 때 자기가 잘하는 강의는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못 하는 대목을 취해 정성을 들이고 한 번 읽을 것을 열번 읽으라는 것입니다. 또 골자를 추리는데 이렇게도 추려보고 저렇게도 추려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강의를 하는데 대번에 군내에서 제일 가는 부락에서 강의하는 것이 아니라 군에서 제일 수준이 낮은 부락에 가서 몇몇 사람을 상대해서 해보는 거예요. 그래 가지고 일류급의 부락에서 하라는 겁니다. 한 번 두 번 해보는 가운데 부족한 것을 보강할 수도 있고, 지금까지 자신이 없었던 것도 자신감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에는 자신을 가져야 됩니다. 자신을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없으면 발전이 없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여러분이 원리 말씀을 선포하는 데 있어서는 대상구역에 대해 계획을 세워 활동하고 여러분들도 발전해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가 발전하지 못한 또 하나의 원인은 어디 있느냐? 그것은 전도된 사람에게 끝까지 관심을 가져 주지 못한 것입니다. 전도한 사람들에 대해서 시일이 지남에 따라 점점 더 관심을 가져야 되는데도 불구하고, 전도할 때는 관심을 가지지만 전도를 하고 나서는 무관심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도한 사람을 죽이는 입장입니다. 죽이는 입장이라는 것입니다. 적어도 3년까지는 어느 때를 막론하고 관심을 가져 주어야 되는 겁니다.
왜 그러냐? 그 사람의 심령정도가 점점 발전한다는 것입니다. 처음 원리를 들었을 때와 1년 뒤의 입장이 다르다는 거예요. 1년이 지나게 되면 원리 안팎에 대한 입체적인 내용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것을 이해하면 이해할수록 원리에 대해 알고 싶은 마음이 더 갈급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지도할 수 있는 사람과 접근하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지도할 수 있는 사람과 접근하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식구가 된 것처럼 생각하면 여기에 시간을 더 투입해 가지고 세부적인 계획을 세워서 내면적으로 갈구하는 그 마음을 해결해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노력은 하지 않고 그저 식구가 되었으니 `이제 네가 공부해라` 해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식구의 인연을 맺은 사람에게는 적어도 3년 동안은 관심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1년 된 식구와 2년 된 식구가 뜻을 따라 정상적인 길을 가려고 할 때, 1년 된 사람보다 2년 된 사람이 더 세부적으로 파고들어간다는 거예요. 세부적으로 열을 내고 모든 분야에 가담하고 싶어합니다. 그런 그들을 보살피고 키워 주어야 합니다.
이 본부교회도 그것을 못 했습니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이 왔다 갔습니다. 그들에게 처음에는 교인되라고 원리를 떡 소개해 놓고 그 다음에 오게 되면 무관심하다는 거예요. 전도된 그 사람은 원리가 좋아서, 말씀을 들은 여력에 의해 한 6개월 내지 1년 정도 교회에 잘 나옵니다. 그런데 자기를 지도해 주는 사람, 책임자가 없다는 거예요. 이것을 원리강의하는 사람이 끼고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한 1년이 지나면 원리를 아는 범위가 넓어진다는 거예요. 체휼하는 범위가 점점 넓고 깊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리에 대한 것을 더 알고 싶은데 이것을 가르쳐 줄 수 있는 주체자를 갖지 못하게 되니, 여기에 대한 궁금증이 쌓이고 여기에서 자신에 대한 교인들의 무책임성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한 가지, 두 가지, 세 가지 쌓이게 되면 자기 스스로를 재비판하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많은 사람을 놓쳐 버린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지방에서도 이와 마찬가지의 현상이 벌어지지 않느냐 하는 거예요. 전도할 때는 열심히 했는데, 일단 전도가 되어 교회와 인연맺어지면 무관심해 버린다는 거예요. 그러나 그들을 못해도 3년 동안은 데리고 다니면서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의심나는 것이나 환경적으로 어려운 입장에 서게 되면, 그것을 원리적으로 해설해 주고 원리적으로 이해시키고 공식적인 발전이 이렇게 되어 있다는 것을 이해시켜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들은 우리 원리가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고 위대하고 엄청나고 멋지다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관심을 주지 않기 때문에 그런 자극적인 체험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전부 잃어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맨 처음 원리를 듣고 감명받았던 것이 오래 못 간다는 거예요. 이것은 아침 밥을 먹었지만 점심 때가 되면 배고픈 것과 마찬가지 이치입니다. 감동받았던 것은 오래 가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계속적인 지도를 해야 합니다. 자기가 책임을 못 지겠으면 지금까지 그 사람을 기르던 심정 기준의 이상에 연결되어 있다고 하는 자기의 대신자를 세워서 그를 인계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을 실제 예를 들면, 이번에 아주머니들이 지방에 전도하러 갔다 와서 하는 보고가 그것이었습니다. 어느 아주머니의 보고를 들어 보면 전에 어떤 동네에서 고등학교 출신의 청년 남녀 30여 명이 죽자 살자 하고 뜻을 따라 나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불이 붙어 가지고 전도하려고 하는데, 40일이 되자마자 돌아가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 이후라도 편지하고 한 달에 한번씩이라도 찾아가면서 활동했다면 한 사람도 잃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 십년 동안 그냥 내버려 두었다가 가보니 다 떨어졌다는 겁니다. 또 거기에 후임자들이 왔다갔다했는데, 그 후임자들이 개척자한테 연락해서 누구누구는 어떤 입장이고 누구누구는 어떻게 지도해야 되는가를 알아보지도 않고, 즉 심정적인 모든 사연을 알기 위해서 개척한 사람에게 문의도 하지 않고 지역장이란 사람이 제멋대로 지금까지 해오던 습관적인 관념으로 `이건 이래라 저건 저래라' 한다는 거예요. 이렇게 난데없는 도깨비가 와서 주인 노릇을 하지, 옛날에 자기를 기르던 사람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책임자라고 새로 발령을 받아 간 사람이 공적인 권한을 가지고 가기 때문에 거기에 식구가 한 30명쯤 있으면 체제확립을 한다고 자기 관념적인 시달방법으로 이래라 저래라 합니다. 그러면 식구들을 다 잃어버리게 됩니다. 전번 개척자로부터 이것을 계승받는 책임을 못 했습니다. 지금까지 지역장들이 그랬다는 것입니다. 심정적이고 내재적인 모든 것을 계획하고 계승한 자리에서, 자발적인 입장에서 자기들에게 지시해 달라고 요구할 수 있는 입장에 세워 놓지도 않고, 또 그들이 원치도 않고 이해도 못하고 있는데, `이래라 저래라' 해서는 안 됩니다. 신임 책임자는 가서 적어도 3개월 이상은 식구들로부터 비판을 받는 것입니다. 식구들이 자기를 지켜보고 있는데 자기가 소신껏 밀고 간다는 식구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키우고 지도하던 사람에게도 3년 안에 그렇게 하면 부작용이 나는데, 이제까지 관계를 맺지 않았던 새로운 사람이 그 지역을 배치 받았다고 해서 난데없이 가 가지고 `이래라 저래라' 한다면 문제가 벌어진다는 거예요. 적어도 3개월 동안은 정성을 들여야 됩니다.
그러니 계승방법에 있어서 이런 실수가 있었고, 또 전도한 사람은 신임 책임자에게 자기가 전도한 사람을 소개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책임자가 이렇게 해놓고 감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들이 섭섭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새로운 책임자가 그 섭섭한 것을 보강해 주고 쓰다듬어 주고 울타리가 되어 주고 그들의 딱한 사연을 털어놓게 해서 풀어 주고 내일의 희망을 중심삼고 새롭게 움직일 수 있는 입장에 세워 놓지는 못하고 또 섭섭하게 만드니, 이것도 섭섭하고 저것도 섭섭하니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교회에 세 번만 안 나오게 되면 사고가 생기는 거예요. 한 주일 안 나오고, 두 주일 안 나오고, 세 주일만 안 나오게 되면 서먹서먹해진다는 거예요. 책임자를 보게 되면 벌써 `아, 저 책임자가 왜 교회 안 나오느냐고 물을 것이다' 하고 생각하는 거예요. 묻게 되면 자기 자신이 섭섭해서 안 나왔는데, 심중의 말은 못하고 거짓말을 한마디 하게 됩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게 되면 교회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되어 나중에는 완전히 떨어져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전도는 해 놓았지만 차후 수습 방법에 있어서 결여된 활동체제를 가지고 나왔기 때문에 많은 사람을 희생시켰습니다. 그러기에 원리강의를 해서 인연을 맺는 것보다도 인연된 사람을 결실시키는 것이 우리의 책임입니다. 그러므로 책임자는 항상 무엇을 생각해야 되느냐? 책임자의 사명은 말씀을 전하고 뿌리는 것이 아니라 거두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말씀을 전하는 것은 뿌리는 것이요, 뿌려 가지고 거둬야 하는 것이 책임자의 사명입니다. 이를테면 돋아난 싹에 물을 주어 가꾸고 제초작업도 해서 꽃이 피게 하고 열매가 맺히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어느 기간이 지난 다음에 완전히 익어서 수확을 할 때 비로소 책임자로서의 사명을 완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남이 심어 놓은 것을 새로운 책임자가 다시 심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잘 가꾸어 주어야 합니다. 비록 다른 사람이 심었을망정 잘 가꾸어서 수확을 하게 되면, 그것은 하늘 창고에 입고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런 생각을 갖지 않고, 과거 지도자의 성격이나 그에 대한 전체적인 지도 방법을 파악하지도 않고 이것을 다시 심은 놀음을 하니 죽는 거예요.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체제내에서 전임자와 후임자간에 계승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사람을 희생시키지 않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책임자들은 말씀 선포도 선포지만 그들을 반드시 거둘 수 있는 책임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뿌리는 책임자가 되지 말고 뿌리고 나서 거두는 책임자가 되어야 합니다. 거두기까지는 3년 이상 걸립니다. 대번에 거두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거느리고 3년 이상 다닌 것입니다. 그것은 원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3년을 수고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1957년도에 120군데에 전도지를 설정해 가지고 파송하면서 '여러분들이 3년 동안 복역한다는 입장에서, 거기에 팔려가 고용살이한다는 입장에서 부락이면 부락에 가서 충성을 하라. 그리고 그들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느냐? 충성의 도리를 가르쳐 줘라. 뿐만 아니라 실천해서 보여 줘라. 그러면 반드시 여러분이 말하지 않더라도 자기들이 할 수 있는 것을 인계 받겠다고 할 것이다. 너도 나도 이렇게 나올 때 여러분은 그 부락에서 완전히 자리잡는다'고 얘기했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지방에 가서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하므로 말미암아 마치 전국에다가 집을 짓다가 만 것 같은 터전을 만들어 놓았다는 거에요. 그 위에다 집을 짓는다는 것은 집을 새로 짓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입니다. 과거에 전도하러 나갔다가 실패해서 식구가 뿔뿔이 흩어지고 현재 한 사람밖에 남아지지 않은 곳에 가서 전도하게 되면, 처음 나가서 전도하는 것보다 2배, 3배의 수고를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마 여러분이 실제로 개척해 오면서 잘 느꼈을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우리가 해야 할 책임을 못 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이런 모든 문제를 두고 볼 때, 우리는 이것을 재차 평가해야 되겠습니다. 첫째는 지역본부의 해결문제요, 둘째는 원리강의에 있어서의 실력문제, 셋째는 식구를 전도해 가지고 기르는 문제입니다. 낳아 가지고 버려 두어서는 안 됩니다. 낳아서 길러야 됩니다. 길러서 자기의 계승자로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이러한 문제를 소홀히 해왔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이제 내일 책임진 곳으로 가거든 이러한 문제를 중심삼고 계획을 세워야겠습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전도한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만약 여러분이 지금까지 열 사람을 전도했다면 열 사람을 자기 소관내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최소한 일년에 한번씩이라도 총회를 가져야 됩니다. 전라도, 혹은 경상도, 혹은 강원도에 흩어져 있더라도 한번씩은 모여야 합니다. 전체가 모이지 못하면 불러서 만나든가 아니면 기회를 만들어서 찾아가서라도 일년에 한번씩은 만나야 합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와 같이 이제까지 지낸 얘기를 서로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식이 부모를 떠나 타 지방에 갔다가 돌아오게 되면 그동안 지내온 것을 보고하고 부모는 그것을 격려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옛날의 심정적인 유대를 중심삼아 가지고 기쁜 일, 슬픈 일을 서로서로 얘기하면서 엉클어질 수 있는 시간을 가져야 됩니다. 이것이 길면 길수록 그 사람들은 여러분을 잊지 못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지금까지 그런 것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어떻게 했느냐? 전남 지역의 책임자였던 사람이 다른 곳으로 가게 되면 어떻게 하느냐 하면 전부다 편지를 해서 불러간다는 거예요. 그래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후임자에게 그들을 소개시켜 주어야 합니다. 소개를 하는 데도 인격적인 소개를 해야 됩니다. `나는 이렇게 이렇게 움직였는데 그 책임자가 이렇게 이렇게 움직여서 상충적인 현상이 벌어지면 요렇게 요렇게 하라. 그래도 정 어려움이 있을 때는 편지하라'고 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자기 있는 곳으로 끌고 가라는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후임자에게 그들을 인계하여 지금까지 자기에게서 키움을 받았던 그 기준을 중심삼아 더더욱 잘 할 수 있는 터전을 만들어 주어야 된다는 거예요. 새로 온 책임자는 그 교회 식구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하여 잘 모르니까 그렇게 하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런 것을 못했습니다.
밤, 깊은 밤은 신비성이 강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흥회를 할 때도 낮에 부흥회 하는 것보다 밤에 부흥회 하는 것이 더 은혜롭습니다. 그것은 왜 그러냐 하면 낮에는 우리의 모든 감정이 분산되기 때문입니다. 즉, 시청각 등 우리가 오관으로 느낄 수 있는 모든 감각이 전부 분산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밤에는 그렇지 않고 오히려 집중됩니다. 모든 것이 나를 포위해 가지고 나를 두드러지게 하고, 그런 권내에 내가 자동적으로 서기 때문에 밤에는 하나님과 더불어 은혜의 역사를 하기 쉽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역사를 잘 해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밤에 식구들을 데리고 뜰에서 얘기하면 그 얘기는 신비성을 띠게 됩니다. 또 부락부락을 왕래하면서 식구들을 집까지 데려다 주는 길에 얘기하면 그 식구는 그것을 일생을 두고 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 재미는 무엇으로도 형용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가치성을 느낄 수 있는 생활을 하는 사람은 발전합니다.
여러분도 12시가 넘어 첫 닭이 우는 소리를 들을 때까지 말씀을 전해 보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신비스러운가. 조용하고 고요한 밤에 동네의 개들이 짓는 소리를 들어가면서 말씀을 전해 보라는 것입니다. 마치 광명한 햇빛을 찾아서 새로운 인생의 길을 타개하고 가는 것과 같고, 등대 빛을 찾아 새로이 항해하는 선장과 같은 기분을 느끼게 된다는 거예요. 주위가 온통 신비로 꽉 찬 세계를 혼자 가는 듯한 용감한 모습, 씩씩한 모습, 장엄한 모습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심정적인 유대를 가지려면 밤시간을 중심삼고 지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밤이나 새벽에 이러한 활동을 전개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대상이 유부녀들일 경우에는 반드시 문제가 벌어집니다. 그것을 잘 이해시켜서 밤 시간을 존중시하게 만들어 가지고 밤이라도 자기의 환경을 떨치고 나올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이러한 심정적인 원동력을 갖추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하여 그 사람들이 어떠한 환경에서도 여러분이 지시하는 대로 따를 수 있게 만들어야 됩니다. 이것은 먼저 말씀으로써 그러게 만들어야 되고, 그 다음에는 행동으로써 그렇게 만들어야 되고, 심정으로써 그렇게 만들어 놓으면 그 사람은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 전도를 시켜 보라는 거예요. 다른 사람을 전도할 수 있는 정도까지 길러 놓아야 됩니다. 이렇게 되면 여러분은 전도한 사람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한 사람을 전도해 놓고 교회에 나온다고 그냥 두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에 나오면 어느 한 제목을 주어서 강의를 시켜 보라는 겁니다. 밤이 늦도록 얘기도 시켜 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키워 나가는 겁니다. 자기가 직접 전도함으로 말미암아 신앙적인 인격을 빨리 조성할 수 있고, 그 다음에 쾌감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또한 많은 사람과 얘기해 봄으로써 자신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보다 의욕적인 사건이나 내용을 그에게 안겨 주라는 겁니다. 이렇게 한 3년 지도하게 되면 3년 이상 크는 것입니다. 자기가 직접 뛰어 보면 스스로 자리를 잡는 것입니다.
자식을 낳아 보아야 부모님께 진정한 의미의 효도를 할 줄 아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 스스로 실천해 봄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가는 길에 대한 가치를 느낄 수 있고, 하나님께서 같이하신다는 것을 체휼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절대로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 이런 사람을 못 만들었다는 겁니다. 이것이 통일교회가 발전하지 못한 요인입니다. 이것이 문제라는 거예요.
그러니 여러분이 이러한 내용을 알고, 수적인 확보를 하기 위해서는 강의를 많이 해야 되겠습니다. 강의를 하는 데도 계획적인 강의를 해야 되겠습니다. 한 달에 반드시 몇 사람을 전도하겠다는 계획을 세워 실행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1개월에 1인 전도를 해야 되겠습니다. 이것은 지구장부터 하고 지역장부터 하라는 것입니다. 그건 강의하면 되게 되어 있는 거예요. 돌아다니면서 승공강의만 하는 것이 우리 체제내에 있어서 책임자의 사명이 아닙니다. 승공강의를 한 번 하면 원리강의는 반드시 두번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공식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원리강의는 하지 않고 승공강의만 하려고 합니다. 그런 사람은 정상적인 발전을 못 합니다. 그런 사람은 앞으로 승공강의를 하더라도 대중에게 감동을 주지도 못 할 것이요, 대다수에게 환영도 못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원리강의를 해서 심정적인 내용을 갖추고 생활적으로 체휼한 것을 중심삼고 승공강의를 한다면 성과를 얻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반대로 생각하고 가는 사람은 발전하지 못합니다. 반드시 길이 막힐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이러한 원칙을 중심삼아 가지고 나가야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선생님이 걸어 나온 생애에서도 그랬지만 지방에 전도하러 갔다 온 사람들의 보고를 들어 보면, 자기가 정성을 들여서 전도했던 사람들이 떨어져 나가면 반드시 탕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아주머니들이 자기들로 인해 전도되어 뜻을 위해 열심히 일하다가 떨어져 나간 한 열 명 정도의 사람을 예를 들어 말하는데, 그들이 자기 나름대로 시집이나 장가간 것을 보면 그 아내가 죽거나 자살을 하거나 아들이 죽거나 다리가 부러지거나 전부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그건 무서운 겁니다.
그러면 그 책임을 누가 질 것이냐? 그런 입장에 처한 그들은 앙심을 먹고 원한을 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천상세계에 가서 여러분을 참소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문제가 심상치 않다는 거예요. 차라리 말씀을 전하지 않았더라면 괜찮았을 것입니다. 말씀을 전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그런 피해를 당하는 결과를 가져 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씨앗을 뿌리지 않았으면 그 알맹이는 썩지 않았을 거라는 말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예요. 이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그렇기 때문에 말씀을 함부로 전하는 것도 큰 문제라는 거예요. 그러므로 무책임하게 말씀을 전하다가는 여러분 자신의 앞길이 막혀 버립니다. 어느 만큼의 수가 그런 피해를 입게 되면 여러분의 가는 길이 편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꺾여 나가게 될 것입니다.
만일에 제물된 입장에서 완전한 제물이 못 되면 어떻게 됩니까? 만약 제물이 실수하는 날에는 제단 앞에 모였던 모든 사람도 벌 받지요? 제물보다 더 죄가 된다는 거예요. 제사를 드리러 왔다가 제주가 제사를 잘못 드리면 참석했던 사람들까지 제사 잘못 드린 죄를 뒤집어쓰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거예요.
우리 앞에는 지금 그런 엄청난 일이 전개되어 나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그런 입장에 서서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를 신중히 하고 책임감을 느껴야 합니다.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되는 것을 원리를 중심삼고 확실히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원리를 중심삼고 공식적인 계획을 세워서 움직여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상대방이 입은 피해는 간접적으로나 직접적으로 여러분에게 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도 모르게 힘이 쭉 빠집니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재기하려고 해도 재기할 수 없게 되는 거예요. 그러므로 여러분이 수적인 면에서 부족한 것을 보충하기 위해서는 이제부터 계획적인 활동체제를 안팎으로 갖추어 활동을 강화해야 될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 다음에는 경제적인 것이 문제입니다. 지금 선생님이 제일 고심하는 것이 이 경제적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 각 지구나 축복가정 부인들을 앞세우려 한다는 통보를 받았을 겁니다. 각 지구의 사업부에 배정되어서 판매된 공기총의 미수금을 수금하면 그것을 회사와 반분하는 방식으로 수급을 강화할 것입니다.
이것으로 선생님이 나름대로 계획한 것은 이것을 실시함으로 말미암아 1970년도에 우리가 활동할 수 있는 물적 자원을 여기에서 공급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여러분들이 돌아가게 되면 여러분들의 아내를 내세워서라도 수금활동을 강화해야 될 것입니다.
이것도 맹목적으로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한 달이면 한 달에 얼마 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해야 됩니다. 여러분이 지도해 주면서 아내와 서로 결의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나는 몇 사람 전도할테니 당신은 얼마 수금 하시오' 하며 서로서로가 계획을 세워 활동하여 새로운 경제 기반을 확보해야 되겠습니다. 이것도 지금 우리에게 시급한 문제입니다.
그 다음에는 무엇이냐? 우리가 그러한 기반을 닦아 가지고 국가에 대해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기반을 어떻게 닦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인적 자원을 확보하고 경제적 자원을 확보하더라도 그것으로는 국가에 영향력을 미치지 못합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어떻게 하면 국가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느냐 하는 것을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교파 활동을 비롯하여 여러가지 간접적인 대외 활동을 전개하여 이것을 연결시키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3년 이내에 그런 기준을 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니만큼 여러분은 우선 작전계획을 세워 먼저 수적인 확보를 하고, 경제적인 기반을 닦는데 힘써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경제적 기반에 있어서는 현재 우리가 수금해야 할 막대한 금액을 금년 일년만에 수금을 완료해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을 여러분들의 가정을 중심삼아 가지고 계획하여 활동해 주기를 부탁합니다. 알겠어요? 「예」
이런 식으로 1972년도 말까지 가게 된다면 선생님의 계획이 이루어지리라고 봅니다. 그때가 되면 상당한 인적 자원과 경제적 자원이 우리 앞에 놓여지지 않을 것이냐.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렇게 인적 기반과 경제적 기반을 확보하면 국가적 활동도 문제가 아닙니다. 선생님이 지금 이러한 계획을 세워 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핵심요원이 부족할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부족한 핵심요원을 보강하기 위해 교육기관을 설립하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그 계획의 첫출발로서 금년도 제 1차 간부 수련회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기 수택리뿐만 아니라 청평에도 수련소를 건립할 것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이런 간부 수련회를 한국만으로 제한하는 것이 아니고, 일본.미국.구라파에 있는 식구들까지 합동으로 수련시키려고 합니다. 그 교육기간은 길 것입니다. 적어도 2개월 이상 70일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70일동안이나 수련을 받게 되면 영어를 못 하는 사람이라도 외국인과 같은 생활권내에서 접하게 된다면, 대학을 나온 사람은 회화를 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봅니다.
이런 수련소를 만들어 가지고 세계적인 핵심요원을 양성하여 어떻게 배치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것만 잘하게 되면 지금까지 우리가 활동하면서 실수한 것을 보강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체제를 갖추고 경제적 기반을 닦아 기성교회를 어느 정도 움직일 수 있는 터전만 갖추게 되면 세계적인 발전을 가져 오지 않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지금 그러한 결과를 가져 오게끔 계획을 세워 나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알고 지방에 돌아가서 계획적인 활동을 해주기를 부탁합니다. 알겠어요? 「예」 먼저 수(인원)를 확보해야 되겠습니다. 그러려면 책임자로서의 사명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그 다음에 경제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총을 판매한 수금을 완료해야 하겠습니다. 이것을 여러분들의 부인을 앞세워서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 교회 식구들을 앞세워서는 안 됩니다. 4개월간만 여러분들의 부인을 앞세우라는 것입니다. 부부가 뜻을 위해 헌신하고 정성들이면 따르고 있는 식구들이 서로 앞을 다투어 자신을 시켜 달라고 나설 것입니다. 그렇게 해가지고 수금이 다 끝나게 되면 월급도 한푼 주지 않는, 다시 말해서 경제적 보장이 없는 환경에서도 식구들을 내세워서 무슨 일이라도 시킬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지 않고는 여러분의 생활에서 경제적인 위협을 모면할 도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앞으로 이런 여건을 중심삼고 새로운 방향을 설정하고 계획을 세워서 움직여 주기를 부탁합니다. 알겠지요? 「예」
아버님, 승리적 통일전선은 최고의 한 사람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았사옵니다. 여기에 처해 있는 개개인이 문제가 된다는 것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먼저 자신의 몸과 마음이 하나되어야 되겠사옵니다. 그리하여 통일된 자아를 발견하고, 그 자아를 중심으로 상대적 존재인 아내와 하나된 가정을 이루어 부부가 하나의 통일 형태를 갖추고 자녀를 중심삼은 사위기대의 형태를 갖추지 않으면 사탄세계의 가정을 통합할 수 있는 주체적인 기준이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았사옵니다. (녹음이 잠시 끊겼음)
아버지의 인격을 대신한 자로서, 아버지의 심정을 대신한 자로서, 아버지의 말씀을 대신한 자로서 천지가 변동하는 일이 있더라도, 이 위치에서 확고부동한 핵심적인 실권을 가지고 상대적 요원을 감화시키고 소화시켜 나갈 수 있는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자아를 갖추어야 당신과 일치될 수 있는 새로운 출발의 기원이 마련될 수 있다는 것을 확실히 깨닫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여! 이제 통일교회가 가는 길 앞에 있어서는 질(質)도 질이지만 수(數)가 필요한 때가 왔습니다. 수를 울타리 삼아 그 조직을 안팎으로 편성할 수 있는 경제적 뒷받침이 시급한 때가 왔사옵니다.
이 나라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고 수많은 물질적 자원이 있는 것을 바라보게 될 때, 아직까지 저희들이 해야 할 책임을 다하지 못함으로 당신이 허락한 그 권을 상속받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있사옵니다. 하오니 저희가 이것을 연결시킬 수 있는 사람을 찾아 나서야 되겠습니다. 이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을 갖추어 국가와 민족을 제 2의 해방권에 세울 수 있게끔 책임을 다할 수 있는 통일용사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여! 이 주일 내내 보호하여 주신 것을 감사하옵니다. 그간 당신의 인연 가운데서 저희들이 느끼고 새로이 결의한 모든 시간 시간을 다시 한번 회상하며, 내일이면 싸움터에 나가야 할 이들 앞에 무한한 자비와 사랑의 축복을 하여 주시옵소서. 자기 나름의 계획을 세워 많은 사람을 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 핵심요원들을 기르는 데 더욱 노력해야 되겠습니다. 한 달에 1인 전도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실천하면서, 그것을 재미로 느끼고 보람으로 느껴 그 자극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발전할 수 있고 당신의 칭찬을 받을 수 있는 아들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 이 시간 이후에 가야 할 미래의 행로를 아버지께서 친히 지켜 주시옵고, 그 동안 체휼하였던 모든 것을 살려서 수많은 사람에게 심어 주는 역군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심을 뿐만 아니라 가꾸고 거두어 당신에게 사랑받고 칭찬받는 아들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우리 타락한 인간을 자신이 선과 악의 중간에 있다는 것을 언제나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인간은 반드시 이런 중간 입장을 통하지 않고는 경계선을 넘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도 경계선을 넘기 위해서는 중간 입장에 있는 우리 인간을 통해야 되고 사탄도 하늘편을 반대하기 위해서는 중간 입장에 있는 우리 인간을 통하지 않고는 안 됩니다. 뿐만 아니라 개인이면 개인, 가정이면 가정, 국가면 국가, 세계면 세계가 모두 이와 같은 중간 입장을 취하지 않고는 섭리사에 나타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개인을 두고 볼 때 여러분 자신에게는 마음과 몸이 있는데, 마음이 선을 추구하는 입장에 서면 하나님편의 경계선에 접하게 되지만, 그와 반대의 입장에 서게 되면 반드시 사탄편의 경계선에 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선악의 중간 입장에 서 있다는 것을 언제나 알고 있어야 됩니다.
상하 관계에 있어서도 역시 그러합니다. 즉, 하늘과 땅의 관계를 두고 볼 때에 하나님이 이 땅을 점령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간을 거쳐야 합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하나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사탄도 하늘권내에 있는 선한 인간을 점령하기 위해서는 땅을 중심삼은 입장에서 인간과 합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지 않고는 하늘권내에 있는 인간을 끌고 갈 수 없습니다. 이렇게 볼 때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되는 자리에서만이 사탄을 굴복시킬 수 있는 것이요, 사탄과 인간이 하나되는 자리에서는 하나님이 떠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좌우관계에서 살펴보면, 부모를 중심삼은 형제의 관계가 좌우관계인데 형제 가운데에서도 참다운 효자는 어떤 형제나 하면 부모님과 하나되어 자기 형제를 대할 줄 아는 형제입니다. 불효자는 어떤 형제냐 하면 부모와 반대되는 자리에 서서 가정을 파탄에 빠지게 하는 형제입니다. 국가를 중심삼고 보더라도 충신이 되려면 주권자면 주권자, 군주면 군주와 하나되어 민족을 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간신은 어떤 자리에서 생기느냐? 군주를 중심삼고 하나되는 것이 아니라 그와 반대되는 입장에서 하나되는 자리에서 역적이 생기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선악은 어떻게 결정되느냐? 선악은 내 자신이 우향 혹은 좌향함으로써 결정되는 것이지, 선악 자체가 우리를 선하게 또는 악하게 만들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선의 방향으로 가느냐, 악의 방향으로 가느냐에 따라 선악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타락한 인간은 선악의 중간 위치에 있다는 것입니다.
선악은 누구에 의해서 결정되느냐 하면 하나님도 아니요, 사탄도 아니요, 바로 `나'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확실히 안식해야 되겠습니다. 따라서 내 자신이 하늘편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과 하나되어야 합니다. 그 길밖에 없는 것입니다. 반면에 나 자신이 악한 입장에 그냥 그대로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악한 현재의 입장을 고수하는 길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이 타락한 기반 위에 서 있는 나 자신이 그곳에서 어떻게 하면 탈피할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지금까지 중간 위치에 서 있는, 선을 추구하고 본연의 세계로 돌아가야 할 타락한 인간이게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인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나 자신이 선과 더불어 일체화 될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중요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나 자신은 이 몸을 지니고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즉 과거에서부터 현재의 이르기까지 악한 사탄과 동반해 왔고, 또 앞으로의 미래에 있어서도 동반하기 쉬운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에서 백까지 모든 것이 사탄과, 악과 결탁되어진 입장이지, 선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입장이 아닙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이 악한 터전을 부정하고 넘어서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악한 터전보다도 더 강력히 선을 추구할 수 있는 방향, 혹은 방편을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이 신앙자들이 지금까지 생활해 나오는 데 있어서의 문제점임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막연하게 알고,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을 막연하게 아는 입장에서는 이것을 풀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적인 신앙, 절대적인 신앙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신앙을 세우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부정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자기가 나라면 나라에 있어서 하나의 국민이요, 가정이면 가정의 한 일원이요, 또 남자면 남자 여자면 여자가 한 부부를 이루는 일원이 되어 가지고 여기에서 하늘편으로 전진하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신앙을 중심삼고 나가야 합니다.
절대적인 신앙을 중심삼고 나가는 데 있어서는 그 국가가 절대적으로 반대하더라도 양보해서는 안 됩니다. 가정이면 가정에서 누가 아무리 반대하더라도 그 반대 앞에 절대적인 신앙을 가지고 굴하지 않아야 합니다. 또한 부부 사이에 있어서도 상대가 반대하는 입장에 서더라도 절대적인 신앙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이러한 태도를 세우고, 또 이러한 태도를 세워 신앙생활을 하려는 목적은 무엇이냐 하면, 단 하나 악한 환경을 탈피하여 선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에서는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백방(白方)으로도 부인하지 못합니다. 수많은 간증담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계신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 하나님을 내가 어느 정도로 알고 있느냐? 과거에 우리 조상들이 맹목적으로 믿어 나온 그러한 신앙 기준이냐? 맹목적으로 추구해 나오던 신앙의 기준보다 강한 입장에 서지 않으면 과거의 신앙 이상의 자리에 나갈 수 없습니다. 또, 지금까지 역사해 나오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어 새로운 세계로 갈래야 갈 수 없습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이냐? 어떻게 아는 것만큼 실천하고 그것에 대해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현실적인 모든 악의 기반을 타파해 버리느냐 하는 것입니다. 악의 기반을 제거할 수 있는 주체적인 자아를 확립해야만 선악을 결정지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사탄을 중심삼은 악은 환경적으로 볼 때 95퍼센트에 해당하는 환경을 지니고 있는데, 하나님을 중심삼은 선은 5퍼센트에 해당하는 환경만 지니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기반은 사탄세계에 배해 5퍼센트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 있는 하나님은 지금까지 우리의 양심을 자극시키며 양심의 방향을 촉구해 나왔습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이 결심하는 때를 중심삼고, 그 사람이 완전히 하나님과 하나될 수 있는 시점을 표준하고서야, 그 사람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때에야 역사를 해 오셨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기도생활을 한다 해도 24시간 항시 하나님과 하나된 자리에서 기도생활을 하지 못하는 것이요, 신앙생활도 24시간 하나님과 하나된 자리에서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주기적인 한때를 중심삼고 뜻과 연결될 수 있는 통일적인 궤도를 스스로 갖추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장성하여 스스로 자주성을 지닐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까지는 하나님과 거리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어 `하나님이 절대적이니 나도 절대적이어야 되겠다. 지금까지 선을 위해서 투쟁해 나온 하나님을 내가 모시는 입장이니 나 자신도 현실적으로 주체적인 입장에 서서 현실적인 무대를 중심삼고 투쟁해야 되겠다'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투쟁하겠다는 신념이 절대적이 되어,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믿을 수 있는 때를 바라보고 우리 개체를 이끌어 나간다는 사실을 생각해 볼 때, 과연 우리 자신들이 그러한 기점에 섰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러한 입장에 자신이 서기 위해서는 탕감조건을 세우지 않고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선생님 자신을 중심삼고 볼 때, 또 지금까지 선생님의 가정이 생활해 나온 것을 쭉 되돌아보게 되면 하나님은 모질고 무자비하시다는 것입니다. 어느 한때에는 축복을 해주시지만…. 선생님의 가정은 증조부 때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할아버지 때에 와서 탕감을 받았습니다. 축복 받은 후에는 반드시 탕감받게 된다는 거예요. 반드시 탕감의 역사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도 축복 받은 후에는 반드시 탕감을 받았습니다. 열만한 축복을 받았으면 반드시 그만한 탕감을 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것을 지탱시키고, 그 씨를 남기기 위해서는 탕감을 받아야 합니다. 더군다나 가정을 위한 씨가 아니라 종족을 위한 씨를 남기려면 그 가정에 축복한 이상의 시련을 사탄이 퍼붓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열만한 축복을 주기 위해서는 스물, 혹은 백만한 시련을 주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반드시 탕감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생님이 하나님의 불리움을 받기까지 선생님의 가정에 상당한 혼란이 일어났습니다. 가산이 탕진되었고, 인명 피해도 있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내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혼란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당사자로부터 전부다 맞았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축복을 받으면 절망적인 상태에 이를 때까지 하나님이 그 가정을 사탄세계에 내놓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탄세계에서 들이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말하면 선생님이 이 뜻을 찾아 나올 때까지 그 배후에는 삼대에 해당되는 탕감의 인연이 관계되어 있었습니다. 할아버지 대에서도 탕감을 받았고, 아버지 대에서도 탕감을 받았고, 내 대에서 형님까지 탕감을 받았습니다. 할아버지 대에 있어서도 슬픈 일이 벌어져야 했고, 아버지 대에 있어서도 슬픈 일들이 일어나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거치지 않고는 탕감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할아버지 대를 보게 되면, 3형제 분이 계셨는데 막내 할아버지 되시는 분은 목사였습니다. 이 할아버지는 3·1 독립운동 평안북도 총책임자로 전국의 책임자들과 내적인 계획을 해오셨습니다. 그러시다가 오산학교 직원과 생도 및 교회신도, 오산 주민들을 이끌고 만세 시위운동을 벌이셨습니다. 이때 주모자로 일헌에 체포 당함으로써 옥고의 생활을 2년동안 하셨습니다. 옥고에서 풀려나오셨어도 편안하게 고향에서 살지 못하시고 일생 동안 타향살이를 하셨습니다. 일경의 박해로 피신 다니시다 강원도 정선에서 생애를 마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아버지 대에 있어서 삼촌도 행방불명이 되셨습니다. 어디로 갔는지도 모릅니다. 물론 객사하셨을 것인데, 무덤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릅니다. 탕감은 이와 같은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다시 말해, 비운의 생애를 거쳐야 됩니다. 이렇게 3대째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정상적인 투쟁의 역사가 벌어진 것입니다. 즉, 복귀의 터전이 벌어졌다는 것입니다.
우리 형님은 동생인 나에 대해서는 절대적이었습니다. 가인의 입장에서 완전히 탕감할 수 있는 기대가 자연히 조성된 것입니다. 형님의 신앙은 철저했습니다. 형님은 6.25사변이 일어날 것도 미리 아셨으며, 우리 민족이 해방될 것도 미리 아셨습니다. 모든 어려운 문제를 영계의 지시를 통해 해결하는 신앙의 태도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형님에게는 신병이 있었는데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형님은 약을 써서 고치겠다는 마음은 꿈에도 가지지 않았습니다. 오직 기도로, 신앙으로 병을 극복해 나갔습니다. 그런 신앙기준에서 그 병을 고쳤던 것입니다.
우리 형님은 동생인 나에 대해서 다른 것은 몰라도 역사상에 수많은 형이 있었고 수많은 동생이 있었지만 내 동생은 역사적인 동생이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내가 뭐라고 하면 절대적으로 순종했습니다. 내가 평양에 가 있을 때, 그때는 복귀섭리 도상에 있어서 크나큰 역사가 있을 때였는데 내가 부탁하는 것은 보통 생각으로는 믿을 수 없는 것이었지만, 형님은 이런저런 내용을 갖추어 동생을 위하여 도왔습니다. 그 부탁이 아무리 어려운 것이라도 그 일을 행하기에 주저하지 않는 형님이었습니다.
이러한 형님과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남북이 갈라진 것입니다. 우리 가정의 사정이 확대되어 국가의 사정이 되었습니다. 형님과 동생이 한자리에 모여 부모님을 모시지 못하는 것과 같이 지금 남.북한이 똑같은 사정이 되었습니다. 틀림없이 형님은 북괴의 손에 피살되었을 것입니다. 또한 내가 남한 땅에 나와 이런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북한 땅에 남아 있는 우리 일가 친척은 말할 수 없는 수난과 역경 가운데 살다 돌아가셨거나 지금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역사적 과정을 중심삼고 볼 때 반드시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선생님 자신에 있어서도 제일 가깝던 친구들, 하늘에서 축복해 줄 수 있는 입장에 있는 친구들은 다 데려갔습니다. 다 제거시켜 버렸습니다. 세상에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것은 다 잘라 버렸습니다. 그들 중에는 평안북도 사람도 있었고 황해도 사람도 있었습니다. 누구보다 제일 가깝던 친구들을 다 데려가 버렸습니다.
또, 형제를 두고 보더라도 내가 제일 사랑하던 동생을 데려가 버렸습니다. 내가 감옥에 들어가 있을 때 무슨 죄인지는 모르지만 데려갔습니다. 그는 내 바로 손아래 여동생입니다. 우리 가정에는 딸이 많았지만 이모댁에는 딸이 없었기에 이모의 간청에 의해 그 동생은 이모댁에 가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언제나 그 동생을 위해 많은 기도를 했습니다. 그 동생은 오빠에 대해 절대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빠로서 동생이 좋을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어떠한 일이라도 다 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 기대까지도 다 잘라 버렸습니다. 여동생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남동생도 데려갔습니다. 또, 선생님 자녀 중에서도 성진이의 동생인 희진이도 데려갔습니다. 아들로 보면 둘째를 데려간 셈입니다. 딸도 둘째를 데려갔습니다. 이런 것을 볼 때 탕감은 용서가 없는 것입니다. 선생님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닙니다.
또, 내가 이 뜻길을 나서 가지고 제일 수난을 당한 것은 언제였느냐? 제2차, 둘째번 길이었습니다. 물론 첫째번 길도 그랬지만 둘째번 길은 더욱 그랬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섭리의 배후를 더듬어 볼 때 하나님은 땅과 인연될 수 있는, 심정적 유대관계를 맺을 수 있는 일체를 끊어 버리신 것입니다. 이것이 나 자신을 망하게 하려는 섭리냐? 아닙니다. 이것은 완전한 승리의 기점을 바라는 하나님의 사랑인 것을 내가 알았습니다. 타락한 혈통을 받고 태어난 역사적인 섭리를 두고 볼 때에도, 이것은 불가피한 사실이 아닐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언제 어느 때 사탄이 그 조상들을 통해서, 가정을 통해서, 형제들을 통해서, 자신을 통해서 들어올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청산지을 수 있는 내용을 지니고 하늘편을 대신해서 나설 수 있는 배후를 갖지 않고는 탕감의 자리에 못 나갑니다. 그 당사자는 알든지 모르든지간에 탕감의 인연은 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뜻을 알고 있는 우리들이 이것을 슬픔으로 맞이하지 않고 어떻게 감사함으로 맞이할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을 슬픔으로 맞이하는 것은 열번 천번 하나님을 배반할 수 있는 충분한 요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가정이면 가정에 있어서 절망된 사연이나 그 누구 앞에 체면을 세울 수 없는 사연이라도 슬픔으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 앞에 감사함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아버지의 뜻이 이와 같은 입장을 통해서 결속되고 하나의 공고한 터전이 되시옵소서' 하고 소망 가운데 이것을 맞지 않고는 뜻을 발전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제물 그 자체에게는 절망이 되지만, 제물을 드리는 그 자리는 소망이 출발하는 자리인 것입니다. 그 자리는 절망이 연결되는 자리인 동시에 소망이 출발되는 자리인 것입니다.
오늘날 통일교회 교인이면 통일교회 교인이니 여러분이 제물의 입장에 서게 된다면, 한 면은 절망적인 입장에 서는 것이요 또 한 면은 소망적인 입장에 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양면을 어떻게 넘어서느냐? 이것은 하나님이 넘겨 주는 것도 아니요, 사탄이 넘겨 주는 것도 아닙니다. 누가 넘어서야 되느냐? 자기 자신이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끊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자신이 완전히 사탄을 끊고 나서게 되면, 그것은 사탄세계로 보면 절망인 것입니다. 완전히 절망인 것입니다. 이것이 성립됨으로 말미암아 하늘세계는 완전한 출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완전한 출발은 한꺼번에 세계적으로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점차적으로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 길은 개인으로부터 열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개인의 길이 열렸다고 해서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길이 열렸다고 해서 그 누구를 믿고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 자주적인 입장에서 개척해야 합니다. 또한 여기에는 시간을 투입해야 되고 노력과 정성을 투입해야 됩니다. 투입하는 시간과 정성도 보통 사람의 몇 배 이상이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아담에게 성장기간이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 스스로 시간을 투입하고 노력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성장기간을 거쳐야 합니다.
그러면 역사적인 사탄이 다시 찾아오는 것입니다. 찾아와 가지고는 `네가 책임을 졌으면 너의 선조보다 나아야 된다' 고 하며 들이치는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 서게 될 때 그것을 절망의 요건으로 생각하고, 자신이 절망적인 입장에 섰다고 생각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이 절망적인 환경에서 새로운 나, 새로운 자아, 새로운 이념을 찾아야 합니다. 그 가운데는 개인, 가정, 국가, 세계가 개재되어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는 60년대에서 70년대로 넘어가는 시점에 있습니다. 여기에서 누가 책임을 해야 되느냐? 물론 선생님이 해야 됩니다. 그것으로 끝나느냐? 제 1차 7년노정은 하나님이 보호하시는 가운데 끝났습니다. 끝났으면 제 2차 7년노정으로 넘어가야 하는데, 넘어가려면 반드시 탕감을 치러야 됩니다. 반드시 3년 기간을 중심삼고 넘어가야 합니다. 통일교회 여러분들은 이 기간에 임하였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선생님 자신도 그런 때가 올 것을 마리 알고, 그때에 우리가 어떻게 하나되어 넘을 수 있겠는가 하는 그 길을 목표로 세워 가지고 지금까지 기도해 나왔습니다. 그런데 선생님과 여러분이 하나되어 있느냐? 못 되어 있습니다. 먼 거리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입장에서 다시 인연을 맺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이냐? 탕감복귀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희진이가 간 것입니다. 선생님은 희진이의 그런 비보를 들었을 때 `아! 올 때가 왔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습니다. 내 자식보다도 나라와 뜻을 더 받들어야 했습니다. 문제는 그것입니다. 그럴 때 슬퍼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면 전체가 허물어집니다. 탕감은 용서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금년 들어 선생님은 여러분에게 제 2차 전도를 시키는 것입니다. 60년대 여러분이 개척하던 그 자리로 다시 보내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선생님이 알고 싶은 것은 그 당시 우리를 반대하던 사람들이 지금 어떻게 되었나 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를 반대하던 그 사람들이 하늘로부터 맞지 않았다면 탕감이라는 것은 필요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전에 전도 갔다 온 사람들의 보고에 의하면 그 당시 적극적으로 반대하던 사람들은 전부 탕감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면 무엇때문에 탕감을 받게 한 것이냐? 통일교회를 위해서냐? 아니면 통일교회 선생님을 위해서냐? 아닙니다. 결국 하나님이 그 사람들을 들이친 것은 그들을 망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국가가 반대했던 것을 탕감시키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탕감을 제시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희생된 사람들을 중심삼아 가지고 복귀할 수 있는 길을 열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탕감복귀역사의 내용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제 70년대를 향하는 경계선에서 여러분의 가정을 중심삼고, 모자 혹은 모녀를 수난의 길에 내몰았습니다. 이것을 하나의 법칙으로 만들자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사연이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이, 혹은 여러분의 아들딸이 추운 방에서 떨면서 자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축복을 받았다는 거룩한 이름을 가진 모습이지만 밥을 얻어먹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어려운 환경 가운데에서도 무엇을 생각해야 하느냐? 자기 아들딸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어느 누구보다도 이 민족을 사랑해야 합니다. 나는 희생되더라도 이 나라는 구원되어야 한다는 마음을 갖고 기도하는 모자가 있다면 여기에 복귀의 조건이 세워질 수 있는 것이요, 그 모자로 말미암아 세계 복귀의 문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바라보고 금번에 이런 대책을 세웠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왜 그래야 되느냐? 하나님께서 완전한 탕감을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불가피한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해 볼 때 여러분들은 어떠한 비참한 노정이라도 가야 합니다. 선생님도 그런 길을 간 사람입니다. 우리 가정도 그런 길을 갔습니다. 가는 데에는 세상의 어느 누구를 원망해서는 안 됩니다. 어려움이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원망에 앞서 이 나라, 이 세계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것과 뜻이 가는 길을 염려해야 합니다. 이것이 복귀의 책임자로서 취해야 할 응분의 태도입니다. 여러분들은 그런 심적 기준을 하늘 앞에 세우지 않으면 안 되는 책임자라는 것을 절감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7년노정을 걷는 데 있어서 선생님의 도움을 받는 입장에 서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탕감복귀가 안 됩니다. 왜 그러냐? 지금까지 역사과정이 그러했고, 선생님이 스스로 그런 탕감노정을 거쳐왔기 때문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선생님의 도움을 받는 자리에 서게 되면 반드시 사탄이 참소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복귀하는 방법이 뭐냐? 여러분의 가정을 축복해 준 것은 여러분의 가정만을 위해서 축복해 준 것이 아닙니다. 종족을 위하고 민족을 위해서 축복해 준 것입니다. 선생님이 여러분들에게 축복을 해주었지만 여러분들은 축복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렇지만 종족 복귀의 책임자로 내세워 완전히 복귀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되겠기에 여러분들을 축복해 준 것입니다. 축복은 여러분의 가정만을 위해서 해준 것이 아니라 종족을 위해 해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족이 편성될 때까지 그래야 되는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종족복귀시대로 넘겨야 되느냐? 여러분이 넘겨 놓아야 합니다. 축복 받은 여러분들은 종족과 민족을 중심삼고 책임을 져야 할 입장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종족을 넘어서서 민족을 위해 축복해 줄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작년에 세게 순회 도중에 세계의 여러 민족을 축복해 주었던 것입니다. 그로 인해 민족을 위하여 또 국가를 위하여 축복의 기반을 닦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종족을 축복하던 그 기준이 민족을 착복할 수 있는 기준과 국가를 축복할 수 있는 기준까지 연결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선생님의 수난의 코스와 같은 길을 가면서 선생님이 가시는 길은 내가 대신 가야 할 길이라고 할 수 있는 축복가정이 있다면, 진정한 의미에서 몸 마음이 하나되어 가지고 일심단결하여 그 뜻을 받들고 헌신하는 가정이 있다면 그 가정을 통해 민족적인 축복기준이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탄 앞에 탕감조건을 제시하여 넘어설 수 있는 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해서 지금까지 뜻을 발전시켜 나왔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선생님이 지금 누구를 사랑하느냐? 이 민족을 사랑합니다. 그런데 탕감하지 않고는 절대 사랑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역사를 돌이켜 보나 선생님 일대를 보나 잘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만을 사랑하다가는 국가를 사탄 앞에 내놓게 되고, 민족만을 사랑하다가는 민족을 사탄 앞에 내놓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세계라는 타이틀을 걸고 나가야 합니다. 민족을 사랑하기 전에 세계를 사랑해야 합니다. 한 단계 높여야 하는 것입니다. 세계를 사랑하는 기준을 세웠을 때는 민족을 사랑해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생님이 여러분에게 말하는 것이 뭐냐? 개인을 세우기 위해서는 가정적 탕감기준을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정을 세우기 위해서는 종족적 탕감기준을 세워야 하고, 종족을 세우기 위해서는 민족적 탕감기준을 세워야 하고, 민족을 세우기 위해서는 국가적 탕감기준을 세워야 하며, 국가를 세우기 위해서는 세계적 탕감기준을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귀의 원칙입니다.
개인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먼저 가정을 사랑해야 합니다. 즉, 개인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가정을 사랑했다는 조건을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를 중심삼고 전부 탕감해 내려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면 이스라엘 민족을 중심삼고 요셉 가정을 세웠고, 요셉 가정을 중심삼고 예수님을 세웠던 것입니다. 이렇게 탕감해 내려오는 것입니다.
요셉 가정은 가정적인 탕감조건을 세워 예수님을 보호해야 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 민족을 탕감시킨 것은 요셉 가정을 세우기 위한 것이요, 요셉 가정을 탕감시킨 것은 예수님을 세우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지금까지는 큰 것을 세우기 위해 작은 것을 탕감시킨 역사가 아니라 작은 것을 세우기 위해 큰 것을 탕감시켜 내려온 역사입니다.
그러나 통일교회는 섭리사적인 입장에서 볼 때 개인이 가정적 탕감조건을 세울 수 있는 기준에서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작전상 필요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피해받을 수 있는 기준을 넘어선 것입니다. 이러한 작전을 잘 연결시켜 나가게 될 때 여러분은 사탄세계의 탕감을 받지 않고 무난히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대신 피를 흘려야 하고, 핍박을 받아야 하며, 외로움을 당해야 합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그러나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완전한 탕감이라는 이념을 두고 볼 때, 혹은 섭리의 입장에서 여러분 자신을 중심삼고 볼 때 앞에서 말한 것처럼 여러분은 선악의 중간에 서 있습니다. 그러면 어디를 향하여 갈 것이냐? 탕감당해야 할 입장이냐, 탕감을 벗어날 수 있는 입장이냐?
여러분은 선생님을 중심삼고 볼 때 가지와 같은 입장에 서 있습니다. 자, 그러면 나무의 줄기와 가지와 잎을 두고 볼 때 바람이 불면 어느 것이 먼저 바람을 맞느냐? 줄기나 가지가 바람을 맞기 전에 먼저 잎이 맞습니다. 그리고 가지가 맞은 다음에 줄기가 맞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은 완전한 탕감이 무엇인지 모르고 나왔습니다. 그저 선생님만 바라보고 하라는 일만 해 나왔습니다. 하라는 일만 해 나온 후에 완전한 탕감기준을 세우려면 여러분 자신이 결정권을 가져야 됩니다. 선악의 중간 입장에서 반드시 악권을 초월하여 하늘 앞에 귀일될 수 있는 자신이 되겠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져야 됩니다. 이것이 없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여기 참석한 사람 가운데 확고한 신념을 가진 자가 있느냐? 그것이 안 되어 있기 때문에 가정들이 다시 탕감을 받아야 됩니다. 완전히 탕감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은 불가피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만일 선생님이 여러분을 후원해 주면 전부 잘려 넘어가게 됩니다. 다 망한다는 거예요. 선생님이 나라를 사랑할 것을 가지고 여러분을 사랑하면 여러분이 망하게 됩니다. 세계를 사랑할 것을 가지고 여러분을 후원하면 여러분이 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건 왜? 탕감법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을 빼앗아 가려고 합니다.
여러분 스스로는 완전히 탕감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랑권내에 들어가서 완전한 하나의 주체가 되고, 하나님과 완전한 일심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밤이나 낮이나 뜻 앞에 귀일될 수 있는 생활을 하는 자신이 되지 않으면 반드시 탕감을 받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아무리 어렵더라도 여러분의 가정을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가정이 살 수 있는 방법은 종족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 가정보다 종족을 사랑하지 않으면 가정이 살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통일교회는 새로운 종족입니다. 그러면 통일교회 종족이 살아가기 위한 방법은 무엇이냐? 민족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민족을 사랑하지 않고는 살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축복 받은 가정들은 먼저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희생해야 됩니다. 자기 가정이나 통일 종족을 위하여 희생해선 안 됩니다. 국가를 위해 제물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재물은 먼저 누구를 위해서 드려야 하느냐? 먼저 민족을 위해, 그 다음에 형제와 부모를 위해, 그리고 나서 하나님을 위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왜 그런가?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아담 가정을 놓고 볼 때, 먼저 우리는 누구를 위해 탕감해야 하느냐? 먼저 하나님을 위해 탕감하는 것이 아니라 가인을 위해 탕감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아요? 우리가 제물 되는 것은 형제를 용서해 주기 위해 되는 것이요, 또한 자기 민족을 용서해 주기 위해 되는 것이요, 가인 세계를 용서해 주기 위해 되는 것이 아닙니까?
가인과 아벨이 하나되지 않고는 부모가 복귀되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가인 아벨이 복귀되지 않고는 부모가 해방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제물적인 입장에 있는 아벨은 누구를 위해 제물을 드리는 것이냐? 가인을 위하여 드리는 것이요, 부모를 위하여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날 통일교회는 아벨적인 입장입니다. 그러면 제물을 누구를 위하여 드리느냐? 형제와 부모를 위해서 드려야 합니다. 여기에서 부모의 입장에 있는 것은 나라의 주권자요, 가인적인 형제의 입장에 있는 것은 삼천만 민족입니다. 우리의 목적은 국가입니다. 여러분 가정을 중심삼고 볼 때 여러분의 형제들은 가인의 입장인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이 여러분의 종족적 메시아라는 특권을 받은 것은 무한한 영광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종족적 메시아라는 특권적인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아무런 내용도 갖추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선생님을 의지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선생님이 민족적 승리의 터전과 세계를 위한 승리의 기반을 닦았기 때문에 여러분이 종족적인 메시아의 자리에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부모는 사랑하는 자녀들을 기반도 닦지 않은 황무지 같은 벌판에 보낼 수 없는 것입니다. 과거의 섭리시대에는 하나님이 사지(死地)와 같은 황무지에 몰아냈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되어 싸우면 반드시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이제는 이길 수 있는 때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 먼저 무엇과 하나되어야 하느냐? 세상의 부모를 중심삼고 하나되는 것이 아니라 참부모를 중심삼고 하나되어야 합니다. 참부모를 중심삼으면 아벨이 되는 것이요, 세상의 부모를 중심삼으면 가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 아벨은 타락하지 않은 복귀된 아들인 것입니다. 여기에는 사탄이 침범할 수 없습니다. 원칙이 그렇습니다.
그렇게 될 때 여러분들의 가정과 가정은 하나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한 가정을 두고 볼 때 여러분 자신들은 참부모를 중심삼고 아벨적인 입장에 서서 반드시 가인과 하나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무엇이냐? 믿음의 아들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아들딸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아벨이 해야 할 책임은 뭐냐? 즉 아벨 자신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먼저 가인을 구원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아담인 부모를 복귀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아요? 아벨이 제물을 드리는 것은 부모 대신 드리는 것입니다. 아벨은 먼저 가인을 복귀해야 되고, 그 다음 부모를 복귀해야 되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제물을 잘 드린다 하더라도 부모가 복귀되지 않습니다. 가인을 굴복시키지 않으면 부모가 복귀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연속되어 왔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도 이런 입장이었고 예수님도 이런 입장이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민족도 이런 입장이었습니다. 부모를 복귀하지 못하고는 하나님을 해방해 드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벨에게는 이중의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은 종족적 메시아의 입장에 서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님을 반대하던 그런 입장이 아닌 환영받는 이스라엘권내에 들어왔습니다. 또한 여러분은 여러분을 반대하는 부모가 아닌 참부모를 모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시대권내에 들어온 것입니다.
이 원칙을 두고 볼 때에 국가가 반대할 수 있는 권이 끊어져 나가고 참부모와 하나될 수 있는 자신이 되어 민족이 환영할 수 있는 환경권내에 들어오면 반드시 새로운 나라의 운세가 닥쳐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원리적 견해입니다. 국가를 굴복시키기 위해서는 원리적인 탕감기간을 거쳐야 합니다. 그러기에 지금가지 그 국가면 국가를 중심삼고 싸워 나온 것입니다. 그렇다고 무력적인 투쟁을 한 것이 아닙니다. 누가 더 세계를 사랑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세계를 사랑하는 나라, 그 나라가 승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반드시 세계가 이스라엘권내로 밀려 들어오게 됩니다.
선생님은 세계를 사랑하기 위해서 한국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때가 가까와짐에 따라 한국을 사랑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세계를 사랑하겠다는 것입니다. 세계를 사랑했다는 조건을 세워야 합니다. 그래야만 사탄이 세계를 대신해서 반대하는 입장에 서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금의 공산당입니다. 그들은 국가를 형성해 가지고 있고, 서로 직접적인 관계를 맺음으로써 하나의 세계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탄은 이 세계를 완전히 점령하기 전에는 대한민국을 굴복시킬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선생님이 기도한 것은 대한민국을 위해서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대한민국을 위해 기도할 때는 지나갔습니다. 이제는 세계를 위해 기도할 때입니다. 시간으로 말하면 한국을 위해 기도한 시간은 극히 짧은 시간이었습니다. 이제 선생님이 세계를 사랑하니까 세계 앞에 사탄이 반기를 드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상이 공산주의 사상입니다.
이제는 세계를 하나의 나라, 하나의 주권 밑에, 한 사람의 통치자 앞에 굴복시켜 놓아야 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여러분은 앞으로 가야 할 길을 헤아려 보고 자신이 어떤 자리에 있느냐? 완전한 하나의 기반을 만들어 사탄의 조건을 끊어 버리고 하나님과 하나되어 주체적인 입장에 섰느냐? 못섰습니다. 그러니 할 수 없이 선생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선생님을 따라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선생님을 업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선생님의 말씀은 내 말씀과 마찬가지이다. 선생님의 표준은 내 표준과 마찬가지이다' 해야 합니다. 여기에 차이가 생기게 되면 반드시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걸려 넘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목적관에 일치되지 않는 사람, 혹은 자체적으로 일치되지 않는 사람은 어떻게 될 것이냐? 끊기게 됩니다. 그 목적에 일치되지 못했다가는 다 망하는 것입니다. 완전한 탕감기준을 여러분이 제시 못 하면 어떻게 되느냐? 여러분은 끊길 수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을 다시 고립된 입장에 내세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70년대에 선생님이 여러분을 대해야 할 섭리적인 입장이요, 완전한 탕감을 요구하는 현시점에서 선생님이 여러분을 대해야 할 태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선생님이 60년대까지는 여러분을 대해 왔습니다. 제자들이 고생하는 것을 바라는 스승은 없습니다. 여러분을 고생시키는 의의는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이 민족 국가 세계를 위하여 공헌할 수 있는 완전한 주체적인 이장에 서지 못하게 될 때는 여러분은 끊기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비장한 자리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떻게 해야 되느냐? 부모 앞에 효자라면 자식을 낳아 그 손자를 부모 앞에 안겨 드려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아들딸을 낳아 안겨 드려야 하느냐? 자기 아버지보다 할아버지를 더 중요시할 수 있는 아들딸을 낳아 안겨 드려야 합니다. 자기보다 더 복받을 수 있는 아들딸이 태어나도록 해야 합니다. 하늘 앞에 더 가까울 수 있는 아들딸이 태어나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 복귀섭리가 발전되는 것입니다. 자기보다 못한 아들딸이 태어나면 망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내용을 주시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나님이 나에 대해 더 큰 기대를 가질 수 있는 내용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여러분의 가정에 멸망이 오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나라를 사랑하고 세계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들딸을 보내 주시려거든 나라를 위하고 세계를 위하는 아들딸을 보내 주시옵소서' 라고 해야 합니다. 이런 관이 서 있어야 됩니다. 그 아들딸은 나라와 세계를 위하여 이 땅에 태어났으니, 세계를 위하고 나라를 위하는 것이 그 아들딸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버이의 입장에서 해야 할 일입니다. 이것이 선생님의 생활철학이요, 신앙의 표준입니다. 사랑하더라도 그런 철학을 가지고 사랑해야지, 그렇지 않고 흐늘거리면 둘 다 망하게 됩니다. 그것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도피구가 없는 것입니다.
공장에 있는 사람들도 그렇습니다. 선생님이 공장에 가보면 피곤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그만두라는 것입니다. 이 공장(수택리의 통일산업)은 통일교회를 위한 공장이 아닙니다. 이 나라, 이 세계를 위한 공장입니다. 그러므로 정성을 드려야 합니다. 이 공장은 앞으로 발전할 것입니다. 나의 이 신념에 어긋나지 않고 일치되게 될 때는 발전할 것입니다. 내가 쓰러지는 입장에 서더라도 하나님은 반드시 도와 주실 것입니다. 이러한 생활을 여러분은 체험해야 합니다.
이 공장은 개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국가를 위하고 세계를 위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더 일하고 싶은 마음, 밤을 새워서라도 일하고 싶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 나라와 이 세계의 복귀역사가 얼마나 초조하고 시급하다는 것을 생각할 때 밥이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고생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다 흘러가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공장은 발전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두려워해야 할 일은 무엇이냐? 어떤 사람을 보게 되면 아들딸을 낳아 가지고는 선생님한테 이름을 지어 달라고 하는데 좋다 이겁니다. 이름을 지어 주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냐? 선생님이 여러분을 정성껏 대해 주는 것이 좋겠지요?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여러분이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 자신이 지금까지 나타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일 제물된 입장에서 동네방네 선전을 했다면 어떻게 되겠느냐? 원수에게 지탄을 받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제물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때가 가까와 올수록 마음 깊이 그 터전을 넓혀 결의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리하여 때가 되면 완전히 사탄세계와 손을 끊고 하나님 앞에 돌아가서 접수시킨 후에 발표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탕감복귀역사는 여러분에게 가르쳐 주고 하는 역사가 아닙니다. 말없이 다 만들어 놓고 발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돼먹지 않게 자랑을 합니다. 그렇게 자랑하다가는 다 망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들고 나와 꼬리를 치다가는 전부 망하게 된다는 거예요. 이것이 탕감원칙입니다. 그 경계선까지는 누구나 다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경계선에서 딱 사탄과의 인연을 끊어 놓고, 돌이켜 놓고, 일시에 복귀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귀역사입니다. 이름이 난다고 좋은 것이 아닙니다. 뭇사람으로부터 높임받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지극히 위험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이 자기를 가까이 해주고 축복해 주고 은사를 베풀어줄 수록 거기에는 반드시 핍박이 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밤이나 낮이나 맞고 넘어갈 것이냐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를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라를 위하여 기도하고, 세계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세계가 전부 뜻 맞게 되면 기도는 안 해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때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그때가 올 때까지 계속 기도해야 됩니다. 여러분, 지금 그렇게 하고 있어요? 기도를 하고는 왜 내 기도는 안 들어 주나 하지만 그것이 복이예요. 십년 동안 정성들이고 일생 동안 정성들였는데도 기도를 안 들어주셨다면 그것이 행복이라는 거예요. 맞지 않을 수 있는 하늘의 보호권내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발전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개인적인 탕감시대를 넘어가고, 종족적인 탕감시대를 넘어가고, 민족적인 탕감시대를 넘어가야 합니다.
그러면 그 자리까지 내가 어떻게 지탱하여 남아질 것이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1년, 2년 가다가 '아이구,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구나' 하고 불평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다 도망가라는 거예요. 그러나 이문이라는 사람은 망하지 않습니다. 다 떠난다고 해도 망하지 않습니다. 선생님이 이 길을 혼자 걸어가더라도 탕감역사를 제시할 것입니다. 여기에 있어서 대한민국이 반대하면 대한민국에 혼란이 일어나 대한민국은 망하더라도 나는 망하지 않을 것이요, 대한민국 이상인 세계가 나를 따를 것이라는 철석 같은 신념을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세계를 추구하고 그 세계를 위해 나가는 것입니다. 아직까지 뜻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지칠 수 없습니다. 아무리 고생되더라도 자기의 터전이 넓어지고 축복의 밀도가 높아진다는 것을 생각할 때 지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게 망하는 것입니까?
여러분은 앞으로 자라나는 자식들 앞에 무엇을 남길 것이냐? '나는 민족을 위하여, 세계를 위하여 산 것 밖에 남겨 줄 것이 없다' 할 때 이것이 가장 위대한 유업입니다. 물질이나 학박사의 간판이 문제가 아닙니다. '세계를 위하여 살아라' 그런 유언을 자식에게 남겨야 합니다. '너는 대한민국에서 태어났지만 대한민국 사람이 아니다. 너는 세계 사람이니 세계를 위하여 살아야 된다. 그뿐만이 아니라 하늘땅을 위해서 살아야 된다'고 해야 합니다. 이것은 천주주의입니다. 이러한 엄청난 이념을 갖고 있고, 또 듣고 알았다는 사람이 시시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세계를 복귀하는 데 있어서 자기의 아들딸 하나 희생시키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그 일가를 희생시키는 것은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여러분을 고생시키려고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여러분은 대한민국을 살릴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평화의 세계를 이룰 것 같아요? 세계를 위한 여러분이 될 때 통일의 역사가 벌어지는 겁니다. 이러한 작전을 왜 촉구하느냐? 여러분이 이런 과정을 거쳐야만 완전한 탕감조건이 성립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여러분들은 나라를 위하여 가는 길, 세계를 위하여 가는 길을 결정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 길은 어디에서부터 출발해야 되느냐? 내 개체로부터, 내 가정으로부터 출발해야 됩니다. 그러면 그 가정은 국가적인 가정이 되고, 세계적인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내 가정에 부딪히는 모든 서러움은 내 한 가정의 서러움으로 느껴서는 안 됩니다. 민족, 국가, 세계와 더불어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실감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지 않겠어요?
그러면 이제 여러분이 뜻을 사랑할 것이냐? 내 한 개체를 사랑할 것이냐? 가정을 사랑할 것이냐? 뜻 가운데서 나라와 세계를 사랑해야지, 내 개체를 사랑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간단합니다. 그런데 답은 간단하지만 그 내용의 실천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어려운 생활에 있어서 남이 10년을 가면 나는 20년을 가야겠다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10년을 간 사람보다는 20년을 간 사람이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오랫동안 그 국가의 수난의 역사를 거친 사람은 충신의 반열에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1년 동안 고생한 사람보다 2년 고생한 사람이, 10년 고생한 사람보다 20년 고생한 사람이, 20년 고생한 사람보다 생애를 바쳐 고생한 사람이 더 위대합니다. 이렇게 그 수난에 관록이 붙으면 붙을수록 그는 그 국가에 있어서 위대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천주복귀라는 이 엄청난 복귀섭리의 노정에 있어서 어떠한 분야에 머무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느냐? 시시하게 김 아무개의 아들딸을 중심삼아 가지고 팔려 다니는 그 따위 시시한 녀석들이 되기 위해서 여기 모인 것입니까? 그런 사람들이라면 며칠을 가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은 일찍 다 도망가라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뭐 여러분 보다 못해서 이런 일을 하는 줄 압니까? 선생님은 이 일을 위해서 아들딸을 버렸습니다. 부모를 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아들딸을 버린 이상의 자리, 내 아들딸을 사랑하는 것의 몇 배의 가치를 중심삼아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리를 찾기 위해서 아들딸을 버린 것입니다. 한 부모가 자기 자식을 사랑하는 몇 배 이상의 사랑을 이 세계 앞에 나누어 주기 위해 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버린다고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탕감복귀역사를 위해 하나님이 나를 세웠다 할진대, 내가 잘못하는 날에는 망하는 겁니다. 들이맞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잘못하게 되면 반드시 병신 자식을 볼 것입니다. 앞으로 두고 보면 알 것입니다. 그러기에 통일교회가 무섭다면 무서운 겁니다. 통일교회 문선생도 무섭다면 무서운 사람입니다. 세계에 없는 무서운 사람입니다. 문선생은 하나님의 심정세계로 가는 원리원칙을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선생님은 지금까지 협회장 자식도 모른 척했습니다. 안아 보지도 않았습니다. 그것은 선생님이 세계가 사랑하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아들딸들을 안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협회장은 선생님이 왜 그렇게 자기의 자식들에게 무관심했는지 모를 거예요. 또한 원필이에게도 딸이 있지만 아직까지 위해 주지 않았습니다. 왜 그러냐?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축복가정의 아들딸을 하늘나라를 이루어 놓고 안는 것입니다. 그것이 본연의 목적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민족과 나라와 하늘 앞에 충성을 한 아들이라고 내가 하늘 앞에 소개해 놓고 그 아들딸을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내 책임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아직까지 그럴 수 있는 자리에 못 나갔습니다.
생애노정에서 축복을 받아 행복의 콧노래를 부르는 것보다 억천만년의 청사 앞에 승리를 다짐할 수 있고, 그 행복을 자랑할 수 있는 후손을 남기는 것이 복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편안하게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통일교회에 왔다면 보따리 싸 가지고 가라는 거예요. 그러다가는 망하는 것입니다. 반드시 망하는 겁니다. 자식을 걱정하고 아내를 염려해 가지고는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망한다는 겁니다.
오늘날 통일교회 문선생이 지금까지 남아질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원칙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망했을 것입니다. 어느 누가 부모 형제를 사랑할 줄 모르겠습니까? 내가 평양에 가 있을 때, 이틀만 걸어가면 형님을 모셔 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라를 형님 이상 사랑했다는 조건을 세워 놓지 않고는 못 모셔 오는 것입니다. 나라를 부모 이상 사랑할 수 있는 조건을 세워 놓지 않고는 부모를 모셔 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완전한 탕감입니다. 완전한 탕감복귀라는 것입니다. 아벨이 되기 위해서는 가인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 다음 참부모를 모시기 위해서는 먼저 사탄세계의 부모를 모셔야 합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그런 역사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할머니들을 모시고 나온 것입니다. 원칙이 그렇습니다. 할머니들을 삼위기대로 묶고, 모자 협조할 수 있는 사탄세계의 세 아들딸을 세워 나온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 원칙대로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일본 구보끼 협회장도 세 할머니와 하나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간부들도 이들 할머니와 하나되어야 합니다. 이 기반에 서지 않고는 발전되지 않습니다. 원칙이 그렇습니다.
그 다음은 무엇이냐? 가인은 사탄편이 복귀될 수 있는 다리를 만들어야 되겠습니다. 아벨의 사명은 부모를 복귀하는 것이요, 가인을 복귀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평면적 도상에서 승리적 결정을 해야 합니다. 선생님이 지금까지 이 일을 해 나왔습니다. 이 할머니들이 질이 좋은 줄 알아요?
그러나 선생님 가는 길에는 그런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 할머니들은 전부 다 선생님이 부른 것이 아니예요. 영계에서 만나게 해준 사람들입니다. 찾아오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있었습니다. 원칙이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만나게 해주는 것입니다. 만나게 해주어도 책임을 감당 못할 때는 절대 안 씁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이하는 녹음이 되어 있지 않음)
아버지, 2천년 전 예수님이 유대교인과 인연을 맺어 가지고 세워야 했던 것을 오늘날 저희들이 종결 짓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버님, 오늘은 3월 들어 두 번째 맞는 안식일이오니, 이날을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이 아침 당신이 사랑의 마음으로 저희와 같이 하시어서 당신께서 저희들의 생애노정을 친히 지켜 주신다는 것과, 저희들 또한 당신께서 소망하는 세계에서 필요한 존재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 찾으시는 저희 자신들과 가정, 국가, 세계, 그리고 천주가 어떠한 것인가를 저희들은 알아야만 되겠사옵니다. 그러나 그것을 관념적으로만 알아 가지고는 아버지와 관계를 맺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오늘날 저희 자신들은 가정 국가 세계를 중심삼고 어떻게 지내고, 어떻게 관계를 맺고, 어떠한 인연 가운데서 횡적인 무대를 연결시키느냐 하는 문제에 있어 저희들이 동기가 되든가 당신이 동기가 되든가 둘 중의 하나의 인연을 갖추어야 하겠사옵니다. 그러지 않고는 당신이 바라시는 좋은 결과의 세계까지 갈 수 없는 자신들인 것을 확실히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아버지, 저희 자신들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될 때, 저희들이 아버지의 뜻 앞에 불리워 세움을 받았다 하더라도 당신의 사랑을 받을 수 있고, 당신의 마음에 일치될 수 있고, 당신의 심정에 영원히 동반할 수 있는 자신들이 될 수 있는 길을 추구해 나가야 되겠습니다.
그런 모습을 추구하게 될 때, 저희들은 악에서 출발한 자신들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옵니다. 이와 같은 흔적을 제거해 주시어서 당신의 마음과, 당신의 몸과, 당신의 생활과, 당신의 이상에 일치할 수 있는 내용을 이 시간 저희 자신 가운데서 발견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가지고 있는 속된 세상의 마음이 변하여 그와 같은 내용에 일치될 수 있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당신이 필요로 하는 선의 결과를 가져 올 수 있는 실체들이 되게 하여 주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1970년대를 맞이하여 저희들은 `승리적 통일전선'이란 표제를 내걸고 각자 걸어가고 있습니다. 70일에 가까운 기간을 지내 온 지금 저희들이 어떤 곳을 향하여 출발했고, 어떤 걸음을 걸어 왔는가를 다시 한번 반성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가 옮겨 놓는 발걸음과 저희가 하는 일들이 아버지께서 목표하신 방향과 기준에 일치되는가를 스스로 반문하고 분별하게 하시어서 자신이 그렇지 못한 자리에 있게 될 때는 당신께서 저희들을 쳐몰아서라도 반드시 아버지께서 뜻하시는 방향과 기준에 일치될 수 있고 직행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길,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지나간 360일이란 기간을 통하여 저희들이 어떤 결과의 길을 거치고 왔는가를 돌아보며 낙심하는 마음보다도 아버지께 감사드리는 마음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만천하에 당신께서 소원하시던 그 기준을 갖추었사오니 받아 주시옵소서'라고 할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될 때, 그 자리는 수고로운 자리가 아니라 기쁜 자리요, 영광의 자리가 되는 줄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한 자리는 자기의 생각 없이 우연하게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저희들이 확실히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목적하는 그 자리까지 가기 위해서는 마음과 몸으로 다짐하고, 생활로 다짐하고, 환경으로 다짐해야 하겠으며, 원수와 투쟁하여 승리할 수 있는 기반 위에 서야 하겠사옵니다. 그러지 않고는 목적하는 곳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하여 주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존엄하신 아버지께서 그 능력과 권한으로 저희와 같이하고자 하더라도 저희의 마음이 아버지의 마음과 일치가 되지 않고, 아버지께서 기뻐하실 수 있는 마음의 자세를 갖추어 새로운 자극을 일으킬 수 있고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아들딸의 모습이 되지 않고는 아버지와 함께할 수 없사오며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세계에도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루 24시간 동안 당신을 얼마나 사랑했고 당신과 얼마나 동반했고 얼마나 동행했는가를 생각하게 될 때, 저희들은 이 땅 위에 악한 자체로 태어난 자신을 중심삼고 생활하는 시간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옵니다.
하늘이 저희에게 `언제 나와 관계를 맺었으며, 언제 나를 모셨고, 언제 내가 섭리 해 나가는 데 동행하고 봉사했느냐' 를 묻게 될 때, 저희들은 회개하는 모습으로 아버지 앞에 다시 한번 용납을 구하지 않을 수 없는 부족한 각자의 모습임을 알게 되옵니다.
아버님, 역사과정을 통하여 오늘 이 모임에 찾아오신 당신이라 할진대 당신께서는 진정 불쌍하신 아버지인 것을 저희들은 또다시 느끼게 되옵니다. 당신께서 저희에게 모든 전체를 의탁할 수 없는 자신들이요, 당신께서 저희에게 바라시는 소망의 기점을 발견할 수 있는 모습이 되기 위한 아무런 무엇도 갖지 못한 자신들임을 느끼면 느낄수록 아버지 앞에 민망한 모습들인 것을 다시 한번 직고해야만 되겠습니다.
역사과정을 통하여 부족하였던 선조들을 대해 참아 나오신 아버지를 생각하게 될 때, 저희들 또한 한 시간을 기쁨과 영광으로 맞을 수 없고, 하루 한날도 기쁨의 자세를 갖추고 아버지 앞에 승리적인 자극을 일으킬 수 없는 자신이 된 것을 무한히 통탄할 줄 아는 자신들이 되어야만 하겠습니다.
저희들은 아버지 앞에 면목이 없고 체면이 없고 위신을 세울 수 없는 모습들임을 느끼게 될 때, 체면과 위신을 세울 수 있는 사람을 찾아 수고해 나오신 아버지가 얼마나 불쌍한 분이신가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기에 저희들은 자신을 붙들고 아버지의 소망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 새로이 결의할 수 있는 모습이 되어야겠고, 통곡이라도 하면서 저희들을 버리지 마시고 동행해 달라고 간구해야 되겠사옵니다. 오늘 저희들은 그러한 입장에 있는 것을 다시 한번 느껴야 되겠사옵니다.
아버지, 이 자리에 모인 당신의 자녀들의 마음속에 찾아오시옵소서. 저희들, 아버지를 흠모할 수 있는 간절한 마음의 터를 갖추고 있지 않사옵니까? 이제 저희들은 마음에 아버지를 모시고도 돌아서는 슬픈 자세를 갖게 될까 봐 두려워해야 되겠습니다.
진정한 의미로 아버지를 모시고 온갖 충성을 다하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있습니까? 무한한 사랑과 자비와 긍휼과 용서로써 그들을 축복의 은사권내에 품어 주시옵소서. 당신의 높고 귀하신 사랑과 마음을 무한히 느낄 수 있게 축복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시간 아버지의 뜻을 염려하면서 남기신 그 뜻을 위해 싸움터를 향하여 달려가는 용사, 자기의 모든 전체를 무한히 투입해서 싸움에 필요한 장비를 갖추기 위해 노력하는 당신의 용사가 있사옵니까? 아버지, 그들을 지켜 주시사 그 나라와 그 세계를 지킬 수 있는 하나의 대표자로서 축복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당신의 거룩한 제단에서 뭇 생명을 위하여 희생의 제물을 드리는 제사장의 직책을 짊어진 당신의 아들딸들이 있습니까? 또한 남이 자는 시간에 정성을 들이고, 남이 즐기는 시간에 고난의 노정을 가고 수난의 길을 걸으면서도 그 길을 자기가 가야 할 길로 알고 민족과 인류의 배후에서 제단의 터전을 넓혀 나오기 위해 남이 모르는 가운데서 수많은 수난에 부딪혀 나온 당신의 아들딸이 있습니까? 아버지, 그들을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그들이 세상의 뿌리이며 그 뿌리의 영향을 받아 세계는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그들 스스로가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남이 알아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아버지께서 감사할 수 있는 마음, 오히려 누가 알아주는 것을 민망하게 여기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시옵소서. 당신과 일치될 수 있는 그 자리는 이와 같은 인연을 통하지 않고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 남이 모르는 가운데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아버지를 모실 수 있는 아들들이 되고 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오늘은 안식일이옵니다. 남한 각지에 널려 당신의 제단을 지키고 있는 자녀들을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은 그 누구를 믿기 위해 나온 무리들이 아니옵니다. 그 어떤 사람을 따라가는 무리들도 아니옵니다. 오직 아버지와의 인연과 아버지께서 주신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모인 무리이옵고, 아버지의 뜻을 위하여 아버지 앞에 바쳐지기를 각오한 무리이오니 이런 저희의 몸 마음들을 받아 주시옵소서.
당신이 소원하시는 대로 적진을 향하여 진군할 수 있는 결의가 저희 각자의 마음에 솟구치게 하여 주시옵고, 저희들을 격려하시어서 아니 갈래야 아니 갈 수 없는 스스로의 모습이 될 수 있도록 아버지께서 직접 주관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주체가 완전하게 될 때는 대상도 반드시 완전한 기준에 서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천리의 원칙이 아니었습니까? 아버지께서 주체가 되시고 저희는 대상이 되었기 때문에, 여기에 아무리 사탄의 방해가 있다 하더라도 당신의 강한 주체적 권한으로 저희의 심정을 아버지와 일체화시키시옵소서. 그리하여 남한 각지의 모든 식구들이 하나됨으로 말미암아 삼천만 민족의 해원성사를 이루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세계에 널려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누가 책임지겠습니까? 보잘것없는 소수의 통일교인들이 이미 수십개 국가에 파견되어 당신의 뜻을 위해 몸부림치고 개척자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 제물된 노정을 걸으면서 밤낮으로 이곳을 그리워하고 있사오니, 아버지여, 부디 그들의 마음을 위로해 주시옵고, 권고해 주시옵소서. 당신의 자비의 은사가 그 자리에 같이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사람을 흠모하는 자가 아니라 아버지를 흠모하는 자요, 이 고을을 흠모하는 자가 아니라 아버지의 나라를 흠모하는 자라 되게 하시옵소서. 또한 이 민족을 위하여 충성할 때에 이 나라 사람들을 위해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소망의 승리적인 아들딸들을 위하여 충성하는 모습들이 되게 하시옵소서. 아버지께서 이런 아들딸들이 외로울 때 흘리는 눈물을 씻어 주시는 위로의 주인이 되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무한히 외로운 그들을 위로하여 주시옵고, 남모르는 가운데에 있는 적적한 그들과 언제나 함께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그들에게 내일의 소망을 다짐하면서 어려운 하루하루의 생활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되시어 부디 그들이 아버지 앞에 찬양받을 수 있는 모습이 되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혹 그들이 아버지의 뜻 앞에 협조하지 못하고 아버지를 슬프게 하여 그 나라와 그 민족 앞에 남길 수 있는 무리가 못 된다고 생각될 때에도 그들과 함께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은사와 아버지의 역사, 그리고 아버지의 은혜로 그들의 생활환경을 지켜 주시옵고, 아버지를 모시고 살고 있다는 사실을 실증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 당신은 지금까지 보잘것없는 통일의 무리를 돕기 위하여 얼마나 수고하셨습니까? 이들이 가는 길이 세계 인류를 해방하기 위한 길이기에 오늘 여기에서 끝낼 수 없는 당신의 처지와 입장이 있는 줄 아옵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당신은 언제나 가야만 할 당신이요, 싸움해 나와야 할 당신이요, 개척해야 할 당신이요, 싸움해 나와야 할 당신이요, 개척해야 할 당신이기에 언제나 불쌍하시다는 것을 알게 되옵니다.
또한 불쌍한 스승을 따르는, 처처에 널려 있는 외로운 무리들을 지키시옵고, 권고하시옵고, 그들의 몸 마음에 천 배 만 배 당신의 심정이 넘쳐 흐르게 하시옵소서. 당신의 무한한 은사에 잠기고 말씀에 동화되어 당신의 마음을 느낄 수 있게 하시옵소서. 본연의 심장이 폭발될 수 있는 당신의 적극적인 주관의 역사가 같이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앞으로 세계 처처에 보내시어서 소망의 한날을 이루시옵소서. 그리하여 민족의 해방과 더불어 시대의 해방을 이루어 제3이스라엘의 특권적인 승리의 깃발을 들고 아버지를 찬양할 수 있는 그 나라가 오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지상에 천국이 이루어질 그때를 생각할 때에 저희들은 천국이 되기를 바라기 전에 천국이 이루어질 그때를 생각할 때에 저희들은 천국이 되기를 바라기 전에 천국을 위하여 싸울 수 있는 각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늘에 대하여 호소하기 전에 자기 자신이 충성하지 못한 것을 반성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고, 후대에 남길 수 있는 복귀의 터전을 아버지 앞에 자랑하며 그것을 유럽으로 남겨 주고 갈 수 있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니다. 이것을 위하여 기도하는 수많은 무리들이 있사오니 이것을 염려하고 사는 길에서 그들이 빚지지 말게 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도 먼 거리에 있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이곳을 찾아 왔사옵니다. 수많은 나라의 국경을 넘으면서 그리운 고국을 찾아왔으니, 부디 그들이 당신의 마음과 일치하여 오늘의 보람과 내일의 소망을 갖출 수 있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돌아가더라도 다시 올 수 있는 그날을 친히 당겨 주시옵소서. 또 물심양면으로 수고한 수많은 사람들에게 천 배 만 배 축복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오늘 하루도 복되게 하여 주시옵고, 이 한 달, 이 한 해가 복되게 하여 주시옵고, 이 70년대가 복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통일의 깃발을 들고 가는 행렬에서 행군의 나팔소리와 더불어 승리의 영광을 찬양할 수 있는 함성을 천지에 드높일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당시께서 찾고 싶은 민족이 있사오면 저희들을 보내 주시옵고, 부르고 싶은 아들딸이 있사오면 저희들을 보내주시옵소서. 아버지의 소원을 어서 속히 성취하시어서 천세 만세 영광 받으시옵소서.
아버지께서 자녀들을 품으시어 자녀의 나라를 따로 세워 주셨음을 감사드리옵니다. 거기에 축복의 자녀는 축복 자녀로서 기쁨을 느껴야겠사오니 아버지께서 축복의 주인으로 군림하시옵소서.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남아진 때와 남아진 시간이 저희들을 부르고 있고 수많은 인간의 영혼들이 저희들을 찾고 있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저희의 모든 것을 아버지 앞에 거룩하게 바쳐 드릴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오늘도 이 아침과 하루를 지켜 주시기를 바라오며 모든 말씀 참부모의 이름으로 간곡히 아뢰었사옵니다. 아멘.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하늘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적습니다. 물론 그 명사는 알고 있겠지만 그 내용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또 현실이라고 하면 우리가 이 가운데서 살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 부딪히는 모든 인연과 환경을 벗어날 수 없는 우리 자신이 되어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에 대한 자극은 누구나 다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나 인간들이 계획하는 것이 이루어지게 하려면 중요시해야 할 것이 현실입니다. 승패의 경정도 현실에서 되어지는 것이요, 새로운 결의나 희망도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어떠한 뜻도 현실을 무시하고는 출발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하나님 자체에게만 필요한 것이라면 그 뜻은 오늘날 우리 인간과 관계를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 뜻은 현실적인 인간들과 관계를 맺어 가지고 이루어야 할 뜻이기에 하나님은 현실 무대에 살고 있는 인간과 더불어 관계를 맺고 나오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현실이 연이어져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날이 되고, 날이 지남에 따라 달이 되고, 달이 지남에 따라 해가 되고, 해가 지남에 따라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과거를 두고 보더라도 그 과거는 어느 한때의 현실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므로 한 직선상에서 볼 때 미래도 앞으로 올 수 있는 현실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과거나 현재, 또한 미래에 있어서도 역시 현실적인 기준을 연결시켜야만 모든 인연이나 관계가 결정되고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아무리 절대자이시며 권한이 많으신 분이라 하더라도 이 땅과 더불어 관계가 있고 인연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또 그 인연은 반드시 현실적인 시간 과정과 관계 맺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생각하게 될 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우리의 현실 생활과 하나님의 뜻, 수습해야 할 세계 정세, 대한만국이 바라는 정책, 혹은 수많은 국가의 위정자들이 해야 할 세계적인 정책 등, 이 모든 것이 현실의 과정을 중심삼고 결정되지 않고는 새로운 일이 벌어질 수 없다는 것을 누구나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역사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흠모를 받은 위인이나 종교의 지도자, 혹은 사상적인 지도자가 있다 하더라도 그들 또한 어는 한 때 소망을 중심삼고 현실의 과정과 관계를 맺지 않고는 그들이 소망하거나 추구하던 목적을 성사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위대한 세계적 지도자가 있다 하더라도 그 지도자가 현실과 더불어 인연을 갖출 수 있는 내용을 얼마나 잘 맺느냐에 따라 그 사람이 역사적인 인물이 되느냐 못 되느냐 하는 것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하나님의 섭리는 우연한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과정을 통해서 그 내용이 결정되고 그 관계와 인연이 맺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것을 결정지을 수 있는 주체적인 존재는 누구냐? 현실에 살고 있는 인간입니다. 자신을 중심삼고 볼 때에 자신이 아무리 못나고 부족하다 할지라도 자신은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현실적인 기점입니다. 자신이 하나의 기점이 되어 역사가 연결되고 섭리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두고 볼 때, 이것이 크나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섭리의 뜻은 반드시 어떤 초점을 중심삼고 현실적인 무대에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현실적인 무대는 어떤 과정을 통해서 점점 발전해 나가느냐? 발전해 나가려면 수많은 현실적인 조건이 전개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의 사람이 되고, 이 하나의 사람이 초점이 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그와 관계를 맺고, 그 관계 맺은 전부가 현실에서 관계를 맺게 되어 역사는 발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두고 볼 때, 이와 같은 입장에 선 여러분들은 하나의 현실적인 존재로서 뜻과 더불어 관계를 맺어야 하며 시일이 가면 갈수록 그 관계는 높아지고 넓어지고 깊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원리적으로 보면 개인복귀, 가정복귀, 종족복귀, 민족복귀, 국가복귀, 세계복귀라는 엄청난 내용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복귀라는 것은 자기를 중심삼아 가지고 자기의 생활무대에서 관계를 맺지 않고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탕감복귀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냥 그대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 대가의 비중이 얼마나 크고 작으냐에 따라 현실의 자기를 중심삼고 뜻의 비중이 얼마나 크게 관계 맺어지느냐 작게 관계 맺어지느냐 하는 문제가 좌우되는 것입니다.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어떤 개인을 보더라도 자신이 중요하게 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위대하고 큰 사람이 되고 위대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이런 과정에서 얼마만한 내용을 연결시키느냐가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그 사람이 얼마만큼 큰 역사적인 인물이 되고 섭리도상에 필요한 사람이 되느냐 하는 문제가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현실과 관계를 맺고 있는 개체를 중심삼고 볼 때, 그 개체가 하나님의 뜻을 중심삼고 국가에 관계를 맺고 있느냐 세계에 관계를 맺고 있느냐의 차이에 따라 그 개체의 존재가치가 결정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렇게 볼 때, 그 관계가 넓으면 넓을수록 그에 비례하는 탕감조건을 제시해야 합니다. 그런 인물은 국가가 탕감조건을 제시하기 이전에 그 국가를 대신하여 탕감조건을 들고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혹은 가정이면 가정 전체가 탕감조건을 제시하기 전에 그 가정을 대표하여 탕감조건을 제시하지 않으면 그 가정을 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의 세계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 세계 자체가 탕감조건을 제시하기 전에 세계를 대표할 수 있는 한 사람이 탕감조건을 제시하겠다고 하는 결심을 하지 않고서는 세계가 탕감복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땅 위에 오시는 주님이 먼저 해야 할 것이 무엇이냐? 다시 말해서 하늘의 뜻을 중심삼고 현실무대에서 세계를 구하기 전에 그분이 행할 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현실과정에서 세계 이상을 대표할 수 있는 내용을 가지고 이 현실세계와 인연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아무리 크나큰 세계적인 내용을 갖고 있고, 책임을 수행할 사명을 갖고 왔다 하더라도 그 사명의 출발을 볼 수 없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를 탕감시키기 위하여 오시는 그분에게는 세계 자체를 탕감시키기 전에 자기 자신이 세계적 탕감의 내용을 홀로 짊어지고 탕감을 시켜줄 수 있는 주체성을 어떻게 확대하느냐 하는 것이 더욱 큰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오늘날 통일교회를 중심삼고 볼 때, 통일교회가 이 민족의 해방을 부르짖고 세계의 해방을 부르짖기 전에 해야 할 것이 무엇이냐? 이 민족 자체에 대한 탕감의 내용을 통일교회 자체가 짊어질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또 통일교회의 한 교인으로서 통일교회를 끌고 나가고 통일교회의 발전을 도모하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 국가면 국가가 탕감조건을 제시하기 전에, 교회면 교회가 탕감조건을 제시하기 전에 자기 스스로 그 탕감조건을 제시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뜻과 더불어 하나되어 앞으로 세계를 구할 수 있습니다. 세계를 구하려는 자리는 세상적인 기준에서 보면 정상적인 자리가 아닙니다. 그러니 현재의 비정상적인 자리에서 정상적인 자리를 갖추기 위해서는 반드시 소모과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현재 대한민국이 경제부흥회를 부르짖고 있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이 중진국가나 선진국가의 수준까지 올라가기 위해서는 그 배후에 막대한 경제적인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수준에 올라가려면 그에 비례하여 탕감의 조건이 투입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현실적인 입장에서 불가피한 것입니다.
세계를 구하는 대한민국이 되기 위해서는 대한민국 자체가 세계를 위해 탕감할 수 있는 입장에 서야 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무엇이 문제냐? 삼천만 민중 개개인이 대한민국을 대신하여 세계로 갈 수 있는 탕감조건을 어떻게 제시하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이것이 크나큰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계를 탕감복귀시킬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하나님께서는 세계를 탕감복귀시킬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계 전체를 위하여 탕감시킬 수 있는 내용을 지니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지니고 계신 분이기에 주체적인 입장에서 땅 위에 상대적인 탕감역사를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를 중심삼고 여러분들이 국가와 민족을 해방시켜야 할 책임이 있다 할진대는 국가와 민족이 탕감조건을 제시하기 전에 여러분 자신들이 국가와 민족을 대신하여 탕감조건을 제시할 수 있는 주체적인 입장에 서야 합니다. 그럴 수 있는 여러분이 되느냐? 이것이 더욱 큰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뜻 앞에서 축복을 받고 싶고, 사랑을 받고 싶고, 훗날 후손들로부터 영광의 한날을 맞이했던 선조라고 칭찬 받고 싶은 마음이 어느 누구에게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럴 수 있는 내 자신이 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살고 있는 현실적 환경을 그냥 그대로 탕감의 내용으로 제시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냉철히 비판하지 않을 수 없고, 분석하지 않을 수 없고, 결단 짓지 않을 수 없는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통일교회의 운명을 짊어지고 가야 할 우리들의 입장입니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현실을 중심삼고 얼마만큼 심각한 자리에 들어가야 되느냐? 하나님 대신 오늘날 이 죄악의 세상을 탕감복귀해야 하는 입장에 서기 위해서는 비록 하나님과 우리가 주체와 대상으로 입장은 서로 다를는지 모르지만 그 감정에 있어서는 동반할 수 있는 기준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귀섭리의 뜻을 추진시켜 나가는 하나님의 간곡한 사정과 뜻과 하나되어 최일선에 서서 승리의 기반을 닦아야 합니다. 그러나 언제 여러분이 하나님의 심정과 일치된 때가 있었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순간순간을 거쳐서 만천하에 들고 나와 자랑할 수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할진대는 이념적으로는 하나님과 관계되어 있을지 모르지만 현실적인 입장에서는 관계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현실 문제를 중심삼고 역사의 흐름과 더불어 주류된 입장에 서서 이것을 해결짓기 위해서 시대에 따라 사람을 투입하셨는데도 불구하고 투입된 사람들이 현실무대에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해결기점을 마련하지 못한다면 뜻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야곱을 두고 보면 그는 에서에게서 축복을 빼앗고 하란 광야에서 21년 동안을 생활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거기에 머무는 동안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발전했느냐? 발전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야곱이 21년 동안 현실무대를 돌고 돌다가 가야 할 방향을 찾고 에서를 굴복시킬 수 있는 현실적인 해결점을 갖추었기 때문에 거기에서 비로소 승리한 이스라엘 민족의 권한이 출발된 것을 우리들이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미루어 볼 때, 하늘의 뜻을 대하는 우리 자신에게 있어서도 불가피하게 현실적인 무대를 중심삼고 결정지어야 할 각자의 운명이 지워져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것은 현실적인 시간과 순간을 중심삼고 연결됩니다. 그러니 똑딱하는 순간이 문제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은혜를 체험했겠지만 은혜는 똑딱하는 순간에 받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한 순간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전등을 두고 말하게 된다면 이것은 청평의 발전소에서 인연된 것입니다. 이것이 인연되기 위해서는 물의 낙차로 터어빈을 돌려 발전기가 돌아감으로써 발생한 전기가 송전소를 통해 여기까지 들어오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여기까지 들어와서 접촉되는 것은 현실입니다. 스위치를 켜는 순간 불이 반짝하는데 이 순간이 전기로서의 최종의 결과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비로소 관계가 맺어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전기가 있다 하더라도 이런 과정이 없다면 우리 인간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는 것인데, 스위치를 누르는 그 순간 비로소 현실적인 관계를 중심삼고 인간과 인연이 맺어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발전소와 같다면, 중간과정이 없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직접 우리에게 오지 않을 것입니다. 중간 과정이 필요한 것 같이 영계의 수많은 선지선열들이 협조를 해야 여러분의 마음과 몸에 올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누가 직접 접선시키느냐? 누군가가 뜻과 더불어 접선시켜 줄 때가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현실적 입장에서 연결되게 될 때에는 뜻과 더불어 연결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아버지의 뜻을 염려해야 합니다. 은혜는 자기를 염려할 때 오는 것이 아닙니다. 뜻에 일치되어 나라를 사랑하고 세계를 사랑해야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금까지 섭리해 나온 기준과 뜻에 일체가 되어 강한 힘으로 현실에 부딪히게 되면 여기에 새로운 인연이 맺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자신이 걸어 나온 생애노정을 전부 다 청산 짓더라도 지금까지 통일교회를 믿고 나온 기간만은 잊을 수 없어야 합니다. 영원히 남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 한 때는 자기를 중심삼은 기간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수년 동안 뜻을 따라 나왔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엄벙덤벙한다면 세월을 따라 흘러가 버리는 것입니다. 이미 가 버린 세월은 다시 올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심각하게 뜻을 파고 들어가 흘러간 세월을 도로 가지고 와야 되겠다고 하는 입장에 서 보았습니까?
오늘날 우리가 하루 24시간 중에서 시간적으로 얼마나 뜻을 중심삼은 생활을 해보았으며, 얼마나 뜻을 현실화시켜 생활해 나갔으며, 얼마나 뜻의 필요성을 느끼며 이것을 추진해 나갔느냐를 생각해 볼 때, 과연 내가 그런 시간을 몇 시간이나 가져 보았습니다? 자기 자신이 생명과 더불어 뒤넘어치는 한때가 필요한데, 자기의 오관이나 이목구비를 통해 느껴지는 모든 감각이나 직관, 혹은 관념 가운데 잊을 수 없는 순간이 이 순간이라 할 수 있는 시간을 얼마나 가져 보았습니까?
여러분들 중 은혜 생활을 하는 사람은 보이는 모든 만물이 옛날과는 다르게 느껴질 것입니다. 모든 것이 새롭게 느껴질 것입니다. 같은 것인데도 아침에 보아도 새로운 것이요, 저녁에 보아도 새로운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거기에 하늘의 은사가 물결쳐서 접선되게 될 때에는 입체적인 신비성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리에서 자아를 자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 한 석가모니의 말처럼 무한한 가치를 지닌 자기의 고귀성을 찬양할 수 있는 입장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은 순간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뜻을 따라 나온 여러분들 가운데 과거의 생활을 회고해 보며 그때가 좋았다고 할 사람이 있습니까? 과거가 좋아 돌아가고 싶다는 사람이 있습니까? 통일교회에서 오래된 사람들 중에는 60년대가 좋았다고 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과거의 무엇이 좋았습니까? 자기 개인을 중심삼고는 좋았을지 모르지만 환경을 중심삼고는 좋지 못했던 것입니다. 좋다는 것은 개인의 특정한 한계권내에서 좋은 것이 아니라 보편타당한 입장에서 전체가 하나된 관계를 지닌 자리에서 좋은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민족적이요, 국가적이요, 세계적인 것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만 좋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좋다고 할 수 있는 영원한 기준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좋지 않은 환경이 온다 하더라도 반드시 그 환경에 적응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공부하여 학박사의 학위를 받았다 하더라도 그 학위 자체가 귀중한 것이 아닙니다. 현실적인 입장에서 보다 가치적인 내용을 어떻게 지니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지금까지 우리가 걸어온 과거를 생각해 볼 때, 우리는 어느 한때 그럴 수 있는 순간을 가졌습니까? 그럴 수 있는 순간이 연결 되지 않고는 현실에 우리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루는 초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하루의 기쁨이라는 것은 순간의 어떤 인연에 부딪혀서 그 인연과 하나될 수 있는 자리에서 오는 것입니다. 혼자 있는데 기쁨이 오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상대기준을 중심삼고 맞부딪쳐서 안팎과 상하가 서로 바꾸어질 수 있고, 서로가 도울 수 있는 자리에서 기쁨이 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여러분이 어느 한 때에 현실적인 내용을 지니고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데 그 현실적 내용 가운데에는 개인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요, 가정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요, 국가, 세계가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 기반 위에 서야 하나님께서 개재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날까지 이 지상에 왜 천국이 이루어지지 못했느냐? 여기에는 하나님과 더불어 현실무대를 영원히 이끌고 갈 수 있는 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며, 그럴 수 있는 하나의 가정이 없었기 때문이며, 그럴 수 있는 하나의 민족과 국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국을 이룰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어요?
대한민국이 영원히 서기 위해서는 대한민국 사람이 있어야 하며 대한민국을 이끌고 나갈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됩니다. 또한 자체내에 역량이 있어야 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영원히 존재하기 위해서는 미래에 연결시켜 줄 수 있는 역량을 자체내에 보유하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현실에 처해 있는 여러분 자체를 중심삼고 어찌하여 하나님께서는 이 땅 위에 있는 여러분 개개인과 함께할 수 없느냐를 생각해 본다면, 그것은 여러분 자신이 순간을 통하여 역사적인 인연을 연결시킬 수 있는 내용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통할 수 있는 순간만 없어지면 모든 것은 슬픔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아요?
세상만사가 그렇습니다. 만났다 헤어지는 시간이 짧으면 짧을수록 원통해지는 것입니다. 슬픔을 자아내는 자극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 시간의 기준이 바라는 것은 영원한 행복입니다. 우리는 영원을 중심삼고 사랑을 추구하고 영원한 사랑을 중심삼고 영원한 행복을 추구합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주체이십니다. 그러면 대상으로서의 여러분들은 이 땅위에서 영원한 존재와 더불어 현실을 넘어갈 수 있는 개체가 되어 있습니까? 그럴 수 있는 개인, 그럴 수 있는 가정이 있게 되면 그 개인과 그 가정은 영원한 역사를 거쳐서 그런 관념을 가진 민족을 건설할 수 있을 것이요, 그 민족은 그런 국가를 건설할 수 있을 것입니다.
통일교인들이 세상 사람들과 다른 것은 그러한 관념과 사상으로 일치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심정통일, 말씀통일, 행동통일, 이념통일의 문제는 천년 전의 통일교회 사람이나 천년 후의 통일교회 사람이나 같다는 것입니다. 지닌 바의 내용이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시간성을 초월하여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의가 주체적인 내용을 가지고 현실을 언제나 리드해 나가면 세계를 지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바라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떤 것을 요구하실 것이냐? 여러분 자신이 현실에 있어서 영원토록 유지할 수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기를 바라십니다. 여러분은 생활권내에서 그 관계를 활용하여 하나님의 개재할 수 있는 환경을 넓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맺어진 그 가치는 소모가 되어 보급해 주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점점 발전해 나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뿌린 씨가 싹이 나와 열매를 맺어 가지고 번식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하나의 핵심적인 기쁨의 자극을 통해 환경권내의 모든 여건을 흡수하여 발전해야 합니다. 그런 자리에서는 하나님을 보고 떠나라고 해도 떠나시지 않을 것입니다. 어떠한 발전적인 요인을 거쳐 가지고 시간과 현실적 무대를 타개해 나간다 할진대는 하나님이 떠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 품에 들어옵니다. 또, 들어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현이 가는 길은 따로 있습니다. 충신이 가는 길이나 효자, 열녀들이 가는 길은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나 가는 길이 아닙니다. 수단과 방법만으로는 갈 수 없습니다. 성현의 길은 하나님을 일심일체로써 모시지 않고는 갈 수 없습니다. 또 효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느 순간이나 어느 환경이라도, 아무리 현실적 내용을 지닌 순간이라도 일체된 마음을 가지고 넘어가야 합니다.
국가가 발전할 수 있는 형태를 갖추려면 국가의 주권을 중심삼고 국민이 문의하는 입장에 서야 합니다. 이런 주체성을 가진 국민은 발전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자기 나름대로의 주체성을 가진 국민은 그 나라를 퇴보시키는 국민밖에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 앞에 있어서 먼저 세움 받은 아담은 성인(聖人)이 되어야 했습니다. 예수님도 성인(成人)이 아니라 성인(聖人)입니다. 나라를 중심삼고 볼 때는 하나님을 군왕으로 모셔야 하며, 가까이로 볼 때는 어버이로 모셔야 합니다. 또한 주체와 대상의 관계에 있어서는 신부의 입장에서 신랑으로 모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인은 하늘을 중심삼고, 충신은 군왕을 중심삼고, 효자는 부모를 중심삼고 일체의 모든 것을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충, 효, 열이란 이름도 저절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리에 동반하기 위해서는 의(義)를 통과해야 합니다.
의는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군신이 군왕에게 미래의 계획을 세워 가지고 와서 이렇게 하겠다고 할 때, 군왕은 그것이 자기의 마음에 맞더라도 `오냐 그렇게 해라'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계획이 있다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그 동기는 주체인 군왕이 되어야 합니다. 공산 국가에 있어서, 특히 북괴를 보더라도 그 측근자를 전부 숙청하는 이유는 무엇이냐? 자기보다 앞설 것 같기 때문입니다. 주체적인 권한을 새로운 각도에서 가지고 나오기 전에 잘라 버리는 것입니다.
천리 원칙을 두고 볼 때도 반드시 주체적 내용을 중심삼아 가지고 관계를 맺어 발전시켜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발전시키는 데는 주체를 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주체가 악당일 때에는 그 세상이 망한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런 입장에서 모순이 발생하면 이것을 극복하기 위한 투쟁이 벌어져 가지고 지금까지 발전해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선한 절대적인 중심이 있다 할진대는 이분과 하나되면 선의 주체 앞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선은 보호의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통일된 절대적인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선은 이랬다 저랬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양심이 바르다는 것은 가다가 꼬부라지지 않고 하나의 목적을 관철하는 것을 말합니다. 선은 목적이 둘로 되어서는 안됩니다. 반드시 하나라야 되는 것입니다.
선한 사람은 그 앞에 죽음이 다가오더라도 뚫고 넘어갑니다. 환경에 이끌려 가는 사람들은 선한 사람의 반열에 동참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외롭고 어려운 환경이 다가온다 하더라도 그것을 사명으로 알고 타개해야 합니다. 운명으로 알고 타개하는 사람보다는 사명으로 알고 타개하는 사람이 그 시대의 개척자가 되고 역사적인 인물이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팔자가 이렇게 타고났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가 수행할 책임을 사명으로 알고 소화시킬 수 있는 자만이 그 시대의 개척자가 되고 역사적인 인물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왜 우리와 같이하시지 못하는가에 대해서 느끼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현실적인 나를 부러워하시는지, 또 나를 떠나서는 앞으로 찾고자 하시는 가정, 국가, 세계와 관계 맺지 못하는데 무엇 때문에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시간이 내 자체에서 이루어지지 않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현실적인 과정에 있어서 어떠한 순간을 기준삼고 하늘과 인연 맺었다 하더라도 그 순간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거기에 시간을 가해 가지고 날을, 날을 가해 가지고 달을, 달을 가해 가지고 해를 거쳐야 합니다. 그리하여 국가를 거쳐 세계를 넘어서야 합니다. 성현이 가는 길이 그러했기 때문에 여러분은 성현지도(聖賢之道)를 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바라시는 것은 무엇이냐?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국가 자체가 탕감조건을 세워 제시하기 전에 개인으로서 국가를 대신하여 탕감조건을 제시할 수 있는 사람을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체성을 지니고 민족 국가를 영원히 이끌고 갈 수 있는 조건을 현실적으로 제시하고 증거해 가지고 그것이 만민의 행복이 될 수 있고, 만민의 기원이 될 수 있고, 승리의 요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것을 보여 주는 데는 막연하게 미래에서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보여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탕감, 탕감을 해야 합니다. 탕감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국가를 위하여 탕감조건을 세우려거든 국가를 대신해 탕감조건을 세워야 합니다. 교회를 위하여 탕감조건을 세우려거든 교회의 모든 수난을 책임져야 합니다. 제물되는 자리는 수난을 책임져야 하는 자리입니다. 사람이 제물이 되면 소나 양이 제물되는 것은 비교도 안 됩니다. 사람이 최고의 수난의 대가로 생명을 걸고 피를 흘려야 합니다. 이렇게 해야 역사의 과정에 남아질 수 있는 발전의 요인이 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지금까지 이 세계의 역사는 전생사로 엮어져 나왔습니다. 그렇지만 수많은 민족과 민족이 전쟁을 함으로 말미암아 과연 퇴보만 했느냐? 아닙니다. 한편으로는 망하는 것 같지만 전쟁으로 말미암아 한편으로는 새로운 각도에서 출발할 수 있는 여건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날 대한민국의 통일교회는 사상계나 종교계의 새로운 분야에서 투쟁의 조건을 제시한 것입니다. 인간은 보다 귀할 수 있는 현세를 찾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는데 그 현세가 우리로 말미암아 증거되었다 할진대는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통일교회는 문제가 되어 왔던 것입니다.
사람이 많은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한 사람이 문제입니다. 수가 문제가 아니라 역사를 움직일 수 있는 한 사람이 문제인 것입니다. 지금 세계의 정책을 좌우하고 있는 사람은 30여명 이내입니다. 이렇게 한 사람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기독교를 중심삼고 볼 때, 역사를 움직여 온 사람은 누구냐? 예수님입니다. 기독교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을 왜 믿어요? 예수 믿고 천당 가자구요? 천만예요. 그래 가지고는 천당 못 갑니다. 기독교인들은 `나는 어려운 것을 다 그만두겠으니 당신이 어려운 것을 책임져 주시오'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좋아하시겠습니까? 만약 하나님께서 좋아하신다면 천리가 틀린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하는 것을 좋아합니까? 좋아하지 않지요? 기독교인들은 `복은 내가 받고 화는 당신이 받으시오' 한다는 거예요. 그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세상의 인격자라면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무슨 생각을 하거나 무엇을 한다고 할 때 서로가 협력하면 이익을 보는 겁니다. 그런데 물건을 나누는 데에 있어서 하나가 남았다고 할 때 서로가 가져야 한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남은 것의 가치를 좌우할 수 있는 것이 없다면 그 물건을 가지려는 사람의 인격이 문제가 되는 겁니다. 그것을 서로 갖겠다고 싸움을 하게 될 때는 제 3자에게 부탁하여 판결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 가운데서 한 사람이 `나는 양보하겠소' 하게 될 때 갖는 사람은 지는 것이요, 갖지 않는 사람은 이기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어떤 사람이 보다 인격자냐? 양보하는 쪽이 인격자입니다. 둘 다 인격자라면 서로 갖지 않겠다고 싸워야 합니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도리가 민족 앞에서 벌어져야 합니다. 하나님과 자기 자신이 합동적인 공사를 한다면 `나는 복을 갖겠으니 당신은 수고하시오'라고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당신의 수고를 덜 수 있다면 비록 수고롭더라도 기꺼이 내가 하겠습니다'라고 해야 될 것 아닙니까?
기성신앙은 끝날에는 다 망해야 합니다. 그들은 열매 없는 수확기를 맞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어느 누구도 남아 있지 않을 것입니다. 남아 있다가도 기분 나빠 나갈 것입니다. 자기가 한 것에 비해 너무 이익을 크게 보려 하면 다시는 그곳에 오려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다시 본연의 자리를 회상하고 인간을 만나고 싶다 한다면 그 자리는 중요한 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거지 신(神)들이 붙었는지 항상 `주시옵소서' 합니다. 주긴 뭘 줘요? 지금까지 죽이지 않고 남겨 놓은 것만 해도 죄송스럽게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라고 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안 받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원수의 자식이 아닙니까? 원수의 자식이 드리겠다니 기분이 나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 원수의 자식인 인간이 천하의 대성인이 된다고 하면 기분 나쁠 것입니다.
원수를 갚아야 할 입장에서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수십 년이 지나면, 다시 말해 자기에게 고통을 주는 기간이 일 배, 이 배, 삼 배 지나가게 되면 복수심에 더 불탈 겁니다. 그 원수가 고통을 주던 그 이하로는 맺힌 것이 풀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원수의 입장에 있는 우리는 그를 위해 몇 배의 희생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원수가 치려다가도 자기 상속분까지 넘겨 주는 놀음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알겠습니까?
그럴 수 있는 일이 세상에도 있지 않아요? 여러분의 생활 가운데에서도 그런 얘기 가끔 나오지요? 여러분은 원수가 여러분을 당장 죽이려고 하다가도 여러분에게 모든 것을 넘겨 줄 수 있는 인연을 만들어야 합니다. 복귀역사가 바로 이렇게 흘려 나온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용납 받을 수 없는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전부다 원수의 자식들로 비겁하게 태어난 것입니다. 그렇지요? 그렇지만 하나님 앞에 `나는 한번 죽고 싶으니 당신이 죽일 수 있으면 얼마든지 죽여 주십시오' 해야 합니다. `나는 원수의 후손으로 태어났지만 당신의 한을 풀기위해 살겠습니다. 그러므로 먹고 자고 사는 모든 것은 당신의 한을 풀기 위해서만 되어지는 것입니다'라고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내 생명을 두 번 세 번도 버릴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게끔 실질적인 행동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수를 굴복시킬 수 있는 길이요, 복귀의 길인 것입니다.
이것이 원칙인데도 불구하고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복을 달라고만 합니다. 복을 빼앗겠다는 것입니까? 복이 그렇게 좋고 그립다면 하나님의 복단지가 있는 비밀창고를 도끼로 부수고 가져 가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적으로 볼 때 하나님 앞에 원수의 자식들입니다. 우리는 용납 받을 수 없는 원수의 자식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맞아야 합니다. 역사를 위해서 국가를 대신하고 세계를 대신하고 하늘땅을 대신하여 맞아야 합니다. 이러한 우리 안에 원수 사탄이 들어오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제일 복받는 길이 무엇이냐? 국가 세계는 그만 두더라도 앞으로 역사적인 사람이 될 수 있는 길이 어떤 것이냐? 원수가 칠 수 있는 자리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도와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그것이 원수를 갚는 일입니다.
하나님도 그렇습니다. 원수가 미워하는 사람은 하늘편에 남기고 원수가 좋아하는 사람을 사탄편에 남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늘편에 서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사탄이 하나님을 미워하니 하나님 대신 맞아야지요. 그래서 사탄이 옛날부터 쳐 왔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제일 가까운 사람이 말을 듣지 않을 때에는 말로 때립니다. 말로 때리는 매도 있지요? 말로 때리는 매로 때리고 난 후에도 안 통하면 그 다음에는 생명을 때립니다. 이것이 탕감법입니다. 매로 계속해서 때릴 때 `아이쿠' 하며 넘어지는 날에는 부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집안을 탕감시키기 위해 계획을 하여 그 가정의 대표적인 한 사람을 죽였다고 할 때, 너무 지나치게 했다고 생각하는 입장에 서는 사람은 잘려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작전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어디로 보내느냐? 사탄세계로 보냅니다. 적의 진영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핍박을 받고 매를 맞으면 사탄편을 굴복시킬 수 있는 조건을 세우는 것이 되며, 또한 하늘편으로부터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익이 될 수 있는 자리는 어떤 자리냐? 그 자리는 천대받고 몰림받는 자리입니다. 억울한 자리인 것입니다. 그래도 `하나님, 사랑해 주세요' 하면서 들어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시기 때문에 적진영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는 아들을 위해서 생명을 바칠 만큼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땅 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시고, 십자가상에서도 하나님께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니 부활하는 예수 앞에 사탄이 총칼을 들도 다시 나타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못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도리인 것입니다. 사탄이 그런 도리에 걸려 있기 때문에 거기서부터 새로운 세계의 기반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통일교회 선생님은 스스로 고생의 자리, 핍박의 길로 갔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원칙으로 세상을 대하여 인간에게 그 모두를 주고 싶어하십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누가 지금 당장 이것을 소화하겠습니까?
원수를 치는 데 있어서 선생님과 여러분은 공동의 입장에 있습니다. 선생님 자신도 국가면 국가의 수많은 원수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혹은 기독교면 기독교의 수많은 구원하기 위해서 머리를 숙이고 그들에게 맞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인연을 맺고 나오는 기간이 현실적으로 얼마나 좋은 기간인지 모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과 동반해 갈 수 있는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맞는 길을 가면서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을 탕감시키고 그를 따르던 사람들까지 용서하는 것입니다. 이럴 수 있는 마음 자세가 얼마나 멋있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작전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려면 어떠한 사림이 되어야 하느냐? 하늘편에 서서 천주에 영광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겁니다. 그러려면 선생님처럼 원수에게 이익될 수 있는 작전을 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아벨이 가인을 굴복시켜야만 둘 다 사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이러한 길이 우리가 가야 할 길입니다.
통일교회 교인들이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기도할 때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 것인가? 원수와 대결하는 최고의 자리와 우리의 현실적 기점은 어디냐? 이러한 것을 알기 위해서는 체험을 해야 됩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제일 기본적인 자리, 최고로 현실적인 자리가 어디냐? 바로 하나님의 입장에서 통치하는 자리입니다. 그러면 이때에 여러분은 무엇을 해야 하느냐? 하늘의 노정을 기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늘의 공식 법도를 달갑게 받아 소화시켜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것을 자체에서 완전히 소화시킨다면 절대자 앞에 가까운 자리에 설 것입니다. 그것을 얼마만큼 소화시키느냐에 따라 실질적인 요인, 절대적인 요인을 갖데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 앞에 누구보다 가까운 자리에 선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돼요?
선생님에게는 여러분을 세계로 내보내려는 욕망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하늘의 전권대사가 되어 무엇이든지 똑똑히 말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밀사는 숨어서 속닥속닥하지만 전권대사는 꼭대기까지 몰리더라도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배포가 있어야 합니다. 전권대사는 `너는 싫다' 하는 편견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형편없이 일을 하는 사람이 무슨 전권대사예요? 그런 전권대사는 목을 잘라도 별수없습니다. 천하의 공법이 그렇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늘의 법도를 완전히 소화하는 전권대사가 되어야 합니다. 전권대사로서 어려운 환경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여러분 자신이 팔려 가더라도 하늘의 소원을 이루어 드릴 수 있는 일이라면 나서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진실한 전권대사입니다.
앞으로 통일교회 세계적으로 탕감복귀를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되겠어요, 안 해야 되겠어요? 통일교회는 세계적으로, 세계를 대표해서 탕감복귀를 해야 되겠습니다. 나라가 하기 전에 통일교회가 해야 합니다. 나라를 위해서는 이 나라를 살리기 전에 이 나라 역사를 탕감하고도 남을 수 있는 탕감조건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통일교회가 세계적으로 탕감하기 위해서는 어느 누가 통일교회를 박대하더라도 여러분이 세계적인 탕감조건을 제시할 수 있는 전권대사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께서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또 우리를 부여안고 `여기가 참 좋구나. 내 아들아, 그러면 그렇지'라고 하실 수 있는 용사가 되어야 합니다. 이 시대에 그러한 개인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러한 개인을 중심삼은 가정이 필요하고, 그런 가정을 중심삼은 종족이 필요합니다. 우리 통일교회가 바로 그러한 환경에 처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딸이면 그러한 가정을 이루어 전통적인 종족과 국가 앞에 나서야 합니다. 그리하여 자기의 눈물과 자기의 생명과 재산을 전부다 투입하여 종착역에서 생사의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그래야 종족의 승패를 결정하게 됩니다. 그렇지요?
60년대를 중심삼고 선생님은 민족을 대신해서 하나의 책임의식을 갖고 민족을 일체화시켜 왔습니다. 그래서 지금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의 감정을 융화시키고 선악의 판가리를 할 수 있는 때가 왔습니다.
한국을 중심삼고 세계적 복귀가 가능하겠습니까, 불가능하겠습니까? 문제는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사탄을 이 민족 앞에 머리숙이게 하여 감사히 여기게 하면 됩니다. 사탄이 머리를 숙여야 들이칠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관권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같은 일념을 가진 실체가 국가와 세계의 주인이 되어 가지고 전체를 위해 그런 길을 간다고 할 때 세계복귀는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주관권은 여기에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실체가 어디에 있느냐? 대한민국에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70년대를 초현실적 기준에서 나아갈 때 1978년 8월 고비를 넘어가야 합니다. 현재 공산주의 국가를 물리칠 곳은 세계에서 통일교회밖에 없습니다. 기독교는 이런 준비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여러분을 대해 `나는 이러하지만 당신들을 됐다' 할 수 있게 감화시켜야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일일이 그들과 싸움을 하고 있지만 결국에는 모든 문제점을 시간이 해결해 줄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내용을 알고 통일교회에 들어왔기 때문에 현실에 있어서 통일교회가 잘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현실에서 통일교회의 책임자가 되어 선생님을 팔아먹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명분이 있어야 합니다. 선생님이 지금 세상의 누구로부터 하라고 하는 권유를 받고 이런 일을 하는 거예요? 선생님이 하고 싶으면 하고 말고 싶으면 마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세상 사람들이 욕을 하고 선생님과 가까운 사람들을 전부다 끌고가 별의별 짓을 다 하더라도 `나는 하겠습니다. 내가 갈 길은 바쁩니다. 내가 해야 할 충효가 남아 있고, 내가 가야 할 길이 남아 있습니다. 천도의 인연으로 해결지어야 할 현실적인 사정이 있습니다' 하며 실천하는 것입니다. 해야 할 역사의 시점이니 어떻게 합니까? 이렇게 하니까 하나님이 나를 신뢰하게 되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선생님을 배반하는 수가 많다고 선생님이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이 가는 노정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상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나라를 끌고 가는데, 이상 세계를 추구하는데 이 나라 이 민족이 배반하게 되면 이 민족은 제일 불쌍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계를 구하기 위해서는 나라가 반대하는 과정을 거쳐야 되기 때문에 내 개체 앞에 `대한민국의 백성과 종족과 가정과 개인이 세계의 국가를 대표하고, 세계의 민족을 대표하고, 세계의 가정을 대표하고, 세계의 만민을 대표한다'는 신념을 세워 놓은 것입니다. 이것이 세계적인 탕감의 내용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죄를 벗을 수 없는 원수들이 하늘길 가는 내 앞에는 나타나지 않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그런 국가적인 원수가 나오기 전에 국가적인 메시아를 대할 수 있는 입장에 서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훗날 원수들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닙니다. 민족을 중심삼고 원수를 대할 때 칠 수 있는 가능성이 많아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기성교인들이 통일교회를 반대하더라도 우리들은 그들을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수많은 가정들이 우리 통일교회의 가정들을 반대하더라도 우리의 가정들을 지키려면 그 가정들을 용서하는 것밖에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반대를 해도 용서할 수 있는 가능성이 더 많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 가정들을 축복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벨적인 존재로서 가인적인 그들을 축복해 주어야 됩니다. 야곱이 자기의 모든 것을 예물로 에서에게 바친 것과 마찬가지로 여러분도 그들에게 모두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물질보다 생명이 귀한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한민족을 중심삼고 나아가는데 원수라고 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권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하나님의 사랑을 잃으면 모든 것이 소용없는 것입니다.
일본을 복귀하기 전에 대한민국이 나를 반대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되게 하여서 대한의 종족 혹은 민족을 연결하여 나라를 사랑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가정이 반대를 하고 종족과 민족이, 국가와 세계가 반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를 반대하던 대한민국에서 이제는 세계 앞에 우리의 뜻을 전파할 수 있는 때가 왔으니 통일의 시대가 다가온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요전에도 어떤 기관에 있는 사람들이 통일교회의 운세에 대해서 좋은 얘기를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사실 교회가 소원하고 나아가는 것은 좋은 내용이지요, 여러분이 사방에 있는 원수를 쓰러뜨리면서 나갈 수 있는 것은 전부다 하나님이 같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하나님을 위해서 죽겠다고 하는 마음으로 전체 앞에 나가야 합니다.
이 길을 가기 위해서는 많은 짐을 져야 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여기에 대해 시상을 한다 할 때, 뜻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분명히 상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생명을 바치지 않은 사람은 망하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그러한 자리에서 반대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반대하던 자들은 나라를 잃었고 우리는 세계 앞에 자랑할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생사의 가름길에서 그럴 수 있는 때가 오는 것입니다.
아담이 가인과 아벨 자체에서 갖지 못한 것을 국가와 민족을 통해서 가질 것입니다. 아담이 그 씨를 개인에서부터 가정, 종족과 국가를 통해 뿌렸기 때문에 그것을 거둘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거둘 때가 온다는 거예요. 이런 관점에서 볼 때, 70년대는 통일교회의 최종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는 때라는 것입니다. 통일교인들, 즉 여러분이 준비하고 정성들이고 엮어 온 모든 사실을 하나님께서 아시니 후대에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협조해서 쉬어갈 수 있는 시대가 올 것입니다.
이제는 사탄도 우리를 밀어 줄 수 있는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우리가 지향하는 목적은 새로운 목적입니다. 사탄의 목적은 인간이 탕감고개를 넘지 못하도록 하여 인류역사를 끌고 나가는 것이요, 하나님의 목적은 인류가 탕감권을 넘을 수 있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목적은 새로운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새로 맞을 수 있는 목적이 되었습니다. 여기서부터 새로운 천국 이론이 발전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현실적인 생활무대에서 이러한 것을 준비해야 하니 여러분은 그러기 위한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여러분을 반대했던 무리들 가운데 이제는 그렇게 생각하며 우리 교회에 들어온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궁중에서 나온 이스라엘 민족의 1세는 망했지만 2세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습니다. 문제는 후손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뜻을 이룰 때까지 우리는 현실적인 사명을 지니고 나가야 되겠습니다. 알겠어요?
지금까지 역사과정에서는 누구든지 떨어지게 되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요? 나무로 보게 되면, 겨울이 되어 잎이 다 떨어져도 재봉춘하게 될 때를 위해 해야 할 일이 있는 것입니다. 내가 평양에 있을 때 남포 사람들이 선생님을 따라 나오다 한 고비길에서 떨어져 나간 것을 곰곰히 생각해보게 되면 그들은 탕감복귀란 말에 질렸는가 봅니다. 그들은 누가 뭐라 해도 뒤돌아보지 않고 간다는 것입니다. 그에 비하면 그 사람들보다 부모의 심정을 가진 여러분이 나으면 나았지 못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니 보다 더 나은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할 때 걱정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기 때문에 여러분은 영원한 하나님이 세우신 현실적인 부모를 중심삼고 영원한 인연을 남길 수 있는 기준을 갖추어야 합니다. 개인을 중심삼고 영원한 세계가 나왔으니 그 개인이 나타날 때에는 하나님과 더불어 모든 것을 수습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가족 가운데 영원히 하나님과 같이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하나님이 그 가족을 도와 줄 것입니다. 그러면 종족 민족 국가를 중심삼고 찾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이 여기에 있을진대 여러분이 이것을 알고 왔던 모르고 왔던 현실적인 이 세계의 기반 위에 지상 천국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버지, 저희들이 가는 길이 험하다 하더라도 그 길은 끝이 있다는 것을 아옵니다. 저희가 가는 길 앞에서 몰아치던 아버지께서는 참으로 불쌍한 아버지였음을 저희들은 이제 와서 알았습니다. 저희들을 사랑하시기에 그리하셨던 아버지의 사정을 알고서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아버지, 통일교단이 이 제단에는 눈물을 흘리는 사연이 많았고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사실들이 많았사옵니다. 아버지께서는 그 모든 것을 아시옵니다. 그러기에 죽음을 각오하고 나선 저희들이 이 생활권내에서 아버지를 어떻게 모시고, 어떤 과정을 거쳐야 남아질 수 있고, 또한 출세의 요건이 어떻다는 것을 아버지께서는 잘 알고 계십니다.
여기 서 있는 통일교회의 문 아무개라는 자는 이 땅에 왔다가 아버지의 가슴에 못을 박아 불효의 흔적을 남기고 가게 되는 것을 제일 무서워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제 일신이 고통받는 자리에서도, 모욕을 당하는 자리에서도 상처를 각오하고 책임을 다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사옵니다. 이것을 당신이 알고 계신 줄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전부는 저 개인의 행복을 위한 것이 아니오라 당신께서 가야 할 길을 위함이요, 당신의 마음의 안위를 위함이었습니다. 아들된 도리를 다하고 신하된 도리를 다하는 하늘의 이상적인 아들, 거룩한 아들을 아버지께서는 찾아 나오신다는 것을 생각할 때, 아버지, 이런 원칙 아래 변함없는 터전을 바라보고 나오시는 것을 감사드리옵니다.
여기에 모인 당신의 아들딸은 누구를 위해서 여기에 온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통일교회 문 아무개를 위해서 온 사람도 아니요, 통일교회 교인들을 위해서 온 사람들도 아닙니다. 하나의 아들을 얻기 위해서, 혹은 하나의 인연을 따라온 무리도 아닙니다. 오직 아버지와 현실적인 문제를 결정짓기 위해 모인 무리들이옵니다.
오늘이 결정을 지을 수 있는 최선의 날이 되지 않고는 앞으로 최후의 운명이 온다 하더라도 관계없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하루, 이 한 시간이 책임을 하는 데 있어서 자기로 하여금 혁명을 제시할 수 있는 시간이 되어야 하고, 미래의 소망을 향해 힘찬 출발을 할 수 있는 마음이 내심에서 우러나오는 시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아침에 솟아오르는 해를 보면서 변하지 않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하고, 철따라 달을 보면서 나도 그렇게 빛을 발하며 살고 있다는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혹은 밤하늘에 빛나는 별들을 바라보며 그 별들을 나의 교육자로, 나의 친구로 삼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내가 아버지를 부르며 눈물짓는 그 모습이 달빛에 비치고, 햇빛에 비치고, 별빛에 비치게 하여 주시옵소서.
만물이 저희들의 엄숙한 모습을 바라보는 그 자리가 천지만상이 머리숙이고 찬양할 수 있는 실체의 자리라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지난날의 슬펐던 자리들은 외로운 자리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렇게 충효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는 아버지의 넓은 품이 있어 저희들이 눈물지으며 품길 수 있고 안식할 수 있는 보금자리가 된다는 걸 생각하게 될 때, 복잡한 현실의 환경이 도리어 외롭다는 것을 알게 되옵니다. 하오니 당신께서 얼마나 저희들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저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제 이 나라 이 민족의 운명을 염려하게 될 때, 저희들이 갈 길은 사방에 막혀 있습니다. 북으로는 중공과 소련, 그리고 북한이 진을 치고 있사옵고 남으로는 일본이 있사옵니다. 일본은 아시아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하여 제 2의 터전을 공고히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계의 평화의 이념에 공헌하기 위하여 새로운 출발을 하는 민족이 올 것을 저는 짐작하였습니다. 아버지께서 이러한 한때에 저희들을 내세운 것은 저희들을 망하게 하기 위한 심정에서가 아니라 저희들을 내세우기 위한 절박한 심정 때문이라는 것을 아옵니다. 그리하여 아시아의 정세를 몰아 저희들 앞에 접근 시키신 것을 아오니, 이런 아버지의 사랑 앞에 저희들은 감사드려야 되겠습니다.
최후의 제단을 결정하기 위한 자리는 제물을 필요로 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죽느냐 사느냐 하는 민족의 악과 선을 판결해야 할 섭리의 뜻을 중심삼고 선악의 분기점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옵니다.
저희들은 국가의 운명을 중심삼고 이러한 입장에 있습니다. 저희들에게는 이미 남북이 갈라진 것을 어떻게 차후에 일치시키느냐 하는 장벽이 남아 있사옵기에, 저희 삼천만 민족의 마음 깊이 자리한 하늘을 위하는 민족정신을 중심삼고 새로운 국민운동으로서 거국적인 사상운동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나라 이 민족이 살기 위해서는 저희들이 먼저 통일사상으로 사상무장을 해야 하고 힘의 무장을 해야 된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습니다.
악은 힘의 대결을 중심삼고 상대적인 권한을 갖추기 전에는 의논할 수 없는 입장에 서 있다는 것을 역사를 통해서 배웠습니다. 악은 역사를 통해서 항상 그런 결과로 나타났사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들을 능가할 수 있는 힘의 기준을 세우지 않으면 그들은 절대로 상대적으로 운행할 수 있는 환경을 양보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이것이 악이 역사적으로 걸어온 걸음인 것을 아옵니다.
아버지를 위해 내적으로 심정일체를 이루고 외적으로 힘의 기준을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 지금 현실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저희들은 아시아를 중심삼고 결속시켜야 할 사명을 책임지고 있기 때문에 이 사명을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일신의 고달픔을 초월해야 되겠으며, 갖고 있는 물질도 전부 투입해야 되겠습니다. 저희들은 아버지의 뜻을 위해서 생명까지 바칠 수 있는 도화선이 되어야 하겠고 그럴 수 있는 동기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원수의 나라를 아버지에게 돌려드릴 수 있고, 그 나라를 좋아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그 나라를 위해 보람 있는 일을 하기 위해서 일본의 통일전선에서 수고하고 있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영계가 있는 것이요, 통일교회가 있는 것이요, 승공연합이 있는 것입니다. 이들을 중심삼고 거국적인 활동을 개시하고 있사오니, 아버지, 축복하여 주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역사적인 국제승공연합이 출발한 터전을 통하여 일본의 통일의 무리들이 세계반공대회(世界反共大會)의 깃발을 들고 세계를 향하여 이미 진군하였사오니 당신이 친히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그들은 한국과 일본과 중국이 하나되지 않고는 이 싸움 앞에 장벽이 되고 있는 것을 뚫을 수 없다는 것과, 뜻을 중심삼지 않고는 이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옵니다. 여기의 모체 되는 사연을 가려내고 주체적인 사명과 책임을 해야 할 곳이 통일교회요, 한국인데도 불구하고 이 사실을 통일교회 교인들도 잘 모르고 있고 한국 사람들도 잘 모르고 있사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명을 알고 책임을 감당하기 위해서 이 길을 향해 달려가는 이들이옵니다. 이들을 보호해 주시고 염려해 주시는 당신의 가중된 은사 앞에 저희들은 천번 만번 감사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아시아권을 중심삼고 일본을 내세워 세계에 하늘의 깃발을 드높이 들고자 하시는 당신의 계획을 성취시키기 위해서 세계 만민 앞에 자랑할 수 있는 한날을 마련해야 되겠습니다. 한국과 일본과 미국은 아버지를 중심삼은 아담 국가, 해와 국가, 천사장 국가로서의 이상적인 출발을 헤야 되겠습니다. 사위기대의 복귀가 천리 원칙의 이상이며 그렇게 되는 순간이 결정적인 순간인 것을 저희들은 아는 입장이기에, 아시아 전체가 하늘 뜻앞에 품길 수 있는 그 한 시점을 결정지어야 하겠습니다.
당신께서는 언제나 수고하시는 줄 아옵니다. 초현실적인 이 기점 위에서 오늘 통일교회가 하는 일은 모험적인 일이기에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하는 일들이옵니다. 이런 일을 하고 있는 저희들은 죽을 각오를 하고 생명을 바쳐서라도 역사적인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현실적인 하나의 기점에 연결시킬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런 자리에서 아버지께서 현현하실 수 있으며, 그 현현이 기쁨이 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거기서부터 새로운 역사적인 창조가 벌어진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은 3월 8일이옵니다. 오늘 이 안식일을 통하여 하늘과 현실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했사오니 승패의 결정이 어떻게 된다는 것을 이들이 가히 알았을 줄 알고 있사옵니다.
여기에 모인 당신의 자녀들은 누구를 위하여 살고 있습니까? 망한 가정을 위한다는 것은 너무나 비참합니다. 망해 버린 나라를 위한다는 것도 너무나 비참한 것이요, 망해 버린 세계를 위한다는 것도 너무나 비참합니다. 그러나 절대 망하지 않을 수 있는 아버지를 위하여 사는 것이 개인이 사는 것이요, 가정이 사는 것이요, 국가가 사는 것이요, 세계가 사는 것이기에 영원한 삶의 기반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오늘까지 통일교회가 걸어온 길이 그러하듯이 이제 이 나라와 통일의 세계가 가는 길이 고달프지 않으면 오늘의 현실이 미래의 현실로 연장될 수 없으니 수십 억 인류 속에서 저희들이 각각 거울에 비친 나 하나를 갖추어 가는 데에 있어 하나님과 90도 선상에 설 때까지 저희들이 책임과 사명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날이 가면 갈수록 세계 만방의 수많은 사람들이 추구하지 않을 수 없는 통일의 세계가 기필코 온다는 것을 알면서 나아가는 저희들의 노정 위에 아버지께서 같이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남아진 날들과 세계 앞에서 저희들은 맡겨진 책임과 사명을 다하는 데 있어 옹졸하지 않고 강하고 담대하게 수행하여 아버지께서 보람을 갖고 바라보실 수 있는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전국 각지에 널려 있는 자녀들에게도 아버지께서 친히 같이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의 이름으로 간절히 아뢰었사옵니다. 아멘.
인간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인간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세상이 되어 있지 못한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이면 대한민국 자체도 아시아를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입장이요, 아시아면 아시아도 세계를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입장입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에, 이 세계 역시 천주, 하늘과 땅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입장에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깨닫게 됩니다.
개인을 놓고 볼 때, 개인 앞에 가정, 가정 앞에 종족, 종족 앞에 민족과 같이 더 큰 것이 앞에 놓여 있을 때에 그 큰 것을 마음대로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어떠한 승리의 기반을 닦아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주관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 이것을 하나로 만들기 위해서도 거기에 대비될 수 있는, 이상의 대가를 치르지 않고는 주관이나 통일의 역사가 벌어지지 않는다는 것, 이것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하루의 생활에서도 여러분이 아침에 어떠한 하나의 일을 계획하고 나서게 될 때, 계획한 그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계획한 그 일보다 더 큰 내적인 결의를 해야 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내적인 결의가 되어 있다 하더라도 환경적으로 타개해야 할 상대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하루의 일과를 성공리에 마쳤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 승리자로서의 영광을 만끽할 수 없는 것입니다.
개인의 일도 그러하듯이, 국가나 세계도 마찬가지의 과정을 거쳐 가지고 주관할 수 있는 권한을 갖기 위해서는 보다 큰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더더구나 복귀섭리역사는 본래 국가를 표준하고 출발할 것이 아닙니다. 국가에서부터 세계로 출발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개인에서부터 출발하여 가정, 가정에서 종족, 종족에서 민족, 민족에서 국가의 형태를 거쳐 가지고 나온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세계, 혹은 천주로까지 발전시켜 나가야 된다는 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복귀섭리를 해 나오시는 하나님께서는 개인을 구하는 데 있어서도 개인을 마음대로 주관할 수 없는 입장에 있습니다. 그 개인 앞에는 보다 큰 종족이 남아 있기 때문에 그 개인보다 더 큰 희생의 대가를 처러야 개인을 복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는 개인을 복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과정을 두고 볼 때, 두말할 바 없는 사실입니다. 복귀역사과정이 이러하였다는 것을 우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건 왜 그러냐 하면 개인보다 큰 기반을 갖고 있는 사탄의 세력이 개인과 접선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개인을 복귀하기 위해서는 개인보다 더 큰 희생의 대가를 치러야 된다는 것입니다. 아벨을 찾기 위해서도 두 배 이상의 대가를 치러야 했고, 노아를 세우기 위해서도 국가권 앞에서 그 모든 환경을 타개하기 위한 절대적인 권위의 기반을 닦아야 했습니다. 그것을 닦기 위해서 120년의 기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렇게 개인을 구하기 위해서는 개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개인과 연결되어 있는 환경을 어떻게 타개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야곱 때나, 모세 때나, 예수님 때를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개인을 구한다는 입장을 두고 볼 때, 반드시 사탄권을 타개하고 사탄을 굴복시키지 않으면 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환경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그 자체보다도 더 큰 시련의 대가, 탕감의 대가, 희생의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통일교회의 사명의 기준은 어디에 있느냐? 개인복귀라는 문제를 중심삼고 볼 때는 개인보다 큰 탕감의 대가를 치러야 할 사명이 있고, 가정을 중심삼고 볼 때에도 그렇습니다. 나아가 천주복귀란 이 엄청난 타이틀을 내걸고도 그 이상의 기준을 중심삼아 가지고 복귀할 수 있는 주체적인 능동력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검(劍)으로 어떤 물건을 자르려면 그 검이 물건보다 강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그 물건을 자를 수 없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복귀섭리를 완수하기 위해서는 나타나는 모든 상대적인 여건을 타개할 수 있는 주체적인 능동성을 지녀야 됩니다. 즉, 강한 자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자체를 상대가 치게 될 때, 그 자체가 부서지지 않고 여기에서 상대적 존재를 부숴 버릴 수 있는 입장에 서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복귀섭리의 완성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 개인의 문제를 타개하는 데에도 역시 싸움이 벌어지는 것이요, 가정이나 종족과 민족을 중심삼고도 그러한 것입니다. 또한 국가와 세계를 중심삼고서도 그와 같은 싸움의 환경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는 그 싸움은 오늘날 인간세계의 싸움과는 다릅니다. 먼저 무형세계의 사탄과 싸워 이겨야 합니다. 그래야 유형세계의 사탄과 싸워서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영적인 사탄을 굴복시키고서야 실체적 사탄을 굴복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접하고 있는 전선에서 싸움을 치르고 나가야 할 사명을 짊어진 우리의 입장이 일방적인 입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평면적인 입장에서 입체적인 입장까지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가야 할 길이라는 것은 먼저 어떻게 되는지 영계와 육계를 중심삼은 그 양면세계의 길을 타개하여 그 목적을 향해서 직선으로 전진하지 않으면 갈 수 없는 길인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영계에서 주체적인 입장에 서 가지고 이 지상의 여러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싸워 나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미 영계에서 승리적 기준을 가진 주체로 서 있다 하더라도 육계를 대표한 인간을 중심삼아 가지고 육계의 문제를 타개하는 행로를 가리지 않으면 지상에서 승리의 권한을 갖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복귀섭리 과정이 어떻다는 것을 배워서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타락한 인간으로서 이 양면의 세계를 어떻게 타개해 나가느냐? 하나님도 실체적인 육계의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서 6천년 역사를 거쳐오셨습니다. 이것을 생각하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과 같이 주체적인 입장에 선 것도 아니고 타락권내에 포위되어 있는데, 우리 자체로서 어떻게 이 양면의 싸움을 완결시키느냐? 이것은 지극히 엄청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먼저 승리적 기준이 필요한 것입니다. 사명을 할 수 있는 출발의 기점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승리적 기준을 세우는 데 있어서는 어떠한 상대적 존재에 속해 있어서는 안 되며, 자기가 주체적 입장에서 승리적 기준을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는 목적하는 바를 실현시킬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논리입니다. 그러면 승리적 기준을 어디에 세우느냐? 그것은 내 자신에 세워야 됩니다. 이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하나님의 전체의 사명을 대신 짊어지고 천주에서 벌어진 이 싸움을 완결시키기 위한 책임자로 섰을 때 언제나 문제시했던 것이 무엇이냐? 하나님과 예수님 자신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천주의 중심이 되어야 하고 자신은 실체의 중심이 되어야 했습니다. 이것을 언제나 염두에 두고 나갔습니다. 만약 여기에서 간격이 벌어지고, 하나의 목적 기준을 중심삼고 상충이 벌어지게 될 때는 승리의 방향으로 전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한 이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언제나 심중으로 깊이 생각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아버지와 아들, 아버지와 아들은 언제나 하나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승리적 주체인 하나님을 중심삼고 내가 땅에 있어서 주체적인 입장에서 승리적 기반을 갖추기 위해서는 먼저 내 마음에 하나님을 모셔야 된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입장에서 예수님이 자신을 일러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한 말이 성립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승리적 기준이라는 것은 땅에서 하나님의 실체되는 예수님을 중심삼아 성전과 같은 입장에서 일체가 되는 기반입니다. 즉, 승리적 기준을 결정짓는다는 것을 표준하지 않고는 복귀의 완결이라든가, 혹은 그 당시의 예수님의 사명을 종결지을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천국이 영계에 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네 마음속에 있다' 고 했습니다. 그래서 먼저 네 마음속에 승리의 동기가 될 수 있는 원천을 모시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 천국에는 하나님도 계실 것이고, 하나님의 가정, 하나님의 종족, 하나님의 국가, 하나님의 세계가 있을 것이거늘, 천국 또한 다른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네 마음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하게 된 것은 승리적 기준을 자기 자신에게서 결정짓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있는 인간인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다' 고 했는데 천국이 어디에 가까왔느냐? 땅에 가까운 것이 아니라, 네 마음에 가까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속에서 먼저 그 기준을 결정지어 놓지 않고는 천국이 땅에 아무리 가깝더라도 나와 관계를 맺을 수 없는 것이요, 자기 부모에 가깝더라도 관계를 맺을 수 없는 것이요, 자기 아들딸한테 가깝더라도 관계맺을 수 없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서 먼저 그 기준이 결정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신앙기준을 세워 출발하지 않고는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 했고, 아무리 어려운 노정을 경과했다 하더라도 그들은 승리의 기준을 갖춘 입장에 섰다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일 큰 문제는 승리의 기준을 자기 자체내에서 먼저 결정지을 수 있는 한 때를 가져야 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복귀도상에 서 있는 우리들은 과거에 수많은 우리의 선조들이 복귀도상에서 생명을 걸고 싸웠지만 실패하여 비운 속에 역사와 더불어 흘러간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그들이 간 길을 따라가는 입장에서 바라봐야 할 소망의 기준은 그들이 바라보던 그런 민족적 기준이라든가 국가적 기준이 아닙니다. 그런 기준을 넘어설 수 있는 세계적 기준 앞에 선 우리인 것입니다. 이런 자신을 중심삼아 가지고 생각하게 될 때, `나는 어떻게 갈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옛날 우리의 선조들은 뜻 앞에 있어서 일차적 승리를 갖지 못하고 패자로서 서러움의 역사를 남겼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날 우리들의 추앙을 받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비판을 받을 수 있는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 항시 하나님과 더불어 일치될 수 있는 승리적 기준을 갖추지 못한 데 원인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승리적 기준을 갖추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하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리고 그 아는 것을 실천하는 데 있어서는 늠름해야 되고, 자신을 가져야 됩니다. 또한 그러한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공격하여 타파할 수 있는 용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자기가 지금까지 지식을 갖기 위해서나 실천을 하기 위해서 수고한 모든 기준이 상대적으로 엇갈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나아가는 방향에 방해되는 것이 있을 때, 내가 갖춰 온 실력과 세운 실적으로 일시에 타개할 수 있는 방안을 어떻게 세우고 그것을 어떻게 실천하느냐 하는 문제를 결정해야 됩니다. 그래야만 우리의 사명과 우리의 책임이 완수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과거의 선조들은 왜 실패했느냐? 그들은 복귀의 도상에 서 가지고 하나님이 바라는 뜻을 중심삼고 완성할 수 있는 기준에 대한 지식 기반이 없었습니다. 알지를 못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알고 있는 것도 실천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실천을 먼저 해 가지고 결실을 맺는 것이 아니라 실천함과 동시에 결실을 맺어야 됩니다. 그러니 실천하는 데는 연습이 필요하고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아는 기준이 있다 하더라도 실천이 없으면 그 아는 것이 나에게 보탬이 되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이 일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관계가 맺어집니다. 관계라는 것은 상대의 여건을 통해서 맺어지는 것이니, 독자적인 입장에서는 관계라든가 인연이란 명사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는 것만으로는 모든 것이 해결되지 않습니다. 알고 나서는 실천을 해야 됩니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한번 실천해 가지고는 안됩니다. 그래 가지고는 실패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는 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마라톤 대회에 출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자기가 달려야 할 코스가 어떻게 되어 있고, 시간이 얼마나 걸리며,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를, 또 어디서부터 시작하여 어느 방향으로 뛰어야 하는지를 다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출발할 때는 선수들이 전부다 스타트 라인에 서 가지고 뛸 것인데, 어떤 때는 갑이라는 사람이 앞서서 달릴 것이고, 어떤 때는 을이라는 사람이 앞서서 달릴 것이라는 것을 다 아는 것입니다. 또한 전환점이 있으면 전환점을 돌아와야 할 것이며, 결승점은 어디에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누구든지 다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실제 승리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자기가 훈련을 해 가지고 그 누구보다도 더 빨리 달려서 목적지에 이르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자가 되지 않고는 승리할 수 없는 것입니다. 복귀섭리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아는 것만 가지고는 안 되기 때문에 실천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통일교회를 중심삼고 볼 때, 우리가 원리 자체를 몰라서 걱정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알고 나서 무엇을 어떻게 실천할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을 비교해 볼 때, 어떤 것이 더 어려우냐? 아는 것은 쉽습니다. 머리가 좋은 사람은 조금만 노력하면 이 원리책 한 권은 다 외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천하는 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실천은 생명을 걸고 해야 됩니다. 아는 것은 어느 기간을 통해서 준비할 수 있지만 실천하는 것은 반드시 생명을 투입하지 않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게 요만하니까 한두 번 그저 손만 움직이면 되지, 발만 움직이면 되지, 내가 그저 왔다갔다하면 되지'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는 복귀섭리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왜냐? 복귀섭리의 인연은 자기의 어떠한 부분을 움직여 가지고 완성되게 안 되어 있습니다. 조그마한 개인의 승리의 기반 위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개인이 승리한, 개인이 사명을 완수한 그 기반 위에서 출발하는 것이지,그 이하에서는 출발을 못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개인이 승리할 수 있는 입장까지는 생명을 바쳐서라도 가야 됩니다. 그렇지 않고 적당히 `며칠 몇 해 동안 하면 되겠지' 해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개인복귀를 완수하지 않고는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의 한계선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이 한계선을 넘어가는 데 있어서는 나 홀로 넘어가는 것이냐?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국가를 복귀하더라도 그 국가 자체로서 넘어가게 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거쳐 넘어가야 됩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개인에서부터 세계까지 거쳐 나가야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복귀섭리에 인연된 개인은 개인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반드시 가정이 딸려 들어와야 되는 것입니다. 왜? 타락은 가정으로 연결되었기 때문입니다. 타락의 동기는 개인인 아담 해와가 됐지만 이들이 그것을 가정으로 끌고 들어감으로 말미암아 종족을 끌고 들어간 결과가 되었고, 국가를 끌고 들어감으로 말미암아 종족을 끌고 들어간 결과가 되었고, 국가를 끌고 들어간 결과가 되었으며, 세계를 끌고 들어간 결과가 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문제 되는 것이 뭐냐 하면 개인을 중심삼은 한계선입니다. 자기 개인을 중심삼은 한계선은 안 되는 것입니다. 세계를 초월한 입장에 선 한계선이어야 합니다. 그 인연이 세계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 백성이나 한국 백성이나 백성은 마찬가지입니다. 선진국가와 후진국가를 볼 때, 후진국가에 가 보면 선진국가보다 더 우수한 사람이 많습니다. 미국에도 문맹자가 있고 거지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국에도 교수가 있고 거지가 있습니다. 한국의 교수가 미국의 거지 보다는 낫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국민 전체를 두고 볼 때 한국은 후진국민이라는 딱지를 떼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미국에 있는 거지는 선진 국민이라는 레테르가 붙어 있습니다. 그건 왜? 갖추어진 범위의 차이에 따라 가지고 개체의 인격이 좌우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복귀섭리의 역사에 나타날 수 있는 인격 기준은 무엇에 의해서 결정되느냐? 여러분 자신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갖추어진 복귀섭리의 승리적 기준을 중심삼아 가지고 결정되는 것입니다. 승리적 기준은 세계를 자연굴복시킬 수 있는 입장에 서는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 섬으로써 타락한 아담 해와의 후손으로 태어난 한을 탕감복귀해 가지고 그 이상의 가치적 존재로서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비로소 한계선을 넘을 수 있습니다.
그러한 아담 해와의 승리적인 기준이 나오면 그 아담 해와로부터 가정이 나와 종족, 민족, 국가, 세계가 형성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아담 해와는 초월적인 존재로서 만우주의 조상, 만민의 조상이며 만인간의 부모, 만가정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아담 해와는 부모도 되는 것이요, 족장도 되는 것이요, 군왕도 되는 것이요, 세계적인 주권자도 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실체도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개인적인 한계선을 넘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입장에서 볼 때, 여러분이 일하는 데 있어서는 통일사상이 필요합니다. 통일사상은 천주주의입니다. 천주주의는 초월적인 세계관을 중심삼은 것으로 우리가 개인적으로 보유할 수 있는 그러한 사상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런 입장에 섰다 할 때는 어떻게 되느냐? 타락권내가 아니라 타락권 본연의 인간을 표준해 가지고 서는 자리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것을 공인하게 될 때는, 거기에 만사를 해결할 수 있는 내용과 동기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용과 동기는 있지만 이것으로 하여금 결과를 어떻게 가져 오게 하느냐 하는 문제는 남아 있습니다. 그러기에 자기 생각은 다른 데 두고 적당히 움직이면 안 됩니다. 결단, 결단을 해야 됩니다.
복귀섭리 도상에 왔다 갔던 사람들이 그냥 적당히 간 것처럼 여러분들도 그저 적당히 따라가며 된다고 하며 가서는 안 됩니다. 전부 뜻과 인연 맺어 가지고 결사적이어야 합니다. 결사적으로 수행해야 한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그리하여 내 개인의 한계선을 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를 여러분이 생각해야 됩니다.
지금까지의 6천년 역사는 아담 하나를 찾아 나온 역사입니다. 아담 하나를 재창조하는 역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나를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해와는 아담이 나오지 않고는 창조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단 하나의 아담, 단 하나의 남자를 창조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를 찾기 위해서는, 창조하기 위해서는 복귀섭리 도상에 왔다 갔던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살이 재료가 되어야 합니다. 억천만 영인들의 원한이 여기에 뭉쳐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실체가 등장하는 날에 비로소 극심한 박해 가운데서도 피를 뿌리며 죽어간 순교자들은 보람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영계에 있지만 지상에 있는 실체와 관계를 맺음으로 말미암아 자기들에게도 해방이 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관념적으로 막연해서는 안 됩니다. 이 자각을 어떻게 하느냐가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40일 금식할 때 사탄이 `네가 배가 고프면 돌로 떡이 되게 하라'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하며 하나님을 중심삼고 나왔습니다. 그 다음에 사탄은 예수님에 대해 시험했습니다.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워 놓고 `만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여기서 뛰어 내려라'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주 너희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고 하셨습니다. 또 세계에 대한 시험을 하기 위해 사탄은 예수님을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온 천하를 네게 주리라' 했는데, 이에 예수님은 `사탄아 물러가라,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를 섬기라' 하였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사탄으로부터 말씀에 대한 시험, 실체에 대한 시험, 세계에 대한 시험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사탄이 원리 가운데 선 예수님을 상대해서 시험한 것이지만, 그 내용은 말씀에 대한 시험, 실체에 대한 시험, 세계에 대한 시험으로 우리가 받아야 할 시험인 것입니다.
그러면, 문제는 어디 있느냐? 사탄이 예수님에게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뛰어내려라'고 한 것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타락권을 넘어서야 될 것 아니냐,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내 시험에서 승리해야 될 것이 아니냐고 한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왔다면 하나님이 복귀섭리를 해 나가시는 과정에 있었던 수난의 모든 요건들이 예수님 안에는 하나도 없어야 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아담을 다시 복귀하기 위해 훈련해 나온 것이 지금까지의 6천년 역사입니다. 그러면 아담을 복귀한 후에는 무엇을 하느냐? 해와를 창조하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는 에덴 동산의 아담 해와와 같이 내버려 두어선 안 됩니다. 관리를 잘해야 되고, 주관을 잘해야 됩니다. 그들이 동으로 가면 동으로 가고, 서로 가면 서로 가서 언제든지 곁에서 관리를 잘 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그렇습니다. 현재 축복 받은 가정들이 아담 해와와 같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탄세계의 모든 인간들은 전부다 천사장들입니다. 타락한 천사장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탄 세계의 여자는 아담을 꼬였던 해와의 입장이며, 사탄세계의 남자는 반대로 해와를 꼬였던 천사장과 같은 입장입니다. 그래서 타락한 해와와 타락한 천사장과 같은 입장에서 타락하기 전 아담 해와와 같은 입장에 섰다 하게 될 때, 이들의 관리를 어떻게 잘하느냐가 문제입니다.
여러분 역시 그렇다는 겁니다. 넓고 넓은 천주에 사람이 많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겁니다. 세계에는 인류가 30억이 있지만 그들은 전부다 우리의 원수들입니다. 여기서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중심삼은 부모의 자녀로 사위기대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계나 육계에서 타락의 요소들을 전부다 뽑아 버려야 됩니다. 이곳을 향해 사탄이 총공격을 하는데, 그 공격을 우리가 막아 내려면 그 이상의 힘이 있어야 됩니다.
그리하여 아담이 타락한 것을 복귀할 수 있는 입장에 서 있는 자기를 자각했을 때, 복귀된 해와의 입장도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해방된 부부로서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천도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천도를 세워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서부터 새로운 종족의 출발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부모가 앞으로 자라나는 아들딸에게 부모의 사상을 어떻게 전통적으로 심어주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에게는 복귀섭리를 위해서 6천년 동안 수고하시면서, 사탄세계에서 당신의 자녀들을 어떻게 빼내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러분들에게는 사탄세계에서 어떻게 아들딸들을 교육시키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런 이중의 십자가를 여러분들은 감수해야 됩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엄벙덤벙하면서 이래도 좋다, 저래도 좋다 해서는 안됩니다. 내적으로 딱 단결해 가지고 사탄세계에서 가정을 구하고, 나라를 구하기 위해 나서야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나서게 될 때, 자기 가정은 하나의 성전과 마찬가지가 됩니다. 즉, 제단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기도할 때 `아버지여, 나를 사랑하시는 것보다도 가정과 나를 사랑해 주십시오'라고 할 수 있어야 됩니다. `아버지여, 나를 도와주십시오'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재치 있는 사람은 기도할 때, 하나님 앞에 가까운 사람을 도와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걸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무리 하나님과 가까운 사람이라도 걸려들기 때문에 그 사람과 같이 있기만 하면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종교라는 게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 예수님이 누구보다 하나님과 가까우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것을 원했을 테니까 예수님을 위하여 해주십시오. 왜 안 해주십니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런 식의 기도를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며 `나에게 복을 주시옵소서' 하는 것은 예수를 팔아먹는 것이지만, 그렇게 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는 언제나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을 걸고 들어가야 됩니다. 그것이 타락한 천사장의 입장에 있는 가인을 복귀하기 위한 전법이 아닙니까? 그렇지요? 그것은 하나님이 환영하게 된다는 거예요. 이것을 싫다고 한다면 그런 복귀역사는 망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원칙을 따라 예수님을 팔아먹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당신의 아들이 이런 것을 원하지 않습니까? 당신의 아들이 이 나라를, 이 세계를 원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당신의 아들딸의 소원이며 당신의 소원이 아닙니까? 이제 나라와 세계를 위해서 필요하다면 저를 죽을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이 세계를 위해서, 당신의 아들의 뜻을 위해서 나는 거야 되겠습니다' 이렇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딴 종교와 다른 것은 성부 성자 성신이 같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멋진 것입니다. 아버지한테 쫓겨나면 어머니가 있고, 어머니한테 쫓겨나면 사랑하는 효자가 있으니 얼마나 멋지냐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복귀도상에 서 있는 우리 자신들이 스스로 거기에 다리를 놓고 가야만 됩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가 자신에 있어서 승리적 기준을 어떻게 찾으며, 한계선을 어떻게 넘어서느냐 하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여기에는 반드시 하나님을 모셔 드려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영적 승리의 중심이신 하나님을 모셔 드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하나님과 내가 하나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하나님과 하나되기에는 너무 먼 거리에 떨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기준에 계시지만, 나는 내가 타락한 만큼 그 기준에서 떨어져 있습니다. 거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과 거리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 거리를 어떻게 메울 것이냐? 여기에 필요한 것은 복귀섭리 도상에 왔다 갔던 선지자들입니다. 왜 그러냐? 아벨이면 아벨을 다리로 놓고, 노아면 노아를 다리로 놓고, 아브라함이면 아브라함을, 모세면 모세를, 세례 요한이면 세례 요한을, 예수님이면 예수님을 다리 놓아야 되기 때문입니다. 다리를 놓기 위해서는 그들과 하나되는 길로 가야 합니다. 그 길로 가기 위해서 생명을 바쳐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민족을 위해서 싸우겠다 하고, 어떤 사람은 세계와 우주를 위해 사랑을 가지고 생명을 바쳐 싸우겠다고 했을 때, 누가 하나님의 위업을 상속받을 것인가? 세계와 우주를 위해서 생명을 바치겠다고 하는 사랑이 상속받게 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싸우신 예수님을 중심삼고 볼 때, 예수님의 죽음은 민족을 찾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여러분은 그를 위해서 세계를 찾겠다고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를 위해서 살기 때문에 그와 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를 위해 가다가 죽으면 역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를 위해서 그가 찾고 있는 민족을 찾고, 세계를 찾아야 합니다. 그와 더불어 민족을 찾는 게 당연하며 그렇게 되면 그 민족은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 민족을 찾고 세계를 찾기 위해 정성을 들여 온 사람을 별수 없이 따라가야 됩니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건 왜 그래야 되느냐? 1대에 안 되면 2대에서 복귀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아담을 복귀시킬 수 있는 것은 누구냐? 아담의 아들입니다. 또, 하나님의 한을 해원해 드릴 수 있는 것은 누구냐?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러면 한 단계 앞에 설 수 있는 것은 누구냐? 주체가 아니고 대상입니다. 대상이 한 단계 앞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매를 맞게 될 때, 뼈가 아니라 살이 먼저 맞는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예수님을 위해서 민족을 찾고 세계를 찾아 나가야 합니다. 그러면 수많은 사람들이 그 세계를 찾아가는 길을 모색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이 세계는 왜 이러고 있느냐? 세계를 지도할 수 있는 지도자가 문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세계를 지도할 수 있는 사람은 승리적 기준을 세워야 되고, 하늘과 땅을 중심삼고 주체적 입장에 서야 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 나왔다 해도 그 한 사람만으로는 뜻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 사람만 있게 되면 그 사람을 중심삼고 사탄세계와 싸움을 해야 할 것입니다. 1세기만 하면 세계가 따를 것이라는 신념을 갖고 싸워야 합니다. 1세기에 세계가 복귀 안 되면 2세기에라도 해야 될 것이고, 2세기에도 안 되면 3세기에라도 해야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세기인 이 때에 있어서 뜻을 품고 그런 운동을 하던 종교 지도자라든가 민족 지도자가 죽었다 하더라도, 그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끊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가 죽더라도 가인세계를 굴복시킬 수 있습니다. `그는 민족을 위해서 싸웠지만 내가 찾고 싶은 것은 나라요, 세계다' 하며 나서는 사람이 있으면 됩니다. 전자는 양자의 모습이지만, 후자가 이상세계를 위해서 싸우고 하늘땅을 위해서 싸우는 실전노정에 있어서 이 땅에서도 대표적인 입장에 서 가지고 세계적인 인물로서 책임을 다하고, 또 영계에서도 그 중심으로서의 책임을 다한다면 지금까지 이 땅에 왔다 영계에 간 어떤 종교 지도자도 반드시 그 사람을 따르고, 그를 내세워 가지고 복귀운동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내세우느냐? 개인복귀도상에 있어서 개인복귀의 사명을 다하겠다고 몸부림치는 사람보다, 개인의 복귀 도상에서 가정까지 구하겠다고 몸부림치는 사람을 내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는 그런 사람이 필요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개인의 승리라는 것은 안식할 수 없는 승리인 것입니다. 개인이 안식하기 위해서는 가정이라는 울타리가 있어야 됩니다. 가정 안에 있는 개인은 안식할 수 있지만 가정이 없는 개인은 안식할 수 없습니다. 또, 가정이 안식하려면 종족의 기준을 닦아 가지고 종족의 보호권을 가져야 됩니다. 그러지 않고는 안식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이런 말을 드렸지만 실천하지 않고는 발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앞으로 할 일에 있어서 내 능력상 불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나라가 비상시에 처해 있을 때, 국가의 운명이 경각에 달렸을 때, 나라의 국법을 어긴 사형수가 있다고 합시다. 그 사형수가 국가의 운명을 책임지고 적진에 들어가서 적장의 목을 잘라 왔다고 하게 되면 적의 나라는 망할 수 있는 동기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형수는 지금까지 지은 죄보다 더 큰 공헌을 한 기준이 있게 되니, 죄는 다 없어지고 그에게 영광이 부여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여러분이 현재 일하는 데 있어서 내가 가야 할 길이 어디냐 하는 것을 모색하여야 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도 오늘날 민족복귀를 해 나가는 섭리의 뜻 앞에 있어서 자신이 충성을 다하여 일하면서 오늘날 이 민족을 구하기 위해서만 싸운다는 관념을 가지면 안 됩니다. 여러분이 주시하는, 응시하는 그 시선 끝은 세계이고, 그 세계를 위해 내가 싸운다는 철두철미한 사상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과중된 목적관을 중심삼아 가지고 어려운 실전에 임할 수 있는 태도를 가지면 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나라가 망하면 세계를 위한 싸움의 무대가 또 있지 않느냐 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이렇게 볼 때, 보다 큰 목적을 중심삼은 하나님의 섭리를 놓고 믿고 못 믿는다는 시시한 말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못하겠으니 시시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세계를 창건할 수 있는, 즉 세계를 제패할 수 있는 요인이 있는 것입니다. 세계를 제패할 수 있는 터전이 바로 여러분이 지금 살고 있는 곳인데, 여기에서 지쳐 있는 사람들이나 복귀섭리 과정에 서서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내일에 남아지지 못합니다. 남아지더라도 내일의 세계에 도움이 못 됩니다.
선생님은 여러분들보다 한 시대를 앞서 간다고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지혜로운 사람이 있다 할진대는 하나님의 복귀섭리의 목적이 무엇일 것이냐 하는 것을 생각할 것입니다. 또, 세상 끝날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세계가 어떤 세계일 것이며, 또 그때에 처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일 것이냐 하는 것을 염려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세상이 다 흘러가고 망한다 할지라도 부활할 수 있는 때가 올 것입니다.
예수님 같은 분은 그런 세계, 말세 이후의 세계를 중심삼고 죽었기 때문에 말세권의 그 세계가 그분을 지배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은 새로운 역사적인 주인공이 된 것입니다. 지금까지 지나간 역사의 주인공이 아니라, 새로운 역사시대의 주인공이라는 것입니다.
그의 사상은 그때까지의 역사시대의 사상이 아니라, 역사시대를 초월한 사상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이상하는 그 시대는 필히 올 것입니다. 그것은 개인을 위하고, 가정을 위하고, 종족을 위하고, 민족을 위하고, 국가를 위하고, 세계를 위하는, 보다 큰 것을 위하는 사상입니다. 오늘날의 인간들은 그 역사적인 인연을 끊고는 갈 길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중심사상 앞에 반드시 굴복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오늘 통일교회를 중심삼고 보면, 선생님이 여러분에게 `이렇게 하자'하고 여러분들은 `예' 하고 대답을 하는데, 그 일을 잘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여러분이 지구(地區)면 지구를 책임지고, 그 책임진 지구를 위해 충성해야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맡은 지구에만 잘하고 나라에는 충성하지 말라는 것이냐? 아닙니다. 내가 지구에 대해 잘하는 것은 대한민국에 대해 잘하기 위한 과정이요, 지구를 위해 충성하는 것은 대한민국을 위해 충성하기 위한 과정입니다. 대한민국 뿐만 아니라, 세계를 위해 충성하기 위한 것이요, 하나님 앞에 충성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렇게 이중, 삼중으로 첩첩이 놓여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작은 지구에서 하는 일이지만 지금 하는 것은 하나의 훈련입니다. 훈련한다는 것은 실전을 위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훈련을 받고 있습니다. 그 훈련이 무엇을 하기 위한 훈련인가 하면 대한 민국에 충성하기 위한 훈련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싸워 나가는 데 있어서 우리의 사명 완수의 표준은 세계를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훈련은 필수적인 것입니다. 여러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지금도 그러한 훈련을 하는 때입니다. 그래도 여러분, 할 수 없어요?
여러분 중에는 `원리를 몰랐으면 벌써 도망갔을 텐데 원리를 알았으니 할 수 없다' 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도 기도할 때에는 아버지를 부릅니다. 그러나 그 아버지는 여러분만 일대 일로 대하시는 아버지가 아니라, 세계를 품고 있는 아버지라는 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여러분은 그 아버지의 아들이 아닙니다. 그 아버지의 아들이 되려면 그 아버지가 품은 그 세계에 들어올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곳은 세상의 30억 인류가 다 들어가는 곳이냐? 아닙니다. 한 사람만 들어가는 곳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하는 곳도 한 곳이고, 하루의 시간권내에 일하는 터전도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그 제한되어 있는 것을 어떻게 세계와 연결시키느냐?
(판서한 것을 가리키시며) 그러기에 요것은 하나의 제물입니다. 제단입니다. 사탄이 하나님과 나를 중심삼아 가지고 결판짓는 제단입니다. 그러니 어디에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간에 그것은 제단입니다. 뜻을 위해서 밥을 빌어먹더라도 그것은 제단입니다. 단을 쌓는 제단입니다. 전부다 그런 입장을 체험해 가지고 특별히 자기를 옹호해야 합니다.
여러분, 지금까지의 수련생들은 어떠했습니까? 선생님에게 지금까지 폐만 끼쳤습니다. 여러분들이 여기에 와서 지금 받고 있는 이 수련이라는 것은 통일교회에서 처음 있는 것입니다. 전무후무한 일입니다. 알겠어요? 그러니만큼 여러분은 최소한 말세에 있어서 이 뜻을 이루는 일에 참가해야지 그러지 않는 사람은 낙제하는 것입니다. 상부의 조직권내에 있으면 상하관계의 인연을 갖추어야 할 것인데도 불구하고, 상하관계의 인연을 중심삼아 가지고 여기에 인연이 맺어지려 할 때 불응하면 그 인연과 관계가 없게 됩니다. 이것이 큰 문제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수련회에 온 것을 저 영계에 간 여러분의 선조들이 안다면 자기 후손들이 수련회 명단에 올랐다고 얼마나 좋아하겠습니까? 좋아하겠습니까, 안 하겠습니까? 「좋아하겠습니다.」
`전무후무한 역사시대인 1970년대의 봄절기에 첫출발을 보는 이때에 내 몇수십 대의 후손 되는 아무개가 등록했구만!' 이렇게 하겠습니까, 안 하겠습니까? 그리고 여러분을 생각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한다면 얼마나 생각하겠습니까? 쌍수를 들고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를 것입니다.
자기 종족이 수련을 잘 받게 하기 위해서 도와 주고 자기 자체를 놓고 별의별 일을 다 할 것입니다. 또, 수련회에 와 가지고 제 1전선에서 수련을 잘 받음으로써 제 2전선에서 승리의 용장이 되기를 얼마나 바라겠습니까? 바라겠어요, 안 바라겠어요? 「바랍니다」
지금 이 자리에 여러분의 조상들 수백 명이 와 여러분을 선정했는데 출석 시간에 불참했다고 한다면 그 조상들의 정성이 뭐가 되겠습니까? 여러분은 그런 생각을 못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볼 때 우리의 생활은 평면적인 생활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영계가 있다는 것을 다 알지요? 「예」 알면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곳이 나와 더불어 종횡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을 얼마나 알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수많은 조상들이 죽어가면서 전부 다 정성을 드렸고, 하늘땅이 전부다 정성을 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지방에 있는 통일교회 교인들은 지금 세계에까지 알려지고 있습니다. 외국에 있는 통일교회 교인들 중 `본부에서 이렇게 하는데 한번 가고 싶다. 거기에 한번 참석했으면'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래서 이번에 그 사람들을 수련회에 참석시키려고 합니다. 일주일 동안 참석시킬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말을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에 지금 따로 교육을 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니 통일교회를 믿는 사람들을 보고 모든 영인들이 얼마나 좋아하겠습니까? 그러니 영계에서 `야, 사람들아 자꾸만 와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상에서 통일교회에 많은 사람들이 들어오면 영계의 영인들이 얼마나 좋아할까요? 이렇게 우리의 수많은 조상들이 정성을 들이고 있는 곳이 이곳입니다.
가만 보면 어떤 사람들은 졸고 있어요. 영계에서는 뜻이 바쁜데, 졸면서 `내 뜻이 하늘 뜻보다 바쁘다' 하는 거예요. (웃음) 잘 조는구만. 이렇게 창피한 일이 있습니까? 우리 통일교회를 알았으면 기절하여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 뛰어야 되는 것입니다. 창피하다고 안 뛰면 너무 늦습니다. 넘어져도 일어나 뛰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힘들다고 옆으로 뺑소니치게 되면 출발을 못 합니다. 그러니 뛸 수 있을 때 더 뛰어야 됩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복귀도상에 있어서 마라톤 선수가 되어야 합니다. 그 마라톤 선수들은 각 종족 가운데에서 뽑아온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목표점까지 뛰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선조 가운데에는 선을 추구하다 죽어간 조상들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그런 조상들 이상이 되기를 원하면서 뛰어가야 합니다. 이렇게 보게 될 때에 오늘날 우리는 한 시간권 내의, 동일한 시간권내의 입장에서 제물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잡지 같은 것을 볼 때에 많은 양을 봐도 괜찮지만, 원리강론을 볼 때는 많은 양을 보는 것보다도 적게 읽더라도 반드시 감동을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기 전에는 책을 놓지 않겠다는 습관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훈련하는 데 있어서 아무 생각없이 받게 되면 그것이 우리가 가는 길과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 아무 생각 없이 훈련을 받는다면 받으나 마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리 말씀은 내 생사 문제를 결정하고 승패를 결정하는 칼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원리강론을 읽게 될 때는 감동을 받고 나서는 실체가 되겠다고 결심하는 습관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알았으면 실천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지구장 자체를 보게 되면 이 기준에 다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런 결심을 했다면 끝난 후에는 제 2의 결심을 해야 됩니다. 이렇게 하여 정성들이며 달려 나가게 되면 앞으로 여러분은 여러분의 갈 길을 자연히 알게 됩니다. 여기에는 기도가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거기서 내가 얼마나 정성들이느냐가 문제입니다. 밥 못 먹고, 잠 못 자고, 자나깨나 정성들이며, `나는 죽어 가지고도 그 일을 해내겠다' 하면 자기 갈 길을 자연히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영계에 가서도 그런 사상을 갖고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셨지만, 그래도 그 십자가의 사상은 지금까지 싸움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조건이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사상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하여 내 자신의 승리적 터전을 마련하여 영적 세계와 육적 세계를 종합하는 책임을 스스로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면 내 자신의 승리적 터전을 어떻게 만드느냐? 하나님을 모심과 동시에 하나님의 사상을 중심삼아 가지고 어떠한 원수의 세력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타개해 나가야 됩니다. 안팎으로 이러한 신념과 이러한 기준을 갖지 않고는 승리적 터전도 갖지 못하며 그 사명도 완수할 수 없습니다.
공장에 가면 쇠를 깎는데, 쇠보다 무른 것 가지고 쇠를 깎을 수 있습니까? 기계 가지고 쇠에다 구멍을 뚫는 데 그 기계가 쇠보다 물러 가지고 구멍을 뚫을 수 있어요? 있어요, 없어요? 쇠보다 몇 배 강해야 뚫을 수 있습니다. 몇 배나 강해야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원수보다 몇 배나 강합니까? 몇 배나 강하냐 말이예요? 강하냐, 무르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이 제일 싫어하는 자리에 처넣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쇠가 얼마나 강하냐 하는 것은 용광로에 처넣어 보면 알 수 있듯이 말입니다.
여기에 지지리 고생하는 지구장이 있는데 어디 얼마나 가나 두고 보자는 것입니다. 고생으로 출발했으면 고생으로 거두어야 됩니다. 그것은 이 고생을 중심삼고 탕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심었으면 심은 대로 거두어야 합니다. 십자가로 뿌렸으면 십자가로 거두어야 되고, 영광으로 뿌렸으면 영광으로 거두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생한 사람은 어떻게 해서든지 세계적 기준까지 고생으로 거둘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강한 힘을 가져야 됩니다.
이 세계를 위하고 나라를 위하여는 반드시 사탄과 부딪혀야 됩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그랬습니다. 누가 세계를 다 정복하겠어요?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삼은 한 사람을 세워 가지고 세계를 정복할 수 있겠어요? 여러분 모두가 그러한 자리에 들어가서 사탄세계의 백이면 백, 천이면 천, 만이면 만 전부를 정복해야 될 것인데도 불구하고 여러분은 지금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지구장들한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많은 지구장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세 사람 정도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원리를 봐도 전후.좌우.상하 이렇게 언제든지 셋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관계만 이루어지면 죽든지 살든지 해야 할 입장이 우리 앞에 벌어져도 좋은 것입니다. 내려가도 좋고, 올라가도 좋고, 도망다녀도 좋고, 고생해도 좋고, 안 해도 좋다는 것입니다. 이럴 수 있게 완전히 하나만 되면 전후.좌우.상하관계를 전부다 탕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상하 관계를 놓고도 이렇게 세 사람이지요? (판서) 그렇지요? 그 다음에 전후관계도 세 사람이고, 좌우관계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걸 알아야 됩니다. 예수님도 이것을 붙들고 싸웠습니다. 여러분들도 세 사람이 하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형운동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일어서서 나아가는 데는 상하관계의 하늘과 아들이 있어야 하며, 이 셋이 하나되어야 됩니다. 그 다음에는 좌우관계에 있어서 하나되어야 되는데, 좌우는 뭐냐? 부부입니다. 또 전후관계는 형제를 말하기 때문에 자기 형제와 하나되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후·좌우·상하관계가 되어 있는 곳이 가정입니다. 가정이 하나가 되면 입체세계가 전부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내의 기쁨은 가정의 기쁨이요, 남편의 기쁨도 가정의 기쁨이요, 자녀의 기쁨도 가정의 기쁨인 것입니다. 그렇지요?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하나님을 모시고, 실체를 중심삼고 극복해 나가야 됩니다. 다시 말하면, 과거 사람들은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실패를 했지만, 우리는 알았으니 승리를 해야 합니다. 실체라는 것이 일시적인 실체가 아니라 영원히 보장될 수 있는 실체이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영원은 어디서부터냐? 국가 기준을 넘어서는 데에서부터 영원입니다. 사탄세계가 국가기준을 넘어섰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우리는 국가복귀라는 문제를 중심삼고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고로 하나님을 모시고 내가 그런 입장에 서서 국가를 대신하겠다고, 국가의 어려운 일을 내가 책임지겠다고 해야 됩니다. 우리 통일교회가 그렇게만 나가게 되면, 이 국가는 우리 통일교회로 말미암아 복귀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책임을 수행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중적 책임, 다시 말하면 전체를 대표할 수 있는 승리적 기반을 염려하며 여러분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 이 일에 임해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하나님의 승리적 기반도 닦여지고, 우리의 사명도 완결되지 않겠습니까? 이런 문제를 중심삼아 가지고 이제부터 여러분은 지방에 가게 되면 결의와 각오를 단단히 하고 나가기 바랍니다. 고생은 여러분에게 있어서 무한한 재산입니다. 예수님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잖아요?
외국에 있는 우리 통일교회 식구들이 선생님을 몇 해만에 한번씩 만나는데, 그들은 선생님에 대해 착실히 배우면서 제일 인상에 남는 것이 말씀에 대한 고마움보다도 선생님이 지금까지 이 길 위에서 고생했던 내용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실천도상에 있어서 선생님이 선두에 서서 고생해 나왔다는 사실을 제일 실감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실감하는 그 자리는 거기에 동참하는 자리입니다. 그것을 실감하는 자리에서 하나님을 붙들고 기도할 때, `당신의 아들이 이러이러한 뜻을 위해서 이렇게 수고의 길을 걷지 않았습니까? 하오니 제가 당할 수 있는 고생 위에 십 배 백 배의 고통을 더한다고 해도 감사하겠습니다'라고 한다면 하나님은 그를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민족을 복귀하라고 할 때, 민족과 세계까지 복귀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후대에 그 기준을 연결시킬 수 있는 상속자가 될 것입니다. 이 기준을 여러분이 연결시켜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 승리적 기준을 중심삼아 영계와 육계를 일치시켜야 되겠습니다.
그 기준을 결정하고 그 다음 여러분은 수난의 길을 감수하면서 세계적인 뜻, 세계적인 관념, 세계적인 신념, 세계적인 자각을 가지고 하루의 생활을 메워 나가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메워 나가느냐? 하루의 생활이라는 것은 제한된 영역입니다. 또 거기에는 제한된 지구(地區)가 있을 것이고 그 지구의 지역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지구, 그 지역이 우리의 한계가 아니라, 거기서 대한민국을 연결시키고 세계를 연결시킬 수 있다고 해야 됩니다.
성지라면 성지를 중심삼고 볼 때, 자기가 선 땅은 40개국을 중심삼은 120개 성지를 대표하는 것이요, 그 단에 서게 되면 그 단은 세계를 대표한 단이므로 세계를 대표하여 선 것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거기에 엎드려 기도하게 될 때는 제물적인 제사장이 만민의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됩니다.
제사장은 이 민족을 구해 주는 것도 문제이지만 이들을 구해 가지고는 만민을 구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책임자에게는 만민을 위하여 길을 닦아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에게는 만민의 속죄를 위해 제물을 드리는 제사장의 입장에 서서 하나님 앞에 호소를 하는 그런 신념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그런 자리에 서게 되면 하나님은 반드시 같이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터전을 갖추지 않으면 우리의 사명을 완결할 수 있는 기점이 상실되기 때문에 우리에게 사명 완수란 있을 수 없습니다. 알겠어요, 무슨 말인지?
예수님은 영계와 육계를 연결시키고 민족을 위해서 세계적인 도상에서 수난의 길, 십자가를 질 수 있는 한 날을 꿈꾸었습니다. 알겠어요? 그러나 여러분은 민족을 대신해서 민족 앞에 머리를 숙이는 것보다도 세계를 대신해서, 수많은 세계 인류를 위할 수 있는 그 길을 가다가 몰려서 죽을 수 있는 그 날을 맞이하겠다고, 그런 길을 가겠다고 몸부림쳐야 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모아서 죽지 않고 망하지 않는 기반을, 세계권내에서 평면적으로 섭리를 할 수 있는 기반을 하나님은 닦아 나오신 것입니다.
이러한 원칙을 중심삼아 가지고 책임수행을 하는 자리에서만 여러분이 앞으로 자신의 사명을 완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영계와 육계를 연결시키는 데는 먼저 세계적인 신념의 자각, 통일적인 이념의 자각을 하고 난 다음 이것을 세계적으로 타개하기 위한 수난의 길을 감수해 나가야 됩니다. 이렇게 하게 되면 영계와 육계가 자동적으로 하나되고 여기서부터 통일이 벌어집니다. 통일의 길을 가는 방향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원칙을 적용해서 여러분은 앞으로 책임자로서 일해 나가야 합니다. 이렇게 하지 않고는 여러분은 자신의 사명을 완결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버님, 땅에 있는 인간으로서 아버지의 사정을 알겠다고 몸부림치는 사람들이 없사옵니다. 아버지의 소원이 무엇인가를 알겠다고 몸부림치는 사람들이 없사옵니다. 아버지의 심정을 스스로 체휼하기 위해 그 내용을 추구하면서 몸부림치는 사람이 없사옵니다.
수많은 사람이 지금까지 자기가 구원받기 위하여 속죄할 수 있는 한 날을 위하여 몸부림쳤사오나, 아버지를 믿겠다고 몸부림친 사람이 없었던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무리 죄인같이 불쌍하더라도, 자기의 구원을 위해서 몸부림치는 것보다도 천륜의 소원을 위하여 당신의 뜻을 중심삼고 역사적인 시련 도상에 서서 아버지 앞에 회개하게 될 때, 그를 따라갈 자가 없는 것이요, 그를 제거할 수 있는 악한 실체가 없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옵니다.
오늘날 저희들이 추구하여야 할 자리는 이 세계 도상을 넘을 수 있는 자리이며, 그 자리가 바로 이 자리라는 것을 확실히 깨닫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 1970년대를 저희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통일의 운세 시대를 마련하기 위해서 제물을 쪼개야 할 결정적 시점인 1970년대를 향하여 지금 출발하였습니다. 제물을 쪼개야 하는 제사장과 마찬가지로 오늘 통일교회에는 남북한에 맺혀진 모든 원한을 다시 쪼개야 할 제사장의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또한 아시아를 쪼개야 할 책임이, 아시아 전체를 세계 전체와 연결시켜야 할`책임이 우리 통일교단에 있음을 절감하옵니다. 그리하여 일본을 중심삼고 저희들이 하나되지 않으면 안 되겠기에, 이것을 예상하여 말한 것이 그대로 지금 흘러가고 있는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지여, 한민족이 살 수 있는 길은 아시아에 있어서 한국과 일본과 중국이 동맹국이 되어서 새로운 방어선을 형성하기 위해 하나님을 중심삼아 가지고 서지 않으면 안 될 줄 아오며, 그렇게 해야 할 때가 다가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이런 국가적 기준의 한 시점에서 우리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내세울 수 있어야겠사옵니다. 또한 이제는 그 경계선을 넘나들 수 있는 시점에 놓여 있습니다. 하오니 아버님이여, 이제 4월부터는 저희들에게 그럴 수 있는 고개를 넘게 허락하여 주옵소서. 이해가 가기 전에 그럴 수 있는 때가 오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그 누구도 모르는 섭리역사에서의 아버지의 수고를 안 자로서 책임을 감당하기 위하여, 아버지의 실전도상에서 어떻게 되도 좋다 할 수 있는 그날을 위하여 아버지 앞에 호소한 사정을 당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 그토록 원하였던 당신과 하나될 수 있는 그 자리가 이제 마련될 수 있는 환경에 접어들었사옵니다.
`천국이 네 마음에 있다'고 했기 때문에 천국을 모시기 전에 아버지를 모셔야 할 것을 저희들이 잊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나는 아버지요, 아버지는 나이십니다' 할 수 있는 입장이 얼마나 필요합니까? 그렇게만 되면 내가 맞는 것은 아버지가 맞는 것이요, 내가 서러운 것은 아버지가 서러운 것이요, 내가 분하고 원통한 것은 아버지가 분하고 원통한 것임을 저희들이 확실히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이것을 중심삼아 가지고 아버님의 소원을 걸고 몸부림칠 때, 저희들이 불쌍한 자리에 들어선 것은 형님을 구하기 위한 입장에 선 것이며, 저희들이 여기에서 아버지 앞에 애걸하는 것은 가인이 아벨을 때려 죽인 것을 사탄세계에서 탕감복귀할 수 있는 일인 것을 아옵니다. 그러면서 원수를 갚기 위하여는 총칼로써 복수해야 될 입장인데도 불구하고 `아버지여, 저희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는 당신의 아들을 보게 될 때, 사탄세계는 굴복한다는 사실을 저희들이 알았기 때문에 끝까지 이 길을 가려고 합니다.
어제까지 저희들은 몰리는 자리에서 체휼하고, 몰리는 자리에서 의붓 자식의 취급을 당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때에 열 한 형제 앞에 배척 받아 팔려가던 요셉의 심정을 물려받지 못하였던 저희들이었습니다.
아버지, 저희들을 가산을 탕진한 탕자가 아니라 가산을 보호한 아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히려 탕자를 대신하여 탕자의 서러움을 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몰리는 자리에 있더라도 고향을 흠모하면서 형제들을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희생하는 자들의 신변을 위해 복을 빌어주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렇게 될 때, 그 앞에 하늘 전부가 엉클어지고 통일된다는 사실을 저희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야곱은 21년 동안 홀로 광야에서 양치는 목자의 신세가 되었어도 고향에 있는 자기 아버지와 자기 형제들을 위하여 눈물 흘리고 기도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마음과 일치가 되었던 것을 아옵니다. 그래서 그는 혼자였지만 하늘의 소망의 가정이 그와 같이하였고, 소망의 민족이 같이하였기에 소망의 기쁨과 소망의 결의 또한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결국 복귀섭리라는 거룩한 뜻을 받들 수 있는 기수가 되었다는 사실을 저희들은 아옵니다.
아버님, 통일의 무리들이 여기 모였습니다. 저희들은 모두 가겠습니다. 이제 영계를 중심삼은 아버지를 모셔 드리겠습니다. 또, 그 다음에는 참부모님의 인연을 알았으니 저희들은 마음속에 꼭 모셔들여야 되겠습니다.
이것은 절대적이며 영원불변한 모습으로서, 원칙적인 당신의 아들로서, 어떠한 제물보다도 더 귀한 제물을 가진 권내에 서지 않고는 안 된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것을 피해 가며 위로 받을 수 있는 입장에 있다 할진대, 내 몸이 천 갈래 만 갈래 찢기더라도 다시 갈 수 있는 자기를 발견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럴 수 있는 개체가 되지 않고는 영계와 육계, 땅과 하늘을 중심삼아 가지고 개인에서 가정, 종족, 민족, 국가, 더 나아가서 보다 큰 환경의 싸움터를 거쳐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세계를 사랑하는 마음이 국가를 사랑하는 마음보다도, 혹은 국가를 사랑하는 마음이 가정을 사랑하는 것보다도,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보다도, 자기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보다도 더 크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런 마음이 있지 않고는 종착점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이 없다는 것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6천년 동안 아버지가 아담 해와라는 한 개체를 찾아 나온 것은 그것으로 세계를 복귀하기 위한 연고가 아니었습니까? 천상에 가 있는 수많은 영인들의 애혼을 바라보시는 아버지의 아픔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저희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 무리들을 해방시키는 것이 당신의 거룩한 사명이요 소망이었다는 것을 저희들이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세계를 넘어선 승리의 한 터전을 세계권내의 모든 사람이 같이 취할 수 있는 날이 와야만 천상세계의 복귀와 지상세계의 복귀는 물론이요, 원수를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니다.
철두철미하게 세계를 사랑할 수 있고, 세계의 어디에도 갈 수 있는 아들딸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지금까지는 한국을 붙들고 싸워 오던 통일교회의 무리지만 능히 세계를 붙들고 세계를 위해 싸우는 무리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하오니 저희가 눈물을 흘려도 세계 인류를 위하여 흘리게 허락하여 주옵고, 저희가 대한민국의 한 아들로 태어났다 할지라도 대한민국의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세계 인류를 사랑할 수 있는 심정을 가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런 심정을 가지고 설 수 있는 내 개체도 되고 후손도 가져야 되겠습니다.
그들을 고생시키고 저희들이 걸어 나왔다면 이것은 천륜이 아닌 것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벨은 형님을 구해야 할 입장이온데, 이런 역사적인 형님의 입장에 있는 가인의 무리가 오늘날 세계의 수십 억 인류가 아닙니까? 이들을 앞에 놓고 저희들은 달려가야 되겠습니다.
아버지는 승리한 그날에 있어서 세계 수십억 인류의 생명의 가치를 내일대의 가치와 마찬가지로 취급하실 것이오니 이런 것을 생각할 때 많은 것들을 위하여 한 개체를 희생시키는 것이 복귀의 제물이 되는 조건인 것을 알게 되옵니다. 저희가 당하는 고통은 세계를 위해 당하는 고통으로써, 이렇게 인류와 더불어 아버지 앞에 감사할 내용을 남겨야만 만민이 저희 앞에 천년 만년 머리 숙이고 감사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런 도상에 있어서 역로의 한 날을 맞게 되는 배은망덕한 자들이 되지 말게 허락하여 주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그러한 내가 되지 않겠다고 몸부림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러한 입장에 서는 자가 되어 서는 안 되겠다고 몸부림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들은 아버님을 모시고 두 세계를 품고 이념적 통일세계를 찾기 위한 노력을 다해야 되겠습니다. 굶주린 자에게는 응당히 먹어야 할 것이요, 헐벗은 자에게는 응당히 입혀야 할 것이요, 처마 끝에서 잠자는 자에게는 응당히 편안히 잘 곳을 마련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한스러운 사연을 당하는 것도 응당히 받아야 할 것입니다. 이처럼 잃어버린 세계와, 잃어버린 국가와, 잃어버린 가정과, 잃어버린 개인을 찾아야 하는 운명이 저희에게 있다는 이 엄청난 사실을 생각할 때에 저희들 혼자서는 지탱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제 저희들은 마음만은 살아 남을 수 있는 인연을 붙들고 죽음을 각오 하고 가야 되겠습니다. 나는 쓰러지더라도 세계는 쓰러져서는 안 되는 것이요, 나는 망하더라도 세계는 망해서는 안 된다는 통일사관을 지닐 수 있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이것이 통일사상이라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개인을 망하게 해 가지고 자기 일가를 지탱하기 위한 것이 아버지의 소원이 아닌 것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나라를 망하게 해 가지고 개인을 살리겠다는 것이 아버지의 사상이 아닌 것을 이들이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 나라까지 팔아서라도 세계를 찾겠다고 하며 나설 수 있는 무리가 되지 않고는 세계를 대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그럴 수 있는 한 날을 이들이 맞이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가 바라시는 입장에 서서 세계인류를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서러운 민족을 두고 볼 때, 끝에서 끝으로 연결시킬 수 있는 것이 당신의 소원이오니, 그 한 날을 맞이할 수 있는 자세를 갖추는 무리들이 많아야 되겠습니다.
이제는 세계의 인종을 초월해서 하나의 종족을 편성해야 할 소원의 날이 찾아왔습니다. 여기에 저희들 마음과 몸을 바쳐 충효의 도리를 다할 줄 아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번 수련기간을 통하여서 저희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세계와 더불어 살고, 세계와 더불어 죽고, 세계와 더불어 말하고, 세계와 더불어 일하고, 세계와 더불어 싸워야 하는 이 모든 것이 얼마나 엄청난 책임이옵니까? 세계 전체의 적에게 제 몸을 갈래갈래 찢어 놓고 그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환경권내에서 저희들이 해야 되겠고, 그것이 세계를 대신한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 일이 세계역사가 전환되는 이때에 개인으로서는 지탱할 수 없는 엄청난 일이오나, 이러한 개인이 되어 남긴 실적이 세계의 역사를 빛낼 수 있는 하나의 빛의 조건을 남기는 줄 아오니, 그것을 위하여 가는 저희들의 걸음이 되게 인도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그날을 위하여, 그 걸음을 위하여 준비할 수 있게 하신 아버지의 은사에 감사드리면서 남아진 이 기간에 충효의 도리를 다하고 정성을 다들임으로써 영계와 육계와 저희들을 보내 놓고 염려하는 식구들 앞에, 이 기간을 보람 있는 한 기간으로 남길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돌아가서는 옛날의 이 그 지구장, 그 지역장이 되지 않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또다시 옛날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되지 말고 새로운 아버지 어머니가 되고, 새로운 남편이 되어서 하늘 가정을 이끌기에 부족함이 없게끔 이번에 복귀해 주시옵길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남아진 그 세계를 향해 저희들이 가야 되겠사옵니다. 30억 인류가 저희를 부르고 있는 소리를 들으면서 달려갈 줄 아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며, 모든 말씀 참부모의 성호 받들어서 아뢰었습니다. 아멘.
복귀섭리를 우리가 회상해 볼 때, 복귀라는 말은 본래 창조본연의 인간이 소망하던 명사가 아니라 인간이 타락한 결과로 말미암아 필요하게 된 명사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로 인해 인간뿐만 아니라 하늘땅도 비통해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복귀가 필요없었던 본연의 세계가 있었음이 사실이라면 타락한 세계를 복귀해야 할 때가 있으리란 것을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복귀섭리를 완성할 수 있는 때가 있어야 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는 복귀가 필요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본연의 세계에서 아담을 중심삼고 소망했던 것은 오늘날 복귀해야 할 세상에서 고대하는 그런 소망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아담 해와를 창조한 전적인 소망은 그 어떤 것보다도 하나님 자신을 현현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아담 해와를 통하여 하나님의 내적인 요소를 외적 실체로서 전개시켜 가지고 하나님이 소망하시는 원대한 희망과 인간의 소망이 일치된 한때를 맞을 수 있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아담 해와는 자신들이 하나님을 위하고 하나님의 소망의 한때에 자신들을 연결시키기 위해 지음 받았다는 사실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아담이 타락하기 직전까지는 하나님과 일치될 수 있는 자리에 있었고, 또 하나님의 소망과 일치될 수 있는 자리에 있었지만 타락한 그날부터는 하나님과 일치될 수 있는 자리도, 또 하나님의 소망과 일치될 수 있는 자리도 갖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곧 타락한 입장인 것입니다.
인간이 이러한 입장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타락한 인간을 바라보고 계셔야 한다는 사실은 천지역사 가운데 있어서 비통한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사실이 아무리 관념적으로 슬프고 혹은 참을 수 없는 슬픔을 갖게 하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볼 때, 여기에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내용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본연의 자리를 찾아가기 위해서 사랑하는 독생자를 불우한 환경에 보냈다가 그 자식을 잃은 입장에 서게 될 때, 그 하나님이 당하는 아픈 마음이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일을 당해 보기 전에는 설명해 가지고는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에게 있어서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지만, 그런 일을 체험할 수 있는 경지를 모색해 보는 것도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슬퍼하셨던 내용을 아는 데 있어서 필요하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자식은 부모가 자기를 어느 정도로 사랑하느냐 하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자기가 부모를 따르고 부모를 좋아하는 그 기준으로 부모가 자기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식의 차원과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차원은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부모의 입장에서 다시는 창조할 수 없다는 절대적 기준을 세워 놓고 지었던 아담 해와이기 때문에, 그들이 타락한 그 순간부터는 인간 스스로 출발할 수 없다는 것을 절대적인 철칙으로 해 오셨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압니다.
하나님은 이상의 한때를 바라셨지만 아담 해와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비운의 한때를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비운의 역사를 엮어온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타락으로 인한 비통한 마음을 어떻게 마음속에서 빼버리느냐 하는 것이 문제요, 인류도 이러한 비참한 운명을 어떻게 청산하여 본연의 위치를 다시 찾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자신들은 영원한 쇠사슬에 얽매여 있는 자신을 해방하는 것이 문제요,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마음속에 있는 비통함을 어떻게 빼버릴 것이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면 그 문제를 누가 해결해 줄 수 있는가? 인간들은 아내가 있고, 남편이 있고, 자녀가 있고, 친지가 있기에 슬픈 환경에 부딪치게 될 때 위로 받을 수가 있고, 또 그 환경을 극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그럴 수 있는 그 어떤 환경도, 그 누구도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자기보다 더 분한 입장에 있는 사람이 위로하게 될 때는 위안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누구보다도 더 비통함을 겪고 계시기 때문에 그 어떤 사람도 하나님을 위로할 수 있는 입장에 있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시작도 하나님 자신이요, 끝도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에 그 마음 가운데 맺혀 있는 원한을 어떻게 풀 것이냐 하는 것이 지금까지의 하나님의 내정적인 사정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정을 품고 지금까지 복귀섭리를 해 나오신 것입니다.
영계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세계이기 때문에 6천년 전의 슬픔도 역사시대권내에 영원히 남아지는 것입니다. 만약 스스로를 제물로 드렸다는 체험으로 기쁨을 느꼈다면, 그것이 시간권의 내용이든지 생활권의 내용이든지간에 일생에 있어서 잊혀지지 않는 것입니다. 세월이 가면 갈수록 그 폭과 넓이가 커져 추앙의 대상이 되고, 그것이 무한한 근원과 인연이 맺어진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여러분이 이러한 신령한 체험을 하여 그런 내용을 갖고 실행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당하신 슬픔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연속적으로 연결되어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슬픈 마음을 풀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을 찾지 못하시고 그 마음을 품은 채로 계십니다. 그러면서도 오늘날 타락한 환경 가운데서 헤매며, 비참한 환경에 처해 있는 인간을 해방시켜 주시기 위해 도리어 당신 자신을 잊으시고 부모의 입장에서 수고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입장에 계시는 하나님이 얼마나 비참한가를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여러분은 하나님이 여러분을 찾아오는 과정에 있어서 자기 자신을 중심삼고 잊을 수 없는 최후의 한때, 타락의 인연을 끊을 수 있는 최후의 한때를 가지고 있어야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위로해 드릴 수 있는 환경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러한 한때와 환경을 갖지 못한 우리 자신들이 어떻게 해서 심정적인 곡절을 가지신 하나님을 위로해 드릴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볼 때, 현재의 입장에서 하나님을 위로해 드릴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타락된 것을 해원성사하기 위해서는 스스로가 타락하지 않은 아담 해와가 소망하던 이상의 실체가 되어야 합니다. 자신을 타락한 아들이라 생각하지 않고 본연의 심정으로서 직행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무엇에든지 그냥 그대로 직접 부딪힐 수 있는, 둘이 아닌 하나가 된 소망의 실체가 되어야 합니다. 자기를 중심 삼고 볼 때, 타락한 기준 이상의 자리를 넘어가지 않고는 하나님을 위로할 수 있는 최후의 한때를 마련할 수 없는 것입니다. 즉, 아담 해와가 쫓겨났던 비운의 근원을 뽑아 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해소시킬 수 있는 한때가 언제가 되겠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역사는 지금까지 6천년 동안 흘러 나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 복귀역사 과정에서 수많은 곡절이 있어 왔다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벨을 중심삼고 아담이 실수한 것을 복귀해 주기를 간절히 바라셨지만,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그 순간 하나님의 심정은 어떠하셨겠는가? 암담했다는 것입니다.
아담이 타락한 것만도 슬픈 일인데 희망을 가지고 잃어버린 자녀의 기준을 찾기 위해 소망의 터를 닦고 키워 복귀의 한때를 바라본 하나님 앞에서 가인이 아벨을 살해하게 되니 2차의 복귀의 소망마저 실패하게 되었고, 가인은 하나님의 내심에 거듭 못자국을 남기게 됐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인간 조상이 하나님 앞에 슬픔의 기원자인 것만도 복통한 사실인데, 아벨이 처참한 형상으로 살해당함으로 말미암아 또 다시 하나님께 못자국을 가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가중된 원한을 품고 나오셨습니다.
노아를 중심삼고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120년 동안 수난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는 환경적으로 그 어떤 사람도 자기를 따라올 수 없는 외로운 자리에 내몰린 것입니다. 평범한 사람이든 특정한 사람이든 타락한 인간이라면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경지까지 몰린 것입니다.
노아는 그렇게 몰리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왜? 그는 둘이 있는 자리에 가서는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단 혼자만의 자리에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 들어가지 않고는 복귀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아벨도 단 혼자만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대했고, 노아도 단 혼자만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대했던 것입니다. 아담 해와 두 사람을 창조하셨지만 섭리는 남자를 중심삼고 하는 것입니다.
복귀역사를 중심삼고 볼 때, 남자가 이것을 찾아야 할 것이 원칙이기 때문에, 복귀해 나오는 과정에 있어서 노아가 찾아가는 자리도 역시 하나님과 노아 자신 둘만이 대할 수 있는 자리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를 어떻게 끌고 나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있어서 노아는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지시하시는 목표와 일체될 수 있는 인연을 세워 하나의 절대적인 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노아는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신앙심을 갖고 하나님이 현현된 실체와 같은 입장에서 주체인 하나님과 일치될 수 있는 탕감조건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120년 동안 절대적인 신앙 기준을 세워 주기를 바라고 노아를 몰아냈던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 됩니다. 하루도 아니요 10년도 아닌 120년 동안의 기간이었습니다. 그렇다고 그 기간 동안 하나님이 노아에게 찾아오시어 참고 극복하라고 언제나 말씀하셨던 것도 아닙니다. 한번 믿었으면 그 절개를 영원히 지킬 줄 알아야 했고, 한번 믿었으면 아무리 환경이 요동을 하더라도 그 환경을 넘어 갈 수 있는 자신이 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노아는 120년 기간을 지난 후에 홍수심판을 당했습니다. 노아는 여기서부터 하나님의 새로운 소원성취가 있을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노아를 중심삼고 볼 때, 노아 개인만으로는 복귀되지 않는 것입니다. 아담이 복귀되기 위해서는 그의 아들인 아벨이 필요했듯이, 노아의 아들이 아버지를 복귀할 인연을 중심삼고 아버지와 일치될 수 있는 기준을 세우지 않고는 타락한 부자의 인연을 복귀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본연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자세를 갖추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식이 구원섭리의 출발을 행하는 것입니다. 본래는 아버지가 해야 되는데 타락했기 때문에 자식이 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아를 중심삼은 뜻에 있어서 부자가 일치될 수 있는 기준을 세우도록 하기 위해 그로 하여금 모든 수난의 역경을 거치게 하여 40일 홍수심판을 했던 것입니다. 심판 이후의 이 땅 위에는 아버지와 그의 가족만 있고 자기들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 누구도 없는 환경이었습니다. 이렇게 자기 아버지인 노아의 말을 들을 수 있었던 환경인데도 불구하고, 뜻하지 않게 함이 불신하는 한때를 가져옴으로 말미암아 제2차적인 복귀도상에 있어서 또다시 하나님께 슬픔을 가중시켜 드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을 중심삼고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데라의 아들을 세워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고 하실 때까지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지금까지의 습관적인 생활환경에서 자라 많은 체험을 한 아브라함을 선택하여 세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때까지 역사과정에 있었던 내정적 슬픔을 전부다 품고 오셔서 그 품은 한을 풀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세우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수의 수중에 있는 사랑하는 아들을 빼내 가지고 고향 산천을 버리고 갈대가 우르를 떠나라고 명하시어 애급노정을 걷게 하셨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제물을 드리는 그 순간은 아담이 타락한 후 2천년 기간의 수난의 역경을 거쳐오신 하나님에게 있어서 복귀할 수 있는 소망의 한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이 제물을 드리는 데에서 실수함으로 말미암아 제 3차적인 복귀를 해야 하는 입장에서 하나님께 다시 못을 박는 원한을 남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모세가 민족을 끌고 나오면서 수습해 나오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민족을 수습하기 위해 모세를 세웠지만,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을 끌고 나오면서 반석을 2타하여 실패하였습니다.
이리하여 하나님께서는 또다시 예수님이 올 때 먼저 세례요한을 보내 터를 닦게 하셨고, 요셉 가정을 중심삼고 예수님이 오실 때 동방박사를 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동방박사를 보내신 것은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한 나라의 대표자로 오시는 메시아 앞에 이방의 대표자로서 굴복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고, 세 사람의 동방박사가 예물을 드린 것은 3대 천사장이 하나님과 아담에게 굴복하지 못한 것을 복귀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국경을 넘어 이런 원칙을 행함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의 국가 기준이 세계적 판도를 갖출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던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이 예수님께 예물을 드렸지만 예수님께 필요한 것은 예물이 아니었습니다. 조건물로서의 예물이 필요했던 것이 아니라 동방박사의 실체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만일 그때 동방박사가 예수님과 뜻이 일치되어 가지고 유대 나라를 중심삼고 해롯 왕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입장에 섰더라면 일차적으로 새로운 길을 모색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선정하여 국경을 넘게 한 동방박사들이 의인이 태어난 것을 이스라엘 민족에게 알리고 그들을 인도해 주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동방박사들은 세상적으로 바라던 소원을 중심삼고 한때의 중간적인 사명자로서 예수님께 예물을 드리는 것으로 자기 사명을 다한 줄로 생각했던 것이 역사적인 불행인 것입니다.
만일 여기에서 세 사람의 동방박사가 예수님과 일치되었더라면 국가를 넘어 천국을 이루어 나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또 이러한 기준에서 요셉과 마리아가 예수님께서 사명을 다하실 수 있도록 준비된 환경을 갖추어 나갔더라면 예수님은 복귀의 한때를 맞았을 것인데, 그러지 못했기 때문에 거기서부터 수난의 길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동방박사는 예수님으로부터 떠났고 요셉 가정은 그를 불신했습니다. 그리하여 세례 요한에게 희망을 걸었으나 그도 책임 못함으로 인하여 예수님에게 교회적인 수난의 길이 전개되었습니다. 교회적인 수난의 길이 전개됨으로 말미암아 국가적 수난의 길이 전개되었던 것입니다. 이때 요셉 가정에서 가정적인 기준이 일치되었더라면 세례 요한은 자동적으로 복귀 되었을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종족기준을 대표한 것과 마찬가지 입장이기 때문에 요셉 가정이 일치되어 나왔더라면 세례 요한은 자연히 환경을 넘어 수습되었을 것입니다. 혈통적으로도 세례 요한은 그러지 않을 수 없는 입장에 있었던 것입니다.
가정적 기준을 잃어버린 예수님에게는 교회의 기준을 세우기 위해 나서는 걸음이 공생애의 첫번째 걸음이었고, 40일 금식 직후의 예수님의 입장은 세례 요한의 입장이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잃어버린 가정적인 기준을 수습하기 위해 이런 제1차적인 노정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거기서 교회적인 기반이 무너지더라도 대제사장 가야바 같은 사람들이 국가적인 기반에서 하나님을 중심삼고 세례 요한적 사명을 대신하여 그 기대를 갖추고 나갔다면, 예수님이 국가적인 기준에 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그런데 그것도 무너짐으로 말미암아 가정적 기준을 상실하고 교회적 기준을 상실해 버린 예수님은 국가적 기준을 갖출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적 기준을 중심삼고 4천년 역사를 섭리해 나온 하나님의 뜻이 진전될 수 없는 입장이니, 하나님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놓지 않을 수 없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4천년 만에 승리의 한때를 맞이하여 가슴에 박혀 있던 원한의 못자국을 뽑아내기 위해 소망의 아들을 세우셨으나 인간들은 그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위해서 유대 나라를 준비하셨고, 유대교를 준비하셨습니다. 또 그를 위해서 요셉 가정을 준비하셨고, 이방 나라를 중심삼고 세 동방박사를 준비하셨습니다. 이같이 모든 환경이 준비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환경의 대표자들이 책임 다하지 못하고 실패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비통한 사실로 인해 하나님은 에덴 동산에서 아담 해와가 타락하던 그 이상의 슬픔을 느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 합니다.
잃어버린 아담을 복귀하기 위한 복귀의 터전을 모색하기 위해 수난의 길을 걸어오신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실패함으로 말미암아 제2의 복귀를 위한 길을 다시 모색해야 하니, 그 하나님의 입장이 얼마나 비참하셨던가는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은 말만 가지고는 모릅니다. 그 입장에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 부활한 하나님의 심정이 얼마나 슬프고 비통한 사실인가 하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기에 이러한 입장을 탕감하기 위해서는 피를 흘려야 합니다. 세계적인 피를 흘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국가를 넘어 세계로 향하는 길을 개척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국가를 넘지 못하여 세계로 갈 수 있는 길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국가를 넘어 세계로 가야 하는 기독교는 피를 흘려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기독교는 순교의 종교가 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그런 순교가 생길 때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셨느냐? 아닙니다. 순교를 당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천당이란 개인주의적인 사상이 중심이 되어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기독교를 믿어 왔던 신앙자들이나, 혹은 시대시대마다 기독교를 지도하며 복귀섭리를 책임져 나온 사람들을 보면 모두가 자신의 입장에서 하나님을 믿어 구원을 얻는 것이 소원이었지 믿고 뜻을 이루어 드리겠다고 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언제나 개인적인 신앙의 관점에서 나왔던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기독교의 2천년 역사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개인을 중심삼고 구원의 목적을 세워 나오는 그 배후에는 누가 국가적인 혹은 세계적인 판도를 연결시켜 나왔느냐? 하나님께서 책임지고 나오셨습니다. 수많은 선교사들을 외국에 파송하여 자신들이 개인구원을 바라는 마음을 가지는 것보다도 하나님 앞에 특별한 보호를 받기 위해서는 이방 사람들을 구원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복귀섭리를 담당한 특별한 나라면 나라일수록 기독교가 발전해 나오는 데있어서 수난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그러지 않고는 복귀섭리도상에 있어서 귀중한 임무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예수님이 국가로부터 세계를 넘어가지 못하고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 오늘날 땅 위에 맺혀진 실체적인 탕감의 기준을 세계적으로 벌여 놓았기 때문에 기독교의 뜻을 전통적으로 상속할 수 있는 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수난의 피를 흘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후를 남겨야만 섭리의 중심 민족이 되는 것이기에 그러한 민족이 국가로 가는 입장에서 어떤 종파적인 입장에 몰려 희생당하는 것도, 국가적으로 수난을 당하는 비참한 자리에서 우왕좌왕하는 것도 필연적인 것입니다.
지금까지 복귀섭리는 개인적인 환경도 그런 환경, 가정적인 환경도 그런 환경, 종족도 그런 환경, 민족도 그런 환경, 국가도 그런 환경을 거쳐 왔습니다. 그런데 만일 그런 내용을 갖추어 가지고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세운 그 가정이 사라져 갔고, 종족이 사라져 갔고, 국가가 사라져 갔다면 어떻게 될 것이냐? 뜻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냐? 아닙니다.
그것들이 사라져 갔을 때는 재차 택해 세워서 지금까지 그 국가가 치른 탕감을 일시에 치르게 하는 것입니다. 탕감하는 이유를 깨달은 민족이나 국가가 있을 때는 그 민족이나 국가를 세워서 복귀섭리를 담당할 수 있는 입장에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의 복귀섭리를 두고 볼 때, 하나님께서 시대시대마다 최후의 비장한 한때를 맞이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아벨이란 이름을 부를 때마다 하나님의 슬픈 숨소리를 듣지 않으면 안 되겠고, 하나님의 맥박을 느끼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노아 할아버지면 노아 할아버지에 대한 역사가 지나간 역사가 아니라 현실에 현현된 역사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왜? 영계는 시간성을 초월하기 때문에 몇천 년 전도 오늘과 같은 것입니다. 오랜 역사과정을 거친 것 같지만 그것이 바로 오늘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중심삼은 내용이라든가, 모세를 중심삼은 내용이라든가, 예수님을 중심삼은 내용 등이 시대적으로 볼 때는 역사적인 거리가 있지만, 그것을 환경적으로 다른 입장에서 느껴선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역사의 한계권내에 있는 우리에게는 몇 천년 전이지만 하늘에서는 하루와 마찬가지로 느끼는 것입니다.
아담 해와가 타락한 한 순간이 우리에게는 용서할 수 없는 원한의 순간인 것입니다.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복귀라는 한 맺힌 명사를 필요로 하게 된 것입니다. 복귀라는 원한의 명사가 필요한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찾아오신 것이 제1차적 복귀입니다. 그 과정에 있어서는 가인이 하나님께 한의 못자국을 남겼는데, 함도 그랬고, 제물 실수한 아브라함도 그랬고, 반석 2타한 모세도 그랬습니다. 또한 동방박사와 요셉 가정이 그랬고, 세례 요한과 유대나라의 제사장들이 그랬고,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가 그랬던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두고 볼 때, 하나님께서는 어느 나라를 바라보시고 소망을 가지시겠습니까? 어떤 종교를 바라보시고 소망을 가지시겠습니까? 어떠한 가정, 어떠한 개인을 바라보시며 소망을 가지시겠습니까? 아무리 힘을 내고 아무리 소망을 다짐한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무엇 하나 믿을래야 믿을 수 없는 입장에 계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불신을 해소해 버리고 스스로 해결짓고 넘어서야 하기 때문에 조건을 세워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높은 단계에 희망의 조건을 세워 놓은 것이 아니라 낮은 단계로부터 희망의 조건을 세워 복귀섭리를 추진해 나가시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해 볼 때에 끝날이 되면 될수록 뜻을 대하는 특별한 사명을 짊어진 사람이 나온다 할진대, 하나님께서 그를 믿기까지에는 지금까지 6천년 동안 맺힌 사연, 즉 6천년 동안 불신한 환경의 내용을 전부다 복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끝날이 되면 될수록 외적으로 종교적인 기반이 넓어져 하나님을 모시는 기반이 넓어지는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뜻을 대할 수 있는 사람을 세우기 위해서는 역사적으로 개인이 믿던 신앙의 기준을 중심삼고 본이 될 수 있는 하나의 조건을 세우기 위한 시련을 거치게 하지 않으면 안 될 아버지의 설움이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끝날에는 기독교가 세계적인 판도를 갖춘 환경일 텐데도 불구하고 믿음을 보겠느냐 하신 예수님의 말씀의 배후에는 그러한 내용이 담겨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그 자리는 사랑하고 싶지만 사랑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닌 것입니다. 뜻을 대해 충성하는 모습을 붙안고 당신의 사연을 통고하고 싶지만 이러한 사연을 통고했다가는 더 큰 슬픔을 남기는 입장에 서기 때문에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께서는 낮은 자리에서 복귀의 심정을 넓혀 나오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심정적으로 지금까지 저끄러졌던 6천년의 원한을 풀고 다시금 심정적인 기반에서 아벨을 지도할 수 있는 이상의 기준을 넘어설 때까지 택한 사람을 시련도상에 내놓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비로소 `너는 믿을 수 있다'고 할 수 있는 조건, 즉 `너는 이제 떨어지더라도 더 이상 떨어지지 않는다'는 조건을 남겨 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끝날이되면 될수록 그러한 입장에서 특별한 자녀들을 대해 나오신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통일교회에 있어서 선생님을 중심삼고 볼 때 선생님도 일신의 기준에서는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선생님이 예수님과 같은 입장에서 전체적인 책임을 짊어졌으면 예수님이 태어날 때 동방박사를 보내 주신 것과 마찬가지로 선생님에게도 보내져야 할 게 아닙니까? 요셉과 같은 가정에 보내져야 되고 세례 요한과 같은 사람이 역시 왔어야 될 게 아닙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배신했던 역사적인 그 후손들을 통한 환경에서 복귀섭리를 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그보다 더 비참한 환경에서 섭리하시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다시 오시는 주님이 가시는 길은 예수님보다 더 비참한 운명에 처해야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나는 그 누구로부터도 협조를 받지 않고 이런 길을 고독단신으로 걸어왔습니다. 일대일의 입장을 갖추지 않고는 복귀의 중심을 결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중심이 결정되어야 비로소 지상에 상대적 여건을 세울 수 있는 것입니다. 중심이 결정되지 않고는 상대적 환경이라든가 혹은 국가라든가 세계라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 통일교회에서 배우고 있는 복귀원리의 내용을 중심삼고 볼 때, 이것은 샘터에서 흘러나온 물줄기와 물줄기가 합하여져 큰 강을 이루어 가지고 대해로 들어가는 것과 같은 자연적인 흐름이 아니라 그 강물이 거꾸로 올라가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대해로부터 거꾸로 올라가서 샘줄기를 찾아가는 것이 복귀의 길입니다.
그러면 오시는 주님은 어떻게 해야 되느냐? 그 누구보다도 포부와 희망이 세계적이어야 합니다. 세계적인 입장에 서고 누구보다도 비참한 자리에 서서 최하의 입장에 있는 사람들을 대표할 수 있는 절망의 자리에까지 가야 됩니다. 다시 말하면 크다면 최고로 큰 자리요, 작다면 지극히 작은 자리까지 거치지 않고는 복귀의 사연을 통틀어 가지고 뒤집어 놓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원리의 배후에는 이런 곡절이 많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타락으로 인하여 갖게 된 슬픔을 풀 수 있는 한 때, 복귀의 한을 풀 수 있는 한때를 맞지 못하셨습니다. 아벨을 찾아왔지만 그 소망을 저버리게 하던 한때, 3차에 있어서 노아를 중심삼고 복귀하려던 그 한때, 아브라함을 중심삼고 또다시 수습하려던 그 한때, 예수님을 중심삼고 전체를 수습하기 위해 섭리하셨지만 하나님은 복귀의 그 한때를 맞이하지 못하셨습니다. 이것을 맞이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지금까지 수많은 선지선열들이 죽음길을 가리지 않고 수난길에서 피의 대가를 치르고 영계에 가서까지 해원성사의 한날을 향하여 수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무리를 바라볼 적마다 하나님께서는 기쁨으로 대할 수 없는 비통한 입장에서 2천년의 역사를 지내 오셨습니다. 이런 것을 생각해 볼 때, 복귀의 종교는 재림사상을 중심삼고 어느 특정한 나라나 민족을 세울 때까지 그 배후에 있어서 그 누구도 모르는 수난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수난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이러한 사명을 책임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누구보다 크고 엄청난 소망을 가져야 됩니다. 어느 누구도 하지 못한 비참한 통곡까지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담을 붙들고 같이 몸부림치면서 통곡할 수 있는 자리를 갖추지 않으면 아담이 하나님께 박은 한의 못을 아담과 더불어 뺄 수 없는 것이요, 아벨이 못을 박았으면 그 아벨을 붙들고 하나님 앞에 통곡할 수 있어야 그 못을 뺄 수 있는 것입니다. 가인 아벨 복귀가 원칙이라 할진대는 아벨의 입장에 서서 가인을 부둥켜 안고 하나님을 모시기 위해 같이 눈물 흘리지 않으면 복귀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인 아벨이 가야 할 복귀의 길입니다.
노아가 실패한 것을 해원하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노아 대신 하늘의 전체적인 책임을 진 아벨의 입장이 되어 실수한 노아를 가인적 자리에 세워 놓고 그를 붙들고 통곡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붙들고 하소연 할 수 있는 한때를 갖지 않고는 노아의 슬픔을 해결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실수한 함을 붙들고 통곡할 수 있어야 됩니다.
아브라함이면 아브라함이 실수한 한 때를 중심삼고 아브라함을 붙들고 통곡하며 회개할 수 있는 한 길을 모색하지 않고는 탕감복귀를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모세면 모세가 실패한 것을 중심삼고 아벨적인 입장에서 모세를 붙들고 하나님께 바칠 수 있는 제물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복귀의 사연을 가릴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칙입니다.
세례 요한이면 세례 요한, 예수면 예수가 실패했던 내용을 중심삼고 그들 대신자 입장에 서서 그들을 붙들고 통곡하며 하늘의 사조를 다룰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아들이 나오지 않고는 지금까지 하나님 가슴속에 못 박혀 있던 서글픔을 뽑아 드릴 도리가 없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또한 기독교단의 희생한 무리들을 붙들고 통곡하면서 회개하여 그 사연을 통과할 수 있는 기반을 닦지 않고는 기독교를 복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영적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고 오셔야 할 분이 재림주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그가 아담과 더불어, 아벨과 더불어, 노아, 아브라함, 모세와 더불어, 나아가 예수와 더불어, 또한 지금까지 복귀섭리의 역사과정에 왔다가 희생한 수많은 순교의 역사와 더불어 눈물 흘리게 될 때, 그 눈물은 타락의 눈물이 아니라 희망의 눈물인 것입니다. 이 희망의 눈물로써 아버지를 부르고 아버지를 붙들고 대신 울어 줄 수 있는 아들이 되지 않고는 복귀의 사연은 결정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일을 더듬어 온 것이 지금까지 통일교회가 있게 된 배후의 역사인 것을 여러분은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역사과정에 있어서 수많은 한때를 잃어버렸던 것을 탕감하기 위해 걸어간 예수님의 일생은 수난의 길이었습니다. 역사의 전체적인 한때를 몽땅 대신할 수 있는 생애를 살아야 했던 것이 오신 그분의 사명이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통일교회를 중심삼고 볼 때, 이러한 사명을 가진 분은 지금까지 실수하였던 하늘땅의 모든 사연을 얽어매어 해원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중심삼아 가지고 영계에 있는 모든 영인들과 예수님 앞에서 지금까지의 종교 전체를 대신하여 판가리를 지어 가지고 승리의 결정권을 갖고 와야만 지상에 현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나님의 소망이 지상에 현현하는 것이 아담의 실체이기 때문에 다시 오시는 제3 아담은 하나님의 내정적인 슬픈 천운을 품고 오셔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분은 슬픈 마음과 기쁜 마음 두 세계의 마음을 몽땅 가져서 그 중 서글픈 마음을 뽑아 버리고 기쁜 마음을 재현시켜야 되는 것입니다. 본래 아담을 창조하신 것이 하나님의 내성적인 표현이라면, 하나님은 타락한 아담을 바라보시던 한스러운 지금까지의 역사를 전부 잊으시고 다시 아담을 창조할 수 있는 소망의 한때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지상천국인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다시 오시는 주님은 두 세계, 즉 슬픈 세계와 소망의 세계의 사명을 책임져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타락한 아담의 후손입니다. 땅 위에 살고 있는 30억의 인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어찌하여 오시는 주님 앞에 목숨을 내놓고 그 분과 같은 운명에 보조를 맞추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인가? 오시는 주님은 역대의 영계에 있는 수많은 영인들과 땅의 인연을 모두 갖고 오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눈물로써 생명을 부활시킬 수 있는 승리의 조건을 갖추고 오시고, 천상의 인연이 아닌 지상의 인연을 갖고 오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을 붙잡고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 이상 슬퍼할 수 있은 기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슬픔이 몽땅 재림할 수 있는 곳은 그분이 계시는 지상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내성적인 뜻을 몽땅 성취할 곳도 지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 오시는 주님은 슬픔과 기쁨의 두 세계에 있어서 사명을 다해야 되고, 영계와의 싸움에 있어서 지금까지 역사를 대신할 수 없었던 입장에서 이제는 역사를 대신할 수 있는 입장이 되어 현실과의 싸움에서 망하지 않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시는 주님이 가야 할 길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니 다시 오시는 주님의 자리는 편안한 자리가 아닙니다. 이런 내용을 두고 볼 때, 복귀의 노정을 담당해야 할 역사적인 사명이 통일교회에 있는 것이요, 여러분을 지도하고 있는 스승에게도 있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나를 선생님으로 대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보시지 않을 것입니다. 아담도 그럴 것이고, 노아도 모세도 예수도 그럴 것이며, 지금까지 왔다 간 역대의 수많은 선인들도 그럴 것입니다.
오늘날 선생님을 따르다가 떨어지면 별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선생님으로 인해 선조들이 부활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었기 때문에, 영계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선생님과 인연을 맺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인들도 마찬가지이고 타락한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선생님과의 인연을 필요로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개인적인 싸움을 전개해 온 것이 1960년도까지입니다. 그리고 가정적인 싸움을 해온 것이 1970년도까지입니다. 즉, 제1차 7년노정이 끝나는 시기까지입니다. 그 다음에는 가정을 중심삼고 여러분을 내세워 종족과 민족적인 싸움을 하는 때요, 예수가 유대교로부터 배척받은 기준을 넘는 때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상적인 면에서나 신앙적인 면에서 가인과 아벨이 넘지 못했던 기준을 넘어서는 단계가 1970년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1970년대는 통일교회 시대로 들어서게 되는 시기입니다.
그러면 들어서는 데에는 어떻게 들어서느냐? 어떤 환경도 개의치 않는 골짜기로 들어가야 합니다. 한국에 그런 입장의 통일교회가 있다고 할 때는 한국의 운세는 세계적인 골짜기로 들이몰릴 것입니다. 그때가 오면 끝날이 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때는 죽을 수도 있는 때요, 살 수도 있는 때입니다. 거기에서 갈라지면 죽는 것이요 하나되면 사는 것입니다. 하나되지 못하여 역사적으로 비운을 남겼던 때가 여러 번 있었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내용을 접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선생님이 싸워왔던 것이요, 여러분은 지금까지 지방에서 싸워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선생님은 지금까지 홀로 개척해 왔던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한국의 종교를 어떻게 규합하느냐 하는 문제, 혹은 어떤 조직의 형태를 갖추어야 하느냐 하는 문제, 한국 정부면 정부를 중심삼아 사상적인 면에서 어떻게 유의해야 하느냐 하는 수많은 문제들이 1960년대 말에서부터 1970년도 중순에 이르러 여러분도 모르게 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1970년대는 통일교회의 시대인 것입니다. 이런 때이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가정적인 기준에 있어서 요셉 가정이 책임 못한 원한을 탕감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축복받은 것은 요셉 가정의 사명을 상속받아 승리의 기점을 마련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입장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셉 가정이 유대교를 수습하지 못한 책임으로 탕감하도록 오늘날 축복받은 가정들을 다시 내세우는 것입니다.
축복가정은 수많은 민족 앞에 본이 되고, 수많은 교회 앞에 본이 되어야 합니다. 요셉 가정이 책임하지 못한 것을 여러분 가정들이 잘함으로써 탕감복귀하고, 요셉 종족이 책임하지 못하고 유대교가 책임하지 못한 것을 우리가 교단적으로 탕감복귀해서 넘어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가정적 실패, 종족적 실패를 국가 기준을 중심삼고 일시에 탕감복귀해 가지고 넘어가자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난 겨울 여러분 가정들이 한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누가 책임 못 했기 때문이냐? 마리아가 책임을 못 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원리적 관점에서 이런 한때를 통일교회의 역사에 남겼다는 사실을 두고 볼 때, 그것이 여러분에게 있어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선생님에게는 비참한 것입니다. 그것은 역사적인 귀추에 있어서 탕감원칙을 세우기 위한 불가피한 작전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그런 때는 어떠한 때냐? 예수님 앞에 요셉 가정이 하나될 수 있는 기반을 갖춘 때요, 세례 요한을 중심삼은 기반을 갖춘 때요, 기성교회와 하나될 수 있는 기반을 갖출 수 있는 자연적인 입장에 선 때입니다. 그때가 되어야만 민족복귀가 가능한 시대권내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죽지 않고 유대교단을 품고 민족을 향하여 넘어갈 수 있고, 승리의 나라, 승리의 세계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과 같은 시대권내로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선생님은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원리적 관점에서 그러한 한 때를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문제는 어디에 있느냐? 국가가 통일되어야 합니다. 국가가 통일되어 합해지면 사는 것입니다. 공산당이 철옹성같이 항상 둘러싸고 있는 입장에 있어서는 한국이 살 길이 없는 것입니다. 지금 아시아에서는 일본이 닉슨 독트린을 중심삼고 자주적인 권한을 갖추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섭리적으로 볼 때 그렇게 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중국이 편대해서 따라가는 것입니다. 거기에 한국도 자연적으로 합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에 들어서 있습니다. 여기에서 본질적인 것은 공산당을 주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복귀원칙으로 볼 때, 일본은 해와의 입장입니다. 해와는 타락할 때 천사장을 끌어들이고 아담을 끌어들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해와를 중심삼고 모든 일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주관성 전도인데 이것을 무너뜨려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누가 복귀해야 하느냐? 아담이 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한국이 국가적 기준을 중심삼고 세계를 목표로 하여 탕감역사를 전개해 나가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일본의 각 분야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금년에는 선생님이 직접 일본 전역을 50개 지구로 재편성했습니다. 무슨 말이지 알겠어요? 전에는 천사장이 끌어들였지만 여기에 있어서 하나되는 날에는 하나님께서 끌어들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시아가 천사장인 공산당을 극복하여 새로운 깃발을 들고 세계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최후의 한때에 있어서 언제나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이냐? 바로 내가 문제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품으신 슬픔이 무엇이고 역사과정에 있었던 수많은 선조들이 품었던 소원이 무엇이겠는가? 자신을 중심삼고 국가를 대하고 세계를 대해서 탕감할 수 있는 한때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은 탕감할 수 있는 그 한때를 맞이하는 길을 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여러분 가정이 완전히 하나되어야 하고, 여러분 개인은 선생님과 하나 되어야 합니다.
가인 아벨 탕감복귀는 실체로 복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지요? 여러분 개인은 가인 입장에서 선생님을 중심삼고 실체복귀해야 되고, 여러분 가정은 선생님 가정을 중심삼고 실체복귀해야 합니다. 그리고 축복가정은 반드시 중심가정인 아벨 가정을 갖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의 자녀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이제 최후의 한때는 왔습니다. 그러면 이때에 있어서 여러분 자신들은 어떻게 해야 될 것이냐? 2천년간의 이스라엘 민족의 탕감역사노정을 회고해 볼 때, 이스라엘 민족은 한을 품은 비참한 민족이 되지 않았더냐? 그 후손은 창끝에 찔리고 말발굽에 밟혀 쓰러지지 않았더냐? 또한 수많은 사람들에게 고난을 받지 않았더냐? 이러한 역사적인 실패자들의 경우를 볼 때, 여러분은 일신의 평화를 구하는 자리에 설 수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내가 잘살려 하고 일신의 향락을 구하겠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통일교회를 중심삼고 볼 때 문제는 어디에 있느냐? 하나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갈라지면 망하는 것입니다. 하난 못 되면 망하는 것은 절대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시대를 담당한 책임자는 하나님과 하나되어 복귀섭리를 담당한 절대적인 입장에 나가야 됩니다. 거기는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것입니다. 홀로 가야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 있어서는 선생님의 명령이 절대적인 것입니다. 이의가 없는 것입니다. 부모가 반대하고 어느 누가 반대하더라도 절대적인 자리에 서야 됩니다. 이것은 선생님의 말이 아닙니다. 하늘의 법도입니다.
명령을 따라 어디든지 갈 수 있어야 합니다. 죽음길도 갈 수 있어야 합니다. "아바 아버지여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 14:16)" 라는 시시한 기도는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 뜻이 뭐예요? 내 뜻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뜻과 내 뜻이 같아야 하는 것을 모르는 말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곧 내 뜻인 것입니다.
자식을 죽을 자리에 내세울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지금까지 이러한 하나님의 심정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나를 죽을 자리에 내세우는 것은 나를 망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몇 천 배 복을 받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심정을 알고 여러분은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하는 경지에 들어가서 이제부터 3년간 활동해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이런 기점에 놓여 있는 이 최후의 한때에 있어서 우리가 가져야 할 것은 무엇인가? 절대적인 신앙입니다. 절대적인 심정을 가져야 되고 절대적인 실체가 되어야 합니다. 타락이 무엇이냐? 절대적인 신앙을 갖지 못하고, 절대적인 실체가 되지 못하고, 절대적인 심정을 갖지 못한 것이 타락입니다. (녹음 불량으로 약간의 말씀을 싣지 못했음)
제1차 축복이 넘어가고 제2차 축복 때부터 싸움이 벌어졌는데 그래야 된다는 것입니다. 통일교회를 반대한 무리들도 전부다 우리의 모모한 사람들의 이름을 다 들추어 가면서 비난했습니다. 여러분은 모르지만 선생님은 결혼 전까지 탕감해 왔습니다. 그때에는 통일교회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통일교회 문선생을 잡아먹겠다고 야단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때는 아무것도 안 되었습니다. 그런 고비가 1960년도였습니다.
축복 당시에 처녀 총각들, 남의 아들딸을 데려다가 부모도 모르게 다 짝을 지어 놓고 청첩장을 보냈습니다. `부모님들 오겠으면 오고 말겠으면 마시오' 했으니 얼마나 욕을 먹었겠습니까? 욕먹게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부모는 `내 딸이 결혼하는데 누가 흰옷을 입고 오라 마라 하느냐. 내가 누군데' 하면서 화가 머리끝까지 난 사람도 있었습니다. 흰옷을 입지 않으면 들어오지 못하게 했으니 그럴 수밖에요. 그러나 자기 딸 결혼식에 참석도 않는 부모가 어디 있겠나를 생각하니 별수 있어요?
그래서 우리 식구한테 부탁해 예복을 빌려 입고 들어와서 보니, 젊은 사람들이 모두 앉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별수 있습니까? 이런 싸움은 빼앗기 싸움입니다. 아들딸을 빼앗는 싸움입니다. 이것은 실질적으로 빼앗는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선생님은 보고를 받았기 때문에 누가 들어왔는지 전부다 압니다. 그가 들어와서 보니 자기 딸이 그 가운데 틀림없이 서 있거든. 그리고 그 딸이 걸어나오는 것을 보고 얼마나 분한 마음이 들었는지 미친 사람처럼 욕을 하는 것입니다. 소리 내서 욕은 하지 못하고…. 선생님은 다 압니다. 이제는 자기의 딸을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나는 책임을 다 했으니 자기 딸을 데려가겠으면 데려가고 말겠으면 말라고 했습니다. 이제 뜻은 어차피 세워질 것입니다.
이 반대는 72가정, 124가정을 축복할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430가정을 축복하고, 나니 합동결혼식이 좋다는 소문이 나게 되었습니다. 부인들의 말을 가만히 들어보니까 그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부인들이 전도를 갔다 오니 자기의 아들딸을 맡아 달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사회가 이미 뒤엎어졌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런 내용을 중심삼고 안팎으로 작전을 세워야 합니다. 거기에는 많은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의 우리 숫자만 해도 적은 숫자가 아닙니다. 여기에 있어서 선생님이 해야 할 일은 기독교와 일반 종교까지 뭉치게 하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국가도 새로운 방향을 향하여 세계로 갈 수 있게 하고, 종교도 새로운 방향으로 갈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이제는 안팎으로 영계와 육계의 싸움에 있어서 새로운 방향을 갖출 수 있는 때가 되었기 때문에, 통일교회는 기성교회와 하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때가 어떤 때입니까? 우리의 때가 된 것 같아요, 안 된 것 같아요? 정세가 자꾸만 우리의 시대로 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일본을 내세워 세계로 향하는 것입니다. 이번에 일본에서 세계반공대회를 갖는 것도 공산당을 복귀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여러분이 몰라서 그렇지만 하늘의 섭리는 모두가 법도적인 것입니다. (이하는 녹음이 되어 있지 않음)
사람을 중심삼고 볼 때, 많은 사람과 관계를 갖고 많은 것을 계획하는 것은 자기의 기쁨의 대상을 만들기 위해서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창조주가 계시다면 그 앞에 지음 받은 피조만물도 창조주의 기쁨의 대상으로 지어졌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소생의 환희' 라는 내용을 놓고 먼저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신 과정을 쭉 살펴보면, 단계적으로 지으시려고 생각하신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처음에는 관념적인 때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창조하려는 전체의 우주를 당신의 마음 속에 미리 그려 놓고 앞으로 현현할 대상의 세계, 즉 실체세계를 순차적으로 창조해 나가려고 생각한 때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피조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생각하는 단계에서 말씀으로 창조하는 단계로 간다는 것은 비약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생각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 내용으로 할 수 있겠지만 그 생각이 체계화되어서 하나의 목적을 지향하고 말씀의 형태로 나타나려면, 거기에서 새로운 무엇이 가해지지 않고는 거기에서 더 이상 발전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 말씀만으로는 이 모든 것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말씀과 일치될 수 있는 실체적인 내용이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말씀에 입각하여 실체를 구성할 어떠한 힘이 가해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중심삼고 볼 때에 이 실체라는 것은 보다 발전적인 소생의 형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실체가 나타난 자리에 비로소 기쁨이 생깁니다. 또 기쁨이 생기면 거기서부터 화동의 역사가 벌어집니다. 그리하여 나타난 실체가 어느 단계까지 발전과정을 거치면 거기에 비로소 사랑이라는 것이 가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피조만물을 창조하신 과정의 형태입니다. 먼저는 생각이 있었고, 거기에 말씀이 플러스되어 실체를 이루고 그 실체 위에 사랑이 가해진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창조과정을 통해서 만물이 생성되었다는 것입니다. 생각하는 단계에서 체계적인 말씀의 단계로 갔을 때, 즉 이렇게 이렇게 창조해야 되겠다고 막연히 생각하는 단계에서 구체적인 내용을 첨부시켜 하나의 이론적 체계를 갖춘 말씀의 형태를 이루었을 때 거기에 말할 수 없는 기쁨이 생기는 것입니다.
어떤 작가가 자기가 구상하던 것을 작품에 표현했을 때 완성된 작품을 보면 기쁨이 생기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나아가서 그 작품이 영화화되거나 극화되어 그것을 자기가 보게 되면 거기에는 보다 큰 환희가 생기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생각했던 것이 이론적으로 체계화되고, 체계화된 그 이론을 기반으로 하여 실체가 갖추어지고, 그 실체가 전체와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어 전체가 바라는 기쁨의 내용이 된다면, 그 실체는 가정 귀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 인간을 두고 볼 때, 하나님께서 천지창조의 이념을 중심삼고 사람 하나를 창조하시기 위해 무한히 애썼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떠한 과정을 통하여 어떤 모양으로 지을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셨다는 것입니다. 인간 역시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상하신 대로 사람은 이런 형태로 짓는다고 작정해 가지고, 눈은 이렇고, 코는 이렇고, 손은 이렇고, 발은 이렇게 지은 것이 사람입니다. 사람을 짓기 전에 사람의 모양이 이렇다고 설명할 수 있는 체계를 모색한 후 그 기반 위에 실체적인 만물과 연결시켜서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의 실체로 창조된 인간이 전체 만물 앞에 중심 존재로 서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보다 크게 기뻐하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거기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수 있는 가치의 내용은 결정되는 것입니다. 아담이 바로 그런 입장에 섬으로써 그 기반 위에 해와를 지은 것입니다. 여기에서 비로소 사랑이라는 것이 생기는 것입니다. 사랑은 반드시 횡적인 기반을 통해서 상대적인 가치의 내용이 결정된 자리에서 성립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우리가 만물을 대함에 있어서 하나님 앞에 갈 수 있는 길은 어떤 길일 것인가? 사회면 사회, 가정이면 가정을 중심삼고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갈 수 있는 길은 어떤 길일 것인가? 막연하게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가려고 하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걸어오신 길을 더듬어 가는 것이 제일 빠른 길입니다. 만일 사람이라는 존재가 이 땅에 없다면, 생각을 가진 `자기' 라는 존재가 땅 위에 없다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시기 위해 생각하시던 그 입장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생각을 체계화하고 이론화해서 그것을 중심삼고 바라시던 형태대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사람에게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 주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타락한 인간은 자기 자신을 복귀시키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에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내가 무엇을 실천하는 것 보다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오늘날까지 `인간은 어떤 존재냐' 하는 문제를 해명하지 못한 채 역사는 흘러 나왔습니다. 인간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느냐? 도대체 나 자신이 어떤 존재나 하는 문제를 해명해야 됩니다. 그것을 해명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서 본래의 인간 모습을 재현시켜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 단계를 찾아 올라가고 있습니다.
오늘날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들이 추구하고 있는 이상세계, 유토피아적인 이상세계를 이루는 것보다도 인간이 어떤 존재냐 하는 것을 해명하는 것입니다. 타락한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큰 문제가 `나 자신'이 어떠한 존재나 하는 것을 해명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해명하는 데 있어서 어떻게 말씀으로 표현해야 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라는 거예요. 그렇게 해명하는 것이 지금까지 철학이나 종교가 추구해 온 최고의 목적입니다. 인간의 존재를 해명하여 만천하에 드러낼 수 있는 말씀의 형태를 어떻게 갖추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인간 시조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하나님의 생각에서부터 말씀의 형태를 갖추어 실체화된 인연을 잃어버린 입장에 있기 때문에, 여러분은 다시 말씀을 찾아 들어가야 됩니다. 찾아 들어가는 데는 어디까지 찾아 들어가야 되느냐? 하나님의 생각의 바탕까지 찾아 들어가야 됩니다. 다시 말하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던 관념권까지 찾아 들어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던 것이 이것이었구나' 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해야 합니다. 그 길이 가장 빠른 길입니다.
하나님의 생각권까지 찾아 들어가서 하나님의 생각에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실체를 쓰고 다시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 타락한 실체를 쓴 입장에서 이상적인 세계를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피조만물을 창조하실 때 말씀으로 창조하셨으니, 그 말씀의 내용을 자신에게 재현시켜 가지고 내 자신 속에서 모든 실체세계와 관계맺을 수 있는 말씀의 형태와 체계를 스스로 찾아야 합니다. 그러면 말씀의 체계를 찾는 데서 끝날 것이냐? 아닙니다. 한 단계 더 들어가 말씀이 출발한 하나님의 생각, 즉 하나님의 관념권까지 찾아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참선을 하는 것도 마음의 근본을 찾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기의 존재의식을 부정하고 무(無)의 상태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무의 상태, 즉 인간으로 태어난 자체의 존재 의식을 완전히 상실한 권에 들어서게 되면, 다시 말해 의식의 경계선을 넘게 되면 거기서부터는 하나님의 생각권과 관계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도달함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내가 아닌 새로운 관념이 소생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새로이 소생한 나의 관념은 지금의 생각보다도 더 좋다는 기준일 것입니다. 이런 것을 추구하면서 참선을 한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여기서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이 뭐냐? 이러한 내용들을 알았다는 것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마음의 바탕, 즉 생각의 바탕에 접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실적인 모든 것을 넘어서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외적으로 뻗어 나가는 것보다도 정신을 통일해서 내적으로 깊이 추구해 들어가는 길을 모색해야 됩니다. 이것이 오늘날 기독교에서 말하는 기도생활이 아니겠어요? 여러분이 목적을 세워 놓고 그것을 성사시키려는 기도보다도 하나님의 생각에 접해서 하나님께서 하고 싶어하시는 말씀을 체휼하여 그것을 실천하겠다는 기도가 더 귀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기도를 하기 위해서 조용한 곳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지금까지의 모든 의식을 초월해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관계맺을 수 있는 범위가 얼마나 클 것인가? 만일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에 생각을 하시던 경지에 도달하게 되면 그 범위는 무한점에 접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온 세계를 포괄하고도 남을 수 있는 바탕으로 하고 새로운 자각을 일으키는 것이 창조의 출발이고 소생의 원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한다' 라는 결정적 기준을 세우시고 인간을 소생시켰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무한한 경지를 추구하는 자리에서 `나는 이렇다'할 수 있는 자각 기준을 세우고 체계적인 말씀을 통하여 `나 자신은 이렇게 해야 된다'는 결정을 지어야 합니다. 거기서부터 새로운 제2의 내가 소생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반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이러한 기준에서 자신의 존재의식을 느끼게 되면, 그때의 자신은 지금까지의 자신의 모습과 다릅니다. 즉, 거기에서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입장에 동참할 수 있는 관념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방에 전도 나가서 말씀을 전하게 될 때에 자기도 모르는 말이 나오는 것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사람의 몸은 마치 텔레비젼이나 라디오와 같아서, 공명될 수 있는 상대적인 여건만 갖추게 되면 반드시 파장을 받아 공명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공명하려면 그 파장에 완전히 주파수를 맞출 수 있는 속성을 갖추어야 됩니다. 그래야 공명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들 자신에게 그런 경지, 다시 말하면 순수하고 깨끗하고 고요한 경지에 이르겠다는 마음의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생각하셨던 그 관념과 일치될 수 있는 경지에 들어가게 되고, 거기서부터 하나님의 관념의 파장이 자신에게 찾아와 자신이 거기에 공명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이 공명적인 요소를 갖춘 본질에 통하게 된다면 공명적인 결과가 반드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러 입장을 자각하여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우주 창조의 목적관을 갖고 나서게 된다면, 이 사람은 실체 세계의 역사에 있어서 새로운 인물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말씀의 배후, 즉 말씀의 바탕이 되어 있는 하나님의 생각권내를 어떻게 추구해 들어갈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입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말씀을 들었으면 들은 그날부터 말씀대로 행동해 나가야 됩니다. 통일교회면 통일교회의 원리말씀을 중심삼고 통일교회에서부터 복귀노정을 따라 움직여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의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생각을 체휼하여 말씀이 중심을 잡고 설 수 있는 자리에서부터 출발해야 됩니다. 그런데 그런 내용을 갖추어 하나님과 관계맺는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과 간격을 두고 한 단계 떨어진 입장에서, 즉 하나님과 관계맺지 못한 입장에서 전도를 나가기 때문에 돌아오게 되면 환희를 느끼는 것보다도 오히려 감소감을 느끼고 실적이 저조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오래 못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법도, 즉 창조과정을 보아도 하나에서 둘을 창조할 수 있는 인연이 되어서 둘이 창조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보다 큰 기쁨을 느꼈습니다. 하나를 창조했을 때의 기쁨보다도 둘을 창조했을 때의 기쁨이 크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전한 말씀을 통하여 감동 받는 실체를 보았을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듯이 기뻐하며 그 실체들을 대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스스로가 갖추고 있는 실력 기반을 중심삼고 말씀을 전하고 나면 점점 감소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것이 가면 갈수록 환희의 세계로 발전되는 것이 아니라 점점 끝을 바라보는 입장에 부딪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맨 나중에는 자신을 가눌 수 없는 경지에 다다르게 됩니다. 자기가 지금 그런 경지로 가고 있다는 것은 본연의 자세, 즉 그 당시의 말씀을 시작하시던 하나님의 생각과 일치된 자세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필연적으로 그런 귀결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서 문제가 뭐냐? 말씀을 들고 밖으로 나가기 전에 말씀을 안고 말씀의 내면을 찾아 들어가서 하나님의 마음 바탕에 일치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그런 다음에 그것을 바탕으로 실천할 수 있는 분야에 나가 움직여야 합니다. 이렇게 열이 움직이게 되면 그 열은 열로 소모되는 것이 아니라 백에 해당할 수 있는 실체적인 권한을 창조하는 창조능력의 역사로 연결되어 나갈 것입니다.
예컨대 발전소에서 전기를 일으켜 송전소를 통해 가정으로 보낼 때 전구까지 선이 연결되어야만 언제든지 빛을 낼 수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도 근원에 접선되지 않고는 힘을 발휘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근본문제는 근원과 어떻게 연결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에게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심정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심정과 일치될 수 있는 결과적 입장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나서 하나님과 배치되는 자리, 하나님과 상극되는 자리에서 일치점을 모색하는 입장에 있습니다. 그러면 어디에서 하나님과 일치할 것이냐? 말씀에서 일치해서는 안 됩니다. 즉 말씀만 일치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근원이 되는 마음에서부터 일치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이제부터 여러분이 추구해야 할 문제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거기에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여러분에게 기도생활이라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기도생활을 하면 형용할 수 없는 기쁨이 오는 것입니다. 그 경지가 창세전 하나님의 생각의 경지입니다. 여러분이 그러한 경지에서 `이렇다' 하는 내용을 갖고 설명할 수 있는 입장에 서게 된다면, 그 입장이 바로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던 입장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피조물을 창조하시던 입장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러한 경지에서 말씀을 선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도 반드시 그 말씀과 접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핵심은 반드시 본성에 공명될 수 있게끔 되어 있기에 본심이 감동되는 날에는 대상은 반드시 거기에 일체화하려고 합니다. 이렇게 되어 대상이 주체 앞에 실체로서 다시 지음 받고자 하게 될 때 비로소 발전이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서부터 하나님을 중심삼은 발전이 가능한 것이지 말씀 그 자체만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지금까지 말씀을 받고서 그냥 좋다는 입장에서 그 말씀의 뿌리를 찾지 못한 채 살아왔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해가 가면 갈수록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점점 점점 퇴보해 왔습니다. 계속 그렇게 나가면 나중에는 하나님까지도 잃어버리고, 또 그 말씀이 진짜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인지도 모르게 되고, 그 말씀과 내가 어떻게 관계되어 있는지조차 모르는 입장이 되어 버릴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되느냐? 하나님은 무한한 힘의 모체이시기 때문에 그 모체와 연결되어 있는 것에는 반드시 창조적 역사가 벌어져야 할 텐데, 그렇지 않은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 그것은 우리들이 원칙적인 기준에서 일치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타락한 인간은 지금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 나왔습니다. 지금까지의 인류사는 진리를 추구해 나온 역사입니다.
여기서 우리 통일교인들은 진리의 배후, 즉 하나님의 마음 바탕에 접근해야 합니다. 그러한 자리에 들어가게 되면 무한히 신비로운 경지가 여러분 앞에 펼쳐질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는, 말로는 형용할 수 없지만 세상의 모든 것을 초월하는 세상의 모든 능력 이상의 힘이 느껴질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안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그런 경지에 갈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한 자리로 가는 데는 갈라져서는 갈 수 없습니다. 반드시 하나되어야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신이 통일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천지만물을 창조하실 때에 말씀보다도 먼저 정신을 통일시킨 후 하나의 목적을 두고 이념세계를 추구하셨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도 그런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상대적인 입장에서 하나님의 마음 바탕에 접해 수수작용을 하는 가운데 기쁨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꺼번에 강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입니다.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감각, 즉 영감에 의해 느껴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겨울과 봄의 경계선이 어디서부터냐고 하면 입춘이라고 하지만 입춘날에도 겨울절기에서 봄절기로 넘어가는지 잘 모르는 것입니다. 무심해 가지고는 모른다는 것입니다. 어제와 오늘의 차이를 모르는 것처럼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같은 것도 아닙니다. 거기에는 분명히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여러분들도 영적인 어떤 모체가 있으면 그 영적이 모체를 중심삼고 그 바탕과 접하여 관계맺을 수 있는 속성을 갖추어서 발육시켜야 됩니다.그것을 완전히 발육시켜서 하나님의 심정과 주고받을 수 있는 관계를 맺어야 됩니다. 그러기 전에 먼저 그런 영적인 모체가 있는지 없는지를 잘 느껴야 합니다. 그 감각이 지극히 미약한 것일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중심삼고 나가야 됩니다. 그런 느낌을 절대 잊어버려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어제 무엇을 느꼈으면 오늘은 그 느낌을 중심삼고 오늘의 느낌을 플러스(+) 시켜야 되겠습니다. 365일을 중심삼고 춘하추동 사계절이 돌아가는 것과 같이 마음세계도 하나님의 창조의 과정을 거치며 돌아가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에 느낀 것이 있으면 그 감각을 절대 잊어버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의 생활권내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절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 느낌을 기원으로 하여 발전할 수 있도록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러기에 기도하는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서 기도를 하다 보면 기도가 잘 됩니다.
여러분들이 기도를 해보면 알 수 있어요. 기도가 잘 되는 때가 있다는 거예요. 인간의 마음에는 마음의 눈, 즉 심안이 있는데 하나님의 마음의 눈과 자신의 마음의 눈이 상대적으로 딱 맞을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때는 자기도 모르게 은혜가 옵니다. 그 신비로운 경지에서의 느낌을 자료삼아 거기에 어떤 느낌을 어떻게 플러스시키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기도를 통해 그런 느낌을 받게 된다면 하루 기도할 것을 이틀 하고 싶어하고 이틀보다 사흘을 기도하고 싶어할 것입니다. 한 시간 기도하는 것보다 두 시간 기도하는 것이, 두 시간 하는 것보다 세 시간하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이처럼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그 기쁨이 크게 느껴질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하는 때가 계절에 따라서 다른 것이요, 사람들의 소성에 따라 전부 다른 것입니다. 기도하는 시간이 새벽 한 시인 사람이 있고 반대로 낮인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에 따라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은 자기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 바탕에 공명될 수 있는 경지를 찾아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거기에서 파장되어 들어오는 느낌을 절대시하고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귀하게 여겨 그것을 붙들고 새로운 기쁨을 찾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완전한 주체는 완전한 대상을 창조하는 것이 원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사적인 입장이 아닌 순수한 공적인 입장에서 생명을 구하게 되면 대상들이 증거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대상은 자신이 아무리 어려운 고개를 넘어가더라도 주체를 그리워하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세계의 젊은 통일교인들이 선생님을 사모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즉, 공적인 주체의 입장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알겠지요? 「예」 여러분이 기도할 때는 자기의 사욕을 중심삼고 해서는 안 됩니다. 보다 더 공적인 하나님의 입장에서 하나님을 위해 기도해야 됩니다. 여러분이 힘들더라도 그래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를 하다 보면 문득 자기도 모르는 말을 할 때도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만물을 통해서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될 때는 새가 날아다니고, 토끼가 뛰어놀고, 바람이 불고 하는 것이 모두 하나님의 가르침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 때는 모든 것이 일률적으로 하나님의 가르침이 됩니다. 그러한 천지를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요? 이를테면 그림 같은 먼 산을 바라보고 시공을 초월하여 무한한 세계로 날아가는 느낌을 받는 그런 세계를 어떻게 표현하겠습니까? 그러한 경지에서 흘러가는 물을 바라보면 그 물이 언제 어디서부터 흘러온 것인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물방울들이 모여 냇물을 이루는 이치를 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세계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세계입니다. 그에 반해 역사는 현실적인 감각권내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피조세계에서 아무리 크다 하는 것이라도 현실적인 감각권내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천태만상의 내용들, 우리가 보고 느낄 수 있는 것들은 무한한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그러한 감정을 느끼려니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기도할 때 무엇보다도 어떻게 하나님편으로 넘어가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기도했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넘어가려면 본연의 세계에서 슬퍼하시는 하나님의 마음 바탕을 찾아 들어가야 됩니다. 그리하여 거기에서 비로소 구체적인 내용, 즉 말씀을 가지고 실천해야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말씀을 중심삼고 실천했어요? 여러분이 하나님의 마음 바탕에 연결되어서 말씀을 중심삼고 실체를 갖추게 되면, 하나님과 같은 입장이 되기 때문에 재창조의 역사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재창조의 역사가 벌어지게 되면 사랑이 번식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물이 필요한 것입니다.
예를 들면 한 시간 이내에 죽을 수밖에 없는 환자가 생겼는데 의사가 주사를 놓아서 그 환자가 죽지 않고 깨어나게 되면 그 의사는 거기에서 보람과 환희를 느끼게 됩니다. 한 사람의 환자가 죽음에서 해방되는 것이 의사에게 있어서 커다란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높고 낮은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그러한 의미에서 한 사람의 위정자에 의해 나라가 살아나는 일도 벌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여러분이 말씀을 알았지만, 하나님께서 마음의 기쁨, 즉 자녀가 나타난 것에 대한 환희와 기쁨을 못 느껴 보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말씀에 대한 환희는 느꼈지만 마음으로 환희를 느껴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기도의 생활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말씀은 갖추어져 있으니 이제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느끼시던 마음의 환희를 여러분이 느껴야만 재창조의 역사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주관할 수 있는 그 사랑의 힘이 바로 창조과정에서 나타난 환희의 본질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원칙을 떠나서는 앞으로 부활의 시간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 자신으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들이 부활되었을 때 느낄 수 있는 환희를 맛보아야만 비로소 완전히 복귀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않겠지요? 「예」
아버님, 당신의 무한히 넓고 깊으신 심정에 저희들이 접하여야 되겠사옵니다. 있으면서도 없는 듯한 당신의 마음 바탕에 접하여 무한한 세계의 중심으로서 신비로운 경지를 체험하는 그 한날을 갖지 못한 저희들을, 아버지, 불쌍히 보시옵소서. 말씀을 통하여 스승 된 자리에, 한 중심에 있지만, 당신의 자녀들을 종횡으로 당신과 연결시키지 못 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지금까지 저희들이 활동한 것이 너무나 허무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옵니다. 자기를 중심삼고 출발하여 책임을 하지 못한 실체는 반드시 허무하게 된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오랫동안 움직이고 보니 스스로 마음이 지쳐서 더 이상 갈 수 있는 여력이 없는 자신들을 바라볼 때에 이와 같은 모습을 바라보시는 아버님이 얼마나 슬퍼하실 것인가를 생각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는 6천년이란 기나긴 세월을 통하여 준비해 오신 역사적인 인연을 품고 저희들을 찾아 오셨사옵니다. 아버지를 알아 모시고 부활의 역사를 일으켜야 함에도 불구하고, 환경적 사위기대를 갖추어 내적인 기반을 닦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를 저버리고 지금까지 자기를 중심삼고 움직여 나온 저희들의 너무나 허무하고 어리석고 유치한 소치들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저희가 고요한 심야에 홀로 앉아 있더라도 거기에 아버지께서 함께 하시어서 가까운 형제나 친구보다도, 그 누구보다도 더 친밀하게 아버지와 더불어 기쁨의 심정을 나눌 수 있는 자녀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실체의 권한을 가진 저희들이 사명을 완수하려면 자신의 입을 열어 말씀을 전파하고 어려운 순간들을 수습해서 부활의 권을 이루고 재창조의 역사를 일으켜야 한다는 것을 확실히 아는 자녀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지금까지 말씀을 전하고도 말씀의 권위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몰랐던 저희 자신들임을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통일의 운세가 얼마나 강하다는 것을 알고, 당신께서 얼마나 이곳에 자유스럽게 임재하고 싶어하시며 실질적인 내용을 갖춘 저희들에게 다짐받고 싶어하시는가 하는 것을 저희들이 알게 하여 주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철이 없던 저희들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어린아이와 같았사옵니다. 이제 참된 사람의 모습을 갖추어야 되겠습니다. 타락의 인연을 무시하고 새로운 인연을 맺을 수 있는 것이 커다란 축복이라는 것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이제부터는 아버지의 마음부터 찾아가야 되겠습니다. 그러하오면 저희의 걸음에 아버지께서 같이하실 줄 아옵니다. 아버지께서 동정하시지 않을 수 없는 경지에서 아버지를 향해 나가야 되겠사오나 그러지 못한 것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굶더라도 아버지께서 굶으신 것 이상의 배고품을 느껴야 되겠고, 저희들이 외로운 자리에 있더라도 그 이상 외로운 자리에 계시는 아버지를 위해 정성을 들어야 되겠사옵니다. 아버지의 동정을 받을 수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은 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저희는 알고 있사옵니다.
누가 알아주는 것이 도리어 무서운 사실이요, 누가 가까이해 주는 것이 도리어 무서운 사실임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누가 알아주기 전에, 누가 가까이해 주기 전에 아버지께서 알아주시고 아버지께서 가까이해 주시는 것이 행복 중의 행복이요, 희망 중의 희망이라고 느끼는 한 때를 갖지 않고는 이 귀한 자리에 설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 오늘 저희들이 말씀을 듣고 소생의 환희를 느꼈사옵니다. 이제 다시 아버지의 마음 바탕을 중심삼고 무궁무진한 소생의 환희를 느껴야 되겠사옵니다. 그리하여 천지만물을 창조하시던 당신의 심정을 체휼하여, 저희들이 말씀을 전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입장에 서야 되겠사옵니다. 스스로 입이 열려 말씀이 나오는 자리에서는 기필코 창조의 역사가 벌어진다는 것을 체험하는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모든 것이 소생하는 창조의 역사를 체험한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그 누가 뭐라 하고 그 무엇이 가로막더라도 이 길을 안 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았사옵고, 이 이상으로 가치 있는 길이 다시 없다는 것을 알았사오니, 이 길을 행복의 기원으로 삼고 전체 중심의 가치로 찬양하며 나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은 지금까지 하나의 중심을 잃어버리고 우왕좌왕하면서 가야 할 방향을 찾지 못하고 살아왔사옵니다. 자기를 중심한 타락의 내용을 벗지도 못하고서 하나님의 섭리역사를 완결짓겠다고 생각한 어리석은 저희들인 것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번 기간 동안 아버지와 하나되겠다는 마음 자세를 갖고 당신을 따라 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고, 지금까지 환경에서 느끼지 못한 것들을 느낄 수 있게끔, 아버지, 체험시켜 주시옵소서. 저희가 그러한 생활을 하게 되면 당신께서 동정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고, 전체적인 생활권내에서 저희들이 가는 곳에 아버지를 중심한 창조의 실적을 남기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이 시간 확실히 깨닫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번 기간에 당신의 아들딸들을 여기에 모이게 하신 특별한 뜻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지금까지 아버지의 신비로운 내적인 깊은 심정을 깨닫지 못하고 모시지 못한 것을 용서하여 주시옵기를 바라옵니다.
사탄세계의 물결에 흘러가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 되겠사옵니다. 오히려 세상의 횡적인 모든 것을 모아서 종적인 하나의 중심과 연결 지을 수 있는 기점을 마련하기 위하여 자기 스스로가 그러한 기반이 되고, 중심이 되어야만 하늘의 인연이 같이한다는 사실을 망각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것을 망각하면 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확실히 깨닫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통일교회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바로 이러한 길이옵니다. 여기에 서서 말하는 스승의 생활철학도 이것이옵니다. 이제까지 병이 채 나기 전에 아버지 앞에 쓰러져 호소한 사람이 있었사옵니까? 당신을 모실 수 있는 환경의 인연과 당신을 중심삼고 승리할 수 있는 내용을 알았기에, 따라갈 수밖에 없는 입장에서 지금까지 나왔사옵니다.
당신을 드러내고 당신으로부터 동기가 된 창조 원칙에 의해서 나아가게 되면, 당신께서는 언제든지 현실적인 방편을 제시하신다는 것을 저는 알았사옵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았기에 원수들이 조롱하고 원수들이 앞을 막았지만 그 길을 타개하여 오늘날까지 통일의 참뜻을 펼쳐 나왔다는 것을 이들이 알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사랑하는 자녀나 아내를 앞에 놓고 기뻐하는 것보다도 더 기쁠 수 있는 것은 아버지를 위하여 기도하고 아버지와 더불어 가까이하는 것임을 느끼는 자녀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세상적인 호화찬란함이나 육적인 향락을 그리워하는 것보다 아버지와 조화를 이루고 아버지의 품에 안겨 아버지의 사랑권내에서 아버지의 동정을 받을 수 있는 그 자리가 더 귀하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사옵니다. 당신의 동정의 인연으로 생애를 출발하게 될 때에는 당신의 아들딸이 될 수 있고 당신의 가정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마음세계의 무한한 경지에 계시는 거룩한 아버지를 모시고 거룩한 참부모의 인연을 중심삼고 아들의 자리를 추구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가치 있다는 것을 느끼는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렇게 되면 기필코 창조의 역사가 다시 벌어질 줄 알고 있사오니, 저희들이 그런 사명을 감당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지금까지 무지했던 자신들을 청산짓고 창조 본연의 인연을 따라 말씀을 실천하는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이번 기간을 특별하게 여기시어서, 저희들이 새로운 관심을 갖고 70년대를 훨휠 날아 기쁨의 봄동산을 이룰 수 있게 하여 주시옵고, 그것을 터전으로 발전하기 위하여 달려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 친히 주시옵소서. 참부모의 성호 받들어 아뢰었사옵니다. 아멘.
아버님, 당신께서 역사과정에서 인류를 복귀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눈물을 뿌렸사옵니까? 선조로부터 이어받은 타락의 모습이 이처럼 천추에 한을 남기게 되었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았사옵니다. 또한 인류의 시조 아담 해와로부터 뿌려진 슬픔의 사연에서 벗어날 수 없는 원한의 쇠사슬에 얽매인 비통한 자리에서는 저희들이 아물 당신이 소원하시는 한날과 권고하시는 한날을 고대한들 그런 날을 맞을 수 없다는 것도 알았사옵니다. 응당 처벌해야 할 우리 인류를 지금까지 연결시키시어 거룩한 복귀의 사명을 이루는 구원의 한날을 바라보면서 버리지 못하고 찾아 나오신 아버지라는 것을 저희들이 완전히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여기에 모인 당신의 아들들을 사랑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은 어느 누구를 위하여 여기에 모인 것이 아니옵니다. 먼저는 자기를 위한 것이요, 그 다음에 자기의 선조와 후손을 위한 것이요, 횡적으로는 연결되어 있는 종족을 위한 것이요, 더 나아가서 민족과 국가를 위함과 동시에 세계를 위하여 이 자리에 온 것이옵니다.
암흑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보잘것없는 저희들을 먼저 불러 주신 은사를 진심으로 감사드려야 되겠습니다. 저희들에게는 그 감사 이상으로 해야 할 사명이 있고 책임이 있다는 것을 더듬어 볼 때에 가야 할 바쁜 생활이 저희를 재촉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아들들이 되어야 하겠사옵니다.
인간은 이 땅 위에 왔다가 언젠가는 가야 할 몸이옵니다. 무엇을 하다가 무엇을 남기고 어떠한 자리에서 갈 것이냐 하는 문제를 생각하게 될 때, 저희들이 아버지 앞에서 살고 아버지 앞에서 죽을 수 있는 몸인지를 생각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당신 앞에 돌아갈 때 저희가 가지고가야 할 내용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셔서 과거엔 이렇게 이렇게 최선을 다하였으며 현실을 부정하였고 미래에 하늘 앞에 염려의 대상이 될까봐 염려하였다고 하늘을 향하여 호소할 수 있는 자신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수많은 사람들이 탄식과 절망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지만 당신의 부름을 받은 저희들은 그 와 같은 모습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통감하게 하여 주시옵길,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들이 진정 아버지를 뵈옵기 위하여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인격과 아버지의 모습을 바라보기 위해 그리움에 사무친 인연을 가지고 당신의 심정을 바라볼 수 있게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당신의 한없이 슬픈 심정의 터전을 바라보면서 그 심정에 연결되는 아들의 모습을 갖출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자신의 모든 것을 넘어 아버지를 위해 태어났고, 아버지를 위해 죽겠다고, 아버지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는 아들이 되겠다고 몸부림치는 아들의 모습이 그리워 이 자리에 모인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당신이 불러 주는 고요한 음성을 듣고 저희들을 소망의 마음으로 덧없이 바라보고 계시는 당신의 사정이 얼마나 딱한가를 아는 아들이 여기에 있사옵니까?
당신은 진정한 의미에서 아버지이시옵고, 저희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아들이옵니다. 그러나 저희들은 아들된 도리와 심정을 알지 못하는 자리에서 당신의 아들이라고 하며 당신을 찾아가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있사옵고, 당신은 저희들에게 아버지라고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계시니 이 얼마나 원통하고 비통한 사실인가 하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이 인류의 부모라는 것을 증거할 수 있는 한 사람이 없었기에 내가 인류의 아버지요, 너희들의 부모라고 말할 수는 있어도 이것을 증거할 수 있는 환경이 없었기에 그것을 인식시키기 위해서 재차 죽음의 길, 희생의 길을 걸어 나오셨다는 것을 아옵니다. 저희들이 그것을 위하여 천주의 중심이 되지 않고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삼천만 민중이 이 길을 바라보고 있사옵고, 30억 인류가 이 나라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대신해서 후세의 자랑으로 세울 수 있는 아들이 없는 것이 아버지의 슬픔인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또한 지금까지 저희들이 아버님을 사랑하고 아버님을 모신다고 하였지만 타의에 의해서 사랑하고 타의에 의해서 모셨사옵니다.
아버지의 뜻 앞에서 훌륭하지 못했던 과거를 다시 한번 뉘우치기 위하여 이와 같은 모임을 가졌사오니, 통일의 운명이 이들에게 좌우된다는 사실을 절감하는 아들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뜻 앞에 자기 하나 희생하게 되면 이 민족이 희생하였다는 조건이 되고 자기 하나가 부족하다면 그 종족과 그 가정이 아버지 앞에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을 느끼면서, 자기의 책임을 감당하기에 온갖 정성을 다하는 당신의 아들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길,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부족한 실적 위에라도 당신이 찾아주시어 현현하시는 그러한 자리를 그리워하오니, 부디 저희 마음 가운데 임하여 주시옵소서. 자기의 마음에 가치 있었던 사실, 혹은 영광의 한 터전이 되었던 사실, 승리의 자리를 갖고 있었던 사실들을 스스로 다시 한번 느낄 줄 아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1970년을 맞이하여 지금보다 한층 더 바삐 가야 되겠사옵니다. 밥을 먹을 때나 잠을 잘 때에도 바쁘게 생활을 해야 한다는 의식 가운데에서 아버지를 위하여 찬송하고 눈물지으며 가는 모습들이 되어야겠사옵니다. 보다 가치있는 자리에 가려면 보다 수난이 뒤따른다는 것을 잊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지금까지 저희들이 걸어온 길을 놓고 수고했다는 생각조차도 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런 생각보다는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바쁘고 책임지고 해쳐 나가야 할 길을 감당해야 되겠다고 자기 스스로가 다짐할 줄 아는 아들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앞으로 저희 협회에서 하는 모든 일들을 당신이 맡아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세계에 널려 있는 자녀들이 이곳을 향하여 우러러볼 적마다 당신이 그들의 중심이 되시어 통일의 자녀들이 모여지도록 허락하여 주시옵고 사망의 세계와 선의 세계가 통일의 세계로 연결될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옵니다.
이 모임으로 인하여 저희들이 당신의 이념과 새로운 희망을 품을 수 있고 저희의 생애가 빛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중대한 계기가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의 이름 받들어 간절히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인간은 자기가 지금 살고 있는 자리가 선과 악을 중심삼고 선편이냐 악편이냐 하는 것을 결정지어야 할 중간 입장에 있습니다. 또 내가 선한 방향으로 가느냐 악한 방향으로 가느냐 하는 것도 제 3자의 힘을 빌어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의 판단에 의해서 결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더욱이나 책임분담을 감당하지 못하여 타락한 인간의 후손이 된 우리는 반드시 이것을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될 중대한 기로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담이 책임분담을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에 오늘날의 우리들은 책임분담을 감당하는 데 있어서 어느 누구의 협조를 받아서는 그 사명을 완수할 수 없는 입장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최후의 결정은 우리 자신이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선한 사람이 되느냐, 악한 사람이 되느냐 하는 결정은 하나님께서 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들이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생애의 목표, 생활의 표준은 무엇이냐? 이것은 선입니다. 이 선의 중심은 하나님입니다. 즉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의 중심되시는 분을 중심삼고 선한 내가 되느냐, 아니면 악한 내가 되느냐 하는 것을 선별하는 이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 인간은 아버지를 중심삼고 새로이 태어나야 되겠고, 새로이 자라 가지고 생애노정을 거쳐가야 됩니다. 다시 말하면 아버지로 말미암아 태어나서, 아버지로 말미암아 살다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죽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더불어 영원한 세계에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 인간들이 가야 하는 길이요, 금후에도 또한 가야 할 운명의 길입니다. 이러한 것을 볼 때, 타락한 우리는 선한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선의 반대인 악한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의 나는 악한 나임에 틀림없습니다. 따라서 태어난 것도 악의 혈통에서 태어났고, 지금까지 살아온 것도 악의 환경권에서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는 과거, 현재가 악하기 때문에 미래도 악할 수밖에 없는 운명의 길에 있습니다.여기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선의 본체를 중심삼고 새로운 생의 출발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즉 새로이 태어나야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생애노정을 선과 악으로 분립하여 선한 목표를 향하여 가는 내 자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가는 길에서 좌측이 악이고 우측이 선이라면 선을 중심삼고 우측으로 가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과거에 악하게 태어나 살아오던 때 보다도 현재 선을 중심삼고 새로 태어난 자신이 더 가치 있고 귀하다는 것을 느껴야 합니다. 이렇게 선하게 살 수 있는 날을 가지게 되면, 금후에 그렇게 살아야 할 생애 노정을 걸어 놓고 볼 때 과거에 있었던 죄상을 탕감해야 할 운명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나' 라는 개체는 현실의 이 자체로만 빚어진 것이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수많은 선조들의 핏줄을 받아서 태어났기 때문에 2차적인 유물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한 과거의 인연을 이어받고 태어난 `나' 자신이 이제 새로운 생명의 인연을 가진 선의 입장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선조들의 핏줄의 인연을 밟고 넘어설 수 있는 새로운 결의와 각오가 없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자리가 어떤 자리냐? 악을 부정하고 선을 긍정하는 힘이 강하여 그 민족의 기원이 되는 과거 전체를 부정하고도 남을 수 있는 힘이 있는 자리입니다. 그러한 자리에서만이 새로운 생의 인연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인연을 통하여 관계 맺는 생활을 하게 될 때에 거기서부터 선이 발생하고 선의 기대가 넓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선의 기대를 넓히기 위한 생활이 뜻을 안 우리들의 생활이요, 금후에 우리가 가야 할 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의 자각된 `나' 는 과거의 `나' 와는 다르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과거에 인연이 되어 있던 형제 친척 혹은 국가나 세계나 인류보다도 오늘의 자각된 나를 중심삼고 빚어지고 갖추어질 수 있는 인연은 보다 가치 있는 인연이어야 합니다. 즉 선한 부모의 인연, 선한 형제의 인연, 선한 종족의 인연, 선한 민족의 인연, 선한 국가의 인연, 선한 세계의 인연을 맺어야 된다는 것을 우리들은 자각해야 됩니다. 또 그것을 자각했더라도 나를 위한 생활을 해서는 선이 안 됩니다. 자각은 자기가 했지만 그 생활은 나를 위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것을 느낀 사람은 과거를 위해서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현실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미래를 위해서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가정만 위하는 사람이 아니라 역사적인 수많은 가정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요, 금후에 올 나라를 계승할 수 있고 세계를 계승할 수 있는 가정을 위해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필요합니다. 또 민족과 국가를 대신해 살되 자기의 민족과 국가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금후에 올 민족과 국가를 위해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뚜렷하게 현실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우리로부터 시작되는 입장이기 때문에 자각된 나를 중심삼고 선한 생활, 즉 공적인 생활을 하지 않으면 선한 세상에 인연을 맺을 수 없는 우리의 입장이라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지금까지 우리는 악의 인연으로 갖추어져서 악의 생활 가운데에 젖어 있었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를 중심삼고 이 악의 인연을 넘어 그보다 넓어질 수 있는 하나님의 창조의 인연을 남겨야만 탕감복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탕감이라는 것은 어떤 것은 어떤 것에 희생의 조건을 대신 세워가지고 넘어가는 것입니다. 열만큼의 손해를 입었으면 어떠한 조건을 세워서 열 이상의 이익을 가져 와야 탕감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들이 해온 탕감은 조건적인 탕감이었습니다.
탕감조건이라는 것은 우리에게는 고마운 은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95퍼센트는 하나님이 책임이고 5퍼센트는 인간의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마치 공식같이 생각하겠지만 우리가 조건적인 탕감을 한다는 것이 지극히 슬픈 사실입니다. 그 조건적인 탕감을 조건적 탕감이 아닌 기준까지 올려 놓기 위해서는 그 배후에 하나님의 수고와 노고가 개재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타락된 선조의 후손으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 면목을 세우기에는 너무나 부족하다는 것을 느낄 줄 아는 여러분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백 퍼센트 이상 탕감의 길을 모색하는 생애노정을 가겠다고 노력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은 탕감조건을 두려워하지 않고도 하나님 앞에 책임적인 발판을 남기는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언제나 나라와 세계를 위해서 자기 몸을 바칠 수 있고 희생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서 가정에 대해서는 효성의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요, 나라에 대해서는 충성의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요, 온 세계에 대해서는 성현의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어떤 목표를 가지고 사느냐? 현재의 자기를 중심삼고 승리의 한날을 바라보며 사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세계의 승리를 찾아가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실의 민족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민족을 위해 산다는 것입니다. 미래를 위하여 산다는 것은 현실을 위해 사는 것과는 상충적인 생활이기 때문에 그런 사람은 현실에서 배척 받는 것이요, 고독한 것이요, 손해를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응당히 자기가 당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생활하는 사람은 무리 어려운 탕감조건이 가로놓이더라도 넘어갈 수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의 30여년의 생애를 두고 볼 때 비록 짧은 생애였지만, 그는 역사를 위하여 일하고 세계를 위하여 일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승리의 기를 높이 드는 그날을 소망하면서 역사와 더불어 살고 세계와 더불어 살았기 때문에 만민이 추앙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것을 알았기에 아무리 어려운 환경이 가는 길을 가로막는다 하여도 좌절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선은 악을 영원히 주관할 수 있지만 악은 선을 영원히 주관할 수 없습니다. 악이 선을 기만이나 강압적으로 주관할 수 있을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선은 결코 악에게 영원히 지배 받을 수 없습니다. 만일 선이 악에게 영원히 지배를 받는다면 하나님의 복귀섭리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귀섭리를 두고 보면 한때에 하나님을 반대하던 악이 우세했다 하더라도 그 악은 반드시 열세해져서 결국은 선에게 우세했던 기반을 넘겨주지 않으면 안 되었던 사실을 우리는 지금까지의 역사과정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당장은 선이 악에게 지배를 받더라도 영원히 지배 받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결국에는 선이 악을 영원히 지배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악을 지배하는 절대적인 발판은 누구가 되느냐? 이것은 하나님도 아니요, 사탄도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입니다. 바로 나입니다. 이러한 `나'를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찾아 나오고계신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찾으시려는 `나' 는 공적인 `나' 이기 때문에 하늘에 속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비로소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것이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내가 할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위해 생각하는 것이 결국에는 나를 위해 생각하는 것이 되고 그를 위한 일이 나를 위한 일이라는 사실을 절감하는 입장에 서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 좋아하실 수 있는 인연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군왕이 염려하는 것을 신하가 대신하여 염려하며 그 일을 해결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그 일이 내 일이라고 하는 사람은 충신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버지와 나를 중심삼고 볼 때, 아버지가 나를 위하여 염려하고 계신다는 사실, 즉 아버지가 내 일을 하고 계신다는 것을 내가 어떻게 자각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것을 자각하게 될 때 아버지와 나는 하나의 자리에 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아버지와 나는 목적도 하나요, 생활도 하나요, 원수에 대항하여 싸우는 싸움도 한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자리에 서지 않고는 선한 하나님과 더불어 살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부터 우리는 아버지의 목전에 서 있는 사람으로 이제 새로 태어났고 이제부터 새로 살아가는 생애를 가야 할 자신이라는 것을 자각해야 되겠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수고하신 것은 결국 나를 위해서 한 것이요, 이제부터 가야 할 세계적인 개척노정의 95퍼센트의 사명도 나를 위해 하고 계신다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들은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의 본질은 무엇이냐?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인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이 있을 때에 그것이 하나님과 내가 타락한 인연을 넘어 하나의 인연으로 맺어질 수 있는 바탕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좋은 입장에 처해야만 감사해야 하는 것이냐?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좋은 때만 우리를 위해 수고해 나오신 것이 아닙니다. 어려운 때일수록 더욱 수고하실 것을 다짐하고 나오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 자신들도 하나님을 내 아버지로 모시기 위해서는 나 대신 일하시며 싸워 나오신 하나님을 좋은 자리에서 감사하는 것보다도 어려운 자리에서 더욱더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과중한 십자가 도상에서도 하나님께서 감사할 수 있는 것도 이런 원칙을 이해하게 될 때 가능한 것입니다.
이 땅에 사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진정한 의미로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가까운 거리에 있는 사람이 누구겠느냐? 문명국가나 문화생활을 하는 사회에서 수난의 길을 가는 사람들보다 저개발국가의 형편없는 생활환경 가운데서 수난의 길을 가는 운명에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모시고 생활하는 사람입니다. 그와 같은 자리에서도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이 있으면 그는 불행한 사람이 아닙니다. 거기에서 비로소 하나님과 심정적 인연이 맺어지는 것입니다.
기쁨과 슬픔의 눈물이 엇갈려 남아질 수 있는 자리는 놀고 뛰는 자리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비참하게 피를 흘리고 죽어가는 자리에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말할 수 없이 처참한 모습으로 상봉할 수 있는 자리, 눈물이 교차되는 자리에서도 감사할 때, 하나님과 인연이 맺어진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혁명의 봉화도 새로운 혁신운동도 그런 자리에서 역사를 중심삼고 엮어져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자리를 찾아 나가게 될 때, 우리가 지금 생활하는 이상의 자리에서 감사하는 것보다도 그 이하의 자리에서 감사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나를 구원하는 입장에 계시기 때문에 나보다도 더 불쌍한 분입니다. 나보다도 하나님이 더 불쌍한 입장에 계신다는 것입니다. 자식이 부모 앞에서 죽어간다면, 물론 자식도 불쌍하지만 그 자식을 바라보는 부모가 더 불쌍하다는 것입니다. 만일 자식이 죽어가는 자리에서도 부모를 위로하고 부모에게 무한한 감사를 드리며 효를 다한다면, 부모의 서러움, 부모의 고통, 부모의 비참함을 메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나를 중심삼고 볼 때도 나보다도 더 불쌍한 분은 하나님이 아니겠어요? 언제 하나님께서 나에게 감사할 수 있는 날이 있을 것이냐? 하나님께서 나에게 감사할 수 있는 날을 갖지 못하고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아무리 감사를 드린다 하더라도 그 감사는 나에게서만 끝나는 감사이지, 하나님과 하나의 목적을 중심삼은 감사로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나보다도 하나님께서 감사할 수 있는 자리는 어떤 자리인가? 그것은 효하는 자리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효라는 것은 어떤 것이냐? 부모가 슬퍼하는 일에 대해서 자식이 먼저 슬퍼하는 것입니다. 그때에 부모는 그 자식을 무한한 소망의 실체, 자기의 모든 생명을 대신한 가치의 존재로 세우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면서 부모는 자식에게 감사하는 것입니다. 환경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부모는 필요 이상의 감사를 느낄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 아버지의 목전에서 어떻게 하면 아버지가 우리에게 감사할 수 있느냐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 나 자신이 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생활하는 하루의 낮 저녁 밤을 절기로 보면 춘하추동을 축소시킨 것입니다. 아침은 봄에 해당하는 것이고, 낮은 여름에 해당하는 것이고, 저녁은 가을에 해당하는 것이면, 밤은 겨울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일년사시를 대신할 수 있는 이 하루를 어떻게 생활하면 아버지가 나에게 감사할 수 있는 생활이 될 것이냐? 이것이 우리가 아버지의 목전에서 해야 할 효의 도리요, 충의 도리가 아니겠는가?
이와 같은 입장에서 우리들은 새벽에 일어나면 인류를 대신한 존재인 나의 하루 생활이 아버지 앞에 감사의 실체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면서 꽃이 피어 있는 봄동산처럼 자유스런 동산에서 아버지께서 나를 세워 섭리하실 수 있는 소망의 결실체가 되겠다고 하고, 낮이 되어 일터에 나가면 소망의 결실체가 자라나는 여름절기와 같이 자기가 한 발 더 발전하여 하나님께서 같이하실 수 있는 가치로 나타날 수 있는 존재가 되겠다고 해야겠습니다. 또 저녁이 되면 모든 전체를 집약시켜서 하나의 결실을 아버지 앞에 바칠 수 있는 가을절기와 같은 때이기 때문에 제물될 수 있는 자리에 서겠다고 하고, 겨울절기에 해당하는 밤이면 생명력을 지녀서 하나님과 내재적인 부자의 인연을 맺어 모든 기를 받아들일 수 있는 자신이 되겠다고 해야 합니다. 그렇게 1년 365일을 승리의 날로 만들면서 감사하는 생활을 하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 사람은 아버지와 관계를 맺고 사는 생활을 하는 사람은 그런 경험을 할 것이 틀림없기 때문에 일생을 감사하는 생활로 보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이 죽음의 자리에 처하더라도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마음은 남아지는 것입니다.
하루를 그렇게 살아야 하고, 1년을 그렇게 살아야 하고, 우리의 일생 동안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 일생에도 소년시대, 청년시대, 장년시대, 노년시대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루의 아침 낮 저녁 밤, 일년의 춘하추동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생을 그렇게 살고 간 사람이라야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그 창조 본연의 목적에 합격된 하나의 승리적 실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와 같은 승리적 기반을 어디에서부터 닦아야 되겠느냐? 하루를 두고 볼 때, 아침은 봄과 유아시대를 대신한 것이요, 낮은 여름과 청년시대를 대신한 것이요, 저녁은 가을과 장년시대를 대신한 것이요, 밤은 겨울과 노년시대를 대신한 것이요. 이와 같은 생애를 감사하며 일생 동안 사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는 하나님에게서 떠날래야 떠날 수 없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시야에서 벗어날래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호하시는 환경을 떠날래야 떠날 수 없는 사람이 아니겠느냐 하는 문제를 중심삼고 우리는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감사의 생활을 해야 되겠습니다. 내가 소원하는 것을 아버지를 중심삼고 다시 한번 비판해 보아야 되겠고, 그 소원이 아버지의 뜻과 더불어 아버지가 기뻐하실 수 있는 것인가 생각해 봐야 되겠습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입장과 상충되는 것이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입장과 상충되지 않는 자리를 이루기 위해서는 탕감복귀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야 하기 때문에 많은 수난의 길을 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 수난의 길을 누가 메워야 하느냐? 하나님께 메우게 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메워야 하는 것입니다. 내 자신의 힘으로 부족하면 가정을 동원하고, 가정의 힘으로 부족하면 종족을 동원해야 되겠습니다. 동원한 가정과 종족의 힘을 합해서라도 내가 해야 할 책임을 이들과 더불어 다하겠다고 노력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은 이 땅에서 아무리 비참한 생활을 하고 갔다 하더라도 아버지를 중심삼고 생활한 것이 틀림없기 때문에 아버지 앞에 영원히 설 수 있는 효자가 되고, 충신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관을 통하여 느껴지는 모든 감각과, 마음으로 느껴지는 직관까지 합하여 감사하는 마음으로 생활할 수 있는 나 자신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아버지로부터 태어났으니 아버지를 모시고 살다가 아버지 앞에 가겠다고 해야 합니다. 이러한 문제를 중심삼고 언제나 아버지 앞에 서 있다는 것을 자각하면서 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살아가면서 어느 누구에겐가 묶인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이런 어려운 고비에 처하게 되더라도 거기에서 결코 사탄에게 묵임을 당하지 말고, 하나님에게 묶임을 당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고통당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나에게 준 것으로 알고 기쁨으로 맞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고통을 피하려고 하지 말고 정면으로 대결하라는 것입니다. 이 수난의 길은 아버지가 나에게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기 위해서 준 예물로 알고 감사히 받을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내 생활에서 더이상 어려운 일이 오기 전에 내가 완전히 하나님 앞에 묶여진 자가 되어 새로운 세계로 출발할 수 있는 동기가 되는 것입니다. 이 고통을 넘게 되면 하나님은 더 큰 승리적 터전을 부여하려고 합니다. 그 승리적 터전을 자기와 관계 맺게 하려면 탕감조건이 필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과 관계 맺으려면 거기에 해당되는 슬프고 어려운 환경을 또다시 뚫고 나가야 합니다.
이것은 더 넓은 환경을 나에게 상속해 주기 위한 하나님의 작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고통이라도 기쁨으로 맞아들일 수 있는 생활을 해야 되겠습니다. 그런 자리가 내게 다가올수록 아버지와 내가 하나되기 위해서 이런 시련이 오는 것이라는 신념을 갖고 헤쳐 나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무서운 사람입니다. 세상에 무서운 사람이 있다면 이 이상 무서운 사람이 없습니다. 역사를 대신하여 이 이상 더 사탄세계에 반역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사탄세계는 굴복되는 것이며, 하나님의 터전은 넓혀져 나가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앞으로 통일교회가 가야 할 수난의 길이 어떤 길인가를 알아야 됩니다. 이제 가정을 중심삼은 수난의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오늘 우리는 통일교인끼리 종족적인 환경의 터전을 마련한 입장에 있기 때문에 우리끼리 가야 할 수난의 길은 벗어났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앞에는 악의 세력을 대표해서 이것보다 더 큰 세력이 부딪혀 온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현존하고 있는 국가요, 현존하고 있는 세계입니다. 이 국가와 세계가 우리 앞에 부딪혀 올 것입니다. 우리는 부딪혀 오는 수난의 길을 피하지 말고 정면으로 맞아들여 그것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물을 주기 위한 최후의 결정적인 조건으로 알고, 이 수난의 길을 환희의 심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그 누구에게도 맡기지 않고 나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하는 입장에서 싸워 이긴 사람이 있다면 그 기반 위에는 그 사람 이외에 아무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비굴하게 도망가고 싶은 것을 참고 어쩔 수 없이 싸워서 승리권내에 선다면 하나님은 축복의 인연을 그 이상 더 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와 내가 당하는 일이므로 그것을 기쁨으로 맞이하여, `그 이상 어려움이 있다 할지라도 나는 간다. 싸운다. 책임을 진다' 하며 가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내일은 천 배, 만 배, 더욱 큰 시련을 가하여 당신의 수고의 길을 내 앞에 맡기시옵소서. 당신이 나에게 이 일을 맡길 때는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맡기는 것이 아니옵니까' 하고 이 일을 성사해 낼 때 아버지께서 감사해 할 수 있는 기원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감사해 할 수 있는 한날을 갖추는 영광의 자리가 내 앞에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런 사실을 알아 가지고 전심전력을 다하여 그 수난을 해결할 때 효의 인연, 충의 인연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자리에 부딪혔을 때 마지못해 맡는 사람은 환경적으로는 승리권을 만들었다 해도 더 큰 축복을 상속해 주기 위한 제 2 차, 제 3 차의 탕감조건, 수난의 길이 있게 되면 실패하고 맙니다.
우리는 이미 뜻을 위하여 죽음을 각오한 몸입니다. 그러면 어떤 자리에서 죽을 것이냐? 개인을 위하는 자리에서 죽으면 서러운 것입니다. 가정을 위하는 자리에서 죽는 것도 서러운 것입니다. 종족을 위하여 죽는 것도 서러운 것입니다. 민족을 위하는 자리에서 죽는 것도 서러운 것입니다. 이왕 뜻을 위하여 죽을 바에야 세계를 위하는 자리에서 죽는 것이 우리가 바라는 소원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할 수 있는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다면 이 거리를 축소시키기 위해서 이 세계를 우리의 생활무대로 끌어들여야 합니다. 그런 책임을 해야 할 입장에서 온갖 지성을 다 바치고 나가는 사람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개인을 찾지 못한 하나님은 나를 의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요, 가정을 찾지 못한 하나님은 나를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요, 종족·민족·국가를 찾지 못한 하나님은 나를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를 의지할 수 있는 입장에서 한 가지라도 해냈다 할 때에는 하나님과 나의 인연은 공고해진다는 것입니다.
수난의 길을 슬픔으로 넘을 것이 아니라 기쁨으로 넘을 수 있는 자신을 어떻게 갖느냐 하는 것이 여러분에게 중대한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의 목전에서 선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지금 내 눈은 누구를 위해서 바라보고 있느냐? 아내를 바라보는 것은 자유로운 세계에서 아내를 바라보기 위해서이고, 자식을 바라보는 것은 해방천국에서 자식을 바라보기 위해서이고, 오늘날 세상을 바라보고 싸우는 것은 내일의 세상을 바라보기 위해서이고, 지금 노력을 하고 희생을 하는 것은 내일의 행복과 승리로 바꾸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내가 자는 것도 아버지를 위해서, 잠에서 깨어나는 것도 아버지를 위해서, 내 일체의 중요한 모든 요건이 아버지를 위해서이어야 합니다. 나는 세계를 위해서 살아가는 자리에서 아버지께 감사하며 살아가야 할 몸…. 여러분은 그런 입장에서 살아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나만 감사해 할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도 감사해 할 수 있기 위해서는 탕감조건을 치러야 합니다. 여기에는 개인적인 탕감조건 보다 더 가중된 가정적인 탕감조건을 짊어져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을 치러야 하나님께서 감사해 할 것입니다. 가정적인 탕감조건을 치르고 나면 하나님은 민족 혹은 국가적인 탕감조건을 짊어 지워 줄 것입니다. 그것을 내가 감당해 내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또 감사해 할 것입니다. 그리고 세계적인 탕감조건을 내게 짊어 지울 것입니다. 그것은 왜 그러냐 하면 선악을 결정하는 것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에 세계적인 모든 문제를 나에게 의탁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내세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자리를 그리워함은 물론 그 자리에서 사명을 다하는 그날을 고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나에게 세워지는 자리가 크면 클수록 사명도 커지므로 그 큰 범위에 비례하여 슬픔이 오는 것이요, 아울러 탕감도 그 범위에 비례하여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탕감내용을 기쁨으로 맞이하고 감사하며 맞는 자신이 되지 않고는 하나님 앞에 세워져서 칭찬 받는 아들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오늘날 우리는 통일교단 가운데 인연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통일교회는 무엇을 위해 싸우는 곳이냐? 통일교회 자체를 위해서 싸우는 교회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알아야 돼요.통일교회는 여러분을 위해서 싸우는 교회요, 여러분이 가정을 위해서 싸우는 교회요, 여러분의 국가를 위해서 싸우는 교회요, 앞으로 올 세계를 위해서 싸우는 교회입니다. 다시 말하면 제단 위에 놓여진 제물과 마찬가지입니다. 이 제단과 제물은 누구를 위하여 있는 것이냐? 이것은 앞으로 올 소망의 세계를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해 주기 위해서 세워진 것입니다. 통일교회는 제물과 같기 때문에 사망세계의 모든 잘못을 용서해 주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죄가 없는 사람으로서 죄 지은 사람 이상의 억울함을 당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탕감의 비결입니다. 죄가 없는 순결한 사람으로 죄 지은 사람의 탈을 쓰고 죄인인 양 희생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희생하는 것이 사탄 때문이라면 희생의 결과가 누구에게 돌려 지느냐? 사탄에게 돌려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서 희생했으므로 자기 자신에게 먼저 거두어집니다. 이럴 때에 자기 자신이 부활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런 자리에 선 분입니다. 예수님은 제물의 입장에 서서 민족을 위해서 희생했고, 죄인을 위해서 희생했습니다. 그리고 그 희생한 결과로 하나님의 뜻이 거두어졌습니다. 예수님의 희생이 거두어질 수 있었던 절대적 기준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것으로 부활되었으며 부활과 더불어 하나님 것으로 거두어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실체만 부활한 것이 아닙니다. 가정·종족·민족·국가·세계를 거둘 수 있는 내용을 갖추었기 때문에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가정, 새로운 종족, 새로운 민족, 새로운 국가, 새로운 세계가 탄생되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오늘날 통일교회는 무엇이 되자는 것이냐? 교단적인 입장에서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제물이 되었다 하는 날에는 문제가 달라집니다. 그러면 그 자리까지 나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나님께서 통일교회를 내세워 자랑할 수 있는 조건이 있어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지못해 하는 것이 아니라, 기쁘고 감사하게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 앞에 오는 시련을 민족과 국가와 세계를 위해서 당한다는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런데 내가 이 수난의 길을 도피하겠다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 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감사할 수 있는 나 자신을 어떻게 발견하느냐? 어떠한 부락에서 어떠한 어려움이 자기에게 부딪혀 온다 해도 그것을 감사하게 여기고 3일노정이 있었던 것처럼 3년 고비를 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어떤 부락에서 반대 받지 않는 입장에서 3개월만 열심히 하면 반드시 그 부락이 여러분에게 감사할 것입니다.
내가 부락이 맞아야 할 수난의 길을 도맡아 가지고 감사한 마음으로 책임지고 넘어가야 승리한다면 그 승리권내에 있는 사람들은 나에게 머리를 숙이게 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은 원칙에서 생각하면 70년대를 바라보고 나아가는 우리에게는 수난의 역사가 끝나고 통일교회 운세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으니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또 과거에 감사한 적이 없는 사람은 이제부터 밤이건 낮이건 모든 전부를 희생하면서라도 이 새로운 운세의 시대를 맞이하는 때에 하나님이 나를 세우실 수 있는 자랑스런 모습이 되겠다고 노력해야 합니다.
나에게는 영광이 필요없습니다. 지금까지 수난의 길을 하나님께서 닦아 왔으므로 이제부터라도 나의 일생을 바쳐 수난의 길을 가더라도 감사하며 가겠다고 동분서주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기필코 하나님께서 내세워 자랑하실 것입니다.
만일 그가 국가를 위해서 움직였다면 그 국가가 찾아지는 날 그는 국가 앞에 자랑할 수 있는 자녀가 될 것이요, 세계를 위하여 움직였다면 세계를 찾는 날 세계 앞에 자랑할 수 있는 자녀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세워 자랑하실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버지께서 여러분에게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감사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여러분 이게 `고맙다'고 할 수 있는 입장에 설 때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 신령한 사람이나, 선한 선조가 있으면 그들을 동원하여 그 사람을 받들라고 하게 되어 있고, 그에게 감사하고 머리 숙이게끔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귀의 내용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날 한국 기독교의 신흥종파 중에서 정석온의 어머니인 김성도를 중심한 감사 집단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오늘날 우리들의 신앙생활에 경각심을 높이고 있습니다. 필히 감사의 생활을 이수해야 할 절대적인 한 집단을 대표하여 그들이 나왔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니 이래도 감사 저래도 감사해야 합니다.
그럴 수 있는 여러분이 되어 아버지 앞에 생애를 다 바치겠다고 할 때에는, 하나님은 여러분이 죽음 가운데에 있다 하더라도 부활시켜서 천상세계에 내세워 자랑하실 것입니다.
세상에서 인정을 못 받고 세상의 일을 못 이룬다고 한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뜻을 중심삼고 가기 때문에 영원한 뜻 앞에 탕감의 조건을 필요로 하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우리가 감사히 탕감조건을 세워 하나님이 소원하시는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감사할 수 있는 인연을 남길 수 있다면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이런 것을 알고 지방에 돌아가서 이런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단에 나설 때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나서야 합니다. 또 총판매를 한다 하더라도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판매에 임해야 합니다. 내가 지금 어려우니까 이렇게 이렇게 하면 되겠지 하는 조건은 통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께서 편안하기 전에는 여러분이 편안할 수 없는 운명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모셔야 할 입장에 있기 때문에 아버지보다 더 고통받아야 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날 지구장이나 지역장들이 책임하지 못한 것이 많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아버지의 목전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아버지의 목전에 있으므로 아버지께서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를 다 알고, 무슨 일을 하려고 하는가도 다 알고, 느끼는 모든 감각까지도 관찰하고 계신다는 것을 자각하면서 가야 합니다. 여기에서 감사의 기준만 남기면 여러분의 갈 길은 일취월장할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과거를 반성하고 앞으로 70년대를 향하여 재출발할 수 있는 좋은 동기로 하나의 인연을 남겨 주기를 바랍니다.
아버님! 저희들이 아버지의 정성을 아는 아들이라면 잠을 자다가 일어나도 죄인의 부끄러운 모습을 가릴 수 없는 민망한 마음으로 엎드리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을 것이옵니다.
아침 밥상을 대하는 자리에서 내가 이 밥을 먹고 무엇을 할 것인가를 스스로 묻는 자신이 되게 하시옵고, 점심 밥상을 대할 때에는 지금까지 내가 무엇을 남겼는가 하는 물음에 부끄러운 모습으로 자책하는 자신이 되게 하여 주시옵고, 저녁 밥상을 대할 때에는 하루를 청산짓기에 부족함이 없는 하루를 보냈는가를 자문할 수 있는 자신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것으로서 하루를 시작하여 아버지의 것으로서 이 시간까지 왔는가, 또 아버지께서는 나에게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가를 생각하게 될 때, 가치있게 지내야 할 하루를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빈 몸을 가지고 세상의 마음을 지닌 하루가 아니었나를 생각하며 침상에 누워 아쉬워하며, 아버지 앞에 눈물로써 사죄하고 침상에 누울 줄 아는 자녀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은 감사하는 생활을 해야 되겠사옵니다. 매를 맞는 자리에서도, 피를 토하는 자리에서도 감사의 생활을 해야 되겠사옵니다. 수많은 선조들이 그러한 자리에서 아버님을 배반했기 때문에 그런 역사적인 서러운 한의 심정을 품고 오신 아버지에게 효(孝) 중의 효의 도리와 충(忠) 중의 충의 도리를 다해야 할 저희들인 것을 아옵니다. 여기에서 내가 원망과 불평을 가지고는 그 자리에 설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고, 그러한 자신을 발견할까 두려워하는 모습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세상에서는 불쌍하고 약한 사람이지만 이런 사람 이상 무서운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동정에 여운을 남겨 놓고 거기서 살 수 있는 아들이 되어, 아버지께서 영계의 수많은 선조를 통하여 아무개를 사랑하고 권고할 수 있는 정도의 동정을 받지 않고는 타락의 탈을 벗고 아버지 앞에 나설 수 없는 운명의 길에 서 있는 것을 아옵니다.
그러므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맞을 수 있고, 내 몸이 지쳐 지탱할 수 없을 정도의 자리에 있을지라도, 아버님께서는 이 보다 더 심한 수난의 길을 극복해 나오시면서 나를 그리워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내가 이 수난을 넘고 나올 수 있어야만 아버지의 슬픈 과거를 위로해 드릴 수 있는 아들이 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가야 할 자신으로 성별하여 아버지 앞에 제물로써 완전히 바쳐지는 아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저희들은 감사하며 생활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한 남자 앞에 맺어진 아내가 부족할지라도 생애를 통하여 봉사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있기 때문에 그 아내를 주신 것을 감사해야 되겠고, 혹은 자식이 나에게 십자가의 일생을 주어도 그럴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신 것을 감사해야 되겠으며, 환경이 나에게 생애를 가눌 수 없는 절망의 구렁텅이에 몰아넣더라도 그것을 어떠한 조건을 세워서라도 감사의 인연으로 남기고 쓰러지겠다고 할 수 있는 아들이 되고, 아버님의 사람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들에게는 민족을 앞에 놓고 가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또한 가정이 당하는 수난 이상의 길이 있는 것을 아옵니다. 내 생활이 어려운 것은 그때뿐인 줄 아옵니다. 아직도 국가적인 수난의 길이 남아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늠름한 자세를 갖추어야 되겠사옵니다.
우리 앞에 감당해야 할 국가적인 수난의 길을 넘으면 그보다 몇천 배의 세계적인 수난의 길이 기다리고 있지만 이 길을 가야만 하는 것이 저희들의 운명이기에 살아서 못 가면 죽어서라도 가야 한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오니 어떠한 수난이라도 항상 감사하며 맞을 수 있는 아들의 자세를 갖추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는 나를 대하여 통곡의 눈물을 더할 수밖에 없음을 아옵니다. 내가 천대받고 죽음의 길을 밟아 가는 한이 있더라도 아버지를 위해 드리고 가는 아들이 되고, 충신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1970년 이해를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통일의 자녀들이 이제부터 마음으로 감사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위로부터 어떠한 명령이 있더라도 그 명령에 따라 달려가고 달려가다 쓰러지는 자리에서도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하시옵소서. 저희들이 아버지를 붙들고 기도하는 자리는 생명의 그 무엇을 주고도 살 수 없는 명예의 기점이라고 자랑하면서 감사할 수 있는 자녀들이 되게 하시옵소서.
70년대에는 하늘의 운세를 맡기기에 부족함이 없는 아들이 되게 하시옵고, 그 아들 위에 딸을 세워 그 가정이 아버지의 복을 받는 가정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이번 기간이 저희들에게 특별한 기간이 되게 하시어서 내일의 새로운 약속의 계기를 마련하게 하시옵고, 아버님의 영광을 위해 하늘의 정병이 되어 승리의 방패를 들고 용맹하게 달려가는 하늘의 역군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의 성호 받들어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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