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태어나서 장성하면 누구나 결혼을 합니다. 그리고 아들딸 낳고 살다가 그 아들딸이 성장하면 시집 장가를 보내고, 다음에는 늙어서 죽게 됩니다. 이것이 인간이 가야 할 보편적인 운명의 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 길을 잘 가느냐 못 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마다 천태만상으로 다릅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잘사는 것이냐?
인생길은 간단하고 단순합니다. 태어나서 장성하면 가정을 이루고 아들딸을 낳아 길러서 시집 장가 보내고, 늙어서 죽어간다는 점에서는 간단하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간단한 내용을 중심삼고 잘 가느냐 못가느냐 하는, 이 한계선을 중심으로 천태만상의 일들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사람이면 누구나 태어나서 잘살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러면 잘사는 한계선이 무엇이냐? 어떻게 사는 것이 잘사는 것이냐? 옛날 원시시대로 말하자면 초막을 짓고 사는 것이 잘사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지금의 시대에 있어서는 다릅니다. 그 시대에 따라서 잘산다 하는 기준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만 보더라도 오늘날 잘사는 사람은 옛날, 지금으로부터 천 여년 전, 아니 천년까지도 안 되는 몇백 년의 어느 나라 군왕보다도 더 잘사는 사회적인 제도권내에 들어와 있습니다. 시대에 따라 그 차이는 있을망정 인간이라면 남녀를 막론하고 누구나 자신이 처해 있는 환경에서 좀더 잘살고 싶어하는 것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러면 진정 잘사는 기준은 어떤 것이냐? 인생길을 가는 데 어떤 길이 잘가는 길이냐? 한 여성으로서 가정을 이루어 애기들을 키우며 살다가 가는 사람을 평범한 보통 여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한 가정을 무대로 해서 살아가는 것은 일반적으로 평범한 여성들이 가는 길입니다. 그러나 `잘 간다' 할 때는 문제가 다른 것입니다. 보통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누구도 원치 않는 보통 이하도 보통과는 다르겠지만, 보통 이상의 다른 모양으로 인생길을 잘 가는 그 기준에는 여러 가지 복잡한 내용이 거기에 개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평범한 기준을 넘어서 특별한 권내, 특별하다는 기준을 찾아가려면 특별한 내용이 개재되어 있어야 합니다.
여성으로서 국가적인 기준을 중심삼은 길을 가려고 할 때에는 남자의 몇배 이상의 시련 과정을 거쳐가야 합니다. 타개하여야 할 관문이 많은 것입니다. 많은 어려움이 부딪쳐 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어려움을 피해서 쉽게 가려고 하는 사람은 가다가 반드시 좌절하기 마련입니다.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그것을 피해서 쉽게 가려 하지 않고 그것을 참고 책임지고 나가게 될 때에 오히려 그 어려움은 내게 의의를 가져다 주는 것이요, 참다운 가치를 결정지어 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특별한 길을 가려고 할 때, 그 특별한 내용을 결정지을 수 있는 재료나 요건은 보통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길은 가기 어려운 고빗길이며 넘어야 할 장벽이 가로놓여 있고 원치 않는 많은 사연들이 앞을 막아서는 그런 길입니다. 그런데 가로막혔다고 해서 그 길을 돌아가려 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서 목적하는 곳에 다다를 수 있다면 누구든지 갈 수 있기 때문에 천 사람이면 천 사람이 다 그 길을 갈 것입니다. 그런 길은 누구나 갈 수 있기 때문에 특별한 사람만이 가는 길이 아닌 것입니다.
특별한 사람은 돌아가지 않고 그 길을 뚫고 나가야 됩니다. 직행해서 최단거리를 뚫고 나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문제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몇배의 시련을 극복해야 됩니다. 거기에는 보통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는 사실들을 개재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을 타개하고 극복할 수 있는 자신이 되지 않고는 그 길을 갈 수 없는 것입니다.
남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반적으로 남자들은 자기 가정의 자녀교육이라든가 경제적인 문제 등을 중심삼고 사회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즉,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정을 위주로 활동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이렇게 보통 남자로서의 가는 길은 쉬운 길입니다. 그러나 특별히 잘 가겠다는 마음을 품고 가는 사람에게는 천태만상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대한민국에서 한 남자가 최고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삼천만 인구의 절반인 천 오백만의 남자를 대표한 자리에서 그 천 오백만 전체가 싫어하는 단 하나의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천 오백 만을 대표할 수 있는 길을 갈 수 없는 것입니다. 천 오백 만을 대표해서 가겠다고 하는 남자는 천 오백만 전부가 가지 못하겠다고 후퇴하는 길을 책임지고 돌파해 넘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남자로서 잘 갔다 할 수있는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남성이 사회활동을 통해서 출세했다고 말들을 하는데, 그출세의 기준이 무엇이냐? 아무리 출세했다 하더라도 자신의 가정과 아들딸을 위해서 출세한 것은 국가적이라든가 삼천만 민족을 대표할 수 있는 내용이 못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는 거예요.
예컨대, 대한민국의 대통령이면 대통령이 국가를 책임진 수반의 자리에서 그 가는 길이 자신의 가정을 중심삼고 움직이는 것이라면, 그는 이 나라 삼천만 국민으로부터 지탄을 받아야 됩니다. 자기 가정을 넘어서서 국가적인 기점을 중심삼아서 일하고, 국가적인 기점을 중심삼아서 움직이고, 국가적인 기점을 중심삼아서 투쟁해 나가지 않으면 그는 민족으로부터 지탄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국가 기반을 중심삼아 삼천만 민족 모두가 `이렇게 나갔으면 좋겠다'고 희망하는 기준을 중심해서 나가게 되면, 그는 민족이 신봉할 수 있는 국가의 지도자로서 역사에 길이길이 남아질 것입니다. 그 기반이라는 것이 자기의 아들딸을 중심삼은 가정의 무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한 여성이 특별한 길을 가겠다 할 때에도 보편적인 가정환경을 중심삼고 가서는 안 됩니다. 그것을 초월해서 국가적인 기반을 중심삼고 생활해 나갈 수 있는 전체적인 내용을 지니고 나가지 않는다 할진대 그는 특별한 길을 갈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가정과 국가, 두 기점을 중심삼고는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특별한 사람이 되려면 국가적인 기준을 가져야 됩니다.
그 다음에 범위를 넓혀서 세계적이다 할 때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30억 인류가 사는 세계이니 그들 모두를 대표해서 특별한 길을 가야 합니다. 어차피 생애를 걸고 가는 길에 있어서, 오늘의 30억 인류가 나오기까지의 수천년의 역사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왔다 갔지만 그 모든 사람들을 총합한 대표자로서 역사에 남을 수 있는 하나의 인물이 되겠다 할 때에는, 역사상에 왔다 간 사람들이 갔던 길로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누구나 생각할 수 있었고, 희망할 수 있었고, 갈 수 있었던 길이라면 이미 많은 사람들이 갔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문제를 중심삼아 내가 참되이 가야 되겠다, 참되고 특별한 길을 가야 되겠다, 그 누구도 못 갔던 모범되는 길을 가야 되겠다 할 때에는, 지금까지의 역사상에 없었던, 지금의 30억 인류가 바라보는 그 이상의 자리에서 가야 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그 길을 가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가는 데에는 역사상에 없었던 강한 성벽이 앞을 가로막을 것이요, 지금까지 사회에서 해결하지 못한 어려움들이 앞을 가로막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해야 될 것이냐? 그 자리에서 후퇴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10년 동안 쉬지 않고 달음질쳐 왔다고 하더라도 그 목적을 성사하지 못할 때는 비판은 면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칭찬받을 수 있는 기준은 남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러면 가는 데에는 어디를 기점으로 해서 가야 되느냐? 대한민국 백성이 대한민국의 민족사상을 중심삼고 세계를 위해서 나간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망언입니다. 세계를 위해서 간다고 할 때는 세계를 무대로 해서 가야 합니다. 세계를 기반으로 해서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세계를 위해서도 가고, 대한민국을 위해서도 가고, 자기 가정을 위해서도 가겠다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세 개의 기반이 동시에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큰 것 가운데에는 작은 것이 포함되어지기 마련입니다. 즉, 개인, 가정, 민족, 국가는 세계에 모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개인의 중심은 뭐냐? 가정입니다. 가정의 중심은 국가요, 국가의 중심은 곧 세계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한꺼번에 중심삼고 갈 수 없는데도 인간은 한꺼번에 가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만일 사람이 한번만 먹고 죽게 되어 있다면, 개인이 보는 데서 먹고 죽는 것보다는 세계의 사람들이 보는 데서 먹고 죽고 싶어할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인생이라는 것은 한번밖에 없는 것입니다. 내가 한번 갔다가 싫다고 해서 다시 올 수 없는 것입니다. 한번 가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에게는 필연코 가야 할 인생길이 있습니다. 가는 데는 어떻게 가야 되느냐?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가정을 중심삼고 들락날락하며 살다가 죽고 마는데, 이러한 사람들은 지금까지의 역사상에 왔다가 낙엽처럼 떨어져 갔던 존재들과 마찬가지의 인생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통일교회가 오늘날 세계적으로 가정을 중심삼고 나가고 있는 것 같지만 그 중심은 가정이 아닙니다. 만일 통일교회가 가정만을 중심삼는다면 하나님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향과는 틀어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어요? 통일교회는 세계에 중심이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자기가 잘났고 아무리 국가를 위해서 살아간다 하더라도 세계의 중심적인 기준과 일치되지 못하게 될 때는 국가를 위하는 것도 낙엽처럼 떨어져 가게 되는 것입니다.
자고로 위대한 사람이라든가 성현이라든가 또는 대통령 등의 역사적인 인물은 어떤 사람이냐?천운과 더불어 세계의 중심과 일치되는 자리에서 일생을 살아간 사람들입니다. 자기의 민족을 넘어서서, 수천년 후의 후손들이 추모할 수 있는 내용을 가지고, 세계를 무대로 세계 만민을 위해서 살아간 사람들이 성현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는 길을 나라가 반대해도, 민족이 반대해도, 가정이 반대해도 갔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는 그런 것이 문제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국가의 주권자로부터 그 국민 전체가 반대를 하더라도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해서 가게 되면 결국은 누가 남아지느냐? 이런 사람이 출발하고 이런 사람이 들락날락하던 그 기반은 무엇에 중심한 것이냐? 그것은 세계를 중심한 것입니다. 그들은 그것을 추구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시대에 따라 가정과 종족과 민족과 국가는 다 사라지더라도 그런 관점에서 이상을 추구해 나오던 사람들은 반드시 역사를 움직여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역사를 움직여서 무엇을 할 것이냐? 세계를 연결시킬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출발의 기점이 언제나 문제입니다.
여러분들은 젊은 청년들입니다. 앞으로 장가를 가고 시집을 가서 아들딸 낳고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어디를 중심삼고 그렇게 해야 하느냐? 삼천만의 민족 중 한 가정의 일원으로서 가정을 중심삼고 새출발을 하겠느냐, 아니면 자기 가정을 이끌어서 이 나라 이 민족을 중심삼고 새출발하겠느냐, 또는 국가를 넘어서 세계가 출발하는 기점을 기반으로 해서 출발하겠느냐 할 때에 여러분은 어떤 것을 선택할 것입니까? 이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것을 선택하고 싶어요? 대답해 보세요. 「세계로 가는 길입니다」 말은 쉽지요. 문제는 여기서 벌어지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위대한 사람이 되고 싶고,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지 그렇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왜 못 되느냐? 출발 기점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올바른 기점을 닦아야 합니다. 대한민국 내에서 자기가 세계를 위해서 가겠다고 아무리 큰소리친다고 해서 갈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에게 새로운 주의와 사상, 새로운 이념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이념은 `이러한 것이다' 하는 팻말을 내걸고 주장했을 때 선한 양심을 가진 세계인들이 그 모든 내용을 보고 `그렇소' 하고 인정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여기에는 반대하는 나라가 있더라도 박차고 나가야 됩니다. 목을 자른다 하더라도 가야 합니다. 나가는 길 앞에 환경상의 장애가 있더라도 그 장애 앞에 굴복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을 밟고 넘어가겠다는 신념으로 가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비록 몸은 정복당하게 될지 몰라도 그 신념과 사상은 정복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에는 정복했던 사람이 정복당했던 사람에게 반대로 정복당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방법으로 역사 하십니다. 결국은 어려운 자리에서 출발했던 그것은 지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젊은 우리들은 어차피 가야 할 필연적인 운명의 이 길을 가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가는 데는 어디서부터 출발해야 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어떠한 것에 고착된 관념을 가지고 살겠느냐는 말입니다. 김아무개면 김아무개의 아들딸로 태어났으니 그 김아무개의 아들딸의 자리를 중심삼고 서러워하거나 즐거워하면서 살아갈 것이냐? 아니면, 서럽든 즐겁든 나라를 붙들고, 국민을 붙들고 같이 서러워하고 즐거워할 것이냐? 더 나아가 죽더라도 세계를 붙들고 죽고, 살더라도 세계를 붙들고 살겠느냐? 문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기준에 따라 천태만상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최고의 기준을 추구하는 사람은 종적인 인물입니다. 종적이라는 것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종적이라는 것은 하나님께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세워 가야 할 기준이 바로 이것입니다. 종적이라는 것은 한곳으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여자들이 시집을 가는 데에도 나는 여자로 태어났으니 한 남자를 찾아간다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내가 시집을 가는 것은 나라를 살리기 위해서 가는 것이다라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자가 시집을 가는 것은 한 남자와 기쁨을 같이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의 남자를 만나기 위해서 가는 것이 아닙니다. 한 가정을 위해서, 또는 한 여인의 행복을 위해서 가는 것이 아닙니다. 대한민국의 모든 여인들을 대표해서, 이 나라 대한민국을 위해 시집을 가겠다고 한다면 그는 위대한 사람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우리 나라를 보면 과거에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영친왕의 부인이 된 마사꼬(方子)여사가 있는데, 그 여자는 일본에서 한국으로 시집왔습니다. 무엇 때문에 왔겠습니까? 한국 남자를 사랑하기 때문에 왔어요? 나라 때문에 왔던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역사에 남는 것입니다. 한일합방 이후 배후의 어떤 관계를 맺기 위해서 정책적인 결혼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 여자는 일본의 전 여성을 대표한 하나의 제물로서 그 나라의 역사에 남아질 것입니다. 그런가요, 안 그런가요? 그러면 시집 장가가는 것은 다 마찬가지인데, 왜 그것만 역사에 남아지느냐? 가치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온 천지간에 있어서 누가 제일 위대한 자리에서 시집 장가가려고 하였느냐?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장가가기 위한 신랑으로서 신부를 맞으러 오실 때에 어떤 입장에서 오셨느냐? 세계를 위해서 오셨던 것입니다. 세계 때문에 장가가기 위해 왔던 대표적 인물이 누구냐 할 때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지금까지 여자들 중에는 나라를 위해서 시집 간 여자들은 있었지만 남자가 나라를 위해서 장가 간 적은 없었습니다. 남자가 장가를 가면 완전히 빼앗기게 되니까요. 그렇지요? (웃음)
그렇지만 역사상에서 자그마치 세계를 걸고 장가를 간다 했던 대표자가 있었으니, 그가 누구라구요? 예수님,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장가가는 내용에 있어서 그 자체가 별다르냐 하면 다른 사람들과 같다는 것입니다. 한 남자로서 한 여자를 취하는 것도 같고, 결혼해서 아들딸을 낳고 사는 것도 같다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다른 점이 없이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세계를 위해서 시집 장가를 가겠다는 것, 이것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세계를 위해 간 것은 국가를 위해 간 것 이상입니다. 세계를 위해 장가를 가서 세계적인 가정을 이루는 날에는 그 가정은 국가적인 가정 이상의 자리에 서는 것이요, 혹은 민족적인 가정을 대표한 그 이상의 자리에 서는 것이요, 모든 가정을 대표한 가정의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정 중에 최고로 승리한 가정을 소망하며 최고로 승리한 가정의 주인으로서 오시는 분이 누구냐 하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재림주입니다. 장가를 가려면 멋지게 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통일교회는 발견을 잘합니다. 그러면 그분의 이름을 짓는다면 무슨 이름으로 지을 것이냐? 그분을 부를 수 있는 제일 적절한 이름이 무엇일 것이냐? 그 이름을 통일교회 문선생이 `참부모'라고 붙였습니다. 어때요? 잘 붙였어요? 이 말은 쉽고도 간단한 말이지만 내용을 알고 보면 위대한 말입니다.
그러면 그분의 생활기점은 어디냐? 가정을 중심삼은 곳이 아닙니다. 들락날락하는 기점은 천지를 중심삼은 곳입니다. 그분이 가는 곳은 천지가 아닌 곳이 없습니다. 그분이 하는 일은 역사적인 일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의 모든 행적은 하나에서부터 천만사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어떤 것보다 존귀한 가치로 영원히 남아지는 것입니다. 그분이 쓰던 종이조각 하나라도 역사적인 유산으로 남아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것이 세계적이요, 천주적인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위대한 사람은 종자가 달라서 위대한 사람이 된 것이 아닙니다. 일대에 세상을 구하기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이 길을 가겠다는 결심을 하고 실행하여 나가는 사람이 위대한 사람입니다. 자기 1대에 못 가게 되면 2대, 3대, 10대를 거쳐서라도 가겠다 하는 사람이 위대한 사람인 것입니다. 천운은 사람을 통해서 움직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마치, 지남철 옆에 크고 강한 쇳덩어리가 있으면 그 지남철이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끌려가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입니다.
여러분의 선조를 두고 볼 때, 대관절 선한 선조가 어떤 선조냐? 자기 자식들만 알고, 자기 마누라만 알고, 자기 남편만 알고, 자기 부모들만 알고 살다 갔던 선조가 선한 선조예요? 아닙니다. 선한 선조는 자기의 가정을 희생시키더라도 그 동네를 위하고, 그 동네를 중심삼고 면을 위하고, 그 면을 중심삼고 군을 위하고, 그 군을 중심삼고 민족과 나라를 위해 희생한 사람을 말합니다. 어디 여기에 있는 아가씨들 대답해 봐요. 그래요, 안 그래요?
그런데 요즘 아가씨들은 사랑한다고 하며 장래를 약속했으면서 나를 버리고 간다고 울고 불고 별의별 야단하는 일이 많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여자가 데데하게 `아이구 당신이 아니면 나는 죽소' 하면서 매달리는데, 그까짓 것들 죽을 테면 죽지, 그런 사람들이 죽어 나가 자빠지더라도 나라는 망하지 않아요.
그러니 여러분들은 자신이 죽으면 나라가 망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죽으면 나라가 망하고, 여러분의 가정이 망하면 삼천만 민족의 가정이 망한다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여러분의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삼천만 민족이 다 죽더라도 여러분의 가정만은 남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삼천만 민족이 겪지 않았던 어려움을 당해서 승리의 실적을 가져야 됩니다. 그래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세계적 기반을 중심삼고 출입할 수 있는 기반을 닦으려고 했기에 십자가의 운명이 눈앞에 다가왔어도 밤을 새워서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 14:36)"라고 기도하였습니다. 내 뜻은 나를 중심한 혈육과 가까웁고 이스라엘 민족과 가까우나 당신의 높고 넓으신 그 뜻을 중심삼고 볼 때는 망하여야 할 이방 사람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나와는 상관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나를 희생시키려는 당신의 마음이 내 뜻과는 다르지만, 내 뜻은 전부 다 뭉개 버리고 당신의 뜻에 순종하여 더 넓은 세계를 구하겠습니다' 하는 마음으로 죽었기 때문에, 세계의 역사가 하나님의 섭리를 중심하고 남아지게 되었고, 또 그로 말미암아 기독교가 세계적인 종교가 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통일교회가 가야 할 길이 있느냐? 여러분 개인이 가야 할 길이 있는 동시에 대한민국이면 대한민국이 가야 할 길이 있다면, 통일교회가 가야 할 길이 있느냐, 없느냐? 있다면 그 길은 어떤 길입니까? 그 길을 가는 데는 남자도 죽어 자빠지고 여자도 죽어 자빠지는 일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한 나라가 살고 한 나라가 번성하는 그 배후에는 여러분이 상상도 할 수 없을 비참사가 꼬리를 연하여 물고서 소용돌이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대한민국만 하더라도 여러분이 알지 못하는 가운데에 이 민족을 살리기 위해서 이북 땅에서, 혹은 일선이나 해외에서 죽어가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이렇게 볼 때 이 나라의 운명은 누구로 말미암아 지탱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사람들로 말미암아 지탱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참고 극복하여 천적인 기반을 닦으려는 그들의 공적이 있기에 대한민국의 갈 길은 남아지는 것이요, 이 나라의 행복의 터전이 닦아지고 운명의 길이 개척되는 것입니다.
통일교회가 가야 할 길은 어떤 길이냐? 여러분, 예수님이 가려던 길과 오늘날 통일교회가 가려는 길 중에 어떤 것이 더 큰 길이예요? 여러분들 한번 얘기해 봐요. 어느 것이 더 커요? 「통일교회요」 정말 커요? 「예」 뭐가 커요? 머리가 커요, 몸이 커요, 밥을 더 많이 먹어요?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크다는 것이냐? 생각이 크다는 것입니다. 생각이 크고 결심이 크다는 것입니다. 세계를 삼키려면 세계의 생각을 능가해야 됩니다. 세계의 사람들이 결심한 이상의 결심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단결하게 되면 그 단결된 힘을 세계의 30억 인류가 단결한 것과 비교해 볼 때, 비록 소수의 무리라 할지라도 그 단결된 힘은 천년 만년이 가도 해체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힘은 한 백년만 가면 다 해체되고 말 것입니다. 소수이지만 천년 만년이 가도 해체되지 않는 힘으로 단결하게 되면 그 힘은 세계를 삼켜 버리고도 남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통일교회에서 주장하고 있는 것이 무슨 주의냐? 「천주주의입니다」 그러면 천주라는 말에서 주(宙)라는 것은 무슨 뜻이냐? 집이라는 뜻입니다. 사람은 집을 기반으로 해서 출입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있고, 아들딸이 있고, 형제가 있고, 친척이 있는 그런 기반을 중심삼고 출입해야 됩니다. 이것이 정상적으로 가야 할 인생의 길입니다.
그런데 이 길의 기반이 자기를 중심한 것이냐, 민족을 중심한 것이냐, 국가를 중심한 것이냐, 세계를 중심한 것이냐, 천주를 중심한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세계주의와 천주주의 중에서 어떤 것이 더 큽니까? 「천주주의입니다」 말들은 좋구만. 말은 좋아요. 지금 여러분은 천주주의에 입문할 수 있는 수속 절차를 밟고 있는 중이구만. 그래요? 「예」
그러면 여러분은 흥할 족속이 될 것입니다. 흥하는 데는 얼마만큼 흥할 것이냐? 대부분의 처녀들은 내가 서울에 올라올 때는 한폭 치마를 입었으나 성공해서 돌아갈 때는 열두폭 치마라도 두르고 가겠다고 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리고 동네의 한 처녀가 서울 간다 할 때 서울 가서 뭐 할 것이냐고 물으면 좋은 신랑감이 있으면 시집가겠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 시집가는 것은 별로 어려운 것이 아니지만 세계를 위해서 들락날락할 수 있는 남편을 만나기는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만일 그런 남편을 만났다 할 때는 열두폭 치마가 문제가 아니라 치마폭이 세계를 향해 부채질할 정도가 될 것입니다.
여자들은 누구나 태어나서 한번은 서울에 올라와서 그러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니 항상 엉뚱한 생각만 한다는 것입니다. 밥을 먹으면서도 꿈을 꾸고 있다는 거예요. 자기가 아무리 지금은 조밥을 먹고 보리밥을 먹고 살지라도 언제까지나 조밥 보리밥만 먹고 살 것이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언제 그 소원을 성취할 것이냐? 자기 나름대로의 결심을 해야 됩니다. 내가 어떤 남자를 신랑으로 삼아보겠다 하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계획을 세우고 길거리에서 지켜 서 있다고 해서 그런 사람이 내 신랑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그 사람의 눈에 들어야 됩니다. 눈에 들려면 그 사람의 눈보다 더 높아야 됩니다. 그런데 남자들도 자기보다 잘난 색시를 얻고 싶어합니다. 남자들 욕심이 그런 것입니다. 그것은 불구자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렇지요? 어떤 사람에게 물어봐도 그것은 백 퍼센트 같은 대답이 나올 것입니다. 어떤 남자든지 자신보다 잘난 여자를 얻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여자들도 마찬가지예요. 여자들, 자기보다 잘난 남자를 얻고 싶어요, 못난 남자를 얻고 싶어요? 어디 한번 솔직하게 얘기해 봐요. 여자들도 대답은 안 하지만 속으로는 제일 잘난 남자를 얻고 싶다고 할 거예요. 여자들 대답을 좀 해봐요. 그래, 좋은 남자를 얻고 싶어요. 못난 남자를 얻고 싶어요? 「…」 이렇다니까. 이게 틀렸다는 거예요. 이러니까 여자보다 남자가 조금 낫다고 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아마 마음속으로는 대답을 열 번도 더 했을 것이지만 대답하는 소리를 차마 입밖으로 내지 못하거든. (웃음)
그렇지만 두고 보세요. 앞으로는 일등가는 절세의 미남자를 앞에 두고 `누가 이 사람한테 시집갈래?' 했을 때, 결심을 단단히 하고 `내가 가겠다'고 먼저 손드는 사람이 그와 결혼하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가 올지도 모른다는 거예요. 그러니 연습삼아 대답을 해보는 것도 좋다는 것입니다. 그럴 수도 있는 거예요.
여러분 가끔 이런 때 있지요? 재수가 좋을지 나쁠지 동전 같은 것을 던져서 점 쳐보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동전의 앞면이 나오면 기분 좋게 가고 뒷면이 나오게 되면 기분이 나빠서 가다가 다시 돌아오기도 합니다. 기분이 잡치거든요. 그러니 동전을 던질 때는 `앞면이 나와라, 앞면이 나와라, 제발 뒷면이 나오지 말고 앞면이 나와라' 하고 마음으로 빌것입니다. 빌어요, 안 빌어요? 만일 여기에 자신의 생명이 죽고 사는 심각한 문제가 달려 있다면 눈이 똥그래질까요, 안 똥그래질까요? 손이 부들부들 떨릴까요, 안 떨릴까요?
여기서 일이 어떻게 벌어지느냐에 따라서 천국과 지옥이 왔다갔다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직 20대에 있기 때문에 시집을 생각지도 않고 있지만 한 50대가 넘은 노처녀가 돼 봐요. 영감한테라도 시집가겠다고 할 것입니다. 어쨌든 다 좋은 남자 얻고자 하는 것이 틀림없지요? 「예」
그러면 그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어요? 마음대로 돼요, 안 돼요? 마음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어떤 대감님 아들을 사모하면서, `저높은 담 너머에 그 아들이 아침에는 세수할 것이고, 밤에는 잠을 자겠지, 지금은 밥을 먹을 것이다. 또, 지금은 무엇을 할 것이다' 하면서 하루종일 그를 생각하며 산다고 해서 그가 자기 신랑 될 수 있어요? 하루종일 마음으로 같이 산다 해서 자기 신랑 될 수 있어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를 신랑으로 맞으려면 먼저 그 사람의 눈에 들어야 됩니다. 그의 눈에 들려면 그 사람이 가는 길에 동무가 되어 줄 수 있고, 그 사람이 잘못되어 갈 때 자극을 주어서 바로잡아 줄 수도 있고, 좋은 길로 이끌어 줄 수도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여자라 할 때는 가만히 집에 있더라도 소문을 듣고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내놓고 살지 못했습니다. 숨어서 살았습니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때도 아버지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사생아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채 쓸쓸하게 태어났습니다. 태어나 가지고도 잡아 죽이려고 했기 때문에 도망까지 다녔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한 3년을 지낸 후에는 갈릴리 해변에서 돌아다녔습니다. 예루살렘에 있으면서도 얼굴을 내놓고 다니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속에는 무엇인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소문이 난 것입니다. 그 소문이 얼마만큼 났느냐? 세계적으로 났습니다. 오늘날 예수님이 신랑되신 주님으로 오셨다는 소문이 얼마만큼 났습니까? 기독교를 통해서 전세계적으로 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이 전부 다 자기 신랑 삼겠다고 지금까지 싸워 나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신랑 삼었어요, 못삼았어요? 「못 삼았습니다」
여러분, `내가 그분의 신부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 이것 한번 생각해 봤어요? 얼마나 좋겠어요? 배고플 때 불고기 백반을 실컷 먹고 난 만큼이나 좋겠어요? 시골 사는 사람들이 중국 요리집에 가 가지고 실컷 먹고 난 만큼이나 좋겠어요? 뭐 그런 불고기, 중국요리 같은 것에 비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누가 찾아가야 합니까? 신랑이 찾아와야 합니까, 신부가 찾아가야 합니까? 신부가 찾아가야 합니다. 신랑이 못난 사나이어서 그래요? 잘난 사나이라서 그래요? 잘났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 잘났다는 소문을 듣고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신랑 되신 예수님을 맞기 위해서 너도나도 밤이든 낮이든 새벽이든 정성을 들이면서 만나고 싶다고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위대한 분이기 때문에 시시해 가지고는 만날 수 없습니다. 세계를 뛰어 넘을 수 있는 천주주의라는 엄청난 주의를 주장하는 하늘의 왕자님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나는 대한민국의 여자이니 그분이 결혼식장에 올 때는 한복을 입지 않으면 안 됩니다'하는 심보를 가지고 기도하면 그 신랑이 나타나겠습니까? 그 신랑은 세계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여러분이 그 신랑을 맞을 수 있는 신부가 되기 위해서는 그 신랑 이상의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그런데 신부 될 여자가 예수님에게 `당신은 얼마만큼 나를 사랑해요, 나를 사랑하려면 이렇게 사랑해야지, 왜 그렇게 해요? 당신이 세계에 이름난 신랑이요? 또 하나님을 이렇게 사랑해야지 그게 뭐요?' 이렇게 말하게 된다면 신랑이 어떻겠어요? 기분이 좋겠어요, 나쁘겠어요? 신랑이 그럴 사람 신부로 맞고 싶겠어요? (웃음) 너무 웃지 말아요. 선생님이 지금은 이렇게 웃으면서 얘기하지만 이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선생님이 밤 늦게까지 얘기할 때 여러분이 졸고 있으면 기분이 나빠서 얘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뻣뻣한 얼굴에 웃음이라도 지어 주어야 말할 수 있겠다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한국 여자들은 대부분 무표정하고 대나무처럼 딱딱해서 멋대가리가 없습니다. 볼 것이 없다는 거예요. 여자는 하루에 적어도 3시간 이상은 웃어야 됩니다. 시집가기 전에는 그래야 된다는 것입니다. 궁둥이 춤이라도 추면서 웃을 수 있어야 다 갖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선생님을 핑계 삼아서 연습은 하지 말아요? 부모들이 그것을 보게 되면 미쳤다고 할 테니 말입니다.
어쨌든 그런 신부가 있다 할 때 그가 예수님에게, `당신 뭐예요? 십자가의 길 뭐예요? 사나이답지 못하게 뭐 할 수만 있다면…. 내 뜻대로 말고 당신 뜻대로…. 시시하게 그게 뭐예요?' 이렇게 말한다면 신랑 되시는, 소위 세계적인 낭군의 기분이 좋겠어요, 나쁘겠어요? 생각해 보세요. 남자들, 어떻겠어요? 「나쁩니다」 그러나 기분 나쁘고 화가 나는 반면에 `야! 정말 멋지다' 하고 생각할 것입니다.
또한 `2천년 전에 네가 나의 제자가 되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나' 할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네가 여자지만 그 당시 너 같은 제자가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겠나' 하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가 제자 되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면, 더 나아가서 내신부 되어 주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을 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합니다」 그런데 뭐가 기분이 나빠요? (웃음) 왜 기분이 나쁘냐는 말이예요.
그런 여자가 있다면 하나님이 보시고 하늘의 왕자로서 수천년 동안을 공을 세운 기독교의 주인 되시는 그분 앞에 불평해서는 안 된다고 하실 수 있겠어요? 없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남자로 태어나서 당신이 한 일이 뭐냐고 항의할 수 있는 여자가 나와서, 예수님에게 `당신이 신랑이요? 사내로 태어나서 30세가 지나도록 장가도 못 가고 뭐 했어요?'라고 반박을 하면 예수님은 어떻겠어요? 겉으로는 기분이 나쁘다고 할는지 모르지만 속으로는 좋다고 춤을 출 것입니다. 선생님은 그럴 것 같은데 여러분은 어때요? 춤추겠어요, 기분 나빠하겠어요? 겉으로는 기분이 나쁘겠지만 속으로는 희망에 벅차 오를 것입니다. 또, 선생님이 강제로 그렇게 말하게 한다고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사실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래요? 「예」 그래도 남자들은 가망성이 있긴 있군요. 생각해 보세요.
통일교회에 들어온 여러분은 예수보다 못해선 안 됩니다. 통일교회는 수준이 높은 곳이니 예수보다도 멋지게 살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은 예수님에게 반말도 합니다. `시시하게 졸장부들에게 죽긴 왜 죽어?' 선생님이 이렇게 말하면 예수님이 기분 나쁘겠어요? 죽지 않을 수 있는 방안이 있었다고 하게 되면, 예수님은 `나는 지금까지 그런 방법이 있는지 몰랐는데….' 할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했으면 안 죽고 뜻을 이룰 수 있었을 텐데….' 하고 선생님이 가르쳐 주면 그때서야 `아 그렇구나' 하고 오히려 감사해 할 것입니다. 본래 예수님은 안 죽게 되어 있었거든요. 이런 것을 예수님에게 가르쳐 주면 예수님이 기분 나빠하면서, `네 녀석이 내 자리를 빼앗아 갔구나, 이 원수야' 하고 칼부림을 하겠어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통일교회 문선생님은 그렇게 쉽게 죽지 않습니다. 기성교회 교인들이 이런 말을 들으면 기분 나빠할 것입니다. 기분만 나쁘겠어요. 가슴이 철렁할 거예요. 철렁하는 정도가 아니라 다 내려앉을 것입니다. 그러니 어느 말이 더 실제적인지를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무슨 주의라고요? 천주주의입니다. 천주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하나님의 집이니까 하나님이 들어가겠어요, 못 들어가겠어요? 「들어갑니다」 하나님이 들어가면 이 세계가 들어가겠어요, 못들어가겠어요? 「들어갑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들어가겠어요, 못들어가겠어요? 백명도 들어가고 남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주(宙)는 집입니다. 이런 천주주의를 중심삼은 것이 우리의 출발기점입니다. 그러므로 밥 한 술을 먹고 나가는 데도 세계를 위하여 나가는 것이요, 보는 것도 그 세계를 위하여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거슬리면 모두가 부정입니다. 내 손이 아직까지 봄철을 맞이하지 못해서 그렇지, 봄철을 맞이하는 날에는 그런 것들은 전부 다 그냥 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목을 자른다는 것은 아니예요.
여러분들은 그들과는 관이 달라야 합니다. 보는 눈이 다르고, 듣는 귀가 다르고, 냄새 맡는 것이 다르고, 말하는 것이 달라야 합니다. 한 세상에 같이 살지만 달라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슨 용사입니까? 통일의 용사입니다. 통일이란 기분 좋은 것이예요, 나쁜 것이예요? 「좋습니다」 정말 좋아요? 통일이란 말만 들어도 신물이 나지 않아요? 선생님은 그 말만 들어도 신물이 납니다. 통일이라는 그 이름때문에 주름살이 더 생겼어요. 대한민국 사람들은 통일을 좋아해요? 남북한 통일은 좋아하지만 통일교회의 통일은 누가 좋아하겠나? 여기 와 있는 여러분이나 좋아하지. 여기 있는 여러분도 진짜 좋아하는지는 두고 봐야 알지 뭐. 체로 쳐 봐야 아는 거예요. 체로 치면 찌꺼기는 다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무엇에든지 찌꺼기는 다 있는 거예요. 다이아몬드에도 찌꺼기가 있고 황금에도 찌꺼기가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삼천만 민족 가운데에도 찌꺼기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통일교회에는 찌꺼기가 있겠어요, 없겠어요? 통일교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혹은 있다고 대답한 그 사람이 찌꺼기일지도 모르는 거라구요. (웃음) 그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도리어 대답없이 가만히 있는 사람은 중간이라도 간다는 것입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여러분은 가야 할 길을 가야 됩니다. 가는 데는 어디를 기점으로 할 것이냐? 위대한 사람이 될 것이냐, 졸장부가 될 것이냐? 이것은 여러분이 선택해야 됩니다. 여러분의 생명을 어디를 기원으로 해서 출발하고 그 생명의 종착점을 어디로 할 것이냐가 문제입니다. 여러분이 천국을 차지하느냐, 지옥을 차지하느냐가 여기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어디를 차지하든 둘 다 용자는 용자입니다. 지옥을 차지하는 사람도 사탄세계에서는 용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국을 차지하는 사람은 하늘세계의 용자입니다. 그러나 사탄세계의 용자는 누구나 될 수 있지만 하늘세계의 용자는 아무나 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늘세계의 용자가 되려면 아까 말한 것과 마찬가지로 거기에 비례되는 만큼의 시련을 극복해야 합니다. 거기에는 극복의 노정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앞에는 꼬불꼬불한 길도 있고 매끈매끈한 길도 있을 것이며 평평한 길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꼬불꼬불한 길을 갈래요, 평평한 길을 갈래요? 꼬불꼬불한 길도 평평한 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다시 말해서 좋은 길과 곧은 길이 있는데 여러분은 어떤 길이 좋습니까? 「곧은 길입니다」 곧은 길을 가려면 앞에 산이 있으면 그 산을 뚫고 나가야 되지만 좋은 길은 산을 돌아서 편안히 가는 길입니다. 곧은 길을 가려면 산을 뚫고 나가야 되는데, 그러면 그 길 자체가 스스로 뚫고 나가게 할 수 있어요?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그 길을 뚫을 만한 수고의 대가를 치러야만 합니다. 그래야 곧은 길이 된다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이면 대한민국이 가는 길에도 여러 가지 길이 있을 것입니다. 평평한 길도 있을 것이요, 좋은 길도 있을 것이요, 곧은 길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통일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통일교회가 갈 길은 평평한 길도 아니요, 좋은 길도 아닙니다. 곧은 길입니다. 곧은 길.
그러면 그 길이 어디냐? 문제는 그 길을 찾는 것입니다. 그 길은 삼천만이 전부 다 해방받을 수 있고 삼천만 민중의 소원이 모두 성취되는 길이어야 합니다. 즉, 남북통일을 하는 길입니다. 이것이 제일의 길입니다. 경제부흥이니 뭐니 하는 것은 전부 다 그 다음의 길입니다. 제일 곧은 길은 남북을 통일하는 것이니 그런 주장을 하는 길이 있다면, 그것은 대한민국 사람들이 바라고 있는 제일 곧은 길이 될 것입니다.
대한민국이 남북통일을 하려면 삼팔선을 넘어가야 되겠지요? 그들한테 넘어오라고 하면 좋지 않습니다. 그들이 넘어오게 되면 어떻게 되겠어요? 지금도 그들이 넘어올까 봐 걱정하고 있지요? 그러니 우리가 넘어가야 됩니다. 넘어가는 데는 우리가 행차하니 나와서 환영을 하라고 나팔을 불면서 깃발을 들고 갈 수 있어요? 맨 처음의 길잡이는 결사적으로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열 사람이 백리를 갔다가 그 중 한 사람이라도 돌아오면 안되는 거예요. 처음에 그들만 넘어가게 되면 뒷사람들은 십리길도 그냥 넘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는 데에는 십리길이라도 그 길을 뚫고 갈 것이냐, 백리길로 돌아서 갈 것이냐? 여러분은 십리길로 갈 수 있는데 백리길로 돌아가겠어요? 십리길을 통해서 가면 돌아서 백리길을 가는 것보다 시간이 절반 밖에 안 걸린다 할 때는 그 십리길로 가지 말라고 해도 갈 것입니다. 십리길로 가려면 옆걸음질을 쳐서 가야 된다고 해도, 또는 뒷걸음질을 쳐서 가야 된다고 해도 모두 그 길을 갈 것입니다. 혹은 돈을 내야만 갈 수 있다고 하면 돈을 내고서라도 그 길로 간다고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길을 통하여 가야 합니다. 장님도 길을 가는 데에는 그 길을 갈 것입니다. 지팡이로 더듬어서라도 그 길을 택할 것입니다. 장님도 갈 수 있는 쉬운 길이라면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길로 가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 길을 가는 데 있어서 명부를 기록해 놓고 가라면 가겠어요, 안가겠어요? 「가겠습니다」 그게 바로 통일입니다. 옛날 사람들도 그 길을 가려고 했습니다. 또한 오늘날의 사람도 그 길을 가려 하고 수천만대 후손들도 그 길을 가려고 할 것입니다. 이 길이 조금 불편하지만 지름길이다 할 때는 늙은 영감도 물론이고, 싱싱한 젊은이도 물론이고, 어린 애기들도 애기 어머니들도 가야 합니다. 결국 남녀노소가 전부 다 그 길을 가니, 그 길을 중심삼고 만민은 통일되는 것입니다. 그런 길을 만들자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이 바라던 본연의 소원을 이루려고 지금까지 나온 것이 얼마나 걸렸느냐? 자그마치 6천년이 걸렸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한 6년에 이룰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 길을 가겠어요, 안 가겠어요? 「갑니다」 6백년 걸린다면 가겠어요? 기분이 좀 나쁘지요? (웃음) 6천년이 걸린다면 어떻겠어요? 하나님이 6천년 걸려서도 못 갔는데 인간이 어떻게 가겠느냐고 하면서 다 포기해 버릴 것입니다.
그러면 그 길을 가는데 6백년이 걸린다면 마음을 먹고 한번 가 보겠다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될까요? 10대 이상은 걸려야 할 텐데, 여러분은 6백년이 걸려도 가자고 하면 가겠어요? 가겠다는 사람은 손들어 봐요? 이 끄떡끄떡하는 녀석들, 말만 그렇게 하고 너나 나나 다 안간다구. (웃음)
그러면 60년이 걸린다면 가겠어요? 60년이 걸린다면 장가도 못 가볼텐데, 이 도깨비 같은 남자들이 갈 것 같아요? 잠자코 갈 것 같아? 가슴에 손을 얹고 솔직히 생각해 보라구요. 그런가 안 그런가? 자기 자신이 잘못된 판인지 잘된 판인지 생각해 봐요. 어디, 박공서! 한번 대답해 봐? 어떨 것 같아. 자신 없지? 「가야겠지요」 당연히 가야 되지. 그런데 가겠느냐고 묻는데 가야 되겠지요가 뭔가? 안 가겠다면 끌고라도 가야지.그런데 억지로 끌고 간다면 가나마나지요. 「어렵습니다」 어렵기 때문에 물어보는 것입니다. 쉽다면 물어볼 게 뭐가 있어요.
여러분, 여기에 하나님 닮은 사람이 있습니까? 영적으로만 사촌이지요? 그러면 언제 실제로 하나님의 사촌이 되겠어요? 닮기 위한 그 길을 천년, 만년이 되어도 못 닦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죽을 때까지 끝내겠다는 다짐을 하고, 안 되면 그 자리에서 쓰러져 죽겠다는 각오를 해야 합니다. 「물고 늘어져야죠」 그래 그래, 대답이 아주 멋지구만. 마치 국민학교도 안 다니고 중학교로 그냥 건너뛴 격이로구만. 그런데 그 길을 가는 데 6개월이 걸린다면 자신 있어요? 생각해 봐요 6개월은 자신 있어요? 그 6개월 기간이면 갈 수 있다는 사람은 몇 푼짜리나 될까? 값으로 친다면 몇푼짜리나 되겠느냐 말입니다.
뜻을 중심삼은 통일교회의 엄청난 값어치를 기준삼고 볼 때, 그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아마도 6개월이라 해도 못 갈 것입니다. 6개월 동안 변함없이 순수하고 철석같은 마음으로 사기충천해서, 하늘에 해가 안보이면 안 보였지 내 마음에 구름이 낄 날은 없다고 자신하면서 갈 수 있겠어요? 6개월은 커녕 엿새도 자신있게 못 갈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이런 여러분들을 믿어 주어야 하는 하나님이 불쌍해요, 안 불쌍해요? 하나님이 이런 여러분을 믿고 엄청난 일을 해야 되는 주체적인 입장인 것을 생각하면 불쌍해요, 안 불쌍해요? 「불쌍합니다」 형편없이 불쌍합니다. 형편없는 사람들을 대하니까 형편없이 불쌍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오늘날 통일교회에서 말하는 천주주의라는 것은 말하기는 쉽지만, 그것을 이루어 나가는 길에는 역사적인 모든 사건들을 일시에 규합해서 우리들을 들이박으려는 사건들이 몇만 번도 몇억만 번도 더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문제에 부딪쳤을 때, 그 문제를 어떻게 뚫고 직행해 나가서 이 자리에 남아질 것이냐 하는 것을 스스로 결정해야 됩니다. 복귀역사가 이렇게 분한 놀음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자신의 아들딸을 중심삼고 천추만대에 인연을 맺기 위해서는 그 모든 문제들을 돌파해 나가야 합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세월이 변하나 끊임없이 내 청춘이 다 가고 검은 머리가 희어져서 백발이 되더라도 내가는 길에 있어서 임 향한 일편단심, 그 마음만은 결코 변할 수 없다는 그런 각오를 가지고 직행해 나가야 합니다. 설사 그런 마음을 가지고 간다 해도 끝까지 갈지 말지 모르는 것입니다.
지금 시간이 비어 있지요? 선생님이 6시부터 8시까지 말씀해 주실 것이라고 했다면서요? 그것도 사전에 인사도 안 하고 연락도 없이 그냥 강제적으로 저녁때 얘기해 주실 거라고 말했다드만…. 그래서 선생님이 오늘 할 수 없이 땜장이 선생님이 되었어요. 여러분, 땜장이 알지요? 구멍이 뚫어진 물건을 임시로 쓰기 위해 그 구멍만 살짝 메꾸는 사람 말예요. 그래 가지고 한 번 쓰고 나서는 집어던져 버리는…. 선생님이 지금 그런 땜장이 선생님이 되었다는 거예요. 세상에 그렇게 하는 법이 있어요? 세상엔 그런 법이 없다는 거예요. 선생님이 이런 말 한다고 여러분들 기분 나쁘게 생각해도 할 수 없어요.
어쨌든 여러분은 이 길을 가야 합니다. 가는 데에는 직행할래요, 돌아 갈래요? 「직행하겠습니다」 돌아가는 길은 누구든지 갈 수 있습니다. 그런 길은 자면서도 갈 수 있고 아무도 간섭하지 않는 길입니다. 하지만 직행하는 길은 고빗길입니다. 직행하는 길은 기다려 줄 시간이 없습니다. 뒤에서 다른 사람들이 길을 따라오기 때문에 앞에서 누가 자빠져 죽더라도 가야 되는 것입니다. 길가에 치워 놓고라도 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 길은 지체해서는 안 되는 길입니다. 그러면 그 길을 가는 데 무슨 주의에 의해서 갈 것이냐? 천주주의입니다. 천주주의라는 말은 하기 쉽지만 생각해 보면 엄청난 내용이 깃든 말입니다.
이제 여러분에게 역사적인 하나님의 심정을 중심삼고 표준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인류의 발원은 어디서부터 출발되었느냐? 하나님의 기쁘신 마음에서부터 출발되었습니다. 창조의 출발은 기쁨으로부터 출발되어졌다는 것입니다. 본래의 발원지가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쁨은 어디서 생기느냐? 목적의 성취라든가 소원성취로 인해서 생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어 가지고는 기쁨이 생길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그 기쁨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영원을 두고 자극 받을 수 있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빛날 수 있고, 영원히 품고 기뻐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것이 무엇일 것이냐? 물질도, 사람도 아닌 사랑입니다. 사랑을 중심삼고 창조한 세계이기 때문에, 기쁨을 목적으로 한 그 결과는 반드시 사랑으로 종결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존재와 창조의 발원은 사랑의 목적을 이루어서 펼치는 데 있는 것입니다.
이런 무한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목적을 중심삼고 사랑할 수 있는 본마음의 바탕, 이것이 바로 심정입니다. 그 가치는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의 가치를 논하려면 이 사랑을 붙들고 논해야 됩니다. 가치라는 것은 상대적 여건이 이루어진 가운데에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쁨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심정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목적이 어디에서 이루어지느냐 하면 인간에게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심정이 보이는 인간의 심정에서 현현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런 심정을 지닌 인간이 횡적으로 뻗어 나가 하나의 가정을 이루게 되면 그 가정이 세계적으로 뻗어 나가 세계의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가정을 이루라고 하나님께서 아담 해와에게 생육하고 번식하라고 축복하신 것입니다. 천주주의는 번식해서 만물을 주관하는 그 바탕 위에서 성립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앞으로 여러분들은 그 내용을 중심삼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 자리에서 태어나서 자고, 먹고, 말하고, 보고, 듣고, 웃고, 느끼면서 장성한 후 시집 장가가서 아들딸 낳고, 그 아들딸을 교육시켜서 그들을 다시 시집 장가를 보내고, 그런 가운데서 살다가 그런 가운데서 죽어가야 합니다. 그 죽음은 다릅니다. 태어난 자리와 출발의 자리도, 죽음의 자리도 다르다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태어난 자리와 죽음의 자리가 타락한 인간과 같으면 지옥 가지 천국 못 가는 것입니다.
본래 에덴 동산에서 아담 해와는 지옥과 상관없는 자리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기에 지옥과 상관이 있는 조건을 가지고는 천국에 못가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심정에서 출발했으니 하나님의 심정의 자리에 도달해야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사탄의 참소조건을 남겨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정에서 태어났으니 그 심정에서 살다가 죽어야지 그러지 않으면 하나님의 아들딸도, 하늘나라의 백성도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껍데기를 전부 다 벗겨 버리고 마음의 보따리를 풀어 놓고 그 속에 들어 있는 천 가지 만 가지의 모든 것을 낱낱이 한번 보십시오. 전시해 놓고 보라는 거예요. 거룩한 것 같던 여러분의 마음이 해괴망측하다는 것입니다. 전부 다 얼룩덜룩하다는 거예요. 얼룩덜룩한 것은 그래도 괜찮지요, 울긋불긋하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는 그런 것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보들을 가지고 살면서도 우리 아빠 엄마 형제를 사랑한다고…. 수작들은 잘한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예」
그러면 무엇을 기반으로 해서 살아야 되느냐? 하나님의 심정입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중심삼은 가정을 기반으로 해서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태어나고, 거기에서 살고, 기뻐하는 것도 거기에서 기뻐하고, 울더라도 거기에서 울고, 죽더라도 거기에서 죽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통일교회에서 말하는 심정이라는 것은 근본적인 내용을 중심삼고 말하는 것입니다.
만일 심정을 중심삼은 그런 집이 있다면 하나님이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그 집에 안 올 수 없는 것입니다. 온 인류가 전부 다 그 집에 들어와 깃들어야 됩니다. 천주라는 그 집은 온 우주를 전부 다 품는 집입니다. 그것이 천주주의입니다. 하나님과 그 아들딸과 온 세계가 다 들어갈 수 있는 그 집, 결국은 한 집인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언제 그렇게 될래요? 언제쯤 그럴 가능성이 있어요? 가능성이 언제냐는 말입니다. 여러분 스스로는 영원히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여러분을 접붙여 줄 수 있는 주인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여러분 자체로서는 영원히 불가능하기 때문에 접붙이는 주인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돌감람나무는 잘라 버리고 거기에 참감람나무의 순을 접붙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새것을 접붙이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현재의 여러분들의 모습을 몽땅 잘라 버려야 됩니다. 그래야 되요, 안 그래야 되요? 「그래야 됩니다」 잘라 주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안 잘라 주면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르지 않겠다 하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잘라 주려고 해야 됩니다」 그러므로 잘라 주어야 할 그 사람을 천리길을 쫓아가서라도 잘라 주어야 합니다. 쫓아갈 수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에게는 선생님이 절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여러분들을 다 잊어버려도 여러분은 꽁무니에 와서 달라붙어야 됩니다. 밤에 쫓아내면 아침에 와서 달라붙어야 되고 아침에 쫓아내면 저녁에 와서 달라붙어야 됩니다. 선생님이 못살게 굴더라도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지금까지 여러분을 못살게 굴어 봤어요? 지금까지 좋게 대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왜냐? 조금 더 길러야 접붙이기가 좋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커 가지고 접붙이기에 충분하다 싶을 때 잘라 버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디를 잘라야 합니까? 밑창을 잘라야 돼요. 꼭대기를 잘라야 돼요. 꼭대기를 자른다면 목을 잘라야 되겠구만. (웃음) 그래도 좋다는 것입니다. 목이 잘리면 대신 새로운 목을 접붙이면 되는 것입니다.
접을 붙여서 오관의 모든 감각이 동화되어야 합니다. 왜 그래야 되느냐? 본래 인간은 하나님이 기쁘시고자 하는 심정에서 그 기쁨의 대상으로 창조되었습니다. 심정을 터로 해서 태어나서 심정 속에서 자라다가 심정적인 가정을 이루면 그것이 횡적으로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래 인간은 심정에서 살다가 심정에서 죽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날 타락한 인간 세상에서 하나님의 심정을 노래한다는 것은 위대한 것입니다. 위대한 발견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인간은 하나님의 심정을 중심삼고 다시 태어나야 됩니다. 부활의 역사가 벌어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태어나 봐야만 이제껏 없는 줄 알았던 아빠 엄마가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엉엉 우는 것입니다. 원리가 그렇다는 거예요. 갓 태어났을 적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오줌도 싸고 똥도 싸고 형편없지만 조금 자라게 되면 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 애기들도 태어나 가지고 한 일년쯤 되니까 `아빠 나 곱지' 하면서 뽀뽀해 달라고 그럽디다. 또 음식을 먹을 때도 `다른 사람이 떠주는 것은 싫어, 싫어. 엄마나 아빠가 떠 줘야지'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통일교회 사람들이 문선생을 좋아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좋아할 것 같아서 이런 말 하는 거예요. 어때요? 혼내 줘도 기분 좋아요? 「예」 자기 아버지 어머니는 곱추라 해도 절름발이라 해도 좋은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아버지 어머니를 위해서라면 죽어도 좋다 할 수 있는 부모를 가진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여러분들은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걸어 놓고 좋아할 수 있는 아버지 어머니를 가져 봤어요? 「세상에서는 못 가져 봤습니다」 그러면 통일교회에 들어와서는 가져 봤어요? 「예」 죽도록 좋아할수 있는 부모를 가진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하나님의 심정에서 태어나 살다가 하나님의 심정 속에서 죽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럴 수 있는 사람들은 천국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중심삼고 통일교회는 팽창해야 됩니다. 이것을 기반으로 하지 않고 자신을 중심삼고 나가게 되면 망하는 것입니다. 추풍낙엽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중심삼고 태어난 사람은 아버지 어머니부터 생각하게 됩니다. 먼저 아버지 어머니를 생각하고, 그 다음엔 가지의 입장인 형제를 생각하고, 그 다음에는 친척을 생각하게 됩니다. 나무로 말하면 뿌리를 절대 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든지 자기의 아버지 어머니를 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인류의 근본은 부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정서적인 면에 있어서 그 하나님의 심정을 중심삼고 모든 생사의 기원점을 세워야 합니다. 그것이 인간으로서의 필연적이고 절대적인 요건입니다. 그러한 요건을 갖추어 가지고 세계를 생각하고 자신의 일생을 살아 나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천주주의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비록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다 하더라도 그는 천주주의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천주주의 주권이 서 가지고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천주주의 세계에 속하게 될 때, 그 주권이 서기까지 핍박받았던 그 사람들은 하늘땅이 환영하는 가운데서 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 상을 받은 사람들은 새로운 지상의 천국에서 살다가 영원한 천국으로 들어가는 것이요, 그 후손은 지상에서 영원히 남아지는 하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거기가 비로소 우리가 가야 할 종착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그 기준을 찾아가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내일이면 학교에 갈 것입니다. 학교에 가서는 뭣 할 것이냐? 공부하는 것도 이 길을 빛내기 위해서 공부하는 것입니다. 직장에 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으로 올 소망의 천국시대에 전국민이 편안히 잘살 수 있게 만들기 위해서 가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아침에 태양을 바라보며 어제의 그 빛과 다르고 봄날을 맞이해도 작년에 맞이했던 봄날과 다르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 봄빛을 내가 가는 길을 반가이 맞아줄 수 있는 봄볕으로 바라보며 즐거워할 수 있고, 이런 길을 가는 나를 반겨 줄 수 있는 햇빛으로 바라보며 가는 사나이는 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 하나님을 중심삼고 죽기 때문에 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길을 택할 것입니까? 선택을 하는 것은 여러분의 자유입니다. 아무리 판사와 검사가 좋다지만 검사 잘못 했다가는 영계에 가서 거꾸로 매달려서 영영 걸어서 못 다니고 기어다녀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부패한 바람에 걸려들었다가는 큰일 나는 것입니다. 천법의 기준으로 보면, 오늘날 불의의 공판도 많고 불의한 검사도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 거기 판사라는 사람, 통일교회의 길을 한번 가 보겠나? 「예」 사람이 순수하긴 하겠는데 끈기가 없겠군. 사람이 사형장에 끌려가더라도 눈하나 까딱하지 않는 그런 무엇이 있어야 돼요. 통일교회의 가는 길이 힘든 길인데 그래도 가 볼래? 「예」 선생님이 기합을 준다고 해도 가 볼래? 「예」 통일교회 문선생이 어수룩해 보이지만 그런 일을 잘 합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언제 걸어 넘어갈지 모르는 거예요. 가다 보면 선생님의 작전에다 말려든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가겠어요? 「예」 선생님이 필시 좋은 길이라는 것을 알았으니 안 가겠다는 사람은 뭉둥이로 후려갈기고 목을 매서라도 끌고 가야 되겠어요. 독재를 해서라도 데려가야 되겠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기분 나빠하지 마세요. 어차피 가야할 길이기에 그러는 것입니다.
장가 갈 나이가 다 되었는데도 장가 안 가겠다는 사람을 선생님이 붙들고 `너 장가 가야 돼' 하고 강제로 끌어다가 결혼식을 시켜 놓으면, 그때 가서는 `독신주의가 더 좋은 줄 알았는데, 아이구 고맙습니다' 하게 됩니다. 안 가겠다고 하는 것을 달래 가지고 장가 가게 해주니 고맙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가겠어요, 안 가겠어요? 그것은 최고의 선물이요, 그 사람에게 있어서는 제일 빠른 직행길입니다. 희망이 앞서 가는 그 이상 빠른 길은 없는 것입니다. 나를 믿으면 직행한다는 거예요. 그러니 여러분, 나를 믿어 보겠어요? 「예」 선생님이 여러분에게 이북에 첩자로 가라고 하면 어떻게 할 거예요? 「가겠습니다」 선생님도 이북에 갔다 온 사람입니다. 선생님이 삼팔선을 넘어올 때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대한민국에 있어서 내가 계획하는 것을 다 이루기 위해서는 불원한 장래에 다시 넘어올 것이다. 지금은 내가 이렇게 넘어가지만 어떤 수난의 길이 있더라도 죽지 않고 기필코 다시 넘어올 것이다. 그때는 김일성이 내 손에 망할 것이다'라는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지금 그 준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통일교회의 아가씨들, 내가 공산당을 해치우라고 명령을 하면 사탄세계에 가서 그들을 해치울 자신 있어요? 어떻게 할 거예요? `내가 왔다' 하고 나가면 문제없이 될 것 같아요? 이건 미친 놀음이 아니예요. 선생님은 이미 그런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여러분의 목숨은 이미 전부 다 쇠사슬에 걸려 있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지금 그런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재 공산당이 세계의 3분의 1정도를 삼켜 버렸고 민주주의 세계를 주도하는 국가인 미국의 CIA,FBI의 간부들도 대부분이 소련의 정보망에 말려들어 있는 판국입니다.
그런데 백수건달과 같은, 마치 발가벗은 여인의 몸뚱이와 같은 통일 교인들 몇사람을 데리고 공산당을 막아내겠다고 하고 있으니 이것이 잘됐어요, 못 됐어요? 공산당의 칼침을 맞더라도 핏자국조차도 찾아보기 어렵고, 눈을 뜨고 다니지만 바로 보지 못하는 사팔뜨기와 같은 그런 여러분을 데리고 이런 일을 하고 있는데, 잘 됐어요? 「예」 그런 일을 선생님이 이미 벌여 놓고 있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모든 공산주의 세계에 다 알려져 있습니다. 그것은 일본의 적기, 즉 `아까하다(赤旗)'라는 신문에서 날마다 선생님에 대하여 대서특필 하였기 때문에 통일교회 문선생이라고 하면 공산당도 다 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선생님에 대한 기사가 난 기관지가 세계 각국의 공산당들에게 일시에 뿌려진 것입니다. 그것이 일주일 이내에 전부 다 들어갔으니 그렇겠어요, 안 그렇겠어요? 민주세계에서는 선생님을 잘 모르지만 공산세계에서는 다 안다는 것입니다. 이런 판국입니다. 그러니 사태가 험악하다는 것입니다. 세계적으로 역사상에 없었던 험악한 시대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것을 어떻게 수습할 것이냐는 문제를 두고 볼 때 선생님이 바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이것을 수습하는 길을 어떻게 잡을 것이냐? 소위 젊은이라고 하는 여러분들을 중심삼고 어떻게 할 것이냐? 선생님은 그 방면에 일가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통일교회에는 여러분들밖에 없으니 누구를 먼저 불러야 되겠어요? 선생님이 여러분들을 불러서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라고 하면 가겠어요? 「예」 그래야 된다는 거예요.
일본 협회의 아베상에게는 선생님이 어디로 가서 이러이러한 일을 하라고 명령을 하곤 합니다. 젊은이들은 그런 것들을 잘 모를 것입니다. 선생님이 어떠한 것을 명령할때는 거기에 대한 책임을 선생님이 집니다. 그러기에 전화를 해서라도 명령하는 것입니다. 명령에 따르는 사람들은 그래도 희망이 있습니다. 선생님을 믿고 하니 말입니다. 그러면 선생님은 누구를 믿고 해야 되겠어요? 여러분을 믿을까요? 나는 누구를 믿고 해야 돼요? 「하나님요」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이 총을 쏘고 칼을 들고 싸우라고 할 수 있어요? 책임분담이라는 것이 있는 거예요, 책임분담. 그러니 나는 누구를 믿고 살아야 돼요? 「저희들을 믿고 살지요」 하나님보다 더 존귀한 인간이로군. (웃음) 웃을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편안하게 이불을 덮고 잠잘 수 없는 시대가 왔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차디찬 냉방도 과분하다는 것입니다. 삼팔선이 갈라지던 그 이상의 수난을 당하면서도 최일선에서 삼천만 민족을 이끌고 첨단을 밟고 나설 수 있는 훈련과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래도 끝까지 갈지 말지 하는 이 길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그러니 바쁘다는 것입니다. 그런 명령을 해야 할 위기가 왔습니다. 비상시기가 왔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명령할 수 있는 사람은 선생님과 제일 가까운 사람입니다. 지금도 가까운 사람을 중심으로 여러분이 모르는 지시를 내리고 있습니다.
옛날 자유당 때에 내가 형무소를 들락날락하면서도 선교사를 밀선에 태워 일본에도 보냈고, 미국에도 보냈습니다. 자유당 시대에 선생님을 죽이려 하는 것을 조건 삼아서 외국 선교의 길을 개척했던 것입니다. 선생님이 형무소에 있을 때에도 사람을 불러서 선교의 사명을 주어서 보냈습니다.
전부 다 이렇게 개척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어떻게 갈 거예요? 멋지게 갈 거예요, 쫓기면서 갈 거예요? 「멋지게 갈 것입니다」
여자들은 태어나서 천주세계에로 시집가는 것이 가장 위대한 소원일 것입니다. 그런데 여자들, 자신있어요? 또 남자들은? 남자들이야 뭐 도깨비 같은 녀석들이니…. (웃음) 만일 미국의 차기 대통령이 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그 사람을 밀어줄 것입니다. 그래서 통일교회 이념을 알려 주자는 것입니다. 미국의 상원의원 부인들을 중심삼고 할 수 있다는 거예요. 미국 사람들이 들으면 기분 나빠 하겠구만. 미국 CIA에 이것을 보고하려면 하라는 것입니다. 통일교회의 문선생이 이런 말을 했다고 보고하라는 거예요.
여러분들은 이런 모든 일을 하면서 하나님을 위해 생명길도 가고 죽음길도 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태어난 사람은 위대한 사람입니다.아까 예수님이 하늘 신랑이 되었기 때문에 훌륭하다고 했지요? 마찬가지예요. 하나님을 위해서 시집가는 사람은 훌륭한 사람입니다.
선생님이 영계에 가면 수많은 영인들이 선생님에게 경배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알아요? 그러니 잘못하게 되면 수많은 민족들이 왜 우리 민족은 사랑하지 않느냐고 선생님한테 참소한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대한민국에 살고 있지만 세계를 중심삼은 선생님이지, 대한민국만의 선생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대한민국만을 위한 선생님이라고 하게 안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선생님은 수많은 민족을 대표한 자리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한국의 남자들과 아가씨들을 세계 각국에 장가도 보내고 시집도 보내는 것입니다. 이 길이 세계를 사랑하는 제일 좋은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민의 핏줄이 자기 민족에게 연결되어지는 것이 영계에 있는 그 민족 선조들의 최고 희망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선생님은 이 땅에 있는 동안 그들이 바라는 그 이상의 일을 해 놓지 못하면 저 나라에 가서 얼굴을 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본래는 12지파가 퍼져서 세계 만민이 되었으니 탕감복귀의 원칙에 의해서 12지파를 심정적인 인연으로 연결시키지 못하면 복귀의 해원성사가 안되는 것입니다. 이 땅 위에서 민족을 대표한 해원성사의 기준이 안 세워지기 때문에 영계에서도 해원성사의 기준이 세워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외국으로 시집 장가를 보내는 젊은이들도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그래서 앞으로는 그런 후보감들이 참 많을 것입니다. 선생님이 지금 거기에 대한 구체적인 얘기는 하지 않겠지만 여러분들은 그런 마음을 가지고 가야 됩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선생님이 그 나라에 가게 되면 국제축복을 받은 가정을 찾아갈 것입니다. 동양의 한국 사람이 서양 사람들과 결혼을 하게 되면 한국도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을 왜 결혼 문제에 결부시키느냐? 여러분이 가야 할 길 중에서 최고의 길이 바로 하나님을 중심삼은 이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 길은 젊은이라면 누구나 다 가야 할 길인 것입니다. 가는 데는 어디를 중심삼고 가야 되느냐? 이 길을 동기로 하여 그것을 결정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아들딸을 어디에 낳아 놓을 것인가를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이것의 가치를 그 무엇보다도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이제 이런 것을 알고 낙엽처럼 떨어질 그런 환경의 기반을 중심삼고 출발하지 말고 하나님의 심정의 기반을 중심삼고 출발해야 합니다. 거기에서 나서 거기에서 죽겠다고 하는 그런 마음으로 가는 사람은 위대한 사람입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예」 여러분이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며, 오늘 수련이 끝나면 이런 길을 자원해서 가기에 온갖 정성을 다 바쳐서 노력해 주기를 바랍니다.
아버지여, 남기신 복귀의 노정 앞에 초초한 저희의 모습들이 벌거벗은 자세로 아버지를 향하여 울며 절규하는 소리를 들어 주시옵소서. 그 부르짖음은 저희의 소원을 성취하기 위함이 아니고 아버지와 세계 혹은 인류를 위한 것이라 할진대, 당신께서 그 음성을 들으셨을 때 얼마나 마음을 졸이셨겠사옵니까? `잠깐만 기다려라' `잠깐만 참아라' 하시면서 저희들은 찾아오시기에 얼마나 고달프셨사옵니까? 이것을 생각해 볼 때, 아버지의 사랑을 다시 한번 느끼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아버지여, 저희들은 지금까지의 일생에 많은 날과 달과 해를 지내 왔지만, 어느 한 때 아버지의 손을 붙들고 `내 아버지여, 이제 만났사오니 영원히 영원히 가지 마시옵소서' 하고 사정할 수 있는 시간이 없었던 것이 한이었사옵니다. 그럴 수 있는 때가 저희들의 생활 가운데 반드시 나타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러한 날과 더불어 봄절기와 같은 절기를 가질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여, 세상 만사를 다 잊어버리고 천주의 인연을 높이 평가하여 당신의 깊으신 사랑의 품속에서 모든 행복과 희열을 느끼는 모습이 되어서 당신의 높고 고귀하심을 찬양할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관을 통하여 이러한 지각을 갖고 자극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다는 사실을 체험하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가 그럴 수 있는 한 계절을 가져야 되겠고, 그럴 수 있는 한날을 가져야 되겠사옵니다. 하오니 그런 한 해를 맞이하여 그것을 영원으로 이어가고 스스로 기뻐서 아버지 앞에 달려가는 그런 생애를 맞이해야 할 것이 아버님의 아들딸이 가야 할 길인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그런 길을 개척하기 위해서 아버님께서는 지금까지 6천년 동안 수고해 나오셨습니다. 수많은 사람과 수많은 가정과 수많은 민족과 수많은 국가 혹은 이 세계의 원한을 묻은 채 지금까지 나오신 것을 저희들이 알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영계에 있는 수많은 영인들이 해방의 한날을 촉구해 나온 것을 생각할 때, 저희들이 아니면 저들이 해원성사를 할 수 없다는 엄청난 사실을 알았사옵니다. 하오니 저희들이 중심이 되어서 그 책임을 다하기 위해 밤이나 낮이나 쉴 새 없이 노력하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원하옵니다.
당신의 자녀들이 며칠 동안 여기에서 말씀을 배우면서 새로운 자극을 느끼고 새로운 결의를 하였사옵니다. 이런 시간을 허락하여 주신 것을 감사하옵니다.
이제 저희들의 여생을 아버지의 깊으신 뜻 앞에 온전히 바쳐서 직행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오나 직행하는 그 길에는 어려움이 크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길은 누구도 가기 싫어하는 길이요, 그 누구도 남기 싫어하는 길이오나 저희들만은 남아서 아버지의 사정을 깨닫고, 아버지의 품속에서 아버지의 숨결을 느끼고, 아버지의 감정을 체휼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자리는 아버지와 저희 자신들만이 만날 수 있는 자리이오니, 아버지 앞에 영원히 남아질 수 있는 무리들이 되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민족을 위하여 노정을 거쳐서 세계를 위한 노정까지 가야 하는 그 노정에서 아버지와 더불어 동행하여 아버지의 마음에 잊혀질 수 없는 아들딸의 모습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여! 저희들의 장래를 아버지께 맡기옵니다. 하오니 새로운 결의와 더불어 인생에 있어서 필연코 가야 할 기점을 중심삼고 하늘의 정병들이 되어서 만유존재의 능력을 지니고 갈 수 있는 참다운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니다.
저희들이 가야 할 생의 노정을 조정해서 소망의 천국문에 이르기까지 사고 없이 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친히 아버지께서 보호하시고 이끌어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오며, 모든 말씀 참부모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아버님, 오늘은 이달을 맞이해서 네번째 맞는 안식일이옵니다.
이 아침 전국에 널려 있는 자녀들 위에 당신의 긍휼과 자비와 사랑을 내려 주시옵고, 그들을 통하여 당신이 소원하시는 뜻을 성취하시옵소서.
저희들이 참된 효자 효녀가 되어 아버지를 만국의 중심으로 받들어 모시기 위해서는 충성을 다해 뜻과 이상을 갖추어 나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있사옵니다.
개인의 생활을 통하고 생애의 노정을 거치면서 저희에게 남겨진 사명은 오직 인류를 위하여 사는 것이며, 그것만이 보람있는 일임을 다시 한번 느끼고 깨달을 수 있는 이 시간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통일의 자녀들이 가는 길에는 기쁨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슬픔으로 시작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야 하고, 수습해야 할 저희들 앞에는 안팎으로 모든 원한의 요건들이 남아 있고, 그것에 둘러 싸여 있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지, 저희들이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이것을 밀고 나가 복귀의 탕감노정을 승리하여 넘어가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아침, 여기에 모인 당신의 소수의 자녀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은 현재 누구를 위하여 있는 자신인가를 알아야 되겠습니다. 나는 어디를 향하여 가고 있고, 어느 위치에서 무엇을 모색하고 있으며, 어떤 인연을 따라 어떤 길을 갈 것인가를 스스로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요구하시는 자리에서 새로운 명령을 받고 마음속 깊이 아버지를 사모하는 효성의 마음이 저희 마음에 싹트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들이 아버지를 관념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저희들이 아버지를 실체의 존재로서, 생활하는 모든 면에 절대적인 주체로 모셔야 한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생활하는 가운데에서 말하고 생각하는 모든 것은 상대적 관계를 추구하기 위한 것임을 알게 될 때, 모든 사정을 누구보다도 만우주의 주체요 절대자이신 아버지와 더불어 나누고, 아버지와 더불어 관계를 맺고, 아버지와 더불어 환경의 모든 인연을 펼치는 참다운 아들딸이 되어야하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저희들에게 부탁하시고 싶은 내용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되겠사옵니다. 그것을 저희들이 알고 거기에 책임감을 가중하여 저희들이 해야 할 사명에 불타는 효성의 마음, 충성의 마음을 갖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들이 생활하는 가운데서 가깝던 아버지가 멀어질 때도 있습니다. 너무 멀어 저희 자체까지도 잊어버릴 때가 많았사옵니다. 하오나, 아버지는 저희들의 곁을 떠나신 것이 아니옵고, 저희들 주위에서 지키시고 계셨사옵니다. 이처럼 가까운 자리에 계시는 아버지를 도리어 멀리 떠나버린 아버지처럼 잊어버린 때가 많은 것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어떤 것이 저희들의 시야에서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그 자체를 식별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저희들은 가까이 계시는 아버지를 알지 못하고 도리어 멀리 계시는 것처럼 모색하다가 무언지 모르는 거와 같이, 가까운 자리에서 아버지를 배반할 때가 많았다는 것을 신앙생활 가운데에서 체험할 줄 아는 자녀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께서는 먼 상대의 세계에 계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마음 가운데 계시고 우리의 몸을 에워싸고 계셨사옵니다. 우리 주위에 공기가 있으되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것처럼, 아버지께서 저희들의 생애 전체를 덮고 계시는 데도 알지 못했다는 것을 저희들이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저희들을 둘러싸고 있는 그 힘을 받을 때에는 무한한 힘이 거기에 동하는 것이요, 그 힘을 흡수하게 될 때에는 영원한 힘으로써 저희들에게 새로운 충격과 새로운 자극을 주심을 아옵니다. 이렇듯 언제나 가까이 계셔서 생명을 일으켜 주시고 저희들을 충만케 해 주시는 아버지의 실존을 체득할 줄 아는 아들딸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그런 자리에서 아버지의 자녀로 성장하고, 그런 자리에서 아버지와 더불어 생애노정을 의논할 줄 아는 사람이 얼마나 귀한 사람인가를 저희들이 깨달아야 되겠사옵니다.
이 땅 위에 수많은 사람들이 천운을 바라고 또는 일신의 여명을 바라고 있으나, 그들은 상대적인 어떤 거리를 두고 바라고 있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나 저희들은 그들과는 달리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생애의 모든 권한도 생명의 중심 되시는 아버지로부터 시작되고, 모든 영광도 앙모의 중심 되시는 아버지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러기 위해서는 아버지께서 저희들의 마음 깊이 함께 계시고 가까이 계시어, 저희들의 모든 일체를 주관하심으로서 저희들의 생명의 원동력이 되시옵고 모든 감정의 기원이 되시어야 한다는 사실을 저희들이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그런 자리에서 넓고 깊고 높고 귀하고 무한한 가치의 주체이신 아버지를 모실 수 있는 자녀가 얼마나 귀하고 그 가치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저희들이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그 기준을 천만 번 혹은 억만 번 증명해 나아가게 될 때 천주를 주관할 수 있고 하늘의 모든 내용을 흡수할 수 있는 자체적인 권한이 성립된다는 사실을 저희들이 알아야 되겠사옵니다.
자기의 욕망에 끌려 나가다 외적인 조건 앞에 사로잡혀 자신을 잃어버리고, 육신의 욕망 가운데 사로잡혀 떠돌다가 외적인 욕망의 사람으로 바꾸어지게 될 때에 그 자신과 아버지와는 먼 거리에 놓여지게 된다는 사실을 저희들이 확실히 알아야 되겠사옵니다.
저희도 아버지의 마음과 더불어 동행하고자 하오니, 마음 깊이 스며드는 생명의 호소를 들을 줄 알아야 되겠사옵고, 복귀의 노정을 가시는 아버지의 음성을 들어야 되겠사옵고, 아버지께서 분부하시고 마음 깊은 곳에서 뿜어내시는 새로운 명령의 말씀을 들을 줄 아는 아들딸이 되어야 되겠사옵니다.
이 아침, 저희들이 남달리 여기에 모인 것은 아버지의 음성을 듣고, 아버지의 권고를 듣고, 아버지께서 제시하는 새로운 운명길을 찾기 위해서였사오니, 초초한 모습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외로운 모습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한없이 슬픈 모습을, 아버지, 마음에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의 자비로우신 마음이 저희 마음속에서 우러나오게 될 때, 아버님이 소원하시는 것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 저희가 이날을 지키게 될때, 사망의 선을 아버님과 더불어 넘고 싶어하는 흠모의 심정이 불타게 될때, 저희는 생명의 원천이신 아버님을 찾아갈 수 있고, 아버님은 전능하신 능력을 갖춰 준비하고 계실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희들은 사랑을 갖추어 당신의 심정을 체휼할 수 있고, 거룩하게 할 수 있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어야 되겠사옵니다.
특별히 오늘 이 시간은 역사적인 거룩한 시간이옵니다. 흑암의 세계에서 생명의 빛을 기다리는 아름다운 소녀의 마음과 같이, 소망에 불타 아침을 기다리고 소원하는 목동의 마음과 같이, 그 고요한 아버지의 모습을 기다리며 아버지의 한날을 맞이하기 위해 새벽부터 남몰래 준비하는 그 자체를 아버지는 얼마나 아릿다와할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이 시간 아버지 앞에 찾아와 귀하고 높고 무한한 가치로써 찬양할 수 있는 자신을 그리워하면서 모인 형제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들이 가냘픈 목소리로 아버지를 부르지만, 나를 위하여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민족과 세계를 살리기 위해서 부르게 될 때, 그런 마음으로 부르짖는 그 음성에 아버지는 기필코 내 앞에 계시고 내안에 계신다는 것을 저희들이 알아야 되겠사옵니다. 힘이 부족하더라도 아버지께서 소원하시는 뜻을 저희들이 책임지고 그 소원을 성취해 드리겠다고 몸부림치며, 아버지 앞에 힘을 보충해 달라고 할 때에는 아버지의 뼛골에 움직이는 힘이 저희들과 같이한다는 사실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로 하여금 외로운 자리에서 심정을 기울여 가지고 민족의 한과 세계의 한과 천하의 한을 해원하게 하시옵소서. 또한, 악한 권세를 대해 죽음길을 달려 나가는 그들을 쌍수를 들어 가로막고 싶고, 자기의 위신과 체면을 잊어버리고 그들을 구하기 위해 미치고 싶고, 몸부림치고 싶은 마음을 가지게 하시고, 연약한 자신을 탄식하면서 힘을 단련하게 하소서. 그럴 수 있는 자신이 되겠다고 울부짖는 곳에는 아버지는 언제나 돕고 계신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길을 간 사람들은 편안 사람들이 아니었사옵니다.
이 몸은 강한 것을 추구하지만, 이 몸은 무한한 약한 면도 가지고 있사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도 이 땅에서 이와 같이 되라고 하셨사옵니다. 우리가 부모를 보게 될 때 부모는 전체의 소원이요, 그리움의 표상이요, 행복의 기원이었사옵니다. 동기도 되고, 과정도 되고, 결과도 되는 것이 부모였사옵니다. 부모와 자식의 인연을 생각해 보게 될때, 동기도 아버지요, 과정도 아버지요, 결과도 아버지옵니다. 아버지를 보고 싶어하고 아버지를 소원하고, 아버지의 뜻을 그리워하고, 아버지를 사랑의 기원으로 삼고, 아버지와 더불어 화동의 인연을 맺는 그 거룩한 자리에 우리를 품을 수 있는 아버지의 심정이 있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아야만 되겠사옵니다.
그리하여 아버지를 대하여 말할 수 없이 반기는 그 모습, 아버지의 품이 그리워서 아버지의 심정을 파고드는 아들딸을 얼마나 원하셨는지를 저희들이 알아야만 되겠사옵니다. 아버지의 품에 품기고 어머니의 품에 품기어 아버지 어머니의 생명의 양식을 자식이 고스란히 받고, 그 아버지 어머니의 마음자리와 소망자리를 상속받고, 자식을 통하여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자리가 아버지께서 찾아 나오신 부자의 인연이 맺어지는 자리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사옵고, 그 거룩한 자리를 저희들은 추구해야만 되겠사옵니다.
저희들이 진정 아버지를 부르면서, 그리운 아버지를 놓지 않고 그 아버지의 뺨에 내 뺨을 대고, 아버지의 눈물과 아들의 눈물이 하나되는 가운데 회개하고, 하나의 세계를 찾기 위하여 호소하며 가는 그 희생의 발걸음을 그 누가 막을 수 있겠사옵니까? 사탄도 여기에는 굴복해야만 되고, 사탄도 이 자리에 참여해야 하는 것이 본래의 창조의 원칙인 것을 알고 있사오니, 그럴 수 있는 아들과 그럴 수 있는 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처럼 아버지를 그리워해야 할 저희들이 쌀쌀한 북풍한설을 맞은 동삼삭과 같은 마음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마음 가득히 찾아드는 봄볕과 더불어 찾아드는 춘삼월과 같은 한날이 저희 심정 동산에 기필코 있어야 되겠사옵니다.
또한 이 마음이 아버지를 향하여 활개를 활짝 펴고 쏟아지는 한 줄기의 빛을 받아 죽었던 생명이 부활하고, 새롭게 꽃이 피고, 향기가 풍겨 나비가 날아들고, 천지와 화동할 수 있는 기쁨의 동산이 저희 자신들을 통해서 피어나게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며 안고 살아갈 수 있는 아들딸의 모습을 얼마나 그리워하셨는가를 알아야 되겠사옵니다.
저희 자신들도 또한 아버지의 품에 안기어서 눈물을 닦고 환희의 성원을 받을 수 있고, 아버지로부터 내 아들이라고 칭송받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 기쁨이 세상 천지의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무한한 가치로운 것인 줄 아는 아들딸이 되어야 하겠사옵니다.
그런 아들딸이 있다 할진대 어찌 아버님을 잊을 수 있사오며, 어찌 아버님께 죄지을 수 있사오며, 어찌 아버님의 주관권내에서 벗어날 수 있겠사옵니까? 이런 사실을 확실히 아는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이여, 1969년도 저물어 가고 있사옵니다. 저희들에게 남아진 40일을 기하여 이해를 다시 한번 밟고 넘어가야 되겠사옵니다.
아버지, 저희들에게 분부하고 싶은 소원이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알아서 새로이 출발해야 되겠사옵니다. 새로운 70년대를 맞이하여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뜻 앞에, 지난날의 지루하던 겨울절기를 보내고 봄절기를 맞이하게 해 가지고 화기애애한 모습으로 아버지를 찬양할 수 있는 거룩한 모습을 그리워하면서, 나는 기필코 그런 모습이 되겠다고, 아버지의 새역군이 되겠다고 결의할 수 있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아침, 다시 한번 아버지 앞에 아뢰옵니다. 통일의 자녀들에게 힘을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뜻을 따라 나오다가 지쳤사옵니까? 아버지께서는 지치지 않았습니다. 뜻을 따라 나오다가 자기를 생각했사옵니까? 아버지께서는 자리를 생각한 때가 없었습니다.
아버지시여! 당신은 주체이시고 저희들은 대상입니다. 주체와 대상이 하나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저희들이 이렇게 먼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되겠사옵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저희들의 잘못이요, 저희들의 부족이요, 저들이 죄의 자리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아버지의 거룩함과 아버지의 승리를 찬양하면서 아버지와 보조를 맞추고, 아버지를 모시고 갈 줄 아는 당신의 자녀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당신의 품에 안기어 영원히 안식할 수 있는 아들딸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통일교단을 통하여 당신이 자랑할 수 있는 아들딸이 많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옵고 원하옵니다.
세계에는 수많은 교단과 나라가 있사옵니다. 또한 대한민국에도 삼천만이 살고 있사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자리에서 아버지 앞에 기억되고, 아버지 품에 안기어 사랑받을 수 있는 자녀들이 어느 곳에 얼마나 많은가에 따라서 세계의 운세가 좌우될 수 있고, 그 나라의 운세가 좌우된다는 것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와 같은 자리에서 저희들이 정성들이고 아버지를 위로해 드려야 할 세계사적이요, 천주사적인 사명이 있다는 것을 아는 참다운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참부모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오늘은 `배반자와 하늘'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의 일상생활 가운데에서 좋고 나쁘다는 관념은 어느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내가 `좋다'하는 것도 여러 관점에서 달리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사업의 종류에 따라서 그 사업을 추진해 나아가는 데 있어서도 좋고 나쁜 것이 있으며, 나라를 중심삼고 보더라도 좋고 나쁜 것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나'라는 존재를 중심삼고 대외적 관계에 있어서 천태만상의 일이 있을 것입니다. 거기에는 국가 세계가 다 포함됩니다. 대외적으로 볼 때 나를 중심삼고 상대세계 가운데에서도 좋고 나쁜 것이 있을 수 있고, 그 반면에 주체적인 입장에서 대내적으로 자기 자신의 양심을 두고 볼 때에도 좋고 나쁜 것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상대세계에 있어서, 내가 대하는 것 중에는 반드시 부딪쳐 가지고 어떠한 과정을 통하여서 식별되어진 결과에 의해 좋고 나쁜 것이 결정되는 일이 많습니다. 무슨 사업을 하더라도 처음에는 좋기를 바라고 시작했지만 그 결과가 나쁘게 나타나는 것을 우리는 왕왕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개인생활에 있어서도 하루를 시작할 때에 이러이러한 일을 해야겠다든지, 어떤 목적이 있으면 그 목적을 중심삼고 저녁까지 지내는 가운데 되어지는 모든 일들이 뜻하는 대로 되어지지 않게 될 때에 우리는 반드시 나쁘다고 하는 것을 느낍니다. 이렇듯 나타난 결과가 좋고 나쁨을 결정하는 축이 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에 우리의 양심을 중심삼고 생각해 보아도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이런 것을 많이 느낄 것입니다. 특별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나 신령한 생활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대번에 느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대하게 될때에 그 사람과는 초면이지만 척 대하면 그 사람이 좋다. 혹은 나쁘다 하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일을 놓고 보다 양심을 중심삼고 사람을 대하면 과정을 거치지 않고 그것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대하는 그것이 처음인데 좋고 나쁘다는 결과를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런 것을 체휼할 때가 많을 것입니다. 영적인 체험을 한 사람들에게는 그런 것이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어떤 일보다도 좋고 나쁜 것을 가장 빨리 결정지을 수 있는 것이 대인관계입니다. 사람과 사람들 사이에서 좋고 나쁜 것이 빨리 판단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선악의 결과를 결정하는 것은 반드시 어떤 자연이라든가, 혹은 외적인 세상의 일을 중심삼고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마음에 의해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일반 사회는 대내적이 아니라 대외적이며, 주체가 아니라 대상의 입장에서 결과를 놓고 좋고 나쁜 것을 결정합니다. 이것은 반드시 과정을 거쳐 가지고 나타난 결과에 따라서 좋고 나쁜 것이 결정되어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서는 영적인 체험을 한 사람들도 그 결과에 대한 전망은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그렇게 심각하고 책임 있는 관계를 맺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사람은 반드시 대내적 관계와 대외적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내적 관계는 어떤 관계인가 하면 인간과의 관계요, 대외적 관계는 세상과의 관계입니다. 이런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그것은 인간이 이성성상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창조원리로 보면, 인간은 대외적 관계, 즉 만물세계와의 관계와 나라를 어떻게 해야 한다든가, 세계를 어떻게 해야 한다든가 하는 관계와 대내적 관계, 즉 인간과의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는 가는 방향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좋고 나쁘다는 문제를 결정하는데 있어서도 대외적 관계와 대내적 관계가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원수란 무엇이며, 어떻게 생겨나는가? 자기의 소원을 가로막으며, 내가 기필코 성사하려는 일을 전면적으로 파탄시키는 것은 반드시 원수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외적 관계에서도 그렇고 대내적 관계에서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성성상으로 계시는 하나님을 닮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우리 자체는 내성적인 것과 외형적인 것을 갖추고 있습니다. 즉, 우리는 내성적인 것과 외형적인 것이 있어서 서로 주고 받는 가운데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은 무엇을 동경하는 것인가? 인격자를 동경합니다. 또한 출세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성공을 바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성공했다고 해서 그 사람의 마음이 특별히 넓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특별히 커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의 권세가 커지고, 혹은 영광의 환경이 넓어지고, 그가 돈을 많이 벌어 가지고 한국의 제일 가는 거부가 되었다 하더라도 그 자체의 보퉁이가 커진 것은 아닙니다. 마음 자체가 커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커지긴 커졌는데 무엇이 커졌는가? 외적으로 커졌을 뿐이지, 그 사람 자체가 근본적으로 커진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 개체가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 인격자를 추구합니다. 그 인격자의 최고 기준은 무엇인가? 그것은 양심을 중심삼고 최고 꼭대기를 기준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양심의 최고 꼭대기는 무엇이냐? 양심은 반드시 선을 추구하며, 그 선을 추구하는 최고의 주체적인 신, 즉 인격적인 면을 갖추고 우리 인간에게 필요한 이상적인 형태를 갖춘 그분을 찾아 올라가다 보니 신의 관념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격을 추구하는 그런 사고방식을 가진 입장에서 볼 때, 그 최고의 기준을 향하여 올라가다 보면 인간만으로는, 인격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평면적인 관계에서 오는 감정 가지고는 만족하지 못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평면적인 세계가 아니라, 입체적인 세계에서 만족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인격을 중심삼고 최고의 꼭대기를 찾아 올라가는 입체적인 세계의 자극을 받게 되면 거기에서 행복을 느끼는 것입니다.
행복은 생명 이상의 인격적인 내용을 겸하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인격을 추구하는 최고 기준은 평면적인 기준이 아닙니다. 그것을 초월하여 입체적인 기준에서 인격을 찾아 나오기 때문에 철학이나 종교라는 관념이 생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의 존재유무에 관한 문제가 생기게 된 것이며, 인류가 걸어 온 역사는 부정당할 수 있을망정, 신은 부정할 수 없는 운명길에 서 있는 것이 현실의 인간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렇듯 우리 인간은 최고의 기준을 추구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이상을 추구합니다. 그러면 그 이상을 추구하는 꼭대기와 끝은 어디냐? 하나의 세계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인간이 추구하는 최고의 기준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신의 개념이 나오는 것입니다. 인간은 신을 추구해 나왔습니다. 6천년 역사를 거쳐 오면서 하나님과 떨어진 것이 아니라 접근해 나왔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는 플러스(+), 하나는 마이너스(-)가 되어야 합니다. 플러스와 플러스가 만나서는 안 됩니다. 또 마이너스와 마이너스가 만나서도 안 됩니다. 플러스와 마이너스 관계를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지'라는 말이 필요합니다. 상하, 전후, 좌우라는 말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천지란 누구를 중심삼은 말인가? 나를 중심삼은 말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상하 좌우 전후라는 말도 전부가 나를 중심삼고 하는 말입니다. 결국 모든 것이 나를 중심삼고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인격의 최고 기준을 추구하고, 하나의 세계를 추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때문에 신인일체가 되고, 그와 동시에 신의 소원과 인간의 소원이 일체가 되는 것입니다. 신에게도 소원이 있습니다. 이 소원이 무엇이냐? 하나의 기점입니다. 결국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천지인(天地人)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길을 인간이 기필코 가야 됩니다. 여기에 배반자와 승리자가 있게 됩니다.
그러면 배반자는 어떤 사람인가? 내가 돈을 좀 가지고 있다고 해서 배반자입니까? 내가 아무리 돈을 가지고 있다 하여도 그 돈을 대한민국에 남아 있는 것입니다. 비록 배반을 했다 해도 그 돈은 대한민국에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돈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내가 아닙니다. 대한민국이 주인입니다. 나는 다만 잠시 관리하고 빌어 쓰다가 가는 사람입니다. 내가 대한민국에 태어났으면 대한민국 땅에 살다가 가는 것이지, 이 땅을 내가 가지고 와서 살다가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자기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죄다 빌어 쓰는 것입니다.
빌어 쓰는 데 있어서 그 빌어 쓰는 사람이 자기를 위해 쓰느냐, 대한민국을 위해 쓰느냐가 문제입니다. 나를 위해서 돈을 빌었는데, 대한민국을 위해서 쓰겠다고 빼앗아 가면 그 사람이 배반자입니까? 여러분 생각은 어떻습니까? 여기에는 사고방식과 관념에 따라 차이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소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최고의 인격과 하나의 세계를 소원하고 요구합니다. 즉, 절대적인 인격자와 절대적인 세계, 이 양면을 누구나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사람을 의지하고 사는 것입니다. 직장을 의지하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남자는 여자, 여자는 남자, 서로 사람을 의지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각 개인은 세계인을 의지하고 사는 대표자 격입니다. 그 둘이 서로 의지하며 사는 것은 세계의 사람들이 서로 의지하고 사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세계에 널려 있는 사람들과 얼마만큼 관계에 맺느냐에 따라 출세가 좌우됩니다. 이러한 근본 가운데 배반자니 은혜자니 하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배반자 가운데도 두 종류가 있습니다. 그렇지요? 외적으로 나타나는 세계의 배반자와 내적으로 나타나는 세계의 배반자, 이렇게 두 종류의 배반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외적 세상의 일은 천갈래 만갈래로 갈라집니다.
대한민국을 보면, 거기에는 행정부서가 있고 그 밑에 조직체, 사업체 등 여러 갈래로 갈라져 있습니다. 이런 부서의 책임을 진 사람들도 일을 해나가는 데 있어서 나름대로 배반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책임자가 무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어떠한 방법으로 처리해야 하느냐가 문제입니다. 그래서 배반한 그 사람이 진짜 배반자냐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외적인 상대적 세계에 있어서의 배반자는 이렇습니다.
그렇지만 마음 세계에 있어서의 배반자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습니다. 마음속의 배반자라는 것은 물질적 조건이 아니라 심정적 조건이나 생명적인 조건에 의한 배반자입니다. 하늘은 지금가지 어떤 길을 주장해 나왔느냐 하면, 심정적 조건과 생명적 조건을 중심삼고 주장해 나오고 계십니다.
자기의 마음을 다하여 어떤 사람을 위해서 베풀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알아주지 않을 때, 말 한마디로써 배반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물질세계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몇백만 원, 몇천만 원, 몇억 원을 가지고 일하는 데 있어서 몇십만 원을 좌우하는 일 가지고 그 사람을 배반자라고 낙인찍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정신적인 세계, 생명의 인연에서 그것은 절박한 것입니다. 말한마디가 지금까지 가까왔던 사람과의 인연을 전부 다 끊어 버리고 쉽게 배반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심각한 것입니다. 결국 내적인 것이 심각한 정도가 넓고 깊고 높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두 종류의 배반자를 두고 볼 때, 우리는 어느 면에서 배반자가 되지 말아야 하느냐? 심정세계에 있어서 배반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외적인 배반자의 낙인이 찍혔더라도, 마음의 세계에서 하나된다면 외적인 세계를 추구하는, 세상적인 배반자의 내용은 얼마든지 넘어갈 수 있습니다. 심정만 같이한다면 몇백만 원 몇천만 원짜리 사업체 하나 파탄시켰다고 해서 배반자가 될 수 없습니다. 같은 입장에서 거지노릇을 하더라도 배반자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외적인 것은 심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내적인 심정을 연결한 참다운 사람들끼리의 관계가 문제입니다. 믿는 사람끼리 심정을 중심삼고 절대적인 인격을 추구해 나가다 만일 틀어지는 날에는 영원히 헤어지게 됩니다. 그 이상의 정신적인 내용, 그 이상의 심정적인 내용, 그 이상의 생명적인 내용을 갖추지 않고는 만날 수가 없습니다.
부모에게 효성을 다해 효자문까지 세워질 정도의 효자라도 그가 부모에게 불경스런 말 한마디를 하면 그럴 수 없는 아들로 알고 있는 부모의 가슴에 영원히 못자국을 남기는 것입니다. `아! 내가 몰랐구나' 하고 천지가 뒤집히는 이상 놀라는 것입니다. 마음의 세계에 있어서는 그렇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생활에서도 문제가 무엇인가 하면, 생명과 심정적인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에게 제일 귀한 것은 무엇인가? 결론적으로 말하면 외적 세계가 아닙니다. 자기 생명과 심정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효라는 말, 충이라는 말, 기쁨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생명의 부활을 받는 기쁨, 생명의 환희의 한 날을 맞이하는 기쁨, 심정적인 면에서 보다 높고 보다 귀한 것을 발견하는 기쁨, 이러한 행복, 이러한 즐거움이야말로 외적 세계의 어떠한 기쁨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연의 자세를 갖추어 가야 할 길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원수라는 것은 참으로 애매합니다. 그렇지요? 백만장자끼리 같이 사업을 하다가도 서로가 대결하고, 서로의 생명을 빼앗는 일이 많습니다. 대부분의 나라의 역사를 두고 보더라도 서로 죽이고 죽이는 싸움의 역사가 엮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외적인 면에서 보면 땅 빼앗기 싸움을 하는 것이지만, 내적인 면에서는 사랑 빼앗기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이 두 싸움이 역사를 엮어 나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슬픔과 기쁨의 감정은 어디에서 나오느냐? 이 두 형태의 싸움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가 망했다 하면 어떤 면에서 망했느냐? 망했다고 하는데도 그는 늠름하게 `나는 내일의 소망을 가지고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 이것을 하나의 자극으로 삼고 하나의 계기로 삼아서 내일의 희망찬 승리자가 될 수 있다' 했을 때 망한 사람입니까? 그는 망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도리어 새로운 동기와 새로운 출발이 됩니다. 독립을 하게 하는 하나의 자극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즉, 새로운 출발을 위한 하나의 과정에 지나지 않습니다. 망한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그렇다고 보는 사람은 망한 사람이요, 그렇지 않다고 보는 사람은 망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역사는 이렇게 흘러 나왔습니다.
그러면 이런 사회에서 우리는 어디를 향해 가야 하느냐? 생명 문제와 정신적인 문제는 심각합니다.
하나님과 인간은 어디서부터 원수가 되었는가? 선악과라는 하나의 물질을 따먹은 것이 원수의 기원이 되었겠느냐?
만약 몇천만 원, 몇억 원을 가진 대한민국의 갑부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산을 한꺼번에 전부다 잃어버리고 한푼 없는 거지가 되었다 하더라도 그냥 넘어갈 수 있습니다. 내적인 내용을 갖추게 되면 넘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잃은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고 그것을 넘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에서 배반자의 한이 맺혀졌는데 그 한은 어디서부터 생긴 것인가? 심적 관계에서 생겼던 것입니다. 보고 따먹을 수 있는 과일로 인해 천지를 판가름할 수 있는 배반자의 기원이 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그것은 무엇인가?
그러면 주체적인 입장에서 하나님께서 희망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보다 새롭고, 보다 기쁘고, 보다 보고 싶고, 보다 사랑스러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럴 수 있는 인간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어디까지나 생명 문제에 있어서나 정신적인 면에서 어떤 내용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외적인 물질은 그런 내용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심정적인 문제에서 부딪쳤던 것입니다. 역사상 처음으로 부딪친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지음 받은 인간으로서는 꿈에도 그럴 수 없는 입장이고,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입장인데도 불구하고 배반해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부딪치기를 바라서 그렇게 했겠습니까? 꿈에도 생각지 않았는데 이런 일들이 생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찾아가야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타락은 우리 통일교회가 말하는 대로 심정적인 면에서 잘못된 것이 아니겠느냐! 이것은 귀납적으로 봐도 그렇고, 사회 현상을 두고 보아도 그렇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은 지금 내적인 세계와 외적인 세계 중에서 어디를 찾아 가고 있느냐? 외적인 세계와 내적인 세계는 점점 하나의 세계를 이루어야 합니다. 외적인 세계와 내적인 세계의 모든 문제는 인간에게 결부되어서 해결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하늘의 문제요, 땅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늘과 땅이 하나되어 하나의 외적인 세계를 이루고, 그래서 내적인 하나의 인격과 상봉해 가지고 비로소 하나님께서 추구하였던 본연의 세계의 모습을 갖추어야 합니다. 에덴 동산에 아담 해와를 지어 놓기 전에 소망하였던, 상처를 입지 않은 본연의 모습을 갖춘 내적인 인격체를 인간 세계에서 찾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이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여기 신앙자로서 대사회생활의 문제가 나오는 것입니다. 출세를 중요하게 여길 것이 아니라, 궁극적인 뜻을 지니겠다는 사고방식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앞으로의 세계는 젊은이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통일교회에 들어온 사람들이 모두다 잘 아는 것 같지만, 선생님이 물어보면 모르는 것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유난스럽게 그럴 필요가 있나' 하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세계는 여러분이 태어나기 전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의 대외적인 세계도 여러분이 태어나기 전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 우주가 아무런 생각없이 그냥 그렇게 생겨났단 말이냐? 아닙니다. 여기에 있는 이 피아노가 생겨나기 위해서도 여기에는 그럴 수 있는 내용이 있었기 때문에 생겨난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생겨난 것인지 모르지만, 어떠한 조화의 힘이 작용했기 때문에 생겨난 것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즉 어떤 힘이 작용했기 때문에 결과로서 나타난 것입니다. 따라서 물체라는 것은 원인이 아니라 결과입니다.
여러분이 태어날 때 마음적 기원이 먼저인가, 물질적 기원이 먼저인가? 내가 태어나 보니 이 세상도 있었고, 내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어느 것이 먼저인가? 물질이 먼저다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중심삼고 사상과 철학의 2대 사조를 이루어 `정신이 먼저다' `물질이 먼저다'라고 하면서 서로가 옳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정신이 없는데 `내가 간다' 할 수 있어요? 없습니다. 생각을 먼저 하고 그 다음에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밥을 먹는 데 있어서도 그냥 `나는 먹는다' 할 수 있습니까? 먹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한 다음에 먹는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 어느 것이 먼저냐? 내적인 것, 즉 생각하는 것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몸의 욕망이 큽니까, 마음의 욕망이 큽니까? 몸의 욕망이란 밥을 한 그릇 더 먹으면 양이 차듯이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욕망은 한계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느 것이 큽니까? 마음의 욕망에 한계가 있어요? 물질적 욕망, 즉 몸의 욕망에는 한계선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한계선을 넘어 요구하는 것은 마음의 욕망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의 생활 가운데에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동물적인 생리작용을 하게 하는 것은 외적인 물질세계가 아니라 그것을 작용시킬 수 있는 보다 높은 기원의 존재, 즉 무형의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인생의 근본문제도 이렇게 보면 풀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태어나서 무엇을 좋아합니까? 물론 먹는 것도 좋아합니다. 애기가 태어나면 어머니의 젖을 먹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젖을 먹는 것만을 좋아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머니의 젖을 먹는 것도 좋아하지만, 어머니를 보고 좋아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어머니를 보고 좋아하기 위해서 젖을 먹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머니도 애기가 자기를 보고 좋아하기 때문에 젖을 주어도 아깝지 않다는 것입니다. 인연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어머니로서는 무한히 주었기 때문에 보고 싶은 것입니다. 자기의 생명과 정성을 퍼부었기 때문에 퍼부은 그만큼 나를 따라올 것이라고 하는 절대적 관계에서 그 애기를 대하는 것입니다. 애기를 중심삼고 보면 물질적인 조건으로 관계 맺어진 것 같지만, 어머니를 중심삼고 볼 때는 그 반대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느 쪽이 주체인가? 어머니가 주체입니다. 물질도 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어머니이니까 어머니가 주체인 것입니다. 전부 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두 작용의 욕망 중에서 보다 높은 경지에 있는 욕망을 중심삼고 인생길을 가야 됩니다.
외적인 세계의 욕망은 참된 욕망이 아닙니다. 내적 세계의 욕망이 참된 욕망입니다. 외적인 세계의 욕망은 더 편하자는 것입니다. 이것을 한 단계 끊고 넘어가는 것이 내적 세계의 욕망입니다. 외적 세계의 욕망은 어디까지나 분파적입니다. 내적 세계의 욕망이 전체적입니다. 몽땅입니다 몽땅. 그렇지 않아요? 여러분, 사람들이 `몽땅 내 사랑'이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을 중심삼은 욕망입니다. 하나님은 전체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배반자라는 것도 외적인 입장에서의 배반자보다도 내적인 입장에서의 배반자가 더 큰 배반자가 아니겠느냐? 그러면 인간이 어디에서 죄를 저끄러뜨렸느냐? 외적인 입장에서가 아닙니다. 기독교에서 알고 있듯이 선악과라는 물질로 된 과일을 따먹은 것이 죄가 아닙니다. 그것이 여태까지 지속되겠습니까? 생명의 문제와 정신적인 문제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것을 부정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남자에게 있어서나 여자에게 있어서 제일 원수는 자기 생명을 노리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그러면 대한민국의 원수는 누구인가? 대한민국의 생사문제, 생명을 노리는 자들입니다. 그 다음에는 무엇입니까? 다음에는 대한민국의 욕망을 빼앗으려는 자들입니다. 세계를 살리려는 욕망을 갖고 가는 것을 막으려는 자들이 원수입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이 제일 사랑하는 것을 막는 자들입니다. 그러면 대한민국의 원수는 누구냐? 여러분, 이북에서 선전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남한은 착취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이 하려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백성을 사랑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백성을 사랑하려는 것이 아니라 착취하려고 하기 때문에 우리의 원수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개인을 두고 볼 때, 내 원수는 누구인가? 내 생명을 노리는 자가 원수입니다. 그 다음에 내가 좋아하는 것을 가로채는 자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금덩이입니까?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람입니다. 어머니가 시집올 때 가지고 온 패물이나 혹은 몇 대조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패물을 가지고 있는데, 지식이 금방 죽게 되어 당장 병원에 입원시켜야 하고 남은 것이라고는 그 패물 하나밖에 없다고 할 때 `아들은 죽어도 좋다. 이 패물을 보관해야 돼'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때에는 그까짓 패물이 문제가 아닙니다. 이렇듯 인간에게는 생명 문제와 사랑 문제가 더 크게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떠할 것인가? 하나님은 누구를 닮으셨을까?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아들딸이라면 하나님은 결국 우리 인간을 닮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의 원수는 어떤 존재인가? 하나님의 실존을 위협함과 동시에,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딸의 생명을 위협하는 존재가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어떤 것이 사탄이냐? 천국에 들어가야 할 사람을 지옥으로 끌고 가려고 생명을 위협하는 동시에, 자유인을 감옥에 가두어 생명을 위협하는 존재가 바로 사탄이라는 것입니다. 또 사탄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딸을 위협하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원수라는 것입니다. 원수는 이 두 가지입니다. 그렇겠어요? 안 그렇겠어요?
하나님은 절대자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생명은 위협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절대자의 아들딸의 생명을 위협하고, 그 아들딸의 사랑을 위협하는 자가 있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그 아들딸의 원수가 부모의 원수요, 부모의 원수는 아들딸의 원수인 것입니다. 어머니 아버지가 죽으면서 자식들에게 `내가 죽거든 원수를 갚아다오' 하고 유언하는 경우가 있지요? 만약 아들을 죽인 원수가 있으면, 아버지는 원수를 갚습니다. 이 모두가 생명을 위협하고 사랑을 위협하는 데에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을 두고 보면, 그래서 그렇게 되었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배반자는 누구입니까? 사탄입니다. 그래서 이 사탄을 알아야 됩니다. 그 다음의 배반자는 누구입니까? 인간입니다. 여러분들 기분이 좋지 않죠? 왜 인간이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느냐? 아까 말한 것과 같이, 인간이 심정적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지 못하고 사탄과의 관계를 맺어 사탄의 자식으로 태어났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지 못하고 사탄의 자식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얘기하겠습니다. 여러분, 민며느리가 무엇인지 알아요? 재산이 넉넉하지 못한 집안에 아들이 하나 있는데, 마음대로 장가 보낼 형편이 못되어 가난한 집 처녀를 어릴 적부터 데려다 자기 울타리 안에서 길러 때가 되면 자기의 아들과 짝지어 주는 며느리가 민며느리입니다. 그런데 민며느리 감으로 잘 키워서 때가 되어 둘을 맺어 주려는데, 그 남자를 버리고 동네의 다른 총각과 눈이 맞아 가지고 도망가 버렸다면 원수가 되겠습니까, 안 되겠습니까? 원수가 된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그렇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과 하나 될 짝이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중심삼고 인류의 조상이 될 여자는 한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에서 해와는 민며느리 입장인데 천사장 누시엘이 민며느리인 해와를 빼앗아 간 것입니다. 아담은 누구냐 하면, 하나님의 몸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에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라고 하신 것과 같이, 우리의 몸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것입니다. 아담이 성숙하여 세상을 헤아릴 수 있는 때가 되면, 즉 하나님의 집이 다 지어지면 하나님께서 그 집에 들어가시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아담은 일체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천지집 안에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땅도 지으셨고, 상대적 세계도 지으셨고, 인간도 지으셨습니다.그러면 우리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최고의 사람이 되는 것이지요?그리고 최고의 세계를 이루는 것이지요? 그것은 또 누구의 소원입니까?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바라는 최고의 인격의 기준은 누구의 소원이냐 하면, 하나님의 소원이요, 우리가 바라는 세계는 곧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소원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것을 받아 가지고 태어나야 할 본연의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들도 하나님께서 바라시던 사람, 즉 아담 해와의 인격을 완성해야 할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최고의 인격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 인격을 중심삼고 상대적 세계로 지으신 것이 만물세계이기 때문에 만물세계를 주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그런데 아담 가운데 하나님이 들어가면 하나님의 소원과 아담의 소원이 둘이 됩니까, 하나가 됩니까? 「하나가 됩니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아담의 소원이자 하나님의 소원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최고 인격적 존재와 하나되어 이 피조세계를 주관하는 것, 즉 만물을 자기 품에 품기를 소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인간도 최고의 인격자와 하나되는 것이요, 최고의 세계와 하나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될 수있는 주체적인 자리에 들어가게 되면 상대적인 세계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천지합동이란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천지합동, 창조주와 피조물이 하나될 수 있는 자리는 그것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하나되려면 안팎의 모든 소성이 맞아야 하나되지요? 안팎이 맞아야 하나되는 것입니다. 만일에 모양은 비슷하지만 한 쪽이 약간이라도 두껍다면 영원히 같이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합하여 같이하더라도 하나는 무거워서 떨어져 가는 것입니다. 깔려서 떨어지게 되어 있지, 같이 올라가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운동에 있어서 둘이 똑같으면 평행을 취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되기 위한 뜻으로 인간을 지으셨다면, 하나님이 절대자이시기 때문에 절대자의 몸을 쓰고 태어난 사람은 절대자이신 하나님을 지탱시킬 수 있는 상대적 기준을 세워야 됩니다. 그럴 수 있는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을 업고 다닐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그런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얼마든지 모시고 다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이 좁아요, 넓어요? 마음의 생김새를 여러분 자신은 잘 모르지만, 마음은 무한히 큰 것입니다. 그러면 그 마음이 얼마나 좋으냐? 세계의 30억 인류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몇 백억 원씩 주고도 또 주고 싶은 것이 마음입니다. 그래요, 안 그래요? 마음은 이렇게 멋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무한한 사랑, 무한한 희망의 꽃으로 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건 왜 그러냐? 무한한 하나님의 성품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마음과 몸을 보게 되면, 마음은 크지만 몸은 작습니다. 이처럼 마음과 몸은 언제나 상대적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서로가 자극을 줍니다. 그래서 내가 기쁨이라든가 슬픔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대적 관계를 맺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민며느리인 해와가 어떻게 되었다구요? 종과 관계를 맺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타락입니다. 종과 관계를 맺었다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후손인 우리는 사탄의 피를 받았습니다. 기가 막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하나님 앞에 배반자가 누구인가? 사탄인 동시에 사탄의 후손들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입장에서 원수를 갚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원수의 목을 잘라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되겠지요?
그러면 누구의 목부터 잘라야 되겠습니까? 「사탄이요」 사탄의 목을 자르고 다음에는 사람의 목을 잘라야 되겠지요? 원수인 사탄과 인간의 목을 자르지 못하면 오히려 하나님이 망한 것이니 목을 잘라야 되겠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입장에서 실제로 원수를 갚아야 되겠습니까, 안 갚아야 되겠습니까? 이것이 걱정입니다. 판이 이렇게 벌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부터 순수한 종교인이 가야 할 길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순수한 종교인이 가야 할 길은 무엇인가? 종교인은 어떻게 가야 되는가? 원수를 갚고 가야 되느냐, 원수를 용서해 주고 가야 되느냐? 이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서 그런 입장에 딱 부딪쳐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온갖 정성을 다해서 희망찬 대업을 꿈꾸며 우주를 창조하셨는데, 그 모든 대업과 생명과 이념의 모든 조건이 일시에 파탄되어 망하게 될 때 천지가 캄캄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원수로 등장한 것이 천사장 누시엘이었습니다. 이 누시엘을 때려 잡아야 되겠나, 안 때려 잡아야 되겠나?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던 뼈중의 뼈요 살중의 살인, 아들딸을 누시엘이 자기의 아들딸로 삼은 것입니다. 이러한 원수의 목을 잘라야 되느냐, 그대로 놔 두어야 되느냐? 이런 문제를 놓고 역사 이래 처음으로 고심한 분이 하나님입니다.
오늘날 인간 세상에서 자기들을 중심삼은 생명의 위협자, 사랑의 위협자와 같은 원수가 문제가 아닙니다. 역사상 최초에 그런 슬픔을 당하셨고, 고통을 당하셨고, 그 역사의 비참함을 당하시면서 이 환경을 타개하기 위하여 몸부림친 최초의 존재가 누구냐?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칼을 드느냐, 용서의 법을 택하느냐 하는 기로에 계십니다. 그렇겠지요?
칼을 들어 죽이면 그 후에 억천만 년의 후한이 남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결국 내 아들딸을 내가 죽이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원수의 피를 받았지만 세상 자식들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그 딸을 어릴적부터 고이 길러 며느리 삼으려고 애지중지 길렀는데, 난데없는 깡패와 관계를 맺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딸은 좋아 죽겠다고 하면서 별의별 짓을 다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이 더 분하다는 것입니다.
최초의 아들딸이요, 자기의 몸입니다. 아담 해와는 하나님의 몸입니다. 실체세계를 이루기 위해 그들을 미래의 신으로 지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세계를 자기 혼자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혼자 있으면 기쁘겠습니까? 그래 사람의 마음이 혼자 가만히 있으면 기뻐집니까? 또 남자면 남자 혼자 있으면 기뻐집니까? 상대자가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은 왜 천지를 창조하셨느냐? 상대자를 구하기 위해서 창조하셨습니다. 기성교회도, 그 어떤 종교도 이런 대답을 못하고 있습니다. 결국은 하나님께서 기쁨의 생활을 하기 위해 천지를 창조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아담은 하나님의 몸입니다. 그러면 해와는 누구냐? 아담의 부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담 해와는 전체의 창조의 기원이 되고, 전체의 생명의 기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을 위협한 장본인인 사탄에 대해 원수를 갚아야 합니다.
이 사탄은 으뜸가는 배반자입니다. 배반자 중에도 배반자요, 일류로 달리는 배반자입니다. 이 사탄이 지금가지 세계를 마음대로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원수를 갚아 주기 전에는 마음대로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딸이 변하여 원수의 아들딸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사랑의 관계를 잘못 맺으면 반드시 핏줄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핏줄을 이어받기 전에 사탄의 핏줄을 이어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원수의 자식들로 태어났습니다.
우리의 본심은 본래 사탄과 인연을 맺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 인연 맺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몸이 이것을 벗어났습니다. 그래서 몸은 사탄과 짝을 맺게 되었고, 마음은 하나님과 짝을 맺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 두 갈래 길에 놓여 있습니다. 삼팔선, 즉 경계선에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경계선에서 작용하는 힘의 3분의 2가 몸이고, 3분의 1이 마음입니다. 그러니 마음과 몸이 싸우면 몸이 번번이 이긴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마음은 아직까지 하나님을 중심삼고 사랑을 맺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즉, 마음이 하나님을 중심삼고 상대를 갖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알겠어요? 왜 몸이 더 강하냐? 하나님과 마음의 사랑을 맺으려고 했는데 그러지 못하고, 먼저 몸의 사랑을 맺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몸은 마음보다 더 강하다는 것입니다. 아직까지 마음의 사랑은 맺지 못했습니다.
이와 같이 마음의 사랑을 맺기 위하여 찾아 나온 것이 하나님의 섭리역사요 종교의 역사인 것입니다.
신랑 신부의 마음의 사랑, 새로운 신랑 신부의 마음의 사랑의 기원을 역사에 제시해 놓기 위해서 종교가 그것을 추구해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의 사랑을 중심삼고 완전히 자리잡은 하나의 남자가 나오지 않고는 완전한 하나의 여자가 나올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하나님은 그런 하나의 남자를 찾아 나오신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역사는 하나님과 마음의 사랑, 즉 본심의 사랑의 인연을 찾아 그것과 완전히 관계를 맺어 절대적 기준에 연결될 수 있는 하나의 남성을 찾아 나온 역사입니다. 이것이 메시아 대망사상(待望思想)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재림주님이 온다고 하고, 불교에서는 미륵보살이 온다고 하고, 유교에서는 진인이 온다고 하는 등 고차원적인 종교에는 재림사상이 있습니다. 거 이상하지요?
하나님은 이런 내용을 중심삼고 섭리해 나오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이론적인 면에서 보더라도, 인류역사는 하나님의 그러한 하나의 남자를 찾아 나오시는 역사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계의 모든 문화권은 이렇듯 이상적인 하나의 남성에 의한 이상적인 사상권을 목표로 하고 형성돼 나오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의 절대적인 사상권을 중심삼고 나온다는 것입니다. 결국 사상은 하나의 절대적인 이념권을 중심삼고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 사상은 하나의 남자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역사는 남자가 이어 나왔습니다. 여자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그렇지요? 이와 같이 역사는 한 남자를 찾아 나오는 역사인 것입니다.
그러면 그 남자는 누구인가? 본심의 사랑을 중심삼고 하나님과 사랑의 인연을 맺는 최초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못 이루었기 때문에, 몸의 사랑을 희생시키지 않고는 마음의 사랑을 갖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담 해와가 이율배반적인 내용을 중심하고 사탄에게 끌려감으로써 마음의 사랑이 몸의 사랑에 눌렸다는 것입니다. 마음의 사랑을 통하여 몸이 사랑을 받아야 할 것인데, 오히려 몸의 사랑을 중심삼고 마음의 사랑이 눌렸다는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 있는 사람은 3분의 2는 사탄세계에, 3분의 1은 하늘세계에 속해 있는데, 마음의 힘을 가하여 3분의 2를 점령하고 있는 몸을 끌어내야 합니다. 마음이 몸을 반드시 때려 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원수를 때려 잡아야 합니다. 이 싸움을 하며 6천년 역사를 이어나온 것입니다. 그러기에 마음의 사랑의 중심이 나오지 않고는 이 싸움은 끝날 수 없습니다.
몸적 사랑이 마음적 사랑보다 강합니다. 몸적 사랑의 상대가 마음적 사랑의 상대보다 강하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요컨대 마음의 사랑의 상대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마음의 소원이나 바람보다 몸의 소원이나 바람이 더 강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마음적 사랑의 상대를 확실히 알게 되면 몸적 사랑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것을 확실히 제시할 수 있는 마음의 사랑을 중심삼고 재창조하시는 것입니다.
아담 해와를 창조했지만 타락했기 때문에 없는 것으로 여기고, 다시 만들어 수습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마음적 사랑의 주체를 대표한 남성을 찾아 나오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역사적인 대표자가 누구라구요? 메시아입니다.
메시아는 생명을 중심한 마음의 사랑과, 생명을 중심한 최고의 인격의 표준이 되는 분입니다. 이분을 하나의 모델로 하여 지금까지 사탄세계에서 이어받은 신념이나 사랑의 감성을 모두 매장하여 무의 상태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본래 타락하지 않은 아담의 몸과 같은, 본성인 마음의 사랑을 중심삼고 백 퍼센트 화합할 수 있는 몸의 상대를 찾아야 됩니다. 그리하여 본연의 마음의 사랑을 실체 몸뚱이와 결부시켜 타락의 인연을 벗어난 하나의 남성이 되어야 하고, 하나님의 몸, 즉 내적인 성전을 이루어 하나님과 하나되어 등장할 수 있는 하나의 남성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남성이 메시아입니다.
메시아란 무엇인가? 인류 최초로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태어난 사랑의 조상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나 다시 오시는 주님은 본연의 마음을 중심삼은 사랑의 세계의 아버지, 우주의 사랑의 아버지가 되는 것입니다. 내 몸과 마음은 서로 떨어질 수 없습니다. 몸은 마음의 사랑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마음과 몸이 하나된 입장에 서 있지 못한 인간은 그러한 입장에 서 있다 하는 조건을 세워 하나님으로부터 접붙임을 받아야 됩니다. 접붙임을 받되 줄기를 잘라 접붙임을 받아야 됩니다. 메시아와 타락한 인간은 씨가 다르기 때문에 줄기를 잘라서 접붙임을 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까지의 복귀섭리 경로입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찾아 나오셨느냐? 한 남성을 찾아 나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창조가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하시고 지금까지 재창조해 나오셨습니다. 인간이 어떻게 되었기에 그래야 되느냐? 창조이상이 완성되어야 하는데, 아직까지 미완성 단계에 있기 때문에 이것을 다시 수습하자니 그래야 되는 것입니다. 미완성 단계에 있으니 완성을 향해 올라가는 조건을 세워야 합니다. 창조원칙에 위배되지 않으면서 재창조과정을 밟아 올라가는 것이 지금까지의 구원섭리 노정입니다. 알겠어요?
자, 그럼 다시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은 칼을 드셔야 하느냐, 용서를 하셔야 하느냐? 용서하기가 쉬운 일입니까? 여러분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용서하기가 쉬운가. 이것은 철천지원수인데…. 그런 원수를 대하는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만일에 여러분이 그런 원수를 대한다면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말이 나오겠습니까, 안 나오겠습니까? 가슴이 막힌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아들딸을 전부 다 잡아 죽인 녀석이요, 안팎의 세상을 전부 다 엉망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원수를 대하여서도 그런 일이 없는 것같이 대해야 할 입장에 계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게 대하지 않고는 복귀역사를 못 하는 것입니다. 원수진 일이 없는 것 같이 생각하지 않고는 구원 역사를 못 하는 것입니다. 원수가 아닌 것같이 대하지 않고는 용서했다 하는 자리에 설 수 없습니다.
그런 자리에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비로소 역사에 없었던 새로운 법도가 나온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마음을 가져야 되느냐? 원수진 일이 없는 것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원수를 사랑한다는 하나님도 할 수 없는 일을 해야 합니다. 알겠어요? 사탄은 자신은 하나님 앞에 원수인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굴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구세주 사상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가는 길은 천리원칙이요, 내가 몽땅 바치고 싶어 해도 받을 수 없는 당신이며, 이 원칙을 따라가지 않으면 풀 수 없는 것이 당신의 사정이기 때문에, 나는 그 원칙에 따라 당신을 따라갈 것입니다. 당신의 천리원칙을 찾아갈 수 있는 사람이 나오면 나를 바치겠습니다…' 이런 조건하에서 복귀역사가 출발했던 것입니다. 알겠어요? 그렇지 않으면 본연의 세계로 돌아갈 길이 없는 것입니다. 달리 돌아갈 수 있겠어요?
원수를 용서해 주는데 무엇으로 용서해 주느냐? 칼 가지고 용서해 줄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생각해 보게 볼 때, 우리들이 소위 원수라고 하는 그 원수를 무엇으로 용서해 주겠습니까? 하나님은 창조과정을 파고 들어 우주 전체의 수천만 존재들을 일시에 파탄시킬 사탄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원수인데도 용서해 주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사랑을 해야 하는데 어느 정도 사랑해야 하느냐? 원수가 되지 않았을 때 사랑했던 것 이상으로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담 해와를 사랑하던 마음, 옛날에 아담 해와를 대하던 그 사랑의 마음 정도 가지고는 복귀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요? 원수의 자식이 되었는데, 타락하기 전에 아담 해와를 사랑하던 그 마음 가지고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 가지고는 구원할 수 없습니다. 아담 해와를 사랑하던 그 이상으로 원수를 사랑하고, 원수의 자식을 자기 자식 이상의 마음을 가지고 사랑할 수 있는 동기를 갖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하느냐? 역사상의 그누구도 그런 내용을 중심삼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어떤 성현현철도 `원수를 용서하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고맙게도 단 한 분 그것을 아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운명하면서 `저들이 지은 죄를 알지 못하나니 아버지여 용서 하시옵소서'라고 하셨습니다.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면서 자기의 원수를 사랑하겠다는 하나의 깃발을 들고 자신의 생명과 자신의 소원이 완전히 막히는 자리에 들어갔습니다. 그런 자리에서도 만민을 구하고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이 앞서서 죽어갔기 때문에, 그 마음과 원수를 사랑해야 했던 하나님의 마음이 하나로 연결되었던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새로운 문화가 출발되었고, 기독교가 세계적인 종교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겠지요? 「예」
원수를 사랑하지 않고는 하늘나라에 가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려면 그와 같은 고비를 넘고, 그 마음의 세계에 동행자가 되고, 그 마음은 하나님을 대신한 대변자가 되어 진리와 뜻을 중심삼고 싸워서 실적을 남겨야 합니다. 그러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이 땅에 없었습니다. 다만 그런 남자되는 한 사람이 이 땅에 나왔었지만, 한 여자가 나오지 못했기 때문에 그분은 돌아가셨던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과 같은 입장에서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한 여성이 있었다면, 그분과 그 여성이 하나되어서 천지에 새로운 역사의 부모, 마음 세계의 부모가 되어 천지를 새로운 세계로 복귀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의 남자로 오신 예수님 앞에 하나의 여자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대신한 남자는 있었으나, 이스라엘 민족을 대신한 여자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천성의 인연을 본심으로 알아서 모실 수 있는 한 여성을 고대했지만, 그러한 여성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전부가 자기를 중심삼고, 자기의 소원을 중심삼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천륜을 중심삼은 천국 이념이 중심이 아니라 자기 뜻, 자기 소원, 자기 욕망을 중심삼은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욕망은 세속과 더불어 이미 타락한 인간의 욕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으니 하나님과 인연 맺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본연의 법칙에 의해 재출발해야 합니다. 마리아부터 재출발해야 됩니다. 예수님을 둘러싼 무리가 여쭙기를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섰나이다' 했을 때, 예수님은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하나님 뜻대로 했다는 것입니까? 못 했다는 것입니다. 그걸 알아야 돼요.
그러면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세계적인 원수들을 구원하는 길을 닦아 가야 할 예수님 앞에, 하나님의 원수를 사랑하고 넘어갈 수 있는 신앙을 갖고 그런 결의를 가지고,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의 심정과 사정을 품은 자가 되어 예수님을 도운 사람이 있었습니까? 이스라엘 민족을 사랑하겠다고 몸부림친 남자나 여자가 있었습니까? 없었습니다. 오히려 하늘의 뜻을 소홀히 하여 그 뜻을 품고 왔던 사나이를 쫓아 버렸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몰아버린 것입니다. 어째서 예수님이 죽기 위해서왔습니까?
그러면 오늘날 통일교회 문선생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말 하면 여러분이 이상하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원수가 많습니다. 가인을 굴복시키지 않고는 하늘나라에 못 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적어도 세사람 이상 굴복시켜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도 베드로, 요한, 야고보, 이 세 제자를 선택했던 것입니다. 열두 제자, 그중에서도 베드로, 요한, 야고보가 예수님이 죽기 전에 먼저 생명선을 넘어가야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죽기 전에 먼저 아들이 죽겠다고 나서야 된다는 것입니다.
초조한 하나님 앞에 아담 해와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 뜻을 세우려고 했더라면 타락하지 않았을 것이 아닙니까? 그와 같은 관계에 있는 것이 예수님과 제자들입니다. 즉, 예수님은 아버지의 입장이고, 제자들은 아들의 입장입니다.
아들의 입장인 아담이 부모인 하나님을 배반한 것이 타락입니다. 이것을 복귀하기 위해서는 반대의 경로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부모가 죽을 수밖에 없는 길을 자식이 먼저 죽겠다고 나서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귀노정의 철칙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죽음의 자리에 내어 놓고 세 제자는 자기들의 살길을 찾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은 모두 죽었습니다.
이 길을 따라감에 있어서 하나님은 칼을 들었느냐? 아닙니다. 베드로가 말고의 귀를 자를 때, 예수님이 어떤 말씀을 하셨습니까? 원수를 갚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비참하고 추하고 억울한 자리에서 가라지 같은 추한 악당들의 입장에 부딪쳤으니 생각하면 천지가 아득해지는 사연이 많았지만, 당장 세계가 망하는 그런 사연보다도 하나님에게는 본연의 사람을 어떻게 찾을 것인가, 타락한 인간을 어떻게 하여 본연의 아들딸로 복귀시키느냐 하는 사연이 더 중했습니다. 그런 사연에 입각하여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보조를 맞추어 상대적 관계를 갖추고 돌아가셨기 때문에, 여기서부터 역사의 새로운 이념이 출발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통일교회가 가는 길은 어떤 길이냐? 통일교회가 가는 길 앞에는 원수가 많습니다. 개인의 원수, 가정의 원수, 종족의 원수, 민족의 원수, 국가의 원수, 세계의 원수가 있습니다. 내 가는 길 앞에는 전부가 원수였습니다. 내가 하늘을 이용할 수 있는 기백도 있고, 용기도 있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억천만년 생애를 두고 보면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내 원수를 갚아 달라고 기도하게 되면 그 사람은 걸립니다. 지금 내가 누구보다도 분한 마음을 품고 하늘의 불이라도 있다면 그것을 가지고 불살라 버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것을 하나님이 보게 된다면 복줄 생각이 안 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편은 맞고 빼앗아 오는 작전을 하시는 것입니다. 사랑의 마음을 뿌려서 사랑의 수확을 거두시는 것입니다. 그 마음 깊이 사랑의 씨를 뿌려 가지고 추운 바람이 부나 폭풍우가 몰아치나 당신의 생명의 피살을 전부 다 바쳐 지금까지 원수를 사랑하기에 몸부림치고, 뼛골이 녹아나는 안타까운 심정으로 같이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런 방향에서 원수들을 위해 사랑의 철칙을 붙들고 나오셨기 때문에, 지금까지두 세계가 점점 하나의 세계로 통일되어 나간다는 것입니다. 알겠습니까? 「예」
이런 관점에서 통일교회 교인들을 보면 하나님이 바라시는 식구가 얼마나 될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또 여기에 할머니들이나 오래된 사람들을 보게 되면 서로가 자기는 어떻게 되나 염려하고 있습니다. 자기만이 귀하다는 거예요.
`통일교회가 잘 되기 위해서는 내가 잘 되어야지. 선생님이야 고생하더라도 내가 편해야지' 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 그 사람이 잘 되나 두고 보십시오. 그 사람의 얼굴은 점점 좋아지겠지만 그 사람의 마음은 점점 내려간다는 것입니다. 땅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종교가 가는 길과 세상이 가는 길은 다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기독교는 맞고 빼앗아 왔습니다. 희생의 길, 순교의 길을 걸어왔다는 것입니다. 맞고 빼앗는 작전을 해 왔습니다. 사탄은 때리고 빼앗는 작전을 하지만, 하나님은 맞고 빼앗아 오는 작전을 합니다. 그러면 누가 이기느냐? 결국에는 맞고 빼앗아 오는 사람이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그건 왜 그러냐? 우리들 가정에서 보게 되면, 철이 없고 약해 보이는 아이인데도 형제끼리는 서로 생각해 주는 아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항상 형제들에 의해 어려움에 몰립니다. 그러면 그 편에 누가 섭니까? 여기에는 부모가 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모가 점령당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도 점령당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아가는 목적이 세상을 점령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점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점령해야만 이 세계를 점령할 수 있고, 영계도 점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기준에 들어가는 것은 하나님을 점령하는 것입니다. 세상 만사가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점령하려면 하나님의 골수의 마음을 끌 수 있는 입장에 서야 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희생봉사입니다. 그러면 그 작전은 무엇이냐? 무한히 용서하는 것입니다. 무한히 용서하고, 사탄을 사랑하는 법도를 세워 나가는 길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은 망하지 않습니다.
동네에서 양심 있고 순하다는 사람도 여러 번 억울한 입장에 몰리면 폭발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동네 사람 전부가 그 사람편에 서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억울하게 맞으면 동네 사람 모두가 그 사람편에 섭니다. 본심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사탄도 꼼짝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왜 그런가? 천도가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며,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섭리해 나오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의 원수를 용서로 갚으라는 것입니다. 하늘 사람이라면 원수가 죽었을 때 원수를 갚겠다는 마음이 드는 것이 아니라 `네후손들에게는 원수를 갚지 말아야지' 하는 마음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잘 죽었다, 그래도 싸지. 내가 그럴 줄 알았다' 한다면 하나님의 아들딸이 될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은 원수가 많은 이 세상에서 원수를 대하여 용서하는 마음을 가지면 그 원수가 자기를 증거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원수를 갚기 위해서 칼을 들고 나올 것이 아니라,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기독교 사상이 위대한 것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칼도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벌거숭인 채로 매맞고 피 흘리고 죽어가는 길에서도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세계를 주관하신다는 것입니다. 통일교회 여러분도 마찬가지로 그래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사탄과 인간에게 배반을 당하셨습니다. 사탄보다도 인간이 더 많이 배반했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을 얼마나 많이 배반했습니까? 사탄보다도 훨씬 더 많이 배반했습니다. 사탄은 그럴 수 있는 환경에서 한 번 배반했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역사를 통해 볼 때, 아담 가정에서부터 노아 가정, 아브라함 가정, 그리고 지금까지 6천년이라는 역사를 거쳐오면서 번번이 배반했습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알아주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의 심정을 가지고 섭리하시며, 보냈던 예수님을 십자가에 쫓아 버린 이스라엘 민족을 대해서 그렇게 원한에 사무쳤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또 잊어버리고 인간을 사랑하는 아들딸로 만들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럴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못났어도 그런 아들딸을 만들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안 우리의 갈 길은 어떠해야 할 것인가? 그 길을 가는 데 돈이 문제입니까? 아니면 명예가 문제가 됩니까? 외적인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세상의 그 어느 것도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내적인 문제입니다. 생명문제와 자기 심정문제에 있어서의 안위의 터전을 마련하는 데에는 외적인 문제 가지고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품어야만 해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어요?
그렇다면 이 경계선, 배반자와 하늘 사이의 경계선을 어떻게 타개하고 넘어갈 것인가? 원수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데 원수를 사랑할 수 없는 입장에서도 하나님의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 깊은 사연과, 안타깝고 억울하고 분한 사연을 넘을 수 있는 사랑을 위해 몸부림쳐 나온 예수가 얼마나 불쌍하겠습니까?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불쌍합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 통일교회에서는 아벨이 되려면 가인을 복귀시켜야 한다고 합니다. 세상이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으니, 하나님의 입장에 서서 소망의 아들딸을 찾기 위해 원수를 때려잡는 것이 아니라, 원수를 사랑하자는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 서지 않고는 복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가인 아벨을 중심삼고 볼 때에, 우리 통일교회 교인들은 아벨된 입장에서 가인 입장에 있는 세상 사람들의 한을 풀어 주고, 그들을 사랑함으로써 따라올 수 있게끔 만들어 놓아야 됩니다. 그러지 않고 먼저 들어왔다고 영웅시하면 망하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면 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통일교회 선생이지만 그런 생각을 안 했습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에게 나를 모시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통일교회 문선생은 독재자라고들 합니다. 선생님이 독재자 하고 싶어서 합니까? 선생님이 명령해서 여러분이 나를 모십니까? 여러분들의 마음이 그렇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내가 언제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까? 또 여러분들이 여기에 모이라고 해서 왔습니까? 누가 오라고 해서 온 것이 아니라, 자기가 자꾸 오고 싶어서 온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마음은 지혜롭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사랑이 있는 곳을 찾고 있습니다. 누가 말하지 않더라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건 왜 그러냐? 마음은 생명과 같아서, 하나님을 중심삼고 사랑의 새로운 싹이 튼다는 것입니다. 얼음산은 봄이 되어 햇볕이 따뜻해지면 추운 겨울의 인연을 버리고 봄을 맞이한다는 것입니다. 추운 겨울을 배반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누가 오라 가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너희들은 전부 다 나를 반대하지만, 너의 2세들은 내 종이 된다'고 말합니다. 내가 어떻게 이처럼 자신 있는 말을 할 수 있느냐? 나는 혼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왜? 사탄이 내 앞에 있지만 그 2세들을 하나님께서 복귀하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에, 내가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에게도 그 공식이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굶어 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굶게 되면 여러분이 밥을 못 먹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밥을 잘 먹는 사람은 통일교회 교인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내가 그렇게 하라고 해서가 아니라, 여러분 마음이 그래서 그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 동기에 대해서는 여러분은 잘 모릅니다. 내가 어제도 얘기했지만,선생님은 참으로 좋기도 하지만 무서운 사람입니다. 나를 개인적으로 반대했던 사람도 망했고, 가정적으로 반대했던 사람도 망했습니다. 또, 반대한 단체도 망했으며 반대한 정권도 망하지 않았느냐? 또 이 세계도 이렇게 망해가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되지 않으면 망합니다. 공식적으로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나는 친구도 없는 지극히 외로운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외로운 분이며 고독의 왕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추구하는 사람은 고독의 왕자가 되어야 합니다.
아무튼 우리는 누구보다도 민족을 사랑하고, 세계를 위해서 피눈물 나는 투쟁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하늘 앞에 나서게 될 때, 즉 통일교회에 들어올 때 세계가 나서고 삼천만 민족이 나서게 되면 여러분이 통일교회 문선생을 따라가겠습니까? 거기에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역사를 하시는지 모릅니다. 별의별 역사를 다 했습니다. 안 가면 들이치면서 가라 했으며, 징계를 주는 역사도 하셨던 것입니다. 내가 오기 싫어하는 여러분을 오라고 유인했습니까? 여러분이 산바람이 나서 그렇게 따라온 것입니다. 마음이 그렇게 한 것입니다.
봄날이 오면 꽃이 피고, 꽃이 피어 향기가 나면, 나비가 날아오기 마련입니다. 천지 조화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지금까지 나왔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반대해도 나는 망하지 않습니다. 나를 감옥에 가두어도 내 마음과 내 이념은 가두지 못합니다. 나를 치라는 것입니다. 치면 지금까지 내가 하나님 앞에 걸어 나온 길과 하나님이 닦아 나오신 길과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얼마나 강한지 감정하라는 것입니다. 칠 테면 치라! 내가 너를 미워하는가, 안 미워하는가? 매를 맞고 피를 토하면서도 `아! 잘 맞았다. 역사적인 모든 원한의 인류를 대신해 맞았다. 내가 맞고 잊어버리고, 내가 이것을 기억하지 않겠다' 하면서 `하나님이시여! 이들을 용서하소서'라고 했다면 이것이 얼마나 멋집니까? 그 자리를 지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를 죽이는 자리에 세워야 합니다. 그러면 간단하다는 것입니다.
왜정 때, 내가 12시간 가까이 고문을 받고 피를 토한 적도 있었고, 15분 동안 사람을 미치게 하는 평생 잊지 못할 그런 고문도 받았습니다. 이것을 12시간 받으면서도 기적적으로 살아 나왔습니다. 맞으면서도 뒤로 벌렁벌렁 나자빠지고, 죽은 피가 주루룩 쏟아지도록 매를 맞으면서도 `쳐 봐라! 그 몽둥이가 부러지나, 내 뼈가 부러지나' 하며 견뎌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큰 시련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들을 원수같이 대하지 않았습니다.그들에게 복을 빌어 주고 가야 할 책임이 내게 남아 있기 때문에, 그들의 무엇을 보고 복을 빌어 줄 것인가를 연구하였습니다. 그 감방에서 고민하고 연구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양심이 있으니, 아침에 사람들이 다 나간 뒤에 아무도 모르게 사과합니다. 그것이 사람인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 인간은 누구나 같다는 것입니다. 그들도 양심은 속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일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런 길을 유린하고 욕을 하게 되면 망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망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하나님께서는 어떤 때는 사랑을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선생님이 좋을 때는 한없이 좋지만, 무서울 때에는 한없이 무서운 사람입니다.
선생님이 가만히 보면, 어떤 때는 유명한 사람에 대해 거 안 되겠는데 하는 생각이 들어요. 참으로 너무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 그 사람은 7개월이 되기 전에 죽어가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그런 길을 걸어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누구를 미워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통일교회 교인들 중에 선생님이 편한 생활을 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도 새벽 두시 반에 일어났습니다. 잠을 자도 한 시간 정도 지나면 깨어나곤 합니다. 빚을 지고서는 못 사는 사람입니다. 이런 생활을 하면 통일교회는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세계가 망하는 한이 있어도 통일교회는 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여기에서 섭리가 연장되고 지지부진해도 그것을 한꺼번에 이루기 위한 하나의 작전입니다. 많은 피해를 입히지 않기 위한 하나의 작전으로 알고 있지, 통일교회가 발전하지 못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 자신이 망하지 않기 때문에 망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내가 생명의 빚을 안 지고, 되레 빚을 지우고 삽니다. 여러분은 선생님에게 생명의 빚을 졌으니, 빚을 갚아야 할 입장에 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오늘날 세계에서 하나님을 위해 죽은 사람이 얼마나 되느냐 할 때, 엘리야가 말한 것처럼 `나만 남았나이다'라는 그 말밖에는 할 수가 없습니다. 천지 가운데 이런 아버지의 마음을 중심삼고 타락한 세상의 구원의 터전을 넓혀 나온 곳이 이렇게 비참하고 초라한 청파동 1가 71의3 통일교회인 것입니다. 이곳을 바라보시며 6천년의 한을 풀겠다고 나오신 하나님이 얼마나 불쌍합니까?
그런 내 자신을 들여다보면 눈물이 고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이상으로 침울한 자리에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게 되면 눈물이 쏟아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런 심정에 얼마나 접해 봤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정적인 통일교회에서 이러한 심정을 바쳐서 하나님을 대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그것을 생각하지도 못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천대받는 자리를 넘어 소원을 이루어 드리고 안식해 드려야 할 하늘의 사정을 모르고, 그 고개만 바라보면서 여러분은 자신을 중심삼고 별의별 생각을 다 하고, 별의별 경거망동을 하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여러분이 하늘의 아들딸이 되었으니….
그런 관점에서 하나님 앞에 여러분이 얼마나 배반된 행동을 했는지를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소원하신 기준과 대치되는 나를 중심삼고 하늘을 끌고 가려 했던 사실이 얼마나 미천하고, 얼마나 불쌍한 짓이었다는 것을 여러분이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의 배반자된 후손으로 태어난 것이 한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배반자의 후손인데도 불구하고, 소망의 아들딸로서 품을 수 있는 그 하나의 모습을 그리워하면서 우리에게 해방을 가져다 주기 위해서 수고해 나오셨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원하시는 원수의 경계선을 넘을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겠다고 몸부림쳐야 하나님의 원수를 갚을 수 있는 내자신이 되지 않겠어요? 여러분은 이것을 잘 알아야 되겠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예」
그러기에 여러분들을 대해서 나타나는 원수가 많습니다. 통일교회에 들어와 보시오. 통일교회에 가려고 하면 반드시 못 가게 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처녀 총각들에게 애인이 생긴다든가, 바람피우던 영감도 교회에 가기 전날에는 집에 들어와 못 가게 한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그렇습니다. 이것은 공식입니다. 그러나 원수를 사랑하고 가야 합니다. 알겠어요?
선생님이 요즈음 청평에 땅을 조금 사 가지고 뭘 하려고 하는데, 그것을 막는 사람이 문가입니다. 남한에서 선생님과 처음 싸움을 한 사람도 문가입니다. 문씨 성을 가진 사람이 많이 나타나야 합니다.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안 되면 거짓말입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반대받고 돌아가셨습니다.
하나님과 그 아들딸에 있어서 원수가 누구입니까? 아들딸이 원수가 아닙니다. 마지막 발판을 밟고 올라서 심판하고 넘어가려는데 원수가 나서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에 아들딸이 나간다고 그 아들딸을 칼로 위협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아버지에게 칼 맞은 사람이 없는 줄 압니까? 그러니 부인들이 남편에게 머리채를 잡히는 것은 보통이었습니다. 뼈가 부러지는 것도 보통이었습니다. 개 끌고 다니듯 하면서 별의별 짓 다 하는 것을 내 눈으로 보아 왔습니다. 억울했습니다. 내가 힘으로 해도 그들을 한 손으로 다 막을 수 있습니다. 그 누가 갖지 못한 그런 힘을 가지고 있다 이겁니다.
어디든지 가라! 세상을 잡으려면 끝날 때까지 해 봐라. 그러나 이것이 어느 고비를 넘는 날에는 세계가 내편이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당하던 것의 7배 이상 원수를 갚게 될 것입니다. 내가 7배 이상 복수하더라도 항의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나는 천법이 무엇인지를 알고 지금까지 이런 일을 해나왔습니다. 때가 될 때까지 극복해야 합니다. 그때까지 고난을 피해서는 안 됩니다.
선생님은 억울한 일도 당해 봤고, 비참한 일도 당해 봤고, 참기 어려운 것도 참아 봤습니다. 어떤 때는 주물공장의 주형틀에 갇혀서 답답한 경지를 차고 나가야 하는 어려움도 많았습니다. 이처럼 빠져 나올 구멍을 찾을 수 없는 길을 거쳐 나가야 할 때도 있었던 사나이였습니다. 하나님도 그런 때가 많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길을 닦아 나온 통일교회의 선생님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이 이 길을 지키고, 가야 할 바른 자세는 무엇인가? 만일에 그런 길을 가야 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여러분은 뜻 앞에 순결한 입장에서 그 길을 가야 됩니다. 그러기에 영계를 통해서 선생님을 보면 불쌍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그 누구도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하나님은 알아줍니다. 세상을 다 잃어버리고, 어머니 아버지 처자식까지 잃어버렸지만 내적인 기준에 있어서 하나님이 같이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한국 땅에 살고 있지만, 소문을 듣고 영계를 통하는 사람들이 기도해 보면, 선생님이 이러이러한 사연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알고 있습니까, 모르고 있습니까? 아는 사람 손들어 보세요. 그것은 여러분도 잘 알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엄청난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꿈같은 사실이 벌어지는데도 불구하고, 이것이 상식화되어 그렇게 여기지 않는 여러분입니다.
이것이 여러분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것을 관계 맺기 위해서 얼마나 수고하셨습니까? 원수의 고빗길을 참고 넘어와서, 한 사람을 통해 그렇게 명령할 수 있는 기반을 닦기 위해서 얼마나 수고하셨느냐는 것입니다. 해원성사의 뜻을 중심한 억천만세의 한이 깃들어 있는데도 여러분은 그것을 보통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애국심이 강한 사람들 중에서 통일교회와 관계 맺은 사람이 아주 많습니다. 선생님은 그 사람이 어떤 영계에 인연되어 있는지 모두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내가 지금까지 한 일을 따라서 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세계를 복귀해야 하기 때문에 영통하는 사람은 다 품어 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수단 가지고는 안 됩니다. 그가 진지할 때 나는 그보다 더 진지해야 합니다. 이 싸움을 지금까지 해 나온 것입니다. 여러분은 영통한다 하는 사람을 보면 그저 꺼벅 죽어버리는데, 그래서는 안 됩니다. 마음이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영통이라는 것은 간단한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세계적인 뜻을 중심삼고 나아가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대신하여 복귀의 일선을 가는 우리를 위해서 얼마나 준비해 왔습니까? 원수의 자식을 사랑하기 위해서 얼마나 몸부림치셨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가치를 알고 하나님의 그 숭고한 희생의 수고를 염려하는 아들이 되면, 아무리 어렵더라도 불평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4천년 역사를 중심삼고 배반하는 이스라엘 민족의 배후에서 얼마나 수고하셨겠는가, 이만큼 지원하기 위해 얼마나 수고하셨을 것이냐 하는 것을 알았고, 자기를 대하여 소원이 큰 것을 알았기 때문에, 아들된 입장에서 불평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아버지편에서 그들을 용서해 달라고 구하는 입장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효자였다는 거예요. 그런 남자가 예수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여자가 하나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다시 오셔서 그런 여자 하나를 찾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결론이 맺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인간의 마음이 사랑의 인연으로 맺어지는 그런 가운데에서 실체의 새로운 아들딸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창조본연의 사랑을 중심삼은 하나님의 세계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원수를 사랑했어요? 또, 좋아할 수 있어요,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세 제자를 찾아 세우고 열두 제자를 찾아 세웠으며, 이스라엘 민족을 세워 원수의 자식들을 사랑의 힘으로 다스리려 했던 것입니다. 그래야 배반자라는 이름이 이 지구상에서 없어집니다. 배반자가 없는 곳이 천국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언제나 선한 마음 앞에서 악의 길을 풀어 갈 것이냐 악을 추방할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악한 사람을 구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내가 병든 사람을 구하러 왔지 건강한 사람을 구하러 온 것이 아니다. 의인을 구하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구하러 왔다'고 하신 것입니다.우리가 죄인의 입장을 동정할 수 있는 마음을 갖지 않고 어떻게 원수의 자식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언제든지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런 입장에서 생각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기가 막혔겠습니까? `인자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느냐? 본래는 내가 하나님의 자녀의 자리에 있어야 되지 않느냐? 그런데 왜 이렇게 되었노? 본래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왜 이렇게 되었노?' 예수님은 그것을 다시 검토해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그런 세계를 잃은 것을 알고 얼마나 한탄하였던가를 알아야 할 텐데, 여러분은 그것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모르고 있으니 가르쳐 주어야 할 책임이 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다 가르쳐 주었는데 배반하면 배반자이지만, 가르쳐 주지 않아 모르는 입장에서 배반했다면 그것은 배반이 아닙니다. 그러니 가르쳐 주지 못하는 것이 죄입니다.
대한민국이 배반한다 하는 것도 원리를 모르니까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르쳐 주고 나서 배반한다고 해야 합니다. 그런데 잘못 가르쳐 주면 안 됩니다. 똑똑히 가르쳐 주었는데도 배반하게 되면 심판을 받게 됩니다. 가르쳐 줄 때까지 사랑해야 됩니다. 자신보다도 더 사랑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자신까지 이런 섭리역사를 해 나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통해서 죽어 갔기 때문에 다시 비참한 이스라엘로 찾아가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편에 서서 끌고 나왔던 이스라엘이 틀어졌으므로 예수님은 또다시 이스라엘로 올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즉, 제2이스라엘인 기독교를 중심삼고 다시 올 수 있는 터전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이 땅의 모든 것을 버리고 갔다면 오지 못합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인류의 소망인 이런 내용을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섭리의 뜻을 거두어 들이면 망하겠지만, 그러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백 퍼센트 걱정해야 합니다. 상대방이 하는 일에는 다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감옥에 들어가 있을 때, 사형선고를 받은 죄수들과 같이 있어 봤습니다. 그들과 얘기를 해보면 모두가 자기 나름대로 비참한 입장에서 그랬었다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란 자체를 두고 보면, 그럴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방향이 달랐던 것입니다. 방향이 다르게 된 그 입장만 밝혀 놓으면 돌아설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을 여러분이 알고, 배반자를 참되게 하기 위해서 마음속으로 사랑의 입장에 선 참부모의 심정을 가지고 참아들의 입장에서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배반자의 자리를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고 앞으로 그런 면에서 정성들이며 나가야 되겠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여러분에게 있어서는 최대의 싸움입니다. 전도를 하더라도 그런 마음을 가지고 해야 합니다. 그것을 넘어선사람은 절대로 망하지 않습니다. 만일 그런 사람을 밥을 굶게 만든다면, 그 동네는 망하는 것입니다. 한편 그런 사람이 가는 데는 반드시 원수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 사람이 진짜 그런 사람인지 아닌지 시험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 시험을 통과하게 되면 그는 선한 사람이라는 것이 밝혀지는 것입니다.
통일교회에 들어오게 되면 개인 원수, 가정 원수, 종족 원수, 민족 원수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요즈음은 세계가 원수입니다. 미국 행정부에는 지금 선생님이 문제가 되어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문제가 되어 있습니다. 일본이라든가, 세계 각국이 전부 다 나를 문제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의 문제의 사나이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외적으로는 그들에게 걸릴지 모르지만 내적으로는 안 걸립니다. 외적으로 나타나는 결과의 세계를 아무리 원수시해도 그것은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뭐라 해도 심정적 세계에서는 그들이 망하지, 내가 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틀림없기 때문에, 선생님이 백악관 앞에서 그런 의미에서 기도했던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그 기도 내용을 말할 수 없지만, 미국이 망하라고 기도한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이 길을 가려면 여러분을 어떻게 정비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다시 한번 수습해 가지고 싸워 나가야 됩니다.
이사를 가려면 짐을 정리한 후 보따리를 싸서 이사가게 되지요? 마찬가지로 모든 것을 정리하여 이사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죽음의 세상에서 사는 사람은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사가야 됩니다. 어디로 이사가야 됩니까? 사탄세계에서 하늘세계로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는 시시한 것은 모두 버리고 좋은 것만 가지고 가야 되는 것입니다.
시집을 가는데 남편이 싫어하는 것을 가지고가면 되겠습니까? 남편이 좋아하는 것을 가져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사를 갈 때도 좋은 것만 가지고 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배반자의 역사를 뒤로 하고 하늘나라에 가서 아주 즐겁게 살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나와 당신이 멀리 떨어져 있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을 아옵니다. 우리가 여기 있을 때 당신도 여기에 계시기를 원하시고, 우리가 저기로 갈 때 당신도 저기에 가고 싶고, 언제나 같이 있고, 같이 살고, 같이 죽고 싶은 것이 당신의 마음인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이것은 인간이 자기 자식과 같이 있고 싶고, 살고 싶고, 죽고 싶어하는 마음과 같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희들의 그런 마음이 아버님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니, 저희들도 그래야만 되겠사옵니다.
아버님이여! 저희들이 언제 아버님이 그리워 최고의 정성을 들이고, 있는 힘을 다하여 팔을 벌려 아버지라고 절규해 본 적이 있었사옵니까? 없었다면, 저희들은 부끄러운 자식들이옵니다.
내가 바쁘고 바쁘게 두 발을 구르면서 아버지의 뜻을 위하여 달려 봤습니까? 그러지 못했다면, 저희들은 부끄러운 자식이옵니다. 저희들이 아버지의 뜻을 위해 가슴을 조이며 소망의 길을 찾을 수 없어 쓰러지는 경지에 들어가 아버지의 뜻을 품고 얼마나 몸부림쳐 보았나이까? 그러지 못했다면, 아버지 앞에 죄인된 자신을 발견해야 되겠사옵니다.
저희가 언제 아버지를 사랑하기에 미친 듯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저버리고, 또는 다 저주해 버리고 차 버리면서 사랑해 보았으며, 언제 아버지의 사랑이 그리워서 밤잠을 이루지 못하며 몸부림쳤사옵니까?
아버님은 저희들이 그러기 전에 저희들을 찾기 위하여 얼마나 몸부림쳐셨는가를 이제야 알았사옵니다.
알고 보니 세월이 많이 흘러갔습니다. 알고 보니 저희들은 염치없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 복귀의 사연을 다시 아버님께 권고 받아야 할 입장에 있사오니,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민족을 대하는 당신의 사정을 민족과 더불어 싸움으로써 배웠고, 세계와 더불어 싸움으로써 실감하게 되었사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제일 불쌍하신 분은 아버지이시며 제일 외로운 분도 아버님이시라는 것을 알았사옵고, 천번 만번 죽음의 길을 걸으신 분도 역시 아버님이시었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그런 아버지 앞에서 저희들이 억만 번 죽고 억만 번 밝히며, 억만 번 쫓기고 억만 번 억울한 자리에 있더라도 아버님을 모셔야 된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이제까지 이렇듯 높고 귀하신 분이 우리의 부모 형제들보다도 더 가까운 자리에 계신 것을 저희들이 몰랐사옵니다. 아버지께서 그 누구보다도 생명의 중심으로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아버님으로 말미암은 아버님의 영광의 한날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치고 가야 하는 자신을 발견하는 그 기쁨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것이 인생의 보람 있는 생활이요, 이것이 인생의 가치 있는 생활이라는 것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세상이 아무리 저희들을 조롱하고 모욕을 주어도 그것은 한때 지나가는 것이옵니다. 그 조롱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굴복하여 머리를 숙여 회개의 마음으로 돌아서는 그날을 바라보며, 아버님의 아들로서의 자세를 갖추어 나가겠다고 몸부림치는 통일의 자녀가 되어야 되겠사옵니다.
이 아침 여기에 모인 당신의 아들딸이 무엇을 찾겠사옵니까? 무엇을 바라겠사옵니까? 그것은 아버지의 편에 서는 것이요, 아버지의 뒤를 따라 아버지의 옷자락을 붙들고 험한 길을 가더라도 아버지의 품에 안겨 가는 것이요, 죽을 길을 가더라도 아버지의 품에 안겨 죽는 것이 소원이 아니겠사옵니까? 저희들은 그 길을 위하여 가야 되겠사옵니다.
민족을 위해 가는 길에 아직 원수가 가로막고 있사옵니다. 민족을 사랑하지 못한 저희들의 죄를 회개해야 되겠사옵니다. 세계를 향하여 가야할 길 앞에 담벽이 가로 놓여 있사옵니다. 세계를 위하여 희생하고 몸부림치지 못한 자신을 발견하여, 그 길을 가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하여주시옵소서.
원수를 사랑하면서 당신의 마음세계를 더듬어 가는 저희들의 길은 외로운 길이라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그 길에는 눈물이 그치지 않고, 원수의 화살촉이 끊이지 않으며, 조롱과 비난과 비소가 끊이지 않는 길이라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이것은 아버지가 그렇게 헤쳐 나오신 역사이기 때문에, 저희들도 응당 당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곱게 맞고, 곱게 억울함을 당하고, 곱게 슬픔을 당하고, 곱게 분함을 느끼면서, 당신의 마음세계를 찾아들 수 있는 아들딸이 되기 위하여 노력하는 모습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이시여, 이제 1969년은 저물어 가고 있사옵니다. 1970년은 제2차 7년노정의 세번째 해이옵니다. 여기에 모인 당신의 자녀들이 책임을 다해야 되겠사옵니다.
아버지로부터 진 빚과 선조로부터 진 빚을 자기 일대에 청산지어 이것을 횡적으로 열매를 맺고 전개시켜야 할 책임이 종족과 민족 앞에 남아 있는 것을 저희들이 알고, 엄숙히 그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당신의 자녀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남아진 뜻 앞에 충성을 다하는 청지기가 되기를 다시 한번 다짐하는 자녀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부탁드리오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대개 혼자일 경우에는 실패하지 않습니다. 상대적일 때에 실패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혼자만의 생활이 절대 필요합니다. 외적인 접촉을 될수록 적게 하고 내적인 세계를 넓혀야 합니다.
우리는 개인 위주가 아니고 가정 위주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가정만 중심삼고 모든 것을 청산짓는 것이 아니라 전부 연결지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옛날 홀로 도(道)의 생활을 하던 때의 노력 가지고는 안 됩니다. 옛날에 노력했던 것의 몇 배 이상 노력하겠다는 결의와 각오를 첨부시키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악을 대하여 도전해 나가는 생활은 까딱하면 지치고 후퇴하기 쉽습니다.
가정을 가졌을 때는 혼자일 때보다 몇 배 노력해야 합니다.
가정은 중심은 잡는 자리입니다. 우리는 현실을 피할 수 없습니다. 전후 좌우 상하의 관계를 가정에서 이루어야 합니다.
과거의 신앙 형태 가지고는 안 됩니다. 과거의 일방적인 신앙 태도 가지고도 안 됩니다. 축복은 죽느냐 사느냐의 결정점입니다.
개인의 신앙은 지도자만 잘 만나면 됩니다. 그러나 가정에서는 서로서로 지도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가정은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사느냐가 문제입니다.
혼자일 적에는 기도하면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가정에서는 반대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십자가를 지고 본연의 기준까지 뚫고 나가야 합니다.
혼자는 객차와 같고, 가정은 기관차와 같습니다. 개인이 실수한 것을 복귀하는 것은 간단합니다. 그러나 가정적으로 실수하면 파탄입니다.
여러분은 이 길을 가기는 가야겠고 이 일을 하기는 해야겠다는 것을 알기는 압니다. 그러나 언제 하겠느냐? 생명에 대한 자신이 있느냐? 악에 대하여 승리할 자신이 있느냐? 하나님의 아들이 될 자신이 있느냐? 자기 생명에 대하여도 자신 없는 사람이 6천년 동안 하나님을 녹여 온 악의 주동 세력인 사탄을 이길 자신이 있겠는가?
1960년대에는 선생님이 교회의 기반을 잡기 위해 살았습니다. 이제 1970년대에는 무엇을 할 것이며, 1980년대에는 무엇을 할 것이냐? 이 20년간에 무엇을 할 것이냐? 하나님이 알아주시는 그 자리를 찾아야겠습니다.
내 생명의 보장은 하늘에 있습니다. 공적인 일을 위해 사는 사람은 하늘의 생명록에 기록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결국 하나님 앞에 사탄이 질 것입니다. 그러니까 악을 당장에 치지는 못하더라도 승리권은 지니고 나갈 수 있습니다.
가정에서는 신앙적으로 소모(消耗)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젊어서부터 깊은 신앙의 터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행복한 것입니다. 단 5초간만이라도 깊은 신앙의 경지에 들어갔다 나와야 삽니다. 계속 소모만 하면 망하지 별수 없습니다.
혼자 있을 때는 간단하지만 가정을 가진 후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남모르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 자원을 무엇으로 얻느냐? 그것은 기도밖에 없습니다. 새벽 경배 시간만이라도 하늘과 직선상에 섭시다. 그 시간은 참으로 심각한 시간입니다. 그 시간에 1초만 늦어도 회개해야 합니다. 그 시간엔 성물로 사탕 한알씩이라도 준비했다가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기 바랍니다. 마치 성만찬 때 하는 것같이….
가정은 중요합니다. 하나가 실패하면 보충도 못 합니다. 처녀 총각이 만나서 서로 사랑을 하게 되면 대개 이상이고 뭐고 다 잊어버리게 됩니다. 우리는 가정이 모든 것의 출발입니다. 서로 자기만 주장하고 싸우다가는 나라가 망하고 하늘땅이 망합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숨구멍과 같은 것이 가정입니다.
하늘의 위신을 세워 놓고 나서야 자기나 상대의 위신을 세울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남편이나 아내라 해도 원칙에 어긋나면 서로 시정해야 합니다.
기도해야 됩니다. 소제를 해야 합니다. 마음의 소재, 생활의 소제를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새벽에라도 일어나서 기도하기 바랍니다. 기도할 때는 심장의 고동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동맥과 정맥, 여기에서 천지의 조화가 벌어진다고 상상하면서 심장의 근원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 건강도 좋아집니다.
창조의 본성상을 중심삼고 하늘을 찬양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디에 가든지 외롭지 않습니다. 혼자 있다고 해도 절대 외롭지 않습니다.
자신이 화덕이 되어야 훈훈할 게 아닙니까?
보이지 않는 것을 사모하여 그 실체를 느끼면 그것은 영원한 것입니다.
뜻 때문에 걱정하지 절대 사업 때문에 걱정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지쳐도 정성들인 목적지를 가 보지 못하고 후퇴하면 사기꾼입니다. 죽더라도 그곳을 향하고 죽어야 합니다. 일을 하더라도 그 목적을 위해서 일해야 합니다. 천국에 가 보지 못하고 후퇴할 수는 없습니다.
왜 땀 흘려 일하지 못하는가? 후대에 기념하고 자랑할 수 있도록 땀 흘려 일해야 합니다.
천국을 이루기 위하여 가정을 찾은 것입니다. 못 가겠다고 돌아서면 망하는 것입니다. 개인이 망하는 것은 괜찮지만 뜻길이 막히면 안 됩니다. 여러분이 그 길을 막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싸워 나가고 성취해 나가야 할 메시아의 입장에 있습니다.
살림살이 어려운 것이 불행한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하늘과 은밀한 가운데 가까와질 수 있는가가 행과 불행의 갈림길입니다.
개인이 망하는 것은 괜찮지만 가정이 망해서는 안 됩니다.
남편에게 있어서는 아내되는 사람이, 아내에게 있어서는 남편되는 사람이 세계에서 제일 필요한 사람입니다. 서로 권고해 주면서 지팡이가 되고 동역자가 되어야 합니다.
빨리 하면서도, 길을 가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창고에 자꾸 쌓여야지 비면 안 됩니다.
부모가 하늘 가는 길에서 탈선하지 않으려고 온갖 정성을 다하면 자식들이 절대로 불효하지 못합니다.
3대를 어떻게 모범되게 잘 살아가느냐? 그것이 문제입니다.
사탄이 여러분의 아들딸의 목을 떼어 간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들을 보호해 줄 수 있는 편을 많이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도해야 합니다.
늘 기도하고 반성하고 결심하는 생활을 거듭해야 합니다. 자기 친구를 전도안 하고 저 나라에 가면 거기서 그의 참소를 받습니다. 그러니까 열심히 전도해야 합니다. 선생님에게 욕을 먹을 때도 기도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은 자신이 나쁘기 때문이라고 뉘우치면서….
남편에게 맞고서도 감사의 기도를 해야 합니다. `남편으로서 아내 한번 못 때려 보면 되겠습니까? 고맙습니다' 하고.
늘 기도하는 생활을 하지 않고는 뜻길을 못 갑니다. 여러분은 생활하는 데 있어서 돈을 생각하지 말고 뜻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책임자의 부인은 남편이 문을 나설 때 절대 바가지를 긁지 말아야 합니다. 아내가 바가지를 긁음으로 인하여 남편 안 사람의 가슴을 흐리게 한 파도가 세계를 흐리게 하는 것입니다. 바가지는 저녁에 긁기 바랍니다. 그러면 모든 문제가 밤사이에 모두 해결될 것입니다. 남자는 아침에 싸우러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 남편을 위해 아내는 아침 일찍 일어나서 서비스를 잘해야 합니다.
분을 바르고 향수를 뿌려서라도 여자는 언제든 아름다워야 합니다. 여자는 정서생활에 있어서 빚지지 말아야 합니다. 또, 남편의 몸이나 의복 등에 대하여 항상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남편이 집에 들어왔을 때 피곤해 보이면 세숫물도 떠다 주고, 양치질할 준비도 해 주고, 발도 씻어 주고, 머리도 빗겨 주고 하기 바랍니다. 여자의 웃음은 집안의 꽃입니다. 원만한 가정을 이루려면 여자는 희비극의 일등 배우가 되어야 합니다. 남편이 기쁠 적에도 완전히 녹여 놓고, 슬플 적에도 완전히 녹여 놓아야 합니다.
자식을 얼마나 사랑하는가요?
옷은 적어도 3일에 한번씩은 갈아입어야 합니다. 머리도 그렇게 자주 감아야 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미소를 짓기 바랍니다. 미소는 마음의 꽃입니다. 언제나 꽃을 피우고 향기를 풍겨야 합니다.
머리 모양이나 화장으로 상대를 테스트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얼굴이나 모양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기쁘게 하지 못한다면 취미로 그것을 대신해야 합니다. 음악이라든가 모든 예술을 총동원해 보기 바랍니다. 잡지 같은 것을 보고 여자의 생리에 대해서 설명해 줘도 좋고, 문학 서적을 읽고 나서 그것을 설명해 줘도 좋습니다. 남편이 어린이같이 치마폭에 싸여서 살게 해주기 바랍니다.
부부는 이왕 만났으니 양팔 붙잡고 죽든지 살든지 함께 가야 합니다. 이왕에 갈 바에는 멋지게 가야 합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심정의 보급창고입니다. 시간이 없으면 하는 일에 통해서라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아버님, 이 아침에도 당신께서는 여기에 모인 자녀들과 더불어 같이 있고 싶고, 같이 가고 싶은 마음이신 것을 저희들이 이 시간 체휼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께서 저희 인류의 시조로 말미암아 슬픔을 당한 그 시간부터 오늘날까지 끊임없이 복귀의 행로를 더듬어 찾아 나오신 그 수고를 저희들은 다시 한번 회상해야 되겠습니다.
아버님께서 그토록 그리워하시고 소원하시던 아들딸이 당신의 마음을 얼마나 상심시켰으며, 얼마나 당신의 몸을 쳤으며, 얼마나 당신을 불쌍한 자리로 내몰았던가를 다시 한번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아버지여, 당신께서 그렇게 억울하고 분통한 자리에 처하게 된 것은, 아버지, 당신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고 자녀의 인연을 가진 이 땅 위의 인간들로 말미암은 것임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원통하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아들딸을 버릴 수 없었던 아버지의 마음, 그러한 가운데에서도 아들딸을 잊어버릴 수 없었던 아버지의 사정을 생각하옵니다. 기필코 그 아들딸을 상봉하시어 당신의 뜻을 성취하시고 해원성사하시옵소서.
그 아들딸은 만유 앞에 찬양의 조건으로써 내세워져야 할 모습이요, 그 아들딸은 쌍수를 들어 당신의 높고 귀하심을 찬양하고 환성을 올리며 영광의 은사 앞에 보답해 드려야 할 모습임을 알고 있사옵니다. 만민이 그러한 아들딸이 되는 것이 아버지의 소원이요, 아버지의 뜻임을 또한 알고있사옵니다.
아버님, 수고의 노정을 걸어오시면서 찾아 나오신 당신의 자녀들을 만나 최후의 승리를 다짐할 수 있는 그 한 순간이 역사상에 기필코 있어야 될 것을 생각할 때, 그 승리의 순간은 개인뿐만이 아니라 가정과 종족과 민족과 국가와 세계와 천주라는 엄청난 문제를 걸어 놓고 기뻐할 수 있어야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옵니다. 또한 안다는 것은 그것을 위한 책임을 수행해야 하는 것을 말한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여기에 모인 당신의 어린 자녀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는 아무것도 갖추지 못한 벌거숭이들이옵니다. 당신이 저희의 마음과 저희의 몸에서 떠난다 할진대 너희는 한푼어치의 가치도 없는 자들로서 땅 위의 마른 흙과 마찬가지요, 마른 막대기만도 못한 부족한 자들이옵니다. 살아봐도 삶의 가치를 지닐 수 없는 부족한 자들인 것을 저희들은 자인해야만 되겠사옵니다.
이렇게 부족한 저희들에게 당신께서 임하시어서 저희들로 하여금 무한한 가치와 존귀와 영광을 차지할 수 있는 은사권내에 잠기게 하여 주신 것을 진정으로 감사드리옵니다. 사탄세계에 있어서 원수와의 관계를 뗄 수 없고 당신과 관계를 맺을 수 없는 자리에 있는 인간들임에도 불구하고 높고 거룩한 당신의 아들딸의 자리에 동참할 수 있도록 세워 주신 그 특권적인 혜택에 또한 감사드리옵니다. 하늘을 보나 땅을 보나 그 무엇을 보더라도 감사드리고 자랑할 수 있는 가치의 존재요, 가치의 자리에 있는 것을 저희들은 알아야 되겠사옵니다.
아버님, 저희들의 마음속에는 항상 뗄래야 뗄 수 없는 당신의 사랑이 깃들어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 사랑의 마음은 저희들의 생활권을 온전히 지배하고 싶어하는 간절한 마음인 것을 아옵니다. 영원한 세계의 역사와 더불어 아버지의 뜻이 머무는 자리에 저희들이 동참하기를 원하시고, 저희들의 생활노정에 같이 임하시어서 저희를 주관하고자 하시는 당신의 마음과 사정을 저희가 알아야 되겠사옵니다. 당신은 영원히 뗄래야 뗄 수 없는 인연 때문에 희생을 무릅쓰고 복귀섭리 노정을 찾아 나오고 있사오나, 저희들은 아버지와 일치되지 못한 자리에 있기에 경험하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자기 자신을 거부하고 아버지와 일체화되어 남기신 최후의 승리의 기점을 향하여 달려갈 줄 아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어야겠습니다.
아버님이시여, 이제 분부하실 명령이 있사오면 분부하여 주시옵소서. 최후의 결전장을 향하여 나아가야 할 저희들이 져야 할 책임이 있사옵니까? 아버지 앞에 생명을 다 바치고 나갈 수 있는 하늘의 용사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 땅에 내세워야 할 당신의 새로운 분부와 약속이 남아 있습니까? 저희들은 가기로 결심한 몸으로서 아버지 앞에 나서기를 주저하지 않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어야 되겠사옵니다. 저희의 마음이 아버지와 더불어 하나되고 저희의 몸이 아버지로 말미암아 움직이기를 원하오니, 아버지의 은사 앞에 저희들이 중보자의 역할을 하는 당신의 자녀들 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아침, 남한 각지에 널려 있는 당신의 자녀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이들이 누구를 만나기 위하여 여기에 참석하였겠사옵니까? 그 무엇을 찾기 위하여 나왔겠사옵니까? 당신을 만나고 당신을 찾기 위함이었사옵니다. 당신의 높고 귀한 마음과 가치의 기준을 저희 마음에 모셔 들이기 위함이었사옵니다. 하오니 저희의 마음이 아버지를 간절히 흠모하게 하여 주옵고, 저희 사정이 아버지의 뜻과 일치될 수 있도록 하여 주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여, 한국과 일본과 미국과 독일, 이 4개 국을 중심삼고 세계 복귀의 역사를 일으키시옵소서. 그리하여 40개 국에 널려 있는 120개 소의 성지를 택정한 이 모든 은사의 터전 위에 영계에 가 있는 수많은 영인들을 땅 위에 집결시키시어 그 후손들과 직접 연결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성지를 지키기 위하여 이 시간 기도하고, 이 나라를 흠모하면서 이 나라를 향해 기도하는 당신의 자녀들을 기억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그들을 홀로 버려 두지 마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여, 그들의 모든 소원이 당신의 소원과 동일하게 하여 주시옵고, 그들의 사정이 당신의 뜻과 일치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땅위에 최후로 남아진 복귀의 사명을 앞에 놓고 마음으로 아버지를 사랑하고, 아버지의 실체로서 태어날 수 있는 당신의 자녀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아침, 모인 곳곳마다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고, 이곳을 위하여 염려하고 기도하는 당신의 자녀들, 천배 만배 복을 내려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영계에 있는 수많은 영인들이 저희들과 더불어 일체가 되게 하시옵고, 땅위에서 당신의 뜻을 따라 지금까지 나온, 준비된 수많은 도인들을 당신의 품에 품으시옵소서. 축복받은 가정들을 비롯한 당신의 자녀들이 영광을 찬양할 수 있는 그날이 올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은 1969년 11월 30일, 이달의 마지막 안식일이옵니다. 아버지, 다시 만날 수 없는 이날을 축복하여 주시옵고, 이해의 끝을 향해 나가는 이 시간 위에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60년대를 넘어 70년대를 향해 나가는 하나의 결전장에 섰사오니, 인간을 통하여 남기신 당신의 뜻이 불변하게 하여 주시옵고, 당신의 영광의 은사가 이 땅에 자리잡아 사탄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터전을 공고히 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이 아침부터 오늘 하루를 아버지 앞에 맡기오니 친히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당신만이 주도하시옵고 당신만이 임재하시옵길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남아진 시간 위에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면서, 이 모든 말씀 참부모님의 성호 받들어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땅 위에 살고 있는 인간들 중에는 자기 스스로 영원히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을 가진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루의 생활을 두고 보더라도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무엇을 바라면서 믿고 사는 인생이라는 것 또한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아침에 우리가 직장이나 책임 부서를 향할 때에는 반드시 비는 마음,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하루의 생활에 임하게 됩니다. 하루가 그렇거늘, 한달이 그럴 것이고, 일년이 그럴 것이고, 우리의 생애노정이 또한 그러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바라는 마음, 원하는 마음을 갖고 생활을 하며 지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한 개인이 그렇거늘 한 나라와 세계도 역시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개인이 연결되어 하나의 나라를 이루고 세계를 이루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개인생활이 그 무엇을 원하고 그 무엇을 바라는 마음을 갖고 나가는 것을 보아서, 한 나라면 나라도 그러할 것이요, 세계면 세계도 그러할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만이 아니라 이 천지를 창조한 절대자가 있다면 그 절대자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우리 인간뿐만 아니라 천상세계에 계시는 하나님도 역시 무엇을 바라고 원하는 마음을 지니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현시점을 중심삼고 보게 될 때, 인간이나 하나님이 바라고 고대하는 그 자체는 무엇인가 하면, 무엇을 추구하느냐 하면, 현실보다 더 낫기를 바란다는 사실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 시간까지보다도 차후에 찾아오는 그 시간이 더 낫기를 바라고, 지금의 입장보다도 앞으로의 입장이 더 낫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신앙이라는 문제가 등장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고 바라는 것은 현실적인 것이 아닙니다. 금후의 문제입니다. 소원하는 자체는 현실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반드시 시간이라는 과정을 거친 후에 나와 부딪칠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소원하는, 혹은 믿고 바라는 모든 마음은 현실의 자기 입장보다도 더 나을 수 있고, 현재의 자기 입장에 무엇인가 플러스시킬 수 있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현재에 열만큼의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 열 이상의 가치의 것, 열 이상의 위치를 바란다고 한다면 내가 추구하는 그곳에는 열 이상의 힘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만일 내가 열의 입장에서 백을 바란다면 90을 어떻게 성취하느냐가 문제입니다. 10의 입장인 나에게 90이라는 힘을 플러스시키지 않고는 바라는 소원을 성취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우리 인간에게는 여러 가지가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생사문제나 행.불행의 문제를 자유로이 가려 나갈 수 없는 것입니다. 행복하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으며 비참하게 최후를 마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그 운명길이라는 것은 자기 스스로 해결지을 수 없는 것입니다. 행복이라든가 불행이라든가 혹은 생사 등의 전체적인 문제는 물론 인간을 중심삼고 벌어지고 있지만 인간 자체가 그 모든 문제의 해결 요인이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두고 사망선이나 불행의 고비를 어떻게 타개하느냐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볼 때, 그 불행이라는 것은 자기가 서 있는 현시점보다도 낮은 위치, 혹은 열이라는 힘을 지니고 있다면 그 열이라는 힘을 지니고 있는 현재의 입장보다 더 낮은 위치에 처할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자신에게 손해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피해가기 위해서는 열이라는 힘에 플러스될 수 있는 요인을 어디서 보급받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이 우리 생활 가운데에서 요구되는 절대적 요건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바라는 소원을 믿고 나가기 위해서는 그 소원보다 더 큰 원동력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그 소원을 이룰 수 없습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불행한 환경이나 죽음의 고비를 밀고 나가서 행복한 환경이나 영원한 생명을 갖는다고 하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제한된 한계권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인간의 모습을 가지고 그 이상의 것을 추구하게 될 때는, 모든 것의 동기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모든 전체를 해결 지을 수 있는 동기의 힘, 어떠한 동기의 요소, 어떠한 동기의 중심을 바라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소원을 이루기를 바라기 전에 우리의 소원을 성사시켜 줄 수 있는 그 무엇을 바라는 것인데, 그것은 자신과의 상대적 기준이 아니라 그 이상의 기준으로 추구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 세계에 있어서나 우리 일상생활에 있어서 요구되는 그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신앙이라는 문제가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이러한 신앙의 기준을 중심삼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새로운 결의를 하고 새로운 각오를 가졌다고 했을 때, 우리의 입장은 이미 그 전의 입장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왔고, 또 지금도 살고 있는 환경과 상대적 관계를 맺고 있는 입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현재의 입장을 초월하고 상대적인 입장을 넘어 어떠한 절대적 기준을 중심삼은 입장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런 입장에 설 때 거기서부터 새로운 출발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자가 바라보아야 할 기준은 절대자이신 하나님인 것입니다. 상대적인 우리가 아니예요. 하나님편에서부터 신앙자의 각오는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절대적인 기준을 갖지 않고는 행.불행의 요건을 가려서 우리가 바라는 이상을 향해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나라를 책임진 위정자면 위정자, 세계를 책임진 정치가면 정치가의 입장에서 자기가 관리하고 주관하는 현실의 국가라든가 세계를 바라볼 때, 그 세계의 내용이 복잡하면 복잡할수록 자기의 한계를 느끼고 자기의 힘으로서는 어떻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큰 일을 맡으면 맡을수록 자신의 주변과 능력만으로 하겠다고 자신을 갖는 사람은 그리 많지 많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인지 모르지만 자기에게 힘이 될 수 있는 상대적인 요인, 어떠한 절대적인 힘의 상대적 기준을 스스로 추구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 힘이 현시점에 있는 자기의 힘 이상으로 나타나길 바라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현시점 이상의 것이 되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입장은 피할 수 없습니다. 자기의 환경을 넘어서서 찾은 것이 동기가 되고, 그로 인하여 결과를 맺어야만 새로운 소원, 새로운 승리적 쾌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적 기준 이상의 동기와 현실적 기준 이상의 결과를 추구하는 입장, 즉 현실보다 더 나은 것을 바라고 또 추구하는 입장이 바로 신앙자의 입장입니다. 다시 말하면 신앙자의 생활방법입니다. 이렇게 볼 때 신앙자의 생활방법이란 결국은 무엇이냐? 그것은 자기 이상의 힘, 자기 이상의 동기, 자기 이상의 자리에서 상대적 결과를 가져오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오늘날 제한된 환경에 처해 있는 자신으로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제한된 권내를 초월해야 되는 것입니다. 초월하기 위해서는 자기 힘만으로는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입장에 부딪치면 부딪칠수록 거기에는 정성이 필요한 것입니다. 신앙자의 각오를 중심삼고 볼 때, 그 신앙자의 각오를 하는 데 있어서도 정성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나는 이제 한다'라는 그 결정 자체, 즉 신앙자로서 목표를 중심삼고 결정하는 그 자체에도 정성이 없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정성은 지금까지의 상습적인 생활 환경권의 내용만 가지고는 안 되며, 그 이상의 기준이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우리의 모든 감각을 거기에 집중시켜야 됩니다. 그리고 상습적인 생활을 해 가지고는 안 됩니다. 그 이상의 생활을 해야 합니다. 즉, 이목구비와 촉각 등의 모든 감각기관 전체를 한 중심에 집중시켜야 됩니다. 통일적인 형태를 갖추어서 거기에 집중시킬 수 있는 기원을 마련하지 않으면 현재의 입장을 초월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 말씀에도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눅 12:30)"고 하신 것입니다. 그`다하라'는 말에는 천주적인 내용이 있는 것입니다. 다하는 데는 또 어느 분야에서 다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한 가정에 있어서 아내가 남편에게 마음을 다하는 것은 아내의 입장에서 다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 그 아내의 입장이 전체를 대표할 수 있느냐? 아니라는 것입니다. 전체의 일부분일 뿐 전체를 대표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절대적이 아닙니다. 한 아내로서 절대적인 입장에 서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하나님이 소원하시는 기준, 즉 하나님의 절대적인 기준과 일치될 수 있는 상대적인 입장까지 올라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첫째 계명입니다. 이 계명은 우리의 소원, 즉 바라는 것을 성취시킬 수 있는 절대적인 요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인들이 `믿고 간다' 하는 그 자리는 오늘날 여러분의 생활권내에서 비판받을 수 있는 사정을 결정될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그 자리는 체휼적, 초월적인 경지에서 인연되는 자리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신앙자로서의 새로운 각오를 한다. 그리하여 그 각오 밑에서 살아간다고 하는 것이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 자리는 최고의 자리요, 절정을 이루는 자리입니다. 즉, 분수령과 같은 자리인 것입니다. 그 최고의 자리를 향해 가는 데는 좌우로 치우치지 말고 전후를 비교하면서 가야 되는데 전보다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올라가야 되는 것입니다.
신앙자의 입장은 단순하다면 지극히 단순한 것이요, 복잡하다면 최고로 복잡한 것입니다. 단순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어떤 목표를 향해 한 길로 곧장 가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잘못해 떨어졌다 하게 되면 천태만상의 곡절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복잡하다면 말할 수 없이 복잡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 신앙자가 가는 길은 절정을 향한 길입니다. 여기서 그 절정을 향하여, 즉 그 목표를 향하여 직행하게 될 때는 단순한 것입니다. 목표를 향하여 직행하는 데 필요한 것 이외에는 모든 것을 다 일소해 버리고 오직 그 목표만을 위해서 갈 때에는 단순하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바라는 것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라면 수습하지 못할 문제가 벌어집니다. 거기에는 무한한 복잡성이 개재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은 언제나 그 경지를 바라보고 가야 합니다. 아침에 나설때, 자기의 마음과 하루의 목표는 어디를 향할 것이냐 하는 것을 생각하고 나서야 합니다. 그리하여 출발하는 아침보다도 저녁에 돌아올 때, 혹은 하루를 지내고 나서 잠자리에 들게 될 때 `나는 오늘 좋았다. 오늘은 다행했다. 뜻 앞에 내 면목을 세울 수 있었다. 오늘이야말로 이 한달을 대신할 수 있고 이 한해를 대신해서 자랑할 수 있다' 할 수 있는 자리에 서야 합니다. 치열한 투쟁이 없이는 그런 자리에 설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호흡을 하고 있지만 평상시에는 그것을 잘 못 느낍니다. 또 자기의 가슴에 맥박이 뛰고 있다고 하는 것이 여실한 사실이요, 부정 할 수 없는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평상시에는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이 눈이 깜박거린다는 것을 평상시에 느끼느냐? 물론 고의적으로 깜박거리는 것은 느끼지만 평상시에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그 자체내에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느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신다고 한다면 그것을 인정할 수 있겠는가? 부정할 수 없는 진실된 사실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어도 그것을 인식하려고 해야 느껴집니다. 또 하나님이 내 마음속 깊은 자리에 계신다는 것을 느낄 수 있겠는가? 눈에 보이고 느낄 수 있는 것도 있다고 생각하고 생각을 집중해야 느낄 수 있거늘,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의 마음속 깊이 계신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정신을 가다듬지 않고는 좀처럼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냐? 아닙니다. 분명히 존재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불행의 길로 안내하고자 하시는 것이 아니라 최대의 행복의 길로 안내하고 싶으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사지백체 가운데 어느 한부분이라도 괴로운 자리로 가고 싶어하는 것이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사지백체 모두는 편안한 입장에 있기를 바라고 거기에 부합될 수 있게끔 작용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불편한 자리에 들어가면 대번에 압니다. 공기가 탁한 자리에 가게 되면 대번에 아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찾아가는 길 앞에 있어서 좋지 못한 일이 있으면 대번에 아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양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양심의 가책을 받으면서 신앙 생활을 해도 된다고 하는 종교는 있을 수 없습니다. 마음이 기쁘고, 마음이 편안하고, 마음이 좋고, 마음의 해방을 제시할 수 있는 그런 내용을 중심삼아 자극을 받고 관계를 맺으라고 가르쳐 주는 종교의 교리는 있을 수 있으되, 그 반대의 입장에 서라고 가르치는 종교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마음이 편안하고 기쁠 수 있는 자리에 서기 위해서는 현실적이고 평범한 삶의 환경을 초월해야 됩니다. 보통 사람들과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현 사회의 제반 여건과 상대적 관계를 갖고 화합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초월하라는 것입니다. 초월하여 거기에서 자신이 주체가 되어야 됩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을 끌고 나가야 합니다. 새로운 주체가 되라는 것입니다. 새로운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마음이 주도할 수 있는 기준을 세우지 않고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신앙자의 출발점이라는 것은 외적인 세상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양심입니다. 그러기에 자기의 양심을 중심으로 그 이상의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 신앙이 필요한 것이지 그 이하의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 신앙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그 이상의 자리라고 하는 것은 어떠한 한계선을 두고 말하는 것이냐? 개인이면 개인으로서 갈 수 있는 한계선이 있습니다. 남자면 30억 인류 가운데 15억에 가까운 남자로서 갈 수 있는 한계선이 있고, 여자면 또 여자로서 갈 수 있는 한계선이 있습니다. 또한 남자와 여자가 합해서 가정을 이루면 그 가정으로서 갈 수 있는 한계선이 있습니다.
그런 고개들이 있을 것입니다. 개인이면 개인으로서 가야 할 고개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도 그렇게 넘어야 할 고개가 있을 것인데 그 고개는 평지가 아닙니다. 최고의 정점인 것입니다. 그 곳을 향해서 가는 데있어서 곧바로 고개를 넘어가려 할 것이 아니라 산맥을 타고 따라가야 됩니다.
여러분, 저 삼각산도 최고봉을 중심삼고 작은 봉우리들이 사방으로 솟아 있고 작은 산맥들이 사방으로 뻗어 있습니다. 여러분 각 개인도 그 작은 산봉우리와 같습니다. 산에 올라가는 사람의 소원은, 어렵다고 하더라도 그 산의 상상봉을 정복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정성을 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려가겠다고 소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내려가겠다고 정성들이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 있어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내려가겠다고 정성들이는 사람은 한 단계 더 올라가기 위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자기 나름대로 찾아 올라가야 할 산봉우리를 향해서 산맥을 타고 올라가는 데 있어서, 올라가기 위해서 내려가는 거예요. 그런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그런 일이 많습니다. 기도를 하더라도 어떤 때는 무한히 은혜될 때가 있습니다. 계속적으로 쭉 기도를 해도 계속적으로 무한히 은혜가 되는 때가 있어요. 신앙생활을 해 나가다 보면 틀림없이 그럴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왜 그러냐? 우리의 마음이, 하루 가운데에도 아침이 있고 낮이 있고 저녁이 있고 밤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년에 춘하추동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침은 봄과 마찬가지요, 낮은 여름과 마찬가지요, 저녁은 가을과 마찬가지요, 밤은 겨울과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사람 사람의 형도 전부 다릅니다. 봄 절기에 해당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겨울 절기에 해당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겨울 절기에 해당되는 사람이 여름 절기와 같은 상대적 기준과 만나면 은혜가 오는 것입니다. 겨울 절기형인 사람이 겨울 절기와 같은 입장에 서면 눈이 녹지 않습니다. 은혜를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모두 그 소성이 다르다는 거예요. 동서남북, 사방을 두고 볼 때, 인간도 동서남북 그 각 방향에 위치할 수 있는 각각의 타입이 있다는 거예요. 그러므로 그 사람 나름대로 기도하는 데 있어서 은혜되는 시간도 다른 것입니다. 꼭 밤이나 새벽에만 기도하는 데 있어서 은혜를 받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낮에, 어떤 사람은 오전에, 어떤 사람은 오후에 기도해야 은혜를 받습니다. 이와 같이 그 은혜되는 시간이 서로 다릅니다. 또한 계절에 따라서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왜그러냐? 그것은 이 우주의 모든 존재는 돌면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돌기 때문에 방향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쪽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동쪽에 있고, 동쪽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북쪽에 있고, 북쪽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서쪽으로 돌아갑니다. 이렇게 입장이 달라지는 환경에 따라 기도하면 기도의 힘이 달아지는 것입니다. 개개인의 기도하는 입장이 전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기도하는 것은 내려가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신앙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뚜렷한 목표입니다. `나는 기필코 이 길을 가겠다' 하는 뚜렷한 목표예요. 이 목표가 흐려질 때 신앙자의 생활은 무너지는 것이요, 아무리 결의를 하고 각오를 해도 목적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목적도 없이 백번 각오하면 뭐 합니까? 목표를 뚜렷이 정해 놓고 백번 결의해야 목표 안에 한 걸음이라도 더 가까이 가지는 것이지 목표가 희미해 가지고는 아무리 결의를 한다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개인 개인은 하나의 작은 산봉우리와 마찬가지입니다. 그 산봉우리는 반드시 그 동기가 되어 있는 산맥을 통해서 뻗어 있습니다. 자기가 모든 산맥을 거느릴 수 있는 주봉이라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고 절대적 입장이 되어 있지 못하면 언제나 상대적 입장에서 무엇을 추구하는 입장, 즉 절대적인 그 무엇을 찾는 입장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는 주봉이 아닌 하나의 산봉우리임에 틀림없기 때문에 주봉을 찾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주봉을 찾아가는 데 있어서는,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시야가 달라집니다. 지금까지는 그 골짜기에 있는 마음밖에 안 보였던 것입니다. 자기가 처해 있는 봉우리에서 더 높은 저쪽 봉우리에 대해서는 깜깜 무소식이었어요. 알려고 해도 알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 봉우리에 대해서 알려면 그 봉우리로부터 가르침을 받아야 됩니다. 그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순응해야 합니다. 절대적으로 믿어야 합니다. 절대적으로 믿기 전에는 가르쳐 주어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학교에 가서 공부할 때, 대학교면 대학교에서 교수가 강단에 서서 이것은 이렇다고 강의를 하면 학생들은 그것을 실험해 보지 않았지만 그 교수를 믿기 때문에 그 교수의 강의 내용을 백 퍼센트 다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모든 장애 요건을 제거한 입장에서, 교수가 가르치는 내용을 전부 자신의 것으로 만들겠다고 하는 결의 밑에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만약에 자기가 그 교수의 강의 내용을 받아들이지 못하겠다고 한다면, 즉 그 교수를 믿지 못한다면, 그것을 자기가 모두 검토하고 실험하여 수십년 동안 강단에서 지내온 교수 정도가 되어야 비로소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낮은 봉우리의 입장에 있는 사람이 높은 봉우리의 사정을 알려면 높은 봉우리를 절대적으로 믿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비판해 가지고는 현재의 자리에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발전할 수 없는 거예요. 그 이상을 넘어가려면 무한한 투쟁을 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환경이 갖추어져 있는데, 길이 모두 닦어져 있는데, 그 닦여진 길을 가면 될텐데도 불구하고 그 길을 가지 않고 자기 스스로 알아서 가겠다고 한다면 무한한 투쟁을 해야 하고, 그래도 그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러면 우리 인생길을 중심삼고 볼 때 우리가 찾아가야 할 그 목적, 우리가 소망하는 최후의 기준은 얼마나 큰 것이냐? 그것은 대한민국이라고 하는 국가적인 기준이 아니요,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적인 기준도 아닙니다. 그것은 자그마치 역사성을 초월한 기준입니다. 그 기준이 바로 우리 통일교회에서 말하는 천주주의입니다. 즉, 하늘땅 전체를 합한 내용을 지닌 인간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 높고 귀한 가치를 추구하는 입장에서 그것을 믿지 못하여 자기가 전부 다 실험해 보고 알아 가지고 가려고 한다면 못 갑니다. 믿어야 합니다. 믿는 데는 상대방이 주장하는 바를 내가 주장하는 것 이상으로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만약 그 주장하던 사람이 쓰러지는 날에는 자신이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이런 싸움을 지금까지 해 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하라'는 한계점이 어디냐? 그것은 역사성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절대 권한에 가까운 기준을 중심삼고 일치될 수 있는 자리, 즉 최후의 기점과 연결될 수 있는 그 자리를 중심삼고 다하라는 것입니다. 그 자리는 하나님이 바라시는, 하나님에 대한 상대의 자리입니다. 통일교회에서는 그러한 자리, 그러한 기점을 하나님의 심정이라고 합니다.
신앙자는 앞으로 앞으로 전진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의 산맥을 따라 주봉을 향하여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 주봉을 향하여 가는 데는 여러 길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의 큰 산이 있으면 그 산의 주봉을 중심삼고 사방으로 산맥이 뻗어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산맥을 중간에서 절벽이 되어 도저히 갈래야 갈 수 없는 산맥도 있을 것입니다. 형형색색의 모양을 지닌 천태만상의 산맥이 뻗어 있을 거예요. 그렇거늘, 오늘날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
자신이 지금 가야 할 길이 막혔을 경우, 아무리 억지를 써서 가려 해도 그 길은 지나갈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현재의 그 골짜기를 넘어 다른 봉우리를 타고 가야 합니다. 다른 봉우리를 타고 가려면 지금까지 자신이 갖고 있던 관념이나 생활적인 습관, 전통적인 내용 등을 전부 부정하고 청산지어야 합니다. 그래 가지고 주봉을 향해 직행할 수 있는 하나의 길을 모색해야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주봉을 향해 가는 데 제일 가까운 길을 찾을 것입니다. 그 길을 찾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자기 혼자서 알아 가지고 가겠다고 하면 안 됩니다. 물어 봐야 하는 것입니다. 산에 올라가는 사람이 있으면 물어 봐야 합니다. 자기보다 앞서 가는 사람이 있으면 `당신이 가는 길은 어떻게 되어 있소?' 하고 물어 봐야 합니다.
주봉으로 가는 길에는 동으로 뻗은 산맥, 서로 뻗은 산맥, 남으로 뻗은 산맥, 북으로 뻗은 산맥, 여러 산줄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제일 가까운 줄기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 길을 중심삼고 주봉을 향해 가는 데있어서는 내려간다고 해도 내려가는 것이 아닙니다. 주봉을 향해서 가는 것이기 때문에 올라가는 거예요. 거기에는 시련 고통이 있고 죽음의 교차로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망하게 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부딪쳐 나감으로 말미암아 연단시키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극복하는 날에는 주봉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주봉을 향해 가는 데는 그런 고비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 고비가 많을지라도 주봉에서 뻗은 산맥을 타고 가는 사람은 순순히 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동쪽으로 가야 하는데 서쪽으로 가고 있는 사람은 돌아가야 됩니다. 180도 반대 방향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걸 못하겠다면 안 됩니다. 서쪽에 있는 사람이 동쪽에 있는 사람이 가는 방향을 보고 `저 사람이 저리로 가니 나도 그렇게 가야지' 하고 가다 보면 결국 내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반대의 환경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인가? 주봉을 아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가야 할 목적지, 신앙의 중심 목적기준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이것도 모르고 신앙길을 간다고 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여러분, 백운대만 올라가더라도 조난당하는 사고가 벌어지곤 하는데 신앙길은 어떤 길입니까? 신앙길이라는 것은 복잡한 길입니다. 제일 겁나는 길입니다. 한번 가다가 실수하면 후퇴해서 다시 갈 수 없는 길입니다. 그것으로 마지막입니다. 한번 출발했으면 끝까지 가야 할 길입니다. 가다 말다 하면서 갈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한번 떨어지는 날에는 크나큰 타격을 받게 됩니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한번 기운을 잃어버린 사람은 다시 회생하기 어렵습니다. 보통 길은 가다가 절벽이 앞을 가로막고 있으면 다른 길로 피해 갈 수 있지만 신앙의 길은 가다가 떨어지면 대절벽이기 때문에 소생할 길이 없습니다.
여러분, 고대 문화국가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종교를 중심으로 새로운 문화를 창건했던 민족이 망했을 경우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민족은 새로운 종교의 힘을 찾기 전에는 재기할 도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세계를 호령할 수 있는 문화를 그 목적의 한계선으로 삼고 나아갈 때, 그 목적을 달성하기까지는 발전할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일단 그 목적을 달성한 자리에서, `이젠 됐다'고 하는 자리에 서면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떨어지기 시작하면 다시는 수습할 수 없는 것입니다.
기독교를 중심삼은 현재의 문명권이 지금 그러한 한계점에 와 있습니다. 이것이 떨어지면 재기할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세계 인류가 재기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새로운 방향의 신앙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없이는 현시점의 세계를 수습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우리 통일교회가 바라고 나가는 최고의 자리가 어떤 곳이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통일교회가 바라보는 신앙의 목적지가 어디냐? 그 목적지를 향하여 가는 데 있어서 중심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지 못하고 희미한 신앙을 가진 사람은 언제든지 교회를 팔아먹을 수 있고, 언제든지 배반하고 그 길을 망칠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 혼자만 망하는 것은 괜찮지만 따르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까지 피해를 입히고는 용서받을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중심에 대한 확실한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중심이 없는 신앙관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까 말한 것과 같이 산맥을 타고 `나는 저 주봉을 향해 가겠다. 내 일생을 두고 가겠다.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극복하고 가겠다'고 하면서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그렇게 나섰으면 밤이나 낮이나 그것을 위해 준비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나섰을 때는 거기에 준비한 모든 전체를 투입해야 하는 것입니다. 투입하는 데 있어서도 있는 정성을 다해 가지고 투입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계속적으로 갈 수 없을 경우에는 거기에 천막을 치고 제2차 훈련을 해 가지고라도 가야 되겠다고 해야 합니다. 그런 길이 신앙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까지의 문화와 역사도 수많은 종교를 중심삼고 이렇게 수습되어 나오는 것입니다.
어느 길이 주봉으로 직행하는 길이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을 모르고 사는 인생은 어떤 골짜기나 산봉우리, 혹은 어떤 7부 능선, 5부 능선, 2부 능성의 어느 한 곳에서 태어나 거기서 살다가 가는 인생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는 것이 내 소원이야. 이렇게 사는 것이 내게는 보람 있는 생활이야'라고 생각하고 생활하는 사람은 결국 그러한 사람밖에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최고의 산맥을 추구하고 최고의 영봉을 점령하여 거기에서 바라보이는 모든 것을 관조하면서 무한한 가치를 느끼기 위해서는 그 이상을 희망해야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통일교회를 믿고 나오고 있는데, 여기에 뭐가 있습니까? 여러분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대한민국입니까? 이 목표가 희미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하나님은 절대적인 분입니다. 그 하나님에게는 절대적인 하나의 기준이 있는데 그러한 하나의 기준 앞에 상대자로서 나타날 수 있는 기준도 하나인 것입니다. 만 우주를 대표한 하나입니다. 둘일 수 없습니다. 그래야만 하나님과 상대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절대적인 하늘과 상대적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싸워야 됩니다. 싸워야 돼요. 그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통일교회가 종교를 중심삼고 싸움을 끝낼 수 있느냐? 그런 무엇이 있느냐? 우리가 바라는 신앙의 중심은 싸움을 끝낼 수 있는 자리입니다. 그야말로 절대적인 자리입니다. 절대적인 하나님을 추구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이 한 분이시므로 하나의 자리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자기라 둘, 셋 있으면 싸워야 합니다. 거기에는 누구도 못 따라옵니다. 문제는 거기에 있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교파가 있습니다. 이 수많은 교파 가운데 어떤 교파가 그 절대적인 하나일 것인가. 열 교파 가운데 최고의 교파일 것이냐? 아닙니다. 자그마치 `수많은 교파 가운데 최고다. 나아가서 이 시대 앞에, 더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최고다' 할 수 있는 교파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통일교회는 그 수많은 교파를 하나로 통일하자고 하는 것입니다.
통일하는 데 있어서 우리가 통일당하는 것이 아니라 통일시키자는 것입니다. 통일시키기 위해서는 상대적 입장에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싸워야 합니다. 그러면 싸우는 데 있어서 무엇을 가지고 싸울 것이냐? 무엇을 가지고 그 일을 실천해야 하느냐? 말씀을 가지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은 절대자 앞에 상대가 될 수 있는 말씀이어야 하고, 그 인격은 절대자 앞에 상대가 될 수 있는 인격이어야 하고, 그 심정은 절대자 앞에 상대가 될 수 있는 심정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을 합해서 지니고 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싶으면 나와 말씀하시고, 하나님이 일하시고 싶으면 나와 일을 하시고, 하나님이 사랑하기고 싶으면 나와 사랑하실 수 있는 자리까지 나가야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절대자이십니다. 뭐 시시하게 너도나도, 누구든지 보따리 싸 가지고 끌고 다니면 되는 줄 아세요?
지금 통일교회에도 시시껄렁한 패들이 많습니다. 지금까지 별의별 꼴을 다 보았습니다. 그런 녀석들, 얼마나 가나 보겠습니다. 마음으로야 전부 다가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자에게는 각오가 필요합니다. 그것도 자기 입장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입장에서 각오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이끌어 주신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등에 업힌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절대적입니다.
그 길을 가는 데에는 모험이 따릅니다. 오늘날 우리가 가고 있는 길은 세상적으로 볼 때는 정상적이 아니라 비정상적인 길입니다. 거기에는 비(非)자가 몇천 개 몇만 개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정상적으로 만들려면 몇천만 번 싸워야 됩니다. 이 싸움의 길을 초월하려면 절대적으로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상대적인 내용을 가지고 기준을 세우려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믿은 마음이 있을 때에는 그 자리에 올라갈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마음속으로 세계의 대통령이 되고 싶다고 하면, 아니 세계의 대통령이 되겠다라고 하면, 그리고 그에 상응한 노력을 하면 실제로 대통령이 될 수 있습니다. 마음 세계가 그런 것입니다. 그러한 입장에서 이적 기사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서는 초월적인 힘이 나와서 상대를 눕혀 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통일교인들 가운데에도 자기 나름의 무엇을 해 가지고, 즉 누더기 보따리를 지고 다니는 거지패들이 많습니다. 통일교회에서 동냥해 가지고 그것을 다시 팔아먹겠다는 거지패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 패들과 어울려 다니는 껄렁껄렁한 것들, 어디 두고 보라는 것입니다. 어떤 명승지를 가게 되면 그 가는 길목에 불량배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가 그 지방의 전체 책임자인 양 오고 가는 사람들을 옆으로 빼 가지고 돈을 우려 내려고 하는 패들이 많이 있는데 그런 패들과 같습니다.
여러분은 통일교회에 들어왔으면서도 선생님에 대해서 자신있게 알고 있지 못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통일교회 원리 가지고 밥벌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소위 도인이라 해 가지고 별의별 짓을 다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용서할 수 없는 적그리스도입니다. 밥벌이를 하면 세금을 바쳐야 하는데 세금도 안 바칩니다. 이런 자들이 영계에 가면 사탄까지도 참소하게 됩니다. 그런 자를 성경에서도 주의하라고 했습니다. 그런 자가 미혹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 동무가 동쪽에 있으면 `이리로 가야 해. 이렇게 가는게 너하고 나하고 제일 가깝지 않느냐' 하면서 곁길로 끌고 가는 사람입니다. 끌고 가는 사람은 곁길로 가는 것을 빤히 알지만, 따라가는 사람은 모르는 거예요. 이러한 일이 많이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의 복귀노정에서 수많은 적그리스도를 대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통일교회가 이만큼 자라는 데 있어서도 적그리스도가 많았습니다. 여자 적그리스도도 한 사람만이 아니었습니다. 자기가 제일이라고, 자기가 인류의 어머니라고 하는 적그리스도가 많았습니다. 입은 쪼글쪼글하고, 이빨은 빠지고, 머리카락은 하얀 80세된 할머니가 세계에 없는 아들딸을 낳고, 인류의 어머니가 되겠다고 하는, 기가 막히는 일도 있었습니다. 젊은 사람이 그런 얘기를 하면 누구든지 믿을 수 있지만 팔다리가 불편한 노인임에도 불구하고 머리 들고 나오는 거예요. 별의별 꼴을 다 보면서 지금까지 나왔습니다.
왜 그런 일이 생기느냐? 물론 복귀도상에서는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대통령 선거를 하기 전에 출마하겠다면 누가 뭐라 합니까? (웃음) 욕하는 사람이 더 이상한 거예요. 투표하기 전까지는 자신이 대통령이 되겠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지금이 그런 때입니다. 그러나 자신이설 때 못 설 데를 알지 못하고 눈을 뚱그렇게 뜨고는 이것 붙들고 저것 붙들고 하면 망하는 것입니다. 자기 혼자 곱게 망하는 것은 괜찮지만, 자기로 인하여 문중 전체를 망하게 하고, 나라까지 망하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과거의 신앙체제에서는 괜찮았지만 지금은 세계의 사조가 전부 최고봉을 향해 가는 때이기 때문에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은 자기의 정체를 전부 폭로하는 때입니다. 공산당도 이제까지는 세계 제패라는 붉은 야욕을 숨기고 나왔지만 지금은 전부 폭로하는 때인 것입니다. 민주주의면 민주주의, 신앙자면 신앙자 모두 폭로할 때라는 거예요.
그렇다고 해서 자기 자신이 `나는 이렇소' 하고 나타낼 수는 없는 거예요. 통일교회 문선생이 아무리 위대하다고 해도 내 자신이 그렇다고 하면 되나요? 배경이 맞아야지요. 정상적인 뿌리를 갖추어야 되는 것입니다. 뿌리없이 물 위에 뜨는 부평초와 같아서는 안 되는 거예요. 정상적인 기준에 뿌리를 박고 올바른 줄기를 뻗어, 사방에 그 형태가 드러나야 되는 것입니다. 다른 나무 뿌리에 포도나무 가지를 접붙여 놓지도 않고 포도나무라구요? 그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자의 자세는 그래서는 안 돼요. 신앙자는 목표에 대한 인식이 확실해야 됩니다. 누가 뭐라 해도 자신의 생명을 투입해 가느니 만큼, 그 목표를 자기 생명 이상의 가치로 인정해야 합니다. 중심에 대한 확실한 신뢰를 가져야 되는 거예요. 아무리 자기를 지도하는 지도자라 할지라도 그를 감별해야 됩니다. 그리하여 확실한 신념을 가져야 됩니다. 그렇게 될 때 거기서부터 통일교회에 대한 신념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려면 하나님에 대해서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 알아야 돼요. 예수님을 믿으려면 예수님에 대해서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소설이나 세계적인 명작을 쓰는 사람이 성경을 읽게 되면, 훌륭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문장도 그렇고 내용도 그렇다는 거예요. 뭐 밤 도깨비와 낮 도깨비가 함께 춤추는 것 같은 거예요. 성경에 체계가 있나요? 뭐가 있나요? 그냥 이랬느니라, 저랬느니라만 늘어 놓았지요. 그렇지 않아요? 문학적 두뇌를 가진 사람이라면 까짓 것 몇 달 동안에 만들어 낼 수 있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려면 예수님에 대해서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예수님이 2천년 전에 있었는지 없었는지 알게 뭡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지 아닌지 알게 뭐예요. 이스라엘 민족을 전부 자기 수중에 넣기 위한 꿍꿍이속을 갖고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했는지, 또한 절대적인 자리에서 자신을 신봉시키기 위해서 그랬던 것인지 알게 됩니까? 그런 것을 다 감정해야 되는 겁니다. 덮어놓고 믿고 덮어놓고 교회에 간다고 하는데, 그래 가지고 안심하고 천당 가겠어요? 그래 가지고는 지당도 못 갑니다. 천당이 무엇입니까? 남이 믿고 간다고 해서 자기도 가는 곳이예요? 남이 믿고 가니까 자기도 믿고 간다는 사람은 장애벽에 부딪치면 다 깨져 나갑니다. 아무리 나라가 반대해도 그 이상의 신념을 갖고 있으면 남아질 수 있으되 그러한 신념을 갖지 못하고 있으면 깨져 나가는 겁니다. 깨져 나가게 되어 있어요.
우리가 바라는 신앙의 중심이 이 세계의 어떤 사조나 어떤 권력 앞에 밀려 나가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존재를 믿고 나가는 것이 우리가 바라는 최고의 신앙의 기준이 아닙니다. 그러한 자리는 절대적인 자리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확실해야 됩니다.
그러고는 `나는 간다. 틀림없이 간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세계는 이러한 세계다. 다른 어떤 기준이 있을 수 없다'고 할 수 있는 확실한 신념으로 가져야 합니다. 세월이 흘러 죽어 가는 일이 있더라도 그 신념이 변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지상에서 이루지 못할 때는 영계에 가서라도 하나님이 바라시는 세계를 개척해 가야지 이대로 지체할 수는 없다는 신념을 갖고 죽어야 저 나라에 가서도 지상에 재림하여 협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영부영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생활을 하다가 죽어 보십시오. 지상 재림을 할 줄 압니까? 지상재림하는 것을 안다고 해서 누구라도 지상재림할 수 있는 줄 아세요. 그런 것은 여러분보다 영계에 있는 영인들이 더 잘 압니다. 그런데 그 영인들이 왜 못 오느냐? 그것은 그들이 땅 위에서 그러한 신념을 갖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신앙의 중심에 대해서, 그리고 목표에 대해서 확실히 알아 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초월적인 존재여야 됩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자기의 현재의 입장보다 더 낫기를 바라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그 절대적인 요구의 기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내용을 지닌 처음의 신앙의 중심 기준이 불변해야 된다는 겁니다. 춘하추동 사시가 변하는 것도 일년권내에서 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무리 환경이 변한다 할지라도 자신의 목표 아래에서 놀아야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신념 아래서 놀아나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신념이 왔다갔다해서는 아무것도 안 됩니다. 신념이 확실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각오가 무엇입니까? 결심입니다. 그럼 결심을 할 때 무엇을 갖고 합니까? 자신만을 믿고 결심합니까? 대상을 두고, 중심을 추구하고 하는 것입니다. 즉, 중심을 위해 `나는 한다'고 하면서 하는 것입니다. `한다'고 하는 것은 `했다'와 다릅니다. `한다'는 미래와 결부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간성을 넘은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해야 되느냐? 하는 여하에 따라 그 사람의 인격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격위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그 창조물의 가치가 인정될 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가치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그 가치가 결정되지 못했기 때문에 복귀라는 사명을 중심삼고 창조물의 가치를 결정짓기 위해 지금까지 걸어 나오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구원섭리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신앙의 목표에 대해 확실한 신념을 가져야 됩니다. 그것을 갖지 않으면 아무리 각오를 하고 결심을 한다 해도 그것은 다 흘러가는 것이 됩니다. 자기 나름대로 아무리 각오와 결심을 했다 하더라도 누구든지 다 흘러가는 것입니다. 자기는 아무리 꽁꽁 싸 매 놓아도 도둑질해 갈 것은 다 해 갑니다. 이와 마찬가지예요.
천주교가 신교를 반대하던 중세사회를 보더라도 신앙을 중심삼고 죽어간 자들이 많았습니다. 그 순교의 반열에 동참한 자들은 나의 하나님이라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그 누구도 느끼지 못하는 깊고 깊은 체휼을 통하여 세상 사람들이 반대해도 그것을 넘었습니다. 그 이상의 가치를 가졌던 것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투입하더라도 손해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말미암아 선의 결과가 맺어진다는 확신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확신을 갖지 못하고 막연히 내가 이렇게 죽으면 천국 데려다 주겠거니 하는 사람은 천국 못 가는 거예요. 가다가 걸리는 겁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통일교회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새로이 신앙자의 각오를 가져야 됩니다. 중심에 대한 확실한 신념을 갖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 중심을 세계 이상의 중심으로 알기 전에는 세계를 요리할 수 있는 신앙생활을 할 수 없는 겁니다. 신앙의 인격을 가려 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신앙의 중심에 대해 확실한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에게는 그게 제일 문제입니다.
앞에서 말한 산의 주봉에 올라가길 바란다면 밤이나 낮이나 그것을 중심삼고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의 세계에서 천번 만번 가 보고 옳은 길이라고 느꼈을 때 비로소 행동할 수 있습니다. 마음속으로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행동이 안 되는 것입니다. 마음속으로 천번 만번 다짐하고 나서 가야 하는 겁니다. 스스로 다짐하고 나섰기 때문에 가다가 어떠어떠한 위험이 닥칠 때 그 위험을 해결하기 위해 재료를 수습하는 것이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신앙생활은 그냥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이란 것은, 주봉이면 주봉을 정복하기 위하여, 상상봉이면 상상봉을 정복하기 위하여 거기에 필요한 재료를 수습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어려운 고비가 닥치면 그 고비를 피해 돌아갈 것이 아니라 헤치고 나아가야 됩니다. 지금 당하고 있는 어려운 일보다도 더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될지라도 나는 거기서 망하지 않는다고 하는 진지한 입장에서 그 어려움을 내것으로 소화시킬 수 있는 주체적인 자아를 발견하기 위해서 노력해 가야 됩니다.
그렇게 할 때 내 앞에 닥쳐오는 어떠한 시련이나 폭풍우는 문제가 안됩니다. `시련이나 폭풍우야 오너라. 나는 여기에서 내일의 승리를 다짐할수 있는 빛나는 재료를 수습해야 되겠다'고 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통일교회에 들어와서 별의별 짓을 하는 녀석들이 많습니다. 뭐가 어떻고 어떻다고 하는 말에 덩덜아 춤추고 놀아나는 패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신앙자의 태도가 아닙니다.
신앙자에게는 `제일 험하다'는 말, `어렵게 간다'는 말, `나쁘다'는 말이 필요합니다. `제일 쉽게 간다'는 말, `좋다'는 말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나쁘다는 말을 들어야 해요. 그런 말이 자신을 망하지 않게 하는 관건이 될 수도 있습니다. 좋은 것은 누구나 다 좋은 것이지요. 그런 것은 필요없는 거예요.
대한민국이 부흥하는 데 동정할 게 뭐 있어요? 대한민국이 망할 수 있는 부패의 요인이 있으면 그것을 제거하는 데 주력해야 되는 거예요.
요즘 처음 들어온 사람들을 보면 사냥개처럼 냄새를 맡으려고 합니다. 냄새를 맡아도 정상적으로 맡는 것이 아니라 주둥이를 끌고 다니면서 똥개처럼 똥 냄새만 맡으려고 합니다. 통일교회에 들어왔으면 선생님을 중심삼고 문제를 해결해야지 시시한 껄렁패들과 어울려서 무슨 일을 하겠어요? 그런 시시한 껄렁패를 대하는 자체가 시시한 거예요. 선생님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1969년도가 이미 저물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자세를 확립해야 할 때가 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신앙자로서, 통일교회의 신자로서 가져야 할 새로운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중심에 대한 확고한 신뢰를 갖는 겁니다. 그러한 신념을 갖기 전에는 아무리 각오를 해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이 길을 감에 있어서 어떠한 일에 부딪치게 되면 나는 어떻게 될 것이냐? 자문자답해 보십시오. 이 길을 가다보면 여러분 앞에 그 누구보다도 가까운 사람이 여러분을 유인할 것입니다. 달콤하고 귀가 솔깃한 말을 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는 길을 가로막고 여러분을 그 자리에서 끌어내기 위해 별의별 짓을 다 할 것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할 것이냐? 자기 얼굴을 보고 물어보라는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은 `비켜라 이 요물아. 나는 밤이나 낮이나 이 길을 갈 것이다'라고 해야 됩니다. 그거 얼마나 멋집니까?
여러분, 역적의 종자가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배반자의 종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얼마만큼 심각한가 하는 그 도수에 따라 누구든지 80퍼센트 90퍼센트 백퍼센트 배반자가 될 수 있습니다. 왜? 배반자의 혈통을 타고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배반자의 혈통을 타고났기 때문에 본래부터 배반자인 것입니다.
이제는 정녕 그런 것을 시험당할 때가 올 것입니다. 그것이 원수로부터 올 때 나는 자신있다고 하겠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면 어떻게 할것입니까? 하나님으로부터도 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문선생이 들이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여러분이 참것을 알았으니 여러분을 용광로에 집어넣어 볼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 여러분은 어떻게 할 것입니까? `아이고! 이럴 줄은 몰랐다'고 할 것입니까? 그럴 줄 몰랐다고 할 수 있는 그 일이 벌어지면 어떻게 하겠어요? 여러분은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합니다. 통일교회 자체가 껄렁껄렁한 것이 아닙니다. 선생님은 지금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깨달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나라를 위해 맹세했다면 진짜인지 테스트를 한번 해보아야겠습니다. 선생님도 지금까지 그러한 시련과 테스트를 당해 나왔습니다. 참인지 아닌지는 딱 부딪쳐 보아야 합니다. 어떤 것이 굳은 것이고 어떤 것이 무른 것인지는 부딪쳐 보아야 할 수 있습니다. 굳은 쇠를 감정하는 데에는 그것이 제일 간단한 방법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사람은 굳은 자인지 무른 자인지 조금만 고생시켜 보면 대번에 알 수 있습니다.
굳은 것이라면 망치로 때려도 차이가 안 납니다. 그렇지만 무른 것은 조금만 힘 주어 때려도 금방 표시가 납니다. 감별법은 간단해요. 그렇게 굳은 것과 무른 것을 감별하는 곳이 통일교회입니다. 그 시험조건이 원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을 원리가 심판하는 겁니다. 복귀노정을 가는 데있어서 여러분의 길목을 원리가 바라보고 있는데 그것이 시험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면 통일교회 문선생은 어떻게 했느냐? 이 시험을 통과했습니다. 원리를 알고 보면 시시한 말은 들을래야 들을 수가 없습니다. 어제 저녁만 해도 통일교회 문선생이 뭐 어떻고 어떻고 하는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동대문 어디인가로부터는 선생님 외에 뭐가 나와야 된다느니 하는 별의별 말이 다 들려 왔습니다. 별 도깨비가 다 나오고 있습니다. 얼굴들을 보면 도둑 같은 얼굴을 해 가지고 뭐가 어떻고 어떻다고 야단입니다.
그러면 자기들이 어디서부터 출발했나요? 통일교회에서 출발했으며 통일교회 선생님이 인정하는 자가 되어야지요. 선생님이 축복을 안 해주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어요? 세례 요한도 하나님으로부터 축복받고서야 유대교의 전통을 상속받지 않았습니까? 예수님도 세례 요한으로부터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고서야 메시아로 나섰잖아요? 증거를 해주어야 됩니다. 자기가 주인 노릇을 해먹으려면 선생님이 증거를 해주어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선생님이 증거를 해주지도 않았는데 어떻고 저떻고 합니다. 그런 자들을 어떻게 증거해 줍니까?
지금까지 별의별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 가운데는 여자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했습니다. 언젠가는 그런 사람들 데려다 간증을 시키려고 합니다. 그렇게 돌아다니다가 다시 통일교회에 들어 왔으면서도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못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그들이 몰라서 그랬기 때문에 아무말도 하지 않습니다. 선생님이 데리고 있는 협회의 사람을 평하는 것은 선생님을 평하는 것입니다. 시시한 자들이 협회장이 어떻니 간부가 어떻니 물고 늘어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은 싸구려 넝마주이입니다. 고급 물건은 아무나 못 가집니다. 무슨 부흥 강사니 무슨 장로니 하는 관점에서 선생님을 보면 안 됩니다. 그들 자신은 자신이 싸구려라고 느끼지 못합니다. 그들처럼 선생님은 공석에 안 나타나기 때문에 통일교회 문선생을 봤다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선생님은 싸구려 넝마주이가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 때가 왔기 때문에 여러분을 모아 얘기하는 것입니다.
통일교회는 선생님으로 말미암아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니 밥을 얻어 먹으려면 자기가 거지라는 간판을 붙이고 얻어 먹으라는 것입니다. 밥을 얻어다 놓고 부자 행세하며 잔치하지 말라는 겁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은 따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아무리 떠돌아 다니는 말이라 하더라도 선생님이 직접 한 말이 아니면 믿지 말아야 합니다.
선생님을 잘 몰라 가지고는 안 됩니다. 여러분, 선생님을 알아요? 여기, 선생님 안다는 사람 있으면 손들어 보세요. 얼굴이야 알지요. 선생님의 가는 길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갈 길이 바쁘니만큼 여러분은 선생님이 움직이는 것을 연구대상으로 삼아야 됩니다. 선생님은 적어도 이 길을 출발할 때는 누구 말처럼 시시껄렁하게 출발하지 않았습니다. 길거리에서 얻어먹고 할 일이라면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데데하게는 시작하지 않아요. 그렇게 데데하게 시작했다면 벌써 깨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제까지 깨어질 고비를 수없이 겪어 왔습니다. 지금처럼 이러쿵 저러쿵 소문을 내고 말이 많았던 자들은 한꺼번에 도망가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수십 수백 고개를 넘어왔습니다. 만나러 가는 중심의 자리를 향한 확고한 신념이 선생님에게 있었습니다. 그러한 선생님의 신념은 세계가 바뀌어진다 하더라도 바뀔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 길을 가는데 있어서 선생님은 그런 절대적인 입장에서 그런 절대적인 신념을 갖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추호의 의심도 없습니다. 배고플 때 밥 먹는 것보다 더 간절한 것입니다.
그러한 각오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한 각오로 가도 부작용이 많은데 이건 데데해 가지고 꽹과리 들도 두드리는데 박자 맞추고 춤추면 다 되는 줄 알아요? 그런 것을 보면 기분 나쁠 때가 많습니다. 호랑이 새끼를 만들려고 했는데 삵괭이 새끼가 되어 있기 때문이예요.
여러분의 눈과 여러분의 마음이 누구를 믿습니까? 무조건 믿을 수 없는 거예요. 통일교회 문선생도 무조건 믿지 마세요. 무조건 믿는 것을 나는 원치 않아요. 믿으려면 분석해 보고 진짜로 믿으세요. 영계에 들어가서 담판을 짓고 나와서 믿으세요. 그것이 내가 주장하는 바입니다.
통일교회 문선생님이 어떤 사람이라고 내가 직접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어떠한 사람이라고 증거했습니다. 나는 나를 위해 믿으라고 강조하지 않습니다. 영계가 강조하는 거예요. 영계에서 알려주기 때문에 여러분이 여기에 붙어 있는 것이지요. 그렇지 않으면 붙어 있을 게 뭡니까? 그런데 요즘에 통일교회에 들어온 사람은 그것도 없어요. 그런 마음 기대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신앙길을 가는 데 있어서 내게는 나로서의 각오, 즉 통일교회 선생님으로서의 각오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어요? 세계적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세계적인 시련과 고통이 도래한다 할지라도 극복하겠다는 각오가 서 있다는 것입니다.
끌려가는 꼬리가 머리를 끌 수는 없는 것입니다. 거꾸로 끌면 되지 않겠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그런 법은 없는 거예요. 기차도 맨 앞에 있는 기관실에서 끌게 되어 있는 것이지 맨 끝 찻간에서 끌게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것은 확고한 신념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중심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있어야 됩니다. 나는 이렇게 할 것이라는 확고한 신념이 있으면 10년이 문제가 아닙니다. 언제까지라도 나는 이 길을 가겠다고 딱 정하라는 겁니다. 나는 제1차 노정에서 이러한 정신으로 나가겠다는 프로그램을 짜라는 겁니다. 처녀의 몸으로서 그런 결심을 하려 했을 때 `아 나는 3,40대가 되어도 결혼을 못 하는 것이 아닌가?' 할지 모르지만 그런 것을 걱정해서는 안 됩니다. 통일교회에 결혼하기 위해서 들어왔다면 데데한 것입니다. 결혼이 문제가 아닙니다. 죽음이 문제가 아닙니다. 중심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으면 하나님의 선물로 갖다 주시는 것이 결혼입니다. 그래야 자기가 사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출발해야 할 길이 이 길입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길을 가다 말고 뭐가 어떻고 어떻고 떠들고 다니더니 얼마 안 되어 시시하게 누더기 보따리 쓰고 이러구(제스쳐하심) 앉아 있으니 기가 막힌다는 겁니다. 얼마나 기가 막힙니까? 그 자신 한 개체만 망하는 것은 괜찮지만 잘못하면 자기 선조 70대까지 걸리는 겁니다. 선한 선조라고 했던 그 선조들이 지금에 와서 후손의 잘못으로 인해 전부 걸려 들어간다는 거예요.
영계는 평면적인 세상처럼 되어 있지 않습니다. 아주 심각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선조들이 영계에서 여러분이 처음 이 길을 나설 때는 좋다고 자랑했지만 여러분이 얼마 안 되어 시시하게 이러쿵 저러쿵 하면 여러분의 선조들은 사탄으로부터 `너의 몇대 손자 손녀 꼴을 봐라 처음에는 잘 되어 가더니 저게 뭐냐' 하는 조롱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복귀섭리를 위해서, 즉 아담과 해와가 이루지 못했던 것을 이루기 위해 몸부림쳐야 할 것이 통일교인인데 만약 옛날 아담 해와처럼 또 사탄의 종새끼가 되면 아담 해와보다 더 나쁜 입장에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엄청난 문제가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 저런 것을 다 알고 있기 때문에 내가 지금까지 이러한 일을 해 나온 것입니다. 여러분도 생각해 보세요. 선생님이 여러분보다 못해서 이런 일을 하는 것입니까? 내가 여러분을 데려간다고 해서 잘 될 게 있습니까? 내가 여러분을 도와주고 피땀 흘려 여러분을 구원하려고 이 일을 하는 것이지, 여러분의 신세를 지려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그걸 알아야 됩니다.
이 길을 걸어 나오는 데 있어서 벌써 숱한 수난의 고비를 거쳤습니다. 예수님처럼 30대에 죽는 것은 간단한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흘리고 죽었다는 것을 생각하고 옛날에는 불쌍하다고 동정도 했지만 지금은 동정하지 않습니다. 신앙세계에서 그것이 뭐가 힘듭니까? 그만한 각오를 못해 가지고 큰 뜻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나는 그러한 각오 밑에서 이 길을 개척해 나왔습니다.
그런데 소위 축복을 받았다는 자들 가운데 뭐가 어떻고 하며 말이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라고 축복해 준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두고 보라는 거예요. 그러지 않기 위해서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것은 신앙의 중심에 대해 확실한 신념을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신념이 얼마만큼 철석같으냐에 따라 오늘의 내 자신의 각오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통일교인들 가운데에도 누구에게는 이렇게 해주고 나에게는 이렇게 해줬다고 섭섭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제일 싫어합니다. 그런 것을 들고 나오는 사람들은 가인 아벨의 원리를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가인 아벨의 원리를 안다면 어떻게 그렇게 해 달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그러한 자는 가인의 입장이 아니겠어요? 하나님께 `아버지, 왜 아벨의 제물은 받고 내 제물은 안 받아 줍니까?'라고 불평하는 가인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통일교회의 정상적인 전통을 중심삼고 볼 때 전부 배역자입니다. 배역자예요.
그래서 내가 일부러 그럴 때도 있습니다. 선생님은 공장에서도 어떤 사람을 쓰고 싶으면 그 사람을 제일 어려운 자리에서 3년간 생활해 보게 합니다. 그래서 3년간은 그 사람을 주시만 하고 얘기도 안 합니다. 어떻게 하나 보기 위해서지요. 그런데 잘 나가다가 2년 8개월쯤 되면서부터 고개를 들기 시작합니다. 여러분은 전부 다 그러한 입장에 있습니다.
큰일을 책임지고 큰일을 해 나가려면 그런 인격을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떠한 마음으로 움직이고 있습니까? 나는 지금까지 많은 사람을 지도해 왔기 때문에 사람에 대해서는 전문가입니다. 아무리 변명을 해도 그 사람의 마음을 벌써 파악하는 것입니다. `지금 너는 이렇게 가고 있구나' 하고 아는 거예요. 그러나 알면서도 말하지는 않습니다.
여러분이 가진 신념이 최고라고 생각하면 한번 해보라는 것입니다. 데데한 싸구려는 되지 말라는 겁니다. 그러려면 신앙의 중심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부끄러워 가지고는 하늘 앞에 서지 못합니다. 천도를 바로잡지 못합니다. 여러분이 그러한 신념 밑에서 각오를 하면 그 각오는 몇해를 갑니다. 결국 무슨 말이냐면, 자신이 잘살겠다거나 잘되겠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거예요. 우리는 타락한 선조의 후손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해서 자기가 잘되겠다거나 복받겠다는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복받겠다고 자꾸 고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신앙생활을 해서 어떻게 하면 잘 죽을 것인가, 또 잘 망할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늘이 지금까지 역사해 나오신 것은 이 사탄 세계를 망하기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사탄 세계의 개인을 망하게 하기 위한 것이요, 사탄 세계의 가정, 사탄 세계의 종족, 사탄 세계의 민족, 사탄 세계의 국가, 나아가 사탄 세계 전체를 망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이 고개를 넘어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뜻을 중심삼고 잘 죽을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문제는 그것입니다. 어떻게 죽을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라는 거예요. 본래 타락이 사망권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거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죽음을 해결하고 나서야 합니다. 영계의 지옥에 가서 고생해야 할 것을 현실 지옥에서 탕감하자는 것이 통일교회의 탕감법입니다.
통일교회는 아무나 오는 곳이 아니요, 아무나 믿을 수 있는 교회가 아닙니다. 특정한 사람, 즉 그 나라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사람이나 그 나라의 충신 열녀의 혈족으로 태어난 후손들만이 들어오게 되어 있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자부심을 가지세요. 나는 세상 사람들과 다르다는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그 신념을 중심삼고 생사를 걸어 놓고, 행불행을 걸어 놓고 주체와 나와의 문제를 해결짓고 나서야 합니다. 하나님과 우리 자신 가운데는 불행의 요건이 감돌고 있습니다. 사망의 물결, 사망의 파도, 사망의 성벽이 가로놓여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타개하느냐가 문제입니다. 이 불행의 요건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더 불행한 자리로 가겠다고 해야만 하늘이 동정하게 됩니다. 죽음의 고개를 넘기 위해서는 백번을 죽겠다고 해야 하나님으로부터 한번 동정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동정받을 수 있는 인연을 갖지 못하면 이 길을 못 가는 것입니다. 남아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까지 통일교회는 그토록 많은 시련과 고통을 겪어 나왔지만 나는 지금도 하나님이 동정하실 수 있는 자리를 잃지 않고 지키기 위하여 밤낮으로 투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동정하실 수 있는 나, 하나님이 동정하시지 않을 수 없는 내가 되기 위해서는 어려운 것을 선두에 서서 책임지고 갈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는 물론 어려운 것도 있고 싫은 것도 있습니다. 또 따르는 사람들이 부족해서 짐을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져야 할 짐은 통일교회만의 짐이 아닙니다. 삼천만의 짐을 져야 되고 30억 인류의 짐을 져야 하는 것입니다. 져야 할 짐이 많아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와 같이 많은 짐을 달갑게 지기 위해 훈련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불평하지 않고 지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새로운 각오가 필요합니다. 주체에 대한 새로운 인식, 새로운 결의, 새로운 신념을 더 강하게 가져야 합니다. 그것을 갖지 않으면 아무리 힘을 내려고 해도 안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이 길을 가려고 해도 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마음속에 그러한 확실한 신념을 결정하고 내일의 희망을 바라보고 나가야 합니다. 민족이나 국가, 세계, 그 어느 것이든지 자신의 역량에 맞는 기준을 세우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 나름의 목적을 세워 놓고 그것을 위해 자신의 능력의 한계권내에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겠다고 해야 합니다. 나는 이 이상은 할 수 없으니 이 한계권내에서 제일이 되겠다고 해야 돼요. 그리하여 시간을 투입하는 데 있어서나 정성을 들이는 데 있어서나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최고의 역량을 발휘해야 하는 것입니다.
1년, 2년, 10년, 30년, 40년, 혹은 죽는 순간까지도, 내가 못하면 몇대의 후손에게까지라도 유언을 하여 그 정성의 도수를 채우겠다고 생명을 걸고 나가는 사람 앞에서는, 아무리 크게 떠드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다 쓰러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에게 복을 주시어 그 몇백 배, 몇천 배의 자리까지 끌고 가려 하십니다. 거기에서 힘이 부족하고 그 자격이 부족할 때는 하나님이 대신해서 역사하심으로서 그 길을 타개해 제2의 목적의 후계자로 세우신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에 들어왔으면 통일교회가 망한 다음 통일교회를 장사 치르고, 3년상을 지낸 후 떠나겠다고 하는 사람이 될 때 그는 통일교회의 후계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러므로 여러분은 선생님 이상의 신념을 가지고 실천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은 가인의 입장이고 선생님은 아벨의 입장이니만큼 선생님의 말에 절대 복중하고 믿어야 합니다. 가르쳐 주는 사실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분석 감정하려면 일생 동안 해도 못합니다.
불가능해요. 여러분이 복귀원리를 보십시오. 선생님이 지금까지의 역사를 축소시켜 현실적인 무대에서 사실적으로 탕감노정을 걸었다는 것은, 원리를 실천했다는 사실은 간단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십년 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지만 통일교회 문선생은 그렇지 않습니다. 밤이나 낮이나 발전하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는 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밤이나 낮이나 나만은 발전한다는 것입니다.
복귀의 길은 모두가 안 가려고 합니다. 완전한 개인 가정 종족 민족 국가 세계 천주에 있어서 중심은 가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복귀 섭리 역사에 있어서도 노아 가정, 아브라함 가정, 야곱 가정, 모세 노정, 예수님 가정 등의 가정이 세워졌던 것입니다. 중심 가정은 많은 가정이 아니라 한 가정이면 됩니다. 종족을 대신할 수 있고, 민족을 대신할 수 있고, 국가를 대신할 수 있고, 세계를 대신할 수 있고, 천주를 대신할 수 있는 한 가정이면 돼요. 하나님의 심정을 중심삼고 일치된 한 가정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선생님은 양보하지 않습니다. 개인으로서도 나은 자가 되어야겠고, 가정으로서도 나은 가정을 만들어야겠습니다.
어느 누가 이렇고 저렇고 해도 선생님이 말 세 마디만 하면 머리 숙일 수 있는 내용을 갖고 있습니다. 오늘날 세계를 다스리는 어떠한 주권자의 가정 앞에서도 나는 뜻을 중심삼은 이러이러한 내용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계의 그 누구도 머리 숙일 수 있는 내용을 갖고 있어요. 부정할 수 없는 하나님의 동정적 내용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도 점령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으며, 또한 통일교회는 세계를 정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정을 중심삼은 이 천주 이상의 씨가 지금은 얼어붙은 얼음 안에 있기 때문에 아직까지 싹은 트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결코 죽지는 않았습니다. 봄이 되기만 하면 보자는 것입니다. 봄철만 되면, 새로운 때가 오기만 하면 활짝 피어날 수 있는 생명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계로 뻗어 나갈 수 있는 생명의 원천적인 내용을 구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가 망하면 망했지 통일교회의 문선생은 망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나는 누구에게도 빚을 지지 않았습니다. 정성을 들이는 데있어서도, 기도를 하는 데 있어서도 빚을 안 지는 것입니다. 빚을 안 지겠다는 것이 선생님의 철학입니다. 절대 여러분에게 빚을 지지 않습니다. 선생님은 편한 생활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런 면에 누구보다도 신경을 더 많이 씁니다. 우리 통일교회의 어느 누구보다도 시간적인 비율에 있어서나 정성의 퍼센트에 있어서나 몇 배가 되는 내용을 뜻을 위하여 투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 있어서 여러분에게 빚을 안 진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이제까지 말한 것이 세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되는 것이겠습니까? 그렇게 안 되면 안 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생각 있는 사람 같으면 뭘 좀 아는 사람 같으면 선생님이 말씀하는 것을 쭉 보게 되면 뜻에 대해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세계적으로 볼 때 금후에는 한국이 문제가 아니라 통일교회 미스터 문이라는 사람이 문제입니다. 지금 미국의 국무성에서는 선생님에 대해 연구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연구해 봐야 알 게 뭡니까? 내용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통일교회에 와서 배워야 해요. 또 일본 정부도 나름대로 연구하고 있습니다. 전적으로 통일사상이 무엇인지 연구하고 있습니다. 연구는 하고 있지만 배워야 하는 것은 불가피한 것입니다. 연구해 보면 나쁜 것 같기도 하고, 좋은 것 같기도 하겠지요.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소문이 나쁘게 나는 것도 한편으론 좋은 것입니다.
한참 격전이 벌어질 때는 적군의 시체도 방어진지가 됩니다. 냄새 나는 시체도 방어진지가 된다는 거예요. 그럴 때는 죽어 쓰러진 시체 뒤에 엎드려서라도 공격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통일교회에서는 그와 같은 작전을 하는 거예요. 사탄이 나쁘다고 제시하는 모든 조건을 갖고 공격하는 겁니다. 공격의 재료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소문 잘 내놓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소문을 내 놓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연막을 뿌리고 작전을 할 수 있는 좋은 담벼락이 마련되는 것입니다.
통일교회 문선생이 어떻다고 신문에 실리고 있는데 얼마든지 기사화돼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때릴 테면 때리라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신문을 무서워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선생님은 신문사를 무서워하지 않는 사나이예요. 그러니 그런 의미에서 선생님이 세계 최고일 수밖에 없습니다. 신문에 내려면 내라고 해요. 신문에 내 보았자 이제는 지금까지 낸 것을 우려먹는 수밖에 더 있어요? 이제 낼 것은 좋은 것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국에서도 먼저 통일교회가 좋다고 소문나지 말고 나쁘다고 소문나기를 바랍니다. 일본도 마찬가지입니다. 좋다고 소문나면 탕감복귀가 안 되는 것입니다. 좋은데 나쁘다고 소문이 나야 탕감이 되는 것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아벨은 좋았지만 소문은 어떻게 났습니까? 나쁘게 났지요? 그 소문은 누가 냈습니까? 가인이 낸 것입니다. 여러분이 통일교회가 진짜인지 아닌지 무엇으로 알 수 있느냐? 통일교회 원리가 진짜고, 통일교회가 아벨적 입장이라면 반드시 가인이 생겨납니다. 알겠어요? 통일교회 말씀을 듣고 나서 가인이 생기나 안 생기나 두고 보세요. 가인이 생겨나면 통일교회 원리가 진짜요, 하나님이 자기를 이끌고 계신 것으로 알라는 것입니다. 통일교회가 확실하다는 것을 알고 또 자신이 아벨적인 입장에서 축복받을 수 있는 자리에 섰다는 것으로 알라는 것입니다.
더우기 부인들이 통일교회에 나오려고 하면 반드시 사고가 납니다. 첩을 얻었던 남편이 당신이 아니면 못 살겠다면서 다시 찾아 들어오는 것입니다. 또 처녀들이 통일교회에 나오려고 하면 옛날에 관계를 맺었던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기도 합니다. 교회에 나오려고 새로운 결심을 하려면 틀림없이 무슨 일을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전도를 해보면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을 볼 때 하나님이 얼마나 과학적인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목사가 와서 `지금도 통일교회를 반대합니다. 이제는 옛날처럼 하나님이 역사를 해주시지 않습니다. 또, 뭐가 좀 될 만하면 사탄들이 불러갑니다' 하더군요. 통일교회를 나오려고 하면 못 가게 하려고 반대가 나타납니다. 먼저는 부모가 반대하고, 그 다음은 부부간에 서로 반대합니다. 즉, 아내가 나가려면 남편이 반대하고 남편이 나가려면 아내가 반대하는 것입니다. 또 제자들이 반대한다는 것입니다. 종새끼들이 반대한다는 겁니다. 자기 손아래 사람들이 전부 반대하는 입장이 됩니다. 자기를 도와 주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망치려 듭니다. 에덴 동산에서 타락이 그렇게 되었기 때문에 오늘날 그러한 일이 벌어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아는 통일교회 신도로서 신앙길을 가기 위해서는 새로운 각오가 필요합니다. 주체에 대한 확실한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알겠어요? 「예」 그렇다고 해서 확실한 신념만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주체를 대신한 제 2 주체의 입장에서 하나님을 내가 이렇게 믿으니 나는 하나님 대신 부모 노릇을 하겠다고 해야 합니다. 그것이 통일교회에서 말하는 부모의 심정입니다. 부모의 심정으로 종의 몸을 쓰고, 눈물은 인류를 위하여 땀은 땅을 위하여 피는 하늘을 위하여 뿌리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통일교인들이 가야 할 진정한 길입니다.
여러분이 이러한 원칙에 의해 이 길을 따라 나가게 되면 가는 길 앞에 어떠한 시련 고통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문제가 안 됩니다. 여러분이 시련 고통을 당하게 될 때 혼자 당한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선생님은 이미 마음세계에 있어서나 외적인 세계에 있어서 그러한 시련 고통을 다 당하고 거쳐 나온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통일교회에 들어온 그날부터는 통일교회 선생님이나 통일교회의 지도자의 생활 방법을 그대로 계승하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에게는 탕감노정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은 요즈음에 세상을 알기 위해서 극장 같은 곳엘 가끔 갑니다. 영화를 보면 요즘 사회상이 어떻게 되어 있나 하는 것을 알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자에 대해 비참한 영화, 혹은 남자에 대한 비참한 영화를 보면 그 사회의 조류를 알게 됩니다. 또 호화찬란한 상류사회를 묘사한 영화, 또 중류사회를 묘사한 영화 등, 3편 정도만 보면 사회상을 대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선생님은 그것을 탐지 하기 위해서 영화관에 갑니다. 그렇다고 여러분도 통일교회 들어오자마자 `선생님도 영화관에 가시는데….' 하면서 영화관에 가려고 하겠지만 그래서는 안 됩니다. 선생님이 그런 자리에 갈 수 있는 것은 선생님 나름대로 기준을 세웠기 때문입니다. 그 전에는 영화관 앞으로 다니지도 않았습니다. `어떠한 입장에 몰리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이러한 현실사조에 휩쓸리지 않는다' 하는 기준을 세워 놓고 그것을 절대시하고 사탄세계를 부정할 수 있는 신념을 갖기 위한 싸움의 기간을 거쳤습니다. 그런 다음에 들어가서 부딪쳐 보았지요. 그래 가지고 자신을 가졌기 때문에 자유로이 영화관도 가는 겁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통일교회에 들어오자마자 통일교회는 그런 곳이구나 하면서 그저 그렇게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통일교회에 들어왔으면 여러분, 영계에 대해 체험을 해보세요. 통일교회에 처음 들어오면 세상의 모든 것을 끊어 버려야 합니다. 자기의 어머니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것도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가지 않으면 책망받는 거예요. 그것은 그들이 아직 갓난아이와 마찬가지라 잘못하면 상처받기 쉬운 입장에 있기 때문입니다. 상처받으면 하늘의 손해가 많습니다. 한번 상처받으면 3배 이상을 투입하지 않으면 복귀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맨 처음에는 상당히 구별시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대하게 되면 징계를 받습니다. 그것은 영적으로 체험한 사람은 알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에는 꽉 조이다가 3년 이상, 혹은 7년, 혹은 한 10년 이상 지나야 비로소 3분의 1쯤 해방해 주는 것입니다. 적어도 10년은 지내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10년도 못 가서 인간 중심으로 말해 버리면 은혜를 다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영계에서 가르쳐 주면 주체가 영계인데도 불구하고 영계를 중심삼고 해결지으려는 생각은 하지 않고, 인간을 중심삼고 해결지으려고 하면 다 잃어버린다는 것입니다.
하늘이 자기에게 가르쳐 준 것은 어느 한때에 쓰기 위해서, 미래에 인격을 갖추게 하기 위해서, 지시해 주고 명령해 주시는 것이니 그것을 꽁꽁 싸서 보관하다가 그것을 재료로 삼아 가지고 하늘 앞에 책임을 완수하기 위하여 사용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전부 다 털어 버리고 전부 빼앗겨 버리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보따리를 자기 마음대로 풀어놓아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에게 선생님이 지금 말을 함부로 하는 것 같지만 선생님에게는 선생님으로서 여러분이 모르는 비밀이 있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여러분이 아무리 알려고 해도 알 수 없는 뿌리가 있는 것입니다. 뿌리도 아주 곧은 뿌리입니다. 이 곧은 뿌리를 누가 들추어낼 수 있겠어요? 그것을 들추어내면 뽑히는 겁니다.
사도 바울이 영계의 3층천 세계를 보고 체험한 것은 그가 14년 동안 꾸준히 선교활동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알겠어요? 그러한 체험이 있어야 되는 거예요. 선생님도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선생님에게도 바라는 기준이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말하지 않았으나 `이렇게 할 것이다' 하는 곧은 뿌리가 있는 거예요. 알겠어요? 선생님은 이러한 신념을 갖고 끝까지 밀고 나갈 것입니다. 좀 더 나가면 선생님은 아시아를 정면적으로 들이칠 것입니다. 일본이면 일본, 어떤 회사의 사장이면 사장까지도 나에게 다 걸릴 것입니다. 대한민국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패한 대한민국을 두고 우리는 후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배짱으로 밀고 나가는 거예요. 이러한 어려움을 앞에 두고 결단짓기 위해 나가는 것인만큼 시시하게 굴지 말라는 것입니다. 남이 얻어먹는 부스러기나 주워 먹고 다니지 말라는 겁니다.
이 일을 시작한 나는 지금까지 생명을 걸고 결사적으로 싸워 나왔습니다. 그렇게 생명을 걸고 결사적으로 싸워 나오면서 죽을 고비를 몇차례나 거쳤습니다. 그렇게 싸워서 지금까지 남아진 것입니다.
선생님은 비록 영어의 몸이 되어 쇠고랑을 차고 마루바닥에 누워 자는 한이 있더라도 낙망하지 않았습니다. 희망에 불탔습니다. `원수! 너희가 채찍으로 치려면 어디 한번 맘껏 쳐 봐라. 네 채찍이 얼마나 강한가 보자. 채찍으로 세계를 요리하는 악의 세력과 권한이 어디까지이냐? 한계선이 어디인지 보자. 쳐 봐라' 이러면서 지금까지 이 길을 걸어 나왔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간단한 것입니다. 생사의 기로를 결정짓고 나선 길이 통일교회가 가는 길입니다. 그러니만큼 여러분이 신앙 중심의 절대적인 신념을 얼마만큼 소화할 수 있는가를 테스트하는 것이 좋습니다. 알겠어요? 각오된 신념을 중심삼고 나는 이러한 신념을 가진 사람이라고 하면서 생활을 통하여 그 각오와 신념의 가치를 테스트하는 것입니다. 신념이 문제입니다. 여러분, 어때요? 자신 있어요? 「예」 지방에 나가라 하면 꽁무니 빼지 않을 거예요? 선생님이 지방 나가라 해서 꽁무니 빼는 사람은 시시한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지혜로운 사람들이라면 선생님의 명령을 잘 따를 것입니다. 선생님이 작정하고 명령하는 대로 따르면 여러분 앞에 복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린다는 거예요. `선생님이 왜 나에게 명령하셨을까. 명령한 목적이 무엇일까. 이렇게 나가서 어떻게 하라는 것일까' 하며 모든 것을 궁금하게 여겨야 합니다. 잘 싸우라는 것입니다. 잘 싸워서 무엇을 할 것인가? 자기 가치를 인정하자는 것입니다. 목적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란 자기 혼자 잘났다고 해서 모든 일이 잘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상대적 세계와 관계를 맺어서 상대적 환경을 갖추어야만 거기서 자기 인격적 가치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남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하면 그만큼의 가치가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렇게 하여 무엇을 할 것이냐? 통일교회의 이름으로 정수분자들을 선출하자는 것입니다. 간단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명령에 움직이지 않는 사람은 정수분자가 못 되는 거예요. 그들은 잎이 되는 것입니다. 나뭇가지는 못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잎사귀는 어느 한 때, 그 나무가 자랄 때까지는 보탬을 줄 수 있지만 잎의 사명을 다하면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 잎은 가지가 크는 데 작용을 하고 줄기가 자라는 데 작용을 할 뿐 그 잎 자체는 떨어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통일교회는 발전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잎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가지가 되어야 하겠습니까? 가지가 되어야 합니다. 가지가 되지 않으면 열매가 맺혀지지 않는 거예요. 그렇지요?
그러면 신념을 가져 가지고 뭘 할 것입니까? 생활을 통하여 실천해야 합니다. 여러분, 진짜 죽음을 각오하고 가겠다는 신념을 가졌습니까? 국경선을 넘어 보아야 되는 거예요. 사탄세계에 대하여 항거를 해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제재를 받아 보아야 하는 거예요. 그 나라의 주권자들로부터 탄압을 받아 보아야 얼마만큼 심각하고 얼마만큼 분한지 알 수 있습니다. 탄압을 안받아 보고는 모르는 것입니다. 원수 앞에도 고문을 당해 보고, 그 아들한테도 당해보고 해야 합니다. 아들과 원수와는 또 다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신념이 있다 하더라도 실천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실천하는 데는 무엇이 필요하냐? 자기의 몸뚱이가 필요하고 시간이 필요하며 정성이 필요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내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해야 되는 것입니다. 생명을 걸고 싸워야 된다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승리라는 것은 생명을 걸지 않고는 해결이 안됩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볼 때 중심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실천생활을 함으로써 자꾸 부딪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주체로 남아지느냐 하는 게 문제입니다. 즉, 누룩과 같은 작용을 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 신념이 희미해져서 그 관계줄이 끊어져 버리면 그 사람은 그 이상은 못합니다. 아예 그렇게 될 가망성이 있으면 거기서 나아가지 말고 한 단계 낮추어 가야 됩니다. `아 나는 그렇게 못하겠구나' 하고 느꼈으면 그러한 책임을 놓아 두고 한 단계 범위를 낮추어서 거기서부터 제1차 수련장으로 삼아서 성과를 거둔 다음 내가 가야 할 길을 바로 가겠다고 하면서 가야 됩니다. 그런 신념으로 자기 기반을 쌓으면서 올라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것은 생각하지 않고 욕심 많게 한꺼번에 올라가다가는 뚝떨어져 국물도 없이 박살나는 겁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신앙자의 각오가 얼마나 심각한지 알 수 있습니다. 신앙자로서 굳은 각오를 하고 중심에 대한 신념을 갖고 그것을 자기 것으로 남기려면 반드시 생명을 걸고 투쟁하여 성과를 얻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영원한 자기 것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버지여, 1969년 11월 30일이옵니다. 지나간 세월의 노정 위에 많은 사람을 보아 왔습니다. 수많은 형상을 가지고 몸부림치던 수많은 사람들이 가엾게도 많이 흘러갔습니다. 이것을 생각하게 될 때, 신앙의 길을 지도하는 사람은 아버지의 마음에 어릴 수 있는 상심의 내용을 지금도 체험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느끼게 되옵니다.
아버님! 6천년간 얼마나 얼마나 많은 사람 앞에 상심을 당하셨사옵니까? 당신이 소망의 기점으로 바라보던 그 모습은 사라져 버리고, 그로 인해 남아진 절망의 한 페이지와 쓰라린 심정을 극복하셔야 했던 아버지의 사정이 얼마나 심각하였을까를 생각하옵니다.
오늘날 통일교단이 이만큼 나오기까지 수많은 피눈물의 사연이 흘러갔습니다. 또한 수많은 억울한 형상의 그림자가 수없이 지나갔습니다. 혹자는 `여기에서 나는 이렇게 살겠다'고 맹세하기도 했습니다. 아버지! 그 모습을 잊을래야 잊을 수 없습니다. 나는 이렇게 태어나고, 이렇게 죽기 위해서 스승을 만나기 전부터, 혹은 수십년 전부터 준비했다고 자처하던 사람들의 말과 내용은 남아 있사오나, 그 모습은 사라져 갔습니다.
그걸 보게 될 때, 믿었던 모든 과거의 인연들이 슬픔을 가할 수 있는 조건으로 남아진 것을 생각하고 한 많은 복귀의 길을 더듬어 온 아버지가 얼마나 불쌍하다는 것을 느끼옵니다. 또한 그런 자리를 지나고 보니 아버지의 불쌍하심을 더더욱 강하게 느끼게 되옵니다.
아버님, 그러나 통일의 교단은 남아질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을 위해 해야 할 사명의 뜻이 남아 있는 것을 알고 있기에, 이 시간 아버지 앞에 엎드리고 과거를 회고하옵니다. 아무것도 아닌 부족한 저희들을 세워 놓고 아버지께서 얼마나 염려하셨나를 저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 당신 앞에 배역자의 모습으로 흘러가는 사나이가 되지 않겠다고 결심한 것을 당신은 알고 계시옵니다. 고요한 심정을 더듬어 아버지의 거룩하심을 찬양하고 싶은 마음은 시간을 넘고 생애를 넘어 우러나고 있사옵니다. 칭찬받고 자랑할 무엇이 있을 때 거기에는 당신의 마음이 어려있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지여, 통일교회를 세워 자랑할 것이 있사오면 그것은 당신의 수고와 피눈물과 희생의 대가이옵니다. 그러하기에 저희들은 그것을 사랑하고 싶사옵니다. 역대의 수많은 배도자들까지도 붙안고 홀로 책임지시고 지금까지 지치지 않고 나오신 아버지의 늠름한 자세를 자랑하고 싶사옵니다.
슬퍼하는 자녀들을 붙들고 다시 권고해 주시는 아버지를 자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한 아버지의 진정한 의미의 아버지로 모시지 못한 불효 막심한 자식들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 높고 귀하신 아버지를 저희에게 있는 모든 것을 다하여 찬양하고 모셔야 되겠고, 정성을 다해 봉사해야 할 책임이 저희에게 있는 것을 알게 하여 주옵소서.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신앙자의 각오가 얼마나 귀하다는 것을 저희가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버지를 위한 그 책임과 사명을 중심삼고 나는 얼마만큼 각오가 되어 있는가 하는 것은 지금 밝혀 놓아야 되겠습니다. 나는 이렇게 결심했기 때문에 이렇게 가겠다고 하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어야겠사옵니다. 그 누가 보아 주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 누가 따르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내 갈길이 바쁘다는 것을 느낄 줄 아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어야되겠사옵니다.
하루의 아침이 지나면 낮이 오고, 낮이 지나면 저녁이 오고, 저녁이 지나면 밤이 오듯 자연의 순환 법도가 변치 않고 가고 있는 것을 바라보고, 아버지를 위하여 반하지 않는 자연의 모습을 닮아 아버지 앞에 변하지 않는 효성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자연적으로 아버지의 영광과 아버지의 무한하신 가치를 상대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아름다운 모습이 되어야겠사옵니다. 그럴 수 있는 아들과, 그럴 수 있는 딸이 되어야 할 것을 확실히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아침에 참석한 당신의 자녀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1969년, 이 슬픈 해가 지나가고 있습니다. 이 한해에 저희들 가슴속에 한 맺힌 모든 사연들을 다 흘려 버려야 되겠습니다. 이제 이 60년대를 밟고 넘어서 70년대를 맞이해야 되겠습니다. 원리적 수자로 7수의 새로운 시대권을 맞이해야 되겠습니다.
이제 저희들이 다시 서울을 중심삼고 계획한 모든 것을 당신이 아시오니 그것을 뒷받침 할 수 있는 마음의 새로운 각오를 가져야 될 때가 오고 있는 것을 이들이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 저희들을 찾아오신 아버지 앞에 저희들이 효성의 모습을 갖추고 아버지를 위안해 드리고 아버지께 기쁨을 돌려 드리는 아들딸들이 되어야 되겠사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저희들이 가야 할 탕감노정이 있는 것을 알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오늘날 이것을 위해 염려하고, 이것을 위해 기도하는 수많은 자녀들을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해외에 널려 있는 수많은 외국 식구들이 이곳을 흠모하고 있다는 것을 저희들이 잊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이 자리가 얼마나 귀하냐 하는 것을 알고 이곳을 당신이 얼마나 주시하시는가 하는 것을 아오니, 오늘 여기에 참석한 자녀들이 스스로의 가치를 다짐할 줄 아는 당신의 자녀들 되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참되고 확실한 신념을 중심삼고 그것을 생활 무대에서 밀고 나갈 줄 알고, 그것을 원동력으로 삼고 나갈 줄 아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새로운 길 앞에 옹졸한 자세를 취하지 말고 늠름한 용자의 모습을 갖추어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믿음직한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옵니다.
내일의 싸움터에 당신이 믿고 보내기에 부족함 없는 아들딸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참부모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이번 회의는 이해에 있어서 마지막으로 갖는 지구장회의입니다. 이해도 이제 앞으로 28일밖에 안 남았습니다. 1969년은 우리 교회로서도 중요한 시기였고, 세계적으로도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1969년대는 우리 교회가 교회로서의 기반을 어느 정도 닦아 나온 시기였습니다. 즉, 개인적 가정적 교단적인 시련을 겪으며 개척해 나온 시기였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선생님이 개인적인 기반을 닦아 나왔고, 1969년대는 교단적인 기반을 닦아 나왔습니다. 1960년대와, 1970년대는 새로운 시대로 넘어가는 때입니다. 그런데 희생과 탕감이 없이는 새로운 기반을 닦을 수 없습니다. 1970년대에는 우리 교회가 세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국가적인 기반을 닦아야 합니다. 1960년대에 우리는 국가에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리하여 이제는 국가 앞에 당당한 위치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1974년도까지는 대한민국에 더 큰 영향을 미치도록 해야겠습니다. 현재로는 아직 너무 약합니다. 이제부터는 보다 실질적인 내용을 갖추어 가지고 영향을 미치도록 해야겠습니다.
1970년도에는 `아시아 승공대회', `국제 승공대회' 등을 통하여 내적인 실적을 세워야겠습니다. 그 다음엔 대한민국을 움직일 수 있는 주체성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핵심요원을 양성해야겠습니다.
원리연구회의 학생들을 통하여 기독교를 믿는 학생들을 움직이도록 해야겠습니다.
초교파운동과 원리연구회운동은 1970년대 활동을 위한 외곽적인 운동이었습니다.
일본 식구들의 활동을 통한 외적인 영향은 좋으나 내적 정예요원이 문제입니다. 앞으로 대학 출신 7천명 내지 1만 2천명이 필요합니다. 기독교인이 들어온다면 두 달만 훈련시키면 요원이 될 수 있습니다.
인적 자원을 만들기 위해서는 경제 문제가 따릅니다. 초교파운동, 학생운동 등을 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합니다. 적어도 몇천만 원이 있어야겠습니다. 필요한 재력만 뒷받침된다면 기성교회도 흡수할 수 있습니다.
서남동 교수가 새문안교회에서 강연한 이후, 통일교회는 도저히 없앨 수 없는 것으로 널리 인식되어졌고, 공포를 느끼는 무리들까지 생겼습니다.
우리 초교파운동에 기성교회 지도자들도 관심도가 높아졌습니다. 이에 대(對) 기성교회 활동과 대학생운동을 활발히 전개해야겠습니다. 여기엔 여러 가지 자원이 불가피하게 필요합니다.
현재의 핵심 요원과 더불어 제2의 요원들을 양성시켜 나가야 1970년대에 있어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습니다.
사상적인 면에서는 통일교회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전국적으로 인식시켜야 되는데, 거듭 말하거니와 여기에는 자원이 필요합니다.
현재 우리는 공기총 관계로 약 1억원 정도의 막대한 빚을 지고 있습니다.
1980년대에는 세계 어느 곳에 가도 통일의 노랫소리가 들리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해가 져서 밤이 되는 것이 원수라고 생각하며 밤낮없이 뛰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아버님, 1969년의 마지막 달의 첫 주일을 맞이한 이 아침에 당신의 자비와 사랑을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이 시간에 당신의 마음과 저희의 마음이 가일층 가까와지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높고 귀하고 거룩하신 은사의 주체이신 당신 앞에 낮고 천하고 비참한 모습을 가진 저희들이 이렇듯 고개 숙였사오니, 당신의 심정의 그늘 아래 품어 주시기를 바라옵니다.
너무도 고요한 가운데 당신의 생명의 맥박이 저희의 움직이는 모든 기관에 작용하는 것을 저희들이 느끼게 하여 주시옵고, 박동하는 그 고동소리 가운데에서 아버지의 살아 계심을 체휼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가운데 당신의 부르심과 당신과의 인연이 약동하는 것을 느끼고, 거룩하신 아버지의 모습을 느껴 지극히 거룩하게 되기를 바라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을 불러 놓고 책망하고 싶으셨던 아버지의 간절한 마음을 저희들이 느끼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은 아버지께서 저희들을 찾으신 기쁨에 취하시어 저희에게 모든 사연을 털어놓으실 수 있는 시간을 고대하옵니다.
마음에 그리던 당신의 성상을 저희들이 뵙게 될 때에, 모셔야 할 자세와 예법을 알아 갖추고 준비하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이렇게 그리워하는 아버지와 상봉하는 이 시간에 어떤 모습으로 아버지를 대할 것인가, 무슨 말로 아버지를 위로해 드릴 것이며, 어떤 내용으로 아버지를 찬양할 것인가 하는 것을 늘 생각하여 준비하는 모습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새로운 길을 갈 때에는 새로운 각오를 하는 것이 인간의 보편적인 태도이옵니다. 따라서, 아버지를 새로이 모실 때에 새로운 각오를 갖는 것이 아버지 앞에 저희들이 취해야 할 태도인 것을 생각하옵니다. 저희들은 당신 앞에 부끄러운 모습이옵니까, 당신 앞에 기쁨을 드리는 모습이옵니까? 이 한계선을 오락가락하는 저희들은 하늘 앞에 어떻게 면목을 세우고 어떻게 처신할 것인지, 또한 어떠한 모습이 될 것인지 염려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저희들은 아버지를 대하기에 부끄러운 자신인 것을 폭로하지 않을 수 없고, 용서의 손길을 바라지 않을 수 없는 입장에서 당신을 만나 뵈어서는 안 되겠사옵니다. 아담이 그런 역사의 기원을 마련함으로 말미암아 아버지께 숱한 짐을 지워 드렸고, 그것이 아버지로 하여금 숱한 원한의 역사의 고빗길을 걸어오시게 한 것을 안 저희들은 절대로 그러한 자리에서 아버지를 만나서는 아니 되겠사옵니다. 아버지께서 간절히 부르시는, 아버지께서 기뻐하실 수 있는, 아버지께서 품고 싶어하실 수 있는 마음과 모습을 갖추어서 아버지와 상봉해야 되겠사오니, 그럴 수 있는 저희 자신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이여! 당신의 거룩하신 생명력이 저희 자체에게 연결되게 하여 주시옵고, 당신의 권위 있는 모습이 저희 자신과 일체가 되게 하여 주시옵시며, 원수를 대해 참아내시는 아버지의 분한 마음이 저희의 마음 위에 옮겨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타락의 인연으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자녀를 찾아오시면서 최후의 승리를 바라고 허덕여 나오신 아버지의 발걸음과 그 심정이 저희들의 마음에 체휼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 저희를 아들이요 딸이라 부를 수 있는 부모와 자식으로서의 인연을 넘어서, 진실로 아버지와 하나되어 저희들이 아버지의 표상으로 나타날 수 있는 그 자리를 그리워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님, 이 아침에 남한 각지에 널려 있는 자녀들이 어떤 모습으로 아버지 앞에 부복하였나이까? 그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사오며, 그 몸이 어디를 향하여 달리고 있는지를 당신이 살피시옵소서. 당신의 마음과 일치된 기준, 혹은 당신께서 원하시는 그 기준을 바라보고 그 기준과 일치되기 위해 그 곳을 향하는 모습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책임지고 있는 그곳에서 새로운 행복의 터전과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새로운 심정의 동산과 자유의 동산을 그리워하면서 이 시간을 대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언제든지 아버지께서 찾아가셨을 때, 자유스런 환경에서 아버지의 몸처럼 아버지와 같이 움직이고 통할 수 있는 모습이 되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아버지와 자녀는 일체라고 하셨사오매, 당신은 마음인 고로 저희들은 몸이 되어서 저희들이 행실이 당신의 기쁨으로 연결되어야 할 것을 알고 있사오니, 이 자리가 그럴 수 있는 자리가 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암흑 같은 이 땅이지만, 저희들이 당신을 향하여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새로운 모습이 될 때 비로소 이 땅이 아버지께서 바라시는 소원의 곳이요, 소원의 동산이 아니겠습니까? 그러한 아들딸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아버지의 소원이 아니옵니까? 그러한 소원의 땅에서 온 몸과 마음으로 아들딸을 품고 사랑하고 싶고, 또한 세계를 그렇게 사랑하고 싶지 않으셨습니까? 그런 아버지의 사랑의 마음이 저희들 소원의 동산에 어릴 것을 아옵니다. 그 가운데에서 당신께 경배드리고, 당신의 은혜를 부르짖고, 당신의 승리를 흠모할 수 있는 모습이 나타나기를 얼마나 고대하셨사옵니까? 또한 당신께서 무한히 무한히 찬양하고 싶고, 무한히 무한히 칭찬하고 싶고, 온 세계의 모든 전체를 상속해 주고 싶은 사랑의 아들딸이 나타나기를 얼마나 고대하셨사옵니까?
그러한 모습이 되기에는 너무나 부족하다는 것을 이 시간 느끼게 되옵니다. 하오니 아버지여, 당신의 넓으신 심정과 긍휼하신 자비의 손길로 저희를 품으시어서 당신의 높고 깊은 그 오묘한 이치를 느끼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그 무엇으로도 굴복시킬 수 없는 강한 힘으로써 저희를 얽어 주시옵소서.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 이 시간 저희 각자를 품어 주시옵소서. 어려움 가운데에 처할때 당신의 능력으로 저희를 자각시켜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내일의 소망의 세계 앞에 부끄럽지 않는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원수들 앞에 강하고 담대한 용자의 모습을 갖추기 위하여, 이 땅 위에 천국의 이념을 세우기 위해 이 길을 나선 저희들에게, 아버지,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개척자로서의 사명과 아버지의 아들딸로서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갖추어야 할 모든 것을 저희들이 갖출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아침 이곳을 바라보며 기도하는 자들이 있사옵니까? 그들에게 복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열 번 부르면 백 번 염려하시는 아버지의 사랑의 마음에 취할 수 있고, 아버지의 참되신 심정 가운데에 사로잡힐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참된 인연 가운데에서 당신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그 자리까지 가는 데 있어서, 아버지, 같이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천한 몸들이 당신의 존전에 부복하여 부끄러움을 느끼오니, 이들이 당신의 고요한 심정 가운데 흘러드는 생명의 힘을 흠모하면서, 그것을 찬양하고 그것을 자극제로 삼아 생명의 인연을 맺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그렇다' 할 수 있는 기쁨의 내용, 승리의 요건을 갖출 수 있는 오늘 이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제 60년대의 마지막 달, 얼마 남지 않은 짧은 날들을 저희들은 최후의 정성어린 심정으로 넘겨야만 되겠사옵니다. 60년대를 맞이하여 지금까지 달려온 저희들, 이제 최후의 종착점을 향하여 달리고 있는 이 순간, 저희들이 짊어진 모든 짐과 저희들이 갖추고 있는 형상이 어떤가를 살펴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아버지 앞에 누추하고 부끄러울 수 있는 내용이 있다면 그것을 제거하여 아버지께서 염려해 주시고, 아버지께서 동정해 주실 수 있는 모습들이 되어야 하겠사옵니다.
하늘을 위하여 나오던 중에 당해야 했던 억울한 사연과, 하늘을 위하여 싸우다 남긴 상처와 흠을 품고 아버지의 거룩하신 모습에 화할 수 있는 참신한 아들딸의 모습이 되기를 저희들은 원하옵니다. 아버지의 품에 안기기 위해 아버지께 달려갈 줄 아는 아들딸이 될 것을 저희들은 고대하고 있사옵니다. 하오니, 저희들이 아버지 앞에 자랑할 수 있는 내용을 갖출 수 있게 하여 주시옵고, 부족한 저희들이 생명의 권한을 가지고 심판의 행사를 대행할 수 있는 아들딸로 허락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님이시여! 세계에 널려 있는 통일의 무리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앞으로 세계에 보낼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더더욱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영계에 있는 수많은 선지선열들과 땅 위에 있는 후손들을 규합하시어서, 40개 국에 택정한 120개 성지를 중심삼고 세계 인류가 아버지의 품에 품길 수 있는 그날이 어서 속히 오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 한국을 그리워하는 당신의 자녀들의 애절한 소리를 들어 주시옵소서. 간곡한 심정으로 이 땅을 그리워하고 있는 무리 위에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하늘에 의지하여 이곳을 마음으로 흠모하고 눈물로 그리워하는 그들의 고충을 저희가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여기에 처하고 싶어하고, 여기를 와 보고 싶어하는 그들의 간절한 마음을 저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자리에 참석한 저희들의 존귀한 가치를 자신들이 느끼게 하여 주시옵소서.
수많은 땅과 수많은 사람이 있었사온데 그 가운데에서 이곳을 찾아오시기 위해, 아버지, 얼마나 수고하셨습니까? 얼마나 억울하셨습니까? 또한 얼마나 딱하고 얼마나 고독하셨으며, 얼마나 비참하셨습니까? 저희들은 이자리에서 아버지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자녀인 것을 높이 평가해야 되겠습니다.
아버지, 저희들을 믿으시고 이 자리를 찾아오셔서 여기에 머무르시고 여기에 짐을 풀고자 하신 아버지의 심정을 아오니, 이 자리를 찾아와 기뻐하시고, 또한 여기를 찾아와 눈물을 흘리는 그들 위에 만복을 베풀어 주시옵기를 바라옵니다.
천번 만번 빚을 지우고도 그것을 기억치 않고 잊어버리는 것이 하늘 아버지의 심정이며 부모의 심정인 것을 아옵니다. 그렇게 수고해 나오신 아버지시온데, 그러한 아버지의 눈물을 막아 주는 아들은 한 명도 없었으니, 아버지, 얼마나 얼마나 분통하고 억울하셨사옵니까?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아들딸의 눈물을 막아 주기 위하여 아버지의 입장과 위신마저 버리셨사옵니다. 하오니, 당신의 분통하고 억울한 그 사정을 알고 위로해 드리는 아들딸이 되어야 할 저희들인 것을 확실히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무리 이 땅 위에 서러움이 있다고 하여도, 아버지께서 당하신 그 이상의 서러움은 없다는 것을 저희들은 온 천지와 함께 느껴야 되겠습니다. 아무리 불쌍한 사람이 있다고 해도 아버지 이상 불쌍한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고, 저희들은 하늘땅에 사무치게 통곡해야 되겠습니다. 또한 억울하고 분하고 비참한 모습이 있다고 할진대는, 그것이 아버지의 모습이라는 것을 저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슬픔의 역사 가운데 있을 수 없는 비참한 자리에 계신 아버지, 그런 자리에 계셔서는 안 될 아버지께서 그러한 자리에 계실 수밖에 없었던 것이 누구 때문인가를 생각할 때 그것은 바로 `나' 때문이며, 내가 살고 있는 내 가정 내 종족 내 민족 내 나라 때문인 것을 느끼게 되옵니다. 하오니, 저희들로 하여금 그러한 사실을 생각하고 천년사에 쌓인 모든 한을 짊어지고 아버지 앞에 눈물로 호소하여야 될 자신들인 것을 발견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사람에게는 탄생의 한때가 있음과 동시에 기필코 최후의 운명의 한시간이 있어 그때가 점점 다가온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호흡과 맥박이 시작되어 이 땅 위에 고고지성을 울리는 그날부터 슬프고 한 맺힌 곡절의 역사를 더듬어 가야 할 인생행로에 있어, 가야 할 목적과 모셔야 할 분을 알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과는 달리, 저희는 태어나기를 아버지를 위하여 태어났사오니 살기도 아버지를 위하여 살고, 가는 것도 아버지를 위하여 가야 하겠사옵니다.
이 땅 위에 거룩하신 당신의 모습을 모셔 놓고 그 존재를 거룩하다 할 수 있고, 그 사는 생활 자체를 거룩하다 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저희가 바라보는 최후의 소망이 아니겠습니까? 그럴 수 있는 아버지의 아들딸들이 될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아버지는 때때로 저희에게 심정의말씀을 주십니다. 당신과의 인연은 뗄래야 뗄 수 없고, 슬픔의 역사에서 만났고, 같은 사정에 놓여 있는 것을 저희들이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하나의 이념으로 인연된 저희들 각자인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슬픈 아버지의 모습 앞에, 불쌍하신 아버지의 모습 앞에 통곡하면서 그 아버지를 위로해 드릴 줄 아는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어서 빨리 슬픈 자리로부터, 한의 눈물로부터 당신을 해원해 드릴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러기 위해서는 아버지께서 저희를 구원의 은사로 사로 잡으시어 저희가 생명의 은혜 가운데에서 아버지 앞에 맹세드릴수 있는 자녀들 되게 키워 주시옵시길,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남아진 이달을 아버지께 맡기옵니다. 아버지, 한 많았던 1960년대를 보내야 할 때가 되어 옵니다. 1970년대를 맞이하는 이 경계선에서 자기자신을 조명해 보고, 아버지 앞에 부끄러운 모습이 아닐 효자의 모습으로 힘차게 새해를 맞이할 준비를 하게 하여 주옵길 간절히 바라옵니다.
과거의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새로운 시대의 새뜻을 중심삼고 새로운 용자의 모습을 갖추어, 당신의 새로운 아들딸로서의 이름을 빛내면서 1970년대를 향할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남아진 시간을 당신께서 지켜 주시옵기를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행복한 생활만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고, 또한 직접 체험하고 있습니다. 개인이 그러하듯이 가정도 역시 그러하고, 민족도 국가도 그러하고, 오늘날 세계의 정세를 두고 봐도 역시 그러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 때문에, 오늘날 전인류는 불행의 여건을 가려 나가지 않으면 안 될 생활무대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과거의 역사도 그렇게 흘러왔고, 또 현재도 그러하고, 미래의 역사 또한 그런 환경으로 연결되어 계속될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환경 속에서 한 생명을 지니고 있는 우리들 개인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슬픔도 개인을 중심삼고 시작됨과 동시에, 개인을 중심삼고 끝나고 있습니다. 이것이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인간의 운명인 것입니다.
한 국가의 슬픔을 그 국가 자체로서는 해결지을 수 없습니다. 그러한 국가의 슬픔을 해결짓기 위해서는 그 국가의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자체내에서 슬픔을 해결할 수 있는 어떤 동기와 인연을 모색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그 국가 전체가 불행이라든가, 악의 여건에서 벗어날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세계의 행복을 추구한다 해도 그 행복이라고 하는 것이 전체를 중심삼고 일시에 다가올 수는 없는 것입니다. 세계의 행복이 이루어지기 전에 세계에 널려 살고 있는 개개인의 행복이 먼저 이 땅 위에 싹터야 합니다. 그리하여 이 땅에서 개개인의 행복이 열매 맺지 않는 한 세계의 행복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러한 점들을 중심하고 볼 때, 오늘날 우리 개체 개체가 얼마나 중요한 입장에 있는가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행복의 모체도 될 수 있고, 불행의 모체도 될 수 있는 두 경계선상에 우리 개체 개체들은 서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개개인, 즉 우리들 개체 개체는 누구나 `나'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중심삼고 위로는 부모가 있고, 아래로는 자녀가 있으며, 좌우로는 형제들이 있는 것입니다. 또한 전후에는 민족이라는 것과 인류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내 한 개체가 이 모든 전체의 중심을 이루는 모체가 되느냐 하는 것을 두고 볼 때, 역사가 아무리 깊고 어떤 인연이 아무리 크다고 하더라도 나를 벗어난 역사요, 나를 벗어난 인연일 때는 나와 하등의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세계에 널려 있는 수많은 민족, 혹은 수많은 인간이 행복하게, 혹은 현세계에서 나타나는 수많은 사회적인 현상이 아무리 행복한 것으로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그 행복이 나와 관계를 맺기 전에는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라는 존재는 전체와 구별된 어떤 특정한 입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대신한 입장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므로 역사를 창조해 나가는 데 있어서도 바로 이 `나'를 참신한 모습으로 세워 나갈 때에 새로운 역사는 창조될 것입니다. 또 역사적으로 행복을 추구하는 생활에 있어서도 나 자신의 참신한 모습을 찾지 않으면 이 땅 위의 행복이나 평화라는 것이 나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이렇듯, 모든 것이 나를 중심삼고 연결되어 있고, 모든 것이 나로 말미암아 좌우된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인간이 그런 입장에 서 있느냐? 그것은 온 인류의 생명의 근본이며 우주 전체의 중심이 되시는 절대자 하나님 앞에, 인간이 제일 가까운 상대적 입장에 있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이 하나밖에 없는 절대적인 주체 앞에 하나밖에 없는 대상의 입장으로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모든 행 불행의 요건이 인간인 내 개체에서, 즉 타락한 개체를 중심삼고 인연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절대적인 주체자 앞에 상대적인 한 개체로부터 행복이 시작될 수 있는 것이요, 참이 형성될 수 있는 것이요, 자유도 희망도 승리도 혹은 영광이면 영광도 거기서부터 싹틀 수 있는 것입니다. 또,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전체 행복의 모체가 될 수 있고, 모든 희망의 요건의 중심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럴 수 있는 사람을 중심삼고 온 세계에 행복과 희망의 인연을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인연을 통하여서만이 이 땅 위에 새로운 행복이라든가 희망의 세계가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절대자 앞에 모든 희망의 요건이 될 수 있는 참다운 자신의 모습을 갖추어 이 땅 위에 나타나지 않고는 어떠한 행복도 자신과 관계가 없는 것이요, 어떠한 소원도 자신과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그냥 지나가 버리는 거예요.
역사의 흐름 앞에, 혹은 생명의 인연을 맺어 가는 인류의 생애 앞에 남겨질 수 있는 참신한 행복이라는 것은 기필코 절대자와 일치될 수 있는 한점을 갖고 나타나는 `나'로 말미암아서만이 출발될 수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그러한 '나'가 문제인 것입니다. 세계에는 30억 인류가 역사를 따라 흘러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가운데에서 주인의 자리에 설 수 있는 `나'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인류 앞에 행복을 제시한다면 제시된 그 행복은 어떠한 중심을 통해서 시작될 것이어늘, 우리가 그 중심이 되어 우리로 말미암아 행복이 시작될 수 있도록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중심의 자리에서 행복을 출발시킬 수 있는 그 `나'를 그리워해야 되겠습니다.
세계가 추구해 나가는 하나의 세계, 이상의 세계, 혹은 행복이니 선이니 하는 것들은 때에 따라서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를 주관할 수 있는 중심이 되고, 천지의 운세를 움직일 수 있는 중심의 자리에 선 `나'가 되면, 우리는 그때부터 영원하신 절대자와 영원히 함께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사는 것도 절대자와 같이, 죽는 것도 절대자와 같이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자리에 설 수 있는 `나'가 되기를 만인류는 바라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의 선한 사람은 그러한 기준을 하나의 포인트로 해서 자기 자신의 위치를 결정짓게 됩니다. 그러한 중심점과 자기와의 거리가 어떠한지, 각도가 어떠한지, 혹은 방향이 어떠한지에 따라서 민족 앞에 애국자요, 혹은 세계 앞에 위인이요, 혹은 인류 앞에 성현현철이다 하는 것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의 중심을 기준으로 그 중심과 방향이 다른 역사한 이념은 우리가 바라는 소망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요구하는 중심 앞에 거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렇듯 중심 앞에 거리를 두고 있는 자리에 있고 완전함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거리를 초월하여 그 중심과 거리가 없는 자리에서, 우리가 바라는 모든 것의 출발의 기원이 될 수 있는 자리에서의 참과 행복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곳이 기필코 있어야만 될 것입니다.
오늘날 개체의 중심이 될 수 있는 그 한 자리는 개체의 중심인 동시에 가정의 중심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러한 개체와 인연된 가정, 그러한 개체와 인연된 가정을 중심삼은 사회, 그런 개체와 인연된 사회를 중심삼은 국가, 그런 개체와 인연된 국가를 중심삼은 세계, 그 세계가 바로 우리가 가야 할 소망의 곳이요, 희망의 세계입니다. 그러한 세계가 왈 유토피아요 지상천국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인류가 역사노정에서 완성된 최고의 참의 경지를 추구해 나가는 입장에서 헤아려 볼 때, 하나님이 인류를 중심삼고 가고 싶은 곳, 머물고 싶은 곳이 어디일 것이냐? 그 곳은 바로 그러한 중심이 세워져 있는 곳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곳을 찾기 위한 중요한 방편이 종교입니다. 종교는 어디까지나 그런 곳을 향해 갈 수 있는 길을 찾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발판 위에서 종교와 나와의 관계를 잘 모색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목적지를 향해 갈 때 생각하는 것과 그 목적지의 사정은 다릅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목적지는 그곳을 향해 가면서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그 내용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적지를 향해 갈 때의 내용을 목적지의 내용으로 삼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러니 지나가는 과정에서는 다른 새로운 기쁨의 내용을 갖고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것이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부활입니다. 여기에서 우리 인간의 본연의 자세를 중심삼은 새로운 생명이 부활되어 나올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은 이러한 기준을 중심삼고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삼천만 민족 가운데 어느 누구의 마음에 그러한 기준이 세워지기 시작했느냐 할 때, 그것의 정도에 따라 세계 30억 인류의 마음에도 그러한 움직임의 형태가 나타날 것입니다. 만일에 그런 움직임이 전혀 없다면 인류는 절망인 것입니다. 아무리 하늘이 있다 해도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할 수 없이 하나님이 중심을 떠난 자리에 머물러야 한다면 그 하나님은 너무나도 비참한 하나님입니다. 인류의 마음 가운데 머물러야 할 하나님이라면 중심을 떠난 그러한 비참한 자리에는 머물지 않아야 됩니다. 본연의 그 중심이 세워지기 전에는 우리 가운데 나타나지도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기에 도의 세계에서는 참신한 마음의 본원을 찾아 나가는 것입니다. 그곳은 인류 전체가 스며들 수 있는 곳이요, 존재세계 전체가 인연을 맺는데 있어서 동기가 될 수 있는 곳이요, 또한 하늘이 이상적인 무대로 삼을 수 있는 곳입니다.
인류도 그 자리를 찾고 있지만, 하나님도 역시 그 자리를 찾고 있을 것입니다. 인류가 모르는 가운데에서 그곳을 암중모색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도 모르는 가운데에서 암중모색하실 것이냐? 아닙니다. 하나님도 모르는 가운데서 암중모색하신다면 우리가 그곳을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절대자 하나님도 그 자리를 암중모색하고 있다 할진대, 우리와 같이 약하고 부족한 사람들이 그곳을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애당초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아는 가운데서 그곳을 향하고 계실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면 중심이 될 수 있는 사람, 또 그런 사람을 중심삼은 가정, 그러한 가정을 중심삼은 나라, 그러한 나라를 중심삼은 세계는 확정지어져 있어야 할 것이 아니겠느냐? 다시 말하면, 영원히 변할 수 없고, 영원히 상처를 입어서도 안 되고, 영원히 장해와 반대됨이 없는 자유스러운 경지에서 거룩과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참된 모습을 하나님은 원하시고 계실 것이 아니냐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모습을 하나님은 혼자 지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짓는 데에는 사람이 상대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비참하시지 않겠느냐 말입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 제목이 `수욕의 상처'지요. `수욕(受辱)'이라는 말이 나왔는데, 욕이 뭐냐? 수치입니다, 수치. 이 수치가 뭐냐 하면, 참인데도 불구하고 참되지 못한 입장의 대우를 받으면 거기에서 수치가 생기는 것이요, 또한 거기에서 부끄러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부끄러움과 수치가 정말 그렇다고 공인되면 그것은 욕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참이 참된 입장을 완전히 부정당하게 될 때 거기에 수욕이라는 말이 생기는 겁니다. 그러니 그 상태에서 벗어날래야 벗어날 수 없는 입장에 서게 될 때 그것은 무한한 고통이요, 무한한 불행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예를 들어 말한다면, 자식이 부모 앞에 둘도 없는 효자로서 `효자의 도리는 바로 이런 것이다' 할 정도로 효성을 다하여 그로 말미암아 부모가 기쁘고, 그럼으로 말미암아 부모와 자식이 완전히 하나될 수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 효자입니다. 그런데 그런 기준에 있는 효자인데도 불구하고 효자가 아닌 것처럼 공격을 받고 참효자의 자리를 되물려야 할 입장에 놓이게 될 때, 그것은 무엇보다도 치욕이 되는 것입니다. 부모와 하나된 효자의 가치가 천만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면 욕이 된 입장에 있는 사람의 수욕의 상처 역시 그만큼 깊은 것입니다.
만약 그것을 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이냐? 그 이상의 자리로 올라서야 합니다. 그 이상의 자리로 올라서는 데는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 자식의 마음에 고개가 생기고, 부모의 마음에 고개가 생깁니다. 두 고개의 경계선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것도 두 경계선의 입장이 각각 다르게 나타납니다. 그러다가 두 경계선의 위치가 점점 멀어지게 되고, 그냥 두면 결국은 영원히 분립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이 경계선을 일치화시킬 수 있을 것이냐? 일치화만 시켜 가지고도 안 됩니다. 경계선을 일치화시키고, 그 고개를 넘어갈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본래의 상태로 복귀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효자가 부모의 마음을 상심하게 했다면, 부모에게서 그 상심이 사라지게 하기 위해서는 옛날에 효도하던 기준 가지고는 안 됩니다. 지금까지 행동하던 것 가지고는 안 돼요. 지금까지 효의 표준으로 생각했던 것들을 새로운 눈으로 감별해야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효의 표준이라고 믿었던 자신을 다시 한번 비판해야 됩니다. 비판하고 감별해야 할 여건이 남아 있는 자리에서의 효의 기준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 이상으로 효의 기준을 상회시켜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부모가 입은 수욕의 상처를 씻을 수 있을 것 아닙니까?
한 나라의 군신 관계에 있어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군왕과 충신이 사이에 있어서 신하가 군왕으로부터 `충신의 도리가 바로 이것이다. 너야 말로 나의 충신이다. 너는 우리의 영광이요, 너와 나의 관계는 역사에 영원히 남겨질 수 있는 관계요 인연이다'라는 칭찬을 받던 자리에서 `네가 이럴 줄 몰랐다' 할 수 있는 변절자의 모습으로 대두되게 될 때 그 군왕이 입은 상처가 얼마나 크겠습니까? 옛날의 충신의 자리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옛날보다 몇백 배 이상의 충성을 하고, 몇천 배 이상의 신의의 도리를 세워야 할 것입니다. 그래도 군왕의 마음을 돌이키기가 힘들지요. 옛날보다 천 배 이상의 충성을 다하더라도 상처입은 군왕의 마음을 돌이키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군왕의 마음에 생긴 상처는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군왕은 그것을 천년이 지나도 잊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신하에 대한 믿음의 강하고 바라는 바가 컸다면 큰 만큼, 거기에 비례하여 그보다 몇천만 배의 큰 아픔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그 아픈 마음을 항시 간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옛날보다 몇천 배 몇만 배의 충성을 하여 군왕의 그 아픈 마음을 다시 풀어 드리고, 군왕이 입은 수욕의 상처를 씻어 드리지 않고는 옛날의 충신의 자리를 회복할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적인 정을 중심삼고 볼 때, 그리고 인간세계에서 영원히 통하는 의리를 중심삼고 볼 때,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는 어떻겠습니까? 여기에서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최고의 중심입니다. 그것을 찾기 위해서 하나님은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을 세워 지도해 나오셨습니다. 어떤 때에는 갑이라는 사람을 세워서 지도해 나오셨고 어떤 때는 을이라는 사람을 세워서 지도해 나오셨습니다.
참을 구하기 위해 수고하시는 하나님은 그들을 한갓 꼭둑각시로 대하신 것이 아닙니다. 참되지 못한 것을 참 이상의 자리에 세우려 하시는 입장이시기 때문입니다. 참의 자리를 떠나 참의 가치를 잃어버린 인간을 다시 참의 자리로 돌아오게 하는 데는 인간이 그 동기가 될 수는 없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이 그 동기를 일으켜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 당하신 하나님의 상처와 수모가 얼마이겠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수모를 당한 부모, 수치를 당한 군왕의 입장에서 인간에게 `이 치욕은 너희가 씻어라' 하신다면 인간이 참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은 절대 불가능합니다.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아무리 몸부림친다 해도 본연의 행복의 기준을 찾아 갈 수 없는 입장인 것입니다. 이런 인간에게 스스로 본연의 기준을 회복하기 바란다면, 그 하나님은 영원히 인류와 관계를 맺을 수 없는 입장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을 최고의 중심 위치까지 올려 놓아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누가 그 동기가 되어야 되느냐? 수욕의 동기는 인간으로 하나님이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수욕의 상처를 회복시킬 수 있는 동기는 하나님이 아니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비참한 것입니다. 불효막심한 아들로부터 치욕을 당한 부모가 그 아들을 다시 찾아 나서야 하는 것, 이것은 부모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천지(天地)가 지천(地天)이 된 놀음이요, 상하(上下)가 하상(下上)이 된 놀음입니다. 거꿀잡이 놀음이예요. 그럴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입장이라는 것은 너무나 비참한 것입니다. 여러분도 생활하는 데 있어서 그런 일을 당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수치니 수욕이니 하는 말은 그런 자리에서 성립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지금까지 우리 인류를 대해 나오신 길은 어떤 길이었느냐? 수치뿐만이 아니라 수욕의 길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이걸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경계선을 만들어 그 거리를 멀게 한 것은 인간인데도 불구하고, 그 거리를 단축시키는 일은 하나님이 하셔야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영원한 절대자의 자리에서 상대적인 인간을 대신하여 하나의 내적인 모습으로 나타나, 그 길을 개척하시는 개척자의 입장에 서신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을 사탄은 조롱합니다. `그것이 당신이 할 일입니까? 당신은 선하고 충효의 도리를 다하는 본연의 인간을 바라보고 기뻐해야 할 입장이 아닙니까? 그런데 당신은 당신에게 상처를 준 인간을 위해 정성을 들이다니요? 그것은 당신의 본래의 뜻이 아니지 않습니까?' 하면서 조롱한다는 것입니다.
타락한 자식을 찾아가는 부모는 타락한 자식이 당하는 수모 이상의 수욕을 당하는 것입니다. 자식이 당하는 부끄러움 이상의 부끄러움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 부모를 바라보는 자식들은 타락한 인간 이하의 평을 받더라도 거기에 아무런 조건도 제시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이상의 비참한 일을 당하더라도 그런 자식을 찾아간 부모 앞에서는 변명할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분하기는 하지만 거기에 반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반박하면 할수록 더더욱 비참해질 뿐입니다.
그런 사연을 바라보게 될 때, 하나님은 지금까지 잃어버린 아들딸, 진정한 의미에서 잃어버린 아들딸을 찾아 나오시는 것이요, 인간 역시 가운데 역사의 중심이 될 수 있는 참된 사람, 우리 모두의 행복의 기원이 될 수 있고 희망의 기점이 되는 자리에 설 수 있는 아들딸의 모습을 찾아 나오시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당신의 세계를 다시 찾아 나오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사탄은 무한히도 괴롭히고 무한히도 조롱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런 수치의 자리를 피하려고 하셨다면 오늘날 인류는 어떻게 되었을 것이냐?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수치스러움을 잊어버리고 또 잊어버리고, 주위에서 반박하는 원수의 아우성을 들을 적마다 `앞으로 나타날 아들딸은 옛날의 아담 해와와는 다르다. 내가 찾아나서는 아들딸은 옛날에 타락한 아들딸과 다르다. 죄악으로 출발한 그런 인간들과는 다르다. 기필코 다르다'라고 하시며 소망을 품고 그런 아들딸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런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지금까지 역사를 이끌고 섭리해 나오시는 것입니다. 원수가 조롱할 수 있는 동기와 기원을 마련한 인간이 아닌 그 이상의 인간을 찾으시며, 원수가 제시한 사랑이나 참이나 선이 아닌 그 이상의 것을 지닌 인간을 소망하시고 찾아 나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소망이 없었더라면 지금까지 역사노정을 거치면서 복귀섭리라고 하는 대업을 해 나오실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런 마음을 가지고 나오신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중심사상으로 삼고, 그 소망이 실현될 역사적인 시대를 바라보고 지금까지 나오신 거예요. 그래야만 그 이상의 아들딸을 찾을 수 있을 것 아닙니까? 또 그러한 아들딸을 찾지 않고는 수욕의 상처를 메울 길이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오늘날 하나님을 부르는 우리들, 즉 신앙자들의 태도가 어떠해야 할 것이냐? 하나님 앞에 수욕의 상처를 남긴 아담 해와의 입장을 넘어서 가겠다고 천배 만배 다짐하는 입장에 서야 합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이 인간을 믿을 수 없었던 억울한 사연을 전부 다 탕감복귀시키고도 남음이 있을 자리에 서야 합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한계선이 어디일 것인가? 하나님이 영원히 믿지 않을 수 없는 믿음의 아들딸, 원수가 참소할래야 참소할 수 없는 거룩한 아들딸의 모습을 찾으시는 그 한계선이 어디일 것인가? 아담 해와보다 십배 나은 자리일 것이냐? 백배 나은 자리일 것이냐? 천배쯤 나은 자리일 것이냐? 천 배든 만 배든 몇억만 배든, 어떻게든 그 기준을 넘어서 하나님의 상처를 완전히 메웠다 할 수 있는 자리까지 가야 합니다.
이런 것을 생각해 볼 때에, 오늘날 우리들의 입장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죄송한 입장입니까? 우리 인간의 과거지사를 생각해 보면, 생활 속에서 하늘 앞에 지은 많은 죄들을 생각하면, 현재 하나님이 나를 몰라 주고, 나를 위로해 주지 않는다고 불평할 수 있는 입장이 못 된다는 것입니다. 내 일대를 놓고 보더라도 일대에 맺힌 한을 하나님이 탕감해 주신다면 내게는 아무것도 안 남을 것입니다. 이 민족이면 민족, 세계면 세계가 한꺼번에 폭파되어 멸망을 당한다 하더라도 반박할 생각조차도 하지 못할 입장에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가운데에서 승리한 아들딸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수욕의 역사를 밟고 넘어서 역사적인 모든 존재들이 어떠한 참소의 조건도 내세울 수 없는 참의 모습, 효의 모습, 충의 모습을 갖춘 아들딸이 어디 있느냐? 그런 아들딸은 하늘만이 찾는 것이 아니라, 인류도 찾아야 됩니다. 그러한 아들딸이 있는 자리가 인류가 가야 할 생명의 중심지인 것입니다. 그러한 자리를 찾아가야만 우리에게 행복이 올 것이며, 그 자리를 찾아가야만 우리에게 희망의 세계가 올 것입니다.
오늘날 모든 종교가 그러한 자리를 찾아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사상을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재림사상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그런 자리를 찾아가서 거기에 하나되고, 거기에서 화합하여 일체가 될 수 있는 자신이 되기 위해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떤 자리에 있습니까? 우리가 믿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예수 믿고 천당가자고 하는데, 자신도 못 믿는 사람들이 예수를 믿을 수 있습니까? 그러면 이처럼 모순되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자신이 자신을 절대적으로 신임할 수 있는 사람이 예수를 믿겠다고 해야지, 자기 자신도 믿을 수 없는 사람이 `나 예수 믿소'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것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볼 때, 하나님은 불쌍합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과연 하나님은 불쌍하다는 것입니다.
딸이면 딸, 아들이면 아들이라는 운명을 안고 태어난 여러분은 시대가 바라는 소망 앞에 어느 한때는 등장함을 받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너는 이런 딸이 되겠느냐, 너는 이런 아들이 될 수 있겠느냐 하는 이 역사의 소망 앞에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생김생김이야 어떻든 간에 충신이 될 수 있고, 효자가 될 수 있느냐는 것이 문제입니다. 얼굴이 잘났다고 해서 충신이 되는 것이 아니요, 못난 사람이라고 해서 충신이 못 되는 것도 아닙니다. 생김생김이 문제가 아니예요. 외적인 모습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골수로부터, 그 마음에서부터 하나님의 아픈 심정을 체휼하면서 천만번 흐느껴 통곡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당신이 그래서야 되겠느냐고 부르짖고 나설 수 있는 참된 효자의 모습, 참된 충신의 모습을 하나님은 그리워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기서 아담 해와의 몇백 배 몇천만 배의 가치를 지니고 본연의 진실된 효의 마음을 가지고 아버지 하나님 앞에 꽃이 되고 향기가 되어 영광된 모습으로 머리 숙일 수 있는 효자로서의 도리를 다할 수 있겠습니까? 효자라고 하더라도 흠이 남아 있는 모습, 타락의 역사를 청산짓지 못하고 계속적으로 연결되어 미래에 흠을 남길 수 있는 그런 아들딸의 모습은 아닙니까? 그런 여러분을 대해서 하나님께서 아들이라 딸이라 부르시는 그 내심에는 얼마나 부족함을 느끼고, 그 내심에 얼마만큼 큰 아픔과 상처를 품고 대하시겠습니까? 이런 점들을 볼 때, 오늘날 우리는 자신의 신앙자세를 새로이 점검해 보아야 되겠습니다.
타락하기 전의 아담을 하나님이 얼마나 좋아하셨습니까?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보고 아담은 또 얼마나 반가와 했습니까? 그때의 인상이 하나님의 가슴에 남아져 잊혀지지 않을 것입니다. 또 에덴에서 아담 해와를 찾아 나설 때의 하나님의 모습이 어떠했습니까? `아담아' 하고 자식을 부를 때의 그 마음이 얼마나 기뻤습니까? 그 자녀의 모습을 바라볼 때, 그 얼굴과 보이는 모든 부분 부분들을 바라보시는 아버지로서 마음에 느낀 자극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때의 하나님 마음에는 희망이 넘쳤고, 행복이 싹텄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소원이 거기에서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하나님의 소원을 이룰 수 있는 영원한 대상으로 섰다면, 그들을 바라보시는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뿌듯했겠습니까? 그런데 일시에 탕개줄이 뒤틀려 가지고 하나님의 아들딸이 파탄을 당하는,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아픈 사건이 생긴 것입니다. 가뜩이나 소망 가운데 계시던 하나님이 그런 입장에 나서야 하는 억울함에 하나님은 얼마나 큰 상처를 입으셨겠습니까?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요, 우리는 그것을 해명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 다시 들어가서 그 문제를 해결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고개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우리는 아담 이상의 자리, 해와 이상의 자리에서 아담 해와 이상의 가치를 가진 모습으로서 나타나야 합니다. 그리하여 악한 세상에 절대 더럽혀지지 않겠다고 결심할 수 있는 자리, 하나님께서 사랑하시지 않을 수 없고 안아 주시지 않을 수 없는 자리에 나아가, 그러한 자신의 높고 큰 가치를 스스로 인정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버지' 하며 부르는 그 자리는 천태만상일 것입니다. 그러면 최고의 자리에서 아버지를 부르는 그 한마디로 하나님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아들딸을 하나님은 언제 만날 것이냐? 하나님은 지금까지 그런 아들딸을 못 만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그러한 아들딸, 한 개인으로서만이 아닌 세계의 중심자로서 나타날 수 있는 아들딸, 하나님께서 소망하시던 실체, 승리의 권한을 갖춘 하나님의 아들딸로 당당히 나설 수 있는 그런 아들딸을 만나기 위해 얼마나 몸부림치셨겠습니까? 여러분이 그런 것을 생각해 본다면, 앞이 얼마나 꽉막혀 있다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자리를 넘어섭시다. 어떠한 담도 헤치고 갑시다. 그 무엇에 부딪쳐도 깨질 수 없다는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내 몸은 깨어질망정 내 마음은 깨질 수 없다고, 내 몸은 상처를 입더라도 내가 갖추어야 할 자세와 예법을 갖추어야 되겠다고 하는 마음을 가지고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러한 입장에서 참고 나오신 하나님이 동정하실 수 있는 길을 가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될 것이냐? 제일 동정받을 수 있는 길이 어떤 길이냐 하나님이 수욕당한 것과 마찬가지로 수욕을 당하는 길입니다.
타락한 자식, 불효의 자식이라 하더라도 아버지의 교훈, 어머니의 교훈을 따르면 아버지 어머니와 가까와지는 것입니다. 너는 죽더라도 이 일을 행하고 죽어야 된다고 하는 부모의 훈시를 받았다면, 타락은 했지만 타락한 환경을 박차고 나가서 `나는 이렇게 살겠다'고 하며, 그렇게 살기 위해 몸부림쳐야 합니다. 환경이 자신과 배치될 때는 `나는 그 환경에 영향받고 살 수 없다'고 하며 그 환경을 과감히 반대하고 나설 수도 있어야 합니다. 주위에서 너는 그렇게 살 놈이 아니라고 하며 몰아치면 몰아칠수록, 그러한 환경에 몰리면 몰릴수록 부모와는 가까와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간접적으로 하나님의 심정을 유발시키는 작전입니다. 이 작전이 하나님의 동정을 받을 수 있는 제일 훌륭한 방법입니다.
세상에서도 그렇지 않아요. 자식이 어떤 잘못을 했을 때, 동네방네 할아버지라든가 어른들이 와서 나도 어릴 적엔 그랬다고 하며 용서할 수 있는 증거를 들고 나서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모는 용서해 줄 수밖에 없지요. 자식이 타락은 했을망정 그것을 마음으로 뉘우치고 그 타락할 때의 환경보다도 더 억센 환경에서 몇번이나 다시 타락할 수밖에 없는 입장에서, 수천명의 타락한 사람들이 자기들의 입장으로 자신을 끌어 내리려 해도 나는 부모의 명령을 지키겠다고 몸부림쳐야 합니다. 그리하여 죽더라도 그 명령을 지키다가 죽겠다고 하면서 상처투성이가 되어가지고도 맞는 그 자리를 찾아가면 거기에서 비로소 하나님은 부모로서 다시 동정을 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리에 가야 하나님의 동정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길이 빠른 길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늘을 위해 맞고, 하늘을 대변해 선을 주장하고, 하늘을 대신해서 사탄과 대결하고, 사탄 앞에서 `네 마음대로 해봐라. 네가 아무리 그래도 나는 그럴 수 없다'고 하며 나설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는 이러이러한 당신의 아들입니다' 하고 자랑하는 것보다도 `사탄아, 네가 가진 모든 힘을 다해서 수없이 하나님께 억울한 수욕의 상처를 입혀 드리게 했던 행동을 나에게 다시 한번 해봐라' 하면서 사탄의 소굴에 들어가 사탄이 마음대로 관장하는 그 과정을 밟고 올라서서 당당히 나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자리에 서야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외의 길에서는 하늘편에 서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하늘을 중심삼고 노력해도 혼자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도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 그런 인연을 알았다고 해서 완전한 인연이 맺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그 인연을 맺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반드시 원수의 세계에 들어가서 수욕을 당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인연이 맺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이 복귀섭리역사입니다. 복귀되는 자리는 죽음의 자리입니다.
내가 잘살기 위해서,내 욕심을 중심삼은 삶의 보람을 찾아 나선 것이 타락의 시발점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이 죽음의 자리를 찾아가겠다는 결의를 하고 나서는 데서부터 소생의 길이 트여 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된 종교는 죽음의 고개를 넘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 죽음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 안에서 죽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와 동기들, 혹은 그 이웃이나 친척 혹은 그 민족 앞에 죽는 것도 아닙니다. 나와 거리가 먼, 나와 내 민족을 반대하는 무리 앞에 죽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듯 반대하는 세계에 들어가 가지고 반대받는 자리에서 죽게 될 때, 세계앞에 상처를 입은 하나님은 그를 동정하시는 것입니다.
참된 효의 길은 하늘권내에만 머물면서 하늘을 믿고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의 세계에 들어가서 거기에서 효자라는 인정을 받아 가지고 돌아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제일 빠른 길은 이 길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최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할 때 `아바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피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내 뜻은 사는 것이요, 아버지의 뜻은 죽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효자를 만들고 충성의 아들을 만들려면 아들의 뜻대로 해주어야 할 것인데, 하나님은 어찌하여 거기에 반대의 뜻을 세워 가지고 예수님을 내몰게 되었던가? 하나님을 배반했던 인류의 조상과 같은 입장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하나님도 그를 외면하고 사탄도 그를 배반하는 자리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탄도 배반하고 하늘도 같이 배반했기 때문에, 만일 하나님이 동정하게 되면 사탄도 동정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내몰게 된 것이고, 또 그것이 새로운 역사의 동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운명하기 직전까지는 사탄의 기세가 등등하였지만, 예수님이 죽고 난 후에는 머리를 숙여야 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탄과 반대의 입장을 취하시어 이 길을 걸어 나오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탄세계를 거슬러서 새로운 명령의 인연, 새로운 출발의 동기가 솟구치는 역사가 벌어졌기 때문에, 그로 말미암아 오늘날 기독교는 세계적인 문화권을 형성하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슬프게 해 놓고 타락한 아들딸, 즉 사탄이 끌어 가며 좋아하던 아들딸은 죽어 버렸습니다. 사탄에게 이용당했던 그 아들딸, 하나님께 절망을 드렸던 그 아들딸은 죽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소원이 출발됨과 동시에 사탄이 희망했던 길은 절망으로 바뀐 것입니다. 그래서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천리를 통하는 말입니다. 여기서 이 길은 타락한 인간이 가야 할 공통적인 길이 아니겠느냐 하는 문제가 대두하게 됩니다.
수욕의 상처는 언제 사라질 수가 있느냐? 원수에게 짓밟힌 역사를 밟고 넘어서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통한 전체를 동원해 반기를 들고 공격할 수 있는 아들딸이 나타나면, 하나님은 수욕의 날에서 해방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어요?
통일교인은 더더군다나 그런 길을 가야 합니다. 통일교회가 지금까지 욕을 먹지만, 내가 이 길을 계속 가는 것은 나 자신이 양심의 가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늘 앞에는 떳떳한 길이지만, 그 길은 또한 수욕의 길인 것입니다. 이 길을 가는 데는 민족이 동원되어 반대할 것이며, 사탄세계 또한 죽어라고 아우성치면서 반기를 들고 대항할 것입니다. 그래야만 됩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사라져 버리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삶과 죽음의 교차로에서 저울질당할 때에 죽음도 밟고 넘어설 수 있는 당당한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도 인정하고, 사탄도 인정하는 가운데 죽었다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죽는 데는 하늘을 위해 사탄과 싸우다가 죽었다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죽는 것도, 목적을 놓고 보면 둘로 갈라지는 것입니다. 세계가 바로 여기서 갈라지는 것입니다. 죽는 모양은 같지만 `하늘을 위해서 죽었다. 하늘을 위해 사탄의 공격을 받아 죽었다'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친 사람을 굴복시킬 수 있는 것이요, 또 억울하게 상처입은 하나님은 거기에서 새로운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죽더라도 죽음 그 자체로 끝나고 말 것이 아니라, 죽은 다음에 하나님을 위한 인간 세상에서의 충신 효자 이상의 충효의 모습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앞에 참신한 아들의 모습으로 설 때, 비로소 하나님은 새로운 마음으로 그 아들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사도 바울의 서한을 본다면, 그 내용과 사정이 모두 하나님과 일치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개체를 대표하여 죽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중심으로, 그분의 부활은 우리들 전체의 부활이라는 견지에서 피력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내용들을 바탕으로 오늘날 기독교는 영원한 사상을 남길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도 통일교회 안에서의 맹신을 버려야 합니다. 통일교회 사람들은 칭찬을 받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하늘길을 가는 데에 있어서 아우성치는 사탄세계의 원수들을 막고, 생명을 걸고 그들과 싸워 이기는 사람이 하늘에 가깝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효자가 되고 충신이 되는 가장 가까운 길입니다. 거기에서 죽음을 삶으로 바꿔칠 수 있는, 즉 사선을 넘어설 수 있는 승리의 모습이 될 것을 스스로 다짐하게 될 때에, 하늘이 당한 수욕의 상처를 딛고 일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로마제국으로부터 4백년 동안 무한한 학살을 받아왔던 것입니다.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든지 기독교가 가는 곳에서는 피를 흘렸습니다. 피를 흘리지 않고는 기독교 앞에 문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한국을 보더라도 대원군 시대에 그러했고, 일본을 보더라도 도쿠가와 이에야스 시대의 히마하라 난에서처럼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기독교에 피를 흘리며 죽은 충신과 효자의 비석을 남기지 않고 시작된 역사가 없었던 것도 그런 연유에서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서 하나님이 입으신 수욕의 상처를 지울 것이냐? 그것은 피의 조건을 세움으로 말미암아, 죽으면서도 충효를 부르짖고, 그 절개를 지켜 나감으로 말미암아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탄세계에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사탄세계는 단지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이지, 그런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부모 앞에 효도하는 효자도 없고, 왕 앞에 충성하는 충신도 없다는 것입니다. 주인이면 주인, 자녀면 자녀가 자기를 위하여 군왕도, 부모도 끌고 가려고만 하는 것이 사탄세계의 상황입니다. 그러니 그들을 밟고 넘어서야 합니다.
에덴에서 타락한 것이 오늘날의 사탄세계와 일치된 자리에 있으니, 이들을 복귀하기 위해서는 이들로부터 반대받는 자리에 가야 합니다. 우리는 사탄의 환영을 받던 타락된 자리를 거슬러서 사탄의 반격을 받는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될 운명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이 길을 가지 않고는 수욕의 상처를 메울 길이 없습니다. 이것이 하늘을 향하여 가는 효의 길이요, 충의 길이요, 참된 길인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중심삼고 이 세계 앞에 생명을 걸고 나갈 수 있는 하나님의 참되고 효성스런 아들딸이 이 땅에 나와야 됩니다. 세계적인 생명의 제단을 쌓아 놓고, 이 우주와 온 천주를 대신하여 자기의 한 생명을 몽땅 바칠 수 있는 아들딸, 부정적인 사회 환경에서 긍정적인 실체로서 죽음의 고개를 넘어 끝까지 남아질 수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모습이 나타나면 아무리 악한 세상일지라도 거기에서 하나님의 수욕이 씻어지고, 거기에 승리의 기준이 세워지고, 거기에서부터 새로운 역사를 창건해 나가자는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새로운 역사를 창건해 나가자는 것입니다. 그런 길을 찾아가서 전통적인 유업을 상속받아야 하는 것이 하늘 앞에 충효의 도리를 다하는 사람들의 본분이요 의무가 아니겠습니까?
그러한 자리를 넘어서서 아담 해와의 몇천만 배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아들딸이라고 하나님께서 칭하실 수 있고, 이런 아들딸을 만났으니 과거의 아담 해와가 차라리 타락을 잘했다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어야 합니다. 아담 해와가 타락하여 하나님에게 원한의 근거요, 분함의 근거요, 원통함과 비참함의 근거가 되었지만, `그들이 타락했기에 이렇게도 충과 효가 지극한 아들딸을 찾았으니, 타락한 것도 잘한 것이다'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하나님 앞에 칭찬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나와서 용서를 구하게 되면 아담 해와가 타락한 것도 용서받을 길이 생겨날 것이요, 지옥까지도 용서받고 해방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리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역사는 그러한 고개를 향해서 뒤넘이쳐 흘러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의 흐름 앞에 새로운 흐름을 갖고 나서서, 이 새로운 흐름의 소용돌이 속에 휙 말아 가지고 한 곳으로 유유히 흐를 수 있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 새로운 흐름은 옛날의 흐름과는 전혀 달라야 합니다.
그런 새로운 생활을 할 수 있는 역사적인 자유의 세계, 행복의 세계를 그려 나가는 것이 오늘날의 종교입니다. 그러니 그런 세계를 찾아 나가는 우리 또한 그러한 모습과 그러한 자세를 갖추어야 합니다. 그래서 비로소 하나님의 수욕의 상처를 메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수욕의 상처를 메우고 나서 기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모시고, 그 옷깃을 붙들고 얼싸둥둥 춤출 수 있는 그날, 자유 천지에서 만존재와 더불어 기쁨의 함성을 지를 수 있는 그날, 아버지도 아들도 고대하던 한 날을 맞이했으니 천지와 더불어 기뻐하자고 말할 수 있는 그날이 이 천지간에 이루어져야만 새로운 세계가 출발되는 것입니다.
거기서 비로소 하늘의 수욕의 상처가 지워질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날을 위해서 우리는 투쟁해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다시 말하면, 그저 믿기만 하는 것이 아버지를 위하는 길이 아니라, 사탄세계와 싸우면서 때로는 맞으면서 가는 길이 아버지를 위하여 가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옛날에 아담 해와는 자기들의 욕심으로 타락하였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욕심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길을 타고 나가야만 수욕의 상처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1970년대에는 그러한 심정을 더듬으면서 새로운 나와, 새로운 민족을 향해서 걸어가는 새로운 통일의 역군이 될 것을 다시 한번 다짐해야 되겠습니다. 지금까지는 탕감의 시대였지만 앞으로는 해방의 시대로, 지금까지는 죽음의 시대였지만 앞으로는 부활과 영광의 시대로, 70년도를 맞이해야 되겠습니다.
지금까지는 하나님께 상처를 입혀 드리는 시대였지만, 앞으로는 하나님의 모든 수욕의 상처를 지워서 해원드려 드릴 수 있는 그런 시대를 맞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우리 교회가 되고, 그럴 수 있는 대한민국과 세계가 되기 위해 우리들은 그런 길을 마련해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지금 그러한 길에서 최후의 정점을 향한, 최후의 5분간을 잘 장식해야 할 시점에 있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의 수욕의 상처를 씻고 넘어가기 위해 기도하면서 준비해 주기를 바랍니다.
아버지가 이렇듯 불쌍하신 분임을 알게 되어 지난날 한없는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를 위로해 드리지 못한 것을 다시 한번 반성하게 되옵니다. 불쌍하신 아버지의 손끝과 뼈가 으스러지도록 붙들지 못한 것이 한이 되옵고, 아버지의 품에 끌어 안겨 천년 사연의 모든 것을 잊었다고 직고하지 못한 자신을 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버님, 몸이 뭉크러지고, 세포가 굳어지도록 아버지를 흠모하고, 아버지를 그리워하지 못한 저희들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최후의 한계선을 넘어섰다고, 비참한 한계점을 넘어섰다고, 끝의 끝에 닿았다고, 이것이 마지막이라고 아버지께 주장하고 나설 정도로 충성하지 못한 것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통일이라는 두 글자 앞에 참소받는 아들딸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통일교회라는 이름이 저희 앞에 참소의 조건이 되고, 심판의 조건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통일교회가 나를 위해 있다고 할 수 있는 아들과 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저희는 어차피 악에서 태어난 몸이기 때문에 선으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두번 태어나야 할 운명, 이것은 비참한 것이옵니다. 세상에서도 의붓부모의 자식으로 생활하는 것은 지극히 억울한 것이 아니옵니까? 우리는 의붓아들의 정도가 아니라, 원수의 자식으로 태어났기에 본연의 부모를 찾아가야 하는데, 그 길은 결코 평탄한 길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저희들은 사탄의 화살과 사탄의 창검의 공격을 무수히 받고 있사옵니다.
하오나 저희들은 이렇듯 몸을 얽어매고 있는 끈들을 끊고 가야 하겠사옵니다. 입으로 끊든지, 힘으로 끊든지, 얽어매고 있는 자들과 부딪쳐야 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피를 흘리지 않을 수 없는 비참한 역사과정을 넘어야 한다는 것을 아옵니다.
이것을 바라보시면서도 권고도 할 수 없는 아버지, 저희와 같은 아들딸을 가진 한이 얼마나 크시옵니까? 아버지의 그러한 심정을 저희들이 알아야 되겠사옵니다. 죄를 지은 아들이 법관에게 끌려가서 교수대에 서게 될 때, 말할 수조차 없는 입장에서 애달픈 심정으로 아들의 죽음을 바라보며, 비통한 가슴을 조여야 하는 부모의 심정, 아버지의 사정을 체휼할 줄 아는 아들딸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영광의 아들딸로 태어난 만유의 중심 가치로서,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그 모습이 원수의 손길에 끌려가서 이슬같이 사라져 가는 것을 바라보시고, 묵묵히 소망의 한 때를 고대하여 나오신 아버지의 그 비참한 심정을 저희는 느낄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듯 소망의 아들을 바라는 마음 앞에, 초조한 아버지의 심정 앞에 엎드려, 수천년 수억만년을 거쳐서라도 잃어버린 아들딸을 찾기 위하여 몸부림치시는 아버지의 처참한 모습을 생각하옵니다. 그 처참함이 역사노정에 사실로 전개될 때에도 그 자리에서마저 동정받지 못하신 아버지이심을 생각하면, 저희들은 두고두고 저주받아야 할 입장에 있사옵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저희들을 저주하시면 아버지가 자식을 저주하는 입장에 서게 되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을 참고 용서해 오셨던 것을 아옵니다. 하오니 저희들은 그러한 아버지의 용서함과 인내함을 본받아야 되겠사옵니다.
땅 위의 있는 그 누구보다도 불쌍한 경지에서 하늘을 찾아가는 사람이 역사 가운데 남아진 것을 아옵니다. 과연 이 길을 알고, 이 길을 가는 사람들은 불쌍한 사람들이옵니다. 이 세상에서 외로운 고아들이옵니다. 누구한테도 호소할 수 없는 사연을 가진 자들이옵니다. 나라가 있어도 그 나라를 믿을 수 없었고, 세계가 있었도 그 세계에 소망을 가질 수 없었사옵니다. 그리하여 가는 곳곳마다 원수의 창과 화살을 받는 자리에 서야 아버지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이렇듯 아버지와 심정적 인연을 두터이 맺을 수 있는 것은 저희만이 가질 수 있는 비참한 내용인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한 자리에서 아버지의 원통한 심정을 상속받는 아들딸로서 아버지 앞에 진실로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어야 되겠사옵니다. 그러니 피를 흘리지 않고는 아버지의 길을 갈 수 없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아벨이 흘린 피의 역사를 저희들이 생각하면서, 아버지를 위하여 피의 담을 쌓아 하나의 보루가 되고, 아버지의 동정을 받을 수 있는 하나의 도성, 영원한 안식의 터전을 마련해야 되겠사옵니다. 그리하여 아버지의 비참함을 위로하고, 영원히 아버지를 방위할 수 있는 하늘의 병사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여기에 통일가의 자녀라고 자처하는 아들딸들이 모였사옵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 마음을 터놓고, 내 아들딸이라 할 수 있는 자가 누구냐 할 때, 면목이 없사옵니다. 그러나, 그 물음에 답할 수 있는 내용을 준비하고 있사옵니다. 아직은 수련과정에 있는 이들을 대해서도 아직 싸움의 행로에 나서지 않은 이들을 대해서도, 참으시는 아버지의 마음이 곧 소망의 마음인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나 명령을 내리시는 그 순간부터는 사랑도 끊으시고 참으심도 끊으신다는 것을 아오니, 저희들은 아버지의 명령을 잘 지키고 명령에 따라 잘 싸우다가 장렬하게 잘 죽어 아버지께서 동정하실 수 있는 내용을 남겨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아버지의 상처를 아물게 해 드리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은은하고 고요한 가운데 아버지의 심정적 인연을 따라 자기 스스로의 이름을 부르며, 역사적인 승리의 아들딸이 되기 위해 다시 한번 자신의 모습을 정비해야 되겠사옵니다. 그리하여 내일의 희망 앞에, 내일의 자유 세계 앞에, 내일의 평화 앞에, 내일의 천국앞에 온 만유의 존재들이 추앙하는 가운데 영광의 꽃으로 피어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아버지의 전체적인 뜻과 온 천주를 상속받을 수 있는 효의 모습, 충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는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은 안식일이옵니다. 전국에 널려 있는 당신의 자녀들을 기억하여 주시옵고, 이날을 맞이하여 이 본부를 위해 눈물짓는 자녀들의 정성 위에 천만 배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외국에 널려 있는 당신의 자녀들은 핏줄이 다르고 민족이 다르지만, 아버지의 심정을 중심해서는 형제가 되오니, 그들을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소원의 세계를 이루기 위해서 저희들이 희생하게 하심을 감사하옵니다. 아버지의 수욕의 상처를 메우기 위해 싸우는 용사들이 되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소망의 세계가 저희를 환영해 줄 그날을 고대하면서, 남아진 날들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또 극복하여 당신 앞에 직행할 수 있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참부모의 성호 받들어 아뢰었사옵니다. 아멘.
아버지, 뜻을 중심삼고 치열한 싸움을 하던 1960년대의 마지막 고비를 맞는 이 시간이옵니다. 아버지여! 당신이 넘어야 할 지루하고도 슬펐고, 억울하고도 비참하였던 역사적인 종착점을 향하여 나오시던 아버지의 사정을 이제 저희들이 가슴을 헤쳐 놓고 다시 한번 반성하면서, 저희의 자체를 정상화시켜 아버지를 향할 수 있는 본연의 마음을 그리워할 줄 아는 자신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아버지, 이해도 오늘까지 3주일을 남기고 있사옵니다. 아버님이여! 이날 전국에 널려 있는 당신의 자녀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의 자녀들은 여러가지 사정을 가지고 있고, 여러가지 모양을 하고 있을 줄 알고 있습니다. 혹자는 뜻을 알고 난 이후에 뜻과 더불어 하루하루를 아버지의 마음 세계에 가까이 가기 위해 노력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혹자는 뜻을 알고 나서 뜻길을 가야 할 책임과 사명을 절감하면서도 세상에 얽매여 이길을 넘지 못하고 허덕이고 있는 자녀들도 있을 줄 알고 있습니다. 또, 자기 스스로의 입장을 세우기 위하여 뜻을 배반하고 하나님 앞에 슬픔의 장벽을 남기고 돌아서는 사람도 있을 줄 알고 있습니다. 천태만상의 사정을 지니고 전국에 널려 있는 자녀들을, 아버지, 굽어살펴 주시옵소서.
당신이 믿고 싶었던 신의의 인연을 가질 수 있는 아들딸이 그 누구이옵니까? 1960년대에 바라시던 소원을 중심삼고 청산지어야 할 당신의 사정을 다시 한번 더듬게 될 때에 마음에 기억될 수 있는 자녀가 통일의 문안에 얼마나 있는지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버지여, 이 시간 여기에 모인 당신의 자녀들 가운데 거기에 뽑힐 수 있는 아들딸들이 몇 명이나 있사옵니까? 아버지, 저희 각자의 마음을 일깨워 주시옵소서. 당신이 분부하고 싶은 참다운 자녀, 당신과 더불어 일체가 된, 남기신 복귀의 도상에 기필코 필요한 당신의 자녀들이 여기에 많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과거와 현재의 경계선을 이루는 현시점에서 생애에 숨겨져 있는 자신의 운명이 얼마나 절박한 자리에 처해 있는가를 다시 한번 느끼게 될 때 저희는 모든 자세를 갖추어 아버지를 향하여 해방의 울타리를 준비해야 되겠습니다. 생명의 인연을 간절히 고대해야 할 자신인 것을 더더욱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버지, 이 자리에 있는 저희에게 찾아와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생애에 있어서 잊을 수 없는 중대한 시점이 오늘 이 시간부터 남아진 시간에, 아버지, 친히 인연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 자신들이 아버지의 뜻과 더불어 아버지의 심정과 더불어 일체가 되게 될 때는 삶의 보람을 찾을 수 있는 것이로되 뜻과 멀어지게 될 때는 영원한 사망과 더불어 짝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해주시고, 양자택일의 운명을 결정지어야 할 순간에 놓여 있는 저희들 자신을 다시 한번 명시하여 주시옵소서. 이와 같은 자리에서 이제 저희의 몸과 마음을 아버지 앞에 바치고 생축의 제물이 되어야 되겠사오니, 아버지의 특별하신 감찰과 특별하신 구원의 은사가 저희들에게 임하기를 바라옵니다.
과거에 부족했던 저희들의 모습을 살피게 될 때에 저희들은 아버지 앞에 얼굴을 들 수 없는 자들이요, 아버지 앞에 정체를 드러낼 수 없는 자들이오나, 무한하신 자비와 긍휼과 사랑이 충만하신 아버지요, 저희들을 찾으시기 위하여 수고하신 아버지인 것을 알았기 때문에, 저희들은 재차 부르시는 그 음성 앞에 부족한 자신의 모든 인연과 환경을 넘어서서 대답하지 않을 수 없는 저희들인 것을 이 시간 알았사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완전히 붙드시옵소서. 당신의 간절한 마음이 저희의 마음속에서부터 솟구쳐오르게 하여 주시옵고, 당신의 인연을 떠나서는 영원히 살 수 없다는 것을 확실히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당신의 명령과 더불어 일체가 되게 하시어서, 남아진 세계를 향하여 생명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가겠다고 다짐하고 결심할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이 아침에 여기에 모인 당신의 자녀들을 살피시옵소서. 저희들이 누구를 위하여 이 길을 가려 하고 있사옵니까? 누구를 위하여 생명의 가치와 생명의 인연을 존중시하고 있사옵니까? 나를 넘어서서 민족과 세계를 위하여, 또 천주를 위하여 내 생명을 다하여 아버지 앞에 바쳐 드려야 할 자신인 것을 깨닫고서, 아버지 앞에 자신의 몸을 다 바치고 아버지의 뜻과 더불어 자신의 생애를 다 바치기 위하여 몸부림치던 자가 얼마나 있었사옵니까? 생각하게 될 때, 부족한 자신, 하늘을 우러르기에 부끄러운 자신, 비참하고도 용납받을 수 없는 자신들인 것을 다시 한번 절감할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마음에 저희의 마음이, 아버지의 사정에 저희의 사정이, 아버지의 소원에 저희의 소원이 일치될 수 있는 모습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저희의 마음 가운데에서 영원히 떠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아버지가 남기신 복귀의 길을 저희들이 책임지고, 아버지가 가야 할 십자가의 길을 저희들이 책임지고 홀로 가겠다고 하며 나설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해주시고, 외로운 모습을 아버지께서 보시고 붙들어 주시지 않을 수 없사옵고 후원하지 않을 수 없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고, 아버지의 모습을 대하면서 아버지의 염려 가운데서 살아갈 수 있고 아버지의 염려 가운데서 죽어갈 수 있는 당신의 자녀들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시간 전국에 널려 있는 자녀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완전히 아버지의 인연으로 말미암아 붙들림을 받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어디로 갈래야 갈 수 없는 마음과 사정을 갖고 아버지와 더불어 동고동락할 수 있는 자녀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지금까지 저희들이 60년대를 중심삼고 싸워 나온 모든 역사적인 슬픔을 다시 한번 회고하면서, 아버지, 남기신 복귀 세계의 슬픔을 다시 책임지겠다고 절규할 줄 아는 당신의 자녀가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는 아무 장비도 갖추지 않았습니다. 벌거숭이의 몸이옵니다. 아버지여, 사탄의 채찍을 맞기 전에 아버지의 채찍을 맞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탄에게 조롱받는 순간에도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노라고 통고할 수 있는 역사적인 마음을 가질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하늘을 향하여 맹세하고 나선 몸이었사오니, 남기신 싸움터에서 저희들이 패하여 도망가고 후퇴하는 무리가 되지 말고 적진을 향하여 늠름한 모습으로 직행할 수 있는 하늘의 용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니다.
아버지여, 이제 진정 저희들을 불러 주시옵소서. 가고도 가고도 또 가기를 원하는 그 길을 아버지께서 지키시옵고, 남아진 싸움터에서도 저희와 같이 싸워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각자가 뜻 앞에 맹세한 모든 인연을 다시 한번 수습하여 70년대에는 60년대의 미진한 책임을 재차 저희 일대에서 탕감복귀해야 할 사명이 저희들을 재촉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모인 곳곳마다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고, 이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새로운 역사적인 시대를 넘어가는 하나의 관문에서 스스로 결의할 수 있고 맹세할 수 있는 자녀들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해외에 널려 외로운 길을 닦아 가고 있는 당신의 자녀들을 지켜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국 땅을 더듬으면서도 눈물짓고 있는 외로운 자녀들을 지켜 주시옵소서. 그들의 사연과 그들이 통곡하는 모든 내용과 소식을 듣게 될 때 아버지께서 같이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느꼈습니다. 이들이 누구를 위하여 그런 자리에 섰는가 하는 것을 생각하게될 때에, 과거 당신의 뜻을 따라간 수많은 선지선열들이 그러하듯이 이들 모두도 아버지를 위한 자리에 섰사옵고 아버지를 의지하고 나선 외로운 무리들이었사오니, 아버지여, 당신의 자녀들을 지켜 주시옵소서.
아버지, 외로운 사막 가운데 광풍이 불어오는 자리에서 하늘을 향하여 최후의 운명을 걸고 절규하는 그들, 남겨진 세계 인류를 다시 품에 품으시고 싶어하시는 당신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기 위하여 싸우고 있는 그들을 친히 지켜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금년과 명년에도 세계적으로 당신이 지시해야 할 것이 저희에게 남아 있사오니, 이것을 맡아서 책임 다하기 위하여 저희들은 마음으로 고대하고 몸부림치며 밀고 나가야 할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하오니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해외에 널려 있는 당신의 자녀들이 한국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이곳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하늘을 사모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간절한 심정으로 절규하는 그 모든 호소와 그들이 외로운 가운데 눈물지으며 싸우는 모든 인연이 아버지의 마음을 중심삼고 열매맺게 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의 마음 가운데 깊고 넓고 놓게 기억될 수 있는 자녀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해에 지나갈 모든 탕감의 노정을 다 지내 버리고 새로운 해에 있어서는 환희와 영광을 대신하여 이 민족을 맞아 새로운 싸움터를 마련해 나가고저 하옵니다. 이런 기간 위에 당신의 거룩하심이 동참하시옵고, 이제 이 기간을 통하여 당신의 은혜와 당신의 풍성하신 모든 결실이 70년대로 향하여 뻗쳐 가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아침, 이 민족 모두 위에 당신의 사랑의 손길을 같이하여 주시옵고, 세계 인류에게 당신의 은혜를 가하여 주시옵시고, 영계에 가 있는 선조들의 해원성사를 이 땅을 통하여, 혹은 그 후손들을 통하여 이루시옵고, 최후의 총칼을 지니고 싸움터를 지키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기독교의 2천년 역사와 하나님의 복귀섭리의 6천년 역사가 최후의 승리로 꽃을 피울 수 있는 70년대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남아진 기간에 저희들이 스스로 준비하고 단장하여 아버지의 부르심 앞에 거룩히 나타날 수 있는 자녀들 되겠다고 재차 천명하는 이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며, 모든 말씀을 참부모의 성호 받들어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이 시간에는 `작금의 우리의 가치'라는 내용을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이 뜻을 알기 전과 뜻을 알고 난 후는 차이가 있는 것을 잘 느끼고 있을 것입니다. 뜻을 알기 전의 `나'와 뜻을 알고 난후의 `나'는 현격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또, 과거의 나, 현재의 나, 미래의 나는 다릅니다. 지금 우리는 1960년대를 보내고 1970년대를 맞이하는 입장에 놓여 있습니다. 이 1960년대와 1970년대도 작금의 인연을 중심삼아 가지고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타락한 그날부터 지금까지의 역사는 복귀의 운명을 가리기 위해서 싸워 나온 역사라는 것을 우리는 원리를 통하여 배웠습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종교가 나와서 본연의 인간의 모습을 추구해 나왔습니다. 참된 인간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참된 사회 국가 세계가 있을 수 있느냐? 그 참된 모습이 자기 자체에서 빚어지기를 바라고 수많은 종교가 역사상에 나타났습니다. 수많은 종교인들은 그 종교로 말미암아 추구할 수 있는 최대의 노력을 다해 왔습니다.
그러던 종교인들이 현세에 와서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습니다. 과거의 종교가 오늘날의 종교로서 남아질 수 있고, 미래를 연결시킬 수 있는 내용을 지니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실상을 볼 때 현실에 남아 있는 종교를 과거의 종교로서 청산짓고 새로운 현실의 종교를 연결시킬 수 있는 종교는 어떠한 종교냐 하는 문제가 등장할 수밖에 없는 순간에 놓여 있는 세계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종교가 참을 추구해 왔습니다. 참의 인간, 참의 나라, 참의 세계를 추구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을 중심삼고 추구해 왔기 때문에 불가능한 것으로서 남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왜 그러냐? 절대적인 신을 중심삼고 추구해 오던 종교이념이 현실에 와서는 인류가 바라는 소망의 이념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중심삼고 참의 세계를 추구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이상적인 사회 국가 세계를 추구할 수 없는 단계에 놓여 있는 현실을 생각하게 될 때에 지금까지의 신관, 지금까지의 신앙관, 지금까지의 신앙을 통한 인생관을 가지고는 인류가 바라왔고, 수많은 종교가 바라왔던 참의 세계는 찾을 수 없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역사와 사상을 뒷받침하고 있는 종교가 이런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는 입장에 있다는 것을 두고 볼 때에 우리 개인은 더더욱 말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개체가 추구하는 참의 나라, 참의 세계는 과연 인간만을 중심삼고 가능할 것이냐? 불가능합니다. 하늘과 인간이 합동하는 이런 내용을 제청하고자 하는 것이 지금까지 종교의 교리인데도 불구하고 종교를 통해서 인간만이 희망의 세계를 모색한다는 것을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지금까지 종교가 더듬어 온 길이 틀렸느냐, 아니면 종교 자체가 가야 할 목적과 일치할 수 있는 자리에 서지 못했느냐 하는 문제를 재검토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우리들은 생각해야 됩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믿었던 하나님과 지금까지 우리가 믿었던 종교, 그리고 금후에 우리가 믿었던 하나님과 금후에 우리가 믿어야 할 종교가 같은 것이 되어서는 새로운 희망의 세계를 추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종착점에 처해 있는 현실의 자아를 중심삼고 볼 때 새로운 가르침을 어떻게 일으키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세계 전체도 이러한 기로에 서서 허덕이고 있습니다. 이런 기로에 서서 허덕이고 있는 세계를 구원하기 위한 뜻을 지니고 세계를 책임질 수 있는 개인이 되어 있으며 그런 종교가 되어 있느냐? 또, 그런 뜻을 중심삼고 제창할 수 있는 내 자신이 되어 있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때 너무나 거리가 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를 앞에 놓은 현실의 이 시점에서 나라는 개인을 다시 한번 비판하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놓여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가 제시하는 내용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또 우리는 통일교회 교인으로서 방금 이야기한 것과 같은 역사적인 책임을 짊어져야 할 이 시점에 놓여 있는데, 이 시대 앞에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지금까지 종교가 제창한 내용을 두고 볼 때 종교는 주로 무엇을 추구해 나왔느냐?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추구해 나왔습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공고화시켜 내 인격이 완전히 하나님의 인격과 일치된 새로운 변화의 모습을 갖출 수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개인이면 개인, 종교면 종교가 사회 앞에 책임을 추구하는 데 있어서 우리 인간이 바라는 최고의 이상의 뜻을 하나님의 뜻과 일치화시키는 문제를 중심삼고 이 땅 위에 나타났다가 쓰러져 갔습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진정한 의미에서 그런 책임을 할 수 있는 종교가 있었느냐?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종교가 피폐의 일로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종교가 어떠한 것을 책임하지 못했느냐? 이것을 하나님을 위해서 종교가 나왔느냐, 인간을 위해서 종교가 나왔느냐 하는 문제에 귀결시켜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종교는 출발 당시에는 하나님을 중심삼고 출발했습니다. 그렇지만 결과에 가서는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하나님을 중심삼아 가지고 하나님과 일치된 자리에서 하나님화한 인간이 사회를 이루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떠나 가지고 인간을 중심한 사회가 이루어지게 될때에는 어떤 종교든지 피폐의 일로를 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종교를 중심삼아 가지고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뜻과 일치되어 가지고 그런 개인, 그런 가정, 그런 종족, 그런 민족, 그런 국가를 구상하고 그것을 생활 표준으로 세워 나가는 종교인들이 있느냐 하면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종교를 믿고 있는 사람들은 그런 관이 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결국 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 종교를 믿고 있는 것이 현실의 실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문제는 나를 중심삼고 종교를 추구하는 이것을 어떻게 탈피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세계의 수많은 종교인들이 감당하여야 할 중대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만일에 하나님이 계신다면 하나님에게는 이런 문제의 해결점을 제시해야 할 중대한 책임이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기로에 서 있는 것이 오늘날 우리의 입장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종교가 발생한 동기가 하나님이라 할진대 종교는 하나님의 뜻, 즉 하나님이 구상하는 참된 세계와 참된 나라와 참된 민족과 참된 가정과 참된 개인을 추구했을 것입니다.
참된 개인에서부터 참된 세계까지 가는 과정에서 참이 연결되지 않고는 안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늘을 중심삼은 참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즉, 참된 개인을 찾기 위해서 죽어간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참된 가정을 찾기 위해서 죽어간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종족을 중심삼고 참된 종족의 이념을 성사시키기 위해서 죽어간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민족을 찾기 위해서 죽어간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나라를 위해 죽어간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참된 세계를 찾기 위해서 죽어간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역사에 남아지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냐? 개인을 중심삼고 죽어간 사람이 그 시대의 인간들 앞에 추앙의 대상이 되고 역사과정에 남아질 수 있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개인보다도 가정을 위하여 죽어간 사람이 수많은 개인의 추앙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정보다도 종교를 중심삼아 가지고 민족을 위하여 죽어간 사람들은 모든 가정들의 추앙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더 나아가 종교의 이름을 가지고 세계를 위하여 죽어간 사람은 그 종교를 추구하는 민족 앞에 추앙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지금까지 역사노정에 남아진 성현들은 어떠한 사람들이냐? 종교를 중심삼아 가지고 개인의 행복과 개인이 바라는 소망의 세계를 완성하고 달성하기 위해서 죽어간 사람들이 아니라 종교를 중심삼아 가지고 세계와 인연맺기 위해 자기의 생명을 바친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일수록 그는 역사적인 인물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석가가 그러했고, 공자가 그러했고, 예수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하늘을 의지하고 죽어간 그 길은 자기 개인의 행복을 위해서 살다가 죽어간 길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개인의 행복을 포기해 버리고 하늘에 남길 수 있는 뜻을 위하여, 온 세계 만민이 추구하는 하나의 목적의 세계를 위하여 그들은 생명을 기울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명을 기울여 간 그들의 소원이 이 땅 위에 이루어질 수 있겠느냐? 또 그들을 추종하는 신자들이 그것을 성취시킬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과거역사를 두고 볼 때 종교면 종교, 또 하나님의 뜻이면 하나님의 뜻을 중심삼고 미래의 세계를 위하여 죽어간 사람들의 이념과 사상이 출발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역사과정을 통하여 현시점까지 상속되어 내려오지 못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현실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보고 알 수 있느냐? 오늘날 신앙자들이 하나님을 위주한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주한 생활을 하는 것을 보고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종교는 하나님에게 플러스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플러스시키기 위해서 남아진 종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두고 볼 때 그 종교를 창시한 사람의 본뜻과 현재 종교를 따라가는 신앙자들이 바라는 그 뜻과는 상치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역사적인 종말시대를 맞이한 현시점에 있어서 우리들이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이냐? 이러한 현시점의 모든 내용을 타개해 버리고 옛날에 추구했던 하나님의 뜻, 옛날에 도의 길을 개척하였던 창시자의 뜻을 현시점에 재현시켜야 합니다. 역사를 초월하여 옛날의 그것을 현시대의 생활 무대에 전개시키는 싸움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교계의 현실을 두고 본 우리의 할 일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 개인을 두고 보면 통일교회에 들어 오기 전의 여러분이 추구하던 세계, 여러분이 바라보던 인생관, 여러분이 바라보던 우주관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들이 무엇을 중심삼은 것이냐? 뜻 있는 사람은 나라를 중심삼아 가지고 살았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걸어 온 길은 기껏해야 대한민국의 백성으로서 충실한 애국자가 되려고 한 길이었을 것입니다. 그 한계선을 넘지 못했을 것입니다. 세계 만민을 위하는 박애주의자가 되어야 된다는 것은 막연했을 것입니다. 최대한으로 바란 것이 자기 나라가 잘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상을 넘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기껏해야 자기 민족, 자기 씨족, 자기 가정을 위하는 사람밖에 못 되었습니다. 그것도 못 된 사람은 기껏해야 자기 자신 하나를 중심삼아 가지고 모든 것을 시작하고 끝맺으며 살아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런 내가 통일교회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통일교회의 교리를 알고 있는 현실의 나 자신과 과거의 나를 비교해 보게 될 때 지금의 나 자신이 과거의 나 자신과 얼마나 달라졌느냐 하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달라진 차이를 발견하지 못하면 역사과정을 거쳐 지금까지 걸어온 종교인들의 범위를 벗어날 도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과거의 나는 기껏해야 나 자신을 중심삼고 불행을 염려하여 나왔습니다. 자기의 부모 형제를 중심삼은 권내를 벗어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뜻을 품었다고 하는 사람들이 겨우 나라를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생각했댔자 국가 기준을 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최고의 생활 목표가 뭐냐 하면 가정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추구하는, 혹은 종교가 추구하는 최후의 목적점이 어디냐? 나 자신을 중심삼은 자리가 아닙니다. 자기가 추구하는 가정이 아닙니다. 가정을 넘고, 민족을 넘고, 국가를 넘어 세계를 위하는 자리인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그런 주의 주장, 그런 이념을 성취하려고 해야 하는 것이 종교라는 것입니다. 만일 개인만의 행복을 발전시키려고 하는 종교라면 그것은 인간 세상에서 사라져야 됩니다. 그것은 인간 세상에서 자기를 중심삼은 개인들을 지도하는 이념으로밖에 등장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늘이니 하나님의 뜻이니 하는 말은 세계성을 띤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을 초월하고, 자기를 위주한 울타리를 벗어나라고 강요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 민족만을 사랑하고 자기 나라만이 제일이 되어야 한다는 관념을 넘어서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유대사상이 하나님이 세운 사상이라 할진대, 그 사상은 유대민족을 기반으로 하여 세계로 갈 수 있는 사상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2천년 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는 유대교인들은 어떤 사상을 가졌느냐? 세계로 가는 사상이 아니라 자기들의 민족만을 공고화시키는 사상으로 귀착하려 했습니다. 민족 제일주의 사상, 세계 만민을 자기 민족 앞에 예속시키고 귀속시키려는 사상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그 시대 유대교인의 신앙태도였습니다.
그러면 그런 신앙태도를 가진 유대 민족 앞에 예수님이 하나님을 대행하여 하려 했던 것은 무엇이었느냐? 유대교의 이념을 중심삼아 가지고 유대 민족의 기반 위에 세계를 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뜻과 사상을 가지고 세계를 위하는 새로운 운동을 전개해야만 만민이 고대하는 메시아가 되는 것이요, 만인간이 고대하는 새로운 종교이념이 되는 것이요, 새로운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사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고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사상과 내용을 가지고 오셨으되 예수님을 대하는 그때의 유대교인과 이스라엘 민족은 어떠했느냐? 국가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폐단이 벌어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산을 넘으라고 하는데 유대 민족은 산을 넘지 않겠다고 하니 두 세계는 지리멸렬되고 만 것입니다. 이런 문제점 때문에 예수님은 십자가의 원통한 길을 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유대 민족을 중심삼고 판가리했어야 할 역사적인 해결점이 아직까지 청산되지 않았기에 이러한 역사적인 시발점은 역사과정을 통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한 때에 하나님의 뜻을 중심삼고 선택되는 민족이 있으면 민족, 그러한 국가가 있으면 그 국가가 이 운명을 중심삼고 최후의 판결을 해서 이 고개를 넘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습니다. 국가라는 이 한계점을 종교인들도 넘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은 비단 종교인들뿐만 아니라 나라를 구성하고 있는 수많은 민족도 그 한계점을 넘지 못하였습니다.
역사과정에서 이 땅 위에는 수많은 전쟁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참을 주장하면서 싸움을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나라를 위해서 한, 자기 나라의 부흥과 자기 나라의 승리를 위한 싸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세계의 승리를 위해 싸운 싸움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좌우가 부딪치는 현시점을 두고 볼 때 그들이 진정한 의미에서 세계를 위하여 싸우고 있느냐 하면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미국도 그러하고 소련도 그러합니다. 즉, 공산주의도 그러하고 민주주의도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세계를 위하여 싸운다고 나섰지만 결국에 가서는 국가적인 한계선을 넘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민족, 자기의 국가 기준을 넘지 못하고 그 한계선에 후퇴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인간들이 자기와 자기 가정과 자기 종족과 자기 민족의 기준을 넘지 못하는 역사적인 운명을 밟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탈피해 넘어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운명의 한계선에서 살고 있는 인간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한계선을 타파하기 위한 싸움을 전개해 오셨습니다. 그래서 가정을 희생시켜서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 모세에게 가정을 버리라고 했습니다. 가정을 희생시키라고 했습니다. 가정을 희생시키지 않고는, 가정만 행복해 가지고는 이스라엘 민족을 구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가정이 잘되고 이스라엘 민족이 구원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안 되어 있습니다. 타락한 세계에 있어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절대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나라를 창건하려면 이스라엘 민족은 희생을 감수하라는 것입니다. 수난의 길을 감수하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나라를 창건하려면 이스라엘 민족은 모든 수난을 감수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기꺼이 감수할 수 있는 민족이 될 때 승리적 이스라엘 나라를 창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급을 떠나 가나안을 향하여 가는 도상에는 많은 민족적 시련이 가로막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생활에 있어서 인간적인 입장에서 자기를 위주하고 살던 그 모든 감정과는 정면으로 부딪치게 된 것입니다. 그 환경에 있어서 부딪치는 괴로움을 극복하고 아버지의 뜻을 세우려 했고, 자기가 희생되는 운명을 당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세우겠다는 마음을 갖고 나갔더라면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수난의 기간은 짧았을 것입니다.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 한계선은 언제나 이스라엘 민족 앞에 하나의 장벽으로 남아져 나온 것입니다.
민족적인 장벽, 국가적인 장벽이 남아져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 나라가 추구하는 소망의 세계, 이스라엘 나라가 희망하는 메시아의 이상세계를 추구할 수 있는 때가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이스라엘 민족 앞에 남겨진 장벽과 그 국가 앞에 남겨진 장벽은 재현되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나라의 운명이었던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운명 가운데 서 있던 이스라엘 나라는 어떻게 해야 했던 것이냐? 자기 국가를 위주한 이념과 자기 국가를 위주한 싸움으로 지탱해 나가다간 기필코 망한다는 것입니다. 천년, 2천년 지탱해 나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사람은 전부 다 자기를 중심하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무리 나라를 위한다 하더라도 자기 일대의 행복의 요건을 그 나라 가운데에서 찾을 수 없게 될 때는 후퇴한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지키던 싸움터를 제삼자에게 넘겨 주고 자기는 그 자리를 지키지 않으면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중심삼고 생각하는 세계에서는 이러한 폐단적인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기독교가 2천년 역사를 어떻게 극복해 나왔느냐? 나라 없는 기독교, 즉 주권을 갖지 못한 기독교요, 백성을 갖지 못한 기독교요, 땅을 갖지 못한 기독교가 어떻게 해서 2천년 역사를 지탱해 나왔느냐? 그것은 기독교가 추구하는 그 나라가 앞으로 다시 와야 할 최후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 나라는 현실 사회에서 그냥 그대로 정주할 나라가 아니라 새로이 올 그야말로 이상적인 나라라는 것입니다. 그 나라를 중심삼은 새로운 주권, 그 나라를 중심삼은 새로운 땅, 새로운 백성을 추구해 나왔기 때문에 그 백성과 그 땅과 그 주권이 찾아질 때까지는 남아져 나온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명실공히 세계적인 종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세계적인 종교가 된 기독교 앞에 세계적인 장벽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세계를 사랑하고 세계를 위해서 싸워 나왔느냐? 하나의 기본적인 장벽이 오늘날 전세계 기독교가 가야 할 도상에 가로막혀 있다는 것입니다. 비단 기독교뿐만 아니라 수많은 종교 앞에 그러한 장벽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 장벽을 어떻게 타개할 것이냐? 이것이 현시점에 놓여 있는 종교인들이 혹은 종교가 해결해야 할 중대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 장벽을 헤치고 넘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될 것이냐? 자기 민족을 주장하는 종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자기 일개 민족을 위주한 종교를 가지고 세계적인 뜻을 성취하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민족이나 국가를 넘어야 하고, 자기 민족의 전통적인 사회제도나 문화, 그 밖의 모든 관습을 전부 다 타파해 버리고 세계인을 중심삼은 사회, 하나님의 뜻과 일치될 수 있는 하나의 세계를 모색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모든 심정을 일체화시키고 생활 전체를 일체화시켜야 됩니다. 인생관이면 인생관을, 세계관이면 세계관을 일체화시키는 놀음을 단행하지 않고는 종교로서 남아지지 못할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통일교회가 이런 문제를 제시하는 중대한 책임을 짊어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민족을 위주한 종교적인 싸움을 전개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위주한 종교적인 싸움을 전개해야 되겠습니다. 민족을 위주한 행복의 이념을 찾으려고 할 것이 아니라 세계를 위주한 행복의 이념을 찾으려고 하는 통일교회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역사과정의 종교를 중심삼고 볼 때에 현재가 그러한 시점이라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자기를 위주한 관념, 자기 가정을 위주한 관념, 자기 국가, 즉 대한민국이면 대한민국만을 위주한 관념을 가지고는 세계화가 안 되는 것입니다. 세계화를 가능하게 하려면 대한민국 안에서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나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통일교회가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중심삼아 가지고 세계화할 수 있는 생활적인 기반이 여러분 자체 내에서 얼마나 공고화되느냐 하는 문제가 해결되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살아가는 하루하루의 생활을 두고 볼 때 자고 깨고 하는 모든 생활 자체가, 좋고 나쁜 사정이, 오고 가는 것이 얼마나 세계적인 뜻을 중심삼고 있느냐? 밥을 먹는 것도 나를 위해서 먹는 것이 아니고, 또 대한민국만을 위해서 먹는 것도 아니고 세계를 위해서 먹는 것이냐? 우리의 생활 감정을 어떻게 세계화시킬 수 있느냐? 추구하는 그 모든 조건들이 절박하게 세포로 직접 느낄 수 있는 경지까지 어떻게 몰아내느냐? 이런 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은 여러분들이 지금까지 닦아 나오던 도의 길이나 정성들이던 자리에서는 불가능합니다. 생각으로는 그럴 수 있을는지 모르나 사실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사실에 적용시킬 것이냐? 지금까지 종교인들이 가던 걸음같이 세상을 피해 가서는 안 됩니다. 세상을 비판해서는 안됩니다. 세상에서 대해 무책임한 종교가 되어서도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을 직접 책임져야 되겠습니다. 세상을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가운데에 들어가야 되겠습니다. 악을 피할 것이 아니라 그 악과 부딪쳐야 되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현실적인 난관을 어떻게 하늘적으로 소화시키느냐 하는 것이 중대한 문제입니다. 지금까지 과거의 종교가 생활해 온 것처럼 습관적인 노정을 거쳐서는 안 됩니다. 반대로 가야 됩니다. 거슬러 가야 됩니다. 그러려면 역사적인 사조 앞에 안겨 가는 종교의 내용을 가지고는 안되겠습니다. 이것을 타개하기 위한 브레이크를 걸어야 되겠습니다. 여기에 강타를 가해야 되겠습니다. 이런 움직임이 있어야 됩니다.
먹기를 좋아하는 인간이기 때문에 먹는 것을 참아야 되겠습니다. 편안한 것을 좋아하는 인간이기 때문에 편안한 것을 벗어나야 되겠습니다. 새로운 방향을 잡고 새로운 자체를 갖추어 자기 자체의 존재위치를 재공고화시켜야 되겠습니다. 지금까지 종교인들이 해 온 상습적인 종교생활 가지고는 안 됩니다. 여기에 하나의 새로운 파동, 새로운 파문을 제시해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것을 책임지고 가겠다고 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현사회로부터 비판을 받는 것입니다. 그 비판이 크면 클수록 그들은 내적으로는 공고화될 것입니다. 세계를 넘어가려는 그 길에 장벽이 철옹성같이 가로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개인에게 있어서도, 가정에 있어서도, 사회에 있어서도 나라에 있어서도, 세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위주로 하여 생활하는 사람 앞에는 자아를 위주로 한 모든 것이 장벽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을 위주한 신념을 가지고 그 장벽을 어떻게 헤쳐 나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에게 부딪쳐 오고 가로놓이는 모든 시련은 우리를 망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자체의 가치를 결정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의 가치는 어떻게 결정되느냐? 여러분 자신이 가만히 앉아서 가치를 인정한다고 해서 그 가치가 사회화되고 세계화될 수 없습니다. 시련 도상에서 부딪쳐 가지고 남아지느냐 없어지느냐에 따라서 새로운 가치가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크게 성공하려면 그 성공에 비례하는 시련이 따르는 것입니다. 국가적인 인물이 되기 위해서는 국가적인 운명을 책임지고 시련을 돌파해 나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생명을 걸고 국난을 책임질 수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생명을 바치기를 회피하는 사람은 국가의 중요한 책임을 질 수 없습니다. 그것은 역사적인 사실을 봐서도 잘 아는 사실입니다.
대한민국을 중심삼고 혁명정부가 등장했을 때를 보더라도 국가의 운명을 책임지기 위해서 생명을 내놓고 새로운 나라를 모색한 사람들의 희망에 벅찬 걸음에서부터 혁명이 개시되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과연 우리 앞에 다가오는 세계적인 파동을 지나갈 수 있는 신념을 지니고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과거의 나를 다시 한번 되돌아볼 때 나라는 존재는 나를 위주하고 살던 나였습니다. 기껏해야 내 어머니 아버지 내 형제밖에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나라는 관념적인 한 단계를 넘어서 남아질 수 있는 무엇을 생각할 줄 몰랐다는 것입니다. 세계니 무엇이니 하는 문제는 아예 생각할 줄도 몰랐다는 것입니다. 시작도 자기 중심이요, 목적도 자기 중심이요, 끝도 자기를 중심삼아 가지고 추구해 나오던 것이 오늘날의 나 자신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종교적인 명사로 본다면 우리는 타락한 후손들입니다. 타락이라는 명사가 붙어 다닌다는 것입니다. 타락권을 벗어나서 자신을 세운 것이 아닙니다. 타락권내에서 자신을 세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세계를 구하고 아무리 세계에 뜻을 이루었다 하더라도 타락권내에 있는 것입니다. 타락권내에 있는 나 가지고는 안 됩니다. 이것을 돌파해야 됩니다. 타락권을 벗어난 나를 모색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 한계선을, 이 울타리를 넘어서야 합니다. 이 울타리만 넘어서면 참의 세계, 참의 내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울타리를 파괴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된 나는 어디에 있느냐? 이 울타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울타리밖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울타리, 이 한계선을 넘어야 됩니다. 그 울타리를 개인뿐만 아니라 가정도 넘어야 되고 종족도 넘어야 되고 국가도 넘어야 되고 세계도 넘어야 됩니다.
왜? 조상이 세계적인 타락을 했기 때문입니다. 개인이 타락했지만 그것이 가정을 이루고, 종족을 이루고, 민족을 이루고, 국가를 이루고, 세계를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타락은 개인이 했지만 그 결과는 세계적인 권을 이루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타락권내에서 나를 위주해 나오는 관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나요, 과거의 인류였습니다.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타파하느냐? 이걸 타파하기 위해서는 정면으로 부딪쳐서 깨뜨려야 됩니다. 이러한 비참한 운명을 앞에 놓고 있는 종교가 어떻게 세계를 향하여 비약하느냐 하는 것이 오늘날 이 시점의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이 권을 어떻게 벗어나느냐? 지금까지 수많은 인간들은 누구를 위해서 살았느냐? 전부 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았지만 결국은 다 망했습니다. 혹자는 나라를 위해 살았지만 그도 역시 망했습니다. 그것은 나라도 타락권내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계를 넘어서 살겠다고 하는 사람만이 이 땅 위에 남아질 수 있는 것이요. 그런 민족만이 이 땅 위에 남아질 수 있는 것입니다.
종교라는 것은 이 타락 세계를 넘어선 나를 찾아 나온 것이요, 이 타락 세계를 넘어선 가정을 찾아나온 것이요, 이 타락 세계를 넘어선 나라를 찾아 나온 것이요, 이 타락 세계를 넘어선 세계를 찾아 나온 것입니다. 지금까지 역사과정에서 세계는 망해 나왔고, 인류도 망해 나왔고, 종교 자체도 망해 나왔지만 종교가 갖고 있는 이념만은 지금까지 남아 왔고, 세계화되어 나온 것입니다. 타락권내 내의 소원이 아니라 타락권 외의 소원을 중심삼은 세계관을 추구하는 것이 종교의 이념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종교의 이념은 남아져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종교의 이념은 남아졌지만 종교의 뜻과 일치되는 개인이 없고, 가정이 없고, 종족이 없고, 민족이 없습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누가 그 이념과 일치할 수 있는 개인이 되고, 가정이 되고, 종족이 되고, 민족이 되고, 국가가 되느냐? 그런 민족과 국가는 금후의 역사시대에 있어서 세계적인 주도 국가가 될 것이요, 주도 민족이 될 것입니다.
도끼를 들고 나무를 패는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세계의 난국을 우리 앞에 놓고 들이 패게 될 때, 개인을 중심삼고 패게 되면 개인이 꺾여 나가느냐? 세계가 꺾여 나가느냐? 세계가 꺾여 나간다는 것입니다. 가정을 중심삼고 패게 되면 가정이 꺾여 나가느냐, 세계가 꺾여 나가느냐? 세계가 꺾여 나간다는 것입니다. 종교를 중심삼고 패게 되면 세계가 깨지느냐, 종교가 깨지느냐? 둘 중에 무엇이 남아질 것이냐? 종교가 남아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종교는 세계 앞에 필요한 것입니다.
가치라는 것은 반드시 비교의 기준을 통해서 나오는 것입니다. 혼자 있는 데서 가치가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 사람이 필요로 하게 될 때 가치가 나오는 것입니다.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사람은 그 국가의 애국자가 되는 것이고,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사람은 그 사회의 책임자가 되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필요로 하는 사람은 그 가정의 가장이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 자체의 마음과 몸을 두고 볼 때 어느 것이 더 가치가 있을 것이냐? 몸보다 마음이 더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그것은 마음이 몸의 모든 악의 요소를 제거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싸움을 책임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 한계선을 넘어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세계는 여러분의 생활권내에 점점 스며드는 것입니다. 세계가 내 세포의 감각과 더불어 감정이 일체화될 수 있는 하루의 생활 무대에 전개되어 질 것입니다. 인류가 추구해 나온 것은 하루의 생활에 있어서 개인으로서 세계를 극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생활에 있어서 세계를 극복하는 것이 소원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계신다면 반드시 그러한 세계를 만들어 놓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때가 왔습니다. 세계적 사건이 우리의 감정과 우리의 호흡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시대권에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세계가 아무리 넓다 하더라도 우리의 생활권 안에 있는 것입니다. 세계는 우리 생활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미국과 한국의 정치는 물론 세계의 정치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하는 나라는 망합니다. 오늘날 미국 같은 나라가 자기 나라만 중심삼고 세계 정세를 도피하게 된다면 망한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이상 세계 앞에 이미 낙선한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앞으로 이런 혼란된 세계를 밟고 넘어서서 새로운 세계를 모색할 수 있는 위대한 사상, 그런 사상의 세계화 운동을 일으킬 수 있는 신앙단체가 나오면 그 단체로 말미암아 새로운 세계의 희망이 싹튼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기성종교 가지고는 안 됩니다. 한국의 장로교면 장로교, 감리교면 감리교, 불교면 불교를 위주해 가지고 우리 종교가 아니면 안 된다고 하는 종교는 망합니다. 지금까지의 종교인들은 자기 종교의 세계화운동을 전개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우리 통일교회 교인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이냐? 여러분이 가는 길이 어디냐고 물으면 여러분은 `뭐 어디 가긴 어디가. 교회에 왔다가 집으로 가지' 합니다. 집으로 가서는 어디로 가느냐? 여러분이 가고 싶은 데로 갑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가고픈 길과 하나님이 가고픈 길이 일치되느냐가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가고 싶은 길과 인류가 가고 싶은 길과 역사의 마음이 지향하는 길이 일치되지 않으면 망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종교가 왜 망하느냐? 하나님과 일치가 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역사의 중심사명을 대신해야 할 종교의 길에서 벗어났다는 것입니다.
종교가 역사의 중심사명을 했다는 것을 무엇을 의미하느냐? 그들이 죽되 자기의 행복을 위해서 죽어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죽어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죽어갔다는 것은 곧 세계를 위해서, 구원받기 위해서 죽은 사람은 무가치하다는 것입니다. 순교를 당할 때에도 `내가 이렇게 죽어야 좋은 천당에 가지' 하는 생각을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죽기는 같이 죽되 `내가 이래야 구원 받지. 내가 이래야 지옥에 안 가고 천당에 가지' 이렇게 생각하고 죽는 사람은 좋은 곳에 못 간다는 것입니다. 죽기는 죽되 `나는 하나님의 뜻을 위해 죽는다. 나는 자그마치 세계를 위해 죽는다'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아바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신 예수님이 위대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를 위해서 죽겠다고 합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죽는 길을 도피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내 뜻이 아니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세계를 중심삼은 새로운 우주관을 모색할 수 있는 하나의 중차대한 분기점을 제시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위대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에게 있어서 여러분의 뜻과 하나님의 뜻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까지 역사적 인연을 벗어나지 못한 그 혈통과 그 인연 가운데서 태어난 인간들은 기껏해야 자기 가정, 자기 나라를 위하는 한계를 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그것이 아닙니다. 세계를 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러한 문제를 중심삼고 최후에 문제되는 것은 무엇이냐? 내가 대한민국 사람이냐, 세계 사람이냐 하는 거예요. 내가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기 위해서는 세계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딸로서 택함받기 위한 가치적인 존재가 되려면 세계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대한민국의 아들딸이 아니라 세계의 아들딸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여러분이 통일교회 교리를 알고 보면 통일교회는 세계를 중심삼은 하나의 가정화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민족을 초월해야 됩니다. 지금 가는 도상에서 민족들과 부대끼고, 수많은 종족들과 수많은 씨족들과 수많은 가정들과 부대끼고 있지만 이 부대낌의 길을 넘어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어떤 기준을 넘어가야 되느냐? 이제 우리가 가야 할 길 앞에는 핍박의 길이 많이 뭉그러졌습니다. 개인이 갈 수 있는 핍박의 길, 가정이 갈 수 있는 핍박의 길, 씨족이 갈 수 있는 핍박의 길, 민족을 대표한 종교가 갈 수 있는 핍박의 길도 우리에게서 다 사라졌습니다. 이제 대한민국에 있어서 통일교회의 자리는 공고해졌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다른 사람들과 우리가 다를 게 뭐냐?' 이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주체적인 신념을 가져야 됩니다. 지금까지 남아진 종교는 오늘 현시점을 넘을 수 없습니다. 그들이 자기 민족이라든가 자기 종파의 관념을 넘을 수 없는 종교로서 암중모색하고 있을 때 우리는 이 길을 늠름히 넘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고생을 하더라도 이 고개를 넘은 자리에서 고생을 하자는 것입니다. 내가 이 시대에 희생을 하더라도 그 고개를 넘은 자리에서 희생을 하자는 것입니다. 그것이 다른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 종교 안에서 죽어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의 중심이 되는 천국에 못 간다는 것입니다. 현재의 종교를 중심삼아 가지고는 천국화시키지 못하기 때문에 그 종교를 믿고 간 사람들은 천국에 못 간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활관이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돈이 생기면 그것을 무엇을 위해 써야 되느냐? 그 나라를 위해, 그 세계를 위해 써야 됩니다. 돈을 버는 것도 그 나라를 위해, 그 세계를 위해서 벌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목적이 거기에 있어야 합니다. 전부다 세계의 뜻, 하나님의 뜻을 위해 생활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민족을 중심삼고 이 세계를 통일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한 사람을 중심삼고 세계를 통일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고난과 대결하는 자세를 중심삼고 그들과 우리를 보면, 그들과 우리와의 가치는 다릅니다. 그들은 이 길을 도피하려고 하지만 우리는 맞으면서 갑니다. 여기에서 주인과 종이 갈라지는 것입니다. 주인은 자기 가문을 중심삼고 부딪쳐 오는 시련을 정면으로 대하지 않을 수 없는 운명을 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피해 가려고 하는 사람들은 전부 다 종이라는 것입니다.
주인은 부딪쳐 오는 모든 것을 정면으로 받아들입니다. 대한민국이 어려우면 대한민국의 어려움을 정면으로 받아들이는 단체가 여당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 가지고 일관적으로 움직이는 하나의 조직체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의 요원들은 전부 다 대한민국을 넘어서 세계로 갈 수 있는 국가를 추구해야 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 내에서 공화당이면 공화당이 공화당의 이념만을 추구하면 망하게 됩니다. 지금까지의 역사가 그렇게 되어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여러분은 우리 통일교회에 가입한 일원으로서 어떻게 해야할 것이냐? 먹고 사는 것, 자고 깨는 것, 우리의 모든 감정은 대한민국을 넘어서 세계를 위해야 합니다. 세계를 위하는 것이 결국은 대한민국을 넘어서 세계를 위해야 합니다. 세계를 위하는 것이 결국은 대한민국을 위하는 것이 됩니다. 대한민국이 세계의 중심이 되도록 대한민국을 세계화시키자는 것입니다. 세계를 대한민국에 예속시키는 것이 아니라 세계 가운데 대한민국을 세워서 빛나게 하자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민족은 세계화 시대에 있어서 주체적인 민족이 될 것입니다. 통일교회는 지금 아무것도 없습니다. 맨손으로 출발했습니다. 그렇지만 아무것도 원치않습니다.
이제 대한민국이 가야 할 길 앞에는 여러가지 어려운 문제들이 있습니다. 현재 정부가 경제 부흥을 추진하고 있지만 이것만이 대한민국을 지탱시킬 수 없습니다. 이것만 가지고는 대한민국을 해방시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박대통령도 제2의 경제라는 말을 하고 있고, 정신적인 단합을 주장하고 있지만 물질적인 문제, 외적인 문제, 경제적인 문제를 주도할 수 있고 움직일 수 있는 정신적인 단합, 국민의 사상적인 주체성을 어디에서 찾을 것이냐? 막연하다는 것입니다. 현재의 종교 가지고는 안 됩니다. 갖다 놓아 봐야 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체에서 이것을 모색하지 못한다면 다른 데서라도 모색할 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보더라도 오늘 통일교회가 얼마나 중대한 입장에 처해 있는가 하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아무리 나라가 부흥한다 하더라도 부흥된 경제력을 움직일 수 있는 참다운 사람을 모색하지 않으면 붕괴합니다. 망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개인의 행복을 따라가다가는 망하는 것입니다. 가야 할 방향을 잃어버리게 되면 거기에서 방황하다가 망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이 가야 할 길 앞에 문제되는 것이 무엇이냐? 경제 문제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무엇이냐? 세계를 움직여 나갈 수 있는 주체적인 사상입니다.
지금 삼팔선 이북에서는 공산주의라는 것이 하나의 체제를 중심삼고 세계화 운동을 모색해 나오고 있습니다. 그 사상 앞에 일개 민족을 위주한 민주주의 사상을 가지고는 안 됩니다. 공산당이 세계화 운동을 주장하는 그 이상의 내용과 실질적인 실적을 남길 수 있는 자체가 아니고서는 그들과 대결할 수 없습니다. 공산주의가 인간을 위주한 사상 관념으로 출발했다면 그것은 기필코 망하는 것입니다. 물질주의와 유물사관을 주장하는 공산주의는 자기의 한계선을 못 넘어갑니다. 자기 나라 이상은 못 넘어간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공산당이 공산당 이념을 중심삼아 세계화 운동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순간에 와서 그 담벼락에 부딪쳐 가지고 후퇴해 버렸습니다. 망하는 것입니다. 공산화 운동이 소련을 위주한 공산화 운동이라면 망하는 것입니다. 세계를 위주한 공산화 운동이 아니고 소련을 위주한 공산화 운동이면 망하는 것입니다. 민주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을 위주한 민주주의는 망하는 것입니다. 세계를 위주한 민주주의가 되어야 합니다. 세계를 위해 가는 길에서 후퇴하는 나라는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세계 인류가 바라는 주체적인 사상, 아무리 외적으로 문명이 발달했다 하더라도 그 문명을 주관할 수 있는 주체적인 사상, 그런 세계적인 사상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공산주의도 아니고 민주주의도 아닙니다. 그 주의는 무슨 주의냐? 하나님 주의입니다.
우리 통일교회가 주장하는 것은 통일교회 주의가 아닙니다. 통일교회 간판을 떼어버리고 싶어요. 한국화된 통일교회가 아니라 통일교회화된 한국이요, 세계화된 통일교회가 아니라 통일교회화된 세계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느냐? 여기에는 통일사상을 세계화시킬 수 있는 요원, 주체적인 구성 요원을 어떻게 양성해 내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세계화 운동의 길을 가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가는 도상에는 모진 시련이 부딪쳐 올 것입니다. 역사시대에 등장했던 모든 시련과 미해결된 문제가 오늘날 우리가 가는 길 앞에, 세계화 운동을 하는 우리 앞에 등장할 것입니다. 그래야 참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에 대한 시련이 있습니다. 내가 죽느냐 사느냐 하는 것을 판가리해야됩니다. 가느냐 안 가느냐를 밤을 새워 가며 고민해야 됩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통일교회는 교리도 좋고, 사람들도 좋은데 아이구 그거 고생 때문에 통일교회 못 가겠다' 하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개인을 중심삼아 가지고 가려면 언제나 투쟁해야 됩니다. 내적인 투쟁을 통해서 시련과 고통을 극복하고 `내 일선을 투신한다' 하고 나서야 됩니다. 이렇게 개인적인 시련을 극복하고 나서면 가정이 반대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틀린 것입니다. 가정의 반대에 부딪칠 것입니다. 지금까지 같은 운명의 길을 걸어 나오던 식구들이 `시련패'로 등장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그 시련 가운데서 어떻게 될 것이냐? 여러분의 부모가 가로막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처자가 가로막을 것입니다. 형제가 가로 막을 것입니다. 가로막다가 안 되면 칼을 들고 나설 것입니다. 통일교회의 길을 따라오면서 칼침을 맞은 사람도 많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별의별 반대를 다 했습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남편이 아내에게 반대를 했고, 형제간에도 별의별 반대를 했습니다. 이러한 비참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도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아비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마 10:34-36)"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이런 의미에서 한 것입니다.
세계화 운동을 제시하던 예수님 앞에 가야 할 시련의 무대가 일시에 등장하였습니다. 나타나는 개인도 시련의 도장이요. 가정도, 종족도, 민족도, 세계도 시련의 도장이라는 것입니다. 이 시련의 도장에게 패자가 될지도 모를 입장에 놓인 예수님은 최후의 운명에 봉착하였습니다. 십자가를 앞에 놓고 망하느냐 흥하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자기 개인을 중심삼고 생각하느냐, 하나님의 뜻을 중심삼고 생각하느냐 하는 기로에 서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청산짓는 것이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였습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싸웠느냐? 30여 년 동안 공적인 뜻을 따라나온 그 생애는 무엇을 중심삼고 산 생애였느냐? 나는 내 일신의 행복을 위해 살았느냐? 아니다. 내 일신의 행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복을 위해 살았다. 하나님권내에 남아질 수 있는, 민족과 국가와 세계를 위한 행복을 추구하면서 살았다. 그렇기 때문에 타락권내에 있는 나를 위주로 하여 그 한계를 넘지 못할 때에는 내 뜻과 그러한 나라를 세우려는 아버지의 뜻은 별개가 된다'고 생각하셨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이 뜻이 부딪치는 순간 마음의 결정을 지어 가정을 중심으로, 민족을 중심으로, 국가를 중심으로, 세계를 중심으로, 판결짓고자 했던 것이 십자가의 죽음이었습니다.
이러한 승리의 결판 과정에서 아버지의 뜻을 붙안고 죽었기 때문에 사망권이 그를 주관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를 죽음에 몰아넣더라도 사망선을 넘어서 재차 태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부활입니다. 이렇게 부활된 사람은 새로운 의미의 개인이 됩니다. 모든 한계권내에서 있어서 제재를 받는 개인이 아닙니다. 한계권을 초월한 개인이 됩니다. 가정의 한계권, 종족의 한계권, 민족 국가 세계의 한계권을 넘은 자리에서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그 부활을 중심삼고 따라가는 사람은 인간세계에서 느끼던 모든 행복, 인간세계에서 느끼던 결의 이상의 힘을 가지고, 흐르는 대해와 같은 탁류를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명실공히 세계화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런 길을 걸어 나왔기 때문에 이것을 상속받아야 할 기독교인들은 재차 정비해 가지고 부딪쳐야 됩니다. 이것이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가야 할 길이요, 현시점의 수많은 종교들이 해야 할 책임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것을 도피하려고 하는 종교들은 지상에서 사라지는 것입니다. 망하지 말라도 해도 망하는 것입니다. 종교를 빙자해 가지고 자기의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은 망합니다. 자기 일신을 중심삼아 가지고 생활하면 망하는 것입니다. 망하는 거예요.
우리 통일교회 신도들에게는 개척노정을 출발한 그날부터 핍박의 화살이 몰아쳐 왔습니다. 이 핍박의 화살이 몰아쳐 오기를 하나님께서 얼마나 고대하셨는가를 생각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날까지 참아 나오고 이날까지 싸워 나온 목적이 무엇이냐 하면 사랑하는 자녀들을 일시에 이 고개를 넘게 하는 것입니다. 이 고개를 일시에 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소망이, 하나님의 고대가, 하나님의 그리움이 이 한 시점에 집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 설 수 있는 때에 태어난 자기 자신의 무한한 가치를 여러분은 깨달아야 됩니다. 과거의 슬픈 역사를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새로운 보금자리에 태어난 자아의식을 느껴야 됩니다. `여기에서 내가 태어났으니 이제부터 나는 당당하게 갈 것이다. 세계의 그 무엇이 나를 치고 밀고 가더라도 나는 갈 것이다. 다가오는 시련이 나를 후퇴시키는 것이 아니라 전진시키는 재료가 될 것이다. 미래에 뜻을 성사시킬 수 있는 영향으로 흡수할 것이다'라고 할 수 있는 주체적인 사람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이 가는 길 앞에 시련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런 시련의 고비를 넘을 수 있는 아들딸을 하나님은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런 자리에서 죽게 했던 하나님입니다. 그것은 죽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승리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승리를 위해서는 불가피했던 것입니다. 승리의 결정을 지어야 할 운명이 이 구원섭리노정에 남아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자식을 죽음의 자리에 내세운 것입니다. 그것이 승리의 결정적인 금을 긋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요, 하나님의 작전법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넘지 않고는 관계를 초월할 수 없습니다. 너와 나와의 관계를 해결지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역사 앞에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종교인이 나타나서 세계적인 사명을 해야 될 것입니다.이러한 사명을 느끼고 나서는 무리가 세계상에 반드시 나타나야 합니다. 이런 무리가 안 나타난다면 하나님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명을 의식하고 나타난 무리가 통일교회무리입니다.
개인이면 개인의 시련이 부딪쳐 올 것입니다. 부딪쳐 올 때 `와라! 원수여, 채찍을 들고 쳐라. 있는 힘을 다해 쳐 봐라. 너는 사탄세계를 대표해 나왔지만 나는 하늘나라를 대표해 나타났다. 너와 나의 싸움에서 나는 절대로 후퇴할 수 없다. 너는 하루의 행복을 위한 싸움에서 몇 해를 도사리고 나를 칠는지 모르지만 나는 수천년을 도시려 나온 하나님을 대신한 아들이기 때문에 십 년, 이십 년, 삼십 년, 아니 일생을 걸어서라도 이 싸움을 계속할 것이다'라고 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싸움의 과정을 거쳐서 통일의 역사는 엮어져 내려온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가 그러하듯이 통일교회 역사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단축시킨 짧은 역사과정이지만 세계를 도피하는 역사의 그림을 그려 나온 것이 아니라 세계를 직시하고 직행할 수 있는 사연을 중심삼아 가지고 그림을 그려 나온 통일교회입니다. 직시된 세계의 관문 앞에서 이것을 어떻게 맞아 가지고 어떻게 소화시킬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지 이것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주의나 사상은 누구든지 주장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확신하느냐가 문제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1960년대는 우리 통일교회 교인들을 시련시키는 시기입니다. 내 자신을 시련시키는 때입니다. `가라'하면 가야 되는 것입니다. 타락의 운명을 벗어나는 길을 모색해야 되는 것이 인류가 가야할 길입니다. 이 고독의 행로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돌아가서는 안 됩니다. 돌아가면 누가 이것을 주장하면서 맞아 가지고 그 싸움을 책임질 것이냐? 돌아가는 사람은 망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세계를 대표해서 직행해야 되겠습니다. 생명을 걸고 전진해야 되겠습니다. 이런 싸움을 우리는 지금까지 해 왔습니다. 개인이 부딪치는 모든 것을 넘어왔습니다. 반대하는 부모를 버리고 형제를 버리고 나섰던 몸들입니다. 동네가 전부 다 반대하고 비웃는 그 자리에 나섰던 몸들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수많은 동네를 찾아다닐 때 미친 녀석이라고 욕을 먹던 몸들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망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놀음을 거쳐 가야 됩니다. 나라에서 욕먹는 것도 거쳐 가야 됩니다. 우리는 개인들로부터 욕을 먹고, 가정에서 욕을 먹고, 동네에서 욕을 먹고, 학교에서 욕을 먹고, 사회에서 욕을 먹고, 나라의 주권자들로부터 규탄받던 무리들이지만 여기서 망할 수 없습니다. 다 망해도 망할 수 없습니다. 망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책임을 짊어지고 나오는 선생님은 역사에 없는 영도자의 생활을 해 나오고 있습니다. 내가 이 나라를 위해서 주장할 말이 많습니다.삼천만의 심정을 붙들고 통사정 할 수 있는 사연이 많지만 때를 기다리고 나온 사람입니다. 양지 중의 양지에서 살아야 할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음지 중의 음지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행여나 민족의 갈 길에 지장을 줄까봐 그러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망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하든지 반대하는 자를 굴복시켜야 됩니다. 개인이 반대하면 개인을 어떻게 굴복시키고, 가정이 반대하면 가정을 어떻게 이해시키고, 종족이 반대하면 어떻게 하고, 교회가 반대하면 어떻게 하고, 나라가 반대하면 어떻게 할 것이냐? 이것이 지금까지 여러분을 지도해 나온 선생님의 고민입니다.
내 자신이 찢기고, 내 자신이 상처받고, 내 자신이 처참한 누명을 쓰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이 민족 앞에 주체의식을 가지고 나설 수 있는 통일의 무리, 세계 앞에 주체의식을 가지고 나설 수 있는 통일의 무리를 어떻게 만드느냐 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체면과 위신만 생각하다가는 망하는 것입니다. 개인이 좋거든 개인을 붙들고 살아 보십시오. 가정이 좋거든 가정을 붙들고 살아 보십시오. 종족이 좋거든 종족을 붙들고 살아 보십시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가치는 개체적인 것이 아닙니다. 한 가정을 위해 희생의 제물이 되어야 할 존재도 아닙니다. 세계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세계를 대신할 수 있는 호흡과 세계를 대신할 수 있는 생활감정을 중심삼아 가지고 전세계 앞에, 전역사 앞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안팎의 생활을 해야 됩니다. 그러지 않고 구덩이를 파 놓고 그 안에서 득실거리고 그 안에서 복닥거려 가지고는 안 됩니다. 그 구덩이가 아무리 크더라도 그 안에서 망하는 것입니다. 가야 합니다. 여기에 서서 말하는 사람은 부모도 버리고 나섰습니다. 처자도 버리고 나섰습니다. 이 길은 그러지 않고는 갈 수 없는 길입니다. 피가 튀는 길입니다. 심정의 힘줄이 곤두서는 길입니다. 말할 수 없는 사연이 교차되는 길입니다. 이것을 극복해야 됩니다. 이 교차로를 뚫고 가야 하는 것이 내 운명이다.
이 운명의 직선상에 선 나입니다. 내 갈 길이 이것밖에 없는 것을 알고 세계를 향하여, 인류를 향하여 내일의 희망을 품고 갈 수 있는 사나이의 모습을 어떻게 남기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시하게 내 자신이 문제가 아닙니다. 가해진 환경이 문제가 아닙니다. 다가오는 시련이 문제가 아닙니다. 인간으로서 넘길 수 없고 체험할 수 없는 비참한 장면을 당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을 어떻게 돌파하느냐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는 이런 싸움을 전개해서 개인의 담벽을 헤치고 나왔습니다. 반대하던 부모가 찾아와 여러분 앞에 무릎을 꿇고 `내가 잘못했다. 통일교회는 알고 보니 그렇지 않더라' 하고 인정했습니다. 여기에서 그 부모에게는 자식으로 말미암아 개인적인 싸움을 거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터전이 닦여진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통일교회의 움직임이 안팎으로 점점 문제화되는 단계에 들어왔습니다. 반대하던 대한민국이 돌아서서 손을 잡고 통일교회가 가는 길을 후원하고, 통일교회가 가는 길을 따라가겠다고 할 때는 삼천만 이 민족은 국가 기준까지의 시련 고통을 거치지 않고 갈 수 있는 길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오늘 통일교회를 지도하는 문선생이라는 사람이 외로운 사람이요 불쌍한 사람이지만 이 민족 앞에 할 말이 있는 것은, 민족 전부가 나와 같은 길을 가야 된다고 한 것이 아니라 나 하나가 시련당함으로 말미암아 수십 년동안 이 민족이 가야 할 시련의 고비를 닦겠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될 때 이 민족은 머리 숙일 것입니다. 민족이 개개인의 시련, 가정의 시련, 종족의 시련, 민족의 시련을 거치지 않고 대한민국이 해방을 맞을 수 있는 특권적인 은사를 하늘로부터 받을 수 있는 인연을 맺게 될 때 이 민족이 지금까지 배반자의 입장, 혹은 반대하는 입장에 섰기만 하나님 앞에 안기는 인연을 가질 수 있는 이 민족이 될 것이 아닙니까? 선생님은 그때를 바라보고 나가고 있습니다.
오늘날 통일교회가 가는 길은 전세계에 소문이 나 있습니다. 통일교회가 나쁘다는 소문이 어디든지 나 있다는 것입니다. `좋다. 너희들이 반대할 테면 반대해라. 그렇지만 우리는 갈 것이다' 하고 가는 것입니다. 지금 일본 정부가 통일교회를 문제시하고 있습니다. 미국 정부도 통일교회를 문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민족이 문제시한다고 해서 민족권내에서 사라질 통일교회가 아닙니다. 민족을 밟고 올라서서 내가 제시한 그 내용을 중심삼아 가지고 세계화하는 운동을 하는 데 있어서는 어떠한 민족보다도, 어떠한 단체보다도, 어떠한 국가보다도 강력한 실천을 한다는 것입니다. 맹세코 다가오는 시련 고통을 회피해 가는 패자가 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념을 품었기 때문에 오늘날 여러분이 스승이라고 추앙하는 이 사나이의 손에는 쇠고랑을 찬 역사가 있는 거예요. 앞으로도 그런 각오를 하고 있습니다. 최후의 죽음의 한 교차로가 내 앞을 가로막게 될 때 나는 졸장부가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들이 칼을 뽑으면 나도 뽑을 것입니다. 일대 싸움을 전개할 것입니다. 아직까지 그때가 안 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있는 것입니다.
저 세계로 갑시다. 광명한 내일의 희망의 세계로 가야 되겠습니다. 지난날 억울했던 원한의 역사, 고통의 역사, 슬픔의 역사, 비통의 역사, 참혹의 역사를 밟고 희망찬 오늘을 맞이하여 내일을 향해서 힘차게 달려갈 수 있는 무한한 가치의 모습을 우리는 어디에서 찾을 것이냐? 대한민국이 아니라 무한한 가치의 모습을 우리는 어디에서 찾을 것이냐? 대한민국이 아니라 세계를 중심삼고 찾아야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야 할 운명의 길입니다. 이 엄청난 역사를 중심삼고 망해 들어가는, 희망없는 절망의 세계 앞에 새로운 희망의 세계를 전개시키고 세계화 운동을 전개시키기 위해서는 소수의 통일교회의 무리가 세계화 기준을 어떻게 정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이 선생님이 지금까지 생애를 걸고 싸워온 투쟁의 목표였습니다. 날아오는 화살을 고스란히 맞습니다. 밤잠을 자지 말고라도 맞으라는 것입니다. 화살이 박혔던 흉터에는 역사의 반응이 나타날 것입니다. 희망의 역사가 거기서 전통의 원천을 마련할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 우리들은 어디로 가야 되느냐? 세계로 가야 되겠습니다. 내가 분부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대통령이나 해먹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세계를 구하기 위해서입니다. 세계 만민을 해방시켜서 하나님의 아들딸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부모가 해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이 해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지금까지 당신의 출세를 위하여 일해 나온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아들딸을 출세시키기 위해서 일해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도 어제는 비참한 모습이었지만 오늘은 세계로 향하는 희망의 새로운 깃발을 날리며 하늘 경기의 대열에 참가한 늠름한 모습이 되어야 됩니다. 시시하게 졸장부가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시련의 노정을 정면으로 부딪쳐 격파해야 되겠습니다. 이것을 격파하고 나갈 때 무한한 가치가 나를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 가치의 사랑, 그 가치의 행복, 그 가치의 자리에서 내일을 흠모하며, 그 가치의 오늘을 찬양할 수 있는 모습, 그것이 하나님이 찾아 나오시는 승리의 아들딸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을 위해 우리는 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런 도상에서 죽어갔습니다.그러나 예수님은 죽었으되 죽은 것이 아니고 역사를 살려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지금까지 참된 세계를 추구하는 데 있어서 신을 위주하고 출발하였던 역사가 자기를 중심삼고 나가게 될 때는 망하는 운명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다시 자기를 밟고 세계를 자기의 시련도장으로 삼고 역사상에 남겨진 모든 시련을 자기의 생명의 시련노정으로 흡수하여 자기의 생활권내에서 탕감하려고 나서는 무리가 있다면 그 무리는 절대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인생의 가치를 느끼고 세계를 위하는 데서 삶의 가치를 느끼는 사람들은 절대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역사적인 거리는 느낄망정, 연한의 차이는 있을망정 그 사람들은 결코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엮어간 시련과 핍박의 도상이 앞으로의 역사과정에, 세계 어느 도처에서 나타난다 하더라도 그 시련과 고통은 극복하기에 어렵지 않은 제2의 시험만으로써 넘어갈 수 있는 재료를 여기서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어젯날의 부족한 자신을 위주한 것을 벗어 버리고 하나님을 위주하여 살수 있는 올바른 애착심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6천년 역사과정에서 하나님이 당하셨던 시련과 고통을 평면도상에서 일시에 탕감할 수 있는, 즉 종적인 역사를 횡적으로 일시에 탕감할 수 있는 무대를 전개해야 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어려운 시련이 나를 휩쓸더라도 내가 거기에 말려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 사상과 내 신념과 내 행복을 넘어선 자리에서 아버지의 뜻을 심고 갈 수 있는 사람은 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남긴 전통이요, 사상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바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고 간 그 길이 오늘날 세계를 창조할 수 있고 세계를 구할 수 있었다는 것을 그 누가 알았겠습니까? 갈릴리 해변가의 어부와 친구가 되었고, 당시 이스라엘 나라의 민족적 반역자로서 사라져 간 그 청년, 아무도 몰라주던 예수님의 죽음이 오늘날 세계화될 줄을 그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 죽음은 동기가 다르다는 거예요. 역사가 다르다는 거예요. 그 동기의 내용이 하나님과 더불어 뒤넘이쳤기 때문에 하나님이 살아서 역사를 움직여 나오는 한 그와 더불어 싸우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피흘린 그 역사를 중심삼고 세계는 거기에 흡수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를 중심삼은 세계화 운동은 자동적인 이치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현시점은 예수님이 맞던 대로 맞을 수 있는 한 때라는 것은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기서 여러분에게 한 가지 이야기 할께요. 내가 저번에 미국에 갔을 때 미국 언론계에 종사하는 저명한 매슈 스미스라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이 사람은 현재 캐나다에 적을 두고 있는데 캐나다와 미국의 언론계의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으로 널리 알려진 문필가입니다. 그 문필가에게 원리강론 번역해 놓을 것을 좀 봐 달라고 부탁하고 왔습니다. 그랬더니 이 사람이 미국에 대한 세부적인 분석을 하여 현재 미국 사람들의 사고방식에 대한 것을 쭉 써 왔습니다. 그 사람은 동양사상과 현재 미국의 사상과는 천지의 차이가 있다고 보고 있었습니다.
`행복'이라는 것은 추상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실용주의를 찾고 있는 미국 사람들 앞에는 행복이라는 말은 구체적으로 설명해 줘야 됩니다. 국민학교 다니는 어린이들이 행복이 무엇이냐고 묻게 될 때 그들에게 추상적으로 설명해 주어서는 안 됩니다. 실지로 눈에 보이는 것을 가지고 행복을 설명해야 됩니다. `행복한 사람은 저렇게 좋은 집을 링컨 같은 자가용차를 가지고 사는 사람이다' 하는 식으로 설명해야 납득한다는 것입니다. 행복 그 자체만 가지고는 아무리 설명을 해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하나님이라는 관념을 집어 넣을 도리가 없습니다. 영계라는 관념을 집어 넣을 도리가 없습니다. 이런 것은 실질적인 것을 가지고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양사상을 중심삼아 가지고 보면 단어 하나에도 이념이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라는 것도 풀이해 보면 마음은 하늘을 상징하는 것이요, 몸은 땅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전부 다 이런 식이기 때문에 이것을 서구사람들은 이해할 도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유명한 학자가 주역을 연구해 가지고 번역을 했는데 그 서문에 `내가 번역을 하긴 했지만 나 자신도 잘 모르는 이 책을 번역했다'고 했답니다. 설명의 근거를 잡을래야 잡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으로 볼 때 하나님은 서구 사람들 앞에 가까이 갈래야 가까이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무의 잎이 뿌리를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잎이 뿌리를 알 수 있어요? 아무리 알려고 해도 잎밖에 모른다는 것입니다. 뿌리가 `야 잎아, 너는 누구를 닮았니? 뿌리를 닮았지?'라고 한다면 믿겠습니까? `내가 잎을 닮았지 뿌리는 왜 닮아? 생김생김이 틀린데'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동양사상은 그렇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잎보다도 뿌리를 더 중요시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극과 극이 지금 열매맺었다는 것입니다. 동양사상은 지금까지 사상을 중심삼아 가지고 나왔는데 서구사상은 물질을 중심삼고 나오다 보니까 큰 산덩이도 잃어버리고 원자니 중성자니 하다가 맨 끝에 가서 눈이 멀개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깨워서 돌이키느냐? 이것을 일깨우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이냐? 채찍을 가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공산당을 중심삼고 채찍질하는 것도 일리가 있는 것입니다. 물질 물질하면서 물질을 중심삼고 모든 것을 들여다보니 물질주의에 공포를 느끼게 되어 아이쿠 이젠 물질이 싫다 하고 부정하는 운동이 벌어질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에 세계적으로 공산당이 한때 득세하는 것은 그런 것을 채찍질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미국 사람이 맨 처음에 한국에 왔을 때 한국 사람들을 사람같이 여겼는 줄 알아요? 그러나 점점 떨어져 내려가니 너희나 우리나 피장파장이라는 것입니다. 비슷비슷하다는 것입니다. 유엔이라는 기관 안에서는 아무리 큰 미국이나 아프리카의 지극히 작은 나라나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큰소리를 했댔자 유엔총회에서는 한 표밖에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기구가 나왔기 때문에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민족의 주체성과 국가의 주체성의 동등권을 취할 수 있는 시대권을 만들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 사람들이 `물질'하게 되면 진저리가 나게끔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미국 사람들이 사회주의는 싫어하지만 그 사회주의에 연결된 물질주의는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회주의를 나쁘다고 하는데 사회주의라는 것은 물질을 위주로 하는 주의입니다. 사회주의의 근본 철학인 유물사상이라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결과는 싫어하지만 그 원인은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싫어하게 만드느냐? 선생님의 미국 작전이 그것입니다. 공산주의의 사회제도가 나쁜 것이 아니라 공산주의 이론이 나쁜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승공운동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적중시키기 위해서 이 작전을 해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사탄이 참 최대의 노력을 했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용하게 끌고 나와 가지고 세계를 지도하는 선진국가까지도, 소위 국민의 3분의 2가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는 미국 사회가 실용주의라는 물질을 위주한 주의 앞에 눈이 멀개지게 만들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디로 가야 할 것이냐? 다시 돌아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살 길은 그 길밖에 없다는 거예요. 살겠다고 허위적거려 봐야 안 됩니다. 돌아가야 됩니다. 돌아가야 돼요. 그렇기 때문에 14세기 말에 나타난 문예 부흥, 인본주의 사상을 박차고 신본주의시대로 돌아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통일교회가 동양과 서구 문화권을 연결하는 교량의 사명을 해야 됩니다. 통일교회에는 그럴 수 있는 내용이 충분히 있습니다. 그런 때가 기필코 올 것을 대비하여 우리는 주체성을 갖춰 나가야 합니다. 민족과 국가와 세계 앞에 전개될 수 있는 모체를 만들어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활동 체제를 강화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그들의 사고방식은 우리의 사고방식과 먼 거리에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한국백성으로 태어난 것이, 동양의 한 국가 체제권내에 태어난 것이 불행이 아니라 지극한 행복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옛날 소크라테스와 같은 사람들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당시에 잘 먹고 잘살던 사람이 아닙니다. 거리의 행인들로부터 조롱을 받고 살던 사람들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오늘날의 세계 문화권을 창설한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잘 먹고 잘 입은 것이 아닙니다. 그 모습은 초췌하고 처참했지만 그들의 사상 체계가 역사를 지배했고, 후대 사람들의 추모를 받은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우리는 현실적인 것만 보고서 낙망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다가오는 시련과 고통이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그것은 후대 역사의 영광과 더불어 빛날 수 있는 하나의 원천이 되고 힘의 맥박으로 남아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할 때 이것은 엄청난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싫다고 하는 사람은 지극히 불행한 사람이요, 이것을 좋다고 하는 사람은 지극히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이런 관점에서 우리의 가치를 어디에 세울 것이냐? 또 가치를 세워서 어떻게 살 것이냐? 이런 문제를 놓고 볼 때, 세계적으로 극복해야할 난문제를 타개하는데 있어서 가치를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은 반드시 후대에 있어서 역사와 더불어 살고, 세계와 더불어 사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선생님은 여러분을 그러한 인격자로 만들기 위해서 엄동설한에 맨발이라 하더라도 무정하게 내몰아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모든 어려운 환경을 타개시키기 위해서는 무자비하게 내몰아야 되겠습니다.
선생님이 지금까지 닦아 놓은 모든 기반을 고스란히 상속받으려면 그런 탕감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통일교인으로서의 참된 가치의 모습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1969년도와 1970년도가 교차되는 시기에 들어왔습니다. 교차될 때에는 반드시 탕감조건을 제시하고 넘어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거국적인 무대를 중심삼아 다시 출발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복귀역사를 배워서 알겠지만 제1차 아담이 실패함으로 말미암아 제2차 아담이 와서 이것을 수습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제2차 아담도 실패했기 때문에 제3차 아담이 등장해야 하는데 이분이 재림주입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들도 1960년대에 실패한 것을 복귀해야 됩니다.
이번에 가정들을 모아 가지고 옛날에 전도했던 그 지역으로 다시 보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알겠어요? 제2차적으로 다가오는 시련 무대는 옛날과 다를 것입니다. 옛날에는 핍박의 화살이 몰려왔지만 이제 그 반대의 결과가 나타날 것입니다. 옛날에 여러분을 반대했던 사람들은 여러분과 원수가 되었고, 또 하늘에 한을 맺히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여러분을 환영하며 `과거에는 내가 잘못했습니다'라고 하면서 하나님 앞에 맺히게 했던 인연을 풀어 놓고 나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통일교회의 새로운 운세의 때가 올것입니다. 이것이 선생님의 관측입니다. 알겠어요? 「예」
그래서 이것을 탕감원칙에 의해서 거국적으로 풀어 줘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원수되었던 사람을 찾아가서 `잘 사십니까? 어떻게 지냈소? 옛날에 핍박했는데 오늘 지금 핍박하시겠습니까?' 하고 겸손한 자세로 방문해 가지고 맺힌 것을 풀어 놓고 그들 앞에 정성을 더 들여 주고, 그들에게 통일교회 사상을 소개해 주고 돌아와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이것이 1960년대에서 1970년대로 넘어가면서 해야 할 책임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기에서 작금의 우리의 가치 문제가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련을 피할 것이 아니라 시련을 고스란히 받아들여 제2의 가치를 재인식해야 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과거의 시련 고통을 넘어 부활의 가치를 재인식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여러분도 새로운 제2의 가치를 재인식해 가지고 1970년대를 맞이하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들에게 내리는 선생님의 명령입니다. 그렇게 알고 무한한 가치를 지닐 수 있는 책임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시겠지요? 「예」 시련 고통을 도피해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고스란히 맞으면서 직행하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제아무리 발버둥친다 하더라도 아버지의 품에서 떠날 수 없는 것이요, 사탄의 품에 안긴 아들딸은 기필코 아버지의 아들이 되고 딸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여기의 결정권은 아버지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원리는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인간이 5퍼센트의 책임을 다 하느냐 못 하느냐에 따라 오늘 섭리의 뜻을 100퍼센트 세우느냐 못 세우느냐 하는 문제가 좌우된다는 사실을 원리는 여실히, 확실히, 분명히 가르쳐 주었습니다.
오늘날 이 민족은 세계의 고아와 같은 입장에 선 것을 알고 있습니다. 북으로는 북괴가 있고 소련이 있고 중공이 있으며, 동으로는 일본이 있사옵니다. 일본은 내일의 운명을 판가리하는 길에 있어서 적화되느냐 민주주의로 돌아가느냐 하는 문제를 중심삼고 해산의 고통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저희가 알고 있습니다.
아버님이여, 1970년대를 중심삼고 통일교회 무리들은 선두에 섰습니다. 피어린 투쟁길로 지금 가고 있습니다. 아버지여, 대한민국에서 핍박받던 통일교회가 일본 사회에서 문제가 되고 있고 그 국가가 주시하는 단체가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될 때, 이것이 대한민국의 자랑이라면 자랑일 것입니다. 이 민족은 지금까지 불쌍한 민족으로 아시아에서 역량을 나타내지 못하고 하늘 대신 비난을 받으며 천주의 운세를 짊어지고 나왔습니다. 이런 무리들을 아버지께서는 잊지 않으시고 대신 찾아오셔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시대적 환경을 만들어 주셨사오매 그 수고 앞에 저희들은 진심으로 감사드리옵니다.
이제 자세를 갖추어 아버지 앞에 감사드려야 할 1960년대는 저희 앞에서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이 1960년대의 끝을 밟고 1970년대의 새로운 출발의 한 날을 맞이해야 할 과정에 있습니다. 오늘이 1969년 12월 14일이기 때문에 1960년대는 이제 17일을 남기고 있습니다. 이 기간에 저희 자신들을 다시 한번 명시해야 되겠습니다.
저희가 지금까지 아버지의 부름을 받아서 역사적인 운명을 책임지고 허덕이며 나온 과거의 10년이 오늘 이 시점과 다른 것을 알았습니다. 통일교회에 들어오기 전의 나 자신과 통일교회에 들어온 후의 나 자신을 두고 볼 때, 현실이 과거 앞에 비판을 받는다면 그것은 부끄러운 것이요, 내려가는 것이요, 그 세계와 관계없이 먼 거리에 떨어지는 것이옵니다. 저희들은 목자를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이 아니라 아흔 아홉마리 양의 무리권내에 있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런 시점에 놓인 것을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작금의 우리의 가치'라고 하였으니 옛날에 뜻을 대하던 모습보다 오늘 뜻을 대하는 저희 모습이 발전되어야 될 텐데 그러지 못하고 퇴화하였다면 이는 불쌍한 자리옵니다. 여기에서 다시 한번 용솟음쳐야 되겠습니다. 다시 한번 아버지의 옷깃을 붙들고 저희들이 아버지의 그 깊은 심정의 줄기를 파고들어가야 되겠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최후의 장면에서 하나님이 얼굴을 돌리시어 예수님의 죽음을 피하셨을 때, 예수님이 `아바 아버지여 내 생명을 받으시옵소서'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최후의 결판을 지어야 할 사명이 통일교단에 있습니다. 통일교단의 십자가의 과정이 여기에 남아 있습니다. 통일교단이 새로이 부활할 수 있는 한 시점이 저희 목전에 다가오고 있습니다.
열두 제자를 앞에 놓고 최후의 만찬을 베풀면서 떡을 나누어 주실 때 그 자리에 원수가 있는 것을 섭섭해하던 예수님의 사정을 알아야 되겠사옵고, 그 원수와 마찬가지의 입장에 서는 저희들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원수도 그 승리의 영광을 찬양하고 굴복하게 하는 자리에 서야 되겠습니다. 모든 만물도 그 모습을 보고 장하신 하나님이요, 기쁘신 하나님이요, 영광의 하나님이라고 찬양할 수 있는 승리의 내 자체, 내 입, 내 세포를 갖추어 가지고 영광의 모습으로 아버지 앞에 노래하고 춤출 수 있는 그날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죽어서 부활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 부활을 이루어야 되겠습니다. 죽어서 원수의 한을 품고 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 원한을 풀고 가는 것이 통일의 길이기 때문에 원수시 당하는 그 자리에서도 지금 이 자리까지 나왔습니다.
저희가 고개를 들고 보면 저희 앞에는 최후로 넘어가야 할 한 문턱이 남아 있습니다. 이것을 박차고 나서는 날에는 광명한 세계가 저희 앞 길에 마련되어 있는 것을 바라보고 오늘 현시점에서 부딪치는 이 시련의 장벽을 저희들이 맞이하여 힘차게 넘어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죽음 이상의 힘을 가지고 부딪치게 될 때 그것은 무찔러진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고 가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결의를 다시 할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저희들이 오늘까지 3주일 남긴 채 안식일을 맞이하였습니다. 오늘을 기점으로 하여 남아진 기간에 새로운 결의를 하고 1970년대를 맞을 수 있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 새로운 계획을 중심삼고 앞으로 가야 할 책임, 새로운 역사적인 일을 결심하고 단행해야 할 책임이 저희들에게 남아 있사오니, 그 길 그 사명을 달게 받고 제2차 해원성사의 노정을 향하여 나서야 되겠사옵니다. 지금까지 아버지를 섭섭하게 했던 그 마음의 먹구름을 헤쳐 버리고 제자신의 면목없던 부끄러운 자세를 떨쳐 버리고 내일의 희망을 향해 가는 모습, 아버지께서 소원하고 아버지께서 동조하고 아버지의 역사 가운데서 아버님의 환희의 환영을 받는 자리에서 민족 앞에 세계 앞에 설 수 있는 승리의 모습, 혹은 참된 가치를 추구하는 통일의 무리들이 되게 하여 주옵길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전국에 널려 있는 자녀들과 세계에 널려 있는 자녀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일본에서 싸우고 있는 당신의 자녀들을 기억하여 주시옵고, 아시아의 대회를 중심삼고 명년에 계획하고 있는 저희 계획 계획들이 아버지의 보호하시는 뜻 가운데서 일취월장하게 허락하여 주옵길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오늘의 말씀과 더불어 극복의 신념을 가하여 내일의 승리의 모습을 갖추기 위해 힘차게 출발할 수 있는 자녀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참부모의 이름 받들어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아버님, 오늘은 1969년 12월 14일, 이달 들어 두번째 맞는 안식일이옵니다. 아버님이여, 이 땅 위에 통일의 말씀이 나타나 통일의 길이 시작된 지도 20여 성상이 흘렀습니다.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복귀의 뜻을 홀로 지니시고, 수많은 민족의 배후에서 당신의 슬픈 사정을 통할 수 있는 한 개인을 찾아 헤매시던 그 시절을 저희들이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아벨이 가인에게 죽임을 당하고 난 그날부터 슬픔이 천지에 가득한 가운데 복귀의 길을 더듬어 나오시기에 초라해진 아버지를 저희들이 무엇으로 위로해 드릴 수 있겠사옵니까? 아담 이후 10대 1,600년 동안 수고하여 노아를 이 땅에 보내놓고 간곡히 부탁하시며 노아를 대하시던 아버지, 120년이라는 그 지루한 세월 동안, 그 기한이 차기까지 얼마나 마음 졸이셨사옵니까? 또한 노아를 대하여 부탁하시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간절하셨습니까? 어느 한날 마음 놓으시고 부탁할 수 없었던 아버지의 사정, 얼마나 불쌍하고 얼마나 딱하셨습니까?
노아 가정은 하늘의 소원 중의 소원이요, 하늘의 수고의 결실로서 거두려 하던 가정이었는데, 함의 실수로 말미암아 생각지도 않았던 함의 노정을 연장시키어, 아버님께서는 다시 아브라함 때까지 바라보셔야만 하셨사오니, 과연 아버지의 그 노정은 불쌍한 노정이었사옵니다.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 있는 데라의 가정에서 불러낼 때 아버지는 더없이 불상한 자리에 처해 있었사옵니다. 원수가 지극히 사랑하는 가정에서 그 아들을 빼내셔야 했던 아버지의 비참한 사정과 내용이 어떠했던가를 생각하게 될 때에, 우리 인간 시조의 타락의 보응이 역사의 고빗길을 거쳐오면서 이렇게도 아버지를 애달프게 했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회고하게 되옵니다.
아브라함을 택하시던 아버지의 마음을 저희들이 알고 싶사옵고, 아브라함을 대하시던 아버지의 정성어린 심정에 저희들이 어리고 싶사옵니다. 그러하오니 저희들 이 시간 찾아오시는 아버지 앞에 그 아브라함 대신 부름 받을 수 있는 아들의 모습이 되고, 딸의 모습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사정이 얼마나 비참했기에 아브라함에게 모든 환경을 초월하여 사랑하는 고향과 친척을 버리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고 하셨겠사옵니까? 여기에서 저희는 사랑하는 자녀를 비참한 자리로 몰아내지 않고는 아버지의 사정이 풀릴 수 없고, 사랑하는 자녀를 비참한 길을 거치게 하지 않고는 아버지의 사정과 인연맺을 수 없다는 사실을 엿보게 되옵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를 떠났습니다. 모든 것을 다 버리고 하늘을 따라 나선 그의 길은 외로운 길이었습니다. 슬픈 길이었습니다. 집시의 행로였습니다.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가야 했으며, 하늘을 모시려 해도 나그네의 신세이니 마음으로밖에 모실 수 없었던 아브라함의 행로를 저희들이 회고하여 볼 때에, 신앙자의 가는 걸음이 그렇게 비참하였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옵니다.
이리하여 야곱이 하늘의 승리의 터전을 세울 때까지 얼마나 마음 졸이신 아버지이신가를 저희가 느끼게 되옵니다. 그 전까지는 아버지의 소원을 중심삼고 세울 수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땅을 바라보아도 흑암의 땅뿐이요, 수많은 인류를 바라보아도 원수의 자식뿐이요, 이 세계를 바라보아도 하늘과는 인연맺을래야 맺을 수 없는 아득한 흑암의 세계였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족속을 중심삼아 가지고 이삭과 야곱을 통하여서 이 땅 위에 하늘의 뜻이 기반을 닦은 그날부터 그의 후손들은 야곱의 가정을 중심삼고 이스라엘 나라를 창건하기 위해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될 나그네의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 행로가 또 얼마나 비참하였습니까? 가는 곳곳마다 물렸습니다. 가는 곳곳마다 억울함을 당했습니다. 가는 곳곳마다 그 불쌍한 사정을 하늘만을 중심삼고 내통해야 할 외로운 길을, 이 땅 위의 그 누구의 충고도 그 누구의 사정도 들어줄 수 없는 외로운 길을 그들은 개척해야만 되었습니다.
야곱이 70가족을 중심삼아 가지고 애급으로 간 그날부터, 이스라엘 민족은 400년의 기나긴 세월을 도탄 가운데서 살았습니다. 그 민족은 원수의 수중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원수의 채찍질을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아버지께서는 하늘을 그리워하는 마음, 하늘을 사랑하는 마음, 이스라엘 복지를 추구하는 마음, 불타는 애국심을 가진 모세를 세우셨사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권고하고 지도하라 하신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난 모세도 역시 모든 것을 버리고 이스라엘 민족만을 붙들고 나서지 않으면 안 될 운명에 설 수밖에 없었던 것을 저희가 알고 있사옵니다.
이렇게 모세 노정을 거쳐서 예수님 때까지의 4천년 역사를 더듬어 오신 아버지여, 얼마나 슬프셨사옵니까? 원수들 앞에 조롱받고 쫓김당하고 죽임을 당하던 그 길 가운데서 살아 남은 무리들은 이스라엘의 제단을 다시 수습하여 아버지의 슬펐던 사연을 풀어 드릴 수 있는 행로를 개척해야 했습니다. 그런 책임이 남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민족은 주저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런 책임을 지기에 앞서 하늘의 영광을 바랐습니다. 져야 할 십자가의 관문은 통과하지 않고, 받아야 할 영광만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오신 예수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이러한 슬픈 일로 말미암아 기독교는 지금까지 2천년의 행로에서 죽음의 고비가 앞놓아진 가운데 나왔습니다. 그러면서 세계적으로 발전되어 나왔으니, 아버지께서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피의 대가를 치렀으며, 얼마나 많은 슬픔과 외로움과 원통함의 대가를 치렀습니까? 그 대가를 치렀던 기독교의 결실이 과연 무엇이었던가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하늘이 절망하지 않을 수 없고 하늘이 낙망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시점에 기독교가 놓여 있다는 사실을 저희들이 알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이러한 때에 여기에 모인 당신의 자녀들은 남다른 길을 이미 밟고 나섰습니다. 외로운 길을 자처하고 나섰습니다. 하늘의 슬펐던 사정을 안다 하고 나섰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저희들이 하늘을 바로 알았습니까? 과연 아버지의 사정을 바로 알았습니까? 알았다면 그것은 안 자의 모습이 이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다시 한번 각성해야만 되겠습니다.
아버님, 오늘 여기에 모인 당신의 자녀들을 굽어살피시옵소서! 과연 누구를 찾아오신 아버지의 발걸음인가를 다시 묻게 될 때, 나 자신을 찾아오신 아버지의 발걸음이었다는 것을 절감하는 당신의 아들이 있어야 되겠고 딸이 있어야 되겠습니다. 이 시간 이러한 것을 자각할 줄 아는 당신의 자녀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1960년대는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이제 17일을 남긴 1960년대는 서러움의 해였사옵고, 원한의 해였사옵고, 슬픔의 해였사옵고, 고통의 해였사옵고, 비참한 해였사옵고, 억울한 해였사옵니다. 이렇게 10년을 보낸 저희 자체가 과연 10년 수고의 결실로 거두어진 하늘의 열매가 되었는가를 생각하게 될 때에 하늘 앞에 부끄러운 자체들임을 발견하게 되옵니다. 여기에서 저희가 하늘 앞에 다시 회개하지 않으면 안 될 자신들임을 발견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시간 여기에 모인 자녀들의 마음을, 아버지, 살피시옵소서. 아버지, 저희는 누구와 더불어 태어났으며, 누구와 더불어 살아가며, 누구와 더불어 죽을 것입니까? 아버지와 더불어 나지 못한 인간들이었으며, 아버지와 더불어 살지 못하는 인간들이오며, 아버지와 더불어 죽지 못할 인간들이옵니다. 그런, 그런 저희들에게 아버지와 더불어 살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셨사오니, 그 아버지의 은사에 저희는 천만번 감사를 드려야 되겠습니다. 아버지 앞에 이 몸을 생축의 제물로 몽땅 바쳐도 부족하다는 사실을 발견하옵고, 아버지 앞에 내놓기에 더러운 저희의 모습들임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되옵니다.
그러기에 저희는 이 몸을 아버지 앞에 바치기에 부끄러워 가리고 덮으며, 이 모습을 어떻게 감출 것인가를 염려하여 마음 졸이며 나타나야 할 인간 개체 개체들이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저희들은 아버지 앞에 너무나 도도했습니다. 아버지 앞에 너무나 교만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요 딸이오니, 이 모습을 받아 달라고 직접 통고할 수 있는 담대한 모습을 갖고 나타난 저희들이었사옵니다.
아버지, 이런 저희를 긍휼히 보아 주시옵소서. 저희들은 죄악세계에서 태어난 죄인으로서 쓰러질 수밖에 없는 무리였사옵니다. 그러나 아버지와 동거할 수 있는 구원의 손길를 펴 주신 연고로, 아버지와 동거할 수 있는 은사를 가지고 이 시간 아버지의 거룩한 성전에 모였사옵니다.
아버님이여, 아버님이 가셔야 할 길은 개인과 가정, 민족과 국가, 또 세계를 통하여 가야 되는 나그네의 길이옵니다. 아버지의 그 길을 지킬 수 있고, 그 길을 걸으시는 아버지 앞에 효자 효녀가 될 수 있는 참다운 자식이 여기에 있어야 되겠사오니, 아버님이여, 굽어살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님이 가시는 가정의 십자가의 길을 저희들이 따라가야 되겠고, 종족의 십자가의 길을 저희들이 따라가야 되겠고, 민족의 십자가의 길을 저희들이 따라가야 되겠습니다. 국가를 거쳐 세계, 나아가서는 천주복귀의 엄청난 과제를 짊어진 그 십자가의 노정을 저희들이 따라가야 되겠사옵니다.
그 길을 가는 데에 있어 아버님을 앞세우고 가서는 안 되겠습니다. 아버지의 앞에 서서 아버님 앞에 놓인 십자가를 제가 대신 지고 가겠다고 할 수 있는 하늘의 효자와 충신의 모습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러한 모습이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그래야만 되는 것을 저희들은 배웠사오니 저희들로 하여금 그럴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님이여! 대한민국을 당신이 사랑하시옵니까? 이 나라를 품에 품고자 하시는 당신의 뜻이 아직까지 이 나라에 남아 있사옵니까? 이 나라, 이 민족을 위한 그 길을 또다시 당신 홀로 가지 않으면 안 될 당신의 입장은 너무나 비참한 입장이옵니다.
이제 저희들이, 아버지와 동역하고 동반하는 자가 되어서 그 길을 가려 나가야 되겠습니다. 저희들이 가시밭길을 가다가 상처투성이가 되더라도 이 길을 나가야 한다는 책임을 느낄 수 있는 하늘의 딸이 되고, 아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1960년대를 보내면서 새로운 1970년대를 향하여 나가는 이때이옵니다. 이때는 제2차 7년노정에 있어 중요한 계기가 되어야 할 때이오니, 1960년대를 넘어가는 이 시점에서 저희들 자신을 다시 명시하여 하늘땅 앞에 올바른 자세를 갖추고, 아버지 앞에 스스로를 회개하여 정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렇게 하여 새로운 1970년대를 맞을 수 있게 당신의 자녀들을 축복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슬픔으로 엮어져 온 역사를 기쁨으로 맞을 수 없는 저희 자신임을 알았사옵니다. 그러기에 저희들 이번 이 기간을 중심삼아 가지고 이 민족을 위하여 다시 싸우지 않으면 안 되겠사오니, 저희들의 이러한 책임자적인 행로를 가고자 하는 마음과 뜻을 위하여 싸우고자 하는 마음이 거룩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뜻을 위하여 염려하면서 마음을 졸이는 자들이 있사옵고, 하늘을 중심삼고 눈물 흘리며 기도하는 자들이 있사오니, 그들 위에 천 배 만 배의 복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그 누구에게도 통고하실 수 없는 아버지의 불쌍한 처지를 알아 가지고 통곡하는 자녀들이 있으면, 아버지, 그들을 기억하시어서 당신의 뼈살과 연결될 수 있는 자녀의 명분을 갖추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제 저희들은 벌거숭이로 아버지 앞에 나왔사옵니다. 저희들은 과거에 원하였던 모든 것을 가진다 하더라도 그것들은 세상에서 흘러가는 것임을 알았사오며, 이 뜻을 안 저희들은 그것들로는 살 수 없음을 또한 알았사옵니다.
이제 저희에게 가장 귀한 것은 아버지 가시는 그 길을 아버지와 더불어 가는 것이요, 아버지 사시는 생활무대에서 사는 것이요, 아버지 가시는 그 길에서 죽는 것이옵니다. 이것이 저희 일생의 목적이요, 인간으로서의 최대의 행복이라는 것을 확실히 아는 당신의 자녀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제 저희의 마음은 완전히 공(空)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공으로 아버지 앞에 완전히 바쳐 드려야 되겠습니다. 저희 자체의 주관, 저희 자체의 일념 전체를 일소해 버리고, 아버지의 관념과 사상만 저희의 마음 가운데 주입되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아버지로 말미암아 빚어진 마음이 되어서 그 마음이 몸을 주관할 수 있는 새로운 모습으로서 아버지 앞에서 다시 한번 출발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여,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날은 거룩한 날이옵니다. 이 나라를 찾아오신 아버지를 이날 저희들이 어떻게 모실까 생각하니 부끄럽사옵니다. 이제 아버지를 모시고 세계를 향하여 가야 할 길을 저희들이 개척해야 됨을 생각하게 되옵니다.
지금 이때 추수할 하늘의 곡식은 많은데 추수할 하늘의 역군이 없다는 사실을 저희들은 느끼지 않을 수 없사오니, 아버지여, 부족한 저희들을 다시 모으시어 그 역군의 사명을 대행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부족한 저희들에게 능력을 가하시옵고, 당신의 사랑의 심정을 가하시옵소서. 그리하여 민족을 사랑하지 않고는, 민족을 위해서 싸우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하늘의 용사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 이 시간 전국에서 이날을 아버지 앞에 경배하는 거룩한 날로 맞기 위해 모인 당신의 자녀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진정한 의미에서 당신 앞에 경배드릴 수 있는 이날 이 아침이 되게 허락하여 주옵길,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세계 도처에 널려서 이 한국을 바라보며, 이 청파동교회를 소망하며 기도하고 있는 수많은 자녀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외로운 길을 가는 개척자의 행로는 과연 비참한 것이옵니다.
이방의 땅에 가서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환경에 몰리면서 눈물짓는 제단이 있으면 거기에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외로운 환경이 있으면, 그 옛날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들이 외로운 자리에 있을 때 그들을 위로하시던 아버지의 그 은사를 거기에 재현시켜 진정 당신이 같이하심을 증거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보람 있는 생애의 가치를 그 자리에서 찾게 하시어 아버지 앞에 감사와 영광과 찬양을 돌려드릴 수 있는 당신의 자녀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또한 그들이 사망세계의 새로운 등대가 되고, 이 흑암세계의 광명한 빛이 되게 하시옵소서. 통일의 깃발을 드높이어 그 민족 앞에,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 마음 앞에 그 깃발을 꽂아 줄 수 있게 허락하여 주옵길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그들이 고대하고 바라는 싸움터에서 승리, 또 승리만이 가중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여, 저희들 이해에 있어서 최후의 결정을 짓고 가야 할 길을 앞에 놓고 여기에 모였사오니, 저희들 앞에 분부하여 주시옵소서. 저희에게 귀한 것이 무엇이옵니까? 그것은 내 아들과 딸이 아니옵니다. 아들과 딸은 두고 가야 되겠사옵니다. 갈 때는 아버지 앞에 저희 자신만이 찾아가야 되겠습니다.
영원히 같이 살 수 있는 분이 아버지요, 영원히 같이할 수 있는 것이 아버지의 뜻인 것을 알게 허락하여 주옵소서. 뜻 앞에 보탬이 될 수 있는 내 개체, 뜻 앞에 보탬이 될 수 있는 내 가정, 뜻 앞에 보탬이 될 수 있는 내 교회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확실히 깨닫는 당신의 자녀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사망의 모든 세력이 저희를 엿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옛날 에덴 동산에서 가인을 대하여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앞에 엎드린다고 하신 아버지의 경계의 그 말씀이 새로운 출발을 앞둔 저희 앞에 다시 한번 놓여진다는 사실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하늘의 사랑의 품에서 축복을 받고, 보호를 받고, 강하고 담대하라는 분부를 받을 수 있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날 온전히 아버지의 마음을, 아버지의 사정을, 아버지의 소원을, 아버지의 행로를 저희들이 가려 가지고 그 모든 것을 상속받을 수 있고 하늘의 특별한 분부를 받고 새로이 다짐할 수 있는 자녀들 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이해의 남은 날들 위에 축복하여 주옵고, 새로운 역사의 인연을 지켜나가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새로이 임하는 70년대에는 기쁨으로 아버지 앞에 더더욱 지극한 정성의 효자 효녀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이날, 이 시간도 온전히 아버지께서 주관하여 주시옵기를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사옵나이다. 아멘.
아버님, 4천년 동안 수고하여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단을 편성한 뜻을 수많은 민족들은 알았지만, 인연된 그 아들이 찾아오는 길은 그 누구도 몰랐나이다. 이렇듯 인간들이 역사과정에 있어서 번번이 지내 놓고야 눈물을 흘리고,지내 놓고야 회개하고, 지내 놓고야 통탄하면서 다시 그 길을 더듬어 가는 슬픈 역도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었던가를 생각할 때에, 그것은 인간들이 타락의 후손으로 태어난 연고로 그렇게 하지 않으면 복귀되어 나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이 땅 위에 오셔서 30여년 동안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심정을 갖고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 교단을 바라보시던 예수님의 마음과 그 예수님의 마음을 더듬으시던 아버지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가? 생각해 보니 과연 예수님은 불쌍한 분이었습니다. 이 땅 위의 그 누구한테도 그의 깊은 사정을 말할 수 없었습니다.
가야 할 십자가의 길, 그 탕감복귀의 노정을 어떻게 가야 할 것인가를 알고 있으되, 그 누구한테도 말할 수 없었습니다. 내가 땅에 불을 던지러 왔노니 그 불이 이미 붙었으면 좋을 뻔하였다고 탄식하신 예수님의 깊은 사연을 그 누가 알았습니까? 수많은 종파를 가진 기독교에도 그의 깊은 마음을 헤아린 자 없었습니다.
오늘날 불쌍한 이 한국을 아버지께서 기억하여 주신 것을 감사드리옵니다. 100년도 못 되는 기독교의 역사를 지닌 이 한국에 하늘의 심정과 내정이 어떠하다는 사실을 세계를 대신하여 알 수 있는 새로운 길을 모색해 주시기 위하여, 아버지께서는 저희가 꿈에도 상상치 못할 때에 핍박의 길을 더듬어 오셨습니다. 외로운 발걸음으로 삼천리 반도를 더듬어 오신 아버지의 숨은 역사가 있었음을 알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아버지께서는 이 민족이 새로운 중흥의 세계를 향하여 나갈 수 있게 미리미리 준비된 역사의 인연을 갖추어 나오셨던 것을 알게 될 때에, 불쌍한 아버지인 것을 다시 한번 저희들이 기억해야 되겠습니다. 그 누구도 생각하지 않을 때에 아버님은 생각하셨고, 그 누구도 알지 못 할 때에 아버님은 아셨사옵니다. 알 뿐만 아니라 그것을 실천하셨사옵니다. 이 민족이 한때를 맞을 수 있는 첨단에 세우기 위해서 수난의 노정에 세우시면서도 버리지 않으신 아버지의 긍휼의 사랑을 저희들은 고맙게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싸움에 지쳐 이 땅 위에서 낙망과 절망 가운데로 사라져야 할 이 민족을 하늘이 거두어 주신 것을 감사하옵니다. 이제 저희들은 하늘의 새로운 중흥의 기회가 이 강토 위에 찾아온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버지의 숨은 역사가 이 민족 위에 같이한 인연을 알게 될 때에, 저희들은 이 민족이 불쌍한 민족이 아니라 세계의 어떤 민족보다도 귀한 민족인 것을 알게 되옵니다.
이 민족의 모습이 보기에는 상처투성이요, 이 강토가 보기에는 황폐한 삼천리 강토로되, 이 강토와 이 민족 가운데 하늘이 스며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저희들은 이 민족을 사랑해야 되겠습니다. 이 삼천리 강토를 붙들고 아버지의 거룩한 제단으로 몽땅 바쳐 드리겠다고 피눈물을 뿌려 거룩히 성별할 수 있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그런 아들딸이 현재의 기독교의 신자 가운데에는 없습니다. 다른 어떠한 종교를 갖고 있는 신앙자 가운데에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일을 책임져야 할 무리가 있어야 되겠기에 아버지께서는 저희들을 수난의 노정으로 몰아내셨습니다. 저희들을 피눈물 뿌리는 그 길로 몰아내셔야 할 아버지의 사정이 있음을 알고 있사옵니다. 이것이 하늘의 축복이요, 하늘의 거룩한 은사임을 알아 몸 굽혀 천번 만번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저희 자신들인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는 저희들을 붙들고 얼마나 사정하셨습니가? 불쌍한 저희들을 세우기에 얼마나 수고하셨습니까? 감히 말로써 되풀이할 수 없고, 더듬어 가지고 반성할 수도 없는 저희들의 부끄러운 역사를 아버지께서는 홀로 책임져 나오셨사옵니다.
또한 아버지께서 저희를 죽은 자리에서 구하기 위해 얼마나 수고하셨다는 사실을 여기에 모인 당신의 자녀들 중에는 체험한 사람도 있고, 알고 있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 체험과 아는 것을 중심삼고 아버지 앞에 얼마나 감사를 드렸습니까? 몸과 마음이 땅에 붙도록, 온 전신이 땅에 녹아지도록 아버지 앞에 감사드린 아들딸이 몇 명이나 되옵니까? 감사할 줄 모르는 저희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감사해야 되겠습니다. 아버지 앞에 고마운 것을 알지 못한 저희였으나 이젠 정말 고마와해야 되겠습니다.
저희가 이 땅 위에 태어나기 전부터 저희의 선조와 인연을 맺고 찾아오신 하늘의 그 인연을 중심삼고 볼 때, 고마우신 하늘, 거룩하신 하늘, 귀하신 하늘, 자랑스러운 하늘이옵니다. 하오니 저희가 갖추어 나가야 할 모든 것을 갖추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활개를 활짝 펴고 하늘을 찬양할 수 있고, 대공(大空)을 향하여 감사하며 몸부림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자기 자신의 모든 것을 잊어버리는 자리, 또는 자신이 쓰러지는 자리에 봉착하더라도 있는 힘을 다하여 아버님께 감사할 줄 아는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이 나라 이 민족을 저희들은 지켜 나가야 되겠습니다. 저희들이 파수꾼이 되어 이 나라 이 백성을 지켜야 되겠습니다. 현재 이 나라 이 민족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없음을 알고 있기에 저희들이 피눈물 흘릴 것을 각오하고 이 나라를 지키겠다고 몸부림쳐 왔고, 이 민족을 세계적인 민족으로 만들겠다고 선두에 서서 외쳐 왔습니다. 그러니 이 일이 거짓으로 낙인 찍혀서는 안 되겠습니다. 거룩한 하늘의 일이 선으로 출발했지만 결과가 악으로 맺어지게 될 때에 하늘 가는 길은 다 그렇다고 사탄이 참소했던 사실이 얼마나 많았사옵니까? 그것을 저희들이 알고 있기 때문에 오늘 통일의 자녀들이 걸어온 길도 한낱 지나가는 사적인 사건으로 남겨져서는 안 될 것을 확실히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여기에는 하늘을 부응시켜야 되겠습니다. 하늘을 제기시켜야 되겠습니다. 하늘의 새로운 역사를 창건해야 되겠사오니 저희들로 하여금 그럴 수 있는 아들딸로서의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아버지의 거룩한 승리의 동산을 향하여 달려갈 줄 아는 하늘의 정병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이제 저희들은 이 민족을 사랑하고, 이 삼천리 반도를 방어해야 되겠습니다. 내 몸이 포탄이 되고 내 몸이 토성이 되어, 이것을 지키고 보호해야 할 책임을 느낄 줄 아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고, 그런 통일교회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이 민족을 잃어버린 통일교회를 원치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나라를 잃어버린 통일교회가 아버지의 뜻이 아닌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하오니 저희들은 이 나라와 이 민족을 위하여 생명을 바쳐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 나가야 되겠습니다.
아버지, 저희들은 겨울이면 추운 줄을 압니다. 여름이면 더운 줄을 압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뜻이 추워서는 안 될 것이고, 아버지의 뜻이 더워서는 안 되겠습니다. 저희들이 그 추위와 더위를 가로막는 평화의 벽이 되고 하늘 앞에 놓여진 모든 고통과 시련 곡절을 막아낼 수 있는 하늘의 방어진지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부탁하고 원하옵니다.
이제 저희들, 벌거숭이로 아버지 앞에 나타나겠습니다. 하오니 더듬어 찾아오신 아버지의 마음 앞에 긍휼의 자식으로서 품길 수 있고, 아버지께서 진정 사랑하는 나의 아들과 딸이라고 품어 주실 있는 그런 아들딸의 모습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에게서 사적인 일체를 제거시켜 버리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저희는 어린아이로 돌아가야만 되겠습니다. 어머니의 얼굴을 대해서 반가와하는 어린아이의 순수한 심정, 생명력을 보급받을 수 있는 그 어머니의 품을 찾으려 하는 어린아이의 심정을 가지고 아버지와 나는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심정의 인연을 이 시간 다시 한번 체휼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사탄에게서 물려받은 죄악의 허물이, 혹은 죄악의 쓴 뿌리가 저희의 일신에 남아 있으면, 이것을 정복할 수 있고 이것을 제거시킬 수 있는 직접적인 주관의 역사가, 아버지, 이 자리에 나타나게 허락하여 주옵길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이 시간 잠깐 동안 말씀을 전하겠사오니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전하는 데는 무엇을 전하오리까 당신의 슬펐던 사정을 전하오리까? 당신의 외로운 사정을 전하오리까? 당신이 기뻐하고자 했던 것을 전하오리까? 무엇을 전하든 그것을 전하기 전에 이들이 체휼하게 하시고, 마음에 감돌게 허락하여 주옵길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남아진 사명을 앞에 놓고 있는 저희들이옵니다. 새로운 제단을 꾸며 놓고 먼 자리에서 아버지를 부를 것이 아니라 가까운 자리에서 아버지를 부르며 아버지의 옷깃을 부여잡고 사정할 수 있는 아들딸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아버지의 목을 안고 서로 비비면서 아버지의 슬펐던 피살의 사정을 놓고 통곡할 수 있는 자녀가 되기 위해서 이 시간 모였사오니, 아버지 앞에 승락받는 자녀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며, 남아진 시간 위에 당신의 영광이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전국에 있는 당신의 자녀들과 세계에 널려 있는 당신의 자녀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영계에 있는 수많은 선조의 애혼들이 저희들을 통하여 탕감, 해원성사하기를 원하고 있사오니, 그들이 복귀해 나갈 수 있도록 저희들이 선의 실적을 쌓을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의 통일의 세계를 향하여 나가는 데 있어서, 하늘이 세운 통일의 종교를 통하여 아버지의 기쁨의 뜻이 이 땅 위에 나타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참부모의성호 받들어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오늘 드리려 하는 말씀의 제목은 `추수의 주인'입니다. 이러한 제목으로 잠깐 동안 말씀드리겠습니다.
여기 여러 사람이 모여 앉아 있는데, 어떤 존재든지 반드시 생겨난 동기가 있습니다. 그 동기의 내용을 벗어난 현실의 존재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결과의 존재인 우리는 반드시 동기와 직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두고 볼 때도 여러분의 모습을 보고 그 부모의 모습이 어떨 것이며, 여러분의 체격을 보고 그 부모의 체격이 어떨 것이라는 것을 역력히 관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개인이 그러하듯이 이 결과 세계가 비참한 결과의 세계이기 때문에, 이 원인되는 세계 역시 비참한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지금 이 세계가 우리가 그리는 평화의 곳이 못 되고 행복의 기지가 못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결과의 세계임을 인정할 때 여기에는 반드시 동기가 있을 것입니다. 어떤 동기와 출발의 기점을 벗어난 결과는 있을 수 없기에 반드시 그 동기도 그런 비참한 내용을 지녔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상식으로도 생각을 할 수 있는 간단한 문제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 자체를 두고 보나, 가정을 두고 보나, 세계를 두고 보나 이 결과가 그릇된 것임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 시조의 출발이 행복을 노래할 수 있는 출발이 아니요, 이상에 잠겨 모든 만물 앞에 영광의 자세를 그리게 할 수 있는 중심적인 존재로서의 출발이 못 되었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종교에서 말하는 타락한 인류의 시조를 추구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류의 근본이 될 수 있는 동기를 추구해 올라가면 인류의 시조가 있을 것입니다. 성경을 중심삼고 말하면 아담과 해와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아담과 해와도 결과의 존재이기 때문에 그 이상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절대자의 존재를 인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은 만물의 모든 주관권을 갖추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작용이라든가, 여러분의 의식기관을 두고 보더라도 인간은 미묘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관찰하는 능력을 한 방향으로 발전시키면 세상 끝까지도 관찰할 수 있는 주체적인 존재가 우리 인간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러한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권내에 미쳐 질 수 있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리의 생각으로는 규명할 수 없는, 어떠한 기준도 세울 수 없는 그런 존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을 추구해 가면 절대자라는 관념은 자동적으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천지창조의 내용을 중심삼고 볼 때도 우리가 창조되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창조주 또한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 시조가 오늘날과 같은 이런 결과를 빚어 낼 수 있는 동기가 되었다 할진대, 그 인류 시조의 기원이 될 수 있는 하나님은 어떤 분일 것이냐? 오늘날과 같이 불완전하고, 개척해야 하고, 시정해야 할 요건들을 가진 이 세계를 지으신 분이 과연 절대자가 될 수 있겠느냐 그럴 수는 없습니다.
우리 인간의 몸의 구조를 두고 보면 이것은 신비의 왕국입니다. 어떠한 존재보다도 `신비' 그 자체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모든 신비의 요소들을 연결시켜 가지고 인간이라는 하나의 생명체를 지으신 절대자가 있다면 그는 무한한 능력의 주인공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분이 모든 존재의 원천인데도 불구하고 그릇될 수 있겠느냐? 만약 그분이 그릇될 수 있다면, 인간 세상에는 이상이니 행복이니 희망이니 평화니 하는 것들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 것들은 한갖 꿈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릇될 수 있는 것으로서 시작되었고, 그것이 결과가 되어 그것으로서 끝나게 된다면 하늘이 없다는 결론은 자동적으로 나오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마음의 동향은 불완전한 기원을 넘어 완전한 기원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역사의 환경을 넘어서고, 시대의 억센 물결을 넘어서 가지고 지금까지 우리 인간의 마음속에서 약동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힘의 자극과 힘의 원천이 남아 있는 사실을 볼 때에, 그 힘의 주체 될 수 있는 본연의 근거지, 혹은 본체, 혹은 원인적인 그 존재는 절대적인 존재가 아닐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그러한 마음의 방향을 통해서 언제나 새로운 것, 언제나 이상적인 것, 언제나 평화스럽고 행복스러운 것을 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또 다른 결과의 내용을 추구하게 되는 일은 어떻게 해서 있게 되었느냐? 그러한 동기의 기원이 오늘 우리 인간과 직접적인 관계를 못맺고, 우리의 생활 환경이라든가 세계적 환경에서는 관계를 못 맺었지만, 우리의 마음 깊은 골짜기에서는 인연을 맺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극을 일으켜서 새로운 역사의 시대, 새로운 문화의 시대를 발전시켜 나왔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우리들이 추구해야 할 세계는 하나의 세계입니다. 그 세계와 인류는 현세계 이상의 세계, 현인류 이상의 인류가 되어야 합니다. 그 세계를 이루는 하나의 민족은 이제까지 있었던 수많은 민족이 규합해 가지고 이룬 하나의 민족 이상의 민족이 되어야 됩니다. 그러니 수많은 주권을 대신할 수 있는 하나의 주권, 역사과정에 나타났던 수많은 주권을 대신할 수 있는 그 이상의 주권이 나와야 합니다. 수많은 국민이 자기의 국가를 사랑했던 그 이상의 사랑의 마음으로 세계를 사랑할 수 있는 그런 국민이 나와야 합니다. 인간들은 그러한 것들을 추구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럴 수 있는 동기의 내용이 오늘날 우리의 마음 바탕에서 아직까지 사라지지 않고 내일을 향하게 하는 자극적인 동기로서 제시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사실은 어디에서 근거가 된 것이냐? 그럴 수 있게 하는 모체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힘은 반드시 주체와 대상이 주고 받는 데서 나옵니다. 여러분이 느끼는 모든 자극적인 감각도 여러분 혼자서 느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반드시 대상의 요건을 통해서 느낄 수 있습니다. 대상의 힘의 작용에 의해서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작용은 곧 힘인데, 힘이라는 것은 주체와 대상이 없어 가지고는 생길 수 없습니다.
우리 인간의 양심의 작용, 즉 내일의 희망을 위하여 촉구하고 내일을 희망의 무대로 삼고 더더욱 가치 있는 인격을 추구하게 되는 그러한 모든 힘의 작용은 어디서 나오느냐? 반드시 주체와 대상의 인연이 있는 곳에서 나옵니다. 그렇지 않고는 그런 힘의 작용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화학작용을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주체와 대상의 요소가 각각 갖추어지지 않으면 절대로 작용하지 않습니다. 손해나는 데서는 작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절대 손해나는 작용은 안 합니다.
여러분이 통일교회의 이 자리를 찾아올 때도 손해를 보기 위해서 왔느냐 하면 절대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주체와 대상의 관계를 맺어 가지고 자신에게 플러스될 수 있는 그 무엇을 찾아왔을 것입니다. 물리나 화학의 작용을 보더라도 손해나기 위해서 작용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에, 모든 존재는 반드시 자기에게 보탬이 될 수 있는, 더더욱 귀한 가치를 갖는, 더더욱 빛날 수 있는 자리를 추구하는 작용을 하게 되어 있지, 자기 자체가 손해를 보기 위한 작용은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명동에 간다 할 때, `나는 오늘 몇십 원 손해보러 명동으로 간다' 할 사람 있어요? 없을 것입니다. 모든 존재가 추구하는 그 목적은 반드시 주체와 대상의 관계를 중심삼아 가지고 거기에 플러스될 수 있는 요건을 찾아 나서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들이 마음 작용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생활하고 있는 이세계의 실상이 그러하거늘, 인간의 마음 세계에서 작용하는 그 자체도 반드시 주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주체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있다는 겁니다. 그 힘이 작용을 하는 데는 혼자서 못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한 개체에 있어서도 주체와 대상이 주고받는 것입니다. 주체와 대상이 주고받게 되면 거기에는 기쁨이 있습니다. 또 행복이 오게 되고, 사랑이 싹트고, 희망이 싹틉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의 마음 작용을 추구해 보면 거기에는 반드시 마음의 본체가 되는 존재가 있을 것입니다. 결과적인 내 자신은 근원적인 존재를 초월해서는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모든 존재의 근원이 될 수 있는 하나의 완전한 플러스적 형태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존재는 어떤 존재인가? 그 존재의 이름은 아무래도 좋습니다. 그러나 그 존재는 절대적인 주체요, 그 누구도 당할 수 없는 최고의 존재요, 상대적 요건을 불허하는 중심적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오늘보다도 내일이 더 선하고, 더 행복하기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더더욱 귀한 결과를 추구한다는 것이요, 더더욱 귀한 가치의 내용을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추구하는 끝은 무엇이냐? 싸우는 세상일 것이냐?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천지를 창조한 절대자, 절대적인 그 주인공이 요구하는 이 세계의 종말은 어떠한 것이냐? 하나의 주권국가, 하나의 국민성을 지닐 수 있는 세계 인류, 하나의 정원, 하나의 주권의 터전이 될 수 있는 그런 세계, 그런 지구성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국가를 중심삼고 서로 분립되어 가지고 싸워 왔지만, 결국에는 하나의 세계를 향하여 발전해 나오는 것입니다.
발전하는 데는 혼자서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새로운 이상 세계를 전개하는 것도 인간 혼자서는 할 수 없습니다. 대상적인 존재 자체로서는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주체의 동기의 인연을 여기에 가미해 가지고서야 할 수 있습니다. 인간 자신들은 모르지만 지금 하나의 세계를 향하여 나가는 거기에는 주체의 힘이 부가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그 부가되어 있는 주체의 가치가 어떻다는 것을 알고 나서 그 대상의 가치가 어떻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인간은 비로소 수확된 결실이 어떤 것인가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서부터 인간의 가치는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만약 절대자가 있다면 그 절대자가 천지만물을 창조할 때에 슬픈 마음으로 창조했겠느냐? 아닙니다. 기쁜 마음으로 창조했다는 것입니다. 창조되어 나가는 과정을 보면서 절대자이신 하나님은 기뻐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얼마나 기뻐했을 것이냐? 얼마나 좋아했을 것이냐? 그리고 얼마만한 가치로서 모든 것을 만들었겠느냐? 하나님이 용인하신 그런 가치의 내용을 지금까지 인간들은 몰랐습니다. 모를 수밖에 없는 것이, 지금까지 인간들은 하나님을 찾아 나가는 과정에 있기 때문에 그 가치를 규명하고, 그 가치의 정의를 내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할 때에 진정한 기쁨으로 지었다면, 그 인간을 대해서 얼마만한 가치의 내용을 부여했으며 얼마만한 기쁨의 대상으로 지었겠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어떤 존재로 만들려고 했을 것이냐? 우리 인간의 마음 작용을 중심삼고 보면, 어느 누구의 마음이나 다 최고의 가치를 추구합니다. 전부다 세계에서 제일 가는 존재가 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못난 여자들이라도 전부 다 세계에서 제일 가는 아내가 되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요, 안 그래요?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는 사람은 전부 가짜입니다. 남자들도 그렇습니다. 자기 모양은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마음만은 전부 다 세계에서 제일이 되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되고 싶어하는 것이 거짓말이냐? 사실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어디서 나온 것이냐? 근거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근거는 우리 인간을 기만하기 위해서 생겨난 것이냐? 아니라는 것입니다. 정당한 것입니다. 그러니 앞으로 인간이 수확의 결실로 나타난 때 그 모습은 어떤 모습일 것이냐? 이것을 단 한마디로 결론을 내리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기뻐할 수 있는 본연의 모습입니다. 통일교회의 원리로 말하면, 창조이상세계로 복귀된 모습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려고 아담과 해와를 지으셨는데, 그들을 어떠한 위치에 두고 기뻐하시려고 했느냐? 이것이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무슨 물건같이 가지고 놀기 위해서 지었겠느냐? 우리 인간의 마음은 최고를 바랍니다. 이렇게 최고의 가치를 추구하는 인간의 본성을 두고 볼 때에, 과연 어떤 자리에 갖다 놓아야 인간이 만족하겠느냐? 절대자가 계신다면 그 절대자의 제일 귀한 자리에 갖다 놓아야 됩니다. 그 이상의 자리는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동시에 사람도 원하는 자리입니다. 거기에는 둘이 없습니다. 원인과 결과가 그 자리에서 일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자리는 어떤 자리일 것이냐? 돈이 있는 자리이냐?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돈보다 귀하다는 사실은 대체로 다 알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서 종교에서는 막연하나마 사랑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사랑이시다'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랑은 무슨 사랑이냐? 오늘날 세계주의를 부르짖고, 박애사상을 부르짖고 있는데, `아! 그것도 사랑 아니냐'고 하겠지만 그런 것은 너무나 데데한 사랑입니다.
그렇지만, 플러스 전기와 마이너스 전기가 맞부딪쳐 가지고 전기불이 오듯이, 번개불이 번쩍이듯이 사랑이 폭발할 수 있는 그런 자리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 자리가 어디일 것이냐? 하나님도 기뻐하시기 위해서는 최고의 자리를 찾아 올라가는데, 우리 인간들은 어떤 자리를 찾아가야 되겠느냐? 천국 백성의 자리냐?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천국 백성으로 사는 것은 시시하다는 겁니다.
오늘날 기독교 신자들의 신앙관을 보면, 그것은 천국 가면 제일이니 예수 믿고 천국 가자고 하는 간단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천국 가는 데는 별의별 것이 다 있을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사정을 두고 보더라도 별의별 것이 다 있지 않습니까?
하늘이 찾아가는 사랑의 실체, 최고의 동기가 되고 최고의 결과가 될 수 있는 이것이 어디에서 일치가 되겠느냐? 합해지기는 합해져야 할 것인데, 어느 자리에서 합해지겠느냐? 바로 주체와 대상의 자리에서 하나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체와 대상의 두 목적이 일치되어야만 합니다. 여기 플러스와 마이너스가 있으면, 이 두 목적이 일치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두 목적이 영원히 일치될 수 있는, 사랑의 꽃으로 필 수 있는 그 자리가 무엇이냐? 하나님도 인간을 통해서 그것을 찾아 나오신 것입니다. 이것은 나무에 비교하면 열매에 해당하기 때문에 잎이니 가지니 줄기니 하는 것은 다 필요없습니다. 그러면 그 하나의 열매, 그 하나의 결실은 무엇을 통해서 완전히 거둘 수 있겠느냐? 그것이 무엇이냐? 통일교인들은 잘 알 겁니다. 그게 뭐예요? 한번 생각해 보라구요.
여러분의 눈을 놓고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눈은 고통을 느끼지 않지요? 초점이 맞았으니까 그런 거예요. 그러나 이 초점이 어긋나면 어때요? 고통을 느끼게 되지요? 또, 여러분 코도 한 쪽이 막히면 어때요? 감기 시초 때 어때요? 고통이 오는 겁니다. 한 쪽만 막혀도 씩씩거리는 겁니다. 그러다 주체와 대상의 두 관계에서도 공동 목적의 일치점에 도달하지 못하면 거기에는 질식이 벌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인간에게 공동의 동기와 결과가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할 것이며 그런 자리가 어디일 것이냐? 이런 것을 추구하여 최고의 명사를 찾아보니 부자관계(父子關係)라는 말 이외에는 없더라는 것입니다. 부자관계 이외의 말이 없어요. 그 이상의 말이 있어요? 아이들에게 `너는 집안식구 중에서 누가 제일 좋으니?' 하면, `우리 엄마와 아빠예요' 그럽니다. 그것밖에 더 있겠어요? 그렇기 때문에 하늘을 추구하는 종교인들이 하나님을 대하여 아버지라 하는 것이며, 그렇게 종교를 가지고 하늘을 추구하는 종교인들은 기필코 하나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체와 대상의 관계로서 하나님이 아담과 해와를 지었는데, 짓는 데에는 사랑을 중심삼고 지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랑을 중심삼고 지은 그 결합점, 일치점이 어디냐? 동기와 결과는 반드시 하나의 맥박에 의해 움직여져야 됩니다. 그렇지 않아요? 심장에서 맥박을 규칙적으로 뛰게 해야지. 그렇지 않고 맥박이 고르지 못하면 잘못된 것입니다. 아픈 징조입니다.
여러분의 마음과 몸도 그래요. 마음이 몸을 중심삼고 `뚝' 하면 몸은 어떻습니까? 마음에게 `이놈아!' 하면서 반대하고 나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타락입니다. 그러니까 개조해야 된다는 겁니다. 마음이 `뚝' 하게 되면 몸도 `뚝' 하고, 마음이 `딱' 하게 되면 몸도 `딱' 하고, 마음이 `이리 가자' 하면 몸이 `응' 하고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해야 할 몸과 마음이 지금 두 패가 되어 싸우고 있습니다. 이것이 잘된 거예요, 못된 거예요? 못된 거예요. 망할 징조입니다. 타락의 보응이예요, 이렇게 마음과 몸의 관계가 틀어짐으로 말미암아 전체가 틀어지게 된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타락한 이 인류세계에서 지금까지 찾고 계신 것이 무엇이냐? 찾아야 할 것이 무엇이냐? 찾고 싶어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무엇이예요? 「자식입니다」 자식인데, 자식이라는 말에도 여러가지가 있지요? 친자식, 의붓자식, 남의 자식이 있습니다. 아버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의붓아버지, 남의 아버지, 친아버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이 세상의 부모가 참된 이름을 가진 부모가 되었느냐? 자식이 참된 이름을 가진 녀석이 되었느냐? 못 되었다는 것입니다. 참아들딸이 되었으면 하나님이 참 좋아하셨을 것입니다. 참아들딸이 되면 몸과 마음이 완전히 하나되는 거예요.
여러분이 통일교회에 처음 들어왔을 때에, 몸이 붕 떠 올라가는 것과 같은 체험들을 했을 것입니다. 체험들 했지요? 괜히 좋아요. 까닭 없이 좋다는 겁니다. 그거 왜 그런지 알아요? 여러분의 마음과 몸이 서로 주고 받을 수 있는 터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원리로 보면, 주체와 대상이 하나되면 거기에 더 큰 주체되신 하나님이 상대로 삼아 주고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고차적인 힘의 작용이 있기 때문에 그전에 느끼지 못하던 감정적, 감각적 작용이 강력히 오는 것입니다. 그 강력한 작용의 힘이 이상적인 힘이기 때문에 기쁨의 감정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저 막연한 것이 아닙니다. 전부 다 원리적인 것입니다. 원리적인 거예요.
이렇게 볼 때, 여러분 자신에게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라 할 수 있는 간판이 있어요? 그렇다는 신념을 가지고 동기의 내용을 완전히 입증할 수 있는 그 결과 자체로서 되어 있느냐는 겁니다. 그렇게 못 되어 있으니까 남의 자식입니다. 사탄의 자식이예요. 못 되어 있으니까 핏줄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잘못 태어났다는 겁니다. 잘못 태어났어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자체입니다.
이러한 개체를 두고 볼 때, 우리 인간은 하나님이 슬픔을 느끼는 자체가 아닐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원상 복귀해야 되는데, 복귀하는 데는 여러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그 조건이 무엇인가를 알아 가지고 세우지 않고는 복귀가 안 되기 때문에, 임자네들은 통일교회에 걸려 들어온 것입니다.알고 난 다음에는 갈 데가 없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하나님이 무엇을 하기 위해서 천지를 창조하셨느냐? 장난하기 위해서? 혹은, 어떤 놀이의 대상으로? 아닙니다. 수확할 수 있는 하나의 결실을 바라보고 창조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자신이 바라시는 최고의 결과, 최고의 결실체로 인간 시조 아담 해와를 지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담 해와가 과연 하나님의 본연의 마음 앞에 일치될 수 있는 결실체가 되었느냐 못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타락입니다.
오늘날 여러분 자신들이 그런 결실을 맺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느냐, 없느냐? 있다 하게 될 때 여러분은 희망의 아들딸이 될 수 있지만, 없다 하게 될 때는 절망의 아들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하나님은 이 인간 세상에 기쁨을 심지 못하셨느냐? 수확의 결실을 추구하셨으면서 왜 완전하고 불변한 실체로 거둘 수 있는 완전한 열매를 심지 못했느냐?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아담 해와가 완전한 결실이 되기 전에 죽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일에 아담과 해와가 하나님의 이상을 백 퍼센트 전개시켜 가지고 최후의 결실로 나타날 수 있는, 생명의 모체로 등장할 수 있는 그 자체가 되었더라면, 그들은 이 땅을 대신하고, 인류를 대신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 있는 대상이 되었을 것입니다. `온 천지여 내 행복함을 본받고, 내 기쁨을 따르라'고 주장할 수 있는 하나의 푯대가 되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인간들이 주장하는 행복의 요건으로 역사적인 주의 사상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인류 시조를 중심삼고 완전한 결실체로 나타난 것이 없습니다. 행복 중의 행복이요, 모든 가치 중의 가치라고 자랑할 수 있는 아담 해와가 되었더라면 그 세계는 행복으로 출발했을 것입니다. 그 세계는 희망의 고개를 넘지 않아도 될 세계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세계에 하나님의 사랑, 이상, 소망이 어디 있으며, 행복의 기원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것들을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기에 잃어버린 그것을 재현하여 복귀하자는 것입니다. 즉, 창조이상을 복귀하자는 것입니다.
천지창조의 대과업을 중심삼고 볼 때, 하나님은 완전한 열매로 맺혀진 아담을 따 가지고 다시 심으려고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아담을 하나님의 사랑의 원동력을 주입시킨 결실로서 거두려 했는데 거두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그런 열매를 심었더라면 그와 같은 아들딸이 태어났을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나는 겁니다. 나지 말래도 나는 것입니다. 역사적 방향이 아무리 치켜 올라 가더라도 이 본질과 본성을 점령하여 헤쳐 놓을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혁명을 불허하는 그런 기반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혁명이 허용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본연의 세계를 다시 추구해 나가는 과정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과정에서는 더 좋을 수 있는 어떤 조건만 제시되면 옛것은 물러가고 새것이 등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가 발전 현상의 단계를 거쳐오는 것과 같이 보이는 겁니다. 이것은 복귀섭리 과정에서 불가피한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이 이 땅 위에 열매를 잘못 심은 것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창조이상을 중심삼고 심은 사람이 잘못 심어졌다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인데 왜 그랬느냐? 그런 하나님을 인간이 추앙할 것이 뭐 있어?' 할 수 있겠지만, 거기에는 `누가 그렇게 만들었느냐? 누가 잘못 심게 만들었느냐? 그렇게 만든 하나님의 원수가 누구냐?' 하는 문제가 발생하는 거예요. 이런 얘기는 그만두고 아무튼 인간은 그릇되게 심어졌다는 겁니다. 원인과 결과가 일치될 수 있는 이상적인 실존체로서 심어지지 못하고, 원인은 거룩하되 결과는 탄식과 비애의 운명을 벗어날 수 없는 결실로 심어졌습니다. 탄식의 결실입니다, 탄식의 결실.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해야 될 것이냐? 여기에서 우주적인 혁명을 일으켜 재창조를 해야 됩니다. 인간은 흙덩이만도 못한 것입니다. 아담 해와를 지으실 때의 흙과 물과 공기, 그 본체만도 못한 것입니다. 그러니 다시 지어야 합니다. 무자비하게 해부하고, 무자비하게 불살라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심적 변화로부터 몸적 변화를 일으키고, 생활적인 변혁이 일어나도록 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된 종교는 혁명의 주체세력을 갖고 나옵니다. 그 사회의 물결에 휩쓸려 가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와 대결해 가지고 혁명할 수 있는 주체 세력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다시 오마' 하시고 가셨습니다. 그것은 다시 와서 심판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 심판이 어떤 심판이냐 하면, 그릇된 것을 치는 것입니다. 그런 주체적인 권한을 갖고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그거 가능한 말입니다.
심어져야 할 것이 잘못 심어졌는데 하나님은 그것을 간섭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 누구로 말미암아 잘못 심어졌느냐? 사탄으로 말미암아 잘못 심어졌습니다. 그래서 그 옥토에 가라지와 피가 심어졌습니다. 알곡을 거둘 수 있는 벼가 심어져야 할 것인데, 가라지와 피가 심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하느냐? 뽑아 버려야 됩니다. 이 거짓 것이 지금 세계에 터를 잡고 요동하고 있으니 이것은 다 뽑아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러한 세계에 있어서 혁명의 왕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늘의 부름을 다시 받아 가지고, 하늘의 본연의 기준 앞에서 하늘의 뜻을 대신하는 아들딸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천지의 대주재 되는 군왕이시라면 그때의 여러분은 그분의 왕자 왕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럴거 아니예요? 그분의 천지의 주인이라면 왕 중의 왕이잖아요? 그러니 그분의 아들딸이 되면 왕자요, 공주가 되는 겁니다. 생기기는 이렇게 생겼어도 왕자님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 얼굴이 잘 생겼구만. 잘만 골인 하면 공주님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수 있는 길이 있기 때문에, 인간들은 자기도 모르게 그 길을 암중모색하여 나오는 것입니다. 마음은 더더욱 빛날 수 있는 그 곳으로, 더더욱 가치 있는 세계적인 존재로 등장하라고 재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잘못 심어진 그대로 흘러갈 것 같애요? 그냥 그대로 흘러가게될 것 같애요? 뜯어 고쳐야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 아느냐? 그것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노라. 사람이 그 아비와 어미와 딸이,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네 집안 식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세계의 정서적인 면을 전부 다 밟고 올라서서 혁명을 하려니까 제일 가까운 데서부터 대결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제일 가까운 것이 문제가 됩니다. 아버지와 어머니, 처자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심을 때에 무엇을 중심삼고 심었느냐? 무엇을 중심삼고 출발했느냐? 사랑을 중심으로 심지 않고 사랑을 부정했다는 것입니다. 어떤 총각이 그 동네의 아가씨를 짝사랑하고 있는데, 난데없이 다른 총각이 나타나서 그 아가씨를 사랑하게 되면 짝사랑하던 총각은 부정당하지요? 꼼짝없이 부정당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음란으로 인해서 타락했다는 통일교회의 원리를 들고 나오지 않더라도, 이런 사실들을 추구해 보면 그 문제의 답은 자동적으로 나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한 주체의 사랑의 인연을 파탄시킬 수 있는 단 하나의 것이 무엇이냐? 사랑 외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이 좋아할 수 있는 사랑의 출발이 아니고, 사탄이 좋아할 수 있는 사랑의 출발을 하였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좋아하는 사랑의 출발이 아니라 종새끼가 좋아하는 사랑의 출발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타락입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그 말을 고이고이 키워 가지고 그 나라의 왕후로 삼으려고 했는데, 다 자라기도 전에 머슴하고 짝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돼요? 미래의 왕후가 머슴한테 끌려가요? 안 끌려가요? 여기 여자들 대답해 봐요. 「끌려갑니다」 틀림없이 끌려갑니다. 머슴을 완전히 잡고 있었다면, 하나님과 완전히 하나되었다면 끌려간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겨났느냐? 어디를 통하여 생겨났느냐? 핏줄을 통하여 생겨났습니다. 이렇게 해서 6천년이 지나갔습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선조들도 오늘날 우리와 다름없이 이런 비탄의 운명 속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사라져 갔습니다. 그런 열매를 심고 거두고, 또 심고 거두어 온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수많은 국가가 되었고, 수많은 인류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인류 세계에 행복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나를 위주로 하여 이런 운명길을 개척하는 것이 오늘의 나의 인생입니다. 여기서의 `나'는 바로 몸뚱이입니다. 인간에게는 마음과 몸의 두 세계가 있습니다. 마음은 그래도 영원의 요소를 지니고 있는 연고로, 하나님의 본성의 터전이 될 수 있는 연고로 선한 세계를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자석에 쇠붙이가 끌려가듯이 마음은 절대적 주체자이신 하나님에게로 끌려갑니다. 그런데 원수의 핏줄을 받아 가지고 그와 혈통의 관계를 맺은 이 몸뚱이는 자꾸만 딴 곳으로 가려고 합니다.
이 둘 사이에서 신음하고 있는 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또한 이 골짜기를 어떻게 거쳐 나갈 것이냐 하는 것이 인생의 문제입니다. 역사상의 수많은 성인현철들도 이 고개를 타개하지 못하고 죽어갔습니다. 몸은 세상이 잡아 끌고 마음은 또 딴 세계가 잡아 끄는 그 싸움 가운데서 이 싸움을 종식시키지 못하고, 이 싸움터에서 태어나 먹고 자며 살다가 죽어가고 있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싸움을 어떻게 수습할 것이냐? 여기에서 오른쪽은 하늘편이요, 왼쪽은 사탄편입니다. 또 몸을 중심삼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사망의 길을 가는 것이니 사탄과 짝하는 사람이요, 마음을 중심삼고 사는 사람은 생명의 길을 가는 것이니 하늘과 짝하는 사람입니다. 두 갈래로 갈라지려는 이 싸움의 요소를 가지고 태어난 인류이기 때문에, 끝날이 가까워 오면 이 둘이 격돌하는 싸움이 벌어집니다. 그래서 지금 민주와 공산, 이 두 세계의 싸움이 휘몰아치고 있는 것입니다. 잘못 심어 놓은 결과가 세계적인 밭에서 열매맺은 것이니 그 이상 될 수 있겠어요? 다시 말하면 지금은 타락 인간 6천년 역사의 수확 기간입니다. 그때에 죄를 그렇게 심었으니 그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어디로 갈 것이냐? 갈래야 갈 데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젊은 사람들이 이러고 앉아 있습니다. 우리네 같은 사람은 시간이 없어서 똑딱하는 순간도 바쁘게 여기는데, 아침에 나갈 때에 이러고 앉아 있더니 오후 3시가 되어 돌아오는데 그때까지 그대로 버티고 앉아 있는 것입니다. 갈 데가 있어야지, 가 보아야 더 나쁘고 더 복잡하니, 차라리 단순한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불원한 장래에 그런 운명에 부딪치게 될지 모릅니다. 세상에서 잘났다고 뽐내는 사람들, 소위 지식층에 있다 하는 사람들 두고 보라는 것입니다. 일본 같은 나라만 해도 대학 교수가 자살한 사건이 있잖아요? 지금 공산당이 난동을 부려 가지고 도저히 그 나라와 민족을 수습할 길이 없으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그 길을 택했던 것입니다. 수습할 도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기말적인 현상을 어떻게 타개하고 넘어갈 것이냐? 타고 넘어갈 수 있는 발판이 없습니다. 그런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민주주의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공산주의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바라는 이상주의, 그것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찾아가기 위해 거쳐야 할 관문, 혹은 지팡이의 역할을 하는 것이 무슨 주의니 사상이니 하는 것이지 주의 사상 그 자체가 진리가 아닙니다. 주의나 사상 같은 것은 진리를 소개하기 위한 지팡이요, 다리입니다. 그 다리를 건너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리를 건너가서는 무엇을 하느냐? 영원한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은 자아를 찾아 가지고 나라를 주고도, 세계를 주고도, 이 천지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무한한 가치의 핵심체가 되어야 합니다. 거기에서 행복을 노래하며 살 수 있다면, 그 사람이 인간으로서 최고의 행복의 제단을 쌓은 최고의 결실체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전역사를 수확하는데 있어 최고의 결실체라는 것입니다.
지금 세계적으로 보면, 미국도 민주주의를 중심삼고 세계가 나아갈 길을 막아 놓고 있습니다. 소련도 공산주의를 중심삼고 세계가 나아갈 길을 막아 놓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무엇이 문제냐? 세계가 문제가 아니라 여러분 자신이 문제입니다.
이 세계가 이렇게 된 것은 동기가 모순되었기 때문이므로 이 문제의 해결점은 결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동기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시조의 출발의 기점이 어떻게 되었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어디로 출발했느냐? 처음부터 길을 잘못 들었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왜 처음부터 이런 일이 벌어졌느냐?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오늘의 통일교회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렇게 잘못 심어져 맺어진 결실이 지금 이 땅 위에 만연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세계의 주인은 과연 누구냐? 하나님이예요? 이 세계의 주인이 하나님이예요? 누구예요? 여러분이예요? 주인이 되어야 할 것은 사람들인데, 지금 사람들은 주인이 못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주인이 되어 있어요? 세계의 주인입니까? 대한민국의 주인이예요? 이 세계의 사람들은 종도 못 되었으니 주인은 더더구나 못 되는 것입니다. `이 세계는 내 세계다' 하며 주장하는 사람 보았어요? 주장할 수 있는 아무 건더기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마음은 그 세계와 접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타락한 이 세계에 사는 사람들이 그렇게 주장하며 나서지는 못하지만, 마음으로는 언제나 세계의 대표자가 되려고 합니다. 마음은 `내 세계다'라고 할 수 있는 일을 한번 해보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타락한 이 세계의 주인이 누구냐? 인간들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살고 있다고 해서 진정한 주인이냐? 알고 보니 인간은 종도 못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통일교회에서는 타락한 인간을 종의 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인 노릇 할 수 있어요? 그렇게 할 수가 없다면 문제가 크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인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무엇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세계를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근본을 못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장할 수 있는 근본을 가지려면, 하나님과 더불어 태어나야만 됩니다. 주인 되신 하나님의 혈통적인 핏줄의 인연을 통해서 사랑의 결실로 태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여러분은 종도 못 된 것입니다. 종은 자기가 섬길 수 있는 주인을 갖고 있는데, 여러분은 그런 주인도 못 가졌으니 종의 종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통일교회 원리가 참 타당합니다. 인간은 종의 종이니 종의 종에서부터 복귀해야 합니다. 아직은 사람의 자식이 아닙니다. 하늘의 족속권내에 들어갈 수 있는 핏줄을 타고난 것이 아닙니다. 종의 종이라는 겁니다. 어디서 굴러먹었는지도 모르는 그런 패들입니다.
인간은 이 세계에 살면서도 주인이 못 되어 있습니다. 사탄세계 뿌려진 씨앗의 결실로 태어난 입장에서 이 사탄세계마저도 마음대로 주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주권자가 있지 않느냐구요? 천만예요. 그 주권이 영원히 자기 것입니까?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영원히 이 세계의 주인 될 수 있는 분은 누구일 것이냐? 세상의 어떤 정치가?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은 전부 다 종 놀음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남의 것을 겁탈해서 자기 것으로 쌓아 놓고 좋아하는 사람들과 같습니다. 그들은 남의 것을 잘못 건드렸기 때문에 저 나라에 가서 그 대가에 해당하는 만큼의 벌을 받게 될 때들입니다.
자, 이와 같은 현시점에서 여러분은 어떻게 할 것입니까? 여러분들은 결실입니다. 열매예요. 어떤 열매인지는 모르지만 열매는 열매라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어떻게 할래요? 여기 여자들, 시집도 안 가고 혼자 살다 늙어 죽을 거예요? 또 남자들도 결혼 안 하고 혼자 살다가 늙어 죽을 거예요? 그렇게 살다 죽으면 그만이겠지만, 그러면 이 처량한 것을 또 심어야 됩니다. 누더기 보따리를 또 심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콩 심으면 콩나고, 팥 심으면 팥 나고, 보리 심으면 보리가 나지요? 여러분같이 타락한 인간을 심으면 무엇이 나올 것 같애요? 무엇이 나올 것 같느냐 말이예요? 「타락인간이 나옵니다」 타락인간 나오지 별 수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접붙이는 운동을 하는 것입니다. 이 땅의 인간은 돌감람나무이니 하늘의 아들이 참감람나무로 와서 접붙이는 운동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접붙임을 받지 않고는 살 길이 없습니다. 예수님도 `너희는 돌감람나무요, 나는 참감람나무'라 했습니다. 돌감람나무밭에 참감람나무 한 그루만 있으면, 그 밭의 돌감람나무를 전부다 참감람나무로 만들 수 있습니다. 접붙임만 받으면 됩니다. 알겠어요? 그런데 접붙임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자기의 혈통을 부정해야 됩니다. 혈통을 부정하는 것이 타고난 사랑의 인연을 부정하는 것이요, 그 사랑의 인연을 부정하는 것이니 타락한 세상의 모든 인륜도덕의 기준까지 부정하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참된 종교는 모든 것을 완전히 부정해 나왔습니다. 참 기가 막히지요? 참된 종교는 뭐라구요? 「완전부정의 세계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부정했어요? 했어요, 못했어요? 이 보따리가 아까워서 등에 지고, 옆에 차고 가슴에 안고 다니면서 부정이 돼요? 자, 그러면 여기 접붙임을 받고 싶은 사람 손들어 봐요. 그건 뭐 다 들거니까 그만 내리라고. 할머니가 제일 먼저 들려고 하는구만.
그러면 접붙임을 받으면 어떻게 되느냐? 접붙임을 받으려면 목을 짤라야 되느냐? 아닙니다. 내가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감정이나 생각, 일체를 새로운 사상, 새로운 인생관, 새로운 우주관을 체인지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내용이 무엇이냐? 부자의 관계를 중심삼은 가정관입니다. 가정관이라는 것입니다. 딴 거 아닙니다.
이런 내용을 중심삼고 볼 때, 통일교회의 문선생이라는 사람이 딴 것은 못했어도, 또 아무리 비판을 받아도 그것 하나는 잘했다고 봅니다. 가정을 중심삼고 천주의 해결점을 발견해 놓은 것입니다. 이것이 천주주의입니다. 이것을 갖지 못한 사람은 하늘 가정을 이룰 수 없고, 하늘 족속을 이룰 수 없고, 하늘 나라를 이룰 수 없고, 하늘 세계를 이룰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은 부자의 관계를 맺어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원래 심고 싶었던 아담은 어떤 모습일 것이냐? 이것을 알아야 되겠어요. 아담은 하나님이 심고 싶지 않았던 것으로 심어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탄식하셨는데, 그러면 하나님이 심고 싶었던 아담은 어떤 모습이었느냐? 그것은 하나님과 일체인 부자관계의 아담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완전 일체될 수 있는, 경계선이 없는 인연을 맺은 아담이었습니다.
그러한 인연을 오늘날 이 인간세상에, 이 사탄세계의 생활권에 어떻게 다시 전개시키느냐? 이 문제가 바로 종교의 최대의 목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을 제시하는 날에는 하나님의 한도 해원되는 것이요, 인간의 소원도 성취되는 것이며, 역사의 모든 문제도 해결될 것입니다. 문제의 해결점이 다른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해결점이 결과의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근원의 세계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천년 전의 사람의 마음이나, 오늘날의 사람의 마음이나 다 마찬가지로 무엇을 그리워하느냐? 마음의 행복의 세계를 추구해 나간다는 것입니다. 마음의 행복의 세계를 추구하는 동시에 마음의 이상의 상대를, 마음의 이상의 가정을, 마음의 이상의 세계를 추구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오늘 우리 통일교회는 무엇을 해야 될 것이냐? 무엇을 해야 통일이 되느냐? 마음이 그리는 이상의 세계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만 제시하면 됩니다. 통일교회의 통일이 아니라 세계의 통일입니다. 여기에서 문제는 내가 심는 데 무엇을 심을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또 다시 심을 수 있는 완전한 결실이 되어 있어야 하고 내 자신이 심는 자리에 들어가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사랑의 주체이신 하나님을 중심삼고 그분의 아들딸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딸은 참된 씨인 것입니다.
처음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어야 할 사람이 누구냐? 인간 조상입니다. 인간 조상은 인류의 부모입니다. 그 부모를 평면적으로 상속한 것이 오늘날 수많은 가정입니다. 그러면 이 세계의 주인은 누구냐? 아담 해와가 되는 동시에 평면적인 상속을 받은 우리 인간도 되는 것입니다. 주인은 혼자서 될 수 없습니다. 부부라야 됩니다. 주인은 부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에서도 신랑 신부를 찾아오고 있는 것입니다. 할 수 없어요. 신랑 신부를 찾아와야 되는 거예요. 그게 무엇이냐 하면 이 기준에 일치될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이러한 것을 알았으면 여러분은 하나님과 하나되어야 되겠습니다.
지금까지 타락한 인간을 찾아 나오신 하나님이 어떤 입장에 계셨겠느냐? 기뻤던 하나님일까요? 슬펐던 하나님일까요? 슬펐던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자기의 아들딸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하여 사탄의 아들딸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복귀해 온 것이 6천년이나 걸렸습니다. 말할 수 없이 슬픈 하나님이십니다. 창조 당시의 이상의 높이에 비례해 가지고 인간 타락에 의한 타격을 느끼신 것입니다. 그것의 상충은 언제나 고통을 느끼게 했습니다. 그처럼 무거운 고통과 슬픔 가운데 처한 하나님의 사정을 어떻게 해소시켜 드릴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아담 해와가 하나님 앞에 불효했고 배반했던 그 모든 내용을 다시 풀어 줄 수 있는 사연을 지니지 않고는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 통일교회에서는 가인, 아벨, 셋을 중심삼은 복귀된 아담 가정을 찾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의 아들딸, 신앙의 아들딸은 자기의 부모를 버리고 여러분은 따라올 수 있어야 됩니다. 자기 부모를 위해 죽고 자기 형제를 위해 죽은 사람은 많지만 오늘 진정으로 하나님을 찾아가는 길 앞에 자기 생명을 바칠 수 있는 그런 아들딸이 있느냐는 겁니다.
예수님을 중심삼고 볼 때, 베드로, 야고보, 요한도 사지(死地)에서는 도망 갔습니다. 타락한 세상의 부자의 인연을 놓고 볼 때도 부모가 죽을 자리에 처하면 자식이 대신 죽으려고 합니다. 이 망할 세상에서도 그러는데 영원히 남을 수 있는 하늘의 부자의 관계를 맺고자 온 예수 앞에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어땠습니까? 예수님 죽기 전에 먼저 죽을 수 있는 자리에 나갔습니까? 못 나갔다는 것입니다.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오늘 통일교회의 문선생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중심삼고 하나님이 슬퍼할 수 있는 장면이 있으면 싹 후퇴하고, 내가 이익될 수 있는 자리에서는 딱 등장하고 그랬으면 오늘날의 통일교회 문선생이 못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미욱해야 됩니다. 사리(私利)가 없어야 되는 겁니다. 그렇지 않고 그 일 자체만 생각하면 견뎌 내지 못합니다. 그것 할 수 있어요?
통일교회를 따라 나온 여러분이 참부모의 인연이니, 새로운 하늘 가정이니, 축복이니 하는 말을 하지만, 그 축복이라는 것은 사망선 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축복은 탕감권내에서, 사망선 이하에서 벌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에덴 동산에서 타락하지 않은 범위입니다. 이것이 축복입니다.
그러면 언제 여러분이 사망선을 넘었습니까? 예수님은 `아바 아버지여 할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면케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했습니다. 십자가의 고개를 넘어 가겠다고 한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런 자리에서 옛날의 자기는 죽이고 하나님을 중심삼은 새로운 인연을 통하여 부활할 수 있는 자아를 찾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새로운 천지에 있어서 주도적 권한을 갖고 희망의 출발을 보게 될 때, 거기서 새로운 인생의 출발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결실의 주인, 수확의 주인이 되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6천년 동안 뿌려 왔습니다. 무엇인지 모르지만 뿌려 왔습니다. 그리고 기독교를 통하여 수많은 사람들의 피를 뿌려 가지고 그 수확의 결실을 찾아 나왔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 결실의 주인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주체의식을 중심삼은 완전한 하나의 씨가 있었느냐? 하나님이 재차 선별해 가지고 이것만은 완전한 씨이기 때문에 이것을 중심삼고 인류의 새로운 혈통을 세우고 새로운 세계를 창건하겠다고 할 수 있는 씨가 있었느냐? 그런 씨가 된 사람이 누구냐?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럴수 있는 여러분이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사람이 되었어요? 안 되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 땅을 찾아오는 데 있어서, 그런 씨를 마련하여 이 땅에 보낼 것이 틀림없습니다. 보내기 위해서는 먼저 그러한 씨앗을 심을수 있는 밭을 마련해야 되니 그것이 이스라엘의 선민사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타락하고 4천년이 지난 후에 한 사람을 세워 가지고, 가정을 중심삼고, 세계를 중심삼고, 이스라엘 민족을 중심삼고 심으려 했습니다. 이것이 옥토예요. 하나의 완전한 기대라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새로운 인격관, 새로운 가정관, 새로운 사회관, 새로운 국가관, 새로운 세계관을 가져 새로운 이상세계로 출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씨를 심기 위하여 이 땅 위에 예수를 보냈습니다. 이 밭이 역사적인 예수가 자랄 수 있는 터전이 되고 예수가 자라는 데에 필요한 생명의 요소로서 흡수되어야 하는 데도 불구하고, 밭으로서의 이스라엘 민족은 반기를 들었던 것입니다. 옥토, 땅이 없는 씨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이 땅 위에 발판이 없습니다. 나라 없는 민족으로서 괄시와 몰림을 받으며 전부 피의 대가를 치러 가지고 발전해 나온 것입니다. 옥토에 심어진 씨가 아니고 공중에 심어진 씨와 마찬가지입니다. 영적 구원이라는 것이 인간입니다. 내용으로만 살지 실체로서는 살지 못했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이 땅 위에 재림의 때가 옵니다. 다시 그 밭을, 옥토를 찾아 가지고 여기에 심어질 수 있는 씨가 이 땅 위에 새로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재림사상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옥토가 되었어요? 오늘날 전세계 기독교가 그러한 옥토가 되어 있어요? 통일교회가 이만큼 발전하기까지 기독교가 얼마나 많은 핍박을 했습니까? 예수님 당시 유대교가 예수님을 핍박하던 그 이상의 핍박을 했습니다. 지지리도 핍박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강토를 옥토로 삼아 여기에 씨를 심으려는 섭리를 하십니다. 그런데 이 민족이 그 씨가 심어질 수 있는 터를 닦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6천년간 하나님의 수고의 그 터전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여러분이 모르는 가운데 하나님은 수고해 가지고 이 땅을 거룩한 옥토로 삼아 여기에 씨를 심어 백배, 천배 거룩한 수확의 결실을 거두려 하십니다. 부모나 형제의 전답을 나를 위해 버린 사람은 백배로 갚아 줄 것이라 했습니다. 여기서 갚아 준다는 것은 완전한 씨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완전한 씨가 되는 것이 더 큰 문제인 것입니다. 완전한 씨만 되면 갖추어진 옥토에 심어져 천배, 만배의 결실을 가져 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옥토에 심어질 수 있는 씨가 되었어요? 되었어요, 못되었어요? 못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대우는 결실한 씨보다도 더 받으려고 합니다. 그러면 망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씨가 못 되었으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어떻게 해야 됩니까? 심은 씨가 다시 씨로서 결실되지 못하면 또 다시 심을 수가 있어요?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그러니 재생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통일교회 7년노정, 하나님의 복귀노정으로 내세운 이 7년 기간에 싸워 가지고 남아질 수 있는 완전한 씨로서 결실된 사람이 누구냐? 자기의 주체의식을 가져 가지고 통일교회가 없어질지라도 자기가 이 땅의 소유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어요? 통일교회가 없어지면 여기 남아질 사람이 몇 사람이나 돼요? 몇 사람이나 돼요? 여기 자신 있어요? 자신 있어요, 없어요? 「자신 있습니다」 자신 있긴 뭐가 자신 있어요? 선생님도 없어지는데. 그래요, 자신 있어요?
몇천 년 전의 그 씨를 대대손손 물려받아 지금까지 내려왔으니, 지금 그 씨를 심으면 틀림없이 그 열매를 맺게 되겠지요? 그러면 통일교회 문선생이 하나의 씨라고 한다면, 통일교회 문선생이 심어 가지고 여러분이 문선생 같은 열매들이 되었어요? 뜻을 대해서 그렇게 되었나, 안 되었나? 되었어요, 못 되었어요? 「못 되었습니다」 못 되었으니 죽기나 해요. (웃음) 그러면 언제 돼요? 죽을 때까지 안 되면 망하는 거지. 문제는 여기에 있어요. 자, 그렇다면 통일교회 교인들은 무엇이 되어야 합니까? 통일교회의 알곡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요? 통일교회 식구라고 하면 장래에 통일교회의 아버지, 어머니가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다시 말하면 수확될 수 있는 결실체가 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인류역사 가운데, 사탄세계, 타락한 이 땅 위에서 창고에 거두어들인 그 열매는, 주인이 없더라도 누구든지 갖다 심어만 놓으면 그 자체의 열매를 맺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그와 같이 불변의 열매, 하늘 앞에 결실을 가져 올 수 있는 자체가 되어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선생님이 주장한 것이 뭐냐 하면, 전통적 사상을 이어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동기와 결과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통일교회에 있어서 동기가 누구예요? 동기가 누구예요? 그냥 문선생이라면 기분 나쁩니다. 하나님을 중심삼은 선생님이 동기인 것입니다. 종적인 기준에서는 하나님이 동기가 되어 있지만 평면적인 기준, 즉 횡적인 기준에서는, 이 땅 위의 인간을 중심삼고는 통일교회 문선생이 동기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무엇이 되어야 됩니까? 무엇이 돼야 돼요? 「결과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결과가 동기와 일치되지 않으면 망한다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아까 여러분이 사탄세계의 동기를 가지고 태어났는데도 불구하고, 사탄을 주인으로 하여 출발했는데도 불구하고 이 세계의 주인이 못 되었다고 그랬지요? 주인이 되면 남아지는 겁니다. 그런데 주인도 못되었으니 망해야 됩니다. 평면적인 입장에서 통일교회 문선생이 동기가 되어 있으면 여러분은 평면적인 입장에서 뭐가 되어야 합니까? 「결과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결과가 되지 못하는 날에는 어떻게 돼요? 「망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망할래요, 흥할래요? 「흥하겠습니다」
흥하는 길은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이 교회의 골수를 따라야 됩니다. 하늘을 업고 넘어가야 되며 선생님을 업고 넘어가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통을 상속받으라는 것입니다. 그 동기의 기원이 어떻게 이루어지게 되었느냐 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 동기가 출발하던 당시의 모든 곡절을 내 곡절로 상속받아야 됩니다. 그 비통한 사실을 내 뼛골에 사무치는 사실로 체휼해야 합니다. 역사적 모든 서러운 조건들을 대해서 투쟁해야 됩니다. 그 투쟁이 끝날 때까지는 결과의 자리에 못 나갑니다. 그런 자리를 거처지 않고 통일교회의 수확, 통일교회의 결실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여기에 통일교회의 열매를 수확하기 위해서 들어왔어요? 아니면, 여러분 자신의 열매를 수확하기 위해서 들어왔어요? 물어 봅시다. 자신의 열매를 수확하기 위해서 왔다면 망한다는 것입니다. 통일교회의 열매를 닮아 가지고 그것을 수확하기 위해서 들어온 것입니다. 그렇죠? 「예」 통일교회 교인들이, 남의 흉이나 보고 못난 사람들이 나가 전도를 하고 민족을 위하고 세계를 위한다고 훈계나 하는 그런 사람 닮기 위해 여기 들어온 것입니까?
여러분은 비판받는 사람이 되어야겠어요, 비판하는 사람이 되어야겠어요? 「비판받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비판받는 사람이 되어야 되겠지요? 그렇게 비판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선두에 서서 달려야 합니다. 밤잠을 안 자고 못 살게 굴어야 됩니다. 선생님이 지금까지 그런 놀음하고 있습니다. 못 살게 구는 겁니다. 모임이 있다 하면 열두 시가 넘고 점심 때가 지났는데도 말씀이 그칠 줄 모르거든요. 쥐어박고 문드러 뜨리고 그냥 두지 않을 눈치거든요. 그래도 괜찮아요? 「예」
보십시오. 여러분, 곡식이 자라려면 무엇을 줘야 됩니까? 사람에게는 꿀바가지를 다 부어 주고, 좋은 고기국물도 주고 밥상도 가져다 주면 되지만 곡식에게는 뭘 갖다 퍼부어 줍니까? 「비료요」 비료가 필요한 것입니다. 비료를 퍼붓게 되면 곡식이 좋아하겠어요, 나빠하겠어요? 「좋아합니다」 좋아하긴 뭘 좋아해요. 그 이파리는 얼마나 지긋지긋 하겠어요. 비료가 잎에는 닿으면 안 됩니다. 뿌리는 비료를 좋아해도 잎은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통일교회에 있어서 내가 거름을 주겠다고 하면 마음은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 거름은 몸뚱이가 받아야 됩니다. 몸뚱이가 거름을 필요로 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몸뚱이가 거름을 잘 흡수하면 그 사람은 잘 자랍니다. 그러나 몸뚱이가 거름을 잘 흡수하지 않는 사람은 빼빼 마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몸뚱이가 거름을 뒤집어쓰는 놀음을 시키는 것은 좋은 일이냐? 여기에 꿀바가지를, 달콤한 것을 뒤집어씌우는 것은 뭐냐?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몸뚱이에다 똥바가지 씌워야 되겠어요, 안 씌워야 되겠어요? 「씌워야 됩니다」 (웃음)
통일교회 문선생이 똥바가지 썼어요, 안 썼어요? 썼으면 나는 망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씀으로 말미암아 흥할 것입니다. 이제 대한민국의 신문이 한면이 지난 8면 전면에 대서특필해도 나는 눈도 깜짝 안 합니다. 뭐 장관이니 뭐니 하는 사람들은 신문을 제일 무서워하지요. 그러나 신문을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이 통일교회 문선생입니다. 왜? 똥바가지 쓸 대로 다 썼거든. 더 이상 쓸 게 없다는 것입니다. 미리 잘 써 가지고 떡 자리 잡고난 후에는 만사가 형통이더라. (웃음) 보십시오. 그렇기 때문에 만일 내가 잘못되더라도 사람들이 `옛날에 그렇게 욕먹더니 결국 그렇군' 하고 생각하게 되니 결국 그것도 벗어날 수 있는 도피구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똥바가지 쓴다고 화내지 말라는 겁니다. (웃음)
몸뚱이로는 썼더라도 마음은 다릅니다. 다가오는 물결이 거세였어도 이것을 헤치고 나갈 수 있는 결의는 강했다는 것입니다. 통일교회 문선생이 그런 똥바가지를 써 가면서 오늘날 세계적인 기반을 닦아 나왔습니다. 잘했어요, 못 했어요? 「잘했습니다」 그 식 본받을래요, 본받지 않을래요? 「본받겠습니다」 말씀은 좋은데 본받겠느냐 본받지 않겠느냐 하니까 왜그래요? (표정 지으심) 이런 사람들은 망할 종자요, 흥할 종자요? 「망할 종자입니다」 망할 종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얼마나 소화시키느냐?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여러분들이 여기서 말하는 수확의 주인공, 결실의 주인공이 될 것이냐? 인간 역사는 그 수확기에 와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 수확기에 누가 주인이 될 것이냐? 인간세계의 어느 누구? 안 된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닉슨? 소련의 코시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이 수확기에 있어서 주인이 될 수 있는 사람은 누구냐? 사망의 물결이 휘몰아치는 그 세계에 있어서 하늘의 뜻과 더불어 수확하기 위해 책임을 지고 싸운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아니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떠한 민족주의를 중심한 국가관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떠한 특정 민족을 중심삼아 가지고 세워 놓은 세계관으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만민이 평등한 이상적인 기점에서 형제의 인연 이상의 인연을 자랑할 수 있는 가정주의적 이상을 가져야 됩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부자관계의 인연을 중심삼아 가지고 이것을 고취할 수 있는 그런 주의와 사상 아니고는 세계를 수습할 도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못난 자식을 더 동정하듯이, 이 세계를 바라보시는 하나님도 불쌍한 민족일수록 더 동정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를 지도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불쌍한 민족부터 사랑할 수 있는 주의와 사상이 가져야 합니다. 그런 주의라면 앞으로의 세계를 수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주의는 사탄세계의 국가를 위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탄세계를 전부 부정해야 됩니다. 새로운 세계를 위주로 하여 그 세계의 이상을 중심삼은 주의가 지상에 현현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주의를 추구해 나가는 집단은 통일교회밖에 없습니다. 이 세계에 딴 집단이 있을 수 없습니다. 통일교회 말고 또 있어요?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찾아 봐도 한 곳밖에 없습니다. 통일교회의 진리가 가르쳐 주는 이상의 방향을 제시한 곳은 아무 데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에 우리는 새로운 시대의 이 세계 앞에, 수확된 결실의 주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알겠어요? 「예」 그러한 주인이 되었으면 그 다음에는 반드시 완전한 결실이 되어서 옥토에 심어지면 백발백중 싹이 나야 될 것입니다. 알겠어요? 「예」 아무리 자갈밭에 심더라도 틀림없이 그 모습을 드러내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야 됩니다. 수가 적더라도 거두어진 결실은 틀림없이 통일교회의 모습으로 나타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틀림없이 문선생이 주장하던 것이어야 됩니다.
그리고 문선생 역시 하나님이 주장하는 결과의 실체라 한다면 하나님이 주장하는 그 모습을 닮아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동기로 삼은 제1결과가 있으면 이 결과를 다시 동기로 삼아 하나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제1동기에서 빚어진 하나의 동기를 중심삼아 가지고 횡적인 여러분이 결과되어 이 동기와 하나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선생님이 뜻을 대해 가는 길에 여러분은 여러분의 생명이 일치될 수 있는 자리에 서 있어야 됩니다. 지금 여러분은 생명이 일치되어 있어요, 안 되어 있어요? 뜻과 일치된 여러분의 생명을 가졌어요? 여러분은 그런 마음 하나뿐이예요? 만약 둘이 되었을 때는 망한다는 것입니다. 가라지가 되는 겁니다. 조와 비슷하지만 가라지가 되는 것입니다. 주인이 고대하는 결실이 못 된다는 것입니다.
벼와 비슷하다고 해서 벼가 아닙니다. 그것은 피예요, 피. 여러분, 피알지요? 이것을 모판에 벼와 같이 심어 놓으면 모르는 것입니다. 진짜인지 가짜인지 전문가가 아니고는 모르는 겁니다. 그런데 이랑 사이를 더듬어 벼밑 부분의 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내가 그런 거 잘 골라 냅니다 벼는 대가 움푹 들어가고 피는 두드러져 나옵니다.
여러분, 통일교인이라고 해서 모두 통일교인이 아닙니다. 이 가운데는 피와 같은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가라지와 같은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라지가 조 모양으로, 피와 같은 사람이 벼 모양으로 행세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앞으로 전부 망할 것입니다. 끝에 가면 본색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결과와 원인이 일치되지 않으면 그 본색이 드러나게 됩니다.
하나님은 동기를 순수한 내용을 중심삼고 출발시켰는데 그 결과가 불손한 것으로 맺어졌다거나 공적인 기준을 중심삼고 출발시켰는데 결과가 사적인 것이 되었다면 그것은 망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어디까지나 공적인 분입니다. 공적이기 때문에 개인보다는 가정을, 가정보다는 종족을 더 존중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족을 희생시켜 민족을 찾아라, 민족을 희생시켜서 국가를 찾아라, 국가를 희생시켜 세계를 찾아라 하는 것입니다.
이 끝날에 있어서 세계를 찾기 위한 하늘의 역사는 바로 이것입니다. 그런데 복귀섭리 과정에 고대하고 있는, 자기 나라를 희생시켜서 세계를 찾으려는 국가나 민족이 있느냐? 만약 있다면 그 민족은 세계를 지배할 것입니다. 그와 같은 민족을 만들려고 하는 것이 통일교회의 주의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가 망해 가지고, 자기가 없어져 가지고, 백배 천배의 수확의 결실을 추구해 가는 것이 하나님주의입니다. 하나님 사상이예요. 이것이 지금까지 남아져 온 하늘의 전통적인 사상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맞고 고통당하여 완전한 결실을 세우자는 것입니다.
생명력을 가지고 시련과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어떠한 어려운 환경도 소화시킬 수 있는 결실의 자체를 찾아 나오는 것이 지금까지의 6천년 하나님의 복귀섭리입니다.
그러면 그 복귀섭리의 결실로 나타난 것이 오늘의 통일교회라면 이 가운데에서 그러한 결실을 대신할 수 있는 개체가 있느냐? 그런 열매가 있느냐? 만약에 있다면 그것은 어디에 갖다 심어 놓아도 틀림없이 결실될 수 있고, 틀림없이 자리를 잡고 살림살이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에는 `저렇게 살게 되어 있어' 하는 간판이 붙게 됩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것은 공적인 일입니다. 공적이예요. 그런 자는 공적인 것 외에는 모릅니다. 그런데 여기서 자기를 들고 나오면 망합니다.
대한민국이 왜 부패하느냐? 그것은 지금까지 대한민국의 관직에 있는 사람들이 나라를 팔아 가지고 자기 가정을 위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나라는 망합니다. 한 나라가 망하면 누가 역적으로 몰리게 되느냐? 가정을 위해 나라를 팔아먹은 자들이 역적으로 몰리게 됩니다. 그런 자들이 먼저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통일사상은 무엇이냐? 내가 망하고, 내 가정이 고생하고, 내 친척이 고생하더라도 나를 살리는 길에 있어서 거름이 되고, 이 민족 앞에 있어서 생명의 싹을 틔워 완전한 결실을 맺게 하는 놀음을 하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통일사상입니다. 자 여러분, 그런 길 가겠습니까, 안가겠습니까? 「가겠습니다」 가겠다는 사람 손들어 봅시다. 어디 봅시다. 왜손 들구 얼굴을 숙이나. 내리십시오.
그러면 이제부터 여러분이 그렇게 해야 됩니다. 1960년에 제1차 7년노정이 시작되어 지금은 제2차 7년노정을 걷고 있습니다. 10년 세월이 흘러가려고 합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습니다. 이제는 어디를 가도 통일교회 망하게 할 사람이 없게 되었습니다. 대한민국이 아무리 국군을 동원해서 어떻게 한다 해도 통일교회는 망하지 않습니다. 세계적인 기반을 닦았기 때문에 이제 망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선생님이 교회의 기반을 닦기 위해 투쟁하면, 염려하던 그 기간이 완전히 지나갔습니다. 이제는 선생님이 죽더라도 통일사상은 남아질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를 중심삼고 염려하든 때는 지나 갔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나라를 위해 염려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정치적으로 무엇을 할 모양이구나 하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아닙니다. 교육을 해야 되겠습니다. 사상적인 교육을 해야 되겠고, 생활적인 교육을 해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면에서 1970년대에는 삼천만 민족을 재교육시키는 운동을 해야 되겠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바라시는 소원임을 알아야 합니다. 알겠어요?
옛날에 우리가 교육받기 위해서 많은 반대와 핍박을 받으면서 쫓기어 나왔으니 이것을 다시 탕감복귀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육을 하는데, 제2차적으로 반대하던 사람들을 중심삼고 교육해야 됩니다. 그 사람들을 원수시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통일교회의 뜻을 중심삼고 볼 때, 통일교회를 반대한 그 사람들은 무엇이 되었느냐? 가인이 되었습니다. 무엇이 되었다구요? 「가인요」 가인이 되었습니다. 알겠어요? 그러면 반대를 받은 사람은 뭐가 된다구요? 아벨입니다. 이렇게 가인과 아벨의 자리가 결정되어 싸움을 지금까지 계속해 나온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아벨적인 자리를 잡았기 때문에 가인을 굴복시켜야 됩니다. 그러지 않고는 복귀의 승리자가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원리의 가르침 아닙니까?
그렇기 때문에 이제 여러분들이 옛날에 전도할 때 반목 질시하던, 혹은 반대하고 추방하던 그 가인적인 사람들을, 하나님의 저주의 대상으로 남아진 그 사람들을 그냥 버려 두게 되면 대한민국이 축복을 받지 못합니다. 그러니 찾아가서 그들을 자연굴복시켜 통일교회를 환영할 수 있는 입장에 서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대한민국에는 새로운 역사의 운세가 도래할 것입니다. 알겠어요? 「예」 이제는 환경적으로 그럴 수 있는 때가 왔고, 삼천만 민중 앞에 이러한 내용을 설명할 수 있는 재료가 있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공인할 수 있는 실적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민족을 원수시했던 가인적인 담벽을 무너뜨려야 할 책임이 누구에게 있다고 봅니까? 가인은 못 하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가인은 못 합니다. 가인에게 죽임을 당했던 아벨이 죽지 않고 부활해 가지고 다시 가인을 찾아와 용서해 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아벨적인 기준을 결정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를 배반한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가인적인 대표가 되었지만, 부활한 예수는 그들을 찾아가 화해하였습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지상에 새로운 기독교의 섭리가 출발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사상이 아닙니까? 우리 원리가 가르쳐 준 근본 내용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통일교회가 이제 갖출 바의 자세를 갖추었다고 한다면 원수를 원수로 갚아 가지고는 안 됩니다. 그러면 통일교회가 갈 길을 못 간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원수로 맺혀진 모든 것을 풀고 가야 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도 동참할 수 있는 축복의 인연을 갖추어 주어야 됩니다. 그렇게 될 때 그들은 말없이 옛날에 핍박한 것을 무릎을 꿇고 회개 할 것입니다. 회개하는 그런 모습이 보이거든 여러분은 삼천리 반도에 복귀의 천국이 시작된다는 것을 아십시오. 그렇게 되면 아시아 있어서 새로운 주도권을 가지고 하나님의 섭리의 깃발을 들고 세계로 출정할 수 있는 시대가 우리 앞에 다가올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알게 될 때, 이제 과거에 여러분에게 맺혀진 가인적인 모든 기대를 어떻게 무너뜨릴 것이냐? 이것이 1969년대를 보내고 1970년대를 맞는 이 시점에서 요구되는 것임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알겠어요? 「예」
이와 같이 사탄세계의 기반, 가인적 기반 위에서 하나님편의 결실된 열매를 심지 못한 것을 다시 재보충하여 심을 수 있는 때를 맞이하였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뜻을 출발하던 1960년도의 마음을, 성심성의를 다하던 그때의 그 마음에 뜻을 위한 사무친 마음을 더해 가지고 이제야 말로 그 터를 옥토로 삼아 새로운 씨를 심어야 되겠습니다. 정성을 모아 심지 않으면 안 될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가라지로서의 모든 원수들이 변하여 새로운 씨를 위한 비료가 될 것입니다. 알겠습니까? 반대하던 사람들이 여러분이 자랄 수 있는 터전이 될 것입니다. 그들이 후회한 것이 조건이 되어 여러분이 발전하는데 자극적인 동기가 될 것입니다. 거기에 새로운 싹이 터 가지고 체제를 갖춘 통일교회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될 때는, 지금까지 선생님이 50평생 싸워 나오던 그 핍박세계, 가인적인 그 세계를 넘어서서 아벨적인 새로운 시대를 향하여 진군할 수 있는 때가 가까워 질 것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1969년도야, 가거라. 빨리 가거라. 통일 역군들에게 피해를 주지 말고 빨리 가거라' 했던 것입니다. 1969년도 이제 17일을 남기고 있습니다. 음력으로는 한 두어 달 남았습니다. 약 50일을 남겨 두고 있습니다. 이것이 지나가는 날 원한의 역사를 대신하여 민족적인 탕감의 터전을 닦을 수 있는 소망의 때가 오거늘, 이 일을 누가 해야 되느냐? 아들이 해야 됩니다. 아버지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알겠어요? 「예」 아들 중에서도 누가 해야 되느냐? 아벨이 해야 됩니다. 통일교회 사람들이 해야 됩니다. 그럼 통일교회 사람 가운데 아벨이 누구냐? 선생님과 가까운 사람이 누구냐? 못난 가정, 처량한 가정의 무리입니다. 그러니 이런 자들에게 엄청난 일을 시켜야 되겠습니다.
가까운 사람을 내세워서 채찍을 들고 희생의 길고 몰아야 했던 이 무정한 사람, 하나님에게 가려진 비운의 역사를 빚지기 위해서 불가피하게 다시 채찍을 들어야 하는 선생님의 입장은 불쌍한 것입니다. 아벨을 통해서 복귀해야 하는 아담의 입장이 불쌍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 민족에 있어서 기성교단이 책임을 다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통일교회 자체 내에서 가인과 아벨적인 입장을 가려 가지고, 민족을 대신하여 제2차적으로 싸울 수 있는 싸움터를 마련해야 됩니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의 갈 길이 막힌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점에 놓여 있기 때문에 현재 우리의 책임이 얼마나 절박하다는 것을 선생님은 미리 알고 벌써부터 기도해 나온 것입니다.
1969년도에 들어서면서부터 이렇게 우리는 심각한 입장에 섰습니다. 이러한 와중에서 희진이가 죽어갔지만 잘 갔습니다. 잘 갔습니다. 지상천국을 건설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소원의 날을 찾기 위해서 예수를 죽음의 자리에 내세우는 아버지와 똑같은 입장에 서게 된 것입니다. 원리적으로 꼭 들어맞았습니다. 뜻을 위해서 눈물을 머금고 가야 되겠습니다.
지난 여름 방학에 가정들을 전체 동원하라고 명령했지만 누가 동원되었습니까? 누가 동원되었느냐는 것입니다. 동원되지 않았기 때문에 희진이가 나섰습니다. `아버님의 말씀대로 아무도 따르지 않으니 나라도 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하고 말을 했을 때 나는 막을 수 없었습니다. 그때 희진이가 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3백리 이상 먼 길을 보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역사적이 노정을 탕감하면서 풀고 가야 합니다. 그렇다고 내가 눈물 흘렸느냐?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습니다. 거리에서 난 사람은 불쌍합니다. 희진이도 예수님과 같이 거리에서 났습니다. 예수님과 똑같은 운명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30대에 민족으로부터 몰림받는 자리에서, 이스라엘의 기반이 없는 자리에서 갔지만, 희진이는 몰림 받는 자리가 아니라 기반을 가진 부모를 중심삼은 자리에서 갔습니다. 세례요한과 더불어 요셉 가정의 반대를 받던 서글픈 자리의 예수, 몰리던 예수의 입장이 아니라 환영받을 수 있는 입장에서 갔기 때문에 잘 갔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예수의 청소년 시대의 한을 풀어 주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영계를 중심삼고 전체가 동원할 수 있는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젊은 사람은 물론, 전체가 동원할 수 있는 영적인 기반을 땅 위에 공고화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터전이 마련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절박한 시대적 양상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중심해서 오늘 이 가인적인 담을 누가 헐겠느냐 했을 때 아벨이 와서 헐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아담이 타락했기 때문에 예수는 아담으로 와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를 성경에서는 제2아담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제3아담으로 오시는 분이 재림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재림주가 무슨 뭐, 구름 타고 온다구요? 허파 썩을 사람들 꿈꾸지 말라는 것입니다. 구름을 타고 와요? 아닙니다. 아담으로부터 심으려다 못 심었기 때문에 아담을 통해서 다시 심어야 됩니다. 그러니까 아담의 이름을 가지고 와야 됩니다. 그 내용도 같은 내용을 가지고 와야 하는 것입니다.
타락하던 한의 고개를 넘어가 가지고 타락될까 염려하던 아버지의 심정을 상속받아 타락을 방지할 수 있는 하나님의 마음을 지닌 제3아담의 출현이 있을 때, 이 땅 위에는 새시대 새역사 창조의 기원이 마련되고 그는 새로운 선조로서의 역사적인 출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비로소 아담의 타락으로 인한 이 세계에 재차 아담이 와 처음 아담은 가인이요, 나중 아담은 아벨 입장에 서 가지고 세계적으로 탕감시키는 것입니다. 지금 세계도 가야 할 사명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계로 가야 할 이 민족 앞에 놓인 가인적인 담을 누가 헐어야 되겠는가? 누가 헐어요? 선생님이 헐어야 되겠어요? 가인이 아버지를 쳤어요, 동생을 쳤어요? 동생을 쳤습니다. 지금까지 대한민국 사람들이 통일교회 여러분들을 쳤어요, 안 쳤어요? 쳤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복귀해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제2차 7년노정이 있게 된 것입니다.
1974년 말까지 한국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이북의 김일성이 아무리 큰소리해도 1974년도만 넘어서게 되면 십년 공부 나무아미타불입니다. 그러면 이 기간을 어떻게 극복하고 넘어가느냐? 어떻게 넘어가느냐? 아시아를 중심삼은 세계 정세는 급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섭리적인 터전 앞에 있어서 순탄한 대로로 갈 수 있는 준비를 어떻게 할 것이냐? 이제 여러분을 두고 보아야 되겠습니다. 선생님은 그것을 예상하고 지금 그 싸움에 대비하고 있습니다. 그 문에 들어가기 위한 대비를 지금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 아시아 대회, 세계적인 대회도 해야 되니 그런 준비를 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인을 통해서 막힌 담을 헐어야 할 책임이 아벨에게 있는데, 여러분이 이 책임을 할 것이냐, 안 할 것이냐? 다시 말하면 여기에 벼가운데 피가 있는데 그 피를 뽑을 것이냐, 그냥 둘 것이냐? 그 피가 남아 있는 한 생존권을 다투는 싸움이 끝날 수 없는 것입니다. 싸움이 계속되면 천국이 건설될 수 없습니다. 그렇지요? 이와 같은 지점에 여러분이 놓여 있습니다. 그러면 선생님이 가라 하면 여러분이 갈 것이냐, 안 갈 것이냐? 가야 되겠어요, 안 가야 되겠어요? 「가야 됩니다」
통일교회를 중심삼고 선생님 앞에는 누가 아벨적인 입장에 있다구요? 가정입니다. 가정 가운데는 누가 아벨적인 입장입니까? 가정 가운데 누구예요? 남자예요? 여자예요, 여자입니다. 재수 없이 여자라는 것입니다. 여자 때문에 내가 골탕먹었다구요. 그러니 그것을 탕감복귀해야 됩니다. 여자란 종자들이 통일교회 문선생으로 하여금 욕을 먹게 했어요, 안 했어요? 「했습니다」 그러니 풀어 놓아야 됩니다. 원리가 그렇게 되어 있으니 풀어 놓아야 됩니다. 그래서 여자를 동원하는 것입니다.
자, 그러니 여자를 가진 남자는 여자 치맛자락을 붙들고 따라가라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우리 축복가정들, 여러분이 언제 아담 가정을 탕감복귀했습니까? 했어요, 안 했어요? 했다면 그때 여자를 중심삼고 그 앞에 순종하는 놀음을 해봤어요, 안 해봤어요? 그것은 사랑을 중심삼은 관계를 맺어 가지고 끌려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살아오던 가정에서 여자를 끌어내더라도 불평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황부장! 알겠어요? 여자들을 끌어다 전도시켜야 되겠습니다. 축복 가정 사내 녀석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고자가 되는 겁니다. 미안하지만. 그렇게 따라갈 수 있습니까? 양도천 같은 목사는 사랑도 싫다고 스스로 불구가 되어 아들딸들도 낳을 수가 없지 않아요?
여러분은 지금까지 아들딸 많이 낳았지요? 그래서 이론 놀음을 시키는 것입니다. `언제는 축복해 주고 잘살라고 하더니 이제는 또 갈라 놓으니, 도대체 어느 장단에 춤을 추어야 됩니까' 할지 모르겠지만, 선생님 장단에 춤을 추면 됩니다. 그렇게 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대답해 봐요. 그럴래요, 안 그럴래요? 그럴 수 있는 남자들 손들어 봐요? 그렇게 하지 않고는 여러분의 아들딸들이 살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탕감해 주지 않고는 살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잘 생각해야 합니다.
자 그러면 이 부인네들 가겠어요, 안 가겠어요? 이제는 부인들 앞에도 가인과 아벨이 생기게 되었는데 여러분은 가인을 사랑할 거예요, 아벨을 사랑할 거예요? 자기가 낳은 아들딸은 아벨입니다. 이제 나가서 전도할 사람은 가인입니다. 해와가 결실한 것이 누구냐? 누구를 결실했습니까? 해와의 타락은 가인으로 말미암아 결실되었습니다. 해와의 열매를 누가 맺히게 했다구요? 가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해와의 열매를 누가 탕감복귀해야 되느냐? 여자가 탕감복귀해야 됩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아벨 앞에 가인을 굴복시키는 놀음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이러한 여러분의 탕감 앞에 선생님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가는 것입니다. 아들딸 다 버리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버리지 않고 그 자리에 두고도 탕감할 수 있는 제2전법이 있기 때문에 선생님보다 행복한 입장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요, 안 그래요?
이렇게 해와가 결실을 맺어 죄의 뿌리가 결정된 것은 가인으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벨을 치는 자리에 서면 망하는 겁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나가서 전도한 아들딸이 아벨을 잘 섬길 수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아벨 앞에 경배할 수 있고 아벨이 시집 장가갈 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가지고 와서 만복을 축원할 수 있는 아들딸로 만들어야 됩니다. 그러려면 여러분이 정성을 들어야 됩니다. 그러지 않으면 지금까지 자기가 낳은 아들딸을 사랑한 것이 전부 다 걸리게 됩니다. 이것이 비법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가인을 사랑해야 되겠어요, 아벨을 사랑해야 되겠어요? 누구를 사랑해야 되겠어요? 남자들도 들어요. 누구를 사랑해야 되겠어요? 아벨이냐, 가인이냐? 「가인입니다」 가인을 자기 아들보다 더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바라서 가인을 억울한 자리에 세웠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심정을 갖고 가인을 먼저 사랑받을 수 있는 자리에 세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지금까지 반대하던 원수들을 내 아들딸 이상 사랑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새로이 입적하느냐 못 하느냐를 결정할 것입니다. 이제 가정으로 입적하는 거예요. 통일교회도 이제 축복을 끝내야 됩니다. 이 문제를 완전히 해결지어 완전히 탕감했다는 기준에서야 합니다. 원리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도 그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다 버리고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런 일 않고 살아도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그것을 하겠습니까, 안 하겠습니까? 축복가정들, 그것을 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하겠습니다」 하겠다는 사람 손들어 봐요. 내려요.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할 때에 여기에서 비로소 수확의 결실, 수확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비로소 역사상에 가정으로 타락하여 심어진 그 열매가 한의 역사를 밟고 올라서서 주인의 자격을 갖추어 가지고 천륜 앞에, 천지 앞에 참다운 부모로서 등장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새로운 종족의 메시아가 되는 것입니다. 새로운 종족의 조상이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김씨면 김씨의 씨족 앞에 메시아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 과거에 왔다 간 숱한 선조들은 조상이 아닙니다. 그러한 조상들은 여러분에게 수천 만대의 손자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천지가 개벽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이 되고, 할아버지가 손자가 되니 천지개벽이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또한 어머니가 딸이 되고 딸이 어머니가 됩니다. 거꾸로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제 새로운 역사 시대에 천지개벽의 개문이 다른 데서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통일교회 원리의 관문을 통해서만이 벌어진다는 것을 확실히 알았습니다. 자, 이것이 신나는 일이예요, 신나지 않는 일이예요? 「신나는 일입니다」 `야! 이런 문제가 벌어지는구나' 해야 합니다.
그리고 `네가 역사적인 장본인이구나! 너를 만나기 위해 6천년 동안 기도했다. 6천년 동안 찾고 찾아서 만났으니 흠뻑 있는 정성을 다 들여 주마' 해야 합니다. 그래서, 부모의 심정을 지니고 종의 몸을 쓰고, 눈물은 무엇을 위해? 인류를 위하여, 땀은 무엇을 위해? 땅을 위하여, 피는 무엇을 위하여? 하늘을 위하여 뿌려야 합니다. 누구를 상대로? 가인을 상대로 하여 그 일을 하자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해결지어 놓는다면 여러분은 틀림없이 수확의 결실이 될 것입니다. 선생님이 필생의 사명으로 알고 추구하던 천적인 가치의 모든 내용을 무조건 상속받을 수 있는 승리의 왕자 왕녀가 될 것입니다.
자, 말로는 간단하게 할 수 있지만 실천하기는 어렵습니다. 여기에는 원수의 쇠고랑이 앞을 가로막고 원수의 총칼이 앞을 가로막는다는 것입니다. 죽음의 교차로에 부딪칠 것입니다. 그러한 장면들을 대할 때에 여러분은 예수가 기도하던 것을 생각하십시오. 바로 여러분에게 형님이요, 오빠가 될 수 있는 예수도 그러한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형님이 간 그 절개를 내가 지키고 가겠습니다. 오빠가 간 그 절개를 내가 지키고 가겠습니다' 해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교차로에서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 뜻대로 하시옵소서. 소망의 천국을 나를 통하여 이루시옵소서. 오늘 나는 개인으로서 죽어가지만 이로 말미암아 세계 앞에 열매 맺으시옵소서. 내가 바라는 가정 앞에서 나는 희생되었지만 그 가정을 통해서 세계 앞에 열매 맺으시옵소서. 나는 종족의 추모의 대상으로 죽어가지마는 세계적인 추모의 결과를 가져 오게 하시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세계를 넘을 수 있는 동기의 기원을 갖고 결과의 세계를 그리워하며 죽어갔기 때문에 동기와 결과가 일치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기준에서 심어진 참씨는 참결실을 가져오기 때문에 명실공히 예수님을 중심삼은 결과의 세계를 창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동기를 십자가에서, 죽음의 교차로에서 뿌렸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입장에서 죽음을 중심삼고 뿌렸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여러분도 그 길을 가야 됩니다. 선생님도 지금까지 그러한 길을 걸어 나왔습니다. 그렇지만 나이 오십이 될 때까지 하나님 앞에 `어찌하여 저에게 이러한 고생을 시킵니까?' 라는 기도를 해 본적이 없습니다. 그런 것을 여러분은 전통으로 본받아야 됩니다. 선생님은 모진 매를 맞고 기절하여 쓰러지는, 생사의 경계선을 몇 번씩 오고 가는 자리에서도 그런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것은 당연하다. 쳐라! 죽음의 세력이 얼마나 크냐! 사도 바울을 잡아먹고,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멸망시킨 이 죽음, 그 원한의 근거지가 나를 찾아오도록 쳐라! 두들겨 패라. 나는 이 죽음이란 장벽 앞에서 후퇴할 사나이가 아니다' 이러면서 지금까지 싸워 나온 것입니다. 나는 지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지쳤어요, 안 지쳤어요? 지쳤어요, 안 지쳤어요? 안 지친 사람 손 들어 봐요. 그 길을 부활할 수 있는 길입니다. 손 내려요.
싸움할 때 포탄은 목적지에 가서 폭발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쏘아진 포탄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달려가야 하는 것입니다. 목적지를 향해 직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큰 포탄일수록 요란한 소리를 내며 가는 방향을 알리는 것입니다. 큰 포탄일수록 요란한 소리를 내며 가는 방향을 알리는 것입니다. 그러한 포탄이 폭발할 때는 문제가 심상치 않습니다. 폭발점을 향해서 통일교회는 지금 가고 있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그것이 아시아의 복판에서 터지는 날에는 세계가 움직일 것입니다. 발사된 그 포탄이 모양은 단조롭지만 대단한 힘을 발산할 수 있는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포탄과 같은 입장에서 나가야 되겠습니다.
이제 통일교회 앞에 죽음길이 있어요, 없어요? 「없습니다」 핍박이 있어요, 없어요? 「없습니다」 나는 죽음길도 각오하고 왔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이제 핍박도 없는데 이 길을 못 가겠어요? 어림도 없습니다. 그런 수작 하려면 선생님을 생각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제 여기서부터 두갈래 길로 갈라지는 겁니다. 갈 것이냐, 안 갈 것이냐? 다시 한번 천명합시다. 가겠다는 사람, 손들어 봐요. 남자들은 여자를 따라가면 됩니다. 여자가 하라는 대로만 하면 복귀되는 것입니다. 아담이 복귀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여자가 선생님을 반대했으니 축복가정들이 그것을 탕감복귀해야 됩니다. 알겠어요? 성진 어머니가 그렇게 극성스럽게 반대했지요? 그것을 여러분이 탕감복귀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중된 섭리적인 내용이 깃들어 있는 것을 볼 때, `1960년대야! 잘 가거라! 나는 여기에서 인공위성이 날 수 있는 기지가 될 것이다. 불을 붙여라! 불이 붙는 날에는 날 것이다' 하며 희망에 벅차야 됩니다. 알겠어요? 내일의 세계를 향하여, 내일의 소원세계를 향하여 활보할 수있는 힘을 갖추어 세계 만민이 주목하는 초점하에서 걸어갈지어다! 「아멘」
거 암스트롱, 내가 맨 먼저 달나라에 갔으면 좋겠는데 그 사람이 먼저 가버렸습니다. 기분 나쁘게. (웃음) 그렇지만 그가 아무리 그래 보았자 달나라밖에 가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달나라는 아무것도 아닙니다.적막강산이거든요. 나는 인간세계에서 사상계를 움직이고 우주세계에서 최고의 첨단에 승부를 건 사나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기분을 갖는 것입니다. 무슨 박사고 대통령이고 전부 다 내 행차를 주목할 때가 올 것입니다. 그런 때가 오나 안 오나 두고 보자는 것입니다. 누가 망하는지 두고 보자는 것입니다. 내가 남아질 때가 기필코 올 것입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당당하고 멋진 이야기 잘 하지요? (웃음) 그럴 수 있는 시대가 왔다는 것입니다. 꿈 같은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으로부터 수십 년 전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때에 이러한 이야기를 하면 `저 미친 사람, (웃음) 척 앉아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은 거룩한 데….'라고들 했습니다. 요즈음은 차도 타고 다니고, 이렇게 양복도 입고 나와서 이러고 있지만,그때는 뭐 잠바를 입고 바른발엔 감정 고무신, 왼발엔 흰 고무신을 신고 하나는 한국식 하나는 서양식으로 차리고 앉아 있었으니 그 주제가 참 거룩했지요. 수염은 자랄 때로 자랐고 머리 모양은 될 대로 된 채로 앉아 가지고 말은 근사하게 잘하는구만! 천주를 통일한다. 하나님이 제 옆으로 왔다갔다한다. 뭐 역사가 엎치락뒤치락한다고. (웃음) 그런데도 믿을 사람 있겠어요? 그때 정신들이 얼떨떨하게 돌았기 때문에 지금까지 붙어 남은 사람이 더러 있지요. (웃음) 머리가 돌지 않았으면 남아지게 안 되어 있거든요. 지금까지는 그래서 무슨 말을 해고 거짓말 같았는데, 이제는 진짜 그럴 수 있는 때가 눈앞에 다가온 것입니다.
선생님의 움직임을 보게 되면 이제는 대해를 걸어갈 수 있고, 고속도로를 달릴 수 있는 좋은 판국이 벌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 다리를 고이고 하면 좋을 때가 옵니다. 여러분이 마음놓고 갈 수 있는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렇겠습니까, 안 그렇겠습니까? 「그렇겠습니다」 생각들을 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은 잠자고 싶을 때 자고, 먹고 싶을 때 먹고 다 했지만 선생님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여러분은 그걸 알아야 됩니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못 해봤습니다. 하늘이 명한 그 길을 가기 위해서 나는 하늘의 종살이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종살이하는 길이 망하는 길이냐? 아닙니다. 주인의 아들딸의 자리를 상속받는 길인 것입니다. 상속받는 수속이 그렇게 오래 걸릴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개인을 상속받고, 하늘나라의 가정을 상속받고, 하늘나라의 씨족을 상속받고, 하늘나라의 민족을 상속받아 올라온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금후의 한국 사회에서는 통일교회가 문제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두고 보십시오. 선생님에 대해서 연구하는 사람이 많아질 것입니다. 그러면 선생님의 이름과 더불어 선생님에 대한 역사가 남겠지요? 통일교회 문아무개의 전기가 남겠어요, 안 남겠어요? 「남습니다」 앞으로 일본의 역사가 없어지고 미국의 역사가 없어진다고 해도 통일교회 문선생의 역사는 남아질 것입니다. 남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도 문선생님이라고 썼구만요. 잘 했어요.
그 역사책의 제1페이지에는 `통일교회 문서방은….' 하고 시작될 것입니다. (웃음) 그 다음에 `부산 영도를 갔는데' 하면서 유효원이라는, 절뚝절뚝하는 병신 협회장이 나올 거예요. (웃음) 그럴 거 아니예요? 그리고는 36가정이 어떻게 어떻게 해 가지고 결혼을 했는데 싸움판이 벌어졌다. 내 아버지 내어 달라고 야단을 했다 (웃음) 하는 것이 다 나올 것입니다. 거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역사적인 인물들입니다.
그러면 역사적인 인물의 권한, 역사적 인물의 가치, 역사적 인물의 위신을 세워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역사를 창조하는 입장에 섰기 때문이요, 역사 창조의 주모자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36가정, 72가정, 120가정은 수요일 저녁, 주일 저녁에 다 모이라고 한 말 들었어요, 안 들었어요? 이 모든 것이 다 애기가 똥싼 것 치워 주는 놀음인 것입니다. 어떤 아이에게 명절날 입으라고 비싼 옷을 사 주었는데, 아이가 명절날을 알 게 뭡니까? 좋아라고 매일 입고 뛰어다니다 보니 전부 더럽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명절날 그냥 입힐 수 없으니까 어떻게 해야 됩니까? 빨아서 입혀야지요. 다시 빨아서 입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내가 다시 빨아서 입혀야 하는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러니 70년도에는 여러분 자신들이 하나님이 소망하실 수 있는 존재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알겠어요, 모르겠어요? 「알겠습니다」 남자들, 큰소리하지 말라구요. 여자들, 알겠어요, 모르겠어요? 「알겠습니다」 이 여자들, 내가 탕감시키기 위해서 고생을 지긋지긋하게 시켜야 되겠습니다. 이런다고 섭섭한 사람 손들어 봐요! 내가 해명해 줄 테니. `선생님, 여자를 무시해도 너무 무시하는 것아닙니까? 여자에게도 인권이 있고 요즘엔 남녀 평등사상이 대두되었는데 왜 그래요?'라고 생각하는 사람 손들어 봐요! 내가 꼼짝달짝 못 하게 설명해 줄 테니까. 여러분도 선생님이 이러는 내용을 잘 알고 있지요? 「예」 알고 있으니까 실천에 옮겨야지요. 알고도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은 벌받아도 하소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지옥의 유황불에 들어가 `선생님! 선생님!' 할 겁니까? 거기서 선생님은 무슨 선생님이예요? 깨깨 망하라고 할 것입니다. 그렇게 일러 주었는데도 안하면 벌을 받아도 싸지요.
여기에 박봉식 할머니 왔어요? 어디 있어요? 여기 처음 온 사람 없겠지요. 기탄없이 얘기 좀 해봅시다. 통일교회 문선생하고는 다 친구지요? 통일교회 문선생과 모두 가깝지요? 「예」 박봉식 할머니, 미혼남하고 함께 다닌다고 소문나지 않았어요? 사실 영감보다 가깝기야 더 가깝지만, 그렇지요? 할머니라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함께 살자고는 하지 마세요. (일동 웃음) 가깝기는 가까운 거예요. 아버지 어머니하고 신랑 가운데 누구와 더 가깝습니까? 신랑이 가까워요? 신랑이 더 가깝지만 신랑이 없을 때는 아버지 어머니와 제일 가깝지요.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거 영감이 죽었는데 가끔 나타나지요? 통일교회에 들어 온 사람은 다 그런 거예요. 죽은 것이 아니라 영계에 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으면 다시 만나 살림살이도 하며 함께 사는 것입니다. 꿈 같은 얘기인데 사실입니다. 박공서, 알겠어요? 「예」 알긴 뭘 알아요. 말로만 알지 사실은 모르지 않아. (웃음)
봉식 할머니 영감이 더러 오지요? 「예」 와서 뭘 하라고 해요? 뭐라고 그랬어요? 「사위기대 얘기를 했습니다」 그 영감이 알기는 알았다는 것입니다. 영계에 가보니까 걸리게 되어 있거든요. 바쁘고 큰일났거든요. 갈 길을 못 가겠거든요. 그렇잖아요? 원리가 그렇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천국은 사위기대를 세워 탕감하지 않으면 절대 들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것 때문에 지금까지 수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생님도 이것 때문에 40평생 고생했지요. 그거 가리기 위해 고생했습니다. 고생한 이유가 딴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위기대 복귀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베드로, 요한, 야고보, 세 제자도 그거 세우기 위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어디서부터 들어갈 수 있느냐? 간단하다는 것입니다. 천국을 잃어버린 곳이 어디예요? 아담 가정에서 잃어버렸으니 가정에서부터 복귀해야 됩니다. 아담과 해와가 불륜의 사랑으로 타락했지요? 거기서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을 복귀하기 위해서는 잃어버린 가인 아벨 셋을 찾아 세워야 합니다. 아담 해와 대신 부모가 되어 가지고 이 세 아들을 세우지 않고는 사위기대를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공식입니다.
예수님도 지금까지 낙원에 있다고 하잖아요? 이 사위기대를 찾지 않고는 천국에 못 들어갑니다. 못 들어가요. 예수님도 그래서 믿음의 아들로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세웠습니다. 그들이 수제자였습니다. 그래서 세번씩이나 `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했지요. 세 번씩 탕감한 것입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 베드로가 세 제자 가운데 맏아들의 위치에 있었으므로 베드로에게 세 번 물은 것은 한번은 베드로에게, 한번은 요한에게 또 한번은 야고보에게 묻는 것이었습니다. 형님인 베드로가 죽었으면 두 동생도 따라 죽지 않았겠어요? 그런데 그런 베드로가 죽는 것을 제일 무서워했습니다. 예수를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그랬지요?
잃어버린 가정이 거듭 내려오면 사망의 세계입니다. 사탄이 세 아들을 빼앗아 갔기 때문에 하늘의 아들은 사탄세계에서 하늘의 부모를 위해서 빼앗아 와야 합니다. 그래서 노아가정을 중심삼고 아담 가정에서 잃어버린 여덟 식구를 다시 찾으려 한 것입니다. 노아시대에 여덟 식구를 중심삼고 심판했지요? 여덟 식구가 중요합니다. 세 아들과 자부, 그리면 여덟 식구 심판했지요? 여덟 식구가 중요합니다. 세 아들과 자부, 그리면 여덟 식구 맞지요. 오늘날 통일교회 문선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통일교회에도 3가정 있지요? 3가정이 없어 가지고는 어머니를 모실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여기에 목을 걸고 사는 것입니다.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천국 가는 비결이 뭐냐? 사위기대 복귀하는 것입니다. 성경 66권이 여기에 다 걸려 있습니다. 6천년 역사의 소원이 여기에 다 걸려 있다는 것입니다. 인류의 해원성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더 세밀히 얘기해 주면 좋은데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 사위기대가 절대적이예요, 아니예요, 절대적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루지 못하면 큰일납니다. 천국에 못들어갑니다. 못 들어가요. 못 들어가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축복받은 여러분의 아들딸들이 천년 만년 탄식할 것입니다. 부모가 책임 못해서 그렇게 만들 것이냐? 그렇게 되면 완전복귀된 후손이 못 됩니다. 통일교회에서 말하는 영계는 그렇습니다. 어찌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부터 여러분들은 자기의 아들딸을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한 단계 앞서 있기 때문에 선생님은 아들딸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대신 아들딸을 사랑해야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아직 그럴 때가 아닙니다. 이것을 탕감해야 할 때입니다. 이제 3년 노정이 넘어서면 1970년도에 들어서게 되는데 이것을 완결짓고 넘어가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명년 6월까지 이것의 해결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복귀섭리의 뜻으로 볼 때, 민족의 해원성사와 더불어 새로운 통일교회의 운세를 맞이할 수 있는 때가 되었습니다.
영통한 사람들은 `이제 하늘의 때가 다 되었다. 다 되었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디를 중심삼고 나온 이야기인지 모르거든요. 그러나 여러분은 알지요? 그러니 여러분은 이러한 거룩한 때에, 한번밖에 없는 역사적 시기를 놓치지 말고 부디 하늘을 중심삼고 승리하는 사람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여자들, 어머니들이 이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430가정을 비롯하여 지금 800여 가정이 있지만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가정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족보에 기록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여러분은 수확의 결실을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수확의 결실이지요? 사망세계의 수확의 결실이 아닌 생명세계의 수확의 결실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에덴의 주인이 되고 천국을 상속받을 수 잇는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꼭 이루어야 됩니다. 세 사람을 세우기 위해서는 열 두 사람 가운데서 빼내야 됩니다. 사위기대를 중심삼고 빼 내는 것입니다. 3곱하기 4는 12아닙니까? 그래야 됩니다. 세 사람만 전도하면 됩니다. 그러면 틀림없이 하늘나라의 백성이 될 것입니다. 자! 여러분 가겠어요, 안 가겠어요? 가겠다는 사람 두 손 들어요.
아버지여, 이 세계에 아버지의 원수가 있사옵니까? 용서하고 싶어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이제 알았사옵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운명하는 그 순간 `저들의 죄를 용납하시옵소서!' 한 것도 복귀섭리 과정에서 가인을 굴복시키지 않으면 안 될 하늘의 사정을 알았기 때문에 그런 기도를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을 알았사옵니다.
그런 내용을 제시한 하늘의 사정이 얼마나 딱하였는가도 알게 되었나이다. 모를 때는 아버지를 모실 수 없고, 아버지께서 그렇게 먼 곳에 계신 것 같았으나 알고 보니 아버지께서는 저희들이 뼈 중의 뼈, 살 중에 살에 약동하고 계셨사옵니다. 저희들에게 아버님이 직접 주관하시는 것을 느끼며 살 수 있는 생활권을 허락하여 주신 것을 감사드리옵나이다.
여기에 축복받은 가정들이 있사옵니다. 아버님, 통일교회 자체를 놓고도, 통일교회 문이란 사람을 놓고도 지금까지 얼마나 수고하셨습니까? 수고한 결실을 거두어야 할 책임이 저희에게 있는 것을 생각하옵니다. 그 결실로 거두어져야 할 열매들이 여기에 모인 축복받은 가정들이옵니다. 과연 하늘 가정으로 거두어질 수 있는 결실이 되었는가? 이 열매를 다시 새로운 동산, 새로운 옥토에 심게 될 때 천배 만배 수확할 수 있는 결실체가 되었는가를 생각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런 모습을 아버님이 고대하시고 찾고 계시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모든 것이 본의대로 참된 결실로 심어진 그곳에는 아버님께서 기필코 백배의 영광을 보상하여 줄 것을 약속하셨사오니, 그곳을 향하여 가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내 일신을 위해서, 나라를 위해서, 세계를 위해서 모든것 다 바쳐야 되겠습니다. 세상이 알아주나 몰라주나 저희들은 그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사옵니다.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당신을 내세워 선전하며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날 통일교회도 입을 가졌어도 묵묵히 저희 자체를 감춰가며 지금까지 일해 왔사옵니다.
아버지, 이제 통일교회가 가야 할 길도 평면적인 도상이 아니옵니다. 사방으로 문제를 파급시켜 가지고 세계가 주시하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될 시점이 저희 앞에 다가오고 있사오니, 이 시점에서 엄숙히 아버님을 모시고갈 수 있는 참다운 아들딸, 참다운 가정이 되어야 되겠사옵니다. 지금까지약 800가정들이 아버지의 축복을 받았사옵니다. 이들이 모두 참다운 결실이 되어 가지고 참다운 주인의 입장을 대신하게 될 때, 하늘나라는 기필코 이루어질 것을 알고 있습니다.
더더욱 두려운 것은 축복을 받고 태어난 아들딸들을 사랑해야 하는데 그러한 입장에 있지 못하는 것이옵니다. 그들을 사랑할 수 있는 조건을 세우기 위해, 역사적인 소생 장성 완성의 3시대를 대표해서 사탄을 대해 반기를 들고 변명할 수 있는 사탄세계의 하늘편적 인물, 즉 사탄세계에서 하늘편 아벨을 보호하고 옹호할 수 있는 존재가 필요한 것을 알았사옵니다. 그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역사를 수습할 수 없다는 것이 원리의 가르침이요, 천륜의 비밀이라는 것, 또한 알았사옵니다. 세상에 그 누구도 이것을 몰랐사옵니다.
그러나 성경 66권이 여기에서 해결되고 여기에서 결실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 이 엄청나고 거룩한 열매를 대할 수 있는, 시대적 축복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총아로 태어난 것을 감사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이 거룩한 행운아의 입장에서 탈락하여 원망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되겠사옵니다. 기필코 승리의 왕자, 승리의 왕녀가 되어 천상세계에서는 물론이요, 이 지상세계에 있어서 천추만대 길이길이 역사의 칭송받는 아들딸, 승리의 깃발을 드높이 들고 만세의 주의 주관을 대신할 수 있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니다.
남아진 그 세계를 가야 할 저희들, 이제 막혀진 가인의 담을 헐고 저희 형제 형제가 손에 손을 잡고 아버지께 경배드릴 수 있는 복귀의 에덴의 이념을 그 가정으로부터 이루어야 되겠습니다. 그 부모의 이름과 자녀의 이름을 아버지 앞에 등록하여 영원한 축복의 터전을 삼고 결실의 주인, 수확의 주인이 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러한 문제를 앞에 놓고 지금 출발하고자 하는 저희들, 아버지, 지켜주시고 축복해 주시어서, 이번 기간이 유종의 미를 거두고 하늘의 승리를 거둘 수 있는 거룩한 계기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의 성호 받들어 아뢰었사옵니다. 아멘
나중에는 지금까지 누가 뜻 앞에 충성했느냐, 70년대에는 어느 가정이 뜻을 위하여 수고했느냐고 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나 성신보다 나은 입장입니다. 예수님이나 성신은 아들딸을 안고 전도해 보지 못했습니다. 아기를 떼어 버리고 전도하러 나간다는 것은 아벨보다 가인을 더 사랑했다는 조건이 됩니다. 따라서 그렇게 하면 가인은 굴복하게 됩니다.
70년대를 중심삼고 하늘 족보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조건을 갖추어야 합니다.
전도를 잘하고 못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정성을 다해 하늘과 나라를 위해 일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것이 하늘 앞에 탕감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될 수 있으면 좋았고 기뻤던 일, 슬펐던 일 등 모든 일들을 그대로 기록해 놓아야 합니다. 후에 천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귀한 것이 될 것입니다.
삼천만이 반대하고 3정권이 반대하는 가운데서도 선생님과 통일교회가 죽지 않고 남아 잇는 것은 기적입니다.
민주주의 세계에서는 미국이 자기 나라를 위주로 세계를 지도하려다 손해나니까 후퇴하고 있습니다. 공산주의 세계에서도 소련이 자기 나라만을 위주한 정책을 펴려다가 중공과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민족과 국가의 장벽을 넘는 운동을 하지 않고는 세계적인 주의가 못 됩니다. 또한 민족애가 세계애로 바뀌게 하기 않고는 세계 인류가 따라갈 수 있는 주의가 못 됩니다. 세계애가 없으면 세계 사람이 따라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세계 사람들은 개인의 권리 혹은 국가의 권리를 위해 서로 싸우고 죽여 왔습니다. 강대국은 약소민족의 주검더미 위에 서 있는 것입니다.
하늘과 종교는 희생과 봉사를 통해서 심정적으로 감화시켜 나오는 역사를 해 왔습니다. 사탄세계는 남을 죽이고 희생시켜 나왔으나 하늘과 종교는 희생하면서 발전해 나왔습니다. 세계를 위해서 희생해야 합니다.
미국이 아시아에서 물러가고 있고 소련과 중공은 분열되고 있습니다. 통일사상은 오늘날의 세계적 요구에 귀일되는 사상입니다.
세계의 문을 여는 때가 70년대입니다. 개인은 가정을 위해, 가정은 국가를 위해, 국가는 세계를 위해 희생해야 합니다. 중대한 입장에 서 있음을 자각해야 합니다. 각지에서 새 아침(新年)을 맞으면서 흘리는 눈물은 희망의 눈물입니다.
역사시대에 빛날 수 있는 하나의 제물이 되기 위해 대한민국 삼천만 민족을 안고 가야 하겠습니다.
아무리 고위층 인사라 해도 선생님은 저자세로 만나지 않습니다. 실력 대결을 위해 만나자고 할 때, 그들에게 훈시를 할 수 있는 자리에 만납니다.
70년대에 세계적 기반을 닦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아까하다('赤旗'; 일본공산당에서 발행하는 신문)를 통해 80개의 공산계열 국가에 알려지고 자유세계에 알려졌습니다.
한국은 김일성이 아니라도 소련과 중공에 포위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일본이 필요합니다. 선생님은 10년 전에 선교사를 밀선에 태워 보내 일본에 기반을 닦았습니다. 일본에서 1년 7개월 만에 그런 기반을 닦은 것은 기적입니다.
대한민국의 사상이 썩었다면 이것은 개인주의 사상 가지고는 못 고칩니다. 인적 자원을 어떻게 보강할 것인가. 대한민국의 불신임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가 문제입니다. 일본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극복해야 합니다. 금년은 원수진 것을 모두 갚는 해입니다. 60년대에서 70년대로 넘어가기 전인 금년의 10일간에 탕감해야 합니다. 이 기간은 하나의 분수령입니다.
나중에 여러분의 자녀들이 `엄마는 그때에 무엇을 했어요? 전도했어요, 도망다녔어요?'라고 물을 때 자랑할 것인가, 부끄러워할 것인가를 늘 생각해야 합니다. 방학때 자녀들에게 여러분의 옛 전도지를 찾아가게 하는 것도 자녀들에게는 교육이 됩니다. 스크랩북을 가지고 자녀들에게 교육하되 선생님의 훌륭한 점을 교육해야 합니다.
전도 나갈 때는 돈을 많이 가지고 가지 말기 바랍니다. 심정을 가지고 가야 합니다. 여자들은 몸을 주의해야 합니다. 전도지에 도착하면 기관장들에게 먼저 인사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우리 남편은 나를 이렇게 사랑합니다' 하고 자랑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통일교회의 합동결혼식은 위대하고 훌륭하다고 소개하기 바랍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싱글벙글 웃으며 `주님 자기 동산에….'를 노래하고 가르치기도 해야 합니다.
웃음을 철학으로 삼고 살도록 해야 합니다. 옛날보다 힘차고 희망에 넘친 모습으로 생활하기 바랍니다. 어린이들에게는 동화도 들려 주고 동요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책임자를 비방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말을 듣고 잘 지도하여 현장에서 해결해 주되 그 바람에 휩쓸리지 말아야 합니다.
반대하는 사람을 원수로 대하지 말고 웃음으로 대해야 합니다.
남편들은 아내에게 일 주일에 한 번씩 편지하기 바랍니다.
선생님이 내년 1월 6일경부터 순회를 할 예정입니다. 그때 선생님이 새돈을 분배할 것인데 그 돈은 역사적인 보배가 될 것입니다.
남편들은 아내의 전도지에 한번씩 다녀오도록 하기 바랍니다.
임신한 사람은 아기를 낳고 40일 후에 전도를 나가기 바랍니다. 전도 나가지 않고는 선생님의 등살에 못 견딜 것입니다.
70년대에 빛나는 전과를 거두어야 합니다.
아버지, 오늘은 이달 들어 세번째 맞는 안식일이옵니다. 아버님이여, 이제 1960년대도 마지막 고비를 향하고 있사옵니다. 지금까지 수고하신 아버지의 노고 앞에 저희들이 진실된 모습으로 스스로를 찾고, 스스로를 반성할 수 있는 이번 기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당신께서는 아담이 타락한 그날부터 지금까지 얼마나 수고하셨습니까? 6수의 노정을 탕감하고 7수의 한때를 찾아 나오신 아버지께서 오늘날까지 얼마나 수고하셨는가 하는 사실을 알고, 이제 70년대를 향해 가는 이날에 있어서 새롭게 태어나는 통일의 모습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새로이 아버지 앞에 부름받고, 새로이 신뢰받으며, 새로이 3년 노정을 개척할 수 있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보람있는 아들이요 딸로서 아버지께 효도할 수 있는 자신들이 되어야 되겠사옵니다.
이제 6수 노정의 슬픔을 지워 버리고 안식의 7수를 찾기 위한 아버지의 역사가 시작되어야 하겠사옵니다. 1961년부터 1969년까지의 수고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탕감시켜 주시옵고, 금후의 하늘의 복귀섭리 앞에 있어서 승리를 다짐하면서 영광의 1970년대로 접어들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지금까지 이 땅 위의 인류를 찾아오신 아버지 얼마나 외로우십니까? 땅위에 있는 인간의 마음을 직접 대할 수 없는 아버지께서는 한 생명을 찾기 위하여 수많은 영인들을 동원하시고 천사들을 동원하시어 다리를 놓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아버지의 수고의 역사가 이제는 직접적으로 권유할 수 있는 평면적인 한 시점을 이 땅 위에 마련하였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이것이 하늘의 영광이요, 하늘의 자랑이요, 하늘의 기쁨이 아닐 수 없음을 저희들이 알게 되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생각하면 할수록 고생길에 있는 저희의 모습이 하늘의 영광이 될 수 있으며, 하늘의 기쁨이 될 수 있으며, 하늘의 자랑이 될 수 있는가를 생각하게 될 때에 저희들은 아버지의 소원 앞에 느끼게 되옵니다. 이러한 모습으로 인하여 당신의 영광을 가릴까봐, 당신의 기쁜 용안에 수심이 잠기게 할까봐 스스로 염려할 때도 많사오니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저희들은 어린이어야 되겠습니다. 당신의 품에 영원히 영원히 품길 수 있는 자녀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당신의 품에 품길 수 있는 아들이 되고 딸이 되어 당신의 귓속말과 입김을 대하면서 진정한 아버지의 심정을 옮겨 받을 수 있는 아들딸의 모습이 얼마나 귀하냐 하는 것을 저희들은 아옵니다. 부디 품길 수 없는 부족한 자신을 아버지께서 품으시사, 저희들을 아버지의 영광의 자리에 세워 주시어 만민을 보살피는 아버지를 찾는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여길 줄 알고, 아버지의 아들된 것을 자랑하여 그 자체를 기뻐할 수 있는 저희 자신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이여, 전국에 널려 있는 당신의 자녀들을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의 자녀들은 뜻을 받들어 1960년대의 마지막 고비와 새로운 1970년대의 처음 고비를 맞는 이 때, 아버지, 거룩한 제물로서 바쳐지기 위하여 어제 지방을 향하여 모두가 흩어져 갔사옵니다.
이들이 간 길은 자기를 위하여 간 길이 아니라 당신이 남기신 복귀의 운명을 위하여 간 길이옵니다. 이 길은 자기들이 기필코 넘어야 할 길이요, 자기 종족이 개척해야 할 길입니다. 그 누구에게도 맡길 수 없는 책임을 저희들 각자가 짊어졌기 때문에 세상의 그 누가 뭐라 해도 저희들은 가야만 되겠습니다. 저희들은 넘어야만 되겠습니다. 저희들은 기필코 이 싸움에서 후퇴하여 조롱받고 비판받는 무리가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지금까지의 역사노정을 두고 볼 때, 섭리의 뜻을 대표해 나오던 통일교회가 하늘의 슬픔과 더불어 수많은 후퇴의 일로를 걸어왔습니다. 면목없는 입장으로 지금까지 살아왔으며 참가치의 모습을 지니지 못하고 죽은 모습과 같이 가련한 모습으로 지내왔습니다. 지금까지는 눈물의 갈림길이 저희의 앞길을 가로 막았고, 십자가의 외로움이 저희 앞길을 몰아 세웠사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수고하심으로 말미암아 이 십자가와 외로움의 모든 고빗길이 낙망의 조건이 될 수 없었으며, 사탄의 모든 흉계가 슬픔의 조건이 될 수 없었사옵니다. 그러므로 저희들은 하늘이 자랑할 수 있고, 하늘이 기뻐할 수 있고, 하늘이 칭찬할 수 있는 최소한도의 자격을 갖춘 아들딸이 되지 않으면 아니 되겠사옵니다. 아버님께서는 언제나 어떤 모양으로든지 그 권한을 찾아 나오셨습니다. 아버지의 그 노고를 저희들은 찬양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이제 저희들은 아버지의 아들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딸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진정으로 아버지의 혈통을 이어받은 아들딸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아버지의 심정이 저희의 심정과 인연맺고 아버지의 심장의 동맥이 저희의 심장의 동맥과 인연되는 일체적인 관계를 이루어, 아버지가 가시는 길이 저희의 길이요, 아버지의 사정이 저희의 사정이요, 아버지의 뜻이 저희의 뜻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아버지, 이제 저희를 살피시옵소서. 당신의 볼꽃같은 눈으로 저희 자신들을 감찰하시옵소서. 타락으로 말미암아 먹구름 같은 죄악의 뿌리가 아직까지 저희를 덮고 있사오니 이것을 타파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는 저희가 암흑 가운데에서도 승리의 깃발을 바라보면서 광명의 빛을 향하여 달려갈 수 있는 하늘의 아들딸이 되기를 간절히 고대하고 계신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습니다. 저희들은 아버지가 계신 곳까지 있는 힘을 다하여 달려왔사옵니다. 하오나 지친 모습을 아버지 앞에 보이지 않을 수 없는 저희들의 부끄러움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저희들은 아버지의 권고를 받아 또다시 눈을 들어 더 먼 곳을 바라보아야 되고 높고 높은 창공을 향하여 다시금 결의하지 않으면 안 될때가 되었사옵니다.
저희들이 가는 이 길이 험하다 하더라도, 이것은 아버지께서 분부의 말씀이며, 역사과정에 저희들을 찾기 위하여 참으시며 싸워 나오신 아버지의 소망인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저희들이 어떠한 험한 곳도 개의치 않고 가는 아들딸의 모습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다시 한번 씻어 버리기 위한 하늘의 권고와 하늘의 권고와 하늘의 힘과 하늘의 능력이 필요한 것을 알고 있사오니,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옵나이다.
이제, 자녀들이 지켰던 이 동산을 지켜 주시옵소서. 간밤을 눈물과 더불어 새운 아들딸들이 있사옵니다. 하늘의 친구요, 외로운 하늘의 동조자의 입장에 서서 이 나라 이 민족을 넘어 세계를 위하여 울부짖는 그들의 기도소리는 아버지의 심정을 두드릴 것이요, 아버지의 사정과 일치될 것을 알고 있사오니, 그 자리에 더더욱 같이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나이다.
가정이 선두에 서서 이끌고 가야 할 실천장의 그 준비된 기반을 고이 갖추시옵고, 축복받은 가정이 지금까지 참여하지 못한 것을 용납하시어 통일의 앞날을 자랑스럽게 빛낼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니다.
이 시간 부족한 모습을 아버지 앞에 드러내는 것을 용납하여 주시옵고, 귀한 당신의 뜻이 저희 마음과 몸에 사무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1960년대도 아버지께서 기쁨 가운데 보낼 수 있게 하여 주시옵고, 다가오는 70년대는 저희의 책임 못했던 과거를 청산하고 소망 가운데에서 새로운 자각을 하여 아버지의 사랑의 심정세계에 다가갈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참부모의 이름으로 기도하였사옵나이다. 아멘.
오늘은 `가야 할 탕감길'이란 제목으로 잠깐 동안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 땅에는 수많은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또한 수많은 민족과 수많은 나라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 자체는 알지 못하지만 개인이나 한나라를 볼 때에 그것들은 하나님을 중심삼고 수많은 탕감의 대가를 치루어 가지고 그 대가의 기반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잘사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못삽니다. 또 어떤 나라는 선진국이라고 세계에 자랑하고 권위의식을 갖고 있는가 하면, 그 반면에 어떤 나라는 후진국의 입장에서 허덕이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되어진 세상의 실상을 앞에 놓고 볼 때에 거기에는 좋아 보일 수 있는 것과 나빠 보일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크고 작다 뿐이지 그와 같은 인연이 우리를 중심삼아 가지고 전후 좌우 상하에서 감돌고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잘사는 민족은 반드시 그만한 대가를 치르고 난 기반 위에 서 있기 때문에 잘산다는 것을 그 나라의 역사를 중심삼고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못사는 나라는 그 나라의 배후에 못살 수 있는 동기가 깃들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엿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잘사는 개인이면 개인, 나라면 나라가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잘살아 왔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큰 나라면 큰 나라가 잘 사는 나라가 되기까지에는 거기에 비례하여 비참한 내용을 중심삼고 생사의 기로에서 결단을 내려야 했던 내용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역사적인 수많은 사건을 지니고 나왔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그 사건들이 처리된 것도 개인이 잘나서 처리된 것이 아니라 국민과 국가가 일치되어 전체의 운명을 걸어 놓고 노력했기에 처리된 것입니다. 국가의 비상사태를 해결짓고 넘어가는 데 있어서도, 상하 혹은 좌우 전체가 단결되어 가지고 난국을 타개하는 과정을 거쳐서 그 기반 위에 발전이라는 연속적인 결과를 가져옴으로 말미암아, 그 나라는 오늘날 선진국을 창건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반면에 낙후된 민족을 보면, 그 민족의 배후에는 희망찬 내일을 위하여 힘차게 난국을 타개한 혁신적인 내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생명을 걸어 놓고 난국을 타개하려는 면에 등한시했고, 거기에 대한 책임을 지지 못했습니다. 국민 전체가, 전후 좌우 상하가 일치되어 가지고 그러한 난국을 타개하기 위하여 움직이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민족 전체가 일치된 행동을 한 내용이 적은 민족일수록 후진국을 면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 됩니다. 역사가 그렇게 되어 나왔습니다.
한 나라의 역사를 두고 볼 때에 그렇다 할진대 우리 개인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우리가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역사시대에 있어서 어떤 일을 남길 것이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그 내용을 결정하는 요인은 그 배후의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체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역사상의 선진국, 혹은 후진국을 보아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개인의 운명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람이 당대에 성공하느냐 못하느냐, 혹은 빛나는 영광의 시대를 맞느냐 슬프고 서러운 생애를 남기느냐 하는 문제들은 그가 생애노정을 살아가는 과정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가 나면서부터 살아가는 과정에 얼마만큼 역사적인 방향과 천운의 방향에 일치될 수 있는 사연이 있느냐, 혹은 그러한 사연과 주의를 가지고 자기 생명을 넘어 미래를 추구하는 심정으로 자기에게 밀려오는 사건에 언제나 정면으로 부딪친 내용을 지녔느냐 하는 것이 그 사람의 현재의 인격과 미래에 남아질 수 있는 인격을 좌우하며, 그 사람이 추앙받을 수 있는 중심이 되느냐 안 되느냐 하는 문제를 좌우한다는 것입니다.
소원과 목적이 크면 클수록 거기에 비해 투쟁의 과정은 큰 것입니다. 그 투쟁의 과정은 없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투쟁이라는 그 자체는 그 누구나 다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투쟁이 없어 가지고는 그 자신이 원하는 목적이 성취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절대적인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현실 환경에 급급해 가지고는 그 환경에서 자기의 새로운 목적을 모색할 수 없는 것입니다. 현실 환경을 타고 넘어야 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생활기반을 확충하려면 무한한 주체적인 인식에 입각해 가지고 자기 자체의 환경에 대해 혁명이라는 두 글자를 세워 놓고 투쟁이라는 길을 거쳐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목적을 추구해 가는 사람이 필연적으로 가야 할 길이라는 것입니다. 누구나 결과의 시점에서는 성공이라는 것을 환영할는지 모르지만 성공이 지내온 과거, 성공이 이루어지기까지의 과정이라는 것은 그 누구도 환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공이 거두어지기까지의 지난날은 생각하면 몸서리쳐지고 그만두고 싶은 한 많은 역사적인 날들의 연속이었을 것입니다. 자기 부모나 자기의 동기, 친구, 혹은 자녀나 부부에 이르기까지 전부 다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과거라는 그 자체는 피비린내나는 투쟁의 일로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극이 교차되는 과정을 타개하지 않고서는 목적을 성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생을 두고도 마찬가지이고 하루를 두고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침에 하루를 출발하면서 오늘은 뜻있는 날이 되었으면 하고 바라지만 그 하루가 내가 고대하는 뜻있는 날로서 결과가 맺어진다는 것은 간단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간단하지 않은 하루를 맞이해 가지고 그 하루를 간단히 지내 버리는 사람은 간단한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인생관을 가지고 사는 사람의 인생길과는 달라야 되는 것입니다.
개인의 일생을 두고 볼 때, 또는 오늘날 선진국이라고 자처하고 있는 국가를 두고 보면 그 배후에는 긴 투쟁의 경로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후퇴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박차기 위해 무한한 투쟁을 치른 그 대가에 비례해 가지고 그 개인이나 나라의 존재가치가 좌우된다는 것을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통일교회는 어떠한 길을 걸어왔느냐?
이렇게 볼 때 우리 통일교회 자체는 어떠한 길을 걸어왔느냐? 70년대의 새로운 복귀섭리시대를 앞에 놓고 내가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통일교회는 어떠한 길을 걸어 왔느냐? 흘러가는 길을 걸어 왔느냐? 그렇지 않으면 발전하는 길을 걸어왔느냐? 다시 말하면 대가를 치르면서 우리가 가야 할 운명의 길을 개척해 나오고 있느냐? 이러한 문제들을 두고 볼 때 우리는 지금까지 대가를 치르며 나왔고, 지금도 치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대가의 기준은 점점 작아져야 되느냐? 아닙니다. 그런 길을 가면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대가를 점점 크게 치를 수 있는 내용을 지니고 있느냐? 또한 여기서 쓰러지지 않고 망하지 않을 자신이 있느냐? `쓰러지지 않고 망하지 않는다. 더더욱 굳건히 설 수 있다 더 큰 대가를 치를 수 있는 자신이 있다'고 할 수 있는 자신을 가지고 나간다 할진대 여러분은 오늘날 이 시대의 비탄 가운데서 사라지는 사람들이 안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브레이크를 걸었고 제재를 가했던 그들은 기필코 우리로 말미암아 패자의 입장에 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러한 환경, 우리로 하여금 대가를 치르게 하는 그 여건들을 우리의 내일의 희망을 자극해 주는 것으로 소화하고 흡수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러한 도구로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자각과 자신을 지니고 오늘 이 현실에 처해 있다할진대 우리는 망할 수 없습니다. 내 손이 빈 손이요, 내 몸이 알몸이라도 희망의 내일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통일교회 교인된 내 자신을 중심삼고 볼 때 나는 교회를 위하여 어떤 대가를 치렀느냐? ` 과거에는 이런 대가를 치렀고 오늘은 이런 대가를 치르고 있고 내일은 이런 대가를 치러야 되겠다'라고 하는 내 자신이 되어야 합니다. 그 대가를 어디에서 치러야 되느냐? 가야 할 섭리의 노선, 각국의 운명이 부딪치는 최고의 노선, 다시 말하면 중심 주류가 있을 것이거늘 그 주류에서 치러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정면으로 가야 할 자세를 망각해 버리고 대가를 치러야 할 책임을 못 하는 사람은, 앞으로 아무리 광명한 새로운 이상시대가 온다 하더라도 도리어 암흑의 시대로 느낄 것이고, 그 대가를 치러 가치를 지닌 사람들 앞에서는 자신의 부끄러움과 부족함을 느낄 것입니다. 불신하였던 바가 크면 클수록 거기에 찾아드는 성공은 반비례할 것입니다. 거기에는 자기 자신의 몰락과 후회와 탄식과 절망이 깃들 것입니다. 이러한 절망이 나를 향하여 물결쳐 들어오게 될 때는 그야말로 내 모든 환경 전체가 비참할 것이요, 하늘땅 앞에 내 일신을 드러낼 수 없고 부끄러움을 모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이러한 시점에서 보게 될 때에 통일교회가 짧은 역사를 가졌지만 그 역사의 배후에서 발전의 무대를 지탱시킨 그 탕감의 대가는 얼마나 컸느냐? 이것이 대한민국적이면 대한민국을 개척할 것이요, 세계적이면 세계를 개척할 것이요, 천주사적이면 천주사적인 역사를 창건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는 입장에서 수난의 길을 걸어왔다면 하나님이 우리의 권내에 반드시 찾아오실 것입니다.
이러한 엄청나고도 방대한 뜻이 가는 길 앞에는 험한 산과 골짜기가 남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비참할 것이지만 이러한 사탄세계의 골짜기가 탕감되는 날 이것을 대신하여 최대의 행복의 고개가 찾아온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지금 부딪치는 것은 일시적인 것이요, 앞으로 다가올 것은 영원한 것입니다. 진실로 이러한 사실을 확실하게 체득한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 가치와 자신과의 무한한 차이를 느낄 것입니다. 여기에 비하는 대가를 얼마나 자신있게, 얼마나 뜻깊고 가치있게 치를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 오늘 여기에 앉아 있는 여러분 자신들은 어떠했느냐? 반성해야 되겠습니다.
역사시대의 모든 발전의 요인이 그러했고, 영원한 역사의 운명과 동반하는 이 시대의 민족의 운명도 치른 대가의 기준에 의해서 결정된다 할진대, 오늘날 이 통일교회에서 남아진 탕감의 기간이 불행한 것이냐?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마음으로 피해 갈 것이 아니라 내 일대뿐만 아니라 2대, 3대를 거치더라도 이를 기쁘게 넘을 수 있는 민족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민족 혹은 그러한 사람이 있다면 그 민족, 그 사람은 망하지 않습니다. 절대로 망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타락의 한을 지니고 태어난 우리 인간들이 타락의 세계에서 행복의 세계,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지향하시는 창조 이상세계로 나아가는 그 과정은 비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원수의 세계에서 개인으로서의 시련의 과정을 극복하여 가정과 종족과 민족, 그리고 국가와 세계를 찾아야 하는데, 여기에는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될 여러 가지 난제들이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 벌어지는 사회제도나 나타난 모든 조직적인 현상세계, 혹은 나타난 결과의 현상세계 전부가 우리를 대해서 환영의 박수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상충을 일으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여기에 대결의 인연을 지니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치고, 이것을 밀어내고, 이것과 맞부딪쳐서 남아질 수 있는 자아가 되기 위하여 노력해야 합니다. 생애에 있어서 그것을 생활철학으로 삼고 싸워 나가는 개인과 민족이 있다면 그 개인, 그 민족은 금후의 이상세계를 주도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개인 탕감복귀로부터 시작하여 가정, 종족, 국가, 세계적인 탕감복귀노정을 가야 된다는 말을 많이 들어 왔습니다. 그러면 세계를 위해 탕감노정을 갈 수 있는 나라는 어떠한 나라냐? 기필코 세계를 대표할 수 있는 한 나라가 있을 것입니다.
일본이 그런 나라로서의 권위와 위신을 가지고 있느냐? 아닙니다. 그렇다면 스스로 국위를 자랑하고 선진국가로서의 위대함을 자랑하는 국가 중에서 그런 국가가 있느냐? 세계를 대표하여 탕감의 제단에 오를 수 있는 나라가 있느냐? 없습니다. 지금 행복을 노래하는 나라는 그런 나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역사과정에서 몸부림치며 피어린 투쟁을 했고, 세계적인 사건을 자기와 연관시켜 가지고 자기의 일로 여기며 몸부림친 민족, 그러한 국가만이 앞으로 세계를 책임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그러한 민족은 어떠한 민족이어야 될 것이냐? 그러한 나라를 추구하면서 그러한 것을 주류 사상으로 받들 수 있는 민족이어야 됩니다. 그 나라 전체 국민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그 사상과 그 행동을 백 퍼센트 받아들여 소망의 상징으로 떠오를 수 있는, 그리하여 그 나라의 주류 사상이 되게 할 수 있는 사상을 국민 앞에 제시하는 운동을 지금 하고 있는 민족이어야 될 것입니다. 그런 종족, 그런 가정, 그런 개인이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세계에서 어떤 나라가 그런 나라일 것이냐? 오늘날 세계에는 수많은 나라가 있지만 삼천리 반도, 대한민국은 보잘것없고 비참한 나라이며 반분 된 슬픔과 비운을 가지고 있는 나라입니다. 그러나 이 나라는 비운에 사라지는 나라가 아니라 오히려 그 비운을 타파해 버리고 새로운 세계의 갑옷을 입고 가겠다고 몸부림치는 나라입니다. 아무리 역사적인 한이 매달리고 길을 막는다 하더라도 이것을 응당히 책임져야 할 시련의 무대로 알고, 여기에 생명을 투입하여 1년, 10년, 40년, 혹은 반세기, 1세기, 수세기를 밀고 나갈 수 있는 민족 단결 운동, 민족 통일의 운동을 벌인다면 세계적인 탕감노정을 책임질 수 있는 하나의 국가가 될 것은 두말할 것도 없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대한민국이 6천년이란 기나긴 세월 동안 수많은 민족이 망하고 수많은 민족이 일어나면서 엮어 온 굴곡의 역사에 하나의 국가 형태를 갖추어 가지고 나왔느냐고 할 때, 과연 그렇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대한민국의 역사는 슬픈 역사가 아니겠습니까? 그것을 인식할수 있는 내 자신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 수다한 곡절의 역사를 청산하고 승리의 권한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내가 살고 있는 대한의 나라는 이러한 나라가 될 수 있다고 나는 주장해 왔습니다.
그러면 대한민국이 하나님 앞에 불리워질 수 있는, 세계적인 탕감을 치르는 나라가 될 수 있느냐? 그러한 탕감의 나라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틀림없다고 자랑할 수 있는 권내에 올 때까지 대가를 치러야 됩니다. 그러나 작은 대가 가지고는 국가의 해원성사는 불가능합니다. 고질된 역사를 판가리하는 데 있어서 온갖 사망의 권세를 쳐부수기 위해서는 국가의 틀을 제거시킬 수 있는 무한한 투쟁을 해야 됩니다. 무한한 탕감의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그리고 그 대가는 민족을 넘을 수 있는 대가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막연한 신념을 갖고서는 사망의 권세를 쳐부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나라라고 자랑할 수 있는 현실적 기반을 닦아야 합니다. 그 현실적 기반은 누가 닦아야 하느냐?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이 닦았다고 할 수 있는 자신을 못 가졌을 것입니다. 내가 닦은 것이 아니요, 또한 우리 민족이 닦았다고 할 수 있는 자신을 못 가지고 있다 할진대 누가 닦아야 할 것이냐? 오늘날 통일교회가 그 자신을 못 가지면 누가 닦아 줄 것이냐? 혹은 선생님이 그 자신을 못 가지면 누가 닦아 줄 것이냐? 닦아진 결과가 남아지고 그것이 공의의 무대로서 전개될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틀림없는 사실의 배후에 있는 탕감의 대가를 누가 치를 것이냐 하는 것을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대한민국이 세계를 향하여 발전할 수 있게 된 것은 어떠한 목적의식이 뒷받침되어 가지고 망할 수 있는 기회를 꺾어 버리고 흥하는 기회로 연결되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보이지 않는 자극적인 힘이 연속적으로 투입되고 희생의 대가를 치러서 그럴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주위 환경에서 벌어지는 실상과 느껴지는 모든 것을 통해 볼 때, 뜻앞에 있어서 이 나라가 승리할 수 있었다는 것은 무한한 희생의 대가가 치러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대가는 누가 치렀느냐? 하나님이 치렀습니다. 그 하나님은 누구냐? 우리 인류의 부모입니다. 인류의 부모로서 대가를 치렀기 때문에, 대한민국 삼천만 민족만의 부모가 아니라 인류의 부모로서, 역사시대의 인간의 부모로서 대가를 치렀기 때문에 그 대가의 보람은 대한민국에만 반영되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시대에도 반영되었고, 현실에도 최대로 반영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미래의 세계 앞에 하나의 유업으로 상속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과거 현재 미래의 인간들 앞에 치러진 대가가 아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통일교회의 원리가 제시하는 가치관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통일교회 원리는 무엇을 주장하느냐? 역사 앞에 인간의 위대한 가치를 재생시키자는 것입니다. 그 가치를 역사적인 인간들과 더불어 재생시키자는 것입니다. 영계에 가 있는 사람과 더불어 현세의 세계인과 더불어 미래의 우리 후손과 더불어 이것을 드러내자는 것입니다. 이것을 틀림없이 드러낼 수 있는 나 자신이요, 내 가정이요, 내 종족이 될 수 있다는 자부심을 당당히 가지게 된다면 여기서부터 역사시대의 인간을 중심삼은 최대의 승리의 기준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생각할 때, 이 자리가 얼마나 엄청난 자리인지 모릅니다. 이 자리에서 치르는 대가는 최고의 정성을 가해야 됩니다. 오관을 통해 느껴지는 모든 것도 최고의 정성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요, 내가 한번 보는 시선도 선을 추구함에 있어서 필요한 사실이라는 것을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새로움을 발견한, 새로운 희망을 가진 사람이라 할진대 자신이 택한 이 길을 생애에 없는 최고의 정성과 지성을 다해 가지고 가야 되겠습니다. 듣고 보고 하는 모든 감각을 중심삼아 가지고 최고의 정성을 들이는 제물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은 오늘 이 현실에 살고 있지만 역사와 더불어 사는 사람입니다. 역사과정에 아무리 회오리 바람이 불어오고 험한 폭풍우가 몰아친다 하더라도 그것을 초월한 경지에서 참된 인간의 모습을 지니고 사는 사람은 역사가 증거할 것이요, 시대가 증거할 것이요, 미래가 환영할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을 하늘은 얼마나 얼마나 고대하겠습니까?
이러한 과정에서 여러분 자신들은 원리를 통해야 됩니다. 통일교회가 제시하는 그 길을 가기 위해서는 탕감의 대가를 치르고 가야 됩니다. 자기 생명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심각하게 책임지려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책임지려는 마음을 갖고 있었으면 책임을 졌느냐 하는 문제를 중심삼고 보면 함부로 생각하고 있었던 지금까지의 우리들인 것을 재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생명의 가치를 귀하게 여기고 현실무대를 힘차게 밟고 나가야 됩니다. 오늘날 내가 현실무대에 있어서 얼마나 보람있는 가치를 투입하고 있고 투입된 그 가치가 얼마만한 결과를 가져오고 있는가를 눈으로 보아 확실히 알고 있듯이, 이렇게 행하는 사람은 역사는 망하더라도 망하지 않습니다. 대한민국의 3천만이 망하더라도 그는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진실된 가치를 역사시대에 얼마나 남겨 왔느냐? 또 그 진실된 가치가 역사과정을 통해서 얼마나 남아질 것이냐를 염려하면서 거두어진 가치를 잊어버리고 지금까지 나오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아무리 어려운 환경의 고빗길이 있다 하더라도 그 가치를 무색하게 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가치의 내용을 중심삼고 가치의 기준을 높이하였습니다. 그 가치를 떨어 뜨리고 파탄시키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여러분 자신들이 지금까지 걸어온 역사과정에서 `이것만은 내가 틀림없이 대가를 치렀다. 삼천만 민중아, 이것만은 나를 본받아라. 내 형제야, 이것만은 본받아라. 내 부모여, 이것만은 분명하다' 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었습니까? 반대하는 사탄도 이것만은 인정합니다. 그러므로 사탄도 `예, 그렇습니다', 또한 부모도 `오냐', 민족도 `옳습니다. 그렇고 말고요'라고 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사탄을 물리칠 수 있는 분석 비판 능력을 갖지 못하였다 할진대는 나라를 위하고 세계를 위하겠다고 부르짖는 그 자체가 허영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경거망동하는 것에 지나지 않고 능동적인 것이 아니라 피동적인 것입니다. 피동적인 존재는 완전한 수확을 거두지 못하는 것입니다. 수확의 결과는 볼 수 있으되 주인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생명이라는 것은 피동적인 인연을 거쳐서 남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능동적인 인연을 통해서 종교의 그 핵심 주류를 통해서 연결되는 것입니다. 피동적인 생명의 인연을 가지고 있고, 피동적인 대가를 가치를 추구하고 있고, 또 피동적인 대가를 치르면서 살고 있는 서글픈 자신임을 발견할 때 그 부끄러움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부끄러움을 가릴 수조차 없는 부족한 자신인 것을 발견하고 통곡할 수 있는 자신이 되지 않고는 이 길을 갈 수 없습니다. 기독교에서 제시하는 회개가 그러한 과정에서는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내 개인이 되어야겠습니다.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내 자신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그럴 수 있는 아내, 그럴 수 있는 남편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남성과 여성이 만나 가지고 한 가정을 구성하는 그날, 하늘은 우리에게 더 큰 기대를 걸 것입니다.
오늘날 다른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합해 나가는 과정에서 그러한 제시된 문제를 중심삼아 가지고 얼마나 심각했느냐? 자기 자신들의 생활 문제를 생각하는 것보다 역사적인 사명과 앞으로의 천운과 승리의 박자를 맞추는데 있어서 얼마나 심각했느냐? 우리는 그럴 수 있는 부부의 인연을 존중시하면서, 그럴 수 있는 인간의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면서 인연의 세계를 창건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내 일대에서 끝이 안 나면 후계자를 세워서라도 상속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엄청난 역사적인 숙명의 과업을 책임지고 준비하여 고스란히 상속시켜 주는 참된 부모의 모습으로서 어떻게 등장하느냐?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기 자신을 통하여 탕감의 대가가 치러질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내 가정을 통하여 탕감의 대가가 치러질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가정뿐만이 아니라 자기의 아들딸을 통해서 탕감의 조건을 제시해야 할 내용이 남아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자녀를 통하여, 종족을 통하여, 민족을 통하여, 국가를 통하여, 세계로 가야 할 길이 남아 있는 것은 틀림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계로 갈 수 있는 확실한 길을 어떻게 내 일대에 닦아 후손들 앞에 남겨 줄 것이냐? 그 시간과 거리는 멀지만 시련이 부딪쳐 오는 환경에 있어서 패하지 않고 승리적인 길을 갈 수 있느냐, 부모면 부모로서, 가정이면 가정으로서 이러한 환경을 어떻게 일시에 이겨낼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여러분의 생사 문제를 좌우하는 심판의 길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대가를 치르는 자리는 어떠한 자리냐? 나로부터 뚝 떠나 가지고 나라의 대가를 치르는 것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거짓이 개재되기 때문에 안 되는 것입니다. 진실이라는 것은 간격을 초월한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간격을 흡수시키고 그 간격을 소화시킬 수 있는 데에 진실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 개인이 국가를 중심삼아 가지고 종의 자리에서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입니다. 내 몸과 마음, 내 자체에서 소화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자리를 내가 비쳐 가게 되면 그 주체 앞에 대상으로서의 가치가 줄어드는 것입니다. 가정이 비쳐 갔으면 그 가정은 사회 앞에 그 가치가 줄어드는 것입니다. 하나의 종족도 세계 앞에 대가를 치러야 되는 것입니다. 초월이란 공식은 있을 수 없습니다. 초월할 수 있는 공식이 있었다면 하나님께서 6천년이라는 긴 세월을 고생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대가를 어디에 치르려고 하느냐, 이 대가를 누구 때문에 치르느냐 할 때 나라를 위해서, 나라 때문에 치른다고 하는 것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스스로 대가를 치르지 못한 사람이 나라를 위해서 대가를 치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요, 스스로 대가를 치르지 못한 사람이 종족과 가정을 위해서 대가를 치른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도리어 개인의 대가를 치르지 못하면 개인과 가정에 대한 이중의 대가를 치러야 하는 가중된 운명의 자리를 인계받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의 생활이라는 것은 무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참이 가는 길 앞에 있어서 대가를 치르지 않게 되면 참의 결과가 나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통일교회 사람들은 말하기를, 우리 교회를 위해서 일한다고 합니다. 또는 우리 대한민국을 위해서, 하늘을 위해서 일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대가를 치르는 데 있어서 하늘이 중심이 되고, 하늘의 동기에 부합될 수 있고 화합될 수 있는 자체를 발견하지 못하고서는 대가를 치러 보았자 사탄으로부터 출발해서 사탄으로 끝난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원리에서는 개인복귀 완성이라는 것이 첫번째로 나오는 것입니다. 국가복귀 완성이 아닙니다. 세계복귀 완성이 아닙니다. 개인복귀 완성이 첫번째라는 것입니다. 누구를 위해서 대가를 치러야 될 것이냐? 내 개인을 위해서 치러야 됩니다. 하늘은 지금까지 세계를 찾아 나온 것이 아닙니다. 세계가 있기 전에 국가가 있어야 되고, 국가가 있기 전에 종족이 있어야 되고, 종족이 있기 전에 가정이 있어야 되고, 가정이 있기 전에 개인, 남자와 여자가 있어야 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지금까지의 종교는 복귀된 개인으로서의 남자를 찾지 못했습니다. 남자와 여자를 중심삼아 가지고 하나의 가정으로서 대가를 치른다는 이러한 종교의 교리, 종교의 얼을 가진 종교가 없었습니다. 통일교회만이 이것을 들고 나온 것입니다.
그러면 이 대가를 치르기 위한 길이 `가야 할 탕감의 길'이라고 하였거늘, 그러한 탕감의 길을 여러분들이 지금 가고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이 추울 때는 `아이고, 옷을 입어야 되겠다'고 합니다. 배가 고플 때에는 `먹어야 되겠다. 먹을 바에는 좋은 것을 먹어야겠다. 최고로 좋은 것을 먹어야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최고로 좋은 것을 먹기 위해서는 그것 이상의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입니다. 최고로 좋은 것을 먹기 위해서는 경쟁과 투쟁과 초월적인 내용을 거쳐 가지고 좋은 것을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존재의 근원이 되고 생명의 원천이 될 수 있고 힘의 원천이 될 수 있는 이 탕감조건들을 세우는 탕감조건이 그렇게 쉽지는 않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탕감을 어디에 치를 것이냐? 치르는 데는 자기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가치의 내용을 가지고 치르느냐? 세계적인 가치의 내용을 가지고 치러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랬다 할 수 있는 때가 될 때에 세계가 필요로 하는 여러분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님은 `아바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한 것입니다. 그것이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개인의 현실적인 민족과 행복을 추구해 왔습니다. 행복과 만족을 얻으려면 대가를 치러야 됩니다. 반비례적인 길 앞에 있어서 자신있게 장담하고 파격적인 내용을 가지고 환경을 혁신하라는 것입니다. 극과 극의 상충된 입장에서 무한한 가치 추구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가는 길 앞에는 반드시 치러야 할 대가가 있는 것입니다. 교회를 위해서 치르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치르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가인 아벨의 문제를 잘 알고 있습니다. 내 마음은 아벨이요, 몸은 가인입니다. 아벨이 아벨되기 위해서는 대가를 지불해야만 됩니다. 그래야 비로소 실체기대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실체기대라는 것은 몸이 마음에 완전히 굴복하여 가지고 하나가 되어야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인간들은 역사시대에 구라파 전쟁이라든가 혹은 대동아 전쟁, 세계대전 등을 거치면서 치른 것 이상의 큰 희생의 대가를 치렀던 것입니다. 마음 앞에 몸을 굴복시키는 전쟁, 보이지 않는 투쟁은 계속되는 것입니다.
세계대전이라는 것은 시작도 과정도 볼 수 있고, 끝도 볼 수 있지만 몸과 마음의 투쟁은 영원한 것입니다. 이 생명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완전한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내 가치를 주장할 수 있는 한 시간이 내 생애의 어느 순간이 될 것이냐? 20대냐, 30대냐, 50대냐? 아니면 70대냐? 내 일대에 안 되거든 2대, 3대, 10대, 수천대 후에라도 될 것이냐? 이러한 노정을 찾아오는 것이 오늘날 종교라는 탈을 쓰고 추구해 나오는 최대의 투쟁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모든 종교는 개인을 찾아 나온 것입니다. 불교는 석가모니를 숭배하고 본받으려는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예수 한분을 본받으려는 종교입니다. 그 이상을 넘지는 못했습니다. 예수는 개인으로서 세계적인 하나의 중심 교주로서 등장한 것이 아닙니다. 개인중심으로 끝나면 그는 망하는 것입니다. 독신 생활을 부르짖고 아무리 노력해 봤자 그건 망하는 것입니다. 그 배후에는 새로운 가정을 제시할 수 있는 종교적인 이념, 새로운 종족을 제시할 수 있는 종교적인 이념과 세계와 천주의 복귀라는 이 엄청난 문제를 중심삼은 종교적인 이념이 있는 것입니다. 복귀시대를 향하여 출발한 출가병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복귀의 도상에 있어서 그 누구도 하지 못한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은 개인을 찾을 수 있는 환경과 가정을 찾을 수 있는 환경과 종족을 찾을 수 있는 환경과 민족과 국가를 살릴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기 위해서 4천년 동안 수고해 가지고 이스라엘이라는 선민국을 만든 것입니다. 개인을 해결함과 동시에 가정과 종족과 민족과 국가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기점을 마련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러한 아들이 가는 노정 앞에 있어서 아버지로서 할 수 있는 수고의 내용을 다해주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러한 수고의 결과로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탄생시켰다는 것은 탕감의 대가를 치러서 이것을 처리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아 놓은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여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가 될 때 그것이 제일탕감입니다. 개체탕감을 위주로 한 예수님의 승리적 기반 위에 가정탕감, 종족탕감, 민족탕감, 국가탕감이 일시에 이루어질 수 있는 환경적 기반을 갖추었던 것인데, 이스라엘 민족이 불신함으로 말미암아 개인 탕감의 결과도 미완성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육을 중심삼은 승리의 탕감권을 갖지 못하고 영적인 탕감길만을 닦았다는 사실은 이 땅에 오셨던 예수님의 한도 되는 것이지만 예수님을 보냈던 하나님의 한도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엄청난 탕감복귀라는 운명의 길을 우리가 상속받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오늘의 이 현시점이 얼마나 중요한 때입니까?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만을 위해서 살면 안 됩니다. 나라가 필요로 하기 때문에 나라를 위해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제일 중요한 점은 통일교회를 믿는 것입니다. 여기에 있어서 통일교회와 나라는 여러분을 위해서 이용당하는 것입니다. 이런 복귀섭리의 원칙, 이런 창조의 원칙을 두고 볼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든지 여러분 자체를 책임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책임지느냐? 하나님이 책임지느냐? 95퍼센트의 책임은 하나님이 하는 것이요, 5퍼센트의 책임은 인간이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합해져서 100퍼센트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창조원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창조주의 권한에 가담되기 위한 특권적인 권한을 부여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95퍼센트의 책임은 하나님이 하는 것이요 5퍼센트의 책임은 인간이 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인간은 이러한 기준을 넘지 못하였기 때문에 역사는 시작했다가 참된 세계의 맛도 보지 못하고 시작과 더불어 저물어가 버렸습니다. 그리하여 인간들은 참된 세계의 맛을 모르는 세계에서 살게 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내가 필요하기 때문에, 내가 역사적인 핵심이 되어 있기 때문에 세계는 나를 위해서 생겨난 것입니다. 오늘날 이 세계 정세는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되었느냐? 나 때문에 이렇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누구를 위해서 생겨났느냐? 나를 위해서 생겨난 것입니다. 내가 주인입니다. 내가 가기 전에는 대한민국은 못 갑니다. 지금까지의 대한민국이 생겨나서 걸어온 그 길을 대한민국 자체를 위해서 걸어온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위해서 걸어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한민국의 운명을 내 운명으로 느끼고 각자가 나라를 책임지려는 국민이 될 때 그 국민은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국민이 오늘날 대한민국이 갈망하는 국민입니다.
그러나 천주주의라는 엄청난 내용을 중심삼고 볼 때 대한민국이 이 사조를 넘어서 승리했다 하더라도 그 승리는 아직 과정적인 승리이기 때문에 단결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다시 단결할 것을 제창할 수 있고 긴장감을 가지고 결의하게 할 수 있는 주의가 있다면 그 주의는 틀림없이 세계로 웅장하게 달려갈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한민국이 필요로 하는 것은 세계를 찾는 것입니다.
세계가 필요로 하는 것은 천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늘땅, 온 피조 만물에 대하여 인간의 절대적인 가치와 자주성을 복귀하는 것입니다. 천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대표적인 왕자가 되고 왕녀와 같이 내일의 희망의 꽃을 피워내야 하는 것입니다. 이 꽃의 가시가 되고 여기에 반대되는 모든 요소를 제거해 놓고, 내가 승리를 찬양하고 전체가 찬양할 수 있는 날, 전체와 일심동체가 되어 그 환경에서 영광을 찬양할 수 있는 날이 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제 자신을 위해서 대가를 치러야 됩니다. 치렀습니까? 치렀다면 얼마나 가치있는 것입니까? 죽음의 칼이 천대, 만대 가중하여 가해지더라도 참된 모습을 드러내야 했던 그러한 가치 앞에는 어떻게 해야 되지요? 죽음의 교차로가 정면으로 내 앞에 닥쳐올 때는 피하려는 생각을 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입니다. 그것은 자동적인 작용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세계를 추구하는 입장에서, 그런 것을 발판으로 삼을 수 있는, 자아의 주관성을 지닌, 끈기있는 자기 자체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 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영원히 남아질 수 있는 참은 둘이 아닙니다. 하나입니다. 개인의 참된 기준은 하나인 것입니다. (테이프가 끊김으로 중략)
그 자리를 바라보고 자기 뜻에 비하여 아버지의 뜻이 큰 것을 느끼고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하면서 아버지 뜻대로 대가를 치렀을 때 거기서 내가 출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지시게 된 십자가를 기쁨으로 소화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예수가 기뻐 따라줘야만 새로운 역사가 밟아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 수 있는 엄숙한 자리, 그럴 수 있는 참된 인간의 모습, 그럴 수 있는 참의 대가를 지불한 절대적인 곳으로 돌아서기 위하여 몸부림치던 예수님은 절대권내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절대권내에는 들어가지 못했더라도 그 뜻과 그가 남긴 사상은 절대적인 것으로서 상대적인 이 환경을 수습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 사랑을 중심삼아 가지고 오늘날 기독교는 세계의 문화를 창건하였습니다. 복귀섭리의 외적인 환경을 마련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 내용의 가치는 누가 결정했느냐? 예수가 결정했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생명을 누구에게 맡기고 싶어요? 여러분의 생명을 누구한테 맡기고 대신 살아달라고 하고 싶으냐 말입니다. 그렇게는 하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절대로 그러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10년이면 10년동안 통일교회를 중심삼고 나왔다 할진대 자기 자신이 어떠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참된 자기 자신을 발견해 놓고 대가를 치러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탕감을 치렀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손들어 보십시오. 이 대가를 치르지 않고서는 못 가는 것입니다. 길이 생기지 않습니다.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야 할 탕감길, 7년노정에서의 대가를 치르고 나서야 길이 생기는 것입니다. 통일의 길은 그런 대가를 치르고 나서야 길이 생기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운 기독교의 새로운 복음은 그런 대가를 치른 후에 생겨난 것입니다.
그러면 대가를 누가 치렀느냐? 여러분이 치렀느냐? 아닙니다. 하늘이 치렀고 개척자들이 치른 것입니다. 그것은 못 치렀으면 생애와 더불어, 죽음과 더불어 절대적인 심복의 몸으로 보조를 맞추어서 그 고빗길을 넘어가야 됩니다. 만일 병이 나서 못 가게 되면 다른 사람에게 업혀서라도 가야 됩니다. 알겠어요? 업혀서 가려면 절대적인 위치에서 절대적으로 순종해야 되는 것입니다. 절대적으로 붙어가야 됩니다. `나는 생명이 없습니다' 하는 마음으로 생명 없는 자의 비참한 마음을 느끼며 생명 있는, 보람있는 그 자체를 추구하는 마음으로 가야 합니다. 자기의 위신과 체면을 완전히 몰락시키고도 남을 수 있는 그러한 기준이나마 되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기준을 갖추어 대가를 치르려고 여러분은 얼마나 몸부림쳤습니까?
그 거리가 멀어요, 가까와요? 멀다면 얼마나 되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늘의 법도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후손인 우리들은 아무리 몸부림치더라도 땅끝에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우리 뜻! 좋다는 것입니다. 그 뜻을 대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이 `뜻!' 할 때 여기에는 하늘이 맨 밑판이 되어 있고, 그 위에 스승이 몸부림치며 쌓아올린 탕감의 조건이 중심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동적으로 우리의 뜻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한 터전 위에 섰습니까? 그 위에 서서 뜻이라는 말을 써야 하는 거예요. 그 위에 서지 않고 `우리의 뜻!'이라는 말씀을 쓴다는 것은 위험 천만이에요. `우리 뜻'이 오히려 그들을 심판할 것입니다.
태양이 올라오면 그늘이 집니다. 그러나 오를 때에는 그늘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태양이 좋다고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안팎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태양을 맞이할 수 있는 자리는 그 누구도 들어올 수 없습니다. 싸움의 행로를 거치지 않고는 맞을 수 없는 것입니다. 먼저 맞을 수 있다면 누구나 다 원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전부다 일등하겠다고 해서 모두가 일등이 될 수 있습니까? 일등은 하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하나는 사탄이 건드릴 수 있는 하나이기 때문에 사탄을 부정할 수 있는 자리에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늘은 하나밖에 없는 것입니다.
치러야 할 탕감의 길! 역사가 이 탕감노정에서 비틀거렸고, 수많은 민족이 당해 왔고, 수많은 선지선열들이 잡혀갔고, 이 시대도 여기에서 쓰러지고 있는 이러한 상처를 응시하는 순간이 여러분 앞에 없어 가지고는 이 길을 갈 수 없는 것입니다. 길을 모색하지 않고는 갈 수 없습니다.
모색하는 데는 나부터 해야 되는 것입니다. 내 개인의 가치를 하늘 앞에 직접 주장하고 싶은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남자면 남자로서의 자기 자신을 당당하게 주장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렇지요? 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남자와 여자를 중심삼고 국가면 국가 전체 앞에서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는 가정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판국을 승리해서 넘어야 할 우리의 가정들은 가정 자체로서 구속되어 살 것이 아니라 민족을 구원할 수 있는 그러한 자격을 갖추고 기쁨을 모색할 수 있는 가정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지 못하는 것을 언제 어디서든지 할 수 있는 가정이 되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통일교회의 가정들은 출동합시다! 가정이 출동해야 되겠지요? 애기를 업고서라도 가겠다고 발버둥치는 모습이 진정한 통일교회인의 모습입니다. 오늘날 세계의 역사상에는 그러한 가정들이 없는 것입니다. 가정에 있어서 어려운 환경을 박차고 나갈 때에 그래도 남자는 쉬운 것입니다. 부인들이 애기를 업고 뜻의 길을 가겠다고 하는 것을 볼 때, 통일교회는 절대 망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을 엿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이것이 우리 통일교회의 자랑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참된 개인으로서 치른 대가가 허술하고 부족하였다면 가정을 통해 치를 수 있는 대가 앞에는 설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가정을 통해서 대가를 치르는 데에 있어서 진실되지 못하였다면 종족이 대가를 치르는 데 있어서 진심으로 탕감의 한때를 갖게 되더라도 그 가정은 구원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개인이 탕감되지 못하면 가정이 탕감되지 못하고 종족이 탕감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민족이 국가 앞에 드릴 수 있는 제물된 탕감의 한 때가 찾아왔을 때, 종족 전체가 가담하여서 민족 앞에 탕감의 내용을 진실하게 치른다면, 종족 전체가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승리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믿는 것입니다. 종교를 믿는 것입니다. 종교는 민족적이요 국가적인 기준을 중심삼고 탕감하기 때문에 종교를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때에 탕감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역사시대에 있어서 종교가 탕감하여 닦아 놓은 기반 위에 서서 내가 완전히 믿고 일체가 되면 나는 개인 탕감의 운명을 벗어날 수 있고, 가정과 종족 탕감의 운명도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적이면서도 외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인간들은 종교를 믿어 왔고, 종교를 통해서 진실을 배웠던 것입니다.
어제도 길을 가던 어떤 사람이 하는 말이 종교를 밑거름으로 해서 출세한 사람은 통일교회 문 선생밖에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통일교회를 대할 자는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종교인들은 다 망했는데 통일교회 믿고 있는 사람들 보면 망할 듯이 비틀거리고 혼자 몸으로 거지처럼 떠돌더니 그래도 이제는 가정을 두고 아들딸 낳고 살고 있고, 그렇게 떠돌던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볼 때 남부럽지 않게 살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통일교회 사람들은 참 별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볼 때에 우리 가는 길이 희망이 있는 길입니다.
탕감은 누구나 싫어합니다. 그렇지요? 그래서 제물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제물이 역사시대를 벗어나서는 나와 하등의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역사와 더불어 흘러가 버리는 것입니다. 내 생명과 더불어, 내재적인 자아와 실체적인 자아의 뼛골 속에, 골수에 사무치게끔 현실화될 때에 그 제물은 나와 상관이 있는 것입니다. 제물이 태어난 역사는 나에게서부터 다시 확인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러한 것을 제시할 수 있는 통일교회가 되어야 됩니다. 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닌것 같지만 역사를 대표해서 귀한 내용을 제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우선은 여기에 감사하고 받아들이자는 것입니다. 알겠지요?
이러한 탕감의 대가를 나 자신부터 치러야 되겠습니다. 개인이면 개인에서 치러야 되겠고, 부부면 부부에서 치러야 되겠습니다. 부부가 치러야 할 탕감의 내용, 그 길은 어디냐? 종족을 위해서 희생하라는 겁니다. 김씨면 김씨 문중을 위해서 고스란히 희생하라는 겁니다. 그리고 김씨 종족은 이 대한민국을 위해서 희생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세계는 반대로 되어 있습니다. 김원필이를 대통령시키려면 문제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김원필이는 대통령이 되기 전에 이 국민을 전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대통령은 자연적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래요, 안 그래요? 「그렇습니다」 그렇게 되어 있지요? 통일교회는 이것이 다릅니다.
통일교회는 세계적인 영광의 한날을 차지하겠다고 손들고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영광의 한날을 맞기 위해서는 세계의 밑창에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암을 치료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의사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암에 걸린 그 사람은 그 의사의 무릎 앞에 모든 재산과 권위를 다 털어 놓고 굴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나'라는 생명이 거룩하고 귀한 것임을 알았습니다. 따라서 내가 요동치면 그 여파가 어디에 가서 부딪칠 것이냐 하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긴장된 사회가 풀어지고, 좌우의 물결이 격동하다가 자신하여 후퇴하게 되고 고요한 완충지대가 세계 앞에, 후손들 앞에 나타날 때 통일교회는 어떠한 파문을 던질 것이냐? 어떤 바위를 던질 것이냐? 어떤 모래알을 던질 것이냐? 어떠한 사람이 되어 어떠한 가정과 어떠한 종족, 어떠한 민족을 대신할 것이냐? 나는 통일교회를 지도하는 스승으로서 거기에 대해서 이러한 파문의 요인을 남겨야 되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통일의 남아면 남아로서, 여자면 여자로서의 사는 보람을 느껴야 되는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합하여 가정을 이루었을 때 보람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리는 역사 전 이상의 자리요, 역사 후 이상의 자리이기 때문에 우리는 지상에 살지만 지상천국에서 사는 것입니다. 천국은 역사 전에 있었던 것이요, 역사 이후에도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자아를 찾기 위해서는 충분한 대가의 탕감을 치러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감각을 총합할 수 있는 세포와 신경이 있습니다. 때문에 세포와 신경이 일치될 수 있는 그 순간은 역사를 대신하여 내가 대가를 치를 수 있는 보람된 순간이요, 보람된 자리인 것입니다. 그러한 자리에서 대가를 치룰 수 있는 보람된 사나이요, 아낙네라는 것을 자각하게 될 때에 그 가는 길이 얼마나 엄숙하겠습니까? 숨을 죽이고 가야 하는 그런 길이요, 다칠세라 상할세라 조심스럽게 가야 할 길이며, 거룩한 그 자체로서 영원히 남아질 수 있는 그러한 길입니다. 그러한 고요하고도 엄숙한 자리에서 꽃과 같이 피어날 수 있는 모습이 되어 일시에 반응을 일으킬 수 있는, 향기를 풍길 수 있는 아름다움의 근원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하늘이 모든 존재의식을 잊어버리고 이 자리에 스며들 수 있고 가치가 결합할 수 있는 그러한 자리가 어떠한 자리일 것이냐? 여러분이 생애를 거쳐서 가야 할 자리입니다. 그러한 자리는 내 생명을 부끄럽게 여기며 내 존재의 기원을 최고의 중심으로 삼는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철저히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경지에 들어가야 합니다. 가정을 안고 그런 경지에 들어가야 하고, 종족을 안고 그런 경지에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대신하는 제사장직은 늘 역경을 헤치며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전통적인 사상을 엄숙한 자리에서 남기기 위해서 개인적인 제사장의 법도로부터 가정적인 제사장의 법도, 종족, 민족, 국가, 세계적인 제사장의 법도를 남기려고 하였지만 다 무너져 버렸기 때문에 이것을 다시 수습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통일교인들의 사명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가 하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이 무엇을 주고 받을 때에도 자기의 생명을 걸고 생명을 팔고 사는 측면에서 생각하십시오. 그렇게 생각하면 심각하지요? 그런 심정을 가지고 가야 합니다. 이런 심각한 자리에서 `하나님이여, 당신이 자리잡고 있는 곳이 바로 이러한 자리가 아닙니까? 나는 그 자리를 향해서 진격 하겠습니다'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그런 점에서 축복가정 부인들이 애기를 업고 전도 나가는 것을 볼 때에 그런 마음을 가지고 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할 때는 이 자리에서 그들을 위해 이런 내정적인 심정을 가지고 기도해 주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불쌍한 사람이 아닙니다. 아무리 굶고 아무리 추워도 이 뜻을 두고 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제는 얼어 죽고 굶어 죽더라도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을 정복해야 됩니다. 만약 죽음이라는 결과가 생긴다 하더라도 여러분의 죽음은 영원히 살아 있을 것입니다. 인간이 이러한 자리에서 축복받으며 갈 수 있다면 행복 중에서도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죽는 자리에서 지켜 줄 수 있고 죽고 나서 느낄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우리는 그 길을 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엄숙한 탕감의 내용을 지니고 여러분이 앞으로 남겨야 할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남편이면 남편으로서 아내 앞에, 아내면 아내로서 남편 앞에 참된 길을 보여 주어야 되고, 부모면 부모로서 아들딸 앞에, 후손 앞에, 종족 앞에 이렇게 가는 것이 인간으로서 가야 할 참된 길이라는 것을 보여 주어야 됩니다. 그 길이 나타날 때까지는 무한한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가야 할 운명의 길에서 탕감의 내용을 제시하지 않고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남아지지 않는다는 것을 여러분이 자각해야 됩니다. 이 자각은 세계를 찾는 것보다도 더 가치있는 것입니다. 그 자각된 자체를 가지고 하늘 앞에 엄숙히 나서는 그 자리는 제사장의 직을 대표하고 세상을 대신할 수 있는 엄숙한 자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들이라는 칭호를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아들된 권위와 딸된 권위로서 세계를 바라보고 탕감의 내용을 제시하기 위해 몸부림쳐야 됩니다. 그 상처가 크면 클수록 하늘이 만져줄 수 있는 상처가 되는 것이요, 그 슬픔이 크면 클수록 아버지의 슬픔에 동참할 수 있는 슬픔이 되는 것입니다. 역사를 넘어서서 굽이칠 수 있는 내용이 우리 앞에 제시되었다는 이 사실은 천주사적인 사건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직시하면서 이것을 처리하는 책임을 짊어졌다는 거룩한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또한 선조들이 머리 숙이고 바라보는 가운데 역사적인 심정을 총결합시킨 자리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해야 하겠습니다. 그 자리만이 우리가 탕감을 제시할 수 있는 자리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시겠지요?
아버님, 숱한 역사노정을 대신하여 찾아오시던 아버지의 사연을 생각하게 될 때, 그래도 말이라도 할 수 있는 이 자리가 복된 자리인 것을 알고 있사옵나이다. 당신의 자녀들을 사방에 벌여 놓은 장본인, 그것을 책임진 장본인으로서의 내 자신을 생각하게 되옵니다.
오늘날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하늘이 치러야 할 대가가 인연되어진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그들이 대가를 치렀다 할 수 있는 눈물의 교차로가, 죽음의 교차로가 먼 역사 위에 남아졌다고 하늘이 인정하지 않으면 하늘 앞에 남아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옵니다. 그러므로 저희들은 언제나 최고의 눈물의 자리를 피할 수 없사오며 언제나 긴장하고, 언제나 긴박하고, 언제나 처절하고, 언제든지 간절하고, 언제나 몸부림치는 자리에 있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생각하게 되옵니다.
이러한 벗어날래야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길에, 이 소용돌이의 와중에 내가 서 있는 것이 불행인 줄 알았으나 아버지가 기뻐할 수 있는 자리요, 아버지와 관계를 맺고 직시할 수 있는 자리라는 걸 생각할 때, 무한히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어야 하겠습니다. 가야 할 탕감의 길은 원한의 길이며 아직도 슬픔과 죽음의 대가를 요구하고 있는 길입니다. 여기에서 그 누구의 신세도 지지 않았고 자주적인 입장에서 대가를 치르며 왔노라고 몸부림치는 무리, 그러한 통일의 역군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런 자리에서만이 이 민족 앞에 남아지게 될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옵니다. 이 세계 앞에 만민들 앞에 남아지게 될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옵나이다. 그러나 저희는 자기만이 남아지는 것을 자랑할 수 없사옵나이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늘을 업고 나가야 되겠고, 스승을 업고 나가야 되겠고, 역사를 업고 나가야 되겠고, 시대를 업고 나가야 되겠고, 미래를 업고 나가야 되겠사옵니다.
그러한 순간이 낙원에 갈 수 있는 결판을 짓고 운명을 다짐하는 순간인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여기에 참된 모습, 진실된 모습으로 나타나 진실된 결과를 추구하게 해주시고, 제물된 모습 그 자체로 변화되어 자신의 실체를 아버지 앞에 돌려드릴 수 있게 되기를 그리워하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 전국에 널려 이 뜻을 따라오고 있고, 혹은 개척자의 길에 나서서 전도하고 있는 자녀들이 처한 자리가 죽는 자리, 몰리는 자리라 하더라도 낙망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늘이 기필코 여기에 역사하실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당신의 아들딸들도 자기가 처한 환경에서 탕감의 내용을 찾게 해주시고, 탕감의 모든 재료를 수습하기 위해 생명을 바쳐 싸울 수 있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또한 오늘 이 아침에 각자의 마음속 깊이 새로운 자각과 더불어 새로운 인연을 갖추어 미래상을 대신하고 나서는 아들과 딸의 모습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자기가 간 길을 후대 앞에 남길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바라오며, 빚지고 신세진 그 마음을 후손 앞에 남겨 주는 선조들이 되지 말게 하여주시옵소서.
그럴 수 있는 길을 가려 가기 위해서 가정들이 헤쳐 나갔사오니, 지금까지의 잘못을 용납받을 수 있고 하늘의 동정을 받을 조건을 남길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옵니다.
남기신 뜻과 더불어, 형제들의 충성과 더불어 아버지께서 기뻐할 수 있는 한 길이 나타나기를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통일교회는 지금까지 가정구원의 목적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축복가정은 통일교회의 중심입니다.
여러분이 다 알다시피 1960년부터 1967년까지는 제1차 7년노정 기간이고, 1968년부터 1974년까지는 제2차 7년노정 기간입니다. 이 7년노정은 모두가 다 가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가정의 기준을 세울 수 없습니다. 아벨도 가인을 복귀시키지 못하고는 복귀될 수 없는 것입니다.
1970년대는 아벨의 권위를 가지고 나타나야 할 터이니 통일의 기반을 세울 때요, 1980년대의 8수는 재출발 수이니 전세계에 통일의 나팔소리를 울리고 나설 때입니다.
한국이 복받는다고 하는 것은, 한국에 누가 있었더냐?
축복받는 데 있어서도 3년노정은 꼭 필요합니다. 1968, 1969, 1970년 3년을 넘어갈 때까지 이것을 결판해야 합니다.
효진(孝進)이는 효도해야 하고, 흥진(興進)이는 흥해야 하고, 현진(顯進)이는 나타나야 합니다.
1960년대까지는 교회의 기반을 닦는 때입니다.
가인에게 나누어 주고 받아야 합니다.
타락은 장성기 완성기준 이하이고 축복은 장성기 완성기준 이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축복은 사탄과 관계가 없습니다. 따라서 사탄이 반대할 수 없고 침범할 수 없습니다.
가정 천국을 위한 민족 해방을 해야 하겠기에 축복가정 부인들을 동원시켰습니다. 1970년 7월까지 중대한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1974년 제2차 7년 노정의 끝까지 가 봐야 합니다. 동원되지 않은 것이 한이 될 것입니다.
①우주주관 바라기 전에 자아주관 완성하라.
②문의하고 행하라.
③명령에 의해서 행동하라.
①믿음을 주시옵소서.(뜻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일이라도 할 수 있는 믿음을)
③지혜를 주시옵소서.
하늘을 위해 정성들이고 가는 사람은 망하지 않습니다.
가정이 민족을, 국가를, 세계를 사랑했다는 기준 위에 서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이 여러분의 갈 길을 가게 하기 위해서 밤낮 여러분을 모아 놓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박봉식 할머니의 간증이 있었음)
여러분이 교회를 위해서 일한다고 꿈에도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는 이미 여러분을 위해서 95퍼센트 일해 왔습니다. 교회가 여러분을 위해 희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제일 추운 날과 제일 더운날 전도함으로써 탕감해야 합니다.
정성의 도수도 채우지 못하고 회개의 조건도 세우지 못하고서 물질 축복을 해달라고 하는가? 그것이 차면 축복은 다 해주게 되어 있습니다.
제물은 존재의식이 없습니다.
선생님의 명령 때문에 가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가야 할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생님이 명령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동정심이 여러분에게서 떠날까봐 두렵습니다. 하나님의 동정을 받을 수 있는 자리에 있으면 절대 안 망합니다.
사위기대를 못 이루면 지상천국과 하등의 관계가 없습니다. 지상에서 천국생활을 하지 못하고는 천상천국에 못 가는 것입니다.
3도(道) 이상, 3군(郡) 이상, 3면(面) 이상을 거쳐가야 합니다. (뜻적으로)
뜻을 위해서 남부여대(南負女戴)하여 천리길을 걸어서 고개를 넘어가는 것은, 비록 밥을 얻어먹으면서 갈지라도 멋진 일입니다.
앞으로 얼마 안 가서 여러분의 자녀들이 `엄마 아빠는 그때 무엇을 했어요? 훌륭한 일 했어요?' 하고 물을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우리 한번 거기에 가 보자' 하고서 자녀들을 데리고 옛 전도지를 찾아가서 `그때 엄마는 너를 안고 여기에 앉고, 아빠는 저기에 앉으셨다. 그리고 저기 저 집에서 밥을 얻어 먹으며 뜻을 전했단다. 그래서 이렇게 복을 받게 되었지, 그때 엄마 아빠를 반대한 집은 저렇게 살고 도와준 집은 이렇게 산단다' 하고 교훈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뜻을 위하다가 상처를 입은 것은 후일까지 자신에게 교육이 되고 후손에게도 훌륭한 교육이 됩니다.
이제 여러분은 옛날 일선 지도지로 환고향할지어다! 그곳에서 선생님과 만납시다.
아버님, 오늘은 1960년대의 마지막 안식일이옵나이다.
아버지께서 수많은 민족을 넘고 넘어 이 삼천리 반도와 한민족을 찾아오셔서 수난의 노정을 걸으신 60년대의 서글픈 역사가 지나가려 하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많은 자녀들이 거룩한 안식일들을 보냈사옵니다. 이제 당신의 무한한 사랑과 자비의 은사를 마음으로 그리며, 복귀의 행로를 개척해온 이 60년대의 마지막 안식일을 보내야만 되겠습니다.
이 기간에 저희들은 많고 많은 수난을 겪어 왔사옵니다. 복귀의 역로를 저희들이 더듬으면서 하루같이 승리의 표준만을 향하여 전진해 나오던 60년대가 지나가려 하는 이 순간이옵니다. 아버지여, 이 순간에 지난 일들을 회고하시옵고거든, 슬펐던 과거지사는 잊어 주시옵소서. 불쌍한 이민족의 한도 아버지께서 망각해 주시옵소서. 이 민족이 아버지께 범한 모든 그릇된 죄상을 잊어 주시기를 바라옵나이다.
통일의 어린 자녀들이 하늘의 기수로서 이 민족 앞에 등장했을 때, 이 민족은 당신이 사랑하는 이 아들딸을 높이 세워 당신의 지고하심을 찬양하고, 당신의 수고에 마음 모아 경배드려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신 앞에 반기를 들었사옵니다. 이들의 지난날의 과오를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선두에 섰던 어린 자녀들은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외로운 길을 걸어왔습니다.
혹자는 몰리는 자리에서, 혹자는 추방을 당하는 자리에서, 혹자는 영어의 몸이 되는 자리에서도 이 길을 걸어 나왔사오나 그 과정에서 벌어진 가지가지의 사건들이 슬픔과 더불어 추억에 남아져서는 안 될 것을 그들이 느끼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이 민족이 그들에게 잘못한 것이 있으면 용납해 주실 것을 비옵니다. 아벨적인 사명을 감당해 온 통일의 자녀들은 가인편 형제들을 복귀해야 하고, 나아가 가인편 가정과 종족과 민족과 세계를 복귀해야 하는 것이 저희의 운명길임을 알았사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적인 비난의 화살도, 가정에서의 핍박도, 사회의 수난도 응당 받아야 할 것처럼, 저희가 죄가 있는 양 당하는 자리에서 아버지를 묵상하고, 아버지를 부르던 과거지사들…. 아버지의 슬픔과 더불어, 마음의 슬픔과 더불어 저희 통일의 식구들이 이 민족을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마음을 다 풀고, 원수라 하더라도 원수로 대하지 말고 사랑으로 대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알았사옵고, 가인편의 형제로 동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았사옵니다.
요셉이 애급 땅에서 열 한 형제들을 다시 만날 줄이야 그 누구가 알았겠사옵니까? 몰리고 쫓기는 서럽고 외로운 자리에 서더라도 참의 지지자가 되어 참의 편에 서서 최후까지 버티면, 몰고 핍박하던 가인적인 형제들이 틀림없이 굴복한다는 것을 역사를 통해 알았기 때문에 저희들은 장구한 세월을 참고 지내 왔사옵니다.
아버지, 이제 대한민국을 사랑하여 주시옵고, 이 나라 이 민족의 정신 세계를 지도하고 있는 수많은 종교들을 사랑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지금까지 저희들에게 날아온 모든 악의 화살을 꺾어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그들을 원수로 여기지 아니하오니 그들을 용서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아버지의 행로는 선하시오니 선의 결과가 나타나야 할 것을 생각하게 될 때, 그렇기 위해서는 용서와 관용이 본질적으로 나타나야 된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오니, 당신은 선의 본체이시기에, 무한하신 사랑과 관용으로 이 나라의 수많은 종교인들이 통일의 자녀들을 핍박했던 과거지사를 용서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원하옵니다.
그간 통일의 문을 두드렸으나 핍박의 길, 눈물의 역로를 개척하는 도상에서, 위로받을 수 있는 한 사람을 맞지 못하였기 때문에 외로움에 지쳐 떨어져 나간 사람도 있사옵니다. 또한 이 길을 가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지쳐 있는 것도 알고 있사옵니다.
이렇게 떨어져 나가고 있고, 지쳐 있는 것은 저희들의 잘못보다도 갖추어지지 못한 환경으로 말미암아 그러한 입장에 서게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도 거리거리에서, 혹은 처해 있는 자리에서 당신을 향해 머리를 숙이고 용서를 빌고 있을 그들의 모습을 생각할 때, 원한 맺힌 아버지의 심정을 풀어 드리고 싶은 참기 어려운 분한 심정도 있지만, 원수의 자식을 찾아오신 아버지의 긍휼하신 복귀의 길을 생각하면 눈물을 머금고 이들을 다시 축복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이들을 용서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배반하고 배신한 불쌍한 무리들을, 아버지, 용서해 주시고 다시 기억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선하였던 본연의 자식으로서 아름다운 본성, 아버지의 놀라운 본성의 영광을 그리워하는 저희들의 마음에 오직 선만이 반영되고, 선 자체로 화합할 수 있는 진실된 모습이 저희의 몸과 마음에 나타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러한 심정으로 참된 자세를 갖추어 모든 것을 믿고 선만을 추구하는 완전한 실체가 되어 아버지를 부를 수 있는 아들이 되기를 그리워하는 이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원하옵니다.
에덴 동산에 있던 인류의 시조, 아담과 해와의 본성의 모습이 너무나 놀라운 미의 상징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오늘날 타락의 후예로 태어난 추하고 더럽혀진 저희 모습을 얼마나 얼마나 부정하고 싶은지 모르겠사옵니다.
영원한 심정적 인연으로 자녀인 저희와 부자의 인연을 맺고 있는 당신이지만, 머리를 저어 돌이키고 눈을 감고서라도 달리 생각하고 싶었던 사람들이 인류역사에 나타났던 선조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당신의 핏줄을 이어받고 나와야 할 아들딸의 인연을 갖고 있기 때문에 잊을 수 없었던 것이 당신의 사정이었다는 것을 아옵니다.
영계의 탄식권내에 가 있는 수많은 영인들을 해방시켜야 할 책임도 아버지께서 하시기 전에 저희들이 해야 한다는 것을 아옵니다. 저희들이 아버지를 행해서 권고해 드리고 위로해 드리는 효성을 받으시고 한을 푸시옵고, 그들을 해방하시도록 해야 할 엄청난 과제가 저희들 앞에 남아 있다는 것을 확실히 느낄 줄 아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죄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당신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아버지라 부르며 나타날 수 있는 본연의 아름다운 모습이 저희들의 일대에, 혹은 후대에 이땅 위에 나타날 수 있게끔 노력하는 저희들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러기 위해 저희들은 지금까지 해산하는 수난의 역사를 엮어 왔사옵니다. 저희들은 역사적인 새로운 소망과 새로운 인연의 한 순간을 찾아왔사오니, 아버지, 이 시간 저희들을 긍휼히 보시옵소서.
1960년대의 서글펐던 모든 날들을 잊으시옵소서. 오늘 마지막으로 보내는 성일 가운데 불충하였던 모든 지난날들을 용납하시옵고, 찾아오신 당신의 발걸음이 서글픔으로 돌아섰던 것을 다시 돌이키시옵고, 긍휼한 마음을 크게 가지시어 새로운 해와 더불어 저희들을 다시 맞아 주시어서 앞길을 독려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전국에 널려 있는 당신의 자녀들을 기억하여 주시어서 이 시간, 아버지의 뜻과 사랑의 은사 안에 포근히 머물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남아진 복귀의 노정을 향하여 전진할 것을 다짐하는 저희들이 될 수 있도록 하여 주시기를 부탁드리옵니다.
이 해가 복되고, 다음 해가 복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 해의 남은 며칠도 아버지의 뜻과 더불어 저희들을 성별시켜 주시사 그릇된 모든 것을 청산하는 거룩한 시간으로 삼아 주시옵기를 부탁드리면서, 참부모의 성호 받들어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이 땅 위에서 발생하는 사건이다. 혹은 존재하는 존재물에는 원인이 있다면 반드시 결과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한다면 근본으로 파고들어가서 하나님도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지 않겠느냐 하는 문제가 제기될 테니 그 문제는 일단 제외하고, 그 외에 피조된 수많은 존재들을 보면 그 존재들이 엮어져 벌어지는 수많은 사건들은 반드시 시작이 있으면 끝이 맺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인류의 시조도 하나님으로부터 창조함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창조하실 때는 선한 목적을 중심삼아 창조했습니다. 선한 목적을 중심삼고 선한 출발을 한 그 창조의 위업은 선한 결과로 매듭지어져야 했는데 오늘날 우리 인간 세상은 선으로 결과된 세상이 아니요 타락한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다시 말하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선의 목적을 이루어지지 못한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선의 결과를 맺지 못하는 입장에 서게 됨으로 말미암아 선하게 시작한 것이라 하더라도 선의 입장으로 남아질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 세상에서의 최대의 소망은, 창조 위업이 선하게 출발한 것이므로 선한 결말을 어떻게 맺을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의 소망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선의 결과, 선의 목적을 이룰 수 있는 최후의 한 때와 그것을 중심삼은 하나의 존재를 어떻게 완결지을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발생한 수많은 역사적인 사건들도 그것을 성취시키기 위한 사건이요, 그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사건이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과연 인류가 추구하는 최후의 순간이 어떠한 것이냐 하는 문제가 가장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날 인간으로 태어난 한 개체, 여기에는 남성도 있고 여성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의 남성, 하나의 여성으로 태어난 자신을 두고 볼 때, 그 한 개인은 겉으로 보기에는 미미한 존재 같지만 이 존재가 내포하고 있는 내적 가치라는 것은 무한한 것입니다.
누구나 무한한 가치를 차지하고 싶어하는 자리에 있는데, 선의 결과에 도달했다 하는 순간을 맞은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인류 역사상에 있어서 승리한 사람이요, 자랑할 수 있는 개체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역사를 엮어 온 수많은 인간들의 인생행로와 현재 살고 있는 인간들의 생활 가운데에서 승리의 결과, 선의 결과를 한 순간이라도 가졌던 사람이 있다면 그는 역사를 대신해서 말할 수 있고, 이 시대를 대신해서 자랑할 수 있고, 미래를 위한 전통을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과거에 참을 추구하고, 선을 추구해 나왔던 모든 성인 현철들은 생활에서 자기들 나름대로 노력하였는데, 그 중심은 선의 최후의 한 장면을 어떻게 장식할 것이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러한 내용도 모르면서 노력해 나왔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인간들이 선을 바라는 최후의 시간을 정해서 아무리 뛰더라도 그 기준에는 도달할 수 없습니다. 인간을 창조하신 주체요, 절대자이신 하나님을 중심삼고 볼 때, 하나님이 `이런 모습이 최후의 한 존재의 모습이다'라고 자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아무리 인간이 스스로 노력하고 추구한다 하더라도 인간만으로는 그러한 완전한 기준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참다운 인간의 모습이 되기 위해서는 인간만으로 안 되기 때문에 창조주이신 절대자 하나님과 하나의 기준에서 상봉하기 위하여 최후의 순간을 추구해 나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노정을 연결시키기 위한 움직임이 지금까지 우리 인간 생활에 있어서 역사적으로 공헌하여 내려온 종교가 아니겠느냐?
그리하여 하나님과 종교를 통하려는 사람들이 서로 같은 입장에 서서 `최선의 목적은 이것이다'라고 할 수 있는 한 순간을 마련하기 위해서, 숱한 사람들이 희생의 길을 갔고, 숱한 사람들이 제물이 되는 대가를 치르며 엮어 나온 것이 종교의 역사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 역사를 끝맺기 위해서 오늘날 종교인들은 신앙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인류역사 가운데 수많은 종교가 있었고 수많은 종교인들이 있었지만, 그럴 수 있는 자리에서 최선의 결과로 맺어진 한 순간을 맞이한 사람이 있었습니까? 누가 그런 순간을 맞이했습니까?
그러면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말을 한 석가가 그런 순간을 맞이 했어요? 그렇다면 과연 석가가 천상의 본 뜻을 대신한 입장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입장에서, 하나님이 바라던 최후의 선의 자리, 즉 온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자리에서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던가? 이러한 문제를 중심삼고 불교를 보게 되면 거기에는 진정한 의미의 절대적인 신의 존재성이라는 것이 애매하다는 것입니다. 더우기나 하나님이 있다면 그 하나님도 마음을 가졌을 것임에 틀림없는데 불교에는 하나님의 내정적인 심정을 통할 수 있는 내용이 없습니다.
이것을 볼 때, 석가가 한 말도 먼 자리에서, 개인적인 목적을 추구하는 자리에서 그 목적 범위를 중심삼고 한 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공자, 마호메트, 예수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분들이 과연 하나님이 찾아 나오는 결과적인 입장에서 최후의 순간을 장식할 수 있는 선의 실체로 왔던 사람들이냐 할 때에 여기에도 차이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주장한 내용이 선하다지만 같은 자리에서 주장한 것이 아닙니다. 지역이 다르고, 역사적 배경이 다르고, 민족적인 환경이 다른 가운데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들이 제창하는 것도 민족적인 환경을 넘어설 수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이 처한 위치도 전부 다 같지 않고, 또한 같은 위치에서 선한 순간을 맞은 것이 아닙니다. 시대의 차이가 있고 환경의 인연을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들의 위치에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가운데서 누가 그나마 최선의 자리를 역사에 남기었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에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자신을 독생자라 부르고, 하나님을 중심삼고 자기는 신랑이고 인류는 신부라 하고, 하나님을 중심삼고 자기는 형이고 인류는 동생이라고 할 수 있는 내용을 가지고 내정적인 분야를 주장한 종교의 창시자는 예수 이외에는 없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그래도 심정적인 내용을 가지고 역사과정에서 하나님께서 찾아 나오시던 본연의 인간상을 추구해 나왔고, 역사적으로 인류가 추구해 나온 최후의 순간을 장식할 수 있는 하나의 실체를 세워서, 하나님의 공인을 받고 인류를 대표할 수 있는 귀일점을 가진 종교는 기독교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기독교는 하나님의 소원, 인류가 추구하는 소망의 목적을 달성시켜서 평화의 기점을 해결해야 할 것이요, 그러한 하나님의 소망이 있는 한 역사는 기독교를 중심삼고 발전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에 기독교가 명실공히 세계적인 종교가 된 것은, 내적인 면에 있어서 인류역사상의 최대의 선을 중심삼고, 완전한 그 기준에는 못 미쳤다 하더라도 거기에 가까운 입장에서 출발한 것이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전부를 귀결지어 최후의 선한 생활을 장식했느냐 하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또 예수님 자신도 소원을 다 이루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는 순간에 `다 이루었다'고 한 그 말은, 예수님 자신의 수난의 노정에 있어서 끝을 예고하는 것이지 수난을 통하여 찾아야 할 이념의 세계를 다 이루었다고 한 말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는 지금까지 수난의 길을 걸어오고 있는 것입니다. 아직도 수난의 역사를 넘고 넘어 세계적으로 걸어야 할 개척의 노정이 남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고 한 말은 자기 당대의 수난의 길에서 승리를 표방하는 말이지, 그것이 세계 전체나 미래에까지 승리의 터전을 닦았다는 말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신랑이요 너희는 신부라'는 미래의 소원을 남기고 가셨기 때문에 다시 오셔야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소원이 이루어질 수 있는 기준, 그 소원이 열매 맺어야 할 그 시대가 미래의 역사과정에 남아 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러한 미래의 한 때가 인류에게 접근해 올 것입니다. 혹 현세의 우리 30억 인류에게 찾아올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의 운명을 중심삼고 어떤 각도를 맞추고 방향을 갖추어 여러분을 향하여 올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일생에 그것이 찾아와 교차되는 순간, 그 순간을 어떻게 해결짓느냐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인 것입니다.
나라를 구하려는 애국심을 갖고 죽음길을 자처하는 충신보다도 미래에 이루어질 그 나라를 위하여 천운이 찾아오는 한 순간을 붙안고 염려하는 애국자가 있다면, 다시 말해서 비상시를 맞이해 원수의 총칼이 목숨을 노리는 자리에서 생명을 걸고 달려 나가는 용자보다도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자기 정체를 드러내지 않은 은밀한 자리에서 미래의 그 나라를 위한 승리의 한 순간을 고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한 시대의 애국자라기보다는 영원한 애국자로 남아질 수 있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부모에게 효도를 하기 위하여 매일매일 부모의 생각과 일치하는 생활을 하는 사람과 지금 당장에는 효도를 하지 못하지만 나라를 찾을 수 있는 길을 찾아 민족이 바라는 최선을 추구하고 세계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한 순간을 고대하는 사람을 비교하여 볼 때, 지금 당장에는 부모에게 효도를 하지 못하지만 미래에 효도를 하겠다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는 더 필요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종교라는 것은 미래를 추구하는 자리에서 미래의 나라를 위해 충성하는 것이요, 미래의 효성의 터전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나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종교가 추구하는, 충효를 행할 수 있는 미래의 한 순간이란 어느 때인가? 인류가 공히 행복을 노래할 수 있고, 인류가 비로소 소망의 기점을 찬양할 수 있으며, 역사를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기쁨으로 자랑할 수 있는 때입니다. 그 순간을 맞이하기 위해서, 승리를 다짐하기 위해서, 그 한순간에 자기를 온 천지의 중심으로 나타내기 위해서 종교가 나왔던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는 현실의 행복의 터전을 닦아 나오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행복의 터전을 개척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미래의 어떠한 기준에서 일치될 것이냐? 종교는 최후의 선이 결실될 수 있는 그 순간을 바라고 나온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여러분의 생활의 행로를 중심삼고 볼 때, 너나할것없이 전부다 습관적으로 비슷비슷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외적인 면에서는 비슷비슷한 모습이지만, 내적인 모습에 있어서는 천태만상입니다. 즉, 아침에 일어나서 밥 먹고 낮에는 나가 활동하고 저녁이 되면 집으로 돌아오는 이런 외적인 일상생활은 모두가 같지만, 내적인 면에서는 천태만상으로 등급과 차이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그러면 등급과 차이에 있어서 최고의 기준으로서 상위(上位)에 설 수 있는 생활적인 본을 보여 줄 사람들은 누구일 것이냐? 그것이 중요합니다. 외적인 대부분의 사람들은 역사에 떡잎같이 사라지지만, 그런 사람들은 종대의 가지로 남아지겠다는 마음 자세를 가지고 선의 실적을 남기기 위해 순간순간의 생활에서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최고의 기준에 설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볼 때 각 개인 생활에서 세계 30억 인류의 등급이 매겨지고 차이가 벌어져 나간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순간순간에서 승리하여 시간으로 통하고 시간에서 승리하여 하루, 또 이 하루를 통한 한 달, 한 달을 통한 일 년, 일 년을 통한 전생애로 이끌어 갈수 있는 사람이 나왔다 할진대는 이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새로운 세상으로 변해 가는 것입니다. 새로운 선의 결실이 맺어지고 선의 목적을 이루는 시대가 인류역사상에 도래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종교인들은 어떻게 이 목적을 찾아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어떻게 최후의 순간을 맞이할 것이냐고 물어 보면 어떻게 죽느냐 하는 문제를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죽느냐 하는 문제에 앞서서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이냐? 어떻게 역사적인 선의 기준을 중심삼고 그 기준에서 최후를 맞이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즉, 선의 결실의 인연을 가지고 거기서 최후를 맞이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또 그때가 언제일 것이냐 하는 문제가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날 이 세계에는 수많은 국가들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선진국도 있고, 후진국도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지금 선진국이라 자랑해도 영원히 선진국으로 남아질 수는 없는 것이며, 또 후진국이라 하더라도 언제까지나 후진국으로 머물지 않습니다. 역사는 수레바퀴같이 도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수레바퀴처럼 돌아가는 역사의 두 바퀴는 무엇이어야 되느냐? 한 쪽의 바퀴를 하나님이라면, 다른 한 쪽은 사람이어야 됩니다. 만일 하나님만이 돌릴 수 있다면 문제가 됩니다. 하나님만이 돌려서 이루어진 세계가 이처럼 악한 세계라면 하나님이 없다는 결론이 나오게 됩니다. 하나님 혼자서 끌고 가는 세상이라면 악한 세상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악한 세상이 된 것은 하나님과 사람이 축을 중심삼고 하나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축은 하나님과 참된 사람이 맞잡아야만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 축이 찌그러지면 모든 것이 다 찌그러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까지의 역사에 있어서 선의 절대적인 기준이 나오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이냐? 창조의 미를 갖춘 사람, 즉 선의 실적을 갖춘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선의 세계를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이 세상은 악한 세상으로 뒹굴어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세계 인류는 이 악한 세상을 수습하고 이 세상을 선으로써 새로이 회전시킬 지도자를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 정세를 보면 누가 지배해야 할 것 같습니까? 미국도 아니고 소련도 아닙니다. 그러면 민주주의가 지배해야 할 것이냐, 공산주의가 지배해야 할 것이냐? 민주주의나 공산주의같이 어떤 주의를 가진 나라가 지배할 수 없습니다. 그런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민족이 세계를 지배하는 시대도 지나갔습니다. 그렇다면 어떠한 국민이 지배할 수 있을 것이냐? 국민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면 어떠한 가정이 나와서 지배할 것이냐? 가정으로서도 불가능합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나와서 지배할 것이냐? 문제는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인류는 최고의 절망에 빠져 있습니다. 절망의 벼랑에서 서서 생사를 결정해야 할 시점에 와 있는 것입니다. 이 절망의 늪에서 구해 줄 수 있는 참된 지도자는 구세주이기 때문에 종교인들은 미래의 지도자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로 말하면 재림사상입니다.
사람이 `오! 주여 오시옵소서' 하며 주를 기다리는데, 그 주가 와서 무엇을 할 것이냐? 그 주는 천 사람이면 천 사람, 만 사람이면 만 사람을 때려 몰기 위하여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악을 종결짓는 동시에 선의 출발을 위한 하나의 기점을 마련하기 위하여 오시는 것입니다. 그 주는 선으로 왔으면 선의 결실의 순간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리고 악으로 왔던 것은 청산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악이 청산되고 선의 결실이 맺어지는 수확기가 도래해야 합니다. 그러한 시대가 와야 하기 때문에 지금 세계는 그런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입니다.
금년까지의 세계 정세를 바라보면, 이 세계는 공산주의니 민주주의니 하는 주의가 이끌어 나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주의의 사명이 끝났습니다. 비판받을 때입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세계를 이끌어 나갈 수 있는 국가와 민족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이 없다고 하면 절망뿐입니다. 이런 절망 가운데 있는 개체들이 찾는 민족과 나라와 세계는 어떤 것이냐? 그것을 모르면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통일교회가 필요한 것입니다.
절망의 장벽을 헐어 버리고 희망찬 내일의 기수가 되어, 역사과정에 있어서 선의 목적을 추구하기 위한 출발점을 제시하고 미래의 세계 앞에 당당히 나설 수 있는 무리가 나와야 합니다. 이러한 사명을 짊어질 수 있는 무리가 나와 그들이 이 지구상에서 활동을 벌여야 합니다.
그리하여 선의 결실을 맺는 개인이 되고, 선의 결실을 맺는 가정, 선의 결실을 맺는 종족과 민족이 되고, 선의 결실을 맺는 국가가 된다고 한다면 그 국가는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그 국가의 이념은 개인의 이념이 될 수 있고, 가정의 이념이 될 수 있고, 세계 만민이 이념이 될 수 있으며, 세계 만민이 공인하는 이념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수 있는 내용을 가진 주의면 주의, 사상이면 사상, 혹은 운동이면 운동이라는 것은 단순히 인간만을 위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앞에서 말한 것과 마찬가지로 절대자의 선의 기준, 절대자의 내적인 기준을 총합할 수 있는 사연을 중심삼고 이루어진 종교를 중심삼은 이념입니다. 그런 이념이 최후의 이념이 아닐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점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앞으로 세계를 수습할 수 있는 주의는 어떤 주의이며, 또 그러한 사람들은 어떠한 사람들이겠습니까? 어떠한 찬란한 문화를 꽃피울 수 있는 기반을 가진 민족이 아닙니다. 물질문명의 만능을 주장하는 20세기는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저물어 가는 거기에는 석양이 깃든다는 것입니다. 석양이 깃들게 되면 어둠이 올 것이요, 어둠이 오게 되면 다음날의 광명한 새 아침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해야 됩니다.
현대 문명이 저물어가는 이 시점에 있어서는 이 밤 시간을 어떻게 넘길 것이냐 하는 문제가 중요합니다. 일정한 방향도 없이 어둠 속에서 우왕좌왕하다가 쓰러지는 인류가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방향을 뚜렷이 정하여 자연의 법도에 따라 정해진 궤도를 순행해야 광명한 아침을 맞을 수 있지 자기 자신이 궤도 자체가 될 수 있고, 궤도를 개척할 수 있다고 자처하는 사람은 모두다 파탄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의 방향은 오늘날 세상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방향과는 다른 것입니다. 지금 세상에는 밤으로 내려가는 무리들이 있는가 하면, 밤을 지나서 아침을 찾아가는 무리가 있습니다. 이때 밤으로 내려가는 무리와 아침을 찾아 올라가는 무리와는 엄연히 차이점이 있습니다. 아침을 찾아가는 무리는 밤으로 가는 길을 통하지 않고는 아침으로 가는 길을 갈 수 없습니다.
대낮에 있는 무리들은 밤에 있는 무리들을 보고 조롱하지만, 역사는 조롱당하고 내몰린 그들에 의하여 발전되어 나왔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몰리고 쫓김받는 무리들이 세상을 혁명시켜 나왔고, 발전시켜 나왔다는 것입니다.
어두운 밤길을 지나고 자정을 넘어야 광명한 아침을 맞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을 내몰고 쫓았던 무리들은 그들의 길을 망친게 아닙니다. 오히려 밤길을 가는 데 있어서 길을 재촉하여 주고 몰아붙여 주는 공헌을 했을망정 그들이 가는 길을 막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역사는 쫓김받는 무리들로 인해 새롭게 발전을 거듭해 나왔던 것입니다.
여기에 오늘날 종교라는 이름을 가지고 새로운 주의 사상을 고취해서 광명한 새 아침을 맞기 위하여 나서는 무리가 있나니 이들이 한국 땅에서 나타난 통일의 무리들입니다. 이들이 진정으로 새 역사를 펼칠 주인공들이라면 낮이라고 주장하고 아침이라고 주장하는 무리들에게 몰려야 합니다. 그리하여 최후의 광명한 아침에 달했다고 자기 스스로 자랑하는 입장에서야 합니다. 오늘의 복잡한 한국의 정세 가운데 있어서 석양길을 가고 있고, 암흑 가운데에서 몰리는 무리들이 있다면 그들이 바로 통일교회의 무리들입니다.
그러나 몰린다고 해서 산산조각으로 깨져서 흩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몰리면서도 방향을 찾아서 그 고비를 넘어가면 넘는 그 순간이 비로소 암흑과 이별하는 시간이요, 광명과 상봉하는 시간입니다. 그런 한 시간이 인류를 중심삼은 전체 역사 가운데 기필코 있어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대한 민국 정세와 운세를 중심삼고 볼 때, 그러한 단체가 꼭 필요한 것입니다.
밤이라 할 수 있는 최후의 순간, 악과 투쟁하여도 양보하지 않은 최후의 순간, 거기에서 그 위치를 공고화시켜 천지의 모든 심정적 요인을 규합시킬수 있는 하나의 기점, 그것을 하나님께서도 바라시고, 인류도 바라고, 영계의 수많은 영인들도 바라는 것입니다. 그 순간에 한 발자국 옮겨 놓는 과정에서 역사는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분수령이라고 하는 게 있지요? 여러분이 그 분수령을 넘으려해도 경계선을 잘 모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기 같기도 하고, 저기 같기도 하고…. 그와 같이 인간 사이에도 네가 나 같기도 하고, 내가 너 같기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서로간에는 천지 차이가 있습니다. 근원도 다르고 내용도 다르며 방향도 다릅니다.
그 순간을 자기 개인으로 맞는 사람은 위대한 역사적인 인물이 될 것입니다. 또 그 순간을 가정적으로 맞는 가정은 위대한 가정이 될 것이고, 종족적으로 맞는 종족은 위대한 종족이 될 것이며, 민족적으로 맞는 민족은 위대한 민족이 될 것입니다. 또한 그 순간을 어떠한 나라가 맞으면 위대한 나라가 될 것이고, 어떠한 사상이나 주의가 맞는다면 그 사상이나 주의는 위대한 사상이나 주의가 될 것입니다. 그 가치라는 것은 천년사와도 바꿀 수 없는 것이며, 그 순간은 만년 행운의 터전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진정한 순간, 최후의 순간일 것입니다.
그러면 그 역사적인 최후의 순간은 언제이겠습니까? 인류가 그토록 고대하고 꿈꾸며 나오던 소망을 중심삼은 최후의 순간은 언제이겠습니까? 이것을 지지부진 끌고 나가게 된다면 인간의 행복은 격감될 것입니다. 입다가 떨어진 옷과 마찬가지로 필요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세계 정세는 기울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기울어지는 이 역사는 어디까지 기울어질 것이냐? 그리고 인공위성과 같이 기울어지는 역사를 박차고 나설 수 있는 존재가 생겨날 것이냐? 기울어져 가는 역사를 그대로 두면 무한한 무저갱에 떨어져 깨지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하늘로 비약할 수 있는 하나의 움직임이 있으니 그것이 우리가 말하는 통일사상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통일사상으로 기울어지는 역사를 끌어올려야 되겠습니다.
여기에 진정한 선이 있어 그 선의 초점을 잡고 그것을 펼치면 그것은 무한한 범위로 확대되어 갈 것입니다. 선이란 펼치면 무한이지만 묶으면 하나라는 것입니다.
산을 보더라도 그냥 산이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흙이 쌓이고 그 위에 또 흙이 쌓이고, 돌과 바위가 쌓이고 그 위에 또 흙이 쌓여서 높은 산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맨 높은 꼭대기에 무엇이 남느냐? 그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흙과 돌밖에 없습니다. 최고로 높은 꼭대기는 하나의 돌이든가 모래입니다. 그와 같이 인류의 역사도 인간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류가 숱한 수난을 통하여 쌓은 역사의 산꼭대기는 승리적인 결실을 맺은 개인이 되어야 하겠고, 가정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승리적인 결실을 맺은 개인이 나온다면 남자가 먼저 나오겠습니까, 여자가 먼저 나오겠습니까? 여자에게 물어 보면 여자가 먼저 나올 거라고 대답할 것이고, 남자에게 물으면 남자가 먼저 나올 거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런데 대체로 보면 지금까지의 종교에는 여자 도주(道主)가 없었습니다. 성신이 있지만 성신도 신랑되신 예수님이 오신 후에 오신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자가 먼저 나와야 됩니다. 지금까지 기독교 역사를 봐도 전부 다 남자를 찾아 나왔습니다. 참된 남자를 찾아 가지고 참된 여자를 찾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랑 신부입니다. 그러므로 그 누구보다도 하루라도 빨리 참된 신랑 신부가 될 수 있는 순간을 가진 사람들은 귀한 것입니다.
그런 내용으로 우리가 새로운 문화세계의 창건이라는 깃발을 들고 헝클어지고 기울어 가는 역사와 시대 사조 앞에 나섰다는 사실을 볼 때, 이것은 위대한 일입니다. 통일교회의 선생으로서 위대하다고 말하면 자화자찬 한다고 할는지 모르지만 그것은 모르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엄숙하고 지고하고 놀라운 역사적인 순간을 꾸려 나왔습니다. 여기까지 오는 길에는 원수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 원수는 우리를 망하게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우리가 내려가는 밤길에 있으면 미명을 향해 빨리 올라가라고 재촉하는 몰이꾼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새로운 아침의 미명을 바라보는 우리는 그들을 원수시 할 수 없음을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은 쌍수를 들어 찬란한 광명의 햇빛을 맞이할 수 있는 순수한 자기 자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기쁜 마음, 백 퍼센트 화합할 수 있는 본성의 마음만이 꽉차서 맞을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원수라는 원치 않는 흔적을 남겨 가지고 그 아침을 바라보기에는 너무나 애석합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원한을 다 잊고 어떠한 원수라도 다 용서해 주어야 됩니다. 그래야 승리를 찬양할 수 있는 70년대의 찬란한 새 아침을 맞이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제 우리는 역사적인 서글픔 가운데 선 것이 아니라, 이것을 완전히 초월하여 새로운 차원에서 광명한 새 아침을 순수하게 맞을 수 있는 자세를 가져야 되겠습니다. 만약 역사적인 서글픔이 조금이라도 남았거든 청산하여 새로운 희망과 선(善)만으로 가득찰 수 있는 광명의 70년대를 맞이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런 순간을 갖겠다고, 그런 순간을 장식하여야 되겠다고 몸부림치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 우리는 망하는 무리가 아닙니다. 절대 망할 수 없는 무리입니다.
여기에는 희망이 있고 미래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완전한 씨로서 삼을 수 있는 새로운 출발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1960년대와 1970년대가 이런 특별한 차이가 있음을 알고 현실의 슬픔을 딛고 광명한 새 아침을 맞기 위해 노력해야 됩니다. 이런 우리의 생애가 얼마나 값진 것이겠습니까? 오늘날 세계에 널려 있는 모든 통일의 식구들이 이런 마음을 가지고 70년대를 맞는다 할진대 통일교회는 역사시대에 그 누구도 알지 못하였던 단체가 될 게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역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 14:36)"라고 기도한 것을 볼 때, 예수님의 뜻과 아버지의 뜻이 달랐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만을 중심삼은 민족적인 감정을 초월하지 못한 예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이 4천년 동안 수고하시며 준비한 이스라엘 민족의 터전 위에 하나님의 사명을 짊어지고 온 예수님이었지만, 이스라엘 민족을 중심삼은 예수님의 관념과 세계를 중심삼은 하나님의 관념은 차이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광명한 중심이 되겠다고 왔던 예수님의 관념과 세계를 대신할 수 있는 중심존재로 세우려 했던 하나님의 관념과는 차이가 있었던 것입니다.
세계로 가는 길 앞에 있어서 이스라엘 민족이 원수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 원수를 갚고 싶고, 처단하고 싶고, 원한을 풀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세계를 구하기 위해 섭리하시는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원수로 취급해서는 세계로 나가는 길을 트지 못하겠기에 원수를 물리치는 싸움을 하는 것보다 넘어가고자 했습니다. 하나님이 넘어가고자 하는 관용의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예수님도 아버지의 뜻을 따라간다는 입장에서 `저들이 알지 못하기 때문이니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라는 기도를 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는 무엇을 부르짖어야 되느냐? 이 민족을 붙들고, 다가올 미래를 위하여 세계 인류가 가야 할 이념을 부르짖어야 합니다. 그 세계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길이요, 만민이 추구해 온 최후의 승리를 결정할 수 있는 길이기에, 그곳을 향하여 우리는 고생을 무릅쓰고 가야 됩니다.
따라서 지금까지 지나온 역사는 깨끗이 청산해야 됩니다. 그것을 청산하지 못하고는 다가오는 새로운 순간을 맞이하지 못합니다. 다시 말하면 선과 악이 섞여져 얼룩덜룩해서는 안 됩니다. 순결한 선(善)만으로 출발하고 싶은 것이 하나님의 심정이기 때문에 우리는 선 앞에 배치(背馳)되었던 모든 인연을 일체 제거해 버리고 새로운 70년대를 맞아야 되겠습니다. 참다운 선의 순간을 동경하고 추구하며, 과거 역사를 잊고 원수를 용서해 주며 복을 빌어 줄 수 있는 아량을 갖고 70년대를 맞이하길 바라는 바입니다. 아시겠어요? 「예」
아버님, 여기에 서 있는 아들은 지금까지 탕감복귀라는 수난의 길을 걸어 왔습니다. 이 길에 많은 원수가 있었습니다. 피묻은 칼을 들어 가지고 부모를 대신해 치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한 개체를 중심삼고 어이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었겠습니까? 가질 수 없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민족을 대신해서 그럴 수 있고, 뜻을 대신해서 그럴 수 있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엄청나고 거룩한 창조 위업의 선의 그 순간을 추구하는 저희들은, 아버지께서 본래 인간을 지으실 때 그러한 마음을 갖고 지으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선으로만 출발하고 선한 과정을 거치어 선의 결과를 맺기만을 소원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더듬게 될 때에 저희들은 언제나 악하였고, 언제나 속되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거룩하신 아버지의 그 마음 앞에 어려질 수 있는 한 순간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저희들은 오늘날 죄지어 사망의 세계로 가는 무리를 한없이 동정하고 내 모든 선의 대가를 잊어버리더라도, 그들을 다시 살 수 있는 길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 몸부림칠 수 있는 자녀들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이 동절(冬節)에 산지사방하여 있으면서 이 밤도 추운 방에서 잠을 자지 못하고 아버지를 향하여 부르짖는 통일의 자녀들이 있사오니, 아버지, 그들에게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그들이 죄가 있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며, 그들이 민족을 잘못 만났기 때문에 그러는 것도 아니요, 하나님과 조상을 잘못 만났기 때문에 그러는 것도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아버님도 책임이 있고, 우리의 인류 조상도 책임이 있지 않습니까? 하늘과 땅의 책임을 감당하기 위해서 그런 길을 가는 그들을 당신께서 위로해 주셔야 되겠습니다. 그들에게 힘을 주시옵소서. 오늘 이 현실에서만 살다가 사라질 것이 아니라 내일에 소생할 수 있는 운명길을 가고 있다는 이 장엄하고도 엄청난 이 역사적인 사실 앞에 하나의 책임자로서 가고 있다는 사실, 그리하여 역사를 창조하신 하나의 실체로서 남아진다는 사실을 마음 깊이 다짐할 수 있는 자녀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오늘 1960년대의 마지막 안식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렇게 모일 수 있었던 60년대의 시간들을 회고해 보게 될 때, 여기에 참석한 자녀들이 당신을 향하여 얼마나 정성들였습니까? 운명한 독자(獨子)의 모습을 바라보고 애달파하는 아버지의 마음과 어머니의 마음을 저희들이 얼마나 느껴 보았습니까? 아버님께서 그런 때를 수없이 많이 가졌다는 것을 저희들은 잊지 말아야 되겠습니다. 원수의 손아귀에서 이슬과 같이 사라지는 운명길을 간 수많은 자녀들을 바라보시며 얼마나 참고 극복하면서 나왔습니까? 저희들은 그런 심정을 아버지 앞에서 체휼하기 위해 노력해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역사적인 한을 품었지만 이 세상을 용서하시고 다시 품으시려는 아버지, 상처 입은 마음을 원수에게 복수의 손길로 돌리지 않으시고 넓고 크신 아량을 가지고 사랑의 손길로 원수의 자식까지도 품으시려는 당신의 마음이 있는 것을 알게 될 때에, 저희들도 그 뜻을 바라고 그 모습을 따라가겠다고 몸부림쳤으나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60년대의 통일교회의 원수들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그들과 더불어 원수의 자녀들을 축복해 주실 줄 믿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무한한 축복을 약속하는 말씀인 것을 생각하게 되옵니다. 저희들이 놀라고 감사하며 받아들여야 할 말씀임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아버지께서 추구해 나온 선의 순간을 맞기 위한 70년대가 앞으로 3일이 남아 있사옵니다. 그 기간 동안도 더욱 면밀하게 모든 것을 분석 비판하면서 지금까지 저희가 허영과 허심으로 나왔느냐, 참의 모습으로 나왔느냐 하는 것을 반성해야 되겠습니다. 알맹이 있는 모습을 다시 한번 희구하면서 60년대에 부족하였던 것을 조건적인 선한 기준으로 남기고 70년대에 있어서 당신을 의지하고 따라갈 수 있는 모습이라고 발견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60년대의 남아진 날들과 더불어 다가올 70년대 앞에 부끄러운 모습을 면하고, 당신이 손길을 내뻗어 가지고 이름을 불러 줄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겠다고 노력하는 자녀들 되게 허락하여 주옵길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오늘 이 아침, 아버지여, 자녀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청주 지방을 순회하고 돌아오는 길에도 아버지 같이하여 주시옵기를 바라옵고, 모든 사연을 다 아버지께서 맡으시고 주관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모든 말씀을 참부모의 성호 받들어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아버지, 1960년대도 이제 마지막 5분을 남겨 놓고 있습니다. 인간을 창조하신 아버지께서 기나긴 세월 동안 수고의 역사 가운데 복귀의 한 날을 소원하게 된 것이 얼마나 분하고 원통한 일인지 저희들은 아옵니다.
무한한 영광과 존귀와 가치를 지닌 가운데 만민은 당신의 아들딸로 품겨지고, 온 천주 만상은 당신의 영광 세계에서 사랑의 상징이 되고 즐거움의 대상이 되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당신께서는 그 역사적인 한의 조건들을 지금까지 탕감해 오시기에 얼마나 수고하셨사옵니까? 그런 것을 생각하면 저희들은 아버지께 아무것도 아뢸 것이 없사옵니다. 6천년이라는 기나긴 세월 동안 수고하신 아버님께 저희들 엎드려 사죄하오니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이 60년대의 마지막 순간에 그 수고의 결실을 맺고자 하옵나이다.
예수님이 4천년 역사를 해원성사하기 위해서 오셨다가 이 땅 위에서 그뜻을 다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신 이후 2천년 동안 수많은 선지선열들이 수고와 피의 제단을 연결시켜 오늘 이 시간까지 온 것을 알고 있습니다. 또한 기독교의 신앙을 받들고 나온 수많은 당신의 아들딸이 희생된 것도 이때를 위한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여! 이제 영계에 가 있는 수많은 영인들을 기억하여 주시옵고, 타락의 후손으로 태어나 60년대의 고난 가운데 슬픔을 품고 있는 온 인류를 긍휼히 보살펴 주시옵소서. 또한 여기에 모인 자녀들이 60년대에 당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이 있거든, 아버지여,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60년대의 마지막 3분을 남겨 놓고 아버지 앞에 최후의 호소를 하오니 모든 것을 받아 주시옵소서. 무한하신 사랑을 저희들에게 베풀어 주시옵고, 무한하신 자비와 동정의 손길을 저희들에게 펼치시어서 지금까지 아버지의 심정을 안 자들로서의 책임을 감당하지 못한 것을 용납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아버지, 지난날은 완전히 청산해 버리고 70년대를 맞고자 하오니, 새해에는 뜻을 대하여 새로이 나설 수 있는 가벼운 몸과 가벼운 마음을 발견하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어려운 환경을 대신 책임지기로 맹세한 실체로서 뜻을 결실을 맺고자 하오니, 아버지여,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통일교회가 지금까지 나온 것은 아버지의 6천년 역사의 열매요, 2천년 예수 그리스도의 수고의 열매요, 수많은 선지선열들의 희생의 결실이며, 한민족을 대신하여 통일의 아들딸들이 눈물과 피땀을 흘린 대가이옵니다. 아버님의 한을 해원성사시켜 드릴 수 있는 승리의 제단이 통일의 제단이라는 것을 아오니, 아버님이여, 이날까지 통일교단이 민족적으로 잘못한 죄가 있거든 모두 용서하여 주시옵고, 수많은 교역자들과 수많은 교단들이 잘못한 것도 이 시간에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원수를 굴복시키시어서 당신의 자녀로 품으시옵고, 가인을 굴복시키시어서 아벨의 제단을 지키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시간, 이 마지막 순간에 지금까지의 모든 것을 청산하고 70년대를 힘차게 맞이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의 영광과 자비가 길이길이 같이하기를 바라옵니다. 60년대의 마지막 이 순간을 탕감의 조건으로 거두어 주시옵소서. 슬픔을 걷어차고 소망과 행복과 승리가 깃드는 70년대로 넘어서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해방의 자녀로 세우시어 70년대를 맞을 수 있는 특권을 부여해 주시옵소서. (복창)
승리와 영광이 새로운 해에 저희들과 같이하게 하여 주시옵기를 참부모의 이름으로 아뢰옵나이다. (복창)
(지금은 12시예요. 내가 하는 대로 하세요. 지금까지 기도한 것은 60년대 말의 기도이고, 이제 새로운 70년대를 맞이하는 기도이니 선생님이 하는 대로 따라 하세요)
영광의 승리가 깃드는 70년대가 힘차게 저희들을 맞이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복창)
하나님이 택한 아들딸의 권위를 가지고 이 70년대에 모든 것을 바쳐 봉헌하기를 맹세하나이다. (복창)
아버지! 이제 저희들과 영원히 영원히 만날 수 없는 60년대를 보냈사옵나이다. 저희들은 당신이 1960년대를 탕감의 시대로 엮어 나오시기에 얼마나 많은 슬픔속에서 극복하여 나오셨는지 이제야 알았사옵니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이 타락할 때 원통해 하신 아버지의 심정을 저희들은 알았사옵니다. 그리고 그것을 복귀하기 위하여 걸으신 아버지의 4천년 수고의 고빗길도 저희들은 알았사옵니다. 또한, 이 땅 위의 이스라엘 민족앞에 회생의 횃불, 소망의 횃불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아버지의 깊으신 마음을 알았사옵니다. 복귀의 한 날을 고대하시고 소망 가운데 예수를 보내셨지만 민족이 반대하고 환경이 환영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그가 십자가에서 죽어 가던 모습을 바라보셔야 했던 아버지의 원통한 심정도 저희들은 알았사옵니다.
그날부터 이어온 피의 역사는 지금까지 이 지구성의 역사를 물들여 왔고, 인류의 마음에 그 흔적을 남기고 갔사옵니다. 그리하여 역사과정에 왔다 간 수많은 선지선열과 순교 열사들은 영계에서 승리의 한 날과 해원 성사의 한날을 고대하고 있사온데, 그들이 고대하는 소망의 때가 바로 지금 이 시대, 이 순간이라는 것을 깨닫고, 이 장엄하고 엄청난 역사적인 시대에 태어난 것을 진정으로 감사해야 되겠사옵니다. 그리하여 엄숙한 사명감에 불타서 아버지께 충효의 도리를 다하겠다고 다짐하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되어야 되겠사옵니다.
아버님! 이 시간을 맞이하게 해주신 것 황공하옵니다. 또한 50성상을 지켜 주신 것 감사하옵고, 수십번 죽음의 갈림길에서 지켜 주신것 감사하옵니다. 왜정 때 원수들의 모진 채찍 아래서도 아버지께서는 저를 지켜 주셨사옵고, 공산 마수의 치하에서 죽음의 경지에 있을 때도 아버지께서는 저를 구해 주셨사옵니다. 그리고 이남으로 내려와서도 어려운 환경에 있는 저희들을 아버지께서 거두어 길러 주셨사옵니다. 참으로 감사하옵니다.
이제 통일교단은 지구성에서 사라지지 않을 수 있는 기반이 닦여져 있습니다. 이것을 위해서 그 동안 수고한 자녀들이 많사옵니다. 그 누구와도 사정을 나를 수 없는 역사적인 억울한 심정을 품고 삼천만 민족과 이 나라 이 땅을 중심삼고 세계의 갈 길을 위해서 지금까지 많은 것을 극복해 나왔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저희들을 지켜 주신 아버지께서는 얼마나 얼마나 수고하셨는지요?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옵니다.
저희들, 연약한 손길들을 모두 모았사옵고 연약한 몸들을 당신 앞에 구부렸사오니, 새로이 분부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하늘의 사명을 짊어지고 남한 각지에 흩어졌던 60년대를 기억하면서 70년대에는 이 민족을 대신하여 저희 교단 전체가 다시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알았사오니, 이제야말로 저희들이 일해야 할 때가 온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모든 것을 아버지께 바치고 주저없이 이 나라와 이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뛰어 나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랜 세월 동안 기다리던 때가 저희 앞에 다가오고 있사옵나이다. 지루한 역사적인 슬픔의 고비를 넘으면서 참아 나온 그 분함을 풀 수 있는 때가 왔사옵니다. 아버지, 이 민족을 통하여 흡족히 해원성사하시옵고, 이나라를 통하여 소원성취하시옵소서.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만국의 중심되신 것을 그 권위로 나타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70년대의 새 아침을 맞이하여 남한에 널려 있는 당신의 자녀들과 이곳을 향하여 머리를 조아리고 마음 모아 기도하는 무리 위에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그들은 외로운 무리이옵니다. 그들은 나라와 더불어 세계를 이끌고 천상세계까지 가야 할 무리이며, 천주복귀라는 사명을 책임지고 완수하여야 할 엄청난 책임을 짊어진 산 제물, 그 실체들인 것을 기억하시어서 새해의 이 한 순간, 그들에게 만복을 베풀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지금까지 교회를 위하여 싸우는 역사노정에서 지켜 주신 아버지의 수고에 감사드리옵니다. 이제 이 나라와 이 세계를 향하여 또다시 출발하오니 저희들의 행로를 다시 한 번 지켜 주셔야 되겠사옵니다. 또 다시 아버지께 의지할 수밖에 없고 아버지의 권고를 고대할 수밖에 없는 저희들을 용납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통일의 기치를 높이 들고 아시아 일각에서부터 온 세계까지 뻗쳐 나갈 수 있는 시대적인 환경을 당신이 저희 앞에 마련해 주셨사오니, 이제 저희들은 가야 되겠사옵니다. 모든 것을 다 바치고 가야 되겠사옵니다. 새로운 결의와 각오를 한 실체로서 아버지께 바쳐지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지금 이런 동절기에도 나가서 싸우고 있는 당신의 자녀들이 있사옵니다. 그들을 60년대에 이어서 70년대에도 새로운 역군으로 인정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하늘의 새로운 사명을 책임진 자로서 축복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제 저희들은 이 70년대를 기쁨으로 맞이하였사옵니다. 소망으로 맞이 하였사옵니다. 하오니 저희들은 지칠 줄 모르고 주저할 줄 모르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어야 하겠사옵니다. 강하고 담대한 하늘의 용사가 되어야 하겠사옵니다. 아시아에서 사탄의 모든 환경을 퇴치하여 버리고 하늘의 권위를 세워야 할 때가 다가오는 것을 알고 총궐기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한국을 중심삼고 세계에 널려 있는 수많은 나라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일본과 미국, 독일에서 해외 선교의 책임을 지고 활동하고 있는 당신의 아들들을 기억하여 주시옵고, 이 해에도 새로운 역사로서 그들을 권고하여 주시옵소서. 새로운 힘과 능력으로서 그들로 하여금 사람들에게 아버지께서 같이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고 증거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의 뜻이 횡적으로, 세계적으로 활짝 전개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본부의 책임이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을 알고, 책임을 다하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니다.
새해의 첫아침에 드리는 첫기도를, 아버지,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새로운 역사를 이루기 위해 아버지께 본부를 받고 새로이 출발하는 하늘의 정병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이날 새로운 계획을 세우는 삼천만 민족과 세계의 만민에게 복을 내려 주시옵소서. 영계에 있는 수많은 영인들도 땅과 일체가 되어서 횡적으로 발전해야 하는 인류에게 직접적으로 협조할 수 있는 평면적인 시대가 어서 속히 나타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옵니다.
아버지, 이 아침 친히 저희의 머리 위에 손을 얹으시옵고, 저희 몸과 마음을 완전히 당신 것으로 받아 주시옵기를 부탁드리옵니다. 축복받은 가정들과 자녀들을 더더욱 당신의 사랑 가운데 두시고, 금후의 통일가에서 행하는 모든 것을 지켜 주시옵소서. 사탄의 수중에 있는 이 나라, 이 민족과 세계를 아버지의 승리의 주관권내로 옮겨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옵니다. 모든 말씀 참부모의 성호 받들어 간절히 아뢰었사옵니다. 아멘.
이제 우리는 1970년도를 맞이했습니다. 금년에는 `승리적 통일전선'이라는 표어를 세워 놓고 1년 동안 달려야 하겠습니다.
제2차 7년노정의 전반기 3년에는 `전면적 진격'이라는 표어를 중심삼고 나가야 한다는 것을 작년에도 말씀했습니다. 승리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전면적 진격이라는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지 않고는 승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금년에는 우리가 아시아 뿐만 아니라 세계를 중심삼고 두드러진 활동을 해야 합니다. 그런 책임을 해야 할 시대가 되었기 때문에 `승리적 통일전선'이란 표어를 세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승리를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지금까지 복귀섭리를 수행해 나오신 하나의 목적도 승리하는 그날을 맞이하기 위해서입니다. 아담 가정에서부터 노아 가정을 거쳐 모세 시대를 거치고, 세례 요한과 예수 시대를 거쳐서, 6천년 역사를 이어 내려온 하나님이 지금까지 싸워 나오신 그 하나의 목적도 승리의 한때를 맞이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소망의 승리는 어떤 땅, 어떤 곳에서 이루어질 것이냐? 승리할 수 있는 모든 요인들을 두고 볼 때, 두말할 필요도 없이 이 한국 땅과 오늘의 이 자리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여기에 모인 여러분은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승리를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싸움과정을 거쳐야 됩니다.
그러면 그 싸움은 어떤 싸움이냐? 그것은 한 나라의 주권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 아니요, 사회의 어떠한 경제적인 목적을 위한 싸움도 아니요, 어떠한 단체의 목적을 위한 싸움도 아닙니다. 이 싸움이야말로 하늘에 있어서나 땅에 있어서나 온 인류 역사를 두고 보더라도, 응당 싸워 내야 할 싸움인 것입니다. 그 싸움에는 하나님이 개재(介在)되고 전인류가 개재될 것입니다. 그 싸움은 국가와 민족을 초월한 싸움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 싸움에서 기필코 승리를 하여야 됩니다.
그러면 그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는 기준이 무엇일 것이냐? 물론 승리할 수 있는 곳은 이 나라 한국이요 이곳이지만, 승리를 향한 위치는 개인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 즉 하나의 남자와 하나의 여자에서부터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역사는 남자 하나를 중심삼고 승리의 기준을 세우기 위한 싸움의 역사였던 것입니다. 2천년 전 예수님도 이 싸움을 책임지고 귀결시키기 위해 오셨던 분입니다. 예수님은 이 싸움을 이스라엘 민족을 중심삼고 당시의 세계를 대하여 전개하려 하셨던 것입니다. 그때까지의 4천년 역사는 세계 인류를 대표하고, 이스라엘 민족을 대표하고, 길고 긴 역사를 대표하고, 역사를 이끌어 나온 하나님을 대표한 예수, 그 하나의 남자 앞에 모두 귀결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한 예수님이 승리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역사의 배후에서 추구하고 소망하던 것, 즉 개인을 통하여 이루어야 할 모든 여건을 완결지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야만 개인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한 요건들을 이루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설령 예수님이 개인적으로 승리의 요건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예수님 혼자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개인적인 승리가 이루어지려면 예수님을 중심삼은 나라가 있어야 했고, 예수님을 중심삼은 종교가 있어야 했으며, 하나의 가정이 있어야 했고, 형제가 있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여건들이 완결되고 나서야 비로소 하나의 개인이 싸움에서 승리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승리의 요인이 될 수 있는 형제와 하나의 가정과 하나의 교단과 하나의 민족과 하나의 국가가 있어서, 그것들이 예수라는 한 개인과 공동 운명체가 되어서 승리했다는 인연을 연결시켜야 비로소 예수가 개인적으로 승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개인이 승리를 하게 될 때 승리한 그 하나의 남성을 중심삼고 하나의 여성을 세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역사상에서 개인적으로 승리한 여성이란 결정권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개인으로서 승리했다는 기반을 완결짓지 못하여 상대이념을 이루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원한의 십자가의 길을 가신 것입니다.
설사 예수님이 개인적인 승리의 기반을 닦았다 하더라도 혼자서는 갖추어진 그 나라를 그냥 그대로 인계받을 수 없습니다. 또, 갖추어진 종교도 그냥 그대로 인계받을 수 없고, 씨족이면 씨족, 형제면 형제, 가정이면 가정도 그냥 그대로 인계받을 수 없습니다. 그것을 인계받으려면 반드시 하나의 남성으로서 하나의 여성과 하나되었다는 기준을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는 가정도, 종족도, 민족도, 국가도 인계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민족과 국가를 인계받을 수 없기 때문에 세계를 인계받을 수 없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외적인 환경을 갖추지 못하여 죽임을 당한 예수님은, 내적인 기준을 완결지어 외적인 기준을 상속받아야 할 입장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외적인 기준에 몰려서 내적인 기준까지 잃어버렸습니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하여 예수님 이후 2천년의 역사가 한의 역사로 엮어져 나왔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수많은 국가와 수많은 민족이 살고 있으며, 문화가 발달한 문명국이 많이 있지만 그런 국가와 민족을 제치고 전체를 대신할 수 있는 역사적인 하나의 해결기점이 한국에서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에 한국의 삼천만 백성은 너나할것없이 쌍수를 들어 환영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러지 못하고 있는 것은 이 민족의 수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민족의 정신적인 지도를 책임진 종교계, 그 중에서도 특히 세계와 연결할 수 있는 기반을 가진 기독교가 협조하여 환경을 수호하는데에 필요한 종교가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반기를 들고 나섰다는 사실은 제2의 수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유대교가 4천년을 준비한 역사의 터전 위에 오신 예수님을 배척하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기독교가, 2천년 동안 준비해 온 그 공적인 터전이 도리어 하늘의 길을 막는다는 것은 비통한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운명길에서 통일교회는 투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투쟁에서 통일교회가 승리하려면 개인적인 승리의 기반을 닦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가 승리하기 위해서는 민족적인 기반을 닦은 후에 종교적인 기반을 닦고 씨족과 가정, 나아가 개인적인 환경에서 승리의 결정을 지어서 상대이념을 거침으로써 이것을 상속받은 일을 했어야 하는데, 그럴 수 있는 환경적인 여건을 갖추지 못했으므로, 우리가 전체를 대해 원수와 같은 입장에 서서 개인적인 승리의 기반을 수습함과 동시에 환경을 수습하는 이중의 싸움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60년대까지 우리가 해 온 싸움입니다.
우리는 유대교가 세우지 못한 종교의 기반을 닦아야 합니다. 기독교가 반대하고 이 민족과 국가가 반대하는 입장에서도 오늘 통일교회는 종교의 기반을 닦아야 됩니다. 유대교가 유대나라의 사상적인 기반을 세웠던 것처럼 통일교단도 한국의 사상적인 기반을 마련하여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기준까지 끌어올려야 되는 것입니다. 민족과 씨족과 가정을 종교와 연결지어서 확고한 기반을 닦으려 했던 예수의 입장을 우리가 탕감하여 나온 것입니다.
통일교회는 기성 종교권내에서 세워진 것이 아니라 새로운 무대에 새로운 이념을 중심삼고 세워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역사상의 종교는 우리와 원수가 된 것입니다. 또한 역사적인 씨족도 가정도 개인도 우리의 원수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몰리고 쫓기면서도 새로운 종교를 중심삼고 국가와 민족 앞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기준까지 끌어올리기 위해 투쟁해 나온 것이 60년대까지의 우리의 싸움이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60년대까지의 싸움이었지만,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인류역사 이래의 싸움이요, 예수님과 성신에게는 2천년간의 싸움인 것입니다. 또한 예수 이후에 왔다 간, 기독교를 신봉한 수많은 순교자와 열사들은 지금까지 원한을 품고 해원의 날을 고대하며 싸워 나오고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이런 엄숙한 과정에서 70년대를 맞이하였고 이제 우리는 이민족에게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통일교회라는 교단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이 교단 가운데에는 우리로서의 단결된 하나의 종족이 있고 하나의 가정이 있고 하나의 형제가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 시대와는 다른 점입니다.
원래 예수님은 유대교를 중심삼고 종교를 규합하여 이스라엘 나라를 향하여 진군하여야 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할 수 있는 시대가 바로 70년대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70년대를 새로이 맞는 이 아침에 우리 통일교회가 해야 할 것은, 유대교를 대신한 우리 통일교회가 민족을 규합하는 사명을 수행하기 위한 첫발을 내딛는 것입니다.
지금은 개인적인 승리의 기준이 이미 세워졌고, 가정적인 승리의 기준도 이미 세워졌으며, 종족적인 승리의 기준도 결정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종교적인 승리의 기반을 결정하여 새로운 무대를 향하여 진출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그냥 그대로 맞이할 수 있었던 유대교와 이스라엘 나라와 같은 시대권내로 들어간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시대권을 마련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역사를 통하여 지금까지 준비해 나오셨고 외적세계도 그에 부합되도록 시대사조를 몰아 오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를 끌고 나온 결과가 지금 나타나는 현정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파문만 일으키면 새로운 역사가 아시아를 넘어 세계적으로 파장쳐 나갈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때가 바로 70년대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까지 원한의 시대요, 탕감의 시대요, 대가를 치러야 하는 분한 시대를 살아왔지만 이 70년대부터는 그러한 것을 모두 종식시키고, 새로운 역사시대로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이 나라, 이 민족을 위해 싸운 것이 영광의 결실로 거두어질 때가 온 것입니다.
과거에는 열 번 심어 가지고도 한 번 거두기가 힘들고 백 번 심어 가지고도 한 번 거두기가 힘든 역사를 거듭해 왔습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은 6천년 동안 수고하며 심어 나오셨지만 한 번도 거두지 못하는 실패의 역사를 거듭해 나오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런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열과 성을 다하여 삼천만 민족을 위하여 삼천리 반도에 피와 땀을 흘리면 그것이 그대로 우리에게 거두어지는 평면적인 시대가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이번에 축복가정을 전체적으로 내세운 것은 지금까지 축복가정이 하나님 앞에 책임을 못한 것을 탕감하도록 하겠다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니 이 70년대에 축복가정들은 통일가정으로서 새로운 이스라엘을 형성해 나아가는 데 있어서 깃발을 들고 이스라엘적 책임을 수행하며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 아침에 마음을 모아 그런 새로운 국가를 위해 책임을 지고 나선다는 입장에서 하나님 앞에 정성을 들일 수 있다는 것은, 통일교회 교인으로서 지금까지 갖추지 못하고 사명을 다하지 못한 것을 탕감하고 용서받을 수 있는 좋은 기회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는 데에 있어서 부끄러운 면모를 일신할 수 있는 절대적인 요건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번에 축복가정을 전부 내모는 원인도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금년도의 표어가 `승리적 통일전선'이라고 했는데, 이 통일전선은 어디에서부터 펼 것이냐? 앞에서 말한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개인, 즉 하나의 남자면 남자에서부터, 또는 하나의 여자면 여자로부터 마음과 몸을 중심삼고 통일전선을 구성해야 되는 것입니다. 통일전선을 구성하는 것은 내가 출세하고 내가 잘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내 소망의 가정이 잘 되게 하기 위한 것이요, 가정을 복귀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내 몸과 마음을 통일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사랑하는 가정을 구하기 위해서는 완전한 남성, 완전한 여성, 즉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가정을 구할 수 없으며 승리의 기준도 세울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엮어져 나온 역사의 소원이 그것이기 때문에 그 소원에 입각하여 하나의 완전한 남성, 하나의 완전한 여성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자기 가정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마음과 몸을 통일시키자는 것입니다. 마음과 몸 사이에 삼팔선이 가로놓여 있으니 그것을 타파해 버리고 마음과 몸을 통일시키자는 것입니다. 통일의 운세를 여기서부터 무한히 뻗어나가게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통일교회의 가정들은 물론 몸과 마음이 일체가 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뜻입니다. 동시에 민족의 뜻이요, 세계의 뜻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은 엄청나게 크나큰 천지의 뜻 앞에 순응하는 한개체로서 가슴에 그 큰 뜻을 품고 그것을 완결짓기 위해 자신의 몸과 마음의 통일화운동을 해야 됩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은 마음대로 몸은 몸대로 놀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에서부터 통일전선을 펴야 하는 것입니다. 즉, 마음이 가는 곳에 몸도 따라갈 수 있는 통일전선을 펴야 한다는 것입니다. 먼저는 그런 개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런 개인을 중심삼고 부모와 자녀가 완전히 하나될 수 있는 가정적 통일전선을 이루어야 하고, 그러한 가정을 중심삼고 씨족이 하나되는 씨족적인 통일전선을 이루어야 됩니다. 그러지 않고는 국가적 승리를 가져올 수 없습니다. 개인적인 승리의 기반이 아무리 잘 닦여졌다 하더라도 가정적인 승리를 못하게 되면 개인적 승리는 또다시 패배의 입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 승리는 영구적인 것이 못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더 큰 싸움을 남긴 작은 승리이기 때문에 가정적인 싸움을 치러서 승리해 내지 않고는 개인적 승리를 지킬 수 없는 것입니다. 즉, 가정적 승리의 기반에 안식할 수 있는 개인의 기반이 세워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가정적 승리를 갖추고 난 후에야만 개인적 승리의 안식처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적 승리의 통일전선을 갖춘 사람은 그 권을 가지고 가정적 승리를 얻기 위해서 투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승리한 가정들이 일체가 되고 핵심이 되어서 씨족을 연결시키는 통일전선을 펴야 됩니다. 씨족 중에는 김씨 박씨 등 각양각색의 성씨들이 있는데 그 모든 씨족들은 하나되어야 합니다. 모든 씨족이 하나로 연결되면 민족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모든 씨족이 통일교회를 중심삼고 일체가 되면 민족을 통일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씨족 전체가 주체성을 갖고 마음과 몸이 하나되어서 통일전선을 이루게 될 때는 대한민국을 통일전선권내로 몰아넣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대한민국에 통일권이 벌어지면 아시아를 움직일 수 있을 것이며 나아가 세계로 발전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통일교회는 이제 국가와 민족을 중심삼고 통일전선을 펴야 되겠습니다. 이것이 현재 우리가 처해 있는 입장임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통일을 추구해 나가는 데 있어서, 통일전선을 펴 나가는 데 있어서 승리하려면 장비가 있어야 됩니다. 승리할 수 있는 무리가 있어야 돼요. 그 중에서도 제일 필요한 무리가 무엇이냐 하면 세계의 그 누구의 신념보다도 더 강력한 신념입니다. 통일시키겠다는 강력한 신념이 없으면 힘이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이 신념이 있기 위해서는 이념이 있어야 되고, 이념이 있기 위해서는 사상이 있어야 됩니다.
그러면 사상이란 무엇이냐? 세계관이나 인생관 등을 중심삼아 가지고 나온 체계요 논리입니다. 체계적인 논리와 사고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진리로 표시될 수 있습니다. 진리가 없이는 이상이 생길 수 없으며, 진리가 없이는 이념이 성립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념이 없이 신념이 생길 수 없으며 신념이 없이 힘이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까지의 역사는 무엇을 찾아 나왔느냐? 통일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한 하나의 진리, 하나의 사상 체계, 하나의 이념 체제를 찾아 나온 것입니다. 지금 때는 사상 주의 시대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그 사상이란 국가와 민족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민주주의도 특정한 지역을 중심삼은 민주주의가 아니요, 초국가, 초국민적 민주주의를 주장하고 있고, 마찬가지로 공산주의도 특정한 국가 하나를 중심한 입장이 아니라, 초국가적인 입장에서 공산주의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승리적 통일전선을 이루기 위해서는 통일사상을 중심삼은 역사관, 시대관, 미래관을 확립시켜야 됩니다. 다시 말하면 진리를 중심삼은 이념을 확립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 이념이야말로 지금까지의 역사가 고대하던 것이요, 복귀섭리를 추구해 나온 수많은 선열들이 애쓰며 찾아 나온 것이요, 인류역사를 움직여 나오신 하나님이 수고하고 싸우며 성사시키고 나타내려 하신 것입니다. 그런 모든 소원의 결실체가 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것은 곧 진리의 현현을 말합니다.
그런 진리를 중심삼은 운동이 오늘날 통일교회가 벌이고 있는 통일운동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통일교회에서 말하는 진리는 어떤 것이냐? 공산주의나 민주주의에서 말하는 진리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공히 요구하는 하나의 사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통일교회에서 말하는 원리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지금까지 `통일'하면 `사상통일'을 부르짖고 나온 것입니다. 진리를 중심삼고는 누구나 같아야 합니다. 갑이라는 사람이나 을이라는 사람이나 김씨나 박씨나 그 바라보는 세계관과 목적관이 같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목적이 모두 같으면 그 목적을 중심삼고 같은 행동이 벌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진리를 중심삼고 말씀을 중심삼았다 할지라도 말씀이 말씀대로만 남아 있는 한 그 말씀이 지향하는 세계는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믿고 따라서 행하여 완성된 세계는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말씀만 가지고는 그런 세계가 현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말씀을 중심삼고 하나가 되어 실천해야 합니다. 말씀을 중심삼고 하나되어 통일전선을 펴야 됩니다. 말씀을 중심삼고 통일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중심삼고 통일하기 위해서는 행동이 벌어져야 합니다. 갑이나 을이나 할 것 없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행동이 통일되어야 합니다. 그러는데는 누구도 이의가 없어야 합니다. 남자도, 여자도 그 명령에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행동통일을 강행해 나온 것입니다. 행동통일, 심정통일, 이념통일을 강행해 나온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이렇게 싸워 나온 것은 무엇 때문이냐? 목적을 성사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진리가 추구하는 목적성사는 무엇이며, 오늘날 우리가 행동을 통해서 추구하는 목적성사는 무엇인가? 말씀이 아무리 좋아도 행동이 뒤따르지 않으면 그 사람은 인격자가 못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중심삼고 행동을 일치화하는 사람이 인격자입니다. 그러면 말씀과 일치된 인격을 갖춘 사람이 원하는 목적은 무엇이냐?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과 일치합니다. 그러므로 창조주가 인간을 창조할 때의 목적과 우리가 찾아 나가는 목적이 일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목적 기준이 무엇이냐고 할 때 거기에서 심정 문제가 대두되는 것입니다.
남자 앞에서도 상대적 존재인 여자가 필요하고 여자 앞에도 상대적 존재인 남자가 필요합니다. 가정에서도 반드시 상대적 심정기준이 필요한 것입니다. 사회를 중심삼은 심정적 기준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가정이 있으면, 그 가정을 중심삼고 하나의 종족을 이루고 그 종족을 중심삼고 더 큰 심정적 목표를 추구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애국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나라를 사랑하는 기준이 있으면 세계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박애주의니 뭐니 하는 것들의 목적은 심정문제에 귀결되는 것입니다.
통일교회는 지금까지 이념통일, 심정통일, 행동통일이라는 말을 부르짖어 나왔습니다. 그것들은 간단히 요약하면, 이념 통일은 말씀을 중심한 통일이요, 행동통일은 인격을 중심삼은 통일이요, 심정통일은 심정을 중심삼은 통일입니다.
그러면 말씀은 무엇이고 인격을 무엇이며 심정은 무엇인가? 그것들은 원래 하나였는데 에덴에서 말씀은 말씀대로, 인격을 인격대로, 심정은 심정대로 갈라졌습니다. 그것이 타락입니다. 아담 해와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말씀은 말씀대로 갈라져 버렸고, 하나님의 말씀과 일체가 되어 실체적으로 완성해야 했던 아담의 인격도 완성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완성된 인격을 중심삼고 이루어야 할 심정도 전부 다 갈래갈래 분산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기에 지금까지 역사는 진리를 추구해 나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참된 말씀을 세우기 위해서 싸워 나온 것이고, 참된 사람을 세우기 위해 싸워 나온 것이며, 참된 사랑을 중심삼은 참된 세계를 세우기 위해서 싸워 나온 것입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통일교회에서는 타락한 인간은 말씀심판, 인격심판, 심정심판의 과정을 거쳐 나가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타락한 인간들은 말씀의 실체가 아니고, 말씀과는 관계없는 사람들이며, 말씀과 일치된 인격자가 아니라 말씀을 파괴해 버린 타락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거기에서 이루어지는 사랑도 갈래갈래 찢겨지는 것입니다. 모두가 완전한 것이 아니고 다 지나가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재차 수습해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거기에 탕감조건이 필요한 것이요, 또 그렇기 때문에 말씀심판, 인격심판, 심정심판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근본 문제로 돌아가서, 말씀심판과 인격심판과 심정심판을 어떻게 통과하느냐? 그리하여 어떻게 결실을 맺을 것이냐? 제일 중요한 문제가 이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말씀은 말씀대로 있고, 사람은 사람대로 있고, 심정은 심정대로 전부 다 갈라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은 많았지만 말씀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말씀과 사람이 일체가 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인간은 오늘날까지 말씀을 찾아 나온 것입니다.
통일교회에 그런 말씀이 있다 할 때는 여러분은 그 말씀과 하나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역사의 소원입니다. 말씀과 하나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여러분 개체가 어떻게 하나님이 공인할 수 있는 말씀의 실체가 되어 하나님의 사랑과 일치되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여러분에게 제일 중요한 문제입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내적인 심정을 인계받은 인격자요, 하나님의 소원을 성취시킬 수 있는 진리의 말씀을 인계받은 분입니다. 또한 예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진 분이요, 하나님의 말씀의 열매를 거둘 수 있는 분이요, 하나님의 창조이상의 열매를 거둘 수 있는 실체인 동시에 사랑의 인연을 맺을 수 있도록 완전한 사랑의 인연을 갖추고 나온 분입니다.
그러한 예수 앞에 합당한 여성이 없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기독교는 신랑 신부의 이념을 중심삼고 2천년의 역사를 엮어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제일 먼저 여러분 개체에 승리적인 통일전선을 전개시켜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말씀이 필요합니다. 인격이 필요합니다. 심정이 필요합니다. 말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문제는 여기에 귀착됩니다. 자기 자신보다 말씀이 더 귀하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통일전선의 역군으로 설 수 없습니다. 자신을 귀하게 여기기 전에 하늘의 인격을 귀하게 여기지 못하는 사람도 통일전선의 역군이 될 수 없으며, 자신을 사랑하기 이전에 천주의 중심존재를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도 통일전선의 역군이 될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통일교회가 가르친 것은 말씀을 가지고 나가서 싸우라는 것입니다. 왜 싸우게 하겠습니까? 타락은 집안에서 벌어진 것이 아니라 일선에서 벌어진 것이기에, 그것을 복귀하기 위해서는 일선에서 싸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잃어버린 것을 찾기 위해서는 잃어버린 곳에 가야 됩니다. 가는 데는 무엇을 가지고 가느냐? 말씀입니다. 말씀을 가지고 가서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인격과 심정이 어디서 산산이 갈라졌느냐? 아담의 타락에서부터 갈라졌습니다. 타락은 혼자 한 것이 아닙니다. 둘이서 했어요. 그렇기 때문에 천국도 혼자서는 못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통일교회에서는 개인구원완성이란 있을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가정구원완성'을 주장하는 거예요. 이것이 지금까지의 종교 역사상에 없었던 새로운 내용입니다. 우리는 가정의 기준을 절대시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화된 종족의 현현이 가능한 것입니다. 가정구원완성이 이루어지면 종족구원이 가능하고 그것을 연결시켜서 민족을 구원할 수 있으며 그렇게 되면 민족을 중심삼은 국가형성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문제는 여러분 개체를 어떻게 통일시키느냐 하는 것입니다. 세계를 통일하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여러분 개체내에서 마음과 몸이 갈라져 매일 싸우고 있으니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수습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인격으로 수습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심정으로 수습해야 됩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을 하나님이 좋아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그러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를 세워 놓고 하나님이 인정하실 수 있어야 됩니다. 내가 말하는 것을 하나님이 그렇다고 인정하시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실체가 되기 위하여 생활권내에서 나를 어떻게 통일시키느냐, 내자체내에서 어떻게 통일전선을 구축하느냐 하는 문제가 가장 시급한 것입니다. 금년에 들어와서 여러분이 이 문제에 대해서 실감하지 않으면 안되겠습니다. 내가 그럴 수 있는 실체가 될 수 있겠느냐, 없겠느냐 하는 것을 알기 위해 나가서 해보는 것입니다. 내게 있는 정성을 다해서 말씀을 전파해 보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말씀을 중심삼고 하나님이 항상 같이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말씀이 아니고는 하나님과 연결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중심삼아야만 하나님과 사람이 연결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없이는 연결성을 찾을 수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말씀을 선포할 실체가 없으면 아무것도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연결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연결되는 것이 목적입니다. 인간을 하나님과 연결시킬 수 있는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은 땅의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전하는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 말씀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사람이 빚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주고받는 기반에 서서 완성의 기준을 갖출 수 있는 것입니다. 원리적 견해가 그렇습니다.
주고받으면 번식이 벌어집니다. 말씀에 하나님이 같이하심으로 말미암아 상대가 부활되는 입장에 서게 되고, 그러한 상대와 내가 하나되면 공고한 실체를 갖추게 되는 것이요, 이러한 실체가 갖추어짐에 따라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가 갖춘 정도의 깊이와 넓이가 커짐에 따라서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하는 비중도 커지는 것입니다.
말씀에서는 하나님의 심정이 약동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타락한 사람이라도 그 말씀을 듣고 말씀을 접하게 되면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의 심정이 싹터 오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정이 싹터 올라서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이요, 사탄세계를 주관할 수 있는 기초적인 힘이 발동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나 혼자서 알아서는 절대 안 됩니다. 여러분 스스로 하나님의 심정을 유발시켜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여러분으로 하여금 개척전도를 하게 했던 것입니다. 사탄이 제2대상을 중심삼고 번식행동을 함으로써 타락했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중심으로 번식행동을 해야만 그것을 복귀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자체내에 통일전선권을 형성하여 말씀을 중심삼고, 인격을 중심삼고, 심정을 중심삼은 실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완결된 실체가 될 수 있는 자아를 어떻게 발굴하느냐에 따라 내가 통일사상을 중심삼고 가정을 향하여 진출하느냐 못 하느냐 하는 문제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 기준이 되지 않고는 가정을 이루어 나갈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은 남겼지만 상대적인 기준을 남기지 못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믿음의 아들딸이 절대 필요한 것입니다. 그들은 나의 증거자인 것입니다. 그들은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천사도 아담을 통해서 존재해야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이 원리의 근본이기 때문에, 이런 견해에 입각해서 나가야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전국에 널려 있는 지구장, 혹은 지역장, 구역장, 전부가 새로운 각오로 재출발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 개체내에 승리적 통일전선을 중심삼아 가지고 말씀과 인격과 심정으로 연결시켜야 되겠습니다. 그러지 못하면 구원도 여러분과는 상관없으며, 그 나라도 그 세계도 여러분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일 문제입니다. 승리적 통일전선은 자기 자신에서부터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승리한 개인을 중심삼고 승리한 가정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자신이 2차 7년노정을 걸었던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60년도 전까지는 개인적으로 모진 풍상 앞에 꺼슬림을 당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굴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중심삼고 천명에 의해서 살고, 천명에 의해서 죽겠다는 심정으로 모든 시련과 부딪쳤습니다. 이제는 가정을 가졌으니 이 가정을 어떻게 하나 만드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여기에는 온갖 정성을 들여야 됩니다. 개인노정에서보다 배가의 정성을 들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처럼 정성을 들인 기준을 중심삼고 통일씨족과 통일교회를 어떻게 해서 영향력 있는 주체로 만드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을 가정을 중심삼고 어떻게 결정짓느냐 하는 것은 큰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개인이 말씀을 중심삼고 통일전선을 확보하고 가정적인 통일전선을 확보하여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그 가정이 뜻과 일치되어 하나님이 입증하실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 가지고 종교와 더불어 국가를 넘어 세계적인 운동으로 전개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들이 가야 할 싸움의 노정이요, 펴야 할 통일전선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개체가 가장 귀한 존재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내 개체가 가장 귀중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내가 그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상대적 여건을 갖출 수 없으면 아무 소용도 없는 것이요, 하나님이 아무리 선하신 분이라 하더라도 내가 그분 앞에 상대적인 인격체가 되지 못하면 하나님의 선하심도 나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또, 말씀이 아무리 좋다 하더라도 내가 그 말씀에 동화되어 재창조되기 위해 노력하는 상대적 여건을 갖추지 못하면 그 말씀과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간추려 말하면, 개인을 중심삼고 가정이 된다는 것입니다. 즉, 개인적으로 상대적인 여건을 갖춘 남성과 여성이 하나되어서 가정이 된다는 것입니다. 개인이 없어서는 가정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남자와 여자 중 어느 하나가 없어도 가정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체와 대상이 주고받을 수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통일교회 식구는 식구끼리, 혹은 축복가정은 가정끼리 서로가 주고받으며 협조해서 뜻을 위해 살아야 됩니다. 플러스와 마이너스가 수수작용을 해야만 거기에 하나님이 임재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축복가정들이 하나님을 중심삼은 생활, 뜻을 중심삼은 생활을 했느냐? 못 했습니다. 모두가 자기를 중심삼은 생활만을 했습니다. 모든 생활의 동기도 목적도 뜻과 하나님이어야 거기에 사랑의 동산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주체로 우리는 상대가 되어 주고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거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개입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 가정이 다시 씨족의 주체가 되어서 주고받으면 씨족의 중앙에 하나님이 운행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되는 것이지, 인간을 중심삼은 수단이나 방편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물질적 조건은 다 상관없는 거예요. 오직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씨족이면 씨족끼리 하나되고 친척이면 친척끼리 하나되어야 합니다. 같은 목적을 가지고 같이 가야 할 책임적인 노정은 하나님을 중심삼아야만 열리기 때문에 그 길을 파고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 입장이 되어야 비로소 씨족을 중심삼은 사랑이 형성되고 사랑의 환경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런 씨족을 중심삼아 가지고, 씨족에 씨족이 플러스되어 가지고 민족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민족도 민족끼리 주고받으면 그 가운데 하나님이 임하시게 되고 사랑의 환경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국가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국가와 민족이 주고 받으면 그 기반 위에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은 사랑의 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창조목적이 이루어진 세계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개인을 중심삼고 보아도, 가정이나 씨족도 그리고 민족을 중심삼고 보아도 그 기준은 모두 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이 개인에서부터 세계까지 퍼질 때 그 세계는 결국 지상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원리에서는 이성성상을 말합니다. 이성성상이 왜 필요하냐? 이성성상이 없으면 창조의 조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 이성성상이 있기에 서로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이요, 그것이 하나는 뼈와 같고 하나는 살과 같기 때문에 주고 받음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형태가 벌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성성상 그 자체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중심삼고 그 상대세계가 생겨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성성상은 창조적 묘미를 이루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체와 대상은 반드시 주고받아야 됩니다. 주고받는 목적은 하나님을 모시기 위한 것이요, 하나님의 사랑을 옮기기 위한 것입니다. 한 국가에서 주권자와 국민이 주고 받으면 그 국민과 주권자는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국가는 세계의 운세를 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의 이념을 중심삼고 주권자와 국민이 하나만 되면 그 국가에는 세계의 운세가 임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중심삼고 한국가가 하나만 되면 거기에 천운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 국가가 흥하겠느냐, 망하겠느냐 하는 것은 그 국가의 주권자와 국민을 중심삼고 보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주권자와 국민이 어느 정도 일체가 되느냐 하는 문제가 앞으로의 발전여부를 잴 수 있는 척도가 됩니다. 국민이 주권자를 사랑하고, 주권자가 국민을 사랑하느냐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어요. 그 사랑은 자기를 넘어서 공동의 목적체인 국가라는 거룩한 자체 앞에 주권자와 국민이 모두 흡수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의 합성체를 형성하고 거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플러스되어 하나님의 사랑의 환경이 벌어져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원리적인 견해입니다.
개인적인 완성도 그렇게 해야 되고 가정적인 완성도, 종족적인 완성도, 민족적인 완성도, 국가적인 완성도, 세계적인 완성도 그렇게 해야 됩니다. 결국은 하나님을 중심한 통일전선입니다. 승리적 통일전선입니다. 그러면 승리적 통일전선이 뭐냐? 바로 이 자리입니다. 개인에서도 마음과 몸이 하나되어야 하나님의 사랑이 임하잖아요? 그러니 여러분은 하나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마음 가운데에 지금까지 느끼지 못한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이 임재할 수 있는 곳을 찾아가야 합니다. 개인과 가정이 가야 할 하나님의 사랑의 없이는 발전도 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사랑이 없는 곳에서는 존재 자체도 깨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는 생명의 본질을 사랑에 둔 것입니다.이것이 우리 통일교회에서 열매맺어야 합니다. 우리의 생활환경 가운데에 사회적인 모든 환경을 대비하여 가야 할 승리전선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 개개인들은 그 길을 가기 위해 어떠한 시련과 고난이 있더라도 희생과 봉사로서 그것을 타개해 나가야 합니다. 모험이 요구되면 모험을 해야 됩니다.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기필코 그 길을 가야 됩니다.
본래 인간은 가정 이하에 머물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가정을 기반으로 하여 종족, 종족을 기반으로 하여 민족, 민족을 기반으로 하여 국가, 국가를 기반으로 하여 세계로 나갈 수 있는 엄청난 존재입니다. 그리하여 천주에까지 갈 수 있고 나중에는 하나님과 부자관계권내까지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계적인 기반 위에 설 수 있는 심정적인 인연을 갖추지 않고는 하나님의 아들딸이 될 수 없습니다.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애국자라고 해서 하나님의 아들딸이 될 수 있어요? 미국을 사랑하는 국민이라고 해서 하나님의 아들딸이 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민족이나 국가의 테두리를 넘지 못하는 주의 사상은 세계를 수습할 수 없습니다. 인간 개인, 즉, `나'를 중심삼은 주의는 국가를 수습할 수 없습니다. 선진국의 국민은 그 국가라는 테두리 안에서 법에 순응하며 그 한계선을 보호하고 육성해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미개한 민족은 국가에는 관심이 없이 오로지 내 아들딸만 잘 키우면 그뿐이라는 생각을 하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바라는 기준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바라시는 기준에서 떨어져 있는 민족은 미개한 민족이요, 그 기준이 높은 민족은 선진 민족입니다.
그러면 앞으로 현재의 선진국의 국민 이상으로 기준이 높은 세계적인 사람들이 나온다면 그 사람들은 어떠한 사람들일 것이냐? 그 사람들은 세계를 자기 나라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이 아니고는 세계를 지도할 수 없습니다. 예컨대 소련의 공산주의도 미국의 민주주의도 그 테두리를 못 넘어섰습니다. 그런 국가는 언젠가는 후퇴하는 것입니다. 다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큰소리를 쳐도 망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통일사상을 지닌 우리는 한민족을 넘어 세계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한국 사람은 다 망하지 않는가 걱정할지도 모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세계를 찾고 나면 한국백성은 맨 앞에 가서 서는 것입니다. 우리가 개척하고 전도하는 목적도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세계적으로 심어 나가기 위해서입니다. 이 나라, 이 민족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심어 주기 위해서, 그리하여 삼천만 민족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분배해 주기 위해서 우리가 이런 엄청난 사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매를 맞는 것도 나를 위해서 맞는 것이 아니요, 세계를 위해서 맞는 것입니다. `역사를 망치고 역사를 참소하는 사탄아 칠 테면 쳐라' 하며 맞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힘이 사탄의 힘보다 강한 데서 규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여러분이 민족권내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끌고 나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의미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예수님의 뜻이 어긋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민족과 그 나라만을 들여다보며 나오기에 급급하였지만 하나님은 세계 전체를 들여다보신 것입니다. 세계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입장과 이스라엘 민족을 사랑하는 예수님의 입장이 서로 달랐던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과 예수님의 뜻이 달랐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내 집, 내 아들딸만 끼고 흥흥거리며 살아 보라구요. 그러다 가는 망하는 것입니다. `내 아들딸' 하는 그 담 안에 무덤을 파고 죽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에서 민족을 사랑하지 않고는 못 살겠다고 할 때에, 그 사람은 대한민국이라는 울타리 안에 이름을 남기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을 애국자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세계적인 울타리 안에 이름을 남겼는데 그것이 기독교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잃어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세계 인류를 찾아야 했습니다. 원수를 용서하고 찾아야 할 미래의 민족권내로 만들어야 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원수를 용납함이 타당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통일교회에도 60년대까지 원수가 많았습니다. 이제 그 원수들을 다 용서해야 됩니다. 내가 이 통일교회의 울타리 안에서 썩어갈 사람이 아닙니다. 대한민국의 삼천만 민족을 넘어 세계로 가야 하기 때문에 교회에 선물을 다 주는 것입니다. 그러한 해방의 역사를 다 하고 난 다음에는, 삼천만 민족에게 다 주고 난 다음에는 무엇을 할 것이냐? 반대하던 사람들을 규합해야 합니다. 그것은 시간 문제입니다. 어차피 주어야 할 것인데 왜 원수를 맺어 가지고 분하게 생각하면서 찾아가 주어야 할 필요가 뭐 있냐는 것입니다. 줄 때는 크게 마음먹고 몽땅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어요? 시간 문제라는 거예요.
통일교회는 지금 그와 같은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일을 하는 데에는 통일교회 하나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기성교회를 규합해서 해야 됩니다. 기독교를 규합해서 일반 종교에도 영향을 미치게 해야 됩니다. 그래서 삼천만 민족에게 영향을 미쳐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대한민국에서 일본으로 아시아로 세계로 연결시켜야 되겠습니다. 지금 우리는 그런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과 일본은 옛날에 원수였습니다. 이마를 맞댈 수 없고 세포를 접하여 결혼하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한이 맺힌 역사적인 원수의 나라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문제가 안 됩니다. 이제는 주체와 대상이 되어서 통일전선을 펴자는 것입니다. 한국과 일본 사이에 하나님의 사랑을 세우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민족의 사랑보다 강한 것입니다. 역사적인 어떤 사랑보다도 강하기 때문에 그 사랑은 민족도 초월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엄청난 일의 실행이 가능한 70년대를 중심삼고 힘차게 출발하자는 것입니다.
여러분 개인에서부터 승리적 통일전선을 펴야 합니다. 승리적 통일전선이란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하나되는 것입니다. 개인을 중심삼고 마음과 몸이 하나되었을 때 거기에 하나님이 임재하십니다. 이렇게 주고받는 곳에 하나님이 임재하시면 거기에는 반드시 번식이 벌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시지 않는다면 번식이 벌어질 수 없습니다. 천지창조의 원칙이 그렇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동기가 되어 만들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을 빼놓고서는 번식이 벌어지는 법이 없습니다. 주고받으면 거기에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또 번식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통일전선을 개인으로부터 가정, 씨족, 민족, 국가, 세계로 펴 나가야 됩니다. 현재 우리 통일교회는 민족을 중심삼고 국가를 찾아 나갈 수 있는 입장까지 올라왔습니다. 이제 통일교회는 민족과 국가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시대권에 왔습니다. 세계적인 정세는 만반의 준비를 하여 우리의 문전까지 와 있습니다. 이제 한 꺼풀만 벗기는 날에는 날게 되어 있습니다. `케이프 케네디'에서 발사한 아폴로 11호도 꼬리에 불을 부치니 날게 되었지요? 우리도 그럴 수 있는 때를 향해서 가야 됩니다. 가는 데는 그냥 갔다가 되돌아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내 마음과 몸에 대한 인식보다 뜻에 대한 인식이 강하냐, 아니면 그보다 못 하느냐 하는 데에 있습니다. 강한 지남철은 한번 붙으면 떼어 내려고 해도 잘 떨어지지 않는 것처럼 여러분의 마음도 강한 지남철처럼 강하게 뜻과 더불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만을 그리워하고, 하나님만을 위해 산다고 하는 철두철미하고 확고부동한 마음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마음 자세가 되어 있다면 몸뚱이가 부서져 없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남아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며 다 이루었다고 하신 것이 무슨 뜻입니까? 그런 마음을 중심삼고 상대적인 세계에서 이루어야 할 목적을 영적으로 이루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에게는 그러한 정신이 희미합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모든 탕감노정을 거쳐야 됩니다. 그것은 일대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탕감조건을 세워서 그것을 전부 다 거쳐 나가야 됩니다. 즉, 승리적 통일전선을 펴 나가기 위해 말씀을 중심삼고 탕감과정을 거쳐 나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개인에서부터 주체와 대상의 관계를 확립하여 가정, 씨족, 종족, 민족, 국가로 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선이 가는 길은 큰 것을 위해서 작은 것을 희생하는 것입니다. 개인보다 가정이 크지요? 그러므로 개인이 가야 할 목적지는 가정입니다. 처녀 총각들이 가야 할 곳은 결혼하여 이루게 될 가정입니다. 남자 여자가 가야할 목적지는 가정이예요. 그리고 가정이 찾아야 할 것은 아들딸입니다. 아들딸이 생기면 형제가 벌어지는 것이고, 거기에서부터 종족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개인의 목적은 가정이며 가정의 목적은 아들딸입니다. 그리고 그 아들딸에서부터 종족이 편성되는 것입니다. 종족이 편성된 다음에는 그런 종족이 모여서 민족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국가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나라는 바로 여러분을 중심삼고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오늘의 민주주의식으로 말하게 되면 대통령은 곧 국민 모두의 대신자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기에 민주주의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국가가 이루어지면 대통령도 우리 집안의 형님이 되는데, 그런 형님이 내 대신 수고하는데 시기할 게 뭐 있겠습니까? 형님이 박사가 되는데, 옛날에 나를 때리던 형이라고 시기합니까? 아버지도 좋아하고, 어머니도 좋아하고, 형제도 좋아하지 않아요?
그러므로 여러분은 개인이 목적하는 가정을 이루고 가정이 목적하는 자녀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가정적인 사위기대를 복귀해야 합니다. 그렇게 복귀된 가정이 합해지면 어떻게 되느냐? 종족이 되고, 민족이 되고, 국가가 되는 것입니다. 종족이나 국가나 세계는 모두 가정이 확대된 것입니다. 이러한 모델이 될 수 있는 가정을 하나 만들어 세계적인 가정으로 세우면 거기에서부터 30억 인류도 나오고, 3천 6백억의 인류도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천국이 다른 데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거예요. 나라가 있기 전에 종족이 있어야 되고, 종족이 있기 전에 가정이 있어야 됩니다. 가정이 없이 나라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예수 믿고 천국 가자고 합니다. 홀아비 혼자서 천국에 갈 수 있겠어요? 예수님도 홀아비이기 때문에 천국에 못 들어가고 2천년 동안이나 낙원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신부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내가 죽으면 남편이 왜 눈물을 흘리겠습니까? 제3목적인 아들딸을 얻을 수 있는 길이 깨졌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못 이루면 쓰러질 수밖에 없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 울 수밖에요. 전기를 보면 양(+)전기와 음(-)전기가 있는데, 이 둘 중에 하나가 없어지면 나머지 것도 아무 작용을 못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가는 길도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자와 여자는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고 아들딸을 낳아야 됩니다. 그리고 가정을 이루었다고 해도 그 가정만 홀로 살 수 없습니다. 그 집안의 친척, 즉 삼촌, 사촌 등의 친척들이 필요합니다. 친척이 있느냐고 물었을 때 `나는 친척이 필요없어요. 혼자 사는 것이 좋아요'라고 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우리 나라 대한민국의 국민이 전부 열 명이라면 좋겠다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 보았어요? 중국 사람들 자기 네 인구가 7억 5천만이라고 자랑하지요? 그러는 것입니다.
자그마치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려면 세계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 천지는 내 것이다'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환경을 정비하여 앞을 가로막는 담과 울타리를 다 헤쳐 버리고 `세계는 내 것이다' 했을 때 사람들이 `옳소'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떻습니까? 나라와 나라의 국경이 많고 문화권이 다르고 언어가 전부 다릅니다. 얼룩덜룩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을 깨끗이 설겆이해 버려야 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좋아하시게끔 언어도 하나로 만들고 생활도 같이하고 일도 같이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하나의 계획을 세우면 그 계획을 중심삼고 전부 다 따라 나서야 합니다. 백두산을 파 젖히자는 계획을 세웠다면 모두 웃통을 벗고 삽을 들고 나서야 됩니다. 우리 통일교인들, 그렇게 되어 있어요? 「예」 선생님이 하자고 하면 할 자신이 있어요? 「예」 정말요? 「예」 우리 통일교회를 반대하는 사람의 어머니 아버지의 무덤을 파 버리자고 해도 할래요? 「예」
승리적인 통일전선이 어디냐? 그렇다고 내가 대한민국의 대통령 하려고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오해하지 말라는 겁니다. 선생님의 말을 잘못 안 녀석들이 별의별 얘기를 다 하고 다닙니다. 통일교회에서 통일전선을 펴서 현정권을 뒤집어 엎으려 한다나요? 손바닥만한 대한민국을 뒤집어 엎어서 뭐 하겠어요? 그럴 생각이 있다면 아시아를 뒤집어 엎을 생각을 하지 시시하게 현정권을 생각할 게 뭐예요?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승공활동에 일본도 걸려들게 되어 있고, 중공에서도 이 일을 하고 있는데 중공도 걸려들게 되어 있습니다. 걸려드나 안걸려드나 두고 보라는 것입니다. 일본은 벌써 걸려들고 있습니다. 이런 실정인데도 기성교인들은 통일교회를 망하라고 하고 있고, 통일교인들은 벌거벗고 춤춘다는 둥 괴수 문서방이 어떻다는 둥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한다고 무너질 줄 압니까?
승리적 통일전선, 여러분, 한번 따라 해봐요? (따라함) 이 승리적 통일전선의 출발점이 어디라구요? 「개인요」 개인의 몸과 마음을 어떻게 하나로 만드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내 몸이 죽는 한이 있더라도 뜻을 따르겠다고 나선 사람들이야말로 통일전선을 펴겠다고 나선, 진정한 용기를 가진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뜻을 가진 남성과 여성이 만나서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을 가만히 보면 마음 한 사람, 몸 한 사람 해서 두 사람입니다. 이 두 사람이 늘 싸우는 것입니다. 이렇게 몸과 마음으로 나누어진 남자와 여자가 합하면 네 사람이 됩니다. 이 넷이 싸우니 행복하겠어요? 행복할 리가 없습니다. 열 사람이면 몇 사람이 됩니까? 스무 사람이 되는 거예요. 스무 사람이 싸우면 어떻겠어요? 세상의 가정들이 될 수 있으면 따로따로 세간을 차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친척이 같이 살면 여자들이 `여보 영감, 동생이 세간 안 내면 못 살아 먹겠소' 합니다. 그러니 분가들을 하는 것입니다. 싸움에서 피난처를 찾는 길은 분가하는 길밖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요즘 미국 같은 나라에서는 여자가 필요없다는 남자들도 있습니다. 남자 혼자 호텔에서 생활하는 것입니다. 호텔방에 앉아 담배를 뻑뻑 피우거나 슬렁슬렁 밤거리를 돌아 다니다 들어와 하룻밤을 지내고 그런다는 거예요. 두 사람이 살기도 복잡한데 네 사람이나 모여서 살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두 사람이 앉으면 복잡하다는 거예요. 그렇잖아요? 마음 몸도 사람도 하나되지 못하고 싸우고 야단하는데 네 사람이면 죽을 지경이라는 거예요. 그러므로 짐이 돼서 결혼 안 한다는 것입니다. 미국 여자들을 보면 팔자가 세게 생겼습니다. 아주 기분 나쁘게 생겼어요. 그러니 과부 행렬이 즐비하지요. 한국 여자들은 그들을 부러워할 필요없습니다. 그들이 누구하고 살겠어요? 우리 통일교회 청년들은 그런 여자들 싫다고 할 것입니다. 내가 좋아하라고 하면 좋아할는지 모르지만. (웃음)
여러분의 생각은 어때요? 마음이 맞는 사람과 한 방에 있는 것이 좋아요? 마음 안 맞는 사람하고 한 방에 있는 것이 좋아요? 「마음 맞는 사람이요」 그렇습니다. 마음이 맞는 사람끼리 한방에 있는 것이 좋지요. 그런데 여러분 자신은 어떻습니까? 마음하고 몸하고 서로 잘 맞아요? 안 맞지요? 그거 언제 하나로 만들 것입니까?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 싸움에 역사는 녹아 났고, 많은 성인 현철들이 그 싸움을 하다 죽어갔습니다. 인생이 무엇이냐, 신이 있느냐? 이런 싸움을 하다가 죽어갔어요.
그런데 통일사상과 통일교회의 뜻만 알게 되면 얄궂은 일들이 생기게 됩니다. 선생님이 전도 나가라고 해서 전부 다 나갔는데 못 나간 사람은 내눈이 뜨일까봐 비실비실하면서 선생님을 슬슬 피합니다. 누가 뭐라고 하는 사람도 없는데 못 견디는 것입니다. 차라리 전도 나가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그거 이상하지요. 여러분도 그럴 것입니다. 또 학교에 다니는 여학생들도 통일교회에 와서 딱 말씀을 듣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학교가 파한 후 가방을 들고 쫄랑쫄랑 교회에 왔다 가야 집에 가서 밥을 먹어도 소화가 잘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런 것을 느껴 봤습니까? 그런 것을 느껴 보지 못한 사람은 가짜입니다.
이처럼 통일교회의 인연은 농도가 짙은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과 몸이 교회를 좋아하고 교회에 있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하나님이 지향하는 말씀과 인격과 심정이 임재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손에다가 모시고 다닐 것이 아니라, 또 생각에다가 모시고 다닐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모시고 다녀야 됩니다. 그렇게 되면 마음에 어긋나는 일은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개체의 통일전선이 그 기준에 세워져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마음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까? 그렇게 되어 있지 않으면 가짜입니다. 가짜예요.
원래는 여러분의 마음과 몸이 하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준이 어긋나게 된 것입니다. 본래부터 심정기준은 내려가는 것은 싫어합니다.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더욱더 올라가려고 합니다. 자꾸만 올라갈수록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가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여러분이 돈을 모으면 자꾸만 더 모으고 싶어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또, 사람들은 모두가 세계의 대통령을 하려고 하잖아요?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사랑도 하나님의 사랑이 최고이니까 자꾸 최고로 올라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통일전선의 기준을 확실히 해야 됩니다. 그것이 안되었을 때는 가짜입니다. 뜻이 마음을 점령케 하고 몸을 점령케 하여 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목적을 중심삼은 사위기대입니다. 이것이 사위기대 철학이예요. 반드시 마음과 몸을 지배할 수 있는 주체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 주체와 주고받아 목적을 놓고 재출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지금까지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즉, 제 위치를 떠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타락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사위기대의 기준을 가정에서부터 남편을 중심삼고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남편이 데데할 때는 아내가 중심이 되어서라도 이루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남편이 기분 나쁘더라도 할 수 없습니다. 누구라도 주체가 되어서 그를 중심삼고 하나로 뭉쳐 수습해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된 그 가정에서부터 출발하여 하나된 종족, 하나된 민족, 하나된 국가와 하나된 세계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하나님의 심정까지 연결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 보따리까지 연결될 수 있도록 해야 돼요. 그래서, 외적인 기준이 하나님의 심정에까지 연결되면, 거기에서 통일 벌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통일된 하나의 세계를 원하듯이 인간도 통일된 하나의 세계를 원하지요? 마찬가지입니다. 통일된 그 세계에서는 하나님은 플러스가 되고, 하나님의 심정과 하나된 그 세계는 마이너스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통일전선을 여러분이 이루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통일교회가 이러한 기준만 딱 세워 놓게 되면 전도 안 해도 됩니다. 전도 많이 할 필요없어요. 왜냐하면 개인적 가정, 종족적인 가정, 민족적인 가정-가정에도 핵심이 있습니다-만 해결되면, 그리하여 그 기준이 세계로 연결되면 세계는 자동적으로 복귀되는 것입니다. 삼천만 민족이 전부 복귀되어야만 되는 줄 알아요?
이러한 승리적 통일전선을 바라보면서 개인에서부터 가정, 종족, 민족을 거쳐 가라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여러분에게 종족적 메시아라는 말을 한 것입니다. 종족적인 메시아가 되는데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되지 않고서 될 수 있겠어요?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되지 않으면 메시아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 기준에 선 남자와 여자가 되어야 축복을 받아 가정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성신과 예수가 하나되는 역사를 함으로 말미암아 믿음의 아들딸이 생겨나는 것처럼, 여러분도 실체로 하나되는 기준을 세워 평면적인 입장에서 아들딸을 번식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어야 종족적인 메시아라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따라서 개인을 희생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가정을 세워야 됩니다. 부모가 희생되더라도 아들딸을 살려야 됩니다. 부모는 죽음의 길을 가는 한이 있더라도 아들딸을 살리려고 합니다. 부모가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 경우가 많지 자식이 부모를 위해 희생하는 경우가 많습니까? 이것이 천법입니다. 부모는 자식을 살려야 됩니다. 자식을 살리지 않으면 부모의 갈 길이 막힙니다. 그리고 그 가정의 자식에게는 친척이 필요합니다. 친척을 위해서 희생해야 됩니다. 그런 가정은 동네에서 선한 가정이라는 추앙을 받고 위함받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주위 사람들에게 추앙을 받고 위함을 받으면 그들에게 준 것이 다시 내것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또 그들이 내 편의 무리가 되어 내가 주관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요, 안 그래요? 알겠어요? 그들을 내 편으로 만들어 나를 중심삼고 열매를 거두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희생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친척, 또는 씨족을 위해서 희생하는 가정은 그 씨족을 전부 다 자기의 열매로 거둘 수 있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씨족들은 전부 그 가정에 와서 도와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씨족을 위해서 가정은 희생해야 됩니다. 그리고 씨족은 민족을 위해서 희생해야 하는 것입니다. 민족과 국가를 위해서 씨족이 희생되는 것이 선입니다. 또, 더 나아가서 한 나라는 세계를 위해서 희생되는 것이 선입니다. 그것이 정상적인 선의 길입니다.
이처럼 선은 희생한 뒤에 찾는 것입니다. 즉, 희생하고 나서 거두는 것이 선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작전은 맞고 빼앗아 오는 것입니다. 사탄의 작전은 치고 빼앗아 가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세계 여러 나라의 흥망성쇠를 두고 보면 그러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때려 죽이고 피를 흘리게 하여 권력을 빼앗은 집권자는 결국 망하고 맙니다. 수많은 국가가 그렇게 해서 망했다는 것은 역사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종교인들은 자기의 희생시키며 빼앗아 왔기 때문에 수 천년의 역사를 거쳤어도 종교는 망하지 않고 도리어 세계적으로 판도를 넓혀 나온 것입니다. 역사적 사실은 어쩔 수 없습니다. 선한 사람은 남을 위해서 희생하려는 사람이요, 악한 사람은 자기를 중심삼고 남을 이용하려는 사람입니다. 그런 악당은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통일교회는 어떻게 하자는 것인가. 통일교회를 중심삼고 대한민국 사람들을 종으로 만들자는 것이냐? 아닙니다. 우리가 대한민국을 위해서 부모의 심정을 가지고 종의 노릇을 하자는 것입니다. 부모의 입장에서 자식을 치료하듯이 민족에게 봉사하고 가르쳐 주고 깨우쳐 주어서 그 심정을 그대로 전통으로 세우자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깨닫게 되면 우리가 부모의 입장임을 그들이 알게 되는 것이니 따라오지 말라고 해도 따라오고, 듣지 말라고 해도 우리의 말을 듣게 된다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이제 70년도에는 이런 원칙적인 내용을 노골화시켜 가지고 승리적인 통일전선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이것을 일원화시키고 표면화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자신이 그런 책임을 져야 합니다. 여러분 자체들이 환경에서 그런 생활을 할 수 있게끔 내몰아야 되겠습니다. 알겠어요? 「예」 그러면서 세계적인 사조와 전부 다 연결시키는 일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금년부터는 아시아, 또는 세계적인 대회를 많이 개최할 것입니다. 어떻게든 통일교회가 앞으로 세계적인 문제를 많이 제시할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들이 거기에 보조를 맞추어 나가기 위해서는, 여러분 자신들이 세계적인 기준에서 하나님을 온전하게 생활권내에 모시어야 합니다. 즉, 가는 길의 전후에 동역자를 만들어 가지고 생활무대를 하늘화시키는 데 주력을 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가는 길은 절대 고독하지 않을 것입니다. 반드시 하나님이 같이한다는 것을 생활 속에서 여실히 느낄 것입니다. 또, 그래야 하나님이 여러분과 같이하신 것을 후손들이 증거할 수 있는 기반을 땅 위에 남길 수 있습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 `승리적 통일전선'이라는 것을 금년의 표어로 내걸었던 것이니, 여러분이 이것을 명심해 주기 바랍니다.
아버님, 1970년대를 맞이하여 승리적 통일전선이라는 엄청난 과제를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 한국에 있는 자녀들과 세계에 있는 자녀들 앞에 말씀하였습니다. 그 통일전선은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적인 것으로 내 개체에서부터 승리하여 가정의 중심이 되고 나아가 씨족과 민족, 국가, 세계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본연의 심정 기준에 직행할 수 있는 일로를 연결시켜야 하는 엄청난 과제가 저희에게 있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아버지, 기독교를 중심삼고 엮어 나온 역사과정에서 얼마나 수고하셨사옵니까? 또한 통일교회로 하여금 이만한 기반을 닦도록 하기 위해서 얼마나 수고하셨사옵니까? 이런 것을 생각하면 저희들이 가야 할 길을 앞에 두고 초조한 마음이 잠시도 떠날 수 없는 것을 느끼게 되옵니다. 아버님의 슬픈 성상과 슬픈 형상을 알면서도 저희들이 효자가 못 되고, 충신이 못 된 것을 한탄하면서 무엇으로 아버지를 위로해 드릴 수 있는가 몸부림치며 생각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로 하여금 아버님은 지극히 멀리 계시는 것이 아니라 저희와 같이 하신다는 사실을 체험하는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멀지 않은 장래에 한국은 아버지의 사랑하는 복지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남북으로 갈라져 있는 엄청난 실상을 바라볼 때, 이제 남북을 통일시킬 수 있는 무리들은 누구이며, 또 아버님이 같이할 수 있는 통일의 무리들이 얼마나 되는가 하는 것을 저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남북한을 통일시킬 수 있는 통일전선을 편성하여 아시아에서 일본과 중국을 연결시키고 마지막으로 소련과 중공을 어떻게 밀어낼 것인가, 또한 이러한 나라들을 어떻게 아버님 앞에 복귀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를 우리는 염려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당신께서 만방으로 모든 것을 준비하고 계시며 저희들이 염려하기 전에 당신께서 천번 만번 염려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는 저희들, 당신의 말씀과 명령에 절대 순응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사옵니다.
아버지의 말씀과 아버지의 심정을 중심삼고 죽든지 살든지 거기에서 살고 거기에서 죽겠다고 결심할 수 있는 자신을 어떻게 발견할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인 것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제 저희들이 가야 할 길은 이북도 이북이지만 중공과 소련을 밀어내어 아시아를 어떻게 아버지 앞에 귀일시키느냐 하는 데에 있사옵니다. 더 나아가서 세계를 어떻게 아버지 앞에 귀일시키느냐 하는 문제가 금후에 저희들이 싸워 나가야 할 크나큰 시련인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지금부터 준비를 해야 되겠사옵니다. 지금부터 시간을 아껴야 되겠사옵니다. 또한 그 길을 가기 위해 투입되어야 하는 어떤 수고도 아끼지 말아야 되겠사옵니다.
아버지께서 요구하는 모든 기준을 저희들이 채우기 위해서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감사할 줄 아는 모습이 되어야 하겠사옵니다. 그리하여 그러한 가정을 이루고 종족을 이루고 민족을 이룰 수 있는 무리가 되어야 하겠사옵니다. 교회의 기반을 닦기 위한 60년대를 지나고 국가와 세계 인류가 살 수 있는 기반을 닦기 위한 70년대를 향해 출발했사오니, 아버지여! 지켜 주시옵고 같이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지금까지 걸어온 과정을 생각할 때, 그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죽지 않고 이날을 볼 수 있고 이런 때를 맞이하게 되었사오니, 이제는 죽더라도 아버지 뜻 앞에 면목을 세울 수 있는 조건을 세웠사옵니다.
이제 저희들은 과거의 역사노정에서 걸었던 모든 곁길을 벗어나서 하늘의 해방의 나팔소리와 더불어 아버지의 그 가슴에 안겨, 효성과 충성의 도리를 다하는 아들딸이 되어야 하겠사옵니다. 일신에 남아진 것이 아무것도 없을지라도 그것을 위하여 죽겠다고 할진대는 틀림없이 당신의 아들이요, 당신의 딸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나이다.
이제 이들이 가야 할 길을 지켜 주시옵고, 통일교회 가야 할 길을 지켜 주시옵고, 이 나라가 가야 할 길을 지켜 주시옵고, 세계가 가야 할 길을 지켜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기뻐하실 수 있는 승리의 주관 세계가 어서 속히 오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오며, 이 모든 말씀을 참부모의 성호 받들어 아뢰었사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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