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3:12-13

<기 도(Ⅰ)>

아버님, 당신의 사랑이 각자의 마음에 깃들게 하여 주시옵고, 사랑으로 영원한 참된 인간의 모습이 천지간에 나타나게 하시옵소서. 온 만상은 그러한 존재를 중심삼고 움직이기를 고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저희들은 아옵니다. 또한 아버님께서 그 참다운 인간과 하나되시어서 찬란한 문화의 세계, 영광의 세계를 창건하실 것을 아옵니다. 그러나 아버님의 사랑이 깃들 수 없게 된 것이 한이요, 그 사랑을 저희들이 찾아도 찾아도 만날 수 없음이 또한 한인 것을 알았사옵니다.

타락의 후예로 태어났기 때문에 아버지의 참다운 사랑의 인연을 찾을래야 찾을 수 없는 슬픔을 안고 역사노정을 걸어 나온 저희들이오니, 긍휼의 아버지시여, 본연의 사랑의 마음을 갖고 저희들을 찾아 주시옵고, 당신의 그 심정 앞에 부복할 수 있는 자녀가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인류가 수천년 동안 아버지에 대한 배역자의 후손으로 태어났고, 또 아버지의 심정에 배역하는 무리로 살아온 것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그러한 실체의 모습으로 아버지의 존전에 부복하였사오니, 긍휼과 사랑으로 저희를 붙들어 주시옵고 자비의 손길로 어루만져 주시옵소서. 지난날의 부족한 것과, 지난날의 불충한 것과, 지난날의 불효한 것을 낱낱이 아버지 앞에 고하고 회개하는 이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당신은 저희들이 영원히 모셔야 할 아버님이시옵니다. 아버님과 저희는 그 인연을 영원히 끊을 수 없는 본연의 관계인 것을 저희들이 확실히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런데 타락하여 아버님을 잃어버리고 아버지와의 영원한 인연이 끊어졌사오니 그것이 저희들의 서러움이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저희가 부복한 것은 잃어버린 아버지를 다시 찾고 끊어진 아버지와의 인연을 다시 맺기 위함이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버지의 사랑이 아니면 안 될 것을 알고 있사오니, 아버지의 사랑으로 말미암은 부활의 은사를 저희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직접적인 사랑의 인연으로 저희들을 묶으시어서 하나의 통일된 제단으로 아버님 앞에 바쳐질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길,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뜻을 따라오는 데 있어서 잊지 못할 사연이 많은 줄 알고 있사오니, 지난날의 모든 사연을 아버지 앞에 솔직히 내놓고, 아버님의 축복의 심정에 동하여 마음 깊이 아버지를 사모하고 흠모하며 아버지의 사랑과 아버지의 인자하심을 고대하는 간곡한 마음을 갖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의 손을 붙들고 아버님의 품에 안길 수 있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기를 간곡히 원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시옵소서. 이와 같이 간절한 심정의 터전 위에, 아버지, 군림하시어서 저희에게 은혜를 내려 주시고, 생명의 인연을 다시 엮을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아버지의 새로운 사명을 분부 받아 소망의 세계를 향하기에 책임 다하고도 남음이 있는 아버지의 아들과 딸이 되고 당신이 요구하는 정병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은 3월의 마지막 날이옵니다. 금년에 들어와 4분의 1을 보내는 마지막 날이오니 이날을 거룩되게 하여 주시옵고, 또한 이날은 안식일이오니, 지금까지 아버지 앞에 책임 못한 것을 회개하고 마음을 다하여 아버지 심정에 다시 안길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날 남한 각지에 널려 있는 당신의 자녀들이 본부를 그리워하며 예배드리고 있을 줄 알고 있사오니, 그들의 모습이 아버지 보시기에 그리 탐탁하지 못할 줄 아오나, 그 가운데 넘쳐흐르는 사랑의 심정이 하늘땅의 인연을 끌어들일 수 있게 하여 주시옵고, 사망세계에 있는 뭇 생명을 부활시킬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해외에 널려져서 외로운 개척자의 길을 더듬어 가고 있는 당신의 적자(嫡子)들을, 아버지, 기억하여 주시옵고, 그들의 외로움을 당신께서 친히 동정해 주시옵소서. 그들이 슬플 때 같이 슬퍼해 주시옵고, 그들이 싸우는 마당에 같이 싸워 주시어서 역사 과정에서 싸우신 아버지의 실적을 그들이 승리로 나타내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그들이 흘리는 눈물과 피와 땀이, 당신께 속한 자리에서 흘려질 때, 그 민족은 기필코 하늘 앞으로 찾아질 것이며 부활의 터전으로 접붙임 되고야 말 것이라는 사실을 아오니, 그 자리에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수많은 교단과 수많은 종교인들, 선을 추구하고 참된 길을 동경하는 당신의 아들딸들을 기억하여 주시옵고, 사망 세계에서 생명을 이끌고 가기에 지쳐 있는 불쌍한 인류를 기억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이날을 통하여 영계에 가 있는 수많은 영인들까지 아버지의 은사 앞에 기쁨과 영광을 돌려드리는 데 동참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옵니다. 이 한 시간 온전히 아버지 앞에 맡기오니 맡아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간절히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님의 성호 받들어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기 도(Ⅱ)>

당신께서 가신 길이 제아무리 험하다 할지라도 저희들은 따라나선 걸음을 놓치지 않을 것을 맹세하나이다. 당신께서 당하시는 핍박이 아무리 죽음이 엇갈리는 것이라 할지라도, 저희들은 이미 생축의 제물이 되겠다고 바친 몸들이오니, 고이고이 제물로서 사라지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당신께서는 이 사망 세계 가운데에 당신의 품에 인연될 수 있는 생명의 터전이 세워지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저희들이 기필코 그 생명의 터전을 세우고야 말겠습니다.

아버님, 이날 다시 한번 굽어살피시옵소서. 저희들은 아버님을 그리워하옵나이다. 무진장 그리워하옵니다. 아버지와 더불어 길이길이 살고 싶사옵고, 아버지와 더불어 의논하고, 아버지의 분부의 말씀을 받들면서 살고 싶사옵니다. 이것이 저희들의 소원이옵니다. 인류가 타락한 그날부터 우리의 존재는 어느 한 날도 아버지의 사랑의 품에 안겨 본 일이 없이 살아왔사옵니다.

인류는 지금까지 한의 고비고비에서 하루하루 처참한 눈물의 역사를 엮어 온 것을 저희가 알고 있사오니, 이러한 역사를 다시 찾아 소망의 기준을 복귀하려는 심정을 지니고 저희를 찾아오시는 아버님을 붙들고 동고동락할 수 있는 참다운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온 영계가 굽어살피는 이 자리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아버지여, 이 자리를 불꽃같은 눈으로 살피시사 사망과 죄악의 쓴 뿌리가 저희 마음 깊은 가운데 남아질 수 없게 하시옵소서. 불꽃같은 눈으로 살피시사 저희들이 오늘 이 시간, 모든 죄악의 뿌리를 뽑고 아버지 앞에 귀일(歸一)되게 하여 주시옵고, 겸손히 엎드렸사오니 운행하시옵소서. 간절히 바라옵니다.

저희들의 마음과 몸이 당신의 마음대로 빚어질 수 있는 진흙덩이와 같이 되게 하시옵소서. 그러기 위해서는 내 자신이 없어져야 되겠사옵고, 본성에 화합할 수 있는 절대적인 마음이 있어야 되겠사오니 그 마음을 일으켜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시간 오로지 아버지께서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수많은 민족을 대신하여 이 민족이 사랑을 받아야만 되겠사옵고, 수많은 종족을 위하여 아버지께서 주신 사명을 저희가 다해야 되겠사옵니다. 맡겨 주신 책임을 하는 가운데 최후의 싸움에서 남아지는 용사가 되어 승리의 개가를 아버지 앞에 돌려드리고 최후의 영광의 자리에 들어갈 수 있는 무리가 되어야 하겠사오니, 아버지께서 직접 동행하시어 주관하시옵고 분부하시옵고 통솔하여 주시옵소서.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시간, 이 환경에 진정 아버님만이 처음부터 끝까지 운행하시옵고 주관하시옵소서. 어둠의 권세가 틈타는 자리가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고, 간악한 사탄이 엿보는 시간이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악에 대하여 방어하는 마음, 선만을 추구하는 마음을 가지고 이 시간을 몽땅 아버지 앞에 묶어 바칠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시작하는 시간이오니 전체를 아버님께서 주관하여 주시옵고, 저희의 마음과 몸에, 오로지 아버지의 마음에 녹아질 수 있는 본성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참부모의 성호 받들어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기 도(Ⅲ)>

아버님, 저희는 어린아이가 되어야 되겠사옵니다. 배고프면 배고프다고 아버지 앞에 떼쓰는 어린애가 되어야 되겠사옵니다. 어린아이에게는 어머니를 흠모하는 갈급함이 있사옵니다. 그 어린아이는 천진난만합니다. 키우면 키울수록, 고이고이 품고 가꾸면 가꿀수록 부모의 표준을 따라 자라납니다.

아버님, 여기에 모인 당신의 자녀들을 거듭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천태만상의 사정을 품고 온 이들이 그 사정을 다 털어놓으면 아버지께서 아니 움직일 수 없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다 털어놓고 굶주린 어린아이가 엄마의 젖을 흠모하는 것과 같이, 그리워하는 것과 같이, 아버님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갖게 하여 주시옵소서.

여기에 누가 스승이 되오리까? 이들은 인간의 말을 원치 않사옵니다. 지금까지 많은 말을 들어 보았사옵고, 많은 교회를 다녀 보았사옵고, 많은 사람을 만나 보았사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는 생명의 꿀이 없었고, 생명의 젖이 없었기에 이들의 마음은 고갈해 있었사옵니다. 피폐한 상태로 의지할 곳 없이 황무지 같은 처참한 자리에 있사오니, 아버지, 이들을 모으시옵소서. 자신들의 사정을 다 제쳐놓고, 아버지의 사정을 중심삼은 생명의 말씀과 생명의 인연을 중심삼고 엉클어지는, 생명이 꿈틀거리는 재창조의 역사가 일어나야만 되겠사옵니다.

‘나’를 아버지 앞에 세울 수 있는 준비를 하지 못했사옵니다. 하오나 나의 전부를 아버지 앞에 바치고 아버지로부터 시작하는 나를 찾아야 되겠사옵니다. 아버지로부터 시작하려는 마음 자세를 가져야 되겠습니다. 아버지로부터 시작하는 참된 모습을 갖추어야 되겠사오니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일주일 동안 상심된 마음을 가지고 여기 나왔사오니, 아버지, 위로하여 주시옵고, 상처에 약을 바르시옵고, 기름을 바르시어서 사랑으로 품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그리하여 외롭고 처참하고 남루한 이들에게 아버지의 집에서 옷을 갈아입고 안식할 수 있는 자리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넘치는 사랑의 양식을 갖추고 스스로 아버지를 찾아가는 모습을 아버지께서는 얼마나 고대하시옵니까? 이들도 그런 자리를 고대하오니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시간 온전히 주관하여 주시옵고 전하는 자의 마음과 받는 자의 마음이 둘이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생명의 줄을 매는 데 있어서 공감하는 자리가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이 시간 운행하시어서 저희의 마음과 몸이 온전히 한 감정, 한 심정으로 동하게 하시옵고, 한 생명 길로 움직일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히 친히 주관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의 성호 받들어 간절히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말 씀> 오늘 말씀드릴 제목이 ‘형제의 애(愛)’이므로 먼저 사랑이라는 문제를 가지고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지음 받은 피조만물

이 땅 위에 존재하는 만물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길가에 자라고 있는 하나의 풀포기로부터 뜰에 살고 있는 하나의 미물에 이르기까지 전부 하나님의 사랑으로 지어졌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어떤 예술가가 하나의 작품을 만드는 데도 소망의 일념을 가지고 자기의 온 정성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그런 정성과 소망이 부합되어 이루어진 하나의 작품은 그 작가에 있어서는 지극히 귀한 것이요, 자기의 생명보다 더 귀하고 자기의 그 무엇보다 더 사랑스런 물건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활권 내에서 느껴지는 사실을 미루어 볼 때 이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피조세계는 하나님의 장난거리로, 취미거리로 지어졌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떤 물건을 보더라도 거기에는 무궁무진한 가치가 있으며, 그 속에 흐르고 있는 모든 생명의 인연 혹은 관계되어지는 모든 인연 가운데는 우주 전체가 벗어날 수 없는 사연이 있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는 크나큰 동기와 과정을 거쳐 크나큰 목적과 관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미루어 볼 때 피조세계가 하나님의 사랑의 인연 가운데에서 지어졌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땅 위의 사람으로서 하나님과 같이할 수 있는 참다운 사람이 있다면, 즉 하나님의 사랑을 직접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는 그런 사람은 미물을 바라보거나 동물을 바라보거나 초목을 바라보더라도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숨은 사랑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땅에는 만물을 수습하여 보호해 주고 하나님과 동고동락할 수 있는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만물을 지으실 때의 그 사랑을 대신해서 이 땅 위의 만물만상을 사랑할 수 있는 참다운 사람이 있었느냐 하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지으신 것은 누구를 위해서였겠습니까? 물론 하나님을 위한 것이지만, 만물을 창조하신 궁극의 목적은 하나님 자신보다도 인간을 위한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하나될 때에 하나님과 인간은 둘이 아닌 것입니다. 남편을 중심하고 생겨난 존재가 아니라 할지라도 아내가 사랑을 중심삼고 남편과 완전히 하나될 때 그 남편과 아내는 하나인 것입니다. 결국 남편과 아내가 서로 좋은 것은 두 사람 중 어느 한 사람만의 좋은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좋은 것이다 하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을 여러분은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을 중심삼고 인간을 지으셨기에 인간이 상대적인 입장에서 중심이 되어 있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완전한 자리에서 하나님과 상대기준을 이루었다면 하나님과 인간은 둘이 아니라 우리라는 입장에서 공동적인 사랑의 가치를 느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기준에 선 조상이 있었느냐? 지금까지의 역사 과정에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인류의 시조가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에서 완전히 하나되어 그 사랑 가운데서 하나된 감정과 심정을 가지고 만물만상을 대해야 했는데,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지금까지 누구도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되는 자리에 서지 못한 것입니다. 땅 위에 있어서 비참하다면 이 이상 비참한 일이 없고, 불쌍하다면 이 이상 불쌍한 일이 없고, 억울하다면 이 이상 억울한 일이 없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왜 이와 같은 결과가 되었느냐 하면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타락했기 때문에 오늘날 인간 세계에 참된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들이 사랑을 논의하고 행복을 노래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빼놓고는 행복이 있을 수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의 기원을 만들어 놓지 않고는 완전한 행복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종교 생활의 중심

완전한 사랑의 기준이 아직까지 천지간에 생겨나지 않았습니다. 사랑의 기원을 이룰 수 있는 참다운 사람이 아직까지도 나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으로 참다운 가정을 이룰 수 있는 한 남성과 한 여성, 하나님께서 붙들고 사랑하실 수 있는, 우주를 대표할 수 있는 인류의 참다운 부모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출발한 기원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은 인류의 시조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런 기준, 인류 시조로 나타나야 할 분야와 올라가야 할 과정을 남겨 놓고 인간은 타락했습니다. 떨어져 버린 것입니다. 그리하여 인류역사 노정에 비통한 사실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 타락한 인간들이 다시 찾지 않으면 안 될 것은 무엇이냐? 그것은 두말할 것 없이 본연의 사람입니다. 그러면 그 본연의 사람은 누구냐? 성경상으로 보면 인간의 종지조상인 아담 해와입니다. 그 선조로부터 타락했기 때문에 본래의 기준을 찾으려면 되돌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되돌아가지 않고, ‘역사는 발전하였으니 발전한 이 세계에서 찾겠다.’고 하는 것은 꿈일 뿐입니다. 되돌아가지 않으면 절대로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종교 생활의 중심은 무엇이냐? 정성을 들이는 것이요, 기도하는 것입니다. 비는 거예요. 그러면 기도하고 비는 기준이 뭐냐? 사람들은 대개 ‘우리나라 잘 되게 해 주옵소서.’ 합니다. 현재 빌고 있는 것이 참되지 못하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는 하나님께서 아니 가실래야 아니 가실 수 없는 것이요, 하나님께서 사랑하실 수 있는 곳에는 하나님이 아니 계실래야 아니 계실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생활을 통해서 볼 때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실 수 없는 여건을 가지고 인류가 출발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슬퍼하실 여건을 가지고 인류가 출발했기 때문에 그로 말미암은 죄악의 역사가 뿌리를 내리고 줄기가 자라고 가지가 벌어지고 잎이 나서 6천년 동안 고목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그 고목에 매달린 잎사귀들입니다. 그러면 그 고목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이 좋아하실 수 있는 나무인가? 아닙니다. 그 나무 전체가 그 자리에서 아무리 하나님의 사랑을 꿈꾸고 하나님의 사랑이 내포되어 있는 열매를 고대한다 해도 그런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런 역사가 잠재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역사의 결과권 내에 있는 이 세상은 청산되어야 합니다. 어느 한때에 제거되어야 해요. 그러지 않고는 우리 조상들이 도달하지 못한 참다운 하나님의 사랑의 자리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는 내가 무엇이냐고 생각해 본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은 무엇이냐? 사람이 사람이지 하면 간단하지만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사람에게는 몸뚱이가 있고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면 몸뚱이는 무엇이냐? 몸뚱이는 모든 원소를 규합하여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이 무엇이냐? 불교에서는 마음의 근본을 알기 위해서 무아경에 들어가라고 말합니다. 그리하여 사심을 버리고 자기 자신을 버리면 새로운 경지로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자꾸 들어가서 수천 대 선조들의 가슴가슴의 심정을 통하고, 인류의 시조인 종주 할아버지 할머니의 마음 뒷골목까지 파고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마음 뒷골목에 누가 있느냐 하면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곳에 가서 다시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는 자기 부정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인정에서 출발하는 종교는 망국 종교입니다. 요즈음 일부 젊은 사람들은 술을 마시고 춤을 추며 떠들며 그곳을 천국으로 생각하지만, 그런 곳은 천국이 아니요, 하나님의 사랑과는 절대 관계가 없는 곳입니다. 인간이 최고 행복의 터전으로 찾고 있는 자리와 절대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자리를 박차고 마음 뒷골목을 찾아 들어가자는 것입니다. 나를 버리고 들어가자는 것입니다. 형님 누나 다 버리고 혼자라도 들어가자는 것이요, ‘지금의 나에게는 조상도 없고 형제도 없다.’ 하는 마음으로 가자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태초에 하나님을 모시고 살던 인간 시조의 기준을 회상하고, 하나의 남성으로 태어났던 인류의 조상이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이루어야 했던 본연의 기준에 도달해야 합니다. 여성이면 여성으로서도 본연의 기준에 도달해야 합니다.

타락의 침범을 받지 않은 자녀의 자리를 탕감복귀하는 것이 인간들이 찾아야 할 제일의 것입니다. 그것을 찾아야 거기서부터 새로운 세계, 새로운 인연, 새로운 사랑이 출발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타락한 세상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사람들은 타락한 인류의 후손입니다. 그런데 인간 조상이 타락하는 것을 누가 봤습니까? 아무도 못 보았어요. 그렇지만 안 봤어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비록 낳는 것을 보지 못했어도 자식을 보면 부모를 알 수 있는 것처럼, 죄악 세계를 보아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타락했기 때문에 세상에서 제아무리 행복하다고 하는 자리에 나가서 엎치고 뒹굴어도 마음이 편치 않은 것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자리에 있다며 기뻐하고 좋아하지만 나중에는 세계에서 일등가는 가난뱅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한 끼의 밥도 어려울 때는 하나님처럼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진수성찬을 마련해 먹어 보라고 하면 놀라서 도망을 갈 것입니다.

의인의 기준

그러면 세상에서 무엇을 가져야 행복하고 만족하다 할 것인가? 먹는 것을 가지고 만족할 것인가? 만족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뭘 가지고 만족하느냐?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이 있어야 억천년이 지나도 사랑에 젖어 거기서 먹고살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영원히 남아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인간 본래의 기원에 어긋난 사랑의 기준을 타파해 버리고, 천주사(天宙史)의 새로운 기원을 이룩해야 합니다.

그러면 인간의 타락이란 무엇인가? 일반 기독교에서는 인류 시조가 에덴동산에서 과일을 따먹은 것이 타락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편안한 생활에서, 편안한 수작을 하는 것입니다. 선악과면 선악과지, 복숭아다 뭐다 또는 둥글한 것 같기도 하고, 뭐 동글한 것 같기도 하고…. 이런 것 따져 가지고 돼요? 절대 안 되는 것입니다. 보지도 않고, 먹어 보지도 않았으면서 괴상하고 망상적인 이야기만 하면서 결사적으로 과일이라고 합니다. 서울에 갔는데 ‘서울 가니까 이렇더라.’는 것 가지고는 안 되는 것이요, 확실한 기점을 알아서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종교인들은 기점이 없습니다. 기점이 없으니 목적이 불투명하고, 목적이 불투명하니 타락을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수리적인 법도를 통해서 생명의 길로 복귀시켜야 하는 것이니, 이 작용을 하는 사랑은 타락된 세계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 참석한 여러분들은 그런 세계와 그런 도(道)와는 상관없는 사람들이지만, 타락한 것을 섭섭하게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악과 싸워야 합니다. 싸움을 하면 한편은 이기고 한편은 망하게 되는 것처럼 어느 한때 선과 악은 부딪쳐서 하나가 깨져야 됩니다. 이처럼 싸우는 것이 개인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가정에서도 싸워야 합니다. 사회에서도 안 싸울 수 없습니다. 그래 가지고 합한 것이 국가가 되었습니다. 국가가 합하려니 안 싸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계 전체가 싸우는 세계가 된 것입니다.

이런 싸움은 일정한 법이 없으면 제멋대로 하게 되는 것이니 개인의 마음의 원수를 잡아 말려야 됩니다. 싸움을 끝나게 하려면 무엇이 필요하냐? 보다 좋은 것이 필요합니다. 보다 더 좋은 것이 있으면 싸움은 끝나는 것입니다. 원수의 것보다도 더 좋은 것이 있으면, 몸의 힘보다도 더 좋은 것, 마음의 힘보다도 더 좋은 것이 나타나면 싸움은 끝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기를 중심한 소원성취 목적성취까지도 제재를 받아야만 합니다. 즉 하나님을 중심삼은 사랑이 없으면 아무리 잘나고 아무리 부자라 해도 제물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도 닦는 사람들은 전부 다 뒤넘이치는 고비를 넘는 것입니다.

그런데 타락한 인간들은 세상에 대한 애착심이 많습니다. 지식에 대한 애착심, 물질에 대한 애착심, 명예에 대한 애착심이 많아요. 그런 건 다 필요 없는 것입니다. 이 어려운 종말시대에서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이냐? 바로 여러분이 제일 애착심을 갖고 있는 그것을 분리하기 위해 싸우는 일입니다. 그것들이 하나님을 못 따라가게 하는 것이므로 여러분의 생활적인 터전에서 그것들을 분리시켜야 하는데 그러려면 확고부동한 신념이 있어야 됩니다. 또한 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가 싸우는 것을 분쇄하고 통합할 수 있는 세계적인 사상이 있어야 되고, 개인에서부터 가정․종족․민족․국가․세계가 달라질 수 있고 세상일을 다 잊어버리고 좋아할 수 있는 사상이 있어야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밖에 없는데, 그 하나님의 사랑이 아직까지 이 땅에 나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해요? 지금까지 그런 사상이 나온 것 같아요? 예수님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고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사랑이라는 것이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단순한 것이 아니라 입체적이란 것을 사람들은 모른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제아무리 사랑해도 입체적인 사랑은 못했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다고 한 것은 무슨 말입니까? 의인이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은 자기도 부정한 것이니 예수님도 의인이 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하면 섭섭할지 모르지만 입체적인 사랑권을 차지할 수 있는 중앙선을 확보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입체적인 하나님의 사랑

원리강의 할 때도 하나님의 사랑은 반드시 상대적인 여건에서 나타난다고 하죠? 상대적인 관계에서 성립되는 것이 사랑입니다. 혼자서는 절대로 사랑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혼자서 사랑이 됩니까? 상대성을 부정해서는 사랑이 성립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은 어디에 나타나느냐? 하나님의 가슴에 나타납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피조만물에 나타납니다. 남편과 아내의 사랑이 어디에 나타납니까? 자식에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또 남편이 있는 곳에는 아내의 사랑이 나타나야 합니다. 남편이 입은 옷에서도 아내의 사랑이 나타나야 합니다.

요즈음엔 여자들이 참 편합니다. 옷을 만드는 데도 재봉틀을 사용하고 남의 힘을 빌립니다. 옛날에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옛날에 우리 어머니를 봐도 그저 저고리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 한 바늘 한 바늘 온 정성을 쏟습니다. 그것이 남편에 대한 아내의 사랑인 것입니다. 가슴으로부터의 사랑은 그만두고라도 생활에서 사랑이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자식을 보아 부모의 사랑을 알 수 있고, 남편의 옷 끝을 보아 아내의 사랑을 알 수 있는 것처럼 이 세상에 나타난 사실을 보아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났습니까? 알고 보니 전부 다 싸움을 하고 복잡해져 있는데 사랑은 무슨 사랑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입체적으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에 여러분 중에 누가 나가다가 벼락을 맞아 죽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그러나 통일교회 갔다가 벼락 맞았으니 ‘통일교회는 나쁘다.’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벼락을 맞았다면 벼락을 맞은 까닭이 있는 것이요, 동기가 있는 것입니다. 벌을 받는 것은 동기가 벌을 받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동기가 무엇일 것이냐? 수천 대 선조로부터 쌓은 죄가 연결되어 그것이 뭉치고 뭉쳐서 터지고 깨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일생을 70년이나 80년만을 놓고 따지다 보니 불공평하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수천년을 잼대로 재 보면 다 공평합니다. 선을 쌓으면 올라가고 죄를 쌓으면 내려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누구 누구는 복 받았어.’ 하지만 복을 받아도 잘못 받으면 망합니다. 복이 가는 길을 붙들지 못하면 망한다는 것입니다. 복이 가면 꽁지만 붙들어도 그건 내 복이 되고 복의 머리를 타고 가면 부러울 게 없습니다. 복을 받는 것은 선조들이 고생을 하고 선행을 쌓았기 때문입니다. 별 것 아닙니다. 선조의 공로가 없으면 여러분이 아무리 잘났다고 해도 파산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국가의 운세는 천운에 보조를 맞추며 따라가야 합니다. 아무리 국운이 훌륭하다고 세계에 자랑하더라도 천운에 보조를 맞추지 못하면 남김없이 파산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만물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인간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해야 합니다. 그러나 타락 세계에는 자식을 모르는 어미가 있고, 어미를 모르는 자식이 있습니다. 그 어미에 그 자식입니다. 그런 자식이 어떻게 어머니를 아껴 줄 수 있겠습니까? 세상이 이렇게 다 글러 먹었다는 것입니다. 형제가 서로를 파면시키지 못해서 안달하는 세상입니다. 이제 이 세상은 망할 수밖에 없는 자리에까지 왔습니다. 끝날이 온 것입니다. 귀찮은 세상이라면 어서 끝날이 와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 끝날에 바꿔치기를 못하면 망합니다. 예를 들어서 ‘난 한식밖에 먹을 줄 몰라. 양식은 절대 먹을 수 없어.’ 했는데 한식이 다 없어졌다 이거예요. 그러면 양식을 먹을 줄 모르니 굶을 수밖에요. 끝날에는 바꿔쳐야 합니다. 소화불량이 생기지 않게 바꿔쳐야 합니다. 나는 그것을 먹으면 소화를 못한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돌바위를 삼키더라도 와작와작 씹어서 소화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무엇이라도 먹어서 영양소를 만들 수 있는 소화력을 가져야만 됩니다. 그런 사람이 되면 얼마든지 살 수 있습니다.

선생님도 일본에 가서는 일본 음식을 먹고, 미국 가서는 미국 음식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외국 사람들은 고추장을 보고는 삼십육계 줄행랑을 칩니다. 그들이 보기에는 흉한 고추장이지만 선생님은 그 고추장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모릅니다. 또 한국에 돌아와서는 다른 음식을 다 제쳐놓고 김치를 먹었습니다.

외국이나 한국이나 사람 사는 것이 대개 비슷합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아침 식사하고 이 닦고 회사에 출근하고, 점심 먹고, 퇴근해서 집에 들어오고, 아들딸과 부인을 데리고 살고 합니다. 별 것 없습니다. 그렇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고추장과 김치는 밤이 되어도 먹고 싶고, 낮이 되어도 먹고 싶은 생각이 떠나지를 않습니다. 바꿔치기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기 때문에 그곳에서는 김치를 먹고 바지저고리를 입고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끝날에는 바꿔치기를 해야 합니다. 사상을 바꿔치고 몸뚱이를 바꿔치고 종교를 바꿔쳐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어머니

이 세상의 제일 중심 과제가 무엇이냐? 옛날에는 의․식․주였습니다. 의․식․주가 중심이었어요. 그러면 사람은 어디로 갔습니까? 인간이 의․식․주를 위해서 태어났다면 참으로 처량합니다. 몇 푼짜리, 몇백 원짜리 판잣집을 위해 태어났다면 기가 막힌 일이요, 난리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무엇 때문에 태어났습니까? 사람은 사람 때문에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참다운 사람을 위하여 태어난 것이지, 오늘날같이 깨지고 못된 사람을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참된 사람, 참된 사람을 위해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참된 사람은 어디에 있고, 참이라는 것은 어디에서 벌어지느냐? 비유하건대 아기에게 제일의 참이 무엇입니까? 아기에게 있어 제일의 참은 어머니의 젖꼭지입니다. 다른 게 아닙니다. 아기에게 그 이상 좋은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면 인간의 시조가 처음에 출발할 때의 참은 무엇이겠습니까? 어머니의 젖꼭지 같은 무엇이 있어야 될 것 아닙니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있나, 없나 하는데, 여러분은 마음을 보았습니까? 마음이 둥글어요, 넓적해요? 마음이 붉어요, 노래요? 보지 못했지요? 그렇다고 해서 마음이 없다고 하는 사람은 미친 사람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마음이 어두워서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사랑.

그러면 사랑의 기원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사랑은 여자에게서부터 출발했을까요, 남자에게서부터 출발했을까요? 이런 것 연구해 보았습니까? 내가 남자인데, 사랑이 여자에게서부터 출발했다면 남자의 체면이 깎이기 때문에 사랑은 남자에게서 출발해야 된다고 하면 사랑이 싸울 것입니다. 사랑은 어디에서부터 출발하느냐? 사랑은 어머니 아버지로부터 생겨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태어난 것은 어머니 아버지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원인 없이는 결과가 나오는 법이 없습니다. 여기 모인 처녀 총각들도 20세기 자유의 바람에 날려 풀어져 가지고 뒤흔들고 야단하며 스스로가 자신의 소유자인 줄 알고 있지만, 천지의 모든 생명이 여러분의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을 중심삼고 더 큰 하나님의 목적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사랑의 어머니가 무엇이냐? 사랑은 영원한 것이요, 천리의 법도를 어기고 나올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법도를 취하지 않고 나온 사람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어느 한 개인을 중심으로 사랑이 나온 것도 아닙니다. 사랑의 어머니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누나와 동생이 서로 싸우다가도 엄마 아빠만 보면 평화로워집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인간 세계에도 사랑의 어머니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 세상의 사랑을 보거나, 우주간의 사랑을 보아도, 사랑의 어머니가 없습니다. 원래는 있었는데 인간이 잃어버린 것입니다. 인간이 잃어버린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사랑이란 명사가 여러분의 마음을 중심삼고 싸우는 것입니다. 그 한계선은 기가 막힙니다. 그런 것을 볼 때 인간의 사랑은 타락했음을 부정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이다.’라는 팻말을 내건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처럼 사랑하사.’ 했을 때 이처럼이 뭐냐? 서로서로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독생자를 주셨으니.’ 할 때 이 독생자란 하나의 사람으로만 봐 가지고는 안 됩니다. 독생자가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독생자로 나타났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 이퀄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시다지만 하나님 이퀄 전지전능이 아닙니다. 다만 그것이 중심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이 사랑을 할 때 사랑의 근원이신 하나님 모르게 할 수 있나요? 하나님은 사랑의 뿌리인데 이파리인 여러분이 그 뿌리 모르게 사랑할 수 있어요? 예를 들어서 포플러 잎사귀가 ‘난 뿌리가 귀찮아. 줄기도 귀찮아.’ 한다면 존재할 수 있겠어요? 뿌리가 있어야 줄기도 잎사귀도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동풍이 불어온다고 서쪽으로 날아가 보고 싶다고 한다면 팔자 다 된 것입니다. 나무의 뿌리가 있어야, 악착같이 잎사귀를 붙잡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 잎사귀가 나무 꼭대기에서 떨어지지 않고 붙어 있을 수 있는 것이지요. 악착같이 붙잡는 뿌리의 힘보다 더한 힘이 우주에 또 어디 있습니까? 그것은 지독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은 생명을 주관합니다. 뿌리가 없는 사랑은 흔들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타락한 인류는 뿌리 없는 사랑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뿌리 없이 흔들려 돌아갑니다. 큰 길도 아니고 벼랑처럼 아슬아슬한 길을 걸어가는데, 여기서는 한 발짝 떼는 것이 바로 죄가 됩니다. 인간 세상에는 사랑의 뿌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참다운 사랑의 동기가 아니 나왔기 때문에 개인의 심정 기반이 틀어졌고, 개인의 심정 기반이 틀어졌기 때문에 가정 기반이 틀어졌으며, 틀어진 가정을 중심하고 이루어진 사회 역시 그 기반이 틀어졌고, 그러한 사회에서 연결된 국가의 기반이 틀어졌고, 그러한 국가로 이루어진 세계의 모든 것이 틀어진 것입니다. 이와 같이 틀어진 기반을 다시 수습하기 위해서 인류는 어머니의 사랑과 같은 사랑을 재현시켜야 합니다. 안 되면 자기를 희생해서라도 재현시켜야 하는 것이요, 국가가 망하고 세계가 망한다 해도 재현시켜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면

그래서 지상에 심판이란 명사가 나온 것입니다. 이 심판의 관문을 거쳐야 됩니다. 여러분 개인에게 걱정이 남아 있고, 가정에 고통이 남아 있고, 사회에 고통이 남아 있고, 국가에 고통이 남아 있고, 세계에 고통이 남아 있으니, 이 심판의 관문을 어떻게 통과할 것이냐? 그곳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변호사가 나와야 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러한 면에서 변호하겠다.’고 변호사의 책임을 짊어진 패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누구냐 하면 지금까지 왔다 간 교주들입니다. 그중에서 우리에게 제일 가까운 자리에 선 것이 기독교입니다. 기독교는 사랑을 중심삼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하고, 예수님을 신랑이라 했으며, 세상 사람들을 신부라 했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사는 과정에서 사랑을 중심하고 파헤친 종교가 기독교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기에 기독교가 세계적인 종교가 안 될 수 없었다는 결론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공판정에 나가서 ‘내 아내가 제일 잘났습니다.’라고 변호할 수 있는 남편이 되고, ‘우리 아들딸이 제일 잘났습니다.’라고 변호할 수 있는 아버지 어머니가 있다면 오죽 이나 좋겠습니까? 그러면 하나님도 기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개인으로서 세계 만민을 변호할 수 있는 하나의 주인공이 나오길 바라셨습니다. 또 그 주인공이 공판정에 나가서 상충되는 입장에 있는 세계 앞에 변호할 수 있는 가정이 나오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리고 그 가정에 종족․민족․국가․세계 만민을 대신해서 변호할 변호사의 책임을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함입니다.

그 나라가 세워지면 세계 인류는 모두 선민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그 나라를 중심삼고 다스리는 모든 것이 선민사상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총결판 짓기 위해서 오신 분이 주님, 즉 구세주입니다. 구세주는 우리를 개인 심판의 공판정에서 변호의 책임을 지고 뽑아내는 것입니다. 가정․종족․민족․국가․세계의 공판정에서 뽑아내는 것입니다. 뽑아 가지고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망의 자리까지 나는 가겠다.’ 할 수 있는 가정이 있으면 개선가를 부르며 복귀된 사랑의 본향 집으로 돌아갈 수 있으니 그렇게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기독교인들에게는 세계를 부흥시켜야 될 책임이 있습니다. 광야의 목자를 대신하여 정성의 노정을 걸어야 됩니다. 여러분은 악의 혈통을 갖고 태어났기 때문에, 그것을 제거하기 위해 생명을 내걸겠다는 신념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마음을 비워 참다운 사랑만이 있게 해야 합니다. 참다운 사랑을 헤쳐 보면 그 사랑 가운데 내가 있고, 어머니가 계시고, 아버지도 계십니다. 또한 아내도 있고, 아들딸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참사랑의 뿌리를 찾아야 합니다. 그 뿌리로 땅 위에 싹을 나게 하는 가정이 있다면 세계를 지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가정에서부터 사랑이 싹터 오르면 인류 조상의 문화가 창조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쓰여지는 언어는 세계의 언어가 됩니다. 현재 사용되고 있는 언어는 무엇이고 간에 다 필요 없습니다. 영어가 심판받을 때가 올 것입니다.

이왕지사 자식이 되려면 사랑의 사회에서 진정한 사랑을 한 부모를 통해서 태어나고 그 부모가 쓰는 말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 민족을 통해서 새로운 세계를 향하여 출발해야 합니다. 거기서부터 사랑을 중심삼은 문화가 발달될 것입니다. 그 문화는 세계적인 문화가 될 것이요, 다른 문화는 그 땅을 통과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곳의 문화는 세계를 대표하는 문화인 것입니다.

그런 세계를 이루기 위해 나온 것이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재림사상입니다. 종교마다 재림사상이 없는 종교가 없습니다. 이 땅의 사람들이 사랑의 뿌리를 잃어버린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이르기를 만민을 고아라고 했습니다. 고아가 귀족이 사는 궁전이라고 해서 가 보니 그곳이 바로 원수들이 사는 소굴이요, 좋은 것을 먹고 있는 줄 알았더니 독약이 섞인 마약을 먹고 있었고, 좋다고 춤추고 있는 줄 알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칼날 위에서 춤추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사랑의 뿌리를 찾아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사랑을 찾아야 합니다. 바울이 말하기를 󰡒믿음․소망․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이 사랑이라.󰡓(고전 13:13)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믿음이 뭡니까? 한문으로 믿음이라는 글자를 써 보면 󰡐신(信)󰡑자입니다. 여기에서 󰡐사람 인(人)󰡑 자를 떼어 내면 󰡐말씀 언(言)󰡑자만 남습니다. 믿음이란 결국 사람의 말을 뜻합니다. 이때 말이란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를 맺어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관계가 없으면 말이 나오지 않으므로 말을 할 때는 벌써 상대적 기준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또 관계가 맺어 지려면 믿음(信)이 있어야 됩니다.

이러한 근본이 어디서 나왔느냐? 사랑으로 빚어진 인연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인연은 자기 멋대로 맺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 인연이 맺어질 힘의 여건이 있었고 목적하는 바의 기준이 서로 부합될 수 있었기 때문에 맺어진 것입니다.

사랑의 세계

우리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사람을 찾는 것입니까, 진리를 찾는 것입니까? 참다운 진리체를 찾는 것입니다. 참다운 사람과 참다운 진리가 하나 되면 소망은 이루어지는 것이요, 믿음은 성립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남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랑이지요. 이 사랑의 고개를 잘 돌파해야 됩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항상 있을진대 그 중에 제일이 사랑이라고 하였으니, 모든 것은 이 사랑을 중심삼고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류가 소망하는 것은 참된 진리를 찾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참된 인생관, 참된 세계관, 참된 우주관을 형성하여 그것을 중심삼고 땅 위에 새로운 세계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한 중심 사상이 바로 메시아사상입니다.

역사라는 것은 참된 진리를 찾아가는 노정입니다. 그 진리는 참된 개인이 살 수 있는 길, 참된 가정이 살 수 있는 길, 참된 사회가 이루어질 수 있는 길, 참된 나라가 이루어질 수 있는 길, 참된 세계가 이루어질 수 있는 길을 제시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개인으로부터 세계까지의 초점이 전부 다 일치되어야 세계완성․국가완성․종족완성․가정완성․개인완성이 가능한 것입니다. 이처럼 맞아떨어질 수 있는 핵이 되는 말씀, 즉 진리를 갖고 오시는 분이 메시아이니, 그 진리는 바로 하나님의 참된 사랑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인류는 새로운 세계를 향하여 나가는 데 있어서 진리를 알지 못했기에 잘못되었습니다. 그러니 인간들은 참된 우주관을 찾아 가지고 참된 인생을 가르쳐 주기 위해 출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중심삼고 하나님의 사랑을 부여받아 새로운 세상을 향하여 출발해야 합니다. 이것이 지상천국을 이루는 방편입니다.

오시는 주님에게는 본래의 참된 하나님의 사랑이 있고, 하나님의 참된 진리가 있습니다. 이 진리에 의해서 가정이 벌어지고 사회와 국가와 세계가 벌어지는 것이요, 개인적․가정적․종족적․민족적․국가적․세계적인 사랑, 이념, 인격이 출발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개인에서부터 출발합니다. 그러므로 개인으로서 참되게 사는 사람은 땅 끝 어디에 있더라도 세계를 위해서 사는 사람입니다. 사랑의 세계에서는 그렇다는 것입니다.

심정의 세계에서 한 시간 사는 것을 천년사에 자랑할 수 있고, 하루 사는 것을 만년 역사에 자랑할 수 있게끔 인생의 고귀한 것을 체험할 수 있게 하는 사랑이 참된 사랑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참된 사랑을 느껴 봤어요? 참된 사랑이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참된 사랑은 세포가 팽창하는 기운까지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 세계가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세계입니다. 그 세계는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지만, 마치 화창한 봄날에 구름을 타고 날아가는 듯한 느낌을 주는 황홀한 세계인 것이요, 모든 세포가 춤추는 듯한 기분이 되는 세계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처럼 멋진 인생을 살 수 있는 영원한 진액을 하나님으로부터 보충 받아야 합니다. 이것을 보급 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항상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자리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이 통일교회 문 선생을 아무리 욕하고 핍박해도 내가 가야 할 길은 죽어도 갈 것입니다. 가다가 다리가 잘려 나가도, 목뼈가 부러져도 그까짓 것쯤은 참고 갈 수 있습니다. 구정물에 들어가 춤을 추라고 해도 할 수가 있습니다. 맑은 물로 깨끗이 씻어 버리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욕을 내가 다 먹고 욕 보따리를 다 짊어지더라도 괜찮습니다. 욕은 영양분이 없어서 배는 부르지 않지만 욕도 영양분으로 소화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선생님은 언제나 혼자

통일교회를 핍박하는 간판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통일교회를 ‘국제공산당’이라고도 합니다. 우리는 왜정 때에 왜놈들한테도 당했고 이북에서 공산당한테도 당했습니다. 요전에 어디서는 통일교회가 조총련이라고도 했습니다. 기가 막히지만 ‘내 말 없이 다 짊어지마. 나 하나 욕먹어서 대한민국이 복 받으면 되는 것 내가 견디마.’ 했습니다. 그렇지만 선생님을 때려 죽여보라는 것입니다. 뒤끝이 어떤가. 통일교회 교인들에게 제일 무서운 것이 뭐냐면 통일교회 문 선생을 빼앗기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선생님보다 더 귀한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 그래요, 안 그래요? 「그렇습니다.」 설령 남편은 빼앗겨도 괜찮을지 모르지만 통일교회 문 선생을 빼앗기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가 위대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통일교회 문 선생이 무슨 요술을 부린다면서 별의별 욕을 합니다. 한번은 공산당을 몰아내기 위해서 이북에 넘어갔는데 그만 내가 잡혀 들어갔습니다. 내가 뭐 이남에서 왔다고 해서 이승만의 앞잡이라나요? 그러나 아무리 조사를 해 봐도 근거를 못 잡았어요. 그러니까 박수무당이니 사회를 문란케 한다느니 하고 잡아 가두었습니다. 선생님은 매도 참 많이 맞았습니다. 고문도 많이 당했고 천대도 많이 받았습니다. 요즈음은 몸이 많이 좋아졌지만 그런 길을 걸어 나온 사람입니다. 아주 극적인 장면들이 많았습니다. 그것들을 소망에 찬 내일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라고 생각하니 귀한 시간들이 되었습니다.

왜정 때는 얼마나 맞았는지 몇 시간씩 기절하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채찍에는 굴복 안 합니다. 나라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절대로 사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가 처음 일본에 갔을 때 일본 황실에 충성한 사람들이 나를 무시하고 반발했지만, 내가 20년 만에 다시 가서 일본 청년들을 다 모았습니다. 이제는 내가 무엇을 요구해도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통일교회는 욕을 먹는 바람에 자꾸만 더 커졌습니다. 그런데 욕을 안 먹고 다 좋다고 그랬으면 얼마나 크게 되었겠습니까?

여기 처음 온 사람들은 통일교회를 잘 모를 것입니다. 그렇지만 선생님이 지나온 사연을 드라마로 엮어 방송국을 통해서 사흘만 말하게 되면 아무리 목석 같은 사람도 다 통곡할 것입니다. 양심은 양심을 통해서, 인연은 인연을 통해서 느껴지는 것이기 때문에 천품이 좋은 사람은 느낄 것입니다. 통일교회의 뜻을 알게 되면 이상해집니다. 세상적인 공부에 관심이 없어집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관심의 대상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뜻 있는 사람은 통일교회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선생님이 국내에선 아무도 만나지 않지만 외국 가면 그렇지 않습니다. 선생님이 만나고 싶은 사람은 다 만납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만나 1953년에 한국을 휴전시킨 것은 잘못한 것이라고 한 시간 이상 토의를 했습니다. 이번에 미국에 가게 되면 또 만날지 모릅니다. 오지 말라고 공갈 협박한다고 해서 안 가겠습니까? 여러분은 어때요? 「가겠습니다.」 대답은 시원스럽게 하지만 대답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선생님은 지금까지 친구 한 명 없이 혼자였습니다. 이북에 갔을 때도 상대가 없었습니다. 언제나 혼자였습니다. 지금도 혼자입니다. 여러분들이 선생님을 은근히 따르고 있다고 하지만, 자기가 잘 되겠다는 속셈을 차리기 위한 것이지 선생님을 위해 따르는 것은 아닙니다. 항상 자기들이 먼저입니다. 기분 나쁘면 기분 나쁘다고 야단합니다. 축복이 있을 때 ‘선생님, 우리 아들은 3년 됐는데 축복을 안 해 주시면 됩니까? 우리 아들은 3년 됐는데 왜 빼 놓으십니까?’ 하는 것은 누굴 위해 믿는 것입니까? 선생님을 위해 믿는 것이 아니요, 자기들을 위해서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혼자다 이거예요.

참된 사랑

참이라는 것은 참된 사람이 오지 않고는 세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참 자체는 거짓과 근본부터 다릅니다. 참은 거짓 사람을 원치 않으며, 또한 거짓 사람에게는 참사랑을 줄 수도 없는 것입니다. 통일교인들은 제일 참된 것을 취급하는 사람들이니만큼 사랑이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우주의 주인인 하나님의 사랑은 지금까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그 하나님의 사랑을 찾아 세워야 합니다. 그리하여 빗나간 길을 바로잡자는 것이요, 참사랑의 뿌리를 한번 잡아 보자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여러분이 통일교회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체휼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통일교회는 일반 교회와 다른 점이 많습니다. 통일교회에는 전기장치가 되어 있어서 한번 들어가면 나올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거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전기는 전기이지만, 하나님의 사랑의 전기이지요. 전깃불도 전등도 갓도 애자도 눈에 보이지만 정작 전기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이 보이지 않는 전기에 사람이 달라붙게 되면 죽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전기도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아무리 움직이고, 생각하며 책을 보아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론으로 논리가 서 있는 것은 인간이 만들어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인류가 이론을 적용시켜서 과학문명을 발전시켜 나왔는데, 마찬가지로 영계가 인정하는 사랑의 이론이 있다면 사랑도 인간이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사랑이란 인간 두뇌로써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며 차원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무슨 관이니 뭐니 하는 것들을 다 초월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타락한 세계에서는 참된 사랑을 세울 수 없습니다. 끝날에는 타락한 세계의 사랑을 정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심판이란 지금까지의 악한 세상의 뿌리를 뽑고, 줄기를 잘라 버리고 본연의 사랑을 접붙이는 것을 말합니다. 접붙이기 위해서는 잘라 버려야 하겠지요? 그런 대심판의 때가 되었기 때문에 가정의 모든 법도가 깨져 나갑니다. 세계적으로 다 깨져 나갑니다. 타락세계의 인간들은 자식을 아나, 부모를 아나, 사회를 아나, 나라를 아나, 모두가 나, 나, 나밖에 모르니 각성해야 됩니다.

미국은 큰일났습니다. 민주주의가 좋은 줄 알았더니 개인주의가 만연되어 서로서로가 분리되어 망해 간다는 것입니다. 개인주의는 망합니다. 나라가 망하는데 그냥 있으면 민족도 망하는 것이요, 사회가 어떻든 나만 잘 먹고 잘 살면 된다는 개인주의는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것은 천도에도 없습니다. 이러한 개인주의 사상으로 말미암은 것이 미국의 혼란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돌려놓을 것이냐? 이러한 것을 바로잡고 고쳐 나가자는 것이 통일사상입니다.

지금까지의 사랑은 사탄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이니 청산되어야 합니다. 타락한 인류에게는 사랑의 관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중심삼은 사랑을 심어 주어야 합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데 설명이 필요합니까? 이론이 필요한가요?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데 이론적으로 하나요? 사랑에는 이론과 설명이 통할 수가 없습니다. 사랑이 무엇인데 그것 때문에 죽고 살고 합니까? 그것은 논리와 이론이 쓸데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필요로 하며, 그 사랑의 뿌리를 찾고 싶어하지요?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은 어디에 나타나느냐? 하나님 자신에게만 나타나서는 인류와 아무런 상관이 없으니, 천년 왕국도 다 소용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에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본래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의 사랑은 인류의 맨 처음 조상인 아담 해와에게 나타날 것이었습니다. 사랑이 저녁때가 되었다고 잠을 자는 것입니까? 때가 되었다고 아쉬워하면서도 보따리 싸들고 가는 것입니까? 여러분이 알고 있는 사랑은 그런 것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에게 나타난다

타락한 세상의 사람들도 아침에 일어나 사랑하는 자식의 얼굴에 뭐가 더럽게 묻어 있어도 개의치 않습니다. 양치질도 하지 않은 채로 있어도 그저 사랑스러워서 덥석 안아 입을 맞춥니다. 어머니들은 아기가 젖을 빨 때 피가 나도록 빨아먹어도 젖을 빠는 것을 보면 재미가 나는 것입니다. 자기 살을 빼앗아 가고 진액을 뽑아 가는데도 그저 기분 좋아합니다. 그저 사랑스러워서 가만히 내려다봅니다. 밤에 자다가 우유를 달라고 하면 먼저 맛을 한번 보고 줍니다. 아주머니들, 그래요? 안 그래요? 안 그런 어머니가 가짜 어머니입니다.

짓궂은 녀석이 밖에 나가 싸우고는 울고불고 야단법석을 떨고 집에 돌아오면 부모의 마음은 무척 아픕니다. 이건 왜 그러냐? 결과적인 사람의 생리가 자식을 그렇듯 사랑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의 관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통일교회 문 선생도 통일교인들이 욕을 먹으면 마음이 아픕니다. 여러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부모 입장이기 때문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처녀 총각에게 그 부모가 ‘너 다시는 사랑하지 말라.’고 하며 반대하면 ‘옳소이다.’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의 사랑은 절대적입니다. 누가 하지 말라고 하면 더합니다. ‘아이구 이 땅에서 못살면 후세에서 같이 살자.’ 하며 죽습니다. 이것이 세상에서의 무질서한 인격입니다. 인간들은 질서의 법도를 따라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중심한 혁명을 해야 됩니다.

그런데 사탄세계의 사랑보다도 더 큰 사랑이 나오면 사탄세계의 사랑은 떨어지는 것입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가서는 안 된다고 암만 울면서 말려도 더 큰 사랑이 있으면 아내는 그리로 가는 것입니다. 남편이 아무리 때려도 가고, 아내가 아무리 당신 없이는 못산다고 해도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참사랑을 맛본 사람은 그곳을 떠나서는 어디를 가더라도 못사는 겁니다. 통일교회가 욕먹는 동기가 이런 데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죄입니까, 선입니까? 여러분, 맛있는 것을 한번 먹어 보면 아무리 비싸더라도 그것을 먹게 되지요? 마찬가지로 자기들이 좋아하는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이 있다면 그 사랑이 있는 곳으로 마음이 작용하는 것입니다. 통일교회 선전 잘 하지요?(웃음) 통일교회에 들어오면 그런 일이 벌어지기 때문에 남편 아내 할 것 없이 모두 들어와야 하는 것입니다. 남편이 통일교회에 갔다면 아내도 얼른 따라 나와 무릎 꿇고 앉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역사상에 없었던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무엇이냐? 믿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나밖에 없는 사랑과 접붙여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나를 본받아라. 나는 하나님의 독생자다.’라고 했습니다. 거짓 사랑보다도, 작은 사랑보다도 참사랑, 큰 사랑이 나타나면 그 사랑에 연결시켜야 됩니다. 사랑의 본질은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에게 나타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이 남자에게 먼저 나타나겠습니까, 여자에게 먼저 나타나겠습니까? 어디서 먼저 나타나야 됩니까? 여자들은 여자에게 먼저 나타나야 된다고 하고 남자들은 남자에게 먼저 나타나야 된다고 하며 서로 싸울 것입니다. 그러니 이걸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지을 때 누구를 먼저 지으셨습니까? 아담을 먼저 지으셨습니다. 아담은 아담하기 때문에 아담입니다.(웃음)

그러면 하나님이 아담을 지을 때 노라리 가락으로 놀아먹자고 지으셨겠습니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사람 얼굴의 이목구비는 참 조화 있게 지어졌습니다. 사람의 감정이 모두 그 얼굴에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얼굴을 보면 모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웃는 것도 좋고 우는 것도 좋습니다. 하지만 기쁜 것과 슬픈 것은 다릅니다. 기쁘면 얼굴이 붉어집니다. 사람이 슬픔을 주관하고 살 수 있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바뀌는 것입니다.

슬픈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고통입니다. 고통을 주관할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는 돈을 주관해야 합니다. 돈을 종이 쪽지로 생각하고 극복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슬플 때 눈물이 납니까, 안 납니까? 「납니다」 응, 모두 나 닮았구만.(웃음) 하나님을 닮아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그렇습니다.

청산해야 할 종의 사랑

우리 통일교회 교인에게 좋은 교훈이 있는데 그것이 탕감이라는 것입니다. ‘탕감’이라는 이 두 글자만으로 감투를 쓰고 내가 죽게 되더라도 인류를 위해서 탕감조건을 세우게 됩니다. 그러면 한이 되겠습니까? 통일교회의 탕감의 원리가 얼마나 위대합니까? 이래도 통일교회가 이단입니까? 몰림받고 쫓겨나는 발걸음으로 말미암아 소망을 창조하는 것이 탕감복귀입니다. 욕을 먹고 쫓겨나는 자리에서도 내가 이 길을 감으로써 만민이 탕감 받는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이 쉬운 일일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소생될 수 있는 길은 고통과 공포의 길입니다. 그러니 거기에서 희열을 느끼고 소망을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소망이 있기에 조금 고생스럽고 슬픈 일이 있어도 극복해야 합니다. 모든 고통과 슬픔을 극복하고 새로운 소망을 찾아 나가면서 인류에게 복을 주기 위해, 우주적이고 역사적인 사연의 흐름을 알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위대한 사람입니다. 선생님은 통일교인들을 그런 사람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11시간 45분 동안 말씀을 한 적도 있습니다. 그건 기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긴 시간 동안 그렇게 많은 얘기를 했어도 길고 지루하다고 나가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이 어디에 나타난다고 했습니까? 사람에게 나타난다고 했지요.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나타나느냐? 사랑의 순서에 따라 나타나는 것입니다. 먼저 부모의 사랑, 다음에는 부부의 사랑, 다음으로 자녀의 사랑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통일교회에서 이것이 나타나기를 원했습니다. 여기에 하나 더 플러스할 것이 있으니 그것이 형제의 사랑입니다. 형제의 사랑이 나와 그 가치를 더하니 지금부터 사랑이 기약되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역사가 출발한 그때부터 참다운 부모의 사랑, 참다운 부부의 사랑, 참다운 자녀의 사랑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지금까지 인류는 타락한 사랑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최상급의 사랑을 중심삼고 출발해야 할 것인데도 불구하고, 인간 시조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종인 천사장의 사랑을 중심하고 출발했습니다. 종의 사랑에서부터 출발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종의 사랑을 받겠습니까? 주인의 사랑을 받겠습니까? 주인의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은 종의 사랑을 받아 왔습니다. 덜된 사랑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청산해야 되겠습니까, 붙들고 있어야 되겠습니까? 청산해야 되는 것입니다.

천사장이 인류의 시조를 유인해 가지고 사랑의 법도를 침범했습니다. 그러한 6천년 동안의 한 많은 타락의 인연을 떼어 버리고 싶은 것이 하나님의 소망입니다. 타락한 인간을 암흑천지의 혼돈 가운데로 처형하고 싶은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었는데 무엇 때문에 치지 못하고 남겨 두셨느냐? 거기에는 공의의 하나님께 인간 스스로가 법도에 의해서 타락의 껍질을 한 꺼풀, 두 꺼풀 벗고 나서 본연의 자리를 찾아가게 하고픈 부모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종의 종의 입장으로 타락되었기에 본연의 자리를 찾으려면 하나님 편의 참다운 종이 나와야 합니다. 그런 책임을 선생님이 지고 있기 때문에 여러분을 하나님의 참다운 종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참다운 종이 되어야 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종인 천사장의 자식이라는 기준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과 다시 사랑 관계를 맺어 가지고 천상의 종의 대표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여 하나님이 사랑하실 수 있는 종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는 양자가 되어야 합니다. 양자로 복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양자와 직계 자녀는 무엇이 다릅니까? 핏줄이 다릅니다. 오늘날 모든 사람들은 양자밖에 못 됩니다.

양자란 원래 직계 아들이 없든가, 아들이 있지만 불량배가 되었다든가, 부모를 배반했다든가 하는 경우에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직계의 자녀가 없기 때문에 양자가 필요하고 양녀가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종의 자식을 믿을 수는 없지만 아들이 없고 딸이 없으니, 할 수 없이 종의 자식이라도 데려와야 하는 것이요, 양자를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민족은 양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했습니다. 양자의 이름으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는 것입니다. 양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직접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합니다. 자기를 낳아준 아버지가 따로 있고, 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통일교회가 가르치는 것

본래 아담과 해와는 하나님의 직계 아들딸로 지음 받았는데, 그들은 종에게 끌려가서 죄를 지어 종의 피를 받고 종의 새끼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아들은 망할 수밖에 없는 자식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통일교회는 몰리고 쫓기는 것입니다. 통일교회가 기성교인들에게 욕을 먹는 것은 그들만 못해서가 아닙니다. 또 일부 사람들은 통일교회 문 선생이 벌거벗고 춤을 춘다고 하는데 모르는 소리 작작 하라고 하십시오. 잠꼬대 같은 헛소리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통일교회 문 선생이 그렇게 껄렁껄렁한 사내가 아닙니다. 그런 소리 듣고 무너질 것 같으면 벌써 보따리 쌌을 겁니다. 내가 살면 얼마나 살겠습니까? 내가 이렇게 보여도 고등학교 때 씨름해서 일등 했습니다. 그들에게 복수하라면 할 수도 있습니다. 한번 들이쳐서 끝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왜 못하느냐? 우리에게는 세계복귀라는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분기점에서 나는 지금까지 참아 왔습니다. 남들이 뭐라고 하든 간에 버젓이 왔다 갔다 하면서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은 선생님 말고는 세상의 누구도 못합니다.

하나님은 누구 때문에 아들을 잃어버렸습니까? 창세기에 보면 아담 해와가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들딸이 타락하여 종의 자식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종의 자식을 데려다가 키우셔야 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얼마나 한탄하셨겠습니까? 여러분,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 보세요. 이걸 알아야 하나님의 직계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거룩하시다고 하면서 눈물 흘리지만, 복 받기 힘든 사람들입니다. 본연의 아들딸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저끄러진 6천년의 인류역사를 대속해야 됩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지금 하나님의 아들을 세우기 위해 종의 자식을 가르치고 기를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야 하는 입장에 있다는 것을 모르고 도리어 ‘하나님, 복 주소서.’ 합니다. 복 받기 전에 복을 돌려 드려야 할 텐데 말입니다.

여기서부터 세계는 기원이 달라지는 것이요, 다음에는 여러분이 달라지는 것이니,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해방 받기 전에 먼저 하나님을 해방시켜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식으로서 부모를 사랑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하나님더러 복을 달라고요? 불효했던 것을 회개하고 아버지의 마음속에 사무쳐 있는 깊은 한을 풀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채찍을 맞고 만민 앞에 버려지고 만민 앞에 걸인이 되더라도 가야 할 것이 효자의 도리라는 것을 명심해야 됩니다. 이것이 통일교회가 가르치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것이 옳습니까? 복이 필요하다고 무조건 ‘아이구, 나한테 복 주소서.’ 해야 됩니까? 그러면 모두가 도둑들이요, 모두가 가인입니다. 부모의 심정을 알지도 못하면서 종의 새끼가 되어 가지고 부모더러 자기의 분깃을 달라는 것입니다. 앉을 자리, 설자리를 제대로 알고 그런 말을 하는 것입니까?

천상세계의 대왕께서 어찌하여 아들딸을 다 잃어버리시고, 아들딸을 찾기 위해 종의 세계로 끌려들어가는 것입니까? 인간이 종의 종으로 끌려들어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탄이 하나님 앞에서 번번이 비소하며 침 뱉고, 번번이 패가망신시키는 것입니다. 사탄이 인간을 데려가면 하나님께서 데려오고, 데려가면 또 데려오고 하는 6천년 엉클어진 사연을 그 누가 알겠습니까? 종의 종으로 인연이 거듭되었으니 이것을 청산하고 양자의 인연으로, 아들의 인연으로 끌어올려서 천지의 위업을 일시에 상속해 주겠다는 하나님의 엄청난 내심을 누가 알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적자(嫡子)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은 지금까지 종적인 사랑과 양자에 대한 사랑의 마음은 가졌지만, 적자를 사랑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적자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이 땅 위의 만민 가운데 세우기 위해서 한 분을 보내셨는데, 그분이 독생자 예수님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직계 아들로 처음 나왔으니 하나님의 독생자인 것입니다. 4천년 만에 처음으로 태어난 하나님의 아들이 바로 예수님인 것입니다. 그러니 그 예수님의 인연을 중심삼고 돌감람나무인 인간들은 자신들의 모든 가지를 끊어내고 참감람나무인 예수님으로부터 접붙임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귀역사입니다.

온 천지가 그 한 분을 고대하며 얼마나 많은 역사 과정을 거쳐 나왔습니까? 그런데 그러한 예수님이 이 땅에서 핍박을 받으셨으니 얼마나 원통하고 비통한 일입니까? 그런 아들을 잡아죽였으니 인간들은 돌감람나무인 채 그냥 그대로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주님이 다시 오시려면 통일이라는 명사를 가지고 와야 예수님의 그 사정과 주님이 오시기를 바라는 우리의 사정이 맞게 됩니다. 그래야 이치에 들어맞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다시 오셔서 결혼을 해야 됩니다.

영적인 세계를 막아서는 안 됩니다. 영적인 세계는 육적인 세계의 뿌리인 것입니다.

참감람나무 되신 주님이 다시 오셔서 세계 만민이 그분으로부터 접붙임을 받음으로써 양자의 자리, 적자의 자리까지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오실 때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고 하셨습니다. 때문에 타락한 인간들은 예수님을 믿어 그 생명의 말씀을 체질화해야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의 근본은 종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양자가 되기 위한 순수한 사랑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될 게 아닙니까? 아담 해와는 부모의 법도를 배반한 불량배가 되었으므로 추방당하고 죽어 버린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의 대상이 죽어 버렸으니 다시 찾아야 되겠기에 충성과 효도를 하는 아들딸이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 14:36)라고 기도하고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그리하여 막혔던 천도가 다시 회생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내 뜻대로가 아니고 아버지의 뜻대로….’ 때문입니다. 바로 그것 때문에 선조들이 반대하여 가지 못했던 것을 탕감복귀하고, 하나님의 사랑의 아들이 된 것입니다.

그렇게 죽은 아들을 원수들의 손길에 의해 묻게 하고 싶지 않아서 하나님은 예수를 부활시키셨던 것입니다. 그래도 사탄은 참소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종이나 양자들이 갈 수 없는 본연의 아들의 자리를 찾은 것입니다. 통일교회가 20세기 후반기에 있는, 지금까지 갈 길을 못 찾고 도탄 중에 빠져 있는 세계를 구원할 주요 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딸로 구원을 얻으시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볼 때, 하나님은 아담 해와를 위해 우주를 지으셨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하나님은 울고 계십니다. 이런 사정과 뜻을 알았다면 자신의 슬픈 일로 가슴을 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살겠다고 하며 슬픈 일도 기쁨으로 맞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주사에 새로운 봄 동산을 맞이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지 못하면 구원을 못 받습니다.

기독교인들 중에 천당에 갈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요? 항상 통일교회를 이단이라고 하는데 그 말을 책임질 수 있겠습니까? 두고 보십시오. 이제 그들이 천국에 간다고 좋아하지만 영계에 가서 아무리 우리를 만나려 해도 만나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아마 통일교인들이 안 보이니까 전부 다 지옥에 갔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자기들이 지옥 웃 뚜껑에 앉아 있는 줄도 모르고….(웃음) 그러니 만날래야 만날 수 없지요. 기가 막힙니다. 선생님은 하나님을 울릴 수 있는 역사를 거쳐왔기 때문에 통일교회를 통해서 세계는 복귀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자신을 가지십시오.

만인에게 필요한 어린양 잔칫날

여러분이 아담 해와보다 더 하나님 앞에 효자 효녀가 되지 않고는 절대로 천국에 못 갑니다. 아담 해와가 효자 효녀가 되고자 했던 그 선을 넘어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선을 넘는 데 있어서 처녀 총각이 먼저겠습니까, 부부(夫婦)가 먼저겠습니까? 지상에서 결혼하여 부부로서 아무리 깨가 쏟아지게 행복하게 산다고 해도 영계에 가게 되면 ‘불합격’입니다. 차라리 같이 안 살았던 것만 못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이런 복귀섭리를 가르쳐 주니 고맙습니까, 안 고맙습니까? 「고맙습니다.」

통일교인들, 혼자서 하나님을 믿으면 좋겠군요. 고차적인 종교는 독신생활을 합니다. 수녀니 신부니 비구승이니…. 그러나 결혼을 하지 않으면 영계에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류의 종지조상인 아담과 해와가 결혼을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하나님을 중심하고 적자의 자리에 서기 위해서는 과거에 지은 죄를 전부 다 회개해야 합니다. 성경에, 돌아온 탕자의 비유처럼 다시 돌아온 직계 아들의 입장이 되어 과거의 모든 죄를 사할 때 하나님께서 ‘오냐, 내 아들아 잔치를 벌여 주마.’ 하실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때는 온 인류가 새 옷을 갈아입고 신랑 신부가 되어 잔치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어린양 잔치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미리부터 인간의 종지조상을 위하여 어린양 잔칫날을 받아 놓으셨습니다. 그러나 이런 어린양 잔치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요, 직계 아들딸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어린양 잔치를 하겠다고, 신랑을 맞겠다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꿀잡이가 된 것입니다, 거꿀잡이. 인간이 타락함으로써 참부모를 잃어버려 직계의 자녀가 못되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중심삼은 참부모가 이 땅에 출현해야 하는 것인데, 그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재림사상입니다. 하나님의 직계의 아들이 신랑으로 오셔서 신부를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6천년 전 에덴동산에서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혼식을 하려고 했던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깨져 버렸으니, 천신만고해서라도 그것을 청산해야 합니다. 6천년 사연을 다 청산하고 이 땅에서 비로소 혼인날을 맞이하는 그날이 바로 어린양 잔칫날, 즉 주님이 재림한 날인 것입니다. 그 날이 있어야 되겠습니까, 없어야 되겠습니다? 「있어야 되겠습니다.」

어린양 잔칫날은, 흑인에게도 필요하고, 백인에게도 필요하고, 한국사람 에게도 필요한 것이요, 젊은이, 늙은이 할 것 없이 온 인류에게 다 필요한 날이요, 영계의 영인들에게까지도 필요한 날입니다. 영인들도 끝날에 부모를 모시지 않으면 천국에 못 들어가는 것이니 그들에게도 어린양 잔칫날은 필요한 것입니다. 천국은 아버지가 자기 처자를 데리고 들어가는 곳입니다. 하늘의 법도가 그렇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천국 사랑의 뿌리는 무엇인가? 내가 있기 전에 누구의 사랑이 있어야 하느냐? 부모의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다음에는 앞으로 내가 있으려면 부부의 사랑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자식의 사랑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3대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부모의 사랑, 부부의 사랑, 자녀의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이 3대 사랑이 인간에게 있어서 절대적인 관을 초월할 수 있는 영원한 실존적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3대 사랑이 결합하게 될 때 인간은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완전하면 행복도 완전한 것이요, 이것이 결여되면 불행이 깃드는 것입니다.

어머니 없는 사람이 행복합니까? 어머니가 없는 만큼 불행한 것입니다. 또 아버지가 없는데 행복합니까? 아버지 없는 사람은 아버지 있는 사람이 부럽습니다. 행복하다는 것은 부러운 것이 없어야 합니다. 사랑도 부러운 게 없어야 합니다. 부러운 것이 있으면 행복하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없어도 행복할 수 없고, 어머니가 없어도 행복할 수 없습니다.

남자가 아무리 배포가 크고 큰소리쳐도 여자가 있어야 됩니다. 아내가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또 부부끼리 재미있게 살다가 남편이 훌쩍 가게 되면 부인은 눈물을 흘립니다. 남자가 없어도 안 되고 여자가 없어도 안 되는 것입니다.

수리로 본 사랑의 법도

다음에 부부끼리 아무리 정이 있게 산다 하더라도 아들딸이 없으면 어떻습니까? 불행합니까, 행복합니까? 「불행합니다.」 아들만 필요합니까? 아들딸이 다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를 들어 부모한테 아들딸 둘밖에 없다면 어떻겠습니까? 아들을 두고 볼 때에 그에게는 누나가 필요하고 또 형이 필요하지요? 또 딸에게는 오빠가 필요하고 언니가 필요합니다. 또 그들에게는 남동생과 누이동생이 필요합니다. 형님이 있어야 되고, 누나가 있어야 되고, 남동생 누이동생이 있어야 됩니다. 이것이 다 갖추어지지 않으면 불행한 것입니다. 여동생, 남동생, 누나, 오빠 다 갖추어져 완전히 하나되는 가정은 하나님이 보호하십니다. 이것이 씨족과 민족과 국가의 기원이 되기 때문입니다.

나를 중심하고 아버지, 어머니, 형님, 누님, 그다음엔 남동생, 여동생, 거기다 나까지 합하면 몇 명입니까? 「7명입니다.」 그래서 7수가 완성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완성이란 사랑을 두고 말한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어찌하여 7수가 완성수냐? 무엇 때문에 기독교에서 말하는 천지창조가 7수를 중심삼고 완성되었느냐? 그러한 내용이 있기 때문입니다.

3수는 하늘 수요, 4수는 땅 수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3수는 아버지, 어머니, 나 해서 3수입니다. 그러면 4수는 무엇을 말하느냐? 위의 3수에 동생들까지 합한 것이 4수입니다.

이 땅 위에 역사가 벌어진 이후에 어느 누가 부모를 중심삼은 참다운 사랑, 부부를 중심삼은 참다운 사랑, 형제를 중심삼은 참다운 사랑을 해 보았습니까? 참다운 사랑은 절대적인 것입니다. 아담가정에 있어서 가인과 아벨 사이에 상충이 벌어졌기 때문에 아직까지 참다운 형제의 사랑도 이 땅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출발된 역사이기에 하나님은 파탄된 참다운 형제의 인연을 다시 하나로 만들기 위한 섭리를 하시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파탄된 형제의 인연이 세계적인 형태로 나타난 것이 공산주의와 민주주의입니다. 맏아들은 가인이요, 작은아들은 아벨입니다. 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내적인 사정을 두고 싸웠던 것이 역사적인 인연이 되어 세계적으로 나타난 것이 공산국가와 민주국가입니다. 여기서 공산국가는 하늘 앞에 반대만 하는 가인적 입장이요, 민주국가는 하늘을 위해서 자기 생명도 아끼지 않고 버리는 아벨적 입장입니다.

그러면 아벨적 입장에 있는 미국은 누구를 위해서 희생해야 되느냐? 자기 나라를 위해서가 아니라 세계를 위해서 희생해야 됩니다. 자기 나라의 국력을 키우는 것보다도 외국 원조에 힘쓰면 절대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미국이 한국에 대한 원조를 삭감한다면, 두고 보십시오. 좋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미국만을 위하는 미국을 사랑하시지 않으며, 세계를 위하는 미국을 사랑하시나니 천륜을 배반한 국권을 인정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역사상에 길이길이 남아질 수 있는 국권은 천륜을 따라 온갖 정성을 다하는 국권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나라가 지금까지 없었습니다.

미래의 통일 천국은 어떤 것이어야 되느냐? 천륜의 법도를 따라 수립된 세계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개인적으로는 어떻게 가고, 가정은 어떻게 가고, 종족은 어떻게 가고, 민족은 어떻게 가고, 국가는 어떻게 갈 것인가를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선생님이 사랑을 중심삼고 갖추어야 할 것이 일곱 가지라고 했지요? 7수가 완성수라는 걸 알아야 됩니다. 성부․성자․성신은 하나님을 중심삼은 아담 해와를 말하는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은 하늘땅을 대신한 것입니다. 성부는 상하, 즉 종적인 인연을 말하는 것이요, 여러분들을 중심으로 볼 때 형과 누나는 동서를 말하고 남동생과 여동생은 남북을 말하는 것이니, 그것이 완성되면 입체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법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학의 모든 법칙도 수리를 떠난 공식 법도에 적용되지 않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법도에 근원 된 창조원리적인 개념이 여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법도가 자리를 잡게 될 때 평화의 기원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루어지지 못하면 지상천국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목적은 사위기대를 이루는 것이요, 사위기대는 하나님과 아담 해와, 그리고 그 자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자녀가 싸우면 사위기대는 파탄됩니다. (이후의 말씀은 녹음이 안 되었음)

<말씀 요지>

하나의 목표를 지향해 나가기 위해서는 몸과 마음이 하나 되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이끌어주는 큰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7일의 창조기간을 거친 피조물은 제8일, 즉 8수를 맞아야 합니다.

탕감조건은 반드시 동등한 가치로써 세워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작은 것으로써 큰 것을 탕감하는 조건을 세우고, 나머지 부족한 것은 하나님께서 책임지고 보충해 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해 주시려면 우리가 탕감조건을 세운 어떤 기간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인내심을 가지고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맹세한 것은 하나님이 대하시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하나님께 맹세한 것은 반드시 이루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홉을 준비해 놓으시고, 인간에게 하나를 가르쳐 주시어 맹세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십니다.

은혜는 반드시 탕감조건을 거쳐야 오는 것입니다.

때가 되기 전에 탕감조건을 세우면 인간에 대한 탕감조건을 물질로도 대신 세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도의 길을 가는 사람은 선을 행해야 합니다. 그것은 탕감노정을 미리 걷기 위한 것입니다.

개인복귀시대에 가정을 걸고 탕감조건을 세우면 가정복귀의 탕감노정을 쉽게 넘어갈 수 있습니다. 앞으로 다가올 가정시대의 탕감을 미리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제 7년노정을 넘으면서 남한을 위한 기도보다 북한을 위한 기도를 더 많이 해야 합니다.

<말씀 요지>

오늘은 선생님이 성혼한 뒤로 9수를 넘어 10수를 바라보는 날이며, 새 역사의 기원이 되는 날입니다.

하나님은 선생님 가정을 세우기 전부터 한국을 중심으로 당신의 내적인 뜻을 이루려 하셨습니다. 이날은 하나님 자신도 원한을 풀 수 있는 날입니다. 그러나 이날은 역경 중에 세웠기 때문에 7년을 두고 재탕감해야 됩니다. 또한 이 기간은 참부모도 6천년 동안의 하나님의 수고와 지상의 수고를 자신의 수고로 체휼하는 기간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잊고 나오셨기 때문에 선생님도 자기를 중심하고 나가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한 사람을 찾아오셨습니다. 지상에서 그런 사람을 세워 탕감하지 않고는 이 설움의 고개를 넘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선생님 가정에는 하나님의 6천년 서러움의 역사가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원수들이 안팎으로 핍박을 하면서 선생님의 노정을 막아 나왔습니다. 하나님도 이런 길을 걸어 나오셨습니다. 땅에서 잘못하여 이렇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심정은 누구도 알지 못했었습니다.

이러한 환경에서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가정을 찾아 세우려고 몸부림쳐 나온 참부모의 길을 여러분이 다시 걸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과거를 청산하지 않고는 이 길을 갈 수 없고, 자기 가정을 중심하고는 이 길을 갈 수 없습니다.

선생님의 내적인 고통이 얼마나 컸겠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가정을 보고 부모님이 고통을 잊을 수 있어야 합니다. 축복가정은 부모님 가정의 울타리가 되어 자기들이 훌륭하다는 것을 보여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새 세계의 대표적인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도 그런 가정이 되기 위하여 몸부림치고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하나님께서 축복가정들을 간섭하지 못했으나, 하나님의 날을 선포한 후부터는 간섭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법도를 세우고 제재를 가해서라도 본이 되는 가정으로 세워야겠습니다. 그러므로 축복가정은 교회 생활에 헌신적인 입장에 서야 합니다.

선생님이 가정을 이끌어 오는 데 무척 고생이 많았습니다.

사람들은 대개 자기를 중심하기 때문에 고충을 많이 느꼈습니다.

선생님은 여러분을 통해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모든 가정들이 선생님 가정을 대신하여 서야 합니다.

모든 생활이 공적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수련 기간 중에 여러분과 시간을 같이하려 했는데,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참석하지 못한 것을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이번 수련회의 의의와 특징

금년은 제2차 7년노정을 출발하는 첫해이고, 또 여러분들이 받은 이번 수련회가 1968년에 들어서는 처음이고, 또 제1차 7년노정이 끝나고 처음으로 가지는 수련회이니만큼 상당히 의의가 큰 줄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은 여러분과 많은 시간을 같이하려고 했었고, 여러분도 본부에 왔으니 선생님을 만날 수 있는 시간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텐데, 그렇게 되지 못한 것을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수련회를 마치고 왔던 길을 돌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수련회에 올 때의 마음과는 달리 돌아가야 하는 지금의 마음은 여러모로 착잡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집이면 집, 지역이면 지역에서는 돌아올 여러분을 상당히 고대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번 수련회에는 전과는 달리 외부 강사들을 많이 초청했습니다. 그것은 우리 통일교회가 대외활동에서 어느 정도 체면을 세웠고, 또 그들이 인식할 수 있는 평형 기준에 섰다고 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을 초청해서 강의를 들음으로써 이중의 이익을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수련생들에게는 흠모하고 선망하는 어떤 기준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대학교를 나오지 못한 사람들은 ‘대학교에 있는 학박사들은 얼마나 훌륭할까? 대학교를 졸업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며 부러워했을 것입니다. 그랬는데 한국에서 저명하다는 인사들을 초청해서 그들의 강의를 들음으로써 여러분 자신과 비교하고, 비판하고, 관찰하고, 타진해서 얻어진 결과가 많을 줄 압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입장에서 그들이 어떠하다고 평가하였을 것입니다. 이렇게 그들이 내세우는 어떤 기준에 대해 내가 평할 수 있다는 그 입장 그 자체가 얼마나 귀한 것입니까? 또 우리가 지니고 있는 이 이념이 얼마나 귀한 것입니까? 여러 면으로 생각한 바가 많으리라고 봅니다.

또 한 가지의 이익은 그 사람들에게 통일교회의 움직임을 소개한 것입니다. 이항녕 교수는 여기에서 여러분에게 강의하기 위해 모든 것을 계획하고 준비했었는데, 강의를 듣는 여러분들의 외모를 보고 처음에는 상당히 기분이 좋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할 말을 다 못하고 갔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강의를 하는 동안 ‘아차! 내가 잘못했다.’고 느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 앞에 우리는 초라한 모습이었지만 자기의 지식 기준, 혹은 현재 사회적인 지식 기준과 우리가 갖고 있는 인격적 기준과는 많은 차이가 있는 것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자기의 생각으로 우리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느꼈지만 강의하는 도중에 자기를 제어시키고 자기를 재평가했다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었다는 것이 그 사람에게는 크나큰 교훈이었을 것입니다. 그 사람이 그렇게 느낀 사실은 그가 어느 집회를 가거나, 어느 공식석상에서 서게 되더라도 생각날 것입니다.

통일교회의 청년들을 외적으로 보고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했는데, 질문하는 내용을 보고는 ‘젊은 사람들이 됐구나.’ 하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어떠한 공식석상에 서더라도 대중을 바라볼 때, 그런 모습이 있을 때마다 거기에서 생각나는 것이 통일교회 수련생의 모습일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이번에 우리가 그 사람에게 좋은 자료를 주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외래 강사들을 초청한 목적

이런 것을 볼 때 여러분은 갖추어진 환경이 문제가 아니라, 그 배경이 어떻게 되어 있고, 그 배경을 통하여 나타난 사실이 어떠한가가 문제라는 것, 즉 현재 나타난 모습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았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이번에 다녀간 교수들은 반드시 ‘통일교회 갔더니 뭐 어떻더라.’ 하고 함부로 평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지금까지의 강단에서 느꼈던 것과는 다른 무엇인가를 느끼고 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한 것을 많이 느끼면 많이 느낄수록 그 사람들은 대한민국에서 최고의 사람들을 대했으니만큼 종교 문제가 나오면 반드시 통일교회 얘기를 더 많이 할 것입니다.

그들은 고위층을 대할 수 있는 관계를 갖추고 있으니 그 사람들을 통해서 앞으로 우리 통일교회를 간접적으로 천명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데 좋은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 이런 일을 해 봤는데, 앞으로는 각계 인사들을 전부 초청하려고 합니다.

이번에 그들이 와서 강의한 내용은 그들이 연구한 전문 분야의 골자입니다. 이것을 불과 한 시간 반, 또는 두 시간 이내에 전부 배운 것입니다. 만약 책을 한 권 출판하려면, 한 20여 명 초청하여 강의하게 하면 될 것입니다. 그들이 강의한 것을 모으면 좋은 책이 될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단에 서게 되면 자기의 자랑을 하려 하고, 자신의 전문 분야 중에서 최고 우수한 부분을 대중 앞에 내놓으려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강의하는 내용은 그들 나름대로 주장할 수 있는 것 중의 최고일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신앙 일변도였지만 이제는 사회적으로 그런 사람들과 접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습니다. 또 그런 사람들을 초청하여 그들의 강의를 접하는 것이 여러분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보아서 이번에 외래 강사를 초청했던 것입니다.

이제 하룻밤만 자면 여러분은 각자 집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러면 돌아가서 무슨 말을 할 것입니까? 사람은 어디에 출타했다가 돌아가게 되면 선물을 가져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여기 왔다가 돌아가는 선물로 무슨 말을 하여 기다리는 사람들을 기쁘게 할 것입니까?

어떤 초청을 받고 강의를 하게 될 때, 제일 큰 문제가 처음에 무슨 말을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첫마디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제 돌아가서 무슨 말을 할 것인가에 대하여 생각해야 됩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제목은 ‘말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사람이 되자’입니다. 이런 내용을 가지고 잠깐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말할 수 있는 사람의 자격

이제 여러분이 집으로 돌아가면 새로운 말을 해야 될 것입니다. 비록 집을 떠났다 돌아가는 기간은 10여 일에 지나지 않지만 돌아가는 그 자체에는 크나큰 변동이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무슨 말을 할 것이냐? 남의 말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남이 밥 먹는 것을 구경만 하고서는 밥을 맛있게 먹었다고 아무리 설명해도 실감이 안 나는 것입니다. 말하는 사람도 실감이 안 나고, 그 말을 듣는 사람도 들으나마나한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배가 고플 때 밥을 먹고 나서 어떻게 어떻게 먹었다고 하는 말은 실감이 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이렇게 여러분이 말할 수 있는 내가 되기 위해서는, 이번 수련회를 마치고 돌아가면 자기 자체에 변화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 변화란 좋은 의미의 변화입니까, 나쁜 의미의 변화입니까? 어떤 의미의 변화가 제일 좋겠습니까? 물론 좋은 의미의 변화입니다. 좋다는 데는 한도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일생에서 출세할 수 있고, 성공할 수 있는 동기를 포착하는 그 시간은 영원한 시간이 아니며 많은 시간도 아닙니다. 그것은 똑딱하는 순간에 결정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오래 걸려서 하는 마음의 결정도 천상에서는 극히 순간적으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순간적으로 결정된 것을 전체에 어떻게 반영시키느냐에 따라 사회를 혁명할 수 있고, 역사를 혁명할 수 있으며, 새로운 세계를 재창조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지금까지 살아온 나를 가지고서는 안 되겠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에 무엇인가 달라지기 위해서 여기에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자신이 내적인 마음의 변화를 일으켰다, 또는 스스로는 주체할 수 없는 폭발적인 혁명이 일어났다 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여러분은 발전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을 가만히 보면 어느 누구나 출세하기를 원하고 있고, 성공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바라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대한민국을 중심삼고 볼 때에 대한민국은 세계에 말할 수 있는 나라가 되자는 것입니다. 또 대한민국에 있는 사회단체를 중심삼고 볼 때에도 대한민국에 말할 수 있는 단체가 되자는 것입니다.

그럼 자기 말을 들을 대상이 누구겠습니까? 자기 이하의 대상이 아닙니다. 자기 단체 내의 사람들보다도 더 차원 높은 상대를 대하여 말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감동시키려고 합니다. 그런 것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욕구인 것입니다. 인간은 그런 욕구를 충족시키려고 함으로써 보다 더 큰 성공을 가져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말을 들을 수 있는 대상으로 요구하는 사람은 자기보다 작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말을 들으면서 ‘다 아는 이야기지 뭐. 먹고 쓰고 난 나머지, 껍데기, 찌꺼기, 꽁다리지, 그까짓 것.’ 하는 마음을 지닌 사람은 자기 자신을 생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자기들이 알지 못했던 보다 더 행복스럽고, 보다 더 가치 있고, 보다 더 보람 있는 것을 추구할 때 비로소 진지한 사건이 벌어집니다. 마음을 합하여, 공통의 목적점을 취하여, 둘이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릴 때의 목적은 개개의 목적을 능가할 수 있는 것이어야 됩니다. 그렇게 되어야만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할 수 있는 대상이 자기보다 생각을 많이 한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어떤 때 다른 사람이 기도하는 것을 가만히 들어 봅니다. 여러분은 기도할 때 어떻게 합니까? 선생님은 ‘하나님, 저희는 본래 하나님의 아들딸로 태어났으니 이 세계는 내 것이 아닙니까? 내게 세계를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먼저 잘못했다고 회개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내 욕망이 이러이러하니….’ 하고 자기 욕망을 중심삼고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기도를 할 때는 먼저 하나님을 설득시켜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귀를 기울이게 해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귀를 기울이실 수 있는 재료를 가져야 됩니다.

말할 수 있으려면 말할 수 있는 재료를 갖추어야

여러분이 기도하는 것을 보면 전부 다 무엇을 주시옵소서라고 달라는 기도만 합니다. 달라고 하는 것은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이지 하나님이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감동시키려면 하나님께서 필요로 하는 재료를 구해야 합니다.

그럼 그 재료가 어떤 것이겠습니까? 웃고 얻을 수 있는 재료입니까, 죽고 얻을 수 있는 재료입니까? 웃고 얻을 수 있는 재료라면 지금까지 남아 있을 리 없습니다. 이 세계에 왔다 간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웃으며 얻을 수 있는 거라면 벌써 다 훔쳐 가고 빼앗아 갔을 텐데, 지금 여러분에게 나눠줄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재료는 여러분이 웃고 찾을 수 있는 그런 재료가 절대 아닙니다.

그럼 어떻게 그 재료를 취할 것이냐? 죽기내기로 해야 됩니다. 죽기내기를 하는데, 손 하나나 팔 하나를 잘라 버리겠다 하는 사람이 있으면, 두 손 다 자르겠다고 하는 사람에게 빼앗기는 것이며, 두 손을 자르겠다는 사람은 두 손과 한 다리를 자르겠다는 사람에게 빼앗기는 것이며, 또 그 사람은 두 손과 두 발을 모두 내놓은 사람에게 빼앗기는 것입니다. 그 사람도 목숨을 내건 사람에게는 빼앗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했으면 목도 자르라고 내놓을 수 있어야 됩니다. 성경에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라는 말씀이 있듯이 죽고 보니 그곳에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부활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감동시키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하나님의 필요한 재료가 되어야 합니다. 그 재료는 악과 바꿀 수 없고, 지상의 악을 제거할 수 있는 재료가 되어야 합니다. 또 그 재료가 하늘땅 전부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것일 때는 하늘땅을 모시고 와서 그 재료와 바꾸자고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이 말할 수 있는 내가 되려면 말할 수 있는 재료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재료가 건달꾼같이 뒷골목에서 훔쳐 온 것이 되어선 안 됩니다. 그런 재료를 가지고 말을 하면 모두에게 공격을 받습니다. 그런 재료를 가지고는 내 양심이 자극을 받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이 말할 수 있는 재료를 찾기 위해 피땀을 흘린다면 하늘땅으로 보나, 양심으로 보나, 과거․현재․미래로 보나 부끄러운 일이 없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그런 재료를 가지고 있습니까? 옛날의 충신열사들을 왜 지금의 사람들이 추모하고 그 인격을 존경하지 않으면 안 되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그들이 만민이 추구하는, 인간으로서 가야 할 표본을 남겨놓고 갔기 때문입니다. 그 재료로 가야 할 길에 다리를 놓아야만 하기 때문에 그것을 자기 자신의 부활권 내로 끌어들여야 합니다. 그래서 지난날의 사람들이 지금까지 그 길을 지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알겠습니까? 「예.」 그래서 말할 수 있는 재료가 필요한 것입니다.

인정 받을 수 있는 재료가 있어야 참이 번식된다

여러분은 원리강의를 들었습니다. 그럼 그 원리가 누구의 재료입니까? 들은 재료입니까, 찾은 재료입니까? 찾은 재료라면 어떻게 해서 찾은 재료입니까? 건들건들하면서 힘없이 파 가지고 찾아질까요? 그렇게 해가지고 찾아지겠습니까?

여기에는 천태만상의 사람이 다 모였습니다. 같은 밥을 먹고, 같은 노래를 하고, 같은 말씀을 들었지만 천태만상의 차이가 여기서도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 재료는 누구의 재료입니까? 그것은 누구에게서 찾아지는 것입니까? 또 어떻게 찾아지는 것입니까? 그것이 찾아지는 높이와 넓이와 깊이와 폭에 따라 그 사람의 가치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 가치에 비례해서 발산하는 빛의 광채도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것을 찾기 위해 밤을 새워 봤어요? 밥을 굶어 봤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용기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잠을 자서는 안 될 텐데, 이놈 왜 자꾸 자려고 그래?’ 하고 자책해 봤어요? 「안 해봤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다는 재료가 어떤 것입니까? 종이쪽지 같은 것입니까, 혹은 쇠막대기 같은 것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못 같은 것입니까?

자식이 부모 앞에 ‘선은 이렇고 후는 이렇습니다. 저것은 저래야 되고 이것은 이래야 됩니다.’ 하고 말할 수 있기 위해서는 자식이 가진 재료가 부모에게 인정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효자냐? 자식으로서 부모 앞에 나타내는 일이나 행동이나 생활에서 제시하는 모든 재료를 부모가 긍정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에 선 아들이 되어야만 효자가 되는 것입니다.

또 충신은 어떤 사람이냐? 나라를 다스리는 군왕을 대신하는 공적인 책임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말 하나에서부터 천만사에 이르기까지 전부 긍정할 수 있는 입장에 서게 될 때 그 나라의 역사에 빛날 수 있는 충신이 되는 것입니다.

충․효․열의 근본을 헤아려 볼 때 듣고 나서 행하는 것은 충이 아니요, 듣고 나서 행하는 것은 효가 아니며, 듣고 나서 행하는 것은 열이 아닙니다. 자기의 생명까지 바칠 수 있는 자리에서 행하는 것이 충과 효와 열인 것입니다. 이런 내용을 중심삼고 행하면 참이 번식되어 나가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 재료를 중심삼은 사연 가운데 참이 건설되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겠습니다.

여러분이 말씀을 들을 때 그 말씀을 누구의 말씀으로 들었습니까? 강사의 말로 들었습니까, 협회장의 말로 들었습니까, 선생님의 말로 들었습니까, 하나님의 말로 들었습니까? 내 몸과 마음이 일치되어 ‘이건 이런 말씀이다.’ 하고 들었습니까? 천년 한을 품고 오신 아버지가 자식에게 처음으로 입을 열어 명령하는 것처럼 엄숙한 자리에서 들었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적진을 향해 출전하는 아들의 입장에서 들었습니까? 여러분은 어떠한 입장에서 이 말씀을 들었습니까? 여러분들이 어떠한 입장이라는 그 자체가 말할 수 있는 재료가 되지 않으면 여러분은 이 말씀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 말씀을 중심삼고 볼 때 여러분의 과거는 어떠했으며, 오늘 현재의 나는 어떻습니까? 또 내일의 내 자신은 어떠할 것입니까? 과거보다도 현재, 현재보다도 미래가 발전적이고 실체적인 산 재료의 형태를 갖추어서 가정이면 가정, 부락이면 부락을 붙들고 말할 수 있는 내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재료는 부락 전체가 공의의 것으로서 인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생한 것이 산 재료

이 말씀이 이런 역사 과정의 서러움을 안고 찾아졌기 때문에 이 서러움의 사정을 내가 체휼했다면, 그 서러움에 뒷받침될 수 있는 인격적인 기준을 내 스스로 닦아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서러움과 피 흘림 이상의 시련도 능히 극복할 수 있는 내적인 결의와 맹세가 되어 있어야 됩니다. 그러한 것을 실천한 후에야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집에 돌아가면 무슨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은 하지만, 실제로 그런 자리에서 과거․현재․미래를 대신하여 자기의 위신을 굽히지 않고 말할 수 있는 재료를 지닌 입장, 즉 실천적인 결과를 지닌 입장에 서지 않으면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단지 여러분들이 지금까지 들은 것을 교회에 돌아가서 말하고, 가정에 돌아가서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통일교회를 대표한 자로서 민족을 대하여 말할 수 있는 여러분은 아직 못 되었습니다.

민족을 대하여 말할 수 있으려면 민족이 요구하는 재료를 갖추어야 됩니다. 그 민족이 난세에 처해 있거나, 혹은 비상시에 처해 있을 때, 그런 환경을 극복해 나갈 수 있는 실질적인 기준, 즉 그 사람들이 공인할 수 있는 산 재료를 지니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재료를 갖지 못한 사람이 민족을 위하여 말한다고 하면 그는 민족 앞에 지탄을 받게 될 것입니다.

역사 속에서 이런 산 재료가 전체적으로 강력히 반영될 때, 그로 말미암아 새로운 혁명의 봉화가 들려진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오늘날의 통일교회는 이 나라, 이 민족 앞에 무슨 말을 할 것이냐? 선생님은 이 민족 앞에 할 말이 있습니다. 이것을 위해 선생님이 만든 것이 통일교회이며, 내가 여러분을 이끌고 지금까지 지탱해 나온 과거였습니다. 그것이 다 사실입니다. 현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줘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우리 통일교회가 걸어온 7년노정의 행로였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 당시에 우리가 민족 앞에 비판을 받고 규탄을 받았지만 그들이 우리가 갖춘 재료를 감소시키거나 격퇴시키지는 못했습니다. 도리어 때가 옴에 따라 불이 붙어 나가는 데에 나무를 더 보태 주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불이 더 붙어 활활 타오르는 모습으로 그들에게 비쳐진다면 우리는 국가나 민족 앞에 절대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당한 모든 시련과 고통을 극복해 온 과정은 역사를 더 빛낼 수 있고, 이 시대가 우리에게 말없이 항복할 수 있는 원천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볼 때 우리가 헐벗고 굶주리고 욕을 먹으며 다니던 그 모든 생활이 우리에게는 흘러간 시대에 한의 조건이 아니라 앞으로 다가올 소망의 세계 앞에 하나의 자랑의 조건이요, 말할 수 있는 재료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그 누구도 갖지 못한 우리의 재산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은 이런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 통일교회는 그런 취지와 그런 목적을 중심삼고 민족 앞에 더욱더 외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여기에 있는 여러분은 과거에 그런 경험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시대를 경험하지 못했다고 한스럽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런 경험은 자기의 결심 여하에 따라 언제 어느 곳에서든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핍박이 지나갔다고 해서 그것을 잊어버리지 마십시오. 핍박받을 수 있는 환경은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대한민국을 대신하여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나아가 대한민국은 세계 인류를 대신하여 말할 수 있는 나라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이 세계 인류가 하나님을 위해서 말할 수 있는 인류가 되는 날, 바로 그때가 천국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좋고 나쁜 기준

‘지금까지의 역사적인 재료는 어느 하나라도 버릴 수 없습니다. 눈물의 인연과 심정의 인연과 통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라고 할 수 있는 그 자리는 슬픈 하나님과 완전한 친구의 입장에서 동반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더 나아가서 내가 자연적인 입장에서 하나님의 주관을 받을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주관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눈물로써 아버지 앞에 나아가면 그 눈물을 통하여 아버님이 동행하시는 것입니다. 공분심과 의분심을 가지고 원수의 진영을 향하여 출전하겠다고 하며 하나님을 대신하여 살아가게 될 때 하나님이 같이하시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심정적인 동반자, 생활적인 동반자, 투쟁적인 동반자의 과정을 거치고, 나아가 영원히 행복한 동반자가 되어야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인류는 자기 나름대로 세계에 무엇인가 남기기를 바라 왔고, 남기고자 하는 목표가 있었지만, 그 목표가 자기가 소망하던 기준을 중심삼고 노력한 결과로 남게 된다면 그 재료는 역사 과정을 거치면서 문화세계에 소망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한 분밖에 없는 하나님을 위하여, 그분이 소망하시는 천국이념을 성취해 드리기 위하여 살고, 그 생활이 하나님께서 고대하고 있던 개인․가정․종족․민족․국가․세계․천주의 전반적인 내용과 융화할 수 있고, 통할 수 있을 때 그것이 산 재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재료가 있다면 그것은 역사적인 사연을 대표할 수 있는 재료로 등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보게 될 때 이 지우개가 그런 재료라면 이것은 만인을 감동시킬 수 있는 원천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 물건이 지극히 미미하지만 승리를 찬양할 수 있고, 영광 가운데 찬란히 빛날 수 있는 인연이 깃들어 있다면, 하나님 앞에 돌려드리는 영광의 재료가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런 점에서 볼 때에 우리 인생에 좋고 나쁜 기준이 무엇인가? 그것은 이 우주이념, 만민이 공통적으로 목표 하는 최후의 하나의 세계 이념입니다. 그런 이상세계의 이념을 통할 수 있는 재료를 가지고 과거․현재․미래를 통해서 부끄럽지 않게 나타날 수 있는 존재라면 그는 영원히 이상세계에 존재하고도 남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상을 가지고 오늘 통일교회는 이 땅에서 태동되어 개척의 행로를 가고 있는 것입니다.

복귀의 사명

이제 여러분은 사회에 나가서 통일교회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되지 않으면 되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거쳐야 됩니다. 그것은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그것이 간단하다면 누구나 다 할 것이지만 쉽지 않은 것이기에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손댔다가도 대번에 떨어져 나가고, 응전했다가는 패배의 서러움을 맛보게 됩니다. 이 하늘의 높은 자리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자기가 지금까지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희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사람들은 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사랑하는 자식이 잘못했으면 그 자식들을 불러 놓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어버이가 되는 것입니다.

부모로서 자기 자식이 올바른 길을 가지 못하는 것을 보고 양심의 가책 없이 당당하게 말하지 못하는 사람은 부모가 못 된다는 것입니다. 부모로서의 책임을 못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자기 가정을 위하고, 종족을 위하고, 민족을 위해서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이 나라 이 민족에게 심어 주시고자 하는 그 재료와 세계 인류의 사상적인 깊은 골짜기에 남겨 주시고자 하는 그 재료를 죽는 날까지 찬양해야 합니다. 이것이 통일인 것입니다. 통일은 여기에서부터 벌어지는 것입니다. 만약 산꼭대기에 통일이 벌어지게 되면 골짜기를 메워야 됩니다. 산이 평지가 될 때까지 골짜기를 메워야 됩니다. 이렇게 하여 이루어진 통일이라야 평면적인 통일인 것입니다. 그것은 어디에도 제재를 받지 않고, 어디에도 구애를 받지 않는 통일성을 갖출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타락은 골짜기를 이룬 것이며, 골짜기를 메우는 것이 복귀의 사명을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처량한 골짜기가 되었기 때문에 이 골짜기를 메우기 위하여 그 골짜기에 샘물을 터지게 하고 흙을 부어 평지를 만드는 사명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복귀 과정에 있어서 재료로 등장할 인물들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그 나라와 민족을 대표해서 깊은 골짜기의 시련 가운데에서도 높은 이념의 환경에서 이루어질 행복을 그들 앞에 보여 주기 위해 십 년이든 이십 년이든 같은 심정으로 투쟁을 하는 사람이 있다 할 때는 그 앞에 환경 전체가 굴복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그러한 경험을 한 사람, 그런 재료를 지닌 사람의 손길이 닿는 곳에는 불이 통하고 역사의 맥박이 울려 나오는 것입니다. 그의 말은 교훈의 말로서, 양심을 감동시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통해서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감동을 받게 될 때 혁명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체성을 지닌 사람은 백만장자가 되려는 일을 해서는 절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하는 일에는 눈물과 피와 땀이 엉클어져 있어야 됩니다. 그뿐만 아니라 죽음의 교차로를 몇 번이고 왕래했다는 과정을 거쳐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그 사실을 공인하게 될 때 그 가치는 청사에 길이 빛날 수 있게 되는 것이요, 거기서부터 새로운 역사는 시작되는 것입니다.

지상천국을 이루고 살자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하지 않은 입장에서 영광을 원하셨지 십자가를 통한 입장에서 영광을 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원하신 영광의 세계는 책임을 다한 이스라엘 민족을 통한 영광의 세계인데, 이스라엘이 반대하는 입장에 섰기 때문에 십자가를 통해 영광의 세계를 응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십자가를 영광의 세계를 이루는 재료삼아 설 수밖에 없었던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이 십자가를 지고 가면 그것은 천만인이 부정할 수 없는 하나의 관문이 되고, 그런 관문은 비참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분은 피눈물이 흐르고 양손과 양발에 피가 흐르고 가슴이 터져 핏줄기가 뻗쳐 나가는 걸 보면서도, 그 핏줄기 너머에 영광의 세계를 바라보며 갈 수 있는 인격자였기에, 역사는 기필코 그분의 운명에 따라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는 기독교 문명권에 흡수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지상천국을 창건하자’는 통일교회 이념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나 그것을 창건하기 위해서는 창건할 수 없는 자리에서 천국의 맛을, 아니 그 이상의 맛을 느끼지 않고는 지상에 천국을 창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지상천국은 순순히 그냥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오기 위해서는 개인․가정․민족․국가․세계가 희생될 수도 있습니다. 순리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역리의 역풍을 통하지 않으면 안 될 이러한 과정이 있는 것입니다. 그 때는 다 도망갈 여러분들입니다.

여러분은 지상천국을 이루고 살겠습니까, 이루어 놓은 데서 살겠습니까? 「이루고 살겠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손을 봅시다. 권투 선수나 당수 선수들처럼 손을 많이 쓰면 휜다고 하는데 하물며 지상천국을 이루겠다는 여러분의 손들이 그보다 못하다면 되겠습니까? 여러분의 손에는 지상천국을 이루고 살겠다고 하는 신념에 찬 개척자의 가치가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의 통일교 교인들은 선생님 앞에서 꼼짝을 못 합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그 사람들이 나하고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어느 사람이나 귀와 눈과 입과 코가 같고 모든 것이 같을진대 무엇이 다릅니까? 그것은 천국을 이루고 살아야 한다는 정신입니다.

통일교회 원리 말씀은 선생님이 실천해서 이루어 놓은 후에 가르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그 누구도 빼앗아 가지 못합니다. 그 점이 여러분과 선생님의 다른 점입니다. 별의별 것들이 다 나와 통일교회 원리 말씀을 이용하려고 하더라도 반드시 저나라에 가서는 이용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되돌려 주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용하려면 얼마든지 이용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선생님은 그런 사람의 선조의 복까지 빼앗아다 그것 때문에 더 핍박받고 더 수고한 통일교회 사람들에게 주겠다는 것입니다. 즉 필요 없는 자의 것을 빼앗아 필요한 자에게 주겠다는 것입니다.

고생의 열매는 귀하다

천국을 이루고 살기 위해서는 앉아서 가야 되겠습니까, 서서 가야 되겠습니까, 누워 가야 되겠습니까, 엎드려 가야 되겠습니까, 거꾸로 가야 되겠습니까? 어떻게 가야 되겠습니까?

그곳에 가려면 거꾸로 가야 됩니다. 발로 가는 것은 정상이므로 손으로 걸어가야 합니다. 밥을 먹을 때도 앉아서 먹지 않고 거꾸로 서서 먹고, 무엇을 볼 때도 거꾸로 서서 보고 전부 다 거꾸로 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반대 편에서 보는 사람들이 우리를 이단시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보긴 바로 봤습니다. 우리는 전부 다 거꾸로인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눈을 뜨고 살면 우리는 눈을 감고 살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눈에는 소망의 천국이 비쳐져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울러 그 눈에는 원수의 속까지도 비쳐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이를 악물고 싸우는 최고로 긴장된 자리에서 사는 사나이가 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알겠습니까? 선생님은 나이가 50이 되어 오지만 지금까지 하루도 편안하게 살아 본 적이 없습니다. 그것이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느 시대에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이냐? 지상에 천국을 창건한 후에 역사에 대해 말할 수 있고, 현재에 대해서 말할 수 있고, 미래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고생을 해야 됩니다. 그러나 고생의 나무가 되지 말고, 고생의 꽃이 되어야 합니다. 고생의 나무는 누구든지 다 될 수 있지만 고생의 꽃이 되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야 고생의 진가를 알 수 있습니다. 고생의 향기를 맡으며 고생의 열매를 위해서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고생의 열매가 뭐냐? 내가 고생하고 남긴 것은 가락지 하나라도 억천만금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것이며, 남루하고 냄새가 나고, 보면 천리만리 도망갈 것이어서, 선조들이 부끄럽기 짝이 없는 욕을 한다 해도 천만금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생의 열매입니다.

내가 비록 개인적으로 남겨 놓았으나, 이것은 청사에 길이길이 남을 것이며, 만인이 이것을 원하고 손끝을 이어 가면서 찾으려고 애달파할 것입니다. 그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들의 수고와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해 내가 생활 과정의 일편을 남기겠다는 것입니다.

후대 사람들이 얼마나 고대하고 얼마나 보고 싶어하고 그리워하며 알고 싶어할 것인가! 그 심정의 빚이라도 갚아 줄 수 있는 재료를 고이 간직했다가 그들의 숙원을 풀어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걸레 조각 같은 러닝셔츠 한 장이라 해도 천만금과 바꿀 수 없으며, 그 집이 아무리 누더기 짜박지여서 동네 개까지 법석대며 짖고 난리를 피울 것 같은 집일망정, 그 집은 찬란한 문화를 자랑하는 어느 국왕의 궁전보다도 더 빛나고 무한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찬란하게 세워진 궁전은 그 한계권 내에서 가치를 나타낼 수 있지만, 그 한계권을 초월할 수 있는 것은 초라한 집이라도 그 가치는 무한한 가치여서 궁전의 가치를 가름하고도 남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세계의 맛을 느끼기 위하여 고생의 나무가 되고, 고생의 꽃이 되고, 고생의 열매가 되자는 것입니다.

그 열매야말로 하나님이 끌려 들어오실 수 있는 열매요, 하나님이 동정하실 수 있는 열매입니다. 그것이 내 것이다 할 수 있게 되면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 될 수 있고, 그러면 천년만년 공을 들여 떠나라고 기도해도 못 떠나는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랑할 수 있는 자녀가 되어야

그러면 누구로 말미암아 그런 것인가? 그것은 물어볼 필요도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물어보기도 전에 하나님이 먼저 누구 때문이라고 자랑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아이구, 저 아들 나타났구나!’ 하고 자랑할 수 있는 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만약에 아버지 어머니는 사회에서 저명인사인데 반하여 자식이 팔다리가 병신이라면 그 부모의 심정은 어떻겠습니까? 아버지가 자랑할 수 있는 자식이 되겠습니까, 걱정하는 자식이 되겠습니까? 여러분들은 부모가 자랑할 수 있는 자식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통일교회 교인들을 자랑하기 위하여 선생님이 지금까지 얼마나 욕을 많이 먹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이제는 선생님이 자랑 안 하려고 하는데 누가 옆에서 자꾸 들쳐 자랑시키려 합니다.

이제 여러분이 가정에 돌아가서 자랑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 분야에 있어서 하나의 재료로 남아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에서 자랑하는 것이 민족에게 자랑할 수 있는 것이요, 민족에게 자랑할 수 있는 것이 국가에 자랑할 수 있는 것이고, 국가에 자랑할 수 있는 것이 세계에 자랑할 수 있고,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것이 하늘나라에 자랑할 수 있고, 하늘나라의 하나님 앞에 가서 자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무엇이냐? 그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을 통한 재료가 최고의 재료

사랑을 통할 수 있는 눈물과, 사랑을 통할 수 있는 비판과, 사랑을 통할 수 있는 세계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 같은 분도 사랑을 중심삼고 갔다는 것입니다. 그 길은 엄숙한 길입니다. 세계적인 어떤 길보다 더 엄숙한 길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탕감의 길을 거쳐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그러한 사랑을 체득하면서 내 가정을 위해서 말할 수 있는 내가 되고, 그런 사랑을 지녀서 민족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내가 되어야 합니다. 그 사랑을 통하여 내 뼛골의 모든 감정이 합하여져 성대를 통하여 울려 나와 만민의 귀를 뚫을 수 있는 사람이 될 때, 그 사람 앞에는 만민이 굴복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재료는 하나님도 울릴 수 있고, 역사상의 그 어떤 성현도 울릴 수 있고, 전 세계 인류도 울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을 지닌 주님이 오셔서 천지를 울리고, 천지를 감싸고, 천지에 행복의 꽃을 피워야지, 그렇지 않으면 지상의 천국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 사랑은 온 세상과 역사 전체를 다 들추어 대조하고 비교하기 전에는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6천년 사무친 사랑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그 사랑을 찾으려는 심정을 가지고 외치는 말과 더불어, 자기의 심정이 기울어짐과 더불어 우리의 눈물과 피땀이 같이하는 그곳에는 생명의 역사와 부활의 역사가 자동적으로 벌어지는 것입니다.

거기에서는 반발하는 사람이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몰라서 반발했더라도 ‘몰랐다.’는 그 점에 대해서는 부끄러움을 느껴야 되는 것입니다. 그의 선조와 더불어 부끄러움을 느껴야 됩니다.

오늘 이 세상이 아무리 넓다 하더라도 이 천지에서 그 재료를 찾아 역사시대로부터 현 시대를 거쳐서 영원한 역사 과정에 이르기까지 그러한 재료가 이 땅 위에 남아질 수 있게 해야 되겠습니다. 그 일은 오직 우리 원리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여러분이 알고 가야 되겠습니다.

그런 관계로 이런 수련회도 갖게 된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여러분이 이 민족 앞에 내놓을 재료가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됩니다.

그러면 우선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냐? 그런 재료를 지니려면 기억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각 가정의 식구들에게 기억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동네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여러분이 살고 있는 민족에게 기억되는 사람이 안 될래야 안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통일교 교인들에게 기억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선생님의 마음에 기억되고 하나님께도 기억되는 사람이 저절로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이제부터 그런 재료를 지니기 위해서 그런 자리까지 가지 않으면 안 될 과정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어떻게 가느냐 하는 것은 여러분 각자의 책임 여하에 달렸습니다. 여러분, 그런 길을 한번 가보겠습니까? 「예.」

탕감복귀하는 데는 별의별 어려움이 따릅니다.

어떤 사람은 죽음의 길도 가야 되고, 거지의 왕초가 되어서 탕감복귀해야 될 곳이면 거지 노릇도 해야 되고, 노동자면 노동자로서 최고의 고난의 자리를 극복해야 되고, 공산당과 싸우는 입장에서도 최일선에 서서 싸워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길에는 이렇게 천태만상이 벌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 길의 가치는 귀중하고 입체적인 우주에 해당할 만큼 넓고 무한한 것이기 때문에, 그 가치에 해당될 수 있는 자기 인격 수준을 찾아내는 것도 역시 분야 분야에 따라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각자의 분야에서 말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 도>

인류는 당신을 하늘에 계신 아버님이라고 부르옵나이다. 저희들은 진정 하늘에 계신 아버님이 그리워 그 아버님과 인연되기를 간절히 고대하고 있사옵나이다.

저희들은 아버님의 혈육을 통해서 빚어진 내 자신이라는 것을 체휼하였나이다. 자라온 수십 성상, 혹은 자기 연령에 따라 아버님과 인연되었던 과거지사가 과연 아버지와 인연될 수 있었던가를 반성해 봅니다.

아버님, 뜻을 알고 난 후 지금까지 외형적인 인간의 표준을 중심삼고 나왔는지 내성적인 인간의 표준을 중심삼고 나왔는지, 두 인간의 대상형에서 어디에 내가 속했었는가를 스스로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런 두 가지의 대상적인 입장을 취하지 못하였으면, 그런 교회 책임자를 중심으로 세워야 될 것인데, 교회 책임자가 그렇지 못하였거든 각자가 아버님을 중심삼고 그러한 입장에 서야 될 것을 알았사옵니다. 그렇지 못했던 과거지사가 있으면 전부 다 아버지 앞에서 청산할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저희 마음 가운데서 제일은 아버지요, 잊을 수 없는 분도 아버지요, 그리워하지 않을 수 없는 분도 아버지요,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분도 아버지요, 더불어 살고 싶은 분도 아버지요, 더불어 행하고 싶은 분도 아버지요, 말미암아 같이 싸우고 싶은 분도 아버지라는 것을 발견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런 아버지의 사랑하는 품 안에서 진정한 아들의 인연을 대신하여 아버지의 분부하신 그 말씀을 따라 살 수 있는 아들이 여기에 몇 명이나 되는지, 아버지, 그들의 마음을 격려하여 주시옵소서.

이 민족의 숫자가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그런 아들딸이 하나도 없다 할 진대는 이 민족은 쓸데없는 것이옵니다. 세계에 30억 인류가 있다 해도 그 가운데 아버지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아들딸이 없다 할진댄 이 인류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역사에 왔다 갔던 사람들이 다 그러했기에 아버님의 눈물이 걷히지 아니하였고, 아버님의 한이 풀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나이다. 그러나 이것을 타파하기 위하여 나선 통일성도의 부푼 마음이오니, 저희들의 간절한 마음이 아버지의 심정 가운데에서 기억될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 무엇을 희생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 뜻을 놓고는 살 수 없는 저희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그러하듯이 이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아버지가 되시옵고, 이들을 그리워하지 않을 수 없는 아버지가 되시옵소서. 그럴 수 있는 관계를 저희들이 무엇보다도 바라고 있사오니, 저희들을 그 자리에 세워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니다.

그런 가운데 민족을 위해 눈물짓고, 그런 입장에 서서 저희들이 책임진 사명을 아버지 앞에 호소할 수 있는 자리를 저희 자신들이 그리워해야 되겠습니다.

아버님도 그런 자리에서 상봉하기를 고대하고 계시는 줄 알고 있사오니, 아버님과 우리가 상봉할 수 있는 그 자리에 따르는 자녀들을 끌고 들어가야 되겠습니다.

변화산상에서 모세와 엘리야를 보고 베드로, 요한, 야고보가 기뻐했던 것과 같이 아버지의 심정에서 흘러 넘치는 인연 가운데에서 엉클어질 수 있고, 천정 가운데 맺혀 있는 그 사연을 알지 못하는 무지한 인간들을 인식시키는 책임을 대신할 줄 아는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말로만 아들딸이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심히 두려운 사실이옵니다. 심판을 피하지 못할 입장의 아들딸이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랑과 그리움에 도취하여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아버지의 품으로 달려 갈 줄 아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러기 위해서 이 땅 위에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아버지의 사랑의 재료를 남겨야 되겠사옵니다.

아버님의 심정의 인연이 엉클어질 수 있는 하나의 재료를 내 마음속에 지녀야 되겠사옵고, 생활 가운데 심어야 되겠사오니 그럴 수 있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 1968년 들어 이곳에서 새로이 개최한 수련회에 참석했던 당신의 자녀들이 이제 어떠한 길을 가겠습니까? 이들이 새로운 7년노정에 있어서 선조의 책임을 지고서 역사시대에 모든 사람들이 시험받고 실패했던 그 과정을 다시 따라가는 자들이 되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 기억하고 찬양할 수 있는 역사적인 흔적을 남길 줄 아는 당신의 자녀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소망 가운데 당신이 고대하던 이 기간에, 아버님, 이들의 마음을 각별히 기억하시옵고, 이들의 마음속에 잊혀질 수 없는 새로운 결의와 새로운 맹세로 아버지께 각오할 수 있는 심정을 일으켜 주시옵고, 내일의 소망의 목표를 향하여 원수들이 집중하는 그 길을 응징하기 위한 최후의 결전을 기다리는 아들딸로서 출전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민족이 저희를 부르고 있사옵고, 사망과 혼란과 도탄 중에서 신음하고 있는 30억 인류가 저희들을 부르고 있사오니 주저하는 저희들이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어떠한 난국이 저희 앞에 첩첩이 가로막혀 있더라도, 그것을 극복할 수 있고 처리하여 넘어갈 줄 아는 힘차고 씩씩하고 늠름하고 믿음직한 당신의 자녀들이 이 가운데 많이 나타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아버님, 지금까지 이 수련 기간을 무사히 지켜 주시고 보호하여 주신 것에 감사하오며, 이날을 마지막으로 하여 각처에 내려가겠사오니 가는 길 전체를 보호하시옵소서. 승리의 결과가 이 민족은 물론 더 나아가 인류 앞에 남겨질 수 있는 재료를 마련하여 천상세계에 계시는 아버지께서 기뻐함으로 사랑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옵니다.

남아진 전부를 주관하여 주시옵고, 이들이 돌아오길 바라는 형제와 식구들에게 같은 은혜를 내려 주시옵길 간절히 부탁드리며, 이 모든 말씀 참부모의 성호 받들어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기 도(Ⅰ)>

아버님, 오늘은 당신의 자녀들이 마음을 모아 당신의 이름을 찬양하고 당신 앞에 경배드리는 안식일이옵니다. 이 시간 남한 각지에 널려 있는 당신의 자녀들이 이곳을 그리워하며 정성들이는 곳곳마다 아버님의 자비로운 보호와 사랑을 같이해 주시옵소서. 승리의 손길로 그들을 보호하시옵소서. 아버님이 원하시는 소원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하여, 아버님을 대신하여 원수와 싸워 승리의 터전을 마련할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 4월은 우리의 역사노정에 있어서 새로운 출발을 하는 달이요, 한 기간인 것을 아옵니다. 외부에서 벌어지는 모든 정세와 내적인 모든 인연들이 상대적 기준을 갖추어 가지고 최후의 결단을 지으려는 아버지의 뜻 앞에 필시 나타나야 할 세계적인 때가 된 것을 아옵니다.

이 가운데에 언제나 아버님만이 좌정하시옵고, 아버님만이 운행하시어서 승리의 터전을 넓힐 수 있도록 하여, 아버님께서 찾고자 하시는 새로운 세계를 찾을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참된 나라가 필요한 것을 알았사오니, 아버님께서 찾고 있는 그 나라를 위하여 저희들이 충효의 도리를 다할 것을 이 시간 맹세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의 뜻을 대신할 수 있는 하나의 종족이 있어야 될 것을 저희들은 알았사옵니다. 종족 가운데 당신이 사랑하는 가정이 있어야 되겠고, 그 가정 가운데 당신의 모든 유업을 인계 받아서 하늘땅 앞에 책임질 수 있는 자체들이 되어야 할 것을 알았사옵니다. 그래서 하늘의 칭찬을 받을 수 있는 존재를 중심삼은 가정과, 그런 가정을 중심삼은 종족과, 그런 종족을 중심삼은 민족과, 그런 민족을 중심삼은 하나의 선한 나라가 이 땅 위에 나타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그것을 목적으로 삼으시고 6천년 동안 참아 오신 아버지의 심정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아버지께서는 얼마나 수고하시고, 얼마나 핍박을 받으시고, 얼마나 비참한 자리에서 긴긴 날을 하루같이 참고 나오셨사옵니까? 그런 아버지 앞에 저희들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효자가 되고 충신이 되기를 이 시간 마음으로 다짐하고, 저희 자체를 아버지 앞에 봉헌할 수 있는 거룩한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아버님, 여기에 모인 당신의 자녀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은 이 민족 앞에 새로운 뜻을 품은 무리요, 그 누가 알지 못하는 새로운 뜻을 알게 된 무리이옵니다. 이러한 무리이기에 뜻 앞에 있어서 언제나 아버님과 심정적으로 가까울 수 있어야 되겠고, 언제나 아버님의 경륜하시는 모든 뜻 앞에 깊은 인연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나 저희들이 지금까지 지내 온 모든 전체를 헤아려 보게 될 때에, 아버지께서 소원하신 그 기준과는 너무나 먼 거리에 있었던 것을 저희들이 자인하지 않을 수 없사오니, 긍휼의 아버지시여, 이런 자들을 격려하시어 당신께서 소원하신 그 표준 앞에 일치될 수 있는 자체로 세워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습관적이요, 인습적인 모든 관념들이 하늘의 법도 앞에 일치되는 데 지장이 되는 요인으로 나타나거든, 아버지, 이것들을 제압하시옵고 제거시켜 주시옵소서. 저희의 참다운 선의 마음과 아버지의 마음이 합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아버지의 긍휼의 심정과 저희의 마음이 통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부족한 모습들이 오늘 야외로 나왔사오니, 아버지께서 창조하신 그 묘미의 세계를 다시 한번 깊이 느끼면서, 이러한 자연 가운데서 아버지의 이름을 찬송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감사한 일인 것을 저희들이 느낄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에덴에서 아담 해와가 아버지의 참다운 가치를 알지 못하고 아버지 앞에 경배드리지 못하였던 그 심정적인 사연을 이 시간 저희들이 깊이 느끼고, 아버지가 원하시는 소원의 일념 앞에 저희들이 접붙임을 받을 수 있는 이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흩어진 마음을 온전히 아버지의 심정과 아버지의 존전 앞에 묶어 놓고, 분부하신 그 마음에 일치되어 아버지의 소원을 위한 간절한 심정으로 사무칠 수 있도록 허락하시옵소서. 그래서 하늘과 더불어 인연되고, 하늘과 더불어 깊은 관계를 맺어서 자기 스스로를 갖출 수 있는 생활 무대를 힘차게 개척해 나갈 수 있는 직접적인 인연이 이 시간 맺어지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여기에 참석하지 못한 자녀들도 많사오니 그들이 어떠한 환경에 있더라도 친히 보호하여 주시옵고, 최후의 싸움터에서 낙오자가 되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승리의 용사가 되어, 승리의 깃발을 드높이 들고 아버지 앞에 개선가를 불러 드릴 줄 아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게 역사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이 한 시간, 아버지 앞에 모인 저희들이 경배드리기를 원하오니 저희들의 부족한 마음들을 모으시옵고, 이 자리에 친히 좌정하셔서 섭리의 심정을 여기에 놓으시옵소서. 개개인이 아버지 앞에 화합하지 못한 여건이 있거들랑 친히 제거시키시어서, 당신만이 그 위에 재창조의 역사를 내적으로부터 외적인 환경까지 빚어낼 수 있게끔 이 시간 역사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날을 아버지를 중심삼은 기쁨의 날로서 받아 주시옵시길 간절히 바라오니, 이 시간을 친히 주관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님의 성호 받들어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기 도(Ⅱ)>

지금 이 시절은 봄철이옵니다. 모든 만물이 새로운 출발을 위해 소생하고, 새로운 소망의 한 결실을 바라보며 나아가고 있사옵니다. 이 모든 것이 다 아버님이 지으신 오묘한 이치를 드러내면서 서로서로 화동하고,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법도에 따라 결실을 맺기 위하여 출발하는 봄철인 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이와 같은 계절을 맞이할 적마다 저희들이 다시 한번 아버지를 그리워할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께는 우리 인류의 시조가 사랑을 중심삼고 온 우주와 더불어 화동할 수 있는 에덴동산을 잃어버린 것이 크나큰 한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 봄날에 이와 같이 저희들이 아버지의 뜻 앞에 모여 하루를 지내면서, 자연 만물 가운데도 아버지의 내정적인 흐름의 소원이 깃들어 있는 것을 체휼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이 시간 남한 각지에 널려 있는 당신의 자녀들을 기억하여 주시옵고, 그들이 마음 모아 그리워하는 이곳이 당신의 자랑이 되고, 당신이 기억할 수 있는 거룩한 곳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해외에서 당신의 뜻을 염려하며 새로운 사명을 짊어지고 슬픔의 길을 걸으며 개척자의 사명을 다하고 있는 당신의 자녀들을 친히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어떠한 환경과 처지에 있더라도 친히 주관하여 주옵시길 간절히 부탁드리옵니다. 오늘의 모든 전체를 친히 맡아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참부모님의 성호 받들어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말 씀> 봄을 맞이할 적마다 언제나 새롭게 생각되어지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이 하나님과 더불어 이 봄을 맞이하지 못한 것을 지극히 불행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봄을 맞이하며 느끼고 배워야 할 것

오늘날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수많은 인류들은 슬픔과 고통 가운데 살고 있지만, 이것을 벗어날래야 벗어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생활 자체에서 마음으로나 환경적으로나 벗어나고 싶고, 해방을 맞고 싶은, 즉 봄날을 맞이하고 싶은 마음의 소원을 지니고 살고 있지만 아직까지 이 세계는 수많은 인류가 서로 마음을 터놓을 수 있고, 기쁨의 봄을 맞이한 것같이 서로 화동하며 살 수 있는 세계가 되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타락한 오늘의 세계인 것을 우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런 입장에서 우리들이 봄을 맞이하면서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은…. 하나님을 중심삼고 혹은 인류의 시조인 아담 해와를 중심삼고 이 봄과 같은 시절을 맞이하였더라면, 오늘날 인류에게는 타락이 없었을 것인데, 이 봄과 같은 계절을 맞이하지 못한 것이 타락이라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구속과 제재를 느껴야 되고, 싸움의 과정을 거쳐야 되고, 그 고통스러운 환경을 타개하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환경을 타개해 놓고 새로운 인류의 시조가 하나님과 더불어 봄날을 맞이해서 새로운 천지를 향해 출발하는 그 세계를 찾아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환경에 처해 있는 우리들은 이 봄을 맞이할 적마다 인류의 시조가 하나님을 중심삼고 봄날을 갖지 못한 한을 깊이 느끼면서, 그러한 때를 그리워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봄은 해방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지루한 동삼삭(冬三朔)이 지나가고, 모든 만물이 자유로운 환경을 맞이해서 자기 본연의 생명력을 자기 나름대로 자연과 온 세계 가운데 드러내는 해방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바라볼 적마다 우리의 마음도 봄을 맞이한 듯이, 그야말로 자유스러운 해방을 맞이한 듯이 자기 나름의 본연의 모습과 본성의 모습을 활짝 피워서 그 가치를 자랑할 수 있는 자기 자신이 되었는가를 다시 한번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봄을 맞이하게 될 때마다 이런 해방된 환경 속에 안기고 싶어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인 것을 엿보게 될 때에, 우리 자신들도 이 봄철과 같이 자유롭고 하늘과 땅이 화합하듯이 화동의 인연이 빚어질 수 있고, 내적 심정의 세계가 봄과 같은 해방의 기준을 가져야 하기 때문에 이 봄을 좋아한다는 것을 느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에게 보여지는 이 모든 자연은 새로운 결실을 표준으로 삼고, 자연스러운 환경 가운데 자기 나름대로 갖고 있는 모든 역량을 사방으로 발휘할 수 있는 해방권을 갖추어서, 생명에의 새로운 소생의 빛을 나타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바라볼 때 우리들도 역시 마음의 세계에 있어서나 생활에 있어서 이와 같은 해방된 모습을 가지고 자연스러운 환경에서 자기 나름대로 생명의 가치를 온 천주 앞에 드러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모습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이 봄을 통하여 배워야 되겠습니다.

새 출발의 봄

또한 봄은 재출발하는 계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루한 겨울을 보내고 봄을 맞이하여 모든 만물들이 새로이 출발하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초목도, 동물도, 지극히 작은 미물과 풀 한 포기까지도 새로운 출발을 하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우리들이 이러한 것들을 바라볼 때 다시 한번 느껴야 할 것은, 본래 인류의 시조가 하나님을 중심삼고 에덴동산에서 봄날을 맞아 출발을 했다면, 그야말로 하늘과 땅이 화합하는 가운데 인간의 본성이 활짝 피어서 생명의 가치를 지닐 수 있는 이상적인 출발을 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인간 세상에서는 그러한 출발의 날을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인간이 그러했기에 인간을 중심삼은 하나님도 역시 천지 만물을 지으시고 인간과 더불어 출발의 한 날을 갖지 못하셨습니다. 이것이 한(恨)인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에덴에서 출발하지 못했던 그 기준을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다시 한번 세워서 새로운 출발을 하겠다는 흠모의 정을 이 봄을 통하여 느껴야 되겠습니다.

지극히 작은 풀 한 포기도 새로운 출발과 더불어 희망에 벅차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모든 만물들은 자기 나름의 희망을 갖고 한 날의 결실을 향하여 새로운 출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볼 때에 우리들은 이 계절을 통하여 인간으로서 새롭게 출발을 하고 새로운 결실을 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배워야겠습니다.

그러면 여름을 지나고 가을을 맞아 결실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꾸준한 생명력을 지니고 성장하여 잘 결실하기 위해서는 봄에 출발의 준비를 공고히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완전한 결실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 봄 절기에 새로이 출발하는 만물을 통하여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들도 역시 봄날을 맞이하여 새로운 뜻을 중심삼고 새로운 출발의 마음을 갖고, 출발의 내적 기반과 외적 기준을 갖추어 봄 절기를 거치고 여름 절기를 지나 가을 절기를 맞게 될 때, 나는 이러이러한 결실을 기필코 이루겠다는 각오를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원천의 출발기인 봄절기에 공고한 터전을 통하여 출발하지 않고는 아무리 소망이 크고 목적이 크다 하더라도 그 결실을 보지 못할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우리는 봄을 맞이할 적마다 새롭게 출발하는 봄의 정취를 통하여 뜻을 위하여 출발하는 내 자신이 소생하는 모든 만물에 지지 않는 자신이 되고, 만물이 거두는 결실 이상의 결실을 거두겠다는 것을 다짐해야 되겠습니다.

화동의 봄

또 봄은 화동하는 계절입니다. 지루한 겨울을 보낼 동안에는 하늘과 땅이 먼 거리에 있음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봄이 찾아옴으로 말미암아 하늘은 낮아지고 땅은 솟구쳐 마치 여기에 간격이 좁아진 것같이 느껴집니다. 이와 같이 거리가 단축되어 서로 주고받아 화합하고 화동할 수 있는 이런 분위기가 벌어짐으로써, 여기서부터 새로운 만물이 소생할 수 있는 터전이 마련되는 것입니다.

봄이 되면 아지랑이가 피어나고 벌과 나비가 날아다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봄이 되면 꽃이 피어나고, 오색의 빛을 통하여 서로가 관심을 갖게 되고, 서로 서로가 주고받는 환경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또 철새가 날아와서 새로운 노래를 불러 줍니다. 이런 것을 보게 될 때 봄은 모든 만물이 화동하는 계절인 것을 알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봄을 맞이하게 되면, 우리의 마음은 그 봄빛에 흠뻑 젖고 싶은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봄이 화동의 계절임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 봄을 통하여서 만물과 화동하고, 하늘과 땅이 화합하는 가운데 화동의 주체인 인간의 본성을 회상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만일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하늘과 땅을 중심삼고 화동의 본체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을 통하여서만이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 있고, 인간을 통하여서만이 만물이 기뻐할 수 있고, 인간을 통하여서만이 만물이 화합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어느 때보다도 봄의 계절을 통하여 우리들은 많이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봄은 우리에게 노래하고 춤을 추고 싶도록 자극시켜 주는 계절입니다. 나비가 나는 것을 바라보게 될 때에 우리의 마음속에는 춤을 추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됩니다. 또 새 소리를 듣게 될 때는 자기도 모르게 노래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런 것을 볼 때 봄은 자연을 통하여서 우리의 마음에 새로운 느낌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야외에 나와서 나비나 벌들이 나는 것을 볼 때나 새 소리를 들을 때면, 그 율동과 소리에 맞춰 가지고 마음 깊이 은은히 춤을 추고 노래하고 싶은 기분에 잠길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만일 우리 인간 시조가 타락하지 않았으면, 에덴동산에서 들리는 모든 새 소리는 노래처럼 들렸을 것이며, 곤충이나 새가 날고 움직이는 모든 것이 새로운 율동으로서 우리에게 춤의 자극을 더해 주었을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오늘 야외에 나와서 이 한 자리를 통하여 본연의 인간의 가치를 그리워하고, 또 봄과 더불어 흠뻑 화합하여 노래 부르고 춤을 출 수 있는 기분에 잠기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야외예배의 의의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품과 같은 봄

봄은 따뜻한 안식의 터전을 허락하는 계절임을 느끼게 됩니다. 여러분은 여기에 가만히 앉아 태양볕을 쬐면서 이 자연에 안겨서 깊은 낮잠이라도 자고 싶어질 것입니다. 자연 속에 모든 것을 맡겨 놓고, 자기 스스로 본성의 마음과 접하면서 깊은 안식을 갖고 싶은 마음이 다른 어느 계절보다도 이 봄에 진하게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시골에서 따뜻한 봄볕을 받아 가며 낮잠을 잔다고 할 때 봄은 어느 계절보다도 인상적이요, 깊은 인연을 체휼할 수 있는 계절이라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내용을 다시 한번 생각하여 볼 때에 이 봄은 무엇을 상징하느냐? 천지를 창조한 하나님의 사랑의 품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봄에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 품을 그리워할 수 있는 여러 가지의 인연과 내용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봄이 네 계절 가운데 아버지의 품, 즉 아버지의 사랑의 품에 안길 수 있는 가장 좋은 계절이라는 것을 알고 감사해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에 아버님을 모셔 놓고, 아버지의 품에 안겨서 해방을 느낄 수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해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지루한 타락권 내에서 구속을 받으며 복귀의 한을 품고 나오던 우리가 아버지의 사랑의 품에 안기어서 새로운 출발을 하는 이 시간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타락의 결과로 말미암아 서로 반목질시하고 개인은 개인 나름대로, 가정은 가정 나름대로, 국가는 국가 나름대로 갈라졌는데 이러한 가운데서도 인간들은 봄이면 화동의 봄 동산에 어울려 즐길 수 있는 한 날을 찾고 있습니다. 우리는 잃어버렸던 인간의 가치, 아버지의 사랑의 품에 안겨 만물과 더불어 주고받고, 하늘땅과 더불어 주고받는 화동의 주체로서의 인간의 가치를 다시 찾는 이 시간을 가질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화동의 주체임을 느끼는 이런 시간이 되고, 다시 한번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이 시간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품에 안김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노래와 춤의 생활을 하지 못하여 한이 되었던 타락의 인연을 벗어 던지고, 자기의 마음과 몸이 합한 가운데서 하나님이 즐거워하시고 온 만물과 화동하는 가운데 노래와 춤을 출 수 있는 마음을 느껴 봐야 되겠습니다.

야외예배를 드리는 목적

이러한 모든 요건들을 중심삼은 봄은 어느 계절보다도 사랑의 하나님의 품을 깊이 상징하는 계절입니다. 이러한 봄을 맞이한 우리는 상대적으로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본연의 아버지의 품을 다시 한번 회상할 수 있는 오늘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하나님의 품에 직접 안길 수 있는 마음을 다시 한번 느끼면서, 봄이 우리에게 안식을 주듯이 아버지의 사랑의 품에 안겨 지난날의 한스러운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안식의 잠이라도 자서 천년의 꿈이라도 꿀 수 있는 느낌을 가져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중심하고 잃어버렸던 본연의 모든 요건들을 봄 절기를 통하여 다시 한번 재현시켜서 아버지와 인연을 맺는 것이 오늘을 기념하고 오늘을 축하하는 의의가 있지 않나 생각해서 몇 말씀 드렸습니다. 다시 한번 기도합시다.

<기 도>

아버님, 봄은 과연 해방을 상징하옵기에, 저희들이 아버님의 사랑의 품에 안기는 기쁨을 다시 한번 그리워해야 되겠습니다. 봄은 새로운 출발을 약속하고 있기에, 저희들은 아버지의 사랑의 품에 안겨 새로운 출발을 해야 되겠사옵니다. 봄에는 삼라만상이 화동하듯이, 저희들이 아버지의 사랑의 품에 안겨서 만우주와 화동할 수 있는 주체성을 복귀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봄은 노래와 춤의 인연을 자아내듯이, 저희들도 아버지의 사랑의 품속에서 아버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그러할 수 있는 때를 그리워해야 되겠사옵니다.

아버지의 뜻을 중심삼고 이 봄은 하나의 안식의 터전이 되듯이, 저희들도 아버지의 사랑의 품에 안기어서 안식하는 모습이 되기를 그리워할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 그리하여 아버님의 내적 사연을 모두 상속 받음으로써 에덴동산에서 소망 가운데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었고, 소망 가운데서 아버지의 사랑에 잠길 수 있었던 그 본연의 인간을 다시 한번 내적으로 그리워하게 하시옵소서. 이 봄을 맞아 그러한 인연을 느끼며 아버지 앞에 무한히 감사드릴 수 있게 하시옵고, 그러한 마음 동산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 이 시간은 아버님 앞에 경배드리는 시간이었사오니, 당신의 이름을 찬양하는 곳곳마다 친히 당신께서 거기에 운행하시어서 같이하여 주시고, 봄이 갖추고 있는 모든 요건들을 각자의 마음 동산에 다시 한번 재현시키시어서 아버님께서 친히 그곳에 머무르실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인간만의 해방이 아니요, 인간만의 출발이 아니며, 인간만의 화동이 아니라 아버님이 해방을 받아야 되겠고, 아버님이 출발을 보셔야 되겠고, 아버님이 화동의 중심체가 되셔야 하겠사옵니다. 그야말로 아버님께서 당신의 위신을 잊으시고 팔을 벌려 춤추시며 노래하실 수 있는 아버님으로 저희들이 받들어 드려야 하겠사옵니다. 아버님께서 안식하실 영원한 터전을 마련해 드릴 수 있는 저희들이 되어야 하겠사오니, 이 봄을 통하여 그러한 지혜를 배울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 짧은 시간에 아버님을 모셔 놓고 경배드리는 이 모든 시간이 저희들에게 잊을 수 없는 마음의 인연을 돋구는 시간이 되게 해 주시고, 아버님의 사랑의 품에 깊이 안길 수 있는 하나의 조건을 세워 주시옵소서. 부디 그리운 아버지, 저희들에게 안 계셔서는 안 될 아버지, 진정으로 화합할 수 있는 아버님이 되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이여, 금년 이 봄이 아버님 앞에 자랑이 되고, 복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 봄이 지나고 여름과 가을과 겨울이 지나서 봄이 다시 찾아올 때, 금년의 이 봄과 같이 기쁨의 계절로 맞을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새로운 7년노정을 맞이하여 새로운 출발을 하는 봄이오니, 이 봄이 맑고 명랑하듯 이 한 해가 맑고 명랑하게 하시옵고, 섭리의 뜻 앞에 있어서 7년 노정도 그러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남아진 섭리의 뜻이 당신의 영광 가운데 드러나고, 그 뜻을 따라 나가는 수많은 자녀들이 해방을 받아 당신 앞에 영광을 돌려드리고, 자유와 기쁨이 넘치는 영원한 안식의 세계에서 길이길이 승리의 해방을 갖추어 아버지 앞에 기쁨의 송영을 돌려드릴 수 있는 아버님의 자녀들이 되도록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자리에 참석하지 못한 자녀들도 각자가 처하여 있는 그 자리에 보호의 손길을 내려 주시옵시고, 사랑의 품에 품으시어서 위로해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면서, 이 모든 말씀 참부모의 성호 받들어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오늘날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모든 인간들은 위로의 중심을 찾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위로의 중심, 가정적인 위로의 중심, 그리고 국가적인 위로의 중심, 세계적인 위로의 중심을 찾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하늘땅 전체를 대표한 천주적인 위로의 중심을 찾고 있습니다.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위로의 중심을 필요로 하는 인간

천지가 존재하는 한, 이런 위로의 중심이 되는 분이 기필코 나타나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분이 위로의 주체가 되시어서 만민을 위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개체를 위로하고, 가정을 위로하고, 국가와 세계를 위로하여 소망의 세계를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분을 보내기 위해서 인간들 앞에 메시아사상을 세워 가지고 지금까지 섭리역사를 이끌어 오신 것입니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여러분은 하나님이 없다고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위로의 중심으로 오시는 그분은 개인적인 위로의 존재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중심하고 전체를 대신한 위로의 가정이 나와야 될 것이고, 종족이 나와야 될 것이고, 민족이 나와야 될 것이고, 국가가 생겨나야 될 것입니다. 이것이 이 땅 위의 역사 과정에 나타난 선민사상인 것입니다. 야곱이 악과 대결하여 승리한 터전 위에 비로소 이스라엘이라는 하나의 기반을 닦아 가지고 하나님을 중심삼고 위로의 싹이 트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 가정으로부터 출발하여 위로의 종족, 위로의 민족, 위로의 국가가 세워지면, 비로소 세계적인 위로의 국가의 기준이 세워지게 됩니다. 이런 기준을 세우기 위해 그 국가적 기준 앞에 오셨던 분이 메시아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전체적 책임을 위해서, 다시 말하면 비통함과 고독에 사무친 이 세상을 위로의 세계로, 평화의 세계로 옮겨 놓기 위해서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때 준비되었던 그 나라가 예수님과 완전히 하나되었더라면 거기서부터 비로소 인간이 마음으로 고대하던 평화의 기원을 찾을 수 있었을 것이요, 모든 인간들이 위로의 주체를 만나 행복의 출발을 볼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왔어도 맞아들이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지금까지 역사과정에 있었던 그 무엇보다도 서러운 사실이라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됩니다.

그러기에 인간에게는 위로의 중심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의 국가, 하나의 종족, 하나의 가정, 하나의 존재, 이것이 연결되어 가지고 국가와 세계에까지 연결시킬 수 있는 중심존재가 나와야 합니다. 그렇게 되지 않고는 이 땅 위에 위로의 천국은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위로의 대상이 되지 못했던 아담 해와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아담 해와가 자라고 있는 그 자체가 하나님 앞에 위로의 대상이 되는 것이요, 지으신 천하 만물이 하나님 앞에 위로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가 움직이고 생활하는 것, 그와 관련된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 위로의 자극적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위로의 대상인 그 한 자체를 갖지 못하게 된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것을 볼 때 인간만이 위로의 대상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도 역시 위로의 대상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위로해 드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하나님을 위로해 드리기 위해서는 알아야 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 시조 아담 해와가 어떤 존재였던가 하는 것입니다. 아담 해와는 하나님의 모든 뜻을 대신 이루기 위해 세워 놓은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담 해와는 하나님의 모든 기쁨과 행복의 요건을 상대할 수 있는 존재로서 온 피조세계의 중심으로 지음 받은 것입니다. 그러한 아담 해와를 하나님이 보시기에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동시에 하나님이 본연의 뜻을 이루기 위한 그 이상을 중심삼고 그들과 한 자리에서 얼마나 당신의 사연을 말하고 싶었고, 심정을 나누면서 살고 싶었겠는가를 여러분들은 생각해 봐야 되겠습니다.

아담 해와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그들은 참다운 인류의 조상으로서, 인류의 부모로서, 당신의 아들딸로서 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담 해와는 하나님 앞에 둘도 없는 아들딸인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아들딸로 대할 수 없는 자리에 서 버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또 아담 해와가 장성한 후에는 부부로서 축복하여 위로의 대상을 삼으시려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아들딸로서의 위로의 대상이 되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신랑 신부로서도 위로의 대상이 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바라시던 소원이 크니 만큼 그들에게 무한한 가치를 부여하고 바라보셨던 것인데, 그들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자녀로서의 위로의 심정을 느끼지 못했고, 신랑 신부로서, 즉 부부로서의 위로의 심정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 해와가 미래에 소망의 조상으로서, 만인류 앞에 하나의 군왕으로서, 하나님 앞에 충효의 도리를 세우는 입장이 되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하나님 앞에 그들은 위로의 대상이 되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을 위로해 드리려면

그러면 이러한 하나님을 위로해 드리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타락한 아담 해와 이하의 기준으로는 하나님 앞에 위로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참다운 아들딸로서 하나님 앞에 서지 못하였으니 참다운 아들딸이 되어야만 하나님을 위로할 수 있다는 것이요, 참다운 신랑 신부가 되지 못한 것이 한과 슬픔이 되었으니 참다운 신랑 신부로 서야만 위로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늘땅을 모두 주관할 수 있는 하나의 주인공으로서, 만국 혹은 만민을 주관할 수 있는 하나의 군왕으로서 책임을 다해야 할 아담 해와가 책임을 다하지 못한 입장에 섰기 때문에 그 이상의 자리에 올라가지 않고는 하나님을 제아무리 위로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위로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위로의 책임을 짊어지고 이 땅 위에 누군가가 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 전체적인 책임을 짊어질 사람이 없다면 어떠한 개인이라도 나타나야 됩니다. 아들이 없으면 딸이라도 나와야 됩니다. 아들딸이 다 있어야 되겠지만 하나라도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류의 시조가 타락하여, 재창조의 원리 과정을 통과하지 않으면 복귀될 수 없기 때문에 먼저 남자가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남자가 나오지 않고는 여자가 나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딸로서 하나님을 위로해 드리고 싶더라도 남자가 먼저 나오지 않으면, 여자 혼자만으로는 딸의 입장을 책임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복귀섭리역사의 책임을 짊어졌었던 사람은 여자가 아니고 남자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남자들이 이 땅 위에 와서 해야 할 것이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아담이 하나님을 위로해 드리지 못하고, 참된 아들의 자리에서 효성을 하지 못했던 그 기준을 탕감복귀하고 인류를 하나님과 연결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위하여 선조들이 역사적인 책임을 짊어지고 왔다 갔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 세계는 사탄이 주관하는 악한 세계이기 때문에 그러한 책임을 진 사람들이 나오면 그들을 중심삼고 이 세상을 정리하여 사탄세계를 파탄시켜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담가정에서부터 노아, 아브라함, 모세, 예수 이후 지금까지 6천년 동안의 기나긴 역사노정에서도 하늘 뜻을 짊어진 사람들은 여자가 아니요, 남자들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책임진 남자들이 들인 모든 정성을 총합해 가지고, 그 정성의 터전 위에 참된 아들이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너는 내 기뻐할 수 있는 아들이다.’ 하고 칭찬할 수 있는 사람이 나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의 중심존재로 이 땅에 오신 분이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요단강가에서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올 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 3:17)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것은 비로소 하늘땅이 기뻐할 수 있는 하나의 존재를 찾았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하나님의 기쁨이었던가를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위로의 중심은 최고의 아들

그러면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 어떠한 위로의 대상이 되어야 하느냐? 사탄의 침범을 받은 슬픈 역사를 걷어치우고, 이것을 넘어서서 본연의 하나님의 뜨거운 심정과 화합된 자리에서 하나님을 위로해 드릴 수 있는 아들의 사명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바라보시게 될 때, 너는 타락한 후손으로서 복귀된 둘째 아들이라는 인상을 가지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며, 나를 지긋지긋하게 고생시키면서 찾아진 아들이구나 하는 인상을 남겨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너는 내 기뻐하는 자, 내 사랑하는 자라고 할 수 있는 아들이라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땅 위에 최고의 아들로서 위로의 주체가 되어야 하는 것이며, 그 가치는 타락 전 아담 해와 이상의 기준을 점유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아담을 지어 놓고 아담을 통해서 해와를 지었기 때문에, 그럴 수 있는 아들을 맞아야만 여자가 등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 앞에 아들로서 대상의 자리에 섰지만, 하나님의 딸로서 대상의 자리에 설 수 있는 하나의 존재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존재를 찾아야 했던 것이니 이것이 신부이념인 것입니다.

지금까지 6천년 동안 하나님이 수고한 것은 무엇인가? 세계를 구하기 위한 승리의 외곽적인 터전은 마련했지만 세계를 구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외곽적인 터전을 닦아 나가면서 내적으로는 타락한 세상 일망정 그 가운데에 에덴동산에서 아담 해와가 타락하지 않고 이루어야 했던 기준을 세워야 했습니다. 즉 사랑의 대상, 위로의 대상의 기준을 하나님 본심 가운데 이루어야 했습니다. 이것을 이루어 놓지 않으면 이 세계는 복귀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이룰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 이스라엘 민족을 키워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세워 21년 동안 하란에서 고생시켰던 것이며, 고향으로 돌아오는 도중 얍복강에서 천사와 씨름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천사는 사탄의 상징이었습니다. 이 싸움은 천사장으로 인해 천륜이 엇갈려졌던 것을 복귀하기 위해서, 복귀의 책임을 짊어지고 가는 야곱이 천사와 싸워서 승리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결정짓기 위해서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내심 가운데 맺혀진 한을 제거시키기 위해 천사장을 대신한 천사와 야곱이 서로 싸웠던 것입니다. 밤새껏 싸우고 나서도 내 생명이 꺼지는 한이 있더라도 승리하겠다는 심정으로 천사에게 ‘나를 축복하지 않고는 못 간다.󰡑고 했을 때, 안 된다는 천사의 말을 들었더라면 이스라엘이란 민족이 과연 나올 수 있었겠어요?

야곱이 고향으로 가는 데 있어서 천사와 싸워서 이기면 가게 되는 것이요, 지면 못 가는 것이니 이는 생사의 결전이었습니다. 야곱이 20여년의 정성을 다하여 한 뜻을 세워서 이스라엘의 기원, 다시 말하면 축복받은 혈통을 남기기 위해 싸우는 그 순간은 모든 것을 걸고 죽느냐 사느냐 하는 판가리 싸움이었습니다.

야곱이 천사와 싸우던 그 순간은 21년 동안 쌓았던 모든 것을 합해서 주관하고도 남을 수 있는 신념과 심정이 부딪치는 순간이었습니다. 야곱이 당한 시련이 얼마나 지긋지긋했던가? 라반이 10여 차례나 속였고, 딸을 주마 어쩌마 하며 이리 저리 못 살게 굴지 않았습니까? 그러한 환경을 박차고 나오는데 네가 내 갈 길을 막느냐, 아무리 네가 최고의 정력과 힘을 가지고 있지만 나를 당할소냐 하며 승리의 기준을 세워 나왔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처럼 사정 봐 가면서 눈치 봐 가면서 그랬을까요? 그런 것은 아랑곳없었다는 것입니다. 너 죽고 나 죽자고 결전을 했으니 천사는 축복을 해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좋아서 해 줬겠습니까? 몰리고 몰리니까 할 수 없이 해준 것입니다.

이러한 기원으로부터 사탄을 분립하게 된 것이며, 승리했다는 뜻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축복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야곱 개인, 야곱 가정으로부터 종족이 되었으니 그 족속은 승리한 족속이 되어야 합니다. 축복을 받은 종족이 모두 몰락해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승리한 족속은 다릅니다.

그러면 승리하게 하여 축복한 목적은 무엇입니까? 자기들 잘살기 위한 것입니까? 그것은 잘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고 축복해 준 이스라엘 민족은 이방과 달리 하나님이 사랑하는 민족이기 때문에 잘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세운 목적

그러면 하나님께서 축복한 목적은 어디에 있으며, 이스라엘을 세운 목적은 무엇이었겠습니까? 하나님의 위로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아들을 보낼 때에 그 아들을 중심삼고 완전히 하나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야곱이 얍복강에서 천사와 싸웠던 것과는 반대로 본향의 고국을 창건할 수 있는 주인공을 맞아 하나 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주인공이신 예수님이 산에 가면 산으로 따라가고, 바다로 가면 바다로 가고, 전부 같이 몰려 다녔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생각해 보세요. 붙들고 안 놓아 주었더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예수님과 하나될 수 있는 민족이었다면 이스라엘은 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의 이스라엘은 얼마나 비참하게 되었습니까? 지지리 벌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 족속의 종자들이 남아 있는 것도 하나님이 보호하사…. 그것도 고맙게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세운 것은 이스라엘을 사탄권 가운데에서 위로의 대상인 아들을 찾기 위한 울타리로 삼으려 했던 것인데, 그들은 그걸 몰랐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위로의 대상으로 그 아들을 세워 놓았으면 하나님은 그 위로의 대상인 아들에게 ‘너는 내 아들이다.’ 하면서 무엇을 선물로 주시겠습니까? 사탄세계를 줄까요? 아닙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4천년 동안 준비했던 선물로서 이스라엘을 주려고 했던 것입니다. 기가 막힌 사실이지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위로의 대상으로서, 만인간 앞에는 천지에 승리한 하나의 위로의 중심자입니다. 이런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중의 아들이요, 뼈 중의 뼈요, 하나님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위로의 대상이니, 그 승리한 터전 위에 무엇을 선물로 주시겠습니까? 벽돌집을 지어 주시겠습니까? 뭣을 주시겠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세계를 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세계를 어떻게 줍니까? 하늘땅을 주고 싶어도 말씀만으로는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나라가 필요한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 나라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4천년 동안 준비한 나라를 중심삼고 비로소 선별한 민족 이스라엘을 예수님이 선물로 받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여러분은 그걸 알아야 됩니다. 이스라엘은 이러한 책임을 해야 했는데도 불구하고 자기 나라만 잘 살 줄 알고 있었습니다. 메시아는 빼놓고 자기들만 좋으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될 때는 다 망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는 효자 중의 효자요, 역사 과정에 자랑하기에 부족함이 없노라.’ 할 수 있는 하나의 존재가 땅 위에 기필코 나와야 됩니다. 그럴 수 있는 하나의 남자, 하나의 아들이 나와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야 이 녀석아, 지금까지 내가 이런 아들을 세우기 위해 수천년 동안 수고해 온 것이다. 너는 반대했지만, 자 오늘 봐라.’ 하셨을 때 사탄도 ‘예, 옳소이다’ 할 수 있는 아들, 그야말로 ‘몽땅 내 사랑이다.’ 할 수 있는 그런 아들이 있어야 됩니다.

그 아들 하나를 가짐으로써 세계를 잊어버리시고 좋아하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사탄세계를 잊어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 한 분을 품고, 그 한 분을 찾음으로써 느끼는 기쁨이 사탄세계에서 엮어 나오는 모든 사연을 잊어버릴 수 있을 만큼 커야 합니다. 그러한 존재가 나와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에덴에서 타락함으로써 저끄러진 이 고개를 넘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마음에 위로의 심정적 기준을 세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한 분을 지금까지 찾아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왔습니까? 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은 메시아가 오신다 하고 있고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주님이 오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분은 어디에 오셔서 메시아의 사명을 할 것인가? 어느 땅에 태어날 것인가?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것은 오시는 그분을 만나는 것보다도 그분을 보내시기 위해 하나님이 당해 나오신 길을 먼저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그분에 의해 직접 중생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메시아 한 분을 보내기 위해, 아담가정에서부터 지금까지 복귀의 길을 찾아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먼 훗날 하나님의 절대적인 아들로서 사랑과 위로의 실체적 대상으로 찾아 세우기 위해, 아담가정에서부터 지금까지 6천년 동안 걸어 나왔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여자들 가운데는 성현이 없습니다. 여자들이 들으면 기분 나쁠지 몰라도 성현이 없습니다. 그러면 여자들이 언제 위신을 찾을 수 있느냐? 그분(메시아)을 만나서 신부가 될 때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신부종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말할 수 없는 슬픔이 된 예수님의 죽음

그러면 그 아들이 인간들을 다시 낳아 주기 위한 개척 역사를 해야 하는데, 그 아들이 나올 때까지 누가 섭리하셨는가? 즉 예수님 오시기 전 4천년 동안은 누가 했는가? 하나님이 직접 하셨습니다. 이 아들을 찾아내기 위해 하나님이 얼마나 서러움을 당했겠나 생각해 보세요. 원수의 나라에서의 충신․효자․열녀보다도 더한 하나님 편의 사람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더구나 하나님께서 낳아서 기르는 것이 아니고 사탄세계에서 빼앗아 하나님편을 만들어야 하는 하나님의 고통은 얼마나 컸겠습니까? 기막힌 일입니다. 하나님은 사탄의 새끼들을 빼앗아다가 당신의 사정과 심정을 이해하게 해가지고 그런 일을 하시기가 쉬웠겠습니까?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4천년의 기간도 하나님에게는 오히려 빠른 것이었습니다. 그 아들이 올 때까지, 즉 베들레헴에서 예수님이 탄생하기 전까지는 하나님이 그 일을 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타락한 이 땅 위에 몇천만 번 왕래하셨겠는가? 몇 번이나 왕래했을 것 같아요? 야곱이 하란에 가기 전, 아브라함이 제물 드리기 전, 노아 홍수심판 전 이렇게 자꾸 거슬러 올라가면 아담가정의 가인 아벨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거기에 찾아와 ‘아벨아, 천륜의 법도가 거꾸로 되었으니 부디부디 가인을 자연굴복시켜서 다시 바로잡아다오.’ 하면서 기도하셨겠습니까, 안 하셨겠습니까? 가인을 굴복시키길 마음으로 얼마나 기도하셨을까요? 하나님이 간절히 바랐던 그 마음은 오늘날 타락 인간들이 하나님을 사모하고 하나님의 심정을 알겠다고 기도하는 것과는 비교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얼마나 간절히 고대했겠습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미흡한 아벨에게 모든 것을 걸고 바라보고 계시던 하나님의 간절한 모습을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처럼 간절한 소망을 갖고 왔던 그분이 사탄에게 쫓겨 가야 했다니 기막히다는 것입니다. 사탄은 좋다고 하며 춤을 추게 되고, 하나님은 눈물을 머금고 왔던 길을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될 사연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하나님에게는 되돌아가야 하는 비참한 날들이 거듭됐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또한 바라셨던 터전의 중심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 세계 역사와 수많은 민족을 걸어 놓고 한 중심을 찾아 내려왔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한국이 앞으로 하나님의 뜻 앞에서 사랑하는 나라가 되고, 뜻을 이루어 드릴 수 있는 제3이스라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원래 서구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중동 지역에만 머물러야 할 종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구라파를 돌아서 한국에 전파된 것이 2백여 년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겨우 2백여년 전부터 찾아오시기 시작했겠습니까? 한국이 그런 자리에 서게 되기까지는 하나님은 서쪽에서부터 역사를 발전시켜 나오면서 동쪽에서도 남모르는 가운데 역사적 인연과 사연을 준비했던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뜻을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수많은 민족의 배후에서 안팎을 감싸 나가면서 한때의 초점에 맞추기 위해 시련 고통을 개의치 않고 수습해 나왔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배후의 노고가 얼마나 크신가를 여러분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하나님은 1,600년 만에 아벨 대신 노아를 세웠습니다. 그다음엔 아브라함을 세웠고, 모세를 세웠고, 세례 요한을 세웠고, 예수님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결과는 번번이 실패한 입장에 선 하나님이었습니다. 사람 같으면 체면이 있기에 얼굴을 들고 나설 수 없을 것입니다. 󰡐에라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 하면서 다 내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럴 수 없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여러분들,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한 수모와 멸시, 원수들의 조롱과 비난과 비소,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피 흘리고 죽기가 일쑤였으니, 매일 같이 장사를 치러야 하는 하나님의 심정을 생각해 보십시오. 대원군 때 기독교인이 얼마나 많이 학살당했습니까? 어느 나라든지 기독교가 그 나라에 들어갈 때는 기독교인들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정성을 모아 길러 놓은 하나님 편의 사람들이 매일같이 쓰러져 가는 참패의 서러움을 당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런 사정을 여러분은 알아야만 합니다.

이처럼 편안할 날이 없는 하나님인데,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영광 가운데 있는 하나님이라고 하니, 성경 말씀에 있는 것처럼 하나님이 사람 지으신 것을 탄식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탄식 안 할 수가 없습니다. 탄식하실 수밖에 없는 하나님…. 어찌하여 탄식하는 것이 당연한 하나님이 되었던고!

하나님의 한을 풀어 드릴 승리의 아들이 다시 와야

여기에 대한 분통과 한을 품고 원수를 갚는 책임을 짊어질 하나의 사람, 하나의 무리,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가가 필요합니다. 그럴 수 있는 한 아들이 와서 하나님의 위로의 주체가 되는 동시에 이 원수를 갚아야 합니다. 아들과 딸이 타락했기 때문에 아들과 딸이 위로의 대상으로 회복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당신을 신랑 되신 주님이라고 하며 그 신랑 앞에 신부 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참다운 대상으로서의 여성 실체를 찾기 위해 허덕이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한을 품고 갔습니다. ‘아바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피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 뜻대로 하시옵소서.’ 하는 예수님의 이 기도에는 4천년 역사의 한이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이 길을 가고 나면 금후의 역사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피의 제단을 넘어가야 한다는 사정을 알기 때문에 기가 막힌 사연을 품고 호소했던 것입니다.

그 미욱장이 베드로, 야고보, 그들이 사도는 무슨 사도입니까? 베드로와 여러분이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하기야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데도 보고 가만히 있었고, 도망 다녔던 그들보다 여러분은 더하지. 그래도 예수님이 돌아가셨다가 부활한 후 회개했기 때문에 다시 사도의 이름을 준 것입니다. 즉 거꾸로 한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거꾸로 죽었어요. 여러분, 기분 나쁘죠? 그러한 사도들로부터 전해 받은 종교가 기독교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배신하였던 그들이 할 수 없이 결속하여 세운 종교를 믿어요? 선생님은 그들에게 항의합니다. 그들을 만나서 공격을 합니다. 기가 막힌 일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에게 아무리 복을 빌고 행복의 터전을 갈구하며 기도하더라도 하나님이 찾고 있던 심정적인 위로의 대상이 찾아지지 않으면 그 기도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이루어지게 되면 오히려 그것은 화가 됩니다. 이스라엘을 축복한 것은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울타리를 만들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모든 나라들 중에 영광된 나라로서 들림 받을 수 있었는데, 오히려 화가 됐다는 것입니다. 차라리 축복을 받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담을 잃어버린 하나님 앞에, 즉 하나님은 이 땅 위의 남성을 대표한 위로의 주체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 주체를 대신할 수 있는 심정의 대상이 이 땅 위에 다시 나와야 합니다. 아담은 순순히 하나님 품안에 안길 수 있었지만 고통과 슬픔을 안겨 드릴 장본인이기에 그는 다시 와서 하나님께서 과거에 상처 받은 역사적인 모든 서글픔을 위로해 드리고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은 한을 하나님의 마음에서 빼 드려야 됩니다. 그다음에 승리한 아들로서 위로해 드릴 수 있는 자리까지 넘어가야 됩니다.

그런 아들의 입장으로 예수님이 올 때까지 하나님은 수천만 번 왕래하면서 그 길을 닦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위로의 주체가 될 수 있는 아들을 세우기 위해 이스라엘 민족을 선민으로 택하시고, 4천년 동안 소원하던, 만민을 하나님이 계시는 곳으로 이끌어 주기를 바라면서 예수님을 보낸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를 짊어지고 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골고다를 향했을 때 하나님의 마음이 좋았겠습니까? 기가 막히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죽기 위해서 왔다면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4천년 동안이나 준비를 하셨겠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죽은 것은 순전히 이스라엘 백성이 책임을 못 했던 탓입니다. 그것도 모르고 예수님이 만민을 구원하기 위해서 죽었다고요? 죽은 예수님이 만민을 구원한다면 죽지 않은 예수님은 만민을 못 구한단 말입니까?

하나님을 완전히 위로해 드리려면

하나님의 유형의 실체로 서 있어야 할 존재가 타락해 버렸기 때문에 그것을 회복하기 위해 섭리해 나온 것이 지금까지의 역사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만일 주님이 혼자 오셔서 위로의 주체가 됐다면 그다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 저만 보고 사십시오. 저 하나면 되지 않습니까?’ 한다면 되겠습니까? 인류의 타락한 동기가 아담 때문인데, 예수님이 아담을 대신하여 아들의 자리에 섰다 할지라도 아직은 사탄세계에 수많은 인류가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인류를 다 저버리고 심판해 버립시다 할 수 있게 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아담이 잘못했기 때문에 아담 대신 책임을 완결하기 위해 오시는 그 아들은 이 세계 사람들을 전부 다 구원시키는 입장에 서야 합니다. 예수님 혼자서 하나님을 섬길 수 없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저 겟세마네 동산에 가서 밤을 새워 기도하고…. 예수님 혼자서도 하나님을 위로할 수 있는 입장에 못 들어갔으니 예수님이 이 땅에서 당한 서러움이 얼마나 억울한 것이었겠습니까?

당시에 예수님을 중심삼고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로 단결해야 했습니다. 어느 정도로 단결했어야 되느냐? 얍복강에서 천사와 씨름하던 것 이상으로 단결해야 됩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이 바다를 건너면 같이 건너가고, 산에 오르면 같이 올라가고 이렇게 유대 나라 전체가 예수님을 따르고 몰려들었더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메뚜기 떼처럼 몰려들었으면 망했겠습니까? 거기서부터 새로운 역사적인 운동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때를 위해 4천년 동안을 준비했으나 준비한 터전을 전부 잃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와서 무엇을 했느냐? 역사에 맺힌 한을 풀기 위해 울었습니다. 선조들이 눈물 흘리며 소원하던 것, 끝날에 메시아가 와서 분함과 원한을 풀어 달라고 천상세계에 호소하던 그 소원을 풀어 주기 위해 기도해야 했습니다. 선조들이 흘리던 눈물이 거두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은 ‘아버님이여, 저들의 눈물을 거두어 주소서.’라고 기도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를 하고 나면 기쁨으로 민족이 맞이해야 할 텐데, 예수님이 개인과 민족을 대신하여 기도하고 회개했는데도 불구하고 전부 반대를 했습니다. 또다시 하나님께 체면 불구하고 ‘아버지, 용서해 주소서.’라고 간구하여 용서받고 그들 앞에 나서면 또 반대를 했습니다. 그래서 용서할래야 용서할 길이 막혔습니다. 한 번 두 번이 아니고 수십 번을 해 봐도 가능성이 없기에 그 용서의 대가로 예수님이 생명을 걸고 걸어간 것이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이 십자가의 길이라니 기가 막힌 사연입니다.

이것도 모르고 예수를 믿어서 천당을 가요? 가령 여자가 나이가 들면 시집을 갑니다. 시집이야 누구나 갑니다. 그런데 시집에서 쫓겨날 수도 있고, 신랑한테 천대받을 수도 있고, 과부가 되어 시집살이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시집을 어떻게 갈 거예요? 남들이 다 부러워하고, 모든 사람이 반할 수 있는 자리에서 시집을 가고 싶지요? 그렇게 되기가 쉬워요? 마찬가지로 믿으면 천당에 간다고 해요. 그런데 천당이 무슨 자리입니까? 정성이 지극한 자리, 충성이 지극한 자리, 모든 사연이 지극한 자리입니다. 그런 자리에 뭐 믿고 간다고요?

그러면 믿고 가는데 어떻게 가야 됩니까? 피눈물이 교차되는 자리에서 가야 합니다. 아담이 타락해 가지고 쫓겨날 때 ‘하하, 좋구나!’ 하면서 쫓겨났겠습니까? 피눈물을 흘리면서 쫓겨났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쫓겨난 그 집에 돌아가려면 아담보다 더 나아야 될 게 아닙니까? 가령 동네에서 쫓겨 나온 후에 다시 들어가려면, 그전보다 못해 가지고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은 아담보다 나아야 됩니다. 아담보다 못한 자리에서 돌아가게 되면 쫓겨날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자식아!’ 하며 책망할 것입니다.

아담보다도 더 나은 자리에서 돌아오길 바라는 하나님이 계시기에 통일교회에서는 7년을 기준으로 해서 전도를 하고 있습니다. 전도 나가면 그 동네에서 핍박받고, 어떤 사람은 몰매도 맞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쫓겨나는 자리에서 ‘너희들 두고보자.’고 하며 다시 찾아올 것을 굳게 맹세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단연코 배후의 모든 면에서 그들이 꿈에도 생각하지 못할 자격과 내용을 갖추고 돌아갈 때, 여러분은 한을 풀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무엇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그것을 못한다면 천대 바가지인 것입니다. 별수 있어요? 별수 있느냐 말입니다.

배후에서 낙오자들을 수습하여 섭리해 나오신 하나님

옛날 예수님이 돌아가셨던 자리보다 나은 자리를 만들어 놓지 않으면 또 쫓겨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망권을 넘더라도 빨리 가라고 기독교를 내몰았던 것입니다. 수많은 민족을 찾기 위해 한 민족이 희생되는 것도 개의치 않고 내몰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끝날에 돌아오는 아들의 수치를 씻고 위신을 세울 수 있는 처지와 환경을 만들어 오로지 하나님의 아들다운 자세를 가지고 나타날 수 있는 그날을 고대하면서, 배후에서 희생되는 참사에도 불구하고 내몰고 내몰아 지금의 기독교로 발전시킨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를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역사는 순교의 역사로 점철되어 나온 것입니다. 분과 한을 풀기 위해서, 억울함과 분통한 사실을 밟고 천지간에 설 수 있는 무리를 만들기 위해서 하늘은 역사해 나온 것입니다. 믿고 가만히 있으면 우리 주님이 날 찾아와 주겠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기독교를 다 망쳐 놓았습니다. 또 이들이 입이나 가만히 다물고 있으면 좋겠는데, 뭐 자기들이 정통이라는 것입니다.

하늘을 위로하자고 하는데 어떻게 위로할 것인가? 여러분은 이 땅 위에 위로의 중심존재가 올 때까지의 역사적 사연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를 세우기 위해 하나님은 수천만 번 인류의 배후에서 패잔병, 낙오병들을 수습해 가지고 섭리하여 나온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심정을 여러분은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잘났다는 사람들은 전부 다 세상과 더불어 세상으로 휩쓸려 넘어갔지만, 하나님은 여기에서 낙오되어 갈 곳 없이 죽음의 길을 헤매던 사람들을 거느리고 섭리해 나온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 마음과 통할 수 있는 같은 사정의 사람들인 고로 그런 인생의 낙오자들을 수습해서 복귀섭리를 해 나온 하나님의 신세가 기가 막히다는 것입니다. 그나마 젊은 사람들은 전부 싫다고 하니 지금까지의 역사상에 하나님 앞에 불리운 사람들은 전부 50대 이상, 60대 이상이었습니다. 나이 많고 찌들어 멀지않아 공동묘지에 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 장송곡을 부를 날이 가까운 패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배후에서 하나님은 오늘은 이렇게 찌들고 마른 노년층을 붙들고 섭리하지만 앞으로는 장년층을 붙들고 섭리해야 하는데, 그들을 붙들고 어떻게 섭리를 전개시킬 것인가 하는 염려를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연을 부여안고 역사노정을 걸어 나왔던 것입니다.

노년시대가 지나가고 장년시대로, 장년시대가 지나가고 청년시대로, 청년시대가 지나가고 소년시대로, 소년시대가 지나가고 유아시대로, 그렇게 여러분은 다시 태어나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천국에 못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천진무구한 어린아이처럼 귀여움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네가 다시 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거듭나지 않으면, 즉 중생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최고의 수습하는 역사로서, 어머니 복중에서부터 구원역사를 하자는 것입니다. 얼마나 기막힌 사연입니까?

젊은이들을 키워라

오늘날 우리 시대에 통일교회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후퇴해야 합니다. 기분 나빠요? 후퇴하라고 해서 천국 가는 길을 막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 시대를 지나가게 해야 하나님이 위로 받을 게 아닙니까? 가만 보면 통일교회에는 나이 많은 사람들이 많은데, 이것 참 곤란합니다. 젊은이들처럼 씩씩거리고 돌아다녀야 탕감복귀를 할 수 있는데, 이거 탕감도 못하고 복귀도 못하니 할 수 없이 선생님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렇게 남의 신세를 지는 사정이 얼마나 처량합니까? 그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신세를 지고, 예수님의 신세를 지고, 수많은 기독교인의 신세를 지고서 이 시대에 살아남았는데, 곱게 늙어 아직까지도 통일교회 젊은 사람들의 신세를 져야 되니 기막힌 일입니다. 신세 안 지게끔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이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기기에 눈물을 흘리면서 노력해야 합니다. 가정을 가지고 살림하는 장로님들, 아저씨, 아주머니들은 ‘내 가정에서 어찌하여 하나님과 메시아를 대신할 수 있는 아들딸을 못 가졌던가!’라고 한탄하여야 합니다. 남들은 자기보다 잘난 아들딸이 있어 하나님께 충성하는데, 우리 집은 왜 그런 아들딸이 없는가! 산을 봐도 강을 봐도 부끄러움을 느끼고, 사방을 돌아볼 때 얼굴을 들 수 없는 부끄러움을 느껴야 합니다. 그런 아들딸이 없으니 자신만이라도 동네방네 다니면서 하나님의 한과 천년 사연을 풀어 드리겠다고 하면서 노력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할 장년층 부부들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먹고 싶은 대로 먹고, 입고 싶은 대로 입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있는데, 그것이 참소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에구, 남들 남편은 돈도 잘 벌어 오는데, 요 모양 요 꼴이야.’ 하면서 바가지 긁는 것이 자기 책임입니까? 장년 부부들은 하나님께 충성할 수 있는 젊은이들을 못 가졌으니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줄 알아야 됩니다. 이제라도 그런 젊은이들을 길러야 되겠습니다.

다행히 고마운 것은 우리 통일교회에 ‘믿음의 자녀’라는 법이 있는 것입니다. 장년 부부들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이 믿음의 아들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뼛골이 녹아나도록 정말로 한번 뛰어 보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젊은이들 앞에 소망의 눈물을 짓게 될 때, 그 젊음의 소망의 터전 위에 메시아가 찾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베드로같이 나이 많은 할아버지나 쓰다 남은 찌꺼기 같은 사람들과 일을 하겠습니까?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의 아들이 먹다 남긴 오이꼭지 같은 사람을 찾아오겠어요? 뜨물에 뜬 오이꼭지에는 파리도 안 붙는데…. 여러분은 아들딸, 조카, 사돈의 팔촌이라도 인도해서 이 한을 풀 수 있는 인연을 만들어야 합니다.

영계에 가 있는 수많은 영인들은 땅 위의 자기 후손들이 탕감의 인연을 가지고 천륜 앞에 서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살아생전에 그 뜻을 알아 가지고, 그들이 바라는 환경이 벌어질 수 있도록 책임은 다하지 못할망정 책임 할 수 있는 인연을 만들어서 책임 하겠다는 마음이라도 가지고 몸부림쳐야 됩니다.

위로하는 사람이 서야 할 자리

예수님이 십자가를 향하여 나가던 그 이상의 심각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심정을 체휼할 수 있는 인연을 갖지 않으면 예수님과 같이 낙원에 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목숨을 걸고 십자가를 지면서도 원수들을 위하여 기도하여 비로소 낙원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건달 중에 상건달이요, 일주일마다 믿으면 된다 하여 그저 속여먹고, 좋으면 훑어 먹고 걸러 먹던 패들이 예수님 믿은 덕택으로 ‘아이고, 하나님 아들딸이니 나도 가야지.’ 하며 성큼성큼 나서 보십시오. 다리가 움직여지나. 체면이 있어야지요. 사람이 체면이 있어야 할 게 아니에요?

하나님을 위로할 수 있는 남자가 나와야 하고 여자가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위로해 줄 사람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분을 필히 만나야 합니다. 아들이 죽어서 낙망한 사람에게 ‘우리 아들이 셋인데 아들 하나를 당신의 아들로 삼으시오.’ 한다고 해서 위로가 돼요? 위로가 됩니까? 그러나 세 아들을 잃어버린 사람이 눈물을 듬뿍 흘리며 ‘당신의 사정을 내가 잘 알아요.’라고 할 때는 눈물 한 방울이라도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시퍼렇게 아들을 세 명이나 두고서 ‘참 안 됐어요. 대신 우리 아들을 줄게요.’ 하면 아무리 그래 봤자 위로가 될 것 같아요? 천만에! 위로하려면 그 사람 이상으로 서러운 심정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 오시는 주님은 어떠한 사람이어야 되느냐? 하나님이 사랑으로 창조해 놓은 인간이 타락하는 것을 바라보실 때 서러웠던 그 심정을 체휼하고 통곡할 수 있는 사나이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하나님 앞에 위로의 대상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러한 사연을 품고 십자가를 짊어지고도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또 그런 예수님의 심정을 알았기 때문에 기도하는 그 마음에 하나님이 같이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믿고 있는 기준이 하나님을 위로할 수 있는 기준입니까? 하나님은 불쌍하다는 것입니다. 말로써만이 아니고 사실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믿고 있는 마음과 몸의 사정을 두고 볼 때, 과연 하나님이 찾고 있는 아들이요, 딸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위로하지 않고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을 위로할 것인가? 여러분이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입고 싶은 것 다 입고,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남은 찌꺼기로 위로해요? 천만에! 그것은 사탄도 싫어하는 것입니다. 불과 네댓 살밖에 안 되는 유치원 학생들 앞에 빵 쪼가리를 갖다 놓고 󰡐너 어디를 가질래?󰡑 하면 귀퉁이는 흙이 묻었다고 안 가지려고 합니다.

타락한 인간의 자식들도 그러하거늘, 천지를 창조한 본연의 주인인 하나님께서는 어떠하시겠습니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부족한 자신이요, 가면 갈수록 천년 사연을 내 마음속에서 용서할 수 있는 빛 된 나를 지지러지게 한 이 환경을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몸부림치기에도 부족한 자신인 것을 생각할 때, 이 꼴을 가지고 뭐 자기 사정 몰라준다고 할 수 있느냐 이거예요.

예수님은 가정이상(家庭理想)을 완성해야 했었다

하나님의 한을 누가 위로해 드리겠습니까? 예수님을 중심하고 하나님을 위로할 수 있는 아들딸이 나와야 되고, 하나의 부부가 나와야 되고, 하나의 충신이 나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할 것인가? ‘아 우리는 우리 생활하기도 바쁘니 예수님 혼자 해야지.’ 그런 사람들은 도둑놈들입니다. 예수님께 폐 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역적이라는 것입니다.

6천년 사연이 엉클어진 하나님의 심정세계가 그랬었기에 하나님께서 찾아 나온 아들 역시 그런 아들이어야 됩니다. 그것을 알았기에 우리는 ‘그런 아들은 못 될망정 그렇게 하려고 몸부림치오니 울부짖는 이 음성을 들어주소서. 몸부림치는 이 사정을 보소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하나님을 위로하기란 불가능합니다.

탄식의 역사, 탄식의 심정을 풀지 못한 하나님인 것을 여러분은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심정과 그 탄식의 사연을 위로할 수 있는 아들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아들딸을 품에 안은 아버지의 모습을 누가 감히 바라볼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럴 수 있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인간이 바라는 최고의 소망이요, 그러한 한때를 이루어야 할 것이 우리의 목표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자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날을 맞이해야 합니다. 그럴 수 있는 분을 세워야 합니다. 즉 여러분보다 조금 낫거든 세우고, 좀더 수고하거든 세워야 됩니다. 자기보다 더한 사람을 세우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그런 마음을 옮겨 민족을 이루고 나라를 이루어, 오시는 메시아를 온 세계의 중심으로 모실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야 할 책임을 하지 못한 이스라엘은 망했습니다. 역사가 그렇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부여안고 아버님이 어찌하여 이렇게 됐습니까? 그것은 우리 선조들이 잘못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바라던 아들딸은 이러한 아들딸이 아닙니까? 당신이 바라던 가정은 이러한 가정이 아닙니까? 이렇게 하나님의 사연을 풀어 주어야 할 책임이 오시는 주님의 책임임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오시는 주님은 이것을 해야 됩니다. 그 책임을 위해 오셔야 하는 것입니다. 하늘땅 앞에 한을 남긴 위로의 실체인 아담 해와가 실수한 인류의 참다운 조상의 기준을 이루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이루지 못하여 한이 맺혔기 때문에 예수님과 성신은 아들이 되고 딸이 되고, 신랑 신부가 되어 가지고 선한 선조가 되어 한을 풀겠다고 2천년 동안 역사 과정에서 피눈물나는 개척자의 사명을 짊어지고 왔던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됩니다.

예수님은 아들딸의 사명을 다하는 동시에 부부로서의 사명도 다할 것을 소망하셨습니다. 그리고 충신의 자리를 소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만국을 굴복시켜 가지고 만국을 전부 거느리고서 ‘하나님 앞에 이것을 바치오니 받아 주소서.’ 하셔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효의 도리를 다하고 충신의 도리를 다해야 했습니다.

메시아가 해야 할 것은 무엇이냐? 가정적 메시아의 기준을 닦고, 세계적인 가정의 기준을 닦고, 세계적인 충신의 도리를 세워 새로운 천지에 하늘나라를 세우고 하늘나라의 법도를 세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사명인 것입니다. 그런데 뭐 천사장의 나팔 소리가 어떻고, 공중으로 들어 올려져 가지고 어떻고 어떻고 하는 것은 다 혼자 좋아 가지고 하는 수작들입니다.

인간은 아직까지 이 땅에서 충효의 기준을 완결시키지 못했습니다. 참다운 부모로서 하늘땅을 대신해서, 남자는 하늘 대신하고 여자는 땅을 대신하여 둘이 화합한 모습으로 참다운 신랑 신부의 인연을 맺음으로써 하나님 앞에 위로의 대상으로 설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가정이 충신 가정이 되어 만국이 그 뒤를 따라갈 수 있는 국가적인 충신의 자리까지 닦아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시는 메시아가 가야 할 기준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영광 중에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에게는 고생보따리가 너절하게 붙어 있다는 거예요.

세계에 30억 인류가 산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으로 보면 남자 여자 둘밖에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나를 본받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은 예수님을 대신한 아들이 되고 성신을 대신한 딸이 되어, 신랑과 신부의 실체를 가져 가지고 신랑 신부의 인연을 갖추어서 하나님 앞에 ‘당신의 소원을 푸시옵소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신랑 신부로서의 메시아 자격, 가정적인 구주의 자격을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예수님 혼자만 구주였습니다. 즉 여자에게는 메시아와 동참할 수 있는 자격을 지금까지 안 주었습니다.

가정으로부터 충신의 도리를 세울 수 있는 기반을 닦아, 이것이 만국의 중심으로 서게 될 때 메시아의 이상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메시아가 땅 위에서 책임을 다하고, 이 세계를 하나님 앞에 드리게 될 때, 메시아의 사명을 종결짓게 되는 것입니다. 타락한 이 세계를 비로소 넘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언제 하나님을 위로하기 위해 밤새워 통곡해 봤느냐

이제 오시는 메시아는 불쌍합니다. 여러분도 물론 불쌍하지만 그까짓 거야 백번 천번 불쌍하면 어때요? 불쌍하게 태어난 그 종자가 못생겼으니 고생하지. 그러나 4천년 동안 준비한 터전 위에 오셨던 예수님에게 십자가가 웬말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하나님의 원이 아니요, 예수님의 소원이 아닌 것을 알았다면, 믿고 가는 길에 있어서 죽음의 골짜기가 있거든 내가 먼저 가서 그 골짜기를 메우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 통일교인들은 그런가요? 따라가려고 눈치들은 잘 보지요. 그렇지만 계산은 빨라서 󰡐어이쿠, 손해날 일이면 안 해야지.󰡑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금까지 손해 투성이었습니다. 손해 대왕이었습니다. 손해 왕국을 이루어 나왔습니다.

이제 하나님을 위로해 봅시다! 아들로서 위로하자는 것입니다. 이 몸을 바쳐 아들로서 일해 보자는 것입니다. 언제 자기 생명, 자기의 문제를 위해서 밤을 새워 땅을 치면서 통곡해 봤어요? 자기 생명을 두고도 그러지 못한 처지에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주저할 것이 뭐 있습니까? 또 여자들은 하나님의 딸 노릇을 다 했어요? 대한민국에는 유관순 같은 여자도 있지만, 여러분은 뜻을 위해 죽으라면 전부 다 도망갈 것입니다. 거센 원수의 세계가 우리 앞에 가로놓여서 순순히 물러가지 않습니다. 어정어정해서는 물러가지 않으니 밀고 나가지 않고는 해결이 안 됩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러면 타락한 인간의 3대 소원 중의 하나가 무엇이냐? 개성복귀 완성, 즉 내가 완성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완성하려면 하나님에게 심정적으로 빚진 것을 청산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짊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지은 죄를 벗기 위해서 제물의 과정을 거쳐야만 용서가 되는 것이니, 반드시 피의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눈물이라든가, 피땀이라든가, 그 대가를 치르지 않고는 절대로 속죄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쉬지 말고 기도하라 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기도할 때 편안하게 네 활개를 펴고 드러누워서 기도합니까? 무릎을 꿇고 이마를 돌에다 부딪치고, 콧등이 깨지면서라도 기도해야 합니다. 편안해서 될 것 같았으면 통일교회 문 선생님은 벌써 꼴찌 됐을 것입니다. 편하지 않길 잘했지. 편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까지 나온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걸 알아야 합니다. 편안한 자리에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그래서 지금도 가만히 지난날을 생각해 보면 제일 그리운 것이 무엇이냐? 잘 먹고 잘 놀았던 것은 선생님 기억에는 없습니다. 아무리 잘 먹더라도 먹는 것은 배가 부르고 나면 빚이 됩니다. 할 수 없이 먹긴 먹었지만 또 빚을 진다는 마음을 가지고 먹었던 것입니다.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몰리고, 쫓기고, 잡혀 들어가 고문당하고 피를 토하던 자리입니다. 그 자리가 제일 기억에 남습니다. 그 자리를 기억하며 ‘아버지!’ 하면, 하나님의 심정이 뒤집히고 복장이 뒤집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지만, 잘 먹고 잘 지내던 기억은 아무리 했댔자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젊어서 하는 고생은 금을 주고도 못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생 가운데서도 참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선생님이 흥남 감옥에 있을 때의 얘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그때 선생님은 흥남 비료 공장에서 비료 가마니를 묶는 일을 하였습니다. 제일 고생스러운 것이 새끼줄로 비료 가마니를 묶는 일인데, 겨울 같은 때에 새끼줄을 사용하면 면으로 된 옷은 사흘이 못 가서 떨어집니다. 그것을 하루에 정량으로 천 삼백 개를 묶어야 하는데, 요것을 열 사람이 8시간에 해내야 했습니다. 하루 책임량이 한 사람 앞에 130개라면 이건 중노동입니다. 일반 사회 사람은 75개, 80개도 못 하는데 배의 기준으로 하라니 그것은 죽으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공산당 패들이 그런 일을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공산당이 어떻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선생님이 여당 지지자는 아니지만 요즈음 대한민국의 야당이 세상 모르고 날뛰고 있습니다. 우리가 누더기만 입고서라도 3년이면 3년, 5년이면 5년을 중심삼고 있는 재산을 다 팔아서라도 나라를 구해야 합니다. 총 끝이 모가지에 들어오고 있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세상 모르는 사람들이 문제가 생기면 먼저 도망갈 패들입니다. 우린 그런 사람들을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걸 알아야 됩니다.

어느 것 하나 귀하지 않은 것이 없는 감옥

선생님이 있던 감옥에서는 유산 암모니아를 만지기 때문에 옷자락에 묻게 되면 냄새도 지독하지만 냄새보다도 그 옷은 하루 만에 구멍이 뚫어집니다. 옷자락이 뚫어질 정도의 모진 일인 것입니다. 구멍이 뚫어지면 기워야 하는데, 손가락으로 깁습니까?

그곳에서 제일 그리운 것이 무엇이냐? 물론 밥입니다. 거기에 누가 면회 왔다 하면 물론 사연도 그립겠지만 그 사람 얼굴보다도 손부터 보게 됩니다. 군대 생활을 해 본 사람은 그 심정을 좀 알 것입니다. 누가 면회 왔다 하면, 뭘 입고 왔나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갖고 왔느냐를 본다는 것입니다. 그건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입니다. 여러분이 일주일 금식을 할 때, 7일째 되는 날 밤 12시 되기 10분 전의 기준이 어떠하던가요? 그 자리에서 죽을 보게 되면, 세상의 무엇보다 좋아할 것입니다. 얼마나 간절합니까?

먹을 것이 제일 그립지만, 그다음에는 무엇이 그리우냐 하면 바늘입니다. 옷을 꿰매려 해도 바늘이 있나, 실이 있나? 없는 것 천지이기에 감옥살이 오래 한 사람은 상거지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지나가다가 천 조각이 있으면 쇠똥이 묻어 있든 말든 집어 드는 것입니다. 부끄러움이니 자존심이니 얘기해 봐야 소용없어요. 부끄러움 같은 것은 진작에 작별했는데 부끄러움이 어디 있겠습니까? 도리어 자랑입니다. 여러분, 그런 기분 알겠어요? 그런 감옥살이를 5년 이상 10년쯤 한 사람들의 보자기를 보면 별것이 다 있습니다. 크지는 않지만, 살림살이를 다 갖추고 있습니다.

바늘이 어디 하나 있다 하면 교섭을 합니다. 그래서 하나 구한 것도 이걸 한번 쓰려면 ‘와이로’를 써야 되는 판입니다. 그것도 아는 사람이 아니면 안 빌려 줍니다. 그래서 어느 감방에 바늘이 하나 생겼다 하면 이건 화젯거리가 됩니다. 그것을 가까운 사람을 통해서 빌려 왔든, 새로 들어온 사람이 가져왔든 간에 소동이 일어납니다. ‘내가 어른이다. 고참이다.’ 하면서 달려드니 빌려 온 사람은 깁지도 못하고 구경만 하고 있다가 주인이 달라면 돌려주어야 하는 판국이었습니다. 선생님도 그때 바늘을 보고 이 이상의 가치를 지닌 것이 어디 있을까 하고 생각했을 정도였습니다.

선생님은 거울을 통해 갈라진 이빨을 볼 적마다 생각나는 것이 있습니다. 가는 철사 줄로 가마니를 꿰매는데 이 철사를 끼울 수 있는 골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강철입니다. 그것으로 바늘을 만들려고 ‘도록꼬’가 다니는 레일 위에 놓고 톡톡 두드리면 납작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납작해졌다 해도 구멍을 뚫을 수가 없기 때문에 구부려서 만들어야 했습니다. 이것을 구부리는 데 잘 구부려야지 잘못하여 딱 하고 부러지는 날에는 십년공부 나무아미타불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도 해 보고 저렇게도 해 보고 해서 겨우 만들었습니다. 정말 어려운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직접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입니다. 말만 들어서는 모른다는 것입니다. 거기 공장 높은 곳에는 유리창이 있습니다. 유리가 필요할 땐 그저 유리창을 깨뜨리는 겁니다. 이건 선생님이 했다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이 그런 장난도 했다는 것입니다.(웃음) 간수야 있건 없건…. 간수들도 어쩔 수 있나요? 자기들이 못해 주니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유리 조각을 하나 구해서 가마니를 타개어 놓지만 구멍을 맞추어서 꿰매어 나갈 수가 있나요? 할 수 없이 비료 가마니를 펼쳐서 구멍을 다시 뚫는데 철사 줄이 중간에서 꼬부라져서 끝을 삼분의 일쯤 남겨 놓고 딱 부러지는 것이었습니다. 할 수 없이 좀 튼튼한 철사줄을 골라 가지고 떠야 하는데, 일일이 뜨자니까 자꾸 꼬여서 일을 할 수가 있나요? 그래서 와이어 줄을 이빨로 물어서 자르다가 갈라진 이빨입니다. 잊을 수 없는 기념품입니다. 선생님은 거울을 볼 적마다 그 생각이 납니다. 그런데 오늘날 바느질이 문제입니까? 바느질하는 통일교 아주머니들, 이제부터는 󰡐바늘님 오셨습니까?󰡑(웃음) 󰡐참 고마운 실이구나.󰡑라고 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일을 계속하고 있는데 일년 반이 지난 어느 날 가마니를 꿰매어 들어가는데 이 가마니에 바늘이 하나 있었습니다. 꿰매는 가마니는 농촌에서 전부 가져오는데, 막 모아서 가져오는 바람에 거기에 떨어진 바늘이 휩싸여 왔었나 봅니다. 그래서 바늘 하나를 얻었습니다. 그 소문이 감옥의 8백 명, 천 명의 수인들에게 ‘야 누구에게 바늘 생겼다.’ 하고 주욱 퍼졌습니다. 바늘이 생겼을 때 하나님 앞에 천명 받은 때처럼 기뻤습니다. 거기 있는 사람은 아무것이나 다 할 줄 압니다. 선생님은 팬티도 잘 만들어요. 학교 다닐 때 책을 싸는 보자기는 좋은 팬티감이었습니다.(웃음) 선생님은 뜨개질도 할 줄 압니다. 못 하는 것 없이 다 할 줄 알아요. 여자들 신세 안 지고도 혼자 멋지게 살 수 있다 이겁니다.

하나님을 위로해 드리려면 같은 사정에 처해야

예수님을 믿는 여러분들은 󰡐예수님 대신자다.󰡑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민족을 위해 눈물짓던 것을 비록 가인의 입장일망정 흉내라도 내 보세요. 흉내를 내다보면 ‘흉내’가 ‘진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는 예수님의 심정을 모릅니다.

배고파 보지 않고는 배고픈 자의 심정을 모릅니다. 같은 입장을 당해 보지 않고는 모르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메시아의 사정이 어떻다는 것을 알려면 메시아와 같은 입장에 서 보아야 합니다. 성신이면 성신의 자리에서 보아야 합니다. 또 하나님이면 하나님의 입장에 서 보지 않으면 그 사정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그와 같은 입장에 설 수 있느냐? 그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이 통일교회 원리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위로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위로하지 않고, 인간들이 하나님을 배반한 빚을 청산하지 않고 어떻게 천국에 갈 수 있겠습니까? 죄를 청산하지 않고 천국을 가겠다고 한다면 그건 도적놈의 심보와 다름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가 쫓기고 몰림을 당했듯이 여러분들도 쫓기고 몰림을 당해 보라는 것입니다. 나쁜 사람한테 이용도 당해 보고, 나라를 위하여, 민족을 위하여, 세계를 위하여, 공적인 기준에서 쫓겨 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쫓기게 될 때에도 서러워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4월이 지나가게 되면 기도하면서 지금까지의 일생을 죽 회상해 보세요. 4월은 언제나 한 고비를 넘어가는 때입니다. 여러분이 지나간 일을 죽 회상해 보면 수많은 일들이 있을 겁니다. 몰리고 쫓기며 이렇게 복귀의 길을 가는 것이구나 하고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핍박당할 때 하나님이 ‘네가 그렇게 당해도 싸다.’ 하는 생활을 해 왔느냐, 아니면 내가 이런 자리에 있을 때 하나님이 같이할 수 있으며, 내가 눈물 흘릴 때 하나님이 같이 눈물 흘리시고, 내가 슬퍼할 때 하나님이 같이 슬퍼하실 수 있는 생활을 해 왔느냐를 생각해 볼 때, 그런 생활을 못 해 왔다면 회개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통일교회에 들어와 원리를 배운 목적은 하나님을 위로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어떻게 위로할 것인가? 여러분들이 대한민국 삼천만 민족의 생명을 책임지기 위해 죽기를 각오하고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밤이나 낮이나 대한민국 삼천만 민족을 위해 기도를 해야 합니다. 나라를 살리는 일이나 선의 길을 개척하는 데 있어서 가로막는 악당들을 몰아내기 위해서 온갖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나아가 통일교인들은 세계를 책임져야 합니다. 예수님이 책임지지 못했으니 통일교회가 책임져 보자는 것입니다. 신을 부정하는 공산당을 때려잡자는 것입니다. 공산당과 총칼을 맞댄 일선에서 쓰러지더라도 때려잡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4, 5년 전부터 외국에 돌아다녔지만 그들을 생각하면 기분이 나빠서 못 돌아다녀요. 국내에 있는 원수들이 문제가 아닙니다. 국외에 있는 원수가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환경에서 통일교회가 무엇을 할 것인가? 이 민족이 갖지 못한 하나님의 인연과 심정을 이 민족 가운데 세우고, 세계 인류가 생각하지 못한 하늘의 인연을 이 땅 위에 세워 놓아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여러분들이 하는 일 자체가 하나님을 위로할 수 있는 것입니다.

끝날에 있을 세 가지 심판

결론을 지어 말하자면 우리는 빚을 졌습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지음 받은 인간은 그 말씀의 결실을 이루어 놓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원리 법도에 의해서 아담은 이러해야 되고, 완성한 인간은 이래야 된다 라는 기준을 세워야 됩니다. 말씀의 결실을 이루기 위해서는 실체가 되어야 하는데, 그 실체는 사탄과 싸워서 이기고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어야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끝날에는 무엇을 하느냐 하면 진리 심판, 심정 심판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위로하는 위로의 실체가 되기 위해서는 그러한 심판의 조건을 전부 다 갖추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말씀하신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로 진리의 예수님이요, 생명의 예수님이라는 것이니, 진리는 말씀이요, 생명은 실체를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는 사랑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여기에는 하나님의 사랑이란 말이 없습니다. 즉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사랑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 앞에 못갑니다.’라고 ‘사랑’을 첨부했으면 전부가 들어갔을 텐데….

지금까지 세계에서 20세기 문화세계를 창조하여 선진국이라고 자랑하는 국가들이 자기네들은 무슨 철학이나 사상도 본받을 것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것들은 하나님의 진리로 혁명을 해야 할 권내에 있는 것입니다. 공산주의 이념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는 진리가 아닙니다. 오늘날의 사회를 볼 때 󰡐하나의 진리의 말씀이 일상생활에 연결되어서 일상생활이 내가 소망하던 진리를 가지고 사는구나. 내가 소원하던 인연의 터전이 진리의 인연으로 말미암아 되었구나.󰡑 할 수 있는 사회가 되었습니까?

우리 통일교회 교인들은 세상 사람과 다릅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말을 많이 합니다. 영이니, 실체대상이니, 탕감복귀니 하는 그들이 알 수 없는 말들이 많습니다. 요전에 어떤 유명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어렵고도 쉬운 질문이라고 하면서 우물우물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참된 인생길은 무엇인가?󰡑라고 질문할 때 ‘이건 이렇다.’고 대답을 할 것입니다. 이 점이 그들과 다르다는 거예요. 여러분들은 반드시 목적을 두고 가지만, 오늘 인간 세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뜬구름과 마찬가지로 동풍이 불면 서쪽으로 몰려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말 자체도 다릅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세계관․인생관․국가관․우주관도 다릅니다. 거기에 대해서 일반 사람들은 통일교회 사람들과 말할 상대가 못 됩니다.

여기에 처음 나온 사람들은 선생님이 하는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할 것입니다. 한바탕 원리의 골자를 얘기하면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아서 마치 무슨 비행기를 타고 둥둥 떠다니는 것처럼 어리둥절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는 진리, 진리로 화하게 하는 생활환경과 진리로 화하지 못하게 하는 생활환경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야, 아담아!’ 하고 부르실 때 무화과나무 뒤에서 숨죽이며 ‘예.’ 하고 살그머니 대답하면 안 됩니다. ‘아담아!’ 하고 부르실 때 우렁찬 목소리로 ‘예, 예, 예!’ 하고 힘차게 대답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아담이 그랬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니 여러분은 ‘예, 예!’ 하고 힘차게 대답할 수 있어야 됩니다.

우리는 세상 천지에 자랑할 수 있는 마음, 하나님의 말씀에 화답할 수 있는 우리말을 못 가졌습니다. 우리는 세계를 중심삼은 생활을 하지 않으면 곤란합니다. 그러므로 통일교회의 식구들은 종자가 달라야 합니다. 종자가 다르다고 해서 눈이 네 개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다음에는 인격 심판입니다. 인간의 타락이 무엇이며, 타락으로 인하여 무엇이 침범당했는가? 먼저 말씀이 침범당했습니다. 사탄은 에덴동산에서 ‘야! 선악과를 따먹으면 얼마나 좋은데…. 그걸 따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눈이 밝아져 가지고 하나님과 같은 자리에 설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시기해서 따먹지 못하게 했을 거다.’라고 인간을 유혹했습니다. 그것 참 그럴 듯합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인간의 눈이 밝아지면 걱정이 없거든. 정말 그럴싸하구나. 그리하여 말이 침범당했습니다. 말이 침범당하면 몸뚱이도 침범당합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것이 아니라 몸뚱이를 침범당한 것이요, 실체가 침범당한 것입니다. 선으로부터 침범당한 게 아니고 악으로부터 침범 당했습니다.

악이 침범할 때 막아내야지 이게 뭡니까? 자기 몸을 가누지 못하겠으면 도망쳐야 했습니다. 그런데 사탄에게 맞아 가지고 몸이 넘어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마음과 몸이 다릅니다. 본래 인간은 누구나 타락하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격을 완성하려면 마음과 몸이 하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위로의 대상이 되려면 실적을 갖추어야

여러분의 마음이 하자는 대로 몸을 움직이면 선한 인간이 됩니다. 그리하여 악을 용납할 수 없다고 다짐하며 당당히 심판할 수 있는 권한을 가져야 됩니다. 아담도 그래야 했던 것입니다. 원래 천사장은 인간의 종이니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종인 사탄을 지배해야 됩니다. 우리 인간은 사탄인 타락한 천사장한테 유린당했기 때문에 여러분은 유린당한 것을 그렇지 않았던 상태로 복귀해야 됩니다. 여러분을 사탄세계의 악의 소굴에 갖다 놓아도 나는 악의 침범을 안 받는다. 내가 악을 잡아 굴복시키는 것이지, 악이 내 생명을 못 빼앗아 간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기성교회에서 통일교회를 반대합니다. 통일교회는 이단이니 가지 말라고 말하는데 왜 못 갑니까? 상대방을 이단이라고 비방하는 것은 같이 이단 될 가망성이 있는 것입니다. 이단은 천국에 못가는 것입니다.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을 차리면 산다는 말이 있듯이 여러분은 사탄에게 침범받았던 동기를 기억하고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통일교회가 어떻고 어떻다고 세상에서 떠들고 있지만 해 보라는 것입니다. 기진맥진할 때까지 해 보라는 것입니다. 맨 처음에는 야단하지만 일년이 가고 이년이 가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다 지나가는 것입니다. 통일교회는 하나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점점 더 당당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치지 못하고 사탄도 치지 못하며 오히려 인간이 가는 길을 영원히 보장할 수밖에 없는 세계, 심판의 공법이 관계할 수 없는 심정세계, 인간이 그런 심정세계를 만들지 못하고 타락했습니다. 타락으로 말미암아 세 가지를 잃어버렸습니다. 말씀을 잃어버렸고, 실체를 잃어버렸고, 심정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인연으로 지음 받은 아들로서의 아담이 하나님을 위로 할 수 있는 대상의 자리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세계적으로 이것을 탕감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 책임을 짊어지고 오시는 분이 메시아이기 때문에 여러분은 메시아를 대신하는 입장에 서야 합니다.

포도나무 줄기와 포도나무 가지가 뭐가 다릅니까? 같은 것입니다. 뿌리가 같은 것이니, 뿌리가 고통을 받으면 잎사귀와 가지도 고통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메시아와 같은 레벨에서 같은 생활 감정, 같은 사연으로 어우러질 수 있는 사람이 되지 않고는 하나님을 위로할 수 없습니다. 그런 가지를 통해서 열매가 맺혀지는 것이요, 그러한 열매가 나와야만 하나님을 위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열매란 실적을 말하는 것이니, 하나님을 위로해 드리려면 실적이 없어 가지고는 안 됩니다. 즉 실적이 있어야만 하나님 앞에 위로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 심정적으로 빚을 졌습니다. 우리가 져야 할 고통의 십자가, 우리가 맞아야 할 모든 고통의 자리를 하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맞아 나오셨습니다. 참된 말씀의 주체이신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이런 일을 해 나오셨습니다. 인간이 가야할 길을 다 닦아 놓고 탕감의 고개를 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고 준비를 해 나오신 하나님께 여러분은 어떻게 보답할 것인가?

그러므로 우리가 최후에 남겨야 할 것은 하나님의 아들딸로서 참다운 선의 조상이 되어 이 땅 위에 하늘나라의 법도를 세울 수 있는 충신의 도리를 세워 이것을 하나님 앞에 다 갖추어 드리는 책임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 사명을 다하고 하나님 앞에 가게 될 때, 우리 인간은 하늘을 위로하는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알겠어요?

<기 도>

아버지의 소원이 출발을 보았사오나 그 소원은 아직까지 결말을 보지 못했습니다. 아버님의 그 소원과 더불어 그리움이 출발을 보았사오나 슬픔이 그리움을 전부 다 소멸시킨 것을 저희들은 알았사옵니다.

이 타락된 세상에서 아버지의 소원과 아버지의 그리움을 내 일신에 다시 환기시켜서 나로 말미암아 타락된 세계에 대하여 울타리가 되고 방파제가 되어서, 내가 품을 수 있는 가정과 내가 품을 수 있는 사회권 내에서는 그러한 역사적인 한이 없게 하겠다고 몸부림칠 줄 아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땅에 당신의 아들로서 오시는 분은 세계를 대신해서 이러한 책임을 짊어져야 한다는 것을 아옵니다. 당신의 아들딸이 되기를 원하는 저희들은 이런 우주사적인 중심존재와 더불어, 자기가 처해 있는 환경에서 그러한 인연의 꿈을 만들기 위해서 본성의 심정과 아버지를 중심삼아 옛날 에덴동산을 그리워하면서, 저희 자체의 환경에서 이것을 개척하겠다고 노력할 줄 아는 당신의 자녀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오늘은 거룩한 날이었사오니 만민을 대표해 모이는 수많은 종교인들 위에 축복하여 주시옵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그들이 진정 아버지의 내정을 알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사정이 얼마나 한스러웠고, 얼마나 딱했다는 사실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6천년 역사의 고비 길 가운데 아버지께서 눈물을 흘리지 않은 곳이 없다는 것을 알게 허락하여 주옵소서.

오늘날 한국의 삼천만 민족이 이와 같은 입장에서도 아직까지 남아 있다는 사실은 이 민족의 선조들이 잘하여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 배후에는 피어린 투쟁과 끊임없는 눈물로써, 이 나라 이 민족을 염려하고 사랑하시는 아버님의 심정의 터전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이 민족이 이렇게 남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이러한 내용이 있다는 것을 이 민족에게 깨우쳐 주어야 하는 것이 통일교회에 있는 당신의 아들딸들의 사명인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이 사명을 위하여서 저희들은 어떠한 어려운 환경에 부딪히더라도 이를 극복해 나가며 최후의 실적을 세워서 아버님을 위로할 수 있는 대상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아버님, 저희들이 전진하여 이러한 책임을 스스로 느낄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은 아버님을 위로하지 않으면 안 될 책임을 강조했습니다. 아버님, 당신의 사연이 얼마나 처량했던가를 저희는 알겠사옵니다. 당신이 분부하시기 위하여 기도하시던 그 마음도 알겠사옵니다. 약하고 보잘것없는 저희들이 찾아와서 엄청난 사연을 알고 엄청난 사명을 짊어질 때, 당신이 마음 졸이던 그 사정이 어떻다는 것을 알게 되었사옵니다. 당신의 마음을 알고 그 책임을 짊어지고 나선 저희들은 죽음 길도 마다 않고 가야 할 입장인 것을 알았습니다.

아버지! 이 길을 걸어 나온 수십년 역사 과정에 있어서 눈물어린 장면도 있었고, 비통한 사연도 많았습니다. 당신이 없었다면 갈 수 없었던 그런 사연도 많았사옵니다. 그러나 천년, 2천년 역사의 흐름 가운데 저희가 외로운 자리에 설 때마다 이 민족을 보호하시고 지켜 주시는 아버지의 심정의 터전이 있었기 때문에 저희들은 오늘날까지 나온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여기에서 녹음이 끊어졌음)

<말씀 요지>

복귀섭리는 외부로부터 중심을 세워 나왔습니다. 그리고 전체의 중심으로 세워진 분이 메시아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아담 해와의 타락으로 인해 느끼신 슬픔 이상의 슬픔을 느껴야 합니다. 곧 슬픔이 인간으로 인해 생겨났으니 인간은 하나님보다 더 슬퍼하는 입장에 서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기쁨이 시작되어야 하니 하나님을 위로해 드려야 합니다.

사탄의 참소조건을 면할 수 있어야 복귀됩니다.

심정의 기준은 1968년 하나님의 날이 세워지기 이전까지의 활동으로 인해 세워졌습니다. 이 기대 위에서 개인부터 세계의 복귀의 길이 열렸습니다.

죄인으로서는 하나님을 모실 수 없습니다. 효자․열녀․충신이 되어야 합니다. 효자는 아버지가 싫어하는 것은 그 이상 싫어해야 하고, 기뻐하는 것은 그 이상 기뻐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하고 기도하신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나를 구하신 것은 나를 위함이 아니라 형제를 구하기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형제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듯이 하기를 바라십니다. 그 이상 사랑한다고 해도 부모는 나무라지 않습니다.

횡적인 터전이 없이 종적인 기준을 세울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만물을 먼저 창조하시고 육신을 나중에 창조하셨습니다.

<말씀 요지>

인간은 타락했기 때문에 그 자신이 스스로 본연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절대자를 추구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종교가 절대자를 찾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스스로 자신을 독생자라고 하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비로소 하나님이 예수님을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천국은 상대이상을 세워서 가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천국 가는 대합실과 같은 낙원에 가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식을 중심한 섭리에 실패했기 때문에 제자를 대신 세우신 것입니다.

복귀를 위해 믿음의 세 자녀를 찾아 세워야 합니다. 또 그들이 직계 자녀에게 절대로 순종굴복해야 됩니다.

부모의 위치는 자녀로써 결정됩니다. 세 자녀가 없으면 자식 없는 아담의 입장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사탄이 마음대로 침범하는 것입니다.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가정에서 이미 승리하고 돌아오는 길이었기 때문에 그 길에 사탄이 나타나지 않고 천사가 나타나 야곱과 싸운 것입니다.

섭리로 볼 때 아담으로부터 노아까지는 10대이고, 거기에 가인 아벨의 2대를 합하면 12대입니다. 그러므로 아담가정을 중심한 12수를 복귀해야 합니다.

1960년 부모의 날을 세움과 동시에 노아의 세 아들과 같은 세 가정을 세워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아담으로부터 노아까지의 죽은 영들을 구할 수 있고, 이 승리의 기대 위에 야곱과 같은 가정을 세우는 것입니다.

120가정은 예수님 중심한 120문도를 대신한 것입니다. 네 가정은 결혼한 기혼가정입니다. 사방의 문을 열어 주어야 합니다.

애국 애족해야 민족을 위해 죽은 영들의 원한을 풀 수 있습니다.

종교 중의 종교가 되어야 순교 당한 영들의 원한을 풀 수 있습니다.

승공을 해야 공산당에게 살해당한 영들의 원한을 풀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영들이 지상에서 활동할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7년노정 기간에 사위기대를 세워 삼위일체의 이상을 세워야 합니다.

<말씀 요지>

부모의 입장이었던 아담 해와가 타락했기 때문에, 이 땅에 다시 타락하지 않은 부모가 오지 않고는 그 본연의 입장을 복귀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신 분이 예수님이었습니다.

오늘날 통일교회가 출현한 것에도 이러한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선생님 가정을 중심하고 여러분 가정들이 완전히 일체가 되어 전세계를 수습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문제는 개인이 아니고 가정입니다. 가정이 하나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성경에도 만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의 세 자녀와 직계 자녀들이 완전히 하나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선생님의 명령이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심적 각오와 자세가 되어 있지 않으면 세계를 수습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 위주로 살면 안 됩니다. 자기 가정만 복 받게 해 달라는 따위의 기도를 해서도 안 됩니다.

앞으로 대한민국은 어차피 우리 이념을 따라오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공적인 입장에 있는 사람은 소유 관념이나 존재의식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맡긴 천적인 가치에 대해서 내가 마이너스시켜서는 안 됩니다. 조금이라도 플러스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심정적으로 빚지는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뜻을 위해 충성하는 어떠한 식구 앞에서라도 부끄러운 입장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식구들끼리 서로 자주 만나고, 자주 만날 수 없을 때는 서로 편지라도 자주 하기 바랍니다. 선생님을 중심삼고도 일주일 이상 연락이 끊겨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매주일 하나님 앞에 경배를 드리는 것도 서로 멀리 떨어진 자리에서 간접적으로 만나고 연결 짓는 의식이요 기회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거니와 남에게 빚지지 말고 하나님이 세우신 뜻 앞에 내 자신이 마이너스시키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통일교회에 들어와서 여러 해 된 사람들은 옛날로 돌아가고 싶어하고 있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옛날을 그리워하는 것은 왜 그럴까요? 이것이 문제입니다. 뜻적으로 볼 때 오늘날 이 시대의 싸움은 옛 시대의 싸움과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망각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오늘날 여러분들이 뜻을 대해 나오는 데 있어서 기운을 잃고, 뜻에 대한 충성심이 변해 가는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핍박 시대는 갔으나 실감을 못하며 신앙하는 우리들

섭리적으로 보면 시대적 혜택권이 우리에게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거기에 비례해서 싸움의 문제는 작아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 커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옛날에는 개인이 교회를 자유스럽게 출입할 수 있는 길을 열기 위해서 무한히 핍박을 받았습니다. 교회를 출입할 수 있는 길을 개척해 나오는 데 있어서 핍박하는 사람이 많았던 것입니다. 부모가 핍박하고, 친구들이 핍박하고, 주위 전체가 핍박하는 그런 환경이었습니다.

한 개인이 움직이게 될 때 전체가 규합해서 그 개인을 공격하는 이런 시대였습니다. 이러한 시대상에 대비할 수 있는 내적 결의, 내적 결심을 해야 할 긴장된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대하고 있는 환경은 큰 원수가 진을 치고 있으니 만큼 하나님도 역시 여기에 대비하셔서 이러한 입장에서도 나를 중심삼고 상대편을 능가할 수 있도록 배가된 힘을 가해 협조해 주는 역사를 하시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때 느낀 모든 것은 오늘날 우리의 인식 관념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자료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냐? 국가적으로 반대하는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사회적으로 반대하는 시대도 지나갔습니다. 가정적으로 반대하는 시대도 지나갔습니다. 이렇게 외부에서 반대하는 시대가 지나고 보니 결국 나 혼자 있는 자리, 원수가 없는 입장에 선 내 자신이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제 내가 산 기분이나,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기분이나, 내일 내가 살아 나갈 기분에 별다른 차이가 없게 된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 처해 있는 그 자체가 하나님이 협조할 수 있는 발판이 될 수 있느냐? 절대로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원수의 세계를 공격할 수 있는 때, 최후의 결단을 지을 수 있는 그런 기회에 역사하셨습니다. 평범할 때는 역사하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현재 하나님 앞에 접근할 수 있고, 충성을 다짐할 수 있고, 악조건을 물리칠 수 있는 환경적인 여건을 갖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의 초점인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옛날 어려운 때는 어떠했느냐 하면 언제나 하늘 편과 사탄 편을 느꼈습니다. 하늘 편과 사탄 편의 경계선에 서 있다는 것을 확실히 실감했습니다. 길을 걸어가면서도 하늘 편과 사탄 편을 깨달았고, 밤이나 낮이나 어느 순간에도 하늘 편과 사탄 편이 대적하고 있다는 것을 언제나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외부의 핍박이 없어지게 되니 사탄 편과 하늘 편에 대한 인식 관념이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옛날로 돌아가려고 아무리 노력하고 아무리 몸부림치며 외친다 하더라도 이제는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것은 왜 그러냐? 그런 환경을 다시 만나기 전에는 돌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뜻을 중심삼고 기도를 해도 실감이 나지 않고, 나가서 전도를 해도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울타리도 없이 사방이 탁 트인 입장에서 무엇인가 모르게 실속을 다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를 부르는 것도 희미하고, 뜻을 위한다는 것도 희미해요. 이런 희미한 생활을 하다 보니 결국은 세속적인 환경에 흡수될 수밖에 없고 자기 자신을 망각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저 이렇게 가다 보니 결국은 난데없는 곳으로 가게 되는 엉뚱한 결과가 초래되는 것입니다.

사탄 편을 이기기 위해서는 동지가 필요한 시점인데

사탄 편과 하늘 편이 대적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사탄 편은 너무나 크기 때문에 거기에 대적하기 위해서는 나 하나 가지고는 안 됩니다. 절대로 나 혼자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반드시 동지가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동지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동지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심이 자기 부모보다도 더 간절하고, 자기 형제보다도 더 간절하고, 자기 친구보다도 더 간절하고, 자기 스승보다도 더 간절해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서로가 밤을 새워 가면서 말하고, 생사지경을 나누어 넘어갈 수 있는 경지에서 결심하면 여기에서는 그 어느 것에도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단결력을 가지게 됩니다.

그 환경이 아무리 무자비한 환경이라 하더라도, 비록 단둘이 원수의 적진 가운데 서더라도 서로가 격려하는 그 힘으로 그것을 밀고 넘어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보다도 둘이 배가되는 역사를 했기 때문에 그런 강력한 힘으로 내일을 향해서 진격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여러분은 동지의 필요성을 상실했습니다.

1960년대에는 통일교회의 형제가 20리 밖에 있어도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났습니다. 안 만나면 안 되었습니다. 자주 찾아가 만날 수 없는 50리 거리에 있는 형제를 만나기 위해서는 20리와 20리 사이에 장소를 택해서 몇 시에 만나자고 해서 만났습니다. 그렇게 만나려고 걸어가던 그 시간은 하나님과 같이 움직이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만나는 그 순간에는 지금까지 자기 고충을 전부 다 터놓을 수 있었고 자기 계획을 위해 서로 의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환경을 지금 어디서 찾겠습니까? 동지에 대한 간절함이 점점 희박해 감으로 뜻이 관념적으로만 인식되었지 사실적인 입장, 현실과는 관계맺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뿌리 없는 나무와 같아서 세파에 흘러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결국은 여러분 자신이 사탄 편이냐 하늘 편이냐를 확고히 하는 전쟁의 시점에 서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내가 복귀되고, 내 가정이 복귀되고, 사회가 복귀되고, 세계가 복귀되는 그 과정에는 내적으로는 보이지 않는 더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나간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망각하고 있습니다.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의 더 심각한 전투장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의 시련이 탄식의 조건으로 남아져 있는 사람은 내일의 시련장으로 전진할 수 없는 것입니다. 후퇴할 수밖에 없는 입장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을 중심삼고 시대적인 혜택권 내에 내세워서 역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은 하늘대로 가고 나는 나대로 떨어지니, 여기에서는 아무리 탄식을 하고 몸부림쳐도 소용이 없습니다. 과거 역사가 그리워 아무리 몸부림쳐도 환경은 이미 벌어졌다는 것입니다. 이런 결과에 놓여 있는 세상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타개할 것이냐? 여러분은 옛날로 돌아가자고 하지만 지금은 전쟁의 시점입니다. 대인관계를 맺는 데 있어서도 전쟁의 시점입니다. 하늘과 사탄과의 판가리 싸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극적인 시점을 어떻게 발전시키느냐 하는 것이 선결문제입니다. 내 생명을 지키고 연장시킬 수 있는가를 결단하는 최후의 결판장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하루의 시간과 생활을 자극시킬 수 있는 내 자신을 어떻게 복귀시키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밥을 먹으면서도 바쁘게 재촉하면서 먹고, 잠을 잘 때도 바쁘게 재촉하면서 자고, 일어날 때도 바쁘게 재촉하면서 일어나야 합니다. 언제나 뜻 앞에서 하늘 편에 선 내 자신을 고맙게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입장에서 바삐 걷는 그 걸음은 적진을 향하였느냐? 사탄 편을 쓰러뜨리고 점령하는 데 있어서 나는 진정한 용사였느냐? 우리는 이것을 생각해 봐야 하는 것입니다.

시대적인 혜택권이 보다 넓어짐에 따라서 우리는 여기에 대응할 수 있는 보다 강한 신념을 어떻게 가지느냐? 이것이 현재 통일교회 신도들이 해결해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선생님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통일교회 신도들이 해결해야 할 중요한 문제

그런 입장에서 보게 될 때, 대한민국이라는 하나의 대상이 나타나서 사탄 편의 입장에서 우리와 대적하게 되면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 나갈 것인가? 실질적으로 우리가 대하고 있다는 입장에서 어떻게 실감적으로 느끼면서 대처해 나갈 것인가? 사탄과 대적해서 싸우지 않으면 우리는 전부 다 망한다는 책임감을 가지고 그들과 부딪칠 수 있는 내 자신을 어떻게 가질 것인가?

여러분 중에 바닷가에 사는 사람은 경험했을 거예요. 물은 건너가야 되는데 해는 저물어 가고, 조수물은 들어오고 있을 때의 그 말할 수 없는 조급한 마음, 그런 조급한 마음을 중심삼고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혼자서는 안 되겠으니 한두 명이라도 동지를 찾아야 합니다. 이 큰 대상을 요리할 수 있는 하나의 생명을 어떻게 규합하느냐? 비례가 크면 클수록 그에 대한 간절한 마음, 더 성실한 마음을 가지고 어떻게 이것을 규합하느냐? 여러분이 따라가는 입장에서는 잘 모르지만 책임자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상당히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것이 흘러간 역사의 한 날로서 남아지면 모르지만, 영원히 결정짓고 가야 할, 내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중요한 시간이라 생각할 때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거예요.

여러분은 지금이 전쟁의 시점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늘 편과 사탄 편이 갈라서야 할 시점에는 반드시 승패가 결정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늘 편인지 사탄 편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아담 해와가 타락한 그날부터 우리 몸뚱이는 전부가 사탄 편이었습니다. 이 모두가 하늘을 공격하는 사탄의 도구였습니다. 내 몸뚱이가 그렇고, 내가 살고 있는 가정이 그렇고, 내가 살고 있는 사회도 그렇고, 내가 살고 있는 국가도 그렇고, 세계도 그렇습니다. 이 땅에 살고 있는 30억 인류 전체가 하나님을 반대할 수 있는 도구로 변했습니다. 그들이 좋아하고 흥청거리는 그 전부가 사탄이 하늘을 망치는 도구요, 하늘 편을 비참하게 학살하던 도구였습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이 세계의 많은 도구와 무기 앞에 얼마나 학살당하셨겠으며, 얼마나 억울한 역사를 거치셨겠습니까? 이 역사는 남의 역사가 아닙니다. 내 역사예요. 내 자신의 역사라는 거예요. 나 하나 때문에 그러한 역사가 벌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수많은 선한 사람들이 이 땅에 와서 얼마나 많이 희생되어 갔습니까? 사탄 품에서 사탄의 공격을 받다가 사탄의 편에서 학살되었습니다. 그렇게 죽어 간 그들의 한을 어떻게 풀어 주느냐? 어떻게 풀어 주면 되겠습니까? 선한 것은 선하게 거두어야 됩니다. 그러자면 사탄세계를 점령하기 전에는 그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여기에는 반드시 싸움이 벌어지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어디에 가서 무엇을 척 보더라도 그것을 하나님 것과 사탄 것으로 전부 갈라야 합니다. 여러분이 어디를 가더라도 사탄 편을 통해서 가느냐, 하늘 편을 통해서 가느냐? 또 사탄의 일을 남기기 위해 가느냐, 하늘의 일을 남기기 위해 가느냐? 어느 한때, 어느 한 시간이라도, 한 음식을 통해서라도 간절한 심정으로 하나님 앞에 플러스될 수 있는 자리에서 분별해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시점을 생각하면서 한시라도 사탄 편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벅찬 승리를 대하고 싶을 때, 그 승리를 위해서는 동지가 필요한 것입니다. 동지를 얻게 될 때는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끝까지 애쓰고도 저히 형용할 수 없는 괴로움을 느끼면서도 하나님 앞에 동정 받을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서는 남모르는 비밀이 많은 것입니다. 그런 사연은 터놓고 말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에 하나님도 지금까지 복귀섭리를 해 나오시면서 전부 가르쳐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전부 다 원수와 교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전쟁의 한 시점에 들어가 있는 이 땅을 중심삼고 지금까지 좌우로 갈라 왔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이런 관념이 뒤바꿔져 있다는 거예요. 그러므로 이 전쟁의 시점에 있어서 일체의 모든 생활 전부를 중심삼고 최전선에 나가 사탄을 굴복시킬 수 있는 강한 나를 갖추어야 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힘만이 아니라 전체를 동원해서 하나님 앞에 이득을 가져올 수 있는 마음으로 회복해야 합니다. 그것은 동지를 사랑하는 마음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이 두 길밖에 없습니다. 동지를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동지가 없으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결국은 동지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동지를 사랑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승자가 되기 위해서는

여러분에게는 통일교회 교인으로서 동지도 있다 이겁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동지를 얼마나 사랑했느냐? 동지를 사랑해야 이 전쟁에서 실천적인 실적을 올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에 도달하여 공동적인 이익을 가져올 수 있는 그들을 얼마나 동원시키고 가담시켜서 하나님 앞에 플러스적인 결과를 가져오도록 움직였느냐 하는 생각을 항상 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전부가 공동 운명체라는 것입니다. 언제 끌려갈지 모르는 이런 전쟁의 시점에 처해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어요.

이제 돌아가는 걸음에 있어서 여러분들은 병사로의 자기 주장을 해서는 안 됩니다. 병사는 기합을 넣는다든가 아니면 어떻게 하면 강하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반드시 승패를 결정해야 됩니다. 그러나 패자가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반드시 승자가 되어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승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외적인 무장을 강하게 할 것이냐, 내적인 무장을 강하게 할 것이냐? 외적인 무장과 내적인 무장 둘 다 강하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북의 공산당들이 이남에 대해서 큰소리치는 것은 내적으로는 사상무장을 했고 외적으로는 전쟁 준비로 무장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앞으로 원수를 상대해서 싸우고 점령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외적인 무장을 강하게 해야 합니다. 여기에는 원리 말씀과 실천이 필요합니다. 아무리 무장을 하더라도 그것을 그냥 믿고만 있으면 안 됩니다. 실천하고 싸워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적인 무장을 해야 합니다. 내적인 무장은 나 혼자서는 안 됩니다. 사탄이 영적 존재들을 중심삼아 가지고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영적인 하나님을 중심삼고, 하나님의 심정을 중심삼고 무장하여 사탄보다 강하게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기 전에는 끌어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탄과 연결된 사랑을 넘어 영적인 하나님과 연결된 사랑에 하나되는 이 두 가지의 무장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무장이 잘 되었다 하더라도 그 수가 상대편 수의 10분의 1, 100분의 1일 때는 승리하기가 어렵습니다. 수적으로 대등하고, 안팎으로 무장을 했을 때는 승리는 결정적인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현재 대한민국에 있는 우리 통일교회가 어떤 입장에 있느냐? 현재 사회단체를 두고 볼 때 외적인 면에서나 내적인 면에서 대한민국 어느 단체보다 뒤지지 않는 무장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자신이 있지만 수가 적습니다. 싸움은 시작되었는데 우리의 동지가 적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일 큰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전면적인 전쟁은 할 수 없고 게릴라 작전밖에 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전면적인 전쟁으로 전개시키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면적 격전을 치를 수 있는 동지의 수를 갖추어야 합니다. 그리고 전면적으로 내적인 무장을 하여 행사할 수 있는 기반을 준비해야 합니다. 선생님은 지금 본부에서 지금까지 작정한 문제를 어떻게 하느냐 하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단체를 모으고, 다리를 놓아 전체를 움직이는 것이니 여러분들도 비장한 각오로 나가야 합니다.

이것은 전쟁입니다. 오늘 내가 집에 갔다 올 수 있다고 해서 우리의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전쟁은 더욱더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만큼 우리는 한 식구라는 생각을 해야 됩니다. 또 생명을 걸고 나가 싸워야 합니다.

만일에 사탄 편의 원수들이 여러분들을 보게 될 때 어떻게 볼 것이냐? 여기에서 한 사람이라도 낙오자가 생긴다면 사탄 편에서는 승리의 조건이 생겼다고 좋아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천주를 규합할 수 있는 대대적인 규모를 갖추어야 됩니다.

그러면 무엇을 가지고 할 것이냐? 맨주먹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조직만 가지고도 안 됩니다. 부모의 심정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가 하나 알아야 할 것은, 만일 원수가 이겼을 때는 어떻게 될 것이냐? 자기가 제일 사랑하는 아내가 사탄에게 농락당하고 비참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또 자기가 제일 사랑하는 부모가 그렇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의분심과 개척정신으로 적진을 향해 돌진하자

뜻을 대한 이후에는 하늘이 끌고 들어가는 운명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승패의 결정을 나누기 전에 우리는 최대의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15배 이상이나 되는 아랍권을 일주일 이내에 격파시켰던 것과 같이 안팎으로 무장하여 소수의 인원으로도 단시일 내에 굴복시키고 격파시킬 수 있는 작전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 통일교회 입장이 그와 같은 작전을 해야 할 때가 왔다는 겁니다. 이런 전쟁의 시점을 향해서 몰아 나가고 있는 기간이 100일 정성 기간입니다. 40일 수련 기간을 통한 이 기간 전체가 전쟁의 시점인데 이것을 어떻게 넘길 것이냐?

여러분이 이제 지방에 돌아가게 되면, 지역장은 지역을 중심삼고 이 싸움을 해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핍박을 받고 몰리는 싸움의 기간이었지만 이제는 반대하는 교회를 대해야 할 때인 것입니다. 한 군 전체의 사람을 놓고 볼 때, 10개 군 10개 면에서 이 싸움을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이냐? 사람을 키워야 합니다. 그러한 비상한 운동을 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7년노정에 있어서 부락이면 부락, 면이면 면을 책임지고 나서서 정성을 들이고 눈물 흘리는 마음을 갖고 지금까지 끌고 나왔기 때문에, 그 부락민 전부가 우리 편으로 모일 수 있는 기반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이 전부 다 사탄 편이 되고 말았으니 문제가 큽니다. 이것을 점령해야 할 책임이 여러분 각자에게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지역장이면 지역장 자신이 군 하나씩을 책임져야 됩니다. 이것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사방의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먼저 경제적인 문제를 중심삼고 볼 때 나 혼자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전체를 살릴 수 있고, 전체의 환경을 대비시킬 수 있는 경제적인 여유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거 안 되겠구나.’ 하고 자포자기하면 망합니다. 내가 피를 흘리겠다고 결의하고 싸워 나가야 합니다. 절대로 자포자기해서는 안 됩니다.

누구나 하나님을 위해서, 자기 교회를 위해서 백 퍼센트 이상의 생명을 가지고 갈 수 있는 기준만 되어 있으면 그는 하나님 앞에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진 다음에는 밀고 나가서 점령해야 됩니다. 안 되더라도 밀고 나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혼자서라도 부락이면 그 부락민 전부를 이끌어서 밀고 나갈 수 있는 일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적군이 점령했던 점령지에 우리가 점령해 들어갈 때, 그 백성들이 우리 편을 완전히 지지할 수 있는 작전이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이 사탄 편 사람들을 대해서 승자로서의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가야 합니다. 그러나 사탄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하늘의 한 많은 사실을 두고 복수하겠다는 입장에서 강한 적개심이 불타 올라야 되겠습니다. 이런 마음을 갖고 나오게 되면 하나님은 반드시 역사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개척정신이 강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결의를 한 사람이 필요합니다. 차분한 사람은 개척정신이 없습니다. 의분에 불타는 사람, 의분하여 자기의 생명이 아까운 줄 모르고 원수를 갚기 위해서 결의한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은 역사해 주시는 겁니다. 모세는 얼마나 혈기가 드세었습니까? 반석을 두 번이나 들이쳐서 석판을 깨뜨렸잖아요?

내가 하늘을 대신해서 사탄을 공격하고 치는 그 힘 자체는 약하지만 결의한 그 입장 앞에는 어느 누구도 당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대해도, 그 누구를 대해도 내 앞을 막을 수 없다는 마음을 가지고 밀고 나갈 때 거기에서 승리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승리의 한 터전을 닦는 것이 전체를 요리할 수 있는 특위대의 할 일입니다.

우선 선발대원 전부가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 결전을 해야 하는 세계에서는 여러분의 졸병이 없으면 여러분 자신들이 직접 선두에 서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시대적 입장에 처해 있습니다. 지금은 1960년대 초의 환경이 아닙니다. 더 치열한 환경이 우리 눈앞에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안팎으로 임전태세를 갖추어야 할 때

오늘날의 국제정세를 보십시오. 까딱 잘못하면 말할 수 없는 혼란이 벌어질 수 있는 시점에 와 있습니다. 공화당도 전쟁에 처해 있고 대한민국 자체의 운명도 이 시대 발전을 위한 전쟁의 시점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런 전쟁의 시점이 하나의 세계적인 해결점을 보게 될 때, 이 현실에서 우리가 소망하는 출발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어려움도 극복해 나가야 됩니다.

전쟁을 하는데 잘 먹고 잘 입으며 하면 좋겠지만 잘먹고 잘입어 가지고는 전쟁에서 이기는 법이 없습니다. 못 입고 못 먹으면서 싸운 전쟁이어야 자기가 정성들인 가치를 그만큼 느끼고, 그 이긴 결과가 시간적으로도 오래 남아질 수 있는 것입니다. 원수에게서 배척받는 자리에서 크게 이겨야 되겠다는 것을 절감해야 됩니다. 그것을 절감하지 못하는 자리에서는 이겼댔자 또 빼앗기게 됩니다. 자기 혼자서 이겼다고 믿고 안일한 생활을 하게 되면 이때도 역시 망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역사가 복수해 나온 것은 그 안일한 기준을 막고 내적인 강화를 하고 시간적인 기간을 연장시키기 위한 하나의 작전이요, 전법이었던 것입니다. 원수가 언제 어떻게 쳐들어올지 모르기 때문에 언제나 긴장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여러분들이 사고방식을 어떻게 철저히 하느냐가 문제입니다. 이제 제2차 7년노정에서 새로운 테이프를 끊고 새로운 무대로 넘어가야 하는 시점에 놓여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사탄 편과 하늘 편의 경계선에 서 있는 연고로 혼자서 외롭고 쓸쓸할 때 동지를 가까이하면 할수록 그 동지가 내 생명 이상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원수에게 위축되어 패하는 날에는 내가 제일 사랑하는 동지가 원수의 총칼에 사라지는 비참한 운명에 처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그걸 알아야 됩니다.

이제까지의 모든 뜻은 수천년 역사를 통하고 오늘날의 일대를 거쳐서 세워 나왔습니다. 하나님이 소망의 한때로 세워 왔던 그 모든 것이 오늘날까지 계승되어 올 때 천번 만번 죽더라도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이러한 심각한 전쟁의 시점에 처해 있는 여러분 자신임을 인식해야 됩니다. 우리는 패자의 서러움이 어떤 것인가를 알고 절대적으로 승리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의 신분이 그러함을 밤낮으로 상기하고, 밤낮으로 감시해야 합니다. 자도 자는 줄 모르게 자야 합니다. 만일 방관하게 되면 언제 습격 받을지 모르는 것입니다.

사탄은 그렇게 여러분을 중심삼고 싸우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르지만 평소의 여러분 마음을 보게 되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늘 편인가 사탄 편인가 하는 것은 마음이 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사탄 편에 있는지 하늘 편에 있는지 모릅니까?

이런 발전적인 전쟁사를 밀고 나오시는 하나님을 중심삼고 볼 때, 지금 우리 교회가 바라보고 있는 이 시점이 옛날 60년대는 문제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때는 원수들이 군복을 입고 우리 앞에 총칼을 겨누며 싸울 때이지만, 지금은 원수들이 사복을 입고 총을 감추고 싸운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 여러분이 습격을 당할지 모르고, 언제 그들이 총을 겨눌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과거의 그 어느 격전시대보다 안팎으로의 무장이 더 필요한 때입니다. 대체로 생각해 보면 격전시대에 내적인 문제는 염려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안팎을 둘러보아야 합니다.

이제 여러분은 현재가 전쟁의 시점이란 것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사탄 편이냐 하늘 편이냐를 확실히 해야 되겠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여러분은 사후에 원통하게 됩니다. 죽어도 하늘 편에 못 간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하늘 편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을 우리가 모집해서 원수의 진영에 얼마만큼 피해를 입힐 것이냐 지금 그 준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여러분들이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정부가 과거 1960년처럼 우리를 반대하고 나온다 하여도 1960년보다도 힘이 강하게 될 때는 여러분들은 과거 그 이상의 출발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부터 재출발하지 않고서는 여러분이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명령에 절대 순종하라

여러분들은 집으로 돌아가 때 현재의 시점에 대해서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에게는 언제 이동명령을 내릴지 모르는 것입니다. 어느 지역을 책임지고 있는 지역장들 중에는 적진을 눈앞에 두고 잠자는 사람도 있습니다.

전면적인 전투에 응하여 나가야 하는 여러분들의 책임은 중요합니다. 지역장이면 지역장이 하나의 군을 책임져야 합니다. 군의 생명은 전부 내 손 안에 달려 있다고 느껴야 합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느낍니까? 또 이것을 느끼고 하나님 앞에 보고할 수 있는 나인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나인가, 하나님과 의논할 수 있는 나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일날 예배 시간이나 공식적인 집회에서 식구들과 여기에 대한 의논을 하며 미래를 설계해야 됩니다. 나 하나를 중심삼고 천명이 내리기를 여러분들은 고대해본 적이 있습니까?

명령을 상부로부터 받는 자리에서 총출동시킬 때, 󰡐무슨 명령이 뭐 이런가?󰡑 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명령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사람은 망하는 것입니다. 명령을 내리면 절대적으로 순종굴복 하여 돌파시키겠다는 마음, 오늘도 내일도 다짐하며 실전에 임하여 싸우겠다는 그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젊은 청년들은 싸움이 필요합니다. 전쟁터에 한번 나갔다 오면 변화를 받게 됩니다. 총알이 핑핑 날아오는 자리에서 버티고 앉아서 상부의 명령이 내리기만을 바랄 수 있어야 합니다.

6천년 전쟁사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어느 한때 최후의 명령을 내리고 싶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 명령이 언제 내리느냐? 언제 내릴 것인가? 그런 생각을 갖고 있습니까? 430가정부터 축복가정은 많아졌지만, 가정을 가짐으로써 명령을 기다리는 마음이 나태해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이 요구하는 것은 이번 일주일 수련회 기간을 통하여 여러분들이 강해지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각자 돌아가서 이런 관점에서 생각해 가지고 패자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것을 확정지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승리의 결과를 가져오고야 말겠다는 결심을 가지고 돌아가기를 부탁합니다. 알겠습니까?

<기 도>

아버님, 과거의 한 날을 생각하게 될 때, 감옥에 갇혀 있을 때는 외부의 원수의 모함도, 식구들의 모든 피해도 생각할 수 없었다는 것을, 그런 귀하고 가치 있는 한때였다는 것을 느끼게 되옵니다.

아버지, 오늘날 자유천지의 이 자유가 얼마나 저희들 앞에 중요하고, 사방의 혼탁한 환경이 얼마나 저희들에게 위험한가를 깨닫게 하시옵소서. 깊은 자리에서 내 힘을 다짐하고 고요한 시간을 모두 다 아버님과 더불어 말없이 무장해 가지고 아버님이 최후의 총진격의 한 시간을 바랄 수 있게 하시옵소서. 그날을 맞는 순간순간의 잊을 수 없는 전쟁의 시점에서 강한 의식을 가지고 총공격작전에 있어서 승리의 왕관을 쓸 수 있는 순교자가 될 것을 확실히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은 이 뜻에 대한 마음이 부족했기에 목적의식과 책임의식에 대해서 다시 한번 결의했사옵니다. 오늘날 이 시점이 전쟁을 완수시킬 수 있는 절대불가결의 한 시점인 것을 저희들은 망각하였사옵니다. 내가 바라는 모든 환경이 나에게 절대적인 재료로서 수습돼야 한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되었사옵니다. 그러나 이제 여기 수련을 다시 받고 돌아가는 당신의 자녀들을 기억하여 주시옵기를 바라옵니다.

이 길을 살아오는 모든 생활들이 최후의 명령을 받아서 판가리 싸움터 앞에, 승패의 벼랑에서 패자가 되지 않기 위해 준비하는 일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 준비하는 것도 역시 전쟁의 시점에서 다짐하는 시간 전에 준비해야 되고, 그렇게 해서 갖추어진 장비를 가지고 저희가 전체의 싸움에 임하여 승리를 다짐해 나가야 한다는 것을 저희들이 망각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여기 당신의 자녀들이 제21회 이 주일간의 수련을 마치고 돌아가는 그 첫 출발부터 전쟁 의식과 전쟁 시점에서 일개 가정으로 돌아가서 그 식구를 대하는 그 시간, 뜻을 대하여 활동하는 그 시간 전부 다 이 전쟁의 시점을 망각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탄 편과 하늘 편을 언제나 투시해 가지고 자기가 서 있는 입장을 확실히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원수들이 어떻게 나를 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원수의 위치가 어떤 자리인 것을 확실히 알아서 자기 자신을 안팎으로 정비해 가지고 최후의 결전을 준비할 줄 아는 당신의 아들딸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만일 이 싸움에서 망하는 날에는 그 전체를 잃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하시옵소서. 한번 망하게 되면 천년 역사가 아니라 수천년 역사가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망각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절대 망해서는 안 되겠사옵니다. 절대적으로 승리해야 할 내 자신인 것을 다짐할 줄 아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남아진 날에도 그러한 자랑스런 아들딸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을 중심삼고 승리의 영광과 승리의 개가를 온 천지에 부를 수 있는 그날을 고대하고 있다는 것을 진실로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내 한 개체가 천만을 대신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갖게 하시고, 패자의 옹졸한 마음을 갖지 말게 하시옵소서. 백만 장군을 굴복시키고도 남음이 있을 수 있는, 하늘의 장군의 모습을 갖추는 데 부족함 없는 당신의 아들딸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저희들이 100일 기간을 정해 놓고 정성들인 이 자리를 통해서…. 제2차 7년노정에 있어서 40일 기간은 저희들이 싸움터에 매달릴 준비를 하는 기간이옵니다. 저희들이 온갖 정성을 다하여 그 한 기간이 전쟁의 시점이라는 것을 알고 그 기간을 통하여 새로운 역사를 움직여 나갈 수 있는, 하늘의 승리의 터전을 노래할 수 있는 결정적인 시점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지금까지 같이하여 주시고 보호하여 주신 것 감사하옵니다. 앞날도 당신이 친히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을 참부모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였사옵나이다. 아멘.

누가복음 10:1-2

<기 도>

이 시간을 기하여 아버지 앞에 경배드렸습니다. 금번에 특별히 분배 받은 책임 지역에서 아버지를 중심삼고 모인 새로운 식구들이 아버지 앞에 처음으로 경배드리는 자리이오니, 친히 임하여 주시옵고, 각별하신 은사와 사랑과 가호로 같이하여 주시옵길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제2차 7년노정을 통하여 새로운 계획과 새로운 뜻을 추진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될 역사적인 사명이 저희 앞에 있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이러한 사명을 앞에 놓고, 금년 들어 ‘전면적 진격’이라는 표어를 중심삼고 움직여 나온 지가 벌써 반년이 다 되어 가는 이때까지 어느 한 번도 그 기준에 맞추어 몸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 자신이었음을 깨닫게 되오며, 아버지 앞에 민망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이와 같은 심정에 있는 저희들은 아버지 앞에 어떠한 조건이라도 세우지 않으면 안 되겠사옵기에, 이번에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 동원되어 있사오니, 이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아버지와 일치시키시어 최후의 승리의 결과를 아버지 것으로 거두어 드릴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나이다.

더욱이 오늘 이 자리에 각별히 당신의 자녀들이 모인 것은, 당신께서 일본으로부터 보내 주신 어린 아들딸들을 축하하고 환영하기 위해서이옵니다. 이런 거룩한 시간이오니 이 자리에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일본에 있는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이들을 이 자리에 보내 놓고, 여기 와서 아버지의 뜻을 대하게 된 이들 위에 당신의 특별한 은사가 같이하기를 이 시간에도 기도하고 있는 줄 아오니, 그들 위에도 아버지, 같이하여 주시옵고, 더 나아가서는 세계에 널려 있는 뭇 자녀들도 이번 기간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는 줄 아오니, 그들 위에도 같은 은사의 손길을 가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 이 통일의 무리를 이 민족 앞에 불러 모으셨사오니, 이들을 최후의 싸움터에서 승리를 다짐하는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어서, 한 많으신 아버지의 역사적인 한을 해원성사하는 데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역군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남아진 시간 전체를 친히 주관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오며, 모든 말씀 참부모의 성호 받들어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말 씀> 오늘은 원래 일본에서 온 식구들을 환영하기 위해 모인 날이지만, 오늘이 주일이어서 전국에 있는 식구들이 이 시간에 예배드리고 있기 때문에, 간단히 예배를 드리고 나서 환영의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잠깐 동안만 말씀드리겠습니다.

현세계는 타락이 심어 놓은 결과의 세계

세상에서도 콩을 심으면 콩이 나고 팥을 심으면 팥이 난다는 말을 합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는 말이지요. 오늘날 이 세계는 두 진영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민주와 공산이 대결하고 있는데, 하나는 유심사관이요, 하나는 유물사관입니다. 이와 같은 두 개의 사관이 대립되어 있는 세계가 된 것입니다. 또 이러한 세계 무대 위에 청소년 문제가 세계적인 문제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이러한 결과의 세계가 되었느냐? 말하자면 심기를 그렇게 심었기 때문에 세계적으로 그런 결과가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세계가 되어 가는 것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세계의 사람들은 전부 다 그러한 환경에서 살면서 어떻게 그러한 환경을 고쳐 나갈까 하는 것을 크나큰 문제로 삼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살고 있는 사람들, 더욱이나 종교를 갖고 있는 사람들은 지금 이때가 끝날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끝날이라고 말하고 있어요. 그러면 끝날은 어떠한 때인가? 모든 것이 끝을 보는 때입니다. 봄절기에 소생했던 초목이나 곡식들은 가을에 수확됨으로써 끝날을 맞게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때가 역사적인 수확 시기, 즉 가을 절기라는 것을 우리는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옛날에 아담 해와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맺혀진 타락의 결과를 복귀노정을 거치면서 기필코 청산 지어야 합니다. 그러면 인류의 시조가 어떻게 되었느냐?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은 입장에서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되어야 할 몸과 마음이 둘로 갈라지게 된 것입니다. 즉 한 사람이 둘로 갈라진 결과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처음에 그렇게 뿌려짐으로써 그러한 형태의 개인․가정․종족․민족․국가․세계를 거쳐 나왔기 때문에, 그것이 전세계적으로 결실하는 때가 오게 됐으니 그때가 끝날, 말하자면 말세인 것입니다.

인류 시조가 뿌린, 사람의 몸과 마음이 갈라진 입장에서 번식되어 나온 인간들이기 때문에, 갈라진 몸과 마음의 형태로 반드시 결실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유심 유물의 두 세계로 갈라져 결실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우리 인간들은 생활하면서 자기 자신의 마음과 몸을 중심삼고 투쟁의 과정을 거쳐 나왔습니다. 어느 한 날, 평화를 이루고 통일을 이루어서 천륜을 따른 뚜렷한 목적을 향해 달려가 보지 못한 인간들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몸과 마음이 싸우면서 지금까지의 역사를 지탱시켜 나왔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이런 두 세계로 갈라지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두고 볼 때 마음은 언제나 하나의 표준과 하나의 목적을 중심삼고 나가려 하는데, 이 몸뚱이는 언제나 그 마음 앞에 반대합니다. 몸이 마음을 쳐 나왔다는 것입니다. 외적인 입장에 있는 것이 내적인 입장에 있는 것을 제어하고 방해하고 공격해 나왔던 역사적인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 자체가 그러하기 때문에 선과 악은 상대적 관계에 있으며, 그 중 선은 내적이요 악은 외적이기 때문에, 외적인 입장의 악이 언제나 내적인 입장의 선을 공격해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결과의 세계가 오늘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세계인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개체의 마음과 몸이라는 싸움의 형태를 민족적 국가적, 혹은 세계적으로 전개해 놓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왜 끝날이 와야 하는가

그러면 이러한 형태가 계속되어 언제까지나 역사를 지탱해 나갈 것이냐? 그럴 수는 없습니다. 우리 인간의 마음과 몸의 간격이 벌어지면 벌어질수록 고충이 커지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고통이 개재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비극이 깃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과 마음의 간격을 좁혀 가지고 그것이 하나로 통일되는 때를 맞이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 세계에 평화나 행복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싸움, 자기 한 개체의 싸움을 종식시키지 못한 사람은 세계적인 싸움이 종식되어서 그런 세계에 들어가 산다 하더라도 희망이나 행복 혹은 평화의 여건을 차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내 자신에게 있습니다. 내 자신의 근본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내 자신이 외적인 세계의 이상적 환경을 맞이하게 될 때에 비로소 마음에 스며드는 평화, 마음에 스며드는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터전 위에서 세계와 연결되어야 비로소 자유롭고 행복한 천국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지, 환경이 제아무리 갖추어졌다 해도 자신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입장에 있으면 어떤 행복한 환경에도 화할 수 없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세계가 이러한 실정에 놓여 있는데, 이는 타락의 결과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 한 개체가 싸우는 형태를 세계적으로 벌려 놓은 것이 오늘날의 세계라는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은 인간들이 이와 같이 분립된 입장에서 싸움으로 시작하여 싸움으로 끝나게끔 세상을 지으시지 않았습니다.

본래 인간들이 하나님을 중심삼고 완성되었더라면, 인간의 몸과 마음은 영원히 하나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몸과 마음은 이 땅에서 하나로 출발을 보아야만 했습니다. 몸과 마음이 하나된 그 기준에서 이 땅에 심어졌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러한 인간 조상으로부터 번식된 후손들이 가정과 종족과 민족과 국가와 세계를 이루었더라면, 오늘날 이토록 비참한 세계가 되지는 않았을 것인데, 이러한 세계가 이루어진 것은 애초에 그러한 씨를 뿌렸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결과를 거둘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즉 타락의 응보로 이러한 세계가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언제까지나 이런 세계가 계속될 것이냐? 이런 세계는 종말이 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싸우고 있는 내 개체에는 고통이 깃들고 있고, 그 고통은 반드시 악을 유발하는 터전이 되기 때문에 이것을 청산 지어야 합니다. 청산되어야 할 이 세계를 심판하는 끝날이 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론이 여기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심판 과정을 거쳐서 몸과 마음이 통일된 형태를 갖추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통일권의 세계를 이루려면

그러면 갈라진 이 세계를 수습하여 새로운 세계로 이끌어 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몸과 마음이 완전히 통일되어 몸이 추구하는 것에 마음이 자동적으로 응해 줄 수 있고, 마음의 바람이 몸의 소망으로 나타날 수 있는 하나의 완성된 존재가 이 땅 위에 나타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한 한 존재, 하나의 중심을 이 땅에 보내 주겠다고 약속한 것이 메시아사상입니다. 세계적인 혼란시기에 있어서의 참다운 지도자, 인류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참다운 책임자를 보내시겠다고 약속한 것이 메시아사상, 즉 기독교에서 말하는 재림사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희망의 세계가 반드시 와야만 합니다.

그러면 오늘날 이 세계를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만으로써 수습할 수 있을 것이냐? 수습할 수 없습니다. 자기들이 아무리 세계를 제패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고, 권위를 가졌고, 현재의 입장이 어떻다고 자랑한다 하더라도 그것으로는 세계가 절대로 수습될 수 없는 것입니다. 새로운 제3의 인간이 나타나야 됩니다. 제3의 인간이 인간 전체를 대표한 모델로 나타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의 남성과 그런 하나의 여성이 나타나서 하나님을 중심삼고 둘이 완전히 안팎으로 하나가 되어 완전한 통일권의 힘, 혹은 그 동기를 중심삼고 영원한 역사적인 통일의 기원과 접할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일치될 수 있는 남자와 여자, 즉 부부가 나타나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랑 신부의 이념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역사적인 결과의 시대에 봉착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계에 있는 우리가 염려해야 될 것은, 이 세계를 손아귀에 넣는다 해도 그것을 다시 한번 수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천하를 통일했다 하더라도 그 통일된 세계는 그 내부에 싸움을 내포하고 있는 통일권의 세계이지, 그 내부가 통일되어 가지고 외적인 통일권을 이룬 세계가 아니기 때문에 설령 외적인 통일을 이루었다 하더라도 그 세계는 어차피 갈라진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유를 바라고 평화를 바라며 천국 생활을 누리고자 하여도 현재의 어떠한 줄거리로 얽어매어 가지고는 그런 것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들 개체의 통일입니다. 몸과 마음이 통일을 이루어 가지고 그 근본 된 마음이 이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의 여건을 차지했다고 주장할 수 있고, 지금 이 세계에 존재하는 어떤 무엇에 부딪혀도 양보하지 않고 깨지지 않는 중심을 갖춘 인간으로 출발하지 않으면 세계 평화의 기원을 가져올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과 양대 진영을 통합하는 방안

이 땅에 오셨던 예수님의 원래의 사명이 무엇이었느냐? 세계를 통일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를 수습하고 로마 제국을 제패하여 타락의 역사적 결과를 벗어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탄식권 내에 있는 세계를 통일하기 위해 하나님은 오랜 역사 과정을 통하여 메시아를 보낼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면 그 약속하신 뜻은 무엇이냐? 이 땅 위에 평화의 천국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 땅 위에 자유의 천국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 땅에 그러한 자유의 천국, 평화의 천국을 건설하기 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한 하나의 개체로서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지만, 그의 상대가 될 수 있는 하나의 여성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될 부부가 있을 수 없었고, 하나될 부부가 없었으니 하나될 자녀가 나올 수 없었으며, 하나될 자녀가 없었으니 하나될 종족․민족․국가․세계가 나올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을 이루려는 목적을 가지고 이 땅에 왔던 주인공은 슬프게도 악당들에게 몰리고 쫓겨 마침내 십자가에 돌아가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갔으니 다시 와야 되는 것입니다. 재림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에 양과 염소의 비유를 들어 말하기를, 다시 올 그때는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 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마 25:32-33)고 하였습니다. 이 오른편에 둔다 하신 양의 입장에 있는 것이 민주세계요, 왼편에 둔다 하신 염소의 입장에 있는 것이 공산세계입니다. 양은 주인이 있는 입장이요, 염소는 주인이 없는 입장입니다. 하나님을 중심삼고 볼 때에 오늘날 하나님을 주인이라 하는 입장, 즉 주인을 가진 면양의 입장에 있는 것이 민주권이요,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입장, 즉 염소의 입장에 있는 것이 공산권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끝날에 가서 양을 옹호하고 염소는 심판할 것이라고 성경에 예언되어 있습니다. 양을 중심삼고 염소를 심판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염소를 심판해 가지고 완전히 제거시켜야 되느냐? 아닙니다. 내적 기준인 민주권이 세계화의 기준을 세우면, 외적 기준인 공산권도 그 민주권의 상대권으로서 세계화의 기준을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쳐서 깨뜨려 부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본래는 사람이 마음을 중심삼고 몸을 제어하고 관리하고 통괄하고 주관하여 하나의 목적을 이루는 공동 목표를 달성해 나가야 합니다. 마음과 몸은 그러한 상대적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상대적 기준을 아주 제거시켜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마음적인 것을 중심삼고 몸적인 것을 흡수하여 그에 동화시킬 수 있는 새로운 운동이 이 시대의 세계 앞에 나타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민주세계와 공산세계는 투쟁해 나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공산세계의 원수는 민주세계요, 민주세계의 원수는 공산당이라고 하면서 서로가 때려잡으려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계에서는 우리가 바라는 평화가 나타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서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몸 마음을 중심삼은 새로운 운동입니다. 마음이 절대적으로 완전히 몸을 관리할 수 있는 하나의 승리적인 기반을 닦기 위한 새로운 운동이 이 지상에서 벌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것이 민주세계를 포섭하고 나아가 공산세계까지 포섭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세계가 크나큰 세계이지만, 결국은 하나의 개인이 씨를 뿌렸기 때문에 그 한 사람이 뿌린 것을 세계적으로 열매맺어 놓은 형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는 내적인 사람의 형태, 하나는 외적인 사람의 형태로서 이 둘이 계속 싸워 가지고는 평화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바라시는 본의가 아닙니다. 지금까지 인류를 대신하여 역사 과정을 거쳐 섭리를 추진시켜 오신 하나님은 기필코 통일을 모색하는 하나의 새로운 무엇을 제시하셔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운동이 지상에서 벌어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혹 그런 운동이 지상에서 벌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런 소망적인 이상의 터전이 역사 과정에 남아 있어야 됩니다. 그것이 종교를 중심삼은 역사상의 문화권입니다.

민주․공산․회회교권으로 갈라져 나온 배경

오늘날의 종교는 이 땅 위에 어떤 주권국가를 갖지 못하였습니다. 기독교를 들어 말하면 기독교는 영적인 세계를 추구하는 종교로서 이 지상에 아직까지 그들의 나라를 갖지 못하였고, 그들의 세계를 갖지 못했습니다. 만우주 앞에 하나님의 아들딸의 자리라고 당당히 주장할 수 있는 세계를 갖추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만존재, 만우주를 주관하고 이끌어서 하나님 앞에 봉헌해 드릴 수 있는 승리의 권한을 갖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앞으로의 세계는 어떠한 세계가 되어야 하느냐? 종교권을 중심삼고 하나로 통합되는 세계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중심삼고 볼 때 오른편 강도와 왼편 강도, 예수와 바라바, 이렇게 씨를 뿌렸습니다. 역사가 이렇게 뿌려졌고 뿌린 대로 거두어지는 것인데, 맨 먼저 나타난 것이 오른편 강도와 왼편 강도형인 우익세계와 좌익 세계, 즉 민주와 공산권이고, 그다음에 나타난 것이 예수의 십자가를 중심삼고 등장한 바라바형인 회회교권입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수 있게 된 바라바형의 회회교는 기독교의 구약을 중심삼고 출발하였습니다.

이렇게 뿌려진 역사는 세계의 형태가 3대 진영으로 결속하는 결과적인 시대의 운세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아랍권의 낫세르는 회회교권을 통합하여 아랍통일국가를 꿈꾸었습니다. 거기에 대비하여 기독교는 지금 ‘모든 종교를 통합하자.’ 하는 세계적인 새로운 추세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세계적인 경향을 바라볼 때 비운으로 심어진 역사가 비로소 하나님을 중심삼은 선의 결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역사의 종말시대가 되면 이것이 노골화되어 가지고, 처음에 뿌린 것을 이때에 맺어진 모양 그대로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섭리의 법도에 의해 나타날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경향입니다.

그러면 이제 나타나야 할 것은 무엇이냐? 예수는 인류를 대신하여 죽었습니다. 그때 왼편 강도는 십자가를 진 예수를 바라보며 비방하였습니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눅 23:39) 하며 비방했던 것입니다. 그런 왼편 강도형으로 나타난 것이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며 비방하고 부인하는 좌익, 즉 공산권입니다. 그에 반하여 ‘이 녀석아, 네가 정죄를 받고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벌을 받는 것이니 당연하지만, 이 사람은 죄가 없는 사람이다’ 하며 예수를 인정하고 하늘을 옹호하고 하늘 편을 증거하던 오른편 강도형으로 나타난 것이 우익, 즉 민주세계입니다.

그것 참 이상하지요? 누가 공산권을 좌익, 민주세계를 우익이라는 이름을 붙였는지 이상하다는 것입니다. 누가 붙였겠습니까? 그렇게 심었으니 그런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빨갱이’의 ‘빨강’은 위험을 상징한 반면에 흰색은 평화를 상징합니다. 그런데 민주세계를 백색주의라 하고 공산주의를 적색주의라 합니다. 누가 애당초 그렇게 이름을 지었겠습니까?

사람은 누구나 천륜 앞에서는 자기 양심을 중심삼고 직고해야 됩니다. 직고해야 돼요. 거짓은 거짓으로서의 종국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 정체를 드러내야 하기 때문에 좌익이니 빨갱이니 적색주의니 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실을 확실히 아는 자 앞에서는 직고해야 하는 것입니다. 악이 아무리 세계적인 세력의 기반을 가졌다 해도 그 정체의 내부까지 세밀히 투시하고 계시는 하나님 앞에서는 부정할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는 좌익 혹은 적색주의라 하는 것입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죽을 자리에서 해방을 입은 바라바형인 회회교권의 낫세르, 이 사람은 이러한 좌우의 투쟁 사이에서 이익을 보자는 것입니다. 그것이 낫세르의 정책입니다.

민주세계가 내적이면 공산세계는 외적입니다. 우익이 내적이면 좌익이 외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메시아는 하나님을 존중하는 민주세계의 내적 기반 위에 오셔서 외적인 환경권을 흡수하고, 기독교 문명권을 중심삼고 통합하는 운동을 해야 합니다. 최후에는 이런 운동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우연이라고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한 동기가 심어졌기 때문에 그러한 결과가 빚어진 것입니다.

타락의 기원과 그 결과

그러면 이러한 시점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복귀하여 돌아가야 합니다. 돌아가는 데는 어떻게 돌아가야 될 것인가? 옛날에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던 그런 역사에 끌려서 갈 것이냐? 아닙니다. 그런 역사의 줄거리를 다 제거해 버리고, 외적인 결과로 말미암아 빚어진 비참한 환경을 넘어가서 내적인 심정의 기준을 중심삼고 역사를 연결시켜 나가야 됩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할 말이 많지만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요 16:12) 하신 그 내정적인 심정의 골짜기를 헤쳐 들어가 거기에 일치되어 그의 친구가 되고, 그 상대가 되고, 형제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동고동락할 수 있는 기점에서 내 마음에 평화의 기반을 마련하고, 내 마음에 자유와 행복의 터전을 마련할 수 있는 기준을 갖고, 그 기준을 중심삼고 몸을 완전히 제압하여 이 세계를 통일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어 나가는 운동이 이 지상에 벌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운동을 달리 말하면 예수가 가지고 왔던 새로운 세계주의 이념인 것입니다. 망각하지 말기 바랍니다.

오늘날 이 세계는 무엇을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되었느냐? 거짓말과 갈라짐과 불신의 결과로 이런 세계가 된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 과정에서도 인륜도덕이란 것이 있어 가지고 피폐해 들어가는 역사의 한 면이나마 지탱시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때에는 그러한 역사적인 인륜도덕이나 삼강오륜도 근본적으로 다시 깨달아야 합니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자식, 혹은 부부 등 이런 모든 가족적인 기본 형태는 원래 부모를 중심삼고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전부 자기를 중심삼고 이루어졌기 때문에 자기에게 이익이 되지 않을 때는 모두 깨부수고 맙니다. 이래서 되겠습니까? 전부 재정립해야 합니다.

타락의 기원이 무엇입니까? 천륜의 질서와 법도를 망각하고 자기 제일주의를 주장하고 나선 것이 타락의 기원입니다. 그러니 끝날에도 개인주의 풍조가 만연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심었으니 그렇게 거두어진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결과의 세계는 반드시 심은 대로 나타나는 거예요. 그러니 이러한 세계적인 풍조 속에서도 반드시 하나님 앞에 거두어 드릴 수 있는 역군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그러한 세계적인 풍조에 휩쓸리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풍조를 가로막고, 외적인 것보다는 내적인 전통을 중심삼고 다시 한번 본연의 원칙에 입각하여 새로운 생활의 원칙을 세우며 나아갈 수 있는 새로운 운동이 이 땅에서 벌어져야 합니다.

지금 이 세상에 선생이 어디 있습니까? 선생이 어디 있어요? 남편이 어디 있습니까? 유한 마담이 얼마나 많습니까? 유한 마담이라고 해서 안 됐지만, 부인이 어디 있습니까? 전부가 엉망진창입니다. 자기의 향락을 위해, 자기의 만족을 위해 역사적인 환경을 팔아먹는 세상입니다. 자기를 위해 이웃을 유린하는 세상이에요. 역사의 기원부터 죄를 심었으니 그 심은 대로 거두어지는 결과의 세계가 지구상에 도래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는 망국지세로 몰려 들어갑니다. 세계는 망해야 합니다. 세계는 망해 들어가는 운세권으로 접어들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때가 그런 때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천법을 중심삼고 나가야 할 인간이 자기를 중심삼은 자기만을 위한 세계를 꿈꾼 것이 타락의 기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20세기의 후반기에 접어든 오늘날에 세계적으로 나타나는 풍조가 어떤 것이냐? 개인주의 풍조입니다. 개인 위주의 풍조를 이상시하는 시대로 떨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현세의 사람들의 안중에는 가정이 없습니다. 스승도 부모도 없습니다. 형제도 없고 친구도 없고 나라도 없습니다. 오직 나만 잘 먹고 잘 살고 향락을 누리면 된다고 하는, 내 고깃덩어리, 즉 몸을 중심삼은 천국이 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하는 시대라는 거예요.

청소년 문제도 타락의 씨가 뿌려진 결과다

타락이 뭐냐 하면 하나님을 팔아먹고 환경을 팔아먹은 것입니다. 자기 고깃덩어리를 중심삼고 떨어져 나간 것이 타락이에요. 그러한 타락으로 인한 결실이 세계적인 형태로 나타나는 때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것을 보고 거기에 휩쓸릴 것이 아니라, 그것에 응수하여 왼손으로 붙들고 오른손으로 쳐 갈겨야 합니다. 이러한 운동이 벌어져야 됩니다.

앞으로 이 민주세계에 돈을 가지고 국권을 팔아먹을 수 있는, 수표를 가지고 국가를 놓고 거래할 수 있는 시대가 되면 마지막입니다. 불원한 장래에 그렇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가 본격적으로 벌어질 때가 온다는 거예요. 이러한 가운데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현재 어느 편에도 설 수 없습니다. 어차피 정비해야 할 세상이지만, 악이 그렇게 뿌려졌으니 악이 결실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뿌린 대로 거두어진다는 것입니다.

또한 오늘날 청소년 문제가 대두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타락론을 보아서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대학가의 청소년들, 20대와 틴에이저 권내에 있는 청소년들의 문제가 심각합니다. 그들은 나라를 팔아먹으려고 마음만 먹으면 나라조차도 자기들 마음대로 팔아먹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들고나서면 나라도 왔다 갔다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젊은이들이 들고 뛰쳐나가면 나라도 왔다 갔다 해요. 이런 것은 문화국이라고 자처하는 콧대 높은 미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공산당에게 허점을 보이게 되면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잘못하다간 대학가의 젊은 청년들 앞에 콧대가 꺾인다는 것입니다. 요즘이 그러한 때입니다. 불란서 같은 나라에서는 또 무슨 일이 벌어지느냐 하면, 곳곳에서 파업과 데모가 일어나고 있는데 그런 젊은이들에 의해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녀 문제가 제기되는데, 이들이 타락하는 데는 어떻게 하느냐? 부모의 허락을 받지 않고 자기들 멋대로입니다. 또 부부가 합하는 데도 자기들 멋대로라는 것입니다. 사랑의 법도는 천륜의 공법이 원천인데도 불구하고, 그러한 천륜의 공법에서 벗어나서 모든 생명의 원동력, 생명의 기원이 되는 사랑의 법도가 길거리에서 하나의 놀이 거리가 되고 춤가락에 나가떨어지는 이러한 세계가 되었으니, 종말이 올 것이 뻔한 것입니다.

아담 해와가 타락한 시기가 언제냐 하면 10대, 즉 청소년기였습니다. 그래, 타락하는 데는 무엇을 중심삼고 타락했느냐? 사랑을 중심삼고 타락했습니다. 나이 많은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문제를 중심삼고 타락하여 둘로 나뉜 타락의 씨를 심었던 것입니다. 사람을 두 갈래로 만든 것은 악이 침입한 연고입니다. 악이 침입한 연후의 불륜한 사랑의 결과로 말미암은 그 씨가 세계에 심어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점점 확대되어서 세계가 두 패로 갈라져서 좌우 문제가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사랑을 중심삼고 최상의 선진국에서부터 최하의 후진국에 이르기까지 전세계에 그러한 태풍이 불어닥치는 그때가 세상의 끝날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심었으니 그렇게 거두어야지….

오늘날 청소년들이 나무 그늘에 숨어서 타락하는 것은 아담 해와가 나무 그늘에서 부모의 공인을 받지 않고 불륜한 사랑의 인연을 맺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씨를 뿌려 놓았기 때문에 그렇게 거두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국경을 초월하고 시대를 초월하고 사상과 주의를 초월하여 세계적인 공통 현상으로 벌어질 때가 올 것이거늘, 그때가 끝날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때가 되었습니까, 안 되었습니까? 되었어요, 안 되었어요? 「되었습니다.」

그러한 바람에 젊은이들도 젊은이들이지만 나이 많은 사람들까지 놀아난다는 것입니다. 미국 뉴욕에 센트럴 파크(Central Park)라는 공원이 있는데, 거기에 가 보면 의자들이 많이 있는데, 그 의자에는 나이 많은 사람들이 많이 앉아 있습니다.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고 하면 가정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대개가 혼자 사는 사람들인데, 그들은 일부러 가정을 가지지 않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들락날락하면서 얼마든지 육체의 향락을 누리며 살 수 있는데, 왜 구태여 가정을 가져 가지고 시시콜콜하게 구속받으면서 사느냐는 것입니다. 독신으로 아파트 생활을 하면서 그런 육체의 놀음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모든 잘못 뿌려진 결과의 바람이 세계적으로 몰아쳐 들어가는 현상임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미국뿐만이 아닙니다. 구라파의 국가들, 그리고 기독교 문명권이나 불교권의 민족들, 나아가 세계의 국가들이 전부 다 그러한 바람에 나가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앞으로의 시대는 종교의 시대

그러면 그러한 타락의 씨를 누가 심었느냐? 누가 심었느냐는 것입니다. 누가? 그것은 사탄이 심었습니다. 그러니 이러한 모든 타락의 결과를 주관할 수 있는 주인이 누구겠습니까? 심은 이가 주인 아니겠어요? 사탄이 심었으니 세계적으로 사탄이 거두는 것입니다. 그렇게 거두어 가지고 어떻게 하는가? 젊은이들을 앞에 세우고 나이든 사람들을 뒤에 세워 가지고 전부 다 끌고 가는 것입니다. 누가 끌고 갑니까? 「마귀요.」 어디로 끌고 갑니까? 지옥으로, 지옥으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이건 내 수확물이로구나.’ 하면서 지옥으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이런 결과의 세계라는 것입니다.

춤바람도 그렇지요. 비비 꼬면서 추는 춤을 선생님이 뱀 춤이라고 했지요? 그러한 춤은 흥분제요, 자극제입니다. 그래서 그 춤에 걸리면 전부 나가떨어집니다. 그래 가지고 세계를 망치로 두드려 패는 지옥행 급행열차에 올라타서, 특급이라는 팻말을 걸어 놓고 ‘허허…. 나는 간다, 간다. 세상아 잘 있거라.’ 하고 있습니다. 어디로 가는 겁니까? 사망의 골짜기로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거 내가 꾸며서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실이 그렇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심은 대로 거두리라.’고 했잖아요? 여러분은 마음과 몸의 싸움을 종결시킬 수 있는 자신들이 되어 있습니까? 자기 마음에 불타오르는 정열 등의 모든 감정을 주관할 수 있는 내 자신이 되어 있습니까? 그러한 천륜과 천도가 이 땅에 나타나기를 고대해야 합니다. 그것이 안 나오면 망국 지경에 봉착해 있는 세계는 망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망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한 전세계에 대하여, 그러한 천도를 가진 한 분이 오셔야 되고, 그런 주의가 나오고, 그런 시대가 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종교는 그러한 숙원을 중심삼고 지금까지 나온 것입니다. 이제 종교의 시대는 멀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몰림의 종교, 쫓김의 종교, 피 흘리고 핍박받고 눈물짓는 종교의 시대가 있었으니, 천상천하에 그 권위를 자랑하시는 하나님을 중심삼고 자유와 해방을 노래하며 영원무궁한 승리의 개가를 부를 수 있는 시대권을 한번도 갖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인들은 ‘끝날이여! 어서 오라.’ 하는 것입니다. 끝날이 되면 심판 역사가 벌어질 것인데 ‘나는 그 심판의 고비를 넘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분을 믿고 그분을 사랑했으며, 그분을 위한 기준이 있으니, 그분이 나를 몰라보지는 않을 것이다. 그분이 오셔서 나를 사망의 세계로부터 옮겨 놓아 주실 것이다.’ 하면서 성경에 나와 있는 재림사상을 중심삼고 끝날에 이루어질 소망의 천국을 고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통일교회에 무엇 하러 왔습니까? 밥 얻어먹으러 왔습니까, 눈요기하러 왔습니까? 어떻게 해서든지 이 세계의 비참한 운명과 부딪쳐서 깨지지 않고 비약하여 새로운 천지로 넘어서야 합니다. 통일을 부르짖어야 합니다. 마음과 몸의 통일,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의 통일을 부르짖어야 됩니다. 우리는 몸과 마음을 통일시키고, 갈라진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을 통일시키기 위해 통일교회에 온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은 대응관계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끊어져서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 있는 사랑의 법도를 세우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수 있는 자녀의 자리에 서지 못한 것입니다. 참다운 사람이 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싸우는 데는 사탄이 주관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인간에게 악이 침입하여 몸과 마음이 갈라져서 싸우면서 개인을 중심삼은 욕정에 불타 사망의 세계로 파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혼란된 풍조를 막아내는 통일이념

그러니 여기에서 하늘의 남편을 추구하는 사상이 나와야 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신랑 신부의 이념을 중심삼고 사람들을 정적인 면에서 하나님 앞으로 집중 집결시키는 운동을 해 나오는 것입니다. ‘주님이 오신다. 신랑 되신 주님이 오시니 너희는 순결한 처녀의 몸을 지녀 가지고 그 신랑 앞에 순정을 바칠 수 있는 한 날을 고대하라.’ 이것이 기독교의 중심 교리입니다. 왜 그런지 압니까? 갈라진 인간을 규합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본래는 인간의 마음과 몸에 하나님의 사랑이 들어가 안팎으로 모순이나 상충 또는 투쟁이 없는 결과를 빚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가 사탄을 중심삼고 외적인 사랑을 한 것이 동기가 되어, 몸과 마음이 상충된 입장에서 투쟁하는 결과가 빚어진 것입니다. 그리하여 외적인 몸을 중심삼은 사랑이 내적인 마음을 중심삼고 이상적인 영원한 생명의 기원이 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배반하여 나오는 역사의 결과가 빚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외적인 사랑, 즉 사탄의 사랑을 제거하고 거기에 본연의 내적인 사랑, 즉 하나님의 사랑을 상속 받아서 몸과 마음을 규합시켜야 됩니다. 그래야만 여기서부터 통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알겠습니까? 통일은 개체로부터 필요하지요? 필요해요, 안 필요해요?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통일시킬 수 있는 방안이 있어야 합니다. 그 방안을 제시해 주는 곳이 통일교회라면 통일교회는 세계를 규합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의 싸움을 종결시켜서 마음이 권한을 갖고 몸을 지배할 수 있는 인간으로 다시 빚어내야 합니다. 그러한 기준에서 천륜의 법도에 응할 수 있는 사랑의 법도를 세워, 인륜이 아닌 천륜을 중심삼은 새로운 도덕관을 세워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러한 교리로 말미암아 새로운 인생관과 우주관을 설정할 수 있고 새로운 질서의 세계를 빚어낼 수 있다면, 그것은 새로운 천국이념이 될 것이요, 또한 그것은 이 세계를 넘어 새로운 세계로 갈 수 있는 기원이 되는 것입니다.

세계에 둘도 없는 강한 사람이 되어야

그러면 하나님의 심판은 언제부터 벌어질 것인가? 1967년부터 벌써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소련 공산당이든 누구든 제멋대로 높다고 꺼떡거리는 녀석들은 망한다는 것입니다. 앞으로의 세계에서는 자기 멋대로 높다고 하는 것들은 다 꺾이게 되어 있습니다. 오래 못 간다는 거예요. 높다고 하는 녀석들을 하늘이 들이친다는 것입니다. 금년부터는 미국 같은 나라도 주도권을 상실해 갈 것이고, 공산권도 마찬가지로 그럴 것입니다. 또한 한국에도 그런 바람이 불어닥칠 것이고, 세계 전체까지도 그런 바람이 불어닥칠 것입니다.

이런 혼란된 풍조가 세계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고, 또한 우리의 생활권 내에까지 침입해 들어오고 있는 이 마당에 있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세계의 모진 바람이 자기 가정과 사회와 국가에 밀어치는 이때에, 세계의 이런 풍조가 태풍 같은 기세로 나를 몰아치는 이때에, 우리는 그러한 기세를 때려부술 수 있는 자력과 권한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 그런 힘과 권한을 갖고 있습니까, 안 갖고 있습니까? 안 갖고 있으면 망하는 것입니다. 망하는 거예요.

오늘 봉독한 성경 말씀에 보면, 예수님이 70문도를 세워 가지고 각 지방에 둘씩 둘씩 보내서 추수할 일꾼을 찾으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추수하려면 낫이 있어야 되지요? 그런데 그 낫이 볏단보다 강해야 되겠습니까, 약해야 되겠습니까? 약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더 강해야 합니다. 얼마만큼 강해야 되겠습니까? 그렇게 만들 수 없어서 그렇지, 돌멩이가 있어도 그것을 깰 수 있을 만큼 강해야 됩니다. 강하기로 말하면 세계에 둘도 없는 강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게 강합니까? 아주머니들, 강해요? 내가 자르면 잘리겠어요, 안 잘리겠어요? 「안 잘립니다.」 안 잘려요? 목을 잘라도 안 잘려요? ‘목은 잘려도 마음은 안 잘린다.’ 해야 합니다. ‘고깃덩이는 잘려서 떨어져 나가도 마음덩이는 안 떨어진다.’ 해야 됩니다. 여러분, 그런 마음이 되어 있어요? 「예.」 내가 그렇게 한번 해 봤으면 좋겠는데….(웃음) 그러니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수확입니다. 그 수확이 문제입니다.

새로운 세계는 새로운 이념으로

오늘날은 전부 다 두 패로 나뉘어 있습니다. 외적인 세계에서도 두 패로 나뉘고, 내적인 세계에서도 두 패로 나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중심삼은 한 패와 사탄을 중심삼은 한 패로 나누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서로 자신들을 자랑합니다. 선생님은 오늘날 이 현실세계, 20세기 문명의 세계 곳곳을 다 다녀 보았지만, 나는 그런 데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꼭대기에 올라가서 ‘이놈의 뉴욕아, 네가 찬란한 문화의 상징이냐? 이 세상이 지금 얼마나 심각한 때에 있는 줄을 아느냐?’ 한 적이 있습니다. 미국의 48개 주를 전부 돌아보았지만 ‘하나님께서 이 미국을 사랑하시니, 미국이여, 마음을 다하여 공경하라.’ 할 수 있는 곳이 없었습니다. 어림도 없어요. 내가 세계 40여 개국을 돌아다녔지만 어디를 가도 기가 막히고 답답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못난 통일교인 여러분들을 보면 좀 낫습니다.(웃음)

아무리 찬란한 문화권이라 해도 그것이 사탄이 기뻐하는 문화권이라면 언젠가는 거기에 하늘의 비수가 일격을 가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토막을 내서 없애 버려야 됩니다. 그러나 자를 때 뼈가 있으면 잘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살은 다 잘렸는데 뼈가 안 잘리고 남아 있으면 거기에 또다시 살이 붙게 됩니다. 살이 있는 곳을 내리치면 잘 잘리다가 뼈다귀가 있으면 거기서부터 잘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뼈다귀가 있든가 철근이 있든가 강철이 있든 간에 내가 칠 수 있는 칼이 있어야 합니다. 역사적으로 부패한 전통을 소탕시킬 수 있는 하나의 칼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늘도 자를 수 없는 뼈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요즘에는 ‘돈!’ 하면 잘난 사람이든 못난 사람이든, 주권을 가진 사람이든 간에 꼼짝 못합니다. 그러니 새로운 주의 사상을 중심삼고 이런 불합리한 것들을 모두 밀어제칠 수 있는 무리들이 나타나서 하나의 새로운 세계를 창건해 나가야 합니다. 그것은 자기를 위주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위주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남을 타고 앉아 찌르고 패고 찢고 약탈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것입니다. 선이란 자기의 위치를 끌어올리기 위해 남을 끌어내리는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해 자신의 위치를 끌어내리는 것입니다. 애국자도 그러한 사람이요, 충신 열녀도 그러한 사람이요, 예수님도 그러한 사람입니다.

성인의 기준은 무엇으로 결정하는가? 더 큰 것을 위하여, 즉 세계를 위하여, 하늘땅을 위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온 만상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갈래갈래 찢어서라도 나눠 주고 싶어하는 데서 결정됩니다. 그것이 세계적인 위대한 사상입니다. 기독교 사상이 바로 그러한 사상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공산당들은 선전미화를 위하여 3대 조상 중에서 부르주아 계급이 있으면 용서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종교사상을 중심삼고 원수까지 용서해 주는 기준에서 움직여 나가야 합니다. 즉 그러한 것을 실천해야 할 일차적인 책임이 종교에 있다는 것입니다.

앞으로는 공산세계도 아니고 민주세계도 아닌 무슨 세계가 와야 하느냐? 우리의 마음을 위주로 한, 하나님을 존중하는 세계가 이 땅에 나타나야 됩니다. 사망의 몸뚱이를 넘어서 우리의 마음이 갈구하는 소망의 세계가 이 땅에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때가 바로 우리가 갈망하는 평화의 왕국시대요, 우리 통일교인들이 말하는 지상천국시대입니다. 그 세계를 향해서 우리는 사망의 구렁텅이를 메우고 넘어가야 됩니다.

여러분은 그런 세계로 넘어가기를 원합니까? 얼마만큼이나 원합니까? 죽음에서 소생하기를 바라는 그 이상의 간절한 마음을 가져 보았느냐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남편이 다시 돌아와 주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 이상의 마음을 가져 보았느냐는 것입니다. 7일 금식이 끝나기 5분 전에 밥을 그리워하는 마음 이상의 간절한 마음으로 그 세계를 그리워해야 됩니다. 여러분이 7일 금식을 할 때도 그러는데, 예수님이 40일 금식을 할 때는 어떠했을 것인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스라엘 민족 앞에서 떠났던 사탄이 광야에서 금식하는 처량한 예수 앞에 나타나 ‘네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을 떡으로 만들어 보라’고 했지요? 그 이상의 것을 부정하고 넘어가서 천륜의 법도를 세워야 합니다. 하늘의 역군이 되기 위해서는 하늘의 인격과 하늘의 이념을 찾아서 그것을 따라가는 자리에 서야 합니다. 여러분, 그러기 위한 간절한 마음을 가져 보았습니까? 가져 보았어요?

선한 사람들이 가는 길

새 천국, 새 시대에 남아질 수 있는 종자는 어떤 종자인가를 알아야 됩니다. 지금까지 심어서 거둔 종자는 자기 아들딸을 중심삼고 ‘아이구, 나는 너 없이는 죽고 못 산다. 너 안 데리고는 못 살아. 너는 죽어도 내 것, 살아도 내 것이다.’ 하는 종자들입니다. 이런 패들은 새 시대, 새 천국에 못들어갑니다. 그 이상의 마음을 가지고 이 모든 사망의 환경을 넘어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기준을 정하지 않고서는 그 세계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누구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이런 말이 세상에 있을 수 있습니까? 네로 황제가 폭군이듯이, 예수님도 폭군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폭군은 폭군이지만 사랑의 폭군인 것입니다. 사랑의 폭군이에요. ‘누구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라. 나밖에 없다.’ 했으니 사랑의 폭군이 아닙니까?

사랑의 폭군은 말없이 주면서 세계를 정복해 나옵니다. 사랑의 폭군은 주면서, 희생하면서 정복해 나오는 것입니다. 반면에 세상의 폭군은 남에게 칼침을 놓고 남의 배를 찌르면서 망해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랑의 법도에 지배받는 세계가 본연의 세계요, 소망의 천국입니다. 여러분이 본연의 세계, 소망하는 나라의 백성이 되겠다는 마음을 가져 봤습니까? 그런 마음을 갖지 않으면 절대 천국 못 갑니다. 천국 못 가요. ‘하나님, 예수님, 내 몸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나를 그 나라에 붙들어 주십시오.’ 하고 암만 기도를 하고 큰절을 해 봤자 그 나라에 갈 수 없습니다. 어림도 없어요.

기성교회를 다니다가 오늘 여기에 처음 온 분들이 있거든 똑똑히 들으십시오. 내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거든 영계에 가서 다시 만나 봅시다. 지옥에 가 있으면 내가 󰡒너 그때에, 내가 얘기할 때에 설마 그럴까? 했지? 그것 봐라.󰡓고 할 것입니다. 그때 가서 나하고 다시 한번 얘기해 봅시다. 내 말이 맞나 안 맞나 보자는 겁니다.

‘누구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라.’ 이 말을 왜 했겠습니까? 지금까지 인간들의 사랑은 타락하여 깨진 사탄세계에 그 기원을 둔 것이니, 새로이 접붙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접붙여야 되는 거예요. 기독교의 교리는 접붙이는 것입니다. ‘나는 참감람나무요, 너희는 돌감람나무이니 잘라서 접붙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세상에서는 모릅니다.

결과의 세계가 이런 세계로 벌어졌으니, 결국 사탄이 심은 세계이기 때문에 사탄이 거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세계가 이 모양 이 꼴로 나가다가는 어떻게 될 것인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흥하겠습니까, 망하겠습니까? 망합니다. 망해요. 이것만 알아 두십시오. 다 잊어도 괜찮습니다. 복잡한 내용 같은 거야 몰라도 괜찮아요. 그러나 세상이 이렇게 나가다가는 망한다는 것만 알아두라는 겁니다. 미국이든 소련이든 다 망한다는 거예요. 알겠습니까? 그러면 여러분, 어떻습니까? 망하는 세계에서는 살지 않겠습니까, 망하는 세계라도 괜찮으니 그냥 살겠습니까? 어때요? 전자예요, 후자예요? 「전자입니다.」 욕심들은 많구만. 병신 곰배팔이도 전자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전자라고 주장한 사람이라 해도, 그가 세계를 위한 마음이 얼마만큼이나 피살에 연결되어 있고 골수에 젖어 있느냐는 것입니다. 내가 곤란할 때에 자신을 염려하는 것보다도 그 세계를 사랑하고 앙모하고 동경하는 비중이 커야 합니다.

오늘 괜히 통일교회에 와서 벅찬 말만 들어 기분 나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냥 그럭저럭 살아 가지고도 천국 갈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이거 듣고 보니 전부 다 천국 못 가게 되어 있으니 큰일났다는 것입니다. 이거 무슨 수라도 써야지…. 이 세계가 어떻게 된다고요? 망하는 것입니다. 망하는 거예요. 말만 들어도 슬프지요? 흥한다고 하면 기분 좋겠지요? 이 세계를 끌어다가 불사를 곳이 어디냐? 지옥입니다. 그것을 관리하는 것이 악한 마귀대왕입니다.

오늘날 이 세상을 가만히 보면 뿌린 대로 거둔다는 논리에 따라, 뿌린 대로 거둘 수 있는 종말시대가 왔습니다. 결실이 되었다는 거예요. 그러니 악은 그렇게 뿌려졌기 때문에 그렇게 거두어지는 세계적인 종말이 왔는데 선은 어떠한가? 악은 나타나게 뿌려졌지만, 선은 보이지 않게 뿌려졌습니다. 지금까지의 역사 과정에서 악한 사람들은 드러내는 데 있어서 선두를 달렸지만, 선한 사람들은 드러내는 데 있어서는 맨 말미에 있었습니다. 그러니 나타나지 않는 자리에서 죽어 가는 사람들이 선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렇지요? 「예.」

선한 사람들이 가는 길은 비참한 길입니다. 참소와 저주와 핍박의 울타리 안에서 고독단신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외로움을 느껴 보았습니까? 사망의 홍수가 밀어치고 사망의 태풍이 몰아치는 환경에서 고독단신으로 ‘오호라, 나는 외로운 사람이로다.’ 하는 사람, 동서남북 어디를 바라보아도 사망의 환경이 가로놓여 있고, 사망의 물결이 밀어닥치고, 사망의 사자가 농락하며 으르렁대는 환경에서 홀로 의연히 세계를 바라보며 한탄할 수 있는 사람이 선한 사람입니다.

분한 마음을 품고 사탄 앞에 무릎 꿇지 아니하며, 천년만년이 흐르더라도 ‘어느 한때 두고 보자.’ 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외부로 나타나지 않는 비참한 자리에서 그 마음에 개인적인 한을 간직하고, 가정적인 한을 간직하고, 국가와 민족을 넘어 세계적인 한을 간직하고, 이 땅 위에서 싸우다 간 사람들이 선한 사람들입니다. 아무도 모르게 세계를 위해 총칼에 찔리고, 창 끝에 끌려 간 사람들이 선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남이 모르는 자리에서 세계를 위해, 하나님을 위해 화살을 맞아 비참하게 죽어 간 사람들이 선한 사람들이라는 거예요.

선의 결실이 맺어져야 할 끝날

여러분, 선은 어떤 자리에 어떻게 뿌려졌는지를 알아야 됩니다. 선은 칼 끝에 쫓기는 자리에 뿌려졌고, 악으로부터 몰리는 환경에 뿌려졌으며, 지극히 고독한 자리에 뿌려졌습니다. 왜? 하나님이 그러한 자리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자리에 계시기 때문에, 그런 자리가 아니고서는 참다운 선의 씨가 뿌려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역사 과정에서 선은 비참한 자리에서 양심적인 터전을 다져 나왔던 것입니다. 그런 연단의 역사 과정을 거쳐서 선의 씨가 뿌려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어찌하여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산정을 향해 가야 했느냐? 어찌하여 피눈물이 엇갈리는 생사의 교차로를 지나 죽음의 경계선을 넘어야만 했는가? 사탄이 그런 자리에서 뿌렸기 때문에, 사탄의 떨리는 손길로 뿌려진 역사이기 때문에, 그것을 수확하는 농군이 되기 위해서는 그런 시련을 당하는 비참한 자리에서 하늘의 심정을 능가하는 심정을 갖고, 떨리는 손으로 낫을 가누어 들고나서지 않으면 안 될 입장의 예수님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런 비참한 생애노정을 거쳐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태풍이 지나간 다음에야 그 바람이 어떤 바람이었는지 분석하여 알 수 있듯이, 역사적으로 그러한 비참한 생애를 보내고 그 비참한 운명이 지나고 난 다음에야 사람들은 그의 인격을 존중하고 그의 업적을 찬양하여, 그 성현들을 중심삼고 세운 것이 역사상의 중심사상으로 남아졌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선은 어떻게 뿌려졌던고! 인간으로서 최고 비참한 자리에서 뿌려졌고, 생사의 결정권이 교차되는 숨막히는 자리에서 뿌려졌고, 사망의 총 끝에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자리에서 뿌려졌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거두는 데도 뿌린 대로 거두어야 하기 때문에, 뿌려진 모양대로 거두어 수습할 수 있는 새로운 어떤 운동이 세계적으로 벌어져야 됩니다.

세계 역사를 이끌어 온 기독교가 눈물로써가 아니면 하늘을 대할 수 없고, 눈물로써가 아니면 세상을 대할 수 없는 입장에서 악과 부딪쳐 눈물로 씻어 나오는 피눈물의 역사를 이어 온 것도, 그렇게 뿌려 온 4천년 역사의 기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 그 결실을 수습하기 위해서는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뿌려진 역사의 결실을 청산 지어야 할 때가 되었으니, 이제 악은 전부 다 물러나고 사랑이란 두 글자를 중심삼고 세계가 하나로 통합되어 하나의 천지가 나타나야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악마의 세계를 수습하여 하나로 통합하는,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악마의 골짜기도 청산할 수 있는 새로운 운동이 이 지구상에 발발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재림사상입니다.

갈라진 몸과 마음을 통일시키고, 갈라진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을 통일시켜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선의 세계가 결실된 하나의 천국 세계로 들어가자고 통합을 부르짖는 운동이 벌어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그렇게 돼야 된다는 것입니다. 반대되는 사상, 즉 원수들에 의해 지옥으로 끌려가는 세계의 가치보다도,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선으로 거두어지는 세계의 가치가 더 커야 새로운 천지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때가 마지막 끝날입니다.

선의 결실을 거두어야 할 통일의 역군

지금까지 기독교인들은 정욕을 절제해 왔습니다. 자유와 평등과 이상을 존중하고, 그 이상의 나라를 찾기 위해 개인의 향락은 전적으로 부정했습니다. 이것은 세상적으로 보면 모순입니다. 세상에서는 이상의 나라를 추구하는 동시에 개인의 향락도 추구하고 있습니다. 요즘에는 아예 거꿀잡이가 돼서, 이상의 나라보다 현실을 더 중요시합니다. 현실의 먹고 사는데 급급하다는 것입니다. 부모님이고 뭐고, 다 시시하고 관계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의 천국이다. 그러니 여기서 잘 먹고 잘 살면 됐지, 장래는 생각해서 뭘 하느냐?’고 하며 현실의 향락을 위주로 미래를 망각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세계가 우리 목전에 벌어지고 있는 이때에 기독교는 현실과 반대 되지요? 기독교는 지금까지 현실을 부정하고 천륜의 심정적인 인연을 중심삼고 신랑 신부의 관문을 통과하기 위한 역사적인 과정을 거쳐 나왔습니다. 그것은 역사적인 추수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추수를 하는 데는 논바닥에 나가 벼를 베는 그런 추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망세계에 썩어져서 사탄의 제물이 될 그런 벼를 추수하는 것이 아닙니다. 6천년 피어린 투쟁의 역사 과정에서 몰리고 쫓기며 쓰러지는 가운데 뿌렸던 씨를 하나님 앞에 공적인 실적으로서 거두어 드려야겠다는 것입니다.

비참한 자리에서 눈물과 피와 땀으로 뿌렸으니, 거두는 데도 비참한 환경에서 눈물과 피와 땀으로 거두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산지사방의 환경으로부터 핍박과 저주가 몰아치더라도 ‘나만 남았나이다.’ 하면서, 하늘의 것을 수확해 가지고 힘차게 돌아올 수 있는 하늘의 역군이 되어야 합니다. 세계적으로 뿌려 놓은 역사를 심판하여 하늘 것으로 거두어들일 수 있는 추수기에 결실이 되어 가는 모든 것을 우리가 하늘의 수확으로 분별해 거두어 들여야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두어들이는 데는 어떤 자리에서 거두어 들여야 되느냐? 눈물이 감돌고, 피땀이 감돌고, 죽음이 감도는 생사지권(生死之圈)이 좌우로 뒤넘이치는 그런 지경에서 거두어들여야 됩니다. 예수도 그 자리를 꿈꾸며 십자가의 길을 갔고, 기독교 또한 그 자리를 꿈꾸며 순교의 역사를 거쳐 나온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뿌렸던 것이 세계적으로 결실되는 이 때에, 그것을 거두어야 할 사명이 오늘날 이 끝날에 하늘을 믿고 나가는 사람들 앞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중대한 문제를 책임지기 위해 나선 것이 통일교회라면, 여러분 어떻겠습니까? 얼마나 좋겠습니까? 좋아요, 나빠요?

그 어떤 종교가 한국 땅에 나와서 20세기 문명을 자랑하는 사탄 주권을 이 땅에서 몰아낸다면, 세상 사람이 전부 비웃고 저주하고 우습게 생각하는 한국 땅에서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미국 사람들도 한국 땅에 와서 굴복하겠습니까, 안 하겠습니까? 한국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면 좋겠습니까, 나쁘겠습니까? 다 좋아해야 됩니다.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다 좋아해야 됩니다. 죽어 가는 사람이 숨이 떨거덕 넘어가면서도 ‘아이고, 좋다!’ 해야 됩니다. 그렇게 못 죽어 가는 사람은 얼마나 원통할까요! 그러니 떨꺼덕 숨이 넘어가는 그 순간에 ‘아이고, 좋아라! 아이고, 좋아라! 세상아! 잘 있거라, 나는 간다. 세상아! 네가 암만 그래도 나는 간다. 하지만 괜찮다.’ 할 수 있다면 그 얼마나 멋지겠습니까? 멋지겠어요, 안 멋지겠어요? 여기 젊은이들, 멋져요, 안 멋져요? 멋지지요? 그럴 수 있다면 벌거벗고 춤을 춰도 괜찮습니다. 통일교회는 벌거벗고 춤춘다고 소문도 났지만….(웃음) 여러분, 얼마나 멋집니까? 여름날 냇가에 가서, 󰡐아!󰡑 하고 숨을 들이쉬고 물 속에 뛰어들 때의 그 기분보다 더 좋지요? 저러면서도 왜 신랑은 교회에 안 데리고 나올까? 남편한테 절대복종만 해 보세요. 남편이 여러분한테 뭔가 툭하면 불평불만하고, 불순종을 하기 때문에 여러분의 환경이 옥살박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부에 그렇게 폭발될 수 있는 원인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남편이 오늘 통일교회 안 간다고 하는 것을 보면 그제서야 ‘내가 무엇을 잘못했구나.’ 할 것입니다. 그러는 여러분이 처량하기 짝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여러분을 보고 ‘아이고, 하나님의 딸이 저 꼴이야!’ 또 ‘하나님의 아들이 저 꼴이야!’ 하는 것을 보시는 하나님은 얼마나 기가 막히겠습니까?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반대를 왜 받습니까, 반대를?

우리 통일교회가 반대를 많이 받았지요. 내 이 두 눈으로 별의별 꼴을 많이도 보아 왔습니다. 머리가 깨져서 오지를 않나, 다리가 부러져서 오지를 않나, 뭐 궁둥이 살이 떨어져 나가고 치마를 벗은 채 쫓겨오질 않나, 별의별 꼴을 다 봤습니다. 그렇게들 하고 오는 것을 내가 구경하겠다고 했습니까? 제발 그런 꼴을 하고 오지 말라고 해도 그러는 걸 어떻게 하겠습니까? 오는 사람을 쫓아 보낼 수도 없고…. 한참 그럴 때는 통일교회가 흘러가는 물결에 자국도 없이 떠내려가 버릴 줄 알았겠지만, 오늘날까지 여전히 커 나왔다는 것입니다. 콩나물 시루에 물을 주면 물은 전부 다 흘러 내려가 버리지만 무엇이 큽니까? 「콩나물이요.」

지도자의 길

그런 것을 볼 때 통일교회 문 선생이 못나서 그런 일을 당했느냐? 선생님의 외모도 이만하면 못생긴 것은 아닙니다. 내가 미국이나 구라파 일대를 다녀 보았지만, 내 키가 작은 키가 아닙니다. 중키는 되지요? 동양 사람이 이만하면 어디 가도 빠지지 않습니다. 서양 사람들 축에 들어가도 작지 않습니다. 남들만큼 잘나지 못해서 이런 일을 하는 게 아닙니다.

누가 본다고 해서 땀 흘려 일할 필요 있습니까? 그런 일은 안 하면 되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이 일은 누가 보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해 달라고 해서 하는 것도 아닙니다. 안 하면 안 될 공적인 입장에 있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공적인 책임을 완수해야 되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은 여러분을 위해서보다도 하늘의 부름을 받고 사명을 받았기 때문에, 그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충절을 다해 이 일을 하는 것입니다. 믿고 안 믿고는 여러분의 마음입니다.

선생님이 어떤 때 어느 동네에 들어가면 한 사람도 아니고 세 사람씩이나 죽어 나자빠집니다. 그러면 동네 사람들은 ‘아이고, 우리가 급벼락을 맞은 것은 저 젊은 녀석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저 녀석을 쫓아내자.’고 합니다. 그래서 동네에서 쫓겨나 보기도 했습니다. 지독하지요? 왜 하필이면 나중에 죽지 않고 내가 들어갈 때 죽었을까? 선생님이 어딜 가든지 그런 일이 벌어집니다. 그래서 가는 곳곳마다 맞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그런 일들이 벌어지겠습니까? 원수의 세계에 하늘의 사람이 왔으니 그러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에 간첩이 내려오면 대한민국 사람들이 모두 편안해하는가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좋아하고 세상의 품에 안길 수 있는 지도자는 아무리 좋은 주의와 사상을 갖고 나왔다 하더라도 세상과 함께 뒤넘이치는 길에 설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알기 때문에, 피를 토하고 매를 맞아 몸을 가눌 수 없는 자리에 들어갔을 때에도 나는 누구를 원망해 보지 않았습니다. ‘이 원수를 복수해야겠다. 기어코 원수를 갚고 말겠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처음 뿌릴 때에 그렇게 뿌렸기 때문에 그렇게 거두는 것이므로, 그것을 이겨내지 못하는 사람은 그런 터전 위에서 거두어들일 수 있는 주인이 못됩니다. 알겠어요?

통일교회 교인들, 혹은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통일교회가 좋기는 좋다. 그 가르침도 좋고, 믿음도 그 가르침대로 따라서 해야 되겠지만, 그것 따라가려면 너무 비참하다, 비참해! 아이고, 너무 너무 비참해.’ 하며 후퇴합니다. 그러면 망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움직임이 사회적으로 보면 비참하더라도 이를 악물고 한 걸음 한 걸음 따라 나가야 됩니다. 그러지 않는 사람은 통일교인으로서의 자격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지금까지 생애를 바쳐 이 일을 혼자서 해 나가는 것입니다. 내게는 스승도 없습니다. 친구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6천년 동안 싸워 나오신, 몰리고 쫓기는 외로운 자리에 내가 대신 들어가서 싸워 나가겠다고 다짐하면서 나왔습니다. 그 자리는 모든 화살이 퍼부어지는 자리요, 삶과 죽음이 교차되는 자리요, 골고다를 거쳐가야 할 탄식의 자리인 것입니다.

만일 민주주의가 나오지 않았으면 통일교회의 가는 길이 어땠을 것인가?

선을 뿌려 오신 하나님이 거두리라고 약속하셨던 그 약조를 이루어 드리는 수확의 역군이 되기 위해서는 비참한 자리를 찾아가야 합니다. 십자가의 절정에서부터 사망의 골짜기를 지나서라도 거기에 뿌려진 선의 결실을 수확해 드리겠노라고, 하나님을 위로해 드려야 합니다. 그런 자리에서 슬피 우시며 탄식의 한을 품으시고 이 땅에서 사망의 세계를 심판할 목표를 세워 놓고 나오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이 슬퍼하신 그 자리에 들어가 ‘당신이 거두기를 원하시는 수확을 제가 거두어 드리겠습니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가 죽은 해골의 곳이 그러한 자리였고, 아브라함 등 역대의 우리 선조들이 걸어간 그 자리 또한 하나같이 그러한 비참한 자리였습니다. 그러니 그런 자리에 들어가서 선조들을 부활의 실체로 거두어들일 수 있고, 하나님의 내정적인 심정을 위로해 드릴 수 있는 권위를 갖추어야만 추수의 역군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선의 결실을 거두려면

하나님이 그러한 선의 씨를 뿌리는 데는 하나의 놀이 거리로써, 하나의 취미거리로서 뿌린 것이 아닙니다. 심정이, 몸과 마음이, 세포와 몸의 모든 것이 일체가 되어 있는 정성을 다하여 뿌린 것입니다. 전역사에 걸쳐서 이렇듯 떨리는 손길을 통하여 뿌려졌으니, 그 결실을 거두기 위하여 나선 사람들도 몸과 마음이 하나되어 가지고, 마음이 호소하는 자리에서 손길이 떨리고 세포가 떨리고 전신경이 집중되는 자리에서 수확을 거두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다시 말하면 정성을 다하여 뿌렸으니 그러한 성의를 갖고 수확을 거두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이 되지 않고서는 이 땅에 뿌려진 선의 결실을 거두어들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눈물을 흘리며 가자는 것입니다. 눈물은 인류를 위하여, 땀을 땅을 위하여, 피는 하늘을 위하여 뿌리며 가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과정을 거치셨기 때문에 그런 자리에서만이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할 수 있고, 그런 자리에서만이 결실된 것을 거둘 수 있기 때문에 통일교회는 심정의 도리를 가르쳐 나오는 것입니다.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인격을 갖추자는 것입니다. 그런 기준에서 민족을 사랑하고, 그런 기준에서 세계를 사랑하자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악한 이 세계를 품어서 굴복시킬 수 있는, 다시 말하면 외적인 세계까지 굴복시킬 수 있는 주도적인 권한을 갖추자는 것입니다. 결국은 본래 인간이 이루어야 했던 몸 마음을 통일하여, 그것을 중심삼고 새로운 세계로 출발할 수 있는 세계적인 결실을 이 땅에 이루어 놓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통일이념으로 완성해야 할 표준입니다.

우리들이 그런 내용을 중심삼고 나아가는 것이니만큼 그 과정에도 비참함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예.」 여러분의 눈에는 눈물이 나와야 됩니다. 여러분이 이 길을 가면서 피땀을 흘려야 됩니다. 하늘 앞에 제물이 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어 가지고, 로마 제국시대에 또는 바로의 학정 밑에 비참하게 쓰러진 기독교인들의 터전을 응당히 자신이 가야할 현실적인 무대로 생각하고, 그러한 자리에서 승리의 실체가 되겠다고 내적인 다짐을 하며 나가야 합니다. 오늘날 그러한 현장이 있다면, 선두에 서서 달려가는 사람이 되겠다고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서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뿌려진 선의 결실을 거두기 위해서는 민족의 뒷골목을 가야 합니다. 오늘날 천도를 중심삼고 선악을 판별, 분별하는 기준을 갖추어야 하는데, 그 선은 악한 세계의 뒷골목에 있다는 것입니다. 뒷골목에 있어요! 비참한 눈물이 감도는 그 세계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는 그런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것이 잘하는 것입니까, 못하는 것입니까? 그렇게 갯벌에 뿌려진 선의 결실을 거두지 않고는 악을 멸할 수 없는 것입니다. 통일교회는 그것을 위해 존속해 나가야 할 운명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7년노정을 승리하고 돌아왔지만, 선생님은 7년노정에서 피눈물을 많이 흘렸습니다. 여러분은 어땠는지 모르지만, 선생님은 피눈물을 많이 흘렸어요. 밤이나 낮이나,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다 해도 이 하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뛰어다녔습니다. 누가 아니 간다고 원망할 일도 아니고, 친구가 없다고 원망할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미 작정하신 섭리의 결과를 거두어야 할 사명이 있기에 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세계에 널려 있는 선의 결실을 거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결실을 거두어서 심정의 낫질로 갈라진 자신을 통일시키고, 분리된 천정과 인정을 통일시켜야 할 것이 오늘날 통일교회를 따라 나오고 있는 무리들의 사명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몸 자체는 무딘 낫 끝일망정 수확하는 데 쓰이는 도구로서의 실체가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우리의 실체를 통하여 오늘날 망해 들어가는 세계를 바르게 이끌어서 하나님의 심정을 중심삼고 새로운 중심의 세계로 넘어가야 합니다. 그것이 통일교회 교인들의 사명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청소년들의 퇴폐적인 풍조를 잘라내야 합니다. 그 무엇으로도 점령할 수 없는 권한을 가지고, 그러한 세계의 풍조를 막아 치워 없애 버리고, 사탄이 끌고 가는 사망세계의 인연을 모조리 다 끊어 버리고, 사망의 세력을 방지해야 할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통일용사로서 이러한 책임과 사명을 완수하는 데 있어서 개인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하늘땅을 중심삼고 그러한 책임과 사명을 감당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이 천주는 하나님 앞에 완성한 결실체로서 거두어질 것입니다.

이렇듯 감당해야 할 사명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알고, 전번에 백일 동안 기도한 것도 그런 사명을 감당하는 데 있어서 스스로의 입장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였음을 알고, 더더욱 정성을 들여서 제2차 7년노정을 의미 있게 출발해 주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선의 결실을 거두는 추수의 역군이 되어 하늘에 기억되고, 하늘의 유업을 상속 받을 수 있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잠깐 말씀드렸습니다. 아시겠지요? 「예.」

<기 도>

여기에 모인 자녀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로부터 부름 받고 가는 길은 평탄한 길이 아닌 것을 알았사옵니다. 오늘날 저희들의 눈앞에는 사망의 세계와 생명의 세계가 교차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역사적인 교차가 저희의 갈 방향을 혼란시키고 있는 이 마당에, 세계적으로 종교인들이 전부 꺾여 나가는 이 마당에 있어서, 하늘이 이런 것을 꺾으실 때는 선한 기준을 세워 놓고 치신다는 것을 아는 저희들은 하늘의 때가 어떤 기준에 도달하였다는 것을 알고 있나이다.

이제 저희들이 표정과 자세를 가다듬어 백일청천하에 아버지를 부르며, 저희의 때가 왔노라고 활개를 치고 춤을 추며 아버지께로 달려갈 수 있는 자유의 천지가 저희 앞에 다가오는 것을 생각하고, 슬펐던 과거가 기쁨으로 변할 수 있으며 억울하고 비통한 사실이 찬란한 하늘의 권위를 자랑할 수 있는 때로 바뀌어 찾아오는 것을 생각하면, 이 모든 것이, 저희들을 이런 자리에 몰아넣으신 그 모든 것이 다 저희들에게 당신의 심정을 상속하고자 하시는 아버지의 사랑인 것을 알았사옵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천만사에 감사를 드릴 수밖에 없사옵니다.

하오나 이런 자리에 서지 못한 자신을 자탄하게 하시옵고, 지금까지 그러한 권한을 가지고 하늘땅 앞에 나서지 못했던 자신의 부족함을 탄식할 수 있는 마음이라도 갖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생명과 사망이 교차되는 이 순간에 생명의 권한을 갖고 사망의 주권을 굴복시킬 수 있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이와 같은 날을 저희들에게 허락하여 주신 것을 감사하옵나이다. 각 지구별로, 지역별로 흩어져서 외로운 길을 가고 있는 당신의 자녀들이 여기에 모였사오니, 오늘 당신의 은사로써 이들의 마음을 위로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께서 뿌리신 선의 결실을 거두기 위한, 수확하기 위한 그 자리를 저희들이 돌파하려 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그러하고 일본에서도 그러하고 세계 수많은 국가에서도 그러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통일의 역군들의 이마에는 땀을 흘려야 되겠고, 눈에는 눈물을 흘려야 되겠고, 그 손길과 몸에서는 피를 흘려 아버지 앞에 바쳐야 할 사명이 남아 있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저희들이 이 길을 다 가서 아버지께서 안식할 수 있는 그날을 맞이할 때까지 죽고 또 죽기를 고대하는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싸움에서 지치는 자들이 되지 말고, 싸우고 또 싸우겠다고 결의하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한 많은 역사의 서러움을 잊어버리고, 생명의 깊은 심정을 품고 자유로운 천지에서 당신을 ‘아버지’라고 목이 터지도록 불러 볼 수 있는 기쁨의 날을 이 땅에서 맞이하여 만민 앞에 자랑할 수 있고, 아버지를 높여 드릴 수 있으며 승리의 개가를 부를 수 있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남아진 시간에도 당신의 거룩한 손길이 같이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이날 남한 각지에서, 혹은 세계 각처에 널려서 이 통일의 본부를 그리워하고 있는 아들딸들이 많사오니, 그들의 애원을 전부 이루어 주셔서 아버지와 더불어 기필코 영광의 한 날을 맞이할 수 있게끔 축복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앞으로 세계에서 저희들, 뜻 앞에 충절을 다짐하는 이 시간 되고, 오늘 말씀을 통하여 내리신 깊은 심정을 중심삼고 자신을 반성하고, 당신 앞에 부복하여 당신께 결속되고, 당신의 위치에 터를 잡고 서겠다고 새로이 결의하고 새로이 맹세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만만사가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올 때, 이 모든 말씀 참부모의 성호 받들어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마태복음 27:27-31

<기 도(Ⅰ)>

이날은 아버님이 기억하실 경축의 날이옵니다. 이날을 만민이 아버님을 모시고 안식할 수 있는 참된 축하의 날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4백만이 살고 있는 이 서울 도성에 당신의 심정에 가까워질 수 있는 길을 모색하기 위하여 갈구하는 수많은 영혼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자리 곳곳마다 당신의 거룩하심을 나타내시어 생명의 인연이 영원히 그들의 가슴가슴에 엉클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한 생명으로 말미암아 부활의 은혜를 입어 뭇 생명이 소생할 수 있도록, 아버지의 권한을 나타내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울려 나오는 종소리에 따라 모두 무릎을 꿇고 아버지 앞에 경배하는 수많은 무리들, 아버지께서 친히 자랑할 수 있는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이 시간 아버지 앞에 간절히 부탁드리옵니다.

교회도 많았고, 당신의 이름을 찬양하는 사람도 많았고, 정성어린 최후의 심정을 기울여 절규하던 무리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진정 당신의 심정을 파헤쳐 당신의 마음을 붙들고, 당신을 위로할 수 있는 참다운 아들딸이 얼마나 있었사옵니까? 그 심정을 생각하며 이 시간 아버지의 긍휼을 다시 바라는 불초의 몸들이 여기에 또 모였사옵니다. 저희와의 부자의 인연으로 인해 슬픔을 당하시던 아버지, 저희들을 다시 한번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의 소원은 당신의 깊은 심정 가운데 들어가 당신의 사무쳤던 원한의 심정을 위안해 드리는 것이옵니다. 또한 당신의 마음을 붙들고 위로해 드릴 수 있는 진정한 아들과 진정한 딸이 되는 것이옵니다.

이와 같이 아버님을 모실 수 있는 자리가 영광의 자리인 것을 저희는 알았고, 아버지께서 그런 아들딸을 찾는 자리가 사랑의 자리인 것을 저희들이 알았사옵니다. 심정의 인연으로 인해 생명의 인연이 엇갈릴 수 있는 아버지와 아들딸이 만나 기쁨의 모든 심정을 털어놓을 수 있는 정다운 시간이 저희들은 그립나이다.

아버님, 여기에 모인 당신의 자녀들을 굽어살펴 보시옵소서. 이들은 누구를 위하여 온 사람들이 아니옵니다. 세상의 그 무엇을 바라고 온 사람들도 아니옵고, 세상의 명예와 부귀영화를 찾아온 사람들도 아니옵니다. 아버지 앞에 나서기 위해 세상의 인연을 다 저버리고 넘어온 사람들이옵니다. 오로지 당신만이 저희들이 전부요, 오로지 당신의 심정만이 저희의 위로의 내용인 것을 확실히 알고 부복한 모습들이오니, 아버님, 굽어살펴 주시옵소서.

이제 손에 손을 붙들고 당신의 아들이라 딸이라 할 수 있는 분부가 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게 허락하여 주옵소서.

생애를 거쳐오면서 한에 멍든 마음을 억제하고 참아 나오던 사정을 털어놓을 수 있는 당신의 기쁨의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지금까지 저희들의 마음에 쌓였던 한을 다 헤쳐 버리고 그 마음 가운데 아버지의 6천년의 한을 옮겨 놓을 수 있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시고, 그럴 수 있는 이 자리가 되게 하여 주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에게는 아무것도 없사오니 당신만이 전체가 되시옵소서. 저희의 중심도 아버지께서 되시옵고, 전체의 중심도 아버지께서 되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은 거룩한 날이옵니다. 아버지께서 수많은 민족에게 복을 베풀어 주시려는 간절한 마음이 있어도 당신이 복을 주실 수 없는 슬픔의 제단들이 얼마나 많은가를 저희들이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거기에 비례하여 아버지의 마음을 위로해 드릴 수 있는 충효의 심정을 더하지 않으면 안 될 저희들임을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는 자녀들 되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남한 각지에 널려 이 시간을 흠모하면서, 이곳을 그리워하면서 무릎을 꿇고 경배하는 당신의 자녀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그들이 원하는 모든 것이 당신이 원하는 것과 일치되게 하여 주시옵고, 당신의 사정과 통함으로 인해 당신의 품에 안길 수 있는 자녀들 되게 하여 주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날을 아버지 앞에 맡기오니 친히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해외에 널리어 외로운 길에서 싸우다 지친 몸을 이끌고 아버지를 향하여 마음을 모으는 당신의 자녀들을 기억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그들이 최후의 승리를 다짐할 수 있는 세계 앞에 있어서 부족함이 없게 하여 주시옵고, 아버지의 심정에 일치될 수 있게끔, 아버지, 언제나 가꾸고 거느려 주시옵길 간절히 부탁드리옵니다.

이 시간 아버지 앞에 전체를 맡기오니 친히 주관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오며, 이 시간을 중심삼고 연결되는 역사적인 서러움과 시대적인 욕구와 미래적인 사명을 책임질 수 있는 각자의 심령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앞에 몽땅 드리는 이 시간이 되고, 아버지로부터 새로운 명령을 받을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친히 찾아오시어서 저희의 심령 동산의 주인이 되시옵고, 저희 자체는 아버지의 품에 안길 수 있고 아버지 앞에 친히 주관 받을 수 있는 각자의 모습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이날 전체를 친히 영광 가운데서 주관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의 성호 받들어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기 도(Ⅱ)>

수많은 백성들 위에 아버지의 자비를 내려 주시옵소서. 수많은 교단들 위에 당신의 경륜이 임하시옵고, 뭇 생명들 가운데에 당신의 영원하신 사랑의 인연이 깃들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 보잘것없는 소수의 무리들이 아버지의 존전에 모였습니다. 저희의 몸과 마음은 세상과 화하기에 좋은 조건을 갖고 아버지와 먼 거리에 설 수밖에 없는 인연을 품은 채로 부복하였사오니, 아버님, 분리시켜 주옵소서. 상처가 심하면 그 상처에 당신의 긍휼이 미치어 주시옵고, 당신 앞에 갖춰야 할 모양을 갖추지 못한 그 모습을 보시고 저희들을 위로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단 한 가지도 아버지 앞에 내놓을 수 없는 불비하고 면목이 없는 자신들임에 슬퍼하고 탄식할 수 있는 마음을 갖게 하여 주옵소서. 깊은 심성에 당신을 흠모하는 마음이 싹트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본연의 에덴동산에서 부르시던 아버지의 음성을 듣고 저희의 조상들이 느끼지 못하였던 아버지의 거룩함을 느낄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마음 가운데 있는, 저희를 품고 싶은 사랑과 그리움의 심정을 저희들이 헤치고 거기에 안길 수 있는 천진하고 순진한 당신의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의 마음속에서 저희가 당신과의 끊을 수 없는 혈족임을 느끼시사 보고 싶은 마음을 감당할 수 없어 저희들을 품지 않을 수 없고, 찾아오지 않을 수 없게 되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아버지, 수많은 사람들이 당신을 향해 무릎을 꿇고 경배하며 당신을 찬양하는 제단에 아버지께서 임하시기를 억천만세를 두고 고대하며 그리워해 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제단들을 대표하여 보잘것없는 이 무리들이 모였사오니, 수많은 민족을 대신하고 수많은 교단을 대신하여, 아버지의 심정 가운데에 사무치는 한을 위로하기에 갈급해하는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당신의 품에 안기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당신이 인정할 수 있는 모습들이 되기를 얼마나 고대하고 있는가를 이 시간 느낄 줄 아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저희는 아버지라 부를 때에 뼈와 살에 사무치는, 진정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음성으로 부르지 못했사옵고, 그러한 감정과 일치된 자리에서 아버지를 붙들겠다고 달려들 수 있는 한 시간을 갖지 못했사옵니다. 이렇듯 아버지를 뚜렷이 알지 못하였사오니 아버지를 뚜렷이 인식할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고, 아버지의 손길과 옷자락을 잡고 영원히 놓치지 않겠다고 간곡하게 사무치는 마음으로 몸부림치는 저희의 모습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한 자리에서 아버지라 부르고 그러한 자리에서 아버지를 붙들고 통사정할 수 있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기를,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낙오된 인간들을 찾아오기 위해 6천년 동안 수고하신 아버지, 오늘도 부끄러운 모습으로 당신 앞에 나타나는 저희들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그러나 당신의 품에 안기어 당신이 가는 길을 따라가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인간이옵기에, 죽든지 살든지 이 길을 돌파하여 나가지 않으면 안 될 의무가 있는 것을 아는 저희들이기에 이 시간 다시 왔사오니, 당신의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동정의 마음과 동정의 음성이 저희의 모든 마음을 움직이시옵고, 사랑의 손길이 저희 몸을 덮으시어서 품어 주시옵고, 권고하여 주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그런 아버지를 알지 못했고, 그런 아버지를 위로하지 못했고, 그런 아버지를 찾지 못했고, 그런 아버지를 깨닫지 못했던 저희의 과거를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만이라도 아버지의 깊으신 사랑이 저희들 앞에서 멈출 수 있도록 아버지를 모셔 놓고, 아버지의 사랑을 찬양하고, 아버지의 사랑에 안기고, 아버지의 생명의 말씀에 화하여 내 자체를 잊어버리고, 아버지에 대한 생각에 잠길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하여 주옵기를, 사랑의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 처해 있는 이 순간, 이 순간은 역사상의 저희 선조들이 호소하는 순간인 것을 망각하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이 시대에 봉화를 들고나서야 할 사명이 저희에게 있음을 잊지 말게 허락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아버님께서 저희를 보고 믿을 수 있고, 저희들을 보고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 그런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시간 아버지 앞에 전부를 맡기었사오니 친히 주관하여 주옵고, 말씀을 전하는 당신의 심정이나 받는 저희의 심정 사이에 경계선이 없게 허락하여 주옵시고, 그것이 있다면 그 사이를 아버님께서 이으시어서 재창조할 수 있는 심정의 인연을 갖추시어 아버지의 마음과 저희의 마음이 통하고, 아버지와 저희가 인연이 맺어질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하여 주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시간 남한 각지에서 무릎을 꿇고 아버지를 부르면서 울부짖고 있는 당신의 자녀들을 품어 주옵소서. 아버지 앞에 생명을 다하여 충성을 바치겠다고 다짐하고, 말씀을 실천하는 데 자기의 생명을 걸겠다고 맹세하는 그들의 모습 위에 아버지의 거룩하심을 나타내시옵고, 살아 계신 아버지의 모습을 증거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저희의 모습으로 인도해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니다.

세계에 널려 있는 통일의 역군들을 굽어살펴 주시옵소서. 외로운 심정을 더듬으면서 이곳을 흠모하는 그 마음 위에 아버지의 위로와 평안이 같이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남아진 시간 전체 위에 친히 당신의 자비와 사랑과 권고가 같이하여 주옵기를 부탁드리면서, 이 모든 말씀 참부모님의 성호 받들어 간절히 기도하였사옵나이다. 아멘.

<말 씀>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하늘 편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세상도 그렇지만 우리 개인에게 있어서도 하늘 편의 것을 찾아볼 수 없는 때가 많습니다.

하늘 편으로 돌아가야 할 타락 인간

양심과 몸의 싸움이 무한히 거듭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생애노정을 거쳐가는 생활환경에서 많이 체험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아무리 어렵고 비참하고 혼란된 환경에 있을지라도 하늘 편을 찾아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연한 논리입니다. 이것을 우리의 목적으로 삼고 필사적으로 성취해 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도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현재 우리가 있는 자리에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하늘 편을 생각해 낼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보이는 것이 모두가 하늘 편과 반대되는 현상뿐이요, 우리가 사는 환경이 하늘 편과 관계없는 내용으로 엉클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하늘 편을 찾아가고, 하늘 편에 선다는 것이 지극히 어려운 것임을 우리들은 알게 됩니다.

우리들은 하늘과 땅, 하나님과 사탄, 선과 악의 기로에 서 있는 우리 자신을 다시 한번 회복시켜서 선을 중심삼고, 하나님을 중심삼고 나아가야 되고, 하나님 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러한 운명에 서 있는 것이 타락한 인생의 모습인 것을 우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이런 길을 모색하기 위해서 수많은 인간들은 종교라는 이름을 내세워 얼마나 하나님을 찾았고 갈구해 왔습니까? 이러한 사실을 우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기나긴 역사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일을 되풀이했습니다. 이렇듯 생활 가운데서 몸부림치면서 찾고 있는 이 일을 버릴래야 버릴 수도 없고, 그것을 또다시 거듭하지 않으면 안 될 운명에 놓여 있는 것이 타락한 후손인 우리의 인생이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이와 같이 우리 인간은 지극히 불쌍하고 비참한 자리에 처해 있고, 그 누구 앞에 서서도 자기를 주장할 수 없는 입장에 처해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지금까지 땅 위의 어떤 영웅 열사가 자기의 내심으로 결심한 바를 성취하기 위해서 갖은 노력을 다해 그 목적을 완성했다 해도, 그것을 하늘편의 것이라고 하나님께 바치고 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수많은 인간들이 거듭 욕망을 품고 나왔지만 결국에는 탄식과 더불어 사라져 갔다는 역사적인 사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환경에 있어서 또다시 몸부림을 쳐 가지고 이런 환경을 기필코 타파해 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사명이요, 우리의 책임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문제되는 것이 무엇이냐? 하늘 편에 서기 위해서는 인간 편에 서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의 사정 가지고는 하나님의 사정과 접할 수가 없는 것이요, 인간의 인연 가지고서는 하나님의 인연과 연결 지을 수 없는 것이요, 인간의 목적을 가지고는 하나님의 목적과 관계를 맺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늘 편에 서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을 중심삼고 생활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겠다는 목표를 갖고 싸우는 입장을 취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적인 노정을 통하여 연결되는 분이시기에 사적인 것을 중심삼은 곳에는 하나님이 임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적인 기준을 통하여서 더욱 큰 공적인 입장에 서게 될 때에 임재하실 수 있습니다. 또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고로 수많은 성인 현철들이 공적인 입장을 중심삼은 선을 강조해 가르쳤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실 수 있는 자리

이런 점에서 보게 될 때에 하나님이 임하실 수 있는 공적인 자리는 어떤 자리냐? 우리 인간의 몸과 마음을 중심삼고 볼 때에 몸보다 더 공적인 입장에 있는 것이 마음입니다. 그리고 몸과 마음이 둘 다 공적인 입장에서는 내 자신이 되었다 할진대, 또다시 더 큰 공적인 입장에 서야 하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가정입니다. 그러나 가정이 내 마음과 반대된 입장에 있으면 거기에서 공적인 입장을 세운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공적인 기반을 세운 가정이 있다 할진대 그 가정은 민족을 중심삼은 공적인 기반 위에 서야 합니다. 민족을 중심삼은 공적 기반 위에 선 하나의 민족이 있다면 그 민족은 국가를 넘어 세계적인 공적 기반 위에 서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더 큰 기반을 세워 나가지 않으면 안 될 운명에 처해 있는 것이 타락한 인간의 생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가야 할 길은 내 양심에 따라, 나 하나 중심삼아 생활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양심을 중심삼고 몸을 주관해 가면서 생활해야 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선의 가정을 꾸미기 위하여 생활해야 되고, 선의 가정을 꾸몄다 할지라도 그 가정을 이끌어 선의 종족을 이루어야 되고, 그 선의 종족을 이끌어 선의 민족을 이루어야 되고, 더 나아가 선의 국가, 선의 세계, 선의 천주까지 끌고 나가지 않으면 안 될 내용이 우리가 가는 길 앞에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가야 할 길이 이렇게 어려운 길이라는 것을 오늘날 인간들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저 나 하나 중심삼고 이럭저럭 사는 것이 삶의 목적이라고 생각하다가 생애를 필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우리들은 남달리 하나님권을 찾아 나가기 위한 공적 기준을 목표로 하여 생활 속에서 선의 발판을 세우기 위해 싸워 나오고 있습니다. 그 행로야말로 인간적으로 볼 때는 무한히 비참한 길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 기준은 전체가 타협할 수 있는 기준이 아니요, 전체를 부정하고, 전체를 밟고 올라서지 않으면 안 되는 절대적인 기준입니다. 절대적인 기준이니만큼 비참함이 동반된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인간들에게 이러한 공적인 행로가 연결되어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만 이 행로를 개척하라고 요구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인간들에게 외롭고 비참한 이 자리를 맡겨 개척시키는 것도 사실이지만, 책임 전체를 인간들에게만 지우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 길을 앞서서 가시면서 자신의 책임을 완수하기 위하여 배후에서 많은 수고를 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어떤 참된 사람이 있다 할 때, 사람들은 그 사람의 외적인 행동을 보고 그를 참된 사람이라고 평할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그 사람이 참되다는 말은 듣는 자리에 나오기까지에는 수많은 투쟁의 과정이 있었고, 수많은 역경의 자리에 부딪혔어도 거기에 굴하지 않고 결의와 맹세를 하는, 그런 고비 길이 있었다는 사실은 잘 모를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이런 사실을 잘 알아야 됩니다.

한 사람에 있어서도 그러하거늘 공적인 역사노정을 통하여서 하늘 편을 세우려 하셨던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가 공적인 노정을 가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그 원하시는 것이 크면 클수록 그에 비례해서 하나님은 배후에서 인간들이 알지 못하는 많은 수고를 해 오셨다는 사실을 지금까지 우리들은 모르고 살아왔습니다.

인간들은 선을 추구해 나가는 과정에 있어서 조금이라도 낙심되든가 불안한 자리에 서게 되면 자신을 부둥켜안고 쉽게 낙망하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러한 자리에서 나를 위해 그와 같은 수고를 하고, 나를 위해 더 비참한 자리에서 나의 갈 길을 개척해 주기 위해 수고해야 한다는 사실을 확실히 안다면, 아무리 외롭고 어려운 자리, 자기 자신이 자탄할 수밖에 없는 공포의 자리라 할지라도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과 나를 비교해 보면 하나님은 우주적인 입장에 서 계시고, 나는 개인적인 입장에 서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수고로움이 나와 비교되지 못할 정도로 크시다는 것을 안다면 닥쳐오는 모든 어려움을 박차고 하나님을 따라가겠다는 결심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 세상의 상례를 통하여서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인간들은 하나님이 계시는지 안 계시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안다면, 하나님이 자신들의 앞길을 개척해 주기 위하여 지금도 수다한 고생을 하시고, 수다한 시련 가운데에서 외로움을 무릅쓰고 공적인 노정을 걸어오신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물론이지만 오늘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하늘의 본향의 나라로 추구해 나가는 신앙의 길에 선 사람들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엄청난 공적인 역사노정을 짊어지고 오셨다는 사실을 망각해 버리고, 자기 자신이 자탄할 내용만을 가지고 하나님을 걸고 넘어가 하나님을 저주하고 하나님을 배반하였던 사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런 역사적 사실이 얼마나 많이 있었는가를 우리 통일교회 교인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통일교인들이 알아야 할 것이 무엇이냐? 공적인 노정에 있어서 책임을 짊어진 하늘 편을 누구보다도 먼저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내 사정보다도 더 어려우셨던 하나님, 우리나라 사정보다도 더 어려우셨던 하나님, 오늘날 혼란 중인 세계의 사정보다도 더 어려운 환경에서 책임을 지고 계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을 진정으로 위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있다 할진대, 하나님은 그 누구보다도 그 사람을 찾아가실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의 비참함을 알아야

하나님을 아는 무리가 있다 할진대 하나님은 그 무리를 통하여 역사상의 서러움을 풀고 싶어하실 것이고, 시대의 사명을 분부하고 싶어하실 것이며, 미래의 책임을 맡기고 싶어하실 것입니다. 오늘 통일교회 식구들은 누구보다도 먼저 선두에 서서 이러한 서러움 가운데 계신 하나님, 이러한 어려움 가운데 계신 하나님, 이러한 억울하고 분한 입장에 계신 하나님이신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분하고 억울하고 원통한 사실은 어느 때에 벌어지느냐? 내가 믿고 바라고 있던 일이 깨어지게 될 때이며, 혹은 나와 그와의 사이에 맺어진 혈연적 관계가 부정될 때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그때가 가장 비참하고 비통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부모가 사랑하는 자식을 그렇게 믿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자식이 배반하게 될 때, 그 믿음에 비례해서 부모가 받는 충격과 고충, 그리고 비참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생명을 걸고 서로 사랑한 사람이 배반하고 배척하며 불신할 때도 역시 말할 수 없이 비참한 것입니다. 그러한 자리에서 몸부림치는 그 고통은 그런 경험을 하지 않은 사람은 모르는 것입니다. 말만 가지고는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일을 미루어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어떻게 되어서 비참하게 되었느냐? 우리는 이것을 놓고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은 막연한 하나님이 아닌 구체적인 하나님입니다. 또한 우리 인간과는 최고의 관계를 가진 하나님이 십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과 더불어 기쁨으로 출발해서 끝이 없는 영원을 향해 계속 나갈 수 있는 그런 출발의 기점을 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출발의 기점을 인간으로 인해 잃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서로 기뻐할 수 있고, 행복을 노래할 수 있는 자리는 하나님을 잃어버리지 않은, 하나님을 모시는 자리입니다. 그러한 자리에서 인간은 하나님을 중심삼고 자녀의 입장으로 맺어질 인연이었는데도 불구하고,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이런 모든 인연이 끊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에 인간은 오늘날 하나님을 비참한 자리에 몰아낸 장본인인 것입니다. 이것을 지금까지 인간들은 몰랐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슬퍼하시되 나하고는 상관없는 자리에서 슬퍼하시고, 수고하시되 제삼자의 입장에서 수고하시는 줄로 알아 왔습니다. 수고와 고통과 모든 슬픔이 인간 때문이고, 그 인간을 대표한 나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확실히 몰랐습니다. 즉 하나님이 그런 입장에 선 것이 나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과거에 얼마나 비참하셨고, 오늘날에도 얼마나 비참하신지를 알고, 또한 나를 위해 그런 절망에 부딪히셨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고 그런 하나님을 염려하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 사람은 하늘 편으로 안 돌아갈래야 안 돌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하나님을 아는 ‘나’, 그러한 인연이 있다는 것을 확실히 깨달은 ‘나’, 이런 ‘나’가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만물을 지으시고 그 만물의 주인공으로 인간 시조를 에덴동산에 지어 놓으셨습니다. 인간을 지으실 때는 하나님의 어떠한 희롱거리로 지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취미로 지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을 지어 만물을 대표하는 중심으로 세우게 될 때까지의 하나님의 수고와 정성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인간은 어떠한 존재로 지음 받았는가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지으실 때, 온갖 정성을 다 들이시고 또한 심혈과 당신의 생명의 핵심을 다 기울여 지으셨으며, 사랑과 애정을 몽땅 퍼부어서 지으셨습니다. 어떠한 힘 가지고도 뗄래야 뗄 수 없고, 갈라질래야 갈라질 수 없는 인연 가운데서 지으신 것입니다. 이렇게 지으신 인간이기에 그 인간을 바라보시는 하나님께서는 비로소 평화가 깃들 수 있는 것이고, 모든 정과 행복은 그 인간을 통하여서만이 깃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아버지요, 인간은 하나님의 아들딸입니다. 하나님의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 골수 중의 골수를 몽땅 퍼부어 지은 인간이기에 이런 인간이 하나님을 끌면 안 끌려오실 수 없는 것이요, 또한 하나님이 인간을 끄시면 안 끌려갈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인연 가운데서 내용과 목적이 일치할 수 있는 인간으로 지으신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지어 놓은 사람을 보고 하나님이 찬양할 수 있는 어떠한 말씀이나 시가 있다면 그것은 세상의 어떤 시인이나 문인도 표현하지 못하는 최고의 작품이 될 것입니다. 그 대상은 하나님도 아니요, 만물도 아니요, 오직 만물을 대표한 인간인 것입니다.

겉보기에 아무리 흉하고 못난 사람이라도 그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넘칠 수 있고,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이 싹틀 수 있고, 하나님의 사랑의 노래가 읊어질 수 있습니다. 타락한 인간으로서는 꿈에서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고차적인, 하나님을 중심삼은 고귀한 가치를 지닌 인간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 모습은 한 개인의 모습이로되 하나님은 그를 우주를 대표한 모습으로 보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왜냐? 모든 신경을 집중해서 온갖 정성을 들여 가지고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인류 시조의 모습이었습니다.

주위에 지어진 모든 만물은 인간에게 있어서 하나의 자극적인 상징체였습니다. 들려오는 새소리는 아담의 심정을 울려 파동 시킬 수 있는 하나의 동기였습니다. 나비나 벌, 그 외의 모든 만물을 아담 해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하나의 상징적인, 자극적인 상징체로 지었다는 것입니다. 불어오는 바람도, 흘러가는 물도, 들에 있는 풀 한 포기도 모두가 아담 해와를 사랑한다는 그 실체의 표상체로서 지으셨습니다. 인간을 만물의 중심으로 두시고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자리가 얼마나 복된 자리입니까? 하나님이 보시기에 사랑스러운 인간이었고, 하나님의 품에 품고는 영원히 영원히 놓지 않고 싶었던 인류 시조였습니다.

아담의 손길을 붙들고 ‘야! 아담아, 너와 나는 그 누구도 영원히 뗄 수 없는 인연을 가진 사이야.’ 하시면서, 새로운 계획을 하고, 새로운 약속을 할 수 있는 한 시간이 있기를 고대하시던 아버지이십니다.

영원 불변한 사랑의 인연 가운데 지음 받은 인간은 평화의 중심이 되고 핵심이 될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럴 수 있다는 자신을 가지고 천하 만상을 다 품고 사랑해야 합니다. 아버지와 아들딸이 손에 손을 맞잡고 심정이 사무친 가운데 ‘아담아!’ ‘네, 아버지!’ 하면서 천지의 모든 기업을 상속해 주고 그것을 받을 수 있는 한 시간을 하나님은 얼마나 고대하셨습니까? 이런 자리를 갖고 싶으신 것이 하나님의 소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소원의 한 날, 하나님께서 고대하시던 소원의 한 날을 이루지 못한 채 인간은 타락해 버렸습니다. 즉 그런 사랑의 품을 동경하던 아담 해와가 타락해서 죽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요, 기쁨의 전체였던 그 아담 해와가 타락으로 인해 사망세계로 떨어진 것입니다. 죽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사랑하는 자녀가 죽은 것을 보시고 저주로 돌이켜야 할 입장에 섰던 하나님, 사랑하는 자식을 잃어버리고 자녀의 인연으로 지었던 인간이 일시에 저주의 조건으로 등장하는 이런 비참한 입장에 선 하나님, 아들을 아들이라 할 수 없고, 딸을 딸이라 할 수 없으며, 사랑의 인연 가운데 몽땅 내 손으로 품을 수 있던 인간을 영원히 품을래야 품을 수 없게 된 그 인간의 모습을 바라보아야 했던 하나님, 하나님을 이렇게 비참한 지경에 떨어지게 한 것이 인간시조의 타락이었음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부모의 심정

오늘날 그 어떤 문학가가 표현하려 해도 표현할 수 없는 그런 고차적인 사랑과 고차적인 가치의 권한이 타락으로 말미암아 이렇게 변질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타락을 목격한 분이 누구냐 하면,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아버지 입장에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자식을 낳아 길러 본 부모들은 알 것입니다. 애지중지한 그 아들딸을 통하여 복을 받고 싶고 행복도 느끼고 싶을 것입니다. 또한 기뻐하고 복 받을 수 있는 기준이 있으면 그 아들딸에게 영원히 남겨 주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한 소망의 마음을 가지고 그 아들딸이 되기를 타락한 인간도 바라고 있습니다. 밤이나 낮이나 그 아들딸이 고이 자라, 만국으로부터 높임을 받고 만세에 칭찬을 받을 수 있는 아들딸이 상처를 입을까 보호하고 애달픈 심정으로 초조해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타락한 부모의 마음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품안에서 젖을 먹여 키우는 어머니의 간절한 마음, 자식이 똥 싸고 오줌을 싸서 냄새가 나더라도 사랑으로 그 환경을 잊어버릴 수 있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타락한 부모가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사랑의 주체 되시는 하나님께서 본연의 심정을 통하여 아담과 해와를 사랑하고 싶었던 그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겠습니까?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아기를 품고 키울 때에 잠자리에서도 노래를 불러 주고 혼잣말로 얘기도 해 주며 잘되기를 바라는 그 마음은, 부모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못나고 부족한 자식이라도 그 자식에게 결함이 있으면 부모의 마음은 그 가슴에 몽땅 젖도록 최고의 고통을 겪는 것이요, 이것이 풀어지면 그 고통에 비례한 만큼 기쁨이 동반되는 것입니다. 타락한 부모의 마음도 그러한데 하나님의 마음이야 어떠하시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원리를 통해서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시되 온 천하가 몽땅 굴복할 수 있는 사랑, 온 전체가 그를 따를 수 있는 권위를 주시되 온 전체가 완전히 고개 숙일 수 있는 권위, 그런 최고의 사랑과 최고의 권위를 생각하고 인간에게 책임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찌하여 인생 가운데 책임분담을 세우셨던고? 전지전능하신 분이니 그 전지전능한 창조성까지 부여하고, 또 영원불변한 사랑의 주체이시니 그 사랑의 주체를 대신할 수 있는 자리에 세우기 위해서 책임분담을 주시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복의 조건이 되는 것이요, 전체를 점령할 수 있는 하나의 열쇠와 같은 것이기에 이것을 안 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책임분담이 문제가 되어서 타락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책임분담과 나

여러분은 제삼자의 입장에 서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과 책임분담과 나 이런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책임분담을 하기 위해 올라가던 과정에서 그 책임분담을 어기려 할 때 하나님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여러분은 축구경기를 많이 해 보았을 것입니다. 자기편의 볼이 센터라인을 넘어서면 좋아서 ‘야!’ 하고 소리치지만 볼이 센터라인을 넘어 자기편으로 오면 마음이 얼마나 초조합니까? 구경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올림픽같이 그 경기가 크면 클수록, 그 배후의 인연이 크고 내용이 넓으면 넓을수록 초조감은 거기에 비례해서 커지는 것입니다. 국가끼리 대결할 때는 그 순간이 아주 심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 참가한 선수들은 공을 차더라도 정성을 다해서 차야 합니다. 한 번만 잘못 차면 전체에 영향을 줍니다. 그런 경험을 해 보았어요? 공은 단번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상대방이 공을 차서 공이 들어가려는 찰나에 골키퍼는 있는 정성을 다하여 공을 향해 움직여야 합니다. 그런데 멍청하게 다른 곳을 보고 있다면 얼마나 기가 막히겠어요? 그러나 축구에서는 그까짓 한 골 먹으면 다음에 다시 이길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 해와 앞에 놓여진 책임분담은 한번 잘못하면, 억천만세 동안 인간에게 암이 될 수 있는 무서운 구렁텅이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책임을 해야 할 입장에 있는 아담 해와이기에 하나님께서는 사탄의 공박이 있을 것을 예상해서 따먹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선악과를 따먹었으니, 그걸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했겠느냐는 것입니다. ‘본래 태어나기를 저렇게 태어났기 때문에 그렇지. 잘한다, 잘한다.’ 하고 후원했겠어요? 그런 입장에서 저끄러지는 경각에도 하나님은 너만은 그러지 않으리라고 믿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염려하는 마음이 두 갈래 길에서 얼마나 뒤넘이쳤겠어요? 타락 직전에 가기까지 인간의 권위를 얼마나 주장하고 싶었겠어요? 그 권위를 세워 가지고 사탄을 굴복시키고 싶으신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겠어요? 이렇게 애달픈 자리에서 인간은 타락한 것입니다. 이것은 천년간의 한으로 탕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억천만세에 수많은 억조창생이 전부 죽음의 고비에 걸릴 함정이 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셨으니 얼마나 분했겠습니까? 그러한 비참한 상처를 입힌 인간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해 볼 때 인간은 할 말 없는 존재입니다.

세상에서도 환갑이 넘어 낳은, 즉 만득자인 7대 독자가 죽는다고 생각하면 절망 중에 절망일 것입니다. 젊으면 또 낳을 수 있지만, 만득자로 태어난 그 7대 독자가 잘 자라지 못하고 죽는다면 7대권을 계승하려던 조상들의 마음이 얼마나 애가 타겠어요?

조상들은 자기의 후손, 자기의 핏줄을 통해서 세계에 없는 만복을 받고 싶어합니다. 그러니 자식이 죽는다면 그 부모는 따라 죽고 싶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은 7대 독자가 아닌 영원한 독자입니다. 하나밖에 없는 아담을 중심삼아 가정을 이루게 하여 천지의 대업을 세우려 하셨는데, 그 아담이 죽었으니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이렇게 일이 틀어졌을 때 어떠했겠어요? 내가 결혼하고 싶은데도 결혼 못 할 때의 그 안타까움에 비교되겠어요? 부모는 천년만년 같이 살고 싶은데 7대 독자가 지금 몹쓸 병에 걸려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다고 한다면 그 부모의 심정이 어떠하겠어요? 여러분의 아들딸이 지금 숨이 넘어가고 있다고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그렇다면 부모가 소리치겠어요, 안 치겠어요? 그 부모는 죽어 가는 자식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체면과 위신을 다 버리고 그 방법을 쓸 것입니다. 어떤 원수가 있어 그의 영원한 종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자기의 아들딸을 살릴 수 있다면 부모는 그렇게 할 것입니다. 그것이 이해가 됩니까? 그 자식을 살리는 어떤 방법이 있다 할진대 부모는 위신과 체면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자식을 살릴 수 있다면 부모가 종이 되어도 좋다는 것입니다. 한 날의 뜻을 세울 수 있는 그 한 실체인 아들을 찾기 위해서는 천만년의 한을 푸는 제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타락한 부모도 그러하거늘 하나님이야 오죽 하시겠습니까? 그런 아들딸이 접경을 넘어 영원히 이별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비참함이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기성교회에서 말하듯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기는 쉽지요. 그러나 그렇게 간단할 것 같으면 이렇게 복귀섭리역사가 6천년이나 걸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비참한 검은 구름이 끼는 환경으로 접촉해 들어가는 자식을 바라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큰 상처를 입으셨겠습니까? 이 땅 위에 수많은 인간들이 왔다 갔으나 지금까지 그러한 상처를 입어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 고비를 넘어갔지만 그 상처를 치료할 수 있는 곳까지는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하나님이신 것을 우리는 다시 한번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사정도 모르고 천당에 가겠다고 해서야

사람들은 교회에 갈 때 성경이나 들고 가면서 ‘예수만 믿으면 천당 갑니다. 예수 믿고 천당 갑시다.’ 하고 있으니 기가 막힙니다. 그렇게 간단하게 갈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렇게 해서 갈 수 있다면 그렇게 믿고 나오던 기독교가 왜 점점 망해 나오고 있습니까?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천당에 가려면 하나님이 어떠하셨던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천당에 간 뒤에 하나님이 비참하셨다는 사실을 안다면 얼굴을 들 수 있을 것 같아요? 하나님의 사정도 모르고 천당에 간 사람들, 얼굴을 들 수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이렇게 비참했던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살면서 ‘아버지, 나 천당 가게 해 주소. 나에게 복 주소.’ 할 수 있어요?

이러한 엄청난 슬픔과 사무친 분노가 백일하에 드러났을 때 그러한 하나님을 보고 그 앞에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면서 얼굴을 들 수 있겠어요? 그럴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진짜 사탄입니다. 사탄은 이러한 하나님의 사정을 유린하면서 하나님을 배반해 나왔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정을 알고서도 얼굴을 들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사탄의 후예나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람은 지옥에 가야 됩니다. 이렇게 비참하고 억울하신 하나님이신데 오늘날의 기성교회에서는 전지전능하시고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슬프긴 뭐가 슬프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렇게 비참한 하나님이십니다.

천국을 가려면 그 사연을 땅 위에서 알아 가지고, 내 힘이 미치지 못하여 풀어 드리지 못하면 눈물이라도 흘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풀어 드리지 못하는 자신을 탄식하면, 내가 더 불쌍한 자리에서 탄식의 주인공이 되면 탄식하는 그 사정을 하나님이 모르시겠습니까? 이렇게 탄식하면 그것이 조건이 되어 하나님과 인연이 맺어지는 것입니다. 뻔뻔스러워 가지고는 인연이 맺어지지 않습니다.

아담과 해와가 타락할 때 천지가 어떻게 되었겠어요? 새까맣게 되었겠어요, 하얗게 되었겠어요? 세상에서도 그렇잖아요? 젊은 부부가 살다가 한 갈래가 갈라져 나가든지 죽든지 하면 얼마나 몸부림칩니까? 나는 그러지 않을 거라고 자신하지만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가 그럴 수 있는 후보자들입니다. 아무리 잘난 사람도, 대한민국에서 제일 가는 권세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고비 길에는 장사가 없습니다. 어디, 거기에서 장사 될 수 있다는 사람 손들어 보세요. 없지요? 아무리 잘나고, 아무리 뚱뚱하고, 아무리 말라깽이고, 아무리 죽어질 그런 순간에 있는 사람이라도 그것을 보면 눈물을 흘리게 되고, 숨이 막히게 되고, 가슴이 터지게 되고, 기가 막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했겠어요? 너 그만두어라. 또 창조하지. 그러셨겠어요? 그랬다면 얼마나 좋겠나?

여러분은 여러분의 아들딸이 태어났다가 죽고 나면 언제나 못 잊을 것입니다. 그 자식이 살아 있을 때 뭐 먹겠다고 할 때 왜 못 사 주었나? 무엇을 입고 싶다고 했을 때 그것을 왜 못 사 주었나? 이렇게 먹겠다는 것 못 사주고 입겠다는 것 못 입혀 준 그 모든 사연이 걸려 한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에게도 그런 마음이 있기 때문에 타락한 인간을 복귀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이 없으면 복귀라는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내 위신과 권세를 자랑하지 말라

아담 해와가 자랄 때에 하고 싶고, 바라던 모든 것을 다 해 주지 못한 것이 부모이신 하나님의 한입니다. 그 마음이 있기에 복귀역사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식으로서 하나님 앞에 효의 도리를 세우고 천륜의 법도를 세워 정착점을 마련해야 할 것이었는데 그것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한 자리에서 태어난 오늘의 인간이기 때문에 탄식과 저주와 불만의 비탄 가운데서 신음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입장에 있는 우리가 하나님의 공적인 터전을 중심삼고 하늘 편에 서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오늘의 내 위신과 권세를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 뼛골 사이에서 스며 나오는 타락 전의 본연의 정, 즉 본성의 정을 불러일으켜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타락했던 조상의 입장에 서서는 안 됩니다. 때문에 타락한 부모들은 울어야 되고 눈물 흘려야 됩니다. 그 후손으로 태어난 우리들도 당연히 고생해야 됩니다. 비참해져야 됩니다. 죽어 나자빠져야 됩니다. 쓰러져야 됩니다. 억울한 자리에 서야 됩니다. 그것은 당연지사입니다. 내 뼛골 깊이 숨겨져 있는 본성의 정을 중심삼고, 타락 전 즐거워하시던 아버지를 동경하면서,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아담 해와가 하나님의 마음에 준 그 상처를 부여안고, 타락하지 않은 본성의 심정을 가지고 이루어 드릴 수 있는 내 자신이 되지 않고는 하나님과 인연맺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의 종교에서는 죽을 때까지 정성을 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막 12:30)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 자리가 어떤 자리냐? 타락권 내에 떨어진, 하나님의 저주권 내에서 태어난 인간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뼛골 사이에 있는 본성의 심정을 유발시켜 가지고 인간을 사랑하고 싶으셨던 그 아버지의 심정이 얼마나 비참하셨겠느냐는 사실을 아는 자리, 그러한 심정을 체휼할 수 있는 자리가 바로 정성들이는 자리입니다. 그것을 느끼기 위해 몸부림칠 때라야만이 하나님과 나와의 인연이 맺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여러분이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이것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동기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라 했더니 오늘은 바쁜데, 어디 가야 할 텐데 하면서 '다했습니다.'라고 말하면 그것이 다한 것입니까? 그리고 장가가려 했는데 '그만 둬야겠다.' 시집가려 했는데 '시집가서는 안 된다.'고 하니 '그만둬야겠다.' 하며 돌아선다 해서 그것이 다한 것입니까?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 한계점이 무엇입니까? 여러분들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럭저럭 산다고 해서 그것이 다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그 한계점을 똑똑히 알아야 됩니다. 그것은 아담 해와가 타락하던 때의 심정의 기준을 능가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염려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내적인 심정이 어떻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리니 여러분들은 명령을 받고도 무책임한 자리에 서서는 안 되겠습니다.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삼고 아담 이상의 심각한 마음으로 생명을 걸고 내 모든 전체를 투입해야 합니다. 폭발하기 위해서 날아가는 폭탄같이 목적지를 향해서 달려가려는 마음이 간절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망선을 넘어 정성을 들이는 그 기준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상 가운데서 천하 만민이 몽땅 하나님을 중심삼은 사랑을 노래하고, 하나님의 품에 안길 수 있는 그 기준을 넘어서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억울하고 분하신 분이십니다. 그것은 누구 때문이냐? 바로 나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아니라고 생각하겠지요? 내가 몇천년 전 조상하고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하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다 썩어 가지고 보기 싫게 앙상한 가지만 남은 고목에 싹이 나온 것을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은행나무든 느티나무든 그 싹에게 나이가 몇이냐고 물었을 때, 금년 봄에 나왔으니 석 달 되었다고 하면 되겠어요? 내 나이는 심으신 할아버지 때부터 뿌리가 나기 시작했으니 몇이라 해야 되겠어요?

그 고목의 순과 같은 사람이 누구이겠어요? 바로 여러분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지금 몇 살입니까? 열 다섯 살, 스무 살로 생각하지 말아요. 여러분들이 생각하고 있는 나이에 6천년을 더해야 합니다. 6천년이 걸리적거리니까 그냥 열다섯 살이니, 스무 살이니 하는 것입니다. 6천년은 다 같으니까요. 사실은 몇 살이냐고 하면 ‘6천 몇 살’ 그래야 됩니다. 그런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하겠지만 심정의 세계는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신앙자에게는 극단적으로 비참한 자리도 필요

여러분은 살기는 살았는데 뿌리가 하나밖에 남지 않은 노송나무가 폭풍우를 맞아 홍수에 밀려 벼랑이나 언덕배기에 간들간들 거꾸로 매달려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소나무든 오리나무든 미루나무든…. 그런데 폭풍우가 계속 몰아치면 나무들이 얼마나 기가 막히겠어요? 그 나무가 비가 멎기를 바라겠어요, 안 바라겠어요? 생각해 보세요. 바라겠어요, 안 바라겠어요? 여러분들은 생명을 위해 그렇게 간절히 바란 때가 있었습니까?

그 이상 비참한 것이 어디 있어요? 뿌리만이라도 살아 있으면 소망이나 있을 텐데 이것은 뿌리가 다 썩어져 가지고 이미 물렁물렁해진 무와 같으나…. 그런 무 꼭지에는 잎이 붙어 있더라도 그것은 어차피 썩어지는 것입니다. 주인이 뽑아 주더라도 그것은 전부 다 외양간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격입니다. 지금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뿌리는 언덕배기에 딱 매달려 있고 몸뚱이는 바닷가로 떨어져 있는데 여기에서 살겠다고 하니 처량해요, 안 처량해요? 이래 가지고도 좋다고 춤을 춰요? 그가 아무리 생명력을 자랑할지라도 솟구쳐 올라와 위에 있는 벽에다가라도 뿌리를 박지 않으면 살길이 없습니다. 그러니 뿌리를 찾아 올라가야 합니다. 나무를 다 뚝 잘라 버리고 뿌리에서 새로 돋아난 가지를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싹이 나오려면 지금까지 있던 나를 잘라야 합니다. 그런 마음이 있어야 종자라도 남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저 ‘나를 잘라 버리면 큰일난다. 나는 살아야 된다’고 하다가는 전부 다 흔적도 없이 망하게 됩니다.

바다에서 풍랑을 만난 큰 배를 바라볼 때 물결이 높아 돛대가 안 보일 적에는 배가 물 속에 들어간 줄 알았다가 다시 보일 때는, '휴!'하고 한숨부터 나오지요? 어때요? 실감나요? 보는 것도 그런데 거기에 타고 있는 사람들은 어떠하겠습니까? 기관장은 어떨까 생각해 보았어요? ‘너 잘 만났다.’ 그럴까요? 들어갈 때는 가슴이 철렁해 가지고 ‘아이구 하나님, 나 죽습니다.’ 하면서 하나님을 불렀겠지요? 파도 밑으로 내려갈 적마다 하나님! 하고 부르고 올라올 적마다 ‘감사합니다.’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랬겠어요, 안 그랬겠어요? 생각해 보세요.

사람에게는 그런 전력(前歷)이 필요합니다. 극단적인 비참한 자리에 있어 봐야 합니다. 십자가를 등에 지고 골고다를 향해 가며 조롱을 받던 예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유대인들은 예수님에게 ‘이 자식아, 네 꼴이 뭐냐? 이 목수의 자식!’ 하면서 조롱했습니다. 그때에 여러분들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예수님에게 뭐라고 했을까요? 그들과 같이 욕했을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보고 '이 자식아!' 한다면 야단나겠지만 그때 사람들의 입장으로서는 안 그럴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유대교인들이 전부 다 여러분들만 못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줄 알아요?

수천년 동안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고 기다리던 메시아로 왔다는 작자가 어떠했습니까? 사람들을 모아 가지고 이 동네로 저 동네로 몰려다니고 쫓겨다녔습니다. 이런 예수님을 유대교인들은 메시아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무친 심정을 이어야 할 아들의 입장에 있었기에 핍박받는 것을 당연지사로 여겼습니다.

몰리고, 매맞고, 구박당하고, 조롱받는 그것을 삼킬 수 있는 예수님을 볼 때에 하나님은 예수님을 동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물론 겟세마네 동산에서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피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지만, 그것은 인류를 위한 기도였습니다. 그렇지만 일단 결정이 난 뒤에는 그것을 몽땅 받아들였습니다. 용자의 모습을 갖춘 장군이라면 이왕 죽을 바에야 소총 앞에서 넘어지지 않고 원자탄에 맞아 죽으려고 할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민족적인 저주와 조롱이 큰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가야 할 천륜의 길은 너희들이 아무리 해도 혼란시킬 수 없고 막을 수 없다는 마음으로 예수님은 아버지의 심정을 느끼며 싸워 나왔습니다. 선생님은 그렇게 알고 있어요. 누구 말을 듣고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알아보니까 그렇더라는 것입니다.

슬픈 하나님이심을 확실히 알아야

예수님은 본연의 아담과 해와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슬퍼하시던 하나님의 그 슬픔의 기준을 넘을 수 있는 내적인 심정을 갖고 자신의 명예와 영광이 일시에 수포로 돌아가는 죽음의 자리를 늠름하게 밟고 넘어 하나님을 부여안고, 죽어도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도 하나님을 모시겠다는 결심을 했던 것입니다. 이 결심 때문에 하나님이 도리어 예수님을 위로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으로 인해 천국의 터전이 이 땅 위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위로 받을 수 있는 터전 없이는 천주통일이 이뤄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하나님이 슬프신 분이라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이 극장에 가서 영화 구경을 할 때라도 심각한 자리에 서서 그것이 남의 일 같지 않고 내 일같이 느껴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길을 가는 데 방해가 되는 원수 같으니 어떤 악한 무리가 나올 때 그들을 잡아 치우겠다는 마음을 갖고 극장에 가면 죄가 안 됩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간다면 극장 아니라 그보다 더한 곳을 가도 괜찮습니다.

악당들이 사는 소굴이라도 사기꾼 모양을 해 가지고서라도 그들을 끌어올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간다면, 또한 원수를 한칼에 전부 쳐 버리겠다는 결의를 갖고 나선다면 하나님의 용자로 세워집니다. 그런 사람은 천하 어디를 가든 화제의 인물이 됩니다. 그럴 것 같아요, 안 그럴 것 같아요? 「그럴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얼마나 그럴 것 같아요? 여러분들, 생각해 보세요. 잘라 죽여 버리고 싶은데 그럴 수 있어요? 생각하면 그럴 것 같은데 하겠지만 그 자리는 심각한 자리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람도 심각합니다. 여러분들은 모르겠지만 생명을 내놓고 덤벼드는 것입니다. 생명을 뿌리지 않고는 생명의 씨를 거둘 수 없는 것입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심정을 가지고 최상의 길로 인류를 찾아오셨기 때문에 그런 심정을 가진 사람들이 지금까지 역사를 발전시키는 데 도움이 되어 왔던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 편입니다.

하나님은 다 잃어버리고 슬퍼하시는 분이십니다. 인간이 자연적으로 발생한 병이 나서 죽었다면 그래도 괜찮겠는데, ‘따먹으면 죽는다.’고 경고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경망스럽게 따먹었다는 것입니다. 이걸 볼 때 얼마나 얄미웠겠습니까? 그것을 따먹으면 죽는다고 했습니다. 반드시 죽는다고 했습니다. 이 말을 귀에 불어넣어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좋다고 따먹었던 것입니다. 인간은 하지 말라면 더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통일교회 나오지 말라 하면 더 나옵니다. '나와라, 나와라.' 하면 안 나오는지 모르겠지만 나오지 말라고 몽둥이로 후려갈기면 새벽같이 들어와 앉아 있을 것입니다. 몽둥이 들고 나오시는 선생님은 몇 시에 나오시겠나 하면서 말입니다. 이런 청개구리 같은 성격 때문에 일이 저끄러진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보시고 ‘잘했구만. 뭐 그럴 수도 있지.’ 하시겠어요? 그럴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멍하니 낭떠러지로 갔다가는 죽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송장이 되는 거예요.

예수님을 믿으면 무슨 법도를 세울 수 있느냐? 사랑의 법도를 세울 수 있습니다. 만일 동네방네에서 전부 다 반대하고 부모 형제가 반대하는데도 죽자살자 하면서 모든 반대를 물리치고 백년가약을 맺고 약혼식을 해 놓은 신랑신부가 있는데, 그 신부가 신랑 되는 사람에게 ‘다른 남자한테 잠시만 시집갔다 올 테니 기다려 주세요.’ 하면 어떻게 하겠어요? 그 말이 통하겠어요, 안 통하겠어요? 절대로 안 통합니다. 하나님이 이런 경우를 당하신 것입니다. 그런 짓을 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이 다시 만나 주시겠어요? 원수입니다. 흉물단지예요. 세상에 그보다 못한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천하를 둘러보아도 그보다 못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너희가 사랑의 법도를 몰라서 그렇게 하였으니 이제는 안 그러면 되지 않겠느냐?’고 하시겠어요? 그것이 통할 수 있겠어요? 그러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사람 하나 죽인 것은 몇백 번, 몇만 번이라도 용서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앞에 세워질 수 있는 단 하나밖에 없는 상대적인 중심존재가 사랑의 법도를 파탄시켰으니 그것을 어디 가서 찾을 것이냐? 이것을 찾아 세우기 위해서 예수님이 사랑의 종교를 가지고 오신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에서 사랑을 부르짖고 있는 것은 바로 그 이유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무슨 선악과를 따먹고 죽었다고요? 야밤중에 다니는 장님보다도 더 어둡군요. 그렇게 믿고 가면 얼마나 수월하겠습니까? 그렇다면 통일교회 문 선생님이 얼마나 편하겠습니까?

아담 해와를 빼앗긴 하나님의 위신을 세워 드리려면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위신을 세워 드리느냐? 타락할 때보다 더 사랑받을 수 있는 아들딸을 찾아 세워 드려야 합니다. 그러려면 믿음에 있어서도 그때의 아담 해와보다 높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심정과 인격에 있어서도 아담 해와 이상이어야 합니다. 사탄이 ‘하나님이 선악과 따먹으라고 하던?’ 하면서 ‘그것을 따먹으면 눈이 밝아진다’고 꼬일 때 거기에 빠져 넘어가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때도 아담 해와보다 더 나아야 되고 인격에 있어서도 사탄에게 ‘넌 뭐야, 이 자식아! 넌 종이야.’ 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또한 심정에 있어서도 ‘사랑의 주인이 누구냐?’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오늘날 통일교회에서는 무엇을 하자는 것이냐? 믿음에 있어서 그 이상의 사람을 만들자는 것입니다. 좋아요, 나빠요? 좋습니까? 얼마나 좋아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어떤 방법으로 감사한다 해도 못다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거짓말이라면 돌무더기에 맞아 죽어도 되지만 그것이 사실이라면 얼마나 감사해야 되느냐? 죽어 가지고 부활할 때까지 감사해야 됩니다. 그렇게 된다면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은 예수가 기뻐하던 부활의 아침을 맞는 데 있어서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도 부활한 예수를 만날 때 ‘때가 이르기 전에는 나를 만지지 말라.’ 해서 가까이 못 갔습니다. 부활의 아침을 맛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아버지 앞에 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죽음의 고통을 느껴야 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데에 있어서는 절대적으로 믿어야 합니다. 믿지 못한 역사의 굴레를 가진 인류이기 때문에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믿어야 합니다. 그렇게 믿어야 천당 가는 것입니다. 뭐 성경 끼고 교회에 다닌다 해서 예수 믿는 것입니까? 십자가를 등에 지고 골고다를 넘어가더라도 ‘나는 부활한다!’ 고 믿어야 합니다. 누구보다도 더 적극적으로 믿으라는 것입니다.

옛날 사탄은 경계선을 그냥 넘어 들어와서 아담 해와에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신앙자는 권한과 인격을 갖추어 사탄이 그 앞에 오기를 무서워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천사장이 그 앞에 오기를 무서워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 많이 한 사람들이 사탄권 내에 있겠어요? 정성의 내용을 가져서 사탄이 그 앞에 나타날 수 없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심정은 어디에서부터 출발해야 되는가? 여기에 있는 여러분들 중에는 처녀 총각이 더러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심정의 주인공이 누구라고 생각해요? 시집가면 남편이고, 남편은 부인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것이 아닙니다. 심정의 뿌리, 심정의 주인공은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인류는 복중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 복중생활에 접붙여 주는 역할을 해 주는 것이 종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된 종교는 복중생활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통일교회도 복중생활을 할까요? 그것을 원해요, 원하지 않아요?

그러면 그것을 어떻게 해야 되느냐? 인격에 있어서 아담 해와의 기준을 넘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심정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배반하여 쫓겨나고 하나님에게 불의의 결과를 가져오게 하는 입장에 서면 하나님이 얼마나 슬퍼하시겠습니까? 지금까지 상처를 입힌 그 죄도 용서 받을 수 없는 일인데 어떻게 또다시 비참함을 안겨 드리는 노정을 거듭해서 갈 수 있겠는가? 나는 죽어도 그 길을 못 가겠다는 심정을 가져야 합니다. 이런 심정의 기준을 가져야 하나님과 일치될 수 있고 하나님 편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시냐? 무슨 보좌에 앉아서 영광 받는 하나님이신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류를 대하여 하나님은 지금까지 무엇을 하셨느냐? 이 인류를 구원시키시느라고 매일 통곡하시고 계십니다. 그런 입장에서 인류를 이끌어 오시는 것이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비참한 분입니다. 비참 가운데 떨어진 인류를 구원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은 잠든 인류를 깨워서 ‘와라! 와라!’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 가지고 가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책임분담을 해야 하는데 이것을 대신해 줄 수 없는 입장에서 일을 하시려니 얼마나 힘이 들었겠습니까?

하나님은 세상의 낙오자들을 붙들고 섭리해 오셨으니

오늘날 종교의 문을 두드리며 참된 길을 추구하고 나선 사람들을 살펴보면 세상의 낙오자들이 많습니다. 통일교인들도 가만 보면 저렇게 얌전하게 앉아 있어도 세상에서 다 멍든 사람들입니다. 이 시대, 이 세상에서 쓰러지고 나자빠진 무리들입니다. 집에 있어도 시원치 않고, 학교에 가도 시원치 않고, 노는 것들을 보아도 마음에 안 들고, 사회를 보아도 그렇고, 세계를 보아도 그러니, 그렇다고 전부 쓸어버릴 수도 없고, 그러니 몸부림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보고 사느니 차라리 청춘시대에 ‘나는 가노라.’ 하며 깨끗이 가 버리는 것이 도리어 근사해 보인다는 것입니다. 지지리 못난 자에게도 허리를 굽실거려야 하니 기가 막힐 게 아닙니까? 특히 단순한 아가씨들이 그런 짓 잘 합니다. 그것이 똑똑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지옥 갑니다. 여기 서 있는 사람도 그런 것을 많이 느껴 보았습니다.

그런 경우도 당해 봐야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게 하고 난 후의 인생길에 암초가 부딪치느냐, 평화의 광야가 전개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통일교회에 들어온 여러분들의 마음을 들여다보면 전부 다 멍들고 구멍 뚫어지고 인생행로에 있어서 패배자라는 낙인이 찍혀 있습니다. 한두 개 만이 아니라 너저분하게 구멍이 뻥뻥 뚫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 하나님이 얼마나 비참합니까? 하나님은 지금까지 이 땅의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섭리하실 때 어떤 사람을 중심삼고 했느냐? 쓰레기 같은 인간들을 중심삼고 구원섭리하셨습니다. 얼마나 기가 막힙니까? 잘났다는 녀석들은 전부 다 도망가고, 지지리도 못나고 상처투성이고 병신이며 곰배팔이고 눈이 찌그러지고 언청이인, 팔방미인이 아닌 팔방병신만 남아 있어서 그들을 중심삼고 섭리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런 인간들을 수습해서 섭리해 나오신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도 모르고 여러분들은 통일교회에 들어와 가지고 아 내가 뜻을 위해서 일한다고 했는데 왜 나를 몰라주느냐고 하겠지요? 하지만 그럴 수 있는 자기 자신인지 본인의 역사를 한번 들추어보십시오. 뭐 마음에 걸려 그저 쫓아내지나 않을까 하고 가슴이 두근두근해야 할 텐데 도리어 남을 쫓아내려는 사람이 있으니 그것이 문제입니다.

쓰레기를 모아 재생시키고 수리하는 곳을 재생창이라 합니다. 교회라는 것은 인간을 다시 수리할 수 있는 재생창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통일교회는 무슨 교회냐? 통일이니까 몽땅 재생시키는 교회입니다. 몽땅 재생시키는 곳입니다.

복귀하려면 무엇을 중심삼고 해야 하느냐? 사랑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사랑 때문에 타락했으므로 복귀하려면 타락 전의 사랑보다 더 커야 합니다. 그것이 복귀 후의 사랑입니다.

그러면 그 사랑을 내가 태어나게 할 수 있습니까? 인간 스스로 나게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누가 해 주느냐? 부모이십니다. 하나님이 나게 해 주십니다. 그러기 위해서 여러분들은 여기에다가 접붙여야 합니다. 뿌리와 줄거리 모두 다를 하나님 가지로 접붙여야 합니다. 이런 일을 하나님께서는 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접붙이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얼마나 비참한 노정을 걸으셨는지를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 것을 생각할 때 하나님은 웃고 살았겠어요, 가슴 치고 통곡하며 살았겠어요? 여러분들이 키우던 자식이 죽어서 그 자식을 붙안고 눈물을 흘릴 때, 여러분은 ‘아버지가 이런 일을 당하셨을 때 얼마나 고통이 크셨습니까? 그 고통을 알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런 일을 당하게 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며 감사해야 됩니다. 아버지를 잃었던 자신인 것을 생각하고 역사적인 과정을 거쳐오면서 해 오신 아버지 의 일 전부가 남의 일이 아닌 내 일이라는 것을 느낄 줄 알아야 합니다. 6천년 역사상에 있었던 모든 일을 남의 일이 아닌 내 일과 같이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구원 받는다는 것은 6천년 역사노정이 전부 승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이 승리하게 된다는 것은 6천년에 쌓였던 역사적인 모든 것이 부활할 수 있는 시대를 맞이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되었다면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모든 것을 부정하고 나에게 오라 하신 뜻

아담과 해와가 타락할 때도 비참한 하나님이었지만 그 아담 해와를 다시 찾으시기 위해 섭리하실 때는 더 비참한 하나님이었습니다. 찾아간 자식에게 추방당하고 배신당하신 하나님, 원수의 품에 안겨서 원수와 하나되어 죽자살자 하며 살고 있는 그 모습을 담 너머로 바라보고 계시는 신세가 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의 신세가 어떠했겠습니까?

그러면 사탄은 이것을 보고 뭐라 했겠습니까? ‘하나님이 왜 저렇게 되었노?’ 하면서 ‘당신의 아들이 이렇게 되었소. 나와 이렇게 같이 있소.’ 하고 비웃는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살고 있는 환경 그 자체가 사탄이 하나님을 조롱할 수 있는 재료입니다. 하나님과 알뜰하게 잘 살면, 참다운 내정이 거기에 깃들 텐데, 사탄과 하나되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사탄과 같은 취급을 받을 수 있는 재료가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전부 다 끊어 버리고 청산 짓지 않고는 나에게 올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누구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지 않고는 나에게 돌아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효와 충의 도리를 다하겠다고 몸부림쳐 봤습니까? 지금까지 우리는 그저 습관적으로 살아 왔습니다. 생활 무대에 젖어 있는 우리의 내적인 심정은 사탄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참소할 수 있는 재료가 되었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기쁨으로 맞기 위해서 인간을 찾아오셨지만, 또다시 십자가를 짊어지게 되심으로 말미암아 슬픔을 가슴에 안고 눈물을 흘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6천년 전 인간 시조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슬펐던 그 하나님이 나를 만남으로 말미암아 또다시 눈물을 흘리고 계시다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얼마나 비참한 분이신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심정의 십자가를 지고 오시는 것입니다, 심정의 십자가를.

아담가정에 있어서 타락한 아담 해와를 제쳐놓고 가인과 아벨을 중심삼고 아벨을 통하여 아담가정을 복귀하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쓰셨겠습니까? 이들이 정성들인 심정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충성할 수 있는 인연을 가지기를 얼마나 고대하셨겠습니까? 하루 이틀 바라셨겠어요? 수십년 동안 바라셨습니다.

그런 과정에 있어서 어느 한 날을 정하여 복귀하시려는 그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초조하셨을 것인가? 그런데 이것이 가인으로 말미암아 파탄되었을 때 아버지의 마음이 어떠하셨겠습니까? 그로부터 1,600년 후 노아 때에 이르러 그것을 다시 수습하기 위해 120년 동안 노아를 고생시키실 때, 그 아버지의 마음은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또한 120년의 세월이 지나가기를 얼마나 고대했겠습니까? 노아도 120년이 지루했겠지만 그때를 알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은 또 얼마나 지루했겠습니까? 노아는 하나님을 믿을 수 있었고, 명령을 따를 때 위로해 줄 하나의 대상이신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위로해 줄 수 있는 대상이 없었습니다. 언제 어느 때에 하나님을 저버려 또다시 하나님의 가슴에 뭇 자국을 남길지 알 수 없는 노아를 바라보시던 하나님이었습니다. 노아에게는 120년 동안이었지만 이것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하루가 천년 같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천신만고 끝에 이루어진 수고의 터전 위에 하나님의 뜻을 세우려 했던 것이 함이 실수함으로 말미암아 전부 다 무너졌을 때, 사탄은 얼싸 좋구나 했겠지만, 하나님은 모든 환경을 다 잊고 돌아서야 했으니 그 심정이 얼마나 기가 막혔겠습니까? 그것은 또 괜찮다 하더라도 함의 실수를 수습하기 위해서 400년 후 사탄이 제일 사랑하는 데라의 아들 아브라함을 이방에서 끌어내 오기 위해 그 가정을 공략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또 얼마나 수고하셨겠습니까? 그리고 만일 그가 살고 있는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고 내모실 때 아브라함이 순응하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자리마저 떠나야 했던 것입니다. 이런 기막힌 사연이 있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똑똑히 알아야겠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에 움직이지 않으면 역사의 모든 수고가 수포로 돌아간다는 것을 잘 아는 하나님이 그를 찾아 한걸음 한걸음 옮길 때, 그때의 마음이 어떠하셨겠습니까?

아담 때부터 역대의 선조들이 그때까지 배반했던 역사의 한을 회상하면서, 하나님은 그 원한을 밟고 넘어설 수 있는 한 날을 찾아가는 데 있어서 아브라함이 배반하지 말기를 마음으로 얼마나 고대했겠습니까? 여기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서 모셔 드리면 다행이지만 만약에 그렇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마음으로 얼마나 초조하셨겠습니까?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너희 후손이 번성하리라.’고 약속해 주셨지만, 큰 포부와 희망을 갖고 당신 앞에 접근하기 위해 준비한 제물을 통하여서 판가리하려고 하셨을 때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초조했겠는가를,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복귀노정에서의 하나님의 초조함과 안타까움을 생각하라

아브라함은 온갖 정성을 다하고 천번 만번 생각하여야 할 입장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소와 양은 쪼갰으면서도 비둘기는 쪼개지 않아 여기에 사탄이 침범했으니 2천년 동안 소원하시던 모든 것이 일시에 끝난 것을 바라보시는 그 하나님의 심정이 얼마나 원통하셨겠습니까? 이러한 것들을 다시 찾아 세우기 위해서 아브라함의 만득자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하지 않을 수 없었던 하나님의 심정은 또 어떠하셨겠습니까? 이 명령에 아브라함이 열 번이라도 순종하겠다는 마음이 있었다 하더라도 만일 이삭이 ‘이게 무슨 하나님의 지시야? 이놈의 영감이 나이가 많아서 미쳤구만.’ 하고 자기 부모를 반대했더라면 어떠했겠습니까? 부모인 아브라함이 반대해도 안 되고 자식인 이삭이 반대해도 안 되는 것을 아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얼마나 초조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제물로 바쳐라.’ 할 때 얼마나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그 명령을 했겠습니까? 천번 만번 생각하고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만일에 명령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2천년사에 한이 깃들게 된다는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아브라함아!’ 하고 부르시는 그 소리에는 하나님의 깊은 사연이 깃들어 있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제물을 바치러 갈 때에 사탄은 천년 역사노정에서 자기의 후손들이 패배하느냐, 아니면 지금까지의 역사를 다시 연장하느냐는 기로에 서 있었기 때문에 사탄은 갖은 노력을 다하여 이것을 파탄시키려 했습니다. 이런 결전장에 아브라함을 내세워 분부하셨던 하나님의 음성이 얼마나 애절했겠는가를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또한 이러한 때에 자식을 데리고 모리아산을 향하여 3일노정을 걸어가는 아브라함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은 얼마나 서러우셨겠습니까? 이러한 환경에서 잘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몇천년 몇만년의 역사가 좌우된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얼마나 기막혔겠어요? 이때 만일 철모르는 이삭이 아버지에게 대항했더라면 하나님은 그것을 제물로 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만약 내가 여러분들을 제물로 바친다면 여러분들은 가만히 있겠어요?

이삭은 자기를 칼로 찌르려 하는 그 자리에서도 아버지에게 어린양과 같이, 아무 불평 없이 순종했기 때문에 사탄이 참소할 수 있는 길이 끊어진 것입니다.

아담은 개인의 영광을 위하여, 개인의 행복과 행락을 위하여, 개인의 욕망을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배반하고 죽음의 길로 타락했습니다. 그러나 생명을 바쳐야 하는 자리에서도 한마디의 불평 불만 없이 제물로 드려진 이삭과 아브라함의 정성에 대해서는 사탄이 참소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비로소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역사가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결정적인 순간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슬프셨겠습니까? 천세 만세의 인류 앞에 자랑할 수 있는 승리의 새 아침이 찾아와 슬픔의 마음은 지나가고 기쁨의 마음이 싹틀 수 있는 희망의 출발이 보여졌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슬픔은 지나가고 그 슬픔보다도 더 강한 기쁨의 한 날을 맞이했기 때문에 이때부터 이스라엘의 창건 역사가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시작된 어둠의 세계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함으로 인하여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는 세계로 출발되었던 것입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란 이름을 가지고 이 땅 위에서 새로운 역사의 출발을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사탄이 참소한 흔적이 남아 있었기에 야곱과 에서를 중심삼고 재차 싸움을 해야 했습니다. 야곱이 라반의 가정에서 21년노정을 걸을 때에 라반의 멱살을 붙들고 싸움을 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래서는 안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지지리 욕을 먹고, 천대를 받고, 멸시받고, 모든 것을 다 빼앗겼지만, 아버지의 축복이 이루어지는 그날을 고대해 나왔고, 또한 그 축복에 대한 소망이 세상의 무엇보다도 더 컸기 때문에 모든 어려움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야곱의 끈기

그 가운데에서 내정적으로 깊이 느낀 것은 무엇이냐? 세상에 믿을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외삼촌도 믿을 수 없고, 친척도 그 누구도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연을 끊고, 반대 받는 그 환경에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하나님을 몽땅 내 것으로 품어 들이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내 소유로, 내 심정의 주인으로, 내 고향의 부모 대신으로, 내 조국의 왕 대신으로 심정의 터전 위에서 모셔 드린 기간이 21년 기간입니다.

그 내정적인 사정을 깊이 안 야곱에게는 외적인 부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외적인 부가 파탄을 당하더라도 하나님의 내적인 부가 자기에게 쌓여진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21년간을 몰리고 배척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고향을 사랑하는 마음과 축복받은 아브라함의 혈족임을 존중시하는 마음은 변치 않았습니다. 축복받은 아브라함의 혈통을 이어받은 자기의 가치를 누구보다도 사랑한다는 것을 사방에 널려 있는 사탄도 공인했기 때문에 야곱에게 축복의 깃발을 넘기지 않을 수 없었고, 또한 그 누구도 야곱을 참소할 수 없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런 야곱이 환향할 때, 천사를 야곱에게 보내어 최후의 결정을 지어야 하는, 야곱을 그런 상황으로 몰아넣어야 했던 하나님은 얼마나 기가 막혔겠습니까? 이것은 인간 조상이 천사장 누시엘로 말미암아, 즉 영계를 중심으로 제1차 타락이 벌어졌기 때문에 이것을 해결할 때도 영적인 것부터 먼저 해결 짓지 않고는 실체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없기 때문에 천사를 보내어 야곱과 싸움을 시킨 것입니다.

여기에서 야곱은 뼈가 일그러지면서도 사력을 다하여 싸웠습니다. 내가 21년 동안 수고한 것이 이 싸움으로 판결되는구나! 오늘 이 한밤의 싸움에 이기느냐 지느냐에 따라 나의 생의 운명이 좌우되고 이스라엘의 축복의 터전이 좌우되는구나! 하는 생각에 생명을 걸고 씨름을 했던 것입니다. 천사가 와서 농담으로 씨름하자고 했겠어요?

천사가 왔을 때 야곱은 하나님의 사자로서 온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를 망치기 위한 사명을 가지고 왔느냐, 아니면 복을 주기 위한 사명을 가지고 왔느냐? 물으니 복을 주기 위해서 왔다는 그 대답에 ‘복을 주려면 주지 왜 못 주느냐?’고 하니 그것은 책임분담이 남아 있기 때문에 그냥 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야곱이 씨름을 해서 이기지 않으면 복을 못 준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생명을 걸고 싸우지 않으면 못 준다는 것입니다. 그런 조건을 걸고 나섰을 때에 야곱은 ‘오냐, 좋다. 내 손가락이 빠지고 내 팔이 빠져도 결코 지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칼로 쳐도 놓지 않고 목을 잘라도 떨어지지 않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씨름을 했던 것입니다. 얼마나 했겠어요? 밤새껏 했습니다. 네가 죽기 전에는 놓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했던 것입니다.

거기에는 하나님도 입회하고 사탄도 입회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최후의 결정을 짓는 그 마당에서 야곱은 얼마나 안타까워했겠습니까? 천사가 환도뼈를 치고 다리를 꺾어 버려도 야곱은 놓지 않았습니다. 네가 죽고 내가 죽고 둘 다 죽는다 해도 못 놓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몇 시간을 했을 것 같아요? 10분? 1시간? 2시간? 7시간 이상 했습니다. 그래도 야곱은 절대 양보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야곱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얼마나 기가 막혔겠습니까? 하나님은 ‘천사가 지금 사탄을 대표해서 싸우고 있으니 굴복하지 마라.’고 알려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으니, 얼마나 초조한 마음으로 그 시간을 채웠겠나 생각해 보십시오.

시간이 지나서 최후의 결단을 짓게 되었을 때에 천사가 아무리 뿌리쳐도 놓지 않으니 거기에서 하나님도 공인하고 사탄도 공인했던 것입니다. 야곱이 그런 입장에서 서 가지고서야 천사가 공인해서 비로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입니다.

야곱이 천사 앞에 승리하여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게 되었을 때 천상세계에서는 어찌했느냐? 졸였던 마음을 풀고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마음 가운데 쌓였던 슬픔의 깊은 한숨을 내쉬며 ‘아버지!’ 하고 부르는 그 음성 속에는 2천년간 쌓인 사연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야곱이 하나님을 위해 20년 동안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의 목을 끌어안을 수 있는 심정의 인연이, 아담 해와가 타락하던 그 인연을 넘어설 수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이라는 칭호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그때까지 사무친 하나님의 한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거듭 눈물을 흘려도 그 마음을 위로할 수 없는 죄를 짊어진 우리 인간들입니다. 이런 역사적인 빚을 짊어졌기 때문에 천만 개의 제물을 드려도 갚을 수 없는 것입니다. 현재에 있어서도 우리가 하나님을 배반하는 순간이 얼마나 많습니까?

슬픔의 짐을 지고 계신 분이 내 아버지라고 느낀다면

이런 것을 바라볼 때 이러한 현실 전부를 구원하고 세계를 복귀하여야 할 하나님의 짐이 얼마나 크시겠습니까? 이것을 생각할 때 여러분들은 가냘픈 여자의 몸이라도, 약한 병신이라도 그 짐의 일부분이라도 책임지겠다고 몸부림치고 나서야겠습니다. 상처가 나면 그 몸을 끌고 뒤에서라도 그 자리를 책임지겠다고 하는 움직임이 이 땅 위에 일어나지 않고는, 역사적인 한을 품고 오시는 하나님을 위로할 수 있는 지상 낙원의 터전을 마련할 수 없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확실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렇듯 슬픔의 짐을 짊어지고 심정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섭리해 오시는 분이 누구냐? 옛날의 어떤 할아버지도 아니요, 의붓아버지도 아닙니다. 억천만세 길이길이 영화를 누리시고, 사랑을 받으시고, 행복 가운데서 영원무궁토록 자녀와 동고동락하셔야 하는 아버지이십니다. 그러한 아버지가 이렇게 비참한 자리에 계시다는 것을 통일신도들은 알자는 것입니다. 이런 사명을 가지고 역사의 한을 품고 오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 하나님을 부여안고, 아버지 나 이제 알았노라고, 아버지 나 이제 왔노라고, 아버지 나 이제 따르겠노라고, 아버지 나에게 명령해 달라고 몸부림치는 모습이 되겠다고 모여든 것이 통일의 무리라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아브라함, 이삭을 거쳐 야곱이 이스라엘이라는 승리의 터전을 마련한 때로부터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2천년 동안 이스라엘 민족이 얼마나 수모를 당했습니까? 얼마나 쫓기고 몰리었습니까? 하나님은 그런 이스라엘 민족을 버릴 수 없었습니다. 역사의 인연을 중심삼고 볼 때 슬픈 과정에서도 당신을 위로하던 한때의 시절을 잊을 수 없는 하나님이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이 잘못하면 그것을 번번이 수습하면서 축복의 기도를 몇십 번, 몇백 번, 몇천 번 해 왔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죽인 죄로 말미암아 2천년 동안 유리고객하는 민족이 되었던 것입니다.

2천년이 지난 오늘, 이스라엘 민족이 새로운 이스라엘권을 갖출 때까지 하나님은 잃어버린 민족으로 내버려두신 것이 아닙니다. 2천년 동안 유리고객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에는 4천년 역사의 한이 엉클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절규하고 유리고객하면서 수많은 민족과 인류 앞에 학대와 학살을 당고 몰리고 짓밟히는 와중에서도 하나님을 섬겨 왔습니다.

그 민족이 있었음으로 말미암아 복귀섭리를 개척할 수가 있었고, 또한 하나님이 보내 주겠다고 약속하신 메시아를 아직도 보내 주시지 않았다고 하면서, 옛날의 약속을 그대로 믿고 기다리고 있는 것이 불쌍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민족을 다시 수습하여 원수들인 아랍권 가운데에서 보호하여 나오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까지의 하나님의 수고가 얼마나 많으셨겠습니까? 그야말로 이리떼 가운데 있는 양과 같은 무리들을 보호하시기 위해 노심초사해 오셨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겠습니다.

이스라엘이 아랍권과 싸워서 6일 만에 승리를 거둔 것은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보호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보호가 아니고서는 절대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은 20세기의 기적이라고 자타가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기적이 어떻게 해서 일어날 수 있었느냐? 배후에 하나님이 역사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을 찾는 마음과 그런 이스라엘과 관계를 맺고 싶었던 하나님의 마음이 인연맺어졌기 때문에 주위의 원수를 무찌를 수 있는 승리적인 터전이 마련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해방의 깃발을 세계에 드높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2천년 전 하나님 앞에 슬픔을 안겨 드린 이스라엘 민족이 다시 나라를 세우고 하나님을 추앙하는 새로운 깃발을 들고 나온 것은 하나님이 보호해 주셨다는 사실을 증거할 수 있는 좋은 재료가 되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민족과 후세들을 버리시지 않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증거할 수 있는 좋은 재료가 된다는 것입니다.

통일신도들이 취해야 할 바른 태도

오늘날 여러분들은 통일교회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면 통일교회가 뭐냐? 아담부터 아브라함까지 2천년 동안 슬픔을 품고 나오신 하나님을 위로해 드리기 위해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4천년 동안 여러 민족 앞에서 유리고객하던 이스라엘 민족 앞에 메시아를 보내 주어서 해원성사할 수 있는 세계적인 터전을 마련해 주었는데 이스라엘 민족은 이것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2천년 역사를 다시 수습하기 위해 역사적인 전체를 책임질 수 있는 입장에서 불러모은 것이 통일교회의 교인들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아버지 앞에 엎드려 기도할 때에는 목이 메이고 가슴이 저리는 심정으로 아버지를 불러야 되겠습니다. 6천년 전에 잃어버렸던 아버지, 나로 인하여 수많은 곡절과 한을 품어 오신 아버지, 수많은 상처와 수많은 억울함과 수많은 원수들 앞에 농락을 받으면서도 참고 나오신 아버지, 수많은 한, 수많은 상처, 수많은 비참한 사연이 엉크러진 아버지이신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우리는 뜨거운 불덩이가 되어서라도 아버지의 가슴을 녹여 드릴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러나 그럴 수도 없는 탄식과 저주의 자녀인 것을 생각할 때, 무엇으로 그 아버지를 위로해 드릴 것인가? 밤을 새워 몸부림치고 통곡하여도 원통함이 풀리지 않아야 될 우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마음들은 다 어디에 갔습니까?

하나님은 숱한 역사를 거쳐오면서 통일의 깃발을 꽂을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기 위해 수많은 억울한 과정을 거치셨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무수한 날이 있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어느 문전에서 박대받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그 몇십 배 이상의 처량한 사정에 부딪힌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 민족이 처참한 환경에 처했을 때 이스라엘 민족은 그 이상의 비참한 민족적인 환경을 거쳐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그 이상의 애달프고 비참한 자리에서도 소망의 마음을 갖고 사람을 찾아오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사정이 핏줄을 통해 오늘날 우리 자신들에게 상속됐다는 사실을 알아야겠습니다.

이런 역사적인 한의 터전을 상속 받고 있는 우리 자신이기에 먹고 나서 죄의식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고, 자고 나서 회개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통일 신도들의 생활철학이고 생활 태도입니다. 밥을 먹어도 기쁠 수 없고, 옷을 보고도 기뻐할 수 없으며, 주위의 환경을 보고도 웃음으로 대할 수 없는 처지에 있습니다. 그렇듯 하나님이 얼마나 비참하게 굶주리셨고, 밟히셨고, 유린당하시고, 농락을 당하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됩니다.

이런 하나님을 우리들이 맞아들여야 되겠습니다. 그런 아버지를 모셔야 되겠습니다. 6천년 동안 한 맺혔던 아버지의 가슴을 풀어 드리기 위해 하나님 앞에 충성을 다할 수 있는 자녀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겠습니다. 6천년 동안 간직했던 아버지의 참된 사랑을 상속 받을 수 있는 자가 되게 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호소해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너무나 참지 못했습니다. 7년노정도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그러고도 하나님을 이러쿵저러쿵 평하기에 급급하였던 이 저주받을 입술을 가진 무리들입니다. 이처럼 부끄러움을 모르는 우리 자신들이 되었다는 사실을 이제라도 저주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그런 무리가 되어 몸부림치고 통곡하면서 하나님의 이런 한의 흔적을 제거시킬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야 되겠습니다. 이런 방법이 있다면 천번 만번 죽어서라도 하겠다고 몸부림쳐야 할 것이 통일신도들이 가야 할 길임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그럴 수 있는 하나의 아들, 하나의 딸이 되어야 하고, 그럴 수 있는 하나의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수 있는 하나의 아들이 누가 되어야 하며, 그럴 수 있는 하나의 딸이 누가 되어야겠느냐? 여러분이 그런 자가 되지 않고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아들과 딸로 이루어진 가정, 그런 가정으로 이루어진 종족, 그런 종족으로 이루어진 국가, 그런 국가로 이루어진 세계가 되어야 하나님 나라로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은 하나님이 짊어져야 할 심정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져야 하겠습니다. 몸이 찢겨 걸인이 되고 독수리 밥이 된다 하더라도 그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럴 수도 없는 입장인데도 불구하고 당신의 위신과 처신을 망각해 가면서도 인류를 구하기 위해 지금까지 몸부림치고 계시는 것입니다.

참된 효도

여러분들은 하늘 편에 서서 아버지를 불러 보고, 하늘 편에 서서 아버지의 입장을 대변해 보고, 하늘 편에 서서 아버지를 대신하여 원수와 대결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을 아버지께서 얼마나 찾고 계신가를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그런 아들이 있으면 뼈가 으스러지도록 안고 싶고, 그런 딸이 있으면 밤을 지새워 가면서 당신의 사연을 털어놓고 싶은 아버지이십니다. 그런 아버지의 가슴에 맺힌 한을 땅에서 누가 풀어 드려야 하겠는가? 바로 여러분들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너희 가정으로 말미암아 행복의 한 날을 보았고, 너희 가정으로 말미암아 한을 풀었고, 너로 말미암아 소원의 한 날을 맞이하였노라고 온 세상에 선포하실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런 날을 맞이해야 비로소 이 땅 위에 천국이 개문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들이 생각해야 할 것은 무엇이냐? 내 편에 서서 하나님을 대해서는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은 우리들에게서 ‘저를 희생시켜서라도 민족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하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저를 희생시켜서라도 세계의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하고 호소하는 사람을 찾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희생당하여 그 이상의 아픔을 느끼면서도 민족의 죄와 세계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호소하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 사람은 온 세계를 상속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까지 사람들은 전부 다 자기를 중심삼고 일해 나왔습니다. 나 나 나 …. 나 중심한 것이 얼마나 갈까요? 나를 중심삼았기 때문에 설 수 있는 자리가 모두 깨어져 나가게 된 것입니다. 별의별 일이 다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홀로 기도하는 날이 많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정을 통고하시며 선생님을 붙들고 사정하시던 그 사정을 모릅니다. 그것은 나만이 알 수 있는 사정입니다. 그렇게도 간곡히, 그렇게도 초조히, 그렇게도 뼈에 사무치게끔 부탁하지 않을 수 없었던 하나님, 광대무변한 이 우주를 창조하신 능력의 주체 되시는 하나님이 어찌하여 미미한 한 사람 앞에 찾아와 당신의 처량함을 사정하는 하나님이 되었던고? 체면이야 어찌 되든 간에 손이 발이 되도록 사정해서라도 하나님의 아들딸을 만들기 위하여 수고하고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중심삼은 아들, 천년만년 믿을 수 있는 아들, 억만년 찬양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아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계십니다. 마음을 졸여 가면서 아담이 살아나기를 고대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그런데 왜 자유의 자리에서 사랑하는 아들딸을 중심삼아 천세 만세 행복을 노래하고 영원무궁 세세토록 사랑을 중심삼은 주권을 찬양할 수 있는 아버지가 되지 못하시고 어찌하여 그리 슬퍼하시는 아버지가 되셨느냐? 그런 아버지를 모실 수 있는 사람이 지구상의 어느 곳에서든 생겨나야 되겠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렇게 하지 못하겠거든, 그럴 수 있는 환경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라도 해야 합니다. 자기가 욕을 먹고, 몰리고 쇠고랑을 차는 한이 있더라도 해야 합니다.

하나님만을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딸을 지켜 줄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을 위하여 그 가정을 지켜 줄 수 있는 사람은 어디 있으며, 하나님 편에 서서 종족과 민족을 보호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어디 있습니까? 아버지를 대신해 아들의 권위를 가지고 세계를 달릴 수 있는 아들딸이 어디 있습니까? 억천만년 전부터 고대하던, 아버지 앞에 그럴 수 있는 한 사람이 지금까지 나오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럴 수 있는 아들딸이 되어 일생 동안 천번 만번 제물이 되더라도 그 터전을 위하여 거름이 되고 받침돌이 되어 자기의 정성을 다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이 서러워하시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딴전을 피우고 있으니 저주받을 노릇입니다.

하나님을 대신하여 심정의 십자가를 지고 가자

오늘 선생님은 아버지 앞에 기도하면서 통곡했습니다. 흘러가는 세월 속에 한 많은 역사를 지닌 아버지이시라는 것을 알았으나 그런 아버지를 위로해 드리지 못했고, 국가 앞에 권위를 세워 드리지 못했고, 국가와 세계를 굴복시켜 아버지 앞에 바쳐 드리지 못한 한스러운 자리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빨리 이루어 만민 앞에 아버지의 사랑하는 아들딸이라고 여러분들을 자랑하고 싶었는데 그것이 늦어짐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사람들이 지쳐 떨어졌습니다.

선생님이 지방에 순회할 때는 옛날에 골목골목마다, 혹은 길가에서 전도하면서 만나 이야기하던 사람이 생각납니다. 그러나 그 터는 남아 있지만 그 사람은 사라져 남아 있지 않음을 보고 수천년 동안 복귀의 길을 걸어오신 아버지의 사연을 생각하게 됩니다. 여러분들은 아버지 앞에서 빚을 갚으라고 졸라대는 사람처럼 품삯을 달라고 하는 자가 되고, 아버지의 눈을 피해 가며 재산을 훔쳐내는 사람이 되겠어요? 여러분들은 지금까지 책임을 다하지 못한 자기 자신의 부끄러움을 알고 하나님의 이상과 뜻을 이루는 데 있어 자신을 굄돌로 삼아 최후의 승리를 위해 몸부림쳐야 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눈을 뜰 때에 하늘 편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하늘 편에 서서 욕을 먹고, 하늘 편에 서서 몰리고, 하늘 편에 서서 억울함을 당하고, 하늘 편에 서서 종족의 인연을 남기겠다고 몸부림쳐야 되겠습니다.

지금까지 통일교회가 걸어온 길은 비참했습니다. 말할 수 없는 사연과 억제할 수 없는 사연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늘편의 사정과 하늘편의 분함과 하늘편의 내정이 어떻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은 이 땅에 태어나서 백년 천년 사는 것이 아니요, 이슬같이 반짝했다가 가야 하는 일생이니 하나님의 저주의 탑을 남겨선 안 됩니다.

여러분이 죽었을 때, 그 무덤 앞에 꽃을 안고 와서 ‘아버지여!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이 갑니다. 당신의 아들이 사랑하던 이 땅을 누가 사랑하고, 이 민족을 누가 살리고, 이 제단을 누가 살리옵니까?’ 하고 몸부림칠 수 있는 동지나 아들딸을 남겨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하나님 앞에 갈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떤 여건하에 있더라도 눈물을 흘리면서 아버지를 위로해야 할 인류인 것을 여러분은 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모두가 하나되어 하늘 편에 서서 죽고 살자고 하면서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는 부모를 이 땅 위에 모시고 천년만년 안식하실 수 있는 터전을 아버지 앞에 마련해 드리겠다고 몸부림치다가 죽어 간다 해서 그것이 한이 되겠습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을 향하여 나가는 그 길 앞에서도 절개를 세우겠다고 다짐하여 몸부림쳤던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 예수님의 가슴에 창 자국이 웬말이고, 그 머리에 가시 면류관이 웬말입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몸뚱이에 입은 아픈 상처보다도 하나님의 마음에 입은 상처가 더 크심을 알았기 때문에 피를 흘림으로 말미암아 아버지의 내정을 위로하려 했고, 상처 받은 가슴으로 아버지의 심정을 위로해 드리려 했습니다. 그런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부활할 수 있었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기에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 교인들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심정적인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야 하겠습니다. 하늘 편을 책임지고, 하늘 편에서 살고, 하늘 편에서 부활할 수 있는 여러분이 모두 되기를 바라며, 이 시간을 기억해 주기를 부탁드립니다.

<기 도>

한 많은 역사 과정에서 아버님의 날이 언제 있었으며, 부모의 날이 언제 있었으며, 자녀의 날이 언제 있었으며, 만물의 날이 언제 있었습니까? 불쌍하게 몰리고 쫓김 받던 통일의 무리를 통하여 이날들을 결정하셨다는 것을 생각할 때, 역사해 주신 아버지 앞에 진실로 감사를 드리옵니다.

아버지, 이제 제1차 7년노정이 끝나고 제2차 7년노정을 향하여 출발할 시점이 저희 앞에 다가오고 있습니다. 혼란된 세계가 바야흐로 저희 앞에 다가오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반대하던 사람들이 다 꺾여나가는 것을 저희들이 바라보고 있습니다.

아버지, 자기의 위신과 체면을 다 버리고 아버지의 내정을 부여안고 몸부림치는 당신의 아들딸들에게 해방의 한 날과 자유의 천국을 바라볼 수 있는 날이 어서 속히 오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오늘 여기에 있는 당신의 자녀들은 하늘 편의 사정이 얼마나 딱하다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변혁되는 아들과 변혁되는 딸이 될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 이 시간을 같이하여 주심을 감사드리옵니다. 남한 각지에 널려 있는 당신의 자녀들을 아버지의 품에 품어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 저희를 불쌍히 보시옵고, 버려두지 마옵길 간절히 바라옵니다. 세계에 널려 있는 당신의 자녀들을 기억하여 주시옵고, 그들이 가는 곳곳마다 승리의 한 날만이 있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 남아 있는 당신의 자녀들도 나가지 않으면 안 될 때인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혼란된 세계 가운데서도 아버지를 위하여 충성을 다하고, 아버지를 위하여 정성을 다할 수 있는 당신의 자녀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과거에 부족하였던 것을 회개하고 아버지 앞에 충효의 도리를 다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고, 저희들이 들이는 정성으로 만민이 축복을 받을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길, 사랑의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승리의 한 날이 저희 앞에 찾아올 것을 믿사오며, 모든 말씀 참부모의 성호 받들어 아뢰었사옵니다. 아멘.

<말씀 요지>

인간은 타락 이전의 입장을 세우지 않고는 새로운 동기를 세울 수 없습니다. 또한 사탄의 공격을 능가하는 힘을 갖고 하나님 편에 서지 않으면 새로운 동기를 세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때는 사탄을 중심한 악의 세계와 하나님을 중심한 선의 세계가 힘의 대결을 하는 때이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민족적․국가적․세계적인 전통을 무엇으로 세울 것인가?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의 입장으로 출발한 여러분들이 해야 될 사명인 것입니다. 어려운 일은 하나님께 맡기고 쉬운 일은 자신이 맡아 온 것이 오늘날까지 우리가 걸어온 길이었습니다.

제2차 7년노정은 여러분들 각자가 책임을 져야 하는 기간입니다. 그러므로 이 노정은 부모가 책임을 지고 가던 과거의 7년노정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명령에 순종하지 않은 사람들을 제거해 버렸던 것입니다.

선생님은 3시대(아담․예수․재림주), 3국가(일본․공산국가․민주국가), 3정권(한국), 3교파의 시련을 받아야 했으며, 3대(36, 72, 120가정)를 거쳐야 했습니다.

선생님은 지금까지 홀로 밤길을 걸어와서 이제는 아침을 맞이한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이 말씀을 수습하는 책임을 해야 합니다.

로마서 8:36-39

<기 도(Ⅰ)>

아버님! 고요한 가운데 당신의 심정을 헤아려서 저희들 자신을 발견할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아버지의 뜻 앞에 멀어져 있는 자신들을 발견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인간 시조가 아버님을 저버리고 패망된 타락의 길을 감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망해 버려야 할 후손으로 태어난 자신임을 탄식하면서, 아버님을 찾아가는 데에 그렇게도 좁히기 어려운 하나의 간격을 남겨 놓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저희들로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음을 다시 한번 발견하게 됩니다.

이렇게 사망의 뿌리에서 번식되어 나와 가지고 태어난 자신을, 그래서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에도 사망의 세계에 얼크러져서 휩쓸려 다니는 자신을 생각해 보면, 아버님께 속하기에는 너무나 멀리 있는 자신을 발견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그러기에 아버지의 사랑의 손길이 필요하고, 아버지의 능력의 손길이 필요한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님이여, 저희들은 마음 깊이 본성의 인연을 지니고 있사옵니다. 이것만은 당신으로부터 이어받은 것이요, 이것으로 말미암아 아버지를 통하지 않으면 안 될 인연이 저희에게 남아 있음을 알고 있사옵니다.

이 인연을 세우기 위하여 아버지께서는 역사 과정을 통하여 저희들을 일깨워 주셨사옵고, 오늘 이 시간도 그것을 위한 아버지의 역사가 계속되고 있사오니, 그 사실을 저희들이 망각하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저희 본성이 간곡하게 울부짖는 소원을 저희들이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본성이 실제로 아버지와 더불어 관계를 맺고자 한다는 것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본성에 대립된 원수의 쓰디쓴 죄악의 뿌리가 저희를 둘러싸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본성은 하나님의 힘을 대신하여, 저희에게 나타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옵고, 저희들이 하나님의 능력의 손길에 붙들려서 엉클어진 모든 사망의 인연을 밟고 올라설 수 있는 생명의 출발을 일으켜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랜 역사를 거쳐 나오면서 아버지의 수고가 얼마나 많았다는 사실을 저희들은 알았사옵고 지금까지 인류를 품어 나오신 아버지의 슬픔이 얼마나 크셨다는 것도 알고 있사옵니다. 또 아버지께서 참아 나오신 역사 과정에서 맺힌 한을 인간을 통하여 해원하시려 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았사옵니다. 그러나 전체를 위한 해원도 중요하지만 저희 자신들이 아버지의 뜻 앞에 부활되지 아니하면, 저희의 가정․종족․민족․국가도 부활할 수 없기에 먼저 저희 개체를 위한 해원을 하기를 바라신다는 사실을 저희들이 확실히 알도록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저희들은 전체의 식구로서 이 자리에 모인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존전에 개인으로서 모였사오니, 이제 저희들 각자가 아버님이 분부하시는 명령을 다시 한번 들을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아버지께서 소원하시는 그 일념을 다시 한번 마음속에 다져 넣을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저희들 각자를 통하여 모든 죄악의 요소를 제거시킬 수 있는 새로운 역사를 일으켜 주시옵소서. 저희들은 아버지의 심정에 일치되고, 생활 가운데에서 사정이 일치되고, 소원을 가진 입장에서 영원한 미래와 일치될 수 있는 그런 자리에서 아버님이 찾아 품고 싶었던 참다운 아들딸의 모습으로서 아버지께 바쳐지기를 원하고 있사옵니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저희들이 너무나 미비하고 불충하며 부족한 것을 발견하게 되오니, 여기에 부끄러운 마음을 느낄 줄 아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자기의 부끄러움을 망각해 버리고 아버지 앞에 체면을 모르는 아들딸이 되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내 개체가 통일의 뜻에 입각하여 보게 될 때, 하나님께 용서 받을 수 없는 자신임을 명시하여 놓고 그 사유를 밝혀서, 이 시간 부끄러운 마음으로 아버님의 긍휼한 심정을 체휼할 수 있게, 간곡히 원하는 마음 자세를 갖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들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통일의 문을 두드려 찾아왔사옵니다. 지금까지 저희들은 여기에서 주장하고 가르치는 말씀을 듣고 배웠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통할 수 있는 실체가 되지 않고는 하나님과 하등의 관계가 없기에 말씀은 말씀대로 나는 나대로 있어서는 안 됨을 확실히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말씀의 실체로서 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말씀에 반대되는 환경을 타개하고 원수들의 화살을 꺾고 넘어갈 수 있는 자리에 서야 한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오늘은 이 달을 맞이하여 첫주일이옵고, 일년의 반을 보내고 새로이 후반기를 맞이하여 처음 맞는 안식일이오니 이 거룩한 날에 아버지께서 저희를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저희들의 몸과 마음을, 아버지의 뜻 가운데 온전히 사로잡아 주시옵고, 아버지의 능력의 손길로 저희들을 붙들어 주시옵소서. 악의 모든 요소를 제하여 주시옵고, 선의 본질을 일깨워 주시어서 당신의 품에 안길 수 있는, 새로운 부활의 역사를 일으켜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남한 각지에 널려 있는 당신의 외로운 자녀들이 이곳을 흠모하면서 당신께 경배드리는 시간을 갖고 있는 줄 알고 있사오니 그 자리에도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증거하고, 당신을 위하여 충성하는 사람만이 땅 위에서 승리하여 영광의 자리에 서게 된다는 사실을, 확실히 보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시간 모든 정성을 모아서 아버님께 드리는 경배이오니 아버지께서 기뻐하실 수 있고, 천상세계의 수많은 영인들이 여기에 화답하여 아버지 앞에 해방의 한 날을 찬양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이 제단에 수많은 영인들이 땅에서의 한을 풀어 달라고 요망할 수 있는 승리의 제단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오늘을 기하여서 세계에 널려 있는 뭇 자녀들을 아버지께서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그들은 이 시간도 한국 땅을 향하여 기도하고 있는 줄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지, 그들이 정성들이고 눈물 흘리며 기도하는 전부는 뜻 하나를 위한 것이요, 당신의 소원을 이루기 위함이오니, 그들이 간구하는 모든 뜻을 살피시어 그들이 요구하는 바를 성취시켜 주시옵소서.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여! 일본에서 왔던 사랑하는 젊은이들이 오늘 돌아가게 되었사오니 친히 같이 하여 주시옵고, 그들이 가고 오는 전부가 뜻을 드러내기 위해서 움직이는 것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머무는 것이나 혹은 활동하는 것도 당신의 영광이 아니면 되어지지 않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일본의 모든 백성들을 당신 앞에 복귀시키기 위해 일하고 있는 자들을 당신이 기뻐할 수 있는 하늘이 사자로서 받아 주시옵고, 그들을 세우시어 그 땅 위에 새로운 부활의 역사를 일으켜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 이 자리에 모인 부족한 자녀들에게 새로이 분부하고 권고하여 주시어서 이 시간 새로운 약속의 세계를 향하여 나가는 데 부족함이 없는 자세를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하늘 정병으로 무장을 하고 적진을 향하여 달려갈 수 있는 당신의 아들딸로 삼아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부족한 저희들이 모여서 경배드리는 이 한 시간을 친히 아버지의 은사로 품으시옵고, 거룩한 은사로 시작하여 결과도 거룩한 은사로 거두어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의 성호 받들어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기 도(Ⅱ)>

아버님, 만유의 주인 되시는 당신 앞에 온 천지 만물은 영원무궁토록 찬송을 돌려 드리기를 원하옵니다.

어느 하나 당신의 인연 가운데서 벗어나서 지음 받은 존재가 없기에 아버지로 말미암아 아버지의 심정을 통하여 빚어진 온 천지 만물은 아버지의 영광을 높이고, 아버지의 거룩함과 심오함을 드러내어, 아버지의 무한한 가치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저희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온 만물의 중심으로 인간을 지으실 때는, 아버지의 내성적인 전체와 외형적인 전체를 겸하여서 만물을 대표할 수 있는 아들의 형상, 딸의 형상으로 빚어 만드신 것을 저희들이 알고 있습니다.

사람은 본래 아버지의 마음속에 영원히 영원히 있어야 할 존재이었사오며, 아버지와의 인연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이었사옵니다.

만물도 그런 인연 가운데 인간과는 상대적인 관계를 가지고 함께 하나님을 중심삼고 영원히 자유와 평화와 행복이 깃들 수 있는 천국에서 존재하면서, 아버지를 모시고 영원한 승리의 자리에서 좋아해야 할 것이었으나, 인류의 시조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이렇듯 비참한 역사의 기원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의 결과로 인간만이 비참하게 된 것이 아니라 만물도 비참하게 되었고, 만물만이 비참하게 된 것이 아니라 창조주이신 하나님도 비참한 자리에 놓일 수밖에 없던 이 엄청난 사실을 저희들은 알았나이다.

아버님이시여! 이처럼 슬픔의 역사를 출발하게 된 모든 여건들을 완전히 제거시켜야 하는 것이 인간의 완수하지 않으면 안 될 책임분담으로 남아 있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았사옵니다.

이 책임분담 과정을 거쳐 나가기 위해서 천상세계에 있는 수많은 선한 영들은 아담 해와 창조 당시에 협조하던 선한 천사세계처럼, 제2의 터전을 바라보면서 소망의 한마음을 갖고 이 땅을 대신하여 싸워 나오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아버님 역시 당시에 천사세계를 중심삼고 움직이던 방향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 불쌍한 인생들을 복귀하기 위한 사명을 짊어지고 지금까지 슬픈 역사를 거슬러 나오고 계시오니 이처럼 수고하시게 된 동기는 우리들의 선조가 잘못한 탓이었사옵니다. 그러나 잘못된 것으로 끝나지 않고 이것을 복귀하여 해방을 보시기 위해 수고하시니, 이것이 아버지의 노고의 역사인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저희들이 생활해 나가는 역사의 한 부분 중 어떠한 환경에서라도 저희 개체의 해원성사를 하여 승리의 터전을 마련하지 않으면, 아버지의 수고 앞에 스스로의 면모를 세울 수 없는 불초(不肖)한 모습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는 당신의 아들딸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렇듯 슬픔의 역사를 남기게 한 선조들로부터 물려받은 슬픔의 흔적을 지닌 저희들이 오늘 아버지의 존전에 다시 모였사옵니다. 그러나 저희들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없는 부족한 몸들이옵니다. 이렇게 불초한 죄인의 후손이라는 것을 저희들은 잘 알고 있나이다.

하늘의 생명의 인연을 맺을 수 없고 부활의 은사를 받을 수 없는, 패역무도하고 몰상식하여 당신의 뜻 앞에 도저히 설 수 없는 저희들이옵니다. 그러나 당신은 긍휼하시고, 자비하시고, 사랑의 본체이시기에 그와 같은 저희들을 지금도 부르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계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희들 그것을 알았기에 부족한 몸 마음을 가누지 못한 채 부끄러운 자세를 가지고 아버지 앞에 엎드렸사옵니다. 아버님 앞에 저희들 회개의 눈물과 더불어 마음 깊이 아버지의 심정을 통하여 아버지라 부르고 싶어하는 마음을 갖고 나왔사오니, 아버지여, 찾아오셔서 긍휼의 심정으로 저희들을 일으켜 주시옵고, 아버지의 생명의 인연을 통하여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특별한 은사를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저희가 천지를 창조한 만유의 주인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고, 그분과 일치된 이상을 가질 수 있다는 이 엄청난 사실을 알고 나서 몸둘 바를 몰라하고 아버지의 은사에 보답할 길이 없다는 사실에 감사와 영광을 아버지 앞에 돌려드려야 된다는 것을 자각하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님, 저희들은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또 갖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저희들은 지금까지 사탄의 혈통을 받아온 흔적으로 말미암아 더럽게 된 피 살을 갖고 있을 뿐이요, 저희들에게 속한 전부는 원수의 것으로 당신의 탄식권 내에 있기 때문에, 당신 앞에 제물로서 세워질 수 없는 것들이옵니다.

그러므로 저희들이 이 모두를 저버리고 벌거숭이와 같은 몸과 어린 아이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아버님께 안길 수 있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지금까지 저희가 가진 관념과, 저희가 아는 모든 것을 일체 제하여 주시옵소서. 저희의 지식이, 목적이, 생활이 온전히 당신을 위하는 것이 될 수 있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그러한 자리에서 아버지를 시봉하며 경배드릴 수 있는 이 시간, 이 자리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께서 친히 분부하시게 될 때 스스로 저희의 전부를 다 살라 버릴 수 있는 마음들을 가지고 부복한 이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님, 이 시간 친히 주관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오며 남한 각지에 널려 있는 외로운 자녀들이 아버지 앞에 부복하여 경배드리는 곳마다 친히 같이하여 주옵시고, 세계에 널려 통일의 깃발을 꽂고 각 민족을 위하여 싸우고 있는 당신의 아들딸들을 기억하시고 지켜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누구나 당신의 사연을 알지 못하는 것에 안타까운 마음을 품고, 당신을 위하여 충효의 일념을 세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큰 뜻을 따라가는 데에 있어 죽음을 각오하고, 생명의 인연을 찬양하면서 민족을 넘어 세계를 사랑하겠다고 몸부림치는 그들의 발걸음을 지켜 주시옵고, 그들의 환경을 보호하여 주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그들이 아버님이 친히 같이하시고 역사하시는 아들딸이라는 것을 증거하시옵고, 그들에게 어두운 세상에서 빛이 될 수 있는 능의 손길을 펴시옵소서. 또한 부활의 권한을 이방 민족들 앞에 펴시옵소서. 그리하여 당신이 소원하시는 하나의 세계를 건국하는 데 부족함이 없게끔, 아버지를 위하여 싸우는 정병으로서의 내적 단장과 외적 조건을 갖출 수 있도록 그들을 보호 육성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그들이 한국 땅을 위하여 기도하고 눈물짓는 모든 사연을 긍휼히 보시옵소서. 그들이 흘리는 눈물이 헛되지 않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그들의 한스러운 눈물이 그 땅 위에서 사라지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님께서 이 시간 현현하시어서 말씀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사망의 세계에 눌리어서 사탄의 쇠사슬에 얽매인 모든 것을 해방시켜야 할 당신의 손길이 있음을 알고 있사옵고, 당신의 심정의 인연과 보호가 여기에 있어야 될 것을 알고 있사오니, 당신의 사랑의 손길로 저희를 일깨워 주시옵소서. 새로운 생명의 불길로써 아버지 품에 안길 수 있는 인연을 세워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시간 온전히 아버지께서 경륜하시는 뜻 가운데에 일체를 받아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오며, 역사에 맺힌 서러움의 조건을 제거시키고 시대의 한을 해원시킬 수 있는, 아버지와 직접 상봉하고 아버지의 소원을 위한 명령을 받을 수 있는 직계의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옵니다.

이제 허락된 시간을 아버지 앞에 봉헌하오니 친히 받아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오며, 이 단에서 내려진 말씀을 통하여 저희들이 아버지와 인연 맺을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나이다.

아버님, 전하는 자의 마음과 받는 자의 마음이 하나되게 하시옵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심정적인 인연을 통하여 저희들을 하나로 엮어 매시옵소서. 그리하여 본연의 모습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사랑하는 식구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하나의 가정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옵니다.

아버지 앞에 나타날 수 있는 영광의 한 날을 위하여 충성을 다할 것을 약속하는 이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말 씀> 이 시간에는 ‘우리의 자랑’이란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날 이 땅 위에는 수많은 민족과 수많은 국가들이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어떤 한 민족을 중심삼고 보더라도 민족 자체를 자랑하고 싶어하는 것이 그 민족의 요구일 것입니다. 또한 어떤 나라를 다스리는 주권자가 있다면 그 국가의 위세를 만방에 떨칠 수 있는 자랑스런 주권자가 되고 싶은 것이 소원일 것입니다. 한 국가도 그렇지만, 크게는 세계를 두고 봐도 작게는 여러분 개인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으로 자기의 환경을 움직여 국가와 세계에 인연맺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입니다.

이것을 생각해 볼 때 인간의 본심이 그러하고, 인간의 생활환경이 그러하고, 인류역사의 흐름 또한 그러한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것을 부인 못한다 할진대, 이러한 사연의 인연, 이러한 사연의 동기는 어디서부터 출발했겠습니까?

만일 하나님이 계셔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다면 하나님 자신이 그러한 입장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인연맺어진 모든 존재들은 자기 스스로를 높이고자 하는 마음, 자기 스스로를 드러내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창조주가 그렇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물을 지으신 목적

하나님께서도 자신을 자랑하고 싶으신 것입니다. 멀리 역사 전 시대로 돌아가서, 창조의 세계를 흠모하시던 창조주께서 6일간 창조하신 창조물을 바라보고 기뻐하시던 그 시대를 회상해 보게 될 때, 하나님께서도 지어진 모든 만물을 통하여서 자신을 자랑하고 싶으신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만물을 창조하신 것이 틀림없습니다. 지음 받은 어떠한 존재를 두고 보더라도 그러한 사연이 엉키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바라보는 이 피조세계, 혹은 이 자연에는 각양각색의 피조물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존재하는 만상(萬象)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창조되었느냐? 그것은 창조주의 정성어린 심정의 과정을 통하여 지어졌던 것입니다. 아무리 미미한 존재라도 하나님의 사랑의 심정을 통하여, 하나님이 소원하시는 자랑의 마음을 지닌, 그런 자리에서 지음 받은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작게는 지극히 미미한 존재로부터 크게는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광대한 우주에까지, 존재하는 모든 만물들은 하나님께서 자랑하고 싶으셨던 자랑의 존재로 지어졌음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지금까지 이 땅 위에 남아진 피조만물을 중심삼고 살아왔습니다. 즉 싫든 좋든 만물을 이용하고 만물을 사용해 나온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일상생활에서 사용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이 사랑하고 자랑하기 위한 목적 아래에서 지음 받았다 할진대, 과연 그것을 알고 그 가치대로 여러분들이 대해 주었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본심에 자문해 보십시오. ‘그렇습니다.’ 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 이것이 문제입니다.

아침에 잠에서 깨어 일어나 밖을 바라보면 광명한 아침 햇빛이 여러분을 반겨 줍니다. 그러면 그 태양 빛이 뜻하는 것이 무엇인가? 즉 자연이 여러분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여러분은 그 빛을 하나님의 영광이요, 하나님의 놀라우신 창조의 은사라고 찬양하는 마음으로 대해 주었느냐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한 생활을 했다면 여러분은 그러한 내용으로 지음 받은 만물 앞에서 부끄러운 모습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자랑이 되어야 할 인간

작은 것에서부터 큰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물건이 하나님의 자랑의 일면을 드러내기 위해서 지어진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이 이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만물을 지으셨기 때문에 지어진 만물을 그렇게 알아주고 자랑할 수 있는 상대적인 존재가 있어야 했습니다.

천사세계를 짓게 된 원인도 여기에 있는 것이요, 인류의 시조인 아담 해와, 다시 말하면 만물의 주인공인 사람을 지으신 원인도 여기에 있다는 거예요.

아담 해와를 지으실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자랑하시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지었던 만물을, 당신 대신 자랑하고 기뻐할 수 있는 모습을 생각하면서 지으셨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또 하나님이 중심 존재로 세우려던 아담과 해와가 만우주 앞에 중심존재로서 서게 되는 날, 하나님은 이 아담 해와를 얼마나 자랑하고 싶으시겠습니까? 그 자랑하고 싶었던 대상의 한계선이 어느 정도까지냐? 지어진 만물의 어떤 부분 부분을 통해서만 자랑할 것이냐? 아니에요. 온 피조만물 전체를 동원하여 자랑하고 싶은 한 날을 바라셨던 것입니다.

그렇듯 귀하고 가치 있는 존재로서 지음 받은 것이 인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자리에 서기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며 만유 앞에 창조의 위업을 찬양해 달라고 친히 선포할 수 있는 한 날을 인간이 찾아 주기를 바라셨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그런 자리에 서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한이었다는 거예요. 역사 과정에 있어서 어느 한때 이 세계가, 혹은 국가가 그런 자리에 서 보았으며, 개인이 그런 자리에 서 보았습니까? 서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랑하고 싶은 그 내용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는 자리에서 하나님이 슬퍼하는 입장에 서 있는 것이 오늘날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인간이라 할진대, 하나님의 창조 본연의 기준과는 상치(相馳)되고 대치되는 입장에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지금가지 살아가는 데 있어서 ‘아! 나는 이러이러한 무엇을 갖고 있고, 이러이러한 사회적 위신을 갖고 있고, 국가 앞에서도 이만하면 애국하는 사람이다.’ 하며 자신을 자랑하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자랑하는 것이 누구를 중심삼고 자랑하는 것입니까? 제일 먼저 하나님을 중심삼고 자랑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자랑할 수 없게 된 인간

인간은 먼저 하나님을 중심삼고 자랑이 되어야 할 존재입니다. 그렇게 자랑할 수 있는 자리를 취하여, ‘나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만우주의 주인 자격을 갖추었다.’고 하며 주인의 행장을 갖추어 나서야 할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인간이 태어난 본래의 목적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인간을 그런 자리에 세워서 자랑할 수 있는 한 날을 갖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여러분들이 사회생활을 하는 데에 있어서 자기 자신만을 중심삼고 자랑하는 그 기준이 어디서부터 시작됐느냐? 이것은 국가로부터 시작된 것도 아니요, 세계로부터 시작된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로부터 시작됐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중심하고 자랑해야 될 입장을 떠나서 자기를 중심삼고 자랑하는 입장이 먼저 되었기 때문에 천륜에는 부합될 수 없는 자신임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 타락한 후손들은 하나님이 자랑할 수 있는 자리에 있느냐?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서 인류의 시조인 아담 해와는 그런 자리에 섰었느냐? 그들 역시 그렇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인류의 시조가 하나님이 창조하시던 전체목적대로, 만우주가 총합된 결실의 존재로서 만우주를 품고 하나님께서 자랑할 수 있는 실체로 세움을 받을 수 있었던들, 인류는 이런 비참한 역사를 엮어 나오지 않았다는 거예요.

인류의 시조인 아담 해와는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자랑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슬픔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었으며, 얼굴을 들고 자랑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 머리를 숙이고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으면 안 될 입장이 되었습니다. 거기서부터 인류역사가 출발했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인류 시조는 하나님의 자랑과 더불어 자기 스스로의 권위를 갖춘, 만우주의 중심존재의 자격을 갖춘 자리에서 출발한 것이 아닙니다. 즉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으로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 없는 자리에 섰으며, 존재하는 만유 앞에 스스로 자기의 모습을 드러내기에 주저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에 섰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인류의 시조가 타락한 결과입니다.

이와 같은 역사의 기원을 가지고 나온 인간이었기 때문에 천륜의 법도를 두고 볼 때, 그런 인간의 자랑이란 것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에서 열, 백, 천, 만….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없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도의 길을 가는 사람은 자랑하지 말라, 교만하지 말라, 자기를 내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자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이 자랑하는 것을 용인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본래 인간은 하나님이 자랑할 수 있는 존재로 인간을 지으셨기에 거기에 보조를 맞추어 자기의 권위를 자랑해야 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런 천도를 배반하고 하나님을 슬픔의 자리로 몰아내고, 스스로의 입장을 자랑하고자 했던 것이니, 이것이 타락의 기원입니다.

이렇게 뿌려진 죄악의 씨가 그대로 거두어져서는 안 되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랑하는 인간을 내리쳐 버리는 거예요. 그러므로 자랑하지 말라는 거예요. 이런 입장에 있는 것이 지금까지의 역사를 거쳐온 우리 선조들이었고, 현세에 머물러 있는 인류라는 거예요.

인류가 소망해야 할 것은 무엇이냐? 자기 개인을 내세워 자랑하는 것이 소망이 아니요, 어떤 가문이나 종족을 내세워서 자랑하는 것이 소망이 아닙니다. 어떤 나라를 세워 자랑하는 것이 그 나라 백성들의 소망이 아니요, 세계를 하나의 평화의 왕국으로 자랑하는 것이 인류의 소망이 아닙니다.

이 세계의 모든 것을 다 집어 던지고 잃어버리더라도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엇이냐? 하나님께서 본래 소망하시던 그 자리에서, 만우주를 대하여 자랑할 수 있는 하나님의 위치를 찾아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류의 소망 중의 소망이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한 하나님을 모시는 것이 타락한 인간의 최후의 목적인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개인이 그런 자리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고, 가정․종족․민족․국가․세계가 하나님의 영광을 자랑할 수 있느냐? 가정․종족․민족․국가․세계가 일치된 자리에서, 개인이 하나님의 영광을 자랑할 수 있는, 전세계 30억 인류가 전부 다 그 영광을 자랑할 수 있는 한 날을 맞이하지 못하면, 하나님이 인간을 지었던 본래의 기준, 자랑할 수 있는 그 기준을 다시 찾았다고 할 수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그러한 한 날을 찾기 위하여 지금까지 타락한 인간에 대한 구원섭리를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홀로 이룰 수 없는 뜻

구원섭리는 복귀섭리입니다. 그럼 복귀섭리는 무엇인가? 그 사건이 벌어지기 전의 기준으로 다시 회복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창세 전 에덴동산에서 모든 만물을 지어 놓으신 후 그것들을 바라보시며 기뻐하시고 자랑하실 수 있었던 아버지의 입장, 다시 말하면 창조주의 입장을 어떻게 회복시킬 것인가?

원래 모든 만물은 무엇을 표준으로 지으셨느냐? 인간을 표준으로 지었습니다. 모든 만물도 인간에 귀결시키기 위해서 창조했었다는 거예요. 이렇게 창조한 사람을 최초의 출발과 더불어 최후의 자랑으로 세우시려던 것이 하나님의 소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자리에 인류의 시조가 서지 못하여 인류역사는 슬픔으로 출발이 되고 말았으니 그 과정에 하나님 앞에 부끄럽고 슬픈 사실이 나타나게 됐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류역사의 비참사요, 탄식의 기원이 되었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인간이 가진 이러한 출발의 기원은 어떻게 해서 제거시킬 것인가? 이것은 하나님만으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이런 출발이 누구로 말미암아 되어졌느냐? 인간으로 말미암아 되어졌기 때문에, 이 일을 성취시키고 이 과정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 혼자서 이룰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짓기 전에는 인간을 창조하여 인간을 중심삼고 뜻을 이룰 수 있는 소망의 권이 있었지만, 창조 후에는,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에 인간을 통하여서 다시 수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전후가 거꾸로 되어 있고, 모든 상하관계가 뒤집혀져 있는데 이것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하나님만으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여기엔 반드시 사람이 개재되어야 됩니다.

이 엄청난 문제는 인간이 지은 죄가 초래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원래대로 다시 회복하기 위해서는, 이 엄청난 죄상을 타개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해방의 터전을 마련하지 않고는 하나님이 본래 바라던 자랑의 세계, 자랑의 인류, 자랑의 피조세계를 이룰 수 없습니다. 이것은 창조원칙으로 보아 불가피한 사실이라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타락한 자리에 떨어진 인간에게는 다시 한번 본연의 하나님을 중심삼고 자랑할 수 있는 자리에 찾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을 위해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하고 자랑하시려던 그 만물을, 또 지으신 그 모든 만물을 바라보시던 아버지의 마음을 우리는 알아보아야 되겠습니다. 그 만물을 바라보시던 아버지의 마음이 기뻤다면 그 기쁜 마음을 우리가 찾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우리가 잃어버린 이 자랑의 권한을, 또 그 위에 세워야 할 모든 만물세계를 복귀할 수 없다는 거예요.

본연의 사랑과 심정을 회복하자

만물은 사랑의 존재요, 기쁨의 존재로 지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지으신 만물을 보시고 지극히 선하다고 하셨듯, 여러분도 피조세계를 바라볼 때 지극히 선하다고 느낄 수 있는 마음을 일깨워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지으실 당시의 심정세계를 알아보아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므로 미물인 풀 한 포기를 보더라도 거기에 하나님의 정성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됩니다. 즉 작은 것이든 큰 것이든 모두가 하나님께서 우주적인 가치를 중심삼고 자랑하고 싶어서 지었다는 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인간 본연의 가치를 추구해 나가면서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만물에 대해서 그 가치를 평가할 줄 아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자리를 찾아 들어가야 됩니다.

우리들이 이런 자리를 찾아 들어가기 위해서는 신비경을 탐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간은 타락해서 모르지만, 하나님이 만물을 대해 주인으로서 기쁨을 표시하면 그 기쁨을 만물이 모르게 돼 있느냐?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만물도 기뻐할 수 있게끔 되어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들은 타락권 내에 있으므로 육적인 오관을 통하여 감지할 수 있는 자극밖에는 느끼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본성의 하나님은 모든 만물을 지으신 주인이기에 상대적 입장에 있는 만물에 대해 기쁨을 표시하면, 그 만물들이 기쁨을 알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모두 느끼고 알게 되어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들은 그런 본연의 사랑, 본연의 심정을 찾아야 됩니다.

인간의 육신은 타락했으나 인간의 심성에는 하나님과 관계되어 있는 기준, 출발의 기준이 남아 있기 때문에 이 출발의 기준을 세워 하나님의 공명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공명(共鳴)된 심정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만물을 지으시고 기뻐하시던 기준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로마서 8장에 보면, 바울은 만물이 탄식한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막연한 어떤 관념을 가지고 그와 같은 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궁극적인 자리를 탐구해 들어가니 만물이 탄식하는 소리가 이 세계 어떤 소리보다도 더 크게 들렸다는 것입니다. 그런 무엇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타락 인간이 찾아가야 할 궁극의 자리

타락한 세계의 사람으로서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지만, 지니고 있는 본연의 심성을 통해 하나님과 일치되는 자리에 들어가서 이 우주 만상의 세계를 바라보면 피조물은 물론 오늘 이 사회 전부가 탄식하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던 본래의 그 기준으로 만물과 일치되어서 인간의 가치를 회복하는 자리가 여러분이 찾아 들어가야 할 궁극적인 자리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종교인들은 신비스러운 이런 경지를 찾아가기 위해 자기의 모든 육정(肉情)을 제압하고 현실적인 모든 조건을 포기해 버리면서 깊은 마음의 세계를 더듬어 들어가기 위해 산중수도를 하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그러한 뜻과 기준을 찾기 위한 하나의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마음이 하나님 앞으로 접근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자연에 대해서도 누구보다 가까운 자리에 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자연은 여러분과 상관없는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연은 인간을 위해서, 즉 여러분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절실히 느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본래 인간의 완성을 위해 만물을 지으셨기 때문에 인간은 그것을 깨달아 만유 앞에 자랑할 수 있는 인간으로 출현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하나님 앞에 자랑할 수 있는 그 목적의 세계를 상속 받을 수 있는 자격자로 설 수 없습니다. 도의 세계의 궁극적인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 만물을 창조하실 때 자랑의 존재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하나님의 심정을 동반한 자리에 서서 이 피조세계를 대하여 하나님께서 창조하시던 기쁨을 체득해야 합니다. 그리고 만물을 놓고 나를 위해 지어진 자랑의 존재물이라고 찬양할 수 있는 마음을 체휼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본성의 마음 터전 위에 연결될 수 있는, 하나님이 찾고 자랑하고 싶었던 자식의 인연을 찾을 수 없다는 겁니다.

여러분은 이런 기준을 찾아 나가야 됩니다. 지금까지 그런 자리에 서서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이 이 땅 위에 있었느냐? 없었다는 것입니다. 개인도 없었으며 가정․종족․민족․국가․세계도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인류역사에서 그럴 수 있는 한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타락 인간으로서, 하나님이 영광의 자리에서 자랑할 수 있는 가치를 체득하지 못하고 쓰러진 후손으로서, 그와 같은 이상의 자리에 나갈 수 있느냐? 못 나갑니다. 절대로 나갈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랑의 심정을 통하여 만유의 가치를 찬양할 수 있는 그 기준에 선 사람도 나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두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랑이 되지 못한 이스라엘

하나님은 온 우주 만상을 대신하여 자랑할 수 있는 한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정에 일치되고, 온 피조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상속권을 받을 수 있는 참다운 이상의 모습으로서, 이 지구상에 하나의 인간이 나타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타락한 인간은, 선조가 자랑의 심정을 체득하지 못한 채 뿌린 죄악의 열매로 거두어진 존재이기 때문에, 참다운 이상의 자리에 나갈 수 없는 것입니다. 콩을 심으면 콩이 나고 팥을 심으면 팥이 나는 법입니다. 인류 시조가 죄의 씨를 뿌렸기 때문에 타락된 존재로밖에는 거두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요, 이러한 인생들로서는 하나님의 자랑된 자리에 도저히 나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러한 인간 앞에, 하나님의 심정세계를 연결시켜 줄 수 있는 중매자로서의 한 인물을 이 땅 위에 보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위하여 선민사상을 중심삼고 이스라엘 민족을 택했습니다. 그러나 택함을 받은 것만으로는 자랑의 기준에 설 수 없습니다. 그 민족은 책임을 다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은 책임을 다하지 못함으로 선민으로 택함 받은 가치를 만세에 자랑할 수 있는 민족이 못 됐습니다. 역사 과정에서 번번이 사탄세계에 굴복했으며, 하나님의 뜻을 배반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맞추어 민족을 지도해야 할 책임자들도 시대시대를 거쳐오면서 하나님의 뜻 앞에 언제나 상치된 자리에 섰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국가는 이러한 상치된 역사를 거쳐오면서 이스라엘의 건국이념을 상실해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4천년 동안 준비하심으로 유대 백성이 선민으로서 택함을 받았지만, 그 민족은 하나님의 국가를 세워 자랑해야 할 책임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개인도 그러했고, 가정․종족․민족․국가도 그러했습니다.

하나님은 개인․가정․종족․민족의 기준을 세워 국가적인 자랑의 기준으로 연결시키는 구원섭리를 위해 4천년 동안 준비해 오셨습니다. 국가적인 기준으로 만민 앞에 자랑할 수 있는 이스라엘권을 수습하고 그 위에 하나님의 뜻을 세우기 위해서 이 땅 위에 주인으로 보내진 분이 메시아입니다. 국가적인 메시아! 바로 국가적인 메시아라는 거예요. 그런데 국가적인 메시아로서 등장해야 할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에는 어떻게 되었느뇨? 예수님은 개인적인 메시아로 떨어졌습니다.

만일 그때 예수님이 죽지 않고 예수님과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이 자랑할 수 있는 건국이념을 중심삼고 일치되었다면, 거기서부터 세계는 구원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국가적인 구주의 권한을 가져야 할 예수님이 국가에서 몰리고 쫓김으로 말미암아 민족적인 메시아의 자리로 떨어져 나가게 된 것이요, 민족적으로도 내몰렸기 때문에 종족적인 메시아의 입장으로 떨어져 나가게 된 것입니다. 또한 종족적인 구주의 입장에서 몰렸기 때문에 가정적인 메시아의 입장으로 떨어져 나갔고, 가정적인 메시아의 입장에서도 몰렸기 때문에 세 제자한테까지 몰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땅 위에 메시아로 설 수 있는 발판이 하나도 없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 땅을 중심삼고 자랑할 수 있는 발판도 없게 된 것이며, 이스라엘 민족을 세워 자랑하시려던 하나님의 소원 또한 이룰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러니 예수님이 안 죽을래야 안 죽을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비참하게 몰리고 쫓긴 예수님은 최후의 결판을 짓기 위해 겟세마네 동산에서 비통한 기도를 하시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런 예수님인데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를 구원하려 하신다고요?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비참한 역사라는 것을 여러분은 생각해야 됩니다.

국가적인 기준을 가져야 할 메시아

개인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구주로 말미암아 이 땅 위에 결정됐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가정을 구원할 수 있느냐? 없다는 거예요. 개인만 구원 받아 가지고는 안 됩니다. 가정을 또 구원해야 됩니다. 가정의 구원이 이루어지면 종족을 구원해야 합니다. 즉 종족․민족․국가․세계를 구원해 줄 메시아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까지 예수님은 무엇을 해 나왔느냐? 개인적인 메시아의 입장에서만 머물렀지 가정적인 메시아의 자리에는 못나왔습니다. 가정적인 메시아가 되려면 예수님은 가정적인 메시아로서 만민의 표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렇게 되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신랑이요, 너희는 신부다.’라고 하시며 가정적인 구주의 기준을 결정하려 하셨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소원이요 바람이었으며, 그것을 바라보며 나온 것이 2천년 기독교사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시시한 것을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천륜의 법도도 가정적인 메시아로서 예수님을 보내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국가를 중심으로 국가적인 메시아의 권한을 가지고 만민을 통치하는 실권을 행사하여야 할 입장에서 땅 위에 그 나라를 건국하여 만 우주를 호령할 수 있는 터전을 갖추어 출발해야 할 것이 국가적인 메시아의 기준이었습니다. 이 기준을 갖는 것이 곧 이 땅 위에 메시아를 보내신 하나님의 소원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민족이 잘못하여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은 예수님 이후 2천년이 지나도록 주권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유리고객으로 깨깨 고생해야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 위에 메시아를 보내기 위해서 많은 수고를 하셨습니다. 노아를 세우고, 아브라함, 모세, 세례 요한을 세워서 4천년 동안 귀중한 터전을 준비해 오셨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그 민족적인 메시아를 중심삼고 국가적인 터전을, 국가적인 메시아를 중심삼고 세계적인 터전을 마련해야 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몰리고 쫓기어 개인의 터전마저도 갖지 못하는 서러운 입장에 섰다는 거예요. 이렇게 예수님을 개인의 터전에서도 자유로운 구주의 권한을 가질 수 없는 슬픔의 자리로 떨어뜨린 장본인인 이스라엘 민족은 수천년 동안 고생을 했습니다. 세계 제2차 대전 때에는 히틀러에게 600만이나 학살을 당했지만, 그들의 죄가에 비하면 적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소원하시는 세계

이제 여러분이 찾아야 할 것이 무엇인가? 본래 아담은 하나님 앞에 자랑의 주인공으로 등장했어야 했습니다. 이것은 만세의 구세주로서의 권한을 다 차지한 것이며 만민의 소원입니다. 타락하지 않은 아담가정에서 가정적인 구세주의 기준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구세주란 타락했기 때문에 쓰는 말이지, 타락하지 않았다면 구주란 말은 필요 없는 것입니다.

본연의 아담은 하나님의 특권적인 권한을 가진, 하나님의 가정을 이룰 수 있는 특권자였습니다. 하나님의 가정에서 태어났으니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며, 나아가 종족도 이룰 수 있었는데 모두 잃어버렸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런 개인을 상실하게 된 장본인은 누구냐? 바로 인간 조상인 아담 해와라는 것입니다.

가정적인 메시아의 권한과 특권을 파탄시킨 것이 아담 해와요, 종족적인 메시아의 영원한 승리의 권한을 파탄시킨 것도 아담 해와요, 세계를 통치할 주권을 전부 잃어버린 것도 아담 해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담을 중심삼고 소원하시던 세계를 동경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개인도 필요로 하지만 그 개인은 가정을 찾기 위해 필요한 것이요, 가정은 종족을, 종족은 민족을, 민족은 국가와 세계를 찾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를 필요로 하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사랑을 중심삼은 천상과 지상세계를 찾기 위해서입니다.

바울이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고 말한 바와 같이 인류는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그런 예수님과 일치될 수 있는 세계를 이루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랑이 천세 만세 영원하기 위해서는 천상세계와 지상세계가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변할 수 없고, 어긋날 수 없고, 옮겨질 수 없는 자랑의 기준으로 엉클어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우편으로 가면 같이 우편으로 가고, 좌편으로 가면 같이 좌편으로 가고, 올라가면 같이 올라가고, 내려가면 같이 내려갈 수 있는 천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십자가의 구원을 믿고 있으면 되겠어요? 만일 그렇다면 통일교회에 들어올 필요 없습니다. 날도 더운데 이런 놀음 할 필요 없다는 겁니다. 오늘날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 믿고 천당 간다고 하지만, 믿고 천당 갈 것 같습니까? 천만에! 그런 자들은 천국이 이루어진다 해도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영계에 가도 기독교를 믿고 있는 사람들은 나라 없는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 땅 위에 나라가 없기 때문에 몰면 몰리는 것이요, 찢으면 찢기는 것이요, 총칼로 찌르면 찔리는 것이요, 또한 자르면 잘리는 것입니다.

영원한 자랑권(圈)에 살아야 할 인간

땅 위의 기반을 잃어버린 슬픈 민족, 슬픈 무리가 종교인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들을 방패로 세계적인 소망의 터전을 위해 선민사상을 주어 분열된 이스라엘을 통해 자랑할 수 있는 국가와 세계를 창건하시려 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그것을 위해 천신만고의 4천년 역로(逆路)를 고심참담하며 개척해 나오셨습니다. 그렇게 마련해 나온 터전 위에 보내신 메시아인데 이스라엘 민족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보혈로 구원받을 수 있어요? 십자가는 부수어 버려야 합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달려 죽임을 당하던 형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으면서 부활의 권을 이루었기 때문에 그때부터 인류는 예수를 믿고 부활함으로 말미암아 영적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도리를 믿는 것이지 십자가의 도리를 모르고는 믿는 게 아니에요. 그런데 십자가의 도리를 믿는 것들이 뭐 정통이라고요?

우리는 자랑해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자랑할 수 있는 요건을 갖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만천주 앞에 인간을 세워 하시고 싶으셨던 그 자랑은 최후의 자랑입니다. 인간이 이러한 자랑으로 출발해야 할 것이었는데도 불구하고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그 자랑을 보시지 못하였습니다. 그 자랑은 알파요 오메가니 처음과 끝이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자랑을 영원무궁토록 계속하며 영원히 끊어지지 않는 자랑권에서 살아야 할 인간은 어디로 갔던가? 타락의 보응으로 말미암아 천 갈래 만 갈래로 다 깨어져 나갔습니다. 이런 여러분을 중심삼고 하나님이 소원하시는 자랑의 천국을 창설할 수 있겠습니까? 어림도 없습니다. 모두 누더기 판이 되었으니 휘발유를 뿌려서 불살라 마땅할 것들입니다.

우리는 기필코 가야 되겠습니다. 이제 타락한 인간으로서 소망하는 것은 개인적인 구주의 사명을 해 줄 수 있는 민족적인 기원을 가진 개인이어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 과정을 통하여 선조들이 가정적인 메시아의 기준을 세우기 위해, 하나님 앞에 제물의 자리를 통해 섰던 그 자리를 내가 찾아가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은 망했지만, 망하기 전까지 복을 받고 살던 기준을 찾아 그 터전을 우리의 것으로 상속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통일교회도 지금까지 신․구약을 통한 이스라엘 역사의 기반을 중심삼고 나온 것입니다.

자랑해야 할 본연의 가치

노아는 인간 조상의 자리에 세워졌는데도 불구하고 책임을 못했습니다. 이와 같이 책임을 못할 때는 사탄이 참소하므로 여러분은 책임을 다해 조상의 실수를 시정할 수 있는 권위까지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은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으로서 실수한 것을 권고할 수 있는 권위를 가진 아들딸, 모세가 실수한 역사적인 사실들을 부여안고 충고할 수 있는 아들딸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중심삼고도 당신은 왜 죽었느냐 할 수 있는 아들딸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에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세 번씩이나 비참한 기도를 했는데 왜 죽었느냐 말입니다. 왜 죽게끔 만들었습니까?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 14:36)라고 기도하게끔 왜 만들었느냐는 말입니다. '기왕 부활할 것이라면 십자가를 지고 죽지 않을 수 없었느냐?' 할 수 있는 아들딸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물론 당시 예수님을 대한 책임을 못하여 2천년 한의 역사 속에서 기독교를 확산시키는 동기를 만든 이스라엘 민족에 책임이 있지만 예수님도 책임을 못했다는 거예요. 선생님이 이런 말을 하면 ‘예수님은 하나님 자체이신데 신성을 침범하다니! 아, 무섭다! 통일교회 문 아무개는 이단의 괴수다’라고 기성교인들이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통일교인들은 껄렁껄렁한 패들이 아닙니다. 선생님도 바람에 날려 가는 가랑잎과 같은 그런 존재가 아니에요. 태풍이 불어도 밀고 나갈 수 있는 무엇을 가지고 함께 일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통일이라는 명사를 중심삼고, 세계기독교라는 간판을 등에 지고, 신령한 협회를 만들자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물론 이것을 요리할 수 있는 능동성이 있어야 됩니다. 예수님은 유대교를 요리하려다 죽었다는 것입니다. 4천년 동안 준비한 이스라엘 선민을 요리하려다 죽었습니다.

오늘날의 세계적인 기독교와 맞먹는 것이 유대교요, 전세계 기독교인들과 맞먹는 것이 유대인이요, 이스라엘 민족과 맞먹는 것이 민주세계요, 또 로마와 맞먹는 것이 공산세계입니다. 이것을 요리해야 됩니다. 그래서 통일교회는 이런 길을 개척해 나온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랑할 수 있는 자체가 되어야 합니다. 개인을 만민 앞에 자랑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이 아담 해와를 지을 때 이런 본성의 기준을 통하여 어떠한 미묘한 가치까지도 부여하여 자랑하려고 하셨습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그런 가치가 있습니까?

있다면 여러분들도 만물들과 신비스런 얘기도 다 할 수 있는 거예요. 나무하고도, 돌하고도 얘기할 수 있는 거예요. 옛날에 성 프란체스코는 새나 늑대에게도 설교를 했어요. 그런 우화 같은 얘기가 있지만 원래 인간은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본연의 가치를 가진 인간은 존재하는 만유의 생명선을 움직여 가지고 만물이 자극을 받으면 그 존재 앞에 다시 수고를 해서 자격을 갖추어 가지고 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랑할 수 있는 자리

우리는 잃어버렸습니다. 자랑할래야 자랑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중에 ‘통일교회 처음 갔더니 대단하던데,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법정에 서 있는 사형수보다 더 천대하나.’ 하며 불평할 사람이 있으면, 불평하라는 거예요. 선생님이 거짓말했나 죽어 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자랑할 수 있는 자리가 어디 있느뇨? 가정을 들어 자랑할 수 있다면 그 가정의 구성이 어떻게 되어 있으며, 종족을 들어 세계 만상 앞에 자랑할 수 있다면 그 종족은 어떤 종족이뇨? 또 그러한 민족․국가․세계는 어디에 있느냐? 이것을 하나님은 마음으로 원했다는 거예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그 마음을 통하고 개인․가정․종족․민족․국가 전체의 가치를 가지고 자랑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이 땅 위에 다시 올 수 있는 한 사람이 있어야 되니 그분이 바로 메시아입니다.

메시아는 여러분이 지금까지 살던 방식을 그냥 그대로 가지고 오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좋다고 하는 그런 방식을 모두 무시하는 것입니다. 도의 길은 이렇게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길은 편하게 걸어가는 길이 아니요, 죽음을 각오하고 가야 되는 길입니다.

본래 하나님은 인간을 중심삼고 자랑하고 싶어서 만물을 지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물을 먼저 사랑할 수 있는 자리에 서지 않고는 인간은 자랑할 수 있는 자리로 못 나가는 것입니다. 인간은 아직 자랑할 수 있는 그 경계선을 못 넘었어요. 하나님은 마음으로 자랑하려고 했지만 자랑할 수 있는 실체의 자리에 인간이 못 나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타락한 인간이 온 피조만물을 다스리는 권한을 가진 만물의 영장이라고요? 그래, 여러분들이 만물의 영장입니까? 영장이 다 뭐요? 만물의 송장이지. 영장이라는 이름을 붙였기 때문에 그렇게 알고 속아 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 한번 죽을 구덩이에 처박혀야 되는 것입니다.

자랑할 수 있는 특권의 기준

개인으로서 자랑할 수 있는 특권의 기준이 어디 있을 것이며, 가정으로서 만유의 존재세계에 하나님이 자랑하고 싶어하시는 특권의 기준이 어디 있느뇨? 종족의 특권의 기준은 어디 있을 것인가? 또 민족의 특권의 기준과 국가, 세계의 특권의 기준은 어디 있을 것이뇨? 또한 우주를 총합할 수 있는 특권의 기준은 어디에 있을 것인가? 인간이 이것을 모두 잃어버렸으니 다시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타락한 인간 사회에서 이상세계를 찾기 위해 자유와 평화를 찾아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복잡해지기만 한다는 것이니, 아무리 찾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악과 인연되지 않은 자리에서 승리할 수 있는 방패를 들고 이 땅 위에 한 분이 와야 됩니다. 즉 다리의 역할, 중매자의 역할을 할 수 있는 한 사람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은 타락한 후손으로 죄악의 사슬에 매여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힘이 세다 하더라도 그 사슬을 끊을 수 없으니, 끊어 줄 수 있는 사람이 와서 여러분을 거기로부터 해방시켜 줘야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태어났는지 아십니까?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아십니까? 형무소에 들어간 사람도 나올 때에는 갈 곳을 정하고 나옵니다. 자신의 집을 그리워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갈 데가 어디입니까? 집이 있어요? 여러분에게 아내와 아들딸이 있다고 하지만 진짜 여러분의 아내와 아들딸 같아요?

하나님의 본성의 기준을 중심삼고 볼 때 개인의 가치는 만유 앞에 자랑할 수 있는 자리에서 세움을 받아야만 있는 것입니다. 아들딸도 그런 자리에서 세움을 받아야 하고 가정도 그런 자리에서 세움을 받은 후 가족끼리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그런 자리에서 사랑했습니까? 여러분은 마음대로 시집 장가가고 별의별 놀음 다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가짜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개인․가정․종족․민족․국가를 얽어매어서 대심판을 해야 합니다. 망할 때가 되었습니다. 이런 것을 볼 때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입니다. 모두 하나님이 자랑할 수 있는 자리에 서지 못했기 때문에 대심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대심판이 공산당들이 학살하는 것보다 더 무섭겠는가, 안 무섭겠는가? 대심판 날을 맞으려면 공산당을 무서워해서는 안 됩니다. 이마가 깨지더라도 싸워야 합니다.

여기에 있는 통일교회 사람들은 대심판을 바라요, 안 바라요? 대심판 날이 오길 바라요, 안 바라요? 바란다면 그날을 피할 수 있는 재간이 있어요, 없어요? 없다면 그날이 오기 전에 하나님의 뜻을 중심삼고 미리 죽어두는 것이 낫다는 거예요.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미리 죽여주려고 죽어라 하고 야단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악이에요, 선이예요? 선이라면 죽여주겠다고 하면 ‘좋다.’고 해야겠군요.(웃음)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도 자랑하고 싶을 거예요. 아가씨들도 좋은 것이 있으면 자랑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자랑해서 뭘 합니까? 자기 중심하고 자랑하고, 가정 중심하고 자랑해 봐야…. 남의 눈을 중심삼고 자랑해서는 소용없어요.

자랑하고 싶으신 하나님

태백산맥의 분수령을 중심삼고 볼 때 한쪽의 물은 동해로 흘러가고, 다른 쪽의 물은 서해로 흘러갑니다. 맑은 동해로 흘러가는 물은 빨리 가기를 원하지만 흐린 서해로 흘러가는 물은 가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최후의 분수령에서는 모두가 갈라지는 것입니다. ‘아이고, 너와 나는 갈라지면 안 되는데,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아야 돼.’ 해도 갈라지는 것입니다.

자! 여러분, 자랑하고 싶어요, 자랑하고 싶지 않아요? 모르긴 몰라도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있을 거예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자랑하고 싶은 거예요.

선생님은 거지들이 살고 있는 곳에 많이 가 봤습니다. 그들은 낮에 밥을 얻어 가지고 오는데 거기에는 별의별 사람이 다 있습니다. 서로 먹을 것을 얻어 가지고 와서 ‘무엇을 얻어 왔어?’ 그러면 ‘나는 잔칫집에서 돼지고기 얻어 왔어.’하며 춤추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환경에서는 그것이 또 자랑이 되거든요. 수십 명이 밥을 얻으러 갔다 왔어도 한 사람이 조금만 기준이 오르게 되면 전부 다 그것을 가지고 떠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랑하고 싶어요, 자랑하고 싶지 않아요? 자랑하고 싶지 않으면 관둬요. 그러면 천국에 못 갑니다. 아무리 못났어도 자랑하고 싶다 이겁니다. 어떤 사람이 ‘저 사람 얼굴이 왜 저렇게 생겼어? 제멋대로 생겼구만! 어이쿠, 거기에 또 혹이 달렸구만!’ 할 때, 사람에게 혹이 달렸다는 것은 기가 막힌 일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자랑할 만한 것이 돼요? 이런 사람이 자랑하게 돼 있어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사람은 자기에게 남에게 없는 것이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자랑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자랑하고 싶지요? 선생님도 자랑하고 싶은데, 자랑하면 세계가 놀라서 자빠지게 되어 있으니 자랑 안 하고 가만히 있는 거예요. 통일교회가 어떻다고 별의별 욕을 해도 가만히 있었어요. 통일교회에서 신문광고 내서 변명하는 말 들어 봤어요? 욕을 하려면 실컷 해 보라는 것입니다. 목이 아프고, 배가 고프면 하다가 그만두겠지,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자랑하고 싶고, 선생님도 자랑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떠시겠습니까? 자랑하고 싶으시겠습니까, 안 하고 싶으시겠습니까? 하나님도 자랑하고 싶으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구를 데려다 자랑할 것이냐? 통일교인들을 데려다 자랑하실 수 있다면 참 좋겠지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마음도 기쁘실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도 자랑하고 싶은데, 거기에는 자랑을 받을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랑하고 싶은 사람이 못난 사람이겠느냐, 잘난 사람이겠느냐? 그 사람은 천하에 하나밖에 없는, 하나님과 완전히 심정과 사정을 통할 수 있는 자리에 선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럴 수 있는 아들딸이 됐습니까? 이런 멋진 아들의 표준을 세워 놓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생각하며 통일교인들은 신나 있는데 세상은 다 잠자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랑하고 싶은 사람

하나님도 자랑하고 싶으신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역사상의 성인 현철, 모든 위인들을 세워서 인류를 수습하게 한 후 자랑하시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세운 조건으로 한 시대, 한 세계, 한 역사 과정을 통해서 자랑하셨지만, 그 사람들이 하늘땅을 거쳐 가지고 자랑할 수 있는 가치를 지니지 못할 때는 그 자리에서 전부 다 쓰러져 갔다는 것입니다.

옛날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비참하게 기도를 하고, 골고다 언덕에서 죽어간 예수님은 얼마나 처량하고 쓸쓸했겠습니까? 생명을 걸고 믿는다던 열두 제자는 어디로 갔으며, 사랑하던 세 제자는 어디로 갔습니까? 예수님이 죽기 전에 먼저 죽겠다고 맹세하던 제자들은 전부 다 도망가 버리고 여자들만이 길가에 엎드려 울고 있는 것을 보셨을 때 예수님의 기분이 좋았을 것 같아요? 나빴을 거예요. 그때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이 녀석들아, 나라를 잃어버리고 세계를 잃어버린 너희들이 이제 와서 울면 뭘 하느냐? 잃어버리기 전에 노력했어야지.’ 하셨을 것입니다. 여자가 이혼을 당하고 소박을 맞고 나서 보따리를 싸면서 울면 뭘 해요? 그 전에 그러지 않게 노력해야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울며 따라오는 여자들에게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을 위해 울라.󰡓(눅 23:28)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참으로 기가 막힌 말입니다.

그러면 통일교회 사람들은 자랑하고 싶은가, 안 하고 싶은가? 얼마나 자랑하고 싶어요? 여러분은 세계의 인류가 전부 두 번, 세 번, 네 번은 구경하려고 왔다 갔다 할 수 있을 만큼 자랑해야 됩니다. 여러분들에게 그럴 수 있는 기력이 있어요? 그것이 3대(代)를 거쳐야 됩니다. 3대를 거치지 않으면 하나님의 것이 못 됩니다. 타락한 세상에서는 3대를 거쳐야 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이렇게 3대를 거쳤으며, 야곱도 7년씩 3단계를 거쳤습니다. 또 아담시대․예수님시대․재림주님시대의 3단계를 거치는 것입니다.

그러면 통일교회인들이 핍박받고 있을 때 통일교인인 여러분은 자랑했어요? 마음으로는 자랑했을지 모르지요. 그러나 이제는 자랑할 때가 되었습니다. 자랑을 하려면 무엇부터 자랑해야 합니까? 아버지 어머니가 자랑스러운 일을 했으면 그 부모의 자랑부터 해야 하는 거예요. 그다음 아들딸이, 그다음 그 손자가 와서 자랑할 수 있으면 신나는 거예요. 이렇게 3대를 거쳐 자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는 하나님께로 못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가정을 중심삼고 종족이, 종족을 중심삼고 민족이 가담해서 자랑할 수 있는 기준이 될 때까지 가야 합니다. 여러분에게는 가정을 중심삼고 가야 할 길이 남아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 길을 가서 하나님이 세워준 민족을 거친 그 후부터 국가의 국민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랑을 하려면

사회의 구성요소는 가정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이 땅에서 명실상부하게 구주 노릇을 다하고 간 줄 알고 있나요? 로마 통치 4백년 기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참히 학살당했는데, 예수님이 구주로서 사명을 다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로마뿐만 아니라 기독교가 들어간 나라마다 몰리고 피 흘리는 역사를 갖지 않은 나라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가 구주의 사명을 다했다고 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본래의 목적은 개인을 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를 구하고 그 나라에서부터 천국을 건설해야 할 예수님이었습니다. 유대교인, 제사장, 교법사, 로마의 바오로 1세까지 전부 다 예수님께 굴복해야 됩니다. 이스라엘의 통치자들 전부가 굴복해야 합니다. 기분 나쁘겠지만 그래야 됩니다. 그리하여 반대하는 사람들을 수습해서 천국을 향해 출발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 양손 양발에 못박히려고 이 땅에 왔다구요? 어찌 하나님의 아들이 그럴 수가 있습니까? 이 죄악 된 세상에 아무리 하찮게 태어난 사람도 그런 놀음 안 합니다. 예수님은 영광이 변하여 극형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는 이스라엘 민족이 책임을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은 예수가 왔다 간 후 2천년 동안 한의 고개를 넘게 된 것입니다. 1948년 5월 15일 유엔에 의해서 이스라엘은 독립이 되었는데 이스라엘이 독립되거든 주님이 오실 때가 된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나라 잃어버린 민족이 얼마나 서러운가를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보다 20배나 더 큰 아랍권 내에 들어가서도 ‘호랑이 굴에 들어가니 정신 똑바로 차려야 되겠다.’고 마음으로 다짐하여 가지고 작년 5월 중동전에서 6일 동안 싸워서 이긴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도와주신 것입니다.

예수님 이후 2천년이 흘렀습니다. 이러한 전역사를 청산 짓고 나가야 할 여러분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럼 ‘우리의 자랑’을 하기 위해선 자랑의 관문을 통과해야 돼요, 안 해야 돼요? 그러나 자기의 자랑을 할 수 없는 사람은 우리의 자랑은 꺼내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내 자랑이 뭐냐? 그것은 피조세계와 만우주를 대신하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만물들과 하나님을 대신하여 그것들을 수습하여 주관하며 사랑할 수 있는 주인공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하여 역사의 수많은 선지선열들이 왔다 갔지만, 그들 모두 나를 본받을 수밖에 없는 입장에 서야 하는 것입니다.

통일교회에서는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않습니다. 통일교회에 처음 들어온 사람들은 ‘어이쿠, 참부모가 뭐야? 뭔데 참부모의 이름으로 기도하나?’ 하고 생각할 것입니다. 여러분, 참부모의 뜻이 뭔지 알아요? 참부모란 에덴동산에서 타락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서 천세 만세에 자랑할 수 있는 우리의 조상을 말하는 거예요.

그런데 세워진 인류의 조상이 타락했기 때문에 새로운 조상이 있어야 하는 것이며, 하나님 또한 새로운 조상을 중심삼고 섭리하기 때문에 새로운 조상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치가 딱 맞는 것입니다. 예수님 한 분으로는 통하지 않기에, 예수님과 성신을 통해야 합니다. 즉 예수는 아버지 신이고 성신은 어머니 신이니 타락한 인간들은 누구나 그런 부모의 인연을 통하지 않고는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신이기 때문에 어머니 신이 없어 가지고는 완전한 구주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된 사실을 모르고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복을 빌면 되겠습니까? 모두 모르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처럼 속고 있는 세계의 10억이 넘는 기독교인들을 재교육시켜야 됩니다. 자신 있어요, 없어요? 자신 있다는 사람들 대답이 왜 그렇게 약해요? 그럼 선생님을 한번 해방시켜 봐요. 선생님도 해방 못 시키면서 나라를 해방시킨다고 할 수 있어요? 그래도 회개를 못하고 눈만 껌벅 껌벅하고 앉아 있지요. 말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바쁜데 언제 그런 말을 늘어놓습니까? 당장 행동으로 나타내야 합니다.

자연은 제1의 성경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이 나라 찾는 데 통일, 통일이여, 오서 오라.’ 하는 노래가 있지요? 그래, 우리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통일교회가 왜 바쁜 줄 알아요? 죽어도 통일, 살아도 통일, 사람을 만나도 통일, 밥을 먹어도 통일, 모든 것을 통일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통일을 하려면 세계 제일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송곳이면 세계 제일가는 송곳이 되어야 합니다.

차돌을 자르는 절단기같이 되라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가끔 공장에 가서 보면 선반이 돌아가는데 거기에 바윗돌을 갖다 대면, 󰡐쉭!󰡑 하고 잘라집니다. 그것을 보면서 통일교회 교인들의 손톱이 이렇게 단단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탄을 산 채로 밀어 버릴 수 있게 말입니다. 그게 악이에요, 선이에요? 남을 치는 것은 죄이지만 사탄을 치는 것은 선입니다.

우리의 자랑을 하기 위해서는, 우리라는 명사를 통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관문을 먼저 통과해야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자기를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됐어요? 선생님이 여러분에게 말하는 것은, 만우주에 있어서 그 무엇보다도 고귀한 자리에서 자랑할 수 있는 권위를 상속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도의 길을 통해 깊고 오묘한 하나님이 심정세계로 넘어가서, 만물을 품고 눈물을 흘리며 피조세계의 존재물을 향하여 자기를 하소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향해 ‘내 사정이 있기 전에 네 사정이 있지만, 너는 나 때문에 이렇게 불쌍한 자리에 있으니 조금만 참아다오. 10년만, 20년만 참아다오!󰡑 할 수 있는 마음의 자세를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가지기 위한 것이 도의 길입니다.

석온씨 노친 왔어요? 지난번에 선생님에게 와서 󰡐아! 선생님 이상해요. 오늘 내가 산에 가서 기도를 하고 내려오는데 소나무, 버드나무, 할 것 없이 전부 춤을 둥실둥실 추면서, 저에게 잘 부탁한다고 하는데, 그거 왜 그래요?󰡑그래서 󰡐이 노친네 미쳤구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나? 사탄 놈이 그랬구만!’ 했어요. 그러나 그건 복이에요, 복! 그렇게 좋은 일이 있었으면 선생님이 반대를 하더라도 참이라고 믿어야지요. 그것을 전부 다 밟고 올라서지도 못하고 자기 것을 만들 수 있어요?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하면 사탄이 빼앗아 가는 거예요.

그래서 옛날 기도하는 사람들이 자연은 제1의 성경이라고 했습니다. 제2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엮어 온 성경을 보면 내용을 확실히 알 수 없거든요. 그 내용을 보고 선생님이 얼마나 머리를 흔들었는지 알아요? 그것은 점쟁이들이 점하는 것처럼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라는 것입니다. 현실을 도피하기 위한 방편입니다. 그래서 사실의 내용을 판단하고 전후사정을 가려내려면 힘이 들기에 성경보다는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의 세계가 제일이라는 거예요.

여기서 내가 우주를 대신하여 하나님이 자랑하실 수 있는 사람이라고 자신하는 사람, 손 들어 보세요. 손 들었으니까, 선생님이 한 가지 물어볼 게요. 여러분이 처음에 색시를 보니까 곱던가요, 안 곱던가요? 「곱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곱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이 내 속에 들어왔기 때문에 사랑스럽고 또 곱다고 느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예」 그럼 상대되는 여자가 ‘나는 영광 중에 영광입니다. 내 남편은 하늘나라에서 왔나요, 별나라에서 왔나요?’ 하면서 찬사하던가요? 「예.」 󰡐예.󰡑라는 말이 어디서 나와요, 예라는 말이.

여러분은 징검다리가 어떤 것인지 알고 있지요? 냇물 속에 있는 징검다리지만 슬쩍슬쩍 건너면 발에 물을 안 묻히고도 갈 수 있어요. 이것은 명사 그대로 징검다리입니다. 그러나 복귀의 길은 징검다리 건너기처럼 쉬운 것이 아니에요. 아주 어려워요. 한 발짝만 내디뎌도 들러붙습니다. 수렁에서 허우적허우적 하게 되면 자꾸자꾸 빠져 들어가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통일교회는 하나님을 해방시켜야 한다

봄에 얼었던 땅이 녹은 진창길을 갈 때, 깨끗한 신발을 신고 나갔으니 돌아올 때도 깨끗하기를 바랄 거예요. 그러나 신발, 버선, 치마 할 것 없이 온통 진흙이 들러붙는 것입니다. 여기 저기 묻어서 인사도 없이 버티고 있거든요. 그런 진흙탕 길도 가기 귀찮아하는데 복귀의 길은 쉬울 것 같아요?

복귀의 길은, 개인복귀․가정복귀․종족복귀․민족복귀․국가복귀․세계복귀․천주복귀․하나님복귀를 모두 거쳐야 됩니다. 하나님을 복귀해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복귀해야 한다고 하지만 하나님을 어떻게 복귀해?’라고 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속에 잠겨 있는 수심을 벗겨 드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도 혼자서는 하나님으로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으로 모셔 줄 수 있는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행복하시려면 효자를 맞이하여야 합니다. 그리하여 천하가 효자로 말미암아야만 하나님의 마음에 천국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자식이 전부 죽을 지경인데 하나님께서 편안하시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을 해방시켜 드리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통일교회에서 이와 같은 일을 하자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욕을 하려면 얼마든지 하라는 거예요. 선생님은 옥살이도 많이 했습니다. 인생살이에, 인생철학에 있어서도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내용이 있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여기서 말씀을 하고 있지만, 노동판에 나가서 노동을 해도 누구한테 지지 않습니다. 염전에 가서 소금 가마니를 메는 데 있어서도 누구에게 지지 않아요. 선생님은 못하는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도와주지 않아도 뜻을 이룰 수 있는 자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통일교회 문 선생님은 ‘여봐라!’ 하면 전부 다 ‘예!’ 할 수 있는 높은 자리에 앉아서 수염을 쓸고 있는 줄로 알고 있는데 잘못 알고 있다는 거예요. 하기야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작전하는 데 도움도 돼요. 그래서 기습작전을 한다, 기습작전! 선생님은 이런 일을 하고 있어요. 선생님 나이가 50이 가까웠습니다. 그러나 갈 길이 멉니다. 여러분들, 따라갈래요, 여기서 그만 둘래요? 「따라가겠습니다.」

끝까지 가야 할 복귀의 길

통일교회는 지금까지 욕을 먹었습니다. ‘통일교회는 벌거벗고 춤을 춘다는데, 음란한 단체지.’ 하면서 자꾸 덮어씌운다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덮지 못하고 추운데 얼마나 좋아요?

옛날 3․1운동 때 선생님 동네에 이런 사람이 있었어요. 이 사람은 죽어도 만세, 살아도 만세를 부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일본 헌병들에게 잡혔습니다. 그때 만세를 부른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하고 불러야 했었는데 이 사람은 잡혀가면서도 만세를 불렀습니다. 옆에서 일본 헌병이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정신이상자 같거든요. 보통 사람들은 잡히게 되면 주름살이 잡히고, 눈이 찡그려지고, 사지를 다 오그리면서 기운을 못 차리고 죽어 가는데, 이 사람은 끌려가면서도 만세를 부르거든요. 지금까지 자기들이 본 것과 다르니까 이 사람은 정상이 아니고 돌았다면서 가다가 그냥 풀어줬습니다.(웃음) 그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일본 헌병들처럼 여기서 그만두겠어요, 따라가겠어요? 「따라가겠습니다.」

선생님은 이제 태평양을 건너갈 텐데 따라가겠습니까? 태평양을 건너갈 자신이 있어요? 「예.」 어떻게 건너갈 거예요? 거북이를 타든가 다리를 놓든가 해야지요? 그렇다고 ‘누가 다리를 놔주면 건너가지. 아이고 건너가다 다리 아프면 조금 쉬고, 그래도 고단하면 돌아오면 되지.’라고 하겠어요? 말은 쉽지요. 그래도 따라가겠어요, 그만두겠어요? 「따라가겠습니다.」 정말이에요? 「예.」

선생님은 참으로 많이 속았습니다. 선생님이 여러분의 마음들을 쓱 들여다보면 무슨 시시껄렁한 것만 잔뜩 채워져 있는 것이 보이니 다짐하는 말들이 믿어져야지요. 이것을 볼 때 하나님이 불쌍하시다는 거예요.

여러분의 마음이 원하는 것을 열에서 백까지 한번 쫙 펴 보세요. 하나님과 친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되는지. 여러분은 좋은 것이 있으면 ‘내 것’ 그렇게 하지요? 그때는 하나님도 자기 뒤에 서라는 거예요. 그러다가도 조금만 나쁜 것이 있으면 ‘난 싫어!’ 한다는 거예요.

여러분이 복귀노정을 가는데, 좋아하는 것만 취해 가지고 복귀할 수 있어요? 좋은 것은 사탄도 안 놓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나쁜 것을 좋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여러분, 그렇게 할래요, 안 할래요? 「하겠습니다.」 그러면 선생님이 선두에 서야 되겠어요, 여러분이 선두에 서야 되겠어요? 누가 선두에 서야 됩니까? 선생님이 선두에 섰으면 좋겠지요?

요즈음 선생님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 결국은 여러분 모아 놓고 뒤치다꺼리하다가 지쳐서 쓰러지더라도, 동정도 못 받을 것 같아요. 그렇지만 ‘본래 선생님의 사명이 그것인데….’ 이렇게 생각한다는 거예요. 하기야 그런 사명이 있다면 얼마나 거룩하겠어요?

자, 여러분은 가겠어요, 안 가겠어요? 「가겠습니다.」 그리하여 자기를 중심삼고 자랑하고, 우리를 중심삼고 자랑할 거예요? 그러나 지금 여러분에게는 그런 자랑할 자격이 없습니다.

개인이 타락하여 구원을 받지 못하더라도, 즉 구원받을 수 있는 때를 잃어버렸더라도, 가정이 구원받을 수 있는 도리를 다해 하나님 앞에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되어 있으면 개인도 제2차적으로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만일에 가정이 구원받지 못하더라도 그 친척들이 구원을 받아, 하나님 앞에 세움 받을 수 있는 종족으로 결정되면, 개인도 구원받을 수 있고, 그 가정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이번에 7월 20일부터 전부 다 지방 파송이라는 명령을 하고 꽁무니에다 불을 붙일 때 여러분은 어디로 가겠어요? 집으로 도망가겠어요, 세계로 뛰어나가겠어요? 열이면 열 사람 전부 다 집으로 도망가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면 망하는 것입니다. 불을 붙여 놓으면 전부 다 세계로 뛰어 나가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이러한 마음 자세가 되어 있어요? 되어 있어요, 안 되어 있어요?

복귀해야 할 본연의 기준

자 그럼 지금부터 우리, 자랑 한번 해 봅시다. 지금까지는 욕먹는 때였습니다. 여러분이 이제까지 뜻길을 따라오면서 자랑해 본 적 있었어요? 동네에 들어가면 이리 쫓기고 저리 쫓겨서, 다리를 다치지 않나, 머리가 터지질 않나, 또 남편에게 쫓겨오질 않나…. 그런 여러분을 볼 때 선생님의 팔자가 왜 이렇게 거센가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하등의 상관없는 무리들에게 이렇게 핍박을 당해야 하나! 그것은 여러분들이 욕을 당한 것이 아니라 선생님이 욕을 당한 것입니다. 또 이건 그저 하지 말래도 해 가지고 욕먹고…. 여러분들이 선생님을 욕먹인 것입니다.

선생님이 무엇을 얻기 위해서 이 일을 하는지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자랑할 수 있는 본연의 기준을 상실했기 때문에 그 기준을 복귀하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통일교회가 말하는 복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우주에 자랑하고 싶었던 본연의 마음이 전부 동강동강 잘려서, 말할 수 없는 수심에 잠겨 있으니, 이것을 모두 붙여서 본연의 마음을 찾아 드려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나로 말미암아 그 기준을 세울 것이냐?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께서 아담 해와를 짓고 기뻐하시던 그 마음을 어떻게 하여 되찾아 드릴 것이냐? 이것이 6천년사의 한으로서, 인류가 해결해야 할 중대한 문제라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됩니다.

예컨대 한 부인이 있는데 그 부인은 자기에게 본남편이 있는 줄을 모르고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갔다는 거예요. 그런데 아들딸을 낳고 살다 보니 본남편이 따로 있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낳은 자식들을 데리고 본남편을 찾아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역사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른 혈통을 통해 태어난 자식들이 여러분들입니다. 그래서 양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본남편을 놓아 두고 시집갔다가 다시 그 남편에게 돌아온 그 부인이 성신입니다. 따라서 성신은 사탄세계에 있는 아들딸들을 데리고 하나님 폼으로 돌아가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본래의 아버지가 내 아버지가 되어야 할 텐데, 나는 다른 핏줄을 통해 태어났습니다. 이런 내 얼굴을 바라볼 때 그 아버지의 기분이 좋겠어요, 나쁘겠어요? 얼마나 나쁘겠어요? 그 아들을 바라볼 때마다 지난날의 역사가 생각난다는 거예요. ‘네가 잘못했기 때문에 내가 지금까지 이렇게 고생을 했구나.’ 한다는 거예요. 여기에 6천년 역사의 사연이 포함되어 생각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한을 풀어야 할 우리

그러나 하나님은 이를 악물고 이런 한을 억누르며, 그런 인간을 접붙여 가지고 ‘너는 내 아들이다. 내 아들이다. 내 아들이다.’ 하는 것입니다. 또 ‘날 닮아라. 날 닮아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짜를 놓고 '진짜다. 진짜다.' 하여 진짜를 만드는 일과 같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입장에 계시는데도 불구하고 인간은 얼마나 하나님에게 반박하고 원망해 나왔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입장에 선 인간들을 중심삼고 나가면서도 이 땅 위에 진정한 메시아사상을 중심으로 본연의 가정이 있고, 종족이 있다면 여기에 사랑을 주시는 것입니다.

아벨은 가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세운 것입니다. 아벨이 아벨로서 서기 위한 결정적인 판가름은 가인을 굴복시켜 가지고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준을 닦는 데서 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는 이러한 사연이 있다는 거예요. 그러나 당신의 그런 입장을 억울해하고 분해하시는 것보다도 당신의 아들이 그런 사연을 수습하여야 할 수밖에 없는 입장을 더 분하게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이 의붓자식과 같은 입장에 있기 때문에 드는 섭섭한 마음보다도, 억울한 자리에서도 할 수 없이 친자식으로 만들기 위한 일을 해야 할 아들의 입장을 놓고 더 서러워하셨기에 참고 지금까지 나오셨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이 땅 위에 오시는 주님은 영광의 주님으로 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인간들의 한스러운 구렁텅이를 모두 메워서 평지를 만들어야 하나님이 본래 이상하시던 천국, 에덴동산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자유스러운 행차를 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아들을 앞에 세우고 행차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행차하실 때 앞에 서시지 않습니다. 한 나라 대통령이 행차할 때 시위대가 앞에 서서 호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땅 위에 하나의 새로운 천국이 이루어질 때는, 아들이 아버님을 모시고 들어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역사를 하셔야 하기 때문에 이 땅 위에 그럴 수 있는 아들딸을 찾기 위해서 종의 종 자리에서 종의 자리, 또 양자의 자리에서 아들의 자리를 거쳐 지금까지 섭리해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개인을 몰고, 가정을 몰고, 국가를 몰고, 세계를 몰아서 자유의 천국 환경을 만들기 위해 엮어져 나온 6천년 역사입니다.

여기서 누가 희생했느냐? 하나님 편에 가까운 종들과 양자들과 아들입니다. 그 중에서 대표적으로 희생한 분이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은 천국의 길잡이로 이 땅에 오셔서 타락 인간이 죽음의 길에서 삶의 길로 돌아설 수 있는 길을 개척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민주세계를 창건하였고 그 2천년 소원의 터전 위에서 새로운 시대를 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역사와 시대를 수습해서 새로운 이상의 천국을 향하여 출발하려는 무리가 통일교회의 무리입니다. 알겠어요?

그러나 통일의 무리는 허우대가 별난 것이 아니요, 얼굴을 봐도 남과 같은 얼굴, 모양도 대한민국의 배달민족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남달리 잘먹고 잘사는 무리도 아닙니다. 어떤 국가를 가져서, 자랑할 수 있는 국권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무엇으로 보나 아무런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무리를 중심삼고 역사적인 해원성사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엄숙한 과제가 우리의 두 어깨에 놓여져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고마운 일입니까, 슬픈 일입니까? 「고마운 일입니다.」 진정으로 고마운 일입니까? 진정 고마워요? 「예.」 그러면 그 고마움에 대해 보답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갖추어야 할 자세

그러면 이 뜻을 찾아 나올 때 어떤 수고를 했는가? 이런 자리가 닦여질 때까지 어떤 죽음의 길을 거쳤는가? 여러분은 이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통일의 한 무리로서 내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나는 주위에서 들려오는 역사적인 모든 원한에 얼마나 사무쳐 있느냐? 시대적인 원한에 얼마나 사무쳐 있느냐? 하는 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자기 자신을 중심삼고 미래의 기준을 완전히 해결 짓지 못할 때는 미래에까지 그 한이 뻗어 나간다는 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그러므로 과거․현재․미래의 결정선에서 몸을 가눌 수 없을 만큼 긴장된다는 사실을 느껴야 할 것이 통일교회의 무리들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복귀노정에서 탈선하여 어긋나지 않도록 하늘땅은 바라고 있습니다. 과거의 선지선열들도 여러분에게 자신들이 풀지 못한 역사의 한을 풀어 구원해 달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런 엄청난 자리에 서서 그것을 해결 짓기 위한 사명을 짊어진 것이 통일의 무리입니다. 비록 가냘픈 무리지만 여러분이 하나님께 해원성사해 드릴 터전을 세울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할 때 모두가 여러분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며 후원하고 하늘땅 앞에 증거 할 수 있는 사람이니, 울타리가 되어 주겠다고 할 수 있게 여러분이 이러한 내용을 갖춘 기반 위에 서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자신임을 누구도 부정할 도리가 없습니다.

이것을 볼 때 여러분은 오늘도 회개 내일도 회개, 오늘도 고통 내일도 고통, 오늘도 몰리고 내일도 몰리는 길을 자진해서 나서야 합니다. 하나님의 깊은 심정의 골짜기를 더듬어 들어가서 이제까지 하나님이 걸어오신 그 길을 수습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역사적인 한의 시대, 세계적인 때는 우리의 목전으로 다가왔는데, 하나님의 애달픈 심정을 중심삼고 이때를 수습해야 할 여러분은 그것을 책임하지 못한 부족한 입장이라는 것을 통회하여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하나님의 긍휼의 마음, 자비의 마음, 동정의 마음, 사랑의 손길을 기다려야 할 입장에 서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신은 상관없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처럼 중대한 시점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 일어나서 하나님 앞에 손을 들고 나가게 될 때, 비록 초초한 모습이요, 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닌 미미한 존재로되 ‘내 몸은 하나님의 한을 대신했나니 사망의 물결이 홍수가 되어 탁류로 흘러갈지라도 반석과 같은 나를 꺾을 자가 없을 것이다.’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흘러가는 사망의 무리들이 여러분을 붙들고 살 수 있게 여러분은 하나의 추가 되고, 하나의 기둥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자신을 가져야 합니다. 또 현재의 사회는 복잡하고 혼란한 환경이기 때문에 인간은 곳곳에서 신음을 하고, 사랑에 메말라 허덕이는 판국입니다. 이것을 안팎으로 넘어서서 이 세계를 중심삼고 혼란된 정상을 해결 지을 수 있는 평화의 왕국을 마음에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랑이 되기 위해 우리가 갖추어야 할 자세

여러분은 외적인 면에서는 낙심이요, 탄식이요, 절망의 환경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있어서는 천상천하에 행복을 자랑할 수 있는 자세를 스스로 갖추고 있습니까?

과거에 그렇게 하지 못했고 현재에 그렇게 하지 못하거든 미래를 놓고 숨은 결심을 하여 내일부터는 그럴 수 있는 내 모습을 세워야 합니다. 스스로 적진을 향하여 나아가 적장의 머리를 자르고 적을 무찌를 수 있는 작전을 세워서 기필코 점령하겠다는 결의를 가져야 합니다. 그리하여 과거와 현재는 그랬지만, 미래에 나아가야 할 행로에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새로운 결의를 해야 됩니다. 이걸 못 하겠으면 보따리 싸서 나가라구요.

여러분의 앞길에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비참한 최후의 결판을 지어야 하는 치열한 싸움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심신을 단련하여 안팎으로 무장을 하고 사탄세계의 어떤 무리도 상대가 될 수 없는 무적의 정병이 되어 진격해야 합니다.

천만년 전의 썩어진 행동의 자국을 그냥 지니고 살아서는 안 됩니다. 이 자리에서 모두 없애 버려야 됩니다. 그리하여 새로운 아침에 기상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거든 희망에 벅차 목표 했던 적진을 향하여 힘차게 진군할 자세를 갖추어야 합니다. 여기에 자극을 주어 그 발걸음에 채찍질을 가할 수 있는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할 통일의 무리인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자세가 걱정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이 자랑할 수 있는 스승을 모시고, 자랑할 수 있는 가정․종족․민족․국가․세계를 찾자는 것입니다.

인류가 이 땅 위에서 4천년 동안 한의 고비 길을 거친 후, 영계의 수많은 선조가 하소연하는 기도의 내용대로 고대하던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소원하던 그 한 날이 왔었다는 것입니다. 나팔 소리는 이 땅 위에 울려 퍼졌고, 그날부터 새로운 천지는 출발되었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이스라엘 민족이 그것을 알지 못했고, 교법사 제사장들도 모두 알지 못했습니다. 밤중 같이 세상 사람들은 모두 잠들어 있었습니다. 이런 가운데서 홀로 깨어서, 그 마음을 다하여 소망의 천국을 그리워하는 예수님은 환경이 복잡하면 복잡할수록 내심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한다는 사명감이 강하게 사무쳐 올랐습니다. 그러나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입장에 있었던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과 담판 짓기 위해 간곡한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 내용이 얼마나 비장했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됩니다. 본연의 사명은 이러했는데 예수님은 어찌하여 십자가의 관문에 걸려야 했는가?

그때 예수님은 ‘나 하나 죽는 것은 괜찮지만 하나님께서 4천년 역사노정에서 흘린 눈물과 피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하나의 제단에 연결시켜 가지고 그 제단을 정화시켜 하나님 앞에 승리의 푯말을 박고 여기서부터 천국의 기반을 닦아야 했습니다. 이러한 사명을 짊어진 예수님이 일대에서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저나라에 갈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 과정에서 밀리고 쫓기고 천대받으면서 끌려 나오는 기독교인들의 고통은 당연하겠지만, 하나님이 또다시 한 맺힌 심정으로 복귀의 사명을 하기 위해 해야 할 수고를 생각할 때, 아들의 사명을 짊어졌기 때문에 그와 같은 담판기도를 할 수밖에 없었던 예수님의 사정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예수님이 죽음으로 말미암아 천륜의 한이 풀린다면 그 길이 응당 아들로서 가야 할 길이지만, 예수님이 책임 못하고 죽은 후에 하나님 심정에 맺혀진 한의 여건들이 역사에, 또 세계에 맺혀 남아진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그것을 친아들의 입장으로 차마 볼 수 없고, 남길 수 없는 사연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이미 때가 지난 그 환경을 잘 아시고 하나님께서 결정한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 줘야 하셨던 하나님의 내적인 고충이 얼마나 크셨던가를 여러분은 잘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자랑할 수 있는 주인공

그리하여 예수님은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인들이 몰려와 아우성을 치며 ‘이단자들의 괴수야 잘 죽는다. 네가 4천년 동안 소원하던 우리의 메시아란 말이냐?’ 하면서 저주하던 소리를 입에서 입으로 전하던 그런 무리들에 의해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박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예수님을 핍박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유대교가 아직까지 이 땅 위에 남아 있습니다. 그들은 주인의 아들을 박대해서 돌려보내고, 주인까지도 박대하는 입장에 서 있으면서도 주인편이라고 나발을 불고 잔치를 하는 무리가 되었습니다. 그 무리들이 2천년 동안 비참하게 유리고객 한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그 민족은 2천년 역사의 소원으로 예수님이 다시 이 땅 위에 와서 그들의 죄를 용서해 준다는 하나의 조건을 세워 주지 않으면 해방 받을 수 없는 민족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운명이 비참했던 것은 보응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해방이 되어 새로운 천지, 새로운 세계를 향하여 출발할 수 있는 때가 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나라를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한을 품고 오셨던 하나님의 소원이 무엇인가? 역사적인 모든 성인 현철들에게,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 가치를 자랑할 수 있는 한 사람을 찾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를 통해서 자랑하고, 이 시대 30억 인류 앞에 자랑하고, 뿐만 아니라 앞으로 올 수많은 후세 앞에 천년만년 걸어간 길을 자랑할 수 있는 주인공이 되라는 것입니다.

과거․현재․미래를 총합한 자리에서 하나님을 감사의 눈물로 울릴 수 있고, 예수님을 감사의 눈물로 울릴 수 있고, 성신을 감사의 눈물로 울릴 수 있는 사람이 되어서 ‘네가 아니었던들 어떻게 될 뻔했는가?’ 하는 말을 들을 수 있게 아들딸의 사명을 다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하나님 앞에 자랑할 수 있는 존재로 설 수 있고, 만우주 앞에 자랑할 수 있는 존재로 설 수 있는 가치를 지닌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그와 같은 입장에 서서 하나님을 대해 아버지라 불러 보았습니까? ‘아버지!’라고 불러 보았어요? 아버지가 계시는지 안 계시는지, 의붓아버지인지 친아버지인지도 몰랐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그런 내용을 아는 자리에서 아버지를 부르고 오직 그 아버지의 가슴에 품은 사정을 붙안고 나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폭발된 분함이 한스러움과 교차되는 자리의 그 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죽음의 길도 자진해서 가겠다는 신념을 가지고, 예수님 이상의 자리에 나갈 수 있는 길을 가야 됩니다. 예수님처럼 비참하게 기도하기보다는 죽음의 길도 당당히 자청해서 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랑해야 할 축복가정

선생님은 이 길을 개척하기 위해서 몇백 번, 몇만 번 죽음을 각오했습니다. 선생님은 심장에 총탄이 수백 번을 지나가더라도 이 길을 가겠다고 마음으로 결의한 사람입니다. 선생님은 이렇게 죽음을 각오하고 이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생님을 따르고 있는 여러분들은 그런 것을 생각이라도 해 보았습니까? 선생님이 죽음의 골짜기로 가라고 명령하게 될 때 갈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 길은, 열 번 가면 아홉 번은 살아 올 수 있는 길인데도 불구하고, 한 번 나가는 길조차 피해 가는 여러분은 아니었습니까?

하나님이 고대하는 것은 인류를 들어 자랑할 수 있는 하나의 존재를 찾아 세우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를 중심으로 한 가정을 세워 자랑하고, 종족을 세워 자랑하고, 민족을 세워 자랑하고, 국가와 세계를 세워 자랑할 수 있는 소망의 천국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고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간절하게 고대하는 마음을 품으시고, 보잘것없는 여러분을 소망하는 한 날의 역군으로서 세우겠다는 하나님의 사정은 기가 막힌 것입니다.

천만번 죽는 한이 있더라도, 여러분 일대에서 하나님이 자랑할 수 있는 아들의 위신과 자격을 결정짓고 죽겠다고 몸부림쳐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곳이 비록 사망의 골짜기일지라도 하나님께 ‘저를 믿고 저에게 가라고 명령해 주십시오.’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안타까운 사정을 책임질 수 있는 아들이 되지 않고는 안 됩니다. 그래야 할 통일교인들인데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들의 자격을 자랑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축복받은 가정을 자랑해야 합니다. 통일교회에서는 36가정이니 120가정이니 하면서 세계에도 없고 역사에도 없는 축복행사를 합니다. 즉 역사에 없는 일을 알고 있으며, 또 역사에 없었던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온 세계 인류가 전부 다 몰려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 인류를 위해서이기 때문에 통일교회는 반대를 받으면서도 축복행사를 하는 것입니다. 요즘에 와서야 그것을 알아주려고 하지만, 하나님은 그 인간들이 알아주지 않는 그 심정을 가지고 6천년 동안이나 참아 나오셨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아들이 되려는 것이니 그것을 알아주는 것이 오히려 부끄러운 일입니다. 만민이 쌍수를 들어 그의 거룩함을 찬양하게 될 때, 오히려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을 느껴야 할 자리가 아들의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의 승리의 터전을 마련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련하기 전에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수그리며 엎드려 통곡하지 않고는 안 됩니다. 자신이 하나님께서 얼굴을 들라고 분부하기 전에는 얼굴을 들 수 없는, 죄악 된 조상의 피를 받고 태어난 후손임을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이 그런 자신을 수습하여 개인적인 승리의 터전을 세움으로 만유와 인류가 그리워하는 자체가 되고, 가정을 세워 수습하여 가정적인 승리의 터전을 세움으로 하나님께 자랑할 수 있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이 죄악된 세상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가정의 권위를 가진 자랑할 수 있는 가정이 못 되었는데, 우리 가정을 부른 것을 도리어 부끄럽게 생각하는 자리에 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너희 가정이 아니면 안 된다고 하시며 세워 주기를 바라기 전에, 하나님이 불러 세울 수 있는 자리에서 하나님을 부르며 회개의 눈물을 흘리고 그 가정을 하나님 품에 안겨 드리는 사명을 해야 하는 것이 통일교회의 가정들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런 가치를 알고 있는 축복가정이 얼마나 됩니까?

또 내가 아니면 네가 있을 수 없고, 네가 아니면 내가 살 수 없는, 피와 살이 인연된 가운데서, 하나의 종적인 터전을 만드는 것이 통일의 가정들입니다. 그러므로 서로가 힘을 다해서 하나님의 영광된 터전을 만들어 빚내라고 하며, 거기에 내가 거름이 되고 터전이 되겠다고 앞을 다투어 나설 수 있는 생활적인 기반을 자랑해야 할 것이, 통일의 이념을 가지고 가는 가정들입니다. 그런데 그럴 수 있는 가정이 얼마나 됩니까?

통일교인의 인격 기준

주일날 준비된 시간을 중심삼고 여러분이 경배드리는 것은 제한된 권내에서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국가를 초월해서 지구상에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향하여 정성을 다하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세상의 사람들에게 몰리고 쫓김 받는 자리에서도 본부를 위하여 기도하며 정성들이고 있습니다. 그런 기도 앞에 ‘옳소이다.’ 하며 찬양하고, 그들의 심정을 대신하여 하나님을 받들어야 할 책임을 가진 것이 본부 식구들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러분은 그렇게 정성들이는 자리에 있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이 기도하는 것을 함부로 여기고 비판, 비소하는 무리가 되지는 않았습니까? 만일 그와 같은 마음이 있거든 잘라 버려야 합니다. 이처럼 심정의 세계는 무서운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일 예배시간을 위하여 사흘 전부터 마음을 조여 가면서 준비해야 됩니다. 그리하여 만민의 행복을 빌어 주고, 나를 통해 만민이 소생할 수 있는 부활의 권한과 생명의 인연을 연결시키겠다고 몸부림치며 교회문을 들어서야 하고, 하나님 앞에 목이 메이는 마음을 가지고 예배에 참석해야 합니다. 그래도 부족할 텐데 여러분은 오히려 장돌뱅이보다 더 뻔뻔스럽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6천년의 역사를 거쳐 찾아온 무리의 모습이었겠느냐?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과 세계 인류는 지금까지 바라던 한때를 맞기 위하여 사방에서 시시각각 우리의 문전을 향하여 들어오고 있습니다. 이때에 여러분은 내적 정비를 하고 모든 것을 훌쩍 받아서 넘겨 놓아야 할 책임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밀려들어오는 사조 앞에 전부 다 밀려서 자빠지는 입장에 서 있다면, 그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딸이겠습니까?

여러분은 잠을 자면서도, 밥을 먹으면서도 시간을 아껴서 이 비참한 정경을 처리하고 넘겨야 합니다. 지금은 그럴 수 있는 권위를 가진 자식의 입장을 세워야 하는 시대인데도 불구하고, 이것을 망각해 버리고 타락된 자기 몸을 다스리지 못하여 책임을 못 하는 무리가 될 때는 망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6천년 수고의 노정을 통하여 찾아 나오신 무리이기에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진리를 세계 만방에 자랑해야 됩니다. 이 통일의 이념을 만세에 자랑해야 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 내용을 가지고도 승리하지 못하여 자랑하지 못하게 되면, 후손들이 사탄과 싸워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승리하여 자랑할 수 있게 되면 여러분의 무덤을 파헤쳐서 당대에 가져야 할 영광의 가치를 지녔으면서도 하늘땅에 책임 못했다고 참소하는 시대가 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영광된 말씀은 그 누구도 갖지 못한, 하나밖에 없는 진리의 말씀입니다. 이 진리를 통하여 하나의 인격 기준을 세워야 합니다. 그것은 사탄이 맘대로 농락하던 환경의 터전 위에서, 침범 당했던 선지선열들의 한스러운 인격 기준이 아니라 사탄을 굴복시켜서 영계의 모든 성현들을 해원성사시켜 줄 수 있는 인격 기준입니다.

하나님의 6천년 동안 맺힌 한의 마음을 풀고 해방의 한 날을 그리워하는 아들딸을 맞을 수 있는, 하나님이 애태우시던 그 가슴을 터놓고 사랑하는 그 아들딸을 맞이할 수 있는 자유로운 천국의 터전이 통일교회입니다. 이 땅 위에서 역사상의 그 누구도 갖지 못했던, 하나님의 심정과 직행할 수 있는 곳이 이 자리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이렇게 엄청나고 두려운 자리에 불리움을 받아 세워진 모습들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여러분은 반드시 책임을 다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세워서 자랑하고 싶어하십니다. 즉 통일의 무리를 세워서 자랑하고 싶어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땅 위에 있는 귀하다는 모든 것을 버리고 일생을 뜻을 위해 바쳐 이 가치를 천세 만세에 길이길이 빛내고 가겠다고 다짐하며, 이 일을 해야 할 것이 통일교회 신도들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한 신도들은 회개하여야 됩니다.

요셉과 같은 심정의 선생님

통일교회 문 선생은 50평생을 이 길을 개척하면서 민족 앞에 몰리고, 국가 앞에 몰렸습니다. 왜정 때에는 왜놈들의 총칼 앞에, 공산당 치하에서는 공산당의 총칼 앞에, 민주세계에서는 독재정권 앞에 몰렸습니다. 이 3시대의 핍박 속에서도 생명을 걸고 헤쳐 나온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3정권(자유당, 민주당, 공화당)까지도 통일교회를 몰아내려고 별의별 핍박을 다 했으며, 또한 하늘의 동지요, 하늘의 형제가 되어야 할 기독교도 우리를 반대한 것입니다. 먼저 나왔기에 우리의 형님이 되고 식구가 되어서 우리의 울타리가 돼야 할 그들이 우리를 몰아내기 위해서 지금까지 얼마나 반대하고 핍박했습니까?

기성교단에서 통일교회를 반대하는 소리가 지금도 그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분하고 원통합니다.

선생님은 그럴 때마다 요셉을 생각하게 됩니다. 요셉은 형제들에 의해 죽을 수밖에 없었던 함정에 빠졌다가 이방민들에게 팔려서 애급 나라에 들어갔습니다. 그리하여 그 당시 시위대장인 보디발의 집에서 일을 하다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중에 들어갔으나 하나님의 보호권 내에서 은사를 받아 애급의 총리대신이 되었습니다.

그 당시 온 땅에는 흉년이 들었기 때문에 요셉의 형제들도 애급으로 먹을 것을 구하러 왔습니다. 요셉은 억울하고 분한 그의 마음대로 그들을 박대해서 돌려보낼 수도 있는 입장이었지만 그래도 아버지의 혈육이며 자기의 형제라는 것을 생각하여 혀를 깨물며 참았던 것입니다.(창 39~42장)

요셉의 그 마음을 선생님은 알고 있기에 그런 심정을 가지고 기도합니다. 통일교회는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갖은 비난과 모략의 화살이 날아오더라도 그 화살이 꺾어지면 꺾어졌지 선생님은 쓰러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통일교회는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심정을 중심삼고 올라설 수 있는 사람이 땅 위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타락성을 중심삼고 올라선 사탄의 권한은 있었지만, 하나님의 심정을 중심삼고 올라설 수 있는 권한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이런 것을 알기 때문에 죽음의 골짜기에 사체와 같이 눕는 자리에서도 낙망하지 않았습니다. 총칼이 엇갈리는 생사의 기로에서도, 운명을 판가름하는 그런 자리에서도 여기에 서 있는 선생님은 졸장부의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생애를 사나이답게 거쳐 나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그렇게 해서 준비하고 갖추어 놓은 면양 떼는 다 어디로 가고 산양 떼들이 있느냐는 거예요. 이것은 민족이 책임을 못함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민족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을 위해 제단을 쌓아야 할 기성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기성교회마저 책임을 못함으로 말미암아 민족은 몰리고 쫓김 받는 민족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산양 떼를 잃어버린 면양 떼보다 더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모든 양들을 구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을 갖고 오늘까지 지탱해 나온 선생님인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됩니다.

전면적인 진격을 하자

선생님이 생각 없이 이와 같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생님은 누구보다도 독한 사람이요, 누구보다도 분함을 참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선생님은 하나님의 크나큰 뜻을 알았고, 하나님의 고통이 얼마나 컸다는 것을 알았으며, 그 원수가 어떠했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것을 수습하여 넘어갈 수 있는 선생님의 길을 나가지 못했기에 그때까지 말없이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것을 조건으로 삼아서 사탄의 내적인 것을 알아내기 위해 노력한 것이 지금까지 나타난 내용입니다.

이제는 우리 앞에 최후의 때가 왔습니다. 최후의 결판을 지어야 할 때가 왔기에 전체적으로 동원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이 흘리는 눈물은, 과거처럼 원수들이 조롱하는 자리에서 흘리는 슬픈 눈물이 아니라, 민족의 슬픔을 대신하여 제사장의 입장에서 흘리는 눈물이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즉 여러분이 핍박받고 몰리는 것은 민족이 핍박받고 몰릴 수밖에 없는 슬픈 운명을 대신해서 당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긍지를 가져야 됩니다.

선생님이 몰리고 쫓기고 눈물을 흘리는 자리에서도 하늘땅을 붙안고, 나무를 붙안고 통곡하며 참아 나온 것은, 이 민족이 갈 수밖에 없는 비참한 길을 막기 위해, 하나님을 부여안고 사정할 수 있는 한 자리를 갖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해서 이 민족을 다시 한번 부활시키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실 때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인류의 영혼을 부활시켰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살아생전에 이 민족을 부활시키는 한 날을 가져야 됩니다. 선생님도 그것을 위해서 죽음의 길을 마다하지 않고 지금까지 걸어 나왔습니다.

이제는 이 나라 이 민족이 우리를 맞이할 수 있는 환경이 되었습니다. 이제부터는 통일교회가 나가는 길에 핍박이 있다 하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국가가 동원되어 반대해도 통일교회는 없어지지 않으며, 하늘 땅 전체가 동원되어 없애려 해도 통일교회는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기반을 닦아 놓았습니다.

이런 시대적인 환경이 되기까지 하나님은 어두운 밤길을 개척하는 수고를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대낮과 같이 되었으니 눈을 뜨고 사방을 바라볼 수만 있으면 살길은 어느 곳에든지 있습니다. 이런 때 책임을 못한다면 하나님의 아들딸이 될 수 없습니다.

세계의 수많은 민족과 국가, 그리고 피조만물 앞에, 여러분은 스스로 맹세하고 나아가야 할 통일교회의 무리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즉 여러분 스스로의 권위를 세우고, 가정의 권위, 종족의 권위를 세워서 그런 통일의 민족을 중심삼아 가지고 복지 천국을 향하여 나가야 할 통일교회의 무리라는 것입니다.

이제 원수를 무찌르기 위해 어떤 희생의 대가를 치르더라도 내가 선봉에 서서 적진을 타파하겠다는 결의를 해야 합니다. 그런 때가 되었기 때문에 금년에 ‘전면적인 진격’이라는 표어를 세웠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됩니다.

끝날에 처한 우리의 자세

지금까지 우리 민족이 얼마나 비참했습니까? 언제 한번 국위선양을 하여 수많은 민족 앞에 자랑한 때가 있었습니까? 이 민족은 참으로 불쌍한 민족입니다.

오늘 아침에도 일본의 젊은이들이 이 민족을 위해 눈물 흘리며 돌아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렇게 불쌍한 한민족 가운데 통일교회 문 선생님이 안 계셨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선생님은 이 민족에게 욕을 먹고 원망을 들으면서도 반대를 받고 쫓김을 받고 별의별 수모를 다 당하면서도, 이 민족을 놓지 않고 붙들고 나왔습니다.

이제는 외국 사람들이, 즉 사탄의 종자들이 이 땅에 와 가지고 스승이 태어난 이곳에 서서 눈물을 흘리게 하고, 자기 조국보다도 고향보다도 이 나라를 더 그리워하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것을 생각할 때 대한민국의 앞날이 밝아오는 것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가져야 할 자세와 권위는 무엇인가? 만국에 자랑할 수 있는 아들딸의 자세와 권위인 것입니다. 그런 아들딸이 되려면 영광의 자리에서 효자 효녀가 되는 것이 아니라 만인이 배척하고 침을 뱉는 자리에서 하나님을 대신하고,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화살을 내가 대신 맞겠다는 자리에 서야 합니다. 죽음의 자리에서도 하나님의 고통을 내가 대신 당하고 아들로서의 책임을 다하여 효의 인연을 만들어야 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신임을 얻어야 합니다. 이것이 이 민족 앞에 핍박과 조롱을 받으며, 몰리고 쫓기는 통일의 무리가 가야 할 길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리하여 만들어진 터전 위에 우리는 생명의 씨를 심었습니다. 거기에 싹이 돋아나고 꽃이 피어서 열매를 맺게 되었으니 그 열매는 처음으로 얻어진 열매요, 이것으로 말미암아 민족적인 전통, 세계적인 전통이 하늘의 새로운 인연으로 출발될 수 있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승리의 터전 위에서 천국이 출발된다는 사실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런 사실을 여러분들은 잘 알아야 합니다.

한민족 외에 수많은 민족들도 일반적인 입장에서는 자랑할 수 있는 민족이 될 수 있습니다. 즉 통일교회를 중심삼고 볼 때 다른 민족들은 하늘 편의 승리를 찬양하는 것만으로도 하나님께 효의 도리를 지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핍박을 받고 몰리고 쫓김을 받으면서 하나님의 서럽고 억울한 사정을 체휼하고, 아무도 대하지 않는 십자가의 죽음의 길을 거쳐서 하나님을 붙안아야 효의 인연을 세우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자리에서 충신, 효자가 되어 싸워 나가야 합니다. 이 길은 어떤 민족, 어떤 신앙자, 어떤 교회, 그 어떤 사람도 갖지 못하는 특권을 쟁취할 수 있는 좋은 기반을 갖는 길이니 꼭 가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외적으로 나타나는 우리는 비참하지만 내면에 있는 사연을 보면 뼛골이 녹고 심장의 고동이 멎을 만큼 긴장된 자리에서 소리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이것이 죽었던 사망세계의 인간들을 다시 부활시키는 동기와 원천이 된다면 이런 자리에서의 효와 충은 우리만이 가질 수 있는 한 때의 좋은 선물인 것이요, 우리만이 지닐 수 있는 자랑의 조건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여러분이 지닐 수 있는 자랑의 조건을 왜 사탄에게 빼앗겨 오히려 사탄이 참소할 수 있는 저주의 조건으로 만드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을 자랑의 조건으로 가지기 위한 것이, 이것을 위해서 생명을 바쳐 싸워 나온 것이 지금까지 선생님이 걸어 나온 길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때가 왔는데도 불구하고 편히 먹고 자고 하면서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이때에 여러분은 책임 못한 것을 부끄러워하며 만민이 그리워하는 광명한 천국을 앞에 두고 효자의 절개라도 세워 놓겠다고 몸부림을 쳐야 합니다. 이러해야 할 때가 제2차 7년노정인 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제2차 7년노정에 동참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귀한지를 모를 것입니다. 그러나 두고 보라는 것입니다. 몇 해만 지나게 되면 이 길을 가지 못한 것이 천년 한으로 맺힐 것입니다. 선생님의 말씀이 거짓이 아닙니다.

하늘의 정병이 되어 적진을 향해 총진격하자

과거에 수많은 선지선열들은 그 시대를 중심삼고 통곡과 호소를 할 수 있는 우선권을 받은 무리입니다. 그런 역사의 인연을 여기서 또다시 재현시킬 것이냐? ‘차라리 몰랐으면 행복했을 텐데….’라고 탄식하는 자리에서는 비참한 무리가 되지 않기를 부탁하고 싶습니다.

자유의 천국인 새로운 평화의 왕국을 창건하기 위한 투쟁 과정에서 누구보다도 엄청난 피를 흘리며 싸웠다면 그는 망하지 않습니다. 그가 흘린 피는 사망의 피가 아니요, 생명의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여 창건한 그곳이 우리가 가야하고, 머물러야 하고, 남겨 놓아야 할 터전입니다. 이것이 뼈아픈 현실입니다.

여러분은 하늘 앞에 ‘하늘이여! 당신이 창조이상을 중심삼고 자랑하고 싶으셨던 모든 바람이 제게서 결실되었습니다. 인간을 세워 영원토록 모든 세계에 자랑하려던 당신의 내적 심정과 일치를 이루었나이다.’ 하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오냐!’ 하실 수 있는 자리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유와 평화의 천국으로 행진하는 그날을 그리워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천군천사와 만우주의 온갖 존재물들이 비로소 만물의 영장이 나왔다고, 중심이 생겼으니 해원성사되었다고 찬양을 할 때, 그 찬양을 받아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의 품에 안길 수 있는 기반을 세우는 아들딸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밖에 없는 하나님, 만유의 창조주이며, 만세에 가치를 자랑할 수 있는, 생명의 원천 되시는 그 하나님의 사랑을 영원무궁토록 자신의 것으로 지녀야 됩니다.

이것을 중심삼고는 세계가 그 안에 있는 것이요, 하나님까지도 그 안에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절대적인 사랑의 권위를 남길 수 있는 이 시대적인 기점을 상실하는 여러분이 되어서는 하나님이 통일의 이념을 통해 세우시려는 자랑의 기준을 세우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오늘도 내일도 이 길을 가야 합니다. 알겠어요?

세계적인 환경 속에서 이 길을 가는 우리는 외로운 고아와 같지만 결코 고아가 아닙니다. 우리 배후에는 억천만 역사를 통하여 오늘을 준비한 하나님의 정병들이 있으니 이들이 바로 영계에 있는 수많은 영인들입니다. 이들은 전부 다 지상을 중심삼고 활동할 수 있는 처소를 마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원군이 세계에 널려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용자로서 적진을 향하여 총진격하는 하늘의 정병들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낙오하여 졸장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또 이 관문을 통하게 하여 자랑하고 싶어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따름으로 영광된 자리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상속 받아 영원무궁토록 행진하는 인류의 조상이 되기를 부탁드립니다. 여러분, 잘 알겠습니까? 「예.」

<기 도>

높고 귀하신 거룩한 성상과 선하신 내정적인 심성을 통하여 그리워하시던 아버지, 그것의 실체로 지으신 자식을 품고 기뻐하시던 아버지. 본연의 세계에서 아버지와 함께 살던 우리 조상의 어린 시절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조상이었던 아담 해와가 타락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자리에 놓이게 될 때, 당신께서는 무자비하게 잘라 버릴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인 원칙이 있다는 것을 알았사옵고, 여기에서 저희가 제아무리 충성과 노력을 한다 해도 아버지께 사랑받던 아담 해와 이상의 자리에 올라가지 않으면 당신 앞에 갈 수 없다는 사실도 알았사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생명이 스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사탄의 계교에 넘어가지 않고 오히려 그런 환경을 뭉그러뜨려서 거기에 아버지의 뜻을 세우고, 아버지의 말씀을 따라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스스로가 아버지의 말씀을 중심삼고 원수의 화살과 모든 계교를 물리쳐 사탄을 자연굴복시킬 수 있는 권한을 갖지 않고는 아버지의 아들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사옵나이다. (이후의 기도는 정전으로 인하여 녹음이 안 되었음)

로마서 8 : 18

<기 도(Ⅰ)>

아버님! 오늘은 1968년 7월 14일, 두 번째 맞는 안식일이옵니다. 금년에 있어서 저희들이 하계 개척전도를 위해 아버지 앞에 정성을 들이고 있사오니, 아버님, 저희들을 권고해 주시옵소서. 당신의 생명의 인연을 두터이하시사 타락의 후손 된 저희에게 있는 원망스러운 모든 요소를 제거시키어서 생명의 근원 되시는 아버지의 품으로 온전히 돌아갈 수 있는 거룩한 은사를 베풀어 주시는 이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 7월 20일을 중심삼고 보면 마지막 맞는 주일이옵니다. 오늘 저희들이 당신 앞에 정성들인 모든 것을 내놓고 각자 각자가 아버님 앞에 부복했사오니, 당신의 권고하시는 말씀과 더불어 가야 할 제2차 7년노정의 중차대한 싸움터를 향하여 갈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그러한 노정은 아버지께서 허락하신 노정임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본부를 중심삼고 남한 각지에 널려 있는, 외로운 통일교회 자녀들이 이 시간을 맞이하여 아버지 앞에 경배드리는 그 자리 자리마다, 아버님,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온 천하를 위하는 일편의 마음이 전체가 되게 하시옵고, 당신이 운행하시어 전체를 주관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자비의 터전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시간 여기에 좌정한 자녀들을, 아버지,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통일의 자녀들이 이곳을 향하여 정성을 들이고 있사옵나이다. 세계에 널려 있는 통일의 식구들이 이곳 한국 땅을 흠모하며 아버지 앞에 부복하여 눈물짓고 있사옵나이다. 이 땅으로부터 시작된 뜻을 중심삼고 이방민족 앞에 곤고한 길을 택해 나서서, 개척자의 책임을 지고 거침없이 싸워 나가고 있는 그들 위에, 아버지여, 생명의 은사를 내려 주시옵소서. 아버님이 권고하시는 그 권고가 그들의 마음 전체에 임하게 하시옵고, 홀로 있는 곳에도 임하시어서 정화시키시옵소서. 아버님만이 그들을 직접 주관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나이다.

말씀이 떨어지는 곳곳마다 생명의 부활의 역사를 일으켜 주시옵고, 역사적인 소망의 실체가 되어질 수 있는 자리가 되게끔, 아버지, 복을 베풀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시간 전세계에 널려 있는 통일의 자녀들이 손에 손을 잡고 7월 20일을 기하여 40일 기간의 행로를 다시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나이다. 아버님, 이 기간은 지극히 더운 기간이옵니다.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은 피서지를 찾아서 휴양하러 가는 발걸음을 자랑하고 있사오나, 저희들은 남다른 뜻이 있어서 더운 계절과 추운 계절을 당신 앞에 충성을 다짐하는 한 때로 설정해 놓았사옵니다. 이번 40일 개척전도기간은 저희들이 거치지 않으면 안 될 중요한 기간이라는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제1차 7년노정에서는 하늘 앞에 충성을 다짐하였던 저희 형제들이 충성된 모습으로 서지 못하고 하늘이 자랑할 수 있는 아들딸의 권위를 갖지 못한 채 슬픈 마음, 외로운 마음, 염려하는 마음으로 지낸 초라한 모습이 되었던 것을 잘 알고 있사옵나이다. 이러한 자신들을 다시 가다듬어 제2차 7년노정에서는 아버님이 책정한 기간에 스스로의 위신과 스스로의 권위를 다시 회복하기 위하여 이 민족을 대신하여 다시 출동하지 않으면 안 되겠사옵니다. 거룩한 하늘의 사명을 분부 받을 수 있는 시기가 저희 앞에 다가온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이 시간을 통하여 저희들이 온갖 정성을 다 들이고, 온갖 싸움터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 있는 실적을 쌓기 위해 최선을 다하여 싸우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를 위하여 생명의 인연을 따라 나온 저희들이옵고, 당신이 원하는 뜻을 따라 저희의 모든 것을 희생하고자 각오하고 나선 몸들이옵니다. 이런 각오를 한 몸으로서 아버님이 기뻐할 수 있는 실적의 기반을 갖지 못하고 외롭고 불쌍한 자리에 섰다 할진대는, 아버님이여, 이번 기간을 통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 앞에 실적을 세워 당신 앞에 어엿이 설 수 있는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기간은 전국에 널려 있는 수많은 자녀들이 이날을 중심삼아서 출발을 하고, 아버지 앞에 특별한 기도로 일신을 걸어 놓고 싸움의 준비를 하는 중요한 시간인 줄 알고 있사옵나이다. 이 시간 여기에 모인 당신의 자녀들의 마음을 수습하여 주시옵고, 하늘을 위하여 충성할 수 있는 하나의 때를 마련하는 이번 기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오늘 이 시간에 부족한 마음을 모아 아버지께 경배드리고자 하오니 첫 시간부터 끝 시간까지 당신이 직접 주장하는 가운데 보호하여 주시옵고, 생명의 은혜로써 저희의 마음 문을 열어 주시옵소서. 부족한 자신들을 제거하여 생명의 부활의 은사에 접할 수 있는 특별한 이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수많은 교단들 위에 축복하여 주시옵고, 더욱이나 한민족을 통하여 수많은 인류들에게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영계에 있는 수많은 영인들이 이 땅을 위하여 실증적인 탕감의 인연을 요구하고 있는 것을 저희들이 알고 있사오니 그들 앞에도 해방의 은사를 허락해 주시옵소서.

이번 기간을 통하여 아버지, 지상에 확실한 통일의 터전을 마련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조건을 부여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그리하여 아버지가 소원하시던 그 나라와 그 세계를 복귀해 드리는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기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나이다.

남아진 시간을 친히 주관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의 성호 받들어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기 도(Ⅱ)>

여기에 모인 당신의 자녀들을 굽어살피시옵소서. 지금까지 저희들은 남이 아니라 하는 길을 개척하였사옵고, 눈물어린 싸움의 노정에서 아버님을 그리워하면서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산 역사를 지니고 나왔사옵나이다. 그간 당신이 얼마나 수고하였나이까?

보잘것없는 저희들을 수습하여 엄청난 사명을 맡기시고 최후까지 죽지 말고 살아남으라고 권고하시면서 부족한 저희를 이끌어 나오시기에 얼마나 당신께서 수고하셨사옵니까? 아버님, 제2차 7년노정을 출발한 이 해도 절반을 보내고 이제 새로운 달을 맞이하여 전국적인 활동을 눈앞에 놓은 저희들이, 아버님이 요구하시는 기준과 저희들이 처해 있는 기준이 일치되지 못한 입장에 있음을 자탄하지 않을 수 없는 자체인 것을 생각하게 될 때, 부족함과 민망함과 죄송스러움을 금할 바 없사옵니다.

이제 저희들 아버지 앞에 부복하여 부족한 자신인 것을 머리를 숙여 생각하면서 긍휼의 아버지를 다시 부르지 않으면 안 될 입장인 것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어느 누가 당신 앞에 장담하고 나서서 당신이 허락하신 법과 당신이 요구하시는 사명을 다할 수 있는 자가 있겠사옵니까? 역사시대를 거쳐오면서 번번이 당신을 염려시킨 것이 우리 선조들이 간 길이요, 역사시대에 있어서 당신의 뜻을 알고 따라 나왔던 수많은 사람들의 종말인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한 후손으로 태어난 인간은 하나에서 천만사에 이르기까지 당신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는 내용이 없다는 것을 저희들은 잘 알고 있사옵니다. 당신께서도 그와 같은 것을 잘 알고 계시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것들을 수습하여 은사의 자리에 끌고 올라가 당신이 원하시는 아들과 딸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될 엄청난 복귀의 기준이 남아 있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오늘 이 자리에서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말씀을 통하여 아버지의 뜻을 알고, 슬프면 슬픈 것을 알고, 기쁘면 기쁜 것을 느낄 수 있는 자리까지 올라오게 하기 위해서, 배후에서 당신이 얼마나 수고하셨는지를 저희들은 진정으로 잘 알고 있사옵나이다.

아무리 불러도 듣지 못하고, 아무리 해명을 해도 보지 못하던 저희들에게 들을 수 있는 귀와 볼 수 있는 눈을 갖게 해 주신 은사이기에 감사드리옵나이다. 아버님, 저희의 마음 몸을 여시어서 분부하여 주시옵소서. 긍휼의 손길을 펴시옵고, 저희들을 아들딸이라 불러 주시옵기를 간구하옵나이다.

아버님, 저희들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사옵니다. 당신 앞에 나타난 모습을 보게 될 때, 벌거숭이의 몸들이요, 아버지께 얼굴을 들 수 없는 부끄러운 몸들이옵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연을 따라서 불쌍한 사정 가운데 섭리의 뜻을 세워 나오신 당신의 내심과 통할 수 있는 하나의 모습으로 기억하여 주시옵기를 당신 앞에 아뢰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벌거숭이의 몸을 가진 저희들이 아버지의 전체적인 책임을 앞에 놓고, 갈래야 갈 수 없고 올래야 올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하고, 낙망과 절망 가운데 몸부림치지 않으면 안 될 때가 온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지를 대할 때 쌍수를 들어 아버지라고 불러야 할 자신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스스로를 헤아려 볼 때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는 부끄러운 모습들인 것을 잘 알고 있사옵나이다.

당신이 요구하는 사명은 크온데 저희 자신들은 너무나 작고 너무나 비열하고, 너무나 비참한 것을 깨닫게 될 때, 부족한 저희를 불러모으신 아버지가 불쌍함을 마음 깊이 느끼면서 눈물짓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이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저희들이 이 한 해에 있어서 ‘전면적인 진격을 하자.’ 라는 엄청난 내용을 분부하시던 아버님의 말씀을 대하는, 부끄러운 모습을 면할 수 없는 자신들이 된 것을 다시 한번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다시 시작되는 제2차 7년노정을 맞이하여 하늘 앞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사명을 앞에 놓고, 지금 전국에 널려 있는 외로운 자녀들이 지치고 몰려 쓰러질 지경이지만 다시 몸을 가누어서 맡은 바의 싸움터를 향하여 가지 않으면 안 될 입장이옵니다. 그와 같은 정경을 바라보면서 또다시 명령하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계시는 아버지께서는 저희들이 불쌍한 것보다도 더 불쌍하고, 저희들이 비참한 것보다도 더 비참하다는 사실을 알았사옵나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희들이 자신을 버리고 몸부림치고 허우적거리면서라도 맡은 바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눈물과 피땀을 흘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사옵니다.

한 가지에서부터 만만사에 이르기까지 전부가 아버지께 면목없는 마음으로 머리 숙인 당신의 자녀들을 굽어살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당신의 내심 가운데 스며드는 염려와 걱정과 한이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될 때, 걸어오신 복귀의 길, 이렇듯 슬펐던 역사의 인연을 아버지께서 되밟게 될까 봐 심히도 두렵사옵나이다.

그러나 저희들은 ‘이 몸 마음 다 바쳐 산제물이 되겠사옵나이다. 죽더라도 뜻을 붙들고 죽고, 살더라도 뜻을 붙들고 살겠사옵나이다. 모든 것을 아버지께 맡기오니 이 몸 마음을 받으시옵소서.’라고 기도드릴 수 있는 자신들이 되어 남아진 사명과 책임을 다하여 부끄러운 모습을 가눌 줄 아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담 해와가 아버지 앞에 부끄러운 모습으로 서게 된 것이 천추에 한이 되었사옵고, 후손들에게 원망의 대상으로서 지금까지 조롱받아 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사옵니다. 오늘날 통일교회가 한민족 앞에 나타나 지금까지 배척받고 핍박받고 서러움을 당하였사옵나이다. 저희들은 친척 혹은 형제, 부모, 자녀들한테 몰림을 받아 나왔던 무리였사옵나이다.

그러나 이것은 아버님을 찾기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알았사옵나이다. 이제 저희들이 아버님도 잃어버리고, 부모도 잃어버리고, 친척도 잃어버리고, 나라도 잃어버리고, 세계도 잃어버리는 자가 될까 봐 두려워하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저희들은 세상의 영광과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길도 다 버렸사옵나이다. 오직 아버지가 남기신 위업 하나를 바라보고 그 일을 그리워하는 자리에 섰사옵니다. 그러나 이것마저도 아버지 앞에 자신 있게 나설 수 없는 부끄러운 모습인 것을 아옵나이다. 부족한 저희들이 다시 아버지 앞에 부름을 받고 명령을 받게 될 때 부끄러운 모습임을 다시 한번 느끼면서, 죽든 살든 최후의 이 생명을 아버지 앞에 바치겠다고 결심하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나이다.

이 민족을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있사오나 그들은 이 민족을 책임질 수 없는 것을 알았사옵나이다. 이 나라의 운명을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있사오나 그들도 이 나라의 운명을 책임질 수 없는 것을 알았사옵나이다. 아버님이 이 민족에게 기대하시는 소망의 기준이 큰 것을 깨달아 그 소망 앞에 나설 자가 없는 것을 알았사옵나이다. 이러한 판국에 불쌍한 이들을 불러내시어서 그러할 수 있는 자리에 서라고 분부하시는 아버지의 명령을 받고 기쁜 마음으로 뛰쳐나왔사옵니다. 그러나 가는 길이 너무나 험하고, 너무나 외롭고, 너무나 비참하기 때문에 가는 발걸음에 상처를 입을까 봐 주저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에 있는 것을, 아버지, 긍휼히 보아 주시옵소서.

다시 사랑의 손길을 펴시사 지쳐서 쓰러진 무리의 심신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이 민족의 운명과 이 민족의 사정과 이 민족의 미래에 대해서, 전체의 분야에 대해서 이들에게 다시 책임 할 것을 권고할 수 있는 당신이 되어 주시옵고, 그 권고를 받을 수 있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의 강한 말씀을 전하게 되면 저희들이 행치 못할까 봐 염려되고, 아버지의 딱한 사정과 깊은 내막을 말하게 되면 오히려 십자가의 짐이 될까 염려하심을 아옵나이다. 그러나 아버님이 원하는 모든 것을 저희의 마음에 전할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고, 이들이 그 마음 앞에 응하여, 간절한 아버지의 사정을 통할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전국에 널려 있는 외로운 통일의 무리들이 7년 기간의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출동했사오니 뜻을 위해 달음질쳐 나가는 그 걸음 위에 아버지의 보호의 손길이 같이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1960년대를 중심삼고서 제1차 7년노정을 걸었던 옛날을 회상해 보게 될 때, 오늘 저희들이 가는 길은 자유스런 환경이 전개되어 있고, 아버지를 증거할 수 있는 때라는 것을 알고 있사옵나이다. 이 환경의 때를 맞이하여 아버지께서 기뻐하실 수 있는 실적을 남길 수 있게끔 저희들이 가는 길을 축복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옵나이다.

이 한 시간 오로지 아버지의 뜻 가운데서 주관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오며, 전하는 자의 마음이나 받는 자의 마음이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온전히 아버지만이 운행하시어 아버지께서 뜻하심만이 결실로 거두어지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오며, 모든 말씀 참부모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사옵나이다. 아멘.

<말 씀> 인류 시조는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가지고 생명과 더불어 지키지 않으면 안 될 중요한 입장에 있었습니다. 그 입장이야말로 다른 어떠한 것보다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인류 시조가 그 입장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인류역사가 비참하게 시작되었다는 사실, 즉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원치 않는 결과의 세계를 가져왔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아담에게 있어서 보다 중요한 것

그러면 아담에게 있어서 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었느냐?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 그다음에 중요한 것은 무엇이었느냐?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과 일체 되는 것이었습니다. 만일 이러한 기준으로서 인류 시조가 출발을 하였다면 우리에게는 그 이상 더 좋은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기준이 결정되었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을 것이요, 하나님 자신도 우리 속에 있을 것입니다. 즉 하나님 자신이 우리 속에 계심과 동시에 우리들은 하나님과 하나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중요한 기준이 인류에게 부여될 것인데도 불구하고 인류 시조가 보다 중요한 그 기준을 망각해 버리고 보다 중요치 않은 타락의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에 오늘날 그 결과의 인연 가운데서 살고 있는 인류는 보다 중요한 자리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보다 중요치 않은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마음이 기뻐할 수 있고 소망이 깃들 수 있는 자리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슬프고 소망이 없는 절망 가운데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결과의 세계가 된 것을 여러분은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입장에 떨어진 인류를 하나님은 다시 구원하고, 인류도 그와 같은 입장에서 벗어나서 다시 본연의 세계에서 필요했던 그 기준을 회복하는 길을 더듬어 나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길을 더듬어 나온 것이 인류의 역사 과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섭리의 인연을 따라 이 땅에 종교를 세워 나온 것이요, 인간은 종교를 통하여 하나님을 찾아 왔던 것입니다. 이리하여 이 세계는 이제 최후의 세계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전세계의 인류들이 찾아야 할 것은 에덴동산에서 인간 시조가 잃어버렸던 보다 중요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을 찾지 않으면 안 될 때가 되었습니다. 종국적인 세계가 되면 될수록 이것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대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그러면 현세에 있어서 온 세계 인류들이 찾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 인류가 막연하게나마 지금까지 찾아 나오는 것은 내적인 것, 즉 정신적인 것, 더 나아가서 이념적인 것, 이상적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적인 것이요,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이상적인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찾아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타락으로 인한 유심주의와 유물주의의 대립

그러면 물질적인 것이 아닌 이상적인 것의 그 중심이 무엇이냐? 진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인류역사는 무엇을 찾아 나왔느냐? 진리를 찾아 나왔습니다. 즉 진리가 지향하는 하나의 개인, 진리가 지향하는 하나의 가정, 진리가 지향하는 하나의 종족과 민족과 국가를 찾아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계적으로 하나의 주의와 사상으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인류는 진리를 통할 수 있는 새로운 이념과 그 이념을 중심삼은 새로운 사상의 세계를 찾아 나왔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그 사상과 이념, 그 진리와 동떨어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 이념과 진리와 여러분의 몸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몸이 하나만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 진리를 중심삼고 우리에게 보다 중요했던 것, 즉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서 하나님과 일체 되어야 했던 기준을 세워야 합니다. 그 기준을 완전히 회복하지 않고는 인간은 보다 중요한 것을 해결 지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념을 추구하여 해결할 수 있는 최후의 기점은 무엇이냐?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즉 인류가 찾아 나오는 진리와 하나님이 세우시려던 그 진리가 일치되고, 그 일치된 진리가 하나님과 하나될 수 있는 기준을 결정짓기 위해서 역사는 지금까지 발전해 나왔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 진리의 기준에 대비하여 외적 세계도 발전해 나왔습니다. 다시 말하면 물질적인 세계도 발전되어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과학이 분담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면 최후에 우리들이 차지해야 할 목적 기준은 무엇이냐? 그것은 하나님이 세우시려는 진리입니다. 그 진리를 중심삼아 가지고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되어야 합니다. 즉 인류 시조인 아담 해와가 에덴에서 일체 되어야 했던 그 기준을 완결시키지 않으면 인간들이 제아무리 소원하더라도 그 소망의 목적을 이룰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역사는 이러한 목적을 향하여 발전해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목적하는 세계를 이루기 위한 하나의 수단과 방편으로 내세운 것이 주의와 사상입니다. 여기서 물질적인 면을 중심삼은 것이 유물주의요, 정신적인 면을 중심삼은 것이 유심주의입니다. 민주주의는 유심주의인 종교와 문화를 중심삼아 발전해 나오고 있습니다. 인류는 이 두 개의 사상이 대립하는 가운데 머물러 있습니다. 이것은 에덴동산에서 아담 해와가 하나님과 사탄의 중간 지대에 있던 것과 같은 상태입니다. 즉 본성의 인연을 가지고 태어난 부모와 타락한 부모, 본성의 사람과 악한 사람의 경계선이 생겨났던 에덴의 본연의 기준을 오늘날 세계적으로 다시 찾아 들어가는 과정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과 일체가 되어야 할 인간

오늘날 전세계의 인류들은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나님이 따먹지 말라고 하시던 명령, 즉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과 일치될 수 있는 그 진리를 그리워하고 찾아나서는 사람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또 이 진리와 더불어 하나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진리와 더불어 하나 된 사람이 있어야만 그 사람을 중심삼고 인류가 하나님과 하나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따먹지 말라.’고 하셨던 그 말씀은 하나님을 중심삼고 볼 때 내적인 면에서는 일체가 되어 있지만 외적인 면에서는 일체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 외적인 면의 일체는 누구를 통하여 이룰 것이냐? 사람을 통해서 이룬다는 것입니다. 본래 사람이 타락하지 않았으면 외적인 실체를 쓴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내적인 진리의 뜻과 일치될 수 있는 한 사람이 생겨남으로 말미암아 내적인 면에서 일치했던 기준이 외적인 인간을 중심삼아 가지고 일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비로소 하나님 자신이 진리의 완성체가 되시는 것이요, 동시에 인간도 진리 완성체를 갖추어 가지고 하나님과 일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타락으로 말미암아 이것이 산산조각으로 깨져 나갔습니다. 하나님이 세웠던 말씀도 떨어져 나갔고,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과 일체가 되어야 했던 아담 해와, 즉 선의 조상도 깨져 나갔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인류 시조는 선의 조상이 되지 못하였고, 인류는 타락된 후손이 되었기 때문에 그 기준을 갖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섭리의 뜻을 따라 복귀, 혹은 구원의 섭리노정을 통하여 그 진리의 기준과 접할 수 있는 하나의 인류의 시조를 찾아 나오는 것입니다.

원래 인류의 시조가 하나님이 세워 놓은 진리와 완전히 일치되어 하나님과 일체를 이루면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무엇보다도 중요시하고 인류가 중요시할 수 있는 제1기준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류 시조가 이것을 상실해 버렸습니다. 이것을 상실함으로 말미암아 내적인 면과 외적인 면으로 갈라졌습니다. 인간이 외적인 면을 담당해야 할 기준이었는데 이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에 외적인 기준과 내적 기준은 완전히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내적 외적으로 일체화될 수 있는 기준을 상실하게 됨으로 말미암아 내적 기준과 외적 기준이 서로서로 갈라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과 땅이 갈라졌고, 인간과 하나님도 갈라졌습니다. 본래의 인간과 본래의 땅이 되어야 할 이 땅과 인간이 본래의 인간이 아니요, 본래의 땅이 아닌 결과가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바라볼 때 인간은 인간대로 갈라졌고, 땅은 땅대로 갈라졌다는 것입니다. 전부 다 산산조각이 나 버렸습니다.

하나님과 사람과 땅의 일체 기준을 조성키 위한 복귀역사

하나님은 이러한 입장에 처해진 이 세계를 수습하여 하나님과 사람과 땅이 하나될 수 있는 기준을 만들기 위해 역사해 나온 것이 지금까지의 복귀역사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으로 볼 때 제일 중요한 것이요, 인간으로 볼 때도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이 기준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세계 역사를 보면 지금은 어떤 때냐? 궁극적으로는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 서로 응할 수 있는 결과를 가져와야 할 것이지만 지금은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 서로 상충하는 때입니다. 이것이 현실의 세계요, 바로 민주와 공산이 싸우는 때입니다.

민주주의는 종교의 이념을 중심삼고 국가라는 체제와 기반을 갖고 있지만 공산주의는 유심사관이 아닌 유물사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물사관은 물질적이요 외적인 것이지만, 유심사관은 내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 상응하는 때가 아니라, 서로 상충하는 때라는 것입니다. 서로 합할래야 도저히 합할 수 없는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서로 상반된 입장에 처해 있는 세계가 어떻게 해야 합할 수 있는 입장에 서겠느냐? 여기에는 반드시 내적인 새로운 기준을 모색해야 합니다. 역사를 거쳐 나온 결과 이 세계는 내적인 기준은 되어 있지만 이것이 완전한 내적 기준이 못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다시 완전한 것으로 옮겨 놓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완전한 내적 기준을 추구해 나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류역사 과정에서 이러한 한때를 마련하기 위하여 종교를 중심삼아 수많은 인류를 종교권 내에 몰아넣었습니다. 종교가 하나의 외적인 터전이 되고 하나님 자신은 내적인 터전이 되어 역사 과정에 종교를 새로운 색채로 이끌어 내서 새로운 내적 기준과 새로운 외적 기준을 하나로 합하여 외적 기준을 수습하자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하여 하나님은 지금까지 6천년 동안 섭리해 나오시면서 수많은 종교를 발전시키셨고, 그 발전시킨 종교의 중심인 메시아사상을 주어서 외적인 면에서 세계적인 새로운 터전을 준비해 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외적인 이념인 유물사관이라든가 내적인 이념인 유심사관이라든가 하는 것을 중심삼고 세계를 수습하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중심삼은 새로운 분야에서 내적 외적 기준을 결정짓지 않고는 새로운 세계로 출발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그런 섭리를 추진시켜 나온 것입니다.

종교가 바라는 세계는 어떠한 세계냐? 공산세계가 추구하는 세계도 아니요, 민주세계가 추구하는 세계도 아닙니다. 새로운 기준에서 내적인 면과 외적인 면에서 하나로 합하는 것을 종교는 바라며 나오고 있습니다.

대다수 종교가 가르쳐 주는 경전의 내용이 어떻게 되어 있느냐? 세상과 격리된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두가 세상과 상반된 내용을 가르쳐 나오고 있습니다. 즉 모든 종교가 한때를 중심삼아서, 그때를 위하여 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때는 어떤 때냐? 타락한 세계의 내적 외적 기준의 그 세계를 맞이하는 때가 아니라, 이 세계를 넘어 하나님이 세울 수 있는 본연의 내적 기준과 본연의 외적 기준이 접할 수 있는 한때를 말합니다. 그 한때를 마련하기 위해 종교는 역사 과정을 통하여 발전해 나왔고, 하나님은 섭리해 나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새로운 기준이 요구되는 때

그러면 오늘날은 어떤 때냐? 말세입니다. 말세에는 어떻게 해야 심판을 받지 않고 남아지는 무리가 될 것이냐? 현재의 내적 기준과 외적 기준을 중요시해 가지고는 남아질 수 없습니다. 그런 무리는 심판 받는 무리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현재 세계에 널려 있는 모든 것보다도 더 큰 내적 기준과 더 귀한 외적 기준으로 하나님과 일치될 수 있는 기준을 모색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책임을 짊어지고 이 세상에 없었던 새로운 운동을 일으킨 것이 통일운동입니다. 우리가 통일운동을 제시하여 우리의 사상을 중심삼아 가지고 국가와 민족을 구원하고자 하는 것은 현재의 민주세계나 공산세계가 요구하는 것을 중심삼고 뜻을 이루자는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분야의 이념, 새로운 분야의 인격, 새로운 분야의 심정으로 뜻을 세워 나가자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기준이 무엇이냐? 그것은 아담 해와가 에덴동산에서 타락하지 않고 말씀을 중심삼아 가지고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내적인 기준과 사람의 외적인 기준이 하나가 되어 새로운 에덴의 출발, 즉 인류가 바라던 본연의 출발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기준이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이것도 안팎의 형태를 갖춘 모양으로 나타났는데 그것이 유물주의와 유심주의입니다. 여기에서 유물주의보다도 유심주의, 공산세계보다도 민주세계가 하나님 앞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내적 기준과 외적 기준을 두고 볼 때 외적 기준, 다시 말하면 종교권 내의 이런 기준은 반드시 민주세계와 연결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세계를 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가 하나님과 가까운 입장을 취해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깝다고 해서 그냥 따라가는 입장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대등한 입장에서 하나님의 뜻과 진리의 내용을 중심삼아 가지고 사람이 일체가 되어야 비로소 인류가 완성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기준을 종결지어야 합니다. 그것을 종결짓기 위해서 온 중심존재가 메시아입니다.

이 메시아를 중심해서 종교는 새로운 분야에 있어서 하나의 주의 형태를 갖추고 하나님의 내적 기준과 외적 세계 형태를 갖추어서 오늘날의 민주와 공산세계를 통합시킬 수 있는 때를 준비해야 합니다. 이러한 목적과 사명을 짊어지고 나온 것이 통일교회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나님을 중심삼은 새로운 이념으로 뭉쳐서 하나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이 사탄 세상의 외적인 공산주의와 내적인 민주주의가 하나된 것보다 더 강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고는 이 세상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찾아 나오시는 내적 외적 기준으로 하나된 것이 사탄세계에서 찾아 나오는 것으로 하나된 무엇보다 더 강해야 됩니다. 그것을 선생님의 말을 들어서 깨닫는 것보다 여러분의 본심에서 깨닫고 느껴야 합니다.

타락하지 않았으면 본심을 통해 하나님이 계심을 알 수 있었다

인류가 타락하지 않았으면 하나님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을 물어볼 필요도 없습니다. 그것은 본심으로 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류 시조가 타락하지 않고 선의 부모로서 이 우주 가운데 등장하여 가정을 이루고, 그 가정이 번식되어 이 세계 인류가 되었다면 오늘날 인류가 하나님이 있느니 없느니 하고 공론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핏줄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대번에 몸으로도 안다는 것입니다. 하나의 나무와 마찬가지로 거기에는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설명을 통하여서 하나님을 알 수 있게 지으셨다면 하나님은 창조를 잘못한 것입니다.

본래 인간에게는 설명이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설명의 과정을 넘어서 그냥 지나갈 수 있는 자리에서 출발하여야 할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격리된 입장에서 출발되어 개인․가정․종족․민족․국가․세계적으로 벌어져 나왔기 때문에 하나님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을 논의하는 이런 세계가 된 것입니다.

인류가 타락하지 않고 본성의 선한 부모를 통해서 태어났던들 하나님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변론은 필요치 않다는 것입니다. 나면서부터 자연히 안다는 것입니다. 아기가 뱃속에서부터 젖 먹는 법을 배워 가지고 나옵니까? 나자마자 눈앞에 젖이 있으면 빨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자동적으로 알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인류가 타락하지 않았다면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자동적으로 알고, 자동적으로 해결하고, 자동적으로 가야 할 입장인 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전부 다 망각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를 논의하고 의심하는 결과의 세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참한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종교의 터전을 중심삼아서 알지 못하는 인간들을 수습하면서 세계적인 역사 과정을 거쳐 섭리의 터전을 넓혀 나오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통일교회를 믿는다고 여기 와 앉아 있지만 여러분이 이 자리에 나오기까지 배후에서 하나님이 얼마나 수고하셨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수천년 동안 싸워 나오신 하나님은 어느 한때 비참하지 않은 시절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탄세계의 안팎에서 벌이는 새로운 종교운동은 모든 종교의 통일을 위주한 운동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수많은 종파를 초월하고 수많은 교파를 초월해서 하나의 종교를 이루자는 주의요 사상입니다. 이 새로운 주의 사상은 정치를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중심삼아 가지고 새로운 이념과 더불어 하나님과 하나되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적이요, 인간은 외적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실체를 쓴 하나님의 몸이 되어야 합니다. 타락이 무엇이냐? 우리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이 들어와 계실 수 없게 된 것이 타락입니다. 누가 들어왔느냐? 사탄이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이 사탄이 들어온 집을 전부 다 부수어 버려야 합니다. 수천년의 역사노정에서 이런 싸움을 하면서 종교는 발전해 나왔습니다. 이래서 끝날에 통일교회가 나온 것입니다.

통일교회는 세상과 짝자꿍해서 하나되기 위해 나온 것이 아닙니다. 무엇인가 달라야 됩니다. 그러므로 이념적인 기준에서 인류의 본심으로 추구할 수 있는 내용을 지니고 나와야 됩니다. 본래 인간이 가야 할 최후의 목적지가 에덴에서 타락하기 전의 인간으로 복귀하여 그곳에서 정착하여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이 비록 타락했을망정 본성의 마음은 언제나 그곳을 향하여 우리를 끌고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세계도 그곳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여 들어가기 때문에 사상적인 세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의와 사상을 중심삼아서 서로서로 국경을 초월해 하나의 흐름을 이룰 수 있는 세계로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즉 민주와 공산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 땅 위에 지금까지 기성 종교를 중심하고 믿는다는 기반은 조성되어 있었지만 진정한 하나님과 진정한 사람이 진리를 중심삼고 일체 될 수 있는 기준까지는 아직까지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천주주의(天宙主義)

그러면 오늘날 통일교회가 주장하는 것은 무엇이냐?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제일 중요시한 기준은 인간을 중심삼고 하나되는 것이요, 인간에게 제일 중요했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삼고 하나되는 것이었습니다. 이 기준이 일치가 되지 못했기 때문에 산산조각으로 갈라진 것입니다. 이것을 땅은 땅대로 수습해 나오고, 사람은 사람대로 수습해 나오고, 하나님은 하나님대로 수습해 나온 것입니다. 양심을 세워 가지고 양심을 중심삼은 사람을 통해 모든 윤리를 세우고, 이 세상의 조직을 중심삼아서 탕감조건을 맺어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하나님과의 고립된 자리에 설 때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이러한 결과에 부딪힐 수 있는 시대에 놓여 있습니다.

안팎으로 갈라진 세계를 바라볼 때 여기서 우리들이 생각해야 될 것은 무엇이냐? 자체 가운데서 동기가 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이념입니다. 그것은 공산세계나 민주세계에서 추구하는 이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주의입니다. 통일교회에서는 천주주의를 주장합니다.

주의는 변해 나가는 것입니다. 즉 그때그때의 편리한 방편으로써 취해지는 것이 주의입니다. 그러나 하나의 방향을 가지고 목적을 향해 좀더 필요한 것을 가려내기 위해서 나오는 것이 천주주의입니다. 우리가 이 악한 세상에서 주의를 갖고 나오지만 주의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주의의 목적을 이룰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야 합니다.

그러면 천주주의에서 천주가 무엇이냐? 하늘땅입니다. 내적인 면과 외적인 면에서 하나님과 하나된 사람, 즉 마음은 하늘을 상징하고 몸은 땅을 상징하는데 이것이 하나님을 중심삼아 가지고 하나되는 주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원래 에덴동산에서 몸과 마음이 하나된 아담과 몸과 마음이 하나 된 해와가 하나님을 중심하고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하나님 편 가정을 이루면 하나님이 아담가정에 임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류의 소망의 뿌리가 될 것이었는데 이것이 깨어져 나갔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타락한 인간은 가야 할 방향을 모르고 허덕이는 가운데 하나님의 섭리의 끝날까지 왔습니다. 이런 시대의 인류에게 본연의 생활 기준을 가르쳐 주는 것이 통일이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여기에 모인 것입니다.

통일교회는 기독교와 같지 않습니다. 내용적인 면에서 기독교와 통하는 것이 있을지 모르지만 지금까지 거쳐온 기독교의 내용과는 다릅니다. 기독교와는 타락한 세계의 섭리역사 과정을 거쳐왔다는 인연이 있지만, 그 인연에 좌지우지될 교회가 아닙니다. 신기한 말씀에 의해 움직이는 교회가 아니고, 어떠한 종속권 내에서 비판받을 교회가 아닙니다. 그것을 벗어나야 합니다. 이런 입장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심정과, 하나님의 인격과, 하나님의 말씀을 두고 나온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역사에서 어느 시대에 내려왔던 것보다 더 엄청난 내용을 가지고 내려온 것입니다. 이것은 만민이 바라보는 종교의 최후의 목적 기준입니다.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누구나 이 목적 기준을 갖지 않으면 안 될 것이기에, 통일교인은 이런 기준에서 새로운 주의 사상을 중심삼고 출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장하는 주의는 공산주의도 아니요, 민주주의도 아닙니다. 보다 중요한 주의이니, 바로 천주주의입니다. 그 주의는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해와가 필요로 하던 최후의 소망 기준이요, 최후의 주의입니다. 이 주의를 통해서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됩니다. 즉 하나님과 여러분이 하나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루어져야 앞으로 세계를 수습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외적으로 벌어진 민주와 공산세계를 대비해서 통일교회 무리들은 세계를 요리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세계를 극복해 가지고 설 수 있는 주춧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핍박을 받고 욕을 먹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역사 과정을 헤아려 보게 될 때 통일교회가 욕을 먹고 싶어서 이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출발 기점, 역사의 새로운 출발 기점을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기성적인 어떤 종교의 관념을 중심삼아 가지고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제까지 어떤 종교가 파헤치지 못한 내적 세계의 기준을 파헤쳐 가지고 출발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땅 위에 나타날 때에는 절대적인 하나님 앞에서 외적인 책임을 짊어지고 세상 앞에서는 어떠한 것에도 지배당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니요, 어떠한 주의 사상에 끌려 다니는 입장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즉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속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기준을 그리워하라

다시 말하면 에덴동산에서의 아담 해와가 어디서부터 출발을 해야 했느냐? 타락한 입장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타락하지 않고 완성하여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는 자리에서 출발해야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이 떨어진 결과가 종말세계에 어떻게 나타나느냐? 반드시 심판으로 나타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자신들이 서 있는 기점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그 기점은 오늘날의 민주세계도 아니요, 공산세계도 아닙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 이 세계를 그냥 그대로 두어서 천국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비록 개인이지만 내적인 면에서 하나님이 같이하고, 외적인 면에서 이 우주 만상을 초월한, 다시 말하면 피조세계 앞에 만물의 영장의 권위를 갖출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하나님이 임재하실 수 있는 본연의 기준을 갖고 하나님께 가야 됩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그리워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말세에 문제가 되는 것은 거짓 종교입니다.

가인과 아벨 둘 중의 하나는 탕감해야 됩니다. 그런데 오늘날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문화는 다 좋은 것이 아닙니다. 이것들은 다 심판권 내에 들어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좋아해야 할 문화의 세계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으니 여러분의 손으로 창건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기점은 태어난 이 세상, 이 자리가 아닙니다. 태어난 이 세상이 악한 세계가 되어 있기에 이 기준을 벗어나 새로운 미래를 이루어 놓겠다고 다짐해야 할 자리가 통일교회의 현재의 위치요, 여러분의 기점입니다. 이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것이 역사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를 지녔기에 이로 말미암아 여러분이 살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나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데 깊은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통일교회를 믿고 나오려면 사탄세계의 인연을 전부 다 잘라 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부모도 사랑하는 친구들도 모두 반대했습니다. 여러분이 끊어 버리기 전에 그들이 먼저 끊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가정이나 종족, 세상 만사를 다 끊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서럽고 외로운 길에 세워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이데아, 새로운 이념을 세워서 이 위기를 막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새로운 이념을 중심삼고 외적인 기준, 즉 세상이 아무리 악하더라도 굴하지 않고, 새로운 기반을 세워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도 그것을 준비해 나왔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지금까지의 여러분의 실적을 보면 별것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내적인 기준과 여러분이 하나되어서 외적인 세계를 이루어야 합니다. 이것을 이루려니까 핍박받으면서도 이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기준을 중심삼고 닦아 놓은 이 터전은 천하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습니다. 세상의 호화찬란한 문화권을 큰소리치며 자랑한다 하더라도 그런 것을 바라보고 침을 흘리는 무리들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세상적으로 생각하고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아버지여, 이것이 당신이 기뻐할 수 있는 자리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고 당신이 기뻐할 수 없는 현실에서 출발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고 하나님을 위로해 드릴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사랑의 물결이 몰아치는 이런 판국을 뛰어넘어서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딸을 중심삼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환경을 이루어 놓아야 합니다. 그때가 언제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새로운 출발점이 어디냐

오늘날에 있어서도 민주와 공산 두 세계를 통째로 흡수하고 성큼 넘어갈 수 있다는 신념을 여러분들은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요즈음 젊은 사람들은 보게 되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사람이 많습니다. 이래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수많은 선지선열들이 하나님의 슬픔을 풀어 드리기 위해 피를 흘린 한의 사연이 남아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 한을 풀기 위해서는 의분심에 불타야 합니다. 또한 정의의 칼을 들고 이 세계를 굴복시키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자기가 아무리 머물 곳이 없고, 피난 대열에 쫓김받고, 밟힌다 하더라도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출발해야 합니다. 여기서부터 새로운 천지가 출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스라엘 땅에 오신 목적은 섭리의 이상을 이루는 것이었고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망하고 죽어 쓰러져 가던 이스라엘 민족을 일으켜 세워 메시아사상을 중심삼고 하나되게 해서 천국 세계를 건설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죽는 자리에서 ‘아바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피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한 목적이 어디 있었습니까? 세상 사람들 같으면 불리할 때는 후퇴하고 유리할 때는 명령만 할 텐데 예수님은 무엇 때문에 안타깝게 ‘아바 아버지여!’ 하며 생명을 걸고 기도하게 되었느냐? 그것은 천지운세가 달려 있었기 때문이요, 세상 사람과는 관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하나님께서 머물 수 있는 환경과 그 터전이 아닌 고로 새로운 관을 세우고 새로운 터전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이것을 살아서 못하면 죽어서라도 만들어야 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는 순교의 피를 흘리면서 발전해 나왔습니다. 누구나 다 좋아하는 자리에서 살려고 하는 것인데 무엇 때문에 죽으려고 하겠습니까?

본질적으로 보다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세상의 높은 권세가 문제가 아닙니다. 자기의 영광을 자랑할 수 있는 그것은 필요 없습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어디 서 있느냐는 것입니다. 즉 타락으로 인하여 생겨난 사탄세계에서 승리하여 하나님 편으로 가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 근거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모르고 자기 멋대로 살다가 나중에는 틀리다고 합니다. 이것은 사탄의 불법적인 침범으로 인한 타락으로 출발한 인류이기에 정상적인 길을 못 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눈물과 피땀으로 복귀해 나왔으나 세상 사람들은 죽이면서 빼앗아 나왔습니다. 즉 하나님은 제일 가까운 사람들을 희생시켜서 섭리를 해 나오셨습니다. 이로 인해서 하나님 편의 충신들이 죽어 갔고, 하나님이 택한 사람들도 죽어 갔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로 오신 예수님도 죽어 갔다는 것입니다.

사탄은 전부 다 자기의 자식들을 중심삼아 외적인 분야를 세우기 때문에 하나님은 내적인 분야, 숨겨진 분야를 가지고 결론을 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입장에 서서 통일교회가 이런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련 과정을 거쳐 나오면서 자리잡는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끼리 좋아해 가지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사탄이 역사하는 와중에서도 하나님이 같이하심을 알았으니 욕을 먹으면서도 밤이나 낮이나 가야 합니다. 세상을 대할 때 하나님이 작전하는 방법을 가지고 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보다 중요한 것이 무엇이며, 여러분들의 출발점이 어디입니까? 여러분들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삼팔선 이북 사람들이 기분 나쁘다고 남한으로 넘어와서 살다가 또 이북으로 가서 살 수 있겠습니까? 간첩도 이 땅에 들어와서 이 땅의 사람을 흉내 내지 않고는 살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이남 사람도 이북으로 가서 살 수 없는 것입니다. 넘어가서 살려면 죽어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작전상 예수를 사랑하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작전은 본래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새로운 출발점이 어디냐? 물론 이제 뜻을 중심삼고 나가는 데 있어서 책임과 싸움도 중요하겠지만, 승리했다 할지라도 출발지가 나쁘면 사탄이 데려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올바른 자리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경제만 부흥하면 대한민국의 문제가 해결될 줄 알았던 것이 그것만으로 안 되니 제2경제라 해서 정신무장할 것을 권유하고 있습니다. 외적인 면만 가지고는 안 되기 때문에 안팎이 합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민주와 공산이 싸워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내적인 유심사상과 외적인 유물사상을 대표하는 양대 체제가 싸워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싸워도 몸뚱이와 마음이 싸우는 것은 할 수 없습니다. 인류 시조가 타락함으로 뿌리기를 그렇게 뿌렸으니 그렇게 거두는 것이요, 몸과 마음이 갈라져서 싸움이 벌어졌기 때문에 그렇게 거두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싸움의 판국을 수습하고 통일시켜야 할 공적인 이념을 가진 사람들이 태만하여 뒤뚱뒤뚱 살만 쪄 가지고 세월을 보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들은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사탄세계에서 살던 집을 전부 다 불사르고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는 자리에 서야 이상국가를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는 사탄이 좋아할 수 있는 시대입니다. 우리의 생활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탄이 좋아하는 생활권에서 안주해서는 안 됩니다. 습관적이고 관념적인 생활을 벗어 버리고 하나님이 추구하는 새로운 생활권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통일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은 이것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소속이 어디냐

하나님을 중심삼고 하나님과 일치된 내적인 기준을 철석같이 세워야 합니다. 사탄의 세력이 몰아쳐 와서 죽게 된다 할지라도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다 죽었다고 공인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임시방편으로 행동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보다 귀중한 것이 무엇입니까? 소속이 어디냐가 중요한 것입니까? 대한민국에서도 무슨 파니 무슨 파니 하며 따집니다. 즉 소속이 어디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천륜의 법도 앞에, 이 땅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입장 앞에 하나되기 위한 곳에 소속되어 있습니까? 이런 곳에 소속되려면 말씀과 인격과 심정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원리 말씀을 주셨습니다. 통일교회를 진짜로 알았다면 생각해 보세요. 통일교회가 정말 이단입니까? 통일교회는 흐지부지하는 곳이 아닙니다.

선생님은 지금까지 수십년 역사를 거쳐 나왔습니다. 거리를 지나가다 우연히 누구의 말을 듣고 이 길을 출발한 것이 아닙니다. 어떠한 목사한테 감동 받아서 이 일을 시작한 것도 아닙니다. 누가 전도해서 이 길을 가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그 동기의 출발점이 어디냐? 그것은 하나님입니다.

선생님은 지금까지 개인의 체면을 죽이며 나왔습니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산 결과입니다. 선생님은 선생님을 부정하고 부정하는 입장에서 나왔지만 하나님이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경우를 몇 번이나 겪어 나왔습니다.

통일교회를 중심삼고 내적인 문제들이 영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영계에서는 지금까지 수천년 동안 지상에 왔다 간 수많은 영인들이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중심삼은 그 수하의 선한 영계와 통일교회가 한편이 되어 사탄과 싸우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에 들어오는 사람을 보면 대부분 영계의 명령을 받아 가지고 온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을 통해서 역사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생전에 듣지도 보지도 못한 사람들이 영적으로 나타나서 통일교회에 나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가지 않으려고 하면 단단히 호통을 치면서 기합을 주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때가 급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영계의 내적인 인연과 지상의 인연이 하나님을 중심삼고 하나 되어야 합니다. 통일교회를 중심삼고 하나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그럴 것이다라는 가정이 아니라 절대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이 통일교회를 중심삼고 악한 세상을 복귀해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적이요, 인간은 외적이어서, 선을 중심삼고 강제적으로가 아니라 자율적으로 세계를 조화시켜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세계를 조화시키기 위하여 노력해야 합니다. 즉 세계를 통일시킬 수 있는 제사장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데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뜻을 중심삼고 투쟁해 나가면 감옥에 들어가도 절대로 흔들리지 않습니다. 선생님이 감옥에 있을 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어도 선생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수십 명이 넘었습니다. 왜냐하면 영계에서 협조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영계에서 ‘그분을 따라가라. 그분이 누군지 아느냐?’고 가르쳐 준다는 것입니다. 공산치하이기 때문에 말은 안 하고 있었지만 감옥에 같이 있던 사람들은 선생님이 어떤 분인가 하는 정도는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몇 대 조상인 할아버지가 나타나 선생님을 따라가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한 번이 아니고 계속 시키니 할 수 없이 선생님을 따라오는 것입니다. 왜 그런 일이 벌어지느냐?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선조들이 망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통일신도들이 가져야 할 올바른 마음 자세

여러분들은 활동하는 것이 힘들고 안타깝겠지만 배후에는 절대적인 섭리의 뜻을 받들고 있는 많은 선한 영인들이 동원되어 협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신념을 가지고, 즉 선생님과 같은 신념을 가지고 나가게 될 때 여러분은 절대로 망하지 않습니다. 망하라고 하는 사람이 도리어 망하는 것입니다.

이북에서 선생님을 반대하던 무리들이 어떻게 되었는가를 요전에 한번 통계를 내어 봤습니다. 전부 다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복종하지 않는 사람은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 앞에 절대복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출발점이 올바르게 되어야만 결과가 올바르다는 것입니다. 즉 봄 절기에 좋은 씨앗을 뿌려 놓아야 가을에 가서 좋은 열매를 맺어서 거둘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격변하는 이 세계권 내에서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면서 춤추다가는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두 다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놈의 세계 두고 봐라 하는 마음을 가지고 우리 지역을 확정지어야겠습니다. 외적으로 벌어진 민주와 공산 두 세계의 어떤 요소가 여러분을 잡아끌더라도 끌려가서는 안 됩니다. 도리어 맞부딪쳐서 끌고 올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권세나 그 무엇이 여러분을 유혹한다 하여도, 그것을 탈피한 권내에서 하나님이 바라시는 이상의 가치를 중심삼은 내적인 기준과 일치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그 무엇이 문제가 아닙니다.

보다 가치 있는 것을 추구하여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하는 사람이 되고 악한 세상의 권세와 영화가 얼마나 허망한가를 깨닫는 사람이 되어 올바른 출발의 기점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이래 가지고 통일교회의 기틀을 세우고 하늘의 용사로서 적진을 향해 돌진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몸부림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통일신도들이 가져야 할 정신적인 자세인 것입니다. 그런데 껄렁껄렁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죽을 끓이려면 콩죽을 쑤든가 팥죽을 쑤든가 둘 중의 하나는 확실히 해야 됩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삼고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야 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은 하나님의 집, 즉 성전이 되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내적인 하나님이 되고 아담은 만물을 주관하는 외적인 하나님이 된다는 것입니다. 아담이 외적인 하나님이 되었다고 해서 하나님과 갈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실체를 쓴 하나님의 몸으로 태어났으면 모두 다 하나님의 직계 아들딸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못하였습니다. 타락했다는 것은 인간이 사탄과 하나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내적으로 사탄이 들어갔고 외적으로 사탄의 몸뚱이가 되어 사탄의 새끼가 됐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본성에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기준과 접할 수 있는 기준이 있기 때문에 몸은 비록 타락했지만 마음에는 이 기준이 남아져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몸이 사탄의 것이라 할지라도 마음은 하나님을 중심삼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제일선 초소는 인간의 양심이 되는 것이요, 사탄의 제일선은 인간의 몸뚱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초소하고 사탄의 일선하고 싸우면 번번이 양심이 졌다는 것입니다. 양심은 타락한 세상의 땅 끝에 선 초소와 마찬가지입니다. 몸뚱이는 사탄세계의 일선입니다. 그런데 이 싸움에서 양심이 몸뚱이한테 번번이 졌습니다. 그렇지만 종교의 이념을 중심삼고 승리의 기반을 넓혀 나왔습니다.

여러분이 살고 있는 이 세계는 몸뚱이를 위주로 하는 세계입니다. 그러나 물질적이고 외적인 것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그런 사회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양심적이고 도덕적인 이념이 있어야 합니다. 세계가 달라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인간의 마음은 사탄의 일선지대인 몸뚱이와 더불어 살아 나오면서 수많은 변덕을 부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을 주장하는 사람 혹은 선한 종교는 이 땅에서 희생되어 나오지 않은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양심의 폭을 넓혀 나왔습니다. 몸과 마음을 중심삼고 각각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로 갈라져 나왔습니다. 그래도 민주세계가 마음에 가까운 기준에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볼 때 마음은 민주세계, 몸은 공산세계를 상징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적인 부분, 즉 지금까지의 종교 기준을 중심삼고 민주세계가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의 싸움이 이러한 결과의 세계를 이루어 놓았습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통일교회의 목표는 민주세계도 아니요, 공산세계도 아닙니다. 이 두 세계를 통일해야 됩니다.

주체성을 확립하라

선생님이 세계 40여 개국을 돌아다니며 내로라하는 것은 다 구경했으나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부러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세상의 명예와 영광의 감투를 가지고 좋아하며 자랑하면 망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는 것은 망할 징조입니다.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종교, 본래의 권위와 본래의 희망을 자랑하기 위하여 통일사상으로 정신적인 무장을 한 사람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격동하는 오늘날 이 세계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해 봤습니까? 우리는 주체성을 강조해야 됩니다. 이 땅에 나온 우리의 출처, 우리가 서 있는 현재의 위치가 어떻다는 것을 강조해야 합니다.

우리가 강조하는 높고 귀한 것이 세계의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 앞에 내세울 수 있고 자랑할 수 있는 것이기에 사랑하는 부모 형제를 모두 우리의 이념권에 접붙여야 하는 것입니다. 죽음을 각오한 굳은 의지로 이것을 지켜 나가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을 각자가 실천할 때 천국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껄렁껄렁한 잡탕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평양 형무소에 있을 때는 박수무당이라고 소문이 났었습니다. ‘이 자식아, 너 이러이런 것 해먹던 녀석이지?’ 하고 상대방이 말하기 전에 미리 알고 물어보니 소문이 났던 것입니다. 이러한 소문을 공산당들이 듣고는 선생님이 무섭긴 무서운지 취조할 때도 셋 이상의 간수가 지키고 있었습니다. 평양 형무소에서 흥남 감옥으로 들어갈 때 선생님은 사탄세계에서 하나님 세계로 넘어갈 수 있는 하나의 결과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이러한 현상이 벌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곳에 가더라도 정체를 밝히지 않고 안팎으로 변하지 않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만방에, 만세계 앞에, 인류의 가슴 가운데 등불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자기의 생명을 좌우하는 환경에서도 꺼지지 않는 심정을 가지고 죽음의 관문을 돌파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오늘날의 역사와 문화의 기원이 되었던 것입니다. 즉 문화세계를 창조하는 기원이 되었던 것입니다. 통일교회도 그런 기반에서부터 출발했다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통일교회 사상을 지녀 가지고 통일교회에 빚지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죽고 어떻게 살 것이냐? 왔다 갔다 하는 인생으로 살다가 말 겁니까?

선생님은 감옥에 있을 때 먹을 것이나 입을 것을 많이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말없는 가운데서 나를 따르겠다고 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지금도 그때가 그립습니다. 영계의 권고를 받지 않고 듣지 않을 때에는 영적으로 두들겨 맞은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을 따르겠다고 한 사람이 수십 명이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지금 남한이 모두 수복되었으니 모두들 남한으로 내려가서 서로 만나자고 약속했는데 그 후 남한에 와서 보니 남아 있는 녀석이 한 녀석도 없었습니다.

감옥에서 제자의 이름으로 직접 데리고 나온 사람은 오직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전에 함경남도 함흥의 군청에 근무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와 같이 나오다가 함흥에 있는 그의 집에 들러 밥을 한 끼 얻어먹었습니다. 그때 그에게 ‘네 부모가 귀하지 날 귀하게 생각하여 따라나서면 뭐 할 것이야?’라고 했지만 그 사람은 부모가 문제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선생님이 어디 가든지 따라가고, 죽을 때도 같이 죽겠다고 했습니다. 그런 사람이 지금 다 어디 갔습니까? 남아난 사람이 없습니다. 그 후에 평양에 나와 있었는데 여기 경리부장(김원필)의 어머니가 장사 나가 있을 때 중공군의 포탄이 자꾸 떨어졌습니다. 피난을 떠나야 되겠는데 거기서 돌아가시게 그냥 올 수도 없고,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기다릴 수 없어서 흥남서 같이 나온 문정빈 씨로 하여금 기다리게 하고 먼저 떠났던 것입니다.

첫 동기를 잃지 말고 신념을 가지고 가라

여러분들이 선생님을 믿고 따르려면 하나님과 인연을 맺고 나와야 합니다. 선생님이 이렇게 나왔기 때문에 선생님을 따라오는 사람들도 그런 마음을 갖고 나와야 합니다. 선생님을 협조하시던 하나님의 원칙은 변치 않는 것이기에, 이 원칙으로 여러분을 대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먹을 것을 걱정말고, 입을 것을 걱정말고, 죽는 것을 걱정말고 나가 싸우라는 것입니다. 어떤 부락이나 동네에 가서 전도하면 핍박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그 반대로 편드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럴 때 편드는 사람이 진짜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발전해 나가야 합니다.

오늘날 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가 격동하는 세계권 내에서 통일교회를 믿고 어떠한 자리에 서야 하느냐? 아담 해와가 에덴동산에서 타락한 것을 복귀하기 위해 하나님을 중심삼고 말씀과 일체 되어 하나님을 모셔 드리는 자리에 서야 합니다. 아담 해와가 상실한 것을 다시 찾아가야 됩니다. 이것을 회복하려면 죽기를 각오하여야 합니다. 원수들의 총칼이 앞에 있을지라도 잃어버린 것을 찾아 세우고 죽겠다는 각오를 해야 됩니다. 죽더라도 그 세계를 이루고 죽어야 됩니다. 여러분을 보면 할 말이 참 많습니다. 여러분은 6천년간 찾아오신 하나님과 하나되어야 합니다.

보다 귀하고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출발점입니다, 출발점. 출발점을 잘 잡지 않으면 아무리 잘하더라도 틀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출발점에서 올바른 방향을 잡아 첫발부터 그 목적지를 향해 가야 합니다. 거센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비운의 환경 속에서도 이기고 나가겠다는 신념을 가지고 어려움을 타개해 나가야 합니다. 이러한 신념과 더불어 하나가 될 때 영원한 세계가 이룩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목적이 이루어지면 이상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통일교회가 7년노정에서 바라고 나왔던 내용이 참 많았습니다. 통일교회의 사람들은 참사람이 가는 길을 닦아 주기 위해 임시 인부와 같은 사명을 해 나왔습니다.

보다 귀한 것은 동기를 잃어버리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동기가 희미해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현재의 모든 시련과 고통은 문제가 아닙니다. 나중에 받을 영광에 비교하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여러분이 고생하는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말은 하지 않습니다. 사람으로 태어났다가 한번 죽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여기에서 충성하던 사람은 역사에 남아질 것입니다. 수천 수만세에, 길이길이 청사에 생명의 원천으로 빛날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나는 사나이로서 이 길을 가는 것을 꿈에도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이 감옥에 있을 때의 일인데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거기 있는 사람들이 다 모이면 수천 명이 되는데 감옥에서 밖으로 나가는 문을 열어 놓게 되면 난리가 납니다. 문을 열어 놓으니 서로들 먼저 나가려고 막 뛰다가 넘어지는 것입니다. 거기 집이 몇 채인가 하면 육사(六舍)가 있는데 전부 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곳에는 선생님보다 나이 많은 사람도 있고 적게 먹은 젊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서로 살겠다고 뛰어 나오니 부딪치면 깔려 죽는 것입니다. 살 도리가 없습니다. 다리가 부러지고 뭐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선생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 사람들은 간수의 눈을 피해 사람들을 헤치고 나와 선생님께 항상 아침인사를 하였습니다. 그러면 선생님은 본체만체하고 쓱 지나갑니다. 그런데도 선생님이 보고파서 하룻밤만 자고 나면 또 오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에 있는 사람들은 먹을 것을 보면 침을 질질 흘립니다. 이렇게 돌아가는 판국입니다. 여기에서는 혼자만 먹으려고 난리를 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미숫가루 같은 먹을 것이 생기면 선생님한테 주려고 신문지에 싸서 별의별 곳에 다 감춥니다. 그게 더러운 물건입니까, 선물입니까?(웃음) 이렇게 감춘 것이 발각되면 죽어나는 것입니다. 거기서는 12시가 되면 점심을 먹습니다.

그 미숫가루를 나누어 먹었던 것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때의 그런 맛을 아직까지 다시 느껴 보지 못했습니다. 무엇이든 서로 나눠 먹던 그때의 심정을 하나님은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때 그 사람들은 선생님을 무척 사모했습니다. 죽을 때 그 사람들이 날 못 만난다 하더라도 자기의 아들딸에게 ‘남한에 문 아무개 선생이 있을 테니 찾아가라.’고 유언하였을 것입니다.

이러한 산 역사가 통일교회에 있습니다. 통일교회 믿는 사람들이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산다면 하나님께서 당신 자체의 입장이 되게 해 주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여러분들은 잘 모릅니다. 여러분이 통일교인이라면 뭐가 달라도 달라야 합니다.

복귀의 길은 안 갈래야 안 갈 수 없는 운명의 길

엘리야가 길을 가다가 사르밧의 과부에게 물 한 모금을 얻어먹자고 했습니다. 처음 보는데도 그녀는 물을 가지러 갔습니다. 그리고 흉년인데도 떡을 달라는 엘리야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고, 자기들이 먹을 것을 전부 가져다 주었습니다. 하나님을 중심한 선민의 마음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통일교회는 그런 점에 있어서 새 시대 새 하늘 새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엘리야가 ‘나만 남았나이다.’라고 탄식할 때 하나님께서 바알에게 굴하지 않는 7천의 무리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며 위로하던 것처럼 통일교회가 가는 길도 마찬가지입니다. 통일교회가 가는 길이 이런 길입니다. 7천의 무리와 같은 입장에서 이 통일교회에 모여든 무리들이 바로 여러분들입니다. 멋진 무리들입니다.

이제부터는 제2차 7년노정을 출발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반드시 이 복귀노정을 출발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조건을 찾아 넘어가야 할 필연적인 길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인물이 필요하고 기간이 필요하고 조건물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마음대로 책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특정한 기간 안에 인류 앞에 공동으로 정해진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적인 책임입니다. 또한 이것은 천추 만대에 이르기까지 이 땅 위에 복귀되어야 할 인간이 남아 있는 한 7년노정은 남아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못 가게 되면 여러분의 후손들, 즉 수천 수만의 후손들이 이 길을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통일교회의 축복가정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축복은 받았지만 아직까지 하늘에 입적이 안 되어 있습니다. 입적이 안 되었기 때문에 그 후손들도 전부 다 똑같은 운명에 있는 것입니다.

이 길을 가지 않고는 안 되기에 선생님이 처음 이 길을 출발할 때 얼마나 생각을 많이 했는지 모릅니다. 이 길을 위해서 피땀을 흘리고, 생명을 걸어 놓고 기도하며 일생을 바쳐 온 사람입니다.

어차피 이 길은 안 갈래야 안 갈 수 없는 운명의 길이기 때문에 피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수습하고 단축해서 여러분들이 조금이라도 힘이 덜 들고 상처를 입지 않고 아버지 앞에 찾아갈 수 있는 길을 백방으로 알아보고 나서 여러분에게 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길을 선생님이 선두에서, 지도자의 입장에서 나가고 있으니 여러분은 뒤에서 따라오면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과 어려운 관문을 전부 해결하고 지극히 편안한 길을 알려 주려는 것이 스승의 마음입니다. 이러한 나를 원수로 알고 있는 무리는 벼락을 맞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무리가 많다는 것입니다. 벼락을 맞아 죽을 자식들입니다.

여러분들이 통일교회에 들어올 때 죽고 사는 것을 개의치 않고 들어왔습니다. 또한 동네방네 소문나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여러분의 출발점이 어디입니까? 여러분의 조상이 누구입니까?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통일교회에서는 선생님이 믿음의 조상입니다.

우리는 전통적인 기준과 확고한 신념을 중심삼아 원수의 세계와 대결해 나가야 합니다. 제2차 7년노정도 거침이 없이 나가야 합니다. 힘들지만 지쳐 쓰러질 수 없습니다. 선생님은 편안하게 쉴 수 있는 입장에서 잠들어 보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기준을 중심삼고 믿음의 조상의 입장에서 이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준에 섰다고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됩니까?

인류 시조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을 중심삼고 선한 출발의 기점을 세웠더라면 이 세상은 선의 세상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릇된 역사의 출발의 기점을 세웠기 때문에 비참한 현실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선조가 한의 눈물을 짓고 몸부림치며 걸어 나왔다는 것을 깨달아서 선조들의 모든 한을 풀어 나가야겠습니다. 기어이 원수를 갚고 말겠다는, 즉 선조들의 한을 풀어 드리겠다는 신념을 가지고 소망의 천국을 향하여 전진해야 합니다.

여기에 책임을 다하지 못할까봐 안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런 것은 생각지도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현재의 입장에서 자리를 잡아 가지고 꿈을 키우며 살겠다고 하는 무리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무리들이 하나님을 따라가겠다고 하는 무리입니까? 이렇게 해 가지고는 어림도 없습니다.

원수들의 터전을 박차고 나와야 합니다. 여러분은 새로운 중심을 찾아가지고 사망 가운데 머물러 있는 배(타락한 인간)를 바다(선한 세계)에 연결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할 운명에 처해 있습니다. 이 일을 죽을 때까지 해야 합니다. 가을이 곧 가까워지니 겨울이 되기 전에 사막의 배를 끌어다 바다에 인도해야 할 사명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통일교회의 운명이요, 사명입니다. 그런데 쉴 것 다 쉬고, 먹고, 입고, 놀고, 잠자고 언제 합니까? 남은 것으로 할 것 같아요? 어림도 없다는 것입니다. 심각하고 절박한 것입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육이 아니라 영

국가적으로 볼 때 앞으로 3년이 고비입니다. 북한에서 전면적인 전쟁을 전개하더라도 지금이 7월이니까 8월, 9월 한 달 반이면 잎이 지게 됩니다. 그러면 심각한 때는 지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이러한 국가의 운명을 알았기에 비장한 각오를 하였습니다. 이 비참한 민족을 구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책임을 지고 눈물어린 싸움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라도 모르고 세계도 모르는 것을 선생님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어렸을 적부터 이러한 사명을 중심삼고 남이 잠잘 때 하나님을 중심삼고 분한 마음을 품고 투쟁하던 역사를 가졌습니다. 그러기에 선생님이 민족의 심각한 운명을 걸어 놓고 누가 인정하지 않아도 하나님 앞에 정성을 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금년 8월만 잘 넘어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8월을 중심삼아 가지고 1970년대까지 연결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때에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이냐? 대한민국의 여러분들이 책임을 못하기 때문에 일본인을 세워서 책임을 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일본에 다리를 놓는 제2차 작전을 전개시키려는 생각을 선생님은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기가 막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더 많은 정성을 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일본 협회장 구보키가 선생님에게 와서 ‘이번 40일 전도기간에 동경을 중심삼아 가지고 집중공세를 하면 어떻겠습니까?’ 하고 물어보길래 ‘동경이 문제가 아니야. 동경은 일본의 일부일 뿐이다. 뜻을 대하여 충성하려면 전 일본을 중심삼아 그들을 교육시켜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일본 전체의 1억에 가까운 생명을 살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동경의 1천만에 불과한 생명을 목표로 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전국적으로 뜻을 펼치라고 명령했습니다. 승패를 불문하고 전국적으로 펼친 다음 피눈물을 흘려서라도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심정을 가지고 통일의 원리를 선포하면서 본격적으로 움직이라고 했습니다.

그러기에 본부에만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일본이 우리와 역사적인 배경과 문화의 수준이 비록 다르다 하더라도 그 심정은 하나이기에, 여러분은 생활적인 태도에 있어서 그들과 일치되고 통일되게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번 40일 기간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세계를 개척할 수 있는 좋은 때가 왔으니 각자가 책임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때가 와서 출발해야 할 여러분이 올바른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보다 중요한 것은 망해 가는 인류의 역사적인 한을 알고 이것을 책임지는 것입니다.

육과 영인체를 중심삼고 볼 때 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육이 아니라 영이라는 것입니다. 육은 70~80년의 시간권, 한계권 내에서 살다가 사라지고 말지만, 영은 시간권을 초월하고 공간권까지 초월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역사적인 책임을 깨닫고 책임을 다하는 것이 인간의 본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육신을 중심삼고 잘살더라도 결국은 죽게 되는 것입니다. 어차피 육신은 죽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적인 기준과 육적인 기준 중에 어느 것이 보다 중요한 것이냐? 육적인 기준을 중심삼고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육은 영을 위하여, 영은 육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과 같은 입장에 매달려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육을 구원했다는 입장에서 영육이 합한 실체를 갖추어 가지고 보다 보람 있는 자리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이것이 통일이념을 가진 여러분들이 가야 할 길인데도 불구하고 육신을 중심삼고 먹고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전부 다 조건에 걸리게 되어 있습니다.

말씀대로 실천하지 않으면 자기 것이 될 수 없다

선생님은 어렸을 때부터 이런 사명을 책임지고 나왔습니다. 그것은 같이 사는 친구도 몰랐고, 그 누구도 몰랐습니다. 선생님이 출발해서 말씀을 전하고 있을 때도 사람들은 몰랐습니다. 이북에서 선생님을 만났던 사람들이 지금 만나 가지고 하는 말이 ‘아이쿠! 그때 원리 말씀을 전부 다 내가 들었으면 좋았을 걸.’ 하고 후회합니다. 이렇게 될 줄 몰랐다는 것입니다. 요즘도 그렇습니다.

내용과 뜻을 전부 다 들었다 해도 말씀대로 먼저 실천하지 않고는 자기 것이 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여러분들이 통일교회에서 선생님이 말씀하는 타락론을 들었으면 자신이 아담의 자리를 통과해야 되는 것입니다.

노아면 노아의 자리를 통과해야 합니다. 그 노아가 어떤 사정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알아야 하고, 아브라함이 어떻고 모세가 어떻다는 것을 다 알아야 합니다.

이런 내용을 예수님은 나보다 더 몰랐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은 에덴동산에서 추구하던 인간의 심정이 어떻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런 나에게 어느 누가 ‘당신의 심정은 이렇지요?’ 하면 대성통곡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 수 있는 사람을 지금까지 만나지 못했습니다. 이 심정은 오로지 하나님만이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나라를 위해서 일했지만 도리어 핍박받은 것을 생각하면 분하기 짝이 없습니다. 지금도 그런 생각을 하면 세상에 살릴 것이 없고 세상에 남길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한을 풀어야 할 선생님에게 부모 친척이 문제가 아니고 자식이 문제가 아닙니다. 단연코 천주를 위한 자리에서 모든 것을 극복해 나갈 수 있는 그 동기와 원천을 남겨야 합니다. 그런 입장에 서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가는 길 앞에는 이런 노정이 가로놓여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넘어가서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고, 왔다 가신 주님이 당신이었다는 것을 찬양하는 아들딸의 모습을 갖추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6천년 동안 수없이 많은 슬픔을 참아 나오셨고 만세의 만민에게 탄식하여도 끝이 없을 한을 품고 나왔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이런 심정을 품고 나왔다고 통곡하는 하나님이 아닌 것을 알았기에 선생님도 선생님의 사연을 얘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처럼 누구보다도 슬픈 심정을 품고 누구보다도 외로운 심정을 품고 가는 스승을 따르는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이 취하고 있는 생활 태도와 생활하고 있는 모든 내용이 하나님 앞에 의롭게 설 수 있는 자신들이 되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선생님이 생각할 때 용서할 수 없는 자세를 가진 사람이 많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설 수 있는 기준을 다시 찾아야 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인간 조상이 잃어버렸던 한스러운 그 본연의 기준을 다시 찾아야 합니다. 이것이 수많은 선지선열들이 소망하던 소망의 기준이요, 만민이 탄식의 한과 더불어 소망하던 기준입니다. 예수님도 이것 때문에 죽어 갔던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하나님도 탄식하시며 6천년 동안 갖은 고생, 갖은 조소를 받으면서 나오셨습니다. 이러한 한을 일시에 해결할 수 있는 관건이 여러 분에게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무엇을 아끼고 무엇을 주저할 것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이러한 한을 풀기 위하여 단연코 이제까지 가졌던 모든 것을 버려야 됩니다. 여러분은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통일교회의 식구라고 해서 자랑하지 마십시오. 대통령의 자리에 있다고 자랑하지 말라 이겁니다. 어떤 위치에 있다 하더라도 뜻이 하루빨리 이루어지고 세계 인류가 살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자신을 그곳에 폭파시켜 버려야 합니다.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그런 생활을 이미 해 왔고, 그런 목표를 정해서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 앞에 이런 말을 하더라도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심각한 순간임을 명심하라

하나님은 영통인들을 통해서 통일교회의 선생님과 관계를 맺으라고 통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쩌다가 이런 무리들을 만나 가지고 이런 일을 해야 되느냐? 어쩌다가 이렇게 패망한 패잔병들을 끌어다가 이 일을 해야 되는가! 선생님이 찾아 놓은 놀라운 역사적인 모든 것을 자기 멋대로 이용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것으로 거두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탄의 제물이 되어 일을 하는 사람을 볼 때 독수리 밥이 되어 마땅하다는 마음이 듭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인간을 보고도 참고 나오신 하나님의 심정을 알기 때문에 내가 더 맞고, 더 고생을 하고, 더 피땀을 흘리고, 눈물 한 방울이라도 더 흘리고, 피곤할지라도 쉬지 않고 가는 것입니다. 나에게 아직 열기가 남아 있고 기력이 남아 있는 한 참고 나가는 것입니다. 나라를 사랑하기 시작했으면 나라가 망하더라도 끝까지 나라를 사랑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알고, 따르는 제자들이 배반하더라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참고 묵묵히 가는 것입니다.

제2차 7년노정의 심각한 시대를 맞이하여, 잘못되면 국가의 비운이 깃들 수 있고 세계의 비운이 깃들 수 있으며, 섭리사의 비운이 깃들 수 있는 이런 찰나를 앞에 두고 칼을 빼어 들고 나가서 싸워야 할 텐데도 불구하고 칼을 빼지 못하는 형편없는 우리의 입장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보다 중요한 것을 중심삼고 출발하여 죄악의 환경을 밀고 나가야 합니다. 이러한 목적을 중심삼아 가지고 내가 왔다고 할 수 있는, 내가 싸웠노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을 맞기 위하여 천년 한을 품고 나왔고 이를 위해 천신만고의 길을 찾아왔다고 하나님 앞에 소리칠 수 있는 자신이 되어야 합니다. 죽더라도 아버지의 손길을 붙들고 죽겠다고 하는 통일 신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데도 불구하고 돼먹지 못한 녀석들이 많습니다.

이제 새로이 출발해야 할 시대가 왔습니다. 통일교회에 있어서 귀한 것이 무엇이냐? 잘못 출발한 한을 풀 수 있다는 것이 귀합니다. 이 한을 풀 수 있는, 하늘땅이 일치될 수 있는 그 소망의 기준은 여러분 개체가 아닙니다. 개인을 넘어 세계 전체의 국가를 연결시킬 수 있는 사명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 사명을 이룩할 때까지는 죽는 한이 있더라도 끝까지 남아서 이 길을 개척하겠다는 신념을 가지고 선생님은 걸어왔습니다. 선생님 개인의 목표를 걸고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 길에 동참해야 되는 것이요, 이 길 가운데 있어서 보다 귀하다고 생각되는 것이 있거들랑 죽을 때까지라도 따라가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죄악의 세계를 누가 수습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자신이 수습하여 가지고 세계를 요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민주와 공산을 감싸고 통합할 수 있는 모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자기 중심적인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선생님과 같은 신념으로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망하는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희생이 필요합니다. 이것을 모르고 말 몇 마디 들었다고 좋아서 헤헤거리는 사람은 사람 축에도 못 들어가는 것입니다.

보다 귀한 것, 보다 중요한 것을 품고 이것을 중심삼고 생활해 나가야 합니다. 외적인 준비에 바쁜 생활을 해야 됩니다. 그리하여 세계의 구원은 내가 기필코 이루겠다고 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럴 수 있느냐? 사탄세계가 동으로 가면 나도 동으로 가고 사탄세계가 서로 가면 서로 가는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은 절대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변하지 않는 신념을 가져야 하고, 어디서 출발의 기점을 세울 것이며, 목적하는 곳이 어떠한 자리인가를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입장에서 세운 기준을 중심삼고 40일 기간을 거쳐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알겠지요? 「예.」

7수를 중심한 복귀역사

하나님께서는 6수인 6일째에 사람을 창조했습니다. 7수는 안식수인데 인간이 타락했기에 이 7수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이 땅에 있는 사람들이 안식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7수를 잃어버렸기에 하루를 천년으로 연장해서 6천년 역사를 통해서 6수를 찾아 세우고, 7천년의 역사로 안식수인 7수를 찾아 나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찾아 나오는 것이 기독교의 소망의 천국입니다. 천년 천국입니다. 인간이 6천년으로 6수를 찾고 7천년으로 7수를 찾아 완성하여 재출발하는 8수의 연한을 다시 찾아 들어가는 것이 복귀의 역사입니다.

인간의 타락으로 6일 창조기간, 즉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 창조한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사람 때문에 전부 다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다시 찾기 위해서 6천년 역사를 섭리해 나오십니다. 이 6천년을 중심삼고 7천년 역사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천년 왕국을 주장하고 있지만 하루가 천년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천년 왕국이라는 것은 세계적인 부활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를 거친 후 안식권을 얻어 가지고 비로소 하나님을 모시고 아들과 딸이라는 공인을 받아야 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기쁨에 동참할 수 있는 안식을 갖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편히 쉬며 잠자는 날이 아닙니다. 안식일을 잠자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안식일은 하나님과 하나되어 하나님의 기쁨에 동참해서 기쁨을 표현하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영계에 가서 하나님을 중심하고 천국을 이루면 영원한 안식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에서 시작됐고 영원히 존재하기에 영원한 안식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안식을 잃어버린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은 물론 선생님도 하나님도 안식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은 7천년의 역사를 중심삼고 나왔지만 모든 종교는 7백년 걸어서 나오는 것입니다. 7백년의 운세가 때를 맞이하면 삼 칠이 이십일(3x7=21), 2천년 운세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역사도 2천년, 2천년 역사가 이어져 나왔던 것입니다. 그것은 반드시 한 단계마다 새롭게 바꿔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중심삼고 볼 때는 7천년 한의 길을 가는 것이요, 종교는 7백년의 역사를 중심삼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가 잘 했으면 예수님이 재림하는 것도 7백년 기간에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그것을 못했기 때문에 마호메트의 이슬람교처럼 이방 민족의 종교가 전부 다 재림사상을 갖고 나온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종교는 7백년 운세를 중심삼아 가지고 나갈 수 있습니다. 7백년 운세를 중심삼고 7단계로 발전해 나갑니다. 택함 받은 선지자들은 개인적으로 70년의 운세를 타고 나옵니다. 하나님은 따라서 7천년 한의 길을 가야 되는 것이요, 종교는 7백년 한의 길을 가야 되는 것이요, 인간은 70년 한의 인생길을 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70년 한의 인생길을 가는데 어떻게 해야 되느냐? 자유로이 결혼생활을 해서는 안 됩니다. 한의 길을 가야 하기 때문에 결혼생활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제일 원치 않는 것이기에 70년 동안 독신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고차적인 종교일수록 독신생활을 주장했던 것입니다.

70년 운세가 문제입니다. 지금까지 70년 운세를 거치며 이루어 놓은 터전 위에 주님이 오시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주님이 오셔서 무얼 할 것이냐? 이 땅에 와서 70년 운세를 7년으로 단축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것을 7개월로 하면 어떻겠습니까? 7개월 가지고는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7년이면 사람의 나이로 일곱 살입니다. 그래도 말을 신용할 수 있는 기준은 7년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7천년의 한의 길이 종교가 나옴으로 7백년으로 단축됐고, 700년 운세가 70년으로 단축됐고, 70년의 운세가 소망의 한때가 옴으로 말미암아 7년으로 단축되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예.」

타락이란 무엇이냐? 7수를 잃어버린 것이 타락입니다. 7수를 잃어버림으로써 사위기대를 못 이루었습니다. 또한 사위기대를 못 이루었으니 삼위기대를 이루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삼위기대는 축복을 받아야 됩니다. 타락으로 인해 축복을 받지 못했기에 성부․성자․성신의 삼위기대를 못 이루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귀역사를 통해서 7수를 이루려면 4수를 먼저 이루어야 합니다. 4수 기반이 없으면 3수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탕감복귀하려면 중심인물이 있어야 하고 조건물이 있어야 하고 기간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철칙입니다. 이것이 있기 때문에 선생님도 이 법을 따라갑니다. 7년에 안 되면 3단계를 거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그래서 7년 걸릴 것이 21년이 걸린 것입니다. 작년에 21년 노정이 끝났습니다.

세계를 구하려면 가정적인 메시아가 되어야

그러면 중심인물과 조건물과 기간을 통일교회의 여러분이 정할 수 있습니까? 선생님이 마음대로 정할 수 있습니까? 정할 수 없습니다. 천리의 법도가 그렇게 정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땅 위의 천하만민이 언제든지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는 문을 전부 열어 놓아야 되겠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안 되겠기에 이 일을 하는 것입니다.

언제부터 이런 일을 해 나왔느냐? 7년노정입니다. 7년노정에서만이 이것이 허락되는 것입니다. 7년의 기간을 못 가지면 아담을 대신한 아벨이 될 수 없습니다. 통일교회를 믿는다고 다 아벨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벨적인 이념과 아벨적인 자리를 결정할 수 있는 기간이 여러분 각자에게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누구나 7년노정을 거쳐야 합니다. 인간이 7수를 잃어버리고 사위기대를 이루지 못하여서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지 못한 것이 한입니다. 그래서 7수를 찾기 위해서 4수를 찾아야 되고, 3수를 찾아야 됩니다. 이것을 전부 다 찾아야 됩니다.

믿음의 기대에서 중심인물을 찾으려면 7수를 찾아야 되고, 기간을 찾으려면 40수를 세워야 합니다. 그리고 조건물인 3수를 세워야 합니다. 그래서 아담가정에서도 3자식으로 3대를 거쳤고 노아의 방주도 3층이었습니다. 전부 3수로 벌어진 것입니다. 예수님도 40수를 세워야 했습니다. 7년 노정을 중심삼아 가지고 40세까지 모두 맞추어야 합니다. 그러면 20세에서 26세까지 7년, 27세부터 33세까지 7년, 33세부터 40세까지 7년, 이렇게 하여 21년 부모의 노정을 걸어야 했습니다. 20세부터 40세까지 한국 나이로 보면 21살입니다. 만 40세에 40수를 복귀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메시아가 만민의 구세주로 등장하려면 7년노정, 7년노정을 거쳐서 40수를 세워야 됩니다. 즉 예수님도 40년으로 40수를 세워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33세까지 이스라엘 나라와 하나되고 40세까지는 세계의 주도권을 잡아야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수리적인 비밀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모든 것이 수리적으로 다 맞았는데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되지 못함으로 인하여 땅 위에 이루어 놓은 것이 하나도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3대 조건물을 찾아 세워야 했습니다. 이 조건물이 세 제자입니다. 즉 세 믿음의 아들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뜻을 출발할 때 따르던 베드로, 야고보, 요한 같은 사람들은 원래 예수님과 관계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보잘것없는 이런 자들을 중심삼고 4천년 역사를 대신해 나왔습니다. 본래는 준비된 제사장, 교법사들을 중심삼고 출발해야 하는데, 그들이 불신함으로 인하여 이들을 중심삼고 공적 3년노정을 출발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기독교는 이방인을 중심삼고 발전해 나온 것입니다.

준비된 사람들을 다 잃어버리게 되자 할 수 없이 미천한 어부들을 중심삼고 나왔습니다. 2천년 전에 어부라면 사람 축에도 못 끼는 최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배반과 요셉가정이 배반한 입장에 서게 되니 민족을 중심삼고 나온 섭리의 기반을 전부 다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찾아 세우기 위해 통일교회가 몰려 나온 것입니다. 선생님은 1960년대를 중심삼고 7년노정을 선포했습니다. 예수님도 7년노정을 선포하지 못했습니다. 선생님도 33세에 이 7년을 선포하여 40세에 끝마쳐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했기 때문에 앞으로 기독교에 7년 대환난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기독교인들은 모르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려면 예수님보다 잘나야 됩니까, 못나야 됩니까? 못나 가지고는 하나님의 아들딸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아들이 되었습니까, 못 되었습니까? 개인적인 메시아로서는 세계를 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세계를 구하려면 가정적인 메시아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신을 맞이해 성부․성자․성신의 이념을 세워야 합니다. 신랑 신부의 이름으로 가정을 이루어야 합니다. 이러한 가정을 이루기 위하여 영적으로 터를 닦아 나왔으니 이제 실제로 그런 날을 맞아야 합니다. 그날이 어린양 잔칫날입니다. 즉 예수님이 장가가고 잔치하는 날이 어린양 잔칫날입니다. 기성교인들은 똑똑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재림주님은 부모로 오신다

타락한 사람들을 하나님도 싫어하고 사탄도 미워합니다. 타락한 아담 해와를 사탄도 싫어합니다. 만일 사탄이 이 인류를 사랑하게 되면 사랑의 법도는 하나님께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사탄이 원래 사랑해서는 안 될 해와를 겁탈하여 하나님의 심정을 유린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참된 조상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하나님 편의 조상을 못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류는 하나님 편의 사람이 아니라 사탄 편의 사람들입니다. 이 땅에 하나님 편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편 사람으로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의 조상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조상이란 인류의 아버지를 말합니다. 그러나 아버지 혼자서는 자식을 낳을 수 없습니다. 낳을 수 있어요, 없어요? 그러기에 인류의 어머니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 인류의 어머니 아버지가 참조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 조상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거짓 조상이 되어 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참조상이 생겨나야 됩니다. 참조상을 통해야만 하나님 앞에 돌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떠한 자격을 가지고 왔느냐? 아버지로 오셨습니다. 인류의 참아버지, 즉 참조상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러나 참어머니를 데리고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원래 인간이 참어머니를 사탄에게 빼앗겼기 때문에 사탄세계에서 죽기를 각오하고라도 빼앗아 와야 합니다.

끝날에 주님이 오셔서 신부를 맞이할 때 신부가 해방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선진국가에서 여성운동이 일어나고 있지만 그 속에 중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중심이 없으니 중심인 예수님이 다시 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인간들에게 형제로서의 구주의 사명만을 갖고 왔다면, 예수님이 다시 오지 않아도 형제로서 구주의 역사는 이 땅에서 얼마든지 계속 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버지의 사명을 해야 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다시 와야 합니다. 아버지는 둘이 될 수 없으니 반드시 다시 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구주를 기다리는 타락 인간이 나는 사촌 형님 혹은 이웃사촌 오빠가 구주였으면 좋겠으니 이웃 사촌 오빠를 구주로 보내 주면 좋겠다고 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사촌 오빠보다 더 가까운 것이 친오빠이니 친오빠를 구주로 보내 주십시오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본래는 자기 가정부터 전도해야 했습니다. 사실 요셉가정은 다윗의 후손으로서 전부 축복받은 후손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셉가정의 요셉과 마리아가 협조했더라면 세례 요한은 자동적으로 넘어오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예수님은 민족에게 쫓기고, 종족에게 쫓기고, 교단에서 쫓기고, 가정에서 쫓기고, 제자들까지도 불신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기가 막힌 일입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은 죽을 때까지 한 많은 3년 공생애노정을 걸어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4천년 동안 하나님께서 준비한 권세 있는 모든 사람들을 다 잃어버리고 천한 어부들인 베드로, 요한, 야고보 세 제자를 중심삼고 나왔던 것입니다.

인류의 조상인 아담의 가정이 파괴되었으니 이것을 복구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타락하지 않은 아담 대신으로 오셔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둘째 아담으로 오신 분입니다. 인류의 첫째 조상인 아담은 타락한 조상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본연의 뜻을 세우기 위해 타락하지 않은 참조상으로 예수님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런 참조상을 중심삼고 아담가정을 찾아야 합니다. 아담가정을 중심삼아 가지고 12대인 노아가정까지 연결해야 됩니다. 전부 12대를 맞추어 나와야 합니다.

타락한 아담가정에 있어서 아담과 해와가 복귀되려면 가인과 아벨이 복귀해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복귀하지 못하고 전부 다 망했으니 그 부모를 복귀할 수 있겠어요? 그래서 후아담으로 오신 예수님이 죽지 않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원리적으로 볼 때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통일교회에서 축복해 주는 이유

예수님은 돌아가신 후 사탄의 참소권을 벗어나 부활하여 세 제자를 중심으로 열두 제자를 세웠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영적 조상이 되었습니다. 영적인 조상밖에 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영적으로 세계적인 터전을 이룬 것이 제2이스라엘인 기독교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영적으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육으로, 즉 실체로 와야 합니다. 그리하여 영육을 중심삼고 사위기대와 삼위기대를 세워야 합니다.

그러므로 통일교회의 여러분은 하나님을 중심삼고서 믿음의 기대를 위한 조건을 세워 놓고 담판을 지어야 합니다. 거기서 승리를 결정한 사람이 되려면 7수 기간을 중심삼고 일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40일 탕감 기간을 거쳐야 합니다. 40일 탕감기간이 없으면 3수를 조건적으로 찾아 세워야 합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탕감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7수가 없으면 4수가 있을 수 없고, 4수가 없으면 3수가 있을 수 없기에, 하나님은 거꾸로 섭리해 나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3수를 중심삼아 가지고 사위기대를 이루어 7수를 찾아 나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3수를 중심삼아 가지고 나온 터 위에 예수님이 오셔서 가정을 찾아 사위기대를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위기대, 즉 가정을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삼위기대의 3수를 중심삼아 사위기대를 찾아 나와서 7수를 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찾아 나오십니다.

그러기에 통일교회에서 거꾸로 나가는 것입니다. 즉 7수권에서 4수를 세워 가지고 3수를 찾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타락한 인간에게 7년 기간이 절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걸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요셉 족속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종급에 속하는 족속이었습니다. 이런 입장에서 예수님은 출발해야 했습니다.

그러면 가정권 내에서는 무엇을 해야 하느냐? 12지파를 편성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민족권을 중심삼은 이스라엘 족장들을 전부 다 규합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각 족장들이 예수님을 증거하여야 했던 것이요, 교법사나 선지자인 세례 요한도 예수님을 모시고 따라다녀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민족을 잃어버렸고, 유대교단을 잃어버렸고, 요셉의 종족을 잃어버렸습니다. 즉 친족과 씨족, 민족을 모조리 잃어버렸습니다. 원래는 요셉의 친척들이 예수님을 중심삼고 모두 제자가 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통일교회의 뜻을 기독교인들이 받아들인다면 기독교는 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통일교회를 반대하는 기독교는 망합니다. 마치 요셉 족속과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님을 모시지 못해 망한 것과 마찬가지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님을 모시지 못함으로 인하여 예수님은 수제자인 세 제자와 120문도를 잃어버렸습니다. 이것을 영적으로 다시 찾을 수 있는 기준을 세운 것이 오순절 다락방의 성신 강림인 것입니다. 이것이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을 수 있는 조건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인해 120문도의 무리가 하나되어 유대 백성을 중심삼고 재인식 기준을 세우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영적 이스라엘 세계가 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민족을 중심삼고 죽지 않고 뜻을 이루어야 했던 사도들의 한을 풀어 줘야 합니다. 또 70문도 120문도의 한을 풀어 줘야 합니다.

원래는 예수님이 구주로 이 땅에 와서 요셉 족속한테 쫓기지 않아야 되는 것입니다. 집을 나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따랐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려면 예수와 같은 자리에서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신랑 신부의 이념을 이루어 가지고 하나님의 품에 안길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야만 아담과 해와가 인류의 조상으로서 타락한 것을 완전히 복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둘이 타락했기 때문에 둘이 복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통일교회에서는 축복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지 않고 신랑 신부의 인연을 이루고 12제자와 70문도, 120문도들을 땅 위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죽어서 영적으로 축복해 주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것을 이루지 못하고 반대받고 몰림을 당하여 돌아가셨기에 한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실체적으로 풀어 줘야 되기 때문에 통일교회의 문 선생이 지금까지 이 일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1960년부터 얼마나 야단이었습니까? 온 교회와 3천만이 반대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들을 사랑해 왔습니다. 인간은 사탄의 자식으로 태어났습니다. 사탄세계에 있는 인간이지만 사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천사장이 타락하게 된 것도 사랑의 감소감을 느꼈기 때문에 타락했으므로 하나님 편의 아들딸만 사랑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녹음이 되지 않음)

<말씀 요지>

하나님의 날이 결정됨으로써 우주의 중심이 결정되고 모든 것이 하나로 귀일됩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자기를 최고로 생각하는 사람은 꺾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지역장의 전면적 이동이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영계는 천사세계에 해당되고, 축복가정들은 아담가정에 해당됩니다. 따라서 영계를 복귀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선령들이 재림해야 합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의식은 탕감을 위한 식이었으나 이제부터는 부모를 중심한 원칙적인 식입니다.

제1차 7년노정은 선생님이 걷는 노정입니다. 제2차 7년노정 중 3년은 각자가 선조의 입장에 서는 기간입니다.

예수님이 가족을 중심하고 열두 제자를 세워 이스라엘 민족을 복귀해야 했던 것을 여러분은 각자를 중심하고 이루어야 합니다.

금년 1월에서부터 7월까지는 7천년에 해당하는 기간입니다. 이 기간에 충신과 효자가 갈라집니다.

이제 가정을 정비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말씀 요지>

지혜로운 사람은 섭리의 때를 가려서 나갑니다. 그런 사람들은 환경을 위주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 때를 위주해 가지고 삽니다. 하나님은 환경을 중심삼고 예언을 내리시지 않고, 때를 중심하고 내리십니다. 따라서 계시를 받지 못하더라도 때를 맞추는 사람이 예언의 뜻을 계승합니다.

때와 환경은 반드시 일치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환경을 극복하고 때를 맞추어야 합니다. 때를 예언한 사람보다도 그때를 자기의 때로 맞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며, 그런 사람이 세계적인 인물이 될 수 있습니다. 아벨의 때에는 아벨이 가인을 굴복시켜야 했고 가인은 아벨에게 굴복해야 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섭리의 때를 맞추어 사는 사람

이스라엘 민족도 세계적인 민족이 될 수 있었는데 그럴 수 있는 때를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지금까지 기독교도들도 재림의 한때를 바라보고 나왔습니다.

우리가 완전히 복귀되려면 개인으로부터 가정․종족․민족․국가․세계․천주․하나님의 8단계 과정을 거쳐 넘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세계적 기준의 터를 마련하셨습니다.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한 방법은 시대마다 달랐습니다. 즉 구약시대에는 제물을 드림으로, 신약시대에는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을 믿음으로, 성약시대에는 참부모를 모심으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몸뚱이(육계)를 지키려면 마음(공간)을 중심삼고 지켜야 하고, 마음을 지키려면 하나님(영)을 중심삼고 지켜야 합니다.

사상시대는 생각하는 시대입니다.

천․지․인(天地人)을 두고 볼 때, 땅의 중심과 하늘의 중심은 인간입니다. 통일주의(統一主義)를 어떻게 해야 맞을 수 있느냐? 몸뚱이를 중심한 유물론적인 공산주의 가지고도, 마음을 중심한 유심론적 민주주의 가지고도 통일주의를 맞을 수 없습니다. 몸과 마음, 그리고 하나님, 이 셋이 일치되어야 통일주의를 맞을 수 있습니다.

통일교회를 믿는 사람은 지금까지의 사상 기준보다 한 단계 더 뛰어 올라가야 합니다. 통일교회를 믿으면 미친다는 소문이 나야 합니다. 통일교회에 가면 죽었던 아버지가 살아서 돌아온 것보다 더 기뻐야 합니다.

나의 몸과 마음, 나의 생활, 내가 속한 사회와 국가와 세계도 통일주의에 입각하여 치리받아야 합니다. 이렇게 하여 이루어진 것이 통일교회가 이루고자 하는 이상천국입니다.

개인적으로 좋은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개인만 가지고는 안 되고, 상대적인 세계를 중심삼고 인연맺어야 합니다. 사탄적인 환경과 섭리의 때는 어차피 일치돼야 하니 먼저 때를 맞아서 환경과 세계를 제패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때를 중심삼고 환경을 지배하는 사람은 승리하는 사람이요, 환경에 지배당하는 사람은 망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때를 중심삼고 환경을 혁명해야 합니다. 즉 때에 환경을 일치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공식노정은 탕감복귀노정입니다.

세 나라를 연결하여 그 세 나라에 영향을 미칠 수 있어야 세계적인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통일교회 교인들에게는 가인적인 입장에서 구원받아 가지고, 아벨가정(이북에 남아 있는 문 씨 가정)을 구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성전은 타락하지 않았을 때의 아담의 몸과 같기 때문에 그 위에 예수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셉가정과 사가랴가정을 하나되게 하여 뜻을 이루어야 했습니다.

세상적인 환경을 중심하고 이루어진 나라와 예수가 와서 이룩하려 했던 나라는 전혀 다릅니다. 요셉은 2천년 전 야곱의 부활체입니다. 그러므로 요셉 가정이 유대교의 핵심입니다.

제2차 7년노정의 섭리적 의의

메시아가 있어야만 가정․종족․민족․국가․세계가 구해집니다.

예수님이 개인적인 메시아가 되고, 가정적인 메시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재림사상입니다.

제2차 7년노정은 예수께서 하지 못한 종족적인 메시아의 사명과 민족적인 메시아의 사명을 대신하는 기간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이종사촌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앞에는 가인입니다. 또한 세례 요한은 타락했다가 복귀된 인류의 아버지격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서 세례 요한은 모든 것을 참아버지로 오신 예수님에게 인계해야 했습니다. 가인적 세례 요한의 가정과 아벨적 예수의 가정이 하나되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결혼을 하여 가정을 가져야 했습니다. 그 당시에 궁중에서 친족끼리 결혼을 하게 되었던 것도 이러한 외적인 때를 맞추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내적인 영계를, 세례 요한은 외적인 육계를 대표한 입장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사위기대와 세례 요한의 사위기대가 하나되어 영계와 육계가 하나될 수 있어야 했습니다.

가인이 실체 기준을 세우지 않으면 부모를 복귀할 수 없습니다.

옛날에 가인이 아벨을 돌로 쳐죽였는데, 또다시 가인의 입장인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불신함으로써 죽게 하는 장본인이 되었습니다.

복귀노정에서 국가 기준까지 어떻게 수습하느냐가 문제입니다. 이것을 수습하는 날이 천국이 완성되는 날입니다.

120가정은 세계의 모든 국가를 대표한 기준에서 세워진 가정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4천년 동안 준비하여 나온 기반으로부터 반대받고 몰리게 되어 할 수 없이 가인형인 사탄권의 어부들을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죽더라도 예수님을 위해 눈물 흘릴 수 있는 사람을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에 남기기 위한 섭리적 사랑에서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탄에게 이끌려서 시험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 시험에서 이겼기에 제2차 노정이라도 출발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장성기 완성급에서 외적으로 쫓겨났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려고 왔다가 이스라엘로부터 안팎으로 쫓겨났습니다. 그때에 예수님은 이방으로 갈 수도 있었지만, 가게 되면 이스라엘 4천년 역사가 모두 깨어져 나가겠기에 가지 않고 남아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여 영적인 승리의 기대를 이룩한 후에는 이방인을 세워 영적인 이스라엘을 편성하였습니다. 기독교의 2천년 역사는 예수님이 부활해서 영적인 제2차 기준을 세웠기 때문에 이어져 나온 역사입니다.

예수님은 소생 기준에서 실패했고, 장성 기준에서 실패했고, 완성 기준에서는 영적으로만 성공했습니다.

1948년 5월 15일에 이스라엘이 독립을 한 사실은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음을 의미합니다.

섭리는 세계적으로 발전해 나갑니다. 유대교와 유대 나라, 로마는 예수님을 중심하고 사위기대를 이루어야 했습니다. 지금과 2천년 전의 예수님 당시를 비교해 보면, 재림주님은 예수님의 입장, 기독교는 유대교의 입장, 한국은 유대 나라의 입장, 민주세계는 로마의 입장과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재림주님을 중심삼고 이들 또한 사위기대를 이루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영적 구원만을 이루었지만, 통일교회는 영적 구원과 육적 구원을 모두 이루기 위한 교단입니다.

지금의 때는 야곱이 21년노정을 마치고 돌아와서 형님인 에서에게 제물을 바치던 때와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통일교회도 형님 교단인 기성교회를 위해서 초교파운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민주세계를 단합시키기 위해서 승공운동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첫째 아들격이 유대교요, 둘째 아들격이 기독교요, 셋째 아들격이 통일교회니, 셋째 아들격인 통일교회가 둘째 아들을 살려 주자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우리가 쫓기고 몰려다녔지만, 이제부터는 위신과 권위를 회복하여 당당히 반격전을 할 수 있는 때가 되었습니다.

통일교인은 애국애족하는 사람들이 되고, 역사적인 충신의 후계자가 되고, 역사적인 효자의 후계자가 되어야 합니다. 나아가 세계를 책임질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통일교회는 종교 중의 종교, 살아 있는 종교, 사회가 필요로 하는 종교가 되어야 합니다.

선생님이, 하늘 앞에 쫓겨난 무리들, 하늘이 세우지 않았던 자들을 찾아 그들을 구해주기 위하여 가는 노정이 2차 7년노정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쫓겨나지 않은 입장에서 찾은 것과 같은 기준을 세우기 위해서 통일교회의 아들딸들이 출동하여 2차 7년노정을 걷는 것입니다.

지금은 종족을 복귀하는 때

지금은 종족을 복귀하는 때입니다. 그래서 다른 종족들이 다 복귀되면, 문씨(文氏) 종족은 자동적으로 복귀됩니다.

선생님이 여러분에게 전면적인 진격을 하라고 한 것은, 지금 때가 예수님이 어부를 찾아 제자로 삼고 교단을 이루어 가정적인 기반을 세우고 전면적인 진격을 해야 했던 때이며, 땅에서도 준비되어 있고 영계에서도 협조하도록 되어 있어서 완전한 작전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은 1960년에서 1963년 사이에 축복을 해 줌으로써 가정복귀의 기준을 세웠습니다. 따라서 식구들도 제2차 7년노정이 시작된 금년부터 3년간, 즉 1970년도까지 이 기준을 세워야 합니다.

땅 위에서 승리할 수 있는 기준이 세워짐으로 말미암아, 6천년 역사 속에서 뜻의 선봉에서 수고해 온 선조들이 이 땅 위에 재림역사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축복가정은 총동원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걸었던 3년노정을 걷고 나면 종족적 메시아의 사명을 다한 것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제1차 7년노정과 합해서 10년노정을 걸은 셈이 됩니다.

3년 후에는 지파 편성을 할 것입니다.

12사람을 전도하면 지파를 찾아 세울 수 있습니다. 3명밖에 못하면 일방밖에 안 되는 것이니, 이 조건적 숫자인 12수를 찾아 세우지 못하고 지파 편성에서 빠졌다고 원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축복가정은 삼위기대를 편성해서 살아야 합니다. 그 가정에 아들이 태어나면 사위기대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삼위기대 가정 중에서 아들이 없는 가정이 있으면, 그 가정에 자기의 아들을 양자로 보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가정에서 아들을 낳게 되면 자기의 아들을 다시 찾아올 수 있습니다.

가인적인 아들딸이 찾아 세워져서 그들이 실체의 아들딸을 낳을 때부터 받들어 키우고 나중에는 시집 장가까지 보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이 전도 나가는 길에는 핍박이 없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핍박하는 자는 망하게 됩니다. 이제부터는 여러분이 심은 것은 여러분의 것으로 수확됩니다.

선생님은 입교한지 3년 이상 된 사람은 될 수 있는 대로 다 축복해 주려고 합니다. 그렇게 되지 못한 사람은 선생님도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가인적인 아들딸을 키우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밥을 굶더라도 밥을 해먹이고 밤을 새워서라도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선생님이 지금까지 여러분에게 대해준 것처럼 여러분도 그들을 위해서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필히 걸어야 할 제2차 7년노정

음력 8월말까지만 잘 넘기면, 공산당이 절대 못 나옵니다.

이번에 입교한 지 3년 이상 된 사람으로서 동원되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교회에 못 나옵니다.

이제 제2차 7년노정을 걷지 못하는 사람은 교회에 못 나옵니다. 정 나오고 싶으면 전도해 가지고, 그 믿음의 아들딸을 데리고 나와야 합니다.

전도하려면 자기가 원리 말씀을 몰라도 안 되고, 자기가 눈물 흘리지 않아도 안 되고, 정성을 들이지 않아도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반대했던 자들의 아들딸들에 대해서는 과거에 우리가 핍박받던 것의 3배 이상 혹독하게 그들을 대해도 괜찮습니다.

축복가정의 삼위기대는 한 달에서 3주일을 넘기지 말고 서로 연락해야 합니다. 삼위기대를 중심삼고 생활해야 합니다.

한 절기 동안은 삼위기대 중 한 가정이 책임을 맡습니다. 즉 한 가정씩 돌아가면서 책임자가 되어 세 가정의 생활을 주도해야 하고, 집을 짓더라도 세 가정이 같이 살 수 있도록 지어야 합니다. 그래서 삼위기대는 없어서는 안 됩니다.

네 개의 삼위기대가 합하여 한 조가 되고, 그 중 모범적인 사람이 조장이 됩니다. 또 4개 조가 합하여 한 팀이 됩니다.

예수님은 40대를 중심해 가지고 세 아들을 찾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7년 동안에 축복까지 해 줄 수 있어야 했습니다.

한 교회가 성립되려면 120명은 있어야 합니다.

한 교회에 360명이 되면 나누어야 합니다.

7년 동안에 120명을 전도하여 교회를 세워야 합니다.

문선명선생말씀선집 제20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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