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은 1966년 11월 6일, 이달 들어 첫 번째로 맞이하는 안식일, 아버지가 소망하는 새로운 날이옵니다. 아버지, 역사의 슬픔을 책임질 사람이 없사옵니다. 그 슬픔은 하늘의 슬픔이 아니라 땅의 슬픔인데도 땅 위의 인간들은 그 슬픔을 책임지려 하지 않았기에 아버님만이 책임지셔야 했습니다. 또 악을 대하여 싸워야 할 무리가 땅의 인간들임에도 불구하고, 그 싸움을 아버지 홀로 책임져 오신 것을 저희들은 아옵니다.
이제 아버지의 그 슬픔을 대신할 수 있고, 아버지가 싸워 나오시던 그 싸움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을 찾고 계시다는 것을 생각하고, 당신의 심정이 얼마나 애달프고 처량한가를 생각하게 될 때, 마음 졸이면서 아버지를 부르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아버지의 아들딸인 것을 자인하게 하시고, 하루를 일년으로, 일년을 10년 혹은 일생으로 생각하면서, 그 싸움 앞에 맹세의 실체로 나타나야 할 무리가 오늘 이 자리에 모여든 통일의 역군들인 것을 자인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니다.
그러기에 저희는 비참한 길을 찾아 나섰고, 슬픈 길을 따라왔습니다. 아버지가 그러하시기에, 아버지의 심정의 발자취를 따라가야 할 천륜의 인연을 가진 무리로서 아버지의 가신 곳을 따라가기 위해서, 아버지가 계신 곳에 살기 위해 아버지의 사정에 동참해야 하는 것이 필연적인 사실이란 것을 알았사옵니다. 아버지가 바라시는 이념의 터전을 저희들이 책임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고, 그것이 천륜의 원칙인 줄 알고 있사오니, 이 길을 가려 하는 저희들에게 강하고 담대한 마음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께서는 역사노정의 비참한 와중에서도 스스로 탄식할 수 없는 입장에 계셨다는 것을 저희들이 망각하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뿐만 아니라 역사가 생긴 이래 줄곧 아버지는 그러한 아버지이셨던 것을 저희들은 잘 아옵니다. 지난날 그런 사정에 처하셨어도 슬픈 마음을 억제하시던 아버지의 그 사정을 놓고 통탄할 줄 아는 한 개체, 그 심정을 알아주지 못하는 역사시대에 있어서 소원의 한 개체를 찾아 나오시던 아버지의 아픈 사정을 생각할 적마다, 이제 저희들은 그런 사정 앞에 아버지의 심정을 대신하여 나서겠다고 몸부림칠 수 있는 새로운 하나의 모임을 이루어 주신 것을 진심으로 감사 드리옵니다.
저희의 팔이 힘을 다하여 그 책임을 위해 노력해야 되겠사옵고, 저희의 발이 모든 기운을 다하여 움직여야 되겠사옵고, 저희의 모든 정성을 다 바쳐야 되겠사오며, 저희의 몸이 당신이 원하시는 목적 앞에 실체적인 제물로 바쳐져야 한다는 사실을 저희들이 망각하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남아진 십자가의 길이 아직까지 저희를 부르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이 새로운 안식일을 맞아 이 한달을 아버지 앞에 맡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희들은 또 몸부림쳐야만 되겠습니다. 저희들은 슬픈 길에 있어서 아버지를 불러야 되겠습니다. 절망의 첨단에서도 하늘을 향하여 정진하고 아버지의 심정을 사모할 수 있는 자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그 누가 뭐라 하더라도 당신과 저희의 인연은 끊을 수 없고, 또 그 누구의 사정이 아무리 딱하다 하더라도 당신의 사정을 능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스스로의 생활에 있어서 감사하는 마음이 넘쳐흐르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만족과 행복한 마음으로 당신을 부를 줄 아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은 흩어졌던 당신의 자녀들이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또한 이 자리에는 오지 못하였으나 이 청파동 교회를 사모하는 사람들도 있을 줄 알고 있습니다. 진심으로 사모하고, 진심으로 흠모하고, 이곳이 아주 귀하다고 느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 앞에 오늘 위로하여 주시옵소서. 생명의 말씀으로서 그들에게 새로운 인식과 새로운 자극을 일으키시옵소서. 그리하여 이 악한 세상과 싸울 수 있도록 힘의 원천을 폭발시켜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는 먼 자리에서 아버지를 부르거나 먼 자리에서 아버지와 의논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것이 통일교회 사상이요, 통일교회의 절개인 것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라 부를 때 그 아버지는 저희 마음 가운데서 대답하시는 아버지였고, 저희 생활에 방패가 되시며 또한 충고해 주시는 아버지인 것을 깨달을 줄 아는 자식들이 되어야겠사옵니다. 저희가 그러한 것을 망각하는 자리에 있거든, 이제 이 시간 아버지 앞에 마음을 졸여 가면서 다시 한번 회개하고, 불효자의 그 모습을 다시 한번 아버지 앞에 폭로시키는 이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역사의 흐름이 저희들로 인해 곡절의 인연을 맺게 하는 것이었으나, 그것이 아버님으로 하여금 기쁨의 씨를 뿌릴 수 있는 한 터전으로 삼아 주신 아버지의 노고 앞에 이 시간 다시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버님! 저희들이 작정하고 나선 7년노정 중 6년이 지나고 7년 고비를 맞이할 날이 목전에 다가왔사옵니다. 이런 위치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될 때, 저희의 이 자체로서는 아버지 앞에 설 수도 없고, 그 무엇을 거두어 드릴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깨달아야만 되겠사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긍휼히 여겨 주시어 저희의 마음과 몸과 생활에서 친구가 되고, 아버지가 되고, 보호자가 되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남아진 날들도 기쁨과 더불어 저희의 생활에 같이하여 주시옵고, 저희가 심정생활에 있어서 아버지와 더불어 동거할 수 있는 기쁨과 영광의 터전을 지니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면서, 만만세의 영광이 아버지와 더불어 길이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참부모의 성호 받들어 아뢰었사옵니다. 아멘.
<말 씀> 1960년도를 중심삼아 가지고 우리가 7년노정을 각오하고 나섰을 때의 우리의 입장과 오늘 이 6년노정을 지낸 현 단계의 우리의 입장을 비교해 보면, 상상할 수 없는 환경의 변화를 가져왔다는 것을 우리는 역력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한 것은 여러분 자신의 신앙생활을 통해서나 주위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실을 보아서 잘 체험되리라 봅니다. 그리고 지금 전국적으로 벌어지는 모든 사실을 두고 볼 때 우리의 사명이 얼마나 지중하며, 우리가 얼마나 중요한 책임을 짊어지고 있는가를 재인식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또한 제1차 7년노정이 끝난 후에는 제2차 7년노정을 출발해야 한다는 것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지금까지 우리 통일교회에서 세워 나온 이 7년노정을 통해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 충신이 되느냐 못 되느냐, 효자 효녀가 되느냐 못 되느냐 하는 중대한 문제가 결정된다는 것을 통일신도라면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다 아는 사실입니다. 효자나 충신은 즐기며 사는 뭇사람들과 같은 평범한 입장에서는 나올 수 없는 명칭입니다. 즉 평범한 환경에서는 참다운 충신과 참다운 효자가 나올 수 없으며, 지극히 어렵고 비참한 환경에서만이 그 이름이 크게 빛나고 역사에 남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난날의 역사를 미루어 보아 잘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이 7년노정을 걸어감에 있어서 여러분 모두는 오로지 본향 길을 찾아가야 할 것이요, 본향의 부모를 모셔야 할 것입니다. 또 본향의 부모를 모신 자로서 본향의 나라를 창건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사명을 절감하면서 가야 할 노정이 7년노정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인간 시조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본연의 국가를 잃어버렸고, 억천만세를 지내더라도 유린당할 수 없고 침범받을 수 없는 참다운 본향을 잃어버렸습니다. 이 본향의 세계를 사탄에게 유린당했는데 이 본향의 세계를 복귀하기 위한 것이 역사인 것입니다. 그 역사 과정에서 우리 선조들은 슬픔의 곡절 가운데, 혹은 통곡과 절망 가운데 사라져 갔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슬픔을 안고 타락의 후예로 태어난 우리는 역사를 회고해 볼 때, 이 시대에 있어서 이 악한 세상을 그냥 그대로 바라볼 수만은 없다는 것입니다. 역사를 이어 나온 후손으로서 책임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 통일신도들이 얼마나 지난날의 역사를 대신하는 자리에 섰고, 시대를 책임진 입장에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나갔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우리는 검토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새로운 결의와 새로운 맹세를 하지 않으면 안 될 단계에 처해 있다고 봅니다.
여러분이 믿고 있는 통일교회, 여러분이 알고 있는 통일교회, 혹은 우리 교회라 하고 우리 식구라 하고 있는 그 교회와 그 식구가 지금 이 땅에서 백 퍼센트 이상의 가치를 발휘하고 있느냐 할 때, 또 그런 명사요 그런 입장이냐 할 때, 그렇다고 하기에는 하나님도 주저하지 않을 수 없고, 선생님 자신도 주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자신들도 그렇다고 긍정할 수 없는 입장에 놓여 있습니다. 사실이 그렇게 되어 있다는 거예요. 그러기에 다시 한번 허리띠를 졸라매고 환경 가운데 모든 나쁜 여건을 제거시켜 버리고, 일편단심 마음을 가다듬어 결의를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이 시대적인 요구요, 이 민족 앞에 책임을 짊어진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1966년을 다시 한번 회고하여 볼 때, 이미 열 달이라는 기간이 지나갔습니다. 이 해에 우리는 4단계 배가운동을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섰습니다. 그 목표했던 우리의 계획은 무난히 돌파되리라 봅니다. 어떤 지역장과 지구장은 여기에 대해 너무 자신을 갖고 있고, 거두어지는 협회원의 수가 많은 것을 염려하는 무리도 있는데, 그것은 여러분들이 수고하고 여러분들이 잘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그럴 수 있는 시대에 접어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할 때마다 6년 동안의 우리의 수고가 얼마나 컸으며, 우리의 노고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보답할 수 있는 조건이 되어 있느냐는 것을 염려치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 지금까지의 우리의 수고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세상에 어떠한 개인이 일조일석에 패가망신하는 자리에 들어갔을 때, 이것을 재건하고 회복하기 위해서도 십년 혹은 생애를 거쳐도 안 되는 것을 보는데, 이 엄청난 역사적인 목적, 즉 섭리의 크나큰 문제를 걸어 놓고 볼 때, 우리들이 실천해 나왔다는 수고와 노고는 지극히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적은 것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오직 하늘만을 위하여 충성을 해야 되겠고, 하늘을 위한 일편단심의 마음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삼천리 방방곡곡에서 눈물을 흘리고 피땀을 흘린 사실, 자기 홀로 정성들인 것이 아니라, 민족을 대신하여 하늘을 부여안고, 세계 인류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하면서 호소하고 눈물을 흘리고 또한 핍박과 조롱받은 사실들은 씨가 되어, 그 뿌렸던 본인들은 사라졌을망정 그 결실은 반드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거두어지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수확의 시기를 맞이했습니다. 즉 환경이 우리들을 맞이할 수 있는 단계에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연적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뿌려 놓았으면 뿌린 그것을 우리 스스로 가꾸어야 합니다. 그런 책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각자가 과연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 있는 자리에서 가꾸어 왔느냐 할 때, 책임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자타를 막론하고 책임을 못한 것입니다. 이만한 결과, 이만한 환경의 변천, 이만한 세계정세를 만들어 나왔다는 사실, 이것은 우리들이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전적으로 책임지셨습니다. 그야말로 95퍼센트의 책임을 완결 지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이 종말시대에 하나님은 전 역사시대를 거쳐오면서 하신 역사 이상 절박한 책임감으로 역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나아가야 할 노정의 95퍼센트, 즉 하나님이 책임져야 할 백 퍼센트의 책임을 다했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합니다.
그런 하나님이 오늘 여러분을 다시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소망은 삼천만이 하나님을 맞이해서 따로 여러분을 부르지 않아도 되는 입장에 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하니 이 민족 가운데서 다시 누구를 불러 세워야만 합니다.
하나님 앞에 부르심을 입을 수 있는 사람, 즉 하나님의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은 하루 이틀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사람은 주림에 절고, 피에 절어 하나님의 심정에 동반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하는데, 이는 하루 이틀에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3, 4년 이상의 연한을 거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잘 아시면서도 수고한 무리들을 뒤에 세워 놓고, 다시 몰려드는 삼천만 민족 가운데서 그 책임을 지울 수 있는 책임자를 선발해야 하는 하나님의 딱한 사정을 알아야 됩니다. 즉 여러분의 고생의 상처가 어떻다는 것을 알고, 상처 입은 여러분의 모습이 어떻다는 것을 아시면서도 삼천만 민족을 향하여 외치는 무리로 다시 뒤를 돌아보고 상처 입은 아들딸, 즉 수고한 통일의 무리들을 내세워야 하는 하나님의 절박한 심정을 여러분들은 느끼고 알아야 합니다.
세상에서 지극히 귀한 것이 무엇이냐? 금은보화도 아니요, 세상의 명예나 권세도 아닙니다. 천지간에 제일 귀한 것이 무엇이냐 할 때, 그건 자기 자신,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이 귀하다는 보장을 무엇으로 할 것이냐 할 때는 답변을 못한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갖추어야 할 바는 갖추지 못하고도 마음으로는 만천하 앞에 자신을 최고의 가치적 존재로 인정시키고 싶어합니다. 그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오늘날 우리 민족을 위하고, 세계를 위하는 관념을 넘어서 가장 귀한 나 자신을 남들이 얼마나 귀하게 여기겠느냐 하는 것을 문제삼지 않으면 새로운 결의와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한의 아들딸로 태어난 여러분은 대한민국으로 하여금 천운과 더불어 하나님의 뜻 앞에 보조를 맞추게 해야 할 사명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 사명을 짊어지고 여러분이 선두에 서서 7년노정을 달음질쳐 온 것입니다. 그것이 누구를 위한 것이었나 하는 것을 생각할 때, 민족을 위한 것도 아니고, 세계를 위한 것도 아니고, 그 어떠한 상대적 존재를 위한 것도 아니고, 주체 되는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망각할 때가 많았습니다. 나 자신이 무한히 귀하고, 나 자신이 무한히 보배로운 것이기에 내 개체는 보배로워져야 합니다. 내 개체가 보배로워지기 위해서는 자기 스스로 환경을 넘어서야 합니다.
아무리 금은보화가 있다 하더라도 그 주인이 있어야 되는 것이고, 만민이 그 가치를 인정해야 되는 것이고, 그것을 흠모할 수 있는 환경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가치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귀한 나 자신을 두고 다시 한번 여러분들이 생각하지 앉으면 안 될 단계에 처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과거의 성인군자 혹은 위대한 선조들을 회상하고 있는데 그들을 중심삼아 가지고 생각하는 것보다는 역사적인 결실체요, 시대적인 선각자로 서야 할 우리 자신을 중심삼고 생각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의 가치를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은 만민이 공통으로 느끼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자체를 우리는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들은 얼마만한 가치의 내용을 지닌 나냐? 여러분은 이것을 생각해 보았어요? 내가 이 우주 가운데에 있어서 하나밖에 없는 보화가 되고, 진정한 보물이 되었다면, 그 보물은 하나님도 그리워할 것이요, 왔다 가신 예수님도 그리워할 것이요, 지금까지 왔다 간 수많은 천천만 성도, 역대에 제아무리 스스로를 세워 가지고 만역사 가운데 있어서 그 전통적인 사상을 남긴 그 누가 있다 하더라도 그도 역시 그리워할 것입니다.
지난날뿐만 아니라 현세의 이 만민도 그리워할 것입니다. 그 가치를 동경할 것입니다. 지금뿐만 아니라 미래도 그러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그럴 수 있는 보화가 자기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자리에서 심각히 생각했습니다. 그는 시대를 잃어버리고 자기가 있는 지상 위의 생활에서 전부 다 배반당하는 자리에 섰어도, 무엇을 중심삼고, 즉 어떻게 그런 환경에서 참을 수 있었는고? 그는 누구보다도 역사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자기의 가치를 알았고, 자기가 역사시대 앞에 지극히 귀한 보화, 보물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면 누구나, 어떤 이념을 동경하는 사람이라도 그런 나를 숭앙하지 않으면 안 될 그러한 무엇을 갖추었으므로, 그 무엇이 공격하더라도 공격당할 수 없는 절대적이고 보배로운 그 가치를 느꼈기 때문에 하나님이 모른다고 하는 자리에서도 자기 자체를 부정할 수 없었던 예수님이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현재의 시점에서 다시 한번 자신을 되돌아 볼 때, 과연 나 자신은 귀한 존재냐? 내가 얼마나 귀한 존재냐 할 때, 여러분 얼마나 귀해요? 한 사나이면 사나이를 두고 볼 때, 그 전후좌우에는 아내가 있고, 자식이 있고, 부모가 있고, 친척이 있습니다. 친척을 연결시켜 민족과 국가, 국가를 연결시켜 세계 가운데 동참하게 된 자신의 존재가 얼마나 귀한 존재이겠습니까?
지금까지 생활해 온 사람들은, 예를 들어 가정을 책임진 사람들은 가정으로서는 가치의 존재가 되어 있는지 모르지만 그 사회 앞에서는 가치의 존재가 못 되어 있다는 거예요. 그 시대 앞에서는 가치의 존재가 못 되었다는 거예요. 그 세계 앞에서는 아무런 가치의 존재도 못 되었다는 거예요. 여기에서 차이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떠했느냐? 그 시대에 있어서 부모와 형제 그리고 친척 앞에서는 가치적인 존재가 못 되었고, 그 사회와 그 시대에서는 다 부정당했지만, 후대로부터는 환영받을 수 있는 가치를 지녔습니다. 그것은 그때에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무리가 참되어서 그랬던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그 가치를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랬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정당했다고 하는 것은 긍정 받을 수 있는 인연을 내포한 부정입니다. 그러니 시대가 흘러감에 따라 부정한 것은 자연히 흘러가고, 참의 가치만 남아지는 것입니다. 한 시대에 부정을 당했던 예수님은 역사시대를 다시 점령할 수 있는 인연을 거쳐 나온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저마다 성공해서 세계적인 인물이 되어 보려고 합니다. 그렇게 되어서 뭘 하겠습니까? 자기 전문 분야에서는 세계적인 권위를 가졌다고 자랑하는데 그래서 뭘 하겠습니까? 그 분야에서는 만민으로부터 영광을 받을 수 있을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그 가치를 사방팔방에서 백퍼센트 인정할 수 있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세상의 외적인 것만 가지고는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선생님은 과거에 이러한 문제를 놓고 심각하게 생각해 봤습니다. 참다운 가치, 만민의 심정과 사랑을 독차지할 수 있는 참다운 가치는 무엇이냐? 참다운 보화라는 것은 구경만 하고 바라만 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만인이 그 속에 들어가 그 보화를 뒤집어쓰고, 그 보화 가운데 잠겨들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 보물이 뭐냐? 이 보물은 이 세상의 외적인, 물질적인 보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단 하나밖에 없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그런 관점에서 볼 때 도의 길이라는 것은 사랑을 표준삼고 맞아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실정을 가만히 바라보면 과연 여기에서 그러한 나의 가치를 세울 수 있겠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가만히 바라보면 이 세상 이대로는 안 됩니다. 이 시대는 최선의 자리에서 공의의 법도를 가지고 정의의 공판정에서 심판을 내릴 수 있는 절대자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악이 만연하여 선을 사로잡고 있는 시대요, 악한 사람이 선한 사람을 농락하는 이런 시대요, 우리가 백 퍼센트 참다운 가치를 지녔다 하더라도 그 가치를 드러낼 수 없는 시대입니다.
이러한 것을 중심삼고 볼 때 좋은 세상이냐, 나쁜 세상이냐 할 때 나쁜 세상입니다. 또 기쁜 세상이냐, 슬픈 세상이냐 할 때 슬픈 세상입니다. 또 행복한 세상이냐, 불행한 세상이냐 할 때 불행한 세상입니다. 불평불만이 가득찬 세상이지 감사와 만족과 행복 가운데 있는 세상이 아닙니다. 전부 다 반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렇듯 절망적인 현실에 반대되는 입장에서 이것을 점령할 수 있는 책임적인 권한을 이 지상에서 무엇으로 보충할 것이냐? 지금까지의 윤리, 도덕, 국가의 헌법, 어떤 국가의 체제를 가지고는 불가능합니다. 역사의 변천과 더불어 새로운 목적을 향해 역사는 발전되어 왔지만, 아직까지 이것을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현세에 이러한 결과가 나타난 것입니다.
무엇으로 이것을 정복하고, 무엇으로 이것을 점령할 것이냐? 이것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것을 격퇴시키고 박멸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모습을 가지고는 안 됩니다. 인간 자신이 스스로 지녀야 할 참된 본성, 보화 중에 보화인 그 자체를 지니고 있다면 세상에 만연되어 있는 불행의 조건에 걸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타락했기 때문에 자기의 본성의 가치를 잃어버렸고, 하나밖에 없는 참다운 귀한 본성의 자기 인격관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이것을 보충하여 나온 것이 종교입니다. 그래서 종교를 살펴보면 대개의 종교가 메시아사상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면 메시아란 어떠한 분이냐? 인간의 무한한 가치, 무한한 보화를 지닐 수 있는 그런 인격을 재현시켜 가지고 오시는 분입니다. 이분은 하늘땅을 주관하고, 하늘땅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비준과 측량의 위치를 재선정하고 나서 인간 세상에 오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메시아가 갖고 오는 것은 기쁜 것, 좋은 것, 행복한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슬픈 것, 나쁜 것, 불행한 것만이 있습니다. 좋은 것, 기쁜 것, 행복한 것, 감사하는 것, 만족한 것은 하늘의 것이고, 나쁜 것, 슬픈 것, 불행한 것, 불평불만 하는 것은 사탄의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 서 있는 나 자신이 지금 귀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사탄이 침범하는 거예요. 이런 자리에서 항상 주의하지 않고는 하늘 편에 설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지구상에 살고 있는 수많은 인류는 스스로 보화의 자기 자신을 찾는 것보다도, 보화 자체에 침범해 들어오는 사탄에 대한 방위 태세에 급급해야 하는 자기 자신임을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우선 이 환경적인 방위를 하라, 사회생활을 잘하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남들과 같이 잘 먹고, 잘 살면서 활동하라 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여건을 중심삼고 생활하면 전부 다 사탄세계에 가까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방위의 입장을 먼저 취해야 하기 때문에 인간에게 종교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교는 사탄세계에서 좋아하는 것은 끊어버리라는 것입니다. 사탄은 불행의 주인공이요, 불만의 왕자요, 불평의 대표자요, 나쁜 것의 주인이요, 슬픈 것의 주인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타락이 본래 어디서부터 나왔느냐? 불평불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불평불만, 불행해짐으로 나쁜 것이 되었고, 슬퍼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사탄이 인간을 침범해 들어오는 공식 경로입니다. 불평불만은 불행과 통하고, 불행은 슬픔과 통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다운 도는 이것을 밟아 치울 수 있는 내용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3․1운동 때 이북 정주에서 피해가 상당히 큰 만세사건이 일어났었습니다. 그때 주모자 되는 한 사람을 일본 관원들이 잡아다가 고문을 했는데, 그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죽어도 만세, 살아도 만세를 불렀습니다. 그리고는 빨리 죽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심하게 매를 맞고 고문을 당했는데도 불구하고 죽어도 만세, 살아도 만세를 부르니 고문을 해도 헛수고라고 하면서 풀어 주더라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종교의 본질은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을 방위하기 위한 제일 중요하고 긴급한 요건을 들라 하면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엔 만족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두 자리를 무난히 합격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메시아의 명칭을 안 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셨지만 부활의 권한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름을 얻고 난 그때부터는 좋은 것, 기쁜 세계, 새로운 역사적인 소원의 한 날, 새 아침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세상적으로 볼 때 예수님은 어떠했느냐? 불행한 자 중의 대표자요, 불만을 얘기하려면 누구보다도 불만을 토로할 수 있는 사람이요, 불평하려면 누구보다도 불평할 수 있는 사람이요, 나쁘다고 말한다면 누구보다 나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요, 슬프다면 누구보다도 슬퍼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세 번씩이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마 26 :39)라고 기도했습니다. 여기서 극복이라는 말이 성립되었습니다. 잃어버린 무한한 보배의 나를 찾고 싶은 여러분은 그런 보화의 가치가 인정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인정되는 입장에 서기 전에 무엇을 해야 하느냐? 하늘 편과 사탄 편의 완충지대와 같은 곳에 서 있는 여러분은 사방을 밀어 제낄 수 있는 권한을 갖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 권한을 갖지 못하면 자기 스스로의 가치를 지니지 못하게 되어 있는 것이 타락한 인생입니다. 이것을 밀어 제껴야 합니다.
그 경계선에서는 어떠한 조건 앞에서도 걸려 넘어져서는 안 됩니다. 행복에 관계되는 것은 누구나 다 좋아하는 것입니다. 어떤 병신이든 세상의 낙오자든 다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세상의 그 누구도 불행과 관계되는 것은 싫어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이 죄악 세상에 있는 나를 이동시키지 못하게 하는가? 그것은 불평불만입니다. 이런 불행의 여건이 이 사회를 감싸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망의 세계를 넘어가는 데 있어서 우리가 정복해야 할 하나의 필수적인 싸움터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종교인들은 싸워 나온 것입니다.
싸움이 아직까지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세계는 밝아오지 않는 것입니다. 이 싸움에 승리하여 승리의 왕자라고 자신하고 나서지 못했기 때문에, 이 악한 세상에 하나님이 바라시는 이념적인 생활 체제를 가져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는 지금 악의 역사를 연속해 오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통일교회에 들어온 사람을 식구라고 부르는데, 그 명칭이 얼마나 귀한 명칭입니까? 선생님이 예전에도 말했지만 식구란 어떠한 것입니까? 누구를 두고 식구라는 말을 세웠느냐? 이것은 여러분 자신을 중심삼고 한 말이 아닙니다. 만우주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천상천하에 유일한 가치요, 무한한 보배의 실체로 오셨던 하나님의 독생자, 즉 하나님이 사랑하셨던 예수님을 중심삼고 한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난다면 그분으로 나타날 수가 있는 것이요, 하나님의 승리의 길이 나타난다면 그분으로부터 나타나는 것이며, 천지의 출발 기준이 나타난다면 그것도 역시 그분으로 말미암아 나타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분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그 무엇도 나타날 수 없을 정도로 그분은 절대적인 분입니다.
그분을 중심삼아야 식구라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식구라는 말은 현재의 통일교회의 교인들을 중심삼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그러한 가치적인 인연, 그 인격적인 것을 중심삼고 식구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중심삼고 보면 나이 많은 사람은 예수의 부모요, 비슷한 사람들은 예수의 형님 혹은 동생들이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단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가치, 무한한 보화의 위치에 선 예수님을 중심삼고 말하는 것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그 당시에 있어서 그의 동생을 사랑할 수 있었느냐? 사랑하려야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그 슬픔은 천주의 슬픔입니다. 부자지간에 마음을 통할 수 있었던들, 사정을 통할 수 있었던들, 소원과 목적이 일치되었던들…. 그러나 그렇게 되지 못한 것이 예수님에게는 불행이었습니다. 그 불행에 사로잡히고 그 불평에 정복되면 예수님은….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을 넘어섰습니다.
그때에 사람들이 예수님의 형제가 되고, 부모가 되고, 친척의 입장에 섰어야 비로소 예수님 앞에서 식구의 인연을 맺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시대를 두고 볼 때, 오늘 여러분이 그와 같은 자리에 선다면 어떠하겠습니까? 참다운 가치는 예수님과 같은 가치의 입장에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확실히 알아야겠습니다.
여러분은 이제부터 사탄을 연상해 보세요. 누가 사탄이 어떤 존재냐고 물으면, 그저 사탄은 사탄이라고 대답하고, 그리고 사탄을 봤냐고 물으면, 있기는 있는데 잘 모르겠소라고 하는데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 사탄이 우리에게 어떻게 침범해 들어오느냐? 사탄이 침범해 들어오는 작전법은 무엇이냐? 하늘 뜻에 대해 불평하는 마음을 가질 때 사탄의 화살이 여러분에게 찾아온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통일교회 교인들 불평 많이 하지요? 눈을 까딱까딱 하고, 뚱딴지같은 말을 합니다.
자기 스스로의 가치는 자기 스스로 닦아 나가는 것이 긴급합니다. 세상이 뭐 어떻고 저떻고 하는데, 물론 그것도 염려해야 하지만, 그보다도 자기 스스로의 가치를 방어하고, 거기에서 승리한 후에 세상 구제의 방침을 세워야 합니다. 자기 스스로 경계선을 넘어서지 못하고 아무리 큰소리로 외쳐 보았자 그 자리에서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무리 승리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첫째 불평을 하지 않아야 됩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 해와가 타락한 제일 첫째 요인이 무엇입니까? 사탄이 그들에게 무엇을 가지고 유혹을 했습니까? 불평하는 것으로 했습니다. ‘이거 하나님이 따먹지 말라 하더냐?’ 하는 불평의 씨를 뿌렸습니다. 아담 해와는 불평의 화살에 침범당한 것입니다.
한국의 현재 실정을 보면 전부 가난하고 전부 생활이 어렵습니다. 그것은 천운이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비정상입니다. 배를 퉁퉁 내밀고 배를 치고 먹고 잘 사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부정한 일을 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불원한 장래에 망해요. 박살날 것입니다. 그래서 공산당이 한국에서 큰 방망이를 들고일어나는 것입니다.
지금 한국은 하나님의 사랑과 천륜의 법도를 세운 대표적인 기준을 보여 주기 위한 자리에 서 있다고 선생님은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 실정에 있어서 잘 살고, 배를 내밀고 만족하게 사는 사람들은 전부 비정상적입니다. 그러면 어떠한 것이 정상적이냐? 못 먹고, 걱정을 태산같이 하고, 오늘을 살았으면 내일 걱정이 가득 차야 합니다. 그것이 지극히 불행한 운명이니만큼 그것을 극복하게 되면 지극히 행복해집니다.
선생님은 예루살렘에 갔을 때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거기에 가보면 반은 사막지대입니다. 낙타 같은 것을 볼 때, 저 큰 체격에 배가 부르게 먹을 수나 있을까 싶을 정도로 풀이 없는 반 사막지대였습니다. 그것을 볼 때 한국은 복지 중의 복지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거기의 포도넝쿨은 한아름도 채 안 됩니다. 낮에는 태양열에 3분의 1이 말라버립니다. 그 잎이 너무 시들시들해져서 포도넝쿨인지 무슨 넝쿨인지 모를 정도입니다. 전부 다 다른 넝쿨 같습니다. 그런데 낮에 뜨거운 만큼 밤과 새벽에는 이슬이 많이 내린다는 것입니다. 그 이슬로 식물들이 다시 생기를 되찾게 됩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땅, 유대 땅에서 자라고 있는 식물들처럼 유대 백성들도 새벽을 기다리고, 그 새벽 고요한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 절규의 기도를 했던 민족이라는 것을 절절히 느꼈습니다.
또 그들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뭐가 있습니다. 감동 같은 것이…. 감동해서 부르는 노래가 최고의 절규이고, 심령이 담긴 기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 여기서부터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걸 생각할 때 대한민국은 아직까지 부유한 나라가 되지 않았는데 청년들이나 아주머니들이 입고 다니는 옷을 보면 세계 어느 민족보다 잘 입고 다니고 있습니다. 더욱이 영국 같은 나라와 비교해 보아도 3분의 2 이상이 상류층의 옷을 입고 다닙니다. 길거리에서 잘 입고 다니는 아주머니 뒤를 따라가 보면 거적으로 엮은 형편없는 집으로 들어간다는 말이 있지 않아요? 현실적인 환경으로 보면 도저히 즐길 수 없는데도 고차적이고, 여유 있는 생활을 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할 것이냐? 이것이 우리 민족에 대한 수수께끼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수천년 동안 못살고 그랬으면 짜부라지고 꼬부라졌을 텐데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한국에는 국민이 서로서로 동정해 주고 인정이 남아 있습니다. 세계 어느 민족에게도 찾아볼 수 없는 인정이 있습니다. 미국 같은데 가보면 부자지간에도 아버지의 것이 따로 있고 아들의 것이 따로 있습니다. 즉 아버지와 아들이 식사를 하더라도 아버지의 점심 값은 아버지가 내고, 아들의 점심 값은 아들이 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은 건달 중에서도 상건달이면서도 식당에 가게 되면 큰소리를 치면서 자기가 낸다고 하는 것입니다. 말일망정 그렇게 할 수 있는 민족입니다. 이것을 보고 선생님은 한민족은 품위가 있고 여유가 있는 민족이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그렇지만 현시점에서 선생님은 대한민국 사람들은 좀더 고생을 해야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말을 하면 삼천만 민족이 선생님을 욕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미 욕을 많이 먹었으니 더 욕을 먹어도 괜찮습니다. 삼천만 민족으로부터 말라 죽을 만큼 욕을 먹었어도 선생님은 거기서 끈기 있게 남아졌습니다. 지금 하늘은 세계 사람들이 전부 도망치는 자리에서도 끝까지 남아, 세계 만민이 가질 수 없는 새로운 이념을 중심삼고 적진을 함락시키기 위해 싸움터를 향하여 나설 수 있는 용장들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민족을 고생으로 연단하고, 시달림으로 연단하고, 굶주림으로 연단시켜서 세계의 어디를 가든지 살 수 있고, 행복을 느낄 수 있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이렇게 연단된 그들이 세계 도처에 흩어져 공세를 취하면 함락하지 못할 곳이 없을 것이라고 봅니다. 선생님은 한국의 맹호부대와 청룡부대를 좋아합니다. 이 맹호부대, 청룡부대의 군인들은 베트남에 가서 한 사람이 베트콩 열여섯 사람을 죽이지 않고는 죽는다는 생각도 안 한다는 것입니다.
아주머니들을 가만히 보면 대개 사탄 편에 가깝습니다. 아주머니들이 들으면 섭섭할 겁니다. 요전에 라디오에서 바가지를 긁는 것이 좋으니 안 좋으니 하면서 바가지 타령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것을 들을 때 여자들이 사탄의 끄나풀 중에 제일 가까운 거리에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집안이 잘 되고 안 되는 것은 여자에게 달려 있다고 합니다. 통일교회 여자들은 입도 통일되어야 하고, 귀도 통일되어야 하고, 눈도 통일되어야 하고 모든 게 다 통일되어야 합니다.
불평하는 자는 사탄의 제1족속입니다. 이렇게 해야 실감날 것입니다. 그래서 인상적인 말을 골라서 하는 겁니다. 불평하는 자는 무엇이라구요? 사탄의 제1족속, 불만을 품는 자는 제2족속이고, 불행한 자는 제3족속입니다. 불평, 불만, 불행, 이것을 다 사탄이 장악하고 있습니다. 불평하는 사람 앞에는 기쁨과 좋음, 만족과 행복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복귀섭리는 이 악한 세상에 메시아를 보내 악을 밟고 선의 세계를 이루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메시아를 어디에 보낼 것이냐? 지극히 어려운 곳에 보냅니다. 만일 하나님이 메시아를 로마의 왕자로 보냈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일시에 세계를 정복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역사의 출발을, 새로운 역사에 박차를 가하여 새 천지를 창건해야 할 메시아이기 때문에 그런 곳에 보낼 수 없습니다. 메시아는 악을 무찌르고, 악의 여건을 소화시키고, 그것을 능가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면 출발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메시아를 제일 어려운 곳에 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구유에서부터 출발했고 피난살이에서부터 출발했던 것입니다. 피난을 가서도 창칼이 넘나들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생사의 기로에서 사망의 권세를 밟고 올라설 수 있는, 승리의 왕자로 등장할 수 있는 날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그 날을 위해 하나님은 지극히 오랜 세월을 준비했습니다. 그런 날을 고대하면서 예수님을 바라보았지만 그 소원이 슬픔으로 끝나 버렸고, 역사가 비참하게 된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것을 알았기 때문에 선생님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가야 합니다. 어디로 갈 것이냐? 콧노래를 부르고 장단에 맞추어 춤추는 곳으로? 그래요? 소위 세상에서 말하는 행복, 만족, 감사가 있는 곳, 좋은 곳, 기쁜 곳? 혹은 청춘 시대에 마음대로 사는 것이 천국의 향락이 아니겠느냐 하는데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렇게 가르쳐야 되겠어요? 여기 젊은 사나이들 어때요? 그래야 되겠어요? 그러나 그런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역사에서는 그런 사람은 문제가 되지 않아요. 그런 무리가 역사를 창조할 수 없고, 새로운 시대를 창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가장 어려운 자리로 가야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자리를 찾아갈 때는 불행한 마음으로, 불행한 사람이 되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행복한 마음으로 행복한 사람이 되어서 가는 것입니다.
적군을 점령하게 될 때, 예를 들면 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가 싸워서 민주주의가 공산주의를 점령하게 될 때, 외적으로는 점령했더라도 완전히 점령한 것은 아닙니다. 민주주의 이념으로 행복의 요건을 제시하고 공산주의의 결점과 공산주의가 인류의 적이라는 것을 절감케 해야만 완전하게 점령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러한 세계를 갖기 위해서는 먼저 무엇을 승리해야 되었겠습니까? 행복을, 감사의 조건을 누렸어야 됩니다. 예수님 당시의 사회적인 환경이 어떠했습니까? 그때의 예수님의 입장에 들어가 한번 생각해 봅시다.
국가적으로 볼 때 이스라엘은 비운이 깃든 패망 국가, 즉 로마의 식민지로 되어 있는 국가였습니다. 종교적으로 볼 때 유대교는 새로운 이념을 품을 수 없는 종교였습니다. 그때의 교단 지도자들은 예수님과 의논할 수 있는 자리에 들어온 지도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사회의 풍조를 바라보게 될 때, 사회 환경에 있어서 천만사가 불평의 요건이었고, 불행의 여건이었습니다.
이러한 것을 느낄 수 있는 환경에서 예수님은 무엇을 중심삼고 몸부림을 쳤던고? 하늘을 부여잡고 역사 전시대의 하나님의 마음 가운데 깃들어 있는 행복의 요건을 찾기에 급급하였던 것을 알아야 합니다. 30년 준비 기간의 명상과 기도의 생활에서 예수님은 무엇을 추구했던가를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예수님은 남들이 좋다고 하는 자리는 보기도 싫어했고, 호강하는 환경을 떠나서 고요한 곳에 들어가 깊은 사색을 하며 본연의 이념을 찾기 위해서 애썼던 것입니다.
이런 자리에서도 그 마음에 느낀 것은 어떠한 환경에 부딪친다 하더라도 쓰러져서는 안 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강한 폭풍우가 아무리 휘몰아쳐 와도 그 폭풍우를 소화시킬 수 있는 그 자체가 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예수님은 철저히 각오를 했던 것입니다. 그 결의한 바가 역사를 움직일 수 있고, 시대를 뚫고 나갈 수 있고, 사악한 악의 요건을 밀어치울 수 있는 내적인 결의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메시아의 이름을 동반시켜 악한 사회에 내세우셨던 것입니다.
공적 3년노정을 출발할 수 있었던 동기가 호강스러운 여건 하에서 결의된 것이 아니라, 그 반대의 여건 하에서 결의된 것입니다. 즉 어떤 풍상이 휘몰아쳐 온다 하더라도 하나님과 내정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이것은 끊으려야 끊을 수 없다는 자리에서 결정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독생자라는 이름과 더불어 내세웠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그야말로 밤이나 낮이나 믿을 수 있는 자리에 섰기 때문에 악한 세상에 대비하여 예수님을 하늘 편의 대표적인 입장에 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선생님은 마태복음 26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를 섭섭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신 기도를 선생님은 기독교에서 해석하는 그런 뜻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기도한 것은 예수님이 자기 자신을 위하여 한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가는 십자가의 길을 수많은 인간이 따라올 때에 그와 같은 운명에 처할 것을 절감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예수님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이 그걸 발견하고 나서야 그러면 그렇지 하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예수님은 메시아 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선생님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않아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다 이루었다.’라고 기도하신 것은 무슨 기도인가? 세계를 정복했다는 기도이겠습니까? 선생님은 그것을 이렇게 생각합니다. 불평의 여건, 불만의 여건, 슬픔의 여건이 예수님을 휘몰아치더라도 원수들을 위해서 복을 빌어 주며, 저들의 죄를 용납해 주시옵소서라고 한 그때에 완전히 세계를 점령할 수 있는 하나의 승리의 자리가 결정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비로소 천지가 생겨난 후 만천하 앞에 처음 나타난 메시아가 아닐 수 없다는 거예요. 선생님은 그런 경지에서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덮어놓고 예수님을 믿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인간적으로 보면 보통 사람과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역사적인 배경도 갖추었지만 그보다는 예수님 자신이 내적인 조건을 갖추었다는 것입니다. 조건을 갖추고 나서 3년 공생애노정을 걸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3년 공생애노정은 무엇을 한 노정입니까? 그것은 모병운동을 한 노정입니다, 모병운동. 그것은 악의 무리를 격퇴시키기 위한 운동입니다. 생명을 결단해 가지고 악의 무리를 전부 다 정복하자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은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무슨 종교냐? 투쟁의 종교입니다. 투쟁이 끝난 다음에 사랑을 세우는 종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랑 되신 예수님이 오시더라도 처음부터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싸움이 끝나 가지고 신랑이 된 다음에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그때에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그전까지는 싸움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이루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끝날에 있어서 메시아, 즉 신랑 되신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무리들은 어떤 사람들이냐? 그것은 성경 말씀을 완성한 사람이라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 말씀을 완성한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예수님과 같은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가신 최고의 경지는 어떤 경지인가? 죽음에 임해서도 원수를 위해 기도하는 자리입니다. 그런 자리는 왜 필요한가? 사탄을 완전히 정복하기 위해서입니다. 사탄을 완전히 정복하려면 사탄이 참소할 수 있는 조건에 걸리지 말아야 하기 때문에 이러한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불평할 수 있는 최상의 자리, 불만할 수 있는 최상의 자리, 불행한 최상의 자리에서도 사탄 앞에 아무런 조건을 잡히지 않아야 됩니다. 예수님은 사탄에게 아무런 조건도 잡히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은 사탄과 완전히 무관한 입장에 서신 것입니다.
몇 해 동안 선생님이 여러분을 개척 활동을 보내 놓고 배포들을 가만히 보니 불평에 잠겨 있고, 불만을 품는 자리에 속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다 불행하다고 느낍니다. 그래서 처녀들은 ‘내 나이 서른 살이 가까워 오는데 행복이 무엇이냐?’라고 하지요? 노처녀를 중매해 준다고 하면 홀아비도 깜짝 놀란다는 거예요. 노처녀 앞에 총각이 나타날 리는 만무하지요.
통일교회 여자들 그런 것 듣게 되면 ‘아이고 7년노정을 어떻게 참나?’ 그럽니다. 그러다가 전도를 내보내면 ‘전도를 어떻게 하나? 7년이고, 70년이고 알게 뭐냐?’ 하다가 보따리를 싸 가지고 도망하는 무리들도 있습니다. 이렇게 불행을 느껴서 다 떠나는 겁니다. 통일교회를 믿다가 멀어진 사람들을 두고 보십시오. 통일교회를 믿다가 떨어져 나간 사람들은 점점 불행 가운데로 떨어집니다. 통일교회 원리는 마음으로 아무리 부정하려야 부정할 수 없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하는 일들마다 장벽에 부딪치게 됩니다.
통일교회에 다니면 부모나 아들딸로부터 미움을 받고 혹은 남편으로부터 매를 맞으면서도 좋아합니다. 반대 받으면서도 좋다는 거예요. 사랑하는 형제지간에도 동생이 통일교회를 다니면 형은 동생을 미워합니다. 그래서 길가에서 동생을 만날 경우 동생이 이쪽으로 가면 형은 저쪽으로 동생을 피해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누구나 선생님을 보면 피해 갑니다. 그렇게 미워하는 거예요. 그러나 선생님은 그게 좋다는 겁니다. 까닭 없이 미워하니 까닭 없이 좋을 수도 있어서….
선생님의 지금 모습을 보면 체격이 좋습니다. 선생님이 어떤 때 가만히 생각하면, 선생님은 원수들의 발길에 목도 밟혀 봤고, 머리도 밟혀 봤습니다. 손이나 발도 밟혀 봤습니다. 그렇지만 선생님은 불평을 안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것을 좋아하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불평할 수 있는 자리에서 불평하지 않아야 됩니다. 선생님은 우리의 원수를 갚기 전에는 딴 것을 할 수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원수 생각만 하면 자다가도 기가 뻗쳐오릅니다.
선생님은 성격이 매우 급해서 불의를 보면 도저히 참지 못합니다. 시골에서 더벅머리 나이 많은 총각 녀석들이 어린애들을 자기들의 꼬마로 만들어 가지고 이용하는 것을 보고 선생님은 배가 아파 잠을 못 잤습니다. 지금도 그렇다는 겁니다. 선생님은 대한민국에서 몰렸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에게 걸려드는 날이 있을 것입니다. 그날을 위해서 선생님은 준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마음으로 통일교회 들어온 것 감사해요, 안 해요? 「감사해요.」 얼마나 감사하는고? 감사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요. 머리끝만큼? 머리 끝만큼 감사하는 것도 감사하는 것이고, 사돈의 팔촌 생각하는 것만큼 감사하는 것도 감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얼마만큼 감사해요? 그 감사하는 것만큼 자기의 생명을 살린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또 죽고 사는 문제도 얼마만큼 감사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여러분, 사탄의 혈통을 받고 태어난 몸이 원수입니다. 그러니 이 몸은 백번 천번 죽어 마땅한 거예요. 눈이 잘못하면 그 눈을 자기 손으로 빼버리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효자 효녀는 부모의 그늘진 자리에 들어가 시중을 들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자리는 항상 어렵고 힘든 일이 떠나질 않는 자리입니다. 여러분은 이걸 알아야 됩니다.
내가 대한민국에 태어났지만 세계의 어느 누구한테도 지지 않습니다. 어느 나라에 나가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선생님은 미국이나 세계 천지를 돌아다니며 좋은 것들을 많이 보았는데, 뉴욕 같은 데 가서는 옛날에 로마가 불타듯이 불에 타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악당들은 그 바람에 다 죽어버릴 것 아닙니까? 뉴욕에는 102층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이 서 있는데 이것은 20세기 문화의 최고의 전당과 같이 숭배하는 곳입니다. 선생님은 그런 곳을 볼 때 불타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곳에 폭발이 벌어져서 하늘의 용사의 창끝 앞에 흉악한 죄악사가 끝이 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종교의 칼 앞에, 정의의 힘 앞에 세례를 받아 보라는 겁니다. 이것이 죄입니까?
모스크바의 공산당들이 자랑하며 내려오던 모든 문명을 전부 다 폭탄 장치해 깨쳐버리게 될 때, 훗날 인류들은 찬양할 것입니다. 사망과 죄악과 원수의 발자취는 후손들은 그 모양도 흉내도 보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이 집에 사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통일교회 오는 사람들은 통일교회가 세계적 기준에 걸맞는 간판이 필요한 때가 되었는데 왜 교회 하나 근사하게 짓지 않느냐고 합니다. 교회를 지으려면 최고로 근사하게 지어야 합니다. 망하려면 아예 망해 죽든가 아니면 완전히 흥해 가지고 천년만년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 통일교회 주의는 바로 그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지옥에 가서 통일하든가, 천상에 가서 통일을 하든가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옥도 사탄 편이 통일하면 안 되지만, 하나님 편 입장에서 통일하게 되면 그 지옥도 하나님 편이 되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요즈음 낚시질을 다니는데 고기를 잡으려고 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낚시질을 가면 고기 값보다 비용이 더 많이 듭니다. 선생님은 낚시질을 하면서 많은 것을 생각합니다. 이제 제2차 7년노정에 임함에 앞서 지난날을 회상해 봅니다. 너는 이렇게 뜻을 위해서 나왔고, 이런 학교를 다니면서 이렇게 했고, 뭐 이러 이러한 과정을 거쳤고, 또 감옥을 거치고, 몰림을 받으면서 통일교회를 이끌어 왔는데 오늘의 너는 어디에 머물러 있느냐? 그 시간까지 자화자찬을 함부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남이 높여주는 자리도 될 수 있는 대로 피하라는 것입니다.
파고다 공원에 제자들을 내보내어 8년 동안 전도를 시키면서도 통일교회 선생님이라는 사람은 그림자도 얼씬 않는다고 욕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사람이 잘 몰라서 그러는 것입니다. 그들이 수고의 대가로 먼저 영광의 자리에 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수고했으니 영광의 자리도 그들이 먼저 동참하는 것입니다. 물론 선생님이 해주어도 좋겠지만 그들 스스로 영광의 자리에 동참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것이 심정세계의 인연입니다. 그 세계에서는 형님이 동생을 지극히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되고,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요즈음에 선생님이 지구장들의 보고를 들은 바에 의하면 지구장들이 이제는 도의 인기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도지사가 표창을 주려고 하고, 내무부 장관이 표창을 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념적으로 보아서 우리를 놓쳐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옛날에는 선생님이 어디를 잠깐만이라도 나서게 되면, 통일교회 문 교주가 어디에 간다라고 전화를 하면서까지 감시를 하던 각 경찰국 정보과가 이제는 통일교회가 아니면 안 되겠다고 하는 단계로 바뀌었습니다. 세상에서 음지가 양지가 되고, 양지가 음지가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들은 점점 급변하는 세계 정세 하에 있어서, 더구나 반공체제를 강화해야 할 국가적인 위기에 봉착한 이런 시점에서 자기들의 생명과 재산이 아까운 줄 알고 까딱 잘못하면 자기들만 죽는 것이 아니라 종족, 친족까지 죽음을 당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북은 지금 전쟁 준비에 광분하고 있습니다. 휴전선에서도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도움이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이런 단계에 들어오니 경찰국장이나 정보과장이 통일교회 간부들이 회의하는 데 와서 인연을 맺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강원도나 경상북도가 지금 그렇게 되고 있습니다. 우리 통일교회는 밑에서부터 점점 올라가는 것입니다.
통일교회 뿌리는 세계를 다 삼켜도 순은 아주 조그마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추운 동삼삭에 잘못 나오다가는 추위에 얼어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봄철만 맞이해 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동삼삭과 같은 7년노정을 거쳐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맞고, 욕을 먹자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선생님의 말을 믿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아벨적인 책임을 할 수 있는 입장에 점점 가까워 오고 있습니다. 각도로 말하면 지금 45도를 지났다는 것입니다. 45도를 넘었으니 60도, 70도, 80도를 거쳐 90도까지 올라가자는 것입니다. 그 자리까지 가면 딴 곳으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옳지 않은 것을 다 정비해야 합니다. 요즈음 통일교회 지구장, 지역장들의 보고를 듣게 되면 상당한 반응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선생님이 계획했던 것이 되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문사 기자들이 각 기관에 들어가 취재활동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통일교회 전도사들도 기관에 출동해 가지고 귀한 말씀을 전파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말씀에 의해 폭발을 일으킬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 젊은 청년들 알겠습니까? 「예.」
선생님의 내력을 이야기하자면 사연이 많습니다. 선생님은 낙망할 수 있는 자리에서 낙망하지 않았고, 비굴해질 수 있는 자리에서도 비굴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선생님은 평양에서 겪었던 일이 생생합니다. 평양에서 쇠고랑을 차고 형무소로 가면서 식구들에게 잘 있으라며 손짓하던 그때의 일이 언제나 잊혀지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형무소에 들어갈 때 낙망과 절망하는 가운데 들어갔지만, 선생님은 오히려 희망을 가지고 들어갔습니다. 이것이 터져 나가는 날에 대한민국에 새로운 소망이 싹틀 것이며, 이것을 터뜨리는 사명을 함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은사가 한국 민족에게, 팔도강산에 깃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에게 북한은 시련의 땅이고 남한은 소망의 땅이었습니다. 이런 것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옥중에서 어떤 사람을 만날 것인지 알려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생님이 배고플 때 사람들을 동원하여 밥을 가져다 먹게 해 주셨고, 말을 하지 않아도 수많은 사람이 따르는 역사적인 산 실증을 보여 주셨기 때문에 선생님은 항상 자신만만했습니다.
통일교회의 신자라면 모두 다 그러한 입장에서 선생님과 같이 뜻길을 가야 합니다. 그래야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사명을 완수하고, 사탄 편을 점령하는 입장에 서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 뜻을 따라가는 입장에 있고, 천상의 모든 성도들도 이 뜻을 따라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체성을 갖고 능동적으로 걸어가기 때문에 여기서부터 새로운 출발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통일교회에 들어오면 기쁘다는 것입니다. 자기도 모르게 기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그런 것을 체험해 보았나요? 못 해보았어요? 통일교회에 들어올 때 희망에 벅차서 들어왔지요? 그런데 역사의 흐름 가운데 핀셋 끝도 닿을락 말락하는 초점상에 선 것과 같은 운세라면 운세, 인연이라면 인연 가운데 서 있는 자기를 볼 때, 이것이 거짓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을지 모릅니다. 나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부정하려야 부정할 수 없는 산 증거를 하늘이 제시해 주셨기 때문에 인정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저 덮어놓고 기쁘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하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에게 매를 맞고, 쫓겨나고, 다리가 부러지고, 머리에 상처를 입고서도 통일교회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재산을 어디에 소모했습니까? 그러한 가치를, 그러한 원천을 어디서 상실했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지금도 그것을 지니고 있습니까? 그런 것이 여러분의 깊은 심정에 항상 감돌며 깃들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되어 스스로 어떠한 환경이라도 뛰어넘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이라면 언제든지 승리할 수 있는 것이며, 그런 사람에게는 어떠한 시련도 문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선생님은 지금까지 복귀섭리를 책임지고 많은 수난과 역경을 겪어 나오면서도 하나님과의 처음 사랑을 잃지 않고 나왔습니다. 그 누가 뭐라 해도 그것은 부정할 수 없고, 내 생명이 천만번 찢겨지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부정할 수 없다고 하면서 나왔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아시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하나님을 보면 가슴이 메어집니다. 하나님의 사정을 생각하면 하늘 뜻을 반대하는 삼천만 민족이 미워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하다가도 하나님이 지금까지 복귀섭리를 해 나오시면서 참아 나오신 것을 생각 하면 부끄러운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며 선생님도 참고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냐? 아들을 위해서는 모든 사랑을 언제든지 주고 싶어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아들, 즉 인간이 통곡하기 전에 먼저 눈물을 흘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소원하시는 것은 자신을 위함이 아니요, 아들을 위하는 것, 인간을 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것을 알게 될 때 그런 하나님 앞에 자기의 불평, 불만을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내용을 우리 통일교회 식구들이 얼마나 알고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전부 다 껍데기만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이래서 선생님은 3년노정을 선포하면서 될 수 있으면 선생님이 설교를 안 하려고 했습니다. 대중 앞에 나타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여러분들 스스로 가기를 바랐습니다. 물론 많은 상처를 입었을 것입니다. 선생님이 지도를 했으면 그렇지 않았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올라왔으면 내려가야 되고, 내려왔으면 올라가야 합니다. 그래서 정녕 되지 않는다면 선생님이 들이쳐서라도 다시 끌고 나가야 되겠다고 생각을 합니다. 여러분, 그게 좋아요?
옛날에는 불우한 환경이었기에 참고 나왔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참지 않으면 옛날에는 그것이 사탄의 참소의 조건이 되고, 전부 원수의 표적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사회 환경이 그렇지 않습니다. 옛날에 문제시되던 그 이상도 사실 그대로 적용해야 할 입장입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선생님이 감아쥐고 가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어요.
그래서 기뻐하고, 감사하고, 만족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하늘 편의 생명체로 결정되어야 합니다. 생명체로 결정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시험되어야 합니다. 기계 공장에서 어떤 기계를 만드는 데 있어서도 양산체제에 들어가기 전에 그 기계가 발휘해야 할 성능의 배, 혹은 3배 이상 작동해 보는 겁니다. 그래서 이지러지고 찌그러지게 되면 다시 용광로에 들어갑니다.
그러면 사람 그 자체를 어떻게 시험하느냐? 통일교회 교인들 사이에서는 시험이 안 되는 겁니다. 통일교회 선생님은 좋은데 그 누가 보기 싫어서 통일교회 못 간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아주 물러가야 됩니다. 그런 사람은 전체 앞에 누를 끼치게 됩니다. 그런 사람이 물러가지 않을 때는 선생님이 쫓아낼 때가 옵니다.
그러면 어디에서 시험하느냐? 사탄세계에서 합니다. 그러므로 사탄세계에 가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사탄세계에 나섰습니다. 이렇게 사탄세계에 나섰는데 아군이 없습니다. 홀로 나섰습니다. 그야말로 홀로 복귀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그러한 길을 가는 것은 개인적인 사명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요, 민족적인 사명을 하기 위해서도 아니요, 천주사적인 사명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사명을 어깨에 짊어지고 홀로 가야 하는 선생님의 행로에는 동지가 필요한 것입니다. 생사를 같이 나눌 수 있는 동지도 필요하고 나를 위해서 희생하고 말이라도 같이 나눌 수 있는 동지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 걸 생각하면 통일교회 교인들이 아무리 잘못하고 있다 하더라도, 내가 그렇게 외로운 자리에서 하나의 친구와 하나의 동지를 요구할 때에, 먼 거리에서라도 부름에 대답할 수 있는 무리는 통일교회 무리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할 때 자기 스스로 부족했다는 것을 느낄 줄 안다면 뜻을 위한 길을 나섰는데 앉아만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청파동 교회가 얼마나 귀하고, 얼마나 보고 싶은 곳이라는 것은 떠나 봐야 알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설명을 듣는 것보다도 실지로 해 보아야 실감이 나는 겁니다. 설명을 들으면 인식할 수는 있으되 행동하기는 힘듭니다. 행동하여 느껴지는 자극은 설명을 들어 느껴지는 자극보다 큰 자극이 됨으로 말미암아 제2출발의 발동력으로 삼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옛날에는 식구 한 두 사람을 만나면 이 세상에서 둘도 없는 형제와 같이 여기고 밤을 새워 가면서 속삭이던 그런 내정적인 인연이 있었습니다. 그런 인연이 변하여 외적인 문제를 가지고 논의하는 오늘을 보게 되면 이는 지극히 불행한 것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선생님은 전통을 존중하고 천적인 자세를 갖추라는 얘기를 많이 해주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러지 못하는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 통일교회에 먼저 들어왔다는 사람들이 나중에 들어온 사람들보다 말을 더 안 듣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은 선생님 앞에 정성을 다하는 식구가 있으면 무섭습니다. 선생님이라고 하면서 자기의 모든 비밀을 직고한다고 시간을 내달라고 하면 가슴이 철렁합니다. 선생님은 그렇게 사는 사람입니다. 그건 왜 그러냐 하면 그가 그렇게 문의해 올 때 선생님이 진정한 스승으로서 지도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오냐 할 수 없는 입장에 서게 될 때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걱정이 들기 때문입니다. 가슴이 철렁합니다. 그래서 조용히 만나서 말씀드리겠다는 사람, 그런 사람을 선생님은 제일 무서워합니다.
선생님 자신도 그런데 요즈음 통일교회 교인들 보면 뻔뻔스러운 사람이 많습니다. 한 집에서 살고, 한 상에서 밥을 먹으면서 ‘내가 먼저 들어왔으니 이 반찬은 내가 갖다 먹어야 돼’ 하면서 끌어다가 먹는 사람이 있다면 선생님은 용서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행동을 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렇게 하겠다는 마음이라도 갖고 있다면 용서할 수 없습니다.
세계적인 인연을 거쳐가야 할 복귀노정은 만민이 공히 가야 할 노정입니다. 그 노정을 거쳐가는 데에는 여러분 혼자는 갈 수 없습니다. 거지같은 동료들도 필요한 것이요, 병신 같은 동료들도 필요한 것입니다. 만일 병신들이 모여 사는 나라가 있다면 그 나라를 지배할 수 있는 사람은 모든 것을 갖춘 온전한 사람, 즉 정상적인 사람은 안 됩니다. 병신의 나라는 병신이 이끌어 가야 합니다. 그래야 그들을 다스릴 수 있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비참한 세계를 요리하기 위해서는 비참, 비참, 비참한 과정을 통과해 가지고 그 세계를 요리해야 부작용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런 비참한 과정을 통과하고서야 정상적일 수 있는 것입니다.
참소의 조건과 탕감의 조건이 감도는 이 악한 세상에 있어서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정상적일 수 없습니다. 또한 참소를 받아야 하고 탕감의 조건을 제시해야 하기 때문에 자기가 그런 자리를 닦고 환경을 갖춘 입장의 자리에 서지 못하면 하늘이 쳐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뒤에 오는 사람들이 밀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대의 지도자들, 혹은 세계적인 책임을 짊어진 지도자들이 잘못하게 될 때 역사적인 비판을 받는 것은 정상적인 법도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생각을 한다면, 오늘 우리들이 가야 할 복귀의 길에 힘이 들고 불행의 여건이 많아도 낙망하지 말고 그 길을 뚫고 나가야 합니다. 그래야 천국을 세울 수 있습니다. 여러분, 알겠어요?
불평, 불만, 불행, 나쁜 것, 슬픈 것은 사탄의 것입니다. 하나님이라는 이름, 뭐 가상적이라 해도 좋습니다. 선도 가상적이라 해도 좋다는 것이에요. 어쨌든 그것은 진보적인 표준이라는 겁니다. 그 표준을 향해 나가는 데 있어서 그것이 하나님이나 인류가 좋아할 수 있는 목적이라면 그 목적 앞에서는 불평, 불만을 할 수가 없습니다. 만일 어떤 책임자가 불만의 대상이 되어 있다면 그것을 위해 반성하고, 그들을 위해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예수도 ‘하나님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할 수 있었기에 사람들을 구해 줄 수 있는 메시아가 된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오랜 역사를 지니고 왔지만 하나님과 일체를 이룬 심정적인 기준을 갖고 오신 예수님 앞에 완전히 정복당하여야 되고, 완전히 치료받아야 했습니다. 그 원칙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오늘 여러분은 스스로의 마음을 단장해야 합니다. 내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불평과 불만과 슬픔이 사탄으로부터 싹터 나오는 것이냐, 즉 사탄의 단체, 더 나아가서는 사탄세계를 위하는 것이냐, 그렇지 않으면 뜻을 더 염려하는 자리에서 나오는 것이냐?
예수님도 그 사회에 대해서 불평을 했습니다. 마태복음 23장을 보면 위선자들에 대해서 책망을 하는 것이 나오는데, 이것은 불평 중의 불평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이 그렇게 한 입장과 우리를 비교해 보아야 합니다. 어느 편의 입장에서 불평하느냐? 예수님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심정적으로 누구보다도 이스라엘 민족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공인받을 수 있는 천적인 기준을 세워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생님도 그런 입장에 있기 때문에 여러분 앞에 불평을 가끔 합니다. 다시 말하면 선생님은 스스로 해야 할 것을 했기 때문에 여러분 앞에 불평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하지 못하고서 불평을 한다면 양심의 가책을 받습니다. 양심에 가책을 받으면 천법에 걸린다는 것입니다. 천하가 그 무어라 해도 선생님은 양심의 가책을 받을 것이 없습니다. 복귀섭리를 해 나가는 데에 있어서 선생님이 여러분에게 어떠한 욕을 하더라도 양심의 가책을 받을 것이 없습니다.
선생님은 여러분을 위해서 기도했고, 여러분을 위해서 눈물을 흘렸고, 또 민족과 세계를 위해서 기도하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누구한테도 빚졌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안 되고 이상한 것이 있으면 해부해서 잘라버릴 것은 잘라버려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욕도 할 수 있는 것이요, 그런 것을 치료하기 위해서 제재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있어서는 이러한 조건이 성립됩니다.
여러분은 우선 여러분 자체를 방지해야 합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개체 개체가 신앙생활을 하며 찾아가야 할 복귀의 길은 멉니다. 길이 멀어요. 그러므로 복귀가 일대에 끝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복귀의 길에서는 자기의 일은 자기가 해야 하며, 각자가 메시아의 입장에서 책임을 다하여 승리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 승리는 무슨 승리? 만국을 대표 할 수 있는 승리라야 됩니다. 예수님의 승리는 만국을 대표할 수 있는 승리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승리를 상속 받을 수 있는 그 기준을 세울 것을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가만히 생각해 볼 때 행복합니까? 행복해요? 행복은 시간권 내에 포위되어 있는 것이 아니요, 어떠한 권한에 팔려 가는 것도 아니요, 어떤 제재를 받는 것도 아닙니다. 이런 것을 볼 때 근본 문제는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만족도 이와 마찬가지로 그 누가 간섭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있어서 제일의 문제는 자아를 단련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것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 기쁨을 돌려 드리고, 좋은 것을 돌려 드리고, 감사와 행복과 만족을 돌려 드리고, 스스로 생명력을 지녀야 합니다. 그리하여 불평불만과 대결하여 승리해야 합니다. 그럴 때는 자신이 하나님의 심정과 일체가 된 방어의 핵심체가 되어 침범당하지 않을 입장에 서 가지고 밀어붙여야 하는 것입니다.
또 우리는 한국의 불행 불평 불안과 대결해 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그것들을 제거하기 전에 먼저 불평불만을 하는 자들로부터 우리가 불평불만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까지 한국의 불평불만을 들어 왔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먼저 맞아왔다는 것입니다. 복귀섭리에서 선은 먼저 맞고 빼앗아 오는 작전을 써 왔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자고로 성인군자들은 그 시대에 있어서 먼저 맞았습니다. 그러나 후대에 와서는 그들이 맞은 것 이상, 그들이 빼앗겼던 것 이상 그들의 가치가 빛났습니다. 채찍이 크고 억울함이 많으면 그만큼 큰 승리를 거두는 깃입니다. 이와 같이 채찍을 맞고 억울함을 당하는 것은 승리를 거두는 데 큰 공헌을 하게 되고, 승리의 모체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딪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들이 역사적인 열매라고 말합니다, 역사적인 열매. 그러나 여러분은 지금까지의 생각, 지금까지의 생활, 지금까지의 그 모양 그대로 역사적인 열매가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여러분을 보면 전부 껍데기만 남아 있습니다. 자기만을 위해서 살던 자들이 어떻게 역사적인 열매가 될 수 있겠습니까? 남편이 한마디만 해도 그저 바가지를 긁습니다. 그러면서도 복 받을 생각을 합니다.
역사적인 열매가 되려고 한다면 여러분은 지금까지 생각해 온 그런 일상적인 생각의 수준을 벗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자기를 중심삼고 과거 현재를 탕감해야 합니다. 그것을 탕감해야 개성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실 때 먼저 물과 흙과 공기와 같은 모든 원소를 지어 놓으시고 사람을 지으신 것처럼 바탕이 정상적이어야 합니다. 바탕이 정상적이 아니면 정상적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선조로부터 흘러 내려온 죄와 자기가 지은 죄를 솔직히 전부 다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하는 데는 그 기간이 있습니다. 6개월에 되지 않으면 3년 혹은 7년에 해야 합니다. 7년 이상을 넘어가게 되면 21년 돌고 비를 돌아야 합니다. 그런 사람을 축복해 주면 축복을 받아 가지고 지지리 고생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탕감복귀노정에서 과거와 현재를 탕감해 놓아야 자기 시대를 맞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자들은 남편이 단 한마디만 해도 짜증을 부립니다. 그래 가지고는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또 자기의 아들딸 전부가 풍족하게 먹고 쓰고 해야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자기의 분한 것은 자기 아들딸이 뭐가 깨지거나 터지든가 해야 풀립니다. 그래야 마음을 바꾸고 돌아섭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여자들은 전부 다 자기만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직 나, 나, 나, 나, 남편도 자기를 위해서 존재하고, 그 어머니와 아버지도 자기를 위해서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여자들은 그렇게 되어 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요전에 부인 식구들을 수택리에 데려다가 신앙지도를 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어린애도 아닌 그들에게 기합을 주었습니다. 만약 기합을 줬다 해서 남편들이 몽둥이를 들고 항의할 것 같았으면 기합을 안 주었을 겁니다. 말을 해도 전부 다 자기를 중심삼고 말하는 그런 사람을 보면 선생님은 비린내가 나고 역겨움이 납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은 10년 아니라 몇십 년을 하나님 믿어도 헛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기를 중심삼고 생각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좋아하시겠습니까? 그래요? 자기를 중심삼고 ‘내가 잘 되어야 남도 잘 되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좋아하실 것 같아요? 하나님은 나는 못 되더라도 남은 잘 되어야 한다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나는 못 되더라도 세계는 잘 되어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주의입니다.
사탄 편과 천주주의 사상의 분기점, 분수령의 그 한 초점이 무엇이냐? 자기를 위주로 하느냐 남을 위주로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탄 편은 나를 위주로 세계를 지배하려는 세계관을 가진 편이고 천주주의는 세계에 자기를 포함시키려는 것입니다. 이렇게 방향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나보다는 식구를, 식구보다는 민족, 국가, 세계를 더 사랑해야 됩니다. 통일교회 교인을 사랑하는 것보다도 세상 사람들을 더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여러분들을 몽둥이로 후려갈겨서라도 세상을 위해 나가서 봉사하고 희생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생님의 마음입니다. 이렇게 하는 선생님이 잔인하지요? 이렇게 하는 것이 자기에게 맞지 않는 사람은 통일교회에 남아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자기를 희생시켜서 가정을 위해야 하고, 가정을 희생시켜서 사회를 위해야 합니다. 통일교회라는 단체를 희생시켜서라도 나라를 위해야 하고, 나라를 희생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세계를 위해야 합니다. 또 세계를 희생시켜서라도 천주를 위하여, 천주를 희생시켜서라도 하나님을 위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작은 것을 희생시켜서 더 큰 것을 위할 수 있는 그러한 이념의 공고한 터전을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교회생활을 해야 됩니다. 여러분의 등에는 모든 것이 짊어지워져 있습니다. 선생님이 여러분의 등에 짊어지워져 있고, 그다음에는 교회가 짊어지워져 있습니다. 또 대한민국이 짊어지워져 있고, 세계가 짊어지워져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그것을 실감해 보았습니까?
선생님이 이번에 40개국을 죽 돌아다니면서 제일 실감한 것이 그것입니다. 선생님이 대한민국을 위해 기도를 많이 했지만 세계를 위해서도 많이 했습니다. 선생님이 어떤 한 나라를 찾아가면 그 나라의 사람들은 선생님을 대한민국 사람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몇 달, 며칠, 몇 시간이나 가느냐? 그것이 제일 궁금했습니다. 역사적 배경과 문화적 배경이 다른 환경에서 살아본 사람을 어떻게 느낄 것인가? 선생님이 일본에 가면서 제일 염려한 것이 그것이었습니다. 선생님이 나는 한국 사람이고, 너희들은 일본 사람이라는 감정을 가지면 그들도 그런 감정을 가진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세계주의를 주장해도 세계주의에 대해 실감하지 못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바로 이런 문제에 대해서 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다른 곳에 가서 뭐 어떻게 부딪치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제일 원칙적인 것이 문제입니다.
일본에 가나, 미국에 가나, 어디를 가나 다른 나라라는 관념에서 벗어나야 됩니다. 또 그곳의 어느 집에 들어가더라도 다른 집이라는 관념에서 벗어나야 됩니다. 이걸 볼 때 통일교회의 식구라는 이름이 거룩한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나라에 대한 관념이 박힌 사람들은 자기들의 관념을 시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은 어디에 가나 고충을 느낍니다.
애급은 이스라엘의 민족적인 원수입니다. 거기 가면 이스라엘과는 확실히 다른 무엇을 느끼게 됩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천상천국을 논의하고, 천국 가기 위해 준비하는 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애급 민족은 그렇지 않습니다. 애급 민족은 지상을 최고로 생각을 하고 죽어서도 지상에서 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죽음의 도시라고도 하는 공동묘지에 가 보면 세상에서 백만장자로 살던 사람의 무덤은 굉장합니다. 땅속으로 20길, 30길 깊이 파고 크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아예 집을 짓고 가겠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것을 볼 때 이스라엘 민족과는 반대가 아니겠어요? 그곳에 가 보면 그런 차이가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내가 세계를 돌아보며 또 느낀 것은 사탄이 한국에 집중해 있다는 것입니다. 사탄의 총본부는 선생님의 말씀과 같이 틀림없이 한국에 있습니다. 선생님이 옛날 한국에서 처음 뜻을 출발할 때에는 합당치 않은 데 가서 밥 한술만 먹어도 설사가 나고, 물만 먹어도 설사가 나고, 딴 곳에서 잠을 자도 수많은 악령(惡靈)들과 싸움을 해야 했습니다. 그랬는데 외국에 나가 보니 어떤 곳을 가도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때는 세계적인 시대로 돌입했습니다. 여러분이 뜻을 중심삼고 나가는데 있어서 그런 감정이 필요합니다.
요전에 말레이시아 사람인 커팔 씽(Kirpal Singh) 씨가 선생님을 만나러 왔었습니다. 말레이시아에서 일부러 선생님을 만나러 온 것입니다. 그 사람과 선생님은 국제결혼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세계를 하나로 통일시킬 것인가? 또 심정교류의 터전을 어떻게 마련할 것이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일본의 총각 처녀들을 한국 사람과 국제결혼 시키려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한국의 테두리 내에서 꼬부리고 앉아 있는 그런 사람을 하나님은 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이념권 내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지길 원하십니다. 공산주의의 여자들은 노동자들과 결혼하는 것이 그들의 최고 희망입니다. 그러나 통일교회 아가씨들은 그 이상이 되어야 합니다.
지방으로 개척을 나가서 못 먹고, 못 입으며 고생을 하는 사람의 손을 보면 보기에 안 좋습니다. 얼어 터지고 엉망입니다. 찬방에서 자고, 찬물로 밥을 해먹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지요. 이 얼마나 처량합니까? 신수가 좋지 않고 막혀 버린 것같이 보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으로 막혀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으로 통일교회의 운명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개인 문제를 중심삼고 좋고 나쁘고, 행복과 불행을 논의할 그런 단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전부 자기를 중심하고 행복하려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기의 불행을 자초하며 민족의 불행을 막기 위해 나서야 되고, 민족의 불행을 자초하며 세계의 불행을 막기 위해 나설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각오 밑에서 나아가야 합니다. 세상과 반대의 길을 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아무리 힘들고 고생되더라도 이 길을 가다가 포기하지 말고 계속 이 길을 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최고의 기준까지 올라가야 되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제2차 7년노정을 가야겠습니다. 원리적으로 볼 때 여러분은 다시 가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있습니다. 여러분이 가려면 어떤 자리에 들어가야 되느냐? 옛날의 마음을 다시 회복해야 되겠습니다.
선생님이 평양에 있을 때 식구가 그리워서 하루 종일 문밖을 내다보면서 기다린 적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그런 마음이 필요합니다.
지금까지는 탕감적인 기준에 있어서 하늘 앞에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는 마음이 충천했지만 이제는 핍박이 아닌 환영받을 수 있는 자리에서 하늘 앞에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이 사무치지 않으면 불합격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탄이 ‘내가 참소할 때는 저들이 하늘 앞에 감사하고 열성을 부리더니 이제 자기의 때를 맞이하니 감사하지 않는구나.’ 하며 조롱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은 지금까지는 이 길을 개척하고 통일의 무리를 보호하기 위해 싸움의 노정을 닦아 나왔지만, 앞으로는 만민이 원하고, 만민이 다 환영하고, 혹은 삼천만 민족, 삼천리반도가 우리를 그리워하는 시대가 올 것인데, 그 시대에 가서 탕감시대에 충성하던 것처럼 어떻게 충성할 것이냐 하는 것을 제일 걱정하는 것입니다.
감옥에 들어가서 고문을 당하고 생사의 기로에서도 하늘 앞에 절개를 지키겠다고 몸부림쳤는데, 그런 충성의 마음을 평화시대, 자유로운 환경에서도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 감사하는 마음이 넘쳐흐르고, 기뻐하고 환영하는 그런 환경에서도 과연 하늘 앞에 뼛골에 사무치는 효성의 인연을 세울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선생님의 걱정입니다. 다른 것이 걱정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은 ‘아버지여, 제게 과거의 그런 십자가보다 더 크나큰 십자가를 짊어지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과거에 핍박의 화살이 선생님을 겨누었던 그런 자리에서 하나님 앞에 충성의 절개를 지킬 수 있었던 것처럼 이제 나를 환영하는 통일교회 신도들 앞에, 삼천만 민족 앞에, 세계 앞에서도 내가 몸부림치며 헤쳐 나갈 수 있는 하나의 십자가가 있었으면 하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머지않아 그런 시대가 올 것을 선생님 은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은 고생되는 일도 불행의 여건으로 생각지 않고 도리어 멋지게 승리하여 하나님 앞에 하나의 탕감조건을 세울 수 있는 하나님이 주신 좋은 선물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야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슬펐던 아버지를 모실 수 있는 효자요, 기쁜 시대가 와도 아버지 앞에 가까울 수 있는 효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다시 한번 이날을 기준삼아 여러분의 현재 위치가 어디에 있는가를 응시해 보아야 합니다. 아무리 생활이 어렵고 궁핍한 자리에 서 있더라도 내 모든 전체를 흘러가는 물결 따라 천만사에 함께 흘려보내자는 것입니다. 우리 통일교회가 가는 길은 삼천만 민족이 걸어와야 할 길입니다. 선생님이 지금까지 걸어온 길은 어떠한 계급의 사람이라도 따라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즈음 세상을 가만 보면 이병철 씨가 뭐 이러쿵저러쿵하더니 한비사건(韓肥事件)에 걸려 가지고 허덕이는 걸 볼 때 세상이 다 전시장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갖추어 가지고 승리자가 되어야 합니다. 승리자가 되면 기쁨도 내 것이요, 좋은 것도 내 것이요, 감사도 내 것이요, 만족도 내 것이요, 행복도 내 것입니다. 여러분, 행복이 누구의 것이에요? 만족이 누구의 것이에요? 감사가 누구의 것이에요? 좋은 것, 기쁜 것이 누구의 것이에요? 이런 것들은 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런 것을 왜 우리들은 그렇게 좋아했느냐? 하나님을 점령하기 위해서 입니다. 하나님을 점령해서는 무엇을 할 것이냐? 하나님의 이념의 동산에서 영생할 수 있는 생명을 복귀하자는 것입니다. 그 생명을 복귀해서는 무엇을 할 것이냐? 그 생명을 뒷받침하고 있는 단 하나밖에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점령하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여러분의 마음이 좋으면 무엇을 가지고 좋아요? 여러분은 지금 내 울타리 안에서 억지로 좋아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그 제한권 내에서 감사해야 하는 승리자하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그런 세계에서 감사할 수 있는 승리자가 있다면 우리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세상에서 좋고, 감사하고, 만족하고, 행복할 수 있는 승리자가 되기 위하여 나가는 도상에 있습니다. 만일 이러한 여건을 갖춘 승리자가 되면 이 승리자하고는 그 어떠한 것과 바꿀 수 있느냐? 바꿀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과도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승리자, 이 둘을 같이 가지면 가졌지 어느 한 편만 가질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 설 수 있는 승리자가 되면 하나님 앞에 하나밖에 없는 보화(寶貨)로 등장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감사와 기쁨과 행복의 요건이 누구의 것이냐?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은 누가 차지하느냐? 만민이 차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메시아의 사명을 완결했더라면 그런 승리자의 요건을 완결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명을 갖고 왔다가 이루지 못하고 갔으니 다시 와야 됩니다. 다시 와서는 무엇을 해야 되느냐? 그러한 행복의 요건을 중심삼고 자기만을 위할 것이 아니라 만민 앞에 나눠 주어야 합니다. 다시 오시는 주님은 세계 인류에게 이러한 요건들을 나눠 주기 위해서 오신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요건에 속해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인 동시에 세계의 것입니다.
이런 과정에 있어서 우리 통일교회 교인들은 새로운 목적을 위해서 사탄세계에 서로 나가려고 해야 합니다. 우리들은 여기서 세상의 모든 것을 초월해야 되겠습니다. 세상에서 먹고 입고 사는 그런 요건을 중심삼고는 갈 수 없습니다.
단체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먹고 입고 자는 것이 문제는 되지만 그런 것은 간단히 초월할 수 있습니다. 좋은 것이 있으면 전체 앞에 내놓고, 옷을 입어도 자신은 나쁜 것을 입고, 잠을 잘 때도 제일 나쁜 자리에서 자고, 그런 생활을 하게 되면 오래 안 가서 그 사람은 상좌에 올라가게 됩니다. 설령 외적인 면에서는 상좌에 못 올라갈지라도 내적인 면에서는 전부 상대방의 기준을 정복해 가지고 주인의 자리에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통일교회 교인들은 내가 좋아하는 것, 대중이 좋아하는 것을 모두 대중에게 주자는 것입니다. 안 갖겠다고 하더라도 주자는 것입니다. 전도할 때도 안 가겠다고, 절대로 싫다고 하더라도 그들을 데려다가 밥 한 그릇이라도 주자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나가자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전부 다 자기주의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모두 사탄을 닮아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세계도 내 것, 무엇도 내 것, 전부다 자기의 것이라고 합니다. 자기 스스로 모든 것이 자기의 것이라 행복하다고 느끼지만, 결국에는 사탄세계, 사망세계에서 패자의 서러움을 받는, 즉 역사의 종말시대에 있어서 심판을 받는 운명을 면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밥을 먹거나, 자나 깨나, 오나가나, 어디에 있을지라도 하나님을 위해서 산다는 관념을 가지고 나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게 되어 가지고 사탄세계를 정복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고 나서지 않으면 여러분의 갈 길은 막힙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현재의 심정을 각자가 분석해 보십시오. 분석해 보면 상습화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전도를 나가더라도 ‘그저 그렇고 그런거지, 뭐 신비로울 게 있나?’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전부 다 마음에 갈급함을 느껴야 하는데 그런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맨 처음에 전도를 나갈 때에는 어땠습니까? ‘아버지, 내 실력이 이렇고 이렇습니다. 한두 번 원리를 듣고서 어떻게 사람들을 하나님 편에 세울 수 있겠습니까?’ 하며 얼마나 조심스러웠고, 얼마나 마음을 졸였습니까? 이런 마음을 가졌을 때는 하나님이 같이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지방에서 통일교회가 발전한 것은 그래서입니다. 거기에서 봉사한 사람, 혹은 공헌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잘난 사람입니다. 전부 다 애달픈 심정으로 밤이나 낮이나 공분심을 가지고서 봉사했고 공헌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여러분은 그것을 거의 다 잃어버렸으므로 이것을 회복해야 되겠습니다. 잃어버렸기 때문에 복귀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큰 부자가 망하더라도 3년은 먹을 밑천이 있다는 말과 같이 여러분이 아주 큰 은혜를 받아 그 은혜가 아직 조금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밑천을 까먹는 놀음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여러분을 대하면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지금은 붙들고 동정하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선생님이 우스운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이번에 노친네들도 전부 지방에 내보냈는데, 여기 석온 씨에게 선생님이 집에 가 있으라고 했더니 자기 집이 없으니까 사위 집에 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위 집에 있으면서 ‘내가 뭘 해야 되겠나?’ 하는 생각을 하니 사위 집에 있는 것이 편한 것이 아니라 지옥과 같고 걱정이 태산 같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기도할 때 마다 ‘본부에 계시는 선생님이 나를 얼마나 그리워하겠나.’ (폭소) 하는 생각을 했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그 말을 듣고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평소에도 이 사람이 이층에 올라오면서도 ‘얼마나 선생님이 나를 보고 싶어하시겠나.’ 하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 얘기는 누가 점령할 수 없는 그의 철학입니다. 석온 씨의 얼굴을 보면, 오가리 모양으로 오글쪼글해져서 아주 서푼짜리 같습니다. 그렇게 생긴 것을 평안도에서는 ‘박주 할머니’ 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석온 씨는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아요. 그렇게 몇 번을 이야기했는데도 언제든지 선생님을 따라다니려 하고, 선생님이 있는데 오면 멀리 앉는 법이 없습니다. 그저 선생님 코앞에 앉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선생님이 석온 씨에게 ‘이거 기분 나쁘게 언제나 앞에 와 앉으려고 그래? 생긴 것도 지지리 못생겨 가지고.’ 그랬더니 이 말이 큰 충격이었던지 사흘 동안 금식을 하면서 담판기도를 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왜 저를 이렇게 못 생기게 했습니까? 내 마음은 선생님께 이 얼굴을 보이게 하지 않으면 안 되겠는데, 이런 얼굴을 보고 선생님이 얼마나 참기가 힘들었겠습니까? 이런 얼굴을 왜 만들었습니까?’ 하고 항의 기도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대답하시기를 ‘잘생겨도 내 형상, 못생겨도 내 형상이니 걱정하지 말라.’라고 하시더라는 것입니다. 그 후에 선생님에게 와서 ‘잘생겨도 하나님 형상, 못생겨도 하나님 형상’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 앞에 선생님이 꼼짝없이 당했습니나. 이런 원리적인 공세법 앞에서는 선생님도 꼼짝 못하는 것입니다.
원리에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고 되어 있으니 잘생겨도 하나님 형상, 못생겨도 하나님 형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못생겼다고 보기 싫어한다면 하나님의 반역자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꼼짝을 못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요전에 못생긴 사람은 오지 말라고 하고 선생님이 나가다가 쓱 보니 미안해서 후닥닥 숨은 사람도 있습니다. 외적으로는 그렇게 말하지만 내적으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 민경식 씨 왔어요? 민경식 씨? 「대전에 갔습니다.」 선생님은 민경식 씨만 보면 생각나는 것이 있습니다. 예전에 통일교회가 여자들 때문에 말썽이 나고 해서 본부교회에 와서 자는 여자들이 있으면 쫓아냈습니다. 그래서 여자들을 내쫓는데 민경식 씨는 이쪽 문으로 내쫓으면 저쪽 문으로 들어오고, 대문 밖으로 내쫓으면 밤 12시가 넘어서 담을 넘어 들어와 가지고 문이 가까운 구석에서 자는 것입니다. 그래야 선생님이 나오면 도망가기 쉽거든요. 마루 구석에 엎드려 가지고 하룻밤을 자는 것이 평생소원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워하는 사람을 만나 마주 앉으면 그 사람에게 이야기를 안 해주려야 안 해줄 수 없습니다. 밤을 새우면서 이야기해도 피곤하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통일교회 무리 가운데에서는 그런 사람을 찾아보기가 심히도 어렵습니다. 이른 봄에 태양 볕이 내리쬐면 쌓였던 눈이 녹아지는 그런 기분을 여러분은 알겠습니까?
아무리 어떻게 하더라도 변함이 없는 그런 사람은 하나님이 같이하는 사람입니다. 옆에 가서 붙들고 함께 살자고 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만민과 더불어 같이 살고 싶어하기 때문에 여러분도 그래야 된다는 것입니다. 나만이 아니라 전체가 같이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에게는 그런 마음이 점점 식어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제일 무서운 것입니다. 선생님이 제일 미워하는 것도 그것입니다.
선생님은아버지!하고 한마디만 하면 벌써 거기에서 하나님의 곡절과 엉클어진 인연을 느낄 수 있고, 세계를 움직일 수 있는 힘을 강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렇습니까? 아니면 장사꾼의 마음으로 그것을 다 팔아먹었습니까? 이런 사람들을 몰아 가지고 다시 간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지금 선생님은 느낍니다.
그러니 이제부터 7년노정이 끝날 때까지 그러한 것을 바꿔쳐야 되겠습니다. 다시 여러분의 심정에 불을 붙이는 환경을 어떻게 만드느냐 하는 것이 선생님의 제일 고민거리입니다.
첫째는 여러분이 그러한 환경에 다시 설 수 있는 마음의 바탕과 마음의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자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세상의 것을 가진 사람이 되어 가지고는 안 되며, 뜻 앞에 있어서는 세상의 것을 가지고 만족해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에서는 많은 것을 가지고 만족한 생활을 하기를 원하지만, 하나님 뜻 앞에 있어서는 그런 것을 가지고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 않다면 불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하여 이제 참다못해서 폭발이 되어 터져 나가야 예전의 상태로 회복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이런 마음도 없는 사람은 회복하기가 지극히 어렵습니다.
선생님이 감옥에 있을 때 하나님의 시련이 제일 많았습니다. 뜻이 있는 최전방에서, 가장 정성을 들이며 나아가야 할 그런 자리에서 하나님은 마음을 쏙 빼 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내가 왜 여기 앉아 있을까?하고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이렇게 저렇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것은 선생님 하고는 인연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 사실은 사실대로 흘러가 선생님은 선생님대로 남아 있고, 하나님은 하나님대로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일치가 되어야 할 텐데 그렇지 못할 때 선생님은 가장 몸부림쳤습니다.
어떤 때는 감옥에서 간수들이 선생님에게 욕을 하거나 말거나 상관하지 않고 엎드려서 기도를 일곱 시간, 여덟 시간 했습니다. 남의 마음을 복귀시키는 방법은 단 한 가지 하나님의 사랑밖에 없습니다.
선생님은 시련을 받으면서도 불평불만을 하지 않고 오히려 탕감복귀를 하시는 하나님을 위로해 드렸습니다. ‘탕감역사를 세워서 나아가야 할 당신의 입장이 얼마나 급하십니까?’ 하며 하나님을 위로했습니다. 그러면 그런 것이 하나님의 가슴에 와 박힌다는 것입니다.
고생을 해보면 하나님의 심정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옥중에 있는 나 같은 사람을 다시 몰아내야 할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실까를 생각하면 하나님의 그 처량함에 대해서 눈물이 흘러내립니다. 이럴 때 실감이 납니다. 이래 가지고 회생(回生)되는 것입니다. 회생의 길은 자신으로부터는 회생할 도리가 없으니, 하나님으로부터 회생시켜야 됩니다. 하나님의 중심을 붙들고 심정적인 감동을 어떻게 폭발시키느냐 하는 내 스스로의 체험이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새로운 사람을 전도하기 위해 울었고, 감옥에서 불쌍한 사람들, 굶주린 사람들을 붙들고 아버지 앞에 기도 드렸습니다. 이런 사연이 아직까지 남아 있으니 세계적인 것을 품고 나가고자 할 때 ‘아버지!’ 하면 통곡이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이런 하나님의 심정을 실감적으로 체휼해 보겠습니까? 여러분에게는 그럴 수 있는 재료가 없습니다. 재료가 있어요? 40일 전도하러 나갔다가도 욕먹기 싫어서 도망쳐 나오고, 또 배탈이 나서 병원 간다는 핑계를 대고 전도지를 뛰쳐나와요? 모진 매를 맞고 찬바람을 맞아 가면서 눈 위에 맨발로 쫓겨다닐지라도 이런 모든 것이 천륜을 회생(回生)시키는 재료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선생님은 더운밥을 밥상에 올려놓고 먹을 때마다 옛날에 감옥에 있을 때 일을 생각하면서 지금까지 감사한 마음을 갖고 생활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을 지방에 전도 보내 욕을 먹게 하고, 때로는 선생님이 책망도 하며, 스승의 입장에서 여러분을 모진 핍박을 받는 개척의 자리로 냉정하게 내몰았던 것은 그런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소유하고, 자아를 주관할 수 있는 사람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목적은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여러분들을 두고 볼 때 뜻을 대신하여 그럴 수 있는 주체성을 가지고 책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한 인격을 갖기 위해서 여러분은 다시 한번 회생해야 되겠습니다. 그렇지 않고는 여러분이 승리자가 될 수 없습니다. 전부가 걸리게 됩니다.
우리를 위해 예수님이 돌아가셨고, 예수님이 팔려 가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동참하지 못했으니, 예수님의 사정을 몰랐던 베드로 혹은 12사도들을 밟고 올라설 수 있는 심정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선생님은 지금까지 40여 평생을 몸부림치며 탕감복귀노정을 걸어 나온 것입니다.
우리는 복귀의 길을 가야 됩니다. 아담가정을 복귀하고, 노아가정을 복귀하고, 아브라함, 이삭, 야곱가정을 복귀하고, 예수님을 중심삼은 이념의 세계까지 복귀해야 됩니다. 이 길은 먼 길입니다. 6천년 기나긴 세월을 가지고도 해결되지 않았던 이 역사적인 문제를 부여안고 가는 길입니다. 아담가정을 대신해서 가야 되고, 노아가정을 대신해서 가야 되고, 아브라함, 이삭, 야곱가정을 대신해서 가야 되고, 모세와 예수님을 대신해서 가야 됩니다. 대신하여 가는 데는 타락한 아담보다 더 나아야 됩니다. 노아보다도 아브라함보다도 더 나아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중심삼고 볼 때, 예수님의 소망이 완결되는 날이 끝날이니 메시아의 뜻을 이룰 수 있는 끝날의 시대적인 환경권 내에 처해 있는 우리는 예수님보다 나아야 됩니다. 예수님은 반대하는 민족을 바라보고 눈물을 머금고 기도하는 입장에 서 있었지만 우리는 기뻐하는 민족을 바라보며 기도할 수 있는 입장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보다 더 나아야 됩니다. 인격적으로 예수님보다 더 나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환경적으로 예수님보다 더 나은 민주주의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즉 국가에서 헌법으로 언론이나 결사의 자유가 보장된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보다 더 나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때의 환경보다 지금의 환경을 낫게 만들어 준 이유를 여러분들은 알아야 합니다.
세계를 배후에 놓고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 효성을 다하는 효자가 되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세계를 대신해서 하나님 앞에 효성을 다해야 하나님의 효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대한민국만 위하는 사람을 효자라고 하며 좋아하시겠습니까? 그러므로 통일교회 교인들은 세계적 기준에서 하나님 앞에 효성을 다하는 효자가 되어야 합니다. 통일교회의 청년은 세계를 활보할 수 있는 아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역사적인 사조 앞에 우리의 손짓 발짓이 동기가 되어서 세계가 문제가 되어야 됩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요즈음 점점 그것을 이룰 수 있는 때가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선전하기 위해서 선생님은 연구합니다. 이것을 선전하기 위해서는 우선 재료가 있어야 합니다. 세계 만민이 이것을 얼마나 고대했으며, 하나님은 지금까지 이것을 얼마나 고대했겠습니까? 오늘날 이와 같은 무리, 이와 같은 족속, 이와 같은 혈족을 세워 가지고 만민 앞에 추앙을 받고 만민 앞에 자랑할 수 있는 그때를 하나님은 얼마나 바라셨겠습니까? 그런 자리에서 우리집, 우리 본향, 우리나라, 우리 세계가 지극히 아름답다 하면서 하나님 앞에 효성을 할 그때가 바로 지금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보다 나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예수님보다 나아야 된다는 걸 오해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보다 나은 환경을 갖춘 우리는 예수님이 다하지 못한 말을 할 수 있고, 예수님이 맛보지 못했던 것을 맛볼 수 있고, 예수님이 입지 못했던 것을 입을 수 있고, 예수님이 하지 못한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보다 외적으로 나은 환경에서 여러분은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원리를 배워서 알겠지만 4천년 만에 오신 예수님을 세례 요한이 믿고 따라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책임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에 복귀의 노정을 다시 가야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세례 요한이 잘못한 것, 모세가 잘못한 것, 아브라함이 잘못한 것, 노아가 잘못한 것, 아담이 잘못한 것을 청산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걸 다 청산해 놓고 아담 본연의 기준까지 가야 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잘 알아야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기준에 이르기까지 복귀의 길을 가야 됩니다. 그 길을 가는 데는 세상이 우리를 용납하고, 세상이 우리를 환영할 수 있는 환경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세상으로부터 언제나 공격을 받고 상처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 환경을 벗어나려면 어떠한 수단과 방법을 써 가지고도 안 됩니다. 진실된 심정,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가야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만을 사랑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할 때 하나님은 어떻게 대답하시느냐? ‘나를 사랑하기 전에 하늘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고, 땅을 사랑하라’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합격된 자만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저 자기가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또 불평불만을 다 늘어놓고서 ‘하나님!’ 하면 하나님은 ‘난 네가 싫어!’라고 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런 사람은 천국에 못갑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자격자는 세계를 사랑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은 이 땅 위에서 만민을 찾기 위해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축복받은 이스라엘을 중심하고 세계뿐만 아니라 천주까지 복귀하기 위해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원수들까지도 위해 기도하셨던 예수님, 만민을 사랑했다는 기준을 세우셨기에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는 말씀을 남기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그래야 됩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사탄을 굴복시킨 후에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최후의 목표는 사탄을 굴복시켜 놓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가 하나님을 사랑했다는 것은 사탄과 싸우는 탕감권 내에서 사랑한 것이지 사탄을 굴복시킨 자리에서 진짜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개인이 이기면 가정이 남고, 가정이 이기면 민족이 남고, 민족이 이기면 국가, 국가가 이기면 세계가 남기 때문에 통일교회가 정성을 들이는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지방에 내려가 7년노정에 몸 바쳐 일하고, 희생을 다하여 하나님이 동정할 수 있는 자리에 서면 하나님은 그 사람을 어떻게 할 것이냐? ‘너는 대한의 아들딸이야. 대한민국을 위해서 정성을 다했으니 거기서 쉬어라’ 하실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그 자리에서 또 내쫓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앞으로 7년노정이 끝나면 하나님은 또 나를 몰아 어디로 보내실 것이냐? 아마 미국 같은 데 보내실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까지 한국을 중심삼고 싸워 나왔으니 앞으로 그곳에서 싸우라고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통일교회 선생님을 따르고 있는 지극히 가까운 제자들은 어디로 보낼 것이냐? 세계 각국으로 보낼 것입니다. 여러분은 세계 각국에 하나님의 전통과 사상을 가지고 가서 그것을 그대로 뿌려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을 하나님이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런 자리에 설 수 있는 심정을 가져야 합니다. 선생님은 개인이 아닌 한국의 운세를 어떻게 몰아갈 것이냐를 생각하니 마음이 착잡합니다.
여러분은 하늘을 사랑하고, 땅을 사랑해야 합니다. 선생님은 언제나 어머니에게 말합니다. 남편을 사랑하는 것도 좋지만 그것보다도 하나님을 중심하고 땅을 사랑하고, 인류를 사랑한 후에 하나님 앞에서 남편을 사랑하라고. 그것이 복귀의 공식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가정에 얽매여 살고 있는 사람, 지금까지의 형식이나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은 천국에 못 간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입장에 있는 사람에게는 자기 마음의 어떠한 폭발적인 혁명을 일으킬 수 있는 천적인 선물이 필요합니다. 그 천적인 선물, 마음에 폭발적인 혁명을 일으킬 수 있고 자극시킬 수 있는 곳이 어디냐? 통일교회입니다. 통일교회에 그 동기와 원천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천사람 만사람이 전부 다 다르지 않고 같습니다.
사람의 감정은 같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감정은 같습니다. 부모의 인연을 중심삼은 형제의 심정은 같습니다. 같은 목적을 향하여 나가는 그 모습, 모양은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변태적인 현상이 아니라 정상적인 현상입니다. 시대성을 초월하고 있습니다. 과거와 현재가 다르지 않습니다. 이러한 여러분 자체가 되어 있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아직까지 여러분은 복귀의 길을 가는 데 있어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정지해 있거나 후퇴한 자리에 서 있다는 것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이건 심각한 일입니다.
우리 통일교회 교인들이 역사적인 열매가 되기 위해서는 여러분 가운데 노아가 있어야 되겠고, 아브라함이 있어야 되겠고, 모세가 있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 전체가 모세가 되기를 원하고, 여러분 전체가 예수님 대신자 되기를 원하고 있지만, 그 가운데 한 사람도 대신해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되어 봤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갈대아우르를 떠나 내가 지시한 땅으로 가라’ 하고 내몰았을 때, 아브라함이 가정을 버리고 정든 고향을 떠날 수 있었던 것과 같이 그렇게 할 수 있는 통일교회 교인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노아에게 120년 기나긴 세월을 두고 방주를 지으라고 했을 때, 그것은 인간적인 범위에서 인정할 수 없고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범위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그런 자리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그에 순종하면서 120년간 절대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고이 품으면서 싸워 나왔던 노아였습니다. 모세와 예수님도 그러한 입장에서 싸워 나왔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어때요?
여러분은 노아나 아브라함, 혹은 역사시대의 그 어느 누구라도 여러분의 그 심정 기준 앞에서는 머리 숙일 수밖에 없는 그런 사람이 되어 봤습니까? 그렇게 되어야 할 여러분이 어떻게 해서 그렇게 쩨쩨하게 되어 버렸습니까? 누가 그렇게 만들었어요? 통일교회 문 선생은 그렇게 안 만들었어요.
통일교회가 지향해 나가는 이념은 그런 것이 아니에요. 그런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지도 않습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그러한 허물을 벗겨 버리고 다시 한번 불을 질러야 하는데, 이것을 선생님이 해야 할 것이냐? 아니면 여러분 자신들이 자발적으로 해야 할 것이냐? 하나님은 자기가 자발적으로 하는 것을 원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제2차 7년노정을 개척하여 나가기 위해서는 3년, 4년의 단계를 거쳐 넘어가야 합니다. 세계사적인 운세에서는 2차가 언제나 생사를 결정하는 판결을 지어 나왔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2수를 중심삼고 판결지어야 하니 제2차 7년노정에 민족적인 운명을 걸어 놓고 몸부림쳐야 합니다. 이것을 하기 위해서는 작전을 세워야 하는데 그런 문제를 중심삼고 의논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자기의 현재의 모든 것을 버리고 다시 한번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1966년은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다가오는 12일에 있을 자녀의 날은 1차 7년노정에 있어서 마지막 자녀의 날입니다. 이걸 생각할 때 하나님 앞에 그 자녀의 책임을 다하여 진정으로 아버지를 봉양할 수 있는 효자가 어디 있습니까? 통일의 식구들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마음속에 파고 들어가 거기에서 하나님이 기억할 수 있고, 하나님이 참다운 아들딸이라고 칭찬할 수 있는 무리가 있습니까? 여러분이 상례적인, 습관적인 형태는 갖추었을지 모르지만 참다운 심정을 갖추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다시는 올 수 없는 이 7년노정은 다 흘러가 버렸습니다.
제1차 7년노정에 있어서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 무엇을 남기고 갈 것이냐? 지치고 초라한 모습을 가지고 그냥 넘어갈 것이냐? 아니면 무엇을 가지고 넘어갈 것이냐?
6수는 사탄세계의 수입니다. 숫자적으로 말하면 1966년과 제1차 7년노정의 6년째, 이렇게 6수가 세 개로 채워지는 것은 우연의 일치로만 볼 수 없습니다. 이 사탄수의 대표적인 수를 영광의 수로 복귀할 수 있는 길은 없을 것이냐? 어떤 때는 선생님이 자녀의 날을 세운 것에 대해서 서글프게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제1차 7년노정이 지나는 이 마당에서 자기 자신과 하나님과의 그 인연이 어떻게 되어 있느냐? 심각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여러분은 재정비하지 않고서는 재출발할 수 없는 것이 현재의 실정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것을 뼈 살에 사무치도록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것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여러분의 힘으로는 해결을 못합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끌어 폭발적인 체험의 과정을 통해야만 해결할 수 있습니다.
지난날의 뼈에 사무친 것이 너무나 진해서 부정하려야 부정할 수 없고 잊어버리려야 잊어버릴 수 없는 너무나 엄연한 사실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접어둘 수 없는 역사적이고 시대적인 모든 사정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부여안고 눈물 흘리며 가야할 남은 길 앞에 지난날의 모든 조건을 제물로 바치기 전에는 정비할 수 없습니다. 그냥 이대로 모든 것이 될 것 같아요? 이것을 다시 한번 정비하도록 해야 합니다. 7년노정은 선생님이 가는 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될 수 있으면 선생님에게는 조용한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선생님이 40여 년 살아온 생애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면 원수들을 사랑한 생애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언제까지나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이제는 ‘원수를 갚아라’ 할 때가 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때에 대비하여 나타나야 할 선생님의 인격은 어떠해야 하느냐? 이것이 복잡한 문제입니다. 선생님은 삼천리반도에 살고 있는 이 민족을 살리기 위해 남한 각지에 있는 명승지를 찾아가 ‘아버지여, 이 강산 이 민족에게 하나님의 인연을 맺어 주소서.’ 하고 기도했습니다.
이제 이런 길을 선생님이 계획을 했으니 이것이 1차에 안 되면 2차에, 2차에 안 되면 3차까지 해서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루어야 합니다. 만일 3차까지 해서 안 되면 전부 다 죽는 것입니다. 1차, 2차, 3차에서도 안 되면 선생님을 따라다니는 사람들과 전부 다 한 구덩이에서 죽든가 멸하든가 할 각오입니다.
선생님이 쫓김받던 서러운 때에, 홀로 삼천만 민족과 삼천리반도를 바라보면서 눈물지으며 아버지 앞에 기도한 것이 불원한 장래에 이루어지면 그 날에 다시 한번 이 명승지를 찾아오겠다고 하나님 앞에 기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선생님과 같이 한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들을 보면 그저 ‘오늘 못하면 내일 하지.’ 하는 식입니다.
복귀의 길에서는 모든 것을 대표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됩니다. 결론은 이것입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아담가정에서는 아담이 되어서 아담이 서러워했던 심정을 느끼고, 또 아담을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슬픈 심정을 느껴야 합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아담이 타락하여 에덴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쫓겨나면서 몸부림쳤던 형용할 수 없는 애달픈 그 심정을 여러분이 체험하고, 또 아담을 쫓아내야 했던 하나님의 심정을 체험해야 합니다. 그런 아담의 입장을 복귀해 들어가고, 더 나아가시는 그런 하나님의 입장을 복귀해 들어가야 합니다.
아담의 처량한 심정을 체휼해야 하는 것이 정상적이요, 아담을 내쫓았던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해야 하는 것이 정상적이로되, 이것이 안 되거든 세상의 핍박을 가지고라도 심정세계와 인연 맺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것은 비단이불을 덮고 자는 데서는 불가능합니다. 찬서리가 내리는 자리, 처량한 자리, 부대끼는 자리에서만이 가능합니다. 그것이 복귀의 철학입니다. 선생님이 감옥에 있을 때 선생님을 조롱하던 사람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당하던 자리에서 ‘아버지! 당신의 억울함이 얼마나 크셨습니까?’ 하고 자신도 모르게 큰소리를 치며 아버지를 불렀던 그 시간과 그때를 선생님은 아직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도 그런 인연이 연결되어 후손들에게 남아질 것을 생각할 때, 원수에게 복수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 원수를 굴복시켜 승리하여야 합니다. 이렇게 하여 아버지의 안식처를 마련하고 그 아버지를 모시는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것들을 생각할 때에 여러분은 심정적인 면에서 아직까지 미달되어 있다는 것을 느껴야 됩니다.
여러분 자신이 아담을 대신하기 위해서는 아담의 발자취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노아는 120년을 정성들였지만 자식을 잘못 가져 천추의 한을 남겼습니다. 1600년을 공들인 천적인 공(功)이 일시에 무너질 줄 꿈엔들 생각했겠어요? 그때 노아의 심정과, 그런 자리를 대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생각해 보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려면 여러분이 편안히 살고 있는 자리에서는 안 됩니다. 선생님은 학생시대에 자취생활을 했는데 불도 안 땐 냉방에서 생활을 했습니다. 또 더운물보다는 찬물을 쓰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생활을 했습니다. 이런 생활 속에서 하나님이 기억할 수 있는 심정의 인연만을 그리면서 나왔습니다. 통일교회 교인들은 그런 생활을 해야 합니다.
만일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갈대아우르를 떠나라고 말씀하시기 전에 아브라함이 먼저 하나님이 원하시는 땅으로 가겠다고 나섰다면 그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셨겠습니까? 노아 역시 마찬가지로 120년 동안 방주를 지어야 할 입장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받기 전에 그 일을 했더라면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셨겠습니까?
야곱, 모세, 전부 다 하나님이 쫓아내서 비정상적인 환경에서 체험시켜 가지고 복귀의 심정을 닦아 나왔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민족도 역시 애급에서 쫓아내 가지고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게 했습니다. 다들 시킴받는 자리에서 모든 일을 해 나왔습니다.
하나님은 복귀섭리를 하는 데 있어서 이렇게 민족적인 이동을 시켜 가지고 하는 것을 원하시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자발적으로 하기를 바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삼천만 민족이 천륜의 뜻을 받들게 하기 위해서는 세계를 대신하여 여러분이 자진해서 대이동을 해야 합니다.
‘나는 그 민족을 대표하여 그 나라 사람이 되겠다. 그 강토에 뼈를 묻겠다.’고 하며 나설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런 면에서 볼 때 전부 다 불합격자입니다, 불합격자.
여러분은 아담보다도 나아야 되고, 노아보다도 나아야 되고, 아브라함, 이삭, 야곱보다도 나아야 됩니다. 또 모세보다도 나아야 되고, 세례 요한보다도 나아야 됩니다. 더 나아가서는 예수님보다도 나아야 됩니다. 하나님이 6천년 수고하여 거둔 열매가 역사시대에 깎여 뭉그러져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그러지 못하고 있으니, 그것은 새 시대에 있어서 책임을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열매는 어떻게 되어야 할 것인가? 어떠한 자리에 있어서도 밀려나지 않는 그런 가치로 인정받아야 됩니다. 그런 가치로 인정받게 하려니 하나님은 통일교회의 7년노정을 중심삼아 가지고 세계적인 사탄을 총규합해 일시에 친다는 것입니다. 이 기간에 있어서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효성과 충성의 인연을 가지고 나서야 할 것인데도 불구하고 여러분은 제멋대로 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지금까지 하나님 앞에 효성과 충성을 다하기 위해 몸부림쳐 나왔습니다. 심정의 자리에서 절대 빚지지 않으려고 자제하고 자숙하면서 개척해 나왔습니다. 그 면에서 선생님은 여러분보다 더 생각해 나왔습니다. 여러분들은 그 이상이 되어야 합니다. 한국 민족을 대표하고 나아가야 하는 우리의 갈 길 앞에는 연단과 시련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복귀의 길은 여러분이 어차피 가야 될 길입니다. 아담 대신, 노아 대신 여러분이 가야 합니다. 승리한 아담의 자리까지 가기 위해서는 역사적인 모든 탕감의 조건 앞에서 해방을 받아야 됩니다. 그리고 그 해방을 받는 동시에 절대로 사탄의 참소를 받지 않는 기준까지 넘어서야 됩니다. 그렇지 않고는 승리의 자리에 갈 수 없습니다.
복귀는 심정을 중심삼고 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기도할 때 통일교회가 잘 되기를 바라는 기도도 물론 해야 하지만, 그것보다는 복귀의 길을 어떻게 넘어서느냐 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아담이 실수했던 이 인연을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이스라엘 민족을 중심삼고 복귀해 나왔으나 전부 다 실패했습니다. 실패한 이것을 어떻게 복귀할 것인가? 치마를 입은 아주머니라고 해서 집안만을 위해서 살아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이 밥을 먹는 것도 자식을 기르는 것도 전부 다 내일의 민족을 위해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7년노정이 끝나게 되면 그때 선생님은 교회를 새로 마련하여 이 교회에서 이사할 계획입니다. 지금까지는 그런 자리를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어떤 계통적인 인연을 결정지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7년이란 기간을 두고 분명히 자리를 잡아 나온 것입니다. 선생님이 자리를 잡으면 통일교회를 따르는 사람도 그때 원칙적으로 자리를 잡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은 그때까지는 동정심도 없는 사람이고, 무자비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머니까지도 옥중 문전에서 쫓아 버린 사람입니다. 감옥에 있는 자식을 대해 눈물 흘린 어머니를 냉대한 사람이에요. 세상적으로 보면 선생님은 불효자입니다. 이 땅에 아무개의 아들로 태어나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그 아들을 어머니는 다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 기준 앞에 너무나 초라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이 그렇게 한 것은 어머니의 아들로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쫓아버린 것입니다.
선생님의 처자도 그렇게 했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자식을 남의 손을 거쳐서 기른 사람입니다. 선생님이 돈이 없어서 그랬겠어요? 하나님의 복귀노정에 있어서는 자기 것을 먼저 사랑하게 안 되어 있습니다. 사탄 세계를 사랑하고 나서야 자기 것을 사랑하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는 부모, 사랑하는 처자를 버려서라도 세상의 악한 원수의 새끼들을 사랑했다는 조건을 세워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자기 자식을 사랑해야 사탄이 참소하지 못합니다.
사랑의 천국을 꿈꾸시는 하나님께서 사탄의 참소권을 벗어난 천국을 만들려니 그런 일을 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통일교회도 지상천국 이념을 갖고 나왔기 때문에 선생님이 그런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원리대로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원리에 부합될 때까지, 제2차 7년노정에서도 합격되지 못하면 3차까지 연장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복귀노정에 있어서 그 아들딸이 가야 할 길을 모세와 야곱을 통하여 보여 주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선생님은 여러분이 갈 길을 닦아주면서 가야 됩니다. 알겠어요? 7년노정은 선생님의 생활이 어떻다는 것과 선생님이 지금까지 여러분을 대하여 나온 그 모든 내적 심정이 어떻다는 것을 보여 주고, 후대 만민이 갈 수 있는 길을 닦아 놓는 것입니다.
이것이 상징적인 요소요, 형상적인 요소요, 실체적인 요소입니다. 상징 형상 실체가 갈라지는 것이 아니라 상징 형상 실체가 한 몸을 이루어 가지고 역사적인 전철을 붙안고 뒤넘이치는 이 길을 개척해 나옴으로 말미암아 그 법도적인 조건을 만세에 수많은 타락권 내의 후손들 앞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용서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리입니다. 세상의 어떤 권세를 가졌다고 해서 적용 안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선생님은 지금까지 축복가정에 대해서 축복은 해줬지만 무관심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매해 36가정 총회를 열어서 이런 것을 다 수습해 가려고 합니다. 그래 가지고 축복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망각한 자식들에게 깨우쳐 주려고 합니다.
축복가정들은 원리적인 숫자의 터전을 중심삼아 선생님이 없더라도 앞으로 통일 종족을 편성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생명록(生命錄)에 기록하는 일이 벌어졌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하나님 앞에 그런 걸 반영시켜 가지고 하나님 앞에 ‘지상에 있어서 내 생애의 노정 위에 싸움의 결실로써 아버지 앞에 드리오니 나를 이겨서라도 이들을 넘겨주시옵소서.’ 하고 보고 드리는 것입니다. 복귀의 원리원칙에 입각해서 하나님 앞에 제시해야 할 책임이 남아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때가 다 되었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해주는 거예요. 알겠어요? 그러니까 여러분은 지금부터 갈 길이 대단히 바쁠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밥을 먹기보다는 눈물이 앞서야 되겠고, 옷을 입기보다도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수치를 회개하는 것이 앞서야 합니다. 그래서 역사시대를 지나 부활의 실체로서 아버지 앞에 승리의 제사장으로서 번제를 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번제는 무엇으로 드려야 되느냐? 송아지가 아니요, 자식이 아니요,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식을 제물로 드리려 하였는데 하나님이 원통한 것이 바로 그것이라는 거예요. 하나님은 그의 자식을 통해서 복귀섭리역사를 하려고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 자신을 통해서 복귀섭리역사를 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복귀역사를 하지 못하신 것이 하나님의 한입니다. 또 아담에게 있어서도 아담 자신을 통해서 복귀역사를 못하신 것이 한입니다. 하나님은 할 수 없이 자식을 통해서 복귀역사를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귀시대에 있어서는 자기의 자식이나 송아지를 세워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 자신이 투쟁해 나가야 되겠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복귀의 고개를 못 넘는 거예요. 아시겠죠? 「예.」 죽더라도 그걸 모른다고 하면 안 됩니다. 나 자신이 생명을 다해야 됩니다. 맞아도 내가 맞고, 천대받아도 내가 받고, 감옥에 가도 내가 가야 됩니다. 슬픈 일은 모두 나 자신이 책임져야 합니다. 나 자신이 스스로 번제의 실체가 되어야 됩니다.
후대의 후손들이 그의 조상을 번제 드리지 못한 것이 타락이 아닙니다. 아담이 번제의 실체가 되어 승리의 왕자가 못된 것이 타락입니다. 그래서 슬프게도 양 새끼가 죽어가고 자식들이 죽어갔습니다. 우리들은 자신이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후대의 후손들에게는 절대 그런 일이 없기를 바라야 합니다. 선생님은 그런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다 그래야 됩니다.
나 자신이 7년노정에서 가야 할 길, 내가 그 심정에 있어서 하나님 앞에 해야 할 책임을 내 스스로 지고 가야 합니다. 편하고 좋은 환경을 바랄 것이 아니라 눈물로써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 길을 가야 됩니다. 이 세계에서 그런 길을 걸어가야만 복귀의 길을 완전히 갈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이 세상을 정복한다는 것을 여러분은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시겠지요? 「예.」
선생님이 여러분에게 한 가지 묻겠습니다. 제2차 7년노정을 자신 있게 가겠다고 결심한 사람 손 들어 봐요. 내리세요. 이제 때가 되었습니다. 그 길을 가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재산은 여러분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삼천만 민족의 재산으로 기부할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 가정은 여러분의 가족만을 위하는 가정이 아니라 삼천만 민중을 위하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또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 자신의 몸이 아니요, 삼천만 민중을 대신하여 번제에 올라가야 할 몸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길을 가기 위해서는 먼저 물질에 대한 것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선생님도 그랬습니다.
역사노정에 있어서 제물의 과정을 볼 때 하나님은 만물을 제일 먼저 쳤고, 그 다음에는 자식을 쳤으며, 그리고 그 다음에는 당사자를 쳤습니다. 이것이 오늘 통일교회에 직결되어서 일시에 탕감해야 하기 때문에 세계적인 복귀역사노정에 있어서 상징제물인 만물을 대신할 수 있는 가정의 모든 전부를 하나님 앞에 바쳐야 합니다. 그래서 내 자식들을 희생의 자리까지 내세워 못 먹고 떨고 불쌍한 처지에 놓이게 한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하나님으로부터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는 권고를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아들을 사탄세계에 보내어 죽음의 길로 내몰아 원수의 창칼에 피를 흘리게 하면서까지 복귀섭리를 해 나오셨습니다. 그러므로 복귀노정을 가기 위해서 여러분들은 자기 자신까지 바쳐야 하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7년노정을 넘어가기 위해서는 못 할 일이 없습니다. 똥 구루마를 끌라고 하면 끌 것입니다.
여러분은 제물의 길을 가야 되고, 속죄의 길을 가야 됩니다. 이 길은 그 어떤 사람이라 하더라도 가야 됩니다. 재림주님도 가야 되는 길입니다. 사탄도 인정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통일교회가 그런 길을 가는 곳입니다. 나 하나 잘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나라를 살리자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나라만 살리고 나라만을 잘 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 나라가 잘됨으로 말미암아 이 나라를 통하여 세계를 통일시키려는 것입니다.
지금 한국이 미국의 원조를 받고 있는 것을 기뻐하고 있지만 선생님은 기뻐하지 않습니다. 원조를 받는다는 것은 우리가 굴복된 민족임을 인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통일교회가 지금 이 사회를 살리고자 하고 있는데, 이 사회로부터 먼저 빚을 져서는 망하는 것입니다. 이 사회를 살리기 위해서는 우리가 빚을 지워야 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예.」
여러분은 상징, 형상, 실체제물을 드렸습니까? 지금까지는 상징, 형상 제물 시대였습니다. 이것이 선생님을 위주로 해서 되어져 왔기 때문에 세계가 선생님을 안 따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죽을 때는 선생님이 필요합니다. 삼천만 민족이 죽을 때는 통일교회 문 선생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또 세계 만민이 통일교회 문 선생을 필요로 할 것입니다. 이것이 절대 철칙입니다. 예수님이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 24 :35)고 하였듯이 천지는 다 없어질지언정 이 말만은 남아질 것입니다.
여러분은 선생님의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사다리를 만들어 놓고 제자들을 축복해 거기에 대한 법궤를 다 만들어 놓았습니다. 여러분 몸뚱이만 갖다 놓고 불만 사르면 됩니다. 누가 불살라야 되느냐? 여러분의 어머니 아버지, 여러분의 자식들이 불살라야 됩니다. 이것이 탕감복귀입니다.
지금까지는 부모를 구하기 위해서 자식이 희생되었습니다. 하나님을 구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죽었습니다. 다 거꿀잡이였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끝날에 돌아설 때는 어머니가 자식에게 경배해야 되고, 아버지가 자식에게 경배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섭리적으로 자식이 제물의 입장에 섰기 때문에 자식은 부모 앞에 아벨입니다. 알겠어요? 이런 원칙을 세워 나가야 할 길에서 뭐 이렇고 저렇고 변명을 해서는 안 됩니다.
이제 얼마 후면 1967년이 됩니다. 그때를 위해서 지금부터 준비해야 합니다. 이 7년노정이 지나고 나서부터는 여러분 마음대로 선생님의 집에 못 들어올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마음대로 못 들어오는 그런 때가 올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길을 출발할 때 마음으로 결의한 가운데 아버지 앞에 손들고 맹세한 것으로 압니다. ‘내가 통일교회 들어와서 뭘 했나?’ 하고 다시 한번 반성해야 하겠습니다. 아시겠어요? 「예.」
이 7년노정이 끝난 다음에는 다시 출발해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한국을 위해서 싸워 왔지만 그때에는 세계를 위해서 싸워야 됩니다. 이래서 선생님은 명년 3월이 다 가기 전에 일본, 미국을 다녀오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때에 선생님은 일본 식구나 미국 식구들을 한번 시험해 보려고 합니다. 그 사람들은 7년노정의 혜택권 내에 들어와 있지 않기 때문에 이 사람들을 어떻게 혜택권 내에 들어오게 할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개인 문답을 하여 그 사람들의 심정을 분석해 가지고 특권을 주기 위한 준비를 선생님이 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한국에서 선생님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은 한국의 사나이와 아낙네들이 세계만방에 흩어져 가지고 세계를 위해서 눈물을 흘리며 뜻을 펼쳐 나가기를 원합니다. 한국 사람들을 선교사로 세계에 내보낼 수 있다면 선생님은 기쁠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 선교사로 보낼 수 있는 사람이 몇 명 있어요?
선생님은 세계 40개국에 120개 성지를 택하였습니다. 성지를 택한 그 40나라를 대표하여 국가적인 기준을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을 선교사로 보내야 하는데 누구를 보낼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가고 싶은 사람 손들어 봐요. 여러분은 그런 것도 다 결심하고 있어야 합니다. 선교사로 가서 전도를 잘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거지 노릇을 하더라도 그 나라 그 민족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고 피땀을 흘렸다는 그 재료만 남기라는 것입니다. 말을 못하면 벙어리가 되라는 것입니다. 말을 해서 뭘 합니까? 말 몰라서 전도 못하겠습니까? 벙어리가 되어도 좋다는 것입니다.
인류를 사랑하는 마음, 그 민족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자기의 있는 정성을 다하고, 벙어리 노릇을 하면서라도 울며불며 몸부림치는 그것이 귀한 것입니다. 그래야 심정적인 주체성을 갖춘 민족이 될 수 있지 그러지 않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 생각을 해봐요. 여기 협회장부터…. 모르지 누가 갈는지.
선생님은 뜻에 미친 사람입니다. 그것은 문 선생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뜻을 위해서는 자식을 제물로 바치라고 해도 그까짓 것은 바칠 수 있습니다. 거꾸로 부모를 제물로 바치라는 하늘의 명령이 있으면 그것이 원리원칙에 입각한 만인류와 역사시대 앞에 만민이 공인할 수 있는 하늘의 뜻이라면 부모도 제물로 바칠 수 있다고 선생님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이러한 스승이 자리를 잡고 출발한 통일교회입니다. 그 전통과 인연은 역사시대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을 총동원해 가지고 전부 다 외국에 선교사로 보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아까 말한 것과 같이 하나님이 이 민족을 대신해서 여러분을 역군으로 내세워야 할 거기에는 또다시 비참함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여기 참석한 여러분은 그런 자리에서 비참해져서는 안 된다는 각오 밑에서 오늘 저녁부터 준비를 해야 합니다.
선생님이 7월 4일부터 10월 14일까지 100일 기도를 하라고 했습니다. 기도는 무엇을 놓고 기도하라고 했어요? 선생님의 옥중 기도를 가지고 기도하라고 그랬지요? 왜 그렇게 말했는지 알겠습니까? 심정적인 면에서 하나님의 동지가 되어 주길 바라는 뜻에서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동지가 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주기 위해서 그랬던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한마디 부탁하겠습니다. 여러분 앞에 비참한 고비 길이 남아 있으니 여러분은 현재에 있어서 하나님 앞에 변함없는 자세를 지니고 복귀의 길을 책임지고 가 주길 부탁합니다. 더도 말고 김 씨면 김 씨 문중에 있어서 그런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 집안에서 그런 책임을 할 수 있는 각자가 되고 어디서나 민족 앞에 있어서는 부끄럽지 않은 여러분이 되어 주기를 부탁합니다.
내 아버님! 제가 부르는 아버지는 너무나도 불쌍하였던 것을 저는 아옵니다. 제가 이렇게 생각해야 할 그 아버지의 요건이 인간이 타락 할 수 있는 기준에서 바라봄에 있어서 당신이 주시는 하나의 아픔을 감당해야 하는 사람으로서 그저 몸부림을 치다가 몸부림으로 사라지다 가는 아버지 앞에 탄식을 남기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버님, 대다수의 인간들은 아버님이 영광의 옷을 입고 만세를 통치하고 만영광에 사로잡혀서 만민을 사랑한다고 선포하시는 줄 알고 그런 아버지의 품에 안기고 싶어하고, 그런 아버지를 붙안고 싶어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지금까지 인간들의 욕망이었습니다. 하오나 통일교회 교인들이 붙들고 있는 그 아버지는 죽음의 자리 가운데서 밤이나 낮이나 소망의 미래를 바라보며 이를 갈아 가면서 참아 나오시는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의 그런 억울함과 수많은 고난 길에서 혹은 가시밭길에서 상처를 받으신 그 손길을 붙들고 가슴 아픈 눈물을 흘리고 싶어하는 것이 통일의 신도들이 바라는 소원입니다.
한 많은 이 복귀의 길, 억만금으로 갚을 수 없고, 그 어떤 말로써도 표현할 수 없는 역사적인 서러운 사정이 있기 때문에 아버님께서 잊어버리고 말겠다는 그 마음 앞에 천만번 회개해야 할 불효의 모습들을 용납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1960년에 출발한 이 7년노정을 앞에 놓고, 7년 고비를 넘어서는 때가 가까워짐에 따라 이제 저희들은 과거를 걸어 놓고 회개하고, 오늘의 시점에서 다시 한번 정비하여 자기가 처해 있는 제단이 성지의 한 지성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세상의 그 누가 뭐라 해도 자기 체면과 위신이 문제가 아닙니다. 아버님의 가정의 법도가 구김살을 당하고, 아버지 뜻 앞에 이 모든 전부가 구름이 끼게 될 때에는 내 몸이 찢기고 내 체신이 밟히는 한이 있더라도 감사하면서 그곳으로 응당 가야 할 줄 아는 무리가 되어야겠사옵니다. 이러한 무리를 아버님께서는 통일의 무리 가운데 찾아 세우려고 얼마나 더듬어 오셨던가를 망각하는 무리가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1960년대를 중심삼은 이 7년 고비 길에서 사탄이 움직이던 공산주의가 이제는 석양과 같이 기울어 분열되고 파괴되는 단계에 들어가는 역사적인 한 전환시기가 저희 눈앞에 다가오는 것을 바라보고 있사옵니다.
7년노정이 끝남과 더불어 이 세계의 변천이 이렇게 되어야 된다는 결정적인 표준을 바라보게 될 때에 당신의 서운함도 있었겠지만, 당신을 향하여 책임진 저희의 마음을 아버지 아시옵고, 이 고비를 넘겨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그 일을 위하여 당신도 수고하셨고, 저도 몸부림쳤사옵니다. 저를 불러 명령하시고 바라셨던 소원이 이제 목전에 다가온 것을 바라보게 될 때, 저희들은 다시 전신갑주를 입고 하나님의 천명에 책임을 다하여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불의가 동참할 수 없는 완전한 선 자체로서 시작하여 선 자체로서 결실될 수 있도록, 당신이 소원하시는 복지가 저희의 문전에 다가 오는 것을 마련할 수 있는 각자가 될 수 있도록 지켜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탄의 참소를 받지 않는 자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아버님, 저의 갈 길을 맡기오니 책임져 주시옵소서. 이제 11월을 맞이하였사오니, 이 달도 아버지 뜻 가운데 있게 하시고, 저희들이 이 민족 앞에 해야 할 책임이 있사오니 아버지, 당신의 수고의 손길을 거두지 마시옵고, 저희들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하나님 앞에 대립하여 서는 자는 하나님이 채찍을 가하시고, 눈물로써 허리를 굽히고 통곡하면서 심정의 빚진 것을 갚을 도리가 없어서 민족 앞에 있어서 혹은 만민 앞에 있어서 탕감의 조건으로 자기 스스로를 제물 삼기 위하여 나서는 자들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이 같이할 것을 아오니 저희들이 그런 사랑의 손길을 같이할 수 있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옵니다.
남아진 이 해에 아버지 앞에 복된 내용을 드릴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오늘 아버지 앞에 저희들이 결심한 모든 새로운 것이 저희의 마음에 새로운 폭발적 인연으로 남아질 수 있게 하시옵소서. 아버지의 남아진 복귀의 뜻 앞에 그 무엇을 남길 수 있도록 저희의 몸과 마음을 새롭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만방에 널려 삭막한 광야에서 복음의 횃불을 들고 싸우고 있는 무리들을 아버지 지켜 주시옵소서. 아버지, 그들의 외로움을 동정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제가 어려운 때 아버지께서 보호해 주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통일의 무리들이 6년 동안 싸울 때에 주위의 모든 환경을 배척하게 하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저희들 부디 지치지 말도록 아버지 보호하여 주시고 권고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그리하여 세계적인 영광의 자리에 동참하여 아버지의 축복을 같이 나눌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남한 각지에 널려 있는 외로운 자녀들을 아버지 부디 지치지 말게 하시옵고, 그들이 주저하지 말고 최후의 목적지인 원수의 적진을 향하여 돌격해 나가는 행진 노정에 있어서 아버지의 서러움을 더하는 자들이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의 모든 전체를 당신이 뜻하신 대로 이끄시옵고, 경륜하신 뜻대로 정하고 보답할 수 있게끔 마음에 힘과 환경의 모든 여건을 아버지 분별시켜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옵니다. 이날의 모든 것을 받아 주시옵소서. 참부모님의 성호 받들어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세상에는 많은 날들이 있습니다. 오늘이 지나면 내일이 옵니다. 이렇게 무수한 날들이 있지만 오늘은 우리가 특별히 자녀의 날을 기념하기 위해서 모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해 놓으시고 기쁨을 누리고자 하셨던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아담과 해와를 지어 놓으시고, 그들이 자라서 당신이 소원하신 기준 위에 섰을 때 그들을 부부로서 친히 축복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들을 중심한 가정을 세우고 그 가정을 통하여 종족, 민족, 국가, 세계를 세우고자 하셨습니다.
만일 아담 해와가 타락하지 않고 축복의 뜻을 이루었더라면, 그때는 아담 해와의 목적을 이루는 때인 동시에 하나님의 창조목적이 달성되는 때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새로운 세계의 생활이 시작될 것이었는데, 아담 해와가 그 뜻을 알지 못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리에 서지 못한 연고로 새로운 세계의 생활은 시작되지 못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창조목적과 아담 해와의 목적이 이루어지지 못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타락한 가정으로부터 타락한 종족, 민족, 국가, 세계를 형성해 나왔습니다.
하나님은 본연의 그 뜻을 종결짓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계시기 때문에, 즉 아담 해와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본연의 그 목적을 다시 찾으시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계시기 때문에 구원섭리를 해 나오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구원섭리를 해 오신 터전은 사망권이요, 악의 주관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주관하실 수 있는 터전을 상실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으로 지으신 이 천지 만물의 사랑의 주인으로 아담 해와를 세워 놓으셨기에 아담 해와와 만물이 일체가 되면, 그 터전 위에서 하나님은 직접 주관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만물의 중심인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과 일체가 되지 못하고 타락하여 사탄과 일체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직접 주관하실 수 있는 터전이 사탄세계로 옮겨졌던 것입니다.
사탄세계의 비원리적인 사랑의 인연을 통하여 이루어진 이 세계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세계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창조원리에 의해 이 세계를 수습해 나오시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오랜 역사를 두고 섭리하심에 있어 직접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 자녀를 찾고 싶으신 것이 소망이었으나 직접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 자녀들을 찾지 못하셨습니다. 다만 간접적으로 대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로 왔다 간 역대의 선조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직접 대할 수 있는 입장에 서지 못하고 사망권 내에 머물러 있는 인간, 하나님과는 먼 거리에 있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간접적인 역사 과정을 통하여 우리의 선조들을 세워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대표적인 인물이 노아, 아브라함, 모세, 세례 요한 등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이 직접 주관하실 수 있는 한 때를 맞이할 수 있도록 섭리를 전진시켜 나오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인간이 타락했으나 하나님을 저버릴 수 없기에 종의 종의 자리까지 내려가야 했습니다. 그러면 종의 종이란 무엇을 말하느냐? 그것은 주인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타락한 인간은 종의 종의 자리에서부터 하나님께 충성해야 됩니다. 사탄은 천사장이었으며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그 종 앞에 끌려갔던 인간이기에 인간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종의 종의 입장에서 하나님 앞에 충성을 다했다는 기준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종의 종’의 자리에서부터 이끌어 나오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종의 종’의 자리에 세우셨다 하더라도 자기의 생명과 재산을 전부 희생시키고도 감사하면서 갈 수 있는 그러한 충절의 도리를 세워야만 ‘종의 종’이라는 인연을 세울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종의 종’의 자리에서 ‘종’의 자리로 올라가고 다시 종의 자리에서 양자의 자리까지 올라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것은 종의 기준을 넘어서 양자의 기준을 세우기 위하여 세워졌던 것입니다. 그리고 2천년의 역사를 거쳐 보내 주신 메시아를 모심으로 인해 메시아에게 접붙임을 받고 양자의 인연을 넘어 비로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직계 자녀의 자리까지 올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가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인하여 기독교가 양자격인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투쟁의 역사를 엮어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투쟁 역사를 거쳐온 기독교는 어떠한 입장에 서 있었느냐? 양자의 입장에 서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직접 주관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기독교가 만일 양자의 인연을 거쳐 직계 자녀의 입장에 들어갔더라면, 심정의 법도를 따라서 하나님은 직접 기독교를 주관했을 것입니다. 그랬더라면 예수님 이후 기독교는 수많은 무리가 희생당하지 않고도 개척자의 노정을 거쳤을 것입니다. 그래서 전세계는 기독교권 내로 흡수되어 완전한 승리를 결정지을 수 있는 터전이 되었을 것인데 그렇게 되지 못한 것이 지금까지 하나님의 한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뜻을 다 이루지 못하시고 지상에 양자의 인연만을 남겨놓고 예수님을 데려가셨기 때문에 그를 다시 이 땅에 보내신다는 약속을 해주셨고, 기독교를 중심으로 직계의 인연을 찾을 수 있는 터전을 개척하기 위해 2천년 동안이나 섭리해 나오셨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전세계에 널려 있는 기독교인들은 무엇을 해야 하느냐?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참아들에게 직접적으로 접붙임 받기를 원해야 합니다. 기독교인들은 이것을 원하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면 역사적인 종말시대에 주님은 어떤 자격을 갖고 오시느냐? 부모의 자격을 갖고 오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땅 위에 오셔서 부모의 자리에 나가지 못하셨기 때문에, 즉 영광 가운데서 하나님을 모시고 만민을 대표하여 하나님을 위로하는 생활적인 터전을 갖지 못하셨기 때문에 메시아는 다시 오시되 영광의 주로 오실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다시 오시는 메시아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다 이루지 못한 뜻을 계승하여 실체를 쓰고 하나님을 위안해 드릴 수 있는 효성의 도리를 먼저 하고 나서 선택함을 받고 사탄까지 굴복시켜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릴 수 있는 터전을 세워놓기 전에는, 참부모의 자격을 갖출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하나님이 섭리해 오신 복귀섭리의 개관인 것입니다.
자녀의 날이 나오기 전에 부모의 날이 나와야 합니다. 오늘날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은 부모를 가지고 있지만 천지가 공인할 수 있는 부모는 갖지 못했습니다. 하늘이 기쁘게 맞이할 수 있는 부모의 날이 없었고, 땅이 최고의 기쁜 날로 맞이할 수 있는 부모의 날을 갖지 못했습니다. 만일 이런 부모의 날을 가졌다면, 그날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날이요, 만민이 즐거워할 수 있는 날이요, 만우주가 환호하는 날인 것입니다.
그날을 중심삼고 하나님의 사랑이 심어져야 하고,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하는 아들과 일체가 되시고, 만물과 일체가 되는 심정이 거기서 닦여져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타락으로 인하여 이 천지간에 아직까지 그런 날이 나타나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수고의 노정을 통해서 참부모의 날을 복귀해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 배후에는 6천년 역사의 고비 길이 잠겨 있고, 하나님의 슬픈 심정이 깃들어 있고, 역사적인 한이 서려 있는 것입니다. 이것들을 청산하기 전에는 부모의 날은 도저히 올 수 없습니다. 이것을 청산하는 탕감복귀역사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수많은 선지선열들이 피의 대가를 치러 나온 것입니다.
가정을 중심삼은 심정의 법도는 부모로부터 자녀에게로 흐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심어져야 할 이 심정이 심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을 다시 심으려는 것이 다름 아닌 복귀역사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남성의 대표자가 메시아요, 여성의 대표자가 성신입니다.
태초에 신랑 신부가 천리원칙에 엇갈렸기 때문에 그것을 정리하여 본 궤도에 올려놓아야 합니다. 그래야 할 뜻이 엄연히 남아져 있기에 하나님은 구원섭리를 해 오신 것입니다.
아무리 국가가 크고 민족이 크다 하더라도 섭리적인 이 기준이 없으면 떠돌이별과 마찬가지입니다. 이 우주의 역사가 아무리 장구해도 중심적인 전통의 기준이 세워지지 못했기 때문에 끊임없이 역사는 변천돼 나왔습니다. 즉 전통의 인연을 존중시할 수 있는 역사가 아니었습니다.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분산시킨 다음 특별한 섭리의 뜻을 펴서 정성을 모아 하나님 앞에 충성하는 무리들을 모으셨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새로운 가정, 종족, 민족을 편성하셨는데, 이 수많은 민족 가운데 대표적인 책임을 짊어지고 나섰던 민족이 이스라엘 민족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이 세계적인 주류 민족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 주류의 역사의 골수를 찾아가 보면 무엇이 있어야 하느냐? 역사는 인류의 시조인 아담 해와의 기준을 중심삼고 발전해 나왔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으니 이것이 재현될 수 있는 기준, 이념을 중심삼은 어떠한 기준이 세워져 있어야 됩니다. 그 기준은 기독교가 바라는 소망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그것은 메시아사상이요, 신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신부 사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독교의 총 결실은 무엇이냐? 기독교 국가도 아니요 기독교 세계도 아닌 최고의 신앙세계입니다. 나무는 반드시 줄기가 있어야 됩니다. 아무리 사방으로 퍼진 옆가지가 많다 하더라도 종대에서 퍼져 나갑니다. 아무리 옆가지가 길다 하더라도 종대를 앞설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전체 인류를 하나의 나무에 비유한다면 개개의 민족은 잎사귀요, 이스라엘 민족은 줄기라고 볼 수 있어서 줄기가 왕성하면 정상적인 나무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세워서 민족을 형성하고 세계를 형성하게 하시려고 했습니다. 즉 온전한 종대의 자격을 갖추어 악한 세계를 하나님의 사랑에 접붙이게 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되어 새로운 역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셨던 것입니다.
한 목적을 중심삼고 하나님은 6천년 동안 섭리해 나오셨는데, 그 섭리의 종반이 지금 이 시대입니다. 참부모의 날이 바로 6천년 전에 시작하여 정상적으로 민족을 형성하고, 국가를 형성하고, 세계를 형성했으면 오늘날 이 지구성은 하나님의 주관권 내로 들어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 못한 이것이 문제입니다. 많은 민족 가운데서 중심되는 한 민족이 나오려면 그 민족은 다른 수많은 민족들과 부딪치더라도 그러한 자리에서도 하나님 앞에 충성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나라를 위한 사상도 철저해야 하는 동시에 세계를 위한 사상도 철저해야 됩니다. 그 사상을 기반으로 하여 아무리 어려운 환경에 부딪치더라도, 역사적인 원수의 적진 가운데 들어가더라도 새 이스라엘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변치 않고 남아져야 합니다. 이런 막중한 사명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민족이 그러한 전통을 이어 나오지 못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흘러가 버리고, 제2이스라엘인 기독교가 그 사명을 계승해 나왔던 것입니다.
그러면 메시아사상은 어떤 사상이냐? 세계를 위한 사상입니다. 세계를 통일시킬 수 있고 가정을 통일시킬 수 있는 중심은 참부모입니다.
그러면 기독교의 열매는 무엇으로 나타나느냐? 기독교는 수많은 역경의 노정을 거치며 신랑 신부의 기준을 향하여 나오고 있습니다.
이 세계가 찬란한 문화를 이루지 못한 암흑의 세계요, 혼돈의 세계요, 황폐한 세계라 할지라도 참부모와 인연만 있다면 이 세계는 평화의 왕국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유사 이래 지금까지 수많은 민족은 그분을 표준해서 사상적인 집중과 정신적인 집중과 생활적인 집중을 해 나왔습니다. 하나님은 외적으로는 하나의 세계를 지향하는 입장으로 끌고 나오셨고, 내적으로는 종교를 중심삼고 한 주인에 연결시키는 역사를 이끌어 나오셨습니다.
그러면 그 부모가 올 때까지는 어떠한 역경을 거쳐야 하느냐? 그분이 영광 가운데 구름을 타고 오셔서 호령을 하시고, 천지를 자기 마음대로 한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천리 원칙을 두고 볼 때 입은 상처가 있으면 그것을 벗어야 됩니다.
그러면 그 상처를 누가 벗겨 줄 것인가? 그것은 인간을 대표해서 참부모로 오시는 분이 벗겨 주어야 합니다. 자녀들이 보자기를 쓴 자리에 있으니 그것을 벗기지 않고는 해방이라는 명사는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이 통일되지 않고서는, 즉 영적인 세계와 지상 세계가 통일되지 않고는 완전한 통일을 이룰 수가 없다고 봅니다. 아무리 위대한 인물이 나와서 세계를 하나의 사상으로 통일시키려고 해도, 천륜의 법도가 남아 있고 하나님이 엄연히 존재하는 한 그것은 하나의 망상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날 통일이 되지 못하는 원인이 어디 있느냐? 모든 것이 막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무너뜨리기 전에는 통일이 될 수가 없습니다. 심정의 터전으로부터 마음의 터전, 생활적인 터전, 존재하는 모든 세계에 가로막혀 있고 간격이 되어 있는 것을 청산 지어 놓지 않으면 통일될 수가 없습니다.
청산해야 할 간격은 지상만이 아니라 천상세계에까지 무한히 연결되어 있는데 이 간격을 무엇으로 타개할 것이냐? 이것은 인간에게 책임이 있으니 인간이 해결해야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이 땅 위에 오시기 위해서는 막힌 영계와 무한한 투쟁을 해야 됩니다. 오늘날 지상에 통일적인 세계관이 세워져 나가고 있는 것도 사실은 영계에서 통일적인 역사가 벌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고로 영계의 역사가 지상에 반영되어 실체적인 현실로 전개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통일은 어떻게 이루어지느냐? 지상에 참부모의 날을 세움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참부모의 날은 천지간에 승리를 결정하는 날이요, 하나님께서 소망해 오신 승리의 날로 세워질 수 있는 날이요, 인간들이 소망해 온 역사적인 결실을 맺을 수 있는 날이요, 만우주의 잃어버린 주인을 찾을 수 있는 날입니다. 이러한 부모의 날이 나오지 않고서는 자녀의 날은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통일교회는 지상에 없는 새로운 날들을 기념하여 나왔습니다.
우리는 ‘오늘은 자녀의 날’이라고 간단히 흘러가는 말로 알지 모르지만 그 말 가운데는 역사의 고비 길에서 수고하던 선조(善祖)들의 함성과 부르짖음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부모의 날이 세워지기를 하나님은 6천년 동안 고대해 나오셨습니다. 본래는 타락한 인간의 후손들이 고대해야 할 날인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6천년 동안 그날을 고대해 오셨습니다. 저끄러진 역사가 시작된 그날부터 숱한 고비 길에서 하나님에게는 슬픈 일과 어려운 일이 많았는데, 그런 가운데서도 단 한 가지 소원했던 것은 부모의 날이었습니다.
그날이 찾아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당신이 같이하실 수 있는 인류의 참된 부모를 세워 가지고 ‘너희는 인류의 참부모다.’라고 명명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세워 주시는 부모의 이름을 갖고 나옴으로 말미암아 부모의 축복의 기준이 세워지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참다운 자녀가 세워짐으로 말미암아 지상에서 자녀의 날을 맞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오늘날 우리 통일교인들이 이런 엄청난 날을 그저 세상의 하나의 기념일같이 생각하고 맞이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자기네들 힘으로는 도저히 인연을 맺을 수 없는 입장에 있는데 그들에게 인연을 맺을 수 있는 새로운 날이 허락된다면, 그 사람들보다 더 그날을 기다리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상정입니다.
매일같이 뜨고 지는 태양은 언제나 마찬가지로되, 그 가운데서도 특별히 바라시는 그 한날을 하나님은 얼마나 그리워하셨을까요? 하나님이 모든 날들을 잊어버리시고 만천하 앞에 희열이 만연한 가운데서 당신의 모습을 나타내실 수 있는 날이 바로 이날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잃어버렸을 때 다시 찾을 수 있는 길만 있다면 죽음 길도 개의치 않고 달려갈 것입니다. 하나밖에 없는 자식을 잃어버렸는데, 그 자식이 자기의 생명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자식이라는 것을 느끼는 부모는 그 자식을 찾기 위해서라면 산도 바다도 개의치 않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이날은 서로 서로가 막혔던 정을 터놓고 한 길로 갈 수 있는 기쁨의 날이요, 천하가 통일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는 날이라고 생각할 때, 하나님은 오늘을 얼마나 소망하셨겠어요?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자식들을 찾아오시는 하나님 앞에 사탄이 가만히 있을 리가 있겠습니까? 억센 화살을 퍼붓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의 어려운 풍파가 여기에서 감돌게 되는 것입니다.
통일교회는 이런 날을 맞이하기 위해 제일 심한 시련을 겪었던 것입니다. 슬픔의 인연을 거치지 않고는 안 되는 것이 탕감의 법칙입니다.
타락한 아담과 해와는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얼굴을 숙였지만, 복귀의 노정을 걸어가는 여러분은 승리의 날을 맞아 하나님 앞에 나간다 하더라도 수고하신 아버지 앞에 머리 숙이겠다고 하는 마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러한 인연을 찾아 우리들은 모여들었습니다. 혹은 세파에 시달리고 혹은 억센 환경에 부딪히면서 찾아왔습니다. 우리들의 몸은 상처뿐입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상처보다 더 큰 상처를 입으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위로해 드려야 할 자신임을 망각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동정이 깃드는 것이요, 그로 인해 하나님과 인연을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시련의 고비를 넘고 나면 하나의 가정으로부터 시작하여 종족 편성이 있게 됩니다. 그럼 제일 힘든 때가 어느 때냐? 7년노정을 출발하는 때가 제일 힘드는 때입니다. 그때는 싸움판이 벌어지고, 일대일로 완전한 탕감을 해야 됩니다. 그 터 위에 아담과 해와가 사랑의 인연을 맺음으로 말미암아서 이 세상은 광명한 날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의 날, 자녀의 날, 만물의 날, 이렇게 3단계의 날을 세웠습니다.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부모를 잃어버렸고, 자녀를 잃어버렸고, 만물을 잃어버렸습니다. 이것을 탕감하는 기준을 세우기 위해서는 부모의 날, 자녀의 날, 만물의 날을 세워야 했는데 그 중에서도 세우기에 가장 어려운 날이 자녀의 날이었습니다. 아담과 해와가 참다운 자녀가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참다운 자녀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한 핏줄을 타고 나야 됩니다. 참다운 자녀가 되기 위해서는 부모 앞에 효도를 다해야 합니다. 효자라는 것은 어떠한 어려운 환경도 수습해야 하고, 그 환경으로부터 공인받고, 전체로부터 공인받고, 부모로부터 공인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해와에게 만물을 주관하라고 하셨는데, 아담 해와는 만물을 주관할 수 있는 공인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소망의 중심으로서 뜻을 책임질 수 있는 자녀라는 인정을 받아야 됩니다. 그리고 부모의 심정에 일치 되어야 합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차이가 있어 가지고는 효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충신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효자나 충신은 변질되어서는 안 됩니다. 과거를 대표하고 현재를 대표하고 미래를 대표할 수 있어야 하고, 하나님의 심정을 중심하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자리에서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역사를 바라볼 때 통일교회 교인들은 누구를 바라보아야 되느냐?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됩니다. 그리고 ‘당신은 이러한 아버지가 아니십니까?’라고 할 줄 알아야 합니다. 통일교인들은 선생님을 바라보아야 될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과거는 이랬고, 현재는 이러하고 미래는 이럴 것입니다.’라고 할 수 있는 자리에 서야 하고, 하나님의 과거, 현재, 미래를 대신 할 수 있고, 심정적으로 일치될 수 있는 기준을 세워 나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러분들은 한 부모의 혈육으로 태어난 형제이기 때문에 생활감정이 서로 통해야 됩니다. 부모가 슬퍼하면 같이 슬퍼하고, 부모가 기뻐하면 같이 기뻐하고, 부모가 수고하면 같이 수고하지는 못하더라도, 눈물이라도 흘리고 자기가 죄인 됨을 실감해야 부모 앞에 용서를 받고 부모의 울타리 안에라도 머물 수 있는 것입니다.
당신이 수고한 그 소망의 기준 앞에 나 같은 존재는 나타날 수 없다고 하는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면 사탄의 족속이 됩니다. 우리가 수고하여 탕감할 수 있는 환경권 내, 즉 6수권 내에서 ‘자녀의 날’을 맞이하는 것도 마지막입니다.
내 마음을 중심삼고 나가면, 그래서 내 마음이 통할 수 있는 환경만 갖추어지면, 내적 기준은 자동적으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이 섭리하실 수 있는 터전이 우리의 목전에 점점 현실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현실로 나타나는 것은 고맙지만, 그 고마운 현실 앞에 내가 어떠한 자세로 임할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얼굴은 수심에 잠겨 있고, 거기에다가 주름살까지 생겼고, 그 몸에는 숱한 원수의 화살 자국이 있는 그 아버지께 여러분들은 자녀의 명분을 가지고 효성의 도리를 다하는 통일신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부모의 날을 맞이할 수 있었고, 자녀의 날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과정 속에서 축복가정이 생겨난 것입니다. 36가정, 72가정, 124가정을 선생님이 축복해 주었습니다. 축복이란 것은 그냥 흘러가는 사람들을 모아서 해준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천지를 대표하는 입장에 세워 놓고 해준 것입니다.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효성의 도리를 다했다는 공인을 받아야 하고, 충신열사를 대신할 수 있는 결실적인 가치를 지녔다고 하는 자리에 서야 합니다. 또한 땅의 권세와 하늘의 권세를 하나님 앞에 돌려 드릴 수 있는 인격적인 대표자가 되어, 하늘땅 앞에 공인받을 수 있는 한 남성과 한 여성이 되어야겠습니다.
내겐 사탄이 참소할 수 있는 어떤 조건도 없다는 자신이 있어야 하고, 내가 싫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축복을 해주시겠다고 할 수 있는 자리까지 나아가야 하는 것이 축복가정입니다. 그런 기준에서 축복을 해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축복받은 가정으로서 합당한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의심스럽습니다.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민족이 화를 입을까 염려하고 속죄의 제단을 향하여 나아가는 제사장과 같은 마음이라도 가지고 살아야 될 텐데, 그렇지 못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옥중에 있을 때, 하나님은 원수를 가까운 친구의 경지로까지 이끌어 주셨습니다. 그걸 볼 때에 하나님은 얼마나 인간을 사랑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게 될 때에 반대하는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한칼에 쓸어버리고 싶었지만, 멀리 보이는 언덕 아래에서 눈물짓고 있는 아낙네들이 있었기 때문에 긍휼히 여길 수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비운의 길을 걷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을 생각하면 그들이 비록 원수들이지만 그들을 위하여 복 빌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자기에게 복을 주고 좋게 할 때는 감사할 줄 압니다. 만민이 환영할 수 있는 영광된 자리에서는 쌍수를 들어 다 환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외로운 자리에 처해 있을 때는 환영하지 않습니다.
흘러가는 물소리가 내게 위로의 대상이 될 때 그 자연은 비로소 나와 인연을 갖게 되고,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될 때에 그 자연을 지으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해 주십니다. 역사는 그렇게 해서 인연이 맺어지는 것이요, 꼬인 역사의 고비 길도 거기서부터 풀리는 것이며, 여기에서 원수가 친구로 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에, 오늘 통일의 길을 찾아가는 우리는 누구나 환영할 수 있는 값싼 통일은 싫다는 것입니다.
갈보리 산상에서 예수님께 절박한 비운이 깃드는 마지막 순간 오른편 강도의 한마디의 말은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위로의 말이었습니다. 그 한마디에 예수님을 의지하고 싶고, 믿고 싶고, 예수님을 세워 드리고 싶은 마음이 깃들어 있음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선생님이 여러분을 전도 내보내고 순회했던 1960년이 아주 인상에 남습니다. 요즈음은 순회를 해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선생님이 오신다고 행로에서 줄지어 인사합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찬바람 부는 곳에서 외롭게 서 있던 초초한 그 때의 모습, 사망세계의 보초인 양, 혹은 생명을 다짐하는 하늘의 깃발인 양, 정성을 다하여 머리 숙여 기도하는 그 마음에 하나님이 천지의 인연을 지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 어려운 자리에 있을 때 하나님과 심정적인 인연이 맺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엘리야도 사람들에게 몰리고 쫓기자 ‘나만 남았나이다.’ 하고 호소했을 때 그 심정 앞에 하나님이 동참해 주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함께 해주셨기에 엘리야에게 승리의 결정권이 새로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뜻길을 가다가 환경에 시달리고 생활에 쪼들려서 하나님을 배반하고 자기의 갈 길로 돌아서 버리는 사람은 지나가는 나그네밖에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검은 구름이 무서운 폭풍우를 실어다 준다 해도 최후까지 남아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선생님이 걸어온 길 앞에 소망의 한 초점으로 나타났다가 흘러가는 구름과 같았던 무리가 많았던 것을 생각할 때에, 차라리 그들이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더욱이 내가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 앞에 호소했는데도 불구하고 그 사람들이 돌아섰을 때는, 그 슬픈 마음이 뼛골에 박혀 빼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한 사람이 미워서가 아니라 민족 앞에 돌아가는 피해가 크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생각할 때에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에 비례하여 그들에 대한 분함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하늘의 명령이 없는 한 참고 나가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한 가정만을 찾으려 하시지 않고 그 가정을 제물 삼아 국가를 찾으려 하고 국가를 제물 삼아 세계를 찾으려 하고 있습니다. 내가 대한민국의 백성이지만, 대한민국을 사랑하지 못할지라도 세계를 사랑하고 하늘땅을 사랑하면, 대한민국에서 배척을 받더라도 세계적인 시대와 천주적인 시대가 오면 환영받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잃어버리고 이스라엘 나라를 잃어버렸지만, 하나님이 소망하는 세계와 하나님이 소망하는 천국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자기 목숨이 다할 때까지 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망했지만, 효의 세계가 그분을 맞이하고 충의 세계가 그분을 맞이할 것이기 때문에, 끝날에는 그분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세계가 움직여 나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교회 내에 있는 것은 깨진 유리라 할지라도 자기 가정의 금은보화보다 더 귀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사람이 충효의 길을 갈 수 있는 사람이요, 천국을 갈 수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이 뜻을 세워 나가는 데 있어서는 공적인 물건에 정성을 다 들여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심정을 가지고 형제를 사랑하고 만물을 사랑하여, 참부모가 원하는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 자신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 부모의 뜻은 무엇이냐? 한국만을 위하자는 것이 아니고, 세계만을 위하자는 것도 아니요, 천주까지 위하자는 것입니다. 즉 참부모의 인연으로 남자, 여자를 대신하고, 높고 낮음을 대신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주고받는 수수작용의 원칙에 입각해 존재하는 모든 것이 부모와 인연을 맺는 것입니다. 그 참부모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귀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귀한 결과를 보답해 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개인, 가정, 사회, 국가, 세계로 확대되어 나가고 전체 앞에 공동의 가치로 나타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딸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식구는 어디를 가더라도 먼저 거룩한 곳, 즉 성지나 교회를 먼저 찾든가 그렇지 않으면 그런 조건이라도 세워야 합니다.
여러분 각자는 개인이로되 개인에만 머무를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또 여러분 각자는 선조의 입장에 서야 합니다.
지성소와 같은 입장에 세운 것이 축복가정입니다. 축복가정을 하나님은 6천년 동안 찾아오셨습니다. 수많은 선지자들과 예수님을 통하여 찾아오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형언할 수 없는 참상을 당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찾기 위해 수고해 나오셨기 때문에, 여러분 개체는 역사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눈물을 흘리며 감사해야 합니다. 아담 해와의 타락한 씨를 남겨서도 안 됩니다. 여러분은 후대 앞에 법도를 세워야 할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고생하라고 한 것입니다.
하늘이 주신 복에 대하여 얼마나 보답을 했는가? 공적인 회합을 개인적인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개인적인 것은 희생해야 합니다.
세계 운세를 안고 소화할 수 있을 것인가가 문제입니다.
여러분이 모였기에 내가 들렀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것이 느껴지지 않는 고로 집회 참석률이 제일 나쁩니다.
축복가정은 서울에 오면 꼭 본부에 들러서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매일 하나님과 국가와 자기 가정을 위해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세계의 식구들이 매주 일요일마다 본부를 향해 정성을 들이고 있는데 여러분은 이것에 대해 보답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못하면 가정이 가는 길이 막힙니다.
축복가정과 식구들이 몸부림을 치면서 지방의 책임자로서 맡겨진 사명을 다했더라면 모든 형편이 나아질 수 있다는 것을 자신했었습니다. 그러나 7년노정이 끝나기도 전에 여러분들은 지쳐 있습니다. 7년 동안 전력을 다해 사명을 완수했다면 모든 것이 피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민족 앞에 전통을 세워야 했었습니다.
그러나 이 민족 앞에 세워야 할 그 무엇도 없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승리할 때까지 어떻게든지 남아져야 합니다. 그 전에 죽으면 일은 틀어집니다. 물론 개인마다 사정은 있겠으나, 그것은 개인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머리를 들 수가 없습니다.
외국 식구들의 편지를 받을 때마다 선생님은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그들에게 해야 할 책임이 무엇인가를 생각합니다.
성지에 축복가정들이 나오지 않습니다. 축복가정들은 일요일과 공적인 집회날에는 선두에 서야 합니다. 부부 중 한 사람은 반드시 공적인 모임에 참석해야 됩니다. 7년 후에는 가정을 정비해야 합니다.
1967년을 넘을 때는 모든 것을 탕감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선생님에게 빚을 넘겨서는 안 됩니다.
3시대를 탕감하는 입장에 서야 합니다.
선조로서 후손이 갈 길을 닦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침저녁으로 자기를 성별해야 하며, 가정을 성별해야 합니다.
각 가정은 흰 방석을 만들기 바랍니다. 그리고 깨끗한 장소를 준비하세요. 그래서 그 방석에 앉아서 정성들이는 시간을 갖도록 하기 바랍니다.
7년노정이 끝날 때까지 선생님이 할 책임은 선생님이 하겠습니다. 다시는 축복해 주고 싶은 생각이 없게 되었습니다. 전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을 보면 민족적인 때가 온 것을 알 수 있는데 축복가정을 보면 한심합니다. 그렇기에 고생이라도 해서 하나님의 동정이라도 사야 합니다.
선생님은 내 몸까지도 공적인 입장에 세워 왔습니다. 사탄에게 잃어버린 것을 찾으려면 내 것을 완전히 내주어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으로, 생활적으로, 환경적으로 준비를 해야 됩니다.
비참한 것을 먼저 당하는 사람은 제사장입니다. 그러므로 축복가정들이 먼저 비참한 일을 당해야 합니다.
각자의 갈 길이 바쁩니다. 지금은 탕감조건을 세우는 입장에서 명령했지만 불원간에 일대일로 명령할 때가 옵니다.
뜻을 위해서 자기를 잊어버리고 일한 때가 있었는가? 심부름꾼의 입장이 아닌 주인의 입장에서 일해 보았는가? 동리의 개가 짖는 소리에도 부끄러움을 느끼는 시간을 가져 보았는가?
책임진 자는 마음놓고 살 수 없습니다. 빚을 지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로 말미암아 누구에게든지 보탬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는 민족 구원의 시대로 들어왔기 때문에, 부모와 형제들을 전도해야 합니다. 7년노정에서 기본 가정을 빼서 심사를 해야 합니다. 여기에는 사정이 있을 수 없습니다. 아들딸을 희생시켜서라도 원수를 구해야 됩니다.
축복가정은 선생님이 성진이를 기르던 입장에 자기 자식들을 세워야 합니다. 자기 자식보다 선생님의 자녀들을 더 사랑해야 됩니다.
선생님은 할 말을 다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1966년 12월 4일, 이 해의 마지막 달에 첫 번째 맞이하는 주일입니다.
뜻을 놓고 볼 때, 지금까지 우리 통일교회 식구들은 생명을 걸고 맹세를 했고, 자기의 모든 것을 희생하더라도 뜻을 위해 가겠다고 달음질쳐 나왔습니다. 그런 날들이 어언간 6년이나 흘러갔습니다.
그간 여러분들에게는 누구에게 터놓고 말할 수도 없는 사연이 있었고, 누구하고도 통할 수 없는 비장한 사정들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도 선생님은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입장에 서게 된 원인은 무엇 때문이냐? 그것은 남겨진 복귀의 뜻을 이루기 위해 협조하고 이 민족을 위한 섭리를 이루어 보겠다고 다짐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맹세의 언약으로 말미암아 이 길을 우리들은 지금까지 걸어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민족 앞에 할 말이 있습니다. 더 나아가 30억 인류를 대하더라도 할 말이 많습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까지 가더라도 우리는 할 말이 있는 것입니다.
이 뜻길을 개척해 나오는 동안 우리를 원수로 대적한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통일교회가 이런 기반을 닦고 한국을 기반으로 하여 세계적으로 개척하는 현 단계에서까지 그런 사람들을 원수로 대해서야 되겠습니까? 개인적으로 분하다고 해서 그 분함을 풀고야 말겠다는 입장이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이런 문제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한 해가 지나가는 그 해의 마지막 날에는 지나간 일년을 회고해 보기 마련입니다. 그런 때는 대개 사람들은 우선 기뻤던 일을 먼저 생각합니다. 어느 달, 어느 때에 잊을 수 없는 기쁨이 있었고, 그 기쁨은 누구로 말미암아 이루어졌는가를 생각하며, 그 일에 연유된 사람을 그 기쁨에 동참시키고 싶은 것은 누구나 다같이 느끼는 마음입니다.
인간은 자기의 기쁜 일 그 자체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기쁜 일에 동참했던 사람을 자랑하고 싶은 것입니다. 반면에 사람은 누구나 다같이 슬픈 일이 있을 때면 그 슬픔이 크면 클수록 그 슬픔을 제거하고 싶은 것입니다.
좋은 것은 자랑하고 슬프고 고통스러운 것은 제거하려 하는 것이 선을 세워 나가는 역사 과정에 필연적인 원칙이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선과 악을 분별하여 참다운 선을 세워 나가는 종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며, 또한 현 사회제도를 통해서도 어느 역사적인 사회 환경을 넘어서라도 이 원칙은 공통적으로 통한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선생님은 이 길을 개척해 나오면서 개인적인 생활이나 가정적인 생활, 단체적인 생활이나 이념을 중심삼고 민족을 대해 나오는 과정에 있어서, 세계무대를 향하여 나가려 할 때 거기에는 수많은 원수들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또는 인생에 있어서 제일 비참하고 누구나 가장 싫어하는 최후의 길을 가는 데 있어서 비난받고 비소받아 억울하고 분한 마음이 일시에 폭발하려고 할 때에도 참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오늘의 통일교회가 성장할 수 있는 자극이 되기도 했었고 슬픔의 표상이 되어 오기도 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들은 원수를 천지간에서 완전히 제거시켜야 되겠습니다. 이것은 원리입니다. 부모의 원수가 있으면 부모의 원수를 갚아야 하고, 종족의 원수가 있으면 종족의 원수를 갚아야 하고, 민족의 원수가 있으면 민족의 원수를 갚아야 합니다. 또 세계를 좀먹는 원수가 있다면 그 원수도 갚아야 합니다. 하나님도 그 타오르는 공분의 심정 앞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마음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천리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종교인이나 사회인, 지위의 상하고저를 막론하고 위치나 행동에 상관없이 이 천리는 역사를 지배해 나왔고 판단해 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슬프고 외롭고 억울해도 오늘날 도의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 이 법도는 있지만 아직까지는 보류된 법이라는 것을 우리 통일교회 신도들은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욕하고 싫고 원수를 갚고 싶은 마음이 있어도 자기 마음 전부를 풀어놓고 대항할 수 있는 입장에 서지 못하는 것이 도의 길을 가는 사람의 공통된 처지입니다.
우리는 타락한 사회에서 자기가 처할 수 있는 위치가 떨어지고, 혹은 박탈당하고 추방당하더라도 거기에서 칼을 뽑아 원수를 갚을 수 없는 것입니다. 몰릴 때에도 묵묵히 몰려야 하고 또 민족이 배반하는 자리에서도 묵묵히 가야 했습니다. 역사시대의 흐름에 밀려나는 환경에 부딪치면 말없이 밀려나야 했습니다. 이런 숱한 슬픔의 역사노정을 더듬어 나온 것이 종교인들의 길이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은 십자가상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기억할 줄 압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라고 하시며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 간곡히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내용을 몰라 이렇게 기도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자신이 민족을 사랑하지 않아서도 아니요, 민족의 배역자(背逆者)들 편이어서 그런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천륜의 법도를 밝히지 못한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오로지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로마 병정들이 창끝으로 자신의 옆구리를 찌르는 자리에 있을지라도 그 원수를 갚을 수 있는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때가 오기까지 그들을 포용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알면서도 참고 당해야만 했던 예수님의 서러움을 우리들은 망각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선생님이 1960년을 중심삼고 7년노정을 선포했었습니다. 그때 우리 교회는 시련 기간이었습니다. 그때 사방에서 몰려오는 사회의 비난과 더불어 휘몰아치는 폭풍의 시련에 휘말려서 한낱 소망의 일념도 찾을 수 없는 환경에 부딪혔을 때도 선생님은 민중을 대항해 싸우라고 명령하지 않았습니다.
‘에스더의 웃는 모습을 가져라. 어떠한 박대를 받아도 다 받아들일 수 있는 모습을 가져라. 슬퍼도 슬프지 않은 모습을 가져라. 억울해도 그 억울함을 잊을 수 있는 모습을 가져라. 분통하고 분통하거든 태어난 것을 잊어버릴 수 있는 각오를 하고 참으라.’고 하나님은 권고하셨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회고해 볼 때 하나님은 오늘날 이렇게 나오지 않으면 안 되었던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선생님이 만약 개인적인 감정을 갖고 원수를 갚는다면 일격에 쳐버릴 사람이 많지만 아직까지는 원수 갚을 날이 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소망의 날을 바라보고 오래 참고 나가시기 때문에 우리도 참아야 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통일교회의 이렇게 어려웠던 사실을 볼 때 형제지간이나 친척이나 우리와 상대되는 사회단체, 국가, 대 세계를 앞에 놓고 우리의 분에 사무쳤던 감정을 일시에 전부 다 풀어 버리고 싶은 마음이지만, 그럴 수 없는 때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복귀의 심정을 회고해 보면, 하나님 앞에 있어서 가인 아벨을 두고 볼 때 가인은 아벨 앞에 원수였습니다. 노아가정을 두고 보면 노아가정 외에는 전부가 노아가정 앞에 원수였습니다. 아브라함시대 역시 아브라함 한 사람 외에는 전부가 원수였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세워 애급노정을 거쳐오는 데에도 4백여 년간 원수의 나라에서 신음하며 고역을 당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지금까지 2천년 섭리의 뜻을 세워 나왔다고 하지만 그것도 역시 원수의 세계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원수의 세계에 들어가 원수를 굴복시키지 않으면 안 될 책임이 남아 있기에 지금까지 참아 나오신 것입니다.
그 원수는 개인적인 원수가 아닙니다. 일개 유대 국가의 국가적인 원수도 아닙니다. 또한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에서의 어떤 한쪽의 원수도 아닙니다. 이 원수는 세계를 망치고 천지를 망치는 대원수입니다. 이 원수를 세계적인 무대에 올려놓고 갚을 그날을 바라보고 나오는 것이 복귀의 길입니다.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 교인들은 뜻이 이루어질 날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세계적인 뜻, 만민이 추구하는 뜻, 천지가 공히 바라는 그 뜻을 속히 이루어야 한다고 여러분이 마음으로 다짐하지만 그 뜻을 이루는 데는 여러분 개체만을 중심삼고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통일교회 한 단체만을 중심삼고도 불가능한 것이요, 한국 민족만을 중심삼고도 불가능한 것입니다. 또한 아시아 열국을 규합해 가지고도 불가능한 것입니다. 온 세계를 규합하고 하늘에 있는 영계를 일치시킬 수 있는 엄청난 문제를 해결해야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뜻을 이루기 위해서 역사적인 원수, 세계적인 원수인 사탄을 굴복시켜야 하는데 총칼로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연굴복 시켜야 합니다. 이 엄청난 책임을 바라보고 하나님은 지금까지 수많은 종교인을 내몰아 오신 것입니다.
개인을 제물로 희생시킨 것은 무엇을 하려고 했는가? 그것은 개인의 원수를 갚기 위하려는 것이 아니라, 개인을 희생시켜서 민족의 갈 길을 열어 놓기 위한 것입니다. 즉 개인의 희생을 통하여 그 민족의 갈 길을 열어 놓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민족을 희생시키는 것은 그 민족이 살고 있는 나라의 갈 길을 열어 놓자는 것이고, 나라를 희생시키는 것은 세계의 갈 길을 열어 놓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복귀섭리를 이렇게 해 나오시기 때문에 하늘의 주관권 내에 있어서 승리권을 갖고 나오는 이스라엘 민족이 가는 길은 비참해야만 된다는 것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개인을 세워서 그 개인이 승리적인 기준에 섰다고 해서 승리적인 기준에 서지 못한 전체를 그로 말미암아 심판해 버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듯이 한 사람을 희생시켜 백 배, 천 배의 소득을 거두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이 희생하라, 고이 희생하라’는 것입니다. ‘미련 없이 백 퍼센트 희생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의 밀알처럼 백 퍼센트 정도가 아니라 그 이상 거두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개개인을 찾아오실 때 개인을 찾아 승리자의 자리에 세우고 싶어하십니다. 그러면 그 개인은 어떻게 해야 되느냐? 개인을 따라온 원수 사탄을 이겨야 합니다. 하나님이 사탄을 없앨 줄 알아요? 사탄을 남겨 놓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원수보다도 더 큰 원수인 가정적인 원수가 남아 있고, 가정적인 원수보다 더 큰 원수인 민족적인 원수가 남아 있고, 민족적인 원수보다 더 큰 국가적인 원수가 남아 있고, 국가적인 원수보다 더 큰 세계적인 원수가 남아 있고, 그리고 또 세계적인 원수보다도 더 큰 하늘땅을 망쳐 놓은 대원수가 남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정적인 원수를 개인이 제아무리 잘 갚았다 하더라도 민족적인 원수는 남아지는 것입니다. 민족적인 원수를 제아무리 잘 갚았다 하더라도 국가를 배신하여 나타난 원수는 막을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민족이 승리의 기치를 높이 들고 자기의 권한과 개선가를 온세계 앞에 우렁차게 불렀다 하더라도 민족적인 승리만으로는 영원한 승리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민족적인 승리를 넘으면 국가적인 원수가 남아 있고, 국가적인 승리를 했다 하더라도 국가적인 승리로써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세계적인 원수가 남아 있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승리를 했다 하더라도 하늘땅을 한에 사무치게 했던 원수, 온 우주의 권세를 갖고 있는 악한 괴수인 원수가 남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제아무리 그 이하의 원수를 갚았다 하더라도, 그 원수를 갚지 않고선 완전한 승리를 거둘 수 없는 입장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원수를 갚았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 가정적인 원수를 갚아야 할 시대에 있어서 승리하지 못하면 첫 칼에 맞게 되는 것입니다. 또 가정적인 원수를 갚았다 하는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그가 민족적인 원수를 갚기 위한 싸움터에서 패자가 되는 날에는 먼저 맞게 되는 것입니다. 맞는 날에는 하나마나 한 것입니다. 거기에 관계된 모든 존재는 피흘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민족의 원수를 갚은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국가적인 원수와 싸워서 승리의 권한을 못 세우고, 선의 기반을 갖추지 못하게 될 때에는 만민으로부터 반대받고 맞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천륜의 법도가 남아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참아라! 참아라!’ 하신 것입니다. 십자가에 희생되는 자리에 들어가더라도 참고, 손발에 피가 흐르고 쓰러져 가는 최후의 운명의 순간까지 참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슬픔이 하나님의 슬픔이요, 예수님의 어려움이 하나님의 어려움이요, 그리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독생자의 죽음을 환영하실 리 만무하거늘, 하나님은 어찌하여 참으라고만 하셨겠습니까? 여러분은 그 뜻을 잘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 때에 세계적인 원수를 갚을 수 있는 조건이 성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은 다시 오셔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기독교를 앞에 세워 기적적인 발전을 하며 밤낮없이 달려오셨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게 해 나오는 가운데 수많은 사람이 희생되었습니다. 수많은 애혼(哀魂)들이 미래의 승리의 나라, 승리의 세계를 불러왔습니다. 하늘땅이 고이 깃들 수 있고 안식할 수 있는 평화의 왕국을 위해 걸어왔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어느 한 날 그런 날을 맞은 조국에서 살아 봤습니까? 기독교는 언제 그런 세계를 가겠다고 다짐한 적이 있었습니까? 또 어느 한 날 그런 세계를 보았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습니까? 그러지 못했기 때문에 최후의 큰 싸움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 싸움에는 전부 다 포함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최후의 한 날을 찾아 세우기 위해 역사의 곡절의 인연은 지금까지 동서남북, 사방팔방으로 몰리고 부딪치면서 얼마나 부대끼며 돌아왔던가!
이러한 관점에서 고요히 자기 자신을 놓고 생각해 볼 때, 내가 하나님 앞에 불림받아 6천년 동안 죽지 않고 개인적인 투쟁시기로부터 가정, 민족, 국가, 세계적인 투쟁시대까지 살아 가지고 섭리의 뜻을 대했다고 한다면, 내 한 개체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충성한 존재가 되었을 것인가를 생각해 보았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오늘은 믿다가 내일은 배신하기 쉬운 무리들을 이리 끌고 저리 몰며, 기독교를 중심삼은 새로운 세계 형태를 갖추도록 하시기 위해 여러분이 상상할 수도 없는 피의 희생을 치뤄 나왔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사람들은 오늘날 발달된 문명으로 편안한 생활을 즐길 수 있는 환경에 사는 것이 자신의 공로로, 혹은 자기 몇 대 선조들의 공로로 말미암아 되어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역사의 배후에 수많은 고비 길을 거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보기에는 각각 다르고 사분오열된 입장에 있는 것 같지만, 하나의 목적을 지향하시는 하늘이 있었기에 어떤 개인이나 어떤 민족이든 그런 자리에 섰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이 언제까지나 그런 자리에 설 수 없고, 그 민족이 언제까지나 그런 자리의 영광을 누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그러한 자리에 처하게 된 역사적인 사실을 망각하게 될 때는 최후의 심판의 날이 그들을 부르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선생님은 통일교회를 출발할 때 가장 가까운 사람이 원수가 될 것이라는 걸 각오했습니다. 개인적인 생활에서의 원수는 견디기 쉽습니다. 개인적인 자리에서 나타난 원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모시고 온 인류의 운명과 천주의 운명을 짊어지고 세계의 최첨단에 서서 그 자리에 나타나는 원수를 갚는 책임은 누가 할 것인가?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이것을 해야 할 분은 오직 이 천지를 지배할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뿐입니다. 그래서 메시아사상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메시아는 어떠해야 되느냐? 한 많은 역사의 고비 길에서 참을 줄 알아야 됩니다. 또 한 많은 역사의 신음에 스스로 동참할 줄 알아야 되고, 한 많은 비운의 자리에도 스스로 나갈 수 있고, 그것을 자기의 것으로 소화시킬 수 있는 주인격 자리를 거쳐 나와야 합니다.
이것이 사실이라 할진대 앞으로 오실 메시아는 절대 영광 가운데 오시지 못합니다. 만약에 그렇게 오신다면 가짜 메시아입니다. 오시는 메시아는 역사적인 비운에 부딪쳐도 역사적인 흐름에서 사라지지 않고 역사를 밟고 올라서서 당당히 세계적인 원수와 대결하여 승리할 수 있는 책임자가 아니면 안 됩니다.
오늘 선생님이 왜 이런 말을 하느냐면, 일본에 우리 식구들이 많은데 식구들 중에 한국 교포들과 일본 사람 사이에 역사상의 감정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것 같아서입니다. 아직까지 노랑이면 노랑 물이, 파랑이면 파랑 물이 빠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파랑 물 노랑 물은 자신과 아무 관계가 없다는 생각, 이 노랑은 내 것이고 저 파랑은 당신 것이라는 사상을 어떻게 없애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늘이 갚아야 할 원수는 일본이나 한국 등 일개 국가를 상대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 원수를 치기 위해서는 세계 전체가 하나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따르는 모든 신자들에 대해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요 15 :5)고 하셨습니다. 즉 한 지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 지체가 어떤 개인이 즐거워할 수 있는 환경에 사로잡힌 지체가 아니라, 세계와 하나님이 즐거워할 수 있는 지체로서 설 수 있기를 하나님은 소망해 오셨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의 통일교회는 나라와 나라의 관계가 문제가 아니에요. 아무리 일본이 스스로 세계적인 원수를 친다 해도 세계적인 원수는 다시 찾아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통일교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았으니 하나님이 바라시는 최후의 한 날을 위해 참음의 길을 가야 합니다. 자신의 생명과 바꾸는 고비 길이 있다 할지라도 참고 넘어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참는 그 자리는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의 소망과 하나님이 바라시는 전체의 책임을 망각해 버리는 자리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뜻을 고이 지니고 묵묵히 생각하며 그 뜻을 세우는 자리로 가야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최후의 한 날을 위해서 불린 몸들입니다. 1966년 12월, 이제는 때가 왔습니다. 통일교회 식구끼리 맺힌 사연이 있으면 풀어야 합니다. 죽어도 같이 죽고 매를 맞아도 같이 맞아야 되는 같은 종자로서 우리는 시련도 같이 당하고 고역도 같이 당해야 할 무리입니다.
우리는 서로 서로가 화합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탄을 중심하고 형성되어 온 이 땅의 개인이면 개인, 식구면 식구의 맺힌 것을 풀어 주어야 합니다. 또한 앞으로 다가올 민족과 국가와 세계 앞에 맺혀 있는 것을 터뜨려야 합니다.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터뜨리느냐? 이것을 터뜨리기 위해서는 나 하나를 기준 하여 나 하나의 승리로만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선 가족과 친지를 규합해야 합니다. 민족적인 승리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종족을 규합해야 하며, 국가적인 승리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민족을 규합해야 합니다. 또 세계적인 승리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국가를 규합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도 세계적인 종교가 빨리 나타나야 합니다.
자기 개인을 중심삼고 자신만을 중요시하는 종교는 발전이 없습니다. 유난히 핍박을 많이 받으면서도 그 개인과 전체가 서로 협조해서 싸워 나가는 종교가 발전합니다. 바울이 소아시아의 일대를 돌아다니며 전도했는데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이 그를 불러 세우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사소한 문제를 중심삼고 원수를 갚아서는 안 됩니다. 풀어야 합니다. 우리끼리 문제가 있다면 우리끼리 풀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기성교회가 통일교회를 원수시해 왔습니다. 선생님은 그들을 원수로 생각하지 않는데 그들은 원수로 대하고 있습니다. 벽돌담이건 콘크리트 담이건 전부 다 헐어 버려야 합니다. 오늘의 통일교회 교인들 몽땅 데려가려면 데려가고 그 대신 마음의 문을 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를 원수처럼 대하지만 우리는 그러지 말아야 합니다. 누가 승리하든 시일이 가면 원수도 흘러가는 것입니다. 원수의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은 그 마음을 풀어야 합니다. 원수를 품고 가는 사람은 광명한 낮으로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누가 주인이 되나 보십시오. 끝날에는 보따리를 바꿔 쥐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앞으로 있을 최후의 한 날, 즉 세계적인 원수, 천주사적인 원수를 갚아야 할 그날을 위해서 다짐해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패의 소굴, 배신자의 소굴을 향하여 우리는 각 분야에서 준비하고 가야 합니다. 그때까지는 참고 가야만 합니다. 이런 길이 정상적으로 하늘이 가는 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적으로 희생되어 더 큰 것을 위해서 희생하고, 더 큰 것을 위해 봉사하고, 더 큰 것을 위해서 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길을 닦아야 하는 것이 신앙의 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통일교회 선생님에 대해 ‘아! 그 통일교회에 가면 고생만 시킨다.’고 합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선생님을 위해서 고생하는 사람은 천치입니다. 그렇게 했다면 망해야 됩니다. 통일교회만을 위해서 충성한다면 망해야 됩니다. 교회만을 위해 충성한다면 망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교회를 위한 역사입니까? 아닙니다. 세계를 위한 역사입니다. 통일교회도 나라를 위하고, 세계를 위하고, 하늘땅을 위해야 합니다. 먼저 자신의 교회를 위하는 것보다도 하늘땅을 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자리는 하늘땅이 세워지는 때, 심판받을 때가 오면 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원수들을 용서하신 것도 그 원수가 고와서 용서하신 것이 아닙니다. 더 큰 원수가 앞으로 올 것을 아시고 이것을 초점으로 해결 짓기 위한 그날, 하늘이 바라시는 그날을 위해 묵묵히 마음을 다짐하고 원수를 용서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직까지 기쁜 날을 갖지 못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시지만 만세에 자랑할 수 있는 기쁜 날을 갖지 못하셨습니다. 왜 그랬느냐? 역사 과정에서 개인이 민족을 이끌어 민족적으로 승리를 가져왔을 때 하나님은 일시적으로 기뻐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기쁨이 역사를 일관하여 천지를 움직이고 하늘땅을 중심으로 드높이 찬양할 수 있는 그런 기쁨이 못 됐기 때문에 그 기쁨은 한때의 기쁨에 그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런 기쁨은 흘러가는 기쁨, 내일에는 슬플 수 있는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세우셨으나 그가 실패하였습니다. 그래서 다시 노아를 세우시고 기뻐하셨지만 그도 실패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세우시고 기뻐하셨지만 그도 실패하였고, 다시 모세를 세우셨으나 그도 역시 실패하였기에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마저 뜻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지금까지 완전무결하게 기쁜 날을 맞이하지 못하신 것입니다. 물론 개인 개인을 구원해서 기쁨을 가지시기도 하셨지만 하나님이 바라시는 최고의 기쁨은 맞이하지 못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떻게 해야 하느냐? 개인을 중심삼고 온 정력을 기울이면 하나님은 그 개인에게 축복하시며, 가정을 중심삼고 정력을 기울이면 그 가정에 축복하십니다. 우리가 하는 것은 통일교회를 위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을 위하기 때문에 귀한 것입니다. 또 나를 위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을 위하기 때문에 우리는 사다리를 놓아 올라가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원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빨리 그 최후의 원수를 갚을 수 있는 그날을 맞이해야 합니다. 원수를 갚아 승리하지 못하면 메시아는 탄생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본래 원수세계에서 태어나게 되어 있는가? 원수를 전부 다 소탕하고 평화의 왕국을 만들어 놓아야 메시아가 태어나는 것이 천리 법도가 아니겠습니까? 그때까지 하나님은 싸우셔야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을 위해 싸우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갈 길을 대신해서, 우리가 살 수 있는 천국을 이루어 주시기 위해 싸우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모두가 하나되어야 합니다.
개인이 모여서 단체를 이루면, 가정을 넘은 종족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통일 종족입니다. 개인의 입장보다 가정의 입장보다 더 높은 종족적인 인연을 갖추고 나온 것이 통일교단인 것입니다. 이것을 꺾으려 할 때는 개인적인 심판 조건에 걸리는 것이요, 가정적인 심판 조건에 걸리는 것이요, 종족적인 심판 조건에도 걸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독교인들 혹은 종교인들에게 끝날까지 참고 견디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최후의 대심판날이 닥쳤을 때 어떤 조건에도 걸리지 않는 승리의 권한을 가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한 승리의 권한을 가져야 하나님 앞에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습니다. 아무런 장애물이 없는 자유 평등한 자리에서 우리 인간과 화답할 수 있는 그날을 맞이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대심판날을 세워 나오신 것을 우리는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똑똑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통일교회 교인들 가운데 자기를 중심삼은 무리가 있다면 뜻 앞에 큰 원수입니다. 이들은 개, 돼지보다 못한 사탄 새끼들입니다. 개인을 중심삼고 모여서 무슨 기도를 하고, 뭐 몰려다니고, 당치 않은 꿈을 꾸는 사람들이 있는데 전부 다 어떻게 되나 보자는 것입니다. 그건 시대적인 운세가 다….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확실히. 신앙의 본질이 틀렸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높여 놓고 타인을 대하는 것은 천륜의 법도가 아니에요. 통일교인들은 생명을 걸고 이런 것을 배격해야 합니다. 그런 무리들은 우리가 싸워나가야 할 무대에서 승패를 결정하는 데 지대한 내면적인 원수의 앞잡이인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바라시는 그 나라 앞에 자기 하나를 주장해 나오고 있습니다. 본연의 나라 앞에 저 하나를 세우기 위하여 본연의 나라를 향하여 나가는 사람들을 원수로 여기는 자가 사탄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문제를 알아야 합니다. 원수를 갚으라는 것이 아니라 그런 사람에게는 아예 접촉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각자가 갈 길이 더 급한 문제인 것입니다.
아침에 교당을 나설 때 민족을 바라보며 염려하고, 민족의 문제를 넘어서서 세계의 문제를 바라보며 염려하고, 하나님의 뜻을 염려하며 나아가야 할 것이 복귀의 길입니다. 우리들이 어떻게 하면 빨리 최후의 한 날을 맞이할 수 있을까를 염려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통일의 세계가 되는 거예요.
하나의 세계로 규합하기 위해서는 주의나 사상의 투쟁을 거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투쟁의 과정을 거치는 데는 수많은 개인과 종족․민족․국가가 동원되어야 합니다. 앞으로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를 하나로 규합하여 이끌어 나갈 수 있는 승리의 권한을 갖지 못한 종교는 역사 앞에 심판을 받게 됩니다.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사상에 그 종교가 가장 철두철미하다고 여기는 교리가 자극받는 그러한 종교로는 최후 심판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고, 대원수를 갚을 수 있는 책임을 질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대는 교차되어야 하고 사정은 부대끼게 되는 것이요 수많은 사상과 교리는 부딪치는 것입니다.
이런 환경을 거치고 몰리고 몰려도 몰린 그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오히려 몰린 사람을 동정하고 몰리는 환경을 원수로 갚겠다고 하며, 그들의 살 길을 마련해 주겠다는 종교가 있다면 그 종교는 마지막까지 남아지는 종교가 될 것입니다.
통일교인들은 서로 만나면 6천년 만에 만난 사이니, 시시한 이야기나 싸움을 해서는 안 됩니다. 만나면 우리 교회를 위한 이야기, 민족을 위한 이야기, 세계 인류를 위한 이야기를 하라는 것입니다. 식구들이 만나기만 하면 ‘잘먹고 잘살고 뭐 어떻다느니, 뭐가 섭섭하다느니, 뭐가 좋다느니’ 하며 말이 많습니다. 이래서는 안 됩니다. 좋고 나쁜 것은 자기 일개인을 중심삼고 가릴 것이 아닙니다. 자기보다 더 큰 가정을 중심삼고 좋고 나쁜 것을 가리고, 그보다 더 큰 종족․민족․국가․세계․하늘땅을 중심삼고 좋고 나쁜 것을 가릴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아벨은 무엇을 바랐겠습니까? 하나님의 소망을 바랐던 것입니다. 노아는 무엇을 바랐겠습니까? 자기 가정을 바랐겠어요? 자기 친척을 바랐겠어요? 자기 민족을 바랐겠어요? 민족을 넘어 더 높은 한 시대에 나타날 세계적인 인물을 바랐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너의 자손이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라.’고 축복하실 때 아브라함은 그 당시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벌써 마음으로는 세계를 점령한 것 같았습니다.
모세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로 궁중에서 공주의 아들로 호화로운 생활을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신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상을 중심삼고 과감하게 그의 모든 것을 희생시키기로 각오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했기에 그는 새로운 이스라엘을 지도할 수 있는 민족적인 책임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민족을 지도하기 위해서는 그 민족 앞에 나타나는 시련을 극복할 수 있고, 원수를 갚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민족을 지도할 수 있는 책임자가 될 수 있습니다.
통일교인인 여러분들은 이제부터 서로 만나서 이야기할 때, 자기를 중심삼고 자기에 대한 이야기를 할 것이 아니라 우리 뜻, 우리 교회, 우리 민족, 이 세계를 위한 이야기를 주고받아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이 민족을 구하고 이 세계를 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하나님의 한을 풀어 드릴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여러분은 시련의 역사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여러분 개인이 벗어날 수 없는 것은 물론 여러분의 후손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운명의 길에 들어서서 가는 것이 오늘날 종교의 길이요, 종교 가운데서도 핍박받고 나오는 통일교회가 가는 길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그러한 길을 가기 위해서는 사소한 문제라도 다 풀고 넘어가야 합니다. 금년에는 다 풀고 넘어가야 합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에 풀 게 있으면 다 풀어야 해요. 그가 통일교회를 믿던 믿지 않던 그와 풀어야 할 것이 있으면 다 풀어야 합니다. 종교면 종교끼리도 풀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늘 편을 대신하여 싸울 수 있는 무대를 넓히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원칙에 입각하여 작전을 변경시켜 나왔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제아무리 큰 무대라도 그 무대에서 자기를 중심삼고 자리 잡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 무대에서 더 큰 무대를 뛰어넘어 가겠다는 사상만 갖고 나가면 아무리 큰 심판날이 오더라도 그를 심판할 수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그런 사람을 맞이하는 그날이 온다는 것을 여러분은 똑똑히 기억해야 되겠습니다.
뜻 앞에 문제되는 것이 있다면 다 풀어 버려야 합니다. 또 우리의 환경 가운데서도 자기를 중심삼은 생활을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서로 만나서 자기 얘기나 하고…. 자기 중심삼고 있는 것은 그만두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언제 스스로 나를 통일교회 선생으로 모셔 주었습니까? 하나님이 영계를 통해서 다 가르쳐 주었으니 모셨지요.
자기가 자기를 세울 수 없습니다. 자기가 자기를 세울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주인이 세워 주어야지, 자기를 세워 달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주인으로부터 세움 받기 위해서는 증거를 받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늘 앞에 나가기 위해서는 개인적인 증거, 가정적인 증거, 종족적인 증거를 받아서 나가야 됩니다.
이 증거를 받으려면 원수로부터 도망해서 승리했다는 조건을 세우는 게 아닙니다. 원수가 공인하는 자리에서 그들이 자연굴복할 수 있는 내용을 가지고서야 가능하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7년간을 우리는 이 민족을 걸어 놓고 싸워 나왔지만, 1966년을 넘어서면서 지금까지 아직도 우리들이 표준했던 그 기준까지 이루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민족을 바라보며 싸우는 것은 세계적인 사탄을 한걸음이라도 따라가 대결하여 판결짓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날을 위해 먹고, 그날을 위해 움직이고, 그날을 위해 싸우고 있으니 그날이 오기까지는 지치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출발 당시부터, 감옥엘 가든 어디에 몰리든 살아 숨만 쉰다면 그것을 위하여 숨을 쉬고, 쓰러져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을 위해 죽는다는 생각으로 이 길을 걸어왔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도 천상이나 지상, 어느 때 어떤 곳에서라도 그것을 위하여 달음질칠 수 있는 환경에 적응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가야 합니다.
그래야만 갚고 싶었던 원수를 한꺼번에 다 갚을 수 있는 것입니다. 천륜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종적인 역사를 횡적으로 탕감복귀 시키기 위해 이 원리가 나온 것이요, 우리 통일교회 교인들은 이런저런 세계사적인 시련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좋은 곳이 아니고 제일 슬픈 곳을 찾아가야 합니다. 좋은 곳은 하늘과 관계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제일 슬픈 곳을 통하여 넘어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쁜 악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좋은 곳은 모두 사탄이 지배합니다. 반면에 슬픈 곳은 사탄이 싫어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인들은 제일 슬픈 자리를 되찾아 나왔습니다.
요즘 통일교인들을 전부 그런 자리에 들어가게 하여 고생시키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앞으로 어떤 자리에까지 나가야 하느냐 하면, 저 아프리카까지도 자진해서 나가야 합니다. 세계의 터전이요, 그리하여 세계의 뿌리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여러분을 보면 처량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7년노정의 마지막 길을 넘어가는 이때에 다시 한번 새로이 결의하고 재정비하여 나아가길 부탁합니다. 아시겠지요? 「예.」
아버님, 아버님께서는 기필코 공중 권세를 잡아 온 천지를 삼켜버린 대원수를 이 온 천지간에서 추방해야 할 그날을 고대하고 계시다는 것을 저희들은 아옵니다.
아버님, 아버님께서 가시는 길이 어찌 내 개인이 가는 걸음걸이와 같을 수 있겠사옵니까? 또한 아버지의 내정(內情)이 어찌 내 개인적인 내정과 통할 수 있다고 느끼겠사옵니까?
한 많은 곡절과 슬픔 가운데서도 참아 나오신 우리 아버님! 그 아버님을 바라볼 수 없는 저희들이옵니다. 아버지를 알지 못하고 달음질쳤던 어리석은 과거의 날들을 용납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달 첫 주일을 맞이하여 통일교회 신도들이 다시 한번 결속하지 않으면 안 되겠사옵니다. 세계를 심판하여 새로운 역사를 창조해 가야 할 크나큰 사명을 중심삼고, 저희들이 가야 할 방향과 개인적으로 취해야 할 생활태도를 알고 있사오니, 아버님, 그러한 날을 얼마나 고대해 왔다는 것을 저희들이 망각하지 말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님, 통일의 무리를 여기까지 몰아내기 위하여 당신은 얼마나 수고하셨사옵니까? 이제 앞으로 가야 할 저희들의 행로에는 갖은 시련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하늘이 이렇듯 곡절 가운데서 참으신 심정을 저희들이 더듬을 적마다, 아버지를 부여안고 몸부림쳐도 걷잡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눈물 흘리며 아버지를 부르고 있사옵니다.
아버지시여! 아버지의 옷자락을 붙들고 몸부림칠 수밖에 없는 타락한 후손으로 태어난 저희들을 긍휼히 보아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나이다.
아버님, 오늘도 남한 각지에 널리어 한 날의 승리를 기약하고 나가는 그들 위에 힘이 되시옵고 방패가 되시옵소서. 세계에 널리어 이곳을 향하여 기도하는 무리가 있사올진대, 그 무리가 하늘이 소원하시는 곳을 위하여 가는 무리가 되어 당신 앞에 제사장의 책임을 다하여 분향할 수 있는 제단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당신의 사연을 통할 수 있는 뭇 자녀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께서 세우신 무리를 따라 원수를 굴복시켜, 승리의 왕자 왕녀로서 축복을 받아 자랑할 수 있는 자녀를 얼마나 고대하고 계시다는 것을 저희들 잊지 말게 하여 주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통일의 제단이 비록 지극히 초라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일지라도 아버지의 심정을 중심삼고 몸부림치는 곳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하나님의 사정을 중심삼고는 피해 갈 수 없고 갈릴 수 없는 인연이 이곳에 깃들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저희들은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벌거숭이일망정 이 땅 위의 배척하는 무리에 의해 쓰러지더라도 당신의 이념과 심정과 사랑만을 부여안고 뒤넘이치는 곳이 되면 이곳은 기필코 당신이 찾아올 수 있는 곳인 줄 알고 있사오니, 이 인연을 따라가는 당신의 자녀들이 한 사람도 낙오되는 사람이 없도록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남한 각지에 널리어서 저희들이 표방하고 나선 시기적인 사명을 중심삼고 몸부림치고 있사옵니다. 혹자는 뜻을 위해 혹자는 원수의 첨단에 서서 새로운 방향으로 싸우고 있사오니, 저희들이 전개하는 싸움터가 아버지 앞에 영웅의 법칙이 되게 하시옵고, 당신이 세워 놓으신 뜻 앞에 당신이 가려서 찾아오실 수 있는 길을 삼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1966년 이 해의 마지막 날까지 저희들이 계획했던 전부가 아버지 뜻과 더불어 일치가 되게 하여 주시옵고, 소망의 한 날 앞에 제물적인 조건을 바쳐 아버지를 위안해 드릴 수 있는 계획과 저희들의 움직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여기에 모인 당신의 자녀들이 지구상에서 원수를 처단한다는 크나큰 뜻을 중심삼고 하나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느끼면서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그곳으로 달음질치는 용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시간 이곳을 위해 기도하고 바라보고 있는 수많은 민족들 위에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고, 생명의 인연을 그들의 생활 가운데에 나타내 주시옵고, 개척자의 사명을 다하는 그들에게 심정적인 뒷받침이 되시어서 하늘이 그 인연을 통하여 찾아올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날의 모든 것을 친히 맡아 주관하시옵고 받아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오며, 제가 원하는 기준을 아버지께서 아시오니 여기에 모인 자녀들 그 기준에 갈 때까지 낙오자가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험산준령을 달리는 고비 길에 있더라도 줄을 내리시어 그 길을 무난히 돌파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자기 스스로 믿고 갈 수 없는 길이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사오니, 하늘과 더불어 의논하고 앞뒤를 살피면서 가는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숨은 가운데 당신과 의논하고 당신께서 분부하신 깊은 자리를 가진 당신의 자녀들이 되어야겠사오니 그런 자리에 찾아오셔서 인연 맺어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한국 일본 미국 독일 이 4개국을 위주한 40개국과 120개 성지를 택정한 인연이 그 나라의 선교국의 인연과 통하여, 땅 위의 인연을 통일시키고 새로운 인생의 방향을 갖추어 아버지께서 소원하시는 곳으로 몰아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날에 원하는 전부를 아버지께서 친히 맡으시옵고 이 해를 거룩하게 하시옵소서. 분별된 이 해와 이 기간을 바쳐드릴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이 모든 말씀 참부모의 성호 받들어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예수님의 한을 푸는 것이 7년노정의 목적입니다.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먼저 상대이념을 세워야 합니다.
예수님이 상대이념을 세우기 위해서는 사탄을 분리해야 했으며 그 사탄을 분리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같이 제자(자녀격)들을 사랑했다는 조건을 세워야 했습니다. 그래서 자녀 입장인 제자들을 상대이념의 입장에 세워 놓고, 부모의 입장에 있는 예수님이 그들보다 먼저 결혼을 해야 했습니다. 그것이 복귀의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1960년도 이후의 이 7년노정은 선생님의 21년노정이 끝나는 마지막 7년노정입니다. 이 제1차 7년노정을 걸은 사람은 선생님과 같이 21년노정을 걸은 입장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한 자녀를 축복하기 위해서는 3인 내지 4인의 자녀를 세워 놓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 자녀를 축복하기 위해서는 12자녀를 세워야 합니다. 12자녀를 세운 기대 위에서 3자녀의 축복을 할 수 있습니다. 선생님이 예수님의 입장에 서기 위해서는 12수의 중심으로 서야 합니다.
선생님이 성진이를 버리고 평양 전도를 출발한 것은 자식보다 제자를 하나님같이 사랑했다는 입장에 서기 위해서였습니다. 1960년도 이후의 제1차 7년노정은 일시에 개인복귀, 가정복귀, 종족복귀, 민족복귀를 하는 노정입니다. 그래서 제1차 7년노정에 참여하는 것은 이런 복귀의 조건을 일시에 찾아 세우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의 한을 풀고 제2이스라엘을 대할 수 있는 입장에 서기 위한 노정입니다.
자기가 뜻을 위해 일할 것을 선서하고도 7년노정의 책임을 완수하지 못하면 다시 7년 탕감노정을 걸어야 합니다.
선생님의 21년노정은 레아와 라헬을 세운 야곱의 21년노정을 완성기에서 탕감복귀하는 기간입니다.
선생님이 이 7년 기간 내에 기성교인을 세우지 않은 것은 그들이 뜻을 반대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방인이나 불신자들을 찾아 세우는 것입니다.
선생님 시대에 사는 사람은 과거, 현재, 미래의 3시대와 공존하는 사람입니다. 이 7년으로 선생님의 21년노정이 끝나기 때문에, 부채(負債)를 지고서 이 기간을 넘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에 이 우주 단상을 6일 동안 창조하시고 7일째는 안식하시겠다는 구상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섭리 역사는 천지 창조 전부터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원리를 통해서 배운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7수를 중심삼고 천지 창조의 여러 단계를 완성하려 하셨으나,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이것이 연장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6천년의 성경 역사를 중심삼고 지금까지 복귀섭리를 종결시키기 위해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느 때든지 특별한 섭리 과정을 새로이 정비하여 세우기 위해서는 어떠한 기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지 몇 년이 됐습니까? 만 21년 됐지요? 21년은 섭리상 중대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21년이 지났기 때문에 국운이 펴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국제적인 모든 문제가 한국에서 벌어져 나간다는 것입니다. 머리만 잘 쓰면 세계적인 파동을 일으킬 수 있는 시대권 내에 들어온 것입니다.
천운이 돌아가는 데는 자기 멋대로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일월성신, 춘하추동도 전부 다 천리법도를 따라 돌아갑니다. 원칙을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한 궤도를 따라서 그 순위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반드시 어떤 법도에 의해서 움직여 나가는 것입니다.
개인의 일생을 보면 유아시대로부터 소년시대, 장년시대, 노년시대로 넘어갑니다.
어제에 살던 나도, 오늘에 사는 나도, 내일에 살 나도 나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거기에 무슨 차이나 간격 혹은 무슨 단계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까? 여러분은 모르지만 일생을 중심삼고 보면, 어떤 사람은 소년시대가 봄절기와 같은 운세에 처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소년시대에 부모의 혜택을 받든가, 특별한 환경의 혜택을 받았을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청년시대에 봄절기로 출발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요, 장년기나 노년기에 봄절기로 출발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때는 다르지만 사람마다 봄절기와 같은 운세를 비롯하여 여름, 가을, 겨울과 같은 운세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이 전부 한 계통으로 돌아가면 평등할 텐데, 이것이 엇바뀌어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춘하추동으로 돌아가는데, 어떤 사람은 동추하춘으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올라가는데, 어떤 사람은 내려온다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그것은 선악의 역사적인 배경에 따라서 생애의 양상이 좌우되기 때문입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여러분의 조상들 중에는 선한 조상도 있을 것이며 악한 조상도 있을 것입니다. 그 차이가 천태만상인데, 그 영향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선은 올라가려고 하는 것이요, 악은 내려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일을 했을 때, 그 일에 대하여 양심에 가책을 받으면 올라가요, 내려가요? 좋을 때는 어떻습니까? 부풀어오르는 것입니다. 천지의 이치가 그렇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악한 사람은 대개 고개를 숙이고 땅바닥만 내려다보고 다닙니다. 그러니 쪼그라드는 것입니다.
도적질하는 사람들이 기분이 좋아서 합니까? 발발 기면서 합니다. 그렇지만 좋은 일이 있고 신나는 일이 있으면 어때요? 팔이 내려갑니까, 올라갑니까? 올라가는 것입니다. 입이 벌어져서 동네방네 소문이 난다는 것입니다. 잠시 그러다 마는 것이 아니라 좋으면 손도 발도 계속 올라가는 것이요. 나쁘면 계속 내려가는 것입니다. 또한 선은 풀리는 것이요, 악은 묶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천지의 이치이기 때문에 역사는 그 궤도를 벗어나서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 상태가 360도 각도에서 45도, 혹은 90도로 벌어져 입체적인 형태를 갖추어서 부딪치고 부서지고 다시 만나고 하면서 천태만상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운행권 내에 들어가서 자기의 입장을 자로 재어 그것만 들여다보고 이 세상은 불공평한 세상이요, 악한 세상이요, 못 살 세상이라고 단언하고는 자기의 일생을 무의미하게 포기해 버린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이 우주의 법칙을 몰라서 그러는 것입니다.
하루에도 춘하추동이 있습니다. 아침 낮 저녁 밤, 이것이 바로 춘하추동인 것입니다. 천지 이치가 다 그렇습니다. 일년 사계절 동안 지구가 태양을 공전하는 법도에 따라 거기에 존속하는 모든 것은 그 혜택권 내에 들어 있기 때문에, 그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필연적인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 자신이 올라가는 운세에 있는가, 내려가는 운세에 있는가를 보고, 조상의 공적을 타고났는가, 못 타고났는가를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남보다 3배, 혹은 그 이상을 수고하고 더 열심히 정성을 들여도 안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내려갈 운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 내려가고 나서야 올라가는 것입니다. 이럴 때 정성을 들이면 빨리 내려갑니다. 내려가는 사람이 정성을 들이면 거기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더 빨리 내려간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악한 자들이 정성을 들이면 급살 맞는 일이 벌어지든가, 자기 아들이 죽든가 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 벌어짐으로 해서 탕감이 빨리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올라가는 운세에 있는 사람이 정성을 들이면 그 배가 되는 속도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막 12:30)고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첫째 계명인데, 하나님을 사랑해서 무엇을 하자는 것인가? 하나님을 점령하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주를 점령하는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우주적인 인연 가운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복귀섭리를 하시는 데에 있어서 인간을 구원한다면 어떻게 구원할 것인가? 그냥 그대로 잡아당겨서는 구원이 안 됩니다. ‘너희들 지금 이렇게 살고 있으니까 전부 다 나를 잡아.’ 하며 잡아당긴다면 어찌할 수도 없는 떨거지들이 딸려옵니다. 그러면 그러한 사람들을 빼내야 하는데 어떤 사람은 다리부터, 어떤 사람은 머리부터, 어떤 사람은 옆구리부터 빼 내야 하는 등 천태만상입니다.
그러면 왜 빼내야 하느냐? 여러분 각자는 역사적인 배경이 다 달라서, 그것이 현 생활 무대에 전개되어 나타나는 현상도 다릅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일생에 각각 다른 곡절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복잡다단한 복귀섭리를 한꺼번에 다 할 수 없기 때문에 빼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역사 가운데에 어떠한 한 사람을 중심으로 세워 복귀섭리 역사를 해 나오십니다. 복귀섭리를 하는 데에는 개인복귀섭리에서부터 가정복귀섭리, 종족복귀섭리, 민족복귀섭리, 국가복귀섭리, 세계복귀섭리, 천주복귀섭리를 거쳐야 합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하나님에게까지도 복귀섭리과정을 거쳤다는 조건을 세워야 합니다.
이런 말 처음 듣지요? 하나님에게까지도 복귀섭리 과정을 거쳐야 된다는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하나님은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섭리를 하시고 계시기 때문에 구원섭리가 끝나는 날까지, 즉 인류가 완전히 복귀되는 날이 오기 전까지는 편할 수도 없고 기뻐할 수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아직까지 하나님의 마음이 춤출 수 있는 그날을 맞이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에게까지도 복귀섭리 과정을 거쳤다는 조건을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천지의 대주재이신 하나님이 이날도 내 날이요, 오는 날도 내 날이요, 이 세계도 내 세계라고 하면서 영원무궁토록 기뻐하며 춤출 수 있는 그날이 되면, 세상에 있는 모든 양심적인 사람들이 아무리 독소(毒素) 가운데 잠겨 있었더라도 그 독이 다 풀어져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우주는 하나님이 그렇게 기뻐할 수 있는 날, 하나님이 웃을 수 있는 그런 환경을 맞이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복귀섭리 과정 속에서 시련과 도탄 가운데서 신음하는 이 인류를 붙안고 뒤넘이쳐 나오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수심의 하나님이요, 근심의 하나님이요, 걱정의 하나님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한 하나님께 우리의 사연을 호소한다 해도 그 하나님은 우리를 평화의 해방권 내로 옮겨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정성과 우리의 정성을 모으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지금 해방을 맞자는 것이 아니라, 이 시대를 지나 앞으로 창건할 천국에 대한 이념을 바라보고 나가자는 것입니다. 이 천국은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섭리의 목적이 되고, 타락한 인류가 지향하는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정성을 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정성들이는 법도를 알아야 합니다. 삼강오륜이 기록된 유교 경전에 잘 쓰여 있습니다. 그런 사상도 다 정성들이는 법도를 알려 주기 위해서 있는 것이라고 봅니다. 하나님도 그 방향으로 섭리를 해나간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최고로 소망하는 것은 무엇이고, 하나님이 최고로 소망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복귀섭리의 과정에 머무는 것도 아니고, 타락권인 이 세상에서 사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러니 그 소원이 무엇이냐? 그러한 틀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벗어나는 데는 그냥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얽혀 있는 역사를 모두 풀고서 벗어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목적도 거기에 있고, 성경을 공부하는 목적도 거기에 있습니다. 성경을 보게 되면 3분의 2가 역사서입니다. 왜 그러냐? 그것은 얽혀 있는 역사를 풀어야 되기 때문입니다.
푸는 데는 개인적으로 풀어야 되고, 가정적으로 풀어야 되고, 종족적으로 풀어야 되고, 민족적으로 풀어야 되고, 국가적으로 풀어야 되고, 세계적으로 풀어야 되고, 천주적으로 풀어야 됩니다. 나아가 하늘땅이 함께 풀어야 됩니다. 그것을 다 푼 후에는 심정의 세계에까지 들어가서 해방의 원천을 만들어 놓아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천국이 도래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왜 사랑을 갖고 왔습니까? 심정의 세계를 펴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도리를 가르쳤지만, 예수님은 개인적인 심정의 터전을 어떻게 닦으며, 가정적인 심정의 터전을 어떻게 닦으며, 종족적, 민족적, 국가적, 세계적인 심정의 터전과 하나님에 대한 심정의 터전을 어떻게 닦느냐 하는 것을 가르쳐 주지 못하고 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감추어져 있는 심정의 세계를 갖고 이 땅에 다시 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젊은이들을 가만히 보면, 얼굴이 불그스름해 가지고 높은 산도 한걸음에 뛰어 넘을 수 있을 것 같은 열망에 벅차 있습니다. 그러면 눈앞에 보이는 그 산만 넘을 것이냐? 모르는 사람은 저 산만 넘으면 된다고 생각하겠지만, 그 산을 넘고 나면 또 산이 있습니다. 그 산을 넘어도 또 다른 산이 있고 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가장 높은 산의 꼭대기까지 올라가야 합니다. 그러나 꼭대기에 다 올라갔다고 거기서 잠을 자서는 안 됩니다. 꼭대기까지 올라갔으면 평지로 다시 내려와, 세계의 산맥을 향해 호령할 수 있는 자리에서 잠을 자야 합니다.
잠은 꼭대기에서 자는 것이 아니라 맨 밑 평지에 내려와서 자야만, 그 사람은 모든 산정을 승리적으로 넘은 자로 인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꼭대기에 올라가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산을 오르고 넘어서 골짜기에 있더라도 그 산을 주름잡고, 세계의 모든 산에 호령하더라도 ‘당신 앞에는 할 말이 없습니다’라고 할 수 있는 자리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야 낮은 골짜기에 있더라도 세계의 모든 산을 정복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꼭대기에 올라갔다고 정복한 것이 아닙니다. 꼭대기에서 내려오다 죽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왜 이 말을 하느냐? 복귀섭리도 이와 똑같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인간들을 보게 될 때, 자기 나름대로 젖 먹던 힘까지 다하고 정성을 다해 한 고개만 넘으려 합니다. 그러나 간신히 그 고개를 넘더라도 그곳이 태평왕국의 성문을 앞에 두고 안식하고 환영할 수 있는 터전이 못 된다는 것입니다. 그 고개를 넘고 나면 또 다른 고개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고개가 지금까지 넘던 고개보다 좀 낮으면 문제가 안 될 텐데, 올려다보면 더 높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한 고개, 두 고개, 세 고개를 넘었다면 그 다음엔 몇 고개나 남아 있을 것 같습니까?
한국 민요 중에 아리랑 노래가 유명하지요? 선생님이 아리랑 해설가는 아니지만 노래가 끝나는 부분에 사랑동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천국을 말하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그렇게 생각한다고 하니까, 통일교회 문 선생이라는 사람이 민요를 잘 모른다고 할 거예요.
삼천만 민족 누구보다도 잘 안다고 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고개가 무엇입니까? 고개를 잘 넘어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고개는 열두 고개인데, 여러분은 열두 고개를 넘었습니까? 넘지 못했으면 아리랑 고개나 불러요. 여러분은 아리랑 고개를 몇 고개나 넘었습니까? 아리랑 고개가 꼬불꼬불하다고 아리랑 고개입니까? 그것은 아리랑 고비이지, 아리랑 고개가 아닙니다. 그럼 넘어가는데, 내려가면서 넘어간다고 할 수 있습니까?
선생님은 삼천만 민중이 이 고개를 아직 못 넘어 봤다고 생각합니다. 몇 백만이 수없이 불렀는지 모르지만, 거기를 완전히 넘어 본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넘어 봤습니다. 그것이 실례가 됩니까? 앞으로 그럴 수가 있다는 한국의 민요와 창은 참 잘 지어졌습니다. 심청전이나 춘향전을 보면, 복귀섭리를 설명하는 데 적절한 예화(例話)가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춘향이와 이도령의 사랑이 얼마나 멋있습니까? 그리고 심청이가 부모를 모신 그 효성 얼마나 갸륵합니까? 이와 같이 앞으로 올 본연의 세계에서는 주님을 그렇게 맞이해야 하고, 참부모님을 그렇게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리랑 고개를 넘어서 승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리랑 고개를 넘어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타락하여 넘어왔으니, 넘어가야 합니다. 지금은 타락되어 그렇지만, 본래 인간은 산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에덴동산은 평지가 아닙니다. 선생님은 수평세계의 불기둥과 같은 높은 산야의 꼭대기에 아담 해와를 지어놨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조상인 아담 해와가 바른쪽의 선한 곳으로 넘어가야 했는데, 그들은 창조하지도 않은 무원리권 내로 넘어갔다는 것입니다. 처음 산정에서 출발할 때 잘 넘어갔으면 순리적으로 목적지에 도달했을 텐데, 처음에 잘못 넘어갔기 때문에 역리적으로 수고의 노정을 거쳐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왔다 갔던 아벨,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등 역대의 수많은 조상들, 또한 세례 요한이나 예수님, 그리고 수많은 기독교 순교자들도 이 고개를 넘기 위해 몸부림을 쳤지만 아직까지 그 절정에서 해방의 기쁨을 맛볼 수 있는 그날을 맞이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날이 언제냐? 주님이 오시는 날입니다. 그럼, 주님이 오실 때 어디로 오신다고 했습니까? 기독교인들은 감람산 꼭대기에 오실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통일교회 식구들 중에 어떤 사람이 ‘주님이 어디로 오십니까?’ 하고 물어보니까 ‘산으로 온다.’고 대답하기에, ‘감람산이요, 백두산이요, 히말라야의 산이요, 금강산이요, 무슨 산이요?’ 하고 물으니 ‘부산으로 오신다.’고 하더라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산은 산이라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자고로 수많은 도인이나 도의 길을 가는 사람들은 전부 산과 인연을 맺고 있습니다. 그것은 산꼭대기에 올라가야 되기 때문입니다. 올라가기 위해서는 수고를 해야 합니다. 내려올 때는 좋아서 내려올지 모르지만, 올라갈 때는 지팡이를 짚고 생명을 걸고 올라가야 됩니다. 이런 천리적인 노정을 거쳐가야 할 길이 있기에,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오시리라고 믿고 바라는 주님도 산꼭대기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오실 때에는 어디로 오실 것인가? 평화와 해방의 노래가 울려올 수 있는 곳으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만민이 그날을 흠모하여 역사적인 곡절과 역사적인 탕감을 참고 견디며 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 고갯마루에 점점 더 가까이 올라가는 때가 끝날이라는 것입니다. 끝날이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두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주님을 맞은 사람들은 아리랑 고개를 넘어가고, 주님을 못 맞은 사람들은 지옥 길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아리랑 고개가 몇 고개입니까? 열두 고개지요? 그런 의미에서 보면 아리랑은 정말 잘 지어졌습니다.
일 년에 열두 고개를 넘으려면 한 달에 한 고개씩 넘어야 됩니다. 일 년이 회생춘(回生春)하기 위해서는 열두 고개를 넘어야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주도 회생춘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고비를 거쳐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 세계에 새로운 봄절기를 펴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열두 달의 모든 절기가 다 들어 있기 때문에, 인간 대표형인 12사도를 품을 수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반대할 때는, 그들의 마음을 맞춰서 넘어섰다는 조건을 세우기 위해 예수님께서 종노릇을 하셨던 것입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긴 이치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예수님이 다시 돌아와서 새로운 봄날을 맞이할 수 없고, 탕감의 고개 고개를 넘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12제자인 것입니다. 영계에서도 역시 12진주문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12진주문을 수시로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는 12사도를 찾아 세워, 중앙에 앉아 나를 모시라고 명령할 수 있는 위치를 결정해야 했던 것입니다.
종적으로는 그렇게 나오지만 횡적으로는 7단계를 거쳐 나와야 됩니다. 복귀노정을 보면, 예수님 이후에 7단계를 거쳐 나왔습니다. 그래서 7년 기간은 언제나 새로운 문제를 들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독교인들은 어떤 고개를 넘어가야 하느냐? 사랑의 고개를 넘어가야 합니다. 사랑이야말로 좋은 것으로 나 자신을 위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사랑하고 대했다면 이 세상은 벌써 망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공평합니다. 엇갈리고 올라가고 내려갈 때도 있겠지만, 세계적인 모든 일에 대해서 공평히 대해 나오셨다는 것입니다. 좋은 것이 있으면 나쁜 것도 절반이 있습니다. 하루에도 절반은 낮이고 절반은 밤입니다. 이렇게 상대적인 관계이기 때문에, 좋은 사람이 있으면 나쁜 사람도 섞여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연을 지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지배하는 것은 선한 권내에서의 지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낮은 하나님이 지배하고 밤은 사탄이 지배하기 때문에, 밤을 하나님이 주관할 수 있는 기준에 세우기 위해서 성도들이 어둠의 세계로 들어가 청소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정비를 하기 위해서 종교를 중심삼고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고, 수많은 나라와 수많은 국민들이 피를 흘려가면서 동원된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오면서 성경으로 보아 6천년 동안 역사가 진행되어 나왔습니다.
복귀 과정에서 하나님에 의해 세움 받은 인간들이 책임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에, 완전복귀의 선까지 올라서는 데는 역사의 시발로부터 그 거리가 점점 멀어집니다. 그와 더불어 사악한 인류가 증가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는 외적인 역사부터 복귀섭리를 해 나오셨으나, 이제는 내적인 역사도 복귀할 수 있는 시대로 들어섰습니다. 즉 안팎이 서로 대할 수 있는 때가 왔습니다. 그래서 좌익과 우익, 적과 백이 상대적인 세계가 되어 있는데, 끝날에 가면 정리해야 됩니다. 여기에서 백(白)은 안전을 표시하는 것이고, 적(赤)은 위험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좌(左)는 그른 것을 표시하는 것이요. 우(右)는 옳은 것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천륜의 공법을 대하고 있는 존재세계의 모든 것들의 본심은 천법을 유린하고서는 본연의 자리에 설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자리에 가면 직고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공산주의․좌익․적색주의․흑색주의라는 이름을 갖고 나온 것은 그 이름 자체가 사실을 직고하는 표시체로써 적합하기 때문입니다. 실체 앞에 있어서도 이것들은 하나의 대상이 되어 민주세계에 대항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좌우가 상응적인 좌우가 아니라, 상극적인 좌우로 되어 있습니다. 상응이 생기고 난 후에 상극은 벌어질 수 있으나, 상극이 생긴 후에 상응은 절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천지 우주가 창조되던 당시부터 상응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에 상극도 존재 할 수 있으나, 만약 상극이 먼저 있었다면 상응은 존재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근본이 파탄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근본에 있어서 상응이 있으면 상극은 화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사방이 붙을 수 있는 것입니다. 플러스(+)가 있어 가지고 마이너스(-)가 있으면 서로 붙을 수 있으나 어느 한 쪽을 빼면 자기들끼리는 상극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은 상응으로 출발했던 것이 아니고 상극으로부터 출발했기 때문에, 즉 상극적인 씨를 뿌렸기 때문에 상극적인 결과를 거두는 것이 자연적인 이치요, 역사적인 이치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마음은 무엇을 해야 되느냐? 천리법도를 순리적인 법도로 맞을 수 있는 본성을 갖기 위해서 상응적인 자아를 완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이 상극하느냐, 상응하느냐? 상극일 때는 상응은 그 자리에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상응으로부터 출발하면 상극은 존재할 수 있으나 상극으로부터 출발하면 상응은 절대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의 이념과 행동이 아무리 아름답다 해도 상극적인 사람의 종말은 파탄인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들이 확실히 알아서 생활철학으로 적용하면 인생에 있어서 실패하지 않습니다. 이 원칙을 자기 생활에 응용해서 천륜에 맞춰 나가는 사람은 결코 천륜의 반역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천륜 앞에 순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도는 무엇이냐? 마음과 몸이 상응하는 것입니다. 선은 무엇이냐? 나를 중심삼고 이웃과 더불어 상응하는 것입니다. 평화와 평등은 모든 인류가 바라는 공동목표입니다. 그 세계는 무엇으로부터 출발할 것인가? 상응 상합(相應相合)할 수 있는 도와 진리로부터 출발해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진리는 무엇이냐? 하늘과 땅이 상응할 수 있고, 상하 고저 전후 좌우를 막론하고 입체적인 세계에 머무는 어떠한 존재와도 상응할 수 있는 원동력과 내용이 갖춰진 세계관과 인생관과 생활관을 가질 수 있는 주의만이 인류 세계의 종말에 남을 수 있는 절대적인 진리일 것입니다. 역사는 상응으로부터 출발한 것이 아니고 상극으로부터 출발했으니, 이 역사는 파탄과 비애로 막을 내리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상응의 이념을 가지고 인류를 부르고 있는 하나의 절대자가 없다면, 인류역사는 절망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종교의 이념을 인간이 알건 모르건 관계없이 이상의 한 날을 작정하시고, 메시아를 새로운 우주적인 상응의 주체로서 우리에게 보내시어, 하나의 이념을 중심삼고 지금까지의 문화와 역사와 전통 등 그 모든 것을 능가할 상응적인 인생관, 상응적인 세계관, 상응적인 생활관을 새로이 세워 주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험난한 상극세계의 기원에서부터 역사 종말시대에 이르는 이러한 사연이 있다는 것을 보게 될 때,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인생의 출발은 어디서부터 시작되느냐?
사탄과 하늘과의 두 경계선에서 내가 하늘 편인가, 사탄 편인가는 무엇으로 결정짓느냐? 결정지을 수 있는 원칙이 있어야 됩니다. 그것은 내게 상응할 수 있는 요소는 몇 퍼센트이고, 상극적인 요소는 몇 퍼센트인가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상응보다 상극이 1퍼센트라도 더 앞서 있거든 그것을 없애야 합니다. 입이 그러면 입을 꿰매고, 다리가 그러면 다리를 자르고, 눈이 그러면 눈을 빼고, 손이 그러면 손을 잘라 버려야 합니다. 선생님이 요전에 사람이 많은 어떠한 장소에 갔었습니다. 선생님 앞쪽에 어떤 아주머니가 앉아 있었는데, 사방으로 나쁜 냄새를 풍기고 있었습니다. 그 아주머니 옆에 한 남자가 있었는데, 그 남자가 보는데도 염치 좋게 머리를 긁는데 정말 굉장하더군요. 그 손이 무엇 하는 손이에요? 손가락을 보니 고양이 발톱 같아 가지고 가슴이 섬뜩했습니다. 여자들 손이 더 그래요. 조금 전에도 핏줄 얘기를 했지만, 독사의 핏줄을 타고나서 그렇습니다. 이렇게 돼먹지 않은 핏줄을 타고났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이런 패들을 잡아가지고 그러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들 자체 내에 상응과 상극 중에서 어느 요소가 많으냐 하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둬야 합니다. 천국은 하나님이 보내주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이 가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좋은 것이 있으면 감정을 참지 못해서 난리를 치지만 그럴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 새로운 무엇을 생각하는 뭔가 다른 여러분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요소가 얼마나 있느냐에 따라 후손에게 미치는 영향이 큽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여러분의 후손들이 복 받기를 바라거든 상화상응(相和相應)할 수 있는 본질적인 요소를 갖춰 가지고 기도를 해주고 하면 하나님께서도 그것을 좋아하신다는 것입니다.
천국에 가고 못 가는 것은 자신의 생활에 달려 있습니다. 좋은 것이 있으면 내 것으로 하면 안 됩니다. 통일교회 왔다고 전부 좋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본질에 있어서 그런 요소가 얼마만큼 있느냐, 여러분의 선한 중량이 얼마만한 가치를 지녔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더욱이나 종교의 길을 가면서 욕심을 부리면 안 됩니다. 내 것만 하나님이 좋아할 것 같아요?
우리는 상극이 되었으니, 본래의 상응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를 들어, 두 손의 등이 붙어 있다면 이 손이 상응이겠습니까, 상극이겠습니까? 서로 붙어 있으니 떼어 놓아야 합니다. 상응이 되려면 붙어 있는 것을 꺾든가 부러뜨리든가 해서라도 떼어 놓아야 합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잘못 달라붙어 있다는 것입니다. 개인도 달라붙었고, 가정도 달라붙었고, 사회도 달라붙었고, 민족, 국가, 세계, 그리고 그 문화와 전통까지 달라붙어 있습니다. 그럼 누가 떼어야 합니까? 여러분들이 다 떼어 놓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일 바란 것은 ‘누구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백 퍼센트를 넘어 120퍼센트도 넘게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자기의 소유를 사랑하는 것만큼 사랑하게 되면, 사탄권 내의 사랑 이하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받는 데 있어서의 동기가 됩니다.
하나님은 최고의 것을 대하여 왔습니다. 상응은 최하에서는 없습니다. 최고의 기준에서부터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먼저 상응해야 되겠습니까? 여러분 자신부터 상응해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서 떨어져 나왔기 때문에 최하의 자리에 서 있습니다. 멸망의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사탄의 혈통을 받고 태어났으니 사탄의 아들딸입니다. 그런데 사탄한테 아들딸 취급을 받았습니까? 못 받았습니다. 사람의 본성에는 사랑의 맛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기 때문에, 사탄이 인간들을 아들딸로 취급하여 사랑하게 되면, 그 마음은 선의 자극을 촉구하는 것으로 나타나 그 사랑이 하나님에게로 빨리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사탄이 사랑하면 할수록 사탄을 멀리 하고 하나님을 찾아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탄이 혈통적 관계에서는 타락한 인간의 아비의 입장에 있지만, 사랑으로 대하지 못하고 강제와 강탈 위주로 나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므로 사탄이가 좋아하는 모든 것을 박탈해야 합니다. 사람은 선을 좋아하고, 사랑을 좋아하며, 평화의 안식처를 좋아합니다. 안식하는 것은 보금자리와 같이 포근한 자리로서 봄과 같은 곳입니다. 천지가 화합하는 그런 자리입니다. 그러한 분위기에서 사랑만 해주면, 사람은 사탄의 품을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탄의 자식으로 태어났지만 사탄에게 자식 취급도 못받고, 사탄의 종의 자식 취급도 못 받는 비참한 인생이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생들이 어느 한 날 사탄 앞에 종으로 취급받아도 기쁠텐데, 어느 한 날 사탄의 양자로 취급받는 것이 소망 중의 소망일 텐데, 어느 한 날 사탄의 자식으로 사랑을 못 받은 것이 한(恨)이라면 한일 텐 데…. 악한 원수의 품에서 그런 정(情)도 못 받고, 그러한 사랑의 이념도 체험하지 못한 인간 앞에 하나님은 찾아오셔서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처음부터 자녀의 사랑을 해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종의 취급도 못 받는 인간을 종의 종 자리에서 하늘과 인연을 맺게 한다는 것입니다. 즉 사탄이 버린 것을 하나님이 취해다 종의 종의 자리로 인연을 맺어준다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 앞에 종의 종의 인연을 맺을 수 있다는 이 은사야말로 천지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보화입니다. 비록 종의 종이지만 여기에서 연단해서 사탄도 공인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사탄도 ‘옳습니다. 그는 내가 아무리 분석하고 시험해 봐도 틀림없이 하나님의 종의 종 자리에서는 제일가는 존재입니다.’라고 공인하게 될 때,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중심삼고 종의 단계로 올려서 종의 민족을 편성해 나가는 것입니다. 노아 때부터 이렇게 해 나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종들을 중심삼고 이스라엘 민족을 편성하여 섭리해 나오신 것입니다.
전세계의 양심적인 사람을 기준으로 하여 종의 자리에 설 수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대표적인 사람을 하나님이 공인하여 양자의 자리에 세웠을 때, 사탄도 ‘옳소이다. 그는 하나님의 양자가 응당히 될 수 있는 자격을 안팎으로 갖추었습니다.’ 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 합니다. 하나님이 ‘너는 내 종 중에서 양자될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해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탄이 공인하는 증명서가 있어야 합니다.
그다음에는 양자의 인연을 중심하고 세운 이스라엘 민족에게 예수를 보내셨으니, 이스라엘 민족이 그 예수를 맞아서 하나되었으면 자녀로서 접붙여지는 직계의 인연을 갖추었을 것인데, 예수를 몰라보았기 때문에 양자의 인연을 신약복음이 대신해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접붙이려고 해도 본 줄기가 없습니다. 본바탕 즉 참감람나무가 없는데, 돌감람나무에 어떻게 접붙일 수 있겠습니까? 봄절기가 와야만 합니다.
이래서 기독교는 역사시대에 수많은 인류와 더불어 비참한 운명을 개척하며 참감람나무를 찾아 나오는 역사를 거친 것입니다. 참감람나무는 곧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 아들이 오면 그분의 진액을 받고 가지를 받아야 합니다. 그 가지에 자신을 접붙여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잘라서 접붙였다는 것을 사탄이 보게 될 때, 역사시대의 모든 선조들이 탕감조건을 제시했다가 사탄에게 걸려 넘어져서 지금까지 맺혀 있는 역사적인 조건이 그 자리에서 전부 다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좋은 옥토, 포근한 보금자리와 같은 터전 위에서가 아니고 돌짝밭과 같은 곳에서 접붙임을 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내용이 지금까지 사탄세계에 없는 본질과 본성의 내용을 갖춘 것으로, 새 시대에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는 증명서를 사탄에게서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마음대로 해주실 것 같으면 6천년 전에 다 해주셨다는 것입니다.
나의 경우, 형무소에서 나오려면 판사가 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누가 해 주느냐? 사탄, 사탄이 해준다는 것입니다. 공판정에서는 검사가 사탄입니다. 그러므로 재판정에서 검사의 공인을 받지 않으면 못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탄의 공인을 받지 않으면, 즉 판사의 정당한 판결을 받았더라도 하나님은 ‘넌 내 아들이다. 내가 살려주마.’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사탄의 공인을 받아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사탄의 공인을 받았습니까, 못 받았습니까? 사탄의 공인을 받아야 됩니다.
통일교회는 무엇을 가르쳐 주는 교회냐? 사탄에게 공인을 받아내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곳입니다. 그런데 사탄에게서 공인을 받되 영적으로만 공인 받아서는 안 됩니다. 영육을 합한 실체로 공인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6천년 동안 수난 가운데 피땀을 흘리며 제단을 이끌어서 피어린 역경의 노정을 걸어온 기독교 역사가, 오늘날 영적 기준밖에 이루지 못한 입장에 서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영육을 한꺼번에 완성할 수 있는 그런 천륜의 길이 있다면, 우리는 어떠한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그 길을 가야 됩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 끼리끼리 밀고 나가도 그 길을 갈 수 있다고 믿고 있는데, 그렇게는 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생각하고 관찰하는 것이 부족하다고 느껴집니다. 아무리 잘났고, 뭐했다 하는 사람이라도 다 우스워 보입니다.
역사적인 배경이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에, 이제는 섭리의 목적이 영육을 완성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움직여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늘의 이러한 특권적인 혜택과 역사적인 새로운 환경이 우리 앞에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손을 들고 나가 싸우다 매를 맞고 통곡하는 일이 있더라도 영육을 완성하는 일에, 사나이로 태어났다면 한번 해볼 만한 일입니다. 여자로 태어났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시집을 못 가는 한이 있어도 해볼 만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요즈음 통일교회 아가씨들이나 총각들을 보면 나하고 관계없는 사람들로 생각이 듭니다.
종이나 양자로서는 새로운 천지의 출발을 할 수 없습니다. 역사의 출발을 무엇으로부터 시작했느냐? 악한 아들로부터 시작했습니다. 즉 가인으로부터 출발된 것입니다. 역사가 잘못된 아들로부터 출발한 것은 천리법도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참부모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그러나 부모가 되기 전에 부부, 부부가 되기 전에 신랑 신부가 되어야 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역사의 비운은 신랑 신부에서부터 깃들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종교가 바라는 최후의 목적은 신랑 신부입니다. 우리는 신랑 신부의 이름을 지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신랑 신부 이름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신랑 신부 이름을 결정해 가지고, 부부가 되고, 이어서 부모가 되어 새로운 부모로서 출발을 해야만 새 천지 역사는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목적은 아담 해와가 선한 신랑 신부로서 결혼하여 부부가 되고, 부부의 인연을 통해서 부모의 인연까지 나가는 것이었는데도 불구하고,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이것이 전부 깨어져 나갔습니다. 이래서 구원섭리는 자식인 가인 아벨부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인생에 있어서 맞아야 할 역사의 출발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생애에 있어서 이런 비운의 역사를 지니고 태어났다는 사실이 원통한 것입니다. 참지 못할 일입니다. 여러분은 조상 앞에 항의하고 원망해야 할 일입니다.
이로 인하여 역사적인 한을 품은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은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역사의 한을 풀어 나가야 되겠습니다. 그 한은 우리 부모의 한이요, 우리 형제들의 한이요, 우리 민족의 한이요, 우리나라의 한이요, 우리 세계의 한입니다.
아담 해와의 한 날 한 실수로 말미암아 신랑 신부가 깨져 나갔고, 부모의 인연이 깨져 나갔고, 참다운 자녀, 참다운 가정, 참다운 종족, 참다운 민족, 참다운 국가, 참다운 세계, 참다운 하늘땅이 깨져 나갔습니다.
우리는 이 비운의 역사를 짊어지고, 이 원한을 어떻게 풀 것인가? 복수, 즉 탕감함으로써 풀어야겠습니다. 탕감하는데 어떻게 할 것이냐? 내가 먼저 총칼을 들고 나서야 되겠습니다. ‘모진 폭풍우여, 나에게 몰아쳐라, 모든 어려움이여, 나에게 오라, 나는 대결하여 결판을 내리라.’ 이러한 결의를 갖고 나서서 역사를 심판하고 새 시대를 창건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 참다운 사람입니다. 그러지 않고 역사의 인연에 되는 대로 끌려가면 참된 사람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통일교인 가운데 많습니다.
통일교회를 만들어 지금까지 이끌어 나온 것이 그러한 무리를 만들기 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새로운 역사는 신랑 신부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참되고 순수한, 순정에 불타는 인연을 맺어야 합니다. 거기에서 약혼단계에 머무를 것이 아니라 그는 내 남편이요, 그녀는 내 아내라고 할 수 있는 부부가 되어야 합니다. 그 부부는 과거의 역사를 심판하고, 새로운 조상으로서 새로운 역사를 엄숙히 출발할 수 있는 자리에 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전에는 인간으로서 가야 할 길을 다 갔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도 그 길을 찾아왔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6천년 동안 수고해 오신 것도 그 날을 찾기 위함이셨습니다.
새로운 세계는 참부모가 이 땅 위에 새로운 기반을 닦음으로써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 부모로 인해 새로운 자녀, 새로운 종족, 새로운 민족, 새로운 국가, 새로운 세계, 새로운 천주가 편성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다시 와서 섭리해야 할 소망의 목적인 것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그날이 한꺼번에 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종의 종의 길을 전부 수습해야 되고, 종의 길을 수습해야 되고, 양자의 길을 수습해야 되고, 그다음에는 아들의 길을 수습해야 됩니다. 그러나 6천년 역사 과정에서 모두 저끄러졌으니, 오시는 주님은 이것을 일대에 걸어서 역사적인 6천년사를 수습했다는 승리의 기준을 세워야 합니다. 역사를 심판할 수 있는 참다운 기준을 세우기 전에는 이 땅 위에 참부모로 나타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오! 신랑 되신 주님이 나를 찾아오십니다.’라고 말하는 도둑놈들입니다. 그런 신앙 하려고 했으면 선생님이 지금까지 이런 길을 걸어 나왔겠습니까? 선생님은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만큼 기도를 했습니다. 눈물 흘리는 데 있어서도 누구한테도 지지 않았고, 회개도 누구에게 지지 않을 만큼 했습니다. 또한 열의를 내라면 누구에게 지지 않을 만큼의 열의를 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성교회 사람들이 반대하는 길을 왜 가느냐? 이 길이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들춰보고 맞춰봐도 틀림없습니다. 역사는 이러한 원칙에 의해서 정비될 것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이 땅의 젊은이들을 언제 한번 만나 보려고 합니다. 그때는 그냥 두지 않을 것입니다. 선생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환경이 점점 벌어질 것입니다. 그렇다고 여러분에게 공갈 협박하는 것이 아닙니다. 원리 원칙에 부합될 수 있는 사람, 천리 공법 앞에 완전히 순응하고 상응할 수 있는 사람, 이런 사람이 되는 것이 우리들의 역사적인 소원이요, 선조로부터 지금까지 도를 닦아 나온 사람들의 소원입니다. 양심의 기준을 중심삼고 투쟁하면서도 승리의 한 날을 갖지 못한 것이 역사적인 한이 되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때려 몰아서라도 여러분을 그 자리에 세워야 합니다. 이것이 역사 앞에 공헌하는 것이요, 현시대 앞에 승리의 권한을 세우는 것이기 때문에 천번 만번이라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요즈음 유교 학당이나, 산중에서 도 닦는 사람들이 정도령을 기다리며 선천시대니 후천시대니 하면서, 새로운 천지 부모가 나와야 한다고 말하는 데, 천지 부모가 무엇입니까? 바로 참부모를 말하는 것입니다.
역사는 무엇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하느냐? 새로운 부모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이 천지 부모가 나오기 전에는 새로운 역사가 시작될 수 없습니다. 사탄과 싸워 승리하여 ‘당신은 천지 부모요.’라고 공인을 받은 참의 부모가 나와야 됩니다. 그 부모가 나오기 전에는 천지개벽은 되지 않습니다. 천지개벽이 되어야 거기에서부터 역사의 출발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새로운 심정을 중심삼고 자라난 아들딸들이, 하나님이 창조 당시에 아담과 해와에 대하여 소망하셨던 그 심정을 지니고 일체의 생활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함으로써, 하나님이 아담 해와에 대해 소망하셨던 것을 대신 이루어 드려야 합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은 아담 해와 대신 그러한 자녀들을 불러서 ‘만세의 축복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 심정의 혈통이 너희와 더불어 길이 같이 할지어다.’라고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이렇게 축복을 받은 참부모가 이 땅 위에 나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신비의 신령세계에 들어가서 기도해 보니까 울려나오는 말씀이 ‘우주의 중심은 부자의 관계’라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부자 관계는 모두가 사탄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아버지 어머니라고 인정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아비 어미인 것입니다. 욕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통일교회 문 선생이 아버지 어머니란 말을 두고 아비 어미라고 했다고 욕할지 모르지만, 진정한 아버지 어머니가 못 된다는 것입니다. 사탄이가 언제든지 농락할 수 있는 그런 어미 아비입니다.
본래 부자라는 말은 본연의 아버지와 아들딸을 말합니다. 그러한 부자가 없으면 그 나라도 이뤄지지 않는 것입니다. 만민은 평화의 세계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 세계는 오늘날 세계의 선진국가들이 추구해 나가고 있는 그런 문화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참부모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참부모가 아무리 거적을 쓰고, 누더기 보따리를 짊어지고, 무늬가 바랜 해어진 옷을 입었을망정, 또한 천길 만길 구덩이에서 기진하다 나왔을망정, 타락한 인간은 그 참부모를 중심삼고 하나님의 심정을 배워야 합니다.
통일교회는 심정의 도리를 가르치는 곳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심정에 접붙여야 합니다. 여러분은 태어날 때부터 사탄 새끼로 태어났는데, 앞으로 심정에 접붙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아버지 어머니가 같이 살면서 자녀를 기르는 그 자리에서 접붙이면 안 됩니다. 아들딸을 낳기 전에 아버지가 장가가기 전에, 즉 어머니를 맞이하기 전에 아버지 뱃속에 씨로 있는 그때부터 심정에 접붙여야 합니다. 복귀역사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승리는 거기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에요. 그런 것 아시겠어요? 여러분들은 껄렁패들입니다, 껄렁패들!
어떤 사람들은 통일교회 갔더니, 통일교회의 문 선생이 사람을 대단히 무시한다고 할지 몰라도, 무시해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아무리 똑똑해도 천리 공법을 중심삼고 볼 때, 잘 알아야 할 것을 모르면 껄렁패인 것입니다. 그 나라의 사회 제도를 모르고, 사회 풍조를 모르고, 상하 전후 관계의 모든 사실을 헤아리지 못하면 껄렁패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런 의미에서 통일교회 교인들은 심정의 인연을 중심삼고 모든 것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어느 정도로 심정을 접붙여야 하느냐 하면, 아버지 뱃속에서부터 접붙여 가지고 아버지와 같이 살았다는 조건을 세운 다음, 어머니 뱃속을 통해서 태어나 자라면서 아빠 엄마를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어머니와 같이 살 수 있는 친척과 더불어 사랑의 인연을 맺고, 친척을 중심삼은 종족과 더불어 심정의 인연을 맺고, 그 종족은 민족과 더불어 심정의 인연을 맺고, 그 민족은 국가와 더불어 심정의 인연을 맺고, 그 국가는 세계와 더불어 심정적인 인연을 맺고, 그 세계는 하늘땅과 더불어 심정의 인연을 맺고, 그 하늘과 땅을 통해 하나님까지 심정의 인연을 맺었다는 기준을 세워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너는 내 아들이다.’라고 하지, 자기 자신만을 중심삼고 심정의 인연을 맺은 사람을 하나님께서 내 아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타락한 세계를 복귀해 나온 하나님 앞에, 천주적인 인연을 중심하고 눈물지으며 몸부림치고 피땀 흘리며 생명을 걸고 뒤넘이쳐 나온, 갈보리 산상과 겟세마네 동산을 넘나들 수 있는 권한을 갖추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 못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에 돌아가셨지만, 부활의 권한을 가졌기에 하나님의 아들로 결정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도할 때 여러분처럼 자기를 중심삼은 기도는 안 했다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의 맨 처음이 무엇입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지요? 맨 처음에 아버지를 붙였습니다. 먼저 하나님을 붙들고 그 나라를 붙들고 내려오는 것입니다. 내려와서 그 나라의 이념을 중심삼고 세계를 위해서 기도하고, 어느 민족보다도 세계를 위해 더 많은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하나님을 찾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위해, 목적하는 세계를 위해 눈물을 흘려 세계가 하나되면 그 범위 내에 있는 그 나라는 그저 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통일교회가 가르쳐 주는 것이 무엇이냐?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맨 꼭대기에 가나 맨 아래 자리에 가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요구한다면 이런 사람을 요구하지 않겠습니까? 단 한 사람이라도…. 요즈음 통일교인들을 가만히 보면 눈꼴사나운 사람들이 많습니다. 건질 수도 없는 패들이 많아요. 몇 사람이나 남아 있나 선생님이 한번 잡아채 볼 것입니다.
선생님이 통일교회 선생님으로서 바라는 최고의 남자와 여자의 표본이 무엇이겠습니까?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이렇게 모이게 하고 훈련시키고 하는 것은 그 표본에 접근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어디를 가더라도 틀림없이 원본에 맞는 사본 같아서, 천륜의 공법 앞에 이것을 제시했을 때, 그것에 부합되는 것이 사실이라고 공인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그것은 하나님의 공인을 받는 동시에 사탄에게도 공인을 받아야만 해방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운명에 놓인 인생행로라는 것을 꿈에도 생각하지 않고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7년노정을 넘어가기 힘들지요? 종의 종의 자리에 있는 인간을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을 중심삼고 종의 인연을 거치고, 그 종을 통해 양자의 인연을 거쳐서 직계 자녀로 복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중심삼고 복귀해야 하느냐? 가정을 중심삼고 복귀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 돌아가셔야 되느냐? 예수님이 제자가 없어서 돌아가신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믿지 못하여 돌아가신 것이 아니에요. 열두 제자가 없어서 돌아가신 것도 아닙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불신해서 돌아가신 것도 아니고, 유대교단이 불신해서 돌아가신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돌아가셨느냐? 출발할 수 있는 내용이 없었어요. 즉 예수가 신랑이라면 신부가 있어야 할 텐데 신부가 없었습니다. 성경에는 이런 내용이 없어요. 없지만, 예수님을 만나서 물어보세요. 안 가르쳐 주면 목을 붙안고서라도 물어보세요. 통일교회 문 선생님 말이 틀렸나. 선생님은 다 알아보고 얘기합니다.
그런 것은 알지 못하면서 대학 교수나 학박사들은 세계적인 문제를 새로이 발견했다 하여 논문을 써서 제출하느니 하는데, 하나님의 뜻을 중심하고 볼 때 이것은 국민학교 정도의 수준도 못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 그런 일만 계속하면 역사적인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별수 없어요. 선생님은 자신을 가졌기 때문에 갖은 시련과 풍파를 잘 이겨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유대민족은 교단적인 환영의 터전을 만들어 놓고, 종족적인 환영의 터전을 만들어 놓고, 국가적인 환영의 터전을 만들어 놓고, 승리할 수 있는 기준을 세워야 했습니다.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유대교와 이스라엘 민족을 선민으로 세우셨는데도 불구하고, 이 조건을 세우지 못했기 때문에 섭리사에 한을 남기게 되었다는 사실을 누가 알겠습니까?
메시아가 오시기를 수천년 동안 고대하더니, 오신 메시아를 못 박아요? 예수님에게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어서, 감춰놓은 예물을 다 털어내서라도 예수님을 모시고 받들어야 할 민족적인 사명과 책임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예수님을 몰아내고 핍박했습니다. 그로 인해 유대민족은 역사의 심판을 받아서 2천년간 나라 없는 민족이 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히틀러에 의해 6백만 명이나 학살되었던 것입니다. 탕감법칙에 의해 그렇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무엇을 하기 위해 남자로 왔겠습니까?
타락한 인간들은 자꾸 사탄의 자식을 번식해 놓고 있습니다. 이러면 하나님의 복귀섭리가 연장됩니다. 한 사람 구하는데도 6천년이 걸렸는데, 이 많은 사람들을 구하려면 수억만 년이 걸릴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에서는 독신생활을 강조한 것입니다. 사탄 자식을 낳지 말라는 것입니다.
참다운 부모가 아직까지 아들딸을 못 낳아 봤는데, 결혼생활조차 못해 봤는데, 비원리적인 종족으로 태어난 무리들이 어떻게 부부생활을 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자식을 낳을 수 있겠어요?
그렇기 때문에 종교에서 독신생활을 강조하는 것이 천륜의 법도입니다. 고차원적인 종교일수록 독신생활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치에 맞잖아요. 하나님의 자녀가 자식을 못 낳아 봤는데, 타락한 후손이 어떻게 자식을 낳을 수 있겠어요. 천인공노할 일입니다. 그 자식들은 전부 다 사탄의 자녀들입니다. 아무리 세계를 움직이는 영웅 열사라도 천륜의 법도로 볼 때, 그들은 전부 다 사탄의 자식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상세계의 꿈을 가슴에 품고 새롭게 출발을 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국가를 중심으로 안팎이 하나되어 로마에 대항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 교단이 예수님과 하나되어 예수님이 동으로 가면 동으로 가고, 서로 가면 서로 가고, 바다로 들어가면 바다로 들어가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기 전에 내가 죽고, 예수님이 슬퍼하기 전에 우리가 슬퍼하고, 예수님이 망하기 전에 내가 망해야 한다는 신념이 있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단이 되었더라면 로마는 순식간에 정복되었을 것입니다. 이럴 수 있는 역사적인 선물을 하나님이 4천년 동안 수고하신 터전 위에 준비해 놓으셨는데, 그들은 그 선물을 배척했습니다. 그러므로 수천년간 역경 속에서 역리적인 노정을 탕감하며 나와야 하는 것이 타락한 인간에 있어서는 원칙인 것입니다. 이 원칙적인 생활을 하기 위해서 여러분은 마음속에 칼을 꽂고 항서를 써 바쳐야 된다는 사실을 망각하는 무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심각한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기에서 말하는 선생님도 사탄과의 싸움에서 영육 안팎으로 뒤넘이치면서 지금까지 기반을 닦아 나왔기 때문에, 이제는 뜻이 이루어질 것을 선생님은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이념이 세계를 제패할 것을 선생님은 자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면 신생님이 바라보는 견지에서 통일교회 식구들, 특히 청년 남녀들이 갖추고 있는 기준이 하나님이 바라는 기준에 얼마나 부합되느냐? 여기에 차이가 있습니다. 그 차이를 어떻게 해야 하느냐? 여기에 제재를 가하고 모험을 해서라도 선생님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사회적인 환경이 안팎으로 갖춰질 수 있는 한 날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알겠어요? 「예.」
선생님이 해방 직후에 7년노정을 출발했을 때, 그 7년노정을 중심삼고 나라의 운명을 바라보니 심각했습니다. 잘하면 이 나라에 하나님이 함께 하실 것이요, 잘못하면 함께 하지 않으실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조금만 지나면 선생님이 이야기한 것을 믿을 때가 올 것입니다. ‘아, 그렇구나!’ 할 것입니다. 앞으로 통일교회 문 선생을 몰아내려고 한국이 고민할 때가 올 것입니다. 7년노정 중에 기독교가 선생님과 하나되었으면, 이승만 박사가 선생님과 손을 잡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렇게 되었다면, 7년노정만으로도 우리 통일교회는 세계적으로 뻗어 나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북한에 있는 공산당들 다 없어지고, 이 세계에 있는 공산당들도 벌써 다 없어졌을 것입니다. 선생님과 이승만 박사가 손을 잡았더라면, 그것은 문제없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선생님은 훤히 알고 작전하는 것입니다.
극동에 있어서 일본이 저렇게 부흥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때가 되었기 때문에 일본의 모든 자원과 부귀영화를 한국으로 가져올 것입니다. 통일교회 문 선생님이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선생님이 작전 명령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자원과 부귀영화는 일본 사람들이 가질 것이 아닙니다. 일본은 해와국가, 즉 신부의 입장에 있는 국가요, 한국은 아담국가, 즉 신랑의 입장에 있는 국가입니다.
그러면 선생님은 이 7년노정 중에 무엇을 해야 했느냐? 가정적인 출발을 해야 했습니다. 이것은 역사의 소원이요, 인류의 소원이요, 모든 도인들의 최고의 희망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그래야 했듯이, 선생님도 하늘땅이 공인할 수 있는 부모의 출발을 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 출발은 이 나라 이 민족이 독립하는 것보다 더 큰 일입니다. 미국의 모든 자원을 우리 한국에 가져와서 삼천만을 고이 먹이고 입히는 일이 있다 해도 그것은 복된 일이 아닙니다. 달이 차면 기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런 것은 다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원칙적인 기준만은 흘러갈 수 없습니다. 즉 부모라는 조상의 기준은 흘러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처음 타락 전의 에덴동산을 이 한국 땅에 새로이 세우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그 일은 편안한 자리에서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편안한 자리는 맨 나중으로 미루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6천년 복귀역사를 통해 가장 참된 가정을 찾아 나오셨습니다. 맨 처음 에덴동산에서 이루려 하셨던 그러한 부모의 기준을 세우기 위해서는 어떠한 어려움이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심정을 중심삼고 교단을 위해, 종족을 위해, 민족을 위해, 누구보다도 많은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7년노정 중에 이러한 기준이 세워져서 이대(梨大)교수와 기성교단이 하나되었더라면, 미국은 벌써 내 계획대로 되었을 것입니다. 존슨이나 브레즈네프가 문제가 아닙니다. 이런 사람들은 다 선생님 계획대로 춤출 사람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7년노정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21년노정을 찾아 나오는 것입니다.
21년노정에는 무엇을 하느냐? 재차 하는 것입니다, 재차. 7년노정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선생님이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예수님이 7년노정을 못 걸었기 때문에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과 같이, 선생님은 감옥에서부터 복귀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 12제자를 잃어버렸으니, 이것과 마찬가지의 탕감조건을 세워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직접 영계를 동원하여 선생님의 제자를 만들기 위한 열두 사람 이상의 사람을 선생님에게 데려다 주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선생님이 감옥에 있을 때 말하지 않고도 그러한 사람들을 다 건졌습니다. 원수인 공산당원까지도 건졌습니다. 이래 가지고 선생님은 기반을 닦은 것입니다.
1960년까지는 무엇을 했느냐? 야곱노정과 같은 14년노정을 걸어 나왔습니다. 여러분에게는 7년노정이지만 선생님에게는 21년노정입니다. 이 7년노정을 중심삼고 우리는 이 민족과 상봉할 운세를 만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전반 3년노정 중에는 내적으로 가정적인 기준을 세우시고, 후반 4년노정 중에는 외적으로 사회적인 기준을 세우시면서 7년노정을 맞춰 나오시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선생님은 가정적인 대표, 민족적인 대표, 세계적인 대표를 찾았다는 조건을 세워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만물의 날을 설정하고, 그 터전 위에 세계적으로 성지를 택정한 것입니다. 이러한 복잡다단한 문제가 있는 것을 여러분은 잘 모르고 있습니다. 어떻든 간에 선생님의 말씀은 다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국가적으로 볼 때, 이념적인 기준에 있어서 가인적인 이 민족이 아벨적인 우리를 따르지 않으면 안 될 단계에 와 있습니다. 관계 공무원들이 전부 다 우리의 이념을 공인할 수 있는 단계에 들어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보면 때는 바야흐로 무르익고 있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이 21년노정이 끝나면 무엇을 할 것이냐? 가정적인 기준과 복귀의 조건을 세워 하나님이 치리할 수 있는 종족을 편성할 것입니다. 아직까지는 선생님의 21년노정이 남아 있기 때문에 안 됩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요즈음 막대한 자금을 투자하는 한이 있더라도 기성교회를 중심으로 새로운 운동을 펴고자 합니다. 야곱이 에서 앞에 가서 탕감복귀했던 것과 같은 조건을 세우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비록 선생님을 반대하고 핍박했지만, 선생님만이라도 천리공법 앞에 걸리지 않고 뜻을 세우기 위해, 세계 교회를 위해서 지금 어떤 사람을 내세워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민족을 대해, 기성교회를 대해 책임을 다했습니다. 선생님이 우선 돕는 데 있어서 자녀들부터 도와서는 안 됩니다. 지역본부에 어려운 문제가 있으면 스스로 해결해야 합니다. 선생님은 자금이 필요하면 공장에 문의하여, 구해서, 기성교회에 대해 야곱과 같은 조건을 세우고자 합니다. 이것이 원칙이기 때문에, 이렇게 하면 틀림없이 뜻이 이뤄집니다. 되지 않는다면 우리 원리가 틀린 것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식구들을 냅다 몰았는데 상대해 줄 사람들이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위해 우리 통일의 역군들 수고했다고 해서 식구들에게 생활 기반을 닦아 줄 수는 없습니다. 식구들의 생활 기반보다는 교회가 문제입니다.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있다면 먼저 교회를 찾아야 됩니다. 국가적인 기준을 세우기 위해서는 먼저 교회의 기반을 닦아야 됩니다. 그럴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때입니다. 우리에게는 남한 각지에서 교회를 대표할 수 있는 아벨적인 제단이 필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천 개의 교회를 세우려는 목표를 정하고 지금 비상작전을 해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안 되면 내적으로 외적으로 연장되기 때문에, 단 한 푼이라도 조건을 세우기 위해서 전부가 이런 활동을 안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아이구! 선생님은 왜 이런 일을 하시나?’ 하는데 그런 사람은 이런 사정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7년노정은 무엇을 하는 기간이냐? 이것은 우리 통일교회에만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30세부터 공생애노정을 출발할 때, 요셉가정에서 마리아와 요셉이 내적으로 예수님을 잘 받들었더라면, 예수님은 가정적으로 뜻을 이루어 나갔을 것입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과 같은 어부들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이종사촌으로서 형님뻘이 됩니다. 세례 요한과의 관계도 가정에서 이루어야 했는데, 가정에서 알지 못하여 뜻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시고자 했던 하나님의 뜻을 가정에서 말할 수 있었다면, 그리하여 가정을 통해서 출발했다면 세상도 모르게 뜻이 이뤄졌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요셉 족속을 중심삼고 사도들을 모아서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종족을 편성했을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찌꺼기 같은 거지 떼거리를 모아서 사도로 만들어서 데리고 다닌 것입니다. 그것도 모르고 오늘날 기성교회에서는 아이구 사도여! 하며 우러러보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그런 것을 생각하면 복통이 터져요. 베드로가 뭐고, 사도 요한이 뭡니까? 곡절이 그렇게 되어 있는데….
우리 식구들 중에 예수님과 통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부릅니까? 만일 부인들이 통한다면 예수 오빠라고 할 수도 있지요? 우리는 이해하지만 기성교회에서는 꿈도 못 꾸어 볼 것입니다. 예수 오빠라고 말하면 ‘아이구, 우리 주님은 온 우주의 구세주인데 예수 오빠라니.’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시고 예수님도 하나님의 아들이니, 예수님과 우리는 한 형제이지 다를 것이 뭐 있습니까? 그러니 예수님이 오빠 안 될 수 없고, 형이 안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그렇게 부를 수 있는 원리를 갖고 있습니다.
여러분, 갖고 있어요, 안 갖고 있어요? 갖고 있지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입니다. 기성교회 하나님은 의붓 하나님, 즉 양자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의 하나님? 내 하나님이십니다, 내 하나님! 여러분에게도 그렇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문제가 됩니다.
7년노정은 뭘 하는 기간이냐? 하나님의 아들딸을 결정짓는 기간입니다. 그것을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선생님은 세계적인 문제를 걸어 놓고 탕감해야 되고, 여러분들은 개인적인 문제를 걸어 놓고 탕감해야 됩니다. 왜 그러냐? 선생님이 종적인 기준을 닦아 놓았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횡적으로 붙들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업혀 들어가는 것입니다. 선생님 자랑이 아닙니다. 기도해 보세요. 통일교인들은 선생님에게 빚을 많이졌습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충성해도 갚을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믿어지지 않으면 기도해 보십시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이 한마디라도 입만 벙긋하면 아무리 시시한 사람이라도 귀를 쫑긋합니다. 선생님 말씀 한마디가 사람을 죽였다 살렸다 할 수도 있습니다.
천륜은 용서가 없습니다. 그리고 공평합니다. 선생님이 무슨 말을 해도 여러분들이 긍정적인 입장으로 받아들이는 그것이 기적입니다. 20세기의 기적인 것입니다.
선생님은 뜻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다 버렸습니다. 부모도 버리고, 처자도 버리고, 일신의 모든 것을 다 버렸습니다. 완전히 버리고 나니까 하나님의 은사가 한꺼번에 쏟아졌습니다. 절대적인 믿음을 갖고 완전히 버린다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큰 은사를 주시려고 하나님이 준비하고 계신데, 그것을 못보고 있습니다. 그저 바늘구멍만 좋다고 들여다본다면 뒤집어질 것입니다. 세상은 요지경입니다.
7년노정은 뭘 하는 기간이라구요? (남자들을 보시며) 하나님의 아들을 결정하는 기간입니다. 뭘 하는 기간이라고요? (여자들을 보시며) 하나님의 딸을 결정하는 기간입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하나님의 아들딸이 결정되었다 하는 날에는 여러분 앞에 옛날 사도들이 와서 경배할 것입니다. 베드로, 야고보가 와서 경배할 것입니다. 선생님이 한마디 더 하고 싶은데 진짜 이단이라 할까 봐 말 못 해요. 사도들이 여러분에게도 경배를 한다는 것입니다. 왜 입을 쩍 다시는 거요? 좋아서 그럽니까, 어이가 없어서 그럽니까? 지금 좋아해서 무엇 합니까? 남들은 다 비행기 타고 미국에 가서 구경하고 있는데, 혼자 미국 가는 비행기표 들고서 좋아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7년 기간은 내가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는 기간임을 알아야 합니다. 선생님은 21년 동안 안중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자나 깨나, 먹으나, 눈만 뜨면 뜻만 생각합니다. 선생님이 애기들을 사랑하는 것도, 가정을 거느리는 것도 하나님의 뜻 때문인 것입니다. 그 뜻에 어긋나는 때는 선생님하고 원수 됩니다.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러한 길을 걸어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선생님은 잘 알고 있습니다.
7년노정이 끝나면 선생님의 21년노정도 끝납니다. 여러분이 선생님의 21년노정에 동참하는 기간은 이번 한 번밖에 없습니다. 앞으로 선생님 모습을 후대 사람들이 알게 될 것입니다. 선생님의 이름이 자꾸 높아질 것입니다. 선생님은 사주팔자를 그렇게 타고났습니다. 감옥에 집어넣고 죽으라고 거꾸로 세워 놓아도 안 죽게 되어 있습니다.
누구든지 선생님 앞에 서면 선생님은 제일 싫어합니다. 어느 누가 역사 시대에 충성을 다했다 해도 선생님 앞에 서면 용서할 수 없습니다. 선생님의 성격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든 한번 붙드는 날에는 ‘너 죽지 않으면 나 죽는다’는 마음으로 일에 전념합니다. 여러분들이 볼 때 선생님 이 유순해 보일 때도 있겠지만, 눈도 조그맣고 코도 이렇고, 말도 빠른 사람치고 만만한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아마 선생님이 이 길에 들어서지 않고 무엇을 해도 누구한테 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선생님은 장(長)이 안 되고는 살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운동을 해도 그렇습니다.
아무리 못하는 것도 3년 이내면 누구한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 또한 머리 쓰는 것도 그렇습니다. 소질은 그저 백과사전형으로 타고났습니다. 이와 같이 선생님은 소질이 풍부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남자로 태어나 몸도 이만하면 괜찮지요? 지금까지 복귀노정을 걸어오면서 남자로서 멋을 한번 제대로 못 내봤습니다. 종로나 명동에 가면 옷은 어느 것이 잘 맞고, 넥타이는 어느 것이 멋있고, 핀은 어느 것이 어울린다는 것을 잘 알지만 선생님은 안 합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할 날이 올 것입니다. 그때에는 선생님이 하는 대로 유행이 될 것입니다. 만일 선생님이 그렇게 못해보고 죽으면 한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지금 귀물이 있으면 죽기 전에 하루라도 그것을 입고 달고 해서, 그것이 세상에서 최고로 유행했다는 조건을 세워 주기 위해서 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 귀물을 달라고는 하지 마십시오. (웃음)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에게는 금반지도 다이아반지도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 둘 선물이 들어오면 보관해 두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선생님이 이 땅 위에서 그 한을 벗고 가지 않으면 후에 여러분들이 걸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살아생전 여러분에게 신세지는 그런 조건을 남기지 않고 가려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상 노릇하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요즈음 어머니에 대해서 애기했듯이, 남의 부모 노릇하기 힘드는 것입니다. 자기가 잘못하여 자식들에게 더러운 피와 악을 유전으로 남겨 놓고, 하늘 앞에 서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 남의 부모 노릇하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도 여러분의 스승 노릇하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욕을 하고, 뭘 해도 양심에 가책을 안 받습니다. 밤이나 낮이나 어디를 가더라도, 모든 것이 백일하에 드러나도 선생님은 양심에 가책을 안 받습니다. 그 문제만은 자신합니다. 아버지 앞에 나서도 자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일을 시킬 때도 내가 먼저 하고 시킵니다. 선생님은 양심에 가책을 받을 일은 하지 않습니다.
통일교회 식구들에게 있어서 7년노정은 선생님이 민족의 운명을 결정지을 수 있는 아벨적인 노정에 동참하는 기간입니다. 선생님이 동으로 가면 동으로 따라가고, 서로 가면 서로 따라가서, 여러분은 이파리가 되든지, 가지가 되든지, 떨어지지 말고 부러지지 말아야 됩니다. 지금은 말랐을망정 부러지지 않는 가지와 떨어지지 않는 잎사귀의 입장에 세워 놓기 위한 기간입니다. 그래서 이 7년노정 기간에 될 수 있으면 여러분 전체가 동원되어야 합니다.
이 기간에는 세계적인 사탄이 총집중해서 공격합니다. 그때가 1960년도부터입니다. 그때는 대한민국 사람 전부가 반대했습니다. 통일교회 문 선생을 잡아넣겠다고 14명인가, 15명씩 행렬을 지어 법원에 투서를 했습니다. 이렇게 전체가 반대하는 자리에 서지 않으면 탕감이 안 되는 것입니다. 합동결혼식 거행 때 식장이 수라장이 되어 경찰들이 와서 싸움을 말렸습니다. 대문을 걸고 밖에서는 아우성을 치고 난리였지만, 안에서는 결혼식을 했습니다. 그런 결혼식은 역사 이래 처음이었을 것입니다. 선생님이 3년 동안 이 일을 하고 나니 꿈같기만 했습니다. 그래야 됩니다.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이 누구만큼 계산을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선생님은 밑지는 장사는 절대로 안 합니다.
7년노정을 출발할 때 ‘7년 후에는 이러이러한 때가 온다.’ 하던 선생님의 말씀을 여러분들 믿었습니까? 앞으로 우리가 완전히 자리 잡아서 우리 뜻대로만 할 수 있게 되면, 공산당은 깨지게 되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몇 년 이내로 김일성 그 녀석을 ‘이 자식아’ 하면서 굴복시킬 수 있다고 봐요. 몇 년 이내인지는 말 안 할 것입니다.
그러면 통일교회가 해야 할 사명이 무엇이겠습니까? 통일천하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적으로 다짐해야 합니다. 중공하고 소련하고 갈라진다고 했지요? 다 맞았잖아요? 민주 세력도 둘이 되고 공산 세력도 둘이 되어 4대 세력으로 될 것입니다. 그때가 우리 때입니다. 때는 바야흐로 통일천하라! 즉 통일 운세권 내로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요리하느냐가 문제입니다.
어때요, 7년노정이 잘 맞아 들어가지요? 실례지만 허리춤이 내려가서 추슬러야겠습니다. 구미(歐美)나라에 가서 이렇게 말하면 큰일납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미국에 가서 실례를 했거든요. 사람들이 많이 모인 데서 한바탕 얘기하는데 자꾸만 허리춤이 내려가더라고요. 그래서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이게 내려갔어요, 안 내려갔어요?’ 하니까, 내려갔다고 해요. 또 말하기 거북하지만 ‘올려야 되겠습니까, 올리지 말아야 되겠습니까?’ 하고 물으니 ‘아! 그것을 올려야 됩니다.’라고 대답하기에 어떻게 했겠어요? 별수 있나요. 추슬러 올려야지요. 그래서 허리춤을 추슬러 올렸습니다. 미국의 전통을 깼습니다. 선생님은 아주 기분이 좋았어요. 이 말을 왜 하느냐면, 여러분들의 생각이 저 문틈 밖으로 빠져나갔기 때문입니다. 몇 시간 이야기했어도 서론도 아직 안 끝났어요. 그러니까 갈 사람은 어서 가요.
7년노정에 여러분들을 선생님이 왜 동원시켰느냐? 앞에서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누구의 증명서를 받아야 된다고요? 검사의 증명서, 즉 사탄의 증명서를 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야곱은 하나님의 축복을 이루기 위해서 하란 땅에 들어가야 했고, 모세도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기 위하여 바로의 궁중으로 들어가야 했습니다. 예수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오실 때도 사탄의 참소를 방지하기 위해 왕궁에서 태어나지 못하시고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것입니다. 그때 벌써 80퍼센트는 탕감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그네와 같은 처지에서 섭리하신 것은 인간이 나그네의 행로와 같은 처지로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결실의 실체를 대신하여 책임을 져야 할 예수님이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것도 복귀섭리에 큰 의의가 됩니다. 하나님의 제일 큰 축복을 받은 다윗의 후손이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이 제일 사랑하는 교단을 중심삼고 출발하지 못하면 제일 끝에 서야 되는 것입니다.
이 7년노정이 끝나면 선생님은 가정에 들어가야 합니다. 선생님 가정은 지금까지 어느 기준을 중심삼고 그 울타리 안에서만 돌아다녔지, 자리를 못잡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축복받은 가정들도 자리를 못잡은 것입니다. 통일교회 식구들도 자리를 잡으면 안 됩니다. 자리를 잡고 살면 천법에 걸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통일교회 식구들의 생활이 비참하다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기독교에서 대환난이라는 것을 우리의 40수 노정을 중심하고 볼 때, 하나님의 섭리노정에는 어느 시대나 10고개가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기독교에서는 끝날에 심판을 하기 위해서 7년 대환난이 있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예수님이 가야 할 노정 중에서 7년을 남겼기 때문에 끝날의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7년을 남겨 놓았으니 통일교회 문 선생이 그걸 상속받아서 가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결정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예수님의 한을 해원해드려야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책임을 못했고, 유대교단이 책임을 못했고, 거기에 속한 족장․사도들이 책임을 못했고, 세 제자마저 책임을 못했습니다. 또한 이 땅 위에서 신부인 한 어머니를 모셔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돌아가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가슴에 한이 사무친 것입니다. 원수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 한이 아닙니다. 찾아야 할 이스라엘 민족에게 핍박받은 것이 한이요, 사랑하는 세 제자를 비롯한 열두 제자에게 배척받는 것이 한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에, 악당의 괴수인 우편 강도가 예수님을 인정했기 때문에, 기독교는 이스라엘 민족을 떠나 이방인의 종교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복이 이방민족을 통해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강도 한 사람이 얼마나 큰 공헌을 했습니까?
이스라엘 민족은 예수님에 대해서 어떻게 했느냐? 이스라엘의 모든 죄상과 악을 전부 다 뒤집어 씌웠습니다. 예수님은 그 모든 것을 뒤집어쓰고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통일교인들이 그런 자리에 서 있다는 것입니다. 통일교회가 3년노정을 출발하여 전도를 나갔을 때, 나가는 곳곳마다 배척을 받았습니다. 배척 안 하던가요? 배척받을 때, 그것은 개개인의 배척이 아니었습니다. 민족정기가 희미하고, 수많은 교회의 운세가 흔들리게 되어 있고, 우리 또한 가는 길이 그렇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나라가 배척하고, 교회가 배척하고, 만민이 배척하는 등 전부 배척한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한을 해원해 드려야 할 입장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던 그 사정으로 우리가 찾아 들어가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시던 당시에는 성지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통일교회에는 부모의 날, 자녀의 날, 만물의 날이 있고, 성지를 택정하여 그 성지에서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이 예수님보다 복되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 것 생각해 보았습니까?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나뭇가지와 풀포기를 붙들고 밤을 새워 가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를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하고 세 번씩이나 기도하던 그 간곡한 심정과, 남모르게 눈물을 흘리며 가슴에 젖어 들어오는 애절한 마음에 가슴 태우던 그 심정을 누가 알았겠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민족을 책임지고, 세계의 운명을 책임지고, 예수님과 같은 심정으로 ‘아버지! 이 민족을 살려 주시옵소서. 새로운 제3이스라엘 민족인 한국을 구원하여 주시옵소서. 이들이 배반하고 핍박하는 것은 2천년 전의 유대교단과 이스라엘 민족이 그렇게 한 것과 마찬가지 아닙니까?’ 하는 자리에 서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마 26:39)라고 기도했던 그런 심각한 자리와, ‘할 수만 있다면 이 민족을 살려 주시옵소서.’라고 애원했던 예수님의 최후의 애절한 호소가 하나님 앞에 사무쳐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그렇게 호소한 것은 누구 때문이었습니까? 민족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들도 나 하나 살기 위한 것보다도 민족을 위하여 ‘아버지여! 할 수만 있다면 이 민족을 사해 주시옵소서.’라는 기도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민족이 가야 할 십자가의 길을 피할 수 있게, 여러분들이 예수님 대신 십자가를 붙들고 통곡을 하면서 제사장적인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그런 심정으로 하늘 앞에 ‘나를 내 보내소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7년노정 중 6년이 끝나가기 때문에 이러한 내용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어느 정도까지 충성을 해야 하느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몰아내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산정으로 올라 갈 때, 예수님의 사랑하는 제자들은 모두 도망쳤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생사의 교차로에서 죽음을 맞아 나설 때, 예수님 앞에 나아가 ‘내가 그 죽음 길을 가겠습니다.’라고 하며 나설 수 있는 결의를 지금 여러분들이 가져야만, 실체를 쓴 사람으로서 예수님의 한을 해원성사 시켰다는 조건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이 여러분들을 민족적인 십자가를 대신 질 수 있는 곳으로 내모는 것입니다. ‘그런 곳으로 가봐라, 하나님이 그랬던 것처럼!’ 여러분을 그런 입장에 세우는 것입니다. 그러면 십자가를 짊어지고 쓰러지려는 찰나에 ‘아버지여! 한을 푸시옵소서. 이것을 제가 극복하겠습니다.’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요, 그러한 호소는 못하고 자탄하며 자기의 입장만 생각하고 미래의 갈 길을 염려하면서 몸부림치는, 그리하여 하나님 앞에 한을 남기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명령한 선생님이 잘못했느냐? 물론 명령을 한 선생님에게도 책임이 있기 때문에 잘못이 있다고 보지만 그러나 여러분에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지금까지 이 노정에서 가다가 지쳐서 자기 개인의 내일을 꿈꾸고 염려하는 그런 무리가 되어, 가지도 못하고 오지도 못하고 주저하는 입장에 있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한칼에 쳐버릴 것이냐? 아니면,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문제가 남아 있는 것입니다.
7년노정이 끝나면 선생님은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할 텐데, 그때가 되면 여러분은 그 부끄러움을 어디 가서 피할 것입니까? 선생님은 그것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는 것을 무엇으로 결정할 것이냐? 예수님은 자기의 생명 길에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하며 사망선에 성큼 다가섰습니다. 악당의 무리 앞에 자기의 몸을 성큼 던진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와 반대로 열두 사도는 자기 일신을 위해 스스로 도피하였습니다. 그때에 하나님의 아들딸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통일교회 식구들은 7년노정에서 무엇을 할 것이냐? 내 생명을 바치는 한이 있더라도, 내 가정을 희생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내 종족을 희생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님이 세우신 뜻과 중심 앞에서는 모진 형극의 길이라도 달갑게 가겠다고 스스로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서는 무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여러분이 될 때 고난의 노정은 다 지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공장에 매일같이 다니면서 가만히 보니, 하나님이 여러분에 대해서 노여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세례 요한의 입장에 있기 때문에 세례 요한으로서의 책임을 다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책임을 못하면 선생님이 그 책임을 다할 것입니다. 선생님은 빚을 지는 사람이 아닙니다. 돈을 쓰더라도 내 손으로 직접 벌어서 쓸 것입니다.
선생님이 계획하고 나오는 것은 나라와 겨레를 위해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군을 할 때에 눈물을 흘려 가면서도 ‘하나님이여 이 민족과 같이 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할 것입니다. 마음의 동지와 행로에 의지가 되는 그러한 사람이 없더라도 혼자 갈 것입니다. 예수님의 해원성사를 위해서는 그런 노정을 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제자들을, 사랑하는 식구들을 고생시키려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어쩔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도망가는 제자들이 되지 말고 겟세마네 동산을 지키고 골고다의 산정을 지켜서, 생사를 같이할 수 있는 제자가 되라고 여러분들을 내보낸 것입니다. 그랬더니 영적 사탄이 거세게 공격했습니다. 그때 일하다가 지친 식구들은 전부 다 휩쓸어 버리는 것이 원칙이지만, 아직까지 선생님이 가정에 대한 결정을 안 내렸고, 7년노정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여유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큰일이 났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무서운 분입니다.
여러분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 봤습니까? 비난과 조소를 받으며 골고다 산정을 가보았습니까? 그리고 예수님의 한이 무엇인지 압니까? 세 제자를 잃어버리고 열두 제자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 제자들을 다시 찾아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은 신부를 맞이하지 못했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신부의 자격을 갖춰 가지고 신랑인 예수님 앞에 가야 할 인연이 있는 것입니다. 갖추지 않고는 신랑을 못 찾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신부를 맞이하려는 자리에서 12제자가 배신했고, 70문도가 배신했고, 이스라엘 전민족이 배신했습니다.
십자가에서 운명하시는 예수님 앞에서 세 제자처럼 죽음이 무섭다고 뒤로 도망가는 사람이 되지 말고, 죽음을 넘어서서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겠다고 나서는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세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세 사람만이 아니라 열두 사람이 그러한 자리에 들어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해원성사를 해주지 않으면 하나님의 아들딸이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 탕감기금이라는 것이 있지요? 그것은 가룟 유다가 은 30냥에 예수님의 몸을 팔았기 때문에, 그것을 탕감하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돈을 받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탕감하기 위해서입니다. 지금은 전부 다 그 조건을 걸어 놓고 싸워 나오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앞으로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기 위해서는 그런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에덴동산에서 타락한 그 타락권을 벗어났다는 조건을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축복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7년노정은 하나님의 아들딸을 결정하는 기간인데, 무엇으로 결정한다고 했습니까? 예수님의 해원성사를 해주는 것으로 결정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나라를 위해 충성을 못 했고, 교회를 위해 충성을 못했고, 민족을 위해 충성을 못 했으니, 우리가 나라를 위해 정성을 들이고, 교회를 위해 정성을 들이고, 민족을 위해 정성을 들여서 예수님의 한을 총괄적으로 탕감해야 합니다.
선생님을 따라 이 7년노정 기간에 활동한 사람들은 대우가 달라질 것입니다. 이 노정에 참여하지 못한 사람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언젠가는 이 7년노정을 거쳐야 합니다. 이것은 공식입니다. 7년노정은 불가피한 것입니다. 앞으로 통일교회에 들어오는 사람은 7년노정을 거쳐야 합니다. 우리 어머니가 들어와도 그렇고, 우리 아버지가 들어와도 그렇습니다. 7년노정은 다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1차 7년노정이 끝나면 2차 7년노정을 가야 합니다. 원래는 7년노정을 출발할 때 우리의 뜻을 중심삼고 아버지 앞에 ‘아버지! 나는 이 복귀노정을 갑니다.’라고 선서하고 가야 합니다. 그러고 난 뒤부터 7년인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는 절대적으로 종의 종 입장입니다. 종의 종에서부터 출발해야 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 교회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먼저 나온 사람들을 전부 다 업고 가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살아 있는 사람이 되려면 뼈가 문드러져도 업고 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 나라 삼천만 민족이 이어나갈 전통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때는 하나님이 지시해서 7년노정을 가게 합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 들어와도 미국 대통령이 들어와도 별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종의 종에서부터 출발해야 하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변소 청소를 시켜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탕감이 빠르게 됩니다. 한꺼번에 7년노정을 총탕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반대의 노정을 걸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겨울에는 모시옷을 입고, 여름에는 솜옷을 입고 나가야 합니다. 또한 매일같이 굶겨 가지고 내보내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무정하게 하면 할수록 그 사람에 있어서는 자체 탕감이 빨리 됩니다. 이것을 알았기 때문에 선생님은 하나님이 어떻게 대해 주셨든 이 길을 뚫고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용서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에게 축복을 맛보게 하여 어쩔 수 없게 해놓고 거꾸로 냅다 몰아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을 원망해서는 안 됩니다. 당당하게 지옥의 밑창에라도 가서 그곳을 점령하여, 그 자리에 출구를 만들어 놓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은사를 주시기 전에 반드시 탕감의 침(針)을 주십니다. 6천년의 복귀역사가 그랬습니다. 7년노정 동안 통일의 역군들이 일을 잘하면 한국에 크나큰 서광이 비쳐올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지를 못하면 선생님으로서 실망이 대단히 큽니다.
7년노정에 있어서 자기가 입은 옷이 자기 옷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걸리는 것입니다. 또 자기가 사는 집이 내 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걸리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인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밥이 있으면 그 밥을 자기 혼자 먹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두 형님을 모셔놓고 그 밥을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소생․장성․완성급의 단계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반드시 두 형님을 대접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옷을 입더라도 새 옷을 두 형님께 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지금까지 나이 30이 넘도록 내 손으로 옷 한 벌 못 사 입었습니다. 복귀섭리로 볼 때 삼단계의 세 번째이기 때문에 형님들이 입던 옷을 입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옷을 입기 위해 고물상에 가서 사 입었습니다.
아무리 추운 겨울에도 옷을 세 겹 입을 수 없습니다. 소생․장성․완성의 삼단계가 있기 때문에, 세 겹을 입게 되면 이 삼단계의 법도에 걸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추워도 세 겹을 못 입었어요. 입을 것이 있으면 남을 주어야 합니다.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런 훈련을 받았습니다. 이런 모든 것을 가르쳐 주면 여러분은 땅을 칠 것입니다. 7년노정이 끝난 후에 선생님이 가르쳐 줄만한 식구들에게는 그런 법도를 가르쳐 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통일교회는 그 누구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곳입니다. 기성교회에서 많은 비판을 하고 있지만, 그들의 머리로 생각하는 그런 권내에서 좌우되고 결정될 통일교회가 아닙니다. 선생님은 그러한 비판과 분석을 천번 만번도 더 해봤습니다. 그렇게 알고 6년노정을 마치고 7년노정의 고비를 넘어서야 합니다.
선생님이 빚을 지고 넘어가면 안 됩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사탄 세계에 빚을 지고 넘어가면 안 되게 돼 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빚을 졌습니다. 우리 통일교회 교인들이 선생님에게 후원을 잘했더라면 선생님이 빚을 졌겠어요? 선생님이 사탄세계에 빚지는 날에는 문제가 큽니다. 이것을 어떻게 탕감할 것입니까? 원래는 통일교회 교인들이 이것을 전부 부담해서 여러분 각자가 어떠한 희생이 있더라도 갚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설명 더 안 해도 알겠지요?
선생님의 가정에 대한 십자가는 지금 거의 넘어서는 단계입니다. 금년 양력 12월까지, 늦어도 음력 12월까지는 해를 넘기지 말고 선생님이 진 빚을 완전히 청산해야 됩니다. 선생님이 빚을 3억 정도 졌습니다. 우리 통일교인 한 사람 앞에 한 50만 원 이상씩 배당해서 부담시키면 도망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여러분, 50만 원씩 탕감하겠습니까? 불평 않겠어요?
원래는 사업하는 것이 선생님의 주목적이 아니지만, 환경 문제를 생각해 볼 때 선생님이 사업을 안 할 수가 없어서 금년에는 비상작전을 썼습니다. 돈 한 푼 없이도 큰 공장 지어서 잘 운영해 나오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그렇게 사업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역사상에 선생님이 처음일 것입니다. 이번에 선생님 말만 잘 들었더라면 그 공장이 목표의 100~150퍼센트를 초과 달성했을 텐데, 말을 잘 안 들었기 때문에 70~80퍼센트밖에 안 나올 것입니다. 이렇게 선생님은 안팎으로 조건에 걸리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선생님의 빚을 갚는 데 동원될 사람은 손들어 봐요. 좋습니다. 그러면 이제는 7년노정이 일년밖에 안 남은 때이니만큼 여러분에게 전부 다 배당을 했습니다.
만약 집을 팔든지 하는 문제가 생기면 저 백사장에 가서 천막을 치고 자면 되지 않겠어요? 선생님이 그런 생활 안 해본 줄 아세요? 다 해봤습니다. 이불 한 채 갖다가 너덧 사람이 아주 다정스럽게 자니, 참 좋더구만. 자다 보면 다리가 입에 척 걸쳐 있어도 차버리는 사람 없고, 입으로 발가락이 들어가면 그것을 젖인 줄 알고 빠는 사람도 있어요. 정이 들면 그래도 좋다는 겁니다. 집이 있는 사람은 부부끼리 한 번 싸우면 침대를 둘을 놓느니, 방을 따로 쓰느니 하면서 말도 안 하지만, 천막에서 한 이불 덮고 자면 매일 싸워도 매일 합하게 됩니다.
우리 통일교회를 판다고 가정해 봅시다. 교회를 팔아서 통일교회가 다 없어졌다고 소문 한번 내보자는 것입니다. ‘아 청파동 통일교회가 큰 일이 나서 교회를 팔았대요.’ 그러면 청파동 하면 통일교회를 생각하고 에구 하던 기성교인들이 좋다고 얼마나 춤을 추겠어요. 춤추는 것 보면 좋습니까? 나쁘지요? 그렇다면 못 팝니다. 그래요. 교회는 못 파는 것입니다. 거지가 되어도….
그러면 무엇을 팔지요? 선생님 양복을 팔까요? 지금 갖다 팔면 십만 원씩은 줄 것입니다. 일본에 가면 일본에서 해주고, 미국에 가면 미국에서 해주고, 독일에 가면 독일에서 해줘서 선생님은 양복이 많습니다. 이것을 팔까요? 양복은 많지만 선생님은 될 수 있으면 공식석상에 그런 양복을 입고 나타나고 싶지 않아요. 지금은 탕감복귀시대이기 때문에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선생님의 옷도 팔아야 되겠지요? 「안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여러분이 책임지겠다고요? 통일교회가 이런 점이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여러분에게 신세지고 싶은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도 선생님이 하시는 일에 돈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선생님은 여러분의 돈을 다시 돌려줄 것입니다. 선생님도 비상작전을 쓸 것입니다. 빚은 선생님이 가만히 있어도 갚게 될 것입니다. 내용적으로는 빚을 안 졌습니다.
들어올 것이 다 들어오면 금년에 공장을 움직이고도 남을 수 있는 재산을 모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빚을 갚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당장 자금이 들어오지 않아서 돌지 않고 있어요. 그러니 시일이 바빠요. 시일이 바쁘니 어떻게 전개해 나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번에 지구장들이 완전히 결의를 했어요. 12월 말까지 만약 선생님이 하라는 대로 안 하는 날에는 축복가정들은 천벌을 받습니다. 통일교회 교인들 전부 다 동원해서 얼마 안 되는 빚을 다 갚아야 하겠는데 그렇게 하겠습니까, 안 하겠습니까? 「하겠습니다.」
그래도 공장이 커서 물건을 만들고 있으니까, 여러분이 판매 요원으로 총동원해서 그 물건을 팔아야 합니다. 알겠어요? 이것을 팔지 못하고 다시 가져올 사람들은 처음부터 안 시키겠습니다. 그럴 사람은 가담하지 말아요. 못해도 3년 고비를 넘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뜻을 좀 알고, 일을 놓고 생각하면 머리가 아프고 가슴이 아파서 잠을 잘 수 없는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사람으로, 원리를 중심삼고 생각하고 느낄 수 있는 사람만 가담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다 가담할 수 없습니다. 선생님이 왜 관계없는 사람을 시키겠습니까? 스스로, 괜찮다는 사람에 한해서만 가담시키는 것입니다. 여러분, 7년노정의 의의를 알겠지요? 모두가 넘어가야 됩니다.
그러면 이렇게 해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가? 이 나라와 이 민족을 구하자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과거를 생각할 때 옛날에 잘 먹고 누구에게 환영 받던 것을 생각하지 않아요. 지지리도 억울하던 것을 생각합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저려 옵니다. 그때 하나님은 ‘아무개야 내가 있다. 세상이야 어떻든 내가 알아주니 걱정 마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투쟁 과정을 거쳐야 할 사명이 있었기에 그 사명을 다하는 날까지 그렇게 가야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길은 결코 쉽고 편한 자리에서는 갈 수 없습니다.
우리도 이러한 길을 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세상 사람들이 그 실력과 배경으로 자기들을 위해 살고, 자기들을 위해 사회에 생애를 바쳐 어떠한 결실을 맺었다 할 때, 우리는 그들을 능가할 수 있는 기준 위에 올라서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통일교인입니다. 알았어요, 젊은이들?
우리는 세계 국가를 대신해서 공산국가와 싸우는 데 희생되는 무리가 되기를 지망해야 하겠습니다. 선생님은 반공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반공만 하면 뭘 합니까? 그러나 반공을 하지 않고는 승공이 나오지 않기에 반공을 한 다음 더 준비를 해 가지고 승공을 해야 합니다. 이제는 우리가 공산당에 대해 공세를 취해야 되겠습니다. 선생님이 앞으로 이것을 위한 거국적인 단체를 조직하려고 계획하여 80퍼센트 정도 진척됐는데, 그것이 세상으로부터 반대를 받게 되어서 지금까지 연기해 나오고 있습니다.
어렵지만 우리는 어떻게든 이 단계를 넘어야 합니다. 그래 가지고 한국을 움직이고 더 나아가 일본과 중국을 포함한 아시아 전체를 움직여야 합니다.
아시아에 반공연맹이 있지요? 이것을 중심삼고 세계의 자유를 우리에게 맡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수고가 지방관리에서부터 고급 관리까지 전부 다 민주주의를 옹호할 수 있는 결과가 되었기 때문에 지금부터 다시 노력하게 되면 그런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앞으로는 한국과 미국을 중심삼고 워싱턴에 세계적인 반공단체를 만들려고 합니다. 그래서 반공에 관한 다른 모든 단체를 전부 흡수하여 새로운 사상과 이념으로 무장시켜서 반공 지도요원을 양성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선생님의 계획입니다.
여러분 그때까지 기다릴 수 있어요, 없어요? 이런 경우 공산당원들은 노리쇠를 걸고 총 끝을 들이대면서 ‘예스까, 노우까?’ 하고 물어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공산당원들은 지금까지 이중간첩으로 넘어왔던 사람들을 살려준 적이 없습니다. 간첩으로서 2차, 3차까지 왔다간 사람들은 모두 죽이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첩보기관에서 비밀활동을 하는 요원들은 모두 그렇게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그들을 대해 어떻게 싸우겠습니까? 밥 잘 먹고, 잠 잘 자고, 치마 두르고, 양산 쓰고 싸우면 될 것 같습니까? 머리는 길어 가지고…. 여러분 앞으로 머리 깎아요. 깎을래요, 안 깎을래요? 앞으로 여러분들은 통일교회에 들어와 살면서 세상 사람들로부터 ‘이 사람 통일교회 들어가더니 달라졌구만.’ 하는 말을 들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들딸이 전부 다 희생됩니다. 선생님이 농담하는 것 아닙니다.
지금은 대한민국의 모든 사람들이 선생님을 싫어한다 해도 앞으로는 선생님을 필요로 하는 환경이 도래할 것입니다. 선생님이 그들에게 만나자고 하지 않아도 그들이 웃으며 찾아올 것입니다. 앞으로 그들이 우리에게 공명정대하게 상대하지 않을 경우 그들은 우리의 적수가 안 될 수 없는 인연을 가지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돈이 많이 필요합니다. 미국에서 어떠한 작전을 해서 물적 자원을 색출해 내느냐 하면, 미국의 상․하의원을 전도하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해방을 전후한 때부터 그날까지 통일교회의 책임적인 입장을 유지하며 앞서 나가야 합니다. 여러분은 선생님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을 알기나 하는지….
여러분은 편안히 잠자고 먹고 살도록 되어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에게는 4단계 배가운동이 필요합니다. 우리 편의 사람을 많이 만들기 위해서는 오해를 받든 어떻든 직행해야 되겠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과거에 활동했던 것을 다 씻어 버리고 이 7년노정이 끝나면 진짜 대공문제를 중심삼고 단체 활동을 해야 되겠습니다. 그럴 때가 됐기 때문에 선생님은 그런 단체 구성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그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외적인 분야에 기독교가 필요합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기성교회와 같은 수의 교인을 어떻게 확보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또한 지금 우리는 긴박한 국가문제라든가 사회문제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많은 사람들을 전도하기 위해서는 여자들이 많이 필요합니다. 지금 지구장 부인들은 모두 아기를 둘, 셋씩 낳고 사는데, 아기는 전부 다 남편에게 맡기게 하고 전도를 위해 전국 어디에 파송할지도 모릅니다. 또 다른 어떠한 비상한 대책을 세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런 것보다도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앞으로 벌어질 크나큰 판국을 수습하기 위한 많은 인재인 것입니다. 수련 과정을 통하여 철두철미한 사상으로 무장이 되어 힘과 패기를 갖춘 사나이와 아낙네를 하나님은 필요로 하시는데, 사실상 현재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해야 할 일은 많은데 우리가 갖고 있는 인적 자원은 극히 적습니다.
하나님은 사회의 모든 사람들을 흡수해서 책임을 지우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당장 우리 이념권 내에서 책임질 수 있는 입장에 설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세상 사람을 선택해서 제1차적인 책임부서에 다시 배치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이 사실이 얼마나 서럽겠습니까? 선생님도 절실히 느끼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허리띠를 졸라매고, 보따리를 둘러메야 하겠습니다. 여자들은 머리에 인다고 하겠지만 피난을 가는 게 아닙니다. 애기 보따리, 남편 보따리를 둘러메고 제2의 행군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학교나 관공서 같은 곳에 가서 그 사람들을 전부 다 훈련시키고 교육시키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실례입니까? 남자들, 생각해 보십시오. 실례입니까, 아닙니까? 젊은 사람들 어떻게 생각해요? 「좋습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모두 생명을 내놓을 만큼 좋습니까? 생각할 여지가 없습니다. 껄렁껄렁한 자세 가지고는 안 됩니다.
아베베가 한국을 다녀갔지요? 이름이 아베베지 반벙어리는 아닙니다. 여러분, 아베베 봤습니까? 모두 봤을 것입니다. 선생님도 그날 바쁜 날이었지만 그가 얼마나 잘 뛰나 일부러 가 봤습니다. 거무튀튀한 사람이더군요. 아프리카에 가면 그런 사람 많아요. 한 사나이가 달리기를 잘해서 세계에 이름이 나니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통일교회 문 선생을 아는 사람은 세계에 없지요? 여러분 아베베가 유명합니까, 문 선생이 유명합니까? 누가 유명합니까? 외적으로는 그가 유명하지만 내적으로는 선생님이 유명합니다. 영계에서는 통일교회 문 선생을 모르는 영들이 없습니다. 영계에서 그런 자들을 선생님에 비한다면 피라미 새끼도 안 되는 것입니다.
앞으로 통일교회 청년들이 선생님이 말한 세계를 만들기 위해 깃발을 들고 어떠한 나라에 들어가 폭탄을 던졌을 때 그 나라의 국민들이 와서 살려 달라고 할 수 있는 그런 날이 오면 여러분 좋겠지요?
옛날에 선생님이 싸울 때 웬만큼 맞아서 터진 것은 종이도 안 붙였습니다. 여기에 지금도 흉터가 있습니다. 학생 시절 여름에 친구하고 한강변에 가서 수면에 돌을 던져 튕기는 놀이를 하는데 친구는 여남은 곳이나 튕기면서 나갔습니다. 그것도 멋지게 하려면 여러 조건이 잘 맞아야 합니다. 돌도 잘생겨야 하고, 던지기도 아주 잘 던져야 합니다. 각도를 조금만 잘 못 맞추어도 빵 하고 한 번도 안 튕기며 물속으로 빠져 버립니다. 또한 각도도 잘 맞추어야 하는데 선생님이 잘 던지려고 있는 힘을 다해서 각도를 맞추어 가지고 던지다가 손끝이 바위에 맞았어요. 이러니 물장난 치게 됐습니까? 기분이 나빠서 피가 흐르는 손끝을 한강물에다 자꾸 자꾸 한 40분쯤 씻어냈습니다. 그러다가 조금 있으니까 입술이 부르튼 것처럼 퉁퉁 부어올랐습니다. 그래서 와이샤쓰를 찢어 가지고 자꾸 찍어 냈습니다. 여름이라 세 시간 내지 네 시간 지나니까 말라붙더니 며칠 후엔 다 나았습니다.
지금 선생님은 허리 부러진 호랑이입니다. 그렇지요? 가만히 앉아서 시켜 먹고 있거든요. 선생님이 무슨 대회를 해도 우리 통일교회 청년들이 다 한 후에 나와 가지고 윗사람으로서 큰소리만 하고 말이에요. 그래서 사람들이 왈 허리 부러진 호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선생님은 모험을 아주 좋아합니다. 선생님처럼 이렇게 눈이 작은 사람이 겁이 없습니다. 대개 눈 큰 사람이 겁이 많다고 말하지요? 그런 말 들어 봤어요? 여자들은 예뻐 보이기 위해서 작은 눈을 고치느니 하면서 법석을 떨고, 어떤 이는 눈이 작다고 좌절하기도 하는데, 눈이 작은 사람이 모험을 좋아하는 거예요. 선생님은 편안히 앉아서 쉬는 걸 싫어합니다. 일주일에 몇 번이라도 자극을 받기 위해 굉장한 일을 하든가, 침을 한 대 맞든가 합니다. 원래 선생님이 그런 선조의 후손입니다. 그런데 통일교회에는 자극적인 사람이 없기 때문에 선생님이 바다로 가고 산에도 가고 해서 스스로 자극을 주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종교 책임자만 아니라면 대로 복판에 가서 한바탕 싸움을 해 보고 싶습니다. 그러면 금방 이길 텐데 그럴 수 없으니 이렇게 가만히 있는 것입니다.
우리 통일교회에는 자극이 필요합니다. 나쁜 의미의 자극 말고 선한 의미의 자극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꼴찌 하는 것을 제일 싫어합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중간치도 싫어합니다. 20여 년 전 한국의 실정을 보면 공산주의자든가 민주주의자든가 둘 중에 하나가 되어야지, 회색분자들은 이리 저리 몰려 다 죽었습니다. 통일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통일교회를 반대하든가 아니면 통일교회의 운동을 적극적으로 하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결의를 하고 똑바로 나아가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가는 데는 제일 빠른 길로 가야 하겠는데 그 길이 어느 길이겠습니까? 그 길은 김일성이 사는 주택이나 모스크바의 크렘린 궁전으로 가는 길입니다. 그러한 곳을 찾아가기 위해서는 혼자는 안 됩니다. 동지가 필요합니다.
지금 뜻적으로 볼 때 우리의 제일 큰 원수가 공산당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들을 대해 총칼을 가지고 싸우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수고해야 됩니다. 고생해야 합니다. 수고를 해 가지고 세계적인 이념으로 고생했다는 전통을 세우고 세계를 사랑하는 데 있어서나, 세계를 위해서 봉사하는 실제 행동에 있어서 그들을 능가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공인할 수 있는 기준이 되어야만 그들이 우리를 환영합니다.
지금까지는 한국에서 통일교회가 핍박받는 자리에서 움직여 나왔지만, 대중이 환영할 수 있는 몇 개의 조건을 세워 나왔기 때문에 이제는 환영받을 수 있는 환경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여실히 느끼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통일교인들은 공산당과 싸워야 하기 때문에 앞으로 고생을 더해야 합니다.
흘러가는 역사의 와중에서 그 누가 뭐라고 해도 당신의 뜻을 따라가겠다고 할 수 있는 참다운 책임자가 없었던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습니다. 핍박의 화살 가운데서도 당신의 사랑하던, 당신의 심정의 깊은 뜻을 논의하던 기독교 신자들이 얼마나 고귀했던가 하는 사실을 저희들은 알고 있습니다.
한 생명이 이 땅 위에 왔다가는 기필코 가야 하는 것이 인간의 공동노정임을 알고 있사옵니다. 사람으로 태어났다가 하나님을 찾아가게 될 때에 스스로 취해 갈 수 있는 선을 갖지 못하는, 혹은 명예밖에 갖고 가지 못하는 불쌍한 사람들이 되지 말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저희들이 남이 가지지 못한 보물을 갖기 위해서는 남이 거치지 않은 시련의 과정을 거쳐야 됨을 아옵니다. 눈물과 고충을 거치지 않고는 자기 기준을 높일 수 없음이 사회생활이나 피조세계의 인연을 통해 사실이라는 것을 저희들은 공인하고 있사옵니다.
저희들 하나님의 심정을 중심삼아 역사의 전체를 대표하고 천주적인 가치를 대표하여 남아질 수 있는 보화로운 그 자리를 차지하여 아버지 앞에 효성의 도리를 다함으로 청사에 빛날 수 있는 거룩한 효자의 이름을 갖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 그것이 지극히 귀하고 가치 있는 일인 줄 알고 있사오니, 그러기 위해서는 비장한 마음과 피어린 투쟁과 피어린 노력을 기울여야 된다는 사실도 잊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공든 탑은 무너지지 않는다’는 속담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공을 들인 것은 귀한 가치로써 받아질 수 있으되 공들이지 않은 것은 귀한 가치로써 받아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당신이 통일의 무리들을 사랑하시는 것이 고맙사옵니다.
한때 저희들은 삼천만 민족의 화살을 받고 그들의 입에 오르내리면서 채찍을 당해야 했습니다. 또한 그들이 저희들에게 세상을 나쁘게 하는 무리라고 손가락질하고, 침을 뱉고 하면서 좁은 길로 몰아넣었사옵니다. 그러나 저희들이 당한 것이 원통하고 분한 것이 아니었사옵니다. 아버지의 노고에 보답해 드리지는 못하고 천륜을 대신한 고귀하신 아버지의 이름을 밟았사오니, 이 민족에 죄 없이 당하시던 아버지의 그 일들이 저희에게는 참지 못할 수난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길이길이 참으시고 오늘날 저희들에게 명령하여 저희들을 배반하는 무리 앞에 새로운 봉화를 밝히게 하시고, 어둠길에서 헤매는 그들 앞에 당신의 사랑하는 사자를 보내셨사오니, 그런 당신의 사랑 앞에 저희들은 감사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욕을 먹고 매를 맞은 사람의 상처를 아버지의 손길 대신 어루만져 주고, 먹을 것이 없는 원수의 자식을 아버지 대신 먹여 주는 참다운 사람을 아버님께서 찾고 계신 것을 저희들은 아옵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통일교회의 무리들은 그러한 뜻을 따라 차가운 시대의 뒷골목을 밟아가며 남모르는 눈물의 길을 자처하고 나섰던 옛날의 고비 길이 있었음을 오늘 감사할 수 있습니다.
또 저희들을 부르시는 아버지의 그 마음에 감격이 어리고 아버지와의 인연을 살릴 수 있는 심정을 가질 수 있는 자신임을 아오니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아버지의 귀한 섭리에 남겨짐을 진심으로 감사할 줄 아는 통일의 자녀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저희 가슴 가운데는 나무도 풀도 없습니다. 공허한 것 중의 공허한 것이요, 빈 것 중의 빈 것이요, 마른 것 중의 마른 것이옵니다. 그러나 한 가지 갖고 있는 것이 있사오니, 그것은 ‘아버지’ 하고 부르고 싶은 마음, 아버지를 만나고 싶은 마음, 아버지를 모시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 마음만은 하늘과 땅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귀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저희들 최후까지 그 전체의 가치가 되겠다는 마음을 지니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불쌍한 민족을 바라볼 때, 그냥 바라보는 자들이 되지 말게 허락하여 주옵소서. 동맥에서 흘러나온 피가 저희들을 동하게 하여 서로 부둥켜안고 통곡하지 않을 수 없고, 감정을 주관하여 그들을 주시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간곡한 자세를 가진 모습이 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께서는 그러한 모습들을 고대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그러한 모습들을 품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옵니다.
재촉해야 하는 발걸음을 멈추고 패망의 길에 있는 나를 품어 줄 수 있는 그런 주인과 그런 부모와 그런 책임자를 고대하는 것이 인간들입니다. 지금까지 패망의 길에서 낙오된 신세를 한탄하는 것이 타락한 인류의 역사였사옵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류가 가는 길이었음을 저희들이 알게 될 때 그 뒤안길에서 친구가 되고, 상처 입은 발걸음을 저희들이 바로 고쳐주어 하나의 패를 남길 수 있는 자녀가 되지 못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속된 것인가를 절절이 느낄 줄 아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지금까지 살아왔던 과거와 살고 있는 현시대의 나 자신을 놓고 볼 때, 이 손은 무엇을 위해 움직이고 있으며, 내 심정은 무엇을 위해 허덕이고 있으며, 몸과 얼굴은 무엇을 향하여 나가고 있는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민족이 부르고 있는 참다운 모습을 대신하기 전에, 과거를 비판하고 현실을 통탄할 줄 아는 참다운 하늘의 아들딸이 되어야 할 것을 알아, 저희들이 그런 아들딸이 되겠다고 얼마나 얼마나 다짐하고 얼마나 얼마나 하나님 앞에 맹세했사옵니까?
그러나 저희의 가슴에는 찬바람이 감돌고,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사라져 버려 사탄세계에 처해 있는 처량한 모습이 되었으니, 하늘의 슬픔과 땅의 슬픔이 얼마나 컸을 것이며, 하늘땅을 품고 싸워 나오신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터지게 아팠겠습니까? 저희들 이것을 망각하는 우매한 자들이 되지 말게 하여 주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러한 길을 갈 적마다 당신 앞에서, 한 많은 아버지의 역사노정에서 위로의 동참자가 되지 못하였던 지난날을 간절히 뉘우쳐야 되겠사옵니다. 통일의 무리들이 아버지 앞에 그러한 자녀의 모습이 되지 못한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아버지라 부를 면목이 없사오니 이를 용납해 주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한 많은 역사노정에 있어 어느 곳에도 찾는 자가 없어 저희들을 찾아오셨으며, 남아진 어떠한 민족이 없어서 이 민족을 찾아오셨습니까?
상처받은 발걸음을 멈추어야 할 가엾은 아버지 앞에서 쓰러져가고 흩어져 가는 외로운 민족이 있었사오니, 그 민족이 아버지께서 소원하시는 기준에 미치지 못해 눈물을 흘리시며 바라보아야 했던 그 상심이 얼마나 크겠사옵니까? 어린것을 사랑해야 할 아버지의 마음, 이 민족의 처량한 모습을 보시고도 백번 천번 참아 오신 아버지의 마음을 저희들은 미루어 짐작 할 수 있나이다.
저희는 그 아버지의 피와 땀을 받고 난 아들딸이옵고, 그 아버지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겠다고 다짐할 수 있는 무리들이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희들, 이 민족이 사경에서 허덕이는 것을 바라볼 때 밤을 새워 지치는 한이 있더라도 민족의 갈 길을 외칠 줄 아는 당신의 자녀들이 될 것도 각오해야 하겠습니다.
아버지, 그 누가 뭐라고 하여도, 비록 저희가 초라한 모습으로 끌려간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기억하실 수 있는 그 모습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알고, 그 길에서 낙망하지 말고 슬퍼하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뜻을 염려하면서 남한 각지를 바라보시며 고뇌하시는 아버지의 그 일념을 저희도 함께 하게 해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아버지의 그 수고를 알아 아버지를 모셔 드릴 수 있는 저희가 되지 못할 때는 저희를 사랑하지 마옵소서. 다만 아버지께서 저희를 세워 칭찬하실 때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자랑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자녀의 날을 보내고 12월을 맞이하여 둘째 번 주일을 맞이하였사옵니다. 이 해도 이젠 20일밖에 남지 않았사오니 지난 일들을 고스란히 보내고 새로운 해를 맞이해야 할 이 때, 과거를 다시 한번 회상하면서 좀더 아버지 앞에서 고뇌하며 마음 졸이고 새로운 미래를 창조하는 재창조의 부름을 그리워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승리의 한 날을 위해 오늘도 곤경에서 과거에도 해산의 수고와 피나는 운동이 이 땅에 있었다는 것을 스스로 느낄 줄 아는 참다운 자녀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앞에 승리의 한 날을 맞이해 놓고 ‘아버지, 영광받으시옵소서.’ 할 때 아버지께서는 대성통곡하실 것입니다. 그날을 그리워하는 것이 아버지의 마음인 것을 알고 있사오니, 그날을 향해 달음질치겠다는 저희들의 이 결의가 변치 말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민족은 세계 만민을 구원하지 않으면 안 될 책임과 사명을 짊어졌기 때문에, 옛날에는 받고 의지하던 민족이었지만 이제는 주고 지도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사오니, 이 책임을 지고 세계만방에 흩어져야 하는 민족이 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저희들에게는 환경적인 지도와 생활적인 지도를 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지방에서 이날을 기념하며 예배드리는 당신의 자녀들을 기억하여 주시옵고, 세계에 널려 있는 수많은 무리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그들은 하나님을 알고 있으나, 스승을 만난 일이 없습니다. 그들을 헛된 자리에 두지 마옵시고 그들의 마음이 충성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천적인 인연이 감돌고, 생명이 싹틀 수 있는 자리에 있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내 아버님, 진실로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날 모든 전체를 당신께서 맡아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남아진 싸움 길로 향하기 위해 저희들이 헤어져야 할 시간이 된 것을 섭섭하게 생각하며, 다시 만날 때 하늘 앞에 드릴 귀한 선물을 남기겠다고 노력할 줄 아는 저희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옵니다.
남은 은사의 노정도 당신의 뜻 가운데로 승리의 한 날을 택할 수 있는 노정이 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바라오며, 참부모의 성호 받들어 아뢰었사옵니다. 아멘.
오늘날 타락한 후손으로 태어난 각자가 스스로를 완전복귀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은 타락하여 사탄 편으로 떨어져 사탄의 종도 못 되었던 인간을 긍휼히 보시고,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대할 수 있는 기대를 세우게 해서 하늘 편의 종의 종 입장으로 세운 후에, 거기에서 충성하는 자를 종의 입장으로 이끌어 올리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종의 입장에서 다시 양자의 입장을 거쳐 직계 아들에 접붙이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하시는 것입니다. 접붙인다는 것은 곧 바꿔친다는 것을 말하는데, 양자가 직계 자녀의 입장으로 되는 것을 말합니다. 차자의 입장에 있는 사람은 장자의 입장에서 사탄의 권한을 심판하고 나서야 비로소 장자의 입장으로 바꿔쳐지게 됩니다. 이렇게 접붙이는 놀음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역사의 처음 출발의 형태를 보면, 사탄세계가 먼저 출발을 했기 때문에 그것은 먼저 난 장자와 마찬가지 입장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오기 전까지는 이 세계 인류가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었기 때문에, 이 아담의 자손 전부는 예수님의 형님과 마찬가지 입장입니다. 어떤 형님이냐 하면 양자 입장의 형님입니다. 이것을 볼 때 역사 이래 이 천지간에 처음으로 하나님을 중심한 직계 아들의 책임을 짊어지고 오신 분이 누구냐 하면 예수님입니다.
그렇지만 타락하지 아니한 아담을 기준으로 보면 예수님은 둘째 아담입니다. 오늘날 기성교회는 그것을 모릅니다. 원래 아담이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 아담은 우리 인류의 타락한 조상이 아닙니다. 아담이 타락하지 않고 하나님을 대신하여 목적을 완성했다면, 그때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모든 권한과 하늘 전체이념을 중심삼고 하늘 가계(家系)의 가법을 세움으로 말미암아 이 천지가 천리에 맞게 출발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깨졌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통하여 뜻을 이루시고자 했던 그 소망의 날을 잃어버렸고, 소망의 개인․가정․종족․민족․국가․세계․천주까지 다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계는 사탄으로 말미암은 악한 세계, 즉 하나님이 세우려고 하셨던 세계의 반대의 세계가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세계를 제거해 버리고 하나님이 세우시려던 세계로 복귀해 나오시는데, 이것이 구원역사라는 것입니다.
이 역사를 일시에 전부 복귀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악의 패거리가 개인․가정․종족․민족․국가․세계의 형태를 이루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냥 빼앗아 올 수는 없습니다. 여기에는 엉클어진 곡절이 많고, 그 곡절마다 맺힌 사연이 많기 때문에, 이것을 반대로 풀지 않고서는 복귀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이치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엉클어진 명주실 같은 것을 풀 때 끄트머리에서 마구 잡아당기면 어떻게 됩니까? 잡아당기면 당길수록 더 엉클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엉클어진 역사를 가진 이 세계와 천주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그 맺힌 곡절을 반대로 풀어야 합니다. 이러한 역사를 풀어 가려니 세상이 가는 길과 그 보조를 못 맞추게 됩니다. 세상은 전부가 자기 만족과 행락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는데, 그러한 세상이 가는 반대의 행로를 가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이 운동이 바로 구원섭리입니다.
구원섭리 가운데에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습니다. 지구상에 있는 수많은 민족은 그 민족마다 문화적인 배경, 역사적인 배경, 전통적인 배경, 환경적인 배경이 각기 다르니 만큼 하늘은 거기에 적응할 수 있는 내용으로 오랜 역사노정을 섭리해 나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위해서 수많은 민족을 대신한 애국자, 사상적인 지도자, 종교적인 지도자를 택해 세우시고, 이들을 내몰아서 엉클어진 역사를 풀어 나오셨습니다. 이것을 풀어 나가는 데는 개인을 거쳐 종족, 민족, 국가의 순으로 풀어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정상적인 코스로 섭리해 나오면서 역사적인 종말시대를 맞이하여, 아담 이후 4천년의 역사가 지난 후에 비로소 그 총괄적인 책임자로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땅 위에 엉클어진 것을 풀어야 할 사명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요 16:12)고 하시고, 자기의 소신과 내면적인 모든 사연을 이 땅 위의 그 누구에게도 토로하지 못하고 그냥 가슴에 묻어 둔 채 가셔 버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맺혀진 세계를 풀지 않고는 구원섭리의 목적, 즉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목적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메시아는 다시 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메시아가 왜 다시 와야 하는가를 알겠지요?
오늘날 20세기 문명을 자랑하는 현재의 세계를 바라볼 때에, 얼마나 엉클어져 있습니까? 미․소가 다투면서 국제적인 문제를 풀려고 자기들 나름대로 공산주의니 민주주의니 하고 주장해 나오지만 그것 가지고는 풀 도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나타난 결과를 두고 볼 때 이것은 이 땅 위의 인간들을 통하여서 되어진 것 같지만, 그 내용에 들어가 보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하나님과 사탄이 그 배후에 맺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알 수 없지만 영계와 육계가 인연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의 배후에서 맺혀진 것이 복잡한 결과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결과를 풀려면 그것을 전부 들추어 가지고 그 원인까지 해결지을 수 있는 길을 개척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러한 사명을 해야 하는 것이 현하 전세계에 널려 있는 수많은 종파, 혹은 교파들인데도 불구하고, 이것을 자기들의 사명 분야로 생각하는 사람조차도 많지 않은 실정입니다.
그러면 통일교회는 무엇을 하자는 곳이냐? 바로 이것을 풀자는 곳입니다. 이것을 풀지 않고서는 복귀를 못 합니다. 이것을 푸는 데는 어떻게 풀 것이냐? 완전복귀를 하려면 완전히 풀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대외적인 관계에 있어서 개인끼리 맺힌 감정이 있으면, 개인끼리 만나면 해결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 잘못했으면 그 사람을 붙들고 주먹질을 하든 어떻게 하든 둘이 만나서 이마를 맞대고 풀어야 합니다. 서로 만나 가지고 풀어야 합니다. 또 가정에 맺힌 것이 있으면 가정 전체가 회합해서 전체의 동의를 얻어야 합니다. 안 그래요? 가정에 맺힌 것은 아버지나 어머니 혼자서는 풀 수 없습니다. ‘나는 뭐 집안의 장자니 내 말대로만 해야 돼.’ 이런 식으로 말하는 아들이 있다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가정에 맺힌 것이 있으면 반드시 가정이 합해서 풀어야 합니다. 또 민족에게 맺힌 것이 있으면 민족이 합해서 풀어야 하고, 국가에 맺힌 것이 있으면 국가가 합해서 풀어야 하며, 세계에 맺힌 것이 있으면 세계가 합해서 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확실히 알겠지요? 「예.」 이렇게 그 범위가 크면 클수록 복잡해지는 것입니다.
복귀역사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예외가 있을 수 없습니다. 혹 어떤 사람은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므로 능치 못하실 일이 없고 마음대로 하실 수 있을 것이니, 세계적으로 맺힌 것을 예수님 혼자 오셔서 풀면 되지 않겠느냐’라는 생각을 할지도 모릅니다. 천만에, 그것은 이치에 벗어나는 것입니다.
메시아로 오시는 분이 세계에 맺힌 곡절을 풀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환경을 만들어 놓아야 합니다. 이것을 풀기 위하여 4천년 동안 수고하여 만들어 놓은 터전이 이스라엘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풀지 못했으니 그 원인적인 책임은 사상적으로 이스라엘 나라를 지도해 온 유대교단에 있고, 그 결과적인 책임은 유대 나라에 있습니다.
악한 세계에 있어서 수많은 인류가 악한 나라의 주권을 가지고 국가적인 기대를 갖추고 있으니, 이 국가적인 기대를 풀기 위해서는 여기에 대할 수 있는 한 민족을 중심삼고 내적으로는 사상적인 터전을 갖추고 외적으로는 국가적 형태를 갖추어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이것은 절대적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예수님이 메시아로 탄생은 했지만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악한 세계에 맺힌 모든 것을 푸는 데 있어서 개인적으로 만나서 풀 수 있는 자격은 갖추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가정적으로 만나서 풀 수 있는 터전이 없었고, 교단적으로 만나서 풀 수 있는 터전이 없었고, 민족과 국가를 대하여 풀 수 있는 터전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터전을 갖지 못한 예수님의 입장에서 세계의 맺힌 것을 풀고자 하는 소망과 목적을 이룬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세계에 맺혀 있는 모든 인연을 풀어서 평탄한 세계를 만드는 것이요, 또한 인류의 행로를 개척하여 만민을 완전 복귀시키고 완전해방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협조하지 않아 이루지 못했는데, 그 목적을 성취시키기 위해서 협조했어야 할 책임이 누구에게 있었겠습니까? 하나님께 있었던 것도 아니고 예수님에게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첫째는 유대교에 있었고, 둘째는 이스라엘 나라에 있었으며, 셋째는 로마제국에 있었던 것입니다.
요즘 믿는 사람들을 가만히 보게 되면 ‘하나님, 제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저희 가정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민족과 세계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데 그러한 기도는 절대로 통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왔다 갔던 우리의 수많은 선조들이 얼마나 많은 기도를 했습니까?
수천년 동안 계속 그렇게 기도를 했을 텐데, 어찌하여 하나님은 이루어 주시지 못했겠습니까? 하나님이 세계를 용서하시려면 하나님이 세계를 대하실 수 있는 터전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가정을 용서하시려면 가정의 주인이 하나님 앞에 초청될 수 있는 자리에 서야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기도를 하려면 어떤 기도를 해야 하느냐?
예수님은 사탄의 3대 시험에서 승리했지만 사탄의 침범권 내에서 침범을 받고 영적으로만 부활되어 그 권한으로 아버지 앞에 가셨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 한계는 사탄세계의 범위, 즉 사망권으로부터 영적으로만 부활할 수 있는 정도밖에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우리들을 완전복귀시켰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나타난 예수님의 사명도 그 분야밖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밖의 것은 예수님이 다시 와서 이루어야 합니다.
자기 개인적으로 승리하지 못하고서는 가정의 무대를 향하여 나아갈 수 없고, 가정적인 승리를 결정짓지 못하고서는 종족의 무대를 향하여 나아갈 수 없으며, 종족적인 승리를 결정짓지 못하고서는 민족의 무대에 나아갈 수 없으며, 민족적인 승리를 결정짓지 못하고서는 국가의 무대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또 국가적인 승리의 터전을 갖추지 않으면 세계의 무대에도 나아갈 수 없습니다. 이런 단계를 거쳐가야 할 절대적인 천명을 받은 예수님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러한 길을 가지 못하고 맡은 바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예수님의 심정은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예수님은 가려야 갈 곳이 없었습니다. 몰리고 쫓기면서도 하늘의 뜻을 마음에 품고 복귀섭리를 이루어야 할 책임을 지고 가야 했던 예수님, 그러한 사명을 짊어지고 가는 길에도 몸 둘 곳이 없어서 갈릴리 해변가 혹은 겟세마네 동산의 은밀한 곳에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시며 사정하시던 그 심정이 얼마나 적적했겠습니까? 여러분, 그렇게 생각되지 않습니까? 그런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믿으면 구원 받는다.’ 하는 엉터리들이라면 반성해야 합니다. 신랑 되신 예수를 믿고 신부 되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신랑이 무엇을 하고 계신지도 모르고, 또 오신다면 말을 타고 오시는지, 구름을 타고 오시는지, 땅 속으로부터 오시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무조건 ‘우리 신랑은 구름 타고 오신다’고 하면 되겠습니까? 신랑이 오면 내가 무엇을 대접할 것인가도 생각하고, 또 신부로서 그를 맞이할 수 있는 승리의 개인이 되어 공동목적을 위해 그와 같이 갈 수 있는 준비도 갖추어야 합니다. 이러한 준비도 안 해 놓고 그저 나 좋기만을 바라는 사람은 이 지구상에서 추방해야 합니다. 이런 것을 생각해 볼 때, 우리 통일교회 교인들은 쉴 새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한은 참다운 개인을 대하려야 대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실 때 이스라엘 나라를 지배하고, 로마제국을 지배하고, 세계를 맨손으로 지배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왔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의 비난과 비소에 자기 몸을 움츠려야 했고, 로마의 창칼에 쓰러져야 했습니다. 나라로부터 몰렸고, 교회로부터 몰렸고, 자기의 가족에게도 환영받지 못했으며, 심지어는 제자들에게도 불신을 당했으니, 갈 곳이 없으신 예수님은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 딱하고 원통한 사정은 알지 못하고 예수님이 자기의 죄를 씻어 주기 위해서 죽었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게 믿어서 그것이 통한다면 좋겠지만 통하지 않는 것입니다. 만일 그것이 통한다면 우리 같은 사람이 무엇 때문에 비난받고 손가락질 받을 이런 일을 하겠습니까?
우리는 혁명의 기치를 드높이 들고 삼천리반도를 넘어서 세계적인 문제를 논의하고 나서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그러기 위해 준비해야 되겠습니다. 쇠망치로 안 되면 그 이상의 망치를 들고서라도, 검으로 잘라서 잘라지지 않으면 그 이상의 검을 만들어서라도, 칠 것은 치고 자를 것은 잘라야 됩니다. 이 일을 위하여 나선 무리, 즉 완전복귀를 목표로 하고 나선 무리가 통일교인들입니다.
세계를 구하기 위해서 나아가려는데 가정이 원수거든 가정을 밟고 넘어서야 하고, 국가가 원수거든 국가를 밟고 넘어서야 됩니다. 어느 누구라도 이 복귀의 뜻에 상대적인 입장이 되지 않을 때에는 그에 응할 수 없다는 절대적인 신의와 권위를 가지고 나타나야 합니다. 선생님은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산상의 그 어려운 죽음의 고비 길을 걸으면서도 참고 복귀해 나가고자 하는 그런 열의를 가진 메시아를 존경하지, 죄를 대속하기 위해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그런 메시아를 존경하지 않습니다. 그런 메시아는 필요치 않습니다. 그런 메시아는 지나가는 메시아로서 다시 올 메시아가 못됩니다.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나가야 할 통일의 무리들입니다.
예수님이 완전구원해야 할 메시아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는 완전한 사도들이 필요했습니다. 어부나 세리였던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을 보면 너무도 덜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선생님은 가끔 그들을 영적으로 만나보았지만 12사도들이 너무도 못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배반하고 팔아 버렸지…. 그러한 입장에 있던 예수님을 도리어 강도가 증거했습니다. 예수님이 3년 공생애노정에서 사명을 다하기 위해 정성들이며 수고하였지만, 제자들이 불신함으로 인해 죽음 길을 가게 되었을 때 난데없이 오른편 강도 한 사람이 증거함으로 말미암아 죽음 길에서 구원의 은사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죽음 길에서 구원의 은사를 찾아가는 것이요, 잘 믿는다는 사람들은 죽음 길을 택해 나왔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완전구원할 수 있는 한 사람을 찾으려 했지만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러한 개인을 만나지 못한 예수님은 그러한 가정은 말할 것도 없고 그러한 종족․민족․국가․세계․천주까지 만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그의 소망 앞에 나타나서 그와 상봉하여 그를 하늘과 더불어 모셔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래야 할 모든 나라와 세계의 이념은 바라다 보이는 수평선 아래의 어둠 속으로 삼켜져 버렸습니다. 사탄이 이 세계에서 예수님을 쫓아내고 이 세계를 지금까지 지배해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다시 한번 수습해야 합니다.
수많은 기독교인들은 억울하게 돌아가신 예수님에 대한 죄를 탕감하고 그에 보응하기 위해서 가기 때문에 가는 곳마다 억울한 입장에 처하게 됩니다. 개인의 화살과 총칼이 억울하게 그들에게 내려지고 가정, 종족, 민족, 국가, 세계적인 화살이 그들에게 쏟아지고 있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을 죽인 죄 때문입니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이 있습니다. 뿌린 것은 끝날이 되면 모두 거두는 것입니다. 유대민족이 제2차 세계대전 때 6백만 명이나 학살당했던 것도 그것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세계적인 보응입니다. 지금도 미국에서는 ‘유대민족’ 하면 아이들까지도 싫어합니다. 유대민족은 만민을 위하여 오신 메시아를 불신했기 때문에, 선한 사람을 박대했고 세계적인 의인을 희생시켰기 때문에 세계 만민들로부터 응당히 보응을 받아야 됩니다. 어디까지나 그 기준에 맞는 탕감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은 개인을 복귀하여 완전구원을 하려 했지만 그러지 못했으니 그 마음이 얼마나 슬펐겠습니까? 그렇다면 개인을 복귀해서 무엇을 하시려 했느냐? 개인을 복귀해서 가정을 창건하시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신랑이요, 너희는 신부라고 하셨던 것인데, 가정을 창건하지 못하고 다시 오마라는 약속만 남기고 가시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세계 가운데에서 하나의 신부를 찾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우선은 신부를 온전하게 길러 줄 수 있는 그런 완전한 남자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복귀원리를 들으면 이해될 것입니다. 천사장이 아담과 해와를 타락시켰기 때문에 이것을 복귀하려면 그 반대의 경로를 거쳐야 합니다. 천사장이 해와를 유인하여 타락시켰기 때문에 이것을 복귀하려면 천사장과 같은 입장에서 신부를 보호하고 길러서, 예수님의 이념을 대신할 수 있는 개인적 인격을 갖춘 신부로 단장시켜서 예수님 앞에 나타나게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2천년의 기나긴 역사를 두고 인간들로 하여금 많은 피를 흘리게 하면서 복귀역사를 해 나온 것입니다.
지금은 예수님의 이념을 중심삼고 나온 세계와 그렇지 않은 세계로 반분되어 있는 시대입니다. 장차 예수님이 오실 나라는 옛날 로마제국 하에 있던 유대 나라와 같은 형태를 갖춘 나라라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미국과 같은 선진국가에는 절대로 안 오신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탕감복귀 할 수 있는 형태를 갖추어야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복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땅 위에 주님이 오시기 전에 무엇을 해 놓아야 되느냐? 하나님은 주님이 개인과 가정, 종족, 민족, 국가, 세계, 천주를 완전복귀하기 위해서 오시는 것이기 때문에 그분이 복귀의 일을 할 수 있는 터전을 지금까지 만들어 나오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유대교를 중심삼고 이스라엘 나라를 세웠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이 땅 위에 기독교를 중심삼은 민주주의 세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외적으로는 민주주의요, 내적으로는 기독교의 세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분열된 기독교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세계적인 종말형은 하나로 통일해야 됩니다. 요즘 보게 되면 바티칸 궁전을 중심삼고 통일운동이니 뭣이니 하면서 교파와 종파를 넘어서 통일시키고자 하는 기운이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섭리상으로 보면 필연적인 사실입니다.
이렇게 외적 기준과 내적 기준이 준비되었으니, 세계적인 이념을 향하여 가야 할 메시아가 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시는 그분을 위해 6천년 동안 수많은 제물을 희생시켰습니다. 다시 말해 개인적인 제물, 가정적인 제물, 민족적인 제물, 국가적인 제물 등 수천만의 제물을 희생하며 탕감시켜서 나왔습니다. 그리하여 세계적인 형태를 갖추었지만, 오늘날 세계는 대원수인 사탄의 유물사관을 중심삼고 이루어진 공산주의 세계와 유심사관을 중심삼고 이루어진 민주주의 세계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지금까지의 인간들은 그것을 몰랐지만 뜻을 성취하기 위해 섭리해 나오신 하나님의 고충이 얼마나 컸는가 하는 것을 우리는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현재의 세계적인 모든 실정을 놓고 볼 때, 과연 이 민주주의가 오시는 주님을 쌍수를 들어 환영할 수 있는 입장에 서 있느냐? 또 수많은 교파로 분열된 기독교와 수많은 종교가 주님이 오실 때, 하나같이 환영할 수 있는 신앙의 터전을 갖추고 있느냐?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 형태가 세계적인 형태로 컸을 뿐이지 옛날과 마찬가지 입장이라는 것입니다.
여러 교파 가운데에 진정한 12사도와 같은 입장에서 책임을 짊어지겠다고 나서는 교파가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가 아닌 딴 종교 중에서 오른편 강도와 같은 입장에서 충성을 다짐하고 나서는 종파들이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만이 예수님을 맞이하고, 기독교만이 예수님을 신랑으로 맞을 수 있는 종교라고 자처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태어났을 때 맨 먼저 누가 알고 찾아가서 경배 드렸습니까? 동방박사입니다. 동방박사는 무엇 하는 사람입니까? 점쟁이입니다. 그는 유대교인도 아닙니다. 지금도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기독교인들이 제일 모른다는 겁니다. 이방종교들은 시대에 대한 운세나 천운에 대한 것을 감각할 줄을 아는데, 기독교인들은 밤인지 낮인지 모르고 멍청히 잠만 자고 있습니다. 어제도 그날 같고, 그날도 어제 같아서 전부가 해 나는 날만 있는 줄 알고 있지, 벼락 치는 날도 있다는 걸 모른다는 것입니다. 어느 땐가 갑자기 태풍이 불어와서 자기의 집이며 자기의 살림살이를 송두리째 다 쓸어갈 수도 있다는 것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어느 때 어떻게 될지 알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끝날에는 지혜 있는 자만이 살 수 있으니 밀실에 들어가서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기도하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통일교회는 뭘 하기 위해서 나왔습니까? 이 나라와 세계를 결속시키기 위해서 나왔습니다. 이 문제를 걸어 놓고 일해 나오고 있습니다. 지금 세계에 널려 있는 10억에 가까운 기독교인들이 문을 열어 놓고 통일교인과 만나 대화만 한다면, 3년 내에 그들을 결속시킬 자신이 선생님에게 있습니다. 아무리 큰 교회라 해도 한번만 때리면 갈라져 나갑니다. 이 나라와 세계의 민주주의가 문만 열어 놓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간단하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들을 결속시키기 위한 싸움을 전개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걷고 있는 노정은 옛날 예수님이 공생애노정에서 민족을 대신해 싸우던 그때의 노정과는 다릅니다. 시대와 환경이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그때는 민족적인 시대였지만 지금은 세계적인 시대입니다. 또 지금은 자유 민주주의 시대이므로 어떤 곳에도 언론과 결사의 자유가 있습니다. 이념을 주장할 수 있는 시대권 내에 들어왔습니다. 예수님이 살았던 시대처럼 말 한마디 잘못하면 죽이는 그런 시대가 아닙니다. 대통령이라 해도 잘못하였을 때는 원칙에 입각하여 비판을 하면 꼼짝 못하는 시대로 들어왔다는 겁니다. 누가 새로운 종교를 만들든, 무슨 일을 하든, 옛날과는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 오실 주님이 천사들의 나팔 소리와 함께 구름을 타고 오신다면, 세계가 한꺼번에 뒤집혀져서 모두가 그 앞에 굴복할는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그렇게 오시지 않는다면 문제입니다. 그렇게 오시면 되겠어요? 그렇게 오신다면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서 6천년 동안이나 기다리셨겠습니까?
완전복귀는 개인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이 개인을 완전히 복귀하지 못하면 가정을 완전복귀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가정을 완전복귀하지 못하면 종족을 완전복귀하지 못하고, 종족을 완전복귀하지 못하면 민족을 완전복귀하지 못하고, 민족을 완전복귀하지 못하면 국가를 완전복귀하지 못하고, 국가를 완전복귀하지 못하면 세계를 완전복귀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구름을 타고 오신다면 무슨 일이 되겠습니까? 그렇게 오셔서 될 것 같으면, 뭐 하러 6천년이나 기다리셨겠습니까? 아마도 그렇게 오시려고 한 다면 벌써 오셨을 것입니다.
사람이 의리와 뜻을 세웠을 때, 그 세운 의리와 뜻을 하나님이 보시고, 기억할 만하고, 믿어 줄 만하고, 협조해 줄 만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주님이 자동적으로 오시기를 바라고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이 오실 수 있게 우리가 길을 닦아야 합니다. 6천년 동안 ‘주님 오십시오.’ 하고 기도만 하고 있으면 주님을 못 만난다는 것입니다.
통일교회의 책임은 세계를 하나로 결속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통일교인들을 가만히 보게 되면 ‘나 아니라도 되겠지.’ 하고 망보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강도보다 더 나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강도가 강도질을 해 가지고 갈 때 만약 그 지갑에 구멍이 뚫어졌다면 그 안에 든 금덩이가 떨어지게 될 테니 뒤따라가다가 그것을 주워 먹겠다고 하는 사람이나 마찬가집니다. 이런 사람은 강도보다 더 나쁩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 욕망을 채우기 위해 주먹을 휘두르며 싸운 사람보다 더 나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냇가에 떡 버티고 앉아서 송사리 떼를 구경하고 있는 황소와 같은 사람입니다. 얼마나 못났으면 그럴까요? 이런 황소와 같은 류의 통일교회 교인들이 있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사람은 어디 손 한번 들어 보십시오.
주님이 오실 때 구름을 타고 와서는 반드시 실패합니다. 목사들이 좋은 가운 입고 나와서 설교할 때는 거룩한 것 같지만 그 속의 내용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니 목사 혹은 그 자녀나 형님이라고 큰소리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절대예정이요, 기정사실이라고요?
만일 구원이 예정된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이 어떤 사람은 지옥 가라고 예정된 사람이니까 천당에 오지 말라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천당 가라고 예정된 사람이니까 갈 수 없는 사람도 오라고 하는 그런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그러한 한정적인 권내에서 그런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은 세계 구원입니다. 그것이 예정된 것입니다. 충신의 아들딸이라고 해서 이들이 마음대로 하려고 하면 하나님이 끌어낸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죄악의 자식이기 때문에 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다 탕감하고 나면 다릅니다.
아무리 큰 죄를 지은 사람이라도 세계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려고 나서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하나님 앞으로 돌아올 수 있는 가망성이 있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예.」 아무리 크나큰 민족적인 죄를 지었을망정 세계의 역적이나 살인자를 치는 사람은 세계적인 시대에서 민족적인 죄를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구원이란 그렇게 받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예정이란 것이 시시하고 껄렁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사실은 통일교인들은 그런 사람들과 이마를 맞대고 만나지도 못하게 하고 싶은 것이 선생님의 소견입니다. 그러나 그럴 수 있습니까? 지금은 그런 사람과 상대적인 입장에 서 있지만, 한 고개를 넘고 나면 그들도 선생님이 책임져야 되고, 또 지금 잘못하면 그때에 가서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에 억울하고 분해도 참고 나가는 것입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내용을 모르는 사람은 기도를 해도, 그저 내 아들딸 잘되게 해달라고 하고 우리 집 잘되게 해달라고 하는데, 전부 다 그렇게만 기도하면 하나님은 거지가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 있는 복을 몽땅 빼앗아 버리고 억울함과 헐벗음과 굶주림은 모두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면 되겠어요? 그러기보다는 ‘하나님, 제 복은 아버지의 것입니다.’ 할 때 하나님은 ‘오냐, 네 복은 내 것이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인연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복은 아버지의 것이자 아들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입장에서 이 영원한 세계를 위해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러한 내정적인 인연을 맺어 주기 위해서 메시아를 보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메시아를 통한 개인, 메시아를 통한 가정, 메시아를 통한 종족, 메시아를 통한 민족, 메시아를 통한 이스라엘을 찾아 세계적인 다리를 놓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이 깨졌습니다. 소망적인 이스라엘 국가를 창건해서 세계를 향하여 활보해 나가야 했던 그 기준이 사망의 세계로 뒷걸음질쳐 갔기에 그들은 하나님을 배신한 무리로서 쫓겨나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그것을 완전히 회복할 수 있을 때까지, 예수님의 사무친 마음이 풀리게 되는 그때까지 해방과 독립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은 2천년 동안 나라 없는 민족으로서 지지리 고생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도 그들이 그나마 오늘날까지 남아진 것은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옛날에는 예수님의 원수였고 돌이킬 수 없는 큰 실수를 했지만, 이제 세계적인 시대가 되었기 때문에 그들을 용서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나라가 독립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은 세계적인 천의의 시대로 들어갔다는 것을 예증한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이해하겠습니까? 「예.」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통일교회의 책임이 지대하다는 것입니다. 통일교회는 완전복귀를 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완전복귀를 하려면 완전복귀의 역사적인 책임자로 다시 오셔야 했었습니다. 그 시대에 인정받기 위해서는 역사적인 충신이나 열녀 혹은 하늘나라의 공신들로부터 인정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역사적인 공적을 쌓아야 했고 역사적으로 증거 될 수 있는 밑천과 터전을 닦아야 했습니다.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예수님을 아무리 믿는다고 해도 올바르게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왜 메시아라고 믿습니까? ‘그야 뭐 목사한테 들은 얘기이고 성경에 그렇게 나왔으니 그렇게 믿고 있지, 내가 어떻게 알아? 그렇다고 하니까 그런 줄 알지’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왜 만유의 주입니까? 예수님은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다.’고 했는데, 그 말은 어떻게 보면 아주 독단적인 말 같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공자와 석가와 다른 게 무엇입니까? 또 기독교인들은 예수님만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하면서 얼마나 자만심이 많습니까? 그들은 이방민족은 아무도 구원 못 받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것도 모르고 하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혈통적으로 타락인간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왈카닥 붙잡고 역사노정 위에 역사적인 혈통을 중심삼은 탕감의 법도를 어김없이 세워 나왔습니다. 그러한 터전 위에서 예수님은 자기의 생을 지내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타락에 대해서 알지요? 아줌마들 타락한 것 알지요? 「예.」 얼마만큼 압니까? 손가락 끝에 가시가 박힌 것만큼이나 알아요? 여러분, 손가락 끝에 가시가 박히면 얼마나 아픕니까? 누구에게나 손가락을 내밀며 도와달라고 할 것입니다. 그 가시를 빼주게 되면 참으로 고맙게 생각하지요? 그래, 타락에 대해서 그만큼이나 알아요? 그 가시가 박혀 아픈 것만큼이나 알았어요? 남자들은 통이 크니까 손끝에 조그만 가시가 들어갔다고 해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겠지요? 안 그래요?
여러분은 타락한 후손이라는 것이 틀림없지요? 그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타락의 후손들 참 처량하다! 그렇다면 타락한 후손을 보고 하나님이 책망해야 되겠습니까, 잘했다고 칭찬해야 되겠습니까? 책망은 얼마만큼이나 해야 되겠습니까? 눈을 한번 흘기는 것으로, 아니면 주먹으로 한번 치는 것으로 되겠습니까? 여기에 오늘 처음 온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이 타락한 후손들로 인해 쌓인 역사적인 곡절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인간이 6천년 동안 하나님의 심정에 못질한 것을 생각하면, 하나님은 먼지와 모래가 바람에 날리는 것처럼 우리 인간들을 한꺼번에 들어서 태평양 바다에 던져 버려도 시원치 않으실 것입니다. 선생님이 이런 표현을 하면 그런 하나님도 있을까 하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선생님이 눈을 치뜨고 두리번거리며 나쁜 말을 좀 하면, 여기에 처음 오신 분들은 밖에 나가서 오늘 통일교회에 갔더니 젊은 사람이 욕도 대단히 잘하더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여러분을 보고 ‘매맞고 억울하게 살아왔으니 잘 왔다.’고 칭찬하시겠습니까? 그렇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죄는 벌로 청산하고 선은 칭찬하여 세워주는 것이 천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대심판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에게 영계의 대심판 법정으로 출정하라는 명령이 내려지리라는 것을 생각해 보았습니까? 언젠가는 대심판 법정에 출정하라는 명령이 내려진다는 것입니다. 그 법정을 관리하고 지배하기 위해서는 판사가 있어야 되고, 검사가 있어야 되고, 변호사가 있어야 됩니다. 그러면 그 판사는 누구이며, 검사는 누구이고, 변호사는 누구이겠습니까? 판사는 하나님이요, 검사는 사탄이며, 변호사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변호사밖에 못됩니다.
검사는 논고하기를, ‘이들은 타락한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나 혈통적인 관계에 있는 고로 하나님 앞으로 복귀될 수 없는 근본적인 내용을 가진 사람들입니다.’라고 할 것입니다. 또 노아 때 범죄 한 사실, 아브라함이 제물 실수한 사실, 이삭과 야곱을 거쳐서 모세 때에는 이스라엘 민족이 불신하고 모세 자신이 혈기를 부린 사실 등, 근 4천년 동안 지지리 하늘을 배신했던 이스라엘의 민족적인 죄상과 오늘날 제2이스라엘의 입장에 있는 기독교인들의 죄상을 낱낱이 들어서 이러한 죄목은 천지의 공법 몇 조에 의해서 걸린다고 제시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변호사가 이 일에 대하여 변호를 해야 하는데, 그 사람의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비교해 보았을 때 그래도 좋은 것이 조금이라도 더 많아야지, 나쁜 것이 더 많으면 변호할 용기가 나겠습니까? 그래, 여러분은 자신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심판의 법정에 섰을 때, ‘하나님, 나는 이러 이러한 좋은 일을 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천지의 공법 앞에 나서게 되었을 때, 변호사이신 예수님의 피의 공로를 믿기 때문에 틀림없이 어떠한 특권이 있으리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말로만 예수님을 믿어서는 안 됩니다. 내용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피를 뿌린 것은 내용을 지니고 뿌렸습니다. 그러니 그 피에 접붙여야 합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죽어간 것도 내용을 지니고 죽어갔던 것입니다. 이런 십자가의 피에 접붙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만민을 사랑하기 위해서 자신의 생사를 개의치 않았고, 하늘의 공법, 공리를 세우기 위해서 죽음 길을 자처해 갔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엄숙한 차원의 내용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천군천사의 옹호를 받을 수 있었지만, 여러분이 그러한 모습을 갖추지 못한 자리에서 예수를 믿었다가는…. 그래 선생님의 말이 틀렸어요?
예수님의 그 피가 어떤 피입니까? 이 문제는 간단히 생각할 문제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피, 남편과 아내의 피가 서로 같습니까? 다릅니다. 겉으로 나타나는 붉은 색깔은 같을지 모르지만, 내용면에서 성분을 전문적으로 분석해 보면 둘 다 피는 피지만 다른 피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디에 접붙여야 되느냐? 하늘의 피에 접붙여야 됩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피에 접붙였기 때문에 그 피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죽음을 초월할 수 있었고, 또 그 공적으로 인하여 죽음에서 부활했습니다. 그러므로 그 피에 접붙이지 못하는 사람은 부활의 은사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피는 어떠한 피냐? 원한에 사무친 피요, 억울하고 불쌍하고 원통한 사연이 담겨진 피입니다. 그러한 핏자국을 중심삼고 예수님 앞에 기도하면, 예수님은 ‘아! 그런 기도는 하지 말아요.’라고 할 것입니다.
2천년 전에 가신 예수님 앞에서 ‘당신은 이러한 심정을 갖고 싸워 오셨습니다. 원한에 사무친 심정을 알지 못했던 이스라엘 민족에 대해 맺힌 한을 누가 풀어 드려야 합니까? 그들에게 복수하실 수 없는 당신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시옵니까? 저는 예수님이 흘리신 그 피의 한을 알고 있습니다.’라고 기도하면, ‘야야 그만둬라, 그만두어.’ 하고 말리실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여러분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중에 그런 교역자가 있습니까?
통일교회는 위대한 책임을 짊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감동시킬 수 있는 위대한 내용을 가지고 있고, 역사적인 사명을 책임지고 간 예수님을 동조하여 오늘날의 시대적인 사명을 짊어지고 십자가의 길, 골고다 산정을 행보하여 넘는 대열을 우리가 갖추어 책임지고 나아갈 수 있다는 이 사실, 이것이 우리들만이 가진 엄숙한 특권이라고 선생님은 자부하고 있습니다. 세계에 심정이 살아 있는 인류가 있는 한, 그러한 의리가 서 있는 한, 통일의 깃발은 사라지지 않고 우리의 뜻은 발전하리라는 것을 자신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예수님의 손을 붙잡고 ‘그곳에 나를 보내 주세요.’ 하면서 약속해 보았습니까? 이런 것 저런 것을 생각하면 모두 엉터리입니다. 엉터리예요. 엉터리의 형은 무엇입니까? 엉터리보다 더 나쁜 것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탄입니다.
기성교회에서는 통일교회를 일컬어 사탄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여기 통일교회의 선생님이 사탄의 괴수가 되었구만. 좋다는 것입니다. 감투는 같은 감투를 썼는지 모르지만 내용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것만 벗어버리면 다른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가리켜서 무엇을 했다고 합니까? 가장(假裝)했다고 합니까? 위장(僞裝)했다고 합니까?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은 그런 오해를 받아도 재미가 납니다. 여러분들도 재미가 납니까? 재미가 나요, 안 나요? 재미나지 않는 사람들은 수준 이하에 속하는 패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가장 알맞은 것이 무엇이냐 하면, 몽둥이라는 것입니다.(웃음) 선생님이 왜 이런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될 수 있으면 여러분들에게 이런 얘기는 안 하려고 하는데….
선생님이 외국에서 목적을 세워 놓고 일을 하면 별의별 일이 다 벌어집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여러분을 데리고 옛날에 했던 일을 또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소학교 선생 같은 일을 하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장난꾸러기 애들에게 제일 좋은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비행기, 자동차, 탱크가 좋으니 그것을 사 달라고 합니다. 우리 애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을 사 준다고 해도 싫다면서 그것만 사달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일입니다. 자기 나이에 맞는 장난감이 제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제 선생님은 여러분을 데리고 그런 장난하고 싶지 않습니다. 선생님은, 여러분들이 당당히 세계에 나서서 호령할 수 있는 한 인격자가 되어, 하나님의 중대한 뜻을 책임지고 나가는, 하나님이 천년만년 믿을 수 있고, 또한 ‘네가 가는 길에 내가 함께 하겠다. 너는 내가 갈 길을 대신 가고 있다.’라고 만세에 칭찬할 수 있는 그런 사나이가 되길 바라고 있는데, 잘못하면 호랑이 새끼는 못되고 살쾡이나 고양이 새끼가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잘해야 합니다. 그렇지요? 여러분 전체가 다 긍정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답은 하기 싫어하면서도 자기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말하고 싶어합니다. 선생님이 이렇게 말을 하면 ‘아이쿠 저런 말씀을 거북하게 왜 하실까?’ 그럴지 모르지만 그게 재미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그것이 하나님도 맥을 못 쓰게 만들고 사탄도 맥을 못 쓰게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완전복귀하기 위해서는 아까 말했던 그 피가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피를 중심삼고 역사해 나오십니다. 조금 전에 선생님이 예수님은 우리들과 핏줄이 다르다고 했습니다. 지금 선생님이 거기에 대해서 얘기해 주겠습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읽어 보면 아실 겁니다. 복귀역사이니만큼, 먼저 낳았던 자식은 사탄의 새끼입니다. 세계 인류는 전부 다 사탄의 새끼로 하나님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리고 다음에 난 아들이 예수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귀섭리역사는 장자를 쳐서 차자 앞에 굴복시키는 역사라는 것을 여러분도 원리를 통해서 다 알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도 그렇고, 에서와 야곱도 그렇고, 베레스와 세라도 그렇고, 요셉과 그의 열한 형제도 그러하며 이스라엘 민족과 세계의 국가도 그렇고, 온 세계 인류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도 그렇습니다. 장자를 쳐서 멸망시키는 것이 아니라, 먼저 쳤던 것을 심판하여 굴복시키는 것입니다. 천도가 거꿀잡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형이 먼저 나와야 할 것인데 동생이 형을 타고 앉아 먼저 나오는 역사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야곱이 요셉의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축복할 때 그들의 머리에 손을 엇갈리게 해서 축복을 해주었던 것입니다. 형은 왼손으로 동생은 오른손으로 거꾸로 축복을 해주신 것입니다. 천지가 왜 이렇게 됐는지 아무도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이 난세는 전부 다 한번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불구덩이에 들어갔다 나와야 합니다. 인간을 쇠에 비유하면, 쇠는 쇠인데 별의별 것이 다 섞여서 순수하지 않은 잡탕 쇠입니다. 그래서 끝날에 심판이 와야 한다는 거예요. 잡탕이 되어 순수하지 않기 때문에 순수한 아들의 피와 살을 접붙여야 합니다.
예수님의 피와 살을 먹지 아니한 사람은 예수님과 상관이 없다고 했지요. 예수님의 피와 살을 먹음으로써 예수님으로부터 접붙임을 받았다는 조건이 세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예수님으로부터 가짜가 진짜 되었다는 영수증을 받아야 하나님 앞에 갈 수 있습니다. 이 영수증을 받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영수증을 써 주는 데 있어서 그와 같아야 영수증을 써 줍니다. 예수님의 영수증을 받으려면 예수님의 사정과 그의 뜻에 하나되고 그가 가는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영수증을 받으면 예수님이 주님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형님이나 오빠가 되고 우리는 그의 동생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했고 우리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양자의 입장에서 혈통을 바꾸어서 복귀된 아들이요, 예수님은 본연의 아들입니다. 이것이 우리와 예수님의 다른 점입니다.
인간들을 하나님의 혈통으로 복귀하기 위하여 오시는 예수님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복귀하기 위한 터전을 닦아 나와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복귀해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 보니 이미 사탄세계의 인간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로 복귀되기 위해서는 거듭나야 합니다. 어머니 뱃속으로 찾아 들어갔다가 다시 나와야 합니다. 중생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중생이란 거듭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니고데모와 예수님과의 대화(요 3:1~10) 가운데 나옵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요 3:4) 하고 중생에 대해서 물어보니까 예수님께서 그것에 대해서 대답을 해주시고 나서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 (요 3:10)고 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중생’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세상에 태어날 때 전부가 원수의 핏줄을 타고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역적의 팻말을 든 사탄의 핏줄을 타고났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니까 섭섭하지요?
옛날 우리나라에서는 원수의 집안은 어떻게 했습니까? 7족까지 멸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원수의 핏줄을 타고 났으니 4차, 5차에 걸쳐 육신이 찢겨서 독수리 밥이 된다 해도 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다행히 그렇게 되지 않았으므로 여러분은 고맙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원수의 피를 받고 태어났기 때문에 이 피를 빼내서 없애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는 ‘금식을 해라, 온유겸손해라.’ 하는 등의 자기 육신을 치는 역사를 해 나왔습니다.
인간이 본래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높고 넓은 천지처럼 높고 넓은 기준을 가져야 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에게 그러한 기준을 부여하지 못한 것입니다.
세계를 제패하고 싶어하는 욕망은 인간의 본능입니다. 본능의 욕구라는 것입니다. 비록 인간조상이 타락하여 강도의 입장, 배신자의 입장, 역적의 입장에서 태어난 우리지만, 인간 창조 시에 본심은 천륜을 향하여 작용하게 한 그것이 없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은 우주의 제일로 높아지고 싶어하고 커지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종교에서는 ‘교만하지 말라, 온유 겸손하라, 자신의 몸을 쳐라.’라고 가르칩니다. 또 내 몸에 있는 사탄의 정욕을 버리고, 혈기를 버리라고 합니다. 그래서 금식을 하는 것입니다. 금식을 해서 사탄의 핏줄을 전부 끊어 버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영계에 갈 때, 일주일 이상 하늘을 위한 금식을 하지 못했을 때에는 저나라에 가서 입적을 못 하게 됩니다. 왜? 하나님은 6천년 복귀역사노정에서 수고했으니 그것을 생각하면서 금식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통일교회에서는 7일 금식 기간이 있습니다. 그것이 여러분들을 고생시키자는 것이 아니라 하늘 앞에 육신을 쳤다는 조건을 세우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육신을 쳐야 합니다. 우리 인간들이 ‘이 원수의 몸, 이놈의 고깃덩이야! 그 속에 사탄의 피가 준동하고 있구나.’ 하면서 칼로 찔러야 할 것을 고맙게도 예수님께서 대신 찔림을 당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남겨 주셨습니까? 예수님의 피와 살을 남겨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예수님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대신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사탄세계를 정복할 수 있는 책임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탄세계 앞에 종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탄의 머리를 쳐서 그의 세계를 정복할 수 있는 책임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가정에 들어가면 가정의 정복자요, 민족 앞에 나가면 민족의 정복자요, 세계 앞으로 나가면 세계의 정복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책임을 위해서 예수님은 우리 인간들에게 모든 피 살을 남겨 주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그 피 살인 포도주와 떡을 성만찬에서 잘 먹더니 배신하여 일전 한 푼도 안 되게 그저 싸구려 피 살로 팔아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성체(聖體)를 범한 죄는 천법에 의해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을 부인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을 알고 성경을 보면 ‘아! 그렇구나.’ 할 것입니다. 성경을 보게 되면, 아담가정에서 가인과 아벨이 나오는데, 여러분은 가인입니까, 아벨입니까? 아벨 하면 기분 좋아하고 가인 하면…. 여러분은 좋은 것만 다 좋아 하지요? 그런데 좋게 되는 것이 간단하지 않아요. 좋은 건 좋지만 좋게 될 때까지의 과정은 어렵다는 것입니다.
타락한 세상에서는 좋은 것으로 시작하여서는 좋은 것이 나오는 법이 없습니다. 타락하지 않았으면 좋은 것으로 시작하여 좋은 것으로 나올 텐데, 타락했기 때문에 좋은 것으로 시작해서는 좋은 것이 나오는 법이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통일교회가 좋은 곳을 찾아가기 위해서는 나쁜 곳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그럼 얼마만큼 나쁜 데에서 출발해야 하느냐? 그것이 문제입니다.
아이구! 난 개인적인 사정이 나쁜 자리에서…. 하면 안 됩니다. 세계적인 사정에 휩쓸리고 천륜의 사정에 휩쓸려서 제일 나쁜 자리에서 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좋은 곳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그것이 나팔통의 모양과 마찬가지입니다. 나쁜 곳과 좋은 곳이 쫙 벌어져 있는데 제일 나쁜 곳으로 깊숙이 들어가게 되면 좋은 곳과 가장 가깝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세상은 이 통처럼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한 점, 즉 아담 해와로부터 출발해서 지금은 이렇게 벌어진 것입니다. 벌어진 곳에서 그대로 깊숙이 들어가야 합니다. 어디까지 가야 하느냐? 아담 해와의 처음 그 자리까지 들어가야 합니다. 들어가는 데 있어서 죽는 고비가 많아도 그런 것을 개의치 않고 한꺼번에 넘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세계사적인 고난과 죽음의 길로 여지없이 몰아넣는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이런 과정은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전부 다 거쳐야 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왔다 간 성인들도 이 땅에서 그 일대에 고이 모심받고, 성공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떠한 사람이든 출세시키려면 들이모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보다 더 큰 사랑을 가지고, 세계를 대해 소망하는 사람보다 더 큰 소망을 가지고 자신을 찾아 주셨다는 것을 느껴야만,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 새 시대의 역군으로 출발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해 주시는 것입니다.
통일교회 선생님은 인류 복귀에 바쁩니다. 삼천만 민족이 나를 배반하고, 수많은 교단들이 나를 내몰고, 나에게 제일 나쁜 명패를 박아 놓아도, 그들이 그러면 그럴수록 선생님도 하나님과 더 깊게 인연 맺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을 감수해 나온 것입니다. 그 모든 노정이 끝나는 날에 흑암천지가 오는 것이 아니라, 광명의 새 아침이 밝아 그 빛으로 말미암아 천지와 함께 환영받게 될, 그런 날이 올 것을 믿고 참고 나왔더니, 과연 선생님은 성공했다고 봅니다.
선생님이 여러분을 지도하는 방법은 선생님의 머리로 생각해서 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천법에 의거해서, 또는 그 범위에 부합될 수 있는 원칙에 의해서 여러분을 지도해 나왔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과정에서 어떤 사람들은 ‘우리 선생님은 그저 고생만 하라고 하셔. 우리 선생님은 무자비하고 이러이러하셔.’ 하지요.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에게 수고와 공로가 크다고 말하면 좀 시원해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는 기뻐할지 모르지만, 심정적으로 하늘 앞에 들어가 자기 자신을 반성해 보면, 자기가 짊어진 십자가는 언제 벗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세상 사람들에게 핍박받는 것은 내가 잘못해서가 아닙니다. 전부 다 여러분들이 잘못해서 핍박을 받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선생님이 여러분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해 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용서받되, 용서받은 입장으로 하늘땅이 공인할 수 있는 조건을 세워야 합니다. 즉 선생님이 욕을 먹고 배척을 받으며 원통한 자리에서 하나님을 부여잡고 눈물어린 길을 걸어갔으면 여러분도 그런 자리에서 하나님을 부여잡고 선생님이 가는 노정을 생각하면서 눈물로써 자기의 죄를 회개해야만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통일교회는 고생하는 교회입니다. 언제나 최고의 고생길을 걸어왔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최고의 고비는 1960년대입니다. 그 고개를 박차 버리고 저편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고개를 넘어가야 합니다. 우리는 7년노정에서 마지막 6년 고비를 넘어가고 있습니다. 이 고비를 넘게 되면 이 민족, 대한민국의 미래의 운명이 환하게 밝아오는 때가 됩니다. 이 민족이 어려운 산정을 넘어 발전할 수 있는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생각할 때, 하늘의 수고가 얼마나 크신가를 다시 한번 느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 가인보다 아벨을 더 좋아하지요? 여러분이 안타까워서 캄캄한 밤중에 ‘아버지!’ 하고 하늘을 바라보며 기도하게 될 때 뭘 보게 됩니까? ‘별’을 보게 됩니다. 밤중에 땅을 바라보면 캄캄하지만 하늘을 올려다보면 ‘아! 별이 있구나.’ 하게 됩니다. 선생님도 하늘을 바라보고 그러한 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선생님도 그런 사연이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 통일교회 식구들은 아벨 되기 원해요, 가인 되기 원해요? 「아벨요.」 그럼, 얼마나 큰 아벨이 될 것입니까? 아벨도 개인적인 아벨, 가정적인 아벨, 민족적인 아벨, 세계적인 아벨, 천주적인 아벨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아벨의 뿌리는 못 되더라도 아벨의 가지, 아벨의 이파리라도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어려우면 아벨의 벌레 먹은 이파리라도 되어야 합니다. 벌레가 먹었어도 죽지 않아야 합니다. 나뭇잎을 가만히 보면 한쪽을 벌레가 갉아 먹었어도 죽지 않습니다. 그래도 여름 절기가 되면 푸르게 잘 크더라 이거예요. 그렇지요? 여러분은 벌레 먹은 아벨의 이파리가 되겠어요, 싱싱한 아벨의 이파리가 되겠어요? 어느 아벨 되겠어요? 물어볼 필요도 없이 좋은 것이야 너도 좋고 나도 좋고 다 좋은 것이지요.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안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벌레 먹은 이파리 같은 아벨이에요? 뭐예요? 여러분 자신의 양심을 펼쳐 보면 자신은 잘 알 것입니다. ‘아, 나는 몇 점짜리구나….’ 그런데 자기가 빵점짜리임에도 불구하고 ‘야, 너 빵점 맞았구나, 빵점!’ 하고 남들 앞에 공포하면 싫어합니다. 그렇지요? 사실을 사실로 공포하면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타락성 근성인 것입니다.
선생님은 선생님 자신이 악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악한 사람인가요? 악한 사람은 아니지요? 선생님은 아벨의 이파리가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뿌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뿌리가 되어 열매를 맺게 해서 그 열매가 떨어져서 온 천지를 덮을 수 있는 그러한 나무의 뿌리가 되고 싶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것을 갈망할 것입니다.
아벨 역사는 아벨이 뿌리기 시작했으니 아벨이 거두어야 되고, 가인 역사는 가인이 뿌리기 시작했으니 가인이 거두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두 세계로 갈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계사적인 책임을 지고 아벨의 천지로 만들기 위해서 아벨의 열매로 오셨던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세계적인 아벨의 입장으로 오셨던 분이 예수님이고, 가인의 입장에 있는 것이 바로 이 악한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가인이 아벨 앞에 굴복하면 천하는 평정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싸움을 하고 있고, 싸움으로 말미암아 가정도 부패되고 있는 것입니다. 요즈음 민주주의가 그런 상태입니다. 상원의원 하원의원, 야당 여당 이렇게 갈라져서 서로 싸우고 있습니다. 나아가서 세계는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는 몸뚱이와 같고, 하나는 마음과 같아서 여러분의 몸과 마음이 서로 싸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세계는 인간으로 인해서 빚어졌기 때문에 결과적인 세계도 필연적으로 인간에 의해 만들어져야 합니다. 그것이 진리입니다. 인간이 이 진리로써 뒤넘이치는 날, 세계는 고생과 신음, 탄식과 불행을 벗어난 세계가 될 것입니다. 또한, 사람은 몸이 원하는 대로 말고, 마음이 원하는 기준으로 몸을 다스릴 수 있어야만 거기에서 비로소 안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몸이 마음을 지배하는 생활을 해 왔습니다. 더욱이 민주주의나 유물주의 개인주의사상이 팽창해 들어옴으로 말미암아서 사상적으로 몸이 마음을 유린하는 세계가 되었습니다. 요즈음 사람들이 ‘하나님은 죽었다’고 하는데, 그 말이 잘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마지막 풀어야 할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 벗겨 보아야 합니다. 즉 죽었는지 살았는지 감정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누가 해야 하느냐? 바로 통일교회가 해야 합니다. 그것을 감정할 책임이 통일교회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죽었다고?’ 그 말이 나온 것을 보면 때가 다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죽긴 죽었습니다. 사탄세계에서 슬퍼하시던 하나님은 죽었습니다. 그 하나님이 부활할 때는 기뻐하는 하나님으로 나타나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탕감복귀의 원칙입니다. 선생님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형제끼리 서로 싸워 왔습니다. 하나님은 가인과 아벨의 원칙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 어머니 뱃속으로 다시 몰아넣는 섭리를 해 나오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형은 동생한테 굴복을 해야 하고 동생에게 축복을 상속해 주어야 합니다. 그런 역리적인 방법으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애급시대에도 장자를 쳤던 것입니다. 이렇듯 성경의 역사는 차자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을 통해서 개인적인 섭리기대를 세웠고, 쌍둥이인 에서와 야곱을 중심삼고 가정적인 섭리기대를 세우려고 했습니다. 그때부터는 쌍둥이 형제의 싸움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들은 뱃속에서도 싸웠고 나와서도 서로 싸웠습니다.
아담가정의 가인과 아벨은 따로따로 나왔는데 태어난 후에 싸웠고, 에서와 야곱은 한 뱃속에서 한 핏줄을 받은 쌍둥이로 뱃속에서부터 싸웠습니다. 이렇게 하여 점점 핏줄을 따라 뱃속을 통해서 복귀해 가는 것입니다. 결국 야곱이 에서를 굴복시켰기 때문에 사탄을 굴복시킬 수 있었습니다. 즉 그것은 혈통적인 내용에 있어서 사탄이 침범할 수 있었던 길을 막았다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점점 복중을 찾아 들어가는 것입니다.
유다는 누구냐면, 야곱의 아들입니다. 그리고 베레스와 세라는 야곱의 손자입니다. 유다와 그의 며느리인 다말을 통하여 쌍둥이로 태어난 베레스와 세라 두 형제는 복중에서 나올 때 바꿔치기 하여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했기 때문에 복귀섭리의 터전을 결정지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야곱과 에서가 복중에서 서로 싸우는 것을 걱정하는 리브가에게 하나님은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창 25: 23)고 하셨습니다. 베레스와 세라가 태어나게 될 때에도 동생인 베레스가 형인 세라를 밀치고 먼저 태어났습니다. 이렇게 복귀의 역사가 복중에서 벌어져서, 복중에서 동생 베레스가 승리하여 사탄을 굴복시킴으로 말미암아 사탄이 복중에 들어가서 참소할 수 있는 혈통적인 인연을 끊어 버렸기 때문에 복중은 불가침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복중을 통해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베레스의 승리의 전통을 이어받아 하늘의 법도에 따른 천륜의 인연을 배경삼고 태어난 후손들이 역사를 이끌어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민족적인 대표로 요셉을 세워서 그를 통하여 승리했다는 조건을 재현시켜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역사상의 딴 성현들과 다르게 메시아가 될 수 있었던 요건 중의 한 가지는 복귀섭리노정에 있어서 혈통을 바로잡은 그런 역사적인 터전 위에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은 내적으로 예수님을 침범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거꾸로 복귀해 나오십니다. 즉 외적인 것으로부터 섭리를 시작하여 점점 내적으로 들어가 복중에서 승리의 결정을 지어 놓은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사탄이 참소할 수 없는 기준을 닦아 놓았다는 것입니다. 야곱이 사탄과 싸워 사탄을 굴복시켰다는 조건으로 얍복강가에서 천사와 씨름하여 천사를 굴복시킴으로 말미암아 승리의 권한을 가졌고 가나안 땅으로 돌아와 에서를 굴복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럼으로써 승리의 민족을 통하여 복중에서부터 혈통적으로 동생이 형을 굴복시켜 나왔기 때문에 본격적으로 이스라엘이 섭리의 출발을 할 수 있었고 그 후손의 장손들이 책임을 지고 나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역사적인 핏줄기를 정화시키고 탕감해야 할 내용을 모두 탕감한 승리의 복귀의 터전을 통하여서 나오신 분은 한 분밖에 없었으니, 그분이 이와 같은 터전 위에서 섭리적인 책임을 지고 요셉가정을 통하여서 오신 예수님이었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은 다른 성현들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그렇게 나와 있지요?
그러면 그렇게 태어난 예수님은 어떠한 예수님이냐? 하나님께서는 6일 동안 천지창조를 하셨습니다. 5일 동안은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6일째 되는 날에 아담을 창조하셨는데 그 아담과 같은 분이 예수님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제2의 아담, 즉 후아담이라는 것입니다. 타락하지 않은 본연의 아담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태초에 아담을 창조하시고 그 아담을 중심삼고 해와를 창조하였으니, 이 후아담을 중심삼아서 후해와를 세워야 했었는데 세우지 못했습니다. 해와는 누가 세워야 하느냐? 아담이 세워야 합니다. 해와가 타락할 때 아담이 책임을 못 했기 때문에 잃어버린 해와를 아담이 찾아 세워야 합니다. 탕감원칙에는 용서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며 왜 오셨느냐? 인류의 참부모요, 참아버지의 사명으로 오신 분입니다. 아담이 타락하지 않았더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서 인류의 참아버지가 되었을 것이고 해와는 참어머니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타락함으로 인하여 그 축복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것을 복귀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4천년의 긴 역사를 통하여 준비하신 터전 위에 예수님을 참아버지의 사명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섭리적인 역사를 상속 받아서 아담적인 자리로 들어가서 사탄의 참소를 받았던 해와의 입장에 있는 사람을 굴복시키고, 그 사회의 모든 조건을 빼앗아 해와 앞에 서 있는 사탄 전체를 굴복시켜야 복귀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오셔서 주장한 것이 ‘나는 신랑이요 너희는 신부다.’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계에서 뭘 찾는 운동을 했느냐? 해와 찾는 운동을 하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맨 나중을 보게 되면,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계 22:17) 했습니다. 그럼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성령은 누구를 말하는가? 어머니, 어머니를 말하는 것입니다.
타락은 누가 먼저 했습니까? 어머니(해와)가 먼저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 죄를 아버지보다 어머니가 먼저 씻어야 하는 것입니다. 죄의 뿌리를 심은 사람이 어머니 입장인 해와이기 때문에 성신이 와서 대신령역사를 해야 됩니다. 그래서 탕감의 조건을 세워서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성신을 받지 않으면 중생이 안 됩니다. 어머니의 복중을 통하지 않고서는 태어날 수 없는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이리하여 성신으로부터 감동을 받아 신랑 되시는 예수님을 흠모하는 사랑으로 취해 내 몸이 있는지 없는지, 몸 안에 있는지 몸 밖에 있는지 알 수 없는 그러한 자리에서 부활된 증거를 받지 않고서는 천국을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중생입니다. 알고 보면 간단한 것입니다. 기성교회에서 말로는 뭐가 어떻고 중생은 뭐 어떻고 하지만 모두가 엉터리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와서 필요했던 것이 무엇이냐? 민족보다는 종족이요, 종족보다는 가정이요, 가정보다 더 필요했던 것은 상대적인 신부, 즉 해와였습니다. 그리고 그 신부보다 더 먼저 찾아야 할 것은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사탄의 3대 시험(마 4:1~11)에서 사탄하고 싸운 것은 자기 자신을 복귀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승리함으로써 자신을 찾게 되었고, 그 다음에는 가정을 찾아야 했습니다. 가정을 찾으려니 신부를 찾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시대에는 예수님이 자신의 그러한 사연을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저 막연하게 ‘나는 신랑이요 너희는 신부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4천년의 역사노정을 두고 전세계로 하여금 신부 단장을 시켜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거기에서 우주사적인 하나의 어머니를 선택해서 신부로 맞음으로 말미암아, 그 아버지 어머니를 중심삼고 새로운 가정, 새로운 종족, 새로운 민족, 새로운 국가, 새로운 세계로 복귀시켜서 천국을 이루어야 하는 것이 예수님의 사명이었습니다. 그것을 여러분들이 확실하게 알아야 됩니다. 알겠어요? 확실하게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혈통적인 입장에서 그러한 남자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예수님을 ‘구주로, 메시아로 완전히 모셨다.’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예수님과 한몸이 돼야 합니다. 그럼 기독교는 예수님과 한몸이 됐습니까? 안 되었습니다. 한몸이 뭡니까? 타락 전, 그러니까 이성을 모르는 입장, 다시 말하면 아담 속에 있는 아들딸의 씨와 같은 입장을 말합니다. 그러한 입장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한몸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계의 만민들은 참어머니가 나타나기 전에 태어났으니 헛되게 태어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과 접붙인 입장에서 예수님의 뱃속으로 들어가서 예수님이 부부를 이루었을 때 성신을 통하여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거짓된 사랑으로 태어났으니 참된 사랑을 통하여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 사랑을 강조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계에서 2천년 동안 무엇을 했느냐? 예수님을 믿다가 영계에 간 사람들은, 아직까지 결혼하지 못한 아버지와 같은 입장에 있는 예수님 안에 들어가 있는 아기 씨와 같은 입장이므로 천국에 갈 수가 없어서 낙원으로 가서 예수님의 신부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천법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신부가 나와야 됩니다. 신부의 인연을 거쳐서, 다시 말하면 신부와 인연을 맺지 못하면 하늘나라를 대하여 자기 나라라 할 수 없고 천국에 대하여 자기의 생활적인 이상세계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결혼을 하지 않았지만 완성한 입장이므로 결혼만 하면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완성한 남자의 입장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요 6:56~57)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 그것이 무슨 뜻이냐? 예수님과 한몸이 되어 예수님의 몸 안으로 파고 들어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이 슬퍼할 때 슬픈 감정을 받아야 되고 기뻐할 때 기쁜 감정을 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와 일심동체가 되어 ‘그의 사정이 내 사정이요, 그의 요구가 내 요구요, 그가 싸움하는 목적이 내 목적이다.’ 하고 느낄 수 있는 자리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렇게 되지 않는 사람은 앞으로 신부를 맞으러 오시는 신랑이신 예수님을 절대 맞을 수 없는 것입니다. 통일교회가 지금까지 고생해온 것도 바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럼 여러분 주님 맞이할 자신이 있습니까?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오시겠습니까? 예수님이 오시는 데는 세계적인 예수님으로 오실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화려하게 오시는 것이 아니라 처량하게 오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신부를 맞이해서 가정을 편성하고, 종족을 편성하고, 민족을 편성하고, 국가를 편성하고, 세계를 편성해야 하는 사명을 짊어지고 오시는 것입니다. 외적으로 준비되어 있는 세계적인 환경을 내적으로 연결시키기 위한 사명을 짊어지고 오시는 것입니다.
인간이 타락함으로 인하여 영적(靈的)으로는 죽었기 때문에 육신만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세계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에 다시 영(靈)을 주입시켜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외적 세상에도 역사적인 배경을 중심하고 내적 기준을 결정지어 놓은 이념적인 내용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앞으로 오시는 주님을 만나게 되면 그 사람이 예수님을 잘 믿은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오시는 주님 앞에서는 무엇인지 모르게 끌리게 되고, 밤이나 낮이나 같이 있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래야만 오시는 주님과 일심동체가 되어서 참어머니의 복중을 통해 태어났다는 조건이 세워지기 때문에 이렇게 하기 위한 작전으로 1960년부터 7년노정을 출발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늘편 가정이 나오기 전에는 사탄편적인 가정을 하늘편 가정으로 접붙일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하늘편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 통일교회에서는 합동결혼식을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통일교회에서 합동결혼식을 한다고 비웃지만, 합동결혼식을 통하여 하나님이 접붙일 수 있는 내용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종족적인 승리의 기준을 갖추고 국가적인 승리를 거두게 되는 날, 세계는 하나님 앞에 무조건 용서받을 수가 있게 됩니다. 그러한 복귀의 길이 얼마나 감격적이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민족복귀 과정에 있어서 사탄과 치열한 투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한 순간은 우주적인 생명이 호흡하는 시간입니다. 그 호흡을 잘 하느냐 못 하느냐에 따라서 질식할 수도 있고 소생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운명을 분별해야 하는 책임을 짊어진 사람들이 통일의 용사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그러한 책임을 느끼고 있습니까? 그저 껄렁껄렁하다는 것입니다. 혹시 여기에 처음 찾아온 사람이 있다면 기독교인들과 마찬가지로 통일교회를 평하지 마십시오. 통일교회는 근본적으로, 질적으로 다릅니다. 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내용적으로도 다르고, 형태적으로도 다릅니다. 기성교회로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을이 오기도 전에 떨어지는 나뭇잎과 같은 입장에 있다 하더라도, 찬바람이 불어와 나뭇잎이 다 떨어지고 몰아치는 설한풍을 받고 서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 가운데서 생명력을 잃지 않고 모든 외적인 난국을 물리치고 승리적인 생명으로 회생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다시 태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통일교회가 외부의 폭풍과 싸우면서 길을 닦았던 모든 것은 희생하는 봄 절기같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기 위함인데, 여러분, 그러한 가지가 되고 줄기가 되었습니까? 그러한 여러분이 되어 있지 않다면 문제인 것입니다.
통일교회가 회생춘(回生春)한 가지에 접붙임을 하여 정상적으로 잎이 나고 꽃이 필 때까지를 몇 년 잡느냐? 우리의 노정으로 볼 때 3년은 걸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돌감람나무를 잘라 내고 참감람나무를 접붙이고자 할 때 돌감람나무의 어느 부분을 잘라야 됩니까? 나무의 밑둥치를 잘라야 됩니다. 그 덩치가 세계보다 큰 나무라 해도 미련 없이 잘라서 아궁이의 불 속으로 던져 넣어야 합니다. 그래서 돌감람나무는 참감람나무의 새로운 가지를 곱게 접붙여 가지고, 새로운 생명관, 새로운 생활관, 새로운 세계관, 새로운 우주관, 새로운 사랑관을 받아야 됩니다.
접붙이는 데 있어서, 우리가 잘 보이지도 않는 참감람나무의 꽃눈 하나 접붙여 가지고서 돌감람나무 전체를 잘라 내고 참감람나무로 바꾸려고 하니까 세상 사람들은 ‘저 미친 녀석들, 정신 없는 녀석들…’ 하면서 비난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 통일교회 교인들은 그러한 비난, 그러한 핍박을 많이 받습니다. 참감람나무와 돌감람나무는 외적으로 볼 때 나무는 똑같지만 내적인 내용이 다릅니다. 그러니까 돌감람나무를 다 잘라서 불살라 버리고 그 뿌리에다 참감람나무의 내적인 내용을 꼼꼼히 싸매서 내 생명 아끼듯이 해가지고 참다운 진액으로 새순을 다시 자라게 해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자기 전체를 묻어 버려야 합니다. 하나의 생명을 위해 자기 일대에 있어 지금까지 아무리 큰 잎사귀였다 해도 그것을 묻어 버리고 새로운 것을 자기 생명보다 자기 개체보다 자기 일족보다 더 존중할 수 있는 기준이 있어야 거기에서부터 비로소 새로운 생명의 싹이 돋아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볼 때에 통일교회 가는 길을 따라가기는 힘들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런 일을 가지고 선생님이 하나님과 문답한 적이 있습니다. ‘너는 그 일을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습니다.’ ‘아이구 우리 부모님, 아이구! 우리 친척, 아이구 우리 아들딸….’ ‘이렇게 세상 사람들이 문제가 되어도 이 길을 가겠느냐?’ ‘그런 것은 문제가 안 됩니다.’ 이러한 대답을 했습니다. 완전복귀는 문제가 없다고 선생님은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앞으로 여러분에게 통일교회가 어떤 노정을 나갈 것인지 세부 세칙을 상세히 설명해 주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얘기를 다 해주려면 아직은 좀 때가 이릅니다. 선생님이 지금 이런 얘기 하면, 세상 사람들이 눈이 뒤집혀 가지고 통일교회는 뭐 어떻구 어떻구 할지 모르나 그러한 어려운 모든 핍박을 이겨 나가게 되면 여러분 자신의 개인 완전복귀는 못하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러면 앞으로 이 세계에 어떠한 사람이 나타나야 되느냐? 개인을 완전히 복귀한 메시아적인 사명을 가진 사람이 나타나야 합니다. 메시아는 개인 완성은 물론 가정을 완성해야 합니다. 가정을 완성하려면 종적인 역사의 더럽혀진 모든 것을 탕감하고 해원하여 질서를 바로잡아야 됩니다. 그래서 가정복귀의 기준을 세워서 종족과 친척을 거느려야 됩니다.
야곱의 70가족, 모세 때에 70장로, 예수 때에 70문도가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통일교회도 새로운 이스라엘 창건의 기준을 중심삼고 그런 층의 가정적인 기대를 세워서 종족적인 터전을 마련하고, 그 종족이 합하여서 선을 중심하고 악을 굴복시켜 거기서부터 새로운 민족을 창건해야 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새로운 국가, 새로운 세계, 새로운 천주를 창건해야 됩니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을 창건해서 하나님 앞에 바쳐야 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그러한 운명을 짊어지고 있는 통일교회의 무리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알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서 말하는 선생님에게도 어쩔 수 없이 부모님을 배척해야 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그것은 용납되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혹은 별의별 욕을 다 듣고 사랑하는 그 누구도 뿌리치고 가야만 했던 역사가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그런 길을 걸어왔기 때문에 여러분들에게 이런 길을 가라고 내몰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탕감복귀를 통해서 개인, 가정, 종족을 중심삼고 복귀의 노정을 넘어갈 수 있는 때가 되었기 때문에 통일교회 교인들은 가정에 들어가 부모님을 전도할 때입니다. 선생님에게도 하나님을 잘 믿는 형님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형님은 내가 누군지를 몰랐습니다. 선생님은 아버지에게도 이런 모든 얘기를 한마디도 못 해 주었습니다. 자기의 혈족을 중심하고 먼저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혈족을 먼저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아들딸들, 즉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제물이 될 리 만무합니다. 사랑하는 아들딸, 사랑하는 백성, 사랑하는 민족을 쳐서 그들을 제물 삼아 이 세계를 구하겠다고 하신 하나님이었기 때문에 그 뜻을 따르는 우리들도 우리의 혈족을 먼저 쳐 가지고 세계적인 제물로 삼을 수 있는 그런 아량이 있어야 공의의 천지 앞에 설 수 있게 됩니다.
선생님이 생각할 때 우리 통일교회 식구가 아무리 선생님을 사랑한다고 해도 나의 부모님이 하신 만큼 사랑하지는 못합니다. 더 사랑해요? 자기 처자를 사랑하는 것만큼도 사랑하지 못한다 이거예요. 그러나 통일교회 교인 한 사람은 세상 사람들의 너덧 명 몫이 됩니다. 선생님이 말하는 것은 공의와 천륜만이 남아질 것입니다. 선생님은 천년만년 심판의 기준이 될 천법, 즉 만민을 위한 공의의 법도를 세워야 합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자나 깨나 그것을 생각하고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책임을 짊어지고 나가는 선생님을 따라 나오는 여러분을 어떻게 지도해야 할 것인가? 그런 공의와 공법 앞에서 승리할 수 있는 모습이 되게 하여 하나님 아버지 앞에 같이 가고 싶은 것이 선생님의 욕망입니다. 좋은 욕망입니까, 나쁜 욕망입니까? 「좋은 욕망입니다.」 여러분들은 좋을지 몰라도 선생님은 죽을 지경입니다. 왜? 가야 할 앞길을 바라보기에도 바쁘고, 또 갈 길은 세계적인데 여러분들을 위해 뒤를 돌아보아야 하니…. 선생님이 오라 해도 오지는 못하고 지쳐서 쓰러지고 죽어가고…. 선생님께 ‘선생님 빨리 가세요. 저희는 지쳐서 쓰러지더라도 선생님의 갈 길은 바쁘시니 빨리 가십시오.’라고 해야 할 텐데 그렇게 하기는커녕 ‘아이고! 저 살려 주십시오.’라고 신음하며 아우성만 치니 선생님 가는 길에 지장이 많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떠한 무리입니까? 선생님은 그것을 묻고 싶어요. 또 앞으로도 묻고 싶은 것입니다. 선생님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는 데 있어서 하나님의 동정을 받는 사나이는 안 되겠다고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뜻길을 가는 선생님 앞에 여러분은 동조자가 될 것입니까? 아니면 반대자가 될 것입니까? 동조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생님의 동조자가 되는 것이 간단한 것입니까?
선생님은 때때로 ‘나 혼자 남았구나.’ 하는 것을 느끼곤 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좋다는 것입니다. 내 갈 길 내가 가야 하기 때문에 선생님에게 어떠한 어려움이 있을 때에도 협회장이나 그 누구한테도 절대로 도움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하늘의 섭리를 선생님이 책임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에게도 자녀로서 해야 할 책임이 남아 있으니 그 책임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그 책임을 못 하게 될 때에는 선생님은 어떻게 할 것이냐? 다른 사람들을 세워서라도, 아니면 선생님의 자녀들을 세워서라도 하나님이 주신 책임을 다하여 승리하겠다는 것이 선생님의 생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은 이 생각 저 생각 하느라 머리가 아주 복잡합니다. 그리고 선생님의 가정이 순탄하지 못하다는 것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무슨 말인지?
여러분들이 선생님이 하는 일에 동조하고 그 분위기에 화합하여 호흡의 일치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은 뜻적으로 볼 때, 또 운세적으로 볼 때 복귀의 사명을 간접적으로 방조하는 입장에 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힘들고 어려워도 선생님은 이러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이 일은 끝까지 해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역사의 한을 풀어 나가야 할 엄숙한 과제를 책임지고 미래의 복귀된 세계를 보여 주자는 한 목적을 향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선생님은 요전에 외줄 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우리의 갈 길이 저렇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하늘 노정을 가는 데 있어서 까딱 잘못하면 몇천년 몇만년 동안 이끌어 오신 하나님의 복귀섭리가 솟구칠 날을 잃어버리고 한 순간의 고비 길에서 뒤넘이쳐지게 됩니다. 이런 것을 생각해 볼 때 우리의 나가는 길이 얼마나 어렵겠는가를 여러분들은 알아야 됩니다.
그런데 그러한 길을 가려면 여러분이 많은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자나 깨나 다짐하고 다짐해야 됩니다. 우리 통일교회 교인들 중에서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습니까? 껄렁껄렁하다는 것입니다. 세계가 복귀되는 시기가 되면, 여러분들도 한번 확 불어 보면, 여러분들이 하늘을 얼마나 사랑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하늘을 위해서 얼마나 맹세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연말이 되면 그때부터 선생님이 모든 사항을 세밀히 가르쳐 줄까 해요. 지금까지는 선생님이 어떠한 일을 하기 전에는 여러분에게 그 일에 대하여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통일교회 선생님은 선생님이 먼저 하지 않고는 가르쳐 주질 않았어요. 선생님이 먼저 하고 나서, 선생님이 했으니 여러분들도 하라고 했습니다. 선생님은 때려서라도 통일교회 교인들이 그 일을 하게 해야 합니다. 통일교회 교인들은 선생님한테 맞아도 꼼짝 못하게 되어 있어요. 이 녀석 하고 욕을 퍼부어도 선생님한테는 꼼짝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선생님이 여러분들에게 욕하고 때리는 것은 여러분을 위해서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을 위한 길을 닦아 놓자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을 위해서 복귀의 길을 닦아 가자는데 못 가겠다고 하면 어떻게 합니까? 끌고서라도 가야 합니다. 거꾸로라도 끌고 가야하고, 말의 뒷다리에 매서라도 끌고 가야 합니다. 기진맥진하여 쓰러지더라도 끝까지 가다보면 참아버지와 참어머니와 아들이 살고 있는 본향 땅에 도착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도 여러분을 때려 쳐서라도 참사람을 만들려고 합니다.
지금까지는 악이 선을 쳐서 악을 만들었기 때문에 죄였지만, 선이 채찍을 들어 악을 쳐서 선을 만들 때는 선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새로운 철학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여러분들을 쳐야 되겠어요, 괜찮겠어요? 「예.」 여러분들을 쳐도 괜찮겠어요? 「예.」
선생님이 이 길을 가는 데는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도 선생님에게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이 생명을 걸고 찾아 나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해서든지 빨리 완전복귀했으면 좋겠지요? 완전복귀…. 그러려면 단단히 각오해야 됩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요즈음 바쁩니다.
옛날과 같이 여러분들을 이끌어서는 안 되겠어요. 아주 호되게 이끌어야겠어요. 그래서 선생님은 할머니나 아주머니들을 젊은 아가씨로 보기로 했습니다. 또한 할아버지나 아저씨들도 젊은 총각으로 보기로 했어요. 선생님의 생각이 어때요? 좋지요? 김 장로 좋아요? 「예.」 하루에 백 리라도 뛰어라 이것입니다. 왜, 그것은 싫어요? 일등으로 못 뛰더라도 뛰라는 것입니다. 어떤 선수가 올림픽 대회의 어떤 경기에 출전해서 그 선수가 꼴찌를 했어도 출전했기 때문에 올림픽 선수인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예를 들어 올림픽 대회에서 어느 코스를 뛸 적에 10년을 걸려 뛰고 있어도 그것은 뛰고 있는 것입니다. 원칙적으로 보면 시간이 됐다고 그 경기를 폐회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10년이 걸려도 10년을 기다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원칙적인 폐회 규칙이라는 것입니다. 마지막 한 사람이 결승점까지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원칙적인 폐회 규약이기 때문에 10년이 걸려도 기다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생각하시기 때문에 하나님도 그렇게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 새로운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즉 뛰라는 것입니다. 10년 걸려서 뛰면 하나님은 10년을 기다려 줍니다. 그 사람이 10년 동안 뛰고 있으면 그는 10년 동안 올림픽 선수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꼴찌지만 어떻든 간에 뛰어서 결승점까지 가면 되는 것입니다. 열 번 넘어지고 열 번 뒤로 왔다갔다하든 간에 한 발자국이라도 앞으로 나가게 되면 그만큼 탕감복귀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선생님이 여러분들을 박대하는 것이 실례예요, 실례 아니에요? 똑똑히 생각해 보세요. 실례예요, 실례 아니에요? 「실례 아닙니다.」 그래요, 실례가 아닙니다. 초창기에 ‘뜻 앞에서 잘 뛰겠다.’고 다짐하던 생각 안 나요? 그때가 좋았지요. 세상 사람들에게 핍박을 받고, 남편에게 두들겨 맞고, 발이 부르트고, 쫓겨다니던 그때가 좋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은 어느 때가 제일 좋으냐? 선수가 되어 뛸 때가 제일 좋은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상 탈 때가 좋지요?
선생님이 늘 생각하는 것은 무엇이냐? 세계적인 사탄을 굴복시켜야 하는 사명입니다. 그것은 선생님이 죽는 날까지 이루어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죽는 날까지 안 따라오겠다고 하면 선생님은 여러분을 단련시킬 것입니다. 그러니 단련받기 싫은 사람은 미리 협회원서를 빼 가지고 가도 좋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솔직하게 얘기해 주는 것입니다.
새해에는 우리가 자던 잠을 깨고, 숙였던 머리를 뒤치고, 감추었던 모습을 드러내고, 한 일주일쯤 금식을 하고 새 출발을 해보자는 것입니다. 알겠지요?
선생님이 여러분을 보면 딱할 때가 많습니다. 틀림없이 이렇게 가야 할 텐데 그렇게 가지 못할 사정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그만한 사정이 많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그만한 사정이 있는 것을 당연지사라 생각합니다. 그만한 사정도 없다는 사람은 진짜 거짓이며 이단입니다. 여러분도 우리가 했던 일의 결과를 보아 나쁜 길로 오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 겁니다.
해를 보면 그 해가 어떻습니까? 올라가는 해는 더디고 내려가는 해는 빠릅니까? 올라가고 내려가는 것이 똑같습니다. 그렇지만 한 세계는 내려가고 한 세계는 올라오는 것입니다. 해가 지고 난 후에는 밤을 거치지만, 그 해가 완전히 진 것이 아닙니다. 그 해는 지구의 반대편을 비치고 있는데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내몰고 전부 다 어둠의 세계로 나갔습니다. 우리는 광명한 천주의 세계를 바라보고 대낮을 맞이하여 산다는 것을 그들은 몰랐습니다. 그렇지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두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특권을 갖고 나간다고 선생님은 생각합니다. 그렇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이 어두운 세상을 바라보면 우리는 활보해야 되겠습니다. 지금, 우리는 돈을 못 모으고 있지만 앞으로 제일 많이 모을 겁니다. 두고 보세요. 이병철 씨보다 더 많은 돈을 모으고 말 겁니다. 대한민국의 부자가 될 것입니다. 아니면 세계의 거부들을 우리 뜻 안에 들어오게 하든 지….
통일교회 교인들 중에는 지금 보리밥도 없어서, 강원도 어디에서는 하루에 12원을 가지고 살고 있는 식구도 있는 줄 알고 있습니다. 뜻을 위한다면 이 12원도 많다는 것입니다. 아예 하루를 금식하고 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나 말고 또 어디에 있어요? 선생님이 왜 그런 말을 하는 줄 압니까? 우리 그물 안에는 세계의 어떠한 사람도 걸리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이념적인 면에서 20세기 후반을 전성시대라 한다면, 선생님보다 더 높고 큰 이념을 가진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높고 낮은 데에 있어서는 제일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계의 인류를 한꺼번에 내 몰 수만 있다면 세계 인류를 모두 그 그물에 몰아 다 걸리게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때는 비참해집니다.
좀 있다가 선생님이 자동차 한 대 사려고 합니다. 미국에서 제일 좋다고 하는 링컨 콘티넨탈을 사오려고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좋겠지요? 선생님이 그것을 타고 다니며 일을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 해도 선생님은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습니다. 선생님은 감옥생활에서부터 이 길을 닦아 나왔습니다. 그러니 우리 식구들은 저 뒤에서 따라오는 꽁지니까 대가리만 따라오면 됩니다. 오다 보면 대가리는 낮이 되어 있어도 꽁지는 밤중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지만 이 꽁지는 몸뚱이에 달려만 있으면 언젠가는 낮을 만나게 됩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선생님은 남은 굶는데 나만 잘 먹겠다고 그러지 않습니다. 지금은 잘 먹으려야 잘 먹을 수도 없지만 말이에요. 선생님은 지나온 30평생 배고프지 않은 날이 없었고, 사람을 그리워하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천만사가 다 그리웠습니다. 그리워하는 데는 가짜로 그리워한 것이 아니라 참되게 그리워했기 때문에 그 그리움이 선생님과 인연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그리움의 목적이 어느 한 날 기필코 세상에 공개되고 말 것입니다.
선생님은 대한민국의 어느 누구도 부럽지 않습니다. 선생님을 따르는 사람들 중에는 선생님이 명령하는 대로 죽을 수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들을 어떻게 몰고 나가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면 중심이 어디가 되느냐는 것입니다. 그 중심을 어떻게 만드는지 여러분 잘 보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원을 목적하시기 때문에 중심을 잡아서 못을 하나 박고 거기에 실을 묶어서 돌리면 굉장합니다. 그 실이 길면 길수록 세계 전체가 돌아간 다는 것입니다. 그 중심이 바로 우리 통일교회입니다. 선생님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 교인들은 뜻을 위해 죽겠다는 사람, 비참한 생활을 하겠다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비참의 과정을 거쳐 올라가야만 하나님의 아들딸인 최고의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습니다.
앞으로 통일교인 중에서 잘사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못사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못사는 사람 중에 이것을 원망하고 왔다갔다 하며 환경에 지배받아 돌아서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야만 나중에 좋은 자리에 올라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몰락하는 사람들이 남겨놓은 좋은 자리를 그냥 얻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원칙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부 다 반대의 길을 가야 하는 것입니다. 눈물 콧물을 흘리면서도, 그저 몰림을 받으면서도 고개를 수그리면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원칙을 모르면 안 됩니다. 모든 만민들은 거의가 일시적인 것을 좋아합니다. 특히 여자들은 추울 때는 그저 온돌방을 찾고 마룻바닥이나 돌짝밭 같은 것은 뭐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탕감이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반은 돌감람나무가 되고 반은 참감람나무가 될 것이라는 겁니다. 또 3분의 2는 돌감람나무가 되고, 3분의 1은 참감람나무가 될 것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좋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내적으로 완전히 청산해야 하며 그것도 부족하면 자기 몸이 제물 되어야 합니다. 그래도 부족함을 느껴야 할 것이 본래 정상적인 신앙길을 가는 사람들의 자세인 것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내가 몹쓸 선생님같이 보일지도 모르지만 너무 원수같이 생각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선생님은 여러분을 등쳐먹지 않습니다. 절대로 빚을 지지 않습니다.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위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이곳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지만 선생님은 그 사람들에게도 빚을 지지 않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영물이기 때문에 그들이 그러는 것은 그 내면적으로 무엇인가를 다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통일교회에 들어온 사람들은 아무리 자기가 그 무엇을 가졌다 하더라도 다시 한번 자기 자신을 바라보게 될 때 그 이면에 짐을 지고 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오히려 여러분이 빚을 갚아야 할 운명에 놓여 있기 때문에 여러분의 갈 길은 바쁘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고 새해에는 새로운 각오를 하고 출발을 해야 되겠습니다.
아버님, 존엄하신 아버님의 존전에 엎드려 기도할 적마다 기뻐하고 계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아닌 것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민망스럽고 죄송함을 금할 길이 없사옵니다. 아버님, 넓고 넓은 이 천지 가운데 저희 한국 백성보다 못한 민족이 없지만 아버님은 이 민족을 택하시었고, 수많은 인류 가운데 저희들보다 못한 자가 없지만 아버지께서는 저희들을 찾아 오셨사옵니다.
철없이 굴고 있는 저희들을 백번 천번 보호하시면서 아껴 주신 것을 생각해 볼 때에 아버지께서는 이 민족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저희들을 무조건 사랑하신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됩니다. 무지하고 철부지한 것들을 찾아오셔서 감당하기 어려운 천지의 복의 이념을 저희들에게 부여하셨고, 남이 꿈도 꾸지 못하는 거룩한 은사의 터전 위에서 무한히 샘솟는 심정으로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한 날을 갖게 하여 주신 것을 감사드리오며, 이 모두가 아버지의 사랑의 손길임을 느끼옵니다.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우리를 어떻게 길러서 아버지 명령을 받드는 기수가 되게 하셨는가를 생각하게 될 때, 또한 찬 서리 몰아치는 그 서글픈 지난날에도 참으시면서 복귀의 길을 닦기 위해 가셨던 당신의 길이 어떠하였겠는가를 생각할 때에 천만번 불초했던 과거를 다시 한번 뉘우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까지 당신이 넘으시었던 최후의 승리의 기준까지 쫓김 받으면서도 나아갈 수 있는 무리를 이 나라 이 민족 앞에 세우시옵소서.
자기의 모습을 굽혀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며 채찍질할 수 있는 이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이 크나큰 뜻에 사무쳐 오셨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될 때에 저희들은 천만번 아버지 앞에 감사 또 감사, 찬송 또 찬송을 영광된 아버지 앞에 돌릴 길밖에 없다는 것을 스스로 느끼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제 저희들은 아버지 앞에 죽기를 각오하고 나가야 되겠습니다. 지금의 때가 귀하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저희들의 몸에는 역사적인 모든 더러운 누더기 옷을 많이 입었었고, 저희 마음은 하나님이 깃들 수 없는 치졸한 것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껴야 되겠습니다. 어린아이와 같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에 따라 저희들은 어린아이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어린아이가 어머니의 품을 그리워하고 어머니의 젖을 그리워하는 거와 마찬가지로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아버지의 품을 그리워하고 아버지의 생명수를 그리워할 수 있는 본연의 자녀의 자리를 저희들은 찾아야 되겠습니다.
저희들은 나라 없는 백성들이었습니다. 나라를 잃어버린 망명자들이었습니다. 잃어버린 나라를 찾기 위한 굶주린 공적인 거지였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새로운 고향, 본향의 땅을 찾아 세우는 참된 것인 줄을 알았사오니, 저희들은 잃어버린 본연의 가정과 본향 땅을 찾아 사탄에게 원수를 갚아야 되겠습니다. 그것만으로 그칠 것이 아니라, 사탄이 틈타지 아니할 천적인 복의 기관인 우리의 모든 상속권을 보태어 역사적인 원수요, 시대적인 원수요, 미래적인 원수인 사탄을 대하여 어떠한 어려움과 어떠한 고통이 있더라도 저희들은 복수하여 탕감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알고 있사오니, 아버님, 저희들에게 힘을 주시옵소서. 당신을 위하여 충효를 다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사망 가운데서 태어난 자식을 보고 탄식하면서 생명의 인연을 찾아 몸부림치는 당신의 자녀들이오니 이들이 흩어지지 말게 하시옵고, 이들이 하고자 하는 일들이 헛되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당신 앞에 보람된 결과로써 수합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나이다.
아버님은 천만번 저희들을 부르고 있사옵고, 이 시간도 저희들이 가야할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는 줄 알고 있사옵니다. 가야 할 그 방향이 천태만상이기에 찬 서리 길과 험한 바닷길도 걸어야 되겠으며, 혹은 원수가 방해하는 험난한 길도 거쳐가야 할, 인생살이에서 체험해 보지 못한 곡절이 있는 고비 길을 가라고 명령하시지 않으면 안 될 아버지의 심정을 체휼하고, 천만번 십자가를 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렇게 명령하심에 감사하면서 그 길을 고이 가겠다고 몸부림치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골고다 산정에서 아버지를 불렀던 예수님의 대신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생사를 걸어 놓고 담판 기도를 올리던 그분의 입장에 설 수 있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하여 골고다 산정에 승리의 팻말을 꽂고, 세상을 돌이켜 아버님이 원하시는 새로운 세계를 향해 출발시킬 수 있는 책임을 감당하겠다는 참다운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오늘은 거룩한 날이오니 아버지, 이 백성 위에 축복하여 주시옵고, 수많은 교단과 수많은 종교인들 위에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남이 모르는 가운데에서 당신이 임하실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 수고하고 있는 참다운 당신의 숨은 자녀들을 친히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끝날, 하나의 목적을 위하여 한 곳으로 모으시어서 당신이 소망하시던 통일의 나라, 통일의 세계를 이룰 수 있도록, 그 길을 재촉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1966년은 이제 기울어 가고 있사오니, 오늘 여기에 모인 자녀들이 다시 한번 마음을 가다듬고 새해를 맞이할 수 있도록 하여 주시옵고, 새해에는 7년노정과 더불어 빛이 될 수 있게 하시옵고, 힘찬 노력을 하여 안식의 세계에서 주인이 되겠다고 스스로 몸부림치고 아버지 앞으로 달려갈 줄 아는 당신의 아들딸이 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나이다.
아버님, 세계만방에 널려져서 이곳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 수많은 통일가의 형제들을 기억하여 주시옵고, 그들이 이루고자 하는 소망의 나라를 어서 속히 이루고 그들이 희망하는 세계를 복귀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역사적인 원수를 갚고, 시대적인 원수를 갚고, 미래적인 원수를 갚고, 온 인류의 원수를 갚아서 아버지 앞에 승리의 개가를 올리고, 그곳에서 아버지를 모시고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그 세계를 이룩하는 그들이 연약하거든 힘을 더하여 주시옵고, 그들이 지쳐 있거든 강한 다리와 강한 무릎을 주시어서 적진을 향하여 달려가려는 마음이 용솟음쳐서 아버지 대신 달려가는 당신의 자녀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남아진 날들이 우리를 바라보고 있고 우리를 부르고 있사오니, 가는 길이 아무리 힘들더라도 참고 나가도록 역사하여 주시고, 그 싸움에서 지치지 않게 하여 주시고, 목적을 향하여 똑바로 정진할 수 있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랍니다.
7년노정이 기울어져 가려 하는 이때에 있어서 당신이 이 민족과 이 세계의 새로운 역사를 창건함에 있어서 저희들을 부르시는 것을 감사드리옵니다. 당신이 허락하신 모든 것들을 기쁨으로 받아 주시옵고, 이 민족 앞에 새로운 본연의 터전을 만들 수 있게 축복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나이다.
이 시간 말씀한 내용을 통하여 각자의 마음에 새로운 무엇을 결심하게 하시옵고, 인생이 귀결지어야 할 것들을 귀결시키겠다고 마음에 새롭게 결심하고 다짐하면서 스스로 생활을 개척해 나갈 줄 아는 당신의 자녀로 삼아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나이다. 이 시간 이후의 모든 것을 아버님께서 친히 맡아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참부모의 성호 받들어 아뢰었사옵니다. 아멘.
오늘처럼 이런 순서를 꾸미려면 사회하는 사람이 미리 와서 '선생님, 오늘 저녁에 말씀을 좀 해주십시오' 하고 부탁을 해야 됩니다. 내가 여기 척 앉으니까 얘기를 하니 원…. 그렇다고 말씀을 못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가만히 보면 이런 것이 전례가 되어 가지고 선생님이 어디에 가 있는지 알지도 못하고 계획을 세워 놓고 하는 모양인데, 오늘 저녁에 조금 늦었더라면 큰일날 뻔했구만요.
알다시피 이번 수련회는 대학생 수련회이니만큼 그 의의가 크고 또 앞으로 우리 교회를 발전시키는 데 있어서 중요한 하나의 관건을 마련하는 좋은 계기가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 국가의 흥망의 기준과 키 (方向舵) 를 좌우하는 것이 누구에게 달려 있느냐 하면, 젊은이들한테 달려 있다는 것은 자타가 공인하는 사실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을 가만 보면 말이지요, 더구나 20세기의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이 젊은이들을 보면, 정상적인 기준에서, 그리고 국가가 바라는 소망을 책임질 수 있는 자리에서 지난날의 역사를 잘 수습하고 현세에 있어서 미래의 중심이 될 수 있는 심적 기반을 갖고 사는 젊은이가 많지 않아요. 더우기나 미국 같은 나라의 젊은이들에게는 무슨 트위스트(twist)인가 하는 이상한 바람이 불어 가지고 그들이 가는 곳은 천태만별입니다. 오늘 저녁에는 술을 먹고 좋아하다가 또 내일은 당구장에 가서 야단이고, 별의별 모양의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 변화하는 모양이 천태만상이라는 거예요. 하루의 생활에도 수십 장면이 벌어져요.
그런 것도 좋습니다. 변화하는 환경에 따라 변하는 것도 좋아요. 하지만 젊은이는 앞으로의 사회에서 소망의 중심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 사회의 조류에 대한 냉철한 비판력을 갖고 어떠한 환경에도 치우치지 않는 자아의 중심을 세워 가지고 일을 처리해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책임을 진 입장에서 환경을 대하는 것은 좋되 그렇지 못한 입장에서 사회의 풍조에 휩쓸린다는 것은 좀 문제가 있지요. 그러한 청년들을 가진 국가라면 그 국가의 장래는 끝이 멀지 않다는 것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격려사라는 것은 좋은 내용을 들어서 대학생들을 칭찬해 주고 격려해 주고 이런 면에서 좋게 되라고 하는 것이겠지만, 현실상….
사실 대학시절은 오늘 이 사회와 구별되어 가지고 학창에 몸을 담고 있는 제일 좋은 시기입니다. 대학생 하게 되면 인생에 있어서 꽃과 같은 시기에 있는 거지요. 누구든지 그 시기를 잡고 싶은 좋은 기간이요, 가치 있는 기간인 것입니다. 그런 시기에 있는 학도들의 하루하루 생활을 비판한다면, 물론 대다수는 그렇지 않겠지만 그중에는 '참 저들이 저래서는 안 될 텐데…' 하고 도리어 무식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걱정하는 입장에 있는 학생들이 많은 것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요전에 내가 만난 어떤 아주머니가 한 말인데 요즘의 대학생들과 대학교를 갓 졸업한 사람들보고 금붕어 떼래요. 금붕어 떼가 뭐예요? 금붕어가 뭐냐 하면 말이지요. 하루종일 그저 어항에 딱 갇혀서 담아진 물을 삼켰다 뱉았다 삼켰다 뱉았다를 몇천 번 몇만 번 계속하지요. 나중에는 어항에 그 입을 거치지 않은 물이 없을 거예요. 이거 무슨 말이냐 하면 요즘에 다방 같은 데 가 보면 그 안의 공기가 어때요? 탁하지요? 그 안에 많은 사람들이 들이박혀 앉아서 그 공기를 마시고 또 마시고 그럽니다. 그리고 또 무엇을 마시느냐 하면 물을 들이 마십니다. 뻐끔뻐끔 물을 들이 마시는 패라 해서 금붕어 떼라고 한다는 거예요. 이거 우스운 말 같지만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한 자리를 거치는 것도 좋습니다. 거기에서 인생의 새로운 무엇을 발견하고 앞으로 자기가 발전하는 데 필요한 하나의 자료를 습득하여 미래를 향하여 달릴 수 있는 하나의 원천, 하나의 동기를 마련할 수 있다면 그것도 좋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자리에서 논의하고 생각하고 움직이는 사상적인 모든 것들을 분석해 보면 이 현세로부터 제재를 받고 추궁을 받아야 할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헤아려 보게 될 때 시정하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있는 학도들이 많은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모인 우리 통일교회 학생들은 예외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지금은 모르겠지만 과거에는 그런 유(類)에 속했던 학생도 많을 것입니다. 더우기나 우리 교회는 지금까지 참으로 치열한 투쟁의 역사를 거듭 거쳐왔고 환경적으로도 대중이 환영하는 입장이 못 되었기 때문에, 적어도 우리 교회의 문을 두드리고 우리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온 사람은 정상적인 사나이나 아가씨가 아닐 것입니다. 정상적인 사람은 못 들어옵니다. 의구심이 많다든가 색다른 면을 모색해 가지고 남이 안하는 일을 하겠다는 사람, 즉 성격적으로 볼 때 특수한 타입의 사람들이 우리 교회에 들어온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교회 사람들의 과거를 분석해 보면 심각한 유(類)의 사람이 많습니다. 골목을 헤매던 사람, 혹은 자기 멋대로 살다가 어떤 큰 충격을 받아서 인생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를 생각하던 사람, 다시 말하면 죽느냐 사느냐 하는 기로에 서서 고심하던 차에 들어온 사람이 많아요. 그 배후를 분석해 보면 질적으로 좋은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도 많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모여 가지고 수련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수련하는 목적이 어디에 있느냐? 이 사회를 정화시키고 앞으로의 세계에 새로운 사상적인 파동을 던져 놓는 데 있습니다. 오늘 이 현하(現下)의 한국이면 한국의 실정, 즉 대한민국의 현재 환경에 새로운 파동을 일으킬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 모인 것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또 자타가 공인하듯이 우리 통일교회는 지금까지 울타리 안의 통일교회를 위해서 움직여 나온 것이 아닙니다. 울타리 안에서 울타리 밖을 위해 지금까지 우리 통일교회는 투쟁해 나온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기 통일교회의 울타리 안에 와서, 본부면 본부에 들어와서 수련을 받는데 통일교회의 울타리 내에서, 통일교회 교인으로서 만족하라고 수련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울타리를 박차고 나가서 울타리 밖을 정화시킬 수 있는 책임적인 사나이와 책임적인 아낙네를 만드는 것이 수련을 시키는 목적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새로운 결의를 하여 어제의 내가 아닌 오늘의 나, 그리고 내일의 나를 재창조하고 재편성하여 환경을 수습하고 새로운 목적을 세울 수 있는 뜻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모여서 수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종대와 순과 샘'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간단히 얘기를 하고자 합니다.
여러분이 지금은 여기에 와 있지만 어제까지는 다른 데 있었습니다. 사람의 생활은 하루하루 변해 갑니다. 물론 자기가 목적하는 표준은 변하지 않겠지만 생활환경은 변합니다. 이처럼 변하고 변하는 환경이 연결되어 자기가 목표하는 목적이 달성되는 것입니다. 그 표준하는 범위가 크면 클수록, 즉 목적이 크면 클수록 그 환경적인 범위도 넓어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어떤 큰 나라가 크게 발전하기 위해서는 그 크기에 비례되는 환경적 요소를 가져야 합니다. 또 아무리 많은 요소를 가지고 있다 해도 그것을 어떻게 하여 적재적소에 동원해 적응시켜 목적을 달성할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 '나'라는 존재를 생각해 봅시다. 나면 나, 여러분이면 여러분 자체를 가만히 생각해 봅시다. '나'라는 존재가 태어났는데 이 '나'라는 자체는 어디로부터 왔을 것인가? 곡절이 많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가만히 앉아서 생각해 보라구요. '나'라는 존재가 어디서 왔을까? 20대, 즉 청년기에 있는 나는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어떻게 걸어 나왔는가, 유치원으로부터, 소학교로부터 중고등학교를 거쳐 대학까지 왔는데, 이제 나는 여기서 어디로 가려고 하는가! 현시점에서 볼 때,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간다 하는 과정이 있습니다. 이 과정은 인생에 있어서 어차피 거쳐 나가야 될 과정입니다.
그러면 불행한 사람과 행복한 사람의 차이는 어디서 벌어지느냐? 어디서 왔는가 하는 자신의 역사적인 인연을 정상적인 환경, 정상적인 생활무대에 연결하여 사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또 그러한 배경을 가진 국가 역시 행복한 국가입니다. 그 역사적인 인연이 끊기면 끊길수록 불행해질 수 있는 여건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겠어요? 지금까지 연결되어 내려온 역사는 수많은 선조들의 생활로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이 선조들의 생활과정이, 그 활로가 변함없이 목적을 향해 나왔고 또 계속적으로 발전해 왔다면 선조들은 불행한 입장에 있지 않은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만일 그러지 못하고 그 인연이 끊기고 끊기는 속에서 생활했다면 그들은 발전을 못하고 거기서 돌고 거기서 부딪치고 거기서 깨지고 하여 천태만상의 비애의 곡절을 빚어 냈을 것입니다. 역사의 배후에는 그런 곡절이 숨어 있을 것입니다.
오늘 여기에 많은 사람들이 모였는데 이 많은 여러분이 걸어온 역사적인 배경이 전부 다릅니다. 또 이제부터 가야할 미래의 길도 달라질 것입니다. 여기서 오늘의 '나'를 두고 볼 때 이 '나'로부터 천추만대 후손이 연결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나'라는 존재는 우주에 하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면 이러한 '나'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어떻게 종결될 것인가, 또한 앞으로 나로부터 연결될 후손들의 미래는 어떠할 것인가 생각해 봅시다. '나'의 가는 길이 뚜렷한 목적을 향해 일관된 방향으로 나간다면 후손도 행복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만약 내가 오늘은 이렇게 가다가 내일은 저렇게 가고 하여 자꾸만 뒤집어지고 바뀌고 왔다갔다 왔다갔다, 올라갔다 내려갔다를 계속한다면 결국에 가서 그 후손은 비참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여러분은 앞으로의 새로운 이념세계에 봉헌, 혹은 공헌할 수 있는 후손을 남기지 못하는 조상이 되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이런 것은 미루어서 헤아릴 수 있는 것이지요.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오랜 역사를 가진 민족, 그런 민족은 어느누구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그 무엇을 갖고 있습니다. 이 세계는 오랜 역사를 통해서 하나의 목적을 추구해 왔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물건은 목적이 없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우리 창조원리로 들어가서 구체적으로 얘기해야 하는데 나중에 깊이 알아보기로 합시다. 모든 것은 목적 없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존재하려면 반드시 상대적인 요건이 필요합니다. 상대적 요건이 필요한 것은 그 자체들의 목적도 있지만 그 둘이 합하여 또 하나의 목적을 추구하게 됩니다. 누구를 좋아한다 하는 것은 혼자 좋아하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와 내가 좋아하고 나와 그가 좋아하는 것이지. 또 우리의 심적 작용은 둘이서만 좋아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전체가 좋도록 하기 위해 작용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볼 때에 인간은 더 큰 목적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태어날 적부터 그러한 인연 가운데 태어났기 때문에 우리 인간은 더 큰 목적과 관계맺기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존재하는 데는 반드시 목적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존재하는 데는 반드시 하나의 목적이 있음과 동시에, 언제나 변천하고 뒤넘이치는 자리에서 존재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편안한 자리에서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편안하면서도 발전하는 자리에서 살려고 하는 것이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요구하는 욕망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인 과정에서 올바른 전통에 입각한 기준을 세워 가지고 목적을 향해 나가면 희망이 생기게 되고 희망을 품게 되면 발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발전을 하면 거기에서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게 되는 거지요. 이런 관점에서 지난날의 역사와 앞으로 올 미래의 역사를 두고 볼 때 변하지 않는 자아를 중심삼고 자기의 존재 위치를 결정하여 목적을 향해 일방적으로 달려갈 수 있는 민족이나 국가나 세계가 되었던들 이 세계는 오늘날과 달랐을 것입니다.
역사적인 분야, 혹은 사상적인 분야, 더우기나 종교적인 분야에서 보면 종교의 지도자들, 즉 예수 같은 양반이나 석가나 공자 같은 양반들이 주장한 것이 무엇이었느냐? 그들은 오늘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주장은 누구로부터 나왔다' 하는 그 모체가 언제까지나 변하지 않는, 언제나 같은 입장에서 존재하는 분을 추구하였습니다. 어떠한 한계권 내에 머무른 자가 아니라 한계권을 넘어서 무한한 공간세계까지 주관할 수 있는 절대자를 추구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이 추구하는 대상, 변치 않는 절대적 존재가 바로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결국 신(神)이라는 문제에 귀결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신을 중심삼아 가지고 그 신이 지향하는 목적을 추구해 나가는 것이 종교입니다. 변하지 않는 신이기 때문에 미래의 세계와 인연된 그 신의 기준도 목적도 변할 수 없는 것이요, 그 신이 추구하는 방향도 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도 밑에서 종교는 신의 이념을 추구해 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념을 품고 현실을 무대로 하여 나온 종교는 역사시대의 모든 풍파를 넘고 넘어서 오늘날의 세계적인 문화권을 창설해 놓은 것입니다. 이런 것은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수많은 종교가 있고 수많은 사상이 있고 수많은 민족이 있었지만 다 흘러갔습니다. 그들의 위치는 전부 다르지만 지향하는 목적은 만민이 바라는 통일적인 기준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아침 해가 솟아오르면, 태양만 나타나면 밤새 어두움에 잠겼던 모든 초목들이 전부 다 그리로 향합니다. 초목의 순들이 모두 태양빛을 향한다는 것입니다. 풀밭에 숨어서 지루한 밤을 새우던 곤충들도 해가 불쑥 떠올라 햇빛을 발하면 모두가 그쪽을 바라보고 활개를 펴고 그때부터 기쁜 하루, 새로운 하루를 맞이할 준비를 합니다. 인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찬가지예요.
인류에게도 앞으로 그런 햇빛이 찾아올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그 쪽을 향하고 그 무엇인가를 찾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수많은 국가와 수많은 민족이 살고 있는데, 하나님이 보더라도, 어떤 사람이 보더라도 어떠한 성현 군자가 보더라도 '이것만이 제일이다'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 것이냐? 다시 말하면 역사적인 소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수많은 국가들이 각기 나름대로의 역사과정을 거쳐오지만, 그 과정에서 이렇게 가고 저렇게 가지만 그것들은 어느 한때에 어차피 이렇게 꼬부라져 가지고라도 하나에 귀결되게 되어 있습니다. 역사에 부합되는 하나의 순(筍)이 있다면 그것을 향해 자기의 생명력과 자기의 생활력과 자기의 본질을 모두 거기에 투입하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인연을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역사가 이와 같이 흘러온 사실을 보아 오늘날 이 현실세계가 하나의 세계를 추구하는 것도 불가피한 현상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현하의 수많은 국가가 하나의 세계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나라 가운데 어느 나라가 중심이 될 것이냐? 즉, 누가 순이 될 것이냐? 다시 말하면 누가 종대가 될 것이냐? 여러분, 종대가 뭔지 알지요? 종대 말예요. 나무로 말하면, 나무의 순이 되기 위해서는 맨 처음 태어난 뿌리와 정상적인 인연을 가져야 됩니다. 그렇지요? 그런 것입니다. 그 나무의 종대가 되고 순이 되기 위해서는 맨 처음 싹이 트는 그 순간부터, 즉 나무가 천지간에 생명력을 나타내는 그 순간부터 올바른 인연을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는 종대가 될 수 없고 순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이 천지의 대기원이 있다 할진대 그것은 발생하는 그 순간부터 이념적인 터전과 인연되어 그 형태는 작지만 그 본질은 전체를 적응시킬 수 있는 내용을 내포한 기준을 가졌을 것입니다. 이 대기원의 출발과 인연이 되어 가지고 연면한 역사적 흐름과 시대적 환경의 변천과 더불어 어떠한 환경을 거쳤더라도 그 생명력이 끊어지지 않는 한 역사는 발전해서 하나의 통일형태로 결실되는 것입니다. 결실된 통일의 형태기준이 완결될 때 까지 그 순은 연결 돼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순이 못 되는 거예요. 안 그렇겠어요?
이런 관점에서 이 세계의 중요한 사상들을 일괄해 볼 때, 이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주의는 어떤 주의일 것인가? 요새 말로 유물주의냐 유심주의냐 하는 것입니다. 요즘은 유심주의니 무엇이니 해 가지고 하나님이 죽었다고, 신이 죽었다고 하는 시대입니다. 신과는 관계없는 시대에 들어온 거예요.
반드시 신이라는 이념을 내포해 가지고 그것이 역사적인 인연을 거쳐 오기 위해서는 인연이 되어야 합니다. 인연을 맺기 위해서는 역사적인 과정을 거쳐오는데 그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이 이 역사세계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계 가운데에서 최초로부터 연면히 이어져 끝까지 남을 수 있는 사상체계, 하나의 목적이 이루어질 때까지 일관해 나갈 사상체계가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어느누구도 터치할 수 없는 완전한, 그리고 새로운 세계관이나 우주관을 내포한 사상적인 형태가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갖고 나온 것이 종교입니다. 종교예요.
그렇기 때문에, 그 본질에 가깝기 때문에 종교는 아무리 뒤넘이쳐도 시대와 세기를 초월하는 것입니다. 한 시대는 연한의 제한이 있습니다. 한 세기는 백년을 기준으로 하는 것입니다. 위대한 종교면 위대한 종교일수록, 원뿌리에 가까운 바탕에 서면 설수록 그것은 천년 만년, 오랜 세월을 연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오늘날 기독교라는 것은 하나님의 천치창조 당시부터 인연 되어 가지고 지금까지 내려온 종교입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성경이 참 우스운 것 같지만 놀라운 인연을 갖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는 여기에서 하나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의 나무로서 자라온 목적, 즉 생의 목적을 완결지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존재해 온 스스로의 목적을 완성할 수 있는 동시에 존재시킨 창조주의 목적도 달성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을 두고 말한다면, 인류가 바라는 목적이 완결되는 동시에 인류를 창조한 창조주의 목적도 완결되는 것입니다. 역사의 흐름은 기필코 그렇게 흘러갑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디에 서 있느냐? 이것부터 분석해야 됩니다. 내가 살아온 과정이 어떠했는가 분석해야 됩니다. 종교니 하나님이니 무엇이니 하는 것들은 꿈도 안 꾸었다 이거예요. 그러니 거꾸로 산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역사는 뻗어 나가는데 나는 어디로 갔어요? 지평선 이하에 사는 사람, 지하에 사는 사람, 굴에 사는 사람과 마찬가지입니다. 나갈 구멍이 그저 하나밖에 없으니 그 구멍만 나가면 살 줄 압니다. 나가는 구멍 앞에 구덩이가 있어서 어떻게 될 줄은 모릅니다. 그런 입장에서 여러분은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현세의 타락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환경인 것입니다.
이런 환경에서 여러분은 어떤 위치에 있습니까? 하늘의 역사가 그렇게 순을 향하여 흘러 나왔기 때문에 우리는 어디에 있으나 그 목적하는 바를 나라와 인류와 세계 등, 큰 데에 두어야 됩니다. 알겠어요? '나'를 위주하는 사람은 안 됩니다. 나를 위주한 가정이라고 하는 사람은 안 됩니다. 가정을 위한 나, 종족과 민족을 위한 나, 국가와 세계를 위한 나라는 관점에 서야 인생에 있어 보람 있는 현재의 위치를 인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를 위주한 가정이요, 나를 위주한 사회요, 나를 위주한 국가요, 나를 위주한 세계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자아의 방향조차 파탄시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양심을 가만히 두드려 보십시오. 그리고 그 양심이 뭐라고 하는지 들어 보십시오. 길을 가다가 불쌍한 사람을 만나면 양심이 뭐라고 하는지 들어 보라는 거예요. 그 사람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어요? 꿈에도 생각지 않은, 혹은 몇천년 전, 우리의 조상들도 생각지 않은 사람을 떡 만났을 때, 그 불쌍한 사람을 만나 그가 배고파하는 걸 볼 때 양심은 '지갑에 있는 돈을 주라'고 합니다. 지갑에는 삼백 원밖에 없어도 그것을 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불쌍한 사람에게 백원을 줘서 지갑에는 이백 원밖에 없는데 가다 보니까 아이고머니나, 그보다 더 불쌍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양심은 또 도와주라고 합니다. 그래서 또 백 원을 주고 가다 보니까 그보다 더 불쌍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도 양심은 또 도와주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에게 나머지 돈을 주고 이제는 돈이 한푼도 없이 가고 있는데 또 불쌍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양심은 '네 옷이라도 벗어서 그에게 입혀 주어라'고 합니다. 양심은 그렇다는 것입니다.
어느날 좋은 일을 한 번 했다고 해서 뭐라고 해도 양심은 코웃음을 칩니다. '좋은 일을 해서 성공을 하고 좋은 일을 해서 목적을 달성했으니 만세나 부르고 개가나 부르고 기뻐할 일이지 다른 것은 필요 없다'고 하지 않습니다. 마음은 계속 재촉하는 거예요. '하라, 하라, 하라'고 합니다. 좋은 일에는 해서 끝나는 종말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마음이 그렇게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좋은 일을 하는데 사랑하는 친구에게만 하라고 그러느냐? 아닙니다. 가정과 환경을 사랑하고 나라를 위하고 세계를 위하라고 마음은 명령하는 것입니다. 왜 그러는 것이냐? 주고받으면 인연이 맺어진다는 것입니다. 하늘땅의 공법에 의해 잘 주고 잘 받으면, 그때 준 것은 억만세에 없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선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한 인연의 길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사랑을 가르치고 불교에서는 자비를 가르칩니다. 그게 다 뭡니까? 사람들의 것을 전부 다 빼앗아서 자기 주머니에 집어넣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주머니에 있는 것을 전부 다 꺼내서 나눠 주라는 것입니다.
종교가 가르치는 것은 희생봉사하라는 것입니다. 누구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더 큰 것을 위해서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진정한 의미의 도주는 누구일 것인가? 선생님은 옛날부터 이런 것을 분석해 봤습니다. 석가 같은 양반은 왕자로 태어나 가지고 그 왕자의 자리를 버리고 인생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설산에서 도를 닦았습니다. 그리하여 도를 깨우쳐서 불교를 창설하였습니다.
그러면 예수라는 분은 어떠했는가. 몰리고 쫓겨다니고 어디 가든지 배척받고, 발붙일 곳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몰리다 몰리다 할 수 없이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죽은 예수는 원수들에게 복수하려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해, 세계 인류를 위해 기도하고 갔습니다. 그런 점에서 다른 성인들과 질이 좀 다르지요. '내가 죽되 세계를 위해 죽어서 세계 인류와 인연을 맺고 세계 역사와 관계를 맺어 영원토록 책임지겠다'는 신념을 갖고 죽어간 것입니다. '내가 뿌린 피는 이 시대 사람들을 위해서 주겠다' 한 것입니다. 수천만대 역사를 초월하고 거리를 초월해서 준 것입니다. 주는 데도 하나님이 공인하는 자리에서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자리에서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 이루었다'고 한 것입니다. 완전히 주고 완전히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완전히 주고 완전히 받았으니 다음에 또 다시 요구할 때는, 찾아올 수 있는 것입니다.
비록 혼자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는 자리에서도 세계를 위해 주고 세계의 역사적인 인연을 거머쥐고 하나님의 마음을 틀어 잡아 가지고 하나님이 눈물 지을 수 있는 기준을 세워 놓고 갔기 때문에 그는 죽어서도 새로운 역사를 창조할 수 있었고 무덤에서 부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공자나 석가 같은 다른 도주들과 좀 다르지요.
죽음을 넘어서는 그 자리에서, 생사를 결판짓는 그 자리에서, 생명을 놓고 투기하는 것과 같은 입장에서 자신의 정조를 잃지 않고 올바른 자리 마음이 요구하는 희망봉에서 세계를 품고 하나님을 붙들고 그 길을 갔기 때문에, 예수는 죽었으되 그의 사상과 뜻이 만민의 것으로 나타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또 만민의 것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예수의 것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역사시대에 수많은 인간들은 예수를 자기의 최고의 희망으로 삼고 신랑처럼 사모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된 동기가 성립됐던 것입니다. 여기서 종교라는 것이 성립되었지요.
여기 멋있는 젊은 청년들이 많이 왔는데, 여러분,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어요? 우리 아가씨들에게 좀 물어 보자구요. 어느 구석에서 어떻게 살았어요? 보따리를 풀어 보면 멋대로일 것입니다. 여기 사내 녀석들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자기들 멋대로일 거예요. 그 마음세계를 사진 찍어서 자기가 스스로 보아도 '아이구' 소리가 나올 것입니다. 스스로 그렇게 느낄 거예요. 여러분, 그렇게 느끼지 않아요? 대한민국이 나쁘다고 망할 것이라고 하는 녀석들의 마음은 더 나쁠 것입니다. 마음이 더 나쁜 녀석이 외적인 세계를 평하고 있으니 껄렁껄렁한 패지요. 그래요? 안 그래요?
여러분은 어떤 자리에 있습니까? 종대가 되고 순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높은 것을 그리워해야 됩니다. 높은 종대가 되려면, 종대가 종대로 서기 위해서는 넓은 면을 가져야 합니다. 큰 나무를 보면 그 밑둥이 어때요? 포플라 나무 같은 것은 예외입니다. 그렇게 자란 나무는 정상적인 좋은 재목으로 쓸 수 없는 것입니다. 단단한 재목, 장구히 갈 수 있는 재목은 키가 작아도 밑둥이 넓습니다. 그런 거예요. 내가 저 제주도의 한라산 꼭대기에 가서 봤는데 말입니다. 향나무 같은 나무인데 한 두 길밖에 안 되더라고요. 한라산 꼭대기에는 찬바람이 몰아치니 오죽 춥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자라면 자랄수록 자기에게 불리하다는 것을 그 나무는 알았던 것입니다.
나무는 사람보다 우둔하지 않아서 그런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키는 안 자라고 옆으로 뻗으려 합니다. 도를 닦는데 키가 자라지 말라고 도를 닦습니다. 자꾸 옆으로만 뻗으려 합니다. 그런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순은 언제나 다른 것보다 높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도 위대한 사람이 되어 보겠다고들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공부하는 이유가 뭡니까? '공부를 많이 하자' 하는 것은 범위를 넓히자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왜 대학을 가자고 합니까? 그것도 왜 서울대학을 가자고 합니까? 서울대학을 가면 좋은 게 뭐가 있어요? 이 나라의 모든 우수한 인재들이 그 대학의 교수가 되어 있고 우수한 사람들이 거의 다 거기에 모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은 환경적으로 넓혀져 있기 때문이지요. 안 그래요? 출세할 수 있는 넓은 무대가 닦여 있다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턱 울리면, 정상적인 자리에서 울리면 전체를 울릴 수 있고 전체를 반응시킬 수 있는 터전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터전을 단시일내에 자신의 활동무대로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서울대학을 가려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환경이 자신에게 자동적으로 출세의 여건을 제시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울대학을 가려 하는 거예요. 나는 그렇게 봅니다. 공부하는 것은 마찬가지예요. 서울대학에 가서도 머리를 싸매고 공부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활동무대는 더욱 넓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꼭대기에 가까와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대통령이 되겠다는 것이지요. 꼭대기에 가까이 가겠다는 거예요.
이런 관점에서 종교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교파 제일주의 종교는 쩨쩨한 종교입니다. '아이고, 불교만이 제일이지', '뭐 기독교만이 제일이지' 하는 것들, 다 쩨쩨한 거예요. 그 분야에서만 제일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일 것인가? 둥글둥글 굴러다니면서 세계를 다 유랑하고 싶어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굴러다니면서 세계를 유랑하고 싶어하신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보면 알 수 있느냐? 태양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태양을 누가 지었습니까? 하나님이 지으셨지요. 태양이 구르면서 세계를 유랑하지요? 해요, 안 해요? 하나님도 그런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종교의 아버지 노릇만 하지 않는 거예요. 그런 하나님은 필요도 없어요. 종교의 아버지도 되고, 이 세상의 아버지도 되고, 싸움터에서 싸우는 장군도 되고, 도를 닦는 데 가서는 도주도 되고, 뜀박질하는 데서는 마라톤 대왕도 될 수 있는 하나님이 멋진 하나님이지요. 통일교회는 그런 아버지를 필요로 합니다. 어떤 울타리 안에서 '아이고, '나는 어느 교회만 왔다갔다하겠다' 그러게 안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든지 종대의 자리에 계십니다. 그러면서, 종대를 위주로 하면서 횡적으로 세계를 치리하시는 것입니다. 그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하나님은 역사시대를 거쳐 나가시면서 종대를 세워 나오는 동시에 횡적인 이 세계를 움직여 나가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윤리를 배우는 사람으로서, 더우기나 젊은 사람으로서 원리를 대할 때 '야! 어쩌면 저렇게…. 햐! 그렇겠다'고 해본 적 있습니까? 그렇다면 나중에 세계에서 제일가는 나라가 어느 나라겠습니까? 이거 알고 싶지요? 알아야 됩니다. 그래 가지고 아가씨들은 그 나라 대통령의 며느리가 되겠다는 욕망을 가져도 괜찮습니다. 또 사내 녀석들은 '그 나라 대통령의 사위는 나다' 해도 괜찮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고 그렇게 되겠다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어요? 하나님도 말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렇게 되라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순이 될 수 있고 종대가 될 수 있는 개인과 가정과 종족과 민족과 국가와 세계를 만나고 싶어해야 합니다. 만나는 데도 '맨 처음부터 서두를 게 뭐 있나, 그저 어떻게든 햇빛만 맞으면 되지' 하는 것은 그만큼 가치가 없습니다. 아침부터 밤을 거쳐 어둠 전체를 느껴 본 사람이 진짜 햇빛을 감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침에 느끼는 어둠의 맛과 밤에 느끼는 어둠의 맛, 그리고 새벽에 느끼는 어둠의 맛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시간의 흐름만큼 그 맛이 다르다는 거예요. 여러분 안 그렇겠어요?
나는 옛날부터 이런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야, 그럴 것이다. 그런 세계가 올 것이다. 그러면 그 세계의 종대가 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메시아 사상, 인류가 공히 추구해야 할 메시아사상이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메시아는 일시에 불쑥 나타나 가지고 일대에 메시아사상을 내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수많은 역사를 거쳐 가지고야 되는 것입니다. 메시아의 순, 즉 메시아의 개인형이 나타나서 역사시대를 거치면서 시달리고 연단받으면서도 쓰러지지 않고 환경의 모든 모순된 것들을 바로잡고 어려움을 극복하여 생명력을 지닌 하나의 형태를 갖추어 가지고서야 세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종교라든가 사상을 내놓을 수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비약이 있을 수 없습니다. 여름에서 대번에 봄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여름에서 대번에 겨울이 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가을을 거치고 겨울을 거쳐서 봄이 되는 거예요. 거기에는 비약이 있을 수 없지요?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서 역사와 더불어 또 흘러 나갑니다. 가다가 도중에 분리하고, 버리고 도망가지 않습니다. 끈기 있게 붙들고 뒤넘이쳐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 종교적인 형태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사회적인 인연을 벗어나지 않고 그 가운데에서 중심역할을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종교의 형태가 있어야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비판해 볼 때, 기독교에는 그런 중심사상이 있습니다. 유교나 불교를 보면 그건 전부 햇내기예요. 기독교를 보면 창조주부터 나옵니다. 그것이 말뿐이 아니라 역사적인 사실로 증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건 그렇다고 치고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은 전부 자기네가 종대라고 합니다. 기독교도 '아, 우리가 종대지' 합니다. 더우기나 요즘에는 영통하는 사람들이 많아 가지고 많은 도인들이 이 세계가 하나의 세계가 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영계를 통해 보니 천운이 지상통일의 운세를 움직여 나오는데 반드시 도를 통해서 통일될 것이어늘, 누구의 도를 통해서 통일될 것인가. 도인들은 누구나 자기 도를 중심삼고 통일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전부 다 자기가 종대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거 알아야 됩니다. 종대가 되고 싶어한다는 거예요. 여러분도 종대가 되면 좋겠지요? 좋겠나, 나쁘겠나? 「좋겠습니다」 좋겠지요? 그래, 종대가 되겠나, 안 되겠나? 「되겠습니다」 아니 이녀석은 고등학교 학생 녀석 아닌가. (웃음) 응? 너 고등학생이야? 「아닙니다. 전문학교 학생입니다」전문학교? 종대가 되어 보자는 것입니다. 얘기 그만 두자고요? 재미없어요? 좀 들어 보라구요. 종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현재 우리 통일교회는 무엇을 통일하자는 것입니까? 치맛바람 통일하자는 것입니까? 무슨 파마를 통일하자는 것입니까? 무엇을 통일하자는 거예요? 꼭대기에 가서 기독교를 통일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일을 통일교회가 할 수 있느냐? 가만히 있더라도 되게 되어 있습니다. 가만히 있어도 된다는 거예요. 되게 하는 내용만 갖고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들 종대가 되고 싶다고 했는데 종대는 제일 높은 데에 올라가야 됩니다. 제일 높다고 하니 좋지요? 좋지 않아요? 그 나라의 제일 꼭대기면 대통령이지요? 대통령은 절름발이도 좋아합니다. 그렇게 다 좋아하도록 해야 됩니다. 그리고 종대가 서는 장소는 몇입니까? 하나입니다, 하나. 하나예요, 하나. 하나님이 종대라면, 하나님이 우주의 중심이라면 하나님이 계시는 그 자리는 중심과 중앙이 딱 들어맞는 하나여야 됩니다. 그런 거예요. 그러나 횡이 서 있는 자리는 많습니다. 횡은 어디서든 자리를 잡습니다. 그렇지요? 그래서 횡이 서 있는 자리는 시시하고 너절하게 많습니다. 그렇듯 시시하고 너절하기 때문에 횡의 자리에는 시시하고 너절한 패들이 서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종(縱)이 서 있는 곳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절대 불가침이예요. 여러분 이거 알아야 됩니다. 종이 되는 사상을 가진 민족은 역사시대에 어느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민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처녀가 되는 것입니다.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사나이가 되는 것입니다. 전부가 그렇게 되어야 해요.
그런 관점에서 수많은 국가의 역사는 변천해 나온 것이며 또 그렇게 변천해 나가는 것입니다. 강한 나라가 휘몰아치면 약한 나라는 전통이고 문화고 다 깨져 나가는 거예요. 그러나 종대가 서면 다시는 변하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종교가 낫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종대가 하나 나오면 대개 그 옆에 가지가 나오는데 몇 개가 나오느냐 하면 세 개 네 개 정도 나옵니다. 가만히 보십시오. 종대가 하나 서기 위해서는 그 받침이 될 수 있는 곁가지가 서너 개는 생겨야 되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세계에도 현재 4대 종교가 있는데, 기독교와 불교와 유교와 회회교가 그것입니다. 그 가운데 종대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으로의 세계는 그 종대가 되는 종교로 말미암아 역사와 문화의 종말을 맞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이 세계를 통일하는 세계적인 영웅이 되고 싶은 사람은 정치적인 힘이나 군사력만 가지고는 도저히 안 되는 겁니다. 종교를 통일시킬 수 있는 능동적인 내용을 가지고 그것을 외적인 세계에 적응시킬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잘 적응시키느냐 하는 여하에 따라 세계는 통합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오늘날의 흐루시초프나 존슨도 모르는 내용입니다. 민주주의도 공산주의도 다 모르는 내용이예요. 그러니 우리 통일교회가 그런 내용을 들고 나가자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그렇다고 우리 통일교회가 종대니까 꼭대기에 가만히 앉아 있자는 것이 아닙니다. 종대가 가는 길은 전체를 대표한 길입니다. 옆에서 나는 가지에도 종대가 있습니다. 있어요, 없어요? 가지 자체에도 순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대는 뻗어나는 가지 전체의 표본, 즉 자라고 있는, 동서남북 사방에서 뻗어 가지고 있는 가지들 전체의 생활표본이 되어야 됩니다. '저렇게만 가면 틀림없구나'할 수 있는 기준을 세워야 합니다. '아무리 망한 나라도 저들과 같이 하면 산다, 아무리 형편없는 환경에라도 그들이 가면 잘 될 것이다' 할 수 있는 능동력을 지닌 사람을 종대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종대가 서 있는 곳은 동서남북 사방에서 오는 바람을 정면으로 받아야 됩니다. 거기에는 울타리도 없습니다. 그래요, 안 그래요? 사방풍을 맞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대는 봄이 오는 것도 먼저 알고 여름이 오는 것도 먼저 알고 가을이 오는 것도 먼저 아는 것입니다. 겨울이 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이든지 먼저 알게 되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어려운 곡절도 모두혼자서, 그리고 먼저 당해야 됩니다. 사방에 있는 곁가지들은 일방향에서 오는 시련만을 당하면 되지요. 동풍이 불면 동쪽 방향에 있는 가지들은 시달리지만, 서쪽과 남쪽과 북쪽에 있는 가지들은 도리어 멋지고 신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어요? 춤을 추게 되는 것이거든요. 곁가지는 일방적인 바람만 맞는 입장에 있으나 종대는 어떻습니까? 종대는 언제나 사방풍에 시달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역사과정에서 이념을 가지고, 혹은 하나님을 믿고 신봉하는 가운데 종대와 같은 시련을 거친 민족이 어느 민족인가? 이스라엘 민족, 유대 민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세계적인 경제 판도의 중심 입장에 있는 유대 민족이 앞으로 철두철미한 사상만 딱 쥐게 되면 세계를 순식간에 손 안에 넣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예루살렘에 갔을 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여기에 깃발을 꽂고, 여기에 세계를 지도할 수 있는 세계적인 사상과 이념을 집어넣어 가지고 오늘날의 공산주의를 삼켜 버리기 위한 출발을 알리는 행군나팔을 불어 이 민족을 기반으로 움직이게 될 때는 세계 경제권의 5분의 3이 전부 다 움직이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했었어요.
미국 뉴욕의 월가 (Wall Street; 세계 금용시장의 중심가) 같은 곳도 5분의 4 이상이 유대인의 손에 의해 유지되고 있습니다. 유대라는 나라는 참 이상합니다. 그렇게 학살을 당하고도 죽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을 품고 다녔습니다. 어디든지 하나님을 품고 다녔다는 거예요. 때문에 고목과 같은 나무의 입장이로되 죽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대신 무슨 잘못을 저질렀느냐 하면 예수를 죽인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유대 나라의 잘못이란 말하자면 예수를 죽인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들이 예수를 죽였기 때문에, 종대를 꺾어 버렸기 때문에 그 종대는 지금 기독교를 통해서 연결되어 나오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아직까지 연결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가 다시 올 때까지 유대 나라는 회생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가 다시 와서 종대를 연결시키고 접을 붙여 주어 가지고 다시 세계를 움직일 수 있는 시대가 와야 하는 것이고 또 올 것입니다.
그러면 통일교회는 무엇을 할 것인가? 그 종대의 역할을 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1 이스라엘, 제2 이스라엘, 제3 이스라엘을 논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한국을 옛날의 유대 나라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제일 많이 받을 수 있는 종대의 자리에 세워 놓자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을 들고 나온 통일교회이기 때문에 세계적인 풍파에 시달려야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긴긴 역사노정에서 갖은 곡절을 거치면서도 그들의 사상과 전통을 연면히 이어왔던 것처럼 우리는 오늘날 이 시대의 환경 가운데에서 한국 강토를 중심삼고 세계적인 시련을 겪자는 것입니다. 세계에 물결치던 모든 풍파가 일시에 한국의 통일교회 무리들이 가는 길 앞에 몰아쳐도 그것을 이겨내어 세계적인 시련의 탕감을 하자는 것이 선생님의 주의입니다.
세계적인 풍파가 몰아친다 해서 거기에 휩쓸려 나가고 꺾여 나가고 잘려 나간다면 종대의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라도 '내가 그런 세계적인 책임과 사명을 하겠다'고 한다면 하나님은 세계의 풍파를 몰아올 것이고 세계적인 폭풍도 전부 다 불러와서 사방풍이 한꺼번에 불어제끼게 하실 것입니다. 그런 때가 있습니다. 6.25동란 이후 7년 동안 한국 정부가 풍파를 겪었지요. 그것이 7년대환란에 맞먹는 노정입니다.
이 가운데 통일교회 교인들은 사방에서 불어오는 사방풍을 맞아야 합니다. 옆에서 불어오는 횡풍뿐만이 아니라 위에서 아래에서 마구 불어오는 직상풍, 직하풍을 맞아야 하는 것입니다. 땅도 우리를 못살게 하고 하늘도 우리를 못살게 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가운데에 자리를 잡아야 합니다. 그래야 천하의 온갖 것들이 항소를 못하는 것입니다. 완전승리를 하는 거예요. 그래야 앞으로 새로운 시대에 순의 자리에서 생명의 권한을 갖고 온 생명을 수하에 거느리고 지배할 수 있는 주도적인 국가의 주도적인 이념을 가진 주도적인 무리가 될 수 있지 그렇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은 천리의 움직임을 보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선생님은 이제 나이가 40이 넘어 50이 다 되어가지만 지금도 여러분과 씨름을 해서 결코 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도 선생님은 젊은이들을 좋아하는데 이 젊은 녀석들은 다 선생님을 제일 무서워합니다. 사실이지요? 왜 무서워하는 거예요? 선생님이 멱살을 잡고 뭐라고 해요? 선생님은 가만히 앉아서 말만 하는데 무서워해요. 선생님이 말을 하면 걸리지 않는 것이 없거든요. 귀를 들고 말하면 귀가 걸리고 코를 들고 말하면 코가 걸리고 눈을 들어 말하면 눈이 걸리고 손을 들고 말하면 손이 걸리니 무서워하지요. 여러분은 선생님이 무서워요, 안 무서워요? 여러분은 안 무섭지요? 대답을 못하는 것을 보니 자신이 없구만.
그러면 예수가 진 십자가의 자리는 어떤 자리냐? 여러분, 이거 남의 일이 아닙니다. 예수가 나의 형님 자리에 있는가, 내가 그의 형님 자리에 설 것인가 생각해 보라구요. 만일 여러분이 예수보다 훌륭하게 된다고 해서 하나님이 '야, 너는 하늘을 모독하는 죄를 짓는다. 그러지 마라. 예수는 나의 독생자인데 그보다 네가 더 훌륭하게 되면 독생자가 깨져 나가겠으니 그래서는 안 된다' 하시겠어요?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 독생자를 능가하여 세계를 삼켜 버려도 당신의 뜻에 합당하면 좋아하실 분입니다. 그런데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는 거예요.
세상적으로 얘기를 해도 그렇습니다. 맏아들도 잘났는데 그 동생이 형보다 더 잘났다면 그것을 보고 '이 자식아, 너는 형님도 몰라보느냐, 네가 형보다 머리가 좋으니 안 되겠다, 머리를 깎아 버리도록 해라' 할 부모가 있겠느냐 이거예요?
선생님은 때때로 공자나 석가가 고문을 당했으면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아주 흥미진진합니다. 그들이 주리를 틀어대는 고문을 당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것이 궁금해요. 인두로 지졌으면 어떠했을까요? 아주 궁금합니다. 요전에 선생님이 노르웨이를 갔었는데 거기에는 북극을 탐험한 기사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노르웨이가 북극에 가까우니까 그 북극탐험이란 것을 해 가지고 큰소리들을 칩니다. 그거 큰소리칠 만합니다. 북극에 부는 바람이 얼마나 찹니까? 북극의 바람이 얼마나 찬바람이예요? 수많은 인간들 가운데 아무도 흔적을 남겨 놓지 않은, 그런 곳에 홀로 가서 새로운 기분을 느낀다는 것,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거기서 느끼는 맛이 어떤지 궁금합니다. 그럴 수 있는 무엇이 있어야 됩니다.
그리하여 통일교회가 세계의 순이 되어야 합니다. 선생님이 그런 욕심을 갖고 있습니다. 이거 실례예요? 어때요? 그런다고 하나님이 욕을 하시지는 않겠지요?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신다면 세계 어디라도 가서 통일교회를 찾도록 해야 합니다. 예수가 와도 통일교회로 이끌려 오도록 해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용이 필요합니다. 어찌할 수 없는 내용을 가지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통일교회는 뭘하는 곳이냐? 순이 되어야 합니다. 순이 되어야 해요. 무슨 순? 돈버는 데 순? 무슨 대회에서 일등하는 순? 아닙니다. 여기에서 여러분은 '전진적 극복'을 해야 합니다. 이런 말은 처음 들을 것입니다만 아무튼 한번 써 봅시다. '전진적 극복' 이것을 하지 않고는 순이 될 수 없습니다. 순이라고 해서 '아이고 나는 봄동산이 참 좋더라. 내가 제일 먼저 싹이 트니 참 좋더라. 나에게는 봄만 필요하지' 해서는 안 됩니다. 순은 언제나, 언제나, 겨울에나 여름에나 생명력을 가지고 앞서가는 입장에서 환난과 시련을 극복한 자리에 서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 자리에서 '전진적 극복'을 해야 돼요.
그런데 지금 통일교회가 전진적 극복을 해 나가고 있어요? 7년노정을 가자고 하면 '가 보자' 하고 나섰다가는…. '요만큼 가기는 좋구나' 하다가는 '아이고 여기서는 불리하구나' 하고 돌아들 갑니다. 앞으로는 우리 교회에 한국의 청년들이 좀 몰려들 것입니다. 대학교 학생들도 몰려올 거예요. 언제 한번 몰려들 거예요. 이런 기준에 서 있지 않으면 망하는 것입니다. 망하는 거예요.
요즘 젊은이들 가운데 그런 사람 있나요? 사회가 부패했으면 '아이고 망할 세상' 하며 자포자기하고 낙망하는 녀석들은 많지만 거기에서 낙망하지 않고 뚫고 나가는 젊은이는 많지 않습니다. 여기서 여러분은 새로운 생명력을 가지고 이 사회를 향하여 진일보할 수 있는 극복의 대왕들이 되어야 됩니다. 배고픔이 찾아와서 배가 고파도 역시 전진하는 것입니다. 찬바람이 불어와도 설한풍을 받아 가면서도 전진하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것은 크는 것이 정상입니다. 전진해야 합니다. 크지 못하는 것은, 전진하지 못하는 것은 쇠퇴하거나 죽어가는 과정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시일이 문제지 어차피 제거 되는 것입니다.
요즘 대개의 청년들을 가만히 보면 다들 '내가 무엇이 될 것이다' 합니다. 그런 사람은 잘 때도 그런 입장에 있어야 되고 깰 때도 그런 입장에 있어야 되고 깨어서 움직일 때도 그런 입장에 있어야 합니다. 앞에 있는 어려움을 극복하고 전진하기 위해서는 투쟁을 해야 합니다. 환경적인 모든 내용을 흡수하여 가지고 극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환경에 밀려 나가는 것이 아니라 주체성을 가지고 환경을 밟고 올라서야 합니다.
순이 되려면 전체적이 시련을 극복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순이 될 수 없습니다. 알겠어요? 전진적인 극복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순을 가만히 보면 언제나 외롭습니다. 언제나 외로와요. 혼자 있으니 외롭지요. 혼자서 꼭대기만 바라보고 있으니 외로울 수밖에요. 옆에 있는 가지들은 친구가 많습니다. 위에도 친구가 있고 아래에도 친구가 있어요. 그러니 그 자체가 좋아 보이고 멋들어져 보이는 것입니다.그러니 '야 사람은 이렇게 사는 것이구나' 하게 됩니다. 오늘날 세계의 인류가 그런 입장에 있습니다. 오늘날 인류가 종대를 잃어버리고 가지끼리 좋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인류가 그런 입장에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종대는 친구가 없습니다. 친구가 없어요. 친구를 만들려면 나로부터 인연된 생명력을 나눠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친구가 되는 거예요. 종대는 그러는 겁니다. 우연히 인연이 되어 가지고 친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나로부터 인연이 되어 가지고서야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친구가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면 통일교회가 종대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시련도상에서부터 가야 합니다. 세계적인 시련도상에서 그 시련을 극복하고 타파해 버려야 합니다.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런 입장에서 투쟁해 나왔습니다. 삼천리 반도가 나를 쳐도 나는 기분이 좋습니다. 한때 이화여대 사건이니 무엇이니 해 가지고 한참 떠들었지요? 그때 내가 얼마나 좋게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면 그렇지, 그래야지' 했어요. 내가 키는 별로 크지 않습니다. 여섯 자가 못 됩니다. 다섯 자는 조금 넘고 여섯 자는 조금 못 돼요. 이런 나를 놓고, 나 한 사람을 놓고 삼천리 반도의 사람들 전체가 한바탕 반대를 할 때 나는 일면으로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반대하라, 소학교 학생들까지 전부 다 반대하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반대 해도 정의에 입각한 것은 승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정의가 완전한 승리를 하기 위해서는 완전한 반대가 필요한 것입니다.
지금에 와서는 어떻습니까? 하나님도 죽었다고 하지요? 끝날입니다. 끝날이예요. 이 이상 반대할 수 있겠어요? 하나님이 죽었다는 거예요. 하나님을 때려잡았다는 거예요. 이렇게 되면 할 놀음 다한 거지요. 끝까지 온 셈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살았다' 하면 세계는 통일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살아났다 하면 그 하나님을 다시 잡을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 숙제를 내가 하겠다는 것입니다. 지금 내게 돈이 몇억 달러만 있으면 뉴욕타임즈 (미국의 신문) 를 대해서 싸움을 걸겠습니다. 그들에게 '이 자식들아, 하나님이 죽었다고? 나를 모르고 하는 말이다' 하게 되면 세계적인 문제가 될 것입니다. 그렇게 전도할 수 있는 좋은 찬스를 내가 놓쳐버린 거예요. 우리는 거기서 멋지게 때려야 됩니다. '통일교회를 몰랐구만, 통일교회의 하나님을 몰랐구만' 해야 됩니다. 이제 그것들 다 정리하려고 그래요. 선생님은 그런 데에 관심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러면 이런 관점에서 통일교회가 종대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시련을 극복해야 합니다. 사방풍에 시달리는 한이 있더라도 그 절개가 변해서는 안 됩니다. 겨울에도 생명력을 흡수하여 그 얼어붙은 땅 속에서 스스로 자랄 수 없거든 봄이 오면 자랄 수 있는 백방의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겨울이라고 전진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진할 수 있으되 잠깐 쉬는 단계이니 봄을 맞이하는 날에는 일시에 번창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통일교회가 얼마나 많은 시련을 받았어요? 시련을 참 많이 당했습니다. 동남풍에, 사방풍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전진적 극복 단계로 넘어가서 발전을 해야 합니다. 선생님은 지금까지 우리 통일교회가 '통일교회는 죽었다. 통일교회는 발전 못한다'는 말을 남길까봐 염려했습니다. 지금도 그 말을 제일 무서워합니다. 누가 반대를 하든 말든, 대한민국 사람들이야 죽겠으면 죽고 말겠으면 말라고 하며 우리는 움직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7년노정에서 핍박을 받으면서 발전해 나왔습니다. 그렇지요? 그랬나요, 안 그랬나요? 「그랬습니다」
종대가 되기 위해서는 생명력을 가져야 합니다. 친구를 만들기 위해서는 받고 주는 것이 아닙니다. 나로 말미암아 인연이 돼 가지고 친구를 만들고 나로 말미암아 사회와 국가적인 터전까지 마련해야 합니다. 그런 입장에 서지 않으면 종대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그 단계를 향해 들이 맞으면서 올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가 종대가 되기 위한 절대적인 요건입니다.
그래, 종대가 되고 순이 되겠다고 하는 여러분들, 이런 것을 생각해 봤어요?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있어요? 서울대학교? 대학교에서 영원히 살 거야? 학생의 갈 길, 사람의 갈 길이 어디일 것인가? 높은 데에 있다고 높은 사람이 아닙니다. 이걸 알아야 됩니다. 낮은 데에 있더라도 그 본질과 가치에 따라 다른 것입니다.
우리 통일교회의 청년들은 대학교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시골에 가서 똥구루마를 끌면서도 콧노래를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죽어 있는 듯한 이 동산이 새로이 소생하는 봄날에 하나의 싹으로 터올라 나로 하여금 연결될 이 나라의 미래상을 생각하고, 나를 기반으로 해서 나라가 자랄 것을 생각하며 희망을 가지고 소망을 가지고 혹은 소망의 봉우리가 되어서 모든 산야를 관찰할 수 있는 기백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생각할 때 우리 대학가의 젊은 사나이와 아가씨들은 몇 점이나 될까요? 머리들은 모두 백점에 가까울 것입니다. 그렇지요? 그런데 내용을 보면 빵점 이하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눈들이 전부 다 도깨비 바람에 들려 있습니다. 전부 눈들을 이렇게 뜨고 '세상에 좋은 구경거리가 있나 보자' 하고 있습니다. 그거 잘못 알았다는 것입니다. 오늘 선생님이 여러분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여러분이 이런 관점에서 자기를 다시 한 번 비판해 보라는 의미에서입니다. 역사는 반드시 그러한 곳에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종대는 언제나 고정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거기에는 조화가 없습니다. 무미건조해요. 그러나 옆가지에서는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립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어려움도 종순이 혼자서 다 당하고 좋은 일은 곁가지가 다 본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세상이 그와 같습니다. 오늘날 세계적인 어떤 사상이나 종교의 지도자 입장에 있는 사람은 세상의 풍상에 부대끼면서 외로이 자기의 길을 지켜 나가는 것입니다. 곁가지와 같은 사람들은 친구도 많고 잘도 삽니다. '나 좀 봐라' 하며 사는 것을 보면 그가 세계의 이목을 전부 끌 수 있고 세계 전체의 관심사가 될 수 있는 기준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통일교회에 들어와서 보면 앙상해 보입니다. 보면 볼수록 앙상해 보여요. 꼭대기를 올려다볼 때는 앙상하지요. 그렇지만 그 뿌리를 내려다보면 거기에 보이지 않는 멋진 판국이 있습니다. 이걸 알아야 됩니다. 그가 지켜 나온 뿌리, 거기에 멋진 판국이 있다는 것입니다. 꼭대기에서 가지들을 바라볼 때는 외로울는지 모르지만, 밑으로 내려와 뿌리를 바라보면 거기에 있는 것은 전부 자기 것인 것입니다. 곁가지들이 아무리 좋아하고, 또 좋은 것 같아 보이지만 그 수많은 가지는 결국 종대 하나를 위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 스스로 자신을 바라볼 때는 외로운 것 같지만 아래 위를 바라보면 그 이상 행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알고 여러분은 자신이 종대인 것을 자처할 줄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 그래요?
어떤 사람은 통일교회 나간다고 반대를 받아 어머니 아버지를 잃어버리고 형제들도 다 잃어버리고 선생이나 친구들까지 잃어버리고 고독단신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마음에 지닌 보화와 가치라는 것은 천지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고귀한 것입니다. 하나님도 그 자리를 찾아가지 않으면 안 될 만큼 고귀한 것입니다.
아까 여러분들이 말하기를 전부 다 종대가 되고 싶다, 순이 되고 싶다고 했는데―순은 꼭대기를 말하고 종대는 중심 줄기를 말합니다―이게 편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지요? 그러면 다시 한 번 물어 봅시다. 뭐가 될래요? 곁가지가 될래요, 종대가 될래요? 뭐가 되겠습니까? 대답을 해 봐요. 「종대가 되겠습니다」 생각도 하지 않은 것과는 관계를 맺을 수 없는 것입니다. 생각지도 않은 것을 행동화할 수 없고, 행동을 하여 인연을 맺지 않은 것이 나와 관계 맺어질 리가 없는 것입니다. 생각을 하고 행동을 해야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원리 공부를 하기 위해서 일주일 동안 수련하는 여러분에게 올바른 선생이 되려면, 그리고 여러분을 전부 종대로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종로 거리로 보내야 되겠어요? 어디로 보내야 되겠어요? 이건 뭐 두말할 것도 없지요. 내가 명령하지 않아도 종대가 되고 싶으면 자기 갈 길을 알아서 가야지요.
그다음에는 샘에 대해서 얘기해 봅시다. 여러분, 샘이 무엇이예요? 어떤 것이 샘이예요? 샘이 좋아요? 샘낼 때의 샘입니까? 아가씨들이 샘을 잘 내지요. '아이 난 몰라' 하면서 새빨간 입술이 새파래지면서 샘을 내지요. 지금 내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그런 샘이 아닙니다. 무슨 샘을 말하느냐? 「샘 솟는 샘」 샘 솟는 샘? 샘 솟는 샘! 통일교회는 이 샘 솟는 샘이 되어야 합니다. 생수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생수가 어떤가요? 깨끗한가요, 더러운가요? 그래 여기 있는 여러분은 깨끗해요? 마음 보자기들 다 깨끗하게 씻고 왔어요? 보자기들을 좀 보라구요. 개똥 보자기는 안 가져왔어요? 보자기들을 들춰 보면 별의별 냄새가 다 날 거라.
샘, 샘이 되어야 합니다. 샘물이 나오는 길은 보통 물들이 나오는 길과 다릅니다. 샘물은 내려 흐르나요, 올려 흐르나요? 올려 솟지요? 폭포수는 내려 떨어지되 샘물은 올려 솟는 것입니다. 폭포수 밑에 생수 통 (샘) 이 있으면 그놈은 올려 솟습니다. 반대지요. 샘물이 되기 위해서 솟아나야 됩니다. 샘물도 물은 물인데 가는 길이 다릅니다. 샘물은 위로 솟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은 이 샘에 대해서 관심이 많습니다.
어떤 산골짜기에 생수가 솟아나는 샘이 있으면 그 산중에 있는 모든 짐승들은 해가 올라올 때 그 샘의 생수를 찾는 것입니다. 명산이면 명산일수록 거기에는 좋은 생수가 있는 것입니다. 좋은 생수가 있어야 명산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 산을 찾는 관광객들은 그 샘이 아무리 높은 곳에 있더라도, 꼭대기에 있더라도 그 하나의 샘줄기를 찾아 그 산의 꼭대기까지 가는 것입니다. 그 산에 갔으면 그 샘물을 마셔 봐야 관광했다는 자격을 인정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거쳐가지 않으면 안 되고 누구든지 관심을 갖고 애호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샘입니다. 그리고 샘이 가는 길은 다릅니다.
여러분, 오늘 여기에 온 여러분은 부패한 대한민국, 시궁창 같은 이 천지에서 샘이 되어 솟아나야 합니다. 시궁창의 더러움을 도수로 말하면 몇 도나 될까요? 더러움의 도수가 만도도 넘는 시궁창에 들어가서 솟아 뻗어나는 생수가 되어야 합니다. 그때 그 샘물을 받을 적당한 그릇만 있으면 그 생수는 태양빛을 맞으면서 큰 웃음을 지으며 마음놓고 마실 수 있는 생수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는 길은 보통 사람과 달라야 합니다. 방향이 달라야 해요. 보통 물은 일단 생수가 사방으로 퍼지게 되면…. 여러분은 생수가 되어서 퍼져야 됩니다. 생수는 일단 솟아올라 퍼지게 되면, 그리하여 흐르게 되면 그 방향이 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생수는 어디로 흘러가느냐. 생수의 마음은 어디로 흘러가고 싶어하느냐. 백사장이 있으면 그리로 흘러가고 싶어하고, 아주 닳고 닳은 청석과 같은 돌만 있어서 천년을 흘러도 티가 조금도 묻지 않을 그런 자갈판이 있으면 그리로 흘러가고 싶어합니다. 생수의 마음이 그래요. 자기의 정결을 고이 간직하고 싶어하는, 그 정결을 잃어버릴까 염려하는 마음이 깊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자체가 찾아가야 할 길이 달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될 것 아니겠어요? 그런데 그러지 못하면 생수라 해도 보통물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생수는 생수로되, 근원은 좋았으되 가다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보통 세상 사람들은 물과 같은 입장에서 마음으로는 생수를 좋아하지만 실제로는 싫어하는 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 가지고 더러운 물과 막 섞여서 삽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살았지요? 여기도 트위스트를 추고 댄스를 한 아가씨나 사내 녀석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갈 길은 그런 곳이 아닙니다. 물이란 흘러가는 것이 본질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생수가 아닙니다. 그런 곳에 있는 물은 수많은 박테리아균이 서식할 수 있는 물입니다. 누구나 먹을 수 있는 물이 아닙니다.
우리는 여기서 분석을 하고 간별을 하여 사람의 생명과 인연될 수 있는 생수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열이면 열, 백이면 백이 모두 뭉뚱그려져서 생명이 될 수 있고 원동력이 될 수 있는, 에너지로 화할 수 있는 힘의 자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순수성을 잃어버리지 않아야 됩니다.
생수가 생수로서의 모습을 나타내기까지는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보십시오. 지층이 있고 암층이 있고 그 다음에 지하천이 있지요. 생수는 그 반석을 뚫고 나와야 됩니다. 어려운 해산의 과정을 거쳐 나와야만 생수가 생수로서의 모습을 나타낼 수 있는 것입니다. 반석과 반석의 틈을 뚫고, 멀리 멀리 뚫고 나와 솟아난 것이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생수 되기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느 골짜기, 어느 고빗길에 있습니까? 여러분은 모두 생수가 되는 길을 찾아 나가는 과정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길을 아는 사람이 있어서 길만 열어 놓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여러분으로 하여금 생수가 될 수 있는 바탕 길을 닦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여러분 앞에 생수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시고, 여러분이 생수가 되어 퍼져서 세계 어디를 가도 사람들이 생수를 마실 수 있게 되기를 바라십니다. 여러분을 통하여 그런 자유 동산을 이루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생수가 되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내가 왜 여러분에게 이런 말을 했느냐 하면 인상에 남기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나무를 볼 적마다 생각하라고, 물을 마실 적마다 생각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마 생각이 날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여기 몇 안 되는 대한민국의 여러분이 커서 활개를 치는 데 천하를 넘나들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 이 선생님에게도 여러분과 같은 청춘시대가 있었습니다. 여러분과 같이 젊은이의 기백을 품고 내일의 소망을 꿈꾸면서 준비하던 과거가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선생님의 과거는 여러분의 그것과 좀 달랐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날에 와서는 세계적인 문제가 되었습니다. 앞으로는 점점 더 문제가 될 것입니다. 그 지닌 바를 분석해 보니 질적으로 내용적으로 다르거든요. 이 가치를, 이 진정한 가치를 아는 사람은 압니다.
앞으로 우리의 움직임과 우리의 이념은 세계 도처에서 환영받을 수 있는 종대가 되고 샘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가는 길에서 그런 결과를 나타내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오늘 말씀을 한 것입니다. 알겠지요? 「예」 그러면 이젠 뭐 기도해야겠구만요. 기도하자구요.
여기는 동방에서 지극히 작은, 동반부에 있는 하나의 나라 한반도이옵니다. 그 가운데에서도 외롭게 자라난 통일교회의 본부라고 하는 곳입니다. 저희들은 비록 초라한 옷을 입고 있고 저희들이 서 있는 이 자리는 말구유와 같이 지극히 초라한 자리일지라도 이 자리에서 하늘땅의 마음을 전하며 예수의 탄생을 자랑하던 베들레헴을 대신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사옵니까? 그것이 저희들의 소원이옵나이다.
개인적인 유아로 태어난 예수보다도 장성한 국가적인 예수의 형이 탄생할 수 있는 시대적인 소망을 대하오니, 이 세계 앞에 한국이 그러한 아들을 태어나게 할 수 있는 터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말만 가지고 안 되는 것인 줄 아옵니다. 연결되어 온 인연의 그 모든 사연을 실증적인 사실로 그 마음과 생활에 느낄 수 있는 각자의 모습을 지녔다고 찬양할 수 있는 터전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사오니, 아버지시여, 그러한 터전을 만들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한 터전을 바라보시고 당신은 지금까지 싸워 오시고 수고해 나오신 것을 아옵니다. 저 또한 그 길을 따라서 그 날을 바라고 그런 환경을 개척하기 위해 지금까지 참아 나왔사옵니다. 오늘 당신의 아들딸들을 만나서 마음들을 다짐시켰사오니, 이 가운데 내일의 새로운 약속을 부가시킬 수 있는 당신의 자녀가 있사올진대, 그들의 마음 깊이 스며들 수 있는 인연을 심으시옵고 생명의 터전을 옮기시옵소서. 당신이 분부하시고 당신이 대하실 수 있는 귀여운 새싹과 새순이 되고 새로운 샘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백만 명이라고 하는 수많은 학도를 가운데에서 이와 같이 소수의 무리만을 모이게 하신 것을 생각하면 일면 섭섭하오나 많은 수를 문제시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아옵니다. 이 가운데 천만번 쪼개고 가를지라도 그 본연의 모습과 본질적인 성품에서는 아버지를 닮고 아버지의 모습을 그려 낼 수 있는 사람이 한 두 사람이라도 나타난다면 이번 기회의 큰 소득이라는 것 또한 알고 있사옵나이다.
그것을 바라보고 이들이 일주일 동안 지내고자 하옵니다. 그 과정에서 어려움도 있을 것이오나 그 모든 것이 문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들이 알고 다시 한 번 자신들의 마음을 좌정시키고 이제부터 생활하게 될 일주일 동안을 일생에서 둘도 없는 귀한 기간으로 알고 연단하고 체험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제가 이 길을 걸어올 때 친히 분부해 주신 인연을 이들에게 연결시키시어서 같이하여 주시옵고, 내일을 약속할 수 있고 미래에 세계를 대신하여 활동할 수 있는, 늠름한 기백을 갖춘 용자의 자태로 아버지 앞에 뚜렷이 나타나서 책임을 다하는 자녀의 모습을 갖추게 하여 주시옵기를, 나의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천지에 당신 앞에 나타나 효성을 다할 수 있는 참다운 아들이 있사옵니까? 그런 아들이 없습니다. 참다운 딸이 있사옵니까? 참다운 딸이 없습니다. 때문에 당신의 손길은 허위의 손길을 대신하는 역사적인 슬픔을 품은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당신의 발걸음은 허위를 위한 결과의 자리에 서지 않으면 안 되었던 당신의 모습을 알고 있사옵니다. 그것은 당신께서 그러한 자리에 서신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대해 나온 사람들이 그러한 자리에 있었기에 당신의 손길과 발걸음마저 허위의 결과를 가져와 슬픔과 탄식의 여건을 남기게 되었다는 역사적인 사정도 알고 있사오니, 이들을 찾아오신 아버지시여! 저희를 품고자 하시는 당신의 그 가슴에 진정히 품길 수 있는 참다운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발걸음을 모아 저희를 앞에 세워 놓고 최후의 훈계를 하실 수 있고 최후의 권고와 최후의 유언과 최후의 명령을 할 수 있는, 거룩한 아버지의 모습을 대할 수 있는 아들딸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생명이 좌우되는 곳이라도 당신께서 가시기 전에 우리를 보내 달라고 호소할 수 있는 참다운 아들딸을 당신은 얼마나 그리워하시옵니까? 당신의 자녀들이 당신께서 그런 아들딸을 간절히 그리워하시며 찾아오신다는 사실을 망각하지 말게 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니다.
저 역시 그러한 길을 찾아 헤매는 과정에서 슬픔도 있었사오나, 그러한 슬픔이란 가을날의 낙엽처럼 일시에 지나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사옵니다. 슬픔이 있으면 당신의 마음과 더 깊이 인연되고, 외로울 때는 고독과 더불어 당신의 친구의 자리에 세워진다는 것, 또한 거룩하신 당신께서 저희와 더불어 이 자리에 좌중하고 계신다는 것을 체험하면서 내일의 소망과 더불어 당신을 모셔 놓고 당신 앞에서 이 나라와 세계를 책임지겠다고, 내일을 책임지겠다고 마음 깊이 다짐하고 맹세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내가 가는 정의의 행로가 새로이 출발하여, 만민이 그 길을 따라오게 하겠다는 당신의 약속과 더불어 오게 하지 않으면 안 될 당신의 뜻이 있다는 것을 믿고 나설 수 있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한으로 인하여 맺히고 엉킨 아버지의 심정을 부여잡고, 아버지의 그 가슴을 부여안고 '내 아버지'라고 하며 눈물 흘리며 위로할 수 있는 효자 효녀가 되게 하여 주시옵고, 그 마음 앞에 아버지께서 '내 아들아, 내 딸아, 이제 나의 모든 한은 풀렸고 어려움도 다 없어졌다. 너만이 나의 기쁨이요, 너만이 나의 자랑이다' 하실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런 아들딸을 세워 놓고 만세의 만민 앞에 자랑할 수 있는 그날을 당신께서 얼마나 그리워하시는가 하는 것을 생각하옵니다. 그러나 이들이 그 자리에 서기에는 너무나 불초한 것들이옵고, 그 자리에 나가기에는 너무나 미비한 것들이옵고, 그 자리를 찾아가서 아버지를 모시기에는 너무나 더러운 것들이옵니다. 하지만 당신은 간절한 심정을 갖고 애절한 마음을 갖고 절규하는 울음소리 앞에는, 눈을 감고 저희를 품어 주려 하는 그러한 사랑이 있다는 것을 이들이 알게 하여 주시옵길,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그 누가 뭐라고 거부하더라도 당신만은 거부할 수 없는 아버지인 것을 알고 그 누가 막을지라도 그것을 넘어 품어 주시는 아버지인 것을 아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이 한반도에서 싹트고 있는 젊은이들을 모아 주시옵고, 당신께서 미래의 소망의 터전을 고대하시는 이들을 모아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여기에 모인 이들의 책임이 얼마나 지중한 것인지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한 나무가 자라서 동산을 덮는 것도 정상적인 생명력을 지녀 가지고 결실될 때까지 참고 남아져야 되는 일이 아니겠사옵니까? 여기 이들이 씨를 뿌려서 하나의 나무가 된 당신의 아들딸이라 할진대, 이들이 이제 결실되어 이 강산 처처에 뿌리 내릴 수 있는 당신의 역군들이 되어야 하겠사오니, 이들 스스로가 그러한 사실을 알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역사적으로 우리를 불러 오신 아버지, 이 시대에 우리를 찾아오신 아버지, 미래에 우리와 같이 기쁘게 행보하시기 위해 우리를 사랑하시며 품고 이러한 아들을 찾아오신 아버지 앞에, 아버지의 소원을 성취해 드리고 아버지의 원한을 풀어 드릴 수 있는, 당신의 사랑을 독점할 수 있는 참다운 당신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 이들을 이 곳에 보내 놓고 지방에서 기도하고 있는 식구들이 있사옵니까? 그들과 같이하여 주시옵고, 날로 아버지의 뜻 앞에 충성을 다짐할 수 있도록 그들의 심정을 이끌어 주시옵길 간절히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의 성호 받들어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12월 25일, 이날은 땅 위에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크리스마스라고 축하하고 있는 날이옵니다.
지나간 많은 역사의 날들을 통하여 당신의 기쁨과 더불어 당신의 소원의 심정을 통하고 당신의 지존하신 거룩하신 모습을 드러내어 존귀와 영광 홀로 받을 수 있도록 만민이 마음을 다하고 충성을 다해야 할 것인데도 불구하고 지루한 복귀노정에 있어서 인생들이 당신 앞에 얼마나 많은 십자가의 길을 남겨 놓았사옵니까? 수많은 우리의 선조들이 슬픔과 고통과 역경의 비참함 가운데서 밟히고 찢겨졌던 험한 역사의 슬픔을 지닌 아버지인 것을 다시 한 번 마음 깊이 회상하옵니다.
이러한 날들을 찾아 헤매면서, 넘고 넘어오면서 해원성사의 한 날을 소원하시던 당신의 소망의 날을 이 땅 위에 세우기 위해 약한 무리를 모아 민중을 편성하였고, 쫓기는 민족을 품으시고 지루한 역사 길에 있어서 약속하시면서 끌고 키워 나왔던 이스라엘 앞에 약속의 한 날을 맞이하여 만민을 구원할 수 있는 메시아의 한 모습을 유대 땅 베들레헴에 보냈던 그 사실이 역사적인 사실만으로 기억될 수밖에 없는 것이 얼마나 서럽고 원통한 것인지 아옵니다.
저희들은 오늘 그와 같은 내정의 심정을 살피면서, 그 아버지를 부를 수 있으며 그 메시아의 모습을 대신하여 어깨를 겨누고 당신 앞에 무릎을 꿇고, 역사적인 사정을 알지 못하였던 우리 선조들의 죄를 다시 한 번 뉘우치면서, 이날을 참다이 맞이하지 못하였던 과거의 이스라엘의 책임을 다시 한 번 회개하옵니다.
그런 날을 갖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역경에 몰리어 갈 곳 없이 십자가 도상에서의 죽음길을 자처하신 예수님의 행로와 더불어, 그 길을 따라 2천 년 역사노정에서의 피흘린 순교선열들이 죽음길에서 하늘 앞에 하소연하던 그 내정적인 인연을 다시 한 번 체득하는 자리에서 위로는 하늘을 위로하고, 아래로는 땅 위에 왔다 갔던 수많은 선조들을 위로하고, 현세에 있어서는 소망의 한 때를 맞이하기 위한 제2 이스라엘을 대표하여 하늘 앞에 스스로 부족한 것을 사죄할 수 있게 해주신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아버님, 진정 감사할 뿐이옵니다.
아버지, 이날은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기 위하여 형형색색의 축하연을 베풀고, 혹은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며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는 별의별 형태의 모임이 다 있을 줄 알고 있습니다. 더우기 이 시간은 세계에 널려 있는 수많은 교파, 수많은 교회가 당신의 존전에 무릎을 꿇고 메시아의 탄생을 축하하는 날이옵니다.
그러나 과연 그 가운데 아버지가 기뻐할 수 있는 모습이 있고, 하늘의 심정과 통하여 이것이 내가 걸어온 길이요, 내가 지금까지 당한 일이요, 내가 지금까지 소원했던 것이라고, 이들은 내가 만나고 싶었던 아들딸이라고, 친히 무릎 앞에 모아 놓고 역사적인 사연을 토로하면서 이 시대적인 한을 풀 수 있는 참다운 아들딸과 참다운 가정·종족·민족·국가가 있나 생각하게 될 때에, 이도 하늘의 슬픔으로 남아질 수밖에 없는 처량한 면임을 다시 한 번 생각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몰리고 쫓기던 이스라엘 민족의 모습이 세계적인 형태의 승리의 터전을 맞이하여 민주세계를 창건하였사오나, 이 가운데에 당신을 중심삼고, 생명의 원천이 되고 이 모든 세계를 통일하기 위한 하나의 지축이 되어 자리를 잡고 이 시간 아버지 앞에 대제사장의 직분을 갖추어 분향하면서 경배드릴 수 있는 참다운 민족과 종족과 참다운 가정과 자녀가 있사옵니까? 그러한 참다운 민족, 참다운 종족, 참다운 가정, 참다운 자녀를 당신이 얼마나 고대하고 있는가 하는 사실을 명심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황폐한 이 땅 위에, 이 민족 가운데 당신은 이미 저희들을 몰아내셨습니다. 외로운 고빗길에서 저희를 시련시켰습니다. 슬픈 자리에서 저희를 연단시켰습니다. 저희들이 때로는 핍박도상에서, 때로는 몰림길에서, 때로는 아버지만이 알 수 있는 환경에서 아버지와 더불어 싸워 나왔습니다. 그렇게 쫓김받고 몰림받던 무리가 오늘날 이 강산에 남아 있는 것을 생각할 때 이들이 통일의 무리인 것을 아옵니다.
이들의 뼈 속에는 당신을 향하여 호소하는 절규의 심정이 담겨져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이들의 골수를 통한 사지백체 신경 계통 전부가 당신만을 위할 수 있는 충절에 불타는 마음, 그 심정에 폭발될 수 있는 간절한 마음이 이들의 온 몸을 지배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참다운 아들인가 딸인가 할 때에, 아버지 앞에 당당하게 나서서 '그렇습니다'고 할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게 해주시옵기를 이 시간 아버지 앞에 간절히 부탁드리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역사적인 슬픔을 한하는 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시대적인 어려움과 시대적인 탄식에 눈물짓는 자녀가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알았습니다. 미래의 소망의 세계를 위하여 자기의 몸을 아버지 앞에 분향하기 위한 번제로서 희생의 산제물이 되어야 할 것을 깨닫는 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사랑하여야 할 통일의 자녀들을, 아버지, 이 시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차디찬 이날에, 아버지, 뜻을 위하여 이곳을 향하여 기도하고 있을 줄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 그들이 눈물지어 기도하걸랑, 그들이 아버지 앞에서 간곡히 심정을 짜면서 기도하걸랑 그 자리에 친히 동참하시옵시고, 내가 그러했을 때 당신이 위로하시던 손길을 다시 펴시옵고 외로울 때 권고하시던 그 위로로 그들에게도 같이하여 주옵기를 아버님 앞에 부탁드리지 않을 수 없는 사정을 들어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그들은 환경과 처지는 다르나 당신의 지체들이옵고, 그들의 사정과 생활적인 무대는 작으나 당신의 세계적인 사정과 무대에 통할 수 있는 그런 자리에서 내적 싸움과 외적 일면의 싸움을 담당하는 하늘 용사의 모습으로 인정하시옵소서. 그리하여 그들이 거동하는 곳에 승리의 자국이 남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그들이 움직이는 곳에 하늘이 환영하고 사탄세계는 물러갈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날은 이해에 있어서 마지막 맞는 성일이옵니다. 저희들이 숙원하였던 7년노정에 있어서 6년 고비를 넘어가는 마지막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과거 7년노정에 있어서 슬펐던 일을 그 마음에 되새기면서, 그 마음 가운데에 있었던 슬펐던 사연을 다시 한 번 회상해 볼 때, 그러한 것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아버지 앞에 미안함과 부족함을 금할 길이 없나이다.
그러나 슬픔과 외로움과 걱정에 가로막혔던 그 모든 사정이 민족을 원망하는 그런 사정이 되지 말게 허락하여 주옵소서. 그러한 길과 그러한 사정이 엉켜 있음은 이 민족과 세계 인류를 찾아나온 당신의 길을 개방하기 위함이었음을 생각하게 될 때에 민족의 부족함과 민족이 아버지 앞에 저지른 바의 죄가 있으면 그것을 용납하여 주옵시고, 인류가 아버지 앞에 남긴 바의 죄상을 용납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이 민족을 품으시고 갈 방향을 제시하시어서 참다운 당신이 지향하는 그곳을 향하여 한 사람이라도 낙오하지 않고 당신이 허락한 동산권 내에 들어가 승리의 개가와 더불어 환성으로써 아버지 앞에 존귀의 영광과 더불어 찬양할 수 있는 뭇 자녀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강토에 있는 수많은 당신의 교단과 수많은 자녀들이 이날을 축하하는 그 모임 모임 위에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고, 아직까지 열교에 있어서 도의 길을 가기 위해 수고의 길을 스스로 가는 수많은 종교인에게도 친히 같이하여 주옵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옵니다.
하늘의 한이 이 땅에 맺혀 있기 때문에 해원성사를 바라는 영계의 수많은 영인들까지도 이날의 기쁨과 더불어, 다가오는 7년노정에 있어서 승리할 것을 다짐하는, 새로운 약속의 계기를 맺음짓는 이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이 한 시간 아버지가 허락한 가운데 부족한 자신들이 이해를, 이날을 보내고, 다시 새해를 맞이할 수 있는 스스로의 내적 자각을 다짐하며 아버지 앞에 스스로 맹세하고 결의할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옵니다.
세계에 널려 이곳을 향하여 기도하고 있는 당신의 자녀들이 많은 줄 알고 있사옵니다. 그들이 지역과 환경을 달리해 갈라져 있사오나 마음은 하나되게 허락하여 주옵고, 아버지와 통할 수 있는 기준에서는 하나되게 하시어 남아진 우주복귀에 있어서 선봉자로서 개척자의 사명, 용사의 사명을 다하는 데 지치지 않도록, 아버지, 붙들어 주시어서 소기의 승리의 동산까지 이끌어 주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옵니다.
이 모든 전체가 합하여 아버지의 영광을 찬양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면서, 이 모든 말씀 참부모의 성호 받들어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예수님 탄신을 기념하는 크리스마스이니 축하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들도, 준비는 하지 않았지만 마음을 준비해 가지고, 외적인 단장보다도 내적인 단장을 하는 의미에서 이날을 기념하기를 바랍니다. (성탄 찬송 부름)
유대 고을 베들레헴 성중에 당신이 4천 년 동안 고대했던 메시아를 만민에 대한 속죄와 구속의 대업을 성취하고자 보내셨던 그날을 축하하는 날을 바로 오늘이라고 축하하는 날을 정하여, 지금까지 만민들이 기념하여 온 것을 저희들은 아옵니다. 아버지, 본래 이 크리스마스는 1월 3일로 지켜야 하는데 수많은 사람들은 알지 못하고 오늘을 역사적인 기원을 찾아 정한 날이라 하여 기념하고 있사옵니다. 오늘이 나신 날은 아니지만, 그날 대신 축하하는 이 시간을 받아 주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니다.
과연 민민을 구속할 수 있는 하늘의 왕자시요 만우주의 인생의 참부모로 오셨던 메시아, 그 모습을 맞이할 수 있는 참다운 이스라엘이 되지 못했던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아버지께서는 얼마나 슬프셨을 것인가를 다시 한 번 회상하게 되옵니다.
이 땅 위에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의 그날, 베들레헴 성중의 사관의 용납을 받을 수 없어 가고 가고 몰리고 몰리어 머무를 곳을 찾지 못한 마리아와 요셉의 사정을 저희들은 아옵니다. 만민을 구속할 메시아가 생각하지 않았던 노상에서 탄생했다는 이 서글픈 사실에 저희들 무슨 마음으로 어떻게 사죄해야 할지, 용서할 그 무엇도 없다는 것을 여기 모인 뭇 자녀들은 다시 한 번 민망함을 느끼옵니다. 그때에 이스라엘의 한 아들과 딸이 되어 모실 수 있는 그 영광의 자리를 가졌더라면, 그때 이스라엘 나라의 한 백성으로서 아버지를 대신한, 당신이 사랑하는 그 아들을 모시고 경배할 수 있었더라면…. 그렇지 못한 인생이 되었고, 그렇지 못한 이스라엘이 되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하나님에게 크나큰 서러운 조건을 남겼던 이스라엘의 죄상을 저희들은 규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버지! 그런 자리에서 태어나 서글픈 행로의 출발과 더불어 남 모르는 생육의 과정을 거치면서 이방의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어렸을 때의 예수님의 사정이며, 그가 갈릴리에 돌아와서 로마인 혹은 그 시대의 모든 이들로부터 주목의 대상으로서 자라고 외로웠던 예수의 생활을 다시 한 번 저희들이 회상해 볼 수 있는 이 시간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소망의 터전이요 싸움의 터전이 되어야 할 이스라엘의 교단과 이스라엘 나라는 예수님 앞에서 사라져 버리고 겟세마네 동산과 갈보리 산정에서 원하지 않는 십자가의 길을 나서야 할 비참한 최후의 길을 결정해야 했던 사실을 저희들은 잊어서는 안 됨을 다시 한 번 다짐해야 되겠습니다.
'아바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나에게서 피하게 하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 뜻대로 하시옵소서' 라고 하며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씩이나 아버지 앞에 몸부림치고 '맡은 바의 책임과 사명을 어이할까!' 하면서 그 마음을 억제하지 못하던 그 터질 듯한 가슴을 누가 헤아렸으며, 그 심정의 어려운 환경을 잊어버리고 아버지의 깊은 심정을 파헤치려고 몸부림치던 그 사연을 누가 알았겠읍니까?
몰리고 몰리던 이스라엘 민족과 오늘날 예수님을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이 한숨과 더불어 그 세계의 경지를 넘으려 했으나 그것을 건너간 사람이 없었사옵고, 그 내정적인 심정을 체득하려 하였사오나 그 경지를 파헤쳐 그 자리에 간 사람이 없었던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이 인류가 얼마나 책임 못 하였는가 하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역사를 거쳐오면서 직고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아버지, 이렇듯 복귀노정에는 하늘의 슬픔이 잠겨 있고, 아버지의 억울함과 분함이 어리어 있다는 사실을 저희들은 원리를 통하여 알았습니다.
수많은 민족 중에서도 달리 외로운 한민족을 통하여, 그 가운데서도 저희들 쫓김받는 무리를 통하여 아버지께서 이렇게 가르쳐 줬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 저희들 쌍수 합장하여 아버지 앞에 천만세의 한을 풀 수 있는 속죄의 제단을 갖추어 제사장의 책임을 다하고 그 책임을 짊어진 제사장의 직분을 대신하여 만민의 속죄제를 드릴 수 있는 당신의 거룩한 자녀들이 되어야 할 우리의 모습들인 것을 느끼게 될 때, 저희는 보기에는 부족한 모습이오나 역사를 빛내야 할 책임이 있사옵고, 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시대를 개척해야 할 사명이 있사옵고, 천국을 창건하지 않으면 안 될 선각자의 책임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오늘 저희들이 하늘을 너무나 자주적인 관념을 가지고 대했던 과거를 다시 한 번 뉘우치게 됩니다.
또다시 이 땅 위에서 이미 21년이라는 기간을 통하여 하늘의 역사는 시작하였사오나, 그 기간에 천태만상의 곡절 가운데서 하늘의 슬픈 고개를 넘기 위하여 고빗길에 부딪칠 적마다 아버지를 또다시 염려시키고 걱정스럽게 했던 지난날을 회상하게 될 때, 아버지, 뭐라고 아버지 앞에 아뢰올 말이 없사옵나이다.
그러나 몰리는 발걸음을 한곳으로 모으시어서 민족 앞에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데에 있어서 수많은 자들의 노고가 컸다는 것을 당신이 기억하여 주셔야 되겠습니다. 천만 번 부족한 모든 것도 용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아버지 당신의 심정이 맞는 효성의 도리를 다했다고 할 수 있는 아들딸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고 나서도 부족한 것뿐이요, 알면 알수록 더더욱 머리를 숙여야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 앞에 충효의 도리를 다할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아야 되겠고 다시 한 번 맹세하고 가야 할 것을 깨닫는 것이 심정의 세계인 것을 알게 될 때에, 가면 갈수록 부족함뿐이요, 가면 갈수록 눈물 없이는 아버지를 부를 수 없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 이날을 기념하는 데에 있어서 수많은 사람이 혼란하고 번잡한 그런 자리에서, 혹은 그 이름을 팔아 자기의 이익을 찾는 자도 있을 것이요, 그 뜻을 따라 자기의 향락을 추구하는 사람도 있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혹은 이런 환경적인 터전을 이용하여 하늘에 패역하고 배반하는 기준을 향해 가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요, 혹은 제단을 지키고 있는 무리들도 있는 줄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나 이러저러한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리고, 저희들만은 벌거숭이의 예수 그리스도를 살과 살을 맞대어 품을 수 있고 마음과 마음을 맞대고 몸부림치면서 품을 수 있는 참다운 어머니 대신, 참다운 아버지 대신, 참다운 형제 대신이 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마리아의 품에 품겼사오나 예수의 참다운 그 사랑의 심정이 하늘과 더불어 일치되지 못했고, 요셉의 무릎 위에 누었사오나 요셉의 심정과 인연맺을 수 없었고, 또한 앞으로 자기 올 동생들이 바라보는 환경 혹은 모든 친척들의 환경이 있었사오나 그 환경에서 환영받을 수 없었던 외로운 예수의 사정을 통찰하여 저희들은 그의 참다운 형이 되고, 동생이 되고, 누나가 되고, 부모가 되고, 친척이 되고, 혹은 백성이 될 수 있는 이 민족이 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들이 형식적으로 갖춘 무엇이 없다 하더라도, 오늘 저희들의 이 짧은 시간에 아버지 앞에 부복한 모습들을 기억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이 왔던 그 길을 바라보면서, 가신 소원의 한 일념을 다짐하고 뜻 앞에 더더욱 충효의 도리를 다하겠다는 거룩한 이 시간이 되도록, 아버지, 친히 주관하여 주시옵고, 예수께서 친히 이 시간을 살피시어 기뻐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하늘의 천천만 성도들과 12보좌를 중심삼은 12장로 이하 모든 전체의 하늘의 영인들, 혹은 사도 이하 거느린 모든 천적인 이스라엘 세계의 영인들을 합하여 땅 위에 해원성사의 한 날을 위해 협조할 수 있는 터전이 되게 하시옵고, 기억하는 이날 위에 기쁨과 자랑의 조건을 세울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옵니다.
만 영광이 당신 앞에만 돌아가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의 성호 받들어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오늘은 기독교의 수많은 교인들이 축하하는 날 중에서 제일 중요한 날인 크리스마스입니다.
우리 통일교회에서는 12월 25일을 지키지 않고 1월 3일을 크리스마스로 지켜 왔습니다. 이 날짜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역사가들도 확실히 알지 못합니다. 대략 추측해서 25일을 전후로 하여 일주일 혹은 이주일 이내의 어떠한 날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확실한 날은 모릅니다.
그러면 우리 교회에서는 어떻게 되어서 1월 3일을 지키느냐? 이것은 우리가 신령한 영계에 들어가 가지고 예수님과 대면해서 문답한다든가 해서 그 결과로 그날을 지키게 된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우리 식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원래의 크리스마스는 1월 3일, 틀림없는 1월 3일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지켜 오고 있습니다. 몇 해 동안은 그 날로 지켜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큰일을 해나가는 데 있어서 사회의 풍조라든가 혹은 세습적인 그 인연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거기에 보조를 맞추어 지방교회면 교회의 자의에 맡겨서 오늘 이날을 기념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부에서는 세상의 일반 교회처럼 외적인 단장을 하지 않았습니다. 간소하게, 도리어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는 이런 자리에 우리들이 모여 이날을 축하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나신 확정적인 내용과 통할 수 있고, 예수님을 그런 자리에 눕게 하신 하나님의 심정과 도리어 가까울 수 있는 자리가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에서 준비하는 것을 제재해 나왔던 것입니다. 그렇게 알고, 그런 의미에서 오늘 여러분에게 '성탄일을 맞이할 사명'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지금부터 약 2천 년 전, 여기 성경 말씀에 나와 있는 거와 마찬가지로 베들레헴 성에서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습니다. 비록 그 순간은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한 개인으로서 태어나는 시간에 불과했을지 모르지만, 우리 인류에게나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둘도 없는 날이었습니다. 이 날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타락한 인류에게 있어서는 새로운 광명의 날이 찾아질 수 있는 것이요, 이 날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이 비로소 지상에서 소원의 한 터전을 잡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날을 세우기 위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세우고 수많은 역사노정을 거쳐오면서 메시아를 보낸다는 것을, 즉 구세주를 보낸다는 것을 수많은 선지자를 통하여 약속해 나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은 이스라엘 민족을 그 날에 표준하게 하고 온갖 소원을 그 날에, 온갖 희망을 그 날에, 모든 이스라엘 민족의 삶을 그 날을 중심으로 해서 연결되게끔 몰아왔던 것입니다. 어떤 편안한 환경에 이스라엘 민족이 들어가서 그 환경으로 말미암아 그 날을 잊어버릴 수 있는 경지에 이르게 되면 이방 나라 사람을 동원하여 쳐서라도, 외로운 자리를 거치게 해서라도 그 날을 마음 깊이 그리워하고 생각할 수 있게끔 몰아왔던 것입니다.
또한 성경 여러 곳에다가도 메시아가 이 땅 위에 나타날 것을 예언해 놓았기 때문에 성경을 숭상하던 그때의 서기관 바리세인들은 어느 곳에서 태어날 것도 알았습니다. 더우기 자기들이 소망하던 메시아요, 이스라엘 나라를 세계적인 국가 형태로 전개시킬 수 있는 책임자로 믿었기 때문에 그 소망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간절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날을 맞이할 수 있는 스스로의 준비는 어떻게 되어 있었느냐 하면, 그 소망의 기준 앞에 일치될 수 있는 내적 심정의 기준이 되어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베들레헴 도성에는 수많은 집이 있었을 것이며 거처할 곳이 많았을 것이지만 갈 곳이 없어 외양간에서 예수가 탄생한 그 입장과 환경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때, 그러한 환경을 맞게 한 것을 본 하나님, 예수가 탄생한 그 장면을 바라보는 하나님 자신에 있어서의 내적인 사정은 말할 수 없이 서글픈 것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다시 한 번 명심해야 되겠습니다.
만민의 구세주로 오신 하나님의 독생자, 하늘의 황태자께서 이와 같이 비참한 자리에서 태어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사실, 누구보다도 영광스러운 자리에서 호화찬란한 환경을 지니고 만민이 환영하는 가운데서 탄생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소망이고, 그러하여야 할 그날인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민족은 그러한 환경을 갖추지 못했고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들이 바라던 소망의 실체가 머무를 수 있는, 혹은 탄생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바라보게 될 때, 소망한 바는 간절하였으나 직접적으로 대할 수 있는 스스로의 준비와 태도는 갖추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부정할 도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메시아가 틀림없이 온다는 것은 민족 전체가 알고 있었으되 그 민족이 오시는 메시아를 모실 수 있는 준비는 하지 못했습니다. 개인으로부터 가정, 이스라엘 민족 전체, 더더우기나 틀림없이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을 아는 그 민족이요 교단이었더라면, 책임진 교법사들은 남이야 어떻든간에 메시아를 맞기 위한 준비를 거국적인 행사로 준비라도 해 놨던들 메시아는 그와 같이 말구유에 눕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때에 어느 누가 오실 메시아를 위해서 방을 한 칸 마련한다든가, 혹은 그가 계실 수 있는 생활적인 환경을 마련할 수 있는 이스라엘 민족이었던들…. 헤롯왕 앞에 동방박사를 통해서 메시아가 탄생했다는 것이 보고될 때, 온 예루살렘 성전이 소동했다고 했습니다. 이 소문은 상하를 막론하고 모두가 들었을 것인데도 그 메시아를 찾아 모시겠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보게 될 때, 소원의 기준이 마음으로는 간절했지만 실제 생활에 있어서는 스스로 해야 할 준비의 터전을 소홀히 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여기서 부정할 수 없이 엿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환경을 바라보면서도 약속한 때는 이르렀기 때문에, 지상의 이스라엘을 구할 수 있는 메시아를 보내지 않을 수 없는 하나님은 때를 맞추어 이 땅 위에 메시아를 보냈던 것입니다. 따라서 마리아와 요셉은 몽중에 천사가 나타나서 가르쳐 준 모든 사실을 진정 그 마음에 품고, 태어날 그 아들이 이스라엘을 구할 수 있는 구주요 만민의 메시아로 온다는 것을 생활과정에서 절절히 체험하고 느꼈다면, 성경 말씀에 있는 거와 마찬가지로 동방박사의 증거함을 따라야 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지난날을 회상하여 그 마음에 예수 탄생을 명심했지만, 요셉은 여기에 대해 모른다는 입장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볼 때, 하늘의 명령을 받고 직접적인 사명을 짊어진 부모마저 하늘의 기준 앞에 합당한 부모의 자세를 갖추지 못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되겠습니다.
만삭이 되어 해산날이 언제 올지 모르는 마리아와 요셉은 거기에 대비한 준비를 해야 했습니다. 베들레헴 성을 찾아가게 될 것 같으면 거기에 사람을 보내서라도 여관을 준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런 준비도 없이 베들레헴을 찾아가 가지고 호적하러 온 수많은 사람들로 말미암아 여관마다 다 찼기 때문에 갈 곳이 없어 마구간에서 하룻밤을 새우는 기간에 예수가 탄생했던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볼 때 요셉가정 자체가 하늘이 바라는 바에, 하늘의 황태자를, 독생자를 보내는 심정 앞에 스스로 맞이할 수 있는 책임을 다 했느냐 할 때 책임을 못 했다는 것입니다. 마리아 자신도 그랬고, 요셉 자신도 역시 그랬고, 그 환경에 처해 있는 친척도 역시 그랬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탄생은 그 가족의 부부만의 기쁨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 종족 전체가 축하해야 할 일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이런 준비를 갖추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에 하늘이 바라는 소원 앞에 있어서 부모가 책임 못 한 사실을 부정할 도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 중에서 여기 처음 온 사람이 있어 '아, 믿을 수 없다'라고 의심되는 사람이 있다면 기도해 보라구요, 그런가 안 그런가.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 위에 찾아오되 복중으로부터…. 그의 어머니 마리아는 누구도 알지 못하는 사연 가운데 근심과 고통 속에서 10개월 동안, 복중에서부터 낳을 때까지 남에게 얘기할 수 없는 근심을 품고 살았습니다. 이렇게 복중기간에 있어서 하늘과 땅이 그를 맞이하여 환희할 수 있는 환경에서 편안한 생활을 하지 못했던 것도 서글프지만, 하늘 앞에 마리아 자신이 정성을 들이고 마리아 자신이 만민 앞에 스스로 이 일에 대해 확고하게 증거적인 사실로써 보여 줄 수 있는 외적 준비를 못했다는 사실 또한 하늘이 볼 때는 슬픈 일이었다는 것을 우리들은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합니다.
요셉가정에서 그러했기 때문에 유대교인은 더더욱, 이스라엘 민족은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태어난 예수는 하늘 땅의 사명을 짊어지고 오는 분이기 때문에 그가 어떤 환경에 태어나는가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보호하는 품에서 하나의 섭리의 목적을 책임질 수 있을 때까지, 갖은 서러움과 역경에 부딪히더라도 하늘이 작정한 그 목적을 위해서 준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는 이렇게 태어나서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자랄 때에도 역시 예수는 요셉에게 있어서는 의붓자식이었습니다. 요셉은 꿈에 마리아가 잉태했으나 그를 데려오는 것을 두려워 말라는 천사의 명령을 듣고 얼결에 데려왔지만 시일이 가면 갈수록 인간적인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하늘의 약속과 더불어 보내신 아버지의 입장에서 예수를 대해 준 것이 아니라 하늘이 보기에 염려하는 입장에서 예수를 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동생들이 태어나면서부터 더더욱 의붓자식의 서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많은 형제들과 더불어 자라게 될 때 그는 가정에 자기의 심정을 둘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그러했고 자라고 있는 동생들도 역시 그러했기 때문입니다. 그저 말없이 요셉가정의 생계를 돕는 데에 있어서 목수의 보조역할을 할 뿐, 협조하는 생활을 연속할 뿐이지, 자기 스스로의 소원이라든가 자기 스스로의 천척인 크나큰 사명에 대한 것을 부모 앞에 제시해 가지고 권고할 수 있는 입장에 서지 못했던 예수인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동생들까지도 예수를 미워했습니다. 형님이 나타나길 바란다면 어찌하여 예수살렘에 올라가지 않느냐고 비난하는 내용이 요한복음에 나와 있겠어요. 이것을 보게 될 때에 동생들까지도 그를 하늘이 보낸 메시아로 대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 이와 같은 명절날, 이스라엘 민족의 명일이라든가 혹은 그 가정에 좋은 날이 있으면 예수로부터 그 기쁜 일을 맞이할 수 있게끔 해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럴 수 있는 자리를 예수를 중심삼고 갖지 못하였다는 서글픔이 예수에게는 한으로 남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됩니다. 이렇게 자라 가지고, 뜻을 증거해 가지고 하늘의 사명을 실행하기 위하여 나선 도상에서부터 3년 여 생애를 지나면서 그가 간 최후의 길까지 우리가 더듬어 볼 때에 예수는 가정으로부터, 환경으로부터, 교회로부터, 혹은 그 사회로부터, 그 나라로부터…. 평화의 나라를 창건하겠다는 소망을 이 땅 위에 발 붙이고 펼 수가 없는 환경에서 살았다는 것을 우리들은 다시 한 번 회상해야 되겠습니다.
오늘 예수가 탄생한 이날을 기념하는 데 있어서 태어난 것만이 기쁜 것이 아니고 그가 태어난 목적이 무엇인가를 확실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가 온 것은 자기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하늘이 보내서 왔기 때문에, 개인으로 왔다 간 것이 아니라 위로는 하늘을 위해서 온 것이요, 아래로는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서 온 것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에 대한 책임과 민족에 대한 책임, 더 나아가서는 세계 인류에 대한 책임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시대의 제한된 책임만이 아니라 앞으로 올 후대의 역사적인 책임까지 짊어졌으니, 예수의 생애가 얼마나 고독하고 얼마나 어려웠었던가 하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래 가지고 이 심정적인 기준에서 그를 동경하고 그의 편이 되어서 그가 형님이 그리웠을 것이어늘 형님 대신이 되고, 동생이 그리웠을 것이어늘 동생 대신이 되고, 부모가 그리웠을 것이어늘 부모 대신이 되고, 혹은 친척, 삼촌 아저씨, 사돈, 그 모든 종족적인 환경이 그리웠을 것이어늘 그 종족적인 환경을 대신 하는 일원으로서 대신 위로해 주고, 그때의 외로움을 위로해 주어서 풀지 못했던 한을 풀어 주겠다는 간곡한 마음을 지녀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이날을 맞이하는 것이 하늘과 역사시대에 왔다 갔던 예수와 지금까지 믿는 성도들이 요구하는 바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태어나던 그 순간은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말할 수 없이 기쁜 순간이었습니다. 하나님뿐만 아니라 예수 자신도 역시 기쁜 시간이었습니다. 예수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도 역시 기뻐해야 할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기쁨과 예수의 기쁨과 이스라엘의 기쁨이 서로 따로따로 전부 갈라져 버렸던 것입니다.
하늘의 기쁨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간 곳이 없고, 복귀의 역경의 노정을 개척해 나오는 과정에 있어서 이스라엘과 더불어 슬픈 길을 걸어 나오는 하나님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기쁨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타락한 그날부터 수많은 민족과 국가가 있으되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는 국가와 민족이 아닙니다.
또, 복귀섭리의 뜻을 대신해 나왔다는 선조들을 두고도 역시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하나님이 기쁠 수 있는 날을 맞이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아벨에서부터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다음은 이스라엘 민족과 모세를 거쳐서 예수님 당시까지 오는 그 역사과정에 있어서 하늘이 진정으로 기뻐할 수 있는 날을 맞이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기쁨의 날을 맞이하기 위한 싸움의 노정은 거쳐왔지만, 기쁠 수 있는 한 날을 맞이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하나님에게 있어서 비로소 역사시대에 기쁠 수 있는 한 날이 찾아왔다면 그날이 어떤 날이었느냐 하면, 예수가 탄생하던 날이었습니다. 예수가 탄생한 날은 하나님의 기쁨의 날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함으로 말미암아 천상세계가 기뻐하고, 천상세계가 기뻐함으로 말미암아 하늘을 추앙하는 모든 도의 세계에 머물러 있는 백성이 기뻐해야 할 날인 것입니다. 그러한 날을 맞기 위하여 예수가 탄생한 것입니다. 예수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뻐하셨으니, 아버지가 기뻐함으로써 자식이 기뻐할 수 있는 날이라는 것입니다.
예수가 뜻을 이루어 드림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는 날을 예수만이 맞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지금까지 사탄세계에서 하늘이 이스라엘을 뽑아내어 이스라엘 민족을 편성하고 이스라엘 나라를 만들어 놓은 목적이 예수의 탄생의 기쁜 날을 국가적인 기쁨의 날로써 이루어 놓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 목적이 예수가 탄생하는 날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아담 한 자체만을 잃어버린 것이 아닙니다. 아담과 통할 수 있는 하나님의 소원, 아담을 통하여 이루려 했던 하나님의 기쁨, 이 전부가 깨져 버린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아담이 실수함으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것을 예수로 말미암아 재현하여 회복하기 위한 것이 예수를 보내신 바의 하나님의 소원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의 탄생은 이스라엘 나라의 탄생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그와 더불어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는 날을 예고하는 겁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승리의 나라로서 등장하느냐, 그러한 나라를 갖춰 가지고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과 더불어 기쁜 날을 맞이하느냐 하는 문제가 예수가 탄생하는 그날부터 제기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땅 위에 수많은 민족과 국가가 있으나 아직까지 거족적 혹은 국가적 기준에서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는 형태로써 나타내지 못했습니다. 이것을 연결시키기 위해 오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한 분이 기뻐함으로 말미암아 하늘이 기뻐하고, 예수 한 분이 기뻐함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나라가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기준이 예수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것인데도 불구하고, 과연 그날에 있어서 하나님이 기뻐하셨느냐 이것입니다. 과연 그날에 있어서 예수가 기뻐했겠느냐 이거예요. 과연 그날에 있어서 이스라엘 나라가 기뻐했느냐? 이런 것을 생각해 볼 때, 하나님도 기뻐할 수 없었고, 예수도 기뻐할 수 없었고, 이스라엘 나라도 기뻐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랬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해야 할 날은 아직 남아 있는 것이요, 예수가 기뻐해야 할 날이 남아 있는 것이요, 이스라엘 나라가 기뻐해야 할 날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해야 할 날과 예수가 기뻐해야 할 날과 이스라엘 나라가 기뻐해야 할 날을 찾기 위해 이날을 다시 예고하고 연장시켜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 예고한 날이 끝날입니다. 이 끝날을 표방하여 잃어버린 이스라엘의 재창건, 재편성 운동을 해 나오는 것이 예수가 왔다 간 후 신약복음을 중심삼은 제2이스라엘 창건의 역사인 것입니다.
민족적 터전 위에서 제1 이스라엘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세계적인 터전 위에서 제2 이스라엘을 편성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제는 세계적인 기반까지 닦아 가지고 끝날이 될 수 있는 이런 때에 우리가 도달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역사시대에 있어서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는 한 날이 와야 되겠고, 예수가 기뻐할 수 있는 한 날이 와야 되겠고, 이스라엘의 이념적인 국가가 기뻐할 수 있는 한 날이 와야 되겠습니다. 이스라엘이 예수를 맞을 때 삼위가 일체되어서 기쁠 수 있는 한 날을 가져야 했지만 갖지 못했기 때문에, 끝날에 있어서 세계적으로 그날을 맞게 하기 위한 것이 재림의 한 날이라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그때의 이스라엘 나라를 다시 한 번 회고해 볼 때, 사회적 환경이라든가 예수가 탄생하던 그 환경이 하나님이 소망하던 그 뜻과 부합되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슬픔이 연장되었습니다. 이러한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오늘 이런 날을 맞이하는 우리에게 있어서는 역사시대의 슬픔을 다시 한 번 분석하여 앞으로 올 그날을 준비할 수 있는 하나의 조건과 여건을 스스로 갖추어 나갈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날을 맞이하여 기념하는 모임을 갖는다는 것이 도리어 하늘 앞에 불공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가 마구간에서 탄생하는 것을 바라보는 하나님이 기뻤겠습니까? 아닙니다. 만일 헤롯왕의 아들이 태어난다고 한다면 만조백관이 옹위하는 가운데서, 수많은 백성이 찬양하는 가운데서 태어났을 것입니다. 추울세라 더울세라 온갖 정성을 다 합하여 거족적으로 그 아기의 탄생을 축하했을 것입니다. 또, 그 나라에서는 그날을 축하의 날로 정하여 경축행사를 거행했을 것입니다. 더우기나 로마 황제의 아들이 태어났다면, 지중해 일대를 중심으로 한 세계적인 판도를 가지고 세계를 움직일 수 있는 로마의 왕자가 태어났다면, 얼마나 수많은 민족이 찬양하고 정성을 다하여 예물을 보냈겠습니까? 그것만이 아닐 것입니다.
하물며 한때에 있어서의 왕의 아들로 태어나도 그러하거늘, 천추만대의 창조주요 만우주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의 왕자로 태어난다면 하나님은 그 아들은 얼마나 영광스럽게 맞이하기를 바라겠습니까? 하나님이 바라보는 표준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이스라엘 나라만이 예수를 맞아 주기를 바랐겠어요? 아닙니다. 땅 위에 살고 있는 수많은 민족이 거족적으로 그의 탄일을 축하하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그랬을 것 아니예요? 그런데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도 없는 환경 가운데서 태어나지 않으면 안 될 사정을 바라보는 하나님이 얼마나 딱했으면 이방의 점장이를 통해 가지고 이스라엘에 구세주를 증거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통한 일입니다.
유대의 모든 교법사들은 어디 가고 점성술객들이 예수를 찾아온 것을 오늘날 기독교에서는 기쁜 일로 말하고 있는 이 사실이 불경이라는 거예요. 하늘을 위하여 충성을 다짐하고, 시대적인 선각자로서 지도자적인 책임을 짊어진 교법사들, 서기관들과 제사장들은 어디 가고…. 교회면 교회, 이스라엘 나라면 나라, 제사장으로부터 서기관, 교법사가 일체가 되어 찾아와 가지고 수천 년 동안 정성들였던 가보를 예물로 갖추어 메시아 앞에 봉헌하여도 부족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관계도 없는 이방의 점성술객들이 찾아와 가지고 예물을 드렸다는 사실은 이스라엘의 모독이요, 하늘나라의 모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민족이 하지 못하고 교단이 받들지 못하니, 하늘은 탄생한 메시아를 땅 위에 공개시키고 인간 세상에 있어서 그가 찾아왔다는 조건적인 인연이라도 남겨 놓아야 할 뜻이 있기 때문에, 하늘을 숭상하고 세계적인 위대한 인물이 어디에 태어나는가를 관찰하면서 그를 찾고 고대하던 점성술객들 앞에 다리를 놓아 그들을 통하여 메시아의 탄생을 예고시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하나님의 서러움과 분함, 억울함이 얼마나 컸겠나 하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생각을 해봐요, 그렇겠나 안 그렇겠나? 뭐 동방박사가 찾아온 것이…. 그것은 기쁨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민족으로서는 '어찌하여 우리 민족은 동방박사 이상으로 하늘 앞에 충성을 다짐하고 스스로 제물된 생애노정을 거치면서 메시아 한 분을 모시기 위해 정성들이지 못했느냐? 그 이상의 사람이 왜 없었느냐?' 하는 것을 생각해야 돼요.
그것을 볼 때 메시아가 태어나던 그날이 기쁜 날이었으나,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유대교단을 잃어버릴 수도 있는 날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하나님과 멀다는 것이 증거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이것을 생각할 때 하나님은 얼마나 서러웠겠습니까? 4천 년 동안 그렇게 수고하면서 길러 나온 이스라엘을 외적인 중보자가 나옴으로 말미암아 메시아를 모셨다는 자리에 세워 놓지 않으면 안 될 하늘의 사연이 여기에 엮어졌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심정적으로 얼마나 괴로웠던 시간이었을까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가 이 땅에 온 것은 4천 년 하늘의 역사를 총탕감하기 위한 책임을 짊어지고 온 것입니다. 예수는 이스라엘의 운명과 세계사적인 운명을 책임지고 오신 분입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과거 현재는 물론 미래의 세계에 있어서 새로운 주권국가를 세워, 새로운 이스라엘을 창건하여 세계를 통일시켜야 할, 하늘나라를 창건해야 할 책임자인 것입니다. 이러한 책임자가 태어나는 그 자리가 마구간이라니 이것이 얼마나 원통하고 분한 일입니까? 그런데 오늘 기독교에서는 마구간에서 태어난 그 자체를 신성시합니다. 그 자체를 신성시한다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 모인 우리들은 그날을 어떠한 입장에 들어가 축하해야 되느냐? 이스라엘이 실수를 부정해 가지고 이스라엘의 인연을 되찾을 수 있는 입장에 들어가야 합니다. 예수를 맞을 수 있었던 동방박사 이상의 성의를 가질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런 입장에서 그가 태어날 수 있는 자리, 그가 태어날 수 있는 환경을 다 알아 가지고 태어나기 전에 복중의 메시아를 모실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태어난 메시아를 모시는 것만이 아니라 복중시대에서부터 모실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이스라엘 나라에서는 그러한 사람이 없었으며, 주님이 복중에서 하루하루 자랄 때 그 어머니의 괴로움을 제거해 주지 못했으며, 그 어머니의 하루의 생활이 편안하도록 책임지고 마련해 주겠다는 아낙네가, 사내가 없었던가! 주님을 복중에 있을 때부터 모시고 정성들일 수 있는 무리가 4천 년 동안 키워 온 이스라엘 나라에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민족적인 사명을 망각해 버린 이스라엘을 제거시켜 버리고 새로운 이스라엘적인 이름을 가지고 복중에 있을 때부터 그를 하늘의 왕자로 모실 수 있는 충신 열녀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한 인연을 가지고 하늘 앞의 메시아를 위하고 모시는 생활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에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의 아들이 예수가 틀림없다고 한다면 예수가 복중에 있을 때부터 모신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하늘 앞에 가까운 것입니다. 그가 불인(不人)이건, 병신이건간에…. 예수가 사도들을 택할 때도 그가 병신이라 하더라도 그를 먼저 택하여야 됩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제자들을 사랑하기 전에 그를 사랑해야만 된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런 아들딸이 있었던들, 그러한 사람이 있었던들 그런 사람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은 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있었다면 기독교는 이방의 종교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터전이 됐더라면…. 하나님은 사랑의 인연을, 충성의 인연을 밟고 옮겨 가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있었던들 예수가 몰려 죽더라도….
그런 사람들이 터전을 지켜 가지고 역사적인 인연을 상속받을 수 있는 준비를 한 터전 위에서 예수를 맞이했더라면 이스라엘의 역사는 옮겨 갈 수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못 옮겨 가니 이스라엘 민족 또한 옮겨 갈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못 옮겨 가니 예수를 중심삼은 기독교가 세계적인 종교로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로마에 가서 4백 년 동안 시련과 고통의 과정을 거치고 핍박을 받아 가지고 승리한 것보다 이스라엘 나라에서 어느 기간을 거쳐 가지고 승리했어야 했던 것입니다. 기독교의 승리의 터전이 로마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 서글픈 사실인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가 복중에 있을 때부터 하나님 앞에 정성을 들이고 마리아를 모셔 가면서 그의 손으로 하늘의 왕자를 받겠다고 기도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우리 인류가 책임을 다하고 하나님 앞에 뻗어나갈 수 있는 자세를 갖출 수 있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격을 갖출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자격을 상실했다는 것이 얼마나 원통하고 분한 것인가를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분하다는 것입니다. 이랬기 때문에, 복중으로부터 태어난 메시아를 맞이하지 못한 이스라엘이 됐기 때문에 앞으로 주님이 다시 오실 때에도 복중으로 태어나는 그 메시아를 맞을 수 없는 기독교의 역사가 예정되었다는 것입니다.
자라는 메시아를 맞이하지 못한 이스라엘의 역사를 지녔기 때문에 앞으로 주님이 이 땅에 와도 자라는 주님을 맞이할 수 없는 기독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이 그러한 역사적인 배경을 지녔기 때문에, 이 땅 위에 다시 오시는 주님도 뜻을 위해 십자가의 길을 가고 다시 부활적인 승리의 터전을 맞고 난 연후에야 비로소 이스라엘의 후계인 제2 이스라엘인 기독교는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인연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탕감복귀를 하는 데는 인류 역사적인 고비를 그냥 그대로 되돌려 재현시켜서 탕감해 나간다는 사실을 보게 될 때, 이스라엘이 얼마나 책임을 못 했는가 하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회개하게 될 때, 자기가 죄지은 것을 회개하는 것보다도, 이스라엘 민족이 이 땅 위에 메시아가 올 때에 맞이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지 못했던 죄를 회개해야 됩니다. 예수님의 복중시대부터 '오냐, 네 민족을 위하여 네 나라를 위하여 보내신 하늘의 왕자를 맞을 수 있는 자들이 너희들이로구나' 하면서 하나님의 마음속에 기억될 수 있는 이스라엘 사람 한 사람이 없었던 것이 한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여기 모여서 이날을 축하하는 데는 흘러가는 역사시대의 사람들이 축하하는 그런 흘러가는 날로 축하할 것이 아니라, 역사를 밟고 올라서 하늘이 예수를 보내실 때 마리아를 찾아오셨던 간곡한 심정을 대신하여 마리아를 모실 수 있는 이스라엘 백성으로서 메시아를 대할 줄 아는 그런 주인공이 되어 이날을 축하해야 됩니다. 그러한 자리에서 이날을 축하한다면 여러분은 세계사적으로 역사적으로 이러한 내용을 모르는 수많은 기독교인보다 하늘 앞에 가까운 심정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조건을 결정짓는 거룩한 자리라고 나는 자신하는 바입니다. (녹음이 잠시 끊김)
복중시대부터 맞이해야 할 메시아의 모습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안나 할머니가 예수가 메시아임을 증거했습니다. 메시아를 제일 먼저 안 사람은 안나 할머니였습니다. 예수를 복중시대 때부터 안 사람이 안나 할머니였던 것입니다. 그래, 안나 할머니가 알았으면 정성껏 모셔야 되는 것입니다. 정성껏 모셔야 된다는 것입니다. 메시아를 맞기를 고대하면서 일생 동안 성전을 지키면서 기도한 할머니라면 마리아를 만나 그 사실을 알았던 그때부터 마리아의 종이 되어야 했습니다. 종이 되어야 됩니다. 그가 어려울세라, 고통받을세라, 그 환경을 전부 주선해 가지고, 자기의 친척까지 동원해서라도 환경을 개척했어야 됩니다. 그랬으면 이스라엘의 인연을 상속받아 가지고 그 터전 위에서 이스라엘 역사를 재현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증거는 했지만 받들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또, 동방박사 세 사람이 있지요? 그 사람들이 복중에 있을 때는 모시지 못했지만 난 후에는 와서 증거를 했습니다. 증거하고는 모두 어디로 갔습니까? 동방박사들 어디로 갔노? 목자들 어디로 갔노? 안나는 어디로 갔어요? 다 가 버렸습니다. 다 가 버렸다는 것입니다.
본래는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 정성들이고 하나님과 일문일답하여 직접적인 계시를 받고 지도받는 특별한 선지자들이 있었던들 그 선지자들이 옹위하는 가운데서 마리아는 10개월 동안, 그가 자라는 기간을 지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가 목수 일을 할 게 뭐예요, 목수? 생각해 보라구요, 예수가 목수 일을 해서 되겠는가? 예수가 목수를 해서 되겠느냐 말이예요.
예수가 바라보는 그 시선은 이스라엘 나라를 바라본 것이요, 이스라엘 나라를 통해 세계를 바라본 것이었습니다. 그의 앞에는 개인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요셉 가정이 문제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때와 시기가 찰 때까지 스스로 준비하려니, 환경을 떠날 수 없는 예수였기 때문에 요셉 가정을 근거지로 하고 터전을 닦기 위한 수고를 여러 차례 했었지만 그 가정이 받들지 못하기 때문에 집을 나오게 되어 3년노정을 떠나게 된 것입니다, 집을 나오게 되어 3년노정을 떠난 것입니다. 집에서 알지 못했기 때문이예요.
예수는 집에 대해서 한이 많다는 것입니다. 천주교에서는 마리아 상을 갖다 놓고 믿고 하지만, 저나라에 가 보라 이겁니다. 예수님이 한이 많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갈릴리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자기의 모친이 포도주가 없다고 말할 때 '여인이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라고 했던 것입니다. 예수가 당연한 말을 한 것입니다. 당연한 말을 한 것입니다. 하등의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천륜을 배반하고 민족적인 사명과 소망을 전부 전복시킬 수 있는 동기를 내포하고 있는 장본인이 어머니라는 것이예요. 그래서 '여인이여 너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라고 한 것입니다.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 저런 것 생각해 볼 때, 오늘날 이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심판을 받아야 된다 이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통일교회가 필요한 것입니다. 때려 보라는 겁니다, 누가 깨져 나가나. 지금까지 통일교회에 나 혼자 남아 가지고 이런 일을 해 나왔습니다. 어느누구 한 녀석도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두고 보라는 겁니다, 누가 깨져 나가나. 부딪치는 날에 누가 깨져 나갈 것인지 보자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는 내가 맞고 나간다 이겁니다. 예수님이 지금까지 개인적으로 맞았고, 가정적으로 맞았고, 종족적으로 맞았고, 민족적으로 맞았고, 국가적으로 맞았으니 나도 맞는다 이겁니다. 맞지만 때가 오니 참아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참는 것은 내 개인을 위해 참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한을 풀고 하나님의 한을 풀기 위해서입니다.
그 대신 하나님이 위로받을 수 있는 그 나라를 못 가졌기 때문에 내적으로 깊은 자리에서 위로할 수 있는 터전을 찾기 위해 싸워 나오는 것입니다. 외적으로 몰릴 적마다 예수의 슬픔을 위로할 수 있고, 하늘의 곡절에 부대낄 수 있는 그런 환경이 된다는 것을 생각하고, 역사적인 고빗길이 여기에서 맺히고 풀릴 수 있는 동기가 된다는 것을 생각하고 참아 나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연은 하나님에게도 그러하고 예수님에게도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이렇게 외로운 생애를 거쳐간 것을 알아야 됩니다. 예수의 손은 까뀌를 쥐고 나무를 깎아서는 안 됩니다. 대패를 쥐고 나무를 밀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가 그래서야 되겠습니까? 그래야 되겠나 생각해 보라는 겁니다. 그러한 메시아를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이 4천 년 동안 준비시켜 나왔겠습니까? 예수가 살던 그 시대에 있어서 책임을 졌던 제사장, 교법사, 서기관들은 전부 지옥 제일 밑창에 가야 됩니다. 그래서 시대적인 지도자의 책임은 무서운 것입니다.
이들을 쳐서 땅에 집어 넣으려니 그들 앞에 하나되어 동조하고 지도받던 이스라엘 민족을 전세계의 지옥에 던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나라와 민족, 종족, 풍습 전부가 산산조각이 되어 세계로 날아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은 세계속에서 메시아가 다시 올 때까지 2천 년 동안 지상지옥에서 후회와 탄식하는 민족이 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그랬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다시 독립이 될 수 있는 때가 된 것은 하늘의 용서의 인연으로 이 땅 위에 어떤 기준이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우리 원리를 두고 볼 때에 아담은 첫아들이요, 예수는 둘째아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탕감복귀 역사에 있어서 임무를 중심삼은 탕감기준을 제시하여 세계적인 조건을 넘겨 놓아야 합니다. 그런 기준이 있기 때문에 2차대전 때 히틀러를 중심한 세력이 이스라엘을 배격하는 사탄편적인 주도세력이 된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이 역사적인 탕감을 해야 했던 것입니다. 6백만이 학살당한 것입니다. 민족이 많았다면 6천만이 학살당했을 것입니다. 그래야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성탄을 맞이하는 날에 있어서 우리들이 갖춰야 할 자격과 자세는 어떠해야 되느냐? 모여 앉아서 무슨 노래나하고 좋아하는 것보다도 엄숙한 자리에서 예수를 그리워하고 메시아를 고대하던 이스라엘을 대표한 역사적인 부활체가 되어 하늘이 약속한 메시아를 고대하던, 소망 시대를 거쳐 나오며 민족적 선조들이 바라던 그 모든 전통을 홀로 책임지고 예수를 친히 모실 수 있는 입장에 선 자신이 되어 가지고, 복중시대의 예수님을 모시지 못했던 것이 한이기 때문에 모실 수 있는 내가 되어야 된다는 것을 이 시간에 다시 한 번 느끼는 여러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메시아를 복중시대부터 정성을 다하여 모셔 가지고, 그가 태어나는 날이 자기 꿈을 실현되는 거와 같은 소망의 한 날로 기다려야 된다는 거예요. 왜 그래야 되느냐? 하나님이 이 땅 위에 메시아를 보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수고를 하셨겠어요? 민족을 만들어 가지고, 야곱이 얍복강에서 승리한 그 이스라엘 민족을 중심삼고, 이 민족이 원수세계에 몰리면 피해를 입을까봐 보호해 가지고, 사탄세계가 나라를 갖고 있기 때문에 한 국가 형태로까지 길러 가지고 그곳에 메시아를 보내셨으니, 그날을 기다리기에 얼마나 지루했겠습니까? 하나님이 4천 년 동안 막혔던 가슴속의 한숨을 내쉴 수 있는 순간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날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태어나는 날을 얼마나 기다리셨겠어요? 하나님은 10개월도 지루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복중의 메시아를 모실 수 있는 내가 되어서 그가 태어나는 날을 하나님과 같은 심정으로 지성을 다하여 바랄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준비했다가 그가 태어나면 이렇게 키우겠다고, 어렸을 때는 어러한 옷을 입히고 어떻게 키우겠다고, 어떻게 모셔야 되겠다고 마음의 단장을 해 가지고 그날을 고대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어야 됩니다.
만일 그렇게 하겠다는 사람이 있었다면 마리아가 다윗성 베들레헴에 찾아갈 때 혼자 가게 했겠습니까? 그가 가는 주위에는 수많은 군중이 옹위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 만삭이 되어 가지고 하루하루가 염려스러운 판국인데 그냥 가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주위에는 수많은 군중이 가고, 며칠 전부터 다리를 놓아 가지고 베들레헴에서 제일 좋은 여관을 마련했음에는 틀림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 수 있는 사람을 갖지 못한 마리아와 예수의 환경이었음을 부정할 도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그런 환경에서 예수님이 태어났다고 생각해 보라구요. 그랬더라면 문제는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베들레헴에 호적하러 온 모든 사람의 수보다 그를 옹위하고 그가 머무는 환경을 지키는 사람의 수가 더 많았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겠습니까? 그럴 수 있었다면 어떻게 됐겠느냐는 것입니다. 문제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베들레헴에 탄생한 메시아를 동방박사가 맞이하겠어요? 동방박사가 맞겠느냐 말이예요.
이스라엘의 슬픔이 그것이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슬픔이 그것이라는 거예요. 어찌하여 이방 사람이 예수를 맞아요? 모인 군중이 동방박사가 증거하는 것과 같은 환경적인 일이 벌어졌다면 사태는 일시에 전국적으로 벌어졌을 것입니다. 성경학자들은 베들레헴에서 메시아가 탄생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환경적으로 이것이 일시에 국가적인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랬다면 예수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생각해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여러분 듣기 좋으라고 생각해서 하는 말이 아니예요.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인 선조들 앞에 책임을 추궁하는 시간인 것입니다.
우리 통일교회는 앞으로 역사시대를 탕감하고 이 시대를 창건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역사시대를 탕감하려면 역사시대를 심판해야 됩니다. 잘했고 못했고를 심판해야 됩니다. 그런 후에야 시대에 대한 사명과 책임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기원을 밝혀 놓지 못하고는 시대적인 사명을 할 수가 없어요. 더우기나 그것은 하늘의 역사와 연결되어 내려온 역사이기 때문에 이것을 밝히지 않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문제를 명심해야 되겠습니다.
예수를 복중으로부터 모셔야 됐어요. 그가 태어날 때 강보에 쌌다고 했어요. 강보, 보자기로 싸다니…. 그 보자기가 어느 누가 만든 보자기예요? 그거 생각해 봤어요? 어느 누가 만든 보자기일꼬?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만들었을까요? 생각해 보라구요. 나그네 신세에 갑자기 벼락을 맞은 거예요. 불의의 사태를 만난 거예요. 그런 상황에서 누가 만들었을까요? 혹 거지가 만들지나 않았을까? 얼마든지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외양간에서 해산하는 형편이니, 그 상황에 어디 손 가까운 데에서 찾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말할 수 없이 비천한 어떤 아낙네의 손을 통해서 만든 보자기인지도 모릅니다. 이게 될 말입니까? 이스라엘은 어디 갔어요? 메시아가 처음 입는 옷이 하늘이 생각하지도 않고 하늘이 꿈도 꾸지 않았던 그런 사람들의 손을 거쳐서 만든 강보라니, 4천 년 동안 하늘이 준비한 이스라엘은 어디 갔느냐 이겁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손으로 꿰맨 누더기라도 좋아! 이런 걸 생각하면 분하고 원통합니다.
또, 그가 태어나서 목욕을 했다면 어디서 했을까요? 생각을 해 보라구요. 누가 시켰을 것인가? 마리아가 아기를 낳았으니 동네 부인들이 달려왔을 것입니다. 생각지도 않은 사태가 벌어졌으니, 아기를 낳아 본 부인들은 그 사정을 알기 때문에 협조하는 겁니다. 그 아기 예수를 씻어 주었을 상황을 생각해 보라구요. 어떤 대야, 어떤 그릇에 물을 떠 가지고 와서 씻어 주었을 것인가? 소 여물을 퍼주던 뚝배기인지도 모릅니다. 혹은 죄짓고 당장 하늘 앞에 형벌을 받을 사람이 쓰던 세수대야인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이 그걸 생각을 해야 된다구요. 이스라엘은 어디 갔는가! 누가 태어난 그를 부축하여 목욕을 시켜 주었을까?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 신자들이, 하늘 앞에 정성을 다하여 그 아기가 탄생하는 그 시간을 맞아 가지고 목욕시킨 조상을 가졌다면 얼마나 영광이겠습니까? 그런데 그 메시아의 몸을 사탄들이 드나들 그런 손길로써 씻어 주다니 이 불경을 무엇으로 하늘 앞에 사죄하겠습니까? 이런 것을 생각이나 해봤습니까? 목사들은 그저 거룩하지요.
난 궁금했습니다. 그때 그가 젖을 먹을 때 어디에서 먹기 시작했을까? 24시간은 보통 지내는데 뉘어 놓고 물을 처음 먹일 때 어디에서 먹였을까? 혹시나 외양간은 아니길 바랬습니다. 이 땅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물을 먹는데, 처음으로 젖을 먹는데―어떤 것이 외양간인지 다 알지요?―소 오줌 똥 냄새가 진동하는 그런 자리에서 먹는 것을 시작하다니, 그 자리에서 울음을 터뜨리다니! 생각을 해보라구요. 그런데 뭐 예수가 탄생할 때 말구유에서 탄생해서 강보로 쌌다고, 그 강보를 무슨 하나님의 옷자락같이 생각하고, 그 말구유가 하늘의 보좌라고 생각하는 모양지요? 거기에는 하나님의 서글픔이 어려 있다는 것을 통일교회 패들은 똑똑히 알아야 되겠어요. 그러한 역사적이 한이 깃들어 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그 한을 탕감하기 위하여 시대적, 역사적인 책임을 감당해야 합니다. 또한 그러한 사명을 짊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를 잉태하여 가지고 그 무거운 몸을 이끌고 다윗성을 찾아갈 때에 그를 부축해 주는 우리의 조상이 못 되었다는 것이 한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가 해산하는 수고와 역경 가운데 있을 때 밤을 새워 가며 시중들지 못한 것을 염려해야 할 이스라엘 민족인데도 불구하고 잠만 자고 꿈에도 그걸 생각하지 않았다는 사실, 이것들은 하늘의 벌을 받아 마땅합니다. 하늘이 살아 있다면 벌을 받아야 됩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을 맞을 수 있는 진정한 축하를 할 수 있고 진정한 송영을 할 수 있는 첫노래를 불러 하늘 앞에 화답할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날 때뿐만이 아닙니다. 날 때까지 하나님의 위로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돼요. 날 때도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는 장면을 우리들이 이루어 드려야 되고 낳아 가지고는 예수가 기뻐할 수 있는 우리들이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30여 생애 가운데 그의 주위에서 그를 시봉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가 태어남으로 말미암아, 당신을 기쁘게 할 수 있는 모습을 고대했고, 당신의 심정의 위안처를 찾기를 바랐던 하나님은 도리어 예수를 보내 놓고 서글픔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아담 해와로 말미암은 제1차적인 서글픔보다도 예수로 말미암은 제2차적인 서글픔이 더 컸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태어나던 그 순간에 하나님을 위로해 드리지 못한 사람들의 후손된 우리는 그날을 탕감복귀해야 되겠습니다. 고이 아버지 앞에 나아가 '그런 역사적인 우리 선조들에 의해 당신의 가슴에 슬픈 심정의 못이 박혀 있는 것을 푸시옵소서' 하고 기도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이날을 맞기 위해 비로소 흰옷을 새로 해 가지고, 아버지 앞에 모실 때 입어야 했으나 잃어버렸던 그 옷을, 더럽혀졌던 그 옷을 다시 빨아 가지고, 첫 번 입지 못하고 더럽혀진 옷을 빨아 입고 아버지 앞에 나와서 다시 아버지의 뜻을 받아, 하늘의 왕자를 대해야 할 신세인 것을 서글퍼하면서 맞이해야 할 시간이 이 시간인 것을 여러분이 느껴야 되겠습니다.
태어나면서까지 하늘의 서러움을 남긴 예수, 이 땅 위에서 30여 생애를 지내면서의 예수, 그는 얼마나 외로웠던가! 그는 4천 년 역사를 부활시켜야 할 하늘의 책임자요, 피폐한 이스라엘을 로마의 속국으로부터 해방시켜야 할 사명을 짊어진 메시아인데도 불구하고 환경적인 어려움을 타개할 내적인 고충과 시련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런 내적인 고충을 누구한테도 이야기할 수 있는 환경이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자주독립국이 아닌 식민지였기 때문에 하늘이 원하는 뜻을 입을 갖고 있으되 말할 수 없는 입장이었습니다. 자기 부모한테도 이야기할 수 없는 입장이었습니다. 묵묵히 밤이면 하늘의 별을 바라보면서 내적으로 속삭이고, 낮이면 쉬는 시간에는 뜰 앞에 흘러가는 냇물을 바라보면서 말하던 예수였습니다. 스쳐 가는 바람결과 더불어 친구했고, 지나가며 우는 새와 더불어 친구하기를 일삼던 예수였습니다.
그는 이 땅에 왔지만 친척도 없었습니다. 친척 같은 패는 많았지만 친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열두 살 때 예루살렘 성에 갔을 때 제사장들과 성전에서 하늘의 말씀을 나누고 있을 때, 그의 부모들은 하룻길을 갔다가 예수가 없는 것을 알고 찾아 나선 것을 보라구요. 그런 것을 보게 될 때에 그들은 예수를 정상적인 사람으로 취급을 안 했던 것입니다. 진정한 메시아의 소견과 일치될 수 있는 환경적인 종족이 없었던 것을 생각할 때 얼마나 외로웠겠습니까?
그는 홀로 아버지 앞에 호소할 적마다 숨은 눈물을 흘리면서 스스로의 책임을 다짐해야 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그런 내적인 생활을 쌓아 나왔던 예수였습니다. 예수의 그런 시대를 생각해 볼 때, 그런 생활환경에 있어서 친구가 되고 혹은 유모가 되고, 그 마음의 위안자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또 그 억센 환경을 실날 같은 어린 몸을 가지고 타개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책임적인 분야를 염려하면서 눈물로써 품어 주고, 자는 그의 외로운 모습을 보고 하늘 앞에 눈물로써 기도하던 한 사람이 있었느냐? 이 얼마나 원통합니까?
남과 같이 입고 싶은 것도 많았을 것입니다. 세상에 많은 부모가 자기 자식을 사랑하지만, 그것으로 만족할 예수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도 그것으로 만족할 분이 아닙니다. 이념적인 심정을 통하여 하늘을 등에 지고 땅 위에서 예수를 품고 그 장래를 염려하면서, 부디부디 고이 자라서 이 민족을 해방하고 세계를 구원해 달라고 기도해 줄 수 있는 협조자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 얼마나 기가 막힙니까?
그때의 제사장들을 하나님이 볼 때 전부 한꺼번에 모가지를 잘라 버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혼자 말없이 쓰러져 입은 채로 자고, 먹는 대로 먹고, 그 주변에서 보호하는 사람도 없는 생활을 한 예수를 나는 알아요. 나는 잘 압니다. 그런 사연을 갖고 있으니….
이런 날을 맞이할 때 그런 이야기를 하려면 내 가슴이 막힙니다. 남 모르는 세상에 남이 알지 못하는 뜻을 품고 왔다 간 그 외로운 사정을 누가 알겠습니까? 모르는 것이 당연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타락한 후손들이 모른다고 생각하니…. 예수의 사연이 그랬다는 것을 여러분이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통일교인들은 뭘할 것이냐? 예수가 바라보던 그 나라, 바라보던 그 세계, 이스라엘 문화가 로마제국을 항복시키고 하늘의 창국의 이념과 더불어 승리의 개가를 아버지 앞에 돌릴 수 있는 그날을 꿈에서나 깨어서나 얼마나 고대했겠습니까? 그가 보고 느끼는 오관을 통하여서 그날을 고대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이 수고하여 세운 이스라엘을 잃어버릴 수도 없는 것이 섭리인 것을 알게 될 때, 무지한 이스라엘을 위하여, 그들이 잠을 자는 그 시간에도 그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지 않으면 안 되는 책임을 짊어지고 홀로 헤매던 예수의 배후의 생애는 성경에는 없습니다. 성경에 없는 것이 도리어 복입니다. 그걸 안다면 여러분은 밥을 먹고 살지 못합니다. 옷을 입고 살지 못하게 됩니다. 네 활개를 펴고 잠을 잘 수 없는 것입니다, 죄인이니까.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예수의 생활의 이념과 그 배후의 심적 고충을 성경에 기록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알고 우리들은 감사해야 됩니다. 그렇지만 당하고 간 그분의 맺힌 바의 한은 풀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풀 도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풀지 않고는 땅 위의 해원성사가 안 됩니다. 땅 위의 해원이 성사 안 되면 하나님이 기쁠 수 없기 때문에 이 일을 풀기 위해서 다시 와야 되는 겁니다. 자기가 맺고 갔으니 자기가 아니면 풀 길이 없기 때문에 자기 이름으로 와야 된다는 겁니다. 통일교회에서는 이런 내정적인 인연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심정을 논하고 나온 것입니다.
예수도 육을 쓴 인간이었으니 하고 싶은 것이 없었겠어요? 하고 싶은 것이 많았겠지요? 그럴 것 아니겠어요? 그렇다면 내가 그의 주위에서 밤이나 낮이나 언제든지, 천 가지 만 가지를 요구하더라도 구해 드릴 수 있는 자신이 되어야 되겠다, 외적인 기준은 못 되더라도 그런 경우에 그의 손을 붙들고 십 년 후에, 이십 년 후에 천배 만배 해주겠다고 마음으로나마, 말로나마 위로해 줄 수 있는 내가 되어야 되겠다 하는 마음을 중심삼아 가지고, 예수 당시에 있어서의 형님 중의 형님이 되고 어버이 중의 어버이가 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그래야 형제가 되는 것입니다. 통일교회의 식구라는 말이 거기서부터 생긴 것입니다.
예수에게 진정한 어버이가 없었고, 진정한 형제가 없었고, 진정한 친척이 없었던 심정을 헤치고 들어가, 그 앞 좌석에 가서 예수를 재차 환영하여 당시에 예수를 맞아 줄 수 있었던 어머니보다도, 형제보다도, 그 민족보다도, 그 누구보다도 더 그를 품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그의 앞에 가기에 부끄럽지 않다는 것입니다. 30여 생을 사신 예수의 생활적인 무대 앞에 위로의 대상이 없었고, 기쁨의 상징체가 없었던 것을 여러분들이 재현하여 비록 역사시대는 지나갔을망정 심정의 세계를 더듬어 올라가 기도로써 그를 위로하고, 그 시대적인 사명을 내가 지금 상속해 가지고 그가 사랑하고 싶었던 그 민족을 사랑해야 되겠고, 그가 사랑하고 싶었던 그 세계를 실제로 사랑할 수 있는 터전을 닦겠다고 생명을 각오하고 나설 수 없는 여러분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역사적인 모든 흠을 밟고 올라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 당시에 맺혔던 시대적인 한, 즉 그의 생애적인 한을 오늘 이 시대에 있어서 우리를 통하여 풀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리에 서야만 예수가 태어난 날을 축하할 수 있는 입장에 선 식구의 자리를 회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번은 그래요.
셋째는, 예수가 소원한 것은 무엇이겠느냐? 물론 하루 생활환경에서 자기를 반겨 맞아 줄 사람도 필요하겠지만, 이스라엘 나라의 주권을 로마 제국으로부터 탈환하여 가지고 새로운 이상적인 이스라엘 창건을 이룩하는 것이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나간 것도 그런 때를 바라보면서 나간 것입니다. 그런 때가 하늘에 예약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참고 나갔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나라의 백성들은 하늘 앞에 슬픈 내용을 세웠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의 이슬로 사라져야 할 운명에 처해 있었지만, 예수의 소망 가운데 이스라엘은 살아 있었습니다. 소망적인 이스라엘은 살아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이스라엘이 배반하고, 물러가고, 쓰러질지라도 예수의 소망 가운데 깃들어 있는 이스라엘 나라는, 엄연히 역사와 더불어 살아 있었다는 것입니다. 소망의 이스라엘 나라와 더불어 생명을 같이하고, 소망의 이스라엘 나라를 창건하기 위해서 현실을 밟고 넘어가는 길이 십자가의 길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 개인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의 기독교인들이 '예수 믿고 천당 갑시다' 하는데,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그것은 개인주의입니다. 그런 사상이 아니라는 겁니다. 예수는 더 큰 의미의 엄숙한 과제를 놓고 죽어간 것입니다. 이스라엘 천국을 위해서, 이스라엘 천국을 구현하기 위해서 죽어갔던 것입니다. 나라를 구하기 위한 입장에 선 백성이 되어야 하고, 백성 가운데 들어간 종족이 되어야 하고, 종족 가운데 들어간 가족이 되어야 하고, 가족 가운데 깃들어야 할 개인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나라 창건을 위주로 한 개인인 겁니다. 내 개인구원을 위주한 이스라엘 나라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관념이기 때문에 하늘을 팔아먹고, 나라를 팔아먹고 별의별 놀음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런 교회는 부패합니다. 그러므로 끝날이 되면 자리를 못 잡고, 어느누구든지 이것을 점령할 수 있는 환경으로 흘러가야 됩니다. 하나님이 그날을 보기 위해 참고 나왔던 것입니다.
오늘날 흘러가는 이것을 다시 잡아 가지고 소망적인 이스라엘을 중심삼고 십자가에서 밟히지 않고 부활과 더불어 행로를 개척해 나갈 소망의 이스라엘 나라, 지상의 천국을 창건할 그 이념은 영원히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한이 무엇이냐? 그의 이념을 중심삼고 하늘 앞에 서약을 하고 하늘나라를 창건하여 만민 앞에 예수의 모습을 통하여 하늘의 권위를 나타내고자, 하나님의 승리적인 권한으로 만세를 주관할 수 있는 승리의 날을 맞이하고자 한 것이 예수의 소원이었는데 이날을 맞이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그의 친구가 되고, 살면서도 그의 친구가 됨과 동시에 이념적인 면에서도 그의 친구가 되어야 됩니다. 이념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혁명적인 입장에서 그보다 먼저 죽을 수도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의 제자들을 좀 보라구요. 그게 무슨 사도입니까? 난 사도란 말을 제일 싫어합니다. 죽게 되니 다 도망갔지요? 그랬으니 이념적인 이스라엘도 전부 잃어버린 것입니다.
다행히도 이름도 없이 쓰러져 가던 오른편 강도만이 예수가 운명하는 경각에 위로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에, 예수가 땅을 잊어버리지 않을 수 있는 하나의 조건이 되었던 겁니다. 그 죄수가 이스라엘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할 수 있는, 용서받을 수 있는 하나의 조건이 됐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강도 때문에 이스라엘 나라가 끝날에 해방을 받는 것입니다.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이르리라' 한 말 때문에 지상 복귀시대에 있어서 이스라엘 나라가 독립이라는 명사를 가지고 하늘 앞에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강도나마 없었더라면 어떻게 될 뻔했어요? 이스라엘 나라는 영원토록 흘러가 버렸을 것입니다.
난데없는, 인연도 없는 강도가 인연이 되어 그의 반열에 동참했던 거와 마찬가지로, 기독교는 난데없는 민족들이 받아 가지고 하늘나라 이스라엘의 특권적인 혜택을 입고 나가게 된 것입니다. 영국 같은 경우를 보더라도, 역사를 찾아보면 대개 좋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의 뜻을 받들어 가지고 잘살게 됐습니다. 오늘날 미국 같은 나라가 복받게 된 동기도 그렇습니다.
의를 위한 싸움 도상에서 책임을 질 수 있는 이스라엘이 되지 못하고 제자들이 되지 못했던 그 한을, 이 세계 앞에 정의에 입각하여 책임을 질 수 있는 민족적인 정기를 받든 것이 오늘날의 미국이기 때문에 하늘이 축복해 주어서 오늘날 민주주의를 지배할 수 있는 권내에 들어서 있다는 것입니다. 그 강도로 말미암아 사도들도 부활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도 강도가 있었기 때문에 다시 온다는 것입니다. 그가 없었다면 예수가 부활해 가지고 그 모든 것을 해낼 것 같아요? 베드로, 야고보, 요한, 12제자가 뭐가 그리워서! 그 녀석들은 전부가 배신자인데. 하나님이 배신자 찾아가는 분이예요?
그렇지만 배신하는 그 자리에서 배신의 고개를 넘고, 죽음권을 밟고 넘고 자기의 모든 입장을 희생시키면서도 예수의 편된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로 말미암아 예수가 다시 찾아가 이스라엘에 대해 잊을 수 없는 자리에 섰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스라엘은 강도를 모셔야 된다는 것입니다. 고맙게 생각해야 된다는 거예요.
예수는 소망적인 이스라엘을 바라보면서 역사적인 사명을 해 나왔습니다. 그러나 지난날 역사시대의 제1 이스라엘을 헤아려 볼 때 예수의 마음에는 이스라엘을 잃어버린 풀 수 없는 서러움이 남아 있습니다. 그때에 새로운 하늘나라를 창건하기 위한 사명을 짊어지고 이스라엘을 바라보았지만, 이스라엘 민족이 배반하고 배척했던 그 한이 그의 가슴에 매여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느 한 시대에 있어서 풀어야 됩니다. 풀어야 됩니다. 이 한을 풀지 않으면 예수의 생활적인 면과 이념적인 면에 있어서 친구가 될 수 없습니다. 이걸 풀지 못하고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의 가슴속에 맺혀진 한을 풀지 못하면 천국이 올 수 없습니다. 그분을 맞이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세계도상에 있는 어떤 나라가 주님이 오시는 끝날에 있어서 책임을 지고 옛날에 실패했던 제1 이스라엘의 사명적인 분야를 재현시켜 역사적인 이스라엘 부활권을 결정지어 가지고 사탄에게 '너희들이 이것을 유린하지 않았느냐?' 하고 그것을 다시 빼앗아 가지고 때려 넘길 수 있는 기준을 잡아야 됩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 한 주님이 오실 수 없는 것입니다. 탕감복귀가 그렇습니다. 그래야 그 한이 풀릴 것 아니예요? 한을 풀려면, 예를 들어 분한 마음이 맺혀 있으면 듣기 싫더라도 '이랬기 때문에 그렇지 않았느냐?'라고 해명을 해야 그것이 풀리는 겁니다. 예수에게 맺힌 역사적인 한, 민족을 통하여 맺힌 그 한을 어떻게 풀겠느냐? '그 민족적인 한이 이랬기 때문에 이러한 환경을 제시하오니 이것을 보고, 이것을 대신 받고 푸시오' 해야 된다는 겁니다.
탕감복귀 원칙에는 용서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통일교회 교인들을 죽음의 길로 몰아내는 겁니다. 예수를 배반한 무리들, 12사도 배반하고 도망갔던 것을 넘어가려면 스스로 따라오겠다고 하는 무리를 쫓아내어 죽음길에 들이미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 죽겠다고 도망을 갔지요? 난 반대예요? 따라오겠다고 하는 자들을 죽을 길에 처넣는 거예요. 예수를 따라다니다가 죽는 것이 아니라, 예수 없이 죽을 수 있는 자리에 있어야 되는 겁니다. 예수와 더불어 죽는 것은 쉽다는 겁니다. 예수를 배반했던 죄를 탕감하기 위해서는 예수가 없는 데서도 예수를 위하여 죽음길을 대신 갈 수 있는 자리에 서야 합니다. 그래야 그 민족이 배반했을 때의 서글픈 마음을 탕감하여서 사탄을 대하여 '이 자식아!' 하고 때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네 이놈, 이러한 조건으로써 내 가슴에 못을 박고, 하늘에 한을 맺고, 이스라엘의 민족적인 사망권을 만들어 놓았지? 이런데도 풀지 못할 거야?' 하면서 사탄을 추방해야 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에서는 통일교회 선생님을 따라가겠다고 하는 무리를 무자비하게 고생길에 내몰았습니다. '죽음길을 가라!' 하고 내몬 것입니다. 거기에서 보따리 싸 가지고 도망가는 사람은 다 인연이 없는 사람입니다. 홀로 죽더라도 응당히 역사적인 모든 죄를 탕감하는 입장에서 죽겠다 하고, 죽더라도 예수가 민족을 안고 세계를 안고 간 것과 마찬가지로 창건의 이념을 중심삼고, 세계복귀를 이념을 중심삼고 십자가를 등에 지고 죽음길을 고이 가던 발자취를 따르겠다 하는 마음을 가지고 죽어서 지키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 그것을 지키겠다 하고 사탄의 화살을 맞지 않고 죽지 않고 부활의 권한을 갖고 나타나야만 민족 해원성사의 터전을 마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겠기 때문에 오늘 통일교회는 그것을 모방하여 지금까지 나온 것입니다.
주위에서 별의별 소리를 다 해도 우리는 아랑곳없습니다. 들어 줄 여유가 없습니다. 내 갈 길이 바쁘니 동네 개야 짖겠으면 짖고, 길에서 낙오되어 쓰러지겠으면 쓰러지고, 상관없는 행객이야 쓰러지려면 쓰러져라 이겁니다. 상관할 수 없어요. 갈 길이 바쁘기 때문에 상관을 못 하는 거예요. 민족적인 한을 탕감할 수 있는 역사적인 사명이 있기 때문에, 이런 길을 개척하고자 하여 나는 여러분을 이끌고 나온 것입니다.
그럼 이렇게 이끌고 나와서 뭘할 것이냐? 구원의 목적이 개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나라를 구원하는 데 있기 때문에, 구원복귀 승리의 터전을 마련하게 될 때는 종족복귀는 물론이요, 가정복귀, 개인복귀는 자동적으로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래 신앙자가 가야 할 길이요, 예수의 전통적, 본간적(本幹的)인 사상인 것입니다. 그런데 천국 가기 위해서 믿어요? 이 껄렁껄렁한 패들, 이놈들을 내가 전부 이 지구상에서 추방하려고 한다구요. 그런 교회는 망해야 됩니다. 나라를 찾지 못하고 망해야 됩니다. 나라가 나라를 상관하지 못하는 거예요.
다시 한 번 얘기하겠는데, 지난날의 역사는 흘러갔어요. 이 역사가 다시 한 번 상봉하여 풀려야 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역사적인 거리를 남겨 놓고 하나님을 위로할 수 있는 아무런 조건을 갖지 못한 내 자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여러분이 배우고 있는 원리를 중심삼고 원리 배후에 있는 특별한 심정의 인연을 통해서 아담 가정에서부터 해원성사하자는 것입니다.
아벨에 대해 하나님이 이러했고, 가인을 대한 하나님의 서글픔이 이러했고, 노아의 가정을 대하던 하나님의 섭리가 이러했으니 그 내정의 심정이 어떻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엎드릴 적마다 그걸 생각하면 피가 뛰쳐 나오는 심정을 느끼면서, '아버님, 얼마나 수고하셨습니까?' 하고 눈물로써 위로하고 '아버지를 내 가정에 모시고 천년 만년 살고 싶다. 환경이 어려우면 어떠하고, 핍박이 심하면 어떠냐?' 하며 내 맘으로 모시는 그 정성으로 남 모르는 가운데 내적인 천국의 기준을 닦아 가지고 '승리적인 천국이, 세계적인 승리적 심정의 터전이 나로 말미암아 닦아졌습니다' 해 가지고 '이제 나로부터 이 육적인 세계에서 제1보의 행차를 단행하시옵소서. 하늘의 권고를 바랍니다' 하며 나설 수 있는 자녀의 명분을 갖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명분을 갖춰야 할 것이 우리의 사명인데도 불구하고 오늘 통일교회 성도들을 볼 때, 그런 무리가 많지 않은 것을 절감하게 됩니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 않아, 나는. 나는 그렇지 않아요. 이를 위해서 나는 생애를 몇천 번 아버지 앞에 바치겠다고 각오를 했고, 죽기를 몇만 번 내적 외적으로 다짐했는지 모릅니다. 화살이 몰려들고 모진 시련에 부대낄 적마다 '내 아버지 가신 길' 하며 참았습니다. 내 아버지입니다. 남의 아버지가 아니예요. 하나님이란 말은 안 씁니다. 내 아버지가 가신 길! 내 아버지! 내적인 '내'라는 의미는 넓고도 큽니다. 내적이라는 의미도 포함되고 자기 편이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전부가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것을 느끼면서 복중시대, 육신시대, 이념시대, 이 3시대를 거쳐서 그 마음속에 기억될 수 있고, 그 생활 속에 기억될 수 있고, 그 이름 속에 새겨질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되어야만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딸이 지금까지 그런 자리를 통해서 찾아 나온 길에 있었기 때문에, 그가 그런 길을 닦아 나오는 시대적인 구원섭리 과정을 거쳐오기 때문에 그 섭리과정에 있어서 동행하고 동사할 수 있다는, 이때의 사명을 생각할 때 그걸 무얼 주고 바꿀 겁니까? 뭘 주고 바꿔요? 세상의 명예는 한때일 뿐 흘러가는 것입니다. 세상의 행락은 한때일 뿐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가는 길, 우리들이 남기는 터전은 영원히 영원히 하늘과 더불어 지내질 것을 생각하면 이 길 이상 더 나은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통일교회는 불쌍하지 않습니다. 불쌍하지 않아요.
내가 지방을 순회할 때 눈물로써 그들을 대할 때가 많습니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참고 가는 걸 보게 될 때 서글프게 생각합니다. 얼마나 참느냐, 비참하면 비참할수록 비참한 가운데서 하늘과 심정적인 결탁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위하여 고생하겠다고 하며 굶으면서도 빈 식기를 붙들고 밥을 그리워하면서 아버지를 부를 수 있는 그 자리에는 하늘의 간장이 녹아나는 겁니다. 혹은 뜻을 위하다 철창에 갇혀 매를 맞고 옷이 찢기고 눈물짓는 그러한 고문의 자리에는 하늘의 심정이 폭발되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아버지 앞에 효자의 명패를 박겠다고, 충신의 명패를 박겠다고 다짐해야 합니다. 우리 역사시대에 그런 사람이 없었거늘 이런 역사적인 심정의 배후를 알아 가지고 하늘을 위로하고, 지금까지 역사적으로 한 많은 순교 열사들을 해원성사해 드려야 되겠다고, 당신들이 간 길이 이러하거늘, 나도 이 길을 감으로써 당신들을 위로하고, 당신들의 한을 풀어 주기 위한 약속을 가까운 미래에 두고 기필코 성취해 드리겠다고 다짐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럴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통쾌하고 의의 있는 일입니까? 여러분은 그렇게 각오해 봤어요?
통일교회는 그러한 원칙과 그러한 생활터전과 그런 이념적인 일을 해 가지고, 예수 앞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둘도 없는 친구가 되어야 됩니다. 하나님 앞에 둘도 없는 효자 충신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통일교회 전통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 이외의 존재들은 전부 사기꾼들입니다.
그 전통만이 남아지게 될 때, 거기서부터 하나님의 개인은 다시 한 번 소생할 수 있는 것이요, 그 전통만이 남아지게 될 때, 하나님의 아들딸이 고이 자랄 수 있는 것이요, 그 전통만이 남아지게 될 때, 하늘나라는 재창건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틀림없는 철칙입니다. 이런 내적 사연을 여러분이 생각하면서 그렇지 못했던 과거의 자기를 비판하고 현재의 그렇지 못한 자기를 정비해 가지고 내일의 숙명적인 내 운명을 새로운 터전으로 마련하겠다고 결의하고 나설 수 있는 시간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이렇게 재차 결의할 수 있는 시간이 되어야만 하늘이 요구하는 성탄절을 맞이할 수 있는 자격을 결정할 수 있는 중요한 이 날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각오와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이날을 맞게 될 때 하늘이 감사하게 되고 예수님도 이날을 맞는 의의를 갖게 되고 앞으로의 소망의 이스라엘이 우리로 말미암아 안 될래야 안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생각하고 오늘 이런 내용을 가지고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이 1966년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7년노정을 넘어가는 데 있어서 제일 시련이 많았던 6년째 되는 해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내가 오늘 새벽에 가만히 생각해 보니 어이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이 길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시련을 당했습니까? 정말로 곡절이 많았습니다. 예배를 한 번 보려면 싸움을 하고, 예배 도중에 끌려 나가서 몽둥이 찜질을 당하고…. 그러던 한 많은 6수의 탕감시대를 넘어가 가지고, 이제는 통일교회가 어디를 가든지 이 민족이 그렇게 대우하지 않을 수 있는 환경적인 터전이 마련되었습니다. 일면 서글픔도 있지만 일면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옛날에 여러분이 이런 날 하루 예배를 드리기 위해 얼마나 도망다녔습니까? 선생님 한 번 만나기 위해서 야간에 담을 넘어 도망하던 일도 있었지요? 여러분이 무엇 때문에 그랬습니까? 그 목적은 여러분 개인을 구원하고 개인들이 좋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나라와 그 의를 위해서였습니다. 선생님은 지나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나라의 인연은 영원히 남는 것입니다. 그 나라의 인연을 맺기 위해서 선생님이 필요한 것이고, 그 인연을 통하기 때문에 선생님이 필요한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선생님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날들을 보내고, 이제 오늘 1966년 마지막 주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제 이날은 오지 않습니다. 7년노정 중에 6년째의 마지막 날인 것을 생각하면 일면 서운하고 일면 기쁘고 그렇습니다. 7년노정의 마지막 해를 맞이하는 초하룻날이 주일이 되는구만요. 햐! 이것이 어떻게? 우연의 일치인지, 그러기를 바랬던 것인지, 그렇게 들어맞는 걸 보고 난 기쁘게 생각합니다. 어떻게 초하룻날이 주일이 될까? 또 오늘 크리스마스가 어떻게 주일일까? 이런 것을 전부 생각해 볼 때, 기쁜 날과 슬픈 날, 혹은 슬픈 날과 기쁜 날이 엇바뀌는 역사적인 전환 시기라고 생각됩니다. 이렇게 생각해 볼 때 소망에 넘치는 무엇도 없지 않아 있어요. 그 대신 앞으로 우리의 사명은 큰 것입니다.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 민족적인 해방의 봉기를 이 세계 앞에 들어 가지고 북한 땅을 해방해야 됩니다. 북한 땅을 해방해야 돼요.
그러기 위해서는 이제부터 남아진 제2차 7년노정을 중심삼고 여러분을 어떻게 또 내몰아야 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지금까지는 탕감과정에서 여러분이 수고했습니다. 이제는 탕감과정이 아닙니다. 열 번 뿌리면 열 번 거둘 수 있습니다. 선생님도 지금까지의 7년노정이 끝날 때까지는 탕감시대를 맞아 수고함으로써 하늘과 연결된 겁니다. 그런 시대를 넘어서서 이제는 민족과 더불어 갈 수 있는 7년기간이 또 있기를 바라는 거에요. 그런 기간이 또 있을 거예요. 내가 지금까지의 탕감시대에서 고생도 했고 별의별 일을 했지만 하늘을 환영하고 하늘을 맞이할 수 있는 그런 일을 못 했으니 앞으로 또 무슨 일을 할지 모릅니다. 여러분을 끌고 거지 소굴로 갈지 모르고, 노동판에 갈지도 모릅니다. 각오하라구요. 그럴 수도 있다는 겁니다. 집을 잡고, 지금 내가 차를 타고 다니지만, 내 발이 차 대신 될 때가 올 거라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의 계획대로 안 되는 날에는 내가 또다시 해야겠다. 이 통일교회 패들이 책임을 못 하게 되면 내가 또 탕감해 줘야 되겠다'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좋겠지요? 그러면 좋겠지요? (이후의 말씀은 녹음이 되어 있지 않음)
각자가 머물고 있는 자리는 우연한 자리가 아닙니다. 또 자기 스스로 원해서 얻어진 자리도 아닙니다. 대한민국 이 한 나라에도 오늘의 현실이 있기까지는 수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이 결과적인 존재로 태어난 것이 인간이기에 각 개인의 현실은 비슷한 입장에 머물고 있으나, 각 개인의 배후적 관계는 천태만상인 것입니다.
개인의 선악을 판단해 볼 때 만약 어떤 사람이 선한데도 불구하고 탕감을 받는다면 그 사람으로 말미암아 더 많은 선의 결과가 맺어집니다. 악은 탕감의 과정을 피해 돌아가려고 하지만 선은 탕감의 과정을 피해서는 안 됩니다.
선은 하늘인 동시에 땅입니다. 선은 양심의 지향성으로 보아 전진합니다. 선은 전체가 좋기를 바라지만 악은 개체가 좋기를 원합니다. 마음은 세상의 어떤 것을 차지하고도 안심하지 못하고 하나밖에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차지해야 안심합니다.
선이 가는 길은 희생의 길이요, 남에게 주는 길입니다. 선은 제일 귀한 것, 곧 네 몸과 사랑을 주는 길입니다. 중심이 되려면 남에게 주어야 합니다. 주고 싶어하는 분이 하나님이시니 남에게 주는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받게 됩니다.
하나님이 쉴 수 있는 입장에 서지 못했기 때문에 인간 또한 쉴 수 있는 입장에 설 수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기뻐할 때, 기뻐하려는 것이 현명한 태도입니다.
가정을 위해 희생하려는 사람이 있어야 그 가정이 살아납니다. 선생님은 일본 땅을 밟았을 때, 천조대신이 일본을 사랑하던 것보다 더 큰 사랑으로 일본을 사랑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땅은, 그 땅을 사랑하는 사람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을 세우기 위한 개척자가 되어야 합니다.
36가정은 아담부터 아브라함까지 2천년 사이에 있었던 선조들을 대신한 가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36가정 앞에는 가인 아벨이 있어야 합니다. 이 입장으로 세워진 가정이 72가정입니다. 또 12수를 중심한 전체 수를 위해 세워진 가정이 124가정입니다. 124가정 중 4가정은 세상에서 이미 결혼했던 사람으로 세웠습니다. 이것은 타락한 인간의 입장을 복귀하는 것이요, 예수님이 역사 속에서 찾으려던 가정을 복귀하기 위한 것입니다.
지난 14년 동안은 선생님의 가정을 결정하는 때였습니다. 선생님은 태어나신 지 만 40년 만인 1960년도에 가정을 세워야 했던 것입니다. 원래는 예수님을 중심하고 이루려 했던 가정적인 기준을 7년 동안에 세워야 했는데 21년으로 연장해 오면서 세워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워지면서 세계도 안정되어 가는 것입니다.
3년노정 중의 여러분은 통일 종족과 같은 입장입니다. 그러나 다음에는 민족을 넘어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민족을 찾아 세우지 못했지만 여러분은 예수님이 죽지 않고 이루었어야 할 그 기준을 세워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하나님이 바라는 대로 한국에 있어서 아벨의 입장에 서야 합니다.
옛날에는 아벨을 세우고 부모를 찾아가는 입장에 있어 개인을 찾아 나왔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평면적 기준에서도 개인을 해산(解産)할 수 있는 때입니다.
축복받은 식구들을 지방에 내보낸 것은 예수님과 성신의 사명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부인들이 성신과 같이 고생해야 되는 때입니다. 배당받은 지역이 작을지라도 그곳은 천주의 축소체이기 때문에 거기서 참고 견디면 그 지역의 복귀는 7년을 넘기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책임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이 기간은 선생님의 책임 기간입니다. 여러분은 모세를 따라 애급을 떠난 이스라엘 민족과 같이 선생님의 보조에 맞추어야 합니다. 선생님은 이 뜻을 세우기 위해 위신과 체면을 다 잊어버리고 나온 것입니다.
축복가정인 여러분이 하늘의 법도를 어기면 불구자를 낳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축복한 뱃속의 아기를 마음대로 낙태한 자들은 어떻게 되는지 영계에 가보세요.
선생님이 서기 위해서 3가정을 먼저 세웠습니다. 축복가정의 아들딸들은 하나님의 직계 자녀로 제물적인 입장에 세워야 합니다. 축복가정은 3시대를 횡적으로 탕감한 기준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혼자는 절대 서지 못하며, 3가정이 함께할 때 비로소 설 수 있습니다. 3가정이 완전히 하나될 때 거기에 비로소 완성이 있는 것입니다. 백성이 없는 제사장은 있을 수 없습니다.
전축복가정 중 책임을 다했다고 할 수 있는 가정이 열 가정이나 될까? 선생님은 여러분을 축복해 주고 하나님 앞에 면목이 없습니다. 책임 못한 무리들을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다시 고생의 길을 가야 합니다. 통일교회가 발전했다고 해서 편안한 생활을 할 수는 없습니다. 이 7년이 넘기 전에 각자가 새로운 출발을 해야 합니다.
국가가 여러분을 환영할 때 그것은 선생님을 환영하는 것이지, 여러분을 환영하는 것이 아닙니다. 즉 여러분은 선생님 대신 환영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에 여러분은 하나님께 감사하며 선생님 대신 그 환영을 받아 거기에 축복을 더하여 민족 전체에 돌려주어야 합니다. 그것을 자기들 것으로만 받으면 꺾이게 됩니다.
여러분은 7년이 지나면 모두 이동을 해야 됩니다. 대세에 맞춰 춤을 추되 그 본의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명령에 죽고 명령에 살아야 합니다. 앞으로 3년은 더 고비 길을 넘어야 합니다. 여자들, 일 못하는 부인들은 시댁에 가서 종살이하여 가정을 복귀한 후 친정에 가야 합니다.
원래 7년노정 중에는 말씀심판, 인격심판, 심정심판이 있으므로 이 기간에는 원리시험이 있어야 하고, 세 자녀를 축복할 수 있는 인격 기준이 세워져야 합니다. 선생님도 아담형 노아형 아브라함형 3가정을 먼저 세워 놓고 선생님 가정을 세웠고, 12제자형을 맞춘 것입니다. 이런 횡적 기준이 섰기 때문에 종적인 노아가정과 야곱가정이 나온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걷고 있는 이 7년노정은 결코 선생님의 사사로운 구상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원리 안에서 만민 앞에 필연적인 것으로 나왔습니다. 이 7년노정은 복귀섭리에 반드시 필요한 우주적인 고비입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꿈도 안 꾸고, 아무것도 모르는 가운데서 우리의 목표를 향해 총진군해 왔습니다. 많지 않은 통일교회 식구들을 거느리고 나오면서 어떻게 하면 통일교회의 점진적인 발전의 모습을 보여 주느냐 하는 것이 선생님의 걱정이었습니다.
우리는 결코 좋은 환경 가운데서 출발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중에서도 일편단심으로 고투를 계속하여 이제 우리는 민족적인 기준에 맞먹는 때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7년노정의 6년 고비를 넘기고 남은 일 년 고비를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사실은 선생님이 해방 직후 이 노정을 출발했을 때부터 이 민족이 이 뜻을 받아들였더라면 이 뜻이 이토록 연장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나는 1946년도에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평양을 찾아갔었습니다. 선생님은 7년을 걸고 이 길을 출발했으나, 환경의 불비로 인하여 계획대로 뜻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평양을 거쳐 남한에 내려와서 부산으로, 서울로 옮기면서 뜻을 펴려고 하였으나 이 민족이 그 길을 가로막으며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이 민족을 버릴 수가 없었기에 지금 다시 여러분을 중심삼고 7년노정을 찾아 세우시려는 것입니다.
이 길은 말할 것도 없이 어려운 길입니다. 그래서 적지 않은 수의 식구들이 끝까지 견뎌내지 못할 줄로 압니다. 그렇다고 하여 싸움의 과정에서 낙오된 식구들을 일일이 동정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복귀섭리를 중심삼고 볼 때 이 기간을 고개라고 한다면 제일 높은 고개요, 골짜기라 한다면 제일 깊은 골짜기입니다. 선생님이 흘린 피와 땀과 눈물이 이 골짜기에 고여 있습니다. 이 고개나 골짜기를 그냥 두어서는 안 됩니다. 평지를 만들어야 합니다. 만드는 데는 산을 파서 골짜기를 메우는 것이 아니고 이 고개를 몽땅 들어내야 하는 것입니다.
원칙적으로 이 7년노정은 단 한번뿐입니다. 복귀섭리역사에 있어서 두 번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편단심으로 최후의 고개를 넘어 승리적 주관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 승리적 주관자가 되지 못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7년노정의 첫 해의 표어는 ‘생애 중 최대의 실적을 남기는 해가 되게 하자’였고 두번째 해는 ‘아버님의 대신자가 되자’였으며, 세 번째 해의 표어는 ‘보여 주고 자랑할 수 있는 자가 되자’였던 것입니다. 그 다음 네 번째 해부터 7년노정이 끝날 때까지는 ‘승리적 주관자가 되자’는 표어로 일관하게 된 것입니다. 또 앞의 3년 기간에는 연속으로 36, 72, 124가정의 성혼식을 거행하고 남한 각지에 임지를 주어 고정 배치하였는데,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을 복귀한 뒤 12지파를 중심하고 새 땅을 분배한 것과 같은 뜻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정의를 위한 의용군으로서 하나님이 알려 주신 작전 비법을, 즉 주신 피와 땀과 눈물을 무기로 삼아 나왔습니다.
만물도 참부모의 주관을 받기를 원합니다. 선생님은 7년노정을 출발하기 전에 남한 각지의 명승지를 찾아다니며,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하여 하늘과 인연을 맺게 하는 조건을 세웠습니다.
탕감복귀의 원칙은 철칙입니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반겨 맞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온 사탄들이 일체가 되어 배반하는 환경을 만들어 싸움을 걸어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것들을 전적으로 굴복시켜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사랑의 심정을 지녀야 합니다. 그런 다음 우리는 그러한 환경적 조건 위에서 종적인 복귀섭리역사를 횡적으로 재현시켜야 합니다.
특별히 이번 7년노정에서는 하나님의 6천년 동안 쌓여온 역사적인 서러움을 우리 일신에서 횡적으로 탕감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은 공석에 나서기만 하면 고생하라는 말을 자주 해왔던 것입니다.
선생님의 생활 역시 6천년의 탕감조건을 걸고 무자비하게 때려 모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감옥에 가서는 제일 어려운 일을 도맡아 했고 그것으로 공산당 치하의 감옥에서도 여러 차례 모범 노무자 상을 받았습니다. 이제는 이 고개를 넘어서는 단계가 되었기 때문에 선생님이 죽더라도 뜻은 평면적인 인연 위에 어차피 이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선생님이 고생할 때면 하나님은 언제나 친구를 갖게 해주셨습니다. 틀림없이 하나님은 아버지이셨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선생님과 함께 하셨습니다. 선생님 역시 죽을 뻔한 지경을 수없이 겪어 왔지만, 그 어떤 경우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절개를 지켰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쇠고랑을 차고 평양 감옥으로 들어갈 때에도 오히려 여기에서 어떠한 동지들을 만나게 될까 하는 흥미와 함께 희망을 품고 들어갔습니다.
하나님을 대신한 고생의 노정에 있어서 특히 원수를 대할 때는 사랑으로 대해 주지 않으면 복귀섭리역사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선생님을 따르는 여러분에게 어찌 시련의 고개가 없겠습니까? 그러나 여러분이 한민족 앞에 7년노정을 거치며 수고한 결과, 마침내 이 민족이 통일교회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습니다. 마치 야곱이 21년 노정을 마치고 에서 앞에 모든 것을 바칠 때에 에서가 그를 환영했던 것과 같은 형의 노정입니다.
이념적인 세계에서 통일교회를 빼놓는다면 그 무엇도 절대 불가능합니다. 지금 우리의 입장에서는 뜻을 중심하고 어떻게 세계의 문제를 합리화시키느냐 하는 것이 문제이기 때문에, 여기에 내가 부딪쳐서 밀어내느냐 밀리느냐 하는 것이 앞으로 일년간의 싸움노정의 과제입니다.
승리자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싸움의 노정을 거쳐야 합니다. 싸움에 이기려면 패자가 맛보아야 하는 서러움을 먼저 느껴 원수에 대한 적개심을 가져야 합니다. 복귀섭리의 역사는 패자의 서러움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통일교회에서는 내일의 승리적인 기쁨을 바로 흡수할 수 있도록 승자의 권한을 가르쳐 주기 전에 패자의 서러움을 가르쳐 나왔습니다.
선생님은 누구보다도 패자의 서러움을 짙게 체험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런 자리에서 적개심이 솟구치더라도 내일은 기필코 승리자가 되고야 만다고 하는 것이 하늘 편이 갖는 임전태세입니다. 그래서 쓴 잔을 달게 받으라는 것입니다. 패자의 서러움을 맛보지 않으면 승리자의 기쁨을 최대한으로 느낄 수 없습니다. ‘저들의 죄를 용서하시옵소서’ 하는 심정을 가지고 어느 한 날 저들이 자연굴복해 들어올 것을 바라야 합니다. 이것이 하늘을 대표해서 싸워온 선생님의 기본 자세였습니다.
선생님은 뼈가 없는 사나이가 아닙니다. 훼방하는 자가 많고 핍박하는 자가 많을수록 분함의 범위를 넓혀 세계적인 원수를 갚겠다고 다짐해 왔습니다. 이것을 근거로 사탄에 대한 복수와 탕감을 위한 끝날의 대심판은 있게 됩니다.
선생님은 서대문 형무소에 있을 때 선생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역사노정에서 패자가 될까봐 염려했었습니다. 그러나 한동안 패자의 운명 가운데 우리를 몰아넣는 것도 내일의 승리를 승리답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깊은 사랑의 배려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6년 동안 당했던 패자가 맛보아야 하는 서러움을 마음에 새기며 기필코 승리적 주관자가 될 것을 다짐해야 합니다. 그래서 개인적인 승리자가 된 다음에는 가정을 구해야 합니다. 가족의 십자가를 지지 않고는 가정을 구할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는 과거를 회상함으로써 새로운 결심을 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우리는 아무리 환경이 어려워도 그 환경을 밟고 올라서서 승리를 쟁취함으로써 개척자의 사명을 완수해야 합니다.
공동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그 일의 일익을 감당한 나는 단순히 한 개인이 아닙니다. 그리고 아직까지 우리의 분함은 풀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먼저 내 개인을 두고 마음의 고개와 몸의 고개를 넘어야 합니다. 마음의 고개는 마음이 지향하는 바를 좇아 고개를 넘어야 합니다. 이 고개를 넘을 때에는 쉴 수가 없습니다. 정성들여 넘어야 합니다.
민주세계의 이념을 중심삼고 어떻게 유물론적 공산세계를 밟고 넘느냐 하는 것과 통일의 이념을 중심삼고 어떻게 민주와 공산, 이 두 세계를 밟고 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가는 길에는 넘어야 할 고개가 많습니다. 그 고개들을 넘으려면 먼저 개인적인 고개를 넘고 승리함으로써 주관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이 ‘우주주관 바라기 전에 자아주관 완성하라’고 했던 것입니다.
승리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승리하지 못하고 실수한다면 그 한은 천추만대까지 갑니다. 이것이 지옥입니다.
그러나 그런 생활 무대에서도 패자의 서러움을 안고 거기에서 동조자를 찾기 위해 두드리고 만나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나간다면 제삼자 앞에 실패의 요인을 남기지 않을 것입니다.
내 스스로를 방어하는데 게을리 하지 않고 공격을 하는데 재치가 있어야 합니다. 승리자가 되기 전에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승리를 가져오기까지 일편단심으로 싸우기 바랍니다.
복귀는 개인에서 가정으로, 가정에서 종족, 민족, 국가, 세계, 천주를 넘어 하나님까지,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까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패자의 서러움을 잊으신 적이 없습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인간의 모든 실수는 단지 역사의 기록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하나님께는 패자의 서러운 기록으로 남아져 있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오늘 아침에도 ‘아버지, 또 가야 하겠습니다.’ 하고 기도했습니다. 한을 품은 사나이의 가는 길이 어찌 평탄하기를 바랄소냐!
우리에게는 남북으로 갈린 국가적인 문제와 민주 공산, 두 사상으로 나누어진 세계의 문제를 타개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넘어야 할 최고의 고개입니다. 세상에서 결심 없이 이루어지는 일은 없습니다.
싸우는 데는 모름지기 정의에 입각하여 싸워야 합니다. 사탄은 근성적으로 높아지기를 원하나 우리는 그와 반대로 낮아져서 내 몸과 사랑으로 싸워 나가야 됩니다. 두 눈은 가로 보아선 안 됩니다. 오직 일직선이어야 됩니다. 즉 일편단심이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나 자신은 포탄이기 때문에 내 귀와 눈과 손이 각각 다른 데 있으면 망합니다. 이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아까운 것이 없어야 합니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희생도 각오하는 것이 하늘의 계산법입니다. 여러분들은 선조들의 핏자국이 얼룩진 희생의 제단을 지켜서 하나님의 원수를 갚아야 합니다.
선생님은 피동적인 사람을 원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은 다분히 피동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결코 피동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능동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은 명령을 받고 가는 사람이 되지 말고, 스스로에게 명령하면서 갈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가정적으로 반대한 사람은 사회적으로 탕감해야 하고, 면에서 반대한 사람은 군에서, 군에서 반대한 사람은 도에서 탕감해야 합니다. 이렇게 큰 책임을 맡은 사람일수록 심판의 조건이 큰 것입니다.
뜻을 위해 가는 노정에서 여러분이 겪는 고생은 여러분 자신들로 하여금 능동적인 생활을 하게 하기 위한 하늘의 선물인 것입니다. 이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승리적 주관자가 될 수 없습니다. 자나 깨나, 어디를 가나, 내 마음은 하늘과 일치되어야 합니다.
하늘로부터 무엇을 받을 때에는 이것을 하늘이 주고 싶어 주는 것인가, 아니면 주기 싫은 것을 주는 것인가 하는 것을 여러분은 생각해 봐야 됩니다. 하늘이 주기 싫어하는 것을 받을 때에는 받은 것의 몇 십배로 갚아 주겠다는 마음가짐으로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늘이 주고 싶어 주는 것은 천추만대 자손들에게까지 전해 주겠다는 마음으로 받아야 합니다. 자기의 욕심만을 채워서는 안 됩니다.
타락의 결과로 우리 인간이 알 수 있게 된 것은 본연의 인간의 가치가 얼마나 귀하고 큰 것인가를 알게 하여 본연의 인간을 그리워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복귀의 고개에서 나 자신이 처해 있는 위치를 재차 살피고 이 한 해의 남은 길을 힘차게 달려가도록 합시다.
7년노정은 선생님이 자리 잡는 기간이므로 식구들은 싸우는 과정에 있습니다. 제1차 7년노정에서 책임을 하지 못한 사람은 제2차 7년 노정을 또 걸어야 합니다. 사탄세계에서 쓰는 죽겠다라는 말은 일절 쓰지 말아야 됩니다.
천국 문은 언제나 열려 있으나, 그곳에는 예복을 갖추어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축복가정은 뜻을 중심삼고 복귀하려는 입장에 서야 합니다. 이러한 입장에 서지 못한 축복가정은 그 대열에서 빼서 보류합니다. 그 기간이 얼마가 될지는 모릅니다.
금년은 내외적으로 수습해야 합니다. 장성기 완성급을 복귀하여 완성기를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 이 7년노정입니다. 이 기간에는 마음대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가정에 의거해서는 사랑할 수 있습니다. 완성기를 지난 후에는 핍박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금년은 총진군하는 해입니다. 안식 기간이지만 민족적인 죄가 남아 있어 민족을 위한 제사를 드려야 하기 때문에 번제드리는 이 일에 전력을 다해야 합니다.
성진에게도 실수하면 자신이 책임지라고 했습니다. 아담의 자식이 타락했기 때문에 선생님의 자식도 타락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다만 환경이 조금 좋아졌을 뿐입니다.
어디를 가더라도 혼자 다녀서는 안 됩니다. 천사와 같은 보호자와 함께 다녀야 순결을 잃는 위험에서 피하는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아담이 장성기 완성급에서 타락하였기 때문에 그 나라와 의를 찾아 세우기 위해서 우리는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외적 창조 후에 내적 창조를 하신 것같이 지금은 외적인 것은 복귀될 수 있는 입장을 갖추었으므로 앞으로는 내적인 것을 복귀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한 해를 총동원의 해로 정해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소망을 갖고 있습니다. 그 소망을 이루기 위해 정성의 자리에서 자신을 갖추어 전체 앞에 보여 주고 싶어하는 것이 인간의 본심입니다. 이것은 인간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이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어떤 역사적인 결실을 남기고, 혹은 그 시대에 있어서 남다른 실적을 거두어 후대의 표본으로 남기고, 또 후손들이 본받을 수 있는 모체로 남아질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정성들이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작거나 혹은 크거나 간에 역사적인 사건의 배후에는 일반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는 정성어린 과정이 있고, 그러한 과정을 거친 결과만이 역사적인 면에서나 시대적인 면에서 공헌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역사를 통하여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정성의 예물’이란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날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눈물 어린 정성의 터전 위에서 새로운 문화 세계를 건설하기 위해 수고했는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편 인간세계를 구원하려 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 하나님도 역시 그 세계를 창건하시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이념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보다 더 큰 정성의 터전을 준비하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놓고 구하지 않으면 세상을 구할 도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이 길을 걸어 나온 사람들은 소망의 터전, 구원의 보금자리를 인류 앞에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아셨기에 하나님은 정성의 터전을 준비하여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섭리를 해 나오셨던 것입니다.
정성들이는 것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마음이 통일되어야 합니다. 즉 일편단심을 지녀야 합니다. 두 마음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시작부터 끝까지 통일된 마음으로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정성은 누구에게 빌려 주었다 다시 찾아올 수 있는 물건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작이나, 과정이나, 끝이 여러 가지 형태로 변화되어서는 정성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일편단심, 통일된 마음을 중심삼고 가야 합니다. 그러나 그 마음이 자기를 위주로 한 것이 되면 정성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정성은 나를 위주로 들여야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 즉 가정이면 가정, 사회면 사회, 국가면 국가 등 더 큰 상대를 위해 들여야만 정성이란 명사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서 정성들인 것은 자기 일대에 있어서는 남아질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자기 일대와 더불어 흘러가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정성의 터전은 상대를 위한 것만이 남아질 수 있는 것입니다. 상대의 크기에 따라서 정성을 들인 실적이나 인연의 크기가 결정됩니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자주 체험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자기를 위주로 하는 데서가 아니라 반드시 상대를 위하는 데서 정성의 요건이 성립되고, 정성이란 명사가 성립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자식이 부모를 위해서, 아내가 남편을 위해서, 신하가 자기의 군주를 위해서 정성들이게 될 때 거기에 효, 열, 충이란 명사가 남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대를 넘어서 역사와 더불어 인연 맺어지기 때문에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그런 기준을 존경하고, 그런 인연을 추앙하게 된다는 것은 필연적인 사실입니다.
자기를 위주로 하지 않고 상대를 위해서 하나의 마음을 가져야 하고,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심정을 갖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즉 사랑의 마음을 터전으로 하여 일편단심, 변하지 않는 마음을 가지고 상대를 위해야만 정성이란 명사가 성립된다는 것입니다. 정성이란 명사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사랑의 마음으로 일편단심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정성들였다, 충성했다 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끊임없이 노력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노력만으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상대 세계를 위하는 데 있어서 예기치 못한 불상사나 반대작용이 일어날 수 있고, 항상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노력과 더불어 인내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또한 인내만 가지고도 안 됩니다. 안팎, 사방으로 용납할 수 없는 것이 나타나게 될 때는 그것을 잘라 버릴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싸움이 필요하고 반드시 투쟁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오늘날 객관적으로 관찰해 볼 때 인류역사는 투쟁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맹목적인 투쟁의 역사가 아니라 일관된 목적성을 지닌 투쟁의 역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투쟁의 역사 배후에는 정성들인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 정성은 자기의 어떤 사상을 중심삼은 것입니다. 자기의 온갖 정성과 마음과 사랑을 상대 세계에 투입시켰을 때, 그 노력과 인내와 투쟁의 실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오늘날 현실적인 환경 혹은 사회적인 모든 제도가 우리가 필요로 해서 있는 것이라 할진대 그 배후에는 이런 인연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먼저 내가 정성을 들여야 하고, 정성을 지닌 자신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편단심, 즉 통일된 마음을 가져야 하고 상대를 지극히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 사랑의 마음과 일편단심의 마음이 있게 될 때 그 사람은 정성을 세워 목적하는 바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노력과 인내와 투쟁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정성어린 심정의 기준에 서고 정성의 가치를 올바르게 자기의 소유로 지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인류 역사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중심인물을 보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사망의 세계에 떨어진 타락한 인류를 구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어떻게 섭리해 나오셨겠습니까? 만약에 적당히 형편에 따라서, 되면 되고 말면 만다는 식으로 섭리해 왔다면 사회 환경의 치우침을 받고 사회제도의 영향을 받으면서 섭리해 나오셨다는 결론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역사는 없었습니다. 이 사회도 정성어린 배후의 인연을 거쳐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 예수님도 사회 환경에 치우침을 받지 않는 입장, 배후의 정성의 터전을 중심삼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중심삼고 구원역사가 결정되느냐? 그것은 정성의 기준을 중심삼고 결정됩니다. 하늘의 정성이 보다 높게 될 때에 사망세계에 있는 사회도 하늘의 정성 앞에 흡수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더 큰 정성은 작은 정성을 흡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심은 더 큰 정성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양심의 표준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더 큰 정성을 바라고, 작은 정성보다는 큰 정성권 내로 옮겨가려고 하는 것은 자연의 이치인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다 애국자가 되고, 충신이 되고, 효자, 열녀가 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회나 민족을 중심삼고 충성할 수 있는 길이 있으면 그런 사람이 되겠다고 소망합니다. 어느 누가 자기 민족, 자기 국가를 사랑하지 않겠습니까? 그 차이는 있을망정 사랑하는 마음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러나 단체, 종족, 또는 민족을 대표할 수 있는 어떠한 사람이 정성을 들일 때, 거기에는 대다수가 동참하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표로 세워진 사람들이 그 단체나 종족이나 국가의 사상적 기준을 대표해 가지고, 그것을 중심으로 환경을 정리해 나가는 방법으로 구원역사를 실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세상을 구하려 하신다면 그 하나님은 어떻게 하셔야 되느냐?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두 마음이 아닌 한 마음으로 정성을 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마음 구석구석까지도 꽉 찬 일편단심으로…. 이렇게 구원섭리를 해 나오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여러분은 인정해야 합니다.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은 사탄세계가 되었고, 사탄은 인간을 종의 입장에도 설 수 없을 정도로 유린해 놓았습니다. 이렇듯 사탄은 우리 인간을 종의 종의 자리까지 떨어지게 했지만,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역사해 나오셨습니다. 하나님께 돌아갈 수 없는 원수의 피를 받고 태어난 타락의 후손들은 혈통적으로 보면 자녀의 인연을 갖고 있지만 사실상 자녀로 세움 받지 못하고, 종으로도 세움 받지 못하는 입장으로 떨어졌습니다.
이런 인간들을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구원하시느냐? 적당히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한 나라의 주권자가 자기 백성을 사랑하는 그 이상의 기준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또 어떤 단체에 있어서, 그 단체의 중심인물을 하나님이 구원섭리의 담당자, 인간의 해방자로 빼올 수 있으려면 그는 그 단체에 충성하는 그 누구보다 정성어린 마음을 갖지 않으면 안 됩니다. 타락하여 사탄의 종의 종이 된 인간을 하늘의 종의 종으로 구원하기 위해서는 사탄과 사탄국가 안에 정성들인 어떤 주권자나 백성들보다도 하나님 자신의 정성이 부족하면 한 사람도 구원해 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탄이 참소하기 때문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당신은 이 인류 앞에 있어서 최고의 기준으로 서야 하며 나보다 더 높은 정성의 자리를 취해야 합니다. 그런데 나 이하의 자리에서 어떤 사람을 구원했다면 완전히 구원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라고 참소할 것입니다.
사탄세계의 인간들을 그냥 두어 가지고는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종으로 세울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 땅에 있는 인간들을 구원하려면 사탄이 정성들이는 것 이상의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사탄세계의 주권국가를 위해 충성을 다하는 백성이 있다면, 그 사람이 충성하는 도수 이상의 자리에 서지 않고서는 사탄세계에 있는 인간들을 구원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역사를 통하여 인간들을 종의 종에서 종으로, 양자로, 아들의 자리를 거쳐 신랑 신부, 부모의 자리까지 복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잃어버린 것을 다시 되찾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회복이나 복귀라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지금까지 기독교 역사와 같은 하나님의 구원섭리의 역사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섭리의 배후에는 정성어린 투쟁 역사, 피어린 인내와 노력의 역사, 일편단심의 눈물의 역사가 얽어져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이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일편단심 정성을 다 들여서, 무한한 노력을 해서 충심을 가지고 인간을 찾아왔습니다.
그러면 구원섭리의 혜택을 받아야 할 인간은 하나님을 위해 얼마나 정성을 들여야 하느냐? 인간도 역시 하나님을 대하려 할 때마다 사탄이 옆에서 참소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종이 되기 위해서는 어떠한 조건이라도 세우지 않으면 설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섭리역사를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120년 동안 하나님의 명령에 자기 생애를 내어 놓고 그 길을 나섰던 노아의 결심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거기에 두 마음이 있었다면 10년도 못 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생애를 꿰뚫어 넘어갈 수 있고, 자기 생애가 좌우로 뒤넘이치더라도 변하지 않는 일편단심이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순응하는 마음과 하나님의 명령을 허술히 여기지 않고 사랑하는 마음, 또한 인내하고 투쟁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기나긴 120년의 역로(逆路)를 참아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정성 앞에 보답될 수 있는, 상대적인 조건이 성립되었기 때문에 역사는 거기서부터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조건이 성립되지 않고서는 구원섭리역사를 세울 수 없고, 구원섭리역사를 세우지 않고서는 새로운 역사의 출발을 할 수 없고, 섭리를 발전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섭리관의 입장에서 본 하나님의 사정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지금까지 이렇게 유구한 역사를 거친 후에 이러한 구원섭리의 이론이 이 지상 위에 남아지게 된 것입니다. 인간은 종의 종의 시대인 구약 전 시대를 거쳐서, 종의 시대인 구약시대를 거치고, 양자의 시대인 신약시대를 거쳤습니다. 그런 다음에 직계의 아들로 오시는 분께 접붙임을 받아서 참다운 아들딸의 자리에 나가고 부모의 사랑을 받았다는 조건을 세워야 합니다. 그런 후에 아담 해와가 에덴에서 하나님의 혈통을 받아 태어났던 창조 본연의 입장까지 나아가야 하나님을 모실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시는 것도 개인적으로 모실 것이 아니라, 가정의 전체 식구들이 하나되어 모셔야 합니다. 이것이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의 이상이었습니다. 그런 에덴의 이상이 완성되지 않는 한 하나님은 직접 인간의 생활권에 동참하여 일체감을 느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 땅에 와서 ‘나는 신랑이요, 너희는 신부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신랑 신부는 무엇을 말하느냐? 아담 해와의 타락하기 전의 기준을 회복해 놓고, 즉 축복받을 수 있는 조건을 세워서 축복받는 것이 어린양 잔치입니다. 그러므로 어린양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은 복귀된 혈통적인 자녀의 인연을 세워서 본연의 이념권 내에 세워질 수 있는 가정을 이루어 가지고 하나님의 참다운 사랑을 찾아 출발해야 합니다. 이러한 첫 출발을 해야 하는 것이 오시는 주님의 사명인 것을 여러분은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면 다가오는 역사노정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6천년 전부터 사탄세계에 인연 맺어져 있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는 사탄세계의 수많은 인류가 들인 정성의 도수를 능가해야만 구원섭리를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사탄도 참소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다.”(마 10:37)고 했습니다. 합당치 못하다는 것은 사탄 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가 사탄세계를 사랑하는 이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우리를 간섭해 주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천국 가기 위해서는 누구를 더 사랑해야 하느냐? 내 부모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내 처자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천국 가는 공식인 것입니다. 과거의 모든 선조들, 즉 노아나 아브라함 그리고 그 밖의 모든 선조들도 이런 과정을 거쳤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으로 결정되는데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자기 아들에게 더 애착심을 가졌다면 믿음의 조상으로 결정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 나라의 충신이 되기 위해서도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 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충신이 되고 효자 열녀가 되기 위해서는 그보다 더한 과정을 거쳐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자식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하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탄과 혈통적 관계를 맺고 있으므로 복귀되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소망의 개인, 소망의 가정, 소망의 종족․민족․국가․세계를 찾아야 할 소원이 남아 있습니다. 이 소원은 내 소원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소원이기도 합니다. 아담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창조본연의 개인으로부터 가정, 종족, 민족, 국가를 완성시켜 나왔을 텐데 타락했기 때문에 거꾸로 복귀해 나온 것입니다.
이래서 이스라엘 민족을 편성해 나왔는데, 이스라엘 민족은 예수님을 참다운 하나님의 아들로 모시고 그에게 접붙임을 받아 가인 아벨이 잃어버린 아담가정의 기준을 예수님을 중심삼고 민족 형태로 복귀했다는 조건을 세워야 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참부모의 인연, 즉 아담이 타락하지 않고 이루어야 했던 그 기준을 세워 이스라엘 민족 앞에 새로운 천국이념을 소개하기 위해 오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벨적인 예수님 앞에 가인적인 입장에 있던 이스라엘 민족이 아담가정에서 아벨을 죽인 가인과 같은 행동을 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망한 것입니다.
돌아가신 예수님을 중심삼고 제2이스라엘로 재편성되어 나온 것이 기독교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구원역사를 이끌어 나오시지만 그것이 발전적인 입장에 있지 못하게 될 때는 망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아시대의 구원섭리는 종의 종 입장에서 종의 터전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모세시대에는 종의 입장에서 양자의 입장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닦기 위해 율법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이 터전 위에 메시아, 즉 구세주를 보낸다는 약속을 세웠던 것이었습니다.
구원섭리를 점진적으로 발전시키는 데 있어서는 시간만 지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정성들인 것과 같이 정성의 제단을 쌓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을 넘어 세계적인 섭리를 할 수 있는 정성의 기준을 세워야만 하나님은 메시아를 이 땅에 보낼 수 있는 것입니다.
시대적인 사명을 할 수 있는 때를 정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예수님을 보내 주셨지만, 이스라엘 민족은 예수님 앞에 양자의 터전을 결정지을 수 있는 민족적인 정성의 기대를 조성하여 환경을 갖추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교법사 제사장들이 반대하여 그것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고, 다시 기독교를 중심삼은 역사가 재편성되어 나왔던 것입니다.
그러면 기독교를 중심한 제2이스라엘은 어떠한 책임을 해야 하느냐? 예수님이 오셨다 가셨지만 다녀가지 않으신 것과 같은 입장에서 세계적 이스라엘형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다시 와야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구름을 타고 오신다는 허무맹랑한 신앙을 하고 있습니다. 천리 원칙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의 만족을 위해서 세워진 기준을 가지고 천리를 대신했다고 자처하는 사람은 심판 날에 공판정에서 판정받게 될 때 지옥밖에 갈 곳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으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심으로 제1이스라엘은 망했습니다. 그래서 제2이스라엘로 연결되어 기독교를 중심한 민주세계를 창건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민주세계를 창건한 제2이스라엘은 무엇을 해야 할 것이냐? 새로운 세계적인 아벨을 모시고 아벨을 죽였던 가인을 복귀해야 되는 것입니다. 앞으로 오시는 주님은 참아들로서 아벨적인 세계형 승리의 주권 형태를 갖추고 오십니다. 여기에서 민주세계는 가인적인 입장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님을 죽이고, 아담가정에서 가인이 아벨을 죽였던 것을 탕감복귀하는 기준을 세워야 하기 때문에, 전세계의 기독교인들은 오시는 주님을 백방으로 모셔야 되는 것입니다.
오시는 메시아를 오늘날 민주세계의 사회제도나 그 형태의 기준에 통할 수 있는 그런 메시아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종의 종시대, 종의 시대, 양자의 시대, 자녀의 시대, 부모의 시대로 넘어가는 섭리를 해 오시기 때문에 시대적인 한계선과 구원섭리의 한계선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구약에 있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메시아가 다시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러기 위해서 온다면 그런 주님은 필요 없습니다. 그러한 신앙관념과 제도의 꼬리를 따라 예수님이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에서 열까지 모든 것이 한결같이 되풀이되면 안 됩니다. 그것은 중간 밖에 안 되기 때문에 달라져야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내용도 달라져야 하고, 목적도 달라져야 하고, 생각하는 전체가 다 달라져야 합니다. 섭리시대는 종의 종의 시대로부터 종의 시대, 양자의 시대, 직계 자녀의 시대를 거쳐서 신랑 신부 즉 부모의 시대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어린양 잔치에 와서 제1차 부활에 동참하려면 예복을 준비해야 합니다. 예복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정성과 인내가 필요합니다. 있는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눈으로 보는 시선도 정성어린 시선으로, 코로 냄새를 맡는 것도 정성스럽게, 듣는 것도 정성스럽게, 육신으로 느끼는 모든 감각도 정성스럽게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정성의 관문을 통과해서 마음이 정성어린 몸 앞에 감사하다고 할 수 있는 자신이 되지 않고는 하나님을 모실 수 없는 것이 천리 원칙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구원섭리를 협조한다는 패들 가운데 오히려 기독교를 욕되게 하고 망치고 팔아먹는 류(類)가 많습니다. 이런 것을 보고 피가 끓는 젊은 가슴을 가진 사나이들이라면 참을 수 없는 의분심과 적개심을 가지고 불의를 지구상에서 추방해야 되겠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통일교회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성을 다한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불의를 추방하는 일에 정성을 바쳐야 합니다. 밤이나 낮이나 어디를 가든지 인간적인 감정에 얽매이지 않고, 우리들의 주위에 어떤 어려운 환경과 원수들의 총칼이 모여든다 해도 참고 나가야 합니다. 그러나 뼈 없는 사나이로 참아서는 안 됩니다. ‘두고 보자. 어느 한 때에 내가 갖춘 모습을 가지고 나타나게 될 때는 그 어떠한 것이라도 아침 이슬처럼 사라질 것이다.’라는 마음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러면 시련의 환경은 결국 종결될 것입니다.
개인에서부터 가정, 종족, 민족, 국가, 세계를 넘어설 때까지의 과정에는 싸움과 더불어 수많은 고통이 있는 것입니다. 세계 복귀가 이루어질 때까지 내 앞에 이런 것들이 침범해 온다는 것을 각오해야 합니다. 의를 위해서는 생명을 걸어 놓고 나가 싸워야 합니다. 그래서 승리한 터 위에서 아버지를 대해야지 패자의 모습을 가지게 되면 아버지께서 싫어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금까지 슬픈 길을 걸어오신 것은 수많은 선조들이 실수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실수하여 낙망하는 자리에서 하나님을 부를 때 하나님은 더욱 서러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분하였던 하나님의 역사적인 한을 간직하고 참음의 심정으로 싸워 승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아버지! 이 승리는 내일의 싸움을 위하여 준비된 것이오니 받아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하기를 하나님은 바라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싸움의 노정을 거쳐가지 않는 사람은 스스로 가슴을 부여 안고 자탄하는 노정을 걷게 됩니다. 그것이 천리입니다. 하나님이 땅에 대하여 부르고 있는 소망의 사람이 되려면 정성들인 눈물의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아담가정의 가인과 아벨시대로부터 노아가정, 아브라함가정을 중심삼고 섭리해 나오시던 시대, 즉 역사 전 시대로부터 역사시대의 과정을 거치면서 일편단심 변치 않는 정성의 마음으로 나오신 것과 같은 터전이 이 땅 위에 나타나지 않는 한, 하나님은 땅에 대하여 결정적인 승리의 섭리를 하실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지금 내가 처해 있는 곳이 하나님이 찾아오실 수 있도록 정성된 예물을 갖추어 세계 운세와 더불어 동참할 수 있는 그러한 자리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 자리는 어떠한 자리냐? 노아 아브라함 모세가 천주를 찬양할 수 있는 자리요, 지금까지 역사상의 수많은 선조들이 패자의 서러운 잔을 마시면서도 정성을 들여 나왔던 자리입니다. 한탄과 한의 역사를 청산하고 환희의 쌍수를 들어 감사하면서 하나님께 경배를 드려야 할 자리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탄이 사방팔방으로 참소할 수 있는 그런 조건을 넘어선 정성어린 실적을 갖고 나타나야 합니다. 그럴 때, 여기에서 새로운 역사적인 승리의 일보를 제시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부르고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정성의 예물을 드리기 위해서 한 개인을 구하는 데에도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여러분 한 사람을 대하기 위해서도 아무렇게나 찾아온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여러분들은 어떻게 찾아왔습니까? 아무렇게나 찾아온 사람들이 많습니다. 정성의 실적을 가지고 모진 역경을 참고 싸워 나오신 하나님의 섭리에 얼마만큼 동참하여 하나님이 정성의 예물을 받을 수 있도록 받들었는가? 하나님 앞에 충성하고 효성을 다하는 자는 되지 못했을망정 동참자라도 되었는가? 이런 것들을 생각해 볼 때 여러분들은 영점입니다, 영점! 이러한 마음을 느끼게 될 때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경배드리기 위해 사지를 펴고 들어올 수 있습니까?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가운데 죄 지은 사람은 죄가 가볍습니다.
불충의 과거와 불충한 현재의 모습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또다시 찾아 나오려니 얼마나 초조하겠습니까? 그렇게 마음이라도 일으켜 봤습니까? 그러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복귀섭리역사 과정 중 ‘종의 종시대’에 하나의 대표자를 이 땅 위에 보내셨지만 그는 완전한 승리를 하지 못했습니다. ‘종의 시대’에 있어서도 책임을 완수하여 승리의 가치를 가지고 나선 자가 없었습니다. ‘양자의 시대’인 이스라엘의 역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으며, 예수님이 왔다 간 이후의 역사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버지시여, 만일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나에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라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던 예수님이 책임을 다했다고 여러분은 생각합니까? 또한 예수님은 정성을 다했습니까? 예수님은 혈혈단신으로 왔다가 뭇사람의 조소와 더불어 십자가에서 피를 흘렸습니다. 처참한 모습으로 돌아오시는 예수를 본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했겠습니까? 4천년 동안 수많은 선지자들이 피 흘린 터전 위에 메시아를 보내 주었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몰랐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역사적인 섭리의 노정을 망각하고, 역사적인 충성의 제물에 대하여 오해하고 있는 기독교 신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님이 이 땅 위에 죽으러 왔습니까? 단지 십자가에서 죽기 위해 온 예수라면 선생님은 그런 예수님을 믿지 않겠습니다. 그런 예수는 죽은 사람을 구할는지는 모르지만 이 세상을 구하지는 못합니다. 종의 종의 입장에서 종의 인연을 거치고, 양자의 인연을 거치고, 차자의 인연을 거쳐서 직계의 아들이 세상에 찾아왔지만, 땅 위에서는 그런 예수님을 위한 정성의 예물을 넣을 수 있는 창고가 없었습니다. 이 창고가 있어서 그것이 기독교가 되고 하나님의 제단이 되어야 했었는데 그렇게 되기는커녕 원수들의 소굴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눈물로 정성들여 쌓은 그 터전은 어디 갔는가? 여러분이 쌍수를 들고 하나님 앞에 나서게 될 때에, ‘아버지여, 당신의 피의 정성으로 된 인연입니다. 그런데 당신이 거두어들일 수 있는 결실된 개성완성의 자리를 잃어버렸습니다. 당신의 일편단심을 저의 일편단심으로 연결되게 하옵소서! 당신의 사랑 이상의 사랑을 가지고 당신이 참고 싸운 그 이상으로 참고 싸워서 지상에서 승리의 한 날을 세워 당신의 한을 풀어드리겠습니다.’ 라고 몸부림칠 수 있는 참다운 자녀가 될 수 있겠습니까?
은혜받아 가지고 구원받겠다고 하는 무리나, 하나님의 힘을 입어 천국 가겠다고 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싫어하십니다. 천국을 창건할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이여! 역사적인 정성의 예물과 공적이 어디 남아 있습니까? 이 시대는 전체 탕감시대인 만큼 종적인 역사를 횡적으로 탕감해야 됩니다.’라고 부르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역대 우리 선조들은 수많은 피의 역사를 엮어 왔고, 하나님의 참다운 정성이 어린 그 제단이 피의 인연을 통해서 기독교로 계승되어 세계적인 터전을 마련했습니다. 그런데 외적인 형태는 갖추었지만 충과 의로 남아질 수 있는 내적인 형태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이 불의의 인연을 청산하기 위해서 나온 것이 통일교회라는 것입니다.
찾아들려는 사람은 세상에 많지만 천국을 향해서 나아가려는 참다운 자녀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 가운데서 참다운 자녀를 구하여 타락한 역사를 고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아시고 다시 당신이 마련한 아들을 보내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전체가 합하여 그분 앞에 상속권을 받는 적자(嫡子)가 되어야 합니다. 그 적자로 말미암아 서자(庶子)도 혜택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되어야 할 통일교회의 교인이요, 통일의 용사입니다.
그러면 정성의 예물을 어떻게 받아야 하느냐? 오늘날의 이 모임이 6천 년 동안의 하나님의 섭리의 뜻을 놓고 온 세계를 대신하여 한국 민족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최고의 정성어린 역사를 총합한 예물이라 할 때 이 예물을 어떻게 받을 것인가? 정성들이지 않고 아무렇게나 받으면 수치입니다. 언제든지 자신을 가지고 자기의 예복을 갖추어서 정성어린 준비를 해 놓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시는 주님을 찾겠다고 하지 말고 그 주님을 맞을 수 있는 준비를 해야 합니다. 정성의 터전을 주님보다 더 크게 마련하고 세계를 위하여 눈물지을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주님은 오시지 말라 해도 그 앞에 오시는 것입니다. 자신의 역사를 들추어보면 사탄의 왕초인데 정성을 들이지도 않고 주님이 나를 위해 오시기를 바랍니까?
통일교인들은 정성어린 예물을 갖추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지금까지 복귀노정에서 이 민족 앞에 제시된 모든 여건들을 여러분 자체의 실적으로 여겨 나왔는지 모르지만, 그 모든 실적을 합하고 뭉쳐서 하늘 앞에 정성어린 터전을 마련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대한민국의 어느 누구보다도 더 충성할 수 있는 통일교회로서 대한민국을 능가할 수 있는 터전을 이루어야 합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여러분들을 어려운 여건과 환난 가운데 부딪치게 한 제1차적인 이유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정성은 어디서부터 그 효과가 빨리 나타나느냐? 편안하고 안락한 자리에서 피리를 불고 춤추고 노래하면서 정성을 들인다면 그것은 효과가 없습니다. 눈물이 감돌고 피비린내가 나고 피골이 상접하는 역경 가운데서 들이는 그 하루의 정성은 편안한 때의 십년, 백년을 탕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았기에 우리들은 스스로 편안한 자리를 저버리고 반대의 길을 가기에 몸부림쳐 나왔던 것입니다. 그것은 왜? 하늘의 정성어린 눈물 앞에 우리의 지극한 정성을 보여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자기가 비록 어떠한 실적은 가지고 있지 못하더라도 하나님에 대한 정성어린 마음과 충성하는 간곡한 심정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런 아들딸이 되지 못했으면, 이 민족 중에서 그런 아들딸을 찾아내는 심부름꾼이라도 되어 그들을 아버지 앞에 인도하고 나서 자기 스스로 아버지를 한번 불러 보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고난 속에서도 하늘에 대한 정성을 다하셨습니다. 십자가상에서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말씀을 하셨지만, 마지막 운명하는 그 순간까지도 아버지는 나를 버리셨지만 나는 아버지를 버릴 수 없다고 하는 일편단심으로 아버지의 심정을 향하였기 때문에 부활의 권능이 그에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한국에서 7년노정을 설정해 놓고 나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7년 노정 기간에 우리 통일교회 식구들은 6천년 동안 사탄세계를 구원하고자 섭리해 나오시는 한 많은 하나님의 선물을 전부 유린해 버리고 파탄시켰던 역사상의 인류의 모든 죄악을 탕감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탕감하겠다고 몸부림치면서 종적인 역사를 횡적으로 탕감하기 위해,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터전을 넓히기 위하여 피와 땀과 눈물로써 전도를 해 나왔습니다.
죽음의 길에서 하늘을 부여안고, 눈물의 길에서 하늘의 정성의 인연을 갖고, 외로운 자리에서 하늘의 권능을 갖고, 하늘이 상기시켜 주는 심정의 권고를 들으며 다시 재기하여 내일의 소망 앞에 나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기준을 여러분에게 소개해 주기 위해 이런 일을 해 나오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여기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이 점점 작아져 가고 있습니다.
누가 정성을 기울이느냐? 주인은 결정되지 않았습니다. 보다 더 정성을 많이 들이는 사람이 있으면 하늘은 그를 택하시는 것입니다. 하늘은 아직 나는 아버지이고 너는 아들이란 결정을 하지 않았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이 민족이 내 민족이고, 이 종족이 내 종족이다. 내 피 살과 더불어 연결되어 있는 그러한 종족이다.’라고 하나님께서 아직 결정하시지 않은 때에는 언제나 정성을 기울이는 높은 곳으로 끌려가게 됩니다. 결정하기 전에는 선민이지 천민(天民)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천민으로 결정되었더라면 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선민에서 천민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통일교회가 주장하는 것은 선민사상이 아니고 천민사상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죠?
선생님이 지금까지 하나님의 뜻을 놓고 정한 목표에는 단 일초라도 다른 누가 침범하지 못합니다. 여기에는 절대로 용서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늘 앞에 정성을 들이는 사람은 함부로 대할 수 없습니다. 지방에서 어떤 식구가 사과 하나를 선생님께 가져왔더라도 선생님은 함부로 손대지 않습니다. 정성들인 것을 잘못 건드리게 되면 용서받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편단심의 심정과 하나님의 최고의 노력을 무시하게 되면 천륜 앞에 용납될 수 없는 죄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남이 정성들인 물건을 함부로 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백 만큼의 정성을 들인 물건이라면 110만큼의 정성을 들여야 대할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를 들어 어떤 집단의 책임자가 정성들인 것을 받아서 하늘 앞에 연결시키지 못하게 되면 정성들인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빨리 망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령한 집단들이 자기 당대는 영화로울지 모르나 천도를 넘어서는 일이 많아 곧 망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천륜의 법도는 여러분의 생활에 있어서 공식적으로 적용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지금 걷고 있는 생의 노정과 살고 있는 생활환경 역시 불가피한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가지고 하늘을 대할 수 있겠습니까? 옛날 노아가 방주를 지으면서 흘렸던 그 땀을 우리가 흘리지 못하면 역사는 참소합니다. 또한 아브라함이 처했던 방랑의 신세, 즉 하나님의 소망인 축복의 땅을 향하여 나그네와 같은 집시의 길을 떠날 때의 그 정성어린 마음을 여러분이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모세가 바로 궁중의 영화와 모든 행복의 요건을 돌아보지 않고 이스라엘 민족을 대표해서 비참과 슬픔과 고독의 자리를 찾아서 나갔던 것과 같이, 여러분이 그러한 기대를 가지고 민족을 사랑하고 하늘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역사적인 선조들이 자기들이 남긴 유언을 조건삼아 삼자의 입장에서 참소해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볼 때 손이나 눈, 더 나아가 몸과 마음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30여 평생을 그런 일을 준비해 나왔다는 것입니다.
정성을 들이는 데 있어서 예수님은 구세주로서 들여야 될 정성의 도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감투를 쓰고 태어났다고 해서 그냥 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 위의 만인간 앞에 내세워질 수 있는 중심존재로 서기 위해서는 내적인 여건의 고개를 넘어 민족과 세계를 향하여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큰 시련이 뒤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계를 대표한 사탄이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을 산으로 들로 성전 꼭대기로 끌고 다니면서 제멋대로 시험한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해 볼 때 이러한 일을 탕감하기 위해서는 여러분 자신이 스스로 행해야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늘이 내린 정성의 예물을 여러분이 갖고 있다 할진대, 예수가 이 땅 위에 올 때까지 하나님께서 얼마나 정성을 들이셨겠는가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땅 위에 기반을 닦기까지 피 흘리는 역사를 엮어 오셨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선조들이 몰리고 쫓기는 눈물의 고비를 넘고, 내일의 소망을 품고 일편단심으로 최후까지 남아지는 아들딸이 되겠다고 몸부림치면서 이 민족을 대신하여 투쟁한 역사적인 과정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그것은 산발적인 행사가 아닙니다. 역사의 진로에는 사실을 촉구시킬 수 있는 내용이 살아있기 때문에, 우리는 시대를 품고 넘을 수 있는 무대에서 하늘이 요구하는 대로 정의를 호소했고, 이런 싸움을 해 나온 것입니다.
싸움의 마지막 고비를 넘어야 할 때가 왔는데, 여러분이 이전에 아무리 평지에서 잘 달렸으면 무얼 하고 험산준령을 잘 넘었으면 무엇 합니까? 최후의 분수령의 한 고비를 넘어야 합니다. 설령 거기서 죽을지언정 여러분은 가야만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즉 이미 때는 결실을 해야 하는 가을인데도 여름인 줄 알고 푸르러 있으면 추풍낙엽과 같이 아궁이 속에 들어가는 불쏘시개밖에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는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정성의 예물을 정성껏 받아야 하며 하나님이 부르고 재촉하고, 권고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선생님이 오늘 아침 태릉 성지에 갔었는데 눈물이 나왔습니다. 이 성지를 누가 얼마나 지키느냐? 세계 40개국의 120개소에 설정해 놓은 성지에는 불이 꺼져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한 계절을 통해서 돌고 돌아야 합니다. 그리고 한국이 하나의 방송국이 되어 세계에 전파를 보내야 합니다. 한국에서 전파를 보내면 세계의 성지에서 그 전파를 수신하여 하늘 앞에 감사와 송영을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성지는 이런 하나님의 지상 초소인데도 불구하고 그 초소를 지키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통일교회의 선지자나 식구들은 하늘 앞에 서러움의 무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성지에 대한 마음이 지극히 깊은데 자녀들이 나타나지 않으니 하나님의 마음은 얼마나 서러우시겠습니까? 성지에 대한 하나님의 서러운 마음은 여러분이 사죄할 수 있지만, 하나님 앞에 충효의 도리를 세우겠다고 약속해 놓고도 그 약속을 이행하지 못하여 하나님이 그로 인해 서러움을 느끼게 될 때는 돌이킬 수 없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충신 열녀는 다시 될 수가 없습니다.
가장 두려운 것은 상하․전후․좌우에서 들인 정성을 유린하지 않았나 하는 것입니다. 그 정성을 받아서 사방에 나누어 주고, 꽃을 피워 많은 후손들이 쌍수를 들어 크게 추대할 수 있게 정성의 예물을 잘 보관하고 있느냐? 이것이 없다면 하늘의 진노가 태풍처럼 나타날 것입니다. 하늘 군대의 분풀이가 땅에 진동하는 날에는 여러분은 갈 곳이 없게 됩니다. 즉 막다른 골목에 몰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또한 산꼭대기에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골짜기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갖춘 것이 없고 실적이 없다 하더라도 이것만은 이루어야 합니다.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그런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보다는 나라를 위해서, 나라보다는 세계를 위해서 눈물 흘려야 합니다. 대한민국, 한민족, 배달민족이라고 하는 이 민족이 없어지더라도 세계는 남아져야 합니다. 평화를 추구하고 평화를 희망하는 세계 인류로 남아져야 합니다. 국가를 위해 정성을 못 들이더라도 세계를 위해 정성들이고, 세계를 위해 정성을 못들여도 하나님을 위해 정성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제일 귀한 선물을 주시기 위해 최고의 기준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 12:30)고 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우리 선조들이 들인 정성은 소망의 정성이란 것을 알아야 합니다. 소망의 한 날을 찾기 위한 과정에서 몸부림친 정성이었지, 소망을 차지하여 하늘을 모시기 위한 정성은 못 들여왔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입장에서, 탕감노정에서의 뒤넘이치는 정성은 되었을지언정 소망의 뜻을 이루어 하나님을 위로해 드리는 정성은 못들였다는 것입니다. 하늘의 영광을 찬양할 수 있는 그런 정성을 인간세계에서는 그 누구도 갖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오시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원수를 전부 다 굴복시키고, 탕감세계의 한에서 벗어난 아버지께 충과 효의 모든 정성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아브라함, 모세, 예수를 통한 기독교 2천년의 섭리역사상에서의 모든 정성은 하나님의 가슴속에 못 자국만 남겼던 슬픈 정성이 되었습니다.
앞으로 참다운 아들딸들이 들여야 할 정성은 무엇이냐? 현실적인 생활 무대에서의 정성이 아니라 소망의 정성, 영광의 정성, 충성의 정성, 모심의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그러한 정성을 남기고 가야만 천국이 내 천국이 되고 그 아버지가 내 아버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정성은 탕감도상에서의 정성이었지만, 앞으로의 정성은 하늘을 모시기 위한 정성이어야 하고, 모시는 자리에 동참하기 위한 정성이어야 합니다. 여기에 동참하는 우리는 첫째 부활에 동참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모심의 자리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슬퍼해 나오셨던 하나님을 위로해 드릴 수 있고, 슬픈 정성의 사연에 동참할 수 있는 내용을 갖추어야 합니다. 이것을 소개하고 그에 따르는 탕감조건을 하나님 앞에 세우기 위하여 나온 것이 복귀원리입니다.
복귀원리를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슬픈 역사 과정을 종결짓기 위해서 정성을 들여 탕감조건을 세워야 합니다. 그리하여 아담가정에서 아담을 잃어버린 하나님의 그 슬픔에 동참해야 되고, 가인이 최후의 결실을 맺어야 했는데도 불구하고 아벨을 살해함으로써 아버지께 못을 박았던 그 서러움을 잊게 하고, 노아가 120년 동안 참고 수고하여 충성해 나왔지만 일시에 파괴되었던 그 서러움을 잊게 해야 합니다. 또한 아브라함 이삭 야곱 3대에 걸쳐 수고하던 심정적인 내용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모세로부터 예수님까지 2천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하나님의 서러움에 동참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나님의 심정을 여러분에게 심어 주기 위한 것이 복귀원리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아담가정에서 잃어버린 아버지를 찾아야 하고, 노아가정에서 뜻 앞에 서지 못한 그 서러움을 대신 이루어야 합니다. 또 자신의 제물 실수로 인해 4백 년 동안 그 후손들이 저주받게 되었을 때 몸부림치던 아브라함의 심정을 대신해야 되고, 모세가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이스라엘 민족이 비참한 자리에 처해 있을 때 불타는 민족애로 원수였던 애급 사람을 쳐 죽인 그 서러운 심정을 대신해야 합니다. 또한 그것을 대하던 하나님의 모든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복귀를 위하여 몰리고 쫓기는 수난의 역사를 당할 때 그 민족을 바라보던 하나님의 서러움과, 지금까지 기독교가 거쳐 온 수많은 피의 대가에 여러분이 동참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를 찾기 위해서 하나님이 이렇게 수고하셨다고 느낀다면 ‘하나님! 역사적인 한을 나로 말미암아 잊으시옵소서.’라고 할 수 있는 자신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탄을 굴복시킬 수 있는 승리의 결정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승자의 모습을 갖추어서 시봉(侍奉)과 영광과 찬양을 돌려드릴 수 있는 정성의 주인공이 되어야 하나님의 양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에 내가 예수님을 위해서 어떻게 어떻게 했다.’라는 말은 버려야 합니다. ‘내가 통일교회에 들어와서 얼마나 일했는데…. 내가 주인이 되면 뭘 하겠다.’라는 생각도 버려야 합니다. 자기 갈 길이 아직 남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뒤를 돌아보고 탄식하는 사람은 이미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엉뚱한 조건을 바라고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러한 여러분에게서 오늘 당장 이러한 마음이 사라지기를 바란다면, 가로막힌 원수의 적진을 파괴해 버리고 승리자의 영광을 갖추어야 되겠습니다.
승리자의 영광을 갖추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역사적인 한을 중심삼은 공분의 심정으로 원수를 무찌르고 이것을 탕감복귀해야 합니다. 선두에 서서 돌격전으로 최후의 결정을 짓자는 것입니다. 승패의 결정을 지어 승리한 민족을 하나님 앞에 세우고, 하나님께서 영광의 한날을 맞이하실 수 있도록 민족적인 정성을 하나님 앞에 바쳐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날을 얼마나 그리워하시겠습니까? 여러분도 그런 그리워하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까?
어떤 식구는 ‘지금 되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건 뭐건 흘러가는 물결에 휩싸여 가만히 있으면 되지 설치고 야단할 게 뭐가 있느냐’ 하고 편리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가만히 있어도 선생님이 끌고 갈 텐데 야단스럽게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산꼭대기의 물은 가만히 있어도 태평양까지 흘러가므로 주로(主路)로 흐르든 옆에서 소용돌이치든 약간의 거리 차이는 있으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요. 그러나 흐르는 물에도 주류와 지류가 있습니다. 내재적인 곡절의 전부와 정면적으로 부딪치는 주류가 먼저 대해(大海)에 들어갑니다.
통일교회에도 주류가 있고 지류가 있습니다. 선생님은 주류의 방향을 끌고 나오기에 온갖 정성을 쏟았습니다. 태풍이 불어오는 대해에 일엽편주가 되어 끌고 나왔습니다. 불어오는 바람이 목적지에 닿게 하는 더 강한 힘이 되게 하고, 결실을 맺게 해야 합니다. 역사가 깨어지지 않는 한, 힘이 부치지 않는 한, 이 대해의 노도도 나로 하여금 목적지를 향해 가는 데에 연단과 시련의 보탬은 될지언정 목적을 달성하는 데에 방해는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통일교회 청년들 중에는 선생님이 기합을 주어 동서남북으로 날아가 버리게 하고 싶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여러분은 죄수들이 가득 찬 패역한 이 세계에서 날아가는 인공위성과 같은 기분을 느껴야 합니다.
신념이 얕은 사람은 앞을 개척하는 데 있어서 주체적인 기준을 세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신념을 앞세우고 쉬지 않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집에 돌아가 밥바리(밥그릇: 밥을 담는 바리라는 뜻의 북한어)를 기억할 수 없을 만큼 열심히 달려가야 합니다. 현재 우리가 적군에게 포위되어 있는 데 어떻게 밥바리 생각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통일교회에는 밥바리를 들고 길거리의 엿장수와 같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럴 사이가 없습니다. 달려야 됩니다. 제트기보다 빠른 인공위성처럼 바쁘게 정성의 예물을 맞이해서 수많은 인류 앞에 고이 넘겨주어야 합니다. 그 예물을 넘겨줄 때 천만인이 우리에게 고맙다고 눈물을 흘리게 될 것입니다.
내가 지금은 비록 기쁨의 한 날을 갖지 못하게 되더라도 후대가 정성의 예물로 대할 수 있는 정성의 터전을 남겨 놓겠다고 노력하지 않으면 통일의 용사가 될 수 없으며 대해(大海)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선생님이 오늘 태릉에 갔을 때 어떤 아주머니가 통일교회는 첩첩산중이라고 말했습니다. 첩첩 산도 넘어가면 평지입니다. 통일교회의 한 사람 한 사람은 전부 다 저 높은 벼랑 꼭대기에 올라가려고 줄을 걸고 매달려 있는 것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각자가 올라가야 할 고개는 비록 험난하기는 하지만 얼마나 멋집니까?
높은 고개를 올라가다가 ‘이만큼 왔으면 됐지.’ 하고 위를 올려다보지 않고 평지만 바라보는 사람은 그것으로 만족하는 것입니다. 만일 고개에 올라서지도 않고 있는데 홍수가 나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순간은 편할지 모르지만 사형선고를 받아 놓고 있는 사형수인 것입니다. 또 얼마만큼 올라가서 ‘아이쿠! 내 다리가 부러졌네. 바른 다리가 부러졌으니 고치고 가야지. 고치는 김에 좀 쉬고 가야지.’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동무가 생겨서, 서로 ‘힘들지!’ 하면서 평지만 바라보려고 합니다.
또 남들은 한 계단씩 밟아 가는데 한꺼번에 뛰겠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맨 처음 교회에 들어오면 몹시 바쁩니다. 밤에 자면서도 다리가 움직이고 눈이 운동을 하는 그런 체험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정상적인 궤도에 올라서 보면 다 알게 됩니다. 선생님도 과거에 그런 때가 있었습니다. 사지의 세포가 먼저 발동을 해서 가고 싶어할 때는 거기에 끌려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도 통일교회에 처음 들어왔을 때는 대번에 뛰고 싶었지요?
선생님은 하나님을 고맙게 생각합니다. 선생님의 성격을 대번에 뛰려고만 하게 해 놓았다면 죽든가 살든가 무슨 사고가 발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일정한 고개에 오르게 되면 못 가게 막아 놓고 준비하게 하십니다. 거쳐야 할 단계가 많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알기 때문에 선생님은 그 고개를 쉽게 넘지 못하더라도 절대 낙망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지난날의 산 증거가 확실하게 역사적인 재료가 됩니다. 다 올라가서 졸라맨 허리띠를 풀어놓으면 많은 핍박과 시련이 옵니다. 한번 넘어지면 한번 일어서는 것이 공식이기 때문에 많은 핍박과 시련을 거치고 나면 목적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는 사람들은 웃는 날을 일주일 이상 가져서는 안 됩니다. 좋은 날이 있거든 ‘하나님, 요건 며칠 가게 하시렵니까?’ 하고 기도를 해서 하나님께 약속을 받고 웃어야 합니다. 그런 기도도 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허파에 바람이 들어간 통일교인들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사형선고를 하고 있습니다. 듣지 못하던 말을 처음 대하니 대포에 꽝 하고 맞은 것처럼 깨어져 나갑니다. 그래서 통일교회 선생님이 지금까지 욕을 먹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전도할 때 어디 가든지 치밀하게 잘 해서 이런 말을 하지 말고 요런 말만 하라.’고 해도 자기가 은혜받을 때 좋았던 말을 먼저 꽝꽝 합니다. 듣는 사람은 기절할 말인데 자기는 그저 좋아서 합니다. 총을 잘 쏘면 카빈총이든 M1총이든 산탄공기총이든 자기 경력에 의해 총을 가져야 할 텐데도 불구하고 산탄공기총을 가지고 M1총 대신 쏘겠다면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적재적소에 활용할 수 있는 배경과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위치와 자기의 중심 기준을 갖춘 사람을 쓰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대개 선생님과 구면인 사람이 많은데 그런 여러분들의 얼굴을 가만히 보면 이전과 다릅니다. 계절에 비유한다면 마치 가을과 같습니다. 눈도 빛나지 않고 손도 기운이 없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나는 그냥 두고 싶지 않아요. 아무리 처음 들어온 사람이라도 죽을 때의 태세를 잘 갖추어야 합니다. 내가 지금까지 통일교회를 지도하면서 염려한 것은 죽는 날은 가까워지는데 그날을 위해서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유언을 써 가지고 다닙니다. 아버지 앞에 가서 내가 요구할 수 있는 요건이 무엇인가를 기도하고, 땅에 살아 있는 한, 할 수 있는 최대의 노력을 했다는 기준에 서기 위해서입니다.
선생님이 복잡한 영계에 울타리를 두르고 몸부림쳐 나왔기 때문에 하늘이 어느 한 때 떠나는 일이 없었습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터전 위에 서 있지만 수많은 영통인들과 수많은 신령한 사람들이 드나들 때 조심해야 됩니다. 이 분야는 자기의 경력 가지고는 안 됩니다. 본성이 서로 다른 만큼 새로운 것이어야 합니다. 새로운 사람을 대할 때는 새로운 기준에 응할 수 있는 마음과 그에 상응하는 가치를 가지고 상대적인 위치에서 대하지 않으면 조건에 걸리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은 정성들인 사람을 제일 무서워합니다. 배짱부리고 천하를 호령하는 그런 사람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호랑이 방귀와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명령할 때는 천지가 ‘예.’ 하고 순종하게 하는 정성들인 사람을 제일 무서워합니다. 정성의 줄로 하나님을 꽁꽁 동여매면 하나님도 완전히 결박당합니다. 정성의 줄을 끊을 수 있는 천법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본체나 본질은 정성의 줄로써 우리 통일교회와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정성의 무리는 맞고 빼앗아 옵니다. 이것이 복귀의 길입니다. 따라서 이런 과정에 서 있는 여러분은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출발을 잘 한다 하더라도 맨 처음에 정성을 들여서 출발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무에 오르기 시합을 한다고 광고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욕심 많은 통일교인들은 제일 큰 나무에 서로 올라가려고 싸우다가 끝내 싸움이 끝나지 않은 채 실적 없이 시합은 끝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욕심만 크고 실적이 없다는 말입니다. 재치 있는 사람은 자기에게 알맞은 나무를 먼저 찾아 올라갈 것입니다. 그러나 욕심 많은 사람은 자기 분수에 넘치는 제일 높은 나무를 올라가려다가 떨어지고 맙니다. 우선 차근차근 올라가서 하나하나 기준을 세워 완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너무 크게 출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착실히 실적을 세우며 자기 본질에 해당되는 충성만큼의 정성을 기울여, 하늘이 쌓아 온 정성의 예물의 기준을 지니고 천고(千古)에 남겨질 수 있는 자리에 섰다면 여러분 당대에는 그 소망하는 뜻이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여러분 후대에는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렇게 세계에 대해서 남겨질 수 있는 정성의 터전을 지니고 나가면 자신과 후손의 명성이 세계로 퍼져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정성이 다른 곳으로 옮겨지게 될 때 어떻게 옮겨지느냐? 작은 지남철에 쇠붙이가 달랑달랑 붙어 있는데, 여기에 큰 지남철이 한번 싹 들어왔다가 나간다면 이 쇠붙이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모두 큰 지남철에 달라붙게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큰 지남철이 천운이라 할 때, 천운의 정성의 터전이 여러분 앞에 왔다가 갈 때는 지금까지 역대의 선조로부터 내려온 정성의 터전을 모두 빼앗아 가져가 버린다는 것입니다.
끝날에는 이 모든 것을 빼앗아서 가져가 버립니다. 이럴 때, 즉 도둑을 맞을 때는 가만히 앉아서 입 벌리고 웃으면서 도둑을 맞게 됩니다. 왜냐하면 도둑맞은 것을 다시 도둑질해 오는 방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하루에 수만 번 지구성을 빼앗아 오는 그런 도둑질을 해야 합니다. 선생님이 지금까지 이 무지의 세계를 개척하는 데 있어서 언제나 그런 작전을 해 왔습니다. 먼저 내려가서 맞는 것입니다. 맞으면 만사가 형통하고 동정을 받게 됩니다. 또 높은 자가 낮은 자 앞에서 맞게 되면 반비례 효과가 나타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온유겸손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쑥 올라오게 될 때는 몽땅 빼앗아 오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이렇게 해서 은혜받은 사람들의 많은 은혜의 보따리를 빼앗아 왔습니다. 이게 죄인 가요, 선인가요? 「선입니다.」
하나님은 통일을 바라시기 때문에 세계적으로 풀어놓은 은사의 보따리를 빼앗아 한 곳에 모아 다시 나눠주게 되면 세계는 통일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과거에 은혜를 받았다가 빼앗긴 사람들은 그 은혜의 맛을 알기 때문에 클클해서 죽을 지경일 것입니다. 이렇게 빼앗아 놓은 은혜를 쌓아 놓았다가 조금씩 아버지부터 아이까지 전부 다 주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은혜를 주관할 수 있기 때문에 삼천만 민족이 ‘이단의 괴수다. 망해라.’ 하여도 망하지 않습니다.
까닭 없이 맞았으면 손해배상을 받아야 합니다. 선생님은 서대문 형무소에 들어가서도 다리를 펴고 코를 골며 잠만 잤습니다. 너희들이 나를 삼키지 못할 때는 수가 난다 이것입니다. 이런 일을 하려니 때로는 남루해야 하기도 했고, 때로는 손가락질 받아야 했습니다. 이 길을 개척하면서 가지가지 고초를 다 당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이보다 더한 풍상을 겪어 나오셨는데 내 어이 이만한 풍상을 겪지 않으리오!’라고 생각했습니다.
공적인 자리에서 당한 그런 사연이 많으면 많을수록 남이 갖지 못한 보화를 창고에 가득 채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은사라는 것을 알게 될 때 여러분이 전도 나가서 지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전도하러 나갔을 때 지쳐서 신경통이 생기는 것도 여러분 자신의 잘못이지 하나님 때문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아이고 내 신경통은 뜻 때문에 생겼는데 선생님은 그것도 몰라주시네!’ 하고 원망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지금까지 한 번도 하나님이 나를 몰라준다고 원망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 세계를 몇 개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약속을 해놓고 정성을 들이고 나서야 하나님을 대할 수 있습니다.
오늘 7년노정을 걸어가는 과정에서 여러분에게 남겨진 예물이 무엇입니까? 앞으로 세계 사람들이 통일교회 간부들을 많이 데려가려고 할 것입니다. 본부에 누가 있으면 관심을 가지고 그 사람에 대해서 반드시 경력을 물어봅니다. 그러면 어떤 경력을 가졌다고 내가 설명합니다. 이럴 때 여러분은 손에 기름기를 싹 씻어버리고 큰소리칠 수 있는 배포를 가지고 가야지, 옛날 그 케케묵은 그런 생각으로 가서 얘기하겠습니까?
사람은 정성의 예물을 받았으면 정성의 예물을 돌릴 줄도 알아야 합니다. 청춘을 불살라 버린 그 정성, 즉 눈물과 피와 땀을 갖고서 정성의 예물을 민족과 세계를 위해 바칠 수 있어야 합니다. 열만 한 하늘의 은사에 백만 한 정성을 가한 우리의 정성의 예물을 세계만방과 하늘 앞에 바쳐야 합니다. 그래서 후손들까지 평안하게 살 수 있는 하나의 탕감복귀의 조건을 남겨야 합니다. 이렇게 네 자신의 손으로 하늘의 요건에 플러스시키겠다고 몸부림칠 수 있는 사람이어야만 천민으로서 백성이면 백성의 예물을, 종족이면 종족의 예물을, 식구면 식구로서의 예물을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정성의 문을 거쳐 들어오지 않는 사람은 도둑입니다.
정성이 가는 길, 통일의 길, 정성의 예물을 소개해 주는 길이 이미 개척되어 있습니다. 그 길을 따라 본래의 전통적인 인연을 거쳐 여러분의 목적지를 향해서 쉬지 않고 생명을 바쳐 나아가야 합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그 모습이 비록 겉으로는 처량하지만 훗날 환희와 영광의 세계가 될 때 환희에 찬 아버지께서 맞아 주실 것입니다. 그날을 위해 죽음까지 각오해야 하며 죽더라도 그날을 이 민족 앞에 소개해 주고 죽겠다고 몸부림쳐야 합니다. 만일 그런 죽음의 날이 온다 하더라도 죽음 가운데서 소망의 그 세계를 차지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기를 더더욱 결의하고 노력해 주기를 부탁드립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것은 귀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내 것이라고 보장할 수 있는 것이 있겠습니까? 진정한 의미에서 내 것이 있습니까?
내 몸도 부모가 주셨습니다. 만약 자연이 내 것을 주장한다면 우리의 육신은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자기의 학문과 지식도 역사적인 유물에 불과합니다. 나를 인정하기 위해서는 상대적, 환경적인 것을 인정하는 입장에 서야 합니다.
사람들이 ‘나는 불행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기만이 행복된 입장에 설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주장하는 입장에 서려면 자기를 부정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따라서 자기는 상대적, 환경적인 입장에서 그들이 허락되는 안에서 인정됩니다.
기도는 자기를 부정하고 간접적인 주체를 세우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절대적인 기준을 세우고 거기에 맞춰 나가는 것이 도의 길입니다.
내 것을 누가 먼저 결정하는가? 그것에 대등한 가치를 부가시키지 않고는 자기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전인류가 저마다 하나님이 자기의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며 피 흘리는 싸움을 하더라도 하나님은 싫어하지 않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 가운데에서 싸워 이기는 사람이 하나님을 자기의 하나님으로 만들 때 하나님도 기뻐할 것입니다.
통일교회는 누구의 것인가? 내 교회가 되기 전에 우리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 것보다 내 것이 먼저 되어야 합니다.
지상에서는 아직도 도의 절대적인 기준을 세우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도 그 기준을 세우지 못하였습니다.
외적인 가치의 기준을 세우지 않고는 하나님도 도의 절대적인 기준을 세울 수 없는 것입니다. 이 기준을 세우기 위하여 선지선열들을 세웠습니다.
내외적인 심정일치의 기준을 세우기 위하여 오신 분이 메시아입니다. 그러므로 메시아가 와서 절대기준을 세운 후에야 ‘내 것’이라는 것이 결정됩니다. 메시아로 말미암아 도의 최대의 가치의 기준이 세워지고, 그에 접붙임을 받음으로써 동일한 가치의 기준이 세워지는 것입니다. 참감람나무로부터 접붙임을 받기 위해서는 자기를 잘라야 합니다. 그래야만 참감람나무가 될 수 있습니다. 참감람나무의 눈 하나를 접붙이기 위해서는 돌감람나무 전체를 잘라야 합니다.
선은 맞고 망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을 죽이려던 사람들은 다 망했습니다. 악이 선을 지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선은 패배의 서러움을 맛보지 않고는 그 목적을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선을 행함에 있어서 낙심해서는 안 됩니다.
주인이 되려면 최고의 기준을 가지고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누구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라.”(마 10:37)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예수님을 완전히 소유할 것입니다.
나라를 위하고 세계를 위하는 사람보다 하나님을 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천주가 없어지더라도 그는 남아지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있을 때에는 문제가 없겠지만, 없을 때에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선생님의 탄신일을 내 것으로 여길 수 있는 식구들이 되어야 합니다.
통일교회는 재판(再版)입니다. 우리는 초판이 아니라 재판입니다. 망가져 있던 것은 두드려 부셔서 다시 만들듯이 자기의 모든 것을 버려야 합니다. 이때 자기 생각이 조금만 있어도 원래의 위치로 복귀될 수 없는 것입니다.
장자요, 초판인 사탄 편은 망했지만, 차자요 재판인 하늘 편은 망하지 않고 승리합니다. 우리 교회는 초판 소속입니까, 재판 소속입니까? 초판은 이미 사탄들이 다 점령해 버렸습니다. 초판에 소속한 사람이 많았지만 전부 깨져 나갔습니다. 초판의 사명을 상속 받은 사람들이 재판에 소속한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여러분들은 통일교회에 들어와서 7년노정의 혜택권 내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선배들이 수고하고, 핍박을 받으면서도 사탄 세계와의 싸움에서 승리한 결과에 기인한 것입니다.
통일교회의 아가씨들은 시집을 가게 될 때 초판에 가나요, 재판에 가나요? 여기 김동원 씨 어디 있어요?(김동원 씨를 향해) 동원 씨는 그때 장가가기를 잘했나, 못했나? 못했다고 말을 안 하는 것을 보니 잘한 모양이구만? 만일 잘못했다고 한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하려면 어떻게 회개해야 되느냐? ‘나는 다시는 장가를 가지 않겠습니다.’라고 회개해야 합니다. 이것이 제일 빨리 용서받는 회개의 방법입니다.
우리는 욕을 먹더라도 첫 번에 먹고, 매를 맞더라도 첫 번에 맞아야 합니다. 얻어맞고 나면 탕감됩니다. 그러나 탕감조건으로 한 인물 앞에 같은 것을 두 번 제시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3제물 헌제의 실수를 청산 짓기 위해서 십 배 이상의 수고의 노정을 거쳐야 했다는 사실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복귀노정에서 탕감조건을 세우는 사람은 단 한 번밖에 세울 수 없습니다. 중요한 탕감의 사명을 맡기기 위해 세웠던 사람이 실패하면 그 사람을 다시 세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 번밖에 없는 탕감시대가 지나가기 전에 탕감조건을 제시하지 못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만일 책임을 못하게 될 때는 살아왔던 공적이 날아갑니다. 지금까지 쌓아 왔던 공적이 고스란히 날아가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을 각오하고 필사적으로 하나님을 위해 싸워야 합니다.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천사와 밤을 새워 가면서 씨름할 때에도 죽음을 무릅쓰고 싸웠기 때문에 승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급한 인류의 대사이기에 ‘오늘 저녁은 졌으니 내일 저녁에 다시 합시다.’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했다가는 몇 천년의 세월이 지난 후에야 그런 때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복귀의 역사는 6천년 동안 흘러왔기 때문에 한 사람이 6천년을 탕감하는 조건을 세우기 위해서는 적어도 60년 동안 뜻을 품고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일생에 있어서 6년도 아니고, 자그마치 60년 동안 번민하며 탕감조건을 세워야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기간에 세우지 못하면 120년 동안에 다시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야곱이나 모세는 예수님을 위한 탕감노정(4천년)을 걸었기에 40수의 탕감노정을 걸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번 때를 놓치면 안 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7년노정이 얼마나 긴박하고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7년 초판 싸움에 도전하여서 하나님께 맹세하고, 민족적인 탕감을 위하여 자기 자신을 제단 위에 스스로 올리어 제물로 삼을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선생님이 여러분을 제물로 삼아 민족적 제사를 드려보겠다고 하는, 한 번밖에 없는 이 7년 기간이란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시집을 가고 장가를 들고 나서 이런 싸움터에 나가게 되면 지장이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될 수 있는 대로 7년노정을 마치고 나서 시집가고 장가드는 것이 좋습니다. 지금까지 시집가고 장가든 사람들은 전부 좋지 않습니다. 그러면 시집가고 장가든 사람들이 많은데 그런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것이냐? 지금까지 시집가고 장가든 사람들은 역사적인 탕감의 제물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아가씨들은 7년노정을 다 마쳐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한국이 환영할 수 있는 시대만 되면 여러분은 일등 신랑감을 만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선생님은 민족복귀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7년노정을 걸어왔습니다. 사상적인 기준을 중심삼고 볼 때, 선생님의 내적인 기준이 아벨적인 입장이요. 외적인 기준이 가인적인 입장입니다. 즉 가인 아벨적인 기준을 중심삼고 볼 때, 내적 기준은 사상적인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사상적인 면에서 이 나라의 모든 권력자나 어떠한 단체를 능가할 수 있는 기준, 즉 천적인 기준에 서 있습니다. 이리하여 삼천만 민족이 하나되어서 세계적인 복귀노정을 출발하게 되면 제2의 초판이 아니라 재판이 되는 것입니다.
초판에서 승리의 권한을 가진 사람들과 재판에서 승리의 권한을 가진 사람들 중에서 어느 쪽이 더 위대한가? 초판에서 승리의 권한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초판에 승리한 사람들은 재판도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으며, 그들이 가고 싶으면 가고, 말고 싶으면 만다는 것입니다. 초판에 합격하지 못한 사람은 가고 싶어도 갈 수 없지만, 합격한 사람은 재판 삼판에도 나갈 수 있습니다. 이것은 1차전, 2차전, 3차전으로 연장시켜 나오는 복귀섭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제1차에 승리하면 제2차에 나갈 수 있고, 제2차에 승리하면 제3차에 나갈 수 있습니다. 만약 제1차의 싸움에서 국가적인 기준의 승리를 했다면, 국가적인 승리의 영광을 차지하기 때문에 천국에 가서도 국가적인 기준의 중요한 책임을 짊어질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세계적인 책임을 다시 연장시켜 나가지 않고는 세계적인 책임을 하는 입장에 나갈 수 없습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통일교회 간부들은 똑똑히 알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36가정이 한국을 위주로 한 초판 싸움에서 책임을 다했다 하더라도 또다시 세계무대로 출전해야 합니다. 36가정은 출전의 책임자들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출전을 안 했을 때는 하나님께서는 가지 않는다고 책망하시지도 않고 책임추궁도 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세계적인 출동에 의해 승리의 결과를 가져온 그 자리에는 동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머물 수 없다. 선생님을 따라 재판 종판까지 따라 나가겠다.’고 하는 사람은 어차피 고생을 해야 됩니다. 고생을 할 때 선생님을 대신하여 책임지고 고생하게 되면, 선생님과 같은 입장에 설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7년노정의 초판 싸움에 가담하여 참된 자로서 하나님 앞에 책임을 다하고 눈물 흘리고 피땀 흘렸던 것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가를 알아야 되겠습니다.
말씀이 언제부터 나왔습니까? 선생님이 열여섯 살 때부터 나왔습니다.
상식이나 수학 문제를 푸는 공식을 얘기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여자로 말하면 무슨 멋을 내겠다는 그런 멋을 기억하자는 것이 아니요, 남자로 말하면 세상에서 지금까지 살았던 자기 처소 가운데서 기억될 수 있는 길을 찾아가자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이 싸움을 책임진 사람으로서의 긍지를 가지고 그 책임을 중심삼고 기억을 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태어난 이 세상에는 4대 성인, 즉 예수 공자 석가모니 소크라테스가 있습니다. 이러한 성인을 추모하다 보니 그 성인이 난 배후의 환경과 생활을 그리워하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성인이 어느 나라에서 태어났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예수가 태어난 이스라엘 나라를 가 보았습니다. 베들레헴에도 가보았고 예루살렘에도 가 보았지만, 그곳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복지라고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반 사막지대에 밭이 조금 있을 뿐이었습니다. 거기에는 나귀와 낙타가 눈에 많이 띄었습니다. 그리고 감람나무도 많았습니다. 그곳의 기후가 열대성이기 때문에 좋지 않은 땅이란 것을 느꼈습니다.
오늘날 이 이스라엘을 온 세계에 널려 있는 기독교인들이 순례하는 것을 일생 최대의 행복으로 여기는 것은 왜 그러냐? 그곳이 예수님이 태어나신 곳이기 때문입니다. 공자가 위대한 것은 공자의 사상을 중심으로 나라가 중흥되고 중국 문화가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석가모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왕실에서 왕자로 태어났으나 스스로 고행을 통하여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리하여 만방의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살길을 개척해 주었기 때문에 고통을 받던 모든 사람들은 그를 추모함과 동시에, 그가 태어난 나라까지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도는 잊을 수 없는 나라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 성인을 기다리는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 되느냐? 그 업적을 생각해야 됩니다. 그 업적을 생각하다 보면 그 업적을 이루기까지 연유된 환경을 생각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성인이 태어난 그 나라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적인 성인이 태어난 나라는 피폐하고 황폐한 땅일지라도 그 땅을 찾아 줄 수 있는 사람은 여전히 남아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역사상의 어느 한 시대에서 한 나라의 주권자, 즉 자기 나라의 문화와 권세를 자랑하던 주권자들은 역사에 한 페이지만 남긴 채 다 흘러가 버렸습니다. 그러나 연륜을 거쳐 사상적인 기반을 닦아서 세계적인 문화를 이룬, 인격적인 소양을 갖춘 그러한 성인이 있다 할진대 그 성인이 태어난 인도면 인도, 이스라엘이면 이스라엘 혹은 희랍이면 희랍, 그러한 나라를 그리워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나라는 비록 망했더라도 그 나라에 그 성인이 남긴 흔적을 더듬어 보고 싶고, 그 성인이 살던 당시의 모습을 상기하고 싶고, 그 시대의 문화와 생활적인 감정을 접하고 싶은 것이 우리 인간들입니다.
통일교회의 이념은 하나님의 복귀섭리 가운데 필시 한 번밖에는 생겨날 수 없습니다, 한 번밖에. 다시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지금은 대외적인 관계로 볼 때 전무후무한 역사적인 한때입니다. 이 얼마나 엄청난 사실입니까? 오늘날 한민족의 실상은 너무나 처참합니다. 말할 수 없는 막중한 책임을 맡은 민족인데 세계의 여러 민족으로부터 동정받을 수밖에 없는 입장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환경 가운데서도 새로운 세계를 세워 갈 수 있는 문화적인 터전과 사상적인 기틀이 통일교회의 움직임으로 말미암아 세계에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위해서 전념한다면, 오늘 우리들이 처해 있는 이 불행한 자리가 역사적인 행복을 위해 투쟁하는 자리가 된다는 것을 부정할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통일교회가 가지고 있는 이념을 예수님이 세운 기준 이상의 것으로 생각합니까, 석가모니가 세운 기준 이상의 것으로 생각합니까? 혹은 소크라테스나 공자가 세운 기준 이상의 것으로 생각합니까? 여러분이 그들이 세운 기준 이상의 기준을 세우게 된다면 그들보다 더 높고 귀한 가치의 자리에 서게 됩니다. 여러분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까? 여러분이 보기에는 선생님이 아무것도 아니고 그냥 찾아온 것 같지만, 오늘 이 땅에 서서 세계의 역사를 뒤돌아보게 될 때 통일교회가 제창하는 이념이 최고라는 것입니다. 통일교회 이념을 중심삼고 세계가 하나로 될 것이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귀섭리의 종착점이 되어야 할 자리에 여러분은 서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서 있는 이 자리가 얼마나 엄청난 자리인가, 여기에 서 있는 여러분 각자의 개체가 얼마나 근실하고 존귀한 존재인가를 여러분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선생님이 예루살렘에 갔을 때 박물관에 들러서 예수님이 당시에 사용했거나 가지고 계시던 어떤 유물이 있는지 물어보았는데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쓰시던 유물, 즉 조그만 젓가락 쪼가리 하나라도 남아 있다면 지금 미국의 돈을 다 주고도 살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미국 전체를 주고도 살 수 없는 무한한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지녔거나 입으셨던 옷이 남아 있다면, 그 옷은 무한한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문화 세계에 있어서 최고의 가치로 대표될 수 있는 가치일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를 지나면서 그로 인하여 미쳐진 영향을 두고 볼 때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 살았던 사람들은 그런 가치가 있을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그 당시의 사람들은 예수님과 더불어 침식을 같이 하고, 행동을 같이하고, 그와 더불어 수양해 나가는 입장에 있었지만, 그들은 그런 가치가 있는지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이 모든 후손 앞에 부끄러움이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느껴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때가 지나고 난 후에 그 가치를 느끼는 것보다도, 역사를 이끌어온 실적을 보고 그 인격을 존중하는 것보다도, 그 당시에 가치를 알 수 있는 소성(素性)과 그럴 수 있는 바탕을 지녀야 합니다. 그분은 세계를 주고도 바꿀 수 없고, 세계에 있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치의 존재라고 높여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주님을 모실 수 있고, 그분의 일을 상속 받을 수 있는 자격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기억하기 바랍니다.
여러분, 지나간 예전의 자기 자신을 회고해 봅시다. 선생님이나 여러분 모두는 지금까지 비참한 길을 걸어왔습니다. 이 삼천리 방방곡곡, 이 강산의 역사적 배경을 바라보면 우리 민족은 비참한 민족이었습니다. 역사 이래 다른 민족들로부터 압제를 당하고 수모를 당하고 그들로부터 쫓김받아 오던 민족입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을 헤아려 볼 때 이 땅은 역사적인 사연과 역사적인 원한이 맺혀 있는 땅이요, 이 민족은 역사적인 슬픔을 간직하고 있는 민족입니다.
여러분은 고향 산천을 그리워하지요? 그런데 비참하고 역사적인 서러움이 깃들어 있는 고향 산천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생각해 보았습니까? 거기에는 충신 열사들이 비참하게 흘린 피와 눈물 자국이 남아 있는데 그들의 슬픔을 해원성사하겠다는 마음을 가져 보았느냐? 그런 마음을 가지고 눈물을 흘리며 그들을 위로하여 보았느냐는 것입니다.
이 민족은 국운이 비운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눈물 흘릴 수밖에 없는 사연이 있었습니다. 이 민족을 통하여 전인류를 복귀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 할진대 삼천만 배달민족은 하나님의 섭리 앞에 충성을 다하는 봉사자가 되고, 봉헌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제까지는 그런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오랜 역사를 두고 볼 때 이것이 우리 선조들의 한이 되었고, 직접적으로 복귀섭리를 주관해 나온 하나님 앞에는 서글픔을 남긴 이 강산 이 민족이 되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수많은 민족을 제쳐 놓고 이 나라 이 민족을 찾아오셨다는 사실에 삼천만의 이 민족은 감사하고 찬양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배달민족의 후손으로 태어난 여러분이 민족을 대신하여 이 민족의 모든 실수를 책임지겠다고 나서야 하는데 그런 생각을 조금이라도 해봤느냐는 것입니다.
이 팔도강산을 중심삼고 하나님이 어떠한 군, 면, 리의 민가든 상가든 어떠한 집을 찾아 들어갈 때, 그 배후에 맺혀진 사연이라는 것은 선생님이 위에서 말했듯이 간단한 사연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결정의 한 닻을 내려놓고 섭리의 출발을 했다면 거기에는 역사적인 곡절이 사무쳐 있고, 역사적인 사연이 깃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것을 알지 못한 사람들은 역사를 상속 받을 수 없었고, 이것을 책임지고 기억하지 못한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공적인 책임을 질 수 없었다는 것이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어찌하여 위인이나 성인을 후손들은 추모해야 되느냐? 그들의 마음속에는 공들인 역사적인 모든 사연이 얽혀 있고, 선의 사연과 곡절이 그 속에 엉클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그러한 터전을 통하여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목적을 향하는 길과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비록 타락의 후손들일망정 인심은 천심과 통하므로, 수많은 사람들이 성인을 추모하고 성인이 걸었던 길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본연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요, 자연적인 것입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볼 때 통일교인들이 이 뜻을 얼마나 염원해 나왔으며 현재 처해진 입장에서 이 뜻을 중심삼고 얼마나 수고했느냐? 내적인 체휼을 하면서 내가 이러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스스로 자각한 바가 있느냐? 이런 것을 생각할 때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서울은 선생님이 학창시절부터 눈물을 많이 흘린 곳입니다. 그리고 선생님은 삼천리 팔도강산의 명승지를 찾아다니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각도의 사방팔방을 돌아다니면서 차를 타고 도로를 달릴 적마다 하나님의 괴로운 마음을 조금이라도 빨리 풀어 드리기 위해 달리는 차바퀴를 재촉하며 눈물어린 신념을 가지고 어려운 식구들을 찾아가기에 급급했습니다. 전국의 마을 마을은 핍박받는 아들딸, 핍박받는 대원들을 남겨 놓고 눈물을 흘리며 돌아선 역사적인 사연이 깃든 그러한 마을 마을입니다.
7년노정에서 통일교회의 청년 남녀들, 즉 나이 어린 20대, 10대 청소년들이 눈물어린 결의를 하고, 집에서 쫓겨나고 형제들에게 몰림받아 가면서도 외로운 전도의 행로를 떠나 환영하지 않는 마을에 들어가, 남들이 생각할 수 없는 비참한 자리에서 뜻이라는 명사를 걸어 놓고 몸부림쳤던 그런 마을 마을을 여러분은 얼마나 생각해 보았습니까?
7년노정 동안 삼천리반도 방방곡곡에 통일교회의 청년 남녀들이 찾아 갔고, 그들은 비장한 마음과 눈물어린 심정을 갖고, 맺혀 있는 하나님의 역사적인 한과 시대적인 한을 풀어 드리기 위하여 ‘나는 역사를 대신하여 이 시대의 탕감의 역군으로 왔다.’라고 생각하고 원수시하는 그들을 위하여 밤을 지새워 가면서 기도하였습니다.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아버지를 부르던 그 기도의 음성이 지금도 남아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았습니까?
여러분이 지금 편안하게 웃고 사는 그 마을의 환경 속에는 우리의 선조들이 눈물로써 기도하던 그 음성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사라져 갔지만 절박한 자리에서 하나님을 부여잡고 호소하고 기도하던 내적인 심정의 기도는 하나님의 가슴속에 남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를 반대하고 한을 심어준 원수를 굴복시켜 하나님께 승리를 안겨 드리고, 또한 우리의 한도 풀 수 있는 그 한 날이 언제 오느냐 하면서 그 한 날이 오기를 천만번 기도하며 몸부림친 사실을 여러분은 생각해 보았느냐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삼천리반도를 바라볼 때, 옛날 우리 선조들이 금수강산이라고 자랑하였던 그 명사의 인연이 여기서부터 맺어졌다는 것을 여러분 생각해 봤습니까? 하나님의 아들딸들이 정성을 다하고 눈물을 흘리고 피와 땀을 흘리며 자기의 생명을 걸어 놓고 담판을 하며 호소했던 그야말로 금수강산이라는 것입니다.
과거에 우리 선조들은 알지 못하는 자리에서 이 나라를 찬양하고 이 민족을 찬양했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배달민족, 대한의 아들딸이 살고 있는 이 삼천리반도야말로 우리 선조들이 흘린 눈물과 정성어린 피땀으로 얼룩져 있다는 것입니다. 천적인 심정의 기반과 가치가 남아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기억해야만 합니다.
정성어린 제물과 같은 입장에서 제단 앞에 서야 할 여러분인데도 불구하고, 그러한 제단 앞에 설 수 있는 자격자가 됐습니까?
만일 예수님이 지금 이 땅에 오신다면, 옛날의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가 아니라 현재 통일교회와 같은 환경 가운데 오신다면 우리를 붙들고 통곡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삼천리반도를 바라보시며 이 민족의 내면에 얼크러져 있는 사연을 보면 이 민족을 붙들고 몸부림치며 통곡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예수님의 입장을 생각해 보았습니까?
이렇게 엇갈린 사연이 삼천리반도 위에 주체로 선 통일의 청년 남녀들의 피 땀을 통하여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이 민족의 눈물의 인연을 파고 들어가 보면 거기에는 피끓는 수많은 청년 남녀들의 눈물이 얼크러져 있고, 역사적인 한을 밟고 넘어서겠다고 통곡하신 선조들의 눈물 자국이 얼크러져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복귀섭리의 역사적 노정을 걸어오신 하나님의 눈물이 숨어 있고, 여러분이 바라보고 있는 스승의 눈물이 섞여져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엄청난 사실 앞에 머리 숙여 진실 된 자세를 갖춰 가지고, 자기 스스로 행동을 자제하면서 하나님의 법도를 지켜 나가기 위해서 몸부림친 사실이 있습니까? 이것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다시 한번 생각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역사적으로 얼크러진 사연 앞에 나서기에 너무나 초라하고, 너무나 미비하고, 너무나 미급한 자신인 것을 깨달았느냐는 것입니다. 이제는 여러분이 자연을 바라보고 혹은 명산을 바라볼 때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다시 한번 고취시켜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정성을 다하고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괭이자루를 잡고, 땅을 파 봐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심정으로 땅 위에 있는 모든 만물을 거느림으로써 주인의 할 일을 다했다고 자랑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었습니까? 이것을 거론해 봐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식구들을 키워 나가고 거느리는 데 있어서 여러분은 역사적인 책임을 짊어진 예수님을 대신한 입장에 서서 간곡한 심정으로 몸부림치며 얽힌 사연을 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들과 더불어 천적인 승리를 가져오겠다는 다짐과 결의 밑에서 인도하지 못한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통일의 역군인 여러분들은 알고 보면 엄청난 인연 가운데 얼크러져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뜻을 따라가는 과정에서는 모릅니다. 그러나 뜻 앞에서 일단 떨어져 보면 알게 됩니다. 이 자리가 얼마나 귀하고 복된 자리인가를 떨어져 보면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떨어지고 나서 아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지나고 나서 알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뜻 앞에 처해 있을 때 아는 사람이 지혜로운 자요, 그런 사람은 지도자가 되고 책임자가 될 수 있습니다.
지방 교회에서 책임을 지고 있는 여러분들, 지방에서 하나님 앞에 충성을 다하겠다고 맹세한 여러분들, 여러분들은 과거에 실제로 그렇게 살았습니까?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면에서 역사를 대표하고 시대를 대표할 수 있는, 하늘이 요구하는 본의에 입각해서 그 사연을 책임지겠다고 몸부림칠 수 있는, 새로운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강을 건널 때도, 옛날처럼 무심히 보고 건너던 그런 여러분이 돼서는 안 되겠습니다. 돈을 버는 일도, 지금까지의 김 아무개면 김 아무개로서의 일생을 걸어 놓아서는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산 고개를 넘나들지라도, 지금까지 그 산 고개를 넘나들던 김 아무개로서 넘나들어서는 안 됩니다. 밥을 먹을 때도 마찬가지요, 길을 갈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잠을 깨나 잠을 자나, 억울해하고 기뻐하고 서러워하는 모든 일체의 행동 전체를 그런 관점에서 재검토해야 합니다. 언제 여러분이 시대적인 책임자로서 이런 역사적인 인연을 생각해 보았는지 다시 한번 상기하여 올바른 관계 속에서 올바른 자세를 갖추어야 합니다. 천적인 탕감역사를 하겠다는 새로운 결의를 가지고 삼천리반도 전역을 향하여 나가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이러한 입장에 있는 것을 알고 다시 한번 새로운 결의를 해야 되겠습니다.
이제 여러분이 책임진 지역이나 마을로 갈 때에는 옛날과 같은 마음으로 가서는 안 되겠습니다. 이 나라 이 강토를 위해 여러분들이 정성을 들이고 충성을 다한 그 터전을 앞으로 여러분의 후손들이 찾아냈을 때, 그들은 그 땅을 거룩한 땅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후손들이 그 땅을 찾을 수 있도록 역사적인 눈물의 흔적을 남기고 돌아가겠다고 생명을 걸고 뒤넘이치는 여러분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의 후손들이 그 땅을 찾아 들어갔을 때 ‘우리의 선조들이 과거에 이렇게 했다’고 말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선조들로서 후손들이 추종할 수 있는 하나의 기준을 세워 놓겠다고 충성을 다하는 여러분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일시에 왔다 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생사를 걸고 승패를 결정지어야 할 책임을 짊어진 하늘의 용사다운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러한 모습을 가지고 자기의 책임진 임지로 돌아가야 합니다.
여러분이 가야 할 그 마을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그 마을은 내가 알고 있던 그러한 마을이 아니요, 지금까지 일상적으로 대해 오던 마을이 아니고, 사연과 곡절이 얼크러져 있는 마을이라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마을에 대한 여러분의 태도가 달라질 것입니다. 그리하여 후대에 여러분의 후손들이 그 역사적인 위업을 상속 받아 더욱 위대해질 수 있는 자리에 설 수 있어야 그 역사적인 인연이 발전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패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아 나오던 모든 환경을 일신하고 역사적인 책임을 진 자로서 새로운 길로 가야 될 때가 왔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제 내일 본부교회를 떠나 차를 타고 지방으로 돌아갈 때, 여러분은 무엇을 가지고 떠날 것이냐? 심각하다는 것입니다. 그냥 왔다 가는 여러분이 되어선 안 되겠습니다.
이 좁은 공간에 사람이 많아 불편하다고 느끼고 뺑소니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이 자리를 빨리 떠나십시오. 협소한 자리에 많은 사람이 앉아 있으니 무리인 줄 알아요. 그러나 우리만이 이것을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더더욱 잘 아십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세상 사람은 비웃을는지 몰라도 선생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선생님은 하나님께 ‘우리 교회를 지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자리에 있는 것을 오히려 영광으로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젯밤에도 저 문 뒤에서 밀고 당기면서 서로 들어오려고 야단법석이었습니다. 이것을 처량하게 바라보지 말고, 이것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애달픈 심정을 위로해 드리기 위하여 ‘한때는 이러한 일이 있는 것도 좋은 일이 아닙니까?’라고 기도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참석한 사람이 있어야 됩니다.
이러한 사람이 있어야 앞으로 세상을 탕감복귀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환경은 비참한 처지에 있는 우리 민족만이 가질 수 있는 진실 된 재산이요, 탕감복귀할 수 있는 재료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미국 땅에서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곳에는 집회에 대한 규정이라는 것이 있어서, 규정 인원 이하의 참석은 허락하지만 규정보다 한 사람만 더 참석해도 법에 걸리게 되어 있습니다. 규정 인원보다 더 많이 참석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은 그럴 수 없습니다. 미국에서는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환경이 불행의 요건이 아니라 오히려 그로 인해 하나님의 속사정에 깊이 들어갈 수 있고, 우리 교회를 지어 주고 싶은 하나님의 심정적인 기준을 우리에게 연결시킬 수 있는 혜택과 은사의 조건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여러분들이 그러한 입장에서 생각을 해봐야 됩니다.
이제 본부교회를 오고 가는 것도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습관적으로 왔다 가서는 안 됩니다. 행사가 있으니 왔다 가고, 일요일이니까 왔다 가고 그래서는 안 됩니다. 오고 가는 것은 누구나 다 할 수 있습니다.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그러한 일을 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원하시지 않습니다. 통일교회의 일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특정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특정한 사람은 내적인 요건이 다르고 외적인 요건도 다릅니다. 그의 지닌 바의 가치도 다르고, 그 자신이 갖고 있는 사상적 기준도 다릅니다. 사상적 기준이 다르니 만큼 정신적 기준도 다른 것이요, 정신적 기준이 다르니 행동 기준도 다른 것입니다.
본부교회의 문을 열고 수많은 통일교인들이 드나들었지만 이 문을 열고 들어올 때, 떨리는 손으로 이 문을 당기면서 ‘아버지, 그리워하던 본부교회를 찾아왔습니다.’라고 통곡하는 식구를 보지 못했습니다. 선생님은 그런 사람을 만나 보기를 심히 고대해 왔지만 아직까지 만나 보지 못했습니다. 본부교회의 초라한 모습을 보게 될 때, ‘제 가슴에 못을 박았으면 박았지 이러한 모습을 바로 바라보지 못하겠습니다. 하늘의 정성어린 터전이 어찌하여 이렇게 초라합니까? 제 일대에 이 초라함을 웅장함으로 바꾸어 드리겠습니다.’라고 충성을 다짐하는 아들딸이 되어야겠습니다.
지금은 여러분이 7년노정의 마지막 고비를 넘어가는 중입니다. 지금은 선생님의 나이가 47세를 지나서 48세로 넘어가는 때입니다. 이때에 통일교회 교인인 여러분들은 지금까지의 생각을 뒤집어 버리고 다시 한번 새로운 생각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즉 본부교회에 대해서도 새롭게 인식하고, 스승에 대해서도 새롭게 인식해야 되겠어요. 지구장에 대해서도 새로운 인식을 가져야 되겠고, 지역장에 대해서도 새로운 인식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권사에 대해서도 새로운 인식을 가져야 되겠고, 식구에 대해서도 습관적인 관념을 버리고 새로운 인식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기억하고 알았던 것들이 하나님이 바라시는 기준에 도달하지 못했다면, 백 퍼센트 이 기준에 도달할 수 있도록 자신의 생각을 정비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바라시는 그 기준에 완전히 도달해야만 되겠습니다. 그럴 수 있는 젊은 통일교회 신도들이 되기를 하나님은 얼마나 고대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이 바라시는 기준에 도달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 기준에 도달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이 낙심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봄이 되면 여러분의 집 처마 끝에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와서 둥지를 치는 것을 볼 것입니다. 그리하여 얼마 후에는 알을 낳게 되고, 한 40일 정도면 그 새끼들이 날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둥지에서 자랄 때는 좁은 데에서 시달려야 하지만 일단 성숙하여 날게 될 때는 천하를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떠한 철새보다도 멀리 날 수 있어 한꺼번에 강남까지 달려갈 수 있는 멋진 제비가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에서 고되게 연단을 받고 시련을 받는 것은 앞으로 다가올 시련의 실전장에서 패자의 서러움을 맛보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에서 이중 삼중의 시련을 겪어서 새로운 신념으로 무장하여야 합니다. 제비같이 새로운 천국을 향하여 날아갈 줄 아는 여러분이 되면, 지금 이 터전이 얼마나 복된 보금자리였다는 것을 여러분은 확실히 알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서 먹는 것은 일생의 무엇보다도 더 귀한 것이요, 여기서 자고 입는 것은 어느 것보다도 더 귀한 것입니다.
새 시대에는 새 진리를 믿어야 합니다. 지방에 있는 식구 여러분들은 기도할 때 언제나 원칙적인 기도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 제가 여기 아무 지역 아무 곳에서 오늘 밤 기도합니다.’라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를 드릴 때는 자기 소속을 밝혀야 합니다. 본부교회의 남방이면 남방, 정남방이면 정남방에서 본부교회에 대한 방향을 갖추어 가지고 아무 지구의 아무 지역의 아무 곳에 있는 누구라고 밝혀야 합니다. 왜 그렇게 해야 되느냐 하면 역사적인 전통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그래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자기가 현재 거느리고 있는 식구들, 즉 자기를 중심삼고 횡적으로 인연되어 있는 식구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저에게는 그들에게 빛을 주고 그들을 위해서 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이 책임을 다하기 위한 힘이 제게는 부족하오니 힘을 주시옵소서.’ 이러한 기도는 통한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기도, 중요한 해결을 위한 기도일수록 본부교회에서 정성들이는 것과 같은 심정으로 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방법이 그래야 된다는 것입니다. 본부교회가 걸어온 지금까지의 역사적인 인연, 역사적인 배후를 더듬어서 눈물어린 심정의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거기에 하나님이 같이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중심삼고 본부교회에서 기도하는 사람이 있거든, 그 사람보다 더 충성하는 자리에서 기도하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본부교회에서 하는 일을 여기에서도 하겠습니다’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기도하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것을 보면 움직이는 것 또한 그럴 것입니다.
통일교회 교인들은 임지를 위해서 뛰어야 합니다. 자기가 어떤 한 지방을 책임지고 활동하는 데 있어서 좋은 일이 생겼걸랑 ‘아버지, 감사합니다.’ 라고 해야 합니다. 좋은 일이 있을 때 자신이 좋다고 그 자리에서 좋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 일을 기뻐하시옵소서. 본부에서 생긴 이 일을 기뻐하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한 다음에 자신이 소속된 지구장이라든가 지역장에게 보고한 후에, 자신이 기뻐해야 합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생활하는 사람이 가는 길에는 막히는 법이 없습니다. 통일의 운세가 발전적인 역사의 운세라 할진댄, 그 운세가 남아 있는 한 그 사람이 가는 노정에는 절대로 막히는 법이 없습니다. 막혔던 일이 도리어 선으로써 유익을 가져오게 되지, 악으로써 그 사람을 결박하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디에 소속하겠다는 것입니까? 하나님 편에 소속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편 가운데도 주류가 있고 지류가 있는데, 통일교회의 여러분은 주류에 소속해 있다는 것에 대해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주류에 속한 여러분은 한 그루의 나무와 같이 봄이 되면 잎이 돋아나야 됩니다. 여름이 되면 잎이 무성하여지고 꽃이 피어야 될 것이요, 가을이 되면 결실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 나무가 지닌 영양을 때맞추어 받아 함께 자라야 됩니다. 잎이 자라면 가지도 자라고, 줄기도 자라고, 뿌리도 자라는 것입니다. 같은 입장에서 자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나무가 지닌 본질입니다. 즉 통일교회가 발전함에 따라서 여러분도 발전해야 됩니다.
국가적인 터전을 통하여 발전하는 것이나 부락적인 터전을 통하여 발전하는 것은 범위는 작을망정 그 형태는 같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는 곳에서 사고가 나는 것이니, 스스로 부족한 자리에 처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사방이 결정되어야 합니다. 즉 지구의 동반구냐 서반구냐, 적도 이북이냐 이남이냐가 결정되어야 합니다. 위치는 상하와 전후좌우의 관계가 결정된 후에 명시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처해 있는 천적인 위치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사방의 도수에 입각해서 가치를 세우고 위치를 결정지어 놓아야 합니다. 그래야 현재의 상황에 부합될 수 있고, 정자세를 갖출 수 있지, 그렇지 못하게 되면 부정자세가 되고 맙니다. 그렇게 되면 어차피 역사의 흐름에 밀려나가는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통일교회는 세상이 발전하는 그 궤도를 따라가서는 발전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이번에 왔다가 돌아가는 여러분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위하는 것인가를 똑똑히 기억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똑똑히 기억해야 되겠고, 복귀섭리의 노정을 똑똑히 기억해야 되겠고, 스승을 똑똑히 기억해야 되겠고, 지구장 지역장을 똑똑히 기억해야 되겠고, 통일교회 정신을 지녀야 발전한다는 것을 똑똑히 기억해야 되겠습니다. 상하 관계에서 스스로 어떠한 자세를 가져야 된다는 것을 똑똑히 기억해야 되겠습니다.
상이 있어야 하가 있는 것이요, 전이 있어야 후가 있는 것입니다. 하상(下上)이 있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을 가만히 보면 자신으로부터 아래를 생각하는데, 이것은 하상이에요. 자기로부터 생각하게 되면 아래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상이 먼저이기 때문에 먼저 상을 존중해야 됩니다. 서로 좋아서 합한 둘보다도 상을 더 좋아하면 더 빨리 발전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도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기도하면 무엇이든지 다 이루어 주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에 있어서는 하나님은 상이 되고 인간은 하가 되는 것입니다.
상하의 종적인 관계에서는 번식이 안 됩니다. 번식을 하기 위해서는 분립 작용을 해야 됩니다. 그리고 횡선 상에 있어야 합니다. 횡선 상에 있으면 번식은 자동적으로 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지역장과 구역장의 관계처럼 종적인 관계에서는 번식이 안 됩니다. 그러나 서로 하나되어 지역장이면 지역장을 중심삼고 구역장이 행동을 같이하게 될 때에는 번식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창조의 원칙입니다.
우리는 전도를 왜 하느냐? 번식하기 위해서입니다. 번식은 종적인 관계에서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횡적인 입장에 서서 하나되어 서로 주고받아야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교회장을 중심삼고 교인들과 횡적인 입장에서 하나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모든 면에서 발전되는 것입니다. 지역장을 중심삼고 교회장들이 하나되라고 한 것은 그렇게 해서 모든 것을 발전시키자는 것이요, 지구장을 중심삼고 지역장들이 하나되라는 것도 더욱 발전시키자는 것입니다. 발전, 즉 번식시키자는 거예요. 여러분이 충성을 다짐할 때는 거기에서 수십 배의 번식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때는 컸다 작았다 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컸다 작았다 하는 것이니 각 지방에 떨어져서 활동하는 개인이라 하더라도 본부에서 온 소식을 중심삼고 횡적인 기준에 서야 합니다. 체내에서 느껴진 모든 감각이 신경을 통해 세포까지 일시에 미쳐지는 거와 마찬가지로, 모든 식구들도 본부 소식에 대해 동시에 동감할 수 있는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정상적인 생명을 지닐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본부를 그리워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렇지만 신경계를 통해서 전달되는 것처럼 종적인 기준에서만 관계맺어 나가면 일시적으로는 느낄 수 있을지 몰라도 계속 느끼지는 못합니다. 우리 몸의 뼈의 조직을 두고 볼 때 그것은 질서 있게 종횡으로 연결지어져 있습니다.
근간에 본부를 왔다 가는 여러분이 마음에 품고 가야 하는 것이 무엇이냐? 그것은 ‘기억하자, 다시 한번 기억하자.’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습관적인 감정을 얼마나 초월하느냐에 따라서 여러분의 인격이 결정된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부교회를 대하는 데 있어서, 지구를 대하고, 지역을 대하고, 각 개인을 대하는 데 있어서 지금까지 여러분이 취하던 입장을 다시 한번 혁신해야 됩니다. 새로운 입장에서 인식을 하기 전에는 발전이 되지 않습니다. 새로운 창조력이 발생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창조원리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4단계 배가 운동, 이것은 금년에 우리들이 내세운 4대 목표 중의 하나입니다. 이것을 초과 달성하기 위해 이상을 크게 갖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희생을 피해 가겠다는 자세를 가지면, 그래서 작년에 어려웠다면 금년은 더더욱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엄청난 금년 목표를 앞에 둔 여러분은 이것을 더욱 기억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심정과 하나님의 사정과 하나님의 소원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렇게 하여 심정적인 내적 기대를 조성하고, 4단계 배가 운동, 혹은 경제복귀하기 위한 활동을 완수하여 이 모든 것을 성취해야 합니다. 이러한 문제를 두고 볼 때 여러분이 지금까지 관념적으로 지구장을 통하여 들은 인식 갖고는 안 되겠어요. 철두철미하게 기억된 인식이 여러분의 사지 백체를 움직이고 폭발시킬 수 있는 행동의 원천이 되어야 합니다. 이 폭발시킬 수 있는 힘의 양이 작년보다 못하게 된다면 7년노정에 있어서 낙오자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다시 한번 기억을 해야 되겠습니다. 지금까지 여러분들이 알고 있던 지구장을 다시 한번 기억해야 되고 지역장을 다시 한번 기억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은 지치는 그 자리에서 다시 한번 기억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러분의 심정이 지치는 원인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에게 그 원인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승리하는 사람이 가는 길을 막는 법이 없습니다. 정성을 다하고 나서는 사람을 하나님은 승리의 길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정성을 다했다면 낙망이 되고 지쳐서 떨어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뜻길에서 지치는 것은 하나님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중심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기로부터 시작하여 망하고 마는 것은 바로 타락한 후손임을 자증하는 것입니다. 자기로부터 출발한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한 것과 같은 것이 된다면 복귀는 자동적으로 되게요?
지금까지 쌓아 온 죄악의 역사를 탕감한다는 이 엄청난 말씀을 여러분은 들었을 텐데, 탕감복귀를 위한 최일선에 서서 하나님을 붙들고 몸부림쳐 보았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도면 도를 책임진 지구장, 군이면 군을 책임진 지역장, 면이면 면을 책임진 교회장을 중심삼고 진정으로 탕감복귀를 위한 최일선에 서서 사탄과 부딪쳐 봤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지내온 과거의 역사를 돌아보며 현재를 바라보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과거에서 현재까지 인식되고 기억된 것을 쇄신하고 새로운 기억과 인식이 여러분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도록 달려가야 합니다. 이러한 결의와 신념을 가진 여러분이 되지 않고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여러분은 무엇을 상기해야 할 것인가? 여러분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일을 하기 위해서는 어려움이 없을 수 없습니다. 당연히 어려움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어려움에 부딪칠 때마다, 노아 할아버지가 120년 동안 주위 사람들의 비난과 비소를 받으면서도 까뀌를 붙들고 나무를 깎아 방주를 짓던 모습을 회상해야 합니다. 또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3대를 거치며 천적인 인연을 회복시키고, 하나님이 찾으시던 본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애쓴 노고를 여러분은 망각하지 말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위하여 노아가 걸은 120년이 얼마나 어려웠던 기간이었습니까?
지금까지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뜻 앞에 서지 못하고 수많은 민족에게 학대를 받고 세계적으로 배척받는 민족이 된 것도 예수를 모시지 못한 우(愚)를 범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어린 기도를 하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산정을 오르면서도, 자기 일신이 찢어지고 망하는 것을 개의치 아니하였습니다. 오로지 하나님과 더불어 결의하고 다짐했습니다. 이런 철석같은 내적 결의가 있었던 것을 여러분은 회상해야 되겠습니다.
어느 한때에 여러분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던 예수와 같이 ‘나의 아버지여!’ 하고 울면서 기도해 본 적이 있습니까? 비난과 비소와 조롱과 채찍질에도 굴하지 않고 죽음을 각오하면서 십자가를 등에 지고 골고다 산정을 향하여 나아가던 예수의 입장에 서 보았습니까? 또 우리 선조들의 모든 과거의 인연을 다시 회상해 보았습니까? 그 역사적인 사연들이 오늘 여러분 앞에 다시 재현되고 여러분에 의해 탕감되어야 하는 것이 복귀섭리의 원칙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대에 여러분을 그런 조건 앞에 내세운 것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노아 아브라함 모세처럼 하나님의 설움과 슬픔을 헤아리고, 역사적인 선조들의 심정을 헤아릴 줄 아는 자신이 되겠다고 몸부림치며 자신을 채찍질하는 여러분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눈물을 짓게 될 때 값없는 눈물이 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낯선 사람의 말 한마디에 팔려 가는 싸구려가 되지 말라는 것이요, 한 사람의 말에 자기의 생명 길을 저버리는 값싼 사람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태풍이 불어올지라도 여러분들은 꿋꿋이 설 수 있고, 원수가 몰려와도 그 원수를 무찌를 수 있는 무기가 되겠다고 다짐해야 합니다. 이렇게 다짐하는 여러분들이 되었으면 되었지, 밀려오는 폭풍과 어지러운 환경 가운데서 스스로를 무너뜨리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역사적인 노정에서 예수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어린 기도를 하고, 골고다를 향해 가던 심정을 생활 속에서 얼마나 체휼해 봤습니까? 노아가 120년 동안 참아 나오던 그 노정을 여러분은 얼마나 걸어 봤습니까? 모세가 자기의 영광을 팽개쳐 버리고, 조국인 이스라엘에 대한 애국정신에 불타서 죽음을 개의치 않고, 하나님의 뜻만을 향하여 나아가던 그 노정을 얼마나 걸어 봤습니까? 여러분들은 역사를 더듬어 올라가 그들을 위로해 줄 수 있는 각자가 되겠다고 하며 나서야 됩니다. 모든 선조들을 그런 자리에서 위로해 주어야 하는 여러분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고 나면 지치려야 지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선조들을 보게 될 때도 여러분은 지칠 수 없습니다. 그래야만 지난날 선조들이 실수한 것을 복귀할 수 있는 하나의 조건이라도 세울 수 있는 것입니다. 선조들이 해 놓은 것만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러분은 하나님을 중심삼고 생각하지 않고 자기 개인을 중심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없어서 비참하고, 아무리 괴로운 일이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아들딸을 잃어버리셨을 때의 서러운 심정과 잃어버린 아들딸을 찾기 위해서 6천년 동안이나 걸어오신 외로운 발걸음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역사노정에서 슬픔과 저주와 처참한 환경에 부딪쳐 나오시면서도 어느 한 날도 우리를 불효자로 생각하시지 않고 오히려 우리들을 구해 주시려고 섭리해 나오고 계십니다. 새로운 소망의 천국을 꿈꾸며 구원섭리를 해 나오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생각할 때, 여러분은 그러한 하나님의 입장에 입각하여서 생각하고 그분이 하시는 일에 동참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역사적인 선조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러한 것을 생각하고, 이런 생각을 실지로 느낀다면 낙망하고 지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듣고도 확실히 인식되지 않으면 기도해요, 기도. 복귀원리를 중심삼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 해와를 창조하실 때 얼마나 많은 정성을 들여서 창조하셨겠습니까? 그것도 모르고 아담 해와는 타락했습니다. 아담과 해와가 타락하였을 때 하나님은 얼마나 슬펐겠습니까? 아담 해와가 타락하자 하나님은 가인과 아벨을 중심삼고 탕감복귀하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깨졌을 때 하나님의 심정은 얼마나 슬펐겠습니까? 여러분이 만약 그러한 자리에 섰더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여러분은 그래서는 안 되겠습니다.
여러분은 노아를 중심삼고 노아의 입장에서 기도해 봐야 합니다. 아브라함이면 아브라함, 모세면 모세의 입장에서 기도해 봐야 합니다. 세례 요한이면 세례 요한의 입장에서 기도해 봐야 합니다. 예수를 알아보아야 했는데도 알아보지 못한 처량한 세례 요한의 입장이 되어 기도해 보라는 것입니다. 또한 3년 공생애노정을 가면서 허덕이던 예수의 입장에서 기도해 봐야 합니다. 배반한 민족을 전부 수습하여 하나님의 제단을 꾸며 놓고 승리의 결과를 하나님께 돌려 드려야 할 책임을 짊어진 예수의 입장에서 기도해 보라는 것이요, 이스라엘 민족만이 아니라 타락한 수많은 세계의 인류를 복귀시켜야 할 책임을 짊어진 예수의 입장에서 기도해 봐야 합니다. 또 지금까지 여러분이 본 선생님을 중심삼고 선생님의 입장이 되어서 기도해 봐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무엇을 생각하고, 무슨 기도를 해야 할 것인가? 여러분의 조그만 마을, 군, 도를 생각하고 기도하는 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현재 한국을 중심삼고 움직여 나가는 데에도 복잡한 사연이 많겠지만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보다 더 엄청난 세계적인 문제가 가로놓여 있는데 여러분은 그것을 염려하고 기도하며 나가야 할 입장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국내에서 벌어지는 고통거리는 고통거리로 삼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지칠 수 있겠습니까? 더욱이나 피끓는 20대 청년 남녀들이 말입니다. 그래서 통일교회에는 젊은 사람들이 많아요.
만약 이러한 환경에서 여러분들에게 총칼을 들고 나서라 할 때 참소하는 무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최후의 백병전에서 총칼을 뺏고 혈투전을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텐데도 불구하고, 그러한 자리에서 자기 개체만을 사랑하기에 허덕이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여러분의 지구장, 지역장들이 갖지 못한 환영의 한 때, 더욱이 이 강토 이 지역에 와서 천대받고 환영받지 못한 선조들을 대신하여 여러분이 환영 받게 될 때에는 감사해야 합니다. 그들이 꿈속에서라도 나타나면 여러분은 그들에게 ‘내가 받지 않겠으니 당신이 받으십시오.’라고 할 수 있는 내적인 심정적 기준을 갖고서 좋아해야지, 그렇지 못할 때는 자기도 모르게 끌려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자리에 나가게 될 때는 단발을 하고 나가야 합니다. 단발을 하고 허리띠를 졸라매고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자신의 눈 앞에 나타난 것을 보고 웃을 수 있는 가능성이 많다는 것입니다. 소화시킬 수 있는 관점에서 그것을 대하고 그때마다 하나님을 부여안고 기도해야 됩니다. 여러분은 아브라함이 대하지 못했던 이상과 노아가 풀지 못한 한, 우리의 선조들이 대하지 못한 환경을 하나님을 거쳐 역대의 선조들 앞에 돌려주어야 합니다. 나는 종의 종이기에 환영을 받기에 부족하다는 태도를 가지고 대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심정적인 기준에서 낙오되거나 사탄에게 절대로 끌려 다니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게 될 때 십중팔구 끌려 다니게 됩니다.
경제복귀를 강조하고 나오는 이때는 더더욱 그러합니다. 지금까지 생활한 모든 배후를 생각해 볼 때, 여러분이 지친다면 이것이 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지역장들이 과거에는 천 원을 구하는 것을 하늘의 별을 따는 것 같이 어려워했는데 이제는 만 원도 우습게 생각하고, 십만 원도 우습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지금까지 기업을 통해서 경제복귀를 강조해 온 것은 그것이 여러분에게 생명의 터전이 되고, 하나님의 발판이 되어 심정을 돋우는 데에 도움이 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도리어 심정을 팔아먹는 하나의 재료로 이용하게끔 된 것을 생각하니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이런 문제 저런 문제를 생각할 때 심정적인 내적 기대의 조성을 재차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을 대신하고 민족을 위하여 나선 여러분이 반공강의를 하는 것은 몇몇 사람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귀도상서 공산주의는 필연코 쳐부셔야 할 사탄의 세력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승리하는 민족을 세우시려고 애쓰기 때문에 민족 전체가 환영하는 그날이 오기 전에는 여러분이 환영받을 수 없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민족이 환영할 때 여러분이 앞에 서는 것보다 선조로 왔다 간 모든 의인들을 앞에 세워서 하나님이 기뻐하시게 하겠다는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대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제 여러분은 환영받는 그 자리에 서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과정적인 현상입니다. 아직까지 여러분에게는 넘어가야 할 고개가 많이 남아 있고 달려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 길을 가는 데 있어서 방해 되는 요건이 있어도 그것을 기어코 넘어가겠다는 여러분들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되겠습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지금까지 쌓아 온 전통을 여지없이 팔아먹게 되는 것입니다. 7년노정의 싸움에서 세워온 공로 중의 제일은 바로 전통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팔아먹게 된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지금까지 잠바를 입고 나가서 일했습니다. 누더기 옷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랑하는 입장에서 입었어요. 그렇지만 대사에는 환경적인 요건을 갖추어야 되겠고, 대외적인 위신도 세워야 되겠기에 이제는 양복을 입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대하기 위함이요, 하나님의 위신을 세우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서는 옛날의 그 모습을 갖추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선생님이 그러한 모습을 갖추는 것을 섭섭해 하거나 싫어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됩니다. 이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사탄입니다.
공장이 발전되는 것은 공장장이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시내에 나갈 때는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갑니다. 공장으로 돌아오면 다시 옷을 갈아입어야 합니다. 그런데 다시 돌아와서도 입고 나갔던 새옷을 벗고 작업복으로 갈아입기 싫어한다면 그는 공장장이 될 수 없습니다. 즉 다시 돌아와서 그 기름 묻은 옷을 입기 싫어하고 기계를 만지기 싫어하게 되면, 그는 자기가 닦아 놓은 터전을 상실하게 됩니다. 여러분도 그 같은 위치에 있기가 쉬워요. 그런데 여러분이 비참한 환경에 처하게 되어 눈물 흘리며 유리고객하게 될 때, 같은 길을 걸으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선생님은 공장에 갈 때 될 수 있으면 양복을 입고 가지 않습니다. 선생님이 마음으로 결심한 책임이 있기 때문에 같이 일하지 못하는 것이 한입니다.
여러분을 길러 줄 보금자리는 어디냐? 환영받는 자리가 보금자리가 아닙니다. 천국이나 궁전처럼 만민이 우러러보는 자리나 쉴 수 있는 안식의 터전이 보금자리가 아닙니다. 그런 자리를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싸워 승리한 자리에서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곳이 보금자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해주시는 위로를 크게 여겨야지, 세상에서 보내 주는 위로를 좋아하면 나라를 팔아먹게 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합니다.
금년에는 경제적 기반 확립을 위해서 움직여야 합니다. 여러분이 사업을 나가니 기성교인들이 ‘통일교회 젊은이들은 장사한다, 비종교 단체다’라고 하는데, 그것에 개의치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경제복귀 하는 데 있어서 호화찬란한 자리에서 하는 것을 선생님은 원치 않습니다. 환영받는 자리에서 하는 것은 더더욱 원치 않습니다. 오지 말라고 해도 가야 합니다.
민족이 전부 환영했더라면 지금까지 복귀섭리를 해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는 삼천만 민족이 서로 위할 수 있는 그런 통일의 민족을 만들어 봤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좋은 자리에서 그것을 거두었다면 그것은 적은 탕감이 됩니다. 어려운 자리에서도 그것을 규합하여 거둔다면 더 귀하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고통스러울지라도 그 하나의 물건을 팔기 위하여 들이는 정성은 어떤 상인보다 더 진지해야 합니다. 다른 장사꾼보다 몇 배의 심정적인 기준을 갖게 되면 더 비싼 물건도 머리 숙이고 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소비자의 수가 금년에 얼마나 더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려면 보통 정성 가지고는 안 돼요.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자기의 책임진 분야로 돌아가서 만사에 대해 기도드리며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그래야 뜻을 이루는 거예요.
지역장들이 모인 데서 지구장이 큰소리치면 기분 나빠합니다. 기분 나빠할 수 있는 간판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어요? 그러나 기분 나빠할 수 있는 그런 자리가 망하는 자리가 아니요, 잘만 이겨낸다면 여러분이 승리할 수 있는 기반을 닦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돌아가게 되면 그냥 그대로 나갈 것이 아니라 이러한 전후좌우를 알고 하나님을 중심삼아서 지금까지의 자기 자세를 반성하고, 다시 한번 새로운 입장에서 움직여 주기를 바랍니다. 알겠지요? 「예.」
여러분, 지금은 시위시대예요, 시의시대예요? 그런데 요즘 시위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시의인지 시위인지 괜히 알쏭달쏭해 하지 마세요.
여러분은 시의시대, 즉 모심의 생활에 있어서 정확한 중심을 두고 나가야 됩니다. 하나님을 모시는 데에는 법도가 있습니다. 그 법도를 어길 때에는 하나님은 무척 노여워하시는 분입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가 자식의 말 한마디에 따라 가슴에 못이 박혔다, 빠졌다 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도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노여움이 많으신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노여움을 사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선생님도 선생님대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려고 합니다. 옷을 입을 때도 잘 입어야 합니다. 선생님도 옷을 잘 입은 사람을 보면 기분이 참 좋습니다. 그래서 선생님도 그래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양복을 입고 나왔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잠바를 입고 나왔을 것입니다.
면에서 칭찬받기 위해 생활하는 사람은 잘할 때는 칭찬을 받겠지만 거기에서 한번 실수하는 날에는 아주 완전히 망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이 면에서 칭찬받고서 군에서도 칭찬받겠다고 열심히 충성하면 살길이 남게 됩니다. 그러나 군에서도 칭찬을 받겠다고 눈이 벌개져서 돌아다니다가 한 번 실수하면 그 사람은 오히려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군을 잊어버리고 도를 위한 목표를 정하고 나가게 될 때는 군에서 실수하더라도 또 살아남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통일교인들은 하나님을 제일 사랑해서 하나님의 칭찬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세계의 어떠한 대통령이 해주는 칭찬이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은 체험만이 영원히 남아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을 수 있는 때가 못 되었습니다.
선생님은 우리 통일교회가 대한민국에서만 칭찬받기를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세계의 30억 인류가 칭찬한다 해도 그것에 만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수많은 영인들이 환영할 수 있고 하나님께서 고맙다고 칭찬할 수 있는 그 자리까지 나아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엄청나게 먼 기준입니다.
내가 3년 동안 수고하고 고생했으니 반드시 칭찬받아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면 그동안 수고한 것이 모두 허사가 되는 것입니다. 민족과 세계를 위해서 3년을 수고했더라도 아직까지 수고한 자리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생각하고 더 충성하겠다고 다짐해야 됩니다. 그러면 그 수고의 값이 점점 더 세계적으로 뻗어나가게 되어 맨 끝에는 크나큰 칭찬, 즉 세계적인 칭찬을 받을 수 있는 자리에 세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여러분들을 지역장을 시키고, 또 여러분들에게 한국을 책임지라고 한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전부 다 아프리카, 남미, 구라파 등 세계의 오대양 육대주로 내보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한국에는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일본 사람을 봐도 전부 다 일본을 떠나서 세계 복귀를 위해 힘쓰고 있는데, 한국의 통일교회 청년들 중에는 그런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있어요, 없어요? 「있습니다.」 있긴 뭐가 있어? 그러려면 여건을 갖추어야 됩니다.
여러분이 수고하고, 고생해 놓고 칭찬받겠다는 입장에 서면 그 여건을 갖출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에게 맡겨진 책임을 중심삼고 면을 통해서 군을, 군을 통해서 도를 움직이겠다고 생각해야 됩니다. 또 도를 통해서 이 나라를 움직이겠다고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이렇게 걸어왔습니다.
선생님은 조그만 토담집에서 어렵게 살면서도 오늘은 무슨 반찬을 먹었으니 내일은 또 어떤 것을 먹어야 할까 하는 그런 걱정 속에서 살지 않았습니다. 비록 옷은 남루하고 밥은 굶는 처지에 있었지만 생각만큼은 이 세계를 정복하고 하늘나라를 꼭 이루겠다고 했고, 그럴 수 있다고 큰소리를 꽝꽝 쳤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지방에 가서 단칸방 또는 동네 사람들이 들어가지 않는 방, 즉 나이가 많아 죽게 된 사람이 들어가 살다가 숨진 그런 땅에서 생활을 하게 되더라도 천하를 통일할 수 있는 터를 남겨야 합니다. 그리고 그 터 위에 교회를 세운다면 하늘이 얼마나 귀하게 여기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그 부락 하나만을 중심삼고 다닌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칭찬받은 것을 전체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지나가는 길손에게 점심 한 끼니를 대접하면 그 길손이 고맙다는 말을 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기분 나쁜 일이 생겼다고 해서 ‘아이쿠 나 억울해서 못살겠네.’ 하면서 자기 가슴에 맺힌 감정을 하나님 앞에 호소하는 그런 기도는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잘 극복하고 뜻을 위해 죽겠다는 자리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무슨 일에든지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을 해야지만 뜻 앞에 조건이 세워지는 것입니다. 이 조건에 걸리는 사람은 욕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욕심이 많은 사람은 눈앞에 있는 것은 다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조건에 걸린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누군 뭐 어떻고, 누군 뭐 어떻다고 하는 사람들은 전부 다 욕심이 많습니다. 아무리 없을망정 절대 그래서는 안 됩니다. 무엇이 없고, 무엇이 없고 하는 것도 다 시련 무대에서 하나님이 나를 교훈하기 위해서 나오는 것이요, 나를 교육시키기 위한 교재로 등장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참회하여 그 환경에서 여러분들은 책임을 다해야 됩니다. 알겠지요? 「예.」
여러분 시의가 무엇입니까? 모시는 거지요? 그러면 여러분은 얼마만큼 모셔 봤습니까?
여러분들은 어디에서든지 배고플 때나 혹은 몹시 어려울 때에 도움을 받게 되면 큰 고마움을 느낄 것입니다. 선생님도 그런 때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학창시절, 어려웠을 때 도와준 사람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7년 동안 선생님이 조건만 세우면 그때는 전부 다 갚으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지금까지 복귀의 길을 걸어오면서 서러움을 당하는 환경에 있을 때 선생님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들을 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즉 선생님이 신세진 것을 다 갚으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왜 안 갚았느냐? 그것은 지금 갚으면 작은 갚음밖에 안 되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이 한 가지 섭섭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선생님이 이북에서 피난을 내려올 때에 선생님에게 도움을 준 평안도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에 대해 뼈에 사무치게 고마워하고 있고, 지금도 그 고마움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이 7년노정이 끝나고 신세를 갚을 수 있는 때가 오면 우리 통일교회 교인들 집은 못 지어 주더라도 그에게 집을 지어 주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앞으로 융숭히 대접하여 본때를 보여야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선생님이 이렇게 다 마음에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사람이 어느 한때 식구들에게 와 가지고, ‘당신네 선생이 어려울 때에 내가 협조를 했으니 여러분들이 나를 도와주시오.’ 하는 것을 선생님이 보았을 때 무척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박복한 사람이로구만. 조금만 더 참지.’ 하고 생각했습니다. 선생님은 그렇게 배은망덕한 사람이 아닙니다. 선생님은 그렇게 하려는 깊은 뜻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예.」
여러분은 하나님을 모신 자로서 여러분이 기쁠 때 하나님을 얼마나 기쁘게 해 드렸습니까? 여러분들이 배고플 때 밥을 먹으면서 느끼는 고마움 이상으로 하나님을 모셔 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좋은 것을 먹을 때나 입을 때, 그리고 슬플 때나 어려울 때에도 항상 하나님을 모셔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에 기억될 수 있는 사연들을 남겨 놓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통일교회에서 출세하려면 지방 교회 교회장의 마음을 점령하여 그 교회장의 마음에 남아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즉 동네면 동네 가운데서 먼저 남아질 수 있는 사람, 교회장의 축복을 옮겨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지역장의 마음에 남아지고, 지구장의 마음에 남아지고, 더 나아가서는 협회장의 마음에 남아져야 합니다. 그래야 선생님의 마음에 남아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단계를 거쳐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윗사람들의 마음에 남아지려면 정성들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좋은 것 하나라도 있으면 더 주고 싶은 마음이 여러분에게 충만해야 됩니다.
심정의 세계에서는 물건을 갖고 통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으로 통하는 것입니다.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윗사람이 슬플 때 같이 슬퍼할 수 있고, 기쁠 때 같이 기뻐할 수 있는 인연을 가지고 통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슬퍼할 때 하나님도 슬퍼하시고, 그가 기뻐할 때 하나님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이러한 단계를 거치지 않고 지구장을 대하고, 지역장을 대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모시는 데 있어서는 단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 교인이 되었다 할진대는 누구든지 7년노정을 다 거쳐야 합니다. 즉 7년노정은 모심의 생활에 대한 준비의 과정으로서 타락한 인간들에게 절대적인 과정으로 남아져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7년노정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있습니다. 다 잊어버렸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7년노정이 뭐야? 다 그저 그렇지.’ 이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정으로 말하면 두 사람이 살면 네 사람이 사는 생활을 해야 됩니다. 즉 부모를 모셔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만 모셔 가지고는 안 됩니다. 더 나아가서 그 아들까지 모셔야 된다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자신이 사위기대를 복귀하기 위해서는 부모만 모셔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그 아들까지 모셔야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여러분의 모든 정성을 그 앞에 연결시켜야 됩니다. 그렇게 되면 외적인 면에서는 두 사람이 살지만 내적인 면에서는 자그마치 네 사람, 다섯 사람의 생활 터전이 되는 것입니다.
부모를 모시는 데는 3년을 모셔야 됩니다. 왜 3년이냐? 3수 과정을 한꺼번에 복귀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가정을 중심삼고 살게 될 때에는, 선생님이 언제 어느 때고 예고 없이 여러분이 사는 집을 방문하더라도 선생님이 잘 수 있는 방이 있어야 됩니다. 방이 없으면 자리라도 있어야 합니다. 그 자리는 정성들인 곳이라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자리를 중심삼고 단간방(단칸방이라는 뜻의 북한어) 이라도 언제나 정성들인 한 곳을 만들어 놓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부모를 모실 수 있는 한 날이 오면 옷을 입어도 준비된 옷을 입고, 신발을 신어도 준비된 신발을 신고 깨끗하게 해 가지고 모실 준비를 해야 합니다. 빗자루를 들고 마당을 쓸더라도 한 번 더 쓸어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부모를 천번 만번 회상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들, 그렇게 해 봤습니까? 그렇게 해 봤어요? 살아 있는 교회가 되려면 다 그래야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는 아버님이 와서 기도할 수 있는 곳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평소에 심정의 촛불을 켜놓고 정성을 들여야 됩니다.
요즈음 지역장들을 보게 되면 껄렁껄렁한 지역장들이 많습니다. 총 팔러 다니다 보니 예배드리는 날이 됐는데도 예배는 식구들끼리 보고 있고 자기는 그날도 모르는 지역장들이 많습니다. 제사는 누가 관리하느냐? 제사장이 관리하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제사는 객이 관리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지방에서도 공적인 회합 자리를 중요시하지 않는다면 발전을 못합니다. 알겠어요, 지역장들? 구역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일날 예배 때에는 반드시 목욕재계하고 하나님 앞에 경배를 드리고, 또한 성지에 찾아가서 기도해야 합니다. 비록 찾아드는 사람이 없을망정 하나님이 그 부락을 굽어살피고 거기에 동역할 수 있는 심정적인 터전을 닦아 놓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혼자 기도하며 눈물 흘리는 그 자리는 절대 외롭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같이하시니 절대로 외롭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3년 이상 여러분들이 정성을 들였는데도 그 동네에서 찾는 자가 없다면 그 동네는 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손톱을 깎는 그 시간에도 아버님을 모실 수 있는 그때 그 시간이 오면 어떻게 할 것이냐? 어떻게 효도를 할 것이냐? 그리고 어떤 모습으로 아버님을 모실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아버님을 어느 강가에서 만날 수 있을 것인가! 어떤 곳에서 만날 수 있을 것인가!
여러분들이 두메산골에 들어가서 생활하게 되면 우리 통일교회 식구들이 찾아와 주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라게 되고, 또 식구 중에 누가 아픈 것이 아닌가 하고 염려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와 제일 가까운 식구를 맞이했으면 좋겠다. 또 선생님을 맞이했으면, 지구장을 맞이했으면, 지역장을 맞이했으면 좋겠다 하는 그리움이 있어야 합니다.
매일같이 그리워하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모시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누구를 그리워하든 항상 그리움에 사무쳐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밤 12시만 되면 ‘야야! 자자’ 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걱정을 끼쳐 드리는 사람입니다. 천국은 밤과 낮이 없습니다. 심정의 인연을 안고 나올 때는 밤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남에게 반대받고 핍박받는 말을 듣게 되면 그 사람보다 더 분해하고 가슴 아파하고, 칭찬받는 사람을 보게 되면 그 사람을 지역장이나 지구장에게 보고해 가지고 자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전부 보고해 가지고 자랑하고 싶은 마음을 여러분이 가져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워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은 모심의 생활을 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리워하는 마음, 즉 본부를 그리워하고, 지구를 그리워하고, 지역을 그리워하고, 교회를 그리워하고, 식구를 그리워하고, 형제를 그리워해야 합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생활하는 사람은 절대로 외롭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으로 인하여 반드시 번식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기준 밑에서 교회를 세워야 정상적인 교회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의 교회는 어떻습니까? 전부 다 냉랭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그리움의 기반이 돼 있지 못하면 여러분들이 사진이라도 보면서 혼잣말로 위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말없이 엮어진 사연은 더 멋진 것입니다. 그러면 아버님이 그동안 흘렸던 그 눈물이 하나의 감정으로 녹아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게 해 봤어요?
그 흘리는 눈물 가운데서 하늘과 통할 수 있는 감정이 생기는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아버지를 부를 때에 그 음성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식구들이 어려운 모습을 볼 때 그 일이 남의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사는 동네에 전도대원들이 왔으면 ‘그들이 내 일을 대신하기 위해서 왔으니 그들에게 가 보고 싶다.’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효자는 아버지의 일을 대신하여 책임진 입장이기 때문에 아버지의 일을 대신하여 책임지는 것도 물론이지만, 그 주위에 정성의 손을 뻗쳐야 할 곳이 있으면 그곳에 가 보고 싶어하고, 또 그곳에 가서 눈물을 흘리며 그곳 식구들과 같이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마음이 없는 사람은 선생님을 모실 수 없습니다. 그런 그리운 마음을 갖지 못한 사람은 시의(侍義)의 생활권을 이탈한 사람입니다. 이미 하나님과 같은 목적을 갖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신자들이 예수님의 사랑의 신부인 신앙의 형제들을 사랑하면 그것은 예수님을 대신하여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사람은 빨리 탕감복귀되는 것입니다.
완전한 플러스는 완전한 마이너스를 낳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완전하게 심정이 일치되면 완전한 심정의 대상자가 나와 가지고, 신랑 신부의 흠모의 심정을 연하여서 종적으로 그런 관계를 맺을 수 없으면 횡적으로 동지, 혹은 식구, 혹은 동포의 관계를 맺어 번식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사람은 배가 고프면 음식을 많이 먹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배가 고프더라도 음식을 옆에 있는 사람에게 나누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보다 더 충성스런 자리에 있었던 선지선열들이 여러분과 같은 입장에서 하나님의 뜻을 세우지 못했기 때문에 한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체가 하나님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그리운 마음이 있어요? 지구장이 그립고, 지역장이 그리울 때가 있습니까? 또 선생님이 그립고 보고 싶을 때가 있습니까? 「예.」 가끔 있겠지. 여러분들이 핍박받고 억울할 때는 ‘선생님! 선생님을 사랑하는 만큼 저를 사랑해 주십시오.’ 하지만 자기가 조금만 편안하고 기쁘게 되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매 맞고 서러운 입장에 들어갈 때는 선생님을 생각 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에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환경이 점점 좋아져서 통일교회를 환영하는 사람들이 많아질 때 그때가 바로 통일교회 신자들 앞에는 위기의 비상시대인 것입니다. 알겠어요? 「예.」
우선 주머니에 돈이 좀 있으면 기도할 마음도 안 생긴다 이겁니다. 여러분, 그래요 안 그래요? 그래서 도의 길을 가는 사람은 전부 다 거지 사촌이 되라는 것입니다. 집을 버리고 산중 수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천국 문을 들어갈 때까지는 거지 모양으로 들어갈 수 있으나 천국 생활을 할 때는 안 되기 때문에 우리는 가려서 가야 합니다.
그 대신 심정만은 언제나 한결 같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심정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지금까지 그런 분야에서는 도의적으로 나올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 종적 관계에 있어서 하늘적인 기준을 세우고 종횡을 탕감해야 되는 것입니다. 상하․전후․좌우입니다. 우좌․후전․하상 그렇게 되어 있어요? 하상․후전․우좌 그렇게 되어 있어요? 「상하․전후․좌우로 되어 있습니다.」 일체의 모든 영양은 뿌리에서부터 올라오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정성들이는 식구들이나 가정들을 제일 무서워합니다. 그리고 고생한 식구를 보면 그 식구가 고생했다는 것을 선생님은 대번에 압니다.
정성들인 곳은 함부로 찾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에 들어와서 선배들이 하늘을 향해 정성들인 터전에서 잘못하면 영계에 가서 전부 걸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고 통일교회에 들어와서 역적이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영계에서 7대가 걸리게 됩니다. 선생님이 딱 점만 쳐 놓으면 그들은 저 세상에 가서 걸리는 것입니다. 이런 원통한 일이 어디 있어요? 악한 세계가 망하게 될 때는 그들이 제일 먼저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시의의 생활을 해야 합니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 첫마디 말을 하늘 앞에 바치고, 집을 나설 때도 첫걸음을 오른발로 내디디며 하늘 앞에 바쳐야 합니다. 평소의 습관이 이렇게 된다면 여러분의 생활은 시의의 생활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여러분들은 원칙적인 기준에서 생활적인 태도를 취해 주기를 부탁합니다.
이제 여러분은 스스로 전도 기반을 닦아야 됩니다. 그런데 지금 여러분들의 마음 자세 가지고 되겠습니까? 더구나 여자들도 전도를 나가야 됩니다. 통일교회 식구들은 여자라도 석 달 이상 전도를 나가야 됩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 여자들은 앞으로 시집갈 나이가 되어도 시집 안 보내려고 합니다. 그것은 탕감조건이 남아 있기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
또 장가들지 않은 청년들을 뭐라고 하지요? 총각이라고 합니다. 총각이라면 통일교회에 와서 여자들을 데려가야 됩니다. 그래서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다는 것입니다. 틀림없이 눈이 빠지도록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많이 체험을 해 보아야 됩니다. 즉 영적인 감을 통하여 상대방이 어떠한 감을 가지고 오느냐 하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런데 대부분 영계를 통하여 예언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실수합니다. 그러므로 그걸 잘 판정해 나가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계에서 가르쳐 준다고 함부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부 다 소화시켜 정상적인 생을 추구하기에 맞게끔 위치를 바꿔 가지고 처리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펑크(punk)가 나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그런 것을 체휼한 사람입니다. 선생님이 감옥에 들어가 있을 때 얼마나 처량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선생님에게 많은 것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럴 때마다 ‘아휴! 저렇게 까마득한 것을 어떻게 헤쳐 나가나?’ 하면서 하나님을 원망하려면 천만 가지의 사연을 가지고 원망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내로 태어났으니 망하더라도 천지를 창조하신 위대한 하나님을 걸어 놓고 일을 하다가 멋지게 망하자고 했습니다. 사실 그래야 사내답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충성을 한다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백 퍼센트 배척하더라도 그것은 멋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기를 백 퍼센트 배척하는 자리에 들어가게 되면 천번 만번 하나님을 배반하고, 원수시하면서 원수를 갚으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자리에서도 허허 웃고 ‘그쯤 해 가지고는 내 마음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하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야, 이 녀석 봐라, 천만 사람 이상의 기백을 가지고 있구나!’ 하신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이걸 생각하고 결심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선생님을 사랑하시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사랑하지 않는다면, 선생님은 천만 한 고비에 이르면 틀림없이 쓰러질 것입니다. 그러나 등뼈가 튀어나오고 엉금엉금 기어다니고 죽게 되더라도 마음에 가진 결심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고문을 많이 당했습니다. 온 사지에 전부 다 죽은피가 돌 만큼, 또 피가 몇 사발 쏟아질 만큼 매도 많이 맞아 봤습니다.
왜정시대에는 군홧발에 배를 얻어맞는 고문도 당했습니다. 두 녀석은 좌우에서 손을 잡고, 또 두 녀석은 위에서 밟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뱃가죽이 어떻게 되겠어요? 미어지나요? 터지나요? 그래서 변소에 가서 한 번 앉았다가 일어나 보세요. 그 얼마나 괴롭겠어요. 그렇지만 선생님은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야! 멋지다는 것입니다. (웃음) 하나님을 위해서 그렇게 했다고 하는 것은 세상에 없는 것입니다. (웃음) 한번 생각해 보세요. 안 그렇겠어요? 그러고도 나갈 때는 그들에게 친절하게 하고 나와야 됩니다. 한 대여섯 시간 동안 심하게 고문을 받고는 기절하여 벌렁 나가쓰러질 때 그때 오히려 그에게 동정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때 근성이 진짜입니다. 아! 그때 그 아무개는 어디 있을까 하고 생각나는 것입니다. 향락을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이런 것을 아무리 설명을 해도 절대 통하지가 않습니다.
그런 자리에서는 아버지와 살던 그때가 그립더라는 것입니다. 매를 맞아 가지고 피를 토하고, 살이 뜨거워지는 그러한 자리에서도 ‘이 피는 역사를 배반했던 선조의 피다. 나는 아직까지 갈 길이 남아 있으니 짊어질 십자가가 있거든 더 지워 달라.’고 하는 기도를 한 나예요. 이 얼마나 사나이다운 기도입니까? 선생님이 그런 얘기를 하려면 끝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그런 노정을 걸어왔습니다.
참고 나가지만 어느 한 날 갚을 날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아버지 참으시옵소서. 한민족을 심판하시려면 최후의 심판을 하시기 전에 저에게 통고하고 심판하십시오. 또한 세계를 심판하시려면 최후에 저에게 통고하고 심판하십시오….
그런 것을 생각할 때 팔자타령이나 하고 신세타령이나 하는 사람에 비하면 얼마나 멋진 사나이예요? 역사시대에 한 번 나타났다가 영계에 가더라도 세계적으로 추앙받는 사람이 되어 보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멋진 일이겠습니까? 그렇게 하는 것은 한 번밖에 없습니다. 이때를 놓치면 없다는 것입니다. 그 기회를 포착해야 합니다.
아버님, 1967년 2월 15일 저녁을 맞이하였나이다. 여기에 모인 자녀들이 7년 고비 길의 한 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천만 가지의 사정을 품고 이 자리에 참석하였사옵니다.
여기에 머무는 시간 동안 아버지께서 보호하여 주시고, 권고하여 주신 은사를 진정으로 감사드리옵니다.
지난날의 한을 남길 수 있는 모든 여건들을 망각하게 해주시고, 새로운 소망의 심정으로 대치하게 하시옵고, 아버님의 장중에 붙들림을 당하여 거룩한 동산을 향해 아버님의 명령을 따라갈 수 있는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옵니다.
아버님, 저에게 있어서는 이제 48년의 새로운 출발을 하는 날이오니, 이 한 해에 남긴 바의 사명을 위하여 온갖 충성을 다할 수 있게 당신이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당신께서 요구하시는 책임 앞에 미진한 자리를 남겨 부끄러운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기 위하여, 힘을 다하고 충성을 다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아버님, 남한 각지에서 몰려온 자녀들의 마음 위에 새로이 맞이하는 이 날부터 당신의 뜻하시는 섭리의 뜻 앞에 새로운 마음 충효의 심정을 더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이 남기신 복귀의 터전 앞에 몸부림치면서 아버지의 염려를 풀어 보겠다고 자나 깨나, 먹으나 굶으나, 죽으나 사나 전체를 개의치 아니하고 주장할 수 있는, 충정의 도리를 갖추겠다고 할 수 있는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진실로 바라옵나이다.
아버지여, 여기에 참석하지 못한 뭇 자녀들이 남한 각지에 널려 있사오니, 이 시간 어떠한 사정이 임하여 있더라도 당신의 일률적인 은사로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더욱이 이 시간 머리 숙여 기도하는 자녀가 있거들랑 당신의 각별한 은사의 자리에 처하게 하시옵소서. 새로운 역사적인 인연을 그 마음 몸에 더더욱 지니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40개국의 120개 성지를 중심삼고 매일 그 어떤 성지의 일각을 책임지고 기도하는 자녀들이 있사옵니까? 그곳을 찾아가는 발걸음을 재촉하는 자녀들이 있사올진대는 아버지여, 긍휼의 마음으로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한국 땅을 그리워하고, 한국에 있는 스승을 마음으로 동경하는 그 마음이 거리가 멀면 멀수록 가중된 심정이 넘쳐흐를 줄 알고 있사오니, 외로울 때 더욱 외로운 눈물을, 슬플 때 더욱 가슴 맺히는 슬픔을 가지고 아버지를 부르는 곳곳마다 당신의 사랑의 손길을 더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세계의 인류가 외면해 온 형제들의 잘못을 아버지 앞에 탕감함과 동시에 저희들이 그들 앞에 보탬이 되고, 도움이 되며, 힘의 원천이 될 수 있는 그 무엇을 영적으로라도 나눠줄 줄 아는 조국 강토를 지키는 참자녀의 모습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여, 여기 모인 당신의 자녀들 이제 새로운 결의와 더불어 싸움터를 향하여 나가겠습니다.
이제 헤어지면 다시 만날 수 있는 시간이 여의치 못한 저희들에게 다시 만날 때는 부끄러운 자세로 상봉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서로 자랑스럽고 아버지께서 기뻐하실 수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야 되겠습니다.
일생에 있어서 아버지께서 기뻐하실 수 있는 자세를 갖춰 가지고 아버지 심중에 기억될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것은 남들이 바라는 여건을 다 갖출 수 없는 자리에서는 가능하고, 남들이 원하는 여건을 다 지닐 수 있는 자리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세상이 바라는 모든 것을 잃어버릴지라도 당신이 요구하시는 그 하나의 귀한 것을 갖추기 위하여 충성하고, 온갖 심혈을 기울이고, 희생을 각오하고 나설 줄 아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돌아가는 당신의 아들딸 앞에 권고한 말씀을 잊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더더욱 새로운 입장에서 이 시대가 요구하는 사명과 이 시대가 절박하게 추구하는 각자의 태도를 저희들이 망각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지금까지의 생활 터전을 혁신하여 새로운 각도에서 아버지를 바라보고 뜻을 대할 수 있는 당신의 자녀들이 될 수 있도록 그들의 심정을 다듬어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 지금까지 아무 사고 없이 저희들을 보호하여 주신 것을 감사드리옵니다. 이제 오가는 절차 전부가 아버지의 뜻 앞에 보탬이 되고, 특별히 이번 기간이 저희들이 움직이는 행로에 있어서 빛의 조건을 세울 수 있는 기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1967년도를 중심삼고 계획하는 저희들의 4대 조건이 자나 깨나 일편단심 그 마음에 심어지게 하여 주시옵고, 그 뜻을 따라 간곡한 행보를 갖추어 가는 각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들은 남한 땅에 있는 동포들을 복귀할 뿐만 아니라 북한 땅에 있는 동포들까지도 복귀해야 되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사랑하시는 복지의 터전을 복귀해야 할 사명이 저희들에게 있사오니, 이제 저희들이 새로운 각오와 신념을 가지고 남한 땅을 대하여 때가 이르기 전에 책임을 완수하고, 북한 땅을 향하여 총진군하고 총진격하는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한반도를 새로운 이념권 내에 몰아넣기 위한 역사의 운세가 이 통일교회에 감돌고 있사오니 저희가 이것을 다 감당하여 세계 인류를 몰아넣을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아버지, 수많은 영계의 영인들을 동원하고 선한 세계를 동원하여 지상에 뜻을 대할 수 있는 후손들을 몰아넣게 하여 주시옵고, 앞으로 서양까지도 아버지 품에 품길 수 있는 새로운 약속의 세계가 어서 속히 임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지금까지 무한히 소망하고 무한히 기도한 모든 요건들이 땅에 떨어지지 않고 실질적인 결과를 갖추게 해주시고,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고 찬양을 드릴 수 있는 조건들이 어서 속히 이 천지간에 이루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아버지의 기쁜 모습을 대할 수 있고, 영광된 승리로 말미암아 아버지를 친히 모시고 살 수 있는 그 나라 그 세계가 어서 속히 이루어지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 각자 각자의 계획이 아버지께서 뜻하신 뜻과 일치하고, 천적이고 일률적인 은사와 더불어 일치하여 승리의 결정이 내려지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지금까지의 은사를 감사드리면서 이 모든 전부를 아버님 앞에 맡겼사오니 모든 전체를 친히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참부모님의 성호 받들어서 간절히 기도하였사옵나이다. 아멘.
가인 아벨의 복귀가 가장 큰 문제입니다.
하늘을 중심삼고 볼 때 가인과 아벨의 다른 점은 아벨은 좀더 공적인 입장이요, 가인은 그 다음으로 공적인 입장입니다. 그러므로 작은 것에서 큰 것에 이르기까지 가인은 아벨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모든 물건은 그 물건에 대하여 높은 가치를 부여한 인간의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갑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을 을이 가치 있게 생각한다면, 그 물건은 을의 소유라는 입장에서 갑은 을의 길을 통해야 합니다. 복귀 과정에 있어서는 이것을 생활의 원칙으로 해야 합니다.
아벨적인 사람은 때가 오기 전에 아벨의 입장에 설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아벨이 될 때까지 세워야 할 정성을 다 세우지 않으면 그 자리에 설 수 없습니다. 아벨은 세워야 할 정성을 다 세워야만 조건에 걸리지 않습니다. 아벨의 입장에 있는 사람은 지나친 월권행위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벨의 입장에 있더라도 낮은 기준에 서는 것이 가장 안전한 것입니다.
자기의 관(觀)을 갖고 행동하면 전체가 걸립니다. 사장이 책임 못할 때, 다른 사람을 자의로 세워 그 일을 성공시킨다 하더라도, 그것은 정성이 없는 터전 위에서 된 일이기 때문에 실패한 탕감을 받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겸손하게 낮은 자세로 생활적인 면에서 아벨적인 기준을 세워야 합니다.
아벨적인 입장에 있는 자신을 가인적인 존재가 참소하더라도 가인을 반대하는 입장에 서서는 안 됩니다. 다만 아벨의 사명을 다한 후에야 칠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고생을 하라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아벨이 민족 앞에 고난의 조건을 세우면 반대하는 그 가인을 칠 수 있습니다.
3년 이상 묵묵히 하늘 앞에 실적을 쌓아야 합니다. 대한민국의 외적인 책임자가 정성들인 것보다도 더 많은 정성을 들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공장에서 선생님이 선봉에 선 원인이 있습니다. 선한 일을 하기 위해서는 피 흘리고 정성들이고 온유겸손하고 형제 앞에 우애하고 땅을 대해 사랑해야 합니다. 그 누가 반대하더라도 선으로써 대하면 백 퍼센트 굴복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교만해서는 안 됩니다. 먼저 줄 수 있는 사람이 주체입니다.
선생님은 모든 일에 아벨적인 책임을 다해 왔습니다. 이것이 선생님의 생활 철학입니다. 더 큰 공적인 것 앞에 설 때는 겸손해야 합니다. 사상적인 면에서 선생님은 영계에서도 투쟁했고 지상에서도 투쟁했습니다.
상업 면에서 보더라도 정성들인 면이 커야 합니다. 그들의 정성에 보답하고 공장의 기반을 갖출 때까지는 노력해야 합니다. 아직도 노력해야 할 부분이 남아 있기 때문에, 하늘 앞에 돈을 벌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만약 이 공장이 실패하더라도 여러분의 태도 여하에 따라 실패를 가져올 수도 있고 성공을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선생님은 선생님이 하려는 일에 이러쿵 저러쿵 말하는 사람을 제일 싫어합니다. 모든 일에는 원칙적인 기준이 있습니다. 효원이가 방에 들어올 때도 그러하지만, 어머니께 대해서도 아는 사람과 같은 입장에 서지 않습니다. 그는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고, 하늘의 일이 잘못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일을 백 퍼센트 다한 후에 싸우는 것은 발전을 위한 것이 됩니다. 유언은 책임을 다한 사람만이 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성경에서 모든 것을 가르쳐 줄 수 없었던 것은 인간이 책임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가인을 복귀하고자 하는 책임감과 의욕과 정성이 있어야 합니다.
천지개벽이 되면 세상의 부모들을 축복시키는 것이 선생님의 소망입니다.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타락된 인간사회는 사탄을 중심하고 밤 기간에 해당하는 때에 이루어진 사회이기 때문에 사랑에 만족 못합니다. 그러므로 끝날은 사랑을 중심하고 밤을 당하는 때를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의 혼란이 옵니다.
말세가 되면 사랑의 윤리를 세울 수 없고, 부모 부부 부자의 사랑에 혼란이 일어나므로 정신적인 병이 많아집니다. 이것은 선진국에서 먼저 시작됩니다. 그러나 민주세계의 이념으로는 이를 수습할 길이 없습니다.
마지막에 하게 되는 심판은 사랑의 심판입니다. 지금까지 사랑을 중심한 심판을 해본 일이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을 중심하고 심판을 하는 날이 끝날입니다.
걸을 때 오른발이 앞으로 나가면 오른손은 뒤로 갑니다. 이것은 하나는 주관하고 하나는 복종해야 된다는 원칙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잘못된 것은 잘라 버리고 선을 접붙여야 합니다(롬 11:17). 이렇게 새로운 혈통을 접붙이기 위해 주님이 오셨습니다. 축복받은 후에는 지방으로 가야 합니다. 그것은 선을 품고, 악의 세계를 탕감복귀하기 위한 주인으로 세우기 위함입니다.
제1차 7년노정은 개척자의 사명을 하는 기간입니다. 제2차 7년노정은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기 위한 사명을 완수하는 기간입니다. 여기에는 21가지의 조건이 있지만, 이것은 선생님이 세웠기 때문에 여러분은 믿고 따르기만 하면 됩니다.
천국에 가려면 예복이 있어야 하는데 이 예복은 각자가 준비해야 합니다. 부모만 입적하면 자식은 따라가면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우리 교회에 있어서 마음속 깊이 기념하고, 정성을 모아서 지켜야 할 날 중의 한 날(부모의 날)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위해서 태어난 사람들이 아니고 하늘을 위해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이와 같이 오늘 우리의 인연은 스스로 원해서 맺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 뜻, 이 교회와 관계를 맺고 이런 자리에까지 나온 데에는 물론 여러분 자신의 노력도 있었겠지만, 그 배후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역사적인 인연이 깃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선조들의 공적과 배후에서 하나님이 역사해 주셨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다시 한번 느껴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자리에 참석한 여러분들은 역사적인 탕감을 치르는 엄숙한 사명을 띠고 태어났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하나님의 복귀섭리를 위해 세계적인 탕감을 이루어 놓기 위한 준비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준비를 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택해 4천년 역사를 거쳐 가지고 예수님을 보내어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펴 나가려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으로 하여금 세계적인 가정을 이루게 하여서 만민 복귀를 완결 지으려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이 그 뜻을 받들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사명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지금까지 수난의 길을 걸어 나왔고, 하나님도 그 뜻을 상속 받을 수 있는 한 나라가 이 지상에 나타나기를 소망하면서 지금까지 수난의 노정을 걸어 나오셨습니다. 그러면서 제2이스라엘인 기독교에 세계적인 사명을 인계해 가지고, 그 기독교를 통하여 그러한 사명을 전개시키면서 지금까지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그 시대에 예수님이 이뤘어야 했으나 못 이루었기 때문에, 그 책임을 선생님이 한국이면 한국을 중심삼아 가지고 완결시키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을 완결시키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왔다 간 이후 오늘까지 있었던 역사시대의 모든 사연을 재탕감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이 땅 위에서 탕감시켜 놓아야 할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민족과 일체를 이루는 조건을 세우지 못하고 죽어갔던 그 사실을 오늘날에 재현시켜서 이 민족을 중심삼고 다시 탕감하는 노정을 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 역사적인 탕감노정을 가기란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아담으로부터 예수님까지 4천년간의 종적인 섭리역사를 횡적으로 재현시켜 탕감복귀해야 하고, 예수님 이후 2천년간의 복귀노정에 남아진 것, 즉 기독교가 그동안 많은 민족이나 국가들에 복음을 전하며 탕감해 나왔으나 남아진 것을 오늘날 우리가 횡적으로 탕감복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탕감복귀는 어떠한 환경에서 되어지느냐? 하나님과 사탄이 맞부딪치는 그러한 곳이 아니고는 탕감복귀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인 아벨 시대나 노아시대나 아브라함시대나 모세시대나 예수님시대를 보더라도 언제나 한 개인이나 가정이나 민족을 중심삼아서 하나님과 사탄이 대결했다는 것입니다. 재물이면 재물, 사람이면 사람, 가정이면 가정 등 어떠한 사명을 짊어진 중심존재를 놓고, 어떤 조건을 걸어 가지고 하나님과 사탄이 대결하여 승리냐 패배냐를 가렸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전개해 나온 복귀역사를 개관해 보면, 구약시대부터 신약시대까지는 상징적, 형상적 탕감시대로서 어떠한 조건을 세우게 되면 탕감할 수 있는 시대였지만, 최후의 실체적 탕감시대에 있어서는 한 국가면 국가, 한민족이면 민족이라는 실체를 걸어 놓고 일대일의 기준에서 탕감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적인 소원입니다. 하나님이 사탄과 그러한 기준에서 승패를 결정하지 않고는 국가면 국가 민족이면 민족을 완전히 하나님 앞에 찾아 세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이러한 사정이 있는 연고로, 만일에 한국이 그러한 사명을 짊어졌다면 한국은 세계면 세계를 건 크나큰 시련에 부딪히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가 한국에서 대결하고 있는 것입니다. 판문점을 중심삼아 가지고 양대 진영이 서로 갑론을박하고 있는 데, 이 사실이 바로 하늘세계와 사탄세계가 서로 싸우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외적으로는 이렇게 한국을 걸어 놓고 대결하고 있지만, 내적으로는 역사적인 사실과 시대적인 사실과 미래적인 사실을 중심삼아 가지고 하나님과 사탄이 최후의 대결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내적인 탕감조건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역사는 이러한 양면적인 관계를 가지고 흘러가고 있습니다.
이렇듯 외적 기준이나 내적 기준에는 상대적인 데가 있습니다. 오늘날 이 세계는 외적 기준으로 보면 민주세계와 공산세계가 대결하고 있고, 내적 기준으로 보면 기독교와 우리 통일교회가 대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과 선생님이 하나되어 새로운 내적인 기준을 세워 소생․장성․완성의 단계를 거쳐 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외적 세계의 기준이 내적 세계 기준에 맞지 않고, 여러분과 선생님이 나가는 기준에도 맞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탕감되어 나가는 과정에 있어서 하나님의 사연이 엉클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완전한 탕감조건을 세우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선생님이면 선생님, 가정이면 가정을 중심삼고 되어진 사실들이 자연스럽게 여러분의 가정과 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이러한 사실들이 교회면 교회, 국가면 국가, 세계면 세계를 거쳐 나가는 데 있어서 모순과 상충이 없이 넘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환경이 되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지금까지 탕감역사를 해 나오는 데 있어서 그 방법을 가르쳐 주지 않고 해 나왔던 것입니다. 내적인 완전한 플러스가 생겨나면 외적인 완전한 마이너스가 생겨나기 때문에, 플러스적인 완전한 기준을 세워 놓고서 여기에 마이너스적인 기준, 즉 탕감의 기준을 수습해 나온 것이 지금까지의 탕감역사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탕감역사를 할 때, 언제나 그 사실을 만민 앞에 선포하고 한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내적 사정은 개인, 가정, 사회, 민족, 국가, 세계까지 연결돼 나가야 합니다. 그럴 일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데, 이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어떻게 해야 되느냐? 내적인 기준을 중심삼고 하나님이 받아들일 수 있는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이 환경적인 터전을 개척하기가 심히 어렵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고충 때문에 하나님은 지금까지 6천년 기나긴 세월을 거쳐오면서, 또 실체로 이 땅에 오셨던 예수님을 통해서도 그 사실을 발표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본래 탕감조건은 누가 세워야 되느냐? 가인과 아벨이 세워야 됩니다. 그러지 않고는 아담이 타락한 것을 복귀할 수 없습니다. 아담은 아무리 부모의 입장에 세워졌다 하더라도 가인과 아벨이 자녀의 입장에서 탕감복귀의 기준을 세우고, 그 기준 위에서 부모의 입장을 복귀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칙입니다. 즉 가인과 아벨이 탕감조건을 세워 이것을 부모와 연결시켜야 부모의 입장이 복귀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인 아벨의 투쟁 이래 지금까지 가인적인 책임을 짊어진 사람들과 아벨적인 책임을 짊어진 사람들 사이에 투쟁이 계속되어 왔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메시아로서 이러한 사명을 세계적으로 탕감복귀하기 위해서 아벨 중의 아벨의 사명을 하셔야 했던 것입니다.
아담가정에서 아벨이 실패한 기준을 아벨의 입장에서 사탄과 대결하여 그것을 빼앗아 와야 했고, 노아가정에서 노아가 실패한 것을 노아의 입장에서 사탄과 대결하여 그것을 빼앗아 와야 했습니다. 또 아브라함이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아와야 했고, 모세를 중심한 이스라엘 민족이 사탄과 대결하여 패배한 것을 탕감복귀해야 했습니다. 즉 예수님을 중심삼고 탕감복귀해야 할 것 전부를 예수님 당대에 탕감복귀하기 전에는 가인과 아벨이 세우지 못한 탕감조건을 세울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생애의 목적은 역사 과정에서 잃어버렸던 모든 것들을 예수님 자신이 싸워 승리하여 그것을 탕감복귀 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가인과 아벨이 탕감복귀 하지 못했던 것을 예수님이 아벨적인 기준을 상속 받아 가지고 탕감복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대민족의 불신으로 그러한 사명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그 사명을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했어야 되느냐? 내적으로 부모의 입장을 복귀하고 역사적으로 부모가 잃어버렸던 것을 탕감복귀하는 조건을 찾아 세워 놓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명을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 터전을 완전히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면 그러한 예수님은 영적으로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 아벨 노아 아브라함 모세 예수님 시대에 잃어버렸던 터전을 성신과 더불어 영적으로 다시 찾아 세워 나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상에서 예수님 앞에 실체 성신이 상대가 되어 가지고 그 일을 했어야 했는데, 그것을 못 하였습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다시 예수님과 성신이 세계사적인 가인과 아벨을 세워 가지고 부모의 입장을 세워 나와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영적 기준을 중심삼고 그 악에 세울 수 있는 가인과 아벨을 찾아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찾기 위해서 지금 세계는 가인적인 개인 가정 국가 세계와 아벨적인 개인 가정 국가 세계로 벌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이상적인 것은 아닙니다. 영적인 기준을 중심삼아 가지고 외적으로 그렇게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 가지고 양대 세력이 지금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상세계가 성립될 수 있는 기반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기반을 상속 받고 그것을 다리 놓기 위해서 기독교가 지금까지 내적 기준을 책임지고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앞으로 주님이 다시 오시면 무엇을 하실 것이냐? 오시는 주님은 내적 기준과 외적 기준을 수습하여 지금까지 종적으로 탕감하여 온 6천년 역사를 횡적으로 탕감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영육으로 세계적인 기준을 세워야 했는데, 영적으로만 세계적인 기준을 세웠지 육적인 기준은 세우지 못했습니다. 영적으로는 세계적인 기준을 세웠지만 육적으로는 민족적인 기준도 세우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민족적인 기준도 세우지 못하셨기 때문에, 다시 오시는 주님은 기독교인들과 하나되어 그러한 기준을 세워야 합니다. 그리고 제1이스라엘, 즉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 민족이 민족적인 기준을 세우는 그 사명을 완수하지 못했던 것을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다시 오시는 주님을 모심으로써 그것을 세워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다시 오시는 주님은 교회와 하나가 되어야 하고, 나라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 예수님 당시보다 이중의 어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대교와 하나되어 가지고 나라를 수습해서 세계로 넘어가야 할 것이었는데, 그러지 못하고 예수님이 돌아가셨기 때문에 기독교와 유대교가 갈라졌습니다.
만약 한국에 그것이 재현되는 판국이 조성되면, 거기에 오시는 주님은 기독교와 하나되어서 국가적인 기준까지 올라가야 유대 나라의 기준을 복귀하게 되는 것입니다. 설사 주님과 기독교가 하나되었더라도 유대 나라의 입장에 있는 한국이 탕감조건을 세우지 않고는 뜻과 연결이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통일교회가 걸어 나온 길을 볼 때에, 이중 삼중의 사명을 짊어지고 걸어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한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 선생님은 예수님 당시에 세워야 했던 역사적인 모든 종적인 탕감조건을 세워 가지고, 또 예수님이 신부를 세우지 못했던 기준을 세워서 출발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기독교를 중심삼아 가지고 이 일을 수습해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이 유대민족에게 불신을 당하고 쫓겨남으로 말미암아 제2이스라엘인 기독교는 영적인 탕감만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유대민족이 예수님을 반대함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이 이방으로 옮겨졌던 것과 마찬가지로, 한국 내에 있어서도 기독교를 중심삼고 섭리하던 뜻이 그들이 책임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이방민족에 해당하는 불신자들을 통하여 재차 기반을 닦아 나온 것입니다.
그러면 이 기반이 무슨 기반이냐? 예수님 당시에 이스라엘 민족이 잃어버렸던 기반인데, 이것을 재차 조성하기 위해서 우리는 제1차 7년노정을 거쳐 나왔습니다. 이것은 선생님을 중심삼고 보면 21년노정입니다.
그러면 선생님의 21년노정 중 14년까지는 무엇을 하는 때였느냐? 이 기간은 가정적인 기준을 중심삼아 가지고 잃어버린 부모의 기준을 결정짓는 기간이었습니다. 그 기간이 바로 야곱의 21년노정 중 14년에 해당하는 기간인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말하자면 지상에서 새로운 출발의 한 기점을 찾는 것과 마찬가지의 기간입니다. 그러므로 그 기준을 세우기 위해서는 아벨의 입장에서 과거의 선조들이 실패했던 모든 사실들을 복귀할 수 있는 여건을 세워 놓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다시 말하면 실체적 기준 앞에 이것을 연결시키지 않고는 탕감복귀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새 아벨을 중심삼고, 새 노아가정을 중심삼아서 상하를 연결시키는 일을 해 나왔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역사를 뒤집는 일이 벌어지고 세계를 뒤집는 일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 당대에 가정을 편성하고 종족을 편성해야 했던 그 모든 사연의 노정을 다시 거치지 않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1960년도를 중심 삼고 부모의 날을 선포한 이후에 7년노정을 거쳐오는 동안, 이러한 기반을 안팎으로 닦아 나왔습니다. 그래서 국가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기준까지 올라선 것입니다.
뜻적으로 볼 때, 이스라엘 나라와 유대교가 예수님을 대할 수 있는 것과 같은 기준, 즉 예수님시대와 같은 환경이 이제 우리 앞에 조성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시점에 놓여 있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초교파 운동을 전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신념을 가지고 여기에서 우리는 양면작전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민족복귀를 위해 충성했듯이, 초교파 운동에도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이러한 기준을 세워 나왔습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무엇이냐? 선생님을 중심삼고 보더라도 가정이 있어야 합니다. 선생님이 나가는 데 있어서 선생님 혼자 가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선생님이 이 길을 가는 데에는 가정이 있어야 되고, 자녀가 있어야 되며, 그 자녀가 하나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녀가 하나되는 동시에 또 여러분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36가정이나 72가정이나 124가정을 가만 보면 절구가 한 곳으로 돌아가지 않고 있습니다. 한데 얽힌 세포처럼 여기에 자기의 생명이 달려 있다고 생각하고 이 생명 길도 모든 것과 그 생활 기준이 돌아가야 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지금 이때를 기해서 무엇을 하시느냐? 하나님의 뜻에는 몇몇 사람의 사정보다도 전체의 사정이 달려 있기 때문에, 민족을 돌이키고 세계를 돌이키기 위해 하나님은 선생님의 가정을 중심삼고 한 방향으로 돌려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한 바퀴씩 돌면 돌수록 점점 더 커져 가지고 한 곳으로 뭉쳐야 할 것인데, 그렇게 되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 영계에서는 이 문제를 제일 염려하고 있습니다. 우리 가정들이 완전히 하나로 어우러져 전부가 돌아가게 되면 저 세상도 우리를 중심삼고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천운이 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은 선생님이 여러분의 꼬리를 물고 자꾸만 한 곳으로 나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여러분이 전부 다 제멋대로 갈라진다는 것입니다.
전부 다 한 곳으로 움직이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다 해주기를 바라고 움직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가 됩니다. 이때는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복귀를 하던 때와 같고 야곱이 하란 땅에서 자기 고향으로 복귀하던 때와 같은데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자기의 모든 것을 모아 그 목적 앞에, 즉 하나님 뜻 앞에 보조를 맞추어야 됩니다. 그렇지 않고는 하나에서 열까지 전부 다 헛수고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보조를 맞추어 나가는 데는 하나님이 중심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중심삼아 가지고 나가는 길에 있어서는 하나에서 열까지 전부 이의가 없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여 7년 고비를 넘지 않으면 상당한 지장이 생기게 됩니다. 이러한 입장에 있는 여러분에게 있어서는 공산당이 무서운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공산당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한 민주세계가 문제가 아니며, 나라가 문제가 아닙니다. 바로 여러분 자신이 문제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계 복귀를 위해서는 참부모님을 중심삼아 가지고 모두가 하나되어야 합니다. 아들딸이 어머니와 하나되어야 하고, 아버지와 하나되어야 합니다. 인간은 타락했기 때문에 모자협조가 절대 필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머니는 무얼 해야 되느냐? 자식을 위해야 됩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하나가 되어 가지고 다시 아버지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가정이 하나되어야 합니다. 그런 후에 축복가정, 즉 36가정과 72가정과 124가정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축복가정이 하나가 되어야 통일교회가 비로소 하나됩니다. 축복가정과 통일교회가 하나되고서야 이 민족이 하나되고, 이 민족이 하나되고서야 한국을 중심삼아 가지고 일본, 미국, 독일이 하나됩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이 4개 국가를 중심삼고 주로 기도를 합니다.
과거에는 한국과 일본이 서로 원수지간이었습니다. 그러나 탕감복귀를 하려면 제일 사랑하는 사람과 제일 미워하는 사람, 제일 사랑하는 나라와 제일 미워하는 나라를 하늘 앞에 서로 상대적인 입장에 세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하늘땅을 복귀할 수가 없습니다. 한국을 중심삼고는 일본, 미국을 중심삼고는 독일이 상대적인 입장입니다. 따라서 한국은 아담형 국가이고, 일본은 해와형 국가입니다. 또 미국은 천사장형 국가이고, 독일은 사탄형 국가입니다. 그래서 한국이 하나되면 이 네 나라를 복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네 나라가 하나되면 세계가 복귀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됨으로 말미암아 영계와 육계를 복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앞으로 어떻게 해 나가야 되느냐? 거꾸로 말한다면, 천주와 세계를 복귀하기 위해서는 이 네 나라가 제물 되어야 합니다. 또 이 네 나라를 복귀하기 위해서는 한국이 제물 되어야 하며, 한국을 복귀하기 위해서는 통일교회가 먼저 제물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 선생님은 민족 복귀를 위해서 통일교인들이 제물이 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통일교인들이 제물이 되기 전에 축복가정들이 먼저 제물 되어야 합니다. 축복가정들이 고생함으로 인하여 축복가정을 중심삼은 축복권이 민족적으로 펼쳐지게 되면, 즉 탕감조건을 민족적으로 세우게 되면 한국은 복귀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축복가정이 서기 위해서는 선생님의 가정이 필요합니다. 선생님이 서기 위해서는, 즉 선생님이 완전히 자리 잡기 위해서는 어머니가 필요하고, 어머니가 서기 위해서는 자녀들이 필요합니다.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이 서기 위해서는 선생님이 필요합니다. 즉 하나님이 서기 위해서는 선생님이 모든 것을 탕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탕감관계가 전부 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거꾸로 기도해야 합니다. ‘참부모와 참자녀를 통하여, 축복가정을 통하여, 통일교회 식구들을 통하여, 한국을 통하여, 일본 미국 독일을 통하여, 세계를 통하여 천주를 복귀해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이런 단계를 거쳐 탕감해 나가는 것이 공식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이 7년노정에서 제일 문제가 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런 내적인 기준을 결정지어 가지고 외적으로 한 방향을 향해 돌아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하늘의 운세가 돌지 못하고 그저 바라만 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기 때문에, 지금 하나님이 전적으로 역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부모의 날은 제1차 7년노정을 중심삼아 가지고는 마지막 날입니다. 그러면 1차 7년노정에 선생님은 무엇을 해 나왔느냐? 가정적인 기준을 세우고 종족적인 기준을 세워 나오면서, 교회를 통해 민족적인 탕감조건을 세워 나왔습니다. 이러한 내적인 기준은 예수님 당시에 이루어야 할 것이었는데 실패했기 때문에 재탕감한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7년노정에는 이것을 맞추기 위해서 애써 나온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가 공산주의를 극복하기 위하여 맹렬히 승공활동을 벌이고 있다는 것은 큰 의의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앞으로 교회활동도 활발히 전개시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때에 있어서 여러분이 알아두어야 할 것은, 야곱이 하란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오게 될 때 자기의 모든 것을 에서한테 물려주었다는 것입니다. 21년 동안 수고한 결과로 얻어진 제물을 몽땅 에서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야곱이 에서에게 바랐던 것은, 야곱 자신이 하나님 앞에 축복받은 사실을 공인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님도 만일 그 당시에 이스라엘 나라를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면 세계 앞에 이스라엘 나라를 주었을 것입니다. 또 이스라엘 민족에게 자기의 모든 권한과 재물과 그밖의 모든 것을 나누어 주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나누어 주어서 그것을 갖게 해 가지고 세계를 굴복시키자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우리 통일교회 교인들이 경제적인 생활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에 비해 고생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는 어떠한 입장에 있느냐?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천사와 씨름하던 순간과 같이 이스라엘로 결정되느냐 못 되느냐 하는 숨가쁜 순간에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 중대한 사명을 짊어진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그런 싸움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중대한 사명을 짊어진 사람이 교회와 하나되고, 민족과 하나되어 가지고 나라를 복귀한다면, 거기에 쓰인 모든 것도 그 사람과 더불어 복귀된 입장에 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이 역사적인 싸움에서 우리가 사명을 다하여 승리하게 된다면 세계를 복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이런 싸움을 하고 있는 극히 심각한 시점에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축복가정이 중심이 되어 지금까지 싸워 나왔습니다. 뜻으로 보면, 과거에는 아벨을 세워 가지고 그를 제물로 삼아 나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일단 이 기준만 세우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아벨을 세워서 탕감시키는 것이 아니고, 가인을 세워서 탕감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야 된다는 것입니다. 가인이 아벨에게 굴복해서 아벨의 터전을 대신 지켜 주지 않았기 때문에 복귀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앞으로는 어떻게 되어야 되느냐? 아벨이 안식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아벨이 해방되어야 되고, 가인이 아벨의 싸움을 책임지고 나가야 합니다. 그래야 천국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아벨가정이 승리해서 가인을 세워 놓았다면, 그 가인은 모든 가정 앞에 아벨의 입장에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아벨의 입장에서 승리한 사람들이 안식을 취하고, 그 대신 가인적인 사람들이 하늘의 아벨의 입장을 상속 받아 가지고 사탄세계의 가인들을 또다시 굴복시켜 나가야 합니다. 가인들을 굴복시킨 사람들, 즉 아벨의 입장을 상속 받은 사람들은 가인적 입장이 아닌 하늘의 아벨적 입장에서 승리했기 때문에 안식할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되고, 자기들의 입장은 새로운 대신자들에게 물려주면서 탕감복귀해 나간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지금까지 7년노정에서 죽고 사는 문제를 걸어 놓고 승리했기 때문에, 이제 자리를 잡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선생님이 자식들이나 어머니가 무엇을 부탁해도 거기에 응할 수 없었던 것은 식구보다 뜻을 더욱 중심삼고 나아가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른 어떤 것을 중심삼고 나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느 기간까지는 제물 과정을 거쳐 나와야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벨이 본연의 아벨이 되기 위해서는 그 주위에 아벨적인 책임을 해주는 사람이 많아야 본연의 아벨이 될 수 있지, 그렇지 못할 때는 결코 본연의 아벨의 입장을 취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7년노정에서의 나의 정상적인 기준은 제물의 과정을 거쳐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까지나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는 여러분들이 그러한 것을 대신 책임져 나가야 합니다. 사탄과 싸워 승리하여 점점 외적인 환경을 정복해 가지고 내적인 천국 건설을 위한 기준을 세워 나가야 합니다. 여기에서 역사시대의 종적인 싸움이 횡적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치열한 싸움을 겪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여러분들이 살아온 생애는 여러분들의 것입니까? 어때요? 그런데 요즈음 가만히 보면 사무실이든 공장이든 선생님이 전체를 책임지고 나가니까, 선생님에게 빚을 떠맡기려고 하고 자기들은 빚을 맡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문제가 큽니다. 지금 선생님이 왜 고통받는 줄 알아요? 식구들이 모두 그렇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어떻게 해결 지을 것이냐 하는 것이 지금 선생님이 골치를 앓고 있는 문제입니다. 공장은 빚을 지건 말건 자기 생활만 풍족하려는 법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자기들이 빚을 지고 생활하는 것은 모르지만 선생님이 경영하는 공장이 빚을 지고, 통일교회가 빚을 지면 되겠어요? 그런데 자기들은 빚을 안 지고 생활을 하겠다는 이런 사고방식을 갖고 있으니 큰 문제라는 것입니다. 남의 것을 끌어 잡아당기면 되겠습니까? 자기들이 오히려 남의 짐을 덜어 주어야 할 책임이 있는데도, 이것을 망각하고 도리어 짐을 지운다는 것입니다. 이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원칙적인 관점에서 볼 때, 여러분의 생활 자세와 심적 태도가 바로 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결코 선생님이 짐을 지기 싫어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천적으로 볼 때 그런 것은 앞으로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지금이 그런 때입니다. 지금이 무서운 때라는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 식구들이 해야 할 것은 선생님의 기준까지 뜻을 대해서 하나님 앞에 책임지고 몸부림치며 일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러분 자신이 앞으로 하여야 할 책임으로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이걸 알고 보면 우리가 하는 일이 참 무섭다는 것입니다. 즉 책임 못하면 여러분이 전부 걸리고 또한 선조들까지 전부 걸린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어요? 예수님 한 분 잘못 모심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나라가 전부 걸려들었고, 그 나라가 깨어졌던 것입니다. 여러분의 책임 수행 여하에 따라서 여러분의 선조가 좌우되고, 여러분의 후대가 좌우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모른다는 거예요. 여러분은 세상이 어떻게 되어지는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이제부터 나머지 7년노정 동안 그런 면에 대해 좀더 알아야 되겠습니다.
3위기대면 3위기대간에 일년이 지나도 편지를 하나, 만나길 하나, 그래가지고 여러분이 하나님을 중심한 식구라고 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이 외적으로 활동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3위기대간에 서로 연락하고 만나야 합니다. 또 36가정도 그래요. 이런 자리에나 참석하는 것이 36가정입니까? 책임 못하면 무섭다는 것입니다. 문제가 크다는 것입니다.
36가정들은 일치 단결해 가지고, 자기들이 가진 것이 없으면 없는 마음으로라도 하나되어 뜻을 대해 정성을 들이고, 선생님 가정의 울타리가 되고, 72가정과 124가정을 수습해 나가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한 책임이 자기들에게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건 그저 어느 때고 선생님만 바라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선생님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믿어지지 않거든 영통하는 사람한테 가서 물어보세요. 지금 때가 그런 때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선생님의 제일 큰 고충이 무엇인가 하면, 식구들이 그러한 천적인 내정을 망각해 버리고, 천정(天情)을 마구 밟고 넘어서려는 것을 어떻게 지도해 주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선생님은 지난 어머님의 생일이 7년노정 중의 마지막 생일이어서, 어머님에게 기념되는 것을 하나 사 주려고 했다가 손이 안 나가서 말았습니다. 협회 부장들에게 와이셔츠와 넥타이를 사 주느라고 어머님에게 기념품을 사주려고 가지고 나갔던 돈을 다 써 버렸습니다. 사실 그것은 선생님이 할 일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들이 했어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살더라도 원칙적인 기준에서 다시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지금 선생님을 중심삼고 나가지만 여러분은 선생님을 하나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연구해도 선생님의 내용을 모른다는 거예요. 인간적인 마음을 가지고 무턱대고 세상적으로 비판했다가는 영계에 가서 단단히 혼난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지금까지 이 길을 걸어 나왔지만 누구만큼 사회를 모르거나, 누구만큼 인류를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누구보다도 인간의 고충을 잘 압니다.
여러분의 앞길에는 여러분이 상상할 수 없는 고충의 길이 몇 고비나 남아 있습니다. 선생님은 선생님의 길을 가기도 벅차고 힘들고 바쁜데, 여러분이 알아서 해야 할 것까지도 일일이 여러분에게 가르쳐 주어야 할 입장에 서 있으니 이중 삼중으로 고통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전 며칠간은 잠을 못잤습니다. 그런 것 다 좋습니다. 그러나 선생님 자신으로서는 괜찮지만 하나님이 염려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여러분이 어디에 가든지 그 길이 엉켜지고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계에서는 이번 7년노정이 끝나면 가정을 재편성하기를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이 전부 다 선생님한테 기도해 보니 영계에서 36가정, 72가정, 124가정들을 전부 다 재편성하라고 하니 이것이 웬말입니까? 라고 합니다. 그렇게 이야기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각자 집으로 돌아가면 실제 생활 무대를 중심삼고, 또 여러분의 가정을 중심삼아 가지고 복귀된 입장에서, 언제나 하나님의 아들딸로서 합당한 길을 가고 있는지 반성해 보라는 것입니다. 언제나 이러한 상태로 가다가는 망합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이런 상태여서는 안 됩니다.
선생님 가정이 가정적 기준에서 아벨적 책임을 다했으면, 그다음에는 여러분들이 가정적 기준에서 아벨적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 가지고 천국을 목표로 하고 뻗어 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아직도 하나님이 안식하실 수 있는 터전이 닦여지지 못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싸움이요, 언제나 수라장입니다. 또 언제든지 사방으로 사탄이 왕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언제 자리를 잡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러한 어려운 문제가 남아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러한 문제를 중심삼고 온갖 정성을 다 들여야 하는 입장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와서 가정을 중심삼아 가지고 교회와 민족적인 기준을 수습하려고 했던 것인데, 그렇게 하지 못했기 때문에 선생님이 그런 입장을 대신해서 일반 사람들, 즉 불신자들을 통해 사상적인 분야에서 민족적인 기준을 개척해야 합니다. 이것이 개척되면 앞으로 이 기준을 중심으로 교회권도 자연히 부활되어 넘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움직이는 이것은 몇 사람 안 되는 통일교회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세계적인 문제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하나의 목적을 중심삼고 정성껏 교회 통합운동을 전개하고, 국민운동을 전개하여 가지고 북한 공산당에 대비해야 합니다. 정성을 들이지 못해 준비가 안 되었을 때에는 그 책임이 우리에게 있지만, 정성을 다 들여 가지고도 준비가 안 되었을 때에는 우리에게 책임이 없는 것입니다.
정성을 안 들여서 망하면 다시 설 길이 없지만, 정성을 다 들여 가지고도 뜻대로 되지 않으면 다시 설 길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부모의 날을 맞이하여 부모의 날에 대한 의의를 알아야 되겠습니다. 본래 이 부모의 날은 심정부활의 날과 실체부활의 날을 선포해 가지고 나와야 합니다. 부활의 과정을 살펴보면 심정부활, 실체부활, 만물부활 이렇게 되어 나갑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만물을 잃어버렸고, 실체를 잃어버렸고, 심정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거꾸로 심정부활, 실체부활, 만물부활을 해 나오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하여 부모의 날, 자녀의 날, 만물의 날이 찾아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루기 위해서 선생님 자신이 형극의 길을 걸어오며 탕감해 온 것입니다. 이렇게 탕감조건을 세웠기 때문에 사탄의 참소조건을 벗어나서 축복된 부모의 날을 설정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모의 날을 설정한 후의 지금까지의 7년노정은 무엇이냐? 또 하나님은 6천년 동안 무엇을 하셨으며, 하나님의 한결같은 역사적인 소원이 무엇이냐? 그것은 어머니 한 분을 찾는 것입니다. 아담을 보내서, 즉 아담을 재창조한 후에 그를 통해서 어머니 한 분을 찾자는 것입니다. 이것은 재창조입니다.
본래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한 후에 아담을 위주로 해와를 만들었기 때문에, 재창조에 있어서도 아담을 보내서 그를 통해 해와를 찾는 것입니다. 즉 어머니를 찾아 세우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이 7년노정 동안 어머님이 사탄세계의 참소조건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을 가게 한 것입니다. 그러려면 어머님 자신이 절대로 사탄과 직접적인 싸움을 해서는 안 됩니다. 선생님에게 절대 순종해야 하고 절대 복종해야 하며, 언제나 선생님 뒤에 그림자와 같이 따라다녀야 합니다. 제멋대로 왔다갔다하다가는 사탄의 침범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 7년 기간은 또 어떤 기간이냐? 6천년에서 7천년으로 넘어가는 과정을 탕감하는 기간으로서, 아담이 책임을 못함으로 말미암아 해와를 잃어 버렸기 때문에 아담의 입장을 복귀하고, 사탄을 굴복시키고 승리의 기준을 세워야 하는데, 7년 기간은 이런 것을 해야 하는 기간입니다. 그 기준을 세워 놓은 다음에는 어머니를 세워 심령적인 기준을 연결시켜 가지고, 타락한 부모의 입장을 탕감복귀하여 참부모의 토대를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나가서 일할 때에는 타락하지 않은 부모의 심정을 갖고 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복중시대부터 모든 탕감복귀의 프로그램을 정하시고 그에 맞추어 역사해 나오셨는데, 여러분도 하나님과 같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아직 모르겠지만 앞으로 그것에 대해 세밀하게 다 말할 것입니다. 이렇게 3년노정을 거쳐 가지고 지금까지 이어 나왔습니다.
그러면 그 기간에 무엇을 해야 하느냐? 어머니가 순산을 해야 합니다. 어머니가 자녀들을 낳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해와 한 사람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지금까지 수많은 여성들이 비참하고 억울한, 그리고 복잡한 곡절을 겪어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원혼들을 구원해 주어야 합니다. 그들을 구원해 주려면 전부 하나님 앞에 용서받을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을 전부 다 수습해 가는 것이 어머니가 가야할 길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을 연결시켜 가지고 승리의 기준, 즉 승리의 조건을 세움으로써 비로소 축복의 날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도 3단계의 과정을 거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보게 되면 해와는 남편을 찾아 나온 것입니다. 해와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아담을 잃어버렸고, 이스라엘 민족이 불신함으로 말미암아 신랑 되신 예수님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끝 날에 오시는 재림주를 잘 받들어야 합니다. 이렇게 기독성도들은 결국 한 사람의 신랑을 찾아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랑을 맞는다는 것이 주먹구구식으로 해서 됩니까? 배후의 모든 조건이 전부 맞아야 합니다. 가정이면 가정, 민족이면 민족, 국가면 국가를 대하는 데에도 사방을 갖춰 가지고 대하게 되어 있는 것이지, 마음대로 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통일교회 식구들은 가만히 보면 전부 가정적인 결함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선생님을 중심하고, 또 어머님을 중심삼아 가지고 보아도 전부 오빠가 없든가, 혹은 독신이든가, 부모가 없든가, 무엇인가 하나씩 구멍이 뚫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건 왜 그래야 되느냐? 그렇게 되어야 반대하더라도 전부 걸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기준에서 어머님을 택해 세웠습니다.
성신을 훼방하는 사람은 용서받지 못합니다. 하나님이나 예수님을 거스른 것은 용서받을 수 있으되, 성신을 거스른 것은 용서받지 못합니다. 왜 그러느냐? 성신은 땅을 대표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우리는 완전한 가정을 갖추어서 천국을 이룩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가정이 반대하게 되면 그들 모두가 악으로 맺혀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풀어놓기 위해서는 가정적으로 구멍이 뚫어져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식구들을 보면 부모가 없든가 오빠가 없든가, 그렇지요? 그것이 지당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배후에 들어가서는 탕감적인 내용이 맞아 떨어져야 됩니다. 이것을 볼 때, 하나님이 얼마나 세심하게 역사하시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선생님은 지금까지 많은 일을 해 왔는데, 이것이 인간으로서는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하나님이 환경을 마련해 놓은 터전 위에서 해 나왔기 때문에 이 일을 할 수 있었지, 그렇지 않았다면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그러한 환경이 준비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30여 년을 총각으로 지내면서 가정을 이루지 못했고, 또 환경도 갖추어지지 못했기에 돌아가실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부모의 도리를 해나가는 데 있어서 자식이 간섭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선생님이 부모의 도리를 해나가는 데 있어서 성진이가 간섭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성진이 자신이 스스로 알아서 행동해야 합니다. 즉 부모가 하는 일을 따라가야 자식이지, 부모가 하는 일을 자식이 간섭하면 자식의 자리에 세워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마음대로 간섭할 것 같으면 복귀역사를 지금까지 해 나왔겠습니까? 복귀역사를 마음대로 다 했지요. 이것은 선생님만이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도 어려운 곡절의 사연을 거쳐가는 데 있어서 스스로 알아 가지고 나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이 하는 일은 누구도 모릅니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도 특별한 일에 있어서는 사명적인 심부름이나 할 뿐입니다. 그 전후 관계의 모든 것을 알고 나서 가게 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잘못한 것은 그 책임이 부모에서 끝나야 하는 것이지, 자식에게까지 이것을 관계 지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뭐라고 대답하게끔 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을 인간적으로 생각해서 이 사람은 좋고 저 사람은 나쁘다고 해서 되겠어요? 그래서 탕감이 될 것 같습니까? 어림도 없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진이도 지금은 거기에 대해서 모르지만, 아버지에 대해 진짜 알게 되면 통곡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한국 강토를 중심삼고 하늘의 기반을 닦아 이만큼 뜻을 펼쳐 나왔다는 사실은 우주적인 일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우주사적으로 귀결 지으려면 이러한 지대한 과제 앞에 만인은 무조건 복종을 해야 됩니다. 선생님이 세상에서 하고자 하는 마음이 열만큼 있으면 배후의 심정적인 사연은 그 이상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땅에 대한 하나님의 심정은 누구보다도 지극히 서러운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저주를 하려면 누구 못지 않게 할 입장에 있습니다. 그렇지만 선생님은 자신의 위신을 세우기 위해 저주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이제부터라도 다른 것을 하라면 하려고 이미 각오한 몸입니다. 선생님은 함부로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아주 철저한 사람입니다. 뜻 때문이라면 선생님 자신은 죽을 각오를 한 사람입니다. 선생님은 감옥에 들어갔을 때 살아나려고 생각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이 충성하다가 죽으면 하나님이 후계자를 세우든가 해서 뜻을 이루겠지 하는 마음으로 최후의 길을 다지면서 지금까지 나온 것입니다. 모든 일을 그런 마음을 갖고 했습니다.
어차피 이 길을 거쳐야 하는데, 이 길을 거쳐 나오는 데는 평지를 걸어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감옥의 울타리에서부터 끌고 나오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감옥의 울타리 안에서부터 마음을 다해 남자와 여자들의 사정을 잘 알아주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증거를 가지고 지금까지 나왔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를 것입니다. 이 다음에 영계에 가 보면 이것이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여러분에게 가르쳐 주려고 해도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에게는 아직 세 고개가 남아 있습니다. 이것은 누구에게도 의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나가나, 자나 깨나 하늘땅을 연결시키고 이 세계를 연결시켜야 할 복잡한 길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이냐? 여기에서는 자식이 암만 효도한다 해도 그 효자를 바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충신이 있더라도 그 자리에서는 충신을 바랄 수 없습니다. 그 고비에서는 충신과 효자의 도움 없이 단지 홀로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왜냐? 인류의 부모가 저끄러뜨린 죄를 탕감복귀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부모의 자리에 서야 되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이 그런 사명과 책임을 가지고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생님이 백일하에 나타나 가지고 만국을 호령해야 할 입장임을 알지만, 이 세계는 사탄세계이기 때문에 사탄세계를 복귀하기 위해 추운 철창 같은 그늘 밑에서 일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여러분은 잘 모를 것입니다.
선생님에게는 하나님을 모시고 백일청천하에서 호령할 수 있는 그런 내적 기준을 어떻게 세워 놓고 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지금 잘살고 어떻고 하는 것은 문제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생님을 통해서 바라는 소원은, 앞으로 직계를 통해서 이루어야 할 사명이 있기 때문에 선생님의 갈 길이 바쁜 것이지, 반대받고 핍박받고 어떻고 그런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이제 선생님을 어느 정도 알았습니다. 여러분들은 바보 천치가 아닙니다. 그것이 믿어지지 않거든 기도해 보세요. 어떠한 수단 방법으로는 이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수행해 나가는 이 일이 세계사적인 내용을 좌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부모의 날을 맞이하여 여러분은 무엇을 느껴야 되느냐? 하나님께서는 6천년 동안 찾아 나오시던 그 부모가 지닐 수 있는 위치, 또 부모가 탕감해야 할 부모로서의 그 위치를 대신 세워 주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지금까지 부모의 위치를 세우기 위해 탕감해 나오던 그 내적 기준을 중심삼고 보면, 여러분은 심정적으로나 여러 가지 면에서 말할 수 없이 빚졌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내적 기준을 자기 자신이 갖춤으로써 하늘 뜻이 더욱 다져진다는 것을 느껴야 됩니다. 여러분 각자가 땅에서 이에 보답하겠다고 노력할 때 하늘의 운세가 열려 나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여러분이 세상에서 살 때나, 뜻 안에 들어와서 살 때가 다른 것이 뭐가 있습니까?
이러한 7년 고비를 넘겼으니 이제 이런 사연을 여러분이 다시 한번 느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날을 세우기를 얼마나 고대했고, 이날을 세워서 부모의 위신과 부모의 책임을 세우기 위한 노정을 지금도 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여러분이 어떠한 책임을 해야 하느냐? 아벨의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선생님의 가정을 중심삼고 보면 여러분 가정은 가인적인 입장에 있습니다. 그렇지만 선생님 가정이 자리를 잡으면, 여러분 가정은 아벨적 입장에서 탕감할 수 있는 이런 위치에 서게 됩니다. 그것이 선생님처럼 하루아침에 전부 다 되겠습니까?
그리고 여러분이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영계와 육계를 어떻게 연결시키느냐 하는 것입니다. 선조를 중심삼고 볼 때는 연결시켜졌지만, 즉 종적으로는 그런 조건이 되었지만 횡적으로 어떻게 연결시키느냐? 이 문제에 관해서 선생님이 지금 상당히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이 민족이 제물 과정을 넘어서야 되는데, 그러려면 우리 통일교회의 식구들이 선두에 서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만민이 해방될 수 있는 그날을 위해서 최고의 목표를 세워 가지고, 오늘도 내일도 나갈 수 있기를 다짐하는 우리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그래야 부모의 날을 맞이하는 의의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세계와 나라와 교회를 위해 움직인다고 해서 특별히 우리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맙시다. 그것은 인지당행지도(人之當行之道)인 고로 누구든지 다 가야 할 길입니다.
내일을 향하여 나아갈 수 있는 힘을 갖추기 위해 나오는 곳이 교회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가는 길은 조금만 기울어져도 무너지는 다리와 같은 길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은 침체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선생님이 설교를 그만둔 지 4년이 되었지만 이제 다시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옛날과는 다를 것입니다.
축복을 해준다는 것은 하늘의 전권을 옮겨 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한국에서만 축복할 때는 지났습니다. 외국에서도 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선생님이란 다리를 밟고 가야 합니다. 선생님의 생애가 여러분의 다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생님이 하는 것이 납득되든 안 되든 순종하기 바랍니다.
지금 선생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 있어서 경제적으로 곤란한 입장에 처해 있으나 식구들은 최선을 다하는 입장에 있지 않습니다.
자기 보따리를 싸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기 보따리를 풀어야 합니다.
선생님이 한국에 없으면 여러분은 두 개의 다리를 건너야 합니다.
공적인 일을 해야 합니다. 공적인 일은 역사적인 죄를 탕감하는 길이기 때문에 편안한 길이 아닙니다. 그 길을 가는 기간이 7년 기간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 기간에 싫든 좋든 선생님을 따르면 됩니다.
선생님의 14년노정은 아담이 타락하기 전의 장성기 완성급에 해당하는 기간으로서, 부모가 세워야 할 길이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책임을 지우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다음 7년노정(1960년 이후)은 자녀 된 여러분이 걸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선생님이 걸은 21년노정을 여러분은 7년으로 횡적 탕감복귀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7년노정은 부모와 같이 왔기 때문에 쉬웠으나 앞으로는 각자가 개척하며 가야 합니다. 7년노정을 끝마칠 때는 선포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탄의 참소조건이 있으면 그 길을 다시 가야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선생님의 줄을 잡고 가기 때문에 함정에 빠지더라도 올라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줄을 놓으면 올라올 수 없습니다.
4월 17일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입니다. 부모의 날을 중심으로 3일간 큰 잔치를 베풀어야 합니다.
누구를 탓하지 말고 자기가 갈 길을 자기가 책임지고 가야 합니다. 가는 도중에 자리를 잡아서는 안 됩니다. 마음이 격해지던가 흥분되면 자신을 다시 한번 정리해야 합니다.
사탄세계에서는 더럽혀지기 쉽기 때문에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심판은 정부(正否)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의 아담이 타락함으로써 하나님을 중심한 선이 끝나고 사탄을 중심한 악이 출발하였습니다. 이 악이 끝을 고해야 할 때가 말세입니다.
선이 끝남으로 인해 거짓 말씀이 나오게 되었고, 거짓 말씀으로 인하여 참된 인격의 실체를 잃었으며, 거짓 사랑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첫째는 진리심판, 둘째는 인격심판, 셋째는 심정심판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끝날의 3심판입니다.
끝날에는 악이 세계적으로 심판을 받습니다. 자기만을 위하는 것은 개인주의이며 자기 중심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악입니다.
주님은 심판받지 않는 방법을 가르칩니다. 그것은 자기보다 더 큰 것을 위하여 살라는 것입니다. 자기만을 중심하면 파멸뿐입니다. 공적인 것만을 위하여야 합니다. 자녀에 대한 사랑도 천국 백성을 만들기 위한 사랑이어야 합니다.
개인의 입장에서 볼 때, 자신을 위해 당기는 것은 악이요, 남을 위해 주는 것은 선입니다. 하루 24시간 동안 선과 악 중 어디에 더 치우쳐 있었는가에 따라 심판이 결정됩니다. 여러분은 지금도 이 심판장을 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한 정성만 들여서는 안 됩니다. 가정도, 교회도 어떠한 정성을 들이느냐에 따라 심판이 결정됩니다.
아무리 힘드는 일을 하더라도 불평해서는 안 됩니다. 남이 알아주든 안 알아주든 바른길로 가야 합니다. 자신의 수고를 몰라준다고 불평하지 마십시오. 개인적인 심판에 걸리면 세계적인 심판에도 걸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할 때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목사가 자기 직업을 밝히기를 꺼리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렇듯 목사까지도 하나님을 부정하는 데 이르렀으니 말세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선진국의 국민들이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사탄적인 사랑을 추종하는 것을 봐도 지금 세상은 말세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선생님은 그동안 큰 사명을 지고 노심초사해 왔습니다. 우리 뜻의 목적은 어떤 국한된 시대와 환경에 영향을 주자는 것이 아니라, 인류 사회에 영원히 공헌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책임을 진 선생님은 심각합니다. 잘못하면 역사적인 심판을 받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그럭저럭 지낼 수 있겠지만, 영계에 가서는 심판을 피할 수 없고 어차피 판정을 받아야 합니다.
뜻을 세우는 데 있어서 천적인 법도와 현실을 어떻게 조화시키느냐 하는 문제가 실로 중대합니다. 선생님이 생애를 바쳐 투쟁해 나온 이 뜻이 하루빨리 이루어지기를 영계는 바라고 있습니다. 누구나 선한 세계가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있듯이, 선생님도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소망의 세계가 빨리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중점적으로 전도해야 할 대상은 실권을 쥐고 있는 권력층의 사람들입니다. 선생님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대해 걱정해 왔습니다.
한국은 여러 면에서 서구 문명국보다 불리한 여건하에 놓여 있습니다. 특히 지난 40여 년 동안에는 이 나라를 불리하게 만드는 일들이 이 나라의 역사를 점철해 왔습니다. 중일전쟁을 비롯해서 대동아전쟁, 해방 후의 정치적 혼란, 6․25의 참극 등 비참한 역사의 소용돌이를 겪어 나왔습니다. 따라서 이 나라에서 생활한 40대 이상의 장년층은 누구보다도 시대적인 고충을 많이 겪었습니다.
뜻을 빨리 세우기 위해서, 첫째는 국가권력층을 이념적으로 설득시켜야 하고, 둘째는 종교계의 허다한 난제를 빨리 해결하여 그들을 통일된 방향으로 인도해야 합니다. 셋째로는 사상적으로 공산주의라는 세계적인 사조를 극복해야 합니다. 민주주의와 기독교문화권으로써 공산주의를 극복해야 하는데, 여기에는 필연적으로 체계적인 이론의 확립이 요청됩니다. 이러한 세 가지가 우리가 풀어야 할 숙제입니다.
그러면 이 중에서 어느 것을 주로 해야 되느냐? 첫 번째와 세 번째 것은 상대적이고 세상적인 것이지만, 두 번째 문제는 내적인 성격을 가진 종교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가지고 어떠한 각도에서 어떻게 사회활동, 국가활동을 할 것이냐가 문제입니다.
섭리적인 면에서 역사를 보면, 하나님은 먼저 공격을 당한 다음에 사탄 세계를 정복하는 전법을 써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한 때 몰리고 쫓긴 것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때 선생님이 옳았다는 사실이 백일하에 드러나면 모든 환경은 선생님에게 완전히 점령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는 방법을 쓰고 있습니다. 그들은 개인을 중심으로 살지만, 우리는 국가와 민족을 중심삼고 활동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그동안 닦은 실력과 쌓아올린 실적으로 상부 권력층을 이해시켜 움직일 수 있을 만큼 되었습니다. 언제든지 하늘의 일은 그 시대를 움직이는 권력 기관의 방해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고비만 넘기면 80퍼센트 정도 이룬 셈이 됩니다.
5․16혁명도 처음에는 몇 명이 시작했습니다. 어떠한 큰일이라도 처음부터 많은 사람이 참여하는 것이 아니고 한 두 사람이 시작합니다.
우리의 입장을 중심삼고 본다면, 철저하게 우리 이념으로 무장된 학사 출신 7천 명만 있으면 한국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지난 21년간의 수고는 어떤 일면에서는 대사회활동을 할 수 있는 광장을 마련하기 위하여 고생한 것이라 볼 수도 있습니다. 그 방법 외에는 길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싸워서 거둔 내용이 공인받게 될 때, 즉 삼천만 민족이 알아볼 때 그 배후에는 크나큰 내용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때부터 하나님은 실제로 역사를 움직이십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통일교인을 고생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끌고 나온 결과는, 즉 교회를 중심삼고 한 것은 사회를 중심삼고 거두어질 것입니다. 이 일을 하려면 단순한 사회인으로서는 안 되고 반드시 핵심요원인 신앙자가 필요합니다. 그 보급로는 일찍부터 하나님이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이런 준비를 통해 우리는 외적인 기준을 잡고 내적인 기준을 갖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어떠한 교회에서 아무리 반대를 한다 해도 그들 뜻대로 안 될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계속 부흥회를 열어 그들이 통일교회를 잘못 알았다고 깨닫게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현 사회에 천적인 인연의 환경을 넓히는 것입니다. 이 활동을 촉진시키려면 상대방으로 하여금 관심을 갖게 해야 합니다.
선생님과 여러분은 인연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연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인연이 짙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관심이 있다 해도 손해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이익이 있어야 합니다. 일시적인 이익이 아니라 십년, 백년, 그 후까지 계속되는 것이라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이익의 내용이 이념적이어야 합니다. 통일교회에는 그런 이념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굶으면서도 논밭을 매고, 똥통을 메며 낮은 자리에서부터 인연을 맺어 왔습니다.
어떤 사람이 발전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주위에서 그 사람에게 어느 정도로 관심을 갖느냐 하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 주의와 관심이 사라지면 조만간 그는 꺾여 나가고 어느새 관심을 받는 제2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복음신보’가 우리를 때리는 것도 일종의 관심의 표시입니다. 이것은 좋은 것입니다. ‘아이쿠’ ‘아이쿠’ 하면서 한바퀴 돌고 나서 보면 어느 사이에 그들의 자리는 빼앗기고 있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맞아도 걱정 안 합니다.
한편 이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신령한 사람도 필요합니다. 산중에 있는 여러 신령한 사람들을 통합하는 운동을 벌여야 합니다. 누구나 성령의 역사를 필요로 합니다. 한번 은혜를 받으면 그 이후에 심령이 더 클클해집니다. 그들이 우리 식구가 되지 않더라도 상관없습니다. 중간적 위치에 있는 사람도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무엇이든 지팡이 삼아 다리를 건너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 혼자만 뛰고 여러분은 구경만 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다른 때는 관계를 맺지 않더라도 결승점에서만은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김일이 어제 프로레슬링 대회에서 세계 선수권을 획득했는데, 그는 첫 회에서는 지고 2, 3회에서 이겼습니다. 이것이 바로 통일교회식이기 때문에 나는 그 과정을 매우 의미 있게 받아들였습니다. 우리는 1회에서 세부득(勢不得)이라 졌습니다. 그러나 2회에서 싸워 이겼고, 이제 3회에서만 싸워 이기면 결정적으로 세계적인 기반 위에 올라서게 됩니다.
처음에 김일이 박치기를 하지 않자 관중들은 안타까워하며 흥분해서 해라, 해라 하고 소리쳤습니다. 이렇듯 마치 자기가 싸우는 것처럼 관중들은 응원했습니다. 심정적으로 그와 동일선상에 있어야 그가 승리하면 그의 승리권 내에 동참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구경꾼들이 더욱 마음 졸여 가며 얻은 승리라면, 그 승리는 큰 의미의 승리가 될 수 있습니다. 선생님은 지금 마지막 판국에 임해서 치느냐 안 치느냐로 심각한데, ‘선생님이 왜 그럴까’ 하고 의심하는 태도를 가지면 안 됩니다.
여러분보다 뒤에 온 사람들이 여러분보다 더 관심을 갖고 인연을 맺으면 여러분이 받은 복을 그들에게 몽땅 빼앗기게 됩니다. 자웅을 결정하는 심각한 판국에서는 관심이 얼마나 있고, 인연을 맺느냐 안 맺느냐에 따라 승패가 결정됩니다. 승패란 싸우는 곳에만 있습니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싸움 끝에 승패가 결정됩니다.
이런 기준에 입각해 볼 때 선생님은 나만 남았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이 없이는 승리를 했다 해도 그것을 민족과 세계에 나누어 줄 수 있는 승리가 못 됩니다. 그러므로 외적인 활동이 필요함과 동시에 내적으로 신령한 사람들의 결집과 활동이 필요합니다.
또 우리의 활동에는 필연적으로 경제 문제가 따릅니다. 그래서 4대 활동 목표 가운데 ‘경제 기반 완성’의 항목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이런 데에는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통일은 인연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면 인연은 어떻게 맺어지느냐? 관심이 있는 데서 인연이 생깁니다.
소중한 때에 통일교회에 들어왔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는가? ‘이념은 좋은데 움직이기가 힘들다. 선생님의 방법이 싫다.’라는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승리하려면 둘로 나뉘어서는 안 됩니다. 완전 통일, 완전 승리를 목적하는 것이 복귀섭리입니다. 선생님 혼자서만 수고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도 같이 보조를 맞춤으로써 각자 각자의 위치가 결정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복귀역사가 끝난 후에 후회가 많을 것입니다.
뜻에 대하여 어느 정도 관심을 가지고 심혈을 기울이느냐에 따라 통일교회의 승리가 결정되고, 개인이 통일교회와 어느 정도 인연을 맺었는가 하는 것이 개인의 위치를 결정하게 됩니다.
야곱의 14년노정은 가정생활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14년이 지나면 생활의 평형 기준이 이룩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이 교회에 대해 얼마나 관심이 있었나 하는 것이 복귀의 관건이 됩니다. 복귀의 움직임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가짜입니다. 이런 사람이 책임자가 되면 깨집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움직임에 얼마나 관심을 가지느냐 하는 것이 승자로 결정되느냐, 패자로 결정되느냐 하는 분수령이 됩니다.
우리는 외적으로는 대외활동을 중심삼고, 내적으로는 은혜받은 사람들이 결속하여 뜻의 성취를 촉진시켜야 합니다. 이렇게 하여 한국 교회를 구하는 봉화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신령한 체험을 한 사람들이 교회에서 완전히 무시되어 왔습니다. 결코 그래서는 안 됩니다.
원래 천사장이 타락의 시초였습니다. 따라서 복귀하는 데 있어서도 천사세계가 협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협조해야 모두 복귀되고 해방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천사세계에 해당하는 영계가 역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인간의 타락성 근성은 타락된 인간이 남아 있는 한 계속됩니다.
예수님 때에 탕감복귀의 중심 책임은 누구에게 있었는가? 유대민족과 유대 국가에 있었습니다. 그때 유대민족은 내적인 사명을 했어야 하고, 유대 국가는 외적인 세계복귀의 사명을 했어야 합니다.
우리가 신령한 체험을 한 사람들을 대할 때, 즉 그들이 찾아와서 보고할 때 마음으로 무조건 순종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우선 그들의 말을 받아들이되 그것을 하나님의 섭리에 비추어 비판해야 합니다. 그때 비판의 기준이 되는 것이 원리입니다.
선생님도 혼자서는 못합니다. 잘못하면 큰일 납니다. 세계적인 상황과 영계의 프로그램에 맞추어 결정해 나갑니다. 영통인들을 받아들여 가인이냐 아벨이냐를 분석해야 합니다. ‘너는 이러이러하니까 아벨이다, 가인이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이러이러하니까 아벨이다, 가인이다.’ 하는 판단을 내려야 합니다.
하나님도 이 내용을 분별하기 전에는 절대 심판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세상 재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통일교인들은 무조건 ‘우리가 아벨이다.’고 하기 쉽고,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영계를 중심삼고 자기들이 아벨이라고 하기 쉽습니다.
그러면 실제로 아벨이 되는 내적인 기준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일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하여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하늘 앞에 제물이 된 후, 아벨의 입장이 결정된 자리에서 가인에게 명령을 하면 됩니다. 그래서 안 들으면 쳐야 합니다. 그래서 깨져 나가면 그 사람의 복을 모두 여러분이 인계 받을 수 있습니다. 뜻을 사랑하는 데 있어서 그 사람보다 자신이 위에 설 수 있도록 하십시오! 그리하여 아벨로서 뜻앞에 제물이 되면 가인은 어쩔 수 없이 여러분을 통해서만 뜻길을 갈 수 있게 됩니다.
선생님은 지금도 그런 기준에서 하늘의 일을 해 나가고 있습니다. 신령역사를 받은 사람들이 선생님을 증거하는데, 선생님은 그들이 하늘에 대하여 정성들인 것을 봐서 대해 주는 것입니다. 그들에 대해 일정한 공식을 적용해서 하늘의 법도대로 어떤 단호한 결정을 내려도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1965년부터 기성교회에 다시 은혜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동안에는 통일교회를 반대하므로 은혜를 잃었습니다. 이제는 통일교회가 21년 기간이 되었기 때문에 기성교회도 재봉춘(再逢春)하는 입장에 놓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벨의 제단이 결정되면 가인의 제단도 마련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는 그들에게 통일교회를 반대하는 기운이 돌았지만, 이제는 우리를 환영하는 기운이 돌 때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넘어오기는 해야 하나 실제 사정으로는 쉽게 넘어올 수 없으니, 우리가 다리를 놔주기 위해서 여러 가지 중간 활동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식구들은, 특히 오래된 식구들은 당초 들어올 때 느꼈던 기쁨과 은혜를 많이 잃어가고 있습니다. 처음 들어올 때 기뻐하던 심정을 다시 찾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을 죽음의 길로 보낸 제자들은 부끄러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과 같이 죽었다가 함께 부활했다면 얼마나 기쁜 구원이었겠습니까? 여러분은 이런 것을 몰랐던 사람들입니다.
처음에는 누가 핍박을 해도 충천된 기세로 나아가던 사람이 몇 해를 지나는 동안에 지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것은 심정이 떨어져 나간다는 증거입니다. 통일교회에 처음 들어올 때 기뻐하던 마음이 얼마의 시련을 겪었다고 무디어진다면 교회와 관계가 멀어집니다.
그래도 여러분이 죽지 않고 이렇게 남아진 것을 정말 고맙게 생각합니다. 다만 한 가지 염려스러운 것은 여러분이 처음 들어올 때의 마음으로 뜻을 대할 수 있느냐, 그렇지 않으면 부끄러운 상태로 대할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계에 들어갈 때 땅에서보다 더 기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면 저나라에 가서는 부끄러운 구원을 받게 됩니다. 그런 자세로는 만민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두 반성해야 합니다.
내가 어느 만큼 하늘을 사랑하느냐, 주가 사랑하는 사람을 어느 만큼 사랑하느냐, 주를 반대하는 사람도 사랑할 수 있는 내가 되었느냐 하는 물음에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 악한 사람도 구원할 수 있습니다.
우선 선생님이 사랑하는 식구를 사랑할 수 있어야 반대하는 사람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랑의 기준이 떨어지면 복귀될 수 없습니다. 부끄러운 구원을 받지 말아야 합니다. 생명의 요건과 영양소를 받기 위해서 언제나 심정적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과거의 기쁨을 잃어버린 사람은 선조의 재산을 탕진해 버린 것과 같습니다.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이 민족과 세계, 종국에는 사탄세계까지 구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지상의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문제도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을 위한 입장에 서면 언제나 아벨적인 입장을 고수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4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내가 부끄러운 구원을 받을 자리, 즉 가인의 입장에 서 있는 것은 아닌지 이 자리에서 다시 한번 반성해야 합니다. 만일 아벨의 입장에 있다면 남들이 피하는 것, 어려운 것을 다 감당해야 합니다. 그리고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는 초연한 태도를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부모의 제일 어려운 문제를 대신 풀어야 하며 바깥의 어려움도 도맡아야 합니다. 따라서 아벨의 입장에 있는 우리들은 식구를 사랑하고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관념적이 아니라 실증적으로 사랑하여 만사에 자신을 가지고 나가야 사탄의 참소를 받지 않는 자리에 서게 됩니다.
개인을 거쳐 가정, 종족, 민족, 국가, 세계를 이루는 모든 복귀섭리역사의 성취에는 이 공식이 적용됩니다. 하나의 확대는 전체가 됩니다. 결국 온 인류는 한 형제자매인 것입니다. 따라서 식구를 대할 때 누구나 형님 누나로 대해야 됩니다.
그리고 나가 싸울 때는 부모의 자격으로 싸워야 합니다. 즉 싸우는 상대가 원수라 할지라도 궁극적인 의미에서는 자기 자식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표어가 ‘부모의 심정을 가지고 종의 몸을 쓰고, 땀은 땅을 위하여, 눈물은 인류를 위하여, 피는 하늘을 위하여 뿌리자.’입니다. 그래야만 완전히 복귀됩니다. 이러한 사람을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최고 교육지침입니다.
앞으로 있을 제2차 7년노정에 대비하여 새로운 결의를 해야겠습니다. 각인의 처세관, 생활관, 그밖의 어떤 것이라도 원칙을 벗어나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식구들을 볼 때 여기에 합당한 사람이 도대체 누구냐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인간적인 감정으로 한다면, 뜻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한 칼에 쳐서 그 피를 들이마셔도 오히려 부족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도 뜻에 대해 현재의 통일교인보다 3배 이상 기뻐하면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책임 못한 사람은 반대자처럼 선생님을 가슴 아프게는 안했다 할지라도 역사의 결과를 놓고 따진다면 조금도 그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과거에 뜻을 반대하던 사람들이 3배 이상 기뻐하면서 뜻을 받아들이면 용서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탄이 참소하게 됩니다. 선생님도 앞으로 그들을 어떻게 대해 줄 것이냐에 관하여 몇 해 동안 생각해 봤습니다.
그들은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죄를 지은 후에 용서받은 자의 감사는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이 감사해 하는 것보다 몇 천 배 더 귀한 것입니다. 그들이 일반 사람보다 몇 천 배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돌아온다면 하나님은 그들을 용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한 심정을 가진 하나님이기에 전체를 복귀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용서하지 못한 부분이 남아 있는 한, 언제까지라도 그 부분은 복귀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심정을 가진 통일교회여야 사탄의 입장인 공산세계까지 복귀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대하시는 하나님을 위로해 드리지 못하는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때가 많습니다.
선생님이 누구를 용서해 줄 때 여러분들이 ‘그러시면 절대 안 됩니다.’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궁극에는 극악의 원수도 용서할 수 있는 심정, 이것이 야말로 사탄세계까지 탕감하고 넘어갈 수 있는 것이 됩니다. 선생님이 만일 이것을 몰랐다면 복귀역사를 못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심정을 통해서만 전체를 복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적 기준을 통해 외적, 즉 사회적 완성 기준까지 복귀해 나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인 편뿐만 아니라 사탄까지도 용서해 줄 수 있는 아벨로서의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과거에 관계 당국이 우리를 얼마나 못살게 했습니까? 그러나 이제는 우리가 쌓아 놓은 실적과 공적을 직접 목격함으로 우리를 이해하게 되었고, 퍽 가까운 사이가 되었습니다. 원컨대 아벨의 사명을 다하라! 그리고 처음 교회에 들어왔을 때 느낀 기쁨을 그대로 간직하여 생명의 원천으로 삼아 생명의 불을 지펴라! 이제 계절적으로 보나 섭리적으로 보나 봄이 되었으니 다시 뭉쳐 재출발해야 되겠습니다. 부끄러운 구원을 받고 저나라에 가서는 안 됩니다.
상하 관계에 있어 가인 아벨이 되어 있느냐, 전후 관계에 있어서 누가 주인이냐, 선생님 가정을 중심한 좌우 관계에 있어서도 누가 중심이냐 하는 것을 바로 알고 각자 합당한 입장을 지켜 나가야 합니다. 인간관계와 하늘땅의 총합적 관계에서도 반드시 누가 가인이고 아벨인가를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어떤 특정한 일을 중심삼고는 평소의 아벨이 가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즉 이 관계는 때에 따라 뒤바뀔 수 있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이것을 몰랐다면 벌써 깨졌을 것입니다.
우리들은 개인적인 승리뿐만 아니고 세계적인 승리라는 목적을 두고 일해야 합니다. 아벨의 위치를 지키는 것도 자체 목적을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세계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세계적인 목적에 부응해서 선 사람은 스스로 망하겠다고 해도 망하지 않습니다. 망하면 천도가 깨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법도대로 해야 사탄의 침범을 받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밤낮 가해오는 사탄의 침범을 면치 못합니다. 그래서 몇 해도 못 가서 지쳐 태풍만 불어오면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을 중심삼고 이념 본위의 인격관을 확립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한을 해원해 드리고, 예수님의 한을 해원해 드리고, 만물의 한을 해원해야 하는 사명이 내 어깨에 달렸는데, 언제 쉬고 뭐하고 할 새가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절대 부끄러운 구원을 받지 않도록 힘쓰기 바랍니다. 예를 들어 쌀은 어떠한 종자이건 다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때에 따라서는 쌀 중에서도 종자가 문제 될 때가 있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쌀은 선생님 식으로 만들어진 종자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은 것은 거지에게나 나누어 주는 데 쓰이는 것에 불과합니다. 물론 어떻게 쓰이든지 간에 어느 것이나 다 필요하기는 합니다.
누구든지 그냥 떨어졌다면 언제라도 다시 돌아와 식구들의 가지에 재차 접붙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았기 때문에 선생님은 어떠한 풍랑과 조소와 어려움이 닥쳐와도 꿈쩍도 안 했습니다. 여러분은 선생님이 아는 것만큼 뜻의 가치를 아는가? 가만히 보면 얼빠진 젊은 사람들이 많아 한심합니다. 이왕지사 뜻길에 나섰으면 부끄러운 걸음을 걸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까지의 발걸음은 어찌할 수 없다 하더라도 내일부터는 새로운 걸음을 걸어야 됩니다. 그러므로 제2차 7년노정은 올바르게 걸어가야 합니다.
선생님은 좋아서 감옥에 끌려간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을 살려 주기 위해서 감옥살이를 한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기성 권력층의 반대는 하늘의 뜻을 펴는 데 지장이 많았습니다. 선생님은 27세부터 14년 걸려 1960년에 와서 가정적 기대를 이루었습니다. 그 후 7년을 더 걸어 지금 21년의 기간이 끝나려는 시점에 있습니다.
해방 직후에도 상부와 연락하여 뜻을 성취시키려 했는데, 일부 측근 목사가 반대하여 깨졌습니다. 그때 뜻을 이루었다면 공산당이 저렇게 세계적으로 번창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 후 3정권을 거쳐 나왔습니다. 이 정권은 아담형, 장 정권은 해와형, 박 정권은 천사장형입니다. 이제 와서 박 정권이 통일교회를 협조한다는 것은 본격적으로 복귀해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초 해와가 천사장의 꼬임에 넘어가서 졌지만 이제는 하나님 편에서 천사장을 말(言語)로써 이겨야 합니다. 즉 이념으로 돌려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국이 우리의 반공 활동에 승공이란 명사를 인정한 것은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천사와 겨루어 이김으로써 이스라엘이 된 것과 비슷한 사례입니다. 이런 점으로 보아 뜻을 성사시킬 수 있는 승리의 팻말은 이미 꽂혔다고 봅니다.
이제 종적인 승리의 기준은 되었으니, 이것을 기반으로 횡적으로도 승리해야 할 조직이 필요합니다. 기성교회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세계를 통일의 이념으로 복귀해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서는 불가불 철학적, 즉 학문적이고 사상적인 토대를 중심으로 해야 합니다. 이러한 일련의 작업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사상을 중심으로 학계와 관련지어 전개하고 있는 것이 반공운동이요, 교회를 중심으로 전개하고 있는 것이 대외 전도활동이요, 학생을 중심으로 펴고 있는 것이 교내(校內)의 원리연구회 운동입니다.
우리는 모든 기성 기관을 발판으로 얼마간 기반을 확충해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학술적 사상적인 면에서 한국에서 터를 잡고, 세계의 정상을 점령해야 합니다. 반공도, 학문도, 신앙도, 애국도 통일교회가 제일이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사탄에 대하여 공격작전, 포위작전을 해야 합니다. 여기에는 각계각층을 대표한 많은 유력 인사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현실적인 정치적 욕망을 가진 것이 아니니, 남들이 추측하는 대로 대통령 같은 것이 되겠다는 의도는 추호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사탄을 굴복시키고 그의 활동을 저지시킴으로써 세계적인 천국 건설의 대 목적을 성취하려 할 뿐입니다.
이것을 위하여 현실적인 악조건의 환경을 개척하고, 기성교회가 하나님의 참된 섭리의 내용을 깨달아 합당한 길을 갈 수 있게 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유물 공산주의 사상을 완전히 극복해야 되겠습니다.
나 자신도 나를 의심할 정도로 놀라울 때가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지식으로 선생님과 하나님을 헤아리기에는 그 척도가 너무나 작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는 순종이 필요합니다. 최후의 결정은 선생님이 하는 것입니다.
한 나무의 가지를 그대로 두어서 열매를 맺을 수 있으면 그냥 둬도 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다른 나무의 순을 잘라서 접붙여야 합니다.
선생님이 한국을 떠날 때 선생님 대신 일을 할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선생님이 떠날 때까지 여러분 중 입교한 지 3년 이상 된 사람으로서, 매일 밤 70명 정도 모여 입교할 때의 기쁨을 되찾아야 합니다. 내가 뜻 앞에 바로 서 있는가, 그렇지 못한가 하는 것은 입교 때의 기쁨을 갖고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으로 검토해야 합니다.
이제 7년이 지났습니다. 8년은 재출발하는 해입니다. 따라서 처음의 기준을 넘지 않으면 더 향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제는 외국도 직접 주관해야 할 때입니다. 선생님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책임 추궁을 받아야 되겠지만, 심정적으로는 동정 받을 수밖에 없는 입장에 있습니다.
나라를 책임지지 못한 사람이 세계를 책임질 수 없고, 세계를 책임지지 못한 사람이 천주를 책임질 수 없습니다. 선생님이 세계 순회를 하고 돌아오면 전국적으로 지도자가 교체되어야 합니다.
선생님은 1946년 5월 28일 남한을 떠나 6월 6일 평양에 들어갔습니다. 올해는 선생님이 공적인 노정을 출발한 지 21년을 지나는 해입니다.
일본이나 구주(歐洲)에서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5월 28일과 6월 6일의 기념일을 지내고 떠나려 했으나 금년 10월까지의 목표를 맞추려면 시간이 없습니다. 한국을 위해 일한 것이 영계의 공인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시련의 노정을 통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민족을 사랑하는 것이 전통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가 맡은 일에 대해 충효의 입장에 서지 않으면 비참하게 됩니다.
선생님의 생활에 대해 악평하는 사람은 선생님의 생애를 모르고, 하늘의 사정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선생님 주위에 있는 사람들 중 80퍼센트는 하늘을 통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특별 금식기도를 해서라도 그 기준에 올라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선생님이 원하는 식구를 찾겠습니다.
지금은 모두 피난민 신세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무엇에 애착심이 있어서는 안 되고 자리를 잡으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목적지에 가서도 모든 것을 회개하고 죄를 벗는 자리로 돌아가 청산해야 합니다. 공동목적 밑에서 공동생활을 해야 합니다. 피난 시 보따리가 많은 사람을 데리고 목적점까지 어떻게 갈 것인가? 그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누구를 보고 통일교회를 도와줄 것인가? 여러분은 나를 보아서 도와 달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 때문에 협조한다고 할 수 있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나를 중심하고 하나님이 도울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선생님의 생활철학이요, 비밀입니다. 하나님이 너로 인하여 대한민국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책임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을 보고 하나님이 통일교회를 밀어줄 수 있을까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원수도 미워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원수가 망하는 것을 보고 기뻐해서도 안 됩니다. 만일 하나님이 원수가 망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신다면, 이 세계는 남아질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탄까지도 미워할 수 없기에 선생님도 그러합니다. 여러분도 그러하여 하나님이 여러분 때문에 통일교회를 사랑한다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는가?
유 협회장은 지성적인 사람인데도 무조건 믿고 나가는 점이 위대합니다. 일편단심 정성으로 밀고 나가야 합니다.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하겠다는 데에는 체면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인간 책임 5퍼센트를 넘는 비결은 순종하는 것뿐입니다. 사람을 평가할 때는 충성과 정성을 그 사람보다 더 한 입장에서 그 사람을 분석하고 평가해야지, 그렇지 않고 평가하면 자신이 심판을 당합니다. 하나님과 나 자신과의 사이에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인연을 맺어야 합니다. 부모의 심정을 어느 정도 느꼈는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선생님은 이런 생활 문제를 지도하겠습니다.
타락한 인간이 완성하려면 원리적인 탕감조건을 세워야 합니다. 왜냐면 탕감원리를 거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원리를 알고 싸워 승리한 후에야 완성할 수 있습니다.
각자가 책임진 분야를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하는가?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일하는 공장이 나를 통하여 사랑받을 수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선생님이 세운 공장이 식구의 잘못으로 잘 안 될 때도 있지만 다른 데서 도와주러 오는 때도 있습니다.
선생님은 감옥에서 매를 맞거나 고문받는 자리에서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아무리 기도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심적 자세가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은 자기 자신보다도 세계를 더 사랑하기 때문에 선생님을 통해 하나님이 세계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나는 감옥에 있을 때마다 그런 충성의 기준을 세우려 했고, 또한 그렇게 나를 다스려 나왔습니다.
하나님은 한국을 사랑합니다. 왜 사랑하겠는가? 나는 어머니에게 어떻게 하면 이 가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 나라를 사랑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가르칩니다.
1960년도 이후의 7년노정은 선생님께 있어서는 가정적 기준을 세우는 기간입니다. 그래서 어머님이 식구들에게 모범이 되지 않은 일은 없었는가를 걱정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기간이 식구들에게 있어서는 개성을 완성시키는 기간입니다. 그리고 다음 7년 기간은 가정을 이루어 가족을 찾아 세우는 기간입니다.
선생님은 제1차 세계 순회 때에는 흙과 돌을 갖고 순회하였지만, 이번에는 심정을 갖고 떠나려 합니다.
사랑의 봄동산에서, 모든 세포가 녹아나는 것같이 넓고 깊은 사랑 안에서 우리는 부활할 수 있습니다. 땅에서 세 가지 사랑의 기준을 세워 남겨 두지 않고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을 소개는 했으나 실체로 느끼지는 못했습니다. 통일교회에 들어오면 처음엔 아들딸 같은 심정, 나중에는 신랑 신부, 부모와 같은 심정이 일어납니다.
지금은 소생․장성․완성의 심정이 일시에 들어올 때입니다. 완전한 인격을 이루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성품을 흡수해야 합니다. 즉 모든 사람의 성품을 받아 주고 흡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만물을 주관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적어도 열두 사람 이상의 마음을 맞추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성품의 표시체이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에게는 원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을 바치면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사람을 싫어하는 사람은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담이 없는 집에서 살아야 합니다. 집단(120명 이상) 생활에서 그들의 성품을 흡수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땅에서 이러한 기준 위에 서지 못했습니다.
은혜를 회복할 수 있는 길은 한 번 기도한 것을 열 번 이상 실천하는 데 있습니다. 은혜스러운 생활을 하려면 간절하고 애끓는 마음으로 사람을 그리워해야 합니다. 평화의 왕자가 되어야 하늘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3년 공생애는 예수님 자신이 도를 닦는 기간입니다. 열두 명의 제자는 열두 인간형의 상징입니다. 천국에 가려면 항상 기도하고, 나아가 대인관계에서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원리를 통하지 않고는 모심의 생활을 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가짜입니다. 은혜를 회복하려면 기도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기도를 못했어도 실천하면 기도한 입장에 섭니다. 한 번 기도하고 열 번 실천하면, 열 번 기도하고 실천한 입장에 섭니다.
선생님에 대한 말은 어느 때고 밝히고 넘어가야 합니다. 선생님이 없을 때는 횡적 연결을 해야 합니다. 열두 진주문을 통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외적 축복은 해줄 수 있습니다. 앞으로는 자유결혼을 시키려고 합니다. 그때 하나님이 보시기에 본이 될 수 있는 입장에 서야 합니다.
3인만 마음을 맞추고 나서면 잠을 자지 않아도 피곤하지 않습니다. 선생님은 상대자가 없을 때는 사람을 창조하는 입장에서 말합니다.
선생님이 돌아올 때까지 정성껏 일하고, 단결하고, 기도할 70명을 뽑아 이들에게 책임을 맡기고 떠나겠습니다. 토요일 밤엔 교회에서 철야를 해야 합니다. 매일 성지기도를 다녀야 하며, 성지기도를 갔다 오면서 한 사람 이상 전도해야 합니다. 전도 못하면 전에 나오던 식구라도 데려오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유발할 수 있는 제일 좋은 방법은 정성들이는 것이니, 3대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정성을 들이면 하나님이 같이하시어 그 후손이 결코 망하는 법이 없습니다.
끝날에는 여자를 중심하고 주로 역사하십니다. 그것은 여자가 먼저 타락한 원인도 있겠지만, 여자는 타락한 땅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통일교회가 나오기 전에 종적인 섭리를 횡적으로 하기 위한 역사가 있어야 했습니다. 주님이 나타나시기 40여 년 전부터 신랑을 맞이할 신부의 역사가 여자들 중심으로 나타나야 했습니다. 거기에 대응하여 남자도 역사하여 하나의 결정적 중심을 세워야 했습니다. 이것들 모두 3단계를 통해 나옵니다.
여호와의 부인이라는 여성이 나와야 복귀역사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사자는 알지 못합니다. 그 여자가 탕감복귀역사를 하는 데 있어서 3분의 2는 하나님의 역사를, 3분의 1은 사탄의 역사를 합니다. 이것을 분별해야 합니다. 이것은 순전히 지혜와 충효의 마음, 진리를 추구하는 마음으로 처리해야 합니다.
그 부인은 성혼 당시의 어머님과 같은 연령(16세) 이상이어야 합니다. 그녀가 증거해야 하므로, 선생님은 처음에 그녀 앞에 종의 입장에서 봉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종을 해방하지 못합니다. 세례 요한 앞의 예수님과 마찬가지입니다.
양자도 하늘의 총리(충신을 말함: 충신의 과정을 지나야 양자가 됨) 자리를 거쳐 직계 아들의 자리까지 올라가야 합니다. 그러한 후에는 자기가 주님 앞에 복종한다는 것을 증거해야 합니다. 그 시간부터 거꾸로 주님이 주관할 수 있는 입장에 서게 됩니다. 여기서 순응하면 사탄이 물러가고 불신하면 그때부터 떨어지는 것입니다. 순응하면 선생님이 고생하지 않습니다.
그로써 아담을 탕감복귀한 기준을 세우게 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는 나이 많은 사람으로부터 증거해 내려옵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어머님을 모시게 되는 것입니다. 준비했던 여인들이 사명을 다 못했기 때문에 선생님이 옥중 과정을 거쳐 나온 것입니다.
선생님에게 아직 두 가지 미진한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모르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제물 된 역사적 한을 풀기 위한 실체로 여러분을 세운 것입니다. 아직 7년노정이 남아 있기 때문에, 어머님이 가야 할 완성 기준이 남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부에는 하나님과 선생님과 식구들이 공인하는 사람이 아니고는 있을 수 없습니다. 선생님이 집을 갖지 못했을 때 집을 갖고 사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걸립니다. 선생님은 할 말을 다 못하고 있습니다.
끝날에는 복에 치이는 때이므로 병이 많이 나게 됩니다. 우리는 역사적인 한 고비 길에 부딪혀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들어오기 전의 시대와, 들어와 은혜받은 때를 회고하여 7년노정을 재출발해야 합니다. 옛날의 기준을 회복할 수 없는 사람은 그런 사람에게 종노릇을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에게 업혀서라도 나아가야 합니다.
선생님도 사람이기 때문에 지칠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옥중에서 고문당하던 때를 생각하고, 그때 하늘 앞에 충효의 도리를 세우던 기준으로 돌아갑니다. 여러분들과 같이 어려움이 닥칠 때에 선생님이 그만두거나 쉬었다면, 이 길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하나님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자는 사람을 깨워서 복을 주려고 하고, 성난 사람을 얼러서 복을 주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제일 큰 서러움입니다. 1965년도에 세계 일주할 때는 기쁨이 없었습니다. 수많은 천적인 자녀들이 연결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각자가 가는 길이 참인가 아닌가를 판단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선생님은 선생님의 역사를 남겨야 한다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끝날에 세 여인이 나와야 할 사람 중 김성도(정 장로의 모친) 씨가 제1인이요, 다음은 허호빈 씨입니다.
주님을 맞이하는 준비를 하는 데 있어서 두 번째 여성으로 나온 이가 허호빈 씨입니다.
남편은 아담의 입장이라 하여 하늘의 간부로 취급당하고 부인에게는 절대 복종해야 했습니다. 또 주님과 같이 섬겨야 했습니다. 예를 들면 부인에게 3천 번의 경배를 드리는 일도 있었습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평생 동안 3일마다 새 옷을 갈아입을 수 있을 정도의 많은 옷을 만들었습니다.
1946년 8월 11일에 선생님은 그들 때문에 그들과 같이 옥중에 들어가 3개월 만에 나왔습니다. 선생님은 옥중에서 그들을 만났으나 그들은 선생님을 몰라봤습니다. 공산당은 선생님과 함께 있는 허 씨의 제자들에게 주님이 복중으로 온다는 것을 부정하면 옥중에서 놓아 준다고 했으나, 그들은 그것을 끝까지 주장하다가 쓰러졌습니다. 그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은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부정하고 나왔었습니다.
세계에서는 12사도형이 역사를 하고, 다음에는 72가정, 120가정형이 역사를 합니다.
허 씨가 있을 때 1,200명이 정성들였습니다. 이들 중 5퍼센트가 희생이 되었습니다.
재림주님은 그들을 살려야 합니다. 그들이 한 일은 앞으로 우리들이 해야 할 일에 대한 모범을 보여준 것으로서 우리들도 그렇게 실천해야 합니다. 그들이 하였던 일을 선생님이 세계에 자랑해야 합니다.
앞으로 첫째 부활에 참여할 사람은 7천 번이라도 경배해야 합니다. 그러한 정성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그들이 통일 성도를 참소하게 됩니다. 그들이 재림주님을 위해 들였던 정성의 기준에 비교하면 통일 식구들은 너무나 정성이 부족합니다. 그때 그들이 사명을 다했더라면 선생님이 고생하지 않아도 됩니다. 선생님이 감옥에 있을 때 그녀의 남편과 제자들을 만나 말해주었습니다.
첨단에서 가는 사람은 잘못하면 비참해집니다. 그 중심이 잘못되면 사탄에게 참소를 당하며, 이것을 탕감짓기 위해 하나님은 탕감조건을 세우도록 몰아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도 십자가에 매달리게 된 것입니다. 그 한 사람을 중심하고 종적인 것을 횡적으로 탕감합니다.
선생님은 앞서 세 사람을 세워서 그들이 가는 길을 보고, 그들에 대한 하늘의 판단을 보아서 갈 길을 결정합니다. 이것이 지혜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겸손한 입장에 서야 합니다. 자기를 먼저 내세우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내세우지 말고 몰리고 쫓기는 자리에 서야 합니다.
10차례 시험을 받으면 하늘이 세 번은 같이해 주십니다. 왜냐하면 7천년 역사를 돌아와 8, 9, 10은 탕감 기준을 넘어선 수이기 때문입니다. 각자는 자기 종족을 구하기 위한 메시아 입장에 서야 합니다. 그러한 입장에 들어서면 자기 선조들이 나서서 자랑하기 때문에 각자에게는 기쁨이 오게 됩니다.
잘못이 있을 때 자녀를 낳으면 그 잘못은 유전됩니다.
최후의 결승전을 앞두고 쉬는 것을 볼 때 그의 선조가 얼마나 한탄하겠습니까? 하나님의 한(恨)을 풀기 위해 몸부림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언제 우리가 영인들이 재림부활할 수 있도록 탕감조건을 세우는 자신이 되었던가?
이제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1967년을 맞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선지선열들보다 더 정성들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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