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하나님께는 보다 작은 가치의 탕감조건을 드릴 수 있지만 사탄에게는 안 됩니다. 사탄에게는 보상과 같은 동등한 가치의 탕감 조건을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보다 작은 가치의 탕감조건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서는 성립되지만, 인간과 사탄 사이에서는 이와 같은 보다 작은 가치의 탕감조건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탄에게는 하나님이 가장 좋아하시는 것을 주어야 탕감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탕감조건을 세울 때는 그 본체 못지않게 사랑하는 것으로 세워야 합니다.
하나님이 A를 탕감조건으로 세우려면 그 A는 하나님 자신이 사랑하는 것이 아니면 안 됩니다. 여기에 심정 문제가 개재되게 됩니다. 그러므로 메시아는 피조세계와 동등하게 사랑받을 수 있는 자라야 합니다.
세계를 탕감복귀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셨다.
통일교회의 탕감조건은 선생님이 세우고 여러분들은 따라오면 됩니다. 영계를 통일하지 않고는 지상을 통일할 수 없습니다. 천사들을 통일하지 않고는 지상의 인간들을 통일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영계를 통일하고 영계가 지상세계를 협조하도록 해야 합니다.
선생님은 해방과 더불어 사명을 지고 나왔습니다. 그때 이 박사가 뜻 가운데 서야 했습니다. 그때 기독교가 나와 손을 잡았더라면 7년 내에, 즉 선생님이 33세 되기 이전에 세계적인 기준까지 나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야만 했었습니다. 내적 외적으로 한 고개를 넘어야 했었는데 선생님 혼자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고난의 골짜기인 이북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소생 7년노정, 장성 7년노정은 선생님 혼자서 걷고, 완성 7년노정은 식구들도 걷게 한 것입니다.
우리는 마지막 고개에서 민족의 지도자들과 상봉하여 민족적인 7년 고개를 넘고, 그 다음에는 세계적인 고개를 넘어야 되는 것입니다.
한국은 아벨적인 국가이기 때문에 종적인 것을 횡적으로 탕감해야 합니다. 가인적인 국가에서도 이러한 탕감조건을 세워야 합니다.
사람을 찾은 후에는 땅을 찾아야 합니다. 선생님이 40개국을 순회한 이유는 성지 택정을 위함입니다. 한국에서 타락 전 기준을 세웠기 때문에 성지를 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세계 40개 국가에서 105곳의 성지를 택했습니다. 120가정은 120개 국가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는 120개의 성지를 택해야 합니다.
한국에서는 70수를 중심으로 하여 72개소를 찾아서 조건을 세워야 합니다. 미국보다 더 많은 성지가 있어야 합니다.
성지가 택해졌다는 것은 인간을 창조하기 전에 땅을 지은 것과 같은 입장입니다. 여기에 성도가 서면 인간과 땅이 창조된 것과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사세계와 영계가 협조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20개의 성지를 가진 것은 120개국의 영토를 가진 것이 됩니다.
미국의 성지를 택하는 데 있어서 그들의 선조들이 동원하여 협조하게 되어 있습니다.
성지를 택하는 기간은 1964년 12월 31일과 1965년 1월 1일에서 시작하여 1965년 12월 31일과 1966년 1월 1일에서 4일까지입니다. 햇수로는 3년에 걸쳐 성지를 택해야 합니다.
6수는 사탄이 침범한 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수를 탕감복귀해야 합니다. 한․일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이 6수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을사보호조약 이후 60년 만에 한․일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상에 오셔서 부모에게 버림받았기 때문에 선생님은 부모를 전도할 수 없는 것입니다.
몸의 욕구를 없애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그 몸을 제어하는 마음의 힘을 강하게 하면 몸을 주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마음을 어떻게 하면 강하게 할 수 있는가?
인간의 마음은 타락선 이하에서 움직입니다. 이 선만 넘으면 그 마음은 하나님 앞으로 직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거기에 목적이 생기고, 방향이 생깁니다. 또 그로 인해 사정이 생기고, 심정이 생기는 것입니다. 목적, 방향, 사정은 곧 이념, 행동, 생활과 통합니다.
선은 하나님 앞에 대상의 입장에 서려 하는 것이지만, 악은 주체의 입장에 서려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대상의 입장에서 오신 분입니다.
창조원리에 의하면 지상에서 이루지 못한 상대이념은 영계에 가서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상에서 믿음의 자녀를 세워 가지고 부모 아닌 부모의 입장에 서서 영계에 가게 되면 비로소 이 이념을 이룰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전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아버님! 어제는 모든 백성들이 아버지의 뜻을 찬양하고 아버지의 아들이 태어난 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요란한 시간들을 보낸 줄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 진정으로 아버지를 모시고 아버지 앞에 충효의 도리를 다했다고 할 수 있는 자녀들이 얼마나 되겠사옵니까? 아버지께서 찾아오셔서 진정으로 내세워 자랑하고 싶은 자녀들이 얼마나 되겠사옵니까? 이런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저희들은 아버지의 슬픔이 더하실 것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이제 그 한 날을 보내고 다시 아버지 앞에 부복하고 경배드리는 새로운 날을 맞이하였사오니, 이 외로운 날이 아버지 뜻 앞에 거룩한 날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려는 저희들에게 아버님께서 힘과 능력을 가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긍휼히 여기시는 당신의 마음과 당신의 사랑이 아니었던들, 저희들은 오늘 이와 같은 모습과 이와 같은 자세로 당신 앞에 부복할 수 없었을 것임을 잘 알고 있사옵니다. 이러한 은사를 받은 저희 자신들, 당신 앞에 갖출 바를 다 갖추지 못해 더욱 민망하오나 용납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흩어진 마음들을 수습하여 아버님 존전에 충성을 다 바칠 수 있는 이 시간이 되어야 되겠사옵니다. 저희들의 마음이 어디로 향하고 있으며, 저희들의 몸이 어떠한 자세로 아버님 앞에 부복하였는가를 생각할 때 저희들은 부족한 마음뿐이옵니다. 그런 마음으로 용납하여 주시기를 기도하오니 품어 주시옵고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이 나라의 수많은 백성들이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고대하고 아버지께서 찾아오실 한 날을 고대하고 있사오나, 그 날과 그 뜻을 알지 못하는 수많은 백성들도 있사옵니다. 그들에게 천적인 은사를 베푸시어 그들이 갈 길을 알게 하여 주시옵고, 그들의 몸과 마음이 스스로 아버지께서 지향하시는 방향에 맞추어 나갈 수 있도록 역사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 남한 각지에 널려 있는 외로운 통일의 형제들을 긍휼히 보시옵고 품으시옵소서. 최후의 싸움을 다짐해야 할 때가 저희 앞에 다가오고 있는 것을 망각지 말게 하여 주시옵고, 충성을 다하고 지성을 다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어떠한 수고와 어떠한 희생이 있더라도 저희들에게 남겨진 이 뜻을 감당해 낼 수 있는 새로운 각오와 결의를 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시간 모든 것을 당신 앞에 맡겼사오니 처음부터 끝까지 주관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였사옵나이다. 아멘.
한 많은 기나긴 역사를 더듬어 오시면서 슬픔의 날들을 안고 밟아 나오지 않으면 안 되었던 당신의 그 심정을 누가 알았사옵고, 당신의 그 사정을 누가 알았사오며, 당신의 그 소망을 누가 알았사옵니까? 홀로 아시는 그 마음, 홀로 가지신 그 사정, 홀로 품으신 그 심정과 그 뜻을 알지 못하는 인간들을 대하여, 그 소망과 사정과 심정을 가르쳐 줄 수 있는 하나의 자녀를 찾아 나오시기 위하여 수고하신 아버님이 얼마나 불쌍하신 분인지를, 저희들 이 시간 다시 한번 느끼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분은 남이 아니오라 저희들과 영원히 같이 살아야 할 아버지이시옵고, 그분은 수고하셔야 할 분이 아니오라 만우주를 창조하신 주인이심을 저희들이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아버지요, 우리의 참다운 주인으로서 만우주 전체를 품으시고 사랑하셔야 할 그분이 그러한 역사적인 곡절을 남겼다는 사실을 통분히 여길 줄 아는 자녀들이 되어야 하겠사옵니다.
우리 선조의 한 번 실수가 이처럼 억천만세를 두고도 용납받을 수 없는 죄가 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 눈물과 피땀을 다하여도 갚을 도리가 없사옵고, 생명을 천만번 희생하더라도 갚을 도리가 없는 것을 이들이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저희들, 1965년 마지막 주일을 맞이하여 모였사오니 긍휼히 보아 주시옵소서. 한 많은 역사의 고빗길을 더듬어 오셨던 당신께 또다시 이 한 해를 슬픔으로 보내게 해 드리는 저희를 긍휼히 보시옵소서.
아버님께서는 이 통일의 무리를 삼천만 민족 앞에 내세우셔서 뭇백성들과 더불어 아버지 앞에 영광 돌려드리는 무리가 되기를 바라셨사오나, 저희들이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이 해를 보내게 되었사오니 눈물과 더불어 이 해를 보낼 수 있게 허락해 주옵소서. 1966년은 새로운 각오와 새로운 신념을 가지고 맞이하게 해 주시옵고, 지난날 아버지 앞에 탄식의 조건을 남긴 것을 회개하고, 새로운 출발을 각오하고 맹세하는 이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당신을 안다고 할 자가 어디 있으며, 당신의 뜻을 세우겠다고 할 자가 어디 있으며, 당신을 위하여 생명을 각오하고 나갈 자가 어디 있사옵니까?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여기에 모인 저희들, 비록 불쌍하고 보잘것없는 무리들이오나 한 때는 당신을 위하여 충성을 다짐하였고, 당신을 위하여 생명을 바치겠다고 맹세한 무리들이오니, 지친 자들이 있사오면 힘을 더하여 주시옵고, 낙망한 자들이 있사오면 붙들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들은 원수들의 농락에 많이 짓밟혔사옵고, 슬픈 과거 역사에 말할 수 없는 애달픈 사정을 가지고 있사옵니다. 그 모든 한 많은 심정을 잃어버리는 자들이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슬픔과 아버지의 한을 잃어버리는 저희들 되지 말게 허락해 주시옵소서. 이 죄악의 세상을 심판 하실 때 기필코 아버님 앞에 영광을 돌려드릴 수 있는 승리자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날 수많은 자녀들이 당신의 무릎 앞에 엎드렸사옵니다. 새해를 맞아 아버지 앞에 약속을 세워 기도하는 자녀들이 있사오면 그들 위에 각별한 은사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지난날의 부족한 모든 것을 청산하고 새로운 해를 맞아 스스로 아버지 앞에 설 수 있는 단장을 하고, 장비를 갖출 줄 아는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집에서는 효자의 장비를 갖추어야 하고, 밖에 나가서는 원수들과 싸울 수 있는 무장을 해야 할 저희들이오니, 저희들의 갈 길을 지켜 주시옵고 권고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시간 보잘것없는 무리들이 모였사오니 그 마음을 하나로 묶어 주시옵소서. 지금까지 그 마음이 누구를 위하여 나왔고, 그 몸이 어떤 방향을 취하였는가를 스스로 비판하여서 이 시간 전체를 아버지 앞에 받들어 드릴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지난날은 저희들이 기쁨과 슬픔의 마음을 가지고 지냈지만, 새해에는 새로운 각오로 출발할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시간 부족한 모습들이 당신 앞에 부복하였사오니 당신의 긍휼의 손길을 펴시사 당신의 품에 품어 주시옵고, 새로운 명령을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였사옵나이다. 아멘.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30여 성상의 곡절 많은 행로를 걸으셨음을 아옵니다. 저희들은 어느 한 날 아버지를 모시지 못하였고, 아버지 앞에 충성을 다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생각할때 마음 아프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어제는 예수께서 탄생하신 한 날을 맞이하여 모든 백성들이 축하하였사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환영받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얼마나 그리워하신 당신이시옵니까?
이 시간 저희들 참다운 그리스도의 형상과, 하늘과 땅이 바라시는 아버지의 참다운 아들딸의 모습을 그리워할 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저희들의 부족한 자세를 시정 받을 수 있는 깨끗하고 아름다운 이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하늘을 추앙하는 사람은 많사오나 하늘을 위하여 책임지겠다는 사람은 적사옵니다. 저희들은 하늘을 위하여 책임을 져야만 되겠사옵니다. 하늘길이 좋다는 것은 알고 있사오나 그 길에 놓여 있는 가시밭길을 피하려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아옵니다.
아버님! 당신은 우리를 위하여 억천만세 수고하셨사옵니다. 그런데 오늘날 인간들은 하늘의 길, 참된 길을 가기 위해서 넘어가야 할 수고의 길을 피해 가려 하고, 저희의 슬픔과 고통도 아버지 앞에 맡기려 하고 있사오니 용납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오늘 통일의 무리들이 아버지 앞에 모였사옵니다. 저희들은 남과 달리 아버지의 심정을 알았사오나, 아버지의 사정과는 달리, 아버지가 남기신 소망의 길을 저희 뜻대로 하고, 생명의 일체를 바치기를 거부한 저희들 자신을 이제 이 한 시간에 아버지 앞에 솔직히 드러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어차피 가야 할 인생의 행로를 아버지의 뜻대로 가기를 기도하고 있사옵니다. 죽음의 길도 아버지와 더불어, 가시밭길도 아버지와 더불어, 버림 받는 길도 아버지와 더불어 가야만 되겠사옵나이다. 아버지의 뜻도 선하시고, 나선 길도 선한 길이온데 저희는 선하지 못하옵니다. 선하지 못한 자체들을 용납해 주시고, 과거의 부족함을 용납해 주시옵소서. 아버지와 같이 살고 싶은 마음을 갖고 있사오니, 아버지, 긍휼히 보시사 품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그 누가 뭐라 해도 나는 당신의 아들이요, 딸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노라고 몸부림칠 줄 아는 자녀의 모습으로 세워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과 사랑의 인연이 맺어져 있고, 아버님과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혈육의 관계가 맺어져 있는 자녀의 명분을 저희가 가지고 있다 할진대, 그 무엇도 당신과의 관계를 부정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님의 진정한 아들이 되지 못하고 딸이 되지 못한 과거를 스스로 회개하고, 겸손히 아버지 앞에 나아가 용서를 비는 모습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아버지가 아무리 보기에는 추하고 초라할지라도 우리의 아버지임에 틀림없고, 그 아버지가 아무리 서러운 가슴을 안고 걱정을 품고 계실지라도 우리의 아버지임에 틀림없다고 하면서 그 아버지를 붙들고 위로할 줄 알고, 아버지를 위해 효성을 다하지 못한 것을 한할 줄 아는 당신의 어린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당신은 누구를 만나고 싶사옵니까? 그 누구와 더불어 약속을 하고 싶사옵니까? 그 누구에게 당신의 한 많은 사정을 털어놓고 싶사옵니까? 오늘 저희들에게 그리하여 주시옵기를 바라옵니다.
당신이 분하고 원통하시면 저희들도 분하고 원통하옵니다. 하오니 강하고 담대하여 원수와 싸울 줄 아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그 누가 당신의 사정을 통고할 자가 있사오며, 그 누가 당신의 심정을 가르쳐 줄 자가 있사옵니까? 당신만이 해 주실 수 있는 것을 아옵니다.
부족하고 초췌한 모습으로 아버지의 긍휼을 바라고 동정을 바라는 마음만 가지고 아버지 앞에 나타나게 될 때 아버지께서 저희들을 버리시지 못한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았사옵니다. 애절한 슬픔의 자리에서 애절한 심정으로 아버지라 부르는 저희의 모습을, 아버님,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다시 한번 새로운 역사의 인연을 책임질 수 있는 새날을 맞이하게 하여 주시옵고, 새해를 맞이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당신이 남기신 심정의 터전 위에서 효성을 다하지 못하고, 충성을 다하지 못한 한을 품고 최후의 승리의 한 날까지 참고 나갈 줄 아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옵니다.
이 시간 아버지, 단에 섰사오니 전하는 자의 마음이나 받는 자의 마음이 둘이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의 심정으로 저희들의 마음의 문을 여시옵고, 저희들의 사정을 움직이시옵고, 저희들의 현재의 실체를 관찰하시사 당신이 기뻐하실 수 없는 모든 요건을 제거해 주시옵소서. 기뻐하실 수 있는 요건만 남겨 주시옵고, 저희들을 찾아오셔서 저희들의 마음의 친구가 되어 주시옵고, 저희들의 생활에 임재하시어서 저희들이 개척자의 사명을 할 수 있는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부족한 저희들에게 아버지를 위하는 일에 저해되는 요소가 있으면 제거해 주시옵고, 오직 아버님만을 모실 수 있고, 아버님만이 분부하실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였사옵나이다. 아멘.
<말 씀> 여러분들이 처음 통일교회에 들어와 보면 통일교회 교인들이 일반 교인들과는 달리 ‘식구’ 라는 명사를 쓰는 것이 이상하게 보일 것입니다. 그런데 식구라는 말은 세상에서 제일 가까운 관계에 있는 사람끼리 쓰는 명사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이 식구라는 말에 대한 의의를 확실히 알아 가지고 사용해야 됩니다.
여러분들은 현재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선한 세상이 아니라는 것을 대체로 보아서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누구에게 물어 보아도 이 세상이 악한 세상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면 자고로 수많은 사람들이 선을 바라고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이 세상이 선한 세상이 되지 못하고 악한 세상이 되었는가? 이것이 뜻을 품은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가장 큰 고충의 고개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희생을 치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것을 우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본심으로 선을 추구한 사람들은 많았지만 본심으로 악을 그리워한 사람들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추구하지도 않고 그리워하지도 않은 악이 선보다도 많은 것을 보게 될 때 오늘날 이 세상은 선으로부터 출발한 것이 아니라 악으로부터 출발하였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계신다면 그 하나님은 인간들이 선으로 갈 수 있는 하나의 길을 마련해 주시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악한 개인으로부터 악한 가정이 생겨났고, 그 가정이 모여서 악한 사회, 악한 민족, 악한 국가를 이루어 오늘날 전세계가 악의 권내에 처하여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원래 인류가 바라던 소원이 아니었고 하나님이 바라시던 소원도 아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이 계신다면 하나님은 기필코 이 세상의 악을 제거할 수 있고, 이 세상의 악을 청산지을 수 있는 새로운 섭리를 하시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악한 세상을 그냥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뜻하신 그 세계를 세워 드리기 위한 운동이 벌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이 운동이 하나의 가정으로부터 벌어져서 사회와 국가와 세계에 확산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도상에서 이스라엘의 선민사상이 나왔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누가 세웠던 것인가? 그것은 하나님이 역사적인 인연을 통해서 새로운 선의 기반을 넓히시기 위하여 세우셨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 됩니다.
이렇게 하여 개인을 세워 가지고 악한 개인에 대한 싸움을 전개시켜 이 세계의 악한 개인에 대하여 승리의 기준을 세우게 하셨고, 가정을 세워서 이 세계의 악한 가정에 대하여 승리의 기준을 세우게 하셨으며, 종족, 민족, 국가를 세워서 악한 세상을 제거시켜 버리고, 선한 종족, 선한 민족, 선한 국가를 세우고자 하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한 때를 마련하여 하나의 나라를 준비해 놓으시고, 그 나라 가운데 세계를 대신하여 전체의 뜻을 세울 수 있는, 즉 세계를 하늘 편으로 귀결시킬 수 있는 전체적인 책임을 짊어진 한 분을 보내셨던 것입니다. 그분이 누구냐? 그분은 악한 세상에서 선을 중심삼고 악한 사람들을 구할 수 있는 분이라야만 하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면 그분은 어떠한 사명을 가지고 어떠한 입장에서 이 땅 위에 오셨을 것인가? 그분의 사명은 악한 세상을 복귀하여 선한 세상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에 그분은 제일 깊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즉 하나님의 사랑의 심정을 대신할 수 있는 독생자의 명분을 가지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입장에서 이 땅에 오셔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독생자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세우기 위하여 선한 왕의 왕으로 이 땅 위에 강림하셨다는 사실을 역사는 증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민족은 예수님을 중심삼고 단결해야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이 악한 세상에서 인간들은 자기를 중심삼고 사회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사회관이나 국가관, 세계관, 우주관은 어디까지나 타락권 내의 악과 더불어 짝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아직까지 이땅 위에는 하나님과 연결되어 선과 짝할 수 있는 입장에서 개인생활, 사회생활, 국가생활, 세계생활, 우주생활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 위에 오셔서 일생 동안 전하고자 하셨던 것은 하나님의 전체적인 뜻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역사적인 모든 희망의 뜻을 종결시켜야 할 사명을 갖고 오셨고, 시대적인 악과 싸워 악을 퇴치시키고, 승리의 한 날을 맞이하여 선한 민족을 중심삼고 선의 국가를 편성하여 만왕의 왕이 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이 땅 위에 오셨던 근본 책임과 목적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터전을 마련하기 위하여 예수님은 이 땅 위에서 개인적인 승리의 터전을 마련해야 되고, 가정적인 승리의 터전을 마련해야 되고, 종족적인 승리의 터전, 민족적인 승리의 터전, 국가적인 승리의 터전을 마련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 터전 위에 예수님의 생활관과 세계관을 세워야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일대가 어떻게 될지 아실 수 없기 때문에, 개인적인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고, 가정적인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고, 종족적인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고, 민족적인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고, 국가적인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는 한 날을 바라시고, 선민을 세워 키워 나오셨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이 선민이 가져야 할 소망은 무엇이어야 했겠는가? 그들은 자기들의 생활관과 인생관과 우주관을 이 땅에 만왕의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활관과 인생관과 우주관으로 대치시켜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의 이스라엘 민족은 예수님을 그러한 입장에서 모시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4천년의 역사를 종결지을 수 있는 선의 결과를 가져오지 못하고 선의 목적을 연장시켜 다시 악과 더불어 싸워야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 이후 지금까지의 2천년 역사로 나타났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자기가 통치해야 할 선의 나라, 선의 민족, 선의 종족, 선의 가정, 선의 개인을 바라보고 나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예수님이 찾으시려던 그 나라와 그 민족과 그 종족과 그 가정, 그리고 예수님을 모실 수 있는 참다운 식구와 형제들이 있었던가? 여기에서 역사는 다시 새로운 문제로 접어 들어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를 믿고 있는 수많은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이 구원섭리를 이 땅 위에서 완결 짓고 간 줄로만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크나큰 오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선민으로 세워 가지고 4천년 동안 키워 나오실 때, 배반하는 그들을 승리의 터 위에 세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셨던가!
이스라엘 민족은 메시아를 맞는 그날부터 그분과 하나되어서 국가적인 악과 세계적인 악을 물리치고 선한 하나의 세계를 이루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통하여 그러한 세계가 이루어지기를 얼마나 마음속으로 원하셨겠는가?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보내실 때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얼마나 바라셨을 것인가?
그런데 예수님은 이 땅 위에 오셔서 그러한 입장에 서지 못하고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이것이 과연 하나님의 소망이었겠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써 만민을 구할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에 선민을 세우셨겠습니까? 그렇게도 애써 길러 놓은 이스라엘 민족, 4천년의 역사적인 승리의 터전 위에서 성장해 나온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단 한 사람도 예수님을 모시지 않았다니….
누구보다도 그 나라의 주권자들, 누구보다도 그 나라의 사상적인 분야를 책임지고 있던 교법사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모셔야 할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책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을 이단자로 몰아 그의 앞길을 막기에 급급했습니다. 이런 역사적인 사실을 우리는 부인할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는 그들이 고통을 당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해 주셨고, 그들이 외로운 자리에 있을 때 그들을 방비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천만 가지의 수고를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왔다가 신 후 2천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민족은 세계에서 유리하는 민족이 되었고, 혁명이 일어나면 그 누명은 대부분 이스라엘 민족이 지게 되었습니다. 역사의 흐름과 더불어 배척당하는 민족이 되어 세계 도처에서 희생의 제물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님을 죽인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서러운 사실을 우리들은 역사를 보아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세계 제2차 대전 중에 히틀러에 의해 6백만 명이 학살되는 피의 보응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서러운 역사는 어찌하여 생겨나게 되었던고? 그것은 만왕의 왕, 즉 하나님의 전체적인 뜻을 해결 지을 수 있는 선의 주권자를 죽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서러운 역사는 예수님을 죽인 피의 대가라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도 사랑하셨던 예수님을 죽인 후에 이스라엘 민족이 그렇게도 지긋지긋하게 나라 없는 민족으로 지내 온 것은, 하나님의 탕감 원칙에 의해 보면 응당 있어야 할 처분인 것입니다. 이것은 선민으로서 받아야 할 상이 아니라, 선민으로서 받아야 할 벌이요 저주라는 것을 우리들은 분명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역사적인 배후를 짊어지고 시대적인 사명을 감당해야 했던 예수님의 마음을 그 누가 알아주었던가?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여러분들은 식구의 인연을 잘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이 요셉가정을 통하여 예수님을 보내셨는데 요셉가정은 이스라엘 전체의 가정 중에서 하나님이 택한 가정이었습니다. 요셉 일가를 중심삼고 하나님의 사랑이 이스라엘 전체에 연결되게 되어 있었는데, 이와 같이 하나님은 이스라엘 전체를 대표한 가정으로 요셉가정을 세웠던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찌하여 불행한 요셉가정을 제일 사랑하셨던고? 이는 하나님이 지극히 사랑하는 아들을 그 가정에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셉가정은 그 아들을 보호하고, 그 아들의 뜻 전체를 자기들의 뜻으로 알고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예수님은 요셉가정에 태어났습니다. 정혼한 마리아의 몸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미암아 태어났던 것입니다.
그러면 본래의 예수님의 소망은 무엇이었던고? 제자를 택하는 것이었던가? 아니면 과거(過去)를 통하는 것이었던가? 아니면 5병 2어로 5천여 명을 먹이는 이적 기사를 행하는 것이었던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소망은 불쌍한 이스라엘 민족을 로마의 학정으로부터 구원하고, 그 당시의 세계를 선의 세계로 통일시키는 데 있었습니다. 그것이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의 소망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에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어 주고 메시아로 알았던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민족은 누구와 직결되어야 했느냐? 로마의 정책에 휩쓸려야 했느냐? 아니면 그 시대의 사회 풍조에 좌우되어야 했느냐? 둘 다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선민과 유대교가 가야 할 하나의 귀결점은 메시아와 하나되는 것입니다. 메시아가 맡은 바의 목적을 놓고 메시아와 화합하여 일체가 되고 절대적인 입장에서 단결된 하나의 국가 형태를 갖추어 가지고 로마와 부딪쳐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하여 로마와 전세계를 통합해서 지중해를 중심삼은 세계적인 판도를 구축해야 했습니다. 그 당시에 이스라엘 민족이 그렇게 했던들 이 세계가 오늘날과 같이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라신 사도는 세상의 악을 따르는 못난 사도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르던 사도들은 그렇지 못했으니 그 당시 예수님이 얼마나 처량했겠는가를 여러분은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못난 사도들을 원하시지 않았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바라신 사도들이 찾아졌다면 이스라엘은 악의 세계를 넘어설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악의 무리들을 넘어설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선한 세계를 이루어야 하는 역사적인 책임을 안고 계셨기 때문에 악을 물리치는 것을 최대의 소원으로 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소원을 이루기 위하여 이를 물고, 혀를 깨물면서 하루 하루 살아 나가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당시의 사람들은 아무도 몰랐다는 것입니다.
만민을 구원하는 것이 예수님의 목적이었지 십자가에 죽어서 개인을 구원하는 것이 예수님의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세계를 일시에 구원해야 했던 예수님의 목적이 왜 이루어지지 않았던고? 민족의 일시 구원은 왜 하지 못했던고? 그것은 그 당시에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가정과 종족과 세계를 일시에 구원하는 것이 예수님의 소원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다 예수님을 믿고 천당 가야겠다는 생각만 했지, 예수님이 바라시던 소원을 생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민족을 로마로부터 일시에 구원해야 된다는 하나님의 뜻을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 예수님이 얼마나 초조하셨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던 사도들은 그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베드로조차도 그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 누가 예수님의 심정을 알아주었던고? 감람산 골짜기를 거닐 때마다 하나님을 위하여 호소하던 예수님의 내적인 심정을 누가 알았던고? 예수님은 로마의 권세를 얼마나 헐어 버리고 싶어하셨던가! 반대하고 알아주지 못하는 유대교의 무리와 이스라엘 민족이 아닌, 하나님 앞에 엄숙히 제사 드릴 수 있는 참된 유대교와 참된 이스라엘을 예수님은 마음속에 얼마나 그리워하셨던가! 제자들도 이러한 것에 대해서는 꿈도 안 꾸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이 믿고 천국 가겠다고 하는 제자들로 만족할 수 없었다는 것을 우리는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 무리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서는 안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 위에 오셔서 유대 나라의 집권자들과 그 나라의 사상적인 분야를 책임지고 있는 유대교단의 지도자들과 하나되어 로마를 하나님 앞에 굴복시켜야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가 하나되어서 메시아를 앞에 내세워 가지고 가야 했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예수님을 반대했으니 그들의 운명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선민들이 예수님을 반대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기 위해서 오셨단 말입니까? 예수님의 꿈이 죽는 데 있었단 말입니까? 오늘날의 무지한 기독교인들은 그렇다고 할는지도 모릅니다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똑똑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죽기 위해서 오셨다면 하나님께서 선민은 무엇 하러 세우셨겠습니까?
그러면 단번에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던가? 아닙니다. 요셉가정은 하나님께서 택한 가정이었습니다. 세례 요한 가정도 요셉가정의 친척이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다윗의 후손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민족의 대표 가정으로 요셉가정을 세우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예수님 한 분을 탄생시킨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예수님이 왜 요셉가정을 떠나 제자들을 택하기 위하여 돌아다니셔야 했느냐 하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비참한 환경에서 이 땅 위에 태어나셨습니다. 그것은 마리아와 요셉이 책임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시간이 없어 생략하기로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태어난 그날부터 하나님 앞에 충성의 법도를 세워서 먼저 하나님을 받들 수 있고, 하나님의 뜻을 세울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야 되었던 것입니다. 그 터전을 어디서부터 마련해야 되었느냐 하면, 요셉가정에서부터 마련해야 했습니다. 물론 이것이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요셉가정에서부터 그것을 마련해야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낳은 마리아도 하늘의 고운 천사들의 지도를 받아서 자신이 낳은 아들이 장차 어떻게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이 자라실 때 하나님께서 언제나 마리아에게 같이하여 주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시일이 경과함에 따라 마리아는 어찌하다 보니 예수님이 태어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요셉가정에서 예수님은 자랐던 것입니다.
한편 요셉에게는 예수님이 진실로 성령으로 잉태했는지, 아니면 누구에 의하여 잉태했는지 의심스럽다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마음이 괴로웠던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정혼한 처녀가 아기를 배어 가지고 와서 성령으로 잉태했다고 하니 요셉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그 사실은 믿었을지 모르지만 예수를 바라볼 때마다, 마리아를 바라볼 때마다 어찌 심한 고통을 느끼지 않았겠습니까?
이렇게 되어서 예수님은 의붓아버지의 품에서 서럽게 자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사정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서러웠던 예수님이었습니다. 동생들의 시중은 들어주었지만 동생들에게 시중 한 번 받아 보지 못했던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요셉으로부터 무엇을 하라는 말을 들을 때에도 진정으로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입장에서 듣지 못했습니다. 의붓아버지의 의심을 받는 입장에서 들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학대 속에서 자라났습니다.
마리아 역시 요셉에게 기분 나쁜 일이 있거나 요셉이 조금만 얼굴을 찌푸리는 일이 생겨나도 예수님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할 것 같습니까? 그런 사람의 심정을 잘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의붓자식을 데리고 시집을 간 부인이라면 남편이 조금만 얼굴을 찌푸려도 그 모든 것을 어찌 자기의 의붓자식과 연관시켜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입장에서 행복의 터전을 갖지 못했던 예수님이었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마음속에는 한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명절날이 가까워 오면 자기 동생들은 엄마 아빠와 함께 기뻐하고 즐기며 준비할 수 있었지만, 생각이 많은 예수님은 옷 한 가지 해 달라고 할 때에도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처량한 모습으로 명절을 맞이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성경에는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아느냐? 이것은 예수님을 만나서 물어 보면 알 수 있는 일입니다. 그렇지 않겠는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명절날 집에서 떡 같은 것을 해놓았다 하더라도 ‘어머니, 나도 좀 주십시오!’ 하고 먼저 손을 내밀 수 없었던 예수님이었다는 것입니다. 좋은 것이 있더라도, 동생들이 입고 있는 아름다운 옷을 바라보면서도 ‘나도 좀 주십시오. 나도 좀 해주십시오.’ 하고 말할 수 없었던 예수님이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 사정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던 예수님! 나이 어린 친구들과 어깨를 겨누고 환경에 보조를 맞추며 나날을 즐길 수 없었던 예수님!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집니다. 이런 것을 누가 알아요? 그저 ‘오오! 만왕의 왕, 하나님의 독생자가 이 땅 위에 오셨다!’ 라고만 알고 있지, 명절 때 때때옷 입고 부모와 함께 기뻐하고 있는 아이들을 바라볼 때마다 하염없는 눈물을 흘린 어린 예수였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세상 천지를 둘러볼 때 그리운 것은 자신을 품어줄 수 있는 부모의 정이었습니다. 동생이 있어도 동생을 동생이라고 부를 수 없었던 예수님! 그 동생들 앞에서 형이라 자처할 수 없는 사정에 놓여 있던 예수님! 참으로 비참한 생활을 하셨던 예수님이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사정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이 말이 문 선생이 꾸며서 하는 말인가 아닌가 하는 것을. 여러분! 그렇겠어요, 안 그렇겠어요? 하나님이 매일같이 그들의 코를 꿰어서 ‘이 녀석아, 이 녀석아!’ 하고 가르쳐 주실 수 있었겠어요? 그럴 수 없는 사정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서러웠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 8:20)고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 줄 알아요? 나면서부터 그랬다는 것입니다. 또 왜 예수님이 자기의 혈육을 대하여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마 12:48-50)고 하셨는지 알아요?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한을 가슴에 품은 채 가신 예수님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어린 시절을 목수의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목수인 요셉 밑에서 조수로 일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낫을 들고 나무를 깎고 대패를 들고 나무를 밀 적마다 이스라엘을 살리려는 마음으로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민 된 이스라엘 민족이 이래서는 안 되겠으니 내가 대신 깎고 다듬어서 새로운 이스라엘을 만들겠다는 엄숙한 책임감을 가지고 일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심정으로 언제나 이스라엘을 품고 사랑하면서, 하나님과 더불어 뒤넘이칠 수 있는 마음으로 일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일념을 가지고 있었던 예수님의 소원을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과 더불어 의논하면서 그의 생애를 단장하기에 전심전력을 기울였던 것입니다. 깊은 밤 부모와 형제들이 아무것도 모르고 자는 고요한 밤에 밖에 나가 하늘의 별을 바라보면서 그 마음을 호소했고,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고 혹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을 바라보고, 그것들을 자신의 친구 삼아 ‘너는 내 사정을 알고 내 뜻을 잘 알지?’ 하면서 마음을 달래곤 했던 것입니다. 인간들은 예수님을 몰랐지만 만물과 자연은 그의 친구가 되어 주었던 것입니다.
인간을 위하여 이 땅 위에 오셨고 인간들에게 인정을 받아야 할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참다운 인간을 찾지 못하고 참다운 인간이 살 수 있는 환경을 찾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자연의 품을, 그리고 하나님의 품을 은근히 동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이었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본래 요셉과 마리아가,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참다운 아들이요, 하나님의 왕자요, 또한 만민의 메시아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가 태어난 그날부터 하나님의 왕자로 모셨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매일같이 예수님께 경배해야 되는 거예요. 만왕의 왕이요, 길이길이 온 천주를 지배할 수 있는 하늘의 주권자로 오신 분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태어난 그날부터 요셉과 마리아는 그에게 정성을 다하고 충효의 도리를 다하여 모셔야 했다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자기 아들 앞에 충효의 도리를 다해야 된다는 법이 어디 있어요? 그러나 천법으로는 그래야만 되는 거예요.
본래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요셉가정에 보내실 때는 예수님을 서럽게 하기 위하여 보내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미리 가르쳐 주어 가지고 마리아의 복중을 통하여 예수님을 탄생시킨 것은, 예수님을 고생시키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가 영광을 받고, 보호를 받게 하기 위함이었지 몰리고 쫓김받게 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요셉가정에서부터 틀어져 나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때를 알고 하늘의 사명이 자기 일신에 짊어져 있다는 것을 알면 알수록 예수님은 자중하면서 그 형제들과 부모를 하나님의 뜻 앞에 인도하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모릅니다.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마 23:37)고 하신 말씀도 이스라엘 민족을 보고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가정을 보고 하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자기 가정을 위해서 힘썼던 것입니다. 천륜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야 할 책임을 지고 오신 예수께서, 즉 무엇보다도 귀하고, 무엇보다도 가치 있는 일을 하셔야 할 예수께서는 가장 가까운 자기의 사랑하는 부모를 먼저 위해 주고 싶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좋은 것이 있으면 그것을 자기의 사랑하는 부모한테 먼저 드리고 싶은 것이 자식의 도리가 아니겠느냐 말이에요. 또 누구보다도 자기의 사랑하는 동생, 자기의 사랑하는 친척에게 먼저 주고 싶지 않겠느냐 말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철이 들면서부터 하나님이 요셉 일가를 찾아오신 역사적인 인연을 생각하고, 요셉 일가를 중심삼고 하나님의 뜻을 세우기 위하여 몇 번이고 하늘 앞에 다짐하며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과 마리아가 예수님을 모셨느냐 말입니다. 원칙은 식사 때에 진지를 담을 때도 예수님 진지부터 먼저 담아 드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예수님의 생활 전체를 책임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될 것 아니에요? 뜻을 중심삼고 보면 그럴 것 아니에요?
그렇게 요셉이 예수님을 모셔야 했던 거예요. 요셉이 제자 중에서도 수제자가 되어야 했던 거예요. 여러분은 요셉이 예수님의 수제자가 되어야 했다는 것이 믿어져요? 만일 여러분이 그런 일을 당했으면 어떻게 했을 것 같아요? 생각해 보세요. 뜻적으로 보고 그렇게 했겠나 안 했겠나를.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이 크고 엄청나다는 것을 알면 알수록 그것을 요셉가정에서부터 이루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그래야 할 원리적인 내용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예수님의 수제자가 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의 동생들도 따라가겠어요, 안 따라가겠어요?
성경에는 없지만 예수님을 놓고 동생들은 형님이 메시아로 나타나기를 바란다면 사람들이 많은 예루살렘에 가지 왜 안 가느냐고 비난했다는 것입니다. 동생들이 그렇게 비난해서 되겠어요? 마리아도 예수님을 괄시했다는 것입니다. 정상적으로 취급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원칙적으로는 그 집안에서부터 이루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요셉가정을 중심삼고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어 나갈 수 있었어야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례 요한은 누구뇨? 그는 예수님의 이종사촌입니다. 친척이에요. 친척들이 다리를 놓아 가지고 요셉가정을 중심삼고 하나되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하나되어서 예수님의 뜻을 받들고, 형제들이 제자가 되고, 친척들이 모두 사도가 되어서, 즉 형제와 친척들이 12제자, 70문도, 120문도가 되어서 악한 세상을 물리쳐야 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다른 종족, 다른 민족과 대결하여 나갔다면 예수님은 절대 십자가에 못박히지 않았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정에서부터 형제들을 중심삼고 기틀을 잡음으로써 이루어야 했던 예수님의 뜻은 이루어지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 엄청난 천도는 사실 그 부모와 형제들부터 받들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요셉 일가는 하나님이 찾아오신 4천년의 은사를 일시에 추방하게 되었고, 하나님을 일시에 배반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쫓아냄으로 말미암아 사정이 달라졌어요. 예수님이 괜히 베드로, 야고보 같은 어부들을 찾아 다니셨겠어요? 아닙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사명이었겠습니까? (중략)
가나의 혼인 잔칫집에서 예수님의 어머니가 예수님에게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말했을 때 예수님이 무어라고 하셨습니까?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요 2:4)라고 하셨지요? 이러한 곡절과 사연이 얼마나 많이 맺혀져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배후의 사실들이 일일이 성경에 다 기록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그 말 못할 사정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예수님이 가나의 혼인 잔칫집에서 자기 어머니를 보고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라고 하신 말씀과,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왔는데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마 12 :50)고 하신 말씀은 어머니와 동생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지 못했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이 죽으러 오신 분이에요? 아닙니다. 원통하신 분입니다.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예수님은 어머니와 아버지를 찾아다니면서 세 번씩이나 간곡히 권고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뜻을 받들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천륜이 인륜 앞에 흡수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인륜이 천륜을 따라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이 땅 위에 보내신 뜻이 인륜을 세우기 위함이 아니라, 이 악한 세상을 정리하고 심판할 수 있는 천륜을 세우기 위함이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천륜의 법도를 세우기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놓고 얼마나 통사정을 했는지 모릅니다. 세 번씩이나 권고하였지만 그것이 어머니에게도 요셉에게도 통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 예수님은 30세가 되었고, 30세가 되자 결국 하나님의 뜻을 위해 집을 나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아직까지 30세에 집을 나가지 않을 수 없었던 예수님의 사정과 억울함,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괴롭고도 서러웠던 사정을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준비한 가족과 일가, 즉 하늘이 마련해 준 4천년의 터전을 버리고 나와야 했던 예수님이 얼마나 서러우셨겠는가 하는 것을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원래는 예수님이 광야에 나가 시험을 받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됨으로써 예수님은 부득이 40일 동안 금식을 해 가지고, 4천년 역사를 탕감복귀하여 그 터전을 다시 닦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40일 금식기간을 통하여서 사탄이 자기 일가에 침범한 모든 원한의 조건을 빼앗아 다시 하나님 앞에 세워야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4천년 동안 요셉가정을 세우기까지 수고하셨던 것을 탕감하기 위해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 담판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40일 금식기간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40일 후에 다시 제2차 노정에 들어가셨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해서 시작된 제2차 노정인지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제2차 노정을 걷는 예수님의 심정은 또 어떠했겠습니까? 예수님은 요셉가정으로부터 몰렸고, 자기 친척들로부터 몰렸습니다. 그러나 원래는 안팎으로 일어나서, 즉 요셉 일가를 중심삼고 친척들이 단결하고 그 시대에 명망이 높은 세례 요한을 세워 새시대의 하나님의 섭리의 발판을 닦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가 따르지 않으면 안 될 환경을 마련해야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다 무너져 버린 것입니다. 다 무너졌기 때문에 정면적인 충돌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먼저 가정적으로 뜻을 이루어 가지고 민족을 대할 것이었는데 거꾸로 민족을 대해 가지고 가정을 찾아 나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개인, 가정, 종족, 민족, 국가의 순서로 대해야 될 것이었는데 이것이 깨어졌기 때문에 거꾸로 다시 찾아 세워야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민족을 찾아 나서야 했고, 교단을 찾아 나서야 했으며, 민족과 교단 가운데 종족을 편성하고, 가정을 편성하여 부모와 형제의 인연을 다시 찾아야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여러분이 원리를 배우면 잘 알아요.
만일 예수님이 요셉가정을 중심삼고 천륜의 뜻을 마련하고, 세례 요한과 일치가 되었더라면, 그 가정과 일가들을 중심삼고 모든 것을 다 이룰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 당시의 세례 요한은 그 나라 전체가 선생으로 알고 있는 명망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세례 요한이 국가의 주권자들과 더불어 예수님을 중심 삼아 가지고 출발해야 했던 것인데, 세례 요한이 반대의 방향으로 가게 됨으로써 예수님은 불쌍한 자리에 서게 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고 하셨는데 이것은 정말로 처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독생자, 하나님의 왕자로 이 땅에 오셨는데 어찌하여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해야 된다는 말입니까?
이스라엘 민족은 4천년을 두고 구주를 원해 왔습니다. 그런데 최고의 자리에서부터 출발해야 할 예수님의 제1차 소망이 요셉가정에서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밑에서부터 찾아 올라가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따르는 베드로, 요한, 야고보와 같은 어부들을 모아 가지고 부패한 교단과 이스라엘 민족을 바로잡아야 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부터 싸움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러 오셨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선생님은 이런 말을 들으면 참으로 화가 납니다. 하나님이 예수를 죽여 가지고 구원을 시켜요? 4천년 역사가 무너졌는데 십자가로 구원을 받아요? 십자가로 죽었으니까 구원받지 그냥 죽었다면 절대 구원 못 받아요?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40일 후에 승천을 했기 때문에 십자가의 도리가 세워진 거예요. 예수님이 40일을 세워 놓지 못했으면 부활도 안 되는 것입니다. 부활하여 40일의 승리 기대를 세워 가지고 승천했기 때문에 기독교가 승리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세계에 걸려 있는 십자가를 통일교인들의 손으로 잘라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처음 듣는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하겠지요?
그러면 통일교회에서는 왜 식구라고 하느냐? 여러분들은 식구라는 말을 잘 사용하지요? 여러분들이 진정 식구입니까? 여러분들이 부르는 식구라는 말은 그렇게 허술한 말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통일교회의 선생님은 식구라는 명사를 내세웠던고? 거기에는 역사적인 곡절이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것은 무엇 때문이었느냐? 첫째는 요셉가정이, 둘째는 세례 요한이, 셋째는 교회가 잘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억울하고 분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4천년 역사를 내려오면서 키워온 이스라엘 민족을 믿고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셨는데, 그 아들을 죽여 놓고 죽으러 왔다고요? 그들은 그것밖에는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무엇 하려고 4천년 동안이나 이스라엘 민족을 중심하고 섭리를 하셨겠습니까? 예수님을 죽이려고 섭리를 하셨겠습니까? 나면서 죽어도 예수님은 예수님이고, 또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인데, 무엇 때문에 30살이나 되어 다 자란 후에 시끄럽게 요란을 피우다가 몰려서 죽게 하셨겠습니까? 나면서 그냥 죽게 하지. 아기 때는 구주가 못 되나요? 이것은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는 것인데,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 있으니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래 가지고도 천당 가겠다고요?
여기에서 말하는 선생님은 그것을 다 들추어 봤습니다. 예수님이 죽게 되었던 제일 원인이 어디에 있었던가? 요셉가정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무엇을 찾기 위해 오신 거예요? 가정을 찾기 위해 오신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는 태평한 가운데 있더라도 요셉가정만은 예수님을 중심하고 하늘나라를 세워 나가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야 예수님이 신랑으로서 신부를 맞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은 남편은 천국에 들어가고 부인은 지옥에 들어가도록 창조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창조 당시의 이상의 주인공들, 즉 아버지와 어머니와 아들과 딸이 종족을 이루고 민족을 이루고 나라를 이루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에 지옥이 생긴 것입니다.
이러한 천륜의 뜻을 대하고 오셨던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바의 뜻을 이룰 수 있는 참다운 가정을 이 땅에서 가져야 했던 것이지 영계에 가서 가져야 했던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되면 수많은 제자들도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은 그처럼 피를 흘리고 죽은 제자들을 품고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이 땅 위에서 자기를 믿고 따르는 제자들을 피 흘리게 해서 구원하는 것이 본래의 구원의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본래부터 그러한 일을 해야 했던 예수님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왕자를 모시고 하나님의 아들딸들로 공인을 받아서 본연의 사랑을 노래할 수 있고, 본연의 부모와 본연의 형제를 중심삼고 본연의 가정, 본연의 민족, 본연의 국가, 본연의 세계를 이루어서, 즉 지상천국을 이룬 다음에 들어가는 곳이 천국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가신 곳은 낙원이라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합니다. 낙원이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대합실과 같은 곳입니다.
본래 하나님께서 천국을 창조하신 목적은 참다운 부모로부터 참다운 자녀가 태어나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수 있는 참다운 가정과 종족, 참다운 민족, 국가, 세계를 이루어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후에 하늘에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천국을 창조하신 본연의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러한 입장에 서 보셨어요? 어째서 예수님이 낙원에 들어가시게 되었어요? 그 처량한 운명과 곡절을 여러분들은 똑똑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는 하나님이요, 나는 신랑이요, 너희는 신부라고. 여러분은 신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신랑을 찾아야 됩니다. 예수님이 신랑으로서 신부와의 인연을 거쳐서 아버지로서 아들딸을 찾아오시겠다는 것입니다. 종이라 하지 않고 친구의 이름으로 아들딸을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온 세계에 널려 있는 신자들을 신랑 되신 예수님 앞에 충성을 다하고, 하나님을 모시는 참다운 하늘 식구가 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본연의 부부가 되고 본연의 부모가 되어 인간들을 본연의 자식으로 품으실 수 있는 본연의 세계를 이 땅 위에 이루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소망이요, 예수님이 가지고 오셨던 인연이었습니다. 이것을 그때 당시의 사람들이 몰랐기 때문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오셨다가 죄인의 몸으로 죽어가는 억울한 입장에 서게 되셨던 것입니다.
신랑이 신부를 찾는 목적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자녀를 번식하자는 것입니다. 신부가 없으면 어떻게 자녀를 낳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나는 신랑이요, 너희는 신부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의 신부를 찾으셔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한국 교계의 실상은 어떠합니까? 오호, 나는 잘 믿으니까, 나는 부흥 목사니까 예수님 앞에 신부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신부가 무엇인지 잘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이러한 한국의 모습은 참으로 불쌍합니다. 미국이나 로마 교황청 등 전세계 신자들이 불원간에 이러한 사실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요즈음 목사들 가운데는 서양 것이라면 무엇이든 좋아하는 목사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목사들을 욕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결국 공부를 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모르는 것을 가르쳐 주겠다고 하는데 싫다고 야단들입니다. 일주일만 통일교회에 맡기면 다 넘어가니 그것이 무섭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알겠습니까?
예수님이 왜 신랑이라고 하셨겠습니까? 그것은 인륜의 도리를 거쳐야만 천도가 나오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이 땅 위에 인륜의 도리를 거친 천도를 세우시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즉 이 땅 위의 인간들이 타락했기 때문에 이러한 인간들 앞에 참부모가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왜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랑할 수 있는 자녀를 이 땅 위에 번식시켜 만물을 주관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일남 일녀를 지어 놓으신 후에 기쁨 가운데에서 그들을 보시고 이제는 너희들이 생육하였으니 축복해 주겠다고 하시고 결혼식을 해 주신 일이 있었습니까? 오늘날 목사들은 결혼식을 잘 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축복해 준 사람이 저나라에 가서 하나님 앞에 역적이 될 때는 자기도 역적이 된다는 사실을 그들은 똑똑히 알아야만 합니다.
냉정하게 생각해 볼 때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과연 아담과 해와를 결혼시켜 보셨습니까? 못시켜 보셨습니다. 아담과 해와는 결혼을 잘못했습니다. 아담 해와는 사탄을 중심삼고 결혼식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6천년 동안 그렇게 소원하시던 결혼식을 못해 주셨기 때문에, 거꾸로 탕감복귀의 구멍을 뚫어서 맞추어야 됩니다. 참다운 아들, 참다운 딸을 세워 가지고 신랑 신부의 이름으로 어린양 잔치를 해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도 모르고 예수님이 구름 타고 오신다고요? 예수님이 구름 타고 오셔서 되겠어요? 그렇게 허무맹랑하게 믿고 있으니 큰일입니다. 잃어버린 것은 잃어버린 곳에서 찾아야 합니다. 땅에서 잃어버렸으니 땅에서 찾아야지 지구름 타고 오시면 어떻게 됩니까?
천사장의 나팔? 그것을 봤어요?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으니 큰일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새로운 소식을 선포하는 것을 말합니다. 통일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참나팔이라는 것입니다. 아주 큰 나팔입니다. 새로운 말씀이야말로 금으로 만든 금나팔입니다. 그러므로 찾아와서 들어야 합니다.
하늘의 왕자님이 수레를 타고 오셔서 ‘아무개 잘 있었는가? 이제야 데리러 왔네!’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도리예요? 그것이 하늘의 천법이에요? 이런 허무맹랑한 사람들을 만나자고 예수님이 구름 타고 오신단 말이에요? 참으로 가엾은 일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세 번만 찾아가서 물어 보아도 ‘나는 모르겠소.’ 하고 돌아설 사람들입니다.
지금은 제트기를 타고 다니는 시대란 말입니다. 제트기를 마음대로 탈 수 있는데도 걸어 다니는 것은 미친 짓 아니에요? 제트기로 가면 한 시간 내외로 쫓아갈 수 있는 거리도 걸어가면 열흘 이상, 백일 이상이 걸리고 맙니다. 그렇다면 가나마나한 것 아니겠어요? 그런 것은 때려부숴야 합니다.
한 시간이면 다 해결할 일을 구태여 열흘 이상, 백일 이상을 걸려서 해결할 필요가 있어요? 한 시간 내에 처리해야 할 일거리를 맡아 가지고 자꾸만 질질 끌겠다고 하니….
여기서 여러분들이 알아야 할 것은 식구라는 것이 무엇을 중심삼은 것이냐 하는 점입니다. 예수님을 중심삼고 식구라는 명사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유대 나라를 넘어 로마로 가는 길을 똑똑히 바라보셨던 것입니다. ‘만일 유대교가 이스라엘 민족과 하나 된다면 로마는 내 손으로 넘어 온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바라보셨던 것입니다. 죽은 예수님이 400년 걸려서 로마를 정복했는데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이 살아 계셨다면 로마가 문제였겠어요? 이스라엘을 기반으로 하여 로마를 정복하실 수 있었던 예수님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원리이기에 이렇게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20세에 접어들면서 이스라엘 민족은 점점 피폐해졌습니다. 로마의 압정하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앞날의 소망이 다 막혀 버리고 황혼 길로 접어든 이스라엘 민족을 바라볼 때 예수님은 말할 수 없는 민족에 대한 사랑에 불타 올랐습니다. 이스라엘을 걸어 놓고 민족에 대한 사랑에 울면서 하나님 앞에 얼마나 호소하셨던고? 이스라엘 민족은 이것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시일이 가면 갈수록 점점 조급한 마음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이스라엘을 통치하고 움직여야 된다는 신앙을 가진 예수님은 유대교를 밟고 올라서고, 더 나아가서는 로마까지도 밟고 올라서야 한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인생관과 새로운 세계관, 그리고 새로운 이념을 중심삼아 가지고 로마를 일시에 쳐 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4천년 동안 하나님께서 수고하시고 준비하셨던 이스라엘이 가정과 민족과 교단이 하나되지 못함으로써 예수님의 마음 가운데 맺힌 원한이 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설 수 있는 터전이 없는 것을 한탄하고 자신이 설 수 있는 언덕이 없는 것을 한탄했습니다.
유대교는 누구를 기다리고 찾아야 하느뇨? 그것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역사적으로 수많은 선조들이 희생의 제물로 죽음의 길을 가면서 닦아 온 그 터전은 이스라엘을 행복의 터전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러한 민족이 메시아인 자신을 몰라보니 그것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심정이 얼마나 외롭고 분하셨겠는가 하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크면 클수록 초조함을 느끼는 반면, 하나님이 얼마나 불쌍하신 분인가 하는 것을 아셨던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을 부여안고 효성의 도리를 다하려 했던 예수님의 간곡한 심정, 삼면사방 어느 곳에도 그를 붙들어 주는 사람은 없고 눈앞에 나타나는 모든 것은 도리어 하나님 앞에 슬픔이 되는 것들 뿐이었으니, 그 슬픔을 부여안고 하나님을 위로해 드려야 하는 예수님의 사정이 얼마나 안타까우셨겠는가! 또한 유대민족 앞에 몰리는 예수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가슴은 얼마나 서러우셨겠는가! 예수님은 이러한 것을 생각하고 통곡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을 책임지고 가야 할 최후의 운명의 길이 다가온 것을 생각하고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서 하나님 앞에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하는 기도를 올렸습니다. 이때의 예수님은 자기 자신이 죽고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자기가 십자가의 이슬로 희생당하는 것이 한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4천년 동안 이스라엘 선민을 찾아 세우기 위하여 수고하셨던 것을 생각하고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고생 길, 고난의 길을 밟아 오면서 오랫동안 이스라엘을 위해 울면서 피맺힌 길을 걸어 나오셨던 그 과정이 이제 자기가 죽으면 전부 산산이 깨져 나가게 될 것을 아신 예수님은 하나님이 수고하신 역사적인 서러운 사정을 부여잡고 우셨던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자기가 죽으면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 앞에 역적이 된다는 사실을 아시는 예수님은 죽는 순간에서도 이스라엘 민족을 바라보시며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하고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4천년 동안 수고하여 세우신 민족인데 저들을 버리시면 저들은 어디로 갈 것인가…. 예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염려하셨던 것입니다. 민족을 붙들고 미래의 운명을 연결시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자기의 책임이라는 사실을 아셨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서 예수님은 이스라엘에 대한 책임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배반하는 민족을 염려하면서 그 소망의 한 날을 위해 그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셨던 예수님의 간곡한 심정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의 마음에는 한없는 슬픔과 새로운 소망에 대한 서러움이 어리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심정을 아시는 하나님의 서러움은 얼마나 컸을 것인가! 누가 이 땅 위에서 이러한 사정을 알아 가지고 해원해 드리며, 또 그 원한을 풀어 드릴 것인가! 이 일은 끝날의 성도들에게 달려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통일교회가 나온 것입니다.
선생님은 한국에서 하나님이 가라고 하신 길을 지금까지 걸어 나왔습니다. 그런데 기성교회 목사들은 하늘을 위하는 길로 뛰어가는 통일교회를 몰아내려고 20년 동안이나 갖은 중상 모략을 다해 왔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6천년 동안 하나님께서 찾아 나오신 섭리의 뜻을 알기 때문에 모략하는 그들을 염려하면서 밤이면 밤마다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선생님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통일교회, 이 사탄 대마귀야! 끝날에는 적그리스도가 많이 나타난다고 했는데 그 적그리스도가 여기에 있구나! 죽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생각하는 목사들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것은 너무나도 분명한 일입니다.
오늘의 통일교회 신도들은 뼈 없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서러운 마음이 우리의 마음속에 깃들어 있고, 억천만세의 원한이 우리의 가슴속에 깃들어 있는데, 이것을 풀어 드리고 해원성사해 드려 하나님을 기쁘게 모시는 것이 통일신도들의 책임입니다. 인류의 아버지로서, 만우주의 군주로서 오셨던 메시아의 한을 풀어 드리고 승리의 한 날을 맞이할 수 있는 최후의 승리자, 최후의 방패가 되기 위하여 나선 사람들이 통일신도라는 것을 여러분들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실 수 있고, 하나님이 품으실 수 있고, 또한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소망의 세계, 소망의 나라, 소망의 종족과 가정과 개인은 어디 갔던고? 이와 같은 소망의 사람이 없었기에 예수님은 할 수 없이 십자가 대속의 길에 서 가지고 최후의 여행 길을 가시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자기의 몸을 성전에 비유했고, 하나님의 성전을 위해서 자기만은 깨지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 마음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내가 할 말이 많지만 너희들이 감당치 못하기 때문에 다 말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요 16:12). 그들은 왜 그렇게도 예수의 사정을 몰랐던고! 그들은 배가 고프면 배가 고프다고 입을 열어 말할 수 있었지만, 예수님에게 그처럼 배고픈 것을 넘어가야 할 탕감의 조건이 있었다는 것은 몰랐습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억울한 사정과 심정은 그 누구도 몰랐다는 것입니다.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 16:12-13)고 하신 말씀을 기억합니까? 이러한 한을 품고 가신 예수님의 사정을 여러분들은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은 몰리고 쫓김받으셨고 억울한 심정으로 몸부림쳐야 했던 분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이해해야 합니다. 그분이 걸어가신 그 길은 아직까지 눈물의 길로 남아 있고, 그분이 걸어가신 그 피의 노정이 아직까지 역사노정에서 그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합니다.
통일교회 신도들은 이러한 것들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바라시던 그 세계, 그 세계를 내가 찾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이 찾으시던 그 나라, 그 나라를 내가 찾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이 품고 싶었던 그 민족, 그 민족을 나로 하여금 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이 안식하고 싶었던 그 가정, 그 가정에서 살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면서 외로웠던 예수님의 심정을 부여안고 그분을 형님과 같이 모실 수 있어야 됩니다. 그분을 부모 앞에 나 이상 사랑받을 수 있고, 나 이상 존경받을 수 있고, 나 이상 귀여움을 받을 수 있는 자리에 모셔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부모를 못 가진 분이었습니다. 따라서 그 마음에는 부모의 사랑이 무한히 그리웠다는 것입니다. ‘엄마! 아빠!’ 하고 부르면 ‘오냐, 내 아들아!’ 하고 대답하면서 ‘나도 너의 뜻을 위하여 협조하겠다.’ 고 말해 주는 부모를 갖고 싶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모의 사랑을 몹시도 그리워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친척들로부터도 사랑을 받는 입장이 못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갔을 때 그 가족들은 전부 그를 미치광이로 취급했던 것입니다. 이웃 동네에 아저씨가 있었지만 그 아저씨가 자신이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 아저씨를 대하기 싫어져 대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그 아저씨의 사랑이 그리웠던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하나님을 바라볼 때마다 하나님도 이 땅의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고 싶으실 것인가 하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중심삼은 일가, 그리고 나라를 중심삼은 예수님을 바라볼 때, 즉 이스라엘 민족을 중심삼고 요셉의 일가를 두고 볼 때 가족들과 친척들 앞에서 사랑을 받지 못했던 예수님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서 사랑을 받지 못한 예수님! 이스라엘 민족으로부터 몰림을 받고 죽어가야 했던 예수님! 그분이 이 땅에 오셔서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곳이 그 어디에 있었던고? 가슴이 미어지도록 사랑이 그리웠던 예수님! 우리는 그 한스러웠던 일들을 해원해 드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라 없는 백성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민족이 있었어도, 주권 국가가 있었어도 보호를 받지 못하는 백성의 한 사람으로 태어나셨던 예수님! 그분에게는 친척도 있었고 가정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받지 못하였던 분이었습니다. 그분은 사랑이 그리웠던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이 그리웠고, 6촌 형제, 아저씨, 할아버지, 동네 사람 등 주위의 모든 사람들의 사랑이 그리웠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품어 주어야 할 민족은 어디 갔던고? 자기를 품어 주어야 할 아버지는 어디 갔던고? 사랑을 받을래야 받을 수 없었고, 사랑을 할래야 할 수 없었던 예수님은 참으로 불행한 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하여 지상에 오신 예수님이 이 땅 위의 인간들에게 몰림을 받았을 때 그 심정은 어떠하셨겠습니까? 하늘을 부여안고 인류의 생명줄만을 바라보고 나가셨던 예수님! 그러나 결국에는 십자가상에서 죽어가면서 하늘을 바라보시던 예수님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사랑을 받지 못한 예수님, 또한 사랑을 할 수 없었던 예수님, 이 천지간에 부모는 수없이 많은데 예수님이 사랑할 수 있는 부모는 어디에 있었던고! 이 땅 위에 수많은 형제들이 있지만 예수님이 사랑할 수 있는 가족은 어디에 있었던고! 예수님이 사랑할 수 있는 친척들은 어디에 있었던고! 예수님이 사랑할 수 있는 민족은 어디 있었으며, 국가는 어디 있었으며, 세계는 어디에 있었던고! 쫓기고 몰림을 받은 예수님! 그러나 하늘은 이처럼 안팎으로 몰림을 받는 예수님의 서러운 사정을 모두 다 알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이겠느뇨?
통일교회의 식구라고 하는 명사는 여기서부터 인연 지어진 것입니다. 인류를 모아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식구의 인연을 갖추기 위해 천륜을 가르치는 것이 소원이었기 때문에 식구라는 명사를 내세우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식구 된 여러분들에게는 그렇게 비참하고, 억울하고 분했던 예수님의 한을 책임지고 해원해 드려야 할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또한 십자가의 고빗길을 갔던 예수님의 고생길을 대신 책임지고 가야 하는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내일을 기대하면서 한을 남기고 가신 예수님! 그 한을 풀어 드려야 하는 것이 여러분들의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이 뜻길을 개척하겠다고 나선 무리가 통일교회 식구들입니다. 이 길을 개척하기 위하여 여러분들을 모아 놓고 식구라는 명사를 가르쳐 주게 된 처절한 사정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됩니다. 이와 같은 내용이 깃들어 있는 식구라는 이름을 걸어 놓고 우리들은 지금까지 이 길을 걸어 나온 것입니다.
이제는 1965년의 해도 기울어 가고 있습니다. 1965년을 매듭짓고 국가의 운명을 책임지고 생사를 결단해야 할 시기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런 판국에 여러분들은 과연 식구라는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당당히 설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다시 한번 냉철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아무리 힘을 다하여 노력한다 하더라도 예수님과는 비길 수가 없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합니다. 그분의 제자였던 사람들은 진정한 제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의 부모도 진정한 부모가 아니었고, 그분의 친척들도 진정한 친척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이 살았던 세계도 진정한 그 분의 세계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연스럽게 부를 수 있는 사람을 한 사람도 갖지 못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마리아를 사랑할래야 사랑할 수 없었던 예수님!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다니시면서도 그들을 사랑할래야 사랑할 수 없었던 예수님이었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한이 맺혀져 있기 때문에 오늘날 하나님의 아들딸들이 이 한을 풀어 드려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하나님의 아들딸이 될 수 없습니다.
구원을 받아 가지고 천국에 간다…. 말은 참으로 좋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가슴에 못이 박혀져 있고, 예수님의 가슴에 멍이 들어 있는 그 상처를 누가 치유해 드릴 것인가! 그 마음을 위로해 드릴 수 있는 사람이 못되면 절대로 천국에 못 들어간다는 사실을 똑똑히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오늘날 통일교회의 식구들은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 사랑을 받지 못하셨던 예수님을 대신하여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고, 사랑을 하지 못하셨던 예수님을 대신하여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 통일교회의 신자들은 어디를 가든지, 예를 들어 어린애들을 볼 때는 예수님을 대신하여 그들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처럼 예수님에게는 사랑하시지 못했던 민족적인 한이 남아 있고 세계적인 한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 식구들은 어린아이들을 예수님과 같이 사랑할 수 있는 아저씨가 되고, 아주머니가 되고, 형님이 되고, 누님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한 많은 예수님의 그 한을 풀어 드려야 하는 것이 우리들의 사명이기 때문에 우리들은 예수님의 아저씨가 되고, 형님이 되고, 동생이 되고, 누님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어머니 아버지,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친척이 못 되었던 것이 한이었기에 여러분들이 그 한을 풀어 드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형님이 되려면 형님의 입장에서 예수님을 사랑하고, 누님이 되려면 누나의 입장에서 예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또 한편으로는 세계 인류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예수님을 예수님으로서 대접하는 한 가족의 입장에 설 수 있고, 친척의 입장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우리들로 말미암아서 하나님의 뜻을 중심삼은 새나라가 세워질 수 있고, 예수님을 사랑하지 못했던 그 나라를 대신하여 예수님을 사랑하는 새로운 나라를 세울 수 있는 것입니다.
통일교회가 가는 길은 이러한 길입니다. 그래야만 모든 국가들이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고, 전세계 인류가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세계, 즉 천국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이루어지기를 기도해본 일이 있습니까?
우리들이 언제 세계 인류를 놓고 예수님과 같이 생각하고 사랑해 보았습니까? 못해 본 것이 한이라는 것입니다. 가는 길이 아무리 험하고 억세다 하더라도 그것을 싫다 하지 않고 사랑으로 채우면서 가야 하는 것이 인생길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예수님의 한을 풀어 드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만나고 싶었던 예수님! 만나서 같이 살고 싶었던 예수님! 그 사정을 받아 줄 수 있는 내가 되어야 합니다. 그 사정을 들어줄 수 있는 어머니 아버지가 되어야 합니다. 그 사정을 들어줄 수 있는 아저씨가 되어야 합니다. 그 사정을 풀어 드릴 수 있는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그 나라가 예수님의 사정을 몰라주었기 때문에 나라를 사랑하시지 못했던 예수님 대신 그 나라를 사랑하고 그 세계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민족과 그 종족을 사랑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랑하시지 못했던 예수님의 한을 풀어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사랑하시지 못했던 한을 풀어 드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놓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오늘의 여러분 자신들이 예수님 앞에 충성을 다하는 동생이 될 수 있고, 누나가 될 수 있고, 한 가정의 가족이 될 수 있고, 종족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무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그렇게 사랑해 보았습니까? 예수님이 사랑하시지 못했던 그 가정을, 예수님이 사랑하시지 못했던 그 민족을, 예수님이 사랑하시지 못했던 그 세계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사랑하지 못해서 몸부림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가지고 하나님이 같이할 수 있는 자리에 서야 하는 것입니다. 땅 위에서 그러한 자리를 넘어설 수 있어야만 땅 위에서 골고다의 고난을 피해 하나님 앞에 갈 수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으며, 하나님과 생명의 인연을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래야만 식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주여 당신은 언제 주로서의 대접을 받으셨습니까? 당신은 나그네의 길을 걸으셨지요? 옥에 갇히셨지요?’ 하고 예수님의 슬프셨던 사정을 풀어 드릴 수 있어야만 하나님과 부자지인연(父子之因緣)으로 오셨던 예수님과 식구의 인연을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인연을 세울 수 있는 입장에 서 있기 때문에 그런 말이 적용되는 것이지, 종과 같은 입장이라면 그런 말이 적용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자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병에 걸린 자식, 혹은 사형장으로 가는 자식을 보고 통곡하는 사람이 있을 때는 그를 위로해 주고 싶으신 것입니다. 그것이 부모의 심정인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아버지와 아들의 인연을 세워야 할 사명, 즉 천도를 세워야 할 사명을 가지고 오셨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하겠습니다.
내 몸이 아무리 어려운 자리에 있다 할지라도, 인류를 자녀의 입장에 세워 놓고 그들을 위로하고, 그들을 위해 서러워하고, 그들이 당하는 고통을 네가 당하는 것같이 생각하는 것이 부모의 심정인 것입니다. 이러한 심정을 참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만 여러분이 식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언제 그래 보았습니까?
오늘도 수많은 식구들이 남한 각지로 나가서 전도하고 있습니다. 일선에서 싸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몇 번이나 예수님과 같은 마음, 혹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동생과 같은 마음을 가져 보았습니까? 그러한 마음을 가져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식이 그런 길을 가고 있다면 그 자식을 천번 만번 찾아가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이 아니겠어요? 자기 동생이 그런 길을 가고 있다면 대신 가주고 싶은 것이 형제의 마음이 아니겠어요? 자기 가족 가운데 그런 식구가 있을 때는 찾아가 보는 것이 식구 된 도리가 아니겠어요?
여러분이 이 민족과 세계를 이와 같이 사랑하는 입장에 서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뜻을 세울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세울 수 있는 자녀가 못됩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나라에 갈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식구라는 명사가 이렇게 엄청나고 두려운 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들에게는 싸움의 노정이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이 간곡한 마음으로 걸어오신 그 노정에 이어서 내가 달려가야 할 길이 남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이 남은 노정을 책임지겠다고 몸부림칠 줄 아는 사람들이 되어야만 식구라는 명사를 지닐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식구라는 이름을 가지고 이 땅 위에서 실천함으로써 예수님에게 맺혀 있는 한을 해원성사해 드리고, 한 맺힌 죽음 길을 가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한을 민족과 세계를 붙들고 우리가 해원해 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세계를 긍휼히 굽어볼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이 세계가 복귀의 길을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여러분들은 식구라는 명사를 유린하는 사람들이 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꼭 그래야만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틀림없이 하나님의 아들딸들이 되어 천국까지 들어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틀림없이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한 세계를 이루어 놓으면 하늘땅이 공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중심삼고 식구로서의 나의 심정이 어떠해야 되겠느냐 하는 것을 여러분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에게 좋은 것이 생기면 그것이 입을 것이든 먹을 것이든, 그것을 먼저 자기가 입거나 먹으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선은 무엇이고 악은 무엇이냐? 악은 나를 중심하고 끌어들이는 것이요, 선은 절대적인 주체 앞에 내가 끌려가는 것입니다. 즉 악은 전체 앞에서 내가 주체가 되고자 하는 것이요, 선은 전체 앞에 내가 대상적인 입장에 서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양심은 자꾸 갚아 주라고 주장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좋으면 또 하라고 권유합니다. 3천만 민족을 통하여서 30억 인류를 대하고, 30억 인류를 통하여서 하늘땅 앞에 보답해야 됩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만족할 수는 없습니다. 양심은 세계를 정복하고, 하늘땅 위에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고, 또 하나님까지 정복한다 하더라도 만족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까지 정복하고 나서도 만족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의 목적세계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사로잡는다 하더라도 또 모자란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무엇까지 정복해야 되느냐? 하나님의 심정 가운데 숨어 있는 사랑까지 정복해야 되는 것입니다. 양심은 쉬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의 종교는 그것을 가르쳐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종교가 처음에 가르쳐 주는 것이 무엇이냐? 하나님을 가르쳐 줍니다. 그 다음에는 무엇을 가르쳐 주느냐? 하나님의 목적을 가르쳐 줍니다. 또 그 다음에는 무엇을 가르쳐 주느냐?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쳐 줍니다. 종교의 가르침으로 볼 때 인간은 하나님의 목적의 실체가 되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것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인연 가운데서 양심이 영원토록 안식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여 그 자리에 영원토록 있고 싶어하는 것이 우리들의 마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복귀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보면 양심이 참으로 고마운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으로 교회에 들어온 사람은 ‘아! 인생의 가치가 이와 같구나.’ 하고 감명 깊게 느끼게 됩니다.
만우주의 주체인 하나님 앞에, 영원을 품을 수 있는 사랑의 하나님 앞에 당당히 서서 하나님과 하나될 수 있고 하나님의 사랑을 점령하는 사람이 될 때는 만우주가 그의 것이요, 모든 만물의 주관권이 그의 것으로 귀결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사람의 욕심에는 끝이 있습니다. 하늘보다 높고 땅보다 넓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욕심은 무엇을 끝으로 삼고 있는지 여러분들은 압니까? 종교의 목적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알면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계를 통일하는 데는 인도(人道)를 중심삼고 통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천도(天道)를 중심삼고 통일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욕심도 그렇지요? 못난 사람이나 잘난 사람이나 세계를 내 것으로 하고 싶지요?
그리고 하나의 목적을 중심삼은 하나님이시기에 두 목적을 두실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천적인 곡절을 거치더라도 하나의 목적을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외적인 세계가 그렇게 되어 나오기 때문에, 내적인 종교도 통일이념을 가지고 나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시대적인 흐름에 의해서 통일교회라는 것이 필요하게 되었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중심삼고 통일해야 할 것이냐? 심정을 중심삼고 통일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사랑을 포로로 하자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과거의 하나님, 현재의 하나님, 미래의 하나님의 심정을 이어받아 하나님을 존경하자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것은 무지에는 완성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은 인공위성시대인데 주먹구구식으로 믿는다면 되겠습니까? 무지에는 개인 완성이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통일교회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적인 정세가 통일의 깃발 아래 모이지 않을래야 모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천륜의 곡절입니다. 곡절이 이러하기 때문에 선생님은 통일교회 식구들을 총동원하는 것입니다. 처음으로 여기에 오신 분이 있으면 기도를 해 보십시오. 그러면 이렇게 되어 있는 것이 사실임을 아실 것입니다.
이러한 엄청난 사실을 알고, 역사적이고 시대적인 해원을 하고 미래를 향하여 용진하는 무리가 여러분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선생님은 여러분들이 어디까지나 식구라는 명예를 잊지 말아 주시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바입니다.
지금까지의 복귀의 노정 위에 얼마나 많은 곡절이 있었을까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저희들이 가야 할 심정의 고빗길이 남아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오늘 여기에 어린 자녀들을 모아 놓고 슬펐던 역사의 사실을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사옵니다.
어제는 크리스마스여서 이날을 축하하는 사람은 많았사오나, 이와 같은 예수님의 심정을 부여안고 눈물을 흘리면서, 한의 심정을 가지고 아버님을 대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었사오며, 또한 내일의 하늘 길을 염려하는 자녀가 몇 명이나 있었사옵니까?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수고하신 아버님이라는 사실을 몇 명이나 알고 있사옵니까? 불쌍하고 불쌍하셨던 아버님이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명심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노정에 이렇게 곡절이 많았던 것과 아버지의 사정이 이렇게 초라한 것이 우리 선조들의 죄로 말미암은 것인 줄 알고 있사옵니다. 아담 해와의 실수로 말미암은 이 모든 골고다의 한을 저희들도 밟고 넘어가야 할 때가 왔사옵니다.
저희들은 내일의 여명을 맞이하기 위하여 이 와중에도 흑암 길을 더듬어가지 않으면 안 되겠사옵니다. 이 흑암 길을 거쳐가야만 새로운 여명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통일의 역군들은 남들이 싫다 하는 새벽길을 더듬으며 지금까지 싸워 나왔사옵니다. 이 노정에서 저희들이 눈물 흘리는 일이 있을 때, 눈물 흘리시는 당신과 같이하기를 바라고 땀 흘림과 굶주림이 있을 때도 당신의 수고의 노정을 위로할 수 있는 한 날을 세우기 위해 몸부림쳤던 것을 당신은 알고 있사옵니다.
한 많았던 과거를 추억으로 남기고 눈물과 더불어 하나님을 염려하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고, 한 많은 추억과 눈물로 지내 오신 한 많은 지난날을 청산하시고 내일의 선을 찾아 웃으시는 소망의 아버님의 모습이 그리워, 오늘의 자기의 초라하고 불쌍한 모습을 잊은 채 효자의 도리를 다 하겠다고 몸부림칠 줄 아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당신이 걸어오신 길을 따라와 보니 십자가의 길이었사옵니다. 그러나 남이 알지 못하는 그 길을 개척자의 심정으로 몸부림치며 따라와 보니 그 길이 망하는 길이 아님을 알았사옵니다.
인간들은 조롱하였으나 당신은 격려하셨사옵니다. 수많은 백성들과 수많은 인간들은 반대하였으나 당신은 앞에 서서 위로해 주셨사옵니다. ‘내가 있고 영계에 있는 천천만 성도들이 네 갈 길을 옹호한다.’ 고 하시며 몇 번이고 권고하셨던 것을 저희는 알고 있사옵니다. 제가 그런 자리에 있을 때 위로해 주셨듯이 외로운 저의 뒤를 따르고 있는 저들도 외로운 자들이오니, 그들에게도 아버지의 사랑이 같이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당신의 간곡한 사정과 서러운 심정을 부여안고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결의하는 딸들이 있사옵니까? 그들을 격려하여 주시옵소서. 그러한 아들들이 있사옵니까? 그들을 붙들어 주시옵소서.
당신이 남기신 최후의 싸움터에서 승리의 영광을 쟁취하여, 아버님 앞에 개선가를 드높이 울리며 아버지의 영광을 찬양하는 자랑스러운 모습을 보여 드릴 수 있는 참다운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한민족의 미래를 긍휼히 보시옵소서. 이 민족이 가야 할 길은 단 하나밖에 없사옵니다. 정치, 경제, 문화적인 면에 있어서 이 민족이 세계에 공헌할 것이 아무것도 없사옵니다. 심정적인 면 이외에는 공헌할 것이 없음을 아옵니다.
천륜의 도리를 따르고 있는 통일의 역군들이 이 민족 앞에 지대한 공헌을 하지 않으면 안 되고, 세계사적인 사명을 해야 되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므로 저희들은 죽을래야 죽을 수 없는 몸들임을 스스로 자각하게 하여 주시옵고, 안 움직일래야 안 움직일 수 없는 책임과 사명을 짊어진 역군들임을 스스로 자각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내일의 승리를 쟁취하고, 오늘의 싸움에서 지치지 말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그 누가 뭐라 하든, 그 누가 반대하든, 그 누가 모략하든 당신을 따르고, 당신이 가신 골고다의 산정에서 당신을 배반한 수많은 무리들과 같이 당신을 모른다 하고 뒤돌아서는 자들이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넘어야 할 십자가의 고빗길을 마저 넘어가야 되겠사오니, 이제 저희들 앞에 세계적인 골고다가 찾아온다 할지라도 저희들은 새 대열을 갖추어 이 길을 향하여 직행하고, 그 고개를 넘어서 승리의 개가를 드높이 울릴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이 기뻐할 수 있는 가족과 형제들이 나오기를 얼마나 바라셨사오며, 그 종족과 그 민족과 그 국가를 얼마나 바라셨사옵니까? 그렇게 될진대 이 모든 골고다의 산정은 평지가 되지 않을 수 없사옵고, 사탄 세력은 쓰러지지 않을 수 없사오며, 하늘은 뜻의 채찍을 들어 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저희들이 알고, 남아진 이 7년노정을 순종해 갈 줄 아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저희에게는 아버지를 사랑하지 못한 한이 남아 있사오니 그 한을 풀어야 되겠사옵고, 아버지 앞에 효성의 도리를 다하지 못한 한이 남아 있사오니 그 한을 풀어야 되겠사옵고, 아버지 앞에 충신의 도리를 다하지 못한 한이 남아 있사오니 그 한을 풀어야 되겠사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싸움의 노정에서 효성의 도리를 다해야 되겠사옵고, 충신의 도리를 다해야 되겠사옵니다.
아버지를 모셔 놓고 효성을 다하고 충신의 도리를 다하면서 아버지를 시봉할 수 있는 평화의 천국이 어서 속히 이루어져야 되겠사옵니다. 그날을 위하여 저희들은 오늘을 자랑하고 내일을 준비해야 되겠사옵고, 기쁨 가운데 가는 길에 지치지 않게 하여 주시옵고, 하늘을 배반하는 자가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니다.
1965년, 한 많은 한 해, 역사적인 곡절을 넘기는 한 해가 지나가게 되었사옵니다. 남은 일주일간 새해를 맞는 그날까지 새로운 자아의 모습을 갖추어, 깊은 잠 가운데 있는 이 민족을 위해 진정으로 아버지 앞에 축원할 수 있는, 대신자의 사명을 다할 줄 아는 통일의 역군, 통일교단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하늘이 저주하는 자리에 들어가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가 흘리는 눈물은 만민의 생명의 원천이 되고, 뭇생명이 그 눈물의 길을 가지 않을 수 없는 생명의 동기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뭇백성이 하나님 앞에 부복하여 충신의 도리를 다하고 감사할 수 있는 인연을 남기는 저희들의 행로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의 역경의 길이 그런 길이 되게 해 주시고, 저희의 슬픈 생활이 그런 생활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한 해의 남은 날들에도, 아버지, 이 민족 앞에 복을 베풀어 주시옵고, 세계 만민에게 복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천상에서 재림의 한 날을 고대하는 수많은 영인들의 한을 해원해 주시옵고, 아버님과 예수님의 한이 해원되고, 이 땅에 평화의 왕국이 건설되고, 아버지가 통치하실 수 있는 그 세계가 어서 속히 이루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만만세의 영광과 승리가 이 땅 위에 충만하여 아버님과 더불어 기뻐하고, 아버님께 영광을 돌려드릴 수 있는 그 한 날이 어서 속히 오기를 간절히 간절히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였사옵나이다. 아멘.
타락한 인류의 역사는 인간이 복귀노정을 거쳐 본연의 위치로 돌아가기 위해 걸어온 역사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아담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가인 아벨을 통하여 아담가정을 중심삼은 복귀섭리를 하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가인이 아벨을 죽임으로써 그 뜻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노아, 아브라함 그리고 모세와 세례 요한을 거쳐 예수님 때까지 연장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역사적으로 실패한 모든 것을 탕감해야 했습니다. 조건을 세워서 전체의 역사, 즉 종적인 역사노정을 횡적으로 탕감복귀해야 했던 것입니다. 개인과 가정을 중심삼고 이스라엘 민족과 국가를 거쳐서 세계까지 탕감하는 것이 예수님의 책임이며 사명이었습니다.
예수님 한 분이 완성함으로 말미암아 아담가정에서 이루려던 것이 완성되는 것이요, 노아와 아브라함가정에서 이루려던 모든 것이 완성되는 것이요,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나왔던 모세의 사명이 완결되는 것이요, 구약 역사를 종결지어야 하는 세례 요한의 사명까지 완결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사명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 한 분이 승리한다는 것은 이스라엘 전체의 승리를 가져오는 것이요, 복귀역사 전체의 승리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세계적인 가나안 복귀노정을 출발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민족의 불신으로 예수님이 전체적인 탕감복귀의 사명을 완수하지 못한 연고로 그 뜻이 재차 연장되어 지금까지 2천년 역사가 흘러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소원이 무엇이냐? 예수님의 소원은 땅 위에서 십자가를 지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즉 전세계 인류를 구속하여 에덴으로 복귀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오늘날까지 수난의 노정을 거치면서 터를 닦아 온 것은 역사노정에서 실수하였던 모든 것을 영적으로라도 탕감복귀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오늘날 통일교회를 중심삼고 볼 때, 통일교회는 지금까지 6천년 역사를 두고 하나님이 섭리해 나오신 복귀노정을 탕감해야 합니다. 개인적인 문제, 가정적인 문제, 도덕적인 문제, 국가적 문제를 탕감복귀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국가를 중심삼고 이루었어야 할 전체적인 문제를 탕감복귀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오늘 한국을 중심삼고 움직이고 있습니다. 해방 전까지 하나님은 선지자적 사명을 지닌 많은 인물들을 보내셔서 준비해 오셨습니다. 여기에는 부인들을 중심삼고 섭리하신 일면이 있는 동시에 남자들을 중심삼고 섭리해 나오신 일면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섭리의 뜻을 세우기 위하여 우리 민족이 알지 못하고, 신앙자들이 알지 못하는 가운데 특별히 택한 자들을 세우시어서 내적․외적으로 역사해 나오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나라 이 민족은 해방 후에 새로운 발전적인 내용으로 출발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뜻을 전하기 위해 통일교회가 출발한 것입니다.
본래 고난 길을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탕감복귀의 기준을 세워 나가기 위해서 고난 길을 가는 것입니다. 이 길을 가기 위해서는 가인과 아벨의 입장을 다시 재현시켜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한국을 중심삼고 볼 때 통일교회는 아벨의 입장이고 한국 민족은 가인의 입장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와 한국 민족은 가인과 아벨이 하나되지 못한 것을 탕감복귀해야 되는 것입니다.
아담가정에 있어서 가인이 아벨을 죽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을 뒤집어 놓았으니, 이것을 탕감복귀하기 위해서는 아벨에게 가인이 굴복해야 합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천륜을 세울 수 있는 참다운 부모의 인연이 이 땅 위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준을 교단적으로 세워 나가야 되고, 한국 전체에 안팎으로 이런 기준을 세워서 탕감복귀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을 위해 하나님이 신령적인 분야와 진리적인 분야에서 준비해 나오셨기 때문에 해방 전후에 한국에는 신령역사가 굉장히 많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거기에는 구약시대적인 진리와 법과 이념을 갖고 나온 단체가 있었는가 하면, 신약시대적인 단체, 즉 예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나온 신령한 단체들도 있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앞으로 이루어야 할 새로운 이념을 갖고 나와 신령한 역사를 하는 단체도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체 역사노정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구약섭리, 신약섭리, 성약섭리를 해 나오시기 때문에 구약시대의 에덴복지 이념과 신약시대의 에덴 복지 이념, 그리고 앞으로 올 성약시대의 에덴복지 이념을 중심삼고, 이 한국 땅에서 각 시대의 섭리의 뜻을 대할 수 있는 특별한 인물들을 세워 이러한 신령역사를 전개시켜 나오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세 가지 분야에서 신령한 역사를 하던 무리들은, 해방을 기점으로 하여 이 땅에 새로운 역사가 벌어진다는 것을 전부 다 하나님으로부터 계시 받았습니다. 그들은 그러한 계시를 중심삼고 하나되어야 했고, 기독교를 중심삼고 하나되어야 했습니다.
기독교를 중심삼고 볼 때, 기독교 내에도 가인과 아벨이 있는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이 있어야만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한국의 동쪽 원산을 중심삼고는 백남주, 이용도 목사와 그 외의 특별한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섭리를 연결시키셨고, 서쪽으로는 성주교단과 허호빈 집단을 중심삼고 섭리를 해 나오셨습니다 이렇게 3대를 거쳐 나오게 하셨습니다. 1대와 2대까지는 준비의 시대입니다. 이때는 반드시 핍박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사회에서 지탄을 받고 교계에서도 지탄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왜 그러냐? 복귀역사에서는 2수를 중심삼고 선과 악을 분별하기 때문에 두 번째 것은 언제나 맞는 것입니다. 반드시 사회적인 비판과 교단적인 반대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때에 범교단적으로 환영을 받고 사회적으로도 환영을 받았더라면 섭리의 뜻은 급진전하여 전국적인 섭리의 터전을 마련하고 새로운 역사의 터전을 공고히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몰랐기 때문에, 즉 하나님께서 전국을 양분해서 체계적으로 섭리하시는 역사를 몰랐기 때문에, 눈앞에 나타난 사실만 보고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책임을 짊어진 사람들이 책임을 못하면 반드시 후계자를 세워서 새로운 분야를 개척해 나가게 하셨습니다. 처음에는 여러 집단과 단체가 나와서 이런 사명을 하지만 시일이 지남에 따라 하나의 귀결점을 향해서 신령한 역사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해방 직후에 목사, 장로를 중심으로 대대적인 부흥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성봉 목사, 박재봉 목사가 특별한 역사를 했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과 일치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하자 파가 갈라지게 된 것입니다. 그 후 목사시대가 지나고 장로시대가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박 장로, 나 장로 등 장로들이 나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도 하나님이 섭리하시고자 하는 방향으로 나가지 못하였기 때문에 집사시대, 성도시대가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특별한 뜻을 받들고 특별한 섭리를 대하는 사람들은 교회에 참석할 수 없는 입장으로 떨어지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이런 시대적인 환경을 대해 나오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내적인 역사를 거듭해 나왔습니다. 우리 교회도 그런 분야에 있어서 일단의 책임을 지고 지금까지 반대를 받으며 발전해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이 길을 출발하면서 통일교회라는 간판을 붙인 것은 본의가 아니었습니다. 이미 있는 단체들을 기반으로 하여 국가적인 새로운 주권을 확립해 가지고 세계의 지도자들과 합의하며 이 길을 출발해야 했던 것입니다.
앞으로 내적인 기준에서 대표적인 사명을 짊어진 사람과 외적인 기준에서 대표적인 사명을 짊어진 사람이 상봉할 수 있는 한 때가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까지의 6천년 역사의 정상에서 반드시 가인과 아벨이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인과 아벨이 만나는 정상의 자리에서 탕감복귀해야 하는 것입니다.
가인이 천도를 받들어 아벨 앞에 순응하는 기준을 갖추게 되면 가인 아벨이 하나되어 탕감의 고개를 넘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가인 아벨이 이 고개를 정상적으로 넘어간다면 서로 상대방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넘어가야 하는데 가인 아벨이 이 기준을 이루지 못하여 아벨만이 넘어가게 된 것입니다.
본래 선생님이 이 길을 출발할 때 이 박사(이승만 박사)하고 손잡고 나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섭리적으로 보면 그렇게 될 수 있었는데 그때의 기성교회가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틀어져 나갔던 것입니다. 이런 일이 벌어졌으므로 이 길을 그냥 그대로 올라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높은 기준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낮은 기준으로 떨어져 내려갔던 것입니다. 내려갈 때는 반드시 최하의 자리까지 내려가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즉시 선생님은 이북으로 갔습니다. 이북으로 가서 다시 올라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헤롯왕에게 쫓길 때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가 합하여 예수님을 모시고 헤롯왕의 뜻을 반대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 앞에 세워야 할 천적인 사명을 세우지 못했으므로 예수님이 애급으로 갔던 것과 마찬가지로, 선생님 역시 그러한 노정을 걷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북으로 갔던 것입니다. 세계적인 원수, 공산당을 찾아가지 않으면 안 될 운명에 접하여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최하의 옥중 생활까지 각오하고 이북으로 떠났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귀섭리로 보게 되면 그때 이 민족에게는 외적으로 희망이 싹트는 것 같았지만 내적으로는 절망이 싹트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그때부터 최하의 고비고비를 거치고 시련과 고통을 거쳐 나왔던 것입니다. 나는 제1차 노정에서 승리의 기반을 닦지 못하고 제2차 노정을 가야 했기 때문에 고난의 길로 갔던 것입니다. 제2차 노정이란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의 길로 가신 것을 탕감하는 노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감옥까지도 찾아 들어가야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음의 길로 가게 되었을 때 이스라엘 민족이 배반했고, 사랑하는 세 제자까지도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그러기에 탕감복귀 원칙에 의하여 선생님이 감옥에 있을 때, 예수님이 잃어버렸던 12제자와 같은 수를 탕감복귀해야 했던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선생님이 감옥에 갔을 때 입을 열지 않았어도 제2이스라엘권 내에 있는 영계의 영인들이 전도를 해서 그 수를 채워 주었던 것입니다. 이런 역사적인 인연을 거쳐 나왔던 것입니다. 공산당의 삼엄한 감시와 주시를 받는 옥중생활에서도 남이 모르는 심정적인 단결운동을 하나님께서 책임지고 해 주셨습니다. 거기에서는 드러내 놓고 전도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선생님이 입을 다물고 있어도 영계에서 전도해 주었습니다. 수인(囚人)들의 선조가 나타나서 감방의 몇 사(舍), 몇 호, 몇 번까지 가르쳐 주면서 ‘너는 그분을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고 가르쳐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들을 영적으로 결합시켜서 예수님의 12제자와 같은 수를 탕감복귀 시켜놓지 않으면 안 될 섭리적인 뜻이 있었던 것입니다. 선생님은 이러한 과정을 거친 후 6․25동란이 발발하자 유엔군이 북진하는 때에 다시 이남으로 내려온 것입니다.
이렇게 선생님은 제2차로 해방의 날을 맞이한 기준을 세운 후 이남으로 내려왔던 것입니다. 그 후 또 최하의 자리에서부터 이 길을 걸어 올라왔던 것입니다. 수난과 역경을 거치면서 지금까지 올라온 것입니다.
이렇게 출발한 제2차 노정이니만큼 반드시 또 투쟁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2차 때에는 아무도 모르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 위에 오셨을 때에도 아무도 모르는 가운데 섭리의 터전을 계승하여, 유대민족의 중심 가정인 요셉가정에서부터 뜻을 펴고, 그리하여 모든 상류 계급에까지 뜻을 펴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뜻이 이루어지지 않자 반대의 입장에서부터 출발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통일교회가 가는 길도 탕감복귀 원칙에 의하여 예수님 때처럼 비참한 노정을 걸으며 맨 말단에서부터 출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남한에서 교단이란 교단은 전부 다 반대하고 전민족이 환영하지 않는 가운데서 통일신도들은 제일 말단에서부터 올라오는 운동을 해 나온 것입니다. 이렇게 나온 1960년까지의 기간은 야곱 노정에 있어서의 14년 기간과 맞먹기 때문에 이 기간 내에 천적인 계획을 결정지어야 하는 것입니다. 전국가가 반대하고 전교계가 최고로 반대하는 치열한 싸움의 자리에서 일을 성사시켜야 했습니다.
편안한 자리에서 탕감조건이 세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의 기준을 세우고, 하늘과 땅에 악을 제거하고 선을 세워야 할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1960년대는 통일교회에 있어서 최고의 시련 기간이었고 최고의 풍파에 시달리던 때였습니다. 그리하여 야곱이 14년 기간을 거쳐 가정적인 기반을 확정지었던 것과 마찬가지의 기준을 세우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통일교회는 1960년을 중심삼고 7년노정을 세워서 지금까지 발전해 나오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가는 길은 탕감복귀의 길이기 때문에 이 민족과 수많은 제단이 반대했습니다. 이것을 통일교회 교인들이 탕감하기 위해 제물이 되어야 했고, 역사적인 서러운 길도 가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선생님이 여러분을 비참한 길로 내몰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3년노정 동안에 무엇을 이루어야 하느냐? 탕감복귀의 원칙에 의하여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세우려 했던 천적인 기준을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우려 했던 민족적인 내적 사명을 결정짓고, 외적으로 세우려 했던 천적인 기준을 세워야 할 사명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3년노정 기간에 하나님이 찾아 나오시는 자녀의 인연을 세우지 못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노아가정의 세 아들의 입장을 중심삼고 36가정을 편성해야 했던 것입니다. 36가정은 아담으로부터 노아까지, 노아로부터 아브라함까지, 아브라함으로부터 야곱까지를 거쳐서 열두 아들을 중심삼은 전체적인 섭리의 터전을 세워야 합니다. 이것은 지난날의 역사를 이루려는 것이 아닙니다. 선조들이 실수하였던 것을 현실에서 횡적으로 일시에 탕감복귀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을 하기 위한 싸움이 36가정을 중심삼고 벌어지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축복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축복받을 사람들은 세상의 부모나 인연된 사람들과 의논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뜻하신 것은 사탄세계의 그 누구에게도 알리고 의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특권으로 여러분들이 갈 길을 결정짓고 난 후에 초청장을 보냈던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 사람들이 욕을 하고 야단들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1차, 2차, 3차 결혼식을 할 때에 밖에서 싸움판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결국 모든 문을 닫아 걸고 파수꾼을 세워서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선생님이 세상 사정을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인간 사정보다도 하나님의 사정이 더 딱하고, 인간의 뜻보다는 하나님의 뜻이 더 크기 때문에 책임지고 이 일을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녀를 잃어버린 역사적인 한을 탕감복귀해야 했기 때문에, 종적인 역사를 현실에서 횡적으로 탕감복귀 하여 조상들의 기원과, 조상들이 세우려 했던 기준을 다시 찾아 놓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36가정을 축복한 것입니다.
36가정을 통하여 아담가정, 노아가정, 야곱가정이 비로소 땅 위에 연결되고 복귀되는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지금까지는 과거․현재․미래를 통하여 인연 지을 수 없었던 섭리적인 인연이 지상을 통하여 인연 지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원리를 모르면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릅니다. 여러분들도 잘 모르는 이런 일을 지금 통일교회에서 해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아담 이후 6천년 동안, 우리 조상들이 실수한 모든 것을 탕감하기 위하여 오늘날 통일교회가 한국 민족을 대표하여 이 삼천리 반도에서 세계사적인 운동을 벌이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이런 일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영계의 영인들이나 땅 위에 살고 있는 인간들은 전부 아담의 후손입니다. 그런데 우리 조상들이 하나되지 못하였고 하늘과 땅이 조상들과 하나 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영계는 영계대로 움직이고 지상은 지상대로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이 영계와 접하기 위해서는 땅 위의 모든 악을 차 버리고 분별된 입장에서 지성을 다하여 생명 기준이 영계와 접할 수 있는 기준까지 올라가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영계와 상봉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의 고충이었습니다.
이제 신앙자들에게는 갈라진 영계와 땅을 연결시켜야 할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영계가 땅으로 내려올 수 있는 자연적인 환경을 조성하지 않고는 통일의 운세를 이 땅 위에 일으킬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신앙자들이 지상에서 이러한 활동을 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선조들이 실수하여 사탄이 참소할 수 있는 권내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이러한 사탄의 권한을 깨뜨리고 승리의 기준을 세워서 지상과 영계를 연결시킬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 놓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이런 사명을 완결하기 위하여 36가정을 축복했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승리하지 못합니다.
36가정은 인류의 조상과 같은 입장입니다. 아담가정에서부터 야곱가정까지를 상징하는 인류의 조상입니다. 그러기에 36가정은 수많은 조상들의 실수를 탕감복귀해야 합니다.
그러면 조상들의 소원은 무엇인가? 조상들의 소원은 여러분이 개체를 완성할 뿐만 아니라 영계와 육계를 합할 수 있는 승리의 실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영계와 육계가 합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늘의 영계는 남자를 상징하고, 땅의 육계는 여자를 상징하기 때문에, 영계와 육계가 갈라진다는 것은 하늘과 땅이 갈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늘의 운세와 땅의 운세를 합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과거의 조상들은 상대적인 인연을 한데 묶어 천적인 기준을 세워 영계와 육계를 통합할 수 있는 조건을 세우려고 했습니다. 그러기에 이러한 역사를 선조들로부터 받게 되면 그것을 받는 사람은 당장에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아담 해와가 잃어버린 것을 가인과 아벨이 복귀해야 하는데, 이들이 서로 싸웠기 때문에 복귀하지 못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가인 아벨이 복귀해야 할 것뿐만 아니라 가인 부부와 아벨 부부가 복귀해야 할 것까지 복귀해야 합니다.
조상 앞에 두 아들의 가정 형을 편성해야 될 섭리적인 뜻이 있었기 때문에, 이것을 세우기 위해 36수의 2배인 72가정을 세운 것입니다.
종적인 역사노정에 있어서 아담가정에서 못 이룬 것을 가인․아벨가정이 완결 지어야 하는 데 완결 짓지 못했습니다. 즉 탕감조건을 세우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가인 아벨 가정 형인 72가정을 축복함으로써 연장되었던 종적인 섭리가 평면적인 하나의 기준점에서 승리의 기준을 세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제1차 3가정 성혼식(1960년 4월 16일)이 끝나자 자유당 정권이 망했습니다. 축복이 있은 후 1주일 이내에 그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2차 33가정 성혼식(1961년 5월 15일)이 끝나자 민주당 정권이 망했습니다. 이것들은 신기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반대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3정권 시대를 거쳐 나왔습니다.
36, 72가정을 세움으로써 종적인 가인 아벨 형의 이념적 기반이 전부 땅 위에 조성된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평면적으로 종적 가정 형을 복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가정은 전부 다 아담가정을 복귀하기 위한 형입니다.
예수님의 12제자의 12수를 10배 한 120수는 평면적인 세계를 대표할 수 있는 수입니다. 그래서 이 120문도와 같은 수를 맞추기 위해 120쌍 축복을 한 것입니다. 원래는 120이지만 4방수(四方數)인 4쌍을 더해서 124쌍을 축복했습니다.
예수님의 120문도를 대신한 120가정은 세계적인 형입니다. 그 사람들 자체에 세계를 통치하고,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대표 형으로서 세계적인 탕감조건을 세울 수 있는 터전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20가정을 세움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세계적으로 찾아올 수 있는 기준을 세우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엔 회원국이 12O개 국가가 넘으면 그때가 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120가정이 결정되었다는 것은 100여 개 국가의 운세를 좌우할 수 있는 천적인 인연이 결정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어느 누구도 통일교회가 가는 길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세상이 떠들고 총칼을 휘두른다 하더라도 통일교회가 가는 길은 막을 도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통일교회가 정부에 등록되었을 때 정부에서는 큰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그때가 1963년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이러한 날이 올 것을 알았기 때문에, 여기에 대비한 천적인 기준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외국 선교를 준비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아벨이 구속을 받게 되면 가인을 세워서 탕감복귀할 수 있는 준비를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옛날에는 가인이 아벨을 죽였지만, 이제는 외국을 중심으로 가인적인 제단을 형성하여 아벨 제단을 받들 수 있고 아벨 제단을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세계적인 인연을 지어 놓기 위해 쫓기고 몰림받으면서도 외국에 선교사를 보냈던 것입니다. 모험을 하면서 미국에 세 사람, 일본에 한 사람을 보냈습니다.
우리는 반대하는 자유당 치하에서 성장해 나왔습니다. 자유당은 통일교회가 없어질 것으로만 알았지 이렇게 발전할 줄은 몰랐을 것입니다. 이렇게 성장하기까지는 피어린 역사와 여러분이 상상하지 못할 내용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때일수록 반드시 국가적인 탄압이 있기 때문에 거기에 대비하기 위한 내적인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이러한 책임을 느껴 미국과 일본에 선교사를 보냈고, 독일에까지도 선교사를 보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교회의 등록이 문제시될 때에는, 이미 미국 연방정부에 통일교회가 등록이 되어 있고, 일본에도 등록이 되어 있고, 독일에까지도 등록이 되어 있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세계 민주주의의 선도국가인 미국에서도 통일교회가 환영받고 있는데, 한국에서 반대하고 등록을 문제시한다면 국가적인 망신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정부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으며 우리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천적인 인연이 있었기 때문에 여러분들을 5,500명 이상 동원하여 지방에 보내 계몽을 하게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지방에 가서 도지사나 군수 또는 면장으로부터 수백 장 이상의 표창장을 받은 것은 정말 잘한 일입니다. 여러분이 피눈물 나는 고생과 투쟁을 했기 때문에 지방민들이 우리 통일교회를 옹호할 수 있는 단계에까지 들어온 것입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여러분을 60년부터 7년노정에 가담시켰느냐? 왜 그전부터 가담시키지 않고 60년도부터 가담시켰느냐 하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복귀역사는 소생․장성․완성의 3단계를 거쳐 가게 되어 있습니다. 7수를 중심삼고 3단계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21수(3x7)를 지나야 그 기반이 닦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소생기, 장성기까지는 타락으로 인해 사탄의 침범을 당한 기간입니다. 부모의 입장에 있는 사람이 타락했기 때문에 소생, 장성의 기간에는 부모가 감당해야 할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부모가 세워야 할 시련과 고통의 기준에 자녀들은 참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자녀들은 3단계에 있어서 완성 단계에 해당되는 7년 기간에 복귀의 길을 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 기간은 사탄의 침범을 당하지 않은 기준을 중심삼고 복귀의 길을 갈 수 있는 기간입니다. 이 7년 기간에 여러분이 수고한 것은 탕감의 내용이 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실적으로 남아지는 것입니다.
자유당, 민주당, 공화당은 타락한 아담과 해와와 천사장의 입장입니다. 원칙적으로 보면 자유당은 아담 형이요, 민주당은 해와 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박순천 여사가 민주당 당수에 당선된 것도 일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 공화당은 천사세계 형입니다. 물론 그들도 반대하는 입장에 있긴 하지만, 통일교회를 지지하고 협조할 수 있는 단계에 들어선 것입니다. 복귀의 인연을 맺을 수 있는 시대로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야곱과 에서가 상봉하던 것과 마찬가지로 국가적인 기준을 넘어 통일교회와 한국 정부가 만나야 할 때가 올 것입니다. 곧 그러한 단계로 넘어갈 것입니다.
복귀섭리의 제1차 단계와 제2차 단계가 매듭지어질 수 있는 시대가 오면 제3차 단계의 길을 출발해야 합니다. 즉 세계적인 무대를 중심삼고, 세계적인 가나안 복귀를 위하여 출발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40수를 중심삼은 노정을 출발해야 되는 것입니다. 모세가 가나안 땅을 회복하기 위해서 40일간 정탐을 한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선생님도 세계 정탐에 나서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40개 국가를 연결시키지 않으면 안 될 섭리적인 내용이 있기 때문에 금년 1월 28일을 기하여 세계 순회에 나섰던 것입니다. 원래는 60년도 전에, 자유당 때에 가려고 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섭리적으로 볼 때 국가적인 기준인 2차 기준에 와 있습니다. 이 2차 기준에서는 판가리를 해야 합니다. 이 민족의 운명을 타개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것도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승리의 길, 즉 이 민족이 가야 할 새로운 길을 택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길이 7년노정의 피어린 투쟁의 길이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이러한 길을 가면 이 민족과 상봉할 때가 오는 것입니다. 또한 섭리적으로 봐도 이 나라가 새롭게 발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일교회와 상봉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청년층이나 대학생층, 또는 군이나 공무원 계층이 우리와 연결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계층들이 우리와 연결될 수 있는 인연이 되어야만 세계적으로 천적인 뜻을 추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강원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김 중령 일가 살해사건이 벌어진 것은 하나님의 섭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북한에서 대남공작활동을 강화시켜서 강력한 행동으로 나왔다는 사실도 앞으로의 천적인 운세를 세우기 위한 하나님의 내적인 섭리입니다. 물론 사탄세계에서 작용한 것이지만, 이것은 천적인 기준을 세우기 위한 터전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김 중령 일가 살해사건으로 말미암아 여당과 야당이 모두 강원도를 반공 시범도로 지정하여 반공투쟁을 강화시켜야 된다고 했습니다. 강원도부터 시범도가 되고 점차 다른 도에까지 확산되어 가야 합니다.
이처럼 반공을 강화시켜 19세부터 55세까지의 모든 남자들로 반공조직을 편성해야 하고, 교단까지도 반공투쟁을 강화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런 판국인데 정부에서는 반공투쟁에 대한 이념적인 대안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치안국이나 정보과에서 큰일났다고 야단이었습니다. 계획은 세워 놓았지만 정신적인 무장을 할 수 있는 아무런 내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이미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통일교회 이념이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강원도지사를 통하고, 군수를 통하고, 면장과 이장을 통해서 우리의 반공이념을 널리 표방하며 강원도 전체를 휩쓸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조금 더 연구하고 조직적인 체계를 갖추어 불을 붙이면 반공 연맹이 자연히 우리로부터 영향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엔 아시아반공 연맹과 연결해야 합니다. 이것이 앞으로 우리가 가야 할 길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승공운동이 강원도에서부터 벌어지는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 일렬로 가다가 전체가 뒤로 돌아가게 되면 맨 뒤에 가던 사람이 맨 처음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강원도가 우리나라에서 제일 불쌍한 도지만 섭리적으로 볼 때는 제일 가까운 도이기 때문입니다.
또 강원도에는 군대가 있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앞으로 통일교회 사상으로 60만 대군을 무장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북한까지도 사상적으로 밀고 올라가는 것입니다. 북한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60만 대군이면 동양 천지에 무서울 게 없는 것입니다.
만일에 한국이 지금부터 약 20년 전 해방 직후에 통일교회 이념을 받아 들였다면, 선생님은 지금쯤 아이젠하워 대통령이나 존슨 대통령 이상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못했기 때문에 세계를 요리해야 할 책임이 천적인 섭리 가운데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명을 두고 한국 땅에서만 피눈물 나는 투쟁을 하고 있는 것이 분하다는 것입니다.
앞으로의 세계는 어떻게 될 것이냐? 별수 없이 복귀노정을 걸어갈 것입니다. 선생님이 말한 대로 되기 때문에 통일교인들이 선생님의 말씀을 무서워하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하나님의 뜻을 중심삼고 오늘날까지 여러분을 이끌고 왔습니다.
어차피 앞으로는 이 민족이 세계의 첨단에 서서 세계사적인 운동을 좌우할 것입니다. 현재 이런 시대적인 환경이 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이제부터 대한민국이 해결해야 할 문제는 무엇이냐? 공화당이 하고 있는 대통령 선거, 국회의원 선거, 물론 이런 것들도 문제가 되지만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들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이번 유엔(UN)총회에서도 한국 문제를 의제로 채택하여 유엔군 감시하에서 남북한 총선거 문제를 거론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북한 괴뢰정부가 이것을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남한 내에 지하조직을 강화시켜 자기들의 모든 목적과 계획을 틀림없이 성취할 수 있다는 확신이 서게 될 때에는 틀림없이 ‘선거하자.’고 나올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대비해야 할 것이냐? 이것이 걱정입니다. 통일교회가 염려하는 것은 이것을 어떻게 대비할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차기 대통령 선거보다 더 급한 것이 남북한 총선거를 대비하기 위한 국가적인 운동을 전개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준비하기 위하여 작년에 3차에 걸쳐서 부흥단을 편성했던 것입니다. 적어도 120개 군, 360개 이상의 면을 대상으로 사상 무장을 시키고, 또한 범사회적으로 사상운동을 벌여 연단시키고 훈련시키려고 하는 것이 선생님의 계획입니다. 이렇게 해서 지금까지의 관념을 뒤집어 놓으면 미국에 들어가서 활동하는 때가 오는 것입니다.
우리 통일교인들은 공산주의 유물사관에 대한 비판을 철저히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남북한 총선거 문제가 나올 때 통일이념을 중심삼고 북한을 여지없이 누르고 승리의 결과를 가져오는 공을 세워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세계를 복귀할 수 있는 터전이 마련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일이 바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적인 문제점을 제시하고 그것을 해결해 나가는 것이 통일신도들이 지고 가야 할 책임과 사명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선생님이 일본에서 돌아올 때 통쾌하게 생각한 것이 있었습니다. 현재 일본에 있어서나 아시아에 있어서 공산주의가 크나큰 문제의 초점이 되고 있습니다. 이념주의적 공산주의는 소련에서 나왔지만 행동주의적 공산주의는 노동자, 농민을 중심삼고 벌어지고 있습니다. 아주 조직적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앞으로 일본의 모든 면을 지배하려는 정치가에게는 공산주의자들과 어떻게 싸움을 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될 것입니다. 지금 일본은 사상적인 재무장을 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야 합니다. 사상적으로 재무장을 하지 않으면 안 될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통일교회가 비약적인 발전을 할 수 있는 시대로 접어든 것입니다. 우리는 세계정세와 일본이 처한 입장을 그들이 인식하게 해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 지금 맹활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번에 선생님이 최봉춘 선교사와 함께 세계 순회를 하고 돌아왔습니다. 최봉춘 선교사는 일본에 계속 머물러 있고 싶어했지만 선생님이 말렸습니다. 일본에 아무리 머물러 있고자 해도 여권문제 때문에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일본 정부가 통일교회 움직임을 항상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선생님이 알고 있습니다. 앞으로 동양에는 동양의 운명에 맞는 집권자가 나온다는 것도 선생님은 알고 있습니다.
지금 일본에 어떠한 일이 벌어지고 있느냐? 일본에 있는 56개 대학에 우리 통일교회의 원리연구회가 등록되어 있고, 학박사들이 그 배후에서 통일이념에 대하여 연구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공산주의 학생들과 통일교회 원리연구회에 참여하는 학생들이 투쟁하고 있습니다. 이 투쟁에서 어떤 대학의 공산주의 학생들이 몽땅 통일교회로 넘어와 버린 일이 생겼습니다.
공산당이 자기들의 활동을 강화시키기 위해 요소 요소에 배치한 지하단체 중의 하나가 통일교회로 몽땅 넘어와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 공산당원들이 통일교회에 가서 전부 다 뒷조사를 한다, 반기를 든다 하며 야단법석을 떨었습니다. 그래서 동경대에서부터 경도대 및 동북대학 등 모든 대학가에서 문제가 되었습니다. 원리연구회가 대회를 할 때마다 공산당의 앞잡이다 뭐다 하며 야단났습니다.
일본 통일교회는 공산당과 싸워야 합니다. 싸워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싸워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공산당을 통일교회 원리 말씀에 의해 전부 무너뜨려야 합니다. 그런 일이 벌어지면 신문에 보도 안 되겠어요? 세상에 알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일본 경찰당국이 통일교회에 대해서 내사해 보니 통일교회가 한국에서 나왔고 한국 정부에게 반대받는다는 것을 알고 감동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기분 좋았던 것은 무엇이냐? 한국에서 나온 통일교회에 일본에서 괜찮다 하는 대학의 500여 명의 똑똑한 젊은 학생들이 들어와 활동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일본 사람들이 믿고 있는 창가학회는 일시적인 종교관을 중심으로 퇴폐적인 국민성을 만들고 있습니다. 이것이 큰 문제입니다. 이것은 진짜 미신입니다.
종교라는 것은 인격을 완성하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것을 믿으면 잘 먹고 잘 산다고 합니다. 이것이 목적입니다. 잘 먹고 잘 살며 병 낫게 해 달라고 비는 것은 종교가 아니고 미신인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1,300만 명이나 되는 대무리가 이 창가학회에 휩쓸려 들어가 그 노릇 하고 있으니 큰일입니다.
일본이 당면한 첫째 문제는 공산당이요, 둘째 문제는 창가학회, 그리고 셋째 문제는 청소년입니다.
앞으로 국가 전체의 운명을 좌우하는 청소년의 윤리문제, 즉 사회윤리문제에 있어서 일본은 절망적입니다. 그러기에 국책상(國策上)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일본 국민들은 지금까지 종교를 비현실적인 것이라고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창가학회가 나와 정부와 국회에서까지 문제시(問題視)되고, 일본 국민 전체가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일본에서도 종교의 힘이 위대하다는 것을 깨닫고 종교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는 단계로 들어왔습니다. 지금 이때가 전도하기 참 좋은 기회입니다. 그래서 구보키 일본 협회장한테 창가학회와 입정교성회(立正佼成會)의 중심인물들을 만나고, 또한 언론기관의 중심인물을 만나서 우리의 뜻을 전하고 그들과 싸워 이기라고 말했습니다.
오늘날 일본에서는 종교가 사회적인 문제가 되고, 국가 정책적인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종교가 전사회적으로 중대한 문제가 되고 있으니 종교 책임자로서 이것을 방관할 수 없기 때문에, 이것을 타개하기 위해서 우리가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싸우면 결국 누가 이기겠습니까?
선생님은 1964년 12월 31일과 1965년 1월 1일 양일에 걸쳐서 7개의 성지를 세웠습니다. 이러한 기준을 세워 국가적 기준에서 개인복귀, 가정복귀, 종족복귀를 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이 취하실 수 있는 개인적인 승리의 터전, 가정적인 승리의 터전, 종족적인 승리의 터전을 갖추어야 합니다. 여기서의 종족은 통일교회 축복가정들을 의미하며, 민족은 이런 종족으로 이루어진 통일민족을 의미합니다. 앞으로 우리는 통일민족을 편성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에서 가인 아벨이 세워야 할 천적인 위치와 중심을 탕감해 세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러한 사명 분야를 향하여 총진군해야 하는 것이 7년노정에 해야 할 사명임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제 종족 기준, 민족 기준을 세우고 국가 기준을 세워 세계적인 시대로 넘어가야 할 때가 왔습니다. 지금은 한 국가의 사상이 그 국가에 국한되는 시대가 아니라 세계적인 문제가 되는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통일교회에 대한 천적인 의의가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을 잘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타락한 세상에 다리를 놓으며 섭리적인 기반을 쌓아 올라온 것입니다.
7년노정을 중심삼고 볼 때, 이 7년노정이 끝남과 동시에 통일교회는 세계적인 가나안, 즉 세계적인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여기에 대한 준비를 하기 위해서 선생님이 40개국을 순방할 때 14개국에 통일교회 선교부를 설치한 것입니다. 우리 무용단과 잘 연결시켜서 안팎으로 맞춰 나갈 것입니다. 이번 해외 공연에서도 우리 무용단이 참 잘했습니다. 하나님이 보우하사,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 무용단 만세인 것입니다. 그곳에 눈이 새파란 사람들이 몰려들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배후에 계시는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나가야 합니다. 문제가 심각합니다.
악한 사람이 선한 사람을 치게 되면 그 책임을 누가 져야 됩니까? 악한 사람이 져야 됩니다. 만일 그가 상처를 입었을 때에는 손해배상을 청구할 것입니다. 통일교회는 이제까지 수없이 맞아 왔습니다. 통일교회가 손해배상을 청구하지는 않았지만 천법은 이 민족과 수많은 반대자들이 손해배상을 하게 할 것입니다.
백만큼의 반대를 했으면 백만큼의 손해배상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몇천만 배의 배상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반대로 통일교회가 세계사적인 사명을 수행하지 못했으면 못한 것만큼 거기에 비례하여 손해배상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욕을 많이 먹으면 그 욕이 도리어 복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악한 사람이 선한 사람을 친다 하더라도 선이 악을 지배하고 악을 멸망시킬 때가 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천리원칙입니다.
악은 선을 치다가 결국은 슬픔으로 끝나고 맙니다. 그 대신 그 대가로 그들이 갖고 있는 복을 가져다 탕감복귀해 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삼천만 민족이 통일교회 문선생을 쫓아내기 위해서 애를 쓰고 있습니다. 자유당, 민주당이 애를 썼고 혁명정부도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통일교회가 수난의 길을 걷게 되면 처참한 길이 이 나라 이 민족 앞에 미쳐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선생님이 요즈음에는 요셉을 많이 생각합니다. 요셉이 애급 사람한테 팔려가서 처량한 신세가 되었지요? 그러나 하나님이 보우하사 애급의 총리대신이 되었지요? 그 후 흉년이 들어서 자기 형제들이 찾아와 백배 사죄하면서 눈물을 흘렸는데, 그때 요셉은 자기를 팔아먹은 형제들을 원수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복수해 죽이기는커녕 형제의 입장에서 그들을 환영했던 것입니다. 이 요셉을 생각하면서 선생님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기성교회 목사님들이나 기성교인들이 몰라서 우리를 반대하는 것입니다. 어느 한때 통일교인들이 복수할 수 있을 때가 기필코 올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의 목을 잘라서 복수하겠다는 생각을 버리며 참고 가야 합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욕을 먹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억울하게 매맞고 몰림받은 사실은 지나가면 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부터 통일교회의 운세는 국가를 거쳐 세계적 운세로 뻗어 나갈 것입니다. 만일 이 나라 이 민족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세계가 받아들일 것입니다. 앞으로 세계의 만민이 쌍수를 들어 환영하는 함성소리가 삼천만 민족의 가슴 가슴에 울릴 날이 반드시 올 것을 확신합니다.
이런 날을 맞기 위해 한국에다 승리의 터전을 마련하는 성지를 택정한 것입니다. 성지 결정은 탕감복귀의 원칙에 의하여, 또한 하나님의 창조 법도에 따라서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창조 법도는 어떻게 되어 있느냐?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짓고 나서 아담 해와를 지었습니다. 그리하여 아담 해와로 하여금 만물을 하나님에게 연결시키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창조의 법도입니다.
인간이 개성을 완성하여 하나님과 심정일체를 이루어 그 기준으로 만물을 사랑하고, 하나님 앞에 효성의 도리를 다했던들 타락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 해와가 그러한 기준을 세우지 못하고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과 반대의 입장으로 떨어진 것을 복귀해 나온 것이 지금까지의 섭리역사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지금까지 만물보다도 먼저 사람을 찾기 위해 역사하셨던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역사는 사람을 찾기 위한 역사였습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는 개인으로부터 가정, 종족, 민족을 찾기 위해 섭리해 나오셨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민족은 아벨적인 민족이 아니라 가인적인 민족 형입니다. 이러한 민족을 만들고 거기에 참다운 개인, 참다운 가정, 참다운 종족, 참다운 민족, 참다운 국가, 참다운 세계적인 이념을 대변할 수 있는 한 중심으로 메시아를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메시아는 사탄이 빼앗아 간 하나님의 축복을 다시 찾아오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계에 내리시는 축복을 상속받으려면 탕감복귀의 원칙에 의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신 복을 사탄이 빼앗아 갔기 때문에 그 복을 상속받으려면 하나님 편에 보다 가까운 아벨을 통해야 합니다. 이것이 천리원칙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를 세웠던 것처럼 기독교, 즉 제2이스라엘을 세워 메시아 앞에 상속함으로 말미암아 외적인 기준을 내적인 기준으로 탕감복귀하려 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형님과 동생의 위치를 바꾸어 동생에게 천지의 모든 권한을 주시려 하십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복귀섭리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명을 완결짓지 않으면 안 될 책임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중심삼고 그러한 사명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통일교회가 하려는 것이 무엇이냐?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려던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려던 것은 무엇이냐?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중심삼고 유대교를 아벨적 기준으로 세워 가인적 기준인 이스라엘 민족을 복귀하려고 했습니다. 오늘날 통일교회는 유대교의 입장이고 한국 민족은 이스라엘 민족의 입장으로 택함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찾으려고 했던 개인 완성, 가정 완성, 종족 완성, 민족 완성의 기준, 즉 하나님이 찾으시려던 가정과, 하나님이 찾으시려던 종족과, 하나님이 찾기 위한 민족적인 기준을 오늘날 우리가 넓혀 나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124쌍을 한국 각지에 배치하면서 성지를 택정해 주었던 것입니다. 그 성지를 중심삼고 일체적인 인연을 갖추어 나가며 사명을 다하라고 당부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개인적인 사명을 다한 것이 기준이 되어 세계사적인 전체의 책임을 중심삼고 세계와 연결될 수 있는 승리의 시대가 찾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서울 지역에 동, 서, 남, 북 4대 성지와 중앙 성지, 그리고 본부 등의 7개 성지를 선정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세계와 연결될 수 있는 승리의 시대가 오자 선생님은 1964년 12월 31일과 1965년 1윌 1일을 기해 7개 성지에서 흙과 돌을 가져다가 외국에 가지고 갈 준비를 했던 것입니다.
이 흙과 돌은 무엇이냐? 아담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아담만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세계를 전부 다 사탄한테 빼앗겼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이 찾아올 수 있는 승리적인 터전이 마련되었기 때문에, 땅을 찾을 수 있는 시대권 내로 들어왔습니다. 그러기에 성지에 있는 흙과 돌은 하나님이 임재하실 수 있는 터전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지를 선포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인간과 성지가 일치되면 어떠한 인연이 벌어지느냐? 타락하기 전의 아담 해와가 복귀됐다는 기준을 세울 수 있는 것입니다. 성지를 선택하는 것은 에덴동산에서 잃어버린 사람과 땅과 만물을 복귀할 수 있는 땅을 갖추고, 사람을 찾아 하나님을 대할 수 있는 초점을 결정짓는 것입니다.
또한 성지를 결정하면 어떠한 일이 벌어지느냐? 아담 해와가 타락하기 전에는 영계가 있었어요, 없었어요? 그때는 영계가 바로 천사세계입니다. 천사세계는 아담 해와가 빨리 완성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생활권 내로 들어가기를 소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천사세계는 아담과 해와를 협조하여 아담 해와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을 중심한 가정을 이루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평화의 터전을 이룩하기를 소망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성지는 하나님에게 축복받은 가정과 같이 성별된 곳이므로 그곳에 영계가 협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정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인간이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어떠한 어려움이 따르더라도 그 자리를 지키고 나가야 하는데, 그 책임을 여러분이 다하지 못한 것입니다. 내가 축복해 준 가정들이, 발전해 가는 통일교회 앞에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번에 순회하면서 절실히 느꼈습니다. 그리고 내가 시작했기 때문에 내가 다시 책임져야 되겠다는 것도 절실히 느꼈습니다.
그렇지만 선생님은 천리의 법도를 따라서 나가는 통일교회의 행보(行步)에 있어서 단 한 사람이라도 뜻을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 있으면 이끌고 나갈 것입니다.
앞으로 민족적인 운세와 더불어 세계적인 운세가 보조를 맞추어 나갈 때가 올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이 한국의 수도 서울에서 택한 성지를 세계적으로 접붙이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접붙이는 것입니다. 한국의 성지를 세계적으로 접붙이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세계를 한국 땅으로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탕감복귀의 원칙에 의해서 사탄세계에 가서 성지를 결정하면 그곳이 한국 땅이 되는 것입니다. 왜 한국 땅이 되느냐? 천적으로 볼 때 성지만 택하게 되면 그곳은 한국 땅이 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성지를 택한 기반 위에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딸을 보내면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기반이 닦아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영계에서 협조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세계 국가들을 순방하면서 성지를 택정해 놓고 통일 신도들을 빨리빨리 배치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곳에 배치되는 사람들을 복귀된 아담 해와의 기준으로 세워 지금까지 영계가 접하지 못하였던 기준을 탕감시킬 것입니다. 그러면 지상에서 횡적인 싸움을 전개시킬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천사가 타락을 시켰기 때문에 천사들이 이 땅에 와서 사탄을 추방해야 합니다. 이것이 탕감복귀의 원칙입니다. 영계를 동원하여 지상에서 사탄을 추방시켜야겠습니다.
지금까지 105개 나라에 성지를 택정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이들 나라에 이미 한국의 영토가 생겨난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한국은 부자지요? 한국은 세계에서 제일 가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105개 나라에 영토가 있는 나라가 어디 있어요? 그것을 관리하는 사람이 통일교회 문 선생입니다. 이것이 우스운 얘기가 아닙니다. 성지를 축복함으로 말미암아 국가 주권이 하늘 편으로 넘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한국의 산천을 눈물겨운 심정으로 어느 누구보다도 사랑했습니다. 또한 세계도 사랑했습니다. 그러기에 미국에 가서도 40일 동안에 48주(州) 순회를 마쳤습니다. 미국 천지에도 나만큼 미국을 사랑한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미국의 역사 가운데 48주를 도는 데 40일 걸린 사람이 없습니다. 40일 동안에 48주를 돌자니 얼마나 부지런해야 했겠습니까? 정 바쁠 때에는 시속 115마일까지 달렸습니다.
미국 땅을 순회하면서 내가 미국의 주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미국 땅은 내 땅이다. 반대할 자는 반대해 봐라.’ 하는 생각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이런 마음을 품고 다니는데 누가 뭐라고 합니까? 그렇지만 그냥 다니는 것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다니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나는 누구보다도 미국을 사랑한다 이것입니다. 왜냐? 미국 땅은 미국 땅이기 전에 하나님의 땅이기 때문입니다. 미국 사람들의 선조가 몇백년 전에 들어와서 점령했기 때문에 그들의 땅이 된 거지, 내가 점령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웃음)
천하 만물이 자기를 미워하는 주인을 원하겠습니까? 아가씨들은 어떤 남편을 원합니까? 자기를 제일 미워하는 사람을 원하나요? 아니에요? 제일 사랑하는 사람을 원해요? 「예.」 사랑, 사랑이 좋긴 좋은가 보구만. 마음이 뿌리째 뽑혀 들어가는 사랑의 밀도(密度)를 통한다면 자세히는 모르지만 정말 멋질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주인을 모시고 싶습니까? 밤이나 낮이나 제일 사랑해 주는 사람을 모시고 싶을 것입니다.
명년 초하루까지는 이제 일주일 남았습니다. 이제부터 특별 정성을 들여 세계의 수많은 민족들한테 뒤지지 않는 여러분이 되어 주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7년노정 기간에 할 일을 다함으로 말미암아 땅이 하나될 수 있는 조건을 세우게 되는 것입니다. 이 조건을 세운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경제적 기준이 하늘 편으로 회복해 들어올 수 있는 때가 된다는 것입니다. 즉 경제적 기준, 물질적 기준을 회복할 수 있는 기준이 성립된다는 것입니다. 물질적 기준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은 통일교회가 앞으로 재정적 기준이 활짝 펴질 수 있는 시대권 내로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에게 자가용 한 대씩 줬으면 좋겠어요? 통일교회 식구들한테 자가용 한 대씩만 사준다 해도 곤란할 겁니다. 길이 꽉차서 다닐 데가 없을 테니까 말입니다. 그러니 안 주는 게 나아요. (웃음)
30억 인류를 잡아당기면 내 뒤로 나가 떨어진다는 신념을 갖고 나가야 합니다. 심정을 세우는 데는 통일교회를 당할 자가 없습니다. 이런 신념을 갖고 이 인류를 이념적으로 제패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어야 합니다. 부인들, 자신 있습니까?
이러한 일념을 갖고 있기 때문에 통일교회 이념이 멋진 것입니다. 하나님까지도 놀랄 이념을 우리가 갖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에는 정성들이고 충성하는 데 있어서도 30억 인류가 전부 동원돼도 우리들을 따라올 수 없다는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충성하는 데 있어서도 그 누구도 우리를 능가할 수 없어야 합니다. 그 다음, 선한 일에도 세계 인류가 따라올 수 없을 만큼 앞장서야 합니다. 세계 30억 인류가 따라올 수 없게끔 선두에 서서 전진해 가야 합니다.
이 세 가지만 하면 승리는 결정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얼마만큼 지탱해 나가느냐입니다. 몇십년 가느냐, 아니면 몇년 가느냐 하는 것은 여러분의 노력과 지구력에 좌우됩니다. 알겠어요?
첫째는 ‘이념적으로 제패하라.’, 둘째는 ‘정성과 충성에서 누구보다도 앞서라.’, 셋째는 ‘선한 일에 최고로 앞장서라.’ 입니다. 이 세 가지만 실천 하면 앞으로의 승리는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결과는 지탱하는 힘과 기간 그리고 노력에 따라 좌우됩니다. 승리를 얻는 것은 여러분의 노력 여하에 따라 7년이 5년으로 단축될 수도 있고, 일년으로 단축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여러분들이 세계복귀 도상에서 이 큰 사명을 책임지고 열심히 뛰는 용사들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되겠습니다.」 그럼 오늘 저녁에 다 되겠구만. 약속을 해야 일이 벌어집니다. 그래서 이것을 복귀의 조건으로 세웁니다.
선생님은 우리 교회가 있는 곳에 갈 때마다 앞으로 아벨적인 존재의 터전을 복귀해야 되겠다는 기도를 하고 옵니다. 선생님은 이것을 위한 섭리적인 계획에 의하여 성지를 선택해 왔습니다. 성지를 택정해 온 것은 경제적인 복귀를 위한 터전을 마련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각 곳에다 아벨적인 재정 지원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각 나라에 갈 적마다 선생님의 이름으로 저금을 해 주었습니다. 미국에 가면 미국 돈으로, 일본에 가면 일본 돈으로, 독일에 가서는 독일 돈으로 예금통장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선생님 이름으로 예금할 수 있다는 것은 자식이 부모에게 만물을 대할 수 있는 심정적인 인연에 동참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선생님이 가는 길에 동참하는 것은 세계사적인 자랑입니다. 그것은 오늘날 물질 복귀를 위한 아벨적인 제단을 쌓는데 중요한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라마다 저금통장을 만들어 준 것입니다.
미국에 가서 40개 주를 순회하고 한국에 돌아와서 성지 축복을 위해 72개소를 순회했습니다. 원래는 21일간에 해야 하는데 16일간에 조건만 세우고 지난 21일에 돌아왔습니다. 선생님은 요즈음 어떤 일에도 강행군을 합니다.
순회 도중 전라도 광주에 갈 때 눈이 내렸습니다. 눈이 얼마나 많이 내리고 바람이 휘몰아치는지, 모든 교통이 차단되어 버렸습니다. 광주에서 영암을 거쳐 돌아오는데 밤 12시에 도착했습니다. 교통이 차단되어 어떻게 갈 수가 있어야지요. 경찰관들이 길목에 지켜 서서 못 가게 했어요. 그러나 ‘비켜라! 내가 너희들한테 쥐어 살 것 같으냐!’ 고 생각하고 물리치고 광주까지 돌아왔습니다.
앞으로 선생님의 이름으로 하늘적인 성금을 모아서 아벨적인 제단을 만들어 이를 중심삼고 세계복귀에 필요한 기반을 구축해야 하겠습니다. 이런 일을 생각하면서 주욱 순회하고 본부에 돌아왔기 때문에 본부에서부터 이 일을 시작해야 되겠습니다.
전세계 우리 통일교회 식구들은 그러한 운동을 해야 됩니다. 이제는 미국 식구한테 한국 식구가 질 것 같아요? 한국이 미국보다 돈은 없지만 돈이 문제가 아닙니다. 정성을 모아야 합니다.
우리는 점심을 굶어서라도 인류를 위해서 저금해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저금을 하고 있습니다. 개인을 위하여 저금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가정을 위하여 저금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자기 회사를 위하고 자기 국가를 위하여 저금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통일이념을 중심삼고 세계 문제를 위하여, 하늘과 땅의 공적인 기준을 위하여 저금을 하는 것은 역사이래 우리가 처음입니다. 이 엄청난 일을 우리가 해야 합니다.
이러한 조건을 세워 놓음으로 말미암아 앞으로 한국 경제를 지원할 수 있는 세계적인 재벌들이 한국에 상당히 관심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국제적인 운세가 한국으로 들어올 것입니다. 이런 배후의 뜻이 있기 때문에 성지를 택했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선생님이 가야 될 복귀섭리 노정에 두 고개가 남아 있는데, 120개 나라에 이러한 기반을 결정해 놓으면 한 고개만 남게 됩니다. 이것이 그 한 고개를 넘어갈 수 있는 천적인 인연이 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 일을 결정지음으로 말미암아 명년부터는 통일교회가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비약적인 발전을 할 것입니다. 왜 그러냐? 명년이 7년노정 중 6년째 접어드는 해이기 때문입니다. 6수는 아담과 해와가 타락한 수입니다. 아담 해와가 7수 과정을 넘어가지 못하고 실수한 한 맺힌 수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탕감복귀하기 위한 모든 천적인 탕감조건을 세계적 무대 위에 세워 나왔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일치 단결해서 움직이기만 하면 모든 면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발전을 위해 시작한 운동이 지금 강원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승공운동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계기를 만들어 총단합해서 승패를 결정지어야겠습니다. 이러한 시기가 명년과 내명년인 것을 알고 이 민족을 살리기 위한 선봉에 서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러한 시대적인 운세가 우리 앞에 다가왔다는 것을 명심해야 되겠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선생님이 지금까지 닦아온 천적인 계획이 어떤 시대로 접어드는가 하는 것을 대강 알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세움을 받은 한국 민족이 뜻을 받드는 날에는 세계복귀의 위업은 간단하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한국 민족만 하나되면 세계복귀는 간단한 것입니다. 이러한 운세에 맞추어 앞으로 통일교회가 어떻게 발전해 나가야 된다는 것을 책임지고 지도할 사명이 선생님에게 있습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알고 거기에 보조를 맞추기 위해 온갖 정성을 다해야 되겠습니다.
이번에 지방에서 온 수련생들도 외국 청년들에게 져서는 안 되겠습니다. 지방에 가 보면 웅성거리기만 했지 실속이 없습니다. 그런 식으로 하면 안 됩니다. 수련받고 돌아가서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의 수련은 세뇌공작이 아니라 마음의 혁명, 심정의 혁명을 일으키게 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 힘을 합쳐 세상을 위하고 통일을 위한 일을 멋지게 한번 해봅시다.
여러분들은 앞으로 통일교회 청년들의 의무와 사명이 얼마나 크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전세계를 하나님 앞에 돌려드릴 수 있는 시대적인 환경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만약 여러분이라면 잠을 자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들은 어쩌다 이런 시대에 태어났습니까? 팔자가 좋아서인지 나빠서인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신나는 때에 태어났습니다. 하나님은 세계를 활동 무대로 삼고 나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또한 세계의 수많은 민족이 우리를 부르고 있고, 세계의 수많은 백성들이 우리를 만나기 위해서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 기다림에 응하여 보답할 수 있는 천적인 의무와 사명을 감당하는 데 선봉장들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렇게 알고 열심히 이 기간을 보내시기를 부탁합니다.
한국 교회에서도 이 시대에 한국 땅에 메시아가 온다는 계시를 받고 있습니다. 새로운 시대가 가까이 오고 있고, 이것을 외적으로 연결시키기 위한 새로운 은혜의 역사가 시작된다는 것을 선생님이 여러분들에게 이미 얘기했을 것입니다. 이제부터의 역사는 이런 경향으로 흘러갈 것입니다. 세계적인 책임을 짊어진 아벨 제단으로서 전세계의 청년 남녀들한테 지지 않도록 노력하여 주시기를 부탁합니다.
만세의 영광을 찬양해야 할 수많은 존재들이, 뭇백성들이 아버지의 품에 안기어 아버지의 영광과 더불어, 아버지와 더불어 살아야 했사오나 인간 조상의 한 날의 실수가 이렇듯 슬픔의 역사를 엮었사옵고, 처량한 고빗길을 넘으며 눈물과 피땀을 어리게 하였던 것을 생각할 때에, 아버지의 한 많은 슬픔을 위로해 드릴 아무것도 갖고 있지 못함을 용납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타락의 후예로 태어난 것을 슬퍼하지 않을 수 없는 자신들을 긍휼히 보아 주시옵소서. 그러나 버릴 수 없는 인연으로 찾아오신 아버지의 심정 앞에 감사드릴 줄 아는 자녀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여기 모인 뭇자녀들의 마음과 몸을 당신이 사랑할 수 있는 마음과 몸으로 세워 주시옵고, 새생명의 불길로 인해 아버지의 생명의 인연에 접붙임을 받을 수 있어서 영원한 아버지를 모시고, 영원한 이념의 세계 앞에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할 수 있는 자녀의 영광을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수많은 민족 가운데서 한민족을 찾아오신 것을 감사드리오며, 수많은 백성들 가운데서 보잘것없는 저희들을 먼저 불러 주신 것을 감사드리옵니다.
저희들이 알지 못하는 가운데 아버지께서 인연 지어 주신 인연의 열매로 이 자리에 불리움받은 자신들인 것을 저희들 스스로 느끼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저희가 짊어진 책임이 내 한 개체에 머물러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민족을 넘어 인류, 세계 앞에 미쳐져야 할 사명이 저희들 개체 개체의 두 어깨에 걸려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명심하고, 아버지 앞에 한걸음 나아가서 책임 다할 것을 다짐할 줄 아는 사랑받는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 주일을 맞이하여 오전 오후로 아버지의 긍휼의 은사 가운데 불러 주신 것을 감사드리오며, 몰랐던 아버지의 내정을 알 수 있는 은사를 부여하여 주신 것을 감사하옵니다. 또한 마음과 몸을 굽혀 눈물 어린 심정으로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은사를 저희에게 허락하여 주신 것을 진실로 감사드리옵니다.
저희들은 가진 것 없사옵고, 세상에 자랑할 아무것도 없사오나, 아버지께서 남겨 주신 거룩한 터전 위에 서서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있으며, 아버지를 아버지로 모실 수 있으며, 아버지를 부모로 모실 수 있는 생활적인 터전을 갖게 해 주신 것을 감사드리옵니다. 억천만금을 주고도 바꿀 수 없고, 세상의 그 어떠한 가치와 권한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가치를 알게 된 것을 감사드리옵니다.
이와 같은 복이 나로 인한 것이 아님을 알고, 뭇백성들과 뭇인류 앞에 그 복을 나누어 주는 복의 기관의 사명을 하는 자리, 그런 천적인 인연을 느낄 수 있는 자리에 세워진 것을 진실로 감사하게 생각하옵니다.
하늘이여, 힘을 허락하여 주시옵고 능력을 가하시옵소서. 이들의 마음에 새로운 불길을 던지시옵고, 새로운 진리의 중심으로 삼으시어서, 이 삼천만 민족에게 하늘의 은사의 축배를 베풀 수 있는 이 한 해가 되고, 다시 맞이할 수 있는 한 해가 되도록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오늘은 이 한 해를 보내는 마지막 성일이옵니다. 이 날들을 연결하여 충성하지 못하고, 정성들여 아버지 앞에 경배드리지 못한 일년의 모든 부족함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이 소망의 한 날을 맞이하여 아버지 앞에 충성을 다짐할 수 있는 이 시간을 부여하여 주신 것을 감사드리옵니다.
무엇으로 아버지 뜻 앞에 충성을 할까 하고 몸부림칠 줄 아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어야 하겠사오니, 뜻을 위하여 아버님이 미치심같이 저희들 또한 뜻을 위하여 미치지 못한 것을 한탄할 줄 아는 효자 효녀의 모습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하늘을 바라보며, 만물을 바라보며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소원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 그 부르시는 음성 따라 싸움터로 달려갈 줄 아는, 아버님께서 기뻐할 수 있는 자녀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바라옵니다.
아버지의 서글프신 역사적인 한을 저희들이 알아야 되겠사옵고, 이 세계를 찾아 나오시는 발걸음이 얼마나 초조하고 비통한가 하는 사실을 저희들이 알아야 되겠사옵니다. 저희의 몸이 아버지께서 가시는 발판이 되고, 평탄한 길을 닦는 데 쓰여져야 할 재료가 된다는 것을 생각할 때, 가시밭길이라 뒤넘이치고 몸부림치고 피를 뿌리게 되더라도 이 길을 개척해야 할 사명이 저희들이 해야 할 진정한 사명이요 책임인 것을 알게 되옵니다.
저희들의 몸 마음을 바쳐 이 민족의 갈 길을 닦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이 민족을 세우시어 만민이 아버지를 향하여 나아갈 수 있는 직행 행로를 닦을 수 있게 하시옵소서. 이러한 사랑의 은사를 받을 수 있는 이 민족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다년간 남이 알지 못하고 남이 환영하지 아니하는 길을 저희들은 걸어 왔사옵니다. 슬플 때도 많았사옵고 외로울 때도 많았사옵니다. 그러하오나 아버지께서 가신 길이기에 감사한 마음으로 눈물로써 환영하였고, 심정어린 음성으로 아버지를 부를 때가 천만 번임을 알고 있사오며, 아버지를 부르던 저희의 음성과 더불어, 저희의 눈물과 더불어 아버님도 눈물지었다는 그 사실이 얼마나 귀하다는 것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이러한 길임을 알았기에 그 길을 가기 위해 통일의 역군들은 수고의 길도 개의치 않았사옵고, 고행의 길을 더듬으며 아버님을 부를 수 있는 기쁨의 한 날을 맞이하기 위해, 세계적인 골고다 노정을 표준하여 찾아 나온 간절하고 갸륵한 그 이름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아버지의 뜻을 위하여 충성하기에 지친 사람이 있사옵니까? 다시 긍휼의 마음을 펴시어서 사랑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제가 홀로 걸어갈 때에 아버지께서 권고하여 주셨듯이 그들을 권고하여 주시옵소서. 제가 외로울 때 위로해 주시며, 내가 가야 할 앞길이 남아 있으니 그 길을 책임져 달라고 하셨고, 내가 가는 길로 가야 된다고 분부하신 아버님의 간곡한 사정과 간곡한 분부의 말씀을 잊을 수 없사옵니다. 저를 따르는 무리도 이와 같은 자리에서 아버지와 심정의 인연을 맺어서 아버지와 더불어 몸부림치고 아버지와 더불어 눈물지을 수 있는 참효자 참효녀의 모습들로 인도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도 남한 각지에서 외로운 마음을 갖고 본부의 식구들과 본부교회를 그리워하며, 눈물짓고, 혹은 찬바람 속에서, 혹은 굶주리면서 아버지 앞에 호소하는 자녀들이 많을 것으로 알고 있사오니, 그들을 긍휼히 여겨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니다.
외로운 길을 가는 스승의 뒤를 따르는 저들 또한 외로운 자들임을 아옵니다. 처량한 심정으로 아버지를 붙들고서 사명과 책임을 다해 나가는 시대적인 역군인 것을 당신은 아시오니, 그 처지와 환경을 기억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1965년 이 해를 보내게 될 때 한 많은 설움을 느끼며 아버지의 뜻 앞에 충성을 다하지 못한 것을 염려하는 마음과, 새롭게 맞는 한 해에도 충성을 다하지 못할까 두려워하는 마음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그러나 저희의 일념만은, 마음에 숨은 심정만은 아버지를 위하여 참다운 효자 효녀의 모습을 갖추기 위하여 충신의 인연을 세우기 위하여 다짐하고, 아버님과 더불어 그 길을 갈 것을 맹세하는 자리에 있사오니, 아버지, 이들을 기억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이제 남은 한 많은 복귀의 길을 또 가야 되겠사오니, 그 발걸음을 거룩히 여겨 주시옵고, 그 모습을 아버지가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보호와 권위를 같이해 주시어서 어디에 가든지 백전백승의 승리를 거두어 아버지 앞에 영광의 터전을 이루어 드림으로써, 아버지께서 친히 뭇백성 앞에 내세우셔서 이는 내 아들이요, 딸이라고 칭찬할 수 있는 아들딸이 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충성 다하지 못한 과거의 모든 생애노정과 맡긴 바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뜻하신 것을 세워 드리지 못한 한 많은 모든 곡절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한 해를 보내는 이 한 주일이 아버지 앞에 복될 수 있게 해 주시옵길,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우주사적인 새로운 탕감의 한 해를 맞이하여서 생사의 판결을 지어야 할 통일교회의 운명을 승리의 길로 몰아 주시옵고 인도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 저녁 잠깐 드린 말씀이 이들의 가슴에, 아버지께서 찾아오신 복귀의 노정이 이렇게 서글프고 어려운 길이었음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아버지께서 먼저 수고하시며 눈물의 골짜기를 메워 나오셨다는 것을 스스로 느끼고 감사하는 일념으로 생애를 이끌고, 생활을 지배할 수 있는 승리의 왕자 왕녀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남아진 복귀의 길 위에, 아버님이 계획하시는 뜻 앞에 승리의 영광만이 남아지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부모의 날, 자녀의 날, 만물의 날을 저희들은 가졌사오나 하나님의 날은 갖지 못하고 있사오니, 하나님의 날을 맞이하기 위하여 저희들이 모든 충성과 온갖 정성을 다 기울이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아버님께 기억될 수 있는 자녀의 명분과 충신 효자의 명분을 갖추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마음에는 의지를, 몸에는 힘을 더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부탁드리옵니다.
만만사의 영광과 승리가 아버지의 뜻과 더불어 길이 함께 하여 주시옵기를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니다. 아멘.
새로운 역사를 향하여 이 시간까지 아버님께서 수고하시면서 복귀의 노정을 걸어 나오신 중첩된 과거의 사정과, 아직도 남아 있는 싸움터를 바라보게 될 때, 민망함을 금할 도리가 없나이다.
타락의 후손으로 태어난, 이 땅에 살고 있는 인류를 아버님께서 긍휼히 봐 주셔야만 되겠습니다. 자기 스스로 자기를 책임질 수 없는 생애의 행로를 밟아 가고 있는 인류의 행로에는 슬픔과 고통과 외로움이 사무쳐 있는 것을 아옵니다.
이러한 인류의 소망이 되시는 아버지, 친히 나타나시옵소서. 이들의 생명의 원천이 되시옵고, 이들의 생활의 중심이 되시어서, 당신이 소망하시던 소망의 그 나라에 불쌍한 이들이 동참할 수 있게, 아버지, 복을 빌어 주셔야만 되겠습니다.
한 많은 역사의 한 고비를 넘기고 1966년 새날을 맞이하는 이 순간, 이 시간, 1965년에 저희들이 뜻 앞에 충성을 다하지 못한 것을 슬픈 마음으로 회개하게 하시옵고, 새로운 한 해를 맞는 이 첫새벽, 첫순간에 아버지 앞에 부복한 저희들을 긍휼히 보시옵소서.
당신이 마음으로 저희에게 통고시키시고 싶은 그 사정을 저희에게 통고 하시옵고, 한 많으신 심정을 저희에게 인연맺어 주시옵소서. 남아 있는 복귀의 나라와 복귀의 세계를 향하여 달음질칠 수 있는 참다운 효자 효녀가 많아야 될 것을 알고 있사오나, 그러하지 못하옵니다. 아버지께서 슬퍼하시는 것을 이 한 해에 책임질 수 있는 참다운 아들딸을 당신이 얼마나 마음에 그리워하고 계시는가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면목이 없나이다.
완전한 자가 땅 위에 없는 슬픔을 참아 오신 아버지께서는 한 번 권고하여 그가 듣지 않으면 두 번 권고하셨사옵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세 번, 네 번, 수십 번, 수백 번 거듭거듭 권고하시며 당신이 사랑할 수 있고 당신이 믿을 수 있는 그 한 모습을 찾아오신 것을 아옵니다. 그렇게도 불충하고, 그렇게도 불효한 선조들을 용납하여 주시옵고, 또한 오늘 저희들의 불충과 불효를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1966년 첫날을 맞아 아버지 앞에 충성을 다짐하고 효성을 다짐해야 할 자리에 서 있는 저희들을 긍휼히 봐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당신이 뜻하신 기준은 멀었사옵고, 기나긴 복귀의 길을 걸어 나오신 그 노정에 슬픈 일이 많았사오나, 길이길이 참아 오신 아버지의 숭고한 사랑으로 말미암아 많은 날들을 보내고 해를 보내면서도, 슬픔을 당하신 우리 아버지이신 것을 망각할 때가 많았사옵고, 역사노정 가운데 참아 오신 아버지가 계심을 망각할 때가 많았사옵니다.
기쁜 일이 있으면 그것이 나로 말미암은 줄 알았사옵고, 하늘 앞에 보여 드릴 것이 있어도 그것이 나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할 때가 많았사옵니다. 불효자의 지난날, 내가 알지 못하는 가운데 아버님은 숨어서 수고하시는 것을 망각한 자리에서, 자기를 중심삼고 살아온 과거의 모든 것을 용납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제 이 정초에 이 삼천만 민중 가운데 혹자는 깊은 위안 중에 있으나 혹자는 이날을 기억하면서 아버지 앞에 수고하고 있는 줄 알고 있사오니, 외로운 그들에게 복을 빌어 주시옵소서. 새로운 소식을 듣고 새로운 약속을 받아 새로운 능력으로 이 민족 앞에 새로운 소망의 시대를 열어 줄 수 있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많이 나오기를 아버님께 진정으로 부탁드리옵니다.
잠자는 삼천만 민중 앞에 새로운 소식을 전하는 길을 걷는 자녀들이 많아야 되겠사옵고, 중심을 내세워서 어두운 세계를 향해 책임을 짊어지고 나가는 아들딸이 많아야 될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한 자녀들이 없거들랑 여기에 모인 이 무리가 그런 자녀들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이 자리에 동참한 이들은 흠 많은 자기 자신을 아버지 앞에 솔직히 내놓고 이 시간 다시 아버지의 자녀로 인정받을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저희들이 1965년을 생각해 볼 때, 아버님이 얼마나 저희를 사랑하셨고, 아버님이 얼마나 고생길을 걷고 있는 저희를 권고해 주셨는가 하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새로운 역사적인 인연을 맺게 하기 위한 120곳을 찾아 세우는 지난 한 해의 노정에 아버님께서 수고해 주신 것을 감사드리옵니다.
이 땅 위의 인간들은 모르나 아버님께서 1966년 초하루, 오늘을 기하여 남기신 뜻을 완결 지으심으로 말미암아, 이 인연으로 저희가 광명의 새아침을 맞이할 수 있는 기쁨의 날이 되게 하여 주시옵고, 기쁨의 날을 맞는 삼천리 반도가 되게 하여 주시옵고, 기쁨의 날을 맞이할 수 있는 삼천만 민중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오늘 여기에 당신의 자녀들이 모였사오니 아버님이 명령할 수 있는 새로운 수고와 인연을 저희들에게 명령하여 주시옵고, 남은 십자가의 길과 눈물의 골고다를 향하여 달음질칠 수 있는 당신의 참다운 효자 효녀가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남한 각지에 널려 있는 통일의 아들딸에게 사랑과 긍휼을 가하여 주시옵고, 지금까지의 수고의 노정과 어려운 환경에 당신이 내려 주신 은사를 이 아침 느낄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이 나라의 운명과 장래가 이들에게 달려 있는 것을 아오니, 당신의 우주사적인 역사를 재창조함에 있어서 당신의 은사를 민족적인 은사로 느낄 수 있게 해 주시옵고, 삼천리 반도에 당신의 나라를 건설하여 봉헌해 드릴 수 있는 귀한 아들딸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당신이 준비하시는 날을 기쁨으로 맞이하고 싶고, 당신으로부터 은사를 받아 만민에게 나눠 주고 싶은 것이 저희의 소원이오니, 그 길로 인도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과거․현재․미래를 연결시킬 수 있는 순간 순간이, 새로운 약속의 시간이 되고 약속의 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부족한 모습들을 부족다 마시옵소서. 이 제단 앞에 부복하여 1966년도를 엄숙히 맞아 아버지 앞에 충성하지 못한 것을 회개하여 다시 충성을 다짐하고, 효성의 도리를 다하지 못한 것을 회개하여 다시 효성의 도리를 다 할 것을 다짐할 줄 아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남한 각지에 널려 남이 모르는 길을 따라 나오고 있는 외로운 통일의 무리들이 슬픈 자리에서 이 밤을, 이 시간을 기억하고 이곳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을 줄 알고 있사오니 그들을 기억하여 주시옵고, 남아진 싸움터를 향하여 달려가는 그들이 되어서 다시 하늘의 분부와 새로운 약속이 그들과 더불어 나타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지방에 널려 있는 당신이 사랑하는 수많은 자녀들과 외로운 자리에서 하늘의 뜻을 책임지고 눈물 어린 입장에서 새날을 맞는 뭇자녀들이 있는 줄 알고 있사오니 그런 자들을 특별히 기억하여 주시옵고, 그들이 하늘의 기업과 하늘의 위업을 상속받을 수 있는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날 저희들 앞에 당신이 허락하실 수 있는 새로운 말씀을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삼천만 민중이 아버지의 새로운 광명의 천지와 인연맺을 수 있게 하여 주시옵고, 30억 인류의 갈 길을 수습해 주셔서 어두운 세계로부터 광명의 세계를 향하여 달음질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땅이 승리함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널려 있는 천천만 성도들이 해원성사하여, 하늘과 땅이 합해서 아버지의 영광을 찬양하고, 아버지를 진정으로 모실 수 있는 아버님의 날이 어서 속히 오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새해의 첫순간, 아버지, 기쁘신 가운데 저희를 환영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은 아버지의 존전에 머리 숙이고 부복하였사오니, 긍휼의 은사를 더하여 주시옵소서.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새로운 해방이 이 나라에 임하게 하여 주시옵고, 이 천지간에 새로운 해방의 종소리와 더불어 영광의 모심이 이 온 땅에 어서 속히 아버지를 중심삼고 나타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옵니다.
만만세의 영광과 찬양과 존귀가 당신과 더불어 뭇자녀들에게 같이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면서, 이 모든 말씀 참부모의 성호 받들어서 기도하였사옵나이다. 아멘.
<말 씀> 오늘 말씀드릴 제목인 ‘승리적 주관자’는 우리 타락한 인류 어느 누구나 개인이나 종족이나 국가를 막론하고 온 땅 전체가 바라는 바요, 하늘이 지금까지 바라고 나온 바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요, 하나님의 소원은 우리를 승리의 자녀로 만드는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만일에 이 제목과 같은 자리를 우리가 찾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수고의 결실을 가져올 수 없는 것이고, 인간들의 소망도 달성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개개인이 승리적 주관자가 되기 전에는 단체가, 혹은 민족, 국가, 세계가 승리적 주관자가 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승리’라는 말을 생각하게 될 때, 이것은 본래 사람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씀이었습니다. 아담 해와를 지어 놓으시고 하나님이 축복하시기를 생육하고 번식하여 생명의 권세가 땅에 충만해 가지고 만물을 주관하라고 하셨으니, 생명의 기준을 넘어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만우주를 주관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나타날 수 있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류 시조의 사명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러한 사명을 상실했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복귀의 도상에 불가피한 명사로 남아진 것이 승리라는 말인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이 승리의 기준을 넘지 않고는 주관자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승리의 기준을 기필코 넘어야만 주관자의 명분을 갖고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승리라는 두 글자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상대하여 싸울 수 있는 적이 있어야 합니다. 승리하기 위해서는 싸움의 노정을 거쳐야 합니다. 싸움의 노정을 거치지 않고는 승리를 가져 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싸움의 대상이 누구냐?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인류와 하나님의 원수인 사탄이라는 것입니다. 그 사탄은 에덴동산에서 아담 해와를 유인한 천사장 누시엘입니다. 이 사탄이 수천년 동안 아담의 후손인 우리를 유린하면서 승리의 권한을 박탈해 나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승리의 권한을 박탈하고 있는 이 사탄을 우리들이 제거해야 승리의 기준을 갖출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할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인류가 타락한 운명에 들어선 그날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본연의 인격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려 주신 약속의 말씀을 잃어버렸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잃어버리게 된 전체의 원인은 누구에게 있느냐? 물론 아담 해와에게도 그 원인이 있겠지만, 악의 주체자 사탄에게 그 원인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사탄을 추방하는 데 있어서 최후의 문제점은 무엇이냐?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나타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중삼삼지 않으면 하늘땅을 주관하는 주관자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천지의 공법에 입각한 하나님의 진리의 주관자로서 명령하지 않으면 이 사탄을 굴복시킬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인간들이 하나님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인격, 하나님의 인격을 통할 수 있는 진리의 주인공들이 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거꾸로 진리를 찾아 가지고 진리에 일치될 수 있는 인격을 갖추고, 그 진리와 인격이 하나되어야만 우주를 품을 수 있고, 만우주가 그 자체와 화합할 수 있는 동시에, 하나님이 거기에 임재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까지 연결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류역사는 먼저 진리를 개척해 나온 역사였다는 것입니다.
진리를 개척해서 진리에 의해 사탄을 굴복시키고, 그 진리와 일체가 되어 사탄을 주관할 수 있는 권한을 갖춘 자리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야 비로소 천주적인 주관자의 위치가 결정된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복귀섭리에 의해서 지금까지 우리를 끌고 나온 목적이 어디에 있느냐?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사탄을 굴복시키는 데 있습니다. 그리하여 나중에는 하나님까지 심정을 통해서 주관할 수 있는 권한을 우리에게 부여하려고 하신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추구해야 할 최후의 목적이 무엇이냐? 하나님까지…. 우리가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을 좋아하면 하나님도 좋아하고, 우리가 싫어하면 하나님도 싫어하실 수 있는 권한까지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우리를 찾아오셨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할 수 있는 진리의 주인공이 되어 가지고, 그 진리에 의해 만우주를 주관할 수 있는 인격을 갖추어서 하나님의 사랑과 일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온 우주를 상대로 취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즉 온 우주와 일체이상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사탄이 물러간다는 것입니다. 그런 개인들이 살고 있는 환경에서 사탄은 물러가는 것입니다. 또 그런 개인들에 의해 이루어진 가정에서 역시 사탄은 물러가게 되고, 그런 가정, 그런 사회, 그런 국가, 그런 세계가 이루어질 때, 사탄은 이 지구성에서 자기의 위치를 떠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끝날에 우리가 이 죄악세계에, 악이 번창해 있는 이 세상에, 참다운 진리의 말씀을 찾아볼 수 없는 이 땅 위에 사탄이 순응할 수 있고, 하나님만이 점령할 수 있는 하나의 진리를 찾아 놓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진리로 세상에 있는, 진리와 반대되는 수많은 말씀들을 우리가 심판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늘땅을 대표한 참다운 입장, 즉 사탄의 손이 미칠 수 없는 진리에 입각한 기준에 서 가지고 악이 번성할 수 있는 발판이 되어 있는 악의 이론들을 진리로 무찔러야 합니다. 사탄을 심판하는 것은 물론이요, 지상에 있는 모든 악의 이론들을 타파해 버려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권한을 대신한, 하나님이 세워 주시는 인격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진리와 일체가 된 인격 기준이 세워지게 될 때, 비로소 사회악을 심판해 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바라시고 목적하시는 승리의 개인, 가정, 종족, 민족, 국가, 세계로 복귀되어 들어간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말하는 진리의 심판이 끝날에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참진리를 중심삼고 그 진리와 어긋나는 모든 악의 이론들을 심판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이 세워 주신 본연의 인격 기준을 중심삼고 거기에 부합되지 않는 세상적인 인격 기준을 심판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진리와 인격이 일체화된 그것으로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하고, 하나님만이 거할 수 있고, 하나님만이 사랑할 수 있는 기준을 세워 세속적인 모든 사랑을 심판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은 복귀노정에 있어서 필연적인 요건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변할래야 변할 수 없고, 치우칠래야 치우칠 수 없는 확고부동한 본연의 승리의 화신체가 되어 하나님과 심정일체화한 자리에 서야 합니다. 그래야 영계에 있는 사탄들을 몰아낼 수 있는 동시에 지상에 있는 악의 터전들을 몰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책임을 할 수 있는 권한을 갖지 않는 한 여러분은 하늘땅 앞에 승리적 주관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만일 우리가 그런 자리에 나간다면, 하나님은 전체의 권한을 갖고 보호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대로 이루어질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행동한 것은 어느 누가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품고 사랑하는 그 사랑은 영원한 사랑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자리에 서게 될 때 비로소 완전한 승리의 주관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여러분은 이 연초에 새로이 결심하기 바랍니다. 그러한 각오 밑에서 이 한 해를 삼천만 민중과 세계 인류 앞에 새로운 복지를 건설해 주는 승리적 주관자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간단히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아버님, 기나긴 역사노정을 거쳐오면서, 거짓된 진리의 노정을 거슬러 오기에 지금까지 아버님과 우리 선조들이 수고하여 온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거짓된 인격 기준을 무너뜨리고 참다운 인격 기준을 세우기 위한 우리 선조들의 노고가 긴 역사에 깃들어 있는 것을 아옵니다.
그러면서 참다운 진리에로, 참다운 인격에로, 참다운 심정의 세계로,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수많은 우리의 선조들을 지도하여 주신 것을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버님, 오늘 새해 이 벽두에 분부하신 말씀을 저희들이 명심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승리적 주관자’라는 표어를 걸어 놓고 저희들이 이 4년 노정을 완결 짓지 않으면 안 될 전체적인 책임이 있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지금까지 저희들이 불충하였던 것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해 주시옵소서.
이제 1966년을 맞이하였사온데 이 해는 7년노정의 6년째가 되는 해이므로 아담이 타락한 원한의 수, 6수를 대표하는 해인 것을 저희들은 알고있습니다. 이 6년 과정에서 저희들이 힘을 내어 아버지께서 소망하시는 기준에 도달해야 되겠사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삼천만 민중과 삼천리 반도를 위해 있는 충성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될 중요한 사명과 책임을 짊어지고 있사오니, 아버님이시여, 저희들에게 새로운 힘과 새로운 긍휼의 손길을 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진리가 고갈되어 있는 이 땅 위에 하늘의 진리의 말씀을 펴야 되겠사옵고, 하늘의 참다운 자녀들을 이 땅 위에 많이 인연 지어야 되겠사옵니다. 당신의 사랑받는 자녀들로 하여금 새로운 가정을 이루어 새로운 종족과 새로운 민족과 새로운 국가를 편성하는 과정에 있사오니, 아버님이시여, 당신의 심정을 통하여 인연되어지는 참다운 혈족을 중심삼고 새로운 세계사적인 민족적 출발, 혹은 민족적 대이동이 벌어지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알고 있사오니 같이해 주시옵소서.
이 통일의 무리를 모으시기에 수고하신 아버지, 지금까지 싸움의 노정에서 저희들을 인도하신 아버지, 진정으로 감사하옵나이다.
저희들이 슬퍼하기 전에 당신이 먼저 슬퍼하신 것을 알았사옵고, 저희들이 환난 가운데에서 낙망하고 있을 때 당신이 친히 저희들을 권고해 주신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하실래야 그러하실 수 없는 아버님의 외로운 사정을 저희들 몰랐사오나 이제는 안 자로서, 장성한 자로서 아버님을 위로해 드릴 줄 아는 참다운 효자 효녀들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이 끝날에 있어서 저희들이 참다운 진리의 말씀과 참다운 인격과 참다운 심정을 통하여서 역사적인 원수 사탄을 이 지구상에서 굴복시키고 이 기준을 통하여서 사회악을 정화시킬 수 있게 하여 주시옵고, 하늘의 전체적인 권한을 대신할 수 있는 은사를 허락해 주시옵고, 승리적인 주관자의 권한을 세울 수 있게끔 힘과 능을 더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남한 각지에 널려 있는 통일의 자녀들을 이 시간 기억하여 주시옵고, 어떤 외로운 자리에서 이 시간 이곳을 향하여 마음 모아 기도하는 무리가 있을진대 그들 위에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이 남기신 싸움터를 향하여 승리적 주관자의 표준을 바라보면서 달려가는 그들에게, 아버지, 권고와 위로와 당신의 힘과 능력을 가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기필코 아버님은 승리하시고, 기필코 만우주 전체를 사랑하는 자녀들 앞에 양도하고 상속시켜 주실 것을 확실히 알고 있사오니, 그 과정에서 지치지 말고 아버지의 영광 앞에 승리의 개가를 돌려드릴 때까지 참고 남아지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제부터 이 한 해를 저희들이 출발하오니 이 한 해에 복을 빌어 주시옵소서. 슬픈 일도 많을 것을 알고 있사옵고, 혹은 외로운 자리, 혹은 어려운 자리에 부딪치는 일도 있을 줄 알고 있습니다. 이 한 해에 당신이 승리의 영광으로 저희들을 품으시옵고, 당신이 소망하는 그 동산에 저희들을 이끌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당신이 외로울 때는 같이 외로운 자리에서 저희들을 분부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아버님이 슬퍼하신 그 마음을 저희들이 찾아가면서 하루하루의 모심의 생활이 빛 될 수 있게 하여 주시옵고, 그런 자아의 생활을 아버지 앞에 보여 드릴 줄 아는 효자 효녀들이 되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옵니다.
이 정초 수많은 민족 위에, 아버지, 복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수많은 인류 앞에 복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저 땅, 영계에 가 있는 수많은 우리의 선조들과 천천만 성도들이 소원하고 있는 것이 성취되는 한 날이, 땅 위에 승리의 결정권을 마련해 주심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새벽에 이 모든 만우주 앞에 당신의 긍휼의 은사를 퍼부어 내려 주실 것을 간절히 바라오며, 잠들어 있는 삼천만 민중과 삼천리 반도에 풍부한 당신의 사랑이 깃들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지치고 몰림받는 이 민족, 외로운 자리에 있으나 새로이 방향을 잡아 가지고 하늘 앞에 충성을 다짐하고 효성을 다짐해야 할 이 민족을, 아버지, 책임져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일을 하기 위해서는 통일의 역군들이 죽을 힘을 모으고 정성을 모아 남아진 싸움터를 정비해야 할 줄 아옵니다. 그 승리의 자리에 아버지를 모시고 아버지 앞에 영광 돌릴 줄 아는 통일의 역군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해외에 널려 있는 통일의 자녀들을 이 한 해에 보호하여 주시옵고, 약속하신 새로운 발전이 저희들과 더불어 이루어지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옵니다. 타국에 나가 있는 선교사들에게 한 많았던 당신의 복귀의 뜻을 두시옵고, 만민을 품을 수 있는 터전으로 삼아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준비된 1964년과 1965년과 1966년, 3년을 기하여 저희들이 일을 하는 것은 당신의 복귀섭리에 조건을 세우기 위한 것인 줄 아옵니다. 하오나 이것이 조건으로만 끝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의 실체가 완전히 복귀되려면 당신의 수고가 저희에게 다시 한번 필요하옵고, 아직 당신의 권고와 당신의 위로가 필요하오니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이제부터 365일 당신을 모시고 지낼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맡겨진 민족 복귀의 책임을 위하여 충성을 다할 것을 저희들이 다시 한번 맹세하였사옵고 효성을 다해 당신을 모실 것을 맹세하였사오니, 저희들을 잊지 말고 당신의 본연의 동산에 저희를 동참시켜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저희들이 가는 발자취 뒤에는 수많은 인류와 저나라에 있는 수많은 영인들이 해원성사할 수 있는 인연이 맺어져 있다는 것을 아옵니다. 횡적인 복귀역사, 종적인 복귀역사…. 횡적으로 전개된 원수의 세계를 무찌르고 평화의 세계를 창건할 줄 아는 통일의 역군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만만세에 영광이 같이하고, 당신이 소원하시는 승리의 환희가 같이하게 하여 주시옵기를 부탁드리며, 모든 말씀 참부모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1966년, 새해의 첫 성일을 맞이하는 이 시간이옵니다. 아버님이시여! 한 많은 역사의 슬픔을 거두시옵고, 이 한 시간 저희들이 새로운 약속과 새로운 소망과 새로운 생각을 갖고 있사오니 새로이 분부하여 주시옵기를 바라옵니다.
아버님, 이 성일을 기준으로 하여 이 해의 52주의 성일이 다 거룩한 날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한 해를 보내면서 당신의 자녀들이 당신과 하나되어 당신이 소원하시는 뜻을 대하며 충효의 도리를 다할 수 있도록 축복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삼천리 강산에 널려 있는 뭇자녀들이 이 시간 이곳을 마음으로 그리며 아버님 앞에 간곡히 경배드리는 이 시간인 줄 알고 있사오니, 이 외로운 무리들을, 아버님, 위로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의 사정이 아니면 해결할 수 없는 입장에 처해 있는 자녀들이 있사옵거든 아버님의 사정에 그들을 연결시켜 주시옵고, 아버님의 심정이 아니면 다시 소망을 갖고 움직여 나갈 수 없는 자녀들이 있사옵거든, 아버님의 심정에 그들을 연결시켜 주시어서 남아진 소망의 뜻을 대하여 또다시 충성할 수 있도록 힘을 더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아버님을 위하여 충성한다고 하면서 걸어온 지난날의 발걸음이 어찌 아버지 앞에 완전하다고 할 수 있사오리까? 당신을 위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나가는 자녀들이 자유롭지 못한 자리, 구속되는 자리, 핍박받는 자리, 혹은 억울한 자리에 처하여 있사오면 새해를 맞이하여 새로운 권고와 새로운 약속을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 수많은 민족을 기억하여 주셔야 되겠사옵나이다. 더욱이 이 한민족은 불쌍한 민족이오니 이 시간 당신이 축복하여 주시옵고, 이 황폐한 삼천리 반도를 당신이 어루만져 주시어서 새로운 세계를 향하여 전진할 수 있도록 천적인 권내로 몰아넣어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한국은 아버님이 찾아오실 수 있는 새로운 약속의 나라요, 새로운 뜻을 대하여 아벨의 제단을 갖추어야 할 나라인 줄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님 앞에 충성을 다하는 것이 이 나라에 대한 아버님의 바라심이요, 아버지에 대한 이 나라의 본분이요, 이 땅과 수많은 나라와 수많은 선령들에 대한 본분인 줄 알고 있사오니, 아버님, 긍휼의 사랑을 베푸시사 이 민족과 이 나라가 아버님 뜻 앞에 합당한 민족이 되어 소망의 제3이스라엘로서 천국을 건설하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될 민족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이 나라가 세운 하늘에 대한 충효의 도리를 만국이 본을 받아 아버님 앞에 충성할 수 있는 그날이 오기를 아버님께서 얼마나 고대하고 계시는지를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여기에 모인 뭇 자녀들은 그러한 것을 마음 깊이 느끼며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사옵니다. 아버님, 당신이 보호하시고 키워 주시사 최후의 싸움에 승리하여 아버님의 영광의 존전에 참석할 수 있는 이 백성과 이 민족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그리하여 한국을 통하여 이루어질 세계적인 새로운 역사가 온 인류에게 미쳐지게 해 주시옵고, 동시에 인류가 소망해 온 목적을 달성하고 아버님께서 소망해 오신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나라, 이 백성이 책임을 다하여 인류의 갈 길을 열 수 있게 해 주시옵고, 그러한 이 나라, 이 백성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땅의 인간은 물론이요, 영계의 수많은 영인들도 땅을 중심삼고 재림 부활하여 자기들의 해원성사를 고대하고 있는 줄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님, 그들의 소원을 들으시옵고, 이 지구성(地球星)이 그들의 소원을 이룰 수 있는 승리의 터전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그들의 협조 아래 아버님의 영광된 세계를 이룬 그 자리, 가인 아벨 전체가 하나 되는 그 자리에 아버님을 모셔야 하겠사옵니다.
아버님, 온 천지가 아버님의 사랑과 행복 가운데 살 수 있게 해 주시고, 평화의 자리에서 아버지의 영광을 찬양할 수 있는 그러한 나라, 그러한 천주를 이루어 드릴 수 있도록 힘과 능력을 더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새해 첫 성일, 아버님께서 친히 주관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오며, 이 모든 말씀 주의 성호 받들어 간절히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만우주를 지으신 아버님이시여! 당신의 영광을 모든 만물과 나눌 수 있는 그 한 날을 당신은 얼마나 간곡히 소원하셨던가를 이 시간 저희들이 마음 깊이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담 해와를 창조하시고 그들을 아버지 품에 기르셔서 영원한 사랑의 생활을 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인류의 복지를 건설하려 하셨고, 자라나는 아담 해와를 통하여 기쁨을 누리려 하셨던 아버지이심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옵니다. 그런 간곡한 소망을 가지셨던 아버님께서 아담 해와를 잃어버리시고 슬픔의 한 날을 맞이하게 됐다는 사실을 저희들이 이 시간 다시 한번 깨달아야 되겠사옵니다.
아버님, 이 땅에는 나라들도 많사옵고 민족들도 많사옵니다. 그들은 지난날 각각 역사를 달리했고, 현실 생활환경을 달리하고 소망도 달리하고 있사옵니다. 이것은 아버지께서 본래 경륜하신 뜻과 상반된 것임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볼 때에, 역사가 다른 것이 아버님의 한이옵고, 환경이 다른 것이 아버님의 한이오며, 소망이 다른 것이 아버님의 한인 것을 알게 되옵니다. 이러한 것을 생각할 때에, 아버님, 이것이 타락의 보응인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과거가 아버지로 말미암지 않으면 안 되고, 현재가 아버지로 말미암지 않으면 안 되고, 미래가 아버지의 이념과 인연을 맺지 않으면 안 될 것이온데, 오늘날 인류는 하나의 인연을 갖지 못하고, 하나의 생활적인 환경과 하나의 이념적인 터전을 갖지 못하고 비참한 현실에 처해 있사옵니다. 이와 같은 혼란된 자리에서, 방향이 뒤바뀐 자리에서, 자기 위치가 서로 상충되는 그런 자리에서 살고 있는 30억 인류의 신음 소리와 처절한 울부짖음을 저희들이 다시 한번 마음으로 듣게 해 주시옵고, 아버님의 심정과 더불어 생각할 줄 알고, 아버님의 심정을 느끼며 지난날의 잘못을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1966년을 맞이하였사옵니다. 새로운 해를 맞아 자기를 중심하고 새로운 약속을 하고 새로운 목표를 정하는 사람은 많사오나, 아버님의 사정을 염려하고, 아버님을 중심삼은 소망을 갖고, 아버님을 중심삼은 목표를 정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는가를 생각하게 될 때 지극히 적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사옵니다.
아버님, 이 땅의 수많은 민족은 아버님을 찾아야 할 운명에 놓여 있사오나 그 운명을 망각하고 있사옵고, 아버님을 시봉하는 은사의 터전을 다져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배반하고 저버리는 자리에 선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님께서는 복을 가져다 주려 하시는데, 그 복을 마다하고 당신의 참된 이상과 참된 이념의 세계를 거부하는 인간들을 바라보게 될 때, 저주하는 마음으로 심판하여 이 땅 전체를 파멸시키고 없애 버려도 시원치 않을 분한 마음이 들 것이오나, 아버님께서는 사랑의 인연, 부모의 인연이 남아 있는 연고로 끝까지 구원하시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님, 진정 회개의 눈물을 흘리며 이 인류가 복된 소망을 갖게 해 달라고 애원하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있어야 되겠사옵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것을 느끼면 느낄수록 아버님 앞에 고개를 들 수 없사옵니다.
오늘날 수많은 종교와 수많은 교단이 하나의 목적을 향하여 나가고 있사오나, 당신이 가셔야 할 그 슬픈 길을 놓고, 인류가 받아야 할 처참한 심판의 서러움을 놓고 아버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눈물짓는 무리가 많지 않은 것을 아옵니다. 오늘 여기에 모인 이 불쌍한 무리는 서러움의 길을 연하여 나왔사옵니다. 당신이 분부하시는 명령을 안고 이날까지 싸워 나오며 지친 발걸음을 이끌고 오늘 이 자리에 남아진 당신의 아들딸들이오니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이 한 해에 저희들이 복을 받으려 하기 전에 현실에 남아져 있는 지난날의 죄를 회개할 수 있는 이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 민족이 그러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 불쌍한 삼천만 민족을 대신하여, 수많은 교단을 대신하여, 수많은 믿는 신도들을 대신하여 눈물로써 아버님 앞에 회개할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나의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당신의 상한 손길을 붙들고 당신의 사정을 위하여 염려할 줄 아는 아들딸이 되어야 하겠사옵고, 당신의 초초한 모습과 당신의 처절한 그 모습을 바라보고 내 아버지라고 달려들어 목을 껴안고 통곡할 줄 아는 참다운 아들딸이 되어야 하겠사옵니다. 그러나 그럴 수 없는 내 마음을 가졌을 진대 스스로 죄인인 것을 직고하여 아버지의 긍휼의 품에 안길 수 있는 이 한 시간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나의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눈물로 속죄받으며 가야 할 인생길인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우리 아버님께서 그러하옵기에 그 아들딸인 저희들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사옵니다. 지난해에도 그랬사옵고, 지지난 해에도 저희들을 그런 자리에 몰아넣으셨사오나 그래도 오늘날까지 참아 나오며 남아진 무리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새해를 맞이하여 다시 허리띠를 졸라매고, 단발을 하고, 새로운 투지를 가지고 하늘의 무기를 갖추어 아버님의 명령을 받들어 달려 나갈 수 있는 자녀들이 되도록 이끌어 주시옵소서.
아버님! 저희들은 따라가는 무리가 되어서는 안 되겠사옵니다. 아버님 앞에, 민족 앞에, 인류 앞에 선발대로 나타날 수 있는 모습이 되도록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많은 날들을 슬픔 가운데 애쓰신 것이 한이었사옵고, 많은 사람들이 하늘을 배반한 역적의 무리가 된 것이 한이었사오니, 이 한 많은 날과 한 많은 사연들을 짊어진 하늘의 십자가를 짊어져야 할 저희들인 것을 잘 알고 있사옵니다.
이제 저희들이 그 짐을 책임지고 맡아 이 온 우주 만물을 위하여 하늘 제물로 바쳐지는 것을 스스로 즐거워할 줄 아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이 시간 저희들은 지난날의 모든 것을 직고해 버리고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의 터 위에 아버님을 그리워하는 마음과 흠모의 정만이 저희들의 마음에 채워질 수 있기를 바라고 있사옵니다. 그리하여 당신이 어떤 사정을 갖고 계시든, 당신이 어떤 모습을 하고 계시든 그것을 개의치 아니하고, 당신을 정성들여 모셔 드릴 수 있는 참효자 참효녀의 모습을 갖출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시간, 새해를 맞이하여 이 서울 본부를 향하여 외로운 자리에서 눈물지으며 기도하는 무리들이 많은 줄 알고 있사옵니다. 그들에게 소망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그들이 소원하는 소망의 날을, 아버지여, 연장시키지 마시옵소서. 이 민족의 슬픔을 느끼게 하시옵고, 이 민족의 죄악사를 밟고 넘어설 수 있는 그들이 되게 하시오며, 아버님의 직접적인 주관 아래 인도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저희들이 참고 나오며 호소하는 내용을 당신이 귀 기울이실 줄 알고 있사오며, 저희들이 외롭고 비참할 때 당신이 보호하여 주신다는 것을 잘 알고 있사옵니다. 핍박당하고 몰리는 자리에 같이해 주신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하신 아버님, 저희들의 사정 사정을 수습하여 주시옵소서. 이제까지 저희들이 얼마나 당신을 슬프게 했는지 말로 할 수 없사옵니다. 이 한 해만은 그러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저희들 아버님 앞에 온갖 정성을 다 묶어 바치고, 겸손히 엎드려 아버님을 부를 수 있으며, 아버님 품에 안겨 한없이 흐느낄 수 있는 간절한 마음을 이 시간 각자가 지니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지금까지 찾아오신 아버님께서는 딴 사람의 아버님이 아니셨사옵니다. 내 아버님이요, 우리들의 아버님인 것을 알았사오니, 그 아버님과 인연을 맺어야 할 복귀의 운명의 도상에 서 있는 이 슬픈 자식들을 다시 당신의 품에 품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새해 벽두 첫 성일을 맞이하여 이들 앞에 섰사오나 무슨 말을 전하오리까? 전하는 자의 마음과 받는 자의 마음이 하나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당신께서 이 가운데 창조의 능력과 더불어 나타나 주시옵기를 바라옵니다. 저희들의 심정 심정을 연결 지어서 하나의 제물로 바쳐지는 이 제단이 되고, 민족을 대신하여 속죄의 분향을 드릴 수 있는 이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만민을 대신하여, 아버지를 대신하여 눈물지을 수 있게 해 주시옵고, 아버님께서 오셔서 아픈 심정을 토로할 수 있는 이 시간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옵니다.
만만세의 영광과 승리가 이 한 해에 저희들과 같이하게 하여 주시옵고, 이 민족과 같이하게 하여 주시옵고, 인류와 뭇영인들과 같이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주의 성호 받들어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말 씀> 이번에 지방을 순회하면서 전한 내용들을 중심하고 이 시간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살고 있는 이 세계를 여러분은 선한 세계라고 생각합니까, 악한 세계라고 생각합니까? 선한 세계예요, 악한 세계예요? 어느 누구에게 물어 보더라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선하지 못하고 악하다고 할 것입니다. 비단 한국 사람만이 아니라 세계 인류에게 물어 보아도 같은 대답이 나올 것입니다.
그러면 이 악한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선한 사람이 많습니까, 악한 사람이 많습니까? 이 악한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 역시 선한 사람보다도 악한 사람이 더 많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악한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 자신들에게도 역시 선한 부분보다도 악한 부분이 더 많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내가 될 때까지 유린되어 온 과거나 유린되어 있는 현재를 볼 때, 악의 인연을 밟고 올라설 수 있는 승리의 터전을 갖지 못하고 있고, 그런 생활 무대를 갖지 못하고 있고, 미래의 소망을 가질 수 없는 인생이 되었다는 것은 비참한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면 수많은 성인 현철들 혹은 수많은 도주들이 바라던 소원은 무엇이었던고? 그들 모두는 이 세계가 선의 세계가 되기를 소망했습니다. 그들은 이 세계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염려했고, 악한 세상을 선한 세상으로 만들지 못함을 탄식했습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내 자신이 모두가 악하다고 하는 환경에 사로잡혀 있고,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와 세계가 악한 사회와 세계가 되어 있는 사실은 어찌된 연고인고?
수많은 사람들이 선을 바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이 세계는 악한 세계입니다. 악한 이 세계를 선의 세계로 만드는 것은 오늘날 인류가 공통적으로 해결해야 할 중대한 문제입니다. 이것을 해결하기 전에 평화가 올 수 없습니다. 악을 제거해 버리기 전에는 새로운 천국과 새로운 이념의 세계를 건설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부정할 도리가 없습니다.
진정 양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환경이 어지러우면 어지러울수록 ‘너만은 이 악한 세상에서 참된 사람이 되라.’ 고 호소하며 울부짖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양심을 중심삼고 생애노정을 개척해 나아가야 할 자신을 두고 볼 때, 하루의 생활이 그러하고, 일년의 생활이 그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선을 중심삼고 내 자신이 승리했다는 자리에 서지 못하고 도리어 선한 환경이 아닌 악한 환경에 속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러한 나의 비참함과 이 세계의 비참함을 누가 책임져야 되겠습니까? 이것은 크나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세상에 살고 있는 여러분 자신들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세상에 제아무리 잘나고 제아무리 세계를 호령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그 자신 역시 악한 환경에 사로잡혀 살고 간 사람임에 틀림없고, 현재 제아무리 잘났다고 하는 사람도 악한 환경에 살고 있는 사람임에 틀림없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꿈을 갖고, 미래를 갖고, 세계를 호령한다 하더라도 역시 이 세계가 선한 세계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신다면 하나님은 이러한 세상을 그냥 두시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국 새로운 대책을 강구하셔야 된다는 결론이 나오게 됩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면 이 세계를 그냥 그대로 두시지 않을 것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선의 목적을 세우신 하나님이 계신다면 이런 세상을 그냥 그대로 두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악한 세계를 선의 세계로 돌리려는 싸움이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이어져 왔습니다. 섭리역사 과정에 그 싸움의 실증이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이스라엘 민족을 중심삼고 선민사상이 나왔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범죄의 이 땅, 악한 이 세상을 가로 막고 참된 개인을 세우고, 참된 가정을 세우고, 참된 종족을 세우고, 참된 민족을 세워 새로운 섭리의 이념을 중심삼고 이 악한 세상에 대처할 수 있는 새로운 사상이 역사 과정에 있었다는 사실은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것이 없었다면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결론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다행히도 선민사상이 역사상에 나타난 것을 보아서 ‘아, 그런 분이 있는 것 같구나.’ 하고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선민사상은 역사 이후에 생겨날 것이 아니라, 본래 역사 이전부터 있어야 할 것입니다. 악한 인간이 되고 악한 세계가 된 후에 생겨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본래부터 선한 기준에 속해 있는 사람이라야 선민이 될 수 있습니다. 악한 기준에 속해 있던 사람은 선민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선민사상은 역사 이후에 나온 것이 아니라, 역사 이전부터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선한 하나님이요, 인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역사 이후에 선민사상을 두었다면 그 하나님은 선한 하나님이 아닐 것입니다.
선민사상은 역사 이전부터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를 지나 현재에 이르렀습니다. 선민사상은 이렇게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선민사상에 의한 하나의 완성된 선민의 실체는 타락한 세계를 중심삼은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본래 천지 만물을 창조하실 때 설정하신 창조의 목적을 완성한 자리에 있는 참된 사람, 즉 하나님이 영원히 취할 수 있고, 하나님만이 대하실 수 있는 참된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참된 사람에 대한 기준은 인간이 타락된 이후, 악이 이루어진 이후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인간이 타락되기 이전부터, 악이 출발하기 이전부터 세워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선한 세계를 만들어야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이 세상은 악한 세상이고, 악이 점령하고 있는 세상인데 이런 세상에서 어떻게 선한 사람을 길러 낼 것이냐? 이 천지를 창조한 주인이 있다면 이것은 그분에게 중대한 과제가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선한 사람을 길러내야 합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하나님이 이 땅을 대하여 섭리해 나오신 방향입니다. 그리고 이 선한 사람을 길러 내는 방편으로 세우신 것이 무엇이냐? 종교입니다, 종교. 아시겠어요?
그래서 타락한 그날로부터 인간에게는 종교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비록 인간이 타락했지만 인간의 본심 깊은 곳에는 종교를 가질 수 있는 마음의 바탕, 즉 신앙을 할 수 있는 마음의 바탕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본래 악이 생겨나기 이전부터 인간에게 선민의 기준,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완성할 수 있는 기준이 설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즉 창조목적을 이루어 나갈 수 있는 본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본성은 언제나 인간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지향하는 선의 목적을 지향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동적인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또 우리 양심은 우리가 선을 향하여 움직이지 않을 수 없게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두 분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됩니다. 만약 두 분의 하나님이 계신다면 창조목적이 하나만 되겠어요? 두 분의 하나님이 계신다면 창조목적도 두 개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창조목적이 두 개가 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 점도 생각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한 분이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한 분의 하나님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한 분의 하나님이 지으신 온 피조만물이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까?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한 분의 하나님께서 하나의 창조목적을 세우셨고, 하나의 목적을 완성하기 위하여 하나의 재료로서 모든 존재물을 지으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만물로 하여금 하나의 목적을 지향하도록 지으셨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한 분의 하나님이 하나의 목적을 중심삼고 온 천지 만물을 지으셨기 때문에, 이 역사가 아무리 소용돌이치고 밀치고 넘어지며 나가더라도 이 역사는 하나의 목적을 향하여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태초에 인간이 완성되었더라면 선한 세계로 출발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도 선한 세계일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 땅 위에는 선한 사람보다는 악한 사람이 더 많은 것을 알게 됩니다. 이것을 보아 이 세상이 선으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악으로 출발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천지 만물을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하여 지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이 세상을 보면 선과 악이 병존하고 있고, 서로 다른 목적을 지향하여 나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용납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한 부분을 제거해 버리셔야 합니다.
그러면 제거당해야 할 것은 무엇이냐?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선이 아니라 악입니다. 과거의 악을 제거하고, 현재의 악을 제거하고, 이 지구상에서 악을 영원히 추방할 수 있는 한 날이 와야만 됩니다. 이렇게 하늘과 땅에 하늘의 주권을 세워서 완전히 악을 제거시켜 버리는 날이 바로 심판의 목적을 완성하는 날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섭리해 오신 인류역사를 보게 될 때, 악은 분산되어 나가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악은 통일되어 나가는 것이 아니라 분산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악은 분산되는 것입니다. 부딪치고 갈라지고 또 갈라져 나가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의 조상으로 출발했는데 오늘날은 어찌하여 수많은 민족이 생기고 각각 다른 역사 배경을 가지고 있으며 많은 국가로 갈라져 있는고? 이것은 인간이 악으로 출발한 결과입니다. 서로 부딪치고 나서 둘이 되고, 둘은 넷이 되고, 이렇게 배수로 갈라져 수많은 종족을 형성해 왔던 것입니다.
악은 통합될 수 없는 것이요, 악은 분립되는 것이요, 분립의 결과는 망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천리의 공법입니다.
지금까지의 역사는 선과 악의 투쟁사입니다. 이 악은 그냥 제거되는 것이 아닙니다. 부딪쳐야 합니다. 선과 악이 부딪치면 악이 선보다 먼저 망합니다. 조금 선한 것은 조금 악한 것보다도 조금 나중에 망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더 악한 것이 먼저 망하고 덜 악한 것이 나중에 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생각해 보세요. 여기 똑같은 사과가 두 개 있습니다. 둘 다 맛이 있어 보이고 보기만 해도 탐스럽습니다. 그런데 한쪽 사과 꼭지에 조그만 파리똥이 하나 묻어 있다고 합시다. 그래도 물론 그 두 개를 다 가지고 싶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둘 중에 하나만 가져야 한다고 할 때 어느 것을 가지겠습니까? 대다수의 사람들이 어느 것을 가지려 하겠습니까? 파리똥이 묻은 사과를 가지려고 할까요, 묻지 않은 것을 가지려고 할까요? 물어볼 것도 없이 묻지 않은 것을 가지려고 할 것입니다. 이건 삼척동자에게 묻더라도 백이면 백, 천이면 천, 만이면 만, 전부가 다 좋은 것을 택할 것입니다. 그건 부정 못 하지요?
한 가지 예를 더 들겠습니다. 어떤 동네에 짓궂은 나쁜 사람이 괜히 얌전히 지나가는 아이를 건드려 가지고 싸움이 벌어졌다고 합시다. 그러면 누가 좋은 사람이고 누가 나쁜 사람이겠습니까? 대다수의 동네 사람들은 싸움을 건 그 나쁜 녀석을 외면해 버리고 매 맞는 아이의 편이 될 것입니다. 억울하게 매 맞는 아이의 편이 될 것입니다. 이것을 보게 될 때에 나쁜 편은 고립되는 것이요, 좋은 편은 후원자가 생겨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부정을 못 합니다.
이 원칙에 의해서 볼 때, 이 천지를 주관하시는 대주재, 절대적인 선의 주체이신 하나님 앞에 더 악한 녀석하고 덜 악한 녀석이 싸운다면 하나님이 어느 편이 되시겠어요? 하나님은 덜 악한 편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계신 편이 망하겠습니까, 안 망하겠습니까? 망하지 않습니다.
선과 악은 반드시 부딪쳐야 됩니다. 부딪치지 않고는 판결을 내릴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들이 수많은 전쟁을 거쳐 나온 것입니다. 수많은 민족으로 분립되어 부딪쳐 왔습니다. 그 가운데서 하나님은 선한 민족을 찾아 세워 나오신 것입니다. 조금 선한 계통이 남아져 나오고, 그 계통을 통해서 역사가 이어져 나왔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은 어떤 시대입니까? 수많은 국가가 하나의 목적을 지향하여 하나의 이념권 내로 점점 흘러 들어가고 있는 시대입니다. 민족의 사상이나 국가의 전통이나 관습이나 문화를 넘어서 세계적인 사상과 전통과 문화를 향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현재 목격하고 있습니다. 많은 수의 민족이 점점 어디로 가고 있느냐? 하나의 기준을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인류역사상 수많은 싸움이 있었는데 항상 악이 위에 있었고, 선이 아래에 있었습니다. 악은 먼저 출발하였기에 위에서 세상을 마음대로 지배해 나왔고, 선은 나중에 출발했기 때문에 아래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선은 점점 높은 자리로 올라왔고 악은 점점 내려왔습니다. 이제 악은 멸망하여 영원히 아래로 내려가는 때가 올 것입니다. 즉 선과 악의 교차 시기가 올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교차 시기가 창조주의 목적을 완성하기 위한 출발 시기인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선과 악이 싸워 왔는데 무엇이 남아지겠습니까? 선이 남아집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 공산주의와 민주주의가 싸우고 있는데, 어느 주의가 남아질 것이냐 하는 것은 자명합니다. 민주주의는 하나님을 중심삼은 주의이고, 공산주의는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유물주의입니다. 이들이 서로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계시는데도 불구하고 안 계신다는 사람과 계신다는 사람 중에 어떤 사람이 더 선한 사람입니까? 계신다고 하는 사람이 더 선한 사람입니다. 엄연히 계시는데도 안 계신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날도둑 아니면 뭔가 잘못된 사람이 아니겠어요?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세계의 종말기에 어떤 편이 승리할 것이냐? 하나님이 하나의 목적을 위해 섭리하시고, 세계를 하나의 목적을 향해 끌고 나가신다 할진대 반드시 하나님의 협조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협조를 받는 편이 이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편을 협조하실까요? 조금 선한 편을 협조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싸우는 것은 다 나쁘나 그 가운데에서 언제나 조금 더 선한 편이 이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산당이 진다는 결론은 자동적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1차대전도 먼저 일으킨 나라가 졌고, 2차대전도 먼저 일으킨 나라가 졌으며, 3차대전이 일어난다면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언제나 전반전, 중반전까지는 악이 우세하다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그건 원리에서 소생, 장성권은 사탄이 침범했으나 완성권만은 사탄이 침범하지 못했다고 하는 것과 상통하는 것입니다. 초반전, 중반전까지는 언제나 악이 우세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후반전 막바지 단계에 들어가서는 언제나 뒤집어졌습니다.
이것은 지나온 역사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악은 끝까지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끝까지 참고 나면 악은 몽땅 양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악은 끝까지 참을 수 없으나 선은 끝까지 참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대개 보면 끝까지 참지 못하는 사람들은 혈기가 많은 사람, 교만심이 많은 사람, 자기 주장만 내세우는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끝까지 참는 사람은 큰 목적을 가지는 사람, 그 목적을 위하여 소망을 크게 가지는 사람입니다. 즉 목적의 기준을 내일에 두지 앉고 먼 미래에 두는 사람일수록 끝까지 참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에게 복을 주십니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악은 자기를 중심삼는 것이며, 선은 절대자이신 창조주에 대해 상대적인 위치에 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큰 목적을 바라보고 큰 목적을 향하여 나아가야 하느니만큼, 작은 목적에 지배받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악은 가는 데마다 부딪칩니다. 그러나 악은 인내하지 못합니다. 악은 교묘하게 운행합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잘 알아야 됩니다.
그런 고로 문제는 악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악의 고향, 악이 태어난 곳은 어디인가? 악의 근거지는 어디이며 악의 본향 땅은 어디인가? 악의 고향은 대한민국이 아닙니다. 어느 나라 땅도 아닙니다. 어떤 간판을 붙인 단체도 아닙니다.
대한민국을 구성하는 것은 개인과 가정입니다. 세계는 수많은 종족과 민족과 나라가 합하여 구성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악의 고향은 이러한 가정, 종족, 국가, 세계가 아닙니다.
그러면 이 악의 고향은 어디이냐? 그것은 바로 사람입니다. 악의 본향, 악의 근거지는 바로 사람인 것입니다. 아시겠지요? 우리라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
인간이 타락한 것을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타락은 무슨 타락이야? 타락하는 것 보았느냐? 그것은 겁장이들이나 약자들이 믿는 것이야.’ 라고 비웃습니다. 인생의 낙오자들이 가는 곳이 종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천만부당한 생각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타락이 무엇입니까? 인간이 타락했어요, 안 했어요? 타락하는 것 봤어요, 못 봤어요? 그런데 어떻게 타락한 것을 알아요?
하나님은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이 피조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창조를 받은 모든 존재물은 이 목적을 향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아침 해가 떠오를 때 모든 만물이 태양을 향하여 숨길을 돌리는 것을 보았습니까? 초목은 물론이요, 모든 동물들도 그렇다는 겁니다. 밤잠이 너무나 지루하고 길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반가운 햇님, 어서 올라오소.’ 하면서 자기의 기쁨을 표현할 수 있는 모든 요소를 동원해서 아침 해를 반긴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만물이 태양을 그리워하는 것은 태양이 생명의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 우주의 중심 되시는 하나님이 계신다 할진대, 인간에게 그 하나님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본심이 있는 것입니다. 만약 없다면 만물만도 못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의 양심은 ‘야, 아무개야, 하나님께로 가라.’ 고 명령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자신들이 ‘나는 하나님의 창조목적의 세계로 갈 수 있다.’라고 자신할 수 있어요? 천만의 말씀이로소이다. 처음 온 사람들에게는 미안합니다.
이제 여러분 자신을 가만히 분석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목적이 하나예요, 둘이에요? 똑똑히 말해 보세요. 여러분의 마음의 목적도 하나예요? 1966년 새해 벽두에 여러분은 ‘나는 하나의 목적을 중심삼고 갑니다. 그 목적은 내가 나면서 목적하던 것입니다. 나는 이 목적을 위해 죽을 때까지 갑니다.’ 라고 해야 합니다. 과거의 하나님이 따로 계시고, 현재의 하나님이 따로 계시고, 미래의 하나님이 따로 계십니까? 하나님이 이랬다저랬다 하십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직선적이십니다. 여러분, 세상에도 곧은 사람, 혹은 똑바른 사람이라는 말이 있지요? 그런데 사람이 곧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중심삼고 하는 말입니까? 그것은 천리 법도를 중심삼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마음이 똑바로예요? 결국 결론을 내리면 우리는 두 목적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두 목적 가운데 한 목적도 갖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마음이 가는 목적과 몸이 가는 목적이 따로 있습니다. 그것을 시인하지요? 똑똑한 사람이라면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 자신들의 모습이 이러하기 때문에 좋든 싫든 부정하지 못합니다. 기분이 나쁘겠지만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에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현재 우리 인생이 어떻게 되어 있느냐? 우리는 두 목적 가운데 있되 어느 하나를 완전히 선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목적을 향해 나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돌고 돌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다 죽어가는 인생입니다. 하나님이 우주의 대목적을 세우셨다면 이러한 사람들이 그 목적 세계에 필요한 사람들입니까, 쓸데없는 사람들입니까? 어떠한 사람들이겠습니까? 그들은 쓸데없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쓸데없는 사람들이 가서 모이는 쓰레기통, 인간 쓰레기통이 바로 지옥입니다. 인간 쓰레기들을 모아 보류시키는 곳이 지옥입니다. 죄인들이 바로 쓰레기통 직행감이라는 것입니다. 미안합니다. 선생님도 이런 말하기 거북 합니다. 여러분, 어떤 돈 많은 부자 양반이 수천만 원을 들여 집을 짓는데 쓰레기통을 먼저 마련하고 집을 짓습니까? 집을 짓고 살림살이를 하다 보니 찌꺼기들이 나오고 그 찌꺼기들을 모아 놓으려니 쓰레기통이 필요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쓰레기통과 같은 지옥을 먼저 만들어 놓고 천지를 창조하셨겠습니까? 이건 당치 않은 말입니다. 지옥은 타락의 보응으로 생긴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니 구세주니 하는 분이 오셔야 하는 것도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기도니 종교니 하는 것도 본래는 필요 없는 것입니다. 본연의 인간 생활에는 하등 필요 없던 것이 타락으로 말미암아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의 목적을 향해 가는 사람이 아니요, 하나의 목적을 갖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두 목적을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두 목적을 갖고 있는 사람은 하나의 목적을 중심삼고 섭리해 나오시는 하나님 앞에 대치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타락했다 이겁니다.
본래는 선만을 위하여, 하나의 목적만을 향하여 나아가야 할 인생입니다. 그런데 그 인생 앞에 어떻게 악이 침범해 들어왔느냐? 이것이 인생에 있어서 한 중의 한이요, 역사의 한이요, 세계의 한이요, 우주의 한으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 악을 어떻게 해야 될 것이냐? 악이 왕성한데 선의 목적이 이루어집니까? 아닙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종교가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종교가 바로 두 목적을 가진 사람을 하나의 목적만을 위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종교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여러분들은 두 목적을 갖고 있으니 이랬다저랬다 하지요? 그래요, 안 그래요? 안 그렇습니까? 두 목적을 가진 사람은 이랬다저랬다 합니다. 여러분들은 이랬다저랬다 하는 사람을 좋아합니까? 그런 사람들은 가는 곳마다 제거당하는 것입니다.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인간들이 두 목적을 갖고 있으니 이랬다저랬다 하는 것입니다. 참된 사람이라면 이랬다저랬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랬다저랬다 하는 사람은 참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은 미안하지만 제거당해야 됩니다.
천주는 이랬다저랬다 하는 존재, 두 목적을 향해 나가는 존재를 위해 지은 것이 아닙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지으신 피조세계이기에, 그 피조세계는 하나의 목적의 세계를 지향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천리 법도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이랬다저랬다 할 때에는 제거당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랬다저랬다 하지 않는 자리, 하나의 목적을 향하는 자리에 서 있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들은 틀림없이 심판을 받아야 됩니다.
두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이상하고 구상하는 세계는 이랬다저랬다 하는 세계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세계를 구성하는 사람들이 이랬다저랬다 하는, 두 목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들에게는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이 백 퍼센트 개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끊어야 되겠습니다.
본래 인간은 하나의 목적을 위하여, 하나의 창조목적을 위하여, 즉 하나님께서 지향하시는 대로 따라가게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인간들은 두 목적을 갖고 이랬다저랬다 하고 있으니 바로잡아 주어야 되겠습니다. 그냥 두면 본심이 지향하는 대로 갈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둘 가운데 하나를 때려잡자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과 몸이 둘 중에서 어느 것을 때려잡아야 되겠어요? 바로 몸입니다.
때려잡자는 데는 전쟁에서처럼 포를 쏘아서 때려잡자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포는 한 방만 맞으면 그만입니다. 두 목적을 가진 인간들에게 한 목적을 갖게 하는 것은 강제로 때리고 쳐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연적으로 ‘나는 포로가 되었습니다. 나를 포로로 잡아 주십시오.’ 하며 천리의 공법 앞에 나타날 수 있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작전이 제일 힘들고 제일 어렵고 제일 지긋지긋한 작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두 목적의 세계를 정비해 나오시는 하나님이 그 수고를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기쁘신 하나님이시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기쁘신 하나님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영광의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한테 무슨 부족함이 있겠느냐? 천지 만물이 그분을 위해 생겨났는데 무슨 슬픔이 있겠느냐? 기독교인들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기도는 왜 해요? 쓸데없이 기도는 왜 합니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이 기도해 주기를 바라시고 여러분을 지었을까요? 하나님은 인간이 자기의 사정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을 대해 주시면서 고통을 느끼십니다. 그러니 슬프신 하나님이란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슬프실 것이냐? 인간들이 칠 팔십년 동안 신음하고 고생하는 것을 하나님의 슬픔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수많은 인류를 자녀로 복귀하기 위하여 수고하시는 하나님, 하나의 목적 세계로 이끌어 가시기 위해 수고하시는 하나님과 인간 중에 누가 더 비참합니까? 하나님이 더 비참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인간들이 하나님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알고 보면 ‘아! 이런 사정을 갖고 계신 분이구나. 그러셨어야만 했구나.’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몸을 때려잡아야 합니다. 이것이 제일 힘든 것입니다. 이 힘든 분야를 누가 책임져야 하느냐? 종교가 책임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때려잡는데 누가 책임져요? 처음 온 사람들도 똑똑히 들으세요. 종교가 책임져야 합니다.
종교는 마루가 되는 가르침입니다. 어느 누구도 이 가르침을 모르고서는 천법 앞에 설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종교의 가르침은 어떠한 가르침인가? 몸이 좋아하는 것을 가르쳐 주는 가르침입니까? 아닙니다. 종교의 가르침은 이 몸을 때려잡으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양심을 해방시키라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종교를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종교는 무엇이냐? 바로 이 몸을 때려잡고 양심을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얼마나 좋겠어요! 양심을 해방시키고 몸뚱이를 구속하자는 것은 대부분의 종교의 가르침입니다.
성경에 배고플 때 밥을 한 그릇만 먹지 말고 세 그릇씩 먹어라 하는 말씀이 있습니까? 이 천하에 대해 교만해라, 혈기를 부려라, 자기 주장해라, 네 마음대로 해라, 인륜도덕이고 뭐고 없다고 하는 종교의 가르침이 있습니까?
이 몸은 이밥에 고깃국을 먹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요구합니다. 이 몸은 좋은 자리에 가도 더 좋은 자리에 가기를 요구합니다. 그러니 만족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구원해야 되는데 어떻게 구원해야 될까요? 이것을 포로로 잡으면 되겠습니까?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는 무엇을 가르쳐 주느냐? 종교의 가르침의 출발은 육적 생활, 육적 사회, 육적 세계를 부정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이것을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종교의 가르침은 육적 세계를 완전히 부정하라고 합니다. 이것으로 종교의 가르침은 출발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몸을 완전히 포로로 잡아서 양심을 완전히 해방해야 됩니다. 아시겠어요? 그러면 결국 인간에게 종교가 필요합니까, 안 필요합니까? 그것은 당연히 필요합니다. 나라의 대통령도 종교가 필요해요, 안 해요? 미국 대통령도 종교가 필요해요, 안 해요? 누구에게나 종교는 필요합니다. 종교는 절대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면 종교는 무엇을 지향해 나가는가? 그것은 천지창조 원칙에 부합될 수 있는 천륜의 도리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즉 하나의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지으셨고, 하나의 목적의 세계를 향하여 섭리해 나오시니 그 방향을 향해 가도록 가르쳐 주는 것이 종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통일교를 믿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종교가 왜 필요한지를 확실히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종교는 바로 육적 생활의 전체를 부정하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불교도 그러하고 기독교도 그렇습니다. 고차적인 종교일수록 전반적으로 부정하라고 하는 것이 많습니다. 성경 말씀도 그런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타락한 인간과 하나님이 그냥 그대로는 하나로 합해질 수 없습니다. 완전한 해방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의 목적을 추구하는 인간으로 개조되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아실 것입니다.
자라는 곡식이 여름 때쯤 딱 부러지면 어떻게 되겠어요? 마르는 동시에 죽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이 곡식에게는 때 아닌 가을이 시작되는 것이며, 그것으로 끝장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타락에 관한 것을 비유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인간의 타락은 무엇과 같으냐? 그것은 봄 절기, 여름 절기를 정상적으로 맞지 못하고 절기 도중에 때 아닌 가을 절기를 맞이한 것과 같습니다.
우주는 지극히 작은 것에서부터 지극히 큰 것까지 모두 관계와 연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과학이 발달된 것도 여러 공식과 법칙을 발견하고 그것에 의해 움직였기 때문입니다. 그랬기에 오늘날과 같은 문명세계를 이룩해낼 수 있었습니다.
과학 문명의 세계를 앞당기게 한 것은 법칙을 중심한 하나의 공식이었습니다. 공식은 전체의 분야에 얼마나 적용시킬 수 있느냐에 따라서 채택되고 안 되고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교 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맹목적으로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공식적인 법도를 통해서 섭리하시기 때문에 그 공식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공식적인 법도를 가르쳐 주는 곳이 통일교회요, 이런 공식적인 법도가 들어 있는 것이 통일교회의 교리입니다. 통일교회 교리는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복귀섭리역사가 어떻게 이어져 왔는지를 확실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통일교회의 교리 중 제일 중요한 내용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종교의 생활은 무엇이냐? 본연의 기준을 다시 세워 나가는 생활입니다.
타락은 무엇이냐? 여름 절기에 때 아닌 가을 절기를 맞이한 것입니다. 지금 20세기 문명은 온대 문명이요, 가을 절기의 문명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과거의 고대 문명은 열대 문명이었습니다. 지금은 가을 절기의 문명권 내에 들어왔기 때문에 앙상한 가지만 남아 있습니다. 대체적으로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민주주의나 공산주의가 다 가을 절기에 속하여 있지만 제대로 그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열매는 만민이 고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만민이 고대하고 있는 열매를 맺을 수 있는 하나의 기준이 이 땅 위에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가을이 점점 가까이 오므로 그 열매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열매로서 이 땅에 오시는 분이 우주를 대표해서 오시는, 기독교가 말하는 재림주이 십니다. 그분은 우주의 중심존재이십니다.
오늘날 인간이 제아무리 노력하고 제아무리 종교의 도를 세워 놓았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본래 이상 하던 완전무결한 하나의 완성한 인간을 찾지 못하였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아직까지 그 인간을 찾아 나오시는 과정에 있습니다.
이러한 완성한 인간이 찾아지면 그로 말미암아 완전한 부부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 완전한 부부를 통하여 완전한 가정이 이루어지게 되고, 또 그 가정을 중심삼고 완전한 종족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완전한 민족, 국가, 세계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독교 사상에 있는 접붙이는 역사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접은 어떻게 붙여야 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나는 참감람나무요, 너희는 돌감람나무….’ 라 하셨는데, 접붙일 때는 참감람나무를 자릅니까, 돌감람나무를 자릅니까? 돌감람나무를 자릅니다. 완전 부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돌감람나무의 밑둥치를 잘라 버려야 합니다. 옆가지를 자르는 것이 아닙니다. 옆가지가 하나도 날 수 없게끔 밑둥치를 잘라야 합니다.
덩치 큰 수백년 수천년 묵은 돌감람나무를 자르는 것을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보면 ‘이 미친 사람아, 왜 그 큰 걸 자르는 거야?’ 하고 나무랄 것입니다. 참감람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할 때는 돌감람나무나 똑같습니다. 열매가 없으면 예수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들이나 똑같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뭘 그렇게 믿는다고 부산스럽게 야단인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그런 세상적인 것을 완전히 부정하고 완전히 잘라 버려야 됩니다. 그리고 자르려면 밑까지 뚝 잘라야 됩니다.
잘라 놓고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이냐? 참감람나무 가지를 하나 빌려 가지고 정성을 다하여 접붙여야 합니다. 믿는다는 것은 참감람나무를 빌려 접붙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원한 참감람나무 씨로서 출발할 수 있는 선의 자식이 되지 못하고, 악의 자식, 즉 돌감람나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돌감람나무로 태어난 것이 바로 타락한 인간들입니다. 타락한 인간들은 본래의 창조목적을 이룰 수 있는 인간들이 못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의 목적을 향하여 가시는 참감람나무의 길을 따라가야 되며, 또 참감람나무의 가지를 상속받아 접붙이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 사상이 참다운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롬 8:15)을 보면 직접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다리를 놓아 양자의 입장에서 ‘아바 아버지’ 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양자는 혈통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선한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한 것이 아니라, 전부 다 악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몽땅 잘라 가지고 선한 감람나무 가지에 접붙여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 세상 앞에 재림사상, 메시아사상, 즉 이 만민을 구할 수 있는 구주사상이 나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구주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참감람나무로 와서 돌감람나무인 이 세계의 30억 인류를 몽땅 잘라 버리고 접붙여 주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악에서 출발하였던 인간이 악을 심판해 버리고 선에서 출발했다는 조건을 갖추게 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양자의 도리를 다하고 직계의 아들딸들이 됐다는 자리에 서게 해야 합니다. 그 자리에 나가는 것이 바로 신앙생활의 목적입니다. 그럼 여러분들, 잘라야겠어요, 안 잘라야겠어요? 자르려면 어디를 잘라야 되겠습니까? 다리만 자르면 되겠습니까? 다리만 자르면 죽지 않습니다. 목을 잘라야 됩니다. 그래야 죽습니다.
사람들은 먹기 위해서 놀아나고 있습니다. 좋은 것을 보고 듣고 먹고, 좋은 것을 입으려고 합니다. 선생님이 합동결혼식을 많이 시켜 봤지만 이 처녀 총각들 가만히 보면 얼굴만 보려고 합니다. 얼굴만 보고 다른 것은 안 보려고 하거든요. 그러니까 어디를 잘라야 되겠어요? 목을 잘라야 합니다. 이 말은 인간이 요구하는 모든 것을 몽땅 쳐 버려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 다음 예수님의 머리를 갖다가 붙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순이 같아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순이 되는 것입니다. 즉 돌감람나무에다 참감람나무를 접붙이면 순이 같아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리 가면 순도 이리 가고, 예수님이 저리 가면 순도 저리 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움직이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늘을 향해서 방향을 정하여 갈 수 있는 사람이 됨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두 목적의 인간이 되지 않고 하나의 목적 기준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섭리는 천륜의 법도를 인간들이 자연적으로 따라갈 수 있도록 만들려는 것임을 여러분은 잘 알았을 것입니다. 이제 이렇게까지 이야기했으니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목 잘랐어요? 못 잘랐죠? 그래서 여러분은 이것을 자르는 일을 하는 과정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참감람나무로서 인간에게 접붙여 주기 위해 오시는 그분을 맞이해서 우리는 무엇을 받아야 될 것인가? 신랑 되시는 그분 앞에 우리는 신부입니다. 그 신랑에게서 생명의 새순을 받고 사랑의 새순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새 세계로의 새 출발을 할 수 있고 섭리적인 목적을 완성할 수 있는 자녀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체적으로 본 섭리의 관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아무것도 아닌 것이 잘났다고 거드럭거리며 으스대고 다니면 한 대 맞게 되어 있습니다. 또 눈을 부릅뜨고 이 세계를 내 세계로 만들겠다고 하는 도둑놈의 심보를 가지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모두 맞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20세기의 문명은 하나의 목적을 향하여 넘어가야만 하는, 가을 절기를 맞은 앙상한 돌감람나무와 같습니다. 이 나무는 다시 봄 절기를 맞이해서 오시는 참감람나무의 가지를 받아 접붙여짐으로써 거기서부터는 새로운 절기로 넘어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타락한 인간 세계에 메시아사상이 필요합니까, 안 합니까? 필요하지 않으면 그만두어도 됩니다. 필요합니까, 안 합니까? 얼마나 필요 합니까? 부모 처자 이상 필요하냐 이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마 10:3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더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돌감람나무를 중심삼고 사랑하는 그 이상의 정성을 가지고 참감람나무를 모시고 사랑하지 못하는 한 접붙일 수가 없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성경을 보면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마 10:36) 한 내용이 맞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몽땅 잘라 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부모도 모른다, 남편도 모른다, 아들딸도 모른다, 세상도 모른다, 살림살이도 모른다 하며 전부 다 잘라 버려야 합니다. 그러면 누가 반대하겠습니까? 남편들이 반대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왜 이렇게 됐느냐고 하면서 핍박하고 반대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집안이 망하는 것입니다. 사탄 세상 집안은 망해야 됩니다. 그래서 네 집안 식구가 원수라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아하, 그렇기 때문에 그런 말이 나왔구나!’ 하고 이해할 것입니다.
이런 원칙적인 기준인 천륜에 의해서 신앙생활을 해야 할 사람들이 이것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접붙여졌습니까? 접붙여지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의 여러분의 생활관으론 안 됩니다. 오시는 메시아의 생활관으로 바꾸어져야 됩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2천년 전에 왔다 가셨던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를 위하여 무엇으로 오셨느냐? 그분은 참감람나무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돌감람나무들에게 접붙여 주려고 했는데, 그 참감람나무를 잘라 버렸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셨다는 것입니다. 잘 돌아가셨지요? 잘 돌아가셨지요? 예수님이 잘 돌아가셨어요? 역사노정에 있어서 슬픈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참감람나무로 오셨던 예수님을 죽인 것입니다. 이것이 비통하고 역사적인 하나님의 서러움이란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정도 모르고 기독교인들은 ‘아, 우리 주님 십자가에서 내 죄를 위해 돌아가셨다.’ 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땅 위에 뿌리를 두고 있는 인간들을 참감람나무로 만들기 위해 다시 오시는 주님은 참감람나무로 오셔야 하며, 영적으로 오셔서는 안 됩니다. 그분은 반드시 사람으로 오셔야만 됩니다. 구름을 타고 오신다는 것은 공상이요, 상상인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알아보아도 그렇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이렇게 해 나오면서 얼마나 많이 알아보았겠습니까? 통일교회의 문 선생을 잡아 죽이려고 세계가 얼마나 핍박했는지 모릅니다. 누구는 욕먹고 싶어 이 일을 했겠습니까? 누구만큼 못나서 이 일을 했겠습니까? 알고 또 알아보니 이것은 틀림없는 원칙으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았기 때문에 이 길을 거쳐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 주님이 구름 타고 오십니까? 수증기를 타고 오신다는 말입니까? 거룩하겠구만….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이단입니다. 사회를 미혹하고 실제 땅 위에 새 세계가 이룩되는 것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허황된 사실, 허황된 말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믿으면 천당 간다.’ 는 말로 욕심 부리게 하고 ‘안 믿으면 지옥 간다.’ 는 말로 공갈 협박을 해 가지고 기독교가 지금까지 발전되어 나온 것입니다. ‘믿으면 천당 가고, 안 믿으면 지옥 간다’ 이것은 반 공갈입니다. 그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끝날이 되어 참과 거짓이 분명히 밝혀지게 됨으로 말미암아 기독교 자체는 사회로부터 비판받아야 하고, 진리로부터도 비판받아야 됩니다.
오늘날 사회에서는 교회의 목사나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말을 우습게 알고 있습니다. 우습게 알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회가 진리의 분야에서 훨씬 앞서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다 차원 높은 진리로 해명하여 세계를 인도할 수 있는 종교의 이념이 나와야 된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시는 주님은 숟가락 들고 젓가락 들고 오셔야 됩니다. 즉 사람으로 오셔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한다고 또 통일교회가 이단입니까? 두고 보자 이겁니다. 기성교인들은 우리보고 가지가 다르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끝이 다른 것이 이단이 아닙니까?
이제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실 것이냐? 한편은 철회해 버리고, 한편은 선택해야 됩니다. 이러기 위해서 선민을 불러야 됩니다. 하나님이 선민을 부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시느냐? 악한 세상에 숨겨 주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빼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아도 불러내신 것입니다.
참이 참되기 위해서는 거짓된 세상에서 참으로 인정을 받아야 됩니다. 사탄도 ‘옳습니다. 당신의 아들은 참입니다.’ 하고 인정할 수 있어야 됩니다. 참으로 인정받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참이 참으로 결실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섭리를 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선민을 불러내시는 하나님은 언제나 고생하는 자리, 언제나 맞는 자리, 언제나 비참한 환경,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아! 나는 싫어.’ 하고 후퇴할 수 있는 입장에 세워 가지고 선민을 빼내는 것입니다. 그냥 빼내면 되겠습니까? 모두가 손을 저으며 ‘아이고, 난 싫어.’ 하는 자리에서 빼낼 수 있어야 됩니다. 완전 부정할 수 있는 입장에 세워 놓고 빼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리를 통하지 않고는 선민권을 만들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노아로 하여금 인간 세상에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방주를 120년 동안 아라랏산에다 지으라고 하셨습니다. 이것 참 근사한 명령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얼핏 생각해 보면 미치광이 중에도 미치광이 같은 명령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빨리 세상과 절연하고, 빨리 세상을 부정하고, 빨리 세상과 떨어지게 하기 위해 그런 자리에 몰아넣으시는 것입니다. 알고 보면 하나님은 참으로 멋진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믿고 따랐고, 최후에는 십자가를 짐으로 승리하셨기 때문에 메시아가 되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세상을 부정하는 자리에 세우시는 것이 하늘의 선민을 선택하기 위한 방법인 것입니다.
노아가 120년 동안 방주를 지을 때 미친 짓 한다고, 미친 영감이라고 소문이 나고 핍박을 받았을 것입니다. 맨 처음에는 가까운 친척이 반대했을 것이고, 점점 확대되어 사돈의 팔촌까지 반대했을 것이고, 나중에는 전체가 조롱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민족이 잘려 나가고, 종족이 잘려나가고, 먼 친척들이 잘려 나가고, 사촌 삼촌까지 잘려 나가고, 그래서 결국 줄이려야 줄일 수 없는 무리만이 남게 되었는데 그 무리가 바로 자기 식구들입니다.
노아의 부인도 얼마나 반대했겠는가 생각해 보세요. 노아는 부인으로부터 많은 반대를 받았을 것입니다. 이런 내용은 성경에는 없습니다만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세요.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 앞에 온갖 정성을 다했습니다.
이제까지의 역사를 보면 악이 선을 쳐 나왔습니다. 그러나 선도 악을 쳤습니다. 왜냐하면 먼저 악이 선을 쳤기 때문에 반대로 선이 들고 일어나 악을 쳤던 것입니다. 이게 바로 공의의 법도입니다.
노아는 만민이 반대하고 조롱하고 핍박하는 입장에까지 들어갔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노아의 편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이 하나도 없는 자리까지 끌고 나갔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노아의 여덟 식구만은 쫓아낼 수 없는 인연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섭리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때가 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죄악 된 세상을 심판하셨던 것입니다. 즉 선이 맞았기 때문에 세 배까지 탕감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악이 선을 침범했을 때는 반대로 선이 탕감을 시킬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악은 손해배상을 해 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사탄이 아무리 뭐라 하더라도 노아가 하늘 편에 섰기 때문에 하나님은 비로소 심판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원칙에 입각해서 선민사상을 지니고 온 이스라엘 민족사를 살펴볼 때, 아브라함도 고향을 떠나 유랑민이 되었고, 이삭도 제물 되었고, 야곱도 하란으로 도망을 가서 고생했습니다. 그리고 모세도 애급에 가서 고행을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배반한 이스라엘 민족은 지금까지 나라 없는 백성으로서 탕감을 받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을 보게 될 때 선민으로 세워지기 위해서는 전세계가 반대하더라도 하늘만을 향해 나갈 수 있는 자리에 서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세계사적인 종말기에 선민권을 완전히 세울 수 있는 어떠한 이념을 갖고 나오는 종교단체가 있다 할진대, 그 종교단체는 이 세계가 쌍수를 들어 반대하는 자리에 서야 된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알겠습니까? 그렇다고 그 종교단체가 통일교회만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여기에서 말하는 이 사람도 지금까지 40여년간 반대받고 감옥에 잡혀 들어가고 쫓겨다니는 입장에 섰었던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통일교회의 이름만 들어도 머리가 지끈지끈하다고 하는 때가 빨리 오라는 것입니다.
기성교인들은 통일교인들을 제일 미워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도 내 집안 식구가 원수라고 했지요? 하나님을 믿으면 식구가 되고 형제가 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을 열 형제가 팔아먹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오늘날 기성교회가 통일교회를 내쫓고 있는 것입니다. 한집안 식구나 마찬가지인데도 불구하고 수많은 교단들이 오늘날까지 통일교회를 죽을 자리에 내몰고 있습니다.
반대를 제일 많이 받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가까이 설 수 있고, 반대를 제일 많이 하는 사람은 사탄 편에 가까이 서는 것입니다. 이러한 원칙을 붙들고 오늘날까지 선생님은 통일교회를 발전시켜 나왔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선생님이 기성교회의 목사나 기성교회의 신자들을 원수시하지는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흉년이 들어 굶주리게 되자 요셉의 형제들이 애급에 있는 요셉에게 찾아가 그 무릎 앞에 엎드려 식량을 구하여 요셉과 하나 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끝날이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점점 통일의 세계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앞으로 교회에 메마른 바람이 불어올 것입니다. 이는 교역자로부터 신도 전체가 가을 나뭇가지에 잎이 떨어지듯 떨어져 나가는 입장에 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때에는 심령의 흉년이 든 것을 자인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흉년 과정에서도, 동삼삭(冬三朔)을 지내는 과정에서도 그것을 뚫고 넘어갈 수 있는 생명력을 지닌 완전한 씨, 즉 완전한 진리를 가진 종교가 나와야만 되는 것입니다.
동삼삭을 지내고 나면 반드시 봄날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생명의 씨를 가진 종교는 때가 되면 천지 조화의 법도에 따라 양지를 맞아 새로운 생명체로 출발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즉 새로운 단계로 넘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끝날에는 시련의 폭풍이 불어올 것입니다. 외적인 시련보다 더 강한 영적인 시련의 폭풍이 불어옵니다. 그러므로 그 시련을 이길 수 있는 생명력을 지닌, 참된 진리를 주장하는 종교가 나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는 가을이 오고 겨울이 따라오는 이때에, 새로운 봄을 맞이하여 새로운 싹으로 출발할 수 있는 하나의 천적인 기반을 세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망하게 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봄을 맞이하게 하시기 위해서 시련과 고통의 과정을 거치게 하십니다. 이런 입장에 있는 교회가 바로 통일교회입니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봉화를 높이 들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통일교회(統一敎會)의 ‘통’ 자는 ‘거느릴 통(統)’ 자입니다. 우리가 이런 이름을 갖고 있는 것은 의미가 큽니다. 그래서 우리는 휩쓸고 들어오는 사망의 물결을 밀어내고, 생명의 힘으로 모든 동삼삭(冬三朔)을 극복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새로운 봄을 맞아 결코 침범당하지 않는, 천리를 대표한 하나의 핵심적인 교단으로 만들어 놓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통일교인의 사명인 것입니다. 새해를 맞아 여러분은 이것을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요셉이 자기를 죽이려 했던 형제들을 용서하고 환영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그렇게 할 때가 올 것입니다. 우리를 반대하던 자들이 통일교회에 와서 그 무엇을 나누어 달라고 할 때가 반드시 올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들을 사랑으로 품어 주어야 합니다. 요셉이 원수와 같은 형제들을 칼로 복수하지 아니하고 사랑으로 용서해 준 것처럼 한 아버지의 같은 아들딸이요, 같은 혈족임에 틀림없는 그들을 사랑으로 품어 주어야 합니다.
천지의 대주재 되시는 하나님은 공의의 법도를 중심삼고 천지를 주관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아무리 악한 사탄도 부모의 자리에 계시는 하나님을 침범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요셉은 부모를 중심삼은 같은 형제들이요, 부모가 사랑하는 형제들이기에 그들을 칠 수 없다는 심정 기준을 가지고 부모 편에서 그들을 대해 주었기 때문에 효자 중의 효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통일교회는 그러한 아량을 가지고 기성교회를 위해 주어야 되겠습니다. 선생님은 기성교회의 어떤 목사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언젠가는 그들이 우리 통일교회로 찾아올 것입니다. 그런 한 날이 올 것입니다.
역사의 목적은 외적인 발전이요, 종교의 목적은 내적인 발전입니다. 오늘날 이 세계를 하나님이 발전시켜 나온 것은 무엇 때문이었느냐? 외적으로 하나의 목적의 세계를 준비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살림살이의 발판을 닦아 나오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기 전에 무엇을 창조하셨느냐?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만물의 주관주로 세워진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이 만물을 잃어버렸으니, 인간은 하나님 앞에 배반자의 위치로 떨어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온 세계가 하나님 품에 안길 수 있는 외적인 기준을 다시 세워 나오는 섭리를 해 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섭리해 오신 정치, 경제, 문화를 중심삼은 사회의 발전이며, 역사의 발전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의 목적을 위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아직까지 인간들이 몸과 마음이 완전히 하나된 적이 없었습니다. 몸과 마음이 완전히 통일된 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외적인 기준을 닦아 나오셨고, 이제 세계적인 통일 형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내적으로 종교의 이념을 통하여 내적인 기준을 닦아 오셨습니다. 종교는 외적인 것을 제거해 버리고, 이 세상과 접촉하지 않은 자리에 서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로 통일되는 기준을 세워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서로 흡수되고 통합되어야 합니다.
오늘날은 기독교를 중심한 4대 종교권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외적인 면에서 점점 통일되어 가므로 내적인 면에서도 통일될 수 있는 기대(基臺)를 갖추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하자는 것이냐? 하나로 만들자는 것입니다. 본래 하나이던 것이 타락하여 둘이 되었으니 다시 하나로 만들자는 것입니다.
한 분의 하나님께서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인간을 창조하시어 출발했는데, 인간이 타락하여 두 목적을 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역사 발전을 거쳐 가지고 본래의 하나의 목적을 지향하는 모습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선민의 인연을 통해서 선민권을 이루어 하나로 통일시켜 가지고 본연의 기준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완전한 사람으로 출발하는 역사가 되지 못했으니, 악한 사람을 심판해 가지고 완전한 사람을 다시 출발시키고 새로운 세계와 새로운 천주(天宙)를 출발시켜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외적인 만물을 먼저 창조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외적인 섭리부터 해 나오셨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비해서 내적으로 종교를 발전시켜 나오셨습니다. 그런데 모든 정치 세계는 싸우면 싸울수록 망했지만, 종교는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양심이 이랬다저랬다 합니까? 양심은 언제나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종교는 하나의 목적을 중심삼고 천륜의 방향을 따라 내적 분야를 책임지고 나오기 때문에 망할래야 망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종교 역사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세계는 변하는 역사 과정을 거쳐서 하나의 목적의 세계를 향해 발전되어 나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발전된 것이 오늘날의 현세입니다. 하나의 목적 세계를 이룰 수 있는 시대가 이때라는 것을 알게 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내적으로 통일된 방향을 갖추어 가지고 모든 것을 수습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의 목적을 지향하는 하나님의 섭리적인 입장에서 볼 때, 이 시대는 통일교회가 나오지 않으면 안 되는 역사적인 시대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통일 종교인 통일교회가 역사적인 귀추로 보아 꼭 이 땅에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이냐? 세계를 대신하여 통일의 기원을 마련하여 통일된 인간으로 완성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통일된 목적을 이룰 수 있는 새시대를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세계는 사랑을 중심삼고 출발하는 세계입니다. 이것이 섭리의 개관인 것입니다.
오늘날까지 몸과 마음이 싸우고 하나되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로, 종교와 과학은 합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끝날에 가서는 완전히 합해야 됩니다. 그러나 과학이 중심이 아니라 종교가 중심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도 역시 외적인 몸이 중심이 아니라 내적인 양심이 중심입니다. 그래서 양심의 도리를 세워 나오는 종교의 이념으로 세상을 지배하는 때가 와야 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거기에 이의 없지요?
그와 같은 세계가 이루어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세계는 하나님의 목적을 이룬 세계이니 거기에서부터 하나님의 사랑이 나오는 것입니다. 만약 정성들여 만든 물건이 원하는 대로 다 되었다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동네방네 소문을 내고 싶고, 또 그 물건이 그 나라의 대표적인 걸작이라면 세계에 자랑하고 싶을 것입니다. 사랑은 바로 여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사랑은 목적을 이루는 데서부터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남자와 여자가 사랑할 수 있는 것도 남자와 여자의 목적을 이루는 데서부터 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도 인간의 목적이 이루어지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지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종교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양심은 몸이 악한 행동을 할 때 ‘야, 잘한다, 잘한다.’ 고 합니까? 안 합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양심은 언제나 ‘선해라, 인간의 도리를 지켜서 행동하라’ 고 명령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양심이 원하는 대로 하면 마음은 어떨까요? 마음이 좋아요, 나빠요? 「좋습니다.」 왜 좋습니까? 좋은 보따리가 툭 튀어나와서 그렇습니까? 또 양심이 원하는 대로 안 하면 괴로워요, 즐거워요? 괴롭지요? 그것은 모두가 공통으로 느끼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만민을 대하여 구원섭리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양심대로 하면 왜 좋으냐? 그것은 하나의 목적을 향해 따라가기 때문에 좋은 것입니다. 우주의 운세는 어디로 향하여 움직이느냐? 큰 것 작은 것 할 것 없이 모두가 하나의 목적을 향하여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천운에 의해 일어난 그 모든 사연도 알고 보면 그 목적을 협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자석 주위에 쇠붙이가 있으면 자석은 쇠붙이를 끌어당기게 되어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천리의 공법이 있으면 모든 것은 그것을 향해 움직여 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의 목적을 향해 나가는 것은 변하지 않습니다. 변하는 것은 이러한 방향을 떠난 입장입니다.
여러분이 바라는 목적이 이루어지면 마음이 기쁩니까, 괴롭습니까? 여러분이 무슨 일을 할 때에 마음이 원하는 대로 그 일이 되면 기분이 좋지요? 왜 기분이 좋습니까? 그것은 자기의 마음을 중심삼고 마음이 원하는 가치에 접근하여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점점 더 가까이 갈수록, 여러분들은 그 목적 기준에 해당하는 마음의 기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의 운세는 천륜의 대목적을 향하여 움직여 나가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양심도 하늘의 운세와 접붙일 수 있는 자리에 있기 때문에 천륜을 따라 나아가는 것입니다.
열이면 열만큼의 목적을 갖추어 나가야 하는 인생의 목적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 열의 기준에서 아홉도 이루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여러분, 일이 실패하게 되면 마음이 섭섭합니까, 섭섭하지 않습니까? 섭섭한 것은 자연적인 법도에 의해서 작용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 우주의 목적권 내에서 완전 후퇴하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존재 가치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존재 가치가 없어지면 이 우주의 공법은 파멸하는 것입니다.
좋고 나쁜 것이 모두 어디에서 판단되느냐? 인간의 양심 작용에 의해 선의 목적관을 중심삼고 그 가치 기준에 따라 좌우되는 것입니다. 어떠한 가치를 추구하는 분야에 동참할 수 있는 양이 커질 때는 마음이 기뻐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참했던 그 선의 자리에서 후퇴할 때에 그 양이 크면 클수록 마음의 고통은 큰 것입니다. 여러분, 병이 생기면 왜 아픕니까? 병이 생기면 왜 아파요? 아픔을 지닌 보따리가 터져 나오기 때문입니까?
여기서 우주의 표준이 나오는 것입니다. 우주는 완전을 중심삼고 주고받는 법도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 안 된 그 자체는 우주의 공리에 불합격한 자입니다. 불합격자는 공리의 법도에 의해 제거당해야 됩니다. 제거당할 수 있는 분량이 많으면 많을수록 우주의 힘이 그것을 밀어내는 것입니다. 그러니 병이 생기면 아픕니까, 안 아픕니까?
이것을 볼 때에, 자연적으로 끝날이 되면 이 세계는 하나의 통일세계가 된다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통일이 언제 어떻게 이루어지겠는가 하면서 절망 상태에서 낙심하면 안 됩니다. 이 우주는 완전히 하나의 목적에 부합 될 수 있는 방향을 갖추어야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양심대로 해야 되겠습니까, 안 해야 되겠습니까? 양심대로 하는 것은 선하기 위해서입니다. 선하면 어떻게 되느냐? 하나님의 목적의 세계로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의 세계에 가서는 무엇을 할 것이냐?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러면 인생의 최고 목적은 무엇이냐? 타락한 인간에게 있어서 최고의 소원은 무엇이냐? ……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는 이 말씀은 참으로 좋은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이 여기에 대한 완전한 내용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선한 것은 우주가 보호하고 육성합니다. 자유와 해방과 평화가 깃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정성이 같이하기 때문에 인력(引力)이 생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양심이 작용을 하게 될 때에 무섭습니까, 무섭지 않습니까? 천하에 무서운 것이 없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권세가 있다는 것입니다. 선은 이 우주가 보호 육성하고, 자유와 평화가 깃들어 있고, 생명과 권세가 같이하는 것입니다. 이를 굴복시킬 수 있는 것은 천지에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 이의 있습니까? 선하게 될 때에는 대통령이 무섭지 않습니다. 어떠한 육법전서가 적용된다 하더라도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형법이 많다 하더라도 그 법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 법은 양심의 기준을 통과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즉 세상 법은 선의 권한을 침범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선의 권한은 누구만이 주관할 수 있느냐? 그것은 절대자이신 선의 주인만이 주관하실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나쁜 것이 선을 주관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 국가 법을 가만히 보세요. 무엇 하지 말라는 것 아닙니까? 무엇을 하게 되면 형법 몇 조에는 콩밥, 몇 항에는 몇 년 징역 하면서 벌을 내리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악은 무엇입니까? 선은 자유와 해방이 깃들어 있고, 우주가 보호 육성하는 것이며, 세계와 더불어 권한과 권세가 함께 하는 것이지만, 악은 제재를 받는 것입니다. 우주의 공의 앞에 제재를 받아야 되고, 국가의 제재를 받아야 되고, 전체 사회의 제도 앞에 제재를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 악을 환영하는 존재는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우주에서는 악이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의 법은 제재의 법도입니다. 대한민국 헌법을 가만히 보십시오. 마음이 좋은 할아버지가 있을 때 상금을 주라고 법에 되어 있습니까? 타락한 세상에는 선에 대한 보상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없어야 됩니다. 만약 있으면 하나님이 할 일이 없어집니다.
최후에 공의에 의하여 심판받는 날이 오면 어떻게 되느냐? 하나님은 악의 법을 치워 버리고 선의 법을 세우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는 선한 사람에게 상금을 주는 시대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악한 세상에서 배척을 당하고 슬픔을 당하더라도 선한 법과 가치를 중심삼고 일을 해야 됩니다. 그러면 언젠가는 선의 복지에서 천법, 즉 천적인 헌법을 중심삼고 선에 대한 보상을 정한 법이 생겨날 것입니다. 천리의 공의에 따라서 그런 법이 나와야 할 세계가 바로 지상천국인 것입니다. 지상천국이 이루어질 때에 여러분들은 보상을 받을 것입니다.
악한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양심이 있습니다. 그들도 이와 같은 근본적인 법이 있다는 것을 조금이나마 알고 있습니다.
통일교회는 앞으로 선한 법을 만드는 운동을 해야 합니다. 선한 사람들이 다 한데 모여 국제적인 법을 만들어 선한 사람, 선한 일을 한 사람에게는 개인별로 선정해서 상금을 주는 그런 시대가 와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악은 제재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선은 보호 육성하고, 자유와 해방이 깃들어 있으며, 진리가 영원히 같이하는 것입니다. 인류에게 희망이 깃들게 하고 천국을 이루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대응할 수 있는 권한이 생기고, 하나님과 동석할 수 있는 권한이 생기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다 분야가 있는 것입니다.
악은 제재를 받는 것입니다. 제재를 받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악은 없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악에는 평화와는 반대로 불안과 공포가 있는 것이며, 생명 대신 사망의 권세가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죄를 지어 지하실이나 천 길 땅 속으로 숨어 들어간다고 해서 마음이 편합니까? 악이 만일에 선을 침범했다가는 선에게 손해배상을 해 주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선은 악을 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이래도 믿어야 되고 저래도 믿어야 되는 것이 선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양심은 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악은 언제나 선에게 두들겨 맞습니다. 만일에 악이 선을 쳤을 때는 몇 천만 배의 손해배상을 해 주어야 됩니다. 천도를 가지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게 한 것도 악이 선을 친 것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손해배상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망하여 없어진 것입니다. 유대인이 독일의 히틀러에게 600만 명이 학살을 당한 것은 예수님을 죽인 죄에 대한 보상인 것입니다.
오늘날 이 세계가 고통을 받는 것은 전부 다 악이 선을 친 데 대한 보상입니다. 그 보상의 대가를 결정하는 공판날이 바로 대심판의 날입니다. 어서 이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은 싫습니까? 선생님이 욕을 많이 먹고 있기 때문에 심판을 적당히 했으면 어떻겠느냐고 하면 여러분은 아마 싫다고 할 것입니다.
타락한 세상을 하나님이 함께 할 수 있는 권내로 발전시켜 나오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기독성도들이 학살을 당해 나왔습니까? 죽고 죽고 또 죽으면서 악의 대가를 치르면서 오늘날까지 복귀하여 나온 것입니다.
선한 자리에서 악을 치면 결과는 악이 아니고 선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악을 행하는 자를 치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그 악을 용서 없이 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악이 망할 때마다 그만큼 여러분들은 선의 공적을 쌓게 되는 것입니다. 악이 세계를 망하게 하기 때문에 악을 친 행위에 대한 보상으로 세계사적인 승리의 상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여러분은 선악에 대한 기준을 확실히 해야 됩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제재를 받고 있습니까? 그것은 안 좋은 일입니다. 제재를 받는다는 것은 ‘너는 망하는 길로 들어간다.’ 하는 경고를 받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들딸들을 먹여 살리는 데 돈이 그렇게 귀합니까? 자기 생명과 자기의 모든 것을 투입해도 아들딸과는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그 귀한 아들딸을 대우주의 목적 앞에 지극히 깨끗한 선물로 바쳐야 합니다. 깨끗이 정성들여 키워야 합니다. 그런데 도둑질해서 먹여 살려요? 그것은 사랑의 법도를 유린한 것입니다. 목적의 세계에 남아질 수 있는 사랑의 법도를 유린한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정성들여 깨끗이 키워야 할 자녀를 뇌물을 받아 가지고 키워요? 나중에 그 후손은 부모를 원망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자식을 위해서는 정성이 통할 수 있는 자리에서 키우고 보호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법도가 있기 때문에 우주는 그러한 무리들이 남아질 수 있는 역사 세계로 발전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종교가 지향하는 선의 자리로 나가는 것이 바로 사탄 앞에 승리하는 것입니다.
악과 선의 방향은 어떻게 틀리느냐? 선은 언제나 절대자이신 하나님을 중심삼고 상대적 입장에 서는 것이며, 악은 자기를 중심삼고 주체적인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선한 것은 무엇이냐? 나를 희생시켜서 전체목적 앞에 플러스되게 하는 것이 선입니다. 그러면 악은 무엇이냐? 전체를 나에게 끌어당기게 하는 것입니다. 선과 악은 방향이 다른 것입니다. 몸은 전부 자기가 원하는 것만 하려고 하고 마음은 전부 몸이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방향이 다른 것입니다.
개인주의 사상은 천지간에 용납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개인주의 사상은 종말에는 다 처량한 운명에 봉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처자도, 부모도, 종족도, 국가도 다 잃어버리는 단계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나 하나를 중심해서 나아가는 것은 끝날에 다 정비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주의 원칙으로 볼 때 악은 반발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양심은 항상 이 악에 대해 말할 수 없이 반대하는 것입니다. 선은 항상 악을 배척하는 것이며, 이것은 자연의 이치입니다. 여러분은 악과 선의 방향이 확실히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불쌍한 사람을 보면 ‘야, 아무개야! 너 이 사람 동정해야지.’ 하고 마음이 명령하지요? 그렇게 하라 그래요, 하지 말라 그래요? 그렇게 하라고 하지요? 이런 불쌍한 사람, 혹은 어려운 사람을 보면 마음은 도와주라고 합니다. 그러면 하루에 한 열 사람쯤 도와줬다고 해서 양심이 ‘그만큼 했으면 됐다. 이제 쉬도록 해라.’ 그럽니까? 양심이 그럽니까, 안 그럽니까? 양심은 그러지 않습니다. 양심은 고집이 셉니다. 대한민국 삼천만 민중 앞에 좋은 일 했다고 양심이 쉬라고 그래요? 그러지 않는다 이겁니다. 양심은 더 나아가 30억 인류를 위해 좋은 일을 하라고 명령하는 것입니다. 30억 세계 인류를 위해 좋은 일 했다고 양심이 쉬라고 합니까? 양심은 또 하라고 명령합니다.
인간은 이 인생의 목적을 잃어버리고 타락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몇천 년 먼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습니다. 갈 길은 먼데 몸이 처하고 있는 곳이 선의 자리와는 한없이 먼 거리에 있으니 양심이 쉬어 가라고 명령하겠어요? 명령하겠느냐 말입니다. 양심은 본연의 가치, 본연의 위치가 어디인지 알기 때문에 그곳을 그리워하고 그곳으로 계속 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몸뚱이가 현실에 머물러 양심이 갈 길을 가로막고 있으니 자꾸 선한 일을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본래 인간이 이 우주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이 온 우주를 품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인연을 맺어야 합니다. 인연을 맺지 않고서는 목적을 달성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삼천만 민족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인연을 중심삼고 연결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목적이 달성되는 것입니다.
양심은 이 우주의 대목적을 달성할 인연을 중심삼고 있기 때문에 몸을 자꾸 몰아치는 것입니다. 몸은 양심을 따라 한국과 세계를 거쳐서 하늘땅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 목적점에 나가서 무엇을 할 것이냐? 몸이 그 목적점에 도달했다고 양심이 ‘이제 됐다. 그만 쉬도록 해라.’ 그럴 것 같습니까? 양심은 또 목적을 세워 놓고 나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점령하게 합니다. 하나님을 점령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고들 합니다. 땅보다도 넓고 하늘보다도 높은 것이 사람의 욕심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 모르는 말입니다. 사람의 욕심의 끝이 되는 것이 양심입니다. 그러므로 양심은 그 목적하는 바가 우주의 목적 기준에 서야 되고 우주의 목적을 달성하는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양심은 하나님을 점령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점령하면 양심이 ‘이젠 정말 됐다. 쉬어라.’ 하고 말할 수 있겠어요? 그렇지 않습니다. 또 할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그 목적을 달성하고 나서는 하나님 가슴속에 있는 사랑을 점령해야 합니다.
여러분, 부잣집의 사위가 되려면 부잣집 할아버지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되는데, 그 방법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그 할아버지의 하나밖에 없는 사랑을 몽땅 점령하기만 하면 그 부잣집 아가씨는 자기 색시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가씨의 재산도 자기 것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겁니다.
양심은 명령합니다. 이 우주의 목적을 점령했다고 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점령하고서 쉬는 것이 아니라, 최후에는 하나의 목적을 완성하여 천주를 지배할 수 있는 자리에서 하나님 가슴속에 묻혀 있는 사랑을 점령하라고 명령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주의 새로운 이상세계가 출발하는 것입니다. 양심은 그것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그 목적의 세계와 하나님과 나중에는 하나님의 사랑까지 점령해야 된다는 것을 목표로 해서 여러분을 재촉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 점을 꼭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양심이 고맙습니까, 고맙지 않습니까?
우리 인간에게는 잃어버린 이것을 필시 찾아야 할 행로가 있기에 70, 80년의 일생은 너무 짧은 것입니다. 40년, 70년, 100년을 사는 인생행로를 거쳐서는, 정상적인 생활 터전을 가지고는 갈래야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그것을 무시하고 독재를 해서라도 한 달에 10년, 일년에 100년만큼의 실적을 쌓을 수 있는 자리로 내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으로 갈 수 없는 먼 곳에 떨어진 인간이기 때문에 여러분의 양심은 여러분을 쉴 새 없이 내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종교는 그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것이 종교의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종교는 하나님을 믿어라, 하나님의 뜻을 알아라, 새로운 목적을 가져라, 새로운 천국을 향해라 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으되 그 중에 제일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랑으로 말미암아 천지의 법도가 나와서 이 세상을 바로잡아 나가는 것입니다. 잘못 돌아가는 이 세상을 바로 돌아가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정상적인 본연의 법도를 따라 새로운 천지의 운세가 이 지구성(地球星)에 깃들게 되는 그때가 바로 주님이 오시는 때입니다. 주님을 맞이하여 목적의 세계에서 즐길 수 있는, 평화의 노래로 행복을 만우주 앞에 드높이 자랑할 수 있는 그 생활이 바로 천국 생활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심판은 무엇을 중심삼고 하느냐? 그것은 하나님의 목적과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한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심판의 목적은 어떻게 해야 이루어지느냐? 선과 악의 세상 속에서 악을 제거하고 선을 증진시켜서 하나의 목적이 완결될 수 있는 그 기준에 가야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외적 세계의 목적도 이것이요, 내적 세계의 목적도 이것입니다. 외적, 내적 소원도 하나님을 중심한 하나의 목적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전체가 하나의 공동 목적을 이룰 수 있는 기준이 벌어짐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하나의 마음이 몸을 주관하는 것을 통감하는 우주사적인 승리의 인간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양심이 몸 앞에 제재받던 그 제재권을 벗어나서 양심이 몸을 절대적으로 주관하는 인간이 나와야 합니다. 이런 인간이 승리의 왕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이 천국의 왕자와 왕녀의 가치로서 이 우주를 주관할 수 있는 만물의 영장이라는 자격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통일교인은 어떠한 존재가 되어야 하느냐? 우주의 목적을 찾아가야 합니다. 우주의 목적을 찾아가려면 방향을 일치시켜야 합니다. 알겠어요? 방향이 다르면 못가는 것입니다. 목적을 향하여 따라나선 사람들은 방향이 같아야 됩니다. 여러분들은 서로 손을 잡고 같은 방향을 향하여 나가야 됩니다. 방향이 문제가 됩니다. 다시 말하면 사정이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봄 절기에 계시는데 가을 절기에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지금 길을 가고 계시는데 쉬어서야 되겠습니까? 그것은 사정이 다른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심정을 일치해야 됩니다. 하나님은 슬퍼하시는데 기뻐해서야 되겠습니까? 심정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목적을 중심삼고 나오시기 때문에 과거의 하나님, 현재의 하나님, 미래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의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이었는가를 알아야 됩니다. 과거의 하나님의 방향이, 사정이, 심정이 어떠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현재의 하나님의 목적, 방향, 사정, 심정을 알고 미래의 하나님의 목적, 방향, 사정, 심정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만 통과하면 인간은 자동적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통일교회에서는 무엇을 가르쳐 주느냐? 섭리적인 면에서 과거의 하나님, 현재의 하나님, 미래의 하나님의 목적과 방향과 사정과 심정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목적은 이념의 완성을 말하고 방향은 행동을 말하는 것으로 목적과 방향은 서로 일치해야 되는 것입니다. 또한 사정은 생활을 말하는 것이며, 심정은 통하는 것을 말합니다. 통일교회는 이 4대 원칙을 내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이념 통일, 행동 통일, 생활 통일, 심정 통일 이 네 가지만 잘하면 틀림없이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는 것입니다.
통일교회는 이것을 가르쳐 주자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통일교회가 지향하는 필수 요건이 어떤 것이라구요? 바로 이념 통일, 행동 통일, 생활 통일, 심정 통일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필수 요건입니다. 그 동안 여러분은 멋모르고 이념 통일, 행동 통일, 생활 통일, 심정 통일을 외치고 나왔지요? 이 4대 요건을 완전히 알아야 합니다. 알았지요?
아담이 완성하여 효자가 되었어야 할 입장, 예수님이 뜻을 완성하여 역사적인 대표자가 되었어야 할 그러한 입장을 우리는 복귀해야 합니다.
선생님이나 여러분이나 효성을 다해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담 대신 효성을 다해야 할 것은 물론, 선민의 중심 되는 종족으로서의 사명을 다해야 합니다.
12사도는 역사적인 실수를 탕감해야 합니다. 선생님은 새로운 사명을 가진 사람을 중심하고 섭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기성교회와 연결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새로운 사명을 가진 사람들이 횡적인 탕감조건을 세웠으면 지금은 세계적인 기대를 이루었을 것입니다.
선생님은 새로운 시대적 사명을 가지고 나왔던 교단들을 복귀하는 기준을 찾아 세워야 했던 것입니다. 선생님이 다른 교단들을 찾아갔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다시 수습하여 재편성해 왔습니다. 그것이 1960년 전까지의 역사입니다.
성혼식에서부터 싸우는 어려운 고비를 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아브라함… 등 선조의 잘못을 복귀한 조상의 입장에 서 있습니다.
아담의 타락과 선생님의 고생이 하늘의 설움입니다. 여러분이 아담과 예수님을 대신하여 해원한 입장에 서야만 재림 기대가 공고해지게 됩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모실 수 있는 영광과 터전을 마련해야 됩니다. 여러분을 승리의 존재로 내세울 수 있어야 합니다.
축복가정들은 복귀섭리에서 하나님이 중심가정으로 세웠던 가정들을 대신한 입장에서 그 가정들의 설움을 자신들의 설움으로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한을 풀고 재림주를 탄생시킨 입장에 서야 합니다.
선생님은 완성한 부모, 여러분은 복귀된 부모의 입장에 서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복귀된 세례 요한 가정의 입장입니다. 나 몰래 정성을 들이기 바랍니다. 교회가 성지이니 교회에서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축복가정들은 매월 백 원씩이라도 지방에서 전도하는 식구들에게 보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선생님의 명령입니다. 이것을 조건으로 하여 물질적인 축복이 돌아옵니다. 그러므로 정성들여 보내야 합니다. 선생님은 외국 식구들에게 보내지 못하는 것이 한입니다. 주지 않고는 받을 수 없습니다.
7년노정을 지나서 국가가 따르는 권내로 들어가게 되면 국가는 소생, 여러분은 장성, 선생님은 완성 가정권 내로 들어갑니다.
가정에 아기 보는 사람을 두는 것이 아닙니다. 식모가 주인보다 더 하늘에 충성하면 그 가정은 걸리게 됩니다. 교회에서 생활하고 있는 독신 부인들은 모두 나가서 전도하고 교회에는 가정만이 살아야 합니다.
<성석 봉헌기도 요지> 40개국의 120개 성지에서 가져온, 하늘땅 전체를 상징하는 돌과 흙들을 봉헌하오니 그 나라의 전체를 봉헌하는 조건으로 세워 주시옵소서. 이 식을 행함으로써 모든 권세는 하늘 편으로 모이고 사탄 세계의 권세는 무너져 들어가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봉헌기도 후 말씀> (서울 각 지역에 일금 천 원씩을 하사하시며) 이것은 선생님의 이름으로 저금하는 것과 같은 입장에서 저금하기 바랍니다. 매월 최소한 12명 이상이 여기에 저축하되 찾아 쓰지는 못합니다.
저금하지 않고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지역장이라도 저금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이것으로써 세계적인 재물 복귀의 기준을 세우는 것입니다. 이것은 벌써 선생님이 세계 순방시부터 세계적인 운동으로 실시했습니다.
영원의 아버님, 당신의 거룩하심과 지존하심이 영원무궁토록 만민과 만우주와 더불어 찬양받게 하시옵소서.
오늘 1966년 3월 13일, 성일을 맞이하여 흩어졌던 자녀들이 아버지의 존전에 모였사오니, 모자라는 저희의 모습들을 긍휼히 여겨 주시옵고, 부족한 자체들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넓고 크신 심정으로 저희들을 어루만지사 분부하시고 권고하시고 운행하시어서 다시 펴시고 싶은 본연의 뜻을 이 자리에 나타내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부탁드리옵니다.
일주일을 지내는 동안 당신의 영원한 뜻 앞에 배치되는 일들이 얼마나 많았사옵니까? 저희들 그것을 자각하면서 이 시간 존귀하시고 엄숙하신 당신의 생명을 흠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연약한 자신들을 당신 앞에 맡기오니 받아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 쓰실 부분이 있으면 가꾸어 아버지의 존전에 헌납하게 하시옵고, 합당치 못한 부분이 있거든 제거시키시옵고, 원치 않는 부분이 있거든 마감하시어서 아버지의 뜻 앞에 합당한 내용의 개체만이 남도록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저희의 몸을 저희 자신의 몸이라고 주장하면서도 아직까지 본성이 요구하는 대로 몸을 갖추지 못한 것을 용납하여 주시옵고, 저희들 자신을 내세워 주장하면서도 본의의 나와 하나되지 못한 것을 용납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자비의 아버지께서 다시 한번 펼쳐 주시는 재창조의 손길이 저희의 사정과 환경 가운데 나타나시사, 아버지께서 소망하시고 그리워하시던 본의의 자세를 갖춘 아름다운 모습으로 화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도 삼천리 방방곡곡에서 외로이 무릎을 꿇고 당신 앞에 간곡히 호소하고 있는 수많은 당신의 자녀들이 있사오니 그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그들의 소원이 당신의 뜻과 일치하고 그들의 싸움의 목표가 원수를 굴복시키기 위한 당신의 목표와 일치될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어린 모습들을 몰아내시어 가라고 명령하시던 아버지의 안타까운 심정을 저희들은 알았사옵고, 아버지의 서러움과 고통스러운 사정을 저희들은 배웠사옵니다.
그러나 배운 것만으로 그치는 것이 저희의 목표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지금 저희들은 남모르는 외로운 길을 자진해서 걷고 있사오니 이 발걸음을 거룩하다 하여 주시옵고, 그 움직이는 모습들을 아버지의 자랑으로 세우시어서 만세의 한(恨)인 원수의 도성을 밟고 올라설 수 있는 정병이 되게 권고하여 주시옵기를, 내 아버지여, 간절히 바라옵니다.
그들이 한 많은 마음으로 당신 앞에 애절하게 하소연할 때에는 당신도 마음 졸이시며 그들과 더불어 운행하여 주시옵고, 그들이 품은 뜻이 당신의 뜻과 일치될 때는 그들을 눈물로 품어 주시옵고 동정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그들의 소원이 당신의 소원에서 벗어나지 말게 하여 주시옵고, 그들의 뜻이 당신의 거룩한 뜻을 밟고 올라서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의 소원과 뜻을 대하는 데에 규범이 되고, 뜻의 성사를 위하여 충신의 도리를 다하고 효자의 도리를 다하며 갈 줄 아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도록 인도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날을 당신 앞에 새로운 약속을 전개시킬 수 있는 날로 세워 주시옵고, 당신의 자녀들이 자랑할 수 있고 기뻐할 수 있는 날로 세워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그들이 눈물지으며 민족을 위하여 기도하거든 그 민족을 긍휼히 보시옵고, 그들이 인류를 위하여 기도하거든 인류를 기억해 주시옵소서. 소망의 세계를 위하여 아버지 앞에 사정하던 그 사정을 아버지의 사정으로 대치하여 주시옵고, 오늘의 이 한 많은 역사를 제거시키시어서 소망의 세계를 책임질 수 있는 새로운 무리로서 기억해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여기에 모인 부족한 소수의 무리들이 아버지 앞에 맡은 바의 귀중한 책임을 다할 것을 마음으로 결의하였사오니, 분부하신 역사적인 사명과 책임을 다할 수 있도록 보살펴 주시옵소서. 당신의 인자하신 사랑 앞에 저희들은 몸둘 바를 알지 못하와 부족한 자신들을 책하며 이 자리에 나왔사오니, 이런 저희들을 당신의 품에 품으시어 당신의 울타리로 모으시사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그저 그냥 모인 이 시간이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기를, 나의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도 해외에서 이곳을 바라보고 눈물지으며 기도하는 무리들이 있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뜻을 알게 된 연고로 당신의 일을 위하여 남모르는 곡절 속에서 하늘의 한을 염려하고, 하늘이 남기신 복귀의 터전을 상속하고자 하는 무리들을 기억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그들의 소원은 어떠한 개인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 아니옵니다. 역사적인 하늘의 사정을 풀어 드리기 위해서 당신의 거룩한 뜻을 대신하여 나아가고 있사오니, 이들을 기억하시어서 그들이 가는 곳곳마다 아버지께서 직접 역사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그들이 많은 민족을 아버지 앞에 돌려 세워 하나되게 함으로써 아버지의 뜻을 만방에 떨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선과 악을 판결 짓는 최후의 싸움터에서 승리하여 기쁨을 아버지 앞에 돌려드릴 수 있는, 선민을 대신한 하늘 종족의 대열로 나타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날까지 그들이 흘리는 눈물, 그들이 지키고 있는 성지 성지를, 아버지여, 기억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40여개 국가에 널려 있는 120개의 성지 위에 당신이 기억할 수 있는 새로운 약속의 무리를 세우시어서, 이 땅 위에 최후의 결판을 지을 수 있는 하나의 심판대를 밝히게 하시옵고, 선과 악의 인연을 갈라서 악을 심판하고자 하시는 당신의 뜻을 이 땅 위 온 천주에 나타내 주시옵고, 세계 만민이 가슴 가슴에서, 생활 무대에서 당신의 뜻을 접할 수 있도록 역사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자리에 있는 당신의 자녀들을 굽어살펴 주시옵소서. 이들을 당신의 장중에 장악하시옵고, 그 마음이 당신 앞에 합당치 못한 것이 있다 할진대 모두 제거시켜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하늘을 위하여 충절을 다하겠다고 맹세한 사실을 스스로 유린하는 자들이 되지 말게 하여 주옵시고, 스스로 맹세한 바를 책임 다하지 못했던 것에 대해 이 시간 마음의 가책을 받아 통회의 심정으로 다시금 당신의 손길을 붙들 수 있는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날을 기억하시어 거룩한 날로 세우시옵고, 이날을 택하시어서 비열한 무리들을 책하시어 악은 악대로 처단할 수 있는 최후의 날로 세워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자리에 참석하지 못한 당신의 자녀들이 있사옵니까? 그들의 발걸음이 당신의 뜻을 위하여 가는 발걸음이 되고, 뜻 앞에 충성을 다짐할 수 있는 발걸음이 되게 인도해 주시옵소서. 자기 자신의 부족을 스스로 반성하고 하나의 목표를 위한 사명을 지니고 있음을 절감하면서 아버지 앞에 새로이 맹세하는 그들이 되도록 복을 빌어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짧은 한 시간을 당신이 분부하신 뜻을 따라 드리오니 받아 주시옵고, 이 전부가 당신의 뜻 이외의 것은 나타나지 말게 하시옵고, 오직 당신의 뜻대로만 이루시옵소서.
각자의 몸과 마음을 일체화시키고 전체의 분위기를 완전히 사로잡아 아버님의 영광된 존전에 바치기에 부족함이 없는 이 모임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땅 위의 온 만민과 하늘의 천천만 성도들이 바라보는 소망의 한 터전을 대신하여, 저희들이 만세에 공히 칭찬받을 수 있는 영광의 보좌를 갖추어 아버지 앞에 경배드릴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만세에 당신이 소원하시던 승리의 한 날을 맞이할 그때까지 저희들의 배후에서 동조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오며, 모든 말씀 참부모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였사옵나이다. 아멘.
역사는 돌고 돌아 한 많은 역사로 연속되어 나온 슬픔의 역사인 것을 저희들은 알았사옵니다.
인간 조상의 한 날의 실수가 이렇듯 한 많은 역사의 고빗길을 만들어 놓는 엄청난 동기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사옵니다. 그것이 결과적으로 사망의 물결에 사로잡힌 세계를 만들어 놓았으니 이것을 통탄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오늘 생명을 가진 저희들에게는 이 엄청난 슬픔의 역사를 청산짓기 위하여 생명의 방패를 들고 나서야 할 역사적인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그러한 책임을 다하겠다고 스스로 맹세하고 다짐할 줄 아는 소수의 무리로 저희들이 남아진 것을 생각할 때, 본연의 심정으로 슬픈 마음을 가다듬어 아버지 앞에 감사의 일념을 드릴 수 있게 된 것을 진실로 감사드리옵니다.
흩어진 수많은 인류를 수습하시기 위하여 혼란된 환경을 제거하시면서, 하늘을 배반한 무리들을 몰고 몰아 당신이 뜻하신 본연의 동산으로 이끄시기 위한 당신의 크신 노고를 이 시간 다시 한번 회상하면서, 당신이 흘리신 눈물과 당신의 가슴 아팠던 억울한 사실들을 상속받을 수 있는 당신의 적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땅에 살고 있는 수많은 인류와 역사의 증언자들을 대표하여 나타났던 수많은 종교인들은 당신이 영광의 아버지임을 알았사옵고, 생명의 주체요 권위의 전체를 대신한 아버지임은 알았사오나, 그 내면에 숨겨져 있는 슬픔의 곡절은 알지 못하였사옵니다.
역사상 문화의 유적을 남긴 종교는 많았사오나 당신의 심정과 뼛골에 사무쳐 흐르는 슬픈 역사를 알지 못하는 수많은 종교가 그 문화의 원천이 되어 왔다는 것을 알수록 더 슬프기만 하옵니다. 당신의 한 많았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당신의 아들딸이 없었고, 당신께 충성을 다짐하고 효성을 다짐하며 하늘을 위하겠다고 울부짖고 나서는 무리가 없었던 것을 회상하게 될 때, 아버님, 여기에 모인 당신의 자녀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이들은 지치고 찢기고 상처받은 무리지만 당신을 위하여 그 마음 골짜기에 흐르는 슬픔의 흔적을 보았사옵고, 당신이 흘렸던 눈물자국을 보았사옵니다. 죽음의 골짜기에 내몰고 채찍질하는 무리들을 가로막고 역사적인 원수와 대결하여 싸우기 위한 하늘의 선봉자로 불리움받은 저희 자체들인 것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당신의 애절하신 마음에 접하지 못한 것이 한이었사옵고, 당신의 탄식하시는 마음에 접하지 못한 것이 한인 것을 이 시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돈이 없어서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이 아니었사옵고, 사람이 없어서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이 아니었사옵니다. 다만 당신의 애절한 심정의 인연을 갖춘 자가 없었기에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이었사오니, 이것을 느낄 줄 아는 이 시간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여기 아버지의 존전에 부복한 자녀들이 있사온데, 이들이 당신의 명령하시는 대로 새로운 하늘의 종족으로 나설 수 있는 각오를 갖기 위해서는 당신의 슬픔의 역사를 독차지하여 상속받으려는 새로운 각오와 결의가 없으면 안 되겠사오니, 이 시간 이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폭발되는 감정과 충격을 일으켜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당신이 누구셨사옵니까? 억만세에 뗄래야 뗄 수 없는 저희들의 아버지인 것을 몰랐사옵니다. 당신의 슬픔이 무엇이었사옵니까? 자식을 잃어버리고 역사를 잃어버린 것이 당신의 슬픔이었음을 저희들은 몰랐사옵니다. 하오나 이제 당신의 애절하신 분부의 일념을 따라서 이 자리에 부복하였사오매 진심으로 감사드리옵니다.
역사적인 한이 남아 있는 한 당신의 한도 남아 있사옵고, 역사적인 슬픔이 남아 있는 한 당신의 슬픔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아는 참다운 효자 효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러한 역사의 흐름을 가로막고, 당신 앞에 제단을 쌓는 것을 이 삼천만 민족과 세계의 민족에게 계대(繼代)해야 하는 세계적인 골고다의 길이 남아 있다는 것을 절감하는 당신의 자녀들이 나와야 할 때가 왔사옵니다.
여기에 모인 당신의 자녀들은 오늘까지 누구를 위하여 살아왔사옵니까? 또한 무엇을 바라보고 나가고 있사옵니까? 하늘이 남기신 역사의 전체적인 운명을 책임져야 할 사명이 저희에게 있사옵고 그 사명을 하겠다고 각오하고 맹세하고 나선 저희들의 걸음이었사오니, 주저하거나 도중에서 포기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원수인 악과 대결해서 결코 패하여 무릎을 꿇는 무리가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날도 수많은 민족을 대표하여 아버님의 제단에 부복한 외로운 무리들을 기억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더욱이 삼천리 방방곡곡의 외로운 몰림길에서도 오히려 하늘과 인류를 염려하며 민족의 탄식을 대신하겠다고 몸부림치는 당신의 자녀들이 오늘도 이곳을 추앙하며 눈물짓고 있사오니 그들을 기억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모든 것이 아버님의 슬픈 역사의 인연이었음을 알았사옵니다. 저희들 앞에 남겨진 슬픈 인연과 슬픈 역사가 청산되지 않는 한, 이 길에서도 피하거나 이 길을 피해 가는 배은망덕한 자녀들이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효자의 도리를 배우고 충신의 절개를 배울 줄 아는 참다운 당신의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저희의 마음이 저희만의 것이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고, 민족을 대신하여 새로운 폭탄을 던져 생명의 원천을 이룰 수 있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새생명의 역군이 되어 민족의 황폐한 땅을 밟고 일어나 아버지 앞에 새로운 제단을 만들어 아버지의 영광의 은사를 찬양할 수 있는 무리들이 되도록 인도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이 나라 이 민족을 긍휼히 보시옵소서. 외로운 역사로 눈물의 골짜기를 면치 못했던 분과 한을 품은 민족이옵니다. 그러나 이 민족이 역사적인 승리의 터전을 갖지 못하여 방황하고 몰리고 쫓김받고 밟힌 민족으로서만 끝나지는 않을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그것을 위해서 각자의 마음과 몸을 통하여 역사를 수습하고 세계관을 정립하여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낼 수 있는 역군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하는 통일의 자녀들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그러한 다짐이 오늘의 다짐으로만 끝나서는 안 되겠사옵고, 그 사정이 오늘의 사정으로만 묻혀서는 안 되겠사옵니다. 그 사정과 한을 영광과 기쁨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당신도 스스로 하실 수 없는 한 많은 곡절의 구렁텅이를 제거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절감할 줄 아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날 이 제단을 지켜 주시옵고, 이곳에 당신께서 분부하시고자 하는 새로운 약속의 인연을 세워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시간을 아버님께 드리오니 받아 주시옵소서. 이제 새로운 약속을 다짐하면서 이 1966년, 7년노정을 마무리하는 운명의 고빗길에서 달음질쳐야 하는 저희들 앞에 엄숙한 사명이 남아 있다는 것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벌써 3월의 중반을 지나고 있사온데도 아직도 머뭇거리고 있는 저희 자신을 한탄할 줄 아는 이 시간이 되게 하시옵소서.
흩어진 마음과 몸을 수습하고 흐트러진 제단을 수습하여 당신의 싸움터, 당신의 골고다 길에서 피어린 투쟁의 노정에서 승리하여 부활의 영광을 차지함으로써 아버님의 이름으로 그 위업을 그대로 상속받을 수 있는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옵니다.
남아진 전체를 긍휼히 보시옵고 품어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오며,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였사옵나이다. 아멘.
아버지, 이 시간 친히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명령하시는 아버님의 그 음성을 듣고 생명과 모든 전체를 당신의 존전에 드리겠다며 감사의 눈물을 흘리는 자녀가 이 시간 한두 사람이라도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흩어진 역사의 슬픔을 홀로 체휼하여 탕감함으로써 당신의 마음 앞에 한 순간이라도 위로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자녀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이 기억하시고 당신이 사랑하실 수 있는 자녀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세상적으로 보면 의지할 데 없고 찾아올 자 없는 불쌍한 모습들이지만 한 많은 아버님 앞에 심정의 동반자가 될 수 있는 자들이라는 것을 저희들 마음으로 느끼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 이 제단을 긍휼히 보시옵소서. 아버님께서 동정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이 제단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께서 숨기고 계셨던 그 심정을 터뜨려 놓고 눈물과 더불어 사정하지 않으면 안 될 이 모임이 되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저는 그러한 자리를 원하고 있사옵니다. 아버지께서도 그러한 자리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이들도 그러한 자리를 원하며 찾아갈 줄 아는 무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의 마음이 그러하고 전하는 자의 마음이 그러하고, 받는 자의 마음 또한 그러하거든, 아버지께서 이 가운데에 좌정하시어 이들의 생명과 마음과 몸이 화하는 자리에서 당신의 간곡한 사정과 동정의 깊은 인연을 맺게 해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이들이 눈물로써 새로운 맹세를 할 수 있는 역사가 여기서부터 일어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 뭐라고 드릴 말씀 없사오나 이 시간 아버님의 안타까운 사정과 서글픈 심정을 솔직히 전할 수 있게 하시옵고, 아버님이 저희들에게 연결시켜 주시지 않으면 안 될 역사적인 모든 사정을 연결시켜 주시어서, 이 시간 두터운 인연을 맺을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또한 이 시간, 외로운 곳들을 기억하여 주시옵고, 이날이 하늘 보좌로부터 천천만 성도들과 역사상의 수많은 우리의 조상들까지 고대하던 하루가 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한 시간이라도 저희의 몸과 마음을 거두어 아버지 앞에 정성을 다하여 저희들의 생애에 기억될 수 있는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고, 이 안식일에 하늘의 복을 받아 만민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저희들로 세워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이곳을 위하여 눈물 어린 사정과 심정을 가지고 기도하고 있는 무리가 있사올진대 그들에게 빚지는 본부의 식구들이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히려 그들이 진 빚을 덜어줄 줄 아는, 본연의 책임을 다할 줄 아는 떳떳한 본부의 식구들이 되어야 하겠사옵니다.
이 자리가 수많은 민족을 대신하여 이 시간에도 이곳을 위해 애절하게 울부짖으며 기도하는 그 음성들을 들을 줄 아는 사람들이 모인 자리가 되게 하시옵고, 아버지 앞에는 대상으로, 이곳을 위해 지방에서 기도하는 식구들 앞에는 주체로서 그들을 긍휼히 여겨 동정을 베풀어 달라고 몸부림치며 호소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옵니다.
남아진 전체를 아버님이 뜻하신 대로 이끌어 주시옵기를 부탁드리오며, 모든 말씀 주님의 성호 받들어 간절히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말 씀> 오늘 여러분과 함께 생각하려는 말씀의 제목은 ‘복지는 부른다’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 위에 오셨던 본연의 목적이 무엇이냐? 당연히 복지(福地)를 찾아 세우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뿐만 아니라 역사 이래 뜻을 품고 와서 이 땅 위에 흔적을 남기고 간 수많은 선지선열, 위인 열사들도 모두 이 복지를 찾아 나가는 올바른 길을 찾기 위해서 왔다 갔다는 것을 기억해야 되겠습니다.
문화와 역사가 그러한 성인 현철들의 공적을 터전으로 하여 이루어진 것임을 우리는 시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그 문화권 내의 사회에서 생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날의 사회, 국가, 세계가 지향해 나가는 그 전체적인 목표가 어디에 있느냐? 그것 역시 복지를 향하여 나간다고 하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큰 사람이나 작은 사람, 큰 나라나 작은 나라 또는 당대에 권위를 자랑하는 선진국이나 패망하여 처량한 국운을 가진 후진국 모두가 도달하고자 몸부림치는 그 목적은 복지를 찾는 데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숱한 역사의 고빗길에서 숱한 인류가 복지를 찾아가기 위해 몸부림쳤지만, 우리는 아직까지 전인류가 공히 소망하는 복지를 찾았다거나 혹은 그 곳에서 살았다고 하는 사람을 만나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 사람을 만나기는커녕 복지를 건설하기 위한 구호를 세계적으로 들고 나선 무리조차도 없었습니다. 또 이 세상에 복지가 이루어지고 그래서 그곳에서 살게 된다는 것을, 그날이 온다는 것을 아무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게 될 때 과연 어떠한 생활을 하는 것이 복지로 가는 길이며, 우리의 생과 사의 문제와 현실과 미래의 문제를 어떠한 인연으로 복지와 연결 짓느냐 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이 땅과 인간 조상을 지어 놓고 바라시던 엄숙한 소망과 이념이 있었다고 하면 그것은 무엇이었겠습니까? 그것 역시 복지를 이루어 놓고 사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복지의 이념은 창세 전부터 하나님이 가지셨던 이념이요, 창세 당시에 이루시려던 이념이었습니다. 또한 타락 이후 역사를 통하여 섭리해 나오신 하나님께서 인간을 다시 찾아 세우기 위한 이념이었습니다. 역사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 이 복지를 이루기 위하여 인간은 얼마나 공을 세웠으며, 하나님은 얼마나 애쓰셨는가 하는 것을 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지어 놓고 소망하시기를 온 지구성(地球星)이 하늘과 합하여져 하나님이 안 계실래야 안 계실 수 없고, 악이 존재할래야 존재할 수 없는 영원한 복지가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복지의 행로를 개척해야 할 과정에서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서러운 한 날을 만들었으며, 그 이후 이 세계는 본래 지향하던 본연의 세계와는 반대되는 곳으로 떨어져 나갔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부정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면 그 복지를 잃어버린 장본인은 누구였던가? 바로 우리의 조상 아담과 해와였습니다. 그들이 타락한 연고인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복지를 다시 찾기 위해서 아담이 타락하기 전의 입장으로 어떻게 복귀하느냐 하는 것이 우리가 먼저 해결해야 할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아담이 복지를 잃어버린 동기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할 수 있는 대행자가 되지 못했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을 대신하여 복지의 주인공의 입장에서 만우주를 품을 수 있는 심정의 주체가 되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이 타락이란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새로운 법도를 세울 수 있는 하나님의 참된 말씀을 잃어버리고, 그 법도를 지키고 따르며 행할 수 있는 사람이 되지 못하고, 그 법도를 중심삼고 하나님 대신 만우주를 주관할 수 있는 참다운 사랑의 주인공이 되지 못한 것이 타락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복지의 세계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수많은 인물들이 복지를 개척하기 위하여 몸부림치며 죽어 갔고, 역사는 지금까지 피어린 투쟁의 역사로 전개되어 나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부정할 도리가 없습니다.
아담은 복지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행복을 노래하며 하나님과 같이 천상천하의 모든 것을 귀하게 여기고, 하나님을 대신하여 피조세계를 다스려야 할 총책임자였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과 하나되는 자리를 마련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타락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타락한 그날부터 그 모든 것을 다시 회복하기 위하여 지금까지 몸부림치며 나오셨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소망의 마음을 갖고 뜻을 성취한 행복한 자리에서 아담을 불렀어야 할 하나님이 뜻을 성취하지 못한 슬픈 자리에서 아담을 부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담아! 아담아!’ 하고 부르시던 그날은 아담을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는 날이 아니었습니다. 그날은 복지를 잃어버린 날이요, 자신의 인격이 파탄된 날이요, 천지의 운세가 거꾸로 되어 버린 날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비통한 심정으로 그날을 맞이하여 부르짖던 한마디가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날부터 하나님은 잃어버린 복지를 다시 찾기 위해 나오셨습니다. 하나님은 복지라는 이름을 미래에 남겨 두시고, 그 복지를 이루기 위한 역사적인 노정을 더듬어 오며 지금까지 역사해 나오셨습니다.
아담이 타락하던 슬픈 날, 하나님은 그 한을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라는 한마디로 부르짖으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복지를 잃어버린 슬픔에서 비롯된 탄식이요 부르짖음이었습니다. 자신의 행동이 천륜을 배반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고백하는 아담을 대할 때 하나님께서 어찌 슬프지 않고 탄식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다시 한번 하나님의 슬픔을 느낄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 이후 6천년 동안 슬픔과 더불어 복지를 회복하기 위하여 간곡한 마음으로 달려 나오셨지만, 인간들은 하나님이 목적하시는 복지를 이루기 위한 부르짖음 앞에 하나되지 못해 함께 그 길을 찾아 나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 또한 하나님의 서러움과 분통함이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복귀의 길을 걸어 나오시면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불러 세우시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아!’ 하는 그 음성은 아브라함 한 사람만을 부르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 옛날 아담 때 사무쳤던 한의 마음을 품고 그 때 잃어버렸던 복지를 다시 찾으려는 울부짖음이요, 동시에 새로운 복지의 주인을 다시 부르시는 음성이었고, 복지의 가정과 복지의 민족과 복지의 세계를 이루기 위한 음성이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책임을 짊어진 아브라함 자신은 하나님의 그 음성이 복지를 소망하는 부르짖음이요, 역사의 비참상을 해원성사해 달라는 부르짖음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제단에 제물을 올려 놓는 순간은 복지의 세계를 이루기 위한 약속의 순간이요, 역사적인 한을 풀 수 있는 결판의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제사를 드리라는 말씀의 참 뜻을 깨닫지 못하고, 그 자신이 짊어져야 할 하늘의 사명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가를 깨닫지 못한 채, 자기의 입장만을 중심삼고 제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물을 쪼개지 않고 드린 것이 또다시 하나님의 슬픔을 자아내는 동기가 되었으며, 후일 예수님의 십자가의 동기가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원리를 통하여 배웠습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아브라함은 동이 터오는 복지를 주관할 수 있는 새로운 선지와 선조로 현현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복지를 부르짖고 애원하시는 하나님 앞에 나타난 아브라함은 그러한 것을 모두 감당할 수 있는 자세와 인격을 갖추지 못하였습니다. 그것이 역사적인 한이었던 것을 우리는 다시 한번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아브라함은 역사적인 책임과 시대를 심판할 수 있는 공의의 법도를 세워야 할 책임과 미래의 소원의 세계를 이룩해야 할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망각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작다고 쪼개지 않은 제물이 역사 노정을 저끄러뜨리는 기원이 될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아담으로 인해 맺힌 한이 아브라함을 통해 해원되는 한 날을 바라면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찾아오셨지만, 또다시 슬픈 마음으로 아브라함을 불러야 할 입장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 대신 그의 독자 이삭을 제물로 드리라고 다시 분부하셨습니다. 이렇게 한스러운 아버지의 사정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이스라엘 민족은 노아로부터 아브라함까지의 곡절의 노정을 다시 걷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애급 고역 400년이라는 한 많은 슬픔의 고빗길을 걸어 나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불러 세운 자, 즉 시대를 책임지고 시대적인 섭리를 책임져 나가야 할 자의 실수는 개인의 실수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역사의 전반적인 문제와 시대 전체, 그리고 미래의 모든 문제가 개재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아브라함 자신도 몰랐고, 이스라엘 민족도 몰랐습니다. 개척자의 사명을 담당한 하늘의 의용군으로서, 하늘의 정병으로서, 하늘의 투사로서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부터 4천년 전, 애급은 문화가 매우 발달했습니다. 그런 애급에 들어가 이스라엘 민족이 400년 동안 고역 생활을 했는데, 그런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께서 무엇을 바라셨는가를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그저 종살이나 하고 벽돌이나 굽는 고역꾼에서 끝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사무치는 한이 크면 클수록, 분함이 크면 클수록 그와 비례하여 원수의 도성을 짓밟겠다는 새로운 결의를 하는 그들이 되기를 하나님은 바라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심정을 망각한 이스라엘 민족의 생활이었던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채찍을 들어 자기들을 호령하는 애급 관원이 있거든 ‘언젠가는 우리가 채찍을 들고 너희를 칠 날이 올 것이다. 지금은 너희들의 문화를 세계에 자랑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그 문화를 밟을 수 있는 새로운 문화를 우리가 창건하겠다.’ 하는 정기를 갖추고, 최대의 내적 기반을 갖추어야 했습니다. 그랬다면 이스라엘 복지, 가나안 복지가 그들을 맞이하여 다시는 역사상에 한을 남기는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 개인이 실수한 것을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탕감하여 역사적인 원수의 도성을 밟고 올라설 수 있게 사상적으로 강한 신념을 갖고 나서야 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자연신을 숭배하고 태양신을 숭배하는 종교 이념을 중심삼고 이루어진 애급의 문화를 밟고 올라서서, 유대교의 이념을 중심삼고 새로운 역사와 문화를 창건할 수 있는 정신적인 기반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유리고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소원은 단지 애급 땅을 피하여 가나안 복지로 돌아가자는 것에서 끝나 버렸던 것입니다.
가나안 복지는 부르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애급의 고역을 마다하고 도망치고자 하는 무리를 부르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애급의 고역을 복수할 수 있고 원수의 문화권을 밟고 올라설 수 있는 민족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 민족도 사망의 고빗길이 다가올 때 그것을 박차고 나설 수 있는 용기에 불타 올라야 합니다. 그리하여 선조로부터 내려오는 한을 품고 새로운 이스라엘의 창건을 위한 용자(勇者)로서 용단하고 나서서, 하나님이 명령하시고 분부하시는 그곳을 향하여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신념의 뒷받침이 희박한 민족에게는 처참함과 비참함과 분열과 파괴가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400년 동안 고역살이를 시킨 것은 무엇 때문이었느냐?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여금 애급 문화 이상의 문화를 창건하게 하기 위함이요, 애급 민족 이상의 권한을 갖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하나님의 본연의 뜻을 알지 못한 이스라엘 민족이었으니 곁길로 가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 시대를 거쳐 이스라엘 민족은 사울왕, 다윗왕, 솔로몬왕 시대를 맞게 되었습니다. 사울은 하나님 앞에 세워져 엄숙한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창건의 대표자로서의 사명을 짊어졌기 때문에 자기 개인의 행복만을 위해서 나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원수의 세계에 널려져 있는 이방 나라의 권한이 크면 클수록 그것을 밟고 올라설 수 있는 더 큰 권한을 갖춘 민족으로 만들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당시의 로마 문화 이상의 문화를 만들어 내어 그 전통을 세워야 했습니다.
그는 또 흩어진 민족을 수습하여 단결시켜서 원수를 쳐부수고, 새로운 이념을 중심삼고 새로운 문화를 이루어 낼 수 있는 선민권을 창건해야 했습니다.
그러한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는 의분심에 불타고 역사적인 한을 탕감하겠다는 결의에 북받쳐 울어야 했는데, 사울과 이스라엘 민족이 가는 걸음은 하나님이 바라시는 본의에서 틀어졌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한 많은 역사를 남기는 슬픔의 길로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다윗 역시 왕위에 올랐다고 해서 그것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왕위를 기반으로 하여 로마를 밟고 올라설 수 있는 민족을 창건하고 민족 문화를 이룩해야 했던 것입니다.
이방 나라를 정복하게 될 때는 그 나라의 문화까지 여지없이 잘라 버려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로마를 밟고 올라서서 억천만 세대에 한을 맺게 한 원수들 앞에서 진리의 칼을 휘두를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한 권한을 가지고 나서야 했던 것이 사울의 책임이요, 다윗의 책임이요, 솔로몬의 책임이었으나 그들은 그 책임을 못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역사에 찬양할 수 있게 한 인물로 솔로몬을 자랑하지만 솔로몬은 그 시대권 내에서의 솔로몬이지, 그 시대를 넘어서서 찬양받을 수 있는 솔로몬은 아닌 것입니다.
복지가 부르는 사람, 복지의 주인이 될 수 있는 사람은 그 시대에서 행복을 노래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 당시의 역사를 밟고 올라서서 그 위에 새로운 문화를 창건해 가지고 온 인류에게 그 세계를 향하여 나아가자고 당당히 명령할 수 있는 새로운 그 무엇을 보여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솔로몬의 책임이었습니다.
솔로몬은 제사 드리는 성전을 짓고 그 성전 안에서 이스라엘의 족장들을 모아 놓고 자기의 왕권을 자랑하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솔로몬의 권위는 지금까지 만방의 수많은 민족들이 세운 모든 문화의 흔적을 여지없이 쳐버리고 깨뜨려서, 타락된 종족의 인연을 통하여 이루어진 모든 문화를 제거할 수 있는 새로운 문화를 창건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그것을 망각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솔로몬을 통하여 이루려던 하나님의 뜻은 그러한 소망을 품고 가는 무리들을 향하여 다시 옮겨 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수천년의 역사노정을 거쳐오시면서 선지선열을 통하여 혹은 예언자를 통하여 권고하여 오셨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민족적인 사명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세계가 순순히 이스라엘 민족 앞에 항복할 줄 알아요? 그들에게는 복지를 향하여 가야 할 사명이 부여되어 있기 때문에 그 길 앞에 반대되는 것이 있거든 그것을 치면서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은 무엇 때문이었겠습니까? 그것은 복지를 찾기 위한 한을 풀기 위함이요, 복지에서 살지 못한 한을 풀기 위함이요, 복지를 잃어버림으로 말미암아 영광을 찬양받지 못한 하나님의 한을 해원성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사명이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군중에게 몰리는 등 억울한 자리에 들어가는 장면이 여러 번 나옵니다. 그것을 보고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마치 겟세마네 동산에서부터 골고다 산정까지의 고난이 당연한 것처럼 믿고 있고,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다고 믿고 있습니다. 만일 그런 예수님이라면 선생님은 필요 없는 예수님이라고 생각합니다. 복지를 창건할 수 있는 예수님, 원수의 문화를 제거하고 새로운 문화세계를 창건해야 할 예수님이 되었어야 했는데 유대민족의 불신으로 그러한 예수님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후 기독교인들이 400년 동안 로마에 박해를 당하였으며 지금까지 2천년 동안 수많은 선조들과 신앙의 조상들이 처형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하늘이 지향하는 하나의 목표를 향하여 피와 땀과 눈물로 일해 나왔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합니다. 죽음 길에서도 ‘하나님이시여, 복지가 이 땅 위에 이루어지게 하시옵소서. 복지의 주인공이 나타나게 하시옵소서.’ 하고 애절하게 절규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한의 울부짖음을 계속 연결시켜 하늘의 제단이 쓰러질 때마다 다시 기대를 세워 수습하며 나온 기독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여 오늘날 20세기 기독교 문화세계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으로 역사는 끝날 것인가? 아닙니다. 아직까지 기독교 사상을 중심한 민주주의는 복지를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한 공산주의도 아직까지 그 사상을 중심삼은 복지를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전 인류가 바라는 복지는 현재의 민주주의 문화나 공산주의 문화로는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복지를 이룰 것인가? 새로운 문화를 창조해야만 합니다. 선생님은 지난번 미국에 갔을 때 민주주의 사상을 기반으로 하여 이룩된 오늘날의 미국 문화를 둘러보면서 ‘전세계를 호령할 수 있는 중심본부가 바로 이곳이구나. 앞으로 창건할 새로운 문화세계는 이곳을 밟고 올라설 수 있는 세계여야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그것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을 왜 자랑하는가? 이는 흘러가는 한 시대의 자랑거리는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새로운 세계를 창건하는 데 있어서는 하나의 팻말도, 하나의 탑도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복지의 문화를 중심삼고, 새로운 세계, 새로운 역사를 창건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소원은 그보다 더 높은 경지에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가 그런 목적을 중심삼고 해야 할 일을 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통일교회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 누가 아무리 반대하고 핍박하더라도 ‘때릴 테면 때려라. 채찍이 부족할 때까지 때려라. 그러나 우리는 망하지 않는다.’ 하며 나가야 합니다. 통일교회는 역사적인 모든 죄악의 고빗길, 더 나아가 골고다의 산정까지도 쳐부수고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떠한 사상도 밟고 올라설 수 있는 철두철미한 사상과 진리에 입각하여 그 진리를 대신하는 인격적인 대변자로서 선악을 판가리하여 하나님의 심정을 중심삼은 참사람, 참자녀, 참가정, 참사랑을 창건해야 할 엄숙한 사명을 자각하고 책임을 지면서 나온 것이 통일교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몰리고 쫓기더라도 확고한 철칙을 세워야 합니다. 선생님이 영어의 몸이 되어 쇠사슬에 얽매여 있으면 안 됩니다. 설사 얽매여 있더라도 언젠가는 자동적으로 끊어질 날이 올 것입니다. 이 시대가 알지 못하면 미래에 할 날이 올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그러한 자세와 신념을 가지고 사탄의 계교와 소원, 또 목적을 밟고 올라설 수 있는 자리에 서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3대 시험을 받을 때 ‘사탄아 물러가라, 천하의 모든 영광을 갖다 준다고 하더라도 내가 소원하는 것이 있는데 그까짓 것에 안식의 꿈을 꾸겠느냐?’ 하며 고난 가운데서도 그 이상을 지켜 나갔던 것입니다. 그러한 늠름한 여력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3대 시험에서 승리하였던 것이요, 십자가의 산정에서 승리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무리 어려운 핍박의 화살이 빗발치고, 아무리 포악한 로마 병정의 마수가 자기의 생명을 옭아맨다고 하더라도 문제가 안 되었습니다. 그런 것들은 한때 지나가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는 그것을 밟고 넘어설 수 있는 신념이 있었기에 세계의 운세를 탕감 지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까지 그 소망의 일념이 남아져 있기에 다시 오시는 예수님이 창건해야 할 문화세계가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소원하던 문화의 세계, 즉 복지는 어떤 세계일 것인가? 그 세계는 아직까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세계는 오늘날까지 우리를 대신해서 어떠한 개인이나 교회, 주의나 교단, 나라 등을 불러왔습니다.
아브라함을 부를 때에도 복지는 옆을 따라보면서 불러야 했고, 이스라엘 민족을 대할 때에도 팔을 벌려 쌍수를 들고 ‘오냐, 반기고 싶었던 민족아!’ 하면서 정면에서 환영하지 못하고 옆으로 바라보며 맞아야 했습니다. 그 각도가 크면 클수록 환영하기가 더 어려웠다는 것을 여러분은 똑똑히 알아야 합니다.
요즈음 우리 통일교회의 식구들을 가만히 보면 현실적인 환경에 자기의 터전을 닦아서 거기에 안식하려는 모습들을 보게 되는데, 그래서는 안 됩니다. 여기는 혼자만의 자리가 아닙니다. 이 자리는 아브라함도, 이스라엘 민족도, 예수님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가는 길은 비록 비참하나 한민족으로 태어난 우리가 이 삼천리 반도를 기반으로 하여 터전을 닦게 된다면 결코 미국이나 소련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옛날 아담이 하나님을 배반함으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참다운 진리의 말씀을 다시 찾은, 만세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진리와 이념을 찾은 입장입니다.
우리는 이제 구경만 하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 이념을 대신하여 말씀을 지키고 재무장하여 말씀의 팻말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완결된 하나의 장벽을 넘어가는 데 있어서 부딪치는 장벽을 모두 파괴시키고 만다는 신념을 가지고 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뜻적인 상대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 복귀 노정에 있어서 광야에서의 생활이 곤고하고 어렵게 되자 시간이 흐름에 따라 다시 애급 땅을 그리워했습니다. 꿈에서도 생각해서는 안 될 그 애급 땅을 그리워했다는 것입니다. 사탄의 올무에 걸린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준을 넘어서지 못한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합니다.
20세기 후반에 접어든 오늘 우리는 어디로 가야 되는가? 신문화세계를 창건해야 됩니다. 이제 통일이 됩니다. 곧 만민이 ‘통일교회가 가는 길을 따라가지 않으면 살 수 없다. 통일교회가 창건한 문화권 내가 아니면 만인류는 살 곳이 없다.’ 할 수 있는 자리까지 가야 하는 것이 통일용사들의 목표입니다.
이것이 복지가 소원하는 방향이요, 복지가 부르는 사람이요, 복지가 부르는 민족이요, 복지가 찾는 국가인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복지의 세계가 이루어지려면 얼마나 더 가야 될 것인가? 현20세기의 시련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돌아보면 노아가 자기 당대에 축복을 받지 못하더라도 하나님을 위하여 고난 길을 가고, 죽는 자리에 처하더라도 억천만세에 죽지 않고 참아 나가겠다고 약속을 했다면 하나님이 심판했겠습니까? 아브라함도, 이스라엘 민족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소망이 자기들 당대에 이루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역사시대를 지나고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이 끝난 후에야 복지가 온다는 것을 몰랐던 그들은 그 시대권 내에서 복지를 찾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세상의 사상과 이념을 능가하여 하나님과 하나될 수 있는 자리에까지 나아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았기 때문에 들이 맞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통일교회에 무엇 하려고 나왔습니까? 여러분들은 결코 믿고 천당 가기 위해서 온 무리가 아닙니다. 몰림뱅이의 걸음을 자초하면서 죽음을 각오하고 하늘 앞에 맹세하고 나선 여러분입니다. 하루하루의 생활 목적을 중심삼고 하루 하루의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여기에 온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여러분들은 똑똑히 알아야 합니다. 지금 내가 처해 있는 자리를 안식의 터전으로 만들 수 있어야 합니다.
선생님은 오늘날 통일교회가 국내에 이루어 놓은 기반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선생님은 결코 미국이나 소련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어떤 문화나 사상도 선생님에게는 별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선생님과 연결시킬 것이 하나도 없는 혈혈단신이기에 내 손으로 안식의 터전을 만들고, 내 힘으로 이 일을 개척하기 위해 있는 정성을 다 쏟아부었습니다. 그 외의 다른 어떠한 것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습니다.
아담은 자기를 중심삼고 생각하다가 타락했습니다. 아브라함도 자신의 복을 꿈꾸다가 망했고, 이스라엘 민족도 자기의 민족적인 복을 꿈꾸다가 망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도 이 세계에서 기독교만을 중심삼고 꿈을 꾸다가는 망하는 것입니다. 세계를 밟고 올라설 수 있는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여 그 위에서 복지를 찾아 출발해 나갈 수 있는 어떠한 분화구를 만들어 놓아야 합니다. 이게 통일교회가 지향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통일이라는 명사 그대로 이 세계가 통일될 수 있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 날이 끝날입니다.
여러분이 똑똑히 알아야 될 것은, 여러분들이 자고 있는 그 자리가 복지의 부르짖음 앞에 배반되는 자리가 아니며, 여러분들의 발걸음이 복지의 울부짖음 앞에 배반되는 발걸음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단단히 명심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가야 할 최후의 골고다 길이 어디냐? 여러분들의 직장도 아니고 가정도 아닙니다.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것은 지난 역사시대의 그 기준을 중심삼고 걸어야 할 운명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옛날 제사를 지내던 제사장이나 이스라엘 족속들과 같은 입장에서 사라지면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이 세계를 밟고 넘어갈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의 시선이 다른 무엇을 향해서도 안 됩니다. 여러분이 태어난 것도, 여러분이 살아가는 것도 오직 최고의 그 한 목적만을 위해서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패배하여 비틀거리는 사람을 보면 ‘비틀거리려면 빨리 망해라.’, ‘만약 내가 그런 입장에 처하면 자지 않고 복수하기 위한 준비를 할 것이다.’라고 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스스로 자신을 자각하고 스스로 충동을 일으키고 자신을 자극시키며 갈 줄 아는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어디에 머물러 있습니까? 여러분들은 통일교회에서 묵으려고 그러지요? 그런 사람이 진정한 통일교인이에요? 여러분들은 오늘은 어디로 나갈 것이며, 어디에 가서 무엇을 할 것이냐를 생각해야 합니다.
선생님이 언젠가 ‘태평양을 가로막자!’ 고 얘기했지요? 그런 말을 한 것도 다 한 목적에 대한 일념에서 나온 말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합니다.
통일교회를 따라오기를 십여 년 아니 반평생, 그동안 시련과 곡절로 지내 왔는데 그 말로가 비참하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기 자신을 중심삼고 탄식하고, 자기 자식을 중심삼고 탄식하는 그런 무리를 보시고 하나님이 탄식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소원하고 계시는데 자탄하는 자리에 있다면 망해야 합니다. 만약 망하지 않는다면 선생님이 때려서라도 망하게 할 것입니다. 이러한 각오와 기준을 가지고 가야 할 사람들이 통일의 역군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전도를 하러 다니면서 분한 마음을 품은 적이 있었습니까? 그럴 때마다 여러분은 ‘몇 년만 두고 보자. 그래도 안 되면 몇십년, 몇백년 후에 두고 보자.’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철저한 사상으로 무장하여 역사와 시대가 바라는 바를 책임질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을 가만히 보면 자기 중심삼고 이러쿵저러쿵 하는데, 그런 사람들은 전부 회색분자입니다. 그런 사람은 모두 역적이 됩니다. 여러분들은 다시 한번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복지는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6천년 전부터 아담이 이루지 못한 복지를 이룰 인간을 찾아 세우셨지만, 아직 인간들은 그 복지를 이룩하지 못하였습니다. 우리의 선조들도 이런 복귀의 길을 걸어 나왔지만 이룩하지 못하였고, 수많은 성인 현철들도 이 목적을 향하여 몸부림치며 나왔지만 이룩하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 오셔서 이 목표를 향하여 새로운 문화세계를 소망하였지만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세계는 어차피 이루어져야 합니다. 만일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타락한 세상은 이대로 연속되어 나가게 되고, 하나님이 이루시려는 새로운 세계는 결국 이 땅 위에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세계를 이루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어디서 안식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사망의 고개를 넘고 넘으며 가야 합니다. 넘어가야 할 그 골짜기는 골고다입니다. 우리는 거기서 싸워서 승리한 후 다시 한 고개를 넘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다시 넘어 가려면 새로운 것을 창조하면서 넘어가야 합니다. 승리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다시 수습하여 하나님의 세계를 어떻게 만들어 내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것을 위해 여러분은 먼저 진리를 찾아야 합니다.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진리를 잃어버렸고, 영적인 모든 것을 잃어버렸고, 심정을 잃어버렸습니다.
여러분들이 가진 이념은 세계의 그 무엇이 끌어가려고 해도 끌고 갈 수가 없는 이념입니다. 사탄이 꾀고 농락하더라도 거기에 끌려갈 수 없고 양보할 수 없는 이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도 분명히 사탄과 악에 대하여서는 단호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이념으로 무장된 진리를 찾아야 합니다. 진리를 찾기 위하여 역사상 수많은 민족들이 죽어갔고 수많은 열사들이 희생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진리를 찾기 위하여 죽음을 각오해 보았습니까? 여러분들은 얼마만큼 고역의 노정을 자초해서 가 보았습니까?
진리의 방패를 들고 가는 길에 세계적인 십자가가 가로막더라도 박차고 나설 수 있어야 합니다. 세계적으로 헝클어져 있는 모든 사상들을 전부 다 치워 버리고, 사회적인 부패를 청산하고 사탄이 세워 놓은 악의 도성을 모두 무찔러 버리고 갈 수 있는 실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그런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참된 말씀을 중심삼은 진리를 가지고 사탄과 대결하여 거짓된 말씀을 때려부수고 사탄의 영혼까지도 굴복시킬 수 있는 인격을 갖추어야 합니다. 사탄에게 끌려갔던 인간은 그런 인격을 갖추어서 하나님의 심정을 중심삼고 사탄을 굴복시키지 않고는 하나님 앞으로 갈 수 없습니다.
인격을 갖춘 후에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심정을 갖추어야 합니다. 심정을 갖춘 기반 위에 비로소 아브라함이 안식할 수 있고, 모세가 안식할 수 있으며, 수많은 이스라엘 민족이 안식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과 세계 만민까지도 안식할 수 있는 터전이 되는 것입니다.
그 심정이 뒷받침된 사람은 만민을 대신하여 영적인 부모의 자리로 올라갈 수 있으며, 그렇게 부모의 자리에 올라갔을 때 부모의 심정을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식을 대하는 부모는 자식에게 결점이 있더라도 그 결점을 먼저 들춰내지 않습니다. 자신의 좋은 점만 닮기를 바랍니다. 자식의 악한 면을 보고 뺨을 때렸을지라도 동정하고 후회하는 것이 부모의 심정인 것입니다. 그것은 그때의 악한 여건을 기준으로 해서 때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닮은 작은 부분이라도 있으면 그것을 악한 면보다 크게 보려는 기준을 중심삼고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 자식을 대하는 부모의 심정입니다.
하나님이 지금까지 죄 많은 인류를 찾아오시는 데는 하나님의 본성을 기준으로 하여 인간에게 조금이라도 닮은 부분이 있으면 그 부분을 수많은 악성(惡性)보다도 크게 평가하여 그것을 붙들고 찾아오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여러분은 오늘날 민족적인 사명과 세계적인 사명을 가지고 부모의 심정으로 가야 할 자리에 서 있습니다. 여러분이 민족을 바라볼 때 그 민족이 잃어버린 부모를 찾기 위해 울부짖는 고아와 같은 입장에 서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한 나라를 볼 때에도 부모를 잃어버린 나라요, 세계를 볼 때에도 부모를 잃어버린 세계로 볼 수 있는 심정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잃어버린 하늘과의 인연을 다시 맺기 위한 마음으로 새로운 터전을 향하여 나설 수 있는 기준을 마련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그것을 실현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통일교회에서도 부모의 심정으로 종의 몸을 쓰고 피와 땀과 눈물로써 복귀의 사명을 완결 짓자고 하는 것입니다. 통일교회가 넘어야 할 시련이 있으니 그것은 세계의 어떤 주의나 사상이 못 넘는 고빗길, 민주세계나 공산세계가 못 넘는 고빗길입니다. 그들이 못 가는 길을 우리가 가고, 그들이 못 하는 일을 우리가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늘날 여러분들이 이 자리에서 멈추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들이 서 있는 자리는 안식의 터전이 아닙니다. 복지로 가는 과정입니다. 우리에게는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종족적으로, 민족적으로, 국가적으로, 나아가 세계적으로 가야 할 운명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의 안식의 터전을 바라보고 이 세계를 넘고 넘어 새로운 문화세계를 창건해야 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역사의 전통과 기준을 세워 놓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복지가 부르는 개인이 될 수 없는 것이요, 복지가 부르는 가정과 민족과 교단이 될 수 없는 것이요, 복지가 부르는 백성과 국가와 세계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모두 이 목적을 위하여 있는 정성을 다하여서 싸워 주시기 바랍니다.
아버님, 한국의 역사는 슬픔의 역사로 이어져 왔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그것이 이 나라의 운명이었기에 출발 때부터 지금까지 당신이 지향하시는 최고의 골고다 길을 걸어온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당신께서 고구려를 중심삼고 이 민족 앞에 승리의 판도를 허락하셨사온데, 이 민족이 책임을 다했다면 오늘날 서글픈 운명을 맞이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이 민족이 소원하던 때마다, 이 민족이 일깨워질 수 있는 때마다 거꾸러지는 역사로 이어져 내려온 이 민족사를 생각할 때, 8․15 해방부터 지금까지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저희들 자신을 완전히 아버지께 드릴 수 있는 권내까지 들어왔다고 생각되옵니다. 이 민족 앞에 새로운 소망이 없고, 이 민족을 세우는 출발의 기원이 아버지로부터가 아니라 할진대, 이 민족에 있어서 하나님은 없었을 것이며 이 민족은 비참한 종말을 맞이했을 것이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이 민족에게 나라를 잃어버리게 하셨고, 의도 잃어버리게 하셨으며, 또한 이 민족을 삼팔선으로 여지없이 갈라 놓으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저희들에게 모든 것을 완전히 찾게 하기 위한 당신의 뜻이었음을 알게 되옵니다.
아버지의 섭리의 손길이 배후에 어려 있음을 알고 있사오니, 이제 다시 한번 저희들이 자세를 가다듬어 아버지 앞에 속죄의 제단을 쌓고 선조들의 모든 죄를 용서받아서 이 시대 앞에 새로운 정장을 하고 나설 수 있게 하시옵고, 복지가 부르는 이 시대의 용사로서 나설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잃어버린 나라를 찾기 위해 심정으로나마 애착심조차 갖지 못하였고, 자신들의 생활과 생명에 대해서까지도 애착심을 잃어버린 민족이 된 것은 더더욱 큰 것을 주기 위한 당신의 뜻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사옵고,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밟는 더할 수 없이 비참한 자리에까지 들어가게 하신 것도 지고한 당신의 생명의 권한을 보여 주시기 위한 것이었음을 알았사옵니다. 저희들은 이러한 숨은 아버지의 손길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사옵나이다.
저희들이 가는 길이 십자가의 길이요, 눈물의 고빗길이라 하더라도 저희들은 이스라엘의 한을 풀기 위해 소망의 세계를 이루기 위해 용전분투하며 갈 줄 아는 새로운 이스라엘이 되게 하시옵소서.
기독교가 이루어 놓은 민주세계의 처참한 모습을 바라볼 때, 저희들은 이 세계를 밟고 올라서서 새로운 문화를 창조할 수 있어야 하겠사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저희들이 아버지의 슬픔의 골짜기의 깊은 맛을 알고 아버지의 애절한 곡절의 마음을 느껴서 아버지께서 저희들을 붙들고 사정하시고 통곡하실 수 있는 자리까지 나아가야 하겠사옵니다.
이제 저희들은 아버지께서 소원하시는 최고의 자리를 상속받을 수 있는 가까운 자리에 섰다는 것을 배워서 알았사옵니다. 그러나 배운 것에서 끝나서는 안 되겠사옵니다. 이 시간 그것을 사실로 알고 실제로 부딪쳐서 아버지 앞에 상속받을 수 있는 각자가 되어야 할 것을 다시 한번 다짐하는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복지는 아담 때부터 지금까지 사람들의 목전에서 부르짖어 왔사옵고, 이 시간에도 저희들의 발걸음을 재촉하며 부르짖고 있사오니, 저희들이 참된 모습, 참된 나라, 참된 세계의 터전을 잡으려면 당신의 소원을 중심삼고 결사의 각오로 분투해야 되겠사옵니다. 이렇게 해야 하는 것이 통일용사가 해야 할 도리라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여기에 모인 당신의 자녀들, 안식의 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에 머물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흘러가던 물이 한 자리에 있으면 썩거나 증발해 버리옵니다. 오직 앞길을 재촉하여 흘러가는 물줄기만이 목적지까지 갈 수 있사오니, 지금까지 책임을 완수하며 흘러나온 물과 같은 당신의 자녀들이 끝까지 이 길을 갈 수 있게 하시옵소서.
이 길을 가는 데 있어서 부딪치는 어려움을 모든 만상 위에 나타나야 할 시련으로 알고, 교단의 운명과 세계의 운명으로 알고 그것을 달게 받아 넘길 수 있는 승리의 용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창건해야 할 새로운 시대의 복지 문화를 이들이 창건하여 후대에 전통으로 남겨 주기에 부족함이 없는 참다운 조상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들의 발걸음이 넘어야 할 산의 중턱에서 멎지 말게 하여 주시옵고, 넘고 넘고 또 넘어서 대로를 향하여 달음질치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1966년도 벌써 4분의 1이 지나가고 있사오니, 이 해에 아버님께서 분부하신 것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 몸부림쳐야 되겠사옵니다. 그것을 위해 아버지 앞에 제물 되어 스스로에게 명령하고 분부하고 채찍질하여 나갈 줄 아는 자녀가 되고, 스스로 십자가를 자청하고 아버지 앞에 부족함을 직고 하면서, 내일의 소망의 큰 십자가를 내가 먼저 지겠다고 앞을 다투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될 것을 이 시간 다시 한번 다짐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복지의 터전을 상속해 주시고자 하시는 당신의 소원대로 저희들이 그것을 상속받아서 아버지께서 안식하실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 드리고, 만세의 당신의 자녀들이 안식의 복지라고 영원무궁토록 찬양할 수 있는 복지를 만들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나의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니다.
이날의 모든 것을 아버지께서 맡아 주시옵고, 이 자리에 왔던 뭇 생명들이 당신의 뜻과 인연맺어 복귀의 한을 푸는 데에 동조하여 아버지의 뜻 앞에 공헌하는 뭇자녀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참부모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였사옵나이다. 아멘.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오늘은 부모의 날입니다. 1960년 3월을 중심으로 우리는 역사상에 없었던 새로운 날을 정했는데 그날이 바로 부모의 날입니다. 이날은 하늘땅이 기뻐하는 가운데서 맞이해야 합니다.
우리의 조상 아담 해와가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들은 이미 부모의 날을 맞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 해와가 타락했기 때문에 부모의 날을 맞기 위해서는 먼저 이 땅 위에 참부모가 와야 합니다. 그래야 부모의 날을 맞이할 수 있는 것이며, 그날을 기준으로 하여 참부모로 말미암은 자녀를 갖게 된 후에야 자녀의 날을 맞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만물을 주관할 수 있는 날도 맞이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날들을 하나님은 타락하지 않은 인간 조상에게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 조상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창조이상이었던 부모의 날, 자녀의 날, 그리고 만물의 날을 맞이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도 천지창조의 목적을 완성한 하나님으로서 기뻐할 수 있는 날과 자랑할 수 있는 날을 맞이하지 못하셨던 것입니다.
물론 아담과 해와가 하나님을 잃어버린 상태에 떨어진 것이 타락이지만 아담 해와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또한 부모의 날과 자녀의 날과 만물의 날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럼으로써 하나님은 소망하신 모든 날들을 다 잃어버리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소망하신 날 중에는 피조세계에 부모가 있는 날, 그 부모를 중심삼고 하나의 가정이 있는 날, 그 가정을 중심삼고 하나의 종족, 민족, 국가, 그리고 세계가 있는 날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영광스러운 날들을 맞이하지 못한 채 오늘날까지 인류역사는 타락의 역사로 엮어져 내려왔고, 악한 세계, 악한 나라, 악한 민족, 악한 종족, 악한 가정, 악한 개인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본래 하나님이 소망하신 창조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냥 두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와 같은 악한 것들을 만들어 낸 장본인이 누구냐? 바로 사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탄세계를 다시 하나님 편으로 찾아 세워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이상하시는 세계를 찾아 세워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악한 세계를 끌어올리기 위한 싸움을 해야 되는데, 사탄이 악한 세계를 이루어 나온 것과 반대로 선한 세계를 찾아 올라가야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6천년의 역사 속에서 3단계를 거쳐서 구원하는 섭리를 해 나오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종의 시대인 구약시대와 양자의 시대인 신약시대를 거쳐서 성약시대를 맞이한 것입니다. 성약시대에는 자녀가 나타나 부모의 자리를 마련하여 부모를 모시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은 이러한 복귀역사를 해 나오신 것입니다.
2천년 전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최고 목적은 종을 구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양자를 구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떠한 목적으로 오셨던가? 피조만물을 구하기 위한 최고의 목적을 갖고, 구주로서 부모의 심정을 갖고 오셨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진정 사랑하는 사람이 물에 빠졌으면 먼저 구하고 싶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물에 빠졌는데 어느 부모가 종을 시켜서 물에 빠진 아들을 구하라고 하겠습니까? 만일 그런 부모가 있다면 그 부모는 참으로 아들을 사랑하는 부모가 아닐 것입니다. 또 자기의 막내아들이 물에 빠졌는데 그의 형을 시켜서 동생이 물에 빠졌으니 건져 내라고 하는 부모가 있다면, 그 부모 역시 아들을 사랑하는 부모가 아닐 것입니다. 그런 부모는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중심삼고 볼 때, 물에 빠진 상태와 같은 이 타락한 인류에게는 어떠한 구주가 필요한가? 부모로서의 구주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진정으로 타락한 인류를 사랑하신다면 어떠한 입장에서 그들을 구하고 싶으실 것인가? 하나님은 부모의 입장에서 인류를 구원하고 싶어하십니다. 하나님이 이 땅 위에 메시아를 세워서 구원섭리를 하시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나사렛에서 3년 공생애노정을 출발하기 전에 갖추어야 할 것은 무엇이었느냐? 그것은 부모의 입장이었습니다. 메시아로서의 예수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메시아를 대리하는 존재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니 먼저 부모의 입장을 갖추어 놓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인류를 위한 참된 시조, 참된 부모가 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참된 부모가 되지 못했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거짓된 부모의 혈통을 받고 태어난 사람들은 참부모와 인연을 맺지 못하고 참부모의 사랑을 받아본 적도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다른 혈육으로 태어난 사람들, 즉 참부모의 혈육을 통하지 않은 사람들을 하나님은 직계의 자녀로 세우실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해야 할 혈통이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혈통과 인연되어졌기 때문에 인간이 아무리 노력을 하고 아무리 정성을 들인다 하더라도 구원을 받아서 하나님 앞에 나가면 참다운 아들딸이 아닌 양자밖에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서러운 사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로마서에 기록된 것과 같이 우리는 양자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도 예수님으로 인해 그렇게라도 부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미 이 땅에 오셨다 가셨지만, 오늘날 수많은 인류가 구원을 받을 때는 그 최고의 기준이 양자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양자란 무엇이냐? 양자는 핏줄이 다른 자식입니다. 참부모를 잃어버리고 거짓 부모와 인연을 맺었으니 밑둥을 잘라 버리지 않으면 진짜 아들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타락 이후 4천년 역사가 지난 뒤 예수님이 오셨던 것입니다. 중생을 하려면 반드시 부모가 있어야 합니다. 부모가 없이는 자식을 낳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땅 위에 메시아로 예수님을 보내셨던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오셔서 무엇을 하셔야 했느냐?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수많은 인간을 구하기 위해서 무엇을 하셔야 했느냐? 참부모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신부를 찾아야 했습니다. 12제자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먼저 신부를 찾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제1차, 제2차, 제3차의 노정을 걸었지만 예수님은 신부를 찾지 못했기에 할 수 없이 자식 입장에 세운 것이 12사도였습니다. 이런 내용은 성경에 없습니다.
인류를 구하기 위해, 인류를 다시 낳기 위해 예수님은 신부를 반드시 찾아야 했던 것입니다. 성신이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에 니고데모가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요 3:4)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요 3:10) 하고 한탄하신 것입니다.
예수와 성신을 중심하고 인류는 거듭나야 하는 것입니다. 인류를 사탄이 다 빼앗아 갔으니 하나님을 중심삼고 거듭나야 하는 것입니다. 참부모의 혈연을 통하여 다시 태어나서 심정적인 기반을 닦지 않고는 천륜 앞에 설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원칙적인 기반, 즉 부모의 터전을 닦아야 했던 것입니다. 부모가 되기 위하여 무엇보다도 먼저 신부를 찾아 세워야 했던 것입니다. 12제자를 찾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거꾸로 된 것입니다. 그래서 몇백 배의 노력이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입니까? 아담 대신 온 후아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부인 후해와를 찾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야 잃어버린 부모의 자리를 다시 찾아 세울 수 있지 않겠습니까?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아야 하겠으니 하나님을 위하여 함께 일할 수 있는 대상을 찾아야 했다는 것입니다.
남자는 하늘을 대신하고 여자는 땅을 대신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남자를 대신하여 신랑으로 오셨기에 신부를 찾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 민족은 예수님의 뜻을 몰랐습니다. 제자들 역시 이 뜻을 몰랐기 때문에 협조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원래는 요셉가정에서 이것이 이루어져야 했는데 그러지 못함으로써 예수님은 참부모가 될 수 없었습니다. 요셉가정은 하나님이 4천년의 역사를 두고 섭리하신 끝에 자신의 가정을 축복하였다는 사실을 알아 가지고 시대적인 총책임을 지고서 그 책임을 완수해야만 되었습니다. 또 그러한 요셉 가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찾아 이루어야 하는 것이 예수님의 사명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세 차례나 그의 부모를 추궁했습니다. 그러나 뜻을 알지 못하는 부모는 끝내 예수님의 뜻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집으로부터 배반당하고 가정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된 예수님은 다시 가정을 만들어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여기에 이스라엘 민족마저 예수님을 불신하자 예수님은 요셉가정과 유대 나라에 뜻을 펼치지 못한 채 그들에게 몰리고 쫓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데려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 위에서 신부를 찾아 참다운 부모의 인연을 세워 가지고 세상과 하나님 앞에 부모의 날을 세워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예수님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그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탕감복귀의 원칙에 따라 부모는 꼭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때 예수님이 총각 된 신랑의 입장에서 처녀의 입장에 있는 신부를 찾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러나 예수님은 탕감복귀노정에서 이루어야 할 소생․장성․완성의 단계를 이루지 못한 입장에서 오셨기 때문에 이것을 전부 넘어서서 승리의 터전을 닦아야 했습니다. 이렇게 안팎으로 승리의 기반을 갖추려니 해와로 말미암아 타락했던 반대의 경로를 거쳐서 먼저 죄를 청산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예수님은 신랑방을 준비해야 했고 신부를 찾아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금식기도를 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한이 되었으며 예수님의 한이 된 것입니다.
인류를 살리는 것이 소망이요 목적이었기 때문에,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은 재림하셔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느냐? 제자들을 만나 보는 것이 아닙니다. 신부를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신부가 오늘날 전인류를 대신하여 신부 된 입장에서 신랑이 오기를 고대하여 준비해 온 기독교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님에 대한 책임을 못 함으로 말미암아 4천년 역사는 2천년이 연장되어 다시금 세계적인 탕감노정을 걷게 되었습니다. 이 노정 역시 세계적인 신부의 터전을 준비해 나가는 노정이기에 다시 오시는 주님은 신부를 찾아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 위에 후아담으로 오셨습니다. 성신도 이 땅 위에 와서 신부의 체(體)를 쓰지 못했습니다. 영계에 가보면 성신은 어머니 신(神)입니다. 예수님이 땅 위에서 실체를 갖추면 신부는 천도의 모든 내용을 알고, 즉 진리 가운데 신부의 자격을 완수해 가지고 신부로서 메시아가 오기를 고대하며 그를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한 가정을 준비하고, 한 국가를 준비하고, 세계를 준비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부가 해야 할 책임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1960년대에 들어와서 여성운동이 세계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자는 남자가 해결하지 못한 것을 해결해야 됩니다. 이 땅 위에 사람들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모두 악한 혈통을 받고 태어난 타락의 후손이기 때문에 어머니적인 사랑을 할 수 있는 참여성이 나와야만 합니다. 끝날이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그런 대표적인 존재가 나올 수 있는 때가 가까워지는 것이므로 세계적인 여성운동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 같은 선진 국가에서는 여자가 남자의 뺨을 갈기는 경우가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많은 여자가 남자를 능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종말기는 타락한 것을 여자가 복귀할 수 있는 때이기 때문에 종말인 지금, 여자는 천적인 해와를 대표하여 나설 수 있는 혜택권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여성들이 해방과 더불어 그러한 자리에 설 수 있게 되었으니 이러한 때에 참다운 어머니가 나와야 합니다. 우리는 그 어머니를 땅 위에서 모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인류는 이러한 때를 맞이하여 하나님을 찾아 나오기 때문에 땅 위에 신부가 세워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부모가 없으면 자녀가 있을 수 없고, 자녀가 없으면 가정이 있을 수 없고, 가정이 없으면 종족이, 종족이 없으면 민족이, 민족이 없으면 국가가, 국가가 없으면 세계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즉 부모의 사랑을 중심삼고 아담과 해와가 하나님을 모셔야만 비로소 하나님이 지으신 바의 세계와 만민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명을 아담가정에서도 못하고 요셉가정에서도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것을 다시 수습해서 전체적인 하나님의 뜻을 통하여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념을 통해서 메시아를 맞이해야 하는데 이 세계는 가인과 아벨을 중심삼고 각각 두 가지의 이념으로 갈라져 나왔습니다. 그래서 이 땅 위에 메시아를 위한 모든 것을 찾아 세워야 합니다.
남자 된 예수님, 신랑 된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남자들도 사랑할 수 있겠어요? 남자들에게 어떻게 신랑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신랑 신부의 인연을 거쳐서 만민을 하나님 앞에 세우기 위한 구원섭리가 이루어져야 됩니다. 남자나 여자나 주님 앞에 신부 입장에 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 전부가 신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마라톤에 나가는 사람들 전부가 일등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뛰기만 하면 누구에게나 일등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지만 마지막에 일등으로 골인한 자만이 최후의 승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다 같이 신부 될 수 있는 허락은 받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택함을 못 받으면 신부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신부로 택정을 받아야 비로소 신부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수많은 신부 후보들 가운데서 어떤 사람을 찾아오시느냐? 오시는 주님을 모시는 사람을 찾아오신다는 것입니다. 신부가 무엇입니까? 나는 신부라는 말이 기분 나쁩니다. 신부라는 말은 타락 때문에 생겨난 말입니다. 타락했기 때문에 생겼어요. 타락하지 않았으면 신부라는 말이 필요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오시는 주님은 어떤 분이며 무엇을 하러 오시느냐?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 주기 위해서, 인류를 사망에서 구해 주기 위해서 인류의 어머니를 찾아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 오시는 주님은 아버지로 오셔야 합니다. 기독교 사상의 중심이 사랑으로 되어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중심은 무엇이냐? 사랑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신부와 인연을 맺어야 할 신랑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타락으로 말미암아 6천년을 지나 다시 찾아야 할 날이 무슨 날이냐? 그것은 하나님이 구원성사하시는 날이며, 인류가 잃어버린 부모를 다시 찾는 날인 것입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을 찾고 부모를 찾는 날이라는 것입니다. 그날부터 인류는 하늘의 법도에 따라 생활해야 합니다.
역사가 흘러오는 동안 많은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어떠한 비참한 운명하에서 국가적인 비상사태가 발생하게 되었을 때 부모와 같은 입장에서 나라를 사랑할 수 있는 지도자가 나와서 그 나라의 운명을 타개하여 다시 국권을 세워 줄 수 있다면 얼마나 기쁜 일이겠습니까!
인류가 승리를 거두었다고 생각되는 날은 많았습니다. 그러나 피조만물이 고대하는 날은 없었습니다. 인류가 참부모를 맞는 날, 이날이 바로 피조만물이 고대하는 날인 것입니다.
오늘날의 인류는 타락의 혈통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영원히 불행한 자리에서 신음하지 않으면 안 되는 운명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이 땅에서 하나님을 모실 수 있고, 행복과 영광을 누릴 수 있다는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소망 중에 최고의 소망은 무엇이냐? 그것은 바로 부모의 날을 맞는 것입니다. 부모의 날을 통하지 않고서는 하늘나라에 갈 수 없는 것이요, 또 하나님을 찾아갈 수도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무엇을 바라고 있느냐? 어린양 잔치의 할 날을 바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바라고 있는 날이 바로 부모의 날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은 잘 알아야 하겠습니다.
부모의 날은 전인류를 위하여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모의 날을 맞이해야 할 여러분은 언제 세계 인류를 위해 민족을 위해 제물이 되어 보았으며, 언제 하늘을 위해 몸부림쳐 보았습니까? 여러분 전부가 나하나 잘되고 편안하기 위해 예수님을 믿지는 않았습니까? 나 하나를 위해 기도하지는 않았습니까? 나 하나 잘되기 위해 연보(捐補)를 하고, 내 아들딸 잘살게 하기 위해 교회에 나오지는 않았습니까? 잘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이 세계에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만민을 해방시키고 만민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딸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던 목적도 여기에 있습니다. 하늘땅이 바라는 날이 바로 부모의 날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전세계에 기독교가 퍼져 있는데 그들이 소망하는 날은 무슨 날인가? 어린양 잔치를 하는 날입니다. 그날이 무슨 날이냐 하면 부모의 날입니다. 이미 다 컸다 하더라도 다시 태어나 부모를 맞이해야 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부모의 날을 맞지 못한 지금까지는 여러분들이 아무리 잘 믿어도 하나님 앞에 양자로밖에 설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에는 아버지로, 아버지의 사명을 가지고 오신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합니다.
세계에 널려 있는 수많은 인종과 민족은 많은 명절들을 맞고 있지만 아직까지 부모의 날은 맞이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1960년을 중심하고 이 땅 위에서, 우리 한국에서 부모의 날이 설정되었습니다. 이날은 한국이 해방되던 그날보다도, 세계가 기뻐할 수 있는 그 어떠한 날보다도 더 기쁜 날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부모의 날이 몰리고 쫓김받는 통일교회의 무리들로 인해 세워진 것입니다.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이날이 없고서는 천주의 한을 풀 수 없습니다. 이날이 오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뜻을 받들 수 없습니다. 이날이 세워지지 않고서는 사탄세계인 이 땅 위에 하나님의 승리의 발판을 닦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승리의 날을 결정하는 날도 이날이요, 성도들이 해방될 수 있는 날도 바로 이날입니다. 천주간에 소원과 이념이 하나되는 날도 이날이요, 천지가 개벽하는 날도 이날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하겠습니다.
만일 오늘날 이 땅에 참부모가 계신다면 그 부모는 어느 개인을 위한 부모가 아닙니다. 그 부모로 말미암아 모든 가정이 있을 수 있는 것이요, 그 부모로 말미암아 종족과 민족과 국가와 세계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부모의 날과의 인연으로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참부모를 몽땅 차지한 사람은 전세계를 차지한 사람과 같으며, 어떠한 국가의 주권자같이 하늘의 영광을 차지하고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의 날은 천지가 찬양하고 기념해야 할 날인 동시에 만민이 잊어서는 안 되는 날인 것입니다.
참부모로 말미암아 아담과 해와가 소망하였던 역사적인 일들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요, 부모의 날을 계기로 타락한 세계가 없어지고,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새로운 세계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하나님의 역적인 사탄이 차지한 세계적인 판도를 빼앗아 버려야 합니다. 지금까지 이것을 빼앗기 위한 싸움을 책임지고 나온 것이 종교입니다. 이것을 위해 종교인들은 도를 닦아 나왔고 기도를 해 나왔습니다.
이 땅 위에 인류의 아버지로 오셨던 메시아를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게 했으니 다시 인류의 아버지가 오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하여 종교인들은 기도를 해야 했고 도를 닦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오시는 인류의 아버지를 모셔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공중의 권세를 잡고 있는 사탄과 대결하여 세계적인 승리를 거두어야만 합니다. 그래야 세계를 복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천지간에 선악의 싸움이 벌어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종말기인 지금 40년, 혹은 120년을 중심하고 환난과 기근, 그리고 파란곡절이 전세계에 연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알아야 할 것은, 끝날이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전인류가 개인주의화되어 간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세상이 망해 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래 가지고 점점 물질주의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탄을 중심삼고 물질적으로 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민주세계와 공산세계가 세계적인 국가의 권한과 위신을 갖고, 언제까지나 세계를 호령하고 그 권세를 자랑할 줄 알지만 그렇게 안 되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흐름이 1960년을 기점으로 해서 주의(主義)를 중심한 형태에서 국가를 중심한 형태를 갖추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세계적인 공산주의가 국가적인 공산주의와 민족적인 공산주의로 갈라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소련과 중공이 싸우게 된 것입니다.
원래는 이 땅 위에 하나님을 중심삼은 아담의 주권이, 영원무궁한 하늘의 주권이 세워져야 했습니다. 하나님을 중심하여 전체가 하나로 화하고 동하여 돌아가는 세계가 이루어져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고 거꾸로 사탄을 중심한 주권이 세워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탄 편에서는 국가와 국민을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국가와 국민이 없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거꾸로 된 것입니다. 그래서 본연의 세계를 복귀하기 위한 싸움이 벌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어느 시대, 어느 환경, 어느 사회, 어느 국가에서도 하나님을 환영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독교는 피눈물나는 반대를 받고 쫓김을 받아 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작전은 맞고 빼앗아 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날 복귀의 길을 가는 우리도 개인적으로 맞고, 민족적으로 맞고, 세계적으로 맞아 가면서 하나님 앞에 충성을 돌려야 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해와는 하나님을 버리고 돌아섰지만, 나는 어떠한 폭풍우가 불어온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겠다는 세계적인 신념을 세워야 합니다. 즉 개인을 복귀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사탄으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모든 것, 즉 가정과 종족과 민족과 국가와 세계 전체를 하나님 편으로 복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야곱가정이 하늘땅의 모든 복을 찾아올 때까지 고향을 그리워하던 심정으로, 혹은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복지를 그리워하던 심정으로 아무리 시련과 고통이 휘몰아친다 하더라도 그 목적을 이룰 때까지는 이를 악물고 넘어가야 합니다.
기독교가 지난날 아무리 대외적인 것을 갖추어 가지고 민족적, 국가적, 세계적인 터전을 닦았다 하더라도 그것은 양자로서의 터전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양자 가지고 만족할 수 있습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전인류는 참부모를 맞이할 수 있는 입장에서 참부모의 사랑을 중심삼고 전체적인 것을 갖추어야만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부모의 사랑과 자녀의 사랑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참부모의 사랑을 받는 형제들끼리 이 땅에서 하나 되어 모든 것을 갖추어 나가야만 합니다.
참부모를 중심삼고 한 많은 역사의 모든 것을 청산지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참부모를 맞는 기쁨을 오색인종이 찬양하고 그 마음이 사랑으로 터져 나와 이 세계에 있는 수많은 고통을 제거시켜야 합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이 안식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일을 누가 할 수 있겠습니까? 부모의 날을 맞이할 수 있는 민족이나 국가만이 해낼 수 있습니다. 부모의 날을 맞이할 수 있는 땅이 있다면 그 땅은 세계를 구해 낼 수 있는 곳이 될 것입니다.
부모의 날을 맞이하여 참부모의 사랑을 받는 아들딸들이 나타나서, 아담과 해와로 말미암아 빚어진 한 많은 사연을 풀어 버리고, 사탄권을 없애고, 선의 세계를 복귀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먼저 언어가 통일되어야 합니다. 세계의 언어와 생활이 통일되어야 하며 문화 역시 통일되어야 합니다. 참부모를 중심하고 하나의 이념, 하나의 신념, 하나의 생활을 이루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터전 위에서 생활이 시작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처럼 통일된 생활을 해 본 시대가 없었고 민족이 없었으니, 오늘날 이 시대에 들어와서는 새로운 터전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성가 ‘하늘의 용사’ 4절에 ‘동방에 밝아 오는 찬란한 문화’라고 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동방에 있는 한국은 침략적인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역사를 유린하는 문화를 지닌 나라도 아니었습니다. 참부모는 어디까지나 역사를 보호하고 침략자를 없애는 참사랑을 가지고 오시는 것입니다. 원래 그러한 법도를 세워서 인류 앞에 공헌하는 것이 종교의 사명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은 분명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참부모가 이 땅 위에 오셔서 아담 해와를 중심삼은 가인과 아벨의 원한을 풀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형제가 형제를 품고, 형제가 형제를 대신하며, 친구를 위하여 죽음의 길로 나설 수 있는 마음들이 생겨나야 합니다. 만민을 구원하겠다는 박애 정신으로 세계 인류와 친할 수 있는 마음들이 나타나야 합니다. 그래야 새로운 생활 터전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중심삼고 이와 같은 일을 해낼 수 있는 부모가 나와야만 합니다. 사람이 태어날 때에도 태어나는 한 날이 있듯이 이러한 부모가 나오기 위해서는 그럴 수 있는 한 날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들도 그날을 위해 여기에 모인 것입니다.
부모의 날, 이 명사는 아주 간단합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이날을 맞기까지 말할 수 없는 눈물어린 사연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만민을 품어줄 수 있는 부모이지만, 그런 부모의 날을 맞지 못해 역사적인 한이 맺혔으니 그날을 위하여 기도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 길에서 ‘소망의 그날이 어서 오소서.’라고 기도하면서 죽어갔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까지 기독교는 사실상 피눈물 나는 길을 걸어왔습니다. 예수님은 돌아가시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 앞에 ‘아바 아버지여! 그날이 오게 하여 주시옵소서.’ 라고 기도를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적인 사탄을 없애 버리고 역사적인 원수를 갚아 선의 세계를 복귀할 수 있는 그날을 그처럼 소망했던 것입니다. 그 소망의 한 날이 부모의 날인 것입니다. 그날은 하나님이 말할 수 없이 기뻐하시는 날이요, 인류가 말할 수 없이 기뻐해야 될 날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슬픔을 체휼하지 않고는 기쁨을 체휼할 수가 없기에 하나님은 오늘날까지 통일교회를 역경의 길로 몰고 나오셨던 것입니다. 눈물과 고통의 길로 인도하셨으며 산골짜기로, 혹은 험산준령으로 내몰았던 것입니다.
이제까지 그러한 길을 마다했던 무리들은 전부 쓰러졌습니다. 그러나 그 길을 고이고이 받들고 걸어 나가며 본향의 땅을 찾아가는 사람, 이 길이 아니면 안 되는 줄 알고 생활한 사람은 하나님이 이끄셨습니다.
이러한 길을 십년을 걸었으면 그 십년이라는 세월은 한 많은 십년이요, 역사적인 해원과 더불어 동정할 수 있는 십년이요,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피를 뿌리신 것과 같은 십년이라는 사실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와 같이 한 많은 사망 길을 헤치고 나와 오늘 이날을 맞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셔야 하고 인류가 기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이아몬드를 찾아가는 것이 기쁜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다 두고 가야 할 것입니다.
본래는 참부모의 인연을 중심삼고 참다운 사랑을 품고 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입지 조건과 환경이 좋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중심삼은 참부모와 인연을 맺은, 천천만대 영원한 법도를 갖춘 그러한 나라를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곳은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하는 터전이요, 영생의 터전입니다. 그곳에서 맺은 인연은 태어나서부터 죽어서까지 영원토록 계속됩니다. 참부모가 없이는 절대로 하나님을 대할 수 없습니다. 하늘의 법도도, 하늘의 터전도 참부모가 없이는 세울 수 없습니다. 죽어서도 참부모가 없이는 하늘의 법도를 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온 인류는 참부모를 찾아 나가야 합니다. 참부모를 통해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해야 합니다. 기독교도 그러하고, 불교도 그러합니다. 유교 역시 참부모를 찾아가야 할 복귀의 운세가 남아 있는 것입니다. 세계적으로 그러한 하나의 목적 기준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죽은 사람과 살아 있는 사람은 무엇이 다르냐? 살아 있다는 것은 햇빛을 받고 그 햇빛을 통하여 자라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때가 가까워질수록 마음이 기쁘면 산 사람이요, 심정적인 기준이 말라 비틀어지고 자유가 구속된 것과 같이 괴로운 사람은 죽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심정적인 인연을 가진 부모일수록 어려운 일이 닥치면 자식들을 생각합니다. 이처럼 아침이 된 줄을 모르고 있는 이 땅에 살고 있는 30억 인류를 위해 오늘 이 한 날을 맞이한 선한 여러분들이 온갖 정성을 다해야 되겠습니다.
소망이 이루어질 시간이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십자가에서 죽기 위해 움직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기울어 가는 해를 따라가는 무리가 되어서는 사람 구실을 할 수 없습니다. 아침 해가 떠오르는 동녘을 향하여 새날을 맞이할 수 있는, 떠오르는 햇빛을 첫 번째로 맞이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떠오르는 해를 따라서 움직여 나갈 수 있는 사람이 진짜 통일교인인 것입니다.
오늘은 부모의 날입니다. 여러분들이 효자가 되려면 부모가 어떤 분이라 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과연 부모가 어떤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가르침을 받아서 알고 있는지, 참으로 알고 있는지 생각해 본 일이 있습니까?
여러분들은 통일교회에 나와서 효자 효녀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오줌 누고 똥 누고 하는 어린애였습니다. 어머니의 젖을 깨물고 빨고 하는 어린애였습니다. 그러면서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 나왔습니다.
이 세상에 최고의 철학이 있다면 부모 철학일 것입니다. 부모 철학이 최고라는 말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어린애가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전부 다 배워야만 합니다. 그것이 부모가 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머니의 배를 통해 태어났지만 양자 양녀들입니다. 그러니 그 부모 앞에 충성을 해야 됩니다. 그래 가지고 여러분이 부모가 되면 사위기대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렇지만 여러분들만으로서는 절대로 하늘의 자녀를 두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늘의 자녀를 두기 위해서는 분명히 하늘의 부모가 먼저 나와야만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부모가 나오기 위해서는 맏아들이 먼저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맏아들이었던 가인이 천도를 배반하였으니 하나님 앞에 배반했던 가인의 노정을 거꾸로 밟아서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는 위치까지 올라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사위기대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러기 전까지 여러분들은 전부 다 아기입니다. 아기예요. 그러니 세상에서 아무리 잘나고 무엇이 어떻다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아기와 같은 심정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하여 어머니의 뱃속과 아버지의 뼛속을 통하여 다시 나와야 됩니다.
아기의 씨는 어머니의 뱃속에 있습니다. 아버지에게도 있지요? 아버지에게는 뼛속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뼛속을 통하고 어머니의 뱃속을 통해 가지고 아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기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아버지와 어머니를 통해서 만들어집니다. 여러분들은 아버지의 뼛속과 어머니의 뱃속을 통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역사가 재미있습니다.
가인과 아벨은 반드시 싸워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에서와 야곱은 복중에 쌍태로 있을 때부터 싸웠습니다. 베레스도 세라와 복중에서부터 싸웠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서부터 사탄을 분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거기에서 사탄이 참소하지 못하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가인 편 인물이 먼저 나왔던 것처럼 공산주의가 먼저 나왔습니다. 먼저 나와야 쫓겨 들어가지요. 그래야 하나님 편이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래 예수는 어머니인 마리아의 뱃속에 있을 때부터 사탄의 간섭을 받으면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마리아의 복중에서부터 싸워 가지고 자라나는 기간이 있었기 때문에 복중에서부터 사탄이 참소하지 못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사탄이 참소하지 않아야 메시아가 될 수 있습니다. 메시아에게는 역사적인 터전이 있고, 또 복중에서 자라나는 심령 기준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메시아는 원래 아기 때부터 사탄이 참소하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입장에서 태어난 메시아는 탕감노정을 걷게 되는데 먼저 법도대로 걸어 나가야 합니다. 오늘날의 여러분들도 탕감노정을 걷기 위해서는 그와 마찬가지로 법도를 찾아 나가야 합니다. 부모를 만나 가지고 어린애가 되고 그 다음에는 아버지 어머니의 법도를 찾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조건을 다 찾지 못했으니 복중의 아들을 제물로 삼아 그 아들을 아벨적인 입장에 세워 놓고 가인적인 입장에서 사랑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싸움이 선생님 가정을 중심삼고 1960년도부터 시작되어 지금까지 계속해 나오는 것입니다.
사위기대를 중심삼고 한 형제가 보리밥을 먹으면 나머지 형제들도 보리밥을 먹어야 하고, 한 형제가 고생을 하면 나머지 형제들 모두가 고생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부모의 날을 기준으로 타락된 경로와 반대 되는 경로를 거쳐 탕감복귀의 노정을 걸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러한 복귀의 길을 가는 것이 종교입니다. 종교가 이 길을 가야만 사위기대를 중심으로 한 탕감복귀노정이 출발되는 것입니다. 종교인인 우리는 여기에서 세계적인 기반을 이루기 위한, 세계적인 기반을 닦기 위한 터전을 마련해야 합니다. 이 민족의 핍박을 받고 인류의 핍박을 받더라도 우리는 이와 같은 세계적인 기반을 마련하기 위하여 싸워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각도에서 볼 때, 여러분들은 오늘 부모의 날을 맞이하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하는 것을 알아야 되겠으며, 여기에 동참하는 것을 큰 기쁨으로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언제 부모를 세워 공경해 보았습니까? 언제 사랑하는 부모를 가져 보았습니까?
가인과 아벨의 탕감복귀에서 먼저 나온 것이 가인이요, 나중에 나온 것이 아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의 법도대로 아벨을 통해서 장자의 기업을 복귀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부모 앞에 먼저 나온 아기의 입장에서 나중에 나오는 아기 앞에 천하의 모든 것을 대표한 충성을 바쳐야만 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해야만 탕감복귀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담 해와는 그들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사탄이 빼앗아 갔습니다. 그러나 가인과 아벨의 경우에는 탕감 법칙대로 먼저 나온 사탄 편인 가인을 하늘 편인 아벨 앞에 굴복시켜 가지고 하나님 앞에 바쳐 드려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 또한 타락했기 때문에 오늘날 이것을 복귀하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이 나중에 나온 아기를 사랑하고 받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부모를 모실 수가 있습니다.
축복가정들은 앞으로 주님의 아들딸을 정성을 다해서 모셔야 합니다. 그들을 모실 수 있는 기준이 세워져야만 예수님의 한을 여러분들이 탕감복귀로 해원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먼저 나온 제1이스라엘이 책임을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죽어 갔고 제2이스라엘이 그 탕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탕감복귀에 의하면 여러분은 제2이스라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제2이스라엘의 출발 기준 위에 서서 메시아를 모셔야 합니다.
선생님이 한 많은 한국 땅에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 것도 복귀역사가 그렇기 때문입니다. 이 일을 하기 위해서는 편안한 자리에서 출발할 수 없었습니다. 삼천만이 반대해도 그것을 뚫고 20년 전부터 이 길을 걸어 나왔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가 나오게 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천륜을 기반으로 해서 우리 교회가 나왔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이러한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을 모시기 위한 기초를 닦는 역군입니다. 천적인 사명을 완결하기 위한 투사들인 것입니다.
부모의 날은 어떠해야 되는가? 부모의 날은 통일교회만을 위한 날이 결코 아닙니다. 한국을 위한 부모의 날로도 만족할 수 없습니다. 세계를 위한 부모의 날? 그것으로도 그 뜻을 다할 수 없습니다. 천상천하, 온 천주가 화합할 수 있는 한 날로서 하나님과 함께 온 우주가 기뻐할 수 있는 날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싸움은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원수들이 남아 있으니 그들을 전부 다 무너뜨리기 위한 탕감 계획이 먼저 세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개인적인 부모의 날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개인적인 부모의 날을 발전시켜서 종족적인 부모의 날을 세우기 위하여 싸워 나왔던 것이고, 종족적인 부모의 날을 발전시켜서 민족적인 부모의 날을 세우기 위하여 싸워 나왔던 것입니다.
우리는 민족적인 부모의 날을 국가적인 부모의 날로, 국가적인 부모의 날을 세계적인 부모의 날로, 세계적인 부모의 날을 천주적인 부모의 날로 세워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위해 해야 할 싸움이 아직도 우리 앞에 남아 있는 것입니다. 7년 고비를 중심하고 가야 할 길, 즉 세계무대로 향한 길이 남아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앞으로의 세계는 어떻게 될 것이냐? 세계적인 공산주의가 국가적인 공산주의로, 국가적인 공산주의가 민족적인 공산주의로 떨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원래 하나였던 것이 자꾸 갈라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가인 형과 아벨 형 국가로 나뉘었는데 앞으로는 가인 형인 공산주의끼리의 싸움이 벌어지게 되는 셈입니다. 그렇게 되면 사탄 편에서는 절대적인 개인주의가 벌어지게 되고, 하나님 편에서는 세계주의를 부르짖게 되어 결국은 하나로 결속하게 될 것입니다.
즉 이렇게 세워진 하늘 편의 세계에서는 이 세계는 내 세계요, 이 나라는 내 나라요, 이 인류는 내 인류라고 하며 전체의 것을 소유할 수 있는 주의의 세계가 가까워 온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있습니까? 그래야만 사탄에게 잃어버린 것을 반대의 경로를 밟아서 되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탄세계를 이루게 된 개인에서부터 종족 민족 세계까지 순서를 거꾸로 해서 찾아오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세계적인 것을 준비해서 사탄세계와 싸워 승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언제부터 이러한 것이 출발되었느냐? 1960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중공과 소련이 분립하기 시작하여 세계의 관심거리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이념은 공산주의 이념을 능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것으로 이 이념적인 세계의 승패를 결정지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됩니다. 한 사람을 중심삼고 종족과 민족과 국가와 세계가 복귀되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민족적인 것을 국가적인 것으로서 완결 짓는 단계까지 나가야 합니다. 지금은 삼천만 민족을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때입니다. 시대적인 사명을 중심삼고 하나로 단결해야 하는 때입니다.
혼란한 시대에 처한 세상 사람들은 날이 가면 갈수록 흑암 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맙니다. 이처럼 세계적인 혼란기를 당할 때에는 새로운 힘을 가지고 이들을 이끌어 뭉치게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무엇으로 이들을 이끌어 뭉치게 할 수 있느냐? 기독교적인 것으로 해야만 됩니다. 서구의 생활적인 그 무엇을 가지고도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이 일을 우리가 해야 합니다. 그래요, 안 그래요? 자신들이 없구만. 여러분들은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통일교회에서는 지금 그것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미국 사람들도 통일교회를 그리워할 때가 올 것입니다. 그때가 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렇게 할 수 있는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생각하고 선생님은 언제나 먼저 준비해 나갑니다. 이제는 식구를 다스릴 때는 이미 지났습니다. 반대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이런 것을 생각하면서 옛날에 나를 핍박하던 사람들이 살아 있을까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우리들은 부모의 심정을 지니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모를 알고, 부모의 소원을 알고, 부모의 날을 알았기 때문에 우리들은 부모의 심정을 가지고 나가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부모의 날, 이 한 날을 세우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죽어 갔습니다. 또한 이 한 날을 세우기 위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찬양해 왔습니다. 인간이 이런데 하나님은 이날을 얼마나 기다리셨겠습니까! 이날을 맞이한 승리한 아들딸들은 하나님의 상속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하나님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품속에 깃들어 있는 사랑까지도 상속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타락이라고 하는 것이 원래 사탄의 사랑 때문에 빚어진 것이기에 하나님도 사탄의 사랑이 있는 자리에서는 움직이지 못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통일교회가 그것을 제거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움직일 수 있게 하고 있으니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세상에서는 통일교회가 이렇다 저렇다 하며 자기네들 마음대로 말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애석한 일입니다. 그러나 두고 보십시오. 우리들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 때가 올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길을 가기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버렸습니다. 그것은 결국 하나님이 자기의 아들을 딛고 넘어간 셈입니다. 여러분들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사실은 여러분들도 그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해서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까? 누가 여러분을 낳았습니까? 이것을 세상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여러분은 도(道)가 무엇 때문에 생겨났으며, 통일교회가 왜 생겨났는지를 확실히 이해해야만 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앞에 충성을 다하여 최후에 가서 하나님이 맞이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참부모를 맞이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일찍이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하셨습니다. 그런 말씀을 하신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말미암는다’ 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 것이냐? 그것은 문을 통해야 된다는 뜻입니다. 어떤 문을 통해야 되느냐? 예수님의 문을 통해야 되고, 어머니의 문을 통해야 되고, 그 다음에는 형제들의 문을 통해야만 됩니다. 그래야 비로소 사탄을 굴복시킬 수 있는 권한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담 해와의 타락으로 인간은 참부모를 잃어버리고, 하나님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또한 가인이 아벨을 죽임으로써 형제까지 잃어버리게 되었기에 인간들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타락한 인간들은 하나님을 찾아야 되고, 부모를 찾아야 되고, 아벨을 찾아야 됩니다. 어떠한 아벨을 찾아야 되느냐? 가인에게 매 맞아 죽은 아벨은 안 됩니다. 살아서 사탄과 싸워 승리한 아벨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야 한 가정의 아들로서 설 수 있는 것이며, 그래야만 악과 선을 심판할 때 있는 하나님의 권능을 대신하여 심판의 권한을 갖는 아들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찾았습니까? 부모를 찾았습니까? 참된 아들딸의 입장에 섰습니까? 그러려면 하나님을 중심삼은 참된 부모가 여러분들 앞에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비로소 여러분들이 참된 자신을 찾아 세울 수 있습니다.
축복권 내에 들어가 있는 축복가정은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가? 통일교회의 축복을 받아야 참된 아들딸의 입장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과 종적인 인연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자면 하나님의 사랑을 가진 부모가 나와야 됩니다. 맨 처음에 그런 부모를 거치고, 그 다음에는 부모가 사랑하는 식구를 거쳐야만 됩니다. 앞으로 때가 오면 모든 것이 원리원칙대로 시행될 것입니다. 반드시 그러한 때가 올 것입니다.
여러분은 부모의 능력을 알아야 됩니다. 형제들을 알기 전에 부모를 알아야 됩니다. 그런 다음 동생을 사랑해야 됩니다. 동생은 아벨이 되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여러분은 모든 아벨적인 사람들을 기쁨으로 대해야 합니다. 그렇게 형제를 중심삼고, 통일교회를 중심삼고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어려운 모든 것을 뚫고 나가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늘 부모에 대한 것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 불원간 이에 대한 것을 밝혀야 할 때가 올 것입니다.
원리원칙적인 기준에 입각해서 볼 때에 오늘날 이 세계는 단순한 세계가 아닙니다. 이 세계는 복귀해야 될 세계인 것입니다. 원래는 하늘 부모로부터 인연이 맺어져 가지고 시작된 문화세계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모든 것이 사탄을 중심으로 하여 이루어져 나왔습니다.
아담 해와를 중심으로 첫출발하여 세계적으로 발전해야 하는 것이 창조본연의 역사였는데, 그것이 안 이루어졌기 때문에 탕감복귀노정에서 싸워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들은 7년노정을 걸어가면서 심정을 가지고 싸워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모의 날을 맞이하는 가운데서 기쁨을 느낄 수 있고, 기쁨을 느끼는 자리에서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기준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부모의 날은 자녀가 태어날 날을 하늘땅 앞에 공포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자녀로서 아담과 해와를 지어 놓으시고 만물을 주관할 수 있도록 축복하셨습니다. 여러분들도 이러한 심정적인 인연에 의해 복귀의 노정을 따라가고 있기 때문에 부모를 대할 수 있는 자리에 선 다음에 만물을 주관할 수 있는 축복을 받는 자녀의 입장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부모의 날은 참으로 의의가 깊은 날입니다. 부모의 날이 세워짐으로써 자녀의 날이 있게 되고, 자녀의 날이 있음으로써 만물의 날이 있게 됩니다. 부모의 날을 기준으로 하여 3대 날이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는 무슨 날이 있어야 하느냐? 하나님의 날이 있어야 합니다. 부모의 날을 맞이했으니 이젠 하나님의 날을 찾아 들어가야 합니다. 아담이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부모의 날과 더불어 하나님의 날은 그때부터 세워졌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들이 모두 하나님의 심정을 부모의 심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사탄세계에서 ‘네 것이자 내 것이다.’ 하는 식으로 하나님의 심정을 소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공산주의에서는 ‘네 것이자 내 것’ 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 것이자 네 것’ 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중심삼고 아담과 해와가 하나되어서 아담으로부터 부모의 날이 세워졌더라면 그날이야말로 천하가 기뻐할 날이요, 온 천하만상의 소망이 이루어지는 날이 되었을 것입니다. 원래는 하나님을 모셔 놓고 부모의 날과 만물의 날을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에 그런 영광스러운 하늘의 날들을 가질 수 없게 되고 만 것입니다.
이제 천상천하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는 날이 와야 합니다. 한 많은 역사의 끈을 끊어 버리고 새로운 역사를 출발할 수 있는 그 날이 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쌍수를 들어 ‘내 것이 네 것이고, 네 것이 내 것이다.’ 라고 할 수 있는 날을 맞이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늘권 내로 복귀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인류는 그것을 위해 싸워야 하는데 이 싸움의 책임을 누가 질 것이냐? 통일교회 교인 여러분이 져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무엇을 가지고 싸울 것이냐? 따뜻한 심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피와 땀과 눈물을 가지고 싸워야 합니다. 그래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자리에서 우리들은 앞으로 일년간 더 싸웁시다. 일년간 이 나라 이 민족에게 편만해 있는 악의 세력을 제거하기에 전력을 다합시다. 오늘 이것을 다시 한번 다짐하고 하나님이 영원히 축복할 수 있는 천상천하의 기쁨의 날을 맞이할 수 있도록 온갖 정성을 다합시다.
그래야만 전체의 뜻이 이루어져서 하나님께 승리의 영광을 돌려드릴 수 있고, 또 그 영광을 여러분이 상속받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4월 3일은 선생님이 잊을 수 없는 공판 날이었습니다. 기성교단의 질시와 공산당국의 종교말살 정책에 따라 2월 22일에는 선생님이 내무서에 구금되었고, 2월 25일에는 머리를 깍였습니다.
공산 치하에서의 종교공판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날(4월 3일)은 그들의 역원(役員) 중에 결원이 생겨서 4월 7일로 공판일이 연기되었습니다. 이날이 구금된 후 만 40일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것은 동지들이 고문을 받던 일입니다. 선생님이 자백만 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고생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동지들이 고문받던 장면이 제일 괴롭고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렇게 고생했던 그 사람들이 하늘 앞에 남아지지 않은 것이 서럽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예수님보다도 그 동지들이 당하는 고통이 더 서러우셨을 것입니다. 기독교가 발전하는 이유도 하나님보다 더 고통스러운 입장에 서려고 한 데 있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에는 죽음을 각오한 사람이 많았지만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선생님은 무엇을 남길 것인가를 염려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같이 눈물을 흘리고 같이 죽음 길을 가는 전통을 세우려는 것입니다.
새 시대를 세운 선각자들은 죽음을 걸어 놓고 고생하였습니다. 여러분이 선생님과 같은 입장에서 고생을 했다면 여러분이 실패하더라도 그 고생이 실패를 능가할 수 있는 것이라면 여러분은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버리지 못하시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심정 때문입니다.
선생님이 감사하는 것은 아직까지 죽지 않고 살아남아 하늘의 일을 할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선생님이 처음 사명을 받고 뜻길을 출발할 때, 세포가 우는 고개를 넘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살이 찢기고 뼈가 부서지는 자리에 있어야지 환영받는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된다고 느꼈던 것입니다. 그러한 각오로 나섰기 때문에 쇠고랑을 차고서도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왜정 때는 왜놈들이 원수였고, 이북에 있을 때는 공산당이 원수였습니다. 더욱이 기독교인들에게까지 반대를 당한 원통함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이것을 해원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애급에 팔려 간 요셉을 생각했습니다. 함께 눈물 흘리며 맹세했던 사람들이 내가 어려운 길을 걷고 있을 때 나를 보자 ‘아직까지도 그 길을 가고 있느냐?’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 통곡할 수 있는 날을 보여 주고 말겠습니다. 내가 그렇게 만들겠습니다.
형무소 문 옆에서 만난 옛 친구가 ‘좋게 됐구먼.’ 하면서 비웃는 것이 아닌가! 그들로 하여금 통곡하며 몸무림치게 해 주겠습니다. 공산당에게 그런 악형을 당하였을 때 이 어려움을 기어코 넘고야 말겠다고 하나님 앞에 맹세했던 나입니다. 개인들로부터 반대를 받았다고 해서 그 개인들을 대하여 복수할 것이냐? 아닙니다. 그 배후에는 사탄이 있습니다. 그 사탄을 지구상에서 추방해야 합니다.
그러한 길을 걷지 않으면 어느 한때 더 큰 고비를 만날 것입니다.
내일부터는 협회가 창립된 지 13년째로 접어들어갑니다. 이제부터 선생님은 어떻게 할 것이냐? 여러 가지로 진행하고 있는 선생님의 계획에 백 퍼센트 참여해 주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다운 신념과 실력을 나타내 주기를 부탁합니다.
창세기는 창조를, 요한계시록은 복귀를 기록한 말씀입니다. 역사의 최종에는 전역사의 탕감조건을 일시에 세워야 합니다. 이것은 원뿔형을 눌러서 하나의 평면을 만든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 각자는 현 시대에 살고 있지만 역사적인 것을 탕감한 입장에 서야 합니다. 이 탕감을 등에 지고 현재의 책임을 앞에 안아야 합니다. 이 전체를 수습하는 분이 재림주입니다.
참된 사람은 잘못된 사회를 시정하고 새로운 앞길을 개척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도 자기 책임을 완수하지 못하였기에 스스로 의인이라는 말을 못하였습니다.
통일교회가 처음부터 환영을 받았다면 자신의 이익만 위해서 살려는 악당들이 자리를 잡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핍박 중에 있었기 때문에 고난의 길을 각오한 사람들만이 들어온 것입니다.
여러분은 생명의 씨앗입니다. 생명의 씨앗은 거름 속에 처넣고 발로 밟더라도 그것을 터치고 나와 새로운 열매를 맺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개인이 필요하여 그 개인을 구원하려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개인을 구원하려 한 것은 가정이 필요해서요, 가정을 구원하려 한 것은 그 친척과 그 사회가 필요해서였습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개인은 자신만을 위한 개인이 아닙니다. 그 개인은 가정, 혹은 사회를 위한 개인입니다.
우리에게는 공산당과 싸워야 할 세계적인 사명이 남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급속한 배가운동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역사상 모든 사람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복귀 과정에서 복닥거리다가 죽어갔습니다. 거기에는 단계 단계마다 매양 탕감이 있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모든 것을 총탕감하지 않으면 안 되는 때가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창세기의 목적을 이룰 때가 된 것입니다.
이 복귀역사의 외적인 책임을 진 것이 사회요, 그 내적인 책임을 진 것이 종교입니다. 그리고 이 역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야 할 중심점은 재림사상입니다.
여러분 각자는 과거 역사의 인연을 등에 지고 있고, 현실을 가슴에 안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창조주를 중심하고 보면 온통 빌려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빌려서 가지고 있는 몸이요 마음입니다. 몸은 부모가 빼앗아 가고 마음은 하나님이 도로 빼앗아 간다고 치면 자기는 없다는 결과가 됩니다.
모든 사람은 역사적인 빚쟁이입니다. 빚쟁이는 그 짐이 무겁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로부터 이 무거운 짐을 벗겨 주시기 위해 수고하고 계신 것입니다.
사람이란 과거를 위하여도 필요하고, 현재를 위하여도 필요하고, 미래를 위하여도 필요한 사람이라야 비로소 참사람인 것입니다. 사명을 못한 자는 구속받아야 합니다. 구속받는 자는 해방 못 된 자니, 해방 못 된 자는 의인일 수 없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이 길을 찾아올 때 좋은 자리는 꿈도 못 꾸었습니다. 여러분은 모름지기 참다운 눈물의 동참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아버지가 그 누구보다도 더 불쌍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데모할 때만 애국자가 되어서야 쓰겠는가? 우리는 이제부터 다 같이 참된 피땀을 흘려 봅시다.
본래는 인간세계에 복귀나 탕감이라는 명사가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 조상이 그릇된 길을 갔기 때문에 복귀나 탕감이라는 명사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복귀라는 명사에는 참의 기준을 추구하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인간들은 마음을 발판으로 해서 올라갑니다. 즉 종의 종의 시대를 거쳐서 종의 시대, 양자의 시대, 참자녀의 시대로 복귀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 각 시대를 복귀하는 데는 언제나 하나의 기준, 즉 한 중심을 결정해 놓고 복귀해 넘어가게 됩니다.
종의 시대에는 하나님이 인정할 수 있는 참다운 종의 기준을 세워 놓고 새로운 역사노정을 출발해야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와서 참다운 양자의 기준을 세워 가지고 참다운 자녀의 기준에 연결해야 했던 것입니다. 참자녀가 되기 위해서는 양자의 기준을 세워 가지고 연결해야 하고, 양자가 되기 위해서는 종의 기준을 세워 가지고 연결해야 합니다. 예수 시대의 증거자인 목자 안나와 시몬은 모두 종의 기준에서 증거하고 나타났던 사람들입니다.
양자시대의 출발자인 세례 요한은 뜻을 대해서는 종의 입장이었고, 모시는 입장에서는 양자의 입장이었습니다. 그러한 그가 종의 사명은 했으나 양자의 기준을 세우지 못하는 실수를 범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3년 공생애노정에서 양자의 기준과 직계 자녀의 기준을 세우기 위하여 고생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40일 금식에 성공함으로써 양자의 기준을 세울 수 있었고, 하늘과 땅, 종횡의 관계를 연결할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예수와 일치하여 종의 종, 종, 양자, 자녀의 기준을 세우는 환경을 조성해야 할 것이었는데 그들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위한 싸움을 인계받은 것뿐입니다. 이렇게 예수님 홀로 환경과 싸웠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종의 종의 기준으로부터 직계 자녀의 기준까지 세우기 위해 이끌어 나온 것이 예수님 이후 2천년 역사입니다.
우리 자신이 7년노정을 통해 이 기준을 횡적으로 전개시키기 위해, 각 기준에서 이러한 탕감복귀의 조건을 세우려고 최하의 기준에서부터 더듬어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환경을 복귀해야 하는 역사적인 사명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눈물과 피와 땀을 흘려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역사적인 입장을 알고 환경을 복귀해야 합니다. 명령을 받고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각자가 알아서 책임져 나가야 합니다. 이것을 하는 노정이 7년노정입니다. 이 노정에서 우리는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리는 전통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들뿐만 아니라 역대의 선지자들도 종의 종의 입장에서 활동을 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이념을 중심하고 하늘의 뜻을 이룬 최후의 인연, 심판할 수 있는 최후의 인연을 세우려면 국가적인 환경을 가지고 나서지 않으면 안 됩니다.
심정에 있어서 과거 선지자들의 기준을 능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직계의 자녀로 설 수 있는 시대권을 조성하기 위하여 먼저 이 민족은 양자의 입장에서 그 사명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이 민족이 그 사명을 다하지 못한다 해도 자녀의 기준만 완전히 세우면 양자의 입장에는 자동적으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7년노정에서 고생을 하는 것은 이런 기준을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그 각급 기준을 대표하여 단 한 사람씩만이라도 사명을 다하여 참다운 기준을 세우고, 그 참다운 기준을 연결시키면 복귀의 노정이 성취됩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책임을 지고 7년노정을 가는 데 있어서 그 마지막 1년을 앞에 놓고 있는 우리는 각자 맡은 바 책임을 완수하기 위하여 다시 한번 반성해야 되겠습니다.
우리 식구들이 그동안 겪어온 슬픔과 어려움을 단순한 과거사로 흘려보내서는 안 됩니다.
오늘을 중심삼고 그 인연을 해원해 드려야 합니다. 먼저는 역사적인 슬픔을 해원하고, 그 다음엔 내 자신의 슬픔을 풀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종의 종, 종, 양자, 참다운 아들의 기준을 연결시켜야 합니다. 그것이 복귀의 전체적인 뜻인 것입니다. 아들이 넘어가면 양자가 넘어가고, 양자가 넘어가면 종이 넘어가고, 종이 넘어가면 종의 종이 넘어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말씀을 받고 직접적인 행동을 받아 가지고 말씀을 중심삼고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 기준을 세우기까지는 아직 기간이 남아 있습니다. 민족적으로 사명을 못할 경우에는 통일교인이라도 그 양자의 기준을 책임져야 합니다. 선생님은 부모의 기준과 자녀의 기준과 양자의 기준을 함께 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양자의 기준은 뜻을 모르고 믿지도 않는 오늘날의 한국 사람의 입장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실상은 여러분이 양자의 기준이라도 세워야 합니다. 즉 세례 요한의 실수를 회복하겠다고 몸부림쳐야 할 것이 현 단계에 있어서의 여러분들의 사명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개인적인 기준만 세워서는 안 됩니다. 전체적인 기준을 세워야 되는 것입니다.
36가정은 선조의 자리에 결정된 것입니다. 거기에는 아담격 가정이 있고, 노아격 가정이 있으며, 세계적인 기준으로서의 야곱격 가정이 있는 것입니다. 그 중심가정 형을 여러분이 결정해야 합니다. 각급 가정들 가운데 그런 가정형이 있느냐? 누가 그런 가정 형을 이루려고 노력했느냐? 민족적, 종족적, 가정적인 기준을 각각 책임질 수 있는 가정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없게 될 때는 문제가 큽니다.
선생님이 아담격 가정을 고생시키려는 것은 노아격 가정이나 야곱격 가정이 자기도 모르게 타고 넘어가고, 다른 가정들도 그 가정을 타고 넘어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남한 각지에 임지를 맡겨서 파견했던 것입니다.
피땀을 흘려 싸울 가정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중에 노아 가정이나 야곱 가정 같은 가정이 한 가정이라도 있어야 합니다. 그 가정이 종족을 대신하고 민족을 대신하여 제사장으로서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못하면 선생님이라도 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가정적인 입장을 대신하고, 종족적인 입장을 대신하고, 국가적인 입장을 대신하고, 세계적인 입장을 대신하여 책임져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세계를 책임지면 여러분은 국가라도 책임져야 합니다.
부모의 날이 나오지 않으면 자녀의 날이 나올 수 없습니다. 자녀의 날이 나오기 위해서는 부모에게 어떠한 조건이 남아 있어서는 안 되고, 만물의 날이 나오기 위해서는 자녀들에게 어떠한 조건이 남아 있어서는 안 됩니다. 선생님은 이것을 알기 때문에 지금까지 이 모든 기준을 아울러 책임져 나온 것입니다.
선생님이 종의 입장에서 걸을 때는 종의 종의 입장을 책임지는 자가 나와야 하고, 선생님이 양자의 입장에서 걸을 때는 종의 입장을 책임지는 자가 나와야 하고, 선생님이 아들의 입장에서 걸을 때는 양자의 입장을 책임지는 자가 나와야 합니다.
선생님은 1960년 만 40세를 기준으로 하여 그때부터 승리의 조건을 세우면서 나왔습니다. 선생님이 움직이는 데에 여러분 가정 전체가 하나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아담격 가정 가운데는 가인과 같은 가정이 있어서는 안 되고, 노아격 가정 가운데는 함과 같은 가정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야곱격 가정들은 모두 에서와 같이 뜻을 맞춰 나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선생님은 소망의 십자가, 사정의 십자가, 심정의 십자가 노정을 걸어야 합니다.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던 예수와는 다릅니다.
여러분 각 가정들이 책임 노정을 못 걸으면 선생님이 닦아 놓은 기준을 다시 상속받아야 합니다.
선생님이 요즘 매일 공장에 나가는 것은, 지금은 만물복귀, 국가복귀를 해야 하는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정성을 들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사실은 여러분 전체가 해야 할 일인데 여러분들이 못 하니까 선생님이 하는 것입니다.
공장을 짓기 위한 헌금을 하는 것은 조건을 중심삼고 끈이라도 달아 놓자는 것입니다. 물질적 기준, 생활적 기준을 공적으로 세워야 합니다.
축복가정들이 해야 할 책임이 남아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중심을 기준 삼고 가야 하기 때문에 중심에 접할 줄 아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아버님, 천지 만물을 지으시던 당신의 심정을 오늘 이 시간 감히 헤아려 보옵니다. 만물의 중심이요 행복과 희락의 중심인 심정을 터전으로 한 가정의 인연이 온 우주 앞에 맺어져야 하는 것이 창조 본의의 소망이요, 목적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오늘날 이 땅은 당신의 소원과 당신의 사정과 또한 당신의 심정을 중심으로 일체가 되지 못한 채 타락의 역사를 거듭해 왔사옵니다. 이러한 것을 생각하면서 역사적인 모든 부족함을 다시 한번 회개할 줄 아는 저희들이 되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사망 세계에서 아직까지 벗어나지 못한 채 내일의 소망을 위해 싸움의 길로 달려가야 할 수많은 인간들을, 아버지,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또한 현세를 박차고 아버지께서 이루시려던 창조이상의 땅인 본향 땅을 향하여 달음질치고 있는 오늘날 수많은 성도들을 긍휼히 여겨 주시옵기를 바라옵니다.
과거 현재 미래를 책임지고 역사해 나오시며 역경 중의 역경을 거쳐오시는 아버지의 가슴엔 한이 많다는 것을, 아버지,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나이다.
아버님의 심정과 이상 앞에 수많은 사람들이 그 영원한 이념과 심정을 찬양하고 노래 불렀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가슴에 못을 박고 말았던 슬픈 과거를 더듬어 볼 때, 당신의 심정이 얼마나 슬펐던가를 느끼면서 당신 앞에 머리를 숙이며 무릎을 꿇고 속죄의 제단을 쌓아야 할 저희들인 것을 다시 한번 마음 깊이 명심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당신 앞에 승리의 제단을 갖추어 놓고 제사장의 사명을 다하는 자녀들이 없는 현실을 바라보시는 당신은 저희들만이라도 하늘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질 수 있는 심복들이 되어 주기를 염원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버님, 생명을 다하고 책임을 다하여 죽는 한이 있어도 아버님의 한과 슬픔을 풀어 드리기 위하여 아버님의 참다운 효자 효녀가 되고, 충신 열녀가 되겠다고 아버님 앞에 쌍수를 들어 맹세한 저희들이었사오나, 실적을 갖추어 아버님이 기뻐하실 수 있는 자리에서 효성과 충성을 다하지 못한 불효하고 불충한 저희들임을 탄식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그러나 하늘이여, 저희들을 버리지 마시옵고, 저희들로 하여금 최후의 승리를 약속하신 그날까지 자기의 직책과 사명을 다할 줄 아는 참다운 자녀들이 되도록 역사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 기나긴 역사노정 가운데 수많은 날들이 흘러왔지만 그 어느 한 날 당신이 기뻐할 수 있었사옵니까? 이러한 역사의 흐름 가운데 이 땅 위에 참다운 부모의 날을 찾아 세우셨으며, 또한 참다운 만물의 날을 찾아 세우셨사옵니다. 아버님, 오늘이 바로 당신이 수고하여 찾으신 만물의 날이옵니다.
아버님, 당신이 수고해 나오신 섭리를 다시 한번 회상하면서 오늘 이날을 맞이하고 보니 감개무량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사옵나이다.
오늘은 아버님께서 이날을 만물의 날로 책정한 그날로부터 4년째를 맞는 역사적인 날이옵니다. 흘러간 노정 가운데 슬픔과 서러움의 비참한 역경을 걸어 나왔사오나, 당신의 크신 섭리의 뜻 앞에 오로지 필승의 한 날을 약속하면서 준비해 온 날들이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되옵니다.
아버지, 지난날의 역경이 크면 클수록 그것이 오늘날의 크나큰 감사의 조건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천번 만번 감사하지 않으면 안 될 저희들임을 깨닫도록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제 사방에 흩어졌던 당신의 아들딸들이 여기 청파동 교회에 모였사오니 이들을 주관하시어 이날을 기억하게 하여 주시옵고, 이날로 말미암아 새로운 심정을 갖추어 아버지 앞에 한걸음 다가설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날로 말미암아 아버님께서 닦아 오신 축복의 날을 세울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남한 각처에 널려 있는 수많은 통일의 무리들이 이날을 위해 무릎 꿇고 정성들여 경배하고 있사오니, 그러한 자녀들이 있는 곳곳마다 당신의 자비의 손길을 같이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또한 세계 만방에서 당신의 이름을 붙들고 경배드리는 수많은 자녀들이 있사오니, 그들 위에도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또한 이 엄청난 우주사적인 사명을 짊어지고 남이 모르는 외로운 길에서 개척자의 서러움을 부둥켜안고 일하는 수많은 당신의 아들딸들이 있사오니, 아버지, 그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남이 모르는 가운데 개척자의 길을 가는 역경이 얼마나 고달픈 것인가를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당신도 그와 같은 자리에서 지금까지 싸워 나오셨기 때문에 그런 사정을 잘 알고 있사오니, 아버님의 사정과 통할 수 있는 자를 세우시어서 그들로 하여금 세계사적인 책임을 완결하게 하시고, 승리의 약속을 이루고 아버님의 뜻을 대신하여 승리의 방패를 세우는 데 부족함이 없는 일꾼이 되도록 역사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제 제1교회, 제2교회, 제3교회가 새로운 임지를 책임지고 서울 장안을 향하여 진군의 행보를 맞추어 나갈 때이오니, 이들 위에 아버님께서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고 명령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승리의 한 날을 위해 영원한 승리의 방패를 들고 대제사장의 책임을 다하고도 남음이 있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 저희들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저희들에게 엄청난 책임과 사명이 지워져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옵니다. 아버지, 이 민족의 운명을 책임지고 나아가면서 정성을 다해 아버지 앞에 보답해야 할 시간과, 이 민족을 위해 최후의 결단을 내려야 할 시간이 목전에 다가온 것을 바라보면서 감사한 마음과 감격된 마음으로 아버지 앞에 새롭게 다짐하고 맹세할 수 있는 저희가 되도록 하여 주시옵고, 그 맹세한 것을 실천하여 실적을 만민 앞에 선물로 나누어 줄 수 있는 당신의 자녀들이 될 수 있도록 역사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영계의 수많은 영인들도 이날을 소망하면서 탕감받을 수 있는 표본적인 한 날을 바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님, 오늘 저희들 한 자체를 세워 놓고 영계와 육계를 연결시킬 수 있는 입장에서 생사의 판결을 지어야 한다는 것을, 그런 중대한 책임이 저희들에게 지워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오늘 여기에 이렇게 모일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하여 주심을 감사드리옵니다. 지금도 이 시간을 위하여 도처에서 흠모의 심정을 갖고 아버지를 부르고 있는 수많은 자녀들을 품어 보호하여 주시옵고, 외로운 길을 가는 자녀들의 모든 사정을 친히 통찰하시옵소서.
기쁨과 영광의 한 날인 오늘 흡족한 은혜로 채워 주시옵기를 원하오면서, 모든 말씀을 참부모님의 성호 받들어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아버님, 당신의 심중에 기억될 수 있는 참다운 효자 효녀가 이 땅 어느 곳에 있었습니까? 이 땅이 효성을 다한 효행의 터전이 되지 못하였사옵기에 아버지를 모셔 놓고 효도를 다하려 해도 할 수 없는 역경의 노정을 거쳐왔음을 생각하게 될 때, 아버지께서는 심중으로 이 땅 위에서 권세를 잡고 있는 사탄을 몰아내고 자유의 천지, 자유스러운 환경에서 ‘당신은 저희들의 아버지요, 저희들은 당신의 참다운 사랑에 엉킨 자녀이옵니다.’ 하면서 당신의 영광을 만세에 칭송하며 노래 부를 수 있는 자녀를 얼마나 고대하셨사옵니까?
그러한 인류의 선조가 나타나지 않았사옵고, 참다운 효자를 갖지 못하셨사옵고, 기뻐하며 자랑할 수 있는 모습을 갖지 못한 것이 역사적인 한이요, 시대적인 곡절로 남아졌다는 사실을 저희들은 아옵니다. 아버님, 아직까지도 그 효성의 터전 위에 태어난 참다운 자녀가 없었사옵고, 그런 자녀들로 이루어진 민족이 나타나지 않았사옵니다.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선민권을 갖추게 하신 목적도 그때를 마련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회고해 볼 때, 인류 조상의 한 날의 실수가 억천만세에 한이 되었사옵고, 이렇게 얼크러진 슬픔이 땅뿐만 아니라 하늘에까지 사무쳐 있는 것을 알게 되옵니다. 이 한의 곡절을 넘어서야 할 운명의 길을 다 가지 못한 인생들에게 다시 한번 긍휼의 손길을 펴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니다.
이스라엘 민족 앞에서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산정을 향하여 걸어가시던 초초한 모습의 예수님은 자기의 슬픔과 서러움을 가슴에 품기보다는 아버지의 서러움과 슬픔을 품고 가셨다는 것을 아옵니다. 장차 이와 같은 운명에 봉착하여 유리고객할 이스라엘 민족을 생각하며 십자가의 노정을 걸어가던 예수님의 심정이 얼마나 아팠던가를 저희들이 회상하게 될 때, 오늘날은 세계적인 골고다를 찾아가는 성도와 세계적인 골고다를 넘어가는 참다운 지도자가 필요한 시대라는 것을 아옵니다.
예수님이 역경 가운데서 ‘아바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시옵소서.’ 하신 것과 같은 기도마저 할 수 없는 부끄러움을 느끼면서 눈물 아니고는 아버지를 대하지 않는, 효성과 지성을 다하는 충효의 자녀를 만나지 못하였던 아버지의 서러운 심정 앞에, 그와 같은 모습을 갖추어 남겨진 십자가의 길, 세계적인 골고다의 길을 가겠다고 몸부림칠 수 있는 당신의 적자(嫡子)가 이 땅 위에 많이 나타나기를 나는 이날까지 고대해 나왔습니다.
아버지여, 그와 같은 자녀가 있사옵거든 당신의 사랑으로 품으시옵고,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을 3일 후 무덤에서 부할시키심으로써 새로운 역사적인 터전을 마련하게 하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와 같은 자리에서 눈물 흘리고 치성을 드리는 그들의 무릎과 눈물자국을 통하여 새로운 역사세계에 부활의 역사를 일으켜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그 누가 당신의 눈물 길을 붙들고 통곡할 수 있으며, 그 누가 당신의 손길을 붙들고 통곡할 수 있었습니까? 아무도 없었던 것이 하늘의 한이요, 하늘의 서러움인 것을 느낄 줄 아는, 이 시간 여기에 모인 몰리고 쫓김받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역사의 최첨단에 서서 남이 알지 못하는 외로운 길을 거쳐가야 하는 것이 하늘 길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이렇게 억울하고 원통하였던 길을 걸으신 당신을 따라가는 저희의 발걸음도 응당 그러해야 될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그 길을 따라가는 통일의 자녀를 보호하여 주시고 지켜 주시는 그 배후에는 말할 수 없는 눈물과 피어린 투쟁의 인연이 얼크러져 있는 것을 저는 아옵니다.
민족은 거부하고 세계 인류는 반대할지라도 심정으로만은 천리의 원칙, 천리의 운세와 더불어 하나의 목적을 향하여 한결같이 나갈 것을 다짐했사옵니다. 쓰라리면 쓰라릴수록, 억울하면 억울할수록 가슴을 부둥켜안고 아버지를 불렀던 그때의 사정이 기필코 이 민족 앞에 나타나기를 당신은 얼마나 소원하셨사옵니까? 이 세계 인류의 심정을 움직여 아버지 앞에 부복 시키는 것이 최고의 방편임을 저희들이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이날까지 참아 나온 당신의 자녀들의 발걸음을 거룩다 하시옵고, 그들의 생활 전체를 당신이 주관하시사 민족이 바라는 일을 할 수 있게 해 주시고, 만민이 그리워할 수 있는 자리에 세워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들이 7년노정을 아버지 앞에서 선포했을 때는 암담했사옵니다. 갈 길을 분간할 수 없는 흑암 가운데서 7년노정을 선포하고 나선 걸음, 벅찬 심정을 가지고 아버지께 충성하고 효성하는 것만이 저희의 할 일이라고 다짐했던 그 발걸음은 이미 역사의 발걸음으로 지나가 버리고 오늘의 입장에서 그날을 추억하게 되었사옵니다. 이날도 그날의 깊은 인상과 깊은 심정의 충격을 다시 한번 저희 각자의 마음에 느끼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3년노정을 지나면서 부모의 날과 자녀의 날을 설정하였고, 만물의 날까지 선포하였습니다. 슬프고 쓰라린 노정을 통해 이와 같은 날들을 세우신 것을 아버지는 보시고 괴로워하셨는데 이 민족은 몰랐었사옵고, 30억 인류는 사망 가운데 잠들어 있었사옵니다.
아버님이 이끄시는 길을 따라 태산준령을 넘고 형극의 길을 넘으면서도 이 민족의 갈 길을 개척하는 데 있어서는 저희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이민족이 인정해야 할 단계에 들어오게 되었사옵니다. 이 모든 것이 아버지의 크신 수고에 연유한 것이었음에 저희들은 머리를 숙이고 무릎을 꿇어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을 이 시간 다시 한번 느끼게 되옵니다.
아버지! 서울에 있는 당신의 자녀들을 다시 불러 모았사옵니다. 이제 저희 제1, 제2, 제3교회가 새로이 싸움의 대열을 갖추어서 원수의 세계를 향하여 전진하지 않으면 안 될 사명이 저희 각자의 두 어깨에 짊어지워져 있음을 아오매, 아버지의 명을 받들어 새로운 역사적인 한 면을 출발하고자 하오니 가는 발걸음이 돌아서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바라보는 저희의 시선은 목표를 넘게 해 주시고, 원수의 심장을 밟고 넘어서 아버님 앞에 승리의 개가를 불러 드릴 수 있을 때까지 죽을래야 죽을 수 없고, 쓰러질래야 쓰러질 수 없다는 강한 신념을 가지고 싸울 줄 아는 당신의 자녀가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여, 진실로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역대의 선조들이 피를 흘리며 걸어갔던 그 길이 저희들이 가야할 길이요, 사탄과 대결하여 싸우던 그 자리가 저희들이 상속받을 싸움터인 것을 알았사오니, 저희들이 환난이나 곤경 가운데 처할지라도 강하고 담대하게 원수와 대결할 수 있는, 새로운 각오를 두터이 할 줄 아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들이, 심장에서 고동치는 피가 동맥을 통하여 정맥으로 흐르는 한, 그 피가 그치지 않는 한 아버지 앞에 충효를 다 할 것을 다짐하고 저희의 정성을 다할 줄 알게 하여 주시옵고, 원수를 향하여 최후의 일격을 가하여 승리를 결정하겠다고 하며 나설 수 있는 하늘의 정병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나의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만 4년째 만물의 날을 맞이하였사오나 그 무엇을 아버지 앞에 드릴 것이 없사옵니다. 만물복귀를 하지 못한 부끄러움을 저희들이 책임져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의 남기신 십자가의 고난 길을 저희가 대신 책임지겠다고 하면서, 아버지가 걸으셨던 눈물의 길, 피의 길, 땀의 길을 저희들은 참고 또 참고 또 참으면서 걸어왔나이다. 저희들은 민족의 서러움을 대신 슬퍼하였사옵고, 민족의 어려움을 대신 통곡했사옵고, 죽음의 교차로에서도 아버지라 부르며 몸부림쳤사옵니다. 이 무리들을, 아버님, 기억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여기 모인 무리들의 연약한 무릎들을 강하다 하시옵고, 부족한 몸들을 부족다 마시옵고 사랑의 심정으로 품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를 부르는 그 사람들 앞에 얼굴 돌리지 마시옵고, 심정적으로 저들을 포옹하시어서 남아진 골고다의 노정을 책임질 수 있는 일선 장병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7년노정을 바라보고 나가면서 모진 환경에서 투쟁하는 자녀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더욱이 남한 각지에 널려서 이날을 위하여 본부를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 앞에 호소하는 무리들이 있사옵거든 그들을 위로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민족적인 서러움과 민족적인 죄악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이 민족 전체가 구원되어 아버지 앞에 쌍수를 들고 아버지의 영광을 찬양할 수 있는 그 날을 어서 속히 이 민족 앞에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날을 거룩한 날이라고 하며 당신의 성호를 찬양하는 수많은 교단 위에도 당신의 사랑의 손길을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그들도 당신을 모시는 양떼를 따라 천성을 향하여 고이 따라가는 무리가 되게 인도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옵니다.
남아진 이 한 날, 전체의 섭리적인 프로가 아버지의 뜻 가운데서 성취되게 역사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면서, 이 모든 말씀 참부모님의 성호 받들어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말 씀> 여러분들이 아는 바와 같이 오늘은 만물의 날입니다. 지금으로부터 4년 전에 우리는 만물의 날을 설정했으며, 이날을 설정하고 나서 전국에 성지를 택정했습니다.
타락의 한을 풀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는 아담가정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아담 해와가 실수한 것을 그들의 자녀인 가인과 아벨을 통하여 복귀하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으나, 가인이 아벨을 살해함으로 말미암아 제2차 타락이라는 슬픈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담 가정을 중심삼은 하나님의 복귀섭리는 이루어질 수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가정의 여덟 식구를 대신해서 노아가정의 여덟식구를 택하시어 아담가정에서 잃어버린 전체의 섭리를 복귀하시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의 차자인 함의 실수로 말미암아 또다시 뜻은 이루어지지 않고 아브라함, 모세, 세례 요한을 거쳐 예수님 때까지 4천년이란 기나긴 세월이 흘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조상이 실수하여 4천년 동안 연장돼 온 하나님의 복귀섭리를 완결해 드리기 위해, 이스라엘 민족을 횡적으로 세워 놓고 역사적인 탕감과 더불어 민족적인 탕감조건을 세워 새로운 시대의 사명을 위해 출발해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과 이스라엘 민족의 사명이었습니다. 이 사명을 위해 예수님께서 3년 공생애노정을 출발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종적인 역사의 기준을 탕감할 수 있는 민족적인 횡적 터전, 실체적인 환경이 무너짐으로 말미암아 제2차적인 섭리노정으로 출발해야 했던 것이 신약(복음)의 역사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담부터 예수님 당시까지의 4천년 종적 역사를 민족의 터전을 중심삼아 가지고 횡적으로 역사적인 전체의 과오를 탕감하려 했지만, 그것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신약의 복음을 중심삼고 새로운 출발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출발하는 그날부터 예수님은 무엇을 해야 되었느냐? 하나님의 뜻을 대신할 수 있는 세계적인 제2이스라엘을 편성해 가지고 그들을 중심삼고 출발해야 했다는 것입니다. 즉 망한 제1이스라엘을 대신하여 영적 제2이스라엘을 중심삼고 출발해야 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까지 이어 온 기독교 역사의 첫출발을 어떻게 했어야 했느냐? 하나님의 아들을 모신 영광 가운데서 출발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습니다. 영광 가운데 오신 메시아를 십자가의 길로 몰아냈기 때문에 십자가를 통하여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자리에 나가 십자가의 노정을 거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는 부활하신 예수님과 인연을 맺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기독교는 가장 어두운 흑암 세계의 자리에서부터 역사시대를 재편성하는 노정을 거슬러 올라왔던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생명을 건 수많은 기독교 신자들은 역사적인 노정 위에서 희생을 당하면서 무엇을 했느냐? 제1이스라엘이 예수님을 맞이하여 그 시대에 모든 것을 탕감복귀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하고 이스라엘의 기준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들은 역사시대에 있어서 제1이스라엘의 실수를 재차 수습해 나오면서 세계적인 이스라엘권을 만들어 나왔던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영과 육을 중심삼은 완전한 입장에 서 있지 못하기 때문에, 즉 육적 기준을 제외한 영적 기준만을 중심하고 제2이스라엘권을 이루었기 때문에 육적 기준까지도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육적 기준을 이루는 날이 재림의 날인 것입니다.
이 한 날을 소망하고 나온 기독교인들은 제2이스라엘의 영적 기준 위에서 다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여 제3이스라엘의 세계적인 선민권을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말은 여러분이 잘 아는 바와 같이 승리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누가 승리했느냐? 야곱이 승리했습니다. 야곱이 누구와 싸워 승리했느냐? 천사와 싸워 승리했습니다.
야곱이 21년노정을 마치고 자기 고향 땅을 찾아갈 때 얍복강가에서 최후의 결판을 짓는 싸움을 했습니다. 그 싸움은 비록 야곱이라는 한 개인의 싸움이었지만 야곱은 그때 당시의 수많은 인류를 대신한 개인이었습니다. 야곱가정 또한 수많은 종족과 민족을 대신한 가정이었습니다. 이러한 입장에 있는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천사와 씨름을 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그것은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천사세계로부터 지배를 당해온 것을 거꾸로 주관하는 싸움을 해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천적인 계획이 있었기 때문에 야곱은 얍복강가에서 천사와 승패를 결판 짓는 싸움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야곱이 천사로부터 받아내야 할 축복은 무엇이냐? 천사세계의 권한을 모두 다 상속받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지상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대신할 수 있는 승리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야곱 자신도 확실히 몰랐지만 하나님의 섭리의 뜻이 심정과 본심을 통하여 인연되어 있기에 나를 축복해 주지 않고는 가지 못한다고 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야곱이 생명을 내놓고 대들었기 때문에 천사가 패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승리한 영광의 자리에 야곱을 내세워 ‘이스라엘’ 이라는 이름을 주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천사 앞에 영적인 승리의 터전을 갖춘 후 야곱은 고향 땅을 찾아갔던 것입니다. 그때 야곱의 입장은 야곱과 그의 처자가 나타나면 원수같이 생각하고 죽이려 하는 에서를 굴복시키지 않고는 완전 승리를 거두지 못할 입장이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의 본심을 통하여 움직이는 하나님의 섭리는 야곱에게 영적 기준의 승리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러면 이 영적 승리의 기준을 토대로 하여 실체적으로 싸워 이겨야 할 실체가 누구냐? 그 실체의 대신자가 바로 에서입니다. 비록 그는 혈통적으로 볼 때 야곱의 형님이지만, 섭리적으로 야곱과 에서는 하늘과 땅을 대신한 존재입니다. 에서는 땅과 사탄을 대신한 존재이고, 야곱은 하늘과 하나님을 대신한 존재였습니다.
그러면 타락이란 무엇인가? 천사가 아담과 해와를 주관한 것이 타락입니다. 야곱이 이스라엘이라는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개인적인 승리의 기준과 가정적인 승리의 기준을 세워야 했습니다. 그래서 형님인 에서가 야곱을 환영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스라엘이라고 약속한 영적인 축복이 비로소 실체를 중심삼고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이스라엘의 기준이 성립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즉 에서가 야곱에게 굴복했기 때문에 거기서부터 새로운 역사는 시작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나님은 지금까지의 구원섭리노정에서 인간을 마음대로 주관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적으로도 주관하지 못했고, 육적으로도 주관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영적인 승리를 세운 터 위에 육적인 승리의 기준을 세워 그 기준 위에서 인간을 주관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왜 그러냐? 하나님이 주관하시던 창조 당시에 있어서는 타락이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타락을 벗어난 자리, 즉 타락과 인연이 없는 자리에서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것이 본래의 창조원칙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자리에 선 사람을 주관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가 있기 때문에 야곱이 승리한 터전을 중심으로 이스라엘이 출발된 것입니다.
그러면 민족적인 기준을 세워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 이스라엘 족속들은 어디로 가야 되느냐? 하나님의 섭리의 터전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축복받은 이스라엘 민족은 영광의 자리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영광의 자리를 버리고 개척자의 길을 걸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개척해야 할 그 땅은 어디냐? 바로 이 지구입니다. 개척자로서의 권위를 세우고 최후의 승리 기준을 결정짓기 위해서는 어떻게 가야 되느냐? 쉬운 자리에서 개척해 가지고는 개척자로서 승리의 기준을 결정할 수 없습니다. 가장 어려운 자리로 가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상상할 수 없는 곤경 지대로 내몬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애급고역의 노정을 거쳐 나오게 된 것입니다.
개척자의 사명을 하는 데 있어서는 제일 어려운 자리에 서야 합니다. 이것이 섭리해 나오시는 하나님의 작전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온 세상을 대신하고 하나님의 뜻을 대신하겠다고 나섰던 사람들은 사탄으로부터 전부 다 환영을 받으면 안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공식입니다.
선을 위하고 하나님을 위하는 사명을 짊어지고 나서게 될 때에 만일 사탄이 그를 환영하게 되면 오히려 사탄 편으로 넘어갈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180도 다른 방향을 갖추어 나타나게 하는 것입니다. 방법은 간단하다는 것입니다. 만일 선한 사람을 사탄이 환영하는 날에는 선이 번식되어 악의 세계를 전부 다 파탄시키기 때문에, 악의 괴수인 사탄은 갖은 반대 여건을 내세워 하나님이 세운 사람들을 몰아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탄이 어떻게 몰아치느냐? 처음에는 개인적으로 몰아칩니다. 그 다음에는 가정적으로 몰아칩니다. 더 나아가서는 민족적, 국가적, 세계적으로 몰아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의 역사는 어느 시대에서나 환영받지 못했던 것입니다. 개인적, 가정적, 민족적, 혹은 국가적, 세계적으로 환영받지 못하면서 나왔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맞고 빼앗아 나오는 것이 하나님의 작전입니다. 수많은 우리의 선조들은 2천년의 역사를 거쳐 나오면서 맞으면서 피의 제단을 쌓아 나왔고, 전통적인 사상을 연결시켜 나왔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기성교회 교인들은 믿기만 하면 천당 간다는 망상적인 신앙을 하면서 마치 천국에 들어간 듯이 큰소리를 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기독교 사상은 어떠한 사상이냐? 죽음의 제단을 새로운 제단으로 연결시켜 나온 부활의 사상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이 부활의 사상을 망각하고 있습니다.
아담가정에서부터 아벨이 맞아 죽음으로써 피 흘리는 역사가 출발되었기 때문에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피의 고개를 넘어가서 승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도 십자가의 길을 걸으며 구세주의 사명을 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원리원칙을 중심삼고 섭리해 나오시기 때문에 그 섭리의 전법은 여러 가지가 아니라 한 가지입니다. 그 전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탄 세계에 들어가서 사탄의 소굴을 점령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야곱도 자신이 축복을 받기 위해서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야곱이 떡과 팥죽으로 승리를 거둔 것을 보고 그가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겠나 여러분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야곱이 간교한 행동을 얼마나 많이 했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원리를 배워서도 알고 있겠지만, 야곱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장자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온갖 정성을 다했습니다. 그의 생활은 오직 그것을 위한 생활이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자기 조상의 인연이 자기까지 이어진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많이 생각했습니다. 또한 자기 조상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이 누구보다도 컸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심정 기준에 있어서는 하나님도 야곱을 무시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야곱은 아브라함이 축복받은 이상의 심정을 가져야 했으며, 하나님의 축복을 상속받는 그 사람과 그 민족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실제로 나타내 보여야 했던 것입니다.
야곱은 자나깨나 축복이라는 관념 속에 살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탄도 공인하지 않을 수 없는 기준을 갖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축복해 주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그러한 내적인 심정 기준이 야곱에게 있었기 때문에 장자권을 빼앗는 것이 문제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또한 야곱은 축복받은 자기 선조들에 대한 가치를 누구보다도 크게 생각했고, 축복해 주신 하나님의 가치 또한 누구보다도 크게 생각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축복하시던 것을 생각하면서 축복받은 이스라엘 민족을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너의 후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땅의 모래와 같이 번성할 것이다.’ 라는 축복을 받았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이 세계적인 이스라엘로 축복받기를 누구보다도 갈망했던 것입니다.
야곱은 이러한 심정으로 떡과 팥죽을 형 에서에게 주고 대신 장자의 축복을 이삭에게서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에서는 하나님의 축복의 은사가 얼마나 귀하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야곱의 말을 농담으로 대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무가치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는 축복받는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탄도 공인할 수 있는 조건이 되었기 때문에 아브라함, 이삭, 야곱 3대의 인연이 여기에서 비로소 세워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아브라함과 이삭은 하나님께서 축복해 준 것을 중요시했지만, 야곱은 그 축복을 이루는 것을 중요시하고 또한 그것을 소망하고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은 축복받는 것을 좋아했지만 야곱은 축복을 성사시키는 데에 소망의 관점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을 볼 때, 축복받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축복을 성사시키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축복을 성사시키는 것은 가만히 앉아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축복 받은 이스라엘 백성만 살아나는 것으로도 안 됩니다. 개인적인 터전을 세울 것을 재촉해야 되고, 가정적, 민족적, 국가적, 세계적인 터전을 세울 것을 재촉해야 되고, 하늘과 땅에 근본적인 터전을 건설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바라고 계시는 승리의 기준인 것입니다.
야곱이 자기 혼자서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이란 칭호를 얻은 것이 아닙니다. 야곱가정이 하나되어서 얻은 결과입니다. 승패는 개인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가정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여러분은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담가정에 있어서도 아담 해와가 타락했던 것을 가인이 아벨을 살해함으로 말미암아 가정적으로 그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즉 아담 해와는 가정적인 타락의 씨를 뿌렸고, 가인과 아벨은 가정적인 타락의 열매를 맺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부터 두 세계가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세계 역사는 두 갈래로 갈라져 나왔던 것입니다. 어떠한 민족을 중심삼고 보더라도 정(正)이 나오면 반드시 반(反)이 나오고, 선이 나오면 반드시 악이 나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세계적인 형태로 갖추어 나온 것이 민주주의요, 공산주의입니다. 또한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도 제각기 두 갈래로 갈라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네 가지 형태를 갖추는 시대가 올 것입니다. 그때가 바로 최후의 심판 시대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런 사실을 원리를 통해서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현재의 국가 형태가 원리에서 말하는 모든 사실들과 일치되고 있습니다.
아담가정에서의 가정적인 싸움의 기준이 모세 시대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야곱은 개인적으로나 가정적으로 하나님 앞에 세움받은 자리에서 그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 개인의 승리의 터전을 마련해야 되고, 가정에 승리의 터전을 마련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야곱이 가정적인 승리의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했느냐? 야곱은 가정적인 승리의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서 가정적인 십자가까지 짊어져야 했던 것입니다. 야곱이 혼자 승리해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지 못합니다. 가정의 십자가까지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 놓아야 비로소 승리의 터전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야곱의 승리의 터전을 중심삼고 이스라엘 족속들은 어떻게 해야 했느냐? 야곱이 가정적인 책임을 할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될 때 이스라엘 족속들은 씨족, 종족의 자리까지 탕감복귀할 수 있는 기준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친척권 내에 머물러 있는 사탄의 참소조건을 야곱가정을 중심삼고 칠 수가 있게 됩니다. 여기에서 싸움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개인이 완전히 승리하기 위해서는 가정 전체가 십자가를 짊어지고 사탄 세계를 공격할 수 있는 터전 위에 서야 합니다. 또 가정적인 승리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가정 그 자체로는 안 됩니다. 가정만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지 못합니다.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원수의 세계의 가정에 가서 승리해야 합니다. 그래서 야곱이 라반의 집에 갔던 것입니다. 이처럼 사탄세계에서 싸워서 가정적인 승리의 터전을 마련해야 합니다.
가정적인 승리를 결정짓기 위해서는 종족적인 십자가를 전부 탕감할 수 있는 승리자가 되어야 합니다. 종족으로부터 받는 화살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종족적 승리의 터전을 만들어 놓아야 합니다. 야곱가정이 이렇게 했으면 종족권까지 확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개인적, 가정적, 종족적 승리를 완결하고 민족적인 승리의 터전을 개척하기 위해 야곱가정의 70인은 애급 땅에 들어가서 갖은 시련을 당했습니다. 비록 외국에서 시련을 당하였지만 이스라엘 민족은 일개 국가뿐만 아니라 뜻적으로 세계를 대표한 민족인 것입니다.
이렇게 세계를 대표한 이스라엘 민족은 밟히고 찢기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하나님 앞에 충효를 다하고,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이스라엘의 섭리권을 상실하지 않고, 하나님이 세우신 인연을 붙들고 나가면 오히려 그들을 치던 무리가 깨어지고 새로운 세계로 출발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이 승리의 터전을 갖기 위해서는 외적으로 민족적인 침범을 받더라도 거기에 굴하지 않고 승리의 기준을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민족은 세계적인 가나안 복귀를 위하여 새로운 시련과 고난을 딛고 출발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 땅에 돌아와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서 민족적인 터전을 공고히 함과 동시에 세계적으로 혼란된 환경을 극복하고 나설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야 했습니다. 그런 후에 아무리 강한 로마제국이라 하더라도 하늘 편으로 인도해야 했던 것입니다.
만일 이스라엘 민족이 그렇게 했더라면 그 기반을 중심삼아 가지고 국가적인 기준에서 세계적인 시련을 넘어서서 메시아와 더불어 세계적인 주권 국가로 성장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이 세계적인 시련을 맞아 책임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개인, 가정, 종족, 민족까지 승리한 역사적인 터전을 인계받아야 했지만,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예수님을 반대했기 때문에 개인, 가정, 종족, 민족까지 하나님 앞에 세운 역사적인 승리의 기준이 전부 무너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생명을 바칠 각오를 하고 개인의 승리, 가정의 승리, 민족의 승리, 국가의 승리 기준까지 다시 수습하기 위해 나섰던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3년 공생애노정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개인, 가정, 종족, 민족의 시대를 거쳐 비로소 메시아를 보내셨던 것입니다. 메시아가 찾아 나가야 할 곳은 세계적인 중심의 자리입니다. 메시아가 그 자리까지 나가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민족 자체가 하나님의 뜻을 중심삼고 세계적인 시련 도상을 극복할 수 있는 완전한 준비를 갖추어야 했습니다. 또한 국가적인 기반을 닦고 국가의 대표적 지도자인 세례 요한과 하나가 되어 메시아를 맞아 일체를 이루어 세계적인 시련과 고통을 참고 넘어가야 했습니다.
예수님을 중심삼고 세계적인 시련과 고통을 넘어가게 되면 로마제국이 아무리 세계의 강국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배후에 계시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을 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일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님과 하나되었더라면 로마제국의 세력은 문제가 없었을 것입니다. 로마제국만 물리쳤더라면 그때부터 세계는 하나님 편으로 넘어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안 되었기 때문에 이것을 다시 찾는 제2차적인 섭리가 2천년 동안이나 연장되어 나온 것입니다.
끝날은 어떠한 시대인가 하면, 역사적인 모든 전체가 탕감되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혼란한 시대가 오는 것입니다. 종교, 경제, 문화 등 모든 것이 혼란 속에 휩쓸리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끝날이 되었다, 주님이 오신다, 우리 집단을 통해야 되고 우리가 아니면 구원을 못 받는다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겉으로 보기에 평면적인 한 시대에 벌어지는 것 같지만, 그 이면을 보면 역사적이고 전체적인 것이 얽혀져 있는 현실입니다. 현실이 이러한 세계적인 와중 속에 있기 때문에 혼미한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때는 종교의 목적이 희미해지는 때요, 철학의 목적도 희미해지는 때입니다. 또한 가정의 목적이 희미해지는 때요, 민족의 목적도 희미해지는 때요, 국가의 목적도 희미해지는 때입니다. 목적을 지향하는 모든 것이 희미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개인을 수습하고 가정, 종족, 민족, 국가, 세계의 모든 것을 수습할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나서 하나님을 중심삼은 새로운 제2의 세계로의 출발을 전개하여야 합니다. 그런 세계가 오지 않고는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그러한 세계가 재차 요구되느냐?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바라시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재차 그러한 세계가 요구되는 것입니다.
본래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사탄 주권의 세계가 아니라 하나님 주권의 세계가 되었을 것입니다. 공산주의도 아니고 민주주의도 아닌 주의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아버지주의인 동시에 아들주의를 말합니다. 하나님을 중심삼고 아버지주의와 아들주의가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주의가 되었습니까? 못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중심삼고 볼 때 종의 주의도 시작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세계에서까지 추방당하고 쫓김받는 무리가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들은 주인을 잃어버렸고, 종도 못되어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타락한 인간은 어느 단계까지 떨어졌느냐 하면 종의 종 단계에까지 떨어져 있습니다. 종의 종이란 무엇이냐? 사탄이 하나님의 종인데 그 사탄의 종이 되었으니 종의 종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러한 자리에 있는 줄도 모르면서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말씀만 중심삼아 가지고는 승리할 수 없습니다. 말씀과 일체 된 실체를 갖추지 않고는 싸움에서 이길 수 없습니다. 실제로 싸울 때에 말씀 자체는 선전밖에 못 됩니다. 선전만 가지고는 실제적인 결과를 가져오지 못하는 것이며, 승리의 결말을 지을 수 없는 것입니다.
흔히 예수 믿고 천당 가자는 말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원래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실 때 그저 믿고 천당 가도록 지은 것입니까? 지상에서 천국 생활을 하고 천국을 이루고 살 때에 하나님이 내려오시게 되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1장에 예루살렘 성이 어디에서 어디로 온다고 했습니까? 올라간다고 했나요, 내려온다고 했나요?
죽은 제사를 하나님 앞에 드린다고 해서 하나님이 ‘네가 잘 믿는다.’고 공인하십니까? 그래 가지고 모든 민족과 전세계 인류가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안 믿으면 지옥 가고 믿으면 천당 간다.’고 모든 민족과 전세계 인류에게 말해도 되는 겁니까?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지옥을 가 보고 천당을 가 보았나요? 그러한 가르침과 믿음은 공갈이요, 협박인 것입니다.
끝날에는 이러한 것이 끝나게 됩니다. 타락이란 무엇이냐? 흑암의 끝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낙망의 끝이 아닌 소망의 끝을 본 것이 바로 타락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타락으로 시작한 역사의 경로를 안다면 하나님을 중심삼고 창조이상으로 세웠던 소망의 끝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때를 바라보고 나가는 것이 역사적인 운명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같이 살아야 할 때가 기필코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16세기에 인문주의, 문예부흥을 중심하고 인본주의 사상이 최고도로 발달한 사조가 오늘날에 와서 하나님까지 추방해 버렸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니 ‘종교’니 하는 것을 싫어하는 자리에 들어와 있습니다. 하나님을 추방하는 운동을 전개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대주의입니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 통일교회는 사탄세계의 쫓김을 받아 왔습니다. 전인류가 하나님을 싫어하고, 종교를 싫어하는 때가 오면 그때가 바로 끝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잃어버린 하나님을 되찾는 운동이 벌어져야 합니다. 이러한 운동이 새시대의 새종교 운동입니다. 철학과 과학과 우리의 생활환경이 그러한 기준에서 하나님을 실증할 수 있는 종교관을 만들어 놓지 않고는 이 세계를 새로운 세계로 바꿀 수 없습니다.
오늘날 이 세상에 끝날이 오면 안 믿는 사람은 물론 못 가겠지만, 믿는 사람들은 전부 천당에 갈 수 있습니까? 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성경에 분명히 간다고 되어 있지요? 성경에 나와 있는 대로 된다면 사탄세계는 추방되어야 합니다.
사탄이나 우리들이나 천국에 가고 싶어하는 마음은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을 아세요? 사탄은 하나님에게 ‘하나님, 이제 나를 인류의 조상으로 대치해 주면 이 우주를 전부 하나님 앞에 바치고 내가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라고 하며 대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천리 법도가 그렇게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처럼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사정과 심정을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심정과 사정을 모르면서 그저 믿고 천당 간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선생님이 아무리 알아보고 또 알아봐도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통일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막연히 그럴 것이다가 아닙니다. 아직도 여러분의 마음은 왔다갔다합니까? 그런 마음가짐으로 뜻길을 가겠습니까?
역사시대의 종말에는 모든 것이 다 희미해지는 것입니다. 내가 믿던 종교도, 내가 좋아하던 사상도, 공산주의까지도 희미해져 가는 것입니다.
공산주의도 이제부터는 두 갈래로 갈라지게 됩니다. 곧 구라파의 공산주의 위성국가들을 보십시오. 이제 루마니아도 민족적인 공산주의로 변천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세계주의 형태로 갖추어지게 될 때에는 국가적인 민주주의도 민족적인 민주주의로 변천되는 것입니다.
끝날에 문을 개방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주의도 아니요, 사상도 아니요, 또한 인간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이 문을 개방하기 위해서 오시는 주님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타락한 인간이 아무리 충성을 다하여도 개방할 도리가 없기 때문에, 천리 법도의 모든 뜻을 받들어 이 문을 개방할 수 있는 주인이 와야 하는 것이 메시아 대망 사상입니다.
그러면 메시아가 오실 때 어떻게 오시겠습니까? 구름을 타고 오십니까? 만약에 구름을 타고 오신다면 하나님은 이미 이 죄악의 세상을 전부 다 멸해 버렸을 것입니다. 또한 불구덩이에 한꺼번에 처넣어 버린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렇게 된다면 하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6천년간이나 인류역사를 이끌어 왔겠습니까?
예수님은 다시 오실 때 절대로 구름 타고 오시지 않습니다. 똑똑한 청년 여러분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성경에 의하면 예수님은 천사장의 나팔 소리와 함께 구름을 타고 거룩하게 왕림하시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일이 실제적으로 일어난다고 믿어집니까? 그렇게 기록된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는다는 것입니까?
예를 들자면 통일교회 사람들은 인공위성을 타고 달나라로 여행을 하려고 하는데, 기성교회 사람들은 땅에 구덩이를 파고 그곳으로 피난 가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달나라에 가서 사는 시대가 옵니다. 미국에는 케이프 케네디 우주센터가 있지만 우리에게는 케이프 통일교회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달나라에 가는 로케트를 쏘아 봅시다. 달나라에 가서 쓰러져 죽는 한이 있더라도 땅 구덩이나 파는 행동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날과 같은 시대에는 그런 망상적인 신앙을 가지고는 시대에 맞는 위대한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들은 역사를 넘어 시대를 주관할 수 있고 환경을 개척할 수 있는 개척자가 되어야 합니다. 원수가 혼비백산하며 도망갈 수 있는 실력과 실권을 갖춘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사람이 아니고는 천국에 못가는 것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장가가고 싶은 대로 장가가고, 시집가고 싶은 대로 시집가고, 먹고 싶은 대로 먹고, 입고 싶은 대로 입고, 하고 싶은 대로 다하고 나서 그제야 하나님을 부르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고서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종말시대에는 이러한 복잡한 환경이 벌어집니다. 신앙계에서도 그렇고, 사상계에서도 그렇고, 가정에서도 그러한 환경이 벌어집니다. 유교사상의 삼강오륜을 내세우며 부모 앞에 효도의 도리를 다하라고 하지만 그 도리가 깨어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어머니가 어디 있으며, 부부가 어디 있으며, 형제가 어디 있습니까? ‘어이쿠, 나 몰라라!’ 이렇게 나온다는 것입니다. 스승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끝날에는 이런 혼란을 바로잡을 수 있는 어떠한 표적을 세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암담한 것으로부터 출발했기 때문에 암담한 결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전세계의 인류가 흑암의 권세에 사로잡혀 갈 길이 없다고 하면서 손을 들고 통곡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나를 살려 주십시오. 나를 죽여 주십시오.’ 하며 통곡의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담과 해와가 눈물로써 뿌려 놓았으니 눈물로써 거두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끝날에 있어서의 타락 인간들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모하면서 ‘하나님 저를 살려 주십시오.’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역사의 슬픔으로 하나님의 슬픔을 대신하고, 시대적인 곡절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곡절을 풀겠다고 하면서 책임지는 자리에서 눈물을 흘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자기를 중심삼고 통곡하지만 우리는 이 세계를 중심삼고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개인의 그 어떠한 소망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자보다는 하나의 공적인 뜻을 위하여 눈물을 흘리는 자가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계십니다.
아담 해와가 타락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될 때 아담 해와는 서글픈 눈물을 흘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긍휼의 마음을 베푸셔서 후손 된 우리를 타락하지 않은 입장으로 부활시키기 위한 한 날을 고대해 나오셨습니다. 그러나 추방당한 인간은 역사적으로 자랑할 수 없는 대악당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는 이러한 인간을 복귀해야 할 심정적인 인연이 있기 때문에 아담, 노아, 아브라함, 모세, 예수를 거쳐 지금까지 참아 오시면서 구원섭리를 해 오셨습니다. 이러한 은사를 생각하며 우리들은 현재의 심정의 인연이 아닌 역사적인 심정의 인연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호소해야 합니다.
선생님은 이러한 심정을 가지고 이러한 사명을 세계적으로 전개시키기 위하여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싸움에 동참하겠습니까? 선생님은 옛날의 아담과는 다릅니다. 또한 모세와도 다릅니다.
하나님 앞에 역사적인 심정과 시대적인 심정, 나아가 미래적인 소망의 심정을 중심삼고 이를 지탱할 수 있는 그 무엇을 가져야만 긍휼의 조건을 넘어서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암담한 세계 가운데 통일교회가 왜 나왔느냐? 이러한 때에 세계를 통일하자고 통일교회가 나온 것입니다. 그러면 통일은 어디서부터 하느냐? 복귀섭리의 원칙이 그러하듯이 하나에서부터 출발하여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통일교회는 하나에서부터 출발해 가지고 나타났으니 어떠한 길로 가야 하느냐? 역사적으로 걸어 나왔던 그 길을 되풀이해서 걸어가야 합니다. 30억 인류가 통일교회 문 선생을 죽이겠다고 칼을 들고, 창을 들고, 총을 들고 나서더라도 선생님은 결코 쓰러져 죽지 않습니다. 싸우다가 넘어져 구르는 한이 있더라도 선생님은 승리합니다. 이러한 자리에서 지금까지 통일교회는 발전해 왔습니다.
오늘 만물의 날 행사에 여러분이 참석하여 준 것은 고맙지만, 여기 모인 여러분한테 좀 섭섭한 점이 있습니다. 통일교회의 뜻은 악한 사람도 복귀하여 찾아 세우는 것입니다. 여기 있는 여러분들은 통일교회를 지독히 반대하는 자의 사촌, 팔촌들이었습니다. 만일 반대하는 자들을 일대일로써 청산한다면 여러분들도 여기에 감히 앉아 있을 수 없으며, 앉으라고 자리를 비워 주어도 못 앉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우하사 복귀섭리의 시대적인 혜택을 받았기 때문에 여기에 감히 발을 들여놓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선생님은 언제나 요셉을 생각합니다. 요셉이 야곱의 열 아들인 그의 형들한테 몰리게 될 때 얼마나 처량했겠습니까? 애급의 대상들에게 팔리어갈 때 그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러나 요셉은 물 없는 우물에 빠져 죽어 가는 자리에서도 살 수 있는 길을 찾아 30세에 애급의 총리대신이 되었습니다. 나중에 그의 형들이 살려 달라고 할 때 그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선생님은 바티칸 궁전 앞에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2천년 역사에 6억 이상의 교인을 가진 교회가 여기에 세워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할 때 염려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수 없이 분열된 교파와 교단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나로 통일해 놓을 것이옵니다.’ 라고 기도했습니다. 그곳은 구라파 문명의 총본산지이며 또한 집결지입니다. 구라파 문명의 진수가 모여 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니 두고 보자 하는 마음으로 기도를 했습니다.
참과 거짓이 부딪치면 거짓이 깨지는 것이 원칙입니다. 우리 통일교회는 지금까지 7년노정을 중심삼고 지방에 가서 참혹할만큼 부딪쳐 왔습니다. 피 어린 역사의 흔적이 남아 있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함께하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피 어린 투쟁의 경륜이 깃들어 있으니 잠자고 있는 사람들을 깨워 하나님의 승리의 방패를 꽂아야겠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싸워 나온 역사는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리는 역사였습니다. 뼛골이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눈물 없이는 바라볼 수 없는 역사입니다. 여러분을 지도해 나오는 스승에게는 가슴에 사무치는 한이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이 민족을 저주하고 싶은 마음이 천번 만번 사무쳤지만, 복귀섭리의 노정이 남아 있기 때문에 그럴 수는 없었습니다. 복귀의 운세를 맞이하기 위하여 민족의 서러움과 한을 품고 모진 풍상을 극복하여 승리의 결과를 가져와야만 합니다. 만민족이 비로소 우리의 가치를 인정할 수 있는 그날을 향하여 참고 나아갑시다. 이제까지 역사적인 서러움의 고빗길을 감돌아 왔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요즈음 들어온 통일교회의 청년 남녀들은 이런 것을 잘 모를 것입니다. 한 사람의 식구를 위하여 백 리가 되는 길을 찾아가서 만나, 둘이 붙들고 통곡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몇십리 밖에 있는 식구들을 만나고 떠나올 때, 섭섭해서 따라 나왔다가 다시 들어갔다가, 또 따라 나왔다가 다시 헤어졌다가 만나기를 세 번, 네 번 이상 그랬던 일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여기에는 세상 사람이 알지 못하는 슬픔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 혈연의 인연, 즉 사탄세계에서의 인연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중심한 부모 아닌 부모요, 형제 아닌 형제의 인연을 중심삼고 하나님만이 기뻐하실 수 있는 길을 찾아 나오면서 우리는 몰림받는 길을 걸어 나왔습니다.
선생님은 오늘 아침에도 지금까지 걸어 나왔던 길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어떠한 시대의 한때를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한 그것이 딱 들어맞았습니다. 북한에 들어가서 기도하던 그 내용이 들어맞았다는 것입니다. 남한에 와서 선생님이 하나님 앞에 어려운 고비를 넘기며 담판 기도를 하던 그 때가 생각이 났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고생시키시는 것은 망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며, 죽으라고 몰아낸 것도 아니며, 더 큰 유혹과 풍파로부터 소망의 한때를 맞이하게 함이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역사노정을 중심삼고 볼 때 그것은 어떠한 한때를 위해 지나온 하나의 과정이었습니다. 아담 이후 예수님 한 분을 찾기까지 기다려야 했던 곡절 많은 아버지의 심정을 생각하며, 참고 견디게 하여 보다 큰 길로 인도하기 위한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자나깨나 통일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 7년노정을 걸으면서 우리의 원수인 공산당을 굴복시키지 않고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이 나라가 배척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 성사가 얼마나 늦어졌습니까? 요즈음에 와서야 통일교회가 아니면 안 되겠다는 말이 나돌기 시작했습니다. 나라뿐만 아니라 아시아가 사는 데 있어서도 우리의 이념이 아니면 안 됩니다. 이제 우리는 출발했습니다. 그러므로 더욱 분발해야 합니다.
환난시에는 사탄이 벌여 놓은 모든 것이 전부 다 넘어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잘났다고 하는 것이 전부 넘어집니다. 아담 해와가 잘났다고 하다가 타락했지요? 잘났다고 하는 것이 타락성 근성입니다. 사탄은 자기 제일주의, 개인 제일주의인 것입니다. ‘부모, 형제, 이 모든 것이 다 뭐냐?’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외적인 혼란이 있지만 더욱 어려운 것은 영적인 혼란입니다.
어느 한 장로가 통일교회를 비난한 사실이 있지요? 선생님은 그들처럼, 누구를 이단이라고 해 보지 않았으며, 또 누구를 죽으라고 기도도 하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이 가만히 살펴보니까 나 죽으라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더군요. 그런 소리가 들려오더군요. 그러나 죽으라고 기도한 사람들이 쓰러지면 쓰러졌지 선생님은 괜찮았습니다.
북한에 있을 때에도 선생님을 감옥에 잡아 넣은 목사들은 전부 다 목이 날아가 버렸습니다. 선생님은 그들이 죽으라고 기도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이 무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구렁텅이에 있다가 남한에 왔을 때에도 민족 앞에 수많은 반대를 받았습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원리를 하루빨리 모든 사람에게 전파해야겠다는 것입니다.
95퍼센트의 탕감은 했지만 여러분이 해야 할 5퍼센트의 탕감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의 외적인 혼란도 혼란이지만 제일 큰 혼란은 영적인 혼란입니다. 우리는 야곱이 영적인 승리의 터 위에 육적인 승리를 결정지어 이스라엘 이란 칭호를 받아 승리자가 된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이 세계무대에 있어서도 영적인 세계를 먼저 주관하고 나서 육적인 세계를 주관할 수 있는 승리의 왕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사실을 똑똑히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 사람도 어떠한 사탄 편 사상에 물들 수 있는 암적인 그 무엇이 있다면 절대로 천국 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공산주의가 세뇌 교육을 해도 통일교회 이념을 갖춘 사람을 세뇌시키지는 못합니다. 여러분들은 공산주의자가 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계시는 것을 알고서는 공산주의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 사상으로 우리를 물들게 할 수는 없습니다.
선생님은 1966년부터 신령역사가 시작된다고 했습니다. 왜 영적 세계에 혼란이 벌어지는가를 이미 얘기했지요? 요즈음 기성교회에 영적으로 혼란한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왜 그런지 알아요? 하나님의 뜻을 잘 모르면서 신령역사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 영적 세계의 혼란을 수습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우하사 하나님의 권위와 가치를 지니고 하나님의 전권, 전능을 대신할 수 있는 내용을 가진다면 얼마나 늠름하고 멋있겠습니까? 그러기에 우리 신령협회에 들어와서 참인지 거짓인지 모르겠다고 하는 사람들은 틀려먹은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보따리 싸들고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날 이 세상에서 승리하는 왕자, 역사를 대신할 수 있는 왕자, 미래를 통하여 책임질 수 있는 왕자를 구하십니다. 따라서 이러한 왕자를 모실 수 있는 하나의 가정이 필요하고, 종족이 필요하고, 민족이 필요하고, 국가가 필요하고, 또한 세계가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복귀섭리의 소망과 같이하여 최후의 목적지까지 도달하게 된다면 거기에 무슨 부족한 것이 있겠습니까?
지금은 몰라서 그렇지만 한번 죽어서 영계에 가 보십시오. 통일교회가 진짠가 아닌가 알게 될 것입니다. 그 아무개 목사, 아무개 박사가 선생님 알기를 우습게 알고 있는데 두고 보자는 것입니다. 부딪쳐서 누가 부서지는가 봅시다. 우리는 무난히 뚫고 나갈 것입니다.
선생님은 전세계를 다니면서 그러한 확신을 더욱 굳게 가질 수 있었습니다. 어떠한 난관이라도 제압하고 헤쳐 나갈 수 있는 신념과 자신이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그럴 자신이 있습니까?
라디오를 들을 때 밤보다 새벽이나 낮에 잡음이 많지요? 잡음이 아주 많이 날 때 잡음 소리를 들으면 참 재미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혼란된 세상에서 우리는 맨 처음부터 끝까지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따를 수 있는 자녀를 찾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다른 말을 들을 용의가 있습니까? 여러분들은 확실히 신념을 갖고 나가야 됩니다. 이러한 곳이 통일교회입니다. 이곳은 엄청난 곳입니다. 그렇지 않는 것은 선생님의 생리에 맞지 않습니다. 선생님은 쩨쩨한 것을 싫어합니다.
통일교회는 총본부입니다. 이곳을 중심삼고 잘못된 것을 전부 다 청산지어야 합니다. 여기에 들어온 사람들은 자기의 본 처소를 잃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타락은 자기의 위치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을 중심삼은 본 처소를 잃어버린 것이 타락입니다. 이러한 사실이 확실하니 여러분들은 자기의 처소를 잃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역사는 나선형을 그리며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즉 동시성으로 전개되어 나오는 것입니다. 개인 형이 가정 형, 민족 형으로 커지더라도 하나의 원천을 중심삼고 전개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이 시대는 옛날의 로마시대와 마찬가지로 민주주의시대권 내로 들어오고 있는 것입니다. 섭리적으로 볼 때 오늘날의 미국은 세계적인 로마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한국을 중심삼고 섭리의 뜻이 이루어지고 통일교회가 이런 중대한 역사적인 사명을 짊어졌다 할진대 통일교회는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 세계를 정복했던 로마, 예수님을 죽인 원수의 나라 로마를 굴복시켜 탕감복귀할 수 있는 신념과 기백을 가지고 세계를 통일해야 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이 문제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통일교회가 이처럼 움직인다면 몇 해 후에는 통일교회 판이 될 텐데, 혹 문 선생이 대통령을 하려고 하지 않겠는가 하는 말을 합니다. 참으로 섭섭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일 그런 마음이 있었다면 벌써 대통령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통령이 되는 게 문제가 아닙니다. 나에게는 세계를 구하는 게 문제입니다.
지난번에 미국에 갔을 때 선생님은 아이젠하워 전 대통령에게 3대 조건을 실천하라고 말했습니다. 역사적인 문제, 종교적인 문제, 그리고 사상적인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처음에는 5분간의 면회시간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20분이 더 지났습니다. 가겠다고 하니까 그는 아쉬워하면서 2층으로 다시 데리고 가 자기의 생활관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 일생일대에 잊지 못할 기념품을 주었습니다. 또한 처칠, 스탈린과 같은 사람들과 어떻게 했다는 것 등을 자랑하기도 했습니다.
우리 통일교회는 미국을 제1비행장으로 삼아야 합니다, 제1비행장! 통일교회에서 한 청년이 나타나 가지고 전세계에 어떤 말을 했을 때 사실이 그렇다 하고 공감하면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이태리, 미국, 불란서에서 축전이 왔습니다. 외국에서 무엇 때문에 축전을 보내겠습니까? 그런데 한국에서는 통일교회를 뭐 같이 알고 욕을 하며 야단들입니다. 이런 일을 생각하면서 선생님은 혼자 마음속으로 웃었습니다.
지난번 미국에 갔을 때 세계적으로 유명한 영통인들을 만나 보았습니다. 그때 선생님은 그들에게 세계의 이런저런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해야 되느냐고 서너 번 질문을 했으나 그들은 대답을 못 하고 쩔쩔맸습니다.
여러분, 지금 미국과 구라파 일대에서는 통일교회의 문 선생에 대한 소문이 크게 났습니다. 물론 한국에서도 소문이 났습니다. 앞으로 한국 교회 목사들을 두고 보십시오. 하나님으로부터 상을 받나 벌을 받나 말입니다.
역사와 시대와 미래를 대신하여 선생님이 나선 것입니다. 앞으로 세계 곳곳에다 선생님의 사진이 든 전단지를 뿌릴 것입니다. 찾아오는 사람이 무척 많을 것입니다.
성경에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눈이 있는 자는 볼지어다. 지혜 있는 자는 깨달을지어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귀가 있고, 눈이 있고, 지혜가 있습니까?
통일교회는 참으로 이상한 곳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잘 모르고 있지만 묘하고 재미가 있습니다. 선생님은 모든 것에 책임이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 이런 일들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통일교회가 얼마나 배척당하고, 핍박받고, 욕을 먹었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결코 쓰러지지 않을 것입니다.
선생님이 감옥에 들어가서 매를 맞고 피를 토하며 쓰러질 때도 하나님 앞에 내 자신을 염려하는 기도는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나는 옛날의 선지자들이나 예수님과 다릅니다.’ 하며 속으로 다짐하면서 참아 나왔습니다. ‘하나님, 나를 구해 주십시오.’ 하는 시시하고 사나이답지 않은 나약한 기도는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위한 기도 이외의 딴 기도는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기대와 소망을 걸고 있는데 영어의 몸이 되었다고 울상을 해 가지고 살려 달라고 기도해서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는 것은 사나이답지 않는 것입니다.
일제시대에도 왜놈들한테 몰렸고, 북한에서도 공산당한테 몰렸고, 민주세계에서도 몰렸습니다. 그렇지만 선생님은 몰림을 받더라도 세계로 나아갈 것입니다. 아무리 핍박하고 몰아치더라도 갈 것입니다. 결국은 힘센 사람이 승리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1세기나 2세기의 권세를 갖고 핍박하는지는 모르지만 선생님은 1천 세기, 아니 모든 역사를 걸고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통일교회가 망하는 줄 알았는데 안 망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절대 안 망합니다. 망해요, 안 망해요? 안 망합니다. 선생님의 목을 잘라 버린다 해도 안 망한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예수님과 같은 패자의 서러움을 남기지 않고, 기어코 승리의 팻말을 박아 놓을 것입니다.
선생님은 40평생을 두고 낮잠을 모르고 지내 오다가 요즈음에 와서야 비로소 조금 잡니다. 그 이전에는 아무리 피곤해도 싸움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어떻게 낮잠을 자겠느냐는 심정으로 지냈습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 앞에 정성을 다하고 충성을 다하는 수많은 신자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제일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말 못 할 하나님의 심정, 6천년의 한으로 인하여 가슴속에 박혀 있는 못을 뽑아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요즈음 신령한 영통인들이 한국은 주님이 오시는 나라라고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오시느냐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것도 모르면서 한국이 뭐 어떻게 되고 하면 뭘 합니까? 만일에 그들이 그냥 그대로 나가다가 영계에 가면 어떻게 되는지 압니까? 그들은 말할 수 없는 참변을 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느 구석에서 불쑥 나와서 또 무엇을 증거 할지 모르는 것입니다.
이런 재미난 일들과 더불어 우리는 욕을 먹으면서도 재미있게 지내 왔습니다. 그때는 새벽 두 시 전에는 잠을 자 본 적이 없었습니다. 하루의 평균 수면 시간은 두 시간이었습니다. 그렇게 7년 동안 하나님을 위해서 온갖 정성을 다 들였습니다. 잠을 못 자고, 먹지 못하고, 입지 못하고, 핍박 받고, 쫓기고, 매를 맞아 가면서도 살아왔습니다.
어떤 때는 감자 두 개를 들고서 선생님을 부르며 눈물 흘리는 사람, 머리를 다쳐서 선생님을 찾는 사람…, 이렇듯 통일교회 선생님은 말할 수 없이 처량한 인간 박람회 구경을 많이 했습니다. 그렇지만 어떻게 합니까?
누가 따라오라고 강요했습니까? 자기가 오고 싶어서 왔지요. 홀려서 왔다고요? 홀리긴 누가 홀렸습니까? 여러분들이 선생님한테 홀렸지요. 선생님이 무슨 요술을 한다고요? 요술은 무슨 요술입니까? 천술(天術)을 합니다, 천술을. 그래도 그때가 가장 좋은 때였습니다.
선생님은 지금 피를 토해서 마룻바닥에 다섯 손가락의 인을 찍어 두고 싶습니다. 이 손은 옛날에 누구와 다투면서 커다란 상처가 날 때에도 최후의 승리로 이끄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왔던 손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를 살려 주셨고, 또 나에게 소망을 걸고 계시다는 것을 선생님은 잘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하나님에게 ‘죽음을 몇천 번이라도 각오하고 나섰으니 염려 마시옵소서.’ 하고 마음속으로 기도를 올리고 있습니다.
쫓겨 다닐 때도 사람들이 배가 고파서 밥을 달라고 하면 밥을 주었습니다. 그때에 기성교회의 목사 열 댓 명에게도 주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의 기억이 아주 새롭습니다. 북한의 흥남 감옥에 있었을 때, 어떤 목사가 그의 사위와 함께 반동분자로 몰려서 들어왔었습니다. 그때 사위가 병이 나서 거의 죽게 되었는데도 목사라는 사람은 약이 있으면서도 주지 않는 것을 보았습니다.
선생님은 감옥에 있을 때, 말을 하지 않고도 제자들을 많이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무엇이 있기 때문에 세상 천지가 무너진다 하더라도 선생님의 마음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하늘 뜻을 향해 가는 데 있어서는 모든 것을 이기고 승리할 수 있는 자신과 각오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신념이 있기 때문에 이 길을 출발한 것입니다.
통일교회를 반대하던 사람들은 다시 한번 반대해 보십시오. 자기 집 안에서 야단들 하지 말고 통일교회가 힘을 못 쓰도록 나서서 다시 한번 반대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고 통일교회 문 선생이 반대를 하겠어요? 그들이 하는 대로 그냥 두겠습니다. 그 대신 그들의 교단을 나에게 일주일만 맡겨 달라는 것입니다. 통일교인이 되는지, 안 되는지 말입니다.
두려워서, 통일교회는 무서운 곳이니까 가지 말라고 하는 겁니다. 거기에는 폭풍우가 몰아치고 지진이 일어나니까 가지 말라 이겁니다. 하나님은 다 같은 하나님인데 가지 말라니요? 여러분이 여기에 오니까 폭풍우가 몰아치고 지진이 일어났습니까?
여러분은 역사는 흘러가도 나는 남아 있다는 신념으로 대우주를 향하여 활보해 나아가야 합니다. 선생님은 이러한 신념을 갖고 나아가는데 감히 따라올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랑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그것이 믿어지지 않으면 40일 금식기도를 하면서라도 거짓인지 사실인지 알아보세요. 이것을 알기 전에는 반대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통일교회는 잠든 세상에서 깨어나 이 세계를 책임지기 위해서 어디서나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선생님의 편지 한 장이면 구라파, 그리고 세계 어디라도 언제든지 갈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습니다. 조금만 더 지나면 나라를 움직이는 위정자들도 마음대로 만날 수가 있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좋겠지요? 그래서 선생님의 사상을 주입시켜 주면 좋겠지요? 「예.」
가을이 되어 곡식들이 익을 때가 가까워지면 태풍이 자주 불어옵니다. 왜 그러는지 압니까? 그것은, 잘 익지 않은 것은 다 꺾어지고 쓰러져 버리라고 부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통일교회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들은 원리 법도를 중심삼은 탕감노정을 거쳐야 합니다. 원리에는 용서가 없는 것입니다. 할아버지가 들어와도 이 공식을 거쳐야 합니다. 역대에 수많은 의인들도 이 공식대로 살아야 했던 것입니다. 하나에다 둘을 더하면 셋이라는 이 법도를 수정하려면 역사 속의 모든 학문적인 체계를 바꾸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잘못된 것 전체를 뒤집어 엎을 수 있는 민족이 나와야 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바꾸어 놓아야 합니다. 인간은 누구든지 지금이나 천년 후에나 천리의 공식대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공식을 세우기 위해 이제까지 잘못된 것을 갈라 놓아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가 위대하다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인간은 하나님을 찾아가는 복귀노정에 있어서 공식적인 절차를 거쳐야 됩니다. 이 공식적인 절차는 죽어 간 선조들도, 지금의 나도, 앞으로의 후손들도 거쳐야 되는 것입니다. 그 공식에는 용서가 없으며 그것이 곧 올바른 법인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이 통일교회에 있기 때문에 위대하다는 것입니다.
한국 교계에서 박 장로, 나 장로, 무슨 장로, 모두 다 대중을 향해 선전을 하고 있는데 통일교회 문 선생은 왜 안 나타나느냐? 안 나타나도 된다는 거예요. 새끼를 많이 쳐 놓았으니까. (웃음) 세상 모든 사람들이 선생님 제자들한테 전도당해서 나자빠지는 꼴을 좀 보고 싶습니다.
요즈음 파고다 공원에 전도 다니는 식구들에게 통일교회의 문 선생이 키가 큰가 작은가, 나이는 젊은가 하는 것을 묻는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선생님은 아직도 젊었어요. 20대 청년이지요? (웃음) 그러면 통일교회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몇 대입니까? 40대, 60대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모두 죽고 난 다음에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나 혼자 남아질 수 있는 시대가 옵니다. 통일교회 시대가 온다는 것입니다. (웃음) 성경 말씀을 들고 와서 무어라 하는 데도 선생님이 아니면 안 되며, 하나님의 인격과 심정을 가르치는 데 있어서도 선생님이 아니면 안 될 것입니다.
충신과 열녀의 도리를 가르쳐 주는 역사적인 이념과 시대적, 사회적인 모든 풍습이 필요할진대 그 기준은 어디까지나 천륜을 통해서 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이렇게 하여야만 된다고 시정하고 가르쳐주는, 과거의 그 무엇보다도 몇만 배나 가치 있는 것이 통일교회에 있기 때문에 눈이 똑바로 박힌 사람이라면 통일교회에 오지 말래도 앞을 다투어 들어와야 합니다. 이렇게 일단 들어오면 나가라고 몽둥이로 때려도 안 나간다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나가지 말라고 하면 이런 처량한 교회에서 어떻게 살 수 있느냐고 말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만일에 선생님에게 고생에 대한 논문을 쓰라고 하면 노벨상을 타고도 남을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만물의 날이 나올 때까지 어떤 노정을 거쳤는지 아십니까?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벗어나는 노정이었습니다. 그러면 이 세계는 무엇이냐? 이 세계는 타락권 내에 있기 때문이 하나님의 창조목적 세계로 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계를 벗어나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접붙이는 역사가 필요한 것입니다.
성경에 ‘나는 참감람나무요, 너희는 돌감람나무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그의 가지라.’ 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나’는 예수님을 두고 한 말입니다. 예수님은 접붙여 주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러면 접붙이려면 참감람나무를 잘라야 됩니까, 돌감람나무를 잘라야 됩니까? 돌감람나무를 잘라야 하는데 성경에는 참감람나무를 잘랐습니다. 그렇게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한 것입니다. 이렇게 된 줄도 모르고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그저 좋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피를 흘린 것도 일리가 있긴 있지만 그렇게 되지 말아야 했습니다.
이제 거꾸로 돌감람나무인 여러분이 잘려야 합니다. 그러면 어디를 어떻게 잘라야 되겠습니까? 발목을 잘라야 합니까? 나무를 자르는 데는 밑을 자르는 것처럼, 사람은 목이 잘려야 합니다. 목을 자르면 죽게 되지만 죽지 않으면 부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죽지 않으면 부활할 수 없습니다.
종교는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인류역사를 통하여 어떠한 심판을 하시려고 하는가? 완전 심판을 하시려고 합니다. 100퍼센트 이상 150퍼센트까지 완전 심판하시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타락한 세상의 모든 것을 축출해 버리고 싶은 것이 하나님의 마음인 것입니다. 무슨 말씀인지 아시겠습니까?
인간은 하나님을 기쁨과 영광 가운데로 모셔야 했었는데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서럽게 했습니다. 그러나 구원섭리의 인연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중심한 문화세계를 이룩하려고 하십니다. 이러한 세계를 위해서 대심판의 역사를 벌이시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배운 교육이나 주의, 사상,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합니다. 사탄세계의 모든 것을 완전 부정해야 합니다. 만약 100퍼센트를 부정해야 되는데 98퍼센트까지만 부정하게 되면 2퍼센트가 문제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란 이름은 완전히 부정한 자리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택함받은 사람들은 인간적인 소망의 길과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습니다. 노아도 그랬습니다. 그는 배를 만들었는데 강가에서 만들지 않고 산에다, 그것도 120년 동안 배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노아 이후 400년을 지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고향을 떠나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고향 땅에서 그때까지 재미있게 살던 친척, 종족을 모두 버리고 행랑 보따리를 싸서 그곳을 떠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국경을 넘어 애급으로 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자기의 부인을 누이동생이라고 속여야 하는 입장에까지 처했던 것입니다. 이렇듯 아브라함은 심정의 생활에 있어서 최후의 처량한 자리, 부정의 자리에까지 나갔습니다. 이런 가운데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제사 드리라고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이라면 그러한 하나님을 믿었겠습니까?
모세를 보십시오.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구하기 위하여 미디안 광야에서 바로 궁중에 갈 때 도중에서 하나님이 죽이려고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자기가 부정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부정시키고 사탄을 분립시키는 것입니다. 이러한 천리의 공법, 이러한 법도로 완전 부정을 시키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종교는 부정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어느 누구보다도 나를 사랑하라.’ 이것이 예수님의 선포입니다. 통일교회의 선포이기 이전에 예수님의 선포라는 것입니다. 또한 ‘네 집안 식구가 원수다.’라고 했습니다. 아버지에게는 아들이, 어머니에게는 딸이, 시어머니에게는 며느리가 원수입니다. 그러기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으면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 고 했습니다. 그러면 자기 십자가란 무엇이냐? 아버지가 잘했다고 해도 그 아들이 아버지의 길을 그대로 이어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원리원칙에도 용서가 허용되지 않습니다. 완전 부정에서부터 출발해야 됩니다.
타락한 인간에게는 한이 맺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심판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역사의 줄거리는 인륜도덕의 기준을 중심삼은 것이었습니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정(情)까지도 그랬습니다. 그렇지만 이제까지 인정을 중심삼고, 인륜도덕을 기준으로 창조된 문화세계를 넘어 천주(天宙)를 중심삼은 새로운 문화의 세계를 창조해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정(人情)을 완전히 부정하는 자리에서 천정(天情)을 중심삼은 새로운 문화세계를 창조해 나가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차적인 종교일수록 현실 부정을 더 심하게 강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부모, 형제, 처자를 버리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예수님을 신랑으로 모셔서 새로운 가정을 편성해야 합니다.
완전 부정을 하기 전에는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탄이 몸속에 들어와 있기 때문입니다. 사탄세계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잘라버리고 새로운 것으로 출발해야 합니다. 인정을 도말(塗抹)시키고 천정을 세워야 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를 대하는 기준이 있는 고차적인 종교일수록 그 자체 속에 전체를 품을 수 있는 열쇠가 있는 것입니다.
사탄을 완전히 제거시키고 하나님만을 인간의 주관주(主管主)로 모실 수 있는 것을 확실히 밝히지 못하는 종교는 가짜입니다.
통일교회 문 선생이 여러분들의 가정을 파괴하라고 시켰습니까? 여러분 스스로가 파괴하는 입장에서 나왔지! 싫으면 안 나오고 좋으면 나오는 사람들이 여기에 들어오게 되면 3일이 못 가서 천리만리 멀어지게 될 것입니다.
거짓된 가정을 내가 부정하지 못하면 하나님이 여러분을 부정하는 자리에 서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를 부정하고 나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때를 준비해 나와야 합니다. 그렇지만 때가 되어도 자기 스스로 부정하지 못할 때는 하나님이 그런 자리로 내세웁니다. 그렇게 되면 내적으로 싸워야 됩니다. 그래서 신앙이라는 것은 싸워야 되는 것입니다.
이제 종교는 생활적인 종교로 전향해야 합니다. 사탄은 이 천지를 유린하고, 이 세계를 유린하고, 하나님을 6천년간이나 괴롭혀 왔습니다. 천리 법도의 원칙으로 볼 때 사탄은 하나님 앞에 원수입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적인 원수입니다. 이 원수 사탄을 굴복시키고, 하나님 앞에 효자가 될 수 있는 기준을 갖춘 인격자가 있으니 그가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탄이 예수님을 무서워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예수님 앞에 굴복당했습니다.
오늘날 인류는 하늘 가정을 중심삼고 새로운 민족을 편성해야 합니다. 복귀섭리의 기준이 전부가 심정적인 가정이었기 때문에 예수님도 가정을 중심삼고 일해야 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신랑으로 이 땅 위에서 신부를 맞아 장가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하면 통일교회는 이단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죽어 보세요. 참말인지 아닌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실 수 있는 아들딸로서 충효의 도리를 다하여 하나님의 주관하에 결혼한 후, 부부를 이루어 하나님을 중심한 직계 자녀를 탄생시켜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오늘날까지 이스라엘 민족이 2천년 동안 유리고객 하던 길을 복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심정일체 된 인간이 나와야 하기 때문에 기독교는 남달리 심정적인 종교인 것입니다. 기독교는 심정세계의 골수를 갖춘 것입니다.
천정을 중심삼은 천륜의 법도로 새로운 세계를 창건해 나가는데 있어서 핵심적인 단위가 가정인 것입니다. 기독교는 가정을 중심삼은 새로운 부모의 기준과 부부의 기준과 자녀의 기준을 가르쳐 왔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우리 통일교회는 천정을 중심한 대표적인 종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적인 이 종교를 반대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신랑 되시는 예수님을 만나면 무엇을 하려고 합니까? 아담 해와는 하나님을 중심한 신랑 신부가 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신랑 신부의 자격을 갖추어 같은 생활권 내에 있어야 효자, 충신, 열녀가 되는 것인데 그렇게 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신랑 신부가 개인적으로 탕감복귀를 해서 천지의 법도를 대신한 부부가 되면 하나님께서 ‘너는 내 살 중의 살이요, 아들 중의 아들이요, 효자 중의 효자, 충신 중의 충신이다.’ 라고 하실 수 있는 그런 부부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만국을 대표하는 기준을 세울 수 있는 자격자가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못했기 때문에 이것을 탕감복귀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신랑의 인연을 가지고 오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신랑 신부의 기준으로 온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섬길 수 있는 효자와 충신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골수입니다.
여러분은 어린양 잔치를 무엇으로 알고 있습니까? 어린양 잔치는 타락하지 않고 맞이하여야 할 참부모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이것을 복귀함으로써 6천년 전에 이루어야 할 인류의 소원인 참부모를 맞이하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러면 본향 땅은 어디겠습니까? 그곳은 한국입니다. 누구로 말미암아 그렇게 됩니까? 하나님을 중심삼은 어떤 단체로 말미암아 그렇게 됩니까? 그것은 통일교회로 말미암아 되는 것입니다. 통일교회라는 이름은 우연히 나온 것이 아닙니다. ‘거느릴 통(統)’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쳐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천주를 치리(治理)하는 데 있어서 그 모든 세부조직을 구상할 줄 알아야 합니다. 여러 민족과 교파를 대신하여 여러분들은 모든 것을 많이 봐 놓아야 합니다. 지금 나 장로, 박 장로, 재건교회, 고려파 등이 있지만 앞으로는 얼마 가지 않을 것입니다. 맨 나중에 남는 것은 통일교회밖에 없을 것입니다. 기분 좋아요, 나빠요? 「좋습니다.」 얼마나 좋겠어요! 그 기분 알지요?
이제 불원한 장래에 인류를 통일의 세계, 영원무궁한 안식의 복지에 안착시킬 수 있는 근거지가 있어야 합니다. 그곳은 어디냐? 심정의 세계라는 것입니다. 심정의 세계에서는 아버지는 자식이 없으면 못 살고, 아내는 남편이 없으면 못 사는 세계입니다. 앞으로 올 세계는 이러한 진실의 세계입니다.
세상의 ‘주의’ 라는 것은 양심 기준에 있어서 의식혁명의 단계가 될는지는 모르지만, 앞으로는 숙명적으로 승리할 수 있고 최종적으로 승리할 수 있는 것이 나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심정’입니다.
앞으로는 인류의 심정을 혁명하여 천도의 기준을 세울 수 있는 새로운 역사관이 나와야 합니다. 이 역사관을 기준으로 새로운 인생관과 세계관을 창건할 수 있는 심정적인 주의가 나와야 합니다. 그러면 그 주의는 무슨 주의냐? 그것은 심정적인 인생관, 심정적인 세계관, 심정적인 우주관을 중심한 것이요, 또한 역사가 기대하는 것입니다. 통일교회는 바로 이런 것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기준을 대하는 인간은 어떻게 해야 되느냐? 첫째는 진리 심판을 거쳐야 합니다. 단지 믿음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먼저 진리의 합격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모든 것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말씀, 즉 진리가 완전하지 않고는 그 실체가 완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즉 진리가 불완전하면 실체도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완전한 자리에 입각하지 않고는 완전한 신앙생활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과 천지가 바라는 완전한 진리가 나와야만 합니다. 진리 심판의 때가 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까지 역사는 무엇을 찾아 나왔느냐? 한 인격자를 찾아 나왔습니다. 인격자를 찾기 위해서는 그 전에 먼저 무엇을 찾아 나와야 되느냐? 인격자를 낳을 수 있는 한 민족을 중심삼고 진리를 찾아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이제 인간들은 갈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최후의 결판을 지어야 하겠기에 절망 속에 있을 수만은 없는 것입니다. 이제는 참다운 진리를 가지고 새로운 천지에 들어갈 수 있는 진리의 개방운동이 벌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낙망과 절망에 부딪쳐 있는 환경을 정비하고 단 하나밖에 없는 생명의 길로 인도할 수 있는 기준이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무슨 주의, 무슨 주의 하면서 진리를 찾아 나온 것입니다. 완전한 진리가 나올 때에 비로소 세계는 완전히 통일되는 것입니다.
진리를 통하고 나서는 인격을 완성해야 하고, 그 다음에는 심정을 완성해야 합니다. 우리는 심정을 통해서 역사적인 하나님을 알아야 됩니다. 창조 당시에 있어서의 하나님은 심정의 하나님이셨습니다. 우리는 창조 당시의 하나님의 심정과 인간 타락 이후의 하나님의 심정이 어떠하셨으며, 역사 과정을 거쳐오면서 어떤 심정을 가지고 계시는가 하는 역사적인 심정의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믿기는 믿지만 하나님의 심정을 아십니까? 하나님의 심정을 알아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시대적인 하나님의 소원이 무엇이고, 시대적인 하나님의 심정이 어떠한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미래적인 하나님의 심정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존재이므로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하며 섭리해 나오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역사적인 심정의 곡절은 시대를 통하고, 시대적인 곡절은 미래를 통하여 연결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역사적인 심정을 위로하고 시대적인 심정을 위로하여 온유겸손하게 미래적인 심정을 깨달을 수 있어야만 하나님이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타락이란 인간이 하나님을 믿을 수 없는 자리, 하나님이 인간을 인정할 수 없는 자리에 처한 상태를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끝날이 되면 진리의 심판시대가 오는 것입니다. 그때에는 진짜가 나오기 전에 가짜들이 많이 나옵니다. 타락한 세계에 있어서는 가짜가 먼저 나와 진짜처럼 되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짜가 지금까지 참으로 많은 업신여김을 받았던 것입니다.
요즈음 영적 세계에 조금이라도 접해 본 사람들은 주님이 한국으로 오신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주님은 어떻게 오시며 또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느냐? 성경에 이르기를 아들도 모르고 천사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아버지만 아시고 아들은 모르니까 그 아들은 상속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까? 아버지로부터 상속을 받으려면 아버지의 논이 어디에 있고 밭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모든 것을 알아야만 상속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광명한 천지 앞에 새로운 자손으로 나타난 것이 통일교회입니다. 여러분들은 통일교회에 들어와서 고생을 많이 했지만 선생님이 하라는 대로 백퍼센트 다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기성교회에 포를 쏘면 그 목사들은 혼비백산하여 도망갈 수밖에 없습니다. 싸움을 하려면 공포탄을 많이 쏘아야 합니다. 전쟁터에서 실탄 천 발을 쏘게 되면 맞아 죽는 사람은 열 명도 안 되지만 그래도 많이 쏴야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공포탄을 많이 쐈습니다. 앞으로는 정식의 포를 쏘려고 선생님은 계획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심판 시대가 오게 됩니다. 그때에는 진리에 입각하되 말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말만 가지고 우려먹는 사람이 많지만, 통일교회 문 선생은 그렇지 않습니다. 선생님은 노동자, 지게꾼, 거지, 별의별 일들을 다 해보았습니다. 그들과 잠도 같이 자 봤습니다. 불쌍한 사람들의 처량한 사정을 보고 통곡도 해 보았습니다. 그런 심정세계와 인연맺고서 지금까지 싸워 나온 것입니다.
그러한 준비를 갖춘 다음 참다운 지도자로서 양심의 가책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각오를 했습니다.
선생님은 하나님 앞에 조금이라도 양심의 가책을 받을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선생님은 지방 교회를 순회하게 될 때 우리 통일교인들이 너무나 비참한 자리에서 생활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 ‘아버지, 저들과 같이하옵소서! 제가 이런 환경을 거쳐올 때 당신이 나와 더불어 같이하셨고, 제가 아버님을 대신하여 이런 자리에 섰을 때 갈 길이 남아있다고 권하시지 않았습니까? 이런 인연을 저들에게도 맺어 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했습니다.
이제 여러분의 비참한 그 자리가 비참 그것으로만 끝나서는 안 됩니다. 비참한 자리에서도 선을 중심삼고 승리의 개가를 부를 수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러려면 악한 세계를 근본적으로 심판할 수 있는 하나님의 왕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모진 풍랑이 몰아치는 곳으로 여러분을 내몰지 않으면 안 될 이 스승의 입장을 여러분들은 잘 알아야 되겠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을 안다면 세상의 어떤 귀한 소망의 자리가 있다 하더라도 버리고, 하나님의 심정을 붙들고 호소할 수 있는 자리로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제2의 인간이 되는 것을 싫어합니다. 선생님은 하늘의 전권을 얻고 나서 이 고개를 넘어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정과 심정의 인연을 가지고 ‘아버님!’ 할 때에는 하나님도 통곡하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이 나를 붙들고 권고하시고 통곡하시던 사실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물리고 쫓기는 생활 끝에 철창에 갇힌 영어의 몸이 되어 눈물지을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도 하나님은 나와 같이하셨습니다. 내가 말하지 않아도 언제나 제자를 만들어 주셨던 하나님이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모시면서 오늘날까지 천신만고를 극복하며 하나님 앞에 일편단심 충효의 도리를 다하려고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나는 이 길을 가는 데 충성을 다하겠다는 마음을 가졌지만, 하나님은 이 이상의 마음을 가질 수 있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럴 때마다 내면에 넘쳐흐르던 감동을 지금도 잊을 길이 없습니다.
지금 어느 누가 선생님 앞에 나타나서 이러한 슬픔의 곡절을 얘기한다면 선생님은 첫 마디에 통곡할 것입니다. 그런 사연 속에 사무쳐 있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 수많은 사람이 있고, 영계에 간 선지자들도 많이 있지만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이끄심은 망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제일 귀하고 제일 큰 것을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선생님은 통일교회를 통해 한국에서 ‘무엇’이 되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오직 죽을 때까지 하나님의 일을 하여 책임을 다해 뜻이 이루어지는 그날이 오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 마음 외에 또 무엇이 있겠습니까? 아무리 싫어도 가지 않으면 안 될 운명의 길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선생님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죽음의 골짜기를 걸어오면서 지금까지 여러분들 앞에 강조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삼천만 민족이 방방곡곡에서 하나님을 생각하며 통곡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이 길을 종결지을 수 없습니다.
통일교회 신도들은 하늘땅을 위해 가슴을 치면서 통곡할 수 있는 심정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과 심정의 인연을 맺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최후의 운명의 순간을 앞에 두고 “아바 아버지여,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막 14:36)라고 기도했던 것에서 하나님에 대한 예수님의 심정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호소했던 예수님이 간곡한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심정의 인연을 맺었던 것처럼, 우리들도 그런 마음을 갖게 될 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정과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일해야 되는 것이 오늘날의 교역자들이요, 섭리역사를 책임진 사람들이요, 또한 하나님의 심정을 잃어버린 빚을 책임진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역사적으로 서러우신 하나님의 모습을 심중에 모시고 슬프신 하나님의 마음을 위로하여 기쁨과 영광을 돌려드리는 효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도 낙망하고 탄식하고 계신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모시고 민족을 넘고 세계를 넘어 만민과 더불어 천주의 전권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한을 붙들고 위로해 드리며 승리의 한 날을 맞이해야 합니다. 아버지께서 심판 대신 축복해 주고 싶다 할 수 있는 그런 아들딸이 되기 위해 몸부림쳐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되어야만 남아지는 무리가 된다는 것입니다.
모진 환경과 역경에 시달려도 거기에 굴하지 않고 ‘나만 남았나이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심정을 가져야만 비로소 하나님과 생명의 인연을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심정에 인연되어 있으면 아무리 강한 삭풍이나 폭풍이 불어온다 하더라도 이런 생명력을 가진 심정의 유대를 감히 무너뜨릴 수 없는 것입니다.
춘삼월 호시절이 오게 되면 새로운 천지에 생명의 씨를 뿌리며 새롭게 발전하는 것이 천지의 이치입니다. 이제 통일교회는 얼음이 꽁꽁 어는 동삼삭을 지내고 봄날의 시대로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여러분들이 알아야 할 것은 무엇이냐? 그것은 생명의 씨를 흡족히 가지기 위해 하나님의 심정과 접붙이는 인연을 맺어야 합니다. 그래야 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역사적인 동참자가 되어야 합니다. 죽어가는 예수님의 모습을 바라보시던 하나님께서 그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어 얼굴을 돌리시며 세 시간 동안이나 하늘을 캄캄하게 하셨던 심정의 배후까지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에게 위로의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예수를 대신한 아들이 되어야 합니다. 죽은 예수님 말고 죽지 않고 하나님을 위로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지금까지 역대의 수많은 선조들은 피어린 역사노정을 거쳐왔습니다. 그들은 죽음의 길 앞에서도 ‘오! 아버지여…’ 하고 부르짖으며 그날이, 그 시간이, 그때가 오기를 고대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선조들이 생명을 내던지며 갔던 그러한 전통적인 인연을 상속받아야 하며 과거에 서러웠던 선지선 열들을 위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러한 길을 걸어 갈 때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애달픈 곡절이 많았던가 하는 심정을 느끼며 ‘아버지, 그들의 한을 나를 통하여 풀게 하여 주시옵고, 그때의 슬펐던 마음을 오늘날 이같이 활동하는 것을 보시고 기뻐하시옵소서.’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시대적인 환경을 개척하여 하나님 앞에 충효의 도리를 다할 수 있는 무리가 필요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믿고 천당 가겠다는 말을 할 수 있어요? 천당 가는 것이 목적입니까?
우리는 천국에 가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천국에 가게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슬픈 역사가 인간으로 말미암았으니 하나님 앞에 충성을 다하고 하나님을 위로해 드리는 것이 인간의 도리요, 책임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천국에 보내 달라고 아우성친다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인간은 지상에서 하나님 앞에 충효의 도리를 다하여 천국 생활을 이 땅에서 맛보고 천국으로 가야 합니다.
타락하지 않은 부모가 나타나야만 합니다. 이 부모는 타락권 내에 머물러 있지 않는 부모이기 때문에 사탄이 침범할래야 침범할 수 없는 불가침권 내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모는 이 세계가 아무리 악하다 할지라도 굴복시킬 수 있는 인류의 참부모인 것입니다. 사탄은 이 참부모를 점령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인류역사는 어두운 밤을 지나 새벽을 거쳐 새로운 광명의 태양을 맞이하기 위하여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태양이란 무엇을 말하느냐? 인류의 태양은 ‘인류의 부모’ 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부모가 나오기 전에는 인류의 고향인 본향 땅이 나올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참된 고향이 있습니까? 타락한 부모를 통한 혈통의 인연으로 이루어진 고향은 진정한 고향이 아닙니다. 이것은 원래 없어야 할 고향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다운 양심을 가진 사람은 자기 부모가 있더라도 부모를 부정하고, 사회 환경을 부정하고, 무엇인가를 추구하는 양심의 자극과 욕망이 자신을 굴복시킨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여러분은 이런 본심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중심삼은 부모를 찾고 본향을 찾아가려면, 참부모가 있어야 하 고 그 참부모를 중심삼은 형제가 있어야 됩니다.
여러분! 우리 통일교회는 세상에 없는 날들을 정했습니다. 통일교회에서 기념하는 4대 명절은 대한민국의 역사적인 큰 명절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명절입니다.
인간들이 제일 바라는 날은 무슨 날이냐? 그것은 부모의 날입니다. 즉 부모를 가질 수 있는 그날을 바라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류는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부모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복귀하는 것 중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부모를 맞이하는 것입니다. 부모를 모신 자리에 들어가기 전에는 자녀가 되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부모의 날을 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부모의 날이 세상에서 완전히 탕감복귀된 후에 자녀의 날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참다운 부모와 참다운 자녀의 인연을 중심삼은 부모의 날과 자녀의 날이 결정된 후에 만물의 날을 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중에 오늘 이 자리에 처음 참석한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 ‘만물의 날’ 이 어떻게 나왔느냐?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해와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뿌린 죄의 씨앗이 그들의 아들들인 가인과 아벨로 거두어졌습니다. 그러기에 죄의 씨를 뿌린 부모가 복귀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주사적인 부모복귀 기대를 중심삼고 충효의 도리를 다할 수 있는 자녀의 기준을 복귀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기준이 결정된 후에 비로소 만물의 날이 나온 것입니다.
오늘날 이 땅 위에 널려 있는 만물은 지극히 불쌍한 자리에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소망 가운데 지어졌던 만물이었고, 하나님이 온갖 정성을 다 들여 지은 만물이었지만,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만물은 인간을 대신한 속죄의 과정을 거쳐야 했으며 슬프게 희생을 당해야 했습니다. 사람을 죽여서 제사드릴 수 없기 때문에 만물을 제물 삼아 희생적인 제사를 드려 왔다는 것입니다.
제물로 바쳐지는 만물도 서럽지만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딸들이 이 땅에서 많은 피를 흘리고 간 것은 더욱 서러운 일입니다. 이러한 섭리를 수천년 동안 해 오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 어느 누구도 부정할래야 부정할 수 없는 곡절이 하나님의 섭리 속에 사무쳐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서 역대의 수많은 성현 열사들이 피의 제단을 연하여 나왔습니다. 또한 본래의 창조이념을 중심삼고는 상상할 수 없는, 생각해서도 안 되고 보아서도 안 될 처량한 길을 걸어 나왔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희생의 자리를 모면할 길이 없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한 번의 희생으로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그날을 고대했음에도 불구하고 복귀섭리의 책임을 짊어지고 왔던 이 땅 위의 수많은 선지선열들은 여기저기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쓰러져 갔던 것입니다.
오늘날 대한민국 삼천리 반도를 여러분이 대할 때마다 이 민족을 구하기 위하여 피땀을 흘리면서 제물, 혹은 영어의 몸이 되어 몰리고 쫓기며, 피를 토하며 죽은 처참한 운명의 길을 간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들딸들이 피눈물을 흘리며 죽음의 고비를 넘어가야 했다는 이 서러운 사정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이 천지간에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인데 타락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하루빨리 없어져야 할 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영적인 이스라엘을 형성해 나온 기독교인들에게 지금까지 어느 한 곳에 하나님을 모시고 살 수 있는 땅이 있었습니까? 인간은 살 수 있는 땅이 있고 집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영원한 내 땅이요 내 집이라고 하실 수 있는 땅과 집이 있었느냐 말입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유랑객이었습니다. 따라서 여러분들도 이곳에서 몰리면 저곳으로, 저곳에서 몰리면 이곳으로 피난 가야 할 유랑객 신세를 모면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족속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악주귄에 시달리면서도 선주권의 한 날을 세우시기 위하여 6천년 동안 섭리해 오셨습니다. 그 한 날의 대표자를 맞이하기 위해 쌍수합장하고 고대하면서 처량한 피땀의 제단을 쌓아 선주권의 본향 땅을 찾아 나왔던 것이 지금까지의 종교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선을 찾아 세우기까지 그 배후의 처량함과 비참함과 죽음의 역사를 알아야 합니다.
심판 역사를 통해 원수들을 처단하여 죄악 역사를 수습함으로써 하나님의 한을 풀어 드리는 책임을 다하는 하늘의 왕자가 나오기를 바라는 것이 하나님의 소윈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선생님은 하나님께 ‘아버지, 내 일평생의 고생은 남아지지 않고 지나갈 것이지만, 일편단심으로 당신을 사랑하고 충성하고자 하는 붉은 정열만은 남아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것을 위해서는 죽음의 길도 개의치 않고 가겠나이다.’ 하고 기도한 적이 있습니다.
이러한 자리에서 선생님이 원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한 개인을 중심삼고 기도하고 한 가정, 한 종족, 한 민족, 한 국가를 중심삼고 기도하여 억천만세토록 하나님이 찾아오실 수 있는 안식의 터전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안식의 터전을 개인적, 가정적, 종족적, 국가적으로 마련하여 하나님 앞에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우리가 개인복귀의 기준을 찾는 동시에 하나님이 허락하실 수 있는 만물복귀의 터전을 닦아 나온 것입니다.
우리는 1960년도에 1차 7년노정을 출발하였습니다. 이 노정에서 참아들딸이 나오기 전에는 참부모의 날, 참자녀의 날이 나올 수 없었기 때문에 부모의 날, 자녀의 날을 먼저 세웠습니다. 그리고 3년노정을 거친 후 만물의 날을 택정한 것입니다. 이날을 정한 지 벌써 4년이 지났습니다.
이러한 날들을 지금까지는 대한민국 사람들뿐만 아니라 30억 인류도 모르고 있었지만, 앞으로 세계 만민이 찬양할 수 있는 역사적인 한 날이 된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까지 여러분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이 자리에 참석해서 문 선생님의 말씀을 들었다는 것은 자랑할 만한 사실입니다. 여러분이 영계에 가게 되면 다른 것은 자랑할 것이 없어도 이 자리에서 말씀을 들었다는 것은 자랑하지 않을 수 없는 하나의 절대적인 조건이 될 것입니다.
이제 모든 것을 하나의 이념으로 통일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을 중심삼고 하나님과 부자의 인연을 맺은 후 새로운 조상의 입장에서 모든 것을 결정짓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에서 합동결혼식을 해 나온 것입니다. 또한 성지를 택하여 기도할 수 있는 땅을 정해 놓았습니다. 몰리고 쫓길 때 기도하러 갈 곳이 없었던 우리에게 이제는 하나님 앞에 사정할 수 있는 성지를 택정한 것이 역사적이고, 세계적인 승리의 팻말을 꽂은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기준을 확대하기 위해 지난해에 선생님이 세계를 순방하면서 40개국에 120개 성지를 택정한 것입니다. 많은 경비를 쓰면서 여러 나라에 성지를 택정하여 그곳의 돌과 흙을 한국에 가지고 온 것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하나님의 섭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은 역사에 없는 일입니다.
그러면 왜 이와 같은 일을 하느냐? 천지 운세에 박자를 맞추고 하나님의 섭리의 프로에 맞추기 위해서입니다. 40개국의 120개 성지는 하나님의 선민권을 지켜 줄 수 있는 땅입니다. 이 땅을 육신을 가진 사람들이 지키지 못하더라도 영계의 영인들이 지켜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할 수 있는 팻말을 박고 싸울 수 있는 터전을 만들어 민족복귀 운동의 싸움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기점을 세우기 위한 것입니다. 이제 천지 운세가 최후의 운명을 결정지어야 할 시대권 내로 들어오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똑똑히 보고 있습니다. 그래요, 안 그래요? 「그렇습니다.」 다 듣고 보았지요?
통일교회가 나온 것은 인간이 죽기 전에 하나님이 함께하는 세계에서 하나님 앞에 사랑받을 수 있는 효자와 열녀의 인연을 맺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주려는 데 있습니다.
선생님이 삼천만 민족 앞에 몰리고 쫓김을 받더라도 대한민국이 살 수 있고 세계가 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결국 망하게 됩니다.
지난번 우리의 강의를 듣고는 무척 좋아하던 사람들도 그 전에는 통일교회를 무척 원수시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선생님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인간적인 감정으로 대하자면, 어느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만큼 복수심이 강한 사람입니다. 선생님은 무골충이 아닙니다. 그러나 허리 부러진 호랑이와 같은 입장에서 참고 나가는 것입니다. 복수를 한다고 해서 선생님의 한이 풀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은 하나님에게 맺힌 한을 해원성사하여 세계적인 복귀의 한 날을 결정짓기 위한 싸움의 과정을 거쳐 나오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부모와 처자가 문제가 아닙니다. 선생님은 부모를 배척했습니다. 처자까지도 배척했습니다. 선생님에게는 친척도 친구도 없습니다. 세상에서 귀하다고 하는 것은 모두 버렸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시는 여러분을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할 수 있는 아들딸과 충신 열녀들을 모아 타락한 세계를 복귀해야 할 하나님의 섭리가 있기 때문에 그랬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을 제물로 세우지 아니하시고 하늘 편인 아벨을 제물로 희생시켜 나올 수밖에 없는 원칙을 선생님이 알았기에, 뜻을 위해 나설 때 육신의 부모를 배척했고, 형제가 찾아와도 만나지 않고 도망다닌 사람입니다.
타락한 인간들은 하나님께서 아벨 편의 사람들을 희생시켜 나오는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자기와 가까운 데 있는 사람을 먼저 사랑할 수 없는 것이 복귀섭리의 원칙이므로 가까운 사랑을 희생시켜서 수많은 인간들을 살려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은 나를 그렇게도 사랑하시는 부모님에게 손수건 한 장, 신발 한 켤레도 사 드리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그런 일을 생각하면 인간적으로는 불효자식입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부모님 앞에 불효할망정 하나님 앞에는 죽는 한이 있더라도 불효의 자리에 서지 않겠다고 몸부림치며 나왔습니다. 선생님은 그런 결심으로 모든 것을 주관해 나왔기 때문에 그 결의가 성사되는 그날까지 안식하지 않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결의를 가진 선생님을 중심한 통일교회는 몰리고 쫓기는 자리에서도 뿌리를 박았고, 뽑으려 해도 뽑히지 않는 세계적인 기반을 닦았습니다. 그러기에 선생님이 큰소리치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가장 크게 생각하는 것이 이 세계의 통일입니다. 선생님은 통일교회 교인들을 좋아해 주고 사랑해 주는 것보다는 이 세계를 책임지고 싸울 수 있는 하늘 용사로 만들려고 합니다. 이것이 제1차적인 목적입니다.
싸워서 이길 수 있는 하늘의 용사가 되어야 하나님 앞에 영구불변의 효자 효녀, 충신 열녀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지 못한 것이 타락한 세계의 운명이라는 것을 선생님이 알기에 불가피하게 여러분들을 내몰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어느 스승이 자기가 사랑하는 제자들을 십자가의 길로 내몰겠습니까? 보내 놓고는 통곡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각 교회를 순회할 때, 식구들이 나를 보면서 눈물 흘리던 장면이 지금도 가슴에 사무쳐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의 부모 형제에게 쫓김받으면서도 선생님을 믿고 따라 나오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그들에게 ‘몰리고 쫓기는 신세지만 고생의 흔적은 하나님께서 기억하실 것이니, 당장에 실적이 나타나지 않더라도 몇 해만 참으라.’ 고 말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통곡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하나님의 심정을 생각하고 마음을 억제했습니다.
이러한 슬픔의 노정을 가면서 우리는 인류 복귀를 위한 부모의 날, 자녀의 날, 그리고 만물의 날을 정했습니다. 이러한 날을 맞이함으로써 세계는 새로운 운세권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 십자가를 중심삼고 오른편 강도와 왼편 강도가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 대신 석방된 바라바라는 사람도 예수님의 십자가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지금의 세계는 종말시대이기 때문에 예수님 때와 같은 현상이 벌어지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중심하여 볼 때, 오른편 강도는 민주주의를 상징하고 왼편 강도는 ‘하나님이 어디 있어?’ 하는 공산주의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이후 인류역사가 이러한 입장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심각한 대립이 있게 된 것입니다.
오른편 강도는 하나님이 있다 하는 입장이요, 왼편 강도는 하나님이 없다 하는 입장입니다. 그러면 바라바는 어떤 입장이냐? 바라바는 회회교권의 입장입니다.
이제 우리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이 부활하시는 시대가 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때가 오기 전에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와 회회교를 중심한 아랍권이 각각 하나로 통일되는 시대가 오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예수님의 재림시대가 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재림주님을 중심한 새로운 천주주의 시대가 나올 수 있는 때에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이 주의가 통일교회에서 주장하는 주의입니다. 피 흘리는 붉은 십자가의 자리를 밟고 피 흘리지 않고 승리의 팻말을 세울 수 있는, 흰 십자가를 들고 나오는 주의입니다. 갖은 고초와 사무치는 서러움이 있다 하더라도 새로운 역사를 창조할 수 있는 승리의 팻말을 가지고 있는 것이 통일교회입니다.
우리가 피와 땀을 흘리며 몸부림치던 것은 천주에 길이 빛날 수 있는 역사적인 내용으로 남아질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는 예수님이 서럽고 원통하였던 십자가의 인연을 승리의 팻말로 세울 수 있는 새로운 진리를 가지고 나온 것입니다. 알겠습니까? 「예.」
앞으로 공산세계가 어디 있으며, 민주세계가 어디 있겠습니까? 또한 회회교권이 어디 있겠습니까? 오직 통일주의만 있을 것입니다. 통일주의를 세우기 위한 ‘창건 동지’가 바로 통일교회 교인들입니다. 우리들은 재건의 동지가 아니라 창건 동지 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삼천리 반도 한국 전역을 순회하면서 식구들에게 강물의 물줄기가 끝없이 이어지는 것처럼 끝없이 전진해 달라고 호소한 적이 많았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충효의 도리를 세우겠다는 소망의 인연을 가지고 죽음의 길을 자청하고 나선 사람들이 바로 여기에 모였습니다.
여러분들이 보기에 통일교회가 정말 처량하지요? 선생님이 당장에 몇천 만 원짜리 교회를 지으려면 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삼천만 민족의 정성을 모아서 지을 수 있는 때를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반대받고 쫓김받는 자리에서도 역사의 흐름을 다시 가름하여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봅시다. 이러한 신념을 갖게 해 주는 곳이 통일교회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과 그 나라를 위하고, 형제자매를 위하고, 만물을 위하는 기준에서 만물과 참다운 인연을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참다운 부모 앞에 참다운 형이 되고 참다운 동생이 될 수 있는 입장에서 형제간에 화목할 수 있는 인연을 맺어야 합니다.
가인과 아벨의 싸움으로 인해서 인류의 역사가 파괴되었기 때문에 서로 화합하여 한 형제의 인연을 맺어야 합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이 세계가 하나님의 소망권 내로 복귀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수 있는 한 날을 맞이하기 위한 조건을 제물로 세울 수 있는 날이 바로 만물의 날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올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한 사명을 다시 한번 결의하기 위해서 이날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제1교회, 제2교회, 제3교회에서 빠진 사람 없이 다 모였지요? 다른날 같으면 조금 늦게 오던 사람들도 오늘은 제시간에 오려고 애를 많이 썼을 것입니다. 이제는 좀더 열심히 하지 않고 좀더 열심히 정성들이지 않으면 한이 될 것입니다.
앞으로 서울에 있는 큰 교회를 갈라서 40개 정도의 교회를 세울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40개 교회에서 120개 교회로, 그 다음에는 360개 교회로 늘릴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기성교회를 완전히 포위할 것입니다. 두고 보세요. ‘아이쿠! 통일교회가 이렇게 된 줄 몰랐구나.’ 하며 놀랄 것입니다. 그전까지는 담 밖에서 반대했는데 이제는 문을 닫고 반대해야 되겠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하다가 보니 누구만 남았겠습니까? 자기의 아들과 딸들은 전부 통일교회에 들어가고 혼자만 남을 것입니다. 기성교회에는 목사만 남는다는 말입니다. (웃음) 똑똑한 사람들은 전부 다 통일교회에 들어 왔습니다.
통일교회 청년들 모두 20대라서 참 기분이 좋습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 일들을 기성교인들은 도무지 알 길이 없습니다. 한 10년 지나 봐야 뭘 하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엉뚱한 일들을 하는 것 같지만 지나고 보면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말입니다.
선화어린이무용단만 해도 기성교회에서 얼마나 반대했습니까? 그런데 미국 순회공연 후에 서울, 부산, 대구, 대전 등지에서 공연을 할 때 서로 구경하겠다고 유리창을 깨뜨리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폭발적인 환영을 받았던 것입니다.
일을 하다 보면 잘 안 되는 일도 있습니다. 하다가 안 되는 일도 조금만 더 참고 나가면 됩니다. 고생이 되더라도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알겠습니까?
이제 여러분들은 타락세계의 습성에 젖은 눈, 코, 입, 귀를 복귀해야 됩니다. 눈, 코, 입, 귀를 재창조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중심삼고 눈 통일, 귀 통일, 입 통일 등 육신을 통일하고, 그 다음에 행동 통일, 심정 통일을 해야 됩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여러분들은 진정한 통일의 성도가 못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인 천사장의 유린으로 인간이 그의 종이 되었으니, 결국 인간은 종의 종이 된 입장입니다. 여기에서 인간은 먼저 종의 종 된 기준을 벗어나야 하고, 그 다음 종의 기준을 벗어나야 합니다.
그러면 종의 기준이란 무엇이냐? 그것은 주인의 재산을 상속받지 못하고 종처럼 그 대가만을 받고 일하는 입장을 말합니다. 이러한 종의 입장에서 양자의 자리에 가기 위해서는 먼저 종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자리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종으로서 충성을 다했다는 조건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종의 자리에서 충성을 다한 후에는 양자의 자리에서 충성해야 합니다.
양자의 자리를 거쳐 나가기 위해서는 양자의 기준을 다 세웠다는 조건이 있어야 합니다. 양자는 상속을 받을 수는 있으나 혈통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양자의 자격으로는 낙원급 영계밖에 갈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양자의 기준을 넘어서기 위해서 직계의 아들딸로 접붙임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땅 위의 모든 인간들을 접붙여 주기 위한 참감람나무로 오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접붙임의 역사를 하시는 참감람나무로 오셔서 세계적인 대표형으로 12제자를 택하여 형제의 인연을 세울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은 형제의 인연을 중심삼고 사탄세계의 침범을 막는 울타리가 되고 사탄의 도성을 함락 시킬 수 있는 형제들이 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그 형제들을 중심삼고 부모의 자리로 올라가야 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목적이었습니다. 이러한 부모의 자리에서 아들과 딸들을 재축복하여 하나님 앞에 세우게 되면 새로운 이스라엘의 천국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섭리역사의 원칙입니다.
그러면 오늘날은 시대적으로 볼 때 어떠한 때인가? 세계는 이미 제3이스라엘을 맞이한 입장에 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핍박당하신 시대적인 억울함이 있기 때문에 오늘날 기성교회가 통일교회를 박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민족의 반대로 인하여 죽음의 길을 걸었지만 다시 부활하시어 영적인 기준을 복귀한 것과 마찬가지로, 통일교회가 외적으로는 교계에 몰리고 쫓기며 말할 수 없는 고생과 죽음의 길을 거쳐가고 있지만, 내적으로는 국가적이고 세계적인 역사를 이루어 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통일교회의 원리로 본 역사관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어느 자리에 있느냐? 종의 종 자리에 있느냐, 종의 자리에 있느냐, 양자의 자리에 있느냐, 아들의 자리에 있느냐, 그렇지 않으면 축복가정으로서 하늘나라에서 조상의 자리에 있느냐? 여러분들이 지금 어느 단계에 있느냐 하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개인과 가정과 종족, 민족, 국가, 세계 기준을 완전히 넘어서야만 만민의 목적을 달성해 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우리들은 다시 한번 다짐해야 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사명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1단계로 국가적인 책임을, 제2단계로 세계적인 책임을, 제3단계로 천주적인 사명을 이루기 위해 싸워 나갈 것을 여러분은 오늘 다시 한번 결의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이러한 싸움터로 가겠습니까, 안 가겠습니까? 「가겠습니다.」 가겠다는 사람 손들어 보세요. 내리세요.
여러분들의 맹세와 함께 지금도 전세계에 있는 통일의 식구들이 이 문제를 가지고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명심하십시오. 오늘 이날을 감사한 마음으로 맞아 줄 것을 부탁합니다.
아버님! 아버님께서는 저희들이 참다운 효자 효녀가 되기를 바라고 계신 줄 아옵니다. 이제 참다운 가정, 참다운 종족, 참다운 민족, 참다운 국가, 참다운 세계를 이루어야 할 저희들임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 오늘날까지 당신이 발 붙일 수 있는 땅이 이 천지에 어디 있었습니까? 그러한 족속이 있었으며, 그러한 나라가 있었으며, 그러한 세계가 있었사옵니까? 아버님은 언제나 이방인이셨습니다. 동풍이 불어오면 서쪽으로 몰려야 했고, 북풍이 불어오면 남쪽으로 몰려야 하는 이런 유랑의 생활을 6천년이나 계속해 나왔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우리 인류 시조가 한 날의 실수로 말미암아 아버님께 곡절의 역사를 거쳐 오시게 했음을 저희는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님, 타락한 역사를 재창조, 재편성해야 할 참된 이념을 바라보는 통일교회가 있사오니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역사적인 선조들의 그 모든 실수가 역사의 노정 위에 어떠한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사옵고, 슬프고 한 많았던 역사가 이어져 내려왔다는 것도 잘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님, 다시는 그와 같은 역사가 되풀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뼛골에 사무치도록 체험을 했사옵니다.
하나님을 위할 수 있는 충성과 효성의 길만이 저희들의 생애 최상의 목적이 되게 하시옵소서. 아버님 앞에서 충효를 다짐하는 이런 자리를 감사하게 생각할 줄 아는 아버님의 역군들이 되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따라오던 사탄도 더 이상 따라오지 못하고 작별을 고하게 하시옵소서. 앞으로 저희가 넘어야 할 태산준령을 기쁨으로 넘어갈 수 있는 아버님의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 거룩한 이날이 이 나라, 이 땅 위에 세워진 것을 감사드리옵니다. 이날이 나오기까지 아버님께서는 얼마나 수고하셨으며, 탄식했던 만물은 또 얼마나 고대했던가를 알고 있사오니, 이 모든 것을 기쁘게 받아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이 지구상에서 세계적인 승리를 할 수 있는 그날을 빨리 이룰 수 있도록 역사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오늘 이날을 위하여 여기에 참석한 모든 아들과 딸들의 심정을 주관하여 주시옵고, 지금까지 이들이 가졌던 어떠한 관념이나 주의, 사상 등 모든 내용과 기준을 전부 심판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 당신의 심정을 중심삼고 재창조의 생활 토대를 확보할 수 있고, 그 터전을 마련할 수 있는 특별한 날이 되게 하시고, 기념의 날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님! 민족적인 노정이 아직도 남아 있사오니 저희들의 발걸음을 재촉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승리의 그날을 위해 다짐하며 감사할 수 있는 생활이 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탕감의 역사노정에 있어서 충정을 다할 수 있는 때는 있었으나, 하늘땅이 진정으로 환영할 수 있는 승리의 날, 효성의 날을 맞이하지 못하였사오니, 아버님, 이제 그날을 맞이하게 하기 위하여 남은 여생은 물론 남은 정력을 다하여 충성과 효성을 할 수 있는 아버님의 아들과 딸들이 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마음으로 다짐하면서 이 시간 쌍수를 들어 아버님 앞에 맹세한 것이 헛되지 않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나이다.
인류와 이 나라와 이 민족, 그리고 수많은 제단 위에 새로운 약속과 특별한 은사를 내려 주시옵기를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님의 성호 받들어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이 세상에는 수많은 인간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 중에는 자기가 제일이라고 생각하는 통치자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타락권 내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새로운 길을 찾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아직까지 하나님의 역사적인 심정을 품을 수 있는 천주적인 인간이 없었습니다. 새로운 이념을 중심삼고 이 세계를 정비할 수 있는 표준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제일 사랑할 수 있는 심정적인 사람이 나와야 되는데 아직까지 그런 사람이 없었습니다.
세계적인 중심이 나오기 위해서는 먼저 세계적인 환경이 닦아져야 됩니다. 개인을 세우기 위해서는 개인을 대표할 수 있는 표상을 세우고, 가정을 세우기 위해서는 가정을 대표할 수 있는 표상을 세우고, 민족을 세우기 위해서는 민족을 대표할 수 있는 표상을 세우고, 세계를 세우기 위해서는 세계를 대표할 수 있는 표상을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역사노정에서 어떤 시대에는 하나님은 개인을 세워 그 개인을 중심삼고 하나로 묶어 놓으려고 했지만 무지한 인간들은 그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역사를 대신하고, 시대와 미래를 대표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하나님도 그런 사랑 앞에서는 굴복하십니다. 사랑은 전체를 굴복시킵니다. 그 사랑 속에는 개인도 들어가고, 국가도 들어가고, 세계도 들어가고, 하나님까지도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랑이 필요합니다.
지금까지 개인, 가정, 국가, 세계를 중심한 사랑은 있었으나 하나님을 중심한 사랑은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타락한 인간들은 더 좋아하면 좋아할수록,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더 심판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가정적인 승리를 했다 해도 가정적인 탕감조건을 세워 놓지 못하고, 국가적인 승리를 했다 해도 국가적인 탕감조건을 세워 놓지 못하고, 세계적인 승리를 했다 해도 세계적인 탕감조건을 세워 놓지 못하면 심판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는 대심판을 말하고 있습니다. 선과 악을 갈라서 선은 승리하고 악은 심판당한다는 것입니다. 유교에서는 ‘순천자(順天者)는 존(存)하고 역천자(逆天者)는 망(亡)한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천도를 말한 것입니다.
역사는 돌고 도는 것입니다. 저기압권이 형성되어 커지면 태풍이 부는 것입니다. 오늘의 역사는 세계적인 기준을 중심으로 하여 움직입니다. 그것은 세계적인 심판선을 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중심삼고 나가야 합니다.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는 진리, 즉 이론을 중심삼고 서로 대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국경을 초월하는 천주주의(天宙主義)가 나와야 합니다. 주의 자체가 목적은 아닙니다.
세계적인 종말이 되면 민주와 공산은 전부 침범당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를 흡수할 수 있는 주의가 나와야 합니다. 즉 개체를 중심삼고 전체를 묶어 놓을 수 있는 주의가 있어야 합니다.
끝날이 다가올수록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냐? 그것은 하나님의 인격이요 심정이요 가치입니다. 즉 소망과 사정과 심정이 문제인 것입니다. 오늘날 득세하고 있는 세계의 모든 주의는 하나님과 상관이 있습니다.
역사의 소원인 종교는 아직 살아남아 있지만 그것을 막으려던 위정자들은 전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높은 소원을 중심삼은 기독교는 승리했습니다.
그러면 우리 통일교회는 무엇을 하는 곳이냐? 숭고한 이념을 가지고 많은 사람이 바라보는 그 소원의 세계에 제일 먼저 정착하자는 운동을 하는 곳입니다. 통일교회의 소원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원은 세계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한 사람, 하나님 대신 천주를 주관할 수 있는 한 사람을 찾는 것입니다. 앞으로 올 세계는 민주주의도 공산주의도 아닙니다. (중략)
6천년의 역사는 잃어버린 참다운 사람 하나를 다시 찾는 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 한 사람을 찾기 위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다리 놓으면서 나왔습니다. 개인을 다리 놓고, 가정을 다리 놓고, 국가와 세계를 다리 놓으면서 소망과 사정과 심정이 하나님과 같은 한 사람을 찾아 나왔으니 그 사람이 바로 메시아입니다. 상하 좌우 동서남북을 초월하는 역사적인 초점이 바로 구세주입니다.
지금까지의 역사는 밖으로 뻗어 나갔지만, 중심이 결정되면 안으로 파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를 중심삼고 충․효․열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절대적인 이념, 절대적인 사정, 절대적인 심정의 일체를 이루어야 됩니다.
과거․현재․미래를 통하여 일치될 수 있는 소망, 사정, 심정을 예수님의 직계 자녀를 중심하고 이루려 했는데, 그것이 안 되니 제자들을 중심하고 이루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일직선상에 서지 못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므로 재림주는 예수님이 세우려던 소망, 사정, 심정 이상의 자리에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절대적인 기준 위에 서야만 원수를 갚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탄의 참소를 받게 되어 원수를 갚을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외적인 통일보다 절대적인 내적 통일을 해야 합니다. 행복이나 평화에서 심정을 빼고 나면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최대의 권한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심정입니다. 심정은 역사를 벗어나 절대적인 기준에서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역사적인 탕감조건을 세워 사탄을 추방해야 합니다. 조건이 남게 되면 사탄이 침범합니다.
심정의 인연은 편안한 자리에서 맺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억울하고 비참한 자리에서 죽어 쓰러지지 않고 세계적인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넘어서 부활의 승리적인 영광을 차지해야 맺어지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나에게 명령하고 나는 그 명령을 받아 실천해야 합니다.
인류역사에 있어서 여러분은 조상이 되는 것입니다.
세계가 통일교회를 추방한다고 해도 여러분은 꼼짝하지 않는 심정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여러분은 두 가지의 기도를 해야 합니다. 하나는 역사적인 탕감을 하지 못한 영계를 위하여, 또 하나는 앞으로 태어나서 새로운 역사를 창건해야 할 어린이를 위하여.
한국은 세계의 꼭대기입니다.
심정의 세계는 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달라고 해서 주는 것이 아니라 싫다고 해도 주고 싶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공격할 때가 왔습니다. 우리가 포위작전을 전개하여 삼백만 서울시민을 인도하여 뜻을 같이한다면 한국은 문제가 아닙니다. 한국에서 된다면 아시아, 세계는 시간문제인 것입니다.
요즈음의 국제정세를 바라볼 때, 우리나라는 너무나 어려운 환경에 직면해 있습니다.
만일 대를 위해 소를 희생시켜서 탕감복귀되고, 그래서 뜻이 이루어진다면, 하나님은 기쁘게 그 일을 단행하신다는 것을 여러분은 똑바로 알아야 되겠습니다. 본부에서 내리는 명령을 어기면 후손들에게까지 막대한 지장이 초래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들이 남한 각지를 책임지고 마음에 마음을 묶고, 몸에 몸을 묶어 일편단심 뜻을 품고 나간다면 내일부터 서광이 비칠 것입니다. 우리는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역사적인 사명을 직시해야 합니다. 그리고 승리해야 합니다. 패배하게 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일찍이 하나님께서 자랑하실 수 있는 참다운 자녀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그 길을 새로이 가야 됩니다. 우리가 그 길을 가면 외로울 때 하나님이 우리를 그대로 두시지 않고 우리의 뒤를 밀어주실 것을 나는 확신합니다.
어떤 사람을 세우려면 담판 기도를 하기 바랍니다. 그러면 됩니다.
좋은 환경을 오히려 나쁜 것으로 생각하고 가야만 강하게 갈 수 있습니다.
1970년도까지 4단계 목표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의무란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제까지는 우리가 쫓겨다녔지만, 지금은 쫓겨다닐 때가 아닙니다. 소망의 심정을 가지고 늠름하게 하늘의 일을 해야 할 때라는 것을 절실히 느껴야겠습니다. (중략)
우리 주변의 사태가 긴박하면 긴박할수록 그것은 낙망의 요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하는 우리에게는 더 유리한 요소라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한국이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영계의 수많은 영인들이 협조합니다. 지방의 기성교회는 지금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기성교회 자체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끝날의 지상세계를 영계가 한꺼번에 협조하는 현상인 것입니다. 그런데 기성교인들은 그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젊은이들의 가슴에 불을 질러서 우리의 뜻이 단시일 내에 승리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아야 하겠습니다.
마음으로 다짐하고, 행동으로 다짐해서 합심하여 기도하면 가정의 부활뿐만 아니라 민족의 부활까지 이루어집니다. 자기가 책임을 못한 것이 있더라도, 그것을 포기해 버리지 말고 그 터전 위에 몇 배의 정성을 들이면 그것은 결국 이루어지게 됩니다.
지금까지 활동한 지역장들은 자기권 내의 기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6년, 즉 6수를 넘어 가지고 7수를 가져야 합니다. 역사적인 최고의 자리에 올라갈 수 있는 중차대한 기회는 한 번밖에 없습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인적 자원을 보강하는 일입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의 지역에서 일어난 일을 여러분의 지역만의 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세계적인 문제로 생각해야 합니다.
맡겨진 책임을 감당해 낼 수 있는 청년 남녀가 많아야 하겠습니다. 그런 사람이 천 명만 있으면 남한 땅은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소기의 목적을 이루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일꾼을 부르고 계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종의 종이 되어서라도 필요한 사람을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제부터 과거를 털어 버리고 새로운 각도에서 활동해야 하겠습니다. 남아 있는 식구들을 놀게 하지 말고 활동시켜야 됩니다.
전체를 동원하여 활동시키려면 조직을 강화해야 합니다. 금년 하반기에는 정성을 다해 일할 것을 새롭게 결의하고 맹세해야 되겠습니다.
협회원을 전도하는 데 우리 식구의 3분의 1은 투입해야 하겠습니다. 협회원 중에서도 상급, 중급, 하급으로 구분하여 이를 보고하고, 될 수 있는 대로 상급은 협회에서, 중급은 지구에서, 하급은 지역에서 보살펴 주어야 하겠습니다.
정상적인 자리만 잡히면 지역장의 3분의 1을 교체해서 횡적인 기준을 공고히 하면서 종적인 일을 하게 할 것입니다.
요즘 새로 들어오는 식구들은 종교의 뜻은 잘 모르지만 선한 선조들의 공적(功績)으로 인해 자기도 모르게 종교를 갖게 된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작전은 지역장을 중심으로 해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승리할 수 있는 권한을 우리에게 부여해 주셨기 때문에 어느 누가 아무리 반대를 할지라도 우리가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 부락도 남김없이 전부 방문하여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7년노정이 끝날 때까지는 통일교회가 있는지 없는지 몰랐다는 말을 듣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10월부터는 부흥회를 개최해야겠습니다. 모두들 최대의 노력을 기울여 잘 싸워주기 바랍니다. 외국 식구들보다 못해서야 되겠습니까?
제일 필요한 것은 여러분의 후계자입니다. 될 수 있는 대로 신앙의 기반이 있는 사람들을 전도해서 자기의 후계자로 세워야 합니다. 이것만 실천하면 몇 배의 성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
오늘은 제3교회 식구들이 가장 많이 모인 것 같습니다. 하여튼 제3교회가 열심입니다. 먼저 알고 모인 교회 식구들보다 오늘 아침에 알아 가지고 연락했어도 많이 모인 제3교회 식구들을 선생님은 치하합니다.
제1교회는 나무의 뿌리와 같고, 제2교회는 줄기와 같고, 제3교회는 가지나 잎사귀와 같습니다. 그래서 제3교회 식구들이 설렐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나다를까, 제3교회 식구들이 설레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나무의 뿌리나 줄기를 보고 좋아하지 않고 잎을 보고 좋아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서울 교회를 3개로 나눈 것입니다.
종교인은 영계를 중심삼고 나가는 사람입니다. 영적 인격의 완성을 제일로 하고 나가는 사람이 종교인인데, 제1교회보다 제2교회에 그런 영통파들이 많습니다. 여기 처음 오신 분들은 영통파가 무엇인지 잘 모를 것입니다. 영통파란 영계와 문답을 하고, 영계에서 이래라저래라 하는 대로 움직이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제2교회에는 그런 사람들이 많다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제3교회만 자꾸 퍼지면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퍼지되 뿌리에 속한 줄기가 되고, 줄기에 속한 가지가 되고, 가지에 속한 잎사귀가 되어야 합니다. 뿌리와 줄기는 가만히 있는데 잎사귀만 자꾸 설레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나올 수 있습니까? 나올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3교회 식구들은 제1교회, 제2교회의 은덕이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을 알고 감사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웃음) 왜 웃습니까? 원칙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남의 나무의 잎사귀를 뜯어다가 자기 나무에 붙인다고 해서 그것이 자기 나무의 잎사귀가 될 수 있습니까? 하루에 잎을 수만 개를 접붙일지라도 그것들이 뿌리에서부터 올라오는 영양분을 공급받지 못한다면 아무리 접붙여 보아야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가만히 보면 제1교회, 제2교회는 어떻게 되든간에 제 3교회주의로 나가는 것 같습니다. 숫자적으로 볼 때 순서가 제3, 제2, 제1, 이렇게 되어 나갑니까? 그것은 제3교회식인 모양입니다.
수를 셀 때도 1, 2, 3…… 이렇게 세어 나가니 3교회 식구들은 그러한 관념을 좀 가져야 되겠습니다. 그렇다고 함께 모여 활동하는 것을 선생님이 싫어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생님에게도 그런 기질이 맞는 것입니다. 다만 전체적인 인연을 중요시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뜻을 중심삼고 나가는 것은 대한민국과 세계를 움직이기 위해서입니다. 그래 가지고 하늘을 움직이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은 내려오고 우리는 올라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려오는 것이 강하게 눌러 주어야 올라가는 것이 쑤욱 올라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우리가 지금까지 닦아 나온 역사적인 인연을 중요시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제3교회에 가 있다면 제3교회에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람이 아무리 출세를 해서 세계를 움직이고 나라를 다스리는 책임자가 되었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으니 그것은 고향 땅이요, 부모의 인연입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들은 맺어진 인연을 중요시해야 합니다. 그것들을 잊어버리면 그 사람은 그 나라의 책임자가 못 되는 것입니다.
한번은 이 목사가 제3교회 교인들은 만나면 인사만 하고는 더 묻지도 않고 휙 가버린다고 하는 말을 선생님이 들었습니다. 옛날 같으면 따라와 가지고 서로 자기 사정을 이야기하려고 하고, 말을 걸어 주면 고마워했었는데 그런 심정은 없어지고 쓸쓸한 바람만 휙 분다는 것입니다. 그거 왜 그러냐? 자기네 교회 발전상을 알면 이 목사가 자극을 받아서 힘차게 움직 일까봐 그런지 인사만 하고는 획 가 버린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가만히 있어도 여러분들이 어떻게 한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또 여러분이 보고를 하지 않아도 그것을 압니다.
선생님은 제3교회를 마음으로 후원해 줍니다. 또 제3교회는 소생․장성․완성격이니 얼마나 좋습니까? 이 3수가 좋긴 좋습니다. 이 ‘삼(三)’자는 바로 쓰면 3단계 성장기간을 상징하고, 옆으로 세우면 ‘내 천(川)’자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3수가 3수로서의 작용을 할 수 있는 원칙적인 기준을 먼저 세워야 합니다.
제3교회 식구들은 우리 통일교회의 대표적인 기준에서 움직이고, 모범적인 활동을 한다고 하더라도 하늘의 전통을 상실하는 자리에서 움직여서는 안 됩니다. 어디까지나 그 전통을 기반으로 하고 그 원칙적인 기반을 중심삼아 가지고 나아가야 됩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교회가 발전을 하면 그 발전한 사실을 책임자들이 본부에 와서 선생님에게 전부 보고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교회 책임자들이 선생님에게 찾아와서 보고하려고 하는 사람을 한 사람도 못 봤습니다. 선생님이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 봐서 그런지 나타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선생님이 여러분에게 이야기를 해주면 좋겠지만, 시작하면 적어도 세 시간, 네 시간, 다섯 시간 걸릴 것입니다. 열두 시간 동안도 이야기를 했던 기록이 있는데, 그렇게 하면 여러분이 전부 지쳐서 도망갈 것 같습니다.
얘기했으면 좋겠어요? 「예.」 얼마나 하면 좋을까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 선생님의 소망인데 그렇게 하려면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 가지고는 안 됩니다. 한 대여섯 시간은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해도 괜찮겠어요? 「예.」 그렇게 해도 괜찮다면 이야기할지 모르지만 여러분이 피곤하지 않겠어요?
선생님이 아직 보고를 듣지 못했기 때문에 먼저 보고를 듣고 싶습니다. 보고를 하려면 서너 시간 걸릴 텐데 보고 끝난 후에 선생님이 세 시간 동안 더 얘기하면 여섯 시간 걸립니다. 그래서 여기에 여섯 시간 동안 계속해서 앉아 있지 못할 사람은 지금 나가도 실례가 되지 않을 테니까 저 뒤에 있다가 인사 없이 가도 괜찮아요. 아시겠어요? 「예.」
그러면 3교회부터 보고하세요. 잘못한 것은 선생님하고 개인적으로 얘기하고 잘한 것을 중심삼고 얘기하도록 하세요. 주인이 주인 노릇을 하려면, 주인이 칭찬받으려면 맛 좋은 음식은 전부 손님에게 대접하고 그 남은 찌꺼기는 주인이 먹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나쁜 이야기를 제해 버리면 좋은 이야기는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나와서 잠깐만 보고하도록 합시다.(제3교회, 제2교회, 제1교회순으로 보고)
많은 사람을 지도하려면 사탕물, 꿀물만 먹이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작용이 벌어집니다. 때로는 사정없이 침도 놓아야 합니다. 찌를 때는 손끝을 찌르면 안 됩니다. 중앙, 아주 복판을 찔러야 되는 것입니다. 때로는 뒤에서 몰아야 할 때도 있지만 앞에서 코를 잡아서라도 끌어야 할 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과 같이 제도화시켜서, 조직적이고 원칙적인 내용을 갖추어 조직체를 형성하여 움직이게 되면 쉬울 것입니다.
그렇지만 신령한 역사라는 것은 그런 것을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때로는 앉아 있는 사람을 거꾸로 세워 놓아야 할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점잖은 어르신인데도 불구하고 그 사람을 못난 사람 취급해서 때려잡아야 할 때도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모르고 제도화된 사회에서 정상적인 생활을 한 사람의 기준에서 보게 될 때는 이해하지 못할 일이 많습니다. 자기들이 이해하고 자기들이 환영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것은 하늘나라와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나이 많은 사람들을 책망해야 할 때도 있고, 때로는 어린 청소년들을 붙잡아서 기합을 줘야 할 때도 있는 것입니다. 알겠습니까?
날씨가 무척 덥습니다. 여러분, 무척 덥지요? 선생님도 이야기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앉아 있는 여러분보다 더 힘듭니다.
선생님이 가야 할 곳이 또 있지만 여러분들이 꼭 붙들고 못 가게 하는 입장이고, 오늘 선생님이 여러분들을 오라고 했으니 이야기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알고, 조는 사람 있으면 안 되겠습니다. 여기 와서는 얌전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잘난 사람이나 할 것 없이 다 들어야 합니다.
또 이 길을 가는 데 있어서는 마구 조일 때도 있습니다. 꾸중을 하게 되면 선생님은 아주 심하게 할 것입니다, 정이 뚝 떨어지게끔. 그렇더라도 양해하세요? 「예.」 사실은 양해를 구하지 않고 해야 하는데…. 말이 참 좋긴 좋아요. 한마디 척 해 놓으면 모두 가만히 있고, 내가 칭찬해 주면 가만히 있고, 싫은 소리 한마디하면 이상한 징조가 벌어지거든. 반대할 징조 아니면 정신차리는 징조, 두 가지 중에 하나입니다.
이 전체를 움직이려면 반대자도 있어야 되고, 정신 차리게 하는 사람도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욕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농담도 하고 꾸지람도 해야 여러분의 졸음이 다 도망갑니다. 대중을 지도하려면 그런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선생님이 미국에 가서 집회를 하는데 미국 사람들이 바짝 긴장을 해서 눈이 삼각형이 되었어요. 동양에서 온 젊은 선생님이 무슨 이야기를 할까 하고 아주 심각한 표정들이었습니다.
그런 때는 심각한 이야기를 절대로 할 수 없습니다. 그때에는 뒤집어 놓아야 합니다. 그래서 ‘여기 여러분들, 모두 노래를 좋아하지요?’ 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다 좋아한다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도 노래를 좋아하니 여러분이 하나 해 주기를 바랍니다. 노래 하나 해 줄래요?’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어떤 식구가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 다음엔 모두 노래를 시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시키기만 해서는 안 되지요. 그래서 그 다음에는 ‘내가 노래 하나 할까요?’ 하고 물으니 모두들 좋아했습니다. 그렇게 한번 쓱 해 놓으면 그만큼 좋아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처음 만나는 사람을 사정과 격식을 차려서 친구로 사귀려면 10년은 걸려야 10년지기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처음 만나서 대뜸 허물없이 ‘야 이 자식아! 왜 이래?’ 하고, 이마를 맞대고 주먹질을 하고 이야기를 하면 금방 친한 사이가 되는 것입니다. 바쁜 생활에 언제 사정 따라 인사를 하고 격식을 차리겠습니까?
대중을 모아 놓고 이야기할 때에도, 점잖게 ‘여러분이 본래는 선한 사람이기 때문에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탄이 들어왔기 때문에, 악의 요소가 있기 때문에 악한 사람이 되었는데 나는 악한 사람은 싫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에게 욕을 해도 괜찮은 것입니다.’ 라고 하는 것은 기성 교회식입니다. 언제 그러겠습니까? 통일교회식은 직격탄입니다. 통일탄입니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선생님이 칠판에 오늘의 말씀 제목을 쓰겠는데 내리 쓸까요, 옆으로 쓸까요? 내리 쓰는 것은 하늘의 운세가 내려오기 때문에 내리 쓰는 것이요, 옆으로 쓰는 것은 통일교회는 세계를 복귀하기 위해서 건너가야 되겠으니 그렇게 쓴다고 생각하십시오.
이 시간 여러분들에게 하고자 하는 말씀의 제목은 ‘통일교회는 탕감교회다’ 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선생님은 탕감이란 말을 제일 싫어합니다. 여러분도 싫지요? 「예.」 그러면 여러분은 왜 여기에 앉아 있습니까? 할 수 없이 나와 앉아 있지요? 그렇지만 할 수 없어요. 탕감을 해야 하니…. 통일교회는 탕감교회입니다.
그렇게 알고 선생님이 노래 한번 하겠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이 먼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도 같이 해야 됩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선생님 혼자 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30퍼센트, 40퍼센트, 50퍼센트가 넘는 것 같습니다. 어디 선생님 혼자 한번 해 볼까요? 「예.」 그러면 선생님은 아기의 언니 입장이고, 여러분은 아기의 동생 입장이라면 노래하겠습니다. 어른의 마음을 다 벗어 놓고 하겠습니다. 좋아요?「예.」무슨 노래를 할까요? 여러분이 제목을 정하세요.
‘빛나는 대한’ 하나 할까요?
여러분들이 노래를 부르면서 ‘구풀구풀’ 할 때에는 진짜로 온 몸이 구풀구풀하며 해야 합니다. 그래서 무엇을 한다고 했습니까? 「충신을 낳고!」 굽이굽이 시냇물은 무엇을 한다고요? 「열녀를 낳고!」 그 다음에 무엇을 한 다고요? 「산의 나무 다듬어서!」 산의 나무 다듬어서 집을 짓고 난 다음 신랑 신부 모셔다가 천년 만년 살고지고…. 그런 거예요. 알겠지요? (2절 다시 부름)
요전에 선생님이 미국 갔을 때 미국의 부인들이 이 노래를 부르는데 ‘아름다운 강산이라’를 어떻게 하느냐 하면 ‘아룬다룬 강산이라’고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여러분은 ‘아룬다룬’ 하지 말고 정신 차려서 불러야 합니다.(또다시 2절 부름)
그러면 3절을 불러 봅시다.
노래는 하나님과 화합하는 근본 재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래할 때는 도취되는 기분을 느껴야 합니다.
선생님이 ‘애향가’ 를 하나 더 부르겠습니다.
우리 모두 그러한 세계에서 살아야지요? 이 땅 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지만, 그들이 진정으로 사랑하며 살아 본 참다운 고향은 아직까지 없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살고 있는 이 나라와 옛날에 살았던 고향 땅을 갖고 있습니다. 이 나라에는 이 나라의 지도자가 있고 백성이 있고 국토가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고향에는 부모와 친척과 잊을 수 없는 형제가 있습니다. 그곳에서 여러분들은 자랐고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심정의 인연을 맺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이 살고 있는 국가면 국가, 혹은 고향이면 고향을 중심삼고 느끼는 그 기준만큼 어느 한때 하나님이 그러한 것을 느껴 보셨겠는가를 생각해 볼 때, 아직까지 그런 때가 한 번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조상들도 그러한 한 날을 가져 보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인간시조가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수많은 후손들이 슬픔의 역사 과정을 엮어 나왔고, 슬픈 환경에서 지금까지 자기의 생애를 지내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자기의 고향과 나라를 사랑하는 그 기준만큼 사랑할 수 있고, 또 당신의 주권을 세워 가지고 이 세계를 치리하실 수 있는 때가 한 번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귀, 복귀란 말이 나와야 합니다.
우리는 복귀해야 하는데 무엇부터 복귀해야 될 것이냐? 나 개인부터 복귀해야 됩니다. 나 개인을 복귀하기 위해서는 나 개인을 그리워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복귀하는 데는 기준이 있어야 됩니다. 내가 어떻게 되기를 소망하는 그런 기준이 있어야 되겠습니다. 이렇게 되어야 되겠다는…. 내 개인이 복귀되어야 하고, 내 가정이 복귀되어야 하고, 내 종족, 민족, 국가, 세계, 온 천주가 복귀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타락한 세계의 운명입니다.
이 운명의 길을 개척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이냐? 개인에서부터 천주사적인 모든 복귀의 고개를 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들이 가야 할 길이라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좋으나 나쁘나 가야 할 복귀의 운명 길에 서 있는데, 이 운명길을 밟고 넘어서서 해방된 자리에서 자기 자신을 모든 가정과 모든 민족과 천주 앞에 세워서 ‘나를 본받아라.’ 할 수 있는 승리적인 한 날을 맞이하고 싶은 것이 인간들의 소망이란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우리는 가야 됩니다.
그러면 복귀하는 데는 어떠한 기준이 있어야 되겠습니까? 그 기준은 여러분이 좋다 하는 기준이 아니고,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수많은 인류가 좋다 하는 기준도 아닙니다. 혹은 과거에 왔다 갔던 성인 현철들이 제시해 놓은 어떤 인격적인 기준도 아닌 것입니다. 그 기준은 어떤 인간의 생각으로 세워진 기준이 아니라 절대적인 하나님을 중심삼고 세워진 기준입니다. 그리고 인류역사의 동기도 하나님의 심정이 되어야 했는데,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심정이 인류역사의 동기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지금까지 한을 품고 나오셨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심정을 중심삼은 본연의 절대적인 기준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알지 않으면 안 됩니다. 본래 인간이 하나님의 심정을 통하는 자리에 있어서 타락하지 않았으면 참부모가 되어 참자녀를 낳아 참다운 가정을 형성하고, 참다운 종족, 민족, 국가, 세계, 참다운 천주의 기준이 형성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타락한 인간세계에서는 그 기준을 아무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개인에서부터 본연의 가정, 종족, 민족, 국가, 세계, 천주적인 기준을 복귀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타락한 인류를 부여안고 ‘복귀’ 라는 명사를 중심삼아 구원섭리를 해 나오신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합니다. 나라와 세계를 먼저 찾고 싶고, 나보다도 가정을 먼저 찾고 싶은 것이 하나님의 소망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본연의 기준 앞에 부합될 수 있는 보다 큰 절대적인 기준이 나오기를 무엇보다도 더 소망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소망하시는 그 무엇보다도 더 큰 기준을 어디서부터 이루어 나갈 것이냐 할 때에, 큰 자리에서부터는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큰 자리에 서서 천주를 주관하고, 천지의 인연을 세워 가지고 인류와 천주를 사랑하시는 것이 본래의 창조목적이었지만,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큰 자리를 내버리고 지극히 작은 자리에서부터 심정의 인연을 다시 세워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어디서부터 복귀해야 하느냐 하면 맨 밑창에서부터 복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만일에 중간에서부터 복귀해 나온다면 그 밑 부분이 남아지기 때문에 맨 밑창부터 복귀해야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많다는 말씀도 이러한 일면에서 적용되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면 밑창은 어떤 곳이냐? 역사를 가만히 들춰 보면 역사 과정에 있어서 새로운 문화는 반드시 기울어져 가는 한 시대의 문화와 접하는 곳에서 발생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옛날의 문화권의 중심지는 새 시대의 중심이 못 됩니다. 옛날의 문화권에 상극적인 입장에서 새로운 문화권을 형성하려고 대립하던 경계선이 새로운 시대의 중심이 되는 것을 우리들은 역사 과정에서 엿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이 세상의 끝날이 되면 될수록 하나의 세계를 지향한다는 것은 자연적인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하나의 세계를 지향하는 역사적인 종말시대에서 바라보게 될 때에 이 세상이 그냥 그대로 있어야 된다는 것은 큰 오해라는 것입니다.
맨 밑창에서부터 이 세계를 복귀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상과 뜻을 가지고 치리하는 법도를 세우지 않고는 사탄이 제거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완전히 이해해야 할 것은, 이 세계를 복귀하려면 하나님의 창조이상의 기준, 본연의 기준을 중심삼고 시작해서는 안 되고 맨 밑창에서부터 시작해 나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개인을 중심삼은 이념이 아니고 이 세계를 위한 이념이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 오셔서 끝날을 중심삼은 새 시대의 이념을 소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재림하는 그 날에는 지상에 천국이 벌어진다고 약속하고 그것을 중심삼고 2천년 동안 기독교를 이끌어 나오신 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세계를 넘어설 수 있는 이념을 초창기에는 가르쳐 주었지만, 과정에서는 탕감이라는 법도를 세워 가지고 나가야 한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겠습니다. 그래서 탕감교회란 말이 나온 것입니다, 탕감교회!
그러면 하나님은 무엇을 원하시느냐? 여러분 개인보다도 가정을 원하십니다. 가정보다도 종족을 원하시고, 종족보다도 민족을 원하십니다. 그리고 민족보다는 국가를 원하십니다.
여러분, 한 나라의 국사는 누구를 위주로 해서 기록합니까? 대개 주권자를 위주로 해서 기록하는 것입니다. 국민들을 중심삼아 가지고 그 나라의 역사를 논위(論謂)하는 것이 아니라, 주권자의 역사를 중심삼아 가지고 논위해 나간다는 것을 알아야겠습니다. 주권자의 역사는 국가 기준에서 과거․현재․미래가 연결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권자의 역사가 연결될 수 있다는 사실은 천운의 법도가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며, 타락한 세계일망정 그 나라의 주권자를 중심삼아 움직인 것이 역사의 주류로 남아진다는 것입니다.
민족을 희생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나라를 세워야 합니다. 대한민국 삼천만 민족을 고생시키는 일이 있더라도 이 나라를 세계 만방에 자랑할 수 있는 주권국가로 만들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은 그 나라보다 무엇을 원하시느냐? 세계입니다. 그 나라를 찾아 세우는 것은 세계를 위해서 찾아 세우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다 알고 있겠지만 탕감복귀라는 것은 개별적인 입장에서는 절대로 되지 않습니다. 자기를 중심삼아 가지고 활동하는 데는 탕감이 안 되는 것입니다. 탕감하는 데는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내 개체적으로 탕감하기 위해서도 절대적인 기준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기준의 대표로 보내진 사람들이 역사시대에 있어서 하나님의 사명을 책임진 대표자들인 것입니다. 노아면 노아, 아브라함이면 아브라함, 그 시대에서는 그들이 절대적 기준입니다. 그래서 노아 이상의 어려운 자리에 가더라도 불평하는 사람이 있으면 안 됩니다. 아브라함을 따라 나가는 그 시대에 있어서는 아브라함 이상의 어려운 자리에 가더라도 불평해서는 탕감의 법도를 통과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모세 시대에는 모세가 민족적인 탕감의 사명자로 왔기 때문에 그가 당하는 어려움 이상의 어려움을 당하더라도 그들이 불평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불평하면 사탄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평했던 이스라엘 민족은 다 망한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 시대에 와서는 예수님을 중심삼고 유대 백성이 전부 일치단결하여 예수님주의에 화할 수 있는 기준에 서고, 불평불만이 없는 절대순종하는 자리로 나갔더라면 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기준을 넘지 못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하나님이 보낸 책임자들은 어떠한 입장에 섰느냐 할 때에 그들은 그 시대의 중심에 서는 것입니다. 이것을 떠날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개인적인 생활을 하더라도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느냐? 하나님이 찾으시려는 가정을 찾기 위해 살아야 됩니다. 하나님이 개인을 세우시는 것도 그 개체를 완성시킴과 동시에 가정을 완성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개체에 대한 탕감과 가정에 대한 탕감, 이중적인 탕감이 가해진다는 것입니다.
이중적인 탕감을 받기 위해서는 이중적인 십자가를 져야 됩니다. 편안한 자리에서는 탕감되지 않습니다. 반드시 십자가를 져야 됩니다. 이렇게 우리에게는 이중적인 탕감이 필요하기 때문에 예수님도 ‘네 집안 식구가 원수다.’ 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십자가를 나에게 지우느냐 할 때 내 개체에 있어서는 내 몸뚱이가 십자가를 나에게 지운다는 것입니다. ‘야, 하나님이고 뭐고 그 뜻이 언제 이루어진단 말이냐? 죽은 뒤에 천당이고 지옥이고 가는 건데 고생할게 뭐냐?’ 한다는 것입니다. 몸이 나에게 원수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제일 가까운 집안 식구가 원수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탕감 할 수 있는 분량만큼 들이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통일교인들은 이것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내 몸과 마음을 중심삼고 승리했다고 해서 하나님이 ‘아! 너는 승리한 자격자다.’ 라고 인정하시지 않습니다. 승리한 개인으로 서기 위해서는 환경적인 터전을 먼저 닦아야 됩니다.
창조 과정을 볼 때 하나님이 만물을 지으신 후에야 사람을 지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복귀섭리노정에 있어서도 하나님은 개인적인 십자가뿐만 아니라 가정적인 십자가까지 승리한 후에야 비로소 섭리의 중심으로 출발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는 것입니다.
가정적인 십자가를 합해서 지지 않고는 아무리 개인적으로 승리했다고 하더라도 또다시 핍박을 받고 싸우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개인적인 십자가와 가정적인 십자가를 한꺼번에 탕감하게 된다면 가정 완성을 위한 길을 출발할 수 있는 환경이 닦아지는 것이요, 내 개체는 완성의 기준을 결정짓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실 때 4천년의 역사적인 탕감복귀를 완성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기 때문에 4천년의 역사적인 열매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하나님의 완성한 아들로서 오신 그가 핍박을 받아야 되었느냐? 그 개체가 미비해서 핍박받은 것이 아니요, 미완성해서 핍박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가정적인 십자가의 탕감노정이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러한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신랑 신부라는 상대적인 이념을 남기고 십자가를 지고 갔다는 것입니다. 또한 지금까지 그 십자가의 탕감노정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즉 완전히 탕감조건이 세워지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누가 탕감해 주어야 하느냐? 이 땅에 있는 신부가 대신 탕감해 주어야 합니다. 역사적인 책임자로 오셨던 예수님을 배반한, 즉 오신 신랑을 추방해 버린 땅 위에 사는 모든 인간들은 신부의 입장에 서서 역사적인 탕감을 재차 해야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세계사적인 책임자로 오셨었기 때문에, 세계적인 복귀의 노정을 완결지을 때까지 오늘날의 기독교 신자들은 개인적인 십자가로부터 가정적인 십자가, 국가적인 십자가, 그리고 세계적인 십자가를 개척하는 데 있어서 그러한 양면적인 십자가를 붙들고 몸부림쳐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어떤 사람이 하나의 민족을 중심삼고, 한 나라를 중심삼고 뜻을 세울 수 있는 자격자가 되었을지라도, 그를 세계적인 인물로 키우기 위해 그를 추방하는 것입니다.
어느 시대나 그 나라를 위해서 세움받은 사람을 그 나라는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왜 그러냐? 그에게 그 나라를 위하는 사명을 맡기고 싶은 것보다도 세계를 위하는 사명을 맡기고 싶은 것이 하나님의 소망이요, 작은 십자가를 지게 하는 것보다도 더 큰 십자가를 지게 하고 싶으신 것이 하나님의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야 세계를 하루빨리 복귀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유대민족은 세계로 흩어져서 탕감 제물의 역사를 엮어 내려왔기 때문에 유대인을 좋아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제사를 드릴 때, 그 제물이 자기의 속죄를 위한 조건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좋아하지, 제물 그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제물로 바쳐지려면 피를 보아야 합니다. 끔찍하다는 것입니다. 얼굴을 찌푸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불러 세웠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전체적인 탕감조건을 세워야 합니다. 그들이 그 탕감을 완성하는 날에는 세계의 수많은 민족을 대신해 탕감하는 입장에 설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세계의 수많은 민족에게 복을 나눠 주는 민족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세우신 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은 예수를 십자가에 달려 죽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이방으로 추방해서 탕감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만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은사를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죽음과 동시에 예수를 믿는 신자들은 개인복귀노정을 더듬어 오고, 가정복귀노정을 세계적으로 준비해 나오고, 혹은 민족적인 복귀노정, 국가적인 복귀노정, 세계적인 복귀노정을 알지 못하는 가운데 부분적으로 더듬어 나왔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대신해야 할 이스라엘 민족이 불신하자 하나님은 세계적인 시련 무대에 내세워 탕감시켰습니다. 그 시련의 역사가 다 끝나고 주님이 다시 올 때까지 이스라엘 민족은 그 십자가의 노정을 벗어날 길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1948년을 중심삼고 이스라엘이 독립되었다는 것은 세계사적인 새로운 섭리시대가 지구상에서 재출발할 수 있는 터전이 시작되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작은 것보다 더 큰 것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개인이 개인으로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십자가를 진 것만으로는 절대 안 됩니다. 가정의 십자가를 져야 되는 것입니다. 가정으로서 자리잡기 위해서는 그 친척 전부의 반대를 받아야 됩니다. 또 그 씨족이면 씨족, 종족이면 종족으로서 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그 나라 그 민족의 반대를 받아야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 통일교회는 지금까지 종적으로 흘러온 6천년 역사를 횡적으로 탕감하는 역사(役事)를 대신해 왔습니다. 그런데 책임진 선생님이면 선생님이 탕감 역사를 해 나오는 데 있어서 언제나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하나님이 개인을 대하는 것은 개인 그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 배후의 가정을 소망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자체가 완전히 뜻 앞에 서서 불변의 자체가 된 후에는 가정적으로 책임지워서 중심사명을 하라고 명령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운행하는 방향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자신들이 개체로서 하나님 앞에 탕감복귀의 조건을 세울 수 있게 되었을 때에는 가정적인 십자가가 연결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개인적인 십자가도 져야 하는 것은 물론이지만 그 다음은 친척, 교회, 종족, 나라 전체로부터 반대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우리 통일교인들이 개인적인 핍박은 물론이요, 가정적, 친척적, 교회적, 국가적으로 핍박을 받았다는 것은 얼마나 복된 것인지 모릅니다. 통일교회에 대해 전부가 핍박했다는 것은 일시에 개인 완성, 가정 완성, 종족 완성, 민족 완성, 국가 완성을 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터전을 지금까지 준비하여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제 내적 외적 승리의 기준을 결정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1960년도를 중심삼고 내적 승리의 기준을 결정해 나온 것입니다. 개인적인 승리의 기준을 탕감복귀하고, 가정적, 종족적, 민족적인 승리의 기준을 탕감복귀해야 합니다. 이것을 7년 동안에 모아서 밀고 나아가자는 것입니다.
시대적으로 보면 모세 시대는 민족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민족 앞에 서기 위해서는 개인적인 십자가, 가정적인 십자가, 종족적인 십자가, 민족적인 십자가, 국가적인 십자가까지 져야 했다는 것입니다. 5단계의 책임을 해야 되었던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해야 되었는가? 그것은 모세가 중심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의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는 개인적인 완성자도 없었고, 가정적인 완성자도 없었고, 종족적인 완성자도 없었고, 민족적인 완성자도 없었고, 국가적인 완성자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전체 사탄 편을 대표한 사탄과 대결해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개인을 위주해서 승리를 거둔 것이 아니었습니다. 세계사적 천주사적으로, 전인류를 대표해서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에 모세 한 개체의 승리가 개인적, 가정적, 종족적, 민족적인 승리가 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유대 백성과 국가까지 반대한 가운데에서도 승리했기 때문에 민족적인 승리로 결정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 민족이 언제 개인적인 시대, 가정적인 시대, 종족적인 시대, 민족적인 시대에 동참했습니까? 동참하지 않았지만 민족적인 승리의 터전 위에 선 모세를 그들이 완전히 믿고 접붙임을 받기만 하면 같이 혜택권 내에 들어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40년 탕감조건을 4일 만에 탕감할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여기에 천년 묵은 소나무와 일년 묵은 소나무가 있다고 합시다. 천년 묵은 소나무는 뿌리가 깊어서 키가 크고 무성하게 가지가 뻗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일년 묵은 소나무는 뿌리가 얕아서 가지가 약하고 잎이 몇 개 안 됩니다. 그러나 일년 묵은 것도 소나무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자라는 환경에 있어서 같은 태양, 같은 공기, 같은 양분을 빨아먹으면서 자랄 수 있는 같은 시대의 소나무과에 속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섭리해 나오시는 데 있어서 왜 그렇게 시대적인 사명자들을 많이 세웠느냐? 그것은 단계적으로 넓혀 나오기 위해서입니다. 개인, 가정, 종족, 민족, 이렇게 단계적으로 넓혀 나가야 하니만큼 그 시대에 있어서 사명자가 승리하면 그를 중심삼고 따르는 사람들이 개인적인 혹은 가정적인 단계에서 승리하지 못했지만 그를 따름으로 말미암아 승리의 조건을 세울 수 있는 것입니다. 즉 가인 아벨의 기준을 완결시켜서 탕감복귀시킬 수 있는 표준적 중심존재로 지금까지 그러한 섭리의 지도자들을 세웠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세계복귀의 사명을 갖고 오셨었는데 유대민족의 불신으로 영적 가나안 복귀를 이루고 가셨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을 완전히 믿으면, 지금까지는 사탄권 내에 있었더라도 예수님을 완전히 믿으면 그때부터 세계적인 영적 이스라엘권 내로 타고 넘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수많은 역사노정을 두고 수많은 선조들이 다리 놓아 온 공적의 터전을 밟고 나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탕감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제 선생님의 관심의 대상이 한국만으로 국한된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기도를 해도 그렇습니다. 옛날에는 한국을 위해서는 3분의 2만큼 기도하고 세계를 위해서는 3분의 1을 기도했는데, 이제는 거꾸로 되었습니다. 한국을 위해서는 3분의 1만큼 기도하고, 세계를 위해서는 3분의 2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세계를 위해서 준비해야 할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적인 시련과 핍박의 십자가를 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즈음의 국제정세라든가 공산당의 움직임에 대해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세계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우리는 영적으로 싸우고 영적으로 책임지고 나가야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책임진 자가 가야 할 정식적인 방향은 어떠한 절대적인 기준을 중심삼고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향하는 길이 이렇게 되어 있으니, 그 기준을 중심삼고 가는 길에는 추호도 차이가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어떤 사적인 개인의 감정이 개재되어서는 안 됩니다. 철두철미 원칙에 입각하지 않고서는, 그 기준에 맞춰 나가지 않고서는 통일교회가 세계적인 발전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해야 되느냐? 국가적인 사명에서부터 세계적인 사명으로 넘어가야 할 입장에 처해 있기 때문에, 지금 현 단계에서는 대한민국만을 중심삼은 활동을 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40개국을 중심삼고 120개소에 성지를 정했습니다. 그리고 세계무대에서 사탄이 참소할 수 있는 때가 오기 전에 이에 앞서 우리는 세계 앞에 탕감조건을 미리 세워 놓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만 실패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적 기준을 세우기 위해 세계적인 문제를 중심삼고 몸부림쳐야 합니다. 실제에 있어서 세계적인 기준에서 통일교회 식구들을 중심삼아 가지고 보조를 맞출 수 있는 그런 때는 아직 안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이 먼저 나가서 시련과 고통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선생님을 중심삼고 사탄이 참소하기 전에 방비할 수 있는 세계적인 탕감조건을 세우게 된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또 개인복귀시대에 있어서 가정적인 십자가만 지는 것이 아니라 종족적인 십자가, 민족적인 십자가까지 첨부해서 지게 되면 개인복귀노정은 자연히 넘어가는 것입니다. 이 7년노정은 이러한 내용이 적용될 수 있는 노정이라는 것입니다.
이 기간은 내 한 개체의 완성을 위해 걸은 탕감노정이 가정과 종족과 민족적인 탕감 기준에까지 연결되는 특혜를 입을 수 있는 기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앞으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때가 다 되고 핍박이 다 지나간 후에는, 즉 국가적인 기준에 서면 공로를 세울 수 없습니다. 따라가는 백성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통일교회보다 세계 교회를 원하고 세계 인류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 땅만이 아니라 하늘의 수많은 영계와 앞으로 올 후손들까지 찾아 세우는 것을 하나님은 원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해야 되느냐? 여러분들은 영계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기도를 함부로 했다가는 복을 빼앗기기 쉽습니다. 그것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이 민족적인 기준에 섰다는 것을 안다면 종족적인 기준까지 영인들에게 기도해 주는 것은 괜찮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민족적인 기준에 서 있는데 영인들에게 국가적인 축복을 해 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함부로 축복기도를 못 해 준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어떠한 급에 있는가를 알기 전에는 함부로 축복기도를 못해 줍니다.
여러분들이 은혜를 받고 영계를 접해 보면 기도 제목이 자연히 나오게 됩니다. 자기가 기도한 것을 통계를 내 보면 기도의 방법과 내용이 공식적으로 발전해 나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타락한 인간이 맨 처음에 기도할 때에 세계적인 문제를 놓고 기도하려고 하면 꽝 하고 나가자빠집니다. 처음에는 제일 가까운 사람, 즉 부모와 사랑하는 아들딸과 남편을 구원해 달라고 기도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시대가 지나가서 발전하게 되면 기도의 내용이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서 기도하느냐? 자기 가족을 위해 하지 않고 세계를 위해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또 자기가 처해 있는 자리가 어떠한 자리인 것과 앞으로 하나님이 소망하시는 자리가 어떤 자리일 것인가를 알고, 하나님이 소망하시는 그 자리에서 탕감노정을 개척하겠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러한 사람 앞에는 하나님도 꼼짝 못하시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 앞에 제1호 충신의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시지 않았는데 자기가 실체적으로 행동해서 실적을 갖고 나타나게 될 때에는 하나님이 그를 대해 주시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그 시대 사람들이 몽땅 타고 넘어가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그러한 길을 걸어 나왔습니다. 감옥에 끌려 가더라도 그 감옥의 제일 밑창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탕감복귀노정이기 때문에 탕감해야 할 것이 백이라면 그 이상, 즉 천 만의 심정 기준을 하나님 앞에 세워 가지고 넘어가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를 중심삼고 지방에 나가 전도하는 사람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고생하는 자리에 들어가게 되면 ‘아이쿠, 그 부락을 위해 내가 전도를 했는데 그 부락이 전부 다 반대하고 한 사람도 교회에 들어오지 않는다.’ 고 말하면서 낙심하는데 천만에! 말씀을 듣지 않는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듣지 않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이 가야 할 탕감의 노정이 남아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지지리 고생할 수밖에 없는 자리에 보내 주어도 고생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학식도 있고 외모도 좋고 안팎으로 갖추어져 있어서, 어떤 자리에 가든지 대표자가 될 것 같은데도 불구하고 지지리 고생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왜 그런가 하면 그 사람은 개인은 통일교회와 인연되었지만, 그에게는 아직까지 완전히 중심과 접할 수 있는 자리에 못 들어온 선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은 그 선조의 탕감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선조들의 탕감을 하고 나서야 자기가 탕감되는 것이 복귀역사의 원칙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생각지 않고 세상 사람만 욕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는 선조의 죄를 위해서 회개해야 합니다.
지금까지의 역사노정에 왔다 갔던 수많은 선조들 가운데는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인정을 받았던, 하늘에 속한 신앙자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 선한 선조들이 정성들인 기준 이상으로 자신이 선조들의 잘못을 위해서 회개해야 합니다. 그런 기간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 가지고 역사적인 공인을 받은 자리에 서서 자기의 탕감을 받아야만 비로소 개인복귀를 할 수 있는 기반이 닦아집니다. 자신이 지금 생각하고 있는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떠나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를 중심삼고 과거와 현재에 대한 탕감의 조건을 빨리 세워 놓아야 개인완성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실 때도 모든 원소들을 지어 놓고 나서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그래야 정상적으로 되는 것입니다. 바탕이 정상적으로 되어 있지 않으면 정상적으로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조로부터 흘러 내려오는 죄와 자기가 지은 죄를 솔직히 전부 회개해야만 됩니다. 그러한 기간이 얼마나 걸리든지간에 탕감하고 넘어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은 사람이 축복을 받으면 축복을 받고서도 지지리 고생하는 것입니다. 탕감의 고개는 어차피 넘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탕감복귀노정에 있어서는 과거의 선조들의 죄와 현재의 나의 죄까지 탕감하고서야 자기 시대를 맞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어떠한 사람도 가정의 전통과 생활이 올발라야만 원만하게 사회에 인격자로서 나설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나 하나가 출발하기 위해서는 과거와 현재의 탕감조건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지 않으면 자꾸 돌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다음에 돌아갈 때는 맨 첫번에 출발하던 기준보다 더 높이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처음의 기준보다 점점 낮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현상이 벌어지는가 하면, 통일교회의 뜻은 선생님이 선두에 서서 점점 세계적으로 펼쳐 나아가는데, 선생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시일이 가면 갈수록 심정적으로 옛날에 내가 왜 그랬던가, 옛날 기성교회에 다니던 것이 차라리 좋았구나 하고 멍해지는 현상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기운을 차릴래야 차릴 수 없을 만큼 기운이 없어집니다. 누가 무슨 좋은 이야기를 해도 감미를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같이하면 힘이 나고, 배고픈 줄 모르고 항상 새로운 것입니다. 사춘기의 청춘 남녀처럼 자기가 지은 시의 내용이 좋든 나쁘든 자기 마음에는 어떤 세계적인 시인이 쓴 것보다도 더 고차적인 시같이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 미를 느낀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렇게 서울 교회를 제1교회, 제2교회, 제3교회로 나눈 것도 섭리적으로 볼 때 어떠한 내용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을 그냥 두어서는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만 이렇게 있으면 있을수록 국가적인 문제, 세계적인 문제를 책임지고 뛰쳐 나갈 수 있는 기백이 없어지니 할 수 없이 나누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발전하면 앞으로는 가정적으로 다시 나눌 것입니다.
본부에서 갈라져 나갔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한 단계 떨어져 나갔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책임을 못 하게 될 때에는 가정적으로 떨어집니다. 그 다음에는 단체 활동에 있어서 통일교회의 이름으로 나갈래야 나갈 수 없는 개인적인 입장으로 내려갑니다. 그랬다가 다시 출발해야 되는 것입니다. 섭리적으로 볼 때 지금이 그런 때입니다.
그리고 뜻을 대하여 앞에 서서 나아가는 사람들은 이제는 국가적으로 넘어갈 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보다도 일본에서 활동이 더 잘 됩니다. 하나님은 한국에 복을 주려고 했지만 한국이 복을 못 받게 될 때는 그 복이 떠날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한 가정에 있어서 남편이 책임을 못 하게 될 때는 아내를 세우고, 아내가 책임을 못 하게 될 때는 아들딸을 세우는 것과 같습니다. 복귀섭리에 있어서도 부모가 책임을 못하게 될 때는 아들딸을 중심삼고 부모를 찾는 일이 벌어집니다. 아버지가 책임 못 하게 될 때는 그 아내에게 소망을 두고, 그 아내가 책임 못 하게 될 때는 그 자식에게 소망을 두고, 그 자식도 책임을 못 하게 되면 떠나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섭리적으로 볼 때 한국을 중심삼고 움직였던 은사가 물론 한국에서도 그 열매가 맺힐는지 모르지만, 그보다 일본에서 더 빨리 맺힐 가능성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이냐? 빨리 교류시켜야 합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지금 12명 이상의 간부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가려고 합니다. 이것은 서로 교류해서 같은 은사의 권내에서 지낼 수 있게 하자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일본 식구들에게 외국에 갈 수 있는 사람 손 들어 보라고 하니 3분의 2가 손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청년 식구들은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벌써 그들이 선두에 섰다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그냥 이대로 나가다가는 꼼짝없이 일본에게 밀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저런 방법으로 작전해 나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7년노정에서 책임 못한 입장에 떨어지게 되면 그때는 선생님이 축복가정들을 본부에 못 오게 하고, 역사노정에 있어서 선생님을 선생님이라 하지 말라고 하게 될 것입니다. 선생님이 선민으로 태어나 가지고 탕감조건을 세워 나오던 것과 마찬가지로 여러분들이 탕감조건을 세우지 못하게 될 때는, 선생님은 여러분을 도무지 알지 못하겠노라 할 것입니다. 한국 식구에 대해서는 무자비하게 대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이런 과정에 처해 있는데 지금까지 책임하지 못했던 것을 연결시키고 충성의 도리를 다할 수 있는 몇몇 사람이라도 있어야 다시 수습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먼저 들어와서 축복받고 책임을 못한 사람보다도 이제 들어온 사람을 하나님은 더 가까이 대해 주려고 생각하신다는 것입니다.
통일교회가 탕감교회로서 탕감을 하고 있는데 여러분들은 어떤 입장에 있느냐? 여러분은 때에 대해서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섭리적으로 볼 때 지금은 민족을 중심삼고 국가적인 시대로 넘어가는 때인데 나 자신은 여기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이냐?
여러분은 여기서 자신을 중심삼고 생각하는 것보다도 나라를 생각하고, 세계를 생각하는 자신이 되어야겠습니다. 다른 사람을 자기 대신 고생하는 자리에 내세우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선생님도 이 길, 복귀 노정을 걸어갈 때, 탕감복귀의 원칙을 알고 나서는 하나님께 고생할 자리가 있으면 나를 보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자신들이 통일교회를 책임지려고 해 보았습니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자기가 지금 어떠한 자리에 처해 있는지 자기 스스로 잘 안다는 것입니다.
지금의 때는 급박한 때입니다. 한국보다도 세계를 일시에 복귀하고 싶은 것이 하나님의 간절한 마음인 것입니다.
그런데 복귀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많은 사람이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희생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피와 땀과 눈물을 흘려야 됩니다.
그러면 누구를 통해서 할 것이냐? 여러분의 조상을 통해서 할 것이냐, 후손을 통해서 할 것이냐? 바로 여기에 있는 여러분을 통해서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5, 6년쯤 걸어와 보고는 다 지쳐 자빠졌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지치지 않았습니다. 지치는 법을 선생님은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누가 가르쳐 주었느냐? 그것은 자기 자신이 지치는 방법을 스스로 유도해 왔고 또한 사탄의 공략전에 걸려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냥 사정없이 고생의 자리로 내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시대에 민족복귀의 기준과 국가복귀의 기준까지 세워야 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이념적으로 공산세계와 대결해서 승리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아 놓아야 합니다. 이 기반을 닦기 위한 것이 4배가운동입니다.
여러분은 탕감복귀노정을 기필코 가야 됩니다. 안 가면 안 됩니다. 안 가면 여러분의 후손들에게 참소받게 되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영화 ‘영광의 탈출’을 보고 느낀 점이 많았습니다. 뜻을 중심삼고 볼 때 하나님의 복을 받아야 할 민족이 저렇게 처참하게 된 것은 옛날 이스라엘 족장들이 책임 못한 천륜의 죄가 아직까지 탕감되지 못하고 남아서 저렇구나 하고 생각하게 될 때, 지금의 통일교회가 맡겨진 책임을 못하게 될 때에는 후대에 또다시 저와 같은 짐을 넘겨 주겠구나 하는 것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의 시대에 책임져야 할 문제를 여러분이 달성하지 못할 때에는 그것이 후손들에게 넘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게 하려면 여러분은 전체적인 책임은 못 하여도 자신의 개인적인 책임은 절대적으로 하고 넘어가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그런데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스스로 마음으로 자문자답해 보십시오. 내 자신이 지금 어떤 입장에서 무슨 책임을 지고 있느냐 하고 말입니다. 지금은 민족복귀․국가복귀․세계복귀를 해야 할 때이므로 하늘은 어떤 사람이 나오기를 바라시느냐 하면, 민족보다도 국가를, 국가보다도 세계를 더 사랑하고, 세계를 구하려는 선봉장들이 나오기를 바라십니다. 누가 세계복귀를 책임지겠습니까? 여러분이 지겠습니까?
여러분들은 개인탕감복귀에 대해서도 등한히 하는 입장에 있고, 가정, 종족의 탕감복귀에 대해서도 등한히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민족, 국가적인 탕감복귀를 생각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행동은 전후가 거꾸로 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선생님은 통일교회를 이끌고 나가는 데 있어서는 현재의 입장을 절대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제부터 이런 것을 하겠다 하는 문제를 중심삼고는 절대로 용서가 없다는 것입니다. 자나깨나 어디를 가나 그러한 생각을 하고, 무엇을 볼 때에도 그런 관점에서 보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은 정성들이는 데 있어서는 누구한테도 지지 않으려고 합니다. 심정적인 면에 있어서도 주면 주었지 절대로 받지 않습니다.
앞으로 책임자들은 자기가 지고 있는 책임에 대해 심정적인 조건이라도 세워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통일교회는 절대로 발전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선생님을 생각하는 것도 희미해져 갑니다. 심지어 선생님은 선생님이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까지 생각하는 사람도 생깁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그런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 사람들은 병이 나서 아무 감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복귀시대의 인연을 중심삼고 동참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길은 둘밖에 없습니다. 전진이냐, 후퇴냐? 여러분들은 통일교회가 앞으로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압니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할 것이냐? 앞으로 나갈 것이냐, 가만히 있을 것이냐, 아니면 후퇴할 것이냐?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이 가만히 있으면 떨어지게 됩니다. 섭리는 민족적인 시대에서 세계적인 시대로 자꾸 발전하는데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옛날에 가만 있을 때보다 더 열성을 내야 하는데 그 열성이 옛날보다도 못하게 되면 자꾸 떨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전후가 거꾸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것은 탕감은 전후가 거꾸로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을 두고 볼 때 아벨을 통해서 탕감이 되는 것이지 가인을 통해서 탕감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떠한 세계적인 탕감복귀를 해 나가더라도 하나님을 중심삼고 나가야 됩니다. 일편단심 하나님과 더불어 나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길을 가더라도 길을 가는 그 기준이 하나님의 목표와 일치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해 상대적인 입장에 서야 됩니다. 이러한 사명을 놓고 하나님에 대해 상대적인 입장을 취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에도 그 생각을 해야 하며, 잠도 그 목적을 위해서 자야 됩니다. 오고 가는 전부, 생각하는 전부, 느끼는 감정 전부가 그 목적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 전후를 거꾸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복귀노정을 걸어가는 데 있어서 자기를 중심삼고는 절대로 탕감복귀가 안됩니다. 거기에는 상대적인 관계를 중심삼고 남아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탕감복귀라는 것은 무엇이냐? 아벨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아벨도 어떠한 입장의 아벨이 되어야 하느냐? 개인적인 입장의 아벨이냐, 가정적인 입장의 아벨이냐, 종족적인 입장의 아벨이냐, 혹은 민족적인 입장의 아벨이냐, 국가, 세계적인 입장의 아벨이냐?
여러분은 여러분의 몸을 중심삼아 가지고 이 민족과 이 나라를 위하여 얼마나 기도해 보았습니까? 30억 인류를 위해서 여러분의 자식들이 죽어 간다는 그런 심각한 심정으로 기도해 보았습니까?
세상에 어떠한 비참한 일이 있으면 비참함을 당하는 당사자 이상의 비참한 심정을 가져 보았으며, 하나님을 대신하여 세계 인류를 생각하는 그런 생활을 해 보았으며, 그러한 신앙태도를 가져 보았느냐 말입니다.
여러분은 전부 다 막연하고 관념적입니다. 막연한 자리에서는 절대로 탕감복귀를 할 수 없습니다. 전후관계를 바로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가정을 희생시켜서 종족을 구해야 되고, 종족을 희생시켜서 민족을 구해야 되고, 민족을 희생시켜서 나라를 구해야 되고, 나라를 희생시켜서 세계를 구해야 됩니다. 이것이 탕감복귀의 철칙입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 개인을 희생시켜서 가정을 구하고, 종족을 구하고, 민족을 구하고, 국가를 구하고, 세계를 구하기 위해 얼마나 정성을 들였습니까?
이 문제를 놓고 볼 때 여러분은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는 기준에 선 대표자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기준의 대표자로, 온 인류의 절대적인 기준으로 오시는 분이 재림주님입니다.
그분을 중심삼고 여러분들이 얼마만큼 심정적인 터를 닦았고, 탕감적인 운명의 노정을 뒷받침하고 혹은 수습하기에 몸부림쳤느냐 하는 것을 생각하면 여러분들은 아직도 먼 거리에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뜻을 위해서 각오를 했으면 가정을 위해서, 혹은 민족을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내어 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다 막연하다는 것입니다. 진짜 죽을 입장에 들어가서도 그와 같은 행동을 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됩니다. 자기의 갈 길은 뚜렷해야 합니다.
전진하는 복귀섭리에 있어서, 종적인 탕감조건과 횡적인 탕감조건의 두 가지 탕감조건을 중심삼고 전후․좌우․상하관계를 어떠한 방법으로 처리해 나갈 것이냐 하는 것이 여러분의 당면 문제입니다.
공부하는 학생들은 공부하는 이상으로 이 민족을 사랑했느냐? 남편은 부인 이상, 부인은 남편 이상 나라를 더 사랑한다는 마음으로 살았느냐? 자신의 몸을 생각하는 것보다 나라를 더 사랑하고, 내 개인을 생각하는 것보다 세계를 더 사랑했느냐? 전부 다 여기에 걸려 있습니다. 전부 다 보게 되면 자기 중심입니다.
이 모든 것을 다 탕감하고 나서야 비로소 자리를 잡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아직까지 개인의 자리를 못 잡았습니다. 예수님은 세계사적인 탕감을 짊어지고 계신데, 그 길을 다 가 가지고 승리했다는 조건을 세우기 전에는 개인적인 자리로 영원히 들어설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도 2천년 동안 탕감노정을 걸어 나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상에 있는 성도들이 그 탕감노정을 걷는 책임을 다해 가지고 안식의 보금자리를 만들어 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이 땅 위의 인간들이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 오시는 주님은 또다시 십자가의 길을 가야 된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개인적인 탕감복귀의 기준도 못 넘어갔고, 가정적인 탕감복귀의 기준도 못 넘어갔는데 그 자리에서 뭉그러 앉으려고 합니다. 여러분 자신이 뜻의 방향과 심정이 일치되고, 뜻을 중심삼고 온갖 정성을 들이고, 하나님을 중심삼고 완전히 하나되어서 그 환경을 주관하고, 사회적 십자가 혹은 민족적, 국가적인 십자가를 응당히 받아야 할 것으로 알고 감사하면서 넘어갈 수 있어야 할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런 기준에 합격한 통일교인들이 과연 얼마나 됩니까?
여러분들은 가정을 갖고 살더라도 자기 가정을 먼저 생각하면 안 됩니다. 뜻을 중심삼고 이 민족, 이 국가, 세계 인류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 기준에서 눈물을 흘리고 나서 자기 가정을 위해 눈물을 흘려야 하늘의 법도에 걸리지 않습니다. 그러한 기준을 중심삼아 가지고 충성을 다하고 나서야 자기 가정을 위해 정성을 다해도 걸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 탕감복귀노정을 걸어가는 탕감복귀 교회의 교인들 가운데 그런 기준에 합격한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즈음 선생님은 영계에 있는 여러분의 선조들을 동원하기 위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선조들을 동원해 가지고 탕감 길을 가는 여러분을 협조하게 하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뜻에 대해서 변치 않고 가겠다는 식구들이 많으면 그런 식구들에 의해 어느 한때 불상사가 많이 일어나리라고 봅니다.
앞으로 자기를 중심삼고 탕감하려고 해도 자기 개체를 중심삼고 탕감하지 않고 가족을 중심삼고, 종족을 중심삼고, 김 씨면 김 씨 가문을 중심삼아 가지고 탕감하는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통일교회 교인 몇몇 사람이 책임하겠다고 기도하게 되면 종족적으로 탕감하는 일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선조들이 재림해서 협조하기 때문입니다. 선조들이 빨리 복귀시키기 위해서 자기의 후손들을 때리고 희생시키는 이런 일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개인적인 책임을 못하는 통일교회 교인들에게 벌어지는 것입니다. 두고 보십시오, 그런 일이 안 벌어지는가. 원칙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선생님은 그런 때가 올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여러분을 고생시키는 것입니다. 뜻을 위해 고생하는 조건만 세우게 되면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세계복귀가 완결될 때까지는 탕감의 짐을 벗을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 좋은 것이 있으면, 이 나라 이 민족에게 복이 돌아오려고 하면 그 복을 사탄세계에 가서 나누어 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빨리 복귀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사탄세계는 자꾸 물러난다는 것입니다. 방법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역사하시는데, 인간들이 고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조금만 손해 보면 싫다는 것입니다.
때가 가까이 올수록 여러분들을 무참히 고생시켜야 되겠다는 것이 선생님의 관점입니다. 그것은 선생님이 여러분들을 세계적인 탕감복귀노정에 동참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러한 가치의 조건을 세우는데 고생은 불가피 한 것입니다. 괜찮습니까?
앞으로 이 7년노정이 끝나면 선생님은 해방됩니다. 선생님이 뜻을 위하여 출발한 지 만 21년이 됩니다. 섭리적으로 볼 때도 만 21년이 문제가 되기 때문에 금년부터 명년까지 뜻적으로 볼 때에 사탄세계와 대등할 수 있는 기준을 세워 넘어가야 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에 있어서 앞으로 이념적인 면에서 통일교회가 앞에 나서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주권이 어떻게 바뀌든간에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안 되면 선생님이 되게 할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분명히 알고 생각해야 할 것은, 현재의 자리를 세계적인 제단이라고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가정에 있지만 단순히 가정에만 머물러 있는 부인이 아니며, 직장에 있지만 단순히 직장에만 머물러 있는 남편이 아닙니다. 세계적인 직장을 대신한 하나님의 용사들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직장에서 처음에는 모두가 여러분을 좋아하지 않았어도 나중에는 그들을 전부 굴복시켜야 되고 칭찬을 받아야 됩니다. 그러한 터전을 닦아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또 먹어도 자기 혼자 먹어서는 안 됩니다. 먹어도 민족을 앞에 놓고 먹고,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과 같이 먹는다고 해야 합니다. 가인의 걸음과 아벨의 걸음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가인 아벨의 관계는 몸을 중심삼고 먼저 들어왔으면 다 아벨인 줄 압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양심에 물어 보면 빤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뜻에 접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이냐? 나에게 가까운 것을 멀리하고, 먼 사람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관심을 갖지 말라는 것입니다. 가까운 사람을 세계에 보내어 세계를 구하면 이것이 세계적인 탕감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 오셔서 전도를 할 때에도 먼저 제일 가까운 가족을 중심하고 전도하려 하지 않고 제일 먼 사람부터 전도하려 했습니다. 물론 가까운 사람들이 책임을 하면 그 사람들을 내세워서 먼 데의 사람을 구하려고 하였지만 말입니다. 그후 기독교는 이방 사람들을 중심삼아 복귀의 터전을 닦아 나온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처하고 있는 그 자리가 개인적인 자리라 할지라도 지금은, 이 시대의 운세는 민족복귀의 기준을 넘어서는 때이니만큼, 여러분의 일체의 생각은 삼천만 민족에게 가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6천년 동안 수고하시며 삼천만 민족과 만날 수 있는 터전을 닦아 나오셨습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이 이 민족을 바라보시는 기준만큼 있는 정성을 다해서 이 민족을 사랑하고, 이 민족을 위하여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사회의 모든 불쌍한 사람들을 자신의 친부모, 친형제, 친자식을 대하는 기준 이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고 해도 마음이 진정으로 그렇게 움직이지 않을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그때에는 자신의 부모나 자식에게 주고 싶은 마음을 바꾸어 그들에게 주려고 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마음으로 선생님과 관계를 맺고 선생님과 끈을 묶어 끈에 달려 넘어가야 합니다. 앞서 나가는 선생님의 기준에 보조를 맞추어 나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이 아무리 수고를 한다고 해도 탕감 복귀의 조건을 세울 수 없는 것입니다.
선생님의 내면적인 신앙생활을 직고하라고 하면 그 대답은 간단합니다. 선생님은 모든 것의 선후를 가려서 먼저 것은 하나님 앞에 돌리고 나중 것은 나에게로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자기 자식을 사랑하더라도 사탄세계의 사람들과 신앙적으로 인연된 사람들을 먼저 사랑하고 나서 자기 자식을 사랑해야 합니다. 자기 자식을 먼저 사랑하면 안 됩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가더라도 그 모든 사람이 남이 아니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식구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나이가 많으신 노인들을 보게 되면 자기 부모같이 생각하고, 그들에게 불쌍한 일이 있으면 그들을 붙들고 같이 통곡할 수 있는 마음이 언제나 있어야 합니다.
얼마 전 신문에 일가족 자살 사건에 관해서 보도가 됐는데 그러한 일을 남의 일로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아기를 낳아 키워 본 사람들은 더욱 실감 있게 생각했겠지만, 사랑하는 자식들이 며칠을 굶어 배가 고파서 밥을 달라고 할 때 그 부모의 마음은 어떠했겠습니까? 어떻게 할 수 없으니 자살했을 것입니다.
복귀의 사명을 짊어진 자신이 그러한 안타까운 부모의 입장에 섰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 또한 하나님도 이러한 딱한 입장에 처했을 때가 얼마나 많았으며, 복귀노정에서 수많은 백성들이 죽음의 자리에 나가는 것을 보고도 손을 못 대고 참고 나가야 하는, 이러한 억울한 입장에 처했을 때가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여러분들은 그러한 딱한 일이 있거든 혼자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과의 심정적인 인연을 결부시켜서 생각하십시오. 어디에 가든지 하나님과 하나될 수 있는 입장을 취해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일생 노정에 어려움이 있을 때는 눈물로 기도하고, 몸부림치며 기도해서라도 그 일을 매듭짓고 넘어가야 됩니다. 아버지와 더불어, 그 일과 더불어 인연맺고 넘어가서 탕감의 조건으로 세워 달라고 하나님 앞에 호소하게 되면 그것이 여러분 앞에 탕감의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많이 쌓아 놓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나 빚진 자의 생활을 하게 됩니다.
선생님이 요즈음 우리 공장에 자주 가는데, 어떤 때는 날씨가 덥고 피곤하여 거기에서 한 30분 잡니다. 그러면 공장에서 원하는 청년들 보기에 죄인 같고 불안한 마음뿐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아무리 피곤해도 공장에서 자지 않습니다.
내가 이와 같은 마음의 각오가 없으면 통일교회 교인들이 선생님을 절대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 그것이 끊어지면 통일교회는 발전을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지방의 각 집회소를 중심삼고 전도를 하고 있는데 그 마음이 어떻습니까? ‘저 사람들이 오늘 저녁 죽으면 어떻게 하나! 지옥에 갈 것인데….’ 이런 마음이 듭니까? 저들이 여러분의 형님이고 여러분의 아들이라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이런 안타까움이 여러분의 마음 가운데 있습니까?
여러분, 홍제동 화장터에 한번 가 보세요. 사람이 얼마나 허무한가! 여러분들도 머지않아 다 죽을 것입니다. 복귀노정을 걸어가야 할 운명에 처해 있는 만민들인데 저 사람들이 저렇게 가다가 종국에는 어떻게 될 것이냐? 이런 문제를 생각하면서 선생님은 한때 밥을 못 먹고 통곡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때가 지나갔습니다.
선생님이 여기 있는 여러분들을 키워 나올 때도 밤을 새워 가면서 이끌어 나왔지요? 그것은 만약 오늘 저녁에 이 사람들이 죽게 되면 선생님이 할 말을 다하지 못했던 것이 한이 될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있는 정성을 다 들인 것입니다.
이제 선생님은 한국 백성 앞에 책임을 다했습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은 아직까지 책임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여러분은 전통적인 계대(繼代)를 밟고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열심히 기도를 해야 합니다. 통일교회 교인들은 기도 안 해도 다 될 것처럼 생각하는데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 가지고, 심정적으로 얽어매어 가지고 시대적인 운세를 여러분의 눈물과 더불어 맺고 넘어가야지, 그렇지 않으면 탕감복귀가 안 된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이번에 축복받은 노인 한 분이 돌아가셨는데, 그 아들이 다녀간 모양인데, 돌아가신 아버지를 가만히 생각하니까 처량했던 모양입니다. 살아 계시는 동안에는 국수 한 그릇 대접해 드리지 못했는데 돌아가신 후에야 생각났던 모양입니다. 이렇게 돌아가신 후에 후회하는 것이 타락한 인간들의 습성인 것입니다.
선생님은 그곳에 다녀와서 느낀 것이 많습니다. 이제 여러분들도, 선생님도 머지않아 영계에 갈 것인데 그때는 어떠할 것인가?
현재 살아 있을 때에는 모실 수 있지만 자기들이 책임을 못하고 영원히 작별해서 이렇게도 저렇게도 하지 못하는 그런 입장에 서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런 때가 분명히 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러한 소원을 중심삼고 천번 만번 권고할 때, 행동하지 않은 사람들은 저나라에 가서 꼼짝할 수 없이 꽁꽁 얽어매여서 갈래야 갈 수 없는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말은 들었고, 그것이 마음에 짐이 되고 있고, 뜻대로 행동은 못했고…. 그렇다고 그러한 말들이 해방해 주겠습니까? 탕감이라는 것은 말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실체적인 행동을 통해서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복을 받을 수 있는 좋은 자리에 있지만 반면에 제일 무서운 자리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주일날도 보면 늦게 와 가지고 맨 뒤에 가서 앉고….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는 탕감교회요, 통일교회 교인은 탕감하는 교인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한 자리에서 탕감할 것인지, 결정해 놓은 것이 있는지 자문자답해 보십시오. 가정을 대표해서, 혹은 종족을 대표해서 자신이 책임을 다하여 탕감 완성자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여러분은 선생님에게 접붙여 가지고 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선생님의 말씀을 잘 들어야 됩니다.
선생님은 여러분에게 털어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마치 예수님이 할 말은 많지만 너희들이 감당하지 못할까 봐 말을 다하지 못한다고 한 것과 같습니다.
탕감복귀는 모두 털어놓고 넘어가야 합니다. 가정을 중심삼고 탕감하려면 가정의 비밀 이상, 종족을 중심삼고 탕감하려면 종족의 비밀 이상, 민족을 중심삼고 탕감하려면 민족의 비밀 이상, 국가를 중심삼고 탕감하려면 국가의 비밀 이상, 세계를 중심삼고 탕감하려면 세계의 비밀 이상의 것을 털어놓아야 합니다. 복귀노정에 있어서 선생님과 하나님과의 사이도 그런 입장에서 나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선생님이니 여러분에게 하지 않은 말도 많이 가지고 있고, 여러분이 생각하지 못할 일도 많이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선생님에 대한 관심이 많아야 됩니다. 사방에 흩어져 있더라도 청파동이 그립고, 생각만 해도 몸부림칠 만큼 그리운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여기 이 언덕배기를 오르내리면서 이 담벽과 전봇대를 바라보고 눈물짓던 그런 인상이 남아 있어야 합니다.
선생님은 하나님을 중심해서 ‘뜻’ 하게 될 때는 설명을 하지 않아도 가슴이 저미어 오는 느낌뿐입니다. 뜻을 생각하면서 얼마나 울었던가!
선생님은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아 있지만 그 길이 어렵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응당 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통일교회 교인들도 이런 마음을 갖고 나가야 합니다. 여러분의 등에 얼마만큼 무거운 민족과 세계의 탕감의 보따리를 짊어지고 있느냐? 이렇게 나아가는 것은 내 개인을 위한 것이냐, 민족을 위한 것이냐? 여러분의 마음에 자문자답해 보면 잘 알 것입니다. 감독자가 필요 없고, 스승이 필요 없는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이 곧 감독자요, 스승입니다.
선생님이 공장에 가서 일하는 청년들을 보면 그들의 신앙 기준을 대번에 알 수 있습니다. 공장에서 하나의 물건을 만들 때는 눈물 어린 정성이 있어야 됩니다. 이 물건이 어찌하여 수많은 공장 가운데 통일교회의 공장에 들어왔느냐? 어찌하여 내 손에 들어와서 하나님의 뜻 앞에 소요될 수 있게 되었고, 경제적인 터전을 닦는 데 협조할 수 있게 되었느냐? 이것을 생각하면 정성 어린 심정으로 만들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 가운데에는 그러한 마음이 있어야 됩니다.
선생님은 요즈음 공장에 자주 다니면서 생각하는 바가 있습니다. 세상의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선생님은 선생님으로서의 가야 할 길을 가야 하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기준에서 내가 해야 할 책임을 다른 어느 누구에게 맡기려고 하지 않습니다. 집에 있는 사람들도 다 모르는 것입니다. 누구한테도 얘기 안 합니다. 무슨 생각을 하고 다니는지….
공장에 있는 사람들은 ‘선생님은 바쁘신데 무엇 하러 매일같이 공장에 나오시나? 매일같이 안 오셔도 될 텐데.’ 라고 생각할 테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어제 저녁에 본 것과 오늘 아침에 보는 것이 별 차이가 없겠지만, 어제보다도 오늘에 발전한 것이 있으면 그 차이에 감흥을 느끼는 것입니다. 같은 기계를 만들더라도 어제보다 얼마나 잘 됐나 봐 가지고 조금이라도 발전한 것이 있으면 신나거든. 이것은 우리의 깃대를 꽂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 앞에 찬양할 수 있고, 하나님 앞에 어떠한 조건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기준까지는 선생님이 그래야 된다는 거예요.
이렇게 나아갈 때 우리가 계획하는 데에 방해가 되는 것이 있으면 잘리든지, 무슨 사건이 벌어지든지 해서라도 길이 열리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의 협조 여하에 따라서 길이 열리거나 막히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선생님의 가는 길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선생님은 지금 모험하는 것 같지만 나중에는 다 이루어지게 됩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나를 중심삼고 어떠한 탕감을 해 주십시오.’ 라고 해야만 탕감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제물을 드릴 때도 하나님이 드리라 해서 제물을 드리는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자진해서 또 제물을 드릴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왜냐? 하나님께서 제물을 드리라 해서 드리는 것은 탕감하기 위한 제물이지만 자기가 자진해서 드리는 제물은 영광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선생님 자신이 민족적인 책임을 지고 이 나라, 이 민족을 중심삼고 삼천리 반도를 돌아다니며 눈물의 길을 걸어왔지만, 이 나라, 이 민족이 얼마나 아버지 앞에 가까운 자리, 사랑받는 자리에 있는가! 이 나라, 이 민족이 기뻐하면서 아버지를 찬양할 수 있는 그런 날은 아직까지 가져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한 날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대한민국만을 중심삼아서는 안 됩니다. 세계를 거쳐와야 합니다. 이런 엄청난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각자가 탕감의 짐을 책임지는 입장에서 나가야 되겠습니다.
전도를 나가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직장에서라도 기도하라구요. 물론 월급을 받기 위해서 일하지만 자기만을 위한 것이라 생각하지 말고, 삼천만 민족을 위해서 일한다는 생각을 갖고, 더 높은 곳을 향해서 분발해 나가야 됩니다.
여러분들을 그런 입장에 빨리 내모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긋지긋하게 고생시킬수록 여러분은 중심 앞에 가까워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언제나 이 중심을 통해서 나아가야 하는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뜻을 향하여 가는 날들이 아버지의 영광의 날이 되옵기를 저희들이 마음으로 무척 바랐지만, 이 해에도 그런 날들이 많지 못한 채 수많은 날들을 보내고 나니 서러운 마음이 앞서 아버지 앞에 무엇이라 말할 수 없는 심정을 이해하여 주시옵소서.
그러나 당신이 뜻하신 길을 어차피 가야 할 것을 알고, 오늘도 내일도 가려는 마음을 이 시간 다시 한번 다짐할 수 있게 하여 주신 것을 감사드리옵니다.
사방으로 헤어졌던 당신의 자녀들이 이 청파동 교회에 다시 모여서, 새로운 입장에서 다시 결의할 수 있는 이런 날을 부여하여 주신 것을 감사하옵니다.
아버지! 복귀노정의 역사 가운데는 얼마나 슬픈 일이 많았사옵니까? 죽음의 길을 재촉하는 쇠고랑에 얽매여 가지고 몰림을 받던 수많은 기독교 신자들과 역사노정에 왔던 우리의 선조들이 비참한 눈물을 흘리며 피땀으로써 쌓아 올린 이 제단의 서러움이 얼마나 컸던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옵니다.
아버지, 이 시대의 사명이 얼마나 크고 엄청나다는 것을 생각하면 생각 할수록, 천만사 앞에 머리 숙여 아버지 앞에 눈물짓고 다시 과거의 부족함을 뉘우치게 되옵니다. 오늘 그러한 무책임한 자신을 한탄할 수밖에 없는 것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은 긍휼의 아버지이옵고 심정의 아버지인 연고로, 많은 실적을 가져와서 자랑하는 자보다도 머리를 숙여 눈물 어린 마음으로, 아버지 앞에 감히 머리를 들어 바라볼 수 없는 서글픈 자신의 탄식의 마음을 붙들고 아버지라 부르는 자를 언제나 찾아 주시고 기억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기만을 간절히 바라옵니다.
타락한 세상의 부모들의 심정도 자식을 채찍질하고 나서는 채찍질하기 전에 사랑하던 것 이상의 마음을 품고 그를 위하고 싶은 것이거늘, 하물며 복귀의 노정에 있어서 저희에게 책임지라고 명령하신 그 자리에서, 저희가 맞고 쫓김받을 때 위로하고 싶은 아버님의 심정이 얼마나 크신가 하는 것을 저희들이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그 자리에서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고 아버지를 위로할 수 있는 효자의 모습을 세워서 심정세계에서 영원히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고 싶으신 것이 아버지의 마음인 것을 저희들이 망각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지금까지 통일교회의 노정은 슬픈 노정이었사옵니다. 남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아버지의 분부대로 따라 나오는 걸음이 얼마나 처량하였는가 하는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사옵니다.
말로써 위로하여도 그칠 수 없는 슬픔에 잠길 수밖에 없는 그런 노정이었사오나 지금은 그래서는 안 될 때인 것을 알았사옵고, 역사를 더듬으면서 과거를 슬픔으로 기억하고 싶은 것이 당신의 소원이 아닌 것을 알았사옵니다.
그러기에 슬픈 역사를 기쁨으로 자랑할 수 있는 그날이 와야만 될 것인데 그런 날을 갖지 못하였기 때문에 더더욱 슬픈 마음을 느끼게 되오며, 아버님도 역시 그러하실 것을 생각하면 할수록 황공하옵니다. 오늘 통일의 무리를 모아 놓고 이와 같은 제단을 움직일 때까지 아버님께서는 얼마나 많은 수고를 하셨사옵니까? 노는 자는 채찍질하여 권고하셨고, 조는 자는 깨워 주셔서 가라고 명령하셨던 것을 아옵니다.
지금도 그런 역경의 환경에서 저희들을 다짐하게 하시고, 저희들을 내몰아야 할 아버지의 사정이 남아 있는 것을 아옵니다. 이러한 서러움이 우주사적인 탕감의 노정으로 남아 있음을 알고 있사옵고, 개인을 추스려서는 가정을, 가정을 추스려서는 종족을, 종족을 추스려서는 민족을, 민족을 추스려서는 국가를, 국가를 추스려서는 세계를 대신하여 가라고 명령하셔야 할 아버지이신 것을 알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그 길에서 쓰라린 탕감의 노정을 거쳐 나가지 않으면 안 될 복귀의 노정이 남아 있는 것을 바라보시는 아버지의 입장이 얼마나 딱하신가 하는 것을 저희들이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그 입장을 알고 있는 효자가 없기 때문에 명령할래야 명령할 수 없는 아버지의 애달픈 마음을 저희들은 아옵니다. 분부하실 그 목적을 향하여 명령 전에 스스로 준비하고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당신의 참다운 자녀가 이 자리에 많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삼천리 반도에 그런 아들딸이 있거든 당신의 사랑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런 자리에서 당신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들이 있사오니 그들을 붙들고 통곡의 심정을 다하여 그들을 위로하여 주시옵고, 승리의 방패를 세워서 그들을 조롱하던 원수를 갚아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나에 대한 원수를 갚아 주시는 것보다도 당신의 자녀들의 원수를 갚아 주시옵길 원하옵고, 나의 요구보다도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실 것을, 아버지, 고대하고 있사옵니다.
그날이 어서 빨리 와야 되겠사옵니다. 지루한 장마가 며칠만 계속되어도 그것을 싫다고 하는 것이 인간의 속성이거늘, 6천년 복귀노정에 있어서 아버지께서 참고 나오신 그런 지루한 자리에서는 한 사람이라도 남아질 수 없는 우리 인간인 것을 깨닫게 될 때에, 어서 그 지루한 탕감의 역사노정을 끝낼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나온 저희들이 핍박의 빗발을 받으면서도 감사하고 폭풍우 앞에서도 그것들을 맞으면서 나 홀로 그 길을 가겠다고 몸부림칠 줄 아는 당신의 참다운 충효의 자녀가 많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아오니, 그것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민족이 수없이 배반한 그 자리에서도 외로운 길을 따라 나오는 소수의 무리와 함께 아버지를 위하여 울부짖던 그 시대가 회상될 때마다, 많은 무리를 모아 놓고도 아버지의 심정을 가까이 접할 수 없는 환경이 얼마나 서러운가 하는 사실을 다시 한번 회상할 수 있는 이 자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지난날 아버지를 그리워했던 참다운 심정을 생각할 때 오늘날 그렇지 못한 자유스런 환경이 저희들 앞에는 도리어 얼마나 불우한 입장인가 하는 것을 스스로 깨달을 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기 위해서는 외부로부터 밀려 들어오는 핍박보다도 내 스스로 내 몸을 치고, 내 스스로 환경적인 십자가에 부딪칠 줄 아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어야만 하겠사옵니다.
이제 남아진 이 길은 탕감의 노정으로서 가지 않으면 안 될 길임을 스스로 자각할 줄 아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어야겠사옵니다.
아버지! 수많은 역사의 노정을 얼마나 많이 참고 나오셨사옵니까! 이스라엘을 키우기 위하여 4천년의 역사를 더듬어 오신 아버지의 서러움이 얼마나 컸으며, 수많은 민족 앞에 배반당하던 유대민족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축복의 터전, 민족적인 승리의 터전을 만들기 위하셨던 수고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종결지으려 하였사오나, 예수께서 몰림받고 또한 민족적인 터전이 무너질 때 아버지의 슬픔과 서러움이 얼마나 크셨던가 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불쌍한 민족들을 다시 한번 용납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이스라엘이 해방될 수 있는 한 날이 왔지만, 이스라엘 민족들이 다시 아버지를 모셔 놓고 찬양드리며 아버지와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제2의 건국의 날이 와야 할 것을 저희는 아옵니다.
아버지, 이제 여기에 다시 그 한 날을 맞아야 할 것을 생각하게 될 때, 그 과정에 있어서 저희들이 뒷받침이 되고 보탬이 되어야 한다는 철두철미한 사상을 갖도록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비록 제한된 자리에 처해 있을망정 그 자리는 제한된 자리가 아님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세계의 운명을 연결시켜서 하늘과 땅을 저울질하는 그런 초점의 자리에 자기 자신들이 서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 가야 할 탕감의 노정, 복귀의 노정을 더 큰 분야에서 책임을 지고 나갈 줄 아는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시대의 운세가 커 감에 따라 지희들도 조급한 마음이 더하여서, 아버지 앞에 간절한 마음이 더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저희들을 이와 같이 모이게 하여 주신 것을 감사하오며, 다시 만날 때에는 아버지 앞에 자랑할 수 있는 어떠한 조건을 가지고 모일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남한 각지에 당신의 자녀들이 뜻을 중심삼고 싸우는 모든 전체의 일들이 아버지께서 경륜하시는 뜻대로 이루어지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세계에 널리어 외로운 자리에서도 아버지의 뜻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는 자녀들이 많사오니 그들을 축복하여 주시옵고, 그들이 바라는 소원을 어서 이루어 주시어서 당신의 해원성사의 한 날을 맞이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날을 영광으로 받아 주시옵고, 새로운 각오로 탕감의 노정을 스스로 다짐하며 갈 줄 아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님의 성호 받들어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여러분들은 어느 공원, 어느 장소에 가든지 선생님이 말한 내용과 비슷하다고 생각되는 곳이 있거든 사진을 찍어서 보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중에서 선생님이 동그라미를 해서 여러분에게 보내 줄 것입니다. 그래서 성지를 찾게 되면 그 얼마나 반갑고 고맙겠습니까?
현재 동원할 수 있는 사람은 손 들어 보십시오. 전부 원하고 있어요? 공부? 물론 공부도 필요하지요. 미래를 위해서 공부도 최소한도로 시켜 주겠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승리를 거두어야 할 때입니다. 승리를 해야만 공부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책임을 짊어지고 계십니다. 그 자리는 편안한 자리가 아닙니다. 타락한 인간에 대해서도 개인적인 십자가, 가정적인 십자가, 혹은 민족, 국가, 세계적인 십자가를 지고, 또 영계의 십자가까지 전부 짊어지고 원수의 화살을 받아 가면서 나가시는 자리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반드시 하나의 제물을 세워서 탕감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 세계를 바라보면 지금 이 시간에도 탕감법에 희생되어서 죽어가는 사람이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는 것입니다. 또한 개인적인 탕감을 위해 자기도 모르게 죽어 가는 사람도 많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의 탕감으로 죽어 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영계에서 ‘너 이렇게 해라.’ 하고 명령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혹은 ‘너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으니 너도 못박혀라.’ 하면 못박히는 것입니다. 40일 금식하라고 하면 그렇게 하는 사람이 이 세계에는 많은 것입니다. 이렇게 세계를 복귀하기 위하여 이 시간에도 처참한 제물의 희생자로 사라지는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세계복귀의 싸움 무대를 바라보시는 하나님께 어느 한 날 편한 날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이 세상을 보시고 ‘아이고, 참 좋구나! 천년만년 같이 살고 싶구나!’ 하시겠습니까? 좋다고 하는 말이라도 들었다가는 하나님도 참지 못해 ‘어유!’ 그러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이 세상을 바라보실 때에 얼마나 비참하시겠습니까? 이 모든 것은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빚어진 결과인 것입니다.
맨 처음에 사람들이 뜻을 대하고는 ‘야!’ 하고 좋아했다가 3년쯤 지나면 많은 사람들이 떨어져 나갑니다. 7년도 못 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통일교회의 7년노정은 심판노정입니다. 잘났다는 사람들이 들어와서는 7년노정의 끝을 맺지 못합니다. 처음 몇 해는 넘어갈는지 모르지만 많이 올라간 사람도 끝을 맺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중심삼고 우리와 합작해서 지상에서의 복귀섭리를 완수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선생님이 한국만 의지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말아요. 선생님은 한국만 의지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는 외국에서 선생님이 계획했던 것들을 못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외국 청년들을 데려다가 이 나라, 이 민족을 위하여 일을 시킬 것입니다. 선생님이 한국에 없더라도 미국에 가서라도 외국 사람을 데려다가 한국에서 그런 일을 시킬 것입니다.
요즈음 선생님이 여러분들을 볼 때 몇몇 사람만 제외하고는 전부 지옥 갈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리 용서를 해 주려고 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원수의 나라 공산당이라 할지라도 용서해 주고 구원해야 할 책임이 있지만 선생님도 어쩔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한번 용서해 주고 또 용서해 줘도 그때뿐입니다. 마음이 홱 돌아가 버립니다.
그러다가 어떻게 하려고 그러는지….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되는지 가만히 두고 보라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지금까지 설령 마음이 그렇게 된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참아 주자.’ 고 다짐하면서 이 길을 걸어 나왔습니다.
선생님이 지금 염려하는 것은 여러분에 대해서입니다. 지금까지 주었던 모든 것을 이제는 전부 다 떼어서 갈아치우고 싶습니다.
옛날 같으면 지방 식구들이 선생님을 찾아오면 자다가도 뛰어나가서 만나 주었습니다. 여러분은 누구 때문에 여기에 왔습니까? 선생님께 플러스되기 위해서 왔습니까, 하나님께 플러스되기 위해서 왔습니까? 아니면 여러분 자신에게 플러스되기 위해서 왔습니까?
하라고 명령하면 하고, 피눈물로 호소하는 것을 보면 몇 해 남아질 것 같이 보이더니 차후에 보면 그게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선생님이 지금 제일 두려워하는 것은 선생님이 한국 사람을 내세우는 만큼 하나님께서도 사랑하시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 안 하시면 나도 옮겨집니다. 옮겨진다고 할 때 붙들게 되면 맞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때가 기필코 올 것입니다.
선생님은 이 길을 출발할 때 가족들이 먹을 것이 하나도 없는 처지에서도 가방 하나 짊어지고 떠났습니다. 가라 할 때는 사정이 없는 것입니다. 집에는 편지 한 장, 엽서 한 장 안 보냈습니다. 죽지 않으면 만나겠지 하고 떠난 것입니다.
모든 것을 깨끗이 청산하고 빈털털이의 입장에서 하늘길을 찾아가야 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절대 자기 처자는 안 굶어 죽는 것입니다. 한 몇 해 동안은 고생하겠지만 그때만 넘어가면 그들의 살길도 열리고 내가 가는 길도 편안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탕감복귀노정이 모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아담 해와를 잃어버리던 때의 하나님의 심정도 느낄 수 있는 것이요, 가정 떠난 자식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사정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전부 그와 같은 입장에서 배우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이번 주에 전국을 순회하려고 합니다. 어디든 가게 되면 사람들을 시켜서 그곳에 통일교회가 있는지 알아보라고 할 것입니다. 또 어디 가서 궁금하면 아이들에게 ‘여기 통일교회 있나?’ 하고 물어 볼 것입니다. 만약 통일교회가 없다고 하면 선생님은 얼굴을 들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럴 때는 몇 시간이고 아버지 앞에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이때가 어떤 때인가를 알아야 되겠습니다. 물론 전체도 중요하지만 여러분 자신을 중심삼고 여러분의 아버지 어머니와 가정 전체를 뜻 앞에 세워야 합니다.
그래서 옛날에 선생님이 통일교회 시작할 때와 마찬가지로 친구들이 여러분의 집에 오면, ‘야, 우리 집보다 여기가 더 좋다. 보리밥을 먹어도 괜찮고, 죽을 먹어도 우리 집 밥보다 더 맛있다. 나 하룻밤만 더 재워줘.’라고 할 수 있는 가정을 만들라는 것입니다. 찾아오는 사람, 찾아오는 친구들마다 자기 집을 버리고 그 집에 오고 싶어할 수 있는 가정이 되어야 그 가정이 천국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통일교회 식구들 중에 선생님이 계시는 본부에 한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갖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그는 통일교인이 아닙니다. 그것은 선생님이 덜 되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통일교인들이 덜 되어서 그런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통일교인이 아닙니다. 선생님은 자신이 있습니다.
뜻 앞에는 조건이 없는 것입니다. 무조건입니다. 여러분들은 조건 없이 받았으니 조건 없이 줘야 합니다. 어머니 아버지가 나를 낳아 주셨기 때문에 주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주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가정을 복귀해야 합니다. 여러분 자신들이 책임져야 할 것은 원수 사탄을 물리치고 여러분들의 부모와 가정을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거기서부터 민족적인 해방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더구나 부모들은 학생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전도하기가 좋다는 것입니다. 나이 많은 사람들은 자기의 어머니 아버지하고 한번 얘기하는 것도 드문 일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사랑하는 부모들에 대해서 얼마든지 전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때인 것을 알고 정성을 다해서 여러분의 부모를 전도해야 하겠습니다. 한 뜻 앞에 같이 하늘의 축복을 받아 축복가정의 울타리를 만들게 되면 그 이상의 행복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것이 박사학위를 몇백 개 가지는 것보다도 더 큰 복인 줄 알고, 이러한 사명을 앞에 놓고 엄청난 복귀의 책임을 다하는 여러분 자신들이 되어 주기를 부탁합니다.
침범을 당하는 입장에서는 진정한 기쁨이 없습니다. 거기에는 투쟁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밑에서부터 눈물과 피땀을 흘린 터 위에 서야 합니다. 경제가 좋아지면 고생한 식구들을 도와줘야 합니다.
4배가 운동의 목적은 첫째 대외 홍보를 하기 위함이요, 둘째 식구들이 섭리적 시기에 대한 새로운 운세를 느껴 내적 재생을 하게 하기 위함이며, 셋째 기성교회를 전도할 수 있는 기대를 조성하기 위함이며, 넷째 협회원들을 동원하는 계기를 조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못하는 것은 아직도 사탄의 침범을 당한 입장에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자식을 사랑하려면 세계를 위하는 마음으로 자식을 사랑해야 됩니다. 정성들인 것은 망한다고 해도 망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내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이 대가(大家) 앞에서 책망하는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의 잘못이 완전히 청산되기 때문입니다. 또 듣는 사람들이 동정하기 때문입니다. 영계가 다 보고 있는 자리에서 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영계에서까지 동정하게 되면 속히 청산됩니다.
효자는 심정을 중심하고 많이 맞는 자입니다. 아벨은 하나님의 뜻을 중심하고 가장 많이 맞는 자입니다. 아벨에게는 맞을 수 있는 조건이 부여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아벨을 치면 언젠가 아벨에게는 자신을 친 자를 그 몇 배로 칠 수 있는 조건이 남아지게 됩니다.
통일교회가 발전하는 것은 아벨의 입장에서 잘 맞았기 때문입니다. 7년노정이 끝나기 전에 잘 살기를 바라서는 안 됩니다.
자신이 숨쉬기가 미안할 정도로, 해와 달을 보기가 부끄러울 정도로 낮은 자리로 내려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최고입니다. 그것을 받기 위해서는 수고해야 합니다.
분(憤)을 오래 품고 있지 말아야 합니다. 분을 품고 있으면 자기를 위하여 기도해 주는 사람이 있더라도 그 기도가 반발하게 됩니다.
지방에 영계의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지구장들의 책임입니다. 내가 제일 무서워하는 것은 마음의 기준이 내려가는 것입니다.
공산당에게 고문을 당할 때 나의 복수심은 하늘까지 닿았으나, 하늘이 치기 전에 칠 수 없기에 다섯 여섯 시간을 두고 기도했었습니다.
‘아버지!’ 할 때 그 심정이 먼 곳에 있을 때는 결사적으로 그 심정을 회복해야 됩니다. 방편적으로만 신앙하는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심정의 최고 기준 위에 못 서거든 식구들의 동정을 받을 수 있는 입장에라도 서야 합니다. 높다고 해서 높은 것이 아니요, 낮다고 해서 낮은 것이 아닙니다. 낮은 곳에서 충(忠)을 세우면 살아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을 수고시키는 자리에 서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성을 들여 빚지는 자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7년노정 …… 한 번밖에 없는 때가 지나가고 있습니다. 이때에 무엇을 남길 것인가!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땅은 하나님이 계획한 세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어느 것을 보더라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세계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
세계가 이렇게 되기까지 숱한 슬픔의 역사가 벌어져 왔습니다. 개인의 슬픔이나 가정의 슬픔, 어떠한 슬픔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인간 끼리끼리 빚어지는 슬픔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탄의 싸움으로 인하여 빚어진 슬픔임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의 비참한 일이 하나님의 심정에 비추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은 더욱 슬프고 비참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개인보다 더 비참하였고, 어떤 민족보다도, 어떤 국가보다도, 어떤 세계보다도 더 비참하였습니다. 아무리 비참한 입장에 있는 자라 할지라도 하나님보다 더 비참한 자는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자식이 죽어 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어머니보다 더 애달픈 심정으로 하나님은 인간을 보아 오셨습니다.
오늘날의 이 비참하고 악한 세계를 청산하고, 선의 세계를 세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하나님의 사정입니다. 타락한 후손으로 태어난 인류는 탕감조건을 세워서 복귀의 길을 찾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 선조들은 새로운 진리가 나올 때마다 그것을 반대하고 핍박하는 자들로부터 고통을 받아 왔습니다.
역사 과정에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타락한 인간들을 본연의 세계로 탕감복귀해야 되는 사명이 부여되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보다도 더 비참한 환경으로 그들을 몰아야만 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개인을 쳐서 가정을 구했습니다. 더 큰 것을 구하기 위해서 반대하는 자를 치지 않고 대신 세움받은 그 아들딸들을 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더 큰 것을 구하기 위해서 자식에게 채찍을 든 하나님의 심정은 말할 수 없이 애달프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충성을 다해야 할 이스라엘 민족이 가는 길에는 말할 수 없는 고난이 동반되었고, 또 그들은 다른 민족들을 대신하여 맞아 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비참한 민족에게 메시아를 보내실 것을 약속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온 역사와 천주의 소망이었으므로 4천년 역사나 그 어떤 것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비참한 자리, 즉 마구간에서 태어났고, 정체도 드러내지 못하고 피난 가는 입장에 섰던 것입니다. 더욱이 예수를 위하여 충성을 다 해야 할 대제사장과 교법사들은 충성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스라엘 민족은 인류역사와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대신하였던 예수님을 십자가의 길로 몰아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았지만 원리를 떠나서 개인의 사정을 보아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이 운명하기 직전까지도 그를 직접 보호하시지 못하고 버리는 입장에 서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하고 부르짖었으나 하나님이 무심한 것 같은 입장을 취하셨을 때, 예수님은 하나님을 배반하려고만 들었다면 백 퍼센트 배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비참한 사정을 인정으로써 대할 수 없었던 하나님이었으니, 예수님이 비참했던 것보다 하나님은 더 비참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할 때에 ‘오, 내 아들아!’ 하는 응답만 있었더라도 예수님은 기쁘게 죽어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든 안 받으시든 모든 것을 바치겠다고 나섰던 예수님의 충성은 역사의 새로운 전환점을 가져왔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충성이 사탄세계를 한 바퀴 돌려 놓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주체이시기 때문에 타락한 후손이라 할지라도 버리지 않으시고 그들을 통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희생시켜서라도 사탄의 수중에서 유린당하고 있는 인류를 용서할 수 있는 길, 즉 구원의 길을 트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버리시면서까지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런 연고로 예수님의 죽음으로 4천년 역사의 희생을 탕감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것은 그 이후의 인간들이 부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 2천년의 역사가 흐른 지금, 세계는 기독교를 중심삼고 하나로 뭉쳐 나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심판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먼저 원수를 칠 것이냐, 먼저 사랑하는 자식을 칠 것이냐를 알아야 합니다.
세계가 심판당하기 전에 먼저 세계를 대표하여 맞을 수 있는 가정이 있어야 하고, 종족․민족․국가가 있어야 합니다.
심판이란 원수를 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심판을 하기 위해서는 원수의 세계를 쳐서 넘어뜨리기 전에 먼저 하늘을 대표하여 맞는 무리가 나와야 합니다. 이 무리, 이 국가는 역사적인 인연과 접하여서 나오기 때문에 비참한 역사를 엮어 나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의 통일교회는 세계를 심판하기 위해서 나타난 것이 아니라 세계를 심판하기 전에 먼저 맞기 위해서 나타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맞고, 가정에서 몰리고, 친척에게 몰리는 억울한 자리에서 채찍을 맞아 나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자리에 처할수록 땅을 깊이 파고 굳건하게 뿌리를 박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자리에서 지친 사람이 많았습니다. 가야 할 길이 멀고 험하다고 주저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지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충성을 맹세했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해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지가 변할지라도 하나님과의 인연만은 끊을 수 없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골고다 산정에서 쓰러져 ‘아바 아버지시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상황하에서도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붙드는 마음이 더 커야 한다는 것입니다.
죽음을 무릅쓰고 충성하는 무리를 통하여 새로운 부활의 승리는 이루어집니다. 우리 통일의 무리들은 이런 관점에서 다시 한번 자기 자신을 분석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죽는 자리에서 자기를 찾아야 할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 자리를 피하고자 하는 사람은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떠한 자리로 가기를 원합니까? 물론 최고의 자리를 원할 것입니다. 또 여러분들은 어떠한 효자 충신이 되기를 원합니까? 어느 누구나 할 수 있는 자리에서의 충신 효자는 별것 아닙니다. 예수님은 어느 누구도 할 수 없는 그런 자리에서 충효를 다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부활시켜 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개인적으로만 부활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을 가정적으로, 민족, 국가적으로 부활시켜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세계적으로 부활시켜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비로소 골고다 산정 저 너머에서 부활의 역사가 벌어진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역사상 이 땅에 왔다 갔던 선지선열들이 뜻을 대해서 충성했던 것과 우리들의 수고를 비교해 볼 때, 우리들의 수고는 너무나도 적어서 뜬구름과 같습니다. 이처럼 우리들의 수고는 적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 앞에 벌어진 환경은 너무나도 큽니다. 그러기에 수고가 있다 할진대 하나님의 수고가 제일 크다고 하면서 자신의 부끄러움을 느끼고 몸부림치는 모습이라야만 정상적인 신앙 태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잘못으로 인하여 민족적이고 세계적인 심판 과정이 남아지게 된다는 어마어마한 사실을 기억합시다.
선생님이 생각하는 통일교회와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통일교회는 너무나도 현격한 차이가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찾아 나오신 하나님의 소망의 자녀들이라는 기준을 두고 볼 때 여러분들은 너무나 먼 거리에 서 있습니다. 물론 과거를 자랑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미래를 바라보면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들이 가는 인생행로에 어찌 골고다의 길이 없겠습니까? 태풍이 불어쳐야만 큰 배도 작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더 큰 배가 되고자 하는 배포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뜻을 대하는 선생님의 마음은 조급합니다. 이것은 내 마음이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이 그러한 것입니다. 30억의 인류 중에서 일년에 3천만이나 되는 사람들이 지옥으로 떨어져 가고 있습니다. 누가 이 죽음 앞에 항거할 자가 있습니까? 이렇게 죽어 가는 자식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심정은 얼마나 조급하겠나 생각해 봅시다. 이렇게 조급한 아버지의 심정을 위로해 드릴 자가 누구입니까? 예수님도 이것을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의 못다한 한을 풀기 위해서 재림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귀 전선에 나선 용사들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우리들의 깃발을 어디에다 꽂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은 사나이 대장부가 품은 뜻을 이루기 전에는 관(棺)에서 곤히 잠들 수 없다는 느낌을 가져 본 일이 있습니까? 또 민족과 세계를 구하기 위해 포탄을 안고 적진에 뛰어들겠다고 하는 용사는 없습니까? 가야 할 길은 너무나 멀고 벅찬데 책임을 못 하여 눈물지으면서 살아가고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한 일이 있습니까? 일부 통일교회 식구들은 너무나도 뻔뻔스럽다는 것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나는 그렇지 못합니다.
십자가의 고빗길을 어떻게 탕감시켜서 넘게 하느냐 하는 것이 책임자로서 가지는 제일 심각한 고민입니다.
하나님이 이 나라를 중심하여 섭리하신다는 것을 알았으면 몸부림치며 충성해 보겠다고 나서는 무리들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만 어려운 것을 대하면 꽁무니를 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역사적인 책임자들은 기쁜 자리에서부터 출발한 자가 없습니다. 모두가 다 최악의 슬픈 자리에서 출발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나면서부터 몰리셨고 먹을 것이 없어서 밀 이삭을 비벼 먹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천도를 통할 수 있다는 원칙하에서 그랬기 때문에 천도는 그를 중심하고 드러났던 것입니다.
선생님도 이 한 대(代)에서 영광을 보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우리들의 주변에는 아직도 ‘아바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나의 가정을, 나의 종족을, 나의 민족을 어찌하여 버리셨나이까?’ 할 수 있는 내용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이러한 사정을 알고 진실로 그렇게 부르짖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민족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십자가로 나가는 길에 부활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넘고 나서야 부활이 있다는 사실을 아직까지 아무도 몰랐던 것입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세계가 찾아온다 하여도 구체적인 기준이 없이는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이제 역사는 원리를 중심삼고 이루어지고 있으니, 우리는 믿음의 목적을 이루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들의 외모야 어떻든 간에 피와 살을 통해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아들딸이라는 자신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7년노정을 통해서 하나님과 인연을 맺어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으로부터 동정을 받고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그런 자리에 서야 하겠습니다. 남아진 기간에도 일심동체가 되어 한결같이 달려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이 가까이할 수 있는 자리는 현재 여러분들이 살고 있는 평범한 일상생활 환경이 아닙니다. 어려운 역경을 뚫고 나서야 하나님의 은사가 같이할 것입니다. 역경을 넘어서서 하나님과의 새로운 인연을 맺어야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통일교인들은 사방에 둘러싸인 높고 낮은 곳들을 고르게 하지 않고는 하나님이 바라시는 이상세계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이제까지는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만우주가 기뻐할 수 있는 참소망의 아들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까지 천상천국이 비어 있었던 것은 땅에 하나님의 참소망의 자녀가 없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 천국은 만인이 머물고 싶어하는 자리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조상이 타락한 그 순간부터 이 땅 위에는 사랑하는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천국은 비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온 천지는 하나님의 슬픔의 대상이 되었고, 하나님께 기쁨을 돌려드리지 못했습니다.
세상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 세상을 갈라 세우는 역사를 오늘날까지 해 나오시는 것입니다.
우리 통일교인들은 어서 빨리 뜻이 이루어졌으면 하고 바라고 있습니다. 물론 뜻이 빨리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있으면서도 이루기 위한 책임을 지는 자가 없습니다. 뜻이 빨리 이루어지려면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효과적인 승리의 결과를 가져오기 위하여 계속적으로 비상한 작전을 써서 공세를 취하고 계신다는 것을 우리는 망각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나님은 뜻을 효과적으로 이루기 위하여 6천년간이나 싸움을 계속하셨고, 이 시간도 싸우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뜻은 하나님 혼자서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뜻을 이룰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뜻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슬픔의 역사는 6천년이나 그대로 흘러나왔던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통일교회의 이념이 천주적인 이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이념을 이루기 위해 정성들이신 하나님에 대하여 상대적인 입장에서 정성들인 어떠한 실적을 가진 이가 있습니까?
물론 뜻은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그 뜻이 이루어지려면 거기에 합당한 나의 실적이 있어야 됩니다. 그것이 없으면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그 마음이 오히려 하나님에 반역자가 될 우려가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만민 앞에 자극제가 될 수 있는 그 무엇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뜻은 왜 이루어져야 하느냐? 뜻이 이루어지면 내가 좋게 된다는 생각을 가진 자는 하나님의 반역자입니다. 또 미국 사람 이상으로 물질적으로도 행복하게 된다는 등의 생각을 가진 자들도 하늘의 반역자란 것입니다. 뜻이 이루어지면 하나님 아버지가 안식하시게 된다는 관점에서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야 되는 것입니다.
뜻이 이루어지는 날 나는 이러한 예복을 갖추고, 이러한 모습으로 동참해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예복을 준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한이 있는 그 아버지 앞에 나타날 수 있는 모습을 갖추지 않고서는 그 아버지 앞에 나타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뜻이 빨리 이루어지는 것이 내게는 오히려 두렵다. 지도자로서 할 바를 다 못한 것이 있을까 봐 두렵다.’는 마음으로 여러분들은 스스로의 책임을 다했는가를 더욱 더욱 생각하고 두려워해야 하는 것입니다.
참고 참아 오신 그 아버지 앞에 그 아버지를 맞이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지 못하고는 천신만고하여 찾아오신 그 아버지를 돌려보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뜻이 사방으로 널려져 있는 것을 보고 기뻐하며 ‘하늘이여! 어서 오소서.’ 하다가 다시 하나님을 돌려보내는 우리들이 될까 봐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당하고 있는 처참한 환경을 벗어나고 싶어서 뜻이 빨리 이루어지기를 바라느냐? 아니면 아버지가 당하고 있는 처참한 십자가를 벗겨 드리기 위해서 뜻이 빨리 이루어지기를 바라느냐? 이처럼 바라는 그 마음을 분석해 보면 사탄 편인지 하나님 편인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과연 아버지를 모셔 안식시켜 드릴 수 있는 입장이 되어 있습니까?
‘하나님이여! 이런 것을 이루어 주옵소서.’라고만 기도하는 자는 하늘의 사명을 모르는 반역자들인 것입니다. 아버지는 평지에서 모셔야 하는데 아버지께서 아직 싸움터에 계시니 우리도 그 고지를 사수해야 되는 것입니다.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심정이 간절하면 간절할수록 할 일이 더욱 긴박하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자신들이 언제 변할지 모르는 불안과 초조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심정을 두고 보아도 언제 하나님을 배반할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이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환경이라고 생각합니까? 뜻이 이루어지기 전에 뜻을 이루기 위한 책임을 다하는 식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과연 나는 완전한 승리와 평화의 기점(基點)을 잡고 산다고 자처할 수 있습니까? 내가 사는 자리에서 과연 아버지를 모실 수 있느냐 하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서 승리의 터전을 마련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소원하시는 평지를 이 지구상에 이루어 놓아야 합니다. 그 평지는 험산준령을 넘어선 후에야 이르를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걸어가는 그 길은 하나님이 걸어오신 탕감노정에 부합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통일시키기 위한 무리인데 통일되어 있지 못한 사람도 많습니다. 여러분들, 통일되어 있어요? 먼저 내 자신이 통일되어 있어야 합니다. 통일되어 있지 않은 내 자신을 가지고서는 아무것도 통일시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통일하려면 갈라진 심정을 한데 얽어매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음 길도 가라 하면 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통일된 무리를 찾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무리를 못 만났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4천년 역사를 두고 예수님 한 분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하나의 모델로 하여 본받도록 하기 위해 역사를 해오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중심삼아서 통일된 것이 없으니 예수님이 다시 오셔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통일교회가 나왔다는 것은 하나님이 지극히 기뻐할 수 있는 일인 것입니다. 우리는 통일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역사적인 심정을 중심삼고 지극히 어려운 자리에서도 하나님을 쫓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태산준령을 넘고 다시 평지까지 가야 사탄이 참소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곳은 통일되기 위한 우주사적인 곳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곳을 들어오기만 하면 여기에서 다 통일되는 것인 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통일을 위해서는 통일된 심정과 이념을 세워 가지고 고난의 길을 넘음으로써 심정의 인연이 골수에서부터 우러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청파동을 중심삼고 하는 것은 다 지나가는 자리인 것입니다.
우리는 죽더라도 통일이라는 사상 밑에서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통일은 선생님과 더불어 하는 것이 아니고, 먼저 하나님과 더불어 통일해야 하는 것입니다. 야곱은 가정적으로, 모세는 민족적으로, 예수는 세계적으로 하나님을 중심해서 통일했습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통일하는 데는 국가적인 기준만으로는 안 됩니다. 하늘과 땅과 더불어 심정의 인연을 같이해야 되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어려움이나 가정적인 어려움, 그 어떤 어려움도 무릅쓰고 하나님의 뜻을 위해 일하다 쓰러지면 하나님은 그를 천주적인 위치에 세우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뜻이 이루어진다고 할 때 덮어놓고 좋아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심정인 것입니다. 뜻이 이루어지는 그날이 빨리 오는 것이 두렵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시집갈 나이의 처녀는 준비를 하고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이가 차는 것이 화인 것입니다.
오늘은 선생님이 감옥에서 나온 날입니다. 선생님은 그때 감옥에 들어가 던 날 팔에 쇠고랑을 차면서 ‘이것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딱지를 붙이는 것이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유관순이나 안중근 의사는 민족이 사랑할 수 있는 딱지가 붙어져 있는 사람들입니다. 민족의 정기를 살리기 위해서는 그들을 높이게 되는 것입니다.
좋은 자리에서보다는 반대받고 핍박받는 죽음의 자리에 내몰아도 내 아버지라 할 수 있는 충효의 아들을 하나님은 그리워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죽음의 자리에서도 아버지를 위로할 수 있는 것이 효 중의 효요, 충 중의 충이기 때문에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33년 생애보다 죽음 직전의 세 시간이 더 하나님이 사랑할 수 있는 자극이 되었던 것입니다.
선생님은 쇠고랑을 차고 감옥에 들어갈 때 신중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평시에 나를 위로하는 자보다 내가 죽음 길에 있을 때, 감옥에 있을 때 나타나 하나님의 지팡이가 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를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보낸 사람들은 많았으나 지금까지 남은 사람은 적으니 지금에 와서 그들은 후회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생님만은 남았습니다.
그 사람이 책임을 못할 때 하나님은 그보다 더한 사람을 세우는 것입니다. 나는 외롭지 않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식구들을 지방으로 내보내 고생시키는 것은 이 시대를 하나님께 기억시키기 위함이요, 하늘과 땅이 공인할 수 있는 자격을 빨리 갖추도록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7년노정에서 지쳐 돌아온 자에게는 선생님은 관심이 적습니다. 여기에 오면서 나뭇잎이 바람에 떨어지는 것을 보았을 때, ‘통일교회에도 봄 절기가 있는 동시에 여름, 가을 절기가 있겠구나. 지금은 겨울 절기가 오는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선생님이 여러분들을 볼 때마다 욕하고 싶고, 나무라고 싶은 것은 그래도 지금은 가을이기 때문입니다. 곧 겨울 절기가 될 것입니다. 들려오는 것은 차가운 바람 소리뿐인 모진 겨울철이 되면 완전한 생명력을 지니지 못한 잎은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 잎들이 떨어질 때 그 비참함은 어떠할 것인가? 최후에 남아질 나무는 어떠한 나무일 것이냐? 춘하추동 사철이 변할지라도 통일의 무리는 변할 줄 모르는 사철나무의 모습을 갖추어야 합니다.
봄이 되면 어느 나무든지 자기의 모습을 자랑할 수 있으나,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지나 겨울이 되어도 남아질 수 있는 나무는 몇 안 됩니다. 통일의 무리는 사시 청청할 수 있는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태풍이 불어도 그 모습을 잃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접을 붙이려면 가지에 붙이지 말고 줄기 중턱에 붙여야 합니다.
지금은 새벽입니다. 그런데 다들 졸고 있는 모습들입니다. 예수님의 열 처녀의 비유를 배웁시다. 축복가정들이 지쳐 떨어지는 모습은 참지 못할 일입니다. 7년노정의 7년을 못 참아서야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통일되는 무리가 아닙니다. 통일시키는 무리입니다. 우리는 밀가루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누룩이 되어야 합니다. 통일은 평지에서 되는 것이 아니고 골짜기를 거쳐서 평지로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죽음의 골짜기에서 승리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승리로 이루어지는 통일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20년이나 이 길을 걸어왔으나 지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여러분들이 부르는 아버지와 내가 부르는 아버지와는 심정적인 인연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분하고 원통한 자리, 감옥까지 수고의 길을 더듬어 찾아오신 아버지와의 인연이 맺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이 감옥에 있을 때 원수가 사과하러 면회 왔던 일이 있었습니다. 만나 주느냐 안 만나 주느냐 하는 것은 하나의 시험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죽여 버렸으면 싶은 사람, 식구가 될 사람 등 별의별 사람이 다 있을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보시는 하나님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나는 배반의 무리들이 찾아왔을 때 하나님을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원수를 맺고 싶어하시지 않으니 나도 그런 심정으로 반겨 맞아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나를 찾아오시는 아버지 앞에 해야 할 효성의 도리는 원수 앞에서도 해야 하는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아버지를 모시고 있을 때는 아버지께서는 언제나 어떤 고통스러운 환경에서도 나를 돌려 눕히려고 하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옛날 나를 찾아 주시던 하나님이 지금도 중요한 일을 위해 기도할 때면 언제나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통일교회의 재산은 바로 이것입니다.
환경을 피하지 말고 그 환경을 소화시켜야 합니다. 선생님은 흥남감옥에서 해마다 모범노동자 상을 받았습니다. 노동자의 씨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환경을 소화시킬 수 있는 능동적인 사람이 되지 못하고 어떻게 하늘의 뜻을 이루어 드릴 수 있겠습니까?
일터에 나가기 전 한데서 두 시간씩이나 신검(身檢)을 받을 때는 살을 에이는 듯한 추위를 당했습니다. 차라리 일터에 나가서 일하는 것이 얼마나 자유로운지 모릅니다. 이런 것을 모르는 사람은 감옥이 얼마나 좋은 곳이고 얼마나 고마운 곳인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누구도 꺾을 수 없는 확고한 자리에 세우시기 위해서 나를 감옥에 넣어서 작전상 시련 시킨 것입니다.
과거에 고생하던 기준이 있기에 현재의 생활에서 고생이 있어도 그때의 입장을 생각하면서 참아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감옥 같은 데서는 바늘이 몇 푼 안 하는 것이지만 참으로 귀한 것입니다. 전깃줄 같은 것을 얻으면 그것을 유리 조각으로 갈아서 바늘을 만들던 일이 눈앞에 선합니다. 지금도 반찬이 없으면 그때 맨밥을 먹던 일을 생각합니다. 그때는 냉수 맛도 참 좋았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냉수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바늘 하나를 3년 만에 얻을 정도로 물질적인 궁함도 컸지만 감옥에서는 배고픈 것이 제일 궁한 것이었습니다. 금식을 해 보았으면 다 알겠지만 감방에서는 이웃에서 무슨 음식을 하고 있는지 다 알아맞힐 수 있습니다. 그 냄새 한번 맡으면 십리를 걸어갈 수 있는 힘이 될 것 같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훈련시킨 것을 생각하여 내가 여러분들을 훈련시켜 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부모에게 만일 그 자녀들이 무엇을 달라고 할 때 그것을 못 주는 그 부모의 심정은 어떻겠습니까?
선생님은 고생의 노정을 밟아 왔기 때문에 어떤 일도 다 좋은 것입니다. 가치 없이 고생한 것은 소용이 없지만, 크나큰 뜻을 품고 한 고생의 경력은 억천만금을 주고도 바꿀 수 없을 만큼 귀중한 것입니다. 이것이 선생님의 재산입니다.
선생님은 설교를 위하여 준비를 해 본 적이 없습니다. 산 체험으로 사실을 말할 때는 모두 감동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지난날 뜻을 위해 고생한 것에 대하여 내가 왜 그랬던가 하고 생각하는 것은 주체성을 상실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민족을 위해서 고생했으면 민족이 남아 있는 한 그 고생의 기준도 살아 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위함도 아니요, 국가를 위함도 아니요, 나 하나를 위한 행동일 경우에는 지칠 때는 수습할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방을 돌아보아도 새로운 자극이 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아무리 죽음의 길이라 하더라도 통일의 제단은 한데 묶어져서 제물로 드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를 위한 통일이 아닌 하나님을 위한, 국가와 민족을 위한 통일이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통일시켜야 할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통일되기를 바라고 있으며, 또 여러분 자신이 통일되어 있지도 않습니다. 먼저 통일이 되어 가지고 통일시킬 수 있는 자리를 향해서 나아가야 된다는 것을 알고 분발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끌려가지 말고 하나님을 모시고 가야 하는 것입니다. 고개를 넘고 강을 건너 찾은 자리가 참된 평지인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을 맞이하여 맹세를 합시다. 우리는 뜻을 이루어야 할 사명자이며, 통일시켜야 할 입장에 있는 용사인 것입니다.
우리는 제2차로 기성교회를 부활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새로이 기성교회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사람들은 제일 불쌍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를 죽음 길에 팔아먹은 열 형제를 용서한 요셉과 같은 입장에서 기독교인을 전도하여 그들의 문을 열어 주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원리연구회를 중심하여 대학가의 문을 열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두 길을 열기 위하여 많은 돈도 아끼지 않고 쓰려고 하는 것입니다. 또 아까워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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