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의 모든 것은 수수(授受)의 인연으로 창조되었습니다. 이 기(旗)는 우주가 인간이 살고 있는 태양계의 태양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는 것같이 천주(天宙)가 하나님을 중심삼고 구성되어 있음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기의 중심부는 우리의 이상(理想)이 되는 모든 것이 연하여져 있음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중심으로 12선이 방사상(放射狀)으로 그려져 있는데, 그 중 굵은 4개의 선은 사방을 표시합니다. 하나의 존재가 중심을 잡고 서기 위해서는 사방이 설정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즉 사위기대인 것입니다. 다음 12개의 선은 사방으로 동서남북을 중심삼은 연월(年月)을 표현한 것이며, 이것이 수수관계로 돌고 있는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배의 키(舵)를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들 자신이 이 천주를 운전해야 함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기(旗) 속에는 우리의 이상인 창조원리의 모든 것이 들어 있습니다. 원래 기는 국가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현재 이 통일기는 우리 교회를 대표하는 것이지만, 우리의 이상은 교회만이 아니고 모든 역사의 희망이며 현대 그리고 미래의 희망인 유일의 세계, 하나님의 심정에 부합된 세계, 하나님의 창조목적이 이루어지는 하나의 세계와 그 빛나는 날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기를 항상 마음에 품고 하나님의 심정과 함께 사는 자는 사탄의 모든 시련이나 반역의 세력을 극복하는 힘을 지니고 있음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그렇게 믿고 용기를 갖고 나아가면, 어떠한 곳에 가더라도 하나님께서 이 기와 더불어 여러분들에게 역사하여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구세주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정말로 구세주라면, 아무도 믿지 않고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아도 이 천주(天宙)는 예수님과 그의 이상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또한 하나님이 계신다면, 마땅히 그 하나님께서 구세주의 이상을 실현시켜 주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구세주는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 될 분이며 하나님에게도 없어서는 안 될 분입니다. 그러기에 구세주는 천주의 극소한 것에서부터 극대한 것에 이르는 모든 존재에게 없어서는 안 될 분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와 같은 관계와 인연을 바탕으로 하는 천주이기 때문에 하나님 자신도, 모든 인류도, 만물도 그 생활의 기준이 예수님을 중심한 것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소원은 곧 땅의 소원이고, 하늘의 소원이며, 인류의 소원이고,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그 소원은 언제 어느 시대든 이루지 않으면 안 될 소원이고, 역사와 시대와 과거, 현재, 미래를 초월하여 이루지 않으면 안 될 절대적인 소원인 것입니다.
이러한 소원의 터전 위에서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이 세상에 보내어지셨지만, 과연 그의 소원이 땅에서 이루어졌는가? 또한 하늘과 인류가 하나님의 소원대로 이 우주간에 이루어졌는가? 그렇게 되어 있지 않은 것이 명백합니다. 왜일까? 그 이유는 예수님의 소원이 나타나기에 앞서 이 지상에는 본연의 소원에 배치되는 하나의 소원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나타난 소원은 인류가 바라는 본연의 소원으로 나타나지 않았고, 그 소원은 하나님에게 혹은 하늘에 대해서 배치되는 소원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참된 소원은 그러한 소원과 충돌하여 그것을 배척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입장에 있습니다. 그것을 배척하여 본연의 소원을 이루려 하는 것이 다름 아닌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지상에 구세주를 보내지 않으면 안 되는 입장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가지고 오신 소원과 목적과 이상이 순수한 길을 통하여 이 지상에 이루어졌었는가? 그러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배치되는 이 지상의 사랑이 사탄을 중심하고 있는 소원이며, 또 사탄을 중심으로 한 목적을 가지고 기반을 만들었으므로 그것이 커다란 환경을 조성하고 있으면 있을수록 그 힘은 예수님의 소원과 목적과 이상에 대해서 극히 마이너스적, 혹은 반대의 힘으로써 나타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은 예수님이 지상에 오시기 전에 이 반대의 소원과 목적이 예수님과 충돌하더라도, 전세계적으로 그 이상이 실현될 수 있도록 예수님의 승리의 기대를 만들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창조본연의 이상세계에서는 구세주나 종교, 그리고 기도가 필요 없습니다. 구세주를 필요로 하는 입장에 섰다는 것은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타락하지 않았다면 하나님과 만나 심정을 표현하고 그 생활 속에서 하나님과 접하는 것 자체가 종교 이상의 종교이고, 기도 이상의 기도인 것입니다. 그러한 생활을 하는 자체가 지상에서 사탄의 소원을 파괴하는 것이 됩니다. 그것을 위해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 예수님의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선조는 그와 같은 하나님이 창조목적에 합당한 조상이 되지 못했습니다. 말씀에 의한 하나님의 창조이상세계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에게 속한 천주(天宙)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심정과 함께하는 그 생활관을 세계화하고 혹은 이상화하는 데 있었습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 인류와 함께 기뻐하고, 인류와 함께 행복을 노래하면서 우리의 생활 가운데에서 스스로 참아버지의 위치에 서고자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을 최고의 존재물로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원리를 통하여 아는 바입니다.
타락한 아담과 해와, 거기에서 가인과 아벨이 탄생되고 아담가정이 시작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정은 하나님이 소원하시는 바의 가정은 아니었습니다. 그 혈통을 계승하여 수많은 자손이 생겼지만, 그 자손은 더욱더 큰 슬픔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수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그것이 하나님에게 슬픔의 조건을 더욱 증대시켰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만 하겠습니다.
그들이 하나의 민족, 국가, 그리고 하나의 세계 인류를 이루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하나님 자신은 그것을 그냥 버려두고서는 견딜 수 없게 됩니다. 참부모라고 하는 본래의 심정 기준에서 보면, 타락은 하였지만 사랑하는 자녀였던 인류를 사탄에게 빼앗기고, 그들이 슬픔의 밑창에 있는 상태를 바라보시고 그들을 내버려둘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또 천적인 입장에서도 그렇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하한 고통의 길을 걸으시더라도 인류를 전부 구해야 된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인 것입니다. 따라서 인류의 수가 점점 늘면 늘수록, 지상에 퍼지면 퍼질수록, 하나님의 마음에는 더욱 괴롭고 비참한 아픔이 느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사탄은 하나님에게 이렇게 참소를 합니다. ‘원래 아담을 중심으로 한 세계와 인류를 당신의 품에 품고 영원한 사랑의 세계를 건설하려고 한 것이 당신의 이상이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나를 중심으로 한 이와 같은 세계가 만들어졌습니다. 이 세계에 당신이 바라는 참된 자녀가 있는가? 가정이 있는가? 혹은 민족, 국가가 있는가?’라고. 이러한 입장에서 사탄이 하나님에게 참소를 할 때, 하나님은 사탄의 그러한 참소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부자관계라고 하는 심정 기준이 있기에 그러한 입장에 서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 원수를 물리치고 이 세계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창조이상세계로 복귀하여 돌려놓으려는 것이 지금까지의 복귀섭리역사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은 섭리노정을 통하여 구세주를 보내려고 하셨습니다. 그 구세주의 희망은 전세계와 천주에 걸친 것입니다. 거기에서 그 소원이 이루어지는 시대, 즉 예수님이 오신 때, 사탄이 구세주에게 대적하고 반대하는 것을 차단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기 위하여 하나님은 하나님에게 절대적으로 기여하는 한 사람을 찾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담가정으로부터 노아가정을 통하여 아브라함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한 사람을 찾았습니다.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오직 한 사람을 사탄세계로부터 빼앗아 찾아 세우는 데 2천년의 역사를 소비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믿고 어떠한 괴로운 일이 있더라도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는다는 기준을 세움으로써, 하나님의 섭리는 지상의 한 인간을 중심으로 한 입장이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 본래 소망 하던 길을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도 가르쳐 주어, 그 내적 생활이나 외적 생활에 있어서 사탄세계의 가책을 받지 않도록 인도하려고 하셨습니다. 데라라고 하는 우상장사의 아들이었던 아브라함을 빼앗아, 그가 살던 환경으로부터 다른 곳으로 옮기어 거기에서 쓰라린 고생을 시키고 가혹한 시련의 길에 세웠습니다. 그러나 그런 시련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하나님에게 한 약속의 일념과 하나님에게 기여하는 일념만은 절대적인 기준으로 하고 나아갈 수 있도록, 그러한 하루를 기다리면서 아브라함을 인도하였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갈대아 우르라고 하는 그의 고향 땅에서 떠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그때까지의 역사적인 환경, 혹은 심정적인 환경, 사정의 환경, 소원의 환경이 있었습니다. 자기의 부모나 형제, 친척을 중심한 환경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그를 부르셨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런 고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곳을 떠났던 것입니다. 거기에서 출발했습니다.
아브라함이 목적 삼고 찾아간 땅은 아브라함 자신이 흠모했던 곳이 아니었습니다. 전연 알지 못하는 이국의 땅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수많은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는 사실을 하나님도 알고 계셨고 아브라함 자신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여 자기 고향인 갈대아 우르 땅을 용감하게 떠났던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들에게 중대한 시련(교훈)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타향 땅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믿으면서 여기저기로 방랑하는 나그네의 생활을 한 아브라함이었지만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믿는 마음이 없었더라면 얼마든지 하나님을 배반할 수 있는 때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최후까지 일관하여 하나님을 흠모한 아브라함이야말로 하나님이 믿을 수 있는 아들, 인류가 타락한 이래 처음으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한 사람을 이 지상에 결정적으로 세운 것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삭의 실체헌제입니다. 모리아산상에 제단을 만들고 거기에서 제사의 제물로 이삭을 바치려 했던 아브라함의 심정,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나에게 약속한 하나님은 반드시 그것을 이루어 주실 것임에 틀림없다고 믿은 아브라함이었기에, 여하한 사탄의 시련이나 박해가 있더라도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그에게 있었기에 이삭헌제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탄을 분별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오직 한 사람 아브라함과 관계맺어 나아갈 수 있는 기대를 조성한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아브라함 한 사람을 중심한 하나님의 소망은 그 한 사람보다도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가정이었습니다. 그러한 가정이 생기면 그 가정보다도 씨족을 원하시고 민족이 되면 국가를 원하셨습니다. 또한 나라가 세워지면 그 나라를 통하여 하나의 세계를 세우기를 원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작은 것에서 큰 것까지, 한 사람으로부터 전체로 그것을 키워 하나님이 이루시려는 창조이상세계에까지 끌어올리려고 한 것이 지금까지의 섭리였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은 아브라함 한 사람을 분별된 지역으로 직접 인도하시면서 야곱시대에 이르러 하나의 가정적 승리의 기대를 조성하셨던 것입니다. 야곱도 아버지의 고향을 떠나서 하란으로 갔습니다. 그 때문에 야곱은 고향에 대한 애착심, 이를테면 자신의 애정이라든가 사정, 앞으로의 희망 따위 등, 자신의 모든 생활 환경을 버리고 갔습니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몸만 하란으로 향하던 그의 심중은 오직 하나님을 흠모하는 심정이었습니다. 야곱에게 보물이 있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축복을 해 주신다고 하는 확신, 어떠한 곳에 있더라도 하나님은 자기와 함께 계신다는 확신, 그것이었습니다. 야곱은 그것을 최상의 영광이라 생각하고, 최상의 권위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란 땅에서의 고통의 길도 그에게는 괴롭지 않았던 것입니다. 괴로움의 밑창에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하나님에게 심정의 깊은 곳을 털어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양을 몰면서도, 양의 소리를 들으면서도 항상 하나님께 ‘제가 이 양의 무리를 사랑하는 것같이 당신은 축복받은 이 야곱의 자손들을 사랑해 주십시오.’ 라고 기도했습니다. 온갖 만상을 볼 때에도 ‘내가 만상 하나하나를 이스라엘 민족을 상징한 물건으로 사랑하는 것같이, 하나님이여! 부디 저희 많은 자손을 사랑해 주옵소서.’ 라고 기도했습니다.
야곱의 21년간의 생활은 하나님에게 모든 것을 의지하는 생활이었고, 하나님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생활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심정 깊은 곳에 접하려고 하는 생활을 함으로써, 생활하는 일체가 하나님과 함께 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을 나타냈던 것입니다. 야곱이 가는 곳은 모두 반대의 길이었고 모두가 허락되지 않은 불완전한 환경이었지만, 그 환경이 험하면 험할수록 하나님을 향한 야곱의 마음도 강해졌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심정도 강해졌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가 환경에서 괴로움, 혹은 쓰라림을 참지 않으면 안 될 상태에 서면 설수록 거기에 대응해서 야곱의 길을 타개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야곱이 그것을 체험함으로써 고난의 21년간을 무사히 지낼 수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때가 차서 이제 고향인 가나안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천명이 있는 것을 안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데 있어서 외삼촌인 라반과의 일이 있었습니다. 라반은 야곱의 21년간의 생활 가운데서 열 번이나 야곱을 속여서 야곱이 축복받은 은혜를 빼앗은 사람이었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야곱의 장인이었지만, 섭리상으로 볼 때 실체를 쓴 사탄의 입장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환경에서 하나님에게 진실로 충성하는 야곱을 진실로 사모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아무리 사탄 편 사람이라 해도 야곱의 탕감기간이 끝날 때까지는 용서할 수 없지만, 그 기간이 지나거나 조건이 다 갖추어지게 되면 하나님은 사탄 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 있었던 사람이 라헬이었습니다. 그녀는 라반의 딸이었으며 야곱의 아내였습니다. 그녀는 아버지 라반이 야곱에게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오랜 생활 가운데 알았습니다.
그런 라헬은 만약 야곱이 가나안으로 돌아간다면 야곱을 따라가야만 했습니다. 라헬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받은 재산을 속여서 빼앗은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 사람에게 머지않아 하나님의 벌이 내린다는 것을 알고 남편인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갈 때, 아버지 라반이 야곱과 약속한 재산을 주지 않을 것을 알고, 마침내 아버지 라반이 야곱과 약속한 이상의 가치가 있는 것을 훔쳐 가지고 가려고 결심했습니다. 이러한 처를 가졌다는 것은 야곱이 천명(天命)을 완수하는 데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절대적인 조건이었습니다. 야곱이 21년 동안 고역한 결과로 라반과 약속한 재산을 백 퍼센트 찾아 가지고 가겠다는 결심, 라반에게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재산을 끌어내 가지고 가려는 결심을 한 처를 가지고 있었던 야곱은 하나님의 섭리, 즉 복귀섭리로 보아 그러한 조건이 성립되지 않으면 가정적인 섭리를 출발할 수 없다고 하는 입장에 섰던 셈입니다. 거기에서 야곱은 라헬과 일체가 되어 지금까지 라반과 약속했던, 자신이 받을 수 있는 모든 것에 해당하는 재산을 3일 동안 챙겨서 자기 고향을 향해 출발해야만 했습니다. 이것은 역사상에 있었던 하나의 사실에 그치는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한 가정을 중심으로 하고 이삭으로부터 축복을 받은 야곱이 아브라함의 대신자로 사탄세계에 들어가서 사랑하는 라헬과 재산을 취해 나왔다고 하는 것은, 인간들이 모든 것을 사탄세계로부터 분별하여 하나님 편으로 넘기는 것과 같은 가정적인 싸움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섭리에 있어서의 절대적인 조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이 라반의 집으로부터 처와 재산을 취해 가지고 돌아가는 것을 라반이 눈치채고 뒤를 쫓으니, 그때 라헬은 아버지 라반이 사랑하고 찾으려 하던 우상을 말 안장 밑에 용케 감추어 발견되지 않게 하고 라반을 자기 고향으로 되돌려보냈습니다.
사탄세계에 있어서 타락한 해와의 복귀노정을 걸은 라헬 자신이 라반을 실체의 입장에서 돌려보냈다고 하는 것은 실체 사탄을 분별한 조건을 만들었다고 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지상에서 사탄이 좇는 조건을 끊고, 야곱가정은 가나안 땅으로 향하였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라헬이 자기의 아버지를 돌아가게 하였지만, 야곱에게는 영적 기준에 있어서 사탄을 굴복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입장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고향인 가나안을 눈앞에 둔 얍복강가에서 밤을 지새며 기도 하던 중에 천사가 나타나 생사를 걸고 씨름을 했습니다. 축복을 받기 위해 야곱은 아무리 상대가 천사라도 싸워 이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한 결의로 밤을 새우면서 싸워서 씨름에 이겼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천사는 야곱의 환도뼈를 위골시키고 야곱은 그로부터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한 내용의 역사를 남겼던 것입니다.
이 역사는 우리에게 알려져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 내용은 하나님이 바라시는 절대적 조건과 사탄이 야곱의 가정에 대해서 하나님쪽에 가지 못하게 하는 가운데에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야곱가정은 사탄쪽을 끊는 동시에 하나님쪽에서 바라시는 승리의 기반 위에 섰던 것이므로, 처음으로 가정을 중심으로 하여 이 지상에 승리, 즉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이름을 받게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가정에 있어서는 믿음의 조상이 되었던 것이지만 야곱에 있어서는 승리를 얻은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로부터 이스라엘 민족이 시작된 것입니다.
야곱은 자기의 형인 에서를 만나는 것이 두려워 양과 종을 앞에다 세웠던 것인데, 고향을 방문할 때, 왜 에서는 야곱에 대해서 반항하지 않았던가? 야곱이 자기의 축복을 빼앗아 갔던 일은 용서할 수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대단히 격분하고 있던 에서의 마음 가운데는 혹 야곱이 오면 단칼에 죽여 버리겠다고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 게 분명합니다.
그런데 왜 야곱을 환영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인가? 그 배후의 이유로서는 야곱이 온갖 모험에 의해서 라헬의 아버지를 격퇴하고 천사를 굴복시켜, 이른바 영적 천사와 반대하는 실체인 라반을 물리쳤다고 하는 내면적인 조건이 성립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에서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는 야곱가정을 반대한다면 하나님도 용서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승리의 기준을 보호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야곱이 가지고 있던 그 조건을 치게 되면 친 자가 맞게 된다고 하는 내용을 에서는 알지 못했지만, 본심 가운데에 자기는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따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야곱의 승리와 라헬의 승리로 말미암아 그렇게 되어졌다는 것을 알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은 가정적인 승리의 기준을 세우고 그 가정으로부터 12자식을 중심으로 한 이스라엘 민족을 만드셨던 것입니다.
야곱의 가정을 성별하는 데 많은 수고가 있었지만, 하나님의 입장에 있어서는 이 가정을 중심으로 하고 하나의 씨족과 하나의 민족을 조성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또 수많은 씨족과 민족을 세우고 탕감조건을 중심으로 하나님쪽이냐 사탄쪽이냐를 결정할 수 있는 지상의 인간이 없어서는 안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이때까지 하나님의 섭리에 있어서 인간을 중심으로 개인과 가정과 민족과 국가의 중심이라고 하는 하나의 심정 기준이나 신앙의 기준에서, 혹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킨다고 하는 기준에서, 즉 아담이 타락할 때에 하나님의 심정을 통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 마음이 없고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못했다고 하는 내용을, 시대는 지나갔지만 그 오랜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서 책임을 진 사람들이 언제든지 신앙을 중심으로 하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고 행동하는, 그리고 하나님의 심정에 통했다고 하는 기준을 세우지 않으면 하나님의 섭리는 발전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거기에서 야곱을 중심으로 승리한 기반을 갖고 가나안에 섰던 이 가정을 애급까지 인도하기 위해서 사전에 요셉을 보낸 것입니다. 하나님은 고난 길에 그를 내보내 시련 가운데 두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과 함께 걷고 행동하며 사탄세계의 어떠한 유혹에도 빠지지 않고 일정한 심정과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과 함께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애급 땅에 있었던 요셉은 그와 같이 살았기 때문에 승리자로서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요셉이 애급의 군대장관 보디 발의 처의 유혹도 거절하고, 지위를 잃어도 정의의 편에 서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심과 이스라엘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은 물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달려 나감으로 말미암아 애급권 내에서, 또 사탄세계에 있어서 한 사람의 승리의 기준이 세워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 기대를 중심으로 하나님은 축복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요셉은 그 땅에서 총리대신까지 되었고 자기의 가정을 애급 땅으로 인도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참된 소원은 그가 총리대신이 되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기간에 요셉에게 애급 백성을 영원히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반대하지 않는 국민으로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책임 관념을 갖도록 섭리하셨지만, 요셉은 그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요셉은 기근으로 굶고 있던 가족은 구제할 수 있었지만, 섭리상 하나님 자체에 있어서 영적 기근을 해결할 내용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요셉이 자기의 가족은 인도하였으나 그 민족이 400년의 역사를 통하여 고역의 길을 갔다고 하는 것은, 요셉이 자기의 책임을 다하지 않은 것에도 그 원인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만약 자기 씨족의 승리의 환경을 만들고, 그것을 터로 하여 이스라엘 민족이 애급 민족을 가인 입장에 두고 아벨 입장에 있는 야곱에게 순종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면, 거기서부터 이스라엘의 국가적 승리의 기준을 만들려고 했던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그 내용을 모르고 그 기준을 세우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4대(代)를 지나 모세를 부르시고 재차 하나님의 소원에 부응한 책임을 지게 하여 바로 왕 밑에 보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사랑한 것같이 모세도 이스라엘 민족을 사랑했습니다. 모세는 자기 동족인 이스라엘 민족이 고생을 하고 고통 가운데 견디고 있는 것을 보고, 바로 궁중에서의 영광을 버리고 민족에 대하여 하나님이 사랑할 수 있는 기준으로 애정의 심정을 세웠던 것입니다. 참으로 축복받은 민족은 이와 같은 비참한 결과에 세워져서는 안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은 마땅히 이 민족을 새로운 희망의 나라로 인도하실 것임에 틀림없다.’ 는 신념을 가지고 먼저 하나님에게 기여하니, 하나님에게 기도하는 사람들의 신념이 모세의 마음속을 통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외적 박해가 크면 클수록 이스라엘 민족의 고향이던 가나안 땅에 대한 애정이 환경적으로 육박하는 고난에 비례해서 강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모세는 하나님에 대한 맹세를 세우고, 또 애급인이 이스라엘 백성을 채찍으로 때리는 모습을 보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해야 할 것을 절실히 느끼며 돌을 가지고 애급 사람을 쳐죽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보통 평면적 입장에서 보면 용서할 수 없는 죄입니다. 그러나 누구라도 그 입장이었다면 당연히 그러한 행동을 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심정이 그러한 입장에 서 있을 때에 모세가 그와 같은 행동을 하였으므로 하나님을 대신하여 친 것이라고 하나님은 인정하셨던 것입니다.
그 다음날 이스라엘 백성이 서로 다투고 있는 것을 보고 모세는 그들을 말렸습니다. 그러나 그른 쪽의 사람 때문에 그 전날에 있었던 일의 소문이 퍼지게 되어, 모세는 자기의 입장이 위험하게 된 것을 깨닫고 미디안 광야로 도망쳤던 것입니다.
그곳에서 양을 친 40년간의 모세의 생활은 처참하고 고생스러웠지만, 그 가운데서도 이스라엘 민족과 하나님을 누구보다도 사랑했던 마음, 그리고 가나안 땅을 누구보다도 흠모하고 사랑했던 마음은 모세의 훌륭한 점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늘이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로서 세우기에 충분한 자격을 갖춘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가나안 땅을 사랑하는 모세의 마음은 가나안으로 복귀시키려는 하나님의 희망과 부합한 입장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모세를 시켜 바로 궁중에 대해 반대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때 그의 처 십보라는 모세가 어떠한 곤란한 땅에 가더라도, 언제나 한 몸이 되어 그의 수족이 되고 그를 위로하며, 모세의 곤란한 입장과 같이하여 하나님의 책임을 같이 진다는 결심을 가졌기 때문에, 하나님이 볼 때 그녀는 모세가 귀중한 섭리를 흠모하면서 완수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절대적인 존재였고, 또 탕감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모세는 자기 가족을 데리고 바로가 있는 곳에서 싸움에 싸움을 거듭하였습니다. 그러나 열 번의 기적을 통하여서도 바로는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키려 하지 않았습니다. 모세가 만약에 바로 궁중에서만 살았더라면 하나님이 그런 명령을 했을 때 바로와 최후까지 싸운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과거 미디안 광야 40년 생활의 고난에서 직접 어려운 환경에 부딪치는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은 언제든지 나의 편이다, 하나님의 입장에 서서 그 마음에 합당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나를 지켜줄 하나님이시다.’ 라는 신념을 굳게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모세는 바로가 몇 번이나 속이고 이스라엘 민족을 돌려보내지 않는 입장에서도 한 번도 낙담하지 않고 당당히 싸워 이겨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3일간의 여유를 타서 이스라엘 민족을 사탄세계로부터 전부 데리고 나왔던 것입니다.
이것은 섭리상으로 본 이스라엘 자손들의 신앙생활 역사의 일단이지만, 이 신앙생활을 인도하시고 명령하신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과 사탄과의 사이에 있어서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기 개인, 자기 가정, 자기 민족을 그러한 고통스러운 입장에 세우지 않으면 안 되었던 쓰라린 속사정이 있었다는 것을 아무도 몰랐던 것입니다.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은 무엇을 알아야 하느냐 하면, 역사 위에 나타나 있는 사실보다도 역사를 움직이시고 사람의 배후에서 섭리의 목적을 성취하게 하기 위하여 명령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내정, 곧 그 속사정을 몰라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모세의 심정을 모르는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과 모세가 일치하여 가나안을 바라고 그리워하는 심정, 최후까지 싸워 이기지 않으면 안 되는 모세의 마음과 하나님의 심정을 모르고, 다만 고향에 돌아갈 수 있다고 하는 마음만 가지고 모세의 뒤를 좇아 출발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고향에 가는 일만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그 이상의 고통과 그 이상의 쓰라림이 있으면 모세에 대하여 반항하고 하나님에 대해 불신하는 입장에 섰던 것입니다.
그러한 60만 이상의 군중을 이끌고 가는 하나님이나 모세의 내적 걱정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 생사를 결하고 가나안 땅에 돌아가야 하는 이스라엘 민족은 상하 일체, 혹은 내외 일체가 되어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맡기고 모세와 하나되어 전진해야만 했습니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 민족의 반 가량이 사탄 편을 지지하더라도 하나님은 나머지 반의 백성만이라도 데리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민족의 5분의 1, 혹은 10분의 1을 희생시키더라도 모세와 일치시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목적을 갖게 하여 가나안 땅에 복귀시켜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야만 거기서 민족을 중심으로 한 하나님의 섭리는 완수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때에 이스라엘 민족은 그러한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자기의 생활 조건만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민족을 생각할 여지도, 하나님을 생각할 여지도 없었습니다. 자기들의 지도자의 마음이 대체 어떤가 하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했지만 그것을 아는 자가 없었습니다. 오로지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하는 것과 생활의 안정만을 바라던 이스라엘 민족에게 애급에서의 생활 이하의 상태에 부딪치자 불평이 일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문제는 거기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만일 거기서 이스라엘 민족이 돌아가야 할 미래의 고향 가나안을 버리고 애급으로 돌아간다면, 아무리 모세의 지도하에 있는 이스라엘 민족이라 할지라도 모세와 하등의 관계가 없는 입장이 되고 하나님과도 하등의 관계가 없는 입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일은 모세에게도, 하나님에게도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때에 그러한 민족의 움직임을 바라보면서 민족으로부터 ‘먹을 것이 없다, 마실 것이 없다, 입을 것이 없다, 살 곳이 없다.’ 는 불평을 듣는 모세의 지도자로서의 쓰라림, 지도자로서의 고통은 명령하신 하나님의 고통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또한 모세가 그렇게 몸부림치면서 고통스러워하고 괴로워하는 것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은 이중의 고통을 느끼지 않으실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에 대해서는 배반하는 것에 대해 괴로워하지 않으실 수 없었고, 모세에 대해서는 불쌍하고 가여운 생각에 괴로운 심정이셨던 것입니다. 그러한 불신앙의 경지에 있던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누가 ‘하나님이여! 이 민족을 벌하소서.’ 했다면 정말로 벌하고 싶은 경지에 계신 하나님이 아니셨던가.
그러나 모세는 그럴 때마다 ‘당신이 간난신고(艱難辛苦)를 거쳐 애급 땅으로부터 이끌어 내신 선민 이스라엘이 아닙니까? 수많은 민족이 아벨을 저주한 것은 사탄에게 좋은 조건이 아닙니까?’ 하며 아픈 하나님의 마음을 위로했습니다. 모세의 그러한 심정이 뒷날 이스라엘의 지도자, 혹은 족장과 수많은 사람을 해방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배반하는 민족을 바라보는 모세의 심정은 차라리 자신이 죽어 버리는 편이 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선조들로부터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신 역사적인 이스라엘 민족이라고 하는 것을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역사적인 하나님, 시대적인 하나님, 미래적인 하나님으로서 자기의 자손들과도 영원히 함께 계시고 자기의 씨족들과도 영원히 함께 계실 하나님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모세는 도망칠 수도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을 그대로 둘 수도 없고 팽개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한 지도자의 입장에 서 있던 모세의 괴로움이라는 것은 아무도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시내산에 올라가 40일간의 기도를 하였습니다. 민족과 일체가 되지 않으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설계하신 제단의 장(場)으로서 타락세계와 분별하여 하나의 제물로 바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가나안 땅을 민족적인 제물로써 하나님께 바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 앞에, 모세 앞에 모두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최후에는 지도자로서의 사명을 가진 모세마저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채 광야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모세를 세워 이끌어 온 역사노정이 그렇게 끝나 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단지 나타난 역사만이 아니라 그 내면에 있는 하나님의 비참한 심정과, 그 하나님의 심정을 중심으로 책임을 진 지도자의 심정을 알지 않으면 안 됩니다.
모세와 함께 죽음의 경지를 넘으면서 원수들 밑에서 온갖 괴로움을 당하는 이스라엘 민족은, 자기들을 대표하여 싸워 주는 모세와 그 모세를 격려하고 그에게 명령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감사해 마지않는 마음을 갖지 않으면 안 될 입장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족은 서로 충돌하고 모세와 하나님을 대하여 우리들에겐 하나님도 없다, ‘우리들에겐 지도자도 없다.’ 고 하며 우상을 만들어 춤추며 난동을 벌였습니다. 2천4백년 동안의 수고의 역사가 그 거칠어 빠진 황야에서 그러한 결말을 맺고 말았으니, 그 이상의 비참사가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그러한 사실을 아무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편 여호수아를 중심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간 민족은 그 지도자와 결속하고 일체가 되어 승리의 제물을 바치고 갈라지지 않는 이스라엘 국가가 되었더라면, 그 이스라엘 국가는 영원히 이어질 국가로서, 하나님이 보호하지 않을 수 없는 국가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은 사탄이 침범할 수 없는 승리한 국민의 입장에 섰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서로 다투고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어진 예언자, 혹은 지도자에 대해서 반항하고 위해(危害)를 가하고 학살하고 했던 것입니다. 역사상에서 연속적으로 그런 행동을 해 왔던 것입니다.
그런 것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은 복귀섭리의 성취, 말하자면 하나님이 소원하시는 이상국가의 실현이 연장된 채 역사가 거듭되면 거듭될수록, 흐르면 흐를수록 그 나라를 흠모하는 마음이 강해졌습니다. 때문에 역사상에 슬픈 일이 많으면 많을수록 하나님의 눈에 눈물이 고이지 않을 수 없었고, 하나님의 마음은 괴로운 골짜기를 헤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비참한 역사를 더듬어서 구원의 섭리를 담당해 나오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지금까지의 신앙자들은 그 누구도 몰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라도 목적을 달성하시지 않으면 안 되는 하나님께서는 그 목적이 성취될 한 때를 바라보시면서, 민족과 세계를 대표하는 지도자가 될 수 있는 한 사람을 하나의 장소와 하나의 환경에 보내시어 최후의 승리를 결정하고 지금까지의 역사의 한을 풀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을 목표로 해서 이스라엘 역사상의 수많은 예언자들을 통하여 구세주 메시아는 오신다고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흩어져 있는 민족을 수습하여 하나의 신전을 중심으로 일체가 되게 하셨으며, 거기에 반대하는 자에게는 벌을 가하셨습니다. 개인적으로 배반하면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배반하면 가정적으로, 씨족적으로 배반하면 씨족적으로 벌하셨습니다. 민족이 배반하면 민족을 벌하셨습니다.
그러한 역사의 괴로운 경험을 통하여 일체가 될 날을 소망하셨는데, 예수가 올 때까지 이스라엘 민족은 그러한 하나님의 소망을 이루지 못하고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벌을 받아 망하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면 타락하고 축복하시면 타락하기를 거듭 반복하였습니다. 하나의 때와 하나의 환경에 보내려고 하나님이 결정하고 있는 인간은 뜻을 섬기는 기준에서 세계적인 승리를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데 그것을 바치는 기대(基臺)가 될 민족과 그 지도자도 그리고 신전(神殿)의 의식(儀式)도 전부 하나님의 뜻에 합당치 않은 입장에 있었던 것입니다.
복귀섭리는 때를 중심으로 탕감조건을 세워 가는 것이니, 4천년의 세월이 경과함에 따라 모든 탕감조건을 세우고 민족적인 승리의 기준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섭리적으로 볼 때, 민족적 신전을 정비하여 그 민족과 일체가 되고 메시아에게 접하는 지상의 모든 민족과 국가 주권과 신전과 모든 것을 바쳐야 했습니다. 그렇게 될 날을 소원하시며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어 나오셨지만, 이스라엘 민족은 전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지도자나 예언자의 명령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 신전의 이상 따위는 어떻게 되어도 좋다.’ 는 식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애급 땅에서 황야에 나온 때와 마찬가지로, 다만 자기 개인의 희망만을 문제삼고 ‘나는 이렇게 살면 된다. 내가 바라는 소원은 이스라엘 민족의 소원과 같은 가나안이 아니다. 그런 것은 필요도 없다. 단지 현세의 나의 욕망이 채워지면 된다.’ 고 하는 식이었던 것입니다. 애급 땅으로부터 인도해 나왔을 때와 같은 생활 태도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가나안 땅에 들어간 민족이 바라는 것과 정반대의 것을 원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면서 2천 수백년간 백성을 사랑하시며 그와 같이 괴로운 길을 더듬어 오신 것입니다.
그것은 왜인가? 그 길이 희망의 나라, 목적의 나라를 위하여 세계적인 사탄을 굴복시키려는 노정이었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땅에 있는 이스라엘 민족이 그것을 해 주기를 원하셨지만, 그 민족은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소원에 참으로 합당한 자, 혹은 당신의 말씀에 순종하여 책임을 진 자, 또 하나님 자신이 미래의 세계를 사랑함같이 비참한 입장에 있는 민족의 운명을 걱정하면서, 장래의 이스라엘, 미래의 희망에 찬 이스라엘을 사모하는 자는 없는가 하며 그런 자를 찾으셨습니다. 그러나 없었던 것입니다.
역사에 나타난 이스라엘 민족은 수많은 나라들의 속국이 되어, 최후에는 로마의 속국이 되었고, 어떻게 할 수도 없는 상태로 되고 말았습니다. 그와 같은 시대와 환경에 예수님은 보내어졌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땅에는 하나님을 믿는 환경이 준비되지 않았지만, 때는 차고 약속의 시기가 되었기 때문에, 즉 하나님 편에서 때와 사람이 준비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런 시점에 보내졌던 것입니다. 그런 환경에 예수님을 보내기 전에 하나님은 환경이 예수님을 사모할 수 있도록 준비할 자를, 역사를 통하여 보내지 않을 수 없으셨습니다. 그러한 사명을 가지고 온 자가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으로 볼 때는 세례 요한을 보내는 일 자체가 하나님의 슬픔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보내지기 전에 민족이 일체가 되고 메시아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준비하였다면 요한을 보낼 필요조차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민족이 하나되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요한을 보내어 가나안 땅을 중심삼고 하나님 앞에 배반한 이스라엘 민족을 다시 모아 예수님에게로 연결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요한마저 그러한 내용과 하나님의 심정을 모르고 환경에 휩쓸려 예수님을 모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세례 요한도 배반한 것이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심인물이 쓰러지고 말았기 때문에, 그에게로 이어져야 했던 이스라엘 민족은 자연히 사탄쪽으로 기울어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자신들의 내적 사상의 중심인 유대교와 외적인 이스라엘 국가와 하나로 이어져, 즉 내외 일체가 되어서 그 위에 메시아를 희망의 주로 맞이하여 모시지 않으면 아니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의 구주로 보내어진 예수님을 흠모해야 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러한 사실을 전연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때는 차고 하나님으로부터 준비된 인물은 보내졌지만 때와 인물을 받아들일 환경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이상(理想)이 전해질 기대(基臺)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 갖추어지지 않은 환경에 최상의 목적을 갖고 오신 예수님은 이스라엘 민족이 메시아를 대망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러한 예수님과 이스라엘 민족은 일체가 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메시아가 가는 곳에 민족이 가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메시아의 소원이 민족의 소원이 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메시아의 생활이 민족의 생활이 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메시아의 행동이 민족의 행동이 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갈라져서는 안 되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 메시아와 민족이 결국에는 갈라졌던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그때까지 민족을 중심으로 흘러 전해진 역사적인 모든 것도 민족의 중심으로 보내어진 메시아도 이스라엘 민족과 역사적으로나 입체적으로 관계가 없다고 하는 입장에 서게 되었고, 예수님은 하는 수 없이 십자가의 길을 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하여 최후의 길을 가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후 성령이 강림하여 부활의 길을 통함으로써 지금까지 영적 구세주를 의지해 왔다고 한다면, 땅을 대하는 하나님의 소원은 무엇이었을 것인가? 하나님의 소원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한 하나님의 소원은 민족을 통한 국가인 것입니다. 축복을 받은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서 축복을 받은 하나의 국가를 세우는 것이 문제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지상에 오실 때 지상에 대한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시기 위하여 오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소원은 하나님의 소원과 같았으며 그것은 민족을 지도하여 국가를 움직이는 것이었습니다. 민족이라기보다는 나라인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과 이스라엘 민족이 함께 이루어야 할 주체적인 국가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소원하시는 국가는 그 시대만을 위한 국가가 아니었습니다. 영원한 역사적인 국가였던 것입니다. 곧 그의 민족을 영원히 이끌 나라인 것입니다. 그 나라 가운데는 민족이 있고 씨족이 있고 가족이 있고 개인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소원도, 하나님의 뜻에 의해 보내어진 그리스도의 소원도, 또 하나님을 흠모하던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적인 소원도 결국은 민족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 자체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나라, 즉 하나님의 나라인 것입니다. 따라서 메시아로서 이 지상에 오신 예수님의 희망과 목표는 곧 이스라엘 국가였던 것입니다.
국가를 형성하는 데는 세 가지의 요소가 필요합니다. 먼저는 국토가 없어서는 안 됩니다. 백성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주권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그 국가의 민족은 어떤 민족인가 하면, 역사 가운데 전통을 북돋아 온 이스라엘 민족이며 국토는 축복받은 가나안 땅입니다. 그리고 주권을 세우는 중심인물이 국가적, 전체적 지도자로 서야 하는데, 그러한 목적을 위해 보내진 분이 메시아였습니다.
메시아는 죽어서 영적인 만민의 구주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상에서 만능의 왕자로서, 그리고 이스라엘 국가의 중심으로서, 또 로마의 중심으로서 보내어졌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축복받을 때 고향 땅에서 불림받아 무조건 보내어졌습니다. 야곱은 축복을 받고서 자기의 고향을 버리고 원수가 있는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모세도 그러했습니다. 축복을 약속받고 광야에 보내어졌습니다.
그와 같이 예수님을 중심으로 이스라엘 국가를 건설하고, 절대적 가나안 땅을 결정하고, 절대적 이스라엘 민족을 결정하고, 절대적 이스라엘 주권을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최대의 사람을 세워 새로운 사상, 새로운 문화, 즉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국가이념을, 그리고 국가적 전통을, 그리고 그 시대의 지상 전체를 움직이고 있던 세계적인 중심인 로마를 능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예수님의 책임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언제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위신을 나타낸 일이 있었는가? 만민의 왕으로서 자신의 명령을 들으라고 하시며 명령하신 적이 있었는가? 하늘 아버지의 독생자로 탄생하셨던 메시아를 향해 지상의 어느 누가 ‘참으로 당신은 하늘의 왕자이십니다.’ 하며 모신 사람이 있었던가? 그런 개인도 없었거니와 가정도 없었습니다. 씨족도 없었거니와 민족도 없었습니다. 민족이 없었으니 국가가 있을 까닭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지상에 오셔서 일개인에 대한 완전한 가르침 하나도 전하지 못한 것입니다. 개인에게 완전한 가르침을 말할 수 없었던 예수님이 어떻게 가정에 대한 가르침을 말할 수가 있었을 것인가? 가정에 대해서 말할 수 없었던 예수님이 어떻게 민족, 국가, 세계를 대해서 그 가르침을 말할 수 있었겠는가? 따라서 예수님의 내면의 심정을 아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예수님의 수많은 기적을 따라, 혹은 빵을 얻고자 예수님의 뒤를 따라다니는 자도 있었을지 모릅니다. 천천만만의 여러 사람들은 자기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모여 왔었지만, 예수님의 참된 심정을 알아 ‘나는 당신에게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되겠다.’ 고 하는 결의를 가지고 예수님을 흠모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런 한 사람이 없었으니 그런 가정이 있을 까닭이 없습니다. 그런 가정이 없었으니 물론 민족도 있을 수 없었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은 비참하고 처량한, 말할 수 없는 괴로운 입장에서 생애를 보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알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겟세마네에서의 기도를 보더라도 그렇지 않았던가? 3인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3년간의 희비애락을 함께하였고 스승을 사모하면서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고 맹세했음에도 불구하고, 겟세마네에서의 세 번의 기도 때마다 그들은 졸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흠모해 오던 제자들의 최후의 결과였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결정하든가, 혹은 삶을 택하든가 하는 기도를 하시며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 기도를 세 번씩이나 반복하셨던 것입니다.
십자가에 죽느냐 마느냐를 결정하는 중대한 그 시간에마저, 예수님과 일체가 되지 못했던 제자들이 예수님 대신 죽는다고 하는 자리에 설 수는 없었습니다. 약속을 정하는 그때에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은 약속을 이행하는 지도자의 입장에 설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잡혔을 때에는 다 도망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4천년 역사에 대한 사람들의 보응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수많은 예언자와 선조들을 보내시어 그 민족이 배반하면 그들을 벌하고 잘못된 길을 바로잡으며 약속에 약속을 거듭하셨던 것입니다. 2천 년 전에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모든 사람들의 소망인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은 그 민족의 운명을 인도하고, 세계적인 운명을 좌우할 책임을 질 메시아를 배반한 것입니다. 역사가 시작된 이래 이것처럼 비참한 일은 없었습니다.
인간시조가 타락한 것은 선조들의 수고가 없는 위치에서 되어진 것이었지만, 이 4천년의 역사를 통한 이스라엘 민족이 메시아를 모셔야 할 입장에서 메시아를 그와 같이 대우한 것은 그때까지 수천년간 수고한 선조들에 대한 전면적인 배반이며, 수천년간의 하나님의 수고에 대한 전면적인 배반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이상, 예수님의 생애의 목적, 인류 전체의 목적에 대해서 그 이상의 죄는 없다고 하는 결과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 까닭으로 그 이후에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는 비참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성서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읽어 보면 언제 어느 시대에도 이스라엘 민족을 박해하고 학대한 민족은 망하였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보호 아래 길리워져 온 민족이 예수님이 돌아가신 이후에는 2천년간 여기저기 유랑민의 생활을 하고 어떠한 지도자를 중심으로 한 민족 관념을 주장할 수 없는 불쌍한 민족이 되고 말았습니다. 최후에는 제2차 대전 때에 히틀러에 의해 6백만 대학살의 결과를 가져온 것은 당연한 보응이었습니다. 그것은 역사적인 탕감을 민족적으로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때까지 4천년간의 역사는 예수님의 죽음과 함께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거기에서 또 새로운 역사는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비참한 역사를 통하여 4천 년간의 하나님의 수고의 기대 위에 쌓아 올려진 이스라엘 민족과 그 공적도 전면적인 파괴를 초래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이후 기독교 신도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제2이스라엘 민족이 되어 국가적 기준을 중심으로 하고 세계적인 출발을 약속하기까지 되었습니다. 메시아가 이상했던 기준은 영적인 기준으로서 진전하였습니다. 이것이 지금까지의 기독교의 발전사인 것입니다.
기독교는 이스라엘 민족이 저질러 놓은 그 역사적인 죄행(罪行)을 청산해 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책임을 지고 죽음을 타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개인이 구원되기 위해서는 그 개인이 죽는 것과 같은 탕감의 고비를 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가정이 구원되기 위해서는 가정끼리 죽는 것과 같은 탕감의 고비를 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민족이 구원되기 위해서는 민족끼리 그러한 죽는 것과 같은 탕감의 고비를 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한 순교의 길에서 피를 흘리면서 하나님의 탄식의 일단을 지상에 호소하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바라옵건데 부디 당신이 약속한 재림주를 보내 주십시오. 초림 메시아에 대해서 이스라엘 민족은 끝까지 불신하였지만, 저희들은 재림주를 사모하고 모시는 신앙의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이름의 민족이 되었으니까 부디 저희에게 보내 주십시오.’ 라고 하면서, 죽음의 탕감길을 넘어, 시체의 무덤을 넘어 하나님에 대해서 두 손을 들고 애걸하며 외치지 않으면 안 되는 운명에 있는 것이 기독교의 입장인 것입니다.
2천년의 역사가 지나간 지금 수많은 피와 수많은 희생의 제단 위에 선 기독교의 이상은 세계의 태반(殆半)을 움직일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현세의 민주주의세계는 기독교문화를 중심으로 한 권내에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섭리는 개인적 섭리시대, 가정적 섭리시대, 씨족적 섭리시대, 민족적 섭리시대, 국가적 섭리시대, 이렇게 점점 넓혀져 오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이상에 합당한 하나의 세계를 이루기 위해서 지금까지 섭리의 무대를 확장시켜 온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이상세계는 둘이 아닙니다. 절대적으로 하나뿐입니다. 그런데 현세에는 세계에 널려 있는 제2이스라엘 민족의 입장에 있는 크리스천들이 교파끼리 투쟁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대망하는 메시아를 보내지 않는다든가, 역사상에 있어서 하나님이 얼마나 수고하셔서 자기들을 남겼는가, 혹은 그 책임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그들이 잊어버릴 때는 크리스천도 또 과거에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에게 반대한 것과 같은 입장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전세계를 통하여 외적 국가의 운세는 하나로 향합니다. 그리고 그 외적 전 세계의 이상의 중심이며 정신적 지도의 중심으로서 기독교계는, 이른바 예수님 당시에 이스라엘 국가에 대해서 기독교가 국가적 정신을 책임지고, 메시아 강림 때에 내외 일체화할 수 있도록 특권을 가졌던 것과 같은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지금 지상에서는 세계가 하나의 무대가 되어 어디에라도 자유자재로 갈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옛날의 로마에 해당한 것이 미국입니다. 그들을 따르는 민주주의, 이것이 기독교를 중심한 역사적 전통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에 기독교는 어떠한 운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일까? 마치 예수님 시대가 각 교파끼리, 분파끼리, 민족끼리의 싸움이 그치지 않는 곤란한 시기였던 것과 같이, 그러한 시기가 이 민주주의 가운데 시대상으로 나타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따라서 현재의 민주주의를 가지고도 세계를 이끌 수가 없는 것과 같이, 당시 로마의 주의를 가지고도 세계를 이끌어 갈 수가 없었습니다. 로마가 지도하는 이상보다도 메시아가 지도하는 이상이 높았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민주세계에서도 그러한 상황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때에 내적인 입장을 지키고 굳혀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기독교가 분파하여 싸우게 되면 이 종말시대에 비참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수많은 교단은 세계적 단결운동을 내부로부터 일으켜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원리가 나타난 한국의 상태는 과거 이스라엘 민족의 그 시대상과 같은 위치에 서 있는 것입니다. 경제적으로는 민주주의 속국과 같고, 신앙면에서는 교회, 교파의 대립 분쟁하는 가운데 그야말로 말이 안 될 정도로 신앙의 열의가 식어 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세계 가운데 우리 통일교회가 그 명칭을 말하는 대로 통일이념인 원리를 가지고 있는 기대를 만들기 위해서 그야말로 역사적으로 비참한 예수님 당시에 상응하는 굴욕의 노정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수많은 주권으로부터 탄압을 받고, 수많은 박해의 길을 걸어서 여러 가지 일이 허락되지 않는 환경에서 이른바 승리의 기대를 만들어 왔습니다.
예수님의 이상이 로마를 시켜 하나의 세계로 만들어 가는 것이었던 것과 같이 우리들의 이상도 일개국만의 이상은 아닌 것입니다. 우선 전세계에 퍼져 있는 기독교 교파의 장벽을 타파하고 결속시키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다음으로 현세에 있어서 사상적인 단결인 것입니다. 바야흐로 민주주의에 대응하는 공산주의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론에 있어서 실증적인 과학의 기대 위에 선 체계적인 이상관(理想觀)을 가지고 민주주의에 대결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이겨낼 사람이 필요합니다. 유심관(唯心觀)을 중심으로 하고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그야말로 실증적이고 실질적인 사상체계, 생활 과정에서 체험할 수 있는 하나의 사상체계, 생활 무대를 움직여서 이상적 세계를 만들 수 있고 그리하여 하나님이 존재를 인정할 수 있는 그러한 사상체계가 갖추어진 이념이 나오지 않으면 이 공산주의를 타도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나타나지 않고 가인과 아벨이 최후까지 싸우면 함께 망하는 것이고, 둘이 다 멸망하면 구원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담가정에서 가인이 아벨과 싸워 아벨을 죽였습니다. 가인이 하나님을 배반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측으로서는 셋을 출산시켰다고 합니다. 이렇게 지금까지의 역사에 있어서는 언제나 하나님에게 거역한 가인이 먼저 치고 있습니다. 지는 편이 먼저 쳤습니다. 제1차 대전도 그러하고, 제2차 대전도 그러하였습니다. 그러나 맞는 편에 이르러 하나님에게 반대하지 않고 죽지 않는다고 하는 입장에 있으면 역사는 거기서부터 출발합니다. 그러나 맞은 자가 때린 자를 능가하여 주권을 세울 힘이 없으면 사명을 다른 사람에게 옮겨 새로운 세계의 이상을 세우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말세의 상황을 보면, 사상체계를 갖춘 세계주의, 세계주의와 함께 사상주의, 사상주의와 함께 정신주의, 이 세 가지 주의의 내용을 중심으로 한 하나님의 주의가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주의는 현존하는 모든 사상체계를 능가하고, 실질적이고 실증적인 생활에 부합하고, 그리하여 종래에 전체의 가치를 가진 중심과 대체(代替)되는 것입니다. 그 대체된 주의가 관념적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고 생활의 중심인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러한 신앙의 기반을 만들 수 있는 이상체계라든가 사상체계라든가 혹은 종교체계라면 문제는 거기서부터 해결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생각하는 관념적인 하나님은 우리와는 거리가 멉니다. 이전부터 알아 왔던 하나님은 우리와 거리가 멉니다. 신앙을 통하여 숭상하는 하나님은 우리와 거리가 멉니다. 우리들은 생활의 신을 필요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사정과 심정이 소원하는 것에 부응할 수 있는 그런 기쁨을 흠모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세계적인 지위나 명예가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생활 감정이라든가 그의 심정이라든가 사정에 부응하는 가치를 갖지 않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그 가치가 세계의 어떤 사람에게도, 또 현재에 있어서의 2대 진영의 모든 사람에게 견주어도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인정되어진다면, 그 사람은 역사를 초월하여 하나님까지 움직이게 할 주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심정이 있습니다. 인간은 생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생활하는 데는 협력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목적은 소원을 통한 것이 아니면 안 됩니다. 더 나아가서 생활에 있어서 자기의 목적에 맞는 가치관, 개인의 가치관, 자기 가정의 가치관, 자기의 가정끼리 공통으로 갖는 가치관, 이것이 절대적인 가치인 것입니다. 이른바 하나님의 목적관에 맞는 가치인 것입니다. 그것은 먼 세계의 문제가 아닙니다. 직접 자기의 문제로서 생활 가치 이상의 가치라고 안다면, 인간으로서 그 이상 가는 소원이 없고, 우리에게 있어서 그 이상 가는 성공이 없습니다. 하나님도 사랑하는 자녀의 심정 가운데서 혹은 희망 있는 인간생활의 수많은 요건 가운데서 무한한 가치적 존재로 흠모받고 칭송받는 존재로 계시고 싶은 것입니다. 따라서 세계의 사람들이 먼저 요구하는 것은 단순한 이상보다도, 무슨 주의보다도 생활 사정인 것입니다. 사정의 하나님이니까 생활 사정에서의 인간의 가치가 세계의 모든 것 이상의 가치로 인정되는 사상이 나온다면 이 사상은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거기에 서 있는 심정 자체가 메시아의 심정이며, 그 심정이 필요한 것은 여하한 목적도 성취할 수 있는 근원이 되는 심정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정은 생활 무대에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사정인 것입니다. 천지가 갈라지더라도 하나로 할 수 있는, 사람들이 갈라지더라도 하나로 할 수 있는 사정인 것입니다. 그 소원은 누구일지라도 공동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는 소원입니다. 옆의 사람에게도 ‘그 소원은 나의 소원입니다.’ 하고 그 성공을 기리고 감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현대의 세상에 개인 개인이 서로 성공을 투기(妬忌)할 수 있는 감정이나 소원은 아닌 것입니다.
이러한 가치관에 철(徹)한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의 심정을 보라. 하나님의 사정을 보라. 하나님의 소원을 보라. 모두 하나님의 목적관에 맞도록 하나님을 주체로 하고 우리들은 대상적인 입장에 서서 일체가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기뻐하면 우리도 함께 기뻐합니다. 내 기쁨은 하나님 자체의 기쁨이 되고 내 슬픔은 하나님 자체의 슬픔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생활상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실재를 보고 무한한 가치의 존재의 기대(基臺)로 되어 있는 자기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가치는 우주의 그 어떤 물건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마 16:26)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진리인 것입니다.
자기의 가치는 우주의 가치 이상이며, 자기가 생활하는 가운데 이 이상의 행복은 없다고 느끼는 그러한 기준에서 하나님과 함께 생활하고 있는 것이 메시아의 생활인 것입니다. 그것을 개인 개인이, 그리고 가정 가정이, 또 씨족과 민족을 통하여 국가, 세계가 상속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이 원하시던 세계인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하나님 자신이 창조이상으로 세우시려 했던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포함되어 있는 생활 자체는 하나님의 가치와 함께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바라셨습니다.
이러한 것을 생각한다면, 여기에 모여 있는 개인은 무엇을 바라야 되느냐? 우리들이 지금까지 가지고 있는 소원은 본연의 내가 바라던 소원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집은 본연의 우리들이 원하던 집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의 사회도 국가도 세계도 원하던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자기를 중심으로 한 생활 관념, 가정 관념, 사회 관념, 국가 관념입니다. 아직까지는 때가 오지 않았지만, 그때가 오면 이런 관념은 모두 하나님을 배반하기 쉬운 관념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눅 14:26-27)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입장에 처해 있는 현세의 우리들로서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하나님 자신이 심판하기 전에 우리들이 자신을 심판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세계의 심판 때에 앞서 심판의 권위를 가지고 심판을 담당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민족 이상의 심판을 통과한 존재가 아니고서는 안 됩니다. 즉 국가 기준 이상의 심판의 권위와 자격을 가지고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역사적 배후의 심정이 어떻게 움직여 왔는가 하는 것을 원리에 의해서 배우고 있는 우리들은 모든 내정을 통하고, 심신을 통하고, 실천을 통하여 그 입장을 세워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지금의 세계는 2대 주의로 되어 있습니다. 즉 공산주의냐 민주주의냐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산주의도 민주주의도 아닙니다. 통일주의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세계는 점차 세계정부를 외치는 시세로 옮겨 오고 있는 것이고, 그것을 세우기 위해 경제적인 통합운동이 나올 것입니다. 거기에 대적하는 것이 있으면 부득이 힘으로써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섭리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중에는 각국이 연합한 국제적인 하나의 세계정부를 보장할 수 있는 방도도 나올 것입니다. 말할 것도 없이 우리 통일교회는 그것들보다도 훨씬 앞선 것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이루어지기 직전에 서 있는 개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자기의 가정을 심판하기 전에 자기를 심판하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은 동정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심판이란 무엇인가? 완전히 굴복시키는 것입니다. 살아 있더라도 죽은 것과 같이 하면 좋다고 하는 것입니다. 목적은 거기에 있습니다. 즉 여하한 일이 있어도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죽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자기 중심적으로 움직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념이 지상에 나타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인간이 정말 거룩한 심판을 담당할 자격자가 되기 위해서는 사탄과 싸우는 데 실력으로 대항하고 올바른 입장에 서서 승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한 심판을 하는 하나의 완전한 자를 세우기 위해서는 조금 불완전한 자의 기준으로부터 완전한 자가 되는 기준상의 고개를 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바꾸어 말하면 그 시련과 존재가치의 위치가 그 내용에 해당하는 자인 것입니다. 어떤 것이 진짜인가, 그것에 대항해서 도리어 역으로 부딪쳐 나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가 어떠한 심판을 받을 것인가? 심판의 역사적인 의미가 무엇인가 하면, 정말 악의 역사에 대하여 지지 않고 최후에 남아서 그것을 정리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최후에 남아지는 사람은 최고의 심판주인 것입니다. 거기에서 금후 최후의 하나님의 이념에 맞는 어떤 세계적 움직임이 나온다고 할 것 같으면, 그 움직임은 개인과 가정과 민족과 국가와 세계를 심판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일찍이 없었던 민족의 혼란과 혹은 세계적인 혼란의 조류 가운데서 부딪쳐 갈 사태가 예상되는 것입니다. 민주주의나 공산주의세계의 지도자들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시련 가운데서도 무너지지 않는 것이 아니면 그것은 참이 아닙니다.
일본의 명도(名刀)를 만드는 데도 두드리는 법이 있습니다. 오직 한 곳으로 정신을 집중해서 천주정신을 주입하고 천지의 힘을 합하여 해머(hammer)로 때립니다. 하나의 해머에 자기의 힘과 함께 천주의 힘을 합해서 때리면 우리 동맥은 약동해 올 것입니다. 우리들이 절대적인 심판의 천위(天位)에 서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을진대, 어떻게 해서 통일교회를 남아지는 교회로 만들 수 있을까, 시대는 지나가고 세계의 사상 주의는 지나갈지라도 통일교회의 이념은 남을 수가 있을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있어서 우리들의 각오는 되어 있는 것인가? 예수님의 최후와 우리들의 각오, 예수님은 무엇을 말하려고 하셨던가? 최후의 심판을 원하셨던 것입니다. 불완전한 존재는 인정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가르침은 도중에서 끊기는 것이 아닙니다. 현세에 와서 기독교회는 왜 힘이 없어졌는가? ‘아, 이것은 안 되겠다. 저것은 안 되겠다.’ 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안 되는 일이 안 되는 것일 뿐, 모든 것이 그런 것은 아닙니다. 예정한 사상관으로 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세계의 사상을 가지고 누군가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해낸다면 거기에 따라서 행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것은 앞의 위치를 빼앗기는 것 같은 신앙 관념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밀어젖혀야 합니다. 천번 만번 밀려올 지라도 그것을 밀어젖히고 자신보다 권위와 힘을 가진 모든 자가 인정할 수 있는 입장에 서게 될 때 하나님은 최후의 승리를 결정하시는 것입니다.
오늘까지의 기독교가 죽음의, 혹은 탕감의 조건을 세계적으로 세우는 그 역사에 있어서는 어떤 승리의 기준을 세웠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소원은 탕감의 세계만은 아닙니다. 이상세계의 건설인 것입니다. 이 이상세계에 가까워짐에 따라서 탕감의 세계의 최후의 한계가 나타날 것입니다. 그 한계를 넘을 때는 과거와 같은 신앙의 상태로서는 안 됩니다. 여기에 필요한 것은 현세의 인류가 흠모하고 있는 최후의 하나의 세계인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창조 본연의 이상세계인 것입니다. 전부를 포괄하고 전부를 포용한 완전한 소원…. 완전하다는 것은 하나의 것을 놓아두고 다른 것으로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는 그 완전한 것을 목표로 하여 움직이는 것입니다.
역사와 문화의 원천으로 되어 온 종교가 최후의 단계에 와서 그 자체가 화해한다고 하는 것은 최후의 역사가 가까웠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 막다른 길에 서 있는 우리들은 무엇을 느껴야 하느냐? 지금까지 하나님의 섭리는 죄악을 없애기 위해서 개인으로부터 세계까지의 탕감의 조건을 세우셨습니다. 즉 희생의 역사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는 희생으로 시작해서 희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희생으로 시작한 역사를 때려치우고, 심판해 버리고 새로운 이상세계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심판을 거쳐 이상 단계에 달한 완전한 개인, 완전한 가정, 완전한 세계를 하나님은 바라고 계십니다. 그 완전한 이상을 예수님은 가르치지 못하셨습니다. 성경에는 아무리 읽어도 그런 것이 없습니다.
지금까지의 종교는 사회를 떠나 있는 것이었습니다. 사탄세계의 한가운데 들어가서 이것을 사방팔방으로 물리치는 힘을 가진 종교는 생활을 떠나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야말로 이상의 철저한 생활 기준을 중심으로 하고 하나님과 함께 있고 하나님의 편입니다. 하나님이 안쪽이라면 인간은 바깥쪽에 있어서 일체라고 하는, 내가 기뻐하면 하나님도 기뻐하고, 하나님이 슬퍼하시면 나도 슬프다고 하는 종교의 목적을 완성한 종교의 가치, 우리들은 그 의미와 가치를 알고서 종교 관념이 우리의 생활이 근원이 되는 이상이라고 하는 견해로 이 종말의 시기를 싸워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통일교회는 무엇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느냐? 심판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세계에 대한 최후의 심판을 하시기 전에 자기 개인을 심판하라. 그것은 무엇을 기준으로 하고서인가? 중심을 기준으로 하고서입니다. 중심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데 하나님의 외적인 것으로 심판해서는 안 됩니다. 지상에 대한 명령관계 등을 가지고 심판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중심하고 심판하라. 문제는 간단치 않습니다. 따라서 금후의 세계를 움직일 이상은 무엇인가 하면 그것은 하나님에게 통하는 심정적인 것입니다. 그 심정을 중심으로 하는 곳에는 평화가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심정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신경에 이어지는 모든 것을 맡고 있습니다. 그것은 생활 관념 등 모든 것을 통괄할 수 있는 내용과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생명의 근원의 위치에 있는 것이 심정이니까 생명을 부정하더라도 심정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존재를 부정하더라도 심정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심정은 존재 이전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하는 결론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통일교회는 심정을 중심으로 하고 산다고 가정합시다. 그러면 심정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심정이라는 것을 본 일이 없습니다. 심정이 긴 것이냐, 둥근 것이냐, 높은 것이냐 하고 따져 묻는다면 대답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있으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 사람이 떠나면 그리움이 가득히 고여 옵니다. 신경의 최고 촉감까지 가득히 괴어 옵니다.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가득히 차 옵니다.
우리는 오감으로 한계를 잴 수 있는 그런 심정은 우리에게 필요치 않습니다. 설명은 되지 않으나 확실히 충일(充溢)되는 것입니다. 거기에 접하면 닫힌 입이 열려집니다. 울고 있던 눈이 반짝반짝 하고 웃습니다. 사색(死色)을 하고 있던 사람이 평화스럽게 됩니다. 그것이 사라지면 비참한 것입니다. 그것이 찾아오면 세계가 필요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심정만 하여도 이러하니까 절대적 심정의 주체이신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고 그 심정에 접한 사람은 어떠할 것인가? 이것은 표면에는 나타나지 않으나 존재하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한 심정주의를, 심정 이념을 중심으로 하고 이제 새로운 세계를 향해서 나아가자고 하는 것이 통일용사들인 것입니다.
그러면 심판은 어디서부터 하는 것인가? 심판의 한계는 어디까지 접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하나님이 복귀의 최정점으로 하는 것은 국가인 것입니다. 앞에서 예수님의 소원은 국가라고 하였습니다. 그 국가는 이상국가인 것입니다. 지금의 국가가 아닙니다. 그것은 심정 심판의 한계를 넘은 개인들이 모여 가정, 민족, 국가를 이룬 것입니다.
이렇게 x를 그려 보자. x를 그릴 때 부작용은 어디서 일어나는가? 그것은 교차점에서 일어납니다. 통일교회가 이 세계에서 어떤 시대에 한 점을 일으켜 교차하는 곳에는 부작용이 일어납니다. 개인에 있어서는 육심과 양심의 경계에서 부작용이 일어납니다. 개인으로부터 가정에, 가정으로부터 교회에 부작용이 일어나고, 만약 통일교회가 동경에 나타나면 동경의 모든 교회에 부작용이 일어납니다. 종교의 이름으로 행한다면 부작용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사회운동의 문제가 된다면 부작용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이상세계 실현으로 나타날 것 같으면 문제가 일어납니다.
그러면 부작용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려면 어떻게 하면 좋은가? 이 부작용을 막는 것이 심판인 것입니다. ‘반대하는 자는 죽여 버려라.’ 고 하는 것은 통용되지 않습니다. 그 부작용을 그대로 두다가는 하나도 남아지지 않습니다. 하나도 용서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를 죽이지 않도록 상대를 세워야 합니다. 내가 죽는 위치에 들어가게 되면 나는 하나님의 동정을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행복한 위치에 있는 존재이니까 참으로 불행한 입장에 들어서 사는 그 일에 의해서 두 입장의 사람들이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까닭에 교차하는 일이 부작용을 일으키는 것이니까 교차하지 않고 뒤에 붙으면 됩니다. 그렇게 하면 함께 평행 위치를 지키고, 함께 가더라도 부작용은 없는 것입니다. 부작용이 일어날지라도 둘 가운데서 통일교회 식구는 그 입장을 취할 수가 있지만 상대는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를 어떻게 해야 하느냐? 그를 앞에 세웁니다. 그러한 방침을 세우면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최고로 완전한 것은 최고로 불완전한 곳에 가도 점령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일본의 맨 밑창에 들어가서 폐품 수집을 하는 것은 물론, 몇 천만, 몇 억을 가진 재벌 앞에 가서 ‘신문 한 장 주십시오.’ 하더라도 당당한 심정으로 달라고 해야 합니다. 그러면 1년이 경과하고 2년이 경과하여도 때의 경과와 함께 반대 방향에는 부작용이 일어납니다. 최하급에서의 일이 최상급에서 부작용이 일어납니다.
그렇다면 일본은 어떻게 될 것인가? 일본을 복귀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일본을 복귀하려면 세계를 복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일본을 복귀하기까지 일본의 통일교회를 필요로 합니다. 일본이 복귀되면 일본의 통일교회는 필요치 않습니다. 따라서 세계를 복귀하면 통일교회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더 큰 것이 필요하니까 작은 것을 세우시는 것입니다. 세우시는 데는 완전한 것을 세우십니다. 이 위치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는 완전한 것에로의 고통의 길이 필요한 것입니다. 따라서 불완전한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완전한 것, 그것이 필요합니다.
우리들의 사상이라고 하는 것은 일본만이 대상이 아닙니다. 세계를 보십시오. 세계복귀를 위하여 우리는 생활에서 부딪칩니다. 심판의 권위를 가지고 자기를 칩다. 예를 들면 ‘저쪽으로 가지 않겠어?’ 하면 ‘가!’ 하고 한마디로 명령하여 자기가 자기를 차 버립니다. 전세계를 울릴 수 있는 영웅을 만드는 데는 선생님은 진지한 자리에서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은 감옥에 들어가더라도 보통으로 여기고, 채찍을 맞더라도 보통으로 여깁니다. ‘때려라. 때리는 네 손이 아픈가, 매를 맞는 나의 정강이가 아픈가 보자. 살가죽이 찢어지는가 때려 보아라.’ 고 합니다. 과거에도 여러 번 그랬습니다. 그 입장 이상의 효행자, 그 이상 전세계를 울릴 수 있는 효행자, 그 이상 하늘의 인정을 받을 수 있는 효행자는 어디에 있는가? 하고도 하고도 하늘에 감사하는 효행자는 하나님을 울리고 세계를 울립니다. 세계를 울리는 자는 모든 것을 움직입니다. 모든 것을 움직이는 자는 모든 것을 얻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는 지금까지 심정의 기초를 쌓아온 것입니다. 개인이 그러한 생활을 하면 개인의 심판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가정이 그러한 생활을 하면 가정의 심판이 끝난다는 것입니다. 통일교회가 그러한 생활을 하면 이 일본에서는 통일교회가 조상이 되는 것입니다. 일본 전국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면 일본을 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계 인류 전체가 할 수 없는 일을 일본 국민이 앞장서서 하면 일본 국민은 세계를 리드하는 국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인격에 합당한, 그러한 이념과 그러한 완성의 기대가 된 하나님의 심정에 사무친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남아질 수 있는 천국의 백성인 것입니다.
우선 일본을 복귀하라. 선생님 이상으로 사랑하라. 세계를 선생님이 사랑하는 이상으로 사랑하라. 하나님 아버지를 선생님이 사랑하는 이상으로 사랑하라. 만약 그대들 앞에 선생님이 쓰러지면 선생님의 시체에 매달려 울어서는 안 됩니다. 선생님이 사랑하는 하나님을 누가 사랑하느냐? 선생님이 사랑하는 인류를 누가 사랑하느냐? 선생님이 사랑하는 천주를 누가 사랑하느냐? 선생님이 진 책임을 누가 지느냐? 그렇게 사랑하지 못한 입장에서 하나님께 탄식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여러분에게 선생님이 남기고 싶은 말입니다.
우리들은 이 시대와 이 환경에서 심판의 길을 개척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심판받을 인류를 구원하지 않으면 안 되는 우리들이 무엇인가를 가지고 가지 않으면 그들을 구원할 길이 없다고 하는 것을 알았거든, 부디 눈물과 함께 피와 함께 땀과 함께 그들을 구원하기까지 노력하고 최후의 승리를 쟁취해 주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지상에서 그 무엇을 얻지 못하고 죽더라도 하늘에서는 최고의 승리자인 것입니다. 이 곤란한 세계의 사정과 운세 가운데에서 통일의 식구가 각국에서 어느 누가 움직일 수 없는 기반을 만든다면, 세계는 재창조, 재부활할 수가 있다고 하는 자신을 가지고 나아가 주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여! 이렇게 해서 참으로 당신의 아들인 것을 알았습니다. 아버지여! 당신의 눈물 빛도 그 맛도 알고 싶습니다. 당신이 흘린 눈물과 땀의 그 고통이 필요합니다. 당신이 심정을 짜면서 지금까지 역사를 움직여 나오신 그 수고의 심정이 필요합니다. 당신의 웃는 그 이상(理想)의 얼굴이 필요합니다. 보좌에 앉으셔서 승리의 권세를 가지고 천주를 명령하는 그 당당한 의기와 몸이 필요합니다.
아버지여! 이제 하나님을 위하여 통일교회 무리들을 갖추시고 하나님을 위하여 죽음의 경지를 참고 가는 가련한 무리들을 필요로 하고 계신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한 길을 가지 않으면 하나님은 과거의 중심인물들이 섰던 위치에 세울 수 없는 것을 알았습니다. 당신은 일찍이 최고의 소원을 이루시기 위하여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지만, 이스라엘 민족이 그 사명을 다 하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지금까지의 역사는 죄악 가운데서 슬픔의 역사로 흘러왔습니다. 부디 과거의 조상들이 범해 온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혹시 일본이 과거에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지은 것이 있다면 이 일본 통일교회 식구들의 눈물과 땀과 피의 수고를 보고 용납하여 주십시오. 당신은 아브라함에게 의인 열 사람이 있으면 용서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와 같이 이 나라 가운데 하늘에 대하여 충성을 다짐하는 100명의 사람이 있으면 이 일본의 장래에 새로운 방향을 나타내실 것을 약속해 주실 당신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희들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마음을 굳히어 하늘을 향해서 일어섰습니다. 아버님을 위해서 일어섰습니다. 이 일본을 짊어지고 세계 어디까지라도 갈 하늘의 용사로서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지금 여기에서 훈련하고 있습니다. 당신께서 이들을 인정하시고 이 훈련받은 사람들을 믿는다면 세계 어떠한 곳에라도 이 민족을 앞에 세워 주실 것을 원하는 바입니다.
아버지여! 특히 지금까지의 역사상에서 비참한 길을 더듬어 온 동양문명권에 있는 모든 백성을 사랑해 주십시오. 물질 문명이며 외적 문명인 서양문명권 앞에 동양문명권은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외적인 모든 것은 내적 위치에 서는 자에 의해서 주관되어지지 않으면 안 되는 원리에 의해서 드디어 서양문명은 동양의 문명에 접근하면 접근할수록 역(逆)으로 모든 것을 잃어버리지 않으면 안 되고, 동양의 내적 정신문명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이지 않으면 안 될 운명의 시대가 되어 온다는 것을 압니다.
이러한 현실에 있어서 동양만이 아니고 우주 전체에 대처하여, 우주 통일의 책임을 다하기 위하여 우리 통일교회를 이 동양의 일각에 세워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부디 지금 사탄의 속박 가운데서 고통받고 참고 탄식하는 인류를, 우리들의 손에 의해서, 우리들의 피와 눈물과 땀을 통하여 구할 수 있기를 원하옵니다. 우리들이 힘을 낼 수 있게 하여 주시옵고, 우리들에게 결심과 용기를 주시옵소서. 주의 이름으로써 아뢰옵나이다. 아멘.
이 현상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중심을 세우지 않으면 영원히 존재할 수 없습니다. 우리들 개인에 있어서도 중심을 결정한 사람은 강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원히 존재할 수 있는 터전을 결정한 다음 거기에서부터 출발하여 새로운 기준을 세워 나가야 된다는 것을 우리들은 생활을 통해서 항상 체험하고 있습니다.
몸의 중심은 마음입니다. 자연은 사람을 중심으로 존재합니다. 범위를 더 넓혀서 생각하면, 세계는 만물을 창조한 그 이상(理想)을 중심으로 하여 하나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신다면 모든 것은 그분을 중심으로 하나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오늘날 이 세계에는 수많은 국가들이 있습니다. 그 국가들은 서로 각각 다른 배경과 문화를 갖고 있으며, 걸어 나온 노정도 제각기 다르고 역사 또한 다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존재하고 있는 국가들 중에서 어차피 하나의 중심이 되는 국가 형태가 나타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중심이 되는 그것은 어느 한때에 지나가 버리는 것에 지배받아서는 안 됩니다. 또 주위의 어떠한 것에 지배받아서도 안 됩니다. 그것은 모든 현상계의 중심이 되어야 하며, 사람들이 추구하는 모든 것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또 이 중심은 시대를 움직이고 역사의 대본(大本)을 기본으로 존재하고 있는, 이 현세의 어느 누구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중심이어야 합니다. 나아가 그 중심은 미래의 어떠한 세계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중심이어야만 합니다. 그 중심은 역사가 지금까지 추구해 나오는 것이고, 선의 길을 찾아 나가는 종교가들이 지금까지 추구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중심이 과연 이 지상에 나타났느냐? 아직도 그 중심은 완전히 나타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계셔서 이 지상에 하나의 중심을 세워야겠다는 소망을 갖고 계신다면, 이 세상에 진정한, 인간을 중심으로 한 진정한 사회와 진정한 세계가 수립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은 하늘땅이 동시에 원하는 것이요, 우리 인류 전체가 바라는 중대한 과제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지상은 하나의 시점에서부터 변하고 또 변하여 오면서 그릇된 방향으로 흘러 나왔습니다. 그러나 최후까지 남게 되는 기준, 즉 하나의 중심을 결정해야 한다는 목적권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모든 존재물은 절대적인 신(神)을 중심으로 하고, 나아가서는 절대적인 이상을 중심으로 하여, 그 중심을 그리워하고 또 그리워하면서 그것을 찾아 나가는 데서 기쁨을 찾고 생의 가치를 발휘할 수 있는 내적 기준을 찾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지상에 하나의 이상세계가 세워졌을 때 그 세계의 중심이 될 개개인이 그 이상세계와 마음속 깊이 영원한 유대관계를 맺을 수 있는, 다시 말해서 일체화할 수 있는 중심 위에 놓여지는 데는 결코 외적인 조건을 가지고서는 안 됩니다. 이제까지의 역사관으로 말해 왔던 어떠한 것으로도 안 되고 자아 관념으로도 안 됩니다. 인간의 마음 깊숙한 밑바닥에서 영원히 불변의 형(型)을 유지하고 있는, 하나님의 창조이상 앞에 영원히 수수작용을 할 수 있는 심정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맨 처음 천지를 창조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이 천지와 당신의 내적 기준과 영원한 인연을 맺기 원하시는 우주관과 창조이상과 창조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것의 중심은 바로 하나님의 심정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생각할 때에, 우주의 근원은 어디까지나 하나님 자체이지만 우주 창조라는 현상을 일으키게 한 최초의 근거는 하나님의 심정이었던 것이요, 그 심정을 중심으로 일체화할 수 있는 이상권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들은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주를 창조하시기 전에, 그 심정으로 만물 창조의 목적을 생각하시고 모든 성상을 중심으로 모든 피조물을 창조목적과 일체화시키면서, 하나 하나의 창조 과정을 통과시켜 지어낸 것이 창조이상의 인간인 것입니다. 그것이 구체화되어 나타난 것이 하늘을 상징한 남자고 땅을 상징한 여자입니다. 또 개인에 있어서는 그것이 마음과 몸으로 나타났습니다.
이와 같이 이 현상계의 모든 것은 주체와 대상의 관계를 구체화해서 하나의 목적권 내에서 우주의 대운에 휩쓸리면서 그들 나름대로의 생활 기준을 세우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중심으로 하여 그 목적세계에서 존재하고 생활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지 못했다고 하는 것은 우주의 비극이며 인류역사의 비극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이상 실체로서의, 목적의 중심으로서의 인간이 하나님의 심정과 일체화하였다면, 그 누구도 방해할 수 없고 침범할 수도 없는 절대적인 기준이 달성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조상이 그 심정적인 일체의 것을 상실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다시 그 이상의 세계, 목적의 세계를 복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타락의 결과로 목적관이 다른 위치로 돌아가 버렸고, 심정적인 절대 기준이 반대 방향으로 향하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하나님을 중심으로 해야 될 그 중심이 사탄을 중심으로 하는 반대의 위치로 옮아가게 된 것입니다. 가서는 안 될 자리에 가서 머물게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을 원래의 자리로 바꾸어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타락한 인류에게 시대에 따라 새로운 이상과 새로운 심정을 찾아 주시려고 지금까지 섭리를 거듭해 나오셨습니다. 외적인 기준은 물론 내적 기준의 실체로서의 인간은 심정적인 절대 기준에 서서 그 목적세계에서 생활해야 했는데, 타락하여 그 세계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이제까지 인간들은 오랜 역사를 통하여 그 목적세계, 이상세계, 행복하고 평화스럽고 자유로우며 기쁨이 넘치는 세계, 심정이 평안히 쉴 수 있는 최고의 세계를 찾아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횡적인 이 세계를 자기 것으로 한다 해도 그 마음속 깊이 스스로 기뻐할 수 있고, 모든 것을 대하여 무한히 기뻐할 수 있는 심정의 기준이 세워지지 않는다면, 잃어버린 세계를 다시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만일 심정의 기준을 세우지 않고도 그 세계를 찾았다면 그것은 어느 한 때에 다시 정리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어떠한 이상이 있다 해도, 혹은 온 세계를 하나로 하여 이상적인 평화의 세계를 수립해 본다 해도, 개개인이 그 세계를 생각하고, 그 세계에 응하고, 그 세계의 움직임에 따라 그 세계와 하나될 수 있는 심정의 기준을 갖지 못하면, 아무리 원하던 이상세계라 하더라도 그 세계는 자신과 아무런 인연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세계와의 관계가 멀면 멀수록 우리들은 복잡해지고 우리의 내부에서는 심한 갈등을 겪게 됩니다. 심정의 기준에 응하는 모든 것이 그 심정과 하나되어 중심에게 강한 감동을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중심은 심정 기준에 대응하여 전체를 향해 움직여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불변의 수수작용의 기반이 심정과 이상을 중심하고 일어나지 않는다면, 우리들이 원하는 최고의 세계, 인류 본래의 목적의 세계, 혹은 하나님께서 창조 이전부터 염원하시던 목적의 세계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런 각도에서 볼 때, 하나님이 안 계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분명히 계십니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세계가 필연코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그러한 목적의 세계는 이루어 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과연 이 세상을 어떻게 바로잡으실 것인가? 하나님은 결코 힘으로 하시지 않습니다. 자연의 법칙과 원리에 따라 새로운 방면에서 그 중심과 목적을 세워 나가십니다. 그러면서 여기에 타락한 인간을 묶어 가지고 목적의 세계까지 끌어올리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제까지의 섭리역사였습니다. 이와 같은 안목을 가지고 성경을 본다면, 하나님이 시대마다 한 중심을 세우시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희생과 노력을 해 나오셨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역사가 증명하는 것입니다.
노아를 중심으로 세우실 때도, 하나님은 주위의 모든 것이 천적(天的)인 목적과 인연을 맺고 수수관계를 맺는 과정을 거치게 한 후 정해진 중심을 따라 상대권으로 들어가게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중심적인 인간을 대하실 때, 중심을 세워 가지고 일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 반대의 방향에 세워 가지고 중심으로 돌아오는 길을 걷게 하십니다. 그러니 중심적인 인간은 거기에서 사방(四方)을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되고, 그 사방의 모든 것은 중심을 향하여 일체화하는 절대적인 인연권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노아를 그러한 자리에 세우셨습니다. 노아는 그 중심의 자리에 서서 목적을 향해 가는 데 있어서의 장애물을 모두 타파해야 했습니다.
사탄세계, 악의 세계에 있어서 천적 위치를 결정해야 하는 선한 중심인물은 언제나 반대적인 위치에 서야 하기 때문에 박해를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개인적으로도 그러하고 가정적, 혹은 민족적으로도 그러합니다. 그 앞에는 현상계의 모든 것이 괴로움의 조건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노아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당시의 세상 사람들은 모두 그를 공격하고 조소하였습니다. 더군다나 노아는 1년도 아니고 10년도 아닌 120년 동안이나 그러한 처지에 있었습니다. 자기 자식들도 반대하고 자기의 처도 반대하였습니다. 반대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도끼를 가지고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배를 만든다는 그 자체를 당시의 사람들은 도저히 이해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120년 후 세계 인류를 심판하신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니 그 기간 중에 사람들은 준비를 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 절대적인 요건이 있었던 거예요.
어떠한 세상에 놓여진다 하더라도, 어떠한 고난 속에 놓여진다 하더라도 절대적인 목적을 생각하고, 약속한 절대적인 위치를 소망하며, 이해하기 어려운 처지에서 모든 것을 참아 낼 수 있는 사람을 하나님은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리에 설 때 비로소 하나님의 심정이 그를 향해 움직이게 되고, 또 그는 하나님의 심정적인 중심으로 세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자리에 선 노아를 그 누구도 흔들 수 없는 최고의 승리자로, 우주의 중심으로 결정하려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노아의 홍수심판이었습니다.
아브라함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들의 조상이 목적의 중심에 서기 위한 소망을 품고 섭리상에 나타나게 될 때에는 반드시 그 환경으로부터 쫓기는 입장에 서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방팔방으로부터 쫓기고 후퇴하게 되더라도 거기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그 자리에 남아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영원한 실체로서 남아진 입장에 서 있어야만, 비로소 하나님이 그를 통하여 섭리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노아 때도 그러했고, 아브라함 때도 그러했고, 예수님 때에도 그러했습니다. 그러니 오늘날 이 세상에서도 역시 그렇게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인간이 태어날 때 창조목적에 일치되어, 즉 하나님의 목적과 심정을 이어받아 탄생한다면 하나님이 심정으로부터 떨어질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 심정을 중심으로 목적하는 세계가 바로 기쁨의 세계요, 이상의 세계인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하였기 때문에, 응당 그 반대의 방향을 취해서 되돌아오는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되게 돼 있습니다. 최저에서부터 최고의 자리까지 찾아 올라가, 즉 외적인 것에서부터 내적인 심정까지 찾아 들어가 중심을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입장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복귀노정을 총괄적으로 살펴보면, 하나님은 지금까지 소생, 장성, 완성의 3단계를 통하여 섭리해 나오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시대에 있어서의 종의 시대, 신약시대에 있어서의 양자의 시대, 성약시대에 있어서의 참자녀의 시대를 넘어 참부모의 시대로 들어가는 이것이 복귀 노정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한 시대의 섭리적인 절대 기준을 결정하실 때 그 기준은 어디까지나 하늘 편에 속해 있기 때문에, 사탄이 절대적으로 원치 않는 것이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하여 하늘 편의 절대적 기준이 세워지게 되면 그 주변에서부터 사탄은 몰리고 또 몰려 도망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사탄은 최대한으로 그 기준을 미워하게 되고 하늘 편에서는 최고로 환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입장이 결정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구약시대에 있어서의 전인류에 대한 구원섭리는 종의 입장으로의 구원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이 시대에는 시작의 시작에서부터 끝의 끝까지 남아 승리할 수 있는 중심을 세우지 않으면 종으로의 복귀기대를 세울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노아나 아브라함 등 중심인물을 세우시어 4천년이라는 역사를 이끌어 오시면서 수많은 희생을 치르셨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종 중에서도 세계적인 종, 혹은 천주적인 종을 세워 종의 위치를 절대화하고, 그 종의 심정 위에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기준을 세우고자 하셨습니다. 그렇게 한 단계씩 한 단계씩 전진해 나오는 섭리를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들은 역사상에 세움받았던 우리의 선조들이 그 목적과 그 이상과 그 사상을 지키면서, 어떠한 장애물이 가로막아도 쓰러지지 않고 끝까지 걸어 나갔던 역사적 사실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그러한 자리에 서야만 우리는 중심으로 결정된 사람과 일체가 될 수 있는 것이요, 소망하는 것에 있어서나 생활에 있어서도 그 중심과 하나될 수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환경과 싸우는 데 있어서도 그 중심과 일체가 되어야 그 중심이 얼마나 중요한 위치에 있는 존재인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하여 모든 가정, 모든 민족, 나아가서는 온 세계가 그 중심 앞에 순종하고 일체화하는 날을 목적하시며 지금까지 섭리해 나오셨습니다.
예수님 때에도, 예수님이 이 지상에 오셨을 때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가 하나되어서 예수님과 일체가 되고 그에게 순종하였더라면, 그들을 중심으로 하여 하나님은 새로운 세계를 이루기 위한 섭리의 출발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 이스라엘 민족은 수많은 교파로 분열되어 예수님의 기대와는 반대되는 입장에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오랜 역사를 두고 세운 종의 기준이 허물어졌고, 승리할 수 있는 환경이 깨뜨려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 지상에서 하나님의 실체 아들로 설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본래의 목적을 중심으로 움직여야 했으나 그것과는 달리 그 반대의 입장에서 행동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선조들이 세워 놓은 역사가 무너져 버렸으니, 그 기준에서 다시 승리의 조건을 세워서 본래의 목적을 이루려 하셨습니다. 그러한 걸음의 출발로 3년 공생애노정을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하여 어떠한 중심을 결정하신 다음, 또다시 거기에 보다 큰 중심을 보내어, 그 중심과 연결시켜 가지고 소생․장성․완성의 단계로 역사를 이끌어 나오셨습니다. 그리하여 최후에는 세계적 중심, 천주적 중심, 모든 현상계의 중심, 이 현세(現世)의 중심이 되어 절대적인 승리자로 설 수 있는 존재로 결정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수많은 종교가 구하고 있고, 하나님께서도 섭리적으로 구하시는, 즉 이상 실현의 중심적인 인물이 출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까지의 역사는 무엇을 구하여 나왔는가? 우리들은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서만 급급해 나왔지만, 역사는 이를 넘어 절대적인 하나의 중심을 구하여 나왔습니다. 때문에 소생․장성․완성을 구하여 나온 세계는 오늘날 그 중심과 하나되는 원(圓)의 세계를 이루어야 합니다. 원을 꾸미는 데는 가운데서부터 꾸며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타락한 인류이기 때문에, 그 반대쪽에서부터 그 중심의 입장을 구하면서 가운데를 향해 들어가야 합니다. 세계는 지금 그런 단계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주위를 충분 히 살피면서 중심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민주주의에서도 내적인 것을 구하고 있습니다. 공산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과연 민주주의나 공산주의가 이 세계를 일체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그들에게는 세계를 일시에 소화할 수 있는 내적인 힘이 없습니다. 참으로 이 세계를 하나로 만들고자 하는 사상이 있다면, 그 사상은 이 세계를 소화할 수 있는 내적인 조건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우주에 중심이 둘이 있을 수 없습니다. 외적인 것은 중심이 될 수 없습니다. 수속(手續)이 중심이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들이 외적으로 볼 수 있는 그 어떠한 형태가 중심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을 설명할 수는 있습니다.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은 그것이 논리적인 체계 위에 있다는 것입니다. 논리적인 체계 위에 있다는 것은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만들어진 것에 지배당하지는 않습니다. 우주관이라든가 세계관과 같은 어떠한 관(觀)이 없는 이상, 우리는 어떠한 방향을 결정지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새로운 사상은 관계하는 모든 방면에 적응할 수 있는 내용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우주의 중심은 창조 본연의 목적과 심정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심정에는 무엇이 필요한가? 그것에 대응할 수 있는 대상물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반발적이어서는 안 되고 융합적이어야만 합니다. 어떠한 것에 대해서 반대되는 것이 부딪쳐서 생겨나는 결과는 심정에서 나타나는 결과가 아닙니다. 만일 그것이 옳다면 그 반대라고 하는 관념으로 인해 금후의 세계가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들은 심정을 기준으로 삼아야 하는데 그 심정은 절대적으로 성스러운 것입니다. 우주를 포섭하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로 성스러운 것입니다.
심정에 대하여 반대되는 결과로 나타나는 것은 투쟁과 같은 반발작용으로 어떤 것을 파괴하고자 나타나는 것이지, 그 자체가 반대적인 것에 대하여 반대의 조건을 나타나 가지고 하나의 목적을 이루어 나가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된다고 하는 것은 서로 상반되는 두 개의 개념으로서 관념이 다르고 내용이 다른 것을 말합니다. 이들은 그 자체가 항상 불안하여서 그 이론으로는 목적의 세계, 평화의 세계, 태평의 세계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몸과 마음이 있습니다. 여기에 외적인 어떤 반대의 요건이 없다면 고통이란 없을 것입니다. 그냥 존재하는 것이지요. 자연의 법칙에는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이 자연의 현상은, 즉 천적인 법도는 이 우주의 어떠한 부분에도 응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안심할 수 있는 거지요. 그러나 만일 이에 저항하는 부분이 있을 경우에는 파괴현상이 일어납니다. 그러한 반대의 조건이 나타날 때에는 하나님은 언제든지 거기에 백 퍼센트 반발합니다.
이것이 잘 작용해서 하나의 목적이 이루어지면 좋은 결과를 나타내게 됩니다. 만일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이 우주는 성스러운 중심이 상대권을 필요로 하는 이 우주의 목적관을 부정하는 것이 됩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과학에 있어서도 앞에서 말한 현상이 일어나는데, 한꺼번에 전부 똑같이 일어나는 게 아닙니다. 예를 들면 얼음이 얼 때에도 한꺼번에 전체가 얼어붙는 것이 아니잖아요? 어느 한 점을 중심으로 하여 그것에 응하는 전체의 작용에 의해서 전체가 얼게 되는 것이지, 반대로 전개되지는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주가 힘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물론 모든 존재가 힘에 의해서 구성되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힘이 존재하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한가?
어떠한 존재가 힘 자체는 아닙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상대적인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힘을 인정하기 전에 상대 기준을 인정해야 합니다. 상대 기준을 인정한다면 주체와 대상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주체란 때에 따라서 변화되는 존재여서는 안 됩니다. 목적을 결정하고 영원한 존재권을 만들 수 있는 존재가 아니면 안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인정할 수 있는 상대적 관계는 주체에 대해 상응할 수 있는 합목적(合目的)인 관계여야지 상대적으로 반발하는 관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상대적 관계란 정(正)이라는 기준에 반(反)이라는 것이 서로 맞서서 그것이 하나로 통일된다고 하는 정반합(正反合)의 관계가 아니라(반대의 관념이 힘을 생기게 할 리가 없기 때문에 이것은 논리적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주체 앞에 대상이 응하는 관계입니다. 즉 주체와 대상이 상응하여 공통의 목적을 중심으로 작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완전한 수수작용을 하여 상대권에 도달하면 힘이 나타나게 되고 그때에 비로소 중심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작용하더라도 그것이 반대로 작용하게 되면 세계는 파괴되고 맙니다.
융합하고 상응하는 상대관계를 가지고 수수작용을 하면 그것은 자연의 절대적인 중심이 되고, 그 중심의 위치는 목적의 중심이 되는 동시에 심정의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이 중심은 심정과 목적 관념의 수수작용에 의해 결정됩니다. 이렇게 결정되는 위치에 서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이것이 생성(生成)하는 데 있어서의 절대적인 공식이라면, 그 목적을 전개하는 중심을 축으로 모든 것이 작용하고 있는 셈이 되는 것입니다. 만일 이것을 파괴하려는 그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이것 이상의 심정 기준 위에 서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지구가 지축을 중심으로 회전하는 것과 같이 신의 심정과 목적을 중심으로 창조된 피조물도 그 목적을 중심으로 수수작용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수수작용을 하는 데 있어서의 매개체가 인간입니다. 이리하여 3점(三點)을 이루는 것입니다. 즉 주점(主點)과 객점(客點), 그리고 그것을 연결하는 중심 기준인 인간, 이것들이 3점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일어나는 힘의 근원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신(神)입니다. 이 힘은 결코 무질서한 것이 아닙니다. 그냥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그러한 힘도 아닙니다. 그 힘은 최고로 심정적인, 그리고 인간의 마음의 중심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이성(二性)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존재물은 두 개의 목적을 갖고 있다는 결론이 세워질 수 있습니다. 우리들 자신을 놓고 보더라도 두 개의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를 중심으로 하는 목적이 있는 동시에 우주와 관계맺으려 하는 제2의 목적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완성과 함께 우주의 완성을 소망하는 이중의 목적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결과적인 입장에서 보면, 모든 존재물이 반발적이고 투쟁적이며 중심과 반대의 위치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언제나 발전할 수 있는 조건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인간에게는 몸의 목적이 있는 동시에 마음의 목적이 있습니다. 마음은 전체적인 목적을, 몸은 개인적인 목적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람이면 사람, 그 외 어떤 존재물도 내외적인 목적을 함께 가지고 연결되어 있습니다. 상하․좌우․전후의 인연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입체원(立體圓)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만일 이 입체원이 성립되지 않으면 완전한 중심은 결정되지 않습니다. 중심이 결정되어 가지고 영원한 이상과 영원한 중심의 힘이 동반하는 데에서만 영원한 운동은 시작되는 것이고, 여기서부터 영원하고 무한한 원의 운동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은 그 어떠한 포물선을 그리며 운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목적으로 하는 거리와 높이와 폭과 그 위치가 다르기 때문에 그 형태는 다르게 나타나지만, 내외 작용에 있어서는 주종관계를 가지고 원운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神)은 오늘날 이 지상의 중심을 구하고 있습니다. 가령 일본 사회를 고찰하여 보면, 거기에는 여러 가지 생각과 움직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영원히 존재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중심을 갖추는 내용 여하에 따라 그들의 생명은 결정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단체가 어떤 중심을 위하여 어느 한 내용을 가지고 백년, 혹은 수세기 동안 연구한다고 하면, 그 단체는 그 중심과 완전히 일체가 될 때까지는 존재합니다. 그렇지만 일단 그것과 일체화되면 흡수당하게 됩니다.
이와 같은 각도에서 지금까지의 역사를 살펴보면, 높은 문화가 낮은 문화를 흡수해 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여서 이것이 궁극에 가서는 하나가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신(神)은 지금 중심을 구하고 있습니다. 신이 구하고 있는 이 중심이 세워진다고 하는 것은 신의 최고의 이상, 최고의 이념을 중심으로 한 세계가 나타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신이 소망하는 목적과 심정의 일치가 이루어질 곳은 어디일 것인가? 그곳에는 30억 인류를 대표한 절대적인 심정과 절대적인 목적을 가진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이야말로 전인류가 소망하는 참어버이입니다. 그러므로 그 앞에서 마음이 흐트러지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마음을 다시 가다듬어야 합니다. 어떠한 외적 장애에도 대응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그러한 최고의 승리적 기준 위에 서 있는 사람입니다. 신의 섭리는 이러한 방법을 통하여 행하여집니다.
앞으로 지상에서는 신의 목적세계에 들어가서 신과 대응할 수 있는 자만이 존재하게 됩니다. 오늘날 이 세계에서는 우리가 보고 있는 바와 같이 모든 집단은 집단끼리 서로 싸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싸움이 신의 목적 세계와 대응할 수 없는 무목적인 싸움이라면 결국에 가서는 패퇴하고 맙니다.
현재에 있어서 어떠한 것이 참이고 어떠한 것이 거짓인가 하는 것을 안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오늘날 모든 사람들이 최고의 세계라고 생각하는 그 세계가 신 앞에 반역하는 세계일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참된 세계란 신을 절대적인 중심으로 하는 세계입니다. 그 목적의 세계는 역사적 목적인 동시에 시대적인 목적, 미래의 절대적인 목적, 또는 신의 창조목적과도 일치되는 세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세계가 이루어지면 신이 기뻐하는 동시에 인간도 기뻐하고 천지도 함께 기뻐하게 됩니다. 그리고 내용적으로는 심정이 일체가 되어서 그 어느 것도 분리시킬 수가 없게 됩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하나가 된 완전한 사람을 중심으로 하여 세계는 새로운 세계로 전환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 세계는 한 중심에 의한 진리를 필요로 합니다. 진리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것에도 영향을 받지 않고 또 어떠한 것에도 침범을 당하지 않는 것이라야 합니다. 그리고 몇천 몇만 가지의 이론을 가지고 논박하더라도 변하지 않고 그에 대해 해명할 수 있는 절대적인 것이라야 합니다. 이와 같은 진리를 찾아 세운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 사람은 구인주(救人主)가 아니고 구세주(救世主)입니다. 여기에는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국가도 들어 있고 권세도 들어 있습니다. 미래적인 모든 것이 들어 있습니다. 구세주는 이러한 것들 위에 절대적이고 완전하게 세워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와 같은 입장에 서는 사람이 구세주입니다.
이러한 각도에서 생각해 볼 때, 2천년 전에 오셨던 예수님은 분명히 구세주였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구세주로 파견되었던 예수님의 본래의 목적은 기독교가 아니었습니다. 대우주관을 세워 거기에 완전히 일치하는, 중심이 되는 세계관을 지상에 세우는 것이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의 본래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려면 그 당시에는 로마 제국이라는 대적을 넘어서기 위한 준비를 해야 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내외 양면에 대응하여 승리할 수 있는 기준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사정 속에 있었던 예수님이 지지 기반 없이 ‘오오! 나는 우주에서 하나밖에 없는 최고의 주님이다.’ 할 수 있었겠습니까? 로마의 속국이었던 그 당시의 이스라엘 나라에서 만일 그와 같은 말을 한마디라도 하였더라면, 3년은 커녕 3일도 살아 있지 못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할 말이 많으나 너희들이 감당하기 어렵다.’ 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참 내용에 대해서는 언급도 못하시고 ‘성령을 통해서 가르쳐주마.’ 하는 약속만을 남기시고 가신 것입니다.
그런데 2천년 전 하늘로부터 오셨던 구세주가 구세주로서 세워야 했던 우주관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기독교를 만들어서 교회나 혹은 신앙심만을 길러내는 것이 목적이었을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이 양심을 가지고 있고, 또 성스러운 사랑에 넘친 인격을 가지고 있다면,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절대적인 이상권이 세워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한 세계를 세우는 것이 예수님의 목적이었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성경을 아무리 읽어도 나오지 않습니다. 다만 공공연하게 말씀하신 것은 ‘나는 심정의 중심이니라.’ 뿐입니다. 이것만은 말씀하시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말해도 예수님의 이 말씀은 역사가 보호합니다. 세계가 그것을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래에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것은 과거․현재․미래에까지도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어떠한 적도, 동지도 화할 수 있는 최초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실제에 있어서 그 세계관은 영(靈)을 중심으로 한, 천적인 심정 기준을 중심으로 한 것이기에 공중에 뜬 세계관입니다. 천주의 대운에 응할 수 있는 길, 절대적인 기준에 연결되어 있는 그 길은 가르쳐 주지 않고 지금까지 이념의 세계만을 연속시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세계는 언제까지나 허용될 수 없기에 하나님은 재림의 주를 보내 주마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다음으로 오시는 구세주는 무엇을 가지고 오실 것인가?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만인들이 다 함께 소원하는, 하나의 이상세계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이상과 이념을 가지고 오실 것입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심정도 가지고 오십니다. 아무리 이상세계, 지상천국을 만든다 해도 거기에 영원한 심정을 보증할 수 있는 절대적 기준이 있지 않으면 안 됩니다. 즉 하나님이 기뻐하고, 전인류가 기뻐하고, 역사가 기뻐하고, 시대가 기뻐할 수 있는 심정의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이념과 이상은 심정이 없이는 설 수 없습니다. 이 심정은 무한히 작용하시는 중심, 즉 절대적인 하나님에 의해 나타나는 기준입니다.
지상에서 통일의 세계관을 가지면, 어떠한 사상과 견해를 초월하여주의문제에 부딪치게 됩니다. 오늘날 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가 있습니다만, 그것들은 아직까지 결정적인 통일의 기준을 세우지 못하고 상대적인 위치에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원래 ‘주의’라고 하는 것은 실체 그 자체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 주의의 세계를 초월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주의는 지금까지 역사적으로 중대한 문제가 되어 왔습니다. 신이 있다면 그 신이 발전시켜 나갈 것은 당연합니다. 발전하는 데는 하나가 둘로 갈라지고, 둘은 또 셋으로 넷으로 갈라져 발전해 나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어떠한 주의라 할지라도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참된 것은 언제 어디서나 하나가 아니 될 수 없습니다. 참된 곳으로 가려는 여러 갈래 길은 하나의 방편일 뿐 참에 합치될 수는 없습니다. 방법이나 수단은 우주의 근원이 되는 진실과 일치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느 권내의 목적 완성을 위하여 ‘주의’는 진리의 본체를 찾아 나가는 방향적 작용을 해야만 합니다. 따라서 그 주의 이상되는 어떤 목적 자체가 생겨난다면 그것과 합치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완전한 목적권 내에 들어가게 되면 완전한 심정권이 나타나게 됩니다.
절대적으로 참된 것에는 온 우주가 호응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참된 것이 손상을 입어서는 안 됩니다. 진리가 있는 곳에는 모든 것이 그리로 몰리게 되어 있으므로 심정이 따르게 됩니다. 참된 것을 알게 되면 심정은 자연히 생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개인적인 것이든, 가정적인 것이든, 그 환경을 어떻게 승리했느냐 하는 기준에 따라 심정의 내용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우리 통일의 성도들은 지금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 지금 미국이 세계의 모든 국가를 주관하려 하지만, 모든 국가가 미국의 주관을 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전세계를 얻는 것 이상의 이상(理想)을 품고 그 가치를 찬양할 수 있는 그 기준이 더 문제인 것입니다. 그것은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는 것이고, 또 자기의 생명과 몇백 번 바꾼다 하더라도 변하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기준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인간은 그 기준을 세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그 세계를 향하여 전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통일의 성도들은 모든 장벽을 넘어서 가야 할 하늘의 정병들입니다. 그러면 우리 정병들의 목적은 무엇인가? 선을 가지고 환경을 넓혀 나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때려 가지고 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맞아 가면서 복귀해 나가는 것입니다. 때려서 복귀한다면 다시 맞아야 합니다. 이 말은 아직도 때리는 것이 있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철저히 맞은 다음에 복귀해 나가야 되겠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전법입니다. 따라서 통일의 성도들은 지옥의 맨 밑창을 들어가야 합니다. 그곳을 뚫고 전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 나라에 힘센 사나이가 있다면, 이 나라를 이끌고 태평양을 건너갈 사나이는 없는가? 또 힘센 사나이가 있다면, 이 섬 전부를 대륙 한가운데로 운반할 사나이는 없는가? 또 1억 되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불구자도 있고, 가난한 자도 있고, 미남 미녀도 있는데 그물을 던져 그들을 어느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전부를 끌어올려 볼 힘센 사나이는 없는가?
여러분들은 일본을 중심으로 한 세계, 일본을 중심으로 한 천주, 일본을 중심으로 한 하나님, 일본을 중심으로 한 선생님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현재 그런 생각은 여러분들에게 허락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누구도 하나님을 점령하지 못했습니다. 세계의 어느 누구도 점령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점령을 해 가는 중에 있을 뿐 점령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일본도 이상국가라고 하는 기준에 있어서 점령되지 않고 있습니다.
개인, 가정, 동경, 일본, 세계에 속해 있는 작은 사람으로부터 큰 사람에 이르기까지 어느 누구 한 사람도 하나님을 점령한 사나이는 없다고 하는 사실을 생각할 때, 사나이라면 결심을 하여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하나님을 한번 점령해 보겠다고 해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배짱의 사나이가 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하면 사실은 어렵습니다. 뜻적으로 일본을 점령하기는 현재의 일본을 점령하는 것보다 어렵습니다. 세계를 뜻적으로 점령하기는 현재의 세계를 점령하는 것보다 어렵습니다. 하나님을 점령하려면 지금까지 6천년간 섭리되어져 온 모든 섭리보다도 더 어렵습니다.
천주로부터 모든 별, 즉 태양계를 하나님이 지금 여행하시면서 지구성을 향하고 계신다고 한다면, 거기에 수행할 수 있는 사나이, 하나님이 일행이 되기를 바라시는 사람은 어떠한 사람일 것인가? 하나님이 필요로 하는,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어야 할 것입니다. 즉 그 여행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 여행길이 험한 길이라면 험한 길에 적합한 사나이, 혹은 여러 곳을 여행할 때, 그 여러 곳에 있어서 적합한 사나이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본을 하나님이 여행하시면서 ‘일본에서 내가 필요로 하는 남자는 누구겠느냐?’ 하고 찾으실 때, 그런 사람은 어디에도 없으며 오직 통일교회에만 있다고 하나님이 인정하실 수 있는 존재가 된다면, 그 통일교회야말로 이 일본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도 가장 하나님이 필요로 하는 최고의 사람을 고르실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반드시 나를 골라 주실 것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입니다.’ 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가진 자가 되십시오. 나의 형(型)이 입체권 내에 있어서 점령할 양이 크니까, 또 나는 아름다우니까, 또 나에게 무엇이든가 형용사를 백 개 이상 열거할 수 있는 기준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다만 문제는 한 가지입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이 일본적이냐 일본적 이상(以上)이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일본적인 것을 필요로 하지 않으십니다. 일본적 이상인 사람이 아니면 하나님은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일본 사람임에 틀림없지만 일본인 주의, 일본적이어서는 소용이 없습니다.
범위를 넓혀서 말하자면 30억 인류를 하나님께서는 필요로 하십니다. 그러나 30억 인류 수준의 인간을 필요로 하시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은 30억보다 그 이상의 사람을 필요로 하십니다. 그렇지 못하면 하나님은 모든 분야에 있어서 최고의 승리를 거둘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에게 말해 주고 싶은 것은 일본인으로서 어떤 위치에 서느냐? 만약 하나님이 계신다면 참일본인으로서 최고의 위치를 허락하실 것인가, 어떤 일본인으로서 인정하실 것인가? 그것을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우리 통일교회는 세계적인 기반을 가졌습니다. 어차피 세계라는 세계는 우리 통일교회 운세를 타고 하늘(大空)을 달리지 않으면 안 될 때가 올 것입니다. 그때 오! 하나님, 일본을 어떠한 위치에 세우시겠습니까? 하고 주장할 수 있는 무엇인가 중심을 자신들이 가지고 있습니까? 그때 일본을 어떠한 위치로 결정짓게 할 것인가 생각하면서, 천사를 굴복시키고 천지를 뒤집어 엎는 그 천적인 축복을 땅의 나를 통하여 전체화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고 판단을 하는 사나이는 없는 것인가?
그러기 위해서는 일본을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나 이상의 심정을 가지고 일본을 사랑한 사람은 없다. 또는 몇 천 몇 만 몇 억이라도 내가 책임지고 천하를 밟아 누르는 이상의 심정을 가지고 일본을 사랑한 사람은 없다.’ 하는 사나이로 나타날 수 있다면 과거․현재․미래를 헤치고 그 사랑하는 마음은 역사적이고 세계적이고 천주적이라고 하는 자신을 가지십시오. 그런 사람이 하나님을 점령합니다.
사람들은 축복이라는 말을 쉽게 사용합니다. 그러나 이 축복의 이면에는 얼마나 많은 고난과 고통이 있고, 또 그것이 있기까지의 과정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축복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축복을 받는 것은 우리 인간 곧 여러분들입니다. 그런데 타락한 세계에 있어서는 인간이 축복받을 수 있는 적합한 조건을 세우지 않는 한 하나님은 인간에게 축복해 주실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 좋은 예를 노아시대를 통해 발견할 수 있습니다. 노아는 축복 받기 전 120년이라는 오랜 기간 동안 극심한 고난을 당하면서 충성을 다해야 되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 조건을 세우기 위해 수고한 기간은 12개월이나 12년이 아닌 120년이란 기간이었습니다. 더구나 그가 받은 명령은 바닷가가 아닌 산꼭대기에 방주를 짓는 일이었습니다. 노아가 이와 같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을 때 모든 사람들은 회의적이었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광상(狂想)이라고 생각되었던 것입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그러한 일을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은 여느 때와 다름 없이 먹고 마시고 향락을 누리면서 하나님을 잊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노아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명령은 절대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런 노아의 심정을 진정으로 이해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오직 자신만이 알 뿐이었습니다. 그의 아내도 이해해 주지 못했고 그의 자식들도 노아의 사정을 알아주지 못했습니다. 하물며 그의 친척들이야 뭐라 했을 것인가,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노아에게 요구했던 사정은 인류 전체와의 관계를 완전히 포기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명령을 완수하기 위해서 노아는 모든 인연을 끊어 버려야 했습니다. 그의 아내나 자식들을 하나님의 명령 이상으로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노아는 절대적이고 추호도 요동할 수 없는 반석과 같은 하나님의 명령 이외에는 다른 어떠한 것도 택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입장에 있었던 노아를 당시의 사람들이 어떻게 대했을 것인가? 그것은 여러분들이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그때에 있어서 그 아내 되는 사람은 자기 남편을 따랐어야 했습니다.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그 당시 그의 전가족이 노아를 버렸기 때문에 그는 혼자서 방주 짓는 일을 맡아 했었다는 것입니다. 노아의 가족들은 노아의 계획을 거절했습니다. 그의 뜻에 반대했던 것입니다. 만일 그가 조금이라도 측근자들로부터 협조를 얻을 수 있었다면 외부로부터 오는 박해를 쉽게 참아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입장에서 10년, 20년, 30년…… 120년을 지나면서 할아버지가 된 노아는 미친 사람으로 세상에 알려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 당시에 있어서는 단 한 사람, 노아만이 하나님을 따랐던 것입니다. 노아 이외의 모든 사람들은 날이 가면 갈수록 점차로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그 당시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단 한 사람인 노아를 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노아의 충성에 의지할 수밖에 별도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지상에서 그 이외의 다른 발판을 찾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에게는 무엇보다도 발판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이 필요로 했던 발판은 세상에서 극심한 박해를 받았습니다. 세상은 그 발판과 하나님을 향하여 반역을 거듭했습니다. 그러한 발판의 조건이 노아에 의해서 세워진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 발판을 터로 하여 세상을 심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예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지상에서 하늘의 사명과 책임을 맡게 되는 개인, 혹은 가정이나 종족, 국가나 세계는 물론이고 그 무엇이든간에 축복하시기 전에 먼저 그들이 어떠한 고난이라도 참아낼 수 있는가를 다짐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사명을 맡은 자는 싸우지 않으면 안 되며, 그 싸움에 있어서는 반드시 승리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축복받기 전에 요구되는 최초의 조건임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다시 아브라함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합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가 사랑하던 고향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고 명령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는 길 이외에는 다른 길이 없었습니다. 그는 한 번도 가 본 일이 없는 낯선 타향으로 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하나님만 믿었습니다. 이와 같이 아브라함은 하나님에 대하여 충성을 다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를 섭리의 중심으로 세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탄의 참소를 받지 않는 자리에서만 어떠한 개인을 택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택함을 받는 그 개인은 사탄의 참소에서 벗어난 자라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중심되는 개인에게 맨 처음에 요구하는 조건입니다. 이 원칙은 오늘날의 섭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야곱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야곱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사탄의 상징적인 땅, 하란으로 가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희생의 조건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21년 동안이나 참기 어려운 고역을 치러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야 사탄을 상징하는 하란 땅에서 승리의 뜻을 가진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아 가지고 하늘세계의 땅을 상징하는 가나안으로 돌아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 70여명의 가족들은 애급 고역을 위한 또 다른 나그네의 길로 떠나야만 했습니다. 이것이 종족적인 면에 있어서의 시련입니다.
그들은 4백년 동안이나 애급에서 고난을 겼었습니다. 그와 같은 고역을 겪고 난 터전 위에서만 하나님은 모세의 주도 아래 이스라엘 민족을 가나안 땅으로 복귀시킬 수 있는, 보다 큰 섭리를 추진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시련과 고난의 노정은 가면 갈수록 험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메시아를 맞기 위한 기대를 수립하기 위하여 더욱 험한 시련과 고난의 고개를 넘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이스라엘 민족은 메시아를 중심으로 하여 이루어져야 할 하늘세계가 복귀 되는데 있어서 어찌하여 자신들이 고난의 노정을 걸어야 하는가 하는 이유를 몰랐습니다. 만일 그 당시 이스라엘 민족이 왜 그래야만 되는가 하는 이유를 알고 민족적인 기대를 세운 후에 국가적인 기대 위에서 메시아를 맞이하여 그와 하나되었더라면, 오늘날의 인류역사는 판이하게 변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이스라엘 민족은 그들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다만 영적으로 국가적인, 우주적인 기대를 이룰 수 있는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민족이 사명을 다하지 못한 연고로 예수 이후 기독교 신자들이 고난과 시련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사탄의 땅인 로마제국으로 이동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기독교는 영적인 메시아와 더불어 로마 제국의 박해 속에서 용감하게 고난을 겪어냄으로써 영적으로나마 세계적인 복귀를 할 수 있는 새로운 기대가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사실상 예수님은 갈보리산정에서 희생의 제물로 죽어서는 안 될 분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았다면 그를 따르던 성도들은 산 예수님과 함께 40년 이내에 로마 제국으로 들어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이러한 내용이 우리에게 계시되기까지는 천적인 섭리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예수께서 죽지 않았다면 영적으로 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승리하여 양면의 승리를 거둘 수 있었을 것입니다.
당시의 로마 제국은 세계적인 제국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로마제국은 전세계의 중심이었으며 전세계를 상징하는 위치에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에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이 산 예수님을 그들의 중심으로 모시고 나갔다면 그들은 로마 제국을 능히 굴복시켰을 것이요, 또 그곳에서 다시 세계적인 시련과 고난을 극복하여 세계복귀의 뜻을 완전히 성취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역사는 원칙적으로 되풀이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역사는 하나의 극적인 한 날, 인류역사의 목적이 달성되는 세계 종말의 한 날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초림 때와 꼭 같은 상태로 꾸며 놓기 위한 방향으로 움직여 나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동안에 하나님은 그냥 계시지 않습니다. 새로운 활기를 띤 종교적인 초점을 세우기 위하여 보다 나은 조건과 분위기, 그리고 보다 나은 환경을 조성하는 방향으로 움직여 나오시는 것입니다. 언론의 자유와 결사의 자유, 그리고 종교의 자유를 세우시어 새로운 종교가 탄생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준비해 나오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세계를 건설할 수 있는 새로운 정치 형식으로서의 민주주의가 생겨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똑똑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오늘날의 미합중국은 2천년 전 로마 제국과 똑같은 입장에 있습니다. 20세기의 로마라고 할 수 있는 미국은 그들의 문화만을 자랑하던 1세기의 로마와 같아서는 안 됩니다. 또한 타국을 지배하기 위해서만 애를 써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절대적으로 공적인 것입니다. 그 축복은 어느 개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요, 또한 어느 가정만을, 어느 국가만을, 어느 세계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우주 전체를 위한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인 미국의 형제 여러분들은 하나님께서 이 땅 위에 크신 축복을 주시기까지, 이 순간 이 자리를 마련하시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 오셨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제 위대한 이념이 진실로 이 땅 위에서 탄생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전세계는 하나의 형제라는 위대한 이데올로기가 탄생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최근의 세계 역사를 살펴봅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세계의 경향은 모든 국가와 인민을 독립시키는 방향으로 기울어져 나왔습니다. 진정하고 참되게 출발하려던 인류역사는 가인과 아벨 두 형제의 싸움으로 말미암아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가인은 그 아우 아벨을 죽였습니다. 이와 같은 인류 역사의 비극을 복귀해야 되는 이 시대에 있어서 형제애는 전세계적인 입장에서 다시 세워져야 합니다.
원리운동을 하기 위해 나선 통일교회의 형제자매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해 주시기 위하여 수많은 땀과 눈물과 피를 흘려 나오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그렇게 해 나오신 것처럼 우리들도 그렇게 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우리들의 동지를 위하여 눈물과 땀과 피를 아끼지 않겠다는 각오를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받은 축복을 만민에게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만일 미국이 오늘날 받고 있는 그 축복을 전세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고, 또한 여러분이 눈물과 땀과 피를 전세계 사람들을 위하여 흘리지 못한다면, 세계의 모든 국가들은 여러분에게 반항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자신도 망해버리고 만다는 사실을 똑똑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솔선수범해서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전세계 사람들을 위하여 주는데 있어서 모범적인 무리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존경하는 전 미국 대통령 케네디는 새로운 개척정신을 수립하였습니다. 이 개척정신이야말로 이 시대를 상징하는 바로 그것입니다. 나아가서 그는 천국시대와 하나님의 섭리를 이끌어 올 수 있는 평화군단(Peace Corps 평화봉사단)을 창설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데 있어서 지금은 옛날과는 달리, 그 방법에 하나의 차이점이 있습니다. 옛날에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해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버리고 낯선 땅으로 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 있어서는 그 무엇도 버려서는 안 됩니다. 오늘날의 우리들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취해 가지고 그것을 나누어 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입니다.
여러분이 주는 데 있어서는 훌륭한 하나의 원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 자신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심정을 지니고 종의 역할을 해내는 것입니다. 심정은 하나님의 심정을 지니되 몸은 종의 몸을 써야 합니다. 그리고 인류를 찾아가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주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가장 귀중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을 아무런 후회 없이 서슴지 않고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있어서 가장 귀중한 소유물은 여러분들의 눈물과 땀과 피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만물을 위하여 땀을 흘려야 하겠습니다. 하늘을 위하여 여러분의 피를 뿌려야 하겠습니다. 인류를 위하여 여러분의 눈물을 흘려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원리운동의 모토입니다. 우리들은 이러한 것들을 자유로이 나누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심령적으로 하나될 수 있고 심정적으로 하나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들은 잃어버린 참자녀와 참형제, 참가정과 참국가, 참세계를 찾아야 합니다. 이러한 참 것을 복귀한다는 것은 쉽고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참 것은 손쉽게 찾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손쉽게 찾아지는 데에는 행복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우리들은 하늘의 축복을 사탄세계에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 사탄세계가 가인에게 속해 있기 때문에 아벨은 그 가인을 통해서 사탄세계를 복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에서에게 봉사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예수님도 택함받은 선민에게 봉사를 통하여 모든 것을 복귀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봉사해야 됩니다. 이것이 복귀하기 위한 공식입니다.
하늘의 축복권 내에 있는 사람들은 축복권 내에 들지 않은 사람들을 도와주어야 합니다. 남을 여러분 앞에 세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여러분들이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들을 도와주고 그들을 앞세워 밀어주어야만 그들이 목적지까지 다다를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의 실례를 들어 봅시다. 미국이 아무리 축복받은 나라라 할지라도 미국 한 나라로서만은 복귀섭리의 최후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최후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다른 나라의 모든 빈곤한 사람들을 도와주어야 합니다. 고통받고 있는 전인류를 앞세워 그들의 뒤를 밀어주며 나아가야 합니다. 사실 오늘날 미국은 그 목적 달성을 위하여 접근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로서는 미국의 더욱 많은 예산이 전세계의 인류를 도와주는 숭고한 목적을 위하여 소비되었으면 합니다.
오늘날 이 미국과 월남의 관계가 좋은 한 예라고 생각됩니다. 여러분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같이 생각되지만 현실적으로 그들과 여러분들은 그 어떠한 관계로 얼크러져 있습니다. 이러한 것이 오늘날의 시대입니다. 그래서 미국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모든 지역을 위해 도와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땅을 여러분들의 땅과 똑같은 책임감을 갖고 대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전인류를 위하여 봉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아들딸들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은 말할 수 없는 희생의 자리를 통하여 여러분을 찾아 나오셨습니다. 최후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여러분을 찾기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는 길을 걸어오셨습니다. 하나님은 가장 귀한 것들을 희생시키면서 여러분들을 찾아 나오신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당신의 모든 것을 무한히 주시면서 무한한 고통을 받아 오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어떠한 자리에 서 있었습니까? 여러분은 축복을 받고자 하는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여러분이 하나님과 같이 고난을 받기 위한 그 어떠한 각오를 하고 있었습니까?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려면 우리는 새로운 하나의 실현을 위하여 각성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나아가 새로운 실천을 위하여 만단의 준비를 갖추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궁극의 목적이 달성되어 축복을 받게 될 때에, 여러분은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던 모든 것을 아무 미련 없이 버릴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의 재산과 여러분의 자녀, 그리고 여러분의 가정을 버릴 수 있겠습니까? 최후에 있어서는 전세계를 위하여 여러분 자신까지도 버릴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의 자녀와 아내, 그리고 여러분의 남편과 여러분 자신의 생명까지도 모두 바칠 수 있겠느냐 말입니다. 그러한 과정에 어떠한 고난이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찾기 위하여 그 길을 걸어 나오셨습니다. 이러한 길을 걸어 나오시기 위해 하나님은 그 무엇과도 타협하지 않으셨습니다.
만일 오늘날 1억 8천만의 미국 국민들이 숭고하고도 신성한 목적을 위하여 그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귀중한 것들을 전인류를 위하여 줄 수 있는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다면, 전세계는 하루아침에 복귀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미국의 현상은 우리들이 바라고 있는 것과는 좀 다르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니 원리운동의 개척자로서 택함을 받은 여러분은 미국의 형제자매들은 위해서 모범적인 진로를 개척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사실상 지금까지 이 선생님이 걸어왔던 길이 그러한 길이었습니다.
일찍이 나는 부모를 버렸습니다. 내가 감옥에 들어가 있을 때에 부모는 나를 찾아와 하던 일을 그만두라고 권고했습니다. 그것은 마치 나를 칼로 찌르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에 나는 즉석에서 그 요구를 거절했습니다. 1945년 해방 직후 나는 가족과 함께 남한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을 받게 되자 나는 그곳에서 사는 것이 좋지 못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남한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전가족을 남겨 두고 혈혈단신으로 공산주의자들이 점령하고 있는 북한으로 가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 스스로를 맨 나중에 생각하십니다. 언제나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여러분을 먼저 생각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위하는 일을 우선으로 돌려놓지 않으십니다. 자신은 잊어버리신 채 이 땅 위에 있는 여러분들을 먼저 걱정하고 염려하고 사랑하십니다. 이 선생님도 하나님 아버지의 뒤를 따라 그와 똑같은 길을 걸어야 했던 것입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과 나와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은 맨 나중에 받아들여야 되는 것입니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사명 제일주의로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진실로 나를 사랑해 주셨던 형님 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는 다소간의 영적인 체험을 가지고 있었는데, 나의 가족 중에서 그 형님 한 사람만이 어렴풋이나마 나의 사명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 형님 이외의 사람은 누구도 나에게 원리에 대한 사명과, 또 하늘과 지상 앞에 최후의 해답을 제시할 수 있는 새로운 운동을 일으키기 위한 뜻이 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나는 가족들을 사랑했습니다. 나의 어머니와 나의 형제들을 사랑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들에게 남보다도 먼저 원리에 관한 놀라운 진리를 말해 줄 수 없었습니다. 남들보다 먼저 그들에게 원리를 밝혀주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는 중심이 결정되기 전에 먼저 사방성을 갖추어져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기준 앞에 나서기 위해서 나의 가족보다도 먼저 남들과, 나아가서는 세계와 인연맺어야 했습니다. 나의 가족보다도 먼저 전세계 사람들이 원리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중심이 결정되기 전에 먼저 주변이 결정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시듯 진실로 사람들을 모셨습니다. 나아가 사회와 국가복귀를 위한 기대를 세우기 위해 낯모르는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대해 왔습니다. 이와 같은 원칙하에서 나는 나의 국가만을 위해 염려할 수는 없었습니다. 가장 심한 핍박을 받는 가운데에서도 나의 기도와 관심은 한국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일본과 미국에 선교사들을 보내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일본에 선교사를 보낼 당시에는 한국과 일본이 정상적인 국교가 수립되지 않은 때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교사는 정상적인 수속을 밟지 못한 채 조그마한 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가야만 했습니다. 그러니 이 미국에 한 사람의 선교사를 보낼 때 우리가 얼마나 많은 고난을 겪었는지 여러분은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당시 우리가 미국에 선교사를 보낸다는 것은 그 누구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환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미국에 원리의 씨를 뿌리기 위해 누군가를 보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밤낮으로 수고를 아끼지 않았던 것입니다.
복귀섭리의 원칙은 외부에서부터 내부로 찾아 들어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미국이 하나님으로부터 영광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섭리의 뜻이 외부에서부터 내부로 찾아 들어오도록 일을 해 나가야 합니다. 이 미국에서부터 일을 해 나가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여러분들의 책임입니다. 이러한 입장이기 때문에 여러분은 먼 길로 떠나야 되는 것입니다. 이 사명에 여러분의 사활이 달려 있는 것입니다.
미국의 복귀를 위하여, 전세계의 복귀를 위하여, 또 우주의 복귀를 위해서는 여러분의 가족이 문제가 아닙니다. 여러분의 자존심이 문제가 아닙니다. 희생이 없이는 큰 일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이제 미국이 새로이 각성할 때가 왔다고 봅니다. 미국 땅에 새로운 새벽이 와야 됩니다.
여러분들은 미국에 있는 전체의 주들을 책임져야 합니다. 이 주에서부터 다른 주에까지 여러분의 활동이 확장되어야 합니다. 비록 여러분의 수가 제한되었다 할지라도 여러분 각 개인은 이 책임을 완수해야 됩니다. 만일 미국의 여러분이 이 책임을 해내지 못할 경우 어떠한 일이 벌어질지 여러분은 아십니까? 그렇게 되면 아벨의 입장에 있는 미국은 가인의 입장에 있는 공산주의 정권을 통하여 고난을 받게 될 것입니다. 자유진영 전체가 환난을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이와 같은 중대한 사명을 느껴 책임을 완수한다면, 민주주의를 구할 수 있을 것이며, 또한 여러분은 자유를 구축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공산세계는 자동적으로 자멸하고 말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섭리로 볼 때, 한국은 경제적인 면에 있어서 미국의 원조를 받아야 되는 입장에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과 미국의 관계를 2천년 전의 유대 왕국과 로마 제국의 관계와 꼭 같습니다. 재창조의 운동이 어찌하여 한국과 같은 나라에서 출발되어야 하는가? 그 역사적인 근거가 여기에 있습니다.
가장 위대한 사상이 보잘것없는 이스라엘 나라에서 밝혀졌던 2천년 전과 오늘날 이 시대가 유사한 점이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위대한 사상이 전세계에 전파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비추어 볼 때 미국은 서방세계의 문명을 대표하는 국가입니다. 미국은 배움과 연구와 분석을 통하여서 오늘날 이러한 문명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러한 과학적인 기초 위에 오늘날의 문화를 이루어 놓았습니다. 이것을 나는 외적인 문명이라고 부릅니다. 여러분들도 그러한 기반 위에서 지식을 획득하면 획득할수록 세계적인 승리를 거둘 것입니다.
그러나 외적인 것만을 가지고는 인류가 요구하는 전부를 충족시킬 수 없습니다. 거기에는 필연적으로 내적인 요소가 요구됩니다. 이 내적인 요소와 외적인 문화의 번영이 하나되어야 합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과학적인 지식을 획득하면 획득할수록 여러분은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종교적이나 신령적인 지식은 획득하면 할수록 물질적인 소유물을 잃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분석하고 연구하는 과학에 대한 노력은 인류를 잘살게 만듭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외적인 것일 뿐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내적인 문명, 즉 신령에나 종교에 열중하는 무리들은 외적인 것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여러분, 왜 그런지 아십니까? 이유는 매우 간단합니다. 영은 물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물질적인 모든 것을 잃어버린 하나의 국가가 동방의 나라 가운데에서 선택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역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 동과 서는 하나되어야 할 단계에 당면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들은 하나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와 같이 끝날에는 전체의 인류 문명을 하나로 통일시킬 수 있는, 즉 영육 아울러 우주적인 완성을 기할 수 있는 한 나라가 나타나야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전세계는 반드시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풍부해질 것입니다.
동양에 있는 많은 나라들은 미국의 외적인 성공에 큰 기대를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미국의 여러분들은 내적인 성공을 위하여 그들에게 기대를 갖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이 바로 원리운동이 뜻하는 바입니다. 우리들은 이와 같이 통일을 위한 교차점에 서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이해해야 되겠습니다. 맨 처음에 언급했던 바와 같이 여러분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많은 고통과 시련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은 여러분에게 있어서 신성한 책임입니다. 이와 같은 모든 것을 알게 된 여러분들은 이제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귀한 것을 고통받고 있는 전세계 사람들에게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그 위대한 부르심 앞에 응할 수 있는 만단의 준비를 갖추어야 하겠습니다.
나는 여기에서 다시 한 번 말하겠습니다. 여러분의 가장 귀중한 것을 자유진영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나누어 줄 것이 아니라 공산권 내에까지 그 범위를 넓혀 나누어 줄 수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최후의 승리는 우리들이 그들을 위하여 무한히 주고 무한히 사랑하고 무한히 희생하는 데 있습니다. 그래야만 공산주의자들이 우리 앞에 머리를 숙이고 굴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때가 와야만 비로소 진정한 천국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천국은 바로 그런 자리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나는 한국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나는 나의 사명이 한국보다 더 큰 데에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나의 사명은 세계적인 데에 있습니다. 나의 기도와 관심은 한국을 넘어 전세계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미국의 형제자매들도 미국만을 위하여 기도한다든가, 혹은 미국에 대해서만 관심을 갖는다든가 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미국 사람들에게만 주어서는 안 됩니다. 미국 사람들만을 위하여 십자가를 져서는 안 됩니다. 전세계를 위하여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미국만을 위하여 울어서도 안 됩니다. 눈물을 흘릴진대 세계를 위하여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전세계를 위하여 피와 땀을 흘려야 됩니다. 여러분은 세계를 사랑하기 때문에 미국을 사랑하는 입장에 서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만이 여러분의 정당한 사랑입니다.
우리의 한계(限界)는 미국이 아닙니다. 이 미국을 넘어서 세계를 사랑해야 영계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여러분은 우주를 사랑해야 됩니다. 여러분이 영계와 지상 이 두 세계를 하나로 통일시켜야만 하나님의 이상이 현실화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들의 신성한 책임입니다.
이와 같은 중책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진실로 각성하고 자신을 재무장시켜야 합니다. 가장 위대한 운동을 위하여 재출발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출발할 때는 개인적인 자리에서 출발하나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개인을 초월하고 국가를 초월하고 세계까지 초월해야 됩니다. 그래야만 우주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충성의 기준을 어디에 두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큰 축복을 받기 원합니까? 그런 줄로 나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기쁨으로 십자가를 짊어질 수 있습니까? 예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그 어미나 아비나 아내나 형제자매나 자식을 나보다도 더 사랑하는 자는 나에게 합당치 못하느니라.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예수께서는 새로운 판도와 새로운 길을 개척하신 선도자이셨습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의 참아들딸이 되기 위해서는 그와 같은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문화인들이 눈물을 흘려야 할 때는 바로 지금입니다. 백만장자들이 눈물을 흘려야 할 때가 도래한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는 유능한 사람들과 지식인들의 눈물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땀과 그들의 피를 필요로 하는 때입니다. 이것만이 천국복귀를 하루라도 빨리 이룰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이 자리에서부터 그 준비를 해야 합니다. 이러한 길에서 여러분의 책임을 완수하기 위하여 용진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은 사실상 지금까지 개인을 위해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여러분들의 개인 생활은 우주를 복귀하는 데 그 목적을 두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사탄세계를 하늘 세계로 바꾸어 놓을 개척자들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사탄의 포위망을 뚫고 새로운 길을 개척하기 위해 용감하게 전진해야 되겠습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참아들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으로써 새로운 과업의 실현을 위하여 싸움의 새로운 한 날을 맞이한 여러분에게 드리는 말씀으로 대신하겠습니다.
오늘은 협회창립 14주년을 맞는 날입니다.
우리가 이날을 기념하는 마당에서 지나간 7년노정을 바라볼 때 이러한 것이 왜 필요했느냐? 그것은 우리가 탕감복귀해야 할 입장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탕감은 어떻게 해야 하느냐? 탕감은 개인에서부터 해야 합니다.
그러면 탕감을 해 가지고 어떻게 할 것이냐? 탕감된 자체가 그냥 탕감된 것으로 끝나 버린다면 이것은 밑도 끝도 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탕감을 해 가지고는 승리의 존재로 서야 됩니다. 승리의 존재란, 승리를 했을지라도 그 환경을 중심삼고 거기에 따라가는 입장에 서서는 안 됩니다. 주동적인 입장에서 주체적인 승리자의 권한을 가지고 그 환경을 대표해서 나타나지 않으면 승리의 존재라고 할 수 없습니다.
탕감을 통한 승리권은 먼저 개인의 승리한 기반 위에서 가정이 승리해야 되고, 가정이 승리한 그 기반 위에서 종족이 승리의 터전을 갖추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종족을 중심삼고 민족, 민족을 중심삼고 국가, 국가를 중심삼고 세계로 복귀역사는 발전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하나님의 복귀섭리노정이 발전해 나오는 과정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왜 탕감이 필요하고, 왜 승리가 필요한 것이냐? 그것은 오늘날 우리들 자신이 잘못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 모든 근원은 우리 조상이 잘못했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벌어진 것입니다. 탕감이 필요한 것에 대해서 우리 자신들은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태어나 보니 이런 타락된 세상에서,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사탄의 지배를 받는 존재로 태어난 것입니다. 태어난 그 자리가 탕감의 조건을 넘어서지 못한 자리요, 탕감조건을 밟고 넘어가야 할 운명을 지니고 있는 자리입니다. 이러한 운명은 인류의 시조인 아담 해와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탕감을 하는 데는 대신자로서는 안 됩니다. 지은 죄를 탕감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이웃사촌도 안 되며, 자기의 아들로도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누가 해야 되느냐? 인간의 종지조상의 이름을 대신할 수 있는 그 한 분을 세우지 않고 탕감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타락한 세상에서 타락된 인간이 구원 받기를 원할 때, 이들을 구원할 수 있는 대표자요 책임자는 어떠한 분이어야 되느냐? 세계적으로 유명한 국가의 통치자로서도 안 되며, 어느 시대 하늘의 사명자, 선지자로도 안 됩니다. 탕감의 중심 된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은 이면(裏面)에서 조상의 책임을 대신 상속 받아 가지고 오시는 분이어야 합니다. 그런 분이 아니고는 세계적인 승리의 조건을 결정지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인류 시조로부터 타락이 빚어졌고 그 이후 인간들도 계속 실패했습니다. 이 실패를 걷어치우고 승리하기 위해서는 인간 조상의 입장을 대신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면 안 됩니다.
그러한 분을 찾아 인류 앞에 소개하기 위한 것이 세계의 수많은 종교가 해야 할 사명입니다. 양심이 목표로 하는 이상을 중심삼고 세계의 인류를 하나로 수습해야 합니다. 이것을 수습하려면 자아를 어느 기준까지 완성해야 하느냐? 인간 조상의 후손으로서 그 모든 죄의 보따리를 청산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자아를 완성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조상 되는 대신자는 천상세계로부터 대를 이어 가지고 이 땅 위에 와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완전탕감 하여 승리권을 세울 수 없는 것입니다.
야곱이 ‘이스라엘’이라는 승리의 권한을 세운 기준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부모로서의 기준도 아니요, 아들로서의 기준도 아니며, 종으로서의 기준인 것입니다. 또한 야곱이 천사와 얍복강에서 씨름한 것은 무엇 때문이냐? 천사장이 인간을 타락시켰기 때문에 인간이 천사장을 대신한 천사와 싸워 천사를 굴복시켜 가지고 승리의 권한을 세운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 기준을 중심한 이스라엘을 세워서 영적 기준의 이스라엘을 계대(繼代)하여 실체적인 이스라엘권을 조성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적 기준의 이스라엘권을 가졌던 이스라엘 민족도 실체적인 기준, 즉 아벨의 입장에서 승리의 권한을 세우지 못하게 될 때는 번번이 망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까지의 기독교 역사는 무엇이며, 선민사상이란 무엇이냐? 기독교 역사는 종의 터전 위에 양자를 세운 역사였습니다. 아들은 아들인데 직계의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양자였습니다, 양자! 양자도 물론 부모의 재산을 상속 받을 수 있는 상속권은 있습니다. 그러나 양자와 직계 자녀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양자는 그 핏줄이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양자는 자기의 핏줄을 잘라 버리고 접을 붙여 직계의 혈통으로 전환시켜야 합니다.
혈통이 다르다는 것은 아버지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다른 혈통을 가지고 태어난 인간은 본래 타락하지 않은 본연의 부모에 의하지 않고는 죄를 탕감할 수 없습니다. 알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역사는 타락하지 아니한 종지조상이 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그 한 분이 올 때까지 종교의 이념을 중심으로 연결시켜 왔습니다.
오늘날의 기독교는 세계적인 종교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어야 천당에 가고, 안 믿으면 못 간다는 말을 합니다. 도대체 이 예수님이 누구입니까? 기독교인은 만민의 구세주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불교나 유교에서는 ‘우리도 세계적인 종교인데 기독교만 중심삼고 만민을 구원할 것이 무엇이냐?’고 말할 것입니다.
하여튼 불교나 유교도 동서양의 문화를 묶기 위해 하늘이 특별히 세운 종교입니다. 세계적인 아벨, 혹은 양자로서 책임을 할 수 있는 역사를 대표한 종교입니다. 그렇지만 불교나 유교에서는 인류의 조상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이 땅 위에 죄악이 출발되었던 것은 인류의 종지조상이 타락했기 때문에 이것을 책임지고 탕감할 수 있는 입장에서 ‘나는 인류 조상이다.’라고 할 수 있는 분이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독생자다.’ 라고 주장한 분이 예수님입니다. 이 한마디가 세계사를 출발시키는 새로운 선민적 표어라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독생자.’라는 이 말은 예수님이 세상 사람과 다르다는 뜻입니다. 독생자라는 그 말이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독생자라는 말이 예수님이 주장하시는 말씀인 복음 가운데 나타났다는 사실이, 오늘날 이 땅 위에 새로운 시대가 출발할 수 있는 기원이요, 새로운 세계가 출발할 수 있는 터전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친 진리와 다른 종교의 말씀을 비교해 보면 다릅니다. 다른 종교는 국가와 인류의 도덕을 가르치며, 영계에 관한 내용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불교는 영계를 가르쳐 주고, 유교는 사회에 관한 인륜도덕을 가르쳐 줍니다. 이들은 땅에 대한 치리, 영계에 대한 치리법(治理法)을 가르쳐 준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 가정을 세울 수 있는 혈통적 기원인 사랑에 대한 기준을 가지고 출발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입장이 기독교나 타종교보다 우월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했습니다. ‘아버지가 내 안에 있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결국 전부 다 하나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피와 살이 얼크러져 일체로서 움직일 수 있는 부자의 관계를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간단합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요, 예수님은 신랑입니다. 그러므로 신랑인 예수님은 신부를 맞이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딸로서 서로가 형제인 것입니다. 이러한 아버지와 신랑 신부, 아들딸이 일체가 되어 사탄세계를 청산해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역사 과정을 보면 예수님은 인류의 조상으로 오셨습니다. 아담이 타락하여 실패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제2의 아담으로 오신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은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을 중심삼고 신랑의 입장에서 신부를 맞아 부부를 이루어야 했고 인류의 참부모가 되어야 했습니다. 거꿀잡이로 섭리했던 것입니다.
원래 아담 해와가 타락하지 않았다면 인류의 부모가 되어 하나님을 중심한 세계를 이루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사탄이 주관하는 거짓 부모가 되어 버렸습니다. 따라서 본래 하나님의 창조이상으로 세우고자 했던 참부모는 없어졌습니다. 참된 인류의 조상이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지구상에는 수많은 인류가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본래의 참된 부모의 후손이 아닙니다. 타락의 혈통을 타고난 후손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양자밖에 못 됩니다, 양자!
고생해서 심어 놓은 나무가 돌감람나무가 되어 버렸습니다. 외부야 번지르르하지요. 핀 꽃도 같습니다. 그런데 열매가 맺히고 보니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독수리 밥이나 또 다른 밥밖에 되지 못합니다. 즉 거짓 부모의 핏줄을 타고났기 때문에 그 근본이 틀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섭섭하지요?
그러면 여러분은 무엇을 기다립니까? 거짓 부모의 핏줄을 뽑아 버려야 합니다. 몸속에 흐르는 이 피가 원수의 피입니다. 원수의 피가 내 몸에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기분 좋아요? 태어나 보니 내게서 원수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몇 대 조의 할아버지로부터 그 원수의 피를 받아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면 이 피를 뽑을 자는 누구입니까? 우리의 조상이 원수의 피를 받아 태어났으니 하늘의 혈통을 받은 새로운 조상이 아닌 사람으로는 이 피를 뺄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만약 하늘의 혈통을 받은 새로운 조상이 아닌 사람이 그 피를 뽑으려고 한다면 사탄은 ‘야 이 녀석아! 너의 조상이 있는데 너는 뭐냐?’ 할겁니다.
이 세계에 수십억의 인류가 살고 있지만 모두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단지 문제는 참부모, 이 한 분이 문제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요즘 일반 잡도(雜道)에서도 천지부모니 뭐니 하는데, 그들이 알기는 잘 알았어요. 천지부모가 왜 생기느냐 하면 그 부모가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한이 무엇이냐? 태어나 보니 가짜로 태어난 것이 한이에요. 가짜 운명이 좋아요, 나빠요? 모양이야 번지르르하지요. 뻔질뻔질하고 허울은 좋은데 가짜가 더 윤이 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가짜 패입니다.
그런데 가짜도 순수한 가짜가 아닙니다. 수천 대 가짜 부모의 피를 타고 내려오면서 오만 잡탕이 다 섞였다는 것입니다. 즉 가짜 부모의 피를 종합해서 태어난 주식회사란 말입니다. 이런 것들이 들썩들썩하고 있어요.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이러한 세상이 뭐가 좋아서 지금까지 명(命)대로 다 살고, 이래 가지고도 무엇을 먹는다고 먹고 있어요….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기분이 나빠요?
이런 가짜 보따리를 언제 청산할 것입니까? 여러분은 그런 마음이 없습니까? 한쪽 눈이 안 보이면 그 눈을 뽑아 버리든가 고쳐 놓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면 이런 것을 시정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종교가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시기심이나 질투가 많아서 지옥을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닙니다. 가짜가 생겨나서 가짜를 처리할 수 있는 처치 창고로서 지옥을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누가 쓰레기통을 먼저 만들고 집을 짓겠습니까? 예를 들면 김치를 담그려고 좋은 채소를 사 왔는데, 담그다 보니 벌레 먹은 우거지 같은 것이 나오니 쓰레기통에 담게 되는 것입니다. 타락은 인간의 종지조상(宗之祖上)이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탕감하여 죄를 청산 짓기 위해서는 참부모의 자격을 가져야만 가능합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어떠한 종교가 세계적인 종교가 될 수 있느냐?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이루어지는 종교가 세계적인 종교입니다. 그러한 종교는 기독교밖에 없습니다. 선생님이 기독교가 좋아서 이런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정을 알고 보니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늘 편은 언제나 맞고 나서야 때렸습니다. 맞고 때리면 그것은 정당방위이지 죄가 아닙니다. 지금까지 하늘 편은 먼저 맞아 나왔지만 먼저 때린 쪽에서 번번이 져 왔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때에도 먼저 친 나라들이 졌고, 제2차 세계대전 때에도 먼저 친 나라들이 졌습니다. 요즘에도 미국과 소련의 관계를 보세요. 미국이 번번이 맞고 있어요. 얼마 전에도 조그마한 월남을 중심삼고 큰 미국이 한 대 얻어맞았잖아요?
이제 하늘 편에서는 공격작전으로 전환해야 합니다. 주님이 오셔서 심판할 단계가 되면 세계적인 공격작전을 전개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오셔야 이 땅을 심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탄 편에서 언제나 총칼을 들고 하늘 편을 칠 수 있게만 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선한 사람은 언제나 빼앗기면서도 좋다고 합니다. 지지리 고생하면서 쓰레기통 속의 벌레에 가까운 생활을 해 왔습니다. 그런 작전 태세를 보이는 사람이 도(道)의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원수 사탄에게 전부를 빼앗겨 버리고 더구나 몸에는 사탄의 피가 들어와 있습니다. 이 원수 사탄의 피를 칼로 찔러 뽑아내야 합니다. 목숨이 할딱할딱 하더라도 죽지 않을 만큼 칼로 찔러서 뽑아내야 합니다. 이 원수 사탄의 피가 아직도 남아 있을진대, 이것이 생명력을 좌지우지(左之右之)할 수 있는 입장일진대 선생님은 싫습니다. 이것을 전파(全破)해 버려야 합니다. 이런 일을 하는 것이 종교 생활입니다. 종교 생활은 사탄적인 육신을 치는 것입니다.
요즈음 술 먹어도 좋고, 담배 피워도 좋고, 뭐가 어떻고 어떻고 하는 패들은 사탄의 이웃사촌들이 다 된 자들입니다.
종교는 악착같이 환경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종교는 부정의 자리에서 출발했습니다.
심정을 중심삼고 나오는 종교는 마지막에 승리하는 종교입니다. 그럴 것이 아닙니까? 어차피 오랜 역사 과정을 거쳐 나오면서 부정하는 일을 해야 한다면 모든 것을 한꺼번에 부정할 수 있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개인․가정․국가․세계를 모두 부정해야 합니다. 오로지 ‘하나님은 내 아버지요, 내가 그 아버지의 괴로움을 책임지고 싸워야겠습니다’ 할 수 있는 자격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탕감은 누가 할 것입니까? 원리적으로 볼 때 종의 탕감시대를 거쳐 양자의 탕감시대로 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 양자의 탕감권을 세우는 것이 이스라엘입니다. 그래서 종으로 출발해서 승리한 터전 위에 이루어 놓은 것이 이스라엘 민족인 것입니다. 따라서 민족권 내에 들어온 사람은 양자권에 들어온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민족을 중심삼고 직계의 아들권으로 넘어가야 됩니다. 넘어가는 데는 자기 혼자서는 못 넘어갑니다. 그것을 넘어가는 데는 한 그루의 참감람나무가 있어야 합니다. 이 참감람나무는 세계의 역사 과정에 있어서 선민사상을 터전으로 하여 죄악을 청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참감람나무로 세워진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비로소 참감람나무가 오셨으니, 그분을 중심삼고 가지를 잘라다가 접붙이는 운동을 해야만 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접붙이는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요 15:5)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혈통은 사탄의 혈통과는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직접적인 혈통 관계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런 창조 본연의 기준을 대표하여 오신 예수님은 이 역사를 그르친 인류 조상의 잘못된 기원을 타파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것을 이 땅 위에 확실히 성립시키지 않고는 구원이 절대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 지상에서 그냥 이 상태로 살면서 지상천국, 평화의 세계, 평등 평화를 이룬다는 것은 꿈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 땅 위에 제일 필요한 것은 무엇이냐? 하나님의 사랑하는 종이 나오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사랑하는 양자가 나오는 것입니까? 종도 필요하긴 필요하지요. 이웃 동네의 원수와 싸움의 판국이 벌어졌을 때 자기 집의 종이 필요하긴 필요하지요. 그러나 종보다는 양자가 더 낫습니다. 그러나 정작 필요한 것은 양자가 아닌 친자식입니다, 양자가 아닌 친자식!
하나님의 직계로서 죄악의 타락권을 없애고, 모든 죄악이 그를 침범할 수 없는 절대적인 권한을 가진 그러한 아들의 사명을 갖고 오시는 분이 필요한 것입니다.
인간 세상에서 볼 때 하나님의 심정을 중심삼은 맏형님을 만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맏형님은 누구냐? ‘아 나는 독생자다.’라고 외치신 예수님입니다.
인간 세상에서 그 맏형님이 사탄을 굴복시키고, 양자를 직계의 아들로 만들어서, 직계 아들인 자기의 책임을 다할 때 맏형님으로서 책임이 끝나고 비로소 부모의 자리에 올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이 책임을 못하여 예수님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하셨지만, 하나님의 기뻐하는 자가 되지 못했습니다. 어디 하나님이 기뻐하는 자가 될 수 있었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뭐라고 하셨습니까?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였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는 결과입니까?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라고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과연 기뻐하실 수 있었겠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이 기뻐하는 아들, 사랑하는 아들이 못 되었습니다.
그러면 왜 이러한 결과가 벌어졌느냐?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책임을 못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통일교회는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을 믿자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자는 것입니다. 구원은 예수님이 달려 돌아가신 십자가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전부 다 거꾸로 믿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 아벨의 사명을 못했기 때문에 이 사명을 못한 것을 다시 수습해야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종에서 양자권을 찾아 세우고 여기서 다시 기독교를 중심삼고 제2이스라엘을 형성했습니다. 그 터 위에 재림의 한 날을 고대하면서 2천년 동안 투쟁의 역사를 이끌어 나오신 것입니다.
그러면 앞으로 오시는 주님은 무엇으로 오시느냐? 예수님은 제2의 아담으로 오셨지만 앞으로 오시는 주님은 제3의 아담으로 오십니다.
제3의 아담이 왜 와야만 됩니까? 그것은 이 땅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땅 위에서 사고가 났으니 이것을 수리해 놓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수리할 수 있는, 고장나지 아니한 새로운 주인이 와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새로운 주인이 와서 사고난 것을 언제 고쳐 주실 것인가를 고대해야 됩니다.
제3의 아담이 누구냐? 이 땅 위에 인류 조상의 이름을 지니고 세 번째로 오시는 분입니다.
오늘날 이 땅 위의 인간들은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아담가정의 혈족에서 벌어진 가인 아벨의 싸움으로 인해 찌그러진 죄악 역사가 오늘날까지 세계적으로 발전했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죄악을 청산 짓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누가 청산해 주어야 하느냐? 타락한 아담 해와로서는 청산할 수 없습니다. 타락하지 않은 조상이어야 됩니다. 타락하지 않은 아담이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만물은 어떻게 되느냐? 그런 아담이 와서 인간과 더불어 만물까지도 천국의 자리까지 같이 가게 하는 것입니다. 천국에서는 이 땅 위의 그 누구보다도 기쁨의 자리에서 행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행복은 무엇이냐? 부모를 잃어버린 고아와 같은 백성들이 6천년 만에 부모를 찾는 것입니다. 이 이상 기쁜 일이 어디에 또 있습니까?
종교를 갖는 것은 이러한 부모를 찾는 일에 가담하는 것입니다. 죽은 부모가 영원히 죽은 줄 알았는데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살 수 있다면, 우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릴 수 없습니다. 부모를 찾는데 재산이 문제입니까? 친척이 문제입니까? 나라가, 세계가 문제입니까? 그 무엇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제쳐놓고 부모를 찾는 일에 온갖 충성을 다 해야 됩니다. 세상에서도 그렇지 않습니까? 자기의 부모가 죽어 가는데 땅이나 돈을 붙들고 희희낙락거리는 자식이 어디 있어요?
본성의 인연을 중심삼은 본연의 부모가 죽은 줄 알았는데, 그 부모가 다시 회생할 수 있다면 그 길을 내가 개척하기 위해서는 말할 수 없는 정성을 들여야 됩니다. 또한 누구보다도 하늘의 서러움에 가슴이 미어지게 아파하며, 그 억울함과 분함을 느낀 그 자리에서 충성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부모가 살아날 수 있는 길을 닦아야 합니다. 그것이 자식의 도리이며, 효자의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책임입니다. 때문에 생사를 개의치 않고 이 길을 개척해야 합니다. 세상의 좋은 것과, 세상의 핍박과 죽음의 길도 개의치 않고 이 길을 개척하기 위해 충효의 인연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는 생명을 바치는 순교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피 흘린 제단을 이어받아 개인의 제단, 가정의 제단, 민족의 제단, 세계의 제단을 쌓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제물로서 하늘에 바칠 수 있는 그 민족이 복 받는 권(圈)과 보호 받는 권을 세워서 오늘날 기독교의 이념을 발전시켜 나오는 것입니다. 알고 보니, 우리는 사람은 사람이되 부모를 잃은 고아입니다. 고아란 말입니다.
본래 그 부모가 타락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아담가정에서의 아담은 족장이 되는 것입니다. 족장이 되는 동시에 민족장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국가의 대표자가 되어 아담 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계는 아담주의 하나로 통일되어 나오는 것입니다. 시시껄렁한 주의들은 다 집어치워야 되는 것입니다. 시시한 주의들이 나와서 세계를 교란하고 있으니, 우리는 이런 주의를 뿌리째 전부 뽑아 버려야 합니다.
미국 돼지나 한국 돼지나 다 같이 꿀꿀 하고, 참새도 똑같이 짹짹 하는데, 만물의 영장인 사람들은 왜 이 모양입니까? 돼지새끼 말도 아니고 소새끼 말도 아니고…. 수십 개국을 돌아다녀 보아도 가는 곳곳마다 말이 다릅니다. 밥을 좀 얻어먹는 데도 정말 힘이 들어요! 벙어리가 되어도 상벙어리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결과를 누가 만들어 놨습니까? 그것은 한 마디로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말도 하나로 통일하지 못하고, 한 종류의 말도 쓰지 못하는 인간이 무슨 만물의 영장입니까? 얼마나 분한 일입니까? 참 기가 막힌 일이 많습니다.
주의도 아담 주의, 언어도 아담 언어, 문화도 아담 문화, 전통도 아담 전통, 생활 방식도 아담 생활 방식, 제도도 아담 제도, 아무튼 모든 것이 아담국가의 이념제도가 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주의는 하나님주의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의해서 하나님과 일체가 되어야 하니 하나님주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통일교회에서는 천주주의를 들고 나왔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주의가 벌써 나왔다는 사실만으로도 고마운 일입니다.
여러분은 부모가 죽었는데 손 하나를 잘라 바쳐서 그 부모가 다시 살아난다면 손을 잘라서 바칠 수 있겠습니까? 바칠 수 있다면 어디를 자르겠습니까? 왼손이요? 하고 자르기를 주저하는 사람은 불효자식입니다. 손가락 하나만 잘라 바치라 해도 ‘아, 왼손가락 이거요? 이만큼요?’ 한단 말입니다. 자르는 것은 어디를 자르나 마찬가지이니, 이 손을 전부, 힘줄까지 완전히 잘라서 바치란 말입니다. 그럴 수 있는 배포들을 가졌습니까? 쯧쯧, 그러니 믿는 사람들이 전부 껄렁패들입니다.
이 따위들이 세계적으로 뭉쳐서 시시하게 논다는 것입니다. 정통? 무엇이 정통이오? 이건 전부 때려 부숴야 합니다. 일시에 밀어 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6천만 한의 심정을 억누르면서 복귀의 한 날을 고대하던 하나님의 안타까운 심정을 생각하게 될 때 참을 수 없이 분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책임과 사명을 갖고 선의 세계인 천국을 세우기 위해 이 땅에 오셨지만 한마디의 말씀도 못하고 돌아가셨습니다. 이것을 알았지요?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뭐 사도들? 사도가 무슨 사도란 말입니까? 예수님이 죽게 될 때는 난 몰라 하던…. 그들은 전부 자기만을 생각하면서 뭐 주(主)의 나라에서 좌정승 우정승이 되기만을 바랐으니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깡패의 세계에서도, 거지의 세계에서도 의를 갖고 생명을 내놓는 일들이 벌어지는데, 하물며 하늘의 도와 의와 선을 중심삼고 무엇을 한다 하는 사람들이 그 꼴이니 생각해 보면 분한 일입니다.
이 땅 위에 4천년 만에 비로소 인류의 참부모의 명분을 가지고 찾아왔던 분이 사탄의 몰림을 받고 돌아가시다니…. 최후에 돌아가실 때는 강도를 좌우 편에 두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이 땅에 인연을 맺기 위해 찾아오셨던 예수님은 할 수 없이 인연을 던지고 가셔야 했습니다. 십자가상에서 참회한 오른편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하셨으니 기가 막힌 사실입니다. 기가 막힌 사실이에요.
예수님은 한을 풀지 못하고 이처럼 서글픈 심정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다시 수습하지 않으면 안 될 예수님의 안타까운 심정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이걸 모르는 터전 위에서 오늘날의 기독교가 생겼으니 기독교인들도 예수님의 이런 감정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무지한 기독교인들, 이 멍청이들! 무슨 박사? 뭐가 어떻고 어때? 박살을 당해야지!
잃어버린 참부모를 어디 가서 찾을 것입니까? 참부모가 나오지 않는 한 참다운 형제는 꿈에 지나지 않습니다. 꿈이란 말입니다. 참부모 없이 참형제가 있다면 그것은 정말로 가짜입니다. 가짜예요. 참부모가 없는데 참형제가 있을 수 있습니까? 분명히 참형제 참자녀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참다운 부모가 나오기 전에는 참다운 사랑도 못 찾는 것이고, 참다운 생활도 할 수 없습니다. 참다운 부모가 없으면 참다운 행복의 나라도 세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이 바라신 이상적인 완전한 기준은 이 땅 위에서 참다운 선을 이어받은 참부모의 이름과 더불어 성립되는 것입니다. 그 참부모를 중심삼고 참다운 혈통의 인연을 맺은 자녀들이 있어야 비로소 그 기준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타락한 자녀들만 있어서는 성립되는 것이 아닙니다. 타락한 자녀인 주제에 무엇을 주고 다니고, 입고 다니고, 지고 다니고, 안고 다니니 아이고, 꼴 보기 좋군요. 꼴 보기 좋아요.
선생님이 미국 48개주를 돌면서, 그 도로만 쓱 보아도 부자의 나라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내가 돌아다닌 곳 중에서 애리조나주와 네바다주, 그리고 캘리포니아주가 접하고 있는 접경지대는 산악지대인데 여기에 대협곡이 있고 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수만년 전 지구가 생기던 그때부터 비가 오면 빗물이 한곳으로 모여 강이 되어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이 골짜기가 이루어지게 되었고, 나중에는 산맥이 강물에 끊겼습니다. 이곳 강폭이 약 150미터 내지 200미터가 되고 물이 흘러 내려가는 이 골짜기는 전부 청석으로 되어 있는데, 지금은 이 강물을 막아 댐을 만들어 발전소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이 댐이 후버댐입니다. 이 댐의 높이가 얼마냐 하면 172미터입니다. 그리고 이 댐의 공사비로 약 3억 달러가 들어갔습니다. 20세기 후반기에 있어서 세계적인 공사로 알려진 댐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그 댐에 사용된 시멘트가 얼마나 들었나 알아보았습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워싱턴까지는 시속 백 마일로 하루 6시간씩 달려 일주일을 가야 하는 길인데, 이 길이 온통 시멘트로 포장되어 있습니다. 이 길을 만들 때 들어간 시멘트만큼 들었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미국이라는 나라는 큰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한국은 왜 이렇게 작은지…. 선생님의 배포는 미국보다 더 큰데 왜 이렇게 작은 한국에서 태어났느냐 말입니다. 내 조상들도 여기서 살았지만 말입니다. 하여튼 미국에는 길도 꼬부랑 길은 찾아볼 수 없었어요. 직선으로 잘 닦아 놓았어요. 운전대만 잡고 있으면 잘 가게 되어 있는데, 한국은 길이란 길은 꼬부랑 꼬부랑 굽어져 있으니 운전수들이 운전하기도 힘들지요.
오늘날 한국을 볼 것 같으면 금수강산이 뭐 어떻고 어떻고 하지만, 명승지라는 곳을 가서 조금 후미진 곳에 들어가면 코를 막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냄새가 코를 찌릅니다.
그러나 미국의 명승지는 어디나 깨끗하여 차를 세워 놓고 기분 좋게 구경을 할 수 있습니다. 잔디를 보더라도 전부 금잔디라서 차에서 내려 폭신폭신한 그런 곳을 지나가노라면 아주 기분이 좋아요.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습니다. 자동차를 타고 하루 백 마일 이상 달리다 보면 허리가 아픕니다. 그때 차에서 내려와 잔디 위에서 쉬면 정말 기분이 좋습니다. 그런 것은 미국 천지가 아니면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는 것입니다. 또 길이 얼마나 멋지게 닦여져 있는지 모릅니다.
한국은 땅이 좁기 때문에 공장 건물을 지어도 높게 짓습니다. 물론 미국의 공장도 굴뚝이 대단한 곳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공장을 보면 2층, 3층의 공장은 드물고 단층 공장들입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기술상 어려운 분야는 반드시 그 분야의 기술을 연구하여 사람들에게 알려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미국의 대통령인 존슨도 타락의 조상이 낳은 후손임에는 틀림없습니다. 타락한 조상이 낳은 후손은 전부 가짜입니다. 진짜 앞에 머리를 숙여야 되는 가짜란 말입니다. 만약 미국의 존슨 대통령보다 한국의 빈민촌에서 가장 빈한한 노동자가 진짜 부모를 먼저 알고 모신다면 둘 중에 누가 형님이 되겠습니까? 진짜 부모를 부여잡고 ‘당신들은 제 어머니, 아버지가 아닙니까? 하면서 달려드는 자식이 있다면, 진짜 부모는 그를 떼어 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존슨 대통령보다 진짜 부모를 먼저 만난 자리에 들어가면 천막집에 살든 어떤 집에 살든 괜찮습니다. 제일 처량한 자리에서 잠을 잔다 할지라도 나중에는 미국에서 세계를 호령하며 호화롭게 사는 사람들보다 형이 됩니다. 한국 사람들은 진짜 부모를 먼저 만났으니 형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제 이것을 알았지요? 「예.」
통일교회 사람들의 눈을 보면 보통사람과는 좀 다릅니다. 외양을 보면 처량해 보이지만 눈을 보면 달라요. 왜냐하면 그런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생각하면 기분 나쁠 때가 있습니다. 선생님이 왜 가르쳐 주었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안 가르쳐 주었으면 말을 잘 들을 텐데…. 가르쳐 주고 나니 말을 안 듣는단 말입니다.
미국의 어떤 곳에 가 보면 참으로 그림과 같은 집들이 있습니다. 좋은 명승지에다 집을 지어 놓았는데, 그 명승지의 풍경에 어울리도록 한 그림 같은 집들이 있습니다. 갈 길이 아무리 멀더라도 그러한 집들을 볼 때에는 그곳에서 낮잠이라도 한번 자고 가고 싶은 생각이 드는 거예요. 이러한 생각을 하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생각이 안 날지 모르지만 선생님은 납니다. 그런 곳을 차를 타고 지나가게 되면 차를 세워 놓고 한참 거기에 정신을 빼앗기기도 합니다. 그 집은 누구의 손을 거쳐 지어진 것이며, 누가 사는 집일까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집들은 사탄의 핏줄을 받아 가지고 하늘 앞에 승인 받을 수 없는 패들이 좋다 하며 사는 집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곳은 하늘이 기뻐할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이 누워서 노래를 부르고 생활하는 곳은 하늘이 기뻐하고 천군천사와 수천만의 성도들이 환영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오! 복된 안식처여! 천년만년 행복의 꿈과 노래가 흘러나올 수 있는 자리로다’ 할 수 있는 곳이 아닌 것입니다. 천리의 법도를 알지 못하고 악주권 내에서 움직이는 그들의 모습과 그러한 환경을 바라보게 될 때, 하나님은 원수에게 맺혔던 한을 풀고 싶은 곳입니다.
미국은 심정적으로 빼빼 말라 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한국은 그래도 손을 붙잡고 함께 눈물을 흘리며 서로 위로할 수 있는 동지라도 찾을 수 있는 곳입니다. 몇 마디 사연을 나누면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심정적 터전이 되어 있는 곳입니다.
미국이 아무리 살기 좋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본연의 심정을 중심삼고 볼 때, 하나님의 기쁨의 자료가 되지 못하고 영광의 상징에 접근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미국 천지가 슬픔과 탄식의 한 구덩이 속으로 휩쓸려 들어가는 것을 하나님이 바라볼 때 기가 막힐 일입니다. 뉴욕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 가서 선생님이 기도한 적이 있습니다. 미국의 찬란한 문화로써 이룩한 세계에서 제일 높다는 빌딩입니다. 야! 이놈의 빌딩아, 이 죄악의 뉴욕 땅에서 너를 중심삼고 하늘과 인연을 맺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느냐? 너도 탕감을 받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뉴욕 땅에서 아무리 찾고 들춰봐도 하나님과 본연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참부모가 이 땅 위에 오실 때, 참다운 혈연적인 인연을 맺어 아들딸이 될 수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약 8백만이나 되는 뉴욕 시민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있느냐 할 때 없었습니다. 1억 2천만이 되는 미국 국민을 다 들춰봐도 없었습니다.
미국 사람이 있기 전에 미국의 주인은 하나님입니다. 인디언이 있기 전에도 주인은 하나님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 미국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미국에 가서 여자들이 야한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보고 마음에 언짢았습니다. 여자들은 그러한 모양으로 어떠한 식당에도 마음대로 들어가는데 남자들은 오뉴월 삼복 더위에도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매지 않으면 못 들어갑니다. 아주 기분이 나빴어요.
소위 통일교회의 선생님도 동양 사람이지만, 서양 사람들은 동양 사람들을 참 우습게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미국의 48개주를 찾아다니면서 기도하고 다짐했습니다. 어디 두고 보라지…. 아무리 그들이 호화로운 생활을 하더라도 하나님의 복귀섭리역사와는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2백년 미만의 역사의 배경을 지니고 있는 미국이 세계의 문화권을 제패했다는 사실은, 옛날 그 비탄 속에서 무엇보다도 하늘을 위해 희생과 봉사를 하며 하늘이 뜻하시는 섭리노정에서 제물 되는 입장으로 책임을 다했기 때문에 하늘이 축복해 준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지탱해야 하는 현재의 젊은 층에서 타락해 가는 사회를 뒤넘이칠 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통일교회가 필요한 것입니다. 선생님이 필요한 것입니다. 미국은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날 세계의 30억 인류를 중심삼고 복귀섭리를 하시기 위하여 참부모를 이 땅 위에 보내십니다. 그런데 그 참부모 앞에 효자 될 수 있고, 효녀 될 수 있도록 준비된 기독교인들이 있어요, 없어요? 그러면서도 믿고 천당에 가겠다고 주일이면 ‘교회 갑시다! 교회 갑시다!’ 하지만 무조건 예수님만 믿고 천당에 갈 것 같습니까? 주님은 다시 오셔야 합니다. 땅 위의 인간들은 타락한 부모의 핏줄을 받아 태어났으니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네가 거듭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7년노정이니, 무슨 노정이니 하는 것은 다 탕감노정입니다. 탕감을 하기 위해서는 그에 대한 인물이 필요하고, 기간이 필요하고, 조건물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것이 왜 필요한가? 탕감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느냐? 참부모가 오시는 다리를 놓아 드림으로써 참부모가 오실 때에 거리끼는 것이 없게 해야 합니다.
에덴동산은 자유의 천국입니다. 그 천지에는 누구도 반대할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운행하고, 사랑만이 깃들 수 있습니다. 평화와 행복만이 있는 안식의 보금자리가 에덴동산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잃어버렸던 본연의 기준을 세워야 하셨기 때문에 서러움을 당하시면서도 복귀의 길을 닦아 놓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오실 수 있는 길을 닦아 놓게 하기 위해서 동원된 자들이 바로 이 땅 위의 수많은 종교인들입니다. 그러한 사명을 짊어지라고 보내어진 종교인인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기가 제일인 줄만 알고 있습니다. 석가모니도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말을 하고 그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종교는 양자로서의 책임을 짊어지고 세계적인 사명을 하는 종교입니다. 물론 그런 종교를 믿는 것도 좋겠지만 그보다도 참된 부모의 종교를 믿어야 됩니다.
통일교회는 욕을 먹고 손가락질을 받지만 어떻게 해야 하느냐? 제일 지혜롭고 제일 똑똑하다고 자부하고 있는 우리는 시시한 양자의 종교를 믿지 말자는 것입니다. 예수님보다도 한 단계 앞선, 예수님이 소원하던 참부모의 종교를 믿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통일교회입니다. 그만하면 믿을 만합니까? 여기서 말하는 선생님도 그런 것을 알았습니다. 기도해 보면 다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이 6천년 역사를 이끌어 나오신 목적은 잃어버린 본연의 참종지 조상을 찾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분은 어떻게, 어디로 오실 것인가? 어떠한 길을 거쳐서 어느 나라로 오실 것인가? 이것이 문제입니다. 미국에 오시면 좋겠지요? 그런데 고생스럽게도 이 한국 땅에 오신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서글픈 심정을 가지고 간구하는 자들의 기도를 들어 주십니다. 잘먹고 잘사는 곳에 가게 되면 뻔한 일입니다. 세상에서도 자식이 병신이면 그 자식을 더 생각하지요? 하나님의 사랑은 이렇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은 어디로 오셔야 되겠습니까? 여러분은 주님이 어디로 오셨으면 좋겠습니까? 한국 사람은 한국으로, 미국 사람은 미국으로 오라고 할 것입니다. 미국 사람이 ‘주님! 한국에 가소서.’라고 기도하겠습니까? 영국 사람도 ‘하나님! 당신은 우리 영국을 사랑하시지만 주님은 한국으로 보내소서.’라고 기도하겠습니까? 누구든지 그저 ‘주님이시여! 우리나라로, 내 안방으로, 내 마음에 오소서.’ 이렇게 기도할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들 전부가 도둑놈들입니다. 이 땅을 추잡한 지옥으로 만들어 놓고서 ‘주님이시여! 어서 오소서.’ 하고 있습니다. 이런 자들이 자기들 욕심대로, 자기들 멋대로 ‘주님이시여! 여기로 오소서, 저기로 오소서.’ 하고 있습니다. ‘아이구 하나님 불쌍도 하시지요.’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만약 주님이 자기들 원하는 곳으로 오시면 어떻게 하겠다는 것입니까?
오늘 통일교회에 처음 온 사람은 선생님을 잘 모를 것입니다. 오늘 선생님을 처음 본 사람은 한번 손 들어 보세요. 여러분들은 주님이 어디로 오시면 좋겠어요? 어디로 오시기를 바랍니까? ‘하나님! 한국 땅은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고, 이토록 반만년 동안 이 민족이 걸어온 길은 내용이 복잡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오소서!’ 이렇게 기도하여 주님이 오시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어느 방에 모시겠습니까? 초가삼간으로 모시겠습니까? 하기야 ‘초가삼간 집을 짓고 양친 모셔 놓고….’ 하는 좋은 노래가 있긴 있지요. 그러나 말은 근사한데 내용이 형편없어요. 선생님이 기도할 때에 ‘아이고, 하나님! 하나님께서 한국에 이루어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하는 걸 봤습니까? 선생님이 그렇게 했어요, 안 했어요? 아니면 ‘하나님! 저녁때가 되었으니 아침 기분을 잊어버리고 저녁 기분으로 그저 한번 와 보소서!’ 했겠습니까?
세계에 비해서 한국에 기독교인이 많으면 얼마나 되나요? 미국에 가서 알아보니까, 1억 2천만이 전부 기독교인이었어요. 명패 붙은 기독교인들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한국은 구교, 신교, 껍데기 명분을 쓴 신도들까지 전부 합해야 겨우 250만이라던가? 사실 알고 보면 이 숫자도 안 됩니다. 이런 판국에 세계 각국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요, 안 그래요?
자! 여기 모인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지요? 어떻게 사랑합니까? 이걸 모릅니다. 사랑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를 모르고 있어요. 이것을 안 사람들은 교회에 나오지 말라고 해도 뛰쳐나오게 되어 있어요. 여러분은 아직 그 맛을 못 봤습니다. 요즘에 선생님이 설교도 안 하고 지도를 안 했기 때문에 그 맛을 모릅니다. 협회창립 14주년이든, 무엇이든 자기와는 관계없는 일이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기도는 해야 됩니다.
기도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하나님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하면서도 하나님이 미국으로 가실 것이냐, 영국으로 가실 것이냐, 어디로 가실 것이냐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분의 발길을 한국으로 돌이키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꼼짝 못하시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한국에 찾아오신다면 어떠한 사람을 찾아오시겠습니까? 하나님이 주님을 어느 혈통을 통해서 보낼 것인가를 알아야 될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이 되면 얼마나 시원하겠습니까?
여기 통일교회의 문 선생님은 선생님 일대에서 세 교단의 핍박을 받아야 합니다. 즉 불교․유교․기독교 세 교단으로부터 핍박을 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뜻이 이루어지려면 120만 이상이 핍박을 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전부 다 반대를 해야 됩니다. 물론 한국도 여기에 동원되어야 하겠지요. 이러한 반대는 영계까지도 동원되어야 합니다. 영계에는 지금까지 수천년간 이 땅에 왔다 간 조상들이 전부 다 한곳에 몰려 있는데 그 수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몇십억? 몇천억? 얼마만큼 될까요? 수많은 영인들은 전부 다 자기 민족을 통해서, 자기 나라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처럼 바라는 모든 것들을 심판해 버려야 합니다. 전부 부결시켜 버려야 합니다. 부결시킬 수 있는 터전을 닦지 않으면 하나님을 모실 수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되어 영계하고도 싸워야 합니다.
통일적인 내용을 갖추지 않으면 지상천국은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영계나 육계, 어디를 막론하고 전부 다 반대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실력이 있어야 합니다. 실력전입니다. 따라서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생명을 걸고 넘어가는 기도를 세 차례나 했습니다. 예수님이 세 차례나 기도를 했던 것처럼 여러분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곤경에서 기도를 했지만 하나님의 본래 뜻은 그러한 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하고 일문일답을 해 가지고 나가야 됩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석가․공자․마호메트와도 일문일답을 통하여 담판을 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원리원칙이 그렇게 되어 있으니 영계에까지 전부 실력전을 벌여야 되는 것입니다. 영계와 싸우고 지상과 싸워서 승리해야 되는 것입니다.
영계와 싸워서 승리해야 되고 지상의 사탄세계와 싸워서 승리의 패권을 잡지 않고는 하나님을 모셔 올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이 있기 때문에 통일교회의 문 선생님은 세계의 영통인들을 전부 다 제자로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오늘 처음 나오신 분들은 ‘어, 그것이 무슨 말인고?’ 하겠지만, 이제 돌아가서 영통인을 찾아가 통일교회의 문 선생님이 어떤 분인가 한번 물어보십시오. 도통하는 사람들도 다 우리의 원리를 알게 되면 원리 안에서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도 이 목사가 얘기를 했지만, 이것 참! 통일교회의 패중에도 껄렁껄렁한 패들이 많아요. 싸구려 패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눈에 다 의안을 끼워서 모릅니다. 통일교회의 문 선생님이 자가선전을 한다고 할 것입니다. 사실 선생님이 자가선전을 할 만도 합니다. 선생님이 나라를 위해서 눈물을 흘리는 데는 누구한테도 지지 않습니다. 십대 소년시절부터 서울 도성을 위해 눈물 흘린 것만도 한이 없습니다. 일본에 가서도 싸웠습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데는 누구한테도 지지 않습니다.
나라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선생님이 부관(釜關)연락선을 타기 위해 7~8시간을 통곡하면서 내려가던 지난날이 새롭습니다. 지금부터 20년 전만 해도 표방해 가던 걸음이 한때는 영웅이라는 길을 거치기도 했고, 한때는 배신자로부터 반대 받는 길을 거치기도 하여 오늘날에는 명실공히 통일교회의 책임자가 되었습니다.
통일교회의 문 선생님을 무엇 때문에 영계에서 증거해야 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 내막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것이든 선생님의 손에 걸리는 날에는 나가 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꼼짝달싹 못하고 반대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짓말 같아서 믿지 못하겠거든 목을 걸고 한 40일 동안 기도해 보십시오.
주님이 오시기를 바라지요? 그러면 효자가 되어 주님을 모셔 와야 하는데, 누가 모셔 올 것입니까? 그분을 모셔 오는 나라, 즉 그 한 분이 나오시는 나라, 그 나라는 그분으로 말미암아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세계를 주관하고 세계 만국의 조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역사는 한 사람이 실수했기 때문에 다시 한 사람을 찾는 것입니다.
한국의 생활 방식이 유대인들의 생활 방식과 비슷하다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리고 한국에서 영통하는 기독교인들은 주님이 필경 한국으로 오실 거라고 합니다. 한국에 주님이 오실 수 있다는 레테르가 붙은 것은 자랑 같지만 통일교회의 문 선생이라는 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에 어떻고, 한국에 어떻고….’ 하면서 엎드려 기도하면 주님이 오신다고 하지만, 주님이 어떻게 오시는지 알기나 합니까? 날이 새어 해가 떠올랐다 할 때는 누구나 해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늦습니다. 이처럼 주님이 오시는 때와 방향을 몰라 운세를 잡지 못하고 야단하는 패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많은 사람이 희생을 당하면서도 많은 정성을 들인 나라도 있는데, 어떻게 해서 한국에 주님을 모셔 올 수 있었을까요? 이것은 통일교회의 공로입니다. 통일교회가 주인들인 것입니다.
통일교하에 들어와서 큰 뜻을 알았다 하면서도 7년노정을 가라는데, ‘아이구, 내가 잘못 오지 않았나.’ 하면서 어정비정하는 이런 눈꼴사나운 일이 많이 있었습니다. 세상 같았으면 선생님의 성격에 전부 다 싹 쓸어 버렸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6천년의 한을 참고 오셨으니 선생님도 참음으로써 하나님의 한을 풀어 드려야 했습니다.
선생님이 입을 다물고 있기에 망정이지 이 나라에 대해서 할 말이 많습니다.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남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수고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뭣 좀 하자고 내보내면 나갈 때는 아주 당당하게 뛰어 나갑니다. 그러나 올 때는 언제 왔는지도 모르게 슬그머니 와서 이렇게 웅크리고 앉아 있습니다. 정말 처량한 모습들입니다. 이게 뭡니까? 낙오자 아니면 패잔병이 아닙니까? 사람들이 어찌 그렇게 되었습니까? 선생님은 지금도 뛰기를 하거나, 또 그 무엇을 해도 누구한테도 지지 않는데…. 통일교회의 선생님은 그렇게 시시하지 않습니다. 나이 50이 가까운 지금도 누구든지 일 대 일로 한다면 무엇을 해도 지지 않을 수 있는 기백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천하에 원수들이 없어지지 않았으니 이 원수들을 다 물리치기 전에는 죽을래야 죽을 수가 없습니다. 피할래야 피할 수가 없습니다. 잘래야 잘 수가 없는 것입니다. 먹을 것 다 먹고 언제 합니까? 밥 먹는 것에 구애받아서는 안 됩니다. 선생님은 지금 점심도 안 먹었어요. 먹고 입고 난 찌꺼기 시간을 가지고 무엇을 합니까? 그런 짓은 사탄세계에서도 싫어합니다. 천지의 대주인이신 하나님을 모시는 길은 그렇게 시시한 길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이런 껄렁패들을 보면 기분이 나쁠 때가 많습니다.
선생님은 이 민족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를 압니다. 어느 정도의 문화 수준에 있으며, 세계적인 정세가 어떻게 되고, 어떤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보조를 맞춰 나갈 마음의 태도가 되어 있기 전에는 안 됩니다. 선생님은 그런 것을 생각하면서 위로 받고 다니는 줄 모르지요? 눈꼴사나운 것이 많다는 것입니다. 사실 생각해 보면 여러분들 때문에 욕을 많이 먹었어요. 통일교회가 뭐, 벌거벗고 춤을 춘다고요? 그것 참! 소문 잘 났군. 춤이나 추어 보고 그런 소리 들었으면 귓맛이라도 좋겠는데, 추어 보지도 못하고 그런 소리를 들으니…. 그것 다 좋다는 거예요. 자는 척하는데 싸운다고 소문이 났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참부모를 모실 수 있는 터전을 닦고 그분 앞에 세계의 형제를 규합하는 일입니다. 또 이런 책임을 짊어진 선조들로서 후손들이 짊어질 십자가와 핍박의 길을 없애 주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본연의 사명인 것입니다.
만민이 평화롭고 행복하게 갈 수 있는 탄탄대로를 닦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기분 좋게 몇백 마일로 달릴 수 있는 하이웨이를 만들어야 합니다. 비록 후대인들이 누가 닦았는지도 모르고, 감사할 줄도 모른다 할지라도 이러한 길을 닦아 놓아야 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직선으로 탄탄대로의 길을 닦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처럼 좁고 산천이 많은 한국에서 직선 도로를 내려니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아이구, 통일교회의 말씀은 좋고 진리는 옳은데, 고생 때문에 못 따라가겠다고? 이 못난 졸장부들! 오늘 모처럼 나오신 분들도 있겠지만, 일단 통일교회에 들어와 문 선생님의 손에 걸려들면 용서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늘의 권위를 가지고 나가야 하겠습니다. 하늘이 바라시고 하늘이 혼자서는 못 하시는 모든 내용을 지녀 가지고 만국 앞에 선전포고하여 자랑할 수 있는 모습을 갖추어야 하겠습니다. 하늘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서는 자기의 권한을 고집하여 세울 것이 아니라 자아주관의 권위를 세워야 합니다. 만민의 뒤에서 뒤치닥꺼리를 하면서 뒷골목의 험한 것을 전부 다 메워 나가야 합니다. 가시밭길이 있으면 제거해 버리고, 구렁텅이가 있으면 메워야 합니다. 돌짝밭이 있으면 이것을 정리하여 만민이 갈 수 있는 길을 닦아야 하는 것입니다. 밤이나 낮이나, 남이야 욕을 하든지 말든지 열심히 길을 닦아야 합니다. 도중에서 칭찬을 한다고 하여 그 자리에서 큰 웃음을 웃고 쉬면서 보따리를 풀어놓을 수 있는 형편이 못 됩니다. 누가 욕을 한다고 할지라도 거기에서 작당을 하여 싸워서 분풀이할 수 있는 내 몸이 아닌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에 대하여 싸움을 벌이는 것보다도 더 바쁜 일을 해야 되기 때문에 절대로 발걸음을 멈출 수 없습니다.
선생님의 발걸음이 이 강토, 삼천리 반도 전체를 편답하지 못한 것이 한이 아닙니다. 삼천만 민족에게 선생님의 입을 통해 말하지 못한 것이 한입니다. 그래서 통일교회는 짐짓 책임을 못한 죄인과 같은 입장에서 길을 찾고 뚫는 데 온갖 정성을 다하자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알고 있습니까?
그런데 오늘날 통일교인 중에는 양반이 참 많습니다. 요즘 들어서 선생님이 양복을 입고 지내지만, 그전에는 항상 잠바를 입고 지냈습니다. 추운 겨울에도 따뜻한 내복을 입지 못하고 지냈습니다. 이렇게 출발한 것입니다. 이 제단을 지키고 세계를 복귀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자리에서 출발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금까지 비참한 자리에서 만민을 구하기 위해서 찾아오셨던 그 길을 내가 이 땅 위에서 다시 재현시키고 그것을 탕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대신하기 위해서는 비참한 자리에서 해야 합니다. 비참한 신세의 모습을 갖고서도 정열과 피끓는 사랑의 마음으로 처리해야 합니다. 그런 책임이 있기 때문에 그러한 과정을 거쳐 나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삼천만 민족을 넘어 세계 만민을 대신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그래서 눈을 뜨면 만민이 자기 품안에 있고 자기의 눈앞에 있어서 그들을 위해 복을 빌어 주고 그들을 위해 싸워야 할 책임을 짊어지고 지금까지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통일교회가 세계적인 문제로 될 것입니다. 선생님이 말씀했던 대로 일은 전부 그렇게 되어 나가고 있습니다.
그거 이상하지요? 이제까지 욕먹고 뭐…. 남들은 문 선생이란 분이 실제로 없는 분이고, 또 있다고 할지라도 볼래야 볼 수도 없고, 상감마마처럼 수염을 길게 해 가지고 ‘여봐라!’ 하면 ‘예이, 대령했소이다.’ 그렇게 사는 줄 알거든요. 오늘도 선생님이 여기에 나와 이렇게 말하지만, 처음 오신 사람들은 내가 문 선생인 줄도 모르고 그저 어떤 교인이겠지 하고 가 버린단 말입니다. 내가 통일교회의 문 선생입니다. 요전에도 미국에서 신문기자가 왔었는데 선생님이 개별적으로 만나 주지 않고 같이 앉아서 예배를 보았지요. 같이 옆에 앉아 있었지만 결국은 못 알아보고 가 버리더군요.
선생님이 예루살렘에 가 보았는데 정말 기가 막히게 되어 버렸습니다. 그 옛날 복귀섭리시대에 하나님께 정성들이던 그 성스러운 곳이 지금은 전부 회교의 성당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이런 것을 기독교인들은 모르고 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무덤에도 가 보았습니다. 그곳은 지금 회교권이라서 아브라함을 자기들의 조상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믿음의 조상을 빼앗아 자기들의 조상이라고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이 사람들 어디 두고 보자! 얼마나 가나 두고 보자! 내 손으로 기어코 여기를 장악할 테니….’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늘을 위해서 충성을 해야 합니다. 충성을 하는 데는 어디서 충성을 할 것입니까? 하나님은 복귀섭리노정에서 충신을 찾았고, 효자와 효녀를 찾았고, 열녀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복귀섭리노정 가운데서 그들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들을 찾지 못한 한이 하나님의 심정에 사무쳤는데 그런 하나님을 어떻게 위로해 드릴 것입니까? 거지의 소굴과 같은 밑창에 들어가서 그 하나님의 한을 풀어 드리는 일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중심삼고 그런 밑창에 들어가 싸워서 망하거든 참소하십시오. 절대로 망하지 않습니다. 선생님도 그러한 자리에 들어가 싸웠지만 망하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들이 치고, 한 민족이 들이치고, 한 나라가 들이쳐도 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것을 볼 때에 통일교회는 빽이 있습니다. 선생님은 일생동안 핍박과 몰림받는 길을 걸어왔지만, 오늘날 그 어느 누구도 부럽지 않습니다. 미국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쯤은 우습게 알고 있습니다. 지금 선생님이 낡은 지프차를 타고 다니지만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당장에라도 지프차 10대를 사려면 살 수 있습니다. 집도 사려면 살 수 있습니다. 선생님에겐 부러운 것이 없습니다. 할 수 있으면서도 안 하는 것, 그것이 멋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선생님이 통일교인들을 고생시키지만 그 고생이 고생으로 시작해서 고생으로 끝나 망하게 될 것이라면, 그런 일은 아예 시키지 않습니다. 고생을 함으로써 청사에 길이 빛나고, 만세가 찬양할 수 있고, 그 무덤에 꽃이 피고, 역사를 빛낼 수 있는 그러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여러분들을 내몰아 무자비하게 고생을 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당연히 고생을 해야 됩니다.
우리의 소원은 무엇이냐? 배우자를 만나서 잘사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배우자를 잘 만나서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해야 할 중대한 과제가 남아 있습니다. 역사적인 숙명의 터전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인류역사의 근원이요, 종지조상인 참부모와의 잃어버렸던 인연을 찾는 것입니다. 천상세계의 하나님의 심정 가운데 묻혀 있는 그 내막을 끌어다가 지상세계에 옮겨서 이것을 이론화․조직화․체계화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만민이 공통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심정적인 발판을 닦는 것이 문제입니다.
한 국가에 있어서 정치도 문제이고, 경제 발전도 큰 문제입니다. 그렇지만 제일 큰 문제는 사상적인 무장을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상으로 무장하든지 만민이 소원하는 최고의 희망적인 사상으로 무장시키려는 것이 통일사상입니다.
감옥에 있는 죄수도, 죽어 가는 사형수도 바라는 소원이 무엇이냐 하면, 본연의 부모를 찾는 것이요, 본성이 지향하는 고향, 즉 본성의 세계를 찾는 것입니다. 이 내용은 만민이 공통으로 바랄 수 있는 최고의 희망이요, 만민이 찾아야 할 본연의 목적 기준입니다. 그러므로 과거의 사람이나 현재의 사람이나, 미래의 사람이나, 이것을 쟁취하지 않고는 그 나라에 행복이 깃들 수 없습니다. 이것이 천리원칙인 것을 알았습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선생님은 이것을 위해서 다른 모든 것을 집어던졌던 것입니다. 부모도 버렸습니다. 선생님을 낳아 준 부모를 몰라보고 처자도 몰라보았습니다.
선생님이 감옥에 들어갔을 때는 일본 제국주의시대였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 선생님은 나라를 배반하는 역적의 자리에 나가지 않게 되어 도리어 감옥에 들어갔던 것을 감사했습니다. 선생님이 추구했던 것은 하늘나라의 주권을 바라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 당시 이 나라는 군왕이 있고, 주권이 있던 그들의 입장에서는 용서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일본 압제권 내에 있었기 때문에 세상적인 것에 대해서는 일체의 마음도 둘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모를 버리고 가정을 버리고, 출세할 수 있었던 환경을 다 버리고 잃어버린 나라를 찾기 위해 이 길을 나섰던 것입니다. 그러한 선생님이 오늘날 대한민국의 부패한 모양을 바라보면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정도입니다.
우리 젊은이들은 피끓는 가슴을 억제해 가면서 말없이 묵묵히 싸웠습니다. 우리의 존엄성과 가치를 그들이 인정할 수 있고 하늘의 말씀을 통해 그들을 정복할 수 있는 그 한 날을 맞기 위해서 노심초사하며 밤낮을 개의치 않고 투쟁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다 보니 우리가 쌓은 실적을 이 나라에서 공인하지 않을 수 없고, 이 민족이 공인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습니다. 명실공히 통일교인들은 국가적으로 문제가 된 것입니다.
여기에 슬픈 것이 있다면 하나님이 이 땅 위에 발을 붙일 수 있는 완전한 터전을 아직 못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터전을 어떻게 만드느냐 하는 것이 선생님이 소원하는 바요, 몽매(夢寐)에도 잊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확실히 알아야겠습니다.
이 땅 위에 하나님께서 6천년을 두고 찾아오신 곳이 삼천리반도 금수강산이요, 의지할 곳 없는 불쌍한 고아와 같은 한 많은 삼천만 민족입니다. 이 강토에서 ‘아버지!’ 하고 부를 수 있는 아들이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이 나라가 황폐한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아들이 되느냐 못되느냐 하는 그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아들이 상처 입은 것을 바라볼 때, 모든 준비된 약을 발라 줄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아들에게는 준비된 양식을 줄 것이니 구하고 두드려라 이것입니다.
자신이 그런 공인을 받아 가지고 ‘내 아들아! 아버지!’ 하며 손을 붙들고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아들딸, 하나님의 6천년의 사연을 풀어놓고 해원할 수 있는 그러한 아들딸이 삼천리반도에 얼마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통일교회의 선생님은 이런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세계의 어떤 국가, 어떤 민족보다도 그런 사람의 수가 하나라도 더 많아야 합니다. 그러기 전에는 이 우주적인 하나님의 섭리의 주권과 하늘의 존재 목적은 결정지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위해서 싸워 나가는 것입니다. 어느 한 개인의 출세를 위해 모인 것이 아닙니다. 이 모임 자체의 행복과 안락을 위해서 모인 것도 아닙니다.
선생님도 가야 할 길이 남아 있는 사람입니다. 싸워야 할 전쟁 마당이 여러분보다도 더 크게 남아 있습니다. 밤이 오기 전부터 그 밤을 예상하면서 싸워 나왔고, 아침에 부끄러운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밤새껏 싸워 나온 것입니다.
이러한 자리에 모인 여러분들이 오늘 그 아버지를 만나 뵌다면 어떤 마음을 가질 것입니까? 여러분은 편히 쉬고 싶겠지요. 그러나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무친 한을 풀고 싶은 분이 누구겠습니까? 민족을 사랑하는 그 마음을 가지고 민족의 갈 길을 닦는 데 선두에 서야 합니다. 개척자의 사명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찾을 수 없는 그런 한이 남아 있는데 이 한을 언제 풀 것이냐? 여러분들이 풀지 않으면 선생님이 대신 풀겠습니다. 그리하여 아버지 앞에 한을 남기지 않고 가겠습니다. 이것이 선생님의 심정입니다.
오늘도 공장에 가서 얘기했지만, 이런 날을 맞이하게 될 때까지 여러분들은 배고픈 것을 참지 못하겠습니까?
하늘의 심정이 깃들 수 있는 심정적인 기준을 세워 가지고 거기에 자신의 심정을 동여매야 합니다. 그리하여 아버지와 본질을 토로할 수 있는 자리에서 ‘아버지!’ 하고 부르면서 ‘하나님! 제 피는 옛날 선조들의 피와는 다릅니다. 배반의 심정을 품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가운데 피를 토하고 쓰러져 죽은 자들과 같은 사나이가 아닙니다. 나를 동정하지 마시고, 민족과 국가와 세계 인류를 동정하시옵소서! 영계에 있는 영인들의 한을 풀어 줄 수 있도록 아버지여 도와주시옵소서! 나를 앞세워 그들의 살길을 열어 주시옵소서!’라고 피를 토하며 기도해 나온 것이 선생님의 길이었습니다.
이러한 선생님의 사상이 전통이 되어 오늘날 통일교회의 역사 과정에 있어서 그 주체가 되어 나오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늘의 심정이 피와 더불어 얽히어진 사실들이 여러분의 생활적인 이면과, 사상적인 이면과, 정신적인 이면에 있어서 폭발적으로 솟아오르는 샘물과 같은 것이 되고 억제할 수 없는 충격이 되어야 합니다. 통일교회의 용사들은 그런 생활의 주인공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충격과 더불어 얻은 힘은 이 사악한 죄악의 땅을 심판할 수 있는 권위를 형성해 갈 수 있습니다. 이런 땅을 바라보면서 참을 수 없는 분한 마음을 억제하며 참다운 주권을 찾아 아버지의 사랑을 따라가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런 마음을 가져야만 그 나라의 소망을 대신하여 아버지 앞에 남아진 무리로서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땅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민족과 종족과 가족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람이 어디 갔습니까? 하나님의 사람이 없으면 하나님의 가정이 있을 수 없고, 하나님의 가정과 종족이 없으면 하나님의 민족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처럼 처참한 운명의 역사가 선생님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을 박차 버리고 위급한 때에는 위급한 대책을 세워서 순간적으로 해결하고 넘어가야만 이러한 세계가 점점 회복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선생님과 여러분은 이런 길을 자발적으로 재촉하여 걸어야 합니다. 이런 걸음을 내 자체뿐 아니라 세계적인 생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나선 걸음이기 때문에 주저해서는 안 됩니다. 내일의 역사에 소망을 두고 한을 남기고 간 영계의 수많은 영인들이 우리의 갈 길에 소망을 두고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에 우리는 도저히 주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 선생님은 이 2차 7년노정을 지나 21년노정에는 국가적인 면과 세계적인 면으로 이루어져야 할 섭리를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늘 앞에서는 외상이 없습니다. 하늘 앞에 자기가 취해야 할 위치를 망각하고 자기 자신의 안일을 도모하는 자에게는 하늘의 진노가 있을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지나온 역사를 되돌아볼 때, 시대의 환경에 자기가 처할 수 있는 입장을 명시해 가지고 역사가 새로운 날을 고대하고 미래의 사람들이 나를 찬양할 수 있는 기준을 세워야 합니다. 이런 것을 명심하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기념의 날이 그러한 의의가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해서 무엇을 하자는 것입니까? 참부모의 탕감의 인연을 완전히 벗겨 줄 수 있는 내 가정, 내 종족, 내 민족, 내 국가, 내 세계를 찾아 세워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엄청난 사명이 통일교회에 있습니다.
물론 선생님이 통일교회가 가는 길을 책임은 지겠지만, 오늘 이 시간을 맞아 다시 한번 우리의 사명을 다짐해 보자는 것입니다. 여기에 이날을 맞는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복귀의 길을 걸어가지 않으면 안 될 중대한 사명을 띤 하늘의 용사들입니다. 이런 입장에 있는 우리들은 어떻게 그 길을 걸어가야 하는 가를 지금부터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금후에 있어서 통일용사들을 어떻게 하면 세계 최고의 기준에까지 끌어 올릴 수 있을 것인가가 선생님의 최대 관심사입니다. 조금 전에 최봉춘 선생이 인도에 대하여 말씀드린 것과 같이, 여러 나라를 순회하고 나면 언제나 마음속에 강하게 느껴지는 것은 ‘차후에 통일의 용사들을 어떻게 하면 세계 최고의 기준에까지 끌어올릴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선생님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관심사입니다.
지금 이 세계는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로 나누어져 서로 대립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인류는 뚜렷한 목적도 없는 길을 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을 볼 때 하늘의 사명과 지상 최고의 이상을 가지고 있는 우리들은 이 양대 진영이 대치하고 있는 세계를 무대로 하여 어떻게 하면 전반적인 승리의 결과를 거둘 수 있는 지름길을 찾아갈 수 있겠는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그것을 생각하고 계십니다. 공산당은 중류 이하의 사람들을 유인하여 중류 이상 되는 사람들과 대결을 하게끔 충동질을 하고 있습니다.
중류층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어떠한 사명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관념이 희박하며 또 어떤 계층에 대하여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하는 사명감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현실 속에 있는 우리 통일의 성도들은 최고의 선진국가에 속하는 민주주의권을 이끌어 전세계에 호소하면서 그보다 한 단계 더 높은 이상향을 향해 전진해 나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어야 합니다. 그러한 사명이 여러분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 세계에 있는 중류층의 사람들은 현실 그 자체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자기 이하의 사람들은 아무렇게 되어도 좋다고 생각하며 자기 시대의 유복한 생활을 탐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관여하려 하지도 않고 오직 이기적이고 개인적인 일에만 몰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오늘의 세태이기에 가진 자를 지도하고 또 가지고 있지 못한 사람들에게 나를 따라오라고 할 수 있는 확고한 사상과 그 어떠한 운동이 시작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오늘날 그 사명을 완수할 수 있는 무리들은 오직 우리 통일성도밖에 없다는 것을 이 선생님은 절실히 느끼고 있습니다. 오늘날에 있어서 유복한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의 좋은 환경을 버리게 하고 인류애에 불타게 하여, 어떠한 자리에라도 자신의 몸을 희생하며 앞서 나갈 수 있는 그런 운동이 필요한 세계가 되었음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중류층 이상의 사람들은 그러한 움직임에 필요한 힘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들은 그들에게 움직일 수 있는 연료를 보급해 주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중류층 이하의 사람들은 비참하게 굶주리고 여러 가지로 처참한 입장에 있으면서도 무엇 하나 새로운 목적 관념을 갖지 못하고 있으며, 전진하려 해도 전진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공산당은 이것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기간 동안은 자기들의 투쟁 대상과의 싸움 속으로 이 사람들을 끌어들일 수 있을지 모르나 그들은 영속적으로 그 사람들을 끌어내어, 전세계를 적화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그들 자신도 절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비참한 하류층에게 불을 붙이고 용기를 불러일으켜 그들이 어떠한 어려운 일에 부딪히게 될 때에도, 그것을 극복하여 뚫고 나올 수 있도록 하는 동시에 상류층에 대해서도 호응할 수 있는 움직임이 일어난다면, 그 움직임은 성공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중심한 심정의 세계, 그 본연의 세계를 중심으로 하여 그들에게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게끔 할 수만 있다면, 그들도 현재의 입장에서 보다 나은 미래의 세계에로 출발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남에게 지도받고 주관받는 것을 싫어합니다. 절대적인 신이나, 절대적인 이상이나, 절대적인 가치는 자기 자신에 있어서 꼭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에 대해서는 복종하려고 하는 천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 외의 것에 지배당하는 것은 싫어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도하는 입장에서 움직여서는 안 됩니다.
만일 어떠한 비참한 환경 속에서도 자신감과 용기를 가지고 어려움을 극복하며 재출발할 수 있는 무리가 있다면, 새로운 세계는 그들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언가 가지고 있는 무리들은 움직이는 데 있어서 용기가 없고, 가지고 있지 못한 무리들은 움직이려 해도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이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수행할 수 있고, 또 줄 수 있는 그 무엇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경지를 넘어서는 데에는 자연적으로 될 수 없습니다. 거기 에는 많은 탕감조건과 희생을 거쳐야만 됩니다. 진정한 희생, 자기의 이익을 위한 희생이 아니라 전체의 이익이 될 수 있는 희생을 하고 전체의 승리, 전체의 가치를 위하여 자기 일신을 희생하는 데에 만족할 수 있는 무리들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것은 개인에게 있어서도 필요합니다. 개인뿐만 아니라 가정, 민족, 사회, 국가에 있어서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그러한 개인과 그러한 가정과 사회와 민족과 국가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없으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도 그러한 것들을 고쳐 나가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원하고 인간 자신들도 원하는 그러한 개인과 단체와 국가는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전법은 결코 때리고 가져오는 전법이 아닙니다. 먼저 얻어맞고 빼앗아 오는 전법을 쓰십니다. 즉 사탄은 먼저 때리는 전법을 쓰고, 하나님은 맞고 빼앗아 오는 전법을 쓰신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어떤 젊은 사람에게 ‘그대는 장래에 어떠한 사람이 되겠는가?’ 라고 물었더니 그는 세계 성인 중의 성인이 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이렇듯 젊은이들은 모두가 그런 큰 희망과 욕망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큰 희망과 욕망은 자기를 중심으로 하여서는 안 됩니다. 설사 자기를 중심하여 그것이 이루어졌다고 해도 그것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뿐만 아니라 역사와 현재를 움직이지 못합니다. 현재를 움직이지 못하면 미래를 움직일 수도 없습니다.
우리들은 역사를 점검하고 현재를 확인하는 인간입니다. 인간의 양심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짊어지고 어떠한 이상을 향하여 전진하고자 하는 정의의 마음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양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완전하게 움직이기 위해서는 완전한 배경이 동반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 하늘이 있고 땅이 있습니다. 천지를 중심으로 하는 어느 한 정의의 개인이 있다 할진대, 그 개인이 자신의 가치를 백 퍼센트 드러내어 인정받을 수 있는 공적 입장에서 새로운 일을 했다면, 그것은 결코 그 한 개인만에 한정되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전세계의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거두어진 승리는 자기 개인만의 승리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세계의 승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승리를 여러분 자신이 거두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정신을 동반하지 않는 주의나 운동은 어떠한 단계를 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자칫하면 세계적인 대파도가 밀려올 때는 그것을 넘을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국가적인 싸움 혹은 어떤 커다란 변동이 생겼을 때에는 그것과 함께 쓰러지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기반 위에 선 주의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통한 어떠한 험한 파도가 밀려온다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넘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기준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천지를 배경으로 하는 성스러운 발판 위에 설 수 있는 승리의 기반을 갖춘 사람이야말로 현재에는 불쌍한 모습으로 보일는지 모르지만, 역사가 흘러 때가 되면 그들을 반대했던 사람들이나 혹은 그의 후손들에게 역사적인 환영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젊은 사람들에게 소망을 걸고 요구하고 계십니다. 이처럼 복잡한 지상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세워 가지고 소망하시는 세계를 이루려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오늘의 우리 젊은 사람들은 그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것을 여러분 일개인으로서 행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문제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일개인이 품은 마음, 정의에 호소했던 그 향의심(向義心)이 사실상 지금까지의 역사를 움직여 나왔다는 것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결심의 기준에 있어서나 목적에 있어서 어떠한 장애에 부딪치게 되더라도 그것을 누르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실천적인 승리를 거두는 사람에게는 세계가 그에게 복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역사는 그러한 사람을 기억하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역사의 흐름이 곧 현세계의 움직임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싸움의 마당에 있어서는 죽음을 무릅쓰고 당신의 가장 귀한 것, 하나밖에 없는 당신의 최고의 것을 최선단(最先端)에 세워 가지고 싸우게 하시는 방법을 써 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전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까지의 복귀노정에 있어서 왔다 간 수많은 선조(善祖)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던 의인이었지만 그 시대의 최선단에 서서 얻어맞았던 것입니다.
큰 사명을 가진 자일수록 역사적이며 환경적인 범위가 대단히 넓습니다. 비록 얻어맞는 환경이 좁은 자리에 있었다 하더라도 그는 세계적인 이상을 가진 사람입니다. 때린 자는 비록 한 사람을 때렸지만 세계적인 이상을 품은 자를 때렸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것을 조건으로 해서 심판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탕감조건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경우를 볼 때 그 당시의 예수님은 참으로 비참하였습니다. 유대 나라에 있어서 예수님은 반역자로 몰리고 쫓김을 당한 끝에 결국은 십자가에 못박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얻어맞게 될 때 예수는 자기 한 개인으로서 얻어맞은 것이었으나, 그것은 하늘 아버지를 배경으로 하고, 과거의 역사와 현재와 미래의 수많은 인류를 위하여 얻어맞았던 것입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걸고 엄숙하게 사면팔방으로부터 얻어맞았던 것입니다. 때린 자는 한 국가의 영역권 내에서 때렸지만, 맞은 자는 민족을 초월하고 세계를 초월하고 나아가서는 천주복귀의 최고의 심정세계에 서서 얻어맞았던 것입니다. 여기에 역사적인 심판자, 즉 하나님께서 계신다 할진대 그 하나님은 이것을 역사적으로 판단하시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길이 몰리고 또 몰리는 길이라 할지라도 결국에는 역사상에 승리를 남기고 가는 길입니다.
선생님은 일본의 젊은이들을 사랑하게 됩니다. 어느 정도 사랑하느냐 하면, 세계적으로 천주적으로 더 나아가서는 하늘 아버지 정도로 사랑합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그 결과가 사랑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생명을 바쳐서라도 진정으로 사랑하는 그런 내용을 가져야만 서로 만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선생님은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때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사랑하는 그 이상으로 때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때려서 어떻게 하자는 것이냐? 나누어 주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생님의 주의요, 하나님의 주의입니다.
선생님이 이번에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내심 깊이 느끼게 된 것은 인격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이제는 영계에 있어서의 싸움도 일단계 마무리짓고 지상에 있어서도 그렇게 싸워 나오고 있습니다. 이제 장차 이 세계가 어떻게 되겠는가 하는 것은, 복귀의 원리를 통하여 본다면 그 결론을 환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길을 빨리 갈 수 있는 방법도 있습니다. 그런데 왜 가지 못하는가? 그것은 국가적으로 희생하는 나라가 없기 때문입니다. 국가적인 희생자와 국가적인 제단, 국가적인 제물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이제까지는 개인이나 가정을 넘어 이스라엘 민족이 종족으로써 희생되어 나왔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한 나라로서의 제물입니다. 오늘날 그런 국가가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탄식이며 동시에 우리들의 탄식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여러 나라들을 돌아다닐 때, 그 나라에 이틀만 머물게 되어도 선생님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몽땅 다 주고 싶은 충동을 느끼곤 했습니다.
심정을 통하게 되면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문화의 배경이나 역사적인 환경, 혹은 시대의 위치 여하에 따라 인간의 가치가 좌우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어떠한 것들로도 인간의 가치를 결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늘을 알고 땅을 알고, 하늘의 목적과 땅의 목적과 인간의 목적을 아는 데에 있어서만이 인간의 가치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하나님이 목적하는 곳으로, 또는 선생님이 원하는 곳으로 따라가야 합니다. 하나님과 선생님은 여러분을 이용하기 위하여 대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개인의 목적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전체를 위한 것이며, 현세를 넘어 미래를 위함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는 비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 식구들은 서로 손을 잡고 성스러운 젊음의 가슴과 가슴으로 단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비록 여러분들의 수는 적지만 여러분들이 품고 있는 그 뜻은 일본의 온 국민의 힘을 초월하고 있기 때문에 외부의 어떠한 큰 세력이더라도 여러분들을 갈라놓지는 못할 것입니다. 부딪치면 부딪칠수록 그 힘으로 인하여 더욱 단결하는 여러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단결해서 무엇을 하자는 것이냐? 하나의 국가적인 제단을 마련하여 그 국가적인 제물을 세계에 바칠 수 있는, 그러한 민족과 그러한 나라가 되기 위해서 단결하기를 하나님께서는 원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6천년 동안 그 섭리의 목적을 위하여 싸워 나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모든 희생과 고생을 참고, 설사 어떠한 비참한 입장에 처하게 된다 하더라도 그것을 물리치고 극복해 나갈 수 있는 힘과 결의를 가져야 합니다.
이제 1967년이면 선생님이 이 뜻길을 출발한 지 21년이 됩니다. 이번에 세계를 순회하면서 생각되어지는 것은 선생님이 조금만 더 젊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30세 전후만 되었더라도 참 좋을 텐데…. 그러한 것들을 느껴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아직도 할 일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이제 선생님의 나이는 40을 넘고 있습니다. 복귀노정에서 볼 때에, 복귀의 목적을 이루어야 할 시기가 점점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그 시기를 맞이하여 일대 판가름 싸움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단계에 돌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이 한 나라를 하나님께 바쳐 드림으로 인하여 전세계를 위한 제물이 된다면, 금후의 세계는 이 나라를 중심하고 모든 것을 맡기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철칙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이 한국에 가면 지칠 대로 지친 한국 식구들에게 명령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가슴이 아파 참으로 견디기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몇년이나 참아 나갈 수 있을까? 3년, 7년, 21년, 40년…. 문제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중심으로 한 어떠한 성공이나 목적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일본의 성공을 요구하는 것은 전세계의 성공을 구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지금의 여러분들만이라도 단결하여 일본에 대한 천적 복귀의 사명을 수행한다면 앞으로 20년도 필요 없습니다. 그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는 쉴새없이 제물을 필요로 하게 됩니다. 제물은 주관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 전체를 대하는 데 있어서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주관을 갖고 존재의 위치를 결정지어야 합니다. 이것이 제물의 사명인 것입니다. 제물이 제물 되기 위해서는 절대로 자기의 주관을 내세 워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타락한 세계는 모두가 자기 존재의 위치를 스스로 결정하려고 싸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은 어차피 역사의 거친 파도에 밀려 사라지고 맙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자신을 중심으로 하지 않고 전체를 중심으로 하는 기준에서 금후에 움직여 나간다면 일본은 머지않아 복귀될 것입니다. 선생님은 일본이라는 이 나라를 잘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러한 것들을 잘 생각해서 국가적인 기준 위에 뜻을 세운다면, 그것은 이 세계를 살리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원하는 길이며 선생님이 원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또한 이 길은 여러분이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길이요, 우리 통일성도들이 가지 않으면 안 될 길입니다. 여러분이 만일 이 길을 남기고 죽는다면 죽은 후에라도 가야 할 길입니다. 이 길이 너무나도 중요한 길이기에 선생님은 동경을 중심으로 하여 세계적인 일을 해 보고자 합니다. 세계를 한번 움직여 보려는 것입니다.
그러자면 여러분들은 동경에 있는 제일 어려운 곳을 책임질 수 있는 주인공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또한 이 일본 통일교회의 가장 어려운 자리에 설 수 있고, 어려운 일을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일본이 가장 어려운 국가적인 자리에 놓이게 됩니다. 십년, 백년, 우리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끝없이 전진해야 됩니다. 내 1대에 이루지 못하게 되면 2대 3대의 후손을 통해서라도 기필코 그 목적을 달성해야 됩니다. 세계적인 파도가 휩쓸 때, 그 속에 뛰어드는 사람의 수에 따라 민족적인 승리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우리 통일교회 식구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적인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어느 한때가 되면 이 지상 위에 나타나 문제가 될 것입니다. 그러한 시기가 틀림없이 올 것입니다. 그때에 가서 일본이 몇 번째? 첫째 번이 되면 일본은 세계의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중심이 되면 사방팔방에서 잡아당기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 잡아당기는 힘을 모을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게 됩니다. 문제는 그것에 있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기도를 할 때 곧잘 이러한 기도를 합니다. 영인들에 대해 ‘그대들의 요구는 이것이지? 그대들의 선조의 소원은 이러이러했지? 그 목적을 달성하고 싶은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모두 다 모여 가지고 오너라. 승패를 결정하자. 나를 이기면 이루게 해주마!’라고 기도를 합니다. 혹은 32억 인류의 발판을 만들기 위해 밟기도 하고 차기도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좋은 것은 모두가 잡아당깁니다. 나쁜 것은 모두 반발합니다.
그러한 때는 반드시 올 것입니다. 오지 않는다면 오게끔 한다! 이것이 선생님의 취미입니다. 이 일을 하기 위해서는 아무리 감옥이라 할지라도 선생님은 옆집 가듯 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죽는다는 것이 두려울 때가 있습니다. 왜인가 하면 후계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느 한때에는 잠시 주저할 때도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은 그러한 각오를 가지고 사명을 완수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들은 쓰러지고 쓰러져도 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선생님은 그러한 동지들이 필요합니다.
일본은 한때에 대동아공영권을 주장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이상은 좋은 것이었습니다. 그것으로 인하여 동남아시아는 더욱더 빛을 보유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동남아시아에 있는 한 나라의 뒷골목 어두운 곳에 가서 ‘당신들은 일본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동양에 있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고 질문하면 대부분이 좋은 대답을 하지 않습니다. 만일 그때, 일본이 그들을 위해서 진실로 국력과 희생을 지불했더라면, 오늘날의 일본은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국가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일본은 무엇을 해야 되느냐? 선을 심어야 합니다.
선은 잘 심어야 잘 자라게 됩니다. 선은 잘 심지 않으면 움터 나오지 못합니다. 또한 선은 잘 기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아무렇게나 두어서는 결실을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선을 아무렇게나 취급하여 상실하게 되면 하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이것은 천칙이요 철칙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선을 심을 때에 잘 심어야 합니다. 일본 민족을 동원하여 전세계에까지 심지 않으면 아니 됩니다. 그것은 최고의 희생을 바치고 최고의 심혈을 기울여 심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진심을 가지고 심게 된다면 역사적인 우리들의 선조들은 우리에게 머리를 숙이며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될 것입니다.
만일 일본 사람이 아닌 다른 민족이 일본에 와서 진심을 가지고 선의 씨를 심는 사람이 있다면, 여러분들의 선조는 눈물 흘리게 될 것입니다. 진정 감사의 눈물을 흘릴 것입니다. 그러나 지상에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선의 씨를 심는 자들입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정성을 기울여 심는다면 절대로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 이것을 함부로 점령할 수 있는 자는 없습니다. 이것을 점령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하늘의 참아들딸뿐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이와 같은 사실을 알아 가지고 금후의 일본에 있어서 새로운 각오와 열의를 가지고 희생해야 하며, 더 나아가서는 최고의 정성을 기울여 전세계에까지 선의 씨를 심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바라고 계시는 소원이요, 목적인 것입니다. 또한 이 길은 우리 인간들이 최후에까지 가야 할 길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러한 정신으로 일본을 움직일 것 같으면 세계는 자연적으로 움직이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많은 나라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한 나라만이라도 서로 단결한다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일본에서 그런 움직임이 일어난다면 선생님은 세계의 모든 사람들을 이 일본으로 집결시키겠습니다. 아프리카 사람들도, 아메리카 사람들도, 깜둥이, 흰둥이, 누렁이, 푸렁이 할 것 없이 일본을 위하여 이 나라에 집결시킬 것입니다. 그리고 어디에 갈 때에도 혼자 가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일본 사람들을 데리고 다닐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일본은 세계적인 나라가 될 것입니다. 이것은 현실적으로 충분히 실현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23년 전, 선생님이 동경에서 공부하고 있을 그때에 선생님은 동경을 많이 돌아다녔습니다. 다녀보지 않은 곳이 없었습니다. 장차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앞으로 몇년 후에는 일본의 젊은이들이 반드시 일어날 것이다.’ 생각을 하면서 말입니다.
선생님은 여러분을 선두에 세워 여러 곳을 돌아다니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 한일 문제가 복잡해졌습니다. 국가적인 문제로 되어 있습니다. 세계적인 문제로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종교가 어떻게 될 것인가는 선생님이 잘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있어서 금후의 문제는 단결해야 된다는 데 있습니다. 깜둥이, 흰둥이, 누렁이 할 것 없이 모두 단결해야 합니다. 이러한 색깔들을 합쳐 가지고 돌리게 되면 태양 빛깔과 같은 흰색이 나옵니다. 여러 가지 색을 섞어 두면 검은 색이지만 그것을 돌리면 흰색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모든 것이 합성체가 되어 돌 때에 빛을 발하게 되며, 그 빛은 세계를 덮는 것입니다.
수수작용을 하면 힘이 나옵니다. 힘이 나오면 작용하고 작용하게 되면 움직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빛을 발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단결하여 북해도면 북해도, 규슈(九州)면 규슈, 어떠한 주면 그 주로써 제일주의가 아니라 전국 일치주의로 나가야 합니다. 그러니 결국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나 한 사람이 벌거벗어 1억 전체가 구원받을 수 있다면 모든 것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선생님은 여러분들이 일본 전체, 나아가 아시아 전체에 공헌해 주기를 진심으로 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일을 다할 수 있는 자신(自信)을 갖고 있습니까? 지금은 그러한 것을 갖추어야 할 때이기도 합니다. 희생을 지불해서 진실된 마음을 가지고 선한 씨를 심는 그 길이 우리 통일 성도들이 가야 할 길이요, 그 길은 하나님께서도 원하시는 길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은 마음 깊이 명심하고, 그것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오랜 인류역사 속에 있어서 실패의 반복으로 인하여 이 복귀의 길이 남았다는 것을 생각할 때, 저희 선조들이 그 사명을 어째서 완수할 수 없었나 하고 후회하게 되옵니다.
하늘의 아버님! 아버님이 이제까지 고생해 오신 수많은 비참한 입장 입장을 잘 알고 있습니다. 현재에 있어서도 세계의 끝까지를 아버님의 움직임의 터전으로서 당신의 품속으로 거두어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될 중대한 사명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님 혼자서는 이것을 이룰 수 없고, 사람이 없으면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선두에 서서 그것을 포섭해 아버님께 바치지 않으면 아버님도 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복귀노정입니다.
일본에 있는 사랑하는 식구들을 아버지 지켜 주십시오. 금후 일본이 움직여야 할 장래의 길에 있어서도 새로운 분야에 공헌할 수 있는 젊은이들이 되도록, 아버님께서 인도해 주실 것을 진심으로 부탁드리옵니다. 헤어지게 된 그 기간에 있어서도 끊임없이 지켜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같이 만날 수 있는 이 기간을 저희에게 주신 아버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금후에도 아버님이 원하시는 목적을 향하여 모두를 희생해서라도 절묘한 제물을 전국민을 통해 바칠 수 있도록, 그리고 세계를 구원할 수 있는 새로운 철퇴(鐵槌)를 이 지상에 던질 수 있는 통일성도가 되도록, 아버님이여, 힘을 복돋아, 그들의 마음을 격려해 가지 않으면 안 될, 갈 수밖에 없는 용기를 쏟아주실 것을 간절히 바라옵니다.
금후 며칠간의 교제를 지키시고, 모두가 아버님의 뜻에 맞도록 인도해 주실 것을 간절히 간절히 바라오며, 참부모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니다. 아멘.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느낄 수 있기 때문에 멋진 것입니다. 자신이 세운 기준은 누구에게도 점령당하지 않습니다. 영원히 자신의 이름과 더불어, 자신의 희망과 더불어 일체화하고, 하나님도 그것을 남겨 주시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보통은 모두 흘러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심정권을 중심으로 해서 아직 비어 있는 위치를 지구상에 정립(定立)하려고 하는 것이 우리들의 목적입니다. 그리고 심정을 기반으로 해서 안정된 위치에 놓인 경우, 영원한 존재로서 남아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떠한 영웅이 나타날지라도 점령할 수 없습니다. 그 이상의 심정의 힘으로 그것을 주관하지 않으면 점령할 수는 없습니다.
노방전도 때 사랑하는 일본의 형제들은 외칠 것입니다. ‘여러분, 통일교회에 오십시오!’ 라고. 오면 무엇을 하느냐? 일깨웁니다. 그리하여 잠에서 깨어난 자신인 것을 인정하게 되면 ‘가라!’고 합니다. 먼 곳으로 가면 됩니다. 정처도 없이. 선생님은 정말로 명령해요.
그렇지만 여러분들의 얼굴을 보니 아직 그렇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도 3년 정도면 달라집니다. 이제 어디로 갈 것인가? 세계 끝까지 갑니다. 하나님이 가고 싶은 곳은 한반도뿐이 아닙니다. 그런 것을 하나님은 원치 않습니다. 스물 네 시간 동안에 지구가 한 바퀴 돕니다. 정말로 지구상의 인간을 사랑하는 하나님은 몇 바퀴나 도실까? 그런 것을 생각해 보았습니까? 지구가 우리를 등에 지고 하루에 한 번씩 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몇 회? 10회 가량 돌으실까? 지구가 도는 힘 이상이 아니면 안 됩니다. 그리하여 점령하십니다.
탕감원리, 탕감조건이라고 하는 것은 실로 좋은 말입니다. 어떤 때는 그 조건에 의해 열(10)이 천만도 됩니다. 탕감조건이라고 하는 것은 어느 때는 나쁘지만 어느 때는 참으로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탕감으로 세운다.’ 그러한 기준이 성립되면서 하나님 자체는 어떻게 할 수도 없습니다. 그 사람에 이르러서는 어떻게 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면 ‘그래.’ 라고 하실 수 있는 기준까지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게 되어 ‘저는 아버지보다 훌륭한 존재가 되겠습니다. 지금은 그렇지 못하지만 그렇게 되겠습니다.’ 할 때, ‘무엇을 가지고?’ 하면 ‘심정으로.’ 라고 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한 통의 편지가 그 사람을 언제든 지 점령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아닌데 없어지면, 하루 종일 시간을 소비해서라도 꼭 찾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하나님은 사랑을 중심으로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있다고 하는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일치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것을 중심으로 하면 그 한계를 초월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중심으로 하면 그 한계를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한 비결의 경지가 있으니까, 인간은 어떻게 해서라도 하나님을 다시 찾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 그런 권내로 전진합시다!
여러분은 아침에 태양을 볼 때, ‘오늘은 무엇을 볼까요? 입이 있으면 저에게 말해 주십시오.’ 라고 하나님께 여쭈어 보세요. 그러면 여러분을 만든 주인은 무어라고 할까? 바람이 불어도 물어 보세요. 벌레 소리가 들려와도 물어 보십시오. 그러면 그 모든 것이 우리의 마음속에 가르쳐 줍니다. 당신이 기뻐하는 그날은 언제이겠는가?
만약 내가 그 자리가 되지 않으면, 소개할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한 한 사람이 머리를 숙여서 한 사람으로 끝나는 것 같은 그러한 생활을 합니다. 사람의 아름다움이라는 것, 인격의 미는 시(詩)적 경지인 것입니다. 아무도 그것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깊어요.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좋아합니다. 빨리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심정의 소유자가 되는 것은 간단합니다.
선생님은 지금까지 여러분들과 같은 젊은 사람들 앞에 서 있을 때에는 권위 있는 선생님이 됩니다. 그러나 개인으로 있을 때에는 선생님이 아닙니다. 선생님이라고 하는 그런 기분은 갖지 않습니다. 언제든지 선두에 섭니다. 언제든지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을 시켜서 하는 것보다도 자신이 하는 것이 오히려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런 책임을 지고 나간다면 일본이라고 하는 나라, 1억이라고 하는 숫자는 많지 않습니다. 이 수는 하루에라도 움직일 수 있습니다. 모든 문명을 복귀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진 곳이 많이 있습니다. 30분 이내에 세계의 정세를 모두 한 곳으로 모읍니다. 이렇게 되면 문제가 없습니다. 현재 우리가 여기에 있는 이상은, 일본에서의 하나님의 걱정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할 때인 것입니다. 일본의 노도(怒濤)를 당당히 넘을 수 있기를 선생님은 바랍니다. 어떠세요? 책임을 다할 수 있는 자신이 있어요? 「예.」
생각해 볼 입장에 있다고 하는 것은 아직 한계까지 가지 않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지 않으려면 생각도 하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그것으로 좋아요. 사람들의 눈치를 볼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 있습니다. 책임을 다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할 수 있겠어요? 원리의 내용을 어떻게 해서 이룰 수 있을 것인가? 만약 영계에 가는 사람이 있다면 영계에 가서 가르칩니다. 그런 얘기를 한다면 여러분들은 눈이 뒤집힐 것입니다.
지상계(地上界)를 바르게 하고, 하나님의 슬픔을 책임지는 그런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결론은 거기에 있습니다. 그렇게 해도 하나님의 심정을 모른다고 하면 선생님은 목을 내주겠습니다. 죽어라! 거기에서 눈물을 흘려라! 하는 것입니다. 잠을 잘 수도 없습니다. 부끄러워서 먹을 수도 없습니다. 목적을 다 이루지 않고 먹을 수가 없어요. 오늘은 내가 무엇을 했는가? 세계 30억 인간들이 그것을 알게 되면 모두 금식하며 죽어 가는 사람들뿐일 것입니다.
심정세계를 어떻게 건설할 것인가? 복귀노정은 종으로부터. 종은 주인에게 백 번 얻어맞으면 백 번 믿을 수 있습니다. 천 번 얻어맞으면 천 번 믿을 수 있는 입장이 됩니다. 거기에서부터 출발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부모의 심정을 갖고 눈물과 땀과 피를 흘리며, 종의 몸으로 봉사합니다. 그렇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심정이 생깁니다.
우리에게는 3대 심판이 남아 있습니다. 말씀심판, 인격심판, 심정심판. 이것을 어디서 일치시킬 수 있는가? 자기가 말한 모든 내용이 선한 것인가 그러지 않는가 심판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인격자로서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이 땅에 사랑의 기준을 바르게 세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그것을 완성하여 완성의 기준에 섰기 때문에, 거기에서부터 부활의 기준이 출발되었던 것입니다. 타락권의 주권자의 권계(圈界)와는 관계없었습니다. 해방권(解放圈)이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도 민감하게 그것을 느낀다면 견딜 수 없습니다. 그런 경지에 들어가면, 어떤 것이라도 한 방에 날려 버릴 수 있습니다. 용기가 납니다. 언제나 젊은이답고 언제나 승리자의 기분인 것입니다. 천국은 실패한 자들을 모아서 위로해 주는 곳이 아닙니다. 최고의 악에 대해서 승리한 사람을 모아서 그들을 찬양하는 곳이 천국입니다. 알겠어요? 지금까지의 신앙 관념과는 근본적으로 틀립니다. 그러한 신앙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알겠지요?
우리 통일성도로서는 지금이 열심히 일하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시기입니다. 공산당의 젊은이들도 활동하고 있지만, 정말로 파고 들어가 물어 보세요. 무엇을 위하여 하는가. 그 근거가 점점 뚜렷해집니다.
공산주의는 크게 중공과 소련의 둘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이 두 나라는 지금 중동지역에 있어서 미묘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인도 문제를 중심으로 중공과 소련이 원조하는 것같이 보이지만, 또한 그것을 중심으로 내분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중공은 빨리 아시아쪽에 기반을 만들려고 하고 있으며, 그 반면에 소련은 중동쪽을 자기들의 것으로 하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낫세르와 손을 잡고 미국과 영국에 반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낫세르는 수에즈 운하를 중심으로 해서 성공한 셈입니다. 그것은 금후 중동에 있어서 중요한 조건이 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낫세르를 중심으로 한 회교의 아랍인과 단결하려고 지금 한창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낫세르는 자기들의 종교를 배경으로 해서 이슬람인을 중심으로 중동지역을 자기들이 장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에 대하여 미국과 영국은 대결하게 됩니다. 그 대결은 어떻게 할 것인가? 로마 교황청을 중심으로 한 종교통일 문제를 배후에서 합니다. 막대한 자금원조로 틀림없이 그렇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란이라든가 그외 몇몇 나라는 그들에게 석유가 있더라도 운반료가 더 많이 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낫세르는 그것을 노리는 의도를 펴 보았던 셈입니다. 그래서 소련은 낫세르를 원조해 주기도 하면서, 어떻게 하면 중동지역에 종교전쟁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 인도와 파키스탄이 싸우고 있지요. 캐시미르는 중공과 파키스탄, 인도 3개국의 국경지대입니다. 중공은 인도양에 나오려면 캐시미르를 통과하지 않으면 나올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지역은 금후 중공이 인도를 적화하는 전화(戰火)의 발단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파키스탄은 인도와 싸우고 있습니다. 파키스탄은 회교국이니까 중동의 나라들이 하나가 되어 인도에 대결합니다. 거기에 또 중공과 하나가 되어 인도에 대결하고 있습니다. 만약 휴전이 되면 분할 문제가 생깁니다. 서로 캐시미르를 차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빼앗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일본 형제들에게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 세계복귀를 위해서는 ‘죽어라.’ 는 것입니다. ‘빨리 죽어라.’ 고 하는 것입니다. 희생이 되어도 모르게 희생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다 아는 입장에 서서 희생되면 세계는 그쪽으로 가 붙습니다. 그러한 운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잘 때에 우리 젊은이들은 어떤 장소에 모여서 노래도 하고 훈련도 하는 것입니다. 밤이나 낮이나 이런 운동을 하는 것입니다.
이제 금후의 문제는 세계를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첫째는 이념의 철저화, 둘째로 조직 강화, 셋째로 공동활동으로 일치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공산주의에 대해서 공산주의 이상으로 강한 조직력과 활동력을 가지고 대결합니다. 조금 발전하면 조직화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들에게는 밤이 없습니다. 낮도 없습니다. 식사도 잊어버립니다. 나는 그러한 무리를 많이 길러내려고 합니다. 일본도 그렇습니다. 머지않아 일본에서도 정부가 통일교회에 대하여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됩니다. 그런 시기가 옵니다. 여러분들에 의해 일본은 구원받습니다. 그 기반이 세워지면 어느 고개를 넘고 나서 조직 운동을 합니다. 그러기에 빨리 문제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어야 현이나 자민당이나 사회당에서 우리의 힘을 빌리게 됩니다.
금후에 일본 형제 여러분은 미국이나 유럽에 가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그것도 선생님이 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발전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미국에 우리의 수련소를 세우려 합니다. 5백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수련소를 세우는 것이 금후의 계획입니다. 그러고 나서 각국의 국가적 대표인 청년들을 모이게 합니다. 100개 국가에서 4명 정도씩 모이게 하는 것입니다. 매년마다 그렇게 합니다. 그들을 모두 세계 각국에 되돌려보내어 세계 전도집회를 합니다. 그들을 선두에 세워 부흥회 등을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을 모아 연구도 합니다. 그렇게 해서 활동 기반을 만듭니다. 제2회, 제3회가 되면 우리 교회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들을 보내어 그를 중심으로 하여 일년에 한 나라마다 한 열 명 정도를 미국에 데리고 와서 6개월 정도 훈련시켜 돌려보냅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자연히 사회적으로도 성장합니다.
일본이 해와국가로서 세계적으로 해야 할 사명이 무엇인가? 아무리 뭐라 해도 복종하는 것이 승리하는 것입니다. 완전히 복종하면 완전히 정복합니다. 백 퍼센트 점령당하면 백 퍼센트 승리합니다.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접목을 알고 있지요? 완전히 접목되려면 3년 정도 걸립니다. 남녀가 완전히 하나되는 것도 7년은 걸립니다. 7년 동안 고생해서라도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14년, 21년 걸려서라도…. 남자와 여자가 만나 그날부터 좋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먹는 것도, 말하는 것도, 듣는 것도 모두 다릅니다. 만남과 동시에 똑같아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완전히 사랑할 수 있으면 완전히 하나가 됩니다. 완전한 플러스가 있으면 마이너스는 완전한 플러스에 합해진 존재로서 나타납니다. 그래서 완전한 플러스에 대하여 완전한 마이너스가 되면 하나가 됩니다. 플러스가 있는 곳에 플러스가 오면 반발합니다. 완전한 플러스와 완전한 마이너스가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해야 이상적입니다. 하나가 되게 되면 그것은 영원한 존재인 것입니다.
이 가운데에 플러스인 양전기가 있습니다. 수많은 양전기가 있지만 마이너스의 상대성이 아직 완전하지 않은 때에는 플러스끼리 어울립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플러스 전기에 대해 상대가 되려고 커다란 마이너스가 만들어집니다. 나아가 완전한 플러스 전기가 다 모였을 때에 완전한 마이너스가 상대로 되어 완전히 하나가 됩니다. 그러나 상대가 결정되면 반발합니다. 원리는 여러분들에게 거기까지는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건 선생님의 설명입니다. 그러니까 이 우주의 작용은 상응작용과 반발작용의 응용인 것입니다. 상응작용은 하나가 된 느낌이고 반발작용은 그 자체에서 보면 반발인 것같이 보이지만, 이상적 존재를 중심으로 보면 반발작용도 보조작용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악의 정의도 여기에서부터 성립됩니다. 선을 보조할 수 있는 반발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선생님이 지금까지 쭉 돌아본 입장에서 결론을 말한다면, 금후 여러분들을 어떻게 세계에 진출시키느냐가 문제입니다. 수많은 젊은이들을 세계에 내보내고 싶습니다. 그런데 돈이 없습니다. 돈이 문제입니다. 거친 파도를 헤치고 넘어갈 자신이 있습니까? 문제는 그것입니다. 과거의 복귀노정에 있어서는 가인이 문제였지만, 복귀되어지는 시대에 있어서는 가인이 선두에 서서 토벌해 나갑니다. 그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 앞에는 슬픈 복귀의 길, 이것밖에 없습니다. 듣지 않고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이제 되돌아갈 수도 없고 물러날 수도 없습니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알면 가야지요. 선생님도 현명해요. 그러나 선생님도 걸렸기에 어쩔 수가 없습니다. 또 다른 곳에 가려고 하더라도 갈 곳이 없습니다. ‘이런 고통은 싫다, 나와는 관계없다.’고 하며 멀리 가더라도 결국은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런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통일교회에 한번 들어와 맛본 사람이 나가서 ‘아! 나는 다시는 그런 곳에는 가지 않겠다. 이제 젊은 청춘시대가 없어지니까.’ 하고 아무리 말해도 어차피 들어오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러분도 이런 사실을 알지 못했다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세상에서 확실한 희망을 갖고 출발하여 목적을 추구하여 갈 것이나,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탄식할 것입니다. 한숨을 쉬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우리들은 한편으로는 고민을 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희망과 즐거움을 얻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갈 길은 오직 한길밖에 없습니다. 선생님이 가는 길을 여러분들도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선생님은 먼 곳까지 갔지만, 여러분은 시대적 혜택을 받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천(千)을 하나로 탕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늘의 작전이기 때문에 여러분은 대단한 이익을 보게 됩니다.
선생님은 피곤할 때에도 잠자지 않고도 합니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10년 이상 걸립니다. 시간이 되면, 배가 고픈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배가 고프지 않습니다. 우리들은 세계에서 가장 큰 전쟁을 하고 있다고 하는 자각을 하는 것입니다. 일본에 의해서 세계가 좌우로 움직일 수 있는 입장이 된다면 잠도 지배할 수 있습니다. 배고픔도 지배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문제가 아닙니다. 내일은 사형대에 오릅니다. 그러나 이 한 밤 조금도 자지 않으면 그것을 피할 수가 있다고 할 때, 여러분은 자겠습니까? 그러니까 다들 아직 심각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무엇을 하더라도 심각하게 합니다. 그것이 전문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손을 대지 않는 것은 관계하지 않지만, 손을 댄 이상은 내 행동의 영향력은 천주를 좌우합니다. 전문가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사람들만 모이면 진지한 것입니다.
선생님을 좋아해요? 어디가 좋아요? 심정? 심정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복잡하고 어려운 말입니다. 심정을 말로 한다면 간단하지만, 어려운 것입니다. 그것을 조금이라도 맛본 이상은 이 길을 가지 않으면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전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게 됩니다.
이제 여러분은 무엇보다도 이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 인간을 만들려고 하는 것이 통일교회입니다. 모두 그렇게 하고 있어요? 절대로 할 수 있어요? 그렇게 하지 못하면 보따리를 싸들고 도망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천적 심정과 일치하는 경지에 들어가면 세계가 눈 안에 들어옵니다. 마음이 넓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속에서 하나님을 보면 하나님은 친구입니다.
선생님은 말씀에 취하면 밤이 깊어 가는 줄도 모르게 됩니다. 노래도 하고 춤추면 어떻게 하지요? 옛날에도 그런 일을 곧잘 했어요. 밤에 세상 부모들은 술을 마시고 춤추지만, 선생님은 술도 아무것도 마시지 않아도 그 이상으로 춤출 수가 있습니다. 기분이 좋다구요. 그 기분을 맛 좀 보고 싶어요? 그런 것을 해보는 것도 괜찮습니다. 여러분들, 자기 혼자 좋아하는 모습으로, 무엇이라도 좋습니다. 세계에 없는 춤을 추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통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좋아요. 사방팔방 어떠한 곳이라도 통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조건을 세우면 통합니다. 이 세상은 조건을 세워도 통하지 않으니 너무 분해서 견딜 수 없어요.
선생님은 빨리 한국에 돌아가야 합니다. 선생님을 선두로 세운 탕감원리를 배운 여러분은 선생님이 하게 되면, 오른쪽으로도 왼쪽으로도 그것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지금까지 쭉 세계를 순회한 것도 금후 여러분들에게 그런 일을 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이집트는 더워서 견딜 수 없어요. 인도는 벌써부터 더워서 선풍기를 돌려도 돌려도 덥습니다. 여러분들 그런 곳에 가서 견딜 수 있을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곳에 가니 너무나 더워서 지루한 하루를 지냈다고 생각하면 밤에는 추워서 다 껴입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변동이 심합니다. 그런 세계를 여행해 보고 싶은 젊은이는 손들어 보라구요. 「예.」 젊은이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일을 해야 합니다.
그것을 하는 데는 모든 준비와 기반을 만들 돈이 필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활동하기 위하여는 땀을 흘리고 눈물을 흘려 기반을 닦아야 합니다. 그 결과를 통해서 우리에게 어떠한 것이 날아 들어올지 모릅니다. 선생님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번에 세계 일주하는 데에도 상당한 돈이 들었습니다. 선생님은 돈이 없습니다. 그러나 필요하면 돈은 얼마든지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경우에는 선생님이 필요로 하는 것은 만듭니다. 지금은 돈이 없습니다. 한국에 돌아가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결의하면 몇천 명을 동원하는 것은 문제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돈이나 권력을 써서 일을 해 왔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없어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어느 누가 연구해도 모릅니다. 한국 정부측에서도 이 3년간은 설명해도 잘 모릅니다. 지금에 와서는 조금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일은 복귀역사세계에 있어서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그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상한 눈으로 우리를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요? 어떠한 박해를 받더라도 그 속에서 발전해 왔고 이렇게 누르면 옆으로 나아가고 이렇게 누르면 세계를 돌아요. 이해 못하는 사람에게는 설명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관심을 갖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귀중한 것이 있는 곳에는, 가치 있는 보석이 있는 곳에는 만인의 마음이 집중해 오는 것과 마찬가지로 마음은 사방으로 통합니다. 바람 불어서 추운 것을 느끼는 것보다도, 따뜻한 것을 맛봤다면 그곳으로 갑니다. 가지 말라고 해도 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옆길을 통해서라도 그 방향을 취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의 가정에서도 반대했던 가족이 여러분들에게 복종합니다. 눈알이 빠져 나갈 정도로 하라. 코가 비틀어져도 하라. 입이 찢어져도 하라. 다리가 빠져 나가도 하라. 얼마나 가치가 있습니까? 알고 있는 만큼의 비교 기준의 행동을 증명하지 않으면 선한 가치를 지닌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사실입니다. 하라! 하지 않으려면 가 버려라! 지금 여러분이 학교에 가면 ‘아! 과연 다르구나.’ 할 정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우러러볼 수 있는 훌륭한 가정을 만들어야 합니다. 해보세요. 십년 후에 봅시다. 함께 출발했지만, 십년 후를 비교해 보세요. 십년 후에는 그 이상의 훌륭한 인간이 됩니다.
그래서 이번에 미국에 가서 그런 것에 대해서 얘기했습니다. 금후 미국의 가정에 있어서 세 가정이 하나가 되어, 한국과 일본에서 온 우리의 자녀들을 유학시키고 그 학비 등을 책임지웁니다. 선생님이 그렇게 하도록 명령합니다. 우리 통일교회는 세계 제일의 길을 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금후의 세계에 있어서 우리 이념세계를 기반으로 한 정신을 가진 젊은이가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의 성일이 당신의 뜻에 합당한 거룩한 날이 되고, 오늘의 집회가 거룩한 집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자신의 부족한 모습을 이끌고 아버님 앞에 설 때에 스스로 해 온 일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여쭐 말씀이 없습니다. 과거와 현재에 만족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버님의 은혜를 이 집회 가운데 주시고 커다란 영광권에 저희들을 인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믿으실 수 있는 자녀로서, 당신이 바라시는 희망을 갖는 자녀로서, 당신이 사랑할 수 있는 자녀로서 인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참된 것을 당신이 원하고 계시다는 것을 생각할 때에 지금은 역사에 믿을 수 있는 아무것도 갖추어 놓지 못했습니다. 당신의 희망이 될 수 있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영원불변한, 우주의 모든 것이 사모하고 있는 당신의 사랑을 저희들은 사모하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하지 못하는 자들이옵니다. 그러나 수많은 선한 선조들을 희생하면서 오늘의 하루를 세우시고, 당신이 믿을 수 있고 소망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는 참된 자녀를 지금까지 사모해 왔다는 것을 생각할 때에, 마음속으로부터 무엇도 말씀드릴 수가 없고 다만 무릎을 꿇고 당신 앞에 회개하는 마음밖에 없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옵니다.
일본의 성도들은 당신이 다년간 눈물과 피와 땀을 흘리면서 모아 오셨습니다. 저희들은 지금까지 당신의 소원에 부응하도록 그 사명을 다하는 사람들이 이 지상에 없었음을 마음 아프게 생각함과 동시에 지금까지 6천년 이상의 역사를 계속하면서도 당신께 바칠 수 있는, 당신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들을 이 땅에 세우지 못한 과거를 뉘우치는 바입니다. 하오니 여기에 모인 저희들, 당신의 소망을 이룰 자녀로서의 의지와 결의를 재다짐하고 최대의 맹세를 굳힐 수 있는 이 시간이 되도록 지켜 주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오늘의 이 시간을 지키고 겟세마네에서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최고의 목적 기준을 저희들이 이어받아 최후의 승리를 성취하고 역사적 원한을 풀 수 있는 하나님의 참된 자녀가 되도록 이 시간을 지켜 주실 것을 간절히 바랍니다. 마음속으로 사모한 사람들을 모아서 함께 지내는 시간을 주신 것을 감사함과 동시에 금후 모든 식구를 지켜 주실 것을 간절히 바라면서, 주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당신 앞에 바칩니다. 아멘.
<말 씀> 우리는 이 우주에 절대적인 존재로 계시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계실진대 그분은 어떤 목적을 갖지 않으실 수 없습니다. 목적이 있다면 희망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 희망을 목적의 경지까지 계승해 나가기 위해서는 그 목적이 크면 클수록 일상생활에서 사랑의 심정을 느끼지 않으면 어렵다고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목적을 가지고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제6일째에 이 우주의 중심으로서, 목적을 완성할 중심인물로서, 희망의 실체로서, 나날의 생활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할 생활의 개척자로서, 그 심정의 기준을 잡아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책임자로서 세우신 것이 우리 선조인 아담 해와라고 하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선조를 창조하시고부터 나날의 생활권을 통하여 ‘나의 목적인 희망의 날은 언제인가?’ 하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으셨습니다. 그런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아담 해와는 하나님의 목적을 완성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명을 띠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아담을 볼 때에 ‘아담을 믿고 싶다. 아담에 대해서 무한한 희망을 가지고 싶다. 무한한 애정을 쏟고 싶다.’ 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입장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어린 아담이 성장함에 따라서 하나님이 믿을 수 있는 그 기준과 희망과 애정은 함께 성장해 가야 할 입장이었고, 이 천주는 하나님이 바라시는 최고의 목적을 완수하여 하나님의 사랑만을 중심으로 하고 이루어져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영광의 우주가 되어 하나님이 생각하시고 하나님이 느끼시는 대로 온 만물이 느낄 수 있는, 나누려고 하여도 나눌 수 없는 일치화된 세계를 실현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지도 않은 하루를 맞이하여 아담 해와는 타락하였던 것입니다. 타락의 하루를 맞이한 하나님에게는 믿을 수 있는 기대가 없어지고 희망의 기준이 없어지고 사랑할 수 있는 실체가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로 하나님의 창조목적은 미완성된 채로 남아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타락한 결과 그 자손인, 우리 선조 이후 지금까지의 인류는 계속 날이 경과함에 따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하나님이 희망하시는 목적과 반대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하나님의 희망에 거역하여, 하나님이 믿을 수 있는 기대에 거역하여, 하나님이 사랑하실 수 있는 입장으로부터 도망한 결과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그대로 놔두면 안 됩니다. 이렇게 된 동기는 물론 사람에게 있지만 최대의 동기는 사람을 유혹한 사탄에게 있습니다. 때문에 여기에서 하나님은 원수인 사탄을 물리치고 본연의 목적을 복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복귀 과정에 있어서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하나님은 그 간격을 메우기 위해 거기에 비례하는 수고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희생을 치르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러한 수고를 사람 자신이 하는 입장에 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탄이 그것을 돕는 입장에 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다고 하는 입장에 서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었던 것입니다.
본래 아담과 해와는 하나님의 심정에 통하고 하나님의 희망에 약동하면서 그 나날의 생활 가운데에서 기쁨의 하나님 품에 안겨 만족하고 모든 것에 대해서 감사하는 주체가 되어야 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와 같은 길을 걷지 못하는 것을 보시는 하나님의 내적 심정의 아픔은 그들 자신의 내적인 처참함 이상이었다고 하는 것을 우리의 조상들은 몰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근본 원칙을 중심으로 한 목적 관념을 버릴 수 없는 하나님으로서는 여하한 일이 있더라도 그것을 실현시키시지 않으면 안 됩니다. 즉 복귀하시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으로서 생각지 않은 대의(大義)의 사명의 길, 구원의 길이 있게 된 것을 우리들은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마음으로 사모해 왔던 믿을 수 있는 아들딸, 만물 창조 당시의 희망이었던 아들딸, 그때까지 희망에 차서 애정을 준 그 하나하나를 역사의 과정에서 시대 시대, 시시 각각을 통하여 하루도 생각하지 않은 때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을 우리의 선조들은 느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아담 해와로부터 이제까지의 수많은 사람이 지상을 통하여 영계에 갔지만, 그 사람들도 그 내적인 깊은 곳의 하나님의 심정을 깨달을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 까닭에 하나님은 1,600년의 역사를 통하여 인류 가운데 세계 가운데, 자기편이 될 수 있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을 단지 한 사람도 갖지 못했던 것입니다.
거기에서 사탄을 물리치고 하나님 편에 쏜살같이 곧장 달려와 ‘나는 다만 하나님에게만 기여하겠다.’ 고 하는 한 사람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슬픈 입장의 하나님은, 노아를 통하여 그 기준을 세우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믿는 바대로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기준의 일치를 발견하지 못하면 하나님으로서는 사탄을 굴복하고 섭리를 출발하실 수가 없습니다. 그러한 고민이 있으니까 노아를 통하여 120년간 하나님을 믿는 그 기준까지 끌어 올리기 위한 수고의 길을 하나님은 명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과 함께 120년 후의 홍수심판의 날을 하나의 희망으로 하고, 그때까지를 하나의 신앙기대의 기간으로 하고, 그의 희망과 신앙기대를 하나님의 애정과 신앙권 내에 결부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 하나님의 섭리였다고 하는 것을 알지 않으면 안 됩니다. 1년도 아니고 10년도 아니고 120년간이라고 하는 장기간 동안 노아 할아버지는 매일 같은 일을 반복하였던 것입니다.
그 가정이 환영했다고 생각하면 큰 잘못입니다. 12일 후의 일도 아니고 12년도 아닙니다. 120년인 것입니다.
그 가정의 식구들은 자기들이 죽을지 어떨지도 몰랐습니다. 그간에 다 들고 일어나 노아에 대해서 불평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듯 환경으로부터 배척받는 그에게 하나님은 무엇을 원하셨는가? ‘나만을 믿어라.’ 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주위의 소용돌이치는 모든 일 가운데서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는 자는 한 사람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거역하고 일어나더라도 그 가운데서 밟고 일어나 혹은 물리쳐서 자기와 일치가 되는 신앙의 기준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신앙과 희망과 더불어 하나님의 심판의 목적을 완수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연속되는 매일의 생활을 감사와 함께 하나님에게 접하는 그 기준에 있어서 애정의 연결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목적으로서 노아를 세워 배를 짓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노아를 볼 때에 당연히 아담과 해와와 같이 거듭 하나님의 믿을 수 있는 기준과 희망의 기준과 목적의 기준에 거역하는 입장에 서지 않을까 하고 걱정하셨습니다. 노아가 또다시 그런 입장에 서면 어려운 문제가 될 것임을 하나님은 잘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날마다 배를 만드는 노아의 생활을 보고 계시는 하나님은 노아가 만약 거기서 물러나면 하나님 자신의 탕감이 얼마나 많아질 것인가를 잘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런 걱정스런 마음으로 노아를 바라보시며 하루하루를 보내시는 하나님의 그 심정은 노아 자신도 알지 못하였습니다.
아담가정을 중심으로 한 복귀의 목적이 미완성이 되어 버린 고로 그것을 복귀하기 위해서는 노아의 여덟 식구가 필요하였습니다. 이러한 하나의 사실이 철저하지 않으면 두 번째의 일을 출발하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어버이를 중심으로 하고 세 아들이 일치되지 않으면 안 되는 절대의 기준을 함이 알지 못하고 깨버린 결과 하나님의 섭리는 400년이나 연장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다시 아브라함을 신앙의 중심으로 세우시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희망의 기준으로 세우시지 않으면 안 되었어요. 목적 완수의 사명을 다할 수 있는 책임자로서 세우시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애정을 품고 그 배후에서 뒷길을 더듬어 가시지 않으면 안 되었던 하나님의 입장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도 이러한 하나님의 내적 심정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천주를 내던지더라도 희망을 가지고 자기를 믿고 계시고, 자기는 하나님의 목적을 달성하는 사명을 수행하고 있다고 하는 것, 하나님이 모든 것을 자신에게 맡기고 있다고 하는 것, 그리고 자신의 일거수일투족 모든 면에 심판의 원칙을 세우고 원수도 심판할 수 있는 심판의 법칙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되는 자신의 입장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생활을 통하여 행할 하나의 기준이라고 하는 것을 아브라함 자신이 잘 느끼지 못하였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3대 제물을 바칠 때에 비둘기를 쪼개지 않은 조건이 역사를 통하여 치러야 할 비참한 탕감의 조건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생각지도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때가 천적 복귀노정에 있어서 천적 원칙의 조건을 세울 수 있는 최종점이라고 하는 것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이삭의 실체 제물을 바치지 않으면 안 되었고, 그 결과 이스라엘 민족은 애급에서 400년 고역의 나그네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복귀의 기준에 있어서 다해야 할 목적을 완수하지 못한 것이 이스라엘 민족의 슬픔의 원천이 되었던 것을 우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거기서 모세라든가 수많은 예언자 등, 우리의 선조들을 보내어 이스라엘을 사모하여 온 하나님은 개인으로부터 믿을 수 있는 하나의 씨족을 세워 가지고 민족을 편성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민족을 중심으로 하고 세계를 하나님의 세계로 하시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이러한 것은 우리 선조들이 하나님 대신 다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책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선조들은 그것을 수행하지도 못하고 하나님이 그것을 다해 오셨다고 하는 것조차 알지 못하였습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역사적인 입장은 우리들의 현세에 있어서의 관계가 없고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과거보다도 현재가 더욱 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때는 세계적인 때이고 범위가 넓으면 넓을수록 거기에는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개인과 가정이 없어서는 안 되고 세계 앞에 하나님의 대신자로서 탕감복귀하는 세계적인 움직임이 없으면 안 됩니다. 물론 하나님은 그것을 흠모하시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이 우주에, 이 세계에 참으로 하나님이 믿으실 수 있는 참된 자녀가 있느냐? 남자가 있느냐? 타락한 사람들의 혈통권에서는 그러한 사람을 구할 수가 없습니다. 태어남과 동시에 80퍼센트 이상 사탄의 감정을 계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긴 역사 가운데 심정적 탕감권을 개척하여 하나님에게 접근하는 중보자로서 보내어진 한 사람의 아들, 그분이 예수님이었습니다.
역사는 움직입니다. 시대는 부릅니다. 미래는 우리들에게 소원을 가집니다. 그것은 모두 하나님에게서부터 시작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전반적인 사명을 다하는 중심으로 역사와 시대를 해방할 미래의 중심인물로서 메시아를 이 지상에 보내신 그날은 인류역사에 있어서 최고의 기쁨의 날인 것입니다. 그 기쁨의 날을 누구라도 다 사모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 기준을 통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한 운명에 있는 우리는 그날이 있으므로 신에 의한 신앙의 기준을 세울 수가 있습니다. 그날이 있으므로 하나님의 희망에 동조할 수 있습니다. 그날이 있으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생활권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현대의 세계는 악이 점령하고 있습니다. 악이 점령하고 있는 위치와 환경은 사탄 편으로 꽉차 있습니다. 그것을 맑히고 그 환경을 밀어제치고 하나님이 4천년간 수고하신 결과로서, 희망으로서 사탄 앞에 자랑할 수 있는 것으로서 세우려 하신 하나의 아들이 우리들의 구주로서의 메시아였던 것입니다. 그러한 책임을 가지고 예수님이 오셨던 것입니다. 하늘과 땅, 모든 존재의 한복판에 목적 완수의 중심자로서 이 지상에 오셨던 것입니다.
왕의 왕 이상이었습니다. 선한 실체 이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을 통하여 모든 것을 보시고 생각하시고 그분을 통하여 모든 행동을 알리시고 그분을 통하여 사랑의 생활을 출발하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지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내적 요구이고 심정이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귀한 아들을 보내시는 데는 그 환경을 만들어 주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바라심에 따르는 개인이 없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가정이 없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선민이 될 수 있는 민족이 없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선민사상이 있으면 선민으로서의 자손이 출생하게 됩니다.
수많은 씨족 민족이 있지만 그 가운데서 하나님이 없이는 살 수 없다고 하는 오직 하나의 씨족권 민족권을 세우기 위해, 하나님은 4천년 동안 수고하시면서 이스라엘 민족을 품고 길러 오셨습니다. 그리하여 연약한, 신앙도 없는 민족을 신앙 있는 민족으로 하고, 희망 없는 민족을 희망 있는 민족으로 하여, 오직 한 사람의 실체와 관계를 맺도록 메시아사상을 예언자를 통하여 주시면서 긴 역사의 기간을 이끌어 오신 것을 우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메시아가 오셨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승리를 결정하려고 하는 기반 위에 서 있는 그 민족권 가운데 메시아는 오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희망하던 목적을 완성하기 위해 민족의 모든 사람의 주체로서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모든 것의 목적은 그분이었습니다. 모든 것의 희망이 그분이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오신 중심은 그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버이가 자식들을 당시까지 끌고 나온 역사적 선한 규범도 그분과 관계를 갖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내적 외적 심정을 가지고 지상에서 예수님의 편에 선 사람이 있었느냐 하면 없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한복판에 서서, 역사의 부름에 응하고 시대의 요구에 응하고, 미래는 자기가 새로운 운명을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환경 가운데 서서, 과거․현재․미래를 통하는 중대한 사명을 자기가 가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니 자기 개인 중심한 생활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공적인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뒤를 돌아보면 영계에 있는 수많은 조상들의 희망이 자기에게 걸려 있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몹시 황폐한 이스라엘 민족의 그 시대의 상태를 최후로 하여 새로운 세계로 인도해 가지 않으면 안 될 사명이 있다고 하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혹시라도 이 단계를 넘기지 못하면 자손은 비참한 단계에 이릅니다. 그리고 사탄세계에 있어서 사탄의 참소를 통하여 역사의 제물이 되어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 우주적인 사명 가운데 선 예수님의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그런 심정을 품고 공적 생활을 출발하기 전까지의 내적 준비기간이 얼마나 심각했던가? 이것은 성서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물론 그 당시의 예수님에게 그날 그날의 먹을 것을 의지하러 온 대중, 그들에게는 어떻게 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역사를 부활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죽은 역사를 인계해서는 산 역사를 건설할 수가 없습니다. 환경이 없으면 존재의 기준을 바로 세울 수 없는 것입니다. 환경이 있어야 비로소 존재의 결정 기준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상의 사정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이 지상에 선한 희망의 기준을 세우고 하나님이 지금까지 만들어 오신 민족의 선한 환경과 관계를 맺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것은 일개인의 관계가 아니고 역사적 관계인 것입니다. 세계적 관계인 것이다. 미래적 관계인 것입니다. 그것을 맺으려고 3년 노정에 나설 때의 예수의 내적 결의는 어떠하였던가? 그것은 예수님을 사모하는 제자들도 몰랐었습니다. 아는 이는 하나님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희망하는 최고의 위치에 섰다고 하는 민족이 가는 방법도 몰랐습니다. 방법과 목적하는 기준이 일치되지 못하면 목적 완성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쪽으로 가지 않으면 안 되는 민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반대의 방향으로 가고 말았습니다.
역사적으로 한 사람밖에 없는 예수님을 보내실 때에 최고의 영광의 입장에 서서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숭앙되는 것을 하나님은 바라셨던 것이 사실입니다. 원래 구주로서 오신 것이니까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지 않을 수 없는 운명을 가지고 왔다고 하는 것은 되지 않는 말입니다. 그런 하나님은 안 계십니다.
‘전지전능한 하나님으로서 그런 방법, 그런 방식이 아니면 구원의 길은 없었을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모욕입니다. 천운에 의해서 십자가에 달리셨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역사적인 신앙의 기준, 희망의 기준, 심정의 기준에 일치되는 생활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 것을 희망하시고 세례 요한을 보내셨던 것입니다.
역사를 인계받기 위해서는 역사적 제물을 바쳐서 승리를 결정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역사권(歷史圈)을 주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지금까지 실패를 거듭했던 관계로 온갖 조건에 걸려 있어서 당하는 모욕을 하나님 혼자서는 제거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만약 된다면 6천년간 섭리해 오신 하나님의 목적인 복귀는 문제가 아닙니다. 구원은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잘못된 것은 원칙대로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됩니다. 고치려면 반대의 것 이상의 좋은 부분을 남기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지 않으면 바로잡아도 사용할 방도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는 과거 4천년 동안 선조들이 잘못한 모든 조건을 담당하여 그 이상의 가치 기준을 세워 가지고 하나님쪽으로 출발할 수 있는 기준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될 사명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탄권 세계로부터 새로운 희망의 하나님의 세계권으로 출발할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입장에 있던 예수님이었습니다. 또 그러한 입장에서 하나님을 볼 때에 하나님을 위로해 드리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런 예수님은 지금까지 자기 한 사람을 희망으로 하고 4천년의 역사를 더듬어 오신 하나님에 대해서 면목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을 지휘하고 이끌고 새로운 민족으로 재건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백성으로서 혹은 자녀로서 키워진 민족이 하나님에게 거역한다고 하는 것을 생각할 때에 하나님께 면목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심정의 고민과 함께 감람산 기슭을 혼자 걸으시면서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그런 시간을 많이 가졌다고 하는 것은 성서 가운데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또 내적 싸움을 해결하려고 요단강으로 세례 요한을 찾아갔던 예수님이었던 것을 알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사랑과 하나님으로부터의 희망과 하나님으로부터의 절대적 신앙에서 하나님의 절대적 보호와 함께 승리와 영광의 생활을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하나님의 독생자였습니다.
그러면 세례 요한은 누구였던가? 이스라엘 민족의 대표, 즉 이스라엘 민족을 대표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진 사자요, 예수님 앞에 산제물로서 역사적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의 기대권에 끌어넣을 수 있는 중심인물, 혹은 중심제물이었습니다. 그런 사명을 지고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진 인물이 세례 요한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백 퍼센트의 신앙의 기대에서, 백 퍼센트 희망의 기준에서 백 퍼센트 사랑의 기준을 가지고 세례 요한을 세워서 자신과 일치된 기준에서 하나님께 바쳐야 했던 것이 예수님의 사명이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비로소 역사적 실패를 탕감복귀하고 세례 요한을 하나의 제물로 하여 심정의 기대와 희망의 기대와 사랑의 기대의 실체로 바침으로써 지금까지 하나님의 내심(內心)에 걸려 있던 원한과 고민과 고통을 제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예수님을 맞이할 기대를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이고 예수님이 세례 요한을 찾아간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세례 요한에게는 신앙의 대표자로서의 실체, 희망의 대표자로서의 실체, 혹은 사랑의 대표자로서의 실체이신 예수님으로부터 희망 또는 심정 혹은 신앙의 기준을 구해 받지 않으면 안 될 사명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것이 가지로 퍼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거기에서 세례 요한이 예수님의 제1의 제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상으로 본 입장이었습니다. 제1의 제자가 되지 않으면 거역하는 존재가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에 있어서 세례 요한은 역사를 거듭 파괴하는 중심이 되고 그 때문에 그때까지의 이스라엘 민족과 예수님과를 연결하는 사닥다리는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로부터 예수님의 생애라고 하는 것은 진보하고 발전하는 생애가 아니라 쫓기고 후퇴하는 생활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상대로부터 환영받는 생애가 아니라 쫓기는 생애가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사명을 다하지 못한 그날부터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예수님의 소원과는 거꾸로 민족 전체가 반대하고 반역하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유대교 전체가 예수님이 아니면 안 된다고 하는 중심기준을 세우지 못하고 그때까지의 역사관이 모세를 중심으로 한 기준에 머무르고 말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인정하는 기준이 아니었습니다.
그 이후에 2천년의 비참한 이스라엘 역사는 하나님으로부터 예수님을 맞이하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의 역사였습니다.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제2차 대전 때에 나치스에 의해 이스라엘 민족이 몇백만 명이나 죽어 갔습니다. 그렇게 안 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때가 거듭 올 때까지 이스라엘 민족은 새로운 희망을 가질 자격을 잃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세계 곳곳에서, 가는 곳곳마다에서 쫓기는 민족으로서 비참한 역사를 남기고 왔다고 하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를 십자가에 내 준 죄의 대가인 것입니다. 그것은 현재의 크리스천들은 모릅니다. ‘혹 그것이 인정되지 않거든 기도해 보라. 하나님은 살아 계신다.’ 이것이 통일교회의 주장인 것입니다.
역사를 토대로 하여 현실을 밟고 미래를 향하여 재출발하는 것이 하나님의 예수님에 대한 최고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목적이 지금 어디에 있느냐인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 목적이 거듭 나타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세례 요한을 중심으로 사축(死畜)의 제물을 바쳐 외적 복귀의 길을 도와 가려고 한 것이었지, 생축(生畜)의 제물을 바쳐 통하는 구원의 길을 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십자가의 구원의 사명, 역사상에 있어서 이 이상 비참한 길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첫 번째의 자녀로서 탄생하였던 아담 해와는 어디로 갔는고? 그들은 사탄 편의 포로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을 분쇄하고 거듭 하나님 편으로 구원하기 위한 기대를 만들기 위하여 보내어진 예수님은 어디에 계신다는 말이냐? 십자가에 달리어 사탄이 예수님의 육신을 범하도록 허락지 않을 수 없는 권(圈)을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정 밑에서 영적 구원의 길을 열고 간 것이 제2이스라엘로서의 기독교인 것입니다. 제1이스라엘이 하나님께 거역하자 제2이스라엘을 세워서 거역하지 않는 원래의 이스라엘이 되기를 원하셨고, 제2이스라엘을 연결시켜 새로운 희망을 남기고 구주를 거듭 찾지 않으면 안 되는 기준으로 인도하여 가는 것입니다. 그 기준이야말로 지금까지 기독교에서 말하는 예수의 재림 때라고 하는 것을 우리들은 배우고 있는 것입니다.
제1이스라엘은 제1아담 해와의 자손으로서 또다시 타락한 아담의 길을 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제2이스라엘의 중심으로서, 제2아담으로서의 사명을 다하려고 오셨던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가셨으니까, 지금까지의 기독교는 십자가의 도를 배워서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사탄 때문에 우리 선조들이 섭리상의 목적 완수에 따르지 않은 그 조건이 역사에 걸려서 지금까지 흘러 왔다고 하는 것은 역사가도 모르고 종교가도 모르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제2의 세계 무대를 중심으로 장래의 이스라엘권을 만들고자 한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이후 제2의 섭리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제2이스라엘의 세계권(世界圈)은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영적인 것입니다. 사람은 원래 영적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영육 함께 이루어졌습니다.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을 세운 것도 영적 천국만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닙니다. 로마를 굴복시키고 세계를 답파(踏破)하고 하나님의 섭리를 완성한 지상천국을 이루는 것이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아담 해와가 타락하지 않았다면 그 시대에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완수한 지상천국을 다 이루었을 것입니다.
지상천국은 무엇인가? 그 생활권 내에 하나님의 신앙 기준이 백 퍼센트 나타나는 세계입니다. 희망 자체인 중심인물을 중심하고 움직이는 세계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정이 누구에게도 나타날 수 있는 세계인 것입니다. 그러한 곳이 지상천국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사명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예수님은 과거를 돌아볼 때에 자기가 만약 이스라엘 민족의 잘못을 용서치 않는다면, 하나님은 재연장섭리를 하실 수가 없게 되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것은 기대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따라서 십자가상에서의 예수님의 심정은 ‘하나님이여, 나를 쳐서 새로운 역사를 향해 출발할 수 있는 인연을 남겨 주십시오. 현세의 이스라엘 선민이 망함과 동시에 전인류가 망하게 되지 않습니까? 아무쪼록 제2이스라엘권을 남기시어, 지금까지 하나님이 수고하여 쌓아오신 기대를 남기어 주시옵소서. 내가 없이는 새로운 미래의 주권이 점점 어둠 가운데 빠져 전인류는 하나님도 무엇도 알 수 없게 되어 버릴 것입니다. 그런 단계에 끌려가고 말겠지요? 그러니 미래의 세계에 하나님이 바라시는 등불로 남아질 희망을 남겨 주십시오.’ 라고 하는 심각한 마음이었다고 하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33년의 생애를 살고 하나님 앞에 나왔을 때는 과거에 사명을 다하지 못한 예수님 자신의 회개의 시간이었습니다.
‘역사상의 선조들의 잘못을 용서해 주십시오.’ 하던 예수님, 그들의 잘못은 예수님이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용서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용서하지 않으면 이스라엘 민족의 이름을 남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의 그날의 죄과를 그대로 하고 연장시켜 제3의 희망을 가질 수 있는 환경과 기대(基臺)를 바라시며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제2의 패전으로 인하여 제3의 싸움을 위한 준비기간이 된 것이 지금까지의 세계에 발전해 온 제2이스라엘 민족의 역사, 즉 기독교의 역사인 것입니다.
그러면 뒤에 남아진 것은 무엇인가? 제3의 아담의 가치를 담당하고 천지창조 본래의 목적을 완수하기 위하여, 또 창조 당시의 하나님의 신앙 기준과 절대 희망의 기준과 절대 심정의 기준을 최후의 역사의 첨단에 다시 세워, 세 번째의 책임을 다함으로써 하나님이 본래 희망하신 재출발을 하려고 하는 것이 오시는 바의 재림의 길이라고 하는 것을 확실히 알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대체 그 경우에 무엇이 조건인가? 제3이스라엘 국가가 편성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지금까지는 모두 희생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의 몸을 희생하여 십자가에 달리셨기 때문입니다. 인도하는 사람이 가는 길은 인도되는 사람의 갈 길입니다. 때문에 십자가의 길을 가신 예수님을 사모하는 사람들은 십자가의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이 영적 천국을 사모하여 갔기 때문에 지상에 있는 크리스천들은 지금까지 영적 천국을 사모해 왔습니다.
그러면 그것으로 완성되는가? 물론 완성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지상에서 목적을 완성할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물과 흙과 공기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과 같은 천국은 아닌 것입니다. 지상천국인 것입니다. 그와 같은 세계를 예수님은 바라신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손에서 떨어지는 피를 볼 때, 과거에 선조들이 세우려 했던 조건을 예수님은 찾으려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심정이었습니다. 양손, 양발, 머리, 옆구리로부터 피를 흘리면서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역사적인 선조의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하나님을 사모하지 못하고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지 못한 우리의 선조 대신 바치오니 받아 주십시오. 내가 33세라는 젊은 나이로 죽더라도 하나님을 위해서 죽었다고 하는 조건을 세워 주십시오.’ 하셨습니다. 만일 자기의 소원을 다 이루지 못하여 자신의 기도에 응하시지 않으면 지금까지 4천년의 하나님의 노고가 없어지고 맙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의 어버이로서의 하나님의 수고에 대한 심정적 기준을 나를 통하여 세워 주십시오.’ 했던 것입니다.
모든 선조들이나 하나님의 심정, 그리고 자신의 미래의 심정 기준에서 하나님을 대할 때에 오직 면목이 없을 뿐이었습니다. 역사를 볼 때도 면목이 없었습니다. 현재와 미래를 볼 때도 면목이 없었습니다. 그런 입장에서도 불쌍한 심정을 갖지 않으면 안 되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또 ‘하나님이여,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나는 지금까지의 하나님의 수고해 오신 역사를 남기지 않으면 안 됩니다.’ 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것은 그 기준에서 사탄의 참소조건을 깨부수고 새로운 제2의 섭리에 있어서 영적 승리의 기반만이라도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심각한 기도였습니다.
미래의 사람을 구원하는 것보다도 우선 과거의 역사적 인연을 연결시켜 남기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역사를 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은 후 3일 동안 지옥에 가서 노아 때에 순종치 아니함으로써 지옥에 가 있는 모든 영인(靈人)들에게 말씀을 전파하셨습니다(벧전 3:18-20). 예수님에게 역사적인 전통을 새로이 자기 나름으로 세우시지 않으면 안 되었던 중대한 사명이 있었다고 하는 것은 지금까지의 사람들은 몰랐었습니다. 역사에 승리의 기반을 만듦으로써 사탄이 물러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현재에 있어서 승리를 얻더라도 역사적 승리의 기반을 갖추지 못해 가지고는 역사를 지배하고 하나님의 섭리 기준을 계승하여 하나님의 심정과 연결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4천년의 인류역사를 대표하여 오셨지만 지상의 30여년의 짧은 생활을 통하여 그 오랜 역사를 담당하고 번민하셨습니다. 그런 분은 예수님 이후에 누구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영계가 그분과 인연을 가질 수가 있었습니다. 역사를 살린 분이니까 시대를 부활시킬 수도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아담가정에 있어서의 가인과 아벨의 일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가인이 섭리를 완성하였으면 그 뒤에 아벨이 출발할 수 있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생애를 시대성으로 보면, 앞의 시대는 가인의 시대이고 뒤의 시대는 아벨의 시대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2의 세계적 아벨적 주인이고 아벨의 세계를 건설하기 위한 제1의 책임자였습니다. 그때까지의 세계는 가인의 세계였던 것입니다. 자기를 중심으로 한 세계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세계를 수습해서 굴복시키고 처음으로 형제가 참부모님을 맞이하여 자녀의 입장에 서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원칙입니다. 미래도 과거도 아벨의 기준에 굴복시키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 대표자로서 세례 요한이 과거와 미래를 결부시키는 사명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가 담당한 새로운 세계로의 출발은 이스라엘이 내외 함께 완수한 기준 위에 설 수 있는 곳으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의 사명 회피로 인하여 예수는 그 외적 기준까지 인계 받아 아벨의 위치에 서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 싸움의 과정이 예수의 3년노정인 것입니다. 처참한 일이었습니다. 여러분은 마태복음 11장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는 세례 요한을 심판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것을 보이셨습니다. 우리들은 그것을 두려워하면 안 됩니다.
모든 민족과 국가와 세계의 배후에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이 같이하여 세계는 발전하고 있습니다. 명실공히 그리스도교는 세계적 종교권, 곧 자유진영을 만들고 있습니다. 여기에 있어서 문제는 옛날 이스라엘과 같은 입장으로 돌아가는 현세가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현재 미국은 옛날 로마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재림주가 오시는 나라는 선진국이 아닙니다. 재림주는 요셉의 사명을 가지고 오십니다. 요셉이 애급에 팔려가서 총리대신이 되고 야곱과 그의 형제 등 가족을 다시 구했듯이 그런 행정(行程)으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절대로 미국 같은 선진국에는 안 오십니다. 쫓기고 쫓기면서도 하나님을 구하는 처참한 민족에게 찾아오시어 처음부터 하나님에 의한 승리의 권한을 만들면서 출발합니다. 섭리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현세의 역사가들은 말합니다. ‘역사는 돈다.’고. 역사는 나선형으로 되돌아옵니다. 왜 돌아오는가? 꼭 들어맞으면 돌아오지는 않습니다. 맞지 않으니까 섭리가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가정으로부터 출발하였으면 다음은 민족을 중심으로 그 형을 연결짓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민족적으로 섭리해 오신 연한, 즉 수리라고 하는 것을 국가적 기준으로 연결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개인은 가정에 포함됩니다. 가정이 승리하면 개인이 승리권을 얻습니다. 그러니까 개인 구원의 실패를 보충하는 데는 가정 구원의 완수를 목표로 합니다. 가정은 씨족권에 포함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정이 실패하면 하나님은 씨족의 승리권으로 잇습니다. 그래서 씨족이 승리하면 가정과 개인의 승리를 인정하게 됩니다. 그것이 실패하면 민족의 승리권으로 이어집니다. 민족이 승리하면 거기에 씨족이나 가정이 전부 들어갑니다. 그리하여 국가 기준을 만들게 됩니다.
국가가 승리하면 거기에 민족권이 들어갑니다. 그리하여 세계의 승리권을 만들고 세계가 승리하면 거기에 국가권까지 포함됩니다. 이러한 일을 깊게 반복하여 돌이키면서 연결되는 결정 기준을 만들게 하여 연장하고 나선형을 이루어 커다란 환경권을 향해서 현세의 역사를 발전하여 왔습니다.
그러면 선이란 무엇인가? 최고의 선이란 무엇인가? 최고의 기준에 대한 중심성을 인정하고 그 책임을 다하는 것이 최선인 것입니다. 우주의 최고는 누구인가? 하나님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위해 모든 것을 다하세요. 이것이 신앙의 제1신조입니다. 하나님의 승리는 전우주를 포함합니다. 그러니 여러분,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맹목적이라도 좋으니까 있는 힘을 다하여 수고하십시오. 어느 때가 오면 다 해결됩니다. 그 기간에는 여러분 자신을 희생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인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계신지 안 계신지 모르고 있습니다. 이것을 해명하는 것이 복귀원리입니다. 지금 시대에 있어서 우리들은 외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찾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이 갖춘 심정기대를 하늘로부터 거듭 받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내가 그분의 희망과 관계를 갖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의 심정을 나와의 서약 기준에 두지 않으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희망, 하나님의 심정기대로서 나에게 역사하실 수 없습니다.
출발할 수 있는 그 기준이 지상에 거듭 나타나지 않으면 이 지상을 하나님의 섭리의 중심으로 수습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역사의 문제이고 현재에 있어서의 세계적인 문제이고, 금후 우리 자신들이 해결해야 할 세계적인 문제로 되고 있다고 하는 것을 여러분은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부터 2천년 전에 그와 같은 수많은 희망, 가르침, 목적 관념을 마음에 품고 있었습니다. 생활의 승리권, 민족의 승리권, 국가적 승리권, 세계적 승리권이 그 심정에 걸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탄세계에 있어서 결실하고 싶은 희망이나 목적을 일단 말로 표현했더라도 그 말의 가치적, 실체적 존재가 서지 않는 이상 그 말은 사탄의 것이 되고 맙니다. 말하려 해도 하지 못하고 그 이념을 다시 품고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예수님의 아픈 마음을 우리들은 알지 않으면 안 됩니다.
유대인들은 이런 것을 알지 못하고 예수님을 모욕했습니다. 그들은 맹목적이고 아무것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우리들은 소리쳐 부르고 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구하시는 최고의 기준은 승리권에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수많은 선조들이 실패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번민의 밑창에 빠져 있는 것을 본 우리 민족은 어떻게 그 기준을 이룰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며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리며 간절히 호소해야 합니다. 그런 기도의 주인공들이 필요합니다.
기도만 가지고도 안 됩니다. 책임을 지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안 됩니다. 재림주가 오기 전에 예수님의 심정과 희망과 목적을 완수하는 기대가 마련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거듭 세례 요한의 존재가 문제됩니다. 재림주는 오십니다. 틀림없이 오십니다. 그러나 오시더라도 기다릴 수 있는 기대가 없는 경우에는 거기에 수고가 따릅니다.
역사는 제1, 제2, 제3기준을 중심으로 원형을 이루며 출발합니다. 두 점을 통과하는 것은 일선입니다. 일선은 되는데 그 이상은 안 됩니다.
천지창조의 출발 기준으로서 하나님은 세 점을 결정하셨는데 그것이 우주 만물 창조의 묘미를 갖추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3수가 문제인 것입니다. 이상권은 3수를 수반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제1의 아담, 제2의 아담은 실패하였지만, 제3의 아담은 무엇을 계승해 오는가? 실체보다도 심정적 내용을 계승해 와야 합니다.
육체를 계승해 오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에 의한 심정, 하나님의 목적에 상응한 심정을 가진 제1, 제2아담의 목적을 계승하여 제3아담은 나타납니다. 그가 메시아인 것입니다. 구름을 타고 천사의 나팔 소리와 더불어 오신다고 하는, 그런 형태로 되는 것이면 하나님의 섭리는 6천년이 아니라 6일도 걸리지 않습니다. 원칙의 하나님인 것입니다. 원리원칙을 중심으로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자신부터 원리원칙을 거역하는 일은 하실 수 없습니다. 그러한 정(正)은, 그러한 선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원칙은 절대적 원칙이고 하나님도 그 원칙의 보조에 일치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으로부터 원칙적인 환경을 만들고 원칙 자체를 다시 구하여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예수 자신이야말로 원칙 자체의 모습, 원칙의 실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에게 순종하지 않을 수 없는 하늘의 원칙 기준이 지상에 서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입장에 선 우리들에게는 천주의 중심에 선 예수님의 심정과 하나님이 역사적 희망과 우리의 사명이라고 하는 것이 남아 있습니다. 그에 대해서 여러분은 어떠한 각오를 가지고 있는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의 예수님의 심정과 같은 심정의 경지에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십자가상에서 하나님께 최후의 기도와 함께 만민의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한 예수님의 그 심정의 경지를 통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을 하려고 하는 것이 우리 통일교회인 것입니다.
교회, 나는 교회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도장(道場)인 것입니다. 재창조하는 일터인 것입니다. 직장인 것입니다. 때문에 되지 않는 것은 잘라 버립니다.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한 모든 것을 다 잘라 버리고 하나님께 거역하지 않고 순종하는 요건에 맞는 그러한 것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됩니다. 거기에서 다리가 길다면 자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눈이 두 개 있더라도 필요하다면 하나를 뽑아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인간에게는 탕감조건이라고 하는 것이 남아 있습니다. 영적으로 보면 다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섭리가 6천년이 걸린 것입니다.
‘오, 젊은이들, 여러분의 희망은 무엇인가?’ 할 때 ‘선생님의 말씀을 들었으니 제가 그 입장에 서서 예수님의 대사명을 완수하겠습니다. 기쁩니다. 예, 하겠습니다.’ 할지 모릅니다.
말은 간단한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로 그대의 배를 쨀 것인가? 예수님은 그 기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심정 기준을 가지고도 져서는 안 되고 승리한 경지에 서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의 신앙생활은 죽어서 심판받는 길이 아니고 살아서 심판받으면서 가는 길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성서에도 있습니다. 손이 죄를 지으면 손을 잘라 버려라. 눈이 죄를 지으면 눈을 빼어 버려라. 불구자가 되어서라도 천국에 들어가는 편이 오히려 낫다.
예수님이 일하는 것을 제자들이 보고 ‘우리 선생님은 세계적인 선생님이다.’ 라고 말했을 것인가? ‘하늘로부터 보내어진 주님이다.’ 라고 말했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기다려라!’라고 말합니다. 누가? 사탄이 말하는 것입니다. ‘너는 예수님과 일치할 수 있는가? 예수님은 이와 같이 가셨다. 너도 그렇게 가겠는가?’ 한다는 것입니다. 그때 ‘아니요.’ 하면 ‘그렇다면 아래로 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승부의 결정권입니다. 우리들이 가져야 할 신앙은 관념적인 신앙이 아닙니다. 생활권(生活圈)에 계셔서 생활을 중심으로 하는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신앙인 것입니다. 생활권을 포함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생활권 내에 들어와 계시는 하나님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한 생활권을 중심으로 하고 움직입니다. 그런 자체가 문제인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까지 안식시킬 수 있는 인물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결론은 그런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6천년 동안 완수하지 못했던 구원의 목적을 모두 완수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은 그러지 않으실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선생님의 싸움은 그것을 위함이었습니다. 어떤 때는 이러한 기도를 하였습니다. ‘하나님이여! 6천년의 하나님의 섭리노정에 있어서 우리의 선조들은 온갖 죄를 짓고 당신을 배역하여 왔습니다. 아무쪼록 6천년을 6일간으로 하여 탕감할 수 있게 그 모든 죄의 짐을 나에게 주십시오.’ 라는 기도를. 또 ‘32억 인류와 지금까지 영계에 가 있는 모든 선조의 대신으로 모든 사탄들은 나를 향해 기관총을 쏘라, 생명만은 남기고. 그 뒤는 병신이 되더라도 상관없다. 어떻게 되더라도 상관없다. 어떻게 되어도 좋으니 나를 쏴라!’라는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여 조건을 세우는 외에 달리 길은 없었습니다. 지금도 그러합니다.
32억의 전인류가‘아! 저 선생님이 오셨다. 저것은 세계적인 대파(大波)다. 다들 빨리 오라. 그리하여 부딪쳐서 집어삼키라. 해치우라!’ 합니다. 해치울 수 없고 집어삼킬 수도 없으면, 자신이 그렇게 되어 버려라. 집어삼킬 수 없으면 역(逆)으로 집어삼켜지고 말 것이다. 이것은 선생님의 사고방식입니다. 그러니까 커다란 목표를 가질 때에는 출발 전에 모두 제1 제2의 계획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일년의 성공을 바라고 하면 일년의 주인밖에 되지 않습니다. 천년의 성공을 바라고 하면 천년의 주인이 되고, 수억년의 성공을 원하여 수억년 분의 수고를 하면 수억년의 승리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루만 일하고 거기에서 기분이 좋아 가지고 눈을 동그랗게 하고 만족해 하며 ‘아, 기분 좋다.’ 라고 하는 것은 선생님이 아주 싫어합니다. 무엇인가 항상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춤을 추고 기뻐하고 있어도 무엇인가 항상 짐을 지고 있어야 합니다. 생애의 십자가를 누구보다도 많이 지고 가야 합니다. 민족의 십자가가 아직은 남아 있습니다. 세계의 십자가가 남아 있습니다. 거기에 몰입하라. 십자가권에 들어가 점령하라. 빨리 점령하라. 그리하여 주인이 되면, 그 십자가권(十字架圈)을 만들고 있는 자와의 단독치기가 됩니다. 그가 만약 하나님의 최고 원수라면 그를 맞아 최후의 결말을 내야 합니다. 이것은 참으로 재미있습니다. 여러분이 벌써 다소 인격을 연성(鍊成)하여 하늘의 정예부대가 되어서 일본을 움직이게 되면, 그러한 여러분을 선두에 세워 세계적 영적 전쟁을 시작할 것입니다. 총이나 대포를 가지고 싸우는 것은 아닙니다. 싸우는 비결을 여러분들은 가지고 있습니다. 심정포탄을 쏘라. 희망포탄을 쏘라. 신앙포탄을 쏘라. 예수님은 확실히 그러한 일을 하셨습니다.
현세에 있어서 우주의 중심인 예수님을 생각할 때 여러분은 무엇을 하면 좋겠는가? 모두들 흔히 말합니다. ‘속죄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신 것을 생각하면 억울해서 못 견디겠습니다.’ 라고. 무엇이 억울한가? 그 증명서를 보여 보세요. 여러분은 최초로 어디에서 증명서를 받아올 것인가? ‘나는 이렇게 되었다. 이런 일을 했다. 이것이 승리의 증명서이다.’ 라고 할 수 있는 증명서를 말입니다. 그런 증명서를 자기 자신이 쓸 수는 없습니다. 그럼 누가 쓰느냐? 처음에는 사탄이 씁니다. 하나님은 쓸 수가 없습니다. 사탄으로부터 그 승리의 증명서를 써 받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3년 공생애노정의 출발 때에 40일간 사탄을 불러내어 증명서를 써 받는 싸움을 하셨습니다. 그것이 3대 시험이었던 것입니다. 사탄은 말하기를 ‘당신은 민족적으로 승리하고 있다. 그러니 내가 증명서를 쓰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나의 활동 무대를 모두 하늘 편으로 즉시 바쳐야 하기 때문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먼저 사탄에게 증명서를 써 받고 나서 예수님의 증명서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의 증명서를 받아야 합니다. 이 세 가지의 증명서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을 믿고 일요일에 교회에 가서 찬송가를 부르고 기도를 하고 그리고 천국행 특급표를 받으니까 안심이다.’ 하며 예배 때 졸고 있습니다. 천국행 손님의 기분입니다. 그것을 축하할 일이라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이 예배 시간이라고 하는 것은 싸움하는 때입니다. 단독 결판하는 때인 것입니다. 그런데 잠을 잡니까? 그런 자가 있으면 흔들어 깨우세요. ‘사탄아 물러가라.’ 하고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말하셨듯이, 옆구리에 한 방 때려 넣으세요. 그것이 사랑인 것입니다. 선생님은 예배 때 자는 자가 있으면 그냥 두지 않습니다. 과거․현재․미래는 나를 부릅니다. 그렇게 생각합니까? 과거․현재․미래는 나를 필요로 합니다. 일본에 내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내 얼굴은 어째서 이렇게 되어 있을까? 조금 옆으로 삐뚤어져 있습니다. 달걀형이었으면 좋을 텐데. 어째서 이렇게 동그랄까? 이런 것을 걱정하지 마세요. 외적으로 나쁘더라도 내적으로는 백 퍼센트 원만한 기준을 갖출 수 있는 양심적 세계가 있습니다. 심적 세계인 것입니다. 정적 세계가 있다고 하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자기의 손을 보고 ‘저 사람의 손은 저와 같이 아름다운데, 어째서 내 손은 송아지의 앞발과 같을까?’ 하겠지만, 그러나 ‘이 손은 보기 싫으나 이 손으로 하나님을 울리고 하나님의 길을 개척하고 하나님을 위로할 수 있다면….’ 하는 마음을 가지면 그것으로 만점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것을 느낀 일이 있어요? 하늘 아버지의 일을 죽 생각하면, 갑작스레 눈물이 철철 흐리고 울음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어떻게 해도 참을 수 없습니다. 심정적으로 접하면 눈물이 나오는 것입니다. 아담가정에 들어가면, 특히 여성의 경우 ‘나는 죄를 지은 해와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할 가련한 해와입니다. 어디에 구원의 한 길이라도 있다면 그 길을 가겠으니 내가 범한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남자라면 자기의 주관 권한을 다하지 못하고 천지창조의 원칙의 기준을 전복한 죄인 아담의 후손이라는 것을 회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위로하고 승리의 결정권을 세워 하나님의 명령을 바라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노아나 아브라함이나 모세가 간 길, 예수의 겟세마네나 골고다의 길과 12명의 제자가 걸어간 길을 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십자가로 가신 분은 십자가를 통해서 오십니다. ‘이 길을 내가 가지 않으면 그분이 오시는 길이 멀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한 걸음이라도 더 가서 그분을 쉬시도록 하기 위해서 나는 앞서 갑니다.’ 하고 나가는 그 길에 수고가 따르는 것은 당연합니다.
일본의 1억 국민을 중심으로 하고 볼 때 어차피 이 탕감길을 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내 사랑하는 친구여! 이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장해가 많은 길이니까 그것들을 빨리 극복해 가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거기에는 희생이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참된 희생심, 과거․현재․미래를 통하는 그 희생심과 희망을 가지고 가시지 않았다면 역사는 그 방향에 일치해 가지 않습니다. 일치하지 않으면 이러한 세계권을 만들 수가 없습니다. 생각하지 않는 것은 자기와 관계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책임을 갖지 않고서는 자기 것으로 할 수 없습니다. 책임을 가지고 싸워서 그 결말을 짓지 않으면 자기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책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일은 무엇이든지 했습니다. 그 지체가 채찍을 맞고 이마가 찢어졌습니다.
그러한 중에서도 예수님은 하나님께 말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보고 슬퍼하지 마십시오.’ 라고. 이것이 예수님의 심정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이라면 ‘오, 하나님이여 나는 억울합니다. 나를 이토록 억울하게 하는 자를 즉석에서 심판해 주십시오.’ 했겠지요? 예수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심정으로 가셨으니까, 우리는 그의 동생으로 서서 지금 이 신부의 시대를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예수님의 형제가 되지 않으면 형제라고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겟세마네와 골고다산상에는 세계적인 한이 남아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이 길, 이 잔을 지나가게 하여 주십시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여 주십시오.’ 라고 기도하신 그 심정을 여러분들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일본에 대해서 그런 책임을 지고 기도한 일이 있는가? 천사세계는 아담 해와에게 협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아담 해와가 천사장을 동원하여 아담을 중심으로 한 하나님의 생활권에 그 민족권을 이루지 않으면 안 되는 것과 같이, 우리들은 영계를 동원하고 천사세계에 명령해서 협조하도록 하고 ‘하나님의 기쁜 생활권에서 나는 간다. 혹은 생활한다.’ 라고 하는 자가 되지 않으면, 이 환경에 복귀완성의 기반을 만들 수 없습니다. 이것이 원리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위치를 구하셨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가정, 자기의 씨족은 구하지 못하셨습니다. 원래는 세례 요한을 중심으로 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입니다.
좀더 말하고 싶은 것은 이런 것이 성서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알고 싶다면 가르쳐 주겠습니다. 내가 가르쳐 준 것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무릎을 꿇고 기도해 보십시오. 기도해 보면 해결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그러한 관계를 알고 예수님을 찾아가 그의 동생이 되고 형님이 되어야 합니다. 필요하면 신부같이도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는 데는 쉬려 해도 쉴 수 없는 수고의 노정을 타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이 30년 준비시대와 3년 공생애시대를 통하신 것같이 선생님도 지금 그러한 권(圈)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몇년부터는 준비시대, 몇년부터는 실천시대, 그리고 몇년부터 몇년까지는 성취시대 등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선생님이 말씀한 것은 다 맞습니다. 선생님이 살짝살짝 이렇게 움직이면 전세계가 움직입니다. 왜 그렇게 되는가? 그렇게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선생님이 지금까지 이루어 나온 공(功)이라고 하는 것은 전부 다 역사적이고 시대적이고 미래적입니다. 그것은 무엇을 중심으로 하였는가?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였습니다.
나는 사랑이 그리운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그리운 것은 아닙니다. 내가 그리워하는 것은 여러분의 얼굴보다도 여러분이 가는 길입니다. 여러분이 가는 길이 그리운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리워하셨던 것은 예수님 자체보다 예수님이 가시는 길이었습니다. 개인이 가는 길, 가정이 가는 길, 씨족이 가는 길, 민족이 가는 길, 세계가 가는 길을 예수님이 가셨다고 하면 어떻게 되었을까?
예수님이 만약 가정 기준에서 세계적 승리자가 되었다면 어떠하였을까? 예수님이 혹시 결혼하셨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 아들을 하나님의 자손으로서 인정하였을까? 인정하지 아니하였을까? 인정했겠지요. 그렇게 되었다면 예수님이 돌아가셨어도 제2의 예수가 있었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 자손이 민족이 되고 또 그들을 중심으로 인류 전부가 하나님을 중심으로 생활하게 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가인과 아벨이 탕감조건을 세웠더라면 세계는 천국이 되었을 것입니다.
만약 유대민족이 그러한 이상을 알고서 예수님의 심정과 의향을 이해하고 예수님 앞에 가서 ‘하나님이 바라시는데 당신은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지 않습니까?’라고 말한 소녀가 혹시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선생님은 그러한 것을 생각합니다. 어떻게 되었을까?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님 중심의 세계권을 만들려고 했다면 만들어졌을 것입니다. 아담 해와의 기준이 창조 본연의 기준이니까 절대적으로 합치하여 하나님과 삼위일체가 되었다면 그렇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기독교회에 가서 가르치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어쫓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거기까지 심각히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생각해야만 됩니다.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는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깨닫지 않고 가는 곳에는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이 뻗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책임을 지고 십자가의 길도 당당히 가는 기세를 가지고 사탄을 극복하여 세계를 재출발시키는 복음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하면 여러분이 그러한 목적을 거듭 세우고 상속받아 먼저 여러분의 가정에, 여러분의 씨족에, 여러분의 민족에, 여러분의 국가에 넓혀 가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필요로 하는 것은 세계를 위해서이고 일본을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선민을 필요로 하십니다. 그것은 씨족부터 민족, 국가에로. 그러니까 제2이스라엘 선민권을 복귀해야 합니다. 복귀하는 데는 예수님의 본래의 희망을 중심삼고 복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왜냐? 예수님이 오셔서 그 사명을 완수하시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3대 제물을 역사적 탕감으로 세울 길이 막혀 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 세 사람 가운데 베드로는 신앙의 대표자, 야고보는 희망의 대표자, 요한은 사랑과 심정의 대표자인 것입니다. 거기서 만약 요한이 죽는다면 기독교의 역사가 끊겨 버립니다. 살아 그것이 이어졌으니까 유대민족의 역사적 심정의 기준과 예수님이 기도하신 기준을 지상에 남길 수가 있었습니다. 그 일은 다 모릅니다. 베드로는 신앙의 대표자, 야고보는 소망의 대표자, 요한은 사랑이 대표자인 것입니다.
이 세 사람의 제자가 겟세마네에서 예수님과 같은 소망, 예수님과 같은 신앙, 예수님과 같은 심정으로 예수님이 기도할 때 같이 기도하는 것이 예수님의 소망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도 좌우의 십자가에는 강도가 달려 있었습니다. 그것이 인간 역사상 가장 비참한 장면이었던 것입니다. 최초로 예수님과 같이 낙원에 간 사람은 바른편에 있던 강도였습니다. 서글픈 이야기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1제자의 사명을 해야 했는데, 자기의 위치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 시대에 있어서의 인류의 대표로서 하나님 앞에 3대 제물로 서야 할 세 제자가 자기들 마음대로 가버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죽어서 다시 그들을 인도하고 40일 부활기간을 통하여 승리권(勝利圈)을 만들었습니다. 기독교는 십자가를 통한 것이 아니고 부활을 통한 것입니다. 십자가는 슬픔의 조건입니다. 만약 부활이 없었더라면 기독교의 시작은 있을 수 없었습니다.
선생님은 세계를 일주할 때에 많은 십자가를 보면서 내 사명은 그 모든 십자가를 없애 버리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재확인하였습니다. 자식들을 통하여서라도 없애 버릴 것입니다. 기독교는 십자가의 도리가 아니고 부활의 도리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제물을 바치지 않고 미래의 소망의 조건으로서 겟세마네를 넘고 갈보리를 넘어가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미래의 제물은 누가 세워야 하는가? 재림시기에 있어서의 제3이스라엘이 세워야 합니다. 제1아담의 잘못을 바로잡고 또 그것을 책임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제3이스라엘은 제1, 제2이스라엘의 실패한 기준을, 그리고 예수님 당시에 완성했어야 할 조건을 현세에 나 자신을 중심으로 완성하여 3대 제물을 결정하고 사탄과 대결하여 승리의 기반을 만들지 않으면 선한 부모의 입장에 설 수 없습니다. 이것은 통일교회에서 가르치는 원리입니다.
예수님은 세 사람의 제자를 잃었기 때문에 돌아가시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한편 만약 세 제자가 예수와 함께 죽었더라면 하나님은 예수님을 부활시킬 때에 세 제자까지 부활시키셨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였다면 기독교는 고난의 길을 가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과거를 뒤돌아보면, 이제 여러분은 현세에 있어서 제3이스라엘의 사정을 인계 받아 선두에 서서 대승리를 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세계에 대해서 번민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위로하고 여러분의 주위, 여러분의 국가를 정비하여 하나님 대신 명령할 수 있는 기준을 현재에 세우면 여러분이 서 있는 환경에 지상천국을 만들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소원이고 하나님의 소원이며 선생님의 소원입니다.
선생님은 그 기준에서 한 생애를 싸워 나갑니다. 그 싸움에서 쉬면 견디지 못합니다. 매일 매일 싸움은 치열하고 맹렬하게 되어 갑니다. 세계적 발전에 따라 원자폭탄이 생겨났습니다. 일발을 쏘면 끝장이 나는 싸움을 전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들은 영적인 싸움을 중심으로 사상권(思想圈) 내에 하나의 기준을 만들고 세계에 외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부디 일본 사람으로서 일본을 중심으로 세계를 움직이는 승리적 사명을 다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입니다.
아버님이여, 저희들은 슬프게도 탕감의 원리를 익히고 있습니다. 괴로울 때에는 눈물을 흘릴 때도 있습니다만, 그러나 일정한 탕감의 기준을 넘지 않으면 아버님께서 만족할 수 있는 기준을 세우지 못하고 사탄을 굴복시켜 승리의 한계를 결정지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저희 선조들이 범한 죄에 대해서 면목없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선조들이 이 길을 더듬어 왔습니다만, 아버님의 원하심과 아버님의 목적을 알지 못하고 사탄의 제물이 된 것을 생각합니다. 현세에 있어서 저희들은 선조들의 전철을 밟지 않는 입장에 세워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바입니다.
아버님이여, 일본에 있는 형제들을 불쌍히 보시옵소서. 지금까지 동양에 있어서 이 국가를 중심으로 한 목적,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을 목표로 움직인 일이 있는 이 민족입니다. 그것은 아버님에 의한 것이 아니고 사탄에 의한 것으로서 역사에 하나의 오점을 남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지금 새로운 일본의 길을 열 수 있고 장래 세계에 공헌할 수 있는 천운을 저희에게 주시어 고마운 길을 받은 모든 형제들이 감사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그들의 마음이 날로 성장하여 환경을 움직이고, 그 실체가 아버님에 의한 존재 기준을 결정하여 모든 것을 움직일 수 있는 동기가 되는 입장에 세워 주시기를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라마지 않는 바이옵니다.
지금 말씀을 전한 우주적인 예수님의 사명이 이 역사적 과정을 통과하여, 현세에 있어서는 제2, 제3이스라엘 민족을 첨단으로 하고 저희들에게 지워지고 있는 것을 생각할 때에, 저희들은 약한 자이기에 손끝이 떨리고 전신이 떨리옵니다. 죄많은 과거를 돌아보면, 도저히 아버님 앞에 설 수가 없는 저희들임에도 불구하고, 현세에 있어서 더럽혀진 저희들을 품에 품으시고서 중대한 사명을 다시 주시지 않으면 안 되는 아버님이신 것을 생각 할 때에, 저희가 가는 길은 여하히 무겁고 여하히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된 다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나이 많은 사람은 나날의 생활을 아깝게 여기고 아버님께 접근하기를 바라면서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압니다. 젊은 사람들은 세계를 구하기 위하여 열심히 싸우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또 자기들에게 대사명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고 모든 것을 아버님께 의지하고 아버님의 목적을 바라고 용기를 내어 아버님의 목적권(目的圈)에 들어가서 아버님을 모실 수 있는 승리자가 될 수 있도록, 그리고 하늘에 영접되고, 땅에 영접되는 하늘의 왕자 왕녀로서, 혹은 중심으로서 설 수 있도록 지켜 주시고, 승리의 현현을 점점 넓혀 주실 것을 간절히 바랍니다.
예수님의 사명을 인계받아 아버님께 감사하는 생활에 있어서, 아버님을 모시고 그 생활의 가치를 무한의 가치 기준으로 세워 감사할 수 있는 자가 되도록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의 모든 것을 인도하여 주신 것을 아버님께 감사드리고, 이 모든 것을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니다. 아멘.
선생님은 ‘만약 우리의 선조들이 40년간 어떤 하나의 목표를 향하여 목숨을 걸고 준비하고 완수했다면, 복귀역사는 6천년이나 계속되지 않는다. 훨씬 이전에 복귀되었을 것이다.’ 하는 생각으로 일해 나가고 있습니다.
세계 역사상에 나타났던 영웅이라든가 성인들은 아주 어렸을 때에 결의한 그 각오를 죽을 때까지 간직하고 그 목적 안에서 살아갑니다. 간단한 것입니다. 선생님도 그렇게 삽니다. 그러므로 잘 때도 그것을 향해 잡니다. 일어날 때도, 눈을 떠도, 누구와 교제해도 그 재료를 구할 수 있도록 사귑니다. 그런 식으로 해 가면, 자연히 생활환경이 자기의 장래 무대를 위한 기준으로 되어집니다. 모두 그렇게 하고 있어요?
현대의 젊은이들은 만약 이 꽃에서 좋은 향기가 난다고 하면 이것이 좋다고 말하기도 하고, 또 동쪽에서 좋은 향기가 난다고 하면 그쪽으로 향기를 찾아가기도 하는데, 그런 식으로 해서는 안 됩니다. 오른쪽이라고 생각했으면, 그 한 곳으로 힘차게 나아가 그것을 극복하고 그것이 나에게 소화되어 흡수될까, 내가 그 편에 흡수될까 하는 문제를 정해야 합니다. 그런 식으로 전진해 나아가야 합니다.
요즈음의 청년들을 보면, 기분 내키는 대로 쓸데없이 두리번 두리번거리며 여기저기 돌아다니는데, 불쌍한 자들입니다. 어디를 가려고 하는 것일까? 자기 집에 있어도, 자기의 집이 자기 집이 아닙니다. 걷고 있는 자기 자신도 자기 것이 아닙니다. 가고자 하는 목적지도 자기의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누구의 것일까? 모릅니다. 모르는 것이 자신과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인가? 여기에서는 결국 움직인 것은 사회뿐이고 자신은 사회악을 넓히든가, 성장을 돕는 재료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필요 없습니다.
일은 원인과 결과가 있고 결과는 과정을 통과하므로 원인과 결과는 하나가 됩니다. 일치하는 데는 과정 조건이 필요합니다. 과정 조건은 원인에 통하지 않으면 아니 되고 결과에 응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한 관계를 떠나서는 하나가 될 수 없고, 목적 완성도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출발점이 없다면 목적도 없습니다. 자기의 움직이는 관계라든가 인연의 조건도 없습니다. 어떻게 성공할 것인가? 누구의 성공?
사랑하는 애인이 있습니다. 자신은 결혼했습니다. 그것은 누구의 것? 누구의 것인지 보증은 안 됩니다. 그래서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때를 지나면 그것이 오히려 자신을 치는 원수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 것은 모두 역사가 처리해 갑니다. 만물의 창조원리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완전한 플러스 마이너스가 일치하면 그것은 영원한 존재 기준을 만드는 셈인데, 그 완전이라고 하는 기준을 얻지 못하면, 그것은 자연도태되고 맙니다. 우주의 대운(大運)의 힘이 그것을 도태시켜 버립니다. 멸망해 갑니다. 청년들은 모두 그렇게 되어 갑니다. 그러므로 그런 모습으로 안심하고 있으면 상대도 죽여 버립니다. 자신도 모르게 아무 계획도 없이 해 버립니다. 하루의 안심을 보증할 아무런 토대도 없습니다. 환경에 몰리어 사로잡혀 버립니다. 그러므로 사회악의 이용물밖에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도 그렇지 않아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때요?
선생님의 학생 시절에는 일본에 후다바야마(双葉山)라는 씨름의 대표 선수가 있었는데 지금도 살아 있어요? 만약 선생님이 씨름을 했다면 한번 겨뤄 보고 싶었는데. (웃음) 겨를이 없었습니다. 선생님은 씨름을 잘해요. 중고교 시절에는 전교에서 일등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지게 되면 그대로는 못 견딥니다. 지고서는 못 잡니다. 또 사람에게 매를 맞으면 1년, 2년, 3년이 지나도 그것은 머리 속에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두 손을 짚고 잘못했노라고 사과하는 것을 보지 않으면 마음이 가라앉질 않는 그런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씨름 같은 것을 해서 지게 되면 밤에도 혼자 뒤뜰에 가서 나무를 상대로 연습합니다. 먼저 부드러운 나무를 ‘에잇!’ 하고 구부러뜨립니다. 다음에는 약간 강한 것을 상대로 또 그렇게 합니다. 한 달 동안이라도 연습하여 상대를 쓰러뜨리고 나서야 기분 좋게 잘 수 있습니다. 그런 기분은 경험하지 않으면 모릅니다. 그렇게 연습해서 사탄에게 부딪쳤던 것입니다. 그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그런 식으로 생각합니다. 한번 손을 대면 승리의 결정을 해야 합니다. 네가 패하느냐? 네가 나의 먹이가 되는가? 먹느냐 먹히느냐? 그렇게 되어 있어요. 힘겨룸의 승패를 결정합니다. 이것은 선의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의 나라가 전쟁할 때 선생님은 일본에 와 있었는데, 신쥬쿠(新宿)의 뒷골목 등을 쭉 돌아보곤 했습니다. 어디라도 들어가 여성들의 과거를 쭉 물어 봅니다. 맥주를 가져오게 합니다. 그러면 자꾸 가지고 옵니다. 그러나 술은 마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옆에 앉아 얘기를 합니다. ‘왜 이런 곳에 왔느냐?’ 계속 얼굴을 보면서 ‘부모가 없는가 보군.’ ‘어머니가 안 계신 거 아냐?’라고 하면 점점 마음을 열고 ‘그렇습니다.’ 라고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계속 그것을 연구했습니다. 어디를 가더라도 자신에게 플러스가 되는 것을 취해 옵니다. 나쁜 곳에 가도 소화할 수 있는 것은 소화합니다. 선생님은 그런 주의입니다. 좋은 환경을 찾아서 돌아다니는 사람은 아닙니다.
수양하는 데는 꼭 조용하고 삼엄 장엄한 곳이나 깊은 산과 같은 곳에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조용한 곳에서만 공부가 된다는 것은 선생님에게는 통하지 않습니다. 공장이 몇백만 마력의 모터나 엔진이 돌아가는 곳에서도 공부합니다. 그런 일을 잘 합니다.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준비하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깨어지는 곳, 어느 때는 두드리는 곳에 들어가고….
굉장한 패거리가 약한 자를 괴롭힐 때에는, 그들을 모두 단독으로 해치웁니다. 싸우는 것입니다. 혼자요, 자기뿐입니다. 그것은 공(公)을 위해서 입니다. 만날 때는 혼자입니다. 맞을 때의 그 기분, 이것은 모두 인생철학에 있어서 필요한 문제입니다.
만약 그런 사람이 있으면, 그런 자리에 부딪쳐 붙잡고 자신의 과거사를 얘기합니다. 자신의 일을 이야기하지 아니하면 진심이 아니라고 상대해주지 않습니다. 자신의 사실의 일을 말하지 않으면 진실하지 않다고 상대도 진실하게 대해 주지 않습니다. 듣는 사람도 진실하게 되지 않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일을 얘기하는 것이에요.
선생님은 불쌍하고 거지와 같은 생활을 자주 했습니다. 추울 때 신문 한 장이 비단 이불 이상의 가치가 있는 것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그것을 체험해 보지 않으면 모릅니다. 사실을 말하니까 사실에 통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필요합니다.
우리 통일 청년들에게는 그런 훈련을 시킵시다. 그렇게 해서 멋있는 인간을, 청년을 키웁시다. 어디에 가더라도 무릎을 맞대고 서로 이야기하며 교제합시다. 자신의 가슴 깊은 곳에 모두를 끌어들이지 않으면 지낼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사나이가 되기 바랍니다. 그렇게 되면 모두의 비밀을 나의 가슴속에 받아들여 그들을 편안하게 해 주는 사나이로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가슴속에 두는 편이 편하다고 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통일교회 여러분은 그렇지요?
선생님은 여러분의 비밀을 듣고 싶지 않지만 영계의 사람들은 조금만 단계를 올라가면 자신의 비밀 이야기를 가지고 와서 ‘선생님 실은 저는 이러이러합니다. 내 마음속에 두는 것보다 선생님께 보고하는 것이 마음이 편합니다.’ 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불가사의한 존재입니다. 손해보는 일은 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자신보다 선생님이 있는 곳에 두는 편이 모든 방편에서 볼 때 유익하다.’ 고. 그것을 모르면 그렇게 되어 있는 거예요. 맛이 있는 인간이 되지 못하면, 맛이 있는….
태양 빛은 누구라도 좋아합니다. 나는 필요 없다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와 같은 삶을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요구하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는 그런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환경에 부딪쳐 여러 가지 연구를 해야 합니다.
선생님이 일본에 왔을 때는 여러분의 나이와 같이 젊은 때였지만, 그런 곳에 대단한 관심을 갖고 공장에 가서 노동 생활을 하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면 가와사키(川崎)의 조선소에 가서 석탄 운반 등의 일을 자주 했어요. ‘하자!’ 해 가지고 친구들을 데리고 가는 것입니다. 신바람이 나 가지고 그것을 하루에 얼마로 도급을 맡는 것입니다.
일할 때는 회사의 노동자들과 대결했습니다. ‘당신들은 이것을 몇 시간에 하겠는가?’ ‘우리들은 6시간 안에 이것을 끝내겠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젊은 사람들을 모아 ‘4시간 안에 하자.’ 고 하여 필사적으로 하는 거예요. ‘오늘 하루 하고 죽어도 좋다. 저들에게 져서는 안 된다.’ 하며 심하게 독려하며 시작합니다. 4시간에 한다고 했으면 3시간에 전부 해치웁니다. 그리고 돌아와서 3일 정도는 잠만 잡니다. 젊은 때는 그런 것이 필요하다고요.
모든 회사의 좋은 곳, 나쁜 곳을 통과하면서 거기서 증명서를 받아야 합니다. 내가 만약 큰일을 하려면, 내 자신이 대중을 움직일 수 있도록 해야 하고 모든 계급의 사람들을 즉시 지도할 수 있게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나로 하여금 비판할 수 있고, 심정적으로 중심의 기준에 세우든가 관계를 가지든가 해서 친구가 되지 않으면 지도자는 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그런 경험이 필요합니다.
여러분들을 지방에 보냅니다. 보내어 제일 참혹한 곳에서 싸우게 합니다. 거기에서 최고의 기준까지 통과해야 합니다. 그리고 올라갔다가는 또 내려가는 인격자를 만들자는 것입니다. 사회에서는 올라가면, 절대로 내려가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다른 일면의 인격을 만듭니다. 올라갔다고 해서 계속 그대로는 안 됩니다. 옛날의 그 경지가 믿음직합니다. 남자답습니다. 거기에 기질이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 옛날의 어느 때는 좋았다고 상기하고, 그리고 높은 곳에서 자연히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인격자가 되어야 합니다. 위로 올라가서 내려오고 또 올라가는 인격자가 아니면 하늘 편에서는 쓰지 않습니다. 올라갔다 내려오기까지는 탕감으로 없어집니다. 또 올라가는 기준이 되어, 이것은 하늘에서 1, 2, 3이라고 해요. 제1의 물결은 문제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제2의 물결부터 문제입니다. 그렇지요? 세상의 현실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올라갔다가 내려와서 쉬는 게 아니에요. 또 올라갑니다. 오르는 데에는 더 굉장한 곳에 올라갑니다. 그런 기백을 배통에 품고 나아가라! 이것이 통일교회의 지도 방침입니다. 알겠습니까?
탕감조건을 넘는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인데, 또 오르는 것인가? 눈앞이 캄캄해졌어요? 그래서는 안 됩니다. 또 올라가야 합니다.
높이 올라갔다 내려올 때에는 그 힘을 갖고 거기에 비례하여 2배 낮게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차(差)의 권내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또 올라갑시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언제나 그런 마음으로, 뛰는 상대의 반발작용과 나의 뛰는 힘을 합하여 뛰려는 것을 생각하세요. 그러고서 자기보다 큰 자가 있으면 활용합시다. 돌입구가 있으면 돌파하고, 그리고 그 힘에 의해 올라가야 합니다. 자기 혼자서는 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보통 사람이 3년에 그 선생님의 제자가 되었다면, 우리들은 1년에 된다 하는, 그런 방법입니다.
어떤 사람이 필요하면, 그 사람에게는 누구도 교제할 수 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어떠한 무리한 일이 있더라도 부딪쳐 사귀어서 그 기대를 자신의 기대로 합니다. 그런 사람이 똑똑한 사람입니다. 주관력의 배양, 이른바 큰 성과를 어떻게 해서 얻을까? 그렇게 함으로 상대방을 나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의 목적과 나의 목적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도 기뻐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그런 일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사귈 친구는 어디에 있을까? 선한 선생님은 어디에 있을까를 생각해서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런 곳이 있으면 자신의 체면이라든가 자기 자신의 일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확실하게 심정의 교제를 합니다.
이런 일을 여러분들에게 가르쳐 주면, ‘아! 알겠다.’ 고 하고 선생님을 아저씨라고 부르면 좀 곤란합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릅니다. 선생님이 나오는 시간을 기다렸다가 ‘선생님, 접니다, 저예요.’ 라고 말하고 ‘잠깐 시간 좀 내주시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좀 곤란하지만, 그런 식으로 해서 통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선생님은 말하는 것입니다. 선생님을 백 퍼센트 이용하세요. 이용하고 이용해서 선생보다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선생님은 40세가 되어 이 정도의 기반을 만들었습니다. 선생님의 정신을 이용해서 뛰세요. 그것을 하는 것이 선입니다.
악한 결과가 될 때에는 그것은 악입니다. 선을 악 편으로 끌어서 악한 결과를 가져오면 악이 되지만, 악이라도 이용해서 선한 결과를 초래하면 선이 되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은 그런 일을 잘합니다.
씨름꾼을 알고 있지요? 저 큰…, 그들이 술을 마실 때에, ‘선생님 오늘 밤 잠깐 와 주시겠습니까?’ ‘왜?’ ‘한 잔 마시려고….’ ‘아 그런가.’ 그때 선생님이 필요하다면, 어떻게 해서든지 형제들, 가족들, 자녀들이 오해해도 당당하게 갑니다. 그들의 목적과 나의 목적하는 것의 이해가 틀린다 하더라도 그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선생님은 가도 소화할 능력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얼마든지 술잔을 가지고 춤추어도 그 기준에 있어 하나 남기는 것이 있습니다. 돌아가서 그 술잔을 깨부수어 버릴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승리라는 것입니다. 그런 때는 당당히 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나쁠 것은 없습니다.
최고의 선은 최악까지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일본에도, 거리에 불량배들이 많지요? 그들을 어떻게 해서 붙잡는가, 그 포위작전을 위해 여러분을 이용할지도 모릅니다. ‘나는 그런 일은 할 수 없다.’ 라는 말을 할 사람은 지금부터 미리 보따리 싸 가지고 군소리 말고 돌아가 버리라구요. 분명히 말해 둡니다. 정말로 솔직히 말해 둡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남아서 ‘나는 할 수 없습니다.’ 라고 하면서 따라오는 자가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그렇지 않지만. 여러분들 이외의 사람들에게는 그런 것이 많이 있습니다. 여기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자신은 그렇게 되지 않도록 분별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회층에 접할 수 있는 맛있는 사나이가 되고, 맛있는 여성이 되라고 하는 것입니다.
통일교회에 있는 청소년은 모두 그렇습니다. 얼굴은 그렇게 말쑥하지는 않아요. 보면 제멋대로 생겨 있습니다. (웃음) 그러나 교제해 보면 이것은 묘한 것이 있습니다. (웃음) 희한한 맛이 있어요. 겨자 정도의 맛이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요는 1개월 교제해도 1개월로 부족합니다. 또 있습니다. 그런 맛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친구들이나 그런 가운데 들어가면 자기가 있기 때문에 모두 곁눈질하며 도망가는 사람이 된다면 목을 매고 죽는 편이 낫습니다. 인간으로 남아 있는 이상은 깊은 맛이 있는 남성 여성이 되어야 합니다.
선생님은 그렇습니다. 선생님은 노동하는 곳에 가면 30분 이내에 친구를 만듭니다. ‘어이 모두 모여! 좋은 이야기 해 줄게.’ 모이면 매일 새로운 얘기를 합니다. 세계가 굴러가고 왔다 갔다 하는 듯한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그동안에 자신들도 모르게 키워 나가는 거예요. ‘그러한 사나이가 되고 싶은가요?’ 「예.」 ‘정말로 발을 내디디고 싶은가요?’ 「예.」 ‘해보고 싶은가요?’ 「예.」 그러면 ‘내 명령대로 해요. 그러면 그렇게 될지도 모릅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명령받아 한 번, 두 번, 세 번 정도 움직여 보았을 때, 손해나지 않고 좋은 결과가 나오면 저쪽으로 가라고 해도 자연히 이쪽으로 옵니다. 그런 것을 생각합니다. 모든 일로부터 그러한 일을 연구합니다. 그러고서 전도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재료를 폭넓게 모으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분야에 있어서 맛이 있는 깊은 인간이 됩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접촉해 보고 싶습니다. 조금이라도 관계를 갖고 싶습니다. 그런 인간이 걷고 있다면 뒤를 좇아 바라보고 싶습니다. 알겠어요? 그런 맛이 있는, 그리고 인격의 향기가 있는 남자 여자가 되기 바랍니다.
그런 인간이 되어 시집가서 남편이 도망가게 되면 선생님이 있는 곳에 와 참소해도 좋습니다. (웃음) 사람이 따라옵니다. 누구인가 좋은 남자가 올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도, ‘오지마, 오지마.’ 해도 나쁜 남자보다 좋은 남자가 따라옵니다. 그러고는 발끝까지 좋아한다고, 구두를 매일 닦아 주면서도 좋아한다고 말합니다.
가만히 있어도 그런 남자가 백 번 신청해 옵니다. 한 번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백 번 정도 신청해 옵니다. 그러면 이쪽에서는 1년부터 일생애까지의 계획을 쭉 말하고 ‘저는 여성입니다. 그래도 섬길 마음을 갖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지도할 마음을 갖고 있습니까? 둘 중에 어느 쪽입니까?’ ‘지도 할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섬기겠습니까?’ ‘좋습니다.’ 라고 하게 됩니다. 선생님은 그렇게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전도하는 것은 하늘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 통일교회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에요. 결국은 여러분들을 위해, 자신을 위해, 즉 모두 자신을 위해서예요. 선생님의 명령이 그러니까, 탕감이니까…. 그렇지 않아요? 결국은 하늘 아버지의 요구라서가 아니라….
하늘 아버지도 6천년간 나를 위하여 탕감했습니다. 선생님도 45년간 지금까지 나를 위해 탕감해 왔습니다. 결국 모두 나를 위해 탕감해 왔습니다. 결국 모두 나를 위해 존재해 왔습니다. 생각해 보면 대단한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도 나를 위해서. 커다란 통일교회도 나를 위해서. 정말로 그렇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일하면 실패하지 않습니다. 고독하지 않습니다. 고통스럽지 않아요. 그런 식의 아들딸을 만들고 싶다는 것이 선생님의 실생활을 통해서 얻은 진짜 신조인 것입니다.
그런가 하고 내일부터 자신을 갖고, 그렇게 하려고 호랑이 굴에 가면 곤란해요. 선생님 혼자 신이 나서 말하면 여러분에겐 나쁠 텐데 그래도 괜찮아요? 모두에게 면목이 없습니다.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결심이 없지요? 「있습니다.」내 품에는 없어요. 어디에 있어요? 어디에…. (웃음) 여러분의 가슴 속에 그 열매가 백 개 천 개 정도 맺어지면 그것을 하나님은 기뻐할 거예요. 어디에 가더라도 외톨이가 되어서는 안 돼요.
찹쌀떡, 한국에서는 찹쌀이라고 하는데 그것으로 찰떡을 만들어요. 그것은 무엇을 붙여도 잘 붙어요. 준비하지 않은 사람은 단번에 삼키려다가는 죽어버려요. 걸리기 때문입니다. 되려면 찰떡과 같은 그런 사람이 되도록 하세요. 여러분이 무엇을 하면 기쁠 것인가? 가만히 있으면 아무것도 되지 않으니까, 되도록 하려면 어떻게 하면 좋아요? 어린이에게는 어린이가 좋아하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되고, 아버지에게는 아버지가 좋아하도록 합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언니 등 모두가 필요한 일을 내가 책임을 집니다. 그런 일을 시작하는 거예요. 나쁜 곳은 누구나 싫어합니다. 선생님은 그러한 일에 손을 댔습니다. 1년, 2년, 3년, 그 정도 하면, 하나의 부락이 된단 말이에요. 그러면 그 사람의 그늘에 들어가고 말아요.
그러한 통일교회의 움직임, 여러분들이 지방에 가면, 그렇게 해야 되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지방에 책임을 갖고 가는 것은 그것 때문입니다. ‘아, 나는 하늘의 뜻에 의해 이 지방의 책임자가 되었으니까 모두 나를 숭배해라! 나를 따라야 한다.’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아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선 부모의 마음을 갖고 인류에 대해서는 눈물을, 땅에 대해서는 땀을, 하늘에 대해서는 피를 흘려야 합니다. 이것은 철칙입니다.
그러고 나서 나의 몸으로 봉사합니다. 그리고 부모와 자식, 아들딸을 부양하는 마음을 갖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젖을 먹이면서 기쁨을 느낍니다. 그렇게 한 부모의 심정에 서서 자신의 최고의 것을 주어서, 줄 것이 없어져 고민하는 것 같은 심정을 갖고 계속해 갑니다. 누구라도 그런 작전을 하고, 3년 간 정진해 나가세요. 그렇게 되면 자신은 말하지 않아도 여러분의 행동으로써 모두를 끌어당기는 시대로 됩니다. 틀림이 없습니다. 현대 청년은 3년도 기다릴 수 없으니까.
여러분들 금식할 때 어때요? 배는 고프고, 천둥처럼 꾸룩꾸룩 소리가 납니다. 견딜 수 없게 됩니다. 세상에서 무엇이 가장 그리운가요? 애인을 사모하는 것이 제일 그리운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배고픔의 절정일 때, 음식이 제일 그립습니다. 아, 이 이상 하늘 아버지를 사랑할 수 있을까요? 그 경지에서 헤아려 보는 거예요. 굶어 죽는 이상으로 하나님을 사모할 마음이 있을까요?
예수님의 40일간의 단식도 이유가 있어요. 그 이상 하나님의 뜻을 사모하고, 그 이상 인류의 구주의 심정 기준을 유지하는, 이것이 필요합니다. 그러고 나서 무거운 짐을 집니다. 가득 짊어지고 단을 올라가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것 이상의 탕감의 짐을 지금까지 짊어지고 오셨기 때문에, 진짜 어떨까 실제로 해보는 거예요. 그 기준에서 모두 비교해 보세요.
외면적인 인상(人相)으로 보면, 우리들은 그의 밑도 되지 않지만 그가 하는 저런 일을 내 자신이 할 수 있을까요? 할 수 없습니다. 열에서 백까지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었다면 하나님은 그를 부르실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승리하면, 모두가 그의 종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목적을 달성하는 데에는 다른 사람보다 많이 자고, 많이 먹고, 다른 사람보다 좋은 곳에 살아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이것은 철칙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이하의 기준을 갖고, 그와 같은 희생을 치름으로써만 다른 사람보다 발전합니다.
일본을 구합시다. 일본을 하나님 앞에 바로 세워 지금 이상의 일본으로 하려고 합니다. 거기에는 보다 많은 희생을 치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누가 하는가요? 하나님이 해 주실 것 같습니까? 선생님이 해 줄까요? 선생님은 일본에 와서 하지 않아요. 일본에서 하면 미국 등의 나라에 가요. 여러분들이 합니다. 여러분들의 살을 깎아 모아서 세계 지도자의 앞에 본으로 가서 나누어 주고 싶은 것이 선생님의 욕망이에요. 이 욕망은 좀 어렵겠는데, 그래도 괜찮아요? 괜찮겠어요? 「예.」 정말로 ‘예.’예요? 「네.」 그런 ‘예.’의 말투는 있을 수 없습니다. (웃음)
지금부터는 그런 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 세계 속에서 고기를 한 사람에 한 근 정도씩 그 정도로 세계를 살릴 수 있다면 그것을 합니다.
여러분은 1년 365일 하루 세끼 먹으면 1,095식인가요? 그렇다면 두 끼만 먹으면 730식. 청년들에게는 730식(食)밖에 허락하지 않아요. 남은 365식은 하늘 편에 맡겨 둡니다. 그것은 누구에게 줄까요? 세계의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줍니다. 선생님은 거기에 조금도 손대지 않습니다.
금년 안으로 12개 국에 선교하러 나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은 무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복귀의 시기는 아무 때나 없습니다. 그것은 바다 가운데 한 점 물보라 같은, 좁쌀 한 알과 같은 기준이 바다 전체의 가치에 상당하는 것과 같은 때가 복귀의 시기입니다. 한 번밖에 없습니다. 사람과 돈은 얼마든지, 또 내일이라도 천년 후라도 언제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때라고 하는 것은 언제나 있는 게 아닙니다. 무리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무리 없이 복귀는 할 수 없습니다. 희생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하는 데는 전부 쓰고 남은 것으로 하는 것이 아니에요. 피를 하늘 편에 바칩니다. 먹지 않고 자신의 피와 힘의 원동력, 이것으로 하는 거예요.
선생님은 금식을 잘 시키지요. 훈련으로써 모두 일주일간 금식하지 않으면 통일교회의 정회원으로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을 알고 있어요? 「예.」 아직 하지 않고 있는 사람은 하세요. 그리고 그 몫의 돈은 전부 헌금하세요. 예금통장을 만들어 모두 부어넣는, 그러한 운동을 하는 거예요. 세계를 복귀시키는 공적 자금이 없습니다. 빨리 이런 운동을 해서 우리의 자금이 미국 1년 예산 이상의 것이 되면 세계는 백 퍼센트 하나님의 계획대로 될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미국의 계획이라면 모두 이러한 방면의 문제에 돈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모두 어떻게 해서라도 없애 버립니다. 미국도 반드시 이런 시대가 오므로 준비해 놓아두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것에 대해서 막대한 손해의 값을 치러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의 문제는 환경이 문제입니다.
오늘날 많은 주의의 전쟁의 끝이 보이면 종교전쟁이 각국으로부터 발생하게 됩니다. 일본도 그렇지요? 창가학회(創價學會)와 입정교성회(立正佼成會)가 싸움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세계의 현상입니다.
선생님은 미국에 가서 아이젠하워 전 대통령과 만나 말했습니다. ‘당신은 그 미국의 헌법을 개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고. 종교와 정치가 분리하는 것은 통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집트) 낫세르 대통령은 아랍 회교를 중심으로 통일 형태를 만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공산주의가 그것과 연결하여 아랍 민족을 종교 전쟁으로 유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머리가 좋은 소련의 정책가가 생각한 일입니다. 그것은 민주주의세계로부터 적극적으로 반대 받을 것입니다. 우리들은 2대 공영권이 된다고 하는 가운데 민주주의를 섬겨 나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인도에 있어서도 회교와의 싸움에 인도의 위정자들이 전인도에 퍼져 있는 힌두교로 빨리 불교도를 동원하고 그들을 그 회교에 대결하는 기준으로 어떻게 돌아가게 하는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제2차 대전 후에, 선생님은 ‘공산주의는 종교의 적입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고 하는 것은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빨리 세계를 원조하는 돈을 갖고 각 나라의 종교 지도자들을 모아 종교협회를 만들자.’고 제일 강하게 주창했습니다.
그 각국의 종교 단체를 통하여, 말하자면 봉사적인 활동 방식을 바로 세우지 않겠는가요? 그리고 공산주의 전체가 행동해 온 일에 대한 보복으로 그것을 기초로 해서 되물리칩니다. 더 밀고 나가면 자연히 어느 권내에 있어서 종교 통일권을 만들 수 있습니다. 종교전쟁의 단계에 들어가고 있는 오늘날 선생님이 항상 생각하는 것은 그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이번에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만나서 말한 거예요. ‘몇년 후에 선생님이 말한 것을 계속 주시해 주시오. 그대로 되는지 안 되는지.’ 라고. 지금 그렇게 되어 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세계를 앞에 놓고 우리들은 단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들은 날마다 어떤 사상 훈련을 하는가? 지금 가르쳐준 대로 머지않아 공산당 이상으로 희생이 되고, 빈민 노동자에 대해서 공산당은 우리들 이상으로는 봉사할 수 없다고 하는 봉사의 실적을 전일본에 쌓아야만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가르치고 이렇게 움직였다. 7일이나 먹지 않고 이런 누더기 옷을 입고 모두의 가운데서 싸워 왔다.’ 고. 일본의 전국민도 공산당도 이렇게 했을까요?
그렇게 되면 실력이 문제입니다. 이념과 실력이 문제로 됩니다. 같은 이념이라면 행동에 의해서 대중이 끌려오게 됩니다.
지금부터 몇년 후에는 일본의 공산당을 향해 정면으로 선전하는 재료가 다르게 됩니다. 빈민들을 어디까지 사랑했는가? 중류 이하의 사람들에 대해서 어느 정도 그들의 생활문제, 교육문제, 사상문제 등 모든 문제의 선두에 서서 그들 이상 했다고 하는 실적의 증명서가 문제입니다. 누구라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조직력이 있다 해도 그것이 조직보다 이상의 일입니다. 그것을 겨누고 있어요. 무슨 일인가 알고 있어요? ‘여러분들이 지방에 가서 땀과 피와 눈물을 흘리시오.’ 라고 하는 목적은 이 기준을 빨리 쌓아 두자고 하는 것입니다.
일본에 있어서도 대학 3년 이상이라면 그 학생들을 2년간 충실히 동원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2년간 현지에 가서 교육하고 돌아와 다시 2년간 대학에 다녀 졸업증명서를 받도록 하세요. 그리고 전일본의 실태를 잘 알고 나서 나라에 필요한 인간이 되세요. 그렇게 하면 중학교, 고등학교의 선생은 급료가 없어도 봉사하게 됩니다. 그것을 문부성에서 하지 않으면 문부성의 공립학교 이상의, 우리 통일교회를 중심삼은 학원부터 시작해서 우리가 주의 주장한 교육방침을 내놓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실력의 기준을 사회에 세웁니다. 그러므로 무리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자녀는 불쌍합니다. 여러분들은 사회 환경에서 보면 혜택을 받고 있는 거예요. 가끔 선생님은 한국에서 지방을 쭉 돌아봅니다. 살짝 가지요. 어떤 사람이 살고 있는 곳에 살짝 들어가 부엌에 갑니다, 무엇을 하고 있는가. 비참한 일이 있는 거예요. 그것은 선생님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것을 밀어내야만 하는 것은 선생님의 입장이 아니면 모릅니다. 심각해요. 심각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있는 지도자로부터 ‘여러분이라면 틀림없다.’ 이런 말을 듣게 될 때가 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도자로서 길리워지는 그 입장으로서 나라를 중심삼고 세계를 중심삼아 우리는 참고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참고 견디어 나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한 결의가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그런 형제와 만나고 헤어질 때는 눈물 없이는 갈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배웅하기 위하여 고개까지 올라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듭니다. 심정적인 것은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그것을 봤을 때에는 두 번째에 가선 서로 껴안고 눈물로 시작합니다. 이런 심정을 중심으로 한 눈물의 장소는 거룩한 성지의 기준으로 됨에 틀림없습니다. 거기를 그 정도의 느낌이 없이 밟는 자는 떠나라!
그런 식으로 움직이는 우리 통일의 청년들은 이 세계를 감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성스러운 자는 세계를 리드합니다.
선생님이 왜 한국에 돌아갈까요? 사람은 고향을 갖지 않으면 안 됩니다. 고향을 갖고 조국을 갖지 않으면 안 됩니다. 고향을 사랑한 자가 나라를 사랑할 수 있고 고향과 나라를 사랑한 자가 세계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선생님이 미국에 가면 미국이 고향이 되고 조국이 됩니다. 그러나 심정 기준에 있어서 미국은 그렇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뭐라 해도 최고의 기준이 한국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에요. 그것을 연결하여 세계 기준까지 끌고 가지 않으면 안 될 사명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국에 가서 또 싸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러분들 이상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어느 부락에 가면 그 부락의 어느 집에 젓가락 숟가락이 몇 개 있는 것까지 압니다. 재미있지요? 동원하면 빈틈없이 알게 됩니다. 우리는 돈으로 움직여지지 않습니다. 지금 이러한 움직임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생님은 한국에서 수수께끼의 인물로 되어 있습니다. 온 세상 사람은 세계를 움직이고 전투하는 데에 돈을 써서 움직이지만 통일교회의 선생님은 일전도 없이 수천인을 움직이고 있습니다. 백만장자가 할 수 없는 일을 하루에 해 버립니다. 그래요. 선생님이 하려고 하면 됩니다. 하는 거예요. 그러므로 큰일을 합니다.
무용단의 일도 그 누구도 몰랐습니다. ‘3년간 연습으로 하라. 밤낮으로 하여튼 하라.’ 한 것입니다. 1년간에 현재의 기준에 도달했습니다. 1년 6개월 만에 자신을 가졌습니다. ‘좋다. 이 정도라면 세계에서 문제로 된다.’ 이것은 한국 본토의 형제들도 모릅니다. 선생님은 무엇을 하기 위하여 이런 일을 하는 것일까요? 종교단체와 예술단체와는 전연 다른 것이 아닌가요? 사회악을 해결하는 최선단의 뒤에서 통일교회는 예술단체를 가지고 있다고 어떤 사람이 말했습니다. 그러나 본질에 있어서 다른 것입니다.
남녀가 같은 방에서 1년을 살아도 문제가 안 생깁니다. ‘당신 그렇게 할 수 있겠어요?’ 미국에 가면 일본보다 집세가 비쌉니다. 여자와 남자가 외면적으로는 부부의 이름으로 등록하고 내면적으로는 남자와 여자가 따로따로 순결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거짓말 같은 사실이에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방을 빌려 주지 않습니다. 하지 않으면 안 될 사명을 완수해야만 합니다. 하늘은 그것을 보증합니다. 그래서 하고 있습니다. 보통의 남자 여자라면 3일도 계속되지 못할 걸요. (웃음) 그러므로 통일교회의 청년 남녀는 아름답습니다. 하나님이 있으면 그런 남녀가 필요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아버지 어머니도 그런 아들딸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예절을 지켜 가는 청년들이 사회운동에 솔선하게 되면 일본은 반드시 구원됩니다. 미국도 구원됩니다. 그러므로 청소년 문제를 해결하는 운동을 하려고 선생님은 계획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종교 단체를 통합하여 하나의 세계적인 운동을 할 것입니다. 선생님은 인도에 가게 되면 수상을 만나고 싶습니다. 선생님이 종교가이므로 만나지 않겠다고 하면 각 종교를 하나로 해서 그 일을 합시다. 그것을 지금부터 계획하기 바랍니다.
세계 각국을 일주한 데는 큰 목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세계를 쭉 돌아온 것입니다. 금후 젊은이들을 보내지 않으면 안 될 곳, 그 현지에 가서 기도해 주고 그리고 심정적 기준을 갖고 뭔가를 남겨야 합니다. 그래서 많은 비용을 들여 머나먼 세계를 일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선생님의 말대로만 하면 틀림없어요. 틀림없습니다.
한국에서도 모두가 반대하는 일을 해 왔습니다. 국민학교 2학년 어린이들을 불러 ‘잠깐 와 줄래.’ 해 가지고 ‘으응 어디 어디에 있는 통일교회나 문 선생님에 대해 신문에서 읽고 아빠나 엄마한테 뭔가 들었지?’라고 하면 ‘아아 몇 번이나 들었어요.’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지?’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 (크게 웃음) 그렇게까지 선전되고 있습니다. 이 정도로 밟히고 매 맞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도 없어지지 않는 이상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이 이상 때리는 자가 없으면 매맞는 일은 이것으로 끝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저렇게 때렸는데도 불구하고 발전한다. 이것은 무서운 것이다.’ 고 말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세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미국을 짊어지고 품에 안아 기릅니다. 기르는 데에는 그 생활 기반을 만들어 놓지 않으면 안 됩니다.
중공이 문제되고 있습니다. 일본이 중공과 통상을 하려고 합니다. 한편으로는 이익이 있지만 여러 가지 부작용이 있습니다. 각 대학이나 학회에는 공산주의가 만연하고 있습니다. 만약 중공이 경제력을 길러 자유자재로 들락거리게 되면 자유권 내의 기업 내에 있어서 스트라이크 운동이 빈번히 일어납니다. 틀림없이 그렇게 됩니다. 그것에 대응할 국책을 생각지 않고 그대로 두면 둘수록 문제가 됩니다. 강제적으로 하면 때가 늦습니다. 10년 이상 먼저 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일본에는 중공 이상으로, 행동적 공산주의보다 이상적 공산주의가 널리 퍼져 있습니다. 이 수습을 어떻게 할 것인가?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모든 방면에서 그 기대를 만들어 나가야만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 것일까? 선생님은 그것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일본을 사랑한다면 빨리 펴 나가야 합니다. 청소년 문제, 공산주의 문제, 종교계의 문제, 즉 지금 문제로 되어 있는 이 3대 문제를 어떻게 소화할까? 한국보다 나쁜 조건에 섰습니다. 한국에서는 공산주의에 대해 절대적으로 반대입니다. 그래서 일본은 한국보다 더 어렵습니다.
일본에 대해 선생님은 관심을 갖고 있어요. 왜냐하면 금후 세계의 정세에서 볼 때 일본의 경제 등이 지금부터 3년, 5년 지나면 확실히 문제로 될 때가 올 거예요. 이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사상문제는 일시적인 국책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공산주의는 세계 공산주의를 기준으로 역사적 배경을 갖고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어 지금까지는 그것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파동이 크면 큰 만큼 빨리 결말이 나는 거예요.
참부모님을 사모해 지상에서 완수해야 할 환경에 서 있으면서 이루지 않고 가면 하늘 앞에 부끄럽습니다. 그리고 천계의 선조로부터 불평을 듣습니다. ‘무엇을 했느냐!’ 그것을 전통으로 하지 않으면 여러분은 자손에게 면목이 서질 않습니다.
하나님은 참된 것을 주시기 위해 당신의 모든 정신을 넣어 우리에게 역사하고 있습니다. 그것에 대응해 우리는 모든 정신을 넣고 있습니다. 그것을 보시고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그러므로 아침에 일어나서 맨 처음의 말은 하늘에 바칩니다. 아침에 처음 집을 나서는 오른발도 하늘에 바칩니다. 무엇을 드릴 때도 귀한 것을 하늘에 먼저 드립니다. 그러므로 가장 최초의 것, 가장 귀한 것을 하늘에 받들어 올립니다. 그러한 제일의 위치에 있는 것을 점령하는 자는 사탄에 가깝습니다. 그렇죠? 가장 좋은 것이 자기 것이라고 하는 것은 사탄의 조건으로 되어집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전도하러 가서 맞았을 때나 박해받았을 때 자기를 생각하기보다 하늘의 일을 생각하세요. 하나님도 함께 한탄하고 계십니다. 때린 잘못을 용서하도록 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사탄도 하나님을 칠 수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응하는 자를 쳤다 하더라도 직접 하나님을 칠 수는 없습니다. 맞았을 때는 하나님과 같이 맞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거기에 생활 방법이 있어요. 감사하면 사탄세계에게 조건이 됩니다. 나를 친 환경이 걸립니다. 예수님도 그러한 탕감조건을 세웠습니다.
부인들! 자신의 남편이 좋은 것입니까? 그야 남편은 길벗이에요. 그러나 영계에 갈 때는 모두 헤어져 버려요. 천 쌍 중 한 쌍도 한곳으로 가는 자가 없습니다. 십만 쌍 가운데에서 한곳으로 가는 사람이 하나 있을까 말까입니다. 그것은 인간으로서 비참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계에 가서, 천국에서 가족 모두를 만날 수 있는 곳을 건설하자고 하는 것도 하나님의 뜻 가운데에 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가족끼리 다 천국에 갑니다. 어머니는 지옥에 가고 아들이 천국에 가서 ‘아 즐거워, 어머니 거기서 뭐하고 있어?’ 그러면 좋겠어요?
불완전한 부모의 세계, 낙원으로부터 12층으로 되어 있다고 그래요. 그것을 본연의 위치로 바로잡으려고 하는 것이 지상복귀와 영계복귀인 거예요. 지상복귀와 더불어 영계복귀가 우리의 70, 80의 생애가 걸려 있으므로 장사로 말하면 이 이상 큰 장사는 없습니다. 선생님의 청춘시대는 모두 이것을 하느라 지나가 버렸습니다. 여러분은 행복해요.
선생님은 수수께끼의 인물입니다. 지금까지 사람들이 문화세계를 건설하고 있지만 심정 중심의 문화세계는 창설하지 않았습니다. 물질 중심의 문화세계를 원치 않습니다. 심정문화세계를 원합니다.
한국에서는 생활의 법도가 엄합니다. 선생님 있는 곳에 가고 싶어요? 하나님이 원하는 기준이 여러분이 상상하는 최고의 기준이라면 어떻게 하지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니까 그 최고를 받습니다.
여러분은 아직 모르지만 선생님 사는 곳에 가면 그 장소에서 넘어져 버릴 거예요. 10년간 바라보아도 그 신비는 모릅니다. 그런 이상세계입니다. 루브르 박물관은 세계의 여러 가지 회화 조각을 모으느라 돈을 들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거기가 좋겠지요. 선생님은 그러한 곳에 가지 않습니다. 선생님은 말이에요, 영적 권내로 조금만 들어가면 그 세계가 그리워져 버립니다. 골치 아픈 일이 지상에는 많으니까. 그것을 생각하면, 아아! 돌아가고 싶습니다.
여러분에게 그것을 가르쳐 주면 여러분은 일할 수 없게 됩니다. 그 세계에 들어가면 손을 들고 발을 뻗어 거기에 취해서 천년도 계속됩니다. 세월 가는 줄 모릅니다.
그러나 지상에 책임을 가진 자가 없어지면 그 후는 어떻게 되지요? 오히려 그 세계를 모르는 편이 좋은 거예요.
참된 시의세계(侍義世界)의 사회 기준은 어떠한 것일까요? 그런 문제를 취급하다 보면 무척 재미있다구요. 장래 여러분은 나가서 충효 정신을 보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외국에 나가 먼 나라에 대해서는 충효를 보다 많이 하는 거예요. 부모로서는 행복하게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형제로서는 참으로 하나가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이 근본입니다.
선생님이 여러분의 입장이라면 쉴 수가 없습니다. 하면 할수록 하는 보람이 있습니다.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생님은 아버지와도 어머니와도 생이별했습니다. 형제와도 생이별했습니다. 모두 눈물 흘리면서…. 정말로 선생님에게는 나를 사랑하는 부모가 있었습니다. 그 아들인 거예요. 누구도 맛보지 않았던 심정을 갖고 사랑받는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자매 여섯 명과 형, 그 중에서 부모는 선생님을 가장 사랑해 주었습니다. 형님과 자매들을 희생하더라도 선생님은 남기지 않으면 안 된다고요.
선생님의 졸업 당시는 대동아전쟁 중이었는데 병역문제도 있고 해서 6개월 단축해 9월에 졸업했습니다. 관부연락선(關釜連絡船)으로 돌아가게 되어 몇 시에 도착한다고 전보를 쳐 두었었습니다. 그러나 사정이 있어서 표를 무르고 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마침 그 배가 전쟁 때문에 침몰하게 되었습니다. 고향에서는 승선자 명단을 조사해 보니 이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들 죽었다고 생각하여 대소동이 일어났고 부락 전체가 발칵 뒤집혔습니다.
어머니는 그 소식을 듣자 맨발인 것도 모르고, 치마도 입지 않고 20리나 되는 곳까지 달렸던 것입니다. 도중에 발뒤꿈치에 가시가 박혔었는데 일주일간 그 아픔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돌아오고 나서야 그때 처음으로 아프다는 것을 알았다고 했어요. 그때의 부모의 애정은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 정도로 부모는 선생님을 사랑했어요.
또 선생님의 형은 영적으로 통했었습니다. ‘장래 우리 집의 남자는 세계를 준다 해도 바꿀 수 없다.’ 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런 정도로 알고 있었으니까 선생님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라도 합니다. 그러므로 가인으로서의 백 퍼센트 기준인 거였어요.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믿을 수 없는 행동을 해도 그 형만은 백 퍼센트 믿었습니다.
부모가 선생님을 공부시킨 것은 그 부락에 회사를 세우겠다는 희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지만, 학교를 졸업하고 돌아와 집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무엇 때문인지 감옥으로 끌려 들어가니까, 집에서도 ‘어떻게 되어서 감옥에 들어가 있는 거냐?’고 불평을 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면회 오면 그것을 차 버리고 거절했습니다.그런 비참한 얼굴을 하려거든 앞에 나타나지 말라. 마음이 괴롭다고. 그 자녀가 감옥에 들어가 비참한 자가 되어 있으므로 만나자마자 눈물을 짜는 것입니다. 흘리지 않을 수 없는 거예요. 그렇죠?
그러나 그러한 어머니에게도, 형에게도 원리 얘기는 한 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 그것은 이 원리를 부모보다도 형제보다도 여러분들에게 먼저 알려주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가장 존귀한 생명을 걸고 찾은 이 원리를 아무 것도 모르는 제3자에게 먼저 얘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그런 기준에 서서 구원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만약 자기의 자녀, 자기의 직계, 친척을 먼저 구원하는 것이면 우리들 지상의 인간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거예요. 만약 하늘 뜻에 꼭 맞아 하늘 섭리를 완전히 하면 모두가 그 형(形)을 대신으로 하여 지켜 나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은 하늘 작전이요 원칙입니다.
그러므로 선생님은 그 정도로 사랑하는 어머니에게 손수건 한 장도 사 드리지 못했습니다. 실로 그 모친은 고생하신 거예요. 세상적으로 보면 불효자처럼 보일지 몰라도 선생님은 불효자가 아닙니다! 이상적인 효도의 길을 밟아 가는 데에는 그렇게 가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하늘이 인정하는 효행에 따라 또 그것을 바라서 진력하고 있는 거예요.
문 : 세계노정에 세운 6수와 4수가 지금은 어째서 7년 간격이 되었습니까?
1960년부터 1967년까지가 최후의 7년간입니다. 선생님에게 있어서 21년 노정의 최후 기간입니다. 선생님에게 맡겨진 그 세계적 탕감 기준으로서 선생님은 만민 앞에, 또는 나라, 천주 그 어느 곳에라도 승리의 조건에 대한 기준을 설정해 두지 않으면 안 됩니다.
1967년까지는 선생님이 사명을 다할 수 있는 최후의 단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1967년에 세계가 뒤집혀진다는 것은 아니에요. 승리의 기준을 결정해 두는 기간입니다. 그 기간은 전에도 없고 후에도 없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가는 기간에 여러분이 보조를 맞췄다는 것은 함께 만나 서로 보충해 주고 도울 수 있는 권내에 모두 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상에서의 행복권입니다. 때가 지나가면, 아무리 충성을 다해도 한 개인의 구원은 이룰 수 있지만, 세계를 위하여 아무런 효력도 나타내지 못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충성을 다하면 선생님과 더불어 공로의 기준을 세우고 자기가 구원받을 수 있는 길도 가깝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이 중대한 시기인 것입니다.
선생님은 서양 24, 동양 16, 모두 40개국을 순회했습니다. 그러면 왜 동양을 중심으로 했는가? 16개국이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4수가 문제입니다. 4수는 동양을 중심으로 하고 복귀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6수는 만물 창조수이므로 서양문명이 중심이 되어 세워집니다. 4수와 6수를 찾지 않으면 안 됩니다. 4수와 6수를 합한 10수는 하나님의 수입니다. 4수, 6수, 10수를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선생님이 이번 한국에 돌아가는 것도 256일만인데, 4로 나누면 64입니다. 그래서 일요일이어도 돌아가는 것입니다.
왜 선생님은 세계를 순회했는가? 성지를 알고 있지요? 지금까지 선생님이 승리한 기준을 세계적으로 분배해 주어야 했기 때문에 순회한 것입니다. 한국에 있어서 이룬 사명은 한국을 중심으로 한 승리적 기준이고, 그리고 그것을 세계 전인류에게 나누어 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성지를 결정하면 타락하기 전의 천지가 생긴 기준과 같습니다. 사람을 창조하기 전의 기간에 만물이 생긴 것과 같습니다. 그것이 있으면 영계, 천사는 하나님의 창조에 협력해 아담을 만들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요? 그렇기 때문에 영계가 지상에 역사하는 기대가 성립되고 거기에 아벨격인 아담의 승리권을 가진, 타락하지 않은 심정 기준을 가진 우리들의 하늘 자녀를 보내면, 그를 중심삼고 말씀의 실체 재창조와 심정 기준의 출발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세계적으로 선교사를 빨리 보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선생님이 여행한 기간이 아직까지는 없었던 시기로 되어 있습니다. 통계적으로 보면 다 퍽 커 있어요. 일본의 재계라든가 정계라든가에, 모든 나라에 문제로 되어 있는 거예요. 어떤 ‘원리’인가 하고. 미국에서는 지금 탕감으로서 다른 해보다 연평균 십배 이상의 사건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선생님이 이번에 순회한 곳은 세계적으로 복잡한 곳이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최고의 싸움의 한 가운데에 세워지지 않으면 탕감은 되어지지 않습니다. 조건부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습니다. 일대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탄 편에 하나님의 위신과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면목이 서지 않습니다.
상징, 형상, 실체. 선생님은 실체 싸움에서 승리를 얻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기부터 내려가 형상권, 상징권을 통과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자유자재로 그런 탕감조건을 사방팔방으로 세울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귀노정은 쉽지 않습니다.
문 : 선생님께서 일본에 계신다면 일본 복귀가 빠르다고 생각합니다만.
선생님의 심정을 여러분이 갖고 있다면, 하나님은 선생님 이상으로 여러분을 협조하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계복귀는 되지 않습니다. 선생님만 한다면 선생님의 육신은 하나밖에 없는데 세계복귀를 어떻게 하겠습니까? 심정권의 세계는 무한을 통하여서까지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본에 있어도 여러분의 심정 기준을 지도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간절히 기도하면 알 수 있어요. 한국의 일도 정확하게 알 수 있어요. 공간을 초월해서 알아요, 어디까지 되어 있는가를. 삼위기대를 만들어 매일 기도하면 선생님을 끌어올 수 있어요. 정말 그래요. 선생님은 민족을 초월해 있습니다. 어디에 가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디에 가더라도 하루나 이틀 지나면 이전의 환경적인 감정을 잊게 됩니다. 말은 통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일본에만 있으면 어떻게 하죠? 하나님이 일본 나라 가운데 들어오시는 것이 아니고 일본이 하나님 나라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세계를 봐요. 일본을 차 버린다고 하는 것은 아니에요.
여러분은 시집갈 때 ‘갖출 것은 일본에서 준비하지 않으면 싫다.’고 하면 그것으로 좋아요. 그렇지만 심정만은 천적 심정이어야 되고 일본적 심정이 어서는 안 돼요. 그러므로 선생님은 한국에서 기도할 때는 세계에 대하여 기도합니다. 자식에 대해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하루 세 번 이상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틀림없이 하도록 해요. 생활 태도는 일본적이어도 좋습니다. 그러나 심정권에 있어서는 일본적 심정만으로는 좋지 않습니다. 천적 심정 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어디에 가더라도 형제입니다.
문 : 현재로서는 통합의 방향으로 향하고 있지만, 그 반면 혼란 상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 혼란은 오랫동안 계속될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의 목적에 빨리 접하면 빨리 해결됩니다. 그러므로 한국에 있어서도 선생님의 말을 이승만 대통령이 들었으면 저렇게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절대로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공산당은 없어져 버립니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선생님은 전후(戰後), 하늘의 목적을 완수하기 위하여 한국에서 출발했습니다. 전쟁이 끝남과 동시에 출발하는 것이 선생님의 사명이었습니다. 사실은 최고의 자리에서 출발하는 것이 하나님에게 허락받은 위치였으나 두 명의 목사 때문에 모두 막혀 버렸던 거예요. 최고의 목사에게서 끊겨 버림으로 최하위의 길로부터 복귀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고생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성장해서 우리를 국가적인 문제로 다루지 않으면 안 될 단계에 들어와 있습니다. 이제 국민과 당(黨) 자체가 우리의 이념과 움직임을 모범으로 하고 우리의 지도를 받지 않으면 금후 그들의 움직임이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문 : 양국간에 한일(韓日) 문제를 논의할 때에 학생운동이 일어났습니다만.
한일(韓日) 문제가 늦어졌습니다. 사실 요시다내각(吉田內閣) 당시에 일어나야 할 문제였습니다. 지금은 이것이 공산당의 선전 재료로 되고 있습니다. 한국 경제가 부흥되면 무리해서 북한에 대한 그 활동의 발을 잡아매는 것 같은 입장이 되지 않아도 됩니다. 일본의 원조로 한일 문제가 해결되고 한국 경제가 대단히 좋아졌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한일 문제가 연장되어 온 것을 잘된 것처럼 생각하고 있지만, 하나님 편에서 보면 대단한 손해인 것입니다. 그것으로 국가적 운명이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교회 내의 여러 가지의 자자분한 일과 경제복귀의 문제라든가를 여러분이 책임지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본래의 하나님이 명령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의 참자녀라는 이름을 가진 자의 손에 그것들은 쥐어지고 싶은 것입니다. 하늘 편으로 돌려 가지고 다시 거기서부터 분배받아 얻지 않으면 영원히 자기의 것은 되지 않습니다. 강도란 무엇인가? 자기의 것이 아닌데 자기 것처럼 쓰려고 하는 것이 강도입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것을 자기의 것으로 한 우주적인 강도입니다.
여러분은 천국에 입적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 위해 제단 위에 자신과 더불어 만물을 바쳤습니다. 만물을 잃었기 때문에 그것을 복귀의 조건으로 하고, 사람을 잃었기 때문에 아벨의 위치에 서서, 만물을 아벨 입장에 세우고 가인에게 조건을 세우게 하여 하나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비로소 하나님은 받아들이십니다.
재산이 있으면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것입니다. 자녀가 있으면 자녀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제사장이 되어 하나님께 바치는 제단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면 복귀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구약시대에는 만물을 제물로, 신약시대에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고 자녀로서의 제물, 지금의 성약시대에는 부모로서의 제물을 드립니다. 여러분이 올바른 물적 기준, 자기의 재산, 자기의 자녀를 예수님의 위치에 세워 자기 입장에서 십자가의 제물로 바치는 것이야말로 역사적 제물이라고 하는 조건이 됩니다. 이렇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이상 선생님은 가르치지 않습니다. 모두 다 말은 잘하지만….
일본은 미국의 한 주 정도의 크기밖에 안됩니다. 그렇게 미국은 큽니다. 거기에 있어서 제물은 우리 자녀가 가서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정말로 세계적 통일이념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운세가 되면 입적 문제가 있습니다. 입적하는 데는 처녀가 자기의 재산 모두를 신랑집에 바치는 것처럼 여러분도 그렇게 해야만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입적할 수 없습니다. 여자는 시집가면, 그 집에 들어가 부인이 되는 것이니까요. 미국에 많이 입적시켜 줄까요? (폭소) 그들은 재산을 많이 갖고 있으므로 입적하면 빨리 복귀됩니다. (웃음) 그것은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선생님의 머리는 지금 해결해야 할 문제로 꽉찼는데, 이것을 언제쯤 텅 비게 할까요? 천지가 서로 도우며 기뻐할 수 있는 그런 때까지는…. 그러니까 여러분은 선생님이 잘한다고 하면 이 길을 뒤로 하고 갈 수가 없습니다. 옛날 베드로처럼, 예수의 세 제자처럼. 그들은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이 심각한 기도를 하실 때 함께 기도하는 사람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몰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심각했습니다.
문 : 깊은 기도가 될 때와 그렇게 안 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상달되는 것 같은 마음이 들 때와 무엇인가 막혀 있는 듯한 것 같은 때가 있습니다만….
선생님은 어디에 가든지 먹는 것과 잠잘 것과 입는 것은 걱정하지 않습니다. 만약 선생님이 굶는 입장이 되면 하나님은 어떻게 해서라도 먹을 것을 갖다 주십니다. 외롭다고 하면 영계에서 전도해 선생님을 따르게 해 주십니다. 그런 일이 있어요.
30억 인류 가운데의 한 사람인데도, 그 많은 사람을 제쳐놓고 왜 선생님에 대해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이것이 수수께끼입니다. 심각한 것이에요. 선생님이 고민하고 있다고 하면 입체적인 하나님은 국가를 초월해 원조하게끔 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도 선생님에게 직접 인도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저 사람이 우리를 인도해 주신 분인데 지상에 계실까?’라고 영인들은 말합니다. 바로 가르쳐 줍니다. 선생님의 명령을 받고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영계는 통일되어 있습니다. 황색인도, 백인도, 흑인도 심정세계에 있어서는 같습니다. 기도할 수 없을 때에는 신앙이 독실한 사람들을 방문합니다. 그리고 얘기를 하는 거예요.
문 : 현재 죽어 영계에 간 사람들은 모두 원리를 알까요?
통일교회 신도였던 사람들은 영계에서 모두 원리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모두 강의를 듣기 위해 영인들이 수없이 밀려옵니다. 사람이 부족합니다.
문 : 저는 지금까지 영계를 믿지 않았는데요.
그렇다면 사람의 반의 가치밖에 안 됩니다. 30억 인류 가운데 영계를 모르는 사람은 8할이에요. 믿는 사람들도 영계가 있을까, 하나님이 계실까, 확실히 모릅니다. ‘목사님이 그렇게 말하니까.’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있습니다. 영계를 체험하면 뛰고 맙니다. 생각해 봐요. 세상의 부자가 이제부터 행복의 동산을 만들려고 합니다. 자신의 모든 돈을 들여서라도 만들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천지창조를 하신 하나님은 자신이 사실 곳을 어떻게 지으셨겠는가? 장래 선생님이 가서 살 곳을 본다면 아마 쓰러질 것입니다. 어느 부분을 찾아 응시해도, 천년 바라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 아름다운 세계입니다.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무엇인가 세계에서 제일이라고 해도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 영계의 한 모서리도 안 됩니다. 그래요. 그러므로 이 지상이 갖고 싶은 게 아닙니다. 선생님에게 말하라고 한다면 이 지상이 선생님의 목적에 맞지 않아서 돌아가고 싶습니다.
잘 기도해 보세요. 여기에 들어오면 빨리 통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한국에서는 통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선생님이 무엇인가 새로운 일을 하려고 하면 전국에서 모두 기도하니까. 일본의 여러분도 기도하는 사람이 직접 명령을 수행하고 끊임없이 그 움직임을 감득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즉 책임자는 아담의 입장에 있고 기도하는 사람은 천사장의 입장으로 서로 협력하여 하나님에게 봉사하는 복귀의 과정인 것입니다.
문 : 지금은 전도사뿐이어서 일방적이지만, 경제라든가 정치라든가, 그러한 것은?
지금 왜 우리는 전도사로서 하느냐고 하면, 일본 전토에 이것을 알리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열을 백으로 선전하지만 하나님은 백의 실적을 세워서 열의 기준을 선전합니다. 통일교회가 좋다고 하는 소문을 나게 해서 통일교회 내부에 접하게 할 때까지는 일년 반이 걸려요. 알고 들어와서부터 행동할 수 있는 기대를 만드는 데는 환경 기준을 조성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어느 빌딩을 세우기 위해서는 땅을 고르게 해야 합니다. 지반을 만들고 빌딩을 세우고 나서는 각 부서가 정해집니다. 그렇게 되면 정치적 경제적 교육적 문제 등 그런 것에 파고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지금 여러분 전도사들이 그런 기반을 쌓아가는 것입니다.
문 : 통일성도는 원리를 무장하고 비원리세계의 현재 상태를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되겠군요. 그러므로 공부를 해야 되겠군요?
아 하지 않으면 안 돼요. 그러니까 공부를 하더라도 선두에 서라는 것입니다. 열 중에서 하나라도 선두에 서세요. 그렇게 생활하면 그 입장에 따라 중심인물이 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누구보다도 고생을 많이 해야 합니다.
한국에서의 고생한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복귀는 어디부터 시작될까요? 복귀는 거지의 기준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사탄세계에 환영되지 못하고 사탄 세계의 그 어느 것도 갖고 있지 않은 무(無)에서부터 복귀합니다. 먹을 것이 없으면 자신이 노동하고 또 거지와 같은 일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시켰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여성들에게 깡통을 들려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들의 심정을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도 하나의 구원을 세우기 위해서 그런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우리도 생사를 초월하여 사람을 구원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이상 선한 일은 없습니다. 그런 심정으로 인해서 어차피 그 중심인물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중심인물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누구보다도 고생을 많이 해야 합니다. 이것이 결론입니다.
저녁이 되면 입을 옷이 없습니다. 배는 고파 밥이 먹고 싶습니다. 쓸쓸합니다. 선생님이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추워서 떨리고 황혼이 되면 희미해져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계속 걷다 보면 갈피를 못 잡게 됩니다. 아아! 그리워라.
통일교회는 공산당보다 무섭다고 합니다. 모두가 가지 않으면 안 되지만 자신도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니까 무섭다고 하는 거예요. 그런 사람은 오지 않아도 좋습니다. 언젠가는 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 움직임을 보시고 눈물을 흘리실 수 있는, 그러한 단체에서 일을 하는 자는 망하지 않습니다. 그는 영원히 발전합니다. 여러분의 심정은 어디로 끌려가는가? 점령당하는가? 눈물로 감사할 수 있는 어린이의 모습에 끌리게 됩니다.
문 : 선생님! 탕감조건이라든가 신앙 기간에 숫자가 있는데요.
창조원리 복귀수인 것입니다. 공산주의자가 말하는데, 대우주에는 힘이 있어서 모든 것이 발전한다고 해요. 환경세계를 인정하고 나서 논리의 출발을 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의 존재가 있기 위해서는 존재하기 위한 환경을 갖지 않으면 안 됩니다. 물, 흙, 공기가 없으면 안 됩니다. 이것은 환경의 절대 요건입니다.
그들의 논법에 따르면, 진화시키는 환경은 어디부터인가? 있을 리 없습니다. 그것으로는 모순입니다. ‘진화할 수 있는 환경의 기준은 어디로부터?’ ‘자연히.’ ‘자연히라면 어떤 방법으로?’ ‘힘에 의해.’ ‘힘은 어디에서 생기는가?’ 힘이라 하는 것은 혼자서는 생기지 않습니다. 힘이 있기 전에 상대기준이 있습니다. 과학적 현상에 있어서도 목적에 연결되는 상대 기준이 아니면 작용할 수 없습니다. 운동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힘이 있기 전에 무엇이 필요한가? 힘이 있기 위해서는 상대 기준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상대 기준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주체와 객체의 관념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주체와 객체, 플러스와 마이너스가 수수(授受)하기 위해서는 공동목적의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작용이나 힘의 현상은 힘의 공동목적권에 있어서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공산당이 말하는 변증법은 깨어지고 맙니다.
정이라는 것과 반대되는 것이 있어서 그들이 투쟁하여 합체(合體) 되어 간다고 합니다. 정이라는 것과 반대되는 것, 그것들은 두 개의 다른 관념으로서 전연 다른 것입니다. 다른 목적권입니다. 서로 다른 목적권이 일치될 수 있는가? 정이라는 것과 반대되는 것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반대되는 것이 있고 거기에 정이 생기기 위한 투쟁과정에 있다고 하는 거예요. 상대작용은 공동목적권 내에 한해서 작용합니다. 절대로 마이너스, 손해되는 곳에는 작용하지 않습니다. 공동목적을 완수하는 권내에 있어서 서로 끌어당기며 작용하는 것이고, 이것을 가지고 본다면 공산주의의 변증법은 근본적으로 잘못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목적권의 세계를 부정할 수 없습니다. 목적을 인정한다고 하는 것은 방향성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방향이 일치할 수 있는 기준에 있어서 작용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에요. 방향성을 인정하는 것에 따라 3단계가 생겨납니다. 이성성상은 왜 이성성상이 아니면 안 되는가? 작용, 운동하는 기준에 섰을 때 이성(二性)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창조원리는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성성상, 수수작용, 방향성(目的), 가치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마음이 주체이며 몸이 객체입니다. 그것이 투쟁하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의 목적 관념 밑에서 작용하는 거예요. 그러므로 우리가 평안하려면 하나님이 바라시는 대로 몸이 움직여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목적 기준이 일치하여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사랑한다고 하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공동목적이 있기 때문에 사랑합니다. 목적의 실체로서 자녀를 낳습니다. 그러므로 힘이 있기 전에 상대 기준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문 : 요한계시록에 기록되어 있는 것과 같은 일들이 정말로 일어날까요?
사실은 현재 일어나고 있는데 모르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을 인간에게 비유하여 설명하면 전부 설명할 수 있습니다. 성서가 있는 것은 인간이 완전해지기 위한 것이며, 역사가 있는 것은 인간이 완전해지기 위함입니다. 섭리가 있는 것은 세계를 개선하기 위함이며 인간을 완성시키기 위함입니다. 모든 성전(聖典)이 인간의 완성 기준을 잘 가르치지 못하면 그것들은 참된 가르침은 아닙니다.
통일교회에 있어서 탕감조건을 어떻게 세울 것인가? 예를 들면 큰 원의 중심점에서 어떤 선을 그릴 때, 이 선의 길이와 반원의 길이는 아무리 작은 원이라도 비례합니다. 그런 기준이 있으므로 탕감조건을 세울 수 있는 것입니다.
문 : 오랜 시간이 걸리겠군요?
선생님이 문제로 하는 것은 하나의 나라입니다. 좁은 지역이나 적은 국민을 시켜 하나님이 복귀의 조건을 세우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처럼. 그러나 그 나라가 복귀되면 세계를 위한 커다란 활동 기반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문 : 미국은 자녀의 입장에서 효도하고 있는 것이군요?
미국은 천사의 입장에 서고 아벨의 입장에도 선 것입니다. 독일은 가인의 입장에 선 것입니다. 신부는 신랑을 맞이하면 축복받게 되는 것입니다. 독일을 쭉 보아 왔는데, 국민성이 복귀노정을 걷는데 가장 적절합니다. 히틀러시대에는 잘못되어 따랐으나 전체적인 행동을 할 수 있는 국민성을 갖고 있습니다.
교양강좌? 옛말로 하자면 수신(修身)의 시간이군요. 선생님이 무슨 얘기를 할까요?
문 : 천주의 크기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문 : 선생님은 어떻게 해서 창조원리를 찾으셨는지요?
그런 것은 묻는 게 아닙니다. 그런 질문을 받으면 약간 약해지는데. 그것보다 먼저 어떻게 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했는가 하는 거지요. 하나님이 계시고부터 창조원리가 시작된 것이므로. 하나님은 존재하실까? 안 하실까? 이런 것을 생각하면 진지해집니다. 하나님이 계신가 하고 생각하던 옛날의 기억을 더듬어 보면 진지해집니다.
하나님을 생각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 자신을 생각해야 합니다. 자신은 어디에서 왔는가? 어머니로부터 왔습니다. 그럼 어머니는 어디에서 왔는가? 어머니의 어머니로부터….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갈까? 인간의 시초는 어떻게 되어 있을까? 정말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걸까? 수많은 인종이 살고 있는데 나는 어느 계통일까? 사람들과는 어떤 관계로 되어 있는 것일까? 이런 것은 모두 체험하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입니다.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 그렇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맺는 데는 어떤 관계 아래서 맺는가? 역사적 관계일까, 시대적 관계일까, 미래의 관계일까, 무슨 관계일 것인가?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 그 관계는 무엇을 중심으로 하며 무엇을 키 포인트로 하고 있을까? 그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알면 자신의 위치와 가치를 알게 됩니다. 또한 관계를 정확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면 하나님 자체는 뭘까? 하나님의 희망은 뭘까? 하나님의 소원은 무엇일까? 우리 생활처럼 하나님에게도 사정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정은 무엇일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세계의 심정은 무엇을 중심한 것일까? 하나님의 목적은 무엇일까? 이 모든 것들이 문제됩니다. 이 희망이나 심정 등의 문제를 모두 총합해 결론을 내리면 인간이라는 것이 됩니다.
그럼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무엇으로 인하여 연결되는 것일까? 그것은 심정 기준을 통과해 가지 않으면 모릅니다. 깊숙한 곳에 들어가 기도해 보십시오. 기도하며 물어 보세요. 우주의 근본은 무엇인가? 부자(父子)입니다. 부모와 자식. 최초의 기준으로 인간과 하나님이 부자관계라 합니다. 천적 심정, 천적 혈통을 중심삼은 부자관계가 우주의 근본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을 낳아 준 부모가 진짜 부모인가? 어떠한 논법으로도 부정할 수 없는 그 심정권에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 문제는 심정이 아니면 모릅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고 외치면 우주의 모든 것이 거기에 모입니다. ‘아버지’ ‘아버님’ 이 말은 전체에 대한 하나의 정의입니다. 모든 것의 표상의 중심어로서 느껴져 옵니다. 그런 입장에까지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은 자신의 마음에 어떠한 생각이 솟아나도 하나님이 자신의 부모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도 자신에 대해 ‘그렇다.’ 라고 하십니다. 거기에 이르러 의심할 수 없는 부자관계를 맺어갑니다.
그러므로 우주의 근본은 부자입니다. 만물은 자녀를 위한 정원입니다. 하나님을 확실히 알면 창조원리가 자연히 나오게 됩니다. ‘나의 마음과 몸은 이러한 관계로 되어 있다. 하나님을 중심한 상대기준을 조성하여 사위기대를 유지할 수 있다. 그것을 영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하여 수수작용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을 확실히 알면 창조원리를 자연히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이 원리를 배우고 있는데, 여러분이 말로만 듣는 그 원리는 선생님이 수많은 발자취를 더듬어 가며 싸워 온, 그 싸움 뒤에 얻어졌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담가정으로 말하자면 선생님을 중심으로 해와가 타락한 그 이상의 단계에 들어가지 않으면 해와가 잘못한 것을 바로 고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담의 타락으로 인한 하나님의 슬픔을 위로해 드리지 않으면 하나님은 참기쁨의 기준을 우리에게 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심정으로 탕감 기준을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역사상의 심정권에 있어서 하나님의 깊은 내심권(內心圈)에까지 들어가 하나님을 위로해 드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상대해 주실 수 있는 기준을 만들어 두어야 합니다. 선생님은 그 길의 개척자요, 선각자입니다. 지금까지 선생님 혼자서 그 일을 해 왔습니다. 그것은 멋진 것입니다. 수천년의 역사를 짊어지고, 잘못 맺어진 것을 모두 풀고 하나의 길을 만들어 놓았다고 하는 것은 세계적인 공헌입니다. 인류역사에 있어서 최고의 성공을 한 셈입니다. 영계로부터 승리의 기준을 세워 지상과 연결시킨 것입니다.
문 : 선생님은 언제부터 하나님을 생각하셨습니까?
어렸을 때부터입니다. 선생님은 어린시절부터 달랐습니다. 신비하고 소박한 곳 무엇인가에 끌려 사람보다도 자연 속으로 들어가 아침부터 밤까지 하루를 쭉 지내곤 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을 듣고 그들과 얘기해 보면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의 환경은 좋지 않다고 느껴져 왔습니다. 저렇게 이야기 하는 사람은 마음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해 말을 들어 보면, 그의 심정이 반향되어 옵니다. 그 깊이에 따라 그 사람이 선한 입장에 서서 말하고 있는지 악한 입장에서 말하는지를 느낍니다. 어릴 때에도 어린이와 친구가 되는 것이 싫었습니다. 왠지 마음이 쏠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늘에 대해 지성을 다 하는 그런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 옆에라도 앉아 있거나, 그의 행동을 보고 있노라면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렇게 되었습니다.
산 같은 곳에 가더라도 좋은 곳이 있고 나쁜 곳이 있습니다. 그것을 알게 됩니다. ‘이리로 가면 가장자리일 것이다.’ 하고 가면 틀림없이 가장자리가 됩니다. ‘아아! 내일은 비가 오겠구나!’ 하고 느끼면 정말 비가 옵니다. 다른 사람과 촉각 등의 감각작용이 좀 다릅니다. 가족 중에 병이 나려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징후를 느낍니다. 인간은 그런 재미있는 기관을 갖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필요 없는 것을 생각하여 그것을 머리에 가득 넣고 살아가니까 그런 기능이 모두 막혀 버렸습니다. 끊임없이 수양해 가면 예민해집니다. 머리가 맑아집니다. 어떤 때에는 먼 곳에서 손님이 오는 것도 영파로 느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상당한 기도를 했습니다. 수고 없이 얻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여러분은 ‘통일교회에 들어와서 몇년이 지났으니까 나는 버젓한 통일교회 청년이다.’ 고 생각하는가요? 선생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나는 통일교회의 절대적 권한을 가진 선생님이다.’ 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멀리 멀리 떨어져 있는, 잃어버린 친구를 찾아온 기분입니다. 그러므로 가만히 앉아 있더라도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면 그 사람을 끌어안고 친근한 기분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이야기할 것은 많이 있습니다. 하나에서 열까지, 하루종일, 밤새도록 얘기해도 싫증나지 않을 것입니다. 참으로 재미있습니다. 자신이 실지로 한 경험담을 선생님은 잘 들어 줍니다. 나이 든 할머니와 이마를 맞대고 밤새도록 이야기해도 선생님 생애의 사명이 그것뿐인 것처럼 듣곤 해요. 그럴 때는 ‘아아! 그랬었느냐?’고 하나님도 그러십니다. 그런 사람을 좋아합니다. 여러분, 부모가 그렇지요? 아들이 자라서 점점 멀어져 가도, 아무리 성장해도 부모는 그 아들과 심정이 일치되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그리움이라는 것입니다. 멀어져 갈 때 쓸쓸하게 생각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하늘 아버지의 마음도 그렇습니다. ‘그대들 어디서 일하고 왔어? 전도 나가서 좋은 일 있었나?’ ‘예. 오늘 이런 일이 있었고 이런 일을 하고 왔습니다. 이러이러해서 이렇게…. 쓸쓸합니다. 저는 외롭습니다. 하나님, 외롭습니다.’ 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면 하나님은 위로해 주십니다. 여러분! 그런 기도를 하나요? ‘아버님 적적하셨지요?’라고 하는 그런 기도는 실로 대면해 이야기하는 기분입니다. 왠지 먼 것 같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선생님은 때때로 어린이처럼 기도합니다. 뒹굴면서 노래도 하고 어느 때는 춤도 추면서 ‘아버님! 이렇게 하는 것 나쁘지 않아요?’ 하면서 말입니다. 기도는 노래로 하는 것이 가장 감동적입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곡을 선택해 거기에 가사를 붙여 기도합니다. 그렇게 하면 자신의 목소리에 자신이 감동합니다. 자기가 노래 부르고 있다는 것을 잊고 남의 노래를 듣는 것과 같은 경지에 들어갑니다.
경험도 하나님의 심정을 중심삼은 곳에 최고의 경험이 있습니다. 자식이 아버지의 무릎 위에서 춤을 춥니다. 이것은 아이가 부모로부터 최고의 경험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얘기할 수 없는 아이에게 있어서 그런 것은 최고의 경험이 아니겠는가?
선생님은 성격상 한번 하겠다고 하면 절대로 그만두지 않습니다. 나는 한다고 하면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되고 모든 것이 안 되더라도 최후까지 밀고 나갑니다. 착수만 하면 그것과 하나가 되어 버립니다.
선생님의 설명만 가지고는 선생님이 가는 길을 알 수 없습니다. ‘글쎄 그런 일이 정말일까?’ 하며 그것이 믿어지지 않거든 목숨을 걸고 기도해 보세요. ‘아버지 저 죽습니다.’ 하면 처음에는 ‘죽어라, 죽어.’ 합니다. 정말로, 진심으로 죽고 싶다고 기도하면 선생님이 어떤 일을 해 왔는가를 보여 줍니다.
선생님은 그런 식으로 이 길을 개척해 나왔습니다. 영적 세계의 수많은 자들이 동원되어 선생님을 반대해 왔습니다. 최후의 승리는 씨름처럼 일대일로 싸워 힘으로 쟁취해야 합니다. 실력을 가지고 승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보조를 받아 이겼을 경우 사탄이 참소합니다. 그러니 싸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선생님은 거기에서 승리를 결정했으므로 수많은 영통인들은 선생님을 증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무슨 기준으로 증명할까요? 동기가 기준이 됩니다.
문 : 혹시 괜찮으시다면 선생님의 성장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상세하게 설명하면 여러분의 탕감조건이 커집니다. 성서에 보면 예수님에 대해 조금밖에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탕감조건이 커지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의 생애도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듣고 싶은가요? 그럼 전세계의 탕감의 책임을 지겠어요? 자신도 없으면서 그렇게 방대한 것을 질문하니, 원.
선생님은 많은 고생을 했어요. 인간의 체력으로 견딜 수 없는 고생을 어떤 사람에게도 지지 않을 만큼 했습니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어느 누구에게 지지 않을 만큼 고생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선생님과 사귀어 보아도 선생님을 알 수 없습니다. 어느 때는 무섭고 어느 때는 하루 종일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선생님에 대해서 연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어디에 가나 알 수 없습니다. 선생님은 항상 하고 싶은 대로 합니다. 그렇다고 환경에 반(反)하는 것은 하지 않습니다. 자연히 끓어오르는 것같이 하는 것입니다.
문 : 복귀원리와 일본 역사, 그리고 직접 원리에 나오지 않은 서양 역사를 어떻게 연결시키면 좋겠습니까?
그것은 입장이 다릅니다. 각 나라의 역사는 탕감원리의 일부를 담당하여 발전해 갑니다. 그러나 전부 하나의 목적권을 보충하는 역사적 사명을 각 민족의 역사가 완수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나라의 역사는 모든 나라의 역사를 배경으로 갖고 있습니다. 사탄세계에서도 원리형의 과정을 밟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반대 방향으로 돌려가면 원리로 됩니다. 그러므로 방향 전환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탄의 역사관을 만들고 있으면서 그 배경에는 일부 섭리의 인연도 남아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 배경으로 세계적 운세와 연결할 수가 있습니다. 전체적인 섭리가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현세의 위치가 하나님과 관계를 가질 수 없습니다.
문 : 그 연결의 관계에서 이스라엘 역사, 기독교 역사, 일본 역사 사이에도 어느 정도의 관계가 있습니까?
직계와 방계의 입장에 있어서 모두 관계가 있습니다. 세계적 유행은 왜 일어나느냐 하면, 방계의 입장에 있는 사람이 직계의 입장에 있는 사람과 연결되기 위하여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금후의 세계역사는 인류가 왕래하면 할수록 좋은 것을 중심삼고 통합됩니다. 나쁜 것은 도태되고 좋은 것은 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의 선하고 좋은 세계관이 자연적으로 남아 모든 것이 거기에 통합되어 궤도에 오르게 됩니다. 좋은 일은 남게 됩니다.
문 : 그러면 일본 민족이 거쳐온 복귀노정, 예를 들면 제2차 대전 때의 국가적 위치와 관계도 민족적인 복귀원리로 해명되고, 또 어째서 일본이 그와 같은 입장이 되었는가 하는 의문의 해결점이 있겠군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6천년 역사를 섭리해 왔지만, 어떤 나라는 3백년의 섭리, 혹은 5백년의 섭리로 그 기간이 전부 다릅니다. 시대적으로 목적 기준을 향하여 발전해 가는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민족의 탕감조건에 따라서도 연한(年限)이 좌우됩니다. 또 그 민족이 하늘이 전체적 섭리를 진행하는 그 위에서 어떤 탕감조건을 남겨 왔는가에 따라서 좌우됩니다.
그러므로 어느 나라에는 국가적 중심인물이라든가 영웅이 나타납니다. 각 나라마다 그 기간이 있습니다. 그런 영웅이 나타난다는 것은 그 국가를 어떤 방향으로 통합시키고 절대적인 진보를 시키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보조를 맞추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일본에 국가적 영웅도 나타나고 동양적 영웅도 나오는 것입니다. 복귀의 목적을 완성하기 위하여 지금 여러분도 자신이 모르는 가운데에 탕감의 사명을 완수하고 있습니다. 여러 민족이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을 시키고 있습니다.
문 : 선생님! 동양의 석가는 하나님을 알고 있습니까?
이제 알고 있어요. 그동안에는 확실히 알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이라고 하면 마음속에서 ‘뭐야?’ 합니다. 들어보면 자기 마음속에서 양심과 자신이 말하고 있습니다. ‘자네 이렇게 해서는 안 돼.’ 라고 하는 것도 자기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느낍니다. 석가도 그런 경지에 들어갔습니다. ‘천상천하유아독존.’ 이라 한 것은 거기에 있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말한 것이 자기가 말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영인체 속에 하나님이 들어온 것도 모르고 그렇게 의식이 작용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영적 경험을 한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양심이 계속 설교하는 것입니다. 현대 여성에게 많이 나타나는 노이로제 현상 같은 것도 모두 영적 현상입니다.
지금부터 한 시간 전에 그런 현상이 일어났지만 지금 이 시간에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자신의 관할권 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쪽의 요구에 의해 나타나는 것이므로 그것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문 : 하늘 아버지가 사랑의 아버지라는 말을 흔히 듣습니다만 그것을 깊이 말씀해 주십시오.
여러분은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늘 아버지와 선생님이 어느 때는 서로 부둥켜안고 표현할 수 없었던 그 심정권을 선생님은 잘 알고 있습니다. 설명하려 해도 설명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가까워지면 그 사람의 힘은 무한한 것입니다. 순간적으로 무한하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에 표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어느 정도 선생님을 사랑하시는가? 이것은 하나님과 선생님밖에 모릅니다. 그 경지에 들어가면 취해 버립니다. 이때 취하는 것은 술 먹고 취하는 것과 다릅니다.
사모하고 그리워하는 것이 마치 처녀가 사랑할 때와 같은 마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생각하면 언제나 사춘기 때의 기분입니다. 희망에 불타는 그런 기분입니다. 그러한 기분이 없으면 마음이 늙어 버립니다. 선생님은 기도하지 않아도 됩니다. 전차를 타고 있어도 하나님이 함께하고 계심을 압니다.
어느 곳을 쭉 통과해 보면 그 감도의 차이에서 그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를 압니다. 나라도 돌아보면 그 나라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압니다. 인간은 실로 미묘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모를 것입니다. 세계를 쭉 돌아보아 그런 것을 알고 있으므로 여러 가지로 계획하는 것입니다.
문 : 약육강식이라는 현상과 사랑의 관념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어린이의 입장에서 하나님과 사랑의 관념을 확실히 아는 단계에 이르기까지는 상당한 거리가 있습니다. 그 거리를 메우는 데에는 시간이 요구됩니다. 이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서는 벌레를 천 마리 잡아죽여서 단축한다고 하더라도 죄가 안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길을 단축할 목적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희생해서라도 합니다. 모든 것을 희생해서라도 그 목적을 빨리 이룰 수 있고 또 그러한 기준을 세울 수 있다면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하십니다. 그것은 희생이 아닙니다.
문 : 모든 동물의 살해 행위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마음이 허락하지 않으면 안 해도 됩니다. 다만 어떠한 존재물도 이중목적을 갖고 있습니다. 식물도 그 자체의 목적을 갖는 동시에 전우주적인 목적을 갖고 있습니다. 식물이라는 개체로서는 동물에게 먹히지 않고 열매를 맺는 평범한 단계를 밟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2의 목적완수를 위해서는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들의 목적도 이중목적이지요? 자기 혼자 기뻐하는 것만으로는 나라의 목적을 이룰 수 없습니다. 나라의 목적과 일치해 그것을 완성시키면 개인의 목적은 자연히 완성한 단계에 들어갑니다.
문 : 동물과 동물 사이에 있어서는요?
동물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원칙은 똑같이 만들어졌습니다. 맹수의 어금니(齒)를 보면 어떻게 해서라도 동물을 잡아먹을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먹지 않고 어떻게 해요? 그 입으로 풀을 먹겠습니까? 큰 것을 위하여 작은 것이 희생되게 만들어져 있는 것입니다.
문 : 그러면 상극관계라 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하는 것과 서로 통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져 있을 뿐입니다. 만약 그렇게 말한다면 사람이 쌀을 먹는 것도 죄입니다. 그러니 입을 봉해 버려야 합니다. 풀은 모든 생물 중에서 한 단계 낮은 생물입니다. 동물은 움직이는데 식물은 못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식물도 자르면 물이 나옵니다. 눈물처럼. 한 단계 낮은 식물 가운데 벼가 있는데, 그것도 생명령을 갖고 있습니다.
문 : 그럼 높은 것은 낮은 것을 잡아먹어도 괜찮은 것인가요?
높은 것은 낮은 것을 토대로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토대로 하기 위해서는 자기에게로 끌어들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또 낮은 것은 높은 것 속에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은 희생이 아니고 건설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청년들을 훈련시키기 위해서 산에 데리고 갑니다. 노루 등을 잡습니다. 정말로 귀엽지요. 선생님은 그런 것을 보면 끌어안고 얘기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러나 청년들을 훈련시키기 위해서, 즉 노루 한 마리를 희생시켜 청년들이 그것에 의해 절대적인 용기를 얻고 천지 심정을 체득하도록 훈련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문 : 창조된 것은 영원성과 유일성과 보편성을 갖는다고 하는데 형태가 있는 것은 반드시 붕괴되지 않습니까? 그것과 유일성, 영원성과의 관계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그것은 원소에 따라 다릅니다. 원소를 중심으로 해서 보는 경우는 유일하고, 보편적입니다. 그것은 원소에 의해 결정됩니다. 지구에는 어떠한 원소가 주 원소로 되어 있는가 그것에 따라 그 성질이 달라진 것입니다.
문 : 형태가 있는 것의 영원성과 그 기준은요?
그 본성이 문제입니다. 나무라면 나무, 포플러라면 포플러를 중심으로 영원성을 갖고 있습니다.
문 : 현상세계의 것이 무형의 것으로 변합니까?
원소는 개체로 되어 있습니다. 원소 자체가 하나님의 무형성상(無形性相)의 기준으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역행성(逆行性)은 가지고 있지만 거기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긴 거리를 초월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가 볼 때에는 가까운 것처럼 보이지만 긴 거리를 갖고 연결되어 있습니다.
문 : 현상세계에는 무형과 유형이 있습니다만, 유형의 것이 다시 무형의 것으로 변화할 수가 있습니까?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원소가 없어져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논리가 됩니다. 그렇게 되면 우주가 모두 없어져 버린다는 결론이 됩니다. 원소는 원소로서 영원한 존재로 남아집니다. 하나의 원소가 그 자체로서 원소력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고 무형이신 하나님의 힘이 중심이 되어 한 개의 원소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우리는 모르지만 제한된 힘이 들어 있습니다. 모든 원소가 시간성을 갖고 만들어져서 힘을 가하면 방향성이 틀리게 됩니다. 힘의 방향과 양의 차이에서 그 원소의 형태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문 : 전도하러 가서 질문받게 되는 것인데요. 우주에는 태양계와 같은 것이 많이 있는데 거기에는 인간과 같은 고등생물이 살고 있는 것이 아닌지요?
아아! 없어요. 그것은 멀지 않아 증명됩니다. 화성에는 뭔가 있지 않을까요? 하지만 없습니다. 이 지구는 미묘하게 되어 있어 기압이 있습니다. 이 기압권 내에 있어야만 생물은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구의 신비입니다. 이 기압이 강하거나 약하면 생물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문 : 인간이 우주에서 최고의 존재라고 하는 근거는 어디서 증명하면 될까요?
하나님의 심정입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알아야만 자연히 그것을 얘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정에 일치되면 내가 북쪽으로 가면 모든 것이 북쪽으로 향합니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선생님은 이렇게 있어도 영계는 지상을 중심으로 되어 있습니다. 모두 지상을 향하고 있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되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더불어 이룰 수 있는 기준, 그것을 가짐으로써 비로소 만물의 영장의 권한이 있는 것입니다. 밝은 빛과 어둠이 있다면 어디로 향할까요? 밝은 쪽으로 향합니다. 이것은 자연현상입니다. 하나님의 심정이란 모든 생명의 근원인 것입니다.
문 : 태양계에 변화가 일어나 인류가 위기에 당면하는 일은 없겠습니까?
지금부터 5년 전인가, 어느 과학자가 혜성이 나타나 지구와 충돌하여 지구가 전부 파괴될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지요? 그러나 지구는 그러한 존재물이 오면 반발력, 즉 밀어내는 힘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위험한 일을 당하면 자신도 모르게 반동력을 내지요? 정면 충돌해서 세계가 없어지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 지구가 같은 운동을 계속하는 이상 그 열도는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혈액이 36.7도를 유지하는 것은 혈액순환이 같은 속도로 되기 때문입니다. 지구의 공전하는 속도가 변하지 않으면 지구의 열도 변하지 않습니다. 태양도 도는 것이라면 그 속도가 변하는 만큼 태양열도 변해 갑니다.
문 : 지구가 조금 경사졌습니다만, 이것은 태양과 지구와의 존재유지상 필요한 것입니까?
그것은 전체적인 영향에 따라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 개체로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지구에 태풍이 분다든가 지진이 일어나는 것은 지구 자체의 작용에 의해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인력(引力)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데이터를 작성해 보면 그것이 통계적으로 일치합니다.
문 : 이 우주에 생명체가 있는 천체는 달리 없습니까?
만약 있다면 하나님은 불쌍한 하나님이십니다. 이 우주에 지구 이상의 위성이 있다면 하나님은 거기에서 창조목적을 완수하십니다. 영계에 가서 어떤 천사들을 보면 사람과 같습니다. 그에게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면 ‘화성에서 왔다.’, 혹은 ‘목성에서 왔다.’고 합니다. 그러면 화성에도 사람이 살다가 죽어 여기에 왔는가 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영계에서는 전우주가 우리의 활동 무대입니다. 태양에도 갈 수 있습니다. 아무리 태양 속으로 들어가도 타지 않습니다. 만우주가 자신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몇천억 광년이라는 긴, 방대한 우주라 할지라도 영들은 한순간에 전우주를 다니며 활약할 수 있기 때문에 빛 같은 것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인체를 만들어 주신 것은 그러한 목적 때문입니다. 영인체는 벽이 있어도 살짝 통과할 수 있고 아무런 불편이 없는 것입니다.
문 : 선생님은 태양계 가운데에서 어느 별이 마음이 끌리십니까?
선생님은 태양입니다. (웃음) 태양 빛입니다.
문 : 하나님께 미를 드려야 하는데, 일상생활에서는 그것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표현해야 합니까?
자신이 언제나 상대적 입장에 서 있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 관념이 항상 자기 마음속에 새겨져 있어야 합니다. 늘 그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무용수가 춤을 추듯이 항상 예술의 미를 나타내고자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자기 자체가 항상 상대적인 위치를 유지하고, 하나님 품에 안길 수 있는 기준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그 기준에서 미남 미녀가 결정되어 갑니다. 예를 들면 사랑은 동적이고 미는 정적입니다. 정과 동이 있어 조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문 : 우주의 축소체가 인간이라는데, 그러면 인간의 육체와 영인체를 연구하면 온 천주의 비밀을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대응 관계입니다. 실체와 형상과 상징의 기준이라도 대응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소우주이지 우주의 실체는 아닙니다. 소우주의 성상적인 형태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실체가 아니면 풀리지 않습니다. 인간과 우주는 대응해야 할 기준을 갖고 있습니다.
문 : 전우주의 힘을 자신의 영혼 가운데로 결집하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힘이 모이지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지요? 전체의 힘이 여러분에게 모아져도 곤란합니다. 그것이 온 우주를 끌고 여러분에게 떨어지면 어떻게 하지요? 인간 전부를 힘으로 끌고 움직이는 것보다 심정적으로 끌면 무엇이든지 한 마디로 백 퍼센트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훨씬 소중합니다. 물리적으로 힘을 결집시키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이 그러한 동기적인 기준을 갖지 않으면 안 됩니다. 100의 힘의 주체적 요소를 소유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러분은 전우주의 모든 힘을 끌어들이는 플러스적 주체를 결정할 수 있는 자신이 되어 있는가?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한 작용 자체에 명령하는 위치에 설 수는 있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하나님의 심정 기준에 서면 명령하는 위치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역사하는 것은 하나님과 만물이고 우리는 견학하는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위치에서 하나님 대신 천주를 지시할 수 있는 심정 기준이 서면 그를 중심으로 이 태양계가 바꾸어지고 또 거기서부터 돌기 시작합니다.
선생님이 만유원력의 모든 기준의 중심이 되어 있다고 해서 귀한 것은 아니에요. 우주를 만든 의지의 주인되시는 하나님의 의식 관점 앞에 작용할 수 있는 상대적 위치에 있기 때문에 고귀합니다. 작용할 수 있는 기준에서면, 그분이 나를 주관하여 목적 관념의 기쁨과 즐거움을 느낍니다. 그렇게 되면 평화의 요소만이 나와 관계를 맺습니다.
영계를 통해 보면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가 되면 천주의 모든 것을 움직일 수 있다.’ 고 합니다. 그렇다고 지금 돌고 있는 지구에게 ‘반대로 돌아라!’고 해도 그렇게는 안 됩니다. 무슨 뜻이냐면 심정권을 가지고 모든 목적 기준을 상대물에게 적응시켜야만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우리에게 허락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동쪽으로 갈 목적 관념을 갖고 나아가도 거기에 대응할 수 있는 우리에게 서쪽의 기준에 서서 작용할 수 있는 권한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원리적으로 운행하니까 무질서란 있을 수 없습니다. 심정권을 갖고 명령해야 변하는 것입니다. 심정으로써만이 우주의 근원되신 하나님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점성술가들은 ‘오오, 내가 명령하면 태양계가 정말 반대로 되어진다.’ 라고 생각합니다. 영계와 통하고 있는 사람 가운데에는 그런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가 명령하면 세계가 하룻밤 사이에 바뀐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는 되지 않습니다. 어느 결정된 한계 내에서는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영의 힘을 빌어서 이쪽 바위에서 몇십 리나 되는 산봉우리까지 날아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일을 하려면 그만한 탕감조건을 치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몇백년에 한번쯤 일시적으로 그러한 행동을 허락할 때가 있는데, 그때에도 탕감조건을 치러야만 가능합니다. 비원리적인 활동을 하면 거기에 대응하는 탕감을 치러야 합니다. 그러므로 영능자가 기적을 행하는 것은 좋은 현상이 아닙니다. 반드시 큰 보상을 해야 합니다.
문 : 불교에서 예를 들면, 불구로서 태어났다든가 하는 것은 양친에게도 원인이 있겠지만, 자기 자신의 과거에 의한 결과라 합니다만 어떻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문 : 윤회설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그렇게 태어나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어떤 원인이 있어서가 아닐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재림부활을 위해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전체목적을 위해 그런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문 : 그럼 그와 같은 상태로 나타난 현상 자체에 그 사람 자신의 책임은 전연 없는 것일까요?
책임은 있습니다. 그러니까 태어나는 데에는 책임을 갖고 태어나는데 과거의 기준과 현재의 그것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조들의 공적이라고 하는 것이 문제됩니다. 그것이 많고 적음에 따라 현재의 과정에 작용합니다. 그래서 태어나는 사람은 그 동기를 갖고 있습니다. 그 동기를 상속받는 것입니다. 좋은 씨를 갖고 태어나면 좋은 결과로 되지만, 나쁜 씨라면 나쁜 결과를 맺는 것입니다.
문 : 태어난 그 자신의 책임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만약에 어떤 사람은 쌀이고, 어떤 사람은 조이며, 어떤 사람은 옥수수라 합시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소질에 의해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완성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리니까 빨리 그 완전한 기준에 올라가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모두 다릅니다. 그러나 모두 천성의 소질에 적응하여 조직의 중심으로 완성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문 : 어째서 자기 자신이 그러한 부모 밑에 태어나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요?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니고, 어째서 타락했는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그런 문제는 없습니다. 타락이 없었다며 모두 해결되었을 것입니다.
문 : 로고스와의 대응성은 어떻습니까?
실체로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말하는 것은 어째서 최고의 자리에서 축복 받으며 태어나지 않고 보통 사람의 아들로 태어났는가 하는 의문일 것입니다. 보통이 없으면 최고도 있을 수 없습니다. 밑에서 최고의 기준을 보면 좋은 것처럼 보이지만 최고는 책임이 무겁습니다. 고생이 많습니다. 움직여야 하는 범위도 넓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완수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높다고 해서 행복한 사람은 아닙니다. 위치라고 하는 것은 문제삼지 않아도 됩니다. 현재의 기준에 있어서 본래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천성을 어떻게 해서 백 퍼센트의 기준까지 도달시키느냐가 문제이지, 출발의 기준에 대해 우리가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인격의 가치를 완성한다고 하는 것에 있어서 모두 평등한 위치에 서 있습니다. 사람을 보면 천차만별입니다. 그래서 아름답습니다. 모두 큰 사람뿐이라면 아름답지 않습니다. 그들 모두가 합해서 인간미의 맛을 냅니다. 천차만별로 태어나게 하는 결정권은 역시 하나님께 있습니다.
문 : 유형인 자기 자신으로 태어나기 이전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태어나기 전에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인연을 갖고 있을 뿐, 아무것도 없습니다. 개체는 전연 없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하나되었을 때 비로소 자기가 태어납니다. 그 이전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형태가 있어서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로고스는 아담을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만들고 나니 로고스의 실체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실체에 로고스가 작용하여 재창조의 행정(行程)을 계속하고 있는 셈입니다.
문 : 로고스로서의 자기는 체내에 있는 것이 전부입니까?
로고스는 아담을 창조할 때의 구상, 즉 생각이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됩니다.
문 : 창조된 이후 자손의 로고스는요?
전부 로고스 자체로 되어 있습니다. 실체로 되어 있으므로 가지처럼 번식합니다. 자손은 실체의 가지입니다.
문 : 그렇다면 불구의 어린이가 태어나는 것도 전체적, 개체적인 이중목적의 탕감조건에 의해 발생한 것이군요. 그러면 그러한 문제를 현세에서 빨리 해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구원의 길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은 구세주를 보내셨던 것이고, 또 각 시대 시대마다 인류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할 사람들을 보내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빨리 연결되라는 것입니다. 연결되면 어떻게 되지요? 자기 자신은 부모와의 인연을 끊어 버리고 본래의 인연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수고하여도 구원받을 수 없었던 곳을 잘라버리고 구원받을 수 있는 길에 이어지는 관계를 맺습니다. 모든 종교를 바로잡고, 그런 인연을 연결해 최후의 기준까지 계속 끌어올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뭐라 하셨는가요? 참감람나무와 돌감람나무를 말하시며 그것을 잘라 버리고 접붙여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문 : 기적에 대한 문제입니다만, 원리에서 벗어난 기적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는 것은 어떻습니까?
죽은 사람을 살리는 데는 영인체를 다시 불어넣으면 살아납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부패해 버리면 안 됩니다. 살이 없어지면 안 됩니다. 3일간이라든가 죽은 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에 영을 불러들이면 소생합니다. 그것은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럴 필요성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한번 영을 불렀으면 그것을 다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는 그 이상의 가치 있는 것을 보상한다든지, 아니면 그것에 따라 천적 이익을 가져올 수 있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세 사람, 네 사람이 죽어야 하는지도 모르기 때문에 영적 가치를 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 일을 하는 데 책임을 지지 않으면 천법에 걸립니다. 그러므로 기적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이런 일도 있다구요. 평양에 어느 할머니가 살고 있었는데, 그 할머니가 영계로부터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선생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통일교회에 들어왔습니다. 그 할머니는 많은 기적을 행했습니다. 환자들을 고치고 서지 못하는 사람을 서게 했습니다. 이 소문이 평양의 구석구석까지 퍼져 세상의 많은 부모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렇게 1년, 2년, 수년이 지나 어느 단계에 들어서자 하나님은 ‘그런 기도는 이제 그만하라.’ 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후 어느 날 한 여자 분이 찾아왔습니다. 유복한 집안의 독자를 둔 어머니였습니다. 그 아들이 지금 폐병에 걸려 시간을 다투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성을 다하여 무슨 일이라도 다하겠으니 아무쪼록 이 아들을 위하여 기도해 달라.’ 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간절히 부탁해도 하나님의 허락이 없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얘기를 들어보니 불쌍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어떻게든 고칠 방법이 없을까 하고 백일기도를 했습니다. 몸을 청결히 하고 성수를 떠놓고 기도했습니다. 99일까지 아무런 응답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백일 째 되는 날 새벽에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오기를 ‘정말로 그 아이를 살리고 싶은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 아무쪼록 고쳐주십시오.’ 했습니다. 그랬더니 다시 ‘그러면 내가 하는 일에 불평하지 않겠는가?’ ‘예.’ 하고 대답하니 컵에 담아져 있던 물이 솟기 시작했습니다. 물이 솟아올랐습니다. 그러더니 ‘이 물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고 그 아들에게 가지고 가 먹여라. 그러면 걷게 될 것이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명령을 받고 그 물을 가지고 가 먹였습니다. 그때가 새벽 3시쯤이었습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한숨 자고 일어나니 자신의 장남이 아침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 ‘어머니, 배가 아파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자기 방에 들어가 30분도 안 되어 죽어 버렸습니다. 그때 할머니는 자기 아들이 그 청년을 대신해 갔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그 할머니는 정신 이상자가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할머니에게 미리 알려주었던 것입니다. 할머니의 아들을 그 청년 대신 데려간다는 사실을. 그 할머니가 정신이 반쯤 나가서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을 때 어느 십자로에서 뚜렷하게 자기 아들이 앞에 나타나서 ‘어머니 어디 가세요. 어머니는 그 청년을 위해 기도해 주고 제가 대신 희생되었다고 하시고는 왜 정신을 흐트러 뜨리고 계십니까? 저는 지상에서 아무리 인간으로서 선한 일을 하고 하늘을 위해 봉사했다 할지라도 도저히 갈 수 없는, 아주 좋은 곳에 가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왜 좋은 곳에 갔느냐 하면 자기가 가야 할 곳과 청년이 가야 할 곳을 합한 곳에 갔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의 목적을 완성한 곳에 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어머니가 매일 울기만 하니까 견딜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보다 더 큰 십자가는 없어요. 내가 당신의 아들이라고 그렇게 응석받이로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할머니는 ‘아! 내가 잘못했다.’ 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아들이 다시 말하길 ‘어머니가 살린 그 청년을 나 이상으로 사랑하지 않으면 내가 영계에서 발전하는데 커다란 지장을 가져올 것이니 그를 나보다 더 사랑하겠다고 약속해 주십시오.’ 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천적 사명을 가진 사람이 책임을 갖고 기도하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특별한 기적을 행하려면 특별한 희생을 치러야 하는 것입니다. 선생님도 흔히 당하는 일입니다. 어떤 사람을 용서해 주고 싶지만 천법 앞에서는 용서할 수 없는데 그래도 인정으로써 용서해 주면 걸립니다. 그런 일이 있습니다.
문 : 선생님 마태복음 19장 30절에 있는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 는 말씀의 뜻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지금 기독교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유명한 목사들이 먼저 된 사람입니다. 우리 교회 안에서도 먼저 들어와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은 귀찮은 자입니다. 여러분은 수련을 받음과 동시에 서로 경쟁하고 있는 것입니다.
문 : 우리에게는 하나님도 사탄도 간섭할 수 없는 자유가 있다고 하는데요, 그렇다면 어떤 때에 우리들은 자기 의식권을 벗어나서 하나님의 필연적인 세계에 들어갈 수 있는지요?
자기의식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 편을 중심삼은 자기의식과 육심을 중심삼은 자기의식의 두 가지가 있다는 것을 알고 육심을 중심할 때는 결연히 잘라 버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중심삼은 자기의식이 있다면 그것은 지켜야 합니다. 그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것은 필연적인 것입니다.
문 : 본심과 일치하는 것이 필연적인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양심은 변합니다. 본심은 변하지 않지만 양심은 여러 가지의 환경에 지배를 받습니다.
문 : 본심을 살리기 위해서는 기도가 필요합니까?
기도 말이에요? 육심에 제재를 가하면서라도 하지 않으면 안 돼요. 기도는 타락한 인간의 책임이며 타락하지 않은 인간에게는 필요 없습니다.
자, 12시가 되었습니다. 오늘은 아침부터 계속 얘기했더니 혀가 무거워진 느낌입니다. 여러분들로부터 그런 질문을 받으면 선생님은 옛날로 돌아갑니다. 정신이 핑 돕니다. 여러분에게는 보이지 않겠지만 선생님은 심각해지기 때문에 여러분의 얼굴이 저 멀리 가 버립니다. 그러니 멀리 간 실체를 끌고 와서 정상으로 보아야 하므로 피곤해지기 마련입니다. 옛날에는 그런 사람들을 모아 놓고는 절대로 얘기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때가 왔으니까 제한하지 않아도 아무런 지장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여기를 보고 있어도 정신은 나가 있습니다. 머리가 이러한 실체로 보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아무리 가르쳐 주어도…. 그런 사람에게 얘기를 하는 것은 겨울에 씨를 뿌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사람은 아무리 얘기를 해도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전반적으로 각 나라를 볼 때에 뭐니뭐니해도 미국의 국민성이, 선의 기준이 높습니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수많은 선의 희생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세계적인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노래나 한 곡 부를까요? 전체적으로 기분을 전환하는 데에는 노래하는 것이 좋아요. (고추잠자리를 합창)
선생님은 일본에 와서 좋은 곳에 구경하려 다니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후지산(富士山)에도 가지 않았고, 아다미(熱海), 하코네(箱根), 닛코(日光)에도 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아름다운 땅에도 하나님이 보시고 기뻐하고 나서 ‘저기는 좋은 곳이니 가보자.’ 라고 말씀하신 후에야 갑니다. 그렇지 않으면 절대 가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선생님의 주의입니다.
휴일 같은 때에는 가와사키(川崎)에 있는 회사 등에 자주 갔어요. 거기에는 유산탱크가 있는데, 노동자가 그 유산탱크 속에 들어가 정화하기 위해 원료를 죽 내려 보냅니다. 그리하여 그 장치는 몇년간 쓰게 되면 못쓰게 되어 버립니다. 유산이 스며들지 않아요. 그러면 그것을 교환하기 위하여 그 탱크 속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그 속에서는 15분 이상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곳에서 싸우면서 일했습니다.
돈이 없어서 그런 일을 했던 것이 아닙니다. 선생님이 선생님의 형님께 ‘전재산을 팔아서 돈을 부치라.’ 고 전보를 치면, 형님은 세계 대표적인 가인이어서, 곧 보내 주십니다. 그런 사람은 좀처럼 없습니다. 선생님의 형님은 선생님이 어떤 남자인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의 사명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세계에서 단 한 사람밖에 없고 세계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그런 남자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늘로부터 가르침을 받는 열렬한 신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돈이 필요하여 전보를 치면 곧 보내 줍니다.
선생님은 돈이 있으면 전부 친구에게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곳을 돌아다녔습니다. 잘했지요?
왜 그런 일을 했을까? 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선생님은 ‘누구보다도 일본을 사랑하는 조건을 세우자.’ 그런 것을 생각했습니다. 여러 곳을 돌아다녔습니다. 커다란 삼목(杉木)을 부둥켜안고 눈물 흘리며 운 적도 있었습니다.
한국이 일본 정권하에 있었을 때, 선생님은 몇 번이나 유치장에 끌려 들어갔습니다. 이곳 도쿄(東京)에 와 있을 때에도 한 달에 한 번은 경찰서에 불려갔습니다. 그 경찰서는 다카다노바바(高田馬場) 거리의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쪽에서 오른편에 있습니다.
그때에도 선생님이 한국에 돌아가려고 하면, 한국에 연락이 갑니다. ‘아무개가 한국에 돌아간다.’ 라고. 학생이었지만 요주의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은 선생님을 잘 모릅니다. 선생님을 보면, 입은 옷은 헌 옷가게에서 산 싼 것들입니다. 그 옷을 보면 반들반들 윤이 납니다. (웃음) 사람들은 모두 머리에는 기분을 내서 포마드라든가 무엇인가를 바릅니다. 바람이 불거나 태풍이 불면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리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바릅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은 어떠한 봄날이나 여름날에도 바르지 않습니다. 또 걸을 때에는 밑에서부터 45도 이상 위를 보지 않습니다. 이런 일을 했습니다.
선생님은 이전에, 선생님이 하숙했던 여러 곳이 있었음을 생각하면서 그 중 한 하숙집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하숙집의 아주머니를 만나고 왔습니다.
선생님은 눈 오는 날이나 태풍이 부는 날에는 학교에 가지 않고 하층 노무자들의 밥집에 나가 일을 했습니다. 그런 때는 참으로 기분이 좋았습니다. 태풍이 불고 있던 때니까 거기서 손이 새까맣게 되어도 비에 맞아서 죽 흘러내려 깨끗하게 되어 버립니다. 그런 가운데에서 땀을 흘리며 일합니다. 그 기분이 참으로 상쾌합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나쁜 사람이 있으면 혼내 주었습니다. 이런 것을 선생님은 잘 생각합니다. 때로는 큰 놈을 해치웁니다. 그리고 노동판에는 조장이 있어서 착취를 하는데, 3할은 떼어냅니다. 그래서 ‘그렇게는 안 된다.’고 하면서 강력히 항거했습니다. 선생님은 무서운 자들이어도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고 하면서 그들의 말에 따르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이 ‘에잇!’ 하면 ‘악!’ 하며 항복합니다. 그런 일을 잘 했습니다.
선생님은 일본인으로부터 많은 고문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자, 고문한 그 특별고등형사(特高刑事)에게 복수를 계획하고 있는 친구들을 전부 모아 놓고, ‘불쌍한 것은 패한 일본이다. 이미 주권을 잃어버려 무릎을 꿇고 비는 사람을 때리는 자는 하나님이 벌한다.’ 고 말하기도 하고, 또 한국에서 쫓기고 있는 일본인을 조용히 불러 ‘고문당하기 전에 빨리 돌아가라.’ 고 말하며 짐을 정리해 주기도 했습니다. 그런 일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은 사람들에게 선생님이 어떤 사상을 갖고 있는지 전혀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친구들도 몰랐습니다. 선생님은 성서를 연구하기도 하고 종교관계 서적이나 보통 사람들이 잘 읽지 않는 철학서를 가지고 와서 읽었습니다.
와세다대학 정경과에 다니고 있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는 공산주의를 공부하고 있어서 그 친구와 격론을 벌인 적이 있었습니다. 또 노방에서 큰 소리로 연설한 적도 있었습니다. 벚꽃이 만발하여 많은 사람이 모였을 때 그곳에서도 했습니다. 그 시대에 대한 비판을 했습니다. ‘내일의 청년은 이러이러한 식으로 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고 외쳤습니다. 그때 예언했던 것이 지금 다 맞아 나가고 있습니다. 그때 친구들이 어정어정 구경 와서는 ‘어떤 젊은이가 저렇게 열렬하게 호소하고 있지, 대체 누구야?’ 하며 머리를 디밀어 보고는 ‘어이 누구 아니야!’하고 깜짝 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교실에서는 말이 없었습니다. 말이 없었기 때문에 아무도 선생님에 대해서 알지 못했습니다. 동급생들은 학교 선생님보다도 오히려 문 선생님을 가장 무서워했습니다. 왜냐하면 평소에 말을 하지 않는 겁니다. 그러다가 문 선생이 학교 선생님한테 한번 질문을 시작하면 대답할 수 없을 때까지 하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한번 일어서서 질문을 시작하면 학교 선생님의 얼굴이 새빨개질 때까지 질문하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내가 일어서면 모두 얼굴이 빨개지는 거예요. 특히 이론이나 변론 같은 때는 학교 선생님쯤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친구도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국민학교 졸업식 때 답사시간이 있지요. 선생님들에게 답사를 읽게 마련입니다. 그때 선생님이 마지막으로 단상에 올라가 호소했던 것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경찰서장, 군수, 교장 선생님 등 지방 유지들이 모두 모여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그런 자리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당하게 단상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러고는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하면서, 소년시대의 교육에 대한 비판과 지금까지의 학교 선생님에 대한 비판을 모두 해 버렸습니다. ‘이 선생님은 이런 성질이 있다. 역사 선생님은 이런 성격이고 이러이러한 사고를 하고 있으니까 이러한 결과밖에 되지 않는다.’ 고 하며 선생님들을 비판했습니다. 그리고 시대적 비판도 하고, 또 ‘이 시대의 책임자는 이러 이러한 각오를 지녀야만 한다.’ 고 한 시간 가까이 했는데, 그것이 큰 문제가 되었습니다. 소학교를 졸업하는 학생이 그런 말을 할 줄은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그때부터 레테르가 붙여졌습니다. 경찰로부터 지목받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은 사람들이 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 연구했습니다. ‘이 입은, 사람들이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가 있을까, 먹지 않고 견딜 수 있을까?’ 라고 숙고한 후, ‘할 수 있다.’ 는 신념을 갖고 훈련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서른 살까지는 배고프지 않을 때가 없었습니다. 언제든지 밥을 가져오면 사발로 서너 그릇을 단번에 먹어 버립니다. 그 정도로 배고프지 않을 때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은 ‘얼마나 먹을 수 있는지 시험해 보자.’고 하게 되었습니다. 전쟁시대인 그때에는 식권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 식권이 있어서 ‘몇 그릇이나 먹을 수 있는지 어디 한번 먹어보자.’ 고 친구들을 데리고 갔습니다. 젊은이들이 모이면 참 재미있어요. 모두들 ‘야, 열 그릇은 문제없다.’ ‘오늘은 자네 생일이니까 마음껏 먹어라, 내가 한 턱 낼께.’ 하며 큰소리를 칩니다. 다카다노바바를 쭉 내려가면 절이 있는데, 거기서부터 식당이 쭉 늘어서 있어요. 거기에서 선생님은 닭고기 계란덮밥을 일곱 그릇이나 먹었습니다. 일곱 그릇 먹고 나서는 목이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배가 고픈 것보다도 더 고통스러웠습니다. 움직일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 일도 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이 항상 그렇게 했다고 생각하면 큰 잘못이에요. 선생님은 항상 배가 고팠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했을까요? 결코 밥이 없어서 그랬던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배만을 채우고 있으면 자신으로부터 민족이 멀리 도망가 버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자기에게서 멀리 달아나버립니다. 배가 고파서 먹고 싶지만, 그 이상으로 민족과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진리이며, 선생님의 신조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은 서른 살까지는 배가 고프지 않을 때가 없었던 것입니다. 형무소로부터 나왔을 때, 아무리 먹고 또 먹어도 계속 먹을 수 있었습니다. 웬일인지 무엇을 먹고 또 먹어도 배가 불러도 거기에서 과식하여 죽을 정도로 먹고 싶었습니다. 아무리 채워도 포화상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렇듯 언제나 모자랐습니다. 이렇게 하면서 이 길을 개척해 나왔습니다.
여러분은 일본을 사랑하겠지요? 어느 정도 사랑하세요? 가늠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많이 사랑할 필요는 없습니다. 먼저 여러분을 낳아 준 부모를 사랑하라! 그 부모의 손이 가늘어지면, 그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려라! 동생이 다른 사람들같이 좋은 옷을 입지 못하였으면, 그 옷을 붙잡고 눈물을 흘려라! 자기의 부모에 대해서 자기의 형제에 대해서 책임져라! 그것을 하지 못하고 그 마음을 갖지 않는 자가 어떻게 나라를 사랑하겠는가? 그것은 원리적으로 보더라도 맞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기준에서의 부모를 중심으로 한 형제들인 것입니다.
심정의 세계는 국경이 없는 것입니다. 언어라고 하는 것은 경계가 되지 않습니다. 선생님은 일본에 오면 한국인이 아니에요. 한국 사람이 아니라 하늘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천국인입니다.
와세다대학의 다카다노바바의 길을 하루에 두 번씩 걸었습니다. 잘 걸었어요. 그것을 생각하니 ‘아 가까운 곳에 왔으니까 옛날을 회상하여 걸으면서, 하나님에 대하여 기도했던 그 기도의 정이 현재 일본의 일각에 성취된 감사의 기도를 하고 가고 싶다.’ 는 마음이에요. 선생님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만약 선생님이 그렇게 하지 못하고 그냥 돌아가면, 여러분들이 그런 마음으로 와세다의 도쓰카초(戶塚町)를 다카다노바바부터 걷기를 바랍니다. 거기에 있는 굽은 길, 거기에 있는 전신주 등 여러분들이 기억할 수 있는 곳에는 선생님의 눈물이 스며 있다고 생각해도 틀림이 없습니다.
사람은 만나고 헤어짐에 있어서 섭섭함을 느끼며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일본의 여러분과 헤어지지 않으면 안 되는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이에 즈음하여 선생님으로서 생각하는 것은, 만나기 전 만나려고 생각하던 심정의 기준과 만났다 헤어진 후의 심정의 기준 가운데 어느 쪽이 높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혹 선생님과 만나기 전의 여러분의 심정보다도 만난 후의 심정이 높지 않다면 그것은 의미가 없는 것이고, 또 그것이 여러분을 지도하고 있는 책임자와 여러분을 생각하는 하늘과 선생님이 걱정하는 바입니다.
이러한 견지에서 보면, 여러분과 함께 며칠 동안 있으면서 여러분의 심정의 세계에 과연 커다란 파동을 일으켰는가, 그렇지 않으면 일어나고 있던 파동을 가라 앉혔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선생님을 만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선생님이 돌아가고 나서 선생님을 생각하는 마음이 있으면, 그 이상으로 나라를 생각하고 하늘에 대한 천적인 책임을 다해 줄 것을 바랍니다.
현재 남아 있는 책임에 대한 태도와 그 책임도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 일본의 복귀를 어떻게 진행해 갈 것인가? 이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신념을 가지고 정해진 목표를 향해 매진하고, 어떠한 작용에도 그것을 유유히 극복하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위신을 당당히 나타내어 최후의 승리자가 되기를 마음속으로 빕니다.
일본의 교회가 금후 점점 진전하기 위해서는 여러분과 같은 젊은 사람들이 제일 필요합니다. 용기백배하여 앞을 가로막아 오는 모든 어려움을 잡아 제끼고 최후의 승리를 불러 올 젊은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상하 좌우라고 하는 말이 있다시피 청년들만의 손으로는 되어지지 않는다고 하는 것을 교회를 지도하면서 절실히 느꼈습니다. 용기를 내어 싸우는 것은 청년으로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지만, 싸우는 청년에 대해서 지켜보고 주위와 환경을 지키어 여러 가지로 보급해 주는 것이 없으면 안 됩니다.
장년부에는 남자 장년부와 부인부가 있으나, 특히 일본은 해와 나라이니까 선한 땅으로서의 부인이 필요합니다. 또 그 이상으로 선한 아담이 필요합니다. 듬뿍 먹는 청년들을 아무 걱정 없도록 지켜 줄 수 있는 것은 장년입니다. 땅이 아무리 비옥하다 하여도 실제로 열매를 맺는 것은 벼인 것입니다. 부인부보다도 그 이상으로 장년부를 번영시켜서 커다란 수확을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알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장년부원들은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있고 아이들과 연로한 어버이를 부양하고 있습니다. 사회적인 장애가 얼마쯤 있겠지만 그것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자기의 아이 중에 청년이 있으면 그를 중심으로 움직일 수 있을 것입니다. 청년부 대신으로서 행하는 장년부가 얼마나 결속하였고, 확대하였고, 청년부와 부인부가 함께 발전하고 있는가가 일본의 문제인 것입니다.
커다란 발전을 보려면 강인한 상대가 필요합니다. 본부에서도 지방에서도, 전도체제에 있어서 이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장년을 인도하기 위해서는 청년들이 먼저 그 사람의 자식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자기 자식과 같이 지켜 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합니다. 교회의 책임자라 하여도 자기의 아버지와 어머니로 생각하고 대하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그들 젊은 사람들을 자식과 같이 여기면서 그들을 중재역으로 하여 가정, 종족의 영적인 새로운 관계를 구성해 가라는 것입니다.
지금 나는 이러한 신앙을 가지고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이러한 변화를 가져오지 않으면 우리들은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일본을 구할 수도 없습니다. 현재 일본의 상태는 어떠한가? 중공이나 소련이라든가 혹은 세계 정세와 연관지어 보면 금후의 일본의 위치는 어떠할 것인가? 이 일본을 구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이상과 이러한 진리가 없어서는 안 됩니다. 만약 여러분이 진리를 실행치 않으면 여러분의 자신은 어떻게 될 것인가? 남의 일같이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되면 부모는 모든 가족을 열심히 사랑할 것이니까 심정의 물음을 받게 됩니다. 어버이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면 그 자식은 어떻게 되는가? 자기 자식이 병으로 위험한 상태에 직면한 그때의 아픔, 그때의 마음을 그 장면에서 생각해 내면서 깨달음을 받아, 자녀를 올바로 교육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을 깨닫고, 처음으로 ‘아! 그렇다. 내 젊은 딸도 교회에 보내지 않으면 안 되겠다.’ 고 생각하게 됩니다. 또 이렇게 생각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게 됩니다. 그리고 전도에서 돌아와서는 반드시 편지를 씁니다. 편지 한 장이라는 것은 간단하지만 그 편지로 진실한 심정의 교류를 남기고 가는 것입니다. 편지 한 통으로.
그것을 잊어버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지능을 가지고 있으니까 ‘처음으로 만난 사람이 나에 대해서 저만큼의 친절과 책임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와 같이 대해 온 사람은 없었습니다. 자신에게 제일 가까운 사람은 함께 술을 마시든가 무엇인가 한 사이와 같이 자기에게 친절하게 해주나, 저러한 뼛골에 스미는 것 같은 감정으로 대해 주지는 않았었습니다. 아, 역시 틀리는구나.’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편지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사람 두 사람 세 사람 순회하면 점점 친근해집니다. 그러한 관계에 이르러 차차 이편을 방문해 오면 그 뒤에는 순회 때 했던 일을 다시 하지 않더라도 잘 됩니다.
그렇게 하여서 장년부의 활동과 목표를 굳건히 세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장년부 여러분 알겠어요? 선생님은 이런 것을 생각합니다. 아, 좀더 통일의 성도가 많다면 대학생 교회, 고교생 교회를 만들 수 있고 여성만이 모이는 교회, 이것은 활발히 선전하면 크게 움직일 것을 텐데…. 그리고 대학 이상 졸업한 사람이 모이는 교회 입니다. 그리고 특히 장년부를 발전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니까 그런 나이가 되어 있는 분은 특히 힘을 합해서 장년부를 발전시키도록 노력해 주기를 바랍니다. 좋습니까? 혹시 남자만으로 약하다고 생각되면 남녀 합동해서 장년부를 발전시키도록 노력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되면 일본을 중심으로 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일본은 지금 젊은 사람만인데 최후의 문제를 완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단계에 들어가면 청년보다도 장년이 많아야 합니다. 목적에 이르는 과정이 필요하지만 목적에 달한 최후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역시 장년인 것입니다.
싸우기는 쉬우나 책임을 다하는 일, 이것은 쉽지 않습니다. 베드로 등은 꽤 나이를 먹고 있었습니다. 나이 든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장년도 청년도 있었습니다. 그것이 상하․좌우․전후․내외의 환경을 만들면 이것은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됩니다. 이것을 마음속에 새겨서 장년부의 여러분은 노력하고, 일본의 3분의 1 이상의 모든 가지와 줄기를 발판으로 세워서 움직이도록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우리들은 일본만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들은 세계를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한 사람이 전부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이 전부를 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공동으로 해야 합니다.
아무리 원리가 위대하다 하더라도 그 원리 자체만으로는 아무것도 안 됩니다. 사람이 있으니까 문제입니다.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으로는 이렇게도 저렇게도 안 됩니다. 전부가 연락을 취해 가지고 공동목표를 세워 각 부문에 있어서 백 퍼센트의 책임을 다함으로써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되어 가는 도상에는 조직이라고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교회의 움직임의 전체와 인연을 맺을 수 있는 관계가 필요하게 되어 옵니다. 관계를 표면화하기 위해서는 조직이 문제로 되어 옵니다. 그것은 줄기를 중심한 가지와 같이 사방팔방으로 갈라집니다. 그렇게 되면 거기에는 명령 계통이 필요하게 됩니다. 그것을 갖지 않으면 그것은 어차피 자기로서 곤란해지든가, 그렇지 않으면 자기가 없어지든가 어느 한 쪽이 되고 맙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조직이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을 남기고 선생님은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니시카와(西川; 한국명 최봉춘) 선생도 미국으로 갑니다. 그렇게 되면 구보키(久保木) 군이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을 생각하게 될 때 선생님으로서 가장 강조하고 싶은 것은 조직을 강화해서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으라는 것입니다. 그때 그 책임자에 대해서 여러분 백 명이 보게 되면 전부 다릅니다. 책임자는 한 사람이지만 비판은 백 가지 비판이 나옵니다. 다 목적의 관점이 틀리니까 비판의 관점도 틀려오기 마련입니다. 목적의 관점이 틀리면 결국은 하나로 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가 백 사람의 중심된 책임자이면 백 사람의 짐을 지고 있는 셈입니다. 거기서 자기가 100분의 1의 입장에 섰다면 99퍼센트 십자가를 지고 자기의 위치에서 사명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알겠어요?
자기 자신은 100분의 1이면서 99라고 하는 사람을 내버려두고 자기 한 사람이 이러쿵저러쿵 말하면 안 됩니다. 99라고 하는 사람을 등에 지고 말을 하는 입장에 서세요.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전부의 것이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즉 책임자가 100을 대표하고 100의 십자가를 등에 지고 자기의 책임을 다하려고 하는데 자기는 100분의 1인가요? 아니 그렇지는 않습니다. 자기는 책임자에 가장 가까운 자입니다. 그래서 책임자는 100의 책임을 갖고 있으나 각자는 99명의 책임을 갖고 있습니다, 99명의 대신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입장에서 책임자를 대하세요. 그런 입장에서 명령을 받기 바랍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움직이면 하나가 안 될 수 없습니다.
그러한 입장에 서지 않으면 지도자의 의견이 최선단까지 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장은 100명의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99명의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마음 가짐, 누구보다도 내가 나빴다고 하는 마음가짐…. 왜냐? 99명의 십자가를 지는데 도움이 되지 못했으니까요. 그러한 입장에 서게 될 때 도움이 되지 못했으니까 내가 나빴다! 그렇게 전체의 책임을 자기의 책임으로 하고, 그리고 자기를 책하는 사람이면 그 사람은 틀림없이 제2의 책임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 때문에 이런 조직을 만드는가? 이것은 제1의 책임자와 제2의 책임자를 위해서입니다.
제1의 책임자를 중심으로 하고 수많은 제2의 책임자를 완성하기 위해서 우리들은 이러한 조직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을 잊지 않고 나간다고 할 것 같으면 일본의 교회는 비약적인 발전을 할 것입니다.
일단 책임을 지면 그는 선생님의 대신자입니다. 무슨 일이 있으면 그때의 결정권은 그 책임자에게 있습니다. 그것을 결정하기 위한 모든 재료는 주위 사람들이 모아다 주게 됩니다. 그 재료를 근거로 해서 결정하는 것은 책임자가 아니고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중대한 일을 결정하기 위해서 책임을 가진 사람은 진지한 기도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기분대로 자기의 생각대로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일을 책임진 지금 중대한 일을 결정하려고 하는 것이니까요. 여기에서 틀림없이 하나님은 역사하실 것이지만, 상대의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도 역사하십니다. 책임자는 그러한 것을 종합하여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중대한 책임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을 여러분이 알고, 온갖 방면에 있어서 그러한 중대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책임자의 가까이서 도와주면 여러분은 그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 됩니다. 가장 가까운 가지가 됩니다.
전부가 그러한 사람이면 여러분은 어디에 보내더라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러한 기준을 가지고 가게 되면 여러분은 어디에 가더라도, 지금부터라도 참된 조직을 거기서부터 또 전개할 수가 있습니다. 아무쪼록 일치단결하여 이러한 중대한 사명을 다해 주기를 바랍니다.
본부는 벌써 이미 좁아졌습니다. 이번과 같은 행사가 있으면 전국에 연락을 하세요. 전국에 있는 형제는 다 모이고 싶어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는 안 됩니다. 거기에 있어서 어떤 때는 이러한 사람들이 모이고, 어떤 때는 이러한 사람들이 모인다고 구분을 짓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일이 되지 않습니다. ‘뭐야 나는 통일교회에 들어온 지가 오래 되었는데 나를 제쳐 놓고 다른 자를 불러?’라고 하면 안 됩니다. 특별 행사 때는 믿을 수 있는 자를 부르는 것보다 도리어 그 반대 사람을 부르는 것이 효과가 있습니다. 여러 가지 입장에 대해서 불평을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조직적으로 동원될 때 순진하게 움직이는 것이 자기 생활의 모토이고 또 생애의 모토가 아니면 안 됩니다. 이러한 훈련이 아직 되어 있지 않다고 하는 것을 느꼈으므로 선생님은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훈련하기 위해서 본부에서 명령을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온갖 문제를 감사하게 받아들이기 바랍니다. 그러한 사고방식을 갖고 있지 않으면 큰일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일본에 있어서는 활동할 수가 없게 되고 세계를 움직일 수도 없게 됩니다. 그래서 조직의 연락성, 혹은 통할성(統轄性)이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거기에 순종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첫째는 조직, 두 번째는 단결, 세 번째는 행동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우리 일본을 중심으로 세계를 움직이기 위한 3대 요소입니다. 철저한 조직권 내에 섬으로써 사방팔방으로의 연락을 백 퍼센트로 하고, 그리고 중심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 선두에 서서 이러한 기준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자기의 위치, 조직권 내의 자기의 위치를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위치가 없으면 앉을 자리가 없습니다. 위치를 결정하고서만 일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노력함에 따라서 그 위치가 여하히 크게 되는가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위치 결정은 조직력을 강화해 가는 데 있어서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의 존재가 이 우주간에 존재하기 위해서는 전후․좌우․상하의 문제가 풀려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세 가지 것이 연락되지 않으면 그것은 하나하나 점점 떨어져 가게 됩니다. 그렇게 하면 자기의 위치가 무너져 버립니다. 위치를 결정하게 되면 상하가 문제가 됩니다. 가정에 가면 나의 웃사람으로는 부친이 있고, 부친의 위에는 할아버지가 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서도, 장래 훌륭한 아들을 만들기 위해서도 훌륭한 아버지가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훌륭한 부친이 되기 위해서는 공부를 해야 합니다. 자기가 성공하기 위해서, 출세하기 위해서 그러는 것은 아닙니다. 훌륭한 아버지가 되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손에게 그러한 사상을 남기고 자녀들을 교육하면 그 씨족은 일본을 쉽게 지켜 갈 수 있습니다.
결혼하는 것도 자기 때문이 아닙니다. 훌륭한 아버지 어머니가 되고, 또 훌륭한 효도를 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그 목적을 기준으로 해서 합니다. 그리고 상하․좌우․전후가 함께 백 퍼센트 결합해서 같은 힘으로 관계를 유지해 나가지 않으면 그 위치가 움직여 버립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에, 이 세계에 그러한 나라를 중심으로 하고 서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인가? 없습니다. 종교계에 있어서 자기 종교의 교조의 가르침과 교리를 중심으로 그러한 입장에 서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인가? 없습니다. 다 각각 저마다 원하는 위치를 구해 가다가 중심을 잃고 무너져 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이 세계를 상대로 겨룰 수가 없습니다.
조직을 필요로 하는 것은 위치를 결정하기 위해서입니다. 자기 위치를 모르면 안 됩니다. 여러분은 알겠습니까? 위치를 결정하는 것은 인연을 맺고 관계를 맺기 위한 것입니다. 나를 중심으로 하고 맺어야 합니다. 연결시키는 권세력(權勢力)을 가진 자가 그 주체가 됩니다. 지도를 받는 자는 그 상대가 됩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관계를 맺어 자기가 서 있는 위치를 결정하면, 즉 사방팔방과 인연을 맺고 자기의 위치를 결정하면 전후․좌우․상하 어떠한 방위(方位)에서 볼지라도 엄연히 설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 자신도 그것을 다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위치를 결정하고서 그 사방팔방 입체권 내에 있어서 온갖 인연의 입장, 자신과 관계된 모든 것을 하나로 합니다. 그러한 원동력을 가진 사람에게 길러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조직을 필요로 한다면 위치를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위치를 결정하는 데는 하나의 주체권(主體圈)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됩니다. 주체권을 만들려면, 그를 중심으로 하고 하나의 상대 존재를 바로 세운 후 그 권(圈)을 만들지 않으면, 그것은 하나의 존재로서 영원히 존속할 수 없습니다. 무너져 버립니다. 위치가 자연도태되고 맙니다.
조직력과 단결력 그것들이 하나가 된다면 비로소 행동할 수 있습니다. 중심은 이러한 것을 할 때에 ‘나에게는 관계없다. 너는 서쪽으로 가라. 나는 동쪽으로 간다.’ 고 하게 되면, 그것은 머지않아 멸망한 상태로 됩니다. 그러니까 조직과 단결과 행동, 이것은 사회의 모든 발전 요소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이 그 목적을 향해서 그러한 위치를 결정한 기준에서 상대 기준을 세워 전체가 일체화할 수 있는 그러한 것을 빨리 만들지 않으면 안 됩니다. 통일된 행동이 취해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어디에서도 번영합니다. 그것은 원칙인 것입니다. 혹시 일본 나라에 있어서 국책을 수행하는 데는 먼저 각자가 서 있는 기구를 결정하고, 그 조직권 내에 들어가서 자기의 위치를 결정하고서 전후․좌우․상하의 관계를 원만히 맺고 주체적 위치에서 왕도(王道)를 가게 되면 거기에 발전이 있습니다.
만약 그러한 입장에 서지 않고 한다면 한 사람을 중심으로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위기에 들든가 치안을 혼란시킵니다. 국가를 담당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만의 목적을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은 그러한 구별을 확실히 해서 조직권 내에 들어가 자기의 위치를 결정해야 합니다.
위치를 이동하고 그리하여 관계를 잃어버린 것이 타락의 근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동하지 않으면 타락의 시작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분명히 할 것은 위치를 알고 조직권 내에 들어가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가 반드시 상대 위치에 서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자기가 천적 작용을 할 수 있는 단결력을 거기에서 나타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을 여러분의 머리 속에서 언제나 잊어버리지 않도록 생각해 주기를 바랍니다. 알겠습니까?
첫째 무엇? 조직. 조직은 무엇 때문에? 위치를 결정하기 위해서. 둘째는 무엇? 단결. 그 위치를 결정한 기준을 중심으로 하여 자기는 주체에 대해서 대상의 위치를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가 됩니다.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의 목적을 갖고 하나의 세계를 향해야 합니다. 이렇게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목적을 향해서 가는 데는 통일된 행동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이 원칙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안 됩니다. 그렇게 하면 위가 누구인가를 확실히 압니다. 여러분들의 상하관계, 이것을 잊어버리면 아무것도 안 됩니다.
위는 누구냐? 최후는 누구냐? 가정을 중심으로 하고 생각하면 자기 아버지와 자기의 자식입니다. 전후관계는 자기와 처, 좌우관계는 형제인 것입니다. 그 범위를 넓히면 그런 입장이 됩니다. 남자와 여자는 전후관계, 선생님을 두고 말하면 전후관계는 나와 여러분 모두인 것입니다. 크게 하면 다 들어갑니다. 그러니까 자기를 중심삼고는 마음과 몸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거기에서 좌우의 팔을 움직입니다. 거기에 의해서 전후로 전진을 합니다. 혹은 역사적인 행동을 합니다. 그리고 이름을 남깁니다. 남긴 것은 자손에게 돌아갑니다. 그러한 관계로 되어 있습니다.
우주는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확실히 알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기에 반(反)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다 용납되지 않습니다. 거기에 반하는 경우에는 발달이라든가 발전이라든가 성장이라든가는 절대로 없습니다. 세포분열, 이 분열은 무엇이 분열하는가? 사방과 관계가 완전하게 되어 그 이상의 세포가 나타나려고 할 때, 거기에 관계할 곳이 없을 경우에는 다른 곳에 기준을 구해서 거기에서 새로운 세포를 번식하는 것입니다. 모두들 이 원칙을 잊어버리지 말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자신이 어떠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가, 어떠한 행동을 하고 있는가 곧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탄쪽인가 하나님쪽인가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웃사람에 대해서는 간섭할 권리가 없습니다. 잎이 줄기에게 이 줄기! 줄기! 줄기! 라고 하면서 불평을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줄기를 통하지 않으면 잎은 죽고 맙니다. 그렇기 때문에 줄기를 누가 문제삼을 수 있느냐 하면 뿌리가 할 수 있습니다. 뿌리는 당당히 줄기를 책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뿌리의 책임권 내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전개하여, 자기 웃사람이 잘못한 경우에는 나를 희생해서라도 그것을 살리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둘 다 죽어 버립니다. 하나라도 살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가지 자체를 잘라 버리더라도 우세한 쪽을 살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이 원칙입니다. 이것은 현대 민주주의 사상관 가운데 있는 개인주의의 사람들에게는 조금 어렵습니다. ‘너는 너고 나는 나다.’ 하는 식으로 모두 자기 자신의 기준에 서게 되면 세계는 분열해 버립니다. 분열해 버리고 최후에는 어떻게 할 수도 없게 되어 마지막에는 쓰러지고 맙니다. 그래서 현대의 문명은 모든 것이 최후에 가서는 전부 자기를 통해서 끝나 버립니다.
원칙에 반(反)하면 자연히 그러한 결과에 부딪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러니까 가지로서는 줄기에 대해서 불평해서는 안 됩니다. 줄기를 살리기 위해서는 자기는 스러져도 좋습니다. 희생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동양 정신에 충효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서양에 있어서는 현재 그것이 용납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떤 단계에서는 인간은 타락했으니까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떨어진 것도 떨어지지 않은 것도 마지막에는 울고 맙니다.
자기는 어디에 있는가? 가지라면 어떤 가지인가? 동쪽에 있는 가지인가, 서쪽에 있는 가지인가? 혹은 남인가 북인가? 사방 동서남북의 어느 방향에 서든가 중앙(중심)을 향해서 너는 무엇이냐?고 말하면 그 나무는 죽어 버리고 맙니다. 모두가 중심의 기준까지 가지 않으면 완전한 목적권에 설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모두가 본부를 중심으로 하여 조직하고, 이 중심의 줄기를 잘라 버려서는 안 됩니다.
자르려는 마음이라면 그것은 원리적으로 비판을 하려는 마음은 아닙니다. 그 비판을 하려면 위치와 단결과 힘, 그러한 방향성 그러한 위치를 알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자기를 중심으로 하면 그것은 뿌리도 없고 줄기도 없기 때문에 재가 되어 버립니다. 사탄은 그렇게 된 것입니다. 자기의 위치를 떠났기 때문에 모든 것을 사망권에 밀어 넣는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그것들을 확실히 알고 우리들의 가는 길이 어떠한 길인가 알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러한 것이 확실히 풀리면, 교회 중심이라고 하는 것, 그리고 자기 일개인의 감정문제를 버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열 사람을 대표하여 말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열 사람을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해서 말하는 것인가, 어느 쪽이 중심으로 인정될 것인가 하는 것을 곧 알 수 있습니다. 혹시 거기에서 판단할 수 없게 되면 그 대신 다른 방향으로 방향을 바꿔야 합니다. 자기 자신의 생각, 그것이 쫓아오게 되면 창문을 닫고 자는 편이 낫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렇게 철저히 자기 위치를 확보하여, 모두 주위로부터 우리를 겨냥해 가지고 틈이 있으면 끼어들겠다고 하는 사탄으로부터 자기 위치를 지키고, 최후의 승리의 목적권까지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백번 죽더라도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한 세계의 운명을 생각하여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러한 기준을 확실히 알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게 하면 이러한 단체를 움직여 가는 데 있어서 어떻게 움직여 가야 할 것인가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조직, 단결, 행동. 그것을 결정하는 위치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둘이 있으면 세계는 둘이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영원을 걸고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책임이며, 선생님이 그 책임을 가졌다면 여러분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책임입니다. 그것은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우리들이 이미 태어난 이 사실 자체는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으시지만, 어떤 조직권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나도 연결권 내에 들어가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살아서 하고 있는 행동, 이것은 그대로 가면 어디로 갈 것인가? 일단계 타고 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현세에 있어서는 각자에게 십자가의 길이 남아 있습니다. 각자가 그 죽음의 길을 타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은 개인의 십자가이고, 교회로서는 사회를 향해서 나아감에 따라서 나타나는 십자가이며, 혹은 일본이 세계를 향해 가려고 할 때 거기에서 나타나는 십자가로서 여러분은 그 세계적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러분이 나아가는 전방에는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다고 하는 것을 여러분이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 바로 앞에 서 있는 여러분은 용기와 자신을 가지고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것을 말해 둡니다.
다음엔 교회에 있어서의 문제, 그리고 여러분의 문제에 관해서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가인과 아벨의 관계는 어떠한 것인가, 알고 있어요? 절대로 하늘의 길에 서서 아벨이 밤이나 낮이나 여하한 명령을 하더라도 그 명령에 순종하고, 그대로 백 퍼센트 행동하기 바랍니다. 그러한 입장에 서 있다면 완전히 살아 있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것은 성장합니다. 이것이 원칙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살아 있느냐, 아니냐 하는 관점에서 자기를 관찰하여 언제라도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젊은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기분이 좋지만 그 반면 걱정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외아들이었던 아담 자식도 타락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아담 이상 선한 입장에 서 있습니까? 그렇지는 못합니다. 타락할 요소가 몇십, 몇백 배 여러분의 주위에 산재해 있습니다. 선을 언제나 직시하면서 이 한계를 빨리 넘어야 합니다.
원리원칙을 밟지 않으면 태평양에 날아가 버립니다. 태평양에 날아가 버린다고 하는 것은 알고 있어요? 여러분도 싸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때에는 채찍을 쳐서라도 선한 사람을 만들면, 그것은 악이 아닙니다. 사탄이 채찍을 가지고 쳐서 선한 사람을 사탄 편으로 가지고 가는 것은 최고의 악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채찍으로 사탄인 자, 최고의 악을 쳐 가지고 하늘의 왕자의 위치에 세우는 것, 그것은 선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반대로 알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만약 듣지 않는다면 채찍을 가지고 칠는지도 모릅니다. 일본의 불량배나 게으름뱅이라든가 혹은 사회를 어지럽히는 자를 쳐 버립니다. 일본을 놓고 바라는 것도 내 중심의 소원 때문이 아니고 세계를 바라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선생님을 보고 ‘아, 저 선생님은 한국의 선생님인데 일본을 원하니 이것은 국가적으로 봐서 나쁜데.’ 이렇게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일본을 원하는 것은 세계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세계를 원하는 것은 천주를 원하는 것이고, 천주를 원하는 것은 하나님을 우리들의 하나님으로 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일본, 한국, 경쟁하라. 일본이여, 지지 말라. 한국이여, 지지 말라. 미국이여, 지지 말라. 빨리 이기라. 세계를 사랑하기 위해서 일본을 필요로 합니다. 세계를 살리기 위해서 일본을 필요로 합니다. 필요로 하는 것은 안락한 자리에 세워질 수 없습니다. 세계에 섭니다. 큰 파도에 씻기웁니다. 부딪치게 합니다. 왜냐? 세계의 파도를 타고 넘기 위해서는 부딪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이 싫으면 도망가 버려야 합니다. 그러한 약자라면 필요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일을 해낼 수 있는 자신을 가지고 있어요? 일본의 모든 곳을 내 발로 걸어 보고 싶습니다. 한국에 있어서는 선생님이 가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그리고 눈물로써 밟고 그 땅을 구하고 선한 그 나라를 생각했습니다. 10년, 20년 그 가는 길은 변치 않습니다. 아무리 파도가 쳐 오더라도 의연히 서 있습니다. 암석과 같이. 커다란 암석은 몇천만년 거기에서 씻기울지라도 엄연히 서 있습니다. 그것이 굳으면 굳을수록 의연히 그 근본 자체에 가까운 형태를 하고 있습니다. 약하면 약할수록 구멍이 숭숭 뚫려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구멍이 숭숭 뚫려 있지 않습니까? 통일교회는 신념으로 합니다. 하나가 된 자는 아무리 몇천년 몇만년이 흘러도 그대로의 모습인 것입니다. 전일본을 빨리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나라로 만들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하지 않으면 선생님이 와서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어차피 ‘시켜 주십시오.’ 하는 것이니까, 선생님은 보자기를 여러분들에게 맡기고 돌아가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번 돌아갔다 와서 어떻게 되었는가 살펴보려 합니다.
그런데 ‘구멍이 뚫려 있었어요, 선생님! 이 보자기는 구멍이 뚫려 있었어요, 그래서 다 빠져나가 버렸어요.’ 이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구멍이 뚫려 있는가 어떤가 자기 자신이 보자기를 가져 보고 천년 만년이라도 쌀 수 있는 보자기라고 생각하면 구멍이 크게 되면 꿰매세요. 기워야 합니다. 천이 없어 정히 곤란할 때는 아무것이라도 좋으니까 붙여야 합니다. 그것을 어깨에 지고 걸을 수가 없다고 하면 바위 위에라도 다 가지고 와서 놓으세요. 그리고 싸는 것은 최후에 싸도록 하십시오.
일본을 망하게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일본을 구하자고 하는 것이 우리들의 입장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제1 조직, 제2 단결, 제3 통일된 행동을 취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심정문제는 자연히 여러분 가운데서 해결되어집니다. 그러한 것을 선생님은 바라고 기쁜 마음으로 돌아가렵니다. 선생님은 돌아가는 것을 대단히 기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렇지요?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고 희망에 불타서 선생님이 돌아갈 때, ‘나의 제1의 목적하는 계획이 실패했습니다. 면목없습니다. 선생님을 뵈올 면목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다음에는 이 면목없는 모양을 바꾸어서 당당한 모습으로 나타나겠습니다.’ 라는 생각을 갖고 대하기 바랍니다. 자기의 면목의 취지를 천지에 세우도록 간절히 바라는 바입니다.
지금까지는 교회에 관해서 얘기했는데, 이번에는 여러분을 중심으로 하고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자기가 승리하려면 복귀를 자기로부터 하지 않습니다. 밖으로부터 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계셔서 창조하실 때 자기로부터 창조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만물을 비롯해서, 그 만물도 가장 말단의 기초되는 것부터 만들어 나왔습니다. 복귀라고 하는 것은 재창조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부모를 뒤에 두고 사랑할 수 없는 원수를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복귀의 길입니다. 사탄이 ‘사랑하였다.’ 고 하는 증명서를 써 주지 않으면 자기의 부모가 계신 곳에 가서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원칙으로 되어 있으니까, 하나님은 지금까지 하나님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자식들을 희생시켜서, 열 번 사랑하면 열 번 이상의 희생의 조건을 사탄 앞에 세우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위신이 무너집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타락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고통스러운 입장이었습니다. 이것을 지금까지의 신자들은 몰랐습니다.
책임을 가진 이상 그에 비례할 탕감조건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되는 역사적 조건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대신으로서 세상 가운데 선 이상은 자기를 중심으로 한 자기 가정의 행복을 도모하여 소원을 이루는 것은 용납되지 않습니다.
그것들을 다 희생하고서라도 세계와 국가, 선한 하나님이 목적하시는 방향을 향해서 봉사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 지금까지의 선한 우리 조상들의 이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지금까지 자신의 가족을 희생해 왔습니다. 선생님에게는 많은 가족이 있고 선생님을 위하여 온갖 희생을 치르고라도 봉사하겠다고 하는 형제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가족에 대해서 천주복귀를 한다고 하는 입장이 얼마나 귀한가 하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내 가족에게 치러야 할 천적인 기준이 있기 때문에 말씀을 전하지 못하였었습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여러분은 와야 할 혜택권 내에 들어와 있습니다.
여러분은 가족에 대해서 아무리 전도하여도 사탄 편으로부터 참소받을 수 없는 단계에 와 있습니다. 이것은 선생님이 사탄에 대한 승리의 단계를 이미 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부터 여러분은 자기의 부모와 친척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그런 시대인 것입니다. 부모를 전도합니다. 자기의 형제를 전도합니다. 그래서 하나가 되어 하나님께 봉사합니다. 가족 전체가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러한 씨족을 만들고 뜻에 봉사합니다. 일체화하여 봉사할 수 있게 되면 그 씨족은 전민족을 움직이는 씨족이 됩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권내에 들어와 있는가? 그것을 만들기 위해서 여러분이 ‘아버지! 어머니! 나의 말을 들으시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여러분은 순수한 자식이 되어서 참된 효도를 할 수 있는 입장에 서서 생명을 걸고 부모에게 말씀을 드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매를 맞더라도 참고 나가면 때린 부모가 머지않아 자식에게 ‘내가 잘못했었다.’ 고 하며 부모 자신들이 무릎을 꿇고 사과하는 때가 옵니다. 그렇게 되면 그 집은 그 자식에게 복종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혹시 어버이에게 매를 맞아 상처가 나더라도 효도를 하는 순진한 자식이 되기 바랍니다. 어버이에게 매맞는 것은 고통으로 여기지 말기 바랍니다. 어려운 입장에 있으면 있을수록 그것이 최후의 영원한 승리를 결정하는 최고의 조건이 된다고 하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사람에게 쫓기는 것을 불행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환경으로부터 몰리더라도 불평하지 말아야 해요. 어차피 알게 되는 일인 것입니다. 그 때문에 죽게 되면 반대한 모든 자가 자기만이 아니고 자기의 자손, 친척 모두를 이끌고 와서 회개할 것입니다. ‘우리의 친척이 행한 모든 죄를 용서해 달라.’ 고 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구원인 것입니다. 알겠어요? 여러분은 마음을 합해서 가야 합니다.
우리들의 자녀 혹은 씨족은 우리의 손에 의해서 구원되어 갑니다. 지금은 모르고 있습니다. 나는 알고 있습니다. 사탄이 여기에 반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외침에 자신을 갖고 부딪치는 것입니다. 부딪칠 때 사탄 자신이 목을 조이는 것은 아닙니다. 제일 가까운 자를 통하여 목을 조입니다. 왜냐하면 가까운 자가 선두에 서서 목을 조여서 이기면 최후의 승리를 사탄이 얻기 때문인 것입니다. 만일에 승리하지 못하면 하나님 편에 양도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의 가장 가까운 자를 통하여 사탄은 역사하여 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허락하시는 것일까? 그 문제를 빨리 해결하려고 하는 목적이 있으므로 사탄을 가장 가까운 자에게 보냅니다. 알겠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자기의 가족이 원수가 됩니다. 빨리 결판을 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목적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10년간 싸울 분량을 일순간에 맞고 그것을 탕감해버립니다. 10년간의 수많은 고통을 한 몸에 끌어당겨 받습니다. 목숨만은 남기고 할 수 있는 한의 것을 하세요. 그래서 선생님은 그러한 기도를 합니다. 32억 전인류가 치를 수 있는 탕감으로써 선생님에게 반대하여 보라. 맞서 당당히 합니다. 그것은 여러분들만의 것은 아닙니다. 사탄이 플러스 되어 있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언제나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전법으로서 그 환경에서 1, 2, 3년까지 참고 견디어야 합니다. 3년간이 아니면 7년간. 그러나 3년을 지나면 내리막길이 됩니다. 이것은 원리가 그렇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의 가족을 복귀해야 합니다. 빨리 복귀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편안히 좋은 음식을 먹는다고 하는 것은 안 됩니다. 가정복귀를 하기 위해서는 달라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게 하면 ‘통일교회에 가는 것은 일찍이 들은 바에 의해 나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가 있는 자기의 자식들을 살펴보니까 무엇인가 변해 있고, 옛날에는 아버지가 말하면 뚱 해 가지고 얼굴을 찌프리고 눈을 치켜 뜨고 뉘집 자식인지 모를 정도였는데…’라고 하게 됩니다. 그 변화를 느끼게 됩니다. 적은 변화가 아님을 느낄 때 그 부모도 적극적으로 선두에 서서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여러분은 자기의 가족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러한 일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이 선생님의 가슴 아픈 일이었습니다. 선생님이 듣는 바에 의하면 선생님의 부모는 벌써 다른 세상에 가 계신 모양입니다.
그러나 지상이 귀중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젊은 사람들은 몸을 정히 보존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순종하는 깨끗한 마음, 깨끗한 몸이 깨끗한 어버이에 대하여 참된 효도가 되는 것입니다. 깨끗한 몸을 갖지 못한 자는 더럽혀진 자입니다. 그것은 깨끗한 자와 마주 대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회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어버이에게 자기의 진상을 고하고, ‘저는 이러한 자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를 맞이해 주시겠습니까?’ 하며 회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용서를 빌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자기의 몸은 귀한 것입니다. 이것을 더럽히지 말고 효도를 하라는 것입니다. 하늘에 봉사하는 그 책임을 가지고,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은 그 몸을 가지고 사탄의 사망권으로부터 탈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은 인간으로서의 최고의 목적이며 또 그것이 기준인 것입니다. 창조원리로서 말하면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자신이 그러한 입장에 서 있지 않으면 효도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고 회개하면서, 하나님 편에 용서를 구하고 자기의 어버이에게 효도를 다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선생님은 그렇게 하라고 명령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교회의 형제들이 자기의 가족들보다 가까웠습니다. 우리는 이미 아벨의 가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인의 가족을 끌고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가인의 가정을 빨리 복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은 가인의 세계에 있어서 효도하는 것이 아니면 장래에 여기 들어와서는 안 됩니다. 지방에 가서, 전일본에 가서, 효도하는 자를 찾아서 전도를 해야 합니다. 때가 오면 그러한 사람은 움직여 나옵니다. 또 형제가 함께 서로 사랑하는 사람을 찾으세요. 그런 사람을 골라내야 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여러분들도 가족을 데리고 들어오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아내는 남편을, 남편은 아내를.
부모끼리 정말 이 길을 죽더라도 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고 하면, 자식을 하나님 편에 데리고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부모의 사명을 다하지 못한 것은 알지 못해서인 것이고, 안다면 제물로서라도 데리고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은 채찍으로 치더라도 선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선생님은 어버이가 제대로만 서 있다면 자식이 구원되지 않는 일은 없다고 합니다. 만약 부모에 대해서 불효자가 있다면 내쫓아야 합니다. 그리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자를 자기 집에 데려다가 양자로 세우기 바랍니다.
하나님쪽에서 보면 그것이 바라시는 길일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정해져 있습니다. 그것은 선생님이 하나하나 자세히 설명하기 어려운 데가 있습니다. 사탄은 지금까지 하나님에게 속해 있는 선한 사람들을 얼마나 비참한 죽음의 경지까지 밀어내 왔던가? 이 방법을 반대 방면에 적용하여도 사탄은 참소할 수가 없습니다. 탕감복귀니까요. 여러분들은 악에 대해서는 가만히 있지 못하는 공분(公憤)이, 공적인 생각이 있습니다. 가정을 파괴하는 것 같은 가혹한 일을 하고, 불화를 일으키는 그런 형제 따위는 불유쾌한 것입니다. 가정의 울 밖으로 밀어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여러분의 가정을 구하지 않으면 아니 되겠습니다. 남은 사명을 생각합시다. 이만한 수라면 이 배후에는 그 가족들이 십 명 백 명 가량이라도 달려 있습니다. 전도되지 않는 일은 없습니다. 우리들은 책임감과 행동에 의한 생활로서 관계를 맺고, 생활권 내에 있어서 그 결실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어버이에 대한 효도입니다. 그런데 형제로서 서로 사랑하지 못한다면 안 됩니다. 가정은 효도하는 자를 중심으로 하여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부모나 형제는 어떻게든지 됩니다. 그래도 움직이지 않으면 그 가정이 문제가 되어집니다. 그리고 하나님 편에서 쳐 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식에서 교회와 개인의 문제에 대한 책임을 가지고 해결하도록 하기 바랍니다. 선생님이 지금까지 더듬어 온 길을 생각하여, 여러분이 하지 않으면 안 될 중대한 점을 이야기하였으니, 아무쪼록 그런 방면에서 힘을 다하고 하늘에 대해서 효도를 행하고 충성을 다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버지의 가시는 길이 얼마나 십자가의 길인가 하는 것을 저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이루 측량할 수 없는 역사노정에 있어서,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쓸쓸하고 혹은 억울한 입장에 서시어, 또 참지 않으면 안 되는 아버님의 그 심정을 가르침받아 잘 알았습니다.
과거의 저희 선조들의 잘못을 지금 현재의 입장에서 저희들이 회개하고, 현재의 환경에 있어서 아버지께서 지시고 있는 수많은 십자가를 일본에 있는 저희들이 짊어지고 장래의 길을 개척하여, 역사적 선각자의 위치에 서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중대한 사명이 있는 것을 확실히 알았습니다.
역사를 볼 때 저희들이 눈물과 땀과 피를 흘리지 않으면 안 되겠사옵니다. 이 현세에 있어서 그러한 십자가의 길을 저희로부터 걷기 시작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 져 오신 십자가를 인계하여 당신을 쉬시게 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을 확실히 알았습니다. 모여 있는 수많은 일본의 형제가, 그 젊은 가슴에 한없는 소원을 가지고 장래 여하한 곤란한 일이 있어도 아버님에 대해서 한없는 효행을 하겠다고 하는 신념을 가지고 있사옵니다. 아무쪼록 당신의 심정에 합당한 승리의 기준을 세워 최후의 싸움의 한복판에, 아버님에 대한 충효를 했다고 하는 증명을 받을 수 있도록 아버님이여! 축복하시고 인도하여 주실 것을 간절히 바랍니다.
이 밤, 이러한 집회를 열고 저희들에게 필요한 모든 말씀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제부터 어느 만큼의 기간에 있어서는 이러한 시간이 저희들에게 없을지도 모릅니다. 아무쪼록 더욱 아버님에게 가깝게, 아버님이 원하시는 입장에서 천적인 사명을 다하면서, 장래의 희망과 더불어 새로운 이러한 집회의 시간을 마음속으로 사모하면서, 아버님이 바라시는 기쁨의 세계를 저희로부터 성취할 결의를 하면서, 이러한 시간을 머지않아 맞이할 수 있기를 바라오니, 아버지께서 그러한 은혜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헤어져도 아버님의 마음 가운데 있다고 하는 것을 저희들은 잊어버려서는 안 되겠습니다. 어떠한 곳에 있더라도 아버님은 하나의 기준을 갖추어 저희를 주관하고 저희를 보호하고 계신다고 하는 것을 잊지 말고, 맡겨진 책임을 다하며, 충성심을 가진 하늘의 정예가 될 수 있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최후의 승리적 단계에서 아버님의 영광을 보고, 개가를 함께 들을 수 있는 아버님의 참된 아들과 딸이 될 수 있도록 키워 주시기를 바랍니다.
만나는 그날까지 이들의 길을 인도하여 지켜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이 기도를 참부모님의 이름을 통하여 당신 앞에 바칩니다. 아멘.
긴 여행길 가운데 함께하여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여러분들이 많은 기도를 해 주어서 무사히 돌아오게 된 데 대해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그동안 전세계를 돌아보면서 새로운 사실을 많이 보았고 새로운 일과 많이 부딪쳤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 그 모든 것을 다 이야기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이야기는 차후로 미루고, 이 시간에는 그동안 세계를 돌면서 느낀 것 가운데 우리들이 앞으로 가지 않으면 안 될 분야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늘과 땅이 다시 수고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서 잠깐 동안 ‘하늘과 땅이 기필코 찾아가야 할 곳’이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장내가 좁기 때문에 상당히 불편하겠지만 조용한 가운데 함께 은혜의 분위기를 조성해 주기 바랍니다.
오늘날 개인이나 가정이나 우리나라나 더 나아가서 전세계를 막론하고, 현재의 생활과 환경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될 것임을 모두가 공인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본래 하나님이 계셨고 그분이 경륜하신 뜻이 있어서 그분의 뜻대로 되었더라면, 오늘날과 같은 현실은 벌어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계시는 데도 불구하고 이와 같이 되었다면, 여기에는 하나님이 아닌 어떠한 다른 존재의 개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들은 타락한 세계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긍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타락되었기 때문에 현실을 부정하고 내일의 새로운 희망을 향하여 개척자의 사명과 투사의 사명을 갖고, 싸움의 노정과 역경의 노정을 거쳐 나가지 않으면 안 될 세계사적인 운명과 현실적인 사정이 있음을 부정할 도리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세계를 그냥 방치해 둘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땅 위의 수많은 인간을 이끌고, 하늘과 땅이 가지 않으면 안 될 곳을 향하여 지금까지 더듬어 나온 걸음이 인류의 역사요, 섭리의 역사인 것을 우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본래 하나님께서 경륜하셨고 하나님의 소망대로 이루어진 사회와 세계, 즉 만민이 공히 가질 수 있는 하나의 본향 땅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 본향땅에서 심정의 터전을 세워 사랑하는 부모와 더불어 인연을 맺고, 그 부모를 중심삼은 형제의 인연을 갖추어 가지고 하나의 가족, 씨족, 종족, 민족, 국가형태를 거쳐 하나의 새로운 세계를 이루는 것이 오늘날 인류가 요구하고 소망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창조목적이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목적을 세계가 성취되지 못하게 된 것은 누구 때문입니까? 우리 인류시조가 사탄의 유혹으로 말미암아 실수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환경을 벗어나기 위해 싸워 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싸워 나오신 이유도 여기에 있음을 지금까지 역사노정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한국을 찾아 나오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만방에 널려 있는 수많은 민족과 수많은 국가들도 찾아오셨다는 사실도 알 수 있습니다. 현재까지도 찾아가지 않으면 안 될 하나님의 노정이 남아 있습니다. 인류와 더불어 하나의 최종 목적점을 향하여 가야 하고, 또 그 인류를 지도하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계신 분이 하나님임을 우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늘은 땅을 향해 찾아 나왔고 인류는 하늘이 소원하는 목적을 향하여 따라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이 목적하는 것과 인류가 목적하는 것이 일치되어 그 방향이 같아야 할 텐데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역사 과정에서 목적의 일치점을 보지 못하였고, 방향의 일치점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역사노정에 있어서 수많은 선조가 수고하였지만, 그 수고는 목적을 위한 수고가 되지 못하였고, 뜻과 일치될 수 있는 영원불변한 하늘의 승리의 터전이 되지 못한 채 흘러가 버리고 말았던 사실을, 이번에 세계를 순방하면서 처처에서 절실히 느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사를 보게 될 때, 아담가정에 있어서 아벨과 가인을 중심삼고 하나님은 아벨을 찾아서 소망의 기점으로 삼아, 하늘 본래의 크나큰 목적을 세우려고 하였던 것이 하나님의 발걸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역사적인 노정에서 섭리를 대하게 된 아벨이 이것을 감당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또 찾아오시는 하나님 앞에 필요한 터전을 준비하지 못한 연고로, 가인과 아벨의 싸움이 벌어져 아벨을 중심하고 아담가정을 찾아오셨던 하나님의 목적과 하나님의 방향은 어긋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을 중심하고 생각해 볼 때, 우리가 요구해서 하나님이 찾아오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셔서 우리를 찾아오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입장에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 인간이요, 이러한 환경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이 타락 인간의 사명과 책임입니다. 찾아오신 그분을 모시는 것이 우리의 본연의 의무이고, 또 그분이 찾아오시는 길에 어려움이 있으면 이것을 제거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인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선조 가운데 그러한 분이 한 분도 없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벨 자신도 하나님께서 찾아오시는 길을 몰랐고,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터전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아벨 자신이 하나님의 목적과 하나님의 방향과 일치하지 못하였고, 더욱이나 가인 아벨이 형제관계인데도 불구하고 싸움을 벌인 연고로, 하나님의 방향과 목적은 그때에 빗나가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다시 노아를 찾게 되었습니다. 노아가 120년간 수고해 나왔지만, 그 수고한 배후에는 노아보다도 더 큰 수고를 하신 하나님이 계셨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루도 아닌 120년의 긴 세월을 수많은 원수들이 조롱하고 영접하는 사람도 없는 그런 환경에서, 하나님이 고대하시는 한때와 한 목적을 바라보면서 따라 나가는 노아를 바라보시던 하나님의 심정은 얼마나 애달프셨겠는가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찾아오시는 그 걸음을 노아 자신도 몰랐고, 또 노아가 가야 할 길을 노아의 가정이 몰랐던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시대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담당하고 역사상에 나타난 모든 개인이나, 가정, 또는 인연되었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 앞에서 해야 할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께 슬픔을 자아내게 했던 사실을 우리들은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노아가정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성취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또다시 아브라함으로 연장되어 모세를 거쳐 예수님까지 4천년이라는 기나긴 역사를 거치면서, 하나님은 개척자의 사명을 가지고 찾아오셨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4천년 동안, 그리고 지금까지 찾지 못했던 그 한 날을 바라면서, 선민 이스라엘권을 세우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얼마나 수고해 나오셨던가 하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4천년간 하나님은 끊임없이 수고하셨고, 하나님은 끊임없이 배척을 당하셨으며, 하나님은 마음 편히 쉬지 못하셨습니다. 우리의 선조와 이스라엘의 선조들은 하나님께서 슬퍼하시고 고통을 당하시는 그 시간에도 하나님을 위로하기는 커녕, 하나님을 배반했다는 사실을 생각하여야 되겠습니다. 4천년간 이 배반하는 민족 가운데서 하나님을 맞이할 수 있는 한 사람의 대표자, 전역사노정을 두고 닦아 온 그 터전 앞에 하나님을 환영하는 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한 민족을 두고 하나님의 수고에 대하여 감사할 수 있는 민족을 대표하고 이 땅을 대표하여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세계사적인 한 분, 하나님의 고통을 위로해 드릴 수 있는 한 분의 중심존재, 하나님의 목적과 방향을 일치화시켜 그 목적을 종결짓기 위해 전체적인 사명을 짊어지고 오신 그 한 중심존재가, 하나님께서 4천년간 수고하여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였음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4천년 역사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슬픔을 해원하기 위한 존재요, 하나님의 목적과 방향을 일치시키기 위하여 오셨던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은 그분의 방향을 따라가고, 그분의 목적을 이어받아 자기들의 지금까지의 과오를 시정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분이 지향하는 그 목적과 방향에 일치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예수님대로 가지 않으면 안 될 역사적인 서러움의 한때를 맞이해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인류에게 있어서 말할 수 없는 비통한 사실로 남아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연고로 예수님이 왔다 간 지금까지 여전히 수고의 역사노정을 책임지시고 개척자의 사명을 감당하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서 계신 분이 하나님이신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이 땅을 2차로 수습하여 오늘날 전세계적인 발전을 가져오기까지, 하나님께서는 배후에서 얼마나 많은 피눈물과 땀을 흘렸겠는가 하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사를 중심하고 볼 때, 역사의 도상에서 모든 선지선열들이 피를 흘리며 하나님이 소망하시는 목적을 향하여 발판을 넓혀 나온 데 대해서는 감사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하나님께서 이들을 대할 때마다 소망의 한때를 바라보며, 그 뜻을 지향하는 간곡한 마음 앞에, 혹은 정성과 충성을 다하며 죽음의 길을 갔던 그들을 대하는 하나님은 말할 수 없이 슬프셨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또한 4천년 동안 수고하여 터를 닦아 놓은 이스라엘 민족이 깨져 버리고, 이방 민족을 내세워 다시 수습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 하나님의 더 큰 슬픔이었음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는 개척자의 사명도 맡아 오셨습니다. 지금까지 이 땅에서는 하나님을 환영하기 위해 길을 닦고, 하나님을 안식시키기 위한 터전을 마련한 진정한 무리, 진정한 하나의 존재가 없었던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들은 오늘날 이러한 하나님의 입장을 생각하면서, 2천년 역사 가운데 숨겨 있는 기독교의 비참한 역사는 하나님을 수고시키고 괴롭게 했던 역사인 것을 더욱 잘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는 수많은 교파로 갈라져서는 안 됩니다.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상하․좌우․전후가 일치되어 하나님께서 지향하는 섭리의 목적과 방향을 놓고 어느 시대, 어느 시기를 막론하고 일치되어야 할 것이 기독교도들의 사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까지 하나님이 지향하는 방향이 어디인지,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 채 역사와 더불어 뒤넘이치면서 현재까지 끌려 나왔던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목적과 일치되고 지향하시는 방향과 일치가 되었다면, 오늘날 기독교가 이렇게 무기력하게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의 목적과 방향에 일치되고, 하나님께서 찾아오실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여 위로할 수 있으며, 그 앞에 효성의 도리를 세우고 충성의 법도를 세워야 할 책임자로 오셨던 분이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내심에 품었던 심정을 누구에게도 토로하지 못하고 그대로 가셨다는 것입니다.
하늘을 보니 하나님의 크나큰 수고의 고비가 남았고, 땅을 보니 방황의 무리가 남아 있는 것을 바라본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을 위로하시기 위하여, 땅 위에 방황하는 인류를 지도하기 위하여 다시 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재림이라는 명사를 미래의 어떤 목표점에 걸어 놓고 다시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는 신부가 되라고 권고하셨던 것이며,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는 자녀가 되라고 분부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충성의 도리를 닦아 가라고 분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 같이 하나님과 예수님으로부터 출발할 수 있는 하나의 기점이 이 땅을 중심삼고 결정지어지지 못했기 때문에 이 세계는 우리들이 원치 않는 세계가 되었고, 기독교는 하나님과 예수님이 요구하는 기독교가 되지 못한 채 굴러가고 있는데, 이러한 현실의 오늘이 끝날인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시점에서 우리들이 다시 한 번 회고해 보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이 땅을 향하여 어떠한 사람을 부르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학식이 많은 사람을 부르는 것도 아니고, 세계를 호령하는 권위를 가진 사람을 부르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찾아 나오시는 그 길이 십자가의 길이라면, 십자가의 길을 평지로 만들어 놓을 수 있는 무리를 부르실 것입니다. 또 그 길이 가시밭길이라면, 그 가시밭길을 개척자의 사명을 갖고 책임질 수 있는 무리를 부르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중심삼고 하나님이 찾아와 주기를 바라는 사람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충신의 도리와 효자 효녀의 도리를 다하여 6천년의 기나긴 세월을 두고 수고하신 하나님의 슬픔과 고통을 위로할 수 있는 사람을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심정적으로 얽어매어 떨어져 갈래야 갈 수 없는, 역사 이래 없었던 하나님의 심정적 기준의 자리에 설 수 있는 참다운 자녀의 입장을 결정지어야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인류가 최후로 가야 할 역사적인 목적지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 시간에도 하늘을 향하여 울부짖는 심정을 토해 내어도 풀리지 않는 한을 품고 있습니다. 또한 남이 모르는 개척자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우리는 주야로 분투해 오고 있습니다. 오늘 나의 기력이 미진하거든 내 맹세의 조건을 믿음의 조건으로 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야 할 것이며, 기필코 하나님께서 가야 할 길을 닦는 자신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6천년 역사를 통하여 수많은 무리와 교단들은 지금까지 하나님께 자신의 구원과 안식의 길을 요구하여 나왔지만, 오늘 우리 통일가의 무리는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찾아 나오신 하나님 앞에 자기의 면목과 체신을 세울 수 없는 부끄러움을 느끼면서, 이 나라와 세계에 남겨진 가시밭길과 골고다의 길을 개척하는 선봉자가 되어, 하나님께서 감당해야 할 수고의 터전을 자신이 대신 짊어지고 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가실 가시밭길을 내가 대신 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찾아오실 때, 자기를 통하여 안식의 한 시간, 안식의 하루를 찾아 드리겠다고 하는 무리가 되지 못한다면, 하나님께서 어디로 가실 것인가 하는 문제에 봉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역사적인 사조와 실증적인 사실로 보더라도 개인주의 사상이 창일(漲溢)한 이 시대에 있어서, 자기를 전체 앞에 희생의 제물로 내세우고자 하는 사람을 찾아보기가 점점 힘들게 됩니다. 이러한 현상은 사회의 모든 면에서 나타나고 있으며, 또 이와 같은 사회적인 여건에서는 하나님께서 찾아오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단연코 자신이 하나님께서 수고하실 그 길을 책임지고 개척하여 오시는 그분 앞에 길잡이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해야 합니다. 그분이 입고 오시는 옷에 더러운 흙이 묻을까 봐 염려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분 앞에 걱정거리의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나님 앞에 충성을 다짐하면서 오시는 그분의 앞길을 준비하는 데 있어서 잘못이 있을 때에는 ‘아무개야 네가 그래서는 안 된다.’ 고 하면서 함께 염려해 줄 수 있는 무리를 세계 인류 가운데서 찾아 하나님 앞에 세워야 하는 것이 지금까지의 수많은 종교인의 책임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세계를 돌아볼 때 그러한 경지로부터는 점점 멀어져 가고, 그 본위의 궤도에서 이탈하고 있는 것을 여실히 느낄 수 있습니다. (중략)
통일신도들에게는 창조이념을 표준으로 하고, 그 방향을 포착하여 지상에서 하나의 승리를 결정지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고생을 하려면 충성을 다짐하고, 그 충성의 맹세를 실천할 수 있는 한 사람의 사나이면 사나이, 한 사람의 아낙네면 아낙네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의 뜻과 목적에 대한 소망이 있고, 땅에 부딪쳐야 할 사정이 있고, 우리와 부자의 인연을 맺어야 할 심정을 갖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소원과 사정과 심정이 연결된 노정을 우리가 맡으려면 지금까지 가는 길을 멈출 수 없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기꺼이 분부하실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분부하실 수 있는 여건이 이 시대 역사노정에 없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앞에서 ‘나에게 명령을 내려 주시옵소서.’ 하고 명령을 자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한 것을 볼 때 예수님과 하나님의 뜻은 서로 거리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정이 달랐습니다. 심정적인 기준이 달랐습니다. 때문에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시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은 하늘땅이 찾아가야 할, 절대적으로 이루어야 할 뜻입니다. 그것을 이루어 드려야 할 한 사람이 나타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수많은 역대의 선지자를 통하여, 또한 예수를 통하여 이 땅 위에서 인류로 하여금 이념과 심정과 생활이 일치할 수 있는 자리에서 찾아 이루어야 할 본연의 한 표본으로서 하나님을 시봉하는 도리를 세우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막연한 거리를 두고, 불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지금까지 이어 나왔음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현시점에서 우리에게 책임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뜻을 위해 나아갈 때 어떻게 가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벨과 같이 죽는 자리에 서서는 안 되고, 함과 같이 노아의 전체적인 뜻을 전복시키는 자리에 서서도 안 되며, 아브라함과 같이 3제물을 실수하던 것과 같은 자리에 서면 안 될 것입니다. 또 모세가 반석을 잘못 쳐서 실수하던 자리,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여 만약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하던 그런 환경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느것을 중심삼고 나가야 하느냐? 예수님과 같은 그 자리보다도 더 앞선 확고한 중심을 찾아야 합니다. 이때가 끝날입니다. (중략)
우리는 하나님을 중심삼고 예수님이 세계를 향해 개척자의 사명을 하려고 했던 것을 내가 대신 하겠다고 하면서 나설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동으로 서로 세계 만민을 구하기 위하여 가보고 싶었지만 가지 못했습니다. 이 땅을 찾아오시는 하나님 앞에 책임지고 그 길을 닦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실 길을 미리 알아서 그 길을 닦고 ‘이 길로 오셔서 쉬소서.’ 할 수 있는 자리까지 나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한을 품고 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하늘이 요구하고 땅이 요구하는 최종 기점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나를 찾아오셔서 갈래야 갈 수 없고 어떻게 할래야 할 수 없는 기점, 즉 하나님의 갈 길과 하나님의 할 일을 내가 책임지고 하나님을 안식시킬 수 있는 하나의 터전입니다. 그것을 이 땅 위에 닦아 놓아야 합니다.
이것은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6천년 동안 수고해 나오신 길은 영광의 길이 아니었습니다. 만민을 위하여 피와 땀을 흘리시며 사망의 고빗길에서도 그들을 구해 주려고 하셨던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항상 배척을 받으시면서도 그런 환경을 찾으시고 지긋지긋할 정도로 수고하시면서 개척자의 사명을 해 나오신 하나님을 예수님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를 등에 지고 골고다산정을 향하여 가실 때에, 누차에 걸쳐 그 무거움 때문에 지쳐 쓰러지면서도 ‘내가 쓰러지는 것이 분하오나 하나님이여! 저들을 용서하옵소서.’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효의 도리를 다하지 못한 채 열두 차례나 쓰러지면서 그때마다, ‘내 피를 다 바쳐 아버지를 위하지 못하고 효성을 다하지 못하였기에 이 길을 가는 것이다.’ 하는 마음을 품고 갔기에 사탄이 하나님 앞에 참소의 조건을 세울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충성을 다하고 생명을 바친 예수님 앞에서는 아무리 사탄이라 할지라도 참소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부활의 역사가 이루어짐으로써 기독교 신앙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가 아들을 두고 떠나갈래야 떠나갈 수 없고, 자식이 헤어질래야 헤어질 수 없는 것이 천륜입니다.
그리하여 다시금 이 땅에 이루지 못한 그 뜻을 책임지고 이룩하기 위해 오시는 분이 바로 재림 예수입니다. 그분이 이 땅에 찾아오셔서 하나님을 위로해 드릴 수 있는 도리를 가르쳐 주고, 하나님을 대신하여 책임질 수 있는 도리와 자녀의 도리를 가르쳐 주게 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요구하지 않는 모든 활동과 조건을 제거시킬 수 있는, 즉 모든 환경을 수습 할 수 있는 승리적인 존재가 곧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중심존재인 것입니다.
지금까지 통일의 역군들은 선생님을 만난 것이 일면 한이 될 때가 올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여러분이 남모르는 역경의 길을 지금까지 걸어온 것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기뻐서 따라온 사람도 있을 것이고, 환경에 몰려 마지못해 따라오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천태만상의 형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각자 처해 있는 입장에서 자기에게 맡겨진 시대적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느냐, 천지가 공히 요구하는 그 목적 앞에 방향을 일치시키고, 하나님 앞에 보답함과 동시에 위로의 조건을 제시할 수 있는 내가 되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아직도 거리가 먼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중략)
지금까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오오, 하나님은 보좌에 계시니 천지 만물이 경배할지어다.’ 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되어 있을 것 같습니까? 자기의 아들딸이 사지경각에서 죽어 가고 있어 장송곡을 불러야 할 입장이며 천지의 피조물이 신음하고 있는데, 하나님만 ‘오오, 너희들 잘 노는 구나.’ 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이라면 인간과는 무관하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타락한 세계에서 부모의 심정을 그 자녀가 체휼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천지를 창조한 본연의 아버지께서 자식을 대하시는 깊은 심정이 얼마나 클 것인가 하는 것을 그들이 알 도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백번 천번 죽더라도 하나님께로 돌아갈지어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욕망과 내 소망은 하나님을 중심삼고 움직여야 할 것이며, 당신이 한 날을 편안하게 계실 때에 나는 한 시간을, 아버지께서 천년을 안식할 때에 나에게는 일년의 평화가 있기를 바라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분이 억천만세토록 영광을 노래할 때, 나는 그로 말미암아 한 생의 기쁨을 누리고 즐기겠다고 생각하는 기독교인을 하나님은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교단을 위주한 신앙생활을 하는 기독교인은 원하지 않습니다. 선생님도 통일교회라는 간판을 붙이고 있지만, 이 간판을 언제나 떼어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여러분들이 통일교회 사람들이라고 주목을 받고 있겠지만, 그 주목이 삼천리반도에서 언제 사라지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세계에 널려 있는 우리 식구들은 하나님의 맺힌 한을 풀고자 이를 악물고 노력하고 있고, 하나님의 고난길을 대신하여 나서겠다고 충효의 심정으로 뛰고 있습니다. 이 일을 하다가 쓰러지는 것을 최고의 기준으로 결의하고 나가고 있는 무리가 통일교회 식구들입니다. 이렇게 가는 길이 복된 길입니다.
그러나 세계를 바라볼 때 기독교인들은 재림 예수가 이스라엘 민족 앞에 다시 오겠거니, 또는 갈리리 바닷가나 감람산으로 오시겠지 하고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탄을 굴복시키고 충효의 도리를 할 수 있는 사람을 그리워하고 계십니다. 지옥이 그리워서 우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땅이 문제가 아닙니다. 이번에 감람산을 가 보았는데, 그 감람산이 문제가 아닙니다. 감람산을 움직여 하나님 앞에 충효의 도리를 세울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인의 수는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몸이 되어 하나님의 명령에 언제 어디든지 가겠다고 결의하는 사람, 하나님께서 기쁜 마음으로 ‘명령을 기다리라.’ 고 분부하고 싶은 그런 사람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몇 억의 신자를 자랑하는 기독교인들 가운데서 과연 그런 사람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옆구리에 칼을 들이대고 ‘너를 하늘의 제단에 희생물로 바치고자 하니 생명을 바칠 테냐?’ 할 때 그 고비를 넘지 못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생명을 걸어 놓고 하나님을 위한 효성에 불타는 사람, 하늘을 걸고 뒤넘이 칠 수 있는 그런 무리가 이 시대에 필요합니다. 이런 무리가 끝날 하늘의 혁명군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늘 여기에 모인 여러분들은 여기에 오는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스승을 만나 보는 것도 중요한 일인지 모르지만, 여러분이 선생님을 만나는 것이 신앙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선생님을 만나 보고 다시 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직도 더 가야 할 슬픔의 길이 남아 있기에 여러분은 그 길을 가야 합니다.
온 세계 인류 앞에 그러한 책임을 다할 수 있는 철두철미한 사상과 일치하는 개인, 가정, 민족, 국가가 어디에 있느냐고 하나님은 찾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그러한 개인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러한 개인은 하나님의 심정을 위로해 드리고, 하나님 앞에 충성의 도리를 다하고 효성을 다해야 합니다. 하늘땅의 모든 사정을 풀어 헤쳐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이 시대 앞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자가 너로다. 너를 바라보니 내일을 소망할 수 있고, 너를 바라보니 오늘의 싸움을 승리로 이끌어 갈 수 있겠구나.’ 하실 수 있는 한 개인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개인이 절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개인을 하나님께서 붙드시고 ‘너는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요, 심정 중의 심정이로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역사상 선조가 많고 시대적으로 인류가 많다 할지라도 심정을 중심삼고 ‘너는 역사에 있어서 전무후무한 최고의 조상의 자리에 있다.’ 할 수 있는 분이 이 지상에 나타나지 않는 한, 인류조상의 타락으로 인한 슬픔의 역사는 청산될 수 없는 것이며, 그 속에 태어난 우리들은 또다시 어떤 부모를 모시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정적인 기반 위에 충효의 도리를 다해야 하는 그분은 하나님께서 부여해 주신 전부를 일치시키고, 도(道)의 심정세계에 있어서 하늘땅을 대표한 부모의 위치를 결정지을 수 있는 자리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그러한 기준을 바랐기 때문에 신랑 신부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신랑은 아버지를 말합니다. 타락하지 않은 아버지의 기준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 신부는 타락하지 않은 어머니의 기준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타락하지 않은 참부모로서 그 창조이상을 이루기 위하여 끝날에 있어서 신랑 신부의 이름을 남겨 놓았던 것입니다.
신랑 신부는 심정을 일치시켜야 합니다. 심정을 일치시키는 데 있어서는 본래 하나님의 슬픈 마음을 개입시켜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역사적인 모든 슬픔을 제거해 버리고 역사의 소망을 성취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뜻 앞에 성취의 길을 갈 수 있는, 가면 갈수록 하루하루 기쁨이 넘치는 환경 속에서 일치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가야 하고, 전인류가 절대적으로 가야 할 곳, 그곳이 어디입니까? 하나님의 한을 풀어 드릴 수 있는 곳을 찾아 기쁨과 소망의 날을 이루어 하나님 앞에 바쳐 드리며, 심정적인 기준에 있어서 조상의 위치에 서야 합니다. 그러한 위치를 결정짓지 않으면 이 세계에서 어떠한 심정의 안식처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을 결정짓지 않게 될 때는 평화와 행복의 터전은 지구상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견지에서 보더라도 사랑의 중심은 신랑 신부의 이름을 중심삼고 나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될 수밖에 없는 것은, 하나님을 중심삼고 볼 때 하나님이 찾아온 참된 인류의 조상, 즉 참된 인류의 부모가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는 비원리적 기준, 비원리적 핏줄로 인한 모든 비원리적 요소를 제거하고 새로운 참된 부모의 혈육으로 다시금 인연맺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무엇이겠습니까? 구원은 복귀입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중심삼고 천지를 유린한 사탄을 굴복시키는 것입니다. 사탄을 중심으로 빚어 내려온 역사적인 모든 내용을 청산하고 비원리적인 세상 부모의 심정 이상으로 하나님 앞에 효성을 하고, 하나님이 가시는 길 앞에 행복의 터전을 닦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사람만이 하나님과 일치가 되어 그 자녀의 인연을 맺어 나갈 수 있습니다.
이제 인류는 참부모를 찾아가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그 참부모 앞에 효성의 도리를 다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아담 해와는 하나님 앞에 효성의 도리를 다하지 못했습니다. 본래는 하나님께 효성의 도리를 다한 후에 자녀들을 번식하여, 그 자녀들로 하여금 효성의 도리를 이어 받들게 해야 했습니다. 즉 하나님을 중심한 심정적인 법도의 종족이 나타났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하나의 종족을 세우기 위해서 지금까지 6천년 동안 역사해 나오셨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역사에 아들의 도리를 세우기 위해 양자의 환경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의 인연이 거듭 연장되어야만 세계적인 인연을 연결시켜 복귀할 수 있는 터전이 마련되는 것이기에, 개인적인 아벨을 세우려면 개인적인 가인이 필요하고, 가정적인 아벨을 세우려면 가정적인 가인이 필요하고, 국가적인 아벨을 세우려면 국가적인 가인이 필요하며, 세계적인 아벨을 세우려면 세계적인 가인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두 패로 갈라지게 됩니다.
여러분은 아벨적인 세계가 어떤 세계인가 하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아담에 대해서 ‘아담아! 너는 하나님의 심정을 유린하고 천륜을 어기고 하나님의 자녀된 위치를 유린했다.’ 고 하며 심판할 자격을 가진 분이 있다면, 그분은 역사상의 만민에 대해서도 심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분을 찾아서 그분으로부터 도리를 배워서 그분이 슬퍼하면 자기도 슬퍼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에게 참부모의 도리를 결정짓게 한다면 참부모가 가야 할 십자가의 길, 참부모로서 책임져야 할 십자가를 우리가 책임져야, 충효의 도리를 세울 수 있고 효자 효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전통이 수립되는 것입니다. 태풍이 불어오고 사방이 요동하는 환경이 될지라도 상하․좌우․전후의 인연을 철석같이 붙들고, 여기에 침범받지 않는 절대적인 기준을 세워야만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침범받는 자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인류가 찾아가야 할 곳은 어디입니까? 고향을 찾아가야 합니다. 고향을 찾아가서 부모를 만나야 합니다. 지금까지 이상주의니 무슨 주의니 하는 것은 다 그 과정에서 지팡이 노릇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부모를 만나서 무엇을 할 것입니까? 부모의 참다운 사랑의 인연을 가지고 그 부모의 사랑을 백 퍼센트 받을 수 있는 자녀가 되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절차를 밟아야 합니다. 이 절차를 가르쳐 주기 위해서 오시는 분이 재림주이십니다.
만민은 공히 그분에게서 절차를 배우고 그분에게 접붙임으로써 그분의 뜻을 대행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을 참감람나무라고 하시며 접붙임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참다운 부모로 말미암아 참다운 가정, 참다운 종족, 참다운 민족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다운 국가가 문제입니다. 예수님도 나라가 있었더라면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일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가 되어 예수님 앞에 철석같은 효성의 도리를 하였더라면, 로마가 아무리 내리쳐도 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중략)
예수가 죽은 후 400년 동안 로마는 사기 등등하여 기독교를 삼키려고 호령했지만 결국은 거꾸로 흡수당했습니다. 예수님이 살았더라면 로마를 40년 내에 정복했을 것입니다.
그러한 예수님 앞에 어찌하여 가정이 없었느냐? 예수님은 본향 땅에서 나의 아버지 어머니라 할 수 있는 부모가 없었습니다. 하늘에 있으면 땅에도 당연히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내가 너희들의 아버지.’ 라고 결정지을 수 있는 싸움에서 승리의 터전을 남기고 가야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이어받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지 못한 한을 남겨 두고 가셨기에 해원해야 할 목표를 세워 다시 오셔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억울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중심삼고 역사해 가실 수가 없으며, 그런 의미에서 선생님이 하는 일을 알아주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찌하여 부모, 즉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하늘의 법도를 친히 가르쳐 주지 못했을까요? 본래 타락하지 않았으면 하나님께서 아담의 부모가 되었을 텐데, 타락으로 말미암아 부자의 인연이 끊어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부자의 인연으로서 충효의 도리를 하지 못한 것을 우리가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충의 도리와 효의 도리를 대신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전에는 하나님이 부모의 자리에서 가르쳐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여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시옵소서.’ 하며 간구하는 예수의 기도를 하나님은 왜 들어주지 않으시고, 무슨 철천지한이 있었기에 예수님을 죽이지 않으면 구원의 도를 못 세우는 것이었던지….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하신 예수님의 사연은 무엇이겠습니까? 그 무식한 자들, 시대를 모르는 것들은 그저 빵이나 생각하고….
하나님에게 얽힌 내적인 곡절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홀로 감람산 골짜기를 찾아가던 예수님의 서글픈 심정을 여러분은 얼마나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그분이 가는 발걸음 앞에 ‘당신의 심정이 이러하거늘, 저를 권고하셔서 당신의 심정을 위로할 수 있는 효성의 도리를 다하게 하옵소서.’ 하는 마음을 갖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오늘 우리들은 그러한 입장에서 다시 한 번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땅 위에서 부모를 갖지 못하게 된 타락의 대가를 청산하기 위해서는 싸우지 않으면 안 될 고비가 남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청산짓기 전에는 부모가 나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청산짓지 못하면 하나님의 역사적인 해원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해원을 성사해 놓지 못하고는 인류조상의 허물을 지울 수 없습니다. 천리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중략)
고층 건물을 지어 놓고 콧노래를 불러 가며 자기의 안일을 노래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여러분들은 그래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재간을 피워도 끝날의 심판을 피해 나갈 도리가 없습니다. 그것은 결코 생명의 닻줄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전부 수라장을 만들어 놔야 될 것이니, 그럴 수 있는 때가 오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선생님은 이번 세계순회 기간에 역사상 가장 많은 파란곡절을 예상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선생님이 가는 길은 뜻이 아닙니다. 태풍이 불어오는 가운데서 길을 닦아 안식을 가져올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고요한 가운데서 길을 닦으면 그는 태풍을 모르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몰아닥치는 태풍과 노도 속을 헤쳐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6천년간 그 물결이 굽이치며 인류를 휩쓸어 사망의 세계로 몰아넣는 고역이 있었거늘, 그 파도를 잠재우고 막을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기에 오늘도 뼈에 사무치는 심정으로, 마음 가운데 단단한 충격을 받으면서도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중략)
우리는 하나님의 한을 해원해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한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는 역사적인 예수님의 한까지도 풀어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땅에 보내셨다가 죽게 됨으로 말미암아 맺힌 슬픔을 풀어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해원성사, 예수님의 해원성사에 대한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예수님의 해원성사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책임 못한 것을 탕감해 드리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이 가던 죽음의 자리를 피해 갔지만 여러분은 그 길을 자진해서 갈 수 있어야 합니다. (중략)
지금까지 기독교는 2천년이란 세월이 걸렸지만 세계를 정복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다운 부모의 자리에 예수님을 세워 놓고 하나님께서 ‘만민이여, 저를 따를지어다. 천지 만물이여, 저 앞에 굴복할지어다. 4천 년 역사상에 왔다 간 모든 무리는 저 앞에 항서를 쓸지어다.’ 할 수 있는 축복을 하지 못했습니다.
우리 인류는 본향 땅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인류가 가기는 가지만 방향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 세계가 하나의 길로 가야 하는데 각기 딴 길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본향 땅을 찾아가고 싶어하지만 그 땅이 문제가 아니라, 부모를 찾아야 합니다.
부자의 도리에는 부모로서 해야 할 도리가 있고, 자식으로서 해야 할 도리가 있습니다. 본향에 가서 부모를 만난 후에 자식의 도리와 부모의 도리를 세워야 합니다. 그러나 아직 그런 도리를 세우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통일교회 여러분들은 이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찾는 부모는 욕심이 많습니다. 지지리 고생하며 발버둥을 치면서 찾아왔는데도 ‘야! 너는 내 대신 가야 된다.’ 하시며 다시 내보내신다는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하나님의 슬픔을 품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불신을 당했던 것을 탕감하기 위하여, 이 땅 위에서 그 책임과 사명을 짊어지고 모든 것을 완결지을 수 있는 대신자를 세워 놓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은 절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통일교인은 누구를 사랑하느냐?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님을 달리 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을 모신 가운데 부모의 인연을 맺어 가지고, 그 부모가 계시는 고향 땅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참다운 부모가 나타나지 않으면 고향 땅은 아직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세계에서 진정한 고향 땅은 어디에 있습니까? 기독교의 수많은 무리가 모이는 대교파일 것이냐? 아닙니다. 참다운 효자는 손끝에 피가 흐르는 아픔을 참으면서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사람입니다. 좋은 자리에서 자기의 안일을 노래하며 깊은 잠을 자려고 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원하지 않으십니다.
이 시간에도 손끝에 피를 흘리면서 ‘나의 부족함을 용납하여 주옵소서.’ 하며 피의 길을 개의치 않고 몸부림치며 수고하는 자리라야 부모가 찾아올 수 있습니다.
그러면 고향 땅에 찾아가 부모를 만나서 무엇을 할 것이냐? 부모로 오시는 그분은 무엇을 할 것이냐? 그분은 타락한 조상인 아담 해와의 대역자로서 그들이 실수하여 입은 상처를 그들 대신 꿰매야 합니다. 아담이 타락함으로 인하여 세계 인류가 엉망진창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꿰매야 합니다. 이것은 부모가 꿰매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 일을 참부모가 해야 할 터인데 그 부모가 30억 인류를 다 꿰매야 하느냐? 아닙니다. 부모님께 효성을 다한 효자, 효녀, 열녀, 충신이 그 명패를 갖고 나가 대역자로서 꿰매 줘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돌아오면서 느낀 것은 ‘아버지여! 당신이 사랑하는 한국이 정말 만민의 고향 땅이 될 수 있습니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나라는 만민의 고향 땅은 물론이요, 아버지의 고향 땅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이 나라의 백성은 충효를 다하는 아들딸로서, 이 땅 한국으로 하여금 세계를 구원할 수 있는 이념과 연결될 수 있는 발판을 만들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삼천만 민족이 시달리고 찢기면서 황폐한 산야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을 맞는 것도 모진 일이지만, 거기에 사나운 맹수까지 달려드는 경지에 있는 한국을 하나님이 고향 땅으로 만들고, 만인의 조국으로 만들어야 할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나라를 위하여 싸우는 것만으로는 하나님 나라의 책임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 나라는 세계가 갈 길을 책임질 수 있고, 하나님의 마음을 위로하고 세계를 위하여 하나님이 가시는 가시밭길을 평탄한 길로 닦을 수 있는 민족적 책임을 진 나라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야 할 곳이 있습니다. 그곳은 고향입니다. 고향에 가서 부모를 만나야 합니다. 그리하여 부모의 법도를 따라가야 합니다. 부모가 해야 할 책임을 내가 대신하고, 그 심정의 인연을 연결시켜 사망권에 들어 있는 만민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해 가지고 하나의 종족, 민족, 국가형을 이루어 태평천국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 나라가 태평천국이 되었는가? 한국을 위주하고 만민과 만국을 만세에 행복하게 하였던가? 그러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한국이 그러한 길을 닦아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가야 할 길, 하나님께서 가시는 길은 구원섭리의 길로서 우리가 기필코 가야 할 길입니다. 우리는 부모를 찾아서 그 나라를 이루고 다시 세계를 되찾아야 됩니다. 이것이 하늘땅이 기필코 가야 할 곳입니다.
고향 땅에 가서 무엇을 할 것인가? 부모를 만나야 합니다. 아무리 고향 땅이라고 해도 부모와 관련을 맺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설령 부모가 죽었다 하더라도 고향과 관계를 맺어야 됩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면 종족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새로운 부모, 새로운 아들딸이 새로운 법도를 세운 가정을 중심삼고 일체화되어, 종족을 이루고 국가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국가는 자기 국가만을 위주로 해서는 안 됩니다. 아버지를 대신하여 시궁창과 같은 곳이라도 마다 않고 갈 수 있고, 부모의 심정을 지니고 충효의 도리를 다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사탄이 거기서 발을 떼고 도망을 간다는 것입니다.
하늘땅이 기필코 가야 할 곳은 고향 땅을 찾아가는 것이고, 고향 땅을 찾아가서는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민주주의의 말기가 되면 제국주의 군주사상으로 돌아가고, 공산주의의 말기가 되면 제국주의적 독재국가형으로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떨어져 나간 자기들끼리 싸우게 됩니다. 민주주의는 민주주의끼리 싸우고, 공산주의는 공산주의끼리 싸운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캐시미르 문제로 인하여 반드시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쟁하게 될 것을 예언했습니다. 여기는 중공이 빠져 나가는 골목길이 되는 곳입니다. 극동에 있어서 소련에 대비한 발판을 세워야 할 현실적인 거점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중공은 인도와 파키스탄의 싸움을 붙이는 것입니다. 싸움을 하게 되면 회회교끼리 싸우게 되어 파키스탄 수상이 중공에 협조를 요청한다는 것입니다. 이 종교전쟁을 어떻게 유도할 것인가 하는 것이 소련의 정책으로 문젯거리입니다. 우리는 여기에 말려들지 않아야 됩니다.
중동으로 가 보면, 낫세르는 이미 회회교권을 통합하여 하나의 목표점을 지향한 통일아랍의 제3세력권을 형성하는 단계에 접어들고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모두 지쳤다는 사실입니다. 수에즈 운하를 이용하지 못하면 전부가 불붙은 휘발유통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한 회회교권의 통일적인 노선을 비추어 볼 때, 기독교는 바티칸을 중심삼고 통일이념을 내걸지 않고는 나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이냐? 그들이 아무리 애써 보아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통일교회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합니다. 그러니 죽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가야 합니다. 복귀의 길이 우리들을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구라파 일대를 돌면서 기도하며 생각해 보았지만, 알프스를 넘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히말라야를 넘는 것도 문제가 아닙니다. 그 이상의 어려운 곳, 최전선에 가서 싸울 것입니다. 이것이 선생님의 작전입니다. 이 길은 복귀의 길이기 때문에 원리원칙에 맞지 않으면 풀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시급한 때를 맞고 있습니다. 이번에 아이젠하워 전 미국 대통령을 만나서, 내가 말한 것이 맞는지 안 맞는지 두고 보라고 했습니다. 지금부터 약 15년 전에 공산당들이 어찌하여 자기들의 원수가 종교라고 했던가 하는 것입니다. ‘종교의 원수는 공산당이다.’ 하는 세계적인 명제하에 우리는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중략)
십년 전 달라이라마가 넘어왔을 때, 세계적인 문제는 어떤 판가리를 할 수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중략)
세계적인 섭리가 움직이고 있는 이때에, 이 땅을 지킬 줄 아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이 땅을 지키려면 다시 오실 주님과 일체가 되어야 합니다. 즉 참부모와 일체가 되어 종족이 되고, 그 종족은 국가의 이념을 넘어 세계의 이념으로 하나님의 목적과 방향이 일치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결정이 바로 한국에서 이뤄진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겠습니다. 이러한 정황을 알고 통일교회 식구들은 가야 합니다. 그러니 손을 불끈 쥐고 이를 악물어야 합니다. 우리의 때가 온 것입니다. (중략)
이 민족이 숱한 곡절을 겪어내야만 어떠한 어려운 고비도 뚫고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앞으로 큰 파도 앞에서 통일의 역군들은 어떻게 될 것이냐? 참패의 종족이 될 것이냐, 승리의 종족이 될 것이냐? 몰아쳐 오는 민족적인 시련과 개인의 서러움도 많을 텐데, 거기에서 자기 자체를 망각해 버리고 맹세와 절개를 포기해 버리는 역도들이 될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가야 할 방향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꼭 가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가르쳐서 꼭 가게 하고야 말 것입니다.
자기 입으로 대답하여 맹세해 가지고 생명을 각오하고 세계를 위하여 뛰쳐나갈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때로는 세계적인 사건이 국내적인 사건으로 축소되어 이것이 다시 승리적 단계에 들어가야, 죽었던 아벨이 부활하여 가인을 부활시키는 복귀 탕감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40개국을 돌아서 온 것은 불원한 장래에 그 나라들에 통일식구들을 배치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선생님이 못하면 하나님이 하실 겁니다.
선생님은 브라질에 가서, 일본의 어느 식구가 그곳의 말을 못하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전하기 위하여 어린 나이에 자진하여 십자가를 진 것을 보았습니다. 그 황무지에, 7만이 사는 그곳에 와 고생을 하는 것을 보니 선생님의 마음이 아팠습니다. 심정의 세계는 국경과 무력과 오늘의 어떤 사상을 가지고도 막지 못합니다. 그 사람은 이미 일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보다도 더 심정적이었습니다. 황혼의 비행장에 서서 떠나오던 선생님을 눈물로 전송하던 그 충성어린 모습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중략)
세계를 향하여 제물로서 찾아가는 그 눈물의 터전 안에서 통일의 역군들을 만나지 못한다면, 이 뜻과 이 사명은 민족적인 것밖에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번에 독일 식구들이 그 인근 여러 나라에 배치되어 개척전도를 나가게 되었습니다. 금년에 선교국이 14개국을 넘어야 되겠습니다. 1967년에 가서는 40개국 이상의 터전을 만들어 세계적인 작전을 세우려면, 그런 재료와 계획이 필요하기 때문에 선생님은 그 나라들을 찾아보았던 것입니다.
우리의 본향, 우리의 조국, 우리의 세계를 위함에 있어서 이것은 우리가 찾아가야 할 최후의 목적지입니다. 우리가 가는 이 길이 정녕 하나님의 뜻 앞에 도움이 되는 길이고, 전통을 남길 수 있는 역사적인 터전을 쌓는 길이 된다는 것을 알고 서슴지 말고 이 길을 가야 하겠습니다. 이제 여러분도 세계적인 무대에서 피땀 흘리는 것을 소망으로 삼고 가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자면 겟세마네 동산에서 인간의 불신을 받은 예수님이 ‘아버지여 할 만하시거든 나에게서 이 잔을 지나가게 하소서.’ 하였던 것과 같은 기도를 하지 말고 ‘하나님과 모든 천군천사는 나를 딛고 세계를 향하여 나아가시옵소서.’ 라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영계의 협조를 세계로 분산시킬 수 있는 여러분이 되어야 세계적인 복귀가 빨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향에 가서 부모를 만나야 되고, 부모의 도리에 따라서 그 법도를 세워 가지고 아담의 가정과 아담주의 국가를 이뤄야 합니다. 그 주의는 곧 하나님의 주의요 그 국가는 하나님주의의 국가입니다.
세상에는 두 가지 씨가 뿌려져 있습니다. 그것은 가인과 아벨이라는 입장입니다. 그래서 사탄도 세계를 지배할 수 있고, 하나님도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두 세계가 벌어졌습니다. 이것이 최후에 있어서 둘 다 꺾여 나가게 될 때, 지구가 깨어지지 않는 한 새로운 역사는 출발하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삼천만의 한과 세계 30억의 한을 풀고, 하나님의 한까지 풀어 드릴 수 있는 최후의 승리자가 되기를 부탁드리면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선생님은 이중 삼중으로 책임을 진 자로서의 여러분의 어려움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책임을 지지 않고는 천적인 뜻을 이룰 수 없습니다.
최후의 문제는 경제도 실력도 아니요, 그 지방에서 어느 정도 이기고 나가느냐 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공적인 면을 움직여 뜻을 이루고, 우리 자신들이 쇄신하여 나가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경제문제입니다.
우리는 지금 재결의를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전국적으로 재편성해야 될 것을 느낍니다. 재교육을 하여 재편성하는 것이 불가피합니다. 3년만 넘기면 모든 것이 타개될 길이 있습니다. 그때까지 어떻게 밀고 나갈 것인가?
전국에서 한 곳에 터지기를 바라 나오던 중 강원도가 뚫렸습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계기로 전국적인 활동을 집중시켜야 합니다. 지구장이 실력이 없어 포섭 못한다고 하는 것은 사회의 실력가가 들어올 때 그의 실력을 발휘해 주는 일에 주력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탄의 지혜를 인간의 지혜가 따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사탄을 굴복시키기 위하여는 충효의 도리를 세울 수밖에 없습니다. 사탄도 이 원칙은 무시할 수 없습니다.
선생님의 사후에 여러분이 눈물을 흘리려거든, 선생님이 사랑하는 하늘과 세계를 위해서 먼저 눈물을 흘리기 바랍니다. 선생님의 형님은 세계적인 가인입니다. 그는 선생님이 품고 있는 뜻의 내용은 모르지만 세계를 주고도 못 바꿀 동생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형님을 사랑해 보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세계적인 탕감조건을 먼저 세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 어떤 식구가 선생님의 센머리를 보고 울면서 천세 만세 사시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미국을 살릴 수 있는 중심 심정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한국 청년들이 이 말을 듣는 것은 들이맞는 것과 같습니다.
선생님이 성지를 세계적으로 택한 이유는 국가적 기반 위에 세계적인 제물을 세우기 위함입니다.
개인을 세우는 것은 그를 터로 하여 가정을 세우기 위함이요, 가정을 세우는 것은 종족을 세우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종족이 복을 받을 때에 가정도 복을 받습니다. 또 종족적인 탕감을 세워야 가정적인 축복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가인을 축복받을 수 있는 입장에 세운 후에야 아벨이 축복을 받습니다. 고생해야 되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 중심한 싸움은 개인으로부터 세계적인 투쟁에 이르기까지 일시에 옵니다. 왜냐하면 종적인 것을 횡적으로 탕감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세 정권을 거치는 동안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하였습니다.
36가정 축복시에는 부모의 승락을 받지 않고 결혼식에 참석하게 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인정하는 만큼, 축복의 중요성을 모르기 때문에 그들을 부모가 없는 사람으로 취급하기 위함입니다. 그 부모는 신앙적으로나 뜻적으로 볼 때는 오히려 자기들의 후손이 되기 때문에 그들에게 문의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제2차(결혼식)때 문제가 일어났습니다. 36가정은 아담으로부터 아브라함에 이르기까지 2천년을 탕감하기 위함입니다. 예수가 상대이념을 세우는 도중에서 죽었는데, 여러분은 이것을 승리했으니 그 이상의 입장입니다. 그러므로 선생님은 책임을 다한 것입니다. 이렇게 통일종족, 통일민족이 벌어져야 합니다.
협회가 등록됨과 더불어 민족적 기반을 세웠습니다. 이후에는 세계적인 제물의 입장을 세워야 합니다. 그런고로 세계 여행은 가장 더울 때 출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만물을 ‘주관하라.’ 하신 말씀을 한국에서 선생님을 중심으로 실현해서 세계로 연결해 뻗어 나가도록 해야 합니다. 선생님은 타락 이전의 기준에 축복의 조건을 세웠습니다. 그러니 영계는 타락하기 전의 천사장 입장, 땅은 타락하기 전의 아담의 입장을 찾아 세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기준을 세움으로써 영계는 땅을 협조할 수 있습니다. 타락하지 않은 아담을 천사가 협조했다 하는 조건을 세우기 위함입니다. 선생님이 256일 만에 40개 국을 순회하고 돌아왔습니다. 4수와 6수를 복귀해야 하기 때문에 40곱하기 6은 240에, 4곱하기 4의 16을 더하면 256일입니다. 그래서 10월 10일이 뜻이 있습니다.
선생님이 동경을 떠날 때에도 세 번이나 장애가 있었습니다. 노스웨스트 편이 변경되었고, 서울의 활주로 때문에 예정대로 도착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어머님은 예진 아기를 복중에 두고서도 식구들을 전도 내보내느라고 여러분과 같이 보리밥을 잡수시고, 반찬도 네 가지 이상을 잡수시지 않았고, 여러분과 같은 입장에서 고생하였습니다. 여러분과 똑같은 입장을 취하여 여러분에게 같은 혜택을 받게 하려 함이었습니다.
모든 존재는 에너지로부터라고 합니다. 힘은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힘은 돌아야 나오는데 도는 데는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플러스의 목적과 마이너스의 목적, 이것을 합한 이중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목적이 있어야 존재를 인정할 수 있습니다.
1960년은 예수의 십자가(제1십자가)를 넘고 제2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이니 이것이 가정적인 십자가입니다. 7년 기간이란 가정적인 제2십자가를 승리의 기대로 세워야 할 기간입니다. 7년 이후에는 제3의 십자가가 있으니 그것이 성진, 희진을 화목한 가정으로 세우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아담을 품고 넘어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뜻을 다 이루지 못하고 십자가를 지고 영계에 가서 협조하는 것같이, 선생님도 뜻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는 빨리 영계에 가서 협조하려고 생각합니다.
여행 중에 어머니, 성진, 협회장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이것은 협회장을 대신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위기대를 이룬 입장에서 여행을 하였습니다. 선생님이 세상을 떠나갈 때, 세상에서 떠나고 싶지 않은 기쁜 자리에 설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뜻을 이루지 못하면 식구들과 자손이 전부 걸립니다.
성진과 희진이를 잘 인도하여, 각자 기쁨으로 결혼할 수 있는 단계로 넘어가야 합니다. 이런 말은 미국에 있는 ‘보희’에게 먼저 말하였습니다.
세계를 평준화하기 위한 일주를 하고 돌아왔으니, 한국도 평준화하기 위하여 지역장들을 이동시키려 하는 것입니다. 강원도가 트였으니 이 지역에서부터 말뚝을 박고 충성하라는 것입니다.
자비로우신 아버지시여! 당신의 소망과 뜻하시는 것을 하늘과 땅 위에 이루시옵소서.
수많은 인간들이 아버지의 품을 떠나 지금까지 불효를 계속하고 있으며 오늘도 그 환경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사망의 골짜기에서 신음하고 있는 것을 매일같이 보고 슬픔을 느끼는 환경에 저희들이 처해 있는 것을 생각할 때, 아버지 앞에 민망하여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자신인 것을 자각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당신께서는 수많은 인류를 품으시고 당신의 자녀라고 명명할 수 있는 기쁨의 한 날을 목표로 지금까지 섭리해 나오셨사오나, 오늘날 이 땅 위에는 당신의 사랑을 대할 수 있는 자녀들이 지극히 적사옵고 당신 앞에 충성을 다하여 당신의 복귀섭리 전체를 상속받을 자가 없사옵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오늘도 아버지의 슬픈 노정이 저희들 앞에 남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옵니다. 하오니 이 시간 저희들이 다시 자책하며 나가지 않으면 안 될 자신들임을 발견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악하고 처참한 세상, 황폐한 이 땅 위에서, 아버지의 섭리의 뜻을 새로운 방향을 거쳐 아버지께서 뜻하신 그 세계로 기필코 이끌어내는 것이 아버지의 소망인 동시에, 땅 위에 살고 있는 전인류의 소망인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지와 이 땅 위의 전인류가 하나될 수 있는 기준을 모색하지 않고는 이 전체의 뜻과 사명을 완결지을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지께서 오늘 저희들을 내세워 이 민족 앞에 새로운 종교의 길을 개척하게 하시고, 세계노정 앞에 새로운 역사적인 면을 제시하여 인생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연결시키기 위하여 평면 도상의 세계적인 모든 탕감조건을 세우려 하시는 당신의 노고와 수고 앞에, 몸 구부려 민망함을 느낄 줄 아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오늘은 안식일이옵니다. 이 땅 위에 수많은 사람들이 당신의 이념을 찬양하고, 당신의 뜻하신 목적을 바라보면서 소망을 품고, 매일 당신께서 원하시는 전체적인 뜻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긍휼히 보시사 그들이 모이는 곳곳마다 당신의 사랑의 손길이 떠나지 말게 하시옵소서. 긍휼의 마음을 더하시사 아버지를 대신하여 각자가 짊어진 책임과 사명을 완수하고 원수의 세계에 승리의 터전을 가꾸어 아버지 앞에 드릴 수 있는 뭇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당신의 이념과 당신의 뜻을 품은 수많은 교파들 위에 축복하여 주시옵고, 더욱이 수많은 도인들 위에도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이 시간에도 방향을 잡지 못하고 신음의 노정을 가고 있는 불쌍한 무리들이 많사오니 그들 위에 아버지 친히 함께하시어서 그들의 방향을 잡아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뚜렷한 목표를 바라보고 도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오늘 여기에 모인 당신의 자녀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이들은 사망의 골짜기에서도 당신 앞에 충성을 다할 것을 다짐하였사옵고, 당신을 위해 세상의 모든 것을 저버렸사옵니다. 아버지의 뜻 앞에 충성과 효성을 다할 것을 다짐하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뜻 성사를 위해 생축의 제물이 되고자 맹세한 무리들이오니, 이 시간 당신의 존전에 모든 것을 다 펼쳐놓고 어제와 오늘과 내일을 염려하는 마음으로 당신 앞에 가까이 가서 당신의 심정과 진정으로 연결될 수 있는 이 한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지방에 널려 이 시간을 기억하고 이날을 아버지 앞에 찬양 드리는 많은 자녀들 위에도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여기에는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였사오나 이들의 마음과 심정은 오로지 아버지만을 향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뜻과 아버지의 소망을 품고 아버지 앞에 엎드리는 이 시간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악의 세계와 악이 활동할 수 있는 모든 요건들을 제거하시고, 이 청중을 친히 장중에 쥐시어 당신이 뜻하시는 방향과 목적지까지 이끌어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이날의 거룩함을 나타내시옵고, 저희들의 마음과 몸으로 승리의 감격을 느낄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부족한 저희들이 정성을 모아 아버지 앞에 경배를 드리고자 하오니, 하나님의 보좌를 둘러싼 천천만 성도들과 이 땅에 우거하고 있는 당신의 자녀라는 명분을 가진 이들 전체가 당신을 에워싸고 경배드릴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여기에 모인 저희들이 아버지 앞에 겸손히 나아가 탄원을 드리어 모든 역사적인 죄를 용납받을 수 있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고, 제사장의 입장을 대신하여 시대적으로 부족한 모든 것에 대한 속죄의 은사를 당신 앞에 간구할 수 있는, 당신께서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이 시간 전체를 아버지 앞에 맡기오니 친히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을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아버지!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30억 인류가 언제 당신의 품에 안길 수 있겠사옵니까? 저희 선조의 한 날의 실수가 이렇듯 엄청난 역사적인 곡절을 엮어냈다는 것을 생각할 때, 당신의 심정에는 슬픈 눈물과 복통할 사실밖에 맺혀져 있지 않음을 깨닫게 되옵니다.
‘나’라는 한 생명을 구하기 위해 6천년이란 기나긴 세월을 하루같이 잃은 자식을 찾으시려는 심정을 가지고 역사노정을 거쳐오신 아버지, 오늘의 저희들을 부르시는 당신의 심정을 붙들고 통곡하는 심정으로 당신의 존전에 서 있는 저희의 불쌍하고 외로운 모습을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저희들은 벌거숭이들이옵고, 무엇 하나 아버지 앞에 나타낼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사옵니다. 다만 당신을 그리워하며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당신이 계신 곳을 가겠다는 일념으로 이 자리에 나왔사오며, 당신의 억울하신 역사적인 사정을 배웠기에 그러한 사정의 터 위에서 쓰러지지 않고 당신을 배반하지 않을 참다운 모습을 그리워하면서 이 자리에 피곤한 몸을 이끌고 나와 당신 앞에 부복하였사오니, 긍휼의 아버지, 저희들을 사랑하여 주시옵고, 저희의 마음을 위로하여 주시옵소서.
연약한 저희들을 권고하여 주시옵고, 낙망의 궁지에서 당신을 원망하던 자신들을 발견하고 눈물이 아니면 슬픔의 아버지를 알 수 없고 당신을 대할 수 없는 부족한 자신들임을 발견할 수 있는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이 민족의 처참상을 대신하여 저희들이 제물이 되지 않으면 안 될 자신들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만민을 대신하여 아버님이 찾아오시는 그 길의 선봉에 서서 원수 사탄과 대결하는 하늘의 용사가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깨닫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시간, 각자의 몸을 자신들의 몸으로 생각하지 말게 하여 주시옵고, 자기를 중심삼고 생각하지 말게 하시며, 오로지 하늘과 땅을 생각하고 남아진 복귀의 뜻을 책임져야 할 자신들임을 발견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고 원하옵니다.
자기 자신의 목적을 추구하는 자리에 서지 말고 공적인 목적을 추구하여 당신의 뜻을 대신하고 당신의 전체적인 사명을 감당해 낼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거룩한 존전에 속죄의 분향을 드리는 제사장을 대신하는 거룩한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의 그 깊은 심정을 더듬어 들어가려 할 때에는 억천만 사탄들이 저희의 갈 길을 막고 저희의 마음과 몸을 노린다는 것을 이들이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단연코 그 사탄들을 제거시키고 아버지의 역사적인 한을 풀어 드리는, 그리하여 아버지의 품에 안길 수 있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이시여! 오늘 저희들이 다시 만날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하여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많은 날과 많은 지역을 거쳐오면서 당신의 뜻이 얼마나 큰 것인지, 세워 놓은 민족을 대한 아버지의 슬픔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절실히 느꼈사옵니다. 이제 다시 이 땅을 수습하여 당신 앞에 생축의 제단을 쌓고 민족적인 승리의 터전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될 중대한 시기가 저희들 앞에 찾아오고 있는 것을 알고 있사옵고, 이와 같은 환경에서 저희들 전체가 하나되어 하나의 마음, 하나의 뜻, 하나의 심정으로 하나의 목표를 향하여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될 최후의 싸움터가 남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이 시간, 아버지 친히 모든 청중을 장중에 쥐시어 이들 전체가 당신이 원하시는 마음을 가진, 당신이 원하시는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당신만이 거룩히 이들을 주관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이들 모두가 당신의 아들딸이오니 당신의 아들딸로서 합당한 천적인 인연을 맺고, 당신께서 명령하실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날 수많은 민족에게 아버지, 복을 베풀어 주시옵고, 수많은 교단을 친히 사랑하여 주시옵고, 수많은 자녀들이 남한 각지에서 눈물어린 피의 노정을 걷고 있사오니 그들을 기억하시어 남아진 최후의 싸움터에서 낙오자가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고, 패잔병이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영광된 승리의 한 날, 승리의 개가를 당신 앞에 돌려 드리면서 당신의 기쁘심과 영광된 거룩한 자리에 참여할 수 있는 수많은 무리가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시간을 오로지 당신 앞에 맡기오니 친히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간절히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니다. 아멘.
<말 씀>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릴 제목은 ‘구원의 목적’입니다. ‘구원의 목적’이란 제목을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선한 세상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 가운데 살고 있는 우리 개체를 보더라도 우리 개체 내에 싸움의 요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도리가 없습니다. 즉 우리의 몸과 마음이 싸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환경적으로 볼 때 죄악된 세상임을 부정할 수 없고, 우리들 자신의 입장으로 볼 때는 어떠한 중심을 세우기가 지극히 곤란한 시대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이 세상과 우리 인간이 이렇게 되었는가? 하나님이 계신다면 하나님은 천지의 대주재요, 중심 중의 중심일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그 중심에 의해 지음받았으니 지음받은 그 환경을 거치고 과정을 거쳐서 목적의 세계까지 중심을 잃지 않고 가야 할 것인데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 자신들은 중심을 세울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어떠한 곡절로 말미암아 빚어진 사실이라는 것을 시인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종교적인 명사를 빌어 말하면 타락이라 합니다. 여기에서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수많은 인간들은 타락권 내에서 자기들의 생을 이끌어 가고 있다는 결론을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타락된 자리에서 우리가 영속적으로 머무르는 것을 우리의 몸과 마음과 환경이 바랄 것인가?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이 타락권을 타개하여 본연의 절대적인 중심을 통해 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과 환경이 아무리 악하더라도 그것을 넘고 넘으면서 어떤 목적을 향하여 일관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 자신을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일생을 걸어 놓고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될 중대한 문제인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타락되었기 때문에 생긴 문제입니다.
그러면 도의 길이나 종교라는 것은 어찌하여 나오게 되었는가? 타락된 인간을 타락하기 이전의 본연의 인간으로 돌이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구원이란 무엇인가? 병이 나기 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복귀하는 명사로 대비시킬 수 있지요. 그러므로 구원이 곧 복귀입니다.
타락은 무엇인가? 자기 본연의 가치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면 그 가치의 최고의 중심은 누구인가? 하나님입니다. 때문에 타락이란 하나님을 잃어버린 것을 말함이요, 하나님이 언제나 일체화된 자리에서 대할 수 있는 참다운 인간의 가치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또한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 환경에서 가치적인 터전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 환경적인 터전을 수습할 수 있는 인간의 가치, 그런 인간을 주관할 수 있는 하늘의 가치를 다시 찾아 본연의 자리를 결정짓기 위해 나온 것이 구원의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타락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봅시다. 인간이 타락할 때 어떤 단계에서 타락했는가? 태초에 에덴동산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께서 창조목적을 중심삼고 지으신 인류의 시조, 죄짓기 전의 아담 해와가 있고, 그 본연의 아담 해와를 중심삼고 하나님의 일을 협조하던 천사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 하나님의 목적, 아담 해와의 목적, 천사들의 목적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천사들만이 기쁘게 살 수 있다고 달성되는 것이 아니요, 아담 해와만이 기쁘게 살 수 있다고 달성되는 것도 아니며 하나님만이 기쁘게 계실 수 있다고 완성되는 것 또한 아닙니다. 하나님과 아담 해와와 천사들이 모두 공동적인 목표 아래 그 목적을 달성했을 때는 천사들도 기뻐할 수 있고, 아담 해와도 기뻐할 수 있으며, 하나님도 기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한 쪽만이 기뻐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전체적인 내용을 갖추어서 이 천지의 중심이신 하나님과 하늘땅을 대표한 아담 해와와 환경을 대표한 천사들 모두가 기뻐할 수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인간을 창조한 목적이 완결되어야만 구원의 목적, 즉 창조 본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목적이 깨어져 버린 것입니다. 그 기준이 떨어져 버린 거예요. 떨어질 때에 어떤 순서로 떨어졌는가? 하나님부터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반대적 입장에서부터 떨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맨 처음에 천사세계의 천사장이 하나님을 중심삼은 뜻 앞에서 멀어지기 시작했고, 그것을 동기로 아담 해와가 타락하게 되었으며, 하나님 역시 이 모든 세계의 공동 목표를 중심삼고 피조물을 창조하신 원칙이 있는 연고로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타락한 아담 해와의 슬픔을 책임지지 않을 수 없는 입장으로 떨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타락의 순서입니다.
이런 순서로 타락했으니 이것을 복귀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이냐? 반대경로에 의해서 섭리노정을 맞추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지금까지 역사노정에서 진정으로 하나님의 심정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정을 느끼면서 하나님과 일치된 소원을 갖고 나오는 사람을 찾아 나오시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이 땅에 하늘세계의 참다운 천사장을 대신할 수 있는 충신을 찾아 나오시는 복귀의 길인 것입니다.
그러면 천사는 어떤 존재인가? 종의 입장에서 하나님 앞에 충성의 도리를 다하고 아담 해와의 울타리가 되어 주어야 하는 존재입니다. 만세토록 하늘세계에 영광된 분위기를 만들어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아담 해와와 함께 행복하게 살아야 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천사장은 아담 해와를 위해서 창조된 거예요. 아담 해와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천사를 창조한 목적은 아담 해와를 위해서였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천사장이 창조된 목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그 울타리가 깨져 나가고, 아들딸이 깨져 나갔으며 하나님께서도 주관권을 침범받게 되어 버렸으니 이것을 다시 수습해 나가야 합니다. 아담 해와가 타락한 사실이 결정적인 죄악으로 결실된 것이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입니다. 이것을 다시 수습하기 위해 하나님은 지금까지 기나긴 역사노정을 거쳐 섭리해 나오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맨 나중에까지 남아져야 할 것이 무엇이냐? 영계가 하늘만을 위주할 수 있는 천사세계와 같은 세계로 재정비되고 이 땅에 하늘만을 위주할 수 있는 가인과 아벨을 중심삼은 새로운 부모가 설정되어야 합니다.
이 땅 위에는 수많은 인간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류는 하나님을 잃어버렸고 참부모를 잃어버렸으며, 아직도 하나님을 중심삼은 참다운 형제의 인연을 맺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그것을 재차 복귀하자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은 외적으로 역사의 발전을 지향하고 내적으로는 종교를 세워 나오셨습니다. 그리하여 외적인 세상은 종교와 결렬된 입장에서 투쟁하면서 외적인 환경을 발전시켜 나오고, 내적인 종교는 심정을 강조하며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하나님만을 위해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인적인 세계형과 아벨적인 세계형입니다. 하늘이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만물을 주관하라.’ 고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딸인 아담 해와에게 내리신 축복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축복하신 내용인 것입니다. 아담 해와의 아들딸로 태어난 인류는 반드시 그 축복의 목적지를 향하여 나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끝날이 되면 가인과 아벨의 세계관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모든 곡절을 수습하고 가인과 아벨이 하나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가인과 아벨이 하나되어서 무엇을 할 것이냐? 부모를 모셔야 되는 것입니다. 아담 해와가 타락했기 때문에 타락한 그대로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가인과 아벨의 싸움 과정을 거쳐 아벨을 세워 가지고 가인의 모든 것을 상속받아, 그것을 부모 앞에 드림으로써 떨어졌던 부모의 자리를 복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천적인 원칙이기 때문에 끝날인 현재의 이 세상에는 가인과 아벨의 세계관이 나타남과 동시에 참부모를 중심삼은 세계관이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또 그와 동시에 참다운 하나님의 심정을 중심삼은 심정의 세계관이 나와야 합니다. 타락 당시의 내용이 오늘날 사회적 역사적인 이 끝날에 다시 나타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종교는 어떤 책임을 지고자 하는 것인가? 천사장적인 책임을 완결하자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종의 자리에서부터 책임을 완결짓고 그 기준에서 천사장 누시엘이 못한 책임을 완결하여 하나님 앞에 하늘땅을 대표한 충신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를 중심삼고 하나님의 아들딸의 인연과 연결시켜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 땅 위의 인류 앞에 구세주를 보내 주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면 그 구세주는 어떤 존재인가? 먼저 하나님의 아들의 사명을 가지고 와서, 그 사명을 완결지은 다음, 이 땅 위에서 참다운 조상의 자리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선민권을 세우시고 악한 사탄세계와 대결할 수 있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세우신 목적은 무엇인가? 사탄세계에서 하나님 앞에 충성을 다할 수 있는 천사장격인 국가를 세워 가지고, 사탄세계와 대결해 사탄을 쳐부수고 승리의 기반을 마련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고 충성을 다할 수 있는 천사장격 국가의 터전 위에, 즉 이스라엘 민족의 내용 전부를 상속받은 후, 아담이 타락하기 전 단계의 기준으로 끌어올리려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의 사명을 가지고 이 땅 위에 오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 당시의 이스라엘 민족은 어떻게 해야 했는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중심삼고 죽든지 살든지 그와 일치되어 하나님의 소망하시는 세계를 이룩하는 데 전체적으로 하나되어 협조해야 했습니다. 그것이 선민을 택하신 하나님의 본연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민족은 예수님과 하나되지 못하고 분립되어 4천년 역사노정을 최후의 판가리 싸움에서 사탄에게 패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제1이스라엘을 중심삼고 이루려던 섭리를 재연장해서 제2이스라엘 창건이념을 중심삼고 기독교는 지금까지 역사적인 사명을 감당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 세상을 끌고 나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를 중심한 세계적인 문화권을 만들어서 천사장 사명을 완결하는 동시에, 재림의 한 날을 맞이하여 아들은 아버지 앞에 효성을 할 수 있는 터전을 준비하고, 백성은 하나님 앞에 충성을 다할 수 있는 충성의 터전을 마련해야 합니다. 그것이 끝날에 이루어야 할 최후의 목적점입니다. 그리하여 아들의 사명을 완결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후에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하나님이 본래 아담 해와를 지으시고 선포하신 친자식이라는 선포를 받아야 합니다. 천주의 대주재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너는 내 아들이다, 천지를 주관할 수 있는 내 아들이다.’ 라는 심정으로 우러난 말을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심정적인 일치점을 연결하여 어느 누구도 유린할 수 없는 절대적인 기준 위에 연결해야 됩니다.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아직까지 한 번도 그 자리에 못나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막연한 소망을 가지고 사랑이라는 것을 내세워 지향하시는 목적의 기준을 향해 오늘날 종교, 특히 기독교를 지도해 나오신 것입니다.
그러면 아들의 사명을 완결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아담 해와가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이 세상은 악한 세상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 해와가 타락하여 자기를 중심삼고 하나님이 원치 않는 타락된 부모가 되었으니, 그것을 깨뜨리고 하나님을 위주한 부모의 자리를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가지고 온 최대의 목적이요 사명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신랑 신부의 이념을 가지고 오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신랑이라는 명사는 무엇입니까? 태초에 하나님이 아담 해와를 중심으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그날부터 소망해 오신 소망의 전체를 완결지을 수 있는 내용이 이 신랑이란 명사 속에 들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담 해와도 하나님 앞에 그들의 목적을 이룰 수 있는 신랑 신부의 기준을 소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그러한 기준이 결정되었더라면 오늘날 이 세상에는 이러한 슬픔의 역사가 지나가고 세계적으로 새로운 역사가 출발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준이 결정되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또다시 소망의 한때를 바라보시며 인류의 역사를 끌고 나오시는 것입니다.
때문에 오늘날의 역사는 부모를 찾아야 하는 역사적인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면 그 하나님을 중심삼고 창조의 목적을 완결지을 수 있는, 즉 구원의 목적을 완결지을 수 있는 참다운 부모가 있어 가지고 그 참다운 부모가 하나님 앞에 효성을 다해야 합니다. 동시에 천사들은 또 그 참부모의 아들딸을 중심삼고 충성의 도리를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본연의 창조원칙인데 그것이 깨져 나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것을 재현시켜 가지고 탕감해야 합니다. 잃어버렸으면 잃어버린 그 모양대로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영계가 있고 지상이 있는데 영계는 어떤 세계인가? 타락 전 아담시대의 천사세계에 해당합니다. 오늘날 끝날에 처해 있는 이 땅의 인류는 어떤 입장에 있는가? 타락한 아담 해와의 세계와 타락하지 않은 아담 해와의 세계를 연결시켜야 할 과정에서 뒤넘이치고 있습니다.
이 두 세계를 연결시키기 위해 예수님이 찾아오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자마자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길을 출발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타락한 세상과 타락하지 않은 하나님 본연의 세상, 이 두 세상을 연결해야 할 책임이 예수님께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타락한 세상의 모든 것을 상속받지 않고는 타락하지 않은 세상으로 출발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사탄이 먼저 주관하였으니 사탄을 때려눕히고 그 주관권을 모조리 빼앗아 오는 것이 아니라 사탄을 자연굴복시켜 가지고 그로 하여금 기뻐하는 가운데서 모든 권한을 하나님 앞에 바쳐 드릴 수 있게 하는 기준을 세우지 않고는 타락하지 않은 본연의 세계로 출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기로에서 예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하나님이 섭리하는 참다운 세계, 즉 지상의 타락한 세계에서 타락하지 않은 세계로 넘어가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민족은 영원히 승리적 기반 위에 선 민족이라는, 하나님께서 택한 나라라는 결정을 받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소망을 남겨 놓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최고의 중심은 신랑 신부이며, 그 신랑 신부의 내적인 의의는 참부모입니다.
여러분이 원리를 통해서 알고 있겠지만, 인간은 타락함으로 인하여 진리를 잃어버렸습니다. 신앙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인격을 잃어버렸고 심정을 잃어버렸습니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과의 영원불변한 심정의 터전 위에서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관계였습니다.
하나님이 내 아버지라는 인식만 갖추어지면 세상이 아무리 부정해도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인 것입니다. 세상 그 누가 자기 부모를 부모가 아니라고 설명해서 굴복시킬 수 있습니까? 없지요. 마찬가지로 아담 해와가 타락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은 바로 내 아버지다. 그분은 나를 중심삼고 계신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땅 위에 그런 기준만 선다면 거기서부터 천도가 자리를 잡고 출발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사람이 어떻게 되어야 행복한가? 돈이 많다고 행복한 것이 아니요, 환경이 복되다고 해서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심정의 발판이 세워진 환경에서 영원히 변치 않는 중심을 갖추게 될 때에, 거기서부터 행복이 출발되는 것입니다. 그 심정의 기준이 영원한 세계를 움직일 수 있는 기준이라면 영원한 행복권 내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심정의 기준이 일시적인 것이라면 어서 그 권내를 넘어서야 합니다.
본래 우리의 인간시조는 하나님을 중심삼고 하나님의 심정과 사랑을 중심삼고 하나님과 완전히 하나되어야 했습니다. 또 하나님은 심정의 목적을 완결짓기 위해 천지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이 심정의 대상인 천지 만물을 사랑하는 아들딸한테 사랑을 중심삼고 상속해 줘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것은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담 해와를 위해서였기 때문에, 기쁨 또한 하나님 자신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것이 아니라 아담 해와로 말미암아 생기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의 부모들도 자식을 보고 기뻐하잖아요? 기쁨이란 대상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것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사랑이 아담 해와에게 상속됨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물 전체가 그 인연을 벗어나서는 존재할 수 없게 되었더라면, 그 인연을 가진 아담 해와를 중심삼고 횡적인 이 세계에 살고 있는 천추만대 후손들에게 하나님의 심정이 연결되었더라면, 오늘날 이 세상이 이토록 악한 세상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영계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세상이 되지 않았을 거예요. 타락 전의 아담 해와가 천사와 일문일답하고 하나님과 일문일답했듯이 우리도 그럴 수만 있다면, 오늘날 이 끝날의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몰라보고 하나님이 없다는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심정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슬퍼하시면 인간도 슬픔을 느끼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인간도 기쁨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영적 체험을 하면 대번에 알 수 있습니다. 자기가 아무리 좋아서 춤출 수 있는 환경에 있어도 하나님이 슬퍼하시면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심 동정으로 하나되어 환경이 거기에 맞춰 움직일 수 있는 터전이 되었더라면 타락은 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담 해와를 중심한 신랑 신부의 인연이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지 못하고 사탄으로부터 출발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복귀해야 합니다. 천지창조 이후 지금까지 숱한 역사가 지나갔지만, 아담 해와는 아직까지 하나님을 위주한 본연의 신랑 신부의 자리에 나가지 못했습니다. 본연의 신랑 신부의 자리에 나가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선한 조상이 생겨나고 선한 자녀가 생겨날 것입니다. 그런데 타락됨으로 말미암아 본연의 선한 부모의 기준과 본연의 선한 자녀의 기준 그리고 본연의 선한 천사장의 기준이 깨져 나가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을 복귀해야 합니다.
오늘날 기독교 신자들은 예수님이 천사장의 나팔 소리와 함께 구름 타고 다시 오신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기 전에 이 땅 위에 천사장의 사명을 완결지을 수 있는 하늘의 충신이 나와야 됩니다. 그리하여 ‘내가 온 것은 내 뜻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의 뜻을 위해서다.’ 라고 선포하는 자가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일이 예수님 당시에도 벌어졌었습니다. 그 사명의 대표적인 중심존재가 세례 요한이었지요. 그래서 그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나니! 내가 온 것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를 증거하기 위해서다.’ 라고 했습니다.
그 세례 요한은 종으로 와서 이스라엘 나라 전체를 대표하여 타락한 직후의 아담의 자리를 복귀해야 했습니다. 타락 직후의 아담의 자리, 타락하지 않은 아담의 자리로 연결될 수 있는 그 자리를 복귀해야 했던 것입니다. 타락한 이 세상에서 타락하지 않은 아담의 자리를 복귀하여 세상의 모든 권한을 그에게 상속해 주기로 약속해야 할 대표자가 세례 요한이었던 것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 는 말은 세례 요한 개인의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전이스라엘 역사를 대표하고, 이스라엘 민족을 대표한 말이요, 4천년 역사를 대표하고,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전인류를 대표하는 말이었던 것입니다. 또 세례 요한이 예수님께 세례를 준 그 자리는 역사적인 모든 책임을 상속하는 자리였습니다. 그 다음부터 예수님은 출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이 땅에 아직까지 하늘의 충신이 나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충신이 나오려면 이 땅 위에 참다운 하나님의 아들이 나와야 됩니다. 천사장은 그 하나님의 아들을 모심으로써 하늘 앞에 충신의 도리를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충신의 기준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인 이 종말시대에 기필코 하나님이 사랑하실 수 있는 아들이 나와야 됩니다. 그래야 충신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례 요한을 불러 세우신 것은 그때까지 4천년 동안 하나님과 대결해 온 사탄의 괴수 천사장, 하나님을 배반한 그 천사장 말고 하나님을 위해 충성을 다짐하고 나서는 천사장의 입장을 대신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께 충성을 다하고, 예수님을 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어려움을 자기의 어려움으로 알고 그것을 헤쳐 나가기 위해 있는 힘을 다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이 그러한 책임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역사적인 슬픔은 더욱 가중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야 했고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세 제자 가운데 들어가야 했던 것입니다. 세례 요한을 환영하던 수많은 무리들은 예수님을 환영하는 무리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세례 요한은 신랑 신부의 본연의 이름을 갖춘 하나님의 아들딸 앞에 충성한 천사세계의 대표적 실체로 나타난 자로서 천사세계를 이끌고, 실체 사탄세계를 방비해야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찾아오실 수 있는 천사장의 실체목적을 완결한 세례 요한이 되어야 하는데, 그가 그 사명을 완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 사명까지 책임지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종 되는 도리가 생긴 것입니다. ‘내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노라.’ 고 했지요. 하나님의 아들이 그러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신랑으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영광 가운데 출발해야 했던 예수님은 슬프고 원통한 종의 멍에를 쓰고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역사적인 과정이 남아 있기에 그 고개를 넘기 위해 나온 것이 기독교의 2천년 역사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민족적 섭리를 세계적 섭리로 끌고 나오신 것입니다. 역사를 이끌고 나가는 데는 역사의 내부를 전부 청산해야 합니다. 청산하는 데는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국가적으로, 세계적으로 전부 청산해야 합니다. 본래는 만민이 받들어 발전시켜 나가야 하는 것이 하늘의 섭리임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이 그 책임을 못했기 때문에 역사는 점점 점점 발전해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외적인 역사에 보조를 맞추면서 내적으로는 역사의 목적과 때를 이루기 위해서 준비해 오셨습니다.
기독교에서는 ‘끝날에는 주님이 오셔야 된다.’ 고 하지요. 주님이 누구입니까? 잃어버린 참부모입니다. 부모는 영적 기준만으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이 죽음으로 말미암아 영육을 중심삼은 참부모의 심정적 터를 마련하지 못했으니, 우리가 그 터전을 마련해서 하나님의 축복권 내에서 예수님을 중심한 참다운 혈족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에서는 그저 믿고 천국 간다고 합니다. 가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믿어 지지 않거든 기도해 보십시오.
만일 하나님과 뗄래야 뗄 수 없고, 사탄이 부정할래야 부정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직계의 혈족이 있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혈족이요 예수의 혈족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혈족이 없기 때문에 심정적 정점이 성립되지 못한 것입니다. 아직까지 하나님의 직계 혈족이 중앙에 자리를 잡지 못하고 사방으로 돌아가고 있기 때문에 사방에서 사탄이 침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중심축에 들어가게 되면 하나님이 직접 주관하시기 때문에 사탄이 침범 할 수 없습니다. 축에 들어가서 돌리기 시작하면 그 힘을 사탄은 막을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아직까지 축에 들어가지 못하고, 전부 다 축의 주위를 돌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도 주관 못하고 사탄도 주관 못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사탄 편으로 가면 사탄이 마음대로 움직이고, 하나님 편으로 가면 하나님이 주관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가운데서 하나님은 지금까지 중심을 결정하기 위한 섭리를 해 나오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현세는 어떠한 때냐? 아벨의 입장에서 보면 가인과 아벨이 대립한 때요, 가인의 입장에서 보면 아벨을 죽였던 것과 같은 역사적인 때입니다. 아벨을 환영한 가인이 어디 있습니까? 이것은 현하 예수님이 아벨이라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횡적으로 보면 예수님을 위한 가인입니다. 이 가인들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사탄을 쳐부숴야 합니다. 그래야 세계의 악한 것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명을 해야 할 책임이 오늘날 기독교에 있는 것입니다.
이 세계는 사탄 편 세계인 공산세계와 하늘 편 세계인 민주세계, 즉 유물세계와 유심세계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여기에서 이제 나올 것은 기독교를 중심삼은 세계관입니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아담 해와의 뜻을 배반하고 아벨을 배반하는 가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환영하고, 아담 해와의 뜻을 환영하고, 아벨의 뜻을 환영하는 가인입니다. 그런 세계형이 민주세계입니다. 이것을 반대로 치고 넘어가려는 것이 진짜 사탄입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가인이 아벨을 협조하여 세계적으로 참다운 아벨적인 사명을 다하게 하기 위해서는 아들의 사명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부모의 자리에 못 올라갑니다. 아들의 자리를 결정하지 않고는 부모의 자리로 못 올라가는 것입니다. 왜? 아담 해와가 타락하여 가인과 아벨을 낳은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인정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딸로 결정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복귀시대에는 하나님의 아들딸이라는 기준을 세우지 않고는 부모의 자리에 올라갈 수 없습니다.
그러니 전세계의 기독교인들은 어떠한 자리에 있느냐 하면 하나님을 반대하던 가인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가인, 아벨의 뜻을 위하는 가인이 되어야 할 자리에 있습니다. 그래야 세계적인 아벨의 중심자로 주님이 오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시는 주님은 신랑으로 못 오십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 위에 와서 책임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책임을 다하고 가인적인 세계를 통합하고 난 후에야 비로소 하나님 앞에 신랑 신부의 자리로 올라갈 수 있는 것입니다. 복귀의 원칙이 그렇습니다.
현재는 어떤 때인가? 가인과 아벨이 싸우는 때입니다. 이러한 때에 기독교는 가인을 위주하고 하나되어야 합니다. 민주세계는 또 아벨로 오시는 주님과 절대적으로 하나되는 기준을 세워야 됩니다. 옛날 아담가정에 벌어졌던 것이 돌고 돌아 역사적인 최후의 종점에 가서 그와 같은 현상이 벌어지면, 여기에 하나님을 중심삼고 심정적인 터전을 마련해 나가면서 참부모의 인연을 결정지으려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니 이 세계에서 개인적인 아벨이 나와야 하고, 아벨적인 가정이 나와야 되고, 아벨적인 종족이 나와야 하고, 아벨적인 국가가 나와야 합니다. 그러면 아벨국가는 어떤 국가인가? 미국인가? 아벨이 가인을 굴복시키기 위한 싸움의 터전 위에, 있는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 앞에 제사 드리는 나라,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를 걸고 자기의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바치는 나라, 오늘날 민주세계에 있어서 제일 비참한 나라, 제일 복잡한 나라가 아벨국가입니다.
외적인 문제도 그렇지만 내적인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벨적인 개인, 아벨적인 가정, 아벨적인 종족, 아벨적인 민족, 아벨적인 국가가 나오면 세계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 자리가 어디냐? 여러분, 우리 나라에 판문점이 있지요? 판문점은 세계에 하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과 사탄이 동시에 참소할 수 있는 곳이지요. 천지의 법도에 어긋나면 거기서 참소하는 것입니다.
한국은 3․8선을 중심으로 남과 북이 딱 갈라져 있습니다. 원리를 통해서 볼 때, 제물은 쪼개야 되지요? 그래서 한국의 경제 상태는 극난(極難)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제사장이 제물을 드릴 때는 상하를 막론하고 다 제단 앞에 머리를 숙이는 것입니다. 속죄의 제물 앞에는 그 나라의 군주도 머리숙이고 민족 전체가 머리숙일 수 있는 기준을 닦는 것입니다. 그것을 못하면 통일교회 사명은 완결되지 못한다고 선생님은 생각합니다.
제물이란 무엇인가? 죽음길을 준비하는 것이 제물입니다. 살길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에요. 어느 한때에 민족을 위하여 속죄의 제단에 깨끗이 오를 수 있는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그가 잘 입는 것도, 잘 먹는 것도 거룩히 바쳐지기 위함이요, 살아 있는 것도 그 생명을 거룩히 바치기 위해 살아 있는 것입니다. 제물은 환경이 좋으면 좋을수록 생명을 바칠 길, 죽을 길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대접을 잘 해 주면 잘 해 줄수록 죽을 날이 가까워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세계에 그런 운명의 제물 길을 가는 민족이 있어야 됩니다. 통일교회가 그 제물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죽을 준비를 해야 됩니다.
오늘날 통일교회가 어려움을 많이 당해서 차후에 삼천만 민족이 당할 어려움의 고비를 먼저 넘어가야 합니다. 그것이 제물의 길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민족을 제물이 희생함으로써 살릴 수 있고, 속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제물된 자가 어려운 고개를 넘으면서 먼저 맞고 먼저 희생하여 하나님 앞에 피를 뿌림으로 말미암아 그 은사를 받아서 민족이 복귀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그럼으로써 제물된 자는 은사를 받아 회생(回生)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통일신도들은 그런 길을 가야 합니다. 이러한 사명은 젊은 사람들이 해야 하는데 싫다고들 합니다.
이번에 선생님이 민주세계를 중심삼고 전세계를 순회할 때, 무엇을 보았는가? 다른 것 보지 않았습니다. 어느 나라에 하나님이 계실 수 있느냐? 어느 민족을 하나님이 사랑하실 수 있느냐? 하는 것을 생각하면서 보았습니다. 어느 민족이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지금은 환경적으로 하나님을 잃어버리기 좋은 사회적 여건들입니다.
제사 드리는 자리에서는 부모라는 관념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자식이라는 관념도 가져서는 안 됩니다. 만일에 제사장의 아들이 죄를 지었는데 그 제사장이라는 사람이 ‘그는 내 아들이니 하나님, 나를 보고 내 아들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하는 기도를 해서 되겠습니까? 그런 사람은 제물이 아닙니다. 자식의 관념, 부모의 관념, 이 친족 전체, 즉 형제라는 관념, 종족이라는 관념이 남게 되면 제물 될 자격이 없습니다.
제물은 공적이어야 합니다. 제물이란 나라의 물건이지 어떤 종족이나 어떤 개인의 물건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동목적을 대신해야 합니다. 제물의 입장에서 ‘내 가정의 죄를 속죄해 주시오.’ 라고 기도해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공동목적을 대신한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제물이 ‘내 민족을 속죄해 주시오.’ 라고 기도해서 되겠습니까? 안 됩니다. 제물된 자는 크게 ‘민족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세계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나아가서 ‘세계의 수많은 불쌍한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 가지고 용서를 받게 되면 자연히 자기 가정이나 종족도 용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물의 길입니다.
복귀섭리를 추진해 가는 데 있어서는 반드시 제물이 필요합니다. 가인 아벨의 싸움터에서는 제물이 없으면 탕감할 수 없습니다. 가인과 아벨을 중심삼고 탕감복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제물이 있어야 해요. 6천년 전 아벨은 아벨대로 가인은 가인대로 하나님 앞에 지성을 다한 제물을 드리면서, 환경을 개척하여 아담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부모의 위치를 결정지을 수 있는 발판을 닦아 드려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가인과 아벨은 그런 제물을 드리는 과정을 거쳐 부모의 위치를 결정지을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끝내 승리적인 부모의 터전은 이루어질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 기성교회 지도자들이 어떤 입장인지 압니까? 제사장의 입장입니다. 그러면 제사장은 어떤 입장에 서야 되는가? 제사장은 제사 드릴 양이 죽을 때 심정이 동하여 눈물 흘려야 됩니다. 절대적으로 양과 같은 공동 소유의 자리에서 하나님 앞에 민족을 대신하여 속죄의 제물을 드려야 합니다. 자기 몸의 피의 값 대신 양을 드린다는 것을 느껴야 합니다.
제물이 무엇이냐 하면 제사장 자신의 몸뚱이인 것입니다. 제사장 자체가 제물이라는 것입니다. 처참한 자기의 모습을 민족을 대신하여 하나님 앞에 바쳐야 할 책임이 제사장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제사장이 그 책임을 못하면 망합니다. 또 거기에 참여한 사람도 구원받지 못합니다. 그러니 어차피 해결점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실 수 있겠습니까? 몇몇 사람들을 만나 봐도 하나님의 심정세계를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통일교인들은 축복받은 사람들입니다. 내가 통일교회 선생이라서 이런 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민족은 앞으로 우리 통일교회가 나가는 방향을 취하지 않고는 살 도리가 없습니다. 두고 보십시오. 그때가 오면 가다가 돌아서야 하는데 그때 뒤에서 안내할 사람이 없으면 그 민족은 망합니다. 그 안내자에게는 민족이 잘못 가면 바른 길로 인도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인도하는 대로 따르지 않으면 어차피 돌아설 때가 있을 것이니 뒤로 돌아설 때 뒤에서 나를 따르라고 지도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양면의 지도자를 가질 수 있는 종교 단체가 나와야 합니다.
최고의 자리에서는 하나님의 아들딸의 책임을 다하고, 최하의 자리에서는 종의 책임을 다하여야 합니다. 이렇게 양면에서 하나님의 심정을 알아 드리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이냐? 이것을 위해서 선생님이 여러분 뒤에서 지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앞에 서서 지도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서 돌아설 때에, ‘내가 이렇게 걸어왔으니 너희들도 그대로 걸어오면 산다.’ 할 수 있는 지도 이념체제를 갖추어 놓아야 합니다. 만일 이 민족이 그 길을 따라가면 살 것이요, 따라가지 못하면 돌아서게 될 것인데, 어느 때라도 지도할 수 있는 양면적인 지도자를 하나님 대신 반드시 세워 놓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 통일교회 이념으로 보게 될 때 책임이 지극히 큽니다. 또 행동면으로 보아도 지극히 큰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비약적으로 발전을 못 하는 것은 젊은 사람들 때문입니다. 대학 다니는 청년들 때문이에요. 지금 우리 교회가 개척하는 과정에서는 대학 가는 것이 문제라고 할 수 없습니다. 희생하고 제물 되는 이 길은 공부할 것 다하고 가는 길이 아닙니다. 지방 식구들은 이런 것을 알고 학교도 다 집어치우고 전부 나가서 뜻을 위해 싸워 왔습니다. 그래 가지고 1년, 2년, 3년 정도는 잘 지내는데 7년 고비를 넘기가 힘듭니다. 한 3년 반 쯤은 뭐가 뭔지 모르는 상태에서 잘 지냅니다. 세계를 위하고 민족을 위한다고 하며 잘 지내요. 그러다가 3년 반만 지나면 자기를 생각하게 됩니다. 처음 3년은 제물을 드리는 때입니다. 이 제물 드리는 시기는 잘 지내고 나서는 자기를 중심삼고 바라보게 되는데 바로 그때 떨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과정에서 생긴 부작용인데 모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7년 기간을 넘어야 하는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을 바꿔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다운 가인이 있습니까? 참다운 가인이 어디 있는가? 가인적인 참다운 개인과 가인적인 참다운 가정과 가인적인 참다운 족속, 가인적인 참다운 교단이 어디 있는가? 하나님을 위해 충성하고 앞으로 오시는 주님을 위해 천번 만번 회개하고 기도한 준비된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통일교인들이 아벨적인 입장이기에 사탄세계에 들어가서 참다운 가인을 세워 가지고 가인이 우리의 뜻을 따를 때까지, 즉 참다운 아벨의 자리를 인계 받을 때까지 우리가 가르쳐 주고 아벨의 뜻을 상속시켜야 합니다. 그래서 아벨의 자리로 다리를 놓아서 넘어가야 합니다.
그러려면 눈물과 땀과 피를 흘려야만 합니다. 이것은 우리 통일교회의 표어와 같습니다. ‘눈물은 인류를 위하여, 땀은 땅을 위하여, 피는 하늘을 위하여’ 흘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눈물을 잘못 흘렸습니다. 땀을 잘못 흘리고, 제사를 잘못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을 다시 수습해야 합니다. ‘부모의 심정을 지니고, 종의 몸을 쓰고, 눈물은 인류를 위하여, 땀은 땅을 위하여, 피는 하늘을 위하여’ 흘리자는 것입니다. 역사노정에서 하나님이 하신 것과 같이 그대로 하자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마음으로 걱정하는 것이 세상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날 아벨의 책임을 짊어진 우리는 아벨을 대할 수 있는 천적인 가인이 없으니 가인을 양육해야 합니다. 아벨을 때려죽이는 가인 말고, 아벨을 위하여 생명을 바칠 수 있는 가인을 양육해야 합니다. 이것이 현하의 우리의 사명입니다.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의 모든 권세는 사탄이 가져갔습니다. 그리하여 세상 나라의 왕도 주권자도 모두 사탄 편이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탄이 가진 모든 것을 다시 빼앗아 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빼앗아 오는 데는 자연굴복이라는 절대 조건을 세워야 합니다. 자연굴복시켜야지 강제굴복시켜서는 안 됩니다. 왜? 아담이 말로 유인당한 것은 강제굴복 당한 것이 아니라 따라간 것입니다. 그러니 반대로 가인적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아벨 앞에 자연굴복하게 만들어야 됩니다. 타락한 아담 해와의 모든 것을 모두 상속받은 것과 마찬가지로 복귀시대에 있어서 가인은 아벨 앞에 자연굴복하여 이 세계의 모든 것을 아벨적인 것으로 상속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몽둥이로 쳐서 굴복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맞고 빼앗아 나오는 것이 하나님이십니다. 자고로 역사에 이름난 사람은 그 시대에 맞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나고 나면 인정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2천년이 지난 오늘날 역사가 증거하는 예수님을 누가 못 믿겠습니까? 그러나 2천년 전 당시대에 제물의 입장으로 처참하게 피 흘리실 때 예수님을 따른 사람은 없었습니다. 죄다 도망쳤거든요. 지금은 믿기가 쉬운 것입니다.
이런 환경에 처해 있을 때 아벨이 해야 할 일은 가인을 굴복시키는 것입니다. 강제굴복이 아니고 자연굴복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인을 완전히 굴복시키기 위해 사랑하는 독생자까지 보내신 것입니다. 가인을 완전히 굴복시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가장 사랑하는 더욱 완전한 아들을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가인이 자연굴복하지 않으면 아벨은 제물이 되는 것이 원칙입니다. 가인이 자연굴복하지 않으면 아벨이 제물되는 것은 철칙이에요. 가인이 자연굴복하면 아벨은 죽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민족 앞에 아벨로 나타난 예수님은 이스라엘 민족이 자연굴복하지 않았기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천도가 그렇기 때문입니다.
맞고 빼앗아 나오는 것이 하나님의 작전입니다. 한 사람을 빼앗기 위해,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하나님은 가정을 치십니다. 그래야 사탄이 참소를 못합니다. 여러분 이거 알아야 합니다. 세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남의 아이와 자기 아이가 싸웠다고 합시다. 자기의 아들이 잘못한 것이 틀림없는데, 남의 아들이 잘못했다고 그 아이를 때리게 되면 매맞은 아이의 부모로부터 참소받게 됩니다. 그러나 남의 아들이 잘못한 것을 뻔히 알면서도 자기 아들을 때리면 그 부모는 참소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역사는 진행되어 왔습니다. 역사노정에서 하나님을 위해 나왔던 수많은 사람은 피를 흘리지 않으면 안 되고,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안 되고, 억울한 생애의 노정을 가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이건 왜 그러는가? 가인적인 세상을 자연굴복시키지 않으면 복귀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새로운 이념과 새로운 진리의 이 길을 탐구시켜서 그 진리가 보편화됨에 따라 그 진리를 추구할 수 있는 역사적인 환경을 개척해 나온 것입니다.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진리! 참된 진리가 나와서 참된 사람, 참된 사랑, 참된 인격, 참된 심정을 찾아야 합니다. 인간은 어차피 그런 것을 찾아가기 때문에 참된 진리 앞에는 머리를 숙이게 되어 있습니다. 또 참된 진리를 말하는 사람 앞에 자연굴복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진리 말씀과 인격을 갖춘 사람을 정해서 역사를 수습하여 가지고 심정적인 하나님의 내적 기준과 맞추어서 하나님 쪽으로 넘어와야 됩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넘어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 세계의 탄식권을 넘어야 됩니다. 넘어가는 그 고개가 십자가의 길이요, 죽음의 길입니다.
도의 길이란, 살아서 죽음의 길을 청산하고 가는 길입니다. 그 길을 넘어가기 위해서는 골고다를 거쳐가야 하는 것입니다.
아벨은 그 고개를 넘어가기 위해서 이중의 사명을 해야 합니다. 가인을 굴복시키고 그를 하나님 앞에 세워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아벨은 하나님과 가인의 중간 입장에서 위로 하나님을 모시고 아래로 가인을 굴복시켜야 합니다. 아벨이란 존재는 가인을 굴복시켜야 하는데 강제굴복이 아니라 자연굴복을 시켜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피와 눈물을 흘리고 무한히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탄세계의 축복권을 빼앗기 위해서는 심정적으로 무한히 주고 전부 감싸주고 진실한 마음을 주어야 합니다. 사탄에게 준 그것이 자기의 물질보다 가치 있는 것일 때는 그것이 울타리가 되어 자연굴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벨은 가인을 굴복시켜야 됩니다. 그리하여 가인으로부터 상속받은 전부를 하나님 앞에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사장 입장과 제물 입장을 탕감하는 것입니다.
제물은 원래 사람이어야 하는데 그럴 수 없으니 이스라엘 민족은 사람을 대신할 수 있는 양을 잡아서 제물로 드렸던 것입니다. 그 양은 제사장의 몸과 같고 제사장 자체는 제사장의 마음과 같은 것입니다. 즉 제사장은 아벨의 입장이기 때문에 가인적인 입장에 있는 사람들을 전부 자연굴복시켜 가지고, 하나님의 심정과 연결시킬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아벨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니 민족을 수습하여 자연굴복시켜 가지고 하나님 앞에 드려야 했는데 그러한 책임을 못했기 때문에 제물이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복귀시대에 우리들은 자처해서 아벨이라고 하며 민족적인 아벨의 사명을 해야 되겠고, 세계적인 아벨의 사명을 해야 되겠다고들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 통일교인들은 민족적으로 반대하라고 해야 합니다. 반대하다가도 참길을 가는 무리에게 자연히 굴복되어 들어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개인적인 시대에 개인적 입장으로 나갈 때는 그들이 굴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아벨적인 입장에서 가정적인 기준을 갖고 맞서게 되면 개인이 굴복하는 것이요, 종족적인 기준에서 맞서게 되면 가정이 굴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언제나 한 단계 앞서 나가 맞서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벨적인 입장에 선 사람에게는 지금이 민족적인 주의시대인 동시에 세계적인 주의시대인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민족을 대표해서 가인을 굴복시켜야 할 책임이 있는 동시에 세계를 수습하여 하나님 앞에 바쳐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세계를 붙들고 민족을 구하여 하나님 앞에 바쳐야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민족을 구하기 위해서는 세계적인 제물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민족을 바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이중의 십자가입니다. 알겠습니까? 아벨에게는 선조로부터 지은 역사적인 죄를 짊어지고 이것을 세계적으로 전부 수습하여 하나님 앞에 바쳐야 할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큰 사명을 책임지고 이중의 사명을 감당하지 않고서는 아벨의 책임을 완결지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아벨의 입장에서 민족 앞에 호소하였는데 그 민족 가운데에는 가인이 없었습니다. 수습된 가인이 없었던 거예요. 그러니 세 제자를 데려다 놓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죽든 살든 너희는 나와 하나가 되자. 내 아픔을 너희가 대신하고, 너희의 어려움을 내가 대신하여 죽음의 길도 같이 가자.’ 하였던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세 제자는 과거·현재·미래의 3시대를 대표한 인간상이었습니다. 아담가정의 가인·아벨·셋을 상징하고, 노아가정의 셈·함·야벳을 상징하고,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삭의 하나님·야곱의 하나님과 사울왕·다윗왕·솔로몬왕을 상징했으며, 또한 1차 아담·2차 아담·3차 아담을 상징했던 것입니다.
그런 세 제자는 역사적인 기간을 횡으로 축소시킨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을 절대적으로 모시고, 사탄이 쳐들어오면 쳐부수는 하늘의 충신의 사명을 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이 맞기 전에 대신 맞을 수 있는 심정적 기반을 마련하지 못하고, 예수님이 세 번씩이나 하나님 앞에 담판기도를 하는 동안에도 끄덕끄덕 졸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둠의 때가 되었다, 너희 갈 데로 가라.’ 고 분부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역사적인 사탄의 침범을 당했음을 알려 주는 말씀인 것입니다.
인간 세상에 아직 가인적인 승리의 터전이 결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날 기독교를 중심삼고 그 역사를 연결하여 영적인 가인세계를 이끌고 나와 영적인 재림 이념을 바라고 나온 것이 기독교의 사상입니다. 그런데 영적인 재림만 해 가지고 되겠어요? 영육 아우른 완전한 재림을 할 수 있는 이념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런 면에서 통일교회는 한 단계 진보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 식구들은 어떤 입장인가? 예수님이 넘어가신 십자가의 자리를 넘어서야 합니다. 민족 앞에 몰리고 쫓기는 자리를 넘어서야 하는 입장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통일교회는 많이 몰렸지요. 삼천만 민족이면 누구나 통일교회와 선생님을 욕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이 가신 서러운 고빗길을 안 갈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민족을 대신하여 제사장적인 입장에 서셨던 예수님 앞에 제물이 되어야 할 입장에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지방에 나가서 피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민족적인 속죄의 사명을 완결짓지 못합니다. 선생님은 그런 일 안 하고 여러분에게만 그런 일을 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선생님도 그런 일을 다 했습니다.
아벨의 입장은 어떤 입장입니까? 두 사명을 완결시켜야 하는 입장입니다. 주먹으로 때려 가지고 강제굴복시켜서는 안 됩니다. 피와 눈물과 땀으로, 심정으로 굴복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심정세계는 창조되어 가는 것입니다. 심정을 갖고 나가면 따라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제자들로부터 열번 백번 배척받던 예수님의 억울한 심정을 우리는 잘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죽게 되었을 때 도망가던 제자가 아니라 십자가를 가로막고 내가 달리겠다고 할 수 있는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베드로는 나중에야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죽었지만, 미리 좀 그렇게 했으면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 같이 부활했을 것입니다. 그랬으면 오늘날 기독교가 2천년씩이나 안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이런 것 생각해 봤어요?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오! 베드로는 수제자였다.’ 라고 하는데 베드로가 무슨 수제자입니까? 예수님이 다시 찾아가서 세워 주었으니 수제자지요. 그 녀석 거 되먹었습니까? 스승이 생명을 걸고 담판기도하는 그 자리에서 잠만 자고 있었고, 스승이 죽게 되었을 때 도망간 자가 무슨 수제자 자격이 있습니까? 불쌍한 예수님입니다. 그런 베드로를 다시 찾아가야 했던 처량한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이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요 12:15) 하고 물을 때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것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요 12:15) 하고 베드로가 대답하였으나, 세 번씩 되풀이해서 물을 때의 예수님의 복장은 뒤집어졌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세 고개가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민족을 대표한 아벨의 입장에서 아벨적인 가인국가인 이스라엘을 수습하여 완전한 아벨적인 국가로 연결시켜야 했는데 그 사명을 완결 짓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영육이 분단된 예수님의 한이 풀리기 전에는 재림역사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안식할 수 없어요. 예수님의 한이 풀리지 않았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편할 수 있겠습니까? 아들이 죽으려고 하는데 ‘너 잘한다! 좋구나.’ 할 아버지가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이러한 곡절이 있는 한을 풀고 하나님의 한의 곡절을 풀기 전에는 이 한의 고개를 못 넘어가는 것입니다. 왜? 부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들은 어떤 사명을 해야 하는가? 예수님에게 아벨적 입장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가인적인 국가로 세워서 하늘 편 아벨국가로 상속하여야 할 책임이 있었는데, 민족이 그를 따라 주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 책임을 못하고 죽어 갔으니, 이 끝날의 우리들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되느냐? 다시 오시는 주님은 민족을 중심삼고 세계적인 뜻을 펴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지금 세계적인 발판을 닦아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형태는 민족적인 형이로되 뜻은 세계를 위하여 펴 나가야 하는 거예요. 세계를 소망하면서 민족까지 이끌고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탕감역사는 청산짓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민족을 대신한 아벨적인 기준이 반드시 민족과 규합되어 나와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런 나라가 있어야 합니다. 내가 고맙게 생각하는 것은 한국이 옛날부터 하나님을 모셔 왔다는 것입니다. 이제 한국은 하나님을 찾지 않으면 나아갈 길이 없습니다. 정치적인 면, 경제적인 면, 어느 면이든 나아갈 길이 없는 것입니다. 남의 힘을 이용해서는 안 됩니다. 어느 나라든 남의 원조를 받아 가지고는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원조를 해 주는 것은 전부 다 미끼입니다. 미끼예요. 그러므로 그런 것을 박차고 자력을 길러 놓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피 뿌리는 일이 벌어집니다.
여러분, 우리는 아벨적인 나라로서 아벨적인 생활을 해야 되겠습니다. 아벨적인 나라의 책임을 해야 되겠습니다. 복귀노정에 있어서 구원을 이루는 것이 우리가 기필코 달성해야 할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가인을 자연굴복시켜야 합니다. 민족적인 가인국가를 아벨적인 국가 앞에 자연굴복시켜 가지고 그 국가를 자기네가 주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며 ‘이 민족을 세계의 국가를 대표한 제물로 바치오니 받아 주시옵소서.’ 해야 됩니다. 그래야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지는 않고, ‘아! 대한민국이 아벨적인 국가의 사명을 다했으니 하나님이시여, 이제 이 나라를 세계적인 대표 국가로 세워 주소서.’ 한다면 하나님도 받을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천법이 그렇게 안 되어 있어요. 대한민국이 아벨적인 국가의 사명을 다해 가지고 하나님께 바칠 때는 ‘하나님, 이 국가를 세계를 위한 제물로 바치옵니다.’ 해야 합니다. 세계 만방의 수많은 나라들이 바라보고 조공을 드리며, 머리숙이도록 하기 위해 바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아벨로서의 책임을 지고 오셨던 예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수습하여 하나님 앞에 바치며 ‘이 민족을 세계의 국가를 구할 수 있는 제물로 드리오니 받아 주시옵소서.’ 했어야 합니다. 만약 예수님이 그런 입장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세계를 위한 제물로 하나님 앞에 바쳤더라면 세계적인 싸움의 노정을 넘어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영적인 기준만을 세우고 가셨기에 오늘날까지 기독교를 중심삼고 그 남아진 해결점을 찾아서 내려온 것입니다. 그런 이념적인 발판 위에 나온 우리 통일교회의 책임은 아벨적 입장에서 하나님과 가인 사이의 중간적인 사명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가인을 굴복시켜서 하나님께 바쳐 드려야 됩니다. 복귀 도상에 있어서 우리 통일교회를 민족과 세계를 위한 제물로 바쳐야 되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통일교회가 가는 길은 어렵고 힘든 길입니다. 그저 기성교인들처럼 다니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통일교회를 다니려면 대단한 각오를 해야 합니다. 이 길이 어렵고 힘들지 않다면 통일교회는 거짓인 것입니다.
오늘날 다방에 가고 술 마시던 사람을 교회에 가자 해서 데리고 교회에 가서 믿는다고 그냥 천국에 갈 수 있다면 오죽 좋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일은 안 하십니다. 곡절이 있습니다. 구멍이 뚫어졌으니 그 뚫어진 구멍을 막을 수 있는 것을 만들어야 됩니다. 그런 것을 복귀섭리라 할 때, 세계를 뚜드려 가지고 일시에 만들 수 있는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이 왜 구원섭리를 하는데 6천년 동안 섭리를 하셨겠습니까? 구원이란 억지로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 구멍이 뚫렸으니 하나님의 아들딸 이 새것을 갖고 와서 갈아넣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한 사람이 맞고 희생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새것으로 뚫린 곳을 막으면 그것이 연결되므로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것을 중심삼고 하는 것이 복귀역사입니다. 여러분이 그런 중심의 입장에 서야 하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오늘날 남자 여자를 막론하고 여러분은 어떤 입장에 있는가? 하나님의 복귀섭리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무엇이 나올 것인가? 천사장이 나오고 아담과 해와가 나오고 맨 나중에 하나님이 나옵니다. 그러면 그 하나님이 목적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천사장도 아니요, 아담 해와도 아니요, 참아들딸인 것입니다. 아담과 해와가 천사장과 타락한 결과가 무엇입니까? 사탄의 아들딸이 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오늘날까지 아담 해와를 대신할 사람을 보낼 수 없어서 복귀섭리를 못 하신 것이 아닙니다. 아담 해와의 사명을 대신할 사람을 또다시 보낼 수는 있으나, 그 결과가 하나님이 바라시는 소망대로 안 되고, 아담 해와가 소망하는 대로 안 되고, 타락전 천사장이 소망하던 세계가 안 된다면, 그 이후는 보내더라도 복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것 잘 알아야 됩니다.
아담이 원하던 것도 아들딸이요, 해와가 원하던 것도 아들딸이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도 아들딸입니다. 그런데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그 소망이 깨져 버리고 죄악의 역사가 벌어졌으니, 그것을 박차 버리고 참다운 혈통의 인연을 복귀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여러분은 유전법칙을 통하여 사탄으로부터 이어받은 사탄의 피를 청산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는 부정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 시대의 사회적 환경을 부정하는 거예요.
무엇을 부정하는가? 자신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먹는 것, 잠자는 것, 정욕 등을 억제하라는 것입니다. 그 단계를 넘어서지 못하고는 하늘 앞에 상대의 인연을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차적인 종교, 불교―불교도 고차적인 종교입니다.―의 스님이나, 천주교의 신부나 수녀들이 전부 혼자 사는 것입니다. 세상을 전부 다 부정하는 거예요. 그리하여 매를 맞아 하늘 앞에 제사를 드려서 제사장으로서의 승리적인 기준을 이루어야 비로소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귀입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천주(天宙)교회가 안 나왔습니다. 하나님이 공인하고 천리법도를 주관할 수 있는 종교가 안 나왔어요. 하나님의 심정과 일치된 부모의 기준을 세우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그 기준을 세워 나가는 것이 복귀의 길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말씀하신 신랑 신부란 말은 딱 들어맞는 것입니다. 주님은 신랑으로 오지만 부모가 되기 위해서 신부를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또 신랑 신부만 갖추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들딸이 있어야 됩니다. 예수님이 세 제자를 찾아가서 뭐라고 하신 줄 압니까? 그러니 여러분은 세 아들딸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예수님을 배척하던 세 제자 같은 자들 말고 그 이상의 제자들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 가지고 그 기준을 넘어서야 합니다. 그리하여 아담 해와의 타락전 단계로 넘어가야 되는 것입니다. 아담 해와가 타락해서 하나님 앞에 시험 받던 그런 자리가 아닌 아벨에게 제물을 드리게 할 필요가 없는 단계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들은 아벨적인 국가의 사명과 세계의 사명을 앞에 두고 국가적인 제물의 과정을 거쳐 나가 하늘이 인정해 주실 수 있는 세계적인 제물의 과정을 거쳐야 할 운명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알겠어요? 「예.」
오늘날 아벨 된 우리의 사명은 어떤 것인가? 민족적인 사명을 대신하여 제물이 되고 세계적인 사명을 대신하여 ‘나를 제물로 세워 주시옵소서.’ 해야 합니다. 제물이 되는데 죽으면 안 됩니다. 양을 잡아서 제사를 지내는 대신 몸은 양을 대신한 제물이 되고 마음은 제사장의 입장에서 제사를 드려서, 속죄의 권한을 부여받아 가인을 자연굴복시켜 가지고 아벨적인 자리로 끌고 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아벨적인 자리에서 그들과 하나되면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아담의 아들이 누구입니까? 참다운 아들은 가인이 아닙니다. 그러니 아벨이 되어야 합니다. 아벨이 되어야 해요. 그래야 아담을 해방시킬 수 있는 기준이 세워지는 것입니다. 아벨적인 입장에서 가인을 굴복시켜 가지고 가인을 아벨의 자리에 세워 놓고 아벨은 부모의 자리로 올라가야 합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아담 해와가 하나님 앞에 책임을 다했으면 하나님이 축복식을 해 주셨을 것입니다. 축복을 받으면 거기서부터 선이 출발되는 것이며 진리의 일체화, 실체의 일체화, 심정의 일체화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진리의 일체화란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라.’ 하시면 ‘예.’ 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다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본 아담 해와는 원래 둘이 아닙니다. 아담이 해와에게 이끌려 천법을 어겼으니 둘이 되었지 원래는 하나인 것입니다. 진리의 일체화, 실체의 일체화가 된 다음에는 심정의 일체화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과 일체화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될 날을 바라보고 나오시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가 일체되지 않으면 선한 아들딸을 낳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선한 아들딸을 낳을 자신이 있어요? 예수 안 믿고도 천당에 갈 수 있는 아들딸을 낳을 자신이 있어요? 아이를 낳자마자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얻는다는 그러한 법도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은 그렇게 부족한 분이 아닙니다. 인간이 죽지 않았으면, 타락하지 않았으면 구주가 필요 없습니다. 기도가 필요 없고, 신앙이 필요 없는 거예요. 타락했기 때문에 구주가 필요한 거지요. 구주가 필요하게 된 것은 타락의 보응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타락했으니 믿고 구주를 따라가야 됩니다. 따라가서는 뭘 할 것이냐? 사랑의 보금자리를 마련해야 합니다. 간단하잖아요? 그리고는 신랑되신 예수님과 실체적으로 일체화하고 심정일체화해야 합니다. 그래서 복귀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참부모와 참자녀가 상봉하는 자리, 즉 하나님이 태초에 소망하신 그 자리가 이 천지간에 벌어지면 거기서부터 새 천지가 열리는 것입니다.
지금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곁을 떠나 온 것들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어차피 탕감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오늘날 이러한 와중에서 통일교인들이 중차대한 입장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들이 잘함으로 말미암아 민족을 살리고, 세계를 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희생해 나온 것은 민족적인 제단을 마련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제는 세계적인 제물이 되기 위해 또 나아가야 합니다. 두 사명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민족이 민족적인 사명과 세계적인 사명을 다하겠다고, 한국이라는 민족적인 제단의 기준을 넘어서 세계적인 제단을 우리가 세우겠다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런 기반을 닦아 놓은 다음에야 비로소 통일교인들이 쉴 때가 온다고 선생님은 생각합니다. 통일교회의 가는 길이 그런 길입니다.
구원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오늘날 믿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오! 하나님이시여, 나를 구해 주시옵소서.’ 하는데, 혼자서는 아무리 빌어도 천당 못갑니다. 자기를 중심삼고 구(求)해서는 구원이 안 되는 것입니다. 내가 구원받으려면 내가 머물러 살 수 있는 가정이 있어야 됩니다. 가정이 구원받으려면 종족이 있어야 하고, 종족이 구원받으려면 민족이 있어야 되고, 민족이 구원받으려면 국가가 있어야 되고, 국가가 구원받으려면 세계가 있어 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시여! 나만 구원해 주시옵소서. 옆에 사람이야 구원을 받든 말든 모르겠습니다.’ 하면 죽어도 구원 못 받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생각할 때 오늘날의 개인, 가정, 종족, 민족, 국가, 세계는 모두 틀려 먹었습니다. 그러니 전부 다 깨뜨리고 혁신해야 됩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가정을 구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서 가정을 구원하고 ‘나를 구원하자.’ 해야 합니다. 이것이 구원받는 길인데 사람들은 이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들은 열심히 잘하고 집에 돌아가서는 그저 매일 ‘이놈아! 나 살려라.’ 하며 싸우면 되겠습니까? 가정적인 구원의 기준을 마련하기 전에 개인 구원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가정적인 구원을 못 이루면 영계에 가서라도 가정 구원 역사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의 신앙의 표준은 나를 구하기 전에 가정을 먼저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당신의 뜻이 이런 것이 아닙니까?’ 하면 하나님께서 ‘옳다.’ 하실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어요?
선이 가는 길은 위하는 길입니다. 더 큰 것을 위하는 길입니다. 그것이 선이 가는 길입니다. 종족을 위하여 가정을 희생하는 것이 선이요, 민족을 위하여 종족이 희생하는 것이 선이요, 국가를 위하여 종족이 희생하는 것이 선입니다. 선의 법도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가인 아벨의 연관된 연대 책임인데 사람들은 이것을 모릅니다. 여러분은 이거 똑똑히 알아야 됩니다.
‘아! 내가 구원을 얻어야겠다.’ 해 가지고 통일교회에 들어와서 ‘뜻을 위해 충성하면 틀림없이 하나님 앞에 갈 수 있을 것이다.’ 할지 모르지만 자기의 환경, 자기의 가정을 그냥 그대로 두고 혼자서는 구원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천국은 혼자서 가는 곳이 아닙니다. 아버지, 어머니, 아들딸 전부 함께 가는 곳이 천국입니다. 본래 하나님의 창조목적으로 본 천국은 그런 곳이에요. 어머니는 지옥에 가서 ‘야! 아무개야 나 좀 살려다오.’ 하고 있는데, 혼자 천국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또 아버지가 지옥에 가서 죽겠다고 하는데, 혼자 천국에서 ‘야, 좋다.’ 하면서 ‘아버지는 거기 있어도 싸지요.’ 하는 곳이 천국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창조이상인 천국은 부모와 처자와 더불어 가족 전부가 같이 가는 곳입니다. 가정만 가서도 안 됩니다. 친척도 같이 가야 되고, 민족도 같이 가야 됩니다. 나라 전체가 가는 곳이요, 세계 전체가 가는 곳입니다.
천국은 아담 혼자서 가는 곳이 아닙니다. 아담의 아들딸과 천추만대 후손들과 모든 족속들이 다같이 가야 하는 곳입니다. 타락하지 않았으면 세계 인류 전체가 아담의 아들딸이요, 아담의 후손이요, 아담의 족속이니 모두가 천국에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이 세계는 공산주의도 아니고 민주주의도 아닌 아담주의 세계여야 합니다. 주의라 하는 것은 길잡이, 즉 지팡이입니다. 그 주의 자체는 실체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길을 갈 때 지팡이 역할밖에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담주의 세계는 어디에 있는가? 이 세계는 타락한 아담주의 세계입니다. 타락한 아담주의 가정, 타락한 아담주의 종족, 타락한 아담주의 민족, 타락한 아담주의 국가는 수둑룩한데 타락하지 않은 본연의 아담주의 세계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완성하여 심정을 중심삼고 천하가 그 영역에서 벗어날 수 없는 천륜의 대법도를 세울 수 있는 참다운 아담주의 가정, 참다운 아담주의 종족, 참다운 아담주의 민족, 참다운 아담주의 국가, 참다운 아담주의 세계는 어디 있느냐?’라고 하실 때 ‘여기 있습니다.’ 하면 하나님이 어떠하실 것 같습니까? 그러한 천지가 지상천국인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가야 할 길에는 곡절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아담의 세계, 타락하지 않은 본연의 아담세계, 우리 인류의 참부모요, 참조상으로서 천륜의 법도와 전통을 이어받아 하나님의 뜻에 일체화될 수 있는 그 세계, 그 세계가 못 되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수많은 도인들이 그 세계를 개척하기 위해 새로운 선민을 통해 섭리해 나온 것입니다.
선민이라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다 죽어 넘어져 있으니 아담을 보호할 수 있는 울타리의 가정, 종족, 민족, 국가를 만들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벨을 위하여 충성을 다할 가인적인 국가, 가인적인 세계형을 갖추자는 것입니다. 민주세계는 가인적인 세계입니다. 공산세계는 사탄주의세계지요?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사탄주의입니다. 여기서 아벨이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아벨은 예수 같은 분입니다. 우리 통일교회의 논리가 틀림없다면 세계와 만민을 위하여, 한 분 하나님의 심정을 중심한 아벨이 나타나서 아들의 사명을 완결짓고 가인적인 입장에 있는 세계 인류를 자연굴복시키고 영계 구원까지도 책임져야 되는 것입니다. 영계가 아직까지 지옥에서 벗어나지 못했지요? 그러니 영계까지 구원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오시는 재림주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세계 인류 앞에 아벨적인 승리의 기준을 세워서, 이 인류를 하나님 앞에 바치는 것입니다. 세계 인류를 행복하게 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영계에 간 우리 선조들은 지옥 간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영계의 지옥까지 책임지고 구원하겠습니다.’ 해야만 하나님의 뜻 앞에 본연의 기준을 세울 수 있는 것입니다.
구원을 하는 데는 아들딸을 구원하기 전에 먼저 천사장을 구원해야 됩니다. 그러면 논리적인 모순이 없어지지요. 그래서 천사장의 나팔 소리와 함께 주님이 오신다고 하지요? 그것이 무슨 말이냐 하면 천사장의 책임부터 완결해야 주님이 오셔서 세계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류가 귀먹고 눈멀어서 암만 봐도 모르고 아무리 외쳐도 듣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민족이 어떠한 자리에 서 있습니까? 민족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세계가 가인적인 입장에 서야 됩니다. 반대하는 가인 말고 아벨의 뜻에 따르는 가인의 입장에 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물을 드려야 됩니다. 이러한 고비가 남아 있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번에 선생님이 세계를 돌아보고 돌아오면서 마음으로 깊이 느낀 것이 있습니다. 오늘날 세계가 어떻고 어떻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아요. 그러나 그런 것은 문제가 안 됩니다. 하늘이 뜻하신 목표가 중요하지요. 그러니 우리는 하늘이 소망하시는 자리에 서 가지고 아벨적인 기준에서 가인을 대신하여 제물이 되고 민족적인 책임과 세계적인 책임을 다하는 세계적인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나라를 위해서 가인을 굴복시키고, 세계를 위해서 제물이 되겠다는 입장에 서야 됩니다. 그래야 천국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런 사명을 하기 위해 애쓰다가 끝내 못하고 세계를 바라보며 죽어간 것입니다. 물론 민족을 위해 희생한 것입니다. 실체로는 민족을 위해 희생하여 탕감받았지만 그 마음과 사상은 세계 인류를 위하여 제물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와 같이 죽음으로써 승리하였지만, 그것을 실체화하여 오늘날 이 세계적인 종말시대의 신도들은 세계적인 무대와 영계의 무대까지 연결시켜야 합니다. 그리하여 영계까지도 구하겠다는 책임을 짊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이 세계에 탕감조건을 세울 수 있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그런 가운데 오시는 주님도 참부모의 자리에 서야 되는 동시에 우리들 자신도 그런 자리에 서야 합니다. 복귀역사에 있어서는 언제든지 그런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의 국가 형태를 가만히 보면 참 재미있습니다. 민주주의의 말로(末路)는 무엇으로 알 수 있는가? 민주주의 국가는 앞으로 개별적인 제국주의 사상 형태로 떨어지게 됩니다. 그것이 민주주의의 말로가 되는 것입니다. 떨어지는 데는 저개발국가로부터 떨어집니다. 그래서 차츰차츰 민주주의세계 전체가 제국주의 형태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또 공산주의는 국제공산주의 형태에서 씨족공산주의 형태로 떨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중에는 공산주의도 민주주의도 아닌 무슨 주의가 나오느냐 하면 부모주의가 나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만민형제주의요, 박애주의였지만, 앞으로는 부모주의, 심정주의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역사의 종말에 나타날 최후의 주의입니다. 통일교회 들어와서 그런 일을 못 하겠거든 보따리 싸 가지고 나가십시오. 심정적인 기준에서 그런 것이 발견되지 않거든 가고 또 가야 됩니다. 그리하여 기필코 찾아야 합니다.
만민형제주의가 아닙니다. 부모를 중심삼고 심정을 중심삼고 부모의 법도와 전통을 따라야 합니다. 부모를 사랑하고 나서 형제를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천도가 설 것이 아닙니까? 형제의 사랑만으로는 안 됩니다. 먼저 부모를 사랑하고 나서 형제를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가인과 아벨은 형제는 형제로되 제사를 드리지 않은 형제였습니다. 그러니 누가 와서 제사를 드려야 하느냐? 주님이 오셔서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부모를 맞이할 수 있는 형제가 되어 새로운 역사세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지금까지는 가인과 아벨이 역사적인 죄를 탕감하는 제물을 드리지 않았습니다.
아담 해와가 부모의 자리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다시 부모의 자리를 찾기 위해서는 가인 아벨이 싸워서 아벨이 승리했던 것처럼 오늘날 이 세계에 가인과 아벨과 같은 기준이 부모를 중심삼고 다시 벌어져서 가인을 굴복시켜 가지고 아벨적인 자리로 들어가야 됩니다. 그래야 비로소 부모의 자리가 복귀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공식적인 길입니다.
그러니 오늘날 우리들은 어떤 입장에 서야 되느냐 하면 민족을 중심삼고 예수님의 사명을 연결시키는 입장에 서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지금 민족을 사랑하는 이상 세계를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어떤 사람은 통일교회가 세계적으로 발판을 넓혀 가니, ‘통일교회의 문 선생은 대통령감이야!’ 하는데, 한국의 대통령이 문제가 아닙니다. 기성교회에서는 ‘통일교회가 뭐 어떻게 하려 한다.’ 하며 비방하지만 이제 그런 말은 지긋지긋합니다. 세계를 살려야지요. 세계를 살려야 해요. 그러려면 우리가 민족적인 책임을 다하고 세계적인 기준에서 가인 아벨의 책임을 다하고, 예수님을 대신할 수 있는 책임자적인 사명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알겠지요? 여러분이 그러한 역사적인 입장에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누구인가? 예수님은 주님이 아니라 여러분의 형님이요, 오빠입니다. 이런 말을 하면 기독교인들은 나가자빠질 것입니다. (정전으로 이 이후의 말씀은 녹음이 안 되었음.)
오늘은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자녀의 날’입니다. 특히 여러분 축복가정들은 하나님께서 맡겨준 책임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가정은 단순히 자기의 가정을 위한 개인적인 것이 아니고, 종적인 조건으로 세운 36가정과, 가인 아벨의 기준으로 세운 72가정과, 평면적인 기준으로 세운 124가정을 대표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 식구들은 본부에서 어떠한 지시가 있으면 생명을 다하여 받들어야 합니다. 주일이면 새벽 경배를 드리되 종족을 대표한 입장에서, 그리고 메시아적 사명감으로 정성껏 해야 합니다.
선생님의 가정은 1967년까지 내적인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여기에 준해서 여러분의 가정들도 각자의 책임을 다하여 추궁받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축복가정이 되었으면 가정생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제사장의 사명을 다해야 하고 가정 완성의 환경을 쌓아 올려야 합니다.
축복의 기준은 지극히 높은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 기준 앞에 서지 못한다면 누가 서겠습니까? 주일에는 자녀들과 함께 하늘의 법도를 세울 것에 대하여 의논하고 그것을 실행하도록 해야 합니다.
오나가나 자기들 ‘둘’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잘못하면 앞으로 축복의 길도 막힌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축복 그 자체만을 자랑할 것이 아니라 축복가정의 생활을 자랑해야 합니다.
축복은 자리를 축복한 것입니다. 아직 축복의 기준을 넘지 못했습니다. 축복가정들은 교회에 먼저 나와 청소도 해야 합니다. 해야 할 것을 하지 못하면 저 나라에 가서도 그대로 한이 남아 있게 됩니다.
공적인 교회도 자기의 집보다 더 귀합니다. 생활의 모든 면을 정비할 줄 알아야 하는 데 그렇지 못합니다. 받고서도 돌려주지 못하면 망합니다. 앞으로는 더욱 가정의 법도를 세워 나가야 합니다. 축복가정이 우리의 나아가는 길에 있어서 때로 지장이 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중심과 일체화된 생활을 해야 합니다. 본부에 가까이 있는 사람들은 주일 같은 때에 주의해야 합니다. 1967년까지는 축복가정을 모두 정비해야 합니다. 축복받은 것보다 책임이 더 귀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선생님은 제1십자가, 제2십자가, 제3십자가를 지고 나갑니다. 그 첫째는 외적인 십자가요, 둘째는 가정적인 십자가요, 셋째는 자녀를 위한 십자가입니다. 이제부터는 가정이 선두에 서야 합니다. 자기의 아들딸도 귀하지만 그것은 세상을 먼저 사랑한 다음의 일입니다. 축복은 아벨로부터 되는 것이 아니라 가인을 거쳐서 복귀하게 되는 것입니다.
남아진 복귀의 세계를 생각하는 것이 더 귀한 일입니다. 자기 가정에 찾아오고 싶어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느냐, 이것이 각 가정이 생각하고 세워야 할 기준입니다. 두 사람이 살면 부모를 모시고 사는 입장이기 때문에 네 사람이 사는 것이 됩니다.
축복이란 책임을 다해야 귀한 것입니다. 남자는 주먹질을, 여자는 입질을 해서는 안 되고, 더욱이나 세상적인 욕을 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 사람들과는 무엇인가 달라야 합니다. 즉 가정은 소교회(小敎會)입니다. 하나님의 대행기관으로서 하나님이 찾아가고픈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최소한 세 가정이 한 살림을 하는 이상으로 뭉쳐야 합니다.
특별히 오늘을 기해서 말해 주고 싶은 것은, 첫째 많은 사람들이 왕래할 수 있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인화(人和)가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둘째는 하늘의 가정끼리 단결해야 합니다. 최소한 3위기대가 된 가정만이라도 완전히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자녀의 날이 세워지려면 자녀의 명분을 다해야 하고, 하나님의 심정적 기준이 지상에 결정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부모로 와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자녀의 명분을 결정지어 주어야 했으나, 결정짓지 못한 채 돌아가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두 번째의 슬픔을 안겨 드린 것입니다. 그래서 지상을 개척해 온 것이 예수님 이후의 노정입니다. 지상의 인간들이 탕감의 고빗길을 거치지 않고는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일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 효도를 다한 후에야 비로소 이스라엘의 부모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1948년 이스라엘의 독립 후부터 새로운 섭리는 벌어졌습니다.
재림주는 부모의 자리, 자녀의 자리, 만물의 주인의 입장을 세워야 합니다.
기독교는 영적으로만 양자의 입장을 세워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다시 와서 실체 자녀의 할 일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복귀섭리는 거꾸로 해 나갑니다.
이 세계는 심정적인 기준을 중심하고 보면 그 존재 가치를 인정할 수가 없습니다.
기독교는 외적으로 세계적인 판도를 닦았지만 여기에 민족을 편성해야 할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 그를 지배하는 제단이 있었던 것과 같이, 이 기독교에도 이를 지배하는 교단이 있어야 합니다.
오시는 주님은 진리를 선포해야 합니다.
초림 때 예수님으로 말미암지 않은 것은 망하였습니다. 예수님과 교단이 하나되어 이스라엘을 지배해야 할 것이었습니다. 오시는 주님은 그 민족의 비참한 것을 하나님과 인연을 맺어 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백성이 믿고 안 믿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자녀의 통합체로서, 다시 말해 가인 아벨을 통합한 자리에서 가정 기준까지 연결지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3년 공생애는 이스라엘 나라와 교단을 인연맺게 하는 기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찾아야 할 형제, 즉 12제자는 이스라엘을 재편성하기 위한 족장이었습니다.
요셉이 형제들한테 죽을 자리에까지 몰렸지만 그들을 용서한 것처럼, 재림주님도 그런 길을 가실 것입니다.
옛날 같았으면 선생님은 살아 있지 못했을 것입니다. 선생님은 옥중에서 핍박을 받을 때, 그 핍박을 간수들에게 받는다고 생각하지 않고 세계로부터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통일교회 초창기에는 하나님이 직접 역사하여 식구들을 전도했습니다. 교계의 중진들을 전도함으로 이웃 교인들까지 전도를 했습니다. 기성교회가 원조물자를 받으면서 싸울 때 우리는 누더기 옷을 입고 싸웠습니다.
하나님은 제2이스라엘이 그 사명을 다하지 못하게 되자 제3이스라엘을 이끄셨습니다.
통일교회는 3국가와 3주권의 핍박을 받아 왔습니다. 통일교회는 통일지파요 종교입니다. 이것은 종족이 됩니다.
하나님은 일대일로 완전 탕감복귀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신랑이 되면 인류는 자녀의 자리로 내려갑니다. 그러므로 인류는 예수님의 몸에서 태어난 씨의 자리에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따라서 예수님 신부의 복중 아기를 아벨로 모시고 복중 복귀의 탕감조건을 거쳐야 합니다. 이러한 탕감조건을 거쳐야 가인 아벨 탕감조건의 기준을 세울 수 있습니다. 그에게 굴복하고, 사탄세계의 모든 것을 상속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여야 자녀의 날이 나오는 것입니다. 원래는 자녀의 명분을 갖추어야 이 식에 참석할 수 있습니다. 이날이 나오기까지 많은 고난의 길을 걸었습니다.
아담부터 야곱까지를 상징하는 36수는 인류의 조상을 표시합니다. 여기에서 가인과 아벨의 복귀형이 72가정입니다.
부모의 날, 자녀의 날, 만물의 날을 주신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모든 날들에 대한 심판의 날이 바로 이날입니다.
땅을 지음으로 인간을 창조한 것같이, 성지가 나옴으로 새로운 자녀를 찾는 섭리를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모든 인류는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모든 인류가 행복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인류는 본향을 잃어버리고 방황하고 있으므로 참다운 인생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참다운 인생길을 찾으려고 수많은 지도자, 우국지사, 세계적인 성인들이 왔다 갔지만 그 누구도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습니다.
대다수의 종교에서는 인류가 타락했다고 합니다. 인류 전체가 선한 세계가 아닌 악한 세계에 처해 있으므로, 이 세계는 타락한 세계입니다. 30억 인류 전체가 악주권 내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지음받은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망각하고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모두 고해에 처해 있습니다. 그러기에 고해를 헤치고 본향을 찾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완전한 세계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류의 본향, 인류의 조국을 찾기 위하여 종교를 세우고 섭리해 나오신 것입니다. 인류는 하나의 문화권을 형성하여 통일된 세계를 만들어야 합니다. 타락으로 불행해졌으니 우리들은 하나님의 뜻을 좇아 본향으로 가야 합니다. 이것이 곧 복귀입니다.
복귀는 새로운 말씀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인간의 타락으로 참부모, 참형제, 친척, 세계, 하늘땅을 잃어버렸으니 이것을 되찾기 위해 모든 종교는 통일되어 하나님 앞으로 가야 합니다.
양심의 세계는 조직망이 완전하여 좋은 일을 하거나 나쁜 일을 하거나 총동원합니다. 양심의 목적은 본향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나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향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나쁜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선한 일을 해야 합니다. 선한 일을 함으로써 복귀의 길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복귀의 길에 비하여 인생은 너무 짧습니다. 하루도 쉬지 않고 가고 또 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소망, 사정, 심정을 채워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은 언제나 하나님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마음은 하나님의 사랑을 정복하고서야 안심합니다. 그래서 가고 또 가야 합니다. 예수님도 모든 것을 만민을 위해서 다 주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복귀에 대해서는 욕심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사람도 또한 하나님의 성상을 소유하고 있으니 욕심이 많습니다.
타락한 세계에서는 마음에 충동이 벌어지고 경주도 벌어집니다. 사람은 양심의 열매를 맺어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천지간에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하기 위하여서는 복귀의 길을 개척해 나가야 합니다.
사람의 양심은 지극히 거룩합니다. 우리 통일신도들은 갈 길이 명확하니 명령에 복종하면 안 될 것이 없습니다.
4천년 동안의 애달픈 하나님의 심정을 통하여 나온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 분은 하나님의 소망과 사정과 심정을 인간에게 인연맺으려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이루지 못한 인연을 다시 오시는 주님과 맺어야 합니다. 이런 입장에 처해 있는 사람들이 통일교회 식구들입니다. 그런데 모두가 자기 중심이기 때문에 그것이 큰일입니다.
앞으로 통일교회의 전조직은 세계적이 될 것입니다. 총협회장은 아프리카의 깜둥이가 될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은 통일교회의 한 뿌리입니다. 이 말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제일 많은 고생한 사람을 축복하실 것입니다. 통일교회 식구라는 말은 바로 형제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오늘까지 인류가 저지른 모든 죄악을 하나님 앞에 청산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조국이 어디인가? 인류의 본향이 어디인가? 참부모님이 태어나신 고향이 역사적이요, 우주적이요, 세계적인 본향 땅이 됩니다. 조상과 사상과 전통을 이어받아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의붓자식 취급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속을 통해서 양자를 거쳐 장차 아들딸의 입장까지 들어가게 됩니다. 이러한 큰 문제가 이 나라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선생님은 안팎을 뒤집어 놓아야 합니다. 한국 백성은 선민이 되어야 합니다. 한국이 본향이고 조국이라면 모든 세계적인 문명이 한국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한국을 본향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오늘날 충성, 정성, 사랑, 희생의 제물이 될 것을 각오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은 본향으로서 자격을 잃게 됩니다. 좋은 것을 만들기 위해서는 실천이 필요합니다.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리면서라도 이루어야 합니다.
오늘 강원도 김 중령 사건을 보아도 우리 민족에게는 반드시 간첩을 막을 수 있는 이념이 필요합니다.
대한민국이 통일교회의 문 선생님을 몰아내도 이 뜻은 청사에 길이 빛날 것입니다. 한국이 아무리 핍박한다 할지라도 이 민족은 하나님이 선택한 백의민족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민족이 살고 있는 한국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피를 토하면서도 뜻을 이루어 왔으며 옥중에서도 기도를 해왔습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심정을 헤아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민족적 사명을 띠고 뜻길에 성스런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식구들이여! 이번 기회를 통해 굳은 결의로 조직, 단결, 행동의 3대 강령을 세우고 총진군할 것을 다짐하며 새역사를 건설합시다. 이렇게 되면 오늘날 본향을 잃어버려 불행 중에서 방황하고 있는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터전이 한국을 중심으로 이룩될 것입니다. 여기에 통일신도의 크나큰 사명과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통일사상 밑에 굳게 뭉쳐 인류의 염원을 성취시키고 본향으로 복귀합시다.
남의 나라의 식민지가 되었다면 지배하는 나라에 반역하면서까지 조국을 사랑하고자 하는 것이 누구든지 가지고 있는 변함없는 마음일 것입니다.
그러나 도인들은 자기가 살고 있는 나라가 조국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유대 백성으로 태어났으나 그가 살고 있는 유대가 조국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새로운 조국을 건설해야 했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그 이상적 평화의 나라를 알았기에 새로운 조국의 목표를 세워야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사회적으로 상충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러나 인류의 조국이 이 지구성에 이루어졌는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가 조국이라고 생각했던 곳은 이스라엘과 같은 왕국이 아니었습니다. 세계의 어느 나라를 보아도 행복한 곳은 없었습니다.
지금까지의 수많은 사람은 미결수라 하겠습니다. 이들은 공의의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사탄은 피고요 도인은 변호사입니다. 인간은 역사적이며 연대적인 죄를 지고 있고, 이 죄를 탕감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선인(善人)들을 희생시켰던 것입니다. 우리들은 희생당한 수많은 선인들의 한을 풀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벨을 통해서만 가인의 제물을 받으실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직계의 자녀가 나오기 전에는 모두가 종의 입장인 것입니다.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천국은 가정을 이끌고 가는 곳입니다. 서로 갈라질 수 없는 곳입니다. 본연의 조국창건을 위하여 선민을 세우신 것입니다.
선생님을 사랑하려면 먼저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다음에는 세계를, 다음으로 이 민족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난 후에 선생님을 사랑하기 바랍니다.
인간은 본연의 조국에서 태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그곳에 태어났다는 조건을 세우기 위하여, 개인적으로 부부와 함께 자녀를 데리고 임지에 세 번 이상 나갔다 와야 합니다.
효자를 가진 부모는 자식보다 더 그 조국을 위해 걱정하십니다. 그러기에 부모가 가야 할 어려운 길을 그 자식이 자진해서 간다면, 부모는 그 자녀를 자기의 목숨을 내어놓고 사랑할 것입니다.
이 본연의 조국을 한국에서 창건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개인, 가정, 종족, 민족, 국가, 세계, 천주를 복귀해야 합니다. 개체가 복귀되기 위해서는 가정 환경을 복귀할 수 있는 조건을 세워야 하고, 민족적인 기반을 세우기 위하여는 세계적인 탕감조건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렇게 점차 올라가야 합니다. 가인을 복귀해야 할 입장에 있는 아벨형의 세계가 민주세계인 것입니다.
거룩한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는 희생해야 합니다. 그래서 제물이 거룩합니다. 여러분들이 고생한 것은 모두 후일의 조국창건을 위한 것으로 남아질 것입니다.
종족적인 기준에서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 고생을 해야 합니다. 고생해서 망한 자가 없습니다. 그렇게 죽은 자의 무덤에는 꽃이 핍니다. 이런 사람들로 말미암아 역사는 방향을 바꿉니다.
조국광복을 위해 일하는 자가 됩시다. 한 나라의 종족으로 하나님을 모시고 영원한 천국을 건설해야 됩니다.
축복가정은 제사장의 사명을 해야 합니다. 제사장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 외에는 분배받을 소유물이 없습니다. 만 명이 정성들인 제물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만 명 중에 어느 사람의 정성보다 앞선 성의를 가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법도에 걸립니다.
선생님은 가정을 지방에 배치할 때 잘못하면 그 결과가 나쁠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잘하면 그 결과 또한 클 것을 알았습니다. 책임을 못하면 세계적인 발전에 큰 지장을 가져오게 됩니다.
3차 축복 후에는 축복을 줄 의욕을 잃어버렸습니다. 축복가정은 원리시험에 합격해야 됩니다. 그것을 못하면 고생이라도 해야 됩니다.
1967년까지는 선생님가정을 중심한 섭리가 따로 있습니다. 이 법도 안에서는 하나님도 선생님도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제일 어려울 때 제일 믿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합니다.
축복가정은 700일을 7년 안에 찾아 놓아야 합니다. 앞으로 기성 신자가 돌아올 때는 기성 신앙의 연수(年數)가 문제 됩니다. 1957년도의 40일 전도기간과 7년간의 동계, 하계 전도기간 40일씩 연간 80일을 총합하면 600일이 됩니다. 축복가정은 그 이상으로 전도한 날을 세워야 합니다.
우리는 자연을 보고 관찰력 배양에 노력해야 합니다. 인격도 젊을 때 자연과 더불어 쌓아야 합니다. 무슨 일이든 관심을 가져야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일에는 선한 일과 악한 일이 있습니다.
성공하려면 전체를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자기의 일생에 있어서 플러스 되도록 노력하여야 합니다. 지식(知識)에 있어서 주인은 자기의 것을 활용하는 것이고, 손님은 보고 들은 것을 전할 뿐입니다.
자기의 감정이 천만 인의 감정과 같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인격의 터를 닦아야 합니다. 30세까지는 고생을 많이 해야 합니다. 처음부터 남다른 기초를 닦아야 합니다.
심정을 갖고 대하면 누구에게나 통합니다. 선생님은 통일교회가 빨리 발전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쪼들리면서도 내적인 기반을 만들어 놓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선생님은 제일 나쁜 자리에서 도의 기준을 세워 나왔습니다. 준비함에 있어서는 눈물이 아니고는 안 됩니다. 이상이 크면 큰 만큼 토대를 튼튼히 세워야 합니다.
선생님은 뜻을 위해 병신이 되더라도 후회하지 않겠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우리는 충격을 받아야 합니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외부로부터, 하늘(영적)로부터 충격을 받아야 합니다.
현사회에 영적인 현상이 많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늘을 위해 7년 이상 뜻길을 가기가 힘듭니다. 야곱이 21년간 고역하였다는 것은 훌륭한 일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사느냐, 인류를 위해서 사느냐, 자기를 위해서 사느냐가 문제입니다.
오늘날까지 인류는 인간이 해결해야 할 자체의 문제에 얽매어 살아왔습니다. 하나님과 해결해야 할 우주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관계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어디에 있느냐? 정지냐, 전진이냐? 정지면 무엇을 하기 위해서냐?
선생님이 ‘아버지!’ 하고 부르는 아버지와, 여러분이 ‘아버지!’ 하고 부르는 아버지와는 그 내용이 다릅니다.
오늘날까지 피상적인 신앙관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주체성을 잃어버렸습니다. 통일교회는 조건이 많다고 합니다. 하나님과 선생님과 교회를 위한 조건이 아니고 여러분을 위해서 세운 조건입니다. 자신들이 순수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대일의 조건이 필요한 것입니다.
뜻을 이루기 위해 전체가 일시에 출발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니 역사적인 조건을 안고 넘어가야 합니다. 소망에만 차서 가기 때문에 넘어집니다.
고생을 더 하는데 하늘이 벌 줄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영계가 총동원해서 뜻이 빨리 이루어지도록 협조합니다. 상대성을 갖고 주체에 대하여 기뻐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에게 ‘전보다 더, 현재보다 더 의논해 주십시오.’ 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진리가 세계를 지배합니다.
처음 나오신 분들은 통일교회에서 말하는 복귀라는 말의 뜻을 모를 것입니다. 복귀라는 말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악의 세계가 되었으니, 이 악의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 타락하지 않은 선한 본연의 세계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즉 타락전의 세계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이렇듯 우리에게는 가야 할 복귀의 길이 남아 있습니다.
천지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엿새 동안에 지은 피조물 가운데, 그 무엇보다도 인간 하나를 하나님의 영광과 소망의 대상으로 세우기 위해 간곡한 심정을 가지고 지으셨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 인간 한 사람이 성장하여 소망을 성취하고, 행복을 노래하는 평화의 가정을 만들어서 함께 살기를 하나님께서 얼마나 바라셨는가 하는 것을 우리들은 다시 한 번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본연의 아담 해와를 창조해 놓으시고 기뻐하셨지만, 타락한 연고로 애절한 심정과 간곡한 심정을 지니시고 하나의 승리를 완결지을 수 있는 그때를 소망해 나오셨다는 것을 우리는 다시 한 번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아담 해와를 위해 지어 놓으신 피조세계를 바라보는 것도 좋거니와, 만물을 주관할 아담 해와의 자라나는 모습을 바라보고 더 좋아하시던 것이 아버지의 마음이었던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하나님 앞에 소망과 행복의 터전이 될 수 있었던 아담 해와였고, 만유세계에 있어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안 될 중심존재인 아담 해와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타락해서는 안 될 아담 해와였고, 슬픈 날이 있어서도 안 될 아담 해와였습니다. 그러나 한 날의 실수로 말미암아 타락이라는 명사가 붙여졌고, 이로 인해 슬픔이라는 명사가 초래됐고, 하나님이 소망하시던 세계에 있어서는 안 될 흑암의 권세가 출현하였습니다. 이 사실이 원통하고 비통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인류시조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인류가 슬픔을 당하는 것은 마땅하나, 인류시조를 바라보고 소망의 마음을 갖고 나오시던 하나님이 이들로 인해 슬픔을 당하게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비통한 사실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인간이 슬퍼하는 자리에 떨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도 억울하고 고통스러운 자리에 서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하늘땅에 있어서는 안 될, 혹은 생각도 할 수 없었던 이런 일이 인류시조의 실수로 말미암아 벌어졌던 사건이 인간 타락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아담 해와가 하나님의 모든 심정을 알고, 하나님의 창조목적과 하나님의 전체 소망을 아는 자리에서 타락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모든 것을 완비하고 완성된 자리에서, 전부 다 깨달은 자리에서 아담 해와가 타락했다면, 하나님의 창조이념, 즉 하나님의 창조위업은 완성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아담 해와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그 모든 내용을 다 알고, 전체 내용을 다 상속 받은 가치적인 존재로서 모든 것을 주관할 수 있는 자리에서 타락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알지 못하고 자라던 성장 과정에서 타락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기성교회에서는 아담 해와가 성인이 되어 모든 천지 이치를 다 알고, 하나님의 심정과 창조위업을 모두 상속 받을 수 있는 권한을 갖춘 한 남성과 여성으로서 타락한 것으로 아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아담 해와는 그러한 내용을 알지 못하는 자리에서 타락했습니다. 완성한 자리에서 타락한 것이 아니라, 완성을 바라고 나가던 자리에서 타락했습니다. 만일에 완성한 자리에서 타락하였다면 우리가 완성한 세계라고 할 수 있는 천국에 가서도 타락할 가능성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담 해와가 타락한 때는 미완성 단계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담 해와는 하나님의 창조위업과 하나님의 창조이상을 마음속에 간직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일념 속에서 살지 못하고 타락했습니다. 그리하여 형성된 세계가 오늘날까지 타락한 후손이 살고 있는 이 세계요, 이것으로 인해 이 세계가 악한 세계가 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아담 해와를 지어 놓으시고 바라셨던 소망은 소망대로 남아져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 소망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을 잃어버린 것이 하나님의 슬픔입니다.
그 소망이 크면 클수록 그 큰 것에 비례해서 하나님의 슬픔도 크게 되고, 그 하나님의 소망이 지극하면 지극할수록 그것에 비례해서 하나님의 내적인 고충이 크게 초래되었음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제까지 일반 성도들은 하나님이 슬프신 분인 줄을 몰랐고, 인간 지으심을 탄식한 하나님이신 줄을 절실히 알지 못했습니다. 이렇듯 오늘날까지,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께서 인간의 실수로 말미암아 슬픔의 자리에 세워지게 된 것을 몰랐습니다.
천국은 누구를 위해 지은 것이냐? 천국은 하나님 자신을 위해 지은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해 지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천국의 주인은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입니다. 인간을 중심삼고 천국이념을 세웠으나 인간이 깨어져 나갔기 때문에 천국이념은 이념대로 남아졌고, 천국은 내용이 없는 천국, 즉 천국이라는 명사만이 남아지게 되어 하나님은 만족과 기쁨과 행복을 노래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영광의 하나님이 못 되었던 것입니다. 천국은 지금까지 비어 있어 슬픔에 잠겨 있습니다. 타락한 아담으로 인해 이 땅이 사탄권 내로 들어감으로 말미암아, 사탄권세는 천국의 문까지 밀어젖히고 하나님의 보좌 단상까지 휩쓸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무엇을 소망했느냐? 하나님이 타락한 인간세계에 대해 소망이 있다면, 그것은 타락하기 전 아담 해와의 본연의 소망을 어떻게 복귀시킬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 복귀의 한 날을 바라보시며 지금까지 나오신 하나님이신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구원이 무엇입니까? 물에 빠진 자를 구원한다는 것은 물에 빠지기 전 상태로 복귀시키는 것이요, 병이 난 사람을 구원한다는 것은 병이 나기 전 상태로 복귀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오늘날 예수가 다시 와서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구주가 되어야 합니다. 구주가 된 후에는 형님도 될 수 있고, 오빠도 될 수 있고, 우리의 그 무엇이 다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 세계가 타락하지 않고 하나님이 이상하신 본연의 세계가 되었더라면 구주로서의 예수님이 필요가 없을 것인데, 아직도 이 땅이 죄악세계에 빠져 신음하고 있기 때문에 구주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가 구주로서가 아니라 형이요, 오빠로서 환영받을 수 있는 세계가 우리가 소망하는 천국입니다.
다시 오시는 주님이 세우고자 하는 그 세계는 어떤 세계이냐? 타락전 본연의 세계요, 하나님이 이상 가운데서 추구하고 그리시던 세계, 완성의 뜻을 이루어 천하를 그 품에 품고 좋아할 수 있는 세계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의 독생자요, 공주로 태어났던 아담 해와가 타락으로 말미암아 깨져 나갔으니, 다시 이 자리를 되찾아야 합니다. ‘하늘땅이 내 것이다.’ 하면서 다시 찾아 세워야 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이 세계를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욕망을 갖고 있는데, 그것은 본연의 욕망입니다. 그 얼마나 근사해요! 하나님이 누구입니까? 내 아버지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은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나면서부터 자연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소망의 천국을 잃어버린 하나님께서는 인류에게 소망의 천국을 찾아 주기 위해서 오늘날까지 수고해 나오셨으며, 인류는 오랜 역사노정을 거쳐 나오면서 소망의 천국을 찾아 나왔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심중에 사모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일 것이뇨? 소망의 천국을 이루는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제일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이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모두 죽은 자식이 되어 버렸고, 사탄의 죄악된 혈통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이 인간들 가운데서는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사랑하며 붙들고 살 혈족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탄의 혈통을 받고 태어난 인류를 복귀시키기 위하여 섭리해 나오셨습니다. 복귀하는 데는 어디까지 복귀시켜야 되느냐? 직계 아들딸의 자리까지 복귀시켜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종의 종 자리에 떨어졌습니다. 종의 종이 무엇이냐? 종의 종은 주인을 가질 수 없습니다. 종은 주인이 있으되 종의 종은 주인이 없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종의 종 자리에 있는 인간들을 구하기 위해 사탄세계에서 종의 종을 빼앗아 오시는 것입니다. 사탄에게 속해 있는 종의 종을 빼앗아다가 하나님 앞에 충성을 맹세하게 하고 하늘 편의 종의 종으로 만들어서 복귀하는 것입니다.
구약시대는 무슨 시대였느냐? 종의 시대였습니다. 종의 종 자리에 있는 인간을 종의 자리로 복귀시켜 나온 시대였습니다. 그러기에 아브라함도 종이었지, 아들은 못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종의 종을 세워 충성의 도리를 세우셨습니다. 그리하여 이 역사적인 세계 인류를 끌어다가 규합시켜 가지고, 세계적인 악한 무대를 하늘 편으로 점령하면서 하나님의 섭리를 발전시켜 나왔던 것입니다. 야곱도 하나님의 아들로서 승리한 것이 아니라 종의 입장에서 승리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종의 종으로부터 종의 위치로 복귀시키고, 종의 위치에서 양자의 자리로 복귀시키면서 섭리해 오신 것입니다.
신약시대는 종을 양자로 복귀하는 시대였습니다. 로마서 8장 23절에는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을 고대한다.’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있어서 양자 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양자는 혈통이 다릅니다. 그러기에 양자의 자리에 세운 다음 하나님의 직계 아들딸이 와서, 돌감람나무에 참감람나무를 접붙이듯이 접을 붙여서 양자의 인연을 해방시켜 직계 자녀의 인연을 맺어 놓아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죽지 않고 이루어야 할 소망이었습니다.
종의 종에서 종으로, 종에서 양자로, 양자에서 직계의 아들딸로 복귀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본래 하나님의 창조이념은 지상천국을 완성하는 동시에 천상천국을 완성시켜, 이 땅 위에 하나님의 심정적인 발판을 세우고 그것을 천상에까지 닦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본래 타락하지 않은 아들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지상천국의 이념과 천상천국의 이념을 다 가르쳐 주지 못하고 영적 구원만을 성사시킴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은 양자의 입장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독생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기도하고 있다는 것은 예수님이 뜻을 다 이루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성신은 2천년 동안 무엇을 하였느냐?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소원의 한 날을 찾아왔고, 지상에서부터 천상으로 통할 수 있는 지상의 행로를 개척해 왔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죽어서 어디에 갔느냐? 낙원에 갔습니다. 낙원은 어떤 곳이냐?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는 대합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독생자인 예수님이 왜 하나님 앞에 가서 기도를 하느냐? 그것은 책임완수를 못했기 때문입니다. 본래 예수님은 만민의 참부모로 오셔야 했습니다. 그러나 만민에 대해서 참부모의 인연을 세우지 못하였기 때문에 지상재림을 해야 됩니다. 천상재림이 아닌 지상재림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천국을 바라보고 오셨던 예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종의 입장에 세워가지고, 양자의 도리와 직계 자녀의 자리를 찾아 세워 예수님과 하나되게 해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게 하여, 이제 너희가 낳은 아들딸들은 타락한 세계와 상관없다고 할 수 있는 위치에 세우려 했으나, 예수님은 그것을 못하고 돌아가셨던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복귀의 천국을 바라보고 나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소망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냐? 본연의 아담 해와, 지성과 정성을 다하여 당신의 모든 소망을 걸고 지으신 아담 해와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타락되었기 때문에 그들을 대신할 존재로 누구를 보냈느냐? 예수님입니다. 본연의 아담을 대신할 후아담격으로 오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타락과 상관 없이 복귀된 아담으로 오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후아담이고 다시 오시는 재림주님은 3차 아담으로 오시는 분입니다.
그러면 그분이 오셔서 해야 할 것이 무엇이뇨? 소망의 천국을 이루는 것입니다. 지상에서부터 천국을 이루고 천상천국을 이루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역사노정에서 섭리해 나오신 전반적인 내용을 분석해 보면, 하나님께서는 복귀 도상에 있어서 타락하지 않은 본연의 아담 해와를 찾아 나오셨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인간들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사탄의 혈통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인간들은 하나님의 혈통을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악한 후손들이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이 인간들이 예수를 믿고 타락 이전의 자리로 올라가기를 소망하시며 내일을 희망삼고 나오셨습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예수 믿고 타락 전 아담 해와의 자리에 올라간 사람이 얼마나 되느냐?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4천년간의 수고를 통해 비로소 타락하지 않은 복귀된 소망의 아담형인 예수를 찾아 세우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는 이 땅 위의 인간들 앞에 있어서 누구인가? 참된 조상인 것입니다. 만약 인간조상 아담 해와가 타락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완성했더라면 그들이 인류의 참조상이 되었을 것인데,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창조이상으로서 세우고자 하셨던 인류의 참된 조상의 자리를 아담 해와는 잃어버렸던 것입니다.
제아무리 잘나고 제아무리 천하를 호령하여 움직이는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인간은 너나할 것 없이 타락한 조상의 혈통을 받고 태어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원통한 사실입니다. 타락한 시조를 가진 인류는 지옥으로 맹주(猛走)하고 있나니, 여기에 하나의 표준을 세워 놓고, 참자녀를 품어 줄 수 있는 본연의 부모를 찾아 헤매어 나온 것이 지금까지의 인류역사였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4천년간의 복귀노정을 통해 찾아 나온 것이 무엇이냐? 아담 해와가 잃어버린 본연의 자리를 찾아 나오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메시아란 무엇이냐? 메시아는 어디에서부터 구주가 되어야 하느냐? 인류가 타락으로 말미암아 참부모의 자리를 잃어버렸으니, 먼저 참부모로서의 구주가 되어야 합니다.
어린양 잔치가 무엇입니까? 본래 하나님께서 아담 해와에게 ‘너희는 선남선녀요, 천지 대주재의 직계 아들딸로서 너희로 말미암아 나의 핏줄기가 이 땅에 생겨나니 기쁘도다.’ 하시며 주시는 축복을 받는 것, 즉 하나님의 모든 대유업을 상속받고 성혼의 축복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전권을 대행해서 나타나야 할 것이 타락 전의 아담 해와였는데, 이들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창조이상이 전부 깨지고 말았습니다. 6천년 전 이들을 중심삼고 소망의 천국을 이룩해야 할 것이 타락으로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인간을 종의 종에서 종으로, 종에서 양자를 거쳐 직계의 아들딸로 복귀시켜 가지고, 사탄을 굴복시키고 하늘의 승리권을 찾아 승리의 왕자로서 하나님의 성혼 축복을 받는 것이 어린양 잔치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이런 내용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 이 사실이 믿어지지 않거든 기도해 보십시오. 인류가 타락으로 인해 잃어버린 참부모를 구원 완성하여 복귀시키는 날이 어린양 잔치입니다. 이날이 있어야 만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선한 인간은 선한 부모 밑에서만 태어납니다. 그리고 거기서 올바른 가정이 형성되는 것이고, 올바른 가정이 생겨나야 올바른 종족, 민족, 국가, 세계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귀의 과정입니다.
하나님은 아담 해와가 타락하기 이전 그 소망의 안중에는 무엇이 있었느냐? 아담 해와가 본연의 참부모를 중심삼은 참혈족으로서 종족, 민족, 국가, 세계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천국세계를 이루는 것이 본래 하나님의 창조이상인데,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부모가 깨져 나가고 자녀가 깨져 나가니 결국 오늘날과 같은 세계가 되고 만 것입니다.
그러면 앞으로 오시는 주님은 어떠한 입장에서 오시느냐? 마태복음 24장에 아버지의 영광으로 오신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1차 아담은 타락을 하였고 2차 아담은 땅 위에서 뜻을 다 이루지 못했으니, 다시 오시는 주님은 그들을 대신하여 3차 아담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30억 인류가 하나같이 참부모의 혈통적 인연을 거치지 못하였기 때문에 현세의 이런 상태로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참부모의 인연을 갖고 오시는 분이 재림주님입니다. 그러면 6천년 역사는 어떤 역사였느냐? 잃어버린 참부모, 즉 아담 해와의 완성한 기준을 복귀하는 역사였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복귀의 노정이란 무엇이냐? 원래는 구주라는 명사가 필요 없는 것입니다. 그냥 상담할 수 있는 형제의 입장에서 주님을 모실 수 있어야 천국 백성이 되는 것이요, 복귀의 조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이치에 맞을 게 아니에요? 그러면 우리가 왜 복귀의 길을 가야 하느냐?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타락이 없었더라면 한 번으로 그만일 텐데,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3시대를 거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생인 구약시대를 거쳤고, 장성인 신약시대를 거쳤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새로이 오시는 주님을 표본으로 하여 완성시대인 성약시대를 거쳐가야 합니다. 이 역사적인 거리를 두고 아담 한 사람을 재창조해 나온 것이 지금까지의 복귀역사였습니다.
아담가정에 있어서 가인과 아벨을 중심삼고 복귀하고자 하셨던 하나님의 뜻이 아벨이 책임을 다하지 못한 연고로, 아담가정에서 노아가정으로 밀려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노아시대에서 아브라함시대로, 아브라함시대에서 모세시대로, 모세시대에서 예수님시대로 연장되어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도 하나님의 그러한 한을 풀어 드리지 못하고, 이 뜻은 또다시 예수님과 성신의 2천년의 역사를 거쳐 가지고 지금까지 연장되어 나온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흐름은 스스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귀섭리의 프로에 의해서 전개되어 나온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또한 이 복귀의 길을 하나님이 더듬어 오셨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아담가정에서 복귀의 기준을 세우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이에 1600년을 수고하여 아담가정 대신 노아가정을 불러 세우셨습니다. 노아에게 120년 후에 홍수심판을 하겠다는 것을 예고할 때, 노아 자신은 하나님의 심정이 어떠한가를 알지 못했습니다. 들려 오는 것은 명령뿐이었습니다. 이제부터 120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이 지난 후 ‘기필코 이 세상을 심판한다.’는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몰랐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억울한 내적인 슬픔과 한을 풀기 위해, 비장한 각오로 자신을 찾아오셨다는 것을 노아는 몰랐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노아는 묵묵히 하나님과 약속한 내용을 일편단심으로, 촌시라도 잊지 않는 신념 가운데서 지켜 나왔습니다.
그러면 그 당시에 있어서 노아는 120년 동안 어떻게 해야 하느냐? 복귀의 조상이 되기 위해서는, 다시 말하여 제2의 인간조상이 되기 위해서는 그 악한 세계에 있어서의 모진 바람과, 모진 시련과 모진 환경에 부딪히게 되어도 그것을 극복해야 합니다. 어떠한 시련에 부딪히더라도 노아는 아담과 같이 천법을 어기고 하나님을 배반하는 자리에 서지 않겠다는 그런 확고한 신념의 기반 위에 서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아가 120년 동안 아라랏산에서 배를 만드는 그 기간은 행복한 기간이 아니었습니다. 덧없이 세월이 흘러갈 적마다 그 시대의 수많은 사람들은 노아를 미친 노인으로 취급했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뭐 120년 후에 인류를 심판해!’ 하는 조롱과 비소, 억울함과 분함이 휘몰아치는 환경 가운데서도 하나님과 약속한 그 약속만은 버리지 않고, 일념의 신앙심으로 그 환경을 극복해 나갔습니다.
노아의 여덟 식구, 즉 노아의 아내와 자식까지도 노아를 부인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러한 내용이 없습니다. 그것은 왜 그랬느냐? 120년 동안 그 일만 하고 다녔으니 그의 아내와 그의 자식이 뭐라 했겠습니까? 여러분이 노아의 아내가 되고 노아의 자녀가 되어 보십시오. 그렇게 되겠나, 안 되겠나? 120년 동안 그러한 일들을 하고 다녔으니 그 모습이 어떠했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내도 노아를 원망했고, 사랑하는 자식들도 노아를 원망했습니다. 원래는 믿어 주기를 바라서 그 가정을 세웠고, 믿어 주기를 바라서 그 사명을 맡긴 것이 하나님의 본심이었습니다. 그 가정이 일치단결하여 노아의 뜻을 받들어서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세워지기를 바랐던 것이 하나님의 바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노아가정이 하나님의 뜻을 믿지 못하고 반기를 들고 반대하는 자리에 섰기 때문에, 노아는 그러한 자기 가정을 이끌고 자유와 소망의 한 날, 하나님과의 약속한 그날을 위해서 참고 참으면서 120년을 지내 온 것입니다.
그런데 노아는 하나님이 얼마나 슬펐고 얼마나 억울하고 얼마나 분했는가 하는 그 내정적인 심정을 모르면서도 그렇게 믿고 나왔다는 것입니다. 자신보다도 불쌍한 자리에 서 계신 분이 하나님인 것을 모르면서 말입니다. 그런 환경에서 몰아침을 받고, 시달림을 받는 노아를 바라볼 적마다 하나님의 마음은 무엇이라 말할 수 없는 슬픔과 비통함이 사무쳤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정이 통할 수 없는 종의 입장이었던 노아였기에, 하나님은 그 내적인 사정을 말하지 못하고 그를 대해 나왔던 것입니다.
노아는 40일 홍수심판 위에서 승리의 터전을 마련했지만, 그 후 함의 실수로 말미암아 노아가정을 중심한 하나님의 섭리는 깨져 나갔습니다.
온 세계를 심판해 버리고 남겨진 노아가정에서, 다시금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 뒤넘이쳤던 그 가정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심정에, 분함과 원통함이 얼마나 사무치셨겠습니까? 그로 말미암아 다시 가야 할 복귀의 길을 더듬어 오신 하나님이시었던 것을 지금까지 인간들은 몰랐습니다. 또 노아가정에서 섭리의 뜻이 저끄러짐으로 말미암아 노아 대신 아브라함을 세우기 위해 400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일구월심, 한마음으로 다시 복귀의 길을 더듬어 오신 하나님의 심정이 어떻다는 것을 오늘날 그 누구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아브라함을 세워서 뜻을 해결지으려고 했지만 그의 제물 실수로 말미암아 연장되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3대 하나님이라는 슬픔 명사가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세워 뜻을 이루시려던 하나님께서 결과적으로 벌어진 슬픈 그 사정을 바라볼 때 얼마나 비참했겠습니까? 당장에 아브라함 일족을 때려부수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소망의 천국을 이루어 나아가야 할 하나님의 애절한 심정이 남아 있는 연고로 또 참고 나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심정을 아브라함 자신은 몰랐다는 것입니다. 야곱이 에서와의 싸움에 있어서 승리의 일로를 개척하고, 하란 땅 라반의 집에서 21년 동안 고역의 노정을 거쳐 나올 때, 이것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야곱은 몰랐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자신이 억울하고 분한 사정에 몰리고 천대를 받고 밟힘을 당하고 원수의 시험을 받더라도, 또다시 가야 할 하나님의 복귀의 노정이 있었음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결국 야곱은 하나님과의 약속이 축복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약속한 그 뜻을 위해 하나의 믿음을 가지고 라반의 가정 환경 속에서 전부를 복귀시켜 가지고 승리하여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 가지 승리의 터전을 마련하여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하나님께서 이 땅 위에 발붙일 수 있는 승리의 조건이 생겨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란 승리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을 중심삼고 애급 400년 고역기간을 거쳐 60만 대중을 이끌어 지상천국을 이루고자 하신 것이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다 쓰러짐으로 말미암아, 다시 제2세를 수습하여 가나안 7족과 대결해 가지고, 그 승리한 터 위에 천국이념을 세우려 하셨습니다. 이것이 지지부진하여 가나안 땅을 거치고, 역대의 처량하고 비참한 역사노정을 거쳐서 예수시대로 넘어왔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복귀섭리노정에 있어서 언제나 개인, 가정, 종족, 민족시대를 한꺼번에 복귀시키기를 원하셨지만 그것을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적인 복귀의 책임과 가정적인 복귀의 책임은 야곱이 졌고, 민족적인 복귀의 책임은 모세가 졌고, 국가적인 복귀의 책임과 세계적인 복귀의 책임은 예수님이 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내서 전체적인 책임을 맡기려고 했던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뜻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점쟁이인 동방박사들이 별을 보고 찾아와서 예물을 줄 때, 온 예루살렘의 성민들이 소동을 벌여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은 오시는 메시아가 사람으로 태어날 줄 몰랐습니다. 교법사나 서기관, 어느 누가 버선 한 켤레라도 마련해 주었습니까? 예수님이 태어났다 해서 옷 한 가지 마련해서 찾아간 사람이 있었습니까? 불쌍한 자리에 오시면 안 되겠다고 초막 대신 거룩한 장소를 예비하고, 예물을 준비해서 예수님의 탄생을 맞이한 사람이 있었느냐 말입니다. 하늘의 때는 지나가지만 인간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어찌하여 4천년 동안의 긴 역사를 통해서 준비해 온 이스라엘 민족이 선민의 한을 풀기 위해서 하나님이 보내 주신 메시아를 알지 못했던고? 하나님께서 4천년 약속의 주인공으로 보내신 메시아를 어찌하여 이스라엘 민족은 한 사람도 몰랐느냐 하는 것입니다. 억울하고 분한 사실입니다. 어찌하여 그렇게 한 사람도 몰랐느냐는 말입니다.
제사장, 서기관, 교법사들은 어디에 갔던고? 그들은 선민권을 자랑할 줄만 알았을 뿐, 저들을 세우신 것이 오시는 메시아를 환영하기 위함이요, 그것이 자신들에게 맡겨진 본연의 책임이요, 사명인 줄은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국가, 이 민족이 반대했다는 것입니다. ‘사귀 들렸다.’ 고, ‘바알세불의 괴수’라고 했으니, 이 얼마나 엄청난 역사적인 비운입니까?
그들은 빌라도와 짝하여 ‘아! 유대의 나사렛 예수, 그는 가짜이니 그를 잡아다가 죽여 주시오.’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진해서 죽었어요? 온 이스라엘인이 죽였습니다. 예수는 피살당한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하는 기도를 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지상에 천국을 완성하기 위해 독생자를 보내셨는데도 불구하고 인간들이 그를 믿지 않으니, 예수님은 할 수 없이 죽음의 길을 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당신이 나를 세우신 그 본연의 목적은 천국을 완성시키는 것인데, 이제 이것을 누가 책임지겠습니까?’ 이를 위해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사세(事勢)는 기울어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변화산상에 올라가 기도할 때 모세와 엘리야는 이에 예수님이 별세하실 것을 예고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이미 사태는 틀렸다, 하나님의 뜻으로 결정된 것이니 할 수 없이 십자가의 길을 가지 않을 수 없다고 자신의 죽음을 작정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으러 왔어요? 기도해 보십시오. 그런가, 안 그런가. 내가 영계를 통하고, 하나님 앞에 담판기도를 해서 안 사실입니다. 오늘날 통일교회는 현세의 기독교 앞에 폭탄선언을 했습니다. 교회 교회마다 십자가를 걸어 놓은 것을 보면, 선생님 마음속에는 불이 납니다. 원통하고 원통한 십자가이기에 그런 것입니다.
예수님이 만일 죽지 않고 살았더라면 예수님이 구주가 못 되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어찌하여 예수님을 비참하게 죽여 가지고 구주로 만들겠습니까? 살아 있을 때 군왕으로 만들려 했습니다. 구주의 과정을 다 지내 가지고 만왕의 왕으로 만들려고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이 세계에 널려 있는 성도들은 구주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군왕이 필요합니다. 즉 만왕의 왕이 필요합니다. 이 세계가 하나님 주권 밑에서 하늘나라의 치리를 받지 못했다는 것이 분하고 원통한 일입니다.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이 사람도 그것을 생각하며 분하고 원통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소망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최후의 운명 시간에 오른편 강도가 웬 말입니까? 왼편 강도가 웬 말입니까? 왜 사도들이 오른편 강도처럼, 왼편 강도처럼 십자가에 못 달렸느냐? 원통 중의 원통한 일입니다.
낙원의 선봉자는 누구입니까? 오른편 강도입니다. 사도들이 아닙니다. 내가 사도들을 우습게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선생님이 베드로를 만나서 물어 보니 꼼짝달싹 못한다는 것입니다.
만민의 구세주요,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요, 만인류의 조상으로 오신 그 예수님을 죽음의 자리로 홀로 보내다니, 같이 죽어야지. 그랬다면 예수님의 부활과 더불어 제자들도 부활했을 것입니다. 만일 사도들이 부활했다면 기독교는 피 흘리는 종교가 안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은 영적 구원만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본래 사명은 영육 아울러 구원하는 것이었는데, 이것을 완결짓지 못했기 때문에 다시 와야 합니다. 그래서 재림이라는 명사는 억울하고 분한 명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세가 다가옴에 따라 하나님께서는 천국이념을 품고 당신이 소원하셨던 그 본래의 천국권을 이루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지상에 끝날이 찾아옴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소원이 무엇이뇨? 이 땅에 천국을 이루는 것입니다. ‘복귀된 천국이 어디 있느뇨?’ 하며 찾아오신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스라엘 민족이 이 천국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왔다 간 이후 이스라엘 민족은 지지리 고생을 했고, 2차대전 중에는 히틀러에게 6백만 명이 학살을 당했습니다. 그런 일이 왜 벌어졌느냐? 예수님을 죽인 죄 때문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살펴 보십시오. 예수가 오기 전에는 어느 누구든지 그 민족을 잘못 건드렸다가는 대번에 망해 버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죽은 이후 2천년 동안 이스라엘 민족은 유리고객이 되었습니다. 광야에서 시달리고 여러 민족에게 쫓김받는 처량한 민족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왜 그랬느냐? 모두가 예수를 죽인 죄 때문인 것입니다. 선생님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으면 생명을 걸고 기도해 보십시오. 인류의 참조상으로 오신 예수님을 잡아죽였으니, 이스라엘 민족은 누구든지 다 회개해야 됩니다.
예수님은 어떠한 분이냐? 인류의 참부모요, 인류의 참조상으로 오신 분이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죽인 것은 자기 부모를 죽인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죄악된 부모를 죽였어도 목을 잘라야 할 텐데, 천륜을 대표하고 역사를 대표하고 인류의 소망을 대표하여 오셨던 참부모를 잡아죽였으니, 하늘의 법도에 걸리지 않을 자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가나안 지상천국을 이루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셨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이 뜻이 연장된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2천년간 영적으로나마 구원섭리를 통하여 말세의 한때를 대비해서 나오고 있나니, 오늘 이때가 바로 끝날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끝날에는 무엇이 올 것이냐? 예수님과 세례 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천국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을 때 천국은 ‘네 마음에 있느니라.’ 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천국만 가지고 되겠어요? ‘천국’ 하면 나라를 두고 하는 말인데, ‘나라’가 성립되려면 주권이 있어야 되고 백성과 영토가 있어야 합니다. 그 뜻은 우선 네 마음에서부터 소망의 천국을 품으라는 것입니다. 소망 천국의 내용을 품고 실체 천국을 이루기 위해 가야 할 길이 남아 있기 때문에 천국이 네 마음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이 소망 가운데서 천국을 가진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 당시 사도들도 소망의 천국을 품고, 치리자(治理者)의 대표인 예수님을 통하여 실체 천국을 이루어야 할 과정이 남아 있는 연고로 말을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소원성사의 한 날을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 4천년간 준비했던 것이 수포로 돌아갔기 때문에, 하나님은 피 흘리는 복귀의 길을 걸어 나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이스라엘 민족에 불벼락을 내려 쓸어버려도 시원찮을 것이었지만,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하시며 간곡하게 기도했던 예수님의 그 기도의 조건을 생각했기에, 그 민족을 쓸어버리지 아니한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죽어 가면서까지 애절하고 간곡한 기도를 드린 것은 왜 그랬느냐?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해 아직까지 남아 있는 지상천국의 이념을 잃어버리게 되면, 하나님이 소원하시고 정성들여 놓은 4천년 역사의 공적이 무너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예수님은 그런 역사적인 심정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을 갖고 기도한 예수님의 기준을 중심삼아서 하나님은 또다시 복귀의 길을 개척해 나오신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죽고난 후 기독교는 개인을 수습하고, 가정과 종족, 민족, 국가를 다시 세워야 되는 비참한 역사를 이루어 나왔던 것입니다.
제1이스라엘이 준비한 4천년 역사 가운데 예수님을 보내서 한 주권과 국가를 이루어 이것을 중심삼고 세계적인 복귀의 천국을 이룰 것이었는데, 이스라엘 민족이 불신함으로 말미암아 이것이 깨어졌기 때문에 제2차적으로 개인적인 기독교, 가정적인 기독교, 종족, 민족, 국가적인 기독교권을 거쳐서 지금까지 세계적인 기독교권으로 복귀시켜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세계적 종말시대에 있어서 전세계에 널려 있는 기독교인들은 무슨 생각을 가져야 되느냐? 천국을 이루기 위해서 오시는 메시아를 고대해야 됩니다.
주님이 오면 모두 천국에 데려갈 줄 아십니까? 천국에는 그냥은 못 데려갑니다. 천국을 이루어 놓고 들어가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하나님은 천국이념을 실현하는 과정에 있어서 천번 만번 저버릴 수 있는 우리 조상들이었지만 참고 나오셨습니다. 한 동네를 찾아갔다가 박대를 당하신 하나님이요, 소망의 한을 풀고자 개인의 어려운 투쟁을 통하여 승리할 수 있는 그 한 날을 바라다가 그때를 맞이하여 개인을 찾아 개인으로부터 배척받은 하나님이요, 가정을 찾아 나왔다가 배척받은 하나님이요, 이스라엘 민족과 이스라엘 나라를 찾아왔다가 배척받으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것으로 인해 로마 앞에 있어서 배척받고 피흘려서, 그 피값으로 섭리해 나온 것이 지금까지의 기독교 2천년 역사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일국을 중심삼고 세계적인 무대를 갖춰서, 오늘날 전세계를 민주세계로 만들 수 있는 터전인 기독교권을 만들어 놓았는데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이 기독교권은 그 방향을 알지 못하고 최후의 절벽에 다다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기독교인들이 알아야 할 것이 무엇이냐? 지상천국을 이루려 했던 예수님의 한을 풀어 드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이 땅 위에서 피 흘린 한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또 신랑 신부의 자리를 찾아 세워야 합니다. 하나님이 찾고자 했던 한 개인과 가정, 종족, 민족, 국가를 예수님이 찾지 못했기에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그 개인을 찾지 못하면 한 가정을 찾지 못하고, 그 가정을 찾지 못하면 한 종족, 민족, 국가를 찾지 못하고, 종족, 민족, 국가를 찾지 못하면 한 신랑 신부를 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마 8:20) 하시며 한탄하셨으니, 하나님이 보내신 황태자가 그런 처량한 사정에 처해 있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하나님이 예수를 세워서 찾고자 하셨던 참다운 개인이 있었느냐? 없었습니다. 참다운 가정이 있었느냐? 가정은 많았으나 참다운 가정은 없었습니다. 참다운 종족과, 참다운 민족과, 참다운 나라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감람산 골짜기에서 하늘의 소망을 품고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참담해 하던 예수님의 심정에는 참다운 개인을 찾아 세우기 위한 한이 맺혀 있었던 것입니다.
하늘땅을 치리(治理)하고 천지를 주관하기 위해 오신 메시아의 제자들이 어부 나부랭이 들이라니…. 2천년 전 이스라엘 어부들은 상놈들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메시아 앞에 제자라니 이것이 웬 말입니까? 메시아 앞에 베드로가 수제자라니 이것이 웬 말입니까?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잘 믿었던 교법사나 서기관이나 제사장은 어디에 갔었습니까? 12제자 가운데는 교법사나 서기관이나 제사장 출신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잘 믿었던 그들은 모두 예수님을 배반했기 때문에 지옥행 열차를 탔습니다. 그들이 천국 갈 수 있었겠습니까? 바알 신의 직속 제자가 되었기에 그렇게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도 제일 하층인 어부였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택함을 받았기 때문에 낙원에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믿고 있던 그 주님이 신랑입니까? 분하고 원통한 일입니다. 그러니 2천년의 한을 풀기 위해서 예수님은 다시 이 땅에 오셔야 합니다. 오는 데는 한을 풀 수 있는 터전을 닦아 놓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끝날에 있어서는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과 제사장들이 예수님의 사도의 자리에 서야 했던 것같이, 세계에 널려 있는 대학자들이 오시는 주님을 ‘오 주여 오시옵소서.’ 하면서 먼저 맞이해야 합니다. 그러니 역사는 과거의 역사를 재현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교법사나 제사장 등 유대교의 지도자들이 자기의 권력을 행사하던 그런 입장에서 예수님이 천사장의 나팔 소리와 함께 구름 타고 오셨다면, 그 예수님은 얼마나 잘 모셨겠습니까? 유대 사람들은 예수님이 구름 타고 오실 줄만 알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목수 조수 노릇이나 하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일입니까? 목수 조수 노릇을 해야 했던 예수님의 신세가 얼마나 처량했겠습니까? 나는 그 목수 말만 들어도 창자가 뒤틀어집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책임을 하지 못한 연고입니다. 30여 평생을 가슴에 한을 품고 소망의 한때를 바라보며 4천년의 역사를 탕감짓고 넘어가는 그 길에 있어서도,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마저 책임을 못 했다는 것입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은 어머니를 보고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요 2:4)라고 했으며, 또 무리가 예수님에게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있다고 했을 때, 예수님은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면서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마 12:50)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예수님이 심정을 잘 알아야 합니다.
한이 사무치고 사무쳤던 예수님이 몇 살 때 집을 나간 줄 아십니까? 그는 요셉가정에서 다른 형제들과는 달리 일을 하면서도 요셉의 직계 아들딸 앞에 미움을 받았습니다. 명절 때가 되어도 새옷 한번 입어 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입장에 있었습니까? 요셉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기르고는 있었지만, 예수님이 의붓자식이었기 때문에 싫증이 났던 것입니다. 명절이 되더라도 마음놓고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그런 심정의 자리를 갖지 못한 서글픔과 억울함에, 예수님은 부모야 있든 말든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갔던 것입니다. 예수살렘 성전을 지켜야 할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알고, 제사장이 머물고 있는 성전 가까이에서 정성을 기울이기를 다했던 것입니다.
한 많았던 예수님,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그토록 고생할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하나님의 독생자요, 만민의 구세주로, 황태자로 오셨던 그 메시아에게 십자가가 웬 말입니까?
오늘날 나는 통일교회에 대한 책임을 지고 나오면서, 그 누구보다 핍박을 당하고 이 민족 앞에 저주받아 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통일교회를 이단이라며 핍박하고, 밟고, 천대해 보라는 것입니다. 뿌리는 밑으로 내리게 되어 있습니다. 누가 참인가, 누가 허위인가 두고 보자는 것입니다. 참은 반드시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나는 온갖 욕설을 다 들어왔기에 민족을 저주하고 교회를 저주할 수도 있지만, 예수님이 걸으신 길을 알았고 하나님의 서글픈 심정과 가야 할 복귀의 노정을 알았기 때문에 참고 나왔던 것입니다. 죽으라고 감옥에 몰아넣는다고 해서 쉽게 죽어 버리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오늘 통일의 용사들은 남아 있는 복귀의 노정을 가고 있습니다. 스승은 오늘날 이 대한민국에 태어났지만, 만약 이 스승이 미국에 태어났다면 이런 지긋지긋한 고생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구세주요 메시아로서 이스라엘 민족을 찾아왔을 때, 이스라엘 민족 중 어느 누가 밥 한 그릇을 주었어요? 어느 누가 옷 한 벌을 주었어요? 아무도 없었습니다. 예루살렘에 들어가 무화과나무의 열매를 따먹으려던 예수님의 사정을 누가 알았겠느냐 말입니다. 서글프고 원통했던 예수님의 심정을 알면 비통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를 믿어서 뭘 하자는 것이냐? 제자 중에서도 참된 제자가 되자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의 용사들은 한 많았던 예수님의 한을 풀어 드리고, 하나님이 소망하셨던 천국을 이루어 드려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천국에 갈 수 있는 참다운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참다운 가정이 되어야 하고, 참다운 민족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바라보고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복귀의 길을 더듬어서 개인과 가정을 찾아오셨지만 그 개인과 가정으로부터 배척을 당하셨습니다. 그런 아버지께서 또다시 세계를 향하여 가는 그 걸음을 멈추지 않으시니, 나도 가야겠다는 것입니다. 그 길이 험준하다고 마다할소냐, 그 길에 죽음이 있다고 마다할소냐, 슬픈 곡절이 있다 해서 마다할소냐!
나의 아버지가 가신 길을 나도 가야 되겠으니, 아버지가 어려우면 나도 어렵기를 바라고, 아버지가 슬프면 나도 슬프기를 바라야 합니다. 이것이 통일의 이념이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나라 이 조그마한 삼천리반도를 기반으로 하여, 이 민족 앞에 이색적인 운동을 만들어 가지고, 세계에 새로운 선풍적인 바람을 일으키자는 것입니다. 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가 우리의 이념권 내에 흡수되게 새로운 깃발을 들고 나서자는 것입니다.
이 민족을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나설 때마다 이 스승은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이 뜻이 정녕 아버지께서 세우신 뜻임을 알게 될 때는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극복해야 합니다. 또한 아무리 어려운 사정이 있다 하더라도 그분은 내 아버지요 내 사정이 되기 때문에, 그 아버지가 세우신 전통을 상속 받고 그 아버지의 역사와 심정에 접붙임을 받기 위해서는, 그 아버지가 고통받으면 나도 고통을 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러기에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잠을 자서는 안 됩니다. 쉬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 가운데는 안식의 한 날을 노래해 온 교단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통일교인들은 쉬지 말고 그 길을 가야 합니다.
갈보리산상에서 예수님이 죽음의 자리에서도 기도하며 전도한 것처럼, 통일교회 여러분들은 사망의 어둠이 휩쓰는 이 천지 가운데서도 전도를 해야 합니다. 지옥에 가더라도 그 속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을 전도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하기 위해 애쓰신 수고에 비하면, 우리가 한곳에 한 자녀를 세우기 위해서 흘린 눈물과 피와 땀의 수고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6천년의 한을 풀기 위해서 복귀의 역사를 재창조의 섭리로서 이끄시며 한 많은 곡절의 노정을 더듬어 오신 것을 생각하며 우리들은 가고 또 가야 합니다.
오늘 여기에 모인 여러분들이 선생님을 사랑하고, 선생님을 위하는 마음은 좋습니다. 그 정성은 고맙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 나라 이 민족을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선생님을 사랑하는 것만큼 이 민족을 사랑해야 합니다. 민족 앞에 주지 못해 눈물 흘리는 여러분이 되어야 합니다. 죽어 가는 자기의 생명을 구해 주기를 바라고 있는 그런 불쌍한 처지에 놓여 있는 민족에게 가서, 그들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도리에 맞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선생님의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여러분이 선생님을 위해 꽁보리밥을 지어 가지고 오는데, 그런 정성이 있거든 삼천만을 위해서, 온 인류를 위해서, 하늘땅 전체를 위해서 나눠 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통일사상입니다.
선생님은 굶는 데 있어서 누구보다 더 많이 굶었고, 욕을 먹는 데 있어서 누구보다도 더 많이 먹었고, 매를 맞는 데 있어서도 선생님을 당할 자가 없습니다. 또 노동 현장에 가서도 선생님은 일등 노동자입니다. 오늘날 한국 사람들은 좋은 자리에서 잘 먹는 것만이 잘사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천만에!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실제적인 환경에서 천국을 건설하는 하늘의 용사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통일신도들이 지녀야 할 사상이요, 통일역사가 지금까지 남겨 놓은 전통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 역사를 책임져야 합니다. 이 역사를 책임지지 못하고 소모만 시키는 사람은 하늘에 역적이 되는 것이요, 이 역사를 빛내는 사람은 하늘에 충신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국을 바라고 계시는 아버지의 뜻을 안 우리는 오늘날 우리 시대에 와서 부모의 날을 세웠고, 자녀의 날을 세웠고, 만물의 날을 세웠지만, 하나님의 날은 찾아 세우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천국을 이루었다는 웃음 소리가 삼천리반도와 온 지구상에 드높이 울려 퍼질 그날을 위해서 행진하고 또 투쟁해야 합니다. 이러한 입장에 있는 우리들인데 쉴 새가 있겠느냐 말입니다. 쉴 새가 없다는 것입니다. 가도 또 가고, 자다가도 눈만 뜨면 깜짝 놀라 일어나는 그런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통일신도들입니다. 밥을 먹다가도 눈물 흘리면서 통곡하는 통일신도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래야 되느냐? 하나님이 소망하셨던 천국을 이루어 드리고, 예수님과 성신이 못 다 이룬 한과, 제대로 먹지 못하고 제물의 과정을 거쳐 나간 천천만 성도들이 지상천국을 못 이룬 복귀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야만 그들이 해원성사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엄청난 내용을 알고, 이 엄청난 사명을 짊어진 우리가 쉴 새가 어디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다리가 부러지더라도, 죽더라도 전력을 다하여 가야 할 복귀의 길이 남아 있습니다.
선생님은 여러분에게 3년노정을 가라고 명령했습니다. 그 길을 가는 데에는 누구나 죽음을 각오해야 합니다. 여기에는 별의별 힘든 일이 많습니다. 수많은 시험에 견뎌야 하며 여비 없이 천리길도 멀다 하지 않고 걸어가야 합니다. 나이 어린 처녀들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수욕(羞辱)을 당하더라도 자기가 세운 일편단심, 뜻을 이루기 위해선 자지 않고 배를 곯며 모험을 무릅쓰고 가야 합니다. 이런 사정을 전개시킨 이 스승에게는 책임이 없겠느냐?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이 바라는 것은 여러분이 그러한 자리에 서게 될 때 누구를 대해 불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런 자리에서 쓰러지고 희생되더라도 한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천국을 건설하기 위해 발판을 닦는 용사에게 어찌 원수의 화살이 없겠으며, 어찌 원수가 자신을 포위하지 않는다고 보겠는가?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승을 위하고 하나님을 위하는 그 마음은 자기 자신을 위함이 아니라, 이 민족을 위함이요 세계를 위함이기 때문에 그 자리는 거룩한 자리입니다. 비록 그 길이 멀다 할지라도 지름길을 찾아 즐거이 가야 하는 것이 통일용사들의 발걸음임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합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통일의 이념을 가지고 벽을 넘고 경계선을 넘어, 삼천리반도와 삼천만 민족 앞에 나서야 합니다. 지금 한국 실정은 길거리의 청년들이라도 잡아다가 통일이념을 교육시켜야 됩니다. 그런 일이 벌어져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망하게 된다는 것을 대번에 느낄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길을 가는 데 있어선 부모의 심정을 지니고 종의 몸을 쓰고 눈물은 인류를 위하여, 땀은 땅을 위하여, 피는 하늘을 위하여 뿌려야 합니다. 그래야 여러분의 눈물과 땀과 피의 가치를 인류와 땅과 하늘이 알아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제물의 발판을 타고 오십니다. 개인적인 제물시대, 가정적인 제물시대, 종족적인 제물시대, 민족적인 제물시대, 세계적인 제물시대를 거쳐서 섭리해 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통일신도들은 개인적인 제물시대를 거치고 민족적인 제물의 책임을 다하여 세계적인 제물의 길로 나가야 됩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될 수 있으면 제일 말단의 자리에 서야 합니다. 남들은 오뉴월 삼복 더위에 피서를 가고, 또 학생들은 모두가 방학이 되어 놀러 가더라도, 여러분들은 고향에 가서 손발이 부르트는 한이 있더라도 농사를 배워야 합니다. 농사꾼이 되어야 합니다. 혹은 달구지를 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통일교인들은 이 민족의 친구가 되고, 이 나라의 애국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여러분들이 점점 섭리의 발전 도상 위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3년노정 가운데 한이 많다면 많다고 할 수 있겠으나, 그래도 여러분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선생님이 3년노정이 지나면 세계가 어떻게 된다고 했는데, 그대로 되어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일들이 우리 손아귀에 의해 결정되는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3년노정의 고비를 넘어가다 지치는 식구들도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은 지친 자들을 바라보고 자기도 지칠까 봐 두려워해선 안 됩니다. 지치지 말고 끝까지 증거하며 넘어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사탄과의 승부를 놓고 싸우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기로에 서서 싸우고 계시는데, 충효의 도리를 다해야 할 우리가 지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의 폭탄과 마찬가지입니다. 터져서 내 자체는 산산조각이 나서 없어지더라도 주저앉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제 4년노정을 거쳐가는 과정에 있습니다. 3년 남은 이 노정을 깨끗이 가야 되겠습니다.
10월 초하루를 전후하여 남한 각지의 책임자인 지구장을 다시 뽑은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들은 책임자의 입장에서 명령만 할 줄 알았지, 식구의 사정은 몰랐습니다. 그러니 식구의 입장에 서서 다시 이 길을 가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지구장이 일선에 서서 하나님의 뜻을 염려하고 앞으로 세계복귀를 향해 나가는 것을 보면서 여러분들도 그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여러분, 따라갈래요, 안 갈래요? 「따라가겠습니다.」
우리에게는 안 갈래야 안 갈 수 없는 사정이 있습니다. 이 길은 이 나라의 장관과, 이 나라의 관직에 있는 사람이 갈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하늘을 위해 죽을 수 있는 사람만이 갈 수 있는 길입니다. 여러분은 지방에서 불쌍한 사람이나 버림받은 사람을 대할 때, 그들을 피해 가는 추한 무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이 살고 있는 활동 무대에서 이러한 사상과 신념을 갖고 그들을 전도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하는 것이 여러분의 후손을 위하는 것이 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 드리는 것이 됩니다. 우리가 그 일을 하지 못하면 우리 조상과 우리 후손들이 참소한다는 것입니다.
아담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수천만대의 후손들은 아담을 많이 비판해 왔습니다. 천륜의 법도를 유린했기 때문입니다. 아담 해와가 천사장인 사탄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시대와 환경이 어지러우면 어지러울수록 하나님 주관을 받겠다는 신념으로 강하고 담대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나선 용사들입니다.
이 강산에 공산당이 웬 말입니까? 우리의 통일이념으로 수십만 정병이 무장만 하면 공산주의는 순식간에 깨져 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들에게 지워진 사명과, 우리들이 가야 할 이 노정에 대한 책임이 얼마나 막중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역사는 흘러가도 우리의 책임은 흘러갈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은 안식하더라도 우리는 안식할 수 없습니다. 필승의 한 날을 세워 놓고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천국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후손 앞에 참소를 받는다는 이 엄청난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그것들을 위해 몸부림치는 여러분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후손과 민족을 걸어 놓고, 세계를 걸어 놓고, 기도하고 정성들여야 합니다.
여러분에게는 아직도 가야 할 복귀의 노정이 남아 있습니다. 복귀의 길을 가는 데 있어서 여러분은 그 앞 단계의 기준까지 닦아 놓고서야 여러분 자신을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하늘의 법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죽는 것이 하늘의 필연적인 법도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과연 어떻게 죽어야 좋으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최후에 하늘을 빛내어, 민족과 세계가 우리를 따라와서 하나님 앞에 머리숙일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야 합니다. 그래야 성공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모인 통일교회 청년 남녀들은 모든 청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의 불을 질러 그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할 수 있는 선각자의 길을 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강하고 담대해야 합니다. 이렇듯 여러분에게는 가야 할 복귀의 길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부르고 있나니, 우리는 그 길을 가야 합니다. 이제부터 6개월을 보내는 과정에 있어서, 지역장이라든가 지구장은 특별한 노정을 출발하는 데 있어서 많은 고충을 느낄 것입니다. 공적인 책임자의 자리가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번에 활동하는 여러분들은 옛날 선생님이 직접 뛰던 전통을 상속 받아 뛰어야겠습니다. 몸소 민족을 위해 선생님이 생명을 걸고 뛰고 싶지만 여러분을 대신 세워 분부하니, 선생님 대신자로서 열심히 움직여 주시길 바랍니다. 여러분들은 이 6개월 기간에 동참한다는 것이 매우 값지다는 사실을 알고, 돌아가더라도 책임자의 말에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에 대해선 공분하는 심정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여러분에게 있어서 보다 좋다는 것입니다.
오늘 전국에 있는 식구들은 선생님이 하는 일들이 누구를 위하여 하는 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전체를 동원할 때 동원될 수 있는 내외적인 준비를 갖추어야 합니다. 모든 것이 여러분에게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다 하더라도 뜻을 위해 나선 이념의 형제를 위해서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알겠어요? 「예.」
여러분은 밥을 먹고 배가 부를 적마다 부끄러움을 느껴야 합니다. ‘나는 이렇게 배불리 먹지만, 우리 지구장은 밥 한 그릇을 배부르게 먹지 못하는 구나.’ 하며 반성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잠을 잘 때도 지구장이 어떻게 잠을 자고 있는지 염려하고 기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생활을 실천하면서 가야 할 복귀의 길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민족적인 골고다를 넘어 승리를 하지 않는 한 세계적인 골고다 도성을 향해서 갈 수 없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에게는 세계적인 골고다를 향해서, 천주적인 골고다를 향해서 가야 할 복귀의 길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원이 그 복귀의 노정을 거쳐서 천국을 이루는 것이므로, 우리는 오늘도 가고 내일도 또 가야 합니다. 이 길을 가는 데에는 어떠한 사정이 있더라도, 혹은 부모가 반대하고 형제가 반대하고 동기가 반대하더라도 가야 합니다.
가야 할 복귀의 노정이 남아 있는 한 계속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억천만세가 걸리더라도 가야 하고, 우리의 후손 수천만대를 통해서라도 이 길은 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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