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하루의 생활을 하는 데도 어떤 방향성을 갖고 생활하게 됩니다. 하루의 생활이 그러하거늘 일년도 그러할 것이고, 일년이 그러하거늘 우리의 생애의 목표, 일생이라는 생애의 목표도 그러할 것입니다.

​타락으로 하나님과 상치되는 방향의 길이 생겨나

우리 인생 개체 하나를 중심삼고 볼 때도 그런 방향은 필시 요구됩니다. 그런 개체 개체를 합한 가정이 그러하고, 가정을 합한 국가, 더 나아가서는 세계, 이 세계를 움직여 나오는 하나님까지 전부가 우리 개인과 마찬가지의 인연이 배후에 연관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연고로 내 개체가 그런 방향성을 갖고 나아가는 한 이 우주도 역시 그런 방향성을 갖고 나가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늘땅이 그런 방향성을 갖고 나가게 된다면 하늘땅을 지으신 하나님도 역시 그럴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렇다 할진대는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은 물론이요, 지은 만물이 그렇다 할진대는 거기에 속한 모든 개체와 어떤 실존체라도 역시 그런 운명에 놓여져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게 될 때, 제일 문제 되는 것은…. 오늘날 이 우주의 움직임은 필시 변할래야 변할 수 없고 움직일래야 움직일 수 없는 완전무결한 이념이면 이념에 의해…. 우리의 원리적인 명사를 빌어 말할 때 창조주가 있었다면 그 창조주가 천지를 창조할 때는 창조목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목적은 필시 선과 이상의 본체적인 내용을 거쳐갈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관점에서 보더라도 필시 하나의 영원을 중심삼아 가지고, 무한한 가치를 지녀 가지고 어느누구든지 행복의 요건으로서 충성을 할 수 있는 내용의 곳, 혹은 세계, 혹은 본향, 혹은 우리의 행복지, 이런 곳이 있을 것입니다. 없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가 그러하다면 본래 인간에게 타락이 없었고 선한 입장에 있었다 할진대, 그 선은 인간 것이 아니고 창조주로부터 시작한 것이므로 창조주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창조주가 본래 그런 선하신 목표의 방향을 향하여 나갔다면 타락이 없는 세계에서 지음 받은 피조만물 역시 선한 방향에서 행하고 생활했을 것입니다. 그 가치야말로 영원과 관계를 맺고 나갔을 것이 필연적인 사실입니다. 그런데 인간 세상에 원치 않는 '타락'이란 두 글자가 생김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원하고 천지가 원하고 창조주가 원하는 그 방향성과 일치되지 못한 한 방향이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타락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우로 간다고 하면 그 반대 방향으로 가는 것이요, 하나님이 앞으로 간다고 해도 반대 방향으로 가는 것이요, 하나님이 위로 간다 해도 반대 방향으로 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타락권 내의 모든 여건이 상치되는 입장에서 별다른 방향을 자인하고 나가고 있는 것이 타락한 세계요, 타락한 역사요, 타락한 지금까지의 이 우주사요, 타락한 인생행로의 타락한 생활 방향입니다. 이것이 타락한 우리들의 개인적인 감정에까지 머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필시 오늘날 이 역사가 크나큰 한 포부의 품에 품기어 어떤 절대자인 주인 앞에 금후의 어떤 목표의 세계를 향하여 은연중 이끌려 나간다 할진대는 오늘의 승리를 두고 그것이 어차피 어느 한때에는 방향이 정해져 나갈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것은 직선으로 가야 할 것이 곡선으로, 먼 거리의 곡선을 그리면서 가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이 곡선상에 내포된 수많은 방향의 갈림길과 방향성이 있어 가지고 오늘날 이 세계는 휘돌아 가고 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종대는 사방의 대표자

여러분들이 내 자체를 두고볼 때나 인간 하나를 두고보게 될 때, 인간에게는 반드시 욕망이 있습니다. 소원이 있어요. 어떠한 삼척동자를 붙들고, 그 말을 이해할수 있는 어린 아이를 붙들고 '야, 너 장래에 커서 좋은 사람 될래, 나쁜 사람 될래?' 하고 물어 보게 될 때, '좋은 사람이 되겠다!' 하는 것은 이치요 원칙입니다.

영리한 아이에게 '너, 좋은 사람 될래, 나쁜 사람 될래?' 하고 물어 보면 '그거 왜 물어 봐?' 하고 대번에 반문할 것입니다. 그것은 정한 이치입니다. 물어 볼 필요도 없을이만큼 명백한 대답의 기준이 서 있지 않느냐고, 이렇게까지 느끼는 어린 아이들도 있다는 것을 우리가 추측할 수 있을진대, 이것은 오늘날 장성한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생활을 하게 될 때 좋은 생활을 해야 되느냐' 하면, '아, 그건 물론이지' 하지만, '나쁜 생활을 해야 되느냐' 하면, '그건 나 싫어!' 한다는 것입니다. 좋고 좋고 좋은 것을 찾아갈 것이라는 것은 삼척동자는 물론, 어느 개인을 막론하고 마찬가지입니다. 천한 자, 귀한 자,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전부 다 거기에 도달하는 것은 정한 이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의 마음에서 그러한 것을 보게 될 때, 그런 것을 스스로 느끼고 있겠지만 여러분 자체에 보게 될 때는 자기 마음이 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내 마음의 방향과 딴 방향에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거예요. 그걸 볼 때에 하나님이 공평하고 공정한 입장에서 나로 하여금 직선상으로 연결시켰던, 하나의 뚜렷한 목표에 대응이 되었던 그 목표가 내 가슴 깊이, 마음속에 줄을 달고 있어요.

이 줄을 달고 마음은 끌고 있는데 몸뚱이가 갈림으로써…. 다시 말하면 이 큰 나무에 아무리 가지가 많다 하더라도 나무의 중심에 뻗쳐 있는 종대는 하나가 있는 거예요. 그 종대를 보게 된다면 이 곁가지의 종대 순이나 이 수직으로 올라가는 종대 순이나 모양은 마찬가지입니다. 모양은 마찬가지다 이거예요. 끄트머리에 싹 모아 놓으면 요것도 그것 같고 그것도 요것 같고 똑같다 이겁니다.

그렇지만 마찬가지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종대는 사방의 대표예요. '너는 어디에 있느냐?' 할 때 '나는 중앙에 있기 때문에 동쪽에도 있는 것이요, 남쪽에도 있는 것이요, 북쪽에도 있는 것이요, 서쪽에도 있는 것이요, 상에도 있는 것이요, 하에도 있는 것이다' 하는 것입니다. 종대가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면 네 가지는 어떻게 되느냐? 동서남북의 수많은 가지를 몰아 보면, 이 가지의 순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지만 네 가지는 무슨 가지냐? 나는 동서남북 가지가 아니다, 서쪽 한 방향에 처해 있는 순이나 동쪽 한 방향에 처해 있는 순같이 어느 일방성에 처해 있는 순으로서 전체를 대표할 수 있는 순이 못 된다 이거예요.

우리 인생이 소원하는 목표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우리 종대의 순이 될 수 있는 하나의 목표점은…. 그렇기 때문에 풀도 보면 순은 곧바로 올라갑니다. 여러분, 고구마 순도 가만히 보면, 이놈이 뻗어 가는 것이 땅이 좋아서 땅에다 뻗어 가지만 순은 땅에다 박는 것이 없어요. 고개를 반드시 들고 가거든요. 그것은 천지의 방향이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마음에 있어서 순이 될 수 있는 방향이 어디냐? 이것을 왈, 간단한 말로 역사의 순이라고도 말하는 것입니다. 역사의 순이요, 시대의 순이요, 미래의 순인데 이 순은 힘입니다. 그 힘은 무슨 힘이냐? 천지에 수많은 민족과 수많은 만물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전부 소망의 여건을 토대로 한 자연적인 위치에 서 있고, 자연적인 가치를 갖고 있습니다. 그 말이 무슨 말이냐? 동서남북 어느 방향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위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이런 경지에서 볼 때 그런 방향이 있어야 됩니다. 추측으로 미루어 보게 될 때, 그것은 논고를 필요치 않는 정의라고 우리는 답을 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동서남북에서 자라는 순이 있다 하더라도 그 순이 전부 다 그쪽을 향하는 것이 아닙니다. 끄트러미는 중심과 더불어 자기 위치의 방향을 통하여 수습되어야 되는 거라구요. 방향만은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역사적인 종말은 섭리적인 방향과 일치해야 돼

오늘날 우리 타락한 인간의 방향이 천태만상으로 갈라지는 것은 역사적인 현상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들의 본심만은 천심을 향한 방향성을 갖추고 있는 하나의 기준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기준이 귀하다는 것입니다. 이 기준을 달리하여 잘라 가지고 딴 곳에 심게 되는 날에는 내가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중심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오늘날 우주가 목적하는 최고의 기준 앞에 그 순의 생명력을 줄기차게 받을 수 있는 사회적인 환경, 생활적인 환경, 시간적인 환경, 공간적인 환경을 가졌다면 그걸 잘라다 심어도 어디에 가든지 그 나무 노릇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역사의 순은 하나님이 바라는 소망의 방향과 일치되어 있고, 역사의 소망의 내용과 일치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순에 환경의 진액이 협조할 수 있는 위치와 입장은 천태만상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심어 놓았다 해도 죽어 버린다 이거예요. 이러한 것들이 오늘날 세계적인 현상인 것입니다. 이러한 권내에 있는 것이 오늘날의 사람들입니다.

이것을 볼 때, 하나님은 어떻게 할 것이냐? 하나님은 이런 인간들에게 오늘날 역사의 순과 같은 하나의 목표를 향한 방향의 기준을 반드시 예고시켜 놓습니다. 그렇게 예고되어 있는 자리를 마련하면 하나님이 바라는 이 세상의 소원의 동산은 춘하추동 사방의 방향성을 갖고 있으되, 그 자체에 있어서는 언제나 봄도 될 수 있고 여름도 될 수 있는 내용을 갖춰야 됩니다.

그러면 인간들이 하늘에서 떨어진 역사를 몰아 가지고 시대적인 하나의 방향과 때의 운세와 더불어 일치될 수 있는 세계사를 꾸며 나온다, 일치될 수 있는 섭리사를 찾아 나온다 이거예요. 그러면 그때에 겨울이나 가을이나 여름이나 봄절기를 통해서 나간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것을 찾아가는 데는 직행으로 갈 수 없으면 환경을 통해 수습돼 나온다, 역사는 과거에 우리가 좋아하고 원치 않는 겨울절기와 같은 시기로부터 수습되어 쭉 나온다 이겁니다. 이래서 인생이 바라는 세계적인 사조와 우리의 마음이 고대하던 모든 요건들이 생활적인 터전 위에 자연적인 욕구로서 이것이 주의와 사상으로 나타날 수 있는 때가 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세계사적인 사조로 나타나고 있다는 거예요.

이래서 여기는 민주주의, 자유 평등을 부르짖는 것입니다. 네가 기쁘면 내가 기쁘다 이겁니다. 어느 특정한 자만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봄동산에 있는 종대도 기뻐하는 것이요, 사방에 있는 가지도 기뻐하는 것입니다. 기뻐하는 데는 어떻게 될 것이냐? 종대도 열매맺고 가지도 열매맺는다 이거예요. 공동, 평등의 내용의 가치를 중심삼아 가지고 자유와 행복의 이념과 통할 수 있는, 그 누구와 더불어 가치의 평등성을 지닐 수 있는 그때가 역사의 종말 시기요, 역사적인 모든 관으로 바라보는 필연성으로서 우리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겁니다. 그러한 요건을 세우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게 된다면, 창조주가 있다고 해도 그 창조주를 우리는 모릅니다. 창조주가 보는 관과 창조주가 보는 관의 방향이 틀렸겠느냐? 이 방향은 틀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지능 정도와 문명 정도 여하의 차이에 따라 가지고 역사를 배양해 나온다 이거예요, 배양.

그러면 역사를 배양해서 필할 것이냐? 역사적인 방향을 배양해 나옵니다. 역사적인 방향을 배양해 나오는데 맨 처음에는 조그마한 가지이니까 1년생 2년생, 이것이 좀더 성숙하기 전에는 씨를 못 맺어요. 지금까지의 역사가 아직까지 크나큰 하나의 결실을 맺을 수 있는 목적에 도달하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로 배양 시기의 방향 과정에서 못 뻗어 나온 다 이거예요. 그렇게 된 거라구요.

이것이 지금 때에 와 가지고는 전부 다 수습되어 두 갈래로 부딪쳐 가지고 하나의 세계가 되어야 합니다. 그 하나의 세계가 되어야 한다 하는 관점은 무엇이냐? 우리 개체를 두고 볼 때, 여러분에게는 욕망이 있습니다. 욕망이 있어요.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나만이 좋아해서는 그것은 무가치한 것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너도 좋아하고, 세계도 좋아하고, 하늘땅도 좋아하고, 하나님도 좋아해야 됩니다. 그래야 그게 절대적인 가치가 되는 거예요.

인간세상에서는 절대적인 그 기준을 상대적인 존재 앞에 세울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절대적인 하나님까지도 '야, 그것 좋다!'할 수 있는 기준에 가서 절대적인 기쁨과 행복의 요건을 지녀야 됩니다. 내가 가치가 있다는 것은 천지가 가치가 있다는 것이요, 하나님이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대우주의 방향의 기점이라는 것은, 그 가치라는 것은 나만이 좋아할 것이 아닙니다. 천지가 기뻐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과거의 우리의 선조들도 기뻐해야 하는 것이요, 지금 이 천지 가운데 있는 자들도 다 기뻐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안 돼 있어요. 그러므로 그런 세계를 만들어야 됩니다. 이러한 논리적인 변증으로서 우리가 추리하여 결론을 내린다면 필시 역사적인 종말은 하나의 세계가 되어야 된다 이거예요. 그러한 천국 시민이 되는 동시에 역사적인 방향은 섭리의 방향과 일치해야 됩니다. 그런 결론이 나옵니다.

소원성취와 목적성취는 하나

그러면, 여기에서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오늘날 타락한 우리 인간들이 여기에서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오늘날 우리들은 태어나서 보니 지금 때가 20세기 후반기에 있다 이거예요, 나서 보니. 오늘날 세계의 사조가 이렇게 돼 있고, 과학 문명이 발달해서 자유의 천지를 꿈꿀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이거예요. 그렇지만 몇천 년 전의 사조로 보게 되면 이것은 꿈나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대적인 현상과 시대적인 단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섭리적인 뜻 앞에….

이것을 오늘날 우리의 입장에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면, 여러분들이 그러한 관을 가지고 끌고 나왔던 하나님을 만나서, 혹은 그런 역사적인 전부를 묶을 수 있는 어떤 역사적인 대표자를 만나서 여러분이 배운 일도 없고 알지도 못 해 가지고 어떻게 하느냐 이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막연하게 알 수 있는 하나의 추측만이…. 남북을 향해 있는 지남철이 때와 환경은 변하더라도 그 방향은 변하지 않는 거와 마찬가지로 방향의 한 지침과 같은 본질성이 우리에게 개입되어 있나니, 그것이 여러분의 양심이예요, 양심. 순수한 양심이라구요. 사심을 빼놓은 양심이다 이겁니다.

그것은 천만 년의 거리에 있고 몇억만 년 세월의 거리에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축소해 가지고 불과 2미터 이내나, 혹은 조그마한 몇 센티미터 이내의 나침판이라도 침의 방향과 평형입니다. 이렇게 그은 줄과 이 줄과는 평형입니다. 그렇게 돼 있다구요. 그러한 방향을 취하는 것이 여러분의 양심이다 이거예요.

인심은 천심이라고 하는 거와 마찬가지로 양심에 호소하는 세계, 양심에 호소하던 그 목적을 달성하는 세계, 양심의 해방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자유 천지는 어디에 있을 것이냐? 이것이 섭리적인 견지에서 본 하나님이 지금까지 방향으로 찾아 나온 길이요, 또 섭리의 뜻을 대하는 역사인들과 지금의 우리 시대인들이 찾아가야 될 방향입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진정한 양심을 통하여 우러나오는 내 마음에도 양심의 욕망이 있다 이겁니다. 인간세계의 양심은 반드시 소망이 필요합니다. 거기에는 소망이 있어야 되고 어떤 결과가 있어야 됩니다. 그다음에는 사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횡적 관계예요. 횡적 관계다 이거예요. 하루하루 생활하는 데는 사정이 있어야 되고 그다음에는 심정이 필요합니다. 정적 관계.

그리하여 정적인 역사성을 초월해야 됩니다. 내 시대성을 초월해야 된다구요. 오늘만 이게 필요한 게 아니예요, 오늘만 이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거 왜? 국민 정신이 있어 가지고 국민성을 조성하는 것은 역사성을 초월해야 되고 시대성을 넘어가야 됩니다. 그런 민족으로서 그런 국민성을 가진 국민은 시대를 넘고 미래의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3대 조건을 다 이루면 소망이 있을 것이요, 사정이 있을 것이요, 횡적 관계가 있을 것입니다. 심정은 역사적 관계예요. 역사성을 넘어간다는 말입니다. 부모한테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고 공적인 이치 앞에 순종하는 이러한 모든 것이 하나다 이거예요.

그런 것을 다 존중하게 하기 위해서는 그건 사정 가지고 안 됩니다. 단지 심정세계예요. 심정세계가 있는 것입니다. 심정세계요, 사정세계요, 소원세계입니다. 이렇게 보면 틀림없다구요. 그러면 그 심정 세계에서 살고 싶은 그분이 누구냐? (녹음이 잠시 끊김)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심정이니 무슨 사정이니 우리의 소원이니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이 소위 많이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냐? 천지창조할 때 그러한 것을 창조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목적관을 성취시킬 수 있는 과정적인 인연을 맺기 위해서는 소원이나 소망이라는 것이 없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소원이 있었던 것입니다. 천지창조의 목적이 있는 거예요. 목적이 있는 거예요. 목적이 성취되었다는 것은 소원성취예요. 소원성취와 목적성취는 하나라구요.

사상적인 기반이 넓을수록 세계적인 희생을 동반해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소원성취하는 데는 반드시 사정이 있어야 된다구요. 사정을 통하려니 횡적 관계가 필요하다 이거예요. 나만 가지고 안 되니 여기에 아담 해와가 필요한 것이요, 천사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뭘할 것이냐? 기쁠수 있는 세계를 이루어야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 세계에 있다는 것입니다. 영원히 두고 두고 흘러갈 수 있고 영원히 두고 두고 기뻐할 수 있는 심정의 세계, 내적으로 느낀 감정적인 그 세계를 사모해야 될 생활적인 무대를 넘어 소원성취한 상대적인 목적의 세계에서 생활하게 될 때, 여기에서 3단계를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만족과 행복은 3단계를 넘어서야 돼요. 보라구요. 내 마음이 기뻐하려면 몸을 통해서 상대를 갖추고 난 후에야 기뻐하게 됩니다. 천지이치가 그렇게 되어 있다는 거예요. 천지원칙이 그렇게 되어 있다구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으로 보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창조하게 되는 데에는 심정적인 관이 없는 것이 아니요, 내재적인 사정의 관이 없는 것이 아니요, 내재적인 소원의 관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적인 실체를 거쳐 가지고 사정적인 세계를 다리 놓아 소원적인 세계를 거쳐 목적을 달성한 후에 심정·사정·소원이 일치한 3세계의 감정을 일시에 품에 안을 수 있고 행복과 만족과 기쁨을 노래할 수 있는 세계를 하나님 이 창조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심정세계만 추구할 수 있다면 하나님 혼자도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런데 왜 하필 피조세계를 지었느냐? 바로 이걸 느끼기 위해서입니다. 심정·사정·소원이 일치한 그 기쁨을 일시에 느낄 수 있는 그 세계를 위하여 천지창조를 했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그런 관점에서 보게 된다면,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가 있으면 창조주의 심정이 있고, 심정이 있으면 사정이 있고, 사정이 있다면 소원이 있어야 됩니다.

이렇게 볼 때 타락한 역사적인 면에 있어서는, 타락한 우리 인류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심정이 어떤지 하나님의 사정이 어떤지 하나님의 소원이 어떤지 몰라요, 몰라. 몰랐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심정을 소개하기 위한 것이, 이 사정을 소개하기 위한 것이, 이 소원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 지금까지의 복귀섭리다 이겁니다. 지금까지의 구원섭리다 이거예요. 다시 말하면 재창조역사다 이거예요. 아마 이것은 여러분들이 알고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말을 처음 듣더라도, 여러분이 듣기는 처음 듣지만 그런 세계가 있었다면 벌써 있었다는 걸 알아야 됩니다. 지금까지의 역사적인 이 거리는 먼 거리인데 나의 생애는 불과 백 년 미만입니다. 영원한 역사선 위에 일생이 백 년도 채 못 되는 것을 볼 때, 한 일 밀리미터나 될까요? 일 밀리미터도 못 돼요. 일 밀리미터도 못 돼요.

그런데 요것들이, 고것들이, 요것도 제멋대로 살겠다고 이 우주적인 방향의 의로운 큰 흐름 앞에 딱 꺼꿀잡이가 되어 가지고 우주를 향해 대항하고 있습니다. 하늘을 배반하는 거예요. 암만 콩튀듯 날뛰어도, 무슨 무슨 주의, 무슨 사상, 무슨 이상을 부르짖었댔자 그건 타당하지 않아요. 거꾸러진다는 것입니다.

이 선이 돌아갈 수 있는 커브는 아직까지 시작되지 않았어요. (판서하신 것을 가리키면서 말씀하심) 그렇지만 요 선이 돌아갈 커브는 많아요. 뒤넘이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는 동시성의 역사입니다. 그렇게 범위가 커진다구요. 그러면서 하나로 수습되는 거예요.

작은 놈들은 말이예요, 조그마한 놈들은 양심이 마음을 중심삼고 하루에도 몇 번씩 뒤넘이치느냐 말입니다. 하루에도 또 하고 또 하고 뒤넘이친다 이거예요. 이 운동을 해야 된다는 거예요. '이것이 점점 커 가면 커 갈수록 여기에 감겨 넘어가는 희생자가 많은 것을 알라!' 이것이 지금까지 투쟁사의 배후입니다. 제1차 전쟁과 제2차 전쟁을 중심삼아 가지고 각 민족의 역사 배후에 나타난 투쟁사의 희생의 제물들이예요. 그 주의사상의 발판이 크면 클수록, 그 사회의 사상적인 기반이 넓으면 넓을수록 거기에 동반한 희생이 세계적인 희생을 동반한다 이겁니다. 작으면 작을수록 거기에 비례해 희생됩니다. 개인이 걸었으면 개인적인 희생이 벌어져 넘어갑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역사적인 사조가 이렇게 크나큰 주의로 갈라져서 뒤넘이 칠 수 있는 희생의 자장이라고 할까, 이러한 환경이 몰아치고 있으니 여기에서 뒤넘이 쳐 가지고 내가 돌아가 꼬꾸라지는 날에는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흘러서 새로운 역사적인 제1방향의 기점을 밟고 나서는 사람은 그래도 남아지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역사는….

그러니 철썩같아요. 이 원칙은 변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그것은 여러분 선조가 나기 전부터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담 해와가 타락하기 전부터 있는 거예요. 천지창조 시작 때부터 있었던 것이 지금까지 없어진 적이 없어요. 존재하는 그 실존의 가치관이 시작될 때부터 그 가치관이 아직까지 결정되지 않은 지금 이때가 고비가 되는 기간입니다. 필요로 하는 기간으로 존재한다 말이예요.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그러면 하나님의 소원이 무엇이며 하나님의 사정이 무엇이며 하나님의 심정이 무엇이냐? 이런 문제를 볼 때 여러분도 그렇잖아요? 오늘날 정치적 정책이 뭐예요? 주권자의 소원과 사정과 심정을 통하는 것입니다. 딴 게 아니라구요.

심정에서 반응되면 사정을 통하여 가지고 사정적으로 소원성취하여 심정, 사정, 소원이 일치되는 기쁨과 행복을 갖고 '아, 과연 나는 지난날이 전부가 좋았다. 오, 과연 태초 천지창조는 선한 창조였고, 과연 하나님이 창조하던 과거가 전부 다 좋았다'할 수 있는 결론은 무엇이냐? 이 3요건이 합의점에 부딪쳐 가지고 성취될 그 순간에 전체 세계는 전부 다 경계 기준이 된다구요. 3점 이상을 넘어가야 영원히 돌아가는 거예요.

직선이라는 것은 1점이지만 3점에서부터 곡선이 벌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곡선은 반드시 3점에서부터 벌어집니다. 이 천지창조는 3점의 조화에서부터 벌어져 나간다 이거예요. 거기서부터 집요한, 미묘한 가치가 벌어져 나오는 것입니다.

지금의 세계는 미결세계

그러면, 오늘날 여러분 자신에게 필요한 신앙생활은 무엇이냐? 결론은 간단합니다. 신앙생활은 무엇이냐? 그것은 하나님의 소원과 접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사정과 접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심정과 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수많은 종교들 가운데는 사정 종교파가 더 많아야 돼요. 사정에도 누구의 사정이 더 좋으냐? 수많은 계급이 있거든요. 종파가 많다 이거예요. 또 심정과 소원이 각각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많은 민족들을 대신하여 수많은 종교의 명사를 얻어 가지고 수습하여 이 대역사적인 흐름과 더불어 연결시키기 위하여 하나의 방향성의 운세를 타고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부정할 수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에서 문제가 무엇이냐? 누가 하나님의 심정을 논하고, 누가 하나님의 소원을 논하고, 누가 하나님의 사정을 논할 것이냐? 과거에 그런 사람이 있었느냐? 문제가 크다는 것입니다. '내가 알기에는 누구 누구다'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느냐? 확실한 답변으로 '과연 내 가 그렇습니다' 할 때 아무리 당당한 자기의 기세라 하더라도 그러한 사정 앞에 할 수없이 무릎을 꿇고 '그렇습니다' 할 수 있는 내용을 지녔느냐? 아직까지 미정이예요. 미확정이예요, 미확정. 아직까지 미결이라구요, 미결. 결정이 안 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계 앞에 기독교가 참 고마운 것은 '이 세상 가운데는 심판이 있다' 하고 잘 때려 놓았다는 것입니다. 미결수들이 있으니까 심판 역사가 나오지요. 그걸 볼 때 필시 오늘날 우리들이 말하고 있는 관점의 내용과 방향의 내용이 틀림없다는 것을 여기서 부정할 수 없다 이겁니다. 미결이예요, 미결. 미정이라구요.

그러므로 하나님도 미결세계에서는 주인이 안 되겠다 이거예요. 또 이 땅 위에 크나큰 세계적인 내용을 지니고 왔던 어떤 도의 주인공이 있으면 그들은 반드시 현시의 주인이 되지 않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미래의 주인이 되겠다 이거예요. 그것이 재림사상이예요, 재림사상. 현시의 주인이 안 되겠다 이겁니다.

예수님도 만왕의 왕이라는 명사를 만들었는데 그게 무슨 만왕의 왕이예요, 무슨 만왕의 왕? 그것은 앞으로 끝날에 이 천지 앞에 심판 목적이 달성된 후 승리적인 그 터전에서 재림하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현재는 미결수예요. 미결수 감방에 있다구요. 여러분, 형무소 생활 해봤어요? 거기에는 궁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귀하지 않은 것이 없다구요.

재림이라는 명사가 나타나려면 인류가 고대하는 요건이 필요해

여기서 우선 여자들을 보면, 여자들의 머리카락 있잖아요? 여러분이 방에서 여자들의 머리카락이 떨어지면 재수없다 그러지요. '이게 뭐야, 재수없이…' 그런다구요. 어때요, 재수없다고 그러지요? 어때요, 누군가? 무슨 영인가? 얘! 은영인가? 「예」 그렇지만 형무소 감방에서는 머리카락이 필요하다 이거예요. 여자 머리카락 하나라도 필요하거든요. 형무소 생활을 많이 하게 되면 필요하지 않은 것이 없어요. 감옥살이 많이 한 사람일수록 요만한 헝겊 짜박지가 얼마나 귀하냐? 감옥살이 많이 한 사람의 보자기를 풀어 보면 별것 다 있거든요, 알록달록한 것이. 사람은 많이 갖고 싶은 거라구요. 분량은 작지만 갖고 있는 것은 중요하거든요. 그런 것이라도 갖고 있으면 그걸 자랑해야지요. 가진 것이 있어야 된다구요.

지금까지 역사적인 모든 내용을 해결지을 수 있는 어떤 종교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필시 이런 내용을 결정지을 수 있는 하나의 때가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하나의 때가 있음과 동시에 하나의 때를 지배할 수 있는 하나의 인물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하나의 인물은 세계와 더불어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분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기독교로 보면 재림사상입니다. 그러니까 기독교가 고맙다는 거예요. 내가 그런 견지에서 볼 때 고맙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재림이라는 명사가 필요한 것을 볼 때, 재림이라는 명사가 나타날 때는 필시 인류가 고대하는 전체적인 내용의 요건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있다면 하나님의 사정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의 심정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의 소원을 알 수 있고, 또 역사가 있으면 역사적인 심정과 사정과 소원이 다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시대면 이 시대에도 그런 내용이 있고, 미래면 미래가 필요로 하는 내용이 있을 것입니다.

이 전체의 3시대를 거쳐 나오면서 이 내용의 전체를 대표할 수 있는 어떤 원칙적인 방향의 여건을 지니고, 그 방향을 움직여 나오신 하나의 주인공이 있다면 그 주인공도 역시 이런 내용의 본체가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그 본체의 뜻과 내용과 사명을 상속받아 가지고 이 땅 위에 오는 사람이 있어야 되겠다 이겁니다. 하나님이 친히 나서서 그런 것을 가르쳐 주지 못할 때에는 반드시 이 땅 위의 인간들을 세워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느때에 가르쳐 주느냐? 맨 나중에 가르쳐 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을 세워서 역사의 방향을 잡아 나옵니다. 여기에 수많은 민족이 있으면 그 수많은 민족이 대결적인 방향도 갖고 있되, 그 민족들 가운데서 하나의 방향과 일치될 수 있는 한 개인이 필요하다 이거예요. 개인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알지 못하는 관점에 서 있기 때문에 믿음이라는, 신앙이란 명사를 세워 가지고, 여기에 미묘한 내용을 내포시켜 놓고 '맹목적으로 믿자. 아들딸들아 믿자. 하나님이 심판한다는데, 이러이러하니 하늘을 위해서 충성하는 사람들은 다 좋게 된다더라. 믿자!' 그러는 것은 무모한 신앙이예요. 그걸 그렇게 찾아간다구요. 그건 또 그렇게 해서 믿는 것입니다.

어떤 큰 집의 주인이 있다고 합시다. 그 주인이 자기 종들 앞에 뭘 나눠 주고 싶은 때에는, 자기가 정성들여 모은 재산이나 혹은 어떤 귀한 것을 갖고 있어서 그것을 나눠 줄 때에는 무조건 나눠 주고 싶지 않다 말이예요. 반드시 시험이라도 하고, 못 하겠으면 회유라도 한번 해 가지고 눈짓이라도 한번 해 가지고 어떡하든지 다 시험을 한 뒤 그것을 지나 가지고 자기가 사랑할 수 있는 정도의 모양이라도 갖춰 놓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것을 봐 가지고 주는 것입니다.

세상에 사람들도 그러하거늘 '믿어라!' 하는 신앙의 역사를 세워 가지고 몇천 년? 오늘날 4천 년이면 4천 년, 그 이상이면 이상 신앙의 역사를 세워 놓고 그 역사 가운데 믿으라는 신앙을 가지고 몇천 년 이상을 믿고 나갈 수 있는 사람이 있느냐? 그러지 않으면 하나님을 못 믿는 거예요. 하나님을 못 믿는 거라구요. 하나님 못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본다 이겁니다. 혹은 지금까지 몇천 년 신앙한 신앙자가 있느냐? 이걸 찾아 나온 것입니다.

이제는 우주사적인 신앙관념이 필요해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되어 나온지가 지금까지 4천 년입니다. '그 4천 년 믿음의 조상을 통해 믿으라는 신앙관념을 세웠는데 그 신앙관념을 통하여 전통적인 신앙의 생활을 대표할 수 있는 역사인의 실체가 있느냐?' 이렇게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역사적인 신앙은 어떠한 신앙이냐? 그 시대적인 신앙이 아니예요. 아브라함의 신앙을, 혹은 모세의 신앙을, 혹은 예수의 신앙을 본받아 가지고 이 시대 앞에 책임질 수 있는 그 신앙자, 그는 그 시대 앞에 아브라함을 대신하여 변명할 자요, 모세를 대신하여 변명할 자요, 메시아를 대신하여 그리스도 앞에 변명할 자다 이겁니다. 이렇게 될 때 그는 역사적인 신앙자입니다. 그런 걸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본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하나님은 오늘날 역사적인 신앙자를 찾는 동시에 역사적인 민족, 역사적인 주인, 역사적인 이상세계를 찾는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성경을 통하여 종교적인 이념 가운데에서 찾아진 것은 무엇이냐? 그것은 내용을 설명한 것이 아닙니다. 막연하나마 신앙관념을 세워 나온 것입니다. 그러면 몇천 년 동안 믿어야 되느냐? '6천 년 이상 숱한 비애의 곡절에 부딪치는 한이 있더라도 믿는다는 철석같은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 이럴 수 있는 신앙이어야 됩니다. 그 신앙이 있겠느냐 말이예요.

오늘도 그런 사람들이 필요한 때입니다. 신앙 관점에서 보게 될 때 하나님도 자그마치 그러한 사람을 찾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면 야곱은 가정적인 믿음의 조상입니다. 아브라함은 개인적인 믿음의 조상이요, 야곱은 가정적인 믿음의 조상이예요.

그것은 성경에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성경에 보면 틀림없이 그렇게 돼 있습니다. 야곱은 가정적인 믿음의 조상이예요. 그러므로 가정적인 믿음의 조상 앞에 있는 그 가정들은 절대복종하여 야곱만 믿으면 종대 순과 접할 수 있는 사방의 지엽적인 순이 된다 이거예요.

그러면 모세는 무엇이냐? 민족적인 믿음의 조상입니다. 그러므로 그 민족적인 믿음의 조상을 중심삼아 가지고 그가 주장하고 그가 믿고 있는 신앙관념에 절대복종하면 지엽적인 가지의 순과 사명은 이 민족적인 기준에서 뻗어갈 수 있다 이겁니다. 그래서 점점 커 나온다는 거예요. 개인적인 믿음의 순, 가정적인 믿음의 순, 민족적인 믿음의 순을 기반으로 하여 세계적인 민족 앞에 세계적인 어떤 주권을 중심삼고 섭리를 하시려니 선민사상이 나옵니다.

이 선민사상이 발생하는 데는 이스라엘 선민, 유대 백성입니다. 그것을 잘 알아야 돼요. 유대 백성을 기반으로 하여 개인적인 신앙이 역사적인 신앙관념의 뿌리에 젖어 있고, 가정적인 신앙관념의 뿌리에 젖어 있고, 민족적인 신앙관념의 뿌리에 젖어 있는 것입니다. 그 기반 위에 세계적인 신앙관념을 세우기 위해서 오신 분이 메시아입니다. 메시아예요. 세계적인 신앙관념을 이 천지간에 세우기 위해서 오신 분이 메시아다 이거예요.

그 메시아가 왔다가 가면서 재림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재림이 필요치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 것이냐? 그때에 천지의 대주재 되시는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는 하나님의 직계 아들이요, 독생자요, 하늘의 황태자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무지한 신앙관념이 있어서는 안 된다 이거예요.

왜 다시 오겠다고 했느냐? 하나님의 섭리적인 입장에서 본 심정과 하나님의 섭리적인 입장에서 본 사정과 하나님의 섭리적인 입장에서 본 이념…. 이것은 예수가 30여 년의 생애노정을 걸어갔지만 그 주 이념은 세계 무대를 넘어서 가지고 세계가 수습된 후에 말할 내용입니다. 민족이 수습되지 않은 그 시대에서는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하지 못하고 가슴에 품고 간 예수가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이러니 '다시 온다' 이렇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신앙 기반 위에 이제는 무엇을 요구하느냐? 우주사적인 신앙관념이 필요합니다. 예수가 구주는 구주인데 인간들만을 구제하는 것이 아니예요. 하늘땅을 구원하고 하나님도 구원해야 됩니다. 하나님을 구원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필요하기 때문에 예수를 보내 가지고 죽이면서도 참고 나오지요. 구주는 구주인데 무슨 구주? 인간 천지만물의 구주로서 구원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하나님까지도 기뻐할 수 있는 해방의 구주가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못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나님의 심정과 하나님의 사정과 하나님의 소원을 성취 못 했으니, 심정을 통할 수 없고 사정을 통할 수 없고 소원이 달성되지 못했으니 하나님도 고통 가운데 있을 수 있느냐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노릇 못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구요. 결론적으로 하나님노릇을 못 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이 망할 세상을 가만히 두고 보니 지지고 볶고 다 그랬다 이거예요.

그러므로 재림사상이 완결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적 사정과 하나님적 심정과 하나님적 소원이 이 천지 신앙관과 일치하여서 재출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인생이 갈 방향…. (녹음이 잠시 끊김) 우리 교회도 그런 문제에 들어가 가지고 선생님이 고생을 많이 한 것입니다.

가치를 지닌 종교의 터전 위에 사는 신앙자들을 길러내야

오늘날 어떠한 주의나 사상을 볼 때, 개인주의적인 관념과 자아주의적인 관념을 중심삼고 새 사조에 적응하여 나가는 사람은 이 사조가 영원히 남아 있지 않는 한 망하는 거예요. 망하는 것입니다. 종교인은 어느 역사가 지배하지 못했다는 결론이 성립됩니다.

그 신앙자 자신은 역사를 초월한 기준에서 비약도 그 기준이요, 종말점도 그 기준입니다. 역사적인 변천의 과정에서는 어떤 상대적인 요건을 요구하지 않는 그 기준이 성립되는 거예요. 그래 가지고 최후의 목표를 연결시킬 수 있는 기준에서 우리가 하나의 끝날을 가져야 됩니다. 그래야만 지금까지 믿고 나오는 신앙의 관점이 세워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대표적으로, 현실적으로 나타난 것이 기독교사상입니다. 그래서 선생님도 기독교를 중심삼고 나오는 거예요. 그렇지 않고, 딴 그 무엇이 있으면 내가 기독교 기준을 절대 세우지도 않았을 거예요.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때는 세계적인 신앙시대가 아닙니다. 천주적인 동시에 하나님의 내재적인 모든 사정과 심정과 소원을 완성시켜 지상의 곡절과 그 모든 것이 여기에 부합되지 않는 것을 심판해 버릴 신념을 가진 그런 사람, 그런 신앙인이 이 지상에 남아져야 합니다. 그래야만 끝날이 가까운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나오기 전에는 끝날이 오지 않아요.

오늘날 세계가 이렇게 수습되어 하나의 세계를 향해 넘어가는 이때에 수많은 주의를 다 수습하여야 합니다. 두 주의가 나왔으나 하나의 체제권은 치리되었습니다. 성경에도 말하기를 면양과 산양을 갈라서 두 패로 만든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그냥 그대로 들어맞는 환경이 되어 있는 것을 볼 때, 또 하나의 세계를 지배하고 주관할 수 있는 때가 온 것을 볼 때 끝날이 된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종교라는 명사를 가지고 세계 사조와 더불어 판가리 싸움을 하게 될때, 여기에서 이 세계 사조를 밟고 올라설 수 있는 신앙의 내용을 가지려면, 하나님이 반드시 세워 줄수 있는 내용의 기반을 가지려면, 지금까지 말한 그 3대 요건의 발판을 지니고 나타날 수 있는 새로운 이념적인 신앙과 종교관이 나오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은 동서고금의 어떤 역사전인 기간을 중심삼고도 무시할 수 없고, 전통적인 기준과 심정적인 기준을 중심삼고 변증해도 무시할 수 없고 그 나라의 역사적인 어떤 애국자나 충신에 대해서도 낱낱이 굴복시킬 수 있는 요건을 지녔다고 할 수 있는 가치를 지닌 그런 종교의 터전 위에 사는 신앙자들을 길러내야 합니다. 그러지 않는 한 앞으로의 종교는 세계 앞에 먹혀 버린다 이겁니다.

그러면 종교가 세계 앞에 어떻게 되었느냐? 로마가 기독교를 못 먹었어요. 이조시대에 아무리 기독교인을 학살했지만 못 먹었어요. 도리어 먹혀 나온다구요. 먹히는 것 같고 없어지는 것 같지만 맞고 빼앗아 나오는 것입니다. 비참한 전쟁과 아무리 지독한 학살이 있더라도 히틀러에 의한 6백만 이상의 학살 같은 것은 지엽적인 희생입니다.

외적으로는 민족적으로 희생하는 데 요것은 개인적인 희생이요, 가정적인 희생입니다. 그것밖에 안 됐다는 거예요. 그만한 희생은 큰일을 섭리해 나오는데 하나님의 뜻 앞에 있어서 용허하지 않을 수 없기에 그런 희생은 가는 길에서 이미 필연적인 요건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희생을 무릅쓰고 지금까지 나온 것입니다.

최후에는 어떻게 될 것이냐? 최후에는 종교가 어떤 주권에 먹힐 수 없어요. 앞으로는 하나의 세계를 주장하는 대통령에게까지도 하늘의 어떠한 종교 명사를 가진 사람들이 축복을 해주고 머리에 기름과 향수를 뿌려 가지고 대관식을 해줄 수 있는 시대가 와야 됩니다. 그러려면 그 종교는 점점 드러나야 됩니다.

외적 창조가 먼저요 내적 창조는 나중

이러한 이념의 발판을 거쳐 역사성을 대표하고 시대성을 대표하고 미래를 대표할 수 있는, 모든 인간이 구현해야 할 요건의 내용을 지닐 수 있는, 아까 말한 3대의 심정, 사정, 소원이 같이할 수 있는 그런 자리를 찾아 나가야 됩니다.

그렇게 되려면 그런 개인으로부터 가정, 민족, 국가, 세계를 거쳐 나가는 신앙의 대표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전통적인 신앙의 내용을 전부 다 평면적인 인연의 가치적인 내용으로 두고 볼 때, '야, 너는 아브라함 주고도 바꿀 수 없어. 모세를 주고도 바꿀 수 없어. 우주하고도 바꿀 수 없다. 그런 심정적인 자격자, 심정적인 신앙의 자세를 갖췄다' 라고 할 수 있는 종교적인 신앙의 대표자가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자그마치 세계적인 하나의 정상의 섭리의 뜻 앞에 있으면서 종교를 책임지고 지도한다는 사람은 사상주의자 앞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예요. 사상주의자들이 그들 앞에 머리 숙여야 됩니다. 하나님주의 앞에 누가 머리 들겠느냐 이거예요. 인간의 주의로서 이 세계 주의 앞에 머리 들 수 있겠느냐 이거예요.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 주의를 주장하는 그들이 인간의 어떤 사상과 주의 앞에 머리숙여 가지고 되겠느냐 이겁니다. 안 된다구요.

종교의 내용을 중심삼아 가지고 충효사상 이상의 체계적이요, 논리적이요, 실증적인 내용을 갖출 수 있는 신앙이론이 기본이 되어서 세계관적인 사상이념을 오늘날 이 역사 앞에 제시하지 못하면 하나님은 죽었어요, 죽었다구요. 하나님이 죽었으니 종교가 무슨 종교예요? 종교인들은 다 죽어야 돼요.

하나님이 죽지 않았다면 필시 그런 때가 올 것이다 이거예요. 그것은 역사를 봐서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것이 틀림없다 이거예요. 그것을 무엇을 봐서 알 수 있느냐? 역사를 봐서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보라구요, 우리가 천지창조의 이치를 가만 보게 될 때, 핵심을 먼저 만들어 놓고 상대를 만든 것이 아니예요. 핵심을 만들어 놓기 전에 상대적인 요건을 만들어 놓는 것입니다.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 흙을 먼저 만들어 놓고…. 외적인 것을 기반으로 하여 내적인 것을 세워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게 천지창조의 이치라는 거라구요. 현재 것보다 더 큰 것, 무가치한 데서 더 가치 있는 것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된다구요. 천지창조의 이치가 그렇다 이거예요. 오늘날 인간창조를 보게 될 때에도, 인간을 짓게 될 때에는 몸뚱이를 먼저 만들어 놓고 영을 만들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아까 '섭리적인 방향' 이라고 하는 제목을 붙였는데, 원래 6천 년 역사의 섭리의 방향을 두고 보게 될 때, 하나님께서 외적인 섭리와 내적인 섭리를 결정지어 가지고 나온 하나의 사건을 종교라고 했습니다.

아담가정을 두고 볼 때, 제물을 드리기 위한 준비는 외적 창조형입니다. 그리고 제물을 드리는 그 순간에는 내적 기준을 완결시켜 가지고 하나의 그 가정 가정에 있어서 완결시킬 승리적인 결정을 지어야 됩니다. 가인과 아벨은 내적 창조의 수습을 하였습니다. 가인과 아벨을 통해 협조해 가지고 하나님이 제물이라는 것을 개재시켜 놓고 내적인 가치를 결정해 나온 것입니다. 전부 다 내적 창조입니다.

노아의 가정을 두고 볼 때도 역시 120년 동안 외적인 환경에 살았고 40일 심판으로써 내적인 결정을 했습니다. 그리고 40일 심판한 그 과정에서 40일이 외적이라면 노아의 가정에서 한 역사의 내적 기준을 완결해 넘어가야 된다 이거예요.

이것은 아브라함도 역시 마찬가지다 이겁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지고 축복의 땅, 앞으로 소망의 하란세계로 내몰려 가지고 혹은 섭리의 뜻을 받들 수 있는 애급까지 갔다 와 가지고 그걸 한 후에 내적인 결정을 한 것입니다, 전부. 아브라함도 그랬고 야곱도 그랬다는 것입니다. 야곱이 21년 동안 내적 기준을 중심삼아 가지고 건너올 때에 얍복강에서 내적 결정을 했다는 거예요.

모세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세도 바로 궁중에서 40년, 그다음에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동안 외적 결정을 해 가지고 그다음에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어 나가는 내적 결정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도 외적인 33년 공생애노정 위에 내적 결정의 여건을 완결하려다가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부 다 외적 창조가 먼저요, 내적 창조는 나중입니다. 내적인 문제가 결정되기 전에 외적인 모든 문제를 사방성으로 갖추어 놓고 사방성의 종대 순과 같은 기준을 결정지음으로 말미암아 하나의 완전한 가치적인 기준을 그 환경에서 이루어 놓았습니다. 그 개인적, 가정적, 민족적, 세계적 혹은 천주적인 범위와 환경은 다를망정 섭리는 그렇게 해 나온 것이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끝날에는 하나님을 모시기 위한 대이동이 벌어져

보라구요. 그런 견지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보게 될 때…. 아담가정에서 아담가정을 두고 볼 때는 하나님을 대할 수 있느냐는 거예요. 대이동이 벌어지는 거라구요. 하나님을 모시게 될 때는 반드시 이동해서 합하는 거예요. 가인과 아벨도 마음대로 돌아다니다가 화합하는 거예요. 노아도 역시, 120년 동안 그 가족들이 마음대로 돌아다니다가도 방주에서는 합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마찬가지라는 거예요, 섭리의 뜻 앞에. 모세도 마찬가지란 말입니다.

합하게 할 수 있는 외적인 것과 주체, 주체와 상대될 수 있는 요인을 거쳐야 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과정에서는 대이동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동이 벌어지는 거라구요. 야곱가정을 보면 야곱이 집에서부터 하나님의 복귀의 가정으로서 하란 땅을 버리고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게 될 때는 이동이 벌어졌습니다. 또, 이스라엘 민족이 애급 땅에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때도 대이동이 벌어졌던 거라구요.

기독교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 위에 악한 로마의 세계를 중심삼아 가지고 새 에덴 땅을 복귀하기 위해서 온 기독교 신앙자들의 대이동을 시킨 것입니다. 그런데 이동을 시켜도 자기들이 안 따라가니까 핍박을 주는 거예요, 핍박을 주는 거라구요. 죽이고 사자밥이 되게 하고….

이건 왜 이렇게 하느냐? 개인적인 섭리의 사명을 두고 볼 때, 개인적으로 믿게 될 때는 그 환경적인 믿음의 조상 한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그때는 한 사람으로도 됩니다. 그러나 한 사람을 연결시켜서 전체성, 온 국제성을 갖출 수 있는 시대적 섭리를 하려니까 아브라함 한 사람만 붙들고 있어서는 안 되겠다 말입니다.

이럼으로 말미암아 점점점점 더 복잡한 사방의 핍박을 가해서 섭리역사를 책임져 나오는 우리의 선조들은 이것을 책임해 감당하지 않으면 안 되게끔 되었다 이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아브라함 때보다도 야곱 때가 더했고, 야곱 때보다도 모세때에 더했고, 모세 때에보다도 예수 때가 더했고, 예수 때보다도 재림 때에 더 대이동이 벌어진다 이겁니다.

민족적인 세계, 민족 관념에서 한 유대나라에 예수님이 유대교를 중심삼고 전파하려고 했지만, 전파하고 나서는 세계적인 종교이지 유대 교의 종교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세계적인 발판을 넓히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학살시켜 죽게 되니까 이스라엘에서 전부 다 도망가 가지고 빨리빨리 선포해서 세계적인 세례 요한이 필요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놓자 이거예요. 역사를 통해서 세계적인 아브라함이 필요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놓고, 세계적인 야곱이 필요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놓고, 세계적인 모세와 세계적인 세례 요한적인 사명을 역사를 통해서 하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한쪽을 치기 전에는 섭리의 뜻이 이루어질 수 없어

이런 관점에서 볼 때에 하나의 섭리의 때를 맞이하게 될 때는, 한 세계에 있어서 대이동을 하게 될 때는 반드시 한 세계를 치든가, 그렇지 않으면 이쪽의 축복받은 사람을 치든가 둘 중의 하나를 쳐야 된다 이거예요.

그 말이 무슨 말이냐? 야곱이 하란에 가 가지고 21년 동안 섭리의 뜻 앞에 수고를 하고 나오게 될 때 야곱을 축복하기 위해서는 라반을 쳐야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유대 민족이 400년 동안 고역당한 고역기간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치기 위해서는 애급의 세력을 강하게 해줘야 된다는 것입니다. 애급문명이 그때 발전한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를 흥하게 하려면 하나를 반드시 쳐야 되고, 하나를 치게 되면 하나는 흥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탄편을 치게 되면 하늘편에게 복을 줘야 되고, 하늘편을 치게 될 때는 사탄편에게 복을 줘야만 우세하게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새 출발을 할 적마다 어떻게 됐느냐? 하늘편이 우세했느냐, 사탄편이 우세했느냐? 새 출발을 할 적마다 사탄편이 우세했다 이거예요. 그걸 알아야 된다구요, 언제나.

야곱 때도 집에서 나오게 될 때 라반이 우세했습니다. 모세 때도 바로가 우세했고, 예수님 시대에도 역시 로마가 우세했습니다. 모든 세계적인 나라의 이념을 중심삼은 국가 체제가 끝날에 전세계에 우세할 수 있는 환경을 기반으로 하여 세제적인 종교의 종말시대가 오는 것입니다. 재림적인 사상적 기반을 통해 그런 종말시대가 오면 그때를 중심삼아 가지고 대혼란과 대투쟁적인 환경에서 대이동적인 현상이 벌어져야 된다 이겁니다. 이것이 섭리적인 견지로 본 역사성입니다.

그러면 앞으로 한국에 특별한 섭리가 있다 할진대, 그 섭리의 뜻을 받들 수 있는 종교인들은 어떻게 돼야 할 것이냐? 세계적인 사상을 가져야 되겠다 이거예요. '이 세상은 우리의 조국 땅이다'는 사상을 심어 놓아야 됩니다. 그리고 이 사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이 사상을 치기 전에 먼저 하늘의 백성이 맞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게 천륜입니다. 심판 때가 가깝게 되면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딸들을 치는 거라구요.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는 맞고 빼앗아 나오는 종교입니다.

종말에 있어서 세계성을 띤 이념을 품고 나오는 종교가 있다 할 때는 그 종교를 중심삼아 가지고 국가적인 반박으로부터 세계의 길을 열어 제낀다고 할 수 있는 환경에서 맞아라 이거예요. 맞으면서 낙망하지 않고 거기에서 소망을 노래하고, 거기에서 우리의 복지를 노래하고, 거기에서 우리의 가나안 땅을 추구하여 있는 성심성의를 다하여 죽음의 길도 마다 하지 않고, 천리길도 마다 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그래 가지고 가고 또 가고, 가고 또 가고 죽음의 고비가 있더라도 또 가야 되겠다고 해야 됩니다. 죽을 때에 자기의 후손을 바라보고 '나는 죽을망정 너는 들어가서 이뤄라. 네가 못 이루면 네 후손을 통해 이뤄라.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3대 하나님의 명사를 거쳐왔거늘 이 3대의 뜻을 연결하여, 3대 만에 뜻을 이룬 것을 우리가 전통으로 삼아 가지고 우리도 3대를 거쳐서 이런 뜻을 완결해야 되겠다'라고 해야 됩니다. 3대 수난 과정의 노정이 우리 앞에 있더라도 가야 되겠다는 신앙사상을 가진 종파와 신앙자들이 없는 한, 앞으로 세계적인 대이동이 벌어지고, 목표를 향해 세계를 중심삼아 가지고 섭리의 뜻이 성취되어야 할 때에 남아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대에서 여러분에게 '매를 맞자, 맞자, 맞자' 하는 거예요. 이리하여 '우리가 3년을 계획하여 그 3년을 뜻 앞에 세워 놓고 가자!' 하는 것입니다. 가는 데는 어디를 찾아가느냐? 바로의 궁중을 찾아가자 이겁니다. '바로의 궁중을 찾아가려면 어떻게 찾아가야 될 것이냐? 바로의 백성의 문전에 가 가지고 그들이 말 못 하게끔, 우리 말 앞에 순응할 수 있게끔 하자!' 이래 놓고 가자 이겁니다.

그래서 3년의 방향을 놓고 우리가 그 놀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외적인 데서부터 상부로 올라가는 모든 것은 이런 기준을 중심삼아 가지고…. 3년이 끝나면 그때 가 가지고 우리가 하나의 기준을 중심삼고 당당코 하나님의 뜻과 약속된 기준 앞에 틀림없이 이럴 때가 올 것을 믿고 가면 그 3년 전과 지금은 천양지판일 거예요.

하나님이 한쪽을 치기 전에는 섭리의 뜻이 이루어질 수 없으므로 우리는 먼저 맞자, 먼저 맞자 이거예요 아브라함도, 야곱도 흉년이 들어서 애급을 찾아간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냐? 심정적인 흉년이 들었을 때에 그 흉년든 민족을 구하기 위하여 대환난 가운데, 기근이 막심한 그런 심정세계 위에 구세주로 왔던 것입니다.

오늘날 이 세계적인 사조 앞에, 좌우로 여기에서 한 무대가 되어 그들이 총칼을 들고 나선 시련장으로서 고통을 받은 이 한반도는 여기에서 쓰러질 것이 아닙니다. 이 민족이 세계를 대표해서 먼저 맞았으므로 세계 역사 앞에서 섭리적으로 볼 때, 반드시 어떤 가까운 거리에 있지않나 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횡적인 내적 기준의 완결을 놓고 싸워 나온 3년 기간

그렇기 때문에 종교의 이념을 중심삼아 가지고 이 민족 가운데서 맞자 이거예요. 맞자 이겁니다. 그런데 종교를 책임져 가지고 지도하는 사람도 그를 따르는 사람을 또 때려라 이거예요. 예수님도 예수님의 제자들도 다 그렇다는 거예요. 유대교 교단에 고통을 줘 민족을 구하고 세계를 구하기 위해서는 내몰아야 할 사명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모세도 추위에 시달리고 기아에 쓰러져 가는 이스라엘 민족 60만 대중에게 더욱 채찍을 들고 몰아대야 할 사명이 있었는데, 몰아대지 못하다가 망했다는 거예요.

그것이 당장에는 비애의 길 같으나 지나고 나면 그 터전 위에 제2세는 반드시 하나님 앞에 한 승리의 터전을 마련하게끔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연고로 이런 천리의 운세 앞에 이런 천리의 작전 기간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여러분 앞에 선생님은 무자비하게 내몰아야 할 사명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면 내모는 데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이냐?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어서의 개인적인 섭리시대도 그랬고, 가정적인 섭리시대도 그랬고, 종족적·민족적·세계적인 섭리사가 그러했거늘, 오늘 전체 섭리의 뜻 앞에 내 개체를 세워 가지고 개인적인 신앙의 대표자, 가정적인 신앙의 대표자, 민족적인 신앙의 대표자 혹은 세계적인 신앙의 대표자의 길을 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자신과 신념과 책임을 질 수 있는 나라고 자부하지 않는 한 이 크나큰 역사성을 중심삼은 섭리의 뜻을 받드는 책임자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고통을 느끼는 것은 여러분 자체의 고통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적 고통이요, 혹은 노아, 혹은 모세, 혹은 메시아적인 고통이라는 거예요. 그런 인생을 사는 것이 무엇이냐? '하나님의 심정을 놓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하나님의 심정을 놓고 하나님의 원수를 갚겠다고 맹세하고 결의할 수 있고, 내 생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정을 위임해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들어 보자' 목적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입장에 있으니 그런 입장에 놓지 않고는 사정 일치의 자리를 찾을 수 없어요. (녹음이 잠시 꿉김) 그렇게 해 가지고 나갈 수 있는 횡적인 내적 기준을 완결지어야 할 이 사명적 책임을 놓고 생명을 걸고 달성하기 위해서 싸워 나온 것이 3년 기간이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1960년대는 3가정을 중심삼아 가지고 36가정과 72가정을 세운 것입니다. 36가정은 뭐냐? 종적인 역사적 대표자입니다. 그러면 72가정은 무엇이냐? 가인 아벨형입니다. 복귀역사는, 부모를 찾아 나가는 데 있어서 가인 아벨이 실수했기 때문에, 역사적인 모든 전체를 대표하는 36가정을 대표할 수 있는 가인 아벨을 중심삼은 수를 완결하자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횡적 기준 앞에 있어서나 종적 기준을 대신하여 횡적 기대를 만들어 가지고, 그 가인 아벨 기대를 만들어 가지고 그 가인 아벨 기대 위에 12사도를 중심삼은 12수를 중심삼아 가지고 횡적 기대를 넓혀 세계성을 기반으로 하여 벌어지는 것이 3년 기간의 우리의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이거 설명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려요.

오늘날 우리들이 고통을 받았기 때문에 이 민족도 고통을 받는 것이 아니냐 말이예요. 세계는 이 3년 기간에 대수라장이 벌어졌어요. 이제 금년이 지나면 수습단계로 넘어갑니다. 선생님이 말을 한 것이, 3년 지나가면….

공산당이 그때 다 그랬지만 별수 있나요? 하나님이 있는 세상에서는 별 수 없어요. 별수 없다 이거예요. 한 곳이 자리를 잡고 나오면 한 곳은 무너져야 된다 이거예요. 그거 두고보라구요. 내적인 면은 외적인 면의 상대이기 때문에, 외적인 것이 자리잡을 때는 내적인 것이, 내적인 것이 자리잡을 때는 외적인 것이 그 상대의 가치를 책임하지 못하면 무너지는 거예요. 무너지는 거라구요.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 말한 대로 다 돼 간단 말이예요. 민주주의도 한 블록 전부 다 되어 가고 공산주의도 한 블록 되는 것입니다. 종교도 그렇게 되어 가지고 전부 다 벌어지는 것입니다. 기독교를 위주로 해봐도 그런 형태로 벌어져 가지고 세계는 반드시 그렇게 벌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3년 기간은 여러분들이 모르지만 천적 부모 앞에…. 이제는 선생님이 일대에서 해야 할 일을 다했습니다. 이제는 죽어도 좋다구요. 죽어도 이젠 좋아요. 이제부터는 모험을 많이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선생님이 참 좋았다구요. 3년이 3일 기간이예요. 야곱에 대해 3일 기간이요, 모세에 대해 3일 기간이요, 예수의 3일 기간입니다. 3일 기간을 연장하여 역사적인 천주사적 기준을 중심삼아 가지고 3년 기간을 3수를 통해서 감쪽같이 우리는 이 민족이 모르는 가운데 자라 가지고 넘어섰다는 것입니다.

아벨에게는 가인을 이끌어 가야 하는 책임이 있어

이제는 우리에게 누가 뭐라고 못 합니다. 하나님이 보고 있어요. 하나님이 이젠 가만 안 두는 거예요. 선생님이 이제는 안심해요. 이제는 어디 가다가 죽어도 걱정 안 해요. 선생님이 모험을 참 좋아합니다.

이러한 섭리의 역사를 해 나가는데, 여러분 생각해 봐요. 하나님이 섭리하신 방향과 역사의 방향이 지금까지 틀어졌었는데 이것을 누가 조정해 줄 것이냐? 누가 조치를 해줄 것이냐? 이것을 조정해야 할 사람은 종교인들이예요, 종교인들. 사상가도 아닙니다. 주의를 주장하는 어떠한 망상가들도 아닙니다. 이것을 조정해 주고 결정해 줄 것은 종교예요, 종교.

그렇기 때문에 로마 교황이 말이지요, 이번에 저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가운데서 중간 역할을 많이 했는데 그게 일리가 있다는 거예요. 해야 된다 말입니다. 앞으로 우리 신도들은 그것을 해야 됩니다. 오늘날의 우리들은 종파적인 관념에 사로잡힌 신앙자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계적인 신앙자들이예요. 온 세계의 누구한테 묻더라도 도의 세계에서 답변할 것이 없어요. 답변을 못 할 거라구요. 수십 년 동안 도를 닦은 사람이라도 만나 보면 그래요. 우리 주먹 안에 다 들어옵니다.

또, 우리는 역사의 방향을 알아요. 그건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래서 오늘날 주의나 사상을 필요로 할 수 있는 세계적인 지도자, 우주적인 지도자가 있다면 그런 지도자를 필요로 할 때 그들이 어떤 사람들이냐? 하나님이 아들딸이 되어야 합니다. 이래야만 그렇게 된다 이거예요. 그러면 그러한 자리는 어떤 자리냐 이거예요. 언제나 이러한 목표를 향해서 나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길을 가는 데 있어서 이 현실이 문제된다면 어떻게 하겠어요? 여러분들은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과거에는 언제나 내가 책임을 못 하고 행동을 못 했지만 내 생각에는 나는 이러이러한 사람입니다. 아버지, 나는 이런 때에 책임 못 한 사람입니다' 하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못해도 어느때까지는 이것을 잊어서는 안 돼요. 잊어서는 안 된다구요. 무슨 공석에 나가더라도 '나는 이러한 사람입니다' 하고 자기를 소개해야 돼요. 그렇게 돼 있다 이겁니다.

여기에 있어서 우리 교회를 보면 가인과 아벨로 쭉 갈라져 있습니다. 그런데 아벨은 아벨로서 가인을 살려주기 위한 책임이 있고, 가인을 이끌어 나가기 위한 책임이 있습니다. 둘이 합해 가지고 하나의 부모를 모시기 위한 책임을 다해야 됩니다. 그렇게 나가야 되는 거라구요.

여러분이 현실 문제에 있어서 어떻게 해야 될 것이냐? 나하고 똑같아야 됩니다. 지금까지 선생님이 그랬습니다. 선생님은 영계의 상속자가 되기 위해서 개인적인 핍박으로부터 쭉 하늘땅의 핍박을 받아 온 거예요. 이래가지고 반대 간판이 붙은 사람이라는 거예요. 팔자에도 그렇게 타고난 모양이지요? 영계에서도 그랬고. 영계에 들어가서 수많은 담판 싸움을 해 가지고 이긴 것입니다.

상대적 가치를 지녔으면 반드시 주체적 내용과 일치해야

이제 우리 이념이 세계에 한번 문제 거리가 될 거예요. 공산주의와는 오래 안 가서 대결한다 말이예요. 틀림없이 그렇게 되게 돼 있어요. 지금까지 선생님 이 과거에는 어느 개인을 대해 가지고 말할 수 있는 때도 없었어요. 얼마나 발전했는지 모르겠다 이겁니다. 그때에는 뭐 신앙생활한다고 얘기를 못 했다 말이예요.

그러므로 하나님만이 알아주는 그런 입장이었어요. 개인적인 고충의 시대로부터 가정적인 고충의 시대를 거쳐오면서 얼마나 핍박을 당했느냐 말이예요. 원래 여기에 온 사람들이 어디 편이 되어서 왔어요? 전부 다 그런 유의한 종자들이예요. 이래 가지고 그 시대를 쭉 지나오다 보니까 이제 40고개입니다.

선생님이 그것을 두고 볼 때, 하나님을 두고 볼 때도 그렇습니다. 과거도 후회와 탄식이었고 현실도 후회와 탄식이다 이거예요. 그렇지만 탄식 해 나온 예수 앞에 과거와 현실은 그랬을망정 미래에는…. 미래를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 누구냐? 그렇기 때문에 더 큰 사람이 필요합니다. 세계가 크게 벌어져 나가기 때문에 더 클 수 있는 사람, 염려할 사람이 필요하다 이거예요

지금까지 선생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까지,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런 거예요. 과거에는 '몇대에는 이런 상황의 40고개를 넘고, 서 있는 고개를 넘어가 가지고 하나님에게 다 프로를 맞춰 놓고 그다음에는 민족을 기반으로 해서 싸워야 되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다음에는 단위가 종족에 대한 단위가 아니에요. 한국이면 한국의 단위지요. 단위가 달라진다 말이예요. 이렇게 해 가지고 이제부터 현실적인 근심과 걱정을 중심삼고 역사해 나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그런 관념이 없잖아요. 여러분들이 일을 해도 과거에는 우리 교회를 위해서 일한다고 했지요? '아, 나는 교회를 위해서, 교회의 무슨 일을 위해 봉사한다' 했는데 그게 아니라구요. 이제는 그게 아니다 이거예요. 이 나라를 위하여 봉사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삼천리반도를 찾아오기 위하여 얼마나 수고했던고? 삼천만 민족이 이렇게 비애의 노정을 거치면서 오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 민족이 오늘날 이렇게 도탄 중에 서 있습니다' 라고 하면서 나라를 사랑해야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거와 마찬가지로 나라를 사랑하고, 개인을 사랑하는 거와 마찬가지로 나라를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을 사랑하는 거와 마찬가지로 나라를 사랑하고, 우리의 식구를 사랑하는 거와 같이 이 나라 이 백성을 사랑하느냐 이거예요. 이렇게 나오면 한 단계 넘어간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설명 안 해주려고 합니다. 이제부터는….

죽든 살든 우리가 우리 교회를 자유의 간판 아래서, 거친 환경에서 말씀을 외쳤으니 얼마나 우리를 죽이려고 야단했어요? 이제 그때가 되어 온다 말이예요. 이 불쌍한 민족을 이끌고 세계무대 앞에 이 민족을 자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운동이 이제부터 남아진 운동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도 거기에 대해서 지금 준비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것을 준비하기 위해서 이 패들을 먼저 고생시켜야 되겠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가정을 끌어내라 이거예요, 가정을. 가정을 끌어내라 이겁니다. 축복해 줬는데도 나하고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되어서는 절대 안 된다는 거예요. 상대적인 가치를 지녔으면 반드시 주체적인 내용과 일치해야 됩니다. 그 결과는 난 몰라요. 결과는 설명 안 해준다 말이예요.

'내 가정은 역사상의 어떠한 가정이 이동한 것보다 더 이동해야 되겠다' 이거예요. 지금까지 살던 애급 땅, 지금까지 살던 지긋지긋하고 한 많은 그 땅에서 자유의 천지를 향해, 가나안 7족을 멸하고 하나님에게서 축복받은 새로운 이스라엘의 천지를 내 땅과 같이 취하기 위해 행군 명령이 떨어지게 될 때 가는 것이 대이동이다 이겁니다.

이 나라 이 민족을 중심삼고 본을 보여야 할 우리들

이 이동 운동을 세계적인 운동으로 제시해야 됩니다. '아무리 일등 미국이라도 미국은 나는 싫다. 아무리 초라한 오막살이 집이 있는 한국이라도 한국 가겠다'고 해야 됩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집이 있었어요? 판자집도 없었어요. 집이 있었느냐 말이예요. 원수들이 불태우고 남은 거기에 들어가서, 불타고 남은 그런 환경을 수습해서 살아야 된단 말이예요. 성전 있었어요?

바알신을 모시던 신자들을 수습해야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우리에게는 집이 없다는 말이예요, 집이 없어요. 우리 입장과 딱 마찬가지에요. 우리가 크나큰 섭리와 이념을 중심삼고 세계적인 가나안 복지를 향해 깃발을 들고 나선 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7족을 대항하여 나선 것과 딱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남루한 거지와 마찬가지입니다. 거지와 마찬가지예요. 먹을 것이 없어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었으니 얼마나 처량하냐 이거예요.

요단강을 건너가려면 자기의 노력을 투입해야 됩니다. 세계적인 가나안 7족을 향하여 외치며 민족적인 정기를 중심삼아 가지고 '이렇게 사는 것은 국가를 살리기 위한 것이다. 또, 내가 살아 나가는 데는 나라가 살아 나가는 것이요, 이 세계와 하나님의 섭리가 살아 나가는 것이다. 역사적인 우리의 선조들이 부활되어 나가는 것이다' 이런 신념을 갖고 나가야 돼요.

'내가 죽어서는 안 된다. 죽지 않고 살아 나가야 된다. 그래야 역사를 살리고 이 시대를 살리고 이 국가를 살리고 이 민족을 살린다'라는 신념 밑에서 세계는 우리의 손아귀에서 돌아간다는 자신을 갖고, 철석같은 기반을 갖고 나가야 됩니다. 그래야 여러분들이 이 삼천리 반도를 주관하여 세계를 움직이는 주인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지금까지 말한 거와 같이 앞으로 세계적 가나안 운동을 제시할 수 있는 때에 있어서는 대민족이동이 있어야 됩니다. 과거에 민족적인 대이동이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교파와 종파를 초월하고 민족 전통을 초월해 대이동 운동이 벌어져 한 곳으로 수습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의 종대 앞에 모든 순은 하나의 운세의 방향과 더불어 목표를 같이할 수 있는 기준에 서야 됩니다. 그렇게 될 때, 이 세계는 새로운 역사의 방향을 수습하여 하나의 목표를 세우고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 깨쳐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관점에서 넘어가야 할, 이러한 전환 기점에서 이것을 올바로 돌려야 할 우리의 책임이 얼마나 중요하냐 이거예요. 먹으나 자나깨나 편안해 가지고는 안 되겠다는 것을 알아야 돼요. 선생님도 그래요. 편안해 가지고는 안 됩니다. 바다에 나가서 고생을 하든가 무슨 고생을 하든가 해야 마음이…. 그것으로 때워 나가는 거예요.

섭리의 뜻이 그래요, 섭리의 뜻이. 그러니만큼 우리들이 이제부터는 이 나라 이 민족을 중심삼아 가지고 본을 보여야 되겠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그걸 수습해 가지고 그런 방향을 갖추지 않으면 이 민족을 살릴 수 없다고 내가 자신하고 있는 거예요. 민족이 그런 방향을 가지고 안 되고, 세계가 그런 방향을 가지고는 안 되겠다'라고 해야 됩니다.

이렇게 섭리적인 방향이 비로소 우리의 생활을 통하여 통일성으로 나타나 가지고 개인적인 역사적인 방향을 취해서 나가게 될 때, 역사는 우리와 더불어 인연됩니다. 그리고 역사적인 기반이 우리가 되면 그 역사는 우리로 말미암은 역사로서 상속받아 이 시대적인 가치를 영원한 시대적 가치의 기반으로 연결시키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소원하던 소망의 목표와 더불어 일치의 관점을 만들어 놓았다는, 자신을 중심삼아 가지고 결정지었다는 신념을 가진 자격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아들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섭리가 추구하는 목적

여러분은 지금까지 마음대로 살았어요. 마음대로 살았다 말입니다. 먹고 싶으면 먹고, 자고 싶으면 자고, 가고 싶으면 가고, 오고 싶으면 오고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그러면서 방향성을 따라 살았느냐? 방향성도 없었습니다. 언제든지 마음대로 치리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구요. 몇 마디로 무엇이든 속여 가지고, 뭐 소근소근해서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고였습니다.

오늘날 여러분들을 천지를 주고도 못 움직여야 합니다. 천지를 주고도 못 움직여야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천하를 주고도 못 움직여야 해요. 일편단심으로 누가? 천지와 하늘을 대신하고, 천정을 위주한 천적인 사정과 소원을 중심삼은 그 관념, 우리의 가치적인 내용을 중심삼고 볼 때 그걸 장악하지 못할 때는 자기가 어떻게 되느냐? 내 방향을 잘 잡아야 돼요. 태풍이 불어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 자리에서 살다 죽게 돼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인 전환시기에 처한 시기를 잘 따라가야 됩니다. 이제부터 선생님이 재차 여러분들에게 강조하는 것은 단결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민족적인 단결을 목표로 하여 세계적인 기반을 움직여 나갈 수 있는 운동을 전개하는 거예요. 이 민족이 안 될 때는 외국 사람들을 동원해서 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민족이 어디 끌려 오나 안 오나 보자 이겁니다. 어디 움직이는 녀석들이 안 움직이나 두고 보자 이거예요. 이래 가지고 전부 다 세계성을 띠고 움직여 나가면 그것이 한 고비 절반쯤 넘어가서 완전히 자리잡는 거라구요. 그다음부터는 완전히 자리잡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야만 여러분이 만민을 수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찰나에 있어서는 '우리가 뜻을 알고 선봉에 서서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개인적으로 보여 주고, 가정적으로 보여 주고, 민족적으로 보여 주고, 국가적으로 보여 주고, 종교적으로 보여 줘야 합니다. 그래 가지고 그와 같은 사상관념과 이념적인 통일성을 갖춰 가지고 하나의 방향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비로소 자동적인 환경에서 움이 터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그때가 멀지 않다고 보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이제 한 4년 동안 여러분들을 몰아다 앞에 세워 놓고 안 가면 채찍으로 갈기고 발길로 들이차서라도 가야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 60만 대중을 광야에서 가만히 두지 않고, 자기가 쓰러지면서라도 모가지를 자꾸자꾸 잘라서 한 10만쯤 잘라 버리더라도 가나안 땅을 향해 갔다면 어떻게 되었겠어요? 그럼 50만은 죽지 않았다구요.

그렇다고 선생님이 그런 일을 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이상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도 어디든 언제든지 심판할 거라구요. 이렇게 여러분들을 무한히 사랑하고 여러분들을 무한히 아끼느니만큼, 그 가치를 역사와 시대를 넘어서 가지고 영원한 가치로서 남겨 주려니 그런 내용의 기반 위에, 그런 실적의 조건이라도 만들어야 할 책임감을 느끼기 때문에 이렇게 강한 말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 입장에 선 것을 여러분들이 이해해야 됩니다. 알겠지요? 「예」

그럼으로 말미암아 여러분들은 지금까지 역사적인 섭리의 방향을 두고 찾아 나온 하나님 앞에 심정의 자리에 비로소 동참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정이 통할 수 있는 생활적인 환경의 발판 위에 소원의 일치점을 품고 나왔다는 기준이 내 생애의 종말시대에 찾아져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 사람에게 비로소 과거를 대표한 나요, 현실을 대표한 나요, 미래를 대표한 나라고 과거를 들어 칭찬하고, 현재를 들어 칭찬하고, 미래를 들어 칭찬하게 됩니다. 그럴 때에 비로소 나는 하나님의 섭리의 노정과 섭리의 방향 앞에 내 자신이 과거에 있었던 자와 마찬가지요, 내 자신이 현실에 있는 자와 마찬가지요, 내 자신이 미래에 있을 수 있는 자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자라고 해 가지고 비로소 방향이 일치될 수 있는 기준 앞에 축복을 해주어서 천주의 모든 것을 상속하겠다는 것이 섭리의 방향의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무슨 말인지? 「예」 알겠어요? 「예」 알겠지요? 「예」

그러면 그 자리까지 나가는 것이 편안해요, 어때요? 여러분이 편안해요, 어때요? 우리들은 고생해야 되겠어요. 아무래도 죽을 거 뭐, 여러분이 한 번 죽지, 두 번 죽나요? 예수도 고생 하나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겠어요? 알겠어요? 「예」

때를 중심삼은 승리자가 되어야

오늘 여기에 계시는 아주머니들, 가정에 돌아가 가지고 남편이 생활능력이 없다고 하여 불평하지 말라는 거예요. 지금 우리 일본 식구들은 다 먹을 것이 없어도, 쌀이 떨어졌어도 걱정 안 하거든요. 내가 그걸 볼 때 '대단하구나' 합니다. 나도 그래요, 나도 그렇다 말이예요. 쌀이 떨어져도 걱정 안 한다 말입니다. 여러분이나 나나 마찬가지예요. 종자가 다 그렇게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도 그렇게 나오는 거예요. 전부 다 굶어 죽는 법이 없어요. 보라구요, 멧돼지가 산에서 굶어 죽어요? 물고기가 바다에서 굶어 죽어요? 나는 개미 새끼들이 암만 흉년들어도 굶어 죽었다는 소리를 못 들었습니다. 사람들이 굶어 죽지요. 왜 굶어 죽어요? 못나서 굶어 죽어요.

선생님은 멧돼지 사냥도 다녀 보고 바다에 고기를 잡으러도 다녀 봤습니다. 선생님은 그런 거라구요. 먹을 것이 없으면 공기총이라도 메고, 그렇지 않으면 올가미를 만들어 가지고 산에 가자 이거예요. 왜 굶어 죽어요, 왜 굶어 죽느냐구요? 먹을 것이 수두룩한데. 얼마나 많아요? 바다에 가면 얼마나 고기가 많아요? 그렇잖아요? 절대 죽는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또 일주일씩 대개 다 금식했지요? 「예」 다 일주일 이상 금식했어요. 우리들은 30일이나 40일이라도 금식한다구요. 일본에 있는 식구들은 형제끼리 무난히 40일 금식을 돌파해 가지고 아주 뭐 세계적인 센세이션을 일으켜 가지고 문제가 된 적이 있다구요. 앞으로 이 민족이 굶어 죽는 사태가 벌어지게 되면 우리 신도들이 전부 모여 가지고 수천 명이 앉아서 한 20일, 한 30일, 한 40일씩 단식투쟁을 하는 거예요. 그래 가지고 한 사람도 죽지 않게 되어 우리들은 굶어 죽지 않는다는 선전을 하게 되면 백 퍼센트 효과가 나지요. (웃음)

그런데 죽기는 왜 죽어요? 안 죽어요. 먹을 것이 얼마나 많다구요. 먹을 것이 얼마나 많아요? 공기도 많고 물도 많다구요. 사람의 몸뚱이는 3분의 2가 물인데요 뭐 그거 뭐 풀도…. 흙에서 한과정을 거쳐 가지고 쌀이 된 거예요. 풀도 쌀 대신 먹을 수 있는 것입니다. 절대 걱정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성경에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고 걱정하라고 했어요? 하라고 했어요? 그 성경이 이루어져야지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먹는 것, 자는 것과는 관계 없어요. 선생님은 그래요. 먹는 것보다도 더 급하다구요. 밥이야 먹겠으면 먹고, 밥 한 그릇 먹으라고 한 것도 귀찮다 이 말이예요. 요전에도 집에서 무슨 반찬해 주려는데 나 그거 귀찮아요. 꽁보리밥도 좋다는 것입니다. (녹음이 끊김) *

<말씀 요지> 우주는 완전무결한 이념, 즉 선의 내용을 갖고 있습니다. 선은 창조주의 것입니다. 천지심(天地心)을 대할 역사심(歷史心)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의 세계는 몇천년 전과 비교해 보면 꿈같은 세계입니다. 영계는 심정이 표현화된 실체적 세계입니다. 마음이 기쁘려면 몸이 마음의 상대로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은 심정, 사정, 소원을 일치시키기 위해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러한 하나님의 심정, 사정, 소원을 모르고 타락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인간을 세워서 역사의 방향을 잡아 나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역사적인 신앙의 민족을 찾아오셨습니다.

세계적인 신앙을 중심한 주의를 세우기 위하여 오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주의의 입장에서 본 신앙이란 세계의 차원을 넘어서 할 수 있는 말입니다. 민족의 차원에서는 말할 수 없는 명사인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는 다시 와야 합니다. 천지신앙관이란 하나님의 심정, 사정, 소원과 일치된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심정과 사정과 소원을 아는 사람이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정과 사정과 소원을 중심한 이념과 신앙관이 나오지 않으면 안 됩니다. 종교를 책임진 사람은 어떠한 사상 앞에도 좌우될 수 없는 것입니다.

창조는 핵심을 먼저 만들어 놓고 합니다. 외적인 것은 내적인 것에 맞추어 들어가야 합니다.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이 합해져야 됩니다.

제물도 외적 제물과 내적 제물로 분류됩니다. 가인은 외적이고 아벨은 내적입니다. 노아는 외적인 40일 심판을 거친 후에 내적인 위치가 결정되었습니다. 야곱도 외적인 21년노정을 거친 후에 내적인 위치가 결정되었습니다. 섭리는 작은 것에서부터 큰 것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그러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애급에서 내몰 때에 하나님은 애급을 강퍅하게 하셨습니다. 새로운 섭리를 하실 때마다 하나님은 쳐서 복귀시키십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섭리를 위하여 미리 맞는 것이 상책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을 몰아내지 못했기에 사망한 것입니다. 그동안의 3년 기간은 모세가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으면서 바로 왕 앞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키는 기준을 세우는 것과 같은 기간입니다.

72가정은 가인 아벨형입니다. 횡적인 것입니다.

한 곳이 자리잡으면 한 곳은 무너집니다. 그러므로 공산세계는 무너져 나갈 것입니다.

과거의 선조들도 책임을 못했지만 여러분 또한 책임을 못한 사람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사는 것은 바로 민족, 국가, 역사가 사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말씀 요지>

주권은 무너지더라도 후대를 지배할 수 있는 문화를 남기는 민족이 되어야 합니다.

역사는 시대를 심판하고 시대는 역사를 심판합니다. 6천년의 눈물의 역사가 실체로 나타나야 합니다.

선생님은 말씀하기 전에 먼저 실천했습니다. 과거 어느 시대의 어떤 충신 열사보다 낫다고 장담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있다는 말입니다. 개인적인 교과서가 필요합니다. ‘누구든 나와 같아야 한다.’고 할 수 있는 한 사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유대교를 수습하고 이스라엘 민족을 수습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은 유대교가 수습되면 수습된 유대교에 굴복해야 했습니다. 이와 같이 세계는 종교의 이념에 굴복해야 합니다.

제1차 작전은 승리하였습니다. 우리 통일교회에서 한 일은 아무도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모세오경에 숨어 있는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한을 풀어 드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친척이 되고 동생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먼저 형제를 불렀습니다. 예수님은 식구와 가정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종족과 주권을 갖지 못했습니다.

124쌍 성혼식 후 헌공식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하여 이루지 못한 개인적, 가정적, 종족적, 민족적인 기반을 이루기 위하여 부활실체로 오셔서 일해야 될 분이 재림주입니다. 그 일을 3년간 하였습니다. 이 3년은 자녀를 찾는 기간(종적 기간)에 해당됩니다. 이 기간은 예수님이 유대교와 유대민족을 수습해야 했듯이 부활실체인 한 분을 세워 놓고 그와 같은 일을 하는 기간입니다.

과거의 역사적인 인물들, 즉 노아․아브라함․모세 등은 미욱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여러분은 3대를 굴복시켜야 하나님의 아들딸이 됩니다. 하나님도 아담, 예수, 재림주 앞에 조상의 입장에 서야 합니다. 노아는 비둘기를 3차례 내보낸 다음에 방주에서 내려왔습니다.

선생님은 아담, 예수, 재림주 3대에 걸쳐 사무친 원한을 총탕감해야 합니다. 이 3년 기간에 36가정, 72가정, 124가정을 축복해 주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3차에 걸친 세계적인 기준을 세워야 했습니다.

인간은 믿음, 심정, 실체를 잃어버리고 타락했습니다.

선생님은 하나님에게 가장 충성하기 위하여, 가장 믿지 못할 말을 하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찾았습니다. ‘나는 여호와의 부인이다.’라고 하는 사람, ‘내가 주님이다.’라고 하는 사람 등을 찾아 시험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역사를 대신한 신앙을 가지고 있고, 심정을 가지고 있고, 실체가 되었는가 하는 것을 시험하였습니다.

믿음을 결정한 후에 심정부활, 실체부활을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종적으로 찾아온 것을 횡적으로 세운 후에 축복했습니다.

이 기준 위에 상을 주었습니다. 또 이렇게 횡적인 기준이 세워진 후에 성지 선별을 했고, 이것을 바치는 식이 헌공식입니다. 이 헌공식을 함으로써 종적인 것이 횡적으로 전개됐고, 평면적인 기준이 생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8월부터 세계는 다른 각도로 나가고 있고, 공산세계에도 싸움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산 자료를 만들기 위하여 고생을 해야 합니다. 앞으로 4년은 승리적 주관자가 되자는 표어를 중심으로 활동해야 합니다. 잘 참고 견디어 왔으니 이제 공세를 취합시다.

이제 만물을 복귀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을 산 교본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적인 사명시대는 지나고, 민족을 걸고 하는 싸움이 시작될 것입니다. 개인을 중심한 가정의 시대를 지나 가정을 중심한 민족의 시대가 올 것이니 하늘을 중심한 민족을 창건해야 합니다.

통일신도들이 가는 길 외에는 이 민족이 갈 길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매일 1원씩 저금하는 운동을 실시해야 합니다.

종족이 안식하려면 국가가 안식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종족적인 고생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4년노정의 마지막 해는 뜻을 위하여 출발한 지 21년째 되는 해입니다(평양 전도를 시작한 26세부터 계산하여).

지금 통일교회는 민족적인 기준을 세워 나아가고 있기 때문에 개인을 붙들어 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개인이 힘을 잃으면 개인이 다시 힘을 얻어야 합니다.

3대를 모실 줄 알아야 하고 3대를 거느릴 줄 알아야 합니다. 자기가 섬겨야 할 분을 놓고 횡적으로 보고해서는 안 됩니다. 위로 3대까지는 자유로이 보고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 요지>

하나님의 뜻을 지키고, 남겨 줄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성지를 터로 만물을 바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축복가정은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영원한 창조이념을 실현한 기반 위에 하나님의 것을 세워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하여서 선의 이상세계, 즉 심정의 동산을 노래하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하나님이 바라시는 거룩한 땅의 주인으로서 심정의 세계를 바라볼 수 있습니까!

성지를 조건으로 삼천리를 사랑해야 합니다. 이 땅에서 살고 싶어하고, 이 땅에서 땀을 흘리고 싶어해야 합니다. 이 땅에 피어린 역사의 전통이 있는 것을 알고, 아버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축복을 받는다는 것은 엄청난 사실입니다. 축복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내가 정하면 천주도 정하다.’는 마음으로 주인으로서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조건이 구비되어 하늘이 우리를 중심삼고 생활이념을 세우실 수 있는 것입니다.

성지(聖地)와 성물(聖物)을 지킬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들을 지키는 데에 총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여러분은 축복받은 가정을 귀중히 여기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축복가정은 여러분이 지켜야 합니다. 거룩하게 살다 죽을 수 있는 거룩한 땅을 찾아야 합니다. 성지(聖地)와 성민(聖民)을 빨리 복귀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가정을 구원하기 위한 구주가 되어야 합니다. 선생님이 국가적인 메시아의 입장에 서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종족적인 메시아의 사명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새로운 이스라엘의 조상이 되어야 합니다.

앞으로 4년간은 개인적인 만물복귀의 기간입니다. 하나님은 성전을 짓기를 제일 희망하십니다.

<말씀 요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여 당선된 자는 제2의 승리자로서 세계적인 무대에서 세계 인류 앞에 기여할 수 있는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야곱은 하란에서의 제1차 노정에서 승리한 후 제2차 노정에서 에서에게 승리해야 했던 것입니다.

모세에게는 바로 궁중에서 바로에게서 이스라엘 민족을 구출해 내는 것이 제1차 노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제1차 노정에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홍해를 건넌 후 제2차 노정에서도 승리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로 제1차적인 노정은 승리로 끝났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이제 제2차적인 승리의 노정을 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선생님이 출옥한 지 7년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7년을 넘어 ‘새로운 길을 가자.’ 할 때 7년 전 사람들이 이런 입장에 서지 못한 것이 서럽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이 일을 해야겠습니다. 나이 많은 사람들은 살림살이에 빠져 있습니다.

죽어도 가겠다는 수많은 사람들이 선생님의 42년 생애 동안에 왔다 갔습니다. 하나님이 세계적인 축복을 주려고 하시는데, 가정에서 쓰러지면 그 후손은 그 이상의 길을 가지 못합니다. 축복가정에 대해서도 그렇게 큰 기대를 갖지 않습니다.

통일교인들은 자기네 교회를 다니면 잘살게 해 준다는 말에 속지 않길 바랍니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전부 다 도둑의 심보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한 집이 망했다가 재기하는 데도 5년은 걸려야 어느 정도 기준이 잡히는데 한 나라를, 그것도 한국같이 엉망진창인 나라, 형편없는 나라, 손댈 수 없을 정도로 기울어진 나라를 몇 개월 동안에 살린다구요? 절대로 안 됩니다.

민족구원과 그 기간

한 가정이 기울어져도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5년 이상의 기간이 필요한데, 하물며 기울어진 한 국가를 바로잡는 데 10년 이상의 세월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더욱이나 우리는 나라를 구하고 세계를 구하고 천주를 구한다는 어마어마한 이념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다 할진대 우리들이 기울어진 이 우주의 살림살이를 다시 일으키고, 이 세계를 본연의 세계로 돌이키는 데 3년 가지고 될 것 같습니까? 만일 3년 가지고 된다고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진짜 도둑놈의 심보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절대로 안 됩니다.

그럼 7년 가지고 될 것이냐? 7년 가지고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도 이것을 바로잡기 위하여 지금까지 6천년 동안 수많은 희생을 치르시며 수고하셨지만 아직까지 바로잡지 못하셨는데, 미약한 우리 인간들이 7년 동안에 그것을 바로잡고 본연의 이상 기준을 세울 수 있겠습니까?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만두고 이 대한민국을 놓고 볼 때, 대한민국을 세계의 어느 선진국에 지지 않는, 모든 면에서 선두가 될 수 있는 국가로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 삼천만 민중이 단결해도 적어도 40년은 걸려야 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큰 빌딩 하나를 짓는 데도 얼마나 오랜 세월이 걸립니까? 그러니 40년은 걸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차를 타고 오면서 이집트의 피라미드에 관한 얘기를 하였습니다. 피라미드 알지요? 그 높이가 약 150미터인데 여기에는 수십 명이 달라붙어도 옮길 수 없는 큰 돌이 약 200만 개가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만들기 위하여 동원된 인원이 약 10만 명이며, 이 인원이 40년을 일해 피라미드 하나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이라는 한 나라를 완전한 자리에 세우기 위해서는, 청사에 길이길이 빛날 수 있고 역사에 영원히 남을 수 있는 하나의 주권국가로 세우기 위해서는 얼마나 걸려야 될 것이냐? 40년 가지고 될 것 같습니까? 40년 이상 열심히 해야 그렇게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 나라를 지도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떠한 사람이냐? 삼천만 민족을 대하여 몽둥이를 들고 ‘너희들 고생하라. 못 먹고, 못 살고, 죽음의 자리에서도 참고 나가라.’고 할 때에 모두가 ‘예.’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지도자가 나와야 이 민족을 구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선생님은 알고 있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생각이 있는 사람은 알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를 지도하는 선생님의 목적은 세상 사람들의 목적과는 다릅니다. 우리는 이미 그 목적지를 향하여 행군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은 그 행군을 지도하는 입장에서 서 있기 때문에 그 노정에는 곡절이 많습니다. 비바람이 휘몰아치면 선두에 선 사람이 먼저 맞게 됩니다. 모든 곡절과 난관은 반드시 그를 거쳐서 해결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칙입니다. 그러니 통일교회를 따라가는 여러분보다 지도하는 선생님의 입장이 더 어려운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가 나선 목적은 무엇이냐? 통일교회라는 간판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 간판을 하루아침에 떼어버릴 때가 올지 모릅니다. 우리가 목적하는 것은 삼천리반도에, 세계만방에 빛을 비춰 줄 수 있는 하나의 주권국가를 세우고 이 민족을 선한 국민, 역사적인 민족으로 만들고 삼천리강토를 역사적인 삼천리강토로 만들자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통일교인들은 어떻게 해야 되느냐? 선두에 서서 책임을 지는 입장에 서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아까 말한 바와 같이 선두에 선 사람은 지도자의 역할을 하는 사람인데, 지도자는 모든 난관을 먼저 당해야 합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이 민족의 모든 어려운 일과 풍파를 먼저 당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그 민족 앞에 지도자적인 사명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천리입니다.

우리가 고생해 온 목적

여러분들을 고생시키는 것이 선생님의 목적이 아닙니다. 이런 고생길을 걷게 해서 무엇을 할 것이냐? 남들은 편안한 자리에서 안일하게 살아가는 이때에 편안한 보금자리를 박차고 처참하고 외롭고 슬프고 폭풍우가 몰아치는 길을 찾아 나서게 한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 우리가 선각자의 길, 지도자의 길을 가서 민족 전체가 그 용기와 정신을 본받아 그렇게 가게 하자는 데 있습니다. 누군가 그렇게 해야 합니다. 처음엔 한 사람이, 그 다음엔 두 사람이, 그 다음엔 세 사람이 이렇게 해서 삼천만 전체가 그런 방향으로 가도록 해야 되겠습니다. 그런 결심을 부모로부터 어린 자식까지 갖도록 해야 합니다. 어머니가 아기를 품고 젖을 먹이면서도 자기의 어려움을 잊고 이 민족의 승리의 한때를 바라면서 기도할 수 있게까지 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런 엄청난 사명을 짊어지고 나선 것입니다.

3년 기간을 지나 지금까지 나왔지만 이 3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을 지도하는 선생님도 역시 3년으로써 끝내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 선두에 서서 더 달려야 되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자전거를 타고 달렸다면 이제는 최고의 문명의 이기를 이용하여 선두에 서서 달릴 결의를 하고 있습니다. 어떠한 원수가 앞을 막더라도 이것을 무찌르고 가겠다는 결의를 하고 있습니다.

세계를 하나님 품으로 복귀해 드리고, 악한 세계를 선한 세계로 돌이키기 위해서는 기필코 투쟁의 역사를 거쳐야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붙들고 ‘소원이 무어냐?’고 물어보면 대부분이 ‘나는 어려운 집에서 태어났으니 돈이 많았으면 좋겠다. 나는 권세가 없는 집안에서 태어났으니 권세가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가난한 집에 태어나 남과 같이 공부를 못했으니 공부를 했으면 좋겠다.’ 하고 대답할 것입니다.

여러분을 지금 몇 달 만에 처음 만났는데 여러분들 중에는 선생님께서 뭐 먹을 거나 한 짐 지어다 주지 않나 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배가 고파서 말씀보다도 빵이나 줬으며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런 사람들에겐 미안하지만 선생님은 빵보따리를 가지고 오지 않았습니다. 빵을 주기 위해서 오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을 졸리게 하기 위해서 온 것도 아닙니다.

그럼 뭘 주기 위해서 왔느냐? 선생님에게도 여기에 온 목적이 있듯이 여러분에게도 여기에 온 목적이 있습니다. 이 두 목적이 합해 가지고 무엇을 해야 할 것이냐? 반드시 해야 할 사명과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요, 안 그래요? 선생님이나 여러분은 목적이 있어서 여기에 왔습니다. 알겠어요?

지금 이 자리에는 나 하나를 놓고 수백 명이 모였는데, 나와 여러분은 일종의 싸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 나서면 선생님은 여러분을 무시해 버립니다. 그런 자리에서도 여러분이 ‘옳습니다.’ 하고 인정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끌어올리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끌어올리지 못합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여러분을 보다 나아지게 만들려면 보태 주어야 되는데 보태 주는 데는 어떻게 보태 주어야 되느냐? 전부 다 뿌리를 뽑고 가지를 자르고 난 다음에 새로운 무엇을 보태 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자면 여러분의 인격을 무시해야 하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여러분들을 보다 더 나을 수 있게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그런 책임이 선생님에게 있는 것입니다. ‘처음 보는 선생님인데 오자마자 저렇게 심한 말씀만 하실까? 말씀하실 것이 얼마든지 있을 텐데 우리 인격을 무시하는 말씀만 하시는구나.’ 하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아까 한 말이 거짓말인가. 그렇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 정신 똑바로 차리고 한 시간 동안 잘 들어 주길 바랍니다. 내가 보따리 싸 가지고 가든지 여러분들이 고개를 숙이든지 해야 되겠습니다.

사람들이 추구해 온 것과 현재 필요한 것

자 이제 되돌아가서 아까 얘기를 해야 되겠습니다. 저 처녀보고 무엇이 되고 싶으냐고 물어봤었지요? 요즘 젊은 사람을 붙들고 무엇을 하고 싶으냐고 물으면 한국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되어 보고 싶다고 대답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다음엔 될 수 있다면 내가 한국을 마음대로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즉 대통령이 되어 이 나라의 권세를 한 손아귀에 넣고 삼천만 민족을 지도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그 다음엔 무엇을 원하느냐 하면, 세계의 그 누구도 따라오지 못하고 온 천지가 우러러볼 수 있는 무불능통한 학자가 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세 가지를 목적으로 합니다. 인간의 욕망은 돈과 권세와 학식입니다. 종합해 보면 그렇습니다. 그래요, 안 그래요?

그러면 이 나라와 이 민족을 구하는 데 있어서 제일 필요하고 긴급한 것이 무엇이냐고 할 때 사람들은 돈이라고 말합니다. 경제 기반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엔 권력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아! 주권을 쥐어야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엔 문화 수준을 높여야 한다고 합니다. 민도를 높여야 한다고 합니다. 다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돈 가지고 그 나라를 영원히 구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권세를 가지고 그 나라를 영원히 구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또 지식을 가지고 그 나라를 영원히 구할 수 있습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아무리 높은 학식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묶을 수 있고, 민족정기를 만들 수 있는 초석이 되지 않는 한, 그 지식은 어느 한때에 도움이 될는지 모르나, 문화세계를 창조하는 데 있어서 어느 한 분야에 도움이 될는지 모르나, 새로운 세계의 영원한 기반은 못 된다는 것입니다. 전인류가 바라는 것은 돈과 권력, 그리고 지식입니다. 그런 것들을 가지고 만들어 놓은 것이 20세기의 문명인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미국을 생각해 봅시다. 미국은 만국이 부러워하는 경제 기반을 갖고 있고, 만국이 추앙하는 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하고 있고, 만국이 따라갈 수 없는 문명국가, 즉 선진국의 위치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이 진정으로 민주 진영을 살릴 수 있는 입장에 있느냐 하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세계를 살릴 수 있는 입장에 섰느냐 하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공산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지금 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가 세계의 사조를 꾸며 나가고 있지만, 이 두 주의가 인류의 역사를 다시 한 번 수습하고, 흐트러진 인류의 양심을 수습하여 하나의 세계관을 갖추어서 천지에 변치 않는 기반을 닦아 놓을 수 있겠느냐 할 때에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소련은 국제 공산당의 위신을 박차 버리고 민족주의적 공산당으로 전락해 가고 있습니다.

그럼 이때에 있어서 생각을 올바로 하는 청년 남녀들이 지녀야 할 욕망은 무엇일 것이냐? 돈도 아닙니다. 권세도 아닙니다. 지식도 아닙니다. 암만 물고 뜯고 해봐야 그런 것들은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 가지고는 안 됩니다. 무엇이 필요하냐? 돈 있는 사람을 무색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 것이요, 권세를 잡은 자에게 굴복하지 않고 이 시대에 있어서는 네가 나에게 호령하지만 10년, 수십년 후에는 내가 필시 너를 항복시킬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지식이나 권세는 갖추지 못했지만 가장 위대하고 역사적인 진리를 가졌다고 할 수 있는 사람들, 하늘과 땅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최고의 진리를 가졌다고 할 수 있는 무리가 나왔다 할진대 그 무리는 기필코 세계적인 사건을 일으킬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세상의 어떠한 힘으로도 밀어내지 못합니다. 어떠한 사람도 그들이 서 있는 자리를 옮겨 놓을 수 없습니다. 아무에게도 그럴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천하를 대신한 진리를 중심삼아 남이 알지 못하는 양심세계의 근원을 파악하고, 양심적인 생활과 사정을 포섭하여 묶어 치울 수 있는 근본적인 진리를 지니고 있다고 자신만만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필시 역사상 모든 인간들이 그를 숭배할 것입니다. 이 땅에 왔다간 성인 현철들도 그 앞에는 머리를 숙여야 할 것이요, 이 시대의 만민들도 그 앞에는 자동적으로 굴복이라는 명사를 세워 놓고 말없이 따라오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재물과 권세와 지식은 어차피 지나가는 것

그러면 우리 통일교인들은 어떠한 길을 가야 되느냐? 또 여러분을 지도하는 선생님은 어떠한 길을 가야 되겠느냐? 인생이 인생다우려면 어떠한 길을 가야 되느냐? 물질을 얻기 위해 자기의 인격을 파는 사람이 되지 말고, 물질을 얻기 위해 자기의 지식을 파는 사람이 되지 말고, 권세 때문에 자기의 인격을 팔거나 자기가 존중하던 진리를 파는 사람이 되지 말아야 되겠습니다. 자기의 인격이나 지식을 팔 수 없고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단 하나 천지의 대도이다, 천지의 대도의 움직임에 따라 움직일 뿐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 사람은 사망권으로 들어가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새로운 방향으로 돌이킬 수 있고, 혼란한 사회의 모든 제도를 수습하고, 사회의 전통을 수습하여 한 방향으로 이끌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통일 이념은 무엇을 표준하고 출발하였던고? 인간이 바라는 세속적인 욕망을 표준하고 출발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밟고 올라서서 출발한 것입니다. 선생님은 세상의 가진 자를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백만장자의 자리에 앉아서 자기가 가진 것을 자랑하는 사람도 부러워하지 않고, 권세를 가지고 호령하는 것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세계적인 어떠한 주의 사상과 지식을 갖고 새로운 문화를 창조했다고 자랑하는 사람들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도 그런 것들을 무시해 버리고 그 위에 올라가 청산지어져야 할 역사의 운명을 헤아려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 것들은 필시 지나가고 마는 것입니다. 거기에 어떤 미련과 애착과 소망과 사정과 심정을 둘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필연적인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런 것들을 무시해 버리고 그 위에서 출발해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필요한 지식은 무슨 지식? 보이는 세상적인 지식이 아닙니다. 육신을 중심삼고 안일의 처소를 마련하는 데 필요한 지식이 아닙니다. 또 우리가 추구하는 권위는 무슨 권위? 세속적인 권위가 아닙니다. 그 양심과 그 인격을 온 피조만물이 추앙하게 할 수 있는 권위입니다. 또 우리가 원하는 물질은 어떤 물질? 하나님으로부터 지음받은 그대로 있는, 순결하고 추함이 없는, 정의에 입각한 물질입니다. 이러한 것을 기반으로 하여 움직이는 사람이나 단체, 어떠한 주의나 사상이 나오지 않는 한 이 세계는 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파괴되고 붕괴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40평생 생명을 걸고 싸워 나온 목적이 무엇이뇨? 선생님은 돈을 원치 않았습니다. 무엇을 원했느냐? 참다운 사람을 원하였습니다. 어떤 참사람이냐? 일시적인 욕망을 단칼에 잘라 버리고 오른팔로 재건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을 원하였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통일교회는 비참한 길을 걸어왔습니다. 그러나 통일교회를 지도하는 이 선생님은 비참하다고 생각지 않았습니다. 만민이 바라보고 조롱하고 저주하고 비난하는 그런 자리에서도 선생님은 낙망하지 않았습니다. 세속적인 어떠한 환경도 부러워하지 않았습니다. 그 모든 것은 어차피 지나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미국 사람들이 자기들의 경제력을 세계만방에 자랑한다 할지라도 그것 역시 그들의 것이 못 되는 것입니다. 미국의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미국이 민주주의의 주권을 중심삼고 세계를 호령한다 할지라도 그 권세는 미국 자체의 권세가 아닙니다. 천지를 호령할 수 있고, 천지를 수습할 수 있는 문화 민족이 있다 할지라도 그 문화와 지식의 기반은 그 민족 자체의 것이 아닙니다.

역사의 종말에 남아질 수 있는 경제력, 역사의 종말에 남아질 수 있는 권세, 역사의 종말에 남아질 수 있는 지식, 즉 역사에 매장되어 버리는 것 말고 역사와 더불어 길이길이 존속할 수 있는 경제력, 역사와 더불어 길이 길이 남을 수 있는 권위, 역사와 더불어 길이길이 남을 수 있는 지식은 주인이 있는 것입니다. 그 주인은 하나님입니다. 그러니 그 모두는 사람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부르는 것입니다. 또 하늘에 공명되는 자신의 기준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양심은 쉴새없이 선이 아니면 몸이 지향해 나가는 방향을 거부하며 지금까지 참소해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길이 하늘을 동경하고 하늘을 위주로 생활하는 사람들이 가야 할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돈이 많으면 많을수록 남에게 주고 싶어하고, 권세가 있으면 있을수록 만민의 것으로 돌리고 싶어하고, 천하를 주고도 갚을 수 없는 참다운 지식의 원천을 알았다 할진대 천하의 것으로 돌리고 싶어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본래 사람이 가져야 할 욕구인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그렇게 되어 있지 못하므로 다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철칙입니다.

정의는 남고 불의는 쓰러지니

오늘 통일교회 문 선생이 여러분 앞에 서서 하는 말씀은 문 선생의 말씀이 아닙니다. 엄연히 역사와 더불어 남아져 왔고, 현실을 수습하고 역사를 이끌어 나갈 천륜이 남아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어떻게 통일의 무리들을 남아질 수 있는 천륜의 길로 몰아낼 수 있을 것이냐, 어떻게 남아질 수 있는 인격체로 세울 수 있겠느냐, 어떻게 영원무궁한 터전 위에 안식의 보금자리를 잡게 할 것이냐, 양심이 바라고 심정의 세계가 바라는, 만민이 그 진리 앞에 천만번 종이 되어도 감사할 수 있다 할 수 있는 최고의 진리를 남겨줄 수 있겠느냐를 항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에 우리 통일교회 교인들을 어디로 내몰아야 되겠느냐? 이런 길로 내몰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알고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 일을 걸어 놓고 투쟁해 나왔습니다. 내 몸의 피가 마르지 않고 신경이 끊어지지 않는 한 내가 바라보는 것, 느끼는 것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날 세상이 하나님을 알고 있고 찾고 있는 것과 같이 하나님을 알고 있지 않고 찾고 있지 않습니다. 나는 그들이 안위의 환경이라고 자랑하는 그런 자리를 원치 않습니다. 권세를 가지고 호령하는 자리도 원치 않습니다. 방향도 다르고, 표준도 다른 입장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상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해보자 이겁니다. 정의는 남는 것이요, 불의는 쓰러지는 것입니다. 생명력을 지닌 가지의 잎은 남습니다. 그러나 생명력이 끊어진 가지의 잎은 떨어지는 것입니다.

천지의 운세는 영원무궁토록 돌고 도는 것입니다. 지금 이때는 새 역사를 창조하기 위한 방향으로 내모는 때입니다. 그러나 그 방향에 부합될 수 있는 자기 자신의 인격만 갖추게 되면 역사는 지나가고 세상의 모든 문화와 권세와 경제력은 사라진다고 할지라도, 그가 바라고 세우려 하는 기준은 분명히 남아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원리요, 천륜입니다.

통일교회의 무리들을 모아 가지고 어떻게 할 것이냐? 그러한 길로 내몰려는 것입니다. 하늘땅이 바라는 경제관이나 권위의 기준은 세상의 것과는 다릅니다. 하늘땅이 찾아 세우려는 최고의 지식 기준과 최고의 진리 기준도 세상 것과는 다릅니다. 우리도 그런 입장에서 나아가야 되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부러운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을 끌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떠한 자리에서 참다운 사람을 만날 수 있느냐? 망해 들어가는 이 사회, 이 사조, 붕괴해 들어가는 이 혼란의 와중에서, 희희낙락하는 자리에서 만날 수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어떠한 사람이 참다운 사람인가? 이 세상을 바라보고 울고, 이 세상을 바라보고 적개심을 품고, 이 시대는 망하여야 된다, 망하지 않으면 내 손을 대서라도 망하게 만들겠다는 사람, 정의에 입각한 마음을 간직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참다운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을 만나려면 어떤 자리에 서야 하느냐? 이 땅 위에서 제일 비참한 자리에 서야 합니다. 돈을 갖고 있는 사람, 권세를 갖고 있는 사람,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지금까지 자기가 가진 그것으로 자기의 입장을 세워 나가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진정 돈의 가치를 압니까? 진정 권세의 가치를 압니까? 진정 지식의 가치를 압니까?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의 입장에 서게 될 때는 그 가치를 백 퍼센트 보호해 줄 수 있고, 백 퍼센트 지켜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선은 세상으로부터 오느냐? 아닙니다. 그럼 내 앞으로 오느냐? 그것도 아닙니다. 선은 뒤에서부터 수습해 옵니다. 그러기에 선한 행동을 하라는 것입니다. 만약 역사의 수레바퀴가 돌아갈 때 그 중심인 천운을 붙들고 돌아갈 수 있는 방향을 잡지 못하다면, 그것이 180도를 지나 돌아갈 때에는 그 축(중심)과 관계가 없기 때문에 떨어져 나가 자멸하게 되는 것입니다.

선진국에는 돈이 많은데 그 돈은 누구의 것이냐? 하나님의 것입니다. 권세는 누구의 것이냐? 하나님의 것입니다. 지식은 누구의 것이냐?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누구냐? 만민의 아버지입니다. 그런고로 그 아버지의 인격, 경제, 권세, 진리는 모두 만민의 것입니다. 그래서 요즈음에 와서 민주주의가 출현하게 된 것입니다.

민주주의에서 주권은 백성의 것, 즉 만민의 것입니다. 그래서 백성이 주권을 좌우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주권이 백성에게 있다고 하지만 실상 그 주권은 재벌들이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미국은 배가 부르지만 혼자만 잘살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 나누어 줘야 됩니다. 천리가 그렇기 때문에 미국은 외국에 원조를 해 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살 수 없는 것입니다. 미국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미국만의 것이 아니라 세계의 것입니다. 어떠한 학식도 선진국만의 것이 아닙니다. 세계의 것입니다.

주더라도 부모의 심정으로 눈물 흘리며 주어야

이제 미국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이냐? 자국의 경제력을 풀어서 제일 못사는 나라를 찾아가 부모의 심정을 지니고 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망합니다. 부모의 심정을 지니고 종의 입장에서 진심으로, 눈물을 흘리면서 주어야 됩니다.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을 대해서는 눈물을 흘리는 입장에 서서 주어야 됩니다. 주는 데 있어서도 지금까지 지니고 있던 권세의 자리에서 주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반발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누가 먼저 눈물을 흘려야 되느냐? 받는 사람이 먼저 눈물을 흘릴 것이 아니라 주는 사람이 먼저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그것이 부모의 입장입니다. 그러니 주는 사람이 눈물을 흘리며 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식이 비참하고 흉악한 자리에 있으면 그 자식을 찾아갈 생각만 하면서도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천지의 대도가 그렇다 할진대 그런 방향으로 가는 것이 원칙이라는 것입니다. 가진 사람이 형이요, 창고지기인 것입니다. 그러니 다 나누어 주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는 데는 어떻게 주어야 되느냐? 눈물로써 주어야 됩니다. 비웃으며 주다가는 망합니다. 이걸 알아야 됩니다. 미국이 가끔 원조를 하고 있는데 권세를 가지고 하게 되면 망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원칙입니다. 대한민국도 그렇습니다. 미국을 대하여 ‘너희들 원조했다고 뻐기는데 언제 한 번 너희들이 얻어먹어 봐라.’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는 데는 눈물로 주어야 합니다. 눈물로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지 못한다 할진대 서로는 형제가 아니라 원수입니다.

돈이 원수라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이것을 누차 깨달았기 때문에 주고 싶어서 눈물을 지을 수 있고 눈물 흘리며 진정으로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늘은 이런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그런 인격을 갖추는 것이 세상적인 돈보다도, 세상적인 권세보다도 더 필요한 것입니다.

하늘은 그러한 자리에서 천지의 운세를 기막히게 돌려놓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민족이 되지 않으면 그 민족은 머지않아 다른 민족에게 흡수되어 버릴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에 우리들은 불행해도 주자는 것입니다. 주더라도 눈물로 주자는 것입니다. 그것이 모자란다면, 피로 주자는 것입니다. 눈물과 땀과 피로 주자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계시다면 세상의 인간 가운데 누구를 찾아오고 누구를 변명해 주시겠습니까? 내가 하나님이라면 그런 사람을 찾아올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세상을 바라볼 때 가진 자, 권세를 가지고 호령하는 자, 무엇을 안다는 자는 있어도, 진정 눈물로 나누어 주고 싶어하고, 눈물로 품어주고 싶어하고, 눈물로 도와주고 싶어하고, 눈물로 가르쳐 주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 이 세상은 망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통일교회는 어디로 가자는 것이냐? 어디로 가자는 것이냐? 하늘이 슬퍼하고 역사가 슬퍼하고 시대가 슬퍼하는 것은 무엇이냐? 돈이 없어서 슬퍼하는 것이 아니요, 사람이 없어서 슬퍼하는 것이 아니요, 권세가 없어서 슬퍼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화가 발달이 안 되어서, 혹은 지식이 없어 슬퍼하는 것이 아닙니다. 돈을 가진 사람이 진정으로 나누어 줄 줄 모르고, 세도를 가진 사람이 진정으로 보호해 줄 줄 모르고, 알고 있는 사람이 진정으로 가르쳐 주지 못해서 슬퍼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은 부패하고 망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세상을 막아내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민주주의 이념을 넘어 세계주의 이념을 가지고, 미국이 주지 못한 민족이 있다면 내가 먼저 주자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주는 데는 빵 한 조각을 주더라도 심혈을 기울이고 정신을 기울여 뼈가 녹아나는 자리에서 주자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빵 한 조각을 주는 사정을 알게 될 때 그 민족은 빵 한 조각을 받고 통곡할 것입니다. 그러한 심정을 지니고 불쌍한 민족을 위해 천릿길을 멀다 않고 왔다는 것을, 지역과 거리를 초월하여 심정어린 발걸음으로 찾아왔다는 것을 알게 될 때, 가져오던 빵 조각을 잃어버렸을 망정, 오다가 지쳐 쓰러져 통곡하는 신세가 되었다 하더라도 역사는 그를 높이 세우는 것이고, 그 자리는 후대에 전통적인 민족성과 새로운 이념의 기반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천지의 법도인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받는 사람보다 주는 사람이 더 훌륭하다

나는 지금까지 ‘아버지여, 내게 돈을 주지 마십시오.’ 했습니다. 내가 돈을 번다면 어느 누구에게 지지 않을 정도로 벌 수 있습니다. 돈도 필요하지만 돈을 정복하는 사람이 더 필요합니다. 돈을 가진 사람들이 찾아와서 ‘제발 이것도 그와 같이 써 주십시오.’ 할 수 있도록 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러기에 통일식구들은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받는 사람보다 주는 사람이 더 훌륭한 것입니다.

지방에 순회 나가 보면 우리 식구들의 생활이 비참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디 가나 먹을 것 먹지 못하고 입을 것 입지 못하고 고생하는 식구들이 있는 것을 선생님은 알고 있습니다. 그런 식구들을 붙들고 통곡할 수 있는 아량이 있는 선생님입니다. 뼈가 울 정도로 사정을 통할 수 있는 심정을 갖고 있는 선생님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그들이 세상의 원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생활적인 인격에서 그치는 사람이 많은 것입니다.

주고 싶어해야 합니다. 주고 싶어 애달파하면 아낙네들이나 아저씨들은 반응하지 않더라도 필시 반응하는 사람들이 나오게 되나니 그들이 누구냐? 어린이들입니다. 천륜을 따라 순진하게 자라는 어린이들은 필시 그러한 사람들을 찾아오게끔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을 지금까지 이끌어 오면서 남과 같이 먹이지 못하고, 남과 같이 입히지 못하고, 남과 같이 편안한 자리에 눕히지 못했습니다. 모두 내 책임입니다. 그러나 책임질래야 책임질 수 없는 사정이 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붙들고 위로해 주고 내 모든 것을 주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지만 그럴 수 없는 사정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연단과 시련의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야 할 역사적인 운명이 남아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십자가 도상을 향하여 가려는 예수님 앞에 베드로가 나타나 ‘주여! 그리 마옵소서.’ 할 때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했습니다. 원수와 같이 대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자기와 뜻을 염려하는 베드로에게 준 최후의 선물인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을 오늘 이와 같은 자리에서도 천추에 남을 수 있는 제자로 만들려 하고 있고, 십자가를 넘어 만민이 우러러 볼 수 있는 인격자가 되기를 바라고 있는데, 여기에서 쓰러지고 여기에서 후퇴하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제자입니까? 역사를 바라보고 미래를 바라보는 예수님은 가슴이 떨리고 신경이 폭발하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최후의 그 길을 가면서 입을 열어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이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였던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바라보고 가시는 예수님의 입에서 사탄아! 하는 말이 웬 말입니까? 그것은 그를 그 자리에 머무르는 사람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이스라엘을 위하여, 세계 만민을 위하고, 후손들을 위하고 천륜을 위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셨는데, 그가 주기 위하여 가는 스승의 길을 막는 입장에 섰으니 사탄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삼천리반도 사방팔방에는 우리의 땀방울이 젖어 있고, 우리의 눈물이 젖어 있습니다. 삼천리반도에서 하늘의 사무친 원한이 쌓여 있습니다. ‘아! 너 산아, 그리고 물아, 우리의 한을 풀어다오. 만 겨레에게 주고 싶은 이 마음을 알아 어서 속히 자유스런 환경에서 줄 수 있게 하여 다오.’라고 하는 사람, 만민이 그 앞에 다 머리를 숙이고 숭고한 그의 피값을 찬양하고, 숭고한 그의 참뜻을 찬양하고, 숭고한 그의 심정을 찬양하는 사람, 받기에 황공하여 그 앞에 만민이 머리를 들 수 없어 하는 인격자가 나오기를 하늘은 바라고 있습니다.

이것을 생각할 때에 여러분들의 걸음을 멈추게 하여 ‘야! 쉬어라.’ 하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나 그 마음을 누르고 더욱더 채찍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하늘의 사정이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결코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이것이 현재의 통일교회의 위치요, 현재 우리가 재결의해야 할 사명이라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굶으며 살아도 나보다 더 굶는 사람이 삼천만 민족 중에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죽지 않는 한 혀를 깨물면서 기도하고, 그들의 서글픔을 하늘 앞에 호소할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가기가 힘들다고 쓰러져 낙망하는 자가 되지 말고 마지막까지 선의 길을 찾아가는 자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재물, 권세, 학식은 천주의 것

여러분은 사탄이 저끄러 놓은 혼란된 인생노정을 가다가 지쳐 쓰러져 낙망하는 무리가 있다는 것을 알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그런 책임이 여러분에게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게 아무리 큰 어려움이 있다 해도 내가 가지 않으면 천만, 2천만이 희생되니 이것을 염려하면서 그들을 위해 눈물짓고 그들의 어려움을 한탄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여러분이 되면 여러분은 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가야 할 길은 진정 가고 싶은 길이요, 우리들이 찾아 이루어야 할 나라는 영원히 영원히 살고 싶은 나라입니다. 우리들이 가져야 할 재물은 천주의 것인 동시에 내 것이요, 이 시대의 것인 동시에 과거의 것이며, 동시에 미래의 것이라고 보증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또 우리가 울 때에 천지가 같이 울 수 있고 우리가 기뻐할 때에 천지가 같이 기뻐할 수 있는 권위와 지식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타락한 인간들이 현세에서 찾아야 할 최고의 욕망이요, 소망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서 여러분, 하나님의 복귀섭리를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통일교인들은 원리를 배웠기 때문에 하나님이 불쌍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하나님이 어느 정도 불쌍하신지 여러분은 압니까? 하나님이 얼마나 불쌍합니까? 여러분이 입을 열어 불쌍한 하나님이라고 한 것은 여러분의 마음과 여러분의 정신의 한계 내에서 했던 말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슬퍼했던 것만큼밖에 하나님의 슬픔을 모릅니다. 여러분의 한계 내에서밖에 하나님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슬픈 아버지를 얼마나 위로해 드리는 자리에 서 보았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불쌍한 아버지란 어디에다 기준을 두고 한 말입니까? 남의 일이 아닙니다.

복귀섭리의 길은 원통한 길이요, 한스러운 길이요, 불쌍한 길입니다. 더구나 선을 찾아 나가는 자에겐 희생의 길입니다. 이러한 길로 우리를 인도하기 위하여 하늘은 먼저 얼마나 많은 수고를 했겠습니까? 이제 여러분들은 이것을 알고 하나님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어야 하겠습니다. 또 하나님을 헤아려 볼 때에 얼마나 불쌍한 하나님이신가를 알아야 되겠습니다. 불쌍한 하나님, 그 하나님의 불쌍함이 어느 정도이겠습니까?

또 하나님의 뜻을 품고 만민을 구하기 위해 이 땅 위에 오셨던 예수의 슬픔은 얼마만한 것이었겠습니까? 억울한 예수요, 불쌍한 예수였습니다. 얼마나 억울하고 얼마나 불쌍했는지 압니까? 그 예수를 따르던 성도들도 불쌍한 길을 갔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불쌍합니까? 이것을 여러분들이 상기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통일교회의 관계를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과 여러분의 관계를 생각하며 가야 되겠습니다.

6천년 역사를 보게 될 때에 2천년 동안의 복귀기대섭리시대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담을 잃어버린 슬픔의 마음이 가시기도 전에 복귀의 한을 풀겠다고 노아를 찾아 세우고, 아브라함을 찾아 세우기 위해 나섰던 하나님의 그 발걸음이 과연 어떠했겠습니까? 신이 나고 의기가 양양했겠습니까? 깨져 버린 아담 해와 대신 긴 역사를 거쳐 노아를 찾아 세우시던 아버지의 그 발걸음이 어떠했겠습니까? 가고 싶었겠습니까? 가기 싫었고 지긋지긋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과 첫 대면을 어떻게 했겠습니까? 직접 말씀을 못 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상징과 비유로, 몸을 감추고 얼굴을 가리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을 해 나왔다는 것을 생각이나 해 보았습니까?

하나님은 노아를 세워 놓고 120년 동안 바라보았습니다. 좋아서 120년을 기다렸겠습니까? 아담 해와로 인해 생겼던 그 슬픈 곡절이 또다시 생겨서는 안 되겠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담의 실수로 인하여 한스러운 심정을 천추만대의 후손에게 남기게 되었는데, 그것을 수습하기 위하여 찾아가는 처량한 발걸음 앞에 노아가 또다시 한을 남기게 된다면 인간들은 더 큰 한의 보따리를 짊어지지 않을 도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들에게는 배반과 실패의 소지가 많기 때문에 두고 봐 가면서 섭리하셔야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아브라함을 거쳐 야곱까지 2천년 동안, 복귀섭리를 해 나왔으니 그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러한 탕감복귀섭리시대를 거쳐서 예수를 세우게 된 것입니다. 이런 예수가 저끄러진 역사를 세계적으로 수습하기 위한 노정을 걷게 될 때 하나님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하나님의 심정

하나님은 예수가 책임을 다하여 그 한을 땅에서 풀어 주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또다시 죽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2천년 탕감복귀연장시대를 향하여 나아가야 했던 하나님이었으니 그 발걸음이 편했겠습니까?

우리의 선조들은 어찌하여 사탄의 수중에서 희생되었던고? 하나님은 마음에 사무친 원한을 풀기 위해 6천년 동안 탕감해 나왔지만 아직까지 완전탕감의 한 날을 맞이하지 못했기에 다시 재림이란 명사를 세워 완전탕감의 한 날을 바라며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심정을 생각하게 될 때 여러분은 아담이 죽어 가는 것을 바라보던 하나님의 슬픔과 십자가상의 예수의 죽음을 바라보던 하나님의 슬픔을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오시는 주님이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하고, 만민 앞에 제단을 쌓고 죄인같이 붉은 옷을 입고 하늘 앞에 속죄의 제물을 드리지 않으면 안 될 이런 사명이 남아 있는 것을 바라보게 될 때, 그 길을 가야만 하는 자식도 처량하지만 그런 길로 내몰아야만 하는 아버지의 심정도 처량한 것입니다. 오늘날 통일교회를 지도하는 선생님과 따르는 여러분의 입장이 그와 같습니다.

우리는 원리를 통하여 아버지의 심정을 어느 정도까지는 알았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가야 할 세계적인 골고다의 길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한국에 남아 있는 골고다의 길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 길을 넘어 세계적인 골고다의 길을 가야 하고, 세계적인 골고다의 길을 넘어 천주적인 골고다의 길을 향해 행군해야 할 여러분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에게는 크나큰 책임이 맡겨져 있습니다. 여러분의 몸이 지탱하기도, 감당하기도 어렵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해 주시지 않으면 갈 곳도 없고, 의지할 곳도 없는 신세입니다. 하나님의 심정은 모든 개인 사정을 천번 아니, 만번이라도 봐주고 싶은 것입니다. 예수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 26:39) 라고 세 번씩이나 기도할 적에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들어주고 싶었겠습니까? 자식이 기도하기 전에 들어주고 싶은 것이 아버지의 마음이지만 아버지는 외면하셨습니다.

또 예수께서 운명하기 직전에 한에 사무친 목소리로 크게 소리질러 ‘아바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했을 때 그 말을 듣는 아버지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우리들은 하나님의 심정을 알 수 없습니다. 제아무리 슬픈 인생을 살아왔고, 제아무리 자기의 생명이 유린당하는 환난도상에서 한탄하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약 사람이었다면 인류를 몰살시키고 뼈까지 전부 불사르고 그 재마저 날려 버렸을 것입니다. 그래도 한이 풀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곡절의 심정을 억누르고 지금까지 인간을 대해 오셨습니다.

인간들은 천차만별의 행로를 거쳐왔지만 하나님은 복귀의 한 날을 바라보시며 개인적인 시대를 거치고 가정적인 시대, 종족적인 시대, 민족적인 시대, 국가적인 시대, 세계적인 시대를 거쳐 수고의 역사를 해 나오신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여러분은 통일교인입니다. 그러나 역사적인 인연을 갖고 오신 아버지 앞에 진짜 아들딸입니까? 선생님은 예루살렘을 바라보면서 눈물짓고, 겟세마네 동산과 감람산을 찾아가던 예수의 심정을 더듬어 그의 슬픈 심정을 알고 나서는, 이렇게 불쌍한 주님을 위로해 드리지 못한 자신이 한스러웠습니다. 그 당시에 그분을 모시고 내가 한번 살아 봤으면 하고도 생각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영광의 그 세계를 꿈꾸며 아담 해와를 바라보시고, 그 아담 해와가 어서 자라기를 바라셨던 것처럼, 아버지의 미의 대상실체가 되어서 천지가 우러러보고, 만우주가 찬양하는 가운데 아버지의 그 사랑의 품에 안기어 사랑받을 수 있고, 그 아버지의 사랑의 품이 좋아서 눈물지을 수 있는 내가 되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까?

탕감은 고생의 자리에서

오늘날 여러분이 서 있는 자리가 하나님이 걸어오신 것과는 거리가 먼 것을 선생님은 알고 있습니다. 이것을 다 메우기 전에는 도저히 갈 수 없는 연고로 하나님께서 무지한 인간을 용서해 주는 법도로 세운 것이 탕감입니다. 그러기에 일대에 조건을 세워서 탕감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탕감의 조건은 어떠한 자리에서 세우느냐? 편안한 자리에서는 세울 수 없습니다. 편안한 자리에서 세우는 탕감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결론은 그렇습니다. 편안한 자리에서 즐거워하며 입을 벌리는 큰 웃음을 웃는, 만족에 취하여 춤을 추는 그러한 자리에서 탕감이란 명사는 없습니다. 그러면 어떠한 자리에서 세워야 하느냐? 눈물이 흐르고, 콧물이 흐르고, 땀과 피가 흐르는 자리입니다. 마음과 몸이 하나로 뒤넘이쳐 마음이자 몸이요, 몸이자 마음이 되어 안타까움에 사무쳐 통곡으로도 할 수 없고, 죽음으로도 할 수 없는 애달픈 자리에서 비로소 세워질 수 있는 것이 탕감이란 명사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인들은 생활적으로 보면 불쌍합니다. 지도하는 선생님이 온다고 해서 마중 나오는 거 나는 싫어합니다. 우리 통일교회 교인들은 비참 그 자체이며 불쌍함 그 자체입니다.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괴로운 눈물 그 자체입니다. 하늘 앞에 나선 예수는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보는 그 자체로 눈물이요, 보는 그 자체로 통곡이요, 보는 그 자체로 원통입니다.

그러나 이런 자리에 있더라도 삼천리반도 곳곳에서 삼천만 민족을 대신하여 아버지를 위하여 충효를 다하겠다고 맹세하는 무리가 나타나기를 선생님은 고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태중에도 있지 않을 때에 선생님은 이런 맹세를 했고, 여러분들이 꿈에도 이런 길을 갈 생각을 하지 않을 때에 선생님은 이미 이러한 길을 걸어왔습니다. 눈물이 많다면 삼천만 민족의 어느 누구 못지않게 눈물이 많습니다. 나에게 누가 나타나서 한마디만 하면 억제할 수 없는 통곡이 벌어질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선생님은 참 불쌍한 사람입니다. 얼마나 불쌍하냐? 마음 둘 곳이 없습니다. 천지가 제아무리 넓다 해도 마음 둘 곳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 곳이 있는데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했었는데, 그 마음이 이해됩니다.

선생님은 우주적인 복귀, 천주적인 복귀의 이념을 향하여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습니다. 내 마음은 바쁜데 현실에 처해 있는 통일교회 무리를 바라보면, 개인복귀 사정도 나는 몰라, 가정복귀 사정도 나는 몰라, 민족이 어떻게 되든 세계가 어떻게 되든 나는 몰라라 하며 가다가 먼 산 바라보며 낙망하는 무리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하늘이 지금까지 닦아 나온 터전 위에 세우려는 통일교회 교인들의 모습이겠습니까? 여러분은 자각해야 되겠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 곳이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한 것처럼 나는 머리 둘 곳이 없습니다. 그 심정이 어느 정도냐? 집에 있어도 밖에 나가도 선생님은 몸 둘 곳이 없습니다. 그러니 무릎을 꿇으면 통곡밖에는 안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시대적인 사명을 하고 있다고 하는 현하의 통일교회 교인들이 가야 할 걸음이요, 해야 할 생활입니다.

그것은 선생님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선생님과 여러분에게는 공통적인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무엇을 놓고? 영광을 놓고 공통적인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요, 천지의 승리의 한 날을 놓고 공통적인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승리의 한 날이야 아무 때 와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바로 탕감 조건을 세우는 데 있어 공통적인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탕감조건은 편안한 자리에서 세울 수 없습니다.

오늘날 삼천만 민족이 어찌하여 허덕이고 있으며 어찌하여 방향을 잡지 못하고 혼란한 환경 속에 있느냐? 그것은 탕감의 수가 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선조들이 지은 죄와 이 시대의 인간들이 지은 죄를 하늘 앞에 용서받을 수 있는 탕감의 수가 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원래 기성교인들이 감당해야 할 책임이었으나 그들은 책임을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가르쳐 주고 이러한 사명을 재촉하기 위해 온 사람이 통일교회 문 선생입니다. 그러니 나를 따르는 통일교회 식구들은 고생해야 합니다. 언제까지? 이 민족이 편안해질 때까지 고생해야 합니다.

하나되어야 탕감이 된다

하나님은 이 민족이 개인적인 탕감조건을 세우고, 가정적, 종족적, 민족적, 국가적, 세계적인 탕감조건을 세우고 나아가 천주적인 탕감조건까지 세워 주기를 바라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민족에게 세계를 구하는 책임을 주셨습니다. 그러면 이 민족이 하나님으로부터 이러한 책임을 부여받았고, 그 책임을 완수할 수 있는 힘을 가졌다 할진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나님 앞에 심정을 걸어 놓고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주적인 역사의 전환점을 이루어 놓을 수 있는 탕감의 기반을 닦아야 합니다.

십자가상에서 예수님의 마음과 오른편 강도의 마음이 같았습니다. 예수님은 불쌍한 자신을 알아보고 그 고통을 위로해 주는 그 강도를 강도로 대하지 않았습니다. 심정을 나눌 수 있는 친구로 대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와 하나가 된 것과 같이 그 강도를 대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여러분들이 구원의 길을 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몸을 쓰고 있을 때 베드로보다도 먼저 낙원에 갈 수 있고, 베드로보다도 먼저 천국에 갈 수 있는 승낙을 받은 사람이 누구냐 하면 오른편 강도였습니다. 그러기에 선생님은 베드로보다 오른편 강도가 더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탕감조건은 어떠한 입장에서 세울 수 있느냐? 슬픔도 함께하고, 기쁨도 함께하고, 어려움도 함께 당하는 자리에서 세울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는 슬퍼하고 하나는 기뻐하는 입장에서는 세울 수 없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을 지도하는 선생님도 여러분과 동떨어진 생활을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슬픔이 있다면 그 슬픔은 선생님의 슬픔이요, 여러분의 생활에 어려움이 있다면 그 어려움은 선생님의 어려움인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그런 어려운 환경으로 가라고 한다면 전부 다 달려들어 죽이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자리로 가라고 명령한 스승을 오히려 눈물로써 사모하고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가야 한다는 마음을 갖는 데에서, 이렇게 둘이 하나된 심정적 인연이 기반이 되어 탕감조건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탕감시대에는 내 몸과 마음을 하나로 만들기 위해 싸워 나왔지만, 가정적인 탕감시대에는 부부가 서로 그의 마음이자 내 마음이요, 내 마음이자 그의 마음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서 서로 심정이 통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한 가정은 탕감조건을 세울 수 있는 자격을 이미 상실한 가정입니다.

지금은 통일교회가 개인적인 탕감노정, 가정적인 탕감노정, 민족적인 탕감노정을 거쳐 세계적인 무대로 진출해야 할 과도기입니다. 이런 때에 한국과 세계에 널려 있는 통일교회 교인들은 하나되어야 합니다. 세계적인 탕감 무대를 향하여 넘어가는 이 순간에는 한국에 있는 선생님이 눈물지으면 미국에 있는 식구들도 눈물지어야 하고, 한국에 있는 선생님이 굶주리면 그들도 굶주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러한 자리에 가지 못하는 것에 대해 회개 기도라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한국 식구들이 고생하면 그들도 고생해야 하고, 한국 식구들이 슬퍼하면 그들도 슬퍼해야 합니다. 한국에 있는 통일교인들이 슬퍼하면 그들도 슬퍼해야 하고, 한국 식구들이 국가를 위하여 싸우는 자리에 서면 그들도 같은 심정을 가지고 싸울 수 있는 자리에 서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세계적인 탕감을 통일제단이 감당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여러분은 이런 것을 모르기에, 이 길을 닦아 놓는 것은 선생님의 책임입니다. 이 3년 기간은 선생님이 이런 책임을 하는 기간입니다. 이 3년이란 기간은 사탄분별 기간입니다. 3수와 4수는 사탄을 분별하는 수입니다. 7수를 유린당한 것이 천지의 한입니다. 인간조상의 타락으로 하나님은 아들딸을 잃어버리셨습니다. 그래서 3수는 아들딸을 찾기 위한 탕감수요, 4수는 만물을 찾기 위한 탕감수입니다. 그러기에 이 3년 기간은 선생님이 생명을 걸고 세계에 널려 있는 사탄들과, 천상천하에 널려 있는 수많은 악령들과, 세계에 있는 인류와 대결하는 기간입니다.

개인적인 탕감노정에서 가정적인 탕감노정을 거쳐 나가려면 반드시 개인의 역사적인 인연을 탕감하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가정적인 탕감의 길이 열리지 않습니다. 천국은 가정을 갖추고 가는 곳입니다. 전후·좌우·상하를 갖추어 가는 곳입니다. 부모는 지옥 가고 아들과 딸은 천국 가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부모와 아들딸이 함께 가는 곳이 천국입니다. 예수님이 천국에 가지 못하고 낙원에서 기도하는 것도 가정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끝날 재림의 한 날을 세워 놓고 어린양 잔치를 하는 것입니다. 어린양 잔치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참된 신랑 신부가 만나서 하늘가정을 꾸미기 위한 잔치입니다. 이렇게 가정을 갖춘 자격자로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천리입니다.

세계복귀의 기반을 닦은 통일교회

선생님은 개인적으로 영적인 세계에서 승리를 하였습니다. 그러기 위해 이 땅 위에서 모진 바람에 휩쓸리면서도 죽어서는 안 되겠다는 결심을 몇 천만 번이나 했는지 모릅니다. 원수를 만나는 고비고비마다 ‘내가 쓰러지면 안 된다. 내가 죽으면 안 된다. 내가 죽으면 이 뜻을 누가 세울 것이냐? 아무리 고생을 하더라도, 사지가 잘리는 병신이 되어 누워 사는 한이 있더라도 내가 죽어서는 안 되겠다.’고 얼마나 마음속으로 다짐했는지 모릅니다. 이렇게 하면서 지금까지 어려운 길을 걸어 나왔습니다.

기반이 없는 상태에서 이름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선생님입니다. 기반을 닦기 전에 이름이 날까 봐 두렵습니다. 왜? 그런 경우에는 사탄의 공격이 있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선생님은 죽지 않고 40고개를 넘어갈 날을 고대하며 세월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말없이 바랐습니다. 아브라함이 복귀의 기준을 세운 이후의 4천년 역사를 끝날에 40수를 세워서 넘어가야 함을 알고 40고개가 어서 넘어가기를 손꼽아 기다렸던 것입니다. ‘청춘아 어서 가라. 세월아 어서 가라. 내게 있는 모든 보화를 빼앗기는 한이 있더라도 와야 할 40고개에서 나는 패자가 되지 않고 승자가 되겠다.’고 하면서 지나온 것입니다. 또 그것은 선생님의 숙원이었습니다. 천주 앞에 일신을 세워 놓고 죽지 않고 책임을 다하기 위해 몸부림치면서 지금까지 나온 것입니다. 이 40고개를 맞이하기까지….

통일교회에 들어온 여러분들은 치열한 전투를 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전부 동원해야 합니다.

선생님이 이러한 길을 가는 데는 친구도 하나도 없었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도 친구가 되어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뒤넘이치는 싸움을 생명을 걸고 싸워서, 1960년에 성혼식을 하고 그때부터 3년 기간을 출발한 것입니다. 그 기간은 자녀를 복귀하는 기간입니다.

하나의 중심이 서기 위해서는 상하․전후․좌우의 입체적인 관계가 완결 지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가정적인 기반을 세워 놓고 역사적인 탕감을 하기 위한 복귀노정을 3년 동안이나 걸어 나왔던 것입니다.

그것이 끝나는 때가 되었는데 이제 앞으로 어떻게 되겠느냐? 개인적, 가정적, 국가적, 세계적, 천주적으로 뻗어 나갔어야 할 탕감의 운세가 개인에서부터 뻗어 나가지 못하였던 것을 통일교회의 문 선생이 책임을 지고 뻗어 나가게 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개인적인 그 은사가 가정을 넘고, 종족을 넘고, 민족을 넘고, 국가를 넘고, 세계까지 넘어서 돌아 들어올 수 있는 길을 닦았습니다. 이제는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 만일 죽는다 해도 이 뜻은 영계가 수습해 줍니다. 과거에 영계에서 사탄과 싸워 사탄을 굴복시켰으므로 이제는 이 세상의 인간만 복귀하면 되는 것입니다. 뻗어 나가는 운세 가운데에서 영계가 협조하면 손해지만 돌아오는 운세에서 협조하면 이익입니다. 열 번 협조하면 열 번 다 하늘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가나안 복귀의 기준을 세우고, 천상천하에 상대적인 이념을 세울 수 있는 기반을 닦아 각 국가에 대표영(代表靈)을 세워 그 국가의 문을 개방했기 때문에 세계 만민들은 통일교회의 운세권 내로 들어오지 않으면 망합니다. 그런 때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여러분들이 전도를 하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전도될 때가 옵니다. 그때에는 우리가 움직이기만 하면 식구들이 늘어납니다. 지금까지 통일교인들은 참 적었습니다. 우리가 사람들을 얼마나 그리워했습니까? 기성교회에서 잘 믿던 목사 장로들은 들어오기 힘듭니다. 그러나 통일교회를 반대하고 선생님을 원수시하던 기성교회 목사, 장로들의 아들딸들은 전부 다 통일교인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들딸들이 자기들의 부모가 반대한 역사를 알면 부모의 무덤을 파게 될 것입니다. 땅이 탄식하는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땅도 그런 시체는 부정한다는 것입니다.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는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죽은 후에도 심판받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선생님을 중심하고 상대적인 기준을 세워서 일체가 된 후에 탕감노정을 가야 합니다. 여러분은 3년 동안 민족을 위해서 얼마나 전도를 했습니까? 전도가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눈물을 흘리고 땀을 뿌리며 하늘과 땅을 위해 걸었다는 기준을 중심삼고 볼 때 3년 기간이 지난 지금은 헝클어진 역사가 어느 정도 청산되었음을 봅니다.

한민족의 위치

그러면 이제 한민족은 어떻게 되느냐? 한민족은 어떠한 시대권 내로 들어가느냐? 복귀섭리 역사를 볼 때 노아로부터 아브라함과 그 이후 수많은 선지선열들이 수고하여 이스라엘 역사를 꾸며 나왔지만 이스라엘 민족이 사명을 완결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오늘날 한민족이 그 사명을 상속 받아 가지고 넘어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통일교회를 중심삼고 볼 때 한국은 어떠한 권내에 있느냐? 전세계 기독교가 제2이스라엘의 입장이라면 한국은 제2이스라엘을 지도할 수 있는 택함받은 천민(天民)의 입장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백성의 믿지 않는 사람들도 제2이스라엘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이런 시대적 혜택권 내에 우리가 들어왔기 때문에 공이 있는 영인들만 이 지상에 재림하여 후손들에게 협조할 수 있는 것이 원칙인데 한국은 예외입니다. 오늘 지상에 있는 한국 백성들은 제2이스라엘과 같은 입장에 있기 때문에, 그런 혜택권 내에 제2이스라엘의 조상들이 이 땅에 내려와 협조하듯이, 한국 백성들에게는 조상들이 내려와 협조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국에 있어서는 조상들이 직접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움직이는 후손들을 협조할 수 있는 때가 된 것입니다.

옛날에는 예수님과 성신이 협조하였지만 이제는 선한 조상들이 자기의 후손들에게 협조할 것입니다. 이런 때에 통일교회에 안 가면 어떻게 되나 두고 보십시오. 조상들이 통일교회에 가라고 들이몰 때가 온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고생스럽겠지만 4년만 참고 견디길 바랍니다. 4년은 탕감기간이니 통일교인들은 고생해야 됩니다.

이번에 우리가 남군 북군으로 나누어 전국적으로 특별 부흥회를 실시하였는데 이번 대통령 선거에도 그런 양상이 나타났습니다.

이 나라가 어느 때에 자리잡을 것이냐? 하늘이 세우려는 이념이 자리를 잡은 후에라야 됩니다. 그러기 전에는 못 잡습니다. 천리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리잡기 전에는 이 나라도 자리를 잡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 민족 앞에 있기에, 이 민족의 정신을 지도하고 있는 수많은 종교가 하나님 뜻 앞에 자리를 잡지 못한다면 이 민족도 자리를 잡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서로 물어뜯고 할 것입니다. 이제 금년이 지나면 흉년이 그렇게 많이 들지 않을 것입니다. 반대로 풍년이 들 것입니다.

지금은 통일교회 선생님도 고생하고 통일교회 식구들도 고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고생하면 하나님도 고생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민족적인 탕감 기준을 세워 넘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통일교회 교인들이 고생하는 심정과 삼천만 민중이 고생하는 심정이 상대 기준이 조성되어야만 민족적인 탕감 기준이 세워져 넘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3년 동안 싸워 나온 목적은 무엇이냐? 교회적인 탕감 기준을 세우기 위해서였습니다. 기성교회가 선생님과 하나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기성교회를 떼어버리고 기성교회를 대신할 수 있는 통일교회를 세워 싸워 나온 것입니다.

그러면 왜 그래야 했느냐? 예수님 당시에 유대 나라는 로마의 속국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를 중심하고 볼 때, 이스라엘 민족은 선민이었고 그 선민을 움직여 나가는 정신적인 근원지는 유대교였습니다. 오늘날 한국의 실정이 그때와 비슷합니다. 끝날에 있어 로마 제국과 같은 것이 미국입니다. 미국은 민주주의의 아성입니다. 그리고 이름만 달랐지 경제적, 사상적인 면에서 식민지와 같은 입장에 있는 것이 한국입니다. 지금 이 세계에서 이스라엘 민족과 같은 책임을 감당해야 하는 단체는 기독교입니다. 기독교 정신이 오늘날의 민주주의를 탄생시켰습니다. 그러기에 기독교를 움직이면 민주주의도 움직일 수 있는 것입니다.

역사는 뿌린 대로 거둔다

오늘날 민주주의 세계는 어떠한 양상을 보이고 있느냐? 옛날 예수님 당시와 같이 세계적인 끝날의 양상을 재현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계사적으로 볼 때에 지금의 민주주의 세계는 그때의 이스라엘의 사명을 해야 할 입장에 있는 것이며, 지금의 기독교는 그때의 유대교 사명을 해야 할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사명을 가지고 오셨느냐? 메시아의 사명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메시아의 사명을 가지고 오신 목적은 무엇이었느냐? 이스라엘 민족을 장중에 넣고, 유대교를 발판으로 하여 전세계를 통일하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사명이었습니다.

그런 예수님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자기가 서야 할 무대, 하늘이 준비했던 터전인 이스라엘 민족은 어디로 갔습니까? 반대하고 나가 자빠졌습니다. 하나님께서 4천년 동안 고이고이 길러 놓은 유대교단은 어디로 갔느냐? 예수를 팔아먹는 데 선봉이 되었습니다. 그렇지요? 이렇게 활동 무대를 모두 잃어버린 예수님이었습니다. 세워 놓은 이스라엘 민족은 어디로 갔으며, 세워 놓은 유대교단은 어디로 갔느냐? 그들에게 몰리어 이슬과 같이 사라진 예수님이었습니다. 민족의 반역자라는 명패를 달고 고아처럼 골고다로 걸어간 예수님이었습니다.

역사는 뿌린 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로 가신 주님은 십자가로 오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역사적인 환난의 고비가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범위만 넓을 뿐이지 민족과 환경은 그때와 같은 것입니다.

이 땅 위의 새로운 이념을 품고 그 기반을 닦기 위해 나타나는 지도자가 있다 할진대, 그는 제2이스라엘의 입장에 있는 전세계의 기독교인들을 유대교인의 입장에 세워 놓고 이것을 기반으로 하여 민주세계를 통일하고 하나의 세계를 완성하셔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재림주의 사명입니다. 예수님이 못했으니 그가 다시 와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예수님은 어떻게 돌아가셨느냐? 민족의 반역자요 이단의 괴수로 몰려 돌아가셨습니다. 오늘 역사를 상속 받고 역사의 계대(繼代)를 천륜 앞에 세워 놓기 위하여 새로운 뜻을 품고 나온 통일교회라면, 통일교회는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 민족에게 몰리고 수많은 교단에 몰리더라도 십자가를 지고 죽음의 길을 갔던 예수님과 같은 신세만은 되지 말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선생님이 지도해 나온 골자입니다. 예수님은 쫓기다 죽었지만 우리 통일교인들은 쫓기더라도 죽지를 말자는 것입니다.

하늘 앞에 부모를 모시는 효자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 유대교단의 책임이요, 하늘을 대신하여 지도자로 오신 예수님 앞에 충신의 도리를 세워야 하는 것이 이스라엘 민족의 사명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유대교인들은 오시는 주님 앞에 효자 효녀가 되어야 했고, 이스라엘 민족은 충신들이 되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효자 효녀가 되게 하기 위해서 4천년 동안 수고한 하나님의 역사는 간 데 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4천년 동안 수고하여 선민인 이스라엘을 찾아오시고, 이스라엘을 세워 충신의 절개를 남기려 하셨던 하나님의 뜻은 간 데 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효자와 충신들이 배반하니 피할 곳은 어디뇨? 없는 것입니다. 죽을 곳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원수가 편히 쉬라고 놓아둘 것 같습니까? 그러니 죽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민족을 잃어버리고 교단을 잃어버려, 충신도 간 데 없고 효자도 효녀도 다 사라져버린 그때에, 원수가 대들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니 할 수 없이 십자가에 돌아간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은 그런 예수님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불쌍한 예수님을 말입니다.

오늘날 세계사적인 견지에서 볼 때 좌우의 사조가 한국을 중심삼고 기묘하게 대치하고 있습니다. 판문점(板門店), 생각해 보십시오. 참 재미있는 명사입니다. 이런 것은 세계에 하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그런 거 생각해 보았어요? 지각이 있는 사람은 생각 좀 해 보십시오. 괜히 그런 일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판문점은 우리 민족만의 문제로 인해 생긴 것이 아니라 세계적인 사조로 인해 생기게 된 것입니다.

후르시쵸프가 유엔 단상에서 신발을 벗고 야단한 때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탄이 최고의 자리에 올라간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그때부터는 내려가는 것입니다. 1957년부터 내려가는 것입니다. 중공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 우리의 역사에 보조를 맞춰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이러한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알고 있다면 내가 이런 얘기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참제자가 되려면

지금은 선생님이 이래야 되겠다 하면 여러분은 그냥 들어야 합니다. 선생님의 말을 안 들으면 치는 겁니다. 여러분에게 왜 해야 하는지를 설명해 줄 때가 아닙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그렇구나. 당연하구나.’ 할 때까지 설명해 주어야 하니 죽을 지경입니다.

지금이 어느 때인지 압니까? 지금은 민족복귀시대로 넘어가야 하는 때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러나 ‘이제 나 압니다.’ 하고 자신 있게 대답을 해도 사탄이 와서 호령을 하면 여러분은 꼼짝못합니다. 잘 모르기 때문에 사탄이 와서 선생님보다 더 큰소리로 호령하면 넘어간다는 거예요. 알겠어요?

오늘 이곳에 처음 온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처음 온 사람에게는 선생님이 인사를 하자마자, 나이 많은 사람 적은 사람 할 것 없이 모두에게 반말 하는 것이 이상하게 생각될 것입니다. 그건 모두 선생님의 제자니까 그러는 겁니다.

선생님은 여러분들에게 진짜를 얘기하고 진짜를 가르쳐 주고 싶습니다. 내가 여러분의 뼈를 부수고 이빨을 부러뜨려 놓고도 가서 그저 코를 골며 편안히 잘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사람이 진짜 제자입니다. 이 손가락 하나를 놓고도 기분 나쁜 얘기를 하면 세상 사람들은 밖으로 나갑니다. 그러나 통일교인들은 다릅니다. 욕을 해도 잘 받아들입니다. 실제 그렇습니까? 사실 내가 언제 욕이나 해 봤나? 그렇지 않았지 뭐. 그러니 오늘 욕 좀 해 봅시다.

여기에 모인 무리들은 다 살살이 패야. 20대입니다. 할머니들은 조금 있다가 가는 것입니다. 보따리 싸 가지고 문밖으로 나가는 겁니다. 살림살이는 이 젊은 사람들이 해야 됩니다. 그렇다고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섭섭하게 생각하면 안 되겠습니다. 여러분들도 옛날에 다 살림살이를 해 보지 않았어요? 돌고 도는 겁니다. 그러니까 섭섭할 것 없습니다. 그렇게 돌아가는 겁니다.

선생님이 필요로 하는 것은 젊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눈들을 보면 전부 다 살살이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통일교인의 평균 연령이 23세입니다. 그것도 채 못 될 거야. 참 원리적입니다. 이 사람들은 자기 부모들이 제발 일이나 열심히 하라고 해도 안 듣는 것입니다. 그것은 차원이 다른 심정을 갖고 태어났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의 길은 어머니 아버지가 가는 길과 다르다는 겁니다.

선생님이 이렇게 얘기한다고 ‘아! 이렇게 가는 것이 원칙인 모양이구나.’ 하고 생각하겠지요? 선생님이 기분 좋게 칭찬하는 것처럼 말을 했는데 으레 그러려니 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이 가는 길이 중요하고 시급해서 그런 것이지 길을 닦아 놓고는 다시 부모와 인연을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사탄세계에서 살아난 다음에 줄을 던져서 부모를 구해야 됩니다. 그 줄을 아주 끊어 버려서는 안 됩니다. 그런 거 알지요?

젊은 사람들에게 얘기하려니 선생님이 젊어져야 됩니다. 원래는 대구에 처음으로 왔으니 말 한마디 할 때도 의젓하게 ‘대구에 계시는 식구님들. 먼 거리에서 오시기 위해 얼마나 수고가 많았습니까? 걸어오신 분들도 계시다는데 얼마나 수고하셨습니까? 지금 4시가 다 되었는데 점심은 잡수셨습니까?’ 하며 인사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선생님의 생리에 맞지 않습니다. 한꺼번에 세 마디씩 해야 되겠다는 마음입니다. 그러니 바쁩니다. 선생님은 얼마나 바쁜지 모릅니다. 선생님이 오늘은 여기 있지만 아침이 오면 또 금방 가야 할지 모릅니다.

오늘 여기에 처음 오신 나이 많은 분들은 선생님이 많은 사람을 거느리고 있는 입장이라 해도, 그런 선생님으로 아시지 마시고 우리 아들과 연령이 비슷하니 친구가 되겠다고 생각하시고 반말하더라도 귀에 거슬리게 듣지 마십시오. 알겠습니까? 대답이 없는 것을 보니 나이 많은 사람이 없는 모양이지요? 그럼 좋아요. 많은 사람을 거느리는 책임을 지고 있으면 어떤 사람과도 친구가 되어야 하니 나이 많은 사람에게 반말도 하게 됩니다.

또 여러분 졸지 마십시오. 졸지 않겠다고 약속하겠습니까? 약속을 안 하겠다면 얘기 안 할 것입니다.

세계를 통일할 수 있는 기반을 닦은 선생님

한국은 동서문화가 교류되는 첨단지역이요, 사상적인 접선지역이요, 새로운 이상세계를 창조할 수 있는 출발기점입니다. 재건을 부르짖는 시대는 지나가고 통일신도가 창건을 부르짖는 새로운 시대가 왔습니다. 그런데 창건이란 명사는 제물 없이는 세울 수 없습니다. 그래요 안 그래요? 원리강의 하는 사람 대답해 봐요. 창건이란 명사를 세우려면 제물 없이 가능합니까, 불가능합니까? 불가능하지요. 그러기에 할 수 없이 여러분들을 사정없이 내모는 것입니다. 재건이란 있는 것을 다시 수습하는 것이요, 창건이란 없었던 것을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내 손이 동기가 되고 내 뼈 살이 원동력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창건의 사명을 짊어진 우리 통일식구들이 앉아서 ‘창건! 거룩! 할렐루야! 아멘!’만 외쳐서 되겠습니까? 안 됩니다. 피와 땀과 눈물을 흘려야 됩니다. 할 수 없습니다. 그러더라도 죽으면 안 됩니다. 눈물과 피와 땀을 흘리더라도 땅을 붙안고 움직이고, 민족을 붙안고 움직이고, 세계를 붙안고 움직여야 합니다.

그러면 이러한 사명을 짊어진 통일식구들을 지도하는 선생님은 어떻겠습니까? 하루도 편안한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없었습니다.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눈만 감으면 많은 생각이 떠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잠을 안 자려고 합니다. 될 수 있으면 일하다가 잠깐 자려고 하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정신을 집중하는 도의 생활을 했기 때문에 그런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생각만 하다가는 볼장 다 보는 겁니다.

여러분보다도 선생님이 사실은 더 불쌍합니다. 그렇다고 선생님을 불쌍하게 보아 달라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여러분은 20대지요? 선생님이 20대였을 때는 아주 불쌍했었습니다.

복귀의 길을 찾아 놓기 위해 하늘의 복귀기대 섭리시대가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선생님에게는 통일교회의 기반을 닦기 위한 준비 기간이 있었습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천지의 도수를 맞춰서 하늘의 원칙을 기반으로 하여 지상에 발판을 닦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마찬가지로 선생님의 생애노정에도 이러한 길을 닦기 위한 시대, 즉 통일교회 준비시대가 있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 시대에 어떤 일이 있었는가 하는 것은 누구도 잘 모릅니다.

이 세상의 사람들은 영원히 모를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선생님만 아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선생님이 어떻게 살았는지 압니까? 선생님이 이러한 길을 찾기 위해서 어떠한 고민을 하고, 영계와 어떠한 싸움을 했는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영계를 통일하기 전에 지상 통일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창창한 무한대의 영계에 들어가서 그 사람들의 감투 끈을 전부 다 잘라내어 항복을 받고, 이러한 통일이념을 갖고 나왔는지 여러분, 알고 있습니까? 영계가 통일되지 않으면 지상 통일은 절대 불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 영통하는 사람들, 또는 다리를 꼬고 앉아서 목탁을 두드리며 도를 닦는 스님들한테 가서 물어보십시오. 내가 누군지. 대번에 증거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것을 압니까? 그렇게 증거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영계에 있는 영인들은 전부 다 통일교회 문 선생을 알아봅니다. 그런데 이 세상 사람들은 모릅니다. 여러분의 눈동자를 보면 모두 정신이 없어요. 그래도 죽는 자리에선 소망을 가져요? 영계에 가면 선생님을 알아보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거 믿어져요? ‘저런 엉터리 같으니. 영계가 있는지 없는 지도 모르는데 자기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다니! 엉터리 자식…!’ 여러분 그래요? 그러나 ‘엉터리’라고 한 것이 ‘진터리’가 되면 됩니다. 수많은 영계의 영인들은 모두 선생님의 말을 듣고 있습니다. 이것을 가로챌 자는 없습니다. 거기에 자신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가서 의인(義印)을 받아야 됩니다. 하나님 앞에 가서 의인을 받고 와야 된다는 겁니다. 승리의 권한을 갖고 나오지 않으면 세계 기독교를 통일할 수 있습니까? 통일이라는 명사는 누구나 다 붙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짜 그런 것을 할 수 있느냐 하면 안 그렇습니다. 믿어지지 않거든 40일 동안 죽기를 각오하고 금식해 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통일교회 문 선생이 이단이라고 소문났는데 사실 그렇습니까?’ 하며 생명을 걸어 놓고 기도해 보라는 것입니다.

반대받았으나 승리한 통일교회

이 길은, 6천년 동안 계대를 이어 여러분을 있게 한 선조들을 전부 다 부활시켜 한꺼번에 제물로 바쳐 드려도 여러분은 갈 수 없는 길입니다. 갈수록 힘든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6천년 동안 고통받고, 예수님과 성신이 걸려들어 오금을 못 펴는 함정이 몇천만 개인지 모릅니다.

그러면 선생님은 그러한 함정을 어떻게 넘어갔느냐? 선생님에게는 비법이 있습니다. 그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 태어날 적부터 그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척 보면 압니다. 옮고 그른 것을 안다는 말입니다. 뒤에 서야 될 것인지 앞에 서야 될 것인지를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그 싸움을 하면서도 패자가 되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은 영계에서 승리했습니다. 이걸 누가 할 수 있겠습니까? 세계에 널려 있는 수많은 도인들은 앞으로 선생님께 와서 배워야 됩니다. 틀림없이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삼천만 민중이 반대하고, 세계 30억 인류가 반대한다 해도 문제가 없습니다. 영계에 있는 수천억 영인들은 전부 다 선생님의 말을 듣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리하진 않습니다.

자녀를 가르치는 데는 원수를 굴복시킬 때 쓰던 비법을 쓰지 않습니다. 선생님이 옛날에 썼던 그런 비법을 쓰면 여기에는 한 사람도 들어와 앉아 있지 못합니다. 선생님이 기도해 보면 여기에 별의별 사람들이 다 모여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누더기 패들이 다 모여 있습니다. 옛날에는 그런 비법도 가끔 썼지만 지금은 안 씁니다. 자녀를 교육하는 데는 비법을 써서는 안 됩니다. 정상적인 입장에서 교육해야 됩니다. 그렇잖아요? 사탄까지 골려 먹던 선생님인데 그런 비법을 모르겠습니까?

여러분에게는 아무 자격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한국에 태어났기 때문에 다 여기에 앉아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왜 한국에서 태어났습니까? 여러분을 만나려고 태어났습니까?

영계에서 승리하여 영계에 발판을 구축했으면 그 다음에는 지상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선생님이 얼마만큼 승리했는지 여러분은 압니까? 선생님의 제1차 계획은 승리적으로 완성했습니다. 6천년 역사의 모든 것을 걸어 놓고, 선생님의 일대에서 해야 할 제1차 사명은 이 3년 기간에 승리적으로 완성한 것입니다.

그게 무엇이냐? 좀 전의 얘기로 되돌아가 보면, 세계에서 판문점이 있는 곳은 한국밖에 없습니다. 그곳은 역사적인 모든 운세가 상봉하는 곳이요, 초점이 되는 곳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을 중심하여 모든 것이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중심이 없이 돌다가는 깨져 나가는 것입니다. 하늘은 한국을 중심으로 세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중심을 붙들고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돌리면 돌릴수록 중심에 화할 수 있는 것만 남아지고 그렇지 않은 것은 다 떨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일생 동안 한국에서는 자유당, 민주당, 공화당과 대치해 왔고, 세계적으로는 일제와 공산주의와 민주주의와 투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로부터 말할 수 없는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선생님 일대에서 개인적인 탕감복귀, 가정적인 탕감복귀, 종족적인 탕감복귀, 민족적인 탕감복귀의 기대를 쌓았습니다. 아울러 국가적인 탕감복귀의 기대까지 쌓아야 세계적인 운세가 한국을 향하여 돌아 들어오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의 위치를 가만히 살펴보십시오. 한국은 이스라엘 민족의 입장에 놓여 있습니다. 기성교회는 이스라엘 민족을 중심삼은 유대교의 입장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새로운 진리를 갖고 나온 집단이 있다면 내몰려야 됩니다. 로마와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를 배경으로 나선 예수는 내몰렸습니다. 결국 그들의 반대를 받고 죽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삼천만 민중이 반대하고 기성교회가 반대를 해도 죽지 않는 기반을 닦았습니다. 원리의 프로에 맞추어 기반을 닦으며 지금까지 나온 것입니다.

예수께서 만일 유대교를 발판으로 할 수 있었다면 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 통일교회는 유대교와 같은 입장에 있는 기성교회의 반대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속에서도 예수님의 제자들이 모인 것과 같이 처량한 이 자리에 여러분들이 지금 모여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전부 이방인들입니다. 예수님을 믿다가 들어온 사람은 몇 명 안 됩니다. 전부 이방인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였던 베드로가 유대교를 믿었어요? 알았어요?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도 제일 신분이 낮은 어부였어요. 그런 사람이 무슨 유대교를 믿었겠어요? 그런 사람들을 모아 가지고 유대교와 대결할 수 있는 신약의 복음을 세워 책임을 하려다가 죽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통일교회는 그와 같은 일을 하고 있지만 망하지 않고 기성교회를 인도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았습니다. 알겠어요?

부모를 죽인 죄인인 인류

그러면 통일교회는 어떠한 입장에 있느냐? 제3이스라엘이라는 축복을 받아 충효의 도를 상속 받을 수 있는 유대교의 입장으로 복귀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전에 등록증이 나온 것입니다. 로마 제국과 같은 미국에도 등록이 되었고 유대나라와 같은 한국에도 등록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종교를 중심삼고 세계적인 무대를 닦아 놓았으니 이제부터는 우리를 추방할 자 없고, 죽일래야 죽일 수 없습니다.

유대교에게는 이스라엘 민족의 사상적인 면을 담당하고, 새로운 천지를 향하여 가는 방향을 가르쳐 줘야 할 사명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에 있어서는 유대교와 같은 입장인 기성교회가 한국 민족에게 가나안 땅에 갈 수 있는 방향을 가르쳐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 방향을 가르쳐 주는 책임을 우리 통일교회가 감당해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교단적인 사명만을 해야 할 때는 지나갔습니다. 이제는 민족적인 사명을 해야 할 시대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3년 동안에 하늘을 알고 충성한 사람들에게 복이 있느냐? 그것은 3년 기간이 효자 효녀로 인정받는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기간이요, 축복의 내용을 상속 받을 수 있는 기간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3년 기간에 충성하면 하늘의 아들과 딸로 인정받을 수 있는 조건이 남아진다는 것입니다.

사탄세계에 있어서 굴하지 않고 절개를 세워 하늘을 대하여 충성하고 부모를 대하여 효성하는 도리를 세워 놓아야 하는 것이 통일교회의 사명입니다. 노래부르고 춤추는 자리에서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도상에서 세워 놓아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로 가셨으니 다시 십자가로 오시는 것입니다. 알겠습니까? 예수님은 고향을 등지고, 부모를 등지고, 형제를 등지고 골고다로 가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그와 같은 길을 가야 합니다.

그러면 오늘날 통일식구들은 물론이거니와 세계의 30억 인류, 또 지금까지 왔다 갔던 선조들은 어떠한 사람들이냐? 죄인입니다. 무슨 죄를 지었느냐 하면 살인강도 죄입니다. 의붓자식이나 종을 죽인 살인강도가 아닙니다. 죄 중에서도 용서받을 수 없는 가장 큰 죄를 저지른, 아버지를 죽인 살인강도입니다. 얼마나 큰 죄인지를 여러분들, 생각해 보십시오. 아버지를 죽였어요, 안 죽였어요? 여러분은 원리를 배웠으니 아버지를 죽인 죄인이라는 것을 알 것입니다. 그게 무슨 사람입니까?

하나님께서 인류의 조상으로 보내신 예수님은 우리의 아버지였습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를 잡아 죽였습니다. 그런 죄인입니다. 그 입으로 무엇을 먹고 그 몸뚱이를 좋게 해서 무엇하겠습니까? 그러한 죄인들만 사는 이 세상에서 제일이 되어 무엇하겠다는 것입니까? 아무리 참혹한 명사를 쓰더라도 참혹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자기들이 지은 죗값으로 본다면 배를 찢어 죽이고 한꺼번에 수천 명을 독수리 밥이 되게 하여 없애 버려도 시원치 않을 악당들입니다. 나가고 싶은 사람은 나가십시오. 이런 말 듣기 싫어 나가고 싶은 사람은 나가라구요.

원리를 배우고 보니 우리는 참아버지를 죽인 자식입니다. 그렇지요? 부모를 죽인 죄인이에요. 살인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보다 더한 부모를 죽인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그런 죄인인데 집을 짓고 편안히 살려고 그래요? 일제시대에 죄가 없는데도 선생님은 감옥살이를 많이 했습니다. 그때는 오뉴월 삼복 더위에도 꿇어앉아 있었습니다. 조금만 잠을 자면 대꼬챙이로 찌르고, 찬물을 끼얹는 것입니다. 그래도 이건 약과입니다. 통일교회 교인들을 원칙적으로 다스리려면 그렇게 다스려도 하늘의 법도에 걸리지 않습니다. 원칙에 걸리지 않습니다. 다 변명할 수 있습니다. 조건에 걸리지 않을 자신이 있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그러한 훈련을 받았습니다. ‘이 몸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맞고 또 맞아서 만민의 속죄의 제물로 사라진다 할지라도 한이 없다.’ 하는 생각을 갖고 선생님은 지금까지 생활해 나오는 것입니다.

용서받고 구원받는 길

여러분들은 추우면 또 끼어 입으려고 하지요? 여러분들은 북풍한설에 얼어죽고, 벼락을 맞아 죽어도 마땅한 죄인들인 것을 느껴야 합니다. 그런 죄인인 것을 느껴야 하는 우리입니다. 이런 것도 모르고 자식을 낳아 안고 다닙니까? 옛날에는 한 나라의 왕을 죽여도 8족을 멸하고 9족을 멸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당연히 벌을 받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스스로 아버지를 죽인 죄인이라는 것을 느껴야 됩니다. 그런 자리에서 회개해야 됩니다.

죽어 마땅한 이런 자식들을 구하기 위하여 하늘은 특사를 내렸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이라는 명사, 용사라는 명사만 듣고 죽어도 한이 없는 것입니다. 듣기만 하고 죽어도 한이 없다는 것입니다.

죽은 아버지가 또 옵니까? 살아서 또 옵니까? 또 오란 말입니까? 기성교회 목사들, ‘오!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합니다. 오면 또 어떻게 할 것입니까? 이런 사정을 알기나 하고 ‘오, 주여!’ 하는 것입니까? 그렇다고 목사들 개개인을 욕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선생님의 말을 이해할 것입니다. 아버지의 심정으로 보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런 자들을 용서해 주고, 구원해 주겠다고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발걸음, 다시 찾아와야 할 입장에 선 부모의 그 사정이 얼마나 딱하겠습니까?

여러분들은 부모를 죽인 죄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그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기 위해서는, 나에게 그러한 피가 흐른다면 칼로 찢어 가지고 그 피를 전부 다 뽑아 버려야 되겠다는 생각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긋지긋하다고 느껴야 되는 것입니다. 고생 고생해야 되는 것입니다. 다리라도 하나 잘라 병신이 되어 그 흠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간다면 면목이라도 세울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앞서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길이 구원받는 길이요, 이런 길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길입니다. 그런데 기성교인들이 기도하는 것을 보면 ‘오, 주여! 남의 집 아들딸은 다 죽더라도 우리 집 아들딸은 죽지 말게 해 주십시오. 세계는 망해도 우리나라는 잘되게 해 주십시오.’ 합니다. 말은 청산유수야. 떡에 기름을 바르면 미끄럽게 잘 빠지는 것과 같이 기도가 줄줄 나옵니다.

우리 통일교회는 어떠한 길을 가야 하느냐? 부모를 죽인 죄의 한을 풀기 위한 길을 가야 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십자가의 길을 가다가 죽었으니 그 한을 풀기 위해서는 우리도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한을 풀 도리가 없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죽인 후에 그분이 부모인 줄 알게 될 때는 그 무덤을 파 가지고 시체를 붙들고 울고 울어도 한이 없는 것이요, 일생을 십자가의 형틀을 거꾸로 달려 보낸다 해도 지은 죄의 한을 풀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모의 무덤을 찾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끝날의 인생들 앞에는 세계적인 골고다의 길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통일교인들은 그런 인생을 보내자는 것입니다.

부모의 입장으로 왔던 예수님은 어떠한 입장에서 죽었는가? 부모의 심정을 지니고 종의 몸을 쓰고 죽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죄인의 멍에를 씌워 부모를 죽인 그 자식들을 용서해 주기 위해서 눈물과 피와 땀과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바쳐서 십자가의 길을 간 것입니다. 그래서 자식들을 용서해 주기 위한 터를 닦은 것입니다.

통일교회 신도들이 가는 길은 부모이신 예수께서 가셨던 골고다의 길을 따라가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가시밭길과 같은 골고다의 길을 부모의 심정을 지니고 죄인의 입장에서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리며 회개의 기반을 쌓아 놓고 갔습니다. 원래 그런 용서법은 없습니다. 천도에도 부모를 죽인 죄를 용서해 주는 법은 없습니다. 예수는 십자가상에서 ‘아바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해 주시옵소서.’라고 하며 죽음과 바꾸어 그러한 도리의 문을 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는 구원의 길을 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통일교회 사람들은 무엇을 신앙생활의 목표로 해서 살아야 할 것이냐? 부모의 심정을 지니고 종의 몸을 쓰고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을 목표로 살아야 합니다. ‘종의 몸’이라고 하는 것도 과분한 말입니다. ‘아버지를 죽인 살인자의 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탕감하기 위한 길을 가야 됩니다. 예수님은 죄 없이도 그 길을 갔는데 아버지를 죽인 죄인인 우리는 백 번 천 번이라도 이 길을 가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망하는 것입니다.

교단과 민족적인 사명을 완결해야 할 4년노정

죽은 나를 살리기 위하여 아버지께서 무덤길을 가셨으니 부모의 심정을 지니고 눈물과 피와 땀을 흘리며 가야 합니다. 이 길은 타락의 후손들에게는 운명길입니다. 예수가 이 땅에 와서 눈물과 피와 땀을 흘린 것은 누구 때문이뇨? 눈물은 인류를 위해서, 피는 하늘을 위해서, 땀은 땅을 위해서 흘린 것입니다. 과거와 현재를 걸어 놓고 한꺼번에 심정적인 실체 기준을 마련한 것입니다. 심정적인 탕감을 하기 위해 불효자의 입장에 놓여 있는 인류를 대신하여 용서의 기준을 세워 놓고 가셨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살인 괴수와 같은 우리들도 예수를 믿음으로 용서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진리입니다. 선생님이 아는 기독교 교리의 골수는 이것입니다.

오늘날 신자들은 자기의 죄를 인식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우주를 구하기 위하여 온 예수님은 천지에 한 분밖에 없는 내 아버지인데 내가 그 아버지를 죽였다는 것을 인식을 하고 회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는 자는 구원받기에 합당치 않습니다. 여러분은 회개하여 보았습니까? 회개도 못한 자는 지지리 고생해야 됩니다. 결론은 이것입니다. ‘선생님, 왜 그런 말씀하십니까?’ 하고 항의할 내용을 가지고 있어요? 여러분들은 별수 없이 다 걸려 있습니다. 천리원칙이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복귀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누구를 본받아 가야 하느냐? 아버지이신 예수님의 본을 받아 가야 하는 것입니다. 알겠지요? 그래서 이 3년 동안을 여러분은 아들의 입장에서 선생님과 같이 고생하자는 것입니다. 예수님 때는 배반함으로 갈라졌지만 우리는 같은 입장에 서서 이런 고비를 넘어가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대교인, 즉 이스라엘 제사장들에게 팔려 십자가의 길을 갔지만 우리는 민족을 안고, 세계를 안고 골고다까지 갑시다. 죽지 말고 갑시다. 죽지 않고 골고다까지 갔다가 다시 내려옵시다. 예수님의 부활로 세계적인 복음의 문을 열렸듯이, 통일교회가 죽지 않고 민족을 넘어 현대의 로마 나라에 갔다가 돌아와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될 때는 세계적인 기반이 본격적으로 닦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이제부터 4년 동안은 교단적인 사명을 완결하고 민족적인 사명을 완결해야 되는 때입니다. 편안하게 있으려면 여기 뭐 하러 왔습니까? 집에 있지. 원래 선생님은 이 땅에 와서 사명을 할 때 7년 동안에 모든 것을 완결 지으려 했습니다. 7년 동안에….

그때에 내가 기성교회와 하나되고 이 박사와 손을 잡았으면 공산당은 벌써 다 없어졌을 것입니다. 선생님이 다 없애 버렸을 것입니다. 원래는 원수들을 때려눕히고 원수의 등골을 타고 한국에 복을 갖다 주려고 했었습니다. 종들을 시켜서 복을 실어다 주려고 했는데 주인인 이 한국 사람들이 막은 것입니다. 복을 가지고 한국에 오긴 왔는데 그 복을 받을 사람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 동란으로 한국 사람은 비참해지고 우리의 원수인 일본은 흥한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만일 한국이 통일교회의 이념을 받아들였다면 싸움은 만주 벌판에서 다 끝내 버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복은 다 한국으로 왔을 것입니다.

7년 동안에 하려던 것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21년으로 연장되게 된 것입니다. 지금 이 4년이 마지막 끝나는 때인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압니까? 이 멍충이들. 왜 4년이 필요한 것인가? 왜 가야 되는 것인가? 가기 싫으면 그만두십시오. 21년이 뭐가 멀어요? 210년이라도 가야지요. 안 가면 안 됩니다. 여러분은 안 가더라도 선생님은 갑니다.

이제부터 선생님은 민족주의자입니다. 여러분들만 위하는 선생님이 아닙니다. 선생님은 이제 곧 미국에 가게 될지 모릅니다. 요즘도 미국 식구들은 선생님 오시라고 야단입니다. 일본 식구들도 ‘선생님, 다음 달에 잠깐이라도 오십시오.’라고들 합니다. 그런 때가 된 것입니다. 미국 식구들이 3년 전부터 오라고 했고 패스포트도 나왔으니 외무부에 가서 보고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연장시킨 것은 불쌍한 여러분 때문인 것입니다. 불쌍한 한국 때문이었습니다.

민족복귀를 재결의해야 할 때

한국 정부를 보면 자유당 정부는 아담형이요, 민주당 정부는 해와형입니다. 따라서 민주당의 박순천 여사가 큰소리친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알면 참 재미있습니다. 이 박사가 당선될 때 왜 두 후보가 쓰러졌는지 여러분 압니까? 선생님은 누구보다 생각을 많이 해 보았습니다. 앞으로 그러한 것을 자세히 해명해 줄 때가 올 것입니다. 이번의 공화당 정부는 천사장형입니다. 아담 해와가 하나되지 못함으로 천사장격인 공화당 정부가 나온 것입니다.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이냐? 이것을 선생님은 지금 많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4년 동안 허리를 졸라매라는 것입니다. 사상적인 무장이 필요한 때가 필연적으로 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나라는 공산당이 옆에서 노리고 있기 때문에 시급히 이념적인 무장, 사상적인 무장을 해야 합니다. 이러한 때에 통일교회 교인들을 사회 전체가 공인할 수 있는 환경을 빨리 만들어 놓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민족의 기본 단위는 가정입니다. 그러니 축복받은 가정들은 이때에 나가 죽으라는 것입니다. 이번에 시간이 없어서 그렇지 원래는 전체를 순회하려고 했어요. 남몰래 그동안 일 안 하고 있던 축복받은 가정들을 찾아가서 일하게 하려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고생하라는 겁니다. 개인적인 제물노정을 걸으라는 것입니다. 또 가정적인 제물노정을 걸으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들은 가정적인 복귀의 기준을 세워야 합니다. 가정을 복귀해야 여러분의 부모가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을 내몰아 가지고 수고하게 하면 그들이 눈물지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통일교회로 오게 해야 합니다.

이제 통일교회는 가정적인 기준도 중요하지만 종족적인 기준과 민족적인 기준을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통일교회를 중심삼고 타락의 능선을 넘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들은 재결의해야 합니다. 우리의 책임과 사명이 얼마나 귀중한지 알겠습니까?

이제 우리들은 모든 힘을 다해서 전도해야 되겠습니다. 가나안 복귀를 위하여 전력을 다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은 하나의 백성을 갖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백성이 없었고, 당신이 임재할 수 있는 땅이 없었고, 당신이 통치할 수 있는 주권이 없었습니다. 지금 이 땅은 하나님의 땅이 아닙니다. 내가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문 선생이 한국에서 대통령 되려고 한다고 생각지 마십시오. 나는 인간 개조를 시키려고 그러는 겁니다. 선생님에게는 내적 사람을 살려 주는 것이 1차적인 일입니다. 외적 사람을 살려 주는 것은 2차적인 일입니다.

통일교인은 내적 사람을 대표하고 세상 사람은 외적 사람을 대표하는 것입니다. 이 둘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하나가 되지 못하고 원수가 되어 있습니다. 원수의 입장에 놓여 있는 것을 하나되게 하기 위해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따라와라, 이렇게 하지 않으면 망한다고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3년 동안만 하라는 대로 해 보라는 겁니다. 그렇게 했는데 망한다면 선생님의 목에 칼을 꽂으라는 겁니다.

선생님은 제2차 승리의 기반을 닦고 제3차 승리의 기반을 닦으려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계적인 기반은 자동적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전세계에 발판을 닦아서 세계복귀 운동을 하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할 수 있습니까? 정말로 할 수 있습니까?

세계적인 승리의 기반을 닦게 되면 선생님은 여러분에게 모두 맡기고 뒤로 물러서려고 합니다. 통일교회 문 선생은 뭐 어떻고 어떻다 하는 별의 별 소문이 났지요? 하지만 지금은 선생님이 대구 모래사장 같은 데서 간판 붙이고 부흥회를 한다면 별의별 사람들이 몰릴 것입니다.

이젠 그만큼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미 때가 지나갔습니다. 그런 것을 알고 허리띠를 졸라매고 다시 선생님의 뒤를 따라오겠습니까? 이제 4년 기간만 지나가면 여러분에게 전도하라고 명령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하지 말라고 할지도 모릅니다. 간섭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가정적인 기대를 세우기 위한 믿음의 세 자녀

앞으로 이 원리를 세계의 사람들이 다 알 것인데, 그때는 전부 다 한국에 와서 일하겠다고 할 것입니다. 또 앞으로는 한국 사람 전부가 통일교회에 다니려고 할 것입니다. 그때는 통일교회에서 전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믿음의 아들딸로 전부 택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알았지요? 조금만 더 있으면 전도할래야 할 수도 없게 됩니다. 지역은 조금밖에 없는데 저마다 먼저 가겠다고 싸움을 하는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두고 보십시오. 그런가 안 그런가. 일 시키려고 선생님이 거짓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 그런 선생님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전도 안 하면 외국 사람들이 기를 쓰고 전도하러 올 것입니다. 와서 여러분들이 덮고 자던 짚단 하나라도 몇천만 원씩 주고 사려고 할지도 모릅니다. 선생님이 여러분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내모는 겁니다. 이번에도 전부 다 고정 배치하려고 합니다. 지구장들은 안 했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그럴수록 더 연장할 것입니다.

선생님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책임 못하는 사람들은 전부 다 바꾸는 것입니다. 바꾸게 되어 있습니다. 앞으로 수많은 종씨들, 김해 김 가니 밀양 박 가니 하는 성씨들, 뭐 많지요. 우리나라에는 수많은 성씨들이 있는데 이들이 전부 다 서로 전도 나가겠다고 할 텐데, 앞으로는 전도 나갈 땅이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전도 나가려고 해도 나갈 땅이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태평양에 굴을 뚫어 미국 땅까지 터널을 만들어서라도 미국에 들어가려고 할 것입니다. 나중에 일이 없으면 그 노릇이라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기 전 7년 동안은 고생해야 합니다. 이것은 공식입니다.

끝날에는 7년 대환난이 있게 되는데 하늘의 부모를 위하여 충성할 수 있는 7년 대환난이 못되고, 땅에 대하여 충성할 수 있는 7년 대환난이 된다면 얼마나 원통하겠습니까? 여러분,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목사, 장로들, 하늘의 원수가 된 그런 사람들은 7년 대환난 기간에 어디로 가게 되는지 아십니까? 하지 말라고 해도 자진해서 땀을 흘리며 지긋지긋한 고생을 하려고 할 것입니다.

이 땅 위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는 7년 대환난이 다 있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7년 대환난, 가정적인 7년 대환난, 국가적인 7년 대환난, 세계적인 7년 대환난, 천주적인 7년 대환난을 넘어야 됩니다. 선생님은 전체를 탕감할 수 있는 일을 해 나오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개인적인 7년 대환난을 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불가피한 것입니다.

이것을 넘기 위해서는 최하 3명은 전도해야 됩니다. 최초의 가정은 노아의 가정이 아니라 아담가정입니다. 그리고 가정을 다시 찾기 위해서는 세 아들딸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 최소한 3명을 전도하라는 겁니다. 원래는 12아들을 전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노아가정을 복귀한 입장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최소한 세 아들만이라도 찾아 세워야 합니다. 복귀해야 할 열두 아들, 70문도, 120문도가 남아 있는데, 선생님은 3년 동안 이것들을 탕감복귀하는 일을 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책임을 다해서 축복해 준 줄 압니까? 통일교를 믿겠으면 믿고 말겠으면 말라는 것입니다. 상관없다는 겁니다. 사람이 문제가 아닙니다. 자리가 문제입니다.

대한민국 정부를 예로 들어 말하더라도 그 자리가 문제라는 말입니다. 아무개 장관이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책임 못하면 전부 다 밀어제칠 수 있는 겁니다. 천 사람, 만 사람이라도 갈아치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축복을 해 줄 때는 제일 먼저 너희들이 실수할 때는 너희들이 책임을 지겠느냐고 물어보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조건적인 축복입니다. 왜 조건적인 축복이냐? 여러분들에게 만물을 주관하라고 한다면 아직까지는 사탄이 참소한다는 것입니다. 축복은 그런 사람들에게 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사탄을 굴복시킨 사람들에게 축복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원칙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러한 기준까지 나가지 못했으니 할 수 없이 조건적인 축복을 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앞으로 한 번 더 축복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경상도를 책임지고 민족을 책임지는 실체가 되라

그렇기 때문에 기합을 주려는 것입니다. 기합을 주어도 좋습니까? 어떻게 주면 좋겠습니까? 강제로 기합을 줄까요? 그렇게 해도 괜찮습니까? 선생님은 본래 독재를 쓰지 않지만 사탄을 대해서는 절대적인 독재를 씁니다. 그러나 자녀들을 대해서는 독재 안 합니다. 자녀에게 독재를 한다면 사탄이 붙어 있을 때에만 하는 것입니다. 민주주의가 무엇이냐? 그건 뭐 얘기할 필요 없습니다.

여기 전부 다 젊은 사람들만 있지요? 손 한번 내 보십시오. 주먹을 한번 보자. 주먹을 쥐어 봐요. 옛날에 선생님은 기도할 때에는 너무 쥐어 가지고 나중에 펴면 손이 아팠어요. 얼마나 힘을 줬으면 그랬겠어요. 땀이 나도 꽉 쥐고 맹세를 했던 것입니다. 세게 한번 쥐어 보십시오. 이렇게 허리띠를 하나 더 졸라매고 가자는 것입니다. 어디로? 골고다로 가자는 것입니다. 어느 골고다? 세계적인 골고다, 천주적인 골고다로 가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계까지 복귀해야 할 우리들입니다.

여러분은 사는 동안에 선조 세 사람 이상을 해방시켜야 된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왜 그러느냐? 아담, 예수, 오시는 주님, 이렇게 3대의 한을 풀어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죽어 보면 통일교 선생님의 말이 거짓말인지 아닌지를 알 것입니다.

축복받은 가정들 앞에는 천국문이 모두 열려 있지만 지금 말하는 원리적인 책임을 못 할 때는 그 문을 통과할 수 없습니다. 탕감조건을 세우지 못하면 통과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세 아들딸을 찾아서 그 문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선생님에게는 제1이스라엘, 제2이스라엘, 제3이스라엘의 책임을 완결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제3이스라엘의 자손이 되려면 세 아들딸과 열두 아들딸, 70명, 120명까지 찾아 세워야 합니다.

여러분은 그 나라의 백성이 되려면 먼저 가정을 가져야 됩니다. 가정을 가지려면 먼저 아담가정 노아가정을 복귀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백성이 못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축복가정들은 전부 다 고생해야 됩니다. 1차에 안 되면 다시 2차로 해야 합니다. 다시 되돌아가야 합니다. 축복받은 가정들 알았어요? 그게 문제입니다. 학교가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 시시한 것은 문제가 안 됩니다. 그렇게 알고 우리는 모두 허리띠를 졸라매고 천주적인 골고다로 가야 되겠습니다.

여러분, 경상북도의 경상이란 말이 무슨 말입니까? 나쁜 것입니까, 좋은 것입니까? 경상도가 좋은 데요, 나쁜 데요? 여러분은 전도 나갔다가 누가 ‘통일교회 좋습니까?’ 하면 ‘예, 좋습니다.’ 하지만 어째서 좋은지 몰라요. 경상도 사람들 대답해 보십시오. 경 자가 무슨 경 자입니까? ‘경사로울 경(慶)’ 자지요? 상 자는? ‘오히려 상(尙)’ 자이지요? 또 무슨 뜻을 가지고 있습니까? 높인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올라가는 겁니다. 경상도에 와서 오늘 하나 배웠습니다. ‘오히려 상’ 자에는 ‘높인다’는 뜻, 즉 승천한다는 뜻이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경상도! 이름은 좋습니다. 이름은 좋은데 실체가 나쁘면 되겠습니까? 실체가 사기꾼이거나 사고대장이면 되겠습니까? 이름은 좋습니다. 이름은 좋은데 사람은 어떻습니까? 좋다구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좋은 것을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구에게 보여 줄 것이냐? 대구 사람에게? 여러분들의 부모와 형제들 앞에? 만일 보여 주려면 영광 가운데서 만국을 대하여 호령하시는 하나님 앞에 보여 주라는 것입니다. 슬픔의 하나님이 아닌 호령하시는 하나님 앞에 보여 주어야 된다는 거예요. 우리의 표준은 그것입니다.

경상도가 참 좋습니다. 내가 여기 와서 모듬매를 맞을까 봐 여러분에게 아첨하는 말이 아닙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이름은 좋은 이름인데 이름만 좋지 말란 말입니다. 알겠어요?

지금 때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하는 때가 아닙니다. 그런 때는 지나갔습니다. 지금 때는 이름구원시대가 아닙니다. 실체구원시대입니다. 지금 기독교인들은 모두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그렇게 기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필요한 것이지 예수님의 이름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란 말은 천 개 만 개 있습니다. 그러나 실체는 하나뿐인 것입니다. 그렇지요? 그러니 하늘나라에는 예수님의 실체를 타고 가야지, 이름을 타고 가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혼자라도 경상도의 나쁜 것을 전부 다 책임지고 좋은 경상도라고 변명할 수 있는 실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경상도를 넘어 삼천리반도까지 책임질 수 있는 실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무엇을 하더라도 결사적으로 하라

이제 앞으로 선생님은 여러분들을 밀선에 태워 중공에도 보내려고 합니다. 버젓이 여행권을 내 가지고야 어느 누가 못 가겠습니까? 그건 동네에서 제일 천대받는 거지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밀선을 타고 공산권에도 가서 선교해야 합니다. 지금 선생님은 그런 것을 교섭중입니다. 어디까지 가야 하느냐 하면 골고다까지 가야 합니다. 세계적인 골고다, 천주적인 골고다까지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에게 명령했다면 못 가겠다고 했겠어요? 선생님은 군대에 가서 싸움을 못해 본 것이 한입니다. 사내로 태어나서 한번 싸워 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원수를 대해서 말입니다. 그렇다고 여러분과 그렇게 된다는 게 아닙니다. 그런 생각하지 마십시오. 남자로 태어나서 군대생활을 한번 해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통일교회 교인들은 못하는 것이 없어야 합니다. 앞으로 전국의 20대 청년들을 데려다가 당수를 가르치려고 합니다. 자기가 손기술이 있다고 자만하지 않는 올바른 정신무장을 한 사람을 만들어서 한 면에 서너 사람을 파견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껄렁한 패들을 전부 다 꼼짝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그 부모들이 좋아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나도 옛날에는 당신의 아들보다 더 했습니다. 이 주먹을 보십시오. 몸을 보나, 눈을 보나, 어디를 보더라도 순하게 생기지 않고 울뚝불뚝하게 생겼습니다. 당신 아들처럼 살던 내가 통일교회 때문에 이렇게 변했습니다.’라고 설명하고, 실제로 그 실적을 보여 주면 ‘아! 외모는 저렇게 생겼지만 저런 아들딸을 가진 부모는 얼마나 행복할까?’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만들어 놓고 ‘당신의 아들딸이 동네에서 깡패라고 손가락질받고 비난받고 있는데 그런 아들딸을 나와 같은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면 좋겠습니까?’ 하면 ‘아이고 상감마마 어서 해 주십시오.’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이제 앞으로 도장을 만들어서 그 안에 전부 다 잡아다 놓고, 당수가 몇 단씩 되는 사범들을 시켜서 몸이 늘어지도록 훈련을 시킬 것입니다. 고되게 훈련시킬 겁니다. 자기들의 기술이 부족하면 배워야 될 거 아닙니까? 그렇게 배우는 입장에 있으면 졸병입니다. 이들에게 원리무장을 시켜 사탄 세계를 무찌르는 선발대로 세우는 것입니다. 이러한 용사들을 만들어야겠다는 것이 선생님의 생각입니다. 이제 통일교회에는 당수파들이 많이 들어올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일하게 한 후에 발길로 차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후에는 함께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염려하지 말고 여러분은 열심히 심신 단련을 해야 되겠습니다.

선생님은 뚱뚱한가, 홀쭉한가?「뚱뚱합니다.」뭐가 뚱뚱해? 옷을 뚱뚱하게 입어서 그렇지. 선생님이 이렇게 뚱뚱하지만 빠를 때는 아주 빠릅니다. 육상을 해도 3등 밖으로 밀려 본 적이 없습니다. 아무리 못해도 그 정도는 했습니다. 그 이하로는 해 본 적이 없습니다. 한다고 작정한 것은 밤을 새워서라도 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씨름에는 중학시절에 전교에서 왕이었습니다. 동네에서도 씨름을 해서 한 번이라도 지면 나무를 붙잡고 밤새껏 훈련을 하는 겁니다. 그 사람에게 항복 받기 전에는 절대로 그만두지 않았습니다. 사나이가 그런 사람한테 지면 그런 사람의 종밖에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연습하고, 자면서도 이길 연구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무엇이 있어야 됩니다. 그러기에 동네에서는 아주 이름이 났었습니다. 운동도 못하는 운동이 없습니다. 육상에서도 등수 안에 못들은 적이 없습니다. 만약에 등수 안에 들어가지 못할 입장이라면 처음부터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일단 손을 대는 날에는 몸뚱이가 갈갈이 찢어진다고 하더라도 이기고 마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가끔 강원도에 가서 사냥도 합니다. 이번에는 30년 동안 사냥한 명사수를 따라다녔습니다. 그런데 며칠을 그 사람이 빨리 가면 나도 빨리 따라가고, 그 사람이 천천히 가면 나도 천천히 따라갔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아! 서울에서 오신 그분’ 하고 탄복하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에는 며칠 동안 혼내 줄려고 했는데 계산이 틀렸다는 것입니다.

통일교인은 꼴찌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손을 안 댔으면 몰라도 일단 댄 날에는 결사적이어야 합니다. ‘내가 죽기 전에는 절대 물러설 수 없다. 나는 승리하지 않고는 못 견딘다. 너희들을 이기고야 말겠다.’는 악착같은 신념이 필요한 것입니다. 알겠어요?

새로운 문화세계와 지식세계를 창조해야 할 우리

여러분은 어디에 가더라도 그렇게 해야 됩니다. 직장에 가서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선생님은 여러분을 취직시킬 곳이 있으면 취직시켜 주려 합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여러분의 상사들을 만나서 ‘그 사람 월급 조금 주어도 타당하냐?’ 했을 때, ‘처음에는 월급을 많이 주었는데 한 두 달 있어 보니 월급을 줄여야겠다.’는 말을 듣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사나이가 한번 한다고 마음먹으면 죽어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신념을 가지고 나가야 되겠습니다. 그래 가지고 어디로 나갈 것이냐? 세계적인 골고다를 향하여 힘차게 나가야 되겠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힘차게 나가지 않으면 선생님은 어떻게 해야 되느냐? 몽둥이로 쳐서라도 가게 만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천히 가기를 바라겠습니까, 빨리 가기를 바라겠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한국을 복귀하고 세계를 복귀해야 하니 얼마나 조급하겠습니까? 시간이 없는 것입니다. 바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뜻을 아는 선생님은 여러분들이 안 가면 때려서라도 빨리 가게 하고 싶은 것입니다. 나중에 가서는 고맙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3년 동안 전도하라고 했는데 떨어지지 않고 근근이 따라 나온 여러분입니다.

이제 4년 동안은 만물복귀를 해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딴 것을 좀 시키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악착같이 돈도 벌어야 되겠습니다. 이북서 내려온 피난민이 약 10년 만에 한국의 경제권을 잡았습니다. 이북 사람이 10년 만에 경제권을 잡았다면 통일교회는 몇년 안에 경제권을 잡는가 두고 보라는 겁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돈을 벌어야 되겠습니다. 내가 돈을 버는 것은 세계의 불쌍한 사람들을 품어 주기 위해서요, 그들에게 베풀어 주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배우는 것은 사탄세계의 철망을 끊는 비밀을 그들에게 가르쳐 주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을 배움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인생의 최후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이 달성하지 못한 최후의 목적을 달성하여 가치 있는 인간으로서 하나님 앞에 축복받고, 승리의 인간으로서 고이고이 모심받을 수 있는 선조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여러분들은 어떻게 해야 되느냐? 허리띠를 졸라매고 세상 것을 초월해야 합니다. 새로운 이념을 중심삼아 가지고, 새로운 세계의 발판을 넓히고, 새로운 주권을 세워 새로운 문화세계와 지식세계를 창조해야 되겠습니다. 알겠습니까? 진짜 하겠다는 사람은 손을 들어 보십시오. 하겠습니까, 안 하겠습니까? 선생님 얼굴 보고 그러지 마십시오. 내려요. 그러면 노래 한 곡 부르고 선생님도 좀 쉬어야겠습니다.

<말씀 요지>

원리대로 사는 것은 승리자가 되기 위함입니다. 사위기대를 조성하기 위해서는 먼저 부부의 심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래야 자녀의 심정을 가질 수 있고, 부모의 심정을 가질 수 있습니다.

남자는 하나님의 양성적 형상이요, 여자는 하나님의 음성적 형상입니다. 부부는 천하를 한 보자기에 싼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부부는 하나님의 이상적인 사랑의 심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사위기대는 지상천국과 천상천국의 초석입니다. 천국은 혼자 세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도 혼자서는 안 되므로 성신이 내려와야 합니다.

이제부터는 남자도 절개를 지켜야 하는 시대입니다. 남자도 절개를 지켜 역사적인 순결의 전통을 남겨야 합니다. 예수님의 피와 살을 먹는 의식은 그의 순결한 피와 살의 전통을 세우기 위함입니다.

선생님은 가정을 찾기 위해서 40년간 수고했습니다. 하나님은 6천년 동안 수고하셨습니다. 축복의 날을 세우시기 위하여 수많은 희생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과 성신이 찾은 것도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축복은 천지에서 가장 귀한 것입니다. 동시에 지극히 두려운 것입니다. 만일 부부가 서로 딴 생각을 한다면 그것은 상대를 유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로부터 먼저 선한 조상, 땅, 나라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축복받은 사람은 눈만 뜨면 천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축복은 남에게 복을 나눠 주기 위한 것입니다.

부부는 서로가 마음의 어머니 아버지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우리도 당신들의 가정과 같은 가정을 만들고 싶다.’고 말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모범을 보여서 각자 여러분의 부모를 전도해야 합니다.

<말씀 요지>

복은 고생하고 희생봉사한 후에야 오는 것입니다. 이 세대가 복받을 세대로 되어 가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원수를 갚을 때도 그가 불쌍한 입장에 있을 때 갚아서는 안 됩니다.

지금까지는 양심을 세우기 위하여 몸을 쳐 왔습니다. 그러나 몸을 그냥 두고 마음에 자극을 줄 수 있다면 몸을 치지 않아도 됩니다. 양심에는 심경(心鏡)이 있는데 이것이 안테나와 같은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죽을 곳을 아니 가려 하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6년 동안 믿음, 원수 사랑을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못 믿을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믿지 못할 것까지 믿으려 했습니다. 6년이 지나고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것이 이루어졌습니다. 거지를 보고 그냥 지나갈 수 없었고, 사람을 보면서 판단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돌연히 하는 것 같지만 다 계획이 있는 것입니다. 6천년에 천년을 더한 7천년을 7년으로 탕감 합니다.

자유당 정권은 아담형, 민주당 정권(박순천)은 해와형, 그리고 공화당 정권은 천사장형을 상징합니다. 미국은 현대의 로마이고, 한국은 재정적으로는 미국의 식민지를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외적이고, 유대교는 내적입니다. 예수님은 이 둘을 통합해야 하므로 먼저 유대교를 포섭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일에 실패했고, 민족의 반역자로 몰렸습니다. 그래서 종교적인 입장에서 볼 때 이방인이라고 할 수 있는 어부와 세리, 창녀와 같은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조상이 되려면 당시 영계에 있는 영인들을 해원하고, 그들의 부활실체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역사적인 사탄의 참소조건을 전부 막기 위해 아담, 노아, 아브라함, 혹은 이삭, 야곱의 횡적 형인 세 아들을 세워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하고 아담의 자리에 올라갔기 때문에 사탄이 마음대로 시험하는 입장에 서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민주국가는 이스라엘과 같은 입장이고, 기독교는 유대교와 같은 입장입니다. 예수님은 총각으로 목수의 조수 일을 했습니다.

선생님이 출옥한 지 12년 만에 재단 허가(1963년 10월 4일)가 났습니다. 1960년 후 3년은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3년을 복귀하는 것입니다.

실력이 있는 자는 실력이 없는 자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실력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말씀, 인격, 진리를 어떻게 하면 하나로 묶을 수 있을까? 예수님의 말씀과 인격과 진리를 하나로 묶은 것은 십자가였습니다. 그러므로 선생님은 여러분을 십자가의 길로 몰아내는 것입니다.

​<말씀 요지>

한국을 도(道)로 구분한 것이 이상합니다. 도에는 큰 뜻이 있습니다. 전라도는 도성(道性)은 나쁘지만 복귀노정에서는 나쁜 도성이 더 유리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불리하면 빼기 쉬운 것이 상정이지만 우리의 길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인사할 때 고향을 속이는 사람이 있지만 여러분은 그러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통일교회의 진리가 문 선생으로 말미암아 생겨 문 선생으로 결실된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 각자의 마음은 문 선생으로 말미암아 생긴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 마음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우리의 마음은 누가 지배하는가? 마음이 나에게 명령하는 것을 보면 마음은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음의 주인은 최고선(最高善)의 주인과 어떤 인연이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마음은 몸에 쉴새없이 명령합니다. 무한히 높고 넓게, 영원한 시간을 두고 명령합니다. 그런데 몸은 그 명령에 복종하지 않고 싸우려 합니다. 마음을 협조하기 위하여 법이 있습니다.

그러면 마음은 어디서 왔는가? 무(無)에서 유(有)가 나오지는 못합니다. 유(有)의 배후에는 그 이상의 것이 동기가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안 됩니다.

모든 것은 그 본체의 기준을 능가할 수 없습니다. 마음도 어떤 목적을 두고 작용하는 것입니다.

몸을 제어하는 것을 닦는 길이 도의 길입니다. 과거에도 수많은 도가 있었습니다. 마음과 몸이 서로 차이가 있으면 상충이 없을 것인데, 대등하기 때문에 싸움이 생기고 고통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특권을 가진 분이 나에게 힘을 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끝날이 되면 마음과 몸의 싸움을 완결 지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마음의 힘을 배가하든가, 아니면 몸의 힘을 반감해야 됩니다. 그런데 몸의 힘을 감할 수 없으므로 마음의 힘을 배가해야 합니다. 그러면 선의 세계는 자연히 옵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면 이러한 생각을 못 하셨을 리가 없습니다. 이것을 해결하려면 하나님이 계시는가, 안 계시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계신다면 왜 그렇게 못하시는가? 그것은 하나님과 반대되는 존재가 있어서 인간을 붙들고 싸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과 사탄이 함께 있으면 하나님은 일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은 부모로부터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부모의 혈육을 닮게 되고 부모의 주관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그 부모가 불의의 씨로 잉태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일할 수가 없습니다. 많은 자극을 받을 수 있는 몸을 사탄이 취했기 때문에 몸의 힘이 더 큰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사탄을 치지 못하는가? 그것은 원래 인간이 스스로 처리하도록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도를 세워 마음의 가책을 느끼게 하고, 그렇게 해서 몸을 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높은 종교일수록 몸을 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종에서 직계의 자녀로 끌어올리는 것입니다.

인간은 지능이 발달되었으므로 어떠한 인격이 선한 것인가를 압니다. 하나님은 사탄의 직속부하를 빼앗아 올 수 없으니 그 세계에서 단념하고 지친 사람을 빼앗아 옵니다.

딴 도에는 종의 종, 종을 만드는 종교가 있습니다. 통일교회에 들어왔던 사람은 통일교회의 진리를 알기 이전의 마음으로 돌아갈 수 없기에 떨어져서도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몸이 양심의 실체가 못 된 것은 양심의 힘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타락은 고향을 잃어버리고 조국을 잃어버리고 형제를 잃어버린 것과 같습니다. 선한 세계에서 살도록 창조된 인간이 비록 죄악세계에서 살고 있지만 선의 세계를 찾으려 하는 것은 본심의 발로 때문입니다.

인류의 마음은 모두 선의 주권자가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본연의 선한 부모를 찾아야 됩니다. 구세주는 부모로서 거꾸로 자녀를 찾아 세우려고 오시는 분입니다. 기독교는 맏아들의 종교입니다. 다시 오시는 메시아는 부모의 종교를 갖고 오시는 것입니다. 복된 소식 중에서도 복된 소식은, 죽은 부모가 살아서 오신다는 사실입니다.

마음은 하나님을 자기 것으로 만들 때까지 나아갑니다. 몸은 배반해도 마음은 지치지 않고 찾아오고 또 찾아오니 이는 스승 중의 스승이요, 부모 중의 부모입니다. 곧 마음은 몸의 하나님입니다. 원리는 이러한 마음이 갈 길을 열어 줍니다. 원리의 길은 찾아 나가는 길이고, 복귀의 길은 밟아 나가는 길입니다.

선생님은 남이 모르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불쌍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3년 기간에 다리를 펴고 잠자지 못한 것입니다. 악과 싸워 승리하려면 삼천만과 싸워야 합니다. 삼천만과 싸우다 지면 민족의 반역자로 몰릴 것입니다. 남녀노소가 머리를 숙이고 지도해 달라 하고 민족과 우방이 따르도록 해야 합니다.

이제 통일교회가 정부에 등록함으로써 어느 권세로도 갈 길이 막힐 수 없는 입장에 서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오시는 주님을 죽지 않도록 하려고 민주주의를 세우셨습니다. 등록이 나온 것으로 안심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제1차 노정의 종결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10대 청소년이 사회악의 온상이 되었으니….

흑백 인종과 민족의 장벽을 뚫읍시다.

3년이 넘어가는 자녀의 날 3일 전, 쿠바 문제로 기도했었습니다. 하나님도 지치지 않고 선생님도 지치지 않았습니다. 제1차 작전에 승리했다고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1959년 12월 4일에 도미 허가가 나왔지만 여러분들 때문에 못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녀들을 비참한 곳으로 몰아넣는 것은 세계를 살리기 위함입니다. 편안한 자리에서 받은 복은 사탄이 빼앗아 가지만 고생의 길에서 받은 축복은 사탄도 빼앗아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얼마나 바쁜지 모릅니다. 부디 죽지 말고 고이 제물이 되기 바랍니다.

우리는 부모를 죽인 살인강도입니다. 이 죄를 용서하는 천리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순간에 원수를 위하여 기도하신 기준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죄인도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또 심정의 인연으로 강도를 낙원에 데려간 기준이 있기 때문에 종의 입장에 있는 인간도 낙원에 갈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3년 기간에는 예수님을 해원시키고 하나님을 해원시켜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3년 기간에는 예수님이 이루지 못한 사위기대, 3제자, 12제자, 72문도를 찾아 세워야 합니다.

천국은 혼자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대 위에서 120쌍을 찾았으니 이는 120국가의 상징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4년간은 세계 진출의 조건을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 요지>

우리의 사명의 기준은 무엇인가? 원리가 그 기준입니다. 그러면 원리는 어디서 나왔는가? 원리는 문 선생으로부터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기준은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이 사명을 못해 수고하고 계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인간에게 사명을 맡길 수 있기를 바라오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인간에게 사명을 맡기셔야 하는가? 하나님은 이 세계를 최고의 걸작의 세계로 지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계의 모든 것은 영원토록 완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명이 완결되지 않았으므로 하나님은 지금도 수고하시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고민하는 대상은 인간입니다. 목적과 사명을 완결하지 못한 중심은 인간입니다. 왜 인간이 이렇게 되었는가? 그것은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타락세계에서 주워 왔습니다. 그러므로 통일교회는 고물상입니다. 그리고 고물을 새롭게 주조하는 공장과 같습니다.

본래의 설계에 맞는 인간을 만들려는 것이 구원역사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임하실 수 있는 행복한 가정을 만듦으로써 천국을 이루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속한 모든 것은 하나님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아까운 것이 없어야 됩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며 지고지대하십니다. 좋은 명사는 다 그분의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보좌를 만들려는 것이 구원입니다.

마음은 선을 행하면 행할수록 더 선해지려고 한다. 그러나 무한히 올라가는 것은 아닙니다. 천지를 선하게 하고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하나님을 내 것으로 만들고 그 하나님의 사랑을 완전히 자기의 것으로 만들 때까지입니다.

마음이 안식할 곳은 하나님의 심정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독차지할 수 있는 사랑의 도를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마음은 여기까지 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음은 본위치를 찾기 위하여 몸까지 끌고 가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몸은 사탄이 붙잡고 있습니다. 이런 몸을 때려서 가도록 하려는 것이 종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교인은 마음의 명령에 절대복종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은 바쁩다. 그러나 몸은 마음이 명령하는 대로 한꺼번에 올라갈 수 없기 때문에 지도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통일교회는 이러한 설계도를 갖고 여러분을 때려서 내모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생님과 여러분들이 하나되게 하여 천국을 건설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은 바로 나의 것으로 되어야 합니다.

자기 당대에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이 소망이 다 이루어지면 그때 우리도 같은 권내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위하여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백 년은 눈 한 번 깜박하는 시간보다도 짧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위해 바쁘게 충성합시다.

통일교회의 사명은 무엇인가? 종교는 몸을 구속하여 마음이 지향하는 방향으로 내몹니다. 어떤 종교는 눈만을, 혹은 발만을 구속하지만 통일교회는 몸 전체를 한꺼번에 구속하여 순종하는 사람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통일교인들은 그러한 것을 알고 연단을 해야 합니다.

마음과 몸은 일대일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원하는 대로 몸이 하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몸을 때려서 하지 않으려는 것을 반감시키면 몸이 마음에 굴복하기야 쉽겠지만 그러면 몸이 피합니다. 그러니 이 방법은 그만두고 마음의 힘을 배가시키면 양심 인간은 몸과 마음을 통일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힘을 줄 수 있는 그 무엇을 찾아내야 합니다.

통일교회의 말씀을 들으면 마음이 변화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접하여 그 사랑에 취하기 때문이며, 마음과 몸 사이의 장벽이 무너져서 하나님의 사랑에 감응하기 때문입니다. 그 장벽이 곧 사탄입니다. 사탄을 승리하기 위하여는 개인을 합하여 가정을, 가정을 합하여 민족을, 민족을 합하여 국가를 이루어야 됩니다. 사탄을 추방하는 것이 예수님의 사명입니다.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은 악, 남을 위해 사는 것은 선

예수님도 주권을 세우려면 백성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종을 불러 양자의 도리를 가르쳐 가지고 부모의 자리에까지 복귀해야 했던 것입니다. 천사에게 해와를 빼앗겼으니 예수님은 사탄세계에서 왕녀를 빼앗아 와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 양자의 부모의 자리에서 오늘날까지 나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오시는 주님은 신랑으로 재림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삼위일체는 사랑을 중심한 것이라야 합니다. 사랑은 자기 것이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오늘날 청소년의 타락을 무엇으로 막을 것인가!

바알 신 앞에 굴하지 않은 7천 인이 있었던 것같이 이제 명령만 하면 세계에서 동원될 수가 7천, 8천만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은 악이요, 하나님과 남을 위해서 사는 것은 선입니다. 나를 희생시켜 가정을 위하고, 가정을 희생시켜 민족, 국가를 위하는 것이 선입니다. 이것을 다 할 수 없으니 하나님만을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은 출생 후에 싸웠습니다. 에서와 야곱은 태중에서 싸웠습니다. 베레스와 세라는 뱃속에서 복귀됐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다시 아버지의 뱃속으로 찾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예수님을 사모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허리 속에 있는 씨의 입장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육적 구원을 위해 주님 속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 후에 어머니 뱃속을 통했다는 조건을 세워야 합니다. 그것은 어머니 뱃속의 아기를 사랑함으로써 세울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아기는 사탄세계에서 싸우고 돌아온 기대 위에서 탄생하는 것입니다.

사위기대를 복귀하려면 역사적인 탕감조건을 세워야 합니다. 3년 기간은 자녀를 찾는 기간입니다.

영계와 지상의 제1, 제2의 족장을 찾아 세워야 합니다. 아담, 노아, 아브라함, 모세, 예수님 가정의 한을 풀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영계를 해방해야 할 천사장과 아버지의 사명자입니다. 120문도의 발판 위에 선 것이 오늘날의 기독교입니다. 목적을 이룰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서야 탕감복귀할 수 있습니다.

민주진영은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 민족의 입장입니다. 유대교가 당시의 사상을 지배했듯이 민주주의 사상을 지배하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한국의 기독교는 이스라엘의 유대교와 같습니다.

통일교회는 예수님이 죽음의 길을 간 것을 탕감복귀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돌아가셨지만 선생님은 살아 있습니다. 예수님은 3년 공생애가 끝나면서 돌아가셨지만 통일교회는 지상천국의 기반을 닦아야 합니다.

선생님 자녀의 봉헌식 때 3대 제물의 조건으로 세 가지 선물을 분배하고, 미역국과 밥과 우유를 먹게 했습니다. 3년 기간은 예수님이 이루지 못한 사위기대를 이루는 기간입니다.

예수님이 유대교를 수습하여 로마를 굴복시켰더라면 돌아가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선생님은 이루었습니다. 제1차 승리는 거두었습니다. 백성을 만들고 주권을 세우려고 3녀 1남에게 상을 주고 헌공을 하였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한을 풀어야 합니다. 민족적 한을 푸는 기간이 3년 기간입니다.

제물이 되어야 할 축복가정

이번에 우리 교회가 정부에 등록된 것은 기뻐할 일이었지만 선생님은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제2차의 투쟁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제4차까지 가서 아버지가 기뻐하실 때 함께 기뻐하려고 합니다.

3년노정은 선생님이 가는 길입니다. 7년으로 끝내려던 것을 21년으로 끝내려 합니다. 그러니 앞으로의 4년으로 21년은 끝나는 것입니다.

이 민족은 점점 혼란에 빠져 갑니다. 우리는 이때를 대비해야 합니다. 속죄의 제단은 통일교회밖에 없습니다. 4년이 지난 후에는 이 민족을 동원하여 세계를 위해 희생봉사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눈물과 피로써 세계를 복귀해야 합니다. 한국이 문제가 아닙니다.

종교의 길은 개인으로 가는 길 같으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제는 축복가정이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축복받은 가족을 고생시키면 여러분들에게 화가 돌아가는 것입니다. 세계와 천주를 하나님 앞에 돌려놓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는 날이 하나님의 날입니다. 이것들을 하나님께 돌려드린 다음에도 ‘주겠으면 주고, 말겠으면 마십시오.’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하나님의 날을 축하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날을 바라보고서야 최후의 승리의 환호성을 올릴 것입니다. 이런 일을 위해 3년 기간이 있었습니다. 이 기간에 충성하지 못했으면 남은 기간에라도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이 일에 동참해 주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예수님의 목적과 모든 것이 이루어지니 그때 창조목적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1963년 10월 20일, 이날은 감격의 날입니다. 이제부터는 삼천만과의 싸움이 남아 있고 세계와의 싸움이 남아 있습니다.

<말씀 요지>

사람이 갓 태어났을 때는 젖만 알다가 성장하면서 부모를 알게 되고, 그 다음엔 자기를 알게 됩니다. 사람의 마음은 항상 최고의 기준까지 올라가려고 합니다. 어느 정도가 되어야 ‘이 이상은 필요 없다.’라고 할 것인가?

제일 높은 분은 누구라도 안심할 수 있는 분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지극히 선한 분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분은 세상에서 만들 수 없는 분입니다. 모든 것은 최고 선한 분으로부터 나와야 합니다. 그래야 안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이 선하지 못한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인간을 악하게 이끌어 가는 것은 몸입니다. 그러기에 종교가 몸의 악을 제거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몸의 악을 치는 것은 종교만으로는 아니 되므로 선생님은 종교가 찾지 못한 면을 개척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은 영원히 불변하는 것이며, 참의 주체이신 하나님도 영원히 불변하십니다. 마음의 힘을 배가할 수 있으면 몸을 치지 않아도 마음이 원하는 대로 몸을 주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을 어떻게 높일 수 있는가? 마음의 목적과 활동범위는 무한대입니다. 마음은 하나님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 하나님의 사랑까지도 독차지하려고 합니다.

종교는 하나님을 가르쳐 줍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라고 가르칩니다.

우주의 근본은 무엇인가? 참부모요, 참자식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한 데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 창조목적은 하나님을 중심한 가정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위기대입니다. 이 사위기대를 중심으로 대가족주의 세계를 이루어야 합니다.

통일교회의 말씀은 악을 심판하여 마음이 몸을 주관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자동적으로 사랑을 이끄는 일을 합니다.

인간시조가 청소년기에 타락했기 때문에 오늘날의 청소년들이 날로 문란해져 가고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심으로 인하여 인간은 하나님과 갈라졌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상에서 다시 오시는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십자가상에는 사탄이 올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은 모든 것을 버린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을 십자가상으로 몰아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골고다에서 종보다 천한 모습이 되어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골고다와 같은 자리에서 피와 눈물과 땀을 흘려야 합니다.

<말씀 요지>

좋은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나쁜 말을 들어도 좋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선생님은 강원도 사람을 좋은 사람들로 인정해 주고 싶습니다. 그러니 모든 말씀을 잘 들어 주기를 바랍니다.

도의 길은 모든 것을 부정하는 데서부터

세상에는 좋은 것이 많습니다. 더러는 그것이 돈이라고 할 것이고, 권세라고 할 것입니다. 또 지식이라고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만으로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는 없습니다. 그런 것은 나의 생사문제와는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진정 선한 사람이라면 마음과 몸이 선해야 하고 생활과 생애가 선해야 합니다.

도의 길은 모든 것을 부정하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기에 이 도를 좋아하는 사람과 좋아하지 않는 사람으로 나뉘게 되는 것입니다. 도가 요구하는 것과 세상이 요구하는 것이 상반되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한번 들어와 자리잡으면 나갈 수 없는 것이 도입니다.

선은 끝이 없고 악은 끝이 있습니다. 마음의 정체를 알아보면 마음은 무한합니다. 또 종교는 육신을 부정합니다. 인간의 중심인 마음이 선을 지향하는 것을 보면 인간은 본래 선한 존재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마음이 지향하는 궁극의 목적지는 하나님입니다.

‘선하라.’ 하는 것은 하나님을 닮게 하기 위함이며, 이것은 완전한 하나님의 대상이 되라는 뜻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일체를 이루어 하나님의 사랑을 독차지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선하게 하려 하십니다. 사람의 혼을 뼈라 한다면 정신은 살과 같습니다. 돌감람나무인 인간을 참감람나무에 접붙이려는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좋은 친구를 찾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까지 친구로 사귀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어떻게 해야 그 아들의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인가?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신 것은 인류를 그에게 접붙임으로 말미암아 혈통과 실체와 심정을 바꾸어 놓으려는 데 있는 것입니다.

피와 눈물과 땀으로 주는 것이 최고의 인도주의입니다. 예수님은 주기 위하여 왔고 또 아낌없이 주고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인도주의에서 천도주의를 세우려 하셨던 것입니다.

내가 고생하는 것은 우리 조상이 예수님을 죽인 탓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해야 합니다.

최고의 인도주의와 천도주의를 완결하기 위하여 통일교회가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천도주의의 방향과 때를 알게 되면 이 길을 가지 말래도 가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출발점과 방향과 때를 알면 앞길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통일교회는 1960년부터 시작된 7년노정중 3년노정을 지나왔습니다. 외적인 역사에 있어서도 변화가 있었습니다. 3년에 걸쳐 세 정권이 등장했습니다.

오늘날의 사회 현실을 보면, 청소년의 비행이 큰 사회문제가 되고 있으나 이것은 국책으로서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요즘 유행하고 있는 트위스트는 손발 궁둥이로 타락했다는 것을 나타낸 춤입니다. 이에 대한 대책을 세우는 책임이 통일교회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연두표어를 ‘생애중 최대의 실적(승리)을 남기는 해가 되게 하자.’ ‘아버님의 대신자(개성 완성자)가 되 자. 보여 주고 자랑할 수 있는 자(주관자)가 되자.’로 했습니다.

인간은 모든 생활감정을 하나님과 같이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3년 만에 영적 구원의 문을 열었지만 우리는 영적 육적으로 사위기대를 복귀해야 합니다. 한국의 기독교가 사명을 못했기 때문에 그 사명이 통일교회로 옮겨진 것입니다.

지난 3년 기간은 선생님이 본향을 찾는 기간이었습니다. 지상천국과 천상천국, 이 본향을 찾기 위해 많은 선열들이 죽어갔습니다.

민족복귀를 위한 4년노정

하나님은 맞고 빼앗아 오십니다. 하나를 주고 셋을 빼앗아 옵니다.

예수님은 3년 동안에 하나님, 이스라엘, 유대교, 선열의 한을 풀어야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세계적인 주권을 갖고 오셨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었다면 하나의 주권과 하나의 백성이 세워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민족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은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셨습니다. 만약 유대민족이 예수님을 믿고 따랐더라면 그 당시에 로마인들까지 구원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교와 이스라엘 민족이 반대하므로 선의 주권을 이룰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렸습니다. 예수님 생전에 세계만방을 통일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하고 영적으로만 그 형태를 이루어 나오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민주진영은 제2이스라엘 나라와 같고 기독교는 제2유대교의 입장에 있습니다. 따라서 미국의 문화적 지배를 받고 있는 한국은 이스라엘과 같고, 미국은 로마와 같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환경에서 모든 것을 탕감복귀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예수님과 같이 쫓기는 교회(통일교회)가 나와야 합니다. 사명을 못하는 기독교를 밀어제치고 새로운 종교 단체가 나와야 합니다.

예수님은 돌아가셨지만 통일교회는 한국을 중심하고 사탄과 싸워 이김으로써 예수님의 한을 탕감복귀해야 합니다. 우리 통일교회는 지난 3년에 걸쳐 승리의 실적을 거두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한을 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천국으로 가지 못했습니다. 천국은 혼자서 가는 것이 아니라 가정을 이루어서 가야 합니다. 부모를 모시고 상대기대를 이루어서 아들딸을 품고 가야 합니다. 믿음의 3자녀를 택하여 가정 형태를 갖추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3제자, 즉 아담, 노아, 아브라함을 상징하는 3자녀를 찾으려 했으나, 3제자마저 예수님과 하나되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돌아가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과 성신의 한을 풀기 위해 3자녀를 중심한 36가정을 세움으로써 잃어버린 조상을 찾아 세우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조상을 세움으로 인해, 그 후손들이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아담을 중심하고 가인 아벨형(型)을 완결해야 하므로 72가정을 세웠습니다. 이 가정을 세움으로 인해 사위기대 형의 조상 기반을 완성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120문도를 중심하고 낙원에 들어가셨으니, 그와 같이 이 120문도를 지상에도 세워야 합니다. 그래서 120쌍 축복이 있었습니다.

지금까지는 사탄이 끌어갔지만 이제는 하나님이 끌어당기는 때입니다. 사탄이 빼앗아갈 때 영계의 협조를 받으면 손해보지만, 빼앗아오는 때에 영계에서 도와주면 도와줄수록 혜택이 큰 것입니다.

우리 삼천만 민족은 세계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혜택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한민족은 설령 믿지 않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제2이스라엘권 내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선조는 제1이스라엘과 같은 입장에 있기 때문에 영인들이 재림협조할 때가 되었습니다.

3년노정의 의의는 잃어버린 아들딸을 찾아 모든 것을 해원성사하고 대이동을 하는 데 있습니다. 야곱이 하란에서 자녀를 찾은 후에는 가나안으로 대이동을 했고, 모세 때도 애급에서 나왔듯이 통일교회의 축복을 받은 무리는 대이동을 해야 합니다. 지금은 한국에서 하지만 나중에는 동반구와 서반구에서 동시에 벌어져야 합니다. 이것은 모든 담을 무너뜨리기 위함입니다.

3수는 자녀를 찾기 위한 분별 수이며, 4수는 만물을 찾아 세우는 수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1차적인 계획에 성공했습니다. 이 3년 동안에 승리하여 세계로 진출하는 기반을 닦았습니다. 이러한 터 위에 제2이스라엘을 찾아야 합니다.

이제 앞으로 남은 4년은 민족복귀를 위해 활동해야 하는 기간입니다. 그러므로 있는 힘을 다해 백성과 국토를 복귀하기 위해 활동하여 승리해야 합니다. 선생님이 걸어왔던 40년을 여러분들은 4년 동안에 가는 것입니다.

앞으로 통일교회라는 간판을 떼는 것도 여러분의 손에 달렸습니다. 통일교회가 아닌 통일 한국을 만들고 그 기반 위에 통일세계를 이루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책임 못하면 외국인을 시켜서라도 할 것입니다. 그들이 이 3년노정을 걷지 못했고 선생님과 같이 피눈물을 흘리지 못하였습니다. 선생님과 같은 입장에서 눈물을 흘릴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눈물 없이는 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한국을 제사장 국가로 만들어야 할 우리

선생님이 순회하는 길에는 맨발 벗고 순회해야 합니다. 그래서 축복가정을 고생시키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이 성신을 보내어 제2이스라엘을 창건하기 위해 고생시킨 것같이.

남자는 예수님 대신, 여자는 성신 대신 고생해야 합니다. 성신이 땅에서 수고한 것같이 여자들은 식구를 키우는 데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남편과 아내는 하나님 앞에 수고한 보고를 하여 뜻이 빨리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애원해야 합니다. 가정이 모범을 보여 전통을 세워야 합니다.

어머니는 열심히 기도해야 합니다. 책임 다하지 못하면 대신자를 세우게 됩니다.

여러분이 선생님을 굶게 해서는 안 되는 것같이 축복받은 식구들을 굶겨서는 안 됩니다. 축복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한 것이기 때문에 그들의 굶는 것을 가슴 아프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삼천만 민족은 우리 뒤를 따라오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이 민족이 통일교회 이념이 아니면 안 된다는 입장에 서게 해야 합니다. 한국을 만방에 호령할 수 있는 제사장 국가로 만들어야 합니다. 쓰러지더라도 삼천만 민족을 붙들고 쓰러져야 합니다.

7년 대환난은 개인을 복귀하기 위한 7년, 가정을 복귀하기 위한 7년 등 7년씩 일곱 번을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생님만 믿고 가면 7년 만에 끝낼 수 있는 것입니다. 제2차 대전 후 7년 만에 가려고 했는데 틀어짐으로 말미암아 옥중을 거쳐 나오게 되었습니다.

야곱이 하란에 가서 고생했던 21년노정이 이제 4년 기간으로 끝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기간은 한 번밖에 없습니다. 선생님은 여러분이 선생님과 같이 고생하는 탕감기간이 빨리 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민족을 위하여, 선생님은 세계를 위하여 가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날, 하나님의 날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천상천하에 수많은 날이 있었으나 하나님의 날은 없었습니다. 사탄을 무찌르고 모든 곤경을 타파하여 하나님께 승리의 영광을 돌려 드릴 때 하나님의 창조이념이 완결되고, 모든 자녀들이 영광된 날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날이 빨리 오게 해야 합니다.

이것을 맹세합시다. 이를 위해 동원되는 것을 영광으로 압시다. 이런 사람이 승리자 중의 승리자요, 효자 중의 효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친히 효자라고 말씀하실 수 있는 사람이 됩시다.

<말씀 요지>

개체를 두고 보아도 몸과 마음이 통일되지 않았습니다. 이 싸움은 반드시 결말을 지어야 합니다. 사람이 싸우고 있기 때문에 천지도 싸움 가운데 있습니다.

선을 중심하고 본 행·불행

인간의 마음과 몸이 통일되더라도 가정이, 민족이, 하늘과 땅이, 하나님과 인간이 통일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사람들은 선하고 행복하기를 소망하지만 자신과 만나는 사람들도 선하고 행복하게 해 주려고 해야 합니다. 개인을 희생하여 가정이 행복해지면 그것은 선입니다. 가정을 희생하여 민족이 행복해지면 그것도 선입니다.

그러면 참다운 선은 누구의 것인가? 나보다도 위에 있는 분, 즉 하나님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선입니다. 내가 윗분에게 드렸다고 해서 선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윗분이 기뻐할 때 나도 기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개체로서는 행복할 수 없는 것이기에 행복은 보다 높은 곳에서 찾아야 합니다.

악의 기점은 외적인 곳에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계시는 한 악한 것은 망하고 선한 것만이 남아집니다. 그러므로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는 공존할 수 없습니다. 보다 선한 것이 남아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민주주의보다 높은 이념의 세계가 오게 되면 민주주의는 사라지게 됩니다.

하나님을 중심하고 볼 때 선의 근본은 사랑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통일은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탄보다 더 수준 높은 사랑을 하면 사탄도 끌려오게 됩니다. 하나님은 최고의 선과 사랑을 주기 위하여 천지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주어야 진정한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만물의 영장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과 하나될 때 영장이 되는 것입니다. 잘 주고 잘 받기 위하여 창조된 인간인데 줄 수 없고 받을 수 없는 입장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여기에서 불행은 출발된 것입니다.

사람이 좋은 사람을 만나려 하는 것은 더 좋은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기 위함이요, 좋은 것을 찾는 것도 결국 하나님을 만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이 기쁨입니다.

하나를 받고 열을 줄 수 있으면 열 자식을 번식한 것과 같습니다. 통일은 받고 싶을 때 줄 수 있는 주체가 되고 주고 싶을 때 받을 수 있는 대상이 있을 때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에게는 줄 수 있는 대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줄 대상을 찾아 나왔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주면 줄수록 화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제일 가까운 명사를 걸어 놓고 주려 하시나니 그것이 바로 자식이라는 명사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전부 받아서 인간들에게 나누어 주려고 오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인간의 몸을 쓴 참부모로 오시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통일한다고 했으니 그분이 나의 신랑이 되든가, 부모가 되든가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최고의 행복의 실체, 최고의 사랑의 실체로 나타납니다. 그분과 관계를 맺게 되면 내 자신보다 몇십 배 몇백 배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천국은 가정을 확대한 것

예수님은 하나님을 부모라 하고 자신은 인류의 신랑이며 형제라고 했습니다. 이는 가정의 중요함을 말한 것입니다. 천국은 하나님을 중심한 가족을 중심하여 통일된 세계입니다. 통일은 식구라는 명사로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중심한 가정을 세워야 합니다. 또 하나님을 중심한 대가족주의가 나와야 합니다. 가정을 확대한 세계가 바로 지상천국인 것입니다. 그 세계에서는 말씀만 들어도 자연히 마음이 끌립니다.

몸에 대한 마음의 요구는 무한합니다. 이와 같이 마음이 몸에 무한의 명령을 하는 것은 무한의 하나님이 주체로 계시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하나님의 사랑을 완전히 소유해야 요구를 끝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효자 효녀 되는 법, 충신 열녀 되는 법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오시는 주님에 대해서는 효자 효녀가 되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충신열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르쳐 주는 곳이 통일교회입니다.

오른편 강도가 예수님과 같이 죽지 않았다면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을 뻔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본향으로 가기를 바랍니다.

타락은 주인의 딸을 늙은 종이 유린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사탄의 혈통을 이어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종의 입장에 처한 인간을 사랑하지 않고 쇠사슬로 묶어 버렸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본심의 작용에 의하여 하나님을 찾아가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부모를 잃어버린 고아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가족, 종족, 민족을 다 잃었습니다. 개인을 지배하는 사탄을 물리치려면 개인을 죽여야 하고, 가정을 지배하는 사탄을 물리치려면 가정을 죽여야 하고, 종족을 지배하는 사탄을 물리치려면 종족을 죽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죽이지 못하고 세계적인 승리의 기대를 조성하여 사탄의 종노릇 하던 인간에게 사탄에 대한 심판권을 주시려는 것입니다. 이 목적을 위해 종에서부터 찾아 올라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셔서 모든 인간들을 접붙여 참감람나무를 만들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영적으로만 해 오셨습니다.

본연의 가정, 종족, 민족, 국가, 세계의 선주권을 잃어버렸으니 이 창조목적을 다시 찾아 이루어야 합니다. 이러한 목적을 가지고 오시는 분이 재림주님이십니다. 타락한 인간의 첫째 소망은 하나님 편으로 돌아가는 것이요, 둘째 소망은 천지를 내 것으로 찾는 것이요, 셋째 소망은 원수를 갚은 것입니다.

본연의 책임은 부모이신 하나님이 지고 계십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종의 자리에서 예수님에게 접붙이려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우리를 접붙여 주시려고 가지고 오신 말씀을 복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외적으로는 이스라엘 민족이 불신하고 내적으로는 유대교가 불신함으로 말미암아 본향 땅을 잃어버렸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예수님의 백성이 되어 그 나라의 국토와 주권을 찾아 세워야 했었습니다.

고생의 길은 사탄이 못 따라온다

만왕의 왕을 중심한 종족을 만들기 위하여 유대교는 효자 효녀가 되게 하고, 이스라엘 민족은 충신 열녀가 되게 해야 했었습니다. 유대 나라는 로마의 속국이었으니 로마를 뜻 가운데 세우면 곧 세계를 하나의 뜻 가운데로 세울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여의치 않아 그 민족은 방랑객이 되었습니다. 제1차 에덴에서 본향을 잃고, 제2차 유대 나라에서도 기회를 잃었으니 영적 가나안 복지에서 역사하게 된 것입니다.

역사는 동시성의 시대를 형성해 나가기 때문에 영적 이념을 중심한 제2이스라엘이 있게 됩니다. 지금의 기독교는 2천년 전의 유대교의 입장입니다. 민주주의는 기독교를 중심한 세계를 이루어야 합니다.

한국은 유대 나라와 같은 입장이며 미국은 로마와 같은 입장입니다. 한국의 기독교는 내적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내적 유대교의 입장으로 세계 기독교의 축소형이며 한국은 내적 이스라엘 국가의 입장입니다. 이스라엘이 로마의 속국이었던 것과 같이 한국은 미국에 의해 경제와 문화의 지배를 당하고 있습니다.

통일교회와 한국 민족과 한국의 기독교가 하나 되었다면 예수님 당시 예수님과 유대교가 하나되지 못했던 것을 탕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불신함으로 말미암아 통일교회는 예수님과 같이 골고다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여기에서 승리했습니다.

7년에 하려던 것이 21년으로 연장되었습니다. 야곱이 아내를 취하기까지 14년, 만물을 찾기까지의 7년을 재탕감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야곱과 같이 자녀와 물질을 찾아 세계적 가나안을 찾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반대하는 기독교와 싸워 승리한 형으로 등록허가가 난 것입니다. 미국에서도 등록이 되었으니 이제는 사위기대를 중심하여 본연의 가정을 찾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역사적인 한을 풀기 위하여 합동결혼식을 하는 것이니 이것으로 본연의 가정을 찾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천지 운세는 이것을 중심하고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한국 민족은 예수를 안 믿어도 이스라엘 민족과 같은 입장에 서 있기 때문에 한국의 영인들은 자기 후손에게 협조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장중(掌中)에 넣지 못하였으니 우리는 앞으로 4년노정을 걸어서 이것을 탕감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인연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땅과 주권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맞고 빼앗아 오는 것입니다. 이제는 민족창건을 위하여 가는 것입니다. 앞으로의 4년으로 21년이 끝나는 것입니다.

이제 대이동이 있을 것입니다. 야곱, 모세, 예수님 때와 같이 이 세계는 물론 영계까지 복귀하여 하나님께 바치는 날이 하나님의 날입니다. 아들딸에게 상을 줌으로써 세상 사람들이 들어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이 기간에 동참했다는 것만으로 세계의 다른 민족보다 앞설 수 있게 됩니다. 지금은 오후 5시 45분입니다. 최후의 결의를 합시다. 그러기 위하여는 고생을 해야 됩니다.

고생의 길은 사탄이 못 따라옵니다. 십자가에서 맹세한 것은 천지가 변해도 변할 수 없습니다.

<말씀 요지>

오늘 말씀드릴 제목은 ‘최후의 승리자’입니다.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사위기대를 이루어서 지상천국을 이루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타락으로 인하여 지상천국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인간은 무가치한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완성한 인간은 하나님의 심정과 소망과 사정을 알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최고의 욕망은 만왕의 왕인 참아버지의 입장에서 하나님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아담 해와는 하나님의 심정과 소원과 사정의 대상입니다. 그러므로 아담 해와의 타락은 하나님의 심정과 소원과 사정을 깨뜨려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정과 소원과 사정을 다시 찾으려니 아담 해와를 복귀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니할래야 아니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심정 때문에 복귀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무시하면 하나님은 스스로 법도의 하나님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정과 소원과 사정 중 두 가지만이라도 일치된다면 복귀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적으로는 심정으로, 외적으로는 소원과 사정으로 복귀해 나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원과 사정이 일치될 때 심정이 나타납니다. 이것을 하나로 연결하실 분이 재림주인 것입니다.

오늘의 인간 사회에는 하나님의 소원과 사정이 직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정과 소원과 사정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날 하나님의 날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 세계는 사정이 서로 통하는 세계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심정적으로도 서로 뗄래야 뗄 수 없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타락한 인간의 구원을 책임지고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탄세계를 싫어하는 사람들을 택하고, 사탄세계에서 지친 사람들을 택해서 세워 나온 것이 선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대신하여 세례 요한을 보내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40일 금식을 하면서 외쳤지만 결국은 책임을 다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 제2이스라엘을 세웠던 것입니다.

통일교회는 하나님의 소원과 사정을 가르쳐 주고 심정일치를 이루게 하여 사탄의 참소조건을 벗어나게 해야 합니다.

선생님의 사명은 선생님 일대에 부모의 날, 자녀의 날, 만물의 날, 하나님의 날을 이 땅에 세우는 것입니다. 부모의 날, 자녀의 날, 만물의 날은 이미 세웠으니 하나님의 날을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부모의 날, 자녀의 날, 만물의 날은 전인류가 지켜야 할 날입니다.

세계적으로 맞이하여 전인류가 지켜야 할 날이 바로 하나님의 날입니다.

대통령이 지도하는 시대는 세계적인 사사시대인 것입니다. 이 시대가 지나면 왕국시대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말씀 요지>

복귀역사는 충신 열사, 효자 효녀를 통하여 이루어 나옵니다. 영인들도 충효의 도를 세워 나오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을 중심하고, 예수님 이후에는 예수님을 중심하고 충신 열사와 효자 효녀를 세우려 하였던 것입니다.

교회를 중심하고 보면 우리는 이념을 위하여 모였습니다. 그러나 가정을 중심하고 보면 식구를 위하여 모인 것입니다. 식구 속에는 부모가 있고 부부가 있습니다. 우리는 아버지를 위하여 모인 것입니다. 이념을 중심하고는 충신이 되어야 하고, 가정을 중심하고는 효자 효녀가 되어야 합니다. 내적으로는 심정적인 생활을, 외적으로는 이념적인 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러한 토대 위에 서야만 하나님의 대신자가 될 수 있습니다.

자녀는 충신, 효자가 되게 키워야 합니다. 외적으로는 충신, 내적으로는 효자가 되도록 길러야 합니다. 서로 권고하여 보충해 주어야 합니다. 지금은 여기에서 같이 초하루를 지내지만 앞으로는 자기 가정을 중심하고 지내야 합니다.

충신 열사, 효자 효녀의 입장에 선 후에야 이 행사에 참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과 같은 행사는 이것으로 마지막이 될지도 모릅니다.

기도를 할 때에도 내가 이렇게 하니 내 자식도 이렇게 하도록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자기가 먼저 표준이 된 후에야 자식을 그러한 위치에 세울 수 있습니다. 자신이 먼저 그러한 위치에 서면 하나님은 자연히 그 자식도 그와 같은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기에서 우리가 우리를 중심하고 그 방향을 돌려놓지 못하면 영계에 가서도 책임 추궁을 받게 될 것입니다.

초하루에는 새벽 5시에 각 가정에서 부부가 함께 본부를 향하여 경배해야 합니다. 기쁜 분위기 속에서 해야 합니다.

일요일에도 새벽 5시에 해야 합니다. 그때에는 일주일 동안의 모든 생활을 보고해야 합니다. 일요일은 어서 돌아오기를 바라는 기쁨의 날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외적인 박해가 심해 피할 곳이 없이 모두 본부에 모여 있었지만 이제는 더 품어서는 안 되므로 흩어져야 합니다.

부모의 날, 자녀의 날, 만물의 날도 교회의 것, 국가의 것, 세계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은 국가적인 장성기대를 세우는 때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날을 찾아 세우기 위함입니다.

<말씀 요지>

그간 여러분은 뜻을 앞에 놓고 죽음을 각오하는 맹세도 하였으며 그 맹세와 더불어 어려운 환경에서 투쟁해 나오기도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모르겠지만 그 결과가 이 민족 앞에 우리의 기반을 공고히 다지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것을 선생님은 잘 알고 있습니다. 수고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감사하지만 뜻을 알고 가야 할 사명을 느끼면서도 가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권고하고 싶은 것이 지금 선생님의 심정임을 여러분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나’는 선과 악의 기로에 서 있는 역사적 존재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사람들은 잠들어 있더라도 역사는 복귀섭리와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난 역사를 보아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그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무지 가운데, 혹은 악한 세대에 처해 있기 때문에 몰랐겠지만, 그 시대의 역사적인 방향은 언제나 어느 한 목적지를 향하여 움직여 나왔다는 것입니다.

시대를 수습하고 시대를 이끌어 가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역사는 하나의 목적지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역사적인 발전상을 보아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나’라는 한 존재가 지극히 귀하고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나’는 역사의 산물인 동시에 현재의 실존체요, 미래의 원천이 되어야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나는 오늘 참된 ‘나’가 되느냐, 그렇지 못한 ‘나’가 되느냐 하는 기로에 서 있는 것입니다. 내가 참을 부르짖고 참된 가치를 붙들려 할 때 거기에는 천주적인 문제가 인연되는 것이며, 내가 악한 입장에 서게 될 때 거기에는 역사적인 악이 인연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환경에 서 있는 자신이라는 것을 항상 명심하여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나’라는 한 존재는 우측에 서면 선이, 좌측에 서면 악이 될 수 있는 기로에 서 있는데, 이것은 역사적인 환경을 벗어나지 못하는 일반인들의 입장임은 물론 오늘날 뜻을 알고 뜻을 대하는 여러분의 입장 역시 그러하다는 것을 여러분은 확실히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뜻을 알고 난 후에 뜻을 중심삼은 선한 자체를 세워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러나 뜻을 안 우리들은 선한 자체도 되지 못하고 때로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반대의 입장에 서게 되는 때도 있습니다. 어떠한 인연과 사회적 환경이 우리를 반대의 입장으로 흘러가도록 에워쌀 때, 자기도 모르게 또 알면서도 가게 되는 것을 우리는 종종 체험합니다.

계획과정․준비과정․실천과정

그러면 여러분은 이러한 기로에 서 있는 자신을 중심삼고 어떻게 나아가야 되느냐?

모든 사람에게는 생각하는 기간이 있습니다. 생각한 다음에 옳다고 결정하였으면, 그것에 대한 자신의 결심이나 맹세의 기준을 중심삼아 가지고 스스로 준비할 수 있는 기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 준비의 기간을 통하여 비로소 승패가 결정됩니다. 이 준비기간에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의 실천 과정을 거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양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양심은 선을 기반으로 움직이기에 양심을 중심삼고 생각하는 사람은 언제나 참된 것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참된 것을 준비하고 참된 것을 실천하는 것이 인간의 본래 의무입니다.

사람이 그러할진대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가 계시다면, 그 창조주 역시 그러할 것입니다. 천지를 창조하기 전에 생각하는 기간이 있었을 것이고, 준비하는 기간 또한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이렇게 창조하겠다고 하는 결정적인 계획을 세우기 전에는 먼저 생각하는 기간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후 세워진 그 계획을 중심삼아 가지고 준비하는 과정을 지나 실천단계로 넘어가셨습니다. 이렇게 천지창조를 하셨다는 것입니다.

천지창조가 그러했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런 분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생각하는 기간으로부터 준비하는 기간과 실천하는 기간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 온 천지 만물을 지으신 것입니다.

그러면 실천단계에서 세워질 수 있는 중심 책임자는 누구뇨? 그것은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이 인간을 창조하기 위한 준비기간으로도 5일이라는 창조기간이 있었고, 그 기간을 중심삼고 마음의 세계에서 승리의 기반을 닦아 놓은 다음 준비과정을 거쳐 실천단계에까지 나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적인 마음의 세계에서도 싸움을 해야 했고, 준비를 하는 데 있어서도 싸움을 해야 했던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그러하듯이 하나님께서도 이러한 입장에서 지금까지 걸어 나오신 것입니다.

실천적인 사명은 하나님이 내적으로, 인간이 외적으로 완수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적인 승리의 주체인 하나님이 외적인 승리의 주체인 인간 앞에 내적인 조건을 제시하여 명령하면 인간이 행해야 하는데, 여기에는 반드시 투쟁이 따르게 됩니다. 이 투쟁은 인간의 맡은 바 책임인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조상이 실천과정에서 실패함으로 말미암아 타락이란 결과를 가져왔기에, 오늘날 수많은 인류는 다시 생각해야 되고 다시 준비해야 되고 다시 실천하지 않으면 안 될 운명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날 양심을 가진 사람이면 누구나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생각을 한 후에 준비하지 않을 수 없고, 준비를 한 후에 대외적인 환경을 중심삼고 투쟁의 과정을 거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승패가 결정되지 않습니다. 이런 과정이 재현된 운명의 노정을 개척해야 하는 입장에 서 있는 것이 오늘날의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참을 추구하는 사람이 가야 할 길

이제 여러분이 생각해야 될 것은 무엇이뇨? 물론 내가 좋아하고 내가 만족할 수 있는 생각을 해야 되겠지요. 그러나 개인이 기뻐할 것을 염두에 두고 생각하고, 준비하고, 실천해야 하는 것이 우리들의 사명이지만, 좋은 일을 생각하고 좋은 일을 준비하고 좋은 일을 실천한다는 것은 자기를 중심삼고 시작하여 자기에게서 결정하고 자기에게서 끝을 맺는 것이 아닙니다. 좋으면 좋을수록 그것은 나로부터 천주까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좋다는 것은 내 개인의 기준에서 시작하여 열매가 맺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상대적인 인연의 세계를 거쳐 열매가 맺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개인의 좋은 것은 가정의 좋은 것으로, 가정의 좋은 것은 종족의 좋은 것으로, 더 나아가 민족, 국가, 세계의 좋은 것으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선한 사람은 자기를 위주로 생각하거나 현세만을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는 물론 미래까지 생각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역사 도상에 있어서 개인적으로 참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을 참된 사람으로 세워 주기 위한 책임자요, 당대에 참된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모든 참된 사람을 대표하여 서 있는 사람입니다. 미래에 참된 사람이 있게 된다 할진대 그에게는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기반을 닦아야 할 책임이 있는 사람입니다. 참된 사람은 역사적인 책임을 짊어진 사람이기에 그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통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며 과거의 가치, 현재의 가치, 미래의 가치를 통할 수 있는 입장에 서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은 왜 그러한 입장에 서고자 하며 왜 그러한 것을 찾아 나오는가? 그것은 천륜을 움직이는 하나님 자신이 그와 같은 입장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실천적인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외적인 실체가 되어야 하는 우리의 필연적인 운명에 인연되어 있는 연, 우리의 마음도 그와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여러분의 마음이 움직이고 있는 것을 바라본다면 어느 누구도 우리는 더욱 큰 선을 위하여 태어났고, 더욱 큰 선을 위한 가치적 실존체로서, 역사를 대신하고 시대를 대신하고 미래를 대신하는 존재로서 삶을 영위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타락한 세상에서 살고 있는 사람을 바라보게 될 때 참된 사람이 되었느냐 하면 되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참된 가정이 되지 못하였고, 참된 사회, 참된 국가, 참된 세계가 되지 못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영계까지도 같은 입장에 처해 있습니다.

오늘날 이 세계 전체가 참되지 못한 것을 볼 때, 참을 동경하고 참을 추구해 가야 하는 우리의 길이 얼마나 처참할 것이며, 개척해야 할 분야 또한 얼마나 많을 것인가를 여러분은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에게 참된 이념세계와 관계를 맺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 할진대, 반드시 여러분이 가야 할 개척노정에는 험산 준령이 있을 것입니다.

내 개체의 선의 노정부터 천주적인 선의 노정까지는 전부 개척의 노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을 소망하고 참을 희구하는 간절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는 어떠한 결의를 하여야 되느냐? 우주사적인 투쟁을 하겠다는 단호한 결의를 하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선의 노정을 개척해 나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 개인이 그러할진대 오늘 이 천주를 움직여 나아가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 하나님 역시 그러하시다는 것입니다.

처음 생각하는 단계에서도 싸움으로 결정해야 하고, 그 다음 준비하는 단계에서도 싸움으로 준비해야 하고, 마지막 실천하는 단계에서도 싸움으로 실천해 나가야 합니다. 그 모든 과정은 투쟁입니다. 여러분은 이와 같은 단계의 과정을 자기 한 개체에 적용시켜 놓고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어떠한 이념을 붙들었다면 여러분은 그 이념을 중심삼고 우주사적인 환경과 더불어 몸부림치며 어떠한 어려운 환경에 처한다 할지라도 내 생애에서는 절대로 굴하지 않겠다는 강한 무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남아지는 것입니다.

지금은 여러분 스스로가 참의 이념세계에 인연을 맺으려는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되는 때입니다. 또 준비를 했으면 이것을 성사시키기 위하여 실천하지 않으면 안 될 ‘나’라는 것을 스스로 다짐하는 마음의 자세를 갖추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천지가 제아무리 악한 실체로서 여러분을 총공격한다 하더라도 마음에서부터 승자가 되어야 합니다.

선을 위한 대변자와 악에 대한 심판자가 되라

지금 우리들이 지향하고 나아가는 통일이념은 개인적인 승리를 표방하고 나온 것이냐? 아닙니다. 우리는 역사적인 최후의 승리를 표방하고 나온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역사적인 최대의 시험에 부딪쳐야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내가 깨어지지 않으려면 그것보다 내가 더 강해야 되는데, 그러려면 스스로 ‘나는 그 모든 것을 쳐부수고도 남을 수 있다.’고 하는 확고한 심적 기준을 가지고 천지가 동하더라도 동하지 않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스스로 그러한 심적 기준을 세워 준비해 나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입장에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오늘날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은 심중에 이런 이념에 의한 결정적인 중심을 세워 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한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중심을 세워 놓았다면 그 중심과 더불어 준비해야 됩니다. 세계적이고 천주적인 가치의 인격자가 되기를 꿈꾸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 거기에는 준비가 필요합니다. 만민을 호령하고 만민 앞에 추앙받는 입장에 서기를 원하면 원할수록, 그 범위가 크면 클수록 거기에 따르는 무수한 시련과 고통이 있으니, 이것을 수습할 수 있는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어떠한 환경에 부딪치더라도 넘어설 수 있고, 이런 환경은 나와 상관없다고 할 수 있는 기준을 세워야 합니다. 그러기 전에는 안 됩니다.

여러분 자신이 이 이념을 최고의 이념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모든 것을 양심에만 맡겨 양심에 따라 행한다면 여러분은 실체세계에 아무런 가치의 실적도 남기지 못하게 될 것이며, 그 세계와 상대되는 세계의 인연도 남기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만일 그런 상태에서 어떠한 환경이 인연 맺어졌다면 그 환경을 수습할 수 있는 무리가 되겠다고 아무리 결심을 천만번 한다 하더라도 승리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으로 말미암아 모든 환경이 인연되고 수습되기 때문입니다.

선한 자리는 물론이거니와 악한 자리도, 원수의 발판까지도 나와 인연이 있다고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승리적 기준을 갖고 꾸준히 준비하지 않으면 실천과정에서 푯대가 되지 못합니다. 그러한 준비를 갖춘 다음 선악의 싸움 무대에 나서게 될 때는 선을 위해서 대변자가 되고 악에 대해서 심판자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그러한 기로에 서야 할 역사적인 사명이 지워져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여러분들을 지도하는 선생님의 입장은 어떠한가? 생각하는 통일교회, 준비하는 통일교회, 실천하는 통일교회의 과정을 거치게 해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도 그렇습니다. 생각하는 복귀의 세계, 준비하는 복귀의 세계, 실천하는 복귀의 세계, 생각하는 선의 세계, 준비하는 선의 세계, 실천하는 선의 세계, 이 3단계의 과정을 거쳐 나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선생님을 따라 나오고 있는 지금은 어떤 때이냐? 실천하는 때입니다. 여러분은 실천하는 통일교회에서 선생님을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은 생각하던 통일교회, 준비하던 통일교회를 모릅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뜻을 책임지고 이 시대를 수습하려는 책임자가 있다면 그는 피동적인 사람이 아니라 주동자입니다. 통일교회도 지금까지 생각하는 시대로부터 준비하는 시대, 실천하는 시대를 거쳐 나와 어느 정도까지는 기준이 서 있기 때문에 통일교회나 통일교회 식구들은 피동적인 입장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주동적인 입장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더라도 개인적인 승리의 기반을 닦지 않고는 개인적인 주동자의 입장에 설 수 없으며 나아가 가정, 종족, 민족, 국가, 세계적인 주동자의 입장에도 설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뜻적으로 지금이 어떠한 시대인가를 알고 거기에 맞춰 먼저 개인적인 승리의 기반을 닦아야 합니다.

지금은 종족과 민족이 한꺼번에 연결되어서 종족적인 승리의 기반 위에 민족을 수습하여야 할 시대입니다. 여러분은 모르겠지만 역사적으로 내적인 투쟁시기, 사고적․준비적․실천적인 투쟁시기를 거치면서 하나님은 이미 수고한 승리의 기반을 갖추어 주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인간들이 그런 역사적인 가치를 망각해 버린다면 그때에는 망하는 것입니다.

피동적인 입장이 아닌 주동적인 입장에 서라

선한 사람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책임져야 합니다. 또 선을 위하여 충성을 다한 어떤 기반이 있다면, 그것을 백 퍼센트 고스란히 계승받을 수 있는 인격자가 되어야 합니다. 선한 사람들이 개인적인 발판, 가정적인 발판, 종족적인 발판, 민족적인 발판을 가졌다면 그것을 여러분이 상속 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은 개인적, 가정적, 종족적, 민족적인 기반 위에 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개인적인 승리를 갖추어 주고, 가정적인 승리를 갖추어 주고, 나아가 민족적, 국가적, 세계적인 승리를 갖추어 줄 것인가? 자기 자신이 개인으로부터 가정, 종족, 민족, 국가, 세계에 이르기까지 그 기반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것을 갖출 수 있는 환경을 가진 사람이나 그 길을 아는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에 복귀섭리노정에서 하나의 뜻을 중심삼고 나아갈 때에 같이 나아가고, 준비할 때에 같이 준비하고, 싸울 때에 같이 싸워 주는 하늘, 역사적인 배후가 있다는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는 무한히 복된 소식인 것입니다.

역사상의 우리의 선조들이 개인적인 승리의 발판을 닦고, 민족적인 승리의 발판을 닦고, 세계적인 승리의 발판을 닦기 위하여 하늘과 공동 목표 밑에서 선을 지향하며 싸워 나왔던 섭리적인 인연이 있었던 것은 우리에게 무한히 행복한 일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인연을 감사하게 느끼면서, 이 인연을 국가적인 입장에서 끝나게 할 것이 아니라 세계를 넘고 천주를 넘어 미래의 우리 후손들에게 까지 영원히 연결시켜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현시대에서만 달려갈 것이 아니라 미래에도 달려가야 되겠습니다. 그렇게 해야 여러분의 후손이 그런 것을 발판으로 삼아 출발할 수 있지 그렇지 않으면 끊어지는 것입니다.

이 시대를 생각하는 것, 즉 현실을 생각하는 것보다 미래를 더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발전하는 것입니다. 현실의 고충을 미래의 한 날의 행복을 위하여 참고 나아갈 때 발전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은 여러분이 국가적인 위기, 사상적인 위기 등 각 분야의 모든 위기들을 정비하는 입장에서 가야 함을 알았고, 참된 것이 어떤 것인지 알았고, 민족적인 결의와 세계적인 결의가 무엇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할진대 여러분은 각각 피동적인 입장에 서지 말고 주동적인 입장에 서서 여러분들 모두가 하나되어야 합니다. 그런 여러분들로 말미암아 새로운 이념이 출발되고 그 이념을 통하여 움직일 수 있는 사회, 국가, 세계까지 만들어 놓아야만 비로소 우리들이 지향하는 이념이 승리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적인 사실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세계적인 시대로 넘어가는 때

이제 여러분들은 통일교회의 승리의 기반을 상속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상속은 어떤 자리에서 받아야 하느냐 하는 것을 복귀섭리의 뜻을 중심삼고 생각해 볼 때, 하늘땅이 이루어진 그 내적인 가치는 여러분이 상상도 할 수 없고 꿈도 못 꾸는 가치입니다. 그냥 흘러가는 물결과 같이, 지나가는 행인과 같이, 세상을 알지 못하는 입장에서 되는 대로 살아가서는 안 됩니다.

하늘땅이 생겨난 이래 어느 누구도 옮길 수 없었던 전통적인 승리의 기반을 통일교회가 닦았다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승리도 되는 동시에 시대적인 승리도 될 수 있는 기반을 닦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역사적으로 인류의 대표자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여러분이 이것을 계승하지 않더라도 기필코 이 뜻을 계승하여 실천하는 무리가 생겨날 것입니다. 만일 이 나라가 계승하지 않으면 영계가 계승할 것이요, 이 민족이 계승하지 않으면 이방인이 계승할 것이요, 여러분 자신이 계승하지 않으면 여러분의 후손들이 계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시대가 왔다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짊어지고 있는 이런 시대적인 사명을 다하지 못한다면, 지금은 여러분 개체가 찾을 수 있는 것을 온 세계가 동원되어도 찾을 수 없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이냐? 마지막, 마지막이라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사명하던 시대의 실수는 가정적으로 사명하는 시대가 오면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이요, 가정적으로 사명하던 시대의 실수는 종족적으로 사명하는 시대가 오면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이요, 종족적으로 사명하던 시대의 실수는 민족적으로 사명하는 시대가 오면 용서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국가적인 시대에서 실수하게 되면 이 세우려 하였던 국가가 다 세워지기 전에는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즉 선한 주권의 세계가 되기 전에는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원칙을 알고 있는 우리는 지금 어떠한 입장에 처해 있느냐? 국가적인 시대를 거쳐 세계적인 시대로 넘어가는 때에 처해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용서받을 수 있으려면 세계적인 운세를 세워 놓아야만 합니다. 그런데 만일 여러분이 이 세계적인 운세를 수습할 수 없다면, 또 세계적인 터전이 여러분의 일대에서 종결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용서받을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최소한 하나의 국가 주권을 중심삼아야 최후의 심판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섭리의 표준이 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의 국가 주권을 세워서 넘어가는 때에는 용서라는 법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역사를 통해서 노아를 생각해 봅시다. 그 시대로 볼 때 노아는 바보요 어리석은 자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과거를 생각하고 현실을 생각하고 미래를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노아가 살던 세계는 악한 세계였기에 노아는 거기에 그냥 그대로 남아서는 안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때를 찾았고, 그때에 알맞은 참다운 사람을 찾았고, 그 참다운 사람이 자기를 지도해 주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었기에, 그러한 책임을 자신이 짊어질 수 있도록 하늘의 허락을 받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아는 남이 생각하지 않을 때에 생각한 사람이요, 남이 생각하지 못하는 일, 남이 준비하지 않는 일을 준비한 사람이요, 남이 실천하지 않는 일을 실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도 그러하였고, 모세도 그러하였고, 예수님도 그러하였고, 선생님 역시 그러하였습니다. 남이 생각하지 않는 일을 생각하였고, 남이 준비하지 않는 일을 준비하였고, 남이 실천하지 않는 일을 실천한 것입니다.

선생님은 통일교회를 국가적인 기준에서 결정적인 실천을 해야 할 단계까지 끌고 왔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통일교회에 들어와서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 옛날 노아와 같이 뜻을 위하여 생각하고 준비하고 실천해 본 적이 있으며, 선생님과 같이 뜻을 위하여 생각하고 준비하고 실천해 본 적이 있습니까? 자나깨나, 먹을 때나 입을 때나, 오나가나,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생활 전체를 심혈을 기울여 가지고 해 보았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하늘은 여러분을 위해서 역사할 수 없습니다.

과거에 내가 이러했고 오늘도 이러하니 미래에도 이럴 것이다 하면 안 됩니다. 과거의 여러분 그대로를 이 시대에서는 인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과거를 입증하고 현실을 입증할 수 있고, 과거를 수습하고 현실을 수습할 수 있는 민족적인 자아가 되었다면 문제가 없지만 과거 앞에 지배당하고 현실 앞에서도 지배당한다면 그곳에 하늘은 역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담의 사명을 대신해야 할 우리

여러분은 움직이고는 있지만 발전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발전해 나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복귀섭리를 해 나오는 데 있어서 후퇴한 것 같지만 발전해 나왔습니다. 내려가는 것 같지만 올라갔던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은 어떠한 때냐? 지금까지 우리는 개인으로부터, 혹은 가정으로부터, 혹은 민족 전체로부터 오는 시련을 받아 왔습니다. 통일교회라는 테두리 안에서 우리는 외적인 시련을 받아 왔습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남아지는 무리가 되었기에 우리는 국가적인 기준을 중심삼아 가지고 민족을 대신할 수 있고, 종교를 대신할 수 있고, 국가를 대신할 수 있는 무리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 세계적인 흐름에 부딪치는 한이 있더라도 여기에 남아지는 무리가 되어야지 그렇지 않는 한 통일교회는 세계적인 통일교회로, 또한 모든 주권을 대신하여 명령할 수 있는 통일교회로 설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이번 집회를 통해서 알아야 할 것은 무엇이뇨? 지금까지는 종교의 테두리 안에서 하늘의 협조를 받아 왔고 그런 종교적인 기반 위에서 외적인 시련과 투쟁을 해 나왔으나 이제는 내 자신이 하나님을 대신한 실체로서 싸워 나가야 되겠습니다.

아담에게는 하나님을 대신하여야 할 사명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그 사명을 못했습니다. 이제 그 사명을 오늘 이 시대에 우리가 책임지겠다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신념에 사무치는 여러분이 되어야지 그렇지 않을 때에는 오늘날의 국가적인 운세를 밀고 나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하나님이 여러분을 밀어 주었습니다. 여러분들을 내세워 싸울 때 거기에 영계와 육계를 협동시켰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늘의 협조 없이도 이 땅 위에 하늘을 대신한 중심과 땅을 대신한 여러분이 일체가 되어 싸워 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담 해와에게 천지 만물을 주관하라고 말씀하셨던 그 사실을 명심하여, 오늘날 이 천주의 어떠한 곳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가겠다는 단호한 결의가 용솟음쳐야 되겠습니다. 이것을 어느 누구도 제재할 수 없게 그 원동력을 보유하고 나서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가다가 떨어질 것입니다. 가다가 후퇴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 통일교회 교인들은 나를 본받으라고 부르짖어야 됩니다. 나는 하나님을 대신한 사람이며, 하나님을 대신하여 싸우기로 했으니 나를 본받으라고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의 마음에는 원수의 세계를 정복하겠다는 일념밖에 없는 것이요, 그 일생의 생활 전체는 그것을 위해 준비하는 기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준비가 되었으면 서슴없이 투쟁하는 것입니다. 하겠다는 신념에 사로잡히면 못 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곤란한 것은 여기에 영계에 다 통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영통하는 사람들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알아요? 통일교회의 움직임에 자기들도 가담시켜 달라는 것입니다. 그게 지금 그들의 요구입니다.

요즈음 선생님에게 몇몇 사람들이 보고하는데 수많은 영인들이 와서는 자기들도 여기에 가담하고 싶은데 언제 가담해야 되겠는지 선생님께 여쭈어 봐 달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선생님은 그 일을 선생님 자신이 하는 것보다도 여러분을 통하여 하기를 바랍니다. 그들에게 가담할 수 있는 권한을 선생님만 부여할 것이 아니라 이 뜻을 위하여 수고하는 모든 사람들도 부여하게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여러분들이 뜻을 위하다 간 수많은 순교자, 충신, 열녀, 선지선열들을 대신하여 명령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선에 대한 또 하나의 정의

그러면 여러분들이 그러한 특권을 부여할 수 있는 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이 시대를 생각하고 미래를 생각하는 여러분의 이념이 하나님의 심정과 일치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될 수 있으면 여러분들을 앞에 내세우고 선생님은 뒤에 있으려고 합니다. 이번에 축복받은 사람들이 가정을 대표하여 뜻 앞에 완전히 서서 하나님의 심정을 중심삼고 이념적인 결의를 가진다면 천주가 돌아가게 됩니다.

특정한 지방이 문제가 아닙니다. 껄렁껄렁한 패들이 되어 바람이 부는 대로 그저 이리저리 밀려 다니기 때문에 그렇게 고생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아무리 수고하며 준비한다 해도 영계를 통할 수 없습니다.

싸움을 하는 실천과정에 기필코 나가서 승리하겠다는 신념 밑에서 싸우는 사람이라면 배고픔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절대로 굶기지 않습니다. 그것을 선생님은 체험했습니다. 만일에 여러분들이 세상을 살아 나가는 데 투쟁하지 않고 지름길로 가려 하다가는 지지리 고생만하고 쓰러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중대한 책임을 오늘 우리들에게 맡기려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여러분 자신을 중심삼고 비판해 보십시오. 내가 통일교회에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지금까지 무엇을 했는가를, 뜻을 위해 내가 무엇과 부딪쳐 보았는가? 지금까지의 모든 일들은 나로부터 출발하여 나에게서 결과를 맺으려 했던 일들입니다. 내가 과거에 이렇게 하였으니 앞으로도 이렇게 하겠다 하는 것이 선입니까?

내가 한 것 중 좋은 것은 삼천만 민족에게 주고, 인류에게 주고, 만민에게 주어야 합니다. 그때 만물들이 알아주고 기뻐해 준다면 나도 함께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알아주지 않으면 낙망하게 되겠지만 그렇더라도 주겠다는 마음으로 가야 합니다.

만일 그런 마음을 갖지 않으면 저나라에 가서 하나님이 지금까지는 너희들을 위해 내가 수고해 나왔으니 이젠 너희가 나를 위하여 수고하라고 한다면 그때 어떻게 얼굴을 들겠는가 말입니다.

하나님은 저나라에 가는 전권까지 우리에게 넘겨주고 우리가 기뻐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아! 내가 그것을 못 가지게 되니 슬프구나. 내가 이렇게 안 되었으니 기뻐할 수 없다.’ 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오늘날 통일교회 청년들을 가만히 보면 나로부터 출발하여 나에게서 끝을 맺으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망하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그 뿌리를 사탄도 모르게 근본적으로 뽑으려는 것입니다.

선이라는 것은 나에게서 출발하여 나에게서 끝을 맺는 것이 아니요, 나로부터 시작하여 천천만까지 즐거워하여 그들의 즐거움이 나의 즐거움보다 더할 때 그것을 바라보고 내가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선이 그렇게 되어 있지 않다면 하나님은 최고의 독재자이며, 그런 하나님이라면 필요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오늘 여러분 자신을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충신이 되고 효자가 되어 있느냐에 대해서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오. 조금이라도 내게 불리할 때 돌아가기 위한 구멍을 찾고 있지나 않았는가? 만약 그런 자들이 있다면 선생님이 가만히 놓아두지 않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망한 동기가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노아가정이 실체헌제에 실패한 원인도 거기에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복귀섭리를 담당했던 지도자들 앞에서 반드시 그를 중심삼아야 할 자녀라든가, 가정이라든가, 혹은 제자들이 거의가 다 그랬습니다. 예수님을 선생님으로 모시던 제자들은 다 어디로 갔습니까? 바로 예수님을 모시던 그 제자들이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오늘 여러분들 중에도 아! 우리 선생님을 중심삼아 가지고 나가다가 좋은 시대가 되면 내가 우정승(右政丞)이 되어 보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전부가 세상을 중심삼아 가지고 하늘을 자기들의 출세의 방패로, 자기들의 성공의 방패로 삼으려는 사람들입니다. 선을 그렇게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선은 절대로 이용당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선을 이용하면 안 됩니다. 선은 절대로 이용당하지 않습니다. 한때는 이용당하는 것 같지만 결국에는 이용한 자가 망하는 것입니다. 이용하고 나서는 망한다는 것입니다.

성화(成和)의 참 뜻

그렇다면 뜻을 따라 나가는 여러분들은 선한 마음을 이용한 결과를 자기 자신 앞에 돌리기를 원하느냐? 아니면 만민 앞에 돌리기를 원하느냐? 선악의 분별은 거기서 벌어지는 것이요, 승패의 동기도 거기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나는 죽더라도 전체를 위해서 죽으니 다시 돌아오지 못하더라도 이것을 천추만대의 내 후손들에게 전해달라.’고 하는 사람이 선한 사람입니다. 내 일대를 위해 선을 이용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일대도 못 넘고 가던 길이 막혀 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성화청년회라는 이 글자의 뜻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성화(成和)라는 말은 어떠한 자극에 의해 피동적인 입장에서 화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능동적으로 화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뜻을 중심삼고 출발한 여러분들인데 아침에는 좋아하더니 저녁에는 울며 야단입니다. 또 밤이 되면 자기 하고픈 대로 다 하는데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안 사람들이라면 아침에는 울고 저녁이나 밤에는 기뻐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들은 처음에는 좋아하다가 나중에 가서는 이러니저러니 하며 많은 조건을 내거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화 졸업생들을 지긋지긋하게 고생시키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전부 한꺼번에 십자가에 매달아서 민족을 구할 수 있다면, 여러분을 전부 최고의 일선에 내보내서 쓰러지게 하여 죽음의 구덩이로 몰아넣어야 민족을 구할 수 있다면, 그러한 일을 시켜야 하고 해야 할 책임이 선생님과 여러분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목표는 학교니 직장이니 하는 세상적인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래서 이번 자녀의 날을 기해서 전국적으로 이런 무자비한 활동을 전개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거기에 함께하지 못한다면 이별할 수밖에 없습니다. 후진들에게 지장이 많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이 여러분과 같은 나이였을 때는 밤잠도 제대로 못 잤고, 먹고 입는 것도 마음대로 못 해 봤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일이든 여러분 마음대로 결정하지요? 계속 그렇게 해 나가 보세요. 어떻게 되나.

선생님은 지금도 종교의 길, 도의 길, 즉 인생의 길을 가며 그 길에 있는 죽음의 세력과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여기에 와 있지만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언제 공동묘지에 갈지 모릅니다. 천년 만년 살 것 같습니까? 여러분은 모두 내가 내 인생을 중심삼고 영원한 생명문제를 결정지어야 한다는 엄숙한 과제를 남겨 놓았기에 그 한을 푸는 것이 우리들의 생활노정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여러분들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으니 남의 생을 사는 것과 같습니다.

선생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죽음의 세력과 싸우는 그 순간에 내가 여기서 진다면 여기서 나는 죽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생각 안 해 보았습니까? 젊은이들은 언제 죽을지 생각하지 않겠지만 천년 만년 사는 게 아니니, 이것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가를 여러분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만민의 불행을 책임지는 하늘의 정병이 되라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이 손도 오래지 않아 뼈만 남을 것입니다. 지금은 모두 곱게 가꾸려 하지만 죽으면 뼈만 앙상하게 남을 것입니다. 또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원소 분해되어 뼈마저 없어질 것입니다. 그런 것이 나입니다. 너나할 것 없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고 어떠한 소원도 성취가 된다면 그 후에는 아무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선생님은 여러분만 못해서 이 일을 하고 있는 줄 압니까? 그렇다면 보따리를 싸도 벌써 쌌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돌고 돌아도, 아무리 다른 길을 가려고 해도 갈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이 길을 안 갈래야 안 갈 수 없기 때문에 가는 겁니다. 심각한 문제입니다.

자신이 이런 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짓고 인생의 참된 길을 찾았다 할진댄 여기서 끝나는 것이냐? 아닙니다. 내 사랑하는 부모와 형제가 있고 동시에 민족과 인류가 있고, 하늘땅이 있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입니까? 이렇게 전체가 가야 할 심각한 과정에 있는 어려운 문제, 중대한 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짓지 못한다면 전체가 고통 가운데서 탄식과 절망을 짊어지고 사망길을 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처참한 광경을 생각하게 될 때에 내가 피곤하다고 편안히 잠을 잘 수 없는 것이요, 내가 힘들다고 쉴 수 없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그러했습니다. 그런 입장에 들어가면 젊은 남녀들이 인생문제를 놓고 고민하다가 독약을 먹는 일, 혹은 몇천 척 되는 벼랑길 밑으로 떨어지는 일들이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누가 책임지겠습니까? 오늘날 한국의 모든 사람들이 신문을 통해서나 혹은 다른 매체를 통해서 이러한 비참상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언제 어느 때 내 자신 혹은 내 아들딸에게 그런 일이 찾아 들지 모르는 일입니다. 또 내 가정에서 그러한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그런 운명에 걸리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나는 거기에 관계없다고 생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역사상에 벌어졌던 모든 비참상은 남의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자신의 것입니다. 그것은 모두 내 사명이요, 내 책임인 것입니다. 자기 주위에서 일어나지 않았다고 해서 관계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늘 이렇게 성화졸업생들의 모임을 가지게 된 것은 전부 다 고생을 지긋지긋하게 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야 한이 풀리겠습니다.

삼천만 민족이 다 여러분을 반대한다 할지라도 변하지 않겠다는 신념을 가진 여러분이 되었습니까? 못 되었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러한 신념을 중심삼아 준비한 것을 갖고 실천 무대에 서서 어떠한 원수에게도 밀려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도 그럴 자신이 있습니까? 선생님은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여러분을 승리하지 않으면 안 될 최후의 한판 싸움터에 내보낼 수 있겠습니까? 선생님은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대로 내보냈다가는 전부 뒤로 도망가든가, 낙오병이 되든가, 옆으로 빠지든가 할 가능성이 많다는 것입니다.

적진의 중심부를 뚫고 들어가 원수세계를 점령하여 그곳에 하늘의 깃발을 꽂고 만민에게 승리의 영광을 돌려줄 수 있는 통일교회의 젊은 남녀들이 있느냐고 할 때에 여러분 자신은 어떠한가를 가만히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승리하여 최고 영광의 자리에 참석하는 사람이 되라

요전에 지구장들 모임에서도 말했듯이 통일교회가 움직이는데 통행금지가 지장이 되지 않도록 길을 터놓으라는 겁니다. 선생님이 직접 데리고 다닐 겁니다. 그래도 통행금지 운운하면서 안 움직이겠습니까? 붙들려서 경찰서에 들어간다구요? 선생님은 여러분이 책임을 다하려다가 길가에서 쓰러지는 것을 직접 보고 싶습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그리 못 하겠다면 그만 두십시오. 여러분들이 못 한다는 그런 환경에서 하늘은 하나 못 하나 두고 보라는 겁니다. 요즈음 선생님은 그러한 생각을 하며 하겠다고 각오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길도 닦아 놓고 재료도 준비하였다 하더라도 그것이 운반되어야 할 자리에 운반되지 못할 때는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주인의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도둑놈이 훔쳐가든가 불필요한 것이 된 채로 썩고 마는 것입니다.

3년 전 6회 졸업장을 받고 나서 떨어진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은 떨어지길 잘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무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가나안으로 가는 도중 광야에서 불평 불만하고 못 가겠다고 반대하고 모세를 내쫓던 무리와 같은 무리가 되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생각하는 내적인 세계에서 마음을 중심삼고 싸워 승리의 기반을 닦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맹세로써 꾸준히 준비하여 선의 그 자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최후의 실천 무대가 한국이 아닌 세계 무대에서 멋지게 싸워 승리함으로써 최고의 영광의 자리에 참석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그런 여러분이 되어 주기를 부탁합니다.

여러분은 자기 자신만 바라보지 말고 하늘을 바라보고 선생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선생님은 지금까지 지치지 않았습니다. 옛날에는 싸울 때에 방어전을 취해 나갔지만 이제는 공격전을 펴 나가는 것입니다. 선생님도 일선에 서서 나가는데 여러분이 가만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에 틈을 주지 말고, 언제나 준비태세를 갖추어서 명령만 내리면 그 명령에 대해 백 퍼센트 행동을 취해야 됩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 이렇게 될 수 있다는 신념을 재수습하여 이 삼천리반도를 뒤흔들어야 하겠습니다. 알겠습니까? 여러분 할 자신이 있습니까?

<말씀 요지>

한국을 지세로 보면, 해가 돋는 동쪽은 남성을 의미하고 해가 지는 서쪽은 여성을 의미합니다.

재림역사는 부인의 역사로 시작되어야 합니다. 더구나 한국은 여신을 숭배하는 일본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여성이 역사를 먼저 일으켜야 했습니다.

한국에서 부인으로서 역사를 처음 시작한 사람이 김성도인데, 이것을 소생으로 하여 허호빈을 거쳐 박 노파로 이어졌습니다. 특히 이 부인들 중 김성도는 처음으로 복귀라는 말을 썼고 타락의 근본과 예수님의 억울한 죽음, 그리고 예수님의 육신 재림을 제일 먼저 말했었습니다. 그녀는 어머니의 사명과 신부의 사명을 다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한국의 동쪽 지방에서는 이용도, 황국주, 백남주 등 3인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백남주는 김성도에게 맨발로 찾아와 절하고 종의 입장에서 섬겨 올라와야 했습니다. 복귀시대이기 때문에 남자가 먼저 여자를 찾아와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1920년 이후 내적 역사에 따라 신사참배에 대항하는 남녀의 외적인 신령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때 만약 그들이 선생님과 하나되었더라면 선생님은 고생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한국은 신앙의 조국으로서 사탄세계에 대한 승리의 기대를 세워야 합니다. 해방되던 해가 선생님이 26세 되는 해입니다. 해방 후 선생님은 여호와의 부인이라고 자칭하는 박 노파(박을룡)라고 하는 부인을 7개월 만에 찾았습니다. 또 그 이후 원산에서 역사하던 신령역사의 줄기를 찾아야 했는데 그 맥을 이은 사람이 바로 김백문입니다. 선생님은 그들의 축복을 받아야 했습니다.

박 노파를 찾아간 선생님은 그가 축복해 주고 증거해 줄 때까지 종의 자리에서 충성을 하고 그녀의 아들딸까지도 섬겼습니다. 그러나 그 노파는 선생님을 축복하고 증거한 이상, 섬김을 받는 자리에서 섬기는 입장으로 내려와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기 때문에 미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녀는 자기 슬하의 6남 4녀가 천지를 대표한 역사를 한다고 믿고만 있었지, 그것이 아담으로부터 노아까지의 10대를 대신하는 역사임을 몰랐던 것입니다.

박 노파로부터 축복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선생님은 주관성을 복귀하고 실체를 복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즉 축복복귀, 주권복귀, 실체복귀를 해 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집의 소유를 결정하는 문서는 휴지에 써도 괜찮습니다. 주인의 날인만 받으면 그것으로 완전합니다. 이와 같이 어머님도 당신의 사명을 모른다 해도 어머니의 위치에 세워 놓으면 그것으로 되는 것입니다.

<말씀 요지>

고생을 피하려는 자는 양자나 거짓 자식은 될 수 있어도 참자식은 될 수가 없습니다.

명년은 섭리적으로 아주 중요한 시기입니다. 국내 정세로 보나 세계 정세로 보나 그러합니다. 특히 지금부터 7개월 간은 섭리적으로 아주 귀중한 때입니다.

지금은 전체가 동원되어야 할 때입니다. 선생님은 시간만 있으면, 하나님이 바라시는 최고의 기준에서 여러분을 지도하고자 합니다.

사람은 자기 환경을 수습하고 때를 맞출 줄 알아야 합니다.

노아가 120년 동안 방주를 만들 때에 핍박과 고생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핍박받는 교회일수록 하나님과 가까이 있는 것이고, 욕을 먹는 사람일수록 착한 사람입니다. 역사는 쫓김을 받는 사람들에 의해서 엮어져 내려왔습니다.

선생님이 여러분에게 욕을 하는 것은 사탄을 피하는 길을 열어 주기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바쁜 때에 먹을 것 다 먹고, 잠잘 것 다 자고 언제 하늘나라를 세우겠습니까? 지금 우리는 너무나 바쁩니다. 통행금지 시간만 없다면 우리 식구들 모두가 교대로 밤새도록 활동해야 합니다.

망하는 자리에 처하더라도 굽히지 말고, 쉬지 말고 나가라고 채찍질하는 것이 양심입니다.

삼위신의 권능으로 사탄을 굴복시킨다 해도 내 몸뚱이가 사탄의 사슬에 얽매여 있으니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도의 길은 먼저 내 몸을 쳐서 정복하는 것입니다. 먹고 입고 자는 것을 주관하지 못하면 도의 길을 가지 못합니다.

세상에서는 돈과 지식과 권세가 필요하지만 도의 길을 가려면 그런 것에 대한 미련이 없어야 합니다. 자고로 물질은 죄의 뿌리가 되어 왔습니다. 지식을 자랑하겠습니까? 현재의 지식 가운데는 사탄의 지식이 많고, 현재의 문화 역시 타락한 세상의 문화입니다. 결코 본연의 지식이나 문화가 아니므로 한 때가 오면 모두 청산하고 새출발을 해야 합니다.

원리를 배우는 근본 목적은 나 자신을 복귀하기 위함입니다.

나 자체는 과거의 실증체요, 미래의 상징체입니다. 그러므로 세계적인 운세에 맞추어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언젠가는 깨져 버립니다. 천지 운세의 물결을 타고 나갈 때 방향을 잘 잡아야 합니다. 아무렇게나 바람부는 대로 가다가는 암초에 부딪칩니다.

세상 풍파를 거슬러서 망하지 않는 길을 찾아가는 사람들이 도인들이며, 그러한 단체를 만드는 것이 도의 목적입니다.

종교인은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이제 세계 운세의 종말시기는 왔습니다.

공산주의와 민주주의 그리고 유교와 불교, 기독교 중 어느 것이 참도인가? 언제 올지 알 수 없는 끝날을 대비하는 것이 도의 길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천당 갈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그 앞길에 심판대가 놓여 있다는 것을 기독교인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심판대에 서서 ‘아버지여, 내가 하늘땅을 책임질 수 있습니까?’라고 물어야 할 입장에 서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변호인이니 예수님께 우리의 죄를 직고해야 합니다.

생사를 걸어 놓고 하나님과 인연을 맺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는 사탄도 그 사이를 끊지 못합니다. 그래야만 여러분은 하늘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기성교회 목사들이 인도하는 예배를 통하여 천당 갈 수 있겠습니까?

죄인은 공판정에서 판사의 심판을 받는 것 외의 다른 것은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도인 역시 심판날 외의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니 하나 하나의 행동은 모두가 심판을 대비한 행동이 되어야 합니다. 죄없는 사람에게 심판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모든 것을 다 밟고 올라서야 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한 번은 하나님의 공판정에 서야 할 미결수와 같은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평안한 자리에서도 항상 어려운 때를 대비하여 시련을 시키는 사람이 훌륭한 지도자입니다. 편안히 믿고 천국 가려는 사람은 기성교회로 가야 합니다. 내 자신의 몸을 중심삼고 현재의 모든 고난을 넘어가야 합니다. 나쁜 명사들의 가장 큰 주인이 바로 사탄입니다.

하나님을 중심삼고, 마음과 같은 입장의 예수님과 몸과 같은 입장의 제자들이 일체를 이루었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불신으로 인하여 몸도 마음도 모두 깨어져 버렸습니다. 이것이 곧 십자가인 것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의 인연을 거쳐서 어머니를 통하여 탄생되어야 그 집에 입적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신학박사나 목사들은 자기들 잘난 멋에 살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 땅에 어머니를 찾기 위해 오십니다. 그것은 어머니를 통해서 아들딸을 찾아 천국에 입적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러기 위해 오시는 주님이 구름을 타고 오시겠습니까? 통일교회를 이단이라고 하지만 끝날에 두고 보자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계적인 고통을 대신해야만 합니다. 아무리 거센 물결이라도 능히 막아낼 수 있어야 합니다. 상처 없이 굳건히 설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통일교회 신도들 앞에는 6천년의 고통이 한꺼번에 닥치고 있습니다. 해방의 날이 올 때까지 그것을 이겨 나가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속에는 하늘을 대신한 피가 끓고 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역사적인 살인강도의 피가 뜁니다. 원리를 가르치는 것은 그 역사적인 죄를 회개시키기 위함입니다. 역사적인 죄를 회개해야만, 역사적인 원한이 풀리고 우리는 역사적인 결실체로서의 자격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6천년 전보다 문화는 발전되었지만, 인생의 희로애락의 감정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지금까지는 개인, 가정, 종족적인 환난과 핍박을 거쳐왔지만 앞으로는 민족적이며 세계적인 환난과 핍박을 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아담 해와의 한을 풀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주신 후에는 반드시 시련을 주십니다. 그래야 사탄의 참소를 막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을 몰아쳤던 것도 이 때문입니다.

지금부터 7개월이 고비입니다. 여러분은 어떠한 핍박도 이겨낼 수 있어야 합니다. 고생을 많이 한 사람이 행복한 사람인 것입니다. 선생님은 고생에 있어서는 산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선생님을 중심삼고 하나님과 힘을 합해서 정성들이면 이 민족이 우리들의 품안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이제 타락으로 맺힌 한을 풀 수 있는 때가 왔습니다. 이 자리에서 기어이 끝을 맺어야 합니다.

<기 도>

아버지! 1963년도 곡절 많은 가운데 보냈습니다. 하늘의 슬픔이 온 천지에 아직도 가시지 않은 이 역사적인 순간에 있어서, 아버지의 수고의 노정 위에 슬픔이 더해진 지난해였음을 저희들은 생각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늘 앞에 저희의 있는 정성을 다 모아 이 한 해만은 아버지께 기쁨의 해로 바쳐 드리겠다고 호소하고 간구하였던 지난해를 회고해 볼 때, 그저 면목없이 머리 숙일 뿐이옵니다. 그러나 부족한 저희들을 부족타 아니하시고 작년 한 해도 아버지께서 사랑으로 품으시사 큰 곡절 없는 날들이 되게 해 주셨사옵니다.

오늘 1964년 새날 새아침 첫 시간을 맞이하게 되었사옵니다. 저희에게 생명이 있음은 아버지의 노고 때문이옵고, 저희에게 자랑이 있음은 아버지의 피값 때문인 것을 잊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있는 정성을 다 모아 엄숙한 자세를 갖추고 새로운 자신을 세워 진정으로 부리시는, 아버지의 심중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음성을 듣고 ‘불초한 아들과 딸들이 여기 있사옵니다. 저희들은 당신이 원하시는 소원의 성취를 위해서는 죽음의 길도, 어떠한 어려움의 길도 가겠습니다.’ 하고 눈물어린 심정으로 아버지께 호소하는 아들딸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는 이러한 아들딸을 얼마나 고대하셨습니까? 이 새벽, 여기에 모인 당신의 어린 자녀들을 아버지시여, 굽어살펴 주시옵소서.

이 무리를 연하여 민족이 있사옵고, 이 민족을 연하여 인류가 있사오며, 이 인류를 연하여 천천만 성도와 만물에 이르기까지 천주가 연결되어 있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아버지께서 기뻐하심은 저희들 자신으로 말미암은 기쁨보다 더 큰 기쁨, 이 온 천주를 대신한 기쁨이라고 생각되오며, 이 불초한 저희들에게 맡겨진 책임과 사명이 너무나 과중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나이다.

사망의 흔적을 벗어나지 못한 죄악의 후손인 연고로 이다지도 많은 곡절을 하늘에 남기게 된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이제 또 새해를 맞아 아버지께 장담하고 결의와 맹세를 할 용기도 없사옵니다. 그러나 맹세하고 가고, 또 맹세하고 가야 할 복귀의 한의 고비고비가 남아 있는 연고로, 이날 다시 새로운 광명의 아침 햇빛도 보기 전에 새벽부터 저희는 새로운 맹세를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느끼옵니다.

새로운 해에 새로운 마음, 새로운 심정으로 이 민족과 인류를 대신한 선봉자의 책임과 선각자의 책임과 개척자의 사명을 다하겠다는 맹세를 드리오니, 저희들이 한 이 맹세가 하늘을 움직이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가 흑암의 세력을 대할 적마다 하늘의 권위를 갖고 사랑의 권한을 가질 수 있는 새로운 자아가 되게 해 주시고, 오늘 맹세의 한 빛을 세워 주시사 1964년의 365일 전부가 이와 같은 날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한 해의 새로운 결심과 새로운 각오가 아버지의 영광의 터전이 되게 하시고 저희들로 하여금 사망의 세계에서 고난의 강을 건너는 범선의 키가 되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아버지가 원하시는 소망의 동산, 그 복지까지 도달하는 데 있어서 장애를 느끼지 않고 피해를 입지 않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이 새벽에도 이곳을 향해 뜻을 품고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는 식구들이 남한 각지에 널려 있사오니 품어 주시옵소서. 더구나 지금은 하늘의 중대한 기간을 앞에 두고, 눈물어린 심정으로 새해를 맞는 외로운 식구들이 있사오니 그들에게 이날부터 새로운 광명의 빛이 깃들게 하시옵고, 아버지의 영광의 터전을 높이고 빛낼 수 있는 아버지의 날을 허락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이 새벽 여기에 머리 숙인 모든 아들딸들의 심정을 굽어 살펴 주시옵고 새로운 한 날 아버지를 모시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통일의 무리로 이 민족의 과거의 죄를 용납하시옵고, 이 민족을 위주로 세계 인류의 죄를 용서하시옵고, 세계 인류를 위주로 천상천하의 모든 애혼(哀魂)들의 죄를 용납하시옵고,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왔다 갔던 선조들의 죄를 용서하시옵소서.

아버지의 기쁨의 한 날을 저희들과 이 민족이 세계만방에 생명의 빛으로 나타낼 때까지 지키고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남겨진 승리의 날들이 어서 속히 저희들에게 찾아들고, 남아진 싸움터의 험악한 조건들이 생명의 빛과 더불어 사라지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부탁드리옵니다.

아버지의 영광이 온 천주에 가득하여 축복받은 가정들과 더불어 이 민족과 수많은 인류 위에 같이하기를 바라면서 거룩하신 참부모님의 이름을 받들어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말 씀> 우리는 4년노정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분부하신 4년 간의 표어로 ‘승리적 주관자가 되자’는 말씀을 받았습니다.

승리의 터를 닦으려면

여러분들이 승리적 주관자가 되려면 전체의 승리를 바라기 전에 먼저 개체의 승리적인 터를 닦아 나가야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승리라는 것은 과거에도 바라왔고, 현재에도 바라고 있고, 미래에도 바라야 할 명사입니다. 하나님도 바라오셨고, 땅도 바라왔고, 우리의 선조들도 바라왔던 명사였으나 타락한 그날부터 오늘날까지 인류와 하나님은 지으신 이 이념의 세계에서 승리라는 명사를 지니지 못하고 슬픔과 비참의 명사를 지니고 나오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생활 환경 속에서 우리가 원치 않는 모든 요건들을 완전히 제거하기 전에는 완전한 승리란 있을 수 없습니다.

복귀섭리를 하시는 하나님도 지금까지 승리를 위하여 싸워 나오고 계십니다. 또한 자고로 시대시대, 혹은 시기시기를 거쳐오면서 하늘의 뜻을 책임지고 나오던 우리의 선조들도 역시 승리를 위하여 싸워 나왔습니다.

유구한 6천년의 역사를 거쳐오면서 이 승리의 한 날을 고대했지만 아직까지 하나님조차도 그날을 맞이하지 못하였습니다. 오늘날 과거․현재․미래를 바라보는 이 시대에 있어서도 완전한 승리의 한 날을 지녔다고 할 수 없는 이런 단계에 처해 있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아직까지 우리는 승리를 바라보며 나아가야 할 입장에 있습니다.

이런 입장에 처해 있는 우리들 각자는 크나큰 승리를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거기에 대비할 수 있는 준비를 해야 합니다. 이 준비를 위하여 우리는 결단하고 용단하고 결의하여서 우리의 싸움의 상대, 즉 원수를 대하여 싸우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서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대하시면서 우리 선조들에게 믿기를 권고하셨습니다. 믿은 다음에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허락하신 소망의 터전 위에서 아버지의 사랑과 일체가 됨으로써, 영원히 아버지의 기쁨이자 우리 인류의 기쁨이요 영원히 아버지의 승리이자 우리 인류의 승리가 되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그러한 자리까지 허락하셨으나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믿음을 잃어버렸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소망을 잃어버렸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복귀섭리를 경영하시는 하나님의 소원으로 남아 있고, 또 그 섭리의 뜻을 받들려는 인류의 소원으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소원과 인류의 소원이 오늘날 우리 개체에도 남아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3절을 보면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도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바라고 계시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제일 귀한 것이 무엇이냐? 하나님이 믿어 줄 수 있는 믿음의 자리에 나아가는 것이요, 하나님이 소망하는 소망의 자리에 나아가는 것이요, 하나님이 사랑해 줄 수 있는 사랑의 자리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대의 행복의 자리인 것입니다. 이 행복의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서 인간은 하나님이 허락할 수 있는 믿음, 하나님이 허락할 수 있는 사랑을 찾아 나온 것입니다. 그것은 기필코 찾아야 할 것이지만 이것을 찾는다는 것은 수월한 문제가 아닙니다.

개인적인 믿음을 세우기 위하여는 개인적인 투쟁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믿음과 소망을 성취한 그 기반 위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성취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나 하나의 기준을 세우고 하나님과 영원한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사랑도 투쟁이 없이는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믿음․소망․사랑의 목적

그러면 믿음의 목적은 무엇이며, 소망의 목적은 무엇이며, 사랑의 목적은 무엇이냐? 물론 그 가운데는 천지의 삼라만상도 포함되겠지만 그보다도 하늘과 땅을 주관할 수 있는 하나님의 대신 존재로 지은 우주의 중심체요, 핵심체인 우리 인간입니다. 인간 그 자체가 믿음의 목적의 실체요, 인간 그 자체가 소망의 목적의 실체요, 인간 그 자체가 사랑의 목적의 실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을 사랑의 장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 장이 의미하고 있는 최후의 목적은 무엇이냐? 인간 그 자체입니다. 물론 이 세계가 목적이 되기 전에 민족이 목적이 되어야 하고, 민족이 목적이 되기 전에 종족이 목적이 되어야 하고, 종족이 목적이 되기 전에 개인, 즉 나 자신이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인간을 위주로 하여 소망이 목적하고, 믿음이 목적하고, 사랑이 목적하는 것이냐? 하나님의 창조 당시에 바라셨던 소망의 사람, 완성하여 완전한 사람, 천지가 그로 말미암아 움직일 수 있는 사람, 하나님도 그 안에 계실 수 있는 참다운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하는 말은 천지를 움직이는 말이요, 그 사람이 속삭이는 말은 천지와 더불어 속삭이는 말이요, 그 사람이 즐기는 즐거움은 천지와 더불어 즐기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을 위주하여 오늘날 우리에게 신앙이라는 명사가 생긴 것입니다.

오늘날 타락한 인간은 소망의 이념과 하나의 귀일점을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최후의 목적은 무엇이냐? 천지와 더불어 기뻐하고, 천지와 더불어 통하고, 천지와 더불어 화할 수 있는 하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을 찾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 하나가 믿음의 목적체요, 소망의 목적체요, 사랑의 목적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복귀원리를 배워서 알고 있겠지만 믿음을 세우기 위한 탕감조건이라든지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 등 모든 것은 믿음을 기반으로 하여 나오는 것입니다. 타락성을 벗기 위해서는 소망의 실체이신 메시아가 오셔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소망의 한때를 바라고 나오고 있는 것은 무엇에 귀결되느냐? 타락한 인간에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 오시는 메시아에 귀결되는 것입니다.

메시아는 그 자체가 믿음의 목적체요, 소망의 목적체이며, 사랑의 목적체입니다. 믿음과 소망이 이루어진 목적체, 즉 메시아를 위주로 하여 목적을 완성한 그때에는 무엇만이 남을 것이냐? 목적이 다 달성되었으니 사랑만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고로 최후에 남는 것은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그 사랑은 믿음의 완성실체를 통한 사랑이요, 소망의 완성실체를 통한 사랑입니다. 그 사랑 하나를 위주로 대표자로 오시는 분이 메시아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승리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떠한 입장에서 승리자가 되어야 하느냐? 믿음을 위주로 한 입장에서 승리자가 되어야 하고, 소망을 위주로 한 입장에서 승리자가 되어야 합니다.

인간은 불가능함이 가능함으로 될 수 있는 한때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 불가능함으로 말미암아 한때 한 분을 찾아 헤매는 것입니다. 믿음의 목적체요, 소망의 목적체요, 사랑의 목적체인 그 한 분을 찾기 위해서 타락한 인간은 허덕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믿음을 부르짖을 때는 믿음의 실체가 필요한 것이요, 소망을 부르짖을 때는 소망의 실체가 필요한 것이요, 사랑을 부르짖을 때는 사랑의 실체가 필요한 것입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실체는 누구였던고? 그는 바로 타락의 인연을 받지 않고 타락의 세계와는 관계가 없는 참다운 사람입니다. 그분으로 말미암아 천지는 수습되는 것이요, 그분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하늘의 영광이 시작되는 것이요, 그분으로 말미암아 아버지와 아들과의 사랑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또한 그분으로 말미암아 부자의 인연을 중심삼은 부부의 인연과 부부의 인연을 중심삼은 가정의 인연이 연하여 새로운 천지의 기원이 시작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됩니다.

믿음․소망․사랑의 실체로 오시는 메시아

그 기원은 반드시 하나의 실체, 즉 믿음의 목적체요 소망의 목적체요 사랑의 목적체인 그분으로 말미암아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분을 신랑으로 맞이할 수 있는 그때에는 사랑의 실체만이 문제가 되기 때문에, 그 세계에는 사랑을 위주한 세계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에도 그렇게 말하였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바라는 그 실체, 즉 믿음의 실체, 소망의 실체, 사랑의 실체는 어떻게 이루어지느냐? 한꺼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실체를 세우기 위해서 타락한 개인으로부터 인연을 맺고 하늘의 섭리의 손길과 연결시켜서 가정을 세우고, 종족, 민족을 세워서 오늘날 현세까지 이끌어 나오신 것입니다. 과거에 수많은 사람이 믿고 갔지만 믿음의 목적을 아직까지 달성하지 못하였고, 소망을 바라고 나왔지만 소망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고, 사랑을 바라고 나왔지만 사랑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어떻게 해야 달성되는가? 믿음으로써 승리할 수 있는 최고의 승리자가 나타나게 될 때, 소망으로써 승리할 수 있는 최고의 승리자가 나타나게 될 때, 사랑으로써 승리할 수 있는 최고의 승리자가 나타나게 될 때 비로소 달성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오시는 메시아는 어떠한 분이냐? 믿음의 실체, 소망의 실체, 사랑의 실체가 되는 분입니다. 믿음의 목적의 실체가 되기 위해서는 믿음을 위주로 하여 세계사적인 투쟁과정에서 승리한 자격을 갖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공로 없이는 안 됩니다. 소망의 실체가 되기 위해서는 세계적인 소망의 투쟁역사에서 승리한 가치를 지녀야 합니다. 사랑의 실체가 되기 위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 각자 각자를 놓고 볼 때, 우리 개체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찾는 목적은 개체를 구원하기 위하여 믿는 경우도 있을 것이요, 가정을 구하기 위하여 믿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종족, 국가, 세계, 하늘땅을 위하여 믿음의 실체를 찾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개인보다는 가정이 더 구하기 힘든 것이요, 가정보다는 종족이 더 구하기 힘든 것이요, 종족보다는 민족이 더 구하기 힘든 것입니다. 범위가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더 구하기 힘든 것입니다.

오시는 메시아는 어떤 분이냐? 개인은 물론이려니와 가정, 종족, 국가, 세계, 천주 전부를 걸어 놓고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실체로 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분이 이러한 자리에 서야만 비로소 인류의 역사상에 남아 있는 믿음이 결실될 수 있는 것이요, 소망이 결실될 수 있는 것이요, 사랑이 결실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결실될 수 없습니다. 그분이 하는 말은 개인적인 말이 아닙니다. 여러분도 그런 신념을 가지고 외치게 될 때, 그 말은 개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로되 세계사적인 내용과 인연을 갖춘 말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완전한 승리와 투쟁

지혜로운 사람이란 어떠한 사람이냐? 세계적인 때를, 소망의 때를 먼저 구별할 줄 아는 지각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것을 미리 알고 분석하고 비판하고 실천하여 자기의 것으로 만드는 책임을 짊어질 수 있는 입장에 서 있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메시아가 이 땅 위에 오실 때 그는 개인으로 오시되 개인이 아닙니다. 그분의 가치는 온 세계 인류가 믿고 있는 신앙의 결실체요, 온 세계 인류가 바라고 있는 소망의 결실체요, 온 세계 인류가 바라고 있는 사랑의 결실체입니다. 그 결실체에는 모든 역사노정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즉 과거․현재․미래가 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개인으로부터 가정, 종족, 민족, 국가, 세계가 전부 연결되어 있고, 하늘과 땅이 모두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분이 이러한 결실체로 나타나셨지만, 그분이 믿음의 화신체, 소망의 화신체, 사랑의 화신체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역사적인 투쟁이 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분이 믿음의 실체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믿음을 중심삼고 승리의 주관자가 되기 위한 역사적인 투쟁을 한 과거가 있는 것이요, 현실이 있는 것입니다. 그분이 소망의 실체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소망의 기준을 중심삼고 승리의 주관자가 되기 위한 역사적인 투쟁을 한 과거가 있는 것이요, 현실이 있는 것입니다. 그분이 사랑의 실체로 나타나기 위해서도 마찬가지의 투쟁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것을 알고 여러분은 4년간의 표어와 같이 ‘승리적 주관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어떠한 승리적 주관자가 되어야 하느냐? 신앙을 중심 삼고 믿는 데 있어서 승리적 주관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투쟁해서 이겨야 합니다.

완전히 승리하기 위해서는 전부로부터 공인을 받아야 합니다. 싸워서 이기는 것은 물론이고, 이긴 후에는 하늘땅의 공인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믿음을 위주로 한 승리적 주관자가 되는 것입니다. 공인을 받는 데는 어떤 공인을 받아야 하느냐? 어떤 한정된 시간권 내에서만 공인받아서는 안 됩니다. 현실의 무대에서만 공인받아서도 안 됩니다. 과거․현재․미래를 통하는 입장에서 공인을 받아야 합니다. 거기에는 개인으로부터 세계까지 다 들어 있어야 합니다. 그런 공인을 받아야 합니다. 소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요, 사랑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세와 예수님을 잃어버린 이스라엘 민족

여러분들은 이스라엘의 민족사를 알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 땅을 향하여 들어가게 되었을 때 먼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민족을 인도하는 모세를 믿었습니다. 모세는 어떠한 사람인가? 모세는 하나님을 대신한 신앙의 목적체였습니다. 60만 대중과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대신한 지도자요, 하나님을 대신한 실체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민족은 모세를 소망의 나라를 이루어 줄 수 있는 사람으로 믿어야 했습니다. 자기 생명보다도 민족을 더 사랑하고 자기 부모보다도 민족을 더 사랑하는 목적체로 믿었어야만 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를 존경했더라면 민족적인 믿음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요, 민족적인 소망을 성취하는 것이요, 민족적인 사랑의 세계를 찾아 세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불신함으로 말미암아 모세를 잃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모세 하나를 잃음으로 말미암아 믿음을 잃게 되었고, 소원을 잃게 되었고, 하나님의 사랑, 민족의 사랑마저 잃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구세주는 어떠한 분이냐? 오늘날 타락한 세계에 있어서 믿음과 소망의 실체입니다. 여러분이 믿는 목적은 믿음의 실체인 메시아와 일체가 되는 것이요, 소망의 목적도 사랑의 목적도 그분과 일체가 되는 것입니다. 인류를 수습하여 에덴을 복귀하기 위하여 오시는 분이 메시아이기 때문에 그분을 완전히 차지하는 사람은 그분의 세계를 차지할 수 있는 것이요, 그 분의 사랑을 차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그분은 하나님을 완전히 붙들 수 있기 때문에 그분을 완전히 붙드는 사람은 하나님을 붙들 수 있는 것입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민족은 평면적으로는 같이 움직이고 있었지만, 하나님을 대하는 기준이 달랐습니다. 그것은 모세는 민족적인 믿음의 실체요, 민족적인 소망의 실체요, 민족적인 사랑의 실체로서 하나님을 대했지만 이스라엘 민족은 개인적인 믿음의 대상, 개인적인 소원의 대상, 개인적인 사랑의 대상으로 하나님을 대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와 일체가 되어서 모세의 실체를 중심하고 우리 같은 것 천만 명을 합해도 모세를 대신할 수 없으며, 이스라엘 민족은 남아지지 않더라도 모세는 남아져야 한다는 신앙을 가졌더라면, 60만 대중은 신앙을 잃게 되지 않았을 것이요, 사랑의 낙원을 잃어버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와 일체가 되지 못함으로써 하나님에게 믿음을 부르짖고 소망을 부르짖고 사랑을 부르짖어도 믿음의 목적체요 소망의 목적체요 사랑의 목적체인 모세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메시아인 예수, 전체의 소망의 중심존재인 예수를 통하여 공인받아야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민족이면 민족, 국가면 국가가 총동원하여 예수 실체 한 분을 위주 하여 민족복귀를 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4천년 역사노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하면서 세워 온 믿음의 전통을 잃어버리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하면서 연면히 이어온 4천년 역사의 그 소망을 잃어버렸습니다. 믿음과 소망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도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그들이 예수를 믿음의 실체로 깨닫지 못하였으니 믿음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었고, 소망의 실체로 맞이하지 못하여 소망을 잃어버렸으니 비참한 역사 노정을 걸어 나가지 않으면 안 되고, 사랑의 실체를 저버렸으니 심판의 자리를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끝날을 맞는 성도의 자세

그러면 여러분들은 끝날의 이때를 맞이하여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나님께서는 기필코 소망의 실체, 믿음의 실체, 사랑의 실체로 오시는 메시아를 중심삼고 세계사의 최종점을 세우려 하신다는 것을 알았으니, 이제 여러분들은 그러한 때를 맞이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느냐? 그분은 세계사적인 내용을 가지고 나타나기 때문에 여러분들도 그분과 같은 입장에 서 있어야 합니다. 자기 개인을 위주로 하는 시대, 자기 가정을 위주로 하는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오늘날은 새 주인을 위주한 세계주의시대입니다. 생활도 세계주의의 무대에서 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여러분들을 세계사적인 믿음의 실체, 세계사적인 소망의 실체, 세계사적인 사랑의 실체로 서게 하기 위해서는 역사가 수고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떻게 해야 되느냐? 개인의 생활에서부터 가정, 종족, 민족, 국가, 하늘땅을 걸어 놓고 ‘하나님이여, 당신이 소원하시던 것이 이러한 실체가 아니옵니까?’ 하고 담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 자신의 행함이 세계사적인 무대에서 믿음의 실체와 같은 커다란 부분으로 나서지 못할 것 같으면, 그런 범위권 내에서 따라갈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내적 결의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자신들은 어떻게 되어야 하겠습니까? 앞으로 오시는 믿음의 목적체요, 소망의 목적체요, 사랑의 목적체인 그분과 일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여야 하느냐? 여러분은 오실 믿음과 소망의 실체인 그분 앞에 상대적인 입장에서 저울질할 수 있는 자기 자신의 믿음을 찾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역사를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역사적인 인연을 파헤쳐 세계사적인 종말시대가 왔음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국가와 민족, 종족, 가정, 개인의 가치를 알고 지금까지 세계를 이루기 위하여 개인, 종족, 민족, 국가를 거쳐 나온 믿음의 전통을 찾아야 합니다. 믿음에 있어서 아브라함이면 아브라함, 모세면 모세, 노아면 노아의 믿음보다 월등히 나아야 합니다.

노아는 가정을 구하기 위하여 120년 동안을 믿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살고 있던 모든 환경을 버렸습니다. 가정의 식구들까지도 반대했지만 노아는 그 모든 것을 초월했습니다. 아무리 핍박이 심하고 아무리 환경이 어려워도 노아는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갈대아 우르를 떠나 혹은 가나안 땅으로 혹은 애급으로 유리고객하면서도 그는 뜻을 대하는 데 있어서 세상의 어떤 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하는 신념을 가졌습니다.

신부의 사명

선조들보다 낫다고 하는 것 하나를 세우기 위하여, 믿음의 소망을 바라면서 찾아 나오신 하늘 앞에 사랑받기 위하여 소망을 두고 싸워 나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오늘 종말시대에 처해 있는 여러분들은 생활적인 면에 있어서나 각오에 있어서 그들보다 못하면 안 되겠습니다. 그들보다 못해서는 오시는 주님 앞에 신부로서 설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앞으로 오시는 주 앞에 신부로 서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천하를 수습할 신랑을 맞이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합니다. 세계사적인 믿음의 터전 위에서 신부로서의 믿음의 기대를 세우고, 그 믿음의 기대 위에 신랑되신 주님이 나타나서 뜻을 세워 소원성취를 할 수 있게 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6천년 동안 신앙의 기반을 닦은 본래의 목적이었으나, 오늘날까지 인간은 그것을 이루어 놓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말살해 버리고 있습니다. 슬픈 일이 있다면 이 이상 슬픈 일이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이런 것을 알았으니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여야 되느냐? 비록 외적인 면에서 역사적인 투쟁은 하지 못할지라도 내적인 면에서 역사적인 모든 투쟁을 부여안고, 오시는 주님 앞에 십자가가 남아질까 봐 염려하며 역사적인 십자가를 부여안고 뒤넘이칠 수 있는 투쟁의 역사를 거쳐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믿음의 실체, 소망의 실체, 사랑의 실체로 오시는 주님 앞에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칙입니다.

그런 기반을 닦아 가지고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한 터전을 세우면 오시는 주님은 고생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신부로서 신랑을 맞이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한다면 신랑되시는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고생을 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기반을 닦으면 애급노정도 지나고 광야노정도 지나 가나안노정에 들어서는 입장에 설 수 있게 되기 때문에 오시는 주님 앞에 고통이나 시련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오시는 주님은 신부가 하여야 할 이 모든 싸움을 대신하여 오시게 됩니다.

주님이 오시면 오시는 그날부터는 주의 날이 시작되는데 이날을 대비하여 가나안의 기반을 닦아야 합니다. 이러한 사명이 신앙자들에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나안의 터전을 못 닦게 될 때는 오시는 주님이 환난의 노정을 걸어 신부들이 가야 할 길을 수습하여야 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통일교회는 이것을 재차 수습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선생님은 완전한 믿음의 목적 기반 위에 서 있느냐? 완전한 소망의 목적 기반 위에 서 있느냐? 완전한 사랑의 기반 위에 서 있느냐? 그렇지 못합니다. 아직까지 가야 할 길이 남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과 같이 갈 수 있는 시대를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1960년을 위주하여 출발한 노정입니다. 주님을 맞아야 할 신부의 입장에 있는 이 땅 위의 신앙자들이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목적의 날을 바라보며 그 기반을 닦아야 할 책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책임을 다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재차 승리의 조건을 세우기 위하여 개인에서부터 가정, 종족, 민족을 거쳐 나온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승리를 위한 슬픔과 고통과 비참의 노정

오늘 우리들은 ‘승리적 주관자가 되자’라는 표어를 내걸고 있습니다. 이 ‘승리적 주관자’란 어떠한 것이냐? 과거를 대해서도 승리적인 주관자요, 현실을 바라보게 될 때도 승리적인 주관자요, 미래를 대해서도 승리적인 주관자입니다. 그러한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과거를 돌이켜 보면 어느 분야에 있어서는 승리적 주관자의 기준을 세웠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시대 앞에 있어서는 역사적인 절대의 소원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 영원한 노정을 남기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승리적 주관자가 되기를 바라며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승리의 시대를 지내고 나면 가정적인 승리의 시대, 종족적인 승리의 시대, 민족적인 승리의 시대, 국가적인 승리의 시대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승리적 주관자가 되기 위해서 예수께서 하늘의 주권을 위주로 하여 땅 위의 주권, 즉 이스라엘의 주권을 중심삼고 세상에 승리적인 영광의 한 날을 세우려 했던 것을 다시 우리들이 세워야 합니다.

예수님이 국가와 민족의 승리적 기반 위에 서지 못하여 해원성사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는 이번 4년간을 국가와 민족의 승리적 기반을 닦기 위하여 나아가야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 노정이 끝난 후에는 세계적인 승리적 주관자가 되기 위하여 또 나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역사적인 노정을 거쳐오면서 가인 이후로부터 오늘날까지 무한히 수고하셨습니다. 노아 때는 노아를 세워 승리자로 만들려고 했으나 이루지 못하였고, 아브라함 때도 역시 그랬고, 모세 때도 역시 그랬습니다. 예수님이 오셨다가 가신 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전부 이런 관계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오늘 여러분 각자에게는 이 시대를 중심삼고 모든 것을 수습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여러분을 책임지겠다고 하면 여러분들은 과거를 책임져야 하고, 선생님이 미래를 책임지겠다고 하면 여러분들은 현실을 책임져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역사노정에서 승리적인 주관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개인적인 승리적 주관자, 가정적인 승리적 주관자, 종족적인 승리적 주관자, 민족적인 승리적 주관자, 국가적인 승리적 주관자, 세계적인 승리적 주관자가 나오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하나의 주권을 위주로 한 국가이기 때문에 우리는 대한민국을 위주로 하여 싸워 나가야 합니다.

이것을 달성하려면 슬픔과 고통과 비참함이 따릅니다. 이 노정은 투쟁의 노정이요, 고통의 노정이요, 비참의 노정입니다. 이러한 것이 전체의 조건이 됩니다. 이것을 무시해 버린 ‘승리’라는 명사는 있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그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노아도 그랬고, 아브라함도 그랬고, 예수님도 그랬습니다. 그들을 따르던 민족도 불쌍한 민족이요, 고통받는 민족이요, 비참한 민족이 되어 따라 나온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역사적인 투쟁을 엮어 나오는 과정적인 현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승리적인 주관자가 되기 위해서는 슬픔의 고비를 넘어야 하고, 고통의 고비를 넘어야 하고, 비참의 고비를 넘어야 합니다.

인내를 통한 극복의 단계

이것을 넘으려면 무엇을 넘어야 하느냐? 인내로써 넘어야 합니다. 인내가 아니면 넘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참고 견디는 것, 즉 인내가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가장 슬픈 일이 무엇이냐? 사랑하는 부모와 처자를 잃어버리는 것 이상 더 슬픈 일은 없을 것입니다. 또한 나라를 잃어버리는 것, 이상세계를 잃어버리는 것 이상 슬픈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반대로 기쁜 것은 무엇이냐? 잃어버렸던 부모를 찾고, 처자를 찾고, 자녀를 찾고, 형제를 찾고, 종족을 찾고, 국가를 찾고, 세계를 찾는 것입니다. 그러면 고통은 무엇인가? 굶주리고, 헐벗고, 질고에 시달리고 자유스럽지 못한 것입니다. 이 모든 고통을 인내로써 극복해야 됩니다.

승리의 길을 가는 데에는 반드시 이런 것들이 수반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의 역사에는 피 흘리는 슬픔과 고통과 비참이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고개를 넘어야 합니다. 슬픔의 고개에서 후퇴하는 자는 결코 기쁨의 고개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고통을 당하여 후퇴하는 자는 고통 너머에 있는 기쁨을 차지할 수 없습니다. 비참함을 당하여 후퇴하는 자는 비참 그 너머에 있는 행복을 차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목표로 삼고 있는 그곳은 어떠한 곳이냐? 슬픔과 고통과 비참함을 밟고 넘어야 찾아지는 곳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 비참과 고통과 슬픔은 세계사적인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서도 어떠한 목적을 세워 놓고 그것을 달성하려면 거기에 대비되는 슬픔이 수반되고, 고통이 수반되고, 비참함이 수반되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하는데 안 그렇겠습니까? 여러분이 소망의 승리적 주관자가 되고, 믿음의 승리적 주관자가 되고, 사랑의 승리적 주관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그것과 대등한 세계사적인 슬픔과 고통과 비참함을 당하여서 낙오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찾아 나가는 목적과 그에 대한 책임을 짊어졌으니, 여기에 수반되어 어떤 것들이 찾아오면 그것을 인내로써 극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부닥쳐 오는 슬픔과 비참에 대해서 세계사적인 감정과 세계사적인 신념과 세계사적인 믿음과 세계사적인 소원과 세계사적인 사랑을 가지고 용진했던 것입니다. 우리들도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그러한 슬픔을 극복해야 하고, 고통을 극복해야 하고, 비참을 극복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개인의 복귀를 위하여 개인적인 고통과 개인적인 슬픔과 개인적인 비참을 중심삼고 싸워서 승리자가 되었다 하더라도 그대로는 가정시대를 못 넘어갑니다.

그러기에 끝날에 태어난 자들이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시대로부터 가정, 종족, 민족, 국가, 세계적인 시대로 발전해 나오는 데는 반드시 역사적인 슬픔이 개재되고, 역사적인 고통이 개재되고, 역사적인 비참이 개재되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세계사적인 비참과 세계사적인 고통과 세계사적인 슬픔에 가담하면 역사적인 슬픔과 고통과 비참을 통과한 곳에 서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섭리하시느냐? 개인을 위주한 개인적인 섭리시대에는 한 개인을 비참과 고통과 슬픔의 자리에 세워 가지고 이것을 극복시킵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그를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도 그것을 극복했다는 가치를 부여하십니다.

모세 당시에도 하나님께서는 모세 하나를 비참과 슬픔과 고통의 자리에 세우셨습니다. 만일 그때 이스라엘 민족이 그를 따랐더라면 민족적인 비참과 슬픔과 고통이 극복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의 슬픔과 고통과 비참의 자리에 세우셨을 때도 그를 따랐으면 세계적인 비참과 슬픔과 고통이 극복되었을 것입니다. 좋아도 따라가고, 슬퍼도 따라가고, 죽어도 따라갔으면 세계적인 비참과 슬픔과 고통은 극복되었을 것입니다. 그 당시에 있어서 세계사적인 슬픔과 고통과 비참을 탕감해 놓고 인류로 하여금 예수를 따르게 하여 구원섭리에 참여시키자는 것이 지금까지의 복음서입니다.

승리적 주관자가 되기 위한 각오

이렇게 미루어 볼 때, 끝날에는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6천년의 종말사적인 슬픔과 고통과 비참의 자리에서 전세계에 널려 있는 기독교인들이 승리하면, 오시는 주님은 슬픔과 고통과 비참과는 상관이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전세계에 널려 있는 기독교인들이 그런 기반을 못 닦아 놓게 될 때는, 오시는 주님은 성도를 대표하여 슬픔과 고통과 비참을 겪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찾아 세우신 유대 나라가 책임 못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슬픔과 고통과 비참을 맛보아야 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은 이것을 알아야만 됩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러한 탕감복귀의 조건이 세워진 자리에서 불리움을 받았다면, 여러분들은 절대복종해야 합니다. 어느 때까지 절대복종해야 되느냐? 하나의 주권을 세워서 한 나라, 한 민족을 동원하여 타락된 생활을 칠 때까지 절대복종해야 됩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모세의 명령에 언제까지 절대복종해야 했느냐? 가나안 7족을 멸할 때까지 절대복종해야 했습니다. 노아의 식구들도 노아에게 절대복종해야 했습니다. 언제까지 복종해야 했느냐? 3대 이상, 즉 손자 때까지는 절대복종해야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그런 때가 오면 절대복종하면서 따라가야 합니다. 그래야 여러분들이 시대적인 슬픔과 고통과 비참을 극복했다는 조건을 세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넘어갈 수 없습니다.

오늘 이 아침에 선생님이 여러분에게 부탁하는 것은 승리적인 주관자가 되자는 것입니다. ‘승리적인 주관자’란 말은 참 좋습니다. 그러나 그 내용을 갖추기는 지극히 어렵습니다. 여기에는 피어린 투쟁이 개재되어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슬픔도 최고의 슬픔, 고통도 최고의 고통, 비참도 최고의 비참의 기준을 뚫고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매를 맞아 피를 토하는 자리에 들어가게 되더라도 원수를 위해서 복을 빌어 주어야 합니다. 그것은 왜 그러냐? 원수도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가지고 있는 연고로 어느 한때를 지나게 되면 찾아 세울 수 있는 입장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이러한 승리적 주관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떠한 각오를 해야 되느냐? 세계사적인 시대가 우리 앞에 다가오게 되는데 이것을 여러분들과 분립시켜서는 안 됩니다. 가정적인 슬픔도 슬픔이겠지만 국가적인 슬픔이 있으면 그것을 여러분의 슬픔으로, 세계적인 슬픔이 있으면 그것도 여러분의 슬픔으로 책임지겠다는 각오를 해야 합니다. 그러한 여러분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고통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인의 고통, 가정의 고통도 고통이겠지만 국가적인 고통이 있으면 그것을 여러분의 고통으로 알고 책임을 지겠다는 각오를 해야 합니다.

이것을 해결하기 전까지는 무엇을 가지고 있는 입장에서도 고통이요, 남에게 줄 수 있는 입장에서도 고통인 것입니다. 인류 전체가 세계적 목적체를 맞이하여, 전체가 소망의 목적체로 그를 바라볼 수 있고, 전체가 믿음의 목적체로 그를 바라볼 수 있고, 전체가 사랑의 목적체로 그를 바라볼 수 있기 전까지는 고통과 슬픔과 비참이 그대로 남아지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런 문제를 놓고 냉정히 비판해야 되겠습니다.

더욱이나 1964년은 숫자적으로도 좋지 않은 해입니다. 그러므로 이 한 해 동안 여러분들이 고통을 당해도 역사적인 고통을 당하는 것이요, 비참함을 당해도 역사적인 비참함을 당하는 것이요, 슬픔을 당해도 역사적인 슬픔을 당한다는 자세로 모든 것을 완결 짓겠다는 결의를 가지고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결의를 해야 할 1964년입니다.

홀로 가야 할 탕감복귀노정

이것을 위하여는 거기에 대비할 수 있는 인내력이 있어야 된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합니다. 모든 것을 참고 넘어가려면 그것을 넘어가기 위한 힘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인내력의 동기를 무엇으로 삼아야 하느냐? 나는 아버지의 아들딸이라는 것, 아버지와 나는 같이 가야 한다는 것, 내가 안 가면 아버지가 가셨다가도 다시 돌아오셔서 나와 함께 가셔야 된다는 것, 내가 여기에서 주저앉으면 아버지는 가셨다가 다시 오셔서 또 끌고 가야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한 번에 가지 못하면 세 번을 거쳐가게 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림으로 말미암아 십자가로 갖다가 십자가로 와서 십자가로 다시 돌아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개인에서 그런 일이 성사되지 않으면 개인에게 그런 곡절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요, 가정에서 그것이 해결되지 않을 때는 가정에서 그런 곡절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늘이 갔다가 다시 와서 또다시 가야 하는 것입니다. 민족, 국가, 세계에 있어서도 같은 이치를 통하여서 가야 합니다. 이것이 부자간의 인연입니다. 같이 가야 할 타락의 한이 있는데 같이 가지 않으면 인간이 모든 고통과 슬픔을 당하면서 가야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입장을 생각해 볼 때, 우리는 황공하고 죄송한 마음을 가지고 천신만고의 수고를 하며 따라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러분들이 가야 할 길을 가지 못할 때 아버지께서는 그 길을 슬픔으로 할 수 없이 가셨다가 슬픔으로 오셔서 슬픔으로 다시 돌아가신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만일에 우리가 슬픔으로 움직이고 하나님과 더불어 나아간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바라보시고 위안을 받으실 것이요, 소망을 가지실 것이요, 원수에 대한 울분심을 더 크게 가지실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움직여 드리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보시고 소망을 느끼시기보다, 원수에 대한 울분심보다 고통을 더 느끼시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이 가야 할 걸음을 아시는 하나님 앞에 고통을 끼쳐 드리고 있다는 것을 실감해야 합니다.

어떠한 고통과 슬픔이 닥치고, 어떠한 비참한 자리에 가게 되더라도 그것들이 거리낌이 될까 봐 그것들을 물리치러 오시는 분이 여러분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런 자리에 있을 때는 혹시라도 누가 동정할까 봐 걱정해야 합니다. 제3자에 의한 후원도 원하지 말아야 합니다.

근본적으로는 아버지와 나 둘뿐입니다. 만일에 여러분이 제삼자의 후원을 받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저나라에 갔을 때, 그가 여러분보다 영광스러운 자리에 있게 되면 모르지만, 그렇지 못한 자리에 있게 되면 여러분들이 그 사람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렇듯 탕감복귀노정은 결코 후원받아서 가는 길이 아닙니다. 천사의 후원도 받지 않고 가는 길이요, 동지의 후원도 받지 않고 가는 길이요, 오직 홀로 가는 길입니다. 노아도 홀로 갔고, 아브라함도 홀로 갔고, 모세도 홀로 갔고, 예수도 홀로 갔습니다. 이렇게 개척을 해 왔지만 아직도 복귀해야 할 한이 남아 있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 시대의 가장 슬픈 자리로 나아가야 할 통일교인

이런 많은 고비들이 남아 있기 때문에 이것을 극복하기 위한 인내가 필요합니다. 문제는 어떻게 이 인내심을 기르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가야 할 길을 안다면,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얼마나 고생시켰는지도 알아야 합니다. 모세가 반석을 두 번 친 것이,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는 원인이 될 수 있을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하늘 가는 길은 그 과정에서 혈기를 내뿜고 싶어도 내지 않고 끈기 있게 가야 하는 길이요, 악의 공격을 고이고이 받으면서도 정면적인 충돌을 피하면서 가야 하는 길입니다. 선생님은 그런 길을 걸어왔습니다.

이제 개인적인 시대로부터 종족, 민족을 대할 수 있는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이 세계적인 환경을 중심삼고 하늘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민주주의를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복인지 모릅니다. 여러분들이 세계를 향하여 마음대로 갈 수 있는 때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최후의 문제는 세계가 아니라 민족입니다. 국가와 민족이 문제입니다. 이것이 최후의 문제입니다. 이것만 해결되면 세계는 문제없습니다. 세계로 가는 길은 단번에 열리는 것입니다.

예수 당시에도 예수를 중심으로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가 일체가 되어 세계적인 주권 국가를 이루었더라면, 기독교가 오늘날처럼 이렇게 되지는 않았습니다. 기독교라는 것이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세계는 벌써 하나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기준을 닦지 못했기 때문에 2천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가 걸어간 비참하고, 슬프고, 고통스러운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여러분은 인내력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나는 형무소에서 쇠고랑을 차고 고통을 당하는 사람을 보고, 저 사람들이 뜻을 대하여 저런 고통을 받으면서도 하나님과 더불어 가면 얼마나 복이 되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여러분도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까? 또한 그런 사람을 보고 ‘내가 뜻을 위하여 저렇게 비참하고 저렇게 고통을 당해도 괜찮다.’ 하는 생각을 가져 보았습니까? 만일에 그러한 길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여러분이 못 가면 하나님이 가야 됩니다.

여러분은 세계적인 비참, 슬픔, 혹은 고통을 볼 때마다 그것들은 남의 것이 아니라 내가 책임져야 할 것이라는 안타까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또 인류를 눈물과 피와 땀으로 대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비록 실제로 그런 일을 행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심정을 중심삼고 눈물과 피땀을 통하여 마음과 행동이 일체가 되었다는 그런 입장에 서게 되면, 그럼으로 말미암아 실제로 행동했다는 조건을 안고 넘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통일교인인 여러분들은 민족과 국가와 세계를 위하여 어떠한 책임을 져야 하는가? 여러분은 오늘 이 시대의 가장 슬픈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가장 고통스러운 자리에 나아가야 합니다. 제일 슬픈 자리로 나가는 것이 사는 길이요, 제일 고통스러운 자리로 나가는 것이 사는 길입니다.

자기 자식이 굶어 죽어 가는 자리에서도 뜻을 위하여 갈 줄 알아야 합니다. 오히려 이것이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이 되지 않을까 하여 그것까지도 내가 책임지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나간다면, 이 민족의 운명은 바뀌어 질 것입니다. 또 이 민족의 비참사는 사라질 것입니다.

우리들은 승리적 주관자가 되기 위한 최단거리를 가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가는 것이 최단거리를 가는 것이냐? 앞서 말한 최고의 슬픔과 고통과 비참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 길은 인내를 가지고 극복해야 합니다. 반드시 극복해야 합니다. 만일에 이 길을 극복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느냐? 하나님은 오셨다가 다시 가셔야 하는 슬픔을 당하시고, 나 하나 때문에 3배 이상의 고통을 당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까지 빚진 것만 해도 청산할 수 없을 만큼 많은데 오늘 이 시대에 부과된 책임을 못하여 황공스럽기 한이 없다는 입장에 서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이 민족의 모든 슬픔을 느껴야 합니다! 민족의 모든 고통도 느껴야 합니다. 이 민족의 모든 비참도 우리의 것이라고 해야 합니다. 그렇게만 한다면 우리는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와 함께할 것입니다.

4년노정을 가는 자세

그러면 그 기간은 얼마나 길 것이냐? 모든 것은 원칙적인 수에 의하여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이 민족의 고통과 슬픔과 비참을 4년 안에 탕감하여야 합니다. 따라서 아버지께 기도할 때에도, ‘환난 중에서 참고 견디어 슬픔과 고통과 비참 속에서도 살아 남을 수 있는 자가 되게 해 주시고, 그 자리에서 그 비참한 환경을 수습하여 하나님 앞에 제단을 꾸밀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만일에 날마다 피땀을 흘리며 정성들이고, 그것도 부족하다고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사실을 고하고 복을 빌 수 있는 통일교회라 할진대, 4년만 두고 보십시오. 하나님은 삼천만 민족 앞에 여러분을 세워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를 굴복시킬 것입니다. 그때는 이 민족이 완전히 굴복될 것입니다. 이런 인연을 거쳐야 이 민족이 국가적인 기준 앞에 세움을 받고, 크나큰 천적(天的)인 사명을 짊어지고 나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에 이 세계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이냐? 자기 민족을 남의 민족보다 더 사랑해서는 바로잡을 수 없습니다. 자기 민족은 굶주리게 될지언정 이방 민족을 배부르게 하고 잘 입히기 위하여 눈물을 흘리는 민족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 민족이 역사상에 없어서는 안 될 문화와 전통과 사상을 갖춘 민족이 된다면 그 민족은 세계를 지배할 것입니다.

선생님이 생각하는 것은 그런 길을 어떻게 갈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선생님은 모든 것을 바쳐 이 길을 걸어왔지만 아직도 건강하고 기력이 왕성하기 때문에 안일의 한 날을 원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도 앞으로 다가올 시련과 환난이 크더라도, 그것에 대하여 내적인 면으로나 외적인 면으로나 울상을 보여서는 안 되겠습니다.

승리적 주관자가 되는 길

선생님은 이스라엘 민족의 입장인 이 국가와 이 민족이 책임을 못하는 자리에 설까 봐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을 앞세워 영광이 있으면 그 영광을 여러분에게 먼저 주고 싶은 것이 선생님의 마음입니다. 그것을 알고 앞으로 남아진 4년 기간을 가야 하겠습니다. 어차피 가야 할 길입니다. 어차피 가야 할 길이라면 돌아서 갈 것이 아니라 똑바로 가야 하겠습니다. 슬픔과 고통과 비참을 한꺼번에 맞게 될 때에도 어렵고 고통스럽다고 차 버려서는 안 되겠습니다. 지금은 모두 지칠 수 있는 때니 우리는 더욱 분투해야 되겠습니다.

아담과 해와가 타락을 하여 가인과 아벨이라는 열매를 맺었으니, 식구들을 중심삼고 탕감복귀해야 합니다. 때문에 축복가정을 중심삼고 탕감복귀 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에 각 지역에서 남이야 가든 말든 충성을 다하여 가는 효자 효녀의 가정이 있다면, 그 가정은 선생님이 지향하는 목적을 대신하여, 눈물과 피와 땀으로 민족적인 이 한의 고개를 넘어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민족을 위하여 눈물로 복을 빌면서 하루하루를 감사히 사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선생님의 상대가 됩니다. 그런 사람들로 말미암아 천적인 역사가 넘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모세가 여호수아와 갈렙과 함께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을 닦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또 가나안 7족과 대결하기 위하여 여호수아와 갈렙을 남길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축복받은 가정들이 여호수아와 갈렙을 대신하고, 이스라엘 민족 대신에 자기의 아들딸을 세워야 합니다. 그렇게 하여 그 아들딸을 중심으로 새로운 민족 이동의 기준을 세우고 가나안 복귀의 위업을 완결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아야 합니다. 또한 이러한 마음을 갖고 전부를 탕감하겠다고 하는 식구들이 있다면, 그들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탕감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4년 기간 동안 여러분이 책임을 다하여 민족적인 승리적 주관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민족적인 승리의 날을 여러분이 맞이하는 동시에 하나님이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것을 알고 일구월심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 일이 끝난 후에는 세계적인 승리적 주관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말미암아 만민이 그런 혜택권 내에서 머물게 되어 하나님을 찬양할 때, 비로소 우리는 해방되는 것이요, 하나님의 날을 완전한 승리의 날로 세우게 됩니다. 또 이 세계를 타락하지 않은 본연의 세계로 완전히 복귀할 수 있게 되는 것이요, 그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이 완전히 주관할 수 있게 되는 것이요, 우리는 완전한 승리적 주관자가 되는 것이요, 천지간의 모든 것이 완결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10년 20년, 혹은 자기 일대에서 되지 않으면 아브라함처럼 2대 3대까지라도 연장해서 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끈기를 가지고 전통적인 사상을 스스로 남기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나가야만 하겠습니다.

승리적 주관자가 되기 위해서는 슬픔과 고통과 비참의 도정(道程)을 인내로써 극복하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오시는 주님의 완전한 승리의 그 한 날을 여러분의 날로 맞이하여, 하나님의 참다운 아들딸의 자리로 나갈 수 없다는 것을 이 시간 여러분 앞에 다시 한 번 천명하는 바입니다.

<말씀 요지>

지금 나는 부족하다고 느껴질 뿐입니다. 아직 책임을 다 못한 것이 하나님 앞에 죄송스럽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슬픔을 알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이 원수의 품에 있기 때문입니다.

아담을 잃어버림으로 말미암아 세우고자 했던 종족과 민족 전체를 잃어버렸습니다. 이로 인한 하나님의 슬픈 심정을 지금까지 누구도 알지 못하였지만 나는 이것을 알고 나왔습니다.

사탄은 피조물을 자기 향락의 도구로 삼아 왔으므로 이 사탄을 물리치고 이것을 찾기 위한 것이 복귀노정입니다.

종의 종의 자리에 있는 인간을 직계 자녀의 자리까지 찾아 나와야 하는 것이 통일교회의 의무입니다. 여기에는 아직 시련과 고난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만큼 책임을 진 무대에서 원수에 대한 적개심을 품어 보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수가 이 세계를 이끌고 가기엔 부족한 수이지만 우리가 세계를 이끌고 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바라는 기준에 비하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너무나 부족합니다. 천만인이 정성을 들여서 복귀해야 할 것을 소수가 대신한 것은 본연의 기준과 거리가 너무나 멉니다.

소수인 우리가 그 기준을 넘기 위해서는 한마음으로 지성을 다해야 합니다.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도 부족한데 정성마저 없다면 하나님을 위로해 드릴 수 없습니다. 자나 깨나 언행, 심사, 전체에서 정성으로 메워 나가야 합니다. 그것을 개인, 가족, 종족에 반영되는 것으로 남겨야 합니다. 기쁨이 있기 위해서 하나님의 수고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았습니다.

나 하나에서부터 천만사가 하나님 앞에 면목이 없습니다. 선생님은 7년 동안 모진 투쟁도 하였고, 어려운 모험도 하였습니다. 3차 식전(式典)에서 복귀노정을 탕감하려 했습니다. ‘나만 남았나이다’ 하는 입장에서 사탄의 참소를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정성을 들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생을 했다면 얼마나 했는가? 우리 고생한 것의 천만 배의 고생을 하나님은 하셨습니다. 세계는 우리가 아니면 안 되는 방향으로 가고 있고, 대한민국도 우리가 아니면 안 되는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슬픈 사정을 다시 한번 알아야 하겠습니다. 지난날에는 환경에 몰려서 안 갈 수 없었으나, 이제 그런 때는 지났습니다. 지금은 내적 결의로써 외적인 것을 내몰아 지금까지의 것과 바꾸어서 하나님 앞에 보답해야 합니다. 선생님 탄신 47주년과 어머님 탄신 24주년을 지나는 동안 내가 수고했다고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이제는 자랑거리를 남겨야 합니다. 지난날에는 하나님의 슬픔이 아직 가시지 않은 환경이었기 때문에 슬픔밖에 남긴 것이 없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민족 어느 누구에게도 동정을 받지 말고, 하나님 대신 세계를 위해 염려해야 합니다.

<말씀 요지>

일반상식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을 해서 성공할 때, 다른 어려운 일도 해결할 수 있게 됩니다. 가령 이북 공산세계에서 교육받은 사람을 전향시키기란 용이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공산당도 무색하게 할 만한 일을 해야 합니다.

이제부터는 기도를 많이 해야 합니다.

세계는 한국과 인연을 맺지 않으면 안 됩니다. 부활 이후 모든 영인들이 지상에서 협조할 수 있는 대상은 한국이므로 자기들의 후손보다도 한국 사람들의 후손에게 협조하려고 합니다.

한국의 선조들은 기독교를 몰랐지만, 지상에서 예언자의 입장에 있던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선조들과 같은 입장에 서게 됩니다. 지상에 살고 있는 한국의 후손들은 다른 나라의 선지자들의 협조보다 자기 선조들의 협조를 요구합니다. 이런 때가 왔기 때문에 지상에서 총공세를 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들을 동원하려면 사탄세계의 어느 누구보다도 더 낫다고 할 수 있는 효자 효녀의 입장에 서야 합니다.

여러분이 기도하면 영인들이 동원됩니다. 그래서 4년만 지나면 영계가 동원되어 전도하므로 여러분은 전도를 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성지기도를 통하여 선조들에게 협조할 것을 요구해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사람을 피하여 그늘을 찾는 노이로제가 나타났지만, 이제부터는 악한 것을 보면 참지 못하는 노이로제가 나타나야 합니다.

영인들이 지상에 재림협조하는 것같이 40세 이상의 식구들을 기성교회에 배치하여 기성교인들로 하여금 우리를 협조하게 만들어 같은 혜택권 내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말씀 요지>

감사의 마음은 과거보다 현재의 생활과 심령의 수준이 높아졌을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없으면 지치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탕감조건을 세워 주셨는데도 불구하고 그 사명을 완수하지 못하면 3대에 걸쳐서 책임을 져야 하는 것입니다.

방향을 제시하는 것은 하나님이지만 그 길을 가고 안 가는 것은 인간 자신에게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개인적으로는 엘리야의 대신자였지만, 그의 사명은 민족적인 기대를 닦아 예수님에게 인계함으로써 예수님으로 하여금 세계적인 섭리노정을 출발할 수 있게끔 해 드렸어야 했습니다.

지옥을 밟고 올라서려면 하나님을 거치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먼저 그 길을 걸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걷지 않은 지옥길을 인간에게 걸으라고 한다면 사랑의 하나님이라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6천년 동안이나 걸으셨던 지옥길을 인간에게는 짧게 걸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악한 인간들에게 복을 빌어 주실 수 있는 것은, 그들을 위하여 하나님이 먼저 지옥길을 걸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까지 30년 동안 성신의 협조를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지금까지는 부인이 남편을 전도하기가 매우 힘들었지만 이제는 그런 때가 지나갔습니다.

축복은 사탄과의 싸움이 끝난 후에야 온전히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옷을 입고 밥을 먹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해서 먹고 입고 있는 것입니다.

천국에 들어가기 위하여는 종족적인 기반을 가져야 합니다.

선생님 가까이 있었던 사람들이 많이 죽었습니다. 그들이 선생님을 반대하다가 죽으면 지옥 가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사랑을 해서 다 살리려고 합니다.

<말씀 요지>

이제부터 여러분들의 생각은 하나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왜 택하셨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세상에서 뜻을 이루기 위하여는 후계자가 필요합니다. 제1후계자는 자식이요, 제2후계자는 자기에게 충성하는 제자요, 제3후계자는 민족 가운데에서 택할 것입니다. 외국 사람 중에서 택한다면 동양 사람을 택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가까운 사람부터 택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택해 준 분이 있기 때문에 이 자리에 불리어 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녀로 세워 창조목적의 세계를 이루기 위해 택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창조목적을 이루시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일체가 되어 천주를 통일하시기 위하여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삼천만은 비참한 민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이 민족의 상태는 같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비참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여기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세상의 즐거움은 하늘도, 땅도, 민족도, 가정도 떠난 즐거움인 것입니다. 과거․현재․미래에서 즐거워할 수 있는 기쁨이라야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환경이 비참하고, 또 개체가 비참하다는 것을 느끼는 입장에 설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부름받은 사람들을 보면 하나님의 서러움을 자기의 서러움으로 느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3정권은 선생님을 핍박했지만 굴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미래의 주체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행복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만우주에 자랑할 수 있는 사랑하는 아들딸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일체가 되기 위해서는 이념이 같아야 하고, 기쁠 때는 하나님과 함께하고, 슬플 때는 혼자 한다는 심정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먼저 이념통일, 심정통일이 되어야 합니다. 다음으로는 생활통일이 되어야 하고, 행동통일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4대 통일입니다.

하나님이 한국을 택한 것은 세계를 심판하기 위함입니다. 그것은 사탄이 다시는 침범하지 못하는 세계를 이루시기 위함입니다.

누가복음 12:48-53

<기 도(Ⅰ)>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천지 만물을 지으신 아버지, 당신의 소망과 기쁨과 사랑의 마음이 온 피조만물 속에 어려 있는 것을 저희들이 다시 한 번 느끼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높고 귀하신 그 소망을 위하여 어느 한 존재라도 아버지의 손길을 거치지 아니한 존재가 없다는 것을 깨달을 줄 아는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의 영원하신 존귀와 영광을 위하여 온 피조만물을 지으셨고, 피조만물은 은사의 품에 안기기 위해 생겨났다는 것을, 그런 기쁨의 한 날이 있었던 것을 저희들이 잊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무한한 생명의 원천과 영원한 생명의 권한을 세우시어 당신과 지음받은 모든 피조물이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이 하나로 뭉치어 살 수 있는 영원한 행복의 터전, 무한한 사랑의 터전이 있었던 것을 잊지 말게 하시옵소서.

당신께서 바라시던 그 소망, 당신께서 희망하시던 그 영광, 당신께서 간곡히 고대하시던 그 사랑이 아버지의 마음속에는 어려 있사오나 만물 가운데는 어려 있지 않음을 아옵니다. 만물 가운데 그러한 것이 어리는 것이 당신의 소망이었사옵고, 창조의 목적이었사오나, 그 소망이 슬픔과 낙망으로 맺히게 될 줄 어느 누가 짐작이라도 했겠습니까? 영광 받으셔야 할 당신께서 원수들 앞에 조롱받는 억울한 신세가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당신의 무한한 사랑 앞에 하늘의 영광을 찬양하고 땅의 영광을 찬양하며 승리의 영광을 드러내야 함에도 불구하고, 슬픔의 눈물과 더불어 한의 복귀역사노정 위에 피 살을 뿌리게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이렇듯 소망의 세계는 오늘날 이 땅 위에서 갈 곳이 없어졌사옵고, 이 천지에 이와 같은 터전은 남은 바 없이 사라지고, 슬픔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는 것을 저희들이 알게 될 때, 오늘 당신의 마음을 그리며 당신의 심정을 더듬는 저희들은 지난날의 과거를 원망치 않을 수 없고, 인류의 비참한 역사를 조소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이러한 입장에 선 이 자체가 얼마나 원통한 사실이라는 것을 저희들이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이 품으시고 싶었던 만우주요, 당신께서 사랑하고 싶었던 자녀였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이 땅 위에 널려 있는 피조만물은 슬픔의 상징체가 되었사옵고, 만민은 아버지의 사랑을 배반한 후손이요, 아버지의 심정의 터전을 유린한 후손이 되었사옵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될 때, 아버지의 슬픔을 위로해 드려야 할 각자의 책임이 얼마나 귀중한가 하는 것을 이 시간 여기 모인 어린 소자들이 마음속으로 느끼어 무릎을 꿇고 과거의 모든 죄악을 회개하고 아버지의 슬픔을 위로해 드릴 수 있는 자체들이 되겠다고 맹세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저희들이 동료들을 규합하여 악의 권한과 싸워 승패를 결정지어야 할 때는 찾아왔습니다. 오늘 저희들이 서 있는 자리는 슬픔의 자리인 것을 알게 허락해 주시옵고, 아버지를 대신하여 원수와 대결해야 할 중차대한 책임을 진 곳이라는 것을 망각하는 자들이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기나긴 역사노정을 헤쳐 나오시면서, 아담으로부터 노아, 야곱, 모세, 예수님에 이르기까지 많은 선조들을 대해 나오시며 역사적인 승리의 한 날을 세워 당신의 영광을 찬양하는 참다운 아들딸들이 나타나기를 얼마나 그리워하셨으며, 얼마나 고대하셨으며, 얼마나 몸부림쳐 오셨사옵나이까?

오늘 저희들은 아버지의 슬픈 복귀역사를 알았사옵니다. 한 많은 복귀역사를 알았사옵니다. 억울하고 분통한 복귀역사를 배웠사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저희들은 한 많은 아버지를 붙들 줄 아는 아들딸이 되어야 되겠사옵니다. 억울한 아버지를 붙들 줄 아는 아들딸이 되어야 되겠사옵니다. 피어린 노정에서 상처 입은 아버지를 진실로 내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아들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한 아버님을 모시고 있는 저희들은 아버지께서 걸으셨던 슬픈 역사노정을 살피면서 통곡하는 자가 되든가, 아니면 아버지 앞에 새로운 책임을 지고 사탄을 대적하여 원수를 갚겠다고 하며 나설 수 있는 용사가 되든가 해야 할 것이옵니다. 이것을 이 시간 깨닫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수많은 민족 가운데서 불쌍한 이 민족을 찾아오신 아버지, 얼마나 가슴 아프시옵니까? 이 땅의 수많은 민족 가운데 이 삼천만 민족을 바라보며 애태우시는 아버지, 얼마나 처량하셨습니까? 수많은 자녀를 고대하시는 아버지, 보잘것없는 이 어린 것들을 불러 놓으시고 얼마나 초조하시며 안타까워하셨습니까?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때를 정하시고 한 날을 세우셔서 한 중심을 통하여 최후의 결판을 짓고자 하는 섭리의 뜻을, 비참하고 처량한 이 민족 삼천리반도 위에 두셨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저희들은 머리 숙여 무릎을 꿇고 감사할 줄 아는 아들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저희들은 뜻을 알았사옵고, 뜻을 위하여 부름을 받아 이 자리에 모였사오니 저희들이 맹세하고 결의한 모든 내용이 아버지의 한을 풀어 드리기 위함이라는 것을 죽는 한이 있더라도 잊지 말게 하여 주시옵길,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어린 것들이 여기에 모였사오니, 아버지, 이들을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이들은 많은 사람으로부터 핍박을 받아 시달린 무리입니다. 이들은 피어린 노정에서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싸우고 허덕여 나온 아들딸들이오니 버리지 마시옵소서. 버리지 마시옵소서! 이들을 품으시고 사랑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들은 남다른 길을 가면서 많은 눈물을 흘렸사옵고, 남다른 위치에서 많은 핍박을 받았사오며, 남다른 실천노정에서 많은 눈물을 흘렸사옵나이다. 이 모든 것을 자신을 위해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아시는 아버님이시여, 이 모든 것을 받아 주시고 이들이 소원하는 것을 성취하여 주시옵고, 이들의 한을 당신이 해원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오늘날 불쌍한 삼천만 민중을 대신하여 방방곡곡에서 피어린 역사노정을 걸으며, 외로운 모습으로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은 통일의 무리들이 있사오니, 긍휼히 보아 주시옵고 품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를 위하여 출발했사오니 끝까지 아버지를 위하여 돌진하게 하시옵고, 아버지를 위해 싸우기를 맹세했사오니 아버지를 위해 싸워 승리하여 아버지의 동산, 아버지의 민족, 아버지의 나라, 아버지의 세계를 이룰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기뻐하실 수 있는 승리의 반도, 승리의 삼천만 민중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날은 거룩한 날이오니, 만민을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천상에 있는 천 천만 성도들이 땅을 대하여 해원되고, 복귀되기를 고대하고 있는 것을 알았사오니, 오늘 저희들이 얼마나 귀중한 자리에 있다는 것을 알아서, 스스로 자기와 인연된 모든 책임을 감당하는 자리에서 성심을 다할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하늘과 땅 위에 아버지의 기쁨의 날이 어서 속히 오게 하여 주시옵고, 사탄의 권한을 무너뜨리기 위해 영계에 있는 모든 영인과 지상에 있는 도인들이 합하여 아버지의 한을 해원해 드릴 수 있는 승리의 날이 어서 속히 오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시간 아버님 앞에 무릎 꿇고 머리 숙인 수많은 민족 위에 축복하여 주시옵고, 수많은 교단 위에 축복하여 주시옵고, 이름없이 기도하는 아들딸들에게도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는 한 날이 어서 오게 해 주시고, 당신의 소망과 당신의 영광과 당신의 사랑을 찾는 한 날이 어서 오게 해 주시옵소서. 본연의 아버지를 모시고 살 수 있는 행복한 이 천지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올 때, 이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기 도(Ⅱ)>

아버지, 저희들은 천진난만한 어린아이같이 부모님의 품에서 엄마 아빠를 부르며 안기고 싶어하는 어린아이가 되어야겠습니다. 자기의 체면과 위신과 사정을 잊어버리고, 기쁜 마음으로 아버지를 반길 수 있는 그 자체가 되는 것이 그립사옵니다.

아버지의 사랑의 품에 안겨 자라는 어린 날이 되지 못하였다는 것을 저희들은 잘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지, 저희들은 아버님 품에 안길 수 있는 천진난만한 어린아이가 되길 고대하고 있사옵나이다.

그러한 어린아이가 된다면 아버지께서 바라보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저희들이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 친히 오셔서 품어 주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저희들이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생명의 젖으로써 저희를 성장시켜 주시옵고, 생명의 능력으로써 저희가 장성할 수 있는 힘을 보충하여 주시옵소서. 어려운 환경과 흑암권세를 삼켜 버릴 수 있는 아버지의 영광의 지체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붙들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나이다.

오늘은 거룩한 날, 만민이 머리 숙여 아버지의 성호를 찬양하는 날이오니, 이들의 마음과 몸에 아버지의 영광의 인연을 보유케 하시사 부르는 그 음성과, 간곡히 호소하며 사모하는 그 마음 위에 아버지께서 바라신 소망의 인연이 두터이 나타나게 하시옵소서. 아버지께서 원하시던 뜻을 이들의 마음과 몸에 나타내시어, 한 날의 기쁨을 위한 승리의 터전을 마련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무리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민족을 대신하여 수많은 교단들이 아버지 앞에 머리 숙일 줄 알고 있사옵고, 30억 인류를 대신하여 수많은 교단들이 아버지 앞에 머리 숙이고, 수많은 자녀들이 당신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리에 서 있을 줄 알고 있사오니, 아버지께서 친히 오시어 찾아오시기에 수고하셨던 아버지의 사정을 토로하시옵소서. 불쌍한 죄악의 후손이지만 버리지 마시옵고 품어 주시사, 당신의 한을 풀어 드릴 수 있는 복귀의 혈족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수많은 민족과 수많은 무리들 가운데서 보잘것없는 통일의 무리를 모아 놓았사오니 아버지 이들을 기억하시옵소서. 이들은 남이 아니라고 하는 길을 피눈물을 머금고 따라 나왔습니다. 핍박의 길도 개의치 않고 따라왔습니다. 몰리고 짓밟히는 길에서도 아버지의 뜻을 염려하면서 이날까지 찾아 나왔사옵니다.

이제까지 나온 통일의 무리들과 이 교회가 우연히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습니다. 보기에는 초라하고 나타난 모습은 처량한 모습일지라도 아버지의 피눈물이 섞여 있다는 것을 알게 허락하옵소서. 남들이 알지 못하는 간곡한 내용이 엉클어져 있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뜻을 대하는 마음이 간절하면 할수록, 때가 가까이 오고 있다는 것을 절감하면 할수록 아버지께서 부르시고 분부하시던 때가 그립사옵니다. 자라고 있는 이 어린 것들의 마음 마음 위에 아버님, 같이 찾아 주시옵소서. 아버지, 같이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남아진 사망의 세계를 향해서 싸워야 할 당신의 크나큰 목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부족한 몸이지만 다 제물로 바치오니 받아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 분부하시고 권고하시는 명령에 따라 생사를 각오하고 나선 몸이오니, 원하시는 소망의 터전 위에 아름답게 쓰여지는 당신의 장미, 백합화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당신의 자랑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 당신의 아들딸을 사랑할 수 있는 날이 하루 속히 오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이 민족 위에 당신의 아들딸들이 참 됨을 자랑할 수 있는 날이 어서 속히 오도록 허락하시옵고, 수많은 인류 앞에 당신이 품으시고 사랑하시는 민족이 귀하다는 것을 알게 할 수 있는 날이 어서 속히 오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오늘 저희들이 부족한 마음을 모아 아버지 존전에 모든 것을 바치오니, 이 몸을 제물로 삼으시든지 이 마음을 제물로 삼으시든지 하시어서 당신의 복귀의 터전을 넓혀 나가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는 무리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 이곳에 왔다가 아버지 앞에 슬픔을 남기고 아버지 앞에 한탄을 남기고 가는 자들이 되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올 때엔 슬픈 사정을 품고 왔사옵고 아버님께 염려를 끼치는 자로 왔사오나, 돌아갈 때는 과거를 뉘우치며 아버지 앞에 설 수 있는 마음을 갖고 돌아가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아버지의 뜻 앞에 과거의 부족한 것을 다시 한 번 자책하고, 스스로 맹세하고 결의하고 나설 수 있는 실체의 무리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역사노정에 있어서 최후의 단계를 앞에 놓고 심히 초조한 마음으로 아버지 앞에 아뢰오니 남은 4년노정 동안에 몸 마음 다 드려 제물될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부족한 정성과 불충한 마음이오나 한 데 모았사오니, 아버지의 거룩한 존재를 분별할 줄 아는 하늘의 자녀로서 세워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오늘 이 민족을 위하여 많은 정성을 들이며 하나님이 바라시는 때가 이루어지길 마음으로, 영적으로 고대하며 호소하는 무리들이 있사옵거든 그들 위에도 축복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이 시간 이곳을 향하여 눈물어린 심정으로 호소하고 있는 당신의 아들딸들도 있사오니, 비록 환경과 처지와 습관과 전통과 습성은 다를지라도 아버지를 위하는 심정만은 하나이오니 거기에도 같이하시어, 남아진 싸움터를 지키는 데 부족함이 없도록 인도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아버지 앞에 세계적인 재단을 쌓아 드리는 데 있어서 이스라엘 민족 앞에 모세와 아론과 훌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니다. 또한 이스라엘 민족 앞에, 유대교단 앞에 새롭게 나타났던 예수의 제자들이 되게 허락해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니다.

아버지, 이 시대의 새로운 사명을 다하기 위해 아버지의 뜻 하나를 놓고 승리의 제단을 쌓는 데 부족함이 없도록 해 주시옵고, 만민을 감화시킬 수 있는 무리가 되도록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영계의 천천만 영인들이 땅을 찾아 나오고 있는 것을 아오니, 아버지, 땅 위의 저희들이 조금이라도 보태어 그들의 원한을 풀어 드리는 데에 열정과 충성을 다하게 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남아진 모든 시간을 친히 주관하여 주시옵기를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말 씀> 오늘 말씀드리려는 제목은 ‘복귀의 길’입니다. ‘복귀의 길.’ 이 복귀라는 명사는 우리에게 있어서 기쁜 명사가 아닙니다.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에 구원이라는 명사가 필요하게 되었고, 구원받아야 할 처지에 있기 때문에 복귀라는 명사가 필요하게 되었다는 것을 우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인간이 죄를 지어 죽음 가운데 떨어졌기 때문에 이러한 인간을 살리시기 위해서는 메시아, 즉 구세주가 필요하다는 것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시조가 타락하지 않았던들 구원이니 복귀니 구주니 하는 명사는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 되었을 것이나, 타락하였기 때문에 구원이니 복귀니 구주니 하는 명사가 생겨났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인간의 타락과 복귀섭리의 목적

본래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는 당신의 소망의 실체로, 당신의 심정을 대변하는 실체로 지었으나,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소망도 이상도 심정도 간 곳이 없이 사라져 버리고, 오늘날 이 땅 위에는 사탄세계의 소망과 사탄세계의 심정이 남아졌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존재하는 모든 만물은 하나님으로부터 지음 받았으나 원치 않는 원수의 품에 존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하나님의 내적 심정을 대신할 수 있는 실체로서 지었지만 타락함으로써 그 존재는 하나님 앞에 상심(傷心)의 존재가 되었고, 후회와 원망의 상징체가 되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원한을 남긴 인간을 그냥 내버려둘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천지 만물을 하나님의 뜻을 중심으로 지었고, 원리 법도를 통하여 지은 연고입니다. 아버지의 심정이 기반이 되었고 뜻이 남아 있는 한 지었던 만물과 인간을 근본적으로 파괴시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만물과 인간을 파괴시켜 버리면 하나님은 뜻을 세웠던 그 이상의 고통을 받아야 하고, 심정을 세웠던 그 이상의 고통을 받아야 할 입장에 서지 않으면 아니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이 세계와 인류를 다시 본연의 뜻과 심정 앞으로 세워질 수 있는 만물과 사람을 찾아 나오시는 것입니다.

복귀하는 데 있어서는 우리 인간 한 개체를 복귀시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도 타락한 전체 인간을 타락하지 아니한 본연의 위치로 회복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품을 떠나 원수의 품에 안겨 있는 이 천지 만물을 하나님 앞으로 돌려놓지 않으면 복귀의 목적이 달성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같이 복귀의 목적이 달성되지 않으면 하나님께 있어서는 소망도 이상도 영광도 없는 것이요, 당신의 심정으로 지은 만물과 더불어 행복을 누릴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섭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 함이요, 당신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자녀를 찾아 행복된 세계, 영원히 변하지 않는 영광의 터전, 생명과 사랑과 승리의 터전 위에서 온 우주만물과 함께 기뻐하고 함께 즐거워하면서 영원무궁토록 천국 생활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이런 천국 환경을 만들어야만 하나님이 바라시는 창조목적이 찾아진 입장에 설 수 있기에 이것을 목표로 하여 복귀의 역사를 해 나간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복귀섭리의 내용과 인간의 무지

그러면 복귀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우리가 원리를 통해서 아는 것처럼 만물부터 복귀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의 제물시대를 거치고 신약의 말씀시대를 거친 후에 실체시대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제물시대로부터 말씀시대를 거쳐 실체시대까지 복귀해 나오는 데 있어서, 우리 인간은 어느 자리에서부터 복귀해 올라가야 하느냐? 인류의 시조가 사탄의 혈통을 받고 난 그날부터 인간은 사탄과 뗄래야 뗄 수 없는 혈통적 인연을 갖게 되었고, 하나님 앞에 돌이킬래야 돌이킬 수 없는 원수의 자식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탄의 자식으로 태어난 인간을 사탄의 사랑을 받을 수 없는 입장에 세워 하늘 편으로 끌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하늘 편으로 이끌기 위해서 종의 시대로부터 양자의 시대로, 그 다음은 참아들딸의 시대로, 그 다음은 참부모의 시대를 거쳐 역사해 나오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거꾸로 올라가는 역사를 하고 계십니다.

만일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우리에게 종이라는 명사가 필요 없고 양자라는 명사도 필요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인정해 주는 모습이 되어 영원한 하나님의 선의 동산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선의 부모의 자리까지 나아갔을 것입니다. 종의 신세와 양자의 신세를 벗어나 아들딸이 되게 하여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참다운 부부의 자리까지 나아가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섭리요, 복귀역사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그 역사를 해 나오시는 하나님과 그 역사를 대해 나왔던 인류의 조상과 현세에 처해 있는 인간들을 비교해 보게 될 때, 오늘 이 땅에 살고 있는 수많은 인간은 하나님께서 복귀역사를 해 나오고 계시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의 선조들이 복귀의 노정을 개척하기 위하여 많은 수고를 하였고, 그 수고의 노정에서 하나님께 충성을 맹세하다가도 그 맹세를 저버리고 저버려 하나님께 슬픔을 가해 내려왔다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들을 단번에 복귀할 수 없는 것이 하늘의 곡절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인류의 시조가 잘못되어 천지를 뒤집어 놓은 연고로 아담 해와의 타락을 복귀해 가기 위해서는 한 중심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참다운 시조가 될 수 있는 한 중심을 찾기 위해 6천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헤매 나왔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 한 중심을 세우기 전에 그 중심을 받들 수 있는 외적인 터전을 준비해 나오시면서 오늘날까지 6천년 동안 기나긴 섭리역사를 해 나오신 것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전세계에 널려 있는 기독교인들은 자기들의 사명이 크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마치 이스라엘 민족이 4천년 역사를 통하여 선민으로 택함을 받았으나 선민으로서의 책임과 사명을 감당하지 못했던 것과 같이….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와 함께 하나님의 뜻을 책임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분과 하나되지 못함으로 인해 역사는 엇갈려지고, 하나님이 찾아 나오던 이스라엘 민족은 사망의 세계로 떨어지고, 하나님의 뜻을 세우려던 메시아는 십자가에 돌아가셨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제2이스라엘 민족을 수습하여 제3이스라엘 민족을 세움으로써 이 땅에 새로운 세계적인 가나안을 복귀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견지에서 보게 될 때, 또 오늘 우리가 복귀의 사명을 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하나님과 선조들과 우리 자신을 비교해서 보게 될 때 오늘날 이 시대는 제1이스라엘 시대가 아니요, 제2이스라엘 시대도 아니요, 세계적인 가나안 복귀를 향하여 나아가는 제3이스라엘 시대, 세계적인 가나안 복귀를 위해 모진 투쟁을 하여 승리의 기치를 높이 들고 하늘의 명령과 더불어 넘어가야 할 중대한 시기인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야곱을 중심한 복귀섭리

복귀섭리를 하시는 하나님은 대번에 하늘땅을 복귀해 낼 수 없기 때문에 개인부터 복귀해 나오셨습니다. 하나의 개인을 찾아 세우기 위해 지금으로부터 4천년 전 야곱을 택하시어 종의 종시대에서 종의 시대로 옮겨 놓기 위한 역사를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종이라고 할 수 없었던 야곱 이전의 시대를 청산하고 종의 시대로 옮겨 놓기 위해 역사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종의 종시대를 벗어나려면 하나님이 분부하신 명령에 순종하여 승리의 기반을 닦아야 합니다. 그래야 종된 개인으로부터 종된 가정, 종된 민족으로 거쳐 나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기 전까지 4천년의 역사는 무엇을 하기 위한 역사였던가? 종의 개인으로부터 종의 가정을 넓힌 후 종의 민족을 건설하여 원수 사탄을 굴복시키기 위한 투쟁을 했던 역사였습니다. 그러한 투쟁의 역사를 거쳐 나왔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종의 시대를 복귀하기 위한 기반을 닦기 위해서 야곱은 개인적인 투쟁의 과정을 거쳐 개인적인 승리의 기반을 닦아야 했습니다. 이런 입장에 있었던 야곱은 어머니의 협조를 받았습니다. 야곱은 자기 아버지가 에서에게 축복을 해 주려는 것을 안 어머니의 지시에 따라 행함으로써 장자의 기업을 빼앗았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축복을 받아 개인적인 승리의 기반 위에 선 야곱은 하란 광야를 지나 라반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인 승리의 기반을 닦았더라도 야곱은 그곳에서 가정이라는 기반을 하늘 앞에 세워야 민족적인 출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야곱은 자신이 직접적으로 민족적인 출발을 할 수 없는 연고로 라반의 집에 가서 21년 동안 가정적인 기반을 닦았던 것입니다.

그는 비참한 생활 환경 가운데서도 일편단심 하나님만을 사모하였으며, 다시 가야 할 고향 땅을 지극히 그리워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야곱은 라반에게 간교한 속임을 당하면서도 하나님을 붙들면서 21년 동안 충성을 다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야곱을 축복하여 라반의 가정에 있는 모든 것을 빼앗아 주시고, 새로운 승리적인 가정 기반을 완성하여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오게 하셨다는 것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 후 야곱가정은 어떻게 해야 했느냐? 야곱가정은 민족을 대신하여 민족적인 싸움터로 가야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운명에 놓여 있었던 연고로 야곱의 70식구는 애급 땅을 찾아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민족에 대한 모세의 사랑

이스라엘 민족이 포악한 바로의 마수(魔手)에 비참한 제물로 사라져 갔던 400년, 마음대로 농락하며 피 살을 빨아먹기에 급급했던 바로의 학정 아래 비참한 제물로 사라져갔던 이스라엘 민족의 애급고역 400년 기간은 지쳐 쓰러지는 기간이요, 낙망하여 하늘을 저주할 수밖에 없는 기간이요, 민족성을 잃어버릴 수 있는 기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은 시련이 심하면 심할수록, 부딪치는 역경이 크면 클수록 그들의 마음속에 솟구치는 하나의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축복한 ‘이스라엘’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마음만은 어떠한 시련과 어떠한 역경이 휘몰아치더라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마음이 있었기에 민족적인 싸움에 있어서도 지치지 않고 하나님을 그리워하였던 것이며, 축복받은 나라 이스라엘을 그리워하는 간절한 애국심이 울어났던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이 있었기에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을 지도할 수 있는 모세를 세웠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모세는 40년 바로 궁중 생활 속에서 뜻을 세우려던 1차 계획을 실패한 후 가나안 복귀를 생각하면서 몇천만 번이고 기도하였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이 축복받은 민족인 것을 알았고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혈족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이 원수 사탄에게 농락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모세는 호화스러운 바로의 궁중에서도 가나안 복귀의 한 날이 오기를 간절히 고대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는 멀리 본토에 자기 나라를 그리워하며 기도하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모세를 알아야 합니다. 바로 궁중의 호화로운 생활 속에서도 이스라엘 민족이 큰 고초와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면 느낄수록, 이스라엘 민족의 생활과 자기의 호화스러운 생활과의 차이가 크면 클수록 이스라엘 민족을 사랑해야 한다는 마음에 사무쳤던 모세였습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동안 목자의 생활을 하면서 양떼를 몰 적마다 그의 마음에는 바로 치하의 애급에서 신음하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을 잊지 않았습니다. 또는 양떼를 불러모아 우리로 몰아넣게 될 적마다, 그는 이스라엘 민족을 대신한 마음으로 신념이 솟구쳐 올랐습니다. 모세는 그런 경지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여! 이스라엘을 버리지 마소서.’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모세를 몰랐으나 그는 미디안 광야 생활에서 하나님이 기억할 수밖에 없는 생활을 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모세는 40년의 기나긴 시련 속에서도 지치지 않았고, 어떤 억센 환경 속에서도 낙오자가 되지 않았습니다. 다시 하나님이 소원하시는 뜻을 중심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마침내 모세를 불러 이스라엘 민족 앞에 보냈던 것입니다.

모세는 숱한 싸움의 노정에서도 하나님이 민족과 같이하는 한 하나님의 뜻이 내 뜻이요, 내 뜻이 이스라엘 민족의 뜻인 것을 알았기 때문에 꿈에도 하나님을 배반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배신할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습니다. 천지는 변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스라엘 민족을 대하는 마음만은 변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마음을 갖고 모세가 가는 길은 하나님이 가는 길이요, 이스라엘 민족이 가야 할 길이었습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바로와 수차의 싸움을 거듭한 후에 애급 민족을 굴복시키고 민족적인 승리의 기반을 닦아 가나안 땅을 향하여 출발하였던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애급을 떠난 이스라엘 민족은 광야에서 죽든지 살든지 그들의 소원이 곧 모세의 소원이요, 모세의 소원이 곧 하나님의 소원이라는 것을 알고, 그 가는 길에 모진 핍박과 갖은 시련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모세가 하나님을 저버리지 않는 한 하나님 또한 자기를 버리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해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사명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쓰러진 이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400년 동안 시련을 거치게 한 것은 새로운 가나안 천국을 건설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면 애급노정에 있어서 시달림을 받으면서도 쓰러지지 않았던 이스라엘 민족이 어찌하여 광야에서 쓰러졌느냐? 하나님이 모세를 세워서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했을 때, 이스라엘 민족은 모세의 인도를 받는 그날부터 만사가 형통하여 세계가 자기들 뜻대로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본래 복귀의 길은 그렇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개인을 찾기 위해서는 개인적인 싸움을 거쳐야 되고, 가정을 찾기 위해서는 가정적인 싸움을 거쳐야 되고, 민족을 찾기 위해서는 민족적인 싸움을 거쳐야 되고, 국가를 찾기 위해서는 국가적인 싸움을 거쳐야 되고, 하늘땅을 찾기 위해서는 천적인 싸움의 노정을 거쳐야 된다는 것을 이스라엘 민족은 몰랐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편에 서서 10재앙을 내리실 때 이스라엘 민족은 당당히 천하를 호령할 수도 있는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건국하기 위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세운 것인데 그들은 해야 할 책임은 다하지 못하고 책임을 다한 자리에 서기만을 원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사명과 책임을 다해야 하는 것을 모르는 자리에서 그들의 가는 길이 평탄하지 않게 될 때 불평하였고, 가는 걸음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불만을 토로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신 뜻과 모세를 세워서 인도하는 뜻을 알지 못했던 이스라엘 민족은 장도(壯途)에서 부딪치는 시련을 이겨내지 못하고 절망하였습니다.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이스라엘 60만 대중이 광야에서 독수리 밥이 되었던 것입니다.

본래의 이스라엘 민족이 민족적인 승리를 한 후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가나안 7족을 물리쳐야 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민족이 가야 할 노정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왕을 세운 목적도 하나의 주권국가를 이루어 사탄세계의 민족을 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애급에서 장자를 치던 것과 마찬가지로 사탄세계의 모든 것을 쳐서 정복하라는 것이 사울왕에게 내린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사울왕에게는 민족적인 크나큰 사명과 이루어야 할 책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적인 기준, 사적인 기준에서 생각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을 배반하고 말았습니다. 그런 연고로 사울왕 때 세우려 했던 성전이상은 다윗왕, 솔로몬왕으로 연장되었던 것입니다. 이 성전이상은 본래 모세가 광야에서 쓰러지지 아니하고 이루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리하여 이스라엘 민족이 통일왕국시대 말기에는 둘로 갈라지고 말았습니다. 북조 이스라엘 10지파와 남조 유대 2지파로 갈라졌습니다. 그래서 서로 싸웠습니다.

예수의 사명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가나안 땅에 불러들이신 것은, 가나안 땅에 천국을 건설하기 위한 승리적인 민족 기반을 완결 지어 하나의 주권을 세운 다음 장차 보낼 메시아를 맞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민족은 메시아를 자기 나라를 통치할 수 있는 주인공으로 모시고, 메시아를 중심으로 사탄세계를 쳐서 하나님의 복귀섭리를 종결지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명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단은 그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민족은 구세주가 오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민족이 될 줄만 알았지, 민족적인 승리와 국가적인 승리의 터전 위에 세계적인 승리의 터전을 닦아 복귀의 역사를 종결지어야 할 줄은 몰랐습니다.

지금부터 2천년 전 예수님 당시를 회고해 볼 때, 예수님은 어떠한 사명을 갖고 왔느냐?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 하나님에게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요, 황태자입니다. 이런 예수님이 와서 해야 할 사명은 무엇인고?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를 수습하고 로마와 대결하여 로마를 점령하는 것입니다. 예수가 죽은 400년 후에 로마 제국을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 로마를 점령해야 했습니다. 그러면 그때 이미 예수의 이념은 세계적인 승리의 기반을 갖추었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하늘과 땅, 하나님과 인간이 갈라져 있는 것을 하나로 만들고, 사탄을 심판하여 사탄세계에 있는 모든 인간들을 하나님 편으로 복귀하고 사탄세계에 있는 만물을 하나님 편으로 복귀해야 하는 것입니다. 갈라져 있는 하늘땅을 연결시켜 천국이념을 지상에 실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사명인 것입니다.

예수가 죽은 후 재림의 한 날을 세워서 천년왕국을 고대하게 하는 것이 본래 하나님의 섭리의 목적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이 살아서 이 땅 위에, 하늘과 땅에 천국, 곧 천년왕국을 건설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소원하시던 천주적인 가나안의 천국이념을 땅 위에서 실현하는 것이 예수님을 보내신 목적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사명을 갖고 오신 예수님은 어떻게 해야 했느냐? 자신을 맞기 위한 기반으로서 4천년 동안 준비시킨 이스라엘 민족은 신앙적으로나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뜻 앞에 가깝게 서야 되는데 서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불러 세운 본연의 목적을 상실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수습하는 것이 예수님의 3년 공생애노정을 출발하셨던 첫째 목적임을 우리들은 알아야 됩니다. 또 예수님은 로마의 속국이 되어 허덕이는 이스라엘 민족을 희생시켜야 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중심으로 유대교단과 민족이 일치되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인데도 불구하고 유대교단은 예수님을 몰아 세우기에 급급하였고, 이스라엘 민족은 예수님을 잡아죽이는 데에 선봉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조건을 잃어버렸습니다.

유대민족의 불신으로 뜻을 다 못 이루신 예수

예수께서 오신 목적은 유대교를 수습하고 이스라엘 민족을 수습하여 세계적인 가나안 복지를 건설하는 것,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었으나 바라던 소원의 터전이 다 무너지자 예수님은 할 수 없이 십자가에 의한 영적 구원의 기대를 세우고 가셨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기쁜 일이 아닙니다. 원통하고 분한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눅 12:4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이 한 구절만 해결하면 신․구약의 모든 문제가 다 풀립니다. 계속해서 예수님은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눅 12:50)라고 하셨습니다. 이 성결 귀절을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완전히 해결해 낼 수 있는 사람은 천지를 장중에 넣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성경의 골자 중의 골자는 어떤 귀절이냐? 바로 이 구절입니다.

예수께서 땅에 불을 던지러 왔다고 했는데 그 불이 무슨 불입니까? 또 예수가 받아야 할 세례가 무슨 세례입니까? 요단강가에서의 세례냐? 아닙니다. 수많은 기독교의 신도들이 많이 있지만, 그 내용을 아는 사람은 나 밖에 없습니다. 이 내용을 아는 무리가 있다면 통일교회 무리밖에 없습니다. 원통하고 분합니다.

4천년 동안 피어린 역사노정 위에 죽음의 제단을 연결시켜 찾아 세운 이스라엘 민족과 교인들이 자기들을 위해 오신 메시아를 몰라보았습니다. 메시아를 보내기 위해 역사 과정을 거쳐오면서 수많은 선지자들을 세워 준비시켜 그 교단과 그 민족을 위해 보냈건만 그 터 위에 오신 예수가 메시아인 줄 누가 알았던고?

오늘날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난 예수 믿네.’ 하고 있지만 살아서 하나님을 소개했고 살아서 천국생활을 증거했던 예수의 말씀을 믿지 않았던 유대교인과 같습니다. 여러분들도 그렇게 생각할 거예요. ‘뭐 예수 믿고 천당 가자….’ 간단해서 좋을 겁니다. 내가 보기에는 예수 믿고 천당 가는 게 그렇게 간단하질 않습니다.

하나님은 민족과 교단을 세우기 위해 4천년 동안이나 힘을 다해 수고하셨습니다. 무형의 신으로 계시는 하나님이 원수인 사탄의 종을 하늘 편의 종으로 구원하기가 얼마나 힘이 드는 줄 알아요? 여러분들이 살고 있는 육계에는 수많은 악인들이 역사하고 있다는 걸 알아야 됩니다. 깊은 기도를 해서 신비적인 체험을 한 사람들은 알 것입니다.

육계와 하늘 보좌를 연결하는 공중권세를 사탄이 잡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무수한 악영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권세를 뚫고 지상에 한 사람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당신의 뜻을 붙들고 생명을 내바칠 각오를 할 수 있는 한 사람을 만들기가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얼마나 힘든지 몰라요.

아담가정에서부터 시작하여 가인과 아벨로 나누고, 노아를 세워서 120년 동안 끈기 있게 이끌고 나온 하늘의 희생이 얼마나 컸던고! 암흑의 천지에서 섭리의 한 터전으로 남아질 수 있는 한 사람을 찾아 세우기에 얼마나 희생이 컸던고! 노아는 120년 동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자기의 환경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분명히 노아의 자식들과 처가 노아에게 항거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기에 120년 동안 산꼭대기에서 배를 만들고 있느냐고 비방하고, 미친 사람이라고 욕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홍수 심판을 가능케 한 노아의 신앙

노아는 슬픈 사람이었습니다. 자기는 철석같이 하나님의 명령과 뜻을 믿었지만 처자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때의 환경이 얼마나 어려웠고 비참했겠습니까? 환경이 어려워지면 어려워질수록 ‘아버지여, 이 지상에 아버지를 믿는 자는 나뿐입니다.’라고 했던 노아였습니다. 그러나 핍박과 조소가 커도 하나님에 대한 신앙심이 컸기에 그 시대의 악한 세력을 누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 기반이 노아에게 있었던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뜻을 알았기 때문에 죽어도 가겠다고 했습니다. 노아는 조롱받고 핍박받는 것을 분하다고 생각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자기가 천대 받는 것도 분하지만, 자기를 믿고 찾아 나온 하나님이 120년 후에 세상을 심판하겠다고 하시며 방주를 지으라고 분부하셨는데, 내가 만일 그 뜻을 반대한다면 얼마나 슬프실까 하고 자기의 슬픔을 넘어 하나님을 위로하기에 급급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아는 120년 동안 참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1년 동안이라도 참아 보았습니까?

노아가 방주 짓는 일에 대해 아침저녁으로 처자들로부터 반대 받았습니다. 성경에는 없지만 알아보세요. 기도해 보면 거짓말인지 아닌지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하는 일에 대해서 서로가 도와주지 않으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노아의 처가 방주 짓는 일을 허락했겠어요? 그러한 환경에 처한 노아였지만 하나님 앞에 가까이 서서 자기를 위해 준비하신 하나님을 붙들고 위로하였습니다. 이런 노아의 신앙으로 인해 복귀의 길을 이어받고도 남을 기반이 닦여졌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심판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수고한 노아를 세워 뜻을 이루시려 했던 하나님의 뜻이 함의 실수로 말미암아 깨어지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슬픔은 말할 수 없이 컸습니다. 노아를 제2의 인간조상으로 세워서 원수 사탄을 몰아내고 하늘의 혈족으로 새로운 천지를 만들어 보시려던 하나님의 뜻이 함의 실수로 인해 깨어져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로부터 400년이 지나 아브라함을 찾아 세웠지만 아브라함의 제물 실수로 말미암아 이삭과 야곱을 거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리하여 3대의 하나님이라는 명사를 남기게 된 것입니다. 현대 기독교인들은 이것이 좋은 명사인 줄 알고 있습니다.

2천년 동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가정을 찾아 나왔지만, 제물 실수로 그 가정을 잃어버리자 다시 에서와 야곱을 세웠습니다. 그리하여 야곱이 사탄 편과 싸워 승리하여 비로소 ‘이스라엘’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란 승리했다는 말입니다. 누구한테 승리했느냐? 지상 사탄한테 승리했고, 그 다음엔 천사장한테 승리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즉 야곱이 천사를 굴복시킨 것은 천사장 루시엘이 천륜을 파탄시킨 것을 회복한 것입니다. 즉 천사장을 자기의 본래의 위치, 종의 위치로 되돌린 것입니다. 그래서 비로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찾게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런 기반 위에 가정, 종족, 민족, 국가적인 기반을 4천년 동안 쌓아 메시아로 보낸 분이 예수입니다.

기독교의 중심은 부활의 교리

이러한 예수께서 오자마자 유대교단과 이스라엘 민족에게 배척당하셨습니다. 그런 유대교단이 아직까지 남아 있습니다. 오늘날 세계의 기독교인들은 단결하여 사탄세계를 뚫고 나가야 합니다. 자기들의 믿음만이 최고라고 알면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한 많았던 예수님이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믿는다는 신자들이 말하기를, ‘오! 예수님은 이 땅의 온 만민을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죽기 위해서 왔다.’고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간단하지만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죽이지 않고는 구원섭리를 못하시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을 잃어버린 예수요, 유대교단을 잃어버린 예수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예수님에게 접붙여서 천민(天民)이 되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천민으로 전환시키는 것이 예수님의 사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이 어떻게 했나요? 유대교단이 어떻게 했나요? 제사장 교법사들이 어떻게 했나요? 하나님께서 예수를 잡아죽이라고 4천년 동안 섭리해 왔겠습니까?

크나큰 포부를 품고 계시되 말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추어지지 못했습니다. 그 사회에서 제일 버림받은 무리인 어부나 창녀, 거지같은 자들을 모아 놓았지만 천국의 이념을 말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얼마나 안타까웠으면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감당치 못한다는 말씀을 남겼겠습니까? 마음대로 말할 수 있는 제단을 한 개도 갖지 못했던 한을 간직한 불쌍한 예수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이 땅에 와서 남들이 자는 고요한 밤중에 무엇 때문에 감람산까지 찾아갔을까요? 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했겠어요? 유대교인이 책임 다하고 이스라엘 민족이 책임을 다했더라면 그거 다 필요 없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친히 같이하는 입장에서 예수님과 유대교와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되었다면 큰 문제가 벌어졌을 것입니다. 로마도 문제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합하면 로마는 꼼짝못합니다.

본래 기독교의 교리는 십자가의 교리가 아니라 부활의 교리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함으로 말미암아 구원이 성립되었지 죽음으로 말미암아 성립되었겠어요?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오늘날 지구상의 십자가를 모두 불살라 버려야 합니다. 누가 하겠어요? 두고 보세요. 내 말이 틀리는지 맞는지. 그렇다고 십자가의 도리, 십자가 구원의 도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탄에게 찔림받은 그 십자가를 왜 걸어 놓느냐는 것입니다.

돌아가셨다가 3일 후 부활하신 예수님의 그 부활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받는 것입니다. 부활 후 40일 기간의 기반 위에 비로소 새로운 제2이스라엘, 즉 유대교를 대신한 새로운 기독교가 출발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십자가의 교리가 아니라 부활의 교리라는 거예요. 믿어지지 않는 사람은 기도해 보세요. 자신을 갖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통일교회가 이 시대에 있어서 핍박받고 몰림받고 있지만 참과 거짓은 기필코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도 그러한 신념으로 사셨습니다.

예수님을 불신한 유대교단과 이스라엘 민족

예수님 당시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예수와 하나되어야 할 민족과 교단이 어디로 갔느뇨? 어디로 갔느뇨? 무너져 버렸습니다. 사탄의 수중에 들어가 버렸기에 예수님은 할 수 없이 다시 기반을 닦기 위해 제자를 찾아 나섰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제자는 세례 요한을 중심으로 한다하는 제사장들과 교법사들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못난 제자들을 거느리고 다니면 만왕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의 체면이 서겠습니까?

유대교단은 어디로 갔는고? 이스라엘 민족은 어디로 갔는고?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단은 간 곳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세우기 위해 했던 노아의 수고는 어디 갔는고? 아브라함의 수고는 어디 갔는고? 이삭과 야곱의 수고는 어디로 갔던고? 애급의 바로 치하에서 400년 동안 고역했던 이스라엘 민족은 어디로 갔던고?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수많은 공적을 세운 선조의 터전이 모두 무너져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때 민족을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 교단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몇 명이나 되었겠습니까? 그러기에 하나님은 역사적인 거리를 두고 제2이스라엘 민족을 재건하기 위하여 영적인 구원섭리를 해 나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영적인 유대교요, 영적인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세계에 있는 수많은 기독교인들은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 민족을 대신하는 입장에 있는 것이요, 유대교단을 대신하는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초림 예수 당시에 이 뜻을 완결 짓기 위해 이스라엘 나라를 움직이고, 그 국가적인 기준을 세계적으로 넓혀 나가야 했던 것입니다. 이 뜻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재차 수습하여 세계적인 환경을 마련해서 재림 때를 준비해 온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은 어떻게 하셨느냐? 예수님께서는 4천년 동안이나 닦아온 민족적인 기반이 모두 실패로 돌아갔기 때문에 사탄에게 시험당했고, 사탄과 싸웠던 것입니다. 민족적인 기반이 실패로 돌아가자 모든 것을 사탄이 빼앗아 갔기에 모든 것을 빼앗아 간 사탄과 싸워서 승리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에게 갖가지 시험도 받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무엇 때문에 사탄에 끌려가 시험을 받아야 합니까? 역사적인 원한을 청산해야 할 조건이 남아 있는 연고로 사탄에게 시험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영적 구원섭리의 기대를 조성하고 오늘의 기독교로 발전시키는 기대를 조성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것으로 예수의 사명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예수의 사명이 무엇이겠습니까? 유대민족을 중심으로 사탄과의 싸움에서 승리의 기반을 닦아 세계적인 가나안을 복귀하는 것이 본래 예수의 사명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끝날에 오시는 주님도 역시 그러한 사명을 하기 위해 오시는 것입니다.

야곱이 실체적으로 승리함으로써 그가 걸은 노정은 그 이후의 중심인물이 걸어야 할 기준이 되었습니다. 예수는 개인적인 노정에서 개인적인 승리의 기반을 닦고, 가정적인 승리 기반, 민족적인 승리 기반 등 모든 기반을 다시 닦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유대교단과 이스라엘 나라가 실패하였던 것을 재차 닦아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역사적인 실체이니만큼 그에게는 역사적인 실체로서 역사적인 선조의 모든 혈통을, 혹은 전통을 상속 받기 위해서 역사적인 사탄과 대적하여 투쟁해야 하는 문제가 산재해 있었던 것입니다.

사탄을 굴복시킬 수 있는 비결

성경을 보면 예수께서 완전히 개인적, 가정적, 민족적, 국가적인 조건을 세워서 사탄과 싸워 이겨 보았느냐? 이겨 보지 못했습니다. 예수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은 사탄이 예수 믿는 사람한테 굴복할 것 같아요? 6천년 동안 하나님 앞에서 참소하고 하나님의 뜻을 유린하고 하나님의 섭리를 망쳐 나온 지혜가 늠름한 사탄이 예수 믿는 사람이 물러가라고 한다고 물러갈 것 같아요? 상속권이 있어야 됩니다. 알겠어요, 무슨 말인지?

우리에게는 역사적인 상속권이 있어야 합니다. 아담으로부터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예수 이후까지의 전통과 기반을 이어받아 역사적인 제물을 대신한 상속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탄에게 ‘너는 역사적인 노정 가운데 노아한테 졌고, 야곱한테 졌으며, 모세한테 지지 않았느냐? 나는 이들의 승리의 기반 위에 서 있고 섭리역사의 모든 전통을 상속 받았으니 사탄아! 너는 물러가라.’고 해야 물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냥 사탄아 물러가라고 아무리 기도해 봐요. 사탄이 물러가나. 6천년 동안 하나님 앞에 참소하고 유린하여 복귀섭리를 파탄시킨 사탄인데, 내가 예수 믿으니 물러가라 한다고 쉽게 물러날 것 같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상속보(相續譜)가 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 심정을 이어받은 상속보가 있습니다. 4천년 동안 예수님을 보낼 때까지의 심정적인 상속보가 있었습니다. 다음에는 예수님의 대상의 상속보가 있어야 됩니다. 예수님의 대상이 되실 분은 사랑의 핏줄을 타고 오는 것이 아니라 선한 혈족을 통해 태어나셔야 합니다. 그런 상속보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의 노정에서 싸워 죽는 자는 쓰지 않습니다. 억만 사탄과 대결하는 자리에 서더라도 죽지 않고 영육이 합하여 부활의 실체가 되어야 실체적인 상속자로 쓰시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알고 보니 이런 문제가 있더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 기성교회 신도들은 무슨 말인지 모를 것입니다. 사탄을 굴복시키는 비결은 내가 심정적인 상속 부활권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나는 틀림없이 역사적인 하나님의 심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찾던 자로다. 나는 예수님의 거룩한 성체에 접붙인 자로다.’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탄을 십자가상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지 않고 사탄을 굴복시켜야 합니다. 그래서 육신을 쓰고 실체로 부활해야만 합니다. 이러한 실체의 상속자로 인정받아야만 이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책임을 했어야 하나 그 민족은 책임을 하지 못했습니다. 오늘 여러분도 책임을 다하지 못하면 여러분의 후손들에게 엄청난 책임이 뒤따른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여러분들은 그러한 자리에 서지 못했으니 아버지 앞에 ‘주인을 보내 주십시오.’ 해야 합니다. 주인을 보내 주신다고 했으니 주인의 길을 닦아야 합니다.

오시는 주인을 모시려면

그러면 찾아오시는 주님을 한국의 주인으로 모시기 위해서 어떤 책임을 해야 하느냐? 여기서는 주인이 오실 길을 닦아 놓아야만 그 도의 책임을 질 수 있는 도리가 됩니다. 세계를 찾아오신 주인을 맞기 위해서는 그 나라가 책임을 할 수 있는 입장에 서야만 합니다. 그래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돼 있는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주인을 위해 준비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아울러 어떤 분야의 책임이 아무리 무거워도 주인의 입장에서 자기의 책임으로 맡아서 나가야 합니다. 방법은 그것밖에 없습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이 잃어버린 주인이 될 수 있고, 또한 주인을 모시는 책임을 다할 수 있습니다.

오늘 저녁 선생님이 말씀한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오늘날 재림하시는 주님이 이 땅에 오시게 된다면, 이러한 사명과 책임을 중심삼고 고통을 겪고 모든 것을 준비한 민족이 있으면 틀림없이 그 나라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설령 하나님이 가지 말라고 해도 그분은 절대로 그 나라로 오시지 않으면 아니 됩니다. 이러한 신념을 가지고 여러분이 선생님을 따라오게 되면 선생님이 한 말이 맞는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겁니다. 두고 보십시오. 지나고 보면 알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정신이 좀 들 때입니다. 이제 머지않아 세계가 굴러 들어올 때가 되어 있습니다. 굴러가는 것이 아니라 굴러 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 굴러 들어오는 세계를 어떻게 수습할 것이냐? 그게 문제입니다. 그러나 해결하는 방법은 있습니다.

오늘날 혁명정부가 이 민족 앞에 수습할 방법을 몰라서 허덕이고 있습니다. 이를 수습하는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아무리 저 사람들이 잘못하고 아무리 그들이 저렇게 하더라도 우리는 그 사람들에게 할 말이 없습니다. 아무리 그들이 망하는 자리에 들어가더라도 우리로서는 지금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럴 수 있는 무기만 가졌다면….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만민을 감동시킬 수 있는 재료

오늘 이 세상의 온갖 고민과 고통을 대신해 나온 통일교회 선생님이 있는 한, 앞으로 이 세계와 기성교회가 제아무리 반대하더라도 통일교회한테 흡수되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당장에 흡수되어 수백만이 넘어오려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틀림없이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내 자신이 장차 감당해 낼 수 있는 큰 재료가 되어야 됩니다. 그러면 그들이 우리 앞에 불평을 할래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걸어서 항소를 할 수 없으며 그러한 재료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권위가 아닌 예수님의 권한으로 세계 만민 앞에 메시아라고 주장할 수 있는 재료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만민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고 원수까지도 사랑으로 품어서 눈물 흘린 것입니다. 거기에는 아무도 반박할 수 없습니다. 양심을 가진 사람은 반박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천리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넘어설 용기가 없는 사람은 굴복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세계사적인 사명을 짊어진 우리는 이 세계를 어떻게 수습해야 할 것인가? 우리가 30억 인류를 바라보게 될 때, 악인이 온 세계를 사망의 구렁텅이로 끌고 들어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존재를 알고 저들이 더 이상 이 세계를 망치기 전에 인류를 구해야 합니다. 나는 비록 낮은 자리에서 망하는 자리로 들어간다 해도, 통일교회가 이 민족과 세계 인류 앞에 제시할 수 있는 재료를 갖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선생님은 그런 걸 염려하는 겁니다. 지금 통일교인이 많아지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어차피 앞으로 많아지게 될 겁니다. 하나님도 그것을 염려하십니다. 그 재료가 필요한 것입니다. 역사를 두고 때릴 수 있는 재료, 시대를 두고 때릴 수 있는 재료, 미래를 두고 때릴 수 있는 재료가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그 재료는 무엇이냐? 그것은 피와 눈물과 땀입니다. 심정으로 통할 수 있는 피와 눈물과 땀, 하나님을 눈물 흘리게 할 수 있는 피와 눈물과 땀, 민족을 눈물 흘리게 할 수 있는 피와 눈물과 땀입니다. 그래서 개인 개인이, 세계인들이 그것을 듣게 될 때에 눈물을 흘릴 수 있는 피와 땀이 있어야 합니다.

그 땀 위에 쌓아진 승리의 공적은 후대인들이 숭배할 수 있는 재료요, 후대인들이 필요로 할 수 있는 재료라고 인식하게 되면, 세계는 그것으로 말미암아 모두 흡수되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3년 동안 고생하라고 선생님이 외친 것입니다. 그래야 여러분은 망하지 않습니다.

축복가정들을 이 천지의 산지사방에 내세웠으니 마음이 아파요. 통곡하고 싶어요! 하지만 그 심정을 억제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대하게 될 때는 무자비한 스승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으나 역사를 창조할 계획을 세우고, 역사를 수습하는 백성으로 만들어야 되겠으니 무자비하게 내모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선생님이 주장하는 신념입니다. 이렇게 해야 몇년 후에는 여러분이 많이 따라오게 됩니다.

하나님의 위신이 있고, 체면이 있기 때문에 헐벗고 굶주리는 때에 축복 받았으나 내가 그런 길로 가라고 한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 길로 가 보십시오. 망하지 않습니다.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그런 재료가 우리에게는 필요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예수님의 지극한 효성

하나님은 개인을 그러한 자리에 세워도 항의할 수 있는 개인이 없고, 가정을 그러한 자리에 세워도 항의할 수 있는 가정이 없고, 민족을 그러한 자리에 세워도 항의할 수 있는 민족이 없고, 국가를 그러한 자리에 세워도 항의할 수 있는 국가가 없으니 세계를 인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가 부활한 후에 기독교는 오늘날 세계적인 종교로 군림하게 됐습니다. 수많은 선지자들을 연결시켜 나와 가지고 오늘의 세계의 문명권을 형성할 수 있는 기반을 닦은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예수 한 사람을 다시 보내기 위해서입니다. 본래 예수는 아담이 타락했던 그 이전까지의 하나님의 심정을 이어 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한 사명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될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가 눈을 들어 그의 무릎 앞에 모여들던 제자들을 바라보게 될 때 얼마나 답답했겠는가 말입니다. 어이구, 지지리도 못난….

천지를 호령하며 만왕의 왕으로서 왕권을 세우기 위하여 예수님이 오셨는데 그 길잡이로 어부에게 찾아갔으니 잘된 것입니까? 잘못된 것입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예수가 처량하고 불쌍한 신세가 되었습니까? 이것은 누구의 책임입니까? 예수가 책임을 못했습니까? 이스라엘 민족이 책임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불쌍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야! 이놈들아, 너희들이 4천년 동안 고대한 소원이 나 하나 찾기 위한 것이 아니었더냐?’ 예수님이 하나님의 한을 품고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에, 천지를 걸어 놓고 저주받아 마땅한 민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저들을 위해서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말라고 하나님의 심정을 붙들고 기도한 것입니다. 이때까지 민족의 역사적 심정을 붙들고 나오신 당신의 마음, 유대민족을 따라 나왔고 유대교단을 따라 나온 그때까지의 아버지의 마음은 어디로 가셨습니까? 역사적인 발판이 끊어지는 마당에 아버지의 마음은 어디 가셨습니까?

그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심정을 붙들고,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내가 대신 지겠습니다. 그러니 아버지, 당신께서 4천년 동안 수고하여 나오신 심정적인 전통을 끊지 마시고, 비록 4천년 준비하신 제1이스라엘은 망했지만 나를 통해 제2이스라엘로 상속하여 넘겨주시옵소서.’ 이런 마음 갖고 기도했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사랑이 많아서? 사랑이 많아서? 천만에요. 하나님이 수고하신 역사적 터전이 무너져 내리기 때문입니다. ‘진정코, 진정코 저들의 죄를….’ 하신 것은 저들이 좋아서?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하나님이 불쌍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이 소망의 날을 가져야 4천년 동안 찾아 나오신 하나님도 소망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런 죽음의 자리에서 사라지는 것은 괜찮지만 하나님이 슬퍼하신다는 것을 생각하고 이스라엘 민족을 대신해서 사죄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는 이렇게 하늘 아버지가 상심했을 때 그 심정을 위로하는 효자 중의 효자였습니다. 이런 자리에 서면 사탄이 물러가는 것입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아들딸을 지금까지 유린해 나온 원수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중심한 용사로서 심정적인 터전을 세움으로 말미암아 사탄을 물리쳐야 합니다.

예수는 고통과 핍박과 조롱을 받는 데에도 만왕의 왕

이러한 것을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는 6천년 동안 수많은 민족을 대신하여 역사의 배후에서 수고하셨는데, 어느 한 날 하나님의 심정을 아는 자들이 나올 것이며 어느 한 날 예수님의 한을 해원성사할 날이 올 것입니까? 또한 6천년 동안 지긋지긋하게 괴롭혀 온 원수 사탄을 우리 인류의 혈통에서 완전히 끊어 버릴 수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 통일교회 식구들은 역사적인 열매라고 하고 있습니다. 말은 잘 합니다. 진정 역사적인 열매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심정을 상속 받아야 됩니다.

역사적인 열매가 되기 위해서는 선한 예수님 앞에 접붙임을 받아 선한 혈통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어떠한 십자가 도상에서도 사탄을 굴복시켜서 영육을 합한 부활의 성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역사적인 결실체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원리를 배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수행하는 사람은 자기의 일시적인 욕망을 위해서 나가면 안 됩니다. 이 말씀을 중심하려면 하나님의 심정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역사적인 원리의 말씀을 들고 나아갈 때에는 사탄의 혈통은 잘려 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원리 말씀을 들고 나가면 사탄이 항복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런 무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말씀을 중심삼고 말씀의 실체로서의 완성한 자리를 실현한 사람이 실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하러 왔던 예수님을 민족과 그들의 교단이 쓰러뜨렸기 때문에 예수님은 개인으로부터 가정과 종족과 민족적인 싸움을 해 나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싸움에 이길 수 있어야 갈라진 영계와 육계를 통일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적 세계에 가서, 이 땅과 영계를 주름잡는 사탄의 흑암 권세를 타파해 버리고 종족적으로 싸워 오던 역사적인 원수들의 종족과 지금까지 수천년 동안 싸워 오던 수많은 악령들과 대결해서 이겨야, 비로소 영적 세계가 평등을 이루게 됩니다. 그런 후에 지상에서 싸워 승리해야 합니다. 복귀의 노정이 그렇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 한 분의 완성은 천주의 완성이요, 예수님 한 분의 승리는 천주의 승리가 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제일 불쌍한 분이었습니다. 이 땅에서 제일 큰 고통을 받고 제일 많은 슬픔 속에 산 분이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예수님을 만왕의 왕이요,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제일 복을 많이 받은 아들로 태어난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고통을 받는 데도 만왕의 왕이요, 핍박을 받는데도 만왕의 왕이며, 수많은 원수들 앞에 조롱을 받는 데에 있어서도 만왕의 왕이었습니다.

천민(天民)이 되려면

오늘날 우리들은 무엇을 바라고 나갑니까? 선민(選民)이었던 이스라엘 민족과 같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천민(天民)이 되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라 할 땐 선민(選民)입니다. 시대 변천과 더불어 환경에 몰리는 민족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천민은 하나님의 백성을 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중심삼고 그 중심과 이념이 태초부터 시작됐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천민이 되어야만 합니다.

천민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는 줄 아십니까? 그 족속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천민사상을 넘겨주기 위해 온다면 우리는 그의 족속이 되어야 합니다. 한국 민족을 배달민족이라 한다면 배달민족을 중심하고 한국이란 나라가 이루어진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위주로 한 민족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전세계에 널려 있는 기독교인들은 아직까지 민족 편성이 되지 않았다고 봐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계에 널려 있는 기독교인들은 알아야 할 것이 있으니 이스라엘 선민은 당시 70장로를 중심삼은 족보권에서 벗어난 이스라엘 백성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기독교는 12사도를 중심으로, 70문도를 중심으로 하나되지 못하고 제각기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 나와 제각기 놀았기 때문에 다 망해 버렸듯이 교파 싸움을 하면 다 망하는 것입니다. 두고 보십시오, 망하나 안 망하나.

누구든지 자기 교파를 위주로 하면 망합니다. 왜 망하느냐? 모세를 따라 나온 이스라엘 민족들이 12지파와 72장로를 위주로 해서 명령 계통을 세우고 절대복종하여 단합된 행동을 하였다면 그들은 쓰러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모세가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고, 엎드리라면 엎드리고, 굶자면 굶고…. 그런데 그들은 서로 물고 싸우다가 결국 망하게 된 것입니다. 광야에서 독수리 밥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심각한 문제는 세계에 널려 있는 수많은 교파를 어떻게 통일해야 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12사도를 위주하여 70문도로 지파를 편성하여 이스라엘 정권을 세울 수 있는 터전을 잡았더라면 그들은 망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통일교회의 사명

오늘 우리 통일교회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이러한 사명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참을 세워서 새로운 기준으로 나오면 언제나 이단자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쫓김받고 몰림받던 무리들의 발자취를 통하여 수습되어 왔고 발전해 나온 것입니다. 혁명도 그의 보상으로 달성되어 나왔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처음의 기독교 앞에 유대교가 반대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전세계가 통합하여 통일교를 반대할 테면 하라는 것입니다. 반대하려면 힘껏 반대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우리들이 천년 만년 구원받게 됩니다. 우리 한국에 있어서 지금까지 선생님의 일대가 그런 것입니다. 기독교와 민족의 박해를 받으면서도 내적으로 남모르는 투쟁을 계속해 나왔던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승리적인 통일의 기준을 세우지 않으면 조상들 앞에 면목을 세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계를 통하는 지상의 수많은 영통인들은 선생님을 알아보는 것입니다. 그들이 어느 산기슭에 엎드려 기도하든지 아니면 영통해서 별의별 일을 다하고 있지만, 그들은 선생님의 말을 듣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통일교회입니다. 통일교회, 이름과 같이 실제로 통일이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영계를 통하는 무리에는 도주가 있습니다. 그래서 먼저 이 도주들을 굴복시켜야 됩니다. 천상의 이치로, 심정의 이치로 정복해 나가야 합니다. 인륜의 이치와 천륜의 이치를 통해서 정복해야 합니다. 그게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하나님이 찾아 나오시는 천륜의 원칙은 이러하고, 아들딸된 인류를 다시 찾기 위한 심정은 이러하다고 설명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아담 해와가 타락할 때의 하나님의 심정과 예수님의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하나님의 심정이 어떠했는지 너 아느냐고 하는 물음으로 모두 굴복시켜야 합니다. 그리하여 도적(道的)인 인연을 책임지고 세계의 영통인을 배후로 하고 있는 영계의 수많은 도주들에게 항의서를 자동적으로 받아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영계의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통일교인들에게는 세상 이야기나 뭐 시시껄렁한 것들을 붙들고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끝날에 남아지는 것

오늘 여러분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6천년 동안 사탄의 농락에 유린되었고, 더러워진 이 무지하고 어두운 세상이 나 한 개인에 부딪쳐 온다는 것입니다. 사탄은 영계에서부터 공격해 나옵니다. 그런데 푯대만 확실히 세워 있으면 천지는 요동하고 변할망정 내가 서 있는 자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세계가 부딪쳐 오더라도 그 세계가 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이 있어야 됩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끝날에 남아질 것이 무엇이냐? 다 깨어지더라도 제일 끝날에 남아질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딸만 남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딸이란 어떠한 사람들이냐? 본래 인간은 하나님의 혈통을 통해 태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태어나면서 하나님의 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자라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대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땅의 기독교인들은 주님이 오시게 되면 원죄를 벗는다고 말하는데 원죄를 벗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탄의 침범을 받지 않는 심정적 혈통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맨 나중에까지 남을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무리 사탄이 와서 부정해 보았댔자 부정되지 않습니다. 몇천 번 몸부림치며 강의를 해도 듣고 난 다음에는 ‘아니다.’ 했을 때 절대 부정할 수 없는 입장에 서 있는 사람이 하나님 편의 사람입니다. 심정을 건드려도 하나님 편이요, 몸을 보더라도 하나님 편이요, 그 사람의 다른 어떤 것을 보더라도 하나님 편이요, 그 사람의 손수건 하나만 갖다 놓아도 사탄이 도망가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끝날에 남아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끝날에 남아지는 그러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서 통일교회 원리가 위대하다는 것입니다.

여기 외국 분들도 와 있지만, 앞으로 두고 보십시오. 서운할지 모르지만 앞으로 여러분들에게 전부 꼬리표를 달아 주어서 전국 팔도강산을 돌아다니게 할 것입니다. 내 순회코스를 맨발로 벌벌 기어 다니게 할지도 몰라요. 사실 이런 것은 생각하지 맙시다. 오늘에 와서 그것은 벌써 과거이니까 그만해 놓고 오늘 현실을 바라봅시다.

오늘 우리 통일교회를 두고 볼 때, 통일교회는 외로운 교회입니다. 그렇지요? 외로운 교회지요? 아니라구요? 아니긴 왜 아닙니까? 통일교회는 외로운 교회, 통일교인은 불쌍한 무리, 통일교인은 밥 굶는 무리…. 그렇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천대를 해도 뜻을 위해서 반항할 줄 모르는 무리입니다. 선생님도 일생을 엮어 얘기하면 역사가 많습니다. 무슨 말씀인지 알아요?

통일교회에 가면 선생님이 수염이 이렇게 자라 가지고 ‘에헴!’ 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할지도 모르겠구만, 그것은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선생님이 일하기가 좋습니다. 작전상으로 봐도 참 잘됐다는 겁니다. 세상 사람들은 생각은 저기 있는데 행동은 뒤꽁무니에 있는 것입니다. 잘못 알았다는 겁니다. 뭐 음란하고, 뭐 어떻고, 자꾸 욕하지만, 해 보라는 것입니다. 우린 욕먹고 쫓김받지만 망하지 않습니다. 계속 크기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껍데기를 벗겨도 죽지 않고 다시 살아납니다.

선은 맞을수록 흥하고 악은 맞을수록 망한다

우리 통일교회는 지금까지 자유당을 비롯하여 민주당과 혁명정부로부터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 어느 정부도 우리편을 들지 않았습니다. 떠도는 말에는 통일교회가 무슨 혁명정부의 편이라고 하는데 천만에요. 그것은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통일교회는 무슨 정당의 편이 되는 그런 교회가 아닙니다.

오늘날 이 모진 핍박과 시련 속에서도 우리는 한 번도 죽지 않고 살아남았습니다. 앞으로 20세기 말기에 이 혼란된 사회가 휘몰아쳐 오더라도 ‘해보고 싶다.’ 하는 마음을 갖고 대처하면 됩니다. 이것은 영계에 가서 싸우는 것보다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늘날 수많은 교단들이 통일교를 이단으로 낙인찍어 심판하는데 그 심판이 나중에는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 되겠습니까? 그런데 기성교회 목사들이 왜 반대를 하느냐 하면, 자기들이 수십년간 고생해서 길러 놓았던 교인들을 자기가 아무리 ‘너는 내 아들딸이다.’라고 해도 우리 통일교회에 한번 데려다가 몇 시간만 강의를 듣게 하면 그들 교회에서 꽁무니를 빼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리가 없어서 강의도 못 들어요. 그러나 이것은 절대 강제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추수할 사명이 있기 때문에 익은 열매가 있으면 거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요즘 여자들의 비방이 많은 모양인데, 내가 왜 그들하고 원수져야 합니까?

여러분들, 싸우다가 지쳐 죽으면 죽었지 싸워 보지도 못하고 죽으면 안 됩니다. 또한 기껏 싸워 가지고 지면 말이나 됩니까? 사탄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야! 사탄아! 네 모든 능력과 실력을 동원하고, 너의 세계를 활용하여 나를 전도해 보라!’고 하면 사탄도 자연굴복합니다.

예수님도 영계에 돌아가서 수많은 수고를 하면서 지상에 발판을 건설해 나왔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대신해서 이루어 놓으신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일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위대하신 것입니다. 모든 것들이 반대하는 그 속에서도 뜻을 이루어 왔으니 말입니다. 그렇기에 하늘은 맞고 맞으면서도 빼앗아 나오는 것입니다. 악은 맞으면 그대로 망하지만, 선은 맞으면 맞을수록 발전하는 것입니다. 역사가 그렇게 흘러왔습니다.

예수가 하늘 편에 서 있었기 대문에, 로마의 통치 밑에서 민족의 반역자로 몰려서 죽었으면 망해야 되는데 그렇지 않고 머리를 들고 세계를 뒤흔들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선은 맞고 흥하지만 악은 맞고 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 통일교회 문선명이라는 사람은 지금 많이 맞고 있습니다. 그러나 맞아도 잘 맞겠습니다. 모둠매를 맞으면서도 흔적이 없게끔 맞겠습니다. 그렇다고 맞고 망하는 사람은 되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다짐하곤 했습니다. 마음속으로 수없이 다짐했습니다. 맞고 망하는 무리는 역사적인 역적이요, 맞고도 흥하는 무리가 있다면 의인들로, 역사의 심판자들로 영원히 남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 젊은 사람들, 여러분도 그렇습니까? 저기 아줌마들도 그래요? 이 해와의 후손들…. 그렇다고 선생님이 욕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선생님은 사실 해와를 생각하면 원수 같습니다. 해와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6천년 동안이나 인류가 이렇게 지지리 고생하는가 말입니다. 그러니 여자 하면 해와가 생각되어지고, 해와 하면 뱀이 생각되어집니다. 그렇다고 여러분이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타락한 해와와 선생님과는 원수지간이기 때문에 미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통일교회 문 선생도 여자들 때문에 얼마나 많은 욕을 먹고 있습니까? 뭐뭐 어쩌고저쩌고 하며 욕하고, 퇴폐하다느니 어쩌니 하며 비판하고 있습니다. 여자라는 인간들…. 그렇지만 통일교회의 여자들은 필요합니다. 죽으라 한다고 다 죽어 버리면 그것도 큰일입니다. 그래 요즈음 수고 많이 하는 여자분들은 해와가 아니라 해와 편에 있는 분들이지요? 저기 부인들, 선생님이 말한 그런 배포 있어요?

오늘 이 세기말적인 역사의 끝에서 태어난 여러분, 이왕 한번 사나이로 태어났으니 결판을 내야 하는데 그러려면 살살 피해 다니지 말고 몽땅 붙안고 몹쓸 것은 집어던지고 멋지게 해치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까지 나는 그렇게 해 왔습니다.

복받기를 원하는 자들에 대한 경고

선생님에게는 무한한 자료가 필요했습니다. 노동판에 가면 일등 노동자입니다. 못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언제든 먹고살 걱정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가령 내가 어떤 노동판에 가서 일을 하더라도, ‘아 통일교회 선생님이 밥벌이가 곤란해서 이런 일을 하는구나.’ 하고 알면 그건 큰 오해입니다.

나는 당장에 어디 가든지 이 몸뚱이를 가지고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안 해 본 일이 없어요. 무엇이든지 한번 붙드는 날에는 끝을 보지 않은 것이 없어요. 또 어디서 무엇을 한다 하면 설렁설렁해도 3등 이내는 한다 이겁니다. 아마 하나님도 지혜로우신 분이라서 나 같은 사람, 특종을 잘 택하신 것 같습니다.

한번 손을 대서 시작하는 일에는 생명이 가다가 죽더라도 해치워야 직성이 풀립니다. 시시껄렁하게 하려면 아예 시작부터 안 합니다. 누구든 한 번 붙드는 날에는 네가 망하든지 내가 망하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내가 이 길을 나설 때에도 ‘하나님 있습니까?’ 하고 끝까지 캐어서 하나님이 계신 것을 확실히 알고 출발했습니다. 다음은 ‘하나님 소원이 있습니까?’ 하고 물어서 하나님의 소원이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또 ‘하나님, 내가 필요합니까?’ 하고 여쭈어서 내가 필요한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면 얼마만큼 필요합니까?’ 하고 따졌습니다. 이렇게 내가 한번 찾아가 붙으면 하나님께서 대답해 주시든가 아니면 보따리 싸들고 다른 데로 가시든가 해야 했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무엇이 있어야 합니다.

선생님은 인간을 많이 연구했습니다. 사람은 별난 게 아닙니다. 내가 술집에 있는 여자를 붙들고 그녀가 제일 안타까워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서 몇 마디만 하면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그를 선한 사람으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선한 사람은 악한 사람을 품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도 옆에 살인강도가 왔기에 아주 가까이에 가서 얘기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에게서 진실한 심정의 폭발이 있었습니다. 진실된 심정의 폭발을 일으켜 주면 다시 살아나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에는 모험이 필요합니다. 그러기에 좋은 것을 자주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좋은 것이 찾아들게 됩니다. 가만히 보니까 영계가 수고해 준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하나님이여, 저에게 복을 주소서!’ ‘저에게 큰 복을 주소서!’ 하는데 복이 보입니까? 그들은 욕심이 많은 만큼 징계가 있는 줄 모르고 있습니다. 복도 큰 것만 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큰 복은 주더라도 삼키지 못합니다. 큰 복만을 고대하는 만민들, 복받기 위해 도닦는 도인들이여 복에 혹이 달려 있는 것을 알라! 큰 복을 받기를 원하는 자들이여! 그것이 뒤바뀔 때에는 커다란 짐과 같을진대, 큰 복이 도리어 헤어날 수 없는 고통이 되기도 하는 것을 알지니라.

복을 받을 수 있는 자리

내가 통일교회를 지도하는 입장에서 염려하는 것은 기필코 하늘의 세계를 이 땅에서 일으켜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 일을 하다가 실패하더라도 하나님이 용서해 주신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큰 복을 받으려면 그 복을 받을 수 있는 뒷받침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시련 도상에 있더라도 거뜬히 이겨내야 하겠습니다. 한 나라와 한 민족의 전통을 세우고 그 민족정신에 부응하는 것도 마음가짐에 달렸습니다. 몇 대를 거치면서 그와 같은 전통을 세우고 심정적인 인연을 세우고 세계적인 혼란을 뚫고 나갈 수 있는 사람들이 나오면 그때부터 그 민족은 발전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뜻을 알고 보면 무한히 높은 것이요, 뜻을 알고 보면 틀림없이 하늘의 아들딸로서 하늘의 황족이 될 것이로되, 가는 방향을 어디로 잡을 것이냐?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자리에서 살 때가 다가왔는데 복을 감당치 못하여 다 빼앗기면 거지가 됩니다. 우리는 복을 빼앗기는 곳에서 자리잡을 것이 아니라 복을 받을 수 있는 곳에서 자리를 잡아야 하겠습니다. 그 권(圈)에 들어가야만 합니다. 이렇게 믿는 부분부터 하늘이 터를 열 수 있다는 것을 선생님을 알고 있습니다.

통일교회에 들어오면 금방 복받는 것이 아닙니다. 선생님도 역시 밥을 얻어먹는 고통도 겪었고, 또한 문전박대를 받는 때도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스승이 가는 길이 참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하늘이 거짓이 아니요 참인 것도 알았습니다. 그러면 하늘을 참되게 모셔야 합니다. 배고픈 자리에 가면 배고픈 사람처럼 굶고, 죽는 자리에 가면 과거에 충신들이 그런 자리에 들어가서 애달파한 것보다 더 애달파하고 그들보다 더 간절해야 됩니다. 그러한 심정의 주인공이 되지 않고서는 천륜을 대할 수 없습니다.

지치고 몰림받고 통일교회 무리를 그런 길로 내몰아야 하는 하늘의 사정이 있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합니다. 선생님은 지금까지 가는 길이 비록 험할지라도 하나님이 가라고 명령할 적마다 나를 버리고, 눈물을 머금고 최후의 폭탄과 같이 터지려고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오늘날 성공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오늘이 있기까지 하늘이 나를 붙들어 주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늘이 같이했다고 하는 것은 과거의 역사노정에 살아 있는 증거로 남아 있습니다.

하늘이 같이 안 해 주기를 바래도 같이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늘이 그런 자리를 권고하고 그러한 자리에 내모는 것은 영원히, 영원히 복을 줄 수 있는 터를 마련해 주시기 위한 참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천국을 어디에 이루겠습니까? 여러분들이 통일교회에 들어와서 이 일을 위하여 생명을 바칠 각오를 했고, 또는 선서를 하곤 했습니다. 우리는 오로지 뜻만을 위해 살고, 뜻만을 위해 죽겠다고 맹세하였습니다.

그런데 맹세한 그 승리의 터전이 언제 이루어지겠습니까? 안식하는 보금자리일 것이냐? 그렇지 않으면 비바람이 몰아치고 폭풍우가 몰아치고, 그런 와중에서 까딱 잘못하면 내 중심을 잃어버릴 수도 있는 자리일 것이냐? 후자라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 하늘이 고대하신 승리의 터전을 닦기 위한 팻말이라도 꽂을 수 있어야 하고, 하늘이 바라는 대로 살아 드릴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런 사람이 되면 하나님도 버리실 수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선생님이 무정하다고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내가 바라는 것은 통일교회 무리가 역사적인 길을 가기 위해 벼랑 끝에 서게 된다 하더라도 떨어지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 승리의 기대를 쌓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귀섭리와 한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복귀의 길은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태초로부터 지금까지 6천년 역사가 흘러 종말기에 다다랐는데 핍박받는다고 해서 낙망하고 절망해서 쓰러지면 하늘의 뜻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6천년 동안 사랑의 발걸음을 걸어 나를 붙들었습니다. 때문에 다시 돌아갈 수 있는 한 길을 개척해 놓지 않는 한 뜻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개인을 중심삼고 돌아갈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기 위하여 애써 왔지만 이제는 자기를 중심하여 종족을 이루고, 가정을 중심하여 민족을, 민족을 중심하여 국가를, 인류를 중심삼아 세계를 구성하여 돌아갈 수 있는 때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스승의 요구가 역사적인 우리 선조들의 소원이요, 선조들을 지도하던 하늘의 소원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역사적인 해원, 하늘의 해원과 선조들의 해원을 성사하여야 할 사명이 오늘 우리에게 있다고 할진대, 지극히 엄숙한 자세로 묵묵히 가야 하겠습니다. 복귀의 길은 그렇게 가야 됩니다.

여러분, 보세요. 3년 동안 우리는 고생했습니다. 밥을 제대로 못 먹고 옷을 제대로 못 입었습니다. 그렇지만 지치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이 본부에 있으면서, 어떤 식구는 개밥을 빼앗아 먹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배가 고파서 밥을 먹고 있는 개를 향하여 ‘야! 이놈아, 너는 너의 한 주인을 위해서 밥을 먹을는지 모르지만, 나는 이 인류를 위하고 하늘땅을 위해 살고 있으니 이 밥은 내가 먹어야 돼! 내가 먹어야 돼!’ 하고서 그 밥을 먹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처럼 개밥을 먹으면서도 하늘 앞에서 호소할 수 있는 날이 있어야 합니다. 스승된 나로서도 여러분에게 개밥을 먹이고 내가 보리밥을 먹으면 내가 더 곤란합니다.

우리는, 우리는 한(恨)에 사무친 무리입니다. 우리는 이를 악물고 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최후에 우리를 엿보는 사탄이 우리를 농락하게 됩니다. 날마다 눈물과 더불어 가야 하고, 패배당하지 않기 위해서 더욱 분발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늘의 전통을 고수해야겠고, 마음껏 그 뜻을 붙들고 눈물과 더불어 사는 일은 있을지언정, 하늘을 배반하고 ‘나는 기운이 없어 못 가겠다.’고 하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선생님은 옥중에서 매를 맞아 쓰러지면서도 피를 흘리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님을 위로해 드리며 차라리 송구스러워했습니다. 이러한 사정을 먼저 아는 하나님 앞에 어떠한 호소도 원망도 할 수가 없었어요. 오로지 갈 길을 바라보며 목적지를 향해 묵묵히 갈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한을 생각하면 자신의 한을 이길 수 있다

지금 통일교회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그런 것을 잘 모를 것입니다. 통일교회의 과거 역사를 모를 것이라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아들딸에게 그 못나고 지긋지긋하게 고생하던 모습을 무엇 때문에 보여 주겠습니까? 하늘도 우리 앞에 그걸 가르쳐 주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실정을 알고 싶다고 하면서 저 밑바닥까지 탐사를 해 보니 그때서야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셨다는 것입니다. 원리를 공부할 적마다, 또는 하늘의 심정을 노래하는 자리에 들어갈 적마다 하늘은 어찌하여 역사적인 노정에 감추어진 심정을 가르쳐 주셨던가! 감추려고 하는 그 심정보다 그 심정을 알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할 때에 하늘은 우리에게 새로운 원리를 지상 위에 나타내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됩니까?

여러분이 진실로 선생님의 역사를 알고 싶거든, 선생님이 하나님을 대하여 안타까워하던 마음이 하나님이 그 심정을 감추어 두려는 마음보다 컸던 것처럼 안타까워야 합니다. 여러분이 그렇다면 가르쳐 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아직까지 진실로 그러한 자리에 서려 하는 통일교회 사람을 만나 보지 못했습니다.

나는 한이 많다면 무한히 많은 사람입니다. 길가에 구르는 조약돌을 보고도 한을 호소했고, 살아 있는 풀 한 포기를 보고도 한을 호소하였습니다. 처량했던 자신을 역사를 걸어 놓고 원망도 해 보았고, 별을 보고 원망도 해 보았습니다. 내가 가야 할 복귀의 길에서 낙오병과 같은 심정도 가져보았습니다.

그러나 천주복귀를 위해 하늘은 인간을 보내 놓고 얼마나 낙망하셨겠느냐, 하늘 아버지의 심정이 얼마나 슬프고, 하늘 아버지의 한이 얼마나 많으셨느냐 하는 것을 알고, 내가 천번 만번 죽고 내 몸이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아버님께 슬픔을 더해 드리지 않겠다고 하면서 나왔습니다. 내가 죽음이란 두 글자를 남기게 될 순간, 내가 죽는 그 시간에 ‘내가 정성을 더 드렸으면, 내가 이렇게 해 봤으면 좋을 뻔했다.’고 하는 유언을 남기지 않겠다고 하면서 모든 것을 참아 나왔습니다. 이러한 가정이 진정한 통일의 가정이요, 통일의 무리인 것입니다.

여러분! 3년노정을 생각해 보세요. 3년노정의 기간 동안 자기가 뜻 앞에서 움직인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복귀 역사는 개인적인 복귀의 기준을 통하여 가정적인 복귀의 기준을 세워 나왔습니다. 하나님은 천주 상에서 최고의 승리의 기대 위해서 복귀를 바라보고 계시는데, 여러분은 하늘땅을 초월한 승리의 기반 위에서 개인복귀를 꿈꾸어 보았습니까? 가정 복귀를 꿈꾸어 보았습니까? 민족복귀, 국가복귀, 세계복귀, 천주복귀를 꿈꾸어 보았느냐 말입니다.

40이 넘어서 요즈음 머리가 희어지는 것을 보면서 나는 하나님을 이렇게 위로해 드렸습니다. ‘아버지! 저를 보고 슬퍼하지 마십시오. 제 결의와 소망은 이러했으나, 이런 연령에서 그런 소망의 한 날을 아버지 앞에 이루어 드리지 못한 것을 아버지 슬퍼하지 마십시오. 지금 자라고 있는 통일가의 무리들은 그 뜻을 받들어 아버지 앞에 충효의 도리를 세울 날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위로하고 나서 여러분을 바라볼 때 내가 하나님께 미안할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마다 참다운 양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아버지 앞에 참다운 자녀들을 못 가졌다고 할 때 심히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한 양심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그 후손들은 거기에서부터 선한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통일의 무리인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의 안타까운 심정과 예수님의 사정을 생각할 때, 하늘을 봐도 부끄럽고, 땅을 봐도 부끄럽고, 나무를 보나 날아가는 새를 보나 부끄러운 마음을 가지고 복귀노정에 있어서 주어진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것을 놓고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천국은 지옥 밑창을 뚫고 가는 길

지금은 복귀의 시련 도상에 서 있으나 개인적인 기반을 닦고 가정적인 기반을 닦고 민족적인 기반을 닦고 세계적인 기반을 닦기 위하여 자나깨나 앉으나 서나 늘 기도하는 심정이 되어야 합니다.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을 바라볼 적마다 너희들이 있는 그 자리가 하나님이 진정 기뻐하는 자리냐고 묻고 싶습니다. 축복받은 가정의 후손들이 그런 자리에 도달해야 하는데 그들이 누더기 옷을 입고, 밥을 굶으며, 광야에서 찬바람을 맞으며 생활하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선생님은 가슴이 아픕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남아 있습니다. 여러분 다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나 자신이 하나님의 복귀섭리인 이 천적인 역사 앞에 서기에 합당한 사람인가 물어보세요. 노아를 걸어 물어보고, 아브라함을 걸어 물어보고, 야곱을 걸어 물어보고, 모세를 걸어 물어보고, 예수를 걸어 물어보고, 2천년 동안에 순교의 길을 갔던 수많은 선지자들을 찾아서 물어보십시오.

개인 복귀노정에서 나는 책임을 다했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지, 가정 복귀노정에서 승리했다고 떳떳이 말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아직도 종족과 민족 복귀노정이 남아 있거든, 그들을 복귀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참다운 사정을 통할 수 있는 사람이 되지 못하면 안 됩니다. 뜻길의 낙오자들을 다시 불러 모아 재기시켜 주시려는 아버지의 아픈 마음을 여러분은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아버지의 그 아픈 마음을 여러분이 잊어버리면 원리가 여러분을 심판하게 됩니다.

오늘 여러분 앞에 있는 복귀의 길이란 슬픔의 길입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나도 가기 싫은 길입니다. 한이 많아요. 쓸쓸한 길입니다. 하나님도 그렇고 예수와 성신도 그렇습니다. 아니 갈 수 없는 길을 가는 것입니다. 천국은 지옥을 통과해서 가는 길이라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합니다. 천국은 지옥을 피해 가는 것이 아닙니다. 지옥 밑창을 뚫고 가는 것입니다.

우리 통일교회의 지방 실정은 선생님이 다 알고 있고 심정으로 다 느끼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나타나서만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 젊은 사람들을 보게 되면 난 이런 말을 해주고 싶습니다. 책임을 할 수 있을 때 책임을 다하라고 말입니다. 만약 책임을 다 못하면 슬픔을 느끼게 됩니다. 이런 것을 느낀다면 마음으로써 넘어가야 합니다. 복귀의 길은 마음으로 넘어가는 길입니다. 그런데 하늘이 먼저 그 길을 몇천만 번 왕래한 것을 알아야 됩니다.

크게 믿고 크게 넘어가자

내가 가는 이 복귀의 길은 나 혼자 가는 길이 아닙니다. 이 길은 우리 선조들이 몇천만 번 왕래하던 길이며, 하나님이 몇천만 번 왕래한 길입니다. 여러분 홀로 가는 길이 아닙니다. 선생님은 친히 행하고 명령하던 것이니 여러분은 틀림없이 순종해야 합니다. 여러분을 그냥 시켜먹기 위해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소망의 고개를 넘고 사탄이 따라오지 못할 고개를 넘어서 신천지를 향하여 가는 것이 통일의 무리이거늘 답답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하신 말씀이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눅 12:49)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에 풀래야 풀 수 없는 예수님의 서러움이 들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어느 나라든 군왕을 모시는 충신은 그 나라의 환경이 비참해지고 어려워질수록 왕에 대한 사무치는 심정이 더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뜻을 품고 말없는 가운데 묵묵히, 남은 돌아서더라도 나는 질러가고, 목숨을 건 결전도 불사하겠다는 결의를 품고 가는 길이 하늘의 아들딸이 가는 길이요, 통일교회 무리가 가는 길이라고 나는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선생님은 가끔 애기들을 불러서 이야기 할 때, 만일 이러이러한 계획이 실천되지 않을 때는 그것을 생각하게 해 주고 갈 길만 가르쳐 줍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나라를 찾아 나가고 있지요? 그런데 우리는 우리 선조들이 하늘을 대했던 그 마음을 오늘날 복귀의 도상에서 우리가 전부 상속 받아야 합니다. 이런 엄숙한 과제를 앞에 놓고 있는 여러분은 어떠한 자세로서 그 과제를 대하겠습니까?

선생님은 하나님께 결의하고 섭리노정을 출발했기에 여러분에게 그런 과제 앞에서는 죽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죽지 말고, 죽지 말고 다시 출발해 가라는 것입니다.

이 뜻은 한국에서 출발해서 세계로 뻗어 나가고 있는데, 오늘의 이 세계는 얼마나 복잡하고 혼란이 많습니까? 세상은 복잡한 문제에 부딪치면 부딪칠수록 더욱 무너져 내려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꾸 올라갑니다. 여러분이 안 올라가려 하면 영계의 영인들이 많기 때문에 그들이 올라가려고 합니다. 그리고 한민족이 올라가지 않으면 20세기의 수많은 인류가 올라가게 됩니다. 우리가 조금만 올라가면, 조금만 더 올라가면 한국이 돕니다. 그런 시대가 옵니다. 통일교회 여러분은 그 시대가 오면 감사해야 합니다. 불원한 장래에 그러한 현상이 벌어지게 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그런 날이 오게 하려면 하루의 싸움이 문제가 아닙니다. 천년 만년을 위한 크나큰 계획을 세우려 하니 1년, 2년, 10년, 20년, 혹은 일생이 문제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계획을 세워 끝까지 갈 결의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위해 출발했으니 끝까지 갑시다. 물론 가다가 거센 풍랑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에는 하나님을 모시고 그것을 벗어납시다. 그러면 반드시 하나님이 복을 내리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 역사적 과제를 이루어야 하고, 하늘의 한을 붙안고 이것을 해원성사하지 않으면 아니 될 현실에 있습니다. 여러분이 좌하면 천지가 좌하는 것이요, 여러분이 우하면 천지가 우하나니 여러분은 자세를 똑바로 세워 천리의 대도를 찾아 나가야 합니다. 여러분이 효자가 될 것이냐, 충신이 될 것이냐, 열녀가 될 것이냐, 효녀가 될 것이냐, 아니면 사탄의 구렁텅이에서 하늘의 원수와 인류의 원수들과 더불어 영원무궁토록 서 있는 슬픈 모습이 될 것이냐?

알려 주어야 할 하늘의 심정을 다 알려 주었고, 밝혀 주어야 할 하늘이 길을 다 밝혀 주었고, 보여 주어야 할 천도를 다 보여 주었습니다. 이제는 여러분이 잘 크느냐 못 크느냐 하는 문제만 남아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잘 사용하느냐 못 하느냐의 여하에 따라 복귀의 길은 단축되기도, 연장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복귀의 길에서의 어려움

한이 어디에 있습니까? 아브라함이 비둘기 하나 쪼개지 않은 것이 한이었습니다. 야곱의 노정에 있어서는 에서와 라반이 야곱의 원수였습니다. 모세의 노정에서도 광야에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몰림받은 것이 한이었습니다. 여러분이 가는 노정에 있어서도 현실에서 자기 자신을 갖추어 가지고 미래의 자신의 가치를 바라보며 현실을 바로 수습할 수 있는 주체가 되어야 합니다. 역사의 한 기점이 되고, 미래의 역사를 돌려놓을 수 있는 하나의 실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여러분의 자체를 위한 복귀의 길을 감사하며 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각오하고 있습니까? 이것이 복귀의 길입니다. 그러면 복귀의 길이 여러분을 중심삼고 어떻게 될 것입니까? 한 개체를 놓고 과거와 미래가 오늘을 중심하고 연결되어 있습니다. 과거․현재․미래가 관계되어 있습니다. 미래가 관계되어 있고, 과거가 관계되어 있습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중심으로 해서 천지의 운세는 돌고 도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자신을 어디에 머물게 하고 싶습니까? 자신을 갖고 더욱 전진하기를 바랍니다. 나의 몸과 마음을 터로 하여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을 하시게 될 때, 내 개인이 심판의 성경이 되고 법전이 되고, 심판을 하여도 걸리지 않는 절대적인 자리를 닦아야만 개인복귀가 완결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개인완성 위에 가정을 완성해야 할 때입니다. 가정의 역사는 전부가 심판의 재료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판받게 될 때에 사탄이 참소할 수 없는 순결의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가정적인 복귀를 이루고 민족적인 터전을 완결 지을 수 있는 것입니다. 민족적인 승리의 기반을 완전히 닦으면 사탄세계의 만민을 심판할 수 있는 것이고, 하나님이 친히 재판장의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은 변호사가 되시고 사탄은 검사가 됩니다.

전세계에 널려 있는 민족들이 사탄을 공격하게 될 때 항의를 받지 않는 절대적인 승리의 기반을 닦아야 민족적인 복귀의 길을 갔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국가, 세계, 하늘과 땅, 온 인류의 구속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영계와 육계를 통합할 천주세계에 있어서 엄청난 역사적인 전체의 탕감 기준을 완결해 놓고, 하늘땅을 중심한 억천만세의 대심판장을 마련해 놓은 후 창조주이신 아버지를 모셔 놓고 지금까지 하늘땅을 저끄러 나온 원수를 무자비하게 심판하게 될 때, 배신자로부터 졸장부까지 전부 항의하지 못하고 당연하다고 할 수 있는 기준을 세워야 천지 복귀노정이 완결되는 것입니다. 사실이 그렇다면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무서운가?

고통의 역사인 고로 하늘은 나를 세워 틈만 나면 몰아내십니다. 개인을 세워 놓고는 가정적인 십자가의 환난노정으로 내몰고, 가정을 세워서는 민족적인 환난노정으로 내몰고, 민족을 중심삼아서는 국가와 세계로 내모는 것입니다. 그러니 택함받는 것도 귀하지만 택함받은 자로서 축복을 받는 길은 심히도 어렵습니다. 나를 찾아 세워 복 주시려는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원망하기 쉽기 때문에 복귀의 길이 어렵다는 것을 잘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밥을 먹어도 천상의 수많은 우리의 선조들의 한을 풀어야 할 입장에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심판은 땅에 있는 인간들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디 험한 것에 속지 말고, 하나님이 오라 하시는 그 표준을 향해 가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여러분을 부여안고 대성통곡하고 승리했다고 하는 칭찬을 받을 수 있고 아버지 앞에 할렐루야 찬송을 부를 수 있는 여러분이 되어야 합니다.

복귀의 길의 최후의 목적

그래서 아버지로부터 ‘억대 만세 온 천주는 기념할지어다.’ 하는 축복을 받는 자리, 참부모의 자리까지 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귀의 길에서 마지막인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죽지 말아요. 그 책임을 다하기 전에는 죽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세계 앞에 작전이 필요한 것입니다. 엉클어진 이 세계를 참부모를 중심삼고 바로잡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세계적인 탕감복귀노정을 넘어가야 할 때에는 5퍼센트의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때는 영광도 필요 없습니다.

우리는 국가적인 기준을 세워서 세계의 여러 나라에 선교사를 파송했고, 예수님 당시 세계적인 중심이었던 로마와 같은 미국에 자리잡았고, 이스라엘과 같은 우리나라에 자리잡았습니다. 그래서 유대교와 이스라엘 민족에게 몰림받고 핍박받고 설움받던 예수님의 사정과는 다릅니다. 이제는 아무리 반대해도 소용없습니다.

여러분은 지난 몇년 동안에 선생님이 말한 것이 지금에 와서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있습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다 들어 이제는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이 하는 말이로되, 그 내용에는 역사가 반영되어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보았을 것입니다.

통일교회 스승의 배후에는 하늘이 있습니다. 우리가 억만 사탄과 싸우다 죽어 그 시체가 가나안 땅에 묻힐 수만 있다면 그것은 영광일 수밖에 없습니다. 애급 땅에 묻힌다고 한다면 큰 한이 되겠기에 야곱과 요셉은 죽음에 이르러 유언한 것입니다. 내가 죽은 다음에 부디 본향 땅에 묻어 달라고.

이제 한국 강산에서 싸우다 죽어도 그렇게 한이 되는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사탄세계는 어차피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도 여기에 책임분담을 짊어지고 전생애를 다해야 합니다. 복귀섭리 앞에서 천주의 상속권을 받아 가지고 언제든지 갈 수 있는 사람이 되길 부탁합니다. 알겠습니까? 그렇게 하겠다는 사람 손들어 보세요.

<기 도>

아버지!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질시하며 죽으라고 하는 이 살벌한 도상에서, 그래도 죽지 아니한 것은 오로지 당신의 은사이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눈을 흘기며 손가락질을 하는 속에서도 홀로 다짐해야 했던 그런 슬픔도, 당신이 보호해 줌으로 말미암아 지금은 한 날의 승리를 행해 가는, 기뻐할 수 있는 길에 서 있습니다. 늠름한 자세로 전죄악역사를 감고 뒤넘이쳐야 할 책임이 저희에게 있음을 생각할 때 감사하옵나이다.

지금의 국제정세로 볼 때 한국은 지극히 불쌍한 현실에 놓여 있습니다. 갈래야 갈 수 없는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갈래야 갈 수 없는 이 민족이 이제 다시 바라볼 것은 하늘밖에 없는 시대로 접어들고 있음을 다시 한 번 보게 됩니다.

지금 한국은 한 분이신 하나님을 찾아야 되겠사옵니다. 잃어버린 세계와 천주를 그 마음에서 다시 불러일으켜야 되겠사옵니다. 이 한민족은 세계 여러 민족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위하여 정성들여 온 민족이요, 선의 역사를 위해 심혈을 아끼지 않은 민족임을 저는 알았사옵니다. 이 민족이 인연 되어 세계적인 책임을 짊어졌사오니, 소용돌이치는 와중에서도 낙망하지 않고 쓰러지지 않는 민족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누가 아버지의 심정을 알겠으며, 누가 아버지의 가는 길을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아는 자와 책임을 맡은 자 외에는 없사옵니다.

무지한 백성을 바라보게 될 때 통곡밖에는 할 수 없으며, 땅 위에 살고 있는 인생들이 죄악 가운데 있는 것을 바라볼 때 저희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그들을 인도해야 할 책임과 무서운 사명이 있음을 알게 되옵니다. 저희들이 굶주리면서도 그들에게 찾아가 그들을 하늘 앞에 세워야 할 책임이 있사옵고, 저희들이 헐벗으면서도 저들을 입혀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을 알고 있사옵나이다.

이러한 노정에서 슬픔에 잠긴 통일의 무리가 있사옵니까? 아버지시여, 그 슬픔을 제거하여 주시옵소서. 낙오자가 되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최후의 싸움터에서 아버지 앞에 슬픔과 염려를 남기는 자가 되지 말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나의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지금도 저희들은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하늘을 찾아가는 길이 이렇게 어렵다는 것을 모르고 있사옵니다. 모르는 것이 죄이옵니까? 모르는 것이 죄가 아니옵거든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통일의 무리들이 가는 앞길을 가로막는 자들이 있사오니, 그들의 무지함을 용납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옵니다.

하늘과 땅은 하나요, 하늘땅은 아버지의 것이요, 모든 아들딸은 아버지의 것임을 아옵니다. 12자녀를 세우고 12족속을 세우기 위한 선의 조상들이 그 혈적(血跡)을 탕감복귀하고 이 시대를 치리할 수 있게 하여 주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직도 남아진 한 많은 복귀역사 도상에서 승리의 한 날을 찾아 나오기 수천년, 오늘 저희가 그 마음 앞에 보답하기 위해 짐을 짊어지게 됨을 감사드리옵니다.

수천만 형상 앞에 이념을 세워 가야 할 길이 복귀의 길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죽어 눈에 흙이 들어오기 전까지 기어이 아버지의 한을 제거시켜 드리고 되돌려 드릴 수 있는 그 무엇에 플러스가 되는 아들딸 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나이다.

아직도 가야 할 한 많은 복귀의 길 앞에 아버지의 영광의 기준을 높이고 승리하여 길이길이 후손들의 찬양을 받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후손들로부터 찬양받을 수 있는, 영원한 승리의 터전을 마련할 수 있는 아들딸 되게 허락하여 주옵시기를 간절히 바라옵나이다.

오늘 세계에 널려 있는 불쌍한 통일의 무리의 앞길을 아버지,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피눈물로 그리워하고 마음을 조이면서 보고 싶어하는 자녀들임을 아오니, 아버지! 그들의 마음을 채워 주시옵소서.

아버지, 뜻을 이루어 세계적인 대가족을 이루는 날, 아버지 홀로 아버지 되시옵소서. 저희를 사랑으로 품어 주시옵고, 사랑의 세계를 이루어 남을 비판하는 사탄의 마음이 한 호리(毫釐)도 없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나이다. 이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하나님이 천지 만물을 지으신 목적

인간이 만들어 놓은 이 세상의 모든 물건에는 반드시 주인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물건에는 그것을 지은 주인의 목적이 있고, 또한 지음받은 그 물건 자체가 지니고 있는 목적이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천지를 지으신 분이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천지를 지으신 주인을 우리는 하나님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지음받은 만물이 하나님과 더불어 있지 못하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지어진 세계가 타락한 세계가 되어 있습니다. 타락한 그날부터 천지 만물은 주인을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천지 만물은 잃어버린 주인을 찾아 다시 인연맺어야 할 입장에 서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잃어버린 주인을 찾아 나가는 길이 복귀의 길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천지 만물을 지으신 주인은 어떠한 목적을 갖고 있었겠습니까? 그 주인은 인간의 아버지로 계시기 위해, 인간을 통해 나타날 수 있는 소망의 중심체로 계시기 위해 천지 만물을 지었습니다. 이러한 천지 만물은 그 주인이 사랑할 수 있고 주인의 사랑을 받을 수 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것, 하나님의 나라의 것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 못하고 하늘은 하늘대로, 땅은 땅대로, 인간은 인간대로 분리되어 버렸습니다. 이것이 타락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분리된 이것을 수습해 나오셨습니다. 하늘을 수습하고 땅을 수습하면서, 인간을 중심으로 전체를 수습해 나오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걸어 나오신 복귀의 길입니다.

원래 하나님과 우리 인간은 영원히 잊을래야 잊을 수 없고,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부자의 인연을 맺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의 입장에 서지 못하고, 우리 인간도 하나님의 자녀의 입장에 서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 가장 불쌍한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 사람은 어떠한 사람이겠습니까? 자식을 가진 부모가 그 자식을 자식이라 할 수 없는 사람, 부모를 모시고도 부모라 할 수 없는 입장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 이상 불쌍한 사람은 없습니다. 또한 인연과 약속을 통해서 천하에 맹세하고 부부의 인연을 맺었지만 남편과 아내가 서로 사랑할 수 없는 입장에 있다면 그 사람 이상 불쌍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부자의 관계를 회복해야 할 하나님과 인간

오늘날 하나님과 우리 인간은 어떠한 입장에 놓여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아버지이고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인데, 그렇지 못한 입장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부자의 관계라는 것이 기독교의 핵심 사상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천지창조의 원칙적인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과 부자의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자리로 찾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아버지)과 인간(아들딸)과의 관계가 끊어져 버린 천하가 된 것 이상 비참하고 슬픈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하나님이 슬퍼하시는 것은 물론이지만 하나님을 잃어버린 우리 인간도 슬퍼해야 할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또 신랑으로 모셔야 할 하늘을 잃어버린 땅의 슬픔 이상 더 큰 슬픔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천지를 동원하여 찾아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잃어버린 아버지를 찾는 것이요, 잃어버린 자녀를 찾는 것이요, 잃어버린 신랑 신부를 찾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찾아 나오는 길이 복귀의 길입니다. 이러한 복귀의 도상에서 하나님은 ‘내가 하나님이다.’ 할 수 있는 한 날을 가져 보았습니까? 못 가져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아들딸을 위하여 세상을 지었지만 ‘내 나라’라고 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을 믿고 나오는 수많은 백성 혹은 수많은 성도들이 이 천하는 내 것이라고 해 보았습니까? 못 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이 천지는 주인을 잃어버린 천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 대신 무엇이 이 천지의 주인이 되어 있습니까? 하나님의 원수요, 우리의 원수인 사탄이 주인이 되어 있습니다. 원래 속해야 할 주인을 잃어버린 만물이요, 원래의 부모를 잃어버린 인간이 된 것입니다. 그렇게 주인을 잃어버리고 부모를 잃어버린 천주요 인류라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잃어버린 부모를 찾고,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부모의 원수를 갚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의무로 남아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복귀의 길은 무엇을 찾기 위한 길입니까? 잃어버린 아버지를 찾고, 그 아버지를 중심삼은 나라를 찾기 위한 길입니다. 이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종의 종에서부터 종, 양자, 자녀의 자리를 거쳐 승리한 아들딸로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야 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중심한 참다운 부모가 되어서 가정을 만들고 종족을 만들고 민족을 만들고 국가를 형성하면서 세계를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복귀의 목적인 것입니다.

어느 한때 하나님께서 한 개인을 세워 놓고 ‘내가 너의 아버지가 틀림없고, 너는 내 아들이 틀림없다.’고 한 적이 있었습니까? ‘나는 천지를 창조한 주인이니 내가 동하면 같이 동할 수 있는 천지요, 내가 정하면 같이 정할 수 있는 천지다. 너는 내 아들이니 너도 내 대신 그런 일을 할 수 있다.’ 하는 말씀을 받은 아들딸이 있었습니까?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 위에 예수님을 보내시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하셨습니다. 독생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아들이요 독생자로 이 땅 위에 보내셨으되 하나님이 끝까지 사랑하실 수는 없었습니다. 창세 이후 처음으로 하나님의 사랑하는 독생자라는 명분을 가진 메시아를 사랑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 이상 원통함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도 그러하시지만 보내심을 받는 예수님은 어떠하셨겠습니까? ‘아버지여! 나를 사랑해 주시옵소서.’라고 해 보지도 못했습니다. 고작해야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마 26:39)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는 크나큰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응당히 아버지의 사랑을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마음대로 사랑받을 수 없는 어떠한 조건과 한계선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저 바라만 보는 사랑이요, 사모만 하는 사랑이요, 고대만 하는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내 아버지여!’, ‘내 아들아!’라고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 땅 위에 예수님을 믿는 많은 성도들은 자칭 하나님의 아들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진정 하나님의 심정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에 불타는 정열의 마음을 가진 아들딸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오냐 너는 내 아들이다.’ 하시며 가슴을 헤치고 품을 수 있는 아들딸이 있습니까? 없다는 것입니다. 천지는 그대로 남아 있고, 인간의 형태를 갖춘 사람은 많지만 천지를 주관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독차지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거예요.

복귀의 책임을 짊어지고 섭리해 나오신 하나님

천상에 가신 예수님도 기도해야 됩니다. 성신도 해산의 수고를 해야 됩니다. 무슨 연고로 그래야 되는가? 타락으로 인하여 생긴, 탕감해야 할 한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개인으로부터 가정, 종족, 민족, 국가를 거쳐 세계와 하늘땅, 영계와 육계에 맺혀 있는 한을 해원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한을 해원하지 않고는 하늘과 땅이 인연을 맺을 수 없습니다. 하늘은 신랑이요, 땅은 신부입니다. 하나님은 인류의 부모요, 인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러한 인연을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 사탄, 혹은 이 마귀는 무엇이뇨? 영원히 가를래야 가를 수 없는 하늘과 땅,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사랑을 도둑질한 도적놈입니다. 이 사탄으로부터 항복을 받기 전에는 가정의 파탄을 막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타락한 후손들은 본심이 지향하는 것을 따라 자기도 모르게 하늘을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쓰러지고 자빠지면서도 가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민족적으로, 국가적으로 쓰러지고 뒤넘이치는 역사노정을 거쳐왔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고마운 것은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이렇게 숱한 뒤넘이치는 노정을 거쳐왔지만 지금까지 하나님의 이름이 인간의 마음속에 남아져 왔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라도 남아 있다는 것이 행복한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갔지만 예수님의 이름이 남아있는 것이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있지만 나는 옛날부터 그렇게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않아요.

역사노정을 걸어오는 동안 숱한 곡절도 많았지만 오늘에 이르러 인간 후손들 앞에 하늘을 신랑이라 할 수 있고 땅을 신부라 할 수 있는, 예수님을 신랑이라 할 수 있고 신도를 신부라 할 수 있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할 수 있고 인간을 자녀라 할 수 있는 이런 명사, 이러한 가르침이 복잡한 이 세상 가운데 전파되어 세계적인 무대를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 모두가 지금까지 기독교인들이 전도를 해서 이렇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겠지요? 물론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제물적인 입장에서 자신을 희생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보다는 그들의 배후에 계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이라도 남겨 주고, 당신이 소원하는 기준이라도 이 땅 위의 인간들 앞에 남겨 주기 위해 책임을 짊어지고 나오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책임을 시대적으로 인간들에게 다리를 놓기 위해 눈물지으면서 지금까지 섭리를 전개해 나온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에서는 순교의 역사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어느 때나 어느 지역을 막론하고 기독교가 들어간 곳에서는 반드시 순교의 피를 흘렸던 것입니다. 이렇게 피를 흘리며 선교의 기반을 닦아 나왔다는 것은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개인, 가정, 혹은 단체가 비참하게 희생되었다고 하는 것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의 비참함보다도 그들을 인도해 오신 하나님이 더 비참한 길을 걸어오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역사적인 모든 비참상을 보따리에 싸 가지고 사탄세계에 가서 풀어놓을 수 있는 사람, 하나님의 분함과 우리 인류의 모든 분함과 억울함을 사탄세계에 가서 퍼부어 복수할 수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할 수 있는 사람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 복수를 할 때가 바로 대심판 날입니다.

하나님이 가야 할 길과 부름받은 인간이 가야 할 길

여러분, 성경 말씀(마태복음 25장 35절 이하)을 보면 오른편에 있는 무리를 대하여, 내가 주릴 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하시고 오른편의 의인들을 대하여는 영생을, 그렇지 못한 왼편의 악인들을 대하여는 형벌을 내리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말씀을 대할 때 여러분은 단순히 비유와 상징으로 하신 말씀이라고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이 땅 위에 오셔서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마 8:20)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습니까? 4천년 동안 하나님이 준비하여 보낸 메시아가 땅 위에서 이런 신세가 될 줄 누가 알았습니까? 메시아를 맞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리고 학살을 당해야 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기 위해서 4천년 역사를 준비하셨겠습니까?

하나님을 위하여 충신이 되고, 효자 효녀가 되고, 열녀가 되겠다고 하는 무리들은 이러한 길을 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왜 그러느냐? 충신의 이름은 있으되 충신으로서 가야 할 길이 남아 있고, 효자 효녀의 이름은 있으되 효자 효녀로서 가야 할 길이 남아 있고, 열녀의 이름은 있으되 열녀로서 가야할 길이 남아 있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을 주어서 죽음의 길로 가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길이 막혀 있기 때문에 이 길로 내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충신, 효자, 효녀, 열녀가 되기 위해서는 군왕과 부모와 신랑을 대신하여 자기 몸을 죽음의 자리로 내던질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불림을 받았지만 인간은 인간으로서 갈 길이 있고, 하나님은 하나님으로서 갈 길이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가는 길에 십자가의 길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가는 길에도 십자가의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개인적인 사정을 중심삼고 가지만 하나님은 개인 사정뿐만이 아니요, 인간은 가정적인 사정을 중심삼고 가지만 하나님은 가정 사정뿐만 아니요, 인간은 민족이면 민족만을 위주해서 가지만 하나님은 민족뿐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는 개인을 넘어서 가정, 가정을 넘어서 종족, 종족을 넘어서 민족, 민족을 넘어서 국가, 국가를 넘어서 세계, 세계를 넘어서 천주가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의 길을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인간의 희생만으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십자가에서 승리한 자들을 합하여 가정적인 형태를 만들어 가지고 하나님이 가야 할 가정적인 십자가를 탕감해야 됩니다. 민족과 민족을 합하여 하나님이 가야 할 국가적인 조건을 세워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진정한 효자 효녀가 되고, 진정한 충신 열녀가 되려면 먼저 자기가 가야 할 길을 다 간 후에 하나님이 가는 길을 도와주어야 됩니다. 하나님을 업고 가든지 어떻게 하든지 도와주어야만 됩니다.

복귀의 길은 인간만이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도 가고 계십니다. 인간은 지상을 통해서 가고 있지만 하나님은 지상뿐만이 아니라 천상세계의 복귀의 노정까지 걸어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위해 가는 사람들은 축복을 받고 나서는 지독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역사가 그래요. 내 개인이 천신만고 끝에 하나님의 불림을 받아 제물이 되었다 하더라도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기반으로 더 큰 십자가에 가담하여 현재의 위치에서 한 발자국 발전해 가는 것이 복귀의 길입니다. 개인보다 가정적인 기준을 세워야 하는 하나님은 가정적인 희생자를 세웠고, 가정보다는 민족, 민족보다도 국가, 국가보다 세계를 위한 희생자를 세워 왔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역사를 수습해 나오시는 하나님 앞에 수많은 희생자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기독교가 세계를 중심삼은 하나의 기반을 닦기 위해서는 기독교로서의 희생적인 사명을 완결 짓는 동시에 기독교를 이끌어야 할 하나님의 십자가를 대신 탕감해야 됩니다. 그래서 세기말적인 대환난이라는 명사가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제물의 자리로 내모는 이유

이러한 환난 도상에 제물로 세움을 받는 사람은 그 자신이 죄가 있어서 제물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현재의 위치보다 더 큰 분야를 개척하기 위해서 제물적인 자리로 내모는 것입니다. 이것이 탕감복귀의 원칙입니다.

이렇게 탕감복귀해 나오는 것을 지금까지 우리의 선조들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개인적인 십자가의 도상에서 승리하여 그 기반 위에서 민족적인 십자가의 길로 가겠다고 사탄 앞에 선포하고 나서면 민족적인 십자가의 노정을 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민족적인 십자가가 무엇인지 몰라 가지고는 안 됩니다. 이것을 몰라 가지고는 책임질 수 없습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세계적인 기독교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기독교로서 짊어진 십자가를 탕감하고 하나님의 십자가까지도 탕감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책임을 완결 짓겠다는 조건을 세워 놓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기독교는 그 책임과 사명을 못함으로 말미암아 깨져 나가고 있습니다.

이런 때를 맞이하여 하나님께서는 세계적인 사명을 할 수 있는 교단을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교단을 세울 때 외적으로는 국가 주권을 세워 가지고 저끄러진 것을 수습해 나옵니다. 그러나 내적으로는 세계적인 무대, 혹은 천적인 기반을 닦기 위한 내용을 중심삼고 하나님 대신 탕감해 나오는 무리가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무리가 없다 할진대 세상을 구원할 길이 막혀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이런 한때를 마련하여 그런 무리를 준비해 나오고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인간들이 이러한 내용을 알고 협조해 나왔느냐? 개인적인 십자가에서 승리했으면 가정적인 십자가를 책임지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호소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아직까지 하나님이 가야 할 길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통일교인 중에 가정적인 핍박을 당하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것을 억울하고 분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가정적인 핍박을 당하고 있는 동안 하나님은 종족적, 민족적인 핍박을 받고 있으며, 또한 십자가의 길을 개척하기 위하여 여러분 이상의 수고를 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이 왜 그런 수고를 하고 계십니까? 그것은 가정적인 십자가노정에서 꺾이는 한이 있더라도 종족적인 기반을 닦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야만 꺾이더라도 다시 수습할 수 있는 기반을 세울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시대적인 혜택권을 미리 만들어 놓음으로 말미암아 가정적인 시대와 종족적인 시대를 빨리 종결지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역할을 해 나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역사노정에서 인간이 당하는 핍박과 십자가의 희생보다 더 큰 십자가의 무대에서 홀로 투쟁해 나오셨습니다. 이러한 길이 하나님이 찾아 나오시는 길이요, 하나님이 가시는 길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 앞에 자녀와 신부의 자격을 갖추려면

오늘날 이 시대를 대표하는 지도자가 나와서 그의 민족을 지도하려면 먼저 종족적인 시련 도상에서 승리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종족을 민족권 내로 옮길 수 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수습하기 위해서는 민족권 내의 시련도 물론 당해야 되지만 미디안 광야에서의 민족적인 시련과 국가적인 시련을 극복하여 승리의 기반을 닦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기반 위에서 민족을 인도해 나와야 참소를 받지 않는 지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무지한 인간을 지도해 나오시는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망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인간이 당하는 시련과 환난보다 더 큰 시련과 환난을 당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가정적인 혜택권 내에서 혹은 민족적인 혜택권 내에서 시련을 참고 견디어 나가는 그 시간에 하나님은 국가적이요, 세계적인 발판을 세우시기에 급급하고 계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제까지 하나님을 대해 나오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 내용을 몰랐기에 자기의 슬픔만을 하나님 앞에 호소했습니다. 자기의 어려움을 호소하며 ‘아버지여, 내 눈물을 부디 받아 주시옵소서.’라고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효자, 효녀, 충신, 열녀가 되겠다고 하는 무리들이 지금껏 이렇게 해 온 것입니다. 내 개인이 당하는 십자가는 내가 잘못됨으로 말미암아서가 아니라, 세계적으로 가정적인 십자가를 대신하는 것이라는 마음을 가지고 사탄을 물리치고 나서 ‘아버지여! 가정적인 승리의 기반을 닦았으니 민족적인 십자가를 저에게 주시옵소서.’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그저 복은 내 것으로 하려 하고, 모든 어려움은 죄다 아버지께 맡기려 합니다. 이건 도둑놈 심보예요. 똑똑히 알아야 합니다.

선생님이 여러분을 대할 때 하나님은 인간보다 한 세계를 앞서 가신다고 가끔 말했을 것입니다. 한 세계를 앞서 가시는 하나님의 걸음이기 때문에 우리가 가정을 세우기 위해 걷고 있을 때 하나님은 민족적인 기반을 준비하는 것이요, 우리가 민족적인 시련을 넘어가는 과정에 있을 때 하나님은 국가와 세계적인 기반을 넓히기 위해 벅찬 십자가의 길을 가고 계신다는 것을 우리 통일교인들은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하나님을 부축해 드려야 할 하나님의 아들딸이요, 신랑을 부축해 드려야 할 신부이거늘, 과연 그러한 생활을 해 왔느냐? 다시 한 번 반성해 보아야 되겠습니다. 아버지와 그 나라, 아버지는 우리의 아버지요, 그 나라는 우리의 나라이거늘, 인간으로 말미암아 아버지가 이렇게 비참하게 되었고, 아버지의 나라가 이렇게 잘못된 것입니다. 인간 홀로 져야할 십자가를 하나님이 지시고, 인간이 가야 할 고난의 길을 하나님이 가시다니…. 이런 분한 마음을 여러분이 체휼하기 전에는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사랑하는 아들딸이 될 수 없는 것이요, 신랑 앞에 신부의 자격을 갖출 수 없는 것입니다.

지방에 가서 통일교인들의 무지한 심정을 바라보게 되면 이 통일교회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심정이 어떠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통일교회의 사정을 바라보고 우리의 갈 길을 개척해 주시기 위하여 우리보다 앞서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이 계신 것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뒤를 따르며 ‘어서 갑시다.’ 하고 격려해 드리며, 하나님 앞에 있는 힘을 다 바치고 맡은 바 책무를 다해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효자가 되어야 합니다. 충신이 되고 열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떠한 자리에서 효자의 칭함을 받을 수 있으며 충신 열녀의 칭함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오직 십자가의 길에서만이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 도상에서 생명과 바꾸는 자리에서야 그 칭함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똑똑히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길을 가지 못하면서 하나님의 아들딸이라구요? 예수님의 신부가 된다구요? 욕심들이 너무 많습니다.

십자가의 길로 나아갈 때 모든 것이 이루어져

효자, 효녀, 충신, 열녀의 이름은 평탄한 자리에서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신앙의 길을 개척하기 위하여 우리 앞에서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신이 애쓰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뼈저린 사명을 짊어지고 가야 할 성도들입니다. 이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죽어 가는 성도들을 눈을 감고 바라보아야 하는 하나님, 고통을 당하고 있는 예수님에게 그 고통에 대항하라고 할 수 없는 하나님, 이 하나님의 마음이 편안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시련과 핍박과 환난에 부딪치고, 사정의 틈바구니에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이에 비례하여 하나님의 십자가도 가중되어 간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딸이 되기 위해서는 십자가의 길로 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굶주림의 길을 가고 계십니다. 이런 하나님을 위하여 언제 정성 한번 들여 봤습니까? 좋은 것이 있으면 전부 도둑질해다가 자기 배만 채웠지요. 하나님을 위해 가는 길은 먹기 위해 가는 길이 아닙니다. 놀기 위해 가는 길이 아닙니다. 편하기 위해 가는 길이 절대로 아닙니다. 진정한 주인(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참다운 종이 되려면 썩어져 가는 몸을 버리고 참다운 종이라는 칭호를 받아야 됩니다. 모셔야 할 어버이가 있거든 그 어버이 앞에 딱한 자리에서도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딸이라 할 수 있는 칭호를 받아야 되고, 모셔야 할 군왕이 있거든 그 군왕 앞에 딱한 자리에서도 충신이라고 하는 칭호를 받아야 됩니다. 그래야만 원수 사탄이 점령할 수 없는 존재가 됩니다. 이러한 존재가 되면 다시는 하나님을 잃어버리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배반한다면 잃어버리겠지만, 이러한 존재가 되고 나면 다시는 잃어버리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효자, 충신, 열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떠한 자리에서 참다운 아들딸을 찾겠습니까? 그곳은 십자가 도상입니다. 결국은 십자가 도상에서 부르신다는 겁니다. 그 아버지를 따라 나서려면 십자가의 도상에서 인연맺어 내 사랑하는 아들딸이라는 칭호를 받아야 됩니다. 그러면 그것으로서 만사가 다 통할 수 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개인적인 십자가가 있는 동시에 가정적인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야곱은 에서 앞에서 개인적인 십자가의 고개를 무난히 넘은 후에 가정적인 십자가의 길을 찾아 나섰던 것입니다. 가정적인 십자가의 길에서 승리한 후에는 민족적인 십자가의 길로 가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국가적인 십자가의 길로 가야 합니다. 그러기에 모세는 애급 땅에서 다시 국가, 즉 이스라엘 나라를 찾기 위한 십자가의 길을 향해 가나안 땅으로 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의 길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책임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후에 오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수도 있는 조건이 성립된 것입니다.

민족적이요, 국가적인 십자가의 길에서 승리한 기반을 토대로 하여 세계적인 십자가의 길을 개척해야 할 것이 이 땅 위에 오셨던 메시아의 사명이었습니다. 그러니 유대 나라와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인들이 하나되어 오시는 메시아를 믿어 주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사명을 다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은 민족적이요, 국가적인 기반을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군왕의 자리에서 모세의 자리보다도, 야곱의 자리보다도 낮은 자리로 떨어진 것입니다. 4천년의 고난 가운데에서 준비하여 세워 놓은 이스라엘 민족이 국가적인 기준에서 배반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은 가정을 떠나고, 종족을 떠나고, 민족을 떠나 광야로 나가게 된 것입니다. 사탄에게 끌려 광야로 나간 예수님은 그와 싸움을 하여 유대민족과 하나님이 닦아 나온 4천년의 기반을 개인, 가정, 종족, 민족, 국가적인 기준에서 다시 찾아 나왔습니다. 영적인 판가리 싸움을 통해 승리의 기반을 조성해 나온 것입니다. 복귀의 길이 이런 길입니다.

이 시대의 복귀노정에 있어서 이제 우리 통일교회는 4년노정을 바라보고 나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4년노정을 어떻게 갈 것이냐를 위해 기도하는 것보다도 4년노정 이후의 노정을 어떻게 준비할 것이냐를 위해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4년노정은 필히 잘 갈 것이라 생각하고 4년 이후에 가야 할 길을 모색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목적

여러분은 지금까지 이 길을 걸어 나오면서 악의 핍박 도상에서 쓰러지지 않고 남은 무리가 되었습니다. 몰리는 자리에서 죽지 않았습니다. 그건 왜? 하나님이 우리를 지도하고 계시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지도하시는 하나님의 발걸음을 멈출 수 있느냐? 발걸음을 세우려 하면 점점 빨라집니다. 안 그래요? 점점 빨라집니다. 개인적인 십자가에서 지쳐 쓰러지면 가정적인 십자가의 기준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가정적인 십자가의 길에서 쓰러지면 종족적이요, 민족적이요, 국가적인 기준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4년노정을 중심삼고 민족과 국가의 기준 위에 세계적인 기준을 끌어다가 발전해 나가야 합니다. 이 세계적인 골고다산상에서 하나님 앞에 충신 열녀가 될 수 있는 자리로 어떻게 돌파해 나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이 시대적인 한계를 넘어 한 시대를 앞서 가십니다. 우리가 민족적인 시대를 책임지면 하나님은 국가적인 시대를 준비하시고, 우리가 국가적인 시대를 책임지면 하나님은 세계적인 시대를 준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짊어진 십자가와 하나님의 십자가 중 어느 것이 더 힘들겠습니까? 하나님이 더 힘들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입니까? 십자가의 산상에서 하나님이 우리의 갈 길을 인도하실 때, 그 길로 가서 승리자가 되어 하나님이 구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개인의 십자가를 다 가고 난 후에 이제 너희들에겐 승리밖에 남지 않았다고 하는 음성을 들을 때까지 가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떤 단계에 머물러 있습니까? 잘 생각해야 됩니다.

이러한 것을 생각할 때 여러분은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쉴 사이가 없습니다. 오늘날 통일교회가 문제가 아닙니다. 한국이 문제가 아닙니다. 또한 선생님이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은 역사적인 모든 것이 전부 걸려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이런 때에 자신을 느껴 보아야 됩니다. 요즘 가만 보면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가야 할 십자가의 길이 남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가지 않고 있습니다.

아버지와 그 나라, 내가 걸어온 목적은 아버지를 찾기 위함이요, 내가 사는 목적은 아버지의 나라를 회복하기 위함입니다. 아버지가 눈물짓고 계시니 내가 편히 살 수 없고, 아버지가 걱정하시니 내가 편히 쉴 수 없고, 아버지가 십자가를 지고 계시니 내가 편안한 자리에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정복해야 할 우리

여러분, 이 뜻을 앞에 놓고 생각해 볼 때, 현재 한국의 실정은 매우 긴박합니다. 세계 정세는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긴박해지고 있습니다. 세계적인 십자가의 정상에서 하나님을 대신해 책임질 수 있는 무리는 어떠한 무리일 것인가? 이러한 것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될 때가 왔습니다. 이러한 길이 싫다고, 이것을 마다하고 떨어져 나가는 사람은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는 예수님을 배반한 무리의 뒤를 따르는 자들입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 백성들은 세계의 수많은 민족을 우리 손으로 구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이 사명을 다른 민족에게 양보할 수 없다는 신념에 차 있어야 됩니다. 또한 통일교회 신자들은 이 나라 이 민족을 구하는 데는 통일교회가 아니면 안 된다는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어려운 십자가는 우리가 먼저 지겠다고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굶주린 자리에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니 우리도 십자가를 지고 먹을 것을 먹지 않고 나서겠다는 각오와 신념이 있어야 합니다. 이래야 효자입니다. 굶주린 자리에서 십자가를 짊어지고도 주고 싶고 드리고 싶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드려야 할 것을 알지만 나에게는 눈물밖에 드릴 것이 없습니다.’라고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야 됩니다. 이러한 일을 내가 해야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목마른 입장에 계시면 나도 그와 같은 자리에서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목마른 자리에서 가야 할 십자가의 길을 내가 짊어지고 하나님에게 편안한 것을 넘겨줄 줄 알아야 됩니다. 외로운 행로에서 지친 발걸음을 멈추고 안식할 수 없는 나그네 신세가 되었더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나는 괜찮습니다.’라고 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자기의 신세를 첨부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통하여 하나님의 신세를 덜어 줄 수 있는 입장에 서야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 자기가 진 십자가를 자기의 책임으로 알고, 하나님은 나보다 더 큰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신다는 것을 알고, 드릴 수 있고, 위할 수 있고, 모실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사람이 참다운 효자 효녀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누구를 위해 섭리해 나오십니까? 가정을 넘어서 민족을 위해서입니다. 그보다 더 큰 것을 위해서입니다. 민족의 입장에서 국가적인 책임을 짊어지고 계시는 하나님은 그 민족권 내에서 하나의 책임이라도 할 수 있는 지극히 작은 한 사람이라도 가벼이 대하시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같은 긍휼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이 당하시는 십자가의 고통을 덜어 드리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이 하는 모든 행동을 하나님 자신을 위해 하는 것으로 받아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통일교인들은 가정적인 십자가를 지고 민족적인 십자가를 첨부시켜 지겠다고 해야 합니다. 이것이 통일교인의 자세입니다. 만일 가정적인 제단에서 실패하더라도 민족적인 기준에서 충신의 칭호를 남기고, 효자 효녀의 칭호를 남기면 됩니다. 이러한 점을 생각하면 우리 통일교회가 민족적인 사명을 해야 하는 시대를 맞이하게 된 것을 알게 됩니다. 이제 4년 노정을 바라보고 있는 이 마당에서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세계적인 길이요, 우리가 찾아야 할 나라는 하늘땅이거늘 이 하늘땅을 하나님께 찾아 드릴 때까지 남아진 십자가의 길이 크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당하는 십자가는 당연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기에서 발걸음을 멈추면 여러분은 길만 닦아 놓고 그냥 지나가 버리는 사람이 됩니다. 통일교회에서는 소생시대, 장성시대, 완성시대 이렇게 해서 단계적으로 연결시켜 나갈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다시 한 번 명심해야 할 것은 이 시대에 있어서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남아진 십자가의 길을 달려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상에서 시련에 부딪칠 때마다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길을 갈 때는 민족만이 아니라 세계적인 십자가를 붙들고 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십자가를 정복해야만 합니다. 십자가를 정복하기 전에는 사탄세계의 환난 고개를 넘어설 수 없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를 정복한 후 부활이라는 새로운 역사를 세워 신약 복음의 역사를 출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 통일교인들도 십자가를 정복해야 합니다. 현세의 십자가를 정복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시련과 핍박을 받아도 망하지 않는 무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지도해 나오시는 방법입니다. 이러한 복귀의 길이 남아 있는 연고로 여러분의 신세가 외롭고 처량하다고 생각될 때마다 나와 같이 걷고 계시는 하나님의 입장을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쉬어도 하나님은 수고하신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대하여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요 1:29)라고 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세상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은 개인에서부터 가정, 종족, 국가, 세계를 넘어 하늘땅, 천주에 사무친 모든 십자가의 고개를 돌파해야 합니다. 영계의 골고다를 돌파하고 지상의 골고다를 돌파해야 합니다. 그래서 개인적인 십자가의 고개를 넘고, 가정적인 십자가의 고개를 넘고, 민족, 국가, 세계적인 고개를 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제일 어려운 일을 골라서 해야 합니다. 제일 어려운 고비를 만나면 ‘선생님 제가 하겠습니다. 저도 한번 해 보겠습니다.’라고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십자가까지 첨부해서 지고 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천적인 사명을 짊어지고 가야 할 이 노정에서 어떠한 책임과 사명을 짊어지고 고달픈 고개를 넘어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위주로 모든 것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지금 굶주리고 있는 것은 밥을 못 먹어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물을 못 마셔서 목마른 것이 아니에요. 여러분들은 말로는 뭐 어떻고 어떻고 하지만 그것이 말 가지고 되는 겁니까? 생명에 관계되는 일은 말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무슨 말을 하면 그때뿐입니다. 그때만 하는 척합니다.

우리는 큰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야 됩니다. 개인적인 시련과 가정적인 시련은 종족적인 기반을 닦기 위한 준비 기간이었습니다. 이제 우리 앞에 나타나는 핍박과 시련이 없다고 해서 우리의 갈 길이 평탄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는 범위가 더 넓어졌습니다. 과거에는 앉은 자리에서 십자가를 졌지만 이제는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야 됩니다. 과거에는 십자가를 지고 한 곳만을 바라보고 나갔지만, 이제는 한 곳만을 보아서는 안 됩니다. 동서남북을 살피며 나가야 됩니다. 과거에는 그 자리에서 십자가의 고개를 올라가면 되었지만 이제는 사방을 두루 돌아보고 살피며 가야 됩니다. 범위가 넓어진 것입니다.

선생님은 하나님이 가시는 길을 받들어야 되고 여러분은 선생님이 가는 길을 받들어야 됩니다. 같은 입장에 서야 합니다. 서로 동떨어지면 안 됩니다. 통일교회 선생님은 여러분보다 더 가중된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또한 선생님을 지도하시는 하나님은 한 수 위의 길을 걸어가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잠들어 있어도 하나님은 소생, 장성, 완성의 3수의 단계를 거쳐 관계를 맺어 나오셨습니다.

소생급을 거쳐 장성급에서 심판받는 거와 마찬가지로 차자가 문제입니다. 둘째가 문제입니다. 상하가 있고 전후가 있고 좌우가 있는 것도 둘째가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에서 모든 것을 해결지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하를 바로잡고, 전후 좌우를 바로잡아야 할 책임이 둘째에게 있는 것입니다.

요즈음 일본교회의 소식을 들어 보면, 일본 고등학교 학생들은 학교에서 공부를 마치면 전부 교회로 온답니다. 책가방을 교회에 두고는 노방전도를 하는데 전부 한 사람씩 전도를 하고 집으로 간답니다. 이런 운동을 하고 있다는 거예요. 여기에 있는 장년, 청년들은 지금까지 뭘 했습니까? 여러분은 움직이지 않더라도 하나님은 쉬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안 하면 내가 할 겁니다.

최후의 결전을 바라보면서 새로운 결전을 치러야 할 입장에선 책임을 지는 사람만이 살아서 돌아갈 수 있습니다. 평생 가도 못 다 갈 길이기에 여러분은 자나깨나 꿈 가운데서도 깨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까? 편안하기만을 바라는 것은 아닙니까? 그러면 안 됩니다. 여러분들은 공적인 책임을 질 때 어떤 고난이 닥치더라도 당당해야 됩니다. 여러분들은 자기들이 가야 할 환경의 울타리를 지고도 주님이 십자가를 지고 있으면 그의 방패가 되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주님에게 뒤집어씌우고 있습니다. 공적인 사명과 개인적으로 해야 할 일은 다른 것입니다.

아버지의 나라를 이루어 드리는 사람이 되자

선생님은 배가 고파 지쳐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염려하는 그 길을 내가 앞놓아 갈 것이냐, 짊어질 수 있는 십자가의 길이 있다면 어떻게 그 길을 갈 것이냐 하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이러한 길을 가려고 준비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날 여러분들은 모심으로 구원받는다고 하는 것을 알면서도 뻔뻔스럽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런 마음에서 멈추면 안 됩니다.

우리는 자나깨나 아버지를 위하여, 아버지의 나라를 위하여 나가야 되겠습니다. 천번 만번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 한을 풀어 드려야 하겠습니다. 그러한 용기가 있는 사람이라면 자기의 십자가를 감당하고 하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질 수 있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아버지와 그 나라를 위하여 일해야 되겠습니다. 아버지가 부를 수 있는 효자 효녀가 되어야겠습니다. 남자는 아버지의 효자가 되고, 여자는 아버지의 효녀가 되어야 합니다. 아버지 앞에 충신 열녀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같이 우리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타고난 백성이요, 효자, 효녀, 충신, 열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들이 해야 할 사명입니다.

우리 통일교회가 가는 길은 어렵습니다. 어려운 십자가 도상에서도 ‘아바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해야 합니다. 피 흘리며 쓰러지는 것이 아버지의 뜻입니까? 고생하라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에요? 아버지의 원수를 갚아야 하니 그렇게밖에는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원수를 갚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알고 앞으로 오시는 아버지를 모시는 아들딸이 되고 충신 열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럴 수 있는 한 날을 맞기 위해 우리는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길에서 패자가 되지 않고 승리자가 되기 위해 각오하는 통일교회의 무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제 한번 지긋지긋할 정도로 일을 해 봅시다.

아버지 앞에 효자 효녀가 되고, 그 나라 앞에 충신 열녀가 되기 위해서는 부모와 형제의 십자가를 대신 질 수 있어야 하고, 그 백성의 십자가를 대신 질 수 있어야 됩니다. 형제를 위하여, 부모를 위하여 대신 십자가를 지는 자가 효자 효녀요, 그 나라의 백성을 위하여 대신 십자가를 지는 자가 충신 열녀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소유할 때 효자 효녀요, 군왕의 사랑을 차지할 때 충신 열녀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은 시대적인 환경을 넘어야 할 십자가의 길을 얼마나 개척했습니까? 개인적인 십자가의 길로 가지나 않습니까? 그래 가지고는 하나님을 위해 살 수 없습니다. 개인으로부터 가정, 종족, 민족, 국가, 세계 무대를 향해 나가는 이 도상에서 하나님에게 십자가를 지우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고 서서 하나님 앞에 효자 효녀를 부르짖고, 충신 열녀를 호소하여, 내 피와 살은 악의 피와 살과 합할 수 없는 피와 살이라고 외쳐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 나라가 여러분과 관계를 맺을 수 있고, 아버지가 여러분과 직접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똑똑히 알고 십자가 도상에 선발대로 책임을 다하여 꼭 남아지는 무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제 선생님이 축복가정을 모아 놓고 새로운 모험을 하려고 합니다.

오늘 저녁에 돌아가서 여러분 자신이 어느 단계에 서 있는가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뜻이 이루어지길 바라지요? 누가 이 뜻을 이룰 거예요? 누가, 누가 이룰 겁니까? 하나님도 혼자 돼요? 인간이 땅에서 보조를 맞추어 드려야 됩니다.

여러분, 가야 할 길이 있나니 허리띠를 졸라매야 되겠습니다. 방심하지 말아야 되겠습니다. 바쁜 걸음입니다. 달려가야 할 길에서 낙오자가 되지 말고, 약속한 통일의 그곳에서 아버지를 모시고, 아버지의 나라에서 승리를 이루어 놓고 살 수 있는 여러분이 되길 부탁합니다. 알겠어요? 어디 그러겠다는 사람 손 들어 봐요.

<기 도>

아버지께서 슬픈 가슴을 부여안고 가야 하다니 원통하고 애통한 일이옵니다. 자기의 친아들딸을 그 험한 산상으로 몰아넣어야 했던 아버지의 채찍이 저희의 배후에 있는 것을 생각하면서 이미 죽기를 각오하고 아버님 앞에 맹세한 저희들이오니 이 길에서 쓰러지는 자들이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은 불쌍하신 분이옵니다. 아버님은 억울하신 분이옵니다. 인간들은 배반하고 돌아설 길이라도 있지만 아버님께서는 배반할 길도 돌아설 길도 없기에, 가고 또 가야 하는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후퇴라는 명사를 요하지 않는 아버지의 길임을 감히 알겠사옵니다.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초조하고 얼마나 심각하고 얼마나 바쁘시옵니까? 진정한 효자 효녀가 되고 충신 열녀가 되고자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였사옵니다. 십자가의 길을 갈 수 있는 하나의 바위가 되고, 하나의 옷자락이 되게 해 달라고 호소하지 못한 저희들, 과거를 뉘우칠 줄 아는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각지에 있는 외로운 통일의 무리들이 아버지 앞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분부를 알고 있습니다. 이 무리들이 가야 할 행로를 알고 있지만 이들이 가는 걸음을 다시 재촉하고 채찍질해야 하는 딱한 사정이 아버지께 있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여기에서 참아 남아지는 자는 아버님의 복을 받을 것이로되, 낙오되는 자는 후대에 참소를 받을 것이요, 탄식을 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이제 나로 말미암아 이런 고통의 길을 가는 사람이 없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부디 강하고 담대한 마음을 갖게 해 주시어 끝까지 참아 남아지는 무리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러기에 끝날에는 모이기를 힘쓰라고 하지 않았사옵나이까? 혼자 가게 되면 낙오자가 되기 쉬우니 모여야 되겠습니다. 끝날에는 끝까지 참는 강인함이 있어야 되겠습니다. 자기를 살피다가는 가지 못할 운명인 것을 알았사옵니다.

아버님이 가시는 걸음은 저희들이 짐작할 수 없을 만큼 빠르다는 것도 아옵니다. 천 가지를 했으면 만 가지를 하라고 명령하고 싶으신 것이 아버지의 마음이요, 도움을 줄 수 있는 자리에 선 아들딸을 찾는 것이 아버지의 마음인 것을 알았사옵니다. 오늘날 저희들에게 분부하신 모든 말씀을 진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고, 뜻 앞에 진정한 아들딸이 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아버지를 찾기 위하여 저희는 효자 효녀가 되어야 하겠고, 그 나라를 찾기 위하여 충신 열녀가 되어야 하겠사옵니다. 그 이념은 거룩하오나 가는 길은 비참하옵니다. 그 내용은 아름다우나 나타난 현상은 죽음의 길이었사옵나이다. 죽음의 길을 가면서도 속으로는 소망을 가져야 할 길이었사옵니다.

아버지가 그러하시기에 아들딸 된 저희들도 그러하고, 아버지가 그러한 길을 가시기에 저희도 그러한 운명의 길을 가야 되겠사옵니다. 하오니 저희들, 이 도상에서 지치지 말고 백절불굴의 심정을 가지고 최후의 승리자로 결정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젠 승리했다고 할 수 있는 안식의 한 날, 너희는 내 것이요, 이 천하는 나의 아들딸인 너희들의 것이라는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그 한 날까지 참고 견디어 남아지는 무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날을 맞이하기까지 고난에 동참하는 무리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제부터 새로운 날을 맞이하기 위하여 새로운 준비를 해야 되겠습니다. 이제 3년노정을 출발하던 때와 같은 결의를 갖고 나서야 되겠습니다. 이제 쉴 사이 없이 아버님을 위하여 싸워야 할 때가 온 것을 알았사오니 이런 환경에서 책임 다할 수 있는 무리들로 세워 주시옵고 책임 다할 수 있는 자리로 내몰아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오늘 말씀을 듣고 돌아가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스스로를 반성하여 책임과 사명을 다하겠노라고 다짐하는 모습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자기 후손들 앞에 하나님을 대신하여 세운 조건을 남기고 갈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옵길 간절히 바라옵니다. 만만사 영광의 터전이 저희들의 협조로 말미암아 빨리 이루어지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올 때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말씀 요지>

충남은 남한의 중심과 같습니다. 그래서 계룡산을 중심으로 도인들이 많은 것입니다.

역사는 스스로 발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인간만을 위주로 하여 흘러온 것도 아닙니다.

이 세상에는 각각 운이 있습니다. 개인에게는 팔자가 있고 한 나라나 세계에도 운이 있습니다. 이 우주도 그 중심이 가는 곳에 천운이 따라가는 것입니다. 타락으로 인하여 오늘날 이런 세계가 된 것이지 우리 조상들이 이러한 세계를 이루고자 해서 된 것이 아닙니다.

지금의 두 세계는 서로 부딪쳐야 합니다. 그리하여 연방정부를 구성할 수 있는 세계를 향해 움직이고 있습니다.

한민족은 계시적인 민족입니다. 한국어의 모든 형용사는 상대적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각 도를 다니다 보면 각 종교권을 다니는 느낌이 듭니다.

진짜 양반은 ‘충청(忠淸)’이라는 글자의 의미대로 마음의 중심을 잡고 깨끗하게 지켜 나가는 사람입니다.

악한 것은 시간이 지나면 결국 망합니다. 그러나 보기에는 초라해도 그가 참다운 선을 찾아 나가면 망하지 않습니다. 역사가 선을 찾아 나가는 한 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훌륭한 어머니들은 자식을 품에 안고, 세계를 움직일 수 있는 선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어려운 입장에서도 참을 수 있어야 한다고 그 자식에게 가르칩니다. 그것은 어머니들이 선은 망하지 않는다는 천리를 통했기 때문입니다.

선은 역사와 시대와 체제를 초월합니다.

2천년 전 예수님을 그 시대의 사람들은 악한 사람으로 보았으나 예수님은 선을 대변하기 위하여 생명과 온갖 노력을 다 기울였기 때문에 그의 주장은 그가 죽은 뒤에도 남아지게 된 것입니다.

선은 망한 것 같으나 망한 것이 아닙니다. 한 시대가 지나면 다시 싹이 트고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계적인 터전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통일교회가 지금은 기성교단의 비난을 받는다 할지라도 나중에는 인정을 받을 것입니다.

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가 대립되어 있는 대한민국에서 과연 어느편이 선한 편인가 생각해야 합니다. 겉으로 선하게 나타나는 것이라 해서 반드시 다 선한 것은 아닙니다. 황홀하게 보이는 것도 악을 대변하는 입장에 설 수 있습니다.

참다운 선은 시종여일합니다. 이 시대에서 아무리 찬란하다 해도 그것이 악의 입장에 있는 것이면 망합니다. 그러나 참다운 시대이념과 더불어 쓰러지면서라도 싸우면 당장 보기에는 초라하고 망하는 것 같아도 다음 시대에 다시 나타나는 것입니다.

선은 시종여일하여 중도에서 포기하지 않습니다. 악을 위해 출발하지 않으며 망하는 길을 따라가지 않습니다.

세계는 하나의 선의 목적지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약하고 중도에 그침으로 인간만으로는 선을 세워 나갈 수 없습니다.

어느 종교나 다 역사의 종말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역사의 발전 과정에서 선의 목적세계가 출현하게 되고 그럼으로써 악의 역사가 끝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비참상은 선과 악이 투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높은 선의 입장에 한 사람을 세워 그분을 위주로 하여 세상을 수습해 나가십니다.

선은 인간만으로는 세울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준이 될 수 있는 절대의 선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십니다.

국가가 망하는 것은 천심과 배치되었기 때문입니다. 천심과 양심이 동행하면 살고 그렇지 못하면 망합니다. 그러므로 공산주의는 망합니다. 기독교는 불사신이었습니다. 종교를 배반한 국가는 결국 쓰러졌습니다.

종교란 으뜸 되는 가르침입니다. 천상천하에 없었던 가르침입니다. 종교인의 공통된 가르침은 선의 세계가 온다는 것입니다. 또 천지를 지으신 대주재가 있다는 것을 가르치며 악인에게 맞고 그 악을 정복하라고 합니다.

선한 사람이 억울함을 당하면 다른 사람이 들고일어납니다. 이것이 혁명이요 심판입니다. 선생님의 생활 철학은 맞고 빼앗아 오는 것입니다. 이 세계에서 또 이 나라에서 맞는 무리가 나와야 합니다. 악이 맞는 것은 당연하지만 선은 맞고 살아남기만 하면 됩니다.

과거에 불교를 믿었던 삼천만 민족이 세계를 위하여 맞았다면 그 불교는 세계를 얻었을 것입니다. 예수님 이전에는 이스라엘 민족을 건드린 나라는 모조리 망했으나 예수님을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한 이후 이스라엘 민족은 6백만이 학살을 당했습니다.

내가 맞아서 삼천만이 복을 받는다면 기꺼이 맞겠다고 할 수 있어야 됩니다.

선생님은 시대의 물결에 휩쓸리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선이 악 같고 악이 선 같은 이 시대를 밟고 넘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절대선이기 때문에 그의 의지를 꼭 이루십니다.

가야 할 곳을 향하여 묵묵히 가는 자세, 환경이 비참하면 비참할수록 더욱 늠름한 자세를 갖추지 못한다면 선이 망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세울 수 없습니다.

복을 받기 위해서는 욕을 달게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만 통일하자는 것이 아니라 천하를 통일하자는 것입니다.

자식을 기르지 않고는 효자를 바랄 수 없습니다. 나는 통일교회의 길이 고난의 길임을 가르칩니다.

참다운 가정이 없이는 참다운 민족도 없습니다. 선한 가정을 중심으로 하여 가정과 민족이 자유로이 통할 수 있는 그때가 지상천국의 출발입니다.

시대와 역사를 심판하는 선의 기준이 가정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숱한 과거도 잊어버리시고 타락한 것도 잊으시려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통일교회의 목적은 참다운 개인과 가정을 세우고 아들딸을 사랑하자는 것입니다. 통일교회는 선합니다. 그러기에 맞아야 합니다.

나는 호소합니다. 민족과 세계를 위하여 핍박받으라고. 민족적, 세계적인 십자가를 피하지 말고 당당하게 죽지만 말고 살아 남으라고. 굶고 병들어 아픈 여러분에게 다시 고생을 강조하는 이 스승의 마음을 이해하는 여러분이 되길 바랍니다. 우리들의 선조가 그러하였고 역사가 그러하였으니 새로운 세계를 세우려 하는 우리도 그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계적인 도탄(塗炭)의 환경이 휘몰아쳐 와도 승리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세계적인 종교가 됩니다.

하나님은 참과 거짓을 구별하기 위하여 역경으로 몰아넣어 치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사탄의 물결에 휩쓸리면 대역적이 됩니다.

역사적인 죄악 가운데 살아오면서 고착된 습관 때문에 싸워야 할 일이 많았습니다.

아버지가 수고했으니 나는 더 수고해야 합니다. 참다운 개인, 참다운 세계가 그리워서 우시는 아버지의 위신을 위해서는 거지가 되어도 좋다는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탄식하지 말고, 원망하지 말고, 지치지 말아야 합니다. 앞으로 한국에서 통일교회가 문제가 될 것입니다.

지금의 이 혼란기에 제시할 수 있는 소망의 내용을 우리가 가지고 있으면 이 민족은 우리를 따라오게 됩니다.

지금은 우리가 원망스러운 입장에서 불리워졌는지 몰라도 이 괴로움이 지나가면 우리의 사적(史績)이 노래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울더라도 자기를 위해서 울어서는 안 됩니다. 민족과 세계를 위해서 울지언정 자기를 위해서 우는 여러분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실력이 부족하면 훈련하고 연단하여 대비합시다. 그래야 천도가 바로잡힙니다.

선생님의 이상은 여러분을 선의 혈족으로 만들어 하나님이 사랑하실 수 있는 민족이 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망하지 않는 충신, 효자, 열녀가 되어야 합니다.

전세계에 널려 있는 통일교회 신도들에게 한 말씀 전하고자 합니다.

지금까지의 역사노정에 있었던 그 어떠한 사람보다도 중대한 책임과 사명을 짊어지고 있는 무리가 우리 통일식구들입니다.

최고의 사명을 짊어지고 있는 우리 통일식구들

이 땅 위에 실현되었어야 할 하나님의 창조이념이 인간시조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선을 추구하는 우리 선조들은 지금까지 있는 정성을 다하여 이를 회복하기 위해 싸워 나왔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하나님의 뜻과 인류의 소망을 달성하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중대한 책임과 사명은 이 시대의 우리가 아니면 완결 지을 수 없고, 우리가 아니면 하나님의 원수요, 인류의 원수인 사탄도 심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중대한 입장에 서 있는 우리들임을 생각할 때, 우리에게는 역사상에서 그 시대의 책임을 짊어졌던 그 어떤 지도자보다도 더 큰 사명이 있다는 것을 확신해야 되겠습니다.

본래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선을 중심삼고 개인과 가정, 국가, 세계, 천주를 세워서 하나님이 원하셨던 사랑을 중심삼은 평화의 세계를 이루려 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이러한 것을 전부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창조한 이 세계는 참다운 개인과 가정, 국가, 세계, 천주가 되지 못하고 슬픔을 동반한 개인과 가정, 국가, 세계, 천주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이것을 복귀하기 위하여 수고해 나오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 선조들도 복귀의 뜻을 따라 나왔지만,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뜻에 맞게 개인이 복귀되고, 가정이 복귀되며, 국가, 세계, 천주가 복귀될 것인가 하는 것을 모르고 나왔습니다. 그리하여 선생님은 참다운 개인으로부터 가정, 국가, 세계, 천주까지 어떻게 복귀할 것이며, 이 천주가 하나님의 심정에 어떻게 일치될 것인가 하는 중대한 문제를 걸어놓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지금까지 고생해 왔습니다.

선생님은 원리를 찾고 난 후에 이것이 과연 인류에게 필요한 것임을 알았고, 또 이 원리가 아니면 하나님이 창조이념을 달성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아가 이것을 달성하려면 지금까지 역사상에 그 누구도 가지 못한 십자가의 길을 거쳐야 될 것이며, 또 지금까지 누구도 겪지 못한 고난의 길을 헤쳐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지극히 낮은 영계로부터 높은 영계에 이르기까지 승리의 기반을 닦아야 할 책임과 사명을 느껴 투쟁하여 왔습니다. 또한 지상에 있어서도 역시 영계의 승리적 기반을 발판으로 하여, 가장 미천한 자리에서부터 최고의 기준까지 다 쟁취하지 않으면 안 될 사명을 느끼면서 지금까지 싸워 나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우리 식구들은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수고를 본받자

하나님이 창조 당시에 소망하시던, 참다운 심정을 통할 수 있는 한 사람, 그가 바로 복귀역사노정에서 찾아 나온 단 하나의 소망의 존재입니다. 그 한 개인이 복귀됨으로써 비로소 하나의 가정, 하나의 국가가 복귀되며 나아가 세계와 천주가 복귀된다는 것을 우리 식구들은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개인이 하늘땅을 중심삼고 승리하는 날에는, 그 승리는 개인의 승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천주의 승리가 되는 것입니다. 한 개인을 위주로 한 가정이 승리한다는 것은 일개 가정의 승리만이 아니라 천주의 가정적인 승리의 기반을 닦는 것이요, 한 가정을 위주로 한 국가가 승리한다는 것은 국가적인 승리의 기반을 닦는 것일 뿐 아니라, 천지간에 새로운 국가의 승리의 기반을 닦는 것이 됩니다. 이리하여 이 세계에 천주복귀의 기반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이러한 사명, 즉 개인복귀, 가정복귀 더 나아가서는 민족복귀 노정을 책임지고 지금까지 투쟁을 해 나오고 있는 것을 우리 통일식구들은 잘 알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세계에 널려 있는 우리 식구들은 선생님을 위주로 하여 종족을 초월하고, 민족을 초월하고, 국가를 초월하고, 또한 문화적인 배경과 시대적인 생활 상태 등 모든 것을 초월하여 하나의 이념을 중심삼고 일체를 이루어야 하겠습니다. 또 이 하나의 이념을 위주로 하여 일체를 이룬 기준 밑에서 행동통일, 생활통일, 심정통일을 가져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선생님의 슬픔을 여러분의 슬픔으로 체휼할 수 있는 단계에 와 있습니다. 그러면 이것을 비단 현세만이 아니라 여러분의 후손과 앞으로 올 미래세계에까지 어떻게 연결시키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런 중대한 역사적인 책임을 느끼는 우리는 새로운 역사적인 전통을 세워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세워야 되고 가정적, 민족적, 국가적, 세계적으로 세워야 됩니다. 이러한 천주복귀의 전통적인 기준을 세우기 위해 지금까지 3년노정, 혹은 4년노정을 목표로 하여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도상에 서 있는 우리는 무엇을 본받아 투쟁해 나가야 하느냐? 하나님은 지금까지 우리를 찾아오는 노정에서 사탄과 대결해 나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수고하신 그 노정을 본받아 우리들도 그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알고 보니 하나님은 부모의 심정을 지니시고 종의 몸을 쓰시고 땀은 땅을 위하여, 눈물은 인류를 위하여, 피는 하늘을 위하여 뿌리시며, 잃어버린 자식을 찾으시기에 역사 노정 가운데 숱한 수고를 해 나오셨습니다. 우리들도 역시 부모를 찾아 모시기 위해 그러한 땀과 눈물과 피를 대신 흘려야 하고, 부모의 심정을 체휼하기 위하여 종의 몸을 쓰고서 나가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오기에 수고하고, 우리 또한 하나님을 찾아가기에 수고하는 이 노정에서 맺어진 눈물은 우리 개체만을 위한 눈물이 아닙니다. 이 눈물이야말로 하나님이 함께하실 수 있는 눈물이요, 그 땀이야말로 하나님이 함께하실 수 있는 땀입니다. 그 피와 희생도 개체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피 흘리고 희생하는 자리에 동참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렇게 싸워 나온 우리의 최후 목표는 사탄세계를 개인적으로 굴복시키고 가정적, 국가적, 세계적으로 굴복시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로 말미암아 지상에 하나님이 안식할 수 있는 복지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생활적인 목표요, 우리 생애의 투쟁 기준입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지상에서 하나님과 인간이 원치 않는 사람이 남아 있습니다. 이 사탄을 개인적, 가정적, 국가적, 세계적으로 굴복시켜야 할 책임과 사명이 엄연히 남아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생각할 때 한국이면 한국, 일본이면 일본, 미국이면 미국, 독일이면 독일 등 각 나라에 있는 혈족과 혈색을 달리한 우리 식구들은 각기 자기 나라를 중심삼고, 사탄격멸 운동의 선두에 나서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창조이상세계의 건설

사탄은 우리의 참부모를 유린했고, 우리의 참다운 가정, 참다운 형제를 유린했고, 참다운 종족, 민족, 국가, 세계를 유린했습니다. 나아가서 지금까지 하나님을 고난과 역경으로 몰아넣은 장본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자나깨나 생명이 끊어질 때까지 천주사적인 원한을 남긴 이 원수를 격퇴시키고, 하나님이 바리시던 평화의 세계, 사랑의 세계, 행복의 세계를 하나님 앞에 이루어 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자녀된 우리의 책임인 것을 알기에 이를 위해 궐기해야 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참다운 부모를 모시고, 참다운 형제로서 참다운 본향을 찾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들이 참다운 본향, 참다운 땅을 찾아 참다운 조국을 건설하고, 참다운 조국을 중심으로 참다운 세계를 이루고, 참다운 세계를 중심으로 참다운 천주를 이루어 놓지 않으면, 하나님이 창조 당시 인간시조 앞에 부여하셨던 창조의 목적과 소망을 달성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희생이 있더라도 이것을 성취해 놓지 않으면 안 될 중대한 책임과 사명이 있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따라서 이제 여러분은 개척전도, 혹은 다른 활동을 하는 데 있어서 어려움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참아 왔고 선생님이 참아 온 그 노정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지칠 자리에서 지치지 말고, 낙심할 자리에서 낙심하지 말고, 후퇴할 자리에서 후퇴하지 말고 전진하고 또 전진해야 합니다. 용맹과 담력을 가지고 적진을 향하여 돌격해 나가, 천지를 대표한 하늘의 용사로서 기백을 잃지 말고 끝까지 싸워야 합니다. 그리하여 승리의 세계를 이루고 천주를 복귀하여, 이 한 많은 역사를 청산짓고 희망과 행복이 넘치는 최초의 창조이상세계를 이룩해야 하겠습니다.

이를 위하여 모든 것을 바쳐 싸워 주기를 부탁하는 바입니다.

좋은 것을 주고 싶어하는 마음이 본연의 마음

이렇게 볼 때 선한 사람은 어떠한 사람인가? 귀하고 좋은 것을 자기만의 것으로 하지 않고 전체의 것으로 하며, 또한 그 가치를 전체의 가치로 연결시키고 싶어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면 천지를 창조한 하나님이 계시다 할진대 그분은 어떠한 분이냐? 지극히 선한 분이요, 모든 만물의 근본이 되는 분이요, 사랑의 주체이신 분입니다. 그러니 그 하나님은 자신이 참으로 믿을 수 있고 사랑할 수 있고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제일 귀한 것을 고스란히 넘겨주고 싶어하실 것입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자기에게 가장 귀한 것을 참으로 주고 싶어하는 마음이 천리의 원칙이며 인간 본연의 마음이라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행, 불행은 어떻게 갈라지느냐? 마음대로 주고받을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갈라집니다. 주고 싶은 마음이 있어도 받을 대상이 없고, 받고 싶은 마음이 있어도 줄 주체가 없을 때는 불행한 것입니다. 주는 데는 자기의 제일 귀한 것을 서슴지 않고 줄 수 있어야 하며 어떠한 환경의 제약을 받지 않고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을 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고 싶은 것이 인간 본연의 마음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후 온 우주의 귀한 모든 것을 인간에게 주고 싶어하셨습니다. 주는 데는 어떠한 환경의 제재나 시간적 제한을 받지 않고 주고 싶어하셨습니다. 그러면 이제까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그 중에서도 성인 현철이나 도(道)의 지도자에게 그렇게 주었느냐? 그러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상천하에 하나밖에 없는 귀한 것을 인간 세상에 주었을 때 인간 세상에서는 그것을 무한한 가치의 것으로 받아 하나님 앞에 공을 돌려 드린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만일 그때 그런 사람이 있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이 세운 모든 것을 주관하고 지배할 수 있는 입장에 서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러한 사람이 나오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역사노정을 거쳐 나오시며 참되게 하늘땅의 귀한 모든 것을 주고 싶은 사람을 찾고 계신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게 될 때 하나님은 개인적으로도 주고 싶고 가정적으로도 주고 싶고, 혹은 종족, 민족, 국가, 세계, 천주적으로까지 주고 싶을 것이며 나아가 내적인 심정에서 나오는 사랑까지도 다 주고 싶은 마음을 갖고 계실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어느 한때도 그런 참된 심정을 개인과 가정 혹은 민족, 국가, 세계, 천주에게 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복귀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원수와 대적하여 싸움의 노정을 개척해 나오시는 것입니다. 노아를 중심으로 역사한 섭리의 배후를 보더라도 노아에게 주고 싶어하신 하나님은 120년이라는 오랜 기간을 두고 그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아가 120년 동안 수고하지 않고는 하나님도 그 약속을 이루어 주실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약속이 지켜진 기반 위에 2차 3차로 점점 범위를 넓혀 세계적인 무대로 전개시켜 나가기 위한 것이 하나님이 노아를 택한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노아가 첫째 목적은 달성했지만 제2차 3차의 목적까지 달성할 수 있는 기준을 갖지 못하였기에, 노아가정은 실패한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아직까지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설 수 있는 발판을 갖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원과 예수 강림 목적

그러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야 행복한 자리에 서게 되는 것인가? 당신의 가장 귀한 것을 사랑하는 개인이나 가정, 사회, 국가, 세계에 혹은 주권자면 주권자, 백성이면 백성에게 고스란히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안심하고 기쁘게 주고받을 수 있는 한 날을 갖지 못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직까지 복귀섭리가 끝나지 않은 실정으로 미루어 볼 때에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소원은 무엇이냐? 그것은 참되게 줄 수 있는 세계적인 발판을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주는 데 있어서도 어느 누가 참소할 수 없고, 받는 데 있어서도 어느 누가 조건을 제시할 수 없는 그야말로 자유롭고 평화롭고 행복한 자리를 소원하십니다. 그러한 자리를 세계적으로 넓혀온 만민을 거기서 살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거두시려는 소기의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그런 자리를 갖지 못한 하나님은 주고 싶은 마음과 받고 싶은 마음이 크면 클수록 슬픔과 고통을 크게 느끼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역사 과정에서 개인을 통하여 천주에까지 주어야 할 하나님은 주기 위한 이 거리를 단축시키고자 하십니다. 가장 가치 있는 것을 주고 싶을 때에도 역사적인 거리를 두고 주시려는 것이 아니라 직접 주고자 하십니다. 명령을 하고 가르침을 받는 자리에서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심정이 통하는 자리, 하나님의 영광과 만우주의 가치를 찬양할 수 있는 자리에서 주고받고 싶은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이런 자리를 마련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지금까지 수많은 선지선열들을 세워 나왔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에 역사노정에서 세워졌던 수많은 도(道) 중에는 하나님의 사정을 통할 수 있는 도(道)도 있었을 것이며, 혹은 하나님의 사명을 대신 책임질 수 있는 선봉적인 역할을 한 도(道)도 있었을 것이며, 하나님의 이념을 대신하여 각 분야에서 천태만상으로 나타난 도(道)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 도 중에 하나님과 직계 혈통적인 관계를 갖고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할 수 있는 도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 도를 세워야 할 주인공이 바로 독생자 예수님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천적인 도의 길을 닦아 나온 수많은 도 중에서 예수님이 갖고 나온 도의 사명은 무엇이냐? 다른 도는 자기 해당 분야의 사명만을 갖고 나왔으나 예수님은 타락하여 사탄과 혈통적인 인연을 맺고 있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없는 입장에 서 있는 인류를 복귀시켜야 할 사명을 갖고 왔던 것입니다. 사탄과의 혈통을 끊어 버리고 하나님과 부자의 인연을 전개시켜 하나님의 자녀의 자리로 복귀시켜야 하는 사명, 즉 인류를 하나님이 사랑하실 수 있는 아들딸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실 수 있는 아들딸로 세우는 사명을 갖고 오셨습니다. 어느 도에서도, 어느 종교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심정적인 문제, 사랑의 문제를 갖고 이 땅 위에 오셨던 분이 예수님이었던 것입니다.

인간 세상에는 하나님의 사정을 통할 수 있는 도, 천국의 이념을 소개할 수 있는 도 등 여러 분야에서 각 사명을 짊어진 도가 있었지만 예수님이 이 땅 위에 오심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만민은 하나님을 대하여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되었고, 하나님은 만민을 대하여 아들이라 부를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때부터 인간들은 하나님의 심정을 논하게 되었고, 하나님과 부자의 관계를 맺어 나갈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견지에서 볼 때 하나님은 기독교를 통하여서 인간에게 무엇을 주려고 하셨느냐 하면, 인류를 참된 아들딸로 찾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입장에 세워 주는 선물을 주려 하셨던 것입니다. 인간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이러한 선물을 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이 땅 위에 오셨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아들 가운데도 효자가 있을 것이고 불효자도 있을 것입니다. 불효자는 구원섭리가 있으나 없으나, 이 땅 위에서 메시아가 죽거나 말거나 상관하지 않고 하나님이 세워 준 공로와 하등의 인연도 없는 자리에 서는 자입니다. 이러한 불효의 자리를 타파해 버리고 모두 효자 효녀의 자리로 복귀시키기 위한 것이 예수님이 이 땅 위에 오셨던 목적이요, 또 하나님이 예수님을 이 땅 위에 보내셨던 목적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님과 행동을 같이했더라면

그러면 지금까지 이 땅 위에서 살다 간 모든 역사적인 선조들과 기독교 신자들을 볼 때에 하나님이 찾으시는 참다운 세계적인 대표자, 온 천주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승리적인 자격자, 하나님이 참된 선물을 줄 수 있는 아들딸, 하나님의 참된 유업을 받아 천지간에 설 수 있는 아들딸은 어떠한 사람이겠는가? 어떤 사람이 과연 참된 아들딸이 될 수 있겠는가를 생각해 봐야 됩니다.

야곱을 중심삼고 볼 때에 야곱은 원수의 편에 선 에서를 굴복시켜서 이스라엘이란 명분을 세웠습니다. 또 하란 땅, 즉 원수의 품에서 하나님이 공인할 수 있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승리의 기반을 닦음으로 야곱가정이 승리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승리한 야곱가정은 민족적인 승리를 향하여 전진해야 하므로 애급에 입성하였던 것입니다. 거기에서 민족을 형성하여 400년 동안 고역살이를 한 후 하나님이 믿을 수 있고 하나님이 축복하실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하였고 원수를 굴복시킴으로써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가나안을 향해 출발했는데, 그 걸음이 가나안 복귀노정인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민족적인 기반을 세우는 데에는 승리하였지만 국가적인 주권을 세우지는 못했습니다. 애급에서 승리한 이스라엘 민족이 국가적인 승리의 기반을 닦기 위해서는 가나안 7족과 싸워 승리해야 하는 것입니다. 싸워서 망하는 무리는 복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원수를 근본적으로 소탕하여 주관자의 권위를 갖게 될 때 하나님은 국가적인 귀한 복을 그들에게 주려 하셨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민족은 선민이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인의 사명은 예수님을 위주로 하여 세계적인 복을 받을 수 있는 길을 닦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슬퍼하면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인도 슬퍼해야 하고, 예수님이 외로워하면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인도 외로워해야 했습니다. 이렇게 유대교인과 이스라엘 민족은 예수님과 하나되어 행동과 생활을 같이하면서 세계적인 원수의 무대, 즉 로마제국을 향하여 공격전을 펼 수 있는 기반을 닦아야 했습니다.

만일 그때에 그런 기반이 닦여졌더라면 기독교가 400년 동안이나 박해를 받는 사건은 없었을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살아 있었다면 로마 제국을 굴복시키는 데 그렇게 오랜 기간이 필요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가 역사적인 하나님, 즉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우리 이스라엘을 세우시고 만민을 통치하게 해 주겠다는 약속을 하셨으며, 이것을 이루어 주시기 위하여 메시아를 보내 주셨으니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에 당당하다는 신념을 갖고 예수님과 행동을 같이하여 세계적인 무대로 전진하였다면, 세계적인 승리는 벌써 오래 전에 거두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러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 이후 기독교는 고난의 종교가 된 것입니다.

이 시대의 기독교인의 사명

하나님께서는 개인적으로도 승리하고, 가정적으로도 승리하고, 민족적으로도 승리하고, 국가적으로도 승리한 터전 위에 메시아를 보내어 세계적인 승리의 터전을 마련하려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내셨는데 이스라엘 민족은 그런 예수님을 죽음의 길로 몰아넣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다시 개인적인 시대로부터 가정, 종족, 민족, 국가적인 시대를 거쳐야 했습니다. 즉 종적인 이스라엘의 4천년 역사를 재차 횡적인 역사로 전개시켜 나와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2이스라엘은 개인적인 십자가의 길에서부터 가정적인 십자가의 길, 종족적인 십자가의 길, 민족적인 십자가의 길, 국가적인 십자가의 길, 세계적인 십자가의 길을 걸으며 사탄과 싸워 승리해야 되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싸움에 승리하여 가정을 위해 싸우겠다는 신념을 가진 자라야 개인적인 축복을 받을 수 있으며, 또한 가정적, 종족적, 민족적, 국가적인 싸움에 승리하여 세계를 위하여 싸우겠다는 신념을 가진 자라야 국가적인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원칙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적인 사실로 미루어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원칙에서 볼 때 종말을 맞이하고 있는 현재의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해야 될 것이냐? 악의 세상에 물들지 않고 오히려 악의 세상을 지배해야 합니다. 현실에서 부딪치는 고통과 곤고와 비참이 제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원통하고 분한 사실이 제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여기에서 자기를 지켜 나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현시대를 수습할 수 없기 때문에 이 시대를 넘어 다가올 새시대의 복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끝날에 처해 있는 오늘날 전세계 기독교인들은 세계적인 환난 도상에서 자기의 일신을 수습해야 할 뿐만 아니라, 가정을 수습하고 종족을 수습하고 민족을 수습하고 국가를 수습하여 세계적인 시련의 고비를 넘겠다는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모두가 그런 신념을 가지고 단결하여 생활적인 무대와 환경적인 무대를 책임지고 청산지을 수 있는 무리가 되지 않고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아무리 주고 싶은 복이 있다 할지라도 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이 시대에 있어서 하나님은 무엇을 찾을 것이냐? 전세계에 널려 있는 많은 기독교회 가운데서 세계적인 종교로 등장할 수 있는 교회를 찾을 것입니다. 또 세계적인 가정으로 등장할 수 있는 가정을 찾을 것입니다. 즉 현실의 고난의 노정, 십자가의 노정을 넘어서서 모든 것을 심판하고 청산지을 수 있는 개인과 가정, 종족, 민족, 국가를 찾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잘 알아야 합니다.

만일 그러한 하나의 국가가 나왔다면 그 국가의 백성은 어떠한 전통적인 면모를 갖추어야 되느냐? 그 나라의 백성이라면 최고의 사람이든 최하의 사람이든, 모두가 현세에서 최악의 자리에 들어가더라도 그것을 극복할 수 있어야 됩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세계를 심판하고 새로운 이념의 세계인 천국을 건설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럴 수 없는 사람을 불러다 축복해 주지 않습니다. 알겠어요?

하나님은 우리 개인을 승리의 아들딸로 세워 가정적으로, 종족적으로, 민족적으로, 국가적으로, 세계적으로 주고 싶어하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주고자 하여 약속을 하셨지만 역사상에는 그 약속을 실천하여 승리의 기반을 닦은 개인이나 가정이나 종족이나 민족, 혹은 국가가 하나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고대하시는 것은 그러한 국가의 이념을 통하여 세계적인 복을 만민에게 속히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6천년 동안 하루도 쉬지 못하고 섭리해 오시는 하나님의 안타까운 심정이요, 서글픈 사정이라는 것을 오늘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 세계를 대하는 하나님의 갈급한 심정

하나님이 어느 한때 우주사적인 참소를 벗어난 자리에서 ‘너희들은 내가 영원무궁토록 품고 사랑할 수 있는 내 아들딸이니 이것도 저것도 다 너희 것이다. 이 전체가 과거․현재․미래를 통하여 내가 너희를 위해 준비한 것이니 이것을 가지고 천세 만세 행복을 누릴지어다.’ 하고 개인을 세워 축복해 보았으며, 가정을 세워 축복해 보았으며, 종족, 민족, 국가를 세워 축복해 보았습니까? 아직까지는 그래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의 소원은 무엇이어야 하느냐? 이 30억 인류를 한데 몰아 빨리 환난의 세계를 박차고, 자유로운 기반 위에서 새로운 천국을 향하여 행진할 수 있는 움직임을 지구상에 나타나게 하고, 천국을 건설하여 그곳에서 하나님을 모시는 것이어야 합니다.

오늘날 최고의 문명을 자랑하는 20세기에 사탄을 중심하고 살아온 인간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자리에서 산다고 한다면 하나님을 어떠한 자리에서 모셔야 될 것이냐? 역사적인 사탄의 입장보다 역사적인 우리 선조들의 입장보다 더 귀하고 훌륭한 기반 위에서 모셔야 합니다. 지금까지 이렇게 하겠다는 신념에 불탄 사람이 있었습니까? 아직은 없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 우리 통일교인들은 어떻게 해야 되느냐? 여러분은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지만 어치피 지나가야 할 시대이니 그렇게 제한된 환경에서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것보다 30억 인류로 하여금 새로운 이념의 세계를 건설하게 해야 됩니다. 20세기 문명을 넘어설 수 있는 지금 이 자리에서 ‘통일교인 중에 하나님이 주고 싶은 것을 내가 받아 가지고 천세 만세 우리 후손들 앞에 하나님의 유업으로 고스란히 상속시켜 줄 수 있는 자리가 그립다 하는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느냐?’ 할 때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장이라도, 이 세계를 박차고 나가 새로운 이념의 세계로 가고 싶어하십니다. 하나님은 승리로써 지금까지 소망하시던 개인, 가정, 종족, 민족, 국가, 세계적인 기반을 닦아 가지고 당신이 계획하신 천세 만세 영원무궁한 창조이상세계를 건설하고 싶으신 것입니다. 그런 마음이 강하면 강할수록 더 급한 심정에 사무치시는 하나님이심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들도 자나깨나 내가 가야 할 곳이 그런 세계라는 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종적인 탕감역사를 해결해야 할 우리

하나님은 지금부터 2천년 전 선민인 이스라엘 민족과 사상적인 중심인 유대교단이 못했던 책임을 하기 위해 다시 세계적인 기준에서 기독교를 제2이스라엘로 세워 놓았습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또 유대교의 사명을 못하였기 때문에 오늘날 통일교회로 하여금 그 사명을 다시 상속 받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세계에 널려 있는 민주주의 권내의 사람들을 수습하여 오시는 주님을 편안한 자리에 모셔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종족적으로, 민족적으로, 국가적으로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터전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본연의 목적이며 인간이 해야 할 본연의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나깨나 그 이념에 사무쳐서 ‘내게 부딪치는 환난이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이스라엘 민족이 애급에서 당하던 400년 고역에 비할소냐?’ 라고 해야 합니다. 오히려 그때보다 큰 세계적인 시대에 왔으니 그들보다 큰 환난이 있어야 되는데 하나님은 반대로 조그마한 환난을 통해서 큰 고개를 넘었다는 조건을 만들어 주시니 무한히 감사해야 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역사적인 심정을 모르는 것을 한으로 생각한다 할진대 애급고역 400년을 거친 이스라엘 민족이, 혹은 로마 박해 400년을 거친 기독교인들이 무지무지한 핍박과 환난 가운데에서도 피땀을 흘려가며 전통을 유린당하지 않고 세워 나온 그 역사적인 심정을 알고 싶을 것입니다. 그렇다 할진대 여러분은 그때 그 환경, 그러한 자리에서 그런 핍박을 받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생각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역사적인 심정의 동반자가 되어 세계적인 입장에서 역사적인 심정을 제기할 줄 아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세계적인 환난 속에서 선한 사람들이 핍박을 받아 왔고 유린을 당해 왔던 역사적인 모든 환경과 핍박의 도상에 자신이 서지 못할까 봐 두려워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옛날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 복지에서 당할 시련이 애급에서의 시련보다 크다 할지라도 가나안 땅에 가야 하겠다는 마음을 강하게 가져야 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 신자들도 아무리 역사적인 환난, 시대적인 환난이 크다 할지라도 이것을 감사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제는 과거처럼 몇백년 몇천년에 걸쳐 시련을 당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세계사적인 시련 도상에 세워 놓고 그 기간을 단축시켜 일시에 총탕감하시려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를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개인적인 승리의 기반은 닦았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가정적인 십자가의 고개가 남아 있기 때문에 그것도 승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개인적인 승리의 기반은 깨지게 되는 것입니다. 또 가정적인 승리의 기반은 닦았다 하더라도 종족적인 십자가의 고개를 못 넘으면 가정적인 승리의 기반은 깨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종족적인 승리의 기반을 닦았다 하더라도 민족적인 십자가의 고개를 또 넘어야만 되고, 민족적인 십자가의 고개를 넘었다 하더라도 국가적인 십자가의 고개를 또 넘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 국가적인 십자가 뒤에는 세계적인 십자가가 남아 있으니 이 또한 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넘어야 할 엄청나고 무지무지한 십자가의 모든 고개를 단축시켜 한꺼번에 탕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역사적인 거리를 두고 종적으로 탕감하여 나왔습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6천년 동안이나 종적인 탕감역사를 해 나왔지만 아직까지 완전히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이것을 누가 해결해야 되느냐? 우리가 해야 합니다. 바로 이 종적인 역사를 탕감해야 할 기간이 우리 통일교회의 3년 기간이요, 4년 기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세우신 이유

이런 것을 알고 이 3년, 4년 기간이 아무리 어려운 핍박의 노정이요, 비참한 노정이라 할지라도 ‘옛날 이스라엘 민족이 애급에서 당하던 곤고에 비할소냐, 옛날 기독교인들이 로마 제국에서 당하던 그 고통에 비할소냐?’ 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들은 개척의 노정에서 피의 제단을 꾸며 나오면서도 하늘의 전통을 세우고 하늘 향한 절개를 지키기 위하여 자기 일신을 초개같이 버렸습니다. 소망의 천국을 바라보면서도 언제 이루어질지도, 또 가는 길도 모르면서 죽어갔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시대와 다릅니다.

하나님은 이런 엄청난 역사적인 탕감의 노정을 압축시켜 일시에 횡적으로 전개하여 탕감시키고자 하십니다. 아직까지 어느 누구도 승리하지 못한 가치적인 내용을 이루게 하기 위해 하나님은 여러분을 세우셨으니, 여러분은 오늘 여러분 한 사람을 세우기 위하여 하나님이 얼마나 많은 수고를 하셨는지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하여 오늘 이 뜻 앞에 세움을 받은 여러분이기에 여러분 중 어느 한 사람도 노아와 바꿀 수 없는 것이요, 아브라함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요, 모세와 이스라엘 민족 전체와도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전세계에 기독교인들이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오늘 우리들이 지닌 이 이념을 지녔느냐 하면 못 지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와 영계의 수많은 영인은 물론 지상에 있는 수많은 도인들과 모든 교파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기반 위에서 세계적인 선물을 주기 위해 우리를 불러 세우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기 위하여 우리를 불러 세우셨으니 이제 우리는 받아야 되겠습니다. 받는 데는 큰 것을 받아야겠습니다. 그리고 큰 것을 받기 위해서는 십자가의 큰 고개를 넘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한국이 비참한 환경에 처하게 되는 것은 불가피 한 일입니다. 오늘날 세계가 좌우로 분립되어 투쟁하고 혼란된 가운데 처하게 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개인적으로 생각해 볼 때 엄청난 일입니다. 어떻게 개인을 수습하고 가정을 수습하고 종족, 민족, 국가, 세계까지 수습할 수 있는 길을 찾겠느냐 할 때 깜깜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가 지나 승리의 기반 위에 설 수 있는 그때만 되면 개인은 물론이요, 가정, 종족, 국가, 세계의 갈 길이 뚜렷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때에 우리들은 소망의 천국세계에서 주고 싶어하시는 하나님의 심정 앞에 참다운 효자 효녀로서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딸을 앞에 놓고 당신의 모든 것을 상속하시는 그 시간에 천상천하의 모든 만물은 ‘천세 만세 무궁하소서.’라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천사세계의 천사장은 물론이요, 존재세계에 있는 모든 존재도 이 세계를 유린해 나오던 사탄도 다 그렇게 증거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증거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비록 사탄이 원칙적인 기준을 무한히 침범해 나왔지만, 우리는 그것을 원수의 입장에서 수습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을 중심삼고 수습해야 하는 것입니다.

축복의 땅에 가서 살 수 있으려면

하나님 앞에 사탄은 역사적인 모든 면에서 원수의 입장으로 반기를 들고 따라 나왔지만 하나님은 그 위신과 체면을 생각하지 않고 언제나 천륜의 도리를 통하여 수습하면서 승리의 기반을 넓혀 오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들 역시 원수들을 대하여 하나님과 같은 입장에서 수습할 수 있는 전통적인 이념을 가진 선민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하나님이 축복한 세계에 들어가 살 수 있는 백성이 못 되는 것이고, 축복받을 수 있는 가정이 못 되는 것입니다. 축복받을 수 있는 개인이 못 된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런 원칙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도 원수를 위해 복을 빌었던 것입니다. 평면적으로 보면 사탄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원수지만 역사의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심정에 입각해서 보면 용서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원칙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역사적인 심정을 상속 받은 아들로서 원수를 위해 복을 빌어 주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은 그 책임을 다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개인적인 공인을 받고 가정적, 종족적, 민족적, 국가적인 공인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심정을 중심삼은 예수님 앞에 개인적으로 핍박하던 사탄이 굴복하고, 가정적, 종족적, 민족적, 국가적으로 핍박하던 사탄이 굴복하였기 때문에 세계적인 영적 천국 건설의 문이 개방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대가 지남에 따라서 이 세계는 예수님의 이념을 통하여 수습되어 나왔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현재 우리의 입장이 이러하니 우리는 어디로 가야 될 것인가? 나는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 여러분이 지금 당장 세계로 나아가서 세계적인 승리의 터전을 마련하고 싶어도 단번에 세계적인 무대로 나가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먼저 가정을 찾아가야 됩니다. 아들딸의 입장에서 부모를 찾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형제를 찾고 부모를 찾은 다음에는 민족이 살 수 있는 세계를 향하여 가야 합니다. 고향 땅을 버리고서라도 그곳으로 가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민족이 자기들이 살 수 있는 축복의 땅을 향하여 가야 했듯이 우리가 살 수 있는 곳을 향하여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원칙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세계적인 이스라엘로서 축복을 받을 수 있는 하나의 나라, 하나의 주권, 하나의 백성, 하나의 국토가 있다 할진대 개인은 형제와 더불어, 형제는 부모와 더불어, 부모는 종족과 더불어, 종족은 민족과 더불어, 민족은 국가와 더불어 가야 합니다. 그러한 나라가 있다 할진대, 그 나라의 주권은 세계의 주권을 대신한 주권이요, 그 나라의 백성은 세계의 만백성을 대신한 선민이요, 그 나라의 영토는 세계의 영토를 대신한 영토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만민은 모든 결정을 그 나라를 통하여 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그 나라는 자연히 세계를 지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속히 그런 나라에 가고 싶다, 속히 그런 길을 개척하고 싶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가는 데는 개인으로는 못 갑니다. 반드시 형제를 찾아서 부모를 모시고 가야 합니다. 부모 앞에 효도하고 형제끼리 서로 위하는 입장에 서서 가야 합니다. 여러분이 앞으로 민족 건설을 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가정보다도 소망의 민족을 더 그리워해야 합니다. 나아가 이것을 위해서라면 형제의 우애라도 넘어설 수 있다는 심정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래야 종족적, 민족적인 권내에 들어갈 수 있으며, 거기에서 다시 하나의 국가적인 기준을 넘어갈 수 있는 길을 닦아 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시련을 극복할 수 있었던 노아의 믿음

오늘날 통일교인들이 걷고 있는 길이 탕감복귀노정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여러분은 선생님이 걷는 이 길을 따라오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선생님도 과거에 하나님의 섭리를 대해 나오는 데에 있어서 그 섭리를 알지 못하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섭리를 모르는 여러분을 지도하는 입장에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선생님이 미래의 섭리를 전개시켜야 할 책임까지 짊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인도하는 대로 그저 따라오면 됩니다.

아까 앞에서도 말했듯이 여러분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중심의 자리에서 있다 할진대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무한히 주고 싶어하신다는 것입니다. 주되 거짓이 아니라 참을 주고자 하십니다. 그러면 참을 주는 데는 어떤 자리에서 줄 것이냐? 태평 왕궁에서, 노래를 부르는 자리에서 줄 것이냐? 참의 가치는 평범한 자리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지긋지긋한 자리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떠한 환경 가운데서도 그 모습이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금이 어째서 귀합니까? 그것은 금이 어떠한 작용을 받더라도 변치 않는 본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도 자유스러운 환경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시련의 조건을 통과해야 참을 소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날 복귀 도상에 있는 타락한 인간을 깨끗이 하기 위해서는 어느 면에서는 사탄도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개인을 중심삼고 볼 때, 오늘날 이 세계사는 개인을 연마시켜 세계적인 승리의 발판을 갖추게 함으로써 세계에서 제일 귀한 선물을 주고자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이것이 세계사의 요구요, 섭리의 요구라 할진대, 역사적인 모든 시련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세계사의 문제가 여러분 하나에 걸려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죽거나 망하는 등의 별의별 일이 다 있습니다. 사탄은 나를 쓰 러뜨려 이 자리를 삼켜 버리려 하지만 나는 나대로 그 자리에 서 있어야 됩니다. 내 몸뚱이는 쓰러질지언정 내 이념은 일보도 후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역사적인 시험을 받아 십자가상에서 그 육신이 쓰러졌지만 사정과 심정에서는 일보 전진했습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노아의 아들딸의 입장에 있었다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노아가 무조건 따라오라고 했을 때 여러분은 그렇게 했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의 향락을 추구하며 살고 있는데 나는 이런 신세가 되었구나. 참으로 적막강산이구나.’ 하였을 것입니다. 그 당시 노아가 슬퍼했다고 하면 거기에는 세계사적인 슬픔이 내포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노아에게는 생활면으로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120년 동안 자기 신세야 어떻게 되건 그것을 개의치 않고 소망의 일념은 발전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120년 동안 방주를 지으라 하셨으니 10년간 짓고 나서는 ‘10년 소망이 이루어졌구나.’ 했고, 20년, 30년, 100년간 짓고 나서는 ‘20년, 30년 100년 소망이 이루어졌구나.’ 했고, 120년간 짓고 나서는 ‘120년 소망이 이루어졌구나.’ 한 것입니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어려운 환경이었지만, 그의 마음속에 가치적인 이념이 있었기에 그 환경을 억누르고 승리의 기반을 닦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노아는 120년 동안 남아졌다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이 시대에서 통하지도 않는 탕감복귀노정을 여러분에게 가르쳐 주고, 아담가정에서부터 6천년 이상 걸린 복귀의 노정을 가자 할 때 여러분은 거기에 동참할 수 있겠습니까? 신세지지 않고 따라갈 수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복귀섭리를 하시는 데 있어 6천년 전의 아벨 하나만을 붙들고 끝까지 나왔다면 지금 어떻게 됐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세워 놓은 중심인물이 책임을 다하지 못하면 그때마다 다른 인물로 대치시켜 나왔습니다. 그랬으니 오늘날 여러분도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천국에 들어가려면

복귀의 길은 가다가 떨어지면 누구든 대신 갈 수 있는 길이기에 오늘 우리가 있는 것입니다. 복귀노정을 가는 데 있어 사람들은 처음에는 다 좋아합니다. 왜? 잃어버린 아버지를 찾으려는 심정이 모든 사람들에게 인연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불인지 물인지 모르고 따라갑니다. 그런데 가다가 지치게 되면 다시 세상으로 나갑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만약 여러분이 6천년 전부터 하나님의 복귀의 길을 따라 나왔다면 지금 하나님께 걱정 안 끼쳐 드리며 따라 나왔다고 자신할 수 있겠습니까? 선생님이 가만히 보니까 만약 여러분이 그렇게 되었다면 역적이란 명패를 이마에 붙이고, 가슴에 붙이고, 발끝에 붙였겠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패들입니다. 여러분 스스로 자신이 마음을 한번 가만히 들여다보십시오. 그리고 내가 과연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겠는가 생각해 보라구요. 어떻습니까? 여러분끼리 마음보를 한번 잘라 가지고 서로를 비판해 보십시오. 그 마음을 보고 하나님이 거룩거룩하다 하며 홀딱 반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그래도 하나님은 그런 여러분의 마음을 붙들고 섭리해 보시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불쌍합니까? 어쩌다 하나님이 이렇게까지 되었습니까? 세상에서도 백만장자가 잘살다가 뒤집어지는 운세를 맞아 밥을 굶게 되었다면 그 아들딸이 우리 아버지 어쩌다 이렇게 되셨노? 하며 통곡을 할 것입니다. 그런데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께서 이러하시다는 것을 생각할 때….

여러분은 본향의 길을 따라가는 나라가 있다 할진대 그 나라를 따라가 세계를 지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천국 못 갑니다. 예수님이 가는 나라는 이 세계에 널려 있는 무슨 장로교니 무슨 감리교니 하는 어떤 교들의 이념을 가지고 가는 나라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가지고 가는 그 내용의 참 뜻은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종족적으로, 민족적으로, 국가적으로, 세계적으로, 천주적으로 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내용을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왜 예수가 못 오시는 것입니까? 아직까지 이 땅에는 세계적으로 갈 수 있는 기독교의 발판이 세워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기독교인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그저 ‘주여! 오셔서 저희를 승리하게 해 주시옵소서.’라고만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천국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면 천국은 어떻게 해야 들어가느냐? 천국은 개인으로부터 가정, 종족, 민족, 국가, 세계, 천주를 지나지 않고서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본래부터 천국 가는 길은 있었으나 지금까지 천국에 들어간 사람은 없습니다. 왜 없겠습니까? 그것은 개인적인 십자가 도상에서부터 가정, 종족, 민족, 국가, 세계적인 십자가 도상에 이르기까지 각 단계의 사탄을 굴복시켜 승리의 기반을 세운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 오셔서 그러한 승리의 기반을 세우지 못하였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낙원에서 기도하는 입장에 계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통일교회가 서 있는 위치

그러면 재림이상은 무엇이냐? 개인적인 환경에서부터 개척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환난에 빠져 있는 세상을 도피해서 산중수도하며 가는 것이 아닙니다. 산중수도는 하되, 지옥의 맨 밑창에서부터 개척하여 기필코 지상지옥의 항복을 받아서 천상지옥을 거쳐야 합니다. 그래야만 낙원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지옥이 무엇입니까? 지옥은 우리가 원치 않는 곳입니다. 나쁜 곳입니다. 지긋지긋하고 비참한 형편없는 곳입니다.

아직까지 천국에 들어간 개인이 없었기에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고 살 수 있는 가정도 없고 영원무궁토록 하늘의 주권을 세워 살 수 있는 종족, 민족, 국가도 없습니다. 이러한 가정, 종족, 민족, 국가를 편성하되 지상에서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지상에서 이루어져야만 천상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기에 이를 편성하기 위해 오시는 분이 메시아입니다.

오시는 그분은 개인적인 십자가를 지고 세계적인 골고다를 넘어야 되고, 가정적인 십자가를 지고 세계적인 골고다를 넘어야 되고, 종족적인, 민족적인, 국가적인 십자가를 짊어지고 각 단계 단계의 골고다를 넘어야 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한 단계를 넘는다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개인적으로나 가정적으로 승리했다고 할지라도 다시 종족, 민족, 국가적으로 넘어야 할 더 큰 시련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통일교회는 지금 어디까지 와 있느냐? 우리는 아직까지 세계적인 골고다상에서 십자가를 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권내에 있는 우리는 종족적, 민족적, 국가적, 나아가 세계적 책임을 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모든 십자가, 이 세계에 널려 있는 모든 환난과 사탄의 개입이 통일교회를 거쳐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중에 그런 가운데서도 남는 자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러면 민족적인 과정을 거쳐 나가는 이때에 들어온 사람은 어떻게 해야 되느냐? 바로 그 자리에서부터 출발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고생한 모든 사람들을 아벨로 모시면 되는 것입니다. 간단합니다.

앞으로 한국 사람이 전부 다 뜻 앞에 서서 국가적인 승리의 기반을 닦는다면, 모든 이방 사람들은 시대적으로 그 혜택을 받아 점점 그 뜻을 알게 되므로 한국 백성을 아벨같이 모시며 세계적인 무대를 향하여 행군을 계속할 수 있게 됩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렇기 때문에 통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대한민국, 이 삼천리반도를 중심삼아 가지고 세계적인 무대를 향하여 나가는 아벨의 주권, 아벨의 땅, 아벨의 백성을 어떻게 만드느냐? 그것을 만들려면 대한민국이 세계적인 시련에 한번 부딪쳐야 되는 것입니다. 한국은 지금 사회적으로 볼 때 공산과 민주가 대결하는 와중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대한민국을 아벨 편으로 세우기 위해서 대한민국에 이런 역사적인 비참한 환경을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를 수습하고 우리를 구해 줄 자는 누구인가? 옛날 애급에서 핍박받던 이스라엘 60만 민중을 구해 줄 자는 모세가 아니라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민족은 자기들에게 핍박이 가중되면 가중될수록, 그런 환경에 서면 설수록 ‘아버지여, 우리 선조의 죄를 용납하시옵소서.’라고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십자가의 길이 자기 선조들의 죄악의 보응이고, 민족적인 탕감인 동시에 세계적인 탕감인 것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니까 그래도 좀 낫습니다.

기도를 해도 진실된 마음으로 하지 않으면 그 기도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수많은 핍박과 시련 가운데서 비로소 선조들이 지은 죄를 알게 됨으로 인해 회개하는 조건은 세웠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 만약 이스라엘 민족이 한 번만이라도 ‘우리의 이 모든 고통으로 세계적인 환난을 대신하게 해 주시어서 세계사적인 탕감의 조건으로 세우시옵소서.’ 라는 기도를 하였다면 광야에서 쓰러지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한민족에게 시련을 주신 뜻

오늘날 우리는 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의 역사적인 모든 죄악을 탕감하기 위한 민족적인 시련을 어떻게 넘어가야 하느냐? ‘이 민족은 새세계를 위하여, 새로운 이념의 천국을 위하여 선한 혈족으로 세움을 받았사오니 이 민족을 희생시켜 역사적인 죄악을 탕감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그런 기도를 해야 됩니다. 꼭 그래야만 됩니다.

이 시대에 하나님이 세계의 인류 중 어느 누구도 아닌, 어떤 종족도 아닌 이 삼천만 민족에게 몇십년 혹은 몇백년 동안의 시련 과정을 두어 연단시키는 이유가 어디에 있느뇨? 일면으로만 보면 비참하지만 다른 면으로 볼 때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무한한 축복을 주시려고 세계적인 제단을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이것을 위해 연단시켰음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상복을 입고 복귀의 사명을 다하는 제사장들이 되든가 혹은 제관(祭官)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이 민족을 대신하여 하나님 앞에 과거를 회개하고 속죄의 제사를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는 제사장이 되어야 하니, 여러분은 민족이 시련의 길을 걸을 때 동참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향하는 원칙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여러분들은 민족적인 시련의 길을 가는 데 있어서 자기 개인을 위해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버님께는 이 민족을 세우셔서 하고자 하는 뜻이 있는 줄 아오니 그 책임을 저희에게 맡기시옵소서.’라고 할 수 있는 입장에 서야 합니다. ‘왼손으로는 과거를 회개하고 오른손으로는 시대를 수습하려는 제물이옵니다. 두 갈래로 가르더라도 사탄이 취할 수 있는 제물이 아니옵니다. 가르더라도 한 쪽은 역사적인 제물이고 한 쪽은 시대적인 제물이오니, 하늘이여, 받아 주시옵소서.’라는 기도를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사탄이 취할 수 없어 굴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민족 앞에 세계적인 시련이 부과되는 이때 우리는 어떠한 자리로 나가야 되느냐? 하나님이 거리거리에 있는 모든 참상(慘狀)을 바라보시면 낙망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런 사실을 통해서 하나님의 심정을 소유해야 합니다. 이 어려운 운명 속에서 이 민족이 살길은 하나님을 붙드는 길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절박한 상황에서, 소망이 없는 환경에서 하나님을 붙들고 호소하였습니다. 그 호소가 민족의 죄악사를 탕감하고 미래를 향하여 나가는 하나님과 보조를 맞추었기에, 가나안 땅을 향한 광야노정을 출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깨어 있어야 할 우리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에서도 그 시대의 시련과 같은 시련이 거쳐갑니다. 여러분들은 여기에 굴복되어서도 안 되고 불평해서도 안 됩니다. 통일교인들은 깨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에게는 울분심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고 정의에 입각하여 싸우고 정의에 입각하여 살아가되 이런 생활을 침범 받게 될 때는 불의의 악당을 굴복시켜 나가야 합니다.

이 민족에게 시련의 바람이 불어오고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은 3면으로 공산권의 포위를 당하고 있습니다. 옛날 예수님 당시에는 예수님 개인을 중심삼고 사방으로 사탄이 진을 치더니, 오늘날엔 국가적인 이념을 가지고 나서는 이 택한 국가를 중심으로 원수들이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것입니다. 중공이 그러하고 소련이 그러합니다. 그런데 또 중공이 유엔에 가입하려 하니 장차 한국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이냐?

여기에서 우리들은 죽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에서 좌절해서는 안 됩니다. 이 모든 것을 박차고, 이스라엘 국가를 드높이고 천국이념을 찬양하며 나설 수 있는 용사의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그러지 않으면 하나님은 이 민족 앞에 세계적인 사탄을 굴복시킬 수 있는 천적인 자녀를 세워 주실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원수를 굴복시키는 것이 우리의 어려움입니다. 현재 이 세계에 가하고 있는 원수의 공격에 지지 말고 오히려 그 사탄을 굴복시켜야 합니다. 사탄 편 가인과 하늘 편 가인을 한꺼번에 굴복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통일교회 여러분들은 점점 긴박한 생활 환경에 부딪치게 될 것입니다. 세계사적인 모든 것을 한번 휩쓸고 지나갈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억천만대를 지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영과 육을 합하여 승리의 깃발을 들고나서는 날에는 우리가 계획했던 대로 돌아가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십자가의 길을 걸어 나왔으니 복이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이 나라, 이 삼천만 민족이 하늘의 백성으로서 하늘 보화의 전체를 받을 수 있는 때가 오나니, 이때를 바라보고 나가는 우리로서는 한 고비만 잘 넘기자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지금까지 하늘길을 걸어 나왔습니다. 아담가정의 입장에서 걸어 나왔고, 노아가정의 입장에서 걸어 나왔고, 혹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 가정의 입장에서 걸어 나왔고, 모세와 이스라엘 민족의 입장에서 걸어 나왔습니다. 비록 몸은 역사적인 거리를 두고 있으나 마음세계에 있어서는 그들보다 앞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야곱이 21년간 하란에서 처참한 생활을 하면서 축복의 땅 가나안을 그리던 심정보다 더 간곡한 심정을 가지고,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지도해 나오면서 가졌던 심정보다 더 간곡한 심정을 가지고 지도해 나왔습니다.

선생님은 역사상의 어떤 선조들에게도 심령적인 기준에서는 지지 않을 자신이 있고, 그들 앞에 서서 늠름히 호령할 자신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심정을 가지고 잃어버린 천지를 찾겠다고 나설 때 겁내지 말고 그것을 다 포괄하여 넘어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기반이 잡히게 되면 그 다음에는 복이 온다는 것입니다.

이제 젊은 여러분은 어디로 갈 것입니까? 이리 가도 고생길, 저리 가도 고생길입니다. 집에 가서 살면 고생을 더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통일교회의 그 길고 지긋지긋한 길을 어떻게 가나?’ 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극복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하나님을 등지고 가게 되면 몇십 배 몇백 배 더한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여기 대구에도 그런 사람이 많습니다. 어차피 가야 할 길인데 나간다고 편해질 것 같습니까?

여러분이 개인으로서 이 길을 가려면 지금보다 더 어렵습니다. 지금은 중심이 있으니 그 주위에서 돌면 되지만, 중심에서 멀어지면 한바퀴를 돌려 해도 그만큼 거리가 먼 것입니다.

심정의 세계를 중심삼고 역사하시는 하나님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심정의 세계를 중심삼고 복귀섭리를 해 나오시는 것이며, 통일교회에서도 심정복귀를 여러분에게 가르쳐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개인이 감당하겠습니까? 중심에서 탕감하면 한바퀴 도는 것은 간단합니다. 중심에 가까우면 도는지도 잘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중심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그 거리가 멀어지게 됩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복귀역사를 해 나오시는 데 있어 초점을 맞추어 나오십니다. 개인적인 초점, 가정적인 초점, 종족, 민족, 국가, 세계적인 초점을 맞추어 나오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한 수직선에 세울 때 자기가 그 중심과 가까운 곳에 서면 설수록 자기의 인생길은 간단해 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인생을 고행의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아! 저 집에는 자가용도 있고, 아들딸도 다 훌륭하고, 세상에 부러울 게 없이 사는 데 우리 집은 왜 이리 고생만 하나?’ 하며 부러워합니다. 그러나 역사는 공평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눈깔을 보면 마치 단추 같습니다. 눈깔이라 한다고 섭섭해하지 마십시오. 볼 줄 모르면 눈이 아니고 눈깔입니다.

하나님은 몇백년 몇천년을 두고 섭리하십니다. 그렇게 스케일이 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겨우 10년 20년을 놓고도 불평을 합니까? 불평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공평한 분입니다. 공평해요. 지금 잘사는 사람들은 옛날 선조들이 못살았기 때문이고 지금 못사는 사람들은 옛날 선조들이 잘살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내려가는 운세에 태어났으니 못사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빨리 내려가야 복을 빨리 받는 것입니다.

앞으로 통일교인들을 어떻게 지도할 것이냐? 천운을 받들기 위해 통일교인들을 몇십년이고 몇백년이고 고생시킬 것입니다. 맨 밑창에 들여보내 철저히 고생을 시킬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그러니 여러분은 지긋지긋해도 고생해야 합니다. 그러면 내려가는 운세에서 올라가는 운세로 바뀝니다. 탕감은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역사노정에서 하나님은 새로운 아들딸, 혹은 새로운 종교를 세워서 고생을 시켰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역사노정의 내리막길에서 정상적으로 올라가려면 몇천년 몇만년간의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단축시키려면 세계가 돌밭길을 거쳐야 하는데, 그때마다 하나님은 세계를 구하기 위해 대표자를 보내어 대신 그 길을 걷게 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모든 위인들은 혼란한 시대를 거쳐 나왔습니다. 그것은 내리막길을 단축시켜서 올라가는 운세를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작전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작전을 할 때에도 공평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민족과 후손을 위해 우리가 가야 할 길

우리 통일교회 교인들을 가만히 보게 되면, 그래도 팔자가 나쁜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은 다 뜻이 있는 것입니다. 어떠한 무엇이 있었기에 여기에 들어온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선조의 공적을 얘기하지요? 선조의 공적으로 시대적인 혜택권 내에 들어왔다고 말입니다. 이건 뭘 안다는 거예요.

지금까지 수백여의 종족의 후손을 지도했던 사람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다. 예수님도 못 했습니다. 그러나 통일교회 문 선생님은 했습니다. 수많은 민족이 다 함께 제물이 될 수는 없지만, 각 민족을 대신해서 몇백 명이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세계적인 어둠의 골짜기인 이 지옥에 뚜껑을 덮어서 영원히 막아야 합니다. 천만인에게 식구의 자격과 천적인 가치를 부여해 한 덩어리가 되게 해야 합니다. 이거 안 하겠습니까? 이것을 안 하는 사람들은 전부 다 도적들입니다.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우리 민족은 해골곳과 같은 골짜기에 와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여기의 생명과 기름과 생명수를 부어 부활권을 만들기 위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느낍니까?

한국이 어찌하여 역사적인 와중에 처해 있는가? 어찌하여 이렇게 비참한가? 헌 옷을 벗기 전에는 새 옷을 입을 수 없습니다. 벗는 데에는 하늘 나라에서 벗는 것이 아닙니다. 악한 세상에서 입은 옷이니 악한 세상에서 새것으로 갈아입고 새로운 천지로 행군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민족적인 길을 닦아 나오게 되면, 이 민족은 세계에 빛날 때가 있을 것입니다. 알겠습니까?

우리는 말없이 전쟁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말없이 미래의 도성을 개척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 자리를 피하게 되면 우리의 선조는 탄식하게 되고 이 삼천만 민족과 우리의 후손은 몇십 배 몇백 배 더 고생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책임을 안 지겠다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그러니 여러분은 울더라도 절대 혼자서는 울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이 땅 위에 와서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가정이 그리워 눈물을 흘렸고, 민족이 그리워 눈물 흘렸고, 세계가 그리워 눈물을 흘렸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마 8:20)고 하신 예수님이셨으니 얼마나 비참한 신세였습니까? 어찌하여 메시아의 신세가 그렇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이 4천년간 수고한 기반 위에서 예수님이 취할 것이 무엇이었겠습니까? 비참한 생활을 하면서도 이런 예수의 심정을 호소하고, 잃어버린 천국을 찾기 위해 호소하며 뜻을 위해 충성을 다하는 식구가 있다면 여러분들은 그런 식구를 아벨로 모시고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시대적 십자가의 길을 개척하면서 가야 되는 하나의 선민을 대하여 나오시기에 그 선민에게서 절대로 떠나실 수 없습니다. 그러니 선민인 우리는 묵묵히 이 길을 가야 합니다. 아무리 우리에게 그리운 고향이 있다 해도 이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되는 불가피한 사정이 놓여 있기 때문에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길을 다 가서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지긋지긋한 비참상을 모두 청산하고 죄악된 십자가의 시련노정을 영원히 이 민족적인 무대 앞에서 사라지게 해야 합니다. 이 민족적인 처참함을 영원히 이 민족 앞에서 사리지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날을 위해서 우리는 끝까지 나아가야만 합니다.

세계적인 싸움에서 승리하려면

우리가 세계적인 입장에 서서 눈물지으면 세계가 눈물짓는 것이요, 기뻐하면 세계가 기뻐하는 것입니다. 또 저주하면 세계도 저주를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신념을 가지고 나아가야 됩니다. 역사적인 책임을 짊어지고 하나님의 공분심에 불탄다면 무엇을 복귀시키지 못하겠습니까? 내가 망하나 네가 망하나 어디 한번 보자 하는 심정을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떠한 때에 가정에게 상을 줄 것이며, 어떠한 때에 종족에게 상을 줄 것이며, 어떠한 때에 민족에게 상을 줄 것인가? 그때는 세계적인 환난 도상에서 승리하는 때, 즉 국가적인 승리의 기반을 하나님 것으로 갖고 나가게 될 때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국가를 드러내어 수많은 국가가 찬양하게 하고, 그 민족을 드러내어 수많은 민족이 찬양하게 하고, 그 가정을 드러내어 수많은 가정이 찬양하게 하고, 그 개인을 드러내어 30억 인류가 찬양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라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자주 말하지만 선생님은 축복가정을 앞세웁니다. 그런데 축복가정들이 고생하지 않고 하늘땅을 위해 눈물짓는 생활을 하지 않으면 소용없습니다. 눈물없이 사는 사람은 가짜입니다. 끝날에는 알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 역시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그렇다고 먹는 것 때문에 울어서는 아니 됩니다. 맡은 바의 책임을 다하기 위하여 울어야 합니다. 원수와 대결하고 있는 우리는 원수의 기반을 점령하라는 특별 명령을 받은 책임자로서 그 책임 때문에 밤잠을 이루지 못하며 눈물지어야 합니다. 그런 책임을 져야 하는데 어떻게 진지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승리적 주관자’가 되자는 표어로 출발한 4년노정 가운데 1년을 아무것도 못한 채 보냈습니다. 이제 남은 3년 기간 내에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이 민족이 당해야 할 시련의 고비는 다 지나갔으니, 우리는 이제부터 ‘대한민국 삼천만 민중이여, 평화의 노래를 부를지어다! 세계 만민이여, 우리들의 수고를 찬양할지어다! 우리들이 걸은 십자가의 길을 찬양할 지어다! 너희들을 대신해서 우리가 갔으니, 이제 우리들이 비참했던 것을 생각하고 너희들은 가슴을 치고 우리들이 억울했던 것을 생각하고 통곡할 지어다!’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래 가지고 한국의 과거의 서러움을 세계가 느끼게 해야 합니다. 아무리 과거의 억울함과 분함을 이야기하더라도 그것에 대하여 지금 눈물지을 수 있는 무리가 이 시대에 없다면 회개도 할 수 없으며 발전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비참한 곳으로 몰아넣으셔서 비참한 역사를 엮으시려는 것입니다. 한국 역사는 이스라엘 역사보다 더 비참하였습니다. 오늘날 통일교회 교인들은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유리고객이 되었던 것과 같은 비참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결코 배반해서는 안 됩니다. 다시 애급 땅을 그리워하는 무리들이 되어서는 절대로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지난날 내 집에서 먹을 것 잘 먹고 입을 것 잘 입던 것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다가는 망합니다.

앞으로 대한민국은 우리를 따라와야 합니다. 그래야만 삽니다. 여기서 누가 협조한다 하더라도 신세지지 말아야 합니다. ‘당신이 삼천만 민족이 비참한 길을 갈 수 있게 몰아낼 수 있겠느냐?’라고 할 때 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는 길을 따라와라. 이 길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길이다.’ 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개인적으로 승리하게 되면 어느 한때에 개인적인 복을 받는 것이요, 가정적으로 승리하게 되면 어느 한때에 가정적인 복을 받는 것입니다.

개인을 필요로 하는 것은 가정을 찾기 위함이요, 가정을 필요로 하는 것은 종족을 찾기 위함이요, 종족을 필요로 하는 것은 민족을 찾기 위함이요, 민족을 필요로 하는 것은 국가를 찾기 위함이요, 국가를 필요로 하는 것은 세계를 찾기 위함입니다. 그러니 세계를 찾기 전에 반드시 국가적으로 승리해야 합니다. 한 나라에 아무리 백전백승하는 장군이 있다 할지라도 그 국가의 운명이 결정지어지는 마지막 싸움에서 패하게 되면 패자가 되는 것입니다.

결국 여기서는 신념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것밖에는 없습니다. 신념이 없으면 세계적인 싸움에서 실패할 것입니다. 아무리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이 민족과 세계를 위해 최선을 다한 후에 쓰러지겠다고 해야 할 겁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세계적인 무대를 찾기 위한 결의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가치는 목적관에 의하여 결정된다

하나님은 손을 벌리며 6천년 동안이나 부르셨습니다. ‘사랑하는 내 아들딸은 어디 갔느냐? 축복을 받아 이루어야 할 가정은 어디 갔으며, 종족은 어디 갔으며, 그 나라와 주권자, 혹은 그 세계는 어디 갔느냐?’고 하루도 아닌 6천년 동안이나 부르며 나오신 것입니다. 그렇게 찾아 헤매이신 처참한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아버지는 수심에 잠기어 눈물을 흘리며 탄식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아버지의 모습을 여러분이 바라볼진대, 이런저런 처소와 환경을 잊어버리고 죽든 살든 그 음성을 놓칠세라 몸부림치며 갈 줄 아는 간곡한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갈 길이 밝습니다.

선생님은 이런 길을 개척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싸워 나왔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남아 있기 때문에 선생님은 여기서 낙망할 수 없으며 지칠 수 없는 것입니다. 한국을 기반으로 하여 세계를 향해 나갈 때, 여러분이 책임을 못해도 선생님은 책임을 해야 합니다.

선생님은 만세에 자랑할 수 있는, 만세에 축복을 받을 수 있는 통일의 무리를 그리워합니다. 또한 만민이 받을 수 있는 복을 이 민족이 받기를 고대하고, 모든 주권자가 받을 복을 이 민족의 주권자가 받을 수 있는 그 한 날을 고대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위하는 효자가 갈 길이요, 하나님을 모시는 충신 열녀가 세워야 할 도리입니다. 이러한 것을 생각하며 우리는 끝까지 책임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있게 되는 내일의 기쁨과 상을 만민의 것으로 주시옵소서.’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 ‘내가 받은 이것이 만민의 것으로 남아지게 하시옵소서.’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귀하고 복된 것을 만민에게 주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개인적 십자가, 가정적 십자가는 물론 지금까지 역사적인 십자가를 수도 없이 지고 나오셨습니다. 이것을 알았기에 선생님도 받은 복이 있다 할진대 만민에게 그 복을 주지 않으면 몸살이 날 정도입니다. 하루라도 전도 안 하면 살지를 못합니다. 여러분도 민족을 위한 생각을 하든가, 공적인 것을 생각하고 살아야지 자기를 중심삼고 살아서는 안 됩니다.

가치는 목적관에 의해 결정됩니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태어났으며, 무엇 때문에 살며, 또 왜 죽느냐? 그것은 어떠한 남편의 아내가 되기 위해서도 아니요, 어떠한 아내의 남편이 되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아내가 되든 남편이 되든 그 목적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목적이 같아야 그 가치도 같아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편과 아내는 같은 가치관으로써 결합된 이상상대이어야 합니다. 그러한 가정과 가정이 민족을 위하고 국가를 위하여 존재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주고 싶어하는 하나님의 전통을 이어받았습니다. 그런 여러분인데 여러분이 언제 개인적으로 이 삼천만 민중을 위하여 주겠으며, 언제 30억 인류를 위해 주겠습니까? 하나님은 그러한 날이 오기를 얼마나 고대하고 계시는지 모릅니다. 여러분이 언제 삼천만 민족을 위해 주어 보았으며, 30억 인류를 위해 주어 보았습니까? 하늘땅을 위해 주고 하나님을 위해 주어 본 적이 있습니까? 주겠다고 안타까워하며 몸부림은 쳤지만 주어 보지도 못했고 받아 보지도 못했던 것입니다.

책임진 자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이렇게 주고 싶어하고 받고 싶어하는 간곡한 마음을 갖고 하나님을 향한 충효의 도리를 닦아 큰 자리에 설 준비를 하려니,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희생이 뒤따라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노력과 희생에 비례하여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시는 모든 것이 뒷받침 되어 나간다는 것을 여러분은 똑똑히 알아야 합니다.

오늘 여기 모인 여러분 가운데서 몇 해 후에 남아질 사람이 얼마나 될 것이냐? 지금까지 선생님이 걸어 나온 이 길을 많은 사람이 따라왔다가 떠나갔습니다. 그렇지만 선생님은 계속 갑니다. 외적인 시련도 찾아왔었고, 인간적인 시련도 찾아왔었고, 개인적인 욕망도 찾아왔었지만 선생님은 그것들에 사로잡혀 포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그것들은 다 지나가 버린 것입니다.

선생님이 대한민국이면 대한민국과 같은 국가적인 시련에 점령당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소원을 따라, 하나님이 남기신 그 뜻을 따라, 하나님이 머무르실 수 있는 보금자리를 향하여 내 몸과 마음은 달려갑니다. 여러분들 중에 지금 그렇게 못한 사람이 있다면, 역사적인 슬픈 자리에서 하나님을 위로하고 내가 죽기 전까지는 이런 책임을 다하겠다고 몸부림치며 마음의 도리를 다하는 모습이라도 갖추어야 됩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은 저주받을 대한민국, 망할 이 땅일지라도 ‘네가 있는 땅이니, 네가 눈물짓는 곳이니….’ 하시며 축복하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 민족이 남아지고 인류가 남아진다는 것입니다.

인심이 천심을 통하는 이러한 인연을 갖고 승리적인 기반을 닦아 나타나는 개인이 있으면 그 개인은 만민의 추앙을 받을 것이요, 그러한 가정, 민족, 국가가 있으면 세계 모든 국가의 추앙을 받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세계적인 중심의 자리가 잡혀지니 그때야 세계가 자리를 잡고 제대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가는 노정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지금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일이 하늘 편 아벨을 편성하는 일인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이것은 엄청난 사실입니다. 이것이 커지는 날에는 이 나라가 살 것이요, 이 세계가 살 것입니다. 이 점을 생각할 때 우리는 여기서 무엇이든 신나게 해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주고 싶어하시는 소망을 가지고 찾아오신 하나님을 여러분이 섭섭하게 해 드리고 되돌려 보내 드리지 말고 위로해 드려야 합니다. 나 때문에 안심하실 수 있게 해야 합니다. 명령은 열이었지만 열 다섯만큼 행동하고 책임지려 한다면 다섯만큼은 하나님이 책임져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에게 같이하신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가 이 삼천만 민족이 못 하겠다는 것을 대신 책임지겠다고 한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시지 않습니다. 지겠다는 책임에 비례하여 하늘이 동정해 주신다는 것을 선생님은 잘 알고 있습니다.

받은 복은 만민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하나님이 주시고 싶어하시는 복을 받았을 때는 만민에게 돌려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받은 복을 나누어 주지 마십시오. 길을 닦아 놓기 전에 복을 나누어 주면 길을 닦을래야 닦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복을 나누어 줄 수 없는 이유를 여러분은 똑똑히 알아야 됩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예수님도 하나님이 복을 나누어 주기 위해 4천년 동안 준비한 터전 위에 오셨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도 하나님이 복을 나누어 주기 위해 40년 동안 닦은 터전 위에 나타났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이 터전에는 6천년의 역사적인 모든 배경이, 심정적인 모든 인연이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제 나누어 줄 수 있는 기반이 준비되었으니, 나누어 주기 위한 대표자로 등장해야 할 여러분은 이 역사적인 기반을 더럽혀서는 안 되겠습니다. 여러분은 나누어 주기 위한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준비한 이 기간에 잘 받아 잘 돌려줄 수 있는 여러분이 되어야만 앞으로의 시대에 있어서 복을 받아 나누어 줄 수 있는 영광의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즉 참다운 효자 효녀가 된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마음으로는 소망의 상속을 바라고 행동으로는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개인을 통하여 가정을, 또 가정을 통하여 어떠한 면이면 면, 지역이면 지역을 위하여 주어야 합니다. 자기 고향과 자기 부모를 위해 주고 거기에서 높임을 받아야 되는 것이 원칙입니다.

역사 속에 수많은 사람이 왔었지만 모두가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만큼은 이 엄숙한 책임을 완수하여서 하나님의 승리의 아들딸로서, 세계 만민에게 복을 나누어 줄 수 있는 복의 기관으로서 남아지는 무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알겠지요? 그렇게 해 보겠다는 사람은 손들어 보십시오.

<기 도>

아버님은 사랑의 아버님이요, 참다운 아버님이요, 의의 아버님이신 것을 저희들은 잘 알고 있사옵니다. 그 아버님이 저희를 찾아오시는 것은 이용하기 위함이 아니라 참다이 주기 위함이라는 것도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한 길을 6천년이나 닦아 나오신 아버지이시니 저희들, 그런 아버지를 앞에 세워 놓고 따라가는 자들이 되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 주시려고 하는 예물을 저희들이 받아 나누어 주는 무리가 되겠다고 하는 간곡한 심정을 가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아버님이 염려해 주시고 근심해 주실 수 있는, 참을 책임진 아들딸이 되게 이 시간 축복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니다.

저희는 지금까지 이 삼천만 민족을 대신하여, 이 삼천리반도를 대신하여 눈물지으며 외로운 길을 참아 나왔사옵니다. 그런 서글픈 길에서 숱한 핍박과 조롱을 받는 자리에서 저희들이 아버지 부르기를 몇백만 번 몇천만 번 하였습니까? 저희가 사무친 심정으로 아버지를 부를 적마다 아버지도 눈물지으셨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오늘 아버지께서 눈물지으시는 자리에 동참한 이 아들딸들을 후대에 기뻐할 수 있는 세계적인 승리의 자리에까지 동참시켜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길을 가는 이들의 앞길에는 수많은 원수들이 있사옵니다. 영적인 원수들도 수없이 많사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뜻을 대하여 가는 이 길에 영육으로 원수들이 반대의 조건을 제시하더라도 수고하시는 아버지의 심정을 본받아 가겠다고 하는 신념과 결의만 있으면 이 모든 것은 제거될 줄 알고 있사옵니다.

오늘날까지 저희를 세워 인도하실 때의 원칙이 그러하셨다는 것을 저희들은 잘 알고 있사옵니다. 하나님이 먼저 슬픔을 넘고 나서 그 슬픔을 저희에게 주신 것을 알았사옵고, 하나님이 먼저 고통의 자리를 넘고 나서 저희에게 고통당하라 하신 것을 알았사옵니다.

아버지, 오늘날 한민족을 중심삼은 통일의 제단이 이 민족 앞에 나타났사옵니다. 오늘 이와 같은 환경을 갖추어 수많은 도성 앞에 우리의 모든 이념을 버젓이 외칠 수 있는 것은 우연히 된 것이 아니옵니다. 그와 같은 이치대로 오늘 자유롭게 가슴을 내밀고, 얼굴을 들고 수많은 사람을 바라보면서 자유로운 환경에서 말할 수 있는 내 자신이 있기까지는 하나님의 6천년의 수고가 있었다는 것을 잊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와 같이 역사적인 거룩한 성터 위에서 하나님과 행보를 같이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영광된 일이며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하오니 아버지 앞에 진정으로 감사하면서 움직이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부르짖는 이 음성이 옛날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부르짖던 그 음성을 대신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하늘을 등에 지고, 역사를 등에 지고, 소망의 천국을 등에 지고, 참세계를 가슴에 안고, 화살과 핍박과 폭탄이 떨어지는 곳으로 돌진하는 하늘의 용사가 되어, 사랑하면서 갈 수 있게 축복하여 주시옵길,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이 도성에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영계에서도 저희와 보조를 맞추려 하고 있사오니, 이 도성의 만민도 스스로 머리를 숙이고 아버지 앞에 모일 수 있게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이 도성에서 벌어진 싸움이 삼천만 민중을 부여잡고 하나님이 움직일 수 있는 계기가 되고, 세계사적인 새로운 기점을 제시하고도 남음이 있게 해 주시고, 그날이 부모의 날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십자가의 행로에서 부모를 모시는 것을, 이러한 곳에서 부모의 날을 맞는 것은 저희들은 원치 않사옵니다. 그러나 남겨진 뜻을 성취하기 위한 저희의 책임을 알기에 이런 자리에서나마 참다운 부모의 날을 기념해야 할 저희들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오니 부모님을 모실 수 있는 아들딸로 서기 위하여 걸어간다는 것을 마음과 몸으로 체휼하면서 이번 기간을 지내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또한 이번 기간을 위해서 기도한 당신의 모든 아들딸 위에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수많은 통일의 용사들이 세계 각국에 널려 있사옵니다. 그들 또한 이런 움직임을 다 알고 있사옵기에 그들이 기도하는 전부도 아버님의 뜻을 위한 것이고, 아버님이 남길 수 있는 영원한 축복의 터전을 위한 것이옵니다. 그러한 것을 위하여 염려하고 있는 그들 위에 축복의 은사를 내려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오늘 이 시간 이후에 되어지는 모든 절차와 행동으로 인하여 아버지의 위신과 체면을 손상시키는 일이 없게 하여 주시옵소서. 각자를 지켜 사탄 세계와 분별하는 조건을 스스로 아버지 앞에 세울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부탁하면서, 모든 말씀 사랑하는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였사옵나이다. 아멘.

여러분들도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오늘은 다섯 번째 맞이하는 부모의 날입니다.

부모의 날의 이념은 본래 하나님의 창조이념 가운데 중심이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신 후, 그 만물을 주관할 인간을 창조하시고 인간들에게 만물을 주관하라고 축복하신 목적도 바로 참부모를 세우기 위해서였습니다.

부모의 날과 하나님의 섭리

원래는 아담 해와가 하나님을 중심삼고 일체가 되어 참부모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면 부모의 날이 세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온 우주가 부모의 이름과 더불어 송영을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부모의 날은 온 우주가 부모의 이름과 더불어 송영을 드리는 기쁨의 날인 것입니다.

이날을 맞이하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시조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이러한 부모의 날을 하늘도 잃어버렸고 땅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본래 계획하셨던 바를 이루시기 위하여, 부모의 날을 찾으시기 위하여 지금까지 경륜해 나오신 것입니다.

부모의 날을 맞이하려면 먼저 참부모를 맞이해야 합니다. 그 참부모는 역사를 심판하고, 현재를 주관하고, 미래를 개척하셔야 할 중심존재이십니다. 그래서 인간이 역사적으로 선망해 온 것도 참부모를 맞이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대신하여 이 땅 위에 나타나셔야 할 참부모는 어떤 분이냐? 만물을 대신하여 사탄세계와 싸워서 만물을 주관할 수 있는 입장을 수습하고, 인간을 대신하여 인간세계를 주관하고 있는 사탄을 괴멸시키셔야 하며, 영계와도 대결하여 수많은 영인들까지 주관할 수 있는 절대적인 자리를 구축해야 할 분입니다. 참부모에게는 그런 사명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타락한 세상을 복귀하시기 위해, 만물로부터 인간, 하늘까지 연결된 하나의 세계를 복귀하기 위해 지금까지 참부모를 보낼 수 있는 길을 닦아 나오신 것입니다.

우리는 복귀원리를 통하여 참부모가 나타나시기 위해서는 참다운 아들딸이 있어야 하고, 참다운 아들딸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참다운 종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복귀역사노정을 보면 종의 시대를 거치고 자녀의 시대를 거쳐서 부모의 날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역사해 오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종의 시대로부터 양자의 시대, 자녀의 시대를 거쳐 부모의 시대까지 복귀해 나오는 동안 영계에 있는 영인들도 협조해 나왔다는 것을 우리는 원리를 통해 배웠습니다.

외적으로 한 국가의 기준을 넘어서 세계적인 발판이 갖추어지기 전에는 참부모가 이 땅에 올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노아와 아브라함을 거치는 2천년의 섭리역사 기간이 있은 후 야곱으로 하여금 비로소 이스라엘 민족을 형성할 수 있는 기반을 닦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민족을 통하여 국가를 형성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기까지 수많은 역사노정을 거쳐오면서 수고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입장에서 하나님 대신 사탄과 대결하여 이겨야 하고, 양자의 입장에서 하나님 대신 사탄과 싸워 이겨야 하고, 직계 아들딸의 입장에서도 하나님 대신 사탄세계와 싸워 이겨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참부모를 맞이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섭리역사는 구약시대로부터 신약시대를 거쳐 지금까지 오랜 역사를 거쳐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종의 입장을 복귀하고, 양자의 입장을 복귀한 터전 위에서 직계 아들딸의 입장을 복귀하여, 즉 승리의 기반을 닦아 놓은 후에 참부모의 인연을 세우시려는 것이 하나님이 이 땅 위에 메시아를 보내신 목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메시아를 보내신 목적

이스라엘 민족의 불신으로 하나님이 4천년 동안 준비하신 종의 기반이 무너졌고, 양자의 기반도 무너졌습니다. 그래서 2천년 전에 오신 예수님은 종의 입장에서 싸워 승리하시고, 양자의 입장에서 싸워 승리하셔서 직계 아들의 입장으로 나아가셔야 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입장이었던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양자의 입장과 직계 아들의 입장을 거친 후, 이스라엘 민족을 기반으로 하여 참부모의 인연을 세워 놓고 가는 것이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신 목적이었습니다. 또 그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하셔야 할 사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 전체적인 기준에서 승리의 기반을 닦지 못하고, 영계를 중심하고 참부모의 인연을 개척해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개인적인 자리, 가정적인 자리, 민족, 국가적인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하늘 뜻을 대하는 개인과 가정과 민족과 국가를 세워서 지금까지 돌아 돌아 나왔다는 것을 뜻을 안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세계적인 시대를 맞이하여 하늘은 기필코 약속하신 바와 마찬가지로 끝날이 되면 신랑 되시는 주님을 보내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신부를 택하셔서 참다운 승리의 기반을 닦으실 것입니다. 참부모의 자리는 본연의 창조목적의 자리이기 때문에 그런 자리를 닦기 위해 하나님은 지금까지 6천 년간 싸워 나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6천년 복귀섭리역사는 이 참부모를 찾기 위한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 참부모는 6천년 섭리사 전체를 대신하는 분입니다. 그래서 그 참부모를 찾지 못한 것이 인류의 전체의 슬픔을 대신하고, 전체의 고통을 대신하고, 전체의 비애를 대신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인류역사는 무슨 역사냐 하면, 참부모 복귀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부모를 복귀하지 않고는 참다운 자녀가 있을 수 없는 것이요, 참다운 자녀의 인연을 세우기 전에 참다운 가정과 참다운 종족과 참다운 민족, 국가, 세계, 천주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이 기준을 세우기 위해 6천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수고해 나오셨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에 오셨던 예수님은 이 땅 위에 처음으로 참부모의 영광으로 오셨던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참부모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즉 참부모는 역사적인 결실체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역사적인 결실체로 서시기 위해서는 일면적인 승리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들의 사명만 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부모의 사명을 해야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 위에서 육적으로는 아들의 입장을 복귀하는 노정을 거쳐 나가야 했고, 영적으로는 부모의 입장을 복귀하는 노정을 거쳐 나가야 했습니다. 이렇게 양면적인 입장에서 책임을 다하여 하나님과 하나될 수 있는 기점을 세워야 했습니다. 그럴 때 비로소 그 기점은 개인적 이스라엘의 기반이 되고, 가정적인 이스라엘의 기반이 되고, 민족적인 이스라엘의 기반이 되고, 국가적인 이스라엘의 기반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었더라면 영적 육적으로 참부모의 기준을 세울 수 있었는데,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님을 불신함으로 말미암아 그 기준을 세울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영적 기반을 상속 받아야 할 다시 오시는 주님

본래 참부모는 창조원리로 보면, 영적 육적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이라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스라엘 민족의 불신으로 인해 참부모가 되지 못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영계에 가셔서도 참부모를 모실 수 있는 터전을 닦아 나오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무슨 말이냐? 이 땅에 다시 오시는 주님은 영적인 부모의 입장을 복귀해야 되고, 육적인 부모의 입장을 복귀해야 합니다. 이것을 아시는 예수님은 그래서 지금까지 2천년 동안 영계에 가셔서 무엇을 하셨느냐 하면, 다시 오시는 주님이 영계로부터 핍박을 받지 않고, 유린당하지 않는 기반을 닦으셨습니다. 예수님을 중심한 영적인 사회, 국가, 세계적인 기반을 닦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지상에서가 아니라 영계에서 섭리해 오셨기 때문에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은 전부 영적 부모와 인연을 맺어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 다시 오시는 주님은 예수님이 세례 요한으로부터 모든 축복을 상속 받으신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으로부터 예수님이 영계에서 닦아 놓으신 영적으로 개인, 가정, 민족, 국가, 세계적인 기반을 상속 받아야 합니다. 그런 입장을 거치지 않고는 참부모의 인연을 이 땅에 세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상에서 영적인 상속의 기준을 세우는 것이 원칙입니다. 이것은 지상의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주님에게 영적인 기반을 상속하시게 될 때 거기에 하나되면 지상에서 상속의 기준이 닦여질 수 있었는데, 지금까지 기독교인들이 이런 기준을 세워 놓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영적인 승리의 터전이 오시는 참부모 앞에 고스란히 옮겨지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다시 오시는 참부모는 재차 영적 상속의 기준을 복귀하고, 육적 상속의 기준을 복귀하는 투쟁역사를 거쳐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께서 6천년 동안 섭리하신 것은 오시는 참부모의 터전을 마련하고 당대에 승리의 기반을 닦게 하기 위해서였는데, 이 땅 위에 있는 성도들이 영적 부모의 명령에 일치 단결하여 따르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그 명령에 보조를 맞추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지금까지 예수께서 닦아 놓은 영적 기반을 다시 오시는 주님께 상속하는 기준을 세우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오시는 주님은, 참부모가 되실 분은 다시 영적인 세계에서 개인적인 시험으로부터 가정, 종족, 민족, 국가, 세계적인 시험을 당해야 합니다. 그 시험을 이기지 않고는, 내적 승리의 기준을 세우지 않고는 지상에 실체적인 승리의 기준을 세울 수 없기에 내적인 싸움을 해 오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복귀원리란 무엇이냐? 영적인 세계에서의 싸움, 즉 내적 십자가의 고비를 넘어가는 데 있어서 승리하게 할 수 있는 원리입니다. 또 역사적으로 저끄러졌던 모든 슬픈 일들을 복귀하게 할 수 있는 원리입니다.

영적인 기준에서의 승리를 지상에 연결시킬 수 있는 실체가 이 지상에 세워짐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2천년 전에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출발하려 하셨던 세계적인 가나안 복귀노정을 다시 출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시는 참부모를 중심하여 영적인 세계와 실체세계에서 싸움을 전개해야 하는데, 아직까지 지상에서 그런 싸움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실 참부모가 거쳐야 할 시련

참부모는 두 분이 있어야 됩니다. 두 분이 없으면 참부모의 기준 위에 설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의 기준을 세웠다 하더라도 지상에 실체의 참부모가 세워지지 않으면, 실체세계에서 승리의 기준이 세워지지 않습니다. 아무리 영계에서 승리의 조건을 이루었다 하더라도, 지상에 참부모가 세워지지 않으면 그 영적 세계의 발판에 해당되는 발판을 이 지상에 닦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오시는 참부모는 이것을 위해 생명을 바쳐, 땅과 하늘을 대신하여 싸워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싸움의 기간이 40년 기간이란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이 40년 기간에 오시는 참부모는 어떤 싸움을 거쳐야 하느냐? 우선 영계에서 영적인 시련을 거쳐야 합니다. 그 다음에 지상에서 실체적인 시련을 거쳐야 합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쓰러지지 않고 중심을 갖고 나서야 비로소 영육 합하여 참부모의 인연을 세울 수 있는 것입니다. 즉 6천 년 섭리역사의 소망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1960년에 부모의 날을 설정했는데, 그날은 어떤 날이냐? 영육 합하여 참다운 승리의 기점을 잡은 날이요, 참부모의 이념이 출발한 날입니다. 그래서 그날은 하루에 지나지 않고, 그날의 인연은 부분적인 인연에 지나지 않지만 이 인연은 천주사적인 인연을 거쳐 나갈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날을 기점으로 하여 영계와 육계에서 동시에 계획을 실천하실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즉 영계와 호응할 수 있는 기반, 비로소 하나님이 싸우실 수 있는 터전이 닦여졌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승리의 기반이 닦여졌기 때문에 여기에 일치되는 가정적 기반, 종족적 기반, 민족적 기반, 국가적 기반, 세계적 기반만 닦아 놓으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스라엘 민족의 반대로 전체적인 사명을 완성하지 못하시고 낙원에 가셔서 영적으로 이스라엘을 수습하여 영적 부모의 입장에 서 계신 것과 마찬가지로, 세계적인 승리의 판도를 지상에 닦을 수 있는 때가 언제냐 하면, 4년노정이라는 것입니다.

이 4년노정 동안에 영계와 육계가 일치하여 승리의 기점을 세우는 날에는 온 세계가 인류가 낙원 이상의 영계로 행군할 수 있는 시대적인 혜택권 내로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역사 과정을 거쳐 나가는 데 있어서 오시는 참부모는 개인적인 십자가를 져야 하는 단계에서 세계 인류의 십자가를 대신 져야 되고, 가정적인 십자가를 져야 하는 단계에서 세계 인류의 십자가를 대신 져야 되고, 종족적, 민족적, 국가적 십자가를 져야 하는 단계에서도 세계 인류의 십자가를 대신 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3년․4년․40년노정의 의의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보면, 야곱은 에서와의 개인적인 투쟁에서 승리했기 때문에 개인적인 복귀의 조건을 세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라반의 집에 가서 하늘이 협조하는 가운데 가정적인 싸움에서 승리했기 때문에 가정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 후 야곱의 후손은 민족을 형성하기 위해 사탄세계인 애급으로 들어갔는데, 그들은 거기에서 하늘의 협조로 구출 돼 나와 가지고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고, 가나안 7족을 멸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 복귀노정 40년을 거쳐 나가면서 비로소 사탄세계에 대해 공격할 수 있었습니다.

40년 광야노정 이전에는 3일노정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3일노정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가나안 복귀를 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에 들어가서는 또다시 40수를 찾아 세워야 했습니다.

복귀섭리가 이런 노정을 거쳐왔기 때문에 지금까지 선생님도 40년노정을 거친 후 3년노정을 걸어야 하고, 4년노정을 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3년노정을 걸었고, 또다시 4년노정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3년노정과 4년노정을 합하면 7년노정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복귀역사를 종결짓고 하늘의 주권을 세울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원래는 33세부터 7년노정을 걸어서 하나님이 바라는 부모의 기준을 세우고, 거기서부터 만물복귀의 기준을 세워 40세에 모든 것을 종결짓고 하늘의 뜻을 이루어야 했습니다. 이것이 예수의 사명이었으나 예수님이 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 이 뜻은 그대로 남아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오시는 참부모가 내적 외적 싸움을 책임지지 않을 수 없기에 40년 준비기간, 혹은 투쟁기간을 거쳐가는 것입니다. 외적으로는 그 40년 기간이 준비기간이나 내적으로는 투쟁기간이었던 것입니다. 이리하여 영적으로 승리의 기반을 닦아 가지고 비로소 지상에 영육을 합한 실체적인 기반을 닦을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것입니다.

참부모가 중심이 되어 가는 3년노정을 거치고, 만물복귀의 기간, 즉 사방성을 갖추기 위한 4년노정을 거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7년노정으로서 탕감복귀를 종결해 나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참부모를 찾기까지의 역사노정을 놓고 보면, 3년노정, 4년노정, 40년노정은 짧은 노정이지만, 역사적인 모든 슬픔을 전체적으로 탕감복귀하는 기간이요, 역사적인 분함을 총체적으로 탕감복귀하는 기간이요, 역사적인 십자가를 전체적으로 탕감복귀하는 기간입니다. 역사적인 모든 슬픔과 고통과 분함에도 굴복당하지 않았다는 절대적인 기준을 세우지 않고는 참부모의 날, 참부모의 승리의 날을 맞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늘을 대신하여, 참부모의 인연을 대신하여 뜻을 책임지고 받들어 나오는 우리 통일교회는 그래서 이런 시련을 자초해서 당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사탄세계와 분별된 자신을 세우고, 참부모가 승리의 한 본보기를 취해 사탄세계를 심판할 수 있는 참자녀의 기준을 세워 놓지 않고는, 종족, 민족, 국가 기준을 세워 놓지 않고는 참부모에 대한 본연의 뜻을 지상에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이 기간에 나와 더불어 싸우고 있는 여러분은 참부모의 개인적 대신자요, 가정적 대신자요, 민족적 대신자요, 국가적인 대신자들입니다. 이런 부모의 대신자로서 지금까지 남한 각지에 나가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세계적인 무대를 향해 나가 책임지고 싸워야 하는 것이 여러분의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지금까지의 영계와 육계의 슬픔이 무엇이뇨? 본래는 참부모가 이 땅에 나타나면 그날부터 하늘땅이 평화를 노래해야 되고, 온 천주가 행복권 내에 들어가야 되고, 하나님을 중심으로 지상천국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상은 천국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직까지 우리는 천국을 향해 나가는 도상에 머물러 있다는 것입니다. 개인, 가정, 종족, 민족, 국가를 거쳐 세계를 향해 나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40년노정을 지나고 3년노정을 지나 가나안 7족을 대할 수 있는 4년노정을 걷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가나안 7족을 대신한 한민족을 어떻게 복귀시키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똑똑히 알아야 합니다.

부모복귀의 어려움

한국복귀를 중심삼고 가는 여러분은 개개인이지만 여러분 개인만이 가는 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한국복귀를 중심삼고 가는 여러분은 참부모를 대신해서 가는 자신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되겠습니다. 그러지 않고는 종족적 민족적, 혹은 국가적인 참부모의 승리의 터전을 마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바르게 참부모를 대신해서 가기 위해서는, 참부모는 세계적인 영적 승리의 기준을 세우기 위해 나간다면 여러분은 국가적인 승리의 기준을 세우기 위해 나가야 된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영적으로는 참부모의 승리의 기준이 세워졌기에 지상에 참부모의 승리의 기준을 세워야 하는데, 여러분이 민족적인 기준을 넘어가야 할 참부모의 책임을 대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면에서 설명하면 여러분이 민족적인 기준을 넘어서 세계적인 기준을 향하여 간다면, 오시는 참부모는 영적으로 천주적인 승리의 기준을 세워야 된다는 것입니다. 참부모의 인연을 갖고 오시는 주님은 우리가 지고 가야 할 십자가를 영적으로 개척하고, 실체적으로 승리하시고 모든 것을 책임지고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모복귀의 어려움인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하늘과 땅과 인간을 돌아보게 될 때, 하늘이 어느 한때 승리의 참부모를 모셨느냐? 아직까지 모시지 못했습니다. 땅이 모셨느냐? 아직까지 모시지 못했습니다. 인간이 모셨느냐? 아직까지 모시지 못했습니다. 그 도상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참부모만 모시면 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참부모를 모신 다음에는 참된 가정, 종족, 민족, 국가, 세계를 복귀해야 됩니다. 이것을 위해 준비한 것이 이스라엘 민족이었습니다.

참부모 앞에 참자녀로 서기 위해서는 자녀의 개인적인 복귀노정이 있는 것이요, 자녀의 가정적인 복귀노정이 있는 것이요, 자녀의 종족적인 복귀노정이 있는 것이요, 자녀의 민족적인 복귀노정이 있는 것이요, 자녀의 국가적인 복귀노정이 있는 것입니다. 부모의 개인, 가정, 종족, 민족, 국가적인 복귀노정과 자녀의 개인, 가정, 종족, 민족, 국가적인 복귀노정을 완결하여, 부모와 자녀가 일체가 되어 승리했다는 기준을 세워 놓고서야 비로소 민족복귀를 종결짓고 세계적인 무대를 향해 새로이 출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하늘의 6천년 복귀역사를 보면, 6천년 복귀역사는 부모복귀 역사인 동시에 자녀복귀역사인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가 개인적인 승리의 터전을 건설했으면 그 승리를 본받아 자녀도 개인적인 승리의 터전을 건설해야 되겠고, 부모가 가정적인 승리의 터전을 조성했으면 그 승리를 본받아 자녀도 가정적인 승리의 터전을 조성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개인, 가정, 종족, 민족, 국가적인 승리의 터전을 마련했으면 자녀도 개인, 가정, 종족, 민족, 국가적인 승리의 터전을 조성해야 합니다. 이렇게 부모의 승리의 터전과 자녀의 승리의 터전이 일치해야 비로소 국가적인 승리의 기준, 국가적인 복귀의 기준을 조성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들이 3년노정을 걸어 나오면서 정한 표준이 무엇입니까? ‘부모의 심정으로 종의 몸을 쓰고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리며 복귀의 길을 가자.’는 것 아닙니까?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자신은 자녀의 입장에 서 있지만 부모의 심정을 가지고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부모의 이념을 중심하고 통일교회를 볼 때, 축복받은 가정들은 하늘의 종족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요, 축복가정을 중심으로 전체 식구들은 하늘의 민족을 형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 삼천만 민족을 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민족 기준뿐만 아니라 종족 기준, 가정 기준, 개인 기준이 포함돼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종적인 기준이 횡적으로 전개된 입장에서 나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여러분을 보면 아직도 출발할 당시의 모양이요, 여러분이 지금 활동하고 있는 방식도 출발할 당시의 그 방식입니다.

통일교회의 사명

여러분 자신은 올바른 승리의 터전을 닦지 못한 개인이지만 참부모의 인연을 통해서, 참부모와 일치된 조건만 세우면 개인적 승리, 가정적 승리, 종족적 승리, 민족적 승리, 국가적 승리의 터전을 닦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기간이 7년노정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부모의 인연을 중심삼고 국가적인 승리의 기준을 세우면 그때부터 비로소 하나님은 만물을 주관하는 첫 출발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만물을 주관하고, 하늘의 가정을 세워 하늘땅에 움직일 수 없는 하나의 주권을 세우고, 하나의 백성을 세우고, 하나의 영토를 세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하나님이 영세 무궁토록 안식하실 수 있고, 거기서부터 심판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게 될 때, 예수님은 하나의 나라와 하나의 민족을 기반으로 하여 보내진 분입니다. 그런데 그런 기반이 되어야 할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이 4천년 동안 수고하여 개인, 가정, 종족, 민족, 국가적인 승리의 터전으로 세운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님을 모시는 입장에 있었느냐? 이스라엘 민족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오시는 주님은 영계와 실체세계를 대표하는 중심이시므로 이스라엘 민족은 주님과 하나되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주님과 하나된 입장에서 개인, 가정, 종족, 민족, 국가적인 승리의 터전을 마련하고, 참부모의 인연을 찾아 세워야 비로소 세계적인 출발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은 예수님과 하나되지 못하고 예수님을 불신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실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통일교회의 사명은 무엇이며, 통일교회에 입교한 여러분은 어떤 입장에 있느냐? 선생님을 중심한 이 통일교회에 불려온 여러분은 서러운 6천년 종적 역사를 횡적으로, 실체적으로 전개해야 하는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무슨 결심을 해야 할 것이냐? 우리가 가야 할 목표는 어디이냐? 세계적인 기반 위에 참부모의 나라를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참부모의 나라를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세계에 아직까지 슬픔과 고통과 눈물이 남아 있는데, 이것들을 우리가 하루빨리 청산해야 되겠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통일교회가 맡고 있는 책임이요, 사명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이제 가야 할 길을 나섰으니,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을 향해 나가던 때와 마찬가지로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마음으로도 그래야 하고 몸으로도 그래야 하는 것입니다.

참부모에 대한 참된 모심

이제 우리가 품어야 할 소망이 무엇이냐? 하늘을 대신하여 이 땅에 오시는 참부모님을 진정으로 모시는 것을 소망해야 하겠습니다. 모시는 데는 승리의 터전이 이루어진 후에, 만민이 우러러보고 만민이 공경하게 된 자리에서 모시기를 바라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슬픈 역사를 거치시는 참부모를 모시기를 바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슬픈 역사를 거치시는 참부모를 모시지 못하는 것을 선조들은 한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참부모를 진정으로 모시는 것은 모든 인류가 소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광의 자리에서 모시려고 하기보다 비참한 자리에서 모시는 참효자 참효녀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런 참효자 참효녀가 되기 위해서는 어려운 자리, 낙망할 수 있는 자리, 비참하여 비명을 지를 수 있는 자리에 서더라도 ‘하늘이여, 나를 인도하시는 하늘이여, 참부모님은 예수님보다도 더 고난의 십자가의 길을 가시니, 부모를 모시는 나로서는 어떤 가중된 십자가를 지게 되더라도 당연합니다. 나는 그것을 찬양하오니 하늘은 나로 말미암아 염려하지 마십시오.’ 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에게 미쳐지는 근심과 고통과 슬픔을 하늘 앞에 짊어지우지 말고 스스로 탕감하고 나갈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개인적인 기준에서 개인적인 부모의 승리의 인연에 접붙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개인적인 승리의 터전이 마련된 그 사람들이 축복을 받아 가지고 가정을 이루는 것인데, 그들이 가정적인 승리의 터전을 닦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자기들이 아무리 가정을 이루었다 하더라도 어느 한때 그들이 참부모를 모셔 보았느냐 할 때 모셔 보지 못했다면 역사적인 한이요, 하늘의 한이요, 천주의 한이요, 인류의 한이 되는 연고로 가정적으로 부모를 모시는 입장에 서기 위해서는 거기에 어떤 어려움이 있고 어떤 후회하고 슬퍼할 일이 있더라도, 그 슬픔을 하늘로 돌려 버리는 부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늘이 아직까지 십자가를 짊어지고 계시고, 참부모가 아직까지 더 큰 십자가를 짊어지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지고 있는 이 십자가는 응당 져야 할 것이라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슬픈 자리에서 부모를 모시고, 어려운 자리에서 부모를 모시더라도 부모를 박대하고, 부모를 슬프게 해 드리지 않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가정적으로 부모를 모신 기준을 세울 수 있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 통일교회는 축복가정들이 삼천리 방방곡곡에 널려 있습니다. 왜 축복가정들을 삼천리 방방곡곡에 널려 놓았느냐?

축복가정들을 삼천리 방방곡곡에 보낸 이유

하늘은 삼천만 민족과 삼천리반도를 중심삼고 섭리하시고, 참부모는 이 삼천만 민족 삼천리반도에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시는 참부모님을 삼천리반도가, 모든 마을 마을이, 골짝 골짝이, 산과 들은 물론이요 전부가 모시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참부모를 모시는 것이 역사적인 소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녀의 입장에서 개인적인 탕감 기준을 세우고 가정적인 탕감 기준을 세워 참부모의 대신자로서, 그 마을과 부락이 후회 없이 모시고 싶어할 수 있는 참부모님의 실체 대신자가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오신 참부모는 물론 중심의 자리에 계셔서 영적으로 전부와 관계를 맺으시지만 실체는 하나이시기에 전체를 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부모의 실체를 대신하여 만민을 대하는 입장에 세워진 것이 축복가정들이라는 것입니다.

참부모에게는 이 민족을 넘어 세계적인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민족적인 십자가는 지방에 널려 있는, 참자녀의 입장에 있는 축복가정들이 지고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축복가정 전체가 하나의 종족적인 발판, 민족적인 발판이 되어야만 하늘의 역사는 이 민족을 중심삼고 승리의 고개를 넘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는 길은 아직까지 끝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하늘 앞에 감사함으로 축복을 받았습니다. 여러분은 개인적으로 감사해야 할 뿐만 아니라 자기 종족을 대표해서 김 씨면 김 씨, 박 씨면 박 씨를 대표해서, 더 나아가서는 삼천만 민족을 대표하고 세계 인류를 대표해서 축복을 받았다는 것을, 그 가치를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또 참부모가 지상에서 해야 할 책임을 상속 받았다는 것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축복가정들은 왜 그것을 상속 받아야 되느냐? 축복가정들이 민족복귀의 과정을 거쳐 나가고 있다면 참부모는 세계적인 복귀의 과정을 거쳐 나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즉 한 단계 앞서 나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민족 복귀의 승리적 기준이 세워지지 않으면 참부모는 세계적인 노정을 갈 수 없으므로 참부모님이 세계적인 노정을 가시게 하기 위해 민족복귀의 책임을 상속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죽기까지, 이 민족의 한이 제거될 때까지 민족복귀의 책임을 지고 가야 됩니다.

오시는 참부모는 슬픈 민족을 바라보게 될 때, 눈물로 찾아갈 것이요, 피땀으로 찾아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 참부모의 대신 실체가 되어서 민족을 위해 눈물을 흘려야 되겠습니다. 참부모 대신 사탄세계로부터 얻어맞고 쓰러지더라도 다시 일어서서 원수를 굴복시키는 책임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이 민족에 대한 통일교회 교인들의 사명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 고개만 넘어가면 됩니다. 오실 예수님을 위해 이스라엘 민족을 4천년 동안 준비시키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 이 민족이 문제입니다. 책임을 하는 데에 있어서도 이 민족이 문제입니다. 전세계에 널려 있는 기독교가 문제가 아니요, 오늘 국내에 널려 있는 기독교가 문제가 아니요, 30억 인류가 문제가 아니요, 삼천만이 문제입니다.

오늘날 보면, 전세계에 역사상에 있었던 모든 것이 복잡하게 내적으로나 실체적으로 드러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수습하여 바로 세우는 날에는 이것은 세계사적이 되는 것입니다.

이 민족은 이 땅의 어떠한 지도자로 인해서는 살길이 열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늘을 의지하지 않고는 살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참부모의 인연을 중심삼은 참다운 아들딸이 아니면, 더 큰 자로 세우려는 하늘 뜻을 대하여 일하는 사람들이 아니고는 이 민족의 살 길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천주적인 부모의 날이 되어야

우리가 지금 개인적인 생활을 무시하고 가정적인 생활을 무시하고, 사회생활을 무시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그것은 전부 이 민족을 찾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우리가 이 민족을 찾으려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이 민족으로 하여금 승리의 참부모를 모시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사탄세계로부터 참소 받지 아니하고, 하늘을 대신하고, 인류를 대신하여 국가 기준 위에서 만천주 앞에 효자 효녀로서 자유천지를 이루어 참부모를 참다이 모시기 위해서입니다.

지금까지는 우리가 슬픈 자리에서 모셨고, 고통의 자리에서 모셨지만, 이제부터는 기쁨의 자리에서, 자유로운 자리에서 모셔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과 함께하실 수 있어야만, 우리가 기뻐하면 하나님이 ‘오냐, 네 기쁨이 내 기쁨이다.’라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온 인류가 ‘당신들의 감사는 우리의 감사입니다.’라고 하는 기준을 세워야 합니다.

오늘날 전세계에 널려 있는 우리 통일교회 신도들이 온 정성을 다하여 전도하려는 것은 무엇을 위해서인가? 그것은 한국을 전도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투쟁하는 목적은 겹겹이 한국을 포위 공격(선교)하려는 것임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오늘은 부모의 날인데, 이 부모의 날을 여러분이 진정으로 여러분 자신의 부모의 날로 세워야 되고, 여러분 가정의 부모의 날로 세워야 되고, 사회의 부모의 날로 세워야 되고, 국가의 부모의 날로 세워야만 세계의 부모의 날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세계의 부모의 날로 세워 가지고 천주의 부모의 날로 세워야 원래 하나님이 참부모를 세우시려던 창조이념이 완결되는 것이요,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부모의 날을 세우지 못했던 한을 풀 수 있는 것입니다. 나아가 이 온 천상천하에 부모의 날을 세워야만 복귀의 한이 완전히 해원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모의 날을 세우고 자녀의 날을 세웠지만 개인적인 부모의 날로부터 가정적인 부모의 날, 민족, 국가, 세계, 천주적인 부모의 날로 세워져 있지 못하고 자녀의 날도 그렇습니다. 만물의 날 역시 그러한데 부모의 날과 자녀의 날과 만물의 날이 세계성을 지니고, 승리했다는 기준 앞에 주관받을 수 있는 권내에 들어가야 비로소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본래의 창조목적이 완결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돼야 비로소 부모의 날이 인간의 부모의 날이 되는 동시에 하늘의 부모의 날이 되는 것입니다. 또 자녀의 날과 만물의 날도 인간의 자녀의 날과 만물의 날이 되는 동시에 하늘의 자녀의 날과 만물의 날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 서게 될 때 비로소 하늘로부터 다 이루었다 할 수 있는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부모의 날, 자녀의 날, 만물의 날을 세우고, 가정적인 부모의 날, 자녀의 날, 만물의 날을 세우고, 민족 국가적인 부모의 날, 자녀의 날, 만물의 날을 세워야 합니다. 한 국가의 기준에서 부모의 날, 자녀의 날, 만물의 날을 설정해야만 이날들이 그 국가의 중심 날이 되고 세계적인 날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4년노정에 대한 책임이 얼마나 귀중하냐 하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지방에 전도 나가 있을 때, 언제 농사짓는 농민들을 위해 참부모의 대신 입장에서 땅을 갈고 농사를 지어 주었습니까? 언제 참부모의 심정을 가지고 하늘 앞에 영광을 돌리며 길을 걸어 보았으며, 언제 부모를 모시고 이 마을 집집, 저 고을 집집, 이 들, 저 산천을 돌아보았습니까?

하나님과 참부모는 우리보다 앞서 가신다

이 자리에 참석한 여러분은 이제 어떻게 해야 되느냐? 지방에 나가서 참부모의 기반을 닦아야 하겠습니다. 참부모는 하늘의 기반을 닦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참부모보다 먼저 참부모의 갈 길을 닦으시고, 참부모는 여러분이 갈 길을 닦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참부모를 따라가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시는 참부모보다 한 단계 앞서 나가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귀섭리를 보게 될 때 복귀기대섭리시대, 복귀섭리시대, 복귀섭리 완성시대가 있는 것입니다.

하늘은 참부모가 알지 못하는 가운데 이 기반을 닦은 것입니다. 또 참부모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가운데 이 기반을 닦은 것입니다. 여러분도 여러분의 후손이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 기반을 닦아야 합니다. 그래서 국가적인 기준을 넘어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계적인 기준도 넘어서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천주사적인 기준을 넘어가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식구들이 국가적인 기준을 넘어서면 참부모는 세계적인 기준을 넘어서고, 하나님은 천주사적인 기준을 넘어서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을 위주해서 온 인류가 천주적인 기준을 넘어가야 합니다.

이렇게 보면 여러분은 하나님보다 두 단계 떨어져 있습니다. 두 단계 떨어져 있는 여러분은 그래서 낙망하고 지치는 입장에 설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가는 길 앞에 나를 위해 참부모가 가시고, 그 참부모 앞에 하나님이 나를 위해 가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수고와 참부모의 수고는 어떠한 것으로도, 죽음으로도 갚을 수 없는 수고입니다. 그런 빚을 지고 간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참부모가 상속 받고, 참부모의 뜻은 여러분이 상속 받아 가지고 그 전통적인 사상을 잃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 전통적인 사상은 무엇이냐? 인간이 원수 사탄의 혈통을 받아 태어났기 때문에 이 원수 사탄의 혈통을 제거한 후, 하나님을 중심하고 참부모를 중심한 혈통적인 복귀를 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하나님과 심정적으로 일치되어야 합니다.

심정적인 일치를 기반으로 해서 하늘의 혈통을 받아 하나님을 뿌리로 하는 나무의 하나의 가지가 되고 잎이 되고, 하나님 대신 실체가 되어 사탄을 굴복시킬 수 있는 절대적인 기준을 지상에 세워 놓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복귀의 역사가 추진되어 나간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필코 복귀역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여러분이 사명을 못한다고 해서 하나님은 이 땅을 포기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지금 때는 전세계적으로 시대적인 혜택권 내에 들어가는 때입니다. 전세계가 한 시대권 내에 들어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벌써 개인적인 시대는 지나갔고, 가정적인 시대도 지나갔고, 종족, 민족, 국가적인 시대도 지나가는 때가 되었습니다. 전세계에 널려 있는 수많은 민족이 개인, 가정, 민족, 국가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 시대에 들어왔기 때문에 이에 소생 기준은 자동적으로 수습되어 나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참부모의 인연 앞에 화할 수 있는 모심의 생활과 참부모의 심정일치, 생활일치, 행동일치, 목표일치를 이루어 나가게 되면, 시일이 지나면 지날수록 개인적인 시대를 넘고, 가정적인 시대를 넘고, 종족, 민족, 국가적인 시대를 넘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광야노정을 걷고, 요단강을 건넜더라도 가나안 7족과 싸우는 도상에서 쓰러지면, 그것은 승리의 죽음이 못 되는 것입니다. 가나안 7족을 굴복시켜 놓고, 거기에 새로운 나라 이스라엘을 세워 놓아야 하나님 앞에 세움 받을 수 있는 본연의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낙원에 머무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치더라도 이 기준을 넘어서 지치면 됩니다. 낙망하더라도 이 기준을 넘어서 낙망하면 됩니다. 오늘날 우리는 넘어가는 시대에 처해 있습니다. 민족을 향하여 넘어가고, 국가를 향하여 넘어가는 시대에 처해 있기 때문에 이 4년노정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이 기간은 여러분이 지금까지 수고한 자체가 열매 맺을 수 있는 기간이요, 6천년 역사의 전체가 열매 맺을 수 있는 기간이라는 것입니다. 또 오늘날까지 선생님이 싸워 나오던 전체가 열매 맺을 수 있는 기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들은 어떻게 이 기간을 보내야 하겠는가? 나를 대신하여 이 민족을 어떻게 수습해야 하겠느냐? 여러분은 이 민족의 슬픔을 행해야 합니다. 이 민족 가운데 어느 누가 당했던 슬픔보다, 어떤 선조가 당했던 슬픔보다 더한 슬픔과 고통을 당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민족의 환난, 즉 개인적인 환난, 가정적인 환난, 사회적인 환난, 국가적인 환난 전부를 우리가 책임져야 됩니다. 우리가 아니면 안 된다는 일념을 가지고 나가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세상을 심판할 수 있는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은 받아들이고 저것은 버려야 되겠다는, 선을 위해서는 본이 되고 악은 심판하겠다는 신념이 여러분의 생활에서 철두철미해야 되겠습니다.

민족의 환난을 책임져야 할 통일식구들

만일 여러분의 전도 임지에 선한 사람이 있으면 여러분은 그 선한 사람 편에 서야 합니다. 또 억울한 입장에 있는 사람, 슬픈 사정에 처한 사람이 있으면 그들과 같이 눈물을 흘려 주어야 되고, 고통당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고통에 동참할 줄 알아야 됩니다.

아직 통일교회 무리 가운데 뜻을 확실히 알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섭리의 뜻 앞에 접붙임을 받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통일교회 식구들은 한국의 비참한 사회상을 주시하며 가야 됩니다. 그런데 내 한 몸으로는 전체를 대신할 수 없으니, 사회의 비참한 모양이 통일교회의 생활 무대에 나타나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 식구들이 그들 대신 책임을 지고 비참한 길을 가야 합니다.

우리 통일교회 식구들은 국가적인 승리의 기준을 세우기 위해 일치 단결해야 합니다. 남자나 여자나 노소를 막론하고 다른 길로 가서는 안 됩니다. 같은 길을 가야 합니다. 영계에 가 있는 수많은 영인들도 하나의 목적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상에서도 그와 같이 하나의 목적을 향해 나가야 되겠습니다.

지금 일선에 서서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들은 내적으로 일선에 나가서 활동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 주든가, 외적으로 나가 싸우는 사람들을 위해 도와주든가 해야 합니다. 즉 일선에 나가 싸우는 아벨적인 식구들에 대해 가인적인 입장에 서서 그들을 모시든가, 기도로 영적인 면에서 힘을 플러스시키든가, 외적인 면에서 경제적인 뒷받침을 하든가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늘을 중심삼고 하나로 연결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중대한 책임을 짊어지고 있는데, 지금 침체 상태에 머물러 있으니 이것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이냐? 우리가 이와 같이 합동으로 집회를 하는 목적은 앞으로 해야 할 공격을 놓고 여러분을 훈련시키는데 있습니다. 이렇게 세계적인 신앙의 도성에서 활동함으로 말미암아 세계 전도에 대한 자신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굶주려 있을지라도 세계 인류를 위해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슬픈 입장에 있더라도 이 민족을 위해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실체적으로 줄 수 없다면 영적으로라도 그들이 필요한 것을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외적으로도 즉 실체적으로도 줄 수 없고, 내적으로도 즉 영적으로도 줄 수 없으면 망하는 것입니다. 내적으로든지 외적으로든지 줄 수 있어야만 여러분은 이 운세권 내에 남아지는 것입니다.

우리 통일교회 식구들은 슬픈 생활 환경 가운데 놓여 있더라도 낙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느 지역에 고생하는 우리 축복가정이 있다면 그 가정은 개인적인 가정이 아닙니다. 민족을 대신한 가정입니다. 고생하는 개인이 있다 하더라도 그 개인은 민족을 대신해서 고생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밥을 먹더라도, 하나님이 지금까지 사탄 편, 악한 편에 재물을 주신 것과 같이 그들에게 먼저 주고 나서 먹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생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렇게 생활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원칙은 하나님을 대신해서 선두에서 십자가를 지고 싸워 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 이상 고생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 이상 고생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삼천만 민족을 바라볼 때, 그들은 남부럽지 않게 잘 산다고 하지만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외적으로는 즐거운 것 같지만 내적으로는 죽지 못해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볼 때에는 외적인 면에서도 아무것도 갖추지 못하고 있고, 내적으로도 아무것도 갖추지 못하고 있는 것 같지만 우리는 외적으로도 불우한 사람들에게 줄 수 있고, 내적으로도 불우한 사람들에게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입장에 서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외적으로는 모든 것아 갖추어져 있는 것 같지만 내적으로는 고통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늘을 대신하여 줄 수 있고 땅을 대신하여 줄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나가야 할 기간이 이 4년노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만큼 손에 손을 잡고 일치단결하여 나가야 하겠습니다.

탕감의 길은 주면서 가는 길

앞으로 지역장들이나 지구장들은 자기들의 지역내에 전체를 대표하여 모범적으로 수고한 식구가 있는데, 그 사람을 또 굶기고 고생시키면 지역이나 지구의 발전이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는 지방의 지역이나 지구를 위해 기도할 때, 그 지역의 책임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습니다. 책임자를 위하여 충성을 다하고, 그 책임자와 상대 기준을 조성하여 열심히 일하는 식구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이래야 우리 뜻이 점점 발전해 나가는 것입니다.

지구장이 책임을 다 했다 해서 지구장을 칭찬할 것이 아니라 지구장을 칭찬받게끔 한 식구들을 칭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책임자들은 자기들을 협조한 식구들을 위해 기도를 해 주어야 합니다. 심정적인 면에서 빚을 져서는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일선에서 싸우고 있는, 고생하는 식구들이 있으면, 밥을 먹을 때에도 그들을 생각하며 눈물과 더불어 수저를 들고 눈물과 더불어 밥을 넘길 줄 알아야 합니다. ‘하늘이여, 그들을 보살펴 주시옵소서.’라는 기도가 저절로 나와야 합니다. 이런 심정이 결여되면 발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지역장은 내내 고생할 것입니다.

이런 원칙에서 우리가 삼천만 민족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 민족 가운데 비참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한 술의 밥을 먹으면서도, 한 술의 국을 마시면서도 ‘이 민족 가운데는 이것도 먹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하늘이여, 그들에게 주시옵소서. 이 우주의 모든 것은 당신 것이오니 주시옵소서.’라고 간곡히 기도해야 합니다. 이렇게 주고 싶은 간곡한 마음이 이 민족의 끄트머리까지 뻗어 나가야 합니다. 그러해야 할 여러분이 받기 위해 움직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 식구들, 여지껏 하나님의 뜻을 따라 나온 식구들 가운데 가만히 보게 되면 자기를 위주하여 자리를 잡으려고 하는 식구들이 있는데, 그러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자리를 잡으시기 전에는 자리를 잡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가야 할 노정이 남아 있기에 아직까지 정착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개인으로 출발하여 가정을 이끌어야 하고, 가정을 이끌어서 종족을 수습하고, 종족을 수습하고 난 후 민족을 세우고, 민족을 세우고 나서 국가, 세계, 천주적인 고개까지 넘어가야 합니다. 가더라도 받기 위해 가는 것이 아니라 주기 위해 가야 합니다. 주면서 가야 합니다. 이것이 복귀의 길이요, 탕감의 길인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예수님은 외로운 신세에 처하더라도 주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민족으로부터 몰리고, 눈물어린 생활 환경에 처하더라도, 한을 품고 감람산 기슭을 걸으면서도 민족에게 주어야 된다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도망을 가면서도 주면서 도망가야 된다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뜻을 책임진 하늘의 대표자가 가져야 될 자세라는 것을 역사가 증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힘든 것을 느끼면, 그 힘든 것은 나로 인하여 힘든 것이 아니고, 이 민족을 대신하여 힘든 것이라고 여겨야 합니다. 이 민족이 처참한 길을 걸어왔는데, 나도 그런 길을 감으로 말미암아, 내가 고통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이 민족의 슬픔과 한과 고난이 줄어든다고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민족적으로 걸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민족을 위해 가는 것은 세계를 위함이요, 세계를 위해 가는 것은 천주를 위함이니 이것을 다 하기 전에는 죽어도 눈을 감고 죽을 수 없다는 신념을 갖고 나가야 됩니다. 예수님도 지금까지 2천년 동안 참고 나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계복귀의 목표를 정하고 그것을 바라보고 2천년 동안 성신과 함께 싸워 나왔고, 하나님과 그 뜻을 위해 싸워 나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런 입장에서 나가야 됩니다.

주는 데는 어떻게 주어야 할 것이냐? 선생님은 과거에 그런 일을 많이 했어요. 나와 인연된 사람들을 위해 매일 기도해 주었습니다. ‘아버지, 그들을 역사적인 소망의 대표로 세워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해야 할 싸움이 벌어지게 될 때에도 그들을 위해 앞장서서 싸웠습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도 지방에 나가 전도할 때, 먼저 그 마을 사람들과 내적인 면에서 일체를 이루어야 합니다. 내적인 일치란 심정통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엔 생활통일, 이념통일의 기준을 연결시켜 나가야 합니다.

참부모를 모시려면

여러분은 현실적인 무대에서 하나님을 중심삼고 마음과 몸이 하나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즉 하나님과 마음이 일치된 거기에 몸이 굴복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소생․장성․완성의 3점을 연결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그렇게 갈 뿐만 아니라 이 민족을 그렇게 이끌고 가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 시대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을 알고 그 마을에 대한 책임을 졌으면 거기에서 끝난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한 단계 높여서 그 면을 책임지겠다고 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 면을 책임졌으면 군을 끌고 넘어가야 되고, 군을 책임졌으면 도를 끌고 넘어가야 되고, 도를 책임졌으면 국가를 끌고 넘어가야 됩니다. 한 단계 앞놓아 나가야 됩니다. 싸움의 무대는 개인적인 싸움의 무대로되 마음과 신념은 국가를 중심삼고 넘어가야 됩니다. 그런 입장에 서야 영적으로라도 하늘의 앞길을 준비하는 자리에 머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늘이 준비한 터전 위에 상대적인 조건이라도 세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발전하고 안 하는 것은 여러분 자체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개인적인 싸움을 할 때에는 가정을 생각해야 되고, 가정적인 싸움을 할 때에는 종족을, 종족적인 싸움을 할 때에는 민족을, 이렇게 국가 세계적인 싸움을 전개해 나가야 합니다. 이와 같이 싸움을 앞 놓아 나가는 사람, 한 단계 앞선 싸움의 무대를 생각하며 준비하는 사람은 절대 지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정신을 가져야 됩니다.

타락한 이 세계를 복귀하는 책임을 지고 오신 참부모는 참부모의 인연을 넓히기 위해 개인적인 십자가를 지면서도 가정적인 십자가를 져야 될 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또 개인적인 십자가와 가정적인 십자가를 지고 찾아오는 자녀들 앞에 서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시는 참부모는 참다이 주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주어야 되느냐? 심정을 주어야 되고, 피살을 주어야 되고, 사탄 앞에 승리할 수 있는 실체를 만들어 주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아직까지 그런 자리에서 자녀의 심정을 완전히 갖지 못하고 자녀의 혈통을 갖지 못하고, 사탄 앞에 승리의 기반을 닦지 못하고 있으므로 참부모를 모실 수 있는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참부모로부터 신세를 져야 할 자리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여러분은 역사적인 한과 더불어 운명을 같이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슬픈 일은 나를 빼놓고 벌어지고 있는 슬픈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와 더불어 슬픈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 이 민족의 처참함은 나를 빼놓은 처참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르지만 나는 한국의 실정을 놓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현재 이 나라와 이 민족에 대한 책임보다도 영적인 세계와 육적인 세계의 전체적인 책임을 어떻게 지고 넘어갈 것이냐 하는 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나라의 주권은 흘러가도 복귀섭리는 거슬러 올라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또 참부모를 모셔야 할 여러분은 내가 어느 때에 참부모를 모실 수 있는 아들딸의 입장에 설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언제 참부모를 모실 수 있는 아들이라고 하는 공인을 하늘로부터 받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염려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복귀원리를 배운 것은 그저 입으로 말하기 위해 배운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아담가정에 대한 복귀원리를 들을 때 남자는 ‘나는 아담의 책임을 져야 될 사람이다.’라고 생각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 세계의 죄를 때려잡아야 할 아담의 입장에 있다는 생각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자들은 또 ‘나는 해와 대신 이 세상의 죄악의 씨를 뽑아 버려야 할 입장에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이래 가지고 여러분은 아담가정을 중심삼고 감돌던 하늘의 원한을 풀어 드리고, 사탄의 침범 조건을 내 생활 무대에서 제거시켜 버리겠다고 해야 합니다. 하늘은 이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 있는 여러분은 복귀섭리의 인물들과 따로따로가 아닙니다. 아담가정의 타락은 내 타락이요, 아벨이 제물을 드린 것도 내가 드렸어야 할 것이요, 노아가 수고한 120년노정도 내가 가야 했던 노정이라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늘로부터 그것을 탕감복귀했다는 공인을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이스라엘 민족의 복귀노정을 대신 걸어간다고 생각한다면 먼저 어떤 입장에 서야 하느냐? 모세 대신 입장에 서야 합니다. 언제든지 나는 모세 대신 입장에 서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세 대신 입장이니 모세 대신 슬픔을 당해야 합니다.

책임자의 고생을 책임지겠다고 해야

책임자가 슬픔을 먼저 당하면 그 민족은 망하는 것입니다. 승리하는 민족이 되려면 책임자의 고통을 자기의 고통으로 알고 책임자보다 먼저 당하려고 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삼천만의 슬픔을 이 민족의 책임자에게 돌리지 않고 이것을 우리가 책임지겠다고 해야 합니다. 이런 책임감을 가진 사람이 많아야 이 민족이 흥한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망한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 이스라엘 민족이 슬픈 일을 전부 모세에게 돌렸기 때문입니다. 가인은 아벨을 모셔야 합니다. 어떤 자리에서 모셔야 되느냐? 탕감하는 자리에서 모셔야 됩니다. 그것은 왜 그러냐? 아벨의 기준이 성립되었으면 가인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쳐야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통일교회 사람들은 통일교회를 지도하고 있는 선생님을 고생시키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갈 길은 거기에서 끝난다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마지막이 된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의 고생을 책임지고, 인류의 고생을 책임지겠다고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염려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하나님, 염려하지 마시옵소서. 제가 책임지겠습니다.’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위로해 드릴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만일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를 낙망시키지 않았던들 이스라엘 민족은 대번에 가나안 땅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복귀 도상에 서 있는 오늘날 우리가 가져야 할 절개가 무엇이냐? 나는 슬퍼도 하나님을 슬프게 해 드리지 않겠다, 나는 삼천만으로부터 매를 맞고 죽더라도 하나님은 그런 입장에 서시지 않게 해 드리겠다는 절개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만일 그런 제자를 두었더라면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여러분은 개인, 가정, 종족, 민족, 국가, 세계적인 복귀의 책임을 짊어지고 나섰으니, 세계 앞에 나선 내 자신의 입장이 비록 초라하더라도 세계적인 인격을 세우기 위해 싸워 나가고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하겠습니다. 슬픈 일에 부딪치더라도 그것을 자기 혼자 처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먼저 아버지를 생각하고 아버지가 이 일을 당하시면 어떻게 해결하실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아버지를 모셔 놓고, 아버지와 의논해 보라는 것입니다. 틀림없이 아버지께서 지도해 주실 것입니다. 이렇게 언제든지 아버지의 지시를 받아서 해결하고, 절대적으로 그 명령에 복종해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자기의 생활 무대를 수습하고, 환경을 수습해 나감으로 말미암아 개인적인 시대, 가정적인 시대, 사회적인 시대, 민족, 국가, 세계적인 시대를 거치면서 떨어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꾸준히 자기의 갈 길을 걸어가고 올라가라는 것입니다. 뜻을 이룰 때까지 꾸준히 올라가라는 것입니다.

옛날 개인적인 시대에는 고생하면서 기뻐하더니 가정적인 시대에 들어와서는 그렇지 않아 큰일입니다. 옛날에 지방에 한두 식구 널려 있을 때는 피땀을 흘리며 어려움을 개의치 않고 마음이 간절하더니 수가 많아지니 그렇지 않은 것을 보게 됩니다. 수가 많아질수록 심정을 잃어버리면 안 됩니다. 보고도 또 보고 싶어하고, 소식을 듣고도 또 듣고 싶어하고, 그 식구가 잘되는 소식을 듣고 싶어하는 것이 참된 식구의 인연이 아니겠습니까?

오늘날 지구를 도별로 편성해 놓고 보니 식구들이 도주의가 되었어요. 식구들이 자기 지구가 속해 있는 교회의 식구들의 소식은 궁금해 하는데 다른 지구의 식구들에 대해서는 궁금해 하지 않습니다. 이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기 지구를 넘어서 다른 지구의 식구들을 보고 싶어 해야 합니다. 다른 지구 식구들의 사정을 염려해야 되고, 전세계 통일교회 식구들의 움직임을 궁금해 해야 합니다.

이런 생각을 가지는 것이 왜 필요하냐? 그것은 이런 생각을 가져야 전체적인 하늘의 섭리를 따라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고 뚝 떨어져서 전세계 식구들에 대한 관심을 갖지 않으면 죽게 됩니다.

새시대에 대한 관심이 없는 민족은 망하는 것입니다. 어느 단체면 그 단체의 모든 요원이 그 단체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의 전반적인 활동에 대해 알고 싶어하고 그리워해야 합니다. 그럴수록 그 단체는 발전하는 것입니다.

복귀섭리에서 심정일치의 중요성

모세를 중심하여 바로 궁중을 떠나 가나안 땅을 향해 갈 때, 이스라엘 민족은 모세의 행동을 알고 싶어하고 그 행동을 본받으려고 했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처음 바로 궁중을 빠져 나올 때도 모세의 행동이 그들의 행동에 반영되었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기뻐하면 같이 기뻐하고, 모세가 슬퍼하면 같이 슬퍼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광야에 나와서는 그렇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양식이 떨어지자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민족의 책임자인 모세를 12지파의 대표자만도 못하게 여겼습니다. 모세가 한 지파의 지도자 이하로 떨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겠습니까?

여러분은 옛날에 전국에 널려 있으면서 고립되고 외로울 때 식구들을 그리워하던 심정을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식구들을 어떻게 하든 더 보고 싶어하고, 도저히 시간이 없더라도 어떻게든 시간을 내어 같이 있고 싶어하고, 내가 갖고 있는 무엇이라도 보태주고 싶어하고, 자기와 인연을 맺고 싶어하고, 서로 흠모하는 간절한 마음이 여러분에게 있어야 합니다.

이런 마음이 결여되면 여러분은 하나님과 점점 멀어져 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또 하늘은 발전해 나가는데 그에 보조를 맞추지 못하는 자신이 된다는 것을 느껴야 됩니다.

앞으로 우리 통일교회 식구들이 이런 관점에서 일체화한 모양을 만들어 놓지 않으면 하늘의 전체적인 운세를 빼앗기게 됩니다. 그 운세가 외국 식구들에게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큰 나무가 있으면 그 나무에서 뻗어 나간 가지가 큰 가지일수록, 줄기에 가까운 가지일수록 줄기를 흠모하고 줄기와 하나되려고 해야 정상적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칙입니다. 그러니 가까운 데 있는 사람들이, 국내에 있는 식구들이 외국 식구들 이상 선생님이 하는 일에 대해 알고 싶어하고 궁금해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궁금증이 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4년노정 가운데 1년이 지나갔습니다. 앞으로 3년 안에 우리가 목표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해야 되겠는데, 문제는 초창기의 그 심정을 어떻게 되찾느냐 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서울에 있지만 지방 식구들이 어떻게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다 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처음 뜻을 대하던 그 마음, 하늘의 충신이 되고, 열녀가 되고, 효자 효녀가 되겠다고 결의하던 그 마음을 어떻게 되찾느냐 하는 것이 큰 문제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선생님의 마음은 지방 식구들에게 가 있습니다. 지구의 식구들보다도 지역의 식구들에게 가 있습니다. 축복받은 가정들을 생각하면 걱정이 됩니다. 선생님의 마음이 그래요. 이들이 서로 인연되었고, 서로 짝이 되었으면 뜻을 위해 일체가 되어 싸워야 합니다. 하늘의 더 큰 책임을 짊어진 사람들을 위해 충성을 다한 사람 중에 망한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런 전통을 이어 가지고, 개인으로부터 가정 종족을 연결시켜 가지고 하나의 통일 민족, 하나의 이스라엘 민족을 형성하고, 국가적인 기준을 넘어가야 할 중대한 책임을 짊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원수를 무찌르는 책임을 완수해야 할 중대한 입장에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하늘의 6천년 복귀섭리역사는 부모를 복귀하기 위한 섭리역사입니다. 부모를 복귀하여 자녀를 복귀하는 섭리역사입니다. 그러한 복귀섭리노정에 있어서는 부모와 자녀가 같은 책임을 짊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개인적인 십자가, 가정적인 십자가, 종족, 민족, 국가, 세계, 천주적인 7단계의 십자가노정을 걷고 있으니 자녀인 여러분도 그런 7단계의 십자가노정을 걸어야 합니다.

기간이 길고 짧은 차이는 있을망정, 앞에 가고 뒤를 따라가는 차이는 있을망정 탕감조건의 내용은 같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슬퍼할 때 자식이 슬퍼하지 않으면 불효가 되는 것이요, 부모가 고통을 받고 있을 때 자식이 기뻐하면 불효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금까지 복귀노정을 걷고 계시니 선생님도 그렇고, 여러분도 죽든지 살든지 이스라엘 민족을 대신할 수 있는 민족 기준을 세우고, 유대교와 전세계 기독교를 대신할 수 있는 교단적인 기준을 세워 놓고, 승리의 부모의 날을 설정해서 세계적인 승리의 부모의 날이 되게 해야 합니다. 그런 부모의 날로 세우고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은 안 가고 있지만 하나님은 가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 하나님이 요구하는 사람

하나님이 천태만상의 노정을 걸으시며 지금까지 고대하고 그리신 부모, 개인적인 부모, 가정적인 부모, 종족적인 부모, 민족, 국가, 세계적인 부모의 기반이 닦여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일 밑창에서부터 닦아 올라와야겠다는 것입니다. 하늘도 고생하고 오시는 부모도 밑창에서부터 고생해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인, 가정, 종족, 민족적인 기준 위에 올라섰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국가적인 기준을 세우는 때에 들어섰기 때문에 악의 세계에 대해 모든 것을 비판하고, 명령하고, 하나님이 계획하는 대로 밀고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사탄세계를 밀어 부치면 사탄세계가 밀릴 수 있는 때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개인적인 부모복귀의 노정을 개척하기 위해 하나님이 수고하셨는데 하나님의 수고가 끝이 났느냐?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정적인 부모복귀의 기준을 세우기 위해 수고하던 하늘의 수고가 끝이 났느냐?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같은 심정을 가지고 국가적인 부모복귀의 기준을 세우기 위해 수고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내적인 고통은 개인적인 복귀노정을 개척하실 때나 국가적인 복귀노정을 개척하실 때나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개인적인 승리의 발판을 닦기 위해 수고하셨지만 지금은 민족적인 승리의 발판을 닦기 위해 수고하고 계십니다. 민족적인 승리의 발판이 닦여지면 세계적인 승리를 위해 싸워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혜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하나만큼 수고해 가지고 열의 효과를 낼 수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 시대에 하늘이 요구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하면, 바로 그와 같은 사람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때가 가까워 오면 가까워 올수록 점점 출발 당시의 마음으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하늘 부모가 하늘의 아들딸들이 가야 할 길입니다. 이 원칙에 부합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류를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나선 몸들입니다. 본래 자녀는 부모를 업고 가든가, 모시고 가든가 해야 합니다. 효자라면 그래야 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원리를 다 가르쳐 주었습니다. 하늘땅 앞에 사탄은 어떤 존재이며, 여러분의 갈 길은 어디이며, 속죄의 길은 어떻게 가야 할 것인가 하는 것도 다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여러분은 부모를 모시고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합니다. 개인, 가정, 민족, 국가, 세계적인 복귀의 길을 가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모심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실제로 부모를 모셔야 합니다. 어떤 슬픔과 고통이 뒤따르더라도 하나님이 기억하실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야 합니다. 작은 조건이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야 합니다.

사탄의 참소를 받지 않고 사탄의 침범을 받지 않을 수 있는 기쁨의 조건을 만들어 놓아야 합니다. 그것이 커져서 가정적인 기쁨의 터전이 되고, 종족, 민족, 국가, 세계적인 기쁨의 터전이 되어야 비로소 지상에 천국의 기반이 조성되는 것입니다. 그런 기반이 조성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시는 부모님이 자녀를 원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대신 책임을 맡기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지금까지 참부모를 원한 것은 무엇 때문이냐? 대신 책임을 맡기기 위해서입니다.

무슨 책임을 맡기느냐? 타락을 인간이 했기 때문에 인간적인 모든 고통을 대신 책임져야 합니다. 민족이면 민족적인 모든 고난과 역경을 실체로 책임져 가지고 하늘이 맡긴 바의 민족적인 기준을 넘어야 합니다. 이것이 통일교회 교인들이 가야 할 길입니다.

여러분은 이번 기간에 마음에 불을 다시 붙여 가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민족을 책임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분발해야 되겠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인류의 조상이 실수함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심정을 저끄러 놓고, 원한을 남겼으니, 수천년 동안 하나님을 슬프게 했으니 우리가 이것을 탕감해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하늘의 주권을 복귀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념을 통일해야 하겠습니다. 그 다음에 물질복귀를 해야 하겠습니다. 이런 전체적인 것을 책임져 나가겠다는 신념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여러분 개체 개체를 부르고 있습니다. 가정적인 복귀의 기준에서 여러분을 부르고 있느냐? 혹은 종족, 민족, 국가 기준에서 여러분을 부르고 있느냐? 아닙니다. 하나님은 세계적인 기준에서 여러분을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를 지고 그곳까지 가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만일 3년노정 끝에 최후의 십자가의 고개를 두려워했다면 세계적인 무대를 향하여 출발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 이 민족도 이 기준을 향해 나가는 데 있어서 낙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강하고 담대하라는 것입니다. 나라가 반대하더라도 싸워 나가서 승리의 기반을 닦으면, 하늘이 닦은 영적 기준 앞에 일치하겠다는 신념을 가지고, 죽든 살든 굳건한 마음을 가지고 싸워 나가면 천주가 복귀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한 각지와 전세계에 널려 있는 우리 식구들은 일심동체가 되어 나가야 하겠습니다. 외적으로 서기 전에 내적으로 서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무너지는 것입니다. 복잡한 사건이 생기면 생길수록 무너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세계는 복잡한 문제에 엉키고 있습니다. 그럴수록 이 세계는 자꾸 내려가고 하늘은 자꾸 올라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개인으로부터 가정, 종족, 민족, 국가, 세계적인 기준을 향해 올라가는 지금 여러분은 참부모와 일치될 수 있는 내적인 기준을 세워야 합니다. 그리고 사탄세계의 모든 악을 제거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 되겠습니다. 사탄세계를 심판해 나갈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하겠습니다.

이런 신념을 갖고 민족적인 부모의 날을 세계적인 부모의 날로 세워야 하겠습니다.

부모의 날을 기억하고 이 자리를 찾아온 여러분은 하늘 앞에 기억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또 이 민족을 대표한 여러분이 되고, 길이 길이 남아지는 여러분이 되길 바랍니다.

<기 도>

아버님이 고대하시던 영광의 터전은 슬픔도 없고, 탄식도 없고, 원한도 없는 아버님의 사랑을 중심삼은 참부모의 인연이 스며 있는 곳이었음을 저희들은 알았습니다. 역사적인 소원이요, 창조이념의 중심인 참부모를 우리 인류의 시조인 아담 해와가 실수함으로 말미암아 잃어버리게 된 그날부터 우리는 고아가 되었고, 원수의 품에 안겨 신음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아버님은 역사노정을 거쳐오시면서 개인, 가정, 종족, 민족, 국가, 세계적인 부모의 인연을 세우기 위해 수고하셨고, 6천년을 다리 놓아 천주사적인 종말기를 마련해 놓으시고, 재차 평면적으로 개인적인 승리의 실체 부모의 가치, 가정적인 승리의 실체 부모의 가치, 종족, 민족, 국가, 세계적인 승리의 실체 부모의 가치까지 찾아 세우기 위해 복귀의 한 서린 노정을 넘어오고 있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저희들이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 아버님이 수고하셨고, 오실 참부모가 개척자의 입장에서 한 많은 생애를 보낸 것을 알았사옵니다. 개인, 가정, 종족, 민족을 위하여 투쟁할 수 있는 현실 무대를 마련해 주신 것을 생각할 때 감사하옵니다.

어느 한때 저희들이 하늘 부모를 모신 개인적인 면모와 가정적인 면모를 갖추어 놓았으며, 하늘의 한을 지니고 살았습니까? 그렇게 살지 못하였습니다. 아버지께서 고아가 된 저희들, 잃어버린 아들딸을 책임지고 찾아 나오신 것을 알았사옵니다. 아버님께서 개인, 가정, 종족, 민족, 국가적인 기반을 미리 마련해 주신 것은 부모를 위한 기반이었고, 아들딸을 살리시기 위한 기반이었음을 알았사옵니다. 이 기반 앞에 백번 천번 죽어도 감사해야 할 저희들인 것을 깨닫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님, 남은 역사를 책임져 주신 것을 감사하옵니다. 아버님, 지금까지 저희의 앞길을 가시면서 개척자의 수고를 하셔서 이 땅에 참부모를 저희들 앞에 세워 주신 것을 황공하게 생각하옵나이다.

아버님께서 고통을 넘겨주신 것은 저희를 인간 세상을 대표한 기준에 연결시켜 주시기 위한 것이요, 참부모의 고통을 저희 앞에 넘겨주신 것은 저희를 덮고 있는 사탄을 굴복시키기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저희들이 알았사오니, 그 책임을 다하겠다는 선서를 하는 이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언제 저희가 무릎을 꿇고 개인적인 부모를 모셨으며, 가정적인 부모를 모셨으며, 종족적인 부모를 모셨으며, 민족적인 부모를 모셨습니까? 또한 부모를 모실 수 있는 참다운 자신이 되었습니까? 그러한 자신이 되지 못한 과거를 후회하면서 오늘이라도 그 한을 복귀하는 길, 눈물의 길, 원수세계를 향해 가는 길을 저희가 책임지게 해 주시고, 민족적인 십자가의 길을 개방하고 국가적인 십자가의 길을 개척하여 부모가 오실 길을 마련하겠다고 결의할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전세계에 널려서 이날을 축하하는 수많은 아들딸이 있사옵니다. 그들은 외로운 무리요, 슬픈 무리오니, 아버지, 복 빌어 주시옵시고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한 많은 역사의 흐름이 종결되지 아니하였기에 다시 아버님의 뜻을 세우기 위한 세계적인 종말기가 있게 된 것을 알았사옵니다. 오늘날 아버님의 마음을 중심삼고 저희들이 피땀 흘리고, 세계를 탕감하기 위한 엄숙한 실체 제물의 사명을 완결 짓는 통일의 무리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나이다.

이제 저희들은 맨 밑창의 비참한 자리에서부터 소식 듣고 찾아왔사오니, 이 대구 도성을 중심삼고 싸우는 이 싸움으로 잃어버린 이스라엘 도성을 찾을 수 있는 조건을 이 민족 앞에 세울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옛날에 배반하고 반대했던 모든 제사장과 교법사들을 실체를 중심삼고 복귀하는 조건을, 오늘 이 시대에 이 도성을 중심삼고 세울 수 있게 허락하여 주옵소서.

이곳에 하늘의 역사가 없이도 뜻을 배반하는 입장에 선 자들을 영적으로 굴복하여 심판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게 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뭇생명을 대표해서 이 도성에 보내졌사오니 예수님이 세워 놓으신 영적인 승리의 기대를 상속 받아 민족적인 승리의 기준, 세계적인 승리의 터전을 마련하여 이스라엘의 권한을 세울 수 있고, 이 나라를 만국 앞에 제사장 국가로 세울 수 있게 해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제 남아진 길은 기쁨으로 가오니 아버님이여 염려 마시옵소서. 이제 십자가를 저희가 책임지고, 세계를 사탄에게서 빼앗기 위해 충성하고, 아버님께서 기쁨으로 저희의 뒤를 따라올 수 있는 길을 마련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옵나이다.

이 시간 모든 영계와 지상에서 참을 바라는 선한 백성들이 뜻을 위한 하늘의 백성이 되어 협조할 것을 선포하오니, 하늘과 땅이 공인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승리의 영광과 찬송과 행복과 사랑을 중심삼은 평화의 세계가 저희들을 통하여, 참부모의 이름과 더불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있사오니, 아버지, 그날이 어서 빨리 와서 온 천주적인 승리의 날을 복귀하고, 천주적인 아버님의 날을 복귀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이날은 만민이 기념해야 할 날입니다. 하오니 만민이 기념하는 날로 세우겠다고 다짐하는 하늘의 용사들로서 이날을 기념할 수 있게 축복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나이다. 참부모의 이름으로 기도하였사옵나이다. 아멘.

여러분들이 3년노정을 최선을 다하여 걸은 결과로 우리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여 어느 단계에 올라섰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은 하나님이 가시는 길

이제 우리는 3년노정을 마치고, 4년노정을 걷는 도중에 있습니다. 앞으로 여러분이 4년노정을 마치게 되면, 그때에는 부모님상을 주어야 할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복귀섭리 도상에 현저한 공적을 쌓은 사람에게 그러한 상을 주어야 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4년노정을 걷는 동안 뜻 대해, 하나님 앞에 충성을 다함으로써 하나님이 기억하는 사람이 되고 상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 사람이 많이 나오기를 바랍니다.

표창을 받을 만한 사람이 많아서 이번에 수상자를 결정하는 데 상당히 고충이 많았습니다. 이번에 상을 받지 못한 사람들도 앞으로 있는 힘을 다 해서 더욱 노력해 주기 바랍니다. 상장이 문제가 아닙니다. 자기가 있는 힘을 다해서 충성했다는 사실은 역사가 지나가도 남아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또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충성한 것은 저나라에 가서 재산이 되느니만큼, 상을 받은 사람이나 안 받은 사람이나 더욱 힘써 나가 주기를 부탁합니다.

더욱이 이번에 상을 받은 사람들은 앞으로도 계속 모범적으로 활동하여, 우리 통일교회가 나가는 도상에 전통적인 기준을 상실하지 않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되겠습니다.

이 시간에는 ‘우리의 갈 길과 책임’이라는 내용으로 잠깐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세상에는 도(道)를 믿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믿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늘날 이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생애의 노정을 걸어가고 있지만 자기들이 가야 할 참된 목적과 방향이 어디인가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러한 사회 환경과 생활 환경 속에서 도의 길을 찾아 나섰다고 하는 사람들도 역시 자기들은 제대로 간다고 하지만, 천륜이 바라고 인류 역사가 바라는 최후의 목적점에 방향을 맞추어서 가고 있느냐 할 때, 그들 역시 참다운 방향과 목적을 알지 못한 채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역사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가기를 원했던 그 목적점과 그 방향에 맞추어서 갈 수 있는 시대에 처해 있다는 것을 무엇보다도 행복하다고 느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이미 가야 할 방향과 목적을 알고 있습니다. 이 방향은 여러분 각자가 가는 방향인 동시에 우리가 가는 방향이요, 이 민족과 세계 인류가 가는 방향이요, 온 땅과 하늘이 가는 방향이요, 천륜을 세우신 하나님이 가시는 방향이라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가는 길에는 언제나 투쟁이 있다

이 방향에서 어긋나거나 이 방향을 잃어버리게 될 때에는 자기 개인을 잃어버리는 것은 물론이요, 또 자기 자신이 파탄되는 것은 물론이요, 천주사적인 풍파가 일어나고, 방금 말한 것과 같이 전체에게 비참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내가 가는 길, 즉 우리가 가는 길은 역사를 대신한 길이요, 우리가 바라보고 나가는 방향은 역사의 흐름과 일치된 방향이며 동시에 그것을 수습해 나가는 길인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목적을 향하여 우리의 전생애노정을 걸어 놓고 가고 있습니다.

지금 나로부터 출발하여 그 목적점까지 가는 길은 개인은 물론 가정, 종족, 민족, 국가, 세계,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과 전체가 동원되어 가야할 길이라는 것을 우리들은 압니다. 이런 방향을 향해 가는 도상에서 평탄함이 거의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이 타락하였기 때문입니다. 개인이 이 방향에 맞추어 목적점까지 나아가는 데에는 투쟁이 있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투쟁, 가정적인 투쟁, 국가적인 투쟁, 세계적인 투쟁, 천주적인 투쟁이 가로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역사의 방향을 올바로 세워 나가야 할 책임이 하나님께 있는 것도 아니요, 과거에 왔다 갔던 어느 성현이나 현철에게 있는 것도 아니요, 어떤 한 나라에 속한 공회의 지도자들에게 있는 것도 아닙니다. 또한 방황하고 있는 사회인들에게 있는 것도 아니요, 옳은 길을 간다고 애쓰고 있는 수많은 종교인들에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핍박받고 몰림받고 쫓기는, 어려운 자리에서 싸우고 있는 통일역군들의 어깨에 짊어지워 있다는 것을 우리들이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나 세계적으로 이 방향을 향해 가는 데는 반드시 투쟁이라는 두 글자를 생활의 목표로 하기 전에는 이 길을 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혹 개인적인 싸움에서 승리하였다고 해서 기쁨으로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사람이 있을는지 모르지만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가정, 종족, 민족, 국가, 세계까지, 더 나아가서는 천주의 해원을 완성하여 아버지 앞에 드릴 때까지, 승리할 때까지 그 싸움은 끝나지 않는 것입니다. 승리를 거듭하여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는 그때까지, 하나님이 온 천하를 향하여 승리자라고 선포할 때까지 그 투쟁은 종결되지 않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가야할 목적지는 세계적인 목적지로 남아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하게 될 때 여러분 자신은 언제나 세계적인 투쟁의 용사로서 나서겠다고 다짐해야 합니다. 그러한 여러분이 되지 않고는 이 길을 돌파해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가는 길에는 투쟁이 연속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투쟁의 한 목표를 향하여 나아갈 때 승리라는 영광된 결과를 자기만의 것으로 삼고 가다가는 여러분은 언제나 실패한다는 것입니다. 또 개인적으로 승리하였다고 해서 한 개인의 입장에서만 기뻐하다가는 앞으로 가정적으로 가야 할 투쟁의 노정에서 갈 길을 잃어버리기 쉽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가정으로부터 종족, 민족, 국가, 세계를 넘어 천주사적인 투쟁을 거쳐 나가야 하느니만큼 자기가 현실적으로 어떤 실적을 거두었다 하여 거기서 기뻐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상을 주는 목적을 분명히 알아야

오늘의 내가 개인적으로 승리한 기쁨이 있다면 그것은 가정적인 투쟁을 자극시키기 위한 계기가 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제2의 투쟁을 할 수 있는 자신을 확고히 세우지 않고는 아무리 기뻐했던 그 기쁨도 여러분과는 상관이 없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여러분들이 상을 받았다고 해서 여기서 기뻐할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3년노정에 있어서 내가 기억되었다.’ 하는 조건입니다. 또 앞으로의 갈 길을 위한 하나의 권고임을 알아야겠습니다. 이것을 남은 4년노정, 전민족적인 노정을 개척하는 데 싸움의 방패와 무기로 삼아 더 분발할 수 있는 힘을 내적으로 다지는 입장에 서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상을 받았다고 기뻐했던 그것이 과거와 미래에 기여하는 조건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상을 주는 목적은 어디 있느냐? 지난날이 기억될 수 있기 위해서 상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 모든 지난날에 대한 기억이 미래에 기여하게 하기 위하여 주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앞으로 이 상을 받은 사람들은 민족적인 사명을 완결 짓는 데 더욱 희생적인 노력을 경주하여 전체 앞에 본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선두에 서서 인류의 방향을 제시해 주고, 우리 민족의 갈 길을 열어 주고, 인류가 다시 출발할 수 있는 자극적이요, 승리적인 내용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상을 받은 것이 큰 의의가 있는 것이지, 그렇지 못하면 도리어 슬픔의 조건이 된다는 것을 기억해 주기 바랍니다.

그러면 왜 그러느냐?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권고함과 도움을 받아서 애급을 떠나오게 될 때,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크나큰 기쁨이요 소망의 출발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그런 기쁨의 한 날을 맞이하였을 때, 그것을 앞으로의 이스라엘 민족에게 큰 축복을 주기 위한 하나님의 다짐으로 알고 출발하였던들 그들이 광야노정에서 쓰러지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다짐해야 할 자기 자신들을 망각해 버리고, 그것이 자신들이 머물 소망의 목적점인 줄로 알았습니다. 또 지금까지 찾아온 방향의 목적점인 것으로 알았기 때문에 앞으로 다가오는 더 큰 싸움의 책임을 회피하는 입장에 섰던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즉 하나님께서 가나안 7족과 대결해 나가도록 이스라엘 민족을 내몰았지만 이스라엘 민족이 책임을 다하지 못함으로 인하여 40년 동안 광야에서 유리고객하다가 망하였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쁨이 오고 승리가 오게 될 때에 그 승리가 어떠한 승리인가, 즉 가정적인가, 국가적인가 혹은 세계적인 것인가 하는 그 승리의 한계를 똑똑히 분별하여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의 갈 길과 목적점이 어떠한 곳인가를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런고로 기쁨이나 어떤 깨달음이 있으면 자신을 독촉하여 그것들을 미래에 시련을 밟고 넘어갈 수 있는 힘의 원천으로 수습하여 놓지 않으면 실패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가야 할 방향을 찾아 목적점까지 가기 위해서, 우리 통일교회가 국가적인 승리를 거쳐 세계적인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 투쟁을 하고 있습니다. 왜 투쟁을 해야 하느냐? 이는 지금까지 인류역사를 유린해 왔고 지금 이 시대를 유린하고 있는 원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원수를 정복하기 위해서 투쟁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투쟁해야 하는 이유

그리고 방향을 맞추어 목적점까지 가기 위해서는 이 시대의 기준에서 세계사적인 원수와 투쟁하여 완전히 굴복시키고 세계사적인 기준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그것으로 끝이냐?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목적점까지 가는 과정에서 원수를 제거한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천국을 재창건해야 합니다. 그런 사명이 남아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다 간 후에도, 목적점까지 돌파하여 승리하고 난 후에도 우리에게 책임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 천지가 사탄에게 유린당해 왔고 사탄에 의해 조직되고 유지되어 왔기 때문에 그것을 전부 제거해 버리고, 새로운 천주의 이념에 규합될 수 있게 천지를 재창건하는 일입니다. 그런 사명이 남아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목적점에 이를 때까지의 투쟁기간은 원수로 말미암아 있게 된 기간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우리 선조들, 특히 도의 길을 간 사람들이 슬픔의 길을 간 것이요, 지금 하늘땅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슬픔의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슬픔의 길은 눈물의 길이요, 피땀의 길이요, 죽음의 길이니 희생을 당하더라도, 죽음을 당하더라도, 형극의 사선을 밟고 넘어서라도 가야할 비참한 노정인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목적하는 어느 한때를 정하여 제거해 버리고 과거에 선조들이 수고한 그 이상의 정성을 들여 천지를 재창건해야 하겠습니다. 그런 사명이 남아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섭리역사의 목적지점에 거의 다 왔으니 이제부터 하늘땅이 공인할 수 있도록 우리의 의무와 사명을 다 해야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아무리 수고가 많았고 공적이 많았다 하여도 그것들은 사탄과 대결하여 투쟁하던 시대에 있어서의 공적이요, 지나가는 도상에서와 심판권 내에서 이루어진 공적입니다. 타락한 입장, 즉 원치 아니한 권내에서의 공적이지 원하는 권내에서의 공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창건하려는 새로운 천주의 이념세계의 깃발을 높이 들어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원수를 무너뜨리던 그 이상의 방법이 필요한 것입니다. 또 사탄세계를 굴복시키던 이상 정성을 다하고 피땀을 흘려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민족을 위한 새로운 의무와 책임이 남아 있다는 것을 망각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시급히 하여야 할 것이 무엇이냐 하면, 어서 속히 이러한 목적을 향하여 나가려는 우리의 앞길을 막고 있는 원수를 타파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목적하고 인류가 목적하던 자리에 서야 합니다.

참다운 결의와 정성, 하나님 앞에 책임과 의무를 완수할 수 있는 그날을 그리워하는 마음, 어떠한 시련이 부딪쳐 오더라도 그 시련을 넘고 넘어가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있어야만 비로소 인생으로서 가야 할 길을 완전히 갈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길이 그런 고개를 올라오는 길이었다면 앞으로의 길은 그 고개를 넘어 평탄한 길을 가게 될 것입니다.

3배 이상의 수고를 해야 할 우리

그러면 평탄한 세계에 가면 어떤 일이 있을 것이냐? 우선 비로소 내가 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과 땅이 바라고 천주가 바라던 내가 된 후에 비로소 나를 중심삼은 가정이 시작되는 것이요, 본향이 시작되는 것이요, 우리의 국가가 시작되는 것이요, 거기에서 비로소 우리의 세계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과거에 수많은 인간들이 가야 했던 인생의 목적점인 동시에, 현재 수많은 인생들이 바라는 인생의 목적점인 것을 알고 또 그것이 우리의 의무와 책임이라는 것을 알고, 그것을 빨리 끝내야 하겠습니다.

내가 죽기 전에 통일을 해서 내 고향 땅에서 부모를 모시고 참다운 효자 효녀의 입장에 서야 합니다. 그러한 입장에서 내가 흘리는 땀은 슬픔의 땀이 아니요 영원무궁토록 기쁨을 촉구할 수 있는 땀입니다. 내가 한 모든 수고는 슬픔의 수고가 아니라 행복을 촉구할 수 있으며, 만우주가 환희로, 영광으로 맞이할 수 있는 수고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인생행로를 가는 데 있어서, 또 우리의 책임과 의무에 있어서 이러한 자신이 되고, 이러한 가정, 이러한 사회, 이러한 세계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비로소 수많은 인류가 바라던 책임과 의무를 감당했다는 자리에 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섭리하여 나오시는가? 오늘날 이 땅에 사는 수많은 사람들이 도의 길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도인들을 세워서 이 무지한 인간들을 도의 길로 인도하기 위하여 영인들을 동원해 나오고 계십니다. 또 도의 길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도를 믿고 간 영인들과, 지상에서 도를 추모하는 도인들이 하나되어 수고하고 있습니다. 도의 길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도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 수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도의 길을 간다고 하는 사람들도 정확하게 그 목적과 방향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방향을 알지 못하고 몰려만 가고 있는 도인들을 하나님은 어떻게 하시느냐? 참다운 하나의 도의 길을 마련해 놓고 그들을 어느 한때에 그 도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 섭리를 해 나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새로운 천지,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기 위하여 수많은 도를 수습하는 수고를 하시면서 새로운 도의 세계, 즉 인간들이 바라던 소망의 세계가 출발될 수 있도록 준비를 해 나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들은 ‘역사적인 열매’라고 자칭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역사적인 열매인 우리는 어떠한 일을 해야 되느냐? 믿지 않는 사람들을 열매 맺게 해야 되겠고, 믿는 사람들을 열매 맺게 해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이 소망하시는 천국을 준비하는 단계에서 준비가 완결되었다는 입장에 서서 결실적인 존재가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통일교회가 세계사적인 책임을 지고 나가는 입장에 있다 할진대, 통일교회와 통일교인들은 어떠한 입장에서 책임을 짊어지고 있느냐? 일대(一代)뿐만 아니라 삼대(三代)까지 연하여 책임을 짊어지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명심해야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도의 문을 두드리면 될 것이고, 도의 길을 가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때를 맞이하여 새로운 도의 길을 찾아 새로운 천주를 건설하는 책임을 하면 될 것이지만, 오늘날의 우리 통일교인들은 이것들을 전부 다 한꺼번에 해야 됩니다.

세상 사람들과도 인연을 맺어야 되고, 지금까지 도의 길을 간 종교인들과도 인연을 맺어야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추구하는 이념을 이루어야 합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이끌고 본연의 세계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우리는 3배 이상의 짐을 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세상 사람들이 슬픈 자리에서 인생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헤아려 볼 때에 그들이 알지 못하는 자리에서 그러한 수고와 고통과 비참의 길을 가거든, 나는 아는 자리에 있으니 내 갈 길이 어떠해야 할 것인가를 여러분이 생각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3배 이상의 수고를 하여 책임을 지고 가야 할 길이니, 어느 한때 쉴새가 없고, 어느 한순간이라도 희생하지 않고는 갈 수 없고, 무거운 짐을 지지 않고는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8)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온유하고 겸손하게 ‘내 멍에가 무겁지 않습니다.’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3배 이상의 책임을 완수하려면

사랑을 위주로 하여 주고 싶은 마음이 간곡한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요 참다운 부모의 마음인데, 자식들이 짊어진 짐을 바라보게 될 때 그 짐이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그가 비참하면 비참할수록, 거기에 비례하여 더 주고 싶은 마음이 동하는 것이요, 더 간절한 마음이 동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받아야 할 입장에 계시지만 주고 싶은 마음이 더 크기 때문에 불쌍한 사정을 느끼는 그 마음에서 더 큰 사랑의 힘이 폭발되어 나오기 때문에 하나님은 무한한 짐을 지고 가면서도 오늘날까지 이 고통을 무난히 돌파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앞으로 3배 이상의 책임을 해야 될 것인데, 어떻게 이 길을 가야 될 것인가? 이 길은 자기 사정을 보다가는 가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어떠한 입장에 서야 하느냐? 자기의 갈 길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과 비교하여 그 사람들보다 내가 더 비참하고 불쌍하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의 기준에서 나를 보지 말라는 것이다. 다른 어떤 도의 길을 가는 사람보다 3배 이상의 책임을 지고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은 다른 통일교인들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넘어가는 사람들은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시련자로 알아야 됩니다. 탕감복귀섭리를 위한 준비 기반을 닦아야 하기 때문에 이러한 기반의 노정을 가야 할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보게 될 때 저와 나를 비교해서 저는 비참한데 나는 그렇지 않다, 혹은 나는 비참한데 저는 그렇지 않다고 하면서 다른 어떤 사람을 자기와 비교하는 입장에 서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이런 어려운 시련 과정을 넘어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 하나님은 자녀의 입장에 있는 불쌍한 인간들이 크나큰 십자가를 짊어지고 크나큰 고통길에 서 있는 것을 바라볼 때 그는 비록 타락의 후손일망정 하나님은 원칙적이시요, 절대적인 책임을 지고 계시기에, 주고 싶은 사랑의 마음을 갖고 계시기에 그가 고통을 받는다고 해서 사랑을 마이너스해서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고통이 심하고 그가 비참한 자리에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거기에 비례해서 더욱 애절하게 더 주고 싶어 하신다는 것입니다. 타락한 세상의 부모의 마음도 그렇거든 본연의 하나님의 마음은 그 이상입니다.

그가 비참하면 비참할수록 주고 싶은 마음은 더 간절한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의 마음을 갖고 주고 싶은 마음에 허덕여 나오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6천년 동안 고난의 노정을 걸어오시고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수고해 나오셨지만, 당신이 잘하여 책임을 다했다는 인식을 갖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래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받으려 하고 자기 중심 삼고 인연을 맺으려고 하기 때문에 지치고 막막하게 생각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야 할 인간이, 축복을 받고 행복을 누려야 할 인간이 어찌하여 이렇게 되었던고? 소망의 길, 승리의 인생길을 가야 할 인간이 어찌하여 패배의 길, 멸망의 길을 가고 있는고? 인간들이 그러한 길을 가고 있는 것이 자신의 책임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을 대신하여 애절한 마음을 갖고 마음속에서 긍휼의 심정이 솟구치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는, 그가 가는 길이 고생의 길일지라도 그는 거기에서 승리할 수 있으며, 감사하는 생활,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을 갖고 가기 전에는 여러분은 지금 3배 이상의 책임을 짊어진 이러한 도상에 있어서 지치기 쉽고, 뒤를 돌아보기 쉽다는 것을 이 시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가야 할 이 길을 틀림없이 가기 위해서는 우리의 오관이 요구하는 것과 감정까지도 주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일시적인 곡절의 흐름이 폭풍우같이 몰아치더라도 그것을 뚫고 넘어갈 수 있는 신념이 서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어떤 위험과 공포를 막아낼 수 있는 힘이 없을 때에도 그런 신념은 서 있어야 합니다. 틀림없이 서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몇백만 명의 군사를 거느린 장군이 큰 싸움을 준비 할 때 그 마음에 이미 적을 이길 수 있다는 신념에 차 있지 않으면 그 싸움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6천년 역사를 유린해 온 대원수 사탄을 상대로 싸워야 하는 우리의 책임을 놓고 생각해 볼 때, 우리는 더욱 그래야 합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민족, 국가적인 시대를 향하여 가야 합니다. 이렇게 가는 목적이 무엇이냐? 우리의 책임을 완수하기 위하여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참된 모심

우리는 지금까지 타락한 세상에서 살아왔습니다. 나는 타락한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나입니다. 우리 가정도 타락한 세상에 있는 가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본향 땅에서 사는 것, 본향 땅에서 부모를 모시는 것, 본향 땅에서 형제와 더불어 사는 것을 그리워해야 합니다. 본향 땅에서 아버지를 모시고 살아야 하는데, 모시는 데는 어떻게 모실 것이냐? 홀아비로 모실 것이냐? 지금까지 살아오던 그런 비참한 환경에서 모실 것이냐? 지금까지 나를 찾아오기 위해 수고하신 아버님인데 또다시 내가 시중을 받는 입장에서 모실 것이냐, 내가 시중을 해 드리는 입장에서 모실 것이냐? 어느 자리에서 모실 것이냐? 내가 시중을 받는 자리에서 모셔서는 안 됩니다.

내적인 면에서는 모든 시중을 하나님께 들어 드리고 이념적인 면에 있어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시중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내적인 모든 것을 수습해서 하나님 앞에 잘 돌려 드리면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붙들려 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정적으로 올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내 자신을 수습해야 됩니다. 개인을 그 이념에 맞게끔 수습하고, 가정을 그 이념에 맞게끔 수습하고, 종족, 민족, 국가를 그 이념에 맞게끔 수습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림없습니다.

오늘날 통일교회는 우리들 서로간에 식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서로 식구라 부르고 있지만 현재의 처한 자리는 식구라는 명사를 지니고 살 수 있는 발판이 못 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본향 땅을 찾아가야 하고 본향의 나라와 본향의 세계를 찾아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무엇을 할 것이냐? 그곳에서 효자 효녀가 되고 충신 열녀가 돼야 합니다. 아무리 지금 효도를 하고 충성을 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때 가서 효자 효녀와 충신 열녀의 명분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아 잘 있거라. 나는 간다. 이 세월아 어서 지나가라. 지긋 지긋한 고생길아 어서 지나가라.’고 하면서 가야 하겠습니다. 내 개인에게 부딪쳐 오는 고생길은 내 개인에게서 한번 지나가면 그만입니다. 또 ‘원수의 깃발을 들고 나오는 사탄아! 내 가정에 부딪쳐 오는 시련이 지나가면 너는 마지막이다. 우리 종족 앞에 시련을 주던 사탄아! 네가 주는 시련이 우리 종족을 지나가게 될 때 너는 마지막이다.’라고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민족과 국가에 부딪쳐 오는 사탄에 의한 모든 고통도 우리를 지나가면 마지막이요, 아무리 치열한 고통이 있고 아무리 비참한 사실이 있다 하더라도 마지막이라는 신념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내가 소망하고, 내 가정이 소망하고, 내 종족, 국가, 세계가 소망하는 그 소망의 마지막 점을 찍어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이 된 후에는 어떻게 할 것이냐? 기뻐하며 즐길 것입니다. 새로운 천지에 들어가서 지상에 천국을 창건하여 수억만 인류와 함께 살 것입니다.

최후의 싸움을 위해 준비하라

그러면 역사적인 한을 해원하고 개인적인 승리, 가정적인 승리 혹은 종족, 민족, 국가, 세계적인 승리를 해 놓고 무엇을 해야 할 것이냐? 지상천국을 창건해야 하겠습니다. 오늘날의 문명사회 이상의 아름다운 지상천국을 건설하여 우리 후손들이 찬양할 수 있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이 가야 할 길이요, 마지막으로 남아진 책임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그리워해야 합니다. 청춘의 사랑 같은 것을 그리워할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세계적인 복귀의 기준을 세워 지금까지 눈물을 흘리던 이상 감사의 눈물을 흘리며 사는 지상천국을 창건하는 역군이 될 것을 다짐해야 합니다. 그때에 지금의 굶주림보다도 더한 굶주림이 있더라도, 소망의 나라를 건설하는 창건의 역군으로서 싸우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싸울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도상에서 개인적인 슬픔에 부딪히게 될 때에도 천국을 그리워하면서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때에 일할 수 있는 참다운 내 자체를 세우기 위하여 준비한다는 신념을 갖고 나아간다면 여러분들은 틀림없이 그 길을 갈 수 있다고 단정하여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인생이 바라는 최고의 목적점에 도달하기 위해 의무와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다짐하고 지금부터 준비하여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민족복귀의 조건을 세우기 위해 4년노정을 걸어가게 됩니다. 만일에 이 4년노정이 하나님의 뜻대로 된다면 우리 민족 삼천만 민중을 거느려서 복귀 건설에 참여할 수 있을 때가 올 것이라고 생각할 때, 여러분들이 지금까지 고생하고 시련받던 그 이상의 고통이 오더라도 감사해야 합니다. 또 그 싸움에 하나님을 대신하여 공적으로 나서는 것을 영광으로 삼아야 합니다. 하루하루 탕감의 노정을 걸어야 하겠습니다.

3년노정을 지나면서 여러분들은 불쌍한 이 민족을 대신하여 무엇을 해야 할 것이냐? 또다시 넘어지면서라도 달려가야 합니다. 선의 세계를 건설하는 역군으로서 준비하고 연단하는 시련 도상에서 사탄세계로부터 참소받지 않는 전통을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연단받는 과정에서 세운 전통을 새로운 천국이념의 세계에서도 영원히 남아질 수 있는 전통으로 남겨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인생이 가야 할 길을 다 갔다고 할 수 없고, 인생으로서 해야 할 책임을 다했다고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늘 앞에 충성하기를 바라고, 하늘이 참다운 효자 효녀가 되기를 바라면 바랄수록 고통이 뒤따르고 시련이 뒤따르더라도 그에 대비하여야 합니다.

미래에 만인류가 내 가치를 찬양하고 만우주가 감사할 수 있는 입장에서기 위해서는, 행복의 조건을 내가 만들어 주기 위해서는 여러분은 단단히 준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세우고자 하신 세계적인 터전을 인간이 유린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크나큰 슬픔을 느끼셨다는 것을 오늘날 우리들은 알고 있어야 합니다.

복귀섭리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고충

하나님께서 노아나 아브라함과 같은 역사적인 인물을 세울 때의 그 간절한 심정이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한 사람을 세울 때는 민족만을 대표해서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민족뿐만 아니라 세계의 복귀를 책임지는 사람으로 세우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역사적이요, 시대적이요, 미래적이요, 더 나아가서는 세계사적인 입장에서 택하여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에 택함받은 그 사람이 실수하게 되면 세계적인 복귀의 터전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이전 사람이 실수한 것을 탕감복귀하기 위해 후대의 사람을 택하여 그것을 그 사람 앞에 넘겨주셔야 합니다. 이런 한의 조건을 품고 사람을 택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연고로 하나님은 한 사람을 택할 적마다 무한한 내적 고통과 외적 고초를 겪으신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성경을 보게 되면 맹세를 하지 말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러면 왜 맹세를 하지 말라고 했겠습니까? 또 하나님은 어찌하여 인간이 책임할 수 있는 확실한 한계선을 가르쳐 주고 섭리하지 않으셨겠습니까? 가르쳐 주지 못하시는 하나님의 안타까운 심정이 있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나는 이러이러한 책임을 지겠습니다. 어느 한때에 이 책임을 완수하겠습니다.’라고 맹세를 하고 약속을 했는데 만일 그 사람이 실패한다면 그 사람의 실패는 하나님의 실패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또한 그 사람의 후손들은 물론 오늘날의 인류의 실패로 연결되고, 역사의 목적까지 실패로 연결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날 인간들을 세워서 섭리를 하시는 데 있어서 맹세를 받아야 할 입장이지만 맹세를 받지 못하시는 것입니다. 또 모든 것을 가르쳐 주고 권고해야 할 입장이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에게 얼마나 고충이 크시겠습니까? 여러분들은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한 입장에서도 하나님은 뜻을 위하여 충성하는 인간에게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그를 위하고 싶고,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그를 자랑하고 싶고,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천상천하에 있는 모든 것을 주고 싶은 마음을 갖고 계시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십니다. 왜 그러느냐? 충성하는 사람을 택해서 세우게 될 때 그가 뜻한 어떠한 기준을 완전히 세우면 그 기준에 의해서 주어야 하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는 세계적인 은사이기 때문에 그가 아무리 충성하더라도 그 기준을 다 이루기 전에는 주고 싶은 마음이 있어도 주지 못하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애달픈 심정을 갖고 나오시는 하나님을 우리들은 모셔야 되고, 그런 애달픈 심정으로 우리들을 대하는 하나님이심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들은 그 하나님을 어떠한 자리에서 만날 것인가? 이것이 문제입니다. 어떠한 자리에서 만날 것인가? 대다수의 사람들은 영광의 세계에서, 기쁨에 충만하여, 하늘땅을 부여안고 천지를 호령하는 복된 자리에서 만나고 싶어할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모든 인간들의 일반적인 염원이요 소망인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자리에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

예를 들어 어느 아버지가 크나큰 집을 짓고 있다고 합시다. 그 아버지는 돈이 많은 것도 아니요, 거기에 필요한 모든 재료가 풍족한 것도 아니지만 천신만고 끝에 모든 사람이 부러워할 수 있는 집을 지어 놓았습니다. 이 아버지는 기쁜 날을 맞이하여 자기의 과거를 돌아보며 과거에 했던 고생을 생각할 것입니다. 그 고생이 크면 클수록 그날의 기쁨은 거기에 비례하여 클 것입니다. 그런데 자식된 입장에 있는 아들들은 아버지가 고생할 때도 와주지 못하고 아버지의 사정을 알지 못하고 아버지를 멀리 했었습니다. 그런 아들들이 아버지께서 기쁜 날을 맞으셨으니 그 기쁜 자리에 가서 같이 기쁨을 누리겠다고 하여 찾아왔다고 합시다. 그럴 때 아버지께서 그들을 어떻게 대했겠습니까?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이 기쁜 날 나와 같이 기쁨을 누리자.’라고 하겠습니까? 오히려 그 아들들의 얼굴을 보면 과거의 슬펐던 일이 떠오를 것입니다. 그 아들들이 아버지를 협조하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 해도 기쁨의 날을 괴롭게 하고 슬프게 만들 것이라는 것을 우리들은 알 수 있습니다.

이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복귀 도상에 있어서 전체 복귀의 목적을 완성하기 위하여, 섭리의 뜻을 두고 나오시면서 무한히 시달렸고 무한히 고충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자녀의 입장에 있는 수많은 인간들은 하나님을 협조하지 못했습니다. 한 고개 한 고개 어려운 십자가의 고개를 넘어 나오신 하나님은 인간들이 협조해 주기를 바라셨습니다. 동반자를 필요로 하셨던 것입니다.

동반자가 없으면 하나님도 그 고개를 넘지 못하시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십자가의 고개도 인간들이 동반해 드리지 않으면 넘어가실 수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가정, 민족, 국가, 세계적인 십자가의 고개를 넘을 때도 동반자가 없으면 넘지 못하시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십자가의 책임을 짊어지고 가시는 하나님 앞에 충효의 도리를 세우겠다고 전심전력을 다하는 제물 된 실체가 없으면 하나님도 이 고개를 넘지 못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복귀의 노정이 있는 연고로 하나님은 하나님과 동반할 수 있는 아들딸들을 지금까지 소원해 나오고 계시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어차피 복귀의 목적은 종결될 것이요, 하나님의 섭리의 뜻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느 한 날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수 있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날을 맞이한 하나님의 모습은 어떤 모습이겠습니까? 수많은 풍상을 겪어 오신 눈물겨운 모습이요, 천번 만번 억천만번 십자가의 고개를 넘어오시면서 거슬리고 상처받은 처참하고 비참한 모습일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그날을 맞이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만일에 여러분이 그러한 자리에 참석하게 된다면, 비록 하나님의 일을 직접 협조하지는 못하더라도 역사적인 풍상을 겪어 오시면서 오직 이 한 날을 마련하기 위하여, 온 인류의 해방을 위하고 행복된 삶을 위하여 수고해 나오신 하나님의 애달픈 심정을 느낄 줄 알아야 합니다.

기쁨의 날을 맞이하신 하나님 앞에 통회하고 통곡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어찌하여 아버지를 알지 못하였고, 어찌하여 아버지가 걱정하시는 그 입장을 알지 못했던가?’ 하며 회개하고 분통해 해야 합니다. 이렇게 지난날의 자기 생활을 반성하는 마음을 가지면 하나님이 동정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한 입장에서 그냥 그대로 동참하고자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 7:21)는 말씀이 성경에 있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가고 있습니다. 기쁨의 하나님을 만나고 싶은 것이 모든 사람의 소원이겠지만, 하나님이 기쁨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실 때까지는 슬픔과 온갖 풍상을 겪으며 걸어 나오신다는 것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여러분들은 십자가노정을 가면서 어떤 하나님을 모셨습니까? 슬플 때 하나님과 함께 슬퍼하면서 하나님의 외로움을 위로해 드리고, 처참한 모습을 붙들고 통곡하며, 당하신 핍박을 위로해 드리며, 걸어 나오신 십자가의 길을 대신 책임지고 가겠다고 몸부림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아들딸이 있다면 그런 기쁜 날이 오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 아들딸을 불러서 모든 만물 앞에, 만우주 앞에 내세워 그 기쁜 날을 당신의 날보다도 아들의 날로 세우고 싶어하신다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란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런 아들딸을 찾아 나오셨고 그런 아들딸로 이루어진 형제, 가정, 사회, 국가, 세계, 천주를 바라고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될 때에 복귀 도상에 선 우리들의 책임이 얼마나 큰가를 여러분들은 알아야 됩니다. 이런 하나님을 모셔야 할 자신이 되기를 바란다면 이 세계 인류가 하나님을 모시길 원해야 하고, 세계 인류를 형제같이 대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모시는 데에 본이 되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위로해 드리게 할 수 있는 조건이라도 세워야 하며, 하나님의 슬픔을 막아 주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 이상의 상과 소망과 칭찬과 행복이 없다

내가 슬퍼할 때 하나님이 나를 찾아와서 만나는 그 자리는 무한히 행복된 자리입니다. 하나님이 고생하는 자리로 찾아가서 하나님을 만나 뵙는 그 자리는 무한히 행복된 자리라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하나님이 그 자리에 찾아오셨고, 천군천사가 머리를 숙이며 그 서러움에 동참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날을 맞이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내적 심정의 고통을 이기고 난 후 자기를 그 자리로 내세웠다는 것을 알았고, 그 자리로 보내지 않으면 안 될 슬픔의 심정이 컸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아버지여……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시옵소서.” (마 26:39)라고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이렇듯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내적 심정과 통하였고, 그 심정의 기준을 이 땅에 세웠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만난 것은 기쁜 자리에서 만나는 것만이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슬픈 자리에서 만나는 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슬픈 자리에서 하나님을 역사적으로 위로해 드리고, 현실적으로 보호해 드리고, 하나님을 대신해서 십자가의 환경을 제거시킬 수 있는 입장에 서야 합니다. 이러한 자리가 자녀를 찾아 나오시는 하나님이 바라시는 자리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이루신 후에 아들딸을 불러서 기쁜 날을 맞이하신다는 것은 누구나 다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민이 원하지 않지만 하나님은 슬픈 자리에서 만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들은 복귀의 길을 찾아 나아가는 데 있어서 하나님을 모시기 위한 내 자신이라는 것을 항상 명심해야 합니다. 세상이야 어떻든 간에 내 환경이야 어떻든 간에, 내 몸이야 어떻든 간에, 내 사정이야 어떻든 간에 하나님을 모셔야겠다, 하나님을 모시는 것이 내 자신의 운명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배반했던 우리 선조의 한을 내 한 몸이 풀어 보겠다고 지독한 마음을 품고 몸부림치며 나아가는 모습이 이 땅에 없다는 겁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사탄의 포로가 되어 가는 인간을 붙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원수의 화살을 하나님이 막아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러한 사실을 체휼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교회에서 어떤 행사 때에 무슨 표창을 받았다고 기뻐하면 안 됩니다. 칭찬을 받았다고 기뻐해서도 안 됩니다. 천지에 있는 수많은 인류를 대하는 하나님의 마음이 모든 사람에게 다 축복해 주고 싶으실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또 어떻게 해야만 그들이 복을 받을 수 있는 길을 개척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칭찬받을 수 있는 그 무엇이 있더라도 나는 칭찬받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아직까지 가야 할 복귀의 길이 남아 있으니 나는 가야 되겠사옵니다. 뜻이 성사되는 그때에 가서 아버님께서 기뻐하시는 웃음 띤 얼굴을 한번 뵙는 것이 내 소원입니다.’라고 해야 합니다.

이런 하나님을 보는 것 이상의 상(賞)이 없고, 그 이상의 소망이 없고, 그 이상의 칭찬이 없고, 그 이상의 행복이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나아가는 자라야 참다운 효자의 도리를 지켜 나가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행하고 걸어가고 싸우는 모든 것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슬픈 입장을 위로해 드리고 인간 앞에 있는 모든 십자가의 길을 제거하기 위하여 가는 길에 슬픔이 없겠습니까? 이러한 길이 세계사적인 복귀의 노정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 만나기를 그리워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소원하시고 목적하시는 것이 내 소원과 내 목적이요, 하나님이 가시고자 하는 그 길이 내가 가야 할 길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대하시는 관점

6천년 전에 우리의 조상 아담 해와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 인간이 갈라진 슬픈 심정을 여러분이 느껴야 됩니다. 한 많은 역사를 회고해 볼 때, 인간은 슬픔 가운데 신음해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탄권 내에서 죄악을 행하고 있는 인간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이 인간들이 슬퍼하는 것보다 더 슬퍼하신다는 것을 여러분은 생각해야 됩니다.

어쩌다가 우리 선조가 그런 한 많은 역사를 꾸몄던고! 이 역사의 분통함과 억울함을 어느 누가 슬퍼했으며, 어느 누가 이 역사적인 원한과 더불어 싸웠습니까? 본래부터 하나님과 우리의 선한 선조들이 이 원한과 더불어 싸워 나온 것입니다. 그 하나님과 선한 선조의 전통을 전달하기 위하여 나는 태어났으며, 그 사상과 그 이념을 전달하기 위하여 나는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세계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처참한 현실을 바라보게 될 때 ‘이 불행하고 처참한 현실을 개척해야 할 책임이 하나님에게 있구나. 이러한 길이 하나님의 길이구나.’ 하고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슬픈 일을 보게 되면 슬픔을 당하는 사람보다도 먼저 눈물이 앞서는 하나님의 심정을 느낄 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어떤 도성을 전도하기 위해서 갈 때에는 눈물을 글썽이며 ‘내가 어디로 갑니까, 아버지, 어디로 갑니까? 내가 어디로 가야 합니까? 오늘 어떠한 사람과 상봉합니까? 사탄과 상봉합니까, 혹은 괴수와 상봉합니까, 하나님이 싸워 굴복시키기를 바라는 사람과 상봉합니까? 아버지! 나는 누구입니까? 나는 한 분을 통해서 나아가겠습니다. 이 고을을 책임진 아버지의 아들로서 가겠습니다. 딸로서 가겠습니다. 하나님의 역군과 같은 입장에서 가겠습니다. 참생명의 도리를 지키기 위해서 가겠습니다.’라고 해야 합니다. 이러한 자리에 서야 합니다. 이러한 자리에서 참된 길을 닦아야 합니다.

사탄세계의 잡초를 뽑아야 합니다. 땅 위에서 승리의 조건을 세움으로써 하늘의 백성으로 만들어 그 실적을 바쳐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는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이 도성을 몽땅 바쳐 드리겠다고 한마디 하면 이루어질 수 있는 때가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내 발걸음을 통하여서 이 민족을 대표하여 제물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을 구하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대할 때 이런 관점에서 보시는 것입니다. 보기에는 미미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하나님의 심정을 흠모하는 내적인 관점에서 보게 되면 여러분이 움직이는 것은 엄숙한 것입니다.

노아는 120년 동안이나 산에 올라가서 남이 보나 안 보나 하나님께 충성을 다했습니다. 노아가 이렇게 한 것이 만세의 기쁨을 돌릴 수 있는 조건이 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는 비록 혼자 땀을 흘리며 일했지만 탄식의 세계가 해방의 한 날을 바라고 있다는 견지에서 볼 때, 그가 한 것은 말할 수 없는 행복을 호소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소망의 심정으로 인간을 찾아오셔서 소원의 한 날을 준비하라고 하신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가는 이 길은 누구를 위해서 가는 겁니까?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가야 되느냐? 하나님과 더불어 출발하고, 하나님과 더불어 가야 되고, 하나님과 더불어 살고 싶은 자리에서 모시고 가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 하나님을 만나 보았으며 언제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 보았습니까? 모시고 살아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세상을 탈피하신 하나님이 아닙니다. 세상 가운데 있는 불쌍한 사람을 위해, 원수의 품에 안겨 신음하고 있는 뭇자녀들을 구하기 위해 일하시고 계십니다. 사지(死地)와 같은 이러한 세계에서 하나님은 기쁨의 한 날을 위해 개척자의 사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무대에 내가 산다는 신념을 여러분은 가져야 합니다. 그런 신념에서 사는 것뿐만이 아니라 원수를 굴복시켜 하나님의 한을 풀어 드리는 생활을 하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러한 마음 자세로 생활하고 싸워 나가는 사람이라야 하나님을 만나고, 모시고 사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같이해 주신 것이 생의 가치가 된다

여러분이 수고하여 어떠한 목적을 이룬 후에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그 때의 하나님은 법적으로 공인된 아버지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피눈물 나는 자리에 있더라도 하나님이 함께하는 생명적인 권내에서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일하고, 함께 싸우며, 함께 먹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십자가 때문에 슬퍼하시지 않습니다. 자신을 중심하고 살지 않습니다. 만민을 위하고 자녀를 위하여 사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도 자기의 십자가 때문에 슬퍼해서는 안 되며, 자기를 위해서 살아서는 안 됩니다. 만민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뜻을 따라 나가는 과정에 있어서 앞이 열리고 환경이 환영하면 할수록 행복하고 감사하다고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환경이 올 적마다 도리어 비좁고 처참한 자리에서 하나님 앞에 눈물짓고 기도하던 때를 그리워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같이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나아갈 때 구원의 손길이 나타나고 선지자의 손길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리야말로 하나님이 같이하고 계시는 자리입니다. 그러기에 이러한 자리에서 일하는 기간이 여러분의 생애에 남아지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라고 맹세를 하며 하나님 앞에 호소하던 그때, 그 어떤 처참한 자리에서도 하나님을 붙들고 ‘나는 홀로 가지 않았사오니 절대로 망하지 않습니다.’라는 신념으로 나아가던 그때가 그리워집니다. 원수 사탄과 부딪치는 시련이 있을 적마다 나는 하나님 앞에 맹세했고 간곡한 심정을 가지고 기도했습니다.

이러한 사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가르쳐 주지 못하고, 맹세를 받지 못하고 위로만 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해야 하는 하나님은 얼마나 비참하셨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충성을 다하다가 배반하고 돌아서도 ‘야 이 자식아, 왜 배반하느냐?’ 하고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하나님의 슬프신 심정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슬프셨던 하나님을 이제 우리가 만난 것은 귀한 것이지만, 만나는 기쁨을 대하기 위해서는 만날 때까지의 도상에서 하나님의 심정적인 동반자가 되어서 만나야 합니다. 이것이 정상적인 만남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아버지를 직접 모시며 살고 있고, 모시며 실제 행동하며 사탄과 싸우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살고 있으며 이러한 유대를 가진 것이 무한한 행복이란 걸 느껴야 합니다. 이제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은 민족적인 긍지를 좌우시킬 수 있는 중대한 일입니다. 오늘날 이 세계는 영적으로 우왕좌왕하고 있습니다. 이런 세계를 변화시키는 엄청난 시대적인 혜택을 우리가 받은 것입니다.

내 자신이 이러한 세계를 만들기 위해 이 길을 결정하고 개척하면서 피땀 흘리며 싸워 나간다는 통쾌감을 여러분들은 느껴야 합니다. 여러분들도 이러한 것을 느끼기 위해 여기에 모였다는 것을 선생님은 알고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전체의 움직임을 다 알게 되면 으레 도망갑니다. 모든 것에 있어서 보호를 해 주는 뒷받침이 없다고 말입니다.

최후의 싸움에서 이길 자신이 있어야

사탄세계에서는 추천을 받아 어떠한 일을 하게 되면 보호자가 배후에서 모든 것을 책임져 주고 생활적인 모든 문제도 책임을 져 줍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탄세계의 사람들이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들이 고난의 길을 도맡아서 간다고 불쌍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우리를 잘 아시지만 배후에서 책임을 져 주지 못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애달프고 서글프시겠습니까? 여러분은 어려움에 지친 모든 식구들을 끌고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가야 합니다. 여러분의 어려움을 아시는 하나님의 슬픔이 얼마나 크시겠습니까? ‘가고 또 가자.’ 이렇게 스스로 환경을 수습해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역사상에 없었던 최후의 투쟁을 하는 무대가 비장하고 심각한 자리일수록 하나님은 역사적인 가치를 보장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입장에서 보게 되면 하나님은 하늘땅을 주기 위해서 우리의 뒤를 밀어 주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나는 통일교회에서 각자가 할 수 있는 분야에서 책임을 짊어지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선생님 분야에서 책임을 지고 있고, 여러분은 여러분 분야에서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책임을 지는 데 있어서는 여러분이나 선생님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생활면이나 그 배후의 사명 분야에 있어서는 차이가 크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섭리해 나오시는 분야 역시 크게 다른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사탄을 굴복시켜 나오는 싸움을 경시하지 않았습니다. 계속해서 싸워 나오고 계십니다. 이 민족이 싸우지 않고 세계 인류가 싸우지 않더라도 이 싸움을 제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가정을 세운 기준이 있으면 이 땅 위에 세계적으로 수많은 식구를 세울 수 있는 것이요, 종족을 세웠으면 민족을 세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천리원칙인 고로 한 중심을 세우기만 하면 반드시 살길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 한 중심이 흥하면 그와 같이 흥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원칙적인 표준을 세워서 가정에서부터 국가와 세계까지 확대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가정에서부터 천주의 원칙에 입각하여 나가면 되는 것입니다. 플러스(+)가 있으면 마이너스(-)는 자동적으로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뜻을 대하는 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원칙적인 기준을 배후에 두고 사탄세계의 전통을 칠 사람은 선생님입니다. 사탄세계의 것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써, 더 철저한 것으로써, 더 완전한 것으로써 한 많은 역사를 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바로 나와 함께 이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인간들이 당하는 고통은 우리 시대에서 마지막이다. 우리들은 이 삼천리반도에서 하는 싸움에서 이길 자신이 있다.’라고 해야 합니다. 모두 그렇게 할 자신이 있습니까? 우리가 정성을 다해 하는 이 싸움이 최고의 악전(惡戰)이요, 또한 최고의 결전입니다. 역사 속에서 세계적으로 많은 흥망성쇠가 있었지만 우리가 하는 이 싸움은 역사상 마지막 싸움이 되어야 합니다. 역사의 한과 더불어서 마지막이 되어야 합니다.

효자 효녀의 길

죄악된 세계를 수습하기 위한 마지막 싸움의 승리가 이 땅 위에 올 것이거늘, 여러분은 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중심삼고 싸우는 마지막 고비가 올 것이거늘, 여러분은 가야 합니다. 종족을 위한 싸움의 마지막 고비가 올 것이거늘, 여러분은 가야 합니다. 이 민족을 위한 싸움의 마지막 고비가 올 것이거늘, 여러분은 가야 합니다. 이 싸움에 참가하지 못한다면 얼마나 한이 되겠습니까? 이 싸움에 이겨 승리의 깃발을 휘날리며 천하를 지배하지 못하면 얼마나 한이 되겠습니까?

그러기에 여러분들이 마음속으로 소망해야 할 것은 승리의 한 날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이날을 맞기 위해서는 싸워야 합니다. 싸움이 없이 승리는 그저 오지 않는 것입니다. 죽느냐 사느냐, 망하느냐 살아남느냐 하는 싸움을 거쳐야 합니다.

이러한 실전 도상에서 여러분은 개인적인 십자가를 지기 위해 무엇을 했습니까? 가정적인 십자가를 지기 위하여 무엇을 했습니까? 하나님께서 이 고개를 넘으려고 얼마나 많은 싸움을 했으며, 얼마나 슬퍼하고, 얼마나 애달파하고, 얼마나 몸부림치신 줄 압니까? 그런 한의 고개를 인간이 일대(一代)에서 넘지 못하다니…. 6천년 역사를 중심삼고 하나님께서 이 고개를 넘기 위해 애달파하시던 그 한의 고개를 우리 통일교회가 일대(一代)에서 넘어야 하겠습니다. 앞으로 개인의 원수는 세계사적으로 사라지고, 가정의 원수도, 종족의 원수도, 국가의 원수도 세계사적으로 사라질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모시는 자리에서 하나님과 같이 싸움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까지 원리를 배우며 나왔지만 책임을 못했다는 것입니다. 원리는 원리대로 여러분들은 여러분들대로 따로따로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이 민족을 대하여 승리의 첫 깃발을 들고 나서는 거룩한 일이 우리 앞에 전개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피와 살을 하나님 앞에 바쳤으니 영광의 그날을 위해 원수의 적진을 무찌르겠다는 신념을 가지고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 10년, 100년, 아니 일생을 바치는 한이 있더라도 기필코 가겠다는 신념을 가져야 됩니다. 이제는 우리가 어떻게 충성을 다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여기 대구 도성이 받고 안 받고는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충성을 다했느냐 다하지 못했느냐 하는 것이 문제이지 받고 안 받고는 문제가 아닙니다. 교인이 불어나고 안 불어나고 하는 것도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교인들이 얼마나 주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줄 때는 다시 돌아오게끔 주어야 됩니다.

여러분들은 뜻을 알고, 지금까지 3년노정에서 진정으로 충성을 다한 사람들입니다. 3년 동안 하나님의 뜻을 위해 일해 오면서 원망하고 낙망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임재하시게 된다면 그들은 변할 것입니다. 그들이 고통을 당하며 세계적인 고난과 싸운 것은 승리의 한 날을 위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모시고자 하는 가치의 생활을 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효자 효녀의 길임을 알아야 합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그러면 오늘부터 처음처럼 새롭게 출발합시다.

<말씀 요지>

이번에 막대한 경비를 들여 부흥회를 하는 것은 여러분들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들은 지방에 돌아가서 재기해야 합니다.

선생님은 사냥을 나가서도 4시간밖에 자지 않았습니다. 부흥회를 통하여 외적인 것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내일부터 3일간 잠을 자지 말고 지구장(地區長)이 선두에 서서 노방 전도를 해서라도 더 많은 사람을 참석시켜야 합니다.

전쟁터에서 잠을 자면 되겠습니까? 3일간 기도하여 영적 기준을 세우고 비가 오더라도 악착같이 활동하여 대구 도성을 복귀해야 합니다. 잠자지 말고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선생님이 금년에는 지역순회를 할 계획입니다. 대외적으로 원수에게 져서는 안 됩니다. 금식을 해서라도 목적을 달성해야겠습니다. 하늘 편이 아닌 것은 모두 심판해야 합니다.

한국은 세계의 축소형이고, 군(郡)의 책임자인 지역장은 대제사장과 같은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해산하는 어머니의 수고의 심정을 가지고 참다운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해야 됩니다. 사탄들이 무수한 화살을 겨누고 있는 촛점에 내가 위치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정신을 집중시켜 간절한 심정으로 기도하여야 됩니다.

하나님은 참다운 마음을 원하기 때문에 참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말씀 요지>

아벨의 뜻이 세워지려면 하나님과 천사와 아벨의 해원성사가 일치해야 합니다. 노아나 아브라함 때에도 하나님의 뜻과 그들의 뜻이 행동적인 면에서부터 인격적인 면에까지 일치되었으므로 심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뜻을 중심삼고 나타났던 것입니다.

오늘날 통일교회는 하나님이 찾는 실체적인 존재로서, 영인들과 조상들과 천사들과 하나님이 바라보는 자리에 있고, 또 그들 모두를 대신하는 자리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것을 알고 또 그러한 신념을 가지고 행동해야 합니다.

영계와 하나님의 협조를 바란다면 역사적인 심정을 가지고 선을 세워야 합니다. 외로울 때도 하나님과 땅과 인류를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이 거룩한 사람입니다.

제물은 역사적인 탕감의 실체로서 공적인 목적관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나’라는 개체는 역사와 조상들의 결실체입니다. 외로운 자리에 있을지라도 혼자가 아니고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복귀의 세계는 주어야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받고서는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참다운 심정과 말씀을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공인을 받는 사람만이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기성교인이 자기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보다 더욱 간절히 기도하여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남한 각처에서 왔으니 한국의 운명과 세계의 운명이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천천만 성도들과 하늘이 주시하고 있으니 엄숙한 사명감을 가지고 참 것을 주어야 합니다.

동지가 되어야 할 종족이 원수가 되는 것을 역사도 조상들도 원치 않습니다.

민족과 하나님을 대신하여 참된 눈물을 흘린 자는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민족을 대하여 4년노정을 갈 때 생각해야 할 것은, 야곱이나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예수님이 섭리의 길을 갈 때 어떤 심정을 가졌을 것인가, 또 예수님이 아무도 그의 고난을 알아주지 않을 때 얼마나 외로워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역사와 하나님을 대신하여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절대로 망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외로운 자리에서도 하나님을 중심삼고 나아가는 우리가 되어 하나님이 보장할 수 있는 내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개인을 세워 민족을 찾고, 민족을 세워 국가를 찾고, 더 나아가 세계와 천주까지 찾으려 하십니다.

여러분은 더욱더 심정을 높이고, 누구에게나 사랑하는 마음으로 참된 것을 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문선명선생말씀선집 제1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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