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가운데서 쓸 만한 청년이 몇 명이나 나올 것인가? 우리 교회의 발판을 넓히기 위해서 여러분을 불러와 수고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곳에 가서 이런 고생 안 하고도 잘 될 수 있다면 이런 일 안 합니다. 어렵기로 말하면 세계에서 가장 어려운 한국에서 말씀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배달민족을 대한 하늘의 섭리가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고생을 좀 해야 합니다. 배가 고파 봐야지요. 뜻이 이루어진다면 무엇을 못해요? 어떤 인정이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님도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내 형제요 모친이라고 하였습니다. 배가 고프다고 먹을 것에 집착되면 종의 자식밖에 안 됩니다. 제일 원수가 먹는 것, 자는 것입니다.
깊은 도의 세계에 가면 많이 먹고 많이 자지 않아요. 이 자리에 참석한 것은 좋지만, 즉 참석은 마음대로 하지만 참석한 후에는 책임을 져야 합니다. 수련회의 전통을 세워야 합니다. 주었을 때 바로 못 받으면 주었다가도 빼앗아 오게 되고 그렇게 되면 문제가 간단치 않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자손과 문중(門中)과 온 마을의 앞길이 막히고, 모든 우수한 사람의 앞길을 막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소망이 없는 이 민족을 뜻을 아는 눈으로 보면 불쌍합니다. 여러분 같은 생짜백이를 불러서 사탄에게 분풀이를 하고 싶습니다. 3년 동안 그것을 하려고 합니다. 이 뜻을 잘 받으면 좋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아예 떠나는 것이 좋습니다.
제비 새끼는 무엇이든 어미가 주는 대로 받아먹습니다. 이것 저것 비판하고 분석하다가는 다 죽어 버리게 됩니다. 그러니 별수 없습니다. 삼천만 민족이 다 그랬으면(제비 새끼들과 같은 태도) 벌써 뜻이 다 이루어졌으리라 생각합니다. 졸면 안 됩니다. 졸면 사탄이 따릅니다.
하늘 앞에 ‘나는 사탄을 원망할 수 있는 심정 속에 있다.’고 자신할 수 있는 자가 있느냐?
여러분에게는 하늘이 여러분을 믿어 주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남이 문제가 아니라 우선 내가 나를 믿을 자신이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선생님은 무슨 고생이라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있으니 그것은 선생님이 없으면 인류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기도해서 해결하고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선생님이 몸을 아끼는 일면도 있습니다. 수련생으로서의 한 가지 문제는 ‘나는 어느편이냐?’ 하는 것입니다. ‘죽더라도 나는 변하지 않는다.’ 하는 것이 있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편안한 자리에 있는데 하나님이 도와주실 것 같습니까?
통일교회의 청년은 무엇이라도 한다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번 기간에는 원리도 배우지만 ‘나는 어느편에 서느냐?’ 하는 것도 체득해야 합니다. 유언으로 남겨 놓을 말은 이것입니다. ‘이 뜻이 이루어질 때까지, 이 생명이 끝날 때까지, 나는 오직 충성을 다해 하늘이 섭섭해하지 않는 일을 하고서 간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됩니다. 내가 성공했느냐 성공하지 못했느냐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선한 것은 침범받지만 결과가 좋고, 그렇지 못한 것은 선전은 좋지만 결과가 나쁩니다. 10가지 선전을 하려면 20가지 실천을 해야 합니다.
당신께서는 역사노정에서 인간들이 흩어질 때마다 불러 모아 주셨고, 방향을 잃어버릴 때마다 원수들을 보내어 쳐서라도 그 방향을 제시해 주셨음을 저희들은 아옵니다.
2천년 전에도 흩어진 무리를 수습하고, 민족을 수습하고, 세계를 수습하여 하늘의 영광을 높이 찬양하기 위해 만민의 통솔자로 메시아를 보내셨사온데, 메시아와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되지 못하였사옵고, 흩어진 이스라엘 민족은 이스라엘 민족대로 메시아는 메시아대로 분립되었기에, 그 이후 2천년 동안 피 흘리는 역사가 계속되었고, 십자가의 고난이 계속된 것을 아옵니다.
오늘날은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갈 길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던 40년 기간과 같은 때요, 그들의 불신으로 인해 이스라엘 민족사가 하늘의 채찍을 받아 종결지어지던 때와 같은 때인 것을 아옵니다. 어떤 면으로 보더라도 현대가 그런 때인 것을 아옵니다.
이와 같은 때를 수습할 수 있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아버님도 소망하고 계시고 저희들도 소망하고 있사옵지만, 저희들 스스로 마음을 수습하고 방향을 정하여 어떠한 길을 가야 하겠다고 결심하지 못하면, 가야 할 방향을 가르쳐 주며 그곳으로 가라 하는 사람이 나타난다 하더라도 가지 못할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문제는 이 땅의 모든 것이 흩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의 중심이 흩어진 것이요, 처할 위치와 나아갈 방향을 잃어버린 것임을 아옵니다. 이렇게 자신이 처할 위치를 모르고 나아갈 방향을 모르는 채 종말의 현상을 바라보는 저희들, 이제 아버님이 중심이신 것을 알았을진대는 아버님이 바라는 위치와 기준에 맞추기 위하여 스스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여 정성을 들여야 하겠사옵니다.
끝날에는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밀실에 들어가 기도해야 되는 것을 아오니, 아버지의 심정 기준과 저희의 심정 기준이 일치되는 자리에 자신을 세우고 생활에 있어서 승리의 조건을 찾아 그 가치를 논하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시옵고, 그러지 못한다 할진대 아버지 앞에 설 수 없다는 것을 저희들이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러한 자리에 처하여 있는 저희들이옵고, 이러한 사회와 이러한 세계의 현상을 바라보고 있는 저희들이옵고, 이러한 환경에서 몸과 마음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 저희들이오니, 이러한 저희들을 다시 빚으시어 심정의 기준을 세워 주시옵고, 아버지의 중심적인 역사를 제시하여 주시옵고, 저희의 마음의 중심을 성별하여 주시옵소서. 저희의 몸과 환경을 성별시키어 주시어 당신과 접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 긍휼의 손길과 자비의 은사를 이 민족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러나 몰림받고 쫓김받는 무리를 통하여 이루셔야 하는 당신의 뜻이 있다면 이 민족을 더 몰리고 더 쫓기게 하여 주옵소서. 그런 속에서 이 민족의 고통을 대신하고, 이 민족의 어려움을 대신하여 책임감을 가지고 나서고자 하는 젊은 무리들이 나오기를 바라고 계시다는 것을 아옵니다.
사망의 일선에서 허덕이고 있는 인류를 바라보고 눈물지으시는 아버지의 서글픔과 이 나라 이 민족의 서글픔을 저희들이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서글픔들이 심정적으로 맺히어 하늘의 한이 피로 연한 울음소리와 더불어, 한숨과 더불어 이 민족 앞에 찾아오는, 두려운 때가 오는 것을 저희들이 알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민족이 어려움을 당하기 전에 저희들이 먼저 어려움을 당해야 되겠고, 인류가 어려움을 당하기 전에 저희들이 먼저 십자가의 길을 넘어가야 될 것을 알았사옵니다. 예수도 혼란된 환경 가운데서 천성을 향하는 길을 먼저 걷고 나서 그 길을 가라 하였습니다. 그것이 예수가 남기신 복음의 내용인 것을 저희들이 알고 있사오니, 이 역사노정의 첨단에 서서 모든 것을 책임질 수 있는 모습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부딪쳐 깨지고 쓰러지는 자들이 되지 말고, 부딪칠 적마다 아버지와 심정적인 인연을 굳건히 맺어 아버지 앞에 나설 수 있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날을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이 단상에 서서 무슨 말을 하기를 원하지 않사오나, 아버지께서 이들을 위하고 이들의 갈 길을 염려하여 이 시간을 허락하여 주셨사오니,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심정이 통하고 마음과 몸이 화할 수 있는 은사의 역사를 일으켜 주시옵고, 전하는 자의 마음과 받는 자의 마음이 하나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의 몸과 마음이 당신과 혼연일체가 되어 당신이 우(右) 하면 저희도 우(右) 하고, 당신이 좌(左)하면 저희도 좌(左) 하고, 당신이 동(動)하면 저희도 동하고, 당신이 정(靜)하면 저희도 정하여 당신의 거룩한 생명의 터전을 저희의 마음 동산에 마련할 수 있는 승리의 이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부족한 모습이 아버지 앞에 아뢰옵니다.
오늘 봉독한 말씀을 통하여 2천년 전에 흩어진 무리들을 바라보던 예수 자신의 모습이 처량하고 간곡했다는 것을 저희들이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는 굶주렸었사옵고, 예수는 목말랐었사옵고, 예수는 나그네가 되었었사옵고, 예수는 헐벗었었사옵고, 예수는 병들었었사옵고, 예수는 옥에 갇힌 바 되었었사옵니다. 참을 위해 가는 그와 같은 길이 끊어지지 않고 상속되어 오늘날 저희들에게까지 이어졌사와 저희들도 배고파 있사옵고, 목말라 있사옵고, 나그네가 되어 있사옵고, 헐벗어 있사옵고, 병들어 있사옵고, 사망의 옥에 갇혀 있사옵니다.
이렇게 굶주림과 헐벗음과 처참한 환경 가운데 있는 저희들이오나 서로 서로 돕고, 마음에서 몸으로, 몸에서 마음으로, 손길에서 손길로 연하여 서로 부둥켜안고 아버지의 이름을 높이고, 아버지의 영광을 노래하고, 아버지 앞에 맹세하는 움직임이 이 가운데에서, 이 자리에서 일어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시간이 가면 갈수록 이러한 인연이 더 두터워질 수 있도록 사랑의 은사를 내려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나이다.
모든 것 맡기오니 사탄이 틈타는 이 시간이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면서,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말 씀> 이 시간 여러분과 같이 생각하려는 말씀의 제목은 ‘하나님의 일선에 선 우리들’입니다.
천지에 중심이 없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우리는 절실히 느끼고 있습니다. 개인을 놓고 보더라도 누구든지 자신의 인격이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왈가왈부될 수 없는 절대적인 사상이나 주의를 중심하여 유지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단체를 보더라도 그 단체 역시 그 중심과 하나되어 중심이 동하면 함께 동하면서 투쟁 노정을 거쳐 하나의 목적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떠한 힘에 의해서도 옮겨질 수 없는, 반석과 같은 중심을 가진 국가라고 하면 아무도 그 국가를 삼킬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세계에 살고 있는 만민은 공히 양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인간은 이 양심을 중심삼고 선을 따라가는 생활을 해 왔고, 또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인간들이 악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생활 가운데 선의 추궁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실상을 보게 됩니다. 이것을 볼 때 세계를 움직이는 어떤 변치 않는 중심이 있어서 그 중심이 인간들을 절대적인 하나의 기준에 연결시키려 하는 것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 할진대 작은 내 개인으로부터 넓고 큰 이 세계에 이르기까지 그 중심에 연결되는 형태와 현상은 각각 다르다 할지라도 원칙적인 방향은 일치되어야 합니다. 그런 입장에 우리 자신들이 놓여 있어야 되겠고, 이 세계가 놓여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땅에 살고 있는 세계 인류와 우주는 변할래야 변할 수 없는 하나의 불변의 중심과 불변의 터전을 갖추어 자리를 잡아야만 문제의 해결점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세계가 이렇다 할진대 천지를 창조하신 절대자도 그렇습니다. 피조세계는 절대자의 이념이 반영된 세계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피조세계는 창조하신 그 주체와 혼연일체가 되고 불변의 중심과 하나되어 영원한 위치를 잡아 하늘이 좋으면 좋고, 하늘이 동하면 동할 수 있어야 합니다. 피조세계가 그러한 하나의 절대적인 불변의 중심을 찾는 날에는 우리의 양심이 위치를 잡고 안식의 터전을 찾아 생각지 않은 가운데에서도 결과적인 목적을 이루게 되고 즐길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이 세계, 더 나아가서는 하늘과 땅, 즉 천주(天宙)에 존재하는 모든 개체 개체가 불변의 중심을 갖추어 그 위치를 잡고 생활노정에서 그 가치를 나타내고 있습니까? 그러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극히 작은 분자를 보더라도 중심과 상대적인 관계를 맺어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절대적인 원칙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절대자가 주체로서 피조물을 창조했다 할진대, 그 주체가 되는 절대자와 상대가 되는 피조물이 뗄래야 뗄 수 없는 불변의 관계에 있어야 하는 것은 필연적인 사실입니다.
맨 처음부터 천지가 그러하였다면 오늘날 우리 인간들은 고통스러운 환경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었을 것이요, 불안과 공포라는 낱말조차도 우리와 관계가 없었을 것이요, 역사적인 비참사나 처참한 전쟁이나 투쟁사도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랬더라면 목적하는 바의 가치를 이루며 살아가고, 목적하는 바의 가치가 결실되어 그 가치와 더불어 즐길 수 있는 환경에 들어갔을 것입니다. 또한 우리에게는 한없이 평화롭고 한없이 자유로운 이상세계가 펼쳐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현실에 처해 있는 여러분 자신이요, 가정이요, 사회요, 국가요, 세계입니다.
섭리의 뜻을 이루어 나가는 데 있어서 눈물의 고비를 피할 수 없는 이 억울한 사정이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이뇨? 그것은 인간이 절대자가 지향하는 하나의 위치를 포착하지 못하고 변할 수 없는 그 위치에서 변할 수 없는 관계를 맺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이런 결과가 벌어졌다고 단정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잘나고 아무리 만천하에 자기의 이름을 드날리며 호령할 수 있는 자가 있다 할지라도, 뒤넘이칠 때는 그도 쓰러지는 운명에 놓이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역사노정에 민족을 지도한 중심, 혹은 애국자가 있었고 하늘을 중심삼고 이 세계 인류 앞에 선에 접근할 수 있는 진리를 표명했던 성현 현철들이 많았지만, 그들도 역사적인 비판의 대상이 되어 역사의 제물이 되어 사라졌던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현재의 주의나 사상, 우리가 지니고 있는 관념, 우리가 세우고 있는 생활의 목표 등은 어떤 것인고? 그러한 것들 역시 변하지 않는, 철두철미한, 원칙적인 중심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하나의 과정적인 것밖에는 안 됩니다. 과정적인 것들은 하나로 합해지지 않습니다.
완전무결한 중심이 세워질 때에는 자신의 갖춘 바를 만천하에 자랑하면 자랑할수록 그것이 오히려 부끄러움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천하를 움직일 수 있는 성공자라 할지라도 무엇인가 물결쳐 들어와 자기의 마음을 흔들어대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절대적인 하나의 완전한 존재, 변할래야 변할 수 없는 뚜렷한 하나의 핵심 존재가 이 세계에 침투하여 이 시간도 움직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양심을 가진 선한 사람들은 그것을 향해 전진해 나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중심을 잃어버린 인간입니다. 이것을 종교적인 용어로 말하면 타락의 보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원통하고 분한 타락의 보응입니다. 이것은 창조 이후 타락의 역사노정을 거쳐온 우리의 선조들도 원치 않은 것이요, 현재의 인간들도 원치 않는 것이요, 미래에도 원치 않을 것입니다. 이런 한스러운 오점과 한스러운 타락의 보응으로 인류는 사방으로 휘몰리어 이리 쓰러지고 저리 쓰러지고, 이리 찢기고 저리 깔리면서 죽음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태어난 인간이기에 고통스런 것입니다. 이러한 입장에 있는 우리들임을 알아야만 됩니다.
그러면 하늘이 원치 않은 타락이 벌어졌는데, 이것을 어떻게 해야 될 것이냐? 만일에 이것을 해결해 주실 수 있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지극히 서러운 일입니다. 오늘날 세계는 좌우 양대 진영으로 갈라져 대결하고 있지만, 이 역사적인 고통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의 새로운 세계를 출산해야 하는 입장에 놓여 있는데 인간이 구상하고 계획한 그 무엇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이념에 젖어 있고 사상에 젖어 있고 주의에 젖어 있는 우리의 마음을 돌이킬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우리 몸의 모든 세포와 신경을 동원하고 힘을 다하여 새로운 동산, 새로운 이념 세계를 향하여 달려가게 할 수 없습니다. 이 일은 인간이 아닌 절대자, 천주의 중심의 가치를 결정하실 수 있는 한 분을 통하지 않고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고마운 것은 이 세상의 어떤 주의가 아니요, 어떤 단체도 아니며, 어떤 지도자도 아닙니다. 이런 처참한 환경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가진 절대자가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중심을 잃어버리고 본향을 잃어버려 아무런 가치도 찾아볼 수 없이 파멸한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 이상 고마운 일이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어떤 주의나 사상을 넘고 자신의 인격과 가치를 넘어 하나님을 존중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양심이 있는 한 이것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역사는 뒤넘이쳐 나왔습니다. 좌가 우가 되고 우가 좌가 되고, 전이 후가 되고 후가 전이 되고, 상이 하가 되고 하가 상이 되면서 사방팔방으로 뒤넘이쳐 나왔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여러분의 하루의 생활도 그런 생활이었으며, 여러분의 1년도 그렇고 일생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가정 생활이나 사회 생활도 그러한 환경에서 뒤넘이치고 있는 것입니다.
좌가 우가 되고 우가 좌가 되고, 상이 하가 되고 하가 상이 되고, 전후가 뒤넘이치며 변천해 나오는 역사노정에서 하늘은 하나의 해결점을 찾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누구를 위해 살고 있으며, 누구를 위하여 일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상이 하가 되고 하가 상이 되고, 전후가 뒤바뀌고, 좌우가 뒤넘이치는 한이 있다 할지라도, 우의 자리에 서야 하는데 억울하게 좌로 거꾸러지는 한이 있다 할지라도 하늘을 위하여 존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쓰러지고 쓰러지면서도 이 작전을 해 나오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인간들은 몰랐습니다. 그러기에 선을 지향해 온 사람들, 즉 도를 따라 나온 선한 사람들은 시대 시대마다 참혹한 일들을 당했습니다. 그들은 위치가 바뀔 때마다 거름이 되었고, 시대가 바뀔 때마다 거름이 되었습니다. 시대의 변천에 따라 억울하게 많은 피와 땀과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들은 당시에 있어서는 망한 자요, 불쌍한 자요, 원망받아 마땅한 자로서 민족의 원수로 사라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목표, 그들의 중심, 그들의 생활 감정은 오로지 하나의 이념을 찾아 나오는 섭리의 중심을 향한 것이었고,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것을 철두철미하게 지니고 나온 사람들이 역사를 뒤집어 놓았던 것입니다. 망하는 것 같은 자가 역사를 깨고, 실패한 것 같은 자가 역사를 수습한 것은 역사노정이 입증하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우리 자신은 어디에 있느냐? 아무리 중심을 잡을 수 없는 혼란스런 환경에 처한다 하더라도, 어떠한 죽음의 자리에 들어가 있더라도 자기 자신이 누구를 위하여 존재하느냐 하는 것은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가르쳐 주고 싶으신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이것을 만민 앞에 가르쳐 주기 위하여 하나님은 종교의 역사를 통하여 메시아니 구원사상이니 하는 것을 내세우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자신은 누구를 위하여 존재해야 하느뇨? 하늘을 위하여 존재해야 합니다. 죽어도 하늘을 위하여 죽고 살아도 하늘을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그런 자는 죽어도 죽은 자가 아닙니다.
어차피 역사는 세기 세기, 시대 시대를 거쳐오면서 뒤바뀌고 깨지는 것입니다. 그 시대에 아무리 크게 성공을 했다 해도, 그것이 천지의 중심과 접할 수 없고 하나님의 목적과 통하지 않는다 할진대 깨집니다. 또 그 당시에는 깨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시간적인 차이가 있을 뿐 십년, 백년, 아니면 몇 세기 후에는 반드시 깨져 나갑니다. 이렇게 바꾸어지는 역사노정에 처해 있는 여러분입니다.
이러한 역사노정에 처한 여러분이기에 아무리 가정을 붙들고 자식을 붙들고 사랑한다 할지라도, 그것 역시 한 번은 바뀝니다. 6천년 역사를 거쳐 왔으니, 이 심정의 중심은 언제 바뀌어도 한 번은 바뀌어야 됩니다.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노정에 있어서 생활을 통한 사정은 해마다 바뀌고, 세기마다 바뀌고, 시대마다 바꾸어져 나왔습니다. 전부가 한 번은 바꾸어져 나왔습니다. 끝날이란 어떠한 때뇨. 심정적인 중심이 인간 자신도 모르게 바꾸어지는 때가 끝날이에요. 그때에는 이 세상 것은 전부가 바꾸어질 것입니다.
오늘날까지의 인륜도덕은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부부는 유별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삼강오륜의 초석으로 지금까지 내려왔으나 이것 역시 바꾸어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기존의 관습이나 규범 등이 자연적으로 바꾸어지는 기세가 사회 환경에, 생활 환경에 침투해 들어오는 날이 끝날이라는 겁니다. 세계적인 지도자, 혹은 메시아가 이 땅 위에 나타난다 할진대 그분은 이 문제를 수습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예수는 이 땅에 와서 누구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구동성으로 끝날이라고 말하는 이때에, 여러분은 자신이 누구를 위하여 존재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위하여 존재해서는 안 됩니다. 나라를 위하여, 세계를 위하여 존재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는 어떤 주의나 사상을 발판으로 하여 하늘과 땅을 위하여 존재해야 합니다. 하늘과 땅을 위하여 존재한다는 자부심을 갖고 나타나는 무리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모든 종교는 땅을 원수라고 합니다. 그러나 ‘땅’을 원수로 대할 것이 아니라 하나의 목적을 이루는 대상물로 대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늘과 땅이 내 것이요, 나는 하늘과 땅을 위하여 존재한다고 자부할 수 있어야 됩니다.
절대자가 계신다 할진대 그가 세우시려는 주의와 사상, 이념은 어떠한 것이냐? 하늘과 땅을 위하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과 인류를 위하여 존재한다고 하며, 스스로 그 가치를 존중시하고, 스스로 그 위치를 높이 평가하고 그러면서 스스로 그 방향을 향하여 철두철미하게 가겠다고 자부하고 나서는 무리들이 이 땅에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늘은 바라고 계시며 지금까지의 인류역사는 이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는 물질 빼앗기 싸움을 했고 그 이후 오늘날까지는 사람 빼앗기 싸움을 해 나왔는데, 이제 마지막에는 하나님 빼앗기 싸움이 벌어집니다. 하나님을 빼앗기 위해 서로 나는 삼단이고 너는 이단이라고 주장합니다. 여러분, 어저께 신문에서도 보았겠지만 앞으로는 그보다 더 큰 문제가 벌어지게 됩니다. 지금까지 하늘은 종교단체를 가만두었지만 앞으로는 세계적인 사조를, 세계적인 운세를 휘감아 소용돌이치게 할 것입니다. 동기적인 입장에 서서 문제를 해결하든가 상대적인 자리로 몰아넣어 해결시키든가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일이 성취될 때까지 많은 종파가 깨어져 나갈 것입니다.
인류역사가 하나의 목적 세계를 향하여 가는 과정에서 수많은 민족이 깨지고 바뀌었습니다. 하나의 귀결점을 찾아 세우려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도 그러한 노정을 거칩니다. 여기에서 마지막까지 남아져 역사를 수습할 수 있는 이념은 하늘을 위하고 땅을 위하고 인류를 위하는 이념입니다. 그러니 인류를 통하고, 하나님을 통하고, 천지를 통할 수 있는 심정 기준을 가진, 자기의 가치를 천상천하에 자랑할 수 있고 노래할 수 있는 사람들이 나와야 합니다. 더 나아가 땅과 하늘과 하나님은 우리의 것이요,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요, 나는 그분의 아들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무리가 나와야 합니다.
지금까지 가정을 가져 보지 못하신 하나님이요, 나라를 가져 보지 못하신 하나님이요, 세계를 움직여 보지 못하신 하나님이 그러한 개인을 찾았다 할진대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하나님은 그 사람을 중심으로 사회의 기본이 되는 가정의 형태를 갖추고 그 가정을 중심으로 사회를 형성하고 그 사회를 중심으로 민족을 형성하고 국가를 세워 새로운 주권 세계를 향하여 출발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 위에 메시아를 보내시어 그를 신랑이라 하시고 인류는 그의 신부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역사노정에서 하나님이 찾아 나오신 제일 기준인 아버지와 아들딸, 즉 참부모와 참아들 딸의 기준을 세워 새로운 역사의 페이지를 기록하기 위한 기점으로 세운 것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제는 정신차려야 할 때입니다. 자신이 갖고 있는 것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때입니다. 밥숟갈을 붙들고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모든 만상을 대하여 재비판하여야 하겠습니다. 자기의 생활적인 모든 조건을 재수습해야 하겠습니다. 천심을 통하여 어떤 것이 옳고 그른 것인가를 냉철하게 판단하고 결정하여 옳은 것을 취하고 그른 것은 베어 버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최후의 때에는 그러한 일이 벌어져야 합니다. 누구를 위하여?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을 위하는 데는 자기 자신이 그르면 자신을 잘라 버리고, 가정이 그르면 가정을 잘라 버리고, 국가, 민족, 세계까지도 미련 없이 자르고 넘어설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 스스로 잘못된 모든 것을 포기하고 변할 수 없는 하나의 중심과 통할 수 있는 위치와 방향을 갖추어 생활 가운데에서 목적의 주체이신 하나님의 가치를 노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는 인생행로에 있어 대승리자입니다. 인간은 그러한 과정을 거쳐 나가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망하고 많은 민족이 멸망하게 되더라도 하나님의 섭리의 뜻이 종결되려면 그러한 핵심적인 과정을 거쳐 나가야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팔자가 좋아서인지 혹은 운이 좋아서인지 시대적인 혜택을 받아 좋은 시대에 태어났습니다. 매를 맞아도 직접 맞고, 상을 받아도 직접 받고, 말을 들어도 직접 듣고, 책망을 들어도 직접 들을 수 있는 때에 태어났습니다. 여러분은 한민족, 즉 한국 백성으로 태어났으되 한국 백성 만으로서가 아니라 세계를 대신한 민족이라는 입장을 떠날 수 없습니다. 내 민족만을 위하여, 내 국가만을 위하여 살 때는 지나갔습니다. 지금은 세계주의가 대두된 시대입니다. 서로 대결하고 투쟁하는 과정에서는 일개 사회의 주의나 사상을 넘어 그 이상의 가치적인 위치와 방향을 갖추어 나타나지 않는 한 도저히 새로운 시대를 향하여 나아갈 수 없습니다. 또 지배받는 민족은 될망정 지배하는 민족은 될 수 없습니다.
이 땅 위의 인간들은 지금까지 무엇을 지배하여 나왔던고? 물질을 지배하고 몸뚱이를 지배하는 데 전력을 다해 나왔습니다. 그 반면에 종교는 물질과 몸뚱이를 끊어 버리고 양심을 지배해 나왔습니다. 이것이 두 갈래의 역사노정입니다. 우리는 몰랐지만 역사노정에서 하나님은 양심적인 역사의 인연을 넓혀 가지고 하나의 중심이념을 가진 존재를 세워서 인간들이 그와 하나되게 하기 위한 목적을 갖고 나오셨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 즉 타락 이후 4천년 만에 양심의 방향을 잃어버린 인간들 앞에 자석과 같이, 플러스(+)적 양심형으로 나타난 사람이 예수입니다. 그는 참사람, 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 이 역사는 어떻게 될 것인가? 무엇을 중심으로 귀결될 것이뇨? 물질과 몸뚱이를 중심한 역사적인 관이나 이념, 주의나 사상은 세계의 기반이 될 수 없습니다. 세상의 인연을 끊어 버리고 양심에 따라 선을 지향하여 나선 사람들, 즉 도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 세계의 기반이 될 수 있습니다. 이들의 가는 모습은 처량합니다. 불쌍합니다. 얼굴을 보아도 처지를 보아도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가는 길은 적막강산입니다. 그 길은 가족도 못 따라갑니다. 홀로, 홀로 가야 하는 길입니다. 한번 가면 다시 못 오는 길입니다. 그 길에서는 뜻을 이루지 못하면 쓰러져 망해 버리는 거예요. 도의 길은 그렇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스라엘 역사를 상고해 보아도 그 길은 갔다가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길임을 알 것입니다. 돌아가는 날에는 죽게 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급의 바로 궁중을 기쁨으로 탈출하여 황무지인 광야를 향하여 힘 있게 달려나갈 때에는 말할 수 없는 희망과 소망에 넘쳐 있었으나 그 길은 비참한 길이었습니다. 보따리도 못 가지고 가는 길이요, 편안히 잘 수 있는 이불 하나도 가지고 갈 수 없는 길이었습니다. 다 팽개치고 나서야 하는 길이었습니다. 그 길은 굶주리는 길이요, 목마른 길이요, 나그넷길이요, 헐벗는 길이요, 병들어 넘어지는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오늘날까지 인류역사노정을 거쳐오는 동안 도를 사랑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그런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 길은 사랑하는 아들딸을 버리고 가야 할 길, 천적인 인연을 갖고 죽어도 그 길에서 죽어야 할 길, 일생을 걸어 놓고 가야 할 길입니다. 뼈 살을 에이는 듯한 고통에 눈물을 흘리면서도 사랑하는 가족을 두고 돌아서서 홀로 가야 하는 운명의 길입니다. 그렇다고 이 길을 가는 데 있어서 뚜렷한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막연한 길입니다. 도의 길을 찾아 헤매는 사람, 참으로 불쌍합니다. 동시에 그러한 길을 찾아가는 가정도 불쌍합니다. 그러한 민족이 있다 할진대 그 민족 또한 불쌍합니다.
하늘을 직접 배반한 것도 이스라엘 민족이요, 하늘의 일을 망친 것도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불쌍한 민족입니다. 유일신 이념을 가지고 어디 가나 그 중심만은 잃지 않은 그들은 가는 곳곳마다 학살을 당하고, 학대를 받았으며, 지금까지 유리고객하고 있습니다. 불쌍한 역사노정입니다. 하늘의 역사가 그렇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 길은 둘이 갈 수 없습니다. 오직 혼자 가야 하는 길입니다.
이런 역사노정에서 세상은 세상대로, 하늘은 하늘대로 나갈 것이 아닙니다. 개인을 세워서 가정을 세웠다 할 수 있는 기준을 세워 놓고 그 개인을 다시 끌어내 가지고는 돌려보내야 됩니다. 4천년 동안 그런 길을 갔던 사람들, 그 전체의 가치를 대신하여 다시 내보낸 한 분이 바로 메시아입니다. 그분이 메시아예요. 이 메시아는 우리 선조들이 흘린 피의 결실체요, 희생의 결실체요, 고생의 결실체요, 눈물의 결실체요, 땀의 결실체입니다. 또한 선조들의 부활체요, 원수를 치고 선조의 한을 풀어야 할 중심존재요, 가나안의 약속을 이어받은 분입니다.
오늘의 세계는 몸뚱이와 물질을 위하여 싸우는 세계입니다. 아무리 경제학, 과학, 사상이 발전된다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 인류에게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없습니다. 그것으로는 안 됩니다. 마음의 세계에 들어와 이 육체와 물질을 재감별시킬 수 있는 어떠한 주의나 천적인 움직임이 역사적인 종말 시대에 나타나지 않는 한 이 세계는 망해 버릴 것입니다. 이제 하늘이 기필코 하나의 중심을 결정지어야 할 최후의 시대에 봉착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이 많은 문제들을 어떠한 입장에서 해결할 것이며 청산할 것이뇨? 이 문제가 세계적으로 벌어져 두 사조로 나타났으니 그 하나는 유물사관이요, 다른 하나는 유심사관입니다. 딱 나뉘어 나왔습니다. 땅과 더불어, 몸뚱이와 더불어 나가면 망합니다. 그러니 하나님과 더불어 청산해야 합니다.
여기에 있어서 우리가 제창해야 할 것은 마음인데 이 마음의 주체가 누구냐? 이것을 들고 나와야 됩니다. 마음의 주체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막연한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위주할 때가 왔습니다. 수천년의 역사노정을 거쳐왔지만 하나님을 위주하여 나아가자는 주의나 사상이 언제 나왔습니까? 나오지 않았습니다. 어느 민족, 어느 국가의 이념이나 주의 사상도 하나님을 위주해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림자 모양처럼 막연한 것이 지금의 민주주의입니다. 앞으로는 인권옹호시대를 넘고 남녀평등권을 주장하는 시대를 넘어, 신권을 옹호하고 하나님과 우리 인간이 평등하다고 하는 자리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이제까지 하나님 노릇을 못 해 보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 노릇을 못 해 보셨다는 것은 무엇이뇨? 하나님과 인간이 평등한 자리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잘못된 일입니다. 신권이 옹호되어야 합니다. 신권을 옹호해야 돼요. 우리를 지으신 주체와는 아무런 관계도 맺지 못해 접할래야 접할 수 없는 입장에 있으면서 무슨 평등이고 무슨 자유입니까? 하나님과 평등한 자리에 가야 합니다. 그 자리로 가는 데는 눈물 아니면 안 되고, 통회하고 가슴을 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을 바로 보지 못하는 입장을 넘어 자유와 평등을 노래하며 ‘나의 아버지!’ 할 때 ‘오냐!’ 할 수 있는 자리에 가야 합니다. 예수가 부활한 후 막달라 마리아가 붙잡으려 할 때에 ‘만지지 말라.’ 한 것은 아직 때가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끝날은 하나님께서 사랑의 손길을 펴시고 ‘내 아들딸아!’ 하며 만민을 품기 위하여 오시는 때입니다. 그러기에 신권옹호를 부르짖고 신인(神人)평등을 부르짖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신과 인간이 다 같이 합하여 자유천지에서 노래할 수 있는 때가 되면 하나님의 복귀역사도 끝나고 우리 인류의 소망도 모두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인간들은 그것을 위해 하나님이 움직여 나오시는 것을 모르고 잠만 자고 있습니다. 자기의 자녀를 사랑하며 살고 있으되 그런 인간들을 바라보며 눈물짓는 하나님이 계신 것을 몰랐습니다. 인간은 평화스러운 가정, 자유스러운 가정을 노래하였지만 하나님은 눈물을 흘리며 나오셨습니다. ‘너희는 나의 아들딸인데 원수의 가정에 들어가 평화를 노래하는구나. 원수의 제물이 되어 수고하는구나.’ 하며 눈물지으셨던 것입니다. 철천지원수인 사탄의 품에 안겨 갈 길을 모르고 자기의 자식을 품고 사는 무리들을 바라볼 때 미칠 것 같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누가 알았던고?
하나님이 원수 앞에 보이고 싶은 것은 무엇이뇨? 당신께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사랑하는 딸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역사노정의 어떠한 사람 이상 사랑의 심정을 품고 아버지와 아들의 인연으로 혼연일체가 된 인간의 모습을 사탄 앞에 자랑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하나님의 소원은 창세 이후 오늘날까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온 세계 인류는 하나님의 아들딸로서 자유와 평화가 가득 찬 행복의 동산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신권옹호와 신인평등을 노래하며 즐겁게 살아야 할 것이었는데, 지금 탄식과 절망 가운데에서 허덕이고 있습니다. 소망의 주체이신 하나님을 가로막고 있는 원수, 양심의 길을 혼란시키는 그 원수에게 사로잡혀 허덕이고 있습니다.
말없이 참을 찾아 나오고 묵묵히 선을 찾아 나온 우리의 선조들은 생애를 통하여 일념으로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는 소망의 한 날을 고대하였거늘, 끝날이라고 하는 이때에까지 그 한 날을 맞지 못했습니다. 그 한 날을 이루실 분을 만나지 못하고 모시지 못한다면 인류는 어떻게 될 것이뇨? 이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새로이 각성해야 되겠습니다. 새로운 각오와 결의를 해야 하겠습니다. 분하고 원통한 하나님이 계시고, 처량하고 불쌍한 우리의 형제가 있으며, 하나님이 이루시려던 하나의 주권과 이념을 세우지 못한 원통함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도를 찾아 나아가는 사람들은 모두 가정을 갖지 못했습니다. 모두 나그네요, 벌거숭이였습니다. 불쌍한 무리였습니다. 어디 가서 하룻밤도 편안히 잘 수조차 없는 길을 걸어나온 사람들이 소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나온 사람들입니다. 원통, 원통한 일입니다.
옛날의 노아도 원통했고, 아브라함도 원통했습니다. 또한 곡절은 모르고 사정은 모르지만 그 곡절과 사정의 대상자로 택함을 받은 자들 역시 원통한 노정을 걸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한다는 일념으로 나아가던 야곱도 하란을 향하여 갈 때 돌 베개를 베고 눈물짓는 노정을 거쳤습니다. 원통한 일입니다. 모세도 마찬가지입니다. 호화찬란한 외적인 모든 것을 갖춘 바로 궁중의 제반 조건이 그의 심정을 평화롭게 해 줄 수 없었고, 행복하고 만족스럽게 해 줄 수 없었습니다. 그가 처한 자리는 원수의 자리였습니다. 때문에 일편단심으로 하늘 앞에 무릎을 꿇고 남모르는 눈물을 지으며 기도를 그치지 않았던 모세였음을 여러분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모세는 하늘을 향한 마음이 간절해지고 복받쳐 올라 마침내는 궁중을 박차고 나섰습니다. 하늘이 허락할 때를 고대하던 모세는 세상을 헤아릴 줄 알고 전후를 가릴 수 있는 연령, 40세가 되던 해에 이스라엘 민족을 향하여 궁중을 박차고 나섰던 것입니다. 그가 간 길은 어떤 길이었는가? 삼시 호화롭게 먹고 호화찬란한 옷을 입던 그가 단벌 옷과 단벌 신발로 일편단심, 목적을 향한 빛나는 충절의 마음에 사무쳐 고역에 시달리는 불쌍한 이스라엘 민족을 찾아들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모세의 발걸음은 비장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러한 모세의 40평생도 원통하지만 찾아간 이스라엘 민족으로부터 배반을 받은 것은 더 원통한 일입니다. 그리하여 원수의 나라 애급에도 몸을 두지 못하고 미디안 광야로 나가던 모세의 서러움을 우리는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환경이 변하고 자기의 몸이 처량하고 보잘것없게 되었을망정 그의 일편단심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자신이 가는 길이 역사적인 제물의 길이요, 도인들이 가다 남긴 역사적인 노정임을 안 모세는 역사적인 길을 가는 민족의 친구가 되기 위해 애썼고, 미래의 수많은 인간들이 가야 할 도의 노정을 개척하는 책임자의 입장에서 40년 동안 양 치는 목자 생활을 했습니다. 바라보이는 초원지대를 가나안 땅으로 보고, 풀을 뜯고 있는 양떼를 이스라엘 민족으로 생각하며 양을 붙안고 울던 모세였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 땅을 붙들고, 양떼를 붙안고 ‘하나님이시여!’ 하며 눈물짓는 모세를 바라보신 하나님은 모세의 그 심정의 터전이 축복해 줄 수 있게 되었기에,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하시며 찾아 오셨던 것입니다. 불쌍한 자리에 있었으나 간절한 마음에 사무쳐 외치는 모세의 심정이었기에 하나님과 인연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하는 길이 이렇게 원통스러운 길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았습니다. 이 길은 비단 모세만이 간 길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민족사를 수습하고 하나님의 한을 풀기 위하여 4천년의 결실체로, 메시아로 보내졌던 예수의 마음은 일편으로 기뻤으나 이 땅 위에 온 그의 처지는 슬프고 원통했었습니다. 그는 어찌하여 남과 같은 민족을 갖지 못하였던고? 어찌하여 권세를 가지고 태어나지 못했는고? 그것은 필연적인 탕감의 노정을 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아시는 하나님은 분하지만 예수를 십자가에 보내 놓고 성신을 이 땅 위에 한 중심으로 보내셨습니다. 땅은 어머니의 상징이니 승천한 예수 대신 어머니 신이 와야 합니다. 그래서 이 땅에 와서 제단을 쌓고 눈물을 뿌리며 인간과 모자의 인연을 갖추어 나온 것이 지금까지의 기독교 역사입니다. 억울하고 분한 일입니다. 억울하고 분한 일이에요.
소망의 한 날을 고대하며 6천년 역사노정에서 고아처럼, 나그네처럼 남루한 옷을 입고 허덕이는 무리들이 기독교 신자입니다. 어느 한 날도 편안한 잠을 잘 수 없는 무리들이 기독교 신자입니다.
내가 잘나고 네가 못났다고 하던 이스라엘 민족은 광야에서 까마귀 밥이 되고 독수리 밥이 되었습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오늘날 우리는 각성을 해야 합니다. 각성하여 원통스러운 역사상의 사실을 우리가 우리 시대에 해원해 봅시다. 모든 정력을 다 기울입시다. 민주사회를 논의하고, 신이 있다고 주장하는 세계의 사조 앞에 우리는 제물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 시대에서 하늘의 복을 받을 자는 누구인가? 안락하게 잠을 자는 자가 아닙니다. 하늘이 아직까지 안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 할진 대 우리가 여기서 안식할 수 없습니다. 이 세계 앞에 원통한 길을 가는 무리는 이 세계를 지배할 수 있습니다. 원통해해야 합니다. 누구를 위하여 원통해해야 되느냐? 내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원통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끝날은 원한을 푸는 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시고 싶은 그 사랑의 심정을 나눠 주지 못해서 원통해하시고, 당신께서 세우고자 하시는 백성을 세우지 못해서 원통해 하시고, 당신께서 찾고자 하시는 가정을 찾지 못해서 원통해하십니다. 우리는 이토록 원통해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사무치는 심정으로 세계를 향하여 봉화를 들고 나설 수 있는 무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무리가 나타나기를 하나님은 바라십니다.
역사는 동서가 하나의 종결점을 짓기 위해 부딪쳐 돌아가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쓰러지지 않고 처참한 소용돌이의 중심에서 솟구쳐 나와 ‘하나님이여! 당신의 슬픔과 고통과 한의 노정에 저를 보내 주시옵소서.’라고 할 수 있는 무리, 광야에서 양을 치던 모세와 같은 절개를 가진 무리가 나오기를 하나님은 고대하십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께 충성하던 아브라함과 같은 사람의 무리, 하란에서 21년 동안 하나님을 대해 준비하던 야곱과 같은 사람의 무리를 하나님은 고대하신다는 것입니다. 필시 그러한 무리가 나와야 합니다.
여러분, 오늘 눈물짓는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피땀을 흘리는 한이 있다 할지라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세계의 운명은 바야흐로 생사를 귀결짓는 때에 와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여러분은 어디로 가겠습니까? 바로 궁중에 머무르겠습니까? 우리가 사는 이곳은 우리의 고향이 아닙니다. 필시 가야 할 본향이 있습니다. 우리의 선조, 아담 해와로부터 원수까지도 ‘할렐루야!’ 할 수 있는 본향이 있습니다. 그 본향으로 가야 할 길이 남아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걸 남기고 가는 자는 망합니다. 망해요.
여러분! 자기 자신을 명시(明示)하십시오. 자기 자신을 재분석하십시오. 자기 자신을 주시하여 내 피는 누구의 피며, 내 고깃덩어리는 누구의 고깃덩어리이며, 내 뼈는 누구의 뼈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손아, 너는 하나님께서 붙들 손이다. 몸뚱이야, 네가 쓰러지는 날에 만민은 조롱할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붙들고 눈물지으실 것이다.’라고 자처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어야 합니다. 몸뚱이가 찢기고 매를 맞고 철창에 갇히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님께서 철창 사이로 손을 내미시어 ‘내 아들아!’ 하실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역사적인 사조를 넘기 원한다 할진대 필시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때는 옵니다. 때를 기다리는 우리는 바쁘지만 때를 찾아 나오시는 하나님은 더욱 바쁘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참다 못해 지쳐 쓰러지는 사람보다도 그러한 자리를 해결해 주지 못하고 참음의 자리에 계셔야 하는 하나님의 마음이 더욱 초조하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 말을 여기 서 있는 젊은 사람의 말로만 알지 말고 논리적인 논거를 세워 그런 면에 입각하여 비판하고 판단해 보십시오. 지금까지의 것과 다른 그 무엇이 있어야 인류는 다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무엇이 없으면 망하게 됩니다. 살고 싶은 대로 살아 보십시오. 얼렁뚱땅 해 가지고 행복의 터전을 갖춘 듯이 살아 보란 말입니다. 망합니다. 아브라함이 취하여 하나님 앞에 바칠 제물의 사체 위에 난데없이 솔개가 내릴 줄 누가 알았습니까? 영원무궁한 평화의 왕궁을 건설하여 산다는 것이 쉬운 일인 줄 압니까?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지금의 때가 그러한 세계를 이루어야 하는 때이니, 모세가 몸단장을 하고, 야곱이 몸단장을 하고, 아브라함이 몸단장을 하고, 예수가 몸단장을 하던 것같이 우리도 몸단장을 하고 나서야 하겠습니다. 무엇을 위하여? 내 나라를 위해서가 아니라 세계를 위하여, 나아가 하늘을 위하여 몸단장을 해야 하겠습니다.
신랑을 맞이해야 할 신부들이여! 그대들은 안팎으로 모든 장비를 갖추어 단장을 해야 합니다. 단장하는 데는 물질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심정으로 단장을 해야 합니다. 인류의 심정과 하나님의 심정과 주님의 심정으로 단장해야 합니다. 하늘의 심정이 나에게 동기가 되어 있었고, 땅의 심정이 나에게 결과가 되어 있으니 나는 알파와 오메가적 심정의 결실체로서 단장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멀리 바라보시던 역사를 당겨 가까이서 바라볼 수 있고, 소망을 찾던 인류가 지금까지의 어떠한 주의나 사상을 다 버리고 ‘당신은 세계를 주고도 바꿀 수 없습니다.’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이 땅 위에 나타나지 않는 한 세계는 망합니다. 이건 공론이 아닙니다.
지금은 생사가 뒤넘이치는 최후의 때입니다. 하나님의 일선 도상에 서서 최후의 결판을 지어야 하고 승패를 결정지어야 할 때입니다. 즉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일선에 서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싸움은 어떤 싸움이뇨? 물질적, 외적인 싸움이 아닙니다. 마음의 싸움, 심정의 싸움입니다. 이 심정에는 원수가 많습니다. 외적으로 나타난 세상의 모든 일이 원수입니다.
사탄을 대하여 책망하고 싶고, 참소하고 싶고, 저주하고 싶고, 시험하고 싶은 모든 조건을 걸어 싸울 수 있는 기간, 120년 동안 노아는 수많은 원수의 무리와 혈혈단신으로 싸웠습니다. 수많은 원수를 대해 혼자 싸웠어요. 창을 가지고 싸운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싸웠습니다. 원수들의 창에 몸을 맞은 것이 아니라 마음을 맞았습니다. 아담 이후 1,600년 동안 상처 입어 오신 하나님을 대신하여 마음에 상처를 입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가 하나님께서 동정하실 수 있는 입장에 섰던 연고로 하나님은 그를 찾으셨습니다. 그런 후에도 1,600년 동안 수고하신 하나님의 일선을 적에게 빼앗기지 않았기에, 그 방주의 고지를 사탄에게 빼앗기지 않았기에, 하나님은 그것을 중심삼고 천사들을 동원하여 홍수심판을 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리하여 근근이 하나님만이 취하실 수 있는 최일선으로 노아의 방주를 세우셨는데, 거기에 다시 사탄의 일선이 생겼으니 하나님의 심정이 어떠하셨겠습니까? 1,600년 동안 억울하게 공격당하고 사탄의 화살을 받아야 했던 사실들을 모두 정리하여, 하나의 승리적인 일선을 갖추어 평화의 동산을 세워야 할 노아의 가정에 다시 사탄의 일선이 생겨난 것은 너무도 원통한 일입니다.
함의 실수는 개인적인 실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실수요, 노아의 분함은 개인적인 분함이 아니라 천주적인 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함은 몰랐던 것입니다. 일 개인으로 택해 세운 노아도 자신이 그렇게 크게 쓰이고, 그렇게 큰 가치의 존재임을 몰랐습니다. 땅을 다 심판하여 수많은 민족을 고기 밥으로 쓸어 넣으시고도 노아의 여덟 식구만큼은 살리신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그들은 몰랐던 것입니다. 노아의 여덟 식구가 있는 곳은 하나님의 사랑의 일선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일선이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함의 실수가 그토록 큰 한을 가져왔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일선이 침범을 받고 나니 하나님은 침범받은 그곳에 계실 수 없기에 그들을 다 사탄에게 내주고 400년 동안 그 민족을 붙들고 억울함을 당하셨습니다.
그리하여 2천년 만에 아브라함을 찾아 세우셨습니다. 근근이 세운 하나님의 일선에 하나님 대신 인간을 세워 인간으로 하여금 사탄을 굴복시키게 하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세우시고 이어 이삭, 야곱 3대를 거쳐 근근이 인간을 대한 작전 개시를 할 수 있는 발판을 세워 나오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비로소 야곱 때에 이르러 땅 위에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의 가정을 움직일 수 있는 참모를 세운 것입니다. 야곱가정이 하나님의 일선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개인을 거치고 가정을 거쳐 민족에 이르러 찾아 세운 모세는 누구며, 이스라엘 민족은 어떤 민족이뇨? 모세는 하나님의 일선의 참모총장이요, 모세를 따르던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일선을 지켜야 할 정병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은 행군 나팔을 울리며 싸우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듣지 않았고, 간곡히 외치는 참모총장 모세의 말을 거부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슬픔의 제물로 쓸쓸한 광야에 묻히고 만 억울한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민족을 찾아 세우신 하나님은 사탄을 민족에게 맡겨 놓고 바라보기만 하고 당신은 싸움을 하지 않으려 하셨습니다. 그런데 민족이 책임을 다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가담하여 다시 역사를 끌고 나오시는 것입니다. 사탄과의 싸움의 일선에 하나님이 가담하지 않고 인간들끼리 모여서 사탄 도성을 무찔러 하나의 세계를 이루게 하려 하신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이 같이하신다고 해서 그의 권한을 가지고 할 것이 아니라, 제일 불쌍한 민족의 입장에 서야 했습니다. 민족을 지도하려면 그 민족의 가장 불쌍한 입장에 서야 합니다. 사탄세계를 지도하려면 사탄세계의 끝에 서야 돼요. 하나님은 모세를 민족의 책임자로 세우시고 그가 가장 불쌍한 자리에서 당신의 심정을 나타내기를 기대하셨던 것입니다.
1,600년 역사를 끌고 나와 때를 맞이한 하나님은 비로소 노아를 세우셨습니다. 다음에는 가정을 세우고 민족을 세운 후 이스라엘 나라를 세우셨습니다. 그렇게 나오면서 하나님은 개인 일선을 잃어버리지 않고, 가정 일선을 잃어버리지 않고, 민족 일선을 잃어버리지 않고, 국가 일선을 잃어버리지 않은 위치에 계셔야 했습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은 가중된 고통을 당해 나오시는 것입니다. 민족이 책임하지 못할 때, 하나님 앞에는 가정이 책임하지 못한 것이 플러스(+) 되고, 개인이 책임하지 못한 것이 플러스(+)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를 이 땅 위에 보내신 것은 땅 위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일선을 책임지고 영적인 싸움을 실체적인 싸움으로 벌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땅 위의 인간들이 예수를 죽임으로 예수와 성신이 갈라져서 지금까지 영적 싸움이 계속되고 거기다가 육의 싸움까지 가중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육을 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육신 속에 사탄이 꿈틀거리고 있으니 치라는 거예요. 원통한 일입니다.
그 이후 2천년이 경과하여 끝날이 되었습니다. 기독교 신자를 동원하여 하나님이 움직일 수 있는 새로운 제2이스라엘을 세우고 새로운 시대를 향하여 넘어가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예수의 말씀을 통하여 천국을 건설하는 하늘 편 선민이 되어야 했는데 그 시대를 놓쳐 버렸습니다. 그래서 국가의 고통과 민족의 고통과 가정의 고통과 개인의 고통을 하나님과 예수와 성신, 즉 삼위신이 지고 계신 것입니다. 지금까지 삼위신이 이 땅 위의 억울한 자의 아버지요, 몰림받는 무리의 주인으로서 나오셨으니 이 얼마나 불쌍하고 원통한 사실입니까?
여러분은 아버지께 복을 바라는데 먼저 그 아버지가 어떠한 아버지인지 알아야 하겠고, 믿고 있는 주님이 어떠한 주님인지 알아야 하겠고, 믿고 있는 성신이 어떠한 성신인지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것을 안다면 자기 손에 상처가 있다 해서 ‘하나님이여, 이것을 고쳐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없는 것이요, 매를 맞아 쓰러진다 할지라도 하나님께 부탁의 기도를 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세계적인 종말시대에 하나님은 다시 역사적인 운명과 더불어 승리의 기준을 세우기 위한 최후의 천적인 일선을 찾아 세워야 합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세계 인류 앞에 봉화를 들어야 하겠습니다. ‘전세계에 널려 있는 기독교인들이여! 도인들이여! 단결하라. 양심 있는 사람은 동원되라.’는 플래카드를 내걸어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정병으로 일선의 고지에 올라가 사탄과 최후의 결전장에 서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고맙고 감사한 일입니다. 일면 분하고 억울하고 원통하지만, 그것을 책임지고 원수를 갚을 수 있는 때가 온 것은 고마운 일입니다. 지금이 바로 그런 때입니다. 역사적으로 그러한 때라는 것입니다.
하늘은 여러분 개개인에게 ‘아무개야, 너는 제2이스라엘 천민(天民)으로서 이 땅 위의 원수를 점령하여 승리의 땅과 승리의 백성을 갖고 있느냐?’ 고 물을 것입니다. 지금이 그런 때입니다. 내가 잘났다 네가 못났다고 싸움하는 그런 때가 아니에요. 전세계의 종교인이 동원되어 이스라엘의 대열을 찾아야 할 때입니다.
그러려면 어떤 관이 서 있어야 되느냐? 아까 말한 대로 나는 누구의 것이며 누구를 위하여 있느뇨? 나의 눈, 나의 모든 감각기관은 누구를 위해 있느뇨? 몸뚱이는 원수요, 마음은 하늘입니다. 여러분은 선악의 일선인 것입니다. 그것이 종적으로 개인으로부터 가정, 사회, 국가, 세계까지 전개되어 나왔습니다. 이제는 여러분이 이렇게 종적으로 내려올 것을 횡적으로 전개시켜 옛날의 노아와 같은 자리에 서야 하고, 아브라함과 같은 자리에 서야 하고, 야곱과 같은 자리에 서야 하고, 모세와 여호수아와 갈렙과 같은 자리에 서야 하고, 더 나아가서 예수와 같은 자리에 서야 할 때입니다. 여러분, 그러한 자리에 서겠습니까? 그런 때가 왔습니다. 틀림없어요. 여러분, 단단히 결심해야 되겠습니다. 이 말은 여기 서 있는 사람의 말이 아닙니다.
많은 한을 품고 나아왔던 한국 민족! 이 민족은 ‘굶주려라. 헐벗어라. 나그네가 되라.’ 한 성경 말씀대로 다 했습니다. 옛날 하늘을 위해 나아가던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이 종말 시기에 세계적인 이스라엘을 건국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 할진대, 이 최후의 시대에 몰림받고 쫓김받는 제물적인 국가가 나타나야 됩니다. 굶주림의 울음소리가 들려야 할 때가 왔습니다. 조갈증에 한숨을 짓고 우는 소리가 들려야 할 때가 왔습니다. 머물 곳이 없는 나그네의 신세가 된 민족이 나와야 합니다. 지금 우리 민족이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나그네입니다. 그러니까 동냥을 하여 먹어야지 별 수 있어요? 굶주려 병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갇혀 있습니다. 지역적으로 그래요.
천상에 하나님이 계셔 이러한 것을 본다 할진대, 시대적인 기운에 따라 이러한 민족을 세계 앞에 하늘의 정병으로 세우실 것입니다. 이러한 운명 앞에 선 삼천만 민족은 어떠한 모습이 되어야 할 것이뇨? 지극히 작은 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피어린 심정을 붙들고 눈물 흘리며 하나님의 심정과 더불어 움직이는 불쌍한 효자의 모습, 효녀의 모습, 충신의 모습이 되어 하나님이 붙안고 통곡할 수 있는 민족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이 민족은 살길이 있습니다.
여러분! 낙심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헐벗는 것은 우리를 위해서가 아니요, 우리가 굶주리는 것도 우리를 위해서가 아니요, 우리가 목마른 입장에 있는 것도 우리를 위해서가 아니요, 나그네가 된 것도 우리를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병든 것도 우리를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세계를 위해서였습니다. 이러한 입장에 있는 이 민족에게 단 하나의 길이 있나니, 못 먹는다고 울지 맙시다. 헐벗었다고 울지 맙시다. 병들었다고 한숨짓지 말고, 갇히었다고 낙심하지 맙시다. 6천년 역사노정에서 하나님의 뜻과 선을 찾아 나왔던 사람들의 발걸음이 그랬고, 타락한 그날부터 지금까지 하나님 역시 이러한 역사를 거쳐오며 수고하셨습니다. 그러니 이 삼천만 민족은 6천년 역사노정 위에 깔린 하나님의 슬픈 발자국을 제거시키고 위로해 드릴 수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민족적으로 하나님을 붙들고, 우리 아버지의 나라를 위하여, 우리 아버지께서 임재하실 길을 닦기 위하여, 우리 아버지께서 계실 집을 짓기 위하여, 우리 아버지께서 행차하실 국토를 단장하기 위하여 굶주리며 움직인다면 그 영광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굶주리고 목마른 그 사정을 가지고 아버지의 터전을 개척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이루 말할 수 없이 처량한 나그네의 모습일지라도 그 나그네 이상 고통의 길을 걸어 아들딸을 찾아오시는 아버지를 염려하며, 자기 일신의 처지를 잊어버리고 아버지를 위안하기 위하여 수고하는 무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썩어 들어가는 사망세계를 바라보시고 고통스러워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위로해 드리고 그 하나님의 아픔과 고통을 덜어 드릴 수 있는 여러분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 할진대는 절대로 망하지 않습니다.
통일 신도 여러분! 여기서 말하는 사람은 어느 한 교파를 주장하고 싶지 않습니다. 교파의 간판이 문제가 아닙니다. 잘생기고 못생긴 것이 문제가 아니요, 알고 모르는 유식과 무식이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단 하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드릴 예물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예물을 준비하기 위해 하나님 아버지의 굶주린 사정을 알고 눈물을 흘리며 굶주리는 자리에서도 하나님께 빵 한 조각을 대접할 줄 아는 여러분이 되고, 목마른 자리에서 마시고 싶은 한 모금의 물을 하나님께 대접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고, 나그네로서 한 벌밖에 없는 옷이라도 팔아서 하나님께 드릴 수 있고, 병석에서도 하나님의 고통을 대신하기 위해 허덕일 줄 아는 여러분이 되고, 갇히어 부자유스러운 환경에서도 하나님을 대신하여 고통받으려 하는 여러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이 민족을 찾아오실 것이로되 그 가운데서도 어떤 자를 찾아오시느뇨? 굶주린 자를 찾아오십니다. 먹고 춤추는 호화찬란한 자리에 있는 자의 아버지로 찾아오시는 것이 아니라 굶주린 자의 아버지로 찾아오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굶주리는 자가 되어야겠습니다. 목마른 자를 찾아오십니다. 이는 당신께서 그런 역사노정을 거쳐오셨기 때문입니다. 나그네를 찾아오십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나그네의 자리를 거쳐 나가야 합니다. 갇힌 자를 찾아오십니다. 병든 자를 찾아오십니다. 그러한 곳에 하나님의 심정이 머무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본심, 천정, 천심을 중심으로 인류애를 갖고 허덕이는 아버지이십니다.
나는 이 민족이 그러기를 원하고, 우리 교단이 그러기를 원하고, 우리 교인이 그러기를 원합니다. 한편으로 보면 잔인한 스승이요, 잔인한 책임자일는지 모르지만, 천적인 원칙으로 볼 때 여러분을 그러한 자리로 내몰아야 할 입장이기에, 이 책임을 못 하면 인류 모두에게 화가 돌아오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내모는 목적은 무엇이뇨? 나 하나 잘 살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천국 건설을 위한 노정에 있어서, 하나님의 일선 도상에서 승리의 정병으로서 개선가를 부르고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려드리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안 가면 하나님이 친히 가셔야 하기에 가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의 생명이 아깝다고 이 길을 돌아서는 자가 있다 할진대, 그는 순교하여 천상에 가 있는 수천만 하늘 식구들의 원수가 될 것입니다. 그들이 분풀이를 한다면 원수를 대하여 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서 내모는 자를 대하여 분풀이를 할 것입니다. 그러니 아니 갈래야 아니 갈 수 없는 길입니다. ‘나는 하늘의 제물로서 하나님 아버지의 품에 안겨서 하나님과 더불어 붉은 피를 뿌리고, 하나님의 일선에 선 정병으로서 동지들의 손을 붙들고 팔을 붙들고 몸을 붙안고 눈물을 짓고, 피를 보고 눈물지으면서 죽음의 자리라도 가겠다.’고 결심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는 세계를 지배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자신의 아버지로 모시고 하늘 앞에 충심을 다하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는 새로운 역사의 첫 페이지에 기록될 수 있는 사도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붉은 피는 우리도 모르는 가운데 자나 깨나 갈 길을 재촉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가야 할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요, 어차피 한 번은 생사의 문제를 해결지어야 할 존재입니다. 그러니 어디로 갈 것인가를 결정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백마고지의 치열한 전투가 높이 평가된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역사에 기록되어 길이길이 남아질 것입니다. 지금은 천국 건설을 위해 백마고지에서 쓰러졌던 장병들과 같은 제물이 필요한 때입니다. 여러분! 어차피 죽어 한 줌의 흙이 되어야 할 몸이요, 공동묘지의 몇 평을 채워야 할 몸뚱이입니다.
역사의 한을 몸에 지니고 있는 여러분들이 남아진 최후의 역사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역사를 펼쳐야 하겠습니다. 하늘이 길이길이 품고 간직해온 천적인 투쟁 역사의 위업을 우리가 상속 받아 이제까지 아흔 아홉 번의 싸움에서 실패했다 할지라도 한 번 남은 이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어야 하겠습니다. 지금까지의 패배의 원한을 씻어 버리고, 역사적인 승리를 자랑하는 사탄을 때려잡아 항복을 받아서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려드려야 하겠습니다. 그러한 여러분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이 대하고 있는 환경이 싸움터입니다. 여러분이 먹는 밥 한술도, 내가 입는 옷 한 벌도, 여러분이 보고 있는 천하 만상 모든 것도 싸움의 조건에 걸려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여러분의 손길을 통해 싸움의 탄식으로부터 해원 받을 한 날을 고대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부디 하나님의 일선 정병으로서의 위신을 세우고 승전병이 되어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여러분이 되어 주시기를 부탁합니다.
아버님! 가라 하신 곳을 찾아왔습니다. 오다 보니 최후의 싸움이 남아 있는 것을 알게 되었사옵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 복지를 기쁨으로 바라보며 나아가던 이스라엘 민족 앞에 요단강이 가로놓였듯이 저희 앞길에도 최후의 싸움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때를 맞이하여 한 지역을 향해 가라 하는 명령을 받고 소망의 터전을 향하던 그 무리 앞에 요단강을 건너기 위한 3일 투쟁노정이 있었던 것을 알았사옵니다.
오늘날까지 면면히 내려온 처참한 역사의 핏줄기가 오늘 저희들에게서 승리의 것으로 거두어져야 할 것을 아옵니다. 예수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흘린 눈물이 거두어져 새로운 겟세마네 동산이 되고, 예수가 골고다에서 흘린 피가 승리의 피로 거두어져 세계적인 골고다가 되어야 할 것을 저희는 알았사옵니다.
이 시간은 최후의 특명을 받아 비장한 각오를 가지고 아버지 하나님의 보좌를 향하여 엄숙히 발걸음을 내디뎌야 하는 심각한 순간임을 아옵니다. 저희의 몸과 마음이 저희 자신들의 것이 아님을 알았사옵니다. 저희들이 누구의 것이며 누구를 위하여 이 자리에 있겠사옵니까?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를 위하여 있사옵니다. 저희의 보급지는 땅이 아닌 것을 알았사옵니다. 몸의 보급지는 사방성을 갖추고 있으나, 마음의 보급지는 곤궁과 슬픔과 비애인 것을 알았사옵니다. 이것을 뚫고 자리잡지 않으면 안 될 최후의 성벽에 당도하여 최후의 돌격 명령을 기다려야 할 순간인 것을 알았사오니, 이 순간에 저희가 꽃을 피우고 쓰러지겠다는 비장한 각오와 맹세와 신념을 갖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날의 외침이 이들에게 심판의 조건이 될까 봐 두렵사옵니다. 엘리야의 기도가 참소당했던 것처럼 이날의 호소가 이들의 노정에 심판의 조건이 될까 봐 두렵사옵니다.
뜻을 배반하여 슬픈 역사노정에 슬픔을 더욱 가하였던 자들을 치시는 아버지를 두려워할 줄 아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살이 깎이고 뼈가 부러지는 한이 있다 할지라도 작정한 결의가 변치 않고 최후까지 남아 질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불변의 중심을 위해 이 몸 마음 모두 바쳐진다면 무슨 한이 있겠사옵나이까?
천지가 자리를 잡고 안식하는 터전이 아버지의 보좌인 동시에 저희의 몸과 마음이 안식할 터전임을 알았사옵니다. 아버지가 저희를 붙들지 못하고 저희가 아버지를 붙들지 못하는 곳에는 사탄이 있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이제 저희는 그 사탄을 굴복시켜야 하겠사옵니다. 아버지를 중심삼고 저희의 몸과 마음이 평화의 세계, 승리의 세계를 향하여 출발하게 하여 주시옵고, 그 세계가 이루어지는 날을 맞아 아버지의 영광을 노래할 수 있는 자녀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옵니다.
자나 깨나 먹으나 굶으나 하나님의 일선을 지켜야 할 정병임을 잊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굶주리고 목마르고 병든 나그네와 같은 신세라 할지라도 서로가 붙안고 눈물지으며 위로하고 나누어 줄 줄 아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이들이 하나되어 아버지를 향하여 맹세하는 무리들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나이다.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시옵고, 권고하신 뜻이 이들에게서 결실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니다. 아멘.
메시아가 등장할 때까지의 내적 고통을 모르면 그 메시아와는 상관없게 됩니다.
예수님은 면목이 없어서 메시아로서 하나님을 대하여 기도할 수 없으셨습니다. 그는 배반하는 민족의 일원(一員)으로 사죄의 기도를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탄의 침범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만일 사탄의 침범을 받게 되면 온전한 메시아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서지 못하고 이스라엘 민족의 한 아들로서 돌아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주로 오셨으나 이스라엘 민족의 한 아들로서 돌아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주로 오셨으나 이스라엘 민족을 대신한 제물로 일하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메시아의 입장으로서 떳떳했었다면 부활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땅을 바라보는 예수님은 비장했습니다. 그러므로 사탄 앞에 참소당하시던 예수님이 얼마나 분하셨겠습니까!
‘나의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신 것을 보면 예수님은 자신의 뜻이 있으셨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뜻을 마음속에 품고 이스라엘 민족을 찾아가 그들의 사정에 맞추어 가면서 싸우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뜻을 이루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부모·부부·형제·자녀의 사랑을 통하여 갈라진 세계를 하나로 세우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죄인 된 이스라엘을 대신한 예수님은 역사적인 회개의 주인공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역사적인 제물이요, 시대적인 제물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심정의 십자가가 막혀 있습니다. 예수님은 역사적인 인연을 맺기 위하여 반대하는 무리를 찾아다니셨습니다.
야곱, 모세, 세례 요한, 예수는 모두 광야생활을 거쳤습니다. 싸움은 언제나 제일 어려운 곳에서 벌어집니다.
여러분 모두는 자기 자신이 모든 선열들을 대신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들은 섭리노정의 중대한 전환기에 처해 있습니다. 또 과거·현재·미래를 연락 지을 수 있는 자리에 놓여 있습니다. 지금까지 기나긴 역사노정이 있었고, 오늘날 지구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나아가서는 무한한 영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모두 통틀어 볼 때에 하나님께서 기쁘게 취하실 수 있는 것이 있느냐? 그 어느것 하나 하나님께서 기쁘게 취하실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아들딸을 찾고 계시며, 또 갖고 싶어하십니다. 지금까지는 하나님의 아들딸이 못 되었으나 이제 여러분은 하나님의 아들딸로 설 수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복된 소식입니다. 여러분이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이 찾고 싶어하시고 갖고 싶어하시던 그런 아들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이제 누구의 것이냐? 변할 수 없는 아버지의 것입니다. 그러니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뜻을 향하여 가야 합니다. 나를 길러 주시기 위해 6천 년 동안 수고해 나오신 아버지가 계시다는 것을 인식하면 할수록 여러분은 영원한 심정의 상속자가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대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 스승과도 여러분이 그런 길을 감으로써만 다시 만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 땅 위에 사람은 많지만 어느 나라에도 하나님의 심정을 알고 있는 아들딸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여러분을 통하여 섭리를 종결짓겠다는 것입니다. 또 여러분을 통하여 사탄을 격퇴시키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버지의 아들이요 딸이니 곧 이 세계의 아들이요 딸입니다. 그러나 먼저는 이 민족을 대신한 아들딸이니 각자 맡겨진 지역에 나가 ‘아버지의 아들딸이 여기 왔사오니 이곳에 심정의 팻말을 꽂을 수 있는 일을 맡겨 주시옵소서.’ 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혼자 있다고 해서 혼자라고 생각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일할 때나 밥먹을 때나 잘 때나 언제나 아버지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을 느껴야 합니다.
원치 않는 노정을 걷게 하시는 아버지의 심정을 느끼며 여러분 자신이 아버지의 염려를 남기지 않기 위해 언제나 민망한 생각을 갖고 행동한다면 어디를 가도 좋습니다. 아버지는 절대로 여러분을 망하는 자리로 이끌지 않으십니다. 여러분은 뜻길을 가다가 죽는다 하더라도 천국에 가서는 대승리자가 될 것이고, 그것은 자손대(子孫代)에 계승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께서 굶주리고 헐벗고 배척당하시던 그 사정을 느끼며 아버지를 모시고 살면, 어떠한 곳으로 가더라도, 또 어떠한 어려움에 부딪치더라도 쓰러지지 않게 됩니다.
여러분의 목적은 사탄세계를 정복하는 것입니다. 어디를 가든지 사탄에게 져서는 안 됩니다. 과거·현재·미래를 통해 선함에 있어서나 인내에 있어서나 절대로 져서는 안 됩니다. 대개 죽음에 가까운 자리에서 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선을 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승리자가 되어야 합니다. 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땅의 방방곡곡 어디에 하나님의 아들딸이 있느냐? 없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세계의 아들딸입니다. 목표는 세계이지만 첫발판은 국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탄의 참소를 제거한 다음이라야 축복해 주십니다. 그렇게 될 때에는 한 고을이 아니라 하늘과 땅을 지배할 수 있는 아들딸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절대로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우리의 아버지는 모든 어려움을 거쳐 나오셨습니다. 여러분은 그 아버지를 안식의 동산으로 모셔야 됩니다. 우리가 계몽을 나가는 것도 아버지를 모시기 위한 것입니다. 이 세계가 아버지를 모실 수 있을 때까지 우리는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야만 효자 효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최일선에서부터 아들딸을 찾아 나오십니다. 끝에서부터 찾아 올라오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천민사상을 가지고 있는 교인을 필요로 하십니다. 여러분은 민족의 밑바닥에서부터 걸어야 합니다. 이 세계를 똑똑히 바라보십시오. 세계 정세는 하늘의 움직임과 더불어 돌아가니 이제 여러분은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여러분을 최후의 승리자로 만들기 위하여 3년을 기한으로 하여 이 길을 개척하고 계시며 여러분을 수련시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시게 될 때 하나님의 전체적 소망의 실체로 오셨습니다. 비록 태어난 곳이 마구간이었지만 그것은 역사 이래 처음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이제까지 수많은 아기가 태어났지만 예수님처럼 처량하게 탄생한 사람은 드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전체 뜻을 상속 받고 태어나셨습니다. 그러한 예수님을 지극히 귀하게 맞이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하나님은 역사적인 모든 한을 예수를 통하여 해원하려고 하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이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은 원통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에게 기쁨이 될 수 있는 동시에 슬픔이 될 수 있는 어마어마한 사명을 지닌 존재였습니다.
예수님은 온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분이었습니다. 천사도 강보에 싸여 말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찬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망을 중심삼고 찬양한 것입니다. 그러나 땅에서는 어느 누구도 하늘의 소망적인 입장에서 예수를 축복하지 못했습니다. 동방박사도 그러했고, 안나도 그러했고, 시몬도 그러했습니다. 하늘이 기뻐하면 땅도 기뻐하고, 하늘이 슬퍼하면 땅도 슬퍼해야 할 텐데 땅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요셉이나 마리아도 예수님의 처량한 탄생에 대해 하늘 앞에 죄송하게 느끼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탄생 때부터 목적하던 바의 실체로서 축복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는 동방박사, 목자, 안나, 시몬 대신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해 드려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오늘을 맞는 의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는 하나님의 목적도 있었지만 예수님 자신의 목적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뜻을 예수님에게 상속하는 것이었고, 예수님 자신의 목적은 자기 생애를 통하여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에게는 내적으로 4천년의 죄악 역사를 해원해야 할 사명이 있었고 외적으로도 이루어야 할 사명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적인 목적과 예수님의 생애의 목적을 이루어 드리고 축하해 드릴 수 있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그러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인류를 식구라 부르며 ‘다 이루었나이다.’라고 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을 이루지 못한 입장에서는 예수님께 완전한 축하를 드릴 수 있는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그 생의 한을 풀어 주는 자라야만 축하해 드릴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제 그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섭리적인 사명과 예수님의 생애의 목적을 맡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의 생애의 목적을 대신 이루어 가지고 하나님에게 축복해 달라고 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예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합니다. 이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완결 짓지 못한 그 사명을 완결 지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축하하더라도 아무런 의의가 없습니다. 때와 장소와 습관은 달라도 하나님의 목적과 예수님의 목적은 변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위해 예수님이 싸우다 가셨으니 여러분은 이것을 상속 받아야 합니다. 그 목적을 이루는 실체로 나타나야 여러분은 참부모를 찾을 수 있는 역사적인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참부모 앞에 실체를 갖춘 자녀들이 있었던들 인류역사가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세우고 싶어했던 그 사명을 대신 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역사적인 사명을 대신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오늘 중대한 약속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나가는 길은 예수 대신 나가는 길이라는 신념을 갖고 승리의 결실을 거두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을 대해서 바라셨던 하나님의 목적과 예수님 자신의 목적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행하면 여러분은 최후의 승리를 거둘 수 있습니다. 이것을 명심하고 나가 주기를 바랍니다.
<기 도> 이 삼천리 반도에 당신이 찾아오시기까지, 수고하신 역사노정에는 당신의 피와 땀과 눈물의 역사가 얼룩져 있는 것을 저희들은 아옵니다.
수많은 민족 가운데 불쌍한 이 한민족을 사랑하시는 아버지시여, 당신이 사랑하시는 그 심정을 만천하에 드러낼 수 있는 그 한 날이 어서 속히 오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남이 알지 못하는 가운데 이 민족을 택하시어 불쌍한 자리에 내몬 것도 당신의 크나큰 섭리의 뜻이 있어서임을 저희들이 아옵고, 당신을 만민 앞에 아버지로 모셔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을 잘 아옵니다.
슬프신 그 아버지가 우리의 아버지요, 고통받으신 그 아버지가 우리의 아버지요, 이 민족이 어려운 역사노정을 걸어 나올 적마다 피와 눈물을 머금고 쓰러지는 수많은 자식들을 붙들고 통곡하시던 그 아버지가 우리 아버지인 것을 알지 않으면 안 될 저희들인 것을 이 시간 다시 한번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은 친히 사랑과 생명의 손길을 연하시어 당신의 아들딸들을 찾아오셨사옵고, 개척자 중의 개척자, 개척의 왕으로서 친히 역사하셨사오나, 오늘 이 삼천만 민족은 당신을 모르고 있사옵니다. 당신 모실 날을 고대해야 할 민족이 되어야 할 것이온데 그러지를 못하고 있사옵니다.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옛날이나 지금이나 아버지의 뜻 앞에 불리움받은 민족이 시대 시대를 거쳐오면서 역사적인 오점을 남긴 것을 잘 알고 있사옵니다. 오늘 이 민족이 과거의 노정을 뉘우치면 뉘우칠수록 당신의 심정을 더 받들어야 할 터인데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자리에 있지 못한 것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불쌍한 이 민족을 찾아 주실 때까지의 당신의 수고가 크면 클수록 그것을 알고 있는 저희들은 당신 앞에 면목없는 모습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아버지, 불쌍한 이 민족 위에 생명의 인연을 맺은 이상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온 인류 앞에 불쌍한 민족이었던 것을 자랑할 수 있으며, 고통받은 민족이었던 것을 자랑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땅 위의 어떠한 무엇에 의지할 수 없었고 자랑할 수 없었던 이 민족이 하늘과 더불어 자랑할 수 있는 한 날이 어서 속히 임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여기에 모인 당신의 아들딸들이 이 뜻과 이 사명을 알았사오니, 이들을 통하여서 복귀의 노정을 개척하시옵소서. 저희의 피와 살이 떨어지고 헤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저희들 일대에 이 민족을 찾아오시기에 수고하신 아버지를 모셔 놓고 위로드릴 수 있는 안식의 한 날을 맞이하기 위해 산 제물이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오늘 저희들은 이 민족을 대신하고, 이 세계를 대신하고, 하늘과 땅을 대신하고, 도의 길을 가다가 쓰러진 수많은 영인(靈人)들을 대신한 자들이오니, 이 시간 새로이 각오하고 결의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당신의 심정과 더불어 노래해야 할 만물이요, 당신의 심정과 더불어 화동(和動)해야 할 모든 피조물이,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본연의 자리와 본연의 위치를 잃어버린 채 6천년이란 세월을 슬퍼하며 탄식해 왔음을 아옵니다.
이 시간까지도 당신께서는 복귀의 심정을 잃지 않으시고 슬픈 자리나 어려운 자리나 죽음의 자리에서도 소원성취의 한 날을 이루시기 위하여 싸워 나오셨고, 참아 나오셨고, 견뎌 나오신 것을 저희들이 아옵니다.
이제 아버지를 모시는 저희들이 마음으로부터 평화와 사랑과 기쁨의 동산을 건설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저희 앞에는 악한 사탄들이 많기에 환경적으로 그것이 허락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는 것을 아옵니다. 하오나 저희들은 마음으로부터 아버지를 모시어서 본연의 우리 조상들이 아버지 앞에 영광을 돌리고 기뻐하는 모습을 마음속에서부터 이루어 생활하는 가운데 환경 무대를 갖추고 온 천주까지 연결시키지 않으면 안 될 책임이 있는 것을 아옵니다. 오늘 여기에 참석한 저희들, 아버지, 친히 나타나시어 부르시고 명령하실 때 거리낌없이 반길 수 있는 자기 자신이 되어 있는가 스스로 살피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러한 아들딸들을 당신은 얼마나 그리워하셨사옵니까? 이런 아들딸들이 당신 앞에 머리 숙여 축복받기를 당신은 얼마나 고대하셨사옵니까?
오늘 저희가 진정 당신을 아버지로 모시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이 자리에 당신을 친히 모셔 놓고 온 하늘땅이 영광의 송영을 드리기에 합당할 수 있는 이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수고하신 아버지의 노고는 이루 헤아릴 수 없사옵니다. 그 뜻을 대신하여 지금까지 수많은 선조들이 왔었사오나 타락의 한을 청산하지 못한 채 역사의 한 장으로 사라졌사옵니다. 그들은 이 시간도 천상에서 땅 위의 보잘것없는 이 무리를 보고 해원성사의 한 날을 고대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저희들의 책임이 중한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오늘 저희들은 내 한 자신만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님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내 한 자신을 중심삼고 하늘과 땅이 연결되어 있고, 천상에 있는 선조와, 앞으로 올 후손과, 현재에 있는 식구들이 연결되어 있는 것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인류역사는 탕감복귀역사라 하였거늘, 오늘 저희들에게는 해원의 조건을 세워 놓고 탕감해 드려야 할 역사적인 책임이 남아 있는 것을 아옵니다. 오늘날 저희들이 잘못하면 하늘의 슬픔이 되고, 이 시대의 슬픔이 되고, 미래의 슬픔이 된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와 같은 입장은 아담 해와가 하나님 앞에 섰던 입장과 똑같은 것임을 저희들이 깨닫고, 금년부터는 자기 자신을 아버지 앞에 자증(自證)할 수 있어서 새로운 아버지의 뜻을 품은 자로서 아버지 앞에 바쳐지기에 부족함이 없는 아들딸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과거의 우리 선조들을 해원하고, 이 시대의 수많은 민족을 해원함으로써 후에 올 수많은 후손들을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딸로서 품어 주시기에 부족함이 없는 터전을 마련할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오늘 이 기간을 빛낼 수 있는 새로운 약속의 흔적과 터전을 마련해 드릴 수 있는 이 아침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 이 시간 남한 각지에 천 명 이상의 식구들이 널려 있습니다. 아버지, 이 시대에 자기 일신의 행복을 위하여서는 모든 것 다 버리고 싸우는 사람이 많사오나, 아버지의 안식의 한 날을 위하여서 모든 것 다 버리고 싸우는 사람은 적다는 것을 저희들은 아옵니다. 그러나 오늘 당신의 어린 아들딸들이 각지에 널려 그와 같이 싸우는 것은, 세계적인 사명을 종결지을 수 있는 이념을 펴시는 아버지의 애달픈 심정 앞에 가까이 서기 위해서입니다.
이 시간도 잠자리에서 엎드려 눈물짓는 식구들이 있습니까? 아버지,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외로운 것들을 이끌어 나오시던 아버지요, 그와 같은 자리에 같이하시는 아버지인 줄 알았사옵고 쓰러지려 할 때에 권고하시는 아버지인 줄 알았사옵기에, 아버지, 이 시간 같이하여 주실 것을 저희들은 믿습니다. 친히 인도하여 주시고 붙들어 주시옵소서.
저희가 감당해야 할 새로운 사명과 책임을 다하여 갈 곳 모르는 이 민족을 아버지 품으로 인도할 수 있는 개척자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사무친 한을 품고 있는 당신의 그 마음을 어느 한 부분이라도 해원해 드릴 수 있는 제사장의 책임을 진 당신의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당신의 아들딸들이 모인 이곳에, 아버지, 친히 나타나시어서 분부하여 주시옵고, 지켜 주시옵고, 강건하게 하여 주시옵고, 지혜롭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저 멀리 해외에서도 이 한 시간을 고대하면서 눈물짓고 기도하는 식구들이 있는 것을 당신이 아시오니, 목적하신 뜻을 성사하시어서 만민이 아버지 품에 품기어 당신의 생명을 중심삼은 혈족임을 자랑하며 찬양할 수 있는 날이 어서 속히 임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 여기에 모인 저희들은 새로운 각오와 결의를 갖고 이 한 날을 새 출발을 할 수 있는 약속의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남겨진 모든 뜻을 책임지기 위해 노력하겠사오니 맡겨 주시옵기를 부탁하옵니다. 모든 것을 저희 가운데서 성취하시옵소서.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말 씀> 우리가 금년 일년 동안 표어로 삼고 나가야 할 제목은 ‘우리는 아버지의 대신자가 되자’입니다. 또 이러한 제목을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지금까지도 물론 그랬지만, 앞으로 이 일년 동안은 특히 아버지의 대신자라는 것을 여러분들이 친히 체험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버지의 대신자라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상대 되는 것으로서 땅을 지으셨고, 자신을 대신한 실체대상으로 우리 인류의 조상을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본떠서 우리 인간을 지으셨고, 인간의 형상을 상징적으로 본떠서 먼저 만물을 지으신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은 크게 보면 한 덩어리요, 작게 보면 모두 하나님의 대신 존재로 지어져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대신 존재의 입장에 서기 위해서는 먼저 중심에 대해서 확실한 해명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대신 존재라면 하나님은 어떤 분이냐? 그리고 하나님과 나는 어떤 관계냐 하는 것을 해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는 본래 어떤 관계냐? 일체라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과 나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일체의 관계가 됩니다. 하늘이 머리라면 우리는 몸통이요, 하늘이 몸통이라면 우리는 지체입니다. 우리와 뗄래야 뗄 수 없는 입장에 계신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자리에 서야 할 우리 인간이 하나님과 일체가 되지 못한 입장에 선 것이 타락이며, 그러한 일체로서 살지 못한 것이 또한 타락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타락한 그날부터 하나님은 복귀의 뜻을 품고 지극한 선의 중심 가치를 모든 만상 앞에 나타낼 수 있는 존재를 고대하고 계시나, 그러한 대상 존재가 없는 것이 탄식의 요소가 되고 있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 자신과 마음으로나 몸으로나 뗄래야 뗄 수 없는 일체의 입장에 들어가게 하기 위하여 수많은 사랑하는 자녀들을 희생시켜 나오는 섭리를 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하나가 되는 데는 무엇이 하나가 되어야 할 것이냐? 첫째 소원이 하나가 되어야 하겠고, 둘째 사정이 하나가 되어야겠고, 셋째 심정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즉 하늘이 심정적으로 기뻐하면 나도 기뻐하고, 하늘이 슬퍼하면 나도 슬퍼하고, 하늘이 움직이면 나도 움직이고, 하늘이 정(靜)하면 나도 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심정으로부터 사정, 소원이 모두 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 인간이 하나님과의 심정과 사정과 소원의 일치점을 가졌더라면 우리에게는 슬픔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천지 만물을 지으실 때 어느 한 존재물도 슬픔을 목적으로 지은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기 때문에 그 지으신 목적도 선한 것입니다.
선은 만족과 행복과 희락을 개재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슬픔을 체휼할래야 체휼할 수 없게 됩니다. 그때에 우리가 고통과 어려움의 자리에 들어간다 할지라도, 그것이 좀더 깊은 아버지의 심정과 좀더 깊은 아버지의 사정과 좀더 깊은 아버지의 뜻을 일치시키는 조건은 될 수 있으되, 이탈시키는 조건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타락하지 않고 하나님의 심정과 하나님의 사정과 하나님의 소원과 일치점을 가졌더라면 하나님께서 전체의 목적을 위하여 움직이시고, 전체의 이념을 위하여 감지하시는 모든 것을 우리 인간이 느끼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되었다면 우리 개인이 살고 있는 생활권은 지극히 좁은 환경이라도 세계를 상대로 하늘과 땅을 대신한 자리에서 모든 것을 느끼면서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대하는 만물, 우리가 대하는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의 모든 감정은 하늘과 땅을 통하여 느껴질 수 있는 감정으로 연결되어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그런 곳에는 하나님의 지극히 높고 깊고 넓은 절대선만이 우리와 연결되어 움직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야 할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이것이 다 끊어졌습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은 하늘과 함께 할 수 있는 뜻이 무엇인지 몰랐고, 하늘과 더불어 살 수 있는 사정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우리 한 자신이 하늘과 더불어 영원히 노래할 수 있으며 하늘과 더불어 영원한 인연을 결정지을 수 있는 심정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는 입장에 떨어지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타락한 인간들은 소망을 품고 이념을 찾아 헤매지 않으면 안 될 입장이 되었는데 그 목적은 어디에 있느냐? 하나되는 데 있습니다. 더 나아가 대인관계에 있어서 사정을 통하고자 하는 그 목적도 어디에 있느냐? 하나되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참다운 선을 중심삼고 참다운 목적을 위하여 결의한 심정은 영원히 변할 수 없으며, 어느 누가 옮길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이런 결정적인 해결을 지을 수 있는 심정적인 기준이 잡혀졌던들 오늘 우리 자신들은 이런 어려운 생활, 허덕이는 생활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그 기준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수많은 인간들은 허덕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실정을 수습하여 하늘과 하나되지 않으면 안 될 책임과 사명이 인간에게 남아 있는 연고로, 우리 인간은 험난한 그 길을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입장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개척하여 하늘과 심정적으로 일치할 수 있는 그날까지 허덕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늘은 이런 입장에 놓여 있는 인간들을 그냥 내버려두었느냐? 그렇지 않았습니다. 본래는 하나님이 인간을 친아들딸로서 지었기 때문에 비록 인간이 타락하여 그 가치와 인연을 갖지 못하였어도,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이것을 다시 하나님이 본연의 심정 기준까지 끌어올려 그 가치와 인연을 맺게 하기 위하여 지금까지 수고해 나오셨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소망이 없었던 인간들 앞에 소망을 주기 위하여 하늘은 역사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날의 소망을 성경상에 나타내 놓았습니다. 다시 오시는 주님을 모실 수 있는 한 날의 소망과 새로운 역사적인 세계를 약속해 놓고 우리를 거기로 내몰고 있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민족이 서로 다른 환경에 처해 있더라도 최후에 가서는 하나의 이념과 하나의 소망의 세계로 향하도록 이끌어 나오시기에 하늘은 무한히 애쓰셨다는 걸 알아야 됩니다. 그뿐만 아니라 서로 전통이 다르고 국가와 국민성이 다르고, 환경이 다르고, 생활사정이 다른 것을 그대로 두시지 않고 수습하여 인간들이 서로 사정이 통할 수 있는 세계적인 환경을 개척하기 위해 지금까지 수고해 나왔습니다. 또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소망을 같이하고, 사정을 같이하고, 하늘과 땅과 하나님과 우리 인간들이 손에 손을 붙들고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자리까지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내몰아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차피 우리가 가야 할 최후의 길이 어디냐? 하나님과 하나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제자를 남겨 놓고 가야 할 입장에 있던 예수님도 강조한 것이 ‘하나되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되라! 그러면 먼저 누구하고 하나 되어야 할 것이뇨? 형제와 형제끼리 하나되라고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 내가 하나된 것같이 나와 저들이 하나되고 또 저들끼리 하나되기를 바랐던 것이 예수님의 소원이었습니다. 그것은 또 하나님의 소원이기도 하였습니다.
하나되어야 한다면 어디서부터 하나되어야 하겠습니까? 한 날의 생활에서만 하나되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은 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목표가 같습니다. 가는 길이 같다는 거예요. 다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태어난 그날부터 우리 인생이 가는 길은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생명을 지니고 인생행로를 허덕이며 가지만, 가는 목적지는 전부 다 한 곳입니다. 아버지로부터 출발했으니 가는 곳도 아버지께로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가는 데는 무엇을 하면서 가야 될 것이냐? 아버지의 대신자로서 아버지의 일을 하고, 아버지의 뜻을 세워 지으신 만물을 아버지 대신 사랑하면서 가야 합니다. 출발도 아버지로부터 했으니 종결도 아버지에게서 종결되도록 아버지와 하나의 심정으로 연결될 때까지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길을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출발도 아버지요, 끝도 아버지입니다. 그래서 알파요 오메가라 했습니다. 출발도 하나이니 끝도 하나여야 합니다. 이것은 사정이 통해야 되고, 소원이 같아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도저히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이와 같은 크나큰 뜻을 우리의 목전에 놓아두고, 세계적인 혼란 시기에 처해 있는 이 시대에 우리가 다시 한번 생각해야 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지어 놓은 본연의 중심 목표가 어디에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우리는 하나입니다. 하늘과 땅은 하나입니다. 둘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의 중심 앞에 죽든지 살든지 하나되지 않으면 안 될 필연적인 입장에 놓여 있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어떠한 사정과 어떠한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어떠한 목적이 있다 할진대,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뜻이 같고, 사정이 같고, 심정이 같아야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목적을 완전히 성사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들을 사정이 통할 수 있고 심정이 하나될 수 있는 소망의 동산으로 이끌어야 할 책임이 있다 할진대, 하나님과 하나되어야 할 입장에 선 인간에게 있어서도 뜻은 역시 하나여야 합니다. 둘이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뜻이자 내 뜻이요, 하나님의 사정이자 내 사정이요, 하나님의 심정이자 내 심정이라는 것을 여러분 자신이 체득하여 그러한 입장에 섰다고 자신하지 않는 한 대신자가 될 수 없습니다. 대신자가 되려면 반드시 하나가 되어야만 합니다. 하나되지 않으면 대신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타락한 우리 인간들이 가야 할 목표는 하나님과 하나 되는 것입니다. 하나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 무엇이냐 하면, 소망이 같아야 되고, 사정이 같아야 되고, 더 나아가서 심정적인 일치점을 갖추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타락된 우리 인간은 하나님과 일체를 이룰 수 없습니다.
여기 참석한 여러분들은 뜻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우리들이 가야할 뜻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오늘날 이 세계 인류가 가야 할 뜻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이 인류가 소망하고 가야 할 뜻이 어떤 것이며, 개개인이 품어야 할 뜻이 어떠한 것인가를 알았습니다. 또 어떠한 사정을 가져야 되는가를 알았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어떠한 심정을 가져야 되는가를 알았습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사정이 같을 수 있고, 소망이 같을 수 있고, 심정이 같을 수 있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나님이 친히 우리를 대하여 너는 내 아들딸이라고 인정하고, 우리 자신도 하나님의 아들딸이라고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는 하늘과 땅 앞에 지음받은 만물이 당신은 틀림없는 하늘의 아들이요 딸이라고 인정할 수 있는 그 자리까지 나아가야 됩니다. 그러기 전에는 우리가 하늘의 대신자로서 설 수 없습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과 하나되어야 하겠습니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요,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중심이요, 하나님은 나와 영원히 같이 할 수 있는 한 몸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느껴야 되겠습니다. 본래 인간은 하나님을 중심삼고 태어났기 때문에 하나님 자신은 우리 아버지인 동시에 그 아버지가 우리 인간의 조상으로 지은 아담 해와가 있었던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지금 타락한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사정을 알아 가지고 하나님을 찾아 나가는 과정에 놓여 있습니다. 아무리 잘 믿는 사람도 지금까지 하나님의 심정은 몰랐습니다. 아무리 잘 믿는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사정을 일면만 알았을 뿐입니다. 전체적인 사정은 몰랐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되 전체의 뜻은 몰랐습니다.
맨 나중에 남는 것은 하나님의 심정이거늘 이 심정의 자리까지 나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당신은 우리의 아버지요, 나는 당신의 아들이라고 할 수 있어야 됩니다. 타락한 인간이 그런 자리까지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참부모와 인연을 맺어야 합니다. 이 참부모의 인연을 맺어 주기 위해 오신 분이 예수와 성신입니다.
예수는 타락하지 아니한 인간시조 참아담의 대신자이며, 성신은 타락하지 아니한 그의 대상 존재로 오셔서, 소망을 같이하고, 사정을 같이하고,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자리까지 인간을 끌어올리기 위해서 수고하셨습니다. 지금까지 하늘의 역사는 부모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자리로 이끄는 역사였기 때문에 천사나 영계의 영인들이 협조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심정 문제를 걸고 나오게 될 때는 반드시 부모의 심정을 통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 타락된 우리 인간에게 남아 있기 때문에 이 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부모를 중심삼은 부자의 인연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정까지 연결시키기 위해서는 예수와 성신을 통하여 참부모의 심정을 거쳐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다년간 신앙생활을 했지만 예수님이 누군지 성신이 누군지 몰랐습니다. 예수와 성신은 인류의 참부모입니다. 우리는 이 참부모의 심정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심정의 자리까지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과 우리가 일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타락한 우리가 하나님과 일치되기 위해서는 참부모와 일치되어야 합니다. 또 참부모와 일치되기 위해서는 누구와 일치되어야 되느냐? 형제가 서로 일치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본래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으면 하나님과 일치가 되었을 것이고, 거기에서 태어난 아들딸은 하나님의 심정과 일치가 되고, 참부모의 심정과 일치가 되고, 참형제의 심정과 일치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타락됨으로 말미암아 거꿀잡이가 되었습니다.
참부모의 심정과 일치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참형제와 더불어 일치가 되고, 참형제와 일치가 되고 난 후에는 참가정과 참민족과 일치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인간 시조 아담 해와로부터 가정, 종족, 민족, 국가, 세계 인류가 퍼져 나간 것과 마찬가지로 다시 올라가는 입장에 서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그러한 입장에 있는 우리가 최후에 하나님과 하나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소망과 사정과 심정을 일치시켜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오늘날을 세계적인 소망의 때, 세계적인 사정의 때, 세계적인 심정의 때로서 전개시켜 나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많은 인류는 하나의 소망, 하나의 이념으로 뭉쳐야 됩니다. 또 하나의 사정으로써 통해야 됩니다. 더 나아가서는 하나의 소망, 하나의 사정이 통할 수 있는 그 기반 위에 무엇이 통해야 되느냐? 심정이 통해야 됩니다.
내가 제일 사랑하는 것은 나만이 아니라 모두가 사랑하고, 그 민족도 사랑하고, 더 나아가서는 전세계 인류가 사랑하고, 하늘과 땅, 모든 것이 사랑하는 것이라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자기가 사랑하는 아들도 아니요, 부부도 아니요, 부모도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내가 제일 사랑할 수 있는 심정의 곬을 뿌리로 연할 수 있는, 어느 누가 옮길 수 없고, 변경시킬 수 없고, 떼어갈 수 없는 그러한 중심적 심정의 주체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는 민족적인 간격이 없습니다. 어떠한 전통적인 간격도 없습니다. 민족을 초월하고 전통을 초월하고 환경을 초월한 입장에서 만민이 공통으로 사랑할 수 있는 주체가 있나니 그것이 무엇이냐? 하나님입니다.
오늘날 인간들이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 모르고 하나님과 자기와의 관계를 모르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리에 서 있지만, 이 관계를 알고 이 인연을 맺는 자리에 나가게 된다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래야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일체의 자리를 만들기 위해서 이 세계를 수습해 나오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소망의 귀일점을 찾아 나가기 위하여 지금까지 사상과 이념을 중심삼고 싸워 나왔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민주와 공산의 대결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이 세계는 민주주의 가지고도 안 되고 공산주의 가지고도 안 됩니다. 어차피 더 나은 하나의 이념으로 규합되어야 합니다. 전세계인류가 이구동성으로 하나의 이념을 추구하며 노래할 수 있는 시대로 넘어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우리는 하나의 소망으로서 하늘과 인류를 하나 만들기 위한 도상에 서 있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한국에서 되어진 일이 세계에 알려지는 데 몇 년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한국에서 되어지는 일이 세계적인 일로, 세계에서 되어지는 일이 우리의 일로 느껴지고 있습니다. 넓고 넓은 이 세계가 우리의 생활 감정과 사정을 통하여 연결되어 들어오는 것입니다. 어떠한 사정이 세계성을 띠고 하나의 어떤 이념적인 심정과 통할 수 있는 세계로 움직여 나가는 것은 온 세계 인류가 같은 사정에서 살아야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 가지고 이것이 최후에는 무엇과 일치점을 가져야 되느냐? 하나님의 심정과 일치점을 가져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참부모의 인연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세계는 소망의 때를 맞을 수 있는 길로 통하고 있고, 사정을 통할 수 있는 때로 통하고 있으되 그것을 종결시키는 것은 심정입니다. 이 심정과 결부시키기 위해서는 어떤 길을 거쳐 나가야 되느냐? 어떠한 사정만 가지고 통하지 않습니다. 어떠한 이념이나 소망만 가지고 통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부모라는 문을 통해야 합니다. 부모라는 이 기준을 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끝날에 약속하신 한 날은 부모의 날입니다. 참부모를 모실 수 있는 날입니다. 다시 말하면 타락으로 말미암아 부모를 잃어버린 이 땅 위의 수많은 인류가 하나님의 축복을 이룰 수 있는 본연의 부모를 다시 맞을 수 있는 날입니다.
인류가 어떤 복귀의 한 목표를 정해 놓고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데 있어서 필연적인 조건이 무엇이냐 하면, 부모의 문을 통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부모의 문을 통하기 전에는 심정을 연결시킬 수 없습니다.
하나되는 데는 반드시 뜻이 같아야 되고, 사정이 같아야 되고, 심정이 같아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날 전세계 인류를 하나 만들기 위하여 역사해 나왔다면, 이 인류를 하나의 일치적인 세계로 끌어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세계는 두 주의로 벌어져서 싸우고 있으니 하나될 수 있는 때가 가까웠다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중요한 사정이 우리의 사정으로 연결되어 들어오는 때가 되었습니다. 이렇듯 사정과 소망이 통할 수 있는 세계적인 여건은 되었지만 심정을 통할 수 있는 때는 못 되었습니다. 이 시대가 심정적으로는 이 민족과 저 민족이 통할 수 없고, 이 종교와 저 종교가 통할 수 없고, 이 가정과 저 가정이 통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심정을 알지 않으면 안 될 것이며, 하나님의 심정과 인연맺지 않으면 안 될 것이거늘, 이것을 연결시켜 주는 중보자가 참부모입니다. 그러니 잃어버렸던 본연의 참부모를 찾아야만 하늘의 심정과 연결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도의 길을 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때에 대한 것은 알았습니다. 사정에 대한 것은 알았습니다. 오늘 이때가 어떻게 되고 그 나라의 사정이 어떻게 되는가를 알았지만 심정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습니다. 하나님의 심정에 대해서는 캄캄했습니다.
최후에 해결해야 할 것이 무엇이냐? 심정 문제입니다.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 개개인은 반드시 참부모와 다리가 놓여 있어야만 합니다. 참부모를 통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들은 지금까지 여러 가지 사정이 얽힌 환경 가운데에서 자라 왔지만, 이제 여러분들은 하나의 이념 앞에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고 나설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자기의 뜻을 버리고 이러한 이념을 자기의 것으로 품을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 모두가 같은 입장에서 같은 목적, 같은 소망, 같은 사정, 같은 심정으로 하나님을 붙들고 우리 아버지라고 주장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역사적인 아버지의 서러움과 고통과 그 아버지의 슬펐던 사실을 알게 될 때, 여기에서 우리는 심정적인 귀일점을 세우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자리까지 인류를 끌어 나갈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싫든 좋든 역사는 그러한 과정을 거쳐 나갈 것입니다. 아무리 부정해도 여러분은 어차피 그 과정을 거쳐 나가야 할 운명에 놓여 있는 것을 피할 도리가 없습니다.
타락한 우리 인간은 어차피 복귀의 노정을 거쳐 나가야 됩니다. 한 많은 이 땅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입장이 아닙니다. 이 땅은 지나가는 곳입니다.
우리가 가야 할 한 곳이 있으니 그곳은 하나님의 뜻을 대신한 자리요,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한 자리요, 하나님의 사정을 대신한 자리입니다. 그 자리에 가야만 여러분이 짐을 풀어 놓고 하늘땅의 모든 천지 만물 앞에 비로소 인간의 가치를 자랑할 수 있는 자리를 차지할 수 있지, 그러기 전에는 그 어디에도 머무를 수 없습니다. 그러한 길을 가야 할 사명이 오늘 우리 앞에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아버지 뜻이 무엇인지를 알았고, 아버지의 사정이 어떠하다는 것을 알았을진대는 그 뜻과 사정을 내 뜻과 내 사정으로 연결되게 해야 되겠습니다. 아버지의 뜻은 창조목적을 달성하는 것이요, 아버지의 사정은 타락한 이 세상에서 사탄과 혈투전을 전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피어린 사정에 놓여 있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고통의 자리를 피하여 안식의 자리에 가게 되면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아들딸들이 사탄 앞에 유린당하고 악한 자들 앞에 유린당하는 자리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한번 사랑하면 그 사랑은 영원한 사랑이요, 하나님이 한번 심정적인 인연을 맺으면 어느 누구도 옮겨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인간들을 갖은 수고와 역경의 길로 몰아내셨습니다. 지금도 그곳을 향하여 끌고 나가는 도상에 있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이 마음놓고 심정적인 인연을 맺을 수 있는 그 자리가 아직까지 마련되지 못한 것을 우리가 안다고 할진대,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사정을 해결해야 되겠습니다. 슬픈 사정이 있거든 슬픈 사정을 대신하고 그 슬픈 자리에 있기를 즐거워해야 되겠습니다. 또 하나님의 뜻을 위해 가는 길이 비록 죽음의 길이라 할지라도 그 자리에서 여러분은 감사할 줄 알아야 됩니다. 그러지 않고는 도저히 아버지의 뜻을 여러분의 뜻으로 옮겨갈 수 없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타락한 이 세상을 지나간 후에 비로소 영원불변한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모든 만물과 더불어 영원무궁토록 아버지를 노래하며 살 수 있는 때가 온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 자리까지 우리는 기필코 나아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들은 투쟁해야 되겠습니다. 소원통일, 사정통일, 심정통일, 이념통일을 단행할 수 있느냐 없느냐, 스스로 반문해 봐야 됩니다. 이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하나님을 대신한 대신자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반대를 받아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지만, 그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땅 위에 왔다 가신 분입니다. 뜻을 중심삼고 아버지의 뜻이 내 뜻이요, 아버지의 사정이 내 사정이요, 아버지의 심정이 내 심정이라는 점만은 변함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1961년의 첫 날이요 첫 주일입니다. 여러분 자신들은 하늘 앞에 당당하게 섰다고 자신합니까?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자로서 당연히 하늘 앞에 책임과 사명을 대신하는 자리에 설 수 있는 대신자라고 자처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자신들은 깊이 생각해 봐야 되겠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마음에 품고 있는 그 뜻과 그 소원이 무엇이뇨? 여러분이 처하여 있는 사정이 누구의 사정입니까? 품고 있는 뜻이 내 뜻이라면 아버지와 하등의 관계가 없습니다. 처하고 있는 사정이 내 사정이라면 아버지와 하등의 관계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늘의 뜻과 사정의 일치점을 가져야 됩니다. 그것이 일치하기 전에는 심정일치를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어떠한 고난의 길, 어떠한 어려운 환경을 거쳐 나가는 한이 있더라도 여러분과 영원무궁토록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심정을 일치하여 사랑하고 노래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이런 뜻이 아직까지 종결되지 못한 이 땅과 이 세계인 것을 알게 될 때, 오늘날 여러분들은 새로운 각오와 결심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나와 하나님과 일체를 이루어야 될 텐데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품고 있는 뜻과 여러분이 갖고 있는 사정은 어떻게 되어 있느냐?
기쁜 일이 있어도 뜻을 중심삼고 기뻐하고, 슬픈 일이 있어도 뜻을 중심삼고 슬퍼하고, 억울함이나 분함이 있어도 뜻을 중심삼고 억울해하고 분해하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는 비록 땅 위의 사탄세계에 살고 있으되 하늘의 아들이요 하늘의 딸임에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까지 뜻을 따라 나왔습니다. 그 뜻은 날이 가면 갈수록 더 커가는 것입니다. 그 사정은 날이 가면 갈수록 더 복잡해져 가는 것입니다. 그 심정은 날이 가면 갈수록 더 간곡하고 간절해져 가는 것입니다. 때가 가까워 옴에 따라 더 깊어지고 더 강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아 오시는 하늘의 사정이요 뜻이요 심정임을 알았을진대, 여러분 자신들이 갖는 뜻도 아버지의 뜻으로 더 간절해야 되겠고, 여러분이 당하는 사정도 아버지의 더 깊은 사정과 연결시켜야 되겠습니다. 뜻과 사정이 통하면 반드시 심정문제가 연결됩니다. ‘나는 비록 불쌍하고 억울한 자리에 있을지라도 아버님만은 절대 그런 자리에 계셔서는 안 된다. 아버님만은 그런 환경에 계셔서는 안 된다.’고 하는 심정이 사무쳐야 됩니다. 그러면 거기서부터 심정이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이 아침에 새로이 각오해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대신자요, 오실 참부모의 대신자입니다. 남자는 아버지의 분신이요, 여자는 어머니의 분신이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남성과 여성의 이성성상의 중화적 주체로 계시기 때문에 남자는 하나님의 남성 성품을 대신하여 태어났고, 여자는 하나님의 여성 성품을 대신하여 태어난 것입니다.
본성에 있어서 우리 개체들은 태어날 적부터 참부모의 지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요 15:5)고 하셨습니다. 남자들은 아버지의 지체요 여자들은 어머니의 지체, 남자들은 아버지의 분신이요 여자들은 어머니의 분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과연 아버지의 분신이 될 수 있고 어머니의 분신이 될 수 있다 할진대, 아무리 떨어져 있을지라도 거기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깃들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사정과 아버지의 뜻을 중심삼고 사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심정이 자연적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들은 금년에 들어와 가지고 그러한 환경에 놓여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껴야 됩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 땅을 찾아오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을 먼저 찾아오신 그 뜻도 여러분 개개인을 위한 뜻이 아닙니다. 세계를 위한 뜻입니다. 또 사정이라는 것도 개개인의 사정을 중심삼고 살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 사정은 만민이 손을 잡고 즐거이 살기 위한 것임을 알아야 됩니다. 그 심정도 만민이 뜻을 두고 서로 통하게 할 수 있는 것임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게 되어야만 행복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무슨 뜻이니 무슨 심정이니 하면서 아무리 울고불고 찧고 까불고 야단법석을 하더라도 아버지의 뜻 이상 더 큰 것이 없고, 아버지의 사정 이상 더 큰 사정이 없고, 아버지의 심정 이상 더 큰 심정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자신들이 그러한 자리에 서 가지고 자기의 환경을 수습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 뜻에 맞지 않는 오늘의 이 환경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 뜻을 어떻게 할 것입니까? 버릴 것이냐, 그렇지 않으면 뜻을 세워 가지고 그 환경을 정비하여 뜻 앞에 굴복시켜 나갈 것이냐? 또한 사정을 중심삼고도 마찬가지요, 심정을 중심삼고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좋아하면 그도 좋아하고, 내가 슬퍼하면 그도 슬퍼할 수 있는 환경적인 무대가 되어 있지 않는 한 하늘의 뜻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자신들의 사정에 얽매일 것이 아니라 기필코 하늘 뜻과 하늘 사정을 통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러려면 이 뜻을 성취시키기 위해서 우리는 모진 투쟁의 노정을 거쳐 나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연적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금년부터는 뜻을 세우고 사정을 통하는 데 지장이 되지 않도록 환경을 개척하고 정리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앞에 서서 ‘하늘이여,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하고 나서지 않는 한 찾아 나오는 뜻과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세계적인 뜻도 개인 문제에서부터 해결해야 세계적으로 전개시킬 수 있습니다. 자유로운 무대를 개척할 수 있도록 자유로운 환경을 조성해야 합니다.
영계의 협조를 받지 않고도 독자적으로 뜻을 세울 수 있어야 합니다. 사탄은 6천년 동안 하늘을 반대해 왔습니다. 그것도 하늘을 믿고서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중심삼고 반대해 왔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일체인 이상 하나님을 대신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실 일은 타락 인간을 구하시는 일입니다.
복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일을 끝내야 됩니다. 가정은 가정적인 일을 끝내고 가정적인 복을 받고, 민족은 민족적인 일을 끝내고 민족적인 복을 받고, 세계는 세계적인 일을 끝내고 세계적인 복을 받아야 합니다. 복을 받으려면 걱정거리와 할 일을 끝내 놓고 나서 안심된 입장에서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것이자 내 것이라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리에서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도 만민이 공인하는 자리에서 주고 싶어 하십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타락 인간을 빼앗아 오고 사탄을 자연굴복시키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과 하나되기 위해서는 편안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사탄이 있는 곳을 찾아가고 하늘을 모르는 사람을 찾아가야 합니다. 그러지 못하는 한 하나님의 뜻도 하나님의 사정도 우리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세계적인 사명을 할 수 있는 때가 우리의 목전에 다가오고 있습니다. 사탄을 굴복시키기 위해서는 참소의 조건을 없애야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위하여 행군해야 합니다. 남이 가기 싫어하는 곳을 가고 남이 하기 싫어하는 것을 해야 합니다.
뜻과 사정을 안 이상 아버지는 뒤에 모셔 놓고 우리가 앞장서야 되겠습니다. 한국을 찾아오시는 아버지께 ‘부디 한국만은 안심하시옵소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행동을 해도 세계적인 무대에서 행동을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민족적인 환경을 정비하여 남아진 2년간 하늘의 뜻을 품고 울고 있는 동포를 찾아가야 합니다. 그들보다 더 어려운 자리에 들어가서 ‘당신이 싸워 나오신 능력을 저에게 주시옵소서’ 해야 합니다. 우리는 복 받는 좋은 자리 말고 어려운 자리에 가야 합니다. 못나나 잘나나 단결해야 됩니다.
끝날에 무너져 내리는 험난한 환경을 밟고 올라서기 위해서는 다 겪고 나서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아버지의 심정의 자리,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자리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인간을 타락시킨 사탄을 굴복시키고 또 사탄으로부터 하늘의 아들딸로 공인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축복이 허락되지 않습니다.
6천년의 싸움의 역사를 일시에 탕감하는 방법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딸을 고통의 자리에 내놓고 나서 사정없이 몰아치는 것입니다. 고통의 자리에 어느 정도 동참하였느냐의 여부에 따라 천적인 인정이 결정됩니다. 하늘은 어려운 일, 고통스러운 일을 책임지고 나아가는 사람을 축복해 주십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요 1:29) 천만인 앞에 내몰리는 자는 천만인의 복을 받을 것이요, 인류 앞에 내몰리는 자는 인류의 복을 받을 것이요, 하늘땅 앞에 내몰리는 자는 하늘땅의 복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어떤 책임자든 무자비하게 내몰아야 합니다. 그것은 뜻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모두 남이 못 가는 길을 가야 되겠습니다. 전부가 가기 싫어하는 자리에서 일편단심 충성하게 되면 그에게 복을 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7년 대환난은 세기적인 복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선발대입니다. 뒷사람은 우리들로 인하여 평탄한 길을 갈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그 일을 위하여 준비하고 그날을 단축시키기 위하여 준비해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성부․성자․성신이 일해 왔습니다. 이제까지 인간의 이름으로 일한 때가 없었다는 사실은 원통한 일입니다. 성부 성자 성신의 이름으로 일했다는 사실이 슬픈 일입니다.
앞으로는 여러분이 여러분의 이름으로 일할 수 있는 때를 가져야 됩니다. 여러분은 기도하지 않고도, 하나님의 협조 없이도 사탄을 굴복시킬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런 사람이 되어야만 새로운 시대의 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사탄도 하나님의 협조 없이 인간을 타락시켰습니다.
이렇듯 독자적으로 책임지고 뜻 성사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역사적인 하나님, 시대적인 하나님, 미래적인 하나님을 알아 가지고 사탄을 공격하여 꼼짝 못 하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기도하지 않고도 영계의 영인들을 동원하여 일할 수 있는 때가 되었습니다. 사탄이나 악한 사람들까지도 ‘당신들만이 할 수 있습니다.’라고 증거하며 머리숙이게 해야 됩니다.
책임을 진 자는 고통의 자리에 나가야 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대신 자로서 잘 싸우고 승리하여서 축복을 받아야 됩니다. 그래야만 비로소 심정 귀일점에 이를 수 있습니다. 거기에서 일체적인 이상은 완결되는 것입니다.
‘…해 버렸더면’ 하는 한스러운 마음을 품고 죽어서는 안 됩니다. ‘내 있는 정성을 다했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사는 사람입니다. ‘수많은 인간이 몰라주더라도 당신만은 나를 알아주실 것이다.’라고 할 수 있는 자가 있다면 그는 인생행로의 최고 승리자가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버님, 당신의 심정의 즐거움을 지으신 만물과 더불어 나누는 것이 그 영광의 가치였는데, 그러지 못한 것은 당신의 잘못이 아니었사옵고 전인류의 시조 된 아담 해와의 한낱 실수로 말미암은 것임을 저희들은 아옵니다. 그리하여 수천만 년 영원한 세계까지 고난의 탑을 쌓아 놓는 억울한 사실을 저희들은 가슴 아프게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의 실수로 이렇듯 수천 년 동안 내려오면서 눈물의 골짜기를 이루지 않으면 안 되었사옵고, 피를 뿌리지 않으면 안 되었사옵고, 땀을 흘리지 않으면 안 되는 어마어마한 고난의 길이 가로놓이게 되었다는 사실을 저희들이 알았사옵나이다.
당신의 심정 가운데서, 당신의 영광된 세계에서 당신의 놀라우신 선을 찬양하며 지금껏 사랑하고 싶었던 자녀를 잃어버리신 아버님의 서러움을 저희들은 알고 있습니다. 인간시조 아담 해와로부터 6천 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하루 한 날같이 눈물과 더불어 고통을 겪어 나오신 아버지인 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복귀의 노정에 있어서 한을 품고 가시는 아버지 존전에 서 있는 저희들은 머리 들 수 없는 부족한 것들이옵니다. 하늘을 대하여 감히 자체의 모습을 드러낼 수 없는 부끄러운 존재였으나 섭리의 뜻의 손길은 아직까지 저희 한 개체와, 저희의 주위와, 저희 민족과, 국가와 세계 가운데 남아 있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오늘 불초한 것들을 찾기 위한 당신의 숨은 사랑의 손길이 저희의 배후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을 앎으로, 부족한 자식들이나마 머리를 숙였사오니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어느 누가 천성 앞에 자기의 모습을 자랑할 자가 있사옵니까? 스스로 완전하다 하여 하늘을 해방할 자가 어디 있겠사옵니까?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사랑의 아버님, 긍휼의 아버님, 인내의 아버님, 선의 아버님, 부족한 것들을 이 시간 용납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더욱이나 역사의 곡절 가운데 서서 최후의 한숨과 더불어 절망 가운데 놓여져 있는 무리가 있사오니 이것이 삼천만 민중이요, 그 가운데에서도 이들인 것을 당신은 아시옵니다. 불쌍한 이 민족 가운데 태어난 한 때의 억울함을 하늘에밖에 호소할 수 없었던 이 민족의 서러움도 당신은 아시옵고, 이 민족 가운데에는 핍박의 길을 가기 위해 온갖 모든 것을 다 저버리고 붉은 주먹을 불끈 쥐고 하늘 앞에 맹세한 무리들이 이 어린 적자(赤子)들인 것을 당신은 잘 아시옵니다.
이들을 몰아 당신이 원하시는 뜻, 당신이 소망하고 원하시던 그 동산, 당신이 지으신 영광의 그 나라까지 인류를 몰아대기 위한 아버지의 심정, 아버님의 간곡한 마음이 있는 것을 앎으로 저희가 상처를 입으나, 저희가 눈물을 지으나, 저희가 핍박의 자리에서 탄식하고 머리 숙여 엎드려 있으나 사무친 심정으로 당신께 고마움을 돌려드리지 않으면 안 될 저희들이 되어 있는 것을 당신은 아시옵니다. 저희는 가진 것 아무것도 없습니다. 자랑할 것 아무것도 없사옵니다. 자랑할 것은 역사적인 죄의 혈족이었다는 것밖에 없고, 자기 자신을 중심삼고 하늘을 해방하겠다는 것밖에 없사옵니다.
그러나 그들을 찾기 위해 당신께서는 이 시간도 사랑의 손길을 펴시고, 각자에게 일일이 손을 내시어 저희의 손을 붙잡기 위한 아버지의 음성이 이 시간도 있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하늘은 사무침의 하늘이요, 억울하면서도 참지 않을 수 없는 인내의 하늘인 것을 알았습니다. 오늘 당신이 원하시는 소망의 뜻 가운데는 갖은 고역의 눈물이 잠겨 있는 것을 알았사옵고, 더 나아가서는 몰림의 자리에서 예수님과 같이 피를 뿌리고 사라진 한의 역사가 깃들어 있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이와 같은 것을 안 저희들은 모든 것을 당신 앞에 다 드리고 산 제물로 바쳐질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더욱이나 여기 모인 무리들은 당신의 인내의 심정을 본받아 아버지 앞에 모였사오니 이들을 한 품에 품으시옵고, 누구도 사탄이 데려갈 사람이 없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들을 세우시어 당신의 영광을 찬양해 주기를 바라시는 아버지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부족한 것들이 감히 감당하기 어려운 아버지 뜻 앞에 머리 숙여 자기 자신을 희생시켜서 산 제물로 드리지 않을 수 없사오나, 그러한 자리에 서지 못하는 부족한 것들을 용납하여 주시옵시기를 ,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더욱이나 여기에 모인 어린 청년 학생들 위에 삼천만의 운명과 한반도의 운명이 책임지워져 있다는 것을 알았고, 오늘날 저희들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도 알았사옵니다. 이제 저희들은 죽음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고, 눈물짓는 형제들을 대신해야 된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땀을 흘려 형제를 대신하기 위해 저희들은 각오하고 나선 무리이오니 당신의 품에 품어 지켜 주시옵시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 어린 당신의 아들딸을 대하고 볼 때, 여기 서 있는 저도 그 시절의 한 때가 그립습니다. 당신의 심정을 알기에 애달픈 마음으로 눈물지을 때가 그립사옵고, 남아진 한스러운 당신의 심정의 세계를 더듬어 방황하던 그 시절이 그립습니다. 그 시절에 그리던 눈물은 깨끗한 눈물이었사옵고, 그 시절에 부여받은 그 책임은 깨끗한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와 같은 터전 위에 하늘은 역사하시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여기 모인 당신의 아들딸 가운데에도 그와 같은 자리에서 당신의 심정을 상속받을 수 있고, 이 땅 만민 앞에 나누어 줄 수 있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많이 일어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간사한 것이 사람이었습니다. 때와 시기를 망각한 것이 사람이었습니다. 자기의 편리 때문에 하늘을 파는 것이 사람이었습니다.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는 하늘을 밟아 치우는 것이 인간이었사오나, 오늘 여기에 머리 숙여 당신 앞에 호소하는 이 아들딸 가운데는 한 생명이라도 하늘을 배반하는 자가 없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불변의 진리를 배웠사옵고, 불변의 역사를 알았사옵고, 불변의 심정을 알았사옵고, 불변의 아버지인 것을 알았사옵니다. 그런 아버지인 것을 안 저희들은 불변의 자식이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여기에 모인 당신의 아들딸들은 한 생명이라도 하늘을 배반하는 자식들이 되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에게 언제나 품겨 당신과 더불어 영원히 살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영원하신 당신이오니 이들도 영원한 아들딸로서 당신 앞에 품길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여, 더욱이나 1960년을 지내고 1961년을 맞이했습니다. 금년부터 계획하신 당신의 뜻이 있다는 걸 알았고, 허락한 천적인 한 때를 저희들이 인계 맡았사오니, 그 기간에 있어서 하늘 앞에 역군으로 나서는 용사들에게 깊이깊이 희생적으로 나가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들이 눈물짓고 굶주린 자리에 가는 곳곳마다 거기서 당신의 처지와 인연맺게 하여 주시옵고, 당신의 애달픈 심정적인 처지와 인연맺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금번 이 기회에 남한 각지의 8백여 명 이상의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딸들이 하늘의 심정을 본받아 자기 일개인의 이익을 잊어버리고, 산 제물로 당신 앞에 드리기 위하여 눈물겨운 이 한 시간을 갖고서 수많은 사람을 대하고 있을 줄 알고 있사오니, 그들 위에 축복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전라북도 이 지역에서 당신의 따뜻한 품에 품기어 세움받아 싸우려는 어린 적자들이 모였사오니 당신이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은 친구가 없습니다. 저희들의 길을 지켜 줄 자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나서야 할 것이 저희들의 길인 것을 알았사오니, 이와 같은 걸음을 다짐하여 나선 저희들을 친히 지켜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들은 눈물로써 인연되어 있사옵고, 심정으로 연결되어 있사오니 심정을 상속시키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하늘에 남겨진 한스러웠던 역사적인 곡절을 저희들이 알았사옵기에, 역사적인 그 한의 곡절을 저희들이 책임지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이와 같은 책임을 감당하기에 부족한 자들이 되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그간 순수한 자리에서 눈물을 뿌리는 당신의 아들딸이 있사올진대, 아버지여,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이들을 내세운 하늘의 심정이 어떻다는 것을 아는 자들이 있사올진대, 당신이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이와 같은 기간이 있어야 하늘이 기억할 수 있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오니, 눈물과 더불어 하늘을 바라보면서 아버지의 심정의 그러한 뜻을 품고 그 지역을 책임지고 제물이 되어 나가게 허락하시옵소서. 몸소 산 제물의 자리에 있어서, 몸소 배척받는 자리에 있어서 먼저 외로운 자리에 서게 된 이들을 당신이 지켜 주실 줄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지, 당신께서 아무리 어려운 곡절의 길을 저희들 앞에 막아 놓고 가라 할지라도 반드시 후에 책임지시기 위한 일면을 세워 놓고 역사하시는 것을 알았습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나설 적마다 하늘은 같이하였사옵고, 어려운 자리에서 외로울 적마다 당신이 같이하셨사옵니다. 저희들이 쓰러지게 될 때 나 여기 있다고 부르짖던 당신의 음성이 있는 걸 알았사옵니다. 이와 같은 자리에 있어서 한 가지 가져야 할 것은 당신의 안타까운 한스러운 심정을 다시 옮겨 받는 것이오니 그럴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그리하여 삼천만 민족을 부여안고, 27억 세계 인류를 부여안고, 더 나아가서는 천상에 있는 우리의 선조들을 부여안고 당신의 뜻을 염려할 수 있고, 제물로 오르기 위해 자기의 모든 것을 바치고 호소할 줄 아는 당신의 귀여운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날 저녁에 저희들의 모든 사정을 다 기억하시고 허락하실 수 있는 은사로 각자의 심정을 채우시어서, 여기 모였던 이 한 시간이 헛된 시간이 되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소망을 아버지와 더불어 나눌 수 있는 시간, 심정을 아버지와 더불어 나눌 수 있는 시간, 사정을 아버지와 더불어 나눌 수 있는 이 한 저녁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하늘에 있는 천천만 성도들도 저희들의 움직임에 같이 협조하게 하시어서 주위에서 엿보고 있는 수많은 억만 사탄들을 제거시키시옵고, 당신이 원하시는 뜻에 합당할 수 있는 당신의 아들딸이 제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이 기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하늘이 요구하고, 하늘이 좌정하는 자리에는 사탄이 참소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사옵기에 부활의 역사가 그 자리에 같이하고 애천자의 역사가 그 자리에 같이하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어제의 마음으로 심중에 아직까지 당신과 더불어 결속하지 못한 자가 있사옵니까? 결속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당신 앞에 맹세하지 못한 자가 있사옵니까? 맹세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 민족을 대신해서 책임지겠다고 하지 못한 자들이 있습니까? 책임지겠다고 하는 새로운 각오와 더불어, 당신 앞에 저를 원하시는 뜻대로 보내 달라고 하늘 앞에 약속을 하고 돌아가는 이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삼천만 민중은 졸고 있습니다. 사탄은 사망의 구렁텅이를 엿보고 있사옵니다. 수많은 사탄들은 이들의 심령을 보고 기뻐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저희들의 모든 것을 희생시키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이 민족을 아버지 품에 품기게 하기 위해서는 남 모르는 희생이 필요한 것을 알았사옵고, 남 모르는 눈물과 피와 땀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이와 같은 길을 자진해 나선 저희들 앞에서 사탄은 물러가고 아버지는 저희들을 시중하여 아버지가 기뻐하는 동산에서 영광을 노래하실 수 있고, 저희들이 본연의 아들딸의 미를 갖추어 아버지의 그런 영광의 세계를 단장할 수 있는 무리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시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시간 숨을 제단을 쌓고 남 모르는 가운데 때를 알아 염려하면서 하늘 앞에 호소하는 아들딸이 있사올진대는, 그들의 발걸음을 통하여 어서 속히 거두어 모으시옵고, 아버지의 권속을 많이 번식할 수 있게 축복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이제 여기 어린 자녀들이오나 이들이 마음을 하늘 앞에 두고, 아버지의 심정에 호소할 적마다 그곳에는 하늘에 있는 천군 천사들이 어울릴 것을 알고 있사옵고, 하늘에 있는 천천만 성도들이 지상의 저희들을 옹호할 것을 알고 있사오니, 믿고 실천하는 자는 승리할 것을 알고 있사오니, 아버지 앞에 새로운 각오를 갖고 나설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와 같이 나가는 곳에는 기필코 승리적인 성과를 하늘땅 앞에 거두어 드릴 줄 알고 있사오니, 이번 기간을 통하여 새로운 것을 느끼고, 새로운 것을 깨닫고, 인생의 골짜기 깊은 심정이 흐르는 것을 부여안고 아버지를 거기서 상봉할 수 있는 인연을 가지는 이번 기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고생도 당신을 위한 것이었사옵고, 눈물도 당신을 위한 것이었사옵고, 죽음도 당신을 위한 것이었사옵니다. 이루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알았기에 이와 같은 길을 가고 있습니다. 탕감복귀의 역사를 저희들이 배웠기에 이 길을 저희들이 탕감짓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을 잘 알고 있으므로 자기의 슬픔을 하늘 앞에 돌려드리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자기의 어려움을 하늘의 어려움으로 돌려드리지 말고 내 일은 내가 책임질 줄 아는 이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니다.
모든 것을 맡겼사오니 이들이 가는 일생의 노정을 이 시간 다시 한 번 살피시옵고, 뜻하신 뜻대로 가꾸어 아버지의 영광의 존전에 드리기에 부족함이 없게끔 축복의 손길을 내려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올 때에,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써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선생님이 말하는 아버님은 세상에 여러분을 낳아 준 그 아버님이 아니라 천지를 창조하신 대주재 되신 아버님이시라는 것을 여러분들은 언제나 느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 자신들, 자기의 한 생명이 귀하다는 것은 자타가 공인하고 있습니다. 내가 좀더 편하고, 내가 좀더 훌륭해져서 국가를 대신하고 싶고, 더 나아가서는 세계를 대신하고 싶고, 더 나아가서는 하늘 앞에 서고 싶은 것이 지음받은 본연의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타락을 했을망정 여러분의 마음은 더 높고 높은 것을 이 시간도 추구하고 있을 것은 틀림없습니다. 오늘보다도 내일이 더 낫기를 바라고, 내일보다는 그다음 날이, 일 년 후 십 년 후 여러분들의 생각이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그 범위에 따라 가지고 욕망은 점점 더 커져서 여러분이 세계 앞에 서고 싶은 것은 누구나 다 마찬가지 심정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그런 심정이 그릇된 것이냐? 아니라는 거예요. 왜냐? 우리 인간은 본래부터 누구를 좋아하게끔 지어졌느냐 하면, 여러분이 지금 낳아 준 부모를 대하게끔 지어진 것이 아니라 부모를 넘어서 수많은 민족이 있으면 민족을 대표해서 서야 할 것이며, 더 나아가서는 세계를 대표해서 서는 동시에, 더 나아가서는 저 영계를 대신하여, 더 나아가서는 천지를 창조한 대주재이신 하나님 앞에 여러분들이 나타나야 할 무한한 가치적인 존재로 지어졌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이와 같은 둘도 없는 가치, 하늘땅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그 가치는 하나님도 존경하는 가치요, 천상에 아무리 놀라운 천사장 혹은 수많은 영계가 있다 할지라도 그 영계도 역시 그런 한 모습이 나타난다 할진대 그 모습 앞에는 어느 누구나 머리를 숙여 찬양하고 싶은 가치인 것입니다. 가치적인 그 존재가 타락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완성된 아담이 돼야 했던 것입니다.
이런 인간이 타락으로 말미암아 자기 본연의 목적을 완성치 못하고 여지없이 떨어졌습니다. 어느 정도까지 떨어졌느냐? 수습할 수 없는 정도만큼 떨어졌다는 거예요. 우리 인간이 하루 생활권 내에 있어서 자기가 계획한 것이나 행하던 일 하나가 잘못되면 그날에 그 일을 수습할 수도 있고, 그날에 안 되면 그다음날, 그다음날에 안 되면 혹은 며칠, 며칠에 안 되면 몇 달, 몇 달에 안 되면 일 년…. 치밀한 계획을 세워 움직임에 따라 가지고 그 일은 회복할 수 있는 기일을 단축시킬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인간시조가 타락하고 난 후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자기 자식인 타락한 인간을 수습하기 위해 6천 년 동안 수고하였지만, 아직까지 완전한 기준으로 수습하지 못할 만큼 타락했습니다. 최상 하늘 끝에서부터 최악 지옥 밑까지 인간은 굴러 떨어졌다는 거예요. 어디 가치를 가꿀 수 없고 거둘 수 없는 무가치한 인간으로 되어 버렸다구요. 이런 인간을 하늘은 다시 최고 가치의 존재로 이끌기 위해 지금까지 수고해 나오셨는데, 그 역사노정이 무엇이냐 하면 복귀섭리요, 구원섭리요, 재창조역사라는 것을 여러분들은 원리에서 배워 알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역사는 수많은 우리 선조시대로부터 지금까지 하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최고 인간의 가치를 향하여 우리의 제반조직이 동원되어 있습니다. 이 사회에 움직이는 어떤 조직적인 기관이나 어떤 형태를 가진 존재물이 불철주야로 그 목적달성에 총동원되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됩니다.
그러기에 그러한 움직임이 천운으로서, 천도로서 혹은 천륜으로서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타락한 세상을 휩쓸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휩쓸고 움직이는 힘은 여러분들이 생각지 않는 사이에 여러분의 마음이 스쳐 가는 그 방향을 향하여 끌고 가려고 합니다. 여러분에게는 그런 마음이 있다는 거예요. 그 마음이 무엇이냐? 오늘보다는 내일, 내일보다는 그다음날, 다음날에 더 좋아지고 싶어하는 마음이 여러분 앞에 있는 것을 누구나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부족한 내 한 자체라고 해서 여러분 절대 소홀히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여러분에게 지금 말한 거와 마찬가지로 여러분 자신이 오늘보다도 더 가치 있는 내일을 추구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이 있거들랑, 여러분은 잘나나 못나나 이 천지 대천륜의 운세권 내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요, 그 가운데에 여러분들은 서 있는 것이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이걸 하나 보더라도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부르나 안 부르나, 혹은 깜깜한 곳에 있으나 광명한 곳에 있으나, 혹은 훌륭한 자리에 있으나 천한 자리에 있으나 마음 방향은 여러분을 재촉하여 `가정을 대표하라! 사회를 대표하라! 국가를 대표하라! 세계를 대표하라! 더 나아가서는 하늘을 대표하고 하나님을 대표하라!'고 언제나 호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적인 종말시대가 가까와 오면 최후에는 어떤 말이 나와야 될 것이냐? 사람 하나를 세워 놓고 세계가 하나될 수 있는 때가 기필코 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을 내세워 세계를 수습하고, 인간을 내세워 하늘과 땅, 유형세계와 무형세계를 수습하고, 무형세계와 유형세계를 수습한 후에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인간을 내세우기 위한 천륜이 남아 있는 한, 기필코 이 법도를 어길 수 없는 한 이 일은 한 때를 맞이하여 종결될 것입니다. 기필코 이 일은 여러분들이 살아서 보지 않으면 죽어서라도 맞이해야 할, 타락한 역사가 끝날 시대에는 여러분들이 부딪치지 않을 수 없는 한 때가 있다는 걸 알아야 됩니다. 이런 때를 기독교에서는 끝날이라고 합니다.
이런 때를 맞이하여, 끝날을 대비하여 타락한 만민 앞에 하나의 약속을 하셨습니다. 한 때를 맞이하여, 끝날을 대하여 한 중심을 세워 놓고, 한 분을 대신할 수 있는 가치적인 내용과, 가치적인 모습으로서 이 땅 위에 나타내 만민이 많은 수고의 노정을 거치지 않고도 그로 말미암아 단시일 내에 하나님 앞에 등장할 수 있는 어마어마하고도 놀라운 역사를 인간 앞에 부여하기 위하여 약속한 날이 있습니다. 그 날이 무슨 날이냐 하면 재림의 날입니다.
여러분들이 좋은 것을 추구하고 더 가치 있는 것을 추구하여 가는 도상에 있어서, 여러분 자신이 자신을 수습할 수 없는 미궁에 처해 있다는 거예요. 내가 일 개의 실낱 같은 하나의 개체로서 생명을 지니고 사는 여기에 있어서도 고충이 많아요. 자기의 일개인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여 엉클어진 곡절을 어떻게 처리할 수 없는 환경에 놓여 가지고 자기의 생명을 끊는 처량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수습할래야 수습할 길이 없기에 탄식을 하고 여기에 비명을 울리다가, 나중에는 그것으로 말미암아 인생의 모든 가치적인 자기 자체를 파괴해 버리는 일들이 참 많다는 거예요.
여러분이 그와 같은 역사적인 도상이요, 그런 천운이 움직이는 도상권 내에 한 개체로 서 있기 때문에 여러분 자신들은 어떤 권내에 있는가를 잘 살펴야 됩니다. 내 마음은 스스로 천운이 움직이는 그곳을 향하여 가려고 하고 있지만, 내 몸과 내가 살고 있는 사회는 거기에 극반대적인 입장에서 양심과 부딪치는 싸움을 모면할 수 없다 이겁니다. 이 싸움이 치열하면 치열할수록 생사의 결판을 지어야 할 시간이 여러분 앞에 박두해 오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차피 우리에게 소망이 있고, 우리에게 소망의 어떤 생명력이 있다 할진대는, 기필코 오늘 현실에 있어서 내 양심을 통하여 부딪혀 들어오는 이 원수를 대해 승리의 개선가를 부를 수 있는 양심의 방향을 따라가야 됩니다. 여러분들의 환경이 작으면 작고, 크면 큰 그런 환경이 문제가 아니라 어떤 위치에 있든지간에 그 문제를 해결짓지 않는다 할진대는, 항해를 해 나가는 큰 배가 암초가 있는 지도 모르고 달려가는 것과 마찬가지의 운명에 처한다는 것을 여러분은 잘 알아야 됩니다.
마음은 고이고이 잘 가서 목적지를 향하여 만민을 대표하고, 하늘과 땅을 대표하고, 더 나중에는 하나님을 대표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 온천지 운세를 움직이는 대주재의 힘에 의해 가지고 그리로 이끌리고 있지만 갈 수 없는 역경, 환경에 여러분이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 환경이 그로 하여금 울려 나오게 하는 웃음소리는 자기의 내일의 생명노정에 있어서 자기 갈 길을 얽어매는 밧줄과 마찬가지요, 안일한 한 날을 즐길 수 있는 그 자리가 내일의 사망을 예고하는 자리라는 것을 대다수의 사람들은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에 처해 있는 자기의 외적인 고통을 밟아 치우고 훌훌 넘고 넘어 자유의 마음세계로 가야 됩니다. 마음세계에 있어서 인연된 어떤 절대자가 있다면 그 절대자와 자기 마음의 연락을 통해 느껴 들어오는 무한한 가치를 악한 세상에서 느낄 수 있고 헤아릴 수 있고, 이것을 감정해 낼 수 있는 어떤 사람이 있다 할진대 보기에 누추하고, 보기에 형편이 없는 자리에 있다 할지라도 인생행로에서는 대승리자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떤 고통이라도, 슬픔이라도, 역경이라도 오너라! 너 고난이 나로 하여금 어떤 어마어마한 고통의 자리에 서게 할 것이냐' 이렇게 부르짖고 나서는 청년 무리들이 이 지구상에 널려 있는 수많은 어떤 민족을 대신하여 한 모퉁이에서 움직여 나온다 할진대 이 무리들은 심상치 않다는 거예요. 기필코 살아 계신 하늘이 있다 할진대 그들을 세우실 겁니다. 최후의 가치를 찾고 계신 하늘은 그러한 무리를 끌어 세계 인류 앞에 내세울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영계의 영인들 앞에,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 앞에 이러한 무리를 끌어내지 않을 수 없는 하늘의 입장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됩니다.
그러기에 여러분들 마음의 고통이 있거든 이 고통을 제거하는 놀음을 해야 됩니다. 더욱이나 신앙의 길이라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마음의 세계에 구속되어 들어오는 일체의 모든 것을 용납치 않고 자기 마음속 깊은 가운데서 그 본연의 목적 대상을 향하여 시간성 공간성을 초월하여, 내 심정적인 기준에서 언제나 세상의 모든 것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그 가치를 노래할 수 있어야 됩니다. 이런 자리에 서야만 마음은 즐거워할 수 있고, 그런 자리에 처해 있어야만 그 무엇을 다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가치적인 무엇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수많은 성현현철들이 찾기 위해서 노력하였지만 아직까지 해결을 못 지었어요.
오늘 여기에는 청년 남녀 학생들이 모였습니다. 여러분들 자신의 그 심정은 오늘날 어느 곳을 향하여 있느냐? 이걸 밝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여러분 마음이 바라는 그 소망의 목표는 최후의 것입니다. 최후의 모든 것을 결정지을 수 있는 한 절대자 앞에 등장하지 않으면 안 될 운명에 놓여 있는 여러분 자신이니, 우선 거기에 있어서 그런 신념을 가져야 됩니다.
결심하지 않은 일을 여러분이 성사하더라도 그건 여러분과 나는 하등에 관계가 없다는 거예요. 결심을 하여 시련과 더불어 싸워 거기에 대해 어떤 목적적인 가치를 투입 분석하여, 거기에 대한 맛을 체휼할 줄 아는 사람이라야, 그 목적을 달성하더라도 어떤 절대자가 있다면 그 절대자 앞에 그 가치를 노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결심, 자기의 신념도 없는 가운데 우연히 어떤 목적이 달성됐다 해서 그걸 자랑할 수 없는 거예요. 만약에 절대자가 있다면 그런 사람에게서는 빼앗아야 돼요. 그들이 아무리 어떤 목적을 달성했다 하더라도 그건 자기 것이 아니예요.
그래서 오늘날 하늘은 인간 앞에 믿음, 신앙이라는 명사를 세워서 `믿어라! 신념을 가져라! 네 원수가 나타나서 믿음을 삼켜 버리려 해도 여기서 삼켜져서는 안 돼! 어떠한 역경, 어떠한 고충의 환경에 부딪치더라도 그것만을 잃어서는 안 돼!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이 없다!'는 이런 놀라운 권고의 말씀, 약속의 말씀을 세워 주셨습니다.
이제 여러분들 자신이 어떠한 절대자 앞에 등장해야 할 인간으로서 그 가치를 이 시간에도 추구하고 있거든 그 마음을 고이고이 지켜야 되겠습니다. 마음에 어떠한 형태로 여러분과 같은 존재가 대신 나타났을 때는 있는 정성을 다해 땀을 흘리고, 어떤 희생을 하더라도 곱게 단장시키고 곱게 먹이고 입힐 줄 아는 여러분이 되어야 됩니다. 그런 길을 가야 된다구요. 이렇게 하는 사람은 지금 타락한 세계에서의 일국의 어떤 제왕보다도 훌륭한 분이요, 역대의 충신 혹은 열사 성현보다도 더 훌륭한 분인 것입니다.
그런 마음의 작용을 따라 가지고 오늘날 우리에게 교훈을 줬고 우리의 인생의 갈 길을 지향해 주었습니다. 그렇지만 지향해 주는 역사 발전노정에 있어서 시대적인 혜택이라는 것을 그들은 몰랐습니다. 아무리 성현현철들이 과거에 주창하고 생각했다 하더라도 오늘날에 와서는 그 이상의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여러분 자신 속에 깊이 잠들어 있는 그 제왕이 무엇이냐? 천상이나 지상이나 더 나아가서는 창조주 앞에 늠름히 나서 가지고 아들의 모습으로, 딸의 모습으로 부끄럼 없이 나설 수 있는 귀동자요, 귀동녀들이 그 마음속에 깊이 잠들고 있다는 걸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의 손길이 움직이는 그 한 시간이지만 여러분의 손길을 위한 손길만으로써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마음속에 이러한 귀동자 귀동녀의 손길이 움직일 수 있는 걸 그리워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길을 가는 데도 여러분이 가는 것이 아니라 그가 갈 수 있는 곳을 그리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나에게 하는 것을 보여 주고 싶다는 거예요. 누구한테? 먼저는 나 자신에게 보여 주고, 그다음에는 나를 대하여서 이 절대적인 가치의 자리까지 이끌어 준 주인 앞에 보여 준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이것은 숭고한 거예요.
만일에 이런 생각을 한다고 여러분 생각해 봐요. 하나님이 있다면 여러분이 그런 생각 한다고 해서 벌주시겠어요? 그런 생각을 못 하기 때문에, 그 생각을 잊어버리고 다른 생각이 나올 그 길을 막기 위해 오늘날 그 이외의 모든 생각을 제거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속 깊이 잠들어 있는 본연의 그 자체의 모습, 그 자체의 행동, 그 자체의 가치 앞에 정성을 다 들일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지 않을진대 여러분들은 절대자 앞에 도저히 나가지 못합니다. 이 길을 가고자 하는 데 있어서 여러분 친구가 반대하게 될 때는 …. (녹음이 잠시 끊김)
오늘날 세상에서 장사하는 사람을 보더라도 그래요. 천만 원 있는 사람이 천만 원 이상의 이익이 날 수 있는 장사가 있다 할진대 그 천만 원을 내던져야 된다는 말입니다. 세상 이치는 다 마찬가지예요.
그런데 오늘날 수많은 인간들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마음이 지향하는 바가 있는데, 절대로 부인할 수 없는 어떤 가치적인 무엇이 있는 데도 불구하고 도달할래야 도달할 길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막연하고 관념적인 신의 실존과 내 실존적인 가치의 개체와 어떻게 관계를 맺느냐? 실체를 갖고 생활하는 생활무대 환경에 있어서 절대자와 더불어 같이 느낄 수 있는 공감의 가치를 어떻게 이루어 놓겠느냐? 관념적인 신이 아니라 생활적인 신의 체휼을 어떻게 할 것이냐? 이것은 불가능합니다.
어떤 철학자, 어떤 성현이 나왔어도 그러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불가능하다구요. 만약에 그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할진대 그건 억천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어요. 그런 것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 수억만 명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가치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여러분들이 허덕이고 있으니 오늘 여러분들이 어떤 단계에 있는가 잘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도 `두 마음을 품지 마라!'고 했습니다. 눈도 둘이요, 손도 둘이요, 발도 둘이요, 입도 둘이요, 머리도 둘이요, 마음도 둘이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여야 됩니다. 그 하나는 여러분들이 잘 되기를 바라고, 여러분들이 더 좋기를 바라고, 더 가치 있기를 바라는 겁니다. 가치가 있는 그곳은 오늘날 살고 있는 여기가 아니예요. 하나님과 함께 사는 곳입니다. 부족한 여러분이지만 여러분을 내세워서 `야, 아무개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만민아! 이를 환영하라! 만인아, 이를 사랑하라!' 할 수 있는 자들을 만들어 놓기 위해서….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그런 가치를 반드시 달성하기 위해서는, 그 가치를 달성해서 나와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거기에 대한 신념이 철두철미해야 됩니다. 이 신념을 빼앗아 가고자 하는 원수가 있더라도 양보할 수 없어요. 내 생명이 당장에 끊어지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양보할 수 없어요. 내 인격이 파산되고 내가 세상에서 지니고 있는 명예나 그 무엇이 일조에 낙엽과 같이 다 떨어져 내려가는 한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만은 안 됩니다. 다 녹아나더라도 여러분이 죽어서 물이 다 되더라도 그것만은 남아져야 돼요. 그것은 어디에 남아질 것이냐? 사람의 마음, 참다운 사람의 마음에 남아질 것입니다.
여기 온 학생들 가운데는, 혹은 청년들 가운데는 통일교회에 들어온 지가 오래지 않은 사람도 있을 거예요. 여러분 앞에 충고하고,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냐? 오늘날 내 몸이 부서지고 내 몸이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 신념의 가치를 감미할 수 있는 여러분의 위치를 작정하지 않는 한 여러분들은 가다가 쓰러진다는 거예요.
여기에서 여러분에게 외치고 있는 선생님도 세상의 명예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요, 세상의 그 무엇을 찾기 위하여 허덕이는 것도 아닙니다. 단 하나 당신과 나와의 관계, 당신도 위신을 잊어버리고 나도 위신을 잊어버리고 붙들고 몸부림치면서 `아무개야!' 하던 그 모습이 그리워 찾고 있던 그분이라는 것을 알고 난 때에, 눈물과 더불어 약속하던 그때의 심정이 하나의 재산입니다.
거기에 세상의 어떤 지도자, 어떤 가까운 사람, 그 무엇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가치의 무엇이 있다 하더라도 세상 것 가지고는 도달할 수 없고, 어떻게 돌이킬 수 없는 하나의 인연이 있기에 이 시간도 여러분 앞에 나서 가지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기 들어오게 될 때까지에는 평탄한 길이 아니었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여기 자유로운 환경에서 앉아서 말씀을 듣고, 외부의 아무런 핍박의 감정도 느끼지 않게 된 것이 오늘 당장에 된 것이 아닙니다. 이러기 위해서 여러분에게는 보이지 않는 노고의 피와 땀과 눈물이 엉클어져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러한 눈물의 길도 피땀의 길도 밟고 넘어설 수 있는 하나의 마음은 피를 주고도 바꿀 수 없고, 눈물을 주고도 바꿀 수 없고, 땀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내 팔 다리를 끊어 가는 한이 있더라도 바꿀 수 없는 , 그분과 나와 맺어진 인연, 그 가치는 인간이 맞아야 할 최후의 길이요, 해결지어야 할 최후의 문제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그런 입장에서 결정을 지어 책임을 질 수 있고, 그 책임과 더불어 그 가치를 중요시하는 그 마음과 더불어 이 세상에 사는 데에는 그 고충이 이루 다 말할 수 없이 크다는 것입니다. 그걸 여러분은 모르고 있어요.
여러분들은 원리를 배웠습니다. 탕감복귀역사라는 걸 배웠다구요. 여러분들은 쉽사리 선생님이니 혹은 무엇이니 하는 명사로 부르지만 그런 명사를 존중시하는 여러분이 되지 말라구요. 어떤 한 일개인의 몸뚱이를 존중시하는 사람이 되지 말라구요. 나는 누누이 어린 식구들에게나 혹은 식구들에게 말합니다. 자기 스승이 쓰러져 죽는 자리에 들어가 가지고 붙들고 울기 전에 스승이 사랑하던 하늘이 있고, 땅이 있고, 백성이 있는 것을 보고 이를 누가 대신 품어 주겠느냐고 이런 심정에 앞서 눈물지을 수 있는 그런 식구, 그런 제자들을 선생님은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의 몸 마음 속에, 혹은 뼈와 살에 젖게 해야 할 것이 무엇이냐? 통일교회의 무슨 진리의 말씀도 필요하겠지만 그 진리 골수에 흐르고 있는, 끊을래야 끊을 수 없고 어느 누가 유린할래야 유린할 수 없는 절대적인 선상에서 직선을 향하여 나를 간섭해 줄 수 있는 절대자와의 인연의 가치를 여러분 자신이 깊이…. 남은 모르나 내 스스로 가치를 노래할 수 있는 그 무엇을 여러분 자신들이 갖지 않았다 할진대 여러분들은 가다가 어느 한 때 어떻게 될지 몰라요. 믿을 수 없는 사람이 된다는 거예요.
여러분이 성경을 배워서 알다시피 노아의 가정도 그러했고, 아브라함의 가정도 그러했고, 역사에 택하여져 선민권을 자랑해 오던 이스라엘 민족도 수천 년 동안 하나의 뜻, 약속의 한날을 고대하여 싸워 나왔지만 그들이 뜻을 대하지 못하고 약속의 실체를 대하지 못한 원인이 어디 있었느냐? 그것은 외적으로 나타난 환경은 중요시할 줄 알았으나 외적으로 나타내기 위하여 자기 선조를 넘어 입체적으로 맺어져 있는 하늘의 심정을 몰랐기에 그들은 배반자의 종족들이 되어 버렸습니다.
오늘 여기 여러분들 대해 내가 제일 염려하는 것이 무엇이냐? 통일 성도들의 수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수가 문제가 아니라 질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어떤 질이냐? 여기서 선생님이 `그래서는 안 돼' 하더라도 선생님이 지지 못할 짐을 진다 할 때는, 더 깊은 하늘의 심정이 그와 더불어 관계 맺어지는 것입니다.
하늘 앞에 사랑을 받을 수 있고, 하늘 앞에 그 가치를 결정받아 나선다 할진대는 내 자신도 그를 존중시하고 머리를 숙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는 거예요. 그런 마음이 없을 때 이 모든 천적인, 어떤 가치적인 문제를 알았다 하더라도 그것을 후대에 상속시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를 좋아하고, 그런 자를 존중시하고, 그런 자를 높이지 않는 어떤 대표자라면 하늘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길을 막는 자밖에 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부디 여러분들, 이제 우리는 최고의 것을 상속받아야 되겠습니다. 최후의 한점을 향하여 우리는 전진해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걸친 옷은 남루하고 처해 있는 환경은 어지러울망정, 일편단심 끓어오르는 심정 속에서 끊을 수 없는 주체인 그 절대자 앞에 내 개체로서의 최후의 가치를 향하여 가겠다는 결심만은 달라져서는 안 됩니다. 아침에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게 될 때 잠자고 난 그 순간이라도 내 피곤치 않다고 다시 일깨워야 됩니다. 저녁 석양에 기울어진 해를 바라보게 될 때 내 마음에 불타는 하늘을 위한 충성의 그 정열만은 서산에 기울어지는 해와 같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목표 밑에서 한 목적을 향하여 모든 것을 수습하고 나간다 할진대는 …. 이미 때가 되었다는 거예요. 수천 년, 혹은 몇천 년 전에는 우리 선조들이 그런 결심을 가졌지만 자기가 처하고 있는 현실과는 관계가 없기 때문에 소망으로밖에 가질 수 없었는 데도 그것을 갖기 위해 애썼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때가 됐다는 겁니다. 이 세상은 싸울 것입니다. 부딪치고 부딪쳐 가지고 내려가는 거예요. 최고의 자기 권한, 최고의 자기 영예, 자기의 권세를 자랑하던 그 모든 것이 최고의 절정에 다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절정에 다다른 그날부터 내려가는 것입니다. 내려간다는 거예요.
그런 환경, 그런 때가 왔거든 거기에 있어서, 최고의 자리에 있어서 자아도취 되어 만족하고 있는 그 무리들 앞에 몰림을 받고, 쫓김을 받고, 눈물 흘리는 자리에서 피투성이로 쓰러져 가는 몸을 부여안고 단 하나 내가 남겨야 할 유업은 무엇이며, 내가 남길 수 있는 유산은 무엇이며, 내가 상속시킬 수 있는 최후의 유언은 무엇이냐? 하늘을 대하여 타오르는 내 심정과 충성하고 싶은 효자의 마음, 충신의 마음, 열녀의 마음이라고 하는 무리들이 있다 할진대 그 무리들은 절대 망하지 않아요.
최고와 최고가 부딪쳐, 세상의 최고와 하늘의 최고가 부딪쳐…. 세상적으로 볼 때는 말할 수 없이 비참하지만 하늘적으로 볼 때는 말할 수 없는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철두철미한 신념과 더불어 이 세계를 생각하는 데는 하나의 이념이 필요합니다. 누구를 위한 이념이냐? 아버지를 위한 이념입니다. 아버지는 이런 이념이 여러분의 이름과 더불어 아버지와 관계맺을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서 6천 년 동안 곡절을 겪어 왔다는 것을 여러분은 잘 알 것입니다. 그 일이 누구의 일이냐? 아버지의 일이예요. 아버지의 일인 동시에 여러분의 일입니다.
세상에서도 그렇잖아요? 어느 누가 그 부모 대해서 내 어머니 내 아버지가 아니라고 부정할 것이냐? 거기에 무엇이 있느냐 하면, 내가 모르는 심정의 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건 아버지가 아니라고 해도 어찌할 수 없는 심정이예요. 그와 마찬가지로 이건 억천만금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떤 인간의 힘으로써 이것을 바꿀 수 없고 끊을 수 없는 거예요.
타락한 종족권 내에 있는 우리의 부모들도 그러하거늘, 본연의 심정을 통해 인연맺기 위하여 역사를 부여안고 역사노정에서 수많은 일을 하시는 아버지는 어떻겠느냐는 거예요. 그런 심정의 인연을 앞에 세우고 찾아 나오시는 아버지는 아직까지 그런 아들딸을 만나지 못하셨습니다. 그런 아들딸을 세우시어 그 아들딸로 말미암아 천적인 가정을 중심삼고 천적인 가정으로 말미암아 종족과 민족을 거쳐, 국가를 거쳐, 만민이 하늘의 백성으로 설 수 있고 하늘의 아들딸로 설 수 있게 하려고 했으나 그런 환경이 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연의 아버지는 이 세계의 끝에 가서라도 이 곡절의 세상 앞에 물들지 않은 참다운 아들딸과 상봉하여, 새로운 역사를 중심삼고 이 세계를 새로운 세계로 전환시키기 위한 한 때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잘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그때에 가 가지고 여러분은 무엇 갖고 나갈 것이냐? 옷 잘 입는 것이 아니예요. 자기의 잘난 얼굴이 아니예요. 지식이 아니예요. 학식이 아니예요. 다 아닙니다. 내 속에 숨어 있는 나만이 갖고 있는 보화,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도 따라갈 수 없는 나만이 가진 이 보화, 이 가치를 절대자와 더불어 길이길이 만우주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가치의 것으로 찬양할 수 있는 그 마음이예요. 여러분 각자에게 그런 마음이 있다 할진대 그런 마음을 가진 자를 중심삼고 하늘은 말씀하시겠다는 거예요.
그런 마음, 그런 입장에 서 가지고 천지를 창조하신 아버지요, 절대자요, 모든 존재세계의 주체로 계시는 아버지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세상에서와 같이 무슨 돈을 주고 끌어온 것이 아니예요. 어떤 수단에 의해서 끌려온 것이 아니예요. 아니 갈래야 아니 갈 수 없는 내 심정이 이 자리까지 끌어온 것입니다. 그런 심정의 줄에 얽매인 사실을 여러분이 느꼈다 할진대 여러분과 아버지의 관계는 지극히 가까운 거리에 있다는 거예요. 지극히 가까운 거리에 있으되 여러분이 움직이는 여하에 있어서 거기에 절대적인 가치의 내용이 있다는 것은 틀림없는 것입니다.
내가 먹는 것도 고깃덩이를 위해서 먹는 것이 아닙니다. 환경이 아무리 변하든, 처지가 아무리 달라졌든 아버지로 말미암아 있어야 되는 겁니다. 그러한 자리에 있으면 있을수록…. 그러면 그런 절대자가 있다 할진대 오늘의 나 한 개체만을 중심삼고 가치적인 인연을 맺기 위한 것이냐? 아닙니다. 온 세계, 자기의 사랑하는 손길을 거쳐 지음받은 것이면 어떠한 존재물 하나라도 본연의 인연을 맺기 위해 지금까지 허덕여 나왔습니다.
하늘은 이 세상을 전체적으로 움직이는 데 있어서 무슨 말씀으로 움직이려는 것이 아니예요. 심정으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아무리 설명을 잘하더라도 설명보다 앞설 수 있는, 어찌할 수 없는, 내가 안 그럴래야 안 그럴 수 없는 심정으로, 하나의 목표를 향하는 불변의 심정으로…. 내 생활을 휩쓸어 가지고 환경을 급변시킬 수 있는 움직임이 반드시 역사적인 종점을 바라보는 끝날에 있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여기 통일교회에 들어와 가지고 그런 결심, 그런 자기 스스로의 심정적인 변화를 일으켜 아니 갈래야 아니 갈 수 없도록 어떤 큰 힘이, 여러분의 가야 할 길을 지향시키는 그 무엇이 없걸랑 또 가야 됩니다. 찾아가야 되는 거예요. 여기가 여러분이 완전히 안식할 곳이 아니예요. 또 찾아가야 된다는 말입니다.
효자의 길에 있어서 자기 생명보다도 더욱 귀한 재산이 있다면 무엇이냐? 부모라는 것입니다. 충신의 길에 있어서 자기 생명보다 더 귀한 가치가 무엇이냐? 군왕을 위하여 충성을 다하고자 하는 그 정성의 마음 그것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열녀도 역시 마음이 문제예요. 그 마음은 어떤 인간의 힘으로써 수단으로써 가치로써는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 스스로가 자연히 환경을 넘어 가지고 나도 어찌할 수 없는 양심의 방향과 더불어 생활적인 환경을 변화시켜 여러분을 이끌어 가는 느낌이 있다 할진대 다른 생각 할 필요 없습니다. 여기서 바라는 것이 제일 확실한 거예요. 반드시 천륜을 밝힐 수 있는, 인류가 공히 누릴 수 있는 하나의 도의 중심이 되어야 할 곳은 어떤 곳이냐 하는 것을 알았기에 심각히 생각하고 통일이라는 글자를 걸고 나오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 있어서 다년간 모든 사람들, 악한 사람들을 붙들어 가지고 실험을 해봤다구요. 한 사람이 아니예요.
내 마음이 향(向)하는 그 움직임은 여러분의 것이 아닙니다. 나는 죽더라도 그것만은 남기고 가야 됩니다. 내가 죽더라도 그 움직임, 그 향심(向心)만은 남기고 가야 돼요. 이 타락한 세상에서 전멸당하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그 마음만은 세계를 정복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늘로부터 시작된 마음이라면 그 마음이 만민과 더불어 엉클어지기 위하여 움직인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 마음은, 잘난 사람, 못난 사람 혹은 동 서양을 넘어서, 어떤 민족적인 전통을 넘어서, 국경을 넘어서 환경은 다르지만, 심정의 세계에 있어서는 느껴지는 그 감촉과 마음의 방향은 변치 않는 작용을 절대자와 더불어 관계맺을 수 있다면 그것이 최후의 길입니다.
여러분은 자기도 모르게 좋은 일이 있으면 누구한테 보이고 싶어요? 주인 앞에, 절대자 앞에. 슬픈 일이 있으면 누구하고 나누고 싶어요? 귀한 분하고. 이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내가 기쁘고 좋을 때에는 발길이 바빠요. 나에게 먹을 것이 있고, 좋은 것이 있고, 입을 것이 좋은 게 있으면 그분을 생각하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그것은 나에게만 있어야지 그분에게 있어서는 안 돼' 하는 마음이 여러분 자체에서 우러나온다 할진대 여러분은 절대 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저녁 사방에서 몰려왔습니다. 여기 서서 말하는 선생도 일대일로 보면 뭐 별거 없다구요. 마찬가지예요. 그러나 문제는 여러분이 모르는 내적 세계에 있어서 그 무엇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어떤 수단 방법으로는 절대 안 돼요. 당장에 그 세계, 그 심정적인 인연에 내가 찾아 들어가게 될 때에는 눈물 없이는 대할 수 없어요. 몸을 가눌 수 없을 만큼 사무쳐 들어오는 심정적인 그 무엇이 있기에 지금까지 싸워 나온 것입니다.
내가 오늘 젊은이들을 바라보게 될 때, 마음에 솟구치는 것이 무엇이냐? 꽃다운 청춘시대, 혈기 왕성한 이때에 하늘 대하여 충성하는 데에 총력을 기울여 가지고 놀랍게 숨겨져 있는 본연의 그 모습을 일으켜 절대자와 인연을 어떻게 맺게 할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가야 할 인생노정에는 곡절이 많습니다. 세상을 바라보게 되면 믿을 수 없는 세상이요, 어느 사방 주위를 바라봐도 자기 일신을 가꾸어 천성의 인연을 맺기 위해 눈물 흘릴 수 없는 환경이 많다는 거예요. 환경이 그런 동시에 내 자신도 그러하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생명을 책임질 수 있는 한 분이 있다 할진대 그분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밖에 없어요.
6천 년 동안 역경 속에서 역사노정을 거쳐오면서 슬픔을 머금는 한이 있다 할지라도, 처량한 눈물을 한없이 흘리는 자리에 가 있다 할지라도, 가슴을 억누르는 한이 있다 할지라도, 배반하고 돌아서는 자가 있는 그 자리에 있어서도 `너는 가더라도 내 사랑하는 아들은 남아 있다. 하늘의 약속을 받아 가지고 민족을 대신할 아들을 보내 주마' 하셨습니다. 이런 마음을 품고 소망의 마음을 앞놓아가면서 현재의 악한 것을 잊어버리고 나온 우리 아버지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또한, `현실의 억울함 가운데에서도 소망의 아들딸이 오래지 않아 찾아온다. 내가 소망하고 내가 싸우는 이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하나의 아들딸들이 앞으로 나타난다. 내가 현세에는 비참함, 억울함, 한스러움을 당하지만 천지를 한시에 파괴해도 마땅치 않은 이런 심정에 사무쳐 있지만, 이런 억울함을 다 이해하면서 이 억울한 자리가 다시는 내 앞에 보여지지 않도록 참다운 아들딸들이, 소망의 아들딸들이 앞으로 온다' 하고 바라시는 아버지라는 겁니다. 이 과정에서 별의별 해괴망측한, 볼래야 볼 수 없고 들을래야 들을 수 없는 참상이 벌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이건 다 지나가라! 이것이 지나가고 소망의 한날이 올 때에 그리운 내 아들, 그리운 내 딸…' 이러시면서, 슬픈 일을 당할 적마다 마음으로 외치시고, 곡절에 부딪칠 때마다 참는 마음으로 이렇게 읊으면서 나오신 아버지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민족을 대신하여 내세웠던 이스라엘 지도자들에게도 하늘의 사정이 이렇다고 통곡하여 가르쳐 줬으나 그 사정을 다 유린해 버렸습니다. 그럴 적마다 `민족에 대한 내 사정을 모르는 이스라엘아! 너는 갈지언정 내가 너에게 사정했던 소망만은 남아 있다. 나는 이 심정을 갖고 이스라엘 너를 대했지만 너는 갔다. 그러나 너를 대하던 소망의 심정만은 남아 있다' 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밥을 먹어도 한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내가 어디 즐거운 그 한 자리, 소망과 사정과 심정이 어우러지는 그 한 자리에서도 사탄의 참소조건을 벗어나 자유스러운 보금자리에서 아버지를 모셔 놓고 밥을 들 수 있는 그 한 시간을 그리워하면서, 여기서 말하는 사람도 그런 소망의 마음을 가지고 나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을 대해 여기서 이 한 마음을 통해 외치지만 오늘 여기에서 외치는 그 가치를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소망의 마음을 갖고 외칩니다. 소망의 가정을 품고 외칩니다. 소망의 심정을 갖고 외치게 된다는 거예요. 아버지를 붙들고 소망을 가졌던 그들의 배반, 사정을 통하였던 그들의 배반, 심정을 나누었던 그들의 배반을 바라보면서도 `너는 가라, 가려면 가라! 소망의 아들딸은 찾아오나니, 소망의 사정은 남아 있나니, 소망의 심정은 남아 있나니…' 이러면서 내 아버지가 품고 나오시던 그 뜻을 따라 나도 그렇게 가야 된다는 자리에서 지금도 나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비록 내 마음에 품은 것은 없고 내 가슴에 담아진 것은 그리 많지 않다 하더라도 아버지가 소망하시던 그 소망의 아들의 모습을 그리워하고, 아버지의 사정을 그리워하고, 심정을 나눠 주시던 아버지의 그 심정을 그리워하는 소망의 사람이라도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망하시던 그 한날 내 아버지를 모실 때 어떻게 모시겠다고 여러분은 준비해야 될 것입니다. 나는 그분을 만나게 될 때 이러한 사정을 통하겠다고 하는 사정의 곡절을 많이 가져야 될 것입니다. 내 억울한 모든 심정을 이렇게 아버지 앞에 아뢰겠다고 하는 남모르는 심정의 곡절을 많이 가진 사람이 행복한 자가 될 것입니다.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예요. 한스러운 역사의 사망의 고난은 소망의 사상을 유린하고, 사정과 심정을 유린하고, 하나의 도의 심정을 갈래갈래 찢어 놓는 세상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하늘은 이 시간도 이러한 사정들을 수수방관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은 나 대신 이 소망을 위하여, 이 심정을 위하여, 이 사정을 위하여, 우리들을 위하여 오늘날 이 현장에서 싸우고 있다는 걸 여러분이 잘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걸 잘 알아야 돼요. 누구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그런 것을 많이 느끼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지방에 나가 전도하든가 혹은 계몽 나가게 될 때, 영적인 수준이 높은 사람이 여러분들을 증거하게 됩니다. 왜 증거하느냐? 소망의 한날을 위하여, 사정의 한날을 위하여, 심정의 한날을 위하여 수많은 영계의 영인들은 지금 이 시간도 하나님을 중심삼고 전체가 동원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소원과 여러분의 사정과 여러분의 심정이 하늘의 소망, 하늘의 사정, 하늘의 심정과 연결될 수 있는 하나의 때를 준비하기 위하여…. 그 놓여질 수 있는 그 기준은 어떤 민족적인 기준이 아닙니다. 하늘땅의 기준이라구요. 하나님도 여기에는 안식할 수 있는 그 기준을 향하여 나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렇게만 되면 다 잊어버려도 좋다는 거예요.
오늘의 내 자신이 그런 사람이 못 되었거든, 소망을 이루는 자로 서지 못하였거든, 사정을 통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서지 못하였거든, 심정을 나눌 수 있는 사람으로 서지 못하였거든 소망의 한 사람이라도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소망을 품고 소망의 사정, 소망의 심정을 향하여 아버지 앞에 나서 가지고 `내 아버지여! 그대의 사정이 이것이지요? 그대의 심정이 이것이지요?' 할 수 있는 오늘의 여러분이 못 됐거든 그런 자리에라도 서지 못하면 여러분 갈 길을 가지 못한다는 겁니다.
오늘 저녁에 이것을 전부 다 수습하여서 가야 되겠습니다. 한 분을 위하여 내가 있기 때문에 내 생각이나 모든 것이, 내 영혼이나 모든 것이 그분을 위하여 있어야 됩니다. 그것이 인간의 목적입니다. 피조물이 그렇게 돼 있다는 거예요. 그 한 분을 위하여 내가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다구요. `나는 그 한 분을 위해서 있습니다. 어떡하든지 그 한 분을 대신해 있습니다. 동으로 가나 서로 가나 밤이나 낮이나 그분을 위하여 있습니다' 할 수 있어야 돼요.
그분이 소망의 심정을 갖고 왔지만 사정을 나누지 못하고, 천지의 모든 것이 그리워할 수 있는 그런 심정적인 기준을 오늘날 인간들과 더불어 관계맺지 못하고 그 소망이 유린되었습니다. 소망을 갖고 그 시대적인 책임자 앞에 그 책임을 맡겨 소망의 자리에 세웠고, 그 시대적인 사정을 논했고, 그 시대적인 심정을 논했으나 다 유린되었다는 겁니다. 오늘날 이 시대는 세계적인 소망의 때요, 세계적인 사정의 때요, 세계적인 심정의 때입니다. 그런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때가 멀지 않았다는 것을 여러분 알아야 됩니다. 절대적으로 그 하나의 마음만….
그러면 여러분이 그분을 대신하여 있다는 걸 느낀다 할진대는 좋은 것만 그분을 대해서 내가 책임지고 내가 대신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을 위해 있는 것입니다. 좋은 것은 물론이로되 나쁜 것도…. 타락을 누가 했어요? 우리 선조 아담 해와가 했던 거예요. 그래, 하나님 앞에 `6천 년 동안 소망의 실체를 갖지 못한 당신 앞에 나는 소망의 실체로서 가정을 대해서도 그렇게 하겠사옵고, 가정을 대신해서 이 사정을 나누고 싶사옵고, 가정을 대신해서 이 심정을 알고 싶습니다' 이렇게 해야 됩니다.
오늘 이 땅은 어떤 땅이예요? 타락한 땅이요, 죄악의 땅이요, 원수가 준동하는 땅입니다. 우리가 가는 길을 막고 갈래갈래 찢어 버리기 위한 땅이예요. 원수와 싸우는 땅이예요. 싸움은 누가 해줘요? 하늘이 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안 되겠다 이거예요. 이 싸움을 우리가 책임져야 되겠다는 겁니다. 역사적으로 이 싸움을 맡긴 것만 해도 억울한 것입니다. 이 싸움을 하겠다고 결의와 각오를 하고 나선 무리가 누구냐 하면 여기에 모인 여러분들입니다. 우리에게는 이제 최후의 싸움이 남아 있습니다. 하늘을 움직이고 땅을 움직여 싸워야 할 최후의 싸움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 싸움은 누구 때문에? 아버지를 위하여 하는 것입니다. 왜? 아버지 때문에 내가 있으니…. 아버지가 그러한 자리에서 나를 키우고, 그런 길을 가르쳐 주고, 그런 길을 소망으로 품고 나오던 하나밖에 없는 그 사랑의 심정을 우리와 연결시키기 위해서 수고해 오신 것을 생각만 해도 고마운데, 오늘날 그런 것을 알고 나서 또다시 그걸 맡길 수 있어요? 이제는 우리를 하늘이 후원해 주나 안 해주나 우리가 책임져야 됩니다. 하늘의 구원을 생각할 때 너무나 미안해요. 너무나 황공하다구요.
우리는 탕감복귀의 원리를 배웠습니다. 아담 해와가 타락할 때 하나님이 후원해 줬어요? 생각해 보라구요. 아담 해와가 생겨날 때까지는 하나님이 빚어서 만들었지만, 타락할 때 하나님께서 `너 타락해라' 그렇게 후원해 줬어요? 후원 안 했다구요. 마찬가지로 여러분들도 최후의 고비를 넘어가는 그때에 하나님의 후원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어떠한 천상세계의 천사의 후원도 받아서는 안 돼요. `이것은 내가 책임지겠습니다' 해야 돼요. `당신은 이러한 소망의 한때에 심정적인 중심을 통하여 심정적인 인연을 통하여 세우고자 하셨던 당신의 족보가 이렇다는 걸 알았으니 하나님의 후원, 천사의 후원, 영계의 어떤 성도의 후원도 받지 않고 이젠 나 혼자 하겠습니다' 이럴 수 있는 열성을 가져야 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선생님도 마찬가지예요. 이때에는 어느 누구의 후원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여기 선생님도 여러분들을 내보내서 원수의 소굴에 처넣을 것입니다. 왜? 일시에 탕감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이때는 간교한 때요, 이때는 죄의 기교가 많은 때요, 이때는 자연 유인당하기 쉬운 때요, 이때는 역사적인 전체의 결재시대입니다. 악한 것이 있다면 최고의 악입니다. 그걸 쓸어내야 돼요. 거기에서 시험치고 나서 늠름하게 자기의 용자를 하늘 앞에 내세울 수 있는 내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앞으로 선생님은 여러분들을 후원해 주지 않습니다. 해줘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이젠 알았다구요. 내 갈 길을 알았고 최후의 가치가 어떻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절대적인 부자관계라는 것을 알았고, 그 부모 앞에 진 빚은 몸뚱이가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져도 갚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입을 벌려 가지고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할 수 있어요? 여러분이 앞으로 나가 전도할 때 환경이 어렵게 되면 `아버지! 내가 배고파 죽겠습니다' 이런 기도를 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이런 자리에 섰음은 저들을 위한 것이었사오니 이런 것을 보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으시거든 저들을 긍휼히 여기시옵소서' 이래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동절기에 추운 방에서 잠을 자게 됐을 때 사정없이 찬 바람이 내 일신을 몰아치고, 혀와 같이 몸을 구부리고 자는 모습으로 눈물짓는다 하더라도 `아버지여! 나를 불쌍히 보시거든…. 내가 이렇게 있음은 이 민족을 위함이요, 세계 인류를 위함이 아닙니까? ' 이렇게 기도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 서지 않으면 절대 여러분은 풀리지 않습니다. 그런 마음이 앞서 가지고 나가는 자는 절대 하늘이 같이하지 않습니다. 내가 지내 보니까 알겠더라구요. 감옥에 들어가 영어의 몸이 되어서 여지없이 이런 환경에 처할 때면 하늘은 난데없는 사람을 통하여 굶주리면 먹을 것을 갖다 주는 것입니다. 옷을 구하지 않았지만 입을 것을 갖다 주더라는 거예요. 여기서 말하는 선생님은 편안한 자리에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역사를 겪어 왔기 때문에 당당히 말할 자신이 있다는 거예요. 양심적으로 가책이 안 돼요.
서울에서 내가 가까운 식구들 모아 놓고 한 말이, 네가 나를 사랑하고 존중시하거든 네 양심에 가책이 되지 않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말할 때마다 그랬습니다. 내가 잘 먹고 잘 입는 표준에서는 말 못합니다. 내가 고생함으로 말미암아 버젓이 말할 수 있어요. 내가 어려운 자리에서 수고함으로 말미암아 민족 앞에 버젓이 나설 수 있고, 만민 앞에도, 하늘땅 앞에도 위신을 세울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행치 못한 기준에 있게 될 때는 양심이 입 못 벌리게 합니다. 그러니 여러분, 부디 마음만은 하나님을 위주로 한 여러분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삼천만 민족을 찾아 품고자 하는 아버지가 계신다면 그 아버지 앞에 초라한 모습이나마 삼천만 민족을 넘어서서 아버지의 심정을 염려하며 눈물지으며 내 일신의 처량한 모습을 잊어버리고, `아버지여! 나를 긍휼히 보시거든 이 민족을 사랑해 주시옵소서' 한다면 그로 말미암아 그 민족은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부모된 자여, 자식을 키우되 훌륭한 사람을 만들고 싶거든 자식을 세워 놓고 남에게 말할 때 양심에 부끄럽지 않은 마음을 가져라 이겁니다. 자기의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세워 놓고 만민 앞에 양심에 거리끼지 않는 자리에서 말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기를 하늘은 바라는 것입니다.
예수가 이 땅 위에서 30평생을 살다가 죽어갔고, 그 대상인 성신도 이 땅에 와서 피눈물 나는 길을 갔습니다. 이것이 하늘의 한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할말이 있어야 됩니다. 여러분, 이제 이 민족 앞에 나선 우리라 할진대, 더 나아가서는 인류 앞에 나선 우리라 할진대 여러분들이 앞으로 이 민족 앞에, 이 세계 만민 앞에 말할 때가 올 것입니다. 여러분, 수고하신 아버지 앞에 말할 때 양심에 가책되지 않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런 자리에서 여러분이 나간다면 나중에는 어떻게 될 것이냐? 하늘은 곡절이 많은 데로 인도하시는 것 같지만 최후에는…. 자기 태어난 천성을 잘 아시는 하늘이기 때문에, 하늘은 사랑의 아버지이기 때문에 내가 어떤 계기와 어떤 수단 방법을 개의치 않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보다도 내가 떨어지는 것 같고 불쌍하게 망하는 것같이 이끌려 들어가지만, 내가 좋아하는 이상의 최고의 그곳까지 하늘은 책임지고 끌어당기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여러분이 그때까지 지탱하지 못하기 때문에 걱정이지요. 몇 해만 가면 다 굴러 떨어진다구요. 야곱도 21년, 노아 할아버지도 120년, 모세도 120년이었으니 못해도 10년 단위는 훌훌 넘어가야 된다구요. 삼칠은 이십 일(3×7=21), 7년 이상 넘어가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나서게 될 때, 하늘은 여러분들을 누구 대신으로 세우려고 그러는 지 알아요? 보기에 아무것도 아닌 무리들을 누구 대신 세우려고 하느냐? 앞으로 오시는 주님 대신 세우고, 지금까지 이 땅에서 역사하신 삼위신을 대신하여 세우고, 나중에는 아버지 자신을 대신해서 세우려고 하시는 겁니다. 실체의 어떤 결과적인 실적의 가치를 가져야 할 이 세계에서는, 마음의 세계에서는 나타난 가치는 지극히 작고 미미하다 하더라도 그 심적인 동기는 목적을 넘어 소망의 심정에까지 붙들고 나오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나타나는 일이 비록 미미하다 하더라도 그 가치는 아버지를 대신한 가치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지금 나가 있는데 누굴 위해 나가 있느냐? 먼저는 여러분 자신을 위해 나가 있고, 그다음에는 아버지를 대신해서 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버지 대신자예요. 여러분이 아버지 대신자면 뭐냐? 아버지의 소망, 아버지의 사정, 아버지의 심정을 여러분은 상속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하늘은 기필코 여러분을 이 땅 위에 만민의 대표자로서, 만우주의 주인공으로 세우기 위한 창조목적을 달성할 것입니다. 그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끝에 가 가지고는 여러분들을 어떻게 만들 것이냐? 대신자예요, 대신자. 남자는 아버지의 분신이요, 여자는 어머니의 분신이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나누어진 몸입니다. 창조원리에서 배운 것과 마찬가지로 대신한 몸입니다.
선생님이 금년 정초에 본부교회에서 강조한 것이 뭐냐? 이것이었어요. 금년에는 여러분들이 아버지 대신이니 책임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소망의 대신이요, 사정의 대신이요, 심정의 대신일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사탄을 대해서 싸우는 싸움의 대신자입니다. 이 싸움에서는 하늘의 후원을 받아서는 안 돼요. 여러분들의 자력으로 가야 되는 것입니다.
선생님도 지금까지 40평생을 나오는 도상에 있어서 누구의 협조를 안 받았습니다. 내가 맡은 바의 책임은 생명이 끊어지는 한이 있다 할지라도 여러분에게 신세 안 져요. 여러분의 갈 길을 지도해 주는 스승의 입장에 있기 때문에…. 그리하여 지금 3년 이 기간을 조건삼아 한계를 정해 여러분들을 내세우는 것입니다. 내세운 여러분들은 누구냐? 아버지의 대신자요, 삼위신의 대신자입니다. 참부모의 심정을 대신하여 나선, 참부모의 사정을 대신하여 나선, 참부모의 소원을 대신하여 나선 여러분이기 때문에 이 법을 유린하는 자는 용서가 없다는 것입니다. 용서가 없다는 거예요.
여러분 자신이 쌍수를 들어 하늘 앞에 맹세하고 나서는 데 있어서 `아버지여, 나는 이제 아버지의 대신이로소이다!' 이렇게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세 사람의 증거가 있어야 돼요. 그걸 누가 해 줄 것 같으냐? 참부모가 해주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모셔 놓고 삼위신을 중심삼아 가지고 하늘땅을 대신한 나는 어쨌든 창조원칙을 통한 본연의 아버지의 분신으로서, 어머니의 분신으로서 손을 들어 삼위신을 입증하는 자리에서 맹세하고 나서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그날에 있어서 무엇을 책임지느냐? 하늘의 소망의 마음입니다. 하늘이 사정을 품고, 심정을 품고 지금까지 가르쳐 주지 못하고 나오던 이 사실을 여러분 앞에 가르쳐 준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의 소원이 무엇인지 알고 아버지의 사정이 어떻다는 것을 알고, 아버지의 심정이 어떻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들이 남한 각지에 지금까지 8백여 곳에 계몽 나가 있습니다. 나는 어떤 많은 성과 내기를 원치 않아요. 나갔다 들어오게 될 때에 무엇을 남겨 놓고 들어올 것이뇨? 아버지의 정신, 참부모의 정신, 성부 성자 성신의 정신을 남겨야 됩니다. 여러분이 그 부락에서 철수해 오더라도 거기에서 잊지 못할 여러분의 모습, 꿈에라도 떠오르고, 생각에서도 떼낼 수 없는 여러분의 모습을 남겨 놓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고 돌아오게 될 때…. 3년 기간에 우리의 생활적인 모든 것이, 눈물과 땀과 피가 흘려져 있어야 됩니다.
6천 년의 최후의 종결을 지어야 할 하나의 소용돌이가 치고 있다는 걸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3년 도상에 있어서 여러분이 어떤 부모된 자가 있다 할진대는 자기 자식들을 이러한 기간에 내세우지 못하면 천추의 한이 될 것입니다. 자기 사랑하는 사람을 가진 자들이 이런 때에 뜻 앞에 있어서 이런 기간에 동참하지 못할 자리에 있으면 천추의 한이 될 것입니다. 그런 부모를 갖지 못한 그 후손은 한할 때가 올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 개체의 몸에 아버지를 모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제 전부가 건설이예요. 에덴의 아담 해와가 집 지을 때 무슨 기구가 있었어요? 연장이 있었느냐구요?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앞으로 지방에 가서 여러분 개체를 중심삼아 가지고 서게 되면 반드시 거기에는 자기가 머물 수 있는 숙소가 있어야 됩니다. 숙소에는 성소와 지성소가 있어야 돼요. 여러분의 집을 지어 나가는 거예요. 여기서 말하는 선생님의 집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의 집이예요. 여러분들의 집을 짓는 데 있어서 여러분들의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리지 않겠다고 하면 망해야지요.
동산을 남겨 놓아야 합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을 모셔 놓고 축복받기를 원해야 합니다. 축복해 주기를 그리워하던 하나님이요, 축복받기를 속사람이 그리워했던 아담 해와였다는 걸 여러분은 알아야 된다는 겁니다. 벌판에서 축복받겠다고 하는 사람은 망하는 거예요. 초가삼간 지어 놓고 어찌 아버지 앞에 축복받겠다고 할 수 있어요? 사탄세계는 저렇게 어마어마한 자리에서 향락을 누리고 있는 이때에 내 무슨 자랑할 것은 없사오나 내 마음만은 천만금을 주고도 바꿀 수 없다고 자랑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어야 됩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몸 대신이요, 하나님께서 아담 해와를 창조하시던 그 이상의 가치인 것입니다.
선생님은 돈이 없습니다. 이번에 선생님이 본부에서 수많은 사람을 동원할 때 돈 천 원 한 장도 없었습니다, 남들은 말하기를 통일교회 돈 많다고 하는데. 돈이 없더라도 해야 할 우리의 운명길을 가야 되는 것입니다. 이런 천륜의 곡절이 있으므로 여러분 일신을 통하여 이 민족의 운명을 가로막고 있는 현세를 타파해야 할 사명을 감수해야 되는 겁니다.
여러분을 내 어린 시절의 한 때를 회상하면서 내몰았습니다. `자라고 있는 이 어린이들을 당신을 위하여 피눈물 뿌리며 호소하던 그 모습을 대신하여 내몰겠습니다. 그때에 당신께서 이렇게 주장했고, 이런 때 이렇게 붙들어 주시던 당신이 있는 것을 아오니…' 하며 여러분들을 내몰았던 겁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이 아니예요. 여러분 내보낼 때 선생님은 눈물을 흘리며 여러분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외식자예요. 여러분의 피와 땀을 농락하는 거라구요. 그래, 여러분이 심정의 빚을 지지 않기를 지금도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늘 앞에 서서 아버지가 쌍수를 들어 축복하시는 그날 야곱의 일가가 하늘의 축복받는 무리가 되었던 거와 마찬가지로 여러분은 종족의 조상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이때에 하늘의 배반자가 되고 천추의 심정적인 범죄자로 등장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등장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아담 해와는 심정적인 범죄자가 됐습니다. 미완성권 내에 있어서 하늘이 허락한 심정을 기른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 대신자입니다. 싸워야 되겠어요. 이를 악물고 싸워야 되겠습니다. 야곱은 하란 라반의 집에 가서 싸웠습니다. 애급에 가서 싸웠습니다. 예수도 이 땅 위에, 사탄세계에 와서 싸웠습니다. 무엇을 위해? 사람을 빼앗기 위한 싸움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여러분이 가야 할 길을 복귀의 노정이라 하는 것입니다. 잘 알 거예요.
하나님의 한이 무엇이냐 하면 예수 앞에 세 제자까지 배척한 거요, 열두 제자가 배반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탕감복귀노정은 꺼꿀잡이입니다. 여러분들도 부모의 자리에 나가기 위해서는 믿음의 세 아들딸을 만들어 놓아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못 나가요. 그렇게 되어 있다는 거예요, 꺼꿀잡이. 아담 해와가 부모가 되어 가지고 자식을 낳았다면 정상적인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백성이 될 것이었는 데 타락했기 때문에 꺼꾸로 뒤집어졌으니 하늘은 종을 시켜, 천사를 시켜 역사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시대입니다. 아버지가 천사와 협조해서 그런 백성을 만드는 데 꺼꾸로 올라가는 거예요.
그다음에 아들을 만들어 가지고 부모의 기준을 통해서 하늘과 인연 맺자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여러분들도 예수가 가던 길을 이를 악물고 가야 됩니다. 탕감복귀 노정을 가기 위해 남 모르는 비밀의 길에서 얼마나 고생을…. `내가 마땅히 받을 세계가 있으나 받을 때까지 나의 답답함을 어찌 알겠는가? '라고 탄식하는 예수님의 심정을 알아야 됩니다.
여기서 외치고 있는 선생님도 마찬가지예요. 40평생 다리를 못 뻗어 보고 뜬구름같이…. 발과 몸뚱이를 놓아 놓고 한 날을 안심하고 살지 못했습니다. 흘러가는 구름결같이…. 탕감복귀의 길이 이렇게 힘들다는 걸 여러분은 모를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지극히 좋은 환경에 있습니다. 우리의 진리를 들고 나서면 하늘이 평면적으로 역사하실 수 있는 때입니다. 심정기준이 땅을 중심삼고 벌어질 수 있는 때가 왔기 때문에 평면적으로 하늘이 역사하실 수 있고 여러분 자신들이 예수와 성신의 역사를 전개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예수 대신, 성신 대신이 되어 가지고 상대 방향을 일으킬 수 있는 평면적인 입장에 들어왔으니 사탄이 지금 벼르고 있다는 거예요. 그 고개를 넘어가야 됩니다.
이젠 선생님이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 그걸 할 때까지는 죽어서는 안 되는 거예요. 이제 인간들이 가야 할 길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가야 할 길에 있어서 필요조건이 뭐냐? 여러분에게 직접적으로 평면적으로 사탄 대해서 가르쳐 주더라도 참소할 수 없는 시대가 왔으니, 이 3년 기간이 무슨 기간인 줄 알아요? 여러분이 피와 땀과 눈물을 중심삼고 사탄세계에 가서 잃어버린 아들딸을 찾아오는 기간입니다. 그걸 알아야 돼요.
그 부락에 들어가는 데는, 여러분이 배정받아 그곳에 나가는 데는 그 목적이 뚜렷해야 됩니다. 무엇 때문에 나와 있느뇨? 잃어버린 부모의 입장, 자식을 찾아 헤매는 사무친 부모의 심정을 알아야 됩니다. 가르쳐 줘도 모르니 부모가 이렇다는 것을 심정적인 면까지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소원을 오늘에 있어서, 아버지의 사정을 오늘에 있어서, 아버지의 심정을 오늘에 있어서 `내 아들아, 내 딸아! 네가 소원의 실체요, 사정의 전통이요, 심정의 전통이다'라고 나타낼 수 있는 그 환경을 얼마나 고대하고 있는가를 알아야 됩니다.
그것을 할 수 있는 마당에서 여러분 빚지지 말라구요. 선생님은 한푼도 도와주고 싶지 않아요. 도와줘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공적으로 도와주면 안 돼요. 각자 책임진 노정에 있어서 통일신도가 가야 할 길은 아버지 대신의 길입니다. `아버지의 소망, 사정, 심정이 오늘날 내 자체에 나타나는 결실이 되겠습니다. 아버지, 당신의 소원을 내게 주시옵소서. 당신의 사정을 내게 주시옵소서. 당신의 심정을 내게 주시옵소서'라고 할 수 있어야 됩니다. 소망의 심정, 소망의 사정, 소망의 소원으로서 여러분 자체가 주체가 되고, 여러분 자신을 통하여 하늘의 소망이 이루어질 수 있어야 됩니다.
여러분은 참부모의 대신자, 아버지의 분신 어머니의 분신으로 아버지 소원의 실체요, 아버지 사정과 아버지 심정의 실체로서 등장해야 됩니다. 아까 말한 것과 마찬가지로 여러분은 6천 년 동안 지금까지 아버지의 소원적인 실체, 사정적인 실체, 심정적인 실체로 나타난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 소원을 내 것으로, 그 사정을 내 것으로, 그 심정을 내 것으로 해야 됩니다. 하늘 대해서 이 땅 위의 여러분의 갈 길은 여러분이 아버지 앞에 제물이 되는 길입니다. 여러분이 책임져야 돼요. 앞으로 여러분이 최소한 그런 심정을 갖고….
그렇기 때문에 신세를 지지 말라는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돈이 없으니 자기 어머니 아버지한테 달라든가 뭐 어떻게 할 거예요. 배가 고프면 어머니 아버지한테 가서 조르면 어머니 아버지는 멋도 모르고 그저 도와주는 겁니다. 그래서 그 조건으로 말미암아 어머니 아버지는 복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기준을 닦아 준다는 거예요. 구체적인 설명은 안 하겠습니다. 때가 그런 때라구요.
또, 여러분들 지금 운세를 보라구요. 1960년은 세계 전환의 때라고 원리에 딱 나와 있습니다. 이 3년간은 예수님의 공생애노정의 3년간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기간에 완전히 동참해서 승리자가 되면 예수님 대해 오빠라 할 수 있고, 형님이라 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피와 땀과 눈물로 탕감해야 되는 것입니다. 최후의 이 격전에 있어서 패자가 되지 않기를 부탁합니다. 알겠어요? 「예」
인생이 바라던 소망의 실체도 당신이었사옵고, 잃어버려 눈물을 흘리게 된 동기의 실체도 당신이었습니다. 인간에게 있어서는 당신이 없으면 하나에서부터 천만사가 전부 다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내 생명도 당신을 잃어버리고는 무의미한 것이요, 내 욕망과 내 소망과 내 모든 존재의 힘의 가치도 당신을 잃어버리고는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들을 일깨워 주시어서 제 마음을 재촉하여 최고의 기준과 연락하기 위한 당신의 구원의, 소원의 뜻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에, 저희들은 너무나 황공한 심정으로 머리 숙였사오니 긍휼히 보아 주시옵소서.
타락한 후손으로서 어느 누가 당신 앞에 버젓이 서서 저는 당신의 아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가면 갈수록 머리 숙이지 않을 수 없고, 가면 갈수록 뼛골에 사무친 눈물을 짓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오늘 저녁 여기에 모인 어린 것들, 당신의 무릎 앞에 모여 당신의 소원이 무엇인지 배웠습니다. 제 어떤 욕망을 이들에게 주고 싶고, 그 욕망은 당신의 욕망과 바꾸고 싶사옵니다. 이제 저희들이 소망하는 모든 소망도, 사정의 모든 것도, 심정의 인연의 모든 것도 당신 앞에 맡기겠사오니, 맡기고 날 적마다 맡기려는 그 입장을 굽어 지켜 봐 주시옵소서. 또, 맡길 수 있는 그 기준이 못 되어 있는 것을 바라보게 될 때에 아버지 앞에 호소하면서도 눈물짓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용납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렇게 하여서라도 당신의 뜻을 이루어야 할 것을 이제 알았사옵니다. 고생 고생하여 한 생명을 붙들어 아버지 제단 앞에 세우시어 충성을 다짐하고 제단을 키우는 하나의 제사장을 만들기 위해서는 피와 눈물이 섞이지 않고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버지, 여기에 당신이 직접 염려하시는 아들딸들이 있을 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의 심정을 나눌 수 있는 무리가 되기를 저는 고대합니다. 불초 이들을 이끄시는 아버지, 얼마나 수고하셨사옵니까? 이들이 눈물 흘릴 때 같이 눈물을 흘리시는 것도 알았사옵고, 매맞을 때 같이 억울함을 느끼시는 것도 알았사옵고, 쓰러질 때 권고하시던 당신인 것을 알았사옵니다. 그런 아버지 앞에 제 자신이 그렇게 대신하여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에, 오늘 이 시대의 하늘을 바라보고 하늘 앞에 송구한 마음 금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으로는 하늘이 대신할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뜻을 중심삼고 이 모든 천지의 움직임이 그들의 마음과 동반할 줄 알고 있사옵니다. 환경적인 희생의 조건을 아버지가 처치해 줄 수 없사온데 저희들이 탕감적 자리에 놓여 있으면서 당신에게 염려를 끼쳐 드림을, 아버지,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그러하오니 끝까지 참고 이기는 자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무리 억센 설한풍이 저희를 휩쓸어 갈지라도 저희 몸에 타오르는 아버지를 향한 일편단심만은 남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 몸이 피를 토하고 쓰러지는 한이 있다 할지라도 `하늘아, 땅아, 나는 충성을 다 했노라!' 할 수 있는 붉은 심정의 마음만은 남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민족을 대신하여 지방 지방, 더욱이나 전라북도 이 한 지방을 대한 당신의 뜻이 컸던 것을 저는 아옵니다. 이제 만 7년을 넘는 이 한 기간에 있어서 당신의 뜻이 다시 여기에 불타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 어린 것들을 통하여 마음과 마음을 연결하시옵고 심정과 심정을 연결하여 주시옵소서. 저희의 길은 지상의 무슨 간격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궁핍한 자리에서 한 그릇 죽을 나누어 먹으면서도 눈물을 합하여 나눌 수 있는 이런 모습들인 것을, 아버지, 기억하옵소서.
세상에 남기고 갈 무엇이 있습니까? 죽으면 물로 돌아갈 몸을 다 잊고 뜻만을 길이 고이 마음에 넣으면서 높일 줄 알고 섬길 줄 아는 저희들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밤이나 낮이나 저희 식구 식구끼리는 시간을 넘고, 시간점을 초월하여 아버지를 찬양해 주기를 저는 바랐습니다. 하늘과 땅, 밤과 낮이 갈라지는 이 절기 위에 어둠의 권세가 드리워진 것이 한스러운 것을 저는 알았습니다. 한 시간이라도, 밤에라도 아버지를 노래하고 아버지를 의지할 수 있는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 민족을 통하여 밤이나 낮이나 당신이 기쁜 가운데서, 당신이 만족한 가운데서 모실 줄 아는 저희들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뜻을 성취하는 노정에 있어서는 밤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잠 못 자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굶주리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핍박받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내가 다 지내 보니 거기에는 아버지가 계셨습니다. 눈물 흘리는 곳에는 아버지가 계셨습니다. (이하는 녹음이 안 되어 있어서 수록하지 못함)
아브라함이나 이스라엘 민족이 사명을 다하지 못하게 되면 다른 사람과 다른 민족을 택해서 섭리하십니다.
종교는 세계 형태를 이루어 나가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모세와 예수를 대하던 아버지의 심정이 남아 있습니다. 그런 고로 그들을 배반하던 선인(先人)들을 심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심판은 심정을 가지고 하기 때문입니다.
효자가 되려면 아버지의 대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반갑고 기쁜 마음에서 만지려 하던 막달라 마리아를 예수님은 뿌리치셨습니다.
왜 그랬을까? 막달라 마리아 이상의 마음을 갖지 않으면, 우리는 주님과 기쁨으로 화동할 수 없습니다. 불쌍한 자의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복귀섭리는 불쌍한 사람의 등을 깎아 이루어 나왔습니다.
예수님이 골고다에서 돌아가신 이유는 선의 뼈로 해골 곳을 채우기 위함입니다.
금년 여름 전도 지역을 택정해 보고하기 바랍니다. 전국 순회를 떠나기 전에 전도지역을 배치하려 합니다. 금년은 1,500~2,000개소 이상의 지역 책임자를 배출해야 합니다. 지금부터 준비하기 바랍니다.
전도비용을 한정하도록 하기 바랍니다.
이번 기간에 하나님 앞에 슬픔을 남기거나 천적인 사명을 다하지 못하면 천추에 한이 되고 부끄러움이 됩니다. 선생님은 이 일을 위해 수십 년 전부터 계획했습니다.
3년 전도 기간이 끝나면 축복해 줄 것입니다. 전도에 동참할 수 있는 시대적인 혜택을 무한히 기뻐해야 합니다. 이것은 천추만대에 자랑할 수 있는 일입니다. 지팡이를 짚고도 나가서 산천을 보고 눈물 흘려야 합니다. 자식을 가진 부모가 자기 자식을 이러한 자리에 내세우지 못하면 천추에 한을 남길 것입니다. 본부에 있는 식구들의 책임이 중합니다.
이 민족 앞에 말할 수 있는 자격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 3년 기간에 원리와 심정을 재무장하도록 해야 합니다.
최후의 승리자가 되기 위해서는 모든 어려움을 참고 견뎌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정이 뼛속에 사무쳐야 합니다. 3년 기간이 끝나면 1차, 2차, 3차 계획을 실시할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을 해야 되느냐? 하늘과 땅이 있고, 사람이 있고, 마음과 몸이 있습니다. 그런데 타락으로 인하여 이 하늘과 땅, 사람과 사람, 마음과 몸이 서로 갈라져 있습니다. 이것을 하나되게 하자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선지선열들과 비교하여 자기의 가치를 높여야 합니다.
선생님은 역사상에서 하나님 앞에 충성한 어떠한 사람보다도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선생님은 지금까지 명령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젠 명령해야 됩니다. 역사적인 초점을 돌려놓느냐 못 돌려놓느냐 하는 어마어마한 사명을 감당해야 되기 때문에 선생님은 명령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명령하는 선생님의 각오는 비장합니다.
선생님 개체를 존중시하지 말기 바랍니다. 뜻을 사랑해야 합니다. 복귀해야 할 하나님의 뜻, 즉 아버지의 뜻은 변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 뜻을 세우지 못했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이 소원하였던 것은 심정적 기준을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알파적 심정을 오메가적 심정으로 결실하고자 했습니다. 즉 심정의 실체를 결정하기 위해 수고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때를 따라 변천했습니다. 하나님은 사탄세계에서 제일 사랑하는 사람, 사탄세계에서 제일 충성하는 사람을 빼앗아 나오십니다. 알파적 심정을 하나님과 더불어 오메가적 심정으로 맺어 놓아야 합니다.
선한 사람, 천국 갈 사람은 어떠한 사람이냐? 변함이 없는 사람, 처음과 나중이 같은 사람입니다. 이 선한 사람들의 심정의 실체, 심정의 종결체로서 오시는 분이 메시아입니다. 이러한 메시아, 즉 하나님을 대신한 심정의 주체만이 하늘과 땅을 심판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개인, 가정, 민족을 축복해 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습니다. 그러나 심정의 인연을 맺지 못하고 가셨습니다. 선생님도 이 심정 문제를 중심삼고 3년 동안을 외쳐 왔습니다. 이 심정의 인연을 맺기 위해서는 간곡한 심정의 성도가 많이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심정과 통하는 가치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이 심정의 기준을 잃어버리면 다시 찾기 힘듭니다.
예수님만 기도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도 기도하셨습니다. 당신의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즉 창조시의 심정을 실체로 대신하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지금까지 소망을 바라보며 산 사람은 있었어도, ‘오늘이 소망의 날이니, 하늘이여 땅이여 기뻐하라.’고 외친 사람은 없었습니다. 예수님도 ‘천국이 가까웠다.’고 하셨습니다.
말씀대로 움직이는 자는 말할 수 없이 행복한 자입니다. 왜냐? 지금까지는 하늘땅이 자기 것이 아니었으나 이제부터 말씀대로 살면 하늘땅이 내 것이요, 인류가 한 식구가 되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은 이번 동원을 위하여 수없이 기도하였습니다. 그래도 안심하는 것은 내가 나를 믿고 하나님을 믿고 여러분을 믿기 때문입니다. 효자가 효자를 가질 수 있고, 충신이 충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별별 사람이 준동하지만 최후의 승리자는 한 사람입니다. 심정에 호소해야 합니다. 여기에 감동되면 불변입니다.
유무식자(有無識者)나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동원해야 합니다. 싸움 도중에 축복이 결정됩니다.
선생님은 40평생 하루도 안심하고 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심정 기준을 해결했기 때문에 벼락을 맞아 쓰러져도 괜찮습니다.
친구의 심정 기준으로는 안 됩니다. 부모의 심정 기준이어야 됩니다. 자녀의 기준, 부부의 기준을 통하여 부모의 기준이 이루어집니다.
작년 정초부터 중대한 해로 접어들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생애 최고의 일을 하라고 했습니다.
이제는 하늘을 대신하고 땅을 대신하여 이름이나마 ‘참아버지’의 이름을 걸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아담과 해와의 소원의 실체는 자녀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아니라 그 자손들로 심정의 전권을 세우려 했습니다. 이때가 바로 그런 때입니다. 그러기에 자녀를 세워야 합니다. 음력으로 명년 4월까지입니다. 이제까지 ‘하늘은 우리의 하늘, 땅은 우리의 땅, 인류는 우리의 인류’라고 피조세계에 말할 수는 있었으나 아버지 앞에는 자랑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에게도 자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늘을 대신한 아버지와 땅을 대신한 어머니와 만민을 대신한 한 분을 갖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축복해 주시옵소서. 사탄은 여기서 물러가라.’고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전영계가 동원될 수 있는 아들(子)의 날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안다면 통곡할 것입니다.
누구를 위해 고생할 것이냐?
아버지-동(東), 어머니-서(西), 아들-남(南), 여러분-북(北). 옛날에는 북쪽에 사탄이 있었습니다. 이제 여러분이 사탄을 밀어내야 합니다. 그 후에 상대적인 남쪽의 아들을 대해야 합니다.
천국 가는 공식은 간단합니다. 하늘과 땅을 사랑하였다는 조건만 있으면 됩니다. 이것을 위하여 고생해야 합니다. 아직까지 진정으로 일한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손해 보지 않으십니다. 선생님이 이 길을 위하여 부모, 형제, 처자를 저버린 대가로 여러분을 찾았습니다. 선생님은 부모 형제 처자 이상으로 여러분을 사랑했습니다. 여러분도 부모 형제 처자 이상으로 선생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선지선열들이 쓰러져 갔습니까? 여러분은 어떠한 태도를 가져야 되느냐. 이제부터는 기도의 기간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엄숙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는 여러분이 아벨이고 세상이 가인이지만, 내적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벨이고 여러분이 가인입니다.
선생님이 사탄과 싸우던 비법을 쓰면 여러분은 하나도 남을 사람이 없습니다. 이제는 단결해야 합니다.
심정의 동반자가 되기 위해서는 고생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자랑은 아버지를 대신하여 하늘을 사랑하고, 어머니를 대신하여 땅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붙안고 춤출 수 있는 아들을 대신하여 인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억울하게 죽은 영인들도 면목 없어 땅을 향하여 머리 숙이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삼위신의 해원을 위해서 일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역사적인 뜻을 대신하여 수고한 선열들의 해원을 위해서 일해야 합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축복의 조건을 세우며 정성들이고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내일(23일)부터 선생님이 돌아올 때까지 매일 밤 목욕하고 기도하기 바랍니다. 이번이 이런 뜻의 순회로는 마지막입니다. 정성껏 음식이라도 만들어 먹으며 화목하게 지내기 바랍니다.
이번 순회에 관해서 식구들이 준비를 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순회 비용에 대해서 의논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선생님이 지방에서 말씀하실 것이라고 느껴지는 시간까지 밤늦도록 자지 말고 각자 힘껏 정성들이기 바랍니다.
지방 순회에 선물을 가지고 가야 하는데 그것을 선생님이 마련해 가지고 갔어요.
수련회비를 도와주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전도 나가기 위해 지금부터라도 준비하기 바랍니다.
본부 식구는 18세 이상이면 전부 혼자 전도 나가야 합니다.
60세 이상은 여기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서울 식구들을 제일 고생할 수 있는 지역에 보내려고 합니다.
전도나 계몽 잘 한 것을 자랑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눈물 흘리고 떨고 굶고 돌부리를 붙잡고 기도한 것을 자랑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번에 전도 나가서 물질에 대한 고충과 사람에 대한 고충과 심정에 대한 고충을 체험하기 바랍니다.
악한 사람까지라도 동정심이 일어나게 해서 후원을 받고 돌아와야 합니다. 이번 여름엔 돈 많이 가져가면 안 됩니다.
이번 기간에는 지팡이 짚고 5리만 갈 수 있는 사람이면 전부 출동시킵니다.
앞으로 할아버지부대, 청년부대를 만들 셈입니다.
24시간 밤이나 낮이나 움직여야 합니다.
연락, 간접 연락과 직접 연락에 대한 훈련을 시킬 것입니다.
몇 번 말하여도 움직이지 않는 사람에겐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심판하는 데는 심정의 기준이 잡히지 않고는 심판하지 않습니다. 몇 해 후에 후회하지 말기 바랍니다.
여러분을 배치해 놓고 쭉 둘러보려 합니다. 1,500군데 이상 지역에 배치하겠습니다.
한 지역에 여러 사람이 신청하면 제일 먼저 신청한 사람을 배치하고 나머지는 보류할 것입니다. 이번 전도는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서 땅을 배치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1차 전도 때는 장년시기였으나 이제부터는 청년시기입니다.
그러므로 이번 기간은 청년들이 많이 나가야 합니다. 18세 이상 30세 이하인데, 필요하면 선생님 나이 이하까지 늘일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신부를 찾는 일입니다.
통일신도는 피와 땀과 눈물을 바람벽에 발라야 합니다. 그것이 집을 짓는 것입니다.
방방곡곡으로 축복받을 장소를 찾아 나아가야 합니다. 선생님은 여러분이 지은 초가삼간에서 축복해 주고 싶습니다.
교회 짓는 데 후원 받지 마세요.
자기 이름 자(字)가 새겨진 곳을 찾아가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로부터 3대 이상의 부조(父祖) 이름이 있는 곳으로 찾아가야 합니다.
절대로 사람의 신세를 지지 말아야 합니다. 한 가지 신세져도 좋은 것은 선생님의 이름입니다.
심정에 사무치게 될 때 주위가 움직이게 됩니다. 왜 주위가 움직이느냐? 지금까지 움직이지 않은 것은 마음의 방향성이 틀렸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심정적인 기준이 하나님과 90도가 되어야 합니다.
세계 인류의 가장 긴박한 문제는 이념적인 방향을 갖춘 토대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를 갖추어 가지고 변치 않고 나아가는 사람이 제일 무섭습니다.
하나님이 인간 타락 후 슬퍼하신 것은 사랑의 굳은 연결이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참다운 마음, 참다운 사랑, 참다운 심정은 모두 간곡한 자리에서 인연을 맺어야 합니다.
일주일 동안 심정적인 인연을 갖추기 위해 기도한 데 대해 감사합니다.
4일간 순회하면서 느꼈던 것은, 역사적으로 군왕을 위한 충신 효자 열녀는 많았는데 비해 하나님의 뜻을 위한 충신 효자 열녀는 없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우리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땅의 기준에 입각한 자유 해방을 위해 바쳐 온 것입니다. 역시 그들은 하나님 앞에 근심의 대상은 되었을지라도 위안이나 기쁨의 대상은 되지 못했습니다.
아직까지 충신 효자 열녀라고 하나님이 자랑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충신 효자 열녀가 되는 것이 인간의 정도이지만 그런 사람은 없었습니다. 군왕과 부모에게는 그랬을지라도 하나님 앞에 그런 사람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충신 효자 열녀들을 바라보시면서 그들이 하나님을 위한 충신 효자 열녀가 되기를 얼마나 그리워했겠습니까?
하나님은 위하고 싶고, 그리워하고, 좋아하고, 보고 싶어 하십니다. 또 모든 것을 하고 싶어하십니다. 하나님은 하고 싶지 않으신 것이 없습니다.
내 웃음, 내 만족은 하나님과 같이한 것이라야 합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나를 돌보지 않고 나가는 것이 신앙의 길이요, 도의 길입니다.
인간의 모든 것은 하나님과 반대된 입장에 있습니다.
지상의 모든 사람들은 천도 앞에 부끄러운 존재였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이 기뻐하는 가운데 주고받고, 동하고, 자고 깨고, 먹고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장담하고 나설 인간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제까지 하나님을 추앙한 인간은 많았지만 부끄럼이 없다고 자신하는 인간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인간이 좋아하는 길로 가면 길이 막히고 싫은 길로 가면 거기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이 종교의 길입니다. 이목구비가 하나님께서 자랑하실 수 있는 것이 되어 있습니까?
영인들이나 땅의 성도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준에 처하여 있지 않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라고 한 성경의 이 말씀은 인간에게 구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먼저 하나님에게 구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러한 중심이 서 있기에 우리에게 권고하셨습니다. 성경의 하지 말라는 말씀이나 하라는 말씀에는 하나님의 뼈와 살이 녹아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워하십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찾으시는가? 땅 위에서 자기를 찾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무한히 찾아 헤매며 구하고 두드리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하나님은 인간 타락 전이나 후나 변함이 없습니다. 인간을 떠나실 때도 눈물로 떠나셨고, 찾아오실 때도 눈물로 찾아오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찾아가는 인간들은 눈물로 찾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과 인간은 고통과 통곡과 눈물을 안 가지고는 서로 대할 수 없습니다. 이제까지 사람의 행동은 하나님의 입장과 상반된 자리에 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여러분은 어떠한 대상자가 되겠습니까? 몸굽혀 눈물 흘리는 처절한 심정을 가진 자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버지는 어느 한때 심정을 풀겠습니까! ‘당신의 고통과 사정과 심정이자 내 것입니다.’라고 하는 아들딸이 나타날 때 풀리십니다.
몸 둘 곳이 없어 허덕이는 자리에서 하나님과 심정의 인연을 맺을 수 있습니다.
남은 길을 열심히 넘어가야겠습니다. 힘이 부족하더라도 가야 합니다. 친구나 이웃이라도 갖추어서 가야 합니다.
여러분의 입장은 여러분 스스로 결정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 다짐하여 알아도 모르는 듯 있어도 없는 듯 ‘당신의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보고 싶고 사랑하고 싶었던 아들의 기준은 어떤 기준이었는가? 천권(天權)을 상속 받을 수 있는 자는 어떤 사람이었던가?
예수님은 부활 후 마리아를 뿌리쳤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성전 휘장을 쳐놓고 대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하나님의 사정이 있었습니다. 천번 만번 학대받고 몰림받고 쫓김받아도 ‘감사합니다.’ 해야 합니다.
역사적인 원수였던 인간이므로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타날 때에는 자기의 몸과 이목구비의 수치스러움을 느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추방된 것을 부끄러워하고 수치스러워하는 자리에서도 하나님과의 인연을 중시하며 받아들여야 정상적입니다.
만민의 부끄러움을 가리워 주기 위하여 죽어간 분이 주님입니다.
자기 스스로 자기의 실적을 내세워 ‘이만했으면 됐지.’라고 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 자랑할 자가 있고, 기뻐할 자가 있다면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피 어린 손길을 찾아 헤매며 그리워하는 자, 하나님의 천권을 상속 받을 자가 누구인고?
있으나 마나 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백성이 되든 아들이 되든 한 가지는 돼야 합니다.
자랑한다면 못난 모습이지만 ‘어느 조건에든지 걸리지 않겠다.’라고 자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피와 살에 심정을 심어 주고 싶어하십니다.
쓰러질 때 몸뚱이가 쓰러지는 것에 대해 슬퍼하지 말고, 피눈물로 외치시던 하나님을 생각하며 슬퍼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보이고 싶어하십시오.
스승이 좋아한다고 좋아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길은 외갈래 길입니다.
옆에 대고 말이나 눈짓을 해서는 안 됩니다.
스승에게는 신념이 있습니다.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자신이 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그런 신념이 있습니까?
지도자는 기뻐하는 자리에서가 아니라 슬퍼하고 눈물겨워하는 자리에서 인연맺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보고 싶어하고 그리워하고 찾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말로만 알아서는 안 됩니다.
스승은 이 길을 찾아 나오기까지 참으로 비참했습니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내 수족과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내놓기가 부끄러워 감추고 싶은 것을 불구하고 나서야 했습니다. 이러한 자리에서 하나님은 긍휼을 베풀고 축복을 하시고자 하십니다.
이런 사람들은 이 길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스승이 술을 안 마시면 음주자는 참석하지 못하고, 스승이 담배를 피우지 않으면 흡연자는 참석하지 못합니다.
지켜야 할 조건이 수십 가지가 있으나 말하지 않겠습니다.
3년 이상 뜻 앞에 충성할 기력이 없는 사람은 참가해서는 안 됩니다. 유언으로 예물을 후손에게 상속시킬 수 있는 자신이 없는 사람도 참가할 수 없습니다.
과거의 모든 후회의 조건과 곡절을 씻어 버리고 어린애의 입장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어린애는 자기가 없습니다. 자기라는 의식과 소유 관념을 망각해 버려야 합니다. 이 시간 여기에서 가르치는 것에 어긋나면 생애의 조건으로 남아져 사탄의 참소를 받을 것입니다. 역사적인 노정을 걸은 선생님의 노정─일대일의 탕감조건으로 세워야 하는 보응의 과정─을 여러분도 거쳐야 할지도 모릅니다.
고아 중의 고아가 되십시오.
이번에 18세 이상 60세 이하 연령에 해당하는 사람은 전도에 참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외적인 것부터 찾아 나오십니다. 내가 믿음의 세 아들을 축복했지만 성진(聖進) 군에 대해서는 못 했습니다. 믿음의 세 아들을 찾아 나오는 도중에 그를 잘 대하면 대할수록 그가 불행해지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아기를 하나님께 봉헌하는 날(예진譽進 님 봉헌일)입니다. 작년에 중요한 일을 하자고 했는데 40일 전도가 끝나는 오늘로써 그 일이 종결됩니다.
딸은 난 지 7일째 되는 날에 봉헌하고 아들은 8일째 되는 날에 행합니다.
오늘 이 시간에 있어서는 과거에 자식을 사랑했던 그 기준 위에 서 있어야 합니다. 사실 누구든지 자기 자식을 낳고 자기 자식 이상 다른 사람을 사랑했다는 조건을 세워야 합니다. 아기 밴 여인에게 화가 있다는 말의 뜻은 여기에 있습니다.
계몽을 나가는 것은 심정적인 인연을 맺기 위함입니다.
기쁨으로 참가한 사람이 자기 설움으로 식의 기쁨을 잃어버릴 때는 각자가 책임진다는 조건 밑에서 식에 참예하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떨어져도 사탄의 참소를 받지 않습니다.
오늘의 식은 여성을 대신한 식입니다. 남자는 성진 군이 있어서 설 수 있는 기대가 되지만 남성을 대신한 식이 있을 것입니다.
기초는 피와 땀과 눈물로 세워야 합니다. 사탄세계에서도 그러하지만 하늘 세계에서도 그러합니다. 나는 하던 일이 잘못되어 감옥에 가더라도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정성으로 행했기 때문입니다.
도인이 찾아오면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여 바쳤습니다. 이는 그러한 그룹의 도인을 대해 주기 위함입니다. 그가 증거할 때는 위치가 거꾸로 될 것입니다.
<말 씀>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누군가를 모시고 싶어합니다. 몸은 마음을 위주로 하여 모시고 싶어하며, 몸과 마음은 부모나 스승 혹은 지도자, 혹은 국가의 주권자를 모시고 싶어 합니다. 즉 인간은 대상의 입장에서 주체자를 모시고 싶어합니다. 이러한 것은 역사가 흐름에 따라 점점 더 확대되어 이제는 하나님을 모시고 싶어 하는 데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인간이 이념의 세계를 찾아 절대자를 모시지 못하는 한, 슬픔은 연속됩니다. 이념의 세계에는 인간이 아닌 절대자, 하나님이 계셔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까지 절대자를 모시지 못하고 있습니다. 몸은 마음 하나도 제대로 모시지 못하고 있고, 우리는 부모도 제대로 모시지 못하고 있으며, 국가의 주권자를 모시지 못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 인간을 지으신 절대자마저 진정으로 받들어 모시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형편없고 불쌍한 자들입니다.
본래 우리 인간은 귀한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이러한 존재가 마음과 몸이 하나되지 못하고, 부모와 하나되지 못하고, 이념과 하나되지 못한 인간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무가치하게 된 것은 타락의 보응입니다. 그러기에 마음이 몸과 하나되기를 바라는 것은 본래의 천성입니다.
이렇게 무가치한 인간들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래도 저버리지 아니하시고 수습하여 인연맺으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절대자가 계신다는 것조차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를 무한한 가치로 끌어올리려고 하는 절대자가 계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사회에 나가면 그 사회의 대표자를 모셔야 하듯 이념세계에서는 절대자를 모셔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세계는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념을 거쳐 최후에는 절대자 하나님, 유일무이한 창조주 하나님을 모시는 자리에까지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광정(匡正)을 통해서 하나님을 모실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 것인가! 우리가 최후에 모셔야 할 분은 절대자이신 창조주 하나님입니다. 그 절대자는 우리의 아버지입니다. 그 아버지를 모시기 위해 우리는 찾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아버지와 하나될 때까지 나아가야만 합니다.
우리 인간은 세상 것 가지고는 만족을 느끼지 못합니다. 하늘땅을 녹여 낼 수 있는 절대자를 모시는 곳에서만 최고의 행복을 얻을 수 있고 최고의 가치를 부여받을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하여 인간들은 오늘도 내일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종교라는 것은 이 절대자와 내적으로 인연맺도록 하는 것입니다. 외적인 면이 아니라 내적인 면으로 섭리해 나오는 것이 종교입니다. 외적인 면은 악이 지배하고 내적인 면은 선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 선을 중심삼고 이념의 세계를 이루어야 합니다. 선의 이념은 내적인 반영으로 되어진 것입니다. 내적인 면을 무한히 추구하여 이념의 세계를 찾고 최후에는 창조주를 찾아 영원히 그분을 모시고 그분과 더불어 즐기며 살고자 하는 것이 종교가 추구하는 것입니다.
지금 세계는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의 상대적인 두 가지 형태로 갈라져 있습니다. 즉 외적인 면을 추구하는 공산주의와 내적인 면을 추구하는 민주주의로 갈라져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무엇을 추구해야 할 것이냐? 무궁무진한 내적인 면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민주주의를 표면적으로 인도하고 계시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뒤에서 밀고 계십니다. 그러나 이 민주주의도 세계적인 이념을 중심삼고 나아가지 않으면 망하고 맙니다.
오늘날의 민주진영이 서로 단결하여 새로운 내적인 하나의 형태를 갖출 때까지는 하늘이 해야 할 그 무엇이 남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현시대의 사조에 잠겨 그것으로 기뻐하고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표면으로 나타난 문화적인 혜택이나 사회적인 행락의 발판을 통하여 즐거워하며 살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내적인 면, 즉 우리의 마음과 접할 수 있고 우리의 마음과 인연맺을 수 있는 종교를 연구하고 찾아야 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때가 앞으로 다가온다는 것을 여러분은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기에 최후에는 이 땅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이 세계를 품기 위하여 역사하는 절대자가 계시다는 사실을 발견한 자들만이 새 시대의 왕자들이 될 것입니다.
오늘날까지 표면상으로 나타난 종파나 교파의 교리가 이 시대에 있어서 전체를 대신할 수 없고, 창조주 하나님과 인연되어 있는 것이라고 인정할 수 없다면 그것과는 인연을 끊어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반드시 하나의 목적, 하나의 이념을 달성하여 온 인류가 당신을 모실 수 있는 자리까지 이끄는 섭리를 하셔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에 하나님의 섭리는 표면적으로 나타난 교파가 아니요, 표면적으로 나타난 현실의 어떠한 주의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이면에서 새시대의 새로운 역사를 꾸며 나오는 숨은 섭리를 하고 계시다는 것을 우리는 추리로써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만일 이 세계를 이대로 그냥 내버려 두면 망해 버립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직접 지배하시는 것이 있다 할진대 그것은 어떤 것일 것이뇨? 여기에서 우리는 인류애를 제창해야 합니다. 말뿐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실감적으로 체험할 수 있고 사실적으로 느낄 수 있는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하고 부르는 그 하나님은 관념적인 존재가 아니라 실증적인 존재입니다.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생활의 중심으로서의 하나님입니다. 그러한 절대자와 인연맺고 사는 무리가 이 끝날에 나타나지 않는다 할진대, 이 세계는 그야말로 최후의 난국에 봉착한다고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이 계시는 한 결코 이 세상을 망하게 그냥 내버려 두시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망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과 우리 인간이 더불어 하는 섭리의 형태가 어느곳에 나타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먼저 어떠한 모습이 되어야 하느냐? 하나님을 창조주, 즉 주인으로 모시는 것보다 하나님을 심정적으로 아버지라 부를 수 있어야 됩니다. 관념적이 아니라 과연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라는 것이 몸과 마음에 사무치게 느껴져야 됩니다. 이러한 체험을 일으킬 수 있는 섭리적인 형태가 반드시 나타나야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관념적으로 하나님을 불러 왔습니다. 종교적인 주체로만 하나님을 불러 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주체인 동시에 생활의 주체요, 생활의 주체인 동시에 이념의 주체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 이념의 주체가 넓고 크다 하더라도 실질적으로 그것이 생활 감정에서 분석되고 체험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만일 생활에서 체험되는 그 이념의 가치를 존재하고 있는 어떠한 것과도 바꿀 수 없노라고 자랑할 수 있는 자리에 선 자가 있다 할진대, 그는 하나님이 찾고 있는 사람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감사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고 아버지로 모실 수 있는 인연을 맺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 이상 가치 있는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인간을 수습하여 최대의 가치를 부여하고 싶어하시나니, 그것은 이 인류를 대하여 친히 아들이라 하고 딸이라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심정을 품고 찾아오신다는 것을 여러분은 체험해야 됩니다. 말로만이 아니라 체험해야 됩니다.
우리는 이렇게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기필코 모셔야 할 운명에 놓여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어떠한 지도자를 모시고 있다 할진대 그 지도자는 여러분이 영원히 모실 자가 아닙니다. 오늘날 이 땅 위에 어떠한 이념을 주장하는 대표자가 있다 할진대 그 대표자도 영원히 모실 자가 아닙니다. 우리가 영원히 모시고 영원히 같이 살아야 할 분은 누구냐? 바로 영원무궁토록 존재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자리에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에서부터 천만사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을 모시고 생활할 수 있는 자리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세상에서는 어떠한 주권자의 아들딸인 것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어떤 회사의 사장의 아들딸인 것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있다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진짜 자랑할 수 있는 것이 있다 할진대 그것은 선의 이념을 통하여 천지 만물을 친히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대하여 여러분이 아버지라 부를 수 있고, 그 창조주가 여러분을 대하여 아들딸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이상의 자리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과연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왜 사랑의 하나님이냐? 인간이 찾고 있는 최고의 것을 인간 앞에 약속하시고 인간을 인도해 나오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말로만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는데 사실 그 내용은 모르고 있습니다. 사실은 그 내용을 체득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하늘에 계시는 참아버지, 만우주를 지으신 창조주를 아버지라고 불러 왔습니다. 그러나 그 아버지를 진짜 아버지로 모셨느냐 하면 못 모셨다는 것입니다. 이름으로 만족하실 하나님이 아닙니다. 실체의 중심으로서 부자의 인연을 그리워해 나오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구원은 이름으로써 얻는 것이 아닙니다. 실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이름으로 인연되는 것이 아니라 실체와 인연되어야 합니다. 창조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은 인연은 결정적인 것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과연 절대자를 대하여 이름 아닌 실체로서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자리에 들어가 있습니까?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되었을 것인가? 인류가 타락이라는 서러운 운명에 봉착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 것인가? 두말할 것 없이 행복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 행복은 사람을 중심한 것이 아니라 창조주를 위주로 한 것입니다. 반드시 창조주를 위주로 하여 행복을 주장하고 선의 이념을 주장한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되면 여러분의 마음에도 몸에도 창조주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활에도, 여러분의 일생의 노정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감정, 감각까지도 창조주와 더불어 인연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할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생활도, 생애노정도 그러하지 못하고 자기를 중심삼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타락한 이 땅 위에서 주장하는 어떤 주의나 국가적인 이념을 중심삼고 살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충성을 하고, 효도를 하는 사람은 많되 절대자인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진정하고 참다운 효자 효녀는 이 땅 위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온 천주를 창조하신 창조주인 동시에 우리의 참아버지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 참아버지는 우리를 찾아오실 것입니다. 어떠한 운명의 곡절에 처하더라도 그 곡절을 넘어 그 참아버지의 손길을 붙들고, 역사적인 소원과 자기 생애의 소원의 심정을 품고서 ‘나의 아버지여!’ 하고 최후의 한마디를 남길 때까지 인간은 가야 합니다. 죽음의 길이 가로놓여 있다 하더라도 그곳까지 가야 합니다. 끝날 인류 가운데에서 그러한 길을 달려가서 창조주, 절대자, 즉 하나님을 대하여 ‘나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무리들이 나오게 될 때, 거기서부터 하나님의 새로운 경륜은 시작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심정의 주체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도 무한히 슬픈 감정을 갖고 계시며 무한히 기쁜 감정을 갖고 계십니다. 하나님이라고 해서 기쁘고 좋은 감정만 갖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슬프다면 인간들이 도달할 수 없을 정도로 깊고 넓은 슬픔의 심정을 갖고 계시는 분이심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인간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을 선물로 안겨 드렸습니다. 고통을 선물로 안겨 드렸습니다. 핍박을 선물로 안겨 드렸습니다. 죽음을 선물로 안겨 드렸습니다. 인간들이 제일 싫어하는 모든 것들을 전부 하나님께 맡겨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인간으로부터 선의 선물, 기쁨의 선물, 만족의 선물, 희락의 선물을 받아 본 적이 없습니다. 죄는 인간이 지었는데 그 죄를 사해 주셔야 할 분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원통한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죄를 지었으면 그 죄를 지은 자가 사함받아야 하는 것이 원칙인데, 죄는 사람이 짓고 죄를 사해 주는 것은 하나님이 해야 되다니 이는 무슨 연고인가? 부자의 인연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그 만물을 주관할 수 있는 인류의 조상을 세운 후 거기에 소망을 두셨습니다. 창조이념을 중심삼고 아담 해와를 바라보셨습니다. 소망의 실체로서 바라보셨습니다. 아담 해와가 성장한 후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찾아가고 싶었다는 것입니다. 어디에? 그들의 마음속에 찾아 들어가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마음뿐만이 아니라 심정 깊은 곳에 자리를 잡으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은 하나님의 심정을 인간의 심정 깊은 곳에 심는 것이었습니다. 그 심정이 심어지기를 바라고 나오셨지만 그것은 도상에서 꺾어져 버렸습니다. 이것이 타락입니다.
예수님은 타락한 인간을 대해서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금까지 그렇게 계시지는 못했습니다. 왜? 죄악된 이 땅이요, 죄악의 침범을 받고 있는 환경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 당시에 세워 놓았던 이념과 심정을 통하는 생활을 영위할 수 없는 인간이 된 연고로 관념적으로는 모셔 왔을는지 모르나 생활적으로는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인간이 못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모든 것을 청산하고 친히 인간들의 심정에 자리를 잡고 인간과 더불어 살 수 있는 한 날을 찾아오신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찾아오신다 할진대 어느 정도까지 찾아오시느냐? 인간의 마음 깊은 곳까지 찾아오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 마음의 작은 부분까지도 남겨 놓아서는 안 됩니다. 마음을 다해야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 깊은 곳까지 찾아오시고자 하십니다. 그 다음에는 우리의 몸을 찾아오십니다. 우리 몸의 세포 하나에까지 찾아오십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생활을 찾아오십니다. 마음과 몸, 즉 여러분 개체를 찾아오시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우리의 생활의 지극히 세밀한 부분에까지 찾아오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사랑을 중심삼고 인연맺고자 하는 목표입니다.
여러분,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그 사람의 깊은 데까지 인연맺고자 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한마디라도 자기와 반대되거나 하나라도 자기의 소원과 대치되는 것이 있으면 용납하지 않습니다. 안 그래요? 그러니만큼 하늘과 땅을 움직여낼 수 있는 근본적인 심정을 가진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시게 될 때 우리 마음의 밑창까지도 티와 흠이 없는 선한 자리에서 인연맺고자 하시고, 우리의 몸과도 그러한 자리에서 인연맺고자 하시고, 우리의 생활과도 그러한 자리에서 인연맺고자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찾아오시는 아버지를 기필코 모셔야 할 우리 자신들은 과연 지금 어떠한 자리에 있는가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제가 갖고 있는 이것이 좋사온데 하나님도 이것이 좋습니까?’ 할 때에 ‘오냐!’ 하고 인정을 하시면 그것은 염려 없습니다. 인정받으면 그것을 소유할 수 있지만 인정받지 못할 때에는 소유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몸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타락의 후손이요, 타락의 혈통을 가지고 태어난 우리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이 지금까지 갖고 있는 양심을 어느 정도는 용납하시지만 전체적으로는 용납하시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양심은 환경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웠던 본연의 양심의 기준은 지금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양심이 기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양심이 기준입니다. 또 몸도 여러분의 몸이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몸이 기준입니다. 또 생활도 여러분의 생활이 기준이 아니고 하나님의 생활이 기준입니다. 이 생활을 통한 환경이 있을 것이고, 환경을 통한 이념의 세계가 있을 것입니다.
인간은 타락한 그날부터 하늘과 인연을 맺지 못하였습니다. 우리 개인이 하늘과 절대적인 인연을 맺지 못하였고, 우리가 살고 있는 생활이 하늘과 절대적인 인연을 맺지 못하였고,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국가, 세계가 하늘과 절대적인 인연을 맺지 못하였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그냥 붙안고 하나님 앞에 나가서는 하나님께 인정을 받을 수 없고 그분과 인연맺을 수 없습니다. 왜? 하늘의 원칙이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인연의 중심으로 삼을 것이뇨? 모든 문제를 해결지을 수 있고 처리할 수 있는 중심의 조건은 무엇일 것이뇨? 그것은 우리의 양심도 아니요, 이 땅 위에 있는 어떠한 이념도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심정과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몸이 하나된 그 기준을 통하여 소원하시는 세계를 이루고자 하십니다. 절대자가 있다면 반드시 그것을 위주로 하여 이 세계를 수습해야 합니다. 오늘날 전세계에 널려 있는 인류가 알아야 할 최후의 해결점은 무엇이뇨? 어떠한 주의가 아닙니다. 미국 같은 선진국가도 아닙니다. 어떠한 영웅도 아닙니다. 어떠한 성현도 아닙니다. 최후의 해결점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생활,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심정, 하나님의 세계, 하나님의 주권, 문제는 여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통한 세계가 아닙니다.
이 땅 위에는 수많은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 한 사람을 붙들고 하나님이 ‘너는 과연 내 마음이자 네 마음이요, 내 심정이자 네 심정이요, 내 몸이자 네 몸이다.’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내 마음이자 네 마음이요, 내 심정이자 네 심정이요, 내 몸이자 네 몸이요, 내 이념이자 네 이념이라고 할 수 있는 대표자를 이 인류 앞에 보내셔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될 게 아녜요? 그래야 하나님입니다. 그래야 인류를 대해서 구원섭리의 뜻을 두신 하나님이 되지, 그러한 대표자를 인류 앞에 보내 주지 않는 한 그 하나님은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대표자로 보내셨던 분이 바로 메시아입니다. 구주입니다. 어떤 구주? 우리를 죽음의 자리에서 끌어내어 살려주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하나님을 대신하여 우리를 하나님 편에 올라가게 하는 구주, 다시 말해서 인류 전체의 소원을 달성시킬 수 있는 구주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떠한 구주냐? 마음의 구주요, 몸의 구주요, 심정의 구주요, 생활의 구주요, 이념의 구주요, 천주의 구주입니다. 복귀역사는 구원역사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위해 섭리해 나오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체(體)를 갖추지 못한 무형의 신으로 계시기 때문에 실체를 가진 우리 인간과 관계를 맺기 위하여 타락하여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인간들 앞에 실체적인 대표자로 보내신 분이 메시아입니다. 이리하여 메시아를 중심삼은 개인, 메시아를 중심삼은 가정, 메시아를 중심삼은 세계를 택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한 형태가 오늘날의 민주주의입니다.
이 땅 위에 메시아로 오셨던 분이 예수님이라 할진대 그분은 최고의 중심 되는 하나님의 사랑의 심정을 인간에게 인연맺어 주어야 했는데 그것을 못하고 가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온 인류 앞에 약속하시기를 나는 신랑이니 너희는 신부가 되어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지금까지 기독교 신자들은 주님만 만나면 다 되는 줄 알고 있지만 그것 가지고는 안 됩니다. 주님을 만났으면 어떻게 해야 되느뇨?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됩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된다는 말입니다. 주님을 통하지 않으면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없기에 주님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간 뒤에는 주님도 필요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 14:6)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 자신 앞에 올 수 없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 앞에 올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는 하나님이 찾아오실 수 있는 외적인 세계 형태는 갖추어졌으나 심정의 세계는 갖추어지지 않았습니다. 이 세계가 사정을 통할 수 있는 환경은 되어 있으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환경은 못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이 찾아오신다면 무엇을 갖고 찾아오실 것이뇨? 심정을 갖고 찾아오실 것입니다. 만일 이 세계를 대표할 수 있고 전세계 인류를 지배할 수 있는 민족이 있다 할진대 그 민족은 어떠한 민족일 것이뇨? 하나님의 심정을 전통으로 세워 나오는 민족일 것입니다. 또 앞으로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문화는 어떠한 문화일 것이뇨? 사람의 마음과 사람의 심정을 통하여 나오는 문화가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정을 통하여 나오는 문화가 세계를 지배하게 될 것입니다. 최후의 문제는 거기에 있습니다. 심정이 통하는 세계, 심정의 세계를 이룰 수 있는 최후의 목적의 세계를 찾기 전에는 여러분들이 여기에서 짐을 풀고 영원한 안식의 생활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심정을 다하여 만나고 싶은 아버지, 정성을 다하여 만나고 싶은 아버지, 뜻을 다하여 만나고 싶은 아버지, 그 아버지를 아버지로서 대하고, 그 아버지와 세계 이상의 가치를 즐길 수 있고, 그 아버지를 직접 대할 수 있는 환경을 찾아 나서야 되는 것입니다. 그 자리가 바로 아버지를 모시는 자리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이제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한번 반성해 봐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어디로 기울어지고 있으며, 여러분의 몸은 어디로 기울어지고 있으며, 여러분의 생활은 어디로 기울어지고 있으며, 여러분의 이념은 어디로 기울어지고 있으며, 여러분이 모시고자 하는 하나님은 지금 어떠한 자리에 있는가를 다시 한번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제 하나님은 여러분의 마음과 같이 있어야 되고, 여러분의 몸과 같이 있어야 되고, 여러분의 생활과 같이 있어야 되고, 여러분의 환경과 여러분들이 주장하고 있는 이념과 같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같이 있다 할진대 여러분의 말은 하나님의 말을 대신할 것이며, 여러분의 행동은 하나님의 행동을 대신할 것이며, 여러분이 사는 생활은 하나님의 생활을 대신할 것이로되, 그렇지 못하다 할진대 여러분의 마음과 몸과 생활은 하나님과 하등의 관계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거룩한 분이시기 때문에 최고의 자리에 계십니다, 최고의 자리에.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의 감정이건 의식이건 전체가 아버지를 통하지 않고 아버지를 위주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아버지를 모시는 자는 어떠한 자냐? 아버지를 통하여서 살고, 아버지를 통하여서 죽고, 아버지를 통하여서 행동하는 자입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들은 자기를 통해서 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모셔야 할 끝날의 성도들은 아버지를 통해서 생활해야 합니다. 밥을 먹으나 자나 깨나 어떠한 행동을 하거나 그 모든 것들은 아버지를 통해서 해야 합니다. 이것은 관념적으로가 아니라 실제적으로 그래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체휼할 수 있는 자리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면 아버지의 소원은 무엇일 것이뇨? 내 개체가 아버지의 소원이 되어 있습니다. 내 한 개체가 소원인 동시에 나를 중심삼은 가정이 소원이요, 가정을 중심삼은 사회가 소원이요, 사회를 중심삼은 세계가 소원이요, 세계를 중심삼은 하늘땅이 소원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아버지 앞에 효자가 되는 사람은 어떠한 사람이냐? 세밀한 분야까지 아버지와 같이 의논하는 사람입니다. 어려울 때도, 슬플 때도, 기쁠 때도 아버지와 같이하는 사람이 효자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이 왜 불행했느냐? 지금까지 하나님이 왜 탄식했느냐? 그것은 하나님이 고생할 때 같이 고생해 주는 아들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고생을 싫어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당신이 고생할 때 같이 고생해 주는 사랑하는 아들딸이 있다 할진대 그 고생도 감사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입니다. 슬픔과 고통을 같이 할 수 있는 아들딸이 있다 할진대 그들이 견디기 어렵고 넘어가기 어려운 슬픔과 고통 가운데 처해 있을 때 위로해 주시는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사망이 부딪쳐 들어오는 고통의 자리에 동참하는 자가 있다 할진대, 그 사망을 초월할 수 있는, 사망의 권위를 무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슬픔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고통받을 때 같이 고통받고 하나님이 슬퍼할 때 같이 슬퍼하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수천 년 동안 인류를 붙안고 나오시는 하나님은 혼자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혼자 억울함을 당하고, 혼자 슬픔을 당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고통당할 때 그 고통을 같이한 사람이 없었고, 하나님이 슬퍼할 때 그 슬픔을 같이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지금까지 고통이 심했고, 슬픔이 심했습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이 끝날, 이 시대가 아무리 악하고, 아무리 사망의 물결이 휩쓸어 친다 할지라도 이 모든 것을 막고 하나님을 위로해 드리는 사람,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더불어 고통 가운데에서 뒤넘이칠 수 있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는 가치적인 존재가 될 것이요, 하나님의 참다운 효자 효녀가 될 것입니다. 그런 아들딸이 있다면 하나님은 그런 자리에서 낙망하거나 슬퍼하시는 것이 아니라 소망을 품고 그런 자리에 처해 있는 아들딸을 권고하고 위로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제 진정으로 하나님을 모셔야 되겠습니다. 모시는 데는 어디서부터 모셔야 되느냐? 기쁨의 자리에서 모실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슬픔을 붙안고 그 마음을 알아주는 자리에서부터 모셔야 됩니다. 그런 참다운 아들딸을 찾지 못하여 수고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고, 우리가 그런 자리에서 하나님과 같이 슬퍼하고 모든 것을 책임지겠다고 나서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거기에서 비로소 소망의 대상으로서 우리에게 새로운 기쁨을 부여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하시는 고통스러운 자리에 동참하여 하나님 앞에 충성하는 자는 하나님이 책임을 지고 해결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쁨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모실 수 없습니다. 이 땅 위에서 제일 슬픈 자리, 제일 고통스러운 자리,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자리로 나아가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의 심정을 붙들고 하나님과 더불어 고통 당하는 자리에서 하나님을 모셔야 됩니다. 그런 자리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위로를 받고 아들이라는 인정을 받아야만, 영원한 이상세계가 이루어진 그때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영원무궁토록 아들로서 하늘땅 앞에 자랑하고, 여러분 자신들은 하나님을 모시고 살 수 있습니다. 그러한 자리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인정을 받지 못하는 한 여러분은 저나라에 가서도 한 면밖에 통할 수 없습니다. 천상에 가더라도 제일 어려운 자리에 갑니다. 어떠한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과 의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찾고 계십니다. 소망 가운데에서 아버지를 모실 수 있는 아들딸 말고 슬픔과 고통이 물결치는 자리에서 아버지를 모실 수 있는 아들딸을…. 소망 가운데에서 하나님을 모시는 아들딸은 많습니다. 그러나 고통스러운 자리에서 하나님을 모시는 아들딸은 심히 적습니다. 심히 적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참으로 모시는 자는 어떠한 자냐? 기쁨과 소망 가운데에서 모시는 자가 아니라 고통 가운데에서 모시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사정을 알아주고 하나님의 심정을 알아줌으로써 하나님께서 친히 붙들고 ‘내 아들아, 내 딸아, 내가 있나니 참고 견디며 싸워라.’ 하고 위로해 주는 자입니다. 고통스러운 자리에서 하나님을 모시지 않는 한 하나님을 영원한 내 아버지로 모실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은 인류 앞에 끝날이 되면 7년 대환난이 있을 것이라고 예고하셨습니다. 이 환란 시기는 6천년 역사노정에 있어서 하늘의 슬픈 곡절이 성도들에게 부딪치는 때입니다. 인간들의 인연이 다 깨져 나가고 믿을 수 없는 환경에 부딪치는 때입니다. 자기가 아무리 양심적으로 올바로 산다 해도 그 양심으로 자기의 생애를 주장할 수 없는 때입니다. 신앙이니 어떠한 주의니 하는 것으로도 자기의 생애를 주장할 수 없는 때입니다. 뜻을 품고 생각이 있는 자일수록 바라보는 곳곳마다 고통을 느끼는 때입니다. 그런 때가 끝날 7년 대환난의 때입니다. 그때는 소망이 흔들리는 때요, 우리가 믿고 있는 신앙의 중심이 흔들리는 때요, 믿고 따라 나가던 지도자가 흔들리는 때입니다. 주의는 물론 종교, 양심, 부모의 심정까지도 전부가 다 흔들리는 때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그런 세상을 만들어 놓으셔야 되느냐? 그것은 참다운 하나님, 역사적으로 수고한 하나님과 동참했다고 하는 가치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6천년 동안 수많은 참상을 보아 왔고, 수많은 곡절을 당하셨기에 끝날에 있어서는 양심이니 주의니 신앙이니 하는 것을 가지고 중심을 세울 수 없는 환경에 부딪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환란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그런 어려운 자리에서도 하나님과 더불어 산다는 참다운 아들딸을 찾기 위하여 그런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교회가 흔들리는 것을 보고 슬퍼하지 말고, 어떠한 주의가 동요되는 것을 보고 슬퍼하지 말고, 어떠한 주권자가 쓰러지는 것을 보고 슬퍼하지 말고, 자기의 부모가 변한다고 슬퍼하지 말고, 자기의 형제가 변해 떨어진다고 슬퍼하지 마십시오. 의지하고 믿고 있던 세상의 모든 것이 동요되더라도 여러분의 마음은 태연해야 됩니다. 세상의 어떠한 고통이 부딪쳐 오더라도 여러분의 마음은 태연해야 됩니다. 하나님은 동요되지 않고 이 시간도 나를 찾아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것은 당신의 귀한 한 날, 당신이 거쳐온 고통의 인연을 우리에게 맺어 주기 위한 크나큰 약속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자리에서 하늘을 붙안고 ‘같이 갑시다. 같이 싸웁시다. 같이 행동합시다.’라고 부르짖고 나서는 사람을 찾기 위하여 그런 세상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 나아가는 길이 막혔다고 낙망하지 마십시오. 이 나라가 어지러워진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죽지 않았습니다. 이 세계가 아무리 뒤끓는다고 하더라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죽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찾아오실 것입니다. 모든 것이 동요되더라도 하늘 대한 일편단심만은 동요되지 마십시오. 하늘 대한 충절(忠節)의 심정만은 동요되지 마십시오. 하늘을 의지하고 바라보는 소망의 마음만은 변하지 마십시오. 그 마음을 변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어떠한 고통의 자리에 처넣는다 할지라도 그 자리에서 아버지를 부를 수 있는 간곡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어떠한 자리에 떨어지더라도 그 자리에서 하늘의 심정의 줄을 붙들고 올라가기를 애써야 합니다. 지옥에 떨어지는 고통을 느끼는 한이 있다 할지라도 아버지와 함께 동참하는 자리에 서서 아버지의 고통을 내가 알아주고, 그 아버지는 나의 고통을 알아줄 것을 믿고, 그런 자리라도 가겠다는 책임과 의무를 느끼고 나간다 할진대 여러분들은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있지만 그러한 신자가 과연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우리는 아버지를 모시는 데 있어서 천상의 보좌에 앉아 계시는 그 아버지를 모실 것이 아니라, 사망의 물결치는 가운데에서 참다운 아들딸을 찾기 위하여 수고하시는 그 아버지를 모셔야 합니다. 그 아버지를 내 아버지로 알고, 그 아버지의 사정을 내 사정으로 하고, 그 아버지의 심정을 내 심정으로 하고, 그 아버지의 소원을 내 소원으로 하여 찾아오시는 아버지 앞에 늠름하게 나아가 ‘당신의 아들을 찾는 것이 당신의 소망인 것을 알았고, 그 아들을 찾아 당신의 역사적인 곡절을 풀어놓는 것이 당신의 사정인 것을 알았고, 잃어버린 아들을 붙안고 사랑하고 싶은 것이 당신의 심정인 것을 알았습니다. 어떠한 도탄과 환란과 어려움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제가 당신의 소망의 실체요, 사정의 실체요, 심정의 실체이옵니다.’ 하고 자신 있게 나설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자라야만 아버지의 아들이요, 또 그 아버지를 모실 수 있는 자가 된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이 자리에 찾아온 것은 영광 가운데 공중에 들려 올라가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늘 보좌에서 수많은 천군천사를 거느리고 호령하는 그런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도탄 중에서 환란과 더불어 싸우고 고통과 더불어 지내시는 그 아버지를 모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공평한 분이라면 누구를 축복할 것이뇨? 그러한 자를 축복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마음에 아버지를 참으로 모시고 싶다 할진대 어떻게 해야 할 것이뇨? 여러분이 잘산다고 해서 잘사는 환경에서 모셔 주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백만장자와 같은 호화스러운 생활 가운데에서 모셔 주기를 바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디서부터 모셔 주기를 바라시느냐? 제일 비참한 자리에서부터 모셔 주기를 바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운명하기 직전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셨지만, 죽음의 자리에서도 하나님은 만나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죽음의 자리를 넘어서 만나려고 하셨습니다. 왜? 사망 선까지 사탄이 침범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망선상을 넘어야 했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아버지와 상봉하려면 인간들이 피해 가는 그런 고통 이상의 자리에서 하늘을 모셔야 됩니다. 그런 자리에서 내가 위로받겠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아버지를 위로해 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내 소원을 위해서 아버지를 부르지 말아야 합니다. 아버지가 나의 소원을 들어 주시기를 바라기 전에 내가 아버지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겠다고 해야 합니다. 아버지를 만나면 ‘아버지여, 이렇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하는 자리에 서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려운 자리에서 아버지를 대하더라도 ‘나는 당신 앞에 이렇게 되겠나이다.’ 하며, 아버지 앞에 드리고자 하는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예수님도 운명 당시에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하는 이 말씀을 성경에 남겨 놓은 것이 원통하다는 것입니다. 천상에 가서 보니 최후에 아버지를 상봉하여 넘어가는 그 자리에서 한마디라도 ‘아버지여,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혹은 ‘아버지의 소망의 뜻을 이루니 감사하옵니다.’라고 했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런 말이 더 멋있지 않아요?
여러분들은 수천년 동안을 하루같이 참아 나오신 그 아버지를 모셔야 할 입장에 있기 때문에 여러분 일신의 고통을 고통스럽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고통스럽다는 생각조차 버려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기도할 때 절대로 자기를 중심삼고 기도하지 마십시오. ‘내게 이런 것은 피하게 해 주십시오.’ 이따위 기도는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당하는 이 고통이 당신의 뜻 앞에 합당한 고통이 되게 해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해야 됩니다. 내가 이런 처지에 놓여지게 됨은 모두가 아버지의 뜻이 있어서요, 또 뜻의 성취를 위해서라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의 근본 관념부터 빼 버려야 됩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한 번이라도 위로해 드려 봤습니까? 무엇을 달라고만 했습니다. 이런 도둑놈 심보가 어디 있습니까? 그렇게 기도해서는 아무리 기도해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내가 기도해 보니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이옵니까?’ 기도는 이렇게 해야 됩니다. 그런데 타락한 후손, 죄지은 무리들은 복을 달라고만 합니다. ‘당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 몸을 통하여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 한 몸이 환난을 겪어 당신의 뜻이 이루어진다면 환난을 겪게 해 주시옵고, 내 몸이 찢김을 당하여 당신의 뜻이 이루어진다면 찢기게 해 주시옵소서. 복과 영광은 당신이 받으시고 벌과 고통은 저에게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통일교회 신도들은 영광스러운 자리에서만 아버지를 모셔서는 안 됩니다. 제 자신이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제일 슬픈 자리에서부터 찾아오시는 아버지를 모실 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슬픈 마음을 품고 찾아오시는 그 아버지의 마음을 붙안고 그 마음의 대상자가 되어 아버지가 ‘너는 내 아들이요, 내 딸이다.’ 할 수 있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만일에 하나님이 지옥 밑창에서 축복을 해 주신다면 지옥의 밑창에라도 찾아가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그러한 마음을 갖고 신앙의 중심을 세워 나간다면 절대로 지옥에 안 갑니다. 영계에 가보면 천당 가겠다고 외치는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안 되어 있습니다. 세상에 그 무엇을 자랑하던 사람들이 영계에 가서도 좋을 줄 알지만 영계는 그렇게 안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모시고 싶은 아버지, 그 아버지를 우리는 모셔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은 그 아버지가 찾아와 주기를 고대했고, 만나기를 고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떠한 준비를 하고 만나기를 고대하고 있습니까? 호화찬란한 좋은 자리를 준비하고 만나고자 합니까? 하늘은 그러한 자리에서 만나 주지 않습니다. 하늘이 찾고 있는 것은 좋은 자리가 아닙니다. 하늘은 피 흘리고 눈물 흘리는 자리에서 만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만날 그 아버지는 웃음의 아버지가 아니라 상처를 입은 아버지입니다. 그 아버지는 상처를 입었을망정 자식이 상처 입은 것을 보시고 온정의 얼굴로 위로하시며 그 자식을 맞기 위하여 찾아오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거꿀잡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아들딸은 최고의 자리에, 그렇지 못한 아들딸은 최하의 자리에 서게 됩니다.
여러분은 아버지 앞에 드릴 선물이 많습니다. 비록 가진 것이 없고, 지닌 것이 없을지라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선물이 있나니,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즐겨하는 것들이 아니라 피 흘리고 눈물 흘리고 땀을 흘리면서 아버지 앞에 나타나는 그 한 모습을 갖추는 것입니다. 그것이 고통의 아버지, 슬픔의 아버지, 억울함의 아버지 앞에 최대의 선물입니다.
뜻을 따라 나오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은 금은보화를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같은 사정에 처한 자의 손에 손을 잡고, 몸에 몸을 붙들고 슬퍼하는 아들을 위로하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리에서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자라야만 천상천하 어디를 가든지 그를 대해서 항거하는 자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우편에 앉혀도 ‘옳소이다!’ 한다는 겁니다. 그렇지 못한 자를 하나님 보좌에 앉히면 천군천사와 천천만 성도, 땅 위의 사탄까지도 참소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된 기독교 신자가 가는 길은 죽음의 길입니다. 참된 신자가 가는 길은 고통의 길입니다. 참된 신자가 걸어간 그 길은 억울한 길이요, 참음의 길이요, 비참한 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결코 비참한 것이 아닙니다. 비참한 자리에서 우리와 더불어 인연맺기 위하여 찾아오시는 하늘은 그러한 자리에서 우리를 박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후대하여 인연을 맺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연은 천상에 가서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딸로서 늠름히 설 수 있는 조건이 된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눈물의 골짜기에서 아버지를 부를 때 응답 받을 수 있는 아들딸이 되어야 합니다. 눈물짓는 자리에서 ‘아버지!’ 할 때 ‘오냐! 내가 여기 있으니 참아라.’, 피땀 흘리는 고통이 사무치는 자리에서 ‘아버지여!’ 할 때 ‘내가 참았으니 너도 참아라.’, 죽음이 닥쳐오는 그 순간에도 ‘내가 있으니 안심해라.’ 하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자리에서 얼마나 아버지를 모셨으며 얼마나 아버지와 더불어 의논했으며 얼마나 아버지와 더불어 살았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지, 영광의 자리에서는 아버지를 불렀댔자 문제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직까지 아버지께서 영광의 날을 보시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까지 미국과 같은 선진국가는 외적인 사명을 갖고서 세계를 주도해 왔지만 이제는 내려가야 됩니다. 돈 보따리를 짊어지고 불쌍한 민족을 찾아 내려가야 합니다. 돈 보따리만이 아니라 마음과 심정도 가지고 찾아 내려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민족이 그 사명을 인계 받습니다. 그러니 원조를 안 해 줄래야 안 해 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돈만 원조해 주면 될 것 같습니까? 천만에요. 세계의 모든 국가를 대표해서 기독교 이념을 중심한 국가로 세워진 이상, 미국은 그 이념의 핵심에다 마음과 심정을 플러스시켜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민족이 그 사명을 빼앗아 간다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사조가 이렇게 흘러나왔거늘, 이런 뜻을 알고 나선 우리는 어디로 가야 될 것이냐? 영광스러운 자리로 갈 것이 아니라 비참한 자리로 가야 합니다. 아직까지 7년 대환난이 오지 아니하였거든 현실에서 7년 대환난과 같은 장소를 찾아가야 됩니다. 대환난이 찾아오는 곳은 어디일 것이뇨?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자리로부터 찾아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는 자리가 아니라 제일 싫어하는 자리로부터 찾아오니 그러한 자리에서 승리하는 여러분들이 된다면 문제없습니다.
역사의 사조는 이러한 단계로 움직여 들어오고 있습니다. 공산주의가 노동자, 농민, 불쌍한 자들을 붙들고 일을 해 나왔기 때문에 급속한 시일내에 세계를 뒤흔들 수 있는 단계까지 왔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외적인 것입니다. 천정(天情)을 가지고 그런 자리에 서지 못하고 인정을 가지고 그런 자리에 섰다는 것입니다. 천정을 가지고 그 자리에 서지 못했으니 앞으로 세계를 지배하려면 천정을 가지고 그런 자리에 서야 됩니다. 그렇게 되면 이 천지는 뒤엎어질 것입니다.
그러기에 통일교회 신도들이 찾아가야 할 길은 어떠한 길이뇨? 소위 인간들이 부르짖고 있는, 평화의 깃발이 휘날린다고 주장하는 그런 자리가 아니요, 인간들이 제일 싫어하는 자리, 인간들이 제일 피해 가는 자리를 찾아가야 됩니다. 찾아가는 데는 어떠한 모양으로? 6천년 동안 찾아오신 아버지의 모양을 대신하여 찾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눈물을 흘릴 때 함께 눈물 흘리시면서 눈물 흘리는 우리를 위로하고자 하는 아버지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눈물 흘리는 그 심정을 붙안고 여러분 자신들이 비록 눈물 흘리는 자리에 처해 있다 할지라도 눈물 흘리는 불쌍한 자를 붙들고 ‘울지 마라. 너의 앞 길에는 소망이 있나니 울지 마라.’고 위로하면서 그들에게 행복을, 그들에게 소망을, 그들에게 사정을, 그들에게 심정을 옮겨 줄 수 있는 무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늘의 상속을 받을 수 있습니다. 천지의 상속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땅과 하늘의 권세는 물론 지옥의 권세까지도 지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가야 합니다. 역사적인 사조가 우리의 목전에 다가오고 있는 것이 사실일진대 여러분은 가는 곳곳마다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 가지고 가야 됩니다. 마음과 뜻과 정성이 다 가는 곳에는 어떠한 문제도 다 해결될 수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다 해결된단 말입니다. 그 외의 것은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버지 대신 가야 되겠거늘, 그러한 자리에 찾아갔을 때에 여러분의 마음을 알고 여러분을 붙들고 눈물을 흘리는 자가 있다 할진대 여러분은 아버지 대신 그를 위로할 줄 알아야 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진정한 아들딸이 될 수 있지, 그렇지 않을진대 여러분은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가는 고통의 길은 돌아가는 길입니다. 잠깐 동안입니다. 소망을 두고 목적을 향하여 나아가는 길이 아닙니다. 소망의 저쪽에서 돌아가는 길입니다. 잠깐 동안입니다. 우리 통일신도들은 이 민족을 대신하여 이 민족이 못 가는 길을 가야 되겠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이 민족을 움직여서 세계가 가지 못하는 길을 가야 되겠습니다. 가는 데는 무엇을 중심삼고 가야 되느냐? 천정을 중심삼고 하나님의 심정을 중심삼고 가야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을 세계를 지배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부르짖고 있는 이념과 여러분들이 처하여 있는 그 위치와 여러분들이 자랑하고 있는 그 가치가 크다 하더라도 그것들은 천주적인 가치 이상의 가치와 인연을 맺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 인연은 어디에서부터 맺어지느냐? 지극히 비참한 자리에서부터, 지극히 어려운 자리에서부터, 지극히 슬픈 자리에서부터 맺어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리에서 아버지와 인연맺어 슬픔을 무시할 수 있고, 슬픔을 소화할 수 있으며,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는 사람이 진실로 아버지를 모시는 자입니다.
그러한 마음을 갖고 나가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고통이 오래가지 않습니다. 절대로 망하지 않아요. 비록 일신은 고통에 부딪힐망정 그 자리를 넘어가면 무한한 자유의 세계가 펼쳐지는 것입니다. 지금은 그런 자리를 넘어서야 할 시대적인 전환기에 처해 있기 때문에 여러분은 기필코 그 자리를 넘어가야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아버지의 심정을 붙안고 아버지의 사정과 소원의 실체로서 고통의 개척자가 되고, 슬픔의 개척자가 되고, 어려움의 개척자가 되어서 그 길을 따라오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여러분은 틀림없이 하늘의 아들딸들이 될 것이며, 온 세계를 대표할 것입니다. 또한 이 민족이 그런 민족이 되면 수많은 민족을 대표하여 하늘의 축복을 받는 민족이 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아시고, 그런 자리에서 아버지를 모실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어 주기를 부탁합니다.
지금까지 저희들은 아버지를 영광 가운데 기쁨을 지니고 계신 분으로 알았사옵니다. 모든 복과 부귀영화를 자유자재로 우리에게 줄 수 있고 우리에게 해방의 기쁨과 목적을 달성해 주시는 분인 줄로 알았사옵니다. 그러나 하늘의 배후의 사정을 알고 보니 복을 주고 싶어도 복을 줄 수 없는 내적인 곡절이 있다는 것을 알았사옵고, 한스러운 6천년의 슬픔의 역사를 탕감복귀해야 된다는 어마어마한 사실을 저희들은 알았사옵니다. 그러하오니 이제는 알고 탄식하는 자가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고, 행치 못함을 탄식하는 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은 이 민족을 찾아오고 계시는 아버지요, 세계 인류를 찾아오고 계시는 아버지인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발걸음에는 아직까지 슬픔의 눈물이 젖어 있사옵고, 아직까지 고통의 장벽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오늘 저희들은 그러한 아버지의 고통의 성벽이 되고 슬픔의 도성이 되어, 아버지가 알아주든 몰라주든 아버님의 억울함과 한을 붙안고 그 책임과 사명을 다하기 위해 원수와의 결전 도상에서 피와 눈물을 뿌리며 싸울 줄 아는 저희들이 되어야 하겠사옵니다.
아버지, 저희들이 귀한 것을 가졌사옵니까? 그것은 본래 저희 것이 아니옵니다. 자랑할 수 있는 무엇을 가졌다 할진대 그것도 저희 것이 아니옵니다. 그것은 하늘의 것이요, 민족의 것이요, 세계의 것이옵니다. 그렇게 돌리기 위해선 하늘과 심정적인 인연을 맺어야 된다는 것을 알았사오니, 저희들 천정에 사무쳐 인류애의 심정을 붙안고 허덕일 줄 아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산천을 바라볼 때도 아버지의 심정을 붙안고 눈물로 바라볼 줄 알고, 백성을 바라볼 때도 역시 그러하고, 인류를 바라볼 때도 역시 그럴 수 있는 저희들이 되어야 하겠사옵니다.
그동안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사옵니다. 저희들은 그것을 하늘의 영원한 유업으로 받았사오니, 이제 저희들이 선조가 되어 천추만대 후손 앞에 하늘이 남겨준 바 그 자체를 그냥 그대로 상속시켜야 되겠사옵니다. 저희들은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개체가 되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가정을 이루어 그 가정을 중심삼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이념적인 세계를 건설해야 되겠사옵니다. 건설할 범위가 크면 클수록 더 많은 피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개인을 찾기 위해서도, 가정을 찾기 위해서도, 민족을 찾기 위해서도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사오며, 더 나아가서는 피와 땀이 흐르는 것을 개의치 말아야 된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생명이 끝날 때까지 아버지를 모시는 데에 모든 것을 소모시키는 것을 자랑으로 삼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런 자리에서 눈물로써 아버지의 영광을 노래할 줄 아는 저희들이 될 것을 이 시간 다시 한번 결심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삼천만 민중을 긍휼히 보시옵소서. 이 민족을 찾아오시기에 수고하신 당신의 노고를 이 민족은 모르오나 저희들만이라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6천년 복귀역사노정의 억울함을 수많은 사람들은 모르오나 쫓김받고 몰림받는 저희들만이라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만은 진정으로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고, 그 아버지는 우리를 대해 진정으로 아들딸이라 하며 서로 위로하고 위로받을 수 있는 그 자리를 그리워하는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남아진 환난의 길을 겁내지 말고 선두를 다투어 나설 수 있는 저희들이 되어야 하겠사옵니다. 이 비극의 운명을 가로막아 사망의 물결을 막을 수 있는 방파제를 쌓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알았사오니, 이 일을 위하여 결의하고, 이 일을 위하여 맹세하며, 있는 정성을 다 들여 이 일의 성취에 총 주력하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눈물 어린 심정으로 하늘을 위하여 기도하는 무리가 있사올진대, 아버지, 품어 주시고 사랑하여 주시옵소서. 이 길은 인간적으로 볼 때는 억울한 길이요, 분한 길이요, 고통스러운 길이지만, 당신이 걸어오신 길이기에 이것을 기쁨의 길, 감사의 길, 영광의 길로 바꾸어 가야 할 곡절의 노정인 것을 알았사옵니다. 이 반대의 길을 가야 할 운명에 처한 것을 당신은 긍휼히 여기신다는 것을 알았사오니, 당신과 더불어 끝까지 이 길을 달려갈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부터 실시되는 이 40일수련에 참석한 젊은 아들딸의 마음을, 아버지, 붙드시옵소서. 아버지를 진정으로 모시는 아들딸이 되기 위하여 어느 누구보다도 어려운 자리에서 아버지를 모시기 위한 준비를 하고 수련을 받는 이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고, 그런 기준 밑에서 결의하고 나설 줄 아는 이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남아진 시간 위에도 아버지의 영광의 손길이 떠나지 마시옵고, 아버지께서 걸으신 발자취를 저희들이 직접 밟으면서 감사의 눈물을 흘리고, 아버지를 위로할 줄 아는 참다운 효자 효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옵니다. 모든 것이 아버지의 뜻 가운데에서 되어지고 승리의 한 날이 이 천지에 나타나기를 바라오면서,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여기에는 여러 가지로 다른 사정을 가진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나름대로 각별한 결의와 맹세를 하고 참가했다고 봅니다.
이제부터는 각자의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주최측의 지도에 응해야 합니다. 앞으로 40일 동안의 수련을 끝마치고 민족 앞에 나타날 때에는 하나의 인격자로 나타나도록 하자는 데에 이번 수련회를 갖는 의의가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특별히 주고 싶은 말씀의 제목은 ‘승리자가 되자’입니다. 우리 인간 개체는 역사적으로도 그러했지만 현실적으로도 끝없는 선악의 투쟁을 하는 가운데에서 살고 있습니다. 개인도 이러했거늘 하물며 하늘의 전체 이념을 펴는 데 있어서 투쟁을 거치지 않고 승리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이 40일 기간은 역사적인 승리자를 양성하는 기간입니다. 우리의 승리의 목표는 개인이나 부분적인 면에서의 승리가 아니라 전체적인 면에서의 승리입니다. 전체적인 승리자가 되어야 해요. 어떠한 환경 가운데서도 승리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진 인격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천사와 씨름하여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순간의 수고로 얻어진 승리가 아닙니다. 뜻을 품고 21년간 투쟁하는 노정에서 갖게 된 필승의 신념과 경험에서 얻어진 것입니다. 라반의 집에서의 목자생활이 자기와 맞지 않더라도 7년, 7년, 7년 하여 3x7년, 즉 21년 동안 자기의 이념을 갖고 소화한 과거가 야곱에게는 있었습니다. 4백년 동안의 애급 고역을 거친 이스라엘 민족도 참고 싸운 야곱의 정신을 가지고 나갔더라면 가나안 복귀는 문제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일하게 모세는 일념으로 고국을 그리며 이스라엘 민족을 품고 나온 나머지 민족의 지도자로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가 애급인을 돌로 때려죽인 것도 하나님과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에서였습니다. 이스라엘 민족 모두가 그 모세와 같은 정신을 잃지 않고 나갔더라면 광야에서 쓰러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러한 정신을 잃어버릴 때마다 징계를 받았습니다. 그들이 야곱의 정신과 모세의 정신을 그대로 계승하였던들, 유대인들이 예수를 배반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야곱과 모세의 정신을 계승하여 민족적 세계적 대표자로 오신 분이 예수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은 그 예수를 받들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제1이스라엘은 망하고 말았습니다.
그 후 그들은 이스라엘 회복운동을 전개해 나오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영광을 회복하기 위하여 지금까지 싸워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이름을 회복하러 오시는 분이 다시 오시는 주님입니다. 그러니 기독교가 이스라엘이 되기 위해서는 야곱과 모세의 정신을 계승해야 합니다. 오늘 이 자리는 한 번밖에 없는 귀중한 자리입니다. 잘하면 승리자가 되고 못하면 패자가 됩니다. 지금은 세계주의 시대이므로 하나님은 이때에 기독교인을 중심삼고 이스라엘 회복운동을 하십니다. 이 싸움에서 이기면 제3이스라엘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야곱이 싸우던 때와, 모세가 싸우던 때와, 예수가 싸우던 때에 맞먹는 시대입니다. 이 시대에 우리는 승리하느냐 실패하느냐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우리는 승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어느 민족,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는 입장에 서야 합니다. ‘나는 야곱의 신념, 모세의 신념, 예수의 신념을 가졌다.’고 할 수 있어야 하늘이 어떠한 자리에도 내세울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늘은 승리자를 요구하십니다.
그런데 승리자가 되려는 자에게 부딪혀 오는 모든 환경 여건은 협조하는 환경이 아니라 반대하는 환경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들은 그 환경을 감당해내야 하고 마음만은 믿고 의지할 수 있게 되어야 합니다. 이 마음은 역사적인 피와 눈물과 땀으로 얼룩져 우리에게까지 연결돼 나온 것입니다. 그런고로 어떤 어려움에도 마음만은 움직이지 않고 변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느 누구도 승리하고 싶은 이 욕구의 심정을 빼앗아 갈 수 없다.’는 자신을 갖고 나가야 합니다. 자신이 없는 승리는 우연한 승리입니다. 그러한 승리 말고 자신이 있는 절대적인 승리를 해야 합니다. 그러한 승리는 역사적인 승리인 동시에 창조이상의 승리인 것입니다. 신념에 불타는 승리적인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시련이라도 이겨내기 전에는 승리의 월계관을 쓸 수 없습니다.
여러분을 수련시키는 것은 신자로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민족을 살리기 위한 싸움의 방패로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문제는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입니다. 한 나라에 한정된 이스라엘이 아니라 세계적인 이스라엘을 세우려는 것입니다. 지금은 개인적인 이스라엘, 가정적인 이스라엘, 민족적인 이스라엘, 세계적인 이스라엘을 회복해야 할 때입니다. 또 하늘땅 자체가 이스라엘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라반, 바로, 헤롯이 아무리 간교할지라도 하늘을 대신한 이름을 더럽힐 소냐고 하는 심정이 있어야 합니다. 야곱이 라반의 집에서 고생한 터전이 있었기에 그의 가정이 있을 수 있었고, 변함없는 모세의 심정이 있었기에 이스라엘 민족을 애급에서 끌어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도 전 인류를 구원하려 했으나 그 뜻을 온전히 이루지 못하고 실패하여 죽게 되었기에, 그 이후 지금까지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수고의 길을 걸어 나오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승리하기 위해서는 첫째 물질적인 고통, 둘째 사랑에 대한 시련, 셋째 사탄의 시험 혹은 직접적인 하늘의 시험을 거쳐야 합니다. 야곱도 물질로 열 번이나 속았으나 그의 신념은 변함이 없었고, 모세도 그 호화스런 환경을 버리고 미디안 광야에 나가 물질적인 고통과 이방 민족으로부터 오는 시련을 이겼으며, 예수도 온갖 시련을 당했습니다. 그러기에 선생님은 여러분을 호화찬란한 자리에 내보내지 않습니다. 야곱은 자기가 접하는 모든 사람들을 사모하고 그 환경에 화하였기에 천사가 나타날 수 있었습니다.
우리 통일교인도 첫째 물질, 둘째 사랑, 셋째 사탄이나 혹은 영인들의 시험을 거쳐야 합니다. 지혜의 시험을 거쳐야 합니다. 이제 여러분을 지도하는 책임자가 여러분을 시험하고 하나님이 시험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거기에서 이겨야 승리자가 됩니다. 마지막에는 천사가 축복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직접 축복하십니다. 그러니까 제일 어렵고 슬프고 고통스러운 단계를 한 번이라도 넘어가야 이스라엘의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시련 도상을 넘어서 삼라만상이 승리자라고 머리를 숙여야 전체를 통일시키고 원수를 몰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
태어나기는 누구나 똑같이 태어나지만 어떤 사람은 백만장자의 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 그는 백만장자의 배후의 고통은 몰라도 그의 아들로 태어났으니 그의 후계자가 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여기 있는 중심 사명을 할 자가 싸움을 해 승리한 이스라엘이 되었다면 그 앞에 그저 순종하고 따라 나가는 사람은 다 이스라엘이 됩니다. 중심인물만큼의 수고를 하지 않고도 그를 따라감으로써 이스라엘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버지가 모든 어려운 싸움의 승리자라는 것을 알고 절대 복종하고 따라가면 자연히 아버지의 상속자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그러한 상속자가 되는 비결을 가르쳐 주려고 합니다. 천지에 하나밖에 없는 절대적인 가치를 모르면 그것이 여러분을 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계시는지 안 계시는지, 선생님이 어떠한 길을 걸어 왔는지, 선배들이 어떻게 눈물을 흘렸는지 몰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자리에 왔으니 됐습니다. 이제부터 어떤 지도자가 단에 서든 그 지도자 앞에 절대복종하십시오. 야곱을 따르던 자들도, 모세를 따르던 자들도 하라는 대로만 하였으면 문제없었을 것입니다. 희생의 제단에라도 오르라면 올라야 했을 것입니다. 예수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정성 어린 마음으로 여기에 온 줄 압니다. 과거를 일소해 버리십시오. 주는 대로 시키는 대로 응하십시오. 불평하면 안 됩니다. 불평은 사탄의 요소입니다. 버려야 할 가지가지의 요소는 모두 버려야 합니다. 사탄이 떨어져 나가게 하기 위해서….
3년간은 굶주림 속에서 눈물을 짓는, 아버지의 뜻을 향해 생명을 걸고 싸워 나가야 합니다. 생명의 인연과 축복의 인연을 가지고 삼천만 민족을 뜻과 연결 지어 축복해 주기 위해 나아가야 합니다. 과거 학창 시절의 기준이나 기타 기성신앙 관념을 갖고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새로운 광야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그곳은 눈물의 종류도 다르고 피의 종류도 다른 곳입니다. 민족적인 승리의 대열에 서기 위해서는 지도자를 절대로 따라야 합니다. 강사가 부족함이 있다 할지라도 그 정성만은 본받아야 합니다. 거기에서는 자기의 요구조건이 있을 수 없습니다. 어떠한 자리에 처박아도 눈물 흘리며 감사하는 심정으로 삼천만 민족을 축복해 줄 수 있는 자격자가 되기 위한 자리임을 알고 나가십시오. 비록 이 자리가 더운 방이라 할지라도 강가나 광야로 생각하십시오. 좋은 자리에 있겠다는 마음은 완전히 일소하십시오.
야곱의 본을 받고, 모세의 본을 받고, 예수의 본을 받고, 앞서 걸어간 형님들의 본을 받으십시오. 40일 기간의 수련을 철저하게 받으십시오. 통일교회의 승리와 스승의 승리는 곧 여러분의 승리요, 하늘의 승리입니다. 얍복 강가에서의 야곱, 광야에서의 모세, 십자가상에서의 예수를 생각하면서 싸워서 승리하겠다는 신념을 갖고 나가기를 부탁합니다. 그러면 이 땅의 누구보다도 행복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복된 승리의 월계관을 쓸 수 있습니다.
한 주일 동안 전체 금식을 시킬지도 모릅니다. 통일교회는 그런 금식을 시키기 때문에 어렵다고들 합니다. 이 기간은 역사적인 40수를 탕감하는 때이니 하늘과 땅, 인류와 나로써 사위기대를 이루십시오. 밥을 먹어도 그것을 생각하며 먹어야 합니다. 아무리 반찬이 없는 밥이라도 여기서 먹는 밥은 최고의 밥입니다. 여기가 바로 그런 자리입니다.
수련 도중에 합당치 않은 자가 있으면 때려서라도 바로잡아야 합니다. 모세도 광야에서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불평하는 자들을 쳐 죽이고 갔으면 전체는 승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최후의 승리를 위하여 우리는 원수를 쳐 갈겨야 합니다. 이번 계몽 기간에 승리하겠다는 일념으로 참고 싸워 이김으로써 반대하던 자들도 머리를 숙였다는 보고를 듣고 통쾌하게 생각하였습니다. 민족이 반대하면 민족을 대하여서도 싸워야 합니다. 수련은 싸움입니다. 민족을 대신하고 세계를 대신하고 하늘땅을 대신하여 싸워야 합니다. 선생님도 개인적인 싸움에서 이긴 다음에야 싸움의 무대가 넓어졌습니다.
이제 이 시간부터 전투 도상에 올랐으니 비장한 맹세 밑에서 싸워야 합니다. 선생님으로서 한 가지 말하고 싶은 것은, 선생님은 지금까지 뜻 하나에 미쳐 온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선생님에게는 부모도 처자도 없었습니다. 뜻이 부모라도 제물로 바치기를 원한다면 부모를 제물로 바치겠다는 각오로 이 길을 걸어온 선생님입니다. 통일교회를 배반하는 자가 있으면 수많은 사람을 동원하여서라도 끌고 가겠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몸에 원수 사탄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았습니까?
이 자리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손도 발도 내놓을 수 없고, 얼굴도 들 수 없는 무리라는 것을 자각하고 수련에 임해야 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선을 향하여 달려 나왔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남아 있습니다.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 언제나 기뻐할 수 있는 곳, 혹은 언제나 기뻐할 수 있는 분을 찾아가야 합니다. 이분이 절대자 하나님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동기의 세계와 결과의 세계에 계십니다. 곧 원인과 결과로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알파요 오메가라고 했습니다.
인간이 원인과 결과의 과정에 있다는 것을 알면,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알게 됩니다. 역사는 원인의 세계에서 결과의 세계로 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양심은 이 과정의 길을 가고 있는데, 역사의 흐름이 빠르기에 이를 따르려는 양심은 두 배로 바쁩니다.
동기는 하나님이 되고 인간을 결과로 세워야 합니다. 타락하지 않았으면 인간이 역사의 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원인을 못 가진 것이 타락입니다.
타락으로 말미암아 목적의 세계는 멀고, 동기적인 권내에 있는 양심이 원인에 가까우므로 양심을 세우려 하는데, 이 사명을 하는 것이 종교입니다. 물론 불교도 마찬가지로서 이 범주에 속합니다.
심정의 안정점을 알게 될 때 평화가 오는 것입니다. 사랑의 세계는 관(觀)이 없습니다. 관을 초월합니다. 전체적인 가치가 부분적인 가치에서 상대되어 그것이 전체적인 결과를 나타내는 것이 사랑이기 때문에 원인과 목적의 세계에 인연을 갖지 못한 인간들은 무가치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원인과 목적을 가르쳐 주는 곳으로 가야 합니다.
역사에 종말이 있다고 한 것과 나를 믿으라고 한 것을 보면, 하나님이 계심을 알 수가 있습니다. 모든 종교 중에서 역사적인 인연을 가지고 종말기를 지향하는 종교는 오직 기독교뿐입니다.
시대를 밟고 넘어야 할 기독교가 그런 입장에 서지 못할 때는 망합니다. 그러므로 시대에 대한 공포심을 갖는 종교나 교회는 망합니다. 로마제국의 박해 가운데도 늠름하게 나아갔던 기독교였기 때문에 망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세계적인 용단을 내려야 합니다. 좌·우익 세계의 중간에 있는 종교가 이것을 헤쳐야 합니다. 사랑은 하나님도, 사람도, 동물도,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도, 다 좋아하는 고로 사랑을 세워 심정적인 것을 세우려 하는 것입니다.
이제 인류는 하나님의 실존하심을 해명하고 자기를 알아야 합니다. 이제까지 수많은 사람을 세웠는데 뜻이 왜 이루어지지 않았느냐고 물으면 하나님도 대답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또 물을 여지가 남아 있으니까요. 사람이 없어 뜻을 이루지 못하셨느냐고 물으면 하나님은 눈물을 흘리시며 머리를 끄덕이실 것입니다. 충성을 다하는 사람이 없는가고 물으면 하나님은 통곡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어떠한 사람인가?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라고 하셨습니다. 수천년 동안 왔다 갔던 어떤 성도보다, 아브라함, 모세, 예수보다도 더 충성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나오기 전에는 뜻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죽음을 걸고 충성하는 것은 다 마찬가지입니다. 충성한 사람이 많지만 뜻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충성의 내용이 하나님이 소원하는 것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상의 소망을 두지 않고 충성한 사람은 없습니다. 즉 자기를 위한 충성을 했습니다.
하나님도 충성의 기준을 세웠기에 충성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충성의 왕, 즉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면 하나님과 같은 충성의 기준을 세워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땅의 죄악 인간들을 위하여 충성하셨습니다. 이 충성은 끝이 나지 않는 충성, 충성할수록 마이너스 되는 충성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러한 충성을 해야 합니다. 즉 절망의 충성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천국도 영광도 싫고, 오직 당신의 충성을 아끼고 고통을 맡을 수 있는 나였어야 합니다. 바로 궁중의 영광을 버리고 나선 모세는 민족과 하나님을 위한 충성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고통은 자신의 것으로, 영광은 성도의 것으로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지방에서부터 해 오는 것입니다. 가자! 이 민족 앞으로 가자! 쓰러진 동포를 보고 ‘오, 내 형제여! 부모여!’ 할 수 있는 부모의 심정을 갖고 가자.
우리는 복중에서의 아벨을 모시고 승리의 조건을 세우려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중의 가인 아벨의 자녀와 같은 상태인 것이니, 복귀된 가인 아벨로 태어나 복귀의 기대를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 책임을 못하면 제2의 작전을 해야 합니다. 가야 할 시기에 갑시다.
내일은 6수를 맞추는 날입니다. 모든 한스러운 것을 털어놓고 갈라야 할 때입니다. 예수님 앞에도 5퍼센트의 책임이 남아 있었던 것같이 우리에게도 5퍼센트의 책임이 있으니, 이 5퍼센트를 위해 보내야 합니다. 의심 없이 가야 합니다. 주의도 전통도 이념도 이름도 없습니다. 오직 참부모주의 밖에 없습니다.
천사가 심부름을 잘못했으니 아들을 세워 심부름을 시킴으로써 천사의 위치까지 복귀하려 하십니다. 미련 없이 가야 합니다. 전부를 불살라 버려야 합니다. 종말에는 아이 밴 여인들과 젖 먹이는 여인에게 화가 있습니다.
오늘은 흥남 감옥에 입감하던 날로부터 14년째가 되는 날입니다. 그때로부터 이제까지의 기간은 야곱 노정에서 사람을 찾는 기간과 마찬가지입니다. 앞으로 7년 기간은 야곱이 물질을 복귀했듯이 물질을 복귀하는 기간입니다. 어제는 음력 1월 7일이며, 오늘은 1월 8일이므로 새 출발의 날입니다. 그래서 1961년 2월 22일은 잘 맞아떨어지는 날입니다.
우리를 모르는 사람이 우리를 만나면 ‘너는 누구냐?’ 하고 묻습니다. 선생님도 여러분에게 같은 말을 묻고 싶습니다. 하나님도 같은 물음을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대답은 ‘나는 청년입니다.’ 하는 것입니다. 개인에 있어서도 제일 좋은 때는 청년 때입니다.
우리는 역사적인 선과 악의 싸움 가운데 살아남은 젊은이입니다. 사탄을 막는 제일선의 방파제이니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 나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며, 미래를 개척하며 책임질 수 있는 사명을 다 해야 합니다.
청년은 미래를 위한 안식의 터가 되어야 합니다. 새 시대의 초석이 되어야 합니다.
마음은 작은 듯하지만 작은 데 속하지 않고 무한한 데 속하여 무궁한 가치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마음의 작용은 대상세계와의 인연을 통한 목적을 향하고 있습니다. 대상은 반드시 주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심정의 세계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더 이상 발전이 없는 세계입니다. 최선의 세계에는 발전이 없습니다. 타락한 세계이기 때문에 발전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권과 문화와 이념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자랑하는 백성, 하나님이 기뻐하는 땅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신문화(新文化) 창조의 세계를 고대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세계를 맞기 위해서는 어떠한 고난도 받을 수 있는 준비를 갖추어야 합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데에는 발전이 없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스승도 부모의 마음을 갖고 제자를 대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마음이 있기에 복귀가 가능한 것입니다.
부모의 심정 이상의 천정(天情)이 있기에 도를 따르는 사람은 부모의 말을 듣지 않는 것입니다. 이 내용을 갖고 통일하려는 종교가 바로 기독교인 것입니다.
하나님께 무한한 사랑과 용서만 있다면 불의를 청산하는 한 날을 세울 수 없을 것입니다. 악의 세계에서 선의 결실을 맺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사람을 세워 놓고 그를 사랑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선악의 대립이 있는 이상 인간 혼자서 이 죄악의 세상을 청산하지 못합니다. 원수가 있기 때문에 역사의 흥망은 반드시 선악이 부딪치는 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원수 이상의 이념과 소망과 심정이 있으면 반드시 원수에게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선에는 혁명이 없습니다. 오직 악에만 있을 뿐입니다.
타락한 인간 때문에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지 못한 입장이 되셨습니다. 야곱의 후손은 야곱과 같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들을 찾기 위해 사탄이 갖고 있는 사람을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탄을 사랑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사랑하는 자녀를 세워 놓고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이 사랑하는 천민(天民)이 되려면 먼저 그 나라의 주권을 찾아 세워야 합니다.
사탄 앞에 자랑할 수 있는 자녀를 세워야 사탄이 굴복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소원을 성취한 자리에서 예수님을 사랑하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사탄의 종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이 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원래 하나님이 인간을 자녀로 지으셨기에 아들딸을 찾으려 하십니다. 양자의 이름을 가지고도 하나님의 상속을 받지 못합니다. 따라서 양자가 직계의 자녀로 복귀되어야 하나님의 복귀섭리가 완결되는 것입니다.
예수도 사탄 세계에서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에 종의 입장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래서 제자의 발을 씻어 주었던 것입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심정은 아버지의 심정이었지만 몸은 종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 고로 몸은 십자가에 내주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려면 아버지의 심정을 갖고 종 중의 종으로 출발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오시면 기독교 신자를 전부 종의 자리로 내몰 것입니다. 이때가 7년 대환난의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심정을 가지고 걸어 나오셨으므로 우리도 그런 심정을 가지고 걸어가야 합니다.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이념은 부모의 심정, 아버지의 심정으로 종의 자리에 설 수 있는 이념이라야 합니다. 그래야 공산주의를 이길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념을 품고 고난의 길을 갈 수 있는 무리가 나와야 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피조물의 환영을 받지 않을 수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이상은 사랑을 빼놓고선 성립될 수 없습니다. 이상의 세계는 곧 심정의 세계입니다. 하나님은 6천년간 종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여기는 과거와 현실이 무시되는 자리입니다. 이제 아버지를 아버지로 알고, 아버지의 심정을 알아서 아버지의 모든 것을 상속 받을 때 우리의 인생의 가치는 나타나는 것입니다.
생활 환경은 각각 달라도 아버지를 사랑하는 심정만은 같아야 합니다.
어느 자리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느냐? 예수의 사랑은 십자가 도상에서 열매 맺었습니다. 죽음의 자리에서도 변치 않고 나아가야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아직 아버지를 사랑했다고 할 수 없는 과정에 있습니다.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하는 기준에 나아가려면 생명을 걸고 죽음의 자리에서도 아버지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 아들딸은 저나라에 가서 하늘땅을 주관하는 자격을 갖출 수 있습니다. 그것을 누구도 못 했습니다. 모두가 못 하고 있으니 부족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눈물 없이는 아버지를 대할 수 없습니다.
한번 나선 걸음이면 끝까지 가야 합니다. 20년이고, 30년이고, 일생이라 하더라도 가야 합니다.
반대되는 것이라면 친구도 물질도 가족도 다 버려야 합니다. 다 갖고는 못 갑니다. 본래의 것이 아닙니다. 다 버려야 합니다. 아버지와 나 사이에 맺은 일편단심의 인연을 누가 끊을 수 있습니까?
삼천만이 있지만 ‘아버지여, 나만 남았나이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삼천 만이 있지만 하늘을 사랑하는 데는 나밖에 없다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엘리야의 사무친 호소같이 ‘나만 남았습니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 117명이 있어도 다 같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116명을 제하고 난 단 한 명일지라도 진정한 아들딸을 원하십니다. 삼천만 중에 한 명을 고르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님은 진정한 아들딸을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아무개와 나는 다릅니다. 그는 이러이러한 것을 가지고 가지만 나는 다 버리고 갑니다.’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죽음의 자리로 끌고 갈지라도 나만 남았다고 해야 합니다.
여러분, 수련생 가운데 ‘나는 누구보다도 아버지를 사랑합니다.’ 하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만큼 아버지를 사랑합니다.’ 해야 합니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데는 거짓으로 해서는 안 됩니다. 먹다 남은, 쓰다 남은 것 갖고는 안 됩니다. 새것 갖고 해야만 합니다.
언제나 새로워야 합니다. 어제 오늘 날마다 새로워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도 선생님은 내 것이라는 관념을 갖지 않습니다. 아버지 뜻에 합당하지 않은 것들을 다 쳐 버리고 갑니다.
아버지를 사랑하겠다고 한 사람은 많았지만 진정으로 사랑해 본 사람은 없었습니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시 군 읍 면 등이 있어야 합니다.
아버지를 사랑했다고 하는 곳, 아버지께서 잊을 수 없는 장소가 있어야 합니다.
‘나’라는 존재는 삼천만, 인류, 하늘땅을 대신한 존재입니다.
인연을 맺는 데는 사랑했다는 내용이 있어야 하고, 사랑의 역사가 입증되어야 합니다.
맡은 바 책임을 다해 ‘나만 남았나이다’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도 혼자이십니다.
하나님과 관계없이 마음대로 자라 왔으니 잘라야 합니다. 돌감람나무인 여러분은 참감람나무의 접붙임을 받아야 합니다. 새로운 진액을 받아 새로운 가지를 뻗쳐야 합니다.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니 나도 아버지를 사랑해야겠습니다. 아버지와 같이 먹고 같이 생활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는 목적은 새것으로 만들기 위함입니다.
이번 5회 수련은 1961년에 행하여져 특히 의의가 있습니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데 있어서 누구에게 져서는 안 됩니다. 내가 먹고 입고 보고 자고 듣고 하는 모든 것을 아버지를 사랑하기 위해서 해야 합니다. 여기에 반대되는 것은 가차없이 끊어야 합니다.
사는 것도 아버지 집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안 돼 있습니다.
오늘날 내가 먹는 것, 입는 것, 사는 집이 모두 아버지 것이 아닙니다.
먹는 것도 입는 것도 사는 집도 아버지의 사랑에 어우러진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안 돼 있습니다. 내 마음이나 내 몸은 그렇지 않다는 입장을 세워야 합니다.
같은 수련생 중에서도 별별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사탄의 제물이 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단단히 결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나만 남았나이다.’ 하는 입장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시시한 보따리 옆에 끼고 기도하면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면 하나님이 붙들어 줄 수 없어요. 여러분은 자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터전을 닦아야 합니다. 수련생들은 기도 많이 해야 합니다. 통일교인들은 기도 많이 안 합니다. 그래도 견디어 나가는 것은 여러분을 위해서 기도해 주는 선생님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만이 사랑할 수 있는 아버지를 가져야 합니다.
이번 수련생 전체를 대표하여 ‘나는 아버지를 사랑합니다.’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복귀시대에는 27억 인류를, 혹은 삼천만 민족을, 그리고 교회를 대표하여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자리에 나아가야 합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그런 입장에 들어가야 합니다. 기도와 금식이라도 해서 죽음의 자리로 자진해 들어가 체휼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지금 바라시는 것은 천국주의를 이 땅에 이루는 것입니다.
나 홀로 이 뜻을 알았고, 나 홀로 이 뜻을 받들고 있으니, 나마저 불충하면 아버지는 어떻게 되겠느냐고 하는 마음을 각자가 가져야 합니다. 이런 마음만 있으면 어떠한 세파나 시련이나 어려움 속에서도 쓰러지지 않습니다.
6천년 동안 수고하여 찾은 내가 겨우 이러한 나인가? 한심하다 못해 천리만리 도망가야 할 자신입니다.
각자가 나만이 사랑할 수 있는 아버지를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제부터 여러분을 사랑하는 분, 사랑하는 아버지를 자랑해야 합니다. 누구에게? 사탄의 족속들이 아니라 양심적인 분,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분에게 자랑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도 구하기만 하지 말고 아버지를 높여 드리는 것이 좋습니다. 자식으로서 높여 드리고 자랑하면 됩니다.
접붙인 가지도 자라면 통나무가 됩니다.
먼저는 하나님을 여러분 것으로 만들어야 세상 만물이 또한 여러분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정 사정 소원을 여러분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 아버지를 내 아버지라고 해야 합니다.
세계에 수많은 인간이 있지만 하나님을 진정 ‘내 하나님’이라고 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할 수 있습니다. 또 앞으로 오실 참부모가 여러분 것이 되고, 식구가 여러분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앞으로 아버지를 소유하지 않는 한 선생님과도 하등 관계가 없게 됩니다.
이제는 본부 식구들이 책임을 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책임을 추궁하십니다. 하나님이 때를 몰라준 데 대한 책임과 지도자를 세워 가지고 대접을 못한 책임을 추궁하십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한 사람을 세울 때는 반드시 목적을 두고 세웁니다. 그 목적은 하늘땅을 위한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에게는 신념이 있어야 합니다. 삼천만이 반대하고, 가령 하나님이 반대해도 이 뜻은 ‘틀림없다.’는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이런 신념만 변치 않으면 어떠한 책임도 해낼 수 있습니다. 앞으로 여러분 가운데서 여러 가지 사람들이 나올 것입니다. 정통파, 탈락파, 중간파, 반대파가 나올 것입니다. 그러니 잘 살펴서 바른 길을 걷도록 해야 합니다.
인류역사는 복귀역사입니다. ‘복귀’하려면 ‘실체’가 있어야 하고, ‘말씀’이 있어야 하고, ‘심정’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땀과 눈물과 피를 흘려야 합니다. 이것이 복귀노정의 곡절을 해원하면서 완성을 목적하고 나아가는 우리가 담당해야 할 책임입니다.
인간이 자기 당대에 제아무리 수고하였다고 해도 역사적인 하나님의 수고와는 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역사상 어느 누가 겪은 슬픔과 어려움 보다 더 큰 슬픔과 어려움을 당해 오셨습니다.
역사상 모든 사람들의 것을 합한 것 이상의 피와 땀과 눈물의 길을 걸어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 당대의 수고만을 가지고는 하늘 앞에 머리도 못 듭니다.
우리의 아버지는 눈물과 피와 땀의 아버지이십니다. 지금까지 아버지는 여러분들이 흘리지 못한 눈물과 땀과 피를 흘리며 사탄을 막아 나오셨습니다.
우리의 어깨에는 역사적인 제1이스라엘과 오늘의 제2이스라엘과 미래의 제3이스라엘의 운명이 걸려 있습니다. 복귀역사를 완결시키기 위해서는 눈물의 양을 채우고, 땀의 양을 채우고, 피의 양을 채워야 합니다. 죽기 전에 눈물과 땀과 피의 양을 채워 제1, 제2, 제3이스라엘에 끼쳐 주어야 합니다. 눈물과 땀과 피의 양을 채우기 전에는 하나님의 아들딸이 될 수 없습니다. 제1, 제2, 제3이스라엘을 위하여 눈물을 흘리고 땀을 흘리고 피를 흘려야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그것을 채워야 합니다. 위로는 하늘을 위해 눈물을 흘리고 아래로는 참부모를 위해 땀을 흘려야 합니다. 여러분은 아무리 고통스러운 일이 닥쳐와도 자기를 위해 눈물을 흘려서는 안 됩니다. 모세와 더불어 울고, 예수와 더불어 울고, 역대의 선지선열들과 더불어 우는 여러분이 되어야 합니다.
이 노정은 하늘과 스승이 가는 노정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여러분은 제3 이스라엘의 조상이 되기 위해서 심정의 역사를 꾸며야 합니다. 또 여러분은 자녀의 사랑, 부부의 사랑, 부모의 사랑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역사적인 위치에 설 수 없습니다. 최후의 길에는 협조자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뜻을 알았으니 뜻을 중심삼고 제1, 제2이스라엘 앞에 제3이스라엘로서의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제1, 제2이스라엘의 책임은 그만두더라도 제3이스라엘의 책임만은 다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제2이스라엘의 대표자를 모시고 나가야 합니다. 이것은 가인과 아벨의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가인과 아벨은 둘 다 하늘이 허락하지 않은 때에 낳은 아들이지만 가인은 사탄 편에 가깝고 아벨은 하늘 편에 더 가깝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가인 편의 사람을 자기 직계의 아들딸보다 더 사랑해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은 가인을 찾으러 나가는 것입니다. 제2이스라엘이 하늘의 축복을 받아서 낳은 것이 제3이스라엘입니다.
이것은 운명의 길입니다. 예수가 소망했던 것은 믿음의 아들을 셋, 열둘, 120명까지 두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이 축복을 받아 아들딸을 낳아야 곧 하늘의 아들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을 복귀하는 데도 남의 집 귀한 독자, 혹은 그 부락에서 제일 신망 있는 청년이나 처녀를 먼저 찾아야 합니다. 제일 잘난 가인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못 하면 혈통복귀 역사를 하시는 아버지와 관계가 없습니다. 축복을 받고 자녀를 낳아야 사명을 다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자녀의 자리와 부부의 자리를 거쳐서 부모의 자리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전체를 살려내기 위해서는 대신 죽어 줄 수 있는 가인의 아들딸을 취해야 합니다. 잘난 사람이 아니면 충직한 사람을 얻어야 합니다. 그래야 여러분이 훌륭한 2세를 낳을 수 있는 기반이 잡힙니다. 여러분이 뜻을 못 이루고 가면 예수처럼 재림해야 하는데, 이제부터는 재림은 없고 그 처리만 남아 있습니다.
선생님은 쇠고랑을 차고 감옥을 향할 때도 소망을 가지고 갔습니다. 그것은 뜻의 사람을 찾아가는 길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6천 년 동안 찾아오신 아버지께서 위업을 맡기셨으니 그 위업을 맡은 자로서의 생활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책임지고 가야 합니다. 나는 여러분이 한 사람도 떨어지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각자 맡은 바 책임을 다하여 축복을 받는 자리까지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아들딸이 될 수 있고,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참주인의 자리에 나아가야만 제3이스라엘의 조상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1961년부터 선생님의 일은 본격적으로 움직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최소한 가인 편 아들이 세 명 이상이 있어야 합니다. 직접적으로 대하는 사람 앞에는 부모의 입장이요, 간접적으로 대하는 사람 앞에는 주인의 입장입니다. 개체 완성을 한 다음에는 ‘참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천사세계를 포함한 온 천지 만물은 참주인 앞에, 인간은 참부모 앞에 서야 합니다. 이러한 심정적인 복귀를 한 다음에야 천지가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참부모의 자리에 나아가려면 3년 동안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참주인은 만물을 대하여 ‘이것은 내 것이다.’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복귀의 조건을 걸고 가는 목적이 무엇이냐? 참부모의 자리를 넘어 참주인의 자리까지 나아가기 위해서입니다. 선생님은 여러분을 참주인의 자리에 동참시키려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입니다.
이제 여러분이 지방에 나가면 그 지방의 모든 것에 대하여 ‘이것은 내 것이다.’ 하고 주인 대신 행세를 해야 합니다. 천지에 널려 있는 모든 것은 아버지의 것인 동시에 내 것이요, 내 것인 동시에 아버지의 것입니다. 모든 것은 우리의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방에 가면 그 면이나 부락을 포위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돌아야 합니다. 너희는 내 안에 있으니 내 안에 있는 너희들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복안을 가지고 실천해야 합니다. 말없이 싸우자니 그동안 하나님과 선생님이 싸워 나온 방법을 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즉 종과 같이 실천해서 마음의 주인, 행동의 주인, 심정의 주인으로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이제는 어려울 것도 없습니다. 때가 다 되었습니다. 조금만 더 나아가면 그냥 넘어가게 됩니다. 나무 한 그루를 붙잡고도 ‘이 땅에 수많은 사람들이 살았고, 살고 있고, 또 살 것이지만 과거․현재․미래를 통하여 나보다 더 심정적으로 너를 사랑한 자가 있느냐?’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참주인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첫째, 모든 것은 아버지의 것이니 이것은 곧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소유 관념을 확립해야 합니다. 둘째, 책임 관념이 강해야 합니다. 모든 것은 내가 책임져야 합니다. 그러고도 힘이 남아서 이웃까지 도와줄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셋째, 모든 것은 내 것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책임을 다한 다음 그것을 내 것으로서 아버지 앞에 바쳐야 합니다. 내 것으로서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자기 일대에서 끝날을 맞아야 승리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말 씀> 여러분은 주일날 예배시간을 잘 지킵니까? 어떠한 사회단체에서도 시간을 지키지 않으면 그 단체에 속할 수 있는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그냥 이 자리에 참석했는지 모르지만 선생님은 여러분들을 위해서 세 시간 이상 기도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주일을 맞이하기 위해서 일주일 동안 준비한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오늘 처음 나온 사람들은 양해하십시오. 오늘은 말씀드리려던 제목을 달리 해서 여러분에게 권고를 해야 되겠습니다. 지금이 어떤 때인 줄 알아요? 여러분들이 그와 같은 생활 태도를 가지고도 하늘의 아들딸이 될 수 있겠어요? 스스로 비판해 보세요.
원래 읽어 드리려던 성경 말씀은 마태복음 5장 33절에서 37절까지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을 위해서 다른 말씀을 읽어 드리겠습니다(마태복음 6:16─34, 25:29─46 봉독하심).
이때의 여러분을 위해서 이 선생은 기도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때에 맞춰 가지고 인생길을 가야 됩니다. 여러분들은 자나깨나 무엇을 생각하고 있습니까? 어디로 가고 있으며, 누구를 위해서 살고 있으며, 어떠한 일을 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가는 것도, 위하는 것도, 사는 것도, 전부 다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방금 읽은 성경 말씀에서와 같이 하나님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기 위해서 먹을 것이나 입을 것이나 마실 것 등 모든 것을 염려하지 말고 오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또 모든 것을 하늘을 위하여 행하고 하늘이 가는 길에 동참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때에 진정 뜻을 위하고 그 나라와 의를 위해서 일해 보았습니까? 하나님이 굶주릴 때, 하나님이 목마를 때, 하나님이 헐벗을 때, 하나님이 나그네가 되었을 때 찾아보았습니까? 뜻을 위하여 찾아드는 맨 처음의 장소가 이곳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아버지를 찾아올 때 어떠한 심정을 갖고 찾아와야 되느냐? 세상의 일을 하고, 세상의 무슨 공적을 세우고, 세상의 뜻을 품고 올 것이 아니라 벗은 자를 입히기 위한 마음, 굶주린 자를 먹이기 위한 마음, 목마른 자를 마시게 하기 위한 마음, 나그네와 같은 자들을 대접하기 위한 마음을 갖고 와야 됩니다.
뜻은 무슨 뜻? 지금까지 인간은 하늘의 뜻을 품을래야 품을 수 없었습니다. 뜻을 품을 수 있는 자격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늘은 천만 번 죽어 마땅한 이 타락의 종족에게 하늘이 수고한 공적의 터전 위에서 하늘나라의 선한 뜻을 품으라고 하십니다. 우리에게는 나라도 없습니다. 뜻도 없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아무리 뜻을 품었다고 해도 그 뜻은 하나님과 하등의 관계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나라를 가졌다고 하더라도 그 또한 하나님과 하등의 관계가 없었습니다. 우리에게는 나라도 없고 뜻도 없습니다. 또 여러분들은 하늘을 대해서 세워 놓을 아무런 무엇도 갖지 못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 자리를 찾아 나온 목적은 무엇입니까? 뜻을 두터이 하고, 그 나라의 의를 염려하고, 그 나라의 사람들을 위하는 마음을 기르기 위해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도 못 지키고서 무엇을 하겠단 말입니까?
여기서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여러분을 위해서 피땀을 흘려 왔습니다. 어느 누가 뭐라 해도 하늘땅 앞에 맹세할 수 있습니다. 있는 정성을 다 기울여서 여러분들을 위해 지금까지 싸워 왔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늘 앞에 여러분의 갈 길을 책임진 자로서 이 한 날을 준비해 온 것입니다. 길거리에서 만난 인연을 갖고 여러분을 대하는 줄 알아요? 기도를 할 때에도 ‘40평생 나를 대해 오셨던 아버지시여!’ 하는 심정으로 합니다. 오늘 한 생명을 아버지 앞에 세우느냐, 사탄 앞에 농락당하게 하느냐 하는 판가리의 기로에서 그 생명을 하늘 앞으로 세워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끼면서 기도한다는 거예요. 세상 사람들같이 어떠한 제목을 정하여 설교를 준비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때에 필요한 아버지의 말씀을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 기준이 안 서면 몸부림치고 눈물 흘리면서 기도를 합니다. 여러분들의 갈 길을 염려하면서 기도한다는 말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그러한 신념과 각오 밑에서 여기에 나왔는데 시간도 제대로 못 지키는 여러분을 앞에 놓고 말할 수 있겠어요? 그냥 거꾸로 처박았으면 좋겠다구요. 여러분들 가운데는 부모 된 사람도 있고 자식 된 사람도 있지만,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나가는 데 있어서 시간이라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입니다. 때라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때를 못 맞추면 망하는 겁니다. 때를 못 찾으면 망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지극히 성별된 환경을 요구하고 성별된 마음을 요구하는데 여러분들은 시간도 못 지켜 가지고 뒤꽁무니에서 찬송을 부르고 있습니다. 하늘은 그런 찬송 원치 않으십니다.
여러분의 책임이 중하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을 바라보고 뜻을 따라 나오는 수많은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들이 여러분과 같은 사람이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구경꾼 같은 사람들이 되어서 되겠느냐 말입니다. 하늘땅 앞에 책임을 다하겠다고 맹세하고 나선 사람으로서 여러분 같은 사람들을 놓고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어떻게 복 주라고 기도하겠어요? ‘하나님이여! 이들에게 하늘에 감추어 둔 영광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하늘의 생명권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할 수 있겠느냐 말이에요.
스승을 스승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아버지 앞에 기도를 하더라도 떳떳하게 ‘아버지여, 당신이 부르시던 아들딸이 왔사옵니다. 당신이 만나고 싶어하시던 아들딸이 왔사옵니다.’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놓고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원래는 시간이 넘으면 문을 잠가 버려야 됩니다. 여러분 같은 사람들을 모아 놓고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요. 이런 여러분들을 모아 놓고 어느 기준까지 끌어올리려니 두 시간 세 시간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내가 하늘 앞에 기도하고 각오했던 심정적인 기준에 연결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예배 시간이 넘었는데 몇 명이나 모였어요? 여러분이 그러한 관념을 갖고 있으면 선생님도 주일에 여러분을 지도하고 싶지 않아요. 도리어 지방 교회에 가는 것이 낫지요. 그게 마음 편하겠어요. 지방 식구들과는 심정이 맞아요. 선생님이 이따금씩 지방을 순회하면 그 한 시간을 맞기 위해서, 그 시간에 참석하기 위해서 수백리 길을 걸어오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된단 말이에요. 그런 사람에 비하면 여러분들은 하늘 앞에 저주받아 마땅합니다. 오고는 싶은데 차비가 없으니 사흘 나흘씩 먹을 것을 먹지 못하고 밤낮없이 백리 이백리 길을 걸어오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이번 수련생들이 본부에 와서 공통적으로 느낀 것이 무엇인가 하면, 본부교회 식구들이 전부 다 덜 돼먹었다는 거예요. 여러분들, 앞으로 선생님이 지방 교회에 가서 여러분의 말을 할 수 있는 기준이 되길 바라거든 여러분 자신들이 지방 교회의 식구들보다 더 잘해야 됩니다. 선생님이 지방 교회에 가서 여러분의 말을 할 수 있는 입장에 서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이 더 잘해야 됩니다. 이래 가지고 무슨 뜻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에요?
심정통일, 행동통일, 이념통일, 생활통일을 부르짖고 있는 여러분들이 이렇게 늦게 와 가지고 부끄럽지 않아요? 어떻게 얼굴을 들어요? 그러고도 무슨 은혜를 받겠다고요? 그런 사람은 절대 은혜를 못 받아요. 더욱이나 끝날에는 모이기를 힘쓰라고 했어요. 모이기를 힘쓰라고요. 그런데 여러분, 힘썼어요? 그래서 앞으로 그런 사람들이 있으면 주일 예배를 30분 이내에 끝내려고 합니다. 기도 한 번 하고 성경 한 번 읽고 설교도 골자만 이야기 하고, 또 선생님이 여기 있더라도 이젠 주일날 예배 인도를 안 하려고 합니다. 어떻게 되어 가나 꼴 좀 보게 말입니다. 여기 선 사람은 여러분들이 그렇게 대할 사람이 아니에요.
우리가 하늘 앞에 나가는 데 있어서 약속이라는 것은 어디를 가더라도 절대적으로 엄수해야 됩니다. 약속을 안 지키는 사람이 무슨 은혜를 받겠어요? 그런 사람은 가다가 말아요. 가다가 만단 말입니다. 앞으로 선생님은 여러분들이 움직이는 대로 지도하겠어요. 싫으면 그만두세요. 누가 망하나 보잔 말입니다. 누가 망하겠어요?
하늘은 간절히 사모하고 간절히 애쓰는 사람을 대해 주십니다. 아무나 막 찾아가서 대해 주시는 하늘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만은 절대로 엄수해야 됩니다. 앞으로 시간을 어기면 앞에 세워 놓고 한 사람씩 창피를 줄 겁니다. 알겠어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려 한 제목은 ‘참된 맹세’입니다. 이 말씀은 지금 이때에 필요한 말입니다. 여러분, 지금은 맹세할 때입니다. 흐지부지할 때가 아닙니다. 맹세할 때입니다. 그렇게 알고 기도하십시오. 다음 주에도 하늘이 허락하면 말씀하고 그렇지 않으면 안 할 겁니다.
여러분, 이렇게 맹세하자고 선동하는 사람이 있으니 하늘땅을 책임지겠다고 맹세하십시오. 이런 때를 맞았으니 얼마나 복인지 모릅니다. 여러분들은 맹세한 친구를 가졌어요? 맹세로써 묶어진 가정을 가졌어요? 여러분, 선생님도 여러분을 지도하면서 힘이 나야 하지 않겠어요? 힘이 나려면 여러분을 통하여 소망의 심정이 돋아나야 합니다. 그런데 이건 말씀을 주고 나서도 허전하고, 가르쳐 주고 나서도 서운하니 무슨 힘이 납니까? 이래 가지고는 아무것도 안 됩니다. 기도합시다.
아버님, 제가 알고 있는 아버지는 책임지기를 바라시는 아버지인 줄 아옵니다. 제가 섬기는 아버지는 피의 제물이 아니고는 받지 않으신다는 것을 아옵니다. 제가 흠모하는 나라는 원수와 관계없는 백성으로 이루어진 나라이옵니다. 제가 원하는 무리는 아버지를 위하여 피와 살을 다 뿌리고도 부족하여 눈물짓는 무리이옵니다.
아버지, 저희는 타락한 세계에 살고 있는 연고로 습관에 물들기 쉽고, 제도에 물들기 쉽사와 생활하고 있는 이 환경을 벗어나기가 힘드옵니다. 뜻을 품은 사람들도 죄악 된 사람들같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앞놓아나가는 생활을 하지 못하고, 현실의 환경을 벗어날 수 없사와 그저 그대로 생활하고 있사옵니다. 그러나 저희 각자가 아버지 앞에 하나의 중심을 갖고 나는 이렇게 하겠다는 맹세를 하였기에, 어떠한 어려운 환경에 부딪치더라도 끝까지 책임지고 나가야 아버지께서 슬퍼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저희들이 깨닫게 허락하여 주옵소서.
한 푼어치의 짧은 시간이라도 약속을 어기면 부끄러움을 느낄 줄 알며, 체면과 위신을 세울 수 없어 머리 숙일 줄 아는 사람이라야 아버지의 기쁨의 상속자가 된다는 것을 저희들이 알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오늘날 저희들은 너무나 등한시하였습니다. 너무나 무책임하였사옵니다.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약속의 뜻과 섭리하시는 경륜은 저희의 목전에 다가왔사온데 저희들이 부족하여 천추에 한을 남길까 두렵사옵니다. 만일에 저희들이 태어나지 않았던들 아버지께 한이 가해지지 않았을 것인데, 태어나서 아버지의 뜻 앞에 덕이 못 될까 두렵사오니 과거보다도 오늘, 오늘보다도 미래에 아버지를 위하여 더 충성하고, 더 간절한 마음으로 더 많은 것을 책임질 줄 아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이 시간도 당신의 존전에 무릎을 꿇은 외로운 무리들이 많은 줄 알고 있사오니 그들을 긍휼히 여겨 주시옵고, 그들에게 복을 빌어 주시옵소서. 원컨대 그들을 품으시사 당신이 원하시는 소망의 자리까지 낙망하지 말고 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고, 당신이 그들을 친히 붙드시사 약속하신 그곳까지 떨어지지 말고 가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이날 참다운 생명을 갈구하여 당신 앞에 호소하는 무리들이 있사옵니까? 그들 위에 당신의 손길을 펼치시사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그들에게 당신이 내왕하시어 운행하실 수 있는 그 한 날을 얼마나 고대하고 계시옵니까? 고대하는 그 한 날이 찾아올진대 그들로 하여금 몸 마음을 다해서 모실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 저희들의 부족한 모든 것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진정 하늘을 위하여 애달파한 흔적을 갖고 준비하여 아버지 앞에 참여할 줄 아는 당신의 아들딸이 될 수 있게 하여 주시옵고, 하늘을 위한 참다운 심정을 내 몸과 더불어 산 제물로 바쳐 드리는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자리는 아버지를 모시는 자리요, 아버지와 의논하는 자리요, 아버지 앞에 정성을 들이는 자리이오니 모든 것을 성별하고 모든 것을 스스로 분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심정 앞에 합당할 수 있는가 없는가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성별시켜서 아버지 앞에 드릴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마음과 몸, 생활 전체를 아버지 앞에 드리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준비하여 아버지와 인연맺을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모든 것을, 아버지, 친히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그 마음으로 권고하여 주시옵고, 아버지의 심정과 더불어 동참할 수 있는 자리로 저희들을 인도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나타난 전체 위에 아버지의 영광이 같이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친히 경륜하시는 뜻을 이들로 하여금 이루게 하여 주시고, 약속하였던 그것을 잊지 마시옵고 끝까지 이들과 더불어 실천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여러분들은 각 지방의 자기가 소속된 교회와 식구를 대표해서 왔습니다. 이 기간이 끝난 다음부터 여러분은 과거의 여러분과는 달라야 됩니다.
하나의 약속 밑에서 뜻을 대신하고 있는 분들의 지시에 따라 안팎으로 하늘이 요구하는 책임을 하고 조건을 갖추어야 합니다. 본부에서는 많은 사람을 대하기 때문에 여러분이 바라는 만큼 잘 대해 주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미리 양해하고 참고 지내기 바랍니다. 설혹 귀하게 대하지 못하는 점이 있더라도 잘 극복해 주기 바랍니다.
사람이 국가를 책임지면 국가의 책임자가 되고, 세계를 책임지면 세계의 책임자가 되고, 하늘땅을 책임지면 하늘땅의 책임자가 됩니다. 우리의 목적은 최고의 책임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선생님은 여러분을 사회, 국가, 세계, 하늘땅, 절대자 앞에 일시적이 아닌 영원한 책임자가 되도록 지도하려는 것입니다.
앞으로 여러분은 여러분 개인을 책임지고 만사를 책임져야 됩니다. 백성이면 백성의 한 사람으로서, 또는 단체면 단체의 일원으로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늘은 여러분들에 대하여 책임지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자기를 중심으로 하여 전후·좌우·상하의 사방성을 갖추어야 합니다.
앞으로 여러분이 뜻을 대신해서 지방이나 어떠한 장소로 보내지게 될 때, 여러분은 자기 자신에 대해 책임질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를 책임지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다른 사명을 맡길 수 없습니다. 자기를 책임질 수 있는 자라야만 다른 책임을 지울 수 있습니다. 자기에 대한 책임을 지고 난 다음에야 이 이념을 세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한 자에게는 이념을 세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아직까지 나를 책임질 수 있다고 하는 자를 하늘땅 가운데서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자신을 책임지고 나서면 그것이 출발의 기점이 됩니다. 민족도 세계의 사조도 모두 책임 소재의 권내에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우리가 먹는 밥도, 입는 옷도 우리에게 책임을 묻고 있습니다. 책임지지 못하면 만물을 대할 면목이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전체 앞에 뜻을 책임질 수 있는 자가 되어 주기 바랍니다. 그런 자리에 서야 비로소 하나님을 대하여 창조주요, 아버지요, 주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타락하면서부터 책임을 질 수 있는 자리를 잃어버렸습니다. 참다운 부모 앞에 참다운 자녀가 되지 못했고, 참다운 주인 앞에 참다운 주인의 것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만물에 대해서는 절대자요, 인간에 대하여서는 부모요, 천지에 대하여서는 참주인이십니다. 여러분은 출발의 목적을 어디에 두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는 실체가 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참아버지요 참주인이시니, 우리는 이것을 대신할 수 있는 자리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생명의 주인을 무시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는 절대자에 대하여는 생명을, 참부모에 대하여는 사랑을, 참주인에 대하여는 충성을 바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창조주의 참다운 생명과 참부모의 참다운 사랑과 참주인의 참다운 도리와 인연을 맺지 못합니다. 자기 스스로를 책임지지 못하면 모든 이웃과 인연을 맺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중에는 스스로 통일의 사도임을 자부하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주체에 대한 대상의 가치를 책임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영원불변한 가치의 존재로 공인됩니다. 여러분이 각 지방으로 가게 될 때에는 책임을 질 수 있는 창조주의 입장, 부모의 입장, 주인의 입장을 대신해서 가야 합니다. 만물은 하나님이 없어서 탄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대신 책임져 줄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탄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기 스스로를 책임져야 합니다. 책임져야 할 곳이 있으면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주로서, 절대자로서, 참아버지로서, 참주인으로서의 책임을 지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귀섭리역사를 해 나오시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이러한 책임을 지지 않으신다면 복귀니 천국이니 하는 것은 있을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배반당하고 쫓김을 받더라도 절대자의 입장은 놓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대자로서, 아버지로서, 참주인으로서 책임을 지십니다. 여러분도 절대자의 책임, 아버지의 책임, 주인의 책임을 대신 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책임을 질 수 있는 자격이 안 된다고 거부하지 말고 아버지로서의 책임, 주인으로서의 책임을 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삼면을 책임지고 나가시는데 여러분은 한 면이라도 책임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러분이 책임을 지고 지역에 가면 그 지역의 만물은 여러분이 어떠한 가치를 지닌 존재인가를 압니다. 환경이 증거해 줍니다. 어떠한 증거를 하는가? 당신은 우리의 생명을 구해 주실 분이요, 아버지의 화신이요, 우리 지방의 주인이라고 증거할 것입니다. 모든 것을 여러분에게 맡기고 바치고 싶은 마음이 움직일 것입니다.
여러분이 창조주로서, 아버지로서, 참주인으로서의 책임을 대신 진다면 어디 가든지 하늘땅이 여러분을 도울 것입니다. 여러분은 절대자의 책임, 아버지의 책임, 주인의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것을 책임지고 나가면 절대로 배척받지 않습니다. 오늘날 모든 사람들은 자기의 행동과 자기의 생명과 자기의 심정을 책임져 줄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이런 사회가 이상사회입니다. 책임을 지고 생명을 각오하고 나가면 동지가 많이 나타납니다.
여러분들이 지역에 나가게 될 때, 생명을 지으신 창조주로서의 책임, 부모로서의 책임, 주인으로서의 책임, 이 세 가지의 책임을 져야 됩니다. 그렇지 못하면 절대자의 대신자, 참부모의 대신자, 참주인의 대신자가 절대로 될 수 없습니다. 이것마저도 못 하면 존재세계에서 추방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책임을 못 지겠으면 절대복종으로 모시기라도 해야 합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자기를 책임질 수 있는 입장에 서야 합니다. 절대자를 대신하고, 참부모를 대신하고, 참주인을 대신하여 책임을 지는 승리의 용사가 되어야 합니다. 하늘은 그러한 존재들을 고대하고 계십니다.
오늘은 예수께서 뜻을 완결 짓지 못하고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인류가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부활이라는 명사는 필요 없게 됩니다. 원래 하나님과 인간, 영계와 육계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인연으로 맺어져야 할 것이었으나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그것은 갈라질 대로 갈라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된 것을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재창조의 섭리를 해 나오셨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하늘과 땅이 부활되기를 소망하시며 개인, 가정, 민족, 세계, 천주가 부활되는 날을 고대해 나오셨습니다. 그러나 그 일을 이룰 개인이 없으니 가정, 민족, 세계의 나갈 길이 모두 막혔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선조를 잘못 둔 것을 한탄하면서 내려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그 마음은 하늘을, 몸은 땅을 터로 하여 지으셨습니다. 따라서 인간 한 사람을 중심삼고 우주가 화동해야 할 것이었는데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모두가 갈라졌습니다. 그러므로 영계와 육계를 통일하기 위해서는 먼저 내 마음과 몸이 일체를 이루어야 합니다. 갈라진 것을 다시 합치고 통일시켜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본성의 기준에서 인간의 양심을 상대로 한 감응 작용에 의해 인류를 선의 방향으로 이끌어 오셨습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의 양심을 기반으로 하여 인간과 인연을 맺어 나오셨습니다. 아담가정에서도, 노아가정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양심의 기준을 세워 대해 나오셨습니다. 역사노정에 있어서 개인이 완전히 부활하여 창조의 목적을 이루어야 합니다.
예수를 통하여 땅을 대한 하늘의 전초지(前哨地)가 비로소 만들어졌습니다. 그 전까지는 하나님께서 인간 세상에 발을 붙이실 수가 없었습니다. 노아를 거치고 아브라함과 모세를 거쳐 예수에 이르러 비로소 하늘의 전초지가 세워졌습니다.
이 땅에 있어서 하나님의 발판이 되는 중심존재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입니다. 그는 사랑의 중심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를 통하여서만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땅의 불신으로 실체를 잃어버림으로 말미암아 땅 위에 하나님의 발판을 세워 놓지 못한 채 영계로 가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빚으신 다음 해와를 빚으신 것같이 예수님이 영계에 가신 다음 성신을 보내셨습니다. 즉 영적인 상대로 성신을 보내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특정한 개체들만을 축복하시지 않습니다. 인간들의 양심을 중심삼고 전전하면서 역사하셨습니다. 양심 기준이 일치되면 성신이 오시고, 그렇지 못하면 성신이 오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신은 정성들여 기도하는 때에만 오시어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성신은 부활의 은사를 가지고 오십니다.
우리는 기도하고 충성을 다해야 되겠습니다. 타락하기 전 천사장이 드리던 기준 이상의 충성을 드려야 하늘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타락한 천사장 대신 충성을 하고 하늘 앞에 가야 됩니다. 예수님 이후 2천년이란 기간이 지났으나 충성드리는 것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이 어떤 기준까지 올라가기 위해서는 얼마나 수고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6천년 동안 수고의 노정을 거쳐오셨습니다.
예수가 이 땅에 재현하여 부활의 성체로서 수고한 것처럼 우리도 최후의 한 날을 맞이하여 부활의 완성체가 되어야 하고 하늘 앞에 충신으로 서야 합니다. 타락한 인간들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와 딸의 입장이 성신 앞에 종의 입장인 천사장 대신 충성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들은 모두 예수와 성신을 실체로 모셔야 합니다.
우리는 이 땅 위에서 천사장이 인간을 모실 수 있는 법도를 세워야 합니다. 타락으로 인해 이러한 실체적인 기준이 서지 못했던 것입니다. 만민의 부활을 위한 기도보다 먼저 자기 개체의 부활을 위한 기도를 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 위에 참아버지로 오시어 우리 각자를 실체로 세우고자 할진대 반드시 해와의 실체형인 참어머니를 찾아 세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다시 오셔서 심정적인 부모로서의 사명을 완결 지을 수 있는 길을 이루어 놓아야 되는데, 이것이 곧 어린양 잔치입니다.
우리는 일생 동안 천리의 법도를 찾아 세워야 합니다.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수천년간의 섭리역사는 아담 해와를 부활시키기 위한 역사였습니다. 이 일을 하기 위하여서는 탕감의 법도에 의하여 역사상 수많은 인간을 희생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목적은 완전한 ‘사람’ 하나와 같은 형태와 기능을 갖춘 피조세계를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기독교는 이를 이루기 위한 뼈요, 다른 모든 종교들은 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전영계(全靈界)가 기독교를 중심으로 움직이도록 역사해 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 위에 하나의 실체를 세워서 선주권의 행사를 아직 한 번도 해 보지 못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직접적으로 역사하지 못하시고 간접적으로 역사해 오셨습니다. 인간조상의 타락으로 인하여 죽었던 만민이 오늘날에 와서는 하나님의 아들의 자리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책임자가 책임을 다하지 못하게 될 때 수많은 인간들은 중간 위치에 남게 됩니다.
예수께서 영적인 기준을 세우고 가셨지만 하나님의 뜻은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위해서는 때가 차고 환경이 조성돼야 하고 하나님이 같이하셔야 합니다. 종적인 예수의 뜻이 횡적으로 제자가 많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종적인 기간을 거쳐야 합니다. 즉 과거로부터 내려오는 전후의 관계를 연결 지어야 합니다.
예수 재림의 목적은 아들의 사명을 지나서 아버지의 사명을 하는 데 있습니다. 참부모는 종의 입장에 있는 사람을 양자로 세우고, 다시 그 양자를 직계의 아들딸로 세워야 합니다. 예수님이 오시는 날은 아버지만 아십니다. 하나님에게는 횡적인 기독교가 문제가 아닙니다. 원칙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은 절대로 예수님을 죽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도 죽고 이스라엘 민족도 죽었습니다. 오늘날 전세계의 기독교인은 정성을 다하여 탕감조건을 세워야 합니다. 구약시대의 영인들도 예수와 같이 기도해야 합니다. 구약의 지도자들이 전부 기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신을 중간에 놓고 역사하십니다. 예수께서는 그날과 그 수가 차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수억천만인과 함께 끝날의 한 존재를 찾기 위해 부활섭리를 하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영적인 골고다와 육적인 골고다의 길을 가야 합니다. 뭇 도인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는 질서와 급수에 따라서 합니다. 마음과 몸이 부활하는 데 있어서도 먼저 종의 부활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종으로서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인은 자기보다 급수가 위인 사람은 도울 수 없습니다.
승리적인 존재가 오기 전에는 하늘과 땅 사이에 막힌 담이 헐리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신 것은 창조의 실체상인 승리적인 존재로 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 재림주는 영계의 말단에서부터 부활의 운동, 해방 운동을 벌여야 합니다. 여러 갈래로 갈라진 영계의 영적인 골고다의 길을 개척해야 합니다. 소생급과 장성급을 거쳐 완성급으로 넘어가야 합니다.
전인류의 소망이 이루어지려면 한 중심이 오셔야 합니다. 재림주는 영적인 골고다의 길을 넘어야 하며, 하늘과 땅 사이에 막힌 담을 헐어야 합니다. 도의 길을 열어 놓아야 합니다. 사선을 넘어서야 합니다. 최하부터 뚫고 넘어서서 승리의 발판을 세워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실체의 기대를 통과하여야 합니다.
장성급에서 완성급으로 가기 위해서는 조건을 세워야 합니다. 그것은 두 세계의 골고다를 넘는 것입니다. 통일의 이념이 나오기까지 어떠한 고난이 있었느냐? 천상의 골고다가 있었습니다. 이 길을 가기 위해서는 최고의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합니다. 하늘의 뜻을 중심삼고 가야 합니다. 부모와 자녀가 같이 승리의 한 날을 맞이해야 합니다.
지금은 주인이 없는 때입니다. 그러나 이 기간은 길지 않습니다. 이 기간 동안 우리는 이 민족을 일깨워야 되겠습니다. 우리 식구들은 다 종이 되어야 됩니다. 농촌에 가서 3년 동안 고생을 해야겠습니다. 일시에 농촌의 동(洞), 리(里)까지 동원하여 움직일 수 있을 때 승리의 기준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생명을 가지고 가야 합니다. 부활의 날을 향하여 가야 합니다. 약속의 한 날을 소망하며 가야 합니다. 우리의 뜻이 승리하면 그것은 곧 하나님의 승리요, 전인류의 승리입니다.
4월 17일 이날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입니다. 이 얼마나 좋은 날입니까? 예수님의 축복을 받으면 영계에서 승리한 예수님의 터 위에 서게 됩니다. 여러분은 천하의 대원수와 싸워 이길 수 있는 용자의 모습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이 길을 무난히 넘으면 천국 가는 것은 문제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영적인 부활이므로 실체의 부활을 이루어 그의 목적을 달성한 뒤에 축하해야 합니다. 완전한 부활을 해야 예수님을 대하여 형제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눈물과 탄식으로 이날을 맞이하셨습니다. 완성부활은 무엇이냐? 창조목적을 달성한 실체의 부활입니다.
타락의 혈통을 가진 인간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예수님에게 공인을 받고 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러야 합니다. 하나님은 함부로 부를 수 있는 싸구려 아버지가 아닙니다. 이 땅에는 예수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던 것과 같이 부를 수 있는 자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영계를 들춰보아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자가 없습니다. 이 이유는 인간이 믿을 수 없고 변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도 진짜 아버지, 가짜 아버지, 의붓아버지 등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인간은 땅 위에서 복귀의 역사, 부활의 역사를 거쳐야 합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무릅쓰면서 원수와 싸우다 가셨는데, 그 길을 좇아가는 자가 없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고통의 자리에서 해방시켜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무턱대고 복을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온유겸손해야 합니다. 지게꾼 하던 사람이 당장 장관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탄의 뿌리를 잘라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축하하기 위해서는 십자가를 밟고 넘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부활한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십자가의 주님이 아니라 부활의 주님을 모셔야 합니다. 영적인 골고다와 육적인 골고다를 넘어가야 합니다. 어차피 모든 인간은 골고다의 고개를 넘어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부활하신 예수님을 모셔야 합니다.
1961년은 천적으로 중대한 의의가 있는 해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하늘땅을 대신하여 가야 합니다. 여러분은 마음과 몸이 부활한 실체로서 하늘땅 앞에 이날을 축하할 수 있는 존재로 서야 합니다. 그래야 완전한 축하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12아들로 12대를 연결할 수 있는 심정적 기대를 조성함으로써 역사적인 종적 노정에 왔다 간 영들이 지상에 협조할 수 있습니다. 12대로 종적 기준을 세우고 이것을 다시 횡적으로 기대를 세움으로써, 영계에서도 지상의 조건으로 인하여 횡적 역사를 이루는 것입니다.
아담 한 사람을 찾기 위하여 수많은 선의 자녀를 희생시켰으므로 그들을 해원하기 위하여 고생하지 않으면 아니 됩니다.
지금까지는 축복받을 자녀만을 찾고 재물은 찾지 않았으나 이제는 재물을 찾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부모에게 드리는 음식이 부족하더라도 잘 모시기 위하여 노력하는 데서 발전합니다. 날마다 잘 모시려는 사무친 심정을 가지면 생활의 발전이 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을 전통으로 세우고 나아가야 합니다.
제물을 바칠 때에는 아벨을 찾아가서 바쳐야 합니다. 3일은 목욕재계하고 바쳐야 합니다.
교회에서는 360명을 기준으로 하여 번호를 정하여 세계성을 띠고 바쳐야 합니다. 교회에서 아벨로 당선되는 사람은 복을 받습니다. 아벨 입장에 있는 인물은 여기에 더 가중하여 제물을 바쳐야 합니다. 아벨로 당선되는 사람은 세계 일주의 은사를 받습니다.
이렇게 되면,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교회는 커지는 것입니다. 이런 방법으로 교육과 주택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범죄하면 여기에 동참할 수 없습니다. 자지 않았다는 기준을 세워야 합니다. 그러므로 야경(夜警)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명령을 대기해야 합니다.
그동안 불비한 환경 가운데에서 수련회를 마치게 된 것을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금번 6회 수련회는 다른 때보다 특별한 의의가 있습니다. 창조나 복귀에서도 6수는 커다란 의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기간에 수련을 받은 여러분들은 각별한 사명을 느껴야 합니다. 하늘과 땅의 죄악을 청산하는 데에 있어서도 6수는 중요하고, 사탄과의 싸움에 있어서도 6수는 의의가 큽니다. 여러분들이 각자 흩어져서 싸우더라도 6회 수련생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어 놓으시고 축복하시려던 가치적인 기준도 6수였습니다. 이 기간은 역사적으로, 천주적으로 중요한 기간입니다.
이 기간을 보낸 여러분은 중심적인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러분 6회 수련생을 중심으로 새로운 활동이 전개된다는 것을 느껴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모두 실전 무대에서 싸우던 젊은이들입니다. 여러분 중에는 이 이념을 잘 모르는 사람도 있겠지만 일선에서 싸우던 사람들이 중심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수련을 받으면서 느꼈던 느낌, 각오, 결심, 맹세를 여기서 그치지 말고, 역사와 시대를 영원히 책임지는 여러분들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여러분들을 지도하고 돌보아 주신 분들에게 감사해야 하고, 배후에서 성원을 보내 주신 분들에게도 감사해야 합니다.
40일 전도사 수련회를 마치는 이 마당에서 여러분에게 부탁하고 싶은 말은 ‘자각하자’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자기 자신을 몰랐습니다. 그러다가 뜻을 알면서부터 자각의 심정을 갖고 이 문을 두드려 왔습니다. 여러분들은 역사를 거쳐, 시대를 지나, 미래를 세워 나가는 ‘나’라는 것을 자각해야 합니다.
내 스스로가 자각하는 것 같으나 사실은 하나님이 나를 자각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내 한 모습을 만들기 위해 수많은 선지선열들이 피를 흘렸고 지금도 배후에서 자각한 내가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또 무엇을 느껴야 하느냐? 역사를 망쳐 왔고, 망치고 있고, 망칠 가능성이 있는 한 자체라는 것을 느껴야 합니다. 역사에 어린 아담과 해와의 한을 양 어깨에 짊어지고, 현실과 미래까지도 책임져야 할 나라는 것을 자각해야 합니다.
자각을 해도 내 개인의 욕망을 중심삼은 ‘나’라는 자각을 할 것이 아니라, 하늘과 땅, 민족과 세계 인류를 위한 ‘나’라는 자각을 해야 합니다. ‘나’는 역사를 대신하여 빚진 자요, 배반자의 후손이요, 불효 불충, 나쁜 요소를 모두 지닌 모습임을 알아야 됩니다. 내가 아담 해와의 후손이기에 아담 해와의 불충과 배반은 곧 나의 불충과 배반인 것입니다.
충성과 효도라는 문구가 우리를 고무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하늘의 혈족으로 남아져야 되겠습니다. 언제나 자기 자신을 자각하여 하늘에 불충 불효한 자신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불충 불효의 모습임을 느낄 때마다 충신의 이름, 효자의 이름이라도 부르면서 충성하겠다, 쓰러지겠다고 맹세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이 자리에 선 것도 여러분 자신이 잘나서가 아니라 불충 불효했던 여러분을 아버지께서 불러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빚을 무엇으로 갚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을 느낄진대 어떠한 자리에서도 패자가 될 수 없습니다. 불효의 자식을 효자로, 불충의 자식을 충신으로 보아 주시는데 어떻게 패배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자각하여 수고하신 하늘 앞에 불충과 불효와 배반의 역사를 탕감하겠다고만 하면 영인을 동원해서라도, 더 나아가서는 아버지께서 직접 나서셔서라도 승리의 터전을 마련해 주십니다. 자각하는 내가 될 때에 슬퍼하고, 외로워하고, 탄식하던 나는 아버지로부터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렇듯 자각된 나는 뜻을 책임진 나입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세계와 천지, 아버지와 나와의 관계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제까지 하나님은 주권과 국토와 백성을 가져 보지 못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망친 것이 나 자신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나를 세워 주신 목적은 망쳐진 그것들을 나로 말미암아 찾아 세우시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늘의 주권과 백성과 국토를 망친 것밖에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충성과 효도로 하늘의 주권과 국토와 백성을 팔아먹고 유린한 자신을 돌이켜야 합니다. 배반한 자신을 돌이켜야 합니다. 슬픔 가운데서도 하늘의 주권과 백성과 국토를 찾아 드리겠다는 신념이 뚜렷해야 합니다. 먹는 것도 사는 것도 죽는 것도 오직 이것을 위해서 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이곳을 떠나 첫발을 내딛게 될 때 눈물과 소망과 간곡한 마음이 넘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직도 망각된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어느곳에 있다 할지라도 여러분은 공통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각자가 자각한 위치에서 삼천리 강산을 향하여 출발해야 합니다. 생명이 있는 이 국토, 이 민족, 이 주권을 위해서 충성하고 투쟁해야 합니다. 불효 불충하고 배반한 것도 내 자신이니 돌이키는 것도 내가 해야 합니다. 길을 가는 것도, 음식을 먹는 것도, 자는 것도 싸우는 것도 모두 이것을 위해서 해야 합니다. 끝까지 충성해야 합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하늘을 위해서가 아니라 땅과 민족과 소망의 주권을 위하여 해야 합니다. 하늘을 위하여 회개하고 충성하고 효도하는 때는 지나갑니다.
그러면 무엇을 위해서 해야 되느냐? 땅과 민족과 인류와 주권을 위하여 충성하고 효도해야 합니다. 자각만 하면 아버지께서 불충, 불효, 배반한 모든 것을 잊어줄 수 있는 때니, 민족을 대신하여 회개하고, 국토를 대신하여 회개하고, 주권을 대신하여 회개하십시오. 아버지를 위하여 회개하는 때는 지나갑니다.
땅을 위하여 회개하여야 합니다. 천천만 성도가 지금도 고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늘의 땅과 주권을 회복하기 위해 회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늘의 백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하늘의 국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하늘의 주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여러분을 택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잘 못하면 아담 해와의 뒤를 따르게 될 것이요, 잘하면 승리의 날을 맞게 될 것입니다.
하늘의 소망이 우리의 양 어깨에 걸려 있습니다. 우리는 하늘의 주권을 민족과 인류와 천주에 세워야 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스스로 자각하여 승리의 실적을 남기기를 고대하십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잃어버린 하늘의 민족과 국토와 주권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 민족은 자각하지 못하고 졸고 있습니다. 자기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국토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주권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잃어버린 민족, 잃어버린 국토, 잃어버린 주권을 천주에 세워야 한다는 것을 깨우쳐 주어야 합니다. 생명을 걸고 회복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늘의 민족과 국토와 주권을 찾기 위하여 회개하고, 하늘의 용사로서 투지를 가지고 용진해야 할 사명을 띠고 있음을 자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선생님도 책임을 자각한 다음부터는 자나깨나 먹으나 오직 이것만을 위해서 생활했습니다. 여러분도 ‘자각된 맹세의 일념을 누가 빼앗아 갈소냐?’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맹세와 신념을 가지고 떠나가 주기 바랍니다. 자각하지 못한 이 민족을 자각시킬 책임을 졌으니 자부심을 가지고 힘껏 싸우기를 부탁합니다.
여러분은 먼저 ‘나’라는 소유 관념을 버려야 합니다. 나는 내 자신을 초월한 공동적인 소유물임을 철저히 인식해야 합니다. 하늘이 여러분을 불러 세웠을진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쓰여지기를 원해야 합니다. 이러한 자각을 하여 아버지와 인류와 하늘땅을 위해 싸워 주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자신과 싸울 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을 대하여 ‘이놈의 눈아, 이놈의 발아, 이놈의 손아, 너는 어디에 어떻게 쓰여질 것이냐?’ 하고 냉혹히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후손에게 남겨 줄 무엇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동지라도 규합해야 합니다. 이렇게 나가면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가는 길에는 승리의 일로(一路)만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자각하는 입장을 지나서 자각시키는 자가 되어 주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각오를 가지고 이 자리를 떠나 주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중심한 하나의 식구라는 것을 철저히 인식하기 바랍니다.
마음은 하늘을 대신하고 몸은 땅을 대신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늘땅이 나를 중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모든 생활은 하늘땅을 위하여, 큰 나를 살리기 위하여 제물 되는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아니 됩니다.
우리 하나를 세우기 위하여 하나님은 억울한 곡절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큰 나를 세우기 위함입니다. 하늘땅의 중심이 자기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는 개체를 위한 내가 아니라 하늘땅을 위한 나라는 것을 알아야 해요.
신념 없이 이 자리에 나온 사람도 있습니다. 아담 해와의 실수가 전인류의 실수와 설움이 된 것같이 우리의 실수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체 의식을 떠나야 합니다. 개인을 위하여 먹고 마시고 행동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것을 하늘땅을 대신해서 해야 합니다.
자식을 기르는 것도 이러한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 해야 합니다. 즉 우주적인 승리자, 가치적인 존재를 만들기 위해서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세계에는 수많은 도인들이 고난 중에 헤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침에 일어나면…. 동족을 생각하기 바랍니다. 고난 중에 핍박을 당하는 자가 없는가 하고.
우리는 공적인 존재입니다. 공적인 존재는 과거·현재·미래를 초월해야 합니다. 우리는 공적인 존재로서 자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늘땅이 동원되는 데도 자신의 가치가 결정되지 않으면 아니 됩니다. 우리는 후대의 모든 것 앞에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여하에 따라 통일의 이념이 결정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믿고 세웠습니다. 우리에게 가치가 있어서 세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출발의 여하가 우리의 운명을 좌우합니다.
남한 각지에 있는 우리 식구들은 지금 굶고 있습니다. 이를 악물고 역경을 뚫고 나아가야 합니다. 영계의 선영인들도 이것을 보고 분해하고 원통해합니다. 복수의 한 날을 생각하면서 적개심을 품어야 합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밥을 먹다가도 통곡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천민(天民)이 되어야 합니다. 온 인류는 우리에게 목을 걸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축복한 기준과 책임을 지운 그 기준에서 여러분을 대하려 하십니다. 종적인 면에서 은혜를 받고 나면 횡적인 면에서 기대를 세워야 합니다. 아버지는 불쌍한 분이십니다. 아버지라는 이름 때문에 비참한 길을 걸어오셨습니다. 그 아버지는 역사를 두고 제물 되어 오셨습니다.
우리는 역사적인 소망의 실체입니다. 그런데 감사하고 찬양할 수 없는 우리가 됨을 한탄해야 합니다.
아버지는 우리들을 위해 싸워 나오셨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관념을 버려야 합니다. 각자 자기의 몸을 쳐서 단속하고 나서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하늘의 전통─마음으로는 아버지의 심정을 지니고, 몸은 종된 입장에서─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는 참된 주인의 마음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우주 자연을 무심히 보아서는 아니 됩니다. 자연을 품고 노래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참다운 부모의 심정, 참다운 주인의 심정으로 자연을 붙들고 속삭일 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마음을 갖고 하늘땅의 모든 것을 부여 안고 살 때 천민이 됩니다.
심정은 부모의 심정으로, 몸은 종의 몸으로 행해야 주인이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유업입니다. 이것은 아버지의 심정을 갖고 눈물과 땀과 끓는 피를 흘려야 얻을 수 있습니다.
참다운 지도자가 되려면 참다운 지도를 받아야 합니다. 내 개체를 위해 눈물을 흘리지 말아야 합니다. 하늘의 길을 가는 참부모의 눈물, 참부모의 땀, 참부모의 피를 이어받아야 합니다. 전통으로 남길 눈물과 땀과 피를 흘려야 합니다.
하늘의 명령에는 불응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북에라도 가라면 가야 합니다. 축복은 원수의 땅에서 빼앗아 와야 합니다. 우리의 축복은 약속으로 받은 것입니다.
아담가정은 세 아들을 중심하고 잘나나 못나나 하나되어야 했습니다. 유식하고 무식한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언제나 제2가정이 중심입니다. 효원(孝元)이를 중심하고, 제3가정과 제1가정은 제2가정을 위주로 하여 움직이기 바랍니다.
지금까지는 부모가 명령을 해 나왔으나 이제는 부모의 명령을 상속 받은 자의 명령에 따라 움직여야 합니다.
지금부터는 실체형제입니다. 아담가정에는 맏형─가인, 제2─아벨, 제3─셋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종횡으로 형제입니다. 이제는 형제끼리 아버지 대신 명령하는 사람을 세워야 합니다.
높고자 하는 자는 낮아집니다. 이것이 가정의 강령입니다. 10명을 지배하는 사람은 10명이 눕고 뛸 자리를 준비해야 합니다. 땅을 만들어 놓고 이스라엘 민족을 세워야 한다는 말입니다.
형제를 평하는 자는 배를 갈라야 합니다. 형은 부모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책임을 진다는 것은 부모의 위치에 서는 것을 뜻하고, 섬기는 것은 자녀의 위치에 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동생이 형에게 순종할수록 형에게 해준 축복은 동생의 것이 됩니다. 전체 식구의 책임을 자기가 대신 지겠다고 하는 자가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효원(孝元)이는 하루에 몇 번씩 통곡해야 합니다. 세운 이들 때문에 다시 용사(容赦)해 달라고 하는 입장에 서지 않게 되기를 원합니다.
선생님은 1대(一代)에 성공한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산천 곳곳에 자기가 흘린 눈물의 인연을 많이 남겨야 합니다. 뜻을 위해 어느 정도 충성하는가 하는데 따라 얼마나 좋은 자녀가 나오느냐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횡적인 선서식은 안 했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명령할 때는 누구든지 거기에 절대복종해야 합니다.
자기가 신임하는 선생 이상, 자기의 부모 이상의 성의로 대할 때 민심은 돌아가는 것입니다.
땅 위의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생애노정을 거쳐 왔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 중심한 소망과 목적을 가지고 살아왔습니다. 내 한 개체는 지극히 작지만 내 뒤에는 역사가 있고, 현실적인 환경이 있으며, 미래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연관 가운데서 인류는 지금까지 탄식하면서 살아왔고, 지금도 탄식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희망과 행복과 자유의 모습을 그리면서 투쟁해 왔습니다.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인류는 역사 이래 지금까지 투쟁하여 왔으나 아직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하늘땅을 대신하여 승리자의 모습이 되었다고 자신할 수 있습니까?
땅 위의 모든 사람들은 부모나 자기 자신, 형제, 종족, 인류를 귀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귀하다는 부모, 자기 자신, 형제, 종족, 인류가 진정으로 귀한 존재가 못 됩니다. 여러분은 진정한 참의 부모, 참의 나, 참의 형제, 참의 종족, 참의 인류를 갖지 못하였습니다. 이 이상 불행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한 입장에 있는 것이 여러분입니다. 여러분은 영원한 이상을 가질 수 없는 불행하고 불쌍한 무리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아야 참되고 귀한 가치를 세울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불행한 환경을 청산하고 ‘나는 무한히 행복한 사람’이라고 자신하고 나설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될 한 날을 무한히 바라오셨습니다. 우리는 잃어버렸던 모든 것을 다시 찾아야 되겠습니다. 거짓된 부모, 나, 형제, 종족, 인류가 참된 부모, 나, 형제, 종족, 인류가 될 때 참다운 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과거에 왔다 갔던 노아, 아브라함, 모세, 예수까지도 참다운 형제를 갖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탄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가치적으로 볼 때, 하나님의 6천년의 심정과 소망의 존재인 참부모를 모실 수 있고 참부모의 자녀로서의 인연을 맺고 나설 수 있는 입장에 있습니다. 그러기에 여러분의 손가락과 머리카락 하나는 역사적인 것이요, 시대적인 것이요, 미래적인 것입니다. 즉 여러분은 새 시대의 조상으로 서야 할 엄숙한 자리에 놓여 있습니다.
여러분의 눈은 참부모의 눈, 참형제인 참된 투사들의 눈을 대신하여 바라보아야 합니다. 또한 여러분은 과거·현재·미래가 변하더라도 변치 않는 철두철미한 자리에 서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과거·현재·미래가 다 흔들리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과거에도 이럭저럭 살았고 이 시간도 이럭저럭 살고 있지만, 여러분은 시대가 어떻게 움직이더라도 절대적인 위치에 서야 합니다. 하나님을 대하는 여러분의 위치를 확고하게 잡아야 합니다. 그 위치가 달라진다면 하나님과 일직선상에 설 수 없습니다. 어떠한 고통을 당하더라도 변하지 않고 확고히 서 있어야 합니다. 핍박이 심하면 심할수록, 환경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더욱 위치를 확고히 하고 간곡한 마음으로 심정의 주체인 아버지를 불러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여러분의 터전은 더욱 굳어질 것입니다.
오늘 여기 모인 여러분의 사정은 각기 다릅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환경에서 몰려온 여러분이 한 자리에서 수련을 받고 다시 싸움터로 나가야 되는데, 무엇으로 불변의 심정을 세울 것이냐? 아버지의 심정으로 세워야 됩니다. 천상에 가서 하나님 앞에 내세울 수 있는 조건은 일을 잘한 것이 아니라 뜻에 대한 심정입니다.
우리는 복귀역사에 있어서 한의 역사를 조성한 자들을 미워해야 하지만 역사상 어느 누구보다도 심정에 있어서는 나아야 합니다. 몸적인 공적은 그들보다 못하다 하더라도 종적인 심정에 있어서는 그들보다 나아야 합니다. 과거에는 종적으로 심정의 인연을 맺기 어려웠고 아버지를 부르는 가치도 달랐습니다. 여러분이 지방에 나가서 전도를 하더라도 중심을 못 잡고 왔다갔다하면서 지도하면 아무도 안 따라옵니다. 기도를 해도 일을 해도 불변의 위치에서 그들의 입장을 변명해 주고서 자기의 입장을 세워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야 아담, 노아, 아브라함, 모세의 심정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 어떠한 주의 주창자나 도인도 우리 통일용사들의 앞길을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목적을 위해서 존재하기에 사명을 다 못하면 먹는 것도 자는 것도 괴롭게 됩니다. 여러분이 형제끼리 권고하더라도 미래의 소망을 중심삼고 기도하는 심정으로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늘의 용사의 자리에 서려면 말없이 원수를 굴복시켜야 합니다. 그러려면 어느 때나 하나님의 심정을 갖고 싸움터에 나가야 됩니다. 그렇게 나가면 아담과 예수님 앞에 나타났던 것과 마찬가지로 여러분 앞에 사탄이 나타나더라도 이 사탄은 입체적으로 나타나지 못하고 평면적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3대 시험처럼 사탄은 심정과 실체와 말씀을 놓고 시험합니다. 그러므로 그 시험에 이기려면 하나님이 타락한 아담 해와를 대하시던 역사적인 심정을 가져야 하고, 사탄을 굴복시키는 아버지의 말씀을 가져야 하고, 예수님의 실체를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 앞에 핍박의 기간이 길어지느냐 짧아지느냐 하는 문제는 여러분의 심정과 실체가 얼마만큼 바로 서 있느냐에 따라서 결정됩니다.
여러분이 수련을 받는 것은 여러분 앞에 있는 원수를 물리치고 원수를 심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말씀을 공부해야 됩니다. 이 말씀은 어디서 나왔느냐? 창조 당시의 심정에서부터 복귀의 노정을 거쳐 나온 것입니다.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말씀을 갖추지 않고는 실체를 세울 수 없고, 실체를 세우지 않고는 심정을 세울 수 없으니, 말씀을 들을 때는 몸으로 듣고 마음으로 듣고 심정으로 들어야 합니다.
수련생 여러분에게 역사 이래 없었던 지긋지긋한 육체적 훈련을 시킬 것입니다. 그것을 말씀과 심정으로 견디어 이겨내야 합니다. 여러분은 아담을 배우고, 모세를 배우고, 예수님을 배우고, 선생님을 배워서 아담이나 노아, 아브라함, 모세, 예수님, 선생님의 입장에 서 보아야 하며, 말씀과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서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해야 됩니다. 말씀과 몸 마음이 하나되기 위한 내적인 싸움에서 승리하면, 하나님은 여러분을 공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들은 언제나 ‘제일 어려운 일을 나에게 시켜 주십시오.’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모임이나 단체는 굶주리고 배고픈 사정을 알고, 외적으로 들이치는 죽음(사탄 세력)의 협박에도 변할 줄 모르며, 하나님을 위해 당당하게 싸우다 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축복받은 무리이니 하나님 대신 이 민족을 지도하기 위하여 어떠한 고난의 길도 굴하지 않고 싸워 이기는 산 역사를 가져야만 합니다.
여러분이 이번에 받을 수련은 1차의 수련입니다. 2차는 이 민족 앞에서 굶주림과 죽음의 공포에서도 굴하지 않는 수련을 받아야 하고, 3차는 세계 앞에서, 4차는 영계 앞에서 이런 수련을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나는 하나님의 아들딸이다.’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적인 인격을 갖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정을 갖추어서 아버지의 심정을 대신해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눈물을 많이 흘려야 합니다. 주위에 있는 모든 자연을 진정으로 쓰다듬어 줄 수 있는 심정 어린 만물의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어떠한 걱정도 3시간이나 3일 이상을 끌지 말고, 사탄의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선한 사람의 억울함을 대할 때는 격동하는 분개심을 가져야 합니다.
선생님은 축복해 주고도 자랑스러운 입장에 있지 못합니다. 선생님은 여러분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몇몇 사람을 위해서. 앞서 맹세한 것에 대한 실천과 실적을 앞세우고 하늘이 인정할 수 있는 입장에 서야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복귀하는 데에 있어서는 먼저 제물부터 복귀해야 합니다. 제물은 대신 존재입니다. 아브라함의 제물은 아브라함과 그의 뜻을 대신한 것이었습니다.
양자가 되려면 제물의 왕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천주를 위한 제물입니다. 완성한 아담은 그 자체가 제물입니다. 제물, 제사장, 양자, 선생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사탄세계의 것을 빼앗아 와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제단이 따로 없습니다. 우리가 눕고 자는 곳이 바로 제단입니다. 이곳을 더럽혀서는 아니 됩니다. 자신이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를 제물로 바쳐 줄 수 있는 제사장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선생님을 제단으로 하여 속죄의 과정을 거치게 하여 여러분을 제사장의 자리에 세우려 하십니다. 그런 후에 양자가 되게 하십니다. 양자는 대신 권한을 갖는 자입니다. 그리고 대제사장의 과정을 거친 후에야 직계가 됩니다.
후대에 보여 주고 남겨 주고 증거할 수 있는 조건이 있어야 합니다. 선생님은 지금까지 아버지의 대신자가 되라고 가르쳐 왔습니다. 축복 후에는 속죄의 사명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자기 선조를 대신하여 설 수 있는 제사장입니다.
고생으로 교회를 세우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대신하겠다고 자진하여 나설 수 있는 3인을 세워야 합니다.
제사를 드릴 때에는 자기의 피를 뿌려야 합니다. 제사를 드리는 데 있어서 내 자신이나 또는 상대자가 제사장으로 합당한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내 입이, 내 귀가 제물이 되었는가! 제물은 자아의식과 존재 관념이 없어야 하며 소유 관념이 없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가정을 잃고, 12제자를 잃고, 3제자를 잃고 자신이 피를 뿌려 제물이 되셨습니다. 이제 제사장이 되어 오시는 분이 재림주입니다. 아버지 된 제사장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동생이나 누이가 되려면 그의 정성과 심정을 상속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예수님이 바라시던 소망의 아들딸이니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이제부터 실체의 자녀들을 번식해야 합니다. 아버지와 심정적인 인연을 맺을 수 있는 자녀를 낳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심정적인 제사장이 될 수 있는 자녀를 낳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선생님은 하늘땅을 대신할 수 있는 심정적인 기준 위에서 자녀를 낳기를 바랍니다. 선생님은 한번 축복을 하면 책임을 집니다. 우리는 세계를 대신 해서 한 번 더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조건적인 결혼입니다. 그동안 40일간은 4천년을 탕감하는 기간에 해당합니다. 사실 결혼생활은 오늘부터입니다. 지금까지는 탕감기간이었습니다.
동산에 여러 가지 꽃이 있는 것은 한 가지의 꽃을 빛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한 가지의 꽃의 가치는 주위의 꽃으로 말미암아 나타납니다.
축복을 받았다고 당장에 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하나의 꽃을 빛나게 하기 위해 옮겨진 꽃이므로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 화단을 떠나면 아니 됩니다. 연대적인 책임이 여러분에게 있는 것입니다.
주인이 다 됐다 할 때 각자 자기를 중심한 화단을 다시 꾸며야 합니다. 앞으로 여러분들이 축복하면 그대로 됩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권한을 여러분에게 주려고 하십니다. 부모의 심정을 갖고 종의 몸으로 제물의 과정을 거침으로써 제사장이라고 자칭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제사장이 되기 위해서는 제물 되는 자녀가 있어야 합니다. 직계의 자녀가 없으면 믿음의 자녀라도 있어야 합니다. 예배를 드리는 시간은 제사를 드리는 시간입니다. 자기 과거를 하나님께 보고하고 속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배 시간은 자유가 없는 시간입니다.
40일 기간을 마친 오늘부터는 새 출발을 해야 합니다. 이런 날은 어떠한 희생을 하더라도 모여야 합니다. 남루한 옷을 입었더라도 민족을 위한 종이 되기 위해 모여야 합니다.
영광은 자기를 중심한 것이 아닙니다. 3년, 4년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아담, 예수에 이어 재림주의 시대이므로 하늘의 혈통을 더럽히지 말아야 합니다. 죄 중의 죄가 하늘의 혈통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부모, 부부, 자녀의 사랑은 지금까지의 복귀 과정에서 필요했지만 이제는 여기에 형제의 사랑이 가담되어야 합니다.
인간은 본래 방금 선서한 내용(가정선서문)의 인연을 갖고 태어났으므로 이 선서 안에서 살고 죽어야 합니다. 아무런 가책 없이 이 선서문을 읽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자랑할 수 있는 역사를 꾸며야 합니다. 원칙을 세우지 않고는 그런 역사를 꾸밀 수 없습니다.
가정에 관한 일기를 쓸 때에는 잘못한 것부터 먼저 써야 합니다. 악이 먼저이기 때문에 어둠을 남기는 시간이 길지 말기를 바랍니다.
각자의 과거를 선생님이 알고 있으니 묻는다면 가르쳐 주겠습니다. 신랑 신부는 과거를 물어 보겠습니까? 아니면 과거를 전부 쓸어 버리고 불문에 부치겠습니까? (전원 불문에 부치겠다고 손을 들어 응답) 선생님이 여러분의 과거를 잊기로 했으니 여러분도 잊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사 온 사람들입니다. 인류를 주고, 천주를 주고 사 온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놓고 천지를 심판하고 싶어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탄세계의 노예 입장에 있는 여러분을 사다가 하나님의 아들딸로 세우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복 받은 영광의 자녀들입니다. 그러니 전 세계에서 여러분을 달라고 할 때 줄 수 있는 여러분이 되어야 합니다. 사탄에게까지도 줄 수 있는 여러분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선생님의 피와 땀의 대가로 사 온 사람들입니다. 선생님의 몸을 주고 사 온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선생님과 같은 일을 해야 합니다. 선생님은 식구들을 자랑하고 싶어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공약하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복귀하시는 데는 언제나 한 사람에서부터 시작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한 사람의 대표로부터 시작하십니다. 어느 한 국가가 잘되는 데도 내 한 개체가 문제가 되는 것이요, 인류가 잘되는 데도 내 한 개체가 문제입니다. 내 한 개체가 전체 앞에 실체적인 목적의 대상으로 서게 될 때 새 역사는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루어야 할 하나님의 뜻이 있을진대 이 뜻을 운영해야 할 주인이 있어야 합니다. 신의 목적을 달성한다는 것은 곧 천지 만물과 인류와 개체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도 됩니다. 여러분은 크신 주인의 뜻 앞에 불리움을 받았으니, 과거로부터 현재를 지나 미래까지 같은 가치를 노래할 수 있는 대상실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내가 품은 뜻은 내 뜻만 되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의 뜻도 됩니다.
뜻은 하나입니다. 개체의 사정과 환경은 다를 수 있으나 결국 전체의 흐름은 하나입니다. 지금까지 개체의 환경과 사정을 초월하여 전체적인 뜻에 대해 불변의 심정을 가지고 시종이 여일한 노정을 간 개체나 민족이나 국가는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민족적인 고개까지 넘어갔으나 국가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상속 받지 못했습니다. 민족적인 범위를 벗어나야 했으나 그러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필코 목적을 이룰 수 있는 한 사람을 찾고야 말 것이며, 민족, 국가, 세계를 찾고야 말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떠한 사람을 찾아서 축복하시고 창조의 목적을 이루려 하실 것인가? 어떠한 개인, 가정, 민족, 국가에게 이 사명을 맡길 것인가? 이것은 전세계 인류가 공동 목표 밑에서 전체적인 대가를 치르고 찾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대가를 치르고, 가정적인 대가를 치르고, 민족적인 대가를 치르고 찾아와야 합니다. 이제까지 6천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었지만 그 고통을 승리의 대가로 치른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제 전인류가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어떠한 값을 치르고 전체적인 승리의 대가를 돌려 받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전세계 인류는 총단합, 총통일하여 이 일에 부딪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개인이 아닌 인류 전체의 행복을 얻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개인이, 가정이, 민족이, 그리고 어떠한 주권 국가가 이것을 얻으려면 어떠한 탕감, 또는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만일 대가를 치르고 찾은 민족이 있다 할진대 그 민족은 선민이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란 이름은 하나님이 주신 크나큰 축복입니다. 전부가 단결하여 ‘이것을 당신께 드리오니 세계적인 가치로 쓰시옵소서.’ 할 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허락하십니다. 우리의 최대 소망은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축복은 결코 가만히 앉아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스라엘의 축복권 내에 들어가려면 개인적으로나 가정적으로 천번 만번 시련에 부닥치더라도 이겨내겠다고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개인적으로 피를 흘리고 가정적으로 피를 흘리고, 민족적으로 피를 흘리는 시대를 지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천민(天民)이 되려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같은 눈물, 같은 피, 같은 땀을 흘릴 줄 알아야 합니다. 제물 된 자는 자기를 중심한 ‘소유 관념’과 ‘주관 관념’이 없어야 합 니다. 개인복귀노정을 거치고, 가정복귀노정을 거쳐 나가는 복귀 도상에 있는 우리는 과거의 우리가 아닙니다.
우리가 빚이나 근심의 짐을 짊어졌다면 풀어야 합니다. 흔히 큰 짐을 풀 때 처음에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릅니다. 방법을 모르면 기술을 배워서라도 풀어야 합니다. 어떠한 기술을 배워야 하느냐? 기중기를 부리는 기술을 배워야 합니다. 이렇게 푸나 저렇게 푸나 짐을 푸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문제는 빨리 풀 수 있는 방법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생명을 다 바쳐서라도 이 짐을 빨리 풀어야 하는 것입니다. 재림의 시기에 있어서 짐을 풀려면 이제까지의 방법과는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 합니다.
끝날에 처한 모든 사람들은 최고의 빚쟁이요, 최고의 유랑자요, 최고로 슬픈 자입니다. 이것들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심정입니다. 부자의 인연을 맺을 수 있는 심정을 갖고서만이 해결할 수 있습니다. 참이란 명사에서 심정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아버지와 심정이 하나될 때 참효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같이 크나큰 짐을 푸는 비법을 이스라엘 민족은 알지 못하였습니다. 예수와 성신이 말하지 못하였던 것도 이 심정입니다. 이 심정의 고개를 넘어가려면 그 고개를 넘어갈 수 있는 도로를 만들어 놓아야 합니다. 소망의 뜻이 머무르는 곳이 곧 심정의 터전입니다.
오늘날 세계는 두 진영으로 갈라져 있습니다. 공산주의의 이념은 결코 만천하의 백성들의 마음이 머무를 수 있는 이념이 못 됩니다. 아무리 잘 나는 비행기도 비행장이 없으면 착륙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미 그 터전을 닦아 놓으셨습니다. 주인 없이 외로움에 지쳐 있는 인류에게 하나님과 통할 수 있는 심정의 샘, 즉 천정을 개발하게 하는 것이 도의 길을 가는 사람이 해야 할 일입니다.
여러분은 역사적인 선조들의 모든 실수를 책임져야 합니다. 천상천하 어떠한 사탄 앞에도 대가를 치르고 영수증을 가지고 오시는 분이 재림주입니다. 그분은 이제부터 ‘내 눈물은 역사적인 눈물이요, 내 땀은 역사적인 땀이며, 내 피는 역사적인 피’라고 할 수 있는 실체입니다. 하나님의 역사적인 탄식을 소망과 기쁨으로 돌리기 위해 오시는 분이 재림주, 즉 메시아입니다.
우리들은 승리한 이스라엘이 되어야 합니다. 역사적인 원수 사탄이 스스로 입을 열어 자신이 패자로 서게 되었음을 직고할 때까지 싸워야 합니다.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얻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사랑하셨다면 어떤 기준에서 사랑하셨을 것인가? 인류를 사랑하기 위해 이때까지 역사해 나오신 하나님이었지만 아직까지 창조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셨고, 사랑하는 아들딸 하나도 얻지 못하셨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원할진대 자기에게 오는 십자가의 짐을 짊어지기를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수천년 동안 뜻을 위해 살아오신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신세진 빚을 갚아야 할 운명에 처해 있는 우리가 이것을 벗어 버리려면 사탄과 맺고 있는 부자의 인연과 형제의 인연을 끊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역사적인 대표의 사명을 해야 되겠습니다. 만일 예수님 당시 제사장들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세상 짐을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 너희들도 세상 짐을 지고 가는 그의 어린양이 되라.’고 외쳤다면 뜻은 이미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오늘 이후 모든 것을 청산해야 합니다. 짐을 풀 때에도 지금까지의 방법과 다른 방법으로 해야 합니다. 모든 짐은 심정으로부터, 그리고 아담가정에서부터 풀어야 합니다. 우리 앞에는 아담과 아브라함과 모세와 예수가 남기고 간 역사적인 일이 남아 있습니다. 말씀은 실체를 통해서, 실체는 심정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천정을 통해서 입체의 세계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받으려면 최고의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몸은 제물이 되어야 하고, 심정은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축복을 받을 수 있는 민족으로 한민족이 택함을 받았다면 우리는 최선을 다하여 책임을 해야 되겠습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이 허락하신 우주사적인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역사적인 빚과 짐을 풀어야 할 책임과 사명이 있음을 알고 그러한 소임을 다하는 데 게을리하지 말아야 되겠습니다.
개인은 가정의 발판이 되어야 하고, 가정은 민족의 발판이 되어야 하고, 민족은 국가의 발판이 되어야 하고, 국가는 세계의 발판이 되어야 하고, 세계는 천주의 발판이 되어야 합니다. 개인을 부르고, 가정을 부르고, 민족과 세계를 부르고 있는 이때에 우리는 어디에 서 있으며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지금은 민족을 위해 가야 할 때입니다. 나 하나는 천주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으니 나를 아버지 앞에 몽땅 드리겠다고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보다 더 처량하고 불쌍한 자리에 계시다는 것을 망각하지 마십시오. 빚진 나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심정의 기준을 잃지 말고 지도자와 자기의 환경을 맞추어야 합니다. 개인과 가정과 민족과 세계를 걸어 놓고 담판 기도를 할 때처럼 심각한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3곱하기 7은 21, 21일의 광야노정 기간 동안 이를 악물고 끝까지 나아갑시다. 이런 기준을 갖고 40일, 1년 혹은 3년이라도 고생하십시오. 이것은 하나님을 울릴 수 있고 사탄을 누를 수 있는 기반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이 3년간 고생의 대가로 사탄세계를 빼앗아 옵시다. 만일 하나님이 ‘복을 받기 위해 너희는 무엇으로 그 값을 치르겠는가?’라고 물으면 ‘피 끓는 사랑으로 갚겠나이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개인이나 단체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무리가 아니라 과거·현재·미래의 역사를 꿰뚫어 하늘과 땅의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창조주로부터 부여받은 책임을 완수하기 위한 무리인 것입니다. 그러자면 보이는 사람과 보이지 않는 사람을 굴복시켜야 합니다. 땅 위에서 자기 측근에 3인 이상이 동조자를 세워야 합니다. 우리들끼리라도 배후에 셋 이상의 기대를 갖추어 가지고 나서지 않으면 안 됩니다. 종적인 사위기대와 횡적인 사위기대를 형성하여 나는 개인이로되 역사적인 배후가 있다는 느낌을 가지고 나가야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없는 분야는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옵소서.’ 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인간적인 면, 즉 평면적인 면만 바라보았지, 하나님이 배후에서 역사적으로 수고하시고 동조해 오셨다는 것은 몰랐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서 잘사는 것도 복이 되겠지만, 더 큰 목적은 가나안 땅에 있는 원수를 격퇴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선조와 하나님을 찬미해야 하는 것을 망각했던 것입니다. 남루한 옷을 입고 찬 이슬이 내리는 들판에 눕게 되더라도 문제는 하나님의 원수를 갚는 것이었습니다. 개인의 소망보다도 큰 것이 이 땅 위의 원수를 갚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원수에 대한 적개심에 사무쳐 있어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원수를 갚고는 다시 애급으로 들어갔어야 했습니다.
오늘 전세계의 기독교인들이 해야 할 일은 교단들이 모여서 원수를 향하여 반격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이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원수에 대한 적개심과 울분심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나, 전체와 개체가 합해져야 합니다. 타락 인간은 일시적으로는 합쳐도 영원히 합치지는 못합니다. 하나님은 온 인류를 한 방에 다 몰아놓고 천년만년을 두더라도 합칠 수 있게 되기를 바라십니다. 인간이 비록 타락했을망정 양심적인 사람들은 누구나 하나님을 흠모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되는 것은 바로의 치하에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광야에서도, 가나안 7족을 물리치는 데에도, 또 그 이후에도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나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원수를 물리칠 때까지 밤이나 낮이나 하나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내 사정과 내 소망을 모두 맡기고 천년 만년 이끌어 나갈 수 있는 지도자를 모셔야 합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지도자는 아무리 훌륭해도 그런 지도자가 아닙니다. 참된 지도자는 하나님을 대신하고 천륜을 대신하여 그 뜻을 지상에 이루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눈물 어린 환경을 뚫고 나왔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광야로 내몬 것은 쓰러져 죽게 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외로운 가운데서 서로 단결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모세가 잠시라도 보이지 않으면 어디에 갔느냐고 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자기의 마음을 주고받을 사람이 없는 사람, 자기의 근심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은 슬픈 사람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이여! 죄악의 길에서도, 고난과 슬픔의 길에서도 당신과 같이 있겠습니다. 당신과 나와의 인연을 어느 누가 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찾고 계시는 무리는 없어서는 안 될 무리입니다. 우리는 없어서는 안 될 개인, 없어서는 안 될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비록 거지 모양을 했을지라도 없어서는 안 될 무리를 하나님은 찾고 계십니다. 그래서 이제는 새로운 국가, 새로운 이스라엘, 새로운 세계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다리 놓아 세계를 복귀하시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없어서는 안 될 개인, 가정, 민족을 요구하십니다. 없어서는 안 될 무리로, 이스라엘 민족에서 12지파와 70장로를 세웠으나 그들은 그러한 무리로 남아지지 못하고, 담대한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남았던 것입니다.
죽은 예수를 붙잡고도 ‘주여!’ 할 수 있고, 굶어 죽으면서도 우리의 지조를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환경이 좋아지면 과거를 잊어버리는 게 사람입니다. 은덕을 잊어버리기 쉽다는 말입니다. 통일 식구는 3천만 민족 앞에, 온 인류 앞에, 하늘과 땅 앞에 없어서는 안 될 무리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중심을 빼놓으면 모두가 이탈이요 상충이지만, 하나님 아버지를 중심하면 통합입니다. 여러분은 중심과 맺어진 영원한 인연이 깨어질까 봐 두려워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생명록에는 온 인류와 더불어 영원히 같이 살고 변치 않는다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기록되는 것입니다. 세상이 변하고 내 몸이 피투성이가 된다 하더라도 우리는 변할 수 없습니다. 예수는 죽음에 대한 공포보다도 죽는 자리에서나 죽은 뒤에도 오직 아버지와 같이 있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에서와 야곱이 갈라졌고,야곱의 두 아들과 열 아들이 갈라졌고, 그로 인하여 남북조가 갈라져서 오늘날과 같은 세계적인 현상이 된 것입니다.
우리들은 광야에 나온 이스라엘이 되어야 합니다. 애급에 있는 이스라엘이 되면 가나안에 못 들어갑니다. 지금 여러분 가운데는 광야에 나온 무리도 있지만 아직 바로의 치하에 남아 있는 것과 같은 무리도 있습니다. 광야에 있는 무리는 아말렉 도성을 쳐야 합니다. 내적 외적으로 싸워야 합니다. 그리하여 역사적인 사명자들의 울음을 들을 수 있어야 하나님과 직접 통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영원무궁토록 하나님과 예수와 성신과 같이 있어야 되는데 그 자리는 영광된 자리에서가 아닙니다. 헐벗은 자리, 분한 자리, 괴로운 자리에서 같이 있어야 합니다. 손을 붙든 그날부터 영원히 같이 있는 것이 내 전체의 소망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자리에서는 죽음이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의 선조들은 그런 자리에서 아버지를 저버렸지만, 역사의 종국에서 사명을 맡은 우리들은 선조로 인한 한을 풀고 갈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들은 빈약합니다. 그러나 하늘은 우리에게 아담, 노아, 아브라함, 예수와 같은 가치의 기준을 두고 인정하고자 하십니다. 아무리 수고하고 실적을 쌓는다 할지라도 그것이 아버지와 같이하지 않는 것이면 사탄이 빼앗아 갑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늘 아버지와 같이 있어야 합니다. 충신은 늘 국왕과 같이 있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역대의 선지들을 희생시킨 터 위에 오늘 우리들을 세워 놓고 소망을 걸고 계십니다. 같이 있고 싶고, 같이 있어야 할 인연이지만 원수를 물리치지 않고는 같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가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원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직접 심판하실 수만 있다면 6천년 전에 이미 심판하셨을 것입니다. 심판은 사람을 통해서 하시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인간들은 이러한 사실을 몰랐습니다.
하나님은 뜻에 입각해서 명령하시는데, 원수를 갚기 위해서는 피가 흐르는 자리에서 명령을 하십니다. 이번 전도는 어린 사람도 나갑니다. 어린 여러분은 옛날 어린 사람들을 농락하던 원수를 격파하겠다는 신념을 가지고 나가야 합니다. 아버지께서도 이러한 자리를 거쳐오셨음을 알고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아버지는 나와 같이 계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마음이 뼈와 살에 사무쳐서 움직이면 병자도 낫게 할 수 있고, 무엇이라도 할 수 있습니다. 올해는 작년보다 핍박이 적을 것입니다. 외적인 때와 박자를 맞추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지금까지의 역사적인 선조들을 대신하여 싸우고 있습니다. 원수는 주권과 권력을 통하여 오고, 그 다음에는 물질을 통하여 오고, 그 다음에는 정을 통해서 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굶는 자리, 외로운 자리로 가야 합니다. 여러분은 옛날 배반했던 이스라엘 민족의 입장을 탕감하고 환영받는 입장에 서야 합니다. 우리들이 같이 있고 싶어도 같이 있지 못하는 것은 원수를 갚아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원수를 대해 싸우는 것은 전세계 인류로 하여금 아버지와 같이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같이 있기 위해서는 원수를 갚는 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이번 40일 기간에도 보리밥을 먹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제물은 자아의식과 소유 관념이 없어야 합니다. 우리는 종의 자리를 거치고 양자의 자리를 거친 다음 아들딸의 자리에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물로 가셨습니다. 제사장이 되려고 하셨으나 백성들의 불신으로 제물로 가신 것입니다. 재림주는 제사장의 자격으로 오십니다. 그래 가지고 자녀의 자리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1960년 1월 1일 아침에 선생님은 여러분에게 ‘3년 동안 복역하는 입장에 서라.’고 했습니다. 이번 여름 전도기간 중에 동원되는 순회사의 수는 지구장, 지역장, 일반 순회사, 특별 순회사를 합하여 모두 102명입니다. 이 102명이 40일간 순회한다고 치면 4,080번이 됩니다. ‘마음으로는 부모의 심정을 지니고, 몸으로는 종의 입장에 서서, 피와 땀과 눈물로 제물이 되어 제사장의 자리에 나아가 속죄의 책임을 지고, 아들딸의 자리에 나아가 아버지의 대신자가 되어 사탄을 심판하자.’ 이것은 우리의 표어요, 실천 요강입니다.
여러분은 아버지의 마음을 가진 아들딸로서 피와 땀과 눈물을 흘려야 됩니다. 피와 땀과 눈물로 길을 적시고, 피와 땀과 눈물로 마을 마을을 연결해야 됩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40일 수련을 마치고 떠나게 되었습니다. 수련을 올 때의 여러분과 마치고 가는 여러분이 얼마나 달라졌는가를 이 시간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하늘이 바라시는 인격과 여러분의 실제 모습과의 차이가 크면 클수록 여러분은 스스로 부족함을 느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현재 자기의 모습이 부족하고 실적이 없다 하더라도, 죽는 한이 있어도 이 길을 가겠다는 결심이 확고하다면 주저할 필요는 없습니다. 부모는 자신 있게 부르는 자식보다 갖추지 못했다며 부족한 심정으로 애타게 부르는 자식에게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단결하면 안 될 것이 없습니다.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요 딸이라는 확신을 가져야 됩니다. 잘난이도 못난이도 병신도 모두 아버지의 자녀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방에 나가서 부족한 것을 느끼면 심정적인 면으로 보충해야 합니다. 100을 목적하고 나갔는데 50의 결과밖에 얻지 못했으면 남은 50은 황공하고 송구스러운 심정으로 채워야 합니다. ‘부족하고 미급하오나 심정으로만은 지지 않았습니다.’라고 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싸워 나가기를 바랍니다.
하늘은 어떠한 실적이나 자격을 보고 협조하지 않습니다. 심정을 보시고 협조하십니다. 그러니 ‘부족한 것을 부르시고 세우셨으니 붙들어 주시옵소서.’ 하고 기원하는 마음으로 나가야 됩니다. 여러분은 이 민족 앞에 선구자요, 하나님 앞에 책임을 진 자들이니 애착심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더럽힌 이스라엘 민족의 과오를 시정하고 대신 책임을 져야 할 이 민족, 특히 기독교인들입니다. 자기를 떠나서 하늘과 땅을 위하는 데 애착심을 가져야 합니다. 본래 이스라엘이라는 것은 자기를 위하는 것보다 천주를 위하는 데에서 얻어진 이름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무엇에 대한 애착심을 가져야 하느냐? 오늘날 인간들은 현존하는 어떠한 주의나 어떠한 사상에 대해 애착심을 잃어버렸습니다. 어떠한 종교나 이념에 대해서도 애착심을 잃어버렸으며, 어떠한 주권을 가진 국가에 대한 애착심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심지어는 자기 자신에 대한 애착심마저 잃어 가고 있습니다. 앞으로 세계를 정복하고 지배할 수 있는 이념은 애착심과 사랑을 기반으로 한, 곧 ‘너와 나는 관계를 아니 맺을래야 아니 맺을 수 없다.’고 하는 그런 이념이어야 합니다.
복귀원리에서 하늘땅은 물론 하나님까지도 슬픔에 차 있다고 했습니다. 7회 수련생 여러분들은 애착심을 가진 사람들이 되길 바랍니다. 이 땅은 태초부터 우리 땅이었는데, 선조가 아들딸의 자격을 잃어버렸기에 6천년 동안 잃어버렸었습니다. 이제 다시 찾아야 할 이 땅입니다. 이 땅을 부여잡고 통곡하여야 합니다. 지금까지 인간들이 땅을 파며 살았지만 진정으로 땅에 대한 애착심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있었습니까? 삼천리면 삼천리에 대해서, 지구면 지구에 대해서 진정한 애착심을 가져야 합니다. 새로운 시대의 백성으로서 하나님께서 정성들여 지어 주신 땅과 만물을 발길로 차서야 되겠습니까? 이 땅은 아버지께서 나를 위해 지어 주신 유물이니 내가 상속 받겠다는 간절한 애착심을 가져야 됩니다. 아버지께서 땅을 지으시던 그 사랑의 심정으로 만물과 땅을 대해야 합니다.
오늘 한국의 산야는 벌거벗었습니다. 우리는 이에 대해 깊은 충격을 받아야 합니다. 언젠가는 우리의 계획이 실천에 옮겨져야 합니다. 땅이 비옥해지려면 비료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자기 자녀를 대하는 것 같은 사랑을 가지고 이 땅을 경작해야 합니다. 사랑의 심정과 정성 어린 기도와 눈물로 땅을 파고 씨를 뿌리고 가꾸어서 수확을 많이 거둔 야목교회의 60세 노인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습니까? 바로 그러한 눈물과 심정을 갖고 경작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3대 부모가 있습니다. 하나님도 부모요, 땅도 부모요, 우리의 육신을 낳아 준 분도 부모입니다. 이 모든 부모의 중심은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최고의 분이십니다. 여러분은 이제 땅을 사랑하여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백성을 사랑하여야 합니다. 역사적인 어떠한 주권자보다 더 백성을 사랑하고, 애착심을 가지고 땅과 인류를 붙안고 나아가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땅을 대신하여 물질을, 하늘을 대신하여 사람을 세워 나오는 역사를 하셨습니다. 오늘날 이 땅은 주인의 사랑을 받아 옥토가 되기를 원하고 있으니 여러분들은 누구보다도 땅에 대한 애착심을 가지고 선조들이 하지 못한 일을 하기 바랍니다.
이제 우리는 땅과 주권과 생애에 대한 애착심을 가지고 분투하여야 되겠습니다. 거기서 나오는 대가는 하나님 아버지께 드리는 것을 자랑으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이 애착심을 갖고 대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남한 각지를 샅샅이 돌고 닷새 만에 돌아왔습니다. 대전을 거치고, 전주를 거치고, 광주를 거치고, 마산으로 해서 대구를 거쳐 삼척으로, 그 다음 제천을 거쳐 춘천으로 해서 돌아왔어요.
이번에 순회를 하면서 느낀 것은, 지금은 우리들이 싸워야 할 때라는 것입니다. 지방에 있는 우리의 청년 남녀들이 대단한 결의를 하고 있는 것을 보아 이번 기간의 싸움은 승리의 성과를 가져오리라고 봅니다. 그런데 이번에 가슴 아프게 생각된 것은 우리 식구들이 선생님이 간다고 하는 장소에 수백리 길을 걸어서 온다는 것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돈이 많아서 차를 타고 다닐 수 있는데도 여기 오기 싫어서 안 오는데, 우리 통일교회 청년들은 수백리 길을 걸어서 옵니다. 광주에 가니까 저 목포에서 혹은 무안에서 2~3일을 밤낮없이 걸어서 왔다고 했습니다. 이런 걸 볼 때 우리 교회가 목표하고 세우려는 뜻이 이루어지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한때와 한 뜻을 위해서 자기 일신의 어려움을 개의치 않고 달려들어 어떤 고난도 물리치고 움직이는 그들은 사회적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또 그들은 개인적인 사정에 매여 있는 사람이 아니요, 개인적인 어떤 의식이나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아닙니다. 20전후의 어린 사람이 자기도 모르게 뜻을 위하여 생명을 바칠 각오를 하고 나서는 모습을 보게 될 때 얼마나 대견해 보였는지 모릅니다. 그런 식구들이 참 많아요.
대체로 그들은 여기 본부에 있는 청년들보다도 더 기백이 있습니다. 본부를 중심삼은 서울과 경기도 일원의 식구들, 현재 여기에 참석한 여러분과 그들을 비교해 볼 때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마음과 뜻을 따르려는 충성심에 있어 여러분들이 따르지 못할 기백이 그들에게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책임을 못 하면 그들이 여러분을 밟고 넘어가 그 책임을 다할 것이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번 기간에 쭉 순회를 하고 나니 목도 많이 쉬었습니다. 가는 곳곳마다 근 세 시간, 네 시간 이상 말씀을 하고, 처음 만난 식구들과 밤이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했기 때문입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저녁 9시에 삼척에 도착하게 되어 있었는데 중간에 차가 고장나서 그날 밤을 지나고 다음날 새벽 4시 40분에 도착했어요. 그러니 삼척 식구들이 얼마나 기다렸겠어요? 아주 지쳤더군요. 새벽에 모임을 가졌는데 동해라 경비가 심해서 오래 얘기하지도 못했습니다. 1시간쯤 하다가 원주로 해서 춘천으로 갔다가 오늘 아침에 여러분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 일이 있을 때 선생님이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기도를 했을 것 같습니까? 금년은 우리 청년 식구들이 선생님의 명령을 받아서 전도 나가 있고, 하나님의 뜻을 공동의 사명으로 느끼고 이루어 나가기 위해 고생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대단히 힘든 일도 있었습니다. 그런 것을 염려하면서, 여러분의 어려움을 대신하기 위해 기도하니 이것을 알아 달라는 기도를 했었습니다. 그래서 외지에 나가서 하룻밤 잠도 잤습니다.
지방 식구들과 우리는 한 형제입니다. 한 혈족입니다. 모두가 없어서는 안 될 사람들입니다. 처음 대하는 식구라도 심정이 같다는 것을 여러분도 느낄 것입니다. 통일교인들이 바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오해받기 쉬운 명사를 쓰고 있는데, 그것이 ‘식구’라는 명사입니다.
사실 우리는 식구입니다. 말 그대로 식구예요. 처음 보는 식구와 한마디만 해도 다 통합니다. 세상의 혈족보다 더 가깝고, 자기의 심정을 털어놓고 얘기할 수 있고, 간절한 소원이 있으면 그 소원을 털어놓고 부탁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인연이 우리에게는 맺어져 있습니다. 이것은 어떠한 수단이나 방법 혹은 어떠한 계획적인 조직 같은 것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은 자연적인 일입니다. 우리들이 알 수 없는 사이에 하나님을 중심삼고 맺어진 인연입니다. 이 인연은 하나님에게까지 연결된 인연입니다.
이러한 인연에 의해 움직이는 무리가 있다 할진대 그 무리는 아무도 깨뜨리지 못합니다. 사탄도 못 하고, 사람은 더욱 불가능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깨뜨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경우에 하나님이 이 인연을 깨뜨리실 것인가? 여러분이 잘못할 때입니다. 여러분이 잘못할 때 깨뜨린다는 것을 명심하기 바랍니다.
여기에 지역장으로서 참석한 사람이 있으면 손들어 보세요. 서울 근방에 있는 지역장 여러분, 여러분들은 본부의 사정도 잘 알고 있고, 또 내가 여러분은 보고 싶으면 지프차로 가서 만나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중심삼고 나가는 데 있어서는 눈으로 보아 얼굴을 잘 안다고 해서 통하지 않습니다. 가까운 데 있어서 보고 만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가까운 곳에 있고 책임을 진 입장에 있으면 있을수록 더 엄격하고 더 중요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본부를 중심으로 가까운 곳에 있는 지역장들에게는 더 중요한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지방에 널려 있는 식구들은 본부가 가까운 곳에 있게 하고 본부 가까운 데에 있는 식구들은 제주도 끄트머리로, 아니면 저 울릉도 끄트머리로, 더 나아가서는 저 아프리카 최남단 희망봉으로 보내고 싶은 것이 선생님의 마음입니다.
책임을 졌으면 감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 책임을 진 것을 자랑으로 생각하고 영광으로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요, 안 그래요? 그랬으면 좋겠어요, 안 좋겠어요?
이제부터는 통일교회에 어려운 일이 생기면 지방 식구에게 맡겨서는 안 됩니다. 선생님의 명령이 지방 식구들에게 전달되려면 1차, 2차 해서 몇 차례나 거쳐야 합니다. 그러니 지방 식구들이 얼마나 불쌍합니까? 여기 서울 가까이 있는 사람을 보면 전부 미끈미끈 합니다. 여학생들은 최소한 크림 정도는 다 바를 겁니다. 저기 있는 남학생들도 바를 겁니다. 충분히 그럴 거 같아요.
저 전라도 남쪽으로 쭉 가 보면 거기에도 우리 식구가 있습니다. 그들도 나나 여러분과 같은 식구입니다. 그런데 심정에 있어서는 여러분보다 간절하고 여러분을 앞서 있습니다. 선생님이 가만히 보면 본부에 있는 식구들은 매끈한 아가씨들 때문에 못된 청년들이 싸움만 한다는 소문이 있는데, 이 서울 깍쟁이 식구들을 실컷 고생시켜 봤으면 좋겠어요. 이 서울 깍쟁이 식구들 중에는 ‘뜻이고 무엇이고 알게 뭐야? 선생님을 내가 언제 알았어? 통일교회가 나 아니면 죽나?’ 하는 패들이 많을 것입니다.
국가적인 운명으로 보나, 세계적인 운명으로 보나, 또는 천운으로 볼 때, 물론 현실적으로는 가진 것이 더 많을지 모르고, 지갑에 몇 푼의 돈을 더 갖고 있을지 모르며, 배후에 자기를 입증해 주고 보호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나 그것들은 문제가 안 됩니다. 사람 자체가 문제입니다.
조금만 어려워도 이리 빠지고 저리 빠지는 사람, 이런 사람은 당장 사회에 나가 자기가 원하는 분야에서는 잘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주적이요 천주적인 크나큰 포부를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기울어지지 않게 설계하여 완성하려 할 때에는 그런 사람 쓸 수 없습니다. 오히려 얼굴은 거무칙칙하나 믿음직스러운 시골 사람이 훨씬 좋습니다. 남이야 보겠으면 보고 말겠으면 말고, 해(日)야 지겠으면 지고 말겠으면 말라고 하는 그들은, ‘뜻을 위해 일할 사람?’ 하면 너도 나도 손을 드는데 서울 깍쟁이들은 손을 들라고 해도 드는 사람이 없어요.
퍼센티지로 보면 이 서울 깍쟁이들은 마이너스입니다. 그러니 이 서울 깍쟁이들은 특별 케이스로 취급해서 끌어내려 교육해야 합니다. 지방에 있는 식구들이 본부에 있는 여러분보다 낫다는 거예요. 여러분은 요것들이고, 지방 식구들은 그분들이에요.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거 좋은 생각입니까, 나쁜 생각입니까?
여러분들은 하루도 안 걸리는 이곳을 오는 데도 얼굴에 화장을 하고 좋은 옷을 입고 사치를 부리고 오지만, 그들에게는 그들 자신 속에서 폭발되는 심정이 있습니다. 그들에게서 흘러나오는 심정의 봇물은 대단합니다. 여러분이 당해내지 못해요. 그러니 잘못하면 여러분이 밀려납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잘먹고 사는 사람과 못 먹고 사는 사람 중에서 누구에게 더 마음이 가겠습니까? ‘밥 먹었니?’ 할 때 ‘예. 어저께도 먹고 오늘도 먹고 내일도 먹을 것입니다.’ 하는 사람보다 ‘어저께는 밥을 보았는데….’라는 사람에게 더 마음이 가는 것입니다. 밥 먹는 것은 고사하고 보지도 못했으니 틀림없이 못 먹었단 말입니다. 내가 하나님이라도 밥 못 먹은 사람에게 더 마음이 갈 것 같아요. 하나님은 밥 못 먹은 사람을 보고 안타까워하실 것입니다.
양심을 가지고 공의의 법도와 더불어 영원히 즐기며 살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런 어려운 환경 가운데에서 사는 사람과 친하고 싶어하고, 그러한 사람을 보호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천리의 원칙입니다.
그러므로 참다운 부모가 있어서 그가 자식을 세계적인 인물로 만들기 위한 계획을 했다면 그 아들을 어떠한 자리부터 보내야 할 것이냐? 먼저는 수련을 시켜야 하는데, 밥 잘먹는 것부터 수련을 시켜서는 안 됩니다. 밥 잘먹고, 놀기 잘하고, 싸움 잘하게 하는 수련부터 시키면 안 돼요. 못 먹고, 못 놀고, 남이 싫어하는 것부터 극복하는 훈련을 시켜야 합니다. ‘아! 난 못 먹어도 좋다. 꽁보리밥도 좋다. 개밥도 좋다.’ 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제일 낮은 것에서부터 제일 높은 것까지, 무엇이라도 잘 소화시킬 수 있다.’ 하는 사람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다 심정적으로 지도할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위정자들을 보면, 대학교를 나와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는 껄렁껄렁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한번 가슴을 치면 뒤로 뻥하고 쓰러질 패들이 많아요. 그런 사람들은, 순진하고 배운 것 없고 땅을 사랑하고, 양심을 재산으로 하여 자연 법도대로 살아가는 양심적인 사람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역사를 섭리해 나오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할진대, 어떤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천륜의 대축복을 상속 받겠습니까? 무엇이든지 척척 안다고 자랑하는 사람? 천만에요. 그런 사람들이 아니라 순진한 사람들에게 상속해 준다는 것입니다. 역사를 한번 보세요. 세계적인 위인들은, 자연과 더불어 피와 땀을 흘리고, 자연의 냄새를 좋아하고 자연을 친구 삼아 노래하면서, 국가를 염려하고 어떤 이념을 품고 사는 사람들의 자식들이었습니다. 그런 부모 밑에서 태어난 자식들이 위대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위인들은 거의 농촌 태생입니다. 자연환경 가운데에서 태어난 사람들이에요.
여러분은 뭐 조그만 일도 자랑하려고 하는데 자랑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자기 혼자 있을 때 자랑하십시오. ‘야, 눈아! 너 참 잘생겼구나. 그럼 잘생겼지. 야, 귀야! 너 참 멋있구나. 잘생겼어. 야, 너 얼굴도 잘생겼구나. 그렇고 말고.’ 하며 혼자 자랑하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을 입회 시키면 더욱 좋습니다. ‘하나님! 제 눈을 이렇게 이쁘게 만들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제 귀를 이렇게 잘 만들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몸도 이렇게 튼튼하고, 얼굴도 이렇게 멋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아버지의 아들딸로서 손색이 없게 만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면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참 좋아하실 것입니다. 이거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자랑의 내용도 못 가진 자들이 자기를 들어 자랑한다고 꺼떡거립니다. 그러면 안 돼요. 그러니 통일교회 청년 남녀들은 자랑을 하되 아버지를 걸어 놓고 자랑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루를 두고 볼 때 낮과 밤이 있듯이, 사람에게도 일생을 두고 볼 때 못난이 모양을 하는 기간이 있습니다. 이 기간은 밤과 같은 기간입니다. 그러나 밤이 지나 아침이 되고 낮이 되면, 그때에는 자기가 맡은 어떤 책임을 절대 남에게 양보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날 이 세계는 아직까지 밤 기간에 머물러 있습니다. 낮과 같은 때를 맞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전세계 인류 모두는 교만하지 말고 자기를 높이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들은 낮을 맞은 것같이 생각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밤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온유겸손하고 낮은 자리로 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단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책임을 지고 나가는 데 있어서는 최대의 권한을 가지고 활동해야 합니다. 그 사람을 어느 누구도 탓해서는 안 됩니다. 정 안 되면 몸뚱이를 갈겨서라도 해야 합니다.
인간은 아직 자기를 자랑할 수 있는 입장에 서 있지 못하니 겸손한 자리에서 자기를 수련해야 됩니다. 그런 후에 자기를 자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얼굴이 뒤뜰에 있는 호박처럼 형편이 없어 자랑할 내용이 없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 사람에게 정말 자랑할 것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의 마음은 고상한 것이기 때문에 남보다 더 넓고 더 깊고 온유한 마음을 지니고서 대하는 사람마다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으면 됩니다. 이런 마음이 있으면 아버지께서 직접 같이해 주실 것입니다.
내가 이런 말을 왜 하느냐 하면, 서울에 있는 여러분들이 이 여름에 지방에 가게 되면 궂은 일은 살살 피하고 먼지가 묻으면 손끝으로 터는 그런 패들이 되지 말고 그와 반대되는 길을 가야 되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지방 식구들과 여러분이 차이가 있다고 해서 조금이라도 지방 식구들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을 오히려 본받아야 합니다. 농촌에 가서 일한다 하더라도 그들을 대할 적에 절대로 자랑하는 입장에 서지 마십시오. 어린이들을 대할 때에도, 그들을 붙안고 ‘야, 너희들 참 좋구나!’ 하며 품어 주어야 합니다. 지방에 나가 보면 아주 꼴불견인 사람이 많습니다. 자기 자랑만 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여러분은 자기 혼자만 자랑하지 말고 ‘너희들 참 잘하는구나.’ 하면서 그들을 붙들고 자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들로 하여금 ‘좋다.’ 할 수 있게 만들어 놓으면 모든 것이 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냐? 하나님의 속성을 따져 보면 자랑하기를 참 좋아하십니다. 세상에 그렇게 자랑하기 좋아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랑은 끝이 없습니다. 창조까지 하신 분이시니 그럴 수밖에요. 하나님은 최고로 자랑하기를 좋아하시는 분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동네 사람들에게 자랑을 하고 싶거든, 자랑하고 싶은 내용을 안팎으로 갖추어 그것으로 그들을 감동시켜 놓고 자랑해야 합니다. 그러면 아무리 호박처럼 생기고 멍텅구리같이 생겼어도 동네 사람들이 복덩이로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십니다. 하나님은 못난 사람을 제일 잘난 사람 이상으로 만들어서 마을 사람들 앞에 자랑하십니다. 그러니까 자랑을 하려면 아버지를 내세우고 해야 합니다. 그러면 괜찮습니다. 자랑을 하려면 먼저 하나님께 ‘나 자랑 좀 하겠어요.’ 하고 나서 해야 합니다. 혼자 해서는 안 됩니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자랑해야 됩니다.
여러분은 이번에 나가게 되면 자랑을 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이름을 갖고 해야 합니다. 아버지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모르나 아버지 이름만 가지고 자랑을 하면 실수를 해도 아버지는 좋아하십니다.
선생님이 지금까지 이 길을 걸어 나오면서 느낀 것은 하나님은 자랑하고 싶어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의 심정을 가지면 자연히 자랑하고 싶어지게 됩니다. 크고 넓고 높고 깊은 사랑을 가지면 가질수록 자랑하고 싶은 것이 본연의 심정입니다. 안 그래요? 부모들이 대부분 그렇습니다. 저 빈민굴의 거지도 다른 사람들은 쳐다보지도 않지만 그저 자기의 아들딸이 좋아서 죽겠다고 합니다. 그것이 사랑에서 흘러나온 마음이요, 그러한 마음이 있기 때문에 자랑하고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께 좀더 악독하고, 좀더 추악한 악마와 같은 마음이 있었다면 타락한 인간들에 대한 복귀섭리 역사를 6천년 동안 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에 인간들이 조금만 잘하면 ‘야 우리 아들딸 보아라’ 하며 자랑하고 싶어하십니다. 어떤 가정이 조금만 잘해도 ‘야, 내 사랑하는 가정 보아라.’ 하시며 사탄까지 공인하게 하십니다. 그렇게 한바탕 자랑했다가도 인간들이 그대로 못 하면 꽝 하고 무너지는 것입니다. 개인을 자랑했다가 그대로 못 해서 꽝, 가정을 자랑했다가 꽝, 이스라엘 민족을 자랑했다가 꽝, 또 예수를 한바탕 자랑했다가 꽝, 이렇게 무너졌던 것입니다.
조금만 잘해도 자랑하고 싶어하는 것이 하나님의 심정입니다. 부모의 심정이 그런 것같이 하나님의 심정도 그렇습니다. 그러니 조금만 기쁘게 해 드리고 잘만 하면 사랑을 몽땅 받을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을 알고 여러분들은 그런 아버지의 자랑거리를 체험하러 나가야 하겠습니다. 알겠어요? 뭘 체험하러 간다고요? 자랑거리요? 그래요. 자랑거리를 체험하러 나가야 합니다. 사업을 해서 돈을 벌어들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러분들은 자랑거리를 많이 만들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자랑거리를 많이 가지면 어떻게 될 것이냐? 하나님께서 삼천만 민중에게만 자랑하시겠습니까? 천하의 모든 사람 앞에, 천상세계 앞에 자랑하실 것입니다. 이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이러한 것을 알고 부디 하나님이 자랑해 주실 자랑거리를 많이 가지고 오기를 부탁합니다. 알겠지요?
오늘 내가 몇 시에 오라고 했습니까? (식구들이 9시라고 대답함) 그러면 내가 여기에 몇 시에 도착했습니까? (10시 10분이라고 대답함) 그러면 70분을 어긴 셈이 되는군요. 사실 약속을 지키지 못한 사람은 여기 나와서 얘기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말씀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에게 사과합니다. 그렇게 알고 여러분들도 앞으로 시간을 잘 지켜야 하겠습니다.
가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께서는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술이 없다고 할 때 ‘여인이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뇨?’ 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모친이지만 하늘의 공법으로 볼 때는 원수였다는 거예요. 그러니 예수님은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사실이 아니겠지. 별 소릴 다 하네.’ 할지 모르지만 사실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심정을 몰라서 하는 말들입니다. 이해하겠어요? 나라도 그랬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에게 한 말을 부모에게 하고 싶었습니다. 또 형제에게도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하지 못하고 집을 나왔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어떻게 죽었습니까? 민족의 반역자요, 사회 질서의 파괴자로 몰려 죽었습니다. 얼마나 미워했으면 살인 강도 바라바와 바꾸자고 했겠습니까? 유대 백성들은 예수님을 원수로 생각했습니다. 얼마나 처참합니까? 여러분은 그토록 처참하게 돌아가신 예수님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은 다 빼놓고, 영광 중에 구름을 타고 재림하셔서 구원해 준다는 말에 귀가 솔깃해 있습니다. 알아야 할 것은 모르고, 해야 할 일도 안 하고 천당에 가겠다구요? 천당은 그런 자들이 가는 곳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4천년 역사의 반역자들입니다. 제사장 이하 전민족이 예수님을 붙들고 ‘나를 잡아가 주시오. 나를 데려가서 죽이든지 살리든지 당신의 뜻대로 하십시오. 동으로 가라면 동으로 가고, 서로 가라면 서로 가고, 남으로 가라면 남으로 가고, 북으로 가라면 북으로 가겠습니다.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라고 하면 들어가겠습니다.’라고 했던들, 예수님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살아서 천하를 통일하였을 것입니다. 모세도 하나님이 내몰아 가나안 7족을 점령하게 했는데, 예수님이 천하를 통일하지 못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는 죽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죽지 않았더라면, 그는 이스라엘 민족을 제물로 삼고 특별히 주신 성소를 중심삼아 대제사장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갈라졌던 천지를 하나로 통일하셨을 것입니다. 또 이 천지의 죄악의 담, 즉 민족과 민족끼리 서로 원수시하던 죄악의 담과 만민의 가슴에 뿌리 깊이 박힌 그 죄악의 담을 헐어 버리고 속죄의 제사를 드렸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대제사장으로서 속죄의 제사를 드리고 만천하를 그 주관 아래 두었더라면, 하나님의 섭리역사는 2천년 동안 연장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두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제물로 삼을 수 없었고, 성전을 중심삼고 일하실 수 없었습니다. 더럽혀진 성전에 있을 수 없어서 예수님은 제물의 길을 가셨으니, 그곳이 바로 겟세마네 동산에서부터 골고다의 산정까지입니다.
그래서 골고다는 세계적인 성전입니다. 이걸 알아야 합니다. 세계적인 성전이 어디라구요?(골고다라고 대답함) 그래요. 골고다입니다. 세계적인 부활의 터가 어디뇨? 골고다입니다. 세계적인 사망의 터가 어디뇨? 골고다입니다. 생사의 결정을 짓는 장소가 어디라고? 골고다입니다. 이 골고다는 예수가 왔다 간 이후에 성소와 지성소가 된 것입니다. 이것을 똑똑히 아십시오.
예수님이 골고다의 길을 간 후에 유대에 있는 모든 성전과 제사장들과 이스라엘 민족은 전부 사탄의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들은 전부 지옥으로 가야 합니다. 지옥 중에서도 상지옥으로 가야 됩니다.
원통한 것은 이 땅 위에 아직도 유대교가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메시아를 죽게 한 유대교가 2천년이 지난 오늘까지 남아 있다니…. 그것을 우리 손으로 정비해야 합니다. 정비하는 데는 무력이나 권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이치대로 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죽인 유대교인들은 보응을 받아야 합니다. 모세를 따르던 이스라엘 민족 60만도, 모세를 배반하고 하나님을 배반하자 광야에서 까마귀밥이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세계적인 지도자 예수님을 배반한 이스라엘 민족은 세계적인 까마귀 밥이 되고 있습니다.
이제는 새로운 조직을 해야 할 때입니다. 그래서 요즘에 재건운동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될까요? 여러분, 궁금할 것입니다. 앞으로는 세계적인 이스라엘의 움직임이 있을 것입니다. 흥미진진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마음에 비장의 무기를 갖고 출발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망하게 된 동기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잘되려다 망했습니다. 그들은 ‘아이고, 고생이 싫으니 메시아가 와야겠구나.’라고 했던 것입니다. 메시아가 오는 그날부터 행복이 찾아올 줄 알았던 거예요. 그러나 메시아가 온 그날부터 어떻게 되었습니까? 미명(未明)이 더 깜깜한 것처럼, 극심한 고난의 불길이 휩쓰는 7년 대환란이 있다고 성경에는 똑똑히 나와 있습니다.
요즘 주님을 신랑으로 맞겠다는 망상적인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할 일은 안 하고 주님을 신랑으로 맞겠다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런 엉터리가 어디 있습니까? 신랑으로 오시는 주님이 어디로 어떻게 오시는지, 무엇을 좋아하시는지 그들이 압니까? 알아요? 일반적으로 신랑이야 거지 신랑도 있고 뭐 많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그런 거지 신랑으로 만들려고 합니까? 그 모양 그 꼬락서니를 해서 주님을 맞겠다구요? 강도짓을 하고 별의별짓 다하는 것들이 주님을 신랑으로 맞겠다구요?
주님은 하나님의 왕자입니다. 하나님의 왕자를 끌어다가 자기 같은 사람의 신랑을 만들려고요? 그런 신랑 만들어서 뭐합니까? 주님은 하나님이 좋아서 품으시는 분이요, 천하 만민이 그 앞에 머리를 숙여야 할 분입니다. 주님은 천하를 품으신 분이기에 손끝 하나로 천하를 움직일 수 있는 영광의 덕망을 갖춘 분입니다. 그러한 분을 신랑으로 모시려면 그 이상이 되어야 합니다. 그보다 고생을 더 해야 돼요.
이렇게 얘기하다간 한이 없겠습니다. 그러나 이런 말들은 참 귀한 말입니다. 선생님의 말이 아니라 사실이에요.
조는 사람이 있으면 얘기 안 하겠습니다. 조는 사람은 내가 웃도리를 벗어서 여기에다가 깔아놓고 모셔다 눕혀 드릴 거예요. 부인네들이 쭉 드러누워 있으면 멋지겠네요. ‘야, 주님이 나의 신랑으로 오신다.’ 그런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런 껄렁껄렁한 생각을 하지 말란 말입니다.
여러분, 거리에 나가면 머리도 엉망이고 손도 시커먼 것을 묻히고 다니는 지저분한 지게꾼이 있지요. 그들에게 가서 목을 안고 입을 맞춰 보십시오. 아주 깜짝 놀라서 어쩔 줄 모를 겁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지지고 볶고 바르고 한다고 해서 하나님이나 주님이 보시고 ‘아! 아름답다.’ 할 수 없습니다.
생각을 해 보세요. 자기의 있는 모든 것을 다 들여 예쁘게 한다고 했는데 주님이 본체만체하면 어떻겠는지…. 주님이 보고 ‘아, 좋구나. 이것도 내 것이고 저것도 내 것이다. 네 것은 전부 내 것이다.’ 할 수 있어야 그의 신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네 것은 전부 내 것이라고 할 수 있어야 근사한 신랑이 되는 겁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겠습니까?
주님이 여러분을 보면 실망하실 것입니다. ‘아이구, 이런 것들이 신부라고…. 더러움 타겠다. 더러움 타겠어. 주님이란 말도 하지 말라.’ 할 것입니다. 백정 같은 마음을 가지고 ‘주님이시여, 나의 원대로 해 주소서.’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주님의 노릇을 하겠어요? 이렇게 마음들이 틀려먹었기 때문에 그것을 고쳐 주기 위해 주님이 오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들의 소원을 절대로 안 들어줍니다. 왜? 그런 사람들의 소원은 타락의 습벽(習癖)을 통한 욕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런 모든 욕망을 부정해야 합니다. 다 때려 눕혀야 해요. 그렇게 하지 않고 주님을 만나 좋아하며 ‘주님, 어디로 갑니까?’ 하면 ‘그만둬라.’ 할 것입니다. 자기가 한 일을 생각해 보고 죄송해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하여 주님께 동정의 마음을 일으켜야 합니다. 그러면서 눈물을 흘리고, 매를 맞아도 ‘주님!’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되어야 비로소 신부로서의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사람이라야 신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전에는 안 돼요.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이 여러분을 내모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들딸의 모습을, 사랑하는 신부의 모습을 만들려고 내모는 것입니다.
내모는 데는 어디로 내모느냐? 사탄이 우글우글하는 빈민굴로 내몰고, 사탄이 우거하고 있는 현장으로 내모는 것입니다. 가 봐라 이겁니다. 거기에서 후퇴한다구요? 주님이 뒤에서 오시기 때문에 살려면 목을 걸고 넘어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골고다를 넘어갔습니다.
여러분, 성소와 지성소가 어디라고요? (골고다라고 대답함) 그렇습니다. 골고다입니다. 우리에게도 골고다의 길이 남아 있습니다. 내가 천신만고의 고통으로 인해 천지를 진동시키는 신음소리를 남기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골고다 산정을 향해 가겠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의 3배 이상의 고통의 십자가를 지고 나는 백 번이라도 가겠다는 결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자는 골고다의 뒤뜰에도 못 갑니다.
이러한 고난의 길이 남아 있기 때문에 2천년 동안 성도들이 수고하며 주님을 고대했지만 주님은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만일 오늘날 이 땅에 예수님을 따르던 12제자 이상, 120문도 이상, 이스라엘의 제사장 이상의 골고다를 넘는 무리가 있다면 주님은 아니 오실 수 없습니다. 그래도 안 오신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상소장을 써서 ‘예수를 좀 보내 주십시오.’ 할 수 있습니다.
왜 그러냐? 예수님은 옛날 세 제자밖에 없는 불우한 자리에도 오셨고, 12제자밖에 없는 천대받는 자리에도 오셨고, 이스라엘 민족이 내모는 자리에도 오셨습니다. 그런데 옛날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제사장들 이상의 무리가 골고다 산정을 넘어섰을 때 왜 안 오겠습니까? 이런 무리가 있어서 지금이라도 ‘주님, 오시옵소서.’ 하면 벼락같이 오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는 명실공히 세계적인 종교가 되었지만, 옛날 베드로, 요한, 야곱을 무색하게 하고, 70문도, 120문도를 무색하게 할 수 있다는 각오 아래 골고다의 산정을 거침없이 넘나들 수 있는 참다운 제자들이 없어서 오셔야 할 주님이 아직까지 못 오신다는 것입니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어요. 우리 통일교회 신도들, 욕을 먹고 쫓김받고 조롱받고, 원수들의 저주를 받는 자리에 있을망정 골고다의 성지를 지켜야 하고, 거기에서 죽음의 고개를 넘어 승리하신 주님을 보호해야 합니다. 베드로 같은 자 말고, 무서워 도망갔던 12제자 말고, 예수가 죽은 뒤에 모인 70문도 120문도 같은 무리 말고, 죽음의 자리를 목을 내놓고 지키며 싸울 수 있는 무리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를 따르던 무리들이 그러한 무리가 되었더라면 예수는 그때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죽지 않았을 거예요.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는 줄 알아요? 분해서 그럽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한이 없습니다.
오늘날 세계의 기독교를 대해 가지고, 또 천상에 가 있는 잘 믿던 사도들을 대해 가지고 당당하게 묻고 싶은 것이 있나니, 그것이 무엇이냐? 골고다의 성전을 어떻게 지었느냐, 예수님께서 골고다의 산정을 어떻게 가셨느냐, 골고다에서 하나님 앞에 제사장으로서 제사를 드리던 예수의 심정 기준은 어떠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무도 모릅니다. 아들과 아버지밖에 모릅니다.
우리는 사도들을 비웃고, 이 땅에 왔었던 선지자들을 비웃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천상의 영인들과 지상의 성도들 앞에 자랑할 수 있는 내용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려면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잡다하게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구원은 나중 문제예요. 당장의 문제는 지성소에 들어가는 법과, 성전에 들어가 속죄소 앞에서 만민을 대신하여 속죄의 기도를 드리는 법도를 아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기 위해 담판 기도를 하고 철야 기도를 해야 할 때인데 ‘구름 타고 오시옵소서.’ 하고 있습니다. 꿈을 꾸고 있는 망상들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암만 기도해 보세요, 오나. 만일 여기에서 내가 한 말이 거짓말 같으면, 이 다음에 죽은 후 나를 호출하여 ‘통일교회의 아무개가 했던 말인데….’ 하고 물어 보십시오. 답변해 줄게요. 더욱 꼼짝 못하게 답변해 줄게요.
우리는 넘어가야 되겠습니다. 기필코 가야 되겠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골고다 산정까지는 주님이 30평생 개척한 길이거늘 기필코 가야 합니다. 골고다 산정을 가던 주님이 세계 만방을 비추는 아침 햇살이 되지 못하고 시들어 가는 저녁놀이 되었다는 사실, 얼마나 원통한 사실입니까?
그러면 예수는 언제 어디로 오시는가? 밤길을 걸어오신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아침 햇빛이 못 되고 저녁 빛으로 사라진 예수이기 때문에 밤길을 걸어오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밤길을 걸어온 기간이 2천년입니다. 이걸 모르고 하나님의 아들이 될 것 같아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지상의 대제사장으로서의 사명도 다하지 못하고 가셨기 때문에 아직까지 제사를 지내고 계십니다. 아직까지 기도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밤 길을 걷고 계시고, 천하를 방랑하면서 하늘의 아들딸을 찾고 계십니다.
그런 걸음으로 개인을 찾아오셨고, 민족을 찾아오셨고, 세계까지 찾아오셨습니다. 이제는 미명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어떤 옷이 빨간 옷인지 흰옷인지 분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떤 것이 그릇된 것이고 어떤 것이 이상적인 것인지, 어떤 것이 합당치 않은 것이고 어떤 것이 합당한 것인지 짐작할 수 있는 시대, 밝은 시대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은 끝날입니다. 예수께서 아침 햇빛으로 떠오르지 못하고 저녁 노을로 사라졌는데, 다시 아침 햇빛으로 떠오르는 시대가 되었으니 지금이 종말의 때요, 끝날인 것입니다. 알겠어요?
그러면 오시는 주님은 어디로 올 것이뇨? 골고다의 길로 가셨으니 골고다의 길로 오십니다. 그러면 세계적인 골고다, 끝날에 성도들이 넘어야 할 이 골고다는 어떠한 곳이뇨? 골고다라는 것은 해골의 곳입니다, 해골의 곳. 참다운 믿음의 아들딸들이 신음하는 곳이요, 생사의 갈림길에서 피를 토하고 쓰러져 나가는 곳입니다. 이런 곳이 골고다예요.
그러면 좌우가 혼란된 이 세계에서의 세계적인 골고다는 어디일 것인가? 귀가 있는 사람은 들으십시오. 머리가 있는 사람은 생각하십시오. 그만큼 얘기했으면 마음이 있는 사람은 느끼란 말입니다. 세계적인 겟세마네 동산은 어떤 곳이뇨? 그곳은 택한 무리가 살지 않았던 곳입니다. 알겠어요, 무슨 말인지? 택한 사람들은 얼씬도 하지 않은 곳이에요. 구경꾼들이 모여드는 곳입니다. 구경꾼들이 모여서 ‘잘 죽는다, 고생 잘 한다.’고 비소하는 곳 이라는 거예요.
끝날의 성도들, 끝날의 참다운 아들딸들은 최후의 골고다를 찾아가야 하는데, 그 길은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이 도망을 간 것과 마찬가지로 누구나 다 갈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잘 죽는다. 잘 논다.’ 하는 구경꾼들과 원수들의 조롱을 받으며 가는 길입니다. 원수들이 바라보는 자리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피를 흘리며 신음하면서도 아버지를 부여안고 ‘아바 아버지여! 어찌하여 날 버리시나이까?’ 하며 아버지의 심정 속을 찾아드는 무리들이 가는 길입니다. 통일교인들이 가야 할 길은 이러한 골고다의 길입니다. 알겠어요?
생사의 결판을 짓는 최후의 순간, 그 숨막히는 긴장된 순간을 앞에 놓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철야를 하며 피땀을 흘리며 호소하던 예수의 심각한 울음 소리를 여러분은 재빨리 듣고 그 고난의 길을 대신 가야 합니다. ‘주님을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는 이 몸이 되겠다.’고 준비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민족 앞에 원수로 몰리고 쫓기는 무리가 될 것이어늘, 옛날에 제사장들에게 쫓김받고, 교단으로부터 몰림받던 무리와 같이 된다고 섭섭해하지 마십시오. 나는 여러분을 끌고 그러한 길을 가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이 길을 가는 데 있어서 예수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흘리던 것과 같이 눈물을 흘려야 하고, 피와 땀을 흘려야 합니다. 만우주의 죄를 대속하는 속죄의 왕자로, 대제사장으로 오신 예수께서 처참한 제사장의 모습으로 자기의 몸을 제물로 드리고 재림의 약속을 남겨 놓고 십자가에 돌아가신 곳이 골고다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늘의 왕자가 제사를 드렸던 제단이, 제물을 드렸던 그곳이 겟세마네 동산이요, 골고다인 것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아니라고 하여도 그곳이 성전이요, 지성소입니다. ‘골고다에서 들리는 그 속죄의 울음소리에 가슴을 치는 이들이여, 여기 모일지어다.’ 이것이 끝날의 새로운 경고입니다.
예수는 하늘의 왕자로 영광스러운 자리에서 태어나야 했지만 말구유에서 태어났습니다. 선생님은 예수의 사정을 잘 압니다. 선생님은 예수와 동시대에 살지 않았지만 이 세계의 어느 누구보다도 예수의 사정을 잘 알고 있습니다. 세상의 역사에서 배우지 않았지만 잘 알고 있습니다. 여기서 선생님이 말하는 것이 가상적인 것인지 아닌지 분석해 보십시오. 2천년 전 골고다의 이슬로 사라진 예수는 사명감에 불탔을 것이며, 정의감에 불탔을 것이고, 원수들을 일격에 물리칠 심판의 한 날을 간곡히 소망하였을 것입니다.
세계적인 골고다의 산정을 넘어가야 할 이때, 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가 대결하여 선악을 판결해야 할 이때에 고난의 제물로 오는 왕자가 다시 오시는 주님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세계적인 골고다를 넘어가야 할 이 시대에, 좌우에서 모진 바람이 불고 회오리바람이 부는 와중에서도 홀로 하늘을 붙들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던 예수, 하늘의 심정을 갖고 골고다 산정에서 피를 흘리면서까지 원수를 사랑하라고 외치시던 예수의 그 음성과 같은 울부짖음을 들을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새 시대에 승리한 이스라엘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길을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예수님이 가신 그 길을 가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겟세마네 동산까지 따라가야 합니다. 가 가지고 졸면 안 됩니다. 거기서 다시 골고다까지 가야 합니다.
오늘 여기서 외치는 사람도 겟세마네의 동산을 넘어 이 민족 앞에 나타나려고 합니다. 이 민족이 공인하는 날까지 골고다의 길을 가려고 합니다. 지상의 모든 면에서 영계의 공인을 받으려고 합니다.
영적인 세계에도 골고다의 길이 있습니다. 육계의 해골 곳이 있는 동시에 영계의 해골 곳도 있습니다. 골고다를 전부 메워 버리기 위해서는 영계의 해골 곳까지 메워야 됩니다. 영계의 해골 곳이 어떤 곳인 줄 알아요? 사탄이 점령하고 있는 곳입니다. 육계의 해골 곳은 어떤 곳인 줄 알아요? 사탄이 지배하고 있는, 그래서 인간이 고통받고 신음하는 곳입니다. 이런 곳을 넘어야 할 세계적인 환난이 남아 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다 지나가야 합니다.
오늘날 인간들은 하나님을 배반하여 하나님을 잃어버린 입장에 있습니다. 이 불행한 입장에서 하나님을 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나쁜 것, 싫은 것을 모두 소화할 수 있는 주인을 만나야 합니다. 예수가 바로 그러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천하에 제일 못된 사람으로 몰려 극형을 당하는 자리에 세워도 죄송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가장 억울한 자리에 내놔도 죄송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런 자리에 있게 될 때 입이 있어도 말을 하지 않았고, 눈이 있어도 볼 줄 모르고 귀가 있어도 들을 줄을 모르는 사람처럼 묵묵했습니다. ‘내가 맡은 바 책임을 다하지 못했으니 욕을 먹어도 싸고 천대받아도 싸지. 내가 책임을 다하지 못하여 수천 수만의 생명이 죽게 됐으니 그 보응으로 죽어도 싸지.’ 하고 생각하신 분입니다.
여러분 진실로 원수를 대해서 복을 빌 수 있었던 예수의 마음을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이 원수를 위해 복을 빈 그것이 원수를 공인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책임을 맡기기 위해서 얼마나 수고하셨는가를 먼저 생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그 수고와 그 고난이 선조들의 피와 땀과 눈물의 모체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비록 고통받다 이슬같이 사라지지만 4천년 동안 수고하신 하나님의 거룩한 공적의 터전만은 상속 받겠다고 하는 사람들을 용서해 주고 기도해 주지 않으면 안 되었던 예수님의 심정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잃어버린 하나님을 찾기가 이렇게 힘든 줄 몰랐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생사의 기로에서 나는 아버지의 것이라고 하며 자기의 몸을 제물로 드리기까지 하셨으나, 아직도 이 땅 위에는 하나님을 모셨다고 하는 증거가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그러니 다시 와서 이 땅 위의 고통과 슬픔의 보따리를 다 청산해야 됩니다. 그래야 하나님 아버지를 모실 수 있습니다. 죄악의 보따리가 청산되지 않고는 이 땅 위에 하나님을 모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재림주님이 예수님으로부터 그 사명을 인계 받아서 모든 죄를 짊어지고 제사장이 되어 속죄의 역사를 함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속죄 받으려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아버지를 영광의 아버지로 모시기 위해 오시는 분이 재림주님이기에 예수님은 오늘날까지 그 재림주님이 오실 날을 위해 정성들이고 준비하고 계십니다.
이 땅 위에 하나님이 오실 길을 개척하기 위해 수고했지만 그 길을 완전히 개척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아들은 아들대로 그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분담해서 사명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아버지와 아들이 같은 일을 하고 있다는 거예요. 아버지와 아들이 같은 목적을 놓고 아들 예수가 하늘에서도 일하고, 아버지 하나님이 땅에서도 일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애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능력 많으신 하나님께서 6천년 동안이나 수고하셨지만 사랑할 수 있는 아들을 못 찾았고,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 되어야 할 인간 또한 사랑하는 아버지를 찾지 못했습니다. 영원한 내 아버지요, 영원한 내 아들이라 할 수 있는 행복의 한 날을 맞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찾기 위해 예수를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만나서 부활의 자리를 찾아 나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아요? 그래서 우리는 골고다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원수는 누구입니까? 사탄의 원수는 누구입니까? 사탄이 하나님의 원수인데 하나님은 그 사탄의 자식들을 용서해 주십니다. 그러나 사탄에게는 용서하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딸이 사탄에게 한번 걸리기만 하면 국물도 없습니다. 그래서 6천년 동안 모든 것을 쥐고 ‘안 됩니다.’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탄이 제일 사랑하는 자가 누구냐? 자기 새끼들입니다. 반면 사탄이 제일 미워하는 자는 누구인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렇겠지요?
여러분들은 무엇이 되려 합니까? 무엇이 되겠어요? 사탄이 제일 좋아하는 사탄의 새끼가 될래요, 하나님의 자녀가 될래요? 물론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고대하겠지요. 하나님의 자녀가 한번 되어 보십시오 어떤가. 사탄 새끼들이 많은 이 세상에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녀로 태어나면 누구의 원수입니까? 사탄의 원수입니다. 또 사탄 새끼의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사탄이 제일 미워하는 사람이지요. 사탄 새끼들이 제일 미워하는 사람이 되는 거예요.
미워하니까 어떻겠습니까? 여러분이 가면 ‘어서 오시오. 당신을 위해 잔치를 벌였으니 멋들어지게 하루 놉시다.’ 할 줄 알아요? 천만에요. 으슥한 곳으로 끌고 가서 목을 걸어 놓고 ‘하나님의 자녀 될래, 안 될래?’ 할 것입니다. 그럴 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자녀는 사탄의 원수요, 사탄 새끼의 원수입니다. 이 몹쓸 세상을 뒤엎기 위하여 태어난 자녀이니 사탄들이 어떻게 하겠어요? 교수대에 목을 걸어 놓고 ‘너 하나님의 자녀 될래, 안 될래? 항복할래, 안 할래?’ 한다는 것입니다. 잡아채기만 하면 그만입니다. 이렇듯 사탄의 교수대에 목이 걸린 입장에서 싸워 나오는 것이 신앙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요, 안 그래요? 여러분은 어떠한 지역이나 어떠한 환경에 가든지 그것이 자기의 보응의 길임을 알아야 합니다.
원수의 나라에는 용서 법이 없습니다. 이토록 수천년 동안 우리의 선조들은 모진 핍박을 당했지만, 피땀을 흘리고 심지어 학살까지 당했지만 사라지지 않고 종족을 번식시켜 나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언제 이 원수를 갚을 날이 올 것인고? 승리의 한 날을 기하여 그들을 전부 판결해야 할 것이 전세계에 널려 있는 기독교인들의 책임인데, 이들이 잠들어 있습니다. 이렇게 잠들어 있는 기독교인들을 깨우쳐야 할 통일의 무리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하늘의 혈족이니 골고다 산정에서 못박혀 쓰러질 각오를 해야 합니다. 너도 불쌍하거니와 나도 불쌍합니다. 교파가 크건 작건 교파에 속한 무리는 모두 불쌍한 무리들입니다. 교파는 갈래갈래 찢어져 나온 핏줄기요, 이 교파에는 뭇사람의 피가 얼룩져 있으니, 우리는 그들을 원수로 생각하지 말고 그들이 맞을 매를 대신 맞고, 그들이 받을 고통을 대신 받을 수 있는 무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무리가 천지간에 많이 나와야만 원수 사탄의 도성을 한꺼번에 무너뜨리고 승리의 한 날을 맞을 수 있으며, 영원한 천국을 건설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하늘 편 땅과 백성과 주권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딸이 지금 누구에게 목이 매여 있습니까? 사탄에게 목이 매여 있습니다. 사탄에게 목이 매여 죽을 시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마당에서 하나님은 가슴을 조이고 계십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지어낸 말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는 만인을 구하기 위해 천신만고 끝에 한 사람을 세우셨는데, 사탄이 그를 죽였습니다. 가정을 대표하는 한 가정을 세웠더니 사탄이 그 가정을 잡아죽였습니다. 민족을 대표하는 민족을 세웠더니 사탄이 역시 그 민족을 잡아죽였습니다. 지금 남아 있는 신자들은 사탄들이 죽이다 죽이다 남은 사람들입니다. 그래도 지금 명실공히 하나님 편에 속한 자녀라는 이름 아래 세계에 수십억의 신자들이 널려 있습니다.
지금 세계는 하나님 편과 사탄 편, 둘로 갈라져 있습니다. 지금 시대는 이 둘이 대결을 벌이고 있는 시대요, 외적인 환경을 수습하는 동시에 내적인 정비를 해야 하는 시대입니다.
이러한 시대에 처한 여러분들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이냐? 아버지께서 무엇을 하시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택한 유대 백성들이 책임을 못 하고 쓰러지니 하나님은 기독교를 제2이스라엘로 세우셨습니다. 그러면 이 기독교는 무엇을 위해 만드셨는가? 새 시대에 왕으로 오실 재림주님 앞에 새로운 이스라엘, 즉 택한 선민이 되게 하기 위해 만드셨고, 만국의 대제사장의 책임을 지고 오시는 재림주님을 모시게 하기 위해 만드셨습니다. 민족적인 감정을 초월하고 국가적인 감정을 초월하여, 한 부모 아래 한 형제라는 혈족의 인연을 존중하면서 오시는 주 앞에 제물이 되고 제단이 되어야 할 것이 현재 기독교입니다.
한국의 기독교가 통일교회를 몰아내기 위해 별의별 짓을 다하고 있는데, 이것은 슬픈 일이지만 일면 고마운 일이기도 합니다. 왜? 그들이 제2이스라엘로서 하늘의 제단이 되지 못했으니 우리가 그 제단이 될 수 있고 제물이 될 수 있으며, 또 그들이 제사장의 책임을 못했으니 우리가 제사장의 자리에까지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곳은 어디인가? 은밀히 기도하는 장소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딸이 죽을 자리에 있을 때 찾아가십니다. 당신의 아들딸이 원수에게 잡혀 쇠고랑을 차고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지려 할 때에 사랑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는 통곡하면서 찾아가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천신만고 어렵고 어려운 험한 길을 거쳐서라도 아들의 죽는 모습이나마 꼭 보겠다고 찾아가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아버지인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그 아버지와 상봉할 수 있는 자리는 골고다입니다. 십자가상이라는 거예요. 우리 통일교인들은 예수께서 비록 단벌의 홍포, 피와 땀과 눈물로 얼룩진 초라한 옷을 입으셨지만 천주 앞에 거룩한 제물이 되어 수천만 대를 이어 온 썩은 피, 사망의 핏줄을 씻어 버리는 속죄의 길을 가심으로써 새로운 생명의 핏줄이 이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가 저녁 빛으로 눈을 감았으나 이제는 반대로 새 아침의 광명한 빛으로 나타나기를 우리는 고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엄숙한 찰나에 서 있습니다. 우리는 죽더라도 하나님 아버지를 보고 죽어야 되고, 살더라도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 함께 살아야 합니다. 예수는 죽는 자리에서 하나님을 만났지만, 우리는 예수가 흘린 피의 공로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동안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끝날 성도들의 소망입니다. 예수는 몸이 찢기고 피를 토하는 죽음의 자리에서,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시며 부활을 약속하고 가셨지만, 오늘날 우리는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환영하시나이까?’ 할 수 있는 자리에 서 있습니다. 그러니 ‘이 몸이 아버지를 모실 수 있는 골고다 산정에 있으니 황공망극하옵니다.’하는 여러분이 되어야 합니다.
하늘이 원하시는 것은, 죽음과 삶(생명)이 뒤넘이치는 자리에서 죽은 아들딸 말고 산 아들딸을 품고 당신의 위신도 잊고 ‘내 아들딸아! 이제는 원수의 손아귀가 없어졌구나. 6천년의 한이 비로소 풀렸구나.’ 하는 것입니다. 자식들도, 죄악의 몸이었던 자신들의 처지를 잊어버리고 눈과 코와 입이 하나되어 하나님을 붙안고 ‘아버지! 천년 만년 함께 살고 싶습니다. 영원히 당신을 붙들고 함께 있겠습니다. 이젠 가도 같이 가게 해주십시오’ 하는 것이 소원입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생이 가야 할 마지막 소망의 종착점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자리는 어떤 자리이냐? 사망과 생명이 엇갈리는 골고다 산정입니다. 이 골고다 산정으로 가는 길이 기독교 신자들이 가야 할 최후의 길, 넘지 않으면 안 될 복귀의 길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이것을 모르고 잠들어 있으니, 우리는 그것을 깨우쳐 그 자리까지 끌고 가야 합니다. 그러려니 우리의 뼛골이 녹아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 스승이 무지한 여러분을 모아 놓고 땀으로 목욕을 하면서 외치고 있는 것도, 여러분의 죽었던 몸이 부활하여 심정의 동산, 골고다를 바라보면서 죽어 간 예수의 한을 풀고 거룩한 몸으로 하나님의 유업을 상속 받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딸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곳이 겟세마네 동산과 골고다 산정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앞으로 우리는 싸움을 해야 할 것인데, 광야노정을 걸었던 이스라엘 민족에게 가나안 7족이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세계적인 가나안 복귀노정을 걷고 있는 제3이스라엘인 우리 앞에는 수십 수억의 원수들이 있고, 그들이 우리의 동태를 엿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행군나팔 소리가 들리면, 밤이든 낮이든 가리지 말고 시간을 초월하고, 사정을 초월하고, 개인적인 소망을 초월하여 전진해 나가야 합니다. 목적 달성을 위해 모든 것을 경주하여 행군해야 할 시기가 온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잃어버린 아버지를 찾고 있습니다. 인간이 타락으로 인해 빈사 상태에 빠졌는데, 죽음 길에서도 아버지를 찾으면 약속하신 아버지는 찾아오실 것입니다. 굶주려 쓰러지는 자리에서 아버지를 불러 보세요. 우리의 아버지는 살아 계십니다. 아버지는 선한 목자이십니다.
여러분은 민족의 운명과 세계의 운명을 염려하면서 ‘아버지시여! 지금까지 못난 저희들을 찾아오시기 위하여 얼마나 고생을 하셨습니까? 이제 이 민족의 죄를 내가 대신 짊어지고, 민족의 고통과 슬픔을 제가 책임지고, 이 세계의 고통을 제가 책임지겠사오니 당신은 부디 나로 말미암아 쉬시옵소서.’ 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외치고 있는 스승은 지금 하기 어려운 말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골고다 산정에서 쓰러지면 어떻고,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진들 무슨 한이 있겠느냐는 결의를 갖고 삼천리 방방곡곡 잠들어 있는 이 민족을 깨우치고, 지금까지 하늘을 유린해 온 사탄을 쫓아 이 민족, 이 강산에서 사탄을 몰아내야 하겠습니다. 또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가시밭길을 내 몸으로 메우겠다는, 살아서 메우지 못하면 죽어서라도 메우겠다는 결의를 갖고 나서야 할 길이, 쫓김받는 통일신도들이 가야 할 길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천대를 당하고 피를 토하는 괴로움이 있더라도 낮이든 밤이든 나를 몰아내시옵소서’ 해야 합니다. 그러다가 쓰러지고 피를 흘려도, 아주 망해도 하늘을 위해 망했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승리의 탑이 세워질 것입니다. 이러한 뜻을 위해 우리는 모였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내가 이번에 남한 각지를 순회하면서 주로 말한 내용이 이런 것입니다. 그러한 사나이와 아낙네들이 되기를 바란다고 했어요. 그들 앞에 내가 무슨 이득을 보기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살길이 거기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살길이 있다면 내가 여러분의 친구가 되어 주기도 하고 천만번 이용당해 주기도 하겠습니다.
이 길은 여러분이 가야 할 길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길을 가서 아버지를 만나 볼 수 있는 늠름한 자격자가 되어야 합니다.
선생님은 그런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길을 가다가 외로울 때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를 불러 ‘아무개야, 내가 있지 않느냐?’ 하시며 권고해 주시던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 외로운 자리가 문제가 안 되지요. ‘나 혼자인 줄 알았는데 당신이 나와 함께 계시는군요.’ 하며 힘차게 걸어갑니다. 어떤 때는 길을 가는 거지를 볼 때 ‘저 거지가 나를 찾아온 아버지의 모습 이라면 어떻게 할까?’ 생각하며 통곡에 통곡을 한 적도 있습니다. 이런 마음을 갖고 아무리 남루한 옷을 입은 거지라도 그의 손을 붙들고 남모르는 통곡을 할 줄 아는 여러분이 되어야 합니다.
선생님은 그런 자리를 많이 거쳤는데, 고통과 고충 가운데에 홀로 있게 되는 외로운 자리에서는 ‘아버지는 매정도 하시구나. 아버지는 무자비하기도 하시구나. 책임만 맡겨 놓고 돌보아 주지는 않으시는구나.’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개야, 네가 거지를 붙들고 있을 때 내가 함께 있었다. 아무개야, 네가 도탄 중에서 불쌍한 사람과 더불어 눈물지을 때 내가 같이 있었다.’ 하셨습니다. 그러니 이 길을 안 갈 수 있겠어요? 그러기에 예수께서도 ‘주릴 때 먹을 것을 주고, 나그네에게 영접하고, 지극히 작은 자에게 행한 것이 곧 나에게 행한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자유롭게 모실 수 있는 자리를 갖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골고다를 찾아오시는 아버님의 발걸음이 얼마나 슬프시겠는가?’ 하는 마음을 갖고 하나님을 찾아가야 합니다. 그러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라고 축복해 주어야 합니다. 그들이 축복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여러분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심정을 알아 드리지 않고, 하나님을 몰아내려 하는 것은 큰 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죄악의 근원은 자신에게 있습니다. 모든 죄악은 자신에게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분명히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들은 죄 많은 살인강도보다 나을 것이 없습니다. 악질분자보다 나을 것이 없습니다. 그러한 여러분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6천년 동안 수고해 오셨습니다. 나는 이런 사실을 알고, 이런 하나님의 사정을 체휼하였습니다. 여러분도 하늘의 사정을 통할 수 있는 환경 가운데 들어가 보아야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대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길을 대신해서 가지 않으면 하나님이 찾아 주시지 않습니다. 행복의 최고 기준이 하나님이시므로 하나님을 찾아야 하는데, 하나님이 가신 길을 가지 않고선 하나님을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몸을 대신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대신하여 가야 합니다. 나를 사랑하여 찾아오신 하나님, 불쌍한 만민을 돌봐 주시던 하나님을 회상하며 하나님을 대신하여 가야 합니다. 슬플 때는 우시던 하나님을 생각하며, 나는 얼마나 그런 일을 했으며 얼마나 그런 사람들을 위한 기도의 제단을 쌓고, 속죄의 조건을 얼마나 세웠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부디 이번 기간은 모든 죄를 탕감하는 기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번 전도 기간이 그럴 수 있는 기간이라는 것입니다. 알겠습니까?
골고다의 십자가는 누가 짊어지고 가는 것이뇨? 부모가 지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지고 가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여러분 자신이 지고 가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갈 때 여러분은 절대 신세를 져서는 안 됩니다. 내가 맡아야 할 나의 책임이니, 내가 지겠다는 결심을 해야 합니다. 내 몫의 십자가는 내가 지고 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기어이 아버지와 상봉해야 합니다.
그렇게 싸워 나가는 노정에 있어서, 여러분은 베드로와 같이 배반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열두 제자와 같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지 못하고 도망가는 무리가 되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한 혈족임을 알아야만 합니다. 피가 같고 살이 같고 뼈가 같은 한 혈족입니다. 그러니 예수가 남긴 사명을 책임지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유업을 상속 받을 수 있는 분이었으나 죽음의 길로 갔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죽지 말고 천하의 모든 영광을 상속 받아 승리의 제2조상, 새 나라 새 역사의 근원이 되어 주길 바랍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예.」하나님을 찾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그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메시아로 왔는데, 메시아는 어떠한 사람이뇨? 고통을 떠맡은 책임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탄식하신다고 했습니까? 천하에 죄악의 보따리가 그냥 그대로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죄악의 보따리는 무엇이겠습니까? 고통과 비애와 눈물의 보따리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러한 것들을 책임질 수 있어야 합니다. 어느 부락에 들어가면 그 부락에 있는 나쁜 보따리는 모두 내 것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앞으로 천민(天民)들의 주의는 어떠한 주의가 되어야 할 것인가? 오늘날 죄악 된 세계의 주의와는 달라야 합니다. 이 천민주의와 죄악세계의 주의를 비교해 봅시다. 오늘 타락된 세계의 사람들은 좋은 것이 있으면 서로 자기 것이라고 합니다. 목숨을 걸고 좋은 것을 차지하려고 합니다. 그런 주의를 가지고 싸우다가는 사탄의 사슬에 걸려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새 시대의 주의, 천민들의 주의는 나쁜 것은 내 것, 슬픔과 고통은 내 것이라고 하는 주의입니다. 서로가 나쁜 것을 갖기 위해 싸우는 주의입니다. 그것을 차지하기 위해 싸우는 무리가 이 천지간에 나타나면 이 천지는 그들의 것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무슨 주의라구요? 나쁜 것은 내 것이라는 주의입니다. 나쁜 것을 서로 갖기 위해 싸워야 합니다. 좋은 것을 갖기 위해 싸우면 나중에는 박살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가인과 아벨이 무엇을 빼앗으려고 싸움을 했습니까? 좋은 것 가지려고, 즉 하나님의 축복을 차지하려고 싸웠습니다. 결국 그들이 싸우다 망하여 오늘날과 같은 세상을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이것을 복귀하기 위해서는 반대의 경로를 거쳐야 합니다. 동생이 좋아하는 것은 싫어하고, 동생이 나쁘게 생각하는 것을 내가 가지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지금까지 하나님 아버지는 그렇게 해 오셨습니다. 그 아버지는 자식을 구하기 위하여 죽음의 자리에도 서셨습니다. 아직 좋은 것을 줄 때가 못 되었으니 그때까지 참으라고 하시며 아들 대신 죽음의 자리에도 서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죄 된 것들을 길러 통일교회 신도를 만들어 놓았더니 그저 좋다고 활개를 치며 다니고 있습니다. 좋은 것만 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좋은 것 차지하려고 싸우다가는 망해도 나쁜 것 차지하려고 싸우다가는 망하는 법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이 사망의 세계에서 사람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것을 가져야 합니다. 제일 지긋지긋해하고 제일 싫어하는 것을 생활 속에서 소화시켜야 합니다. 매일 밥을 먹듯이 말입니다. 그러한 일을 행하는 데 있어서는 자기가 어떻게 되어도, 밥을 굶어도, 눈물을 흘려도, 피를 토하며 쓰러져도 ‘고맙습니다!’ 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여야 이러한 사람이 되겠는가? 역사적인 하나님의 심정을 샅샅이 알아야 합니다. 자기의 후손들과 천추만대 후대의 세계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앞으로의 세계에 대한 가치를 알면 현실에 대해 애착심을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현실의 가치는 실날 같은 것이므로 이것은 날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무리들을 만들기 위하여 하나님은 불쌍한 한민족에게 새로운 주의를 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통일의 이념입니다. 통일이 쉬울 것 같아요? 세상의 죄를 우리가 도맡아야 합니다. 죄는 나쁜 것의 근거지이니 이것을 제거하는 책임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기준에 여러분, 일치될 수 있어요?
여러분들이 그런 곳에 들어가 고생할 때는 고생한다는 생각을 가지면 안 됩니다. 나쁜 것은 내 것이라는 마음만 가지라구요. 매를 맞을 때도 그 부락을 걸고 맞는 것이 아니라 27억 인류를 대신해서 맞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 매를 맞는 대신 인류의 죄를 탕감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세요. 한 끼의 밥을 굶더라도 ‘굶주리고 있는 수많은 인류를 해원시켜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 이러한 길을 걸어 나오셨으니 그 심정을 내가 본받겠나이다.’라고 기도하라구요. 이 얼마나 숭고한 사랑입니까?
그런 자리에서 주위를 돌아보며 ‘메시아의 모습을 바라보기를 고대해온 만물아! 주인의 심정을 그리워하던 만물아! 너는 어느 한때 이러한 심정을 가진 참다운 주인의 손길 앞에 귀여움을 받아 보았으며, 그 심정의 품에 안겨서 하룻밤이라도 지내 보았느냐!’ 해야 합니다. 그러한 마음을 품게 될 때 풀 한 포기를 붙들고도 진정으로 귀여워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여러분이 되었어요?
여러분들은 집에 있는 골동품을 내놓고 이건 우리의 선조가 물려준 것이고, 이조 시대의 보물이고, 뭐 어쩌고 저쩌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시시한 것을 갖고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심정으로 지으신 천지 만물을 사랑하고 자랑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딸을 잘 살게 하기 위하여 지어 주신 것입니다. 금은보화를 주고도 살 수 없는 귀한 창조의 유물입니다. 그런데 그 유물이 천대받고 무시당해 왔습니다. 그래서 지금 천지 만물이 탄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산을 보면 산이 탄식하고, 들을 보면 들이 탄식하고 있습니다. 불어오는 바람결마저 탄식하고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골고다에서 하나님을 모시는 아들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후에는 하나님의 아들딸의 자격으로 만물을 책임지는 만물의 주인이 되어야 됩니다. 하나님의 심정, 6천년 동안 죄 많은 우리를 찾아오셔서 버리지 아니하시고 사랑하신 하나님의 심정을 본받아 몽땅 사랑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누가 있든 없든 여러분은 풀 한 포기를 붙들고 ‘아버지! 당신이 이 풀을 지으실 때 이러이러한 마음을 갖고 지으셨지요? 이 풀을 갖다가 사랑하는 아들딸에게 보이면서 얼마나 자랑하고 싶으셨습니까? 여기 아버지가 지으신 이 풀도 사랑하는 아들딸 앞에 자기를 자랑해 주기를 얼마나 그리워했겠습니까? 그런데 그러한 날들을 맞지 못하였으니 얼마나 불쌍합니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 ‘이제는 때가 되었으니 아버지를 대신하여 너를 품고 귀여워해 줄테니 지난날의 모든 탄식을 잊어버리고 나와 더불어 길이길이 같이 살자.’ 해보세요. 그리고 ‘너는 영원무궁토록 넘겨줄 귀한 생명들이야. 아무리 많은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천추만대의 후손에게 넘겨줄 창조의 유물이며 보화야.’ 하면서 만물을 대해야 합니다. 이렇게 풀 한 포기라도 애지중지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주인이 된다면 얼마나 멋진 주인입니까? ‘산아! 내가 여기 왔노라. 물아! 나를 보면서 흘러라.’ 하는 감정을 가져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보고 하나님이 ‘야, 이 녀석 봐라. 내가 좋아하고 내가 보고 싶어할 건데 네가 그러면 되니?’ 하시며 꾸지람하시겠어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래, 오냐. 그럼 다 너에게 줄게. 네가 좋아하는 것이라면 다 줄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풀 한 포기에서부터 천하 만물 모든 것에 이르기까지 통틀어 너에게 주마. 하늘의 보좌까지라도 몽땅 너에게 주마. 네 것으로 만들어 주마. 내가 이토록 사랑하는 아들딸에게 주지 않으면 누구에게 주겠니?’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여러분이 하늘 편의 승리의 왕자로 서고 피조세계가 여러분 앞에 머리 숙이고, 서로가 없어서는 안 될 가치를 노래하며 사는 세상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창조이상이 이루어진 본연의 세상이며 곧 지상 천국입니다. 이러한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 여러분들이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최고의 행복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돈도 아니요, 재산도 아니요, 지식도 아닙니다. 인간의 최고의 행복은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만군의 여호와이시기 때문에 없는 것이 없습니다. 전지전능하신 분이기에 모든 것을 갖추고 계십니다. 그분은 좋다는 것은 얼마든지 창조하십니다. 지금도 사랑하는 아들딸들이 천하보다 더 아름다운 것을 구상하여서 ‘이것을 제가 원하오니 저에게 만들어 주실 수 있겠습니까?’ 하면 하나님은 ‘오냐.’ 하며 순식간에 창조하십니다. 얼마나 멋집니까!
그렇지만 나쁜 것은 창조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나쁜 것에 사랑하는 아들딸의 목이 걸려 있기에 이것을 풀기 위해서 이제껏 고생해 오셨습니다. 이제는 나도 이것을 풀 줄 압니다. 이것을 처리하는 방법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이 사탄세계를 소탕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남기신 유업을 상속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남기신 유업을 상속 받아 예수의 동생과 누이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의 친형제들은 사탄이 전부 끌어갔습니다. 사실이 그러니, 여러분들은 주의해야 합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후원 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나 혼자만 남았다고 생각될 때는 하나님께 살려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사탄과 단 둘이 대결할 때, 서너 마디로 사탄을 천길 만길 굴러 떨어지게 만들었습니다. 선생님은 우리의 작은 처녀들이 억센 사내들, 별의별 남자들이 우글우글한 데에 떡 가서 늠름하게 대결하여 승리하는 것을 볼 때, 기분이 매우 좋습니다.
여기 있는 여자들은 더욱 조심해야 돼요. 아담 해와도 열여섯 열일곱 살 때 타락했습니다. 여기 그러한 연령에 있는 우리 식구들은 사탄이 어떤 수단을 써서 유혹해도 끄떡없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오히려 의기를 일으켜 사탄을 멋지게 밀어제끼고 그들을 하늘 편에 세우는 여러분이 되어야 됩니다. ‘우리를 어떻게 알고 이러느냐? 어림도 없다.’ 할 수 있어야 됩니다. 이러한 승리의 아가씨들이 되기를 부탁합니다. 알았지요?「예」
그리고 우리 총각들은 그런 일에 플러스되는 일을 해야 합니다. 본시 사탄이 누구입니까? 6천년 동안 혈연을 통해서 우리를 고생시킨 장본인입니다. 이런 사탄과 싸움을 시키더라도 ‘요놈, 네가 하늘의 주관권을 가로채 6천년 동안 행사했지만 이제는 안 된다.’ 하여야 합니다. 사탄의 멱살을 잡고 후려칠 수 있는 늠름한 사내들이 되어야 합니다. 알겠어요?「예.」
선생님은 이러한 마음으로 남한 각지를 돌며 여러분을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 더구나 지금은 복잡한 때이니 여러분은 말을 주의해야 합니다. 또 지방에 가서 반드시 주의해야 할 사항은 40일을 40일로만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브라함부터 지금까지의 4천년 역사를 대신한 것이고, 광야 40년 기간을 대신한 것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 1961년은 3년 기간 중에서도 총진군을 해야 할 해입니다. 각 면 단위에까지 우리의 초소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인간을 붙잡고 허덕이게 하는 사탄을 감시하여 일시에 몰아내야 하겠습니다. 명년에는 리 단위까지 계획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알지요?
이러한 뜻을 위해서 여러분이 어린 몸이지만 제물이 되겠다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 단단히 준비하고 단단히 결의해야 하겠습니다. 이제는 여러분들이 기도를 하면 영계에서 협조해 줍니다. 동네에 가서 동네 사람들을 불러다 놓고 열심히 해 보십시오. 하늘이 협조해 주실 것입니다.
이제까지는 선생님에게 후방은 없었습니다. 언제나 일선이었습니다. 가는 곳마다 사방에서 사탄의 화살이 날아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선생님이 후방에 서야 할 때가 왔습니다. 여러분이 열심히 일해서 선생님의 울타리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에게도 후방은 없습니다. 여러분이 일선에 섬으로써 우리에게 후방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전도 나갈 때에 혼자 가면 안 됩니다. 반드시 전도 나가지 못한 사람들과 연계 작전을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일선과 후방이 합동작전을 해야 합니다. 일선에 있는 사람은 앞에서 싸우고 후방에 있는 사람은 정성을 다해서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협력하여야 합니다. 그런 정성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번에 불가피한 식구는 전도 안 나가더라도 모두 동참하였다는 조건을 세워야 합니다.
후방에 남아 있는 사람은 타락하지 않은 천사장의 입장이고, 일선에 나가 있는 사람은 타락하지 않은 아담 해와의 입장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모두가 타락한 사탄과 싸우는 것입니다. 후방에 있는 사람들은 타락하지 않은 천사장의 입장이므로 먼저 일선에서 싸우는 사람들에게 돈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일선에서 싸우는 아들딸이 오히려 자기들의 주머니를 털어 써야 합니다. 그래야 그들 앞에 위신이 서는 것입니다. 자기의 땀과 자기의 피로 사탄을 굴복시켜야 합니다. 아담 해와가 자기 위치를 다시 찾은 후에야 천사장이 모셔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칙입니다. 복귀의 이치가 그렇다는 겁니다. 후방에 있는 여러분의 입장은 천사장의 입장입니다. 일선에 나가 싸우는 사람이 아담 해와의 입장이라면, 후방에 있는 여러분은 천사장의 입장인 것입니다.
우리는 2대 1로 사탄과 싸우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중심삼은 사위기대를 이루어 사탄을 몰아내야 합니다. 사탄세계는 반드시 무너진다는 확신을 갖고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선생님이 하나님 앞에 충성을 하듯이, 여러분도 뜻을 위해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러한 길을 걸어오셨으니 여러분도 이러한 어려운 길을 가야 합니다. 여러분이 전도할 때 통일교회를 위해서 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뜻을 위해 한다고 생각하십시오. 알겠어요? 원리 말씀을 대할 때도 선생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늘의 말씀입니다.
선생님은 지금까지 여러분이 모든 것을 소유할 수 있는 비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무보수로 인계해 주었으니 원리도 여러분의 것이요, 교회도 여러분의 것이요, 이 나라도 여러분의 것이요, 하늘과 땅도 여러분의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도 여러분의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하나님을 모셔야 되며 이 천하도 여러분이 사랑해 주어야 합니다. ‘아! 이 백성도 나의 백성이니 내가 사랑해야지. 이 마을 사람들도 내 부모요 내 형제니 내가 사랑해야지.’ 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은 누구를 위한 삶입니까? 결국 나를 위한 삶입니다. 나, 나, 나, 나를 위한 삶이란 말입니다. 예수도 그러한 일을 다 못 하고 죽었으니 하늘나라에서라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모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도 민족적으로 해야 할 사명을 못했으니 죽어서라도 해야 합니다.
‘나는 한다.’는 신념이 있어야 합니다. ‘27억 인류가 없어지더라도 나는 한다.’는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엘리야도 그러한 마음으로 ‘나만 남았나이다.’ 했던 것입니다.
선생님에게도 그런 기간이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홀로 출발했지만 그런 얘기는 하지 않았습니다. 나 혼자라도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싸움은 이겨야만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그러니 하나님을 사랑하고 인류를 사랑하고, 이 온 만물을 내 것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땀을 흘리며 가는 모습을 보고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신 길을 따라감으로써 전통적인 유업을 상속 받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앞에 나서면 하나님께서는 그런 아들딸에게 무엇이든지 전부 주시고 싶어하십니다. 주고도 또 주고 자꾸 주고 싶어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자기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일을 하는데 누가 월급을 줍니까? 월급 받고 싶으면 줄 테니 받고 싶은 사람 있으면 어디 손들어 봐요. 자기 갈 길을 가는데 누가 돈을 줍니까? 통일교회에서는 돈을 안 받고 일해야 합니다. 내 땀과 눈물을 흘려서 일해야 합니다. 땀과 눈물을 흘려서 안 되거든 피를 팔아서라도 해야 합니다. 통일의 청년 남녀들은 선생님이 보고 ‘됐다.’ 할 때까지 일해야 합니다. 선생님은 여러분에게 명령하지만 말로만 명령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생님도 과거에 그런 길을 걸어 보았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나를 모른 척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그러한 길을 가면 하나님은 여러분을 반드시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러한 아들딸이 될 것을 생각하고 기뻐해야 합니다. 앞으로 우리 식구가 많아지면 월급 받지 않고 이 나라의 중요한 직에서 일하게 할 것입니다. 틀림없이 그렇게 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피와 땀을 아끼지 말고 쏟아야 합니다. 하루에 밥을 한 끼 밖에 못 먹는 한이 있더라도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그래도 안 죽어요. 안 죽어. 그럴 자신 있지요?「예.」일주일쯤 훈련해 보세요. 안 죽습니다. 내 나라 내 땅을 위하여 내가 살아 있는 동안 고생해야 합니다.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모실 수 있도록 자리를 깨끗이 해야 합니다.
삼천만 민족부터 전세계 인류까지 우리의 움직임을 본받으라고 자랑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합니다. 이러한 성실성을 이 민족 앞에 보여 주고, 하늘에 대한 애착심을 갖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 민족이 살아날 길이 열리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는 안 됩니다. 오늘날 혁명 정부도 그렇습니다. 의식혁명, 다시 말하면 정신혁명을 어떻게 일으키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벌써 그 이상 몇 단계를 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만이 가고 있습니다. 알겠어요?「예.」
우리는 이 길을 가다가 매를 맞아도 그들을 원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도 그렇게 생각하십니다. 요놈의 사탄들이 동원되어야 얼른 탕감할 게 아니겠어요? 그래요, 안 그래요? 그렇지요? 결판을 내려면 싸움을 해야 합니다. 싸움을 하려면 악착같이 해야 합니다. 사탄들이 다 물러가야 싸움에서 이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있어 가지고 되겠어요? 그래 가지고 인정받겠어요?
여러분은 먼저 사탄과 싸워 사탄한테 이겼다는 증명서를 받아야 합니다. 그 증명서를 받기 전에는 하나님의 아들딸이 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사탄한테 승리했다는 증명서를 예수님에게서도 받고 선생님에게서도 받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만 하면 우리는 지상에 있는 공산당을 단번에 몰아낼 수 있습니다. 공산당 같은 것은 문제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갖고 나가면 됩니다. 자신의 몸을 제물로, 자신의 눈물과 피와 땀을 제물로 바치면 됩니다. 자신을 죽지 않은 산 제물로 바치면 됩니다. 또 이러한 제물이 될 수 있는 상속자를 세워 놓고, 제사장이 되어 천지에 있는 탄식의 조건을 전부 일신에 지니고 ‘제가 여기에 있으니 저를 채찍질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저로 말미암아 해원하시옵소서.’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담이 어떻게 타락했고, 그것을 어떻게 탕감해 나오는가 하는 복귀원리를 다 배웠지요? 여러분은 하나님의 한에다 이 선생님의 한까지 플러스해서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선생님은 여러분을 대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그런 아들딸들에게 축복을 해주신다고 약속하셨으므로 내가 ‘당신의 아들딸로 드리오니 받아 주시옵소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 여러분이 축복을 받을 게 아니겠어요? 그래야 비로소 축복받는 자리로 나가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통일교회가 가는 길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대신자가 되는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그토록 수고하셨으니 우리가 하나님 대신 수고하여 그것에 보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쉬실 것 아니겠어요? 나 자신부터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연대적인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각자 하나님의 대신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모의 심정을 지니고 종의 몸을 쓰시고 지상에 오셨습니다. 만민이 눈물을 흘리면 하나님도 눈물을 흘리셨고, 만민이 땀을 흘리면 하나님도 땀을 흘리셨습니다. 또 만민이 죽음의 자리에 설 때에 만민을 대신하여 피를 흘려 주셨습니다. 나를 대신하여 하나님께서 몇천만 번 제물이 되셨는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여러 번 손수 제사장의 노릇을 하셨는지 모릅니다. 이러한 일을 개인적으로부터 가정적·민족적·세계적으로까지 해 나오셨으니 얼마나 고통이 많았겠습니까? 아들을 보내시어 이 사명을 하게 하려 하셨는데, 그나마 실패하여 하나님께서 아들의 사명까지 하시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은 참된 아들, 하늘과 관계 지을 수 있는 천지의 대신자를 세워서 그로 말미암아 만민이 고난의 길을 넘어 재생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런 후에 축복해 주시려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일을 가능케 해야 할 것이 예수의 사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가 사명을 다하지 못했으니 오늘 우리들이 그 사명을 책임져야 합니다. 부모의 심정으로 종의 몸을 쓰고, 눈물과 피와 땀을 흘려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물론 승리한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죽어서는 안 됩니다. 죽은 제물이 되어서는 안 된단 말입니다. 산 제물이 되어 제사장의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제사장이 되려면 성전이 있어야 되고 제단이 있어야 하고 백성이 있어야 합니다. 제단은 백성 때문에 있는 것이고, 제물과 제사장은 하늘땅을 위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이제 제사장의 자리로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동네를 찾아 다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제단을 짓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이 제사장이 되려면 성전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동네에 가면 축을 쌓아서 성전을 지어야 합니다. 그 다음엔 제단을 쌓아야 합니다. 제단이 무엇입니까? 그 마을의 눈물의 성지입니다. 뜻이 이루어질 때까지 필요한 제단을 만들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그 마을에서 특별한 사람을 택해서 3대의 제물과 12가지 제물을 드려야 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3수는 12수의 근본이 되는 수이고 12수는 전체를 대신하는 수이기 때문입니다. 12수를 찾아 세우면 동서남북 사방을 대신하여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12제자를 데리고 제사장 노릇을 하려고 하셨습니다. 그러다가 실패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3제자를 세웠습니다. 세 사람은 동서남북 중에서 한 방향, 태양빛이 떠올라 오는 동쪽만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제물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3제자를 세워 제물을 드렸던 것입니다.
그러면 3제자는 어떻게 해서 제물이 되었는가? 예수님 자신이 제1차 아담, 제2차 아담의 책임은 했지만 제자들의 실수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소망의 제3차 아담, 재림주라는 이름을 걸어 놓고 3제자를 세워 제사를 지내게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 야곱, 요한이 실수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의 실수를 복귀하기 위해 수고해 오셨고, 재림주님이 오실 때까지 제사장의 입장에서 준비해 나오고 계신 것입니다. 알겠어요?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예수님의 한과 하나님의 한을 해원해 드려야 합니다. 예수님의 한이 해원되기 전에는 하나님의 한도 풀려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먼저 예수님의 한을 풀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예수님에게 3년 공생애 노정이 있었던 것같이 여러분들도 3년 동안 공적인 길을 가야 합니다. 3년 동안 120명을 전도 못 하겠습니까? 정성을 들이면 됩니다. 그러고 나서 성전을 짓고 제단을 만들고 제물을 만들어 제사장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승리했다는 조건을 세우고 난 후에야 비로소 하늘의 아들딸로서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노아의 가정에서부터 야곱의 가정 형태를 복귀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여러분은 이스라엘의 지파와 같은 개별적인 한 종족의 조상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지요. 이것이 우리의 갈 길입니다. 알겠어요?
그러므로 나이 어린 여러분들 때부터 빨리빨리 시작해야 합니다. 이 길은 가라, 마라 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원리를 배우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임을 알게 될진대 안 갈 수 없고 안 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자신이 가야 할 길이므로 그 노정에서 패배자가 되지 말고 승리해야 합니다. 선생님도 지금까지 혼자 싸웠지만 승리한 기준이 있으므로 여러분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선생님이 있는 한 염려하지 말고 끝까지 싸워 나가면 승리는 여러분에게 있을 것입니다. 선생님은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알고 자신을 갖고 힘차게 돌격해 나갑시다. 알겠어요? 그렇게 맹세하겠어요? 맹세하는 사람 손들어 보세요. 자, 그럼 이제 선생님과 그런 서약을 합시다.
지금까지 예수님을 대하고 뜻을 대하면서 별의별 생각을 다 했습니다. 하나님을 찾아 나가는 길이 힘든 길이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힘들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지요? 힘든 길이 복 받는 길입니다. 어려운 것을 내가 책임지겠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딸 되는 첩경입니다. 선생님도 노동을 해 보았고, 빌어먹는 사람도 되어 보았고, 모둠매를 맞아도 보았고, 천대도 받아 보았습니다. 빈민굴에 들어가서 살아도 보았고, 거지를 도와주기도 했습니다. 그렇다고 싸구려 선생님이 아닙니다. 어디를 가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절개와 위신을 잃어버리지 않았습니다. 알겠어요? 우리 통일교회 식구들은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지독한 핍박을 해도 선생님 앞에서 항의하면 안 됩니다. 항의를 못 하게 되어 있습니다.
선생님은 이번에 여러분을 개척지로 보내면서 여러분이 있는 곳곳에 못 가는 것을 제일 가슴 아프게 생각합니다. 그 이유를 요전에 설명했지요? 여러분들이 동원되어 있는 곳을 찾아가는데 선생의 입장에서 어떻게 빈손으로 가겠어요. 2천 명이 동원되어 2명이나 3명이 한 조가 되어 나가는데 한 사람에게 천 원씩만 줘도 2백만 원이 들어갑니다. 또 40일 동안 순회하려면 할 수 없이 차를 타야 하는데, 기름 값만 해도 하루에 만오천 원이나 듭니다. 또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돌아다니려면 이에 따른 비용이 또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루에 평균 3만 원을 잡으면 40일 동안 120만 원이 듭니다. 작년에는 찾아가는 데마다 돈을 주었는데 많이 줄 때는 만오천 원까지 주었습니다. 이것 저것 생각하면 자그마치 5백만 원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돈이 있어요? 없으니까 어쩔 수 없이 못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알고 선생님이 못 간다고 절대로 섭섭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대신 선생님은 여러분을 위해서 기도할 것입니다. 밥도 먹지 아니하고 기도할 거예요. 전도를 나가야 할 여러 젊은이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전도 나가기 전에 힘껏 격려해 주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부탁하는 선생님의 심정 앞에 어긋남이 없이 전부 전도에 참가해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앞에 자랑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어 주기를 부탁합니다.
아버님, 감사합니다. 당신이 찾아오신 복귀의 행로가 이렇게도 상처가 많은 행로요, 이렇게도 곡절이 많은 행로인 줄을 저희들은 진정 몰랐사옵니다. 수많은 인류가 살다 갔고, 수많은 인류가 살고 있으나 오늘 저희들이 알고 있는 뜻은 아무도 몰랐사옵니다. 저희들이 알고 있는 것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게 해 줄 수 있는 날들을 맞이하게 해주신 은사를 생각하면 천만번 죽어도 갚을 도리가 없음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이들이 새로운 확신을 가졌습니다. 이제 돌아가야 할 자리에 있사와 맹세적인 제물로 돌아가기를 원하고 있사오니 받아 주시옵소서.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민족의 승리와 영광을 위해 흘린 땀과 눈물과 피를 거두어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 피 흘리시며 호소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들도 땀과 눈물과 피로 호소하게 해주시옵소서. 이로 말미암아 제2, 제3이스라엘이 회복되어 승리적인 아버지의 복귀의 권세가 땅에 세워지게 될 것을 알고 있사오니, 어린 사람에서부터 나이가 많은 사람에 이르기까지 사랑의 손길을 펴시사 아버지의 심정에 접붙여 주시옵소서. 간절히 부탁하옵니다. 언제나 보호하여 주시옵기를 바라올 때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새로운 차원의 울음을 울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선생님은 거지를 붙들고도 옷을 벗어 주며 통곡할 때가 많았습니다.
어린아이를 붙들고라도 천운을 감싸고 사랑하면 그것을 중심으로 하여 그 부락의 인심이 돌아가게 됩니다.
지구장들은 책임 못한 회개의 눈물을 흘리고 사명감에 찬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진정 책임을 져 보았습니까? 이번 기간에는 선생님도 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제2의 약속과 사명감을 갖고 나아갑시다.
아버지의 뜻을 알고 붙들었으니 그 모양이라도 보여 드려야 합니다. 못하겠다는 사람을 붙들고 나오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생각해봐야 합니다.
삼천만에게 외치고 싶은 말을 대신 여러분을 붙들고 하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제일 못난 자리에서부터 출발했습니다.
선생님은 군대에서와 같이 원칙에 어긋난 것을 용서하지 않는 마음을 가진 효원이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래서는 아니 됩니다. 천운이 바뀔 때는 용서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선생님은 맨발로 삼천리 강산을 돌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것도 단벌 옷을 입고 돌고 싶습니다. 부흥단은 그런 심정을 보여 주기 위한 것입니다. 자녀를 찾는 부모의 모습을….
밥을 먹을 때도 ‘아버님, 먼저 드시옵소서.’ 해야 합니다.
승리한 아들딸을 놓고 즐거워해 보시지 못한 아버지께서는 사탄에게서 빼앗아 올 수 있는 탕감조건이 되는 우리들의 땀을 얼마나 보고 싶어 하시겠습니까. 지금까지는 뿌리를 내리지 못해 어떻게 할 수 없었으나 이제부터는 할 수 있습니다.
72명의 지구장은 축복받은 72명의 외적 형(形)입니다. 종영(鍾泳)이는 처리 케이스에 든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탄과의 연계적인 입장으로 세운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붙들고 고생하며 우시던 자리로 나아가서 우리 스스로 아버지를 맞이합시다.
시간을 엄수하고 공금에 대해 엄격해야 합니다. 십일조는 철저히 해야 합니다. 자기 총수입에서 십의 일조는 반드시 하나님 앞에 바쳐야 됩니다.
연중행사 중 부모의 날, 자녀의 날은 성심을 다하여 기념해야 합니다. 역사 이후 어느 효자가 베푼 잔치보다도 기쁜(심정적인) 잔칫날로 맞이해야 합니다.
복귀역사이므로 자녀의 날에는 모든 것을 봉헌해야 합니다. 이날을 위하여 성심성의껏 준비해야 됩니다. 부모의 날에는 정성, 자녀의 날에는 결실을 표시해야 합니다.
내적 성전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믿음의 자녀를 찾아 세워야 합니다. 하나님은 때를 수습하기 위하여 대신자를 세우십니다. 환경이 악하면 악할수록 대신자를 세우기 위한 하나님의 싸움이 크고 그로 인한 하나님의 심정의 고통 또한 큰 것입니다.
노아가 1,600년의 하나님의 심정을 상속 받기 위해 걸린 기간이 120년입니다. 하나님의 심정은 1,600년 동안보다 120년 동안이 더 초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주적인 중심을 세우기 위해 6천년의 심정을 가지고 접붙이려 하십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제물이 되었습니다.
선생님은 하나님의 심정을 상속 받아 그것을 다시 상속해 주려 했던 노아의 입장에서 여러분을 대하려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 상속 받을 수 있는 자를 찾아 세워야 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고난의 길에 세우려 하시는 것은 참소조건을 제거하기 위함이요, 불쌍한 자리에 세움으로써 동조자를 만들기 위함입니다.
고난 중에서 맹세한 각오와 결심을 잃어버리지 않아야 합니다. 이제부터 핍박의 한 고개는 넘어갑니다. 아무리 평안한 자리에 있을지라도 아버지의 심정을 잊어서는 아니 됩니다.
심정을 중심한 인격을 길러야 합니다. 심판 후 노아와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서는 광야 40년의 노정을 계속 걸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에 들어간 후에도 성전을 짓고 축복받을 때까지 광야노정과 같은 생활을 계속 했어야 했습니다. 모세와 같이 안타까워하는 족장이 12명만 있었어도 모세는 그 길을 끝까지 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어느 시대나 선각자의 것을 상속하기 위해서는 눈물 없이는 안 됩니다.
생명의 길은 몸부터가 아니라 심정부터 가야 합니다. 선각자는 사람들을 깨우쳐 가며 가야 합니다. 이름이 있기에 깨우치기 위해서는 상속자를 세워야 합니다. 하늘을 위하여, 시대적인 중심을 위하여, 나를 중심한 아들딸을 위하여 눈물 흘려야 합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기도하던 절개,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던 절개, 그리고 선생님이 기도하던 절개를 잃어서는 안 됩니다.
연로한 사람들이 마음놓고 잠자는 것을 보면 이상합니다.
하나님 앞에 무엇을 가지고 갈 것인가? 책임 다한 것을 가지고 가야 합니다.
우리는 죽음을 소홀히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가 갈 길이 바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종교 생활은 사후에 탕감해야 할 것을 살아서 탕감하는 생활입니다.
일생의 갈 길을 단축해서 가려는 것이 도의 생활입니다. 육신이 있는 동안은 준비해야 합니다.
내가 살고 있는 것은 흡사 거미줄 같은 것에 걸려서 살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죽어 평탄한 자리에 가는 문제는 살아서 해결해야 합니다.
선생님이 죽어도 사탄은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각자에게는 갈 길이 남아 있습니다. 준비기를 지나고 실천하는 기간을 지나 수확하는 시기에 생명을 거두어야 합니다.
준비기보다 수확기가 더 바쁜 것입니다. 말씀하는 사람이 하늘을 대신하여 선포할 때 졸면 천법에 걸립니다.
선생님은 기도를 많이 합니다. 예배시에는 모든 식구를 위해 기도합니다. 식구들의 고통을 체휼적으로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는 단 5분이라도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3년만 지나면 선생님과 상관없는 일들이 생길 것입니다. 모세 때에도 60만 명이 광야에서 쓰러졌으니 이 시대에도 쓰러지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선생님의 심적 상태는 작년 다르고 금년 다릅니다. 과거에는 식구들의 것을 선생님이 책임지려 했으나 지금은 다릅니다. 각자가 결실할 때이므로 그들을 생각해 주면 도리어 그들의 길을 막는 결과가 되기 때문입니다.
식구들이 옷을 잘 입은 것을 보면 마음이 불안합니다.
4월 이후부터는 이 단에서 설교하지 않았습니다. 각자의 최후의 때임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선생님은 단 10분을 마음놓고 살지 못했습니다.
신앙생활 하는 동안에는 하늘이 인정하는 환경을 가져야 합니다. 죽은 후에 자기를 붙들고 울 자가 몇일까 생각해 보세요. 죽기 전에 자기로 인하여 구원받고 영계에 간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천사를 대신해서 싸워 줄 것입니다.
여러분을 보면 살이 없고 해골만 남은 사람처럼 보입니다. 에스겔 골짜기의 해골들은 바로 살아 있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신앙자는 죽음의 문제를 현실에서 해결해야 합니다.
갈 길이 멀면 멀수록 발길로 차서라도 갈 길을 가게 해야겠습니다. 이것은 하늘의 책임입니다. 혼자서는 못 갑니다. 서로 자극을 받아야 합니다.
내가 책임을 지고 움직일 때는 하나님도 같이 움직이십니다. 심정을 붙들고 쉴 때는 하나님도 함께 쉬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대해 주시는 법도와 도수가 있습니다. 하늘의 일을 대신하는 사람만을 대해 주십니다.
섭리는 아담 하나를 찾기 위한 것입니다. 심정은 무한합니다. 사탄을, 종을, 형제를, 자식을 굴복시킨 후에야 부모의 자리에 설 수 있습니다.
사탄은 편안한 자리에서 굴복시킬 수 없습니다. 눈물로써 굴복시켜야 합니다. 6천년의 역사적 총탕감을 단시일에 하고 넘어가는 기간이 3년 기간입니다. 내가 나를 바로잡아서 죽지 않고 하나님 앞에 바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자기를 위해 변명하는 것은 허락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자기를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도 당신을 위한 변명은 아니 하십니다. 종과 형제, 자녀를 위해 변명할 수는 있습니다. 종과 형제나 자녀를 위해 변명하는 것은 허락된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여러분과 같이 종이나 형제, 자녀의 입장에 설 때는 이미 지나갔습니다. 여러분들은 하늘의 대신자로 설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 길은 피를 토하면서라도 가야 하고 죽어서라도 가야 합니다. 고생하면 그것이 재산입니다. 후회하면서 간 길은 다 갔어도 헛된 길입니다.
여러분이 본부를 찾아올 때에 많은 기대를 품고 왔을 줄 압니다. 그러나 수련이라는 낱말이 의미하고 있듯이 여러분의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것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본부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사명을 맡아 바삐 움직이는 실무자들이고, 또 워낙 많은 사람들을 상대하다 보니 자연히 지방에서 전도자들이 여러분을 대해 주던 것처럼 따뜻하게 대해 주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양해하고 수련에 임해 주기를 부탁드립니다.
누가 여러분에게 ‘너는 누구냐?’ 하고 물으면, ‘나는 이러이러한 사람이다.’ 라고 개인적인 입장에서 대답할 것입니다. ‘너는 무엇 하는 사람이냐? 너는 무엇 하러 왔느냐?’ 필시 창조주 하나님도 이런 질문을 하실 것입니다. 여기에서 여러분이 자기의 사정과 심정을 온전히 하나님 앞에 맡길 수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이 세계에 30억 인류가 살고 있지만 어느 누구도 창조주 앞에 자신 있게 선 사람이 없었습니다. 창조주께서 과연 그렇다고 공인할 수 있는 절대적인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여기에 온 목적이 무엇이냐? 그것은 어떠한 환경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인간의 근본 문제를 해명하고 절대자로부터 인정을 받고 확정을 받아 그 절대자 앞에 설 수 있기 위하여 온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행복하지 않으면 불행합니다. 외적, 곧 환경적으로 행복하다 할지라도 그 행복이 영계에까지 미쳐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절대자가 찾는 사람은 어떠한 사람이냐? 행복한 사람이 아니라 불행한 가운데 있을지라도 그 불행을 물리치고 진정한 행복을 만들어 가는 사람일 것입니다. 이런 내용을 토대로 구태여 오늘 드릴 말씀의 제목을 붙이자면 ‘두 세계의 왕자가 되라.’ 는 것입니다. 슬픔과 기쁨, 이 두 세계의 왕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라면 어느 누구든지 두 세계의 왕자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오늘 이 세계가 바라고, 또한 창조주께서 바라는 사람은 두 세계를 책임지고 맡아서 승리하는 사람입니다. 인간에게는 양심이 있어 가지고 이를 기준으로 한 생활관과 인생관이 있다고 할 때, 여기에는 양심의 근본이 되고 주체가 되는 존재가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입니다. 그분이 절대자라면 그분과 나는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 더 나아가 가정과 사회와 국가와 세계와 절대자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면 절대자가 찾고 있고, 절대자 앞에 아들딸로 설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이제까지 절대자는 한 번도 기뻐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인간이 기뻐해 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원인적인 주체가 기뻐해 보지 못했으니 결과적 대상인 우리 인간이 기쁠 수 없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어떤 위인도 참된 기쁨을 누려 보지 못한 채 선을 추구하며 악과 싸우다가 갔습니다. 오늘보다는 내일, 내일보다는 모레가 더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이 인간이 바라는 공통의 욕망이지만 욕망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인간이 기쁘기 위해서는 슬픔을 제거해야 합니다. 그러나 먼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기 전에는 기쁨이 있을 수 없습니다.
종교의 이념은 우주적이요 내세적입니다. 종교인은 이미 수천년 전부터 이것을 위해 싸워 왔는데, 일반인은 이제야 유엔이니 세계 정부니 하고 있습니다.
종교인은 언제나 역설적인 길을 걸어 나왔습니다. 현실의 비극을 퇴치시키기 위해서는 현실과 반대 방향으로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현실과 똑같은 길을 가서는 안 됩니다.
참된 사람이란 선을 주장하는 사람이며, 어려운 사람과 슬픔을 같이 겪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종교인 가운데서 기쁨과 슬픔을 완전히 정복하였다고 하는 사람이 있느냐?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기쁨과 슬픔을 완전히 정복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기쁨과 슬픔의 두 세계를 뚫고 나가야 합니다. 종교인은 보다 높은 세계를 추구해 오기는 했지만, 슬픔의 세계를 제거하기 위해 전력을 쏟은 사람은 없습니다. 부모의 슬픔과 고통을 제거하는 사람이 효자입니다. 부모가 효자를 사랑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인류의 슬픔이나 고통을 자기의 것으로 여기는 사람을 사랑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선만을 추구하는 사람보다는 고통을 밀어내는 실전의 투사가 되어야 합니다. 뒤따라가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기쁨을 노래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슬픈 환경을 영원히 제거시킨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이상주의적 망상에 잠겨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참된 이상은 모든 슬픔을 거친 후에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선지 성현이나 역사적인 인물, 무릇 참을 찾아 나가는 사람보다는 미래를 개척해 나가는 사람을 찾아 쓰십니다. 우리는 행복의 문을 두드리기 전에 불행의 요소를 해부해야 합니다. 이 기준을 넘어야 우주적인 왕자가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인류의 슬픔, 역사의 슬픔, 민족의 슬픔, 세계의 슬픔, 하나님의 슬픔을 배우러 왔습니다. 역사를 위하여, 시대를 위하여, 미래를 위하여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라야 애국자라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슬픔을 책임져야 합니다. 역사는 하나님께서 그르친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르친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이 이 슬픔을 청산해야 합니다. 선생님은 기도할 때 천당 가겠다고 기도하지 않고 슬픔을 청산 짓겠다고 기도합니다. 하늘에 가서 좋은 위치에 서려면 땅에서 좋은 위치를 만들어야 합니다.
하나의 세계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기쁨과 슬픔의 두 세계를 정복해야 합니다. 좋은 것을 갖겠다고 하는 단체는 많았지만 나쁜 것을 갖겠다고 하는 단체는 없었습니다. 그러한 단체가 있다면 세계는 그들의 손에 지배되고 하나님도 소유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한 난경에 빠질지라도 그 환경을 점령하고 그 가운데에서 무한한 가치를 찾아 노래하여, 그 환경을 밟고 다져서 콘크리트처럼 견고한 환경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선의 세계가 왔을 때 겉으로 나타나지 않는 주관자가 될 수 있습니다.
천국은 지옥을 피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지옥의 밑창을 뚫고 가야 합니다. 천국을 가기 위해서는 죄의 문제와 고통의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위하여 싸우는 사람을 원하십니다. 세계를 제패하기 위해서는 가장 천한 자리로 내려갈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날의 가난한 토인들을 강대국들은 도우며 그들과 함께 노래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은 하나님을 중심삼고 이러한 방향으로 움직여야 할 때입니다. 여러분은 눈물을 흘리되 자신을 놓고 ‘과거에는 그러했고 현재에는 이러 이러한 놈입니다.’ 하는 회개의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산골짜기에 눈물이 고여 그 위를 배를 타고 건너야 될 정도로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눈물로 시작된 역사이기 때문에 눈물로 해결 지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눈물을 흘려야 됩니다. 역사의 혁명사를 보면 그 혁명의 뒷면에는 반드시 피눈물이 어려 있습니다. 몰리고, 박해당하고, 욕먹고, 매 맞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선생님도 그러한 투쟁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내 슬픔보다 하나님의 슬픔이 수천만 배 크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의 평면적인 슬픔은 하나님의 입체적 슬픔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자신을 몇 번이나 살펴보았습니까? 오늘 있은 공판을 보았겠지만 여러분들은 그 이상의 죄인입니다. 여러분들은 스스로 자신을 비판해야 합니다. 조금도 변명할 수 없는 나입니다. ‘이놈의 입, 이놈의 눈, 이놈의 손, 이놈의 발, 이놈의 몸은 이제까지 다 무엇을 했느냐?’ 하며 비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눈물 골짜기를 지나지 않고는 아버지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우리가 부르는 아버지는 결코 천한 아버지가 아닙니다. 참되고 귀한 아버지이십니다. 이러한 아버지께서는 하늘의 왕자들이 필요하기에 여러분을 모아 수련을 시키는 것입니다. 학박사가 효자 충신이 아니라 외곬으로 나가는 사람이 효자요 충신입니다. 부모의 슬픔을 아는 사람이 효자요, 나라의 슬픔을 아는 사람이 충신입니다.
사실 한국은 여러 면에서 꼴찌입니다. 그것이 거꾸로 돌아서면 첫째가 됩니다. 하나님은 최고의 선진국을 택하여 섭리하는 동시에 가장 후진국을 택하여 섭리하십니다. 여러분이 전도를 나가도 가장 어려운 곳을 찾아가야 합니다. 돌아가는 데서만이 영원이 있을 수 있습니다. 평면적인 직선상에는 영원이 있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기쁨의 왕자가 되는 동시에 슬픔의 왕자가 되어야 합니다. 슬픔의 왕자가 되면 기쁨은 저절로 따라오게 마련입니다.
눈물을 흘려야만 역사적인 인물이 될 수 있고, 우주적인 인물이 될 수 있습니다. 복귀역사는 조건의 역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용서를 받으려면 하나님의 눈물 골짜기를 메워야 합니다.
뜻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을 세워야 합니다.
성신은 말씀의 신이요, 예수는 인격의 신이며, 하나님은 심정의 신이십니다.
중심만을 그리워하는 때는 지났습니다. 개인시대가 지나갔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가정시대를 지나 종족시대로 들어왔기 때문에 중심을 그리워하는 심정이 간절하면 그것을 사탄세계로 돌려야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급에서 나올 때에, 병든 자나 잠자던 자 할 것 없이 모두 때려서라도 이끌고 나왔어야 했습니다. 쓰러져도 광야에 나와서 쓰러져야 했습니다.
제2의 아담인 예수와 아벨, 함, 이삭, 다윗 등 둘째 아들들은 고난의 제물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제물의 입장에서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금년에도 그러했듯이 명년에도 제물의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서울에서도 각자 각자가 책임을 지고 원하는 지역을, 최소한 12지역을 책임져야 합니다.
아버님! 또다시 새로운 달의 초순을 맞이하였사오니 영광을 드러내소서. 면목 없는 저희들이 아버님을 모시게 되니 천만번 죽어도 부족하옵니다.
날이 갈수록 황송함을 느끼게 되고, 저희의 책임이 막중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옵니다.
영인들의 책임도 저희들에게 달려 있음을 아옵니다.
몸 마음 다 드려 영광의 자리에 참여하게 하시고, 싸움터에서 아버지의 책임을 감당하게 하옵소서.
새로이 각오하고 결심하는 이 달이 되게 하옵소서.
나가 싸우는 아들딸들을 보호하시고 그들의 제물로 저희들을 세우소서.
그들의 개척적인 노력에 아버지께서 힘을 가해 주시옵소서. 아멘.
강원도는 산골 지방입니다. 한국의 자랑이 있다면 좋은 산수를 가지고 있다는 점일 것입니다. 이곳에는 딴 지역보다도 맑은 공기와 아름다운 산수가 있어서 좋습니다. 비록 딴 지구, 지역에 비해 인위적인 것은 뒤떨어졌더라도 자연환경에서 보충해 주기 때문에 오히려 복된 환경을 갖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강원지구 인도자 수양회에 참석하기 위해 사방에서 모여 왔으나 바라보는 목표는 한 가지입니다. 다시 한번 마음을 결속해서 나아가야 합니다.
때는 결실의 가을절기입니다. 여러분도 씨가 되어 심겨지기를 바라야 합니다. 이것이 여러분이 가야 할 길입니다. 심는 것은 주인이 심어야 합니다. 또 여러분도 주인의 입장에서 심어야 합니다. 심부름꾼을 통하지 않고 친히 심고 가꾸고 거두어야 합니다. 생명의 씨를 뿌리는 데도 종을 시켜서 뿌려서는 안 됩니다.
역사를 통해 닦아진 터 위에 아들이 왔지만 완전한 결실을 거두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오셔서 뿌리고 거두시려는 것입니다. 종이나 아들딸이 일하는 때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일하시는 때입니다. 아버지께서 거둬들여야 합니다.
나라는 존재는 지극히 미미하지만 아버지께서 명령하셨으니 내 것이 아니요, 아버지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제1, 제2, 제3이스라엘의 조상이 돼야 합니다. 아버지를 대신할 여러분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으니, 아버지께서 수고하셨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여러분을 위해 우리를 대신 존재로 세우신 것은 우리에게 소망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영원히 지니기 위해서는 아버지와 심정 기준이 일치해야 합니다.
소망의 심정을 품고 수고해 나오시는 아버지께서는 영원한 아들딸을 갖고자 하십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배우는 것이 원리 말씀입니다.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는 아버지의 실체가 되어야 합니다. 원리 말씀에는 아버지의 심정이 들어 있습니다. 아버지는 말씀을 유언으로 해 나오셨습니다. 이것이 역사노정입니다.
지금까지 이 땅은 하늘의 소망과 심정을 통할 수 있는 말씀을 갖지 못했으나 여러분은 이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말씀이 내 것에 그칠 것이 아니라 만민의 것, 영원한 것으로 해야 합니다. 하늘땅을 통일하여 전체의 목적이 완성될 때까지 해야 합니다. 이 말씀을 하늘땅 끝까지 전파하고 그 다음 아버지 앞에 보고해야 하고, 보고의 성과에 준하여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행복한 자는 돈이나 권세나 명예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 어떤 주권자가 귀한 것을 맡기는 것과 같이 유업을 맡을 수 있는 자가 행복합니다.
여러분에게는 종족의 흥망이 걸려 있습니다. 여러분은 승리자가 되기를 원하고 패망자가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이것을 느끼지 않으면 안 됩니다. 승리하기 전엔 죽어도 안 됩니다. 어떻게 하든지 죽지 말고 맡은 바의 민족적인 책임이라도 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늘의 기준입니다. 이 말씀은 세계를 주고도 바꿀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을 받은 데 대해 천만번 쓰러지더라도 감사하는 느낌이 있어야 합니다. 어차피 여러분은 한 번은 죽습니다. 이 말씀을 어느 정도만큼 귀하게 받았습니까? 혼자서도 7개국 이상의 사람들을 책임져야 합니다. 나아가 전체가 합동해서 전세계를 책임져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과 실체와 심정이 하나되면 하늘땅도 천국도 아버지도 다 우리의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고생하시는 선(線)과 더불어 고생해야 합니다. 완전 평행선이라야 합니다. 조금만 틀려도 배반하는 때가 옵니다. 90도가 안 되고 85도만 돼도 이 마이너스 5도가 자꾸 커져서 부딪쳐서 깨집니다. 90도의 싸움을 해야 합니다. 그런 싸움을 한 대표적인 분이 예수님입니다.
아직까지의 여러분은 온전한 상태가 아닙니다. 지금의 나의 가치보다 몇천 만 배 더 큰 가치를 지닌 나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것은 아버지와 같은 심정으로 수고함으로써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6천년 동안 아버님께서도 가 보시지 못한 제일 치열한 전투 마당에 저를 몰아넣어 주시옵소서.’ 해야 합니다.
이것을 가지고 거꾸로 탕감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이만큼 고생했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이것을 어떻게 당하셨을까! 아버지의 피땀, 비통한 사실, 이것을 찾아내야 합니다. 아버지를 찾고 형제, 가정, 국가, 하늘땅을 찾아야 합니다.
도의 길은 아버지 찾아가는 길입니다. 슬픈 아버지를 찾아가는 길이니 기쁜 길을 더듬어 갈 수 없습니다. 개인을 찾기 위한 노아는 뿌리요, 아브라함은 가지요, 야곱은 꽃이었으나 피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꽃으로 필 수 있는 존재였으나 폈다 떨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잎이 된 제2이스라엘, 기독교가 겨울철이 되니 앙상한 가지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를 새로운 나무에 접붙이는 데는 내 아버지, 내 어머니, 내 형제, 내 처자로부터 끊어지는 아픔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소유하는 민족은 세계를 지배합니다. 하나님의 종손이기 때문입니다. 싫건 좋건 이삭은 사망세계의 대표자이며 야곱은 생명세계의 대표자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선생님의 한은 자신이 풀 수 없습니다. 아들딸이 풀어 드려야 합니다.
아버지가 좋아해야 할 얼굴이요 몸입니다. 나의 모든 것이 아버지의 것입니다. 동계 계몽 때에 잘하면 여름 전도 때 실패한 것을 탕감복귀할 수 있습니다. 말씀의 실체(인격자), 즉 심정을 중심한 실체가 되어 나아가면 반드시 승리하게 됩니다.
보여 주고 싶고 남기고 싶고 말하고 싶은 것은 자녀의 3대 소원이요, 보고 싶고 받고 싶고 듣고 싶은 것은 아버지의 3대 소원입니다.
황무지에 심어도 싹을 틔울 수 있는 생명력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가을이 되더라도 시드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선두에서 싸우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선두에 서면 사탄과 하나님이 직접 싸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닦으신 기반 위에서 인간이 싸워야 합니다. 최후의 길은 홀로 싸우는 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 때까지의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해골 곳에 묻힌 격이 되고 말았습니다. 600만 명이 학살된 것도 예수를 죽인 연고입니다.
애급에서 나온 이스라엘 민족의 목표는 광야가 아니라 가나안 입성이었습니다. 60만이 다 쓰러져도 가나안에 들어가야 했던 것입니다.
나는 흥남 감옥에서 가마니에 비료를 넣는 일을 했었습니다. 하나님의 심정의 비료가 될 사람은 누구입니까?
아버지와 맹세한 기준은 누구도 빼앗지 못합니다. ‘죽어서 후퇴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했습니다. ‘사탄의 혈통을 받은 피와 살은 다 떨어져라.’ 그러나 뼈는 남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암모니아! 나는 암모니아를 어머니로 생각하겠습니다. 생명을 구원할 어머니로.’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앞으로는 세계적인 투쟁의 시기가 옵니다. 오늘 책임 못하는 사람을 내일 무엇에다 쓸 것인가! 온 길이 아깝습니다. 한민족을 붙들고 뜻을 이루지 못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제는 정리할 때가 왔습니다. 세계 인류는 모두 불행합니다. 인간처럼 불쌍한 존재는 없습니다. 악과 싸워 승리하지 않으면 행복은 있을 수 없습니다. 혹 행복이 오더라도 그것을 느낄 수 없습니다. 행복한 사람이 되려면 공의를 위해 싸우고 하나님 대신 주어야 합니다.
도의 길은 주는 길입니다. 가정부터 세계, 하늘 끝까지 주어 가지고 돌아와야 합니다. 도인들은 남을 위해 자기 자식들을 원수의 종살이를 시키기도 합니다. 심정을 걸고 창조물 전체에게 주어서 그들과 인연맺어야 합니다.
열을 주고 백을 거두려는 자는 망합니다. 그런 사람은 심정을 중심한 세계에 못 들어갑니다. 하늘 세계는 주는 세계입니다. 물질이 문제가 아닙니다. 적선은 곧 주는 것입니다. 줄 때에는 내 마음에 물질을 플러스해서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갖고 주는 것은 누구도 빼앗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구약시대에는 종의 입장에서 주셨고 신약시대에는 형제의 입장에서 주셨습니다. 이제는 부모의 입장에서 주셔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이 부모의 입장에서 주시는 것을 우리가 받았으니 우리도 부모의 입장에서 부모의 심정으로 주어야 합니다. 이러한 사람이 되면 하나님은 그로부터 떠나실 수 없는 것입니다.
주는 데는 원수를 치우고 주어야 하니 싸움이 있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주려 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몰라서는 안 됩니다. 주기 위하여 6천년간 싸워 오신 하나님의 심정을 알아야 합니다.
행복한 사람은 주고 싶을 때 줄 수 있고 받고 싶을 때 받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불행한 사람은 줄래야 줄 수 없고 받을래야 받을 수도 없는 사람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하나님은 불행하신 분입니다.
심판은 마음을 중심하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타락으로 인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오직 하나 남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탄의 세력으로 겹겹이 둘러싸인 마음뿐입니다. 세계의 모든 것은 사탄이 점령하였습니다.
나의 가장 큰 원수는 몸입니다. 이 몸이 마음의 길을 막고 있습니다. 우리의 아버지는 못난 아버지가 아닙니다. 충신 효자 열녀를 거느릴 수 있는 아버지입니다.
목적을 남겨 놓고 죽은 자는 아버지 앞에 효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기도해야 됩니다.
부모를 빼앗기고 천지를 빼앗기고도 빼앗아 간 자를 몰라보았는가? 이스라엘 민족은 망하면서도 망하는 줄을 몰랐습니다. 충성을 해도 그것을 알아 줄 수 있는 나라가 있어야 합니다.
나는 지금도 마음 세계의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6천년간의 수고를 6년으로 탕감해도 그 모양은 같아야 합니다. 가인, 아벨, 노아, 아브라함, 모세에게 하고 싶었던 아버지의 말씀이 무엇일까? 노아, 아브라함, 모세로 태어나지 못한 것이 분합니다.
사람들이야 알든 모르든 생명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생명을 걸고 싸워서 찾은 말씀입니다. 한민족으로 태어나 40평생을 싸워온 것이 분합니다.
용매도를 가기 위해 갯물길을 건널 때, 이 길을 못가면 하늘이 망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여기서 쓰러지면 아버지는 어디로 갈 것인가 하는 생각으로 가 보십시오. 못 갈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나는 어차피 갑니다. 여러분이 지쳐도 갑니다. 사탄한테 잃어버린 것은 사탄 앞에 가야 찾아올 수 있는 것입니다. 7년 대환난이라 했으니 적어도 7년은 헤매어야 합니다. 나로 인하여 축복받을 수 있는 사람 셋 이상을 세워야 합니다. 이런 고비를 넘어갈 때에는 아버지의 심정과의 일치점을 찾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복귀적인 심정은 알아도 시대적인 심정은 모릅니다. 시대적인 심정 앞에서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오늘의 선서> 하늘과 땅과 인류와 우주와 참부모님 앞에 책임을 다하여 승리의 가치를 찾아 세울 것을 맹세하나이다. 아멘.
40일 동안 불편스러운 장소에서 별 사고 없이 지내고, 오늘 수료식을 갖게 된 것을 선생님으로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이제는 자신들이 가야 할 길과 책임지고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했을 줄 믿습니다.
인간은 대충 세 가지 유형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선을 거역하며 선과 반대 방향으로 가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이도저도 아닌 완충지대와 같은 길을 가는 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선의 목적을 지향하면서 그 책임을 지겠다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선과 반대되는 길을 가는 사람, 무해무득한 길을 가는 사람, 선의 목적을 위하여 생명까지 바치는 길을 가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지금 어떠한 길을 걷고 있는가? 과거에는 어떠했고, 현재는 어떠하며, 이제부터는 어떠한 길을 가야 할 것인가? 선의 목적을 위하여 생명을 바치는 길로 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어느 한때가 오면 장송곡을 불러서 이 인간세계에 있는 악의 요소들을 추방시켜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지극히 어려운 길로 들어왔습니다. 일단 들어와서 알 것을 알고 보면 아니 갈래야 아니 갈 수 없는 길인 것을 스스로 알게 될 것입니다. 이 길은 중간 상태의 길도 아니고 선과 반대되는 길도 아닙니다. 절대자와 인연을 맺어 나가야 할 길임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종교적으로 보면 악을 지향하는 반역의 길, 다만 양심적인 길을 표방하는 길, 그리고 최고의 선을 지향하는 길이 있습니다. 여기서 양심적으로 사는 것, 곧 인륜도덕을 기준하여 사는 것은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과 다릅니다. 과거 역사를 통하여 볼 때 악의 길도 있었고, 양심에 입각한 인륜 도덕의 길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은 우리로 하여금 인습에 젖어서 절대적인 길을 가지 못하게 합니다. 과거의 습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합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습성들을 과감히 잘라 버리고 나서지 않으면 안 됩니다.
어차피 인간은 어디론가 가야 하는데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할 것인가? 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을 위하고 절대자를 위하는 길을 가야 합니다. 이것은 천지가 변한다 해도 결코 변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아직까지 자신 하나의 문제에서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몸은 악에 가깝고 마음은 양심에 가깝습니다.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은 과연 하나님이 계시는가 하고 의심하는 입장에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망상적인 존재가 아니라 실재하시고 활동하시는 분이십니다.
세 갈래 길이 있는데, 이 가운데 첫 발걸음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물론 사람은 하나님을 위하고 절대자를 위하는 길로 가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위하는 길을 가는 데는 어떻게 가야 할 것인가? 나라를 위하는 데도 여러 분야가 있듯이, 하늘 길을 가는 데도 여러 갈래의 길이 있습니다. 종의 길도 있고, 양자의 길도 있고, 자녀의 길도 있으며, 부모의 길도 있습니다. 그러면 어떠한 길로 가야 할 것인가? 좀더 고상하게, 좀더 가치 있게 가고자 한다면 어떠한 입장을 취해야 할 것인가? 종의 입장을 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희생을 각오하고 나아가는 데는 종의 입장에서 가고 싶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도 역시 그렇게 가라고 권고하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형제의 입장? 그것도 아닙니다. 양자의 입장? 이것 역시 하나님도, 여러분 자신도 원치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떠한 입장에서 가기를 바라실 것인가? 적어도 아들딸의 입장에서 가기를 바라실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원하는 바일 것입니다. 오늘 떠나는 여러분들은 ‘나는 아들딸의 입장에서 가겠다.’는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종도 좋지만 이왕이면 아들딸의 입장에서 가야 하겠습니다. 혹시 하나님께서 참람(僭濫)하다고 하시지나 않을까 하고 걱정하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내 아들, 내 딸아! 잘 싸워라.’ 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그 길을 가는 아들딸의 입장은 어떠한가? 물론 종의 입장이나 형제의 입장보다 어렵습니다. 하나님은 아들딸의 입장에서 가는 데도 그저 아들딸로서만이 아니라 효자 효녀로서 가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인류를 지극히 사랑하고 싶어하시는 하나님이기에 인간들을 아들딸로서 오라고 하시는 것은 당연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전권을 행사하는 입장에 서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이라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대신자로서 오라고 권고하실 것입니다. 태평가를 부를 수 있는 입장에서 아들딸을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사탄과 싸워야 하는 입장에 계시는 하나님이기에 효자 효녀를 지나 당신 대신 책임져 줄 수 있는 자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늘은 사랑을 받으려는 자녀보다 하나님 대신 책임을 지려 하는 자를 더욱 바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해서라도 사탄을 굴복시킬 대신자가 필요하십니다. 6천 년 동안 하나님의 세계를 농락하고 유린한 사탄과 싸워 이겨서 호령할 수 있고, 심판할 수 있는 대신자를 하나님께서는 고대하고 계십니다.
이제 떠나는 수련생 여러분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종과 양자의 입장을 지나 적어도 아들딸의 입장에서 가라는 것입니다. 아들딸이 되어야만 아버지의 영광의 자리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우리 통일교인은 지금까지 어려운 길을 걸어왔지만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최후까지 남아지는 사람이 아버지의 대신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들딸로서, 그리고 대신자로서 이 나라 삼천만 겨레를 위해서 가라고 목이 아프도록 울부짖고 계십니다. 곳곳마다 아버지의 대신자, 아버지의 사랑받는 아들딸을 보내고 싶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너는 내 대신자요, 아들딸이다.’ 할 수 있는, 사탄을 물리치고 하늘의 참사랑을 받는 자들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가는 길은 호화찬란한 길이 아니라 하나님 대신 죽어야 할 길입니다. 하늘 아버지를 대신하여 죽음의 길을 가야 할 입장에 있는 여러분이기에 아들딸이지만 죽음의 길을 놓고 싸워 나가야 합니다. 이 세상은 선과 악의 전쟁터입니다. 줄잡아 6천년 동안 사탄이 하나님을 골탕먹여 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대신하여 책임지고 싸움의 길을 가야 합니다. 여러분은 종이 아닙니다. 그러니 자기 중심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사탄의 도성과 원수의 장막을 쳐부수기 위해 싸워야 합니다. 그러니 단단히 무장해야 합니다.
하늘과 땅을 책임지고 처리할 수 있는 아버지의 아들딸이요, 대신자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이제까지 그러한 아들딸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불쌍한 하나님입니다. 이러한 한스러운 하나님의 사정을 알았을진대 이제부터라도 여러분은 생명을 걸어 놓고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사탄과 싸우는 전투장에 서 있습니다. 굶어야 할 때 굶고, 헐벗어야 할 때 헐벗고, 쫓기고 몰려야 할 때 쫓기고 몰리면서라도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어야 합니다. 아직도 하나님은 태평가를 부르시며 내 아들아, 내 딸아! 할 수 있는 입장에 계시지 못합니다. 그러니 그러한 자리에 계시게 될 때까지 싸워야 합니다. 삼천리 강산 방방곡곡이 하나님의 아들딸로 꽉 차 있으면 하나님께서 마음놓고 명령하실 수 있을 텐데 그렇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딸이나 대신자로서 하나님의 명령을 받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그러한 아들딸이, 하나님의 대신자가 나오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대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아버지의 대신자가 못 되겠으면 아들딸이라도 되고, 아들딸이 못 되겠으면 형제라도 되고, 형제도 못 되겠으면 종이라도 되어야 합니다. 그것도 못 되면 차리리 죽는 편이 낫습니다. 선조들의 잘못으로 이스라엘 민족은 지금까지 유리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수습이 될지 안 될지 모르는 실정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는 통일교회나 교파를 확장시키자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교회의 간판보다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아들딸이 많아야 합니다. 간판이 많아 봐야 무엇에 쓰고 구더기 같은 사람이 많아 봐야 무엇에 쓰겠습니까?
우리는 어서 완충지대 같고 중간 단계 같은 입장을 벗어나야 합니다. 그러는 데는 양심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심정을 가지고서야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고 대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나가서 싸우는 도중에 어떠한 어려움이 닥쳐도 쓰러지지 마십시오. 그리고 울 때는 혼자 울지 마십시오. 울어도 하나님의 아들딸로서 ‘아버지! 이 자식이 부족하여 아버지의 심려를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아버지의 아들딸이라는 이름이 부끄럽습니다.’ 하며 울어야 합니다. 결코 비굴하게 울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 혹은 딸로서 눈물을 흘리면 하나님 아버지도 눈물을 흘리실 것을 알고 눈물을 흘려도 값비싼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어떤 고난에도 ‘아버지시여! 염려하지 마소서. 이까짓 것이야 문제없습니다.’ 하는 기백이 살아 있어야 합니다.
먹을 것이 없어 며칠씩 굶고, 잠자리가 없어 밖에서 자고, 모둠매 한 번 쯤 맞는 것이 문제입니까? 옳지 못한 것은 사정없이 들이쳐야 합니다. 힘으로 안 되면 몸을 던져서라도 그들을 굴복시켜야 합니다. 사탄이 올라가면 하늘은 내려오면서 섭리의 일로를 개척해 나온 것이 지금까지의 6천년 역사입니다. 우리의 이념을 사탄 앞에 내놓고 ‘삼켜라!’ 했는데 못 삼키고 걸리면 해결됩니다.
우리 통일교회의 이념은 누구도 삼키지 못합니다. 공산주의도 못 삼킵니다. 어떠한 주의도 삼키지 못합니다. 못 삼키면 그만입니다. 하나님을 어느 누가 삼킬 수 있겠습니까? 사실 역사를 통해 보면 하나님은 지지리 못난 하나님 같습니다. 노상 밟혀만 오셨습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사탄을 굴복 시키고야 말 것입니다.
우리 통일교인은 매를 맞고서라도 큽시다. 크는 데는 올바로 크고 똑바로 커야 합니다. 좋은 소나무는 가지도 줄기도 똑바로 뻗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옆으로 뻗지 말고 곧바로 뻗어 올라갑시다. 나무를 유용한 재목으로 쓰기 위해 다듬을 때 곁가지는 잘라 버립니다. 이것을 알고 멋지게 싸우세요. 자신 있습니까?
내가 원하는 것은 이번에 여러분이 전도 나갔을 때 사탄이 몰려와서 여러분의 턱을 쳐 갈겼으면 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아이구!’ 하는 비명을 지르고 쓰러지면 안 됩니다. 결코 후퇴해서는 안 됩니다. 결심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딸로 가는 데는 사탄도 못 당합니다. 여러분이 가는 데는 오직 백전백승이 있을 따름입니다. 이런 승리적인 길을 가지 않으면 아버지의 대신자가 될 수 없습니다. 아버지의 아들딸로서 또는 대신자로서 얼마만큼 싸웠느냐, 아니면 형제로서 혹은 종으로서 얼마만큼 싸웠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타락한 조상의 후손인 우리 인간에게는 개인적인 골고다가 있고, 가정적인 골고다가 있으며, 사회적이며 국가적인 골고다, 그리고 세계적인 골고다가 있습니다. 또 영적인 골고다와 육적인 골고다가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골고다를 넘어야 비로소 ‘너희는 하나님의 아들딸이다. 그러니 영광을 받으라.’는 말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까지 기성교회에서는 거룩 거룩만 찾고 ‘오오, 하나님이시여! 영광 받으시옵소서.’ 했지만 아직까지 하나님은 영광을 받아 보지 못했습니다. 유구한 역사를 통해 하나님께서 보낸 수많은 선지자와 성도들도 모조리 죽고, 인간의 죄를 씻기 위해 성신도 고생하고 있고, 예수님도 기도하고 계시는데 영광은 무슨 영광입니까? 유사 이래 지금까지 최고의 고통의 대왕이 바로 하나님이요, 가장 분하고 가장 억울한 책임자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도 이러한 하나님같이 분하고 억울한 입장에 있습니까? 그런 입장에서 아버지를 부르는 자가 몇이나 됩니까?
타락한 아담 해와! 내가 그 당시에 있었으면 가만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배반한 선조들을 불러내어 담판을 짓고 심판하겠다는 하늘의 효자 효녀, 열남 열녀가 지금까지 없었습니다. 싸우다 천번 만번 쓰러지더라도 다시 일어나 싸우는 자녀들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아들딸을 갖지 못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정말 불쌍하신 분입니다. 아직까지도 원한에 사무쳐 계십니다. 이것을 알고 이 원한을 풀기 위해 싸우다가 죽겠다는 효자 효녀가 나온다면 사탄 주권하의 이 세계는 깨져 나갈 것입니다. 여러분, 살 바에는 멋지게 살고, 멋지게 싸우고, 멋지게 죽읍시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니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 아버지의 원이라면 지옥 밑창이라도 저는 가겠습니다.’ 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아이고, 너에게는 꼼짝할 수 없구나.’ 하실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 비결은 오직 충성밖에 없습니다. 만일 예수님 이상 하늘에 충성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예수의 형제가 될 수 있습니다. 성경에도 예수께서 ‘내가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않고 형제라 하리라’고 하신 것을 여러분은 알 것입니다.
아까 말한 세 갈래의 길에서 여러분은 중간적인 사람들이 가는 완충지대로도 가지 말고, 하나님과 반대의 길로도 가지 마십시오. 양심적인 농사꾼은 주인을 알아봅니다. 그러나 알기만 하면 뭘 합니까? 알았으면 보답을 해야지….
어떤 관념이 한번 머리 속에 자리잡히면 빼내기 힘듭니다. 그래서 종교가 필요한 것입니다. 종교가 없는 곳은 망합니다. 우리는 절대자인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딸입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사랑을 짓밟은 간부(奸夫)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아버지는 하나님이신데, 사탄이 아버지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요한복음 8장 44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려 한다.’라고 책망하셨던 것입니다. 사탄의 피를 받은 분통한 사실을 알았으면 분한 마음이 솟구쳐 내 몸을 칼로 찔러 더러운 거짓 피를 빼 버리고 싶은 의협심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까? ‘이놈의 고깃덩이!’ 하며 몸을 치면서 분통해하는 사람이 하늘의 충신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도 금식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도인들은 몸을 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원수인 사탄이 하늘땅을 더럽히고 참사람, 참가정, 참민족, 참세계를 망쳐 놓고 나까지 빼앗아 가려 합니다.
이러한 사탄을 책임지는 구주가 있다면 내 모든 것을 그에게 바칠 수 있어야 합니다. 죄의 괴수는 사탄입니다. 이 사탄을 때려잡아야 합니다. 이제는 사탄에 대한 복수전을 감행해야 합니다. 지금은 유격전을 벌여야 할 때입니다. 통일교인은 멋진 투사가 되어야 합니다. 하늘 아버지의 아들딸이 되고 대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앞서 말한 세 가지 길 가운데 어떠한 길로 갈 것이냐 하는 것은 여러분의 결심 여하에 달렸습니다. 여러분은 능히 자기의 갈 길을 잘 갈 수 있어야 합니다.
‘아버지시여, 제게로 오시옵소서.’ 할 수 있는 자녀가 많이 나와야 합니다. 오시고 싶어도 자녀가 없어 못 오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이제까지 사탄 때문에 못 오셨던 아버지시여! 어서 오시옵소서. 얼마나 고생하셨나이까? 오셔서 영광 받으시옵소서.’ 할 수 있는 승리의 왕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왕자로서 하나님 앞에 경배를 드릴 수 있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오실 길을 닦고 보금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아버지여, 저희와 의논하시고 저희를 지휘해 주시옵소서.’ 하고 여러분은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아름다운 삼천리 금수강산을 무한히 찾아오고 싶으셨으나 사탄 때문에 못 오셨습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천국을 만들어 놓고 ‘어서 오시옵소서.’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고 싶어요?「예.」그러면 그렇게 합시다.
여러분, 이것만은 잊지 마십시오. 세 갈래 길이 있다는 것,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중심한 선의 세계를 책임지는 길을 가야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선생님도 이것을 알았기 때문에 지금까지 이 놀음을 해 왔습니다. 나는 결코 그냥 죽지 않습니다. 설사 내가 죽는다 해도 곁가지가 뻗고 새 순이 돋아나 뜻은 이루어지고야 말 것입니다. 그러니 이 뜻길을 가는 데 있어서 선두에 서기를 조금도 주저하지 맙시다.
지도자는 불쌍하다는 공인을 받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자신을 과대평가하지 말아야 합니다.
근로자를 만나도 인류의 노동자를 대하는 심정으로 대해야 합니다.
심정의 빚을 지지 말아야 해요. 충성을 충성으로 갚지 못하면 빚을 지는 것입니다.
가르치는 자는 또한 배우는 자의 심정을 가져야 합니다. 자기가 한 말을 책임지고 배우는 입장에 서야 합니다.
우리는 세 부모를 모셔야 합니다. 마음의 부모는 하나님이요, 몸의 부모는 땅이며, 육친의 부모는 친부모입니다. 땅이 부모이므로 땅도 부모의 심정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땅은 우리를 낳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무한한 천대를 받으면서도 불평하지 않습니다. 그에 감사할 줄 몰라도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밟아도 침을 뱉어도 오히려 그것을 거름 삼아 우리에게 그 무엇을 돌려줍니다.
땅은 곡식을 한 알 주면 수백 알을 돌려줍니다. 아름다운 꽃을 피워냅니다. 땅의 심정은 영원히 변함이 없습니다. 그리고 속임이 없습니다.
앞으로 1일을 전후한 3일간은 성별기간으로 합니다. 삼위기대끼리는 늘 만나야 하며 서로 숨김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서로 고백서를 작성하여 전식구들 앞에 보고해야 합니다. 이 계몽 기간에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중심존재가 되려면 제물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제물 되는 사람이 세워지면 그를 협조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드시 치는 사람이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어느 한 지역에 그런 존재를 세우기 위해서도 그 지역을 위해 제물 되는 사람과 협조하는 사람을 세우게 되고, 그런 후에는 제물 되는 사람을 치는 역사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공산국가는 치는 국가이고 한국은 제물 국가입니다. 제물은 삼천만 민족(성소)과 기독교(지성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책임을 다 못했기 때문에 제물 되는 사람을 이 민족 중에서 다시 세우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이 성소와 지성소의 사명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사명을 해야 할 사람으로 택함받았습니다.
제물은 자아의 관념이 없습니다. 제물은 성소와 지성소를 거쳐 제사장이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입니다. 제물은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제물은 수천년 역사의 청산자입니다. 선생님은 지금까지 제물적인 입장에서 책임을 해 나왔습니다. 여러분들은 제물 된 자를 부모의 입장에서 붙들든가, 업든가, 아니면 그에게 붙들리든가, 업히든가 해서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해산된 사람들은 부활된 제물입니다. 제물적인 조건을 벗어나는 사람이나 자기 중심한 감정으로는 자기의 아들딸들을 책망하지 못합니다. 제물 될 양은 그 먹이까지 성별해야 하는데 그것은 제물 행사가 지나야 끝납니다.
선생님은 여러분을 위해 기도합니다. 개인적으로 볼 때 맞을 사람이 있기에. 그러므로 고비를 넘어갈 때마다 여러분이 제물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기를 볼 때, 이 더러운 눈으로 천진난만한 아기를 바라볼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영광과 두려움을 느껴야 합니다.
복귀노정은 밑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맞고 빼앗는 것입니다. 맞는다는 것은 형편없이 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존재 가치를 잃어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자기 본성(本性) 이하로 내려가면 사탄이 칠 수 없습니다. 자기의 본성 이하로 내려간 자는 하늘이 긍휼히 보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을 치게 되면 하늘이 대책을 세워 주십니다.
만우주를 복귀하기 위해서는 복을 복귀해야 합니다. 복은 공적인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세계적인 공적 기준에서 제물 되어야 합니다. 선생님은 거지를 보아도 동정을 아니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그들의 아기들을 동정하여 그들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 주려 합니다.
불쌍한 자를 100퍼센트 알아주는 것이 하늘입니다. 선생님도 그런 사람에게 긍휼의 마음이 일어납니다. 아이들로 인하여 만민의 죄를 풀어 주는 새 길이 열립니다. 여러분이 그러한 아이들의 부모가 되려면 먼저 부활되어야 합니다.
금년에는 선생님이 기도를 많이 할 것입니다. 이 자리에서 하는 말은 책임을 집니다. 여러분 중 3인 이상이 이북에 가야 합니다. 미국에도 3인이 가 있습니다. 살겠다는 생각을 말고 형장에 죽으러 간다는 입장에서 가야 합니다.
예수의 죽음은 짧은 기간에 이루어졌습니다. 한 점에서 죽음을 청산했지만 기독교 신도는 오랜 기간의 거리를 두고 이런 과정을 거쳐왔습니다. 기독교 신도는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해야 합니다. 축복받은 자는 선생님이 처단해야 합니다.
지성소, 성소가 없어져야 합니다. 앞으로는 영력이 많아지게 되고 영이 밝아지게 됩니다. 거기에 오점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공적인 입장을 떠나 생활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를 지키는 데 있어서는 축복받은 자끼리 삼위기대를 편성하여 지켜야 하며, 잠을 자서는 안 됩니다. 사탄이 주관하는 밤까지 주관하기 위하여 철야하며 지켜야 합니다. 교회를 비워서는 안 됩니다. 사방으로 휘저어도 안심할 수 있을 때까지 그래야 합니다. 그러니 암호 훈련을 해야 합니다. 전국에 있는 식구들은 3일에서 7일 이내에 서로 연락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암호는 사탄이 몰라야 합니다. 이것으로 사탄을 심판해야 합니다. 식구가 70명, 120명이 되는 곳에서는 밤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졸아도 안 됩니다. 3년이 지난 후에는 절대로 밤이 있게 해서는 안 됩니다.
앞으로 집회는 밤에 할 것입니다. 어둠의 세계를 헤쳐 나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일을 하기 위해선 간절한 심정을 가져야 합니다. 공적인 일을 책임지고 나서는 것이 그 얼마나 귀한 일인가! 이번 동원은 전체 동원입니다. 특별한 사정이 있는 가정은 부부 중 한 사람이라도 나가야 합니다.
여러분은 선의 정복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제부터는 이웃을 전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목적은 사탄을 무찌르는 데 있습니다. 그러니 자기가 있는 곳에서 악질분자를 적발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전부 정보원들입니다. 정보를 수집하려니 두 세계의 행위를 해야 합니다.
축복받은 자들은 지파 편성을 해야 합니다. 지파 편성은 투표로 합니다. 이 지파에 들어가는 사람들 앞에 심정적인 빚을 져서는 안 됩니다. 심정적인 빚은 심정으로만 갚을 수 있는 것입니다.
12수는 조상 수인 동시에 4수 중심한 복귀적인 수입니다. 누가 열녀가 되고 효자가 되는가? 자기 지파가 인정하고 자기 종족이 인정하는 자이어야 합니다.
각 가정을 대표하여 세계적인 전도사가 3인은 나와야 합니다. 그리고 심정적으로 충성할 수 있는 사람을 세워야 합니다. 제1가정은 영계를 해방해야 합니다. 이 시대는 3시대의 결합 시대이므로 셋이 하나되는 입장에 서야 합니다. 12인 중 한 사람씩 뽑아서라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즉 세계 앞에 자랑 할 수 있는 효자 효녀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절대복종해야 합니다. 심정을 중심한 이외의 것에 대하여 남편에게 명령하면 안 됩니다. 아내는 남편이 잘못되더라도 운명을 같이해야 합니다.
앞으로는 심정 문제에 있어서만이 죄가 형성됩니다. 그 죄를 심판할 때에는 부락을 걸어 놓고 심판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심판자로 택함받았습니다. 누구든지 심정적으로 지도하는 사람에게는 절대복종해야 합니다. 그리고 공적인 입장에서 명령하는 사람에게도 절대복종해야 합니다. 사적으로 움직이는 사람을 나는 제일 싫어합니다. 공적인 것을 침해했을 때는 공회(公會)에서 그것을 판결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궁정 법에 맞추어서 살아야 합니다.
선생님은 사탄과 싸우던 기준에서 영계를 열어 놓고 다시 그 기준에서 여러분을 대할 때가 옵니다. 국가에 죄인이 많아도 헌법은 남아져야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축복도 절대적이기 때문에 아무리 개인은 무너져도 그 축복의 가치는 절대로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성진이까지도 그 축복의 조건을 세우려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손끝 하나에도 심정이 사무쳐 있어야 합니다. 타락이 없었으면 3단계를 일시에 완성했을 것입니다. 몸을 세우고 하나님의 심정을 불어넣으려 한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축복해 준 것은 종족으로서 해 준 것입니다. 여러분은 한 나라를 대신해서 축복받았습니다. 3차의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실족해도 그것이 아이들에게 영향이 미쳐져서는 안 되기 때문에 아이들은 선생님이 축복해야 합니다. 제2단계를 넘어서야 선생님이 안심할 수 있습니다.
공법에 의한 심판은 자기부터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자기 가정에서부터 심판해야 합니다. 책임을 못하면 심판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명령이 내리면 그 명령은 찬 서리와 같이 엄격해야 합니다.
이제는 여러분에게 선생님이 걸어온 길과 영적 세계의 비법을 가르쳐 주려 합니다. 여러분은 기도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 앞에 플러스(+)가 되어야 합니다. 심정적인 일은 한국에 있는 여러분이 하고 선생님은 세계적인 일을 맡으려 합니다.
앞으로는 공개적인 명령이 아니고 계통적인 명령을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계통을 잃어버리면 안 됩니다. 조직을 떠나서는 생명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전후(식구) 좌우(삼위기대) 상하(부모)의 관계를 잃어버리면 존재 가치가 없어집니다. 연로한 사람은 양자라도 세워야 합니다. 양자는 삼위기대의 자식으로 세웁니다.
부부를 걸어 평해서는 안 됩니다. 자식이 잘못할 때도 부모를 평해서는 안 됩니다. 절대로 상대적인 인연을 침범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선진국가들의 민주주의는 이 기준에 맞추어야 합니다. 물론 관심은 가져야 하지만 침범해서는 안 됩니다. 일주일에 한 번은 무엇을 주어도 주어야 합니다. 줄 것이 없으면 기도라도 해 주어야 합니다.
각자는 죽기 전에 3국인과 인연맺을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인연맺어야 합니다. 원래의 뜻은 이렇게 갈라져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헤어져 사는 원한을 원수에 대한 적개심으로 돌려 원수를 물리쳐야 합니다.
희진의 잘못은 선생님께 보고해야 합니다. 모두 관심을 갖고 길러야 합니다. 그래야 여러분도 좋은 자녀를 낳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선생님의 가정을 인정해야 하며, 그 가치를 아는 입장에서 자기 가정을 세워야 합니다. 하늘이 소망하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잘못하면 그 영향이 여러분의 후손에까지 미치게 됩니다. 희진은 사탄의 총공격 대상입니다. 그러므로 학교 갈 때도 데리고 다녀야 합니다.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은 우리를 중심하고 하는 말입니다.
아침에 일어나 쉬는 숨의 첫 것도 아버지의 것으로 쉬어야 합니다. 아버지는 아버지의 몸을 닮은 사람, 아버지의 심정을 닮은 자식에게 유업을 상속하십니다. 외형적인 형을 닮은 자식, 양심 면에서 닮은 자식, 심정을 닮은 자식이 있는데 이 셋을 다 닮은 자식이 제일입니다.
아버지의 영원한 유업은 심정입니다. 심정을 상속하는 것이 축복입니다. 부부가 의좋게 가는 것을 보고 환영하고 기뻐하는 민족성을 길러야 합니다.
좋은 일이 있을 때는 3인 이상, 3국 이상, 3세상 이상에 줄 수 있는 심정을 가져야 합니다. 세상에서 이런 인연을 맺지 않으면 영계에 가서도 그런 입장에 설 수 없습니다. 물을 마셔도 아버지가 마시고 싶으셨던 물이라는 심정이 우러나야 합니다. 뜰은 성소, 안방은 지성소라는 생각으로 항상 깨끗이 해야 합니다. 더구나 여자들은 앉는 데도 아무 데나 앉아서는 안 됩니다. 성별하고 앉아야 합니다.
지금은 기도할 때입니다. 기도에 전념해야 합니다. 모두 순회사가 되어야 합니다. 임부들도 계몽을 나가야 합니다.
일단 수련회에 참가한 여러분은 이 시간 이후부터는 옛날과 같이 자유로운 몸이 아닙니다. 철저한 심신의 연단을 통하여 승리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러분은 개인의 입장에서 어찌어찌하다가 여기에 들어왔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일개인이로되 여러분의 배후에서 유구한 세월을 통하여 엮어져 내려온 역사적 배경이 있다는 것을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앞에 놓인 이 길은 가지 않으면 안 될 길입니다. 여러분은 어차피 이 길을 가야 할 자신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면 이 길을 가는 데 있어서 어떠한 방법과 수단으로 가야 할 것인가? 이것이 문제입니다. 희망적이고 가치적인 길을 가려면 단단한 각오가 필요합니다. ‘나’라는 존재는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보다 오히려 내일의 ‘나’가 더 문제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 한 개인은 평면적으로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역사적으로, 또 나를 에워싸고 있는 전후 좌우 입체적인 입장에서 보면 지극히 중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하고 싶은 말씀의 제목은 ‘승리자가 되자’입니다. 여러분이 수련을 받는 것, 그밖에 생활하는 모든 것 다 싸움입니다. 수련을 받고 있는 여러분은 승리자가 되느냐 패배자가 되느냐 하는 중대한 시련기에 처해 있습니다. 개인적인 승리자가 되느냐, 민족적인 승리자가 되느냐, 세계적인 승리자가 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일을 하는 직장이나 공부를 하는 학교에서나 무엇을 하거나 반드시 거기에는 투쟁 과정이 있습니다. 타락 세계에 살고 있는 모든 인류는 싸우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거기에는 준비가 필요합니다. 그 싸움은 생각대로 빨리 끝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승리자가 되는데 어떤 분야에서 승리자가 되어야 하는가? 어떤 국가의 주권자가 그 당시의 승리자는 되었을지 모르지만 오늘 이 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승리적 가치는 세우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민주와 공산의 양대 진영이 싸우고 있는데, 그 중 어느 한 쪽이 승리한다고 해도 싸움은 끝나지 않습니다. 또 싸워야 할 노정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역사적이고 시대적이고 미래적인 승리자라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어떠한 일개 종파나 혹은 주권이 승리했다고 해서 미래적인 승리자가 될 수 있는가? 다 지나가 버립니다. 역사상의 무수한 승리자들이 진정한 승리자라면 오늘날 이 세계가 이 꼴이 되었겠습니까?
예수님도 과연 영원한 승리를 거두었다고 볼 수 있는가? 과거의 선지 선열들도 그 권한을 지금까지 자랑할 수 있는가? 없습니다. 과거에도 그런 승리자가 없었고 현재에도 없으니 미래에는 영원한 승리자가 나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인간을 대하여 너의 승리가 곧 나의 승리라고 할 수 있을 때까지 인류는 언제까지나 투쟁을 계속해야 합니다. 그냥 평면적인 현상만 보면 낙망과 절망을 할 수밖에 없지만 그렇다고 인간 스스로가 그것을 결정지을 수는 없습니다. 역사적으로 승리한 예를 보아도 때와 형편이 갖추어져서 승리한 것이지 인간이 혼자서 승리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도 역사적인 조건을 가지고 승리했다 할진대 여기엔 내 개인의 목적보다 더 큰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천지를 지은 창조주가 있다면 그는 어떠한 분일 것인가? 이 역사적 종말기에서 인간 지은 것을 후회하고 쓰러진다면 그는 진정한 창조주가 아닙니다. 창조주는 반드시 실패가 아닌 승리의 결실을 봐야 합니다.
그러면 그 절대자가 승리를 자랑한 적이 있었는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인간이 아무리 능력과 재능을 가졌다 해도 승리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승리하지 못하는 한 인간도 승리할 수 없습니다. 모두가 역사의 심판을 받고 지나가 버리는 일시적인 승리였을 뿐 완전한 승리는 아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개인과 가정과 민족을 거쳐, 주의와 사조를 세워 하나의 목적을 향하여 섭리해 오셨습니다. 그러다가 이제는 좌우 양대 진영으로 갈라놓고 승리의 한 날을 향해 가고 계십니다. 절대자와 심정의 인연을 맺고 싸우기 전에는 완전한 승리를 거둘 수 없습니다. 행복은 심정을 가지고 승리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구하기 위하여 종교를 세워 섭리해 오셨습니다. 종교에는 민족적인 종교와 세계적인 종교, 그리고 역사적인 종교와 시대적인 종교와 미래적인 종교가 있습니다. 종교는 역사적이며 시대적이며 미래적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완전한 승리를 거둘 수 없습니다. 현재의 기독교가 과거에서 현재까지의 사명은 다해 왔는지 모르지만 앞으로 미래적인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볼 때 과거․현재․미래를 통할 수 있는 종교 이념이 필요한 것입니다. 과거와 현재에 있어서 어느 누구도 흠잡을 수 없는 승리적인 기준을 세워야 미래에 승리할 수 있습니다. 왜냐 하면 하나님이 그러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유물사상은 필연코 망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민주주의가 역사적이고 시대적인 승리의 조건을 갖고 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승리의 조건 없이 미래의 승리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런 조건을 갖지 못한 종교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전세계의 기독교인은 연합해야 합니다. 이제는 미래적인 것이 나와야 합니다. 지금에 와서 몇몇 종교가 과거로 돌아가자고 주장하지만, 오늘날의 정세는 과거와 다릅니다. 과거의 것으로 오늘날의 상황을 처리해 갈 수 있겠습니까? 과거로 돌아가선 안 됩니다. 역사적이고 시대적인 실적이 있어야 미래적인 발판을 세울 수 있습니다. 그러니 과거·현재·미래를 통할 수 있는 이념이 나와야 합니다.
여러분의 생활은 시대적인 생활인 동시에 세계적인 생활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도 개인적인 구원이 아니라 개인을 지나고 가정을 지나고 민족을 지나고 세계를 지나 천주적인 구원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역사상에 일찍이 그런 때가 있었는가? 아브라함을 중심한 개인 기대, 야곱을 중심한 가정 기대, 모세를 중심한 민족 기대를 세운 후 국가 기대를 거쳐, 예수 때에는 예수를 중심한 세계적인 기대를 세우려 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그런 세계적인 기대를 닦지 못했던 것입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도의 길을 걷는 사람들은 제2이스라엘 재편성운동을 하여야 합니다. 국가적인 제2이스라엘을 재편성하기 위해 나온 것이 기독교인데 그 사명을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명을 완결 짓기 위해 오시는 분이 재림주입니다.
오늘날 각각의 단체는 끼리끼리 연합체를 형성하여 움직이고 있는데 이들은 세계적인 운동을 해야 합니다. 역사적이며 시대적인 동시에 미래적인 운동으로 발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섭리하신다 할진대 종교인들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역사적인 승리자만 되어서는 안 됩니다. 현재의 승리자만 되어서도 안 됩니다. 과거와 현재를 넘어 미래적인 승리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최후의 승리자가 될 수 없습니다. 앞으로 세계적인 내용과 형태를 갖추지 못한 종교는 깨어져 나갑니다. 기독교도 불교도 회회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못 되면 세계를 위한 재료라도 되어야 합니다. 내 것 네 것 하며 종파가 갈라져 싸울 때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최후의 승리를 바라십니다. 뜻을 중심삼고 승리해야 합니다. 그 뜻은 오늘날 지상에 나와 있는 어떤 이념보다도 월등한 것입니다. 이 뜻의 뿌리는 이미 과거부터 존재했습니다. 이젠 믿고 천당 간다고 할 때는 지나갔습니다. 요는 자기가 어느편에 서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지금 당장 구원받지 못한다 할지라도 구원받을 수 있는 편에 서 있어야 합니다.
지도하는 사람이 잘못하면 그 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도 영향을 미칩니다. 개인이 좀 못해도 전체가 승리하면 그도 같이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는 개인이 축복받을 때도 지나가고, 민족이 축복받을 때도 지나갑니다. 이제는 세계가 축복받을 때가 옵니다. 예수께서 만일 그 시대 그 환경에서 승리했더라면 악한 무리들도 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세계를 구하기 위해서 세계적인 단체가 있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필요 없습니다.
먼저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합니다. 뜻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시대적인 사조 앞에 몰림을 받고 규탄을 받아야 합니다. 뜻을 알았을진대 그 다음엔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심정의 주인이십니다. 이 심정을 알고 움직이는 사람은 누구도 심판할 수 없습니다.
어차피 수많은 주의와 주장이 부딪치게 되어 있습니다. 부딪쳐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머리에서는 서로 싸워도 꼬리에서는 하나가 되어가야 합니다. 뜻을 대하는 심정이 변치 않고 뜻을 세우신 분과 하나 되어야 합니다. 뜻은 어떤 뜻이어야 하느냐? 인종이 다르고 환경과 사조가 달라도 ‘옳소이다.’ 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 뜻을 세우는 것이 종교의 사명인데, 종래의 모든 종교가 역사적인 사명과 시대적인 사명은 했어도 하나님의 미래적인 섭리와 맞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자 예수님의 뜻이요, 예수님의 뜻이자 성도의 뜻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개인이 믿고 천당 가라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전체를 살리자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러한 뜻 앞에 원수가 사탄입니다. 뜻을 반대하는 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나는 너와 같지 않다. 뜻을 위해 싸운다. 역사적인 가치를 찾기 위해서 싸운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하늘과 땅, 인류와 나, 뜻과 마음이 하나로 합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집니다.
공중에는 사탄이 권세를 잡고 있습니다. 하늘과 땅, 인류와 나, 뜻과 마음 이 셋이 합해야 됩니다. 그러고 나서 하나님의 심정과 합하면 다 됩니다.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심정과 하나되는 것이 얼마나 큰 승리입니까?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절대자의 심정과 하나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꿈꾸시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종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아들딸을 만드는 것입니다. 앞으로는 심정적인 주의와 심정적인 사상이 세계를 정복할 것입니다. 종족적인 것과 민족적인 것은 다 지나가야 합니다. 1차대전은 경제전, 즉 몸적인 싸움이었고, 2차 대전은 사상전, 즉 마음적인 싸움이었습니다. 앞으로는 심정적인 투쟁시대가 올 것입니다. 이 전쟁은 종교인들이 치러야 합니다.
예수 때에는 복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자기 가족이나 민족에게 복을 달라고 기도할 때는 지났습니다. 이제는 ‘당신의 한을 청산하시고 당신의 심정과 인류와 만물이 하나되게 하소서.’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내 사랑하는 아들딸이라고 인정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뜻을 아는 사람은 하늘과 땅과 인류와 자기 몸까지 마음에 쓸어넣고 살 수 있어야 합니다.
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가 싸우면 공산주의는 망합니다. 망해도 삼분오열돼 망할 것입니다. 민주주의가 이기면 어떻게 될 것인가? 미국을 중심한 민주주의는 공산주의가 하나님의 원수라는 주장을 세워 놓아야 합니다. 공산주의가 망하면 그들은 회회교권 내로 들어갈 것입니다. 틀림없이 종교를 내세우게 될 것입니다. 민주주의 진영에서는 여기에 대비한 종교적인 이념을 갖추어야 하는데 아직까지 그런 이념이 없습니다. 그래서 만민은 새로운 이념을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념은 세계의 모든 이념을 녹여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이념을 세우는 일이라면 이 몸이 가루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한번 할 만하지 않습니까? 더구나 한국에서 이런 이념이 나왔다는 것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사실입니까? 이러한 이념을 세우기 위해 지금까지 우리는 욕을 먹으며 싸워 나왔습니다.
우리의 눈은 천지를 바라보아야 하고 우리의 생활은 ‘뜻’을 위한 생활이어야 합니다. 하나님도 그러한 분이신데, 무형이시기에 그렇게 못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음대로 행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있어 제1의 문제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입니다. 뜻을 알자니 역사는 어떻게 흘러왔고, 이 시대는 어떻게 흘러가고 있으며,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또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신가를 알아야 합니다. 역사적인 하나님은 어떠한 하나님이었으며 어떠한 투쟁의 역사를 엮어 오셨는가? 이 시대에는 어떠한 투쟁을 하고 계시며, 그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미래로 연결될 것인데, 그 뜻의 내용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회개를 하는 데도 역사적인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아담 해와의 죄로부터 시작하여 노아, 아브라함, 모세, 예수까지도 청산하지 못하고 간 역사적인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역사적인 죄를 회개하지 못한 사람은 시대적인 하나님의 뜻을 상속 받을 수 없으며, 시대적인 회개를 하지 않고서는 미래적인 하나님의 뜻을 상속 받을 수 없습니다. 3대를 걸어 놓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중심삼아 아담 해와를 거쳐 가인 아벨에 이르는 3대가 인연맺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역사적인 승리의 왕자가 되고 미래적인 승리의 왕자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만 천당 가면 됩니까? 이 세상이 해결되지 않는 한 천당 가더라도 다시 와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성경의 글자를 간추려 보면 성경의 중심은 예수요, 예수의 중심은 신랑 신부요, 신랑 신부의 중심은 사랑입니다. 중요한 것은 심정적인 일치입니다. 우리가 춤추면 세계가 춤추고, 우리가 웃으면 세계가 웃을 수 있는 멋진 세계를 하나님은 구상했던 것입니다.
이제까지 되는 대로 막 살아온 이 몸을 가지고서는 역사적인 결실체가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대하여 ‘역사적인 한을 내게 지우시옵소서.’, 선조들을 대하여도 ‘남아진 한을 내게 지우시옵소서. 해원해 드리겠나이다.’ 해야 합니다. 아담 해와의 실수도 내가 책임지고 함의 실수도 내가 책임지고 모세의 실수도 내가 책임지겠다고 해야 하며, 예수님께도 ‘당신이 왔다가 남기고 간 한이 무엇이며, 인류 앞에 하나님 앞에 책임 못한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책임지겠소이다.’ 해야 합니다.
그들의 한을 풀고 참으로 충성된 천사장이 되겠다고 하는 이가 있다면 아담도 모세도 예수도 ‘너 어디 있다가 이제 왔나?’ 하며 통곡할 것입니다. 이러한 장면을 하나님도 예수도 성신도 고대하지 않겠습니까? 그러한 장면이 벌어져야 비로소 역사적인 열매가 맺어지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지금 어떠한 싸움을 하고 계십니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제가 대신 책임지겠습니다.’ 하며 하나님의 한을 풀어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미래의 소망을 갖고 피조물을 하나 하나 지으실 때에 얼마나 진지하셨겠습니까? 정성을 기울여 심정의 아들딸을 지으시면서, 그들이 장차 자라서 아버지의 그 지으심의 실상을 보고 기뻐하는 모습들을 얼마나 보고 싶어하셨겠습니까? 그런데 그 아들딸이 그만 타락한 것입니다. 어떠한 미물이나 풀 한 포기라도 하나님의 정력이 들어 있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아들딸에게 주기 위하여 지으셨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역사적인 문화재나 골동품을 아끼고 소중히 다루지만, 하나님이 친히 공들여 지으신 만물만큼 귀하고 소중한 것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이 만물을 창조하실 때의 하나님의 심정이 우리에게 연결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역사와 시대를 걸어 놓고 회개하고, 하나님의 소망을 이루어 드리기 위한 책임을 지고 오시는 분이 메시아입니다. 그분은 문명인이나 야만인이나 모두 같은 가치의 인간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또한 죄악 사회를 천국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한 목적 아래 투쟁의 길을 걸어 나오는 것이 통일의 무리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역대의 선조들이 ‘고맙습니다.’ 또한 세계 인류가 ‘고맙습니다.’ 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대한민국의 혁명 과업을 완수해야 합니다. 나아가서는 천지의 혁명 과업, 우주적인 혁명 과업을 완수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을 주께서 심판할 수 있겠습니까?
역사적인 회개를 하기 위해서는 역사적인 공포와 싸워야 하고, 시대적인 회개를 하기 위해서는 시대적인 공포와 싸워야 합니다.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심정을 대하면서 한 쪽으로는 원수 사탄을 단칼에 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과거 이 땅에서 살다 간 역사적인 인물들을 전부 모아 놓고 하나님 앞에 회개의 조건을 거쳤느냐고 물으면 모두 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여기 온 여러분들은 과거는 쓸데없이 보냈을지 모르지만 이제부터는 그렇지 않아야 합니다. 이 이념을 아는 사람은 이 길을 따라갈 수 있으되 그렇지 않으면 공산당이라도 못 따라갈 것입니다. 여기에 들어오면 1주일 금식을 해야 합니다. 강제가 아닙니다. 스스로 실행하는 것입니다. 시시껄렁한 사람을 만들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이 많은 사람은 좋은 밑거름이 되고 젊은이들은 멋지게 싸우라는 것입니다.
나는 내 자신이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훈련을 여러분에게도 그대로 멋지게 시키고 싶습니다. 그래서 멋지게 천국을 건설하고 싶습니다. 몇십년, 혹은 몇백년 이후에라도 이(利)가 남는다면 남이 욕을 하더라도 있는 것 다 팔아서라도 그것을 사야 합니다.
통일교회의 이념은 누구도 삼킬 수 없습니다. 여러분을 교육시켜 무엇에 쓰자는 것이냐? 하늘땅을 녹여내자는 것입니다. 하늘땅에 있는 사탄을 모조리 없애자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 서 있는 이 사람이 반쯤 미쳤거나 돌아 버린 사람이 아니라면 문제는 큽니다. 27억 인류가 통일교회를 반대하는 날이 어서 와야 합니다. 반대하다가 통일교회를 굴복시키지 못하면 끝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승리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눈물과 땀과 정성으로 민족을 넘고 세계를 넘어 하나님을 녹여 내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런 마음 가져 봤습니까? 눈물을 흘려도 하나님을 녹여 내겠다는 마음으로 흘리고, 싸워도 하나님을 녹여 내겠다는 마음으로 싸우면 여러분은 천국 가고도 남습니다.
여기 와서 공부하는 목적은 잘 알자는 것입니다. 아담을 잃고 난 하나님의 심정은 어떠했으며, 선조들은 어떤 길을 갔고, 섭리역사를 이끌어 오시는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신가 하는 것과 그 하나님이 참아들딸을, 충신 열녀와 효자 효녀를 얼마나 그리워하시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뜻을 알아 하나님의 뜻은 이러한데 천지가 어찌하여 갈라졌고, 인간은 어찌하여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나는 어찌하여 이러고 있고, 하나님은 어찌하여 아직까지 그렇게 계시는가를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눈물은 갈라진 인류를 위하여, 땀은 갈라진 땅을 위하여, 피는 갈라진 하나님의 심정을 위하여 흘려야 합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굶주리며 추위에 떨고 있는 식구들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선생님이 가지 말라고 해도 가야 합니다. 가면 됩니다. 갈래요? 가야 하지요? 갈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 데려다 놓고 훈련시키는 것은 농락받는 사나이와 아낙네를 만들자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를 감화시키고 굴복시키는 사나이와 아낙네를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통일교회는 독특합니다. 땅 위에 수많은 교회가 있지만 어디에도 우리 교회 같은 것은 없습니다. 누구나 다 배워야 합니다.
때가 되면 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가 싸우는 제일 치열한 전선에 통일교인을 보낼 셈입니다. 우리의 원수가 누구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북에서 이남으로 보내는 간첩 이상의 첩보대로서 모스크바까지 갈 각오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요, 천지는 하나님의 것이니 천지가 곧 우리들의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의 효자 효녀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과거를 정복하고 현시대를 정복하고 미래를 정복해야 합니다. 시대적인 운세는 끝날의 한때를 향해 돌아가고 있습니다.
원리 공부를 할 때에는 그때 그때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심정을 느껴야 합니다. 뜻을 위하여 싸워 이겨야 역사적인 승리자가 됩니다.
우리는 많은 해를 살아왔지만 자랑할 수 있는 한 해를 가져 보지 못했습니다. 천지를 대해 ‘나는 누구다.’라고 주장할 수 있고 자랑할 수 있는 자체가 되지 못했습니다. 자기의 몸뚱이지만 어느 한 부분도 자랑할 곳이 없습니다. 많은 날 가운데 한 날도 자랑할 수 있는 날이 없고, 사지백체 가운데 어느 한 부분도 자랑할 수 없다는 것이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어떻게 하면 내 자신이 귀한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하면 내 사지백체를 가치 있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하면 시간을 가치 있게 보낼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문제입니다.
우리 대한민국에는 여러 가지 기념일이 있습니다. 노동일, 현충일, 어머니의 날 등 많은 기념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천상에서 즐거워할 수 있는 기념일은 없습니다. 여러분의 생일도 타락의 부모와 인연되어 생긴 날이니 한탄할 수밖에 없는 날입니다.
그러기에 하늘은 어차피 대심판을 하셔야 됩니다. 대심판은 곧 대정리이며 대청산이며 대결산입니다. 타락이라는 명사가 있는 한 심판은 불가피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죄악의 구덩이에서 태어나신 것도 슬픈 일이요,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도 지극히 슬픈 일입니다. 심판되어야 할 일입니다.
역사상에 충신과 효자와 열녀가 많이 왔다 갔지만 하늘이 공인할 수 있는 충신과 효자와 열녀는 없었습니다. 끝날에는 하늘이 공인할 수 있는 충신과 효자와 열녀가 나와야 합니다. 참과 거짓을 구별하려면 원칙이 나와야 합니다. 역사상의 충신과 효자 열녀라고 할 수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사탄의 수첩에 적혀 있습니다. 그들 모두는 하늘에 대해 ‘감사합니다.’ 할 수 있는 입장이 못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사탄은 하나님에게 ‘내게는 이러한 충신과 효자와 열녀가 있지 않습니까?’ 하고 참소해 왔습니다.
하늘이 자랑할 수 있는 충신과 효자와 열녀는 사탄세계의 그들보다 훨씬 더 높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 땅 위에 예수님을 보내셨던 것입니다. 역사상 시대 시대마다 사탄이 참소해 왔습니다. 이 지상에는 자랑할 수 있는 날이 많지만 하늘은 아직까지 자랑할 수 있는 한 날을 갖지 못했습니다. 이제 종교적인 충신과 효자와 열녀가 나와야 할 때가 왔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사탄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아야 되겠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자랑할 것이 아니라 그 역사를 이끌어 온 인물들을 자랑해야 합니다. 하나님 존전에 세계적이요, 역사적인 충신이 나와야 됩니다. 하나님은 전체를 위하여 계시고, 예수는 하늘을 위하여 있고, 성신은 땅을 위하여 있습니다.
어떤 행사의 날을 맞이할 때 ‘아버지여, 당신은 이제까지 이런 날을 가져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먼저 맞이해서 죄송합니다.’ 해야 합니다.
성지가 없이는 거룩한 사람이 나올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늘은 제물을 끌고 다닙니다. 성경에도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으며……”(롬 3:10) 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성지와 성인이 있기 전에는 성전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꾸로 섭리해 오십니다.
그 다음엔 성천(聖天)이 있어야 합니다. 성천의 대표자로 오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이제 우리는 성천과 성지를 가진 성인이 되어야 합니다. 내 몸은 성지를 대신한 것이요, 내 마음은 하늘을 대신한 것이요, 내 인격은 하나님을 대신한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스스로 위로하고 믿어서는 안 됩니다. 한때를 바라보고 나가야 됩니다.
오늘날에는 두 가지 입장의 사람이 필요합니다. 첫째는 지도자가 불러서 의논할 수 있는 사람이요, 둘째는 지도자가 명령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전자가 안 되면 후자라도 되어야 합니다.
이날(자녀의 날)을 맞기 위해서는 40일 전부터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3일 전부터 목욕재계를 하고 전 3일과 후 3일 동안 금식을 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직까지 ‘하나님의 날’과 ‘부모의 날’과 ‘자녀의 날’을 갖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지향하는 창조의 이상은 심정일체입니다. 하나님, 아담, 자녀로 이어지는 심정적인 일직선을 이루기 위한 것이 창조목적입니다. 조화의 이치를 세워 창조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재창조의 방법과 그 설계도, 이 원칙에 의거하여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가 70문도를 잃어버린 것은 가나안 땅에서의 모세와 같은 신세요, 12제자를 잃어버린 것은 노아와 같은 신세로 되돌아간 형상이요, 3제자 마저 잃어버린 것은 아담의 입장으로 되돌아간 것입니다. 그러니 죽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귀섭리는 먼저 노아가정의 세 아들을 찾고, 다음에는 9수를 완성하는 9인을 세워, 도합 12인을 세워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상하로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야곱가정의 12수와 아담가정의 3수를 찾아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같이 모든 창조의 법도는 3대상 위치를 확립해야 합니다. 하나님 아담 해와(자녀) 이렇게 3대상이 각각 어느 한 편씩을 중심삼고 수수(授受)의 회로를 연결시키면 도합 12수의 위치가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앞으로 ‘자녀의 날’을 갖는 동시에 ‘부모의 날’과 ‘하나님의 날’을 세워서 만민이 축하하는 날을 가져야 모든 기념일을 완결 짓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 것이냐? 이 물음에 대하여 대다수의 사람들은 외적인 어떠한 곳을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깊은 심정의 곳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외적인 민족, 고향, 친지를 위해 가는 것보다 항상 부족한 자신임을 생각하고 무한한 심정을 중심삼고 단 하나의 길을 가야 합니다.
지금은 3년 전도기간 중 제2년을 넘어가는 때이며, 이번 9회 수련회는 금년의 마지막 수련회가 됩니다. 또한 9수는 모든 것을 청산해야 할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오늘 밤 9회 수련생 여러분께 당부하고 싶은 말은 남아지는 여러분, 영원히 남아지는 여러분이 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실 것인가? 하나님은 앞으로 역사가 끊어진다 할지라도 영원히 계실 분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이 찾는 사람도 일시적인 사람일 수 없습니다. 그는 영원한 하늘과 영원히 같이 있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의 뜻과 이념과 생활과 행동과 말, 심정까지도 역사적이고 시대적이며 미래적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영원히 남아질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영원한 것을 바랍니다. 자신이 느끼고 구상하는 사실이 모두 영원하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 자신에게 있어서, 나라는 자아의식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는 대우주와 공명할 수 있는 자리를 찾아야 합니다. 즉 내가 움직이면 하늘도 움직일 수 있는 자리를 찾아야 합니다.
위인이나 성인들은 하늘과 같이 움직이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위대한 위인이라 하더라도 영원히 남는 길을 가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하늘이 영원히 함께 할 수 있는 참사람은 어떤 사람이며 어디에 있을 것인가? 사람들이 믿고 있는 도주(道主)도 지금까지는 필요했지만, 그가 영원히 필요한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영원히 필요하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아직까지 없었습니다.
그러면 하늘이 영원히 말하고 싶고 대하고 싶은 사람은 누구뇨? 그는 복귀섭리를 하는 데 있어서 그가 아니면 안 된다는 사람입니다. 그는 과거의 성현이나 오늘의 인류나 미래의 후손까지도 그와 더불어 말하고 싶어하고 인연을 맺고 싶어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 천지간에 그러한 존재가 나와야 하나님을 대할 수 있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과거의 모든 사람, 현세인, 미래인까지도 길이길이 그와 같이 살고 싶어하는 분입니다. 생활 뿐만이 아니라 모든 행동도 같이하고 싶은 소망의 분, 심정을 걸어 놓고 영원히 사랑할 수 있는 분입니다. 이러한 도주나 현인이 이 땅 위에 왔던들, 우리는 오늘날 이와 같은 자리에 처하여 있지 않을 것입니다.
행복한 사람, 가치 있는 사람이란 말하는 데에 있어서, 생활하는 데에 있어서 스스로 행복을 느끼는 사람입니다. 하나님도 놓지 못하겠다는 사람이어야 가치적인 인간이요, 행복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늘은 이렇듯 행복한 존재, 가치 있는 존재를 찾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존재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자리를 찾아 나아가야 합니다.
하늘이 바라는 가치적인 존재는 영원히 함께 말하고, 함께 살고, 함께 행동하고 싶은 사람입니다. 그러한 존재가 되지 못하면 그러한 존재 앞으로 이끌려지기를 바라는 기도라도 해야 합니다. 과거에 제아무리 훌륭했던 사람도 이 시대에 아무리 훌륭한 사람도, 미래에 아무리 훌륭하게 될 사람도 그런 분을 맞이해야 합니다. 만일 그러한 분이 우리 앞에 나타난다면 우리는 최고로 행복할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의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귀한 가치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이념이 이 시대의 이 세계에 펼쳐진다면 이 세계는 하나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와 더불어 말하고 그와 더불어 행동하고 사는 자리는 하늘과 같이하는 자리입니다. 따라서 천지간에 허용될 수 있는 주의나 사상, 이념은 이러한 것이어야 됩니다.
그러한 것을 찾았다면 여러분은 무한히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가 세계를 위하고 인류를 위하여 하는 말은 모든 사람이 즐겨야 할 말이요, 그의 생활이 아무리 어렵다 할지라도 모든 사람이 그와 더불어 살고 싶어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영원한 분이시라면 하나님의 말씀과 이념, 생활도 영원해야 합니다.
개인과 가정, 사회, 국가, 세계, 하늘과 땅이 있는데 이것을 어떻게 하나로 연결시킬 것인가? 여러분이 말씀을 들었다면 이 말씀을 어느 정도 가치 있는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있고, 몇 퍼센트나 받아들이고 있는가? 이 말씀과 영원히 같이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가? 없다면 갈라서야 합니다. 만일 이 말씀을 듣고 헤어졌다가 전과 같은 관계를 다시 맺고자 한다면, 이 말씀 이상의 심정적 인연을 갖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지 않고는 더 높은 자리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 말씀이 어떤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의 책임자와 영원히 살고 싶은 느낌을 느껴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죽음의 자리까지도 같이 갈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우주는 통일되어야 합니다. 말씀이, 행동이, 생활이, 심정이 통일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인간으로부터 나온 것으로는 안 됩니다. 인간은 결과적인 존재이지 원인적인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통일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무엇을 통일하자는 것이냐? 진리, 행동, 생활, 이념, 심정을 통일하자는 것입니다. 심정은 가정, 사회, 국가, 세계, 하늘까지 연합니다. 심정의 세계에서만이 입체적 감정을 느낄 수 있으며, 영원이라는 명사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심정이 문제입니다.
내가 있으면 내 위에는 부모가 있고, 그 위를 거슬러 올라가면 인간시조 아담과 해와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 위에는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 위에는 심정의 근원자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근원자는 우리에게 자기를 찾아보라고 호소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느껴야 합니다.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는 말할 수 없는 죄인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사랑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그 사랑은 누구에 대한 사랑이뇨? 사랑의 궁극지는 하나님입니다. 이 사랑보다 더 깊은 것이 심정입니다. 그러므로 이 심정을 중심삼고 말씀도, 행동도, 이념도 성립됩니다. 그 어떤 것도 혼자만으로는 안 됩니다. 언제나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종적인 심정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적 심정, 시대적 심정, 미래적 심정을 가져야 합니다.
주체와 대상이 주고받으면 번식이 벌어집니다. 거짓이란 천지의 심정을 떠난 것이며, 악이란 천지의 심정을 떠나서 주고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타락 전의 하나님의 심정을 알아야 하며 타락 이후의 복귀의 심정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적, 시대적, 미래적인 심정 앞에 당당히 설 수 있는 사람은 천지 앞에 당당한 승리자가 됩니다.
여러분이 지방에 나가서 말씀을 전파할 때에는 개인적인 심정말고 하나님의 심정을 가지고 모든 사람들에게 말해야 합니다. 똑같은 말, 똑같은 행동, 똑같은 생활을 수천 번 하게 되더라도 싫지 않아야 됩니다. 한 사람을 놓고 말씀을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직접 그 사람을 놓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은 심정을 가지고 말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한꺼번에 주는 것이 아니라 한 단계 한 단계 거쳐 나가면서 그때마다 그 사람이 좋아할 수 있는 말씀을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날까지 인간을 대해 하시고 싶은 말씀을 다 하지 못하셨습니다. 인간이 좋아하는 말만을 해 오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당신이 하시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는 한때를 바라보며 나오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심정을 말해 줄 수 있는 한 존재를 찾아야 합니다. 모든 행동을 아버지와 더불어 하여야 합니다. 말을 하고 시선 하나를 보내는 것도 아버지와 더불어 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정만 가지고 나가면 여러분은 패자가 되지 않습니다. 이 말씀을 반역하는 자는 심판받을 것이요, 그 행동을 비웃는 자도 심판받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지방에 나가 싸울 때 아버지께서 얼마나 실체와 더불어 살고 싶으셨겠는가 하는 심정을 가지고 아버지를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거룩한 생활과 행동을 하여야 하고 억울한 자리에서도 아버지와 더불어 가야 합니다. 그러나 어려운 자리에서는 아버지를 내세우지 말고 뒤에 모시고 자신이 선두에 설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 수련 받은 여러분은 지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말씀의 지도자, 행동의 지도자, 이념의 지도자, 생활의 지도자, 심정의 지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사명을 담당하는 것은 말할 수 없는 영광이며 가치 있는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과거에 선생님은 너무 주의를 아니 하고 말씀을 많이 하여 혀가 돌아가지 않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지방에 나가면 조심하고 염려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해야 합니다. 그 마을을 위하여 충성하는 사람을 보면 ‘저 사람은 내 일을 대신해 주고 있구나.’ 하고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원리강의를 할 때에도 여러분 자신이 거기에 등장하는 가인, 모세, 예수가 되어서 말씀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여 여러분은 삼천만 민족에게 아버지의 심정을 심어 주어야 합니다. 비록 자신은 부족한 모습일지라도 말과 행동과 이념과 생활과 심정은 아버지의 것이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금년은 민족 앞에 맞아도 단단히 맞아야 할 때입니다. 그러니 단단한 각오와 맹세를 해야 됩니다. 최후의 싸움 고개에서 포탄의 끝머리는 내가 되겠다는 각오를 해야 하겠습니다. 심정을 중심삼고 말씀을 전하고, 심정을 중심삼고 생활하고, 말씀을 중심삼고 행동하고, 말씀을 중심삼고 이념을 펴야 합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이용하겠다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부모의 마음을 가지고 주어야 합니다. 자기의 욕망과 야심을 가지고 주어서는 안 됩니다. 아버지께서 그러셨기 때문에 여러분도 그래야 합니다. 이 말씀은 눈물을 통하여 나온 것이므로 여러분들도 눈물을 통하여 주어야 합니다. 참이 없는 이 땅 위에 참을 심어야 합니다. 말씀을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증거하는 것이요, 자신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행동하는 것이나 생활하는 것도 자신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말씀을 줄 때에는 심정적으로 주어야 합니다. 심정에서 흘러나오는 말씀은 듣고 흘려버린다 할지라도 그 속사람은 성장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움직이는 대로 대상자는 서게 됩니다.
여러분은 자기를 증거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증거를 하는 데는 영원한 위치에서 해야 합니다. 영원은 심정을 통해서만 나옵니다. 여러분이 나가서 싸울 때에 한번 배척을 받게 되면 배의 수확을 얻게 됩니다. 하늘을 대신하여 불변의 것을 줄 수 있는가의 여부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됩니다. 이것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나는 개인적인 존재가 아니라 공적인 존재입니다. 선이나 의나 행복 등은 공적인 것이므로 이를 내 것으로 갖기 위해서는 공적인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역사를 통해 보아도 개인은 나타났다가 사라져도 공적인 의나 행복은 남아 있습니다. 내가 아무리 괴롭고 슬프더라도 공적인 복은 민족이나 인류를 위해 남겨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공적인 것은 역사가 보장하고, 시대가 보장하고, 미래가 보장해 줍니다. 즉 역사성과 시대성과 미래성을 띤다는 것입니다. 역사 이래로 공적 사명을 완수한 자가 없었습니다. 여러분은 ‘공적 사명자’라는 신념을 갖고 싸워 주기 바랍니다. 그런데 한 가지 명심해야 할 사실은 ‘내가 공적인 사명자’로 서게 된 것은 내 스스로 공적인 입장에 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인연은 멀고도 먼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공적인 이익과 우리의 조상과 현실의 여러 환경을 타개하기 위해 그 위치에 서게 된 것입니다.
그런 고로 이번(동계계몽전도) 기간에 여러분이 맡은 지역에서 하는 모든 행동과 일은 개인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상 하나님의 공적인 이익을 위해 수고하다가 영계에 간 모든 영인들이 전부 여러분 편이 되어 협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공적인 사명을 알고 신념을 갖고 역사상의 어느 누구보다도 제물적인 입장에서 이 사명을 하려고만 한다면 과거의 공적, 전체적인 가치를 찾으려고 노력한 선조들의 인연이 현실에서 역사적인 결실로 재현될 것입니다. 해원이란 명사는 이럴 때에 부합되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공적 책임을 진 자들이 책임을 다하지 못할 때는 하나님이 대신 그 역사적인 공적 책임을 맡아서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나올 때까지 수고하십니다.
오늘날까지의 역사노정은 선과 악의 투쟁이 점철된 노정입니다. 이러한 역사가 내 앞에 다가왔으니 나를 중심하고 악은 악으로 선은 선으로 갈라 세워야 합니다. 나라는 존재는 이 성패를 좌우할 관건을 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개인을 초월하여 공적인 존재임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과거에 충성과 효성으로 공적인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수고한 선조들의 그 역사적인 위업을 계승할 자는 그들보다 공적 사명 앞에 더 충성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공적인 사명을 맡으려면 역사를 초월한 우주적인 충효열(忠孝烈)의 심정과 각오를 갖추어야 합니다.
이와 같은 공적인 일을 누가 할 것이며, 누가 책임을 질 것인가? 하늘도 땅도 아닙니다. 오직 사명을 깨달은 사람만이 하여야 합니다. 나는 공적인 입장이므로 나의 말과 행동에는 하늘과 땅의 인류가 매여 있다는 엄숙한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끌려 다니는 사람이 되지 말고 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역사적으로 공적 책임을 졌던 수많은 가정과 개인, 즉 노아, 아브라함, 모세 등을 불러일으키는 동인(動因)이 되어야 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여러분을 역사적인 공매장에 끌고 가서 공매에 부친다면 여러분은 자신의 가치가 얼마나 나갈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사람은 얼마나 줄래? 하실 때 아무도 관심 있게 바라보지 않는, 거지조차도 거들떠보지 않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미처 말하기도 전에 사탄이 먼저 하나님, 이 지구상에 있는 만물의 반을 주겠습니다.’ 해도 하나님이 고개를 가로저으실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만물을 더 주겠습니다. 그래도 안 주시겠습니까?’ 하며 사탄이 안달할 수 있는 인물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중심한 전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가치적인 존재였기 때문에 사탄이 침범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사탄의 3대 시험을 생각하면서 여러분은 자기가 몇 푼짜리냐를 생각해야 됩니다.
오늘의 나는 개체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연의 옷’을 입고 있는 존재입니다. 이 옷에는 아담, 아벨, 노아, 아브라함과 같은 역사적인 모든 사람들의 한숨과 애수와 눈물과 한이 젖어 있고, 인류의 불신의 죄가 얼룩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옷을 벗어야 합니다. 벗되 일시에 벗어야 생명나무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자격자가 됩니다. ‘하나님이시여, 역사적인 인물들의 땀과 눈물과 한과 피와 심정을 제가 대신 상속 받아 감당하겠사오니 저를 세워 주소서!’ 하면서 담판하여야 합니다. 선생님은 이런 것을 알기에 여러분을 공적인 입장에 세워 주고자 하는데 여러분은 싸구려가 되렵니까? 밥 한 그릇에 팔려 가고, 몽둥이 앞에 물러서고, 원수 앞에 쉽게 굴복하는 자가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특정 가치가 개인의 가치보다 크면 그 개인의 가치는 굴복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개인의 가치가 특정 가치보다 작은 것을 알면 굴복하여야 합니다. 어느 민족 전체의 가치가 특정 가치보다 작으면 민족 전체가 굴복해야 합니다. 그 특정 가치와 같이 살고 또 같이 죽으려면 공적 가치의 입장에 서야 합니다. 그 특정 가치는 영원, 절대, 불변의 가치이므로 그 가치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공적 입장에 서고 그 가치의 대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 가치는 하늘과 땅이 못 세웁니다. 오직 참사람만이 세울 수 있습니다. 이 ‘참’이란 말 속에는 역사성과 공적인 의의가 있습니다. 이 참사람의 가치를 상속 받기 위해서는 자기의 관점과 심정을 천주를 대신하는 입장에 세워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지방에 나가서 계몽할 때 가령 ‘가’자 한 자를 흑판 위에 쓰면서 강의를 하더라도 앞에 앉은 소수의 사람을 대해서 강의하지 말고 온 천주를 대해서 강의해야 합니다. 땀을 흘려도 천주복귀의 심정으로 ‘부활의 땀’을 흘려야 합니다. 그러면 역사적인 인연을 갖고 있는 후손이므로 선령을 감동시키고 선령의 양심과 인연되어 열매를 맺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종의 시대, 자녀의 시대, 부모의 시대를 거쳐오시면서 복귀섭리를 해 나오십니다. 우리는 이 땅 위에 선지자가 나타나서 종의 위치와 환경을 개척한 줄 알고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먼저 하늘이 이 땅을 찾아오셔서 종의 입장에서 길을 닦아 세계적 종의 시대를 만드는 수고를 하신 다음, 그 터전 위에 종의 실체로 선지자를 보내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독생자 예수를 보낼 수 있는 터전을 닦기 위해서 하나님은 친히 자녀의 입장에서 수고해 나오셨습니다. 또 참부모를 보내시기 위한 길을 닦아 놓기 위하여 하나님은 이 땅을 몇천 번이나 왕래하셨고, 한민족에게 한 가닥 희망을 걸고 수고해 오셨습니다. 하나님이시면서도 종의 모습으로 눈물 흘리셨고, 하나님이시면서도 자녀의 모습으로 눈물지으셨고, 부모의 모습으로 눈물을 뿌리셨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수고하신 하나님의 역사노정을 그대로 걸을 수 없습니다. 지상에서의 한정적인 때만을 가진 우리이니 그 역사 과정을 통해 계시는 하나님의 심정과 인연맺어야만 합니다. 그래야 역사적인 인물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구약시대에 당신의 심정을 상속 받고 대신 책임져 줄 종이 없어 얼마나 한스러우셨습니까? 저는 이 시대에 심정적으로 그때의 종을 대신하는 자가 되겠습니다. 하나님이여! 당신이 자녀의 입장에서 수고하실 때 당신이 찾으시던 자녀가 없어서 얼마나 한탄하셨습니까? 저는 갖출 바를 갖추지 못했으나 심정적으로 그때의 자녀가 되어 당신을 위로하겠습니다.’ 하면서 하나님의 심정을 위로해 드려야 합니다.
이 끝날에 참다운 신앙의 길을 가는 자라 할진대 하나님의 종이 되어 하나님을 찾는 입장을 취하든가 종을 찾는 하나님의 실체가 되어 종을 찾아 헤매든가 이 둘 중 어느 하나의 입장을 취해야 합니다.
오늘날 온 인류는 하나님의 종의 입장이므로 하나님의 딸 중의 딸, 하나님의 아들 중의 아들을 만나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계적인 효자 효녀의 길을 닦아 세계적인 효자 효녀를 만들어 놓고, 세계적인 충신의 길을 닦아 세계적인 충신을 만들어 놓은 다음에 심판하십니다. ‘그 사람이 바로 참사람의 표준이다. 그와 같이 되라.’고 하십니다. 이 ‘참사람’이 오시는 주님입니다.
이와 같이 감격의 날, 재림의 날이 오면 살아서 그날을 맞는 사람은 반역한 종의 입장에서 울어야 하고, 쫓겨난 자녀의 입장에서 울어야 하고, 다시 들어온 입장에서 울어야 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통곡하며 죄악의 피로 더럽혀진 옷을 씻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입장에 있는 것이 가치적 인연으로 본 공적 존재로서의 ‘통일용사’입니다. 선생님은 이 어마어마한 인연이 여러분의 실수로 인해서 유린될까 봐 걱정이 됩니다.
돌감람나무는 참감람나무의 접붙임을 받아야 한다고 하였는데 접붙임을 받을 때에는 결과인 가지 쪽에서 받으면 안 됩니다. 역사성을 청산지을 수 있도록 뿌리 쪽에서 접붙임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접붙임을 받는 순간에는 종래에 가졌던 진액을 없애고 새로운 진액을 받아야 됩니다. 지난날의 자기를 없애고 절대적으로 온유겸손하고 복종함으로써 화(和)하여야 합니다.
이번 기간에 여러분이 맡은 지역에 나가면 ‘면민이여, 다 오라. 이 면 출신 영인이여, 다 모여라. 충성 대회를 하자.’라고 할 수 있는 각오로 일을 해야 합니다. 어떤 반대자가 생기면 여러분은 그가 자기 자녀에게도 베풀지 못하는 큰 사랑으로 부모의 입장에서 그 사람을 대해 주십시오. 피조물의 생명의 요소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기에 극치의 사랑은 그런 자를 굴복시킬 수 있습니다. 또 부모가 자기 자녀를 위해 일하는 것보다 더 한 봉사로써 그 반대자를 위해 일할 수 있는 자녀의 입장에 서십시오. 그러면 그 반대자를 굴복시킬 수 있게 됩니다.
아담이 원수 사탄에게 패하였으므로 남자에게는 종으로서 원수를 대해 싸워 이기는 법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해와가 효자가 될 아담을 타락시켰으므로 여자가 효녀가 되어 남자를 효자가 되게 해야 하니, 여자에게는 효녀가 되는 법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남자는 종의 사명을 해야 하고, 여자는 자녀의 사명을 해야 하고, 예수님은 부모의 사명을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남자는 원수와 싸워 이겨서 원수를 자녀로 만들어 놓기 전에 나는 아무개를 사랑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또 여자는 아버님 앞에 효녀의 실체가 되어야 하니 딴 생각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정하여 놓은 3년은 역사적인 탕감기간을 줄여 놓은 최소한의 연수로서 개인의 탕감기간입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통일교회 식구는 누구나 이 3년 기간을 지나야 합니다. 심정일체라 말하였으니 여러분은 모두 선생님의 심정을 알아야 합니다. 이 밤에 선생님은 무엇을 하실까, 이 밤을 뜬눈으로 새지는 않으실까를 생각하며 선생님 대신 입장에 서서 모양이라도 닮아 느껴 보라고 허락한 것이 3년이라는 특사(特使) 기간인 것입니다. 3년 동안 1년에 40일 계몽전도를 두 번 실시해서 3년간 합쳐도 1년이 못 되는데 이것마저 못한다면 말이 안 됩니다. 원래 이 기간은 금식하면서 넘어야 합니다.
여러분, 이와 같은 인연의 때는 한 번밖에 없습니다. 모쪼록 이번 기간에 여러분이 설 자리를 찾고 목적을 찾아 세우기 바랍니다. 만일 때를 놓치면 위치도 목적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여러분은 선생님과 무관하게 됩니다.
이 3년(1960~1962)은 역사적인 전환기입니다. 여러분은 모르지만 내적으로 그러합니다. 이 기간에 참가한 것이 크나큰 영광이 됩니다.
이 1961년, 3년 노정의 2년째를 넘어가고 있습니다. 이 3년 기간에는 승리적인 실적을 가져야 합니다. 3일째 되는 날(1월 3일)에 새해의 표어를 주겠습니다.
지금까지의 축복은 탕감해야 할 것 때문에 소모가 많았지만 이제부터는 그렇지 않습니다. 앞으로는 축복한 대로 이루어집니다.
이제 또 축복가정을 세워야 합니다. 자식 가운데 축복받은 아들딸이 있으면 세상에서 결혼한 아들딸보다 3배 이상의 성의를 가지고 대해야 합니다.
이제 들어오는 사람은 3년 동안 남의 도움 없이 지내야 합니다. 이 기간에는 우리들이 살던 생활 기준 이상의 생활을 시키지 않으려고 합니다. 믿음의 자녀를 세우기 전에 자기 자식을 둘 수 없습니다. 가인을 먼저 세우고 축복을 인계한 다음에 자식을 두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결혼한 사람은 선생님에게 속하게 되는데, 이것은 특례인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지파 편성을 해야 합니다. 축복은 조건 축복입니다. 외적으로는 하나님이 선생님에 대하여 잔인하십니다. 그때에 나는, 마음은 하늘에 두고 몸은 반대 위치에 세웠다가 다시 찾습니다.
사탄세계에 있는 입장에서 가르쳐 주어 부족한 것을 메워 나가야 합니다. 예수님도 믿음의 아들딸을 세우려다 돌아가셨습니다. 지금까지는 아기들도 전부 복귀노정을 걸었습니다. 이제는 자기 가정을 구원할 때가 왔습니다.
금년부터는 영계가 동원됩니다. 심정만 일치되면 예수님과 성신의 역사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지상에서도 실체를 걸어 놓고 영적 역사를 할 수 있습니다. 부모의 인연, 부부의 인연, 자녀의 인연이 싹터 오기 때문에 모두의 마음이 몰려드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자기의 것을 자랑하고 보이고 싶은 심정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랑할 것을, 혹은 보여 줄 것을 가져야 합니다. 아버지 앞에 자랑할 그 무엇을 가져야 합니다.
금년에는 아버지 앞에 무엇을 보여 드리고 자랑할 것인가! 오직 심정뿐입니다. 통일교회에 자랑할 것이 있다면 심정을 통하는 개인과 가정입니다. 그러므로 이를 평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또한 하늘이 자랑하고자 하는 것을 막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평할 수 없는 이유는 그것들이 선생님에게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은 원수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미워하지 못합니다. 선(善)은 원수 앞에 서도 선이어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아벨의 입장에서 맞아 왔습니다. 이제부터는 법적 치리를 할 수 있습니다.
제1세는 밀리고 제2세가 설 때입니다. 목사 장로는 못 들어와도 그의 자녀들은 들어옵니다.
선생님은 잘났다고 하는 자를 보면 지금까지 무엇을 했는가를 묻고 싶습니다. 선생님은 식구들이 옛날 그대로 머물러 있기를 원치 않습니다.
아기들에게 불쌍한 생각이 듭니다.
자고 깨고, 오고 가고, 만나는 것을 맘에 거리낌없이 보고하는 생활을 하십시오. 외적으로 못하면 내적으로 보여 주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말씀-실체-영으로 되어 있는 인간이기 때문에 먼저 말씀을 세우고, 인격을 세우고, 신령역사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 정상적입니다. 만약 먼저 신령을 앞세우면 단계를 뛰어넘은 것이 되기 때문에 탕감이 큽니다.
설교는 우선 자기가 감동을 받아야 합니다. 자기의 기도가 자기를 감동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설교는 동정받는 입장에서 해야 합니다. 나를 통해 생명의 인연을 맺어야 할 사람들의 불쌍함을 하나님께 호소하고 동정을 받는 입장에 서야 합니다.
여러분이 그러한 동정을 받는 입장에 서기 위해서는 자기가 고생을 하면서 하늘 길을 찾던 입장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원수가 없어야 합니다. 그들은 나를 죽이려 하지만 뒷골목을 가도 안심할 수 있는 자신이 되어야 합니다.
1962년, 이 해는 역사적으로 두 번 다시없을 해입니다. 그러면 이 해를 어떻게 맞이해야 할 것인가? 하나님이 소원하시는 것을 몇몇의 통일신도들만이라도 해원해 드리겠다는 목표 아래 새해를 맞이해야 하겠고 또 책임을 져야 하겠습니다.
금년에는 여러분들이 사탄의 참소를 피하여 하나님의 염려의 대상이 되지 말고 전후 좌우 상하 안팎으로 부족함이 없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지금까지 섭리해 오시면서 자랑하고 싶어하시던 소원의 실체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하늘과 땅, 온 피조만물 앞에 인정받고, 더 나아가 이 땅과 사탄세계에까지 보이고 자랑할 수 있는 실체가 되어야 합니다. 이 한 해에는 그것을 실천하고 감당하는 여러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소원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인간이 타락하지 않고 이루어야 했던 창조이상세계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타락한 이후 하나님께서는 온 피조세계를 대하여 당신의 심정을 줄 수 있고 받을 수 있는, 온 피조세계 앞에 보여 줄 수 있고 자랑할 수 있는 존재를 찾고 계십니다. 그 소원을 가지고 지금까지 역사해 오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직도 그 소원을 이루지 못하셨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지음받은 피조만물은 형태는 갖추고 있으나 그 가치가 없습니다. 그것은 만물의 주인공인 인간이 완성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소원은 인간이 만물과 인연을 맺고 하나님과 인연을 맺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인간을 종의 자리로부터 시작하여 양자의 자리를 거쳐 자녀의 자리, 그리고 부모의 자리까지 끌어 올리는 일을 해 오셨습니다. 그것은 한스러운 타락의 인연을 끊어 버리고 만물과 인간과 하나님이 일체의 인연을 맺어 하나님의 기쁨이 인간의 기쁨이요, 인간의 기쁨이 만물의 기쁨이 되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들딸을 만물세계와 천사세계에까지 자랑하고 보여 주고 위해 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어느 누구나 창조 당시의 모습이 아닙니다. 인간에게는 정적인 성품이 있기에 슬픔이나 기쁨 등의 감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상대를 통하여 기쁨이나 슬픔을 느낄 수 있습니다. 상대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될 때 서로 자랑하고 싶고 보여 주고 싶은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기뻐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시고, 인간은 자기들로 인하여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보고 기뻐하는 것이 바로 주고받는 기쁨입니다.
본연의 세계로 되돌아가는 데는 인간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끌어올리는 역사를 하십니다. 이것이 복귀섭리입니다. 여기에 인간이 협력하면 복귀섭리는 쉬울 터인데 지금까지 인간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에 협력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심정을 걸어 놓고 하나님의 손길을 붙잡으려 하는 사람을 찾기에 무한히 애써 오셨으나 그러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반기를 든 사람은 있었으나 하나님을 환영하고 옹호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하나님께서는 가정, 민족, 국가, 세계에까지 뜻을 넓혀 오셨습니다. 그 과정에서 내적 외적으로 받으신 고충은 말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국가나 민족도 평면적으로는 고생을 했노라고 할 수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고생했노라고 할 수 없습니다. 개인은 더욱 그렇습니다. 지상 뿐만 아니라 이제까지 왔다 간 모든 인간을 다 총합해 봐도 뜻을 위해 수고하고 협조했노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인간을 끌어 주시기 위해 하나님은 책임지고 친히 수고하시며 싸우고 계신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은 영광으로 나타나실 존재입니다. 인간의 기쁨이 하나님의 기쁨이요, 하나님의 기쁨이 인간의 기쁨이 되는 것이 창조의 이념인데 그 이념은 간 곳 없고 하나님께서는 처참한 모습이 되셨습니다. 인간 앞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모습은 영광의 모습이 아닙니다. 어떤 처참한 개인이나 민족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한 입장에 있는 하나님입니다. 원래 하나님은 영광의 모습이었으나 인간이 타락한 그날부터 그 반대의 모습으로 계시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자녀인 인간에게 맡길 수 있고, 인간들은 모든 것을 아버지 하나님께 맡길 수 있는 것이 하나님과 인간의 상호 입장이었는데 그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처참한 모습으로 자녀들 앞에 나타날 수밖에 없는 부모의 심정이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고통과 사정을 통고하고 싶지 않고 무한히 애쓰는 슬픈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하나님입니다.
이 땅의 수많은 신앙자들은 자기의 소원을 위하여 주님이 오실 영광의 한 날을 기다리고 있으나, 하나님은 그분을 보내시기까지 말할 수 없는 수고를 하시는 것입니다. 신앙자들은 이 사실을 모릅니다.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들은 자기를 위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이 손을 들라 하면 들어야 하는, 하나님을 붙잡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어떤 책임자라도 그와 같지 않으면 하나님을 붙잡을 수 없기 때문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고생에 대하여 동정하기에 앞서 그들을 보내기까지 하나님의 고생이 더욱 컸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영광을 보게 되는 이면에는 이미 하나님의 고생이 있었고, 우리가 소원을 이루는 배후에도 이미 하나님의 고생이 있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승리하기까지 하나님은 몇천만 번 패자의 쓰라린 고통을 겪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잘못된 일이 있으면 하나님은 그것을 위하여 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영광의 모습이 아니라 피와 땀과 눈물이 엉킨 처참한 모습으로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불리움을 받아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까지, 우리를 승리의 그 한 자리에 세우기까지 하나님은 제물이 되어 나오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영광을 누리시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나님께서 고난의 길을 거쳐오셨기에, 우리도 고난의 길을 거쳐야 합니다. 그렇지 않는 한 하나님께서 영광을 누리실 수 없습니다. 이제까지 우리는 하나님의 그러한 수고를 알지 못했고 하나님 또한 그것을 보여 주고 싶어하시지 않았습니다. 부모로서 사랑하는 자식에게 자신의 수고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덮어 내려오신 것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은 어떤 모습이셨는가? 무한히 슬픈 모습이었습니다. 피조만물세계에 하나님의 고통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랑을 해 보지 못하셨습니다. 자랑하고 싶은 하나님의 심정이 여지없이 유린당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을 붙든 사람이 있었느냐? 민족이 있었느냐? 없었습니다. 반대하고 깎아내리는 사람은 있었어도 책임을 다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더구나 책임을 다하라고 밀어 준 사람은 더욱 없었습니다. 책임을 해 보려 한 사람마저 꺾여 넘어갈 때마다 하나님은 분한 마음에 당장 심판해 버리고 싶었으나 매번 참으셨습니다. 아브라함까지 2천년, 민족복귀의 400년, 국가복귀 2천년을 참아 오신 것입니다. 모세가 뜻을 위해 염려할 때에 그가 헐벗는지 입는지 굶는지 먹는지 염려하고, 외로울 때에 위로해 준 사람이 있었는가? 모두가 강탈을 했지 안식의 터전을 제공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죄상의 대가를 받는다면 무엇 하나 남아질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사탄 앞에 하나의 개인을 심판할 때에, 나는 개인을 위한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에 심판할 수 없다고 변명해야 했습니다. 얼마나 슬프고 처량한 일입니까?
개인을 위하여 나간다면 다 꺾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위하여 나가십니다. 그러나 사탄은 개인을 걸고넘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개인은 쓰러져도 그 개인을 보낸 나는 쓰러지지 않는다. 너는 개인적으로 대하지만 나는 우주적으로 대한다.’ 하시기 때문에 사탄이 상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하나님은 인간을 찾아오고 계십니다. 우리가 사탄과 싸우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 사정을 고하면 물론 들어주실 하나님이시지만 우리는 하나님께 사정을 고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개인을 붙잡고 가정을 대하시고, 가정을 붙잡고 민족을 대하시고, 민족을 붙잡고 세계를 대하십니다. 이렇듯 한 단계를 넘어서서 대하는 심정적 발판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심정적 발판에 의해 가정을 대하다 그 가정이 쓰러지면 다시 개인을 세워 역사하시는 수고를 계속해 오셨음을 알아야 합니다.
개인의 고통이 아무리 커도 하나님 앞에 그 고통을 말할 수 없습니다. 가정의 고통이 아무리 커도 그 고통을 말할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상을 붙들고 이 현세와 싸우는 심정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개인에 얽매이지 말고 하늘땅에 얽매여야 합니다. 아버지께서 그러하시니 우리도 그래야 하는 것입니다.
때가 가까워 올수록 하나님은 영광의 모습이 아니라 무한히 슬픈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피와 땀과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반대하는 사람이 있으면 굴복시켜 하나님을 옹호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복귀역사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옛날에는 몰리고 쫓겼으나 이제는 난관 앞에 몰리거나 쫓겨서는 안 됩니다. 죽지 말아야 합니다. 환경과 인연의 형태는 옛날과 마찬가지이지만 죽어서도 안 되고 밀려나서도 안 됩니다. 왜? 수고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손길을 느껴야 합니다. 개인을 붙들고 가정을 붙들어야 합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 앞에 무엇을 보여 드리기 전에 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사정을 통하고 분한 모든 것을 풀어 드려야 합니다. 그러고 난 다음에 인간의 무엇을 보여 드려야 합니다. 우리 자체는 하나님 앞에 보여 드릴 존재가 못 됩니다. 타락하여 타락권 내에 있는 인간으로서는 아무것도 보여 드릴 수 없습니다. 역사적인 아버지께서 그토록 비참한 모습을 하고 계시니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소원을 풀어 드려야 합니다.
그것은 영광 가운데서는 안 됩니다. 사탄이 제일 험한 곳을 안내하더라도 그대로 따라갈 수 있어야 합니다. 오히려 사탄이 발을 들여놓을 수 없는 곳도 서슴지 않고 가야 합니다. 사탄들을 따라가서 싸워 이겨야 합니다. 인간이 최후의 고비를 돌파해야 하나님도 비로소 ‘내 아들아! 내 딸아!’ 하실 수 있습니다.
조건을 세워 사탄을 쫓아낸다면, 삼천만을 녹여내던 사탄은 어누 누구도 데려가지 못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다시 소망을 가지고 찾아오십니다. 하나님은 심판하기를 지극히 바라십니다. 그런데 누구 때문에 6천년 동안이나 심판하시지 못했는가? 사람 때문입니다. 무조건 심판하면 사탄이 ‘죽여 주시오.’ 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문제는 사람이 없어서 심판을 못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 아브라함, 모세, 예수를 세워 인간을 심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손을 들어 치시지 않았습니다. 어디까지나 인간을 통해서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의 원수를 갚도록 되어 있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원수는 아들이 갚아야 합니다. 원수는 자기 자신이 갚거나 그의 아들이 갚아야 합니다. 예수가 못 했으면 그의 아들이 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의 아들이 있습니까? 그래서 끝날에 예수를 세우지 못하고 슬픈 모습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을 위로해 드려야 합니다. 슬프신 아버지십니다. ‘불쌍하다. 억울하다.’ 하는 말은 하나님을 두고 해야 합니다. ‘슬프다, 분하다, 억울하다’ 하실 분은 오직 아버지 한 분이십니다.
처참한 아버지 앞에 참소하는 사탄을 붙잡고 호령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몰아내야 합니다. 그러면 사탄은 어디로 갈 것인가? 지옥의 밑창으로 갈 것입니다. 거기서도 몰아내면 무저갱(無底坑)으로 도망갈 것입니다. 그런 다음 오랜 역사를 통하여 싸워 나오신 아버지, 모셔야 할 아버지, 상처 입으신 아버지를 위해 좋은 군마를 대기시켜 놓고 ‘아버지, 이제 오십니까?’ 하며 맞이해야 합니다.
아버지는 잘 입고 따라오는 아들보다, 못 입었어도 자기를 따르고 모시는 아들을 더 좋아하십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오시다가 화가 날 때 화를 풀어 주고 저주를 내리기 전에 아버지를 위로해 드리는 이가 메시아입니다. 슬픔과 억울함과 분함을 하나님과 함께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류 앞에 어떤 모습을 보여 주셨느냐? 영광의 모습이 아니라 그 반대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있지만 피조만물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만물이 탄식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세계사적인 고통을 받은 사람 이상의 고통을 받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팔이 부러지더라도 가야 합니다. 고통과 슬픔과 분함을 청산할 수 있는 자리로 가야 합니다. ‘슬퍼하지 말라. 소망을 갖자.’ 하고 나갈 때 민족은 화를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금년 이 해는 뜻적으로 볼 때 중요한 해요, 하루 하루가 중요한 날들입니다. 예수가 넘은 한 고비를 넘어야 할 때입니다.
예수는 선두에 나서서 싸우셨습니다. 예수의 사상을 상속 받아 하나님을 위해 싸울 수 있는 신앙자, 끝까지 사탄과 싸울 수 있는 신앙자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어느 한 민족을 중심삼고 최후의 결판을 내리실 것입니다.
만일에 하나님께서 우리 통일신도를 중심삼고 그 일을 하신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나님을 분하게 만든 원인자가 우리의 선조요, 더 나아가 사탄이니 복수를 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대신 보여 주어야 합니다. 제일 불쌍한 것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복귀의 심정과 소망의 심정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소망의 심정을 빼앗겨서는 안 되는 것처럼 여러분의 소망의 심정도 빼앗겨서는 안 됩니다. 사탄을 밀어내기 전에는 하나님의 소망의 심정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이 투쟁은 6천년 인류역사 이래 최고의 투쟁입니다. 지금 이때는 자기 아버지가 죽어간다 해도 그 아버지를 붙들 여가가 없는 절박한 때입니다. 이러한 투쟁 과정에서 하나님이 ‘네가 내 대신 악을 치는구나. 네가 내 대신 핍박을 받는구나. 네가 내 대신 피땀을 흘리는구나.’ 하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탕감복귀가 이루어집니다. 이스라엘보다도 더욱 용감하게 싸워야 하나님께서 ‘오, 과연 너는 내 아들이구나.’ 하십니다. 이렇게 싸우고 돌아와서야 ‘다 이루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가 다 이루었다고 했지요? 그는 영적으로 다 이루었다 했지만 우리는 육계에서 ‘다 이루었다.’ 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보여 주고 자랑해야 합니다. 아버지께서는 비통한 모습을 보여 주셨으나 사람들은 그러한 아버지를 생각조차 못 했습니다. 여러분은 아버지의 서글펐던 역사적인 내력을 분하게 여기고 아버지 대신 싸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믿을 수 있게 해야 합니다. 무엇을 보여드려야 하느냐? 복귀의 심정, 소망의 심정을 가지고 하나님 대신 사탄과 싸우는 모습을 보여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타락하지 않은 참아들딸, 참부모, 참가정, 참민족, 참세계를 보고 싶어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아들딸이 천상천하를 주관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시려 했습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하나님을 모셔 보지 못한 것이 한입니다. 이 한은 내 한인 동시에 하나님의 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6천년이 걸렸지만 그 터전 위에 있는 우리는 6년이나 6개월, 혹은 6일이라는 수리적인 기간에 걸쳐 해낼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진해서 움직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한 민족만의 것이 아니고 전세계의 것이니 하나의 민족에서 그치지 말고 세계를 향하여 나가야 합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위해 모인 무리이며 무엇을 위한 역군인가?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모인 무리입니까? 아닙니다. 사탄과 싸우기 위해 모인 무리입니다. 우리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싸우면 사탄은 도망갈 것입니다. 누구도 우리를 당해내지 못합니다. 우리는 모든 어려움과 고통을 책임진 무리입니다. 우리는 세계사적인 종적인 슬픔과 고통을 횡적으로 탕감해야 합니다.
이 3년은 짧은 기간이지만 중요한 노정을 형상적이며 상징적으로 걷는 기간이니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잘 넘겨야 합니다. 이 민족이 가기 싫어하는 길을 가는 데 선두에 서고, 세계의 민주주의 진영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하는 데 선봉이 되어야 합니다. 복귀적인 심정, 소망적인 심정을 가지고 가다가 쓰러지면 육신은 사탄이 끌고 갈 수 있어도 정신(영혼)은 끌고 가지 못합니다. 영적으로 점령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엔 영광의 시대로 들어가야 합니다. 계속 싸워야 하지만 그런 가운데에서 행복을 노래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그런 가운데 내부에서는 자리를 정리해야 합니다. 이런 이중적인 싸움을 해야 합니다. 최고의 고통을 겪으며 사탄의 최일선을 붕괴시켜 우리 앞에 머리를 숙이도록 해야 합니다. 한 쪽에서는 무시무시한 싸움을 벌이고 한 쪽에서는 승리적인 영광의 모습을 자랑해야 합니다.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느냐? 개인적인 싸움이 끝나면 가정적인 싸움, 가정적인 싸움이 끝나면 종족적인 싸움을 해야 합니다. 종족적인 싸움이 일어나면 문제는 다릅니다. 내적으로 개인적인 싸움, 가정적인 싸움이 끝나면 더 이상 외적으로만 싸워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 찾아진 개인이 있고 가정이 있으니, 이런 환경을 자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가 싸우는 동시에 내적으로 자랑할 수 있는 무엇을 가져야 됩니다. 보여 줄 수 있는 무엇을 가져야 됩니다. 최일선이 후방이 되고 점령지대가 넓어지며 내적인 발전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는 움직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까지 야곱을 세우시고, 모세를 세우시고, 예수를 세우시어 종적으로 섭리해 나오셨습니다. 이제 끝날에는 개인적으로 자랑할 수 있는 아들딸, 가정적으로 자랑할 수 있는 한 가정, 종족적으로 자랑할 수 있는 한 종족을 횡적으로 찾아 세우십니다. 이것이 어느 한도까지 차면 세계는 움직입니다. 그렇게 되면 사탄은 삼천만 민족 가운데에서 추방됩니다. 하나님이 원수를 갚기 위하여 싸우고, 하나님을 증거하면서 죽어야 합니다. ‘나는 당신의 아들딸로 죽습니다.’ ‘당신이 찾으시는 아들딸을 위해 죽습니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아들딸로 자랑하시고 축복을 해 주십니다.
우리들 자신으로 돌아와 생각해 봅시다. 자랑할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자랑은 싸워서 승리한 다음에야 할 수 있습니다. 그냥 자랑하면 사탄이 참소하게 되어 있습니다. 무형의 아버지 대신 싸워 유업을 상속 받고, 오시는 실체의 참부모 대신 유업을 상속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아버지,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해야 합니다.
금년의 표어는 ‘보여 드릴 수 있는 자가 되자, 자랑할 수 있는 자가 되자’입니다. 도망가는 사탄을 어디까지라도 쫓아가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개인을 드러내어 자랑하고 싶어하시고 가정을 드러내어 자랑하고 싶어하시니, 이것을 위해 싸워 승리해야 합니다. 그래야 영계와 육계를 연결할 수 있는 아들딸이 됩니다. 싸움에서 이겨야 자랑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늘 가정의 복귀를 위해 싸워야 합니다.
1962년은 보여 줄 수 있고 자랑할 수 있는 기준을 세워야 합니다. 싸울 때는 하나님을 중심삼고, 또는 하늘 가정을 중심삼고 싸워야 합니다. 그래서 승리해야 합니다. 싸워도 가장 고생스러운 자리에서 싸워야 합니다. 제일 어렵고 힘든 노동, 혹은 거꿀잡이로 왕거지로부터 시작하여 꼭대기를 눌러 굴복시켜야 됩니다. 부모와 합동작전을 해야 됩니다. 부모와 자녀가 합력하여 전도해야 할 때입니다. 부모와 자식, 한 가정이 총대를 나란히 하고 싸워서 천적인 가정, 종족, 민족을 이루어 온 세계를 복귀해야 합니다. 이제부터는 가정을 중심삼고 싸워야 합니다.
여러분이 낙망하면 그 상처는 가정에 미치게 됩니다. 여기서 밀려 나가면 마지막입니다. 통일신도가 가져야 할 오직 하나는 ‘하나님의 심정’입니다. 그 심정에는 하늘과 땅이 왔다 갔다 합니다. 세상에서 보기에 우리는 바보같이 보일 것입니다. 돈을 써도 심정적으로 하늘 편에 이익이 될 수 있게 쓰면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보여 주려면 고생의 최고 기준을 세워야 합니다. 고생은 혼자 하지 말고 부부끼리, 식구끼리 해야 합니다. 지금은 개인적으로가 아니라 가정적으로 민족적으로 고생할 때입니다. 금년에는 민족적으로 세계 앞에 보여 줄 수 있는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세계적인 단계로 넘어가는 때입니다.
하나님이 천지 만물을 짓게 될 때, 참다운 인간의 조상을 세워 영원토록 기뻐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런 기쁨이 계속될 수 있는 세계를 바라보고 아담 해와를 지으셨습니다.
그런데 아담 해와가 기뻐하고 감사해하고 행복해하면 하나님도 기쁘고 영광이겠으나, 타락으로 인해 그들이 지옥을 달리는 선봉자가 되었으니 하나님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지어 주신 것을 자랑할 수 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으니 아담 해와는 수치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아담 해와를 원망하는 동시에 만물을 원망하면 원망할수록 하나님에게 슬픔이 돌아갑니다. 우리는 아담 해와가 저지른 모든 것을 다 회복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늘과 인류와 만물의 슬픔이 어느 때에 풀리겠느냐? 이것은 후아담, 곧 예수로 말미암아 풀리게 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아담 해와를 다시 살리는 재생의 기점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한 분의 탄생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재현되는 것이요, 피조만물이 재생되는 것입니다. 곧 메시아의 탄생은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소원 성취의 기점입니다. 그 한때를 맞기 위하여 고생을 해 오셨는데, 이스라엘 민족은 그러한 하나님의 뜻에 부응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이스라엘 민족 때문에 실패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민족의 반역이 없었더라면 개인과 가정과 민족도 찾아 세울 수 있었는데, 이스라엘 민족의 불신으로 섭리의 전체적인 책임을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이중의 십자가 노정을 걸으셨습니다. 하나는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것과 또 하나는 자기 자체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한 것입니다. 부활 후에 12제자를 다시 찾아가 일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민족이 받들지 않으니 30세까지는 개인을 중심한 가정적인 기준, 종족적인 기준을 만들어 놔야 민족적인 기준으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하나되었더라면 가정적인 기대는 이루어졌을 것인데, 그러지 못한 가운데 종족적인 기준을 세우려니 이중의 십자가를 지게 되었습니다. 내적으로 택해 세운 이스라엘 민족과 하나되어 나가지 못하고 외적으로 나아가 하나님의 아들딸을 찾아 뜻을 이루고자 한 것이 3년 공생애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딸의 나라를 건설하고 온 우주에 있는 사탄의 세력을 제거하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기에, 그러한 뜻을 품고 사탄을 대해 싸워 나가면서 뜻을 이루고자 한 것이 3년 공생애노정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재현이자 하나님 나라의 재현이요, 에덴동산의 재현이며 하나님의 사랑의 재현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슬픈 민족이 될 것이 아니고 온 천상천하를 주관하는 민족이 되어야 할 것인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하나님은 예수만의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이름은 예수만의 이름으로 남아졌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하늘 민족, 하늘 백성, 하늘의 소원이 될 수 있어야 할 것인데 하나님의 나라도, 하나님의 사람도 예수만으로 한정되고 말았습니다.
예수와 더불어 이룰 수 있는 하나의 가정적 혈통적 기반이 되어야 할 것인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증거한 사람도 그랬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도 그랬습니다. 예수는 나면서부터 영광을 누려야 할 것이었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남아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천국이념으로 이스라엘 민족이 잘못한 연고로 예수만의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또 메시아가 만민의 것으로 남기지 못하니 하나님의 것으로 남아졌습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것만으로 탄생되니 이런 것을 바라보는 하나님은 탄식하고 후회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인 줄 마리아나 요셉은 몰랐습니다.
4천년 동안 찾아 세운 제1이스라엘은 깨어져 나가고 예수 믿는 무리로 제2이스라엘이 형성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이후 지금까지 그러한 무리를 중심삼고 섭리해 나오셨습니다. 예수는 자신의 소망과 꿈을 인류와 하늘땅의 소망으로 이루기 위해 걸은 것입니다.
참다운 축하를 드리기 위하여는 이스라엘 민족 앞에 보이시던 예수의 참모습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의 사랑이요, 예수의 사랑은 곧 내 사랑이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늘의 천군천사가 찬양하기 전에 우리 인간들이 먼저 찬양하지 못한 것을 한해야 합니다. 심정적인 차이는 있을망정 오늘과 같은 축하는 처음입니다. 참다운 축하를 못 드리면 참다운 분을 모시지 못합니다. 그가 죽으면 대신 죽겠다고 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다시 오시는 메시아의 한을 해원할 수 있는 인격자가 되어야 합니다. 메시아를 맞이하여 해방의 자리에서 기뻐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메시아는 하늘나라의 왕자로서 사랑과 생명과 기쁨의 중심이요 이상의 중심이었습니다.
다시 찾아오는 메시아 앞에 부끄러움 없이 나타날 수 있는 적격자가 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마음 상태나 생활을 예수와 비교해 볼 때 과연 자신이 있느냐? 모시기 위하여 준비되어 있느냐? 그렇지 못하다면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대상인 하나님의 가정, 하나님의 민족, 하나님의 세계까지 나타나야 합니다. 민족과 하늘과 땅을 대신하여 축하할 책임을 느껴야 이스라엘의 대를 이어 나갈 수 있는 자격자가 됩니다. 그리고 과거 이스라엘의 재현의 실체가 됩니다.
그러므로 이제 여러분의 종말노정에 있어서 이스라엘 민족이 실수한 것과 같은 그러한 노정이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신념이 있어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제는 세계적인 준비와 기반을 닦아 가지고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한으로 남아진 것을 박차고 나서서 모든 것을 상속 받겠다는 신념을 가지고 오시는 주를 맞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지 못하면 다시는 주를 맞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과거의 모든 실수는 무지했기 때문인 것으로 알고 이제는 새로운 주님의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오늘날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자보다 예수 당시에 축하하는 자를 하늘은 더 소망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실체가 되어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자가 되고, 또 그렇게 된 다음에 죽은 예수의 한을 풀고 모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자격을 갖추어 가지고 주님의 성탄을 축하한다면 2천년이 지난 오늘이지만 그러한 축하가 가장 의의가 있을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지금까지의 모든 잘못을 총탕감하고 넘어가겠다는 마음을 갖추어 가지고 오시는 주는 어떠한 개인이 아니고 하나님의 재현체이고, 온 천주이념의 재현체라는 것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참다운 축하의 자격자가 되어야 합니다.
6천년 역사는 하나님이 개인을 때려 개인을 빼앗고, 가정을 때려 가정을 빼앗고, 민족을 때려 민족을 빼앗고, 국가를 때려 국가를 빼앗고, 세계를 때려 세계를 빼앗아 온 역사입니다. 예수는 역대 섭리사에 왔다 갔던 중심인물들의 재림체요, 국가는 이스라엘의 재림체입니다.
공산주의는 가인, 민주주의는 아벨, 이상세계는 셋을 상징합니다. 율법적으로 에덴을 복귀하고자 하는 파는 신·구약을 지킵니다. 진리로 에덴을 복귀하고자 하는 파는 ‘이용도’ 파로서 모든 것을 진리로 풀어 나가는 파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사랑으로 에덴을 복귀하고자 하는 파가 나와야 합니다. 지금은 성경에 있는 최고의 말씀을 거두어 이룰 때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하늘과 종적으로 연결되어 나아가지만, 중심이 생긴 다음부터는 평면적으로 연결되어 나아갑니다. 심정적인 인연을 벗어나서 존재하는 것은 없습니다. 참된 통일의 아들딸이 있다고 하면 하나님은 그들에게 바라는 것이 많을 것입니다. 자신을 주고 싶을 것입니다. 과거나 현재에도 그러하고 미래에도 그러할 것입니다.
어떠한 고통과 슬픔이 있어도 사탄 앞에 굴복하면 해원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제 어떻게 해야 할 것이냐? 내 나가는 길을 어떠한 고통이나 슬픔과 어려움도 막을 수 없다는 심정적인 기준을 세워야 합니다. 그리고 아버지께 ‘제 어깨에, 제 몸에 지우고 싶으신 것을 지워 주시옵소서.’ 하고 자신 있게 아뢸 수 있어야 합니다.
나무의 순은 하늘을 향하여 90도로 자라고 있습니다. 인간은 만물의 주관자요, 주관자는 중심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 무엇이 걸고 잡아채도 넘어 지지 않아야 합니다. 45도의 입장에 처한 인간은 다 꺾였습니다.
선생님은 이 길을 가고 싶어서가 아니라 가야 하기 때문에 갔습니다. 아직까지는 탕감노정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소원은 창조의 이념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 뜻을 이루어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가는 데 이념과 이상이 높은 것은 좋되 하나님의 심정은 여러분의 이념과 이상 그 이상이기 때문에 자숙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딸이라면 하나님의 심정을 나타내야 합니다. 한을 해원해 드리기 위해서는 심정을 중심삼고 해야 합니다. 하늘과 땅, 또는 영계의 천천만 영인들이 걸고 넘어지더라도 무난히 넘어서야 합니다. 보다 가까운 식구 식구들의 한을 풀어 주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좋아하십니다. 선생님은 그러한 것에 너무나 예민해 있습니다.
하나님의 6천년의 원, 이것은 이 땅에서 풀어야 합니다. 원, 이것은 어느 때부터 있었느냐? 타락 전부터 있었습니다. 그것은 창조이념을 중심삼은 원입니다. 거기에 타락의 한이 첨부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한을 풀어 드려야 합니다. 어디에서? 지상에서 해야 합니다. 여러분 각자로부터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아들딸로서의 여러분이 아니면 안 됩니다. 타락으로 떨어진 것을 다시 붙안고 창조의 성업을 이루기 위한 섭리가 6천년 역사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실수한 모든 것까지 해결해야 할 입장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과 무엇을 맺기 위하여 찾아오시겠습니까? 여러분은 죄에서 해방을 받아 마음과 몸이 화동할 수 있는 입장을 갖추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과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어느 정도? 목적이 없는 만물은 하나도 없습니다. 목적을 다하는 날까지….
이때는 결실기인 가을과 같은 때입니다. 눈앞에 보이는 만물, 또는 천상에 있는 모든 것은 다 아버지의 심정을 통해야 합니다. 지상의 어느 것이라도 다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자리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여러분의 느낌이 마음을 움직이고 심정까지 움직여야 합니다. 나아가 환경을 움직이고 만물까지 감동시켜야 합니다.
자신을 비판해 보십시오. 아버지의 사랑 앞에 무엇을 나타낼 것이냐? 실체적인 그 무엇을 가지고 나타내야 합니다. 이것이 남자는 여자, 여자는 남자와의 주고받음입니다. 상하 부모, 전후 부부, 좌우 형제로서 식구들 끼리끼리 한을 풀어야 아버지의 한을 풀어 드릴 수 있습니다.
가나안을 향하여 가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각자의 사사로운 재산 가지고 가나안 입성이 되었겠습니까? 역사적으로 중대한 의의를 가진 3년 기간에 있는 우리에게 있어서 돈을 가지고 있는 것이 오히려 헛된 일이며 가는 길에 지장이 많습니다.
민족적으로 애급을 떠나 가나안으로 복귀할 때에 통고를 받지 못해서 함께 떠나오지 못한 사람이 있었다면, 그들에 대해서는 통고하는 측이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끝날에 처한 우리들도 이 소식을 받지 못해서 못 따랐다고 하는 사람이 있게 된다면, 그에 대한 책임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 3년 동안 우리 통일교회 소식을 듣지 못해 따르지 못했다고 하는 동포가 한 명도 없도록 면면 촌촌 구석구석까지 이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지금은 어느 누구든지 역사상에 왔다 간 도주들만큼의 심정을 품게 되면 평면적인 위치에서도 그들이 통한 만큼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때입니다. 또한 역대의 선조들이 우리 성도들을 협조하는 때입니다. 그들은 땅 위에서 실체를 쓰고 사는 사람들에게 영적 교류를 통해 협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혜택권 내에 있습니다.
만일 나가서 고생하는 여러분에게 월급을 준다고 해 보자구요. 그 월급을 누가 주겠어요?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여러분의 수고는 이미 대가가 치러진 것인 즉 그 수고는 사실상 하나님이 한 것이 됩니다. 결과적으로 여러분은 삯꾼밖에 안 됩니다. 그러니 고생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처음 이 뜻을 받아들일 때에 진심으로 받아들였던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 전하여 줄 때도 진심으로 전해야 합니다.
우리들은 세기적인 피난민이나 다름없습니다. 사실상 피난민이 되어야 합니다. 어떠한 것에 대하여 책임을 진 자는 그것에 사무쳐야 합니다. 죽을 때에 그것을 이렇게 했더라면, 혹은 그렇게 하지 말았더라면… 하는 후회의 조건을 남기는 여러분이 될까 봐 걱정이 됩니다. 아무것도 먹지 않고 오직 모체로부터의 영양만을 받고 자란 아기도 출생하자마자 배내똥을 눕니다. 아무것도 먹지 않았는데 어떻게 똥이 있을 수 있는가? 그러나 분명히 똥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선한 역사를 위하여 일하는 무리 가운데도 그러한 존재들이 있습니다. 그 대변과 같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니, 여러분들은 부디 버려지는 배설물과 같은 존재가 되지 말고 알곡으로 남아지는 실체가 되기 바랍니다.
지도자는 자기를 과대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또 심정의 빚을 지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가 어떤 책임자의 위치에 있다 하더라도 항상 배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말씀 요지> 지상에는 한을 품고 허덕이는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한을 토로할 수 있는 친척과 친구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그러한 대상이 없습니다.
우리는 고통이나 슬픔 등이 하나님과 아무 관계가 없는 줄 알고 지내 왔습니다. 알고 보면 인간에게 아무런 큰 한이 있더라도, 아무리 분한 원수가 있다 해도 이것들은 어떠한 한계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의 분(憤)과 한은 역사적인 것입니다.
인간은 한을 풀기 위해 어떠한 것을 생각하고 추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무리 슬픈 일이 있더라도 그 슬픔을 표시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이 세계가 원수가 주관하는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불행을 표시하는 말은 여러 가지가 있어도, 하나님의 불행은 무어라 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하나님의 불행을 어찌 인간의 불행에 비할 수 있겠는가!
인간은 불행합니다. 우리는 불행한 인간을 찾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에게 고통을 준 것이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의 불행을 청산해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한은 세기적이요 세계적입니다. 하나님은 역사를 이끌고 심판의 한 날을 향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앞장서는 사람은 하나님의 심정을 알아야만 합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왜 제물을 받아야 하는가? 그것은 고통 가운데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어느 도(道)나 제물의 과정을 거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이 비참한 자리에 들어가는 것을 인간은 막을 수 없습니다. 왜 그런가? 그것은 하늘이 인간의 비참함을 하나님의 것으로 세우려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개인을 희생시켜 가정과 사회와 국가를 세워 나갑니다. 7년 대환난은 그래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심판대에서 최후의 부름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비참한 사람들입니다.
메시아를 찾아 나아가는 사람에게는 행복과 평안을 허락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늘이여, 인류여, 나를 쳐라! 역사 이래의 모든 것이 전부 동원되어 나를 치더라도 그것을 이길 수 있는 자라야 최후의 승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탄세계의 위압이 있다 하더라도 쓰러질 때는 혼자 쓰러지지 말고 하나님을 붙들고 쓰러져야 합니다, 예수님같이. 이스라엘 민족은 쓰러지면서 하나님을 붙들지 못하였습니다.
앞으로 미국이 사명을 못하면 이제껏 쌓아놓은 탑이 무너집니다. 쓰러지더라도 하나님을 붙들고 쓰러져야 합니다. ‘아버지, 당신의 한을 나로 인하여 청산하시옵소서.’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니, ‘이제부터 새로운 역사를 출발시키시옵소서.’라고 할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리에서 하나님과 함께 심정의 터를 닦아야 새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이라야 새로운 시대의 선봉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이념주의시대입니다. 또한 세계주의시대입니다. 앞으로 올 세계와 자기와의 관계를 알아야 합니다. 그 관계의 차이가 크면 클수록 고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지금은 불행한 때입니다. 이것이 크면 클수록 복된 세계가 빨리 옵니다.
심정은 개인에서 천주까지 직선을 그으며 그 외적인 형을 넓혀 왔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알아야 할 것은 타락의 심정, 복귀의 심정, 부활의 심정입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내려온 것이지만 여러분은 오늘 이 시대의 전체를 평면적으로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야곱이 고생할 때에는 그에 반응하여 모든 사람이 고생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과거의 개인, 가정, 민족, 국가의 결실체로서의 나라는 것을 심정적으로 알아야 합니다.
‘너는 누구냐?’ 할 때, 복귀된 아담이요, 복귀된 노아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아담과 노아를 심판할 수 있습니다. 요컨대 심정을 중심해야 심판이 성립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영육을 합하여 한을 풀 수 있는 실체가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역사적이고, 시대적이며, 미래적인 실체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전후와 과정의 심정을 갖고 주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승리적인 존재가 됐는가 안 됐는가를 결정하는 것이 대심판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아담이 당한 유혹이나 시험, 노아의 시련, 아브라함의 시련, 그리고 모세가 당한 어떠한 처참한 것도 이겨내야 합니다. 미디안 광야 40년의 역경이나 십자가의 죽음도 문제가 없다는 입장에 서야 합니다. 하나님이 치시더라도 괜찮다는 입장에 서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배반한 것을 탕감복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생각하고 소망하지도 않은 세계가 자기의 것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죽은 자와 산 자를 심판할 수 있는 자신이 있어야 합니다. 역사적인 인물의 꼭대기를 넘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면 그 얼마나 멋진 일인가!
여러분은 어떠한 역사적인 인물의 짐을 지워 달라고 기도해 본 일이 있는가? 아침 햇빛과 저녁 별빛을 바라보며 역사 이래 한을 품어 오신 하나님이 소망의 한 날을 바라보며 비춰 주는 것이라는 감정을 가져 보았는가?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이 우리를 보고 슬퍼하신다는 것을 아는 만물이므로 만물이 탄식하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밥(음식)의 신세를 지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아니라고 하면 그들은 원망스럽다고 할 것입니다. 그들이 동맹이라도 한다면 10일 이내에 인류는 쓰러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니 모든 인류가 자기들로 인하여 살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밥의 신세를 지고 사는 우리들은 밥만 못하다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을 하면 만물은 모두 우주적인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자기 것으로 주관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심정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정과 하나된 조건이 갖추어질 때 비로소 가능합니다.
말씀의 모든 요소 중에서 중심은 심정입니다. 말씀은 태초부터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슬퍼하시는 것은 이것이 단절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잇자는 것이 복귀섭리입니다. 이것을 잇는 자는 역사적인 재현의 실체입니다.
예수님이 심정적인 재현의 한 날을 바라보고 오십니다. 하나님은 정복하고야 안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아무리 탄식해도 이러한 심정을 중심하고 탄식해 보지 못한 우리들입니다.
하나님을 대신한 심정으로 모든 것을 소화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심정으로 원수를 점령하라! 하나님과 우리의 재산은 심정입니다.
이념을 찾아가는 것은 복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이 복을 찾아 나왔으나 복된 생활을 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복의 한계는 어디까지냐? 권세나 명예 같은 것은 지나가는 것입니다. 참된 복은 영원히 공존하는 것입니다.
참된 복은 타락된 전인류나 지구 전체, 기타 어느 피조물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복의 운전사는 사랑입니다.
주관하라 하신 말씀은 만물뿐만 아니라 하나님까지도 주관하라고 하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복된 자가 못 되고서는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복을 주마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복은 심정이 영원히 깃드는 곳에 있습니다. 복이 가는 곳은 하나님의 심정의 중심점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신은 복된 사람이니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라고 하는 말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혼자서는 복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역사적인 인물의 꼭대기를 타고 넘어야 합니다. 예수님까지도 타고 넘어야 합니다. 예수님도 이것을 바라고 계십니다. 이것이 부모의 심정입니다.
시대적인 생활을 하는 자가 되지 말고 역사적인 생활을 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생활을 하지 못하고, 우리 이상 심정적인 생활을 실천하는 자가 나오면 우리는 뒤떨어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복된 길을 가야 합니다.
남는 것은 고생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즐겨 받을진대 내가 여러분에게 선물로 줄 것은 오직 이것뿐입니다. 고생하는 자리에서 아버지를 만나야 영원한 존재가 됩니다.
시대적인 효자가 되지 말고 역사적인 효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종의 입장에서 사명을 못하는 민족과 국가를 칠 때에는 하나님 자신이 그 이상 많은 고통을 받으신 후에 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불쌍한 하나님이십니다.
종의 자리에서 양자의 자리로 가는 데에는 복잡한 수속 절차가 있습니다. 기독교는 양자의 권한을 갖고 있는 종교입니다.
이제는 양자의 자리에서 직계 자녀의 자리로 나아가는 때입니다. 양자는 출발부터 다른 자녀입니다. 몸도 마음도 심정도 혈통도 부모와는 다른 자녀입니다. 그러나 직계 자녀는 부모와 혈통이 같습니다.
부모의 고통이 그 핏줄에 있고, 부모의 선악의 전부가 그 핏줄에 있습니다. 자식이 어린아기로 태어나지만 그 자식에게는 부모가 자라던 근원에까지 인연이 맺어져 있습니다. 80노인의 일평생의 모든 것이 10살 난 자식이라도 그에게 모두 인연 지어져 있는 것입니다.
접을 붙일 때에도, 양쪽에서 진액이 나와서 화(和)할 수 있는 하나의 기준이 잡혀야 그 진액이 전체에 이어집니다. 접을 붙이기 위하여는 뭉청 잘라야 합니다. 고목에는 접을 붙일 수 없습니다. 아무리 큰 나무라도 다 끊어내야 접을 붙일 수 있습니다. 끝날 성도들에게 모든 것을 버리라고 하는 것은 접붙일 준비를 하라는 말입니다.
성신을 거쳐 예수님의 마음속에까지 들어가려는 것이 오늘의 기독교의 역사(役事)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종적으로 볼 때에는 부모요, 횡적으로 볼 때에는 신랑입니다. 물론 남자에 대해서도 예수님은 신부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남자도 예수님을 그리워해야 합니다. 자기의 몸이 자기 것이 아닌 입장에 서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심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세계를 심판할 수 있습니다. 역사적인 인물들은 모두 ‘나만 남았나이다.’ 하는 자리에서 출발하였습니다.
부모를 사랑하는 것이 자식을 사랑하는 것보다 털끝만큼이라도 나아야 합니다. 도의 생활의 저울추가 자식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정으로 인하여 창조가 있었던 것이니, 모든 것이 있기 전에 심정이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대에 살고 있지만 심정만은 하나님이 창조한 때부터 현재까지 전역사에 동참되어 있습니다.
종으로부터 양자, 자녀, 부부, 부모의 자리로 나아가고, 하나님과 일체를 이루는 자리에까지 나아가야 하니 험난한 길을 아니 갈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생활 환경과 생활 방법이 각각 달랐습니다. 그러나 일단 이 수련회에 참석하였으니 이제부터는 과거의 모든 습관과 관념을 버리고 새로운 생활을 해야 됩니다. 처음 6일 내지 1주일은 여러분 자신의 시험기간이 될 것입니다. 여기서는 눈을 꼭 감고 나는 없다는 입장을 취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물론 각각 자기 방식대로 살던 과거의 자유 생활에 비하면 불편한 점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난 9회까지의 선배들도 모두 늠름히 기쁘게 마치고 갔으니 여러분도 기쁜 마음으로 보내기를 바랍니다. 본부에 오면 잘해 주겠지 하는 기대를 했겠지만, 그런 기대는 조금도 갖지 말고 오직 눈은 앞만 바라보며 강사의 말을 열심히 듣기 바랍니다.
오늘 특별히 여러분에게 해 주고 싶은 말씀의 제목은 ‘기쁜 날을 맞는 자가 되자’입니다.
인격이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 혹은 유식한 사람이나 무식한 사람을 막론하고 인간은 모두 슬픈 나날 속에 살고 있습니다. 과거에서부터 오늘까지 그렇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사람뿐만이 아닙니다. 존재하는 만물까지도 슬픔 속에 처해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을 비롯한 모든 피조만물은 하나같이 기쁘기를 원합니다. 기쁜 시간, 기쁜 날을 맞고자 합니다. 창조주 역시 두말할 것 없이 기쁜 날을 맞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나도 이 원칙(기쁘고자 하신 창조원칙)을 벗어날 수 없다.’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중심한 전후․좌우․상하가 전부 기쁜 날을 맞이하기 위하여 있습니다. 여러분 각자는 ‘나는 이만하면 되겠지.’ 하고 자랑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나타내는 것은 온 우주 앞에 기쁜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습니다. 완전한 기쁨이란 선악을 분별한 후에야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는 아직 분별되지 않은 환경에 있기에 자랑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타락한 모습이기 때문에 만물 앞에 보여 줄 수 있고 자랑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동서남북, 즉 평면적으로 볼 때 내가 기쁠 수 있는 위치라 해도 나는 만족하지 않으려 합니다. 사람은 결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불행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원치 않는 불만이란 요소와 싸움을 해야 합니다. 그것도 내가 치느냐, 아니면 쓰러지느냐 하는 싸움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최전방의 병사와 같습니다.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지금 어떤 입장에 계시는가? 기쁨을 누리고 계시는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아직까지 기쁨의 한 날을 맞지 못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지으신 상대의 세계가 기쁨의 대상으로 나타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피조세계가 비운의 운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타락한 이후 하나님은 어떤 나날 속에 계시는가? 슬픈 나날 속에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도 슬픈 나날 속에 살아왔으며 온 만물도 슬픈 나날을 지나 온 것입니다. 모든 만상은 기쁨의 한 날을 맞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기쁘신데 인간은 슬프고, 인간은 기쁜데 만물이 슬퍼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웃음에 인간도 만물도 웃음으로 호응해야 할 것인데, 아직까지 그렇게 되어 있지 못합니다.
우리가 좀더 뜻 있고 가치 있는 길을 걸어 나가는 것은 하나님과 온 우주가 함께 기뻐할 수 있는 한 날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은 말로만 기쁨의 한 날을 맞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지나 온 여러분의 생활 가운데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 있는 조건이 있었습니까? 그런 것이 없는 사람을 잡아서 처리하는 곳이 지옥입니다. 오늘날 나병환자 같은 불치병자를 격리하는 것과 같습니다.
지나간 역사는 모두 슬픔의 날들이었습니다. 인류는 이 슬픔의 길을 한걸음 한걸음 밟고 올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역사의 발전 현상입니다. 역사상 성현으로 일컬음을 받은 사람들은 어떠한 사람들입니까? ‘제가 이제 죽사오니, 하나님이여 붙들어 주시옵소서’라고 한 사람들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라.’고 하였지만 사실은 거기에 ‘생명을 다하라.’도 보태야 합니다. 쓰러지는 사람들을 하나님은 그냥 두는 것이 아니라 구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붙들려고 하는 사람들을 붙들어야 합니다. 붙드는 데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생명을 다해서 붙들어야 합니다.
그러자니 여기에 지도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천주적인 지도자, 양심적인 지도자는 어디에 있는가? 가장 중심 되는 분은 어떠한 인간이 아니라 천지를 창조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버리고 나를 믿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을 믿다가는 다 망합니다. 망하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은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절대자이십니다. 온 인류 앞에 심령을 개척하여 절대자를 찾기 위해 나타난 것이 종교입니다.
하나님께서도 기쁨의 한 날을 맞기 위하여 수고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 홀로는 그날을 맞을 수 없습니다. 인간과 공동으로 해야 됩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인간이 하늘을 부르는 것이 상식입니다. 소망을 잃고 죽은 자와는 달리 소망을 잃지 않은 자가 있다면, 양심의 직고는 공식적인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하나님 살려 주십시오.’ 하는 것은 최후의 선언이요, 유언입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타락할 수 없습니다. 발전은 있어도 퇴보는 있을 수 없습니다. 하늘은 아십니다. 거기가 인간의 종착점입니다.
부모가 아들딸을 불러 놓고 ‘너는 어떠 어떠한 사람이 되고, 또 어떠 어떠한 일을 하라’고 가르친다 해도 ‘너는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는 것만 못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되라는 것은 최고의 가르침입니다. 죽기 전에 ‘하나님!’ 하는 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남겨야 할 유언입니다. 슬픔이 연속되는 가운데에서도 최후의 말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어야 합니다.
자기 아들딸이 살인강도로 교수형을 받아 최후를 맞게 될 때 그것을 보고 ‘아이고 하나님, 내 아들딸 죽으니 감사합니다.’ 할 부모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법이야 어떻든지 ‘하나님, 우리 아들딸을 살려 주십시오.’ 합니다. 악한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탄에게도 그런 마음이 있기에 복귀섭리를 해 나오시는 것입니다.
분하다고 칼을 가지고 나타나는 것보다도 그것을 꽉 누르고 ‘하나님!’ 하는 것이 최고입니다. 도의 길을 가는 수많은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그러한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거기에 숨겨진 하늘의 손길이 있는 것을 알게 될 때에 그들은 모두 ‘감사합니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분함이 있어 당장 풀어야 할 때는 ‘하나님, 당신은 아시나이다.’ 하는 것이 그 어떠한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일입니다. 그럴 수 있는 자들은 기쁜 모습으로 이 세계에 나타날 수 있을 것입니다.
생활이 어렵고 분하고, 복잡하면 할수록 그 속에서 ‘아버지!’ 하며 외치는 사람이 도의 생활에서 승리하는 사람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은 자기 본위의 생활을 하지만, 도인들은 내 가정, 내 민족, 혹은 세계의 잘못된 모든 것이 내 죄요 내 잘못이라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붙들고 나오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통할 수 있고 하나님이라는 말을 유언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 할진대 하나님은 또 다른 사람을 찾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1대에 한 유언이 하나님의 유언과 들어맞아 ‘네 것이자 내 것이다.’ 할 수 있는 입장을 찾아 세우기 위하여 오시는 이가 메시아입니다. 이분이 와서 이 땅의 인간들을 대표하여 기쁨의 한 날을 찾아야 합니다. 역사적인 유언을 할 수 있는 개인, 가정, 민족, 세계가 있습니까? 없으면 망합니다.
여기에 모인 수련생 여러분은 하늘과 더불어 기쁨의 한 날을 맞이해야 합니다. 평탄하지 못했던 과거를 가진 그대로 멸망의 도가니에 쓰러지는 불쌍한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과거의 나와 오늘의 나를 비교하여 오늘의 나는 발전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는 사람은 기쁨의 한 날을 맞는데 있어 방해꾼입니다. 여러분은 과거보다 나아졌어요? 나아진 사람은 손들어 보세요. (모든 손을 들었음) 그래야 됩니다.
지식과 건강뿐만이 아니라 모든 면에서 부족하였다고 생각하는 것이 나쁜 것이냐, 좋은 것이냐? 좋은 것입니다. 그것은 좋은 생각입니다. 그러나 그런 걱정 속에서 눈을 높이 떠 창조주는 어떠할 것이냐를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 자리는 얼마나 엄숙하고 거룩한 자리인지 모릅니다. 돈 천만 원이나 억만 원이 문제가 아닙니다. 자신이 얼마나 나아졌느냐가 문제입니다.
옛날에는 시골에서 국민학교만 나왔어도 괜찮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부족하다고 느낄 것입니다. 이제는 밥을 먹는 자리에서도 ‘하나님!’ 굶는 자리에서도 ‘하나님!’ 해야 합니다. 고통거리가 더 늘었습니다. 우리들의 고통이 크면 클수록 이 세상의 고통의 한계선은 내려갑니다. 우리가 그 고통으로 인해 굴러 한바퀴 도는 날에는 세상의 고통은 밀려나는 것입니다. 이제 천상천하에서 절망의 왕자는 하직을 해야 합니다.
이 삼천만 민족을 놓고 슬퍼하는 것보다 더 큰 한을 품고 하나님을 부르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 하나님께서 ‘기특한 내 아들아, 내 딸아!’ 하시겠습니까, 안 하시겠습니까? 그러한 무리가 많으면 많을수록 하나님의 슬픔은 없어질 것입니다. 인간도 하나님도 지금까지 슬픔의 환경을 벗어나지 못했으니 이것을 벗어나기 위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슬픔을 하루빨리 해소해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슬픔과 한이 다 내 것이라 하며 서로 책임지려 할 때 하나님의 한과 국가의 한과 세계의 한과 나의 한이 풀립니다.
인간을 고생시키려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인간은 타락 행위를 저질렀기 때문에 하나님이 마련하신 탕감의 영역권에서 싸워야 합니다. 싸움은 인간이 해야 합니다. 우주적인 한을 품고서 싸우는 사람이 많이 나타나야 됩니다. 그러한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 한 하나님의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만일 그런 책임자가 있다면, 그런 길을 가는 집단이 나타나야 됩니다. 여기에 통일교회가 나타난 것입니다.
‘나’는 역사적인 존재입니다. ‘나는 노아나 아브라함 때의 나다.’ 하는 것을 유언으로 남기고 갈 수 있는 역사적인 사람이 많이 나타나야 됩니다.
민족적인 투쟁 시기가 지나고 세계적인 투쟁 시기가 지나서 해방이 되면 하나님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이요, 그때 이루어지는 세계가 이상세계입니다. 과거에는 내 가정, 내 마을 하였지만 수련을 받고 난 후에는 이 세계를 끌어안고, 나아가 이 천주의 소원을 붙들고 나아가야 됩니다. 끝날에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소집하십니다. 오늘날도 이런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이러한 사람을 만드는 것이 통일교회의 사명입니다.
우리에게는 기쁨의 한 날을 맞이해야 할 소망이 남아 있습니다. 여기에 그날을 맞이할 수 있는 비결이 있습니다. 우선 내가 있으면 전후·좌우·상하가 있습니다. 그리고 과거·현재·미래가 있습니다. 돌아서서 역사를 찾아가는 내가 되고, 조상을 찾아가는 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내가 되어 있습니까?
하나님은 왜 기쁨의 하나님이 못 되었느냐? 왔던 길을 되돌아간 하나님이기에 불쌍하신 하나님이요, 슬프신 하나님입니다. 미래의 길을 가지 못하시고, 오늘을 버리고 과거로 되돌아가야 하는 하나님이기에 기쁨의 하나님이 못 되는 것입니다. 돌아가는 데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가야 하기에 슬프신 하나님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돌아서서 가시지 않는다 할진대 인간은 소망의 한 날을 가질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뒷걸음질쳐 돌아가시는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하나님이시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하며, 에덴으로 돌아가시는 하나님을 붙들고 통곡하는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가시는 길은 평탄한 길이 아닙니다. 슬픔의 골짜기입니다. 가시는 그 길을 보고 큰소리라도 질러야 하는데 우리는 방향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거기서 ‘아이고, 답답하구나. 막혔구나. 질식하겠구나.’ 하시는데 지금 우리는 하나님을 부를 수도 없고 붙잡을 수도 없는 지경입니다. 가다가 뼈다귀만 남는다 할지라도 인간은 하나님을 따라가야 하는데 방향도 알지 못하는 형편입니다. 이곳에 쓰러지면 하나님은 그냥 두고 돌아가셔야 하는 입장입니다. 물어 뜯겨 죽게 되어서야 하나님을 부르는 인간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옛날부터 어둠의 권세가 잠식해 들어오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어찌하여 고아가 되었나! 팔목을 잘라도 항의할 자가 없습니다. 주권이 없는 불쌍한 백성들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주권이 없는 불쌍한 모습입니다. 우리가 주권을 찾으려면 내 마음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불러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시 내려오실 수 없습니다. 사탄이 하나님을 오실 수 없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어떤 험산 준로도 넘어, 사탄이 ‘나는 못 따라가겠다.’고 하는 곳까지 가야 합니다. 이 길이 고해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사탄이 따라오지 못하는 곳에 하나님이 거하실 수 있는 안전지대를 만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유구한 역사를 선인(善人), 선가(善家), 선민(善民)을 통하여 섭리하셨습니다. 과거의 도인들은 사탄이 못 가는 길을 갔습니다. 모두가 싫다는 길을 갔습니다. 마음이란 무엇이며, 사랑이란 무엇이며, 참이란 무엇이냐를 알기 위해 고난의 길을 갔던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가야 할 길입니다.
통일교회는 어떠한 교회인가? 산이 있으면 굴을 뚫고, 골짜기가 있으면 교량을 놓는 일을 하는 교회입니다. 철통같은 사탄과 대적하는 최일선의 교회입니다. 여기에서는 사탄을 나 혼자서 책임지겠다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할 수 있는 힘을 다하여도 하지 못할 때에 하나님께 협조를 청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협조하여 주실 것입니다.
이 나라 이 민족이 8․15해방 때 얼마나 기뻐했습니까? 이제는 하나님을 해방시켜야 합니다. 천상천하에 이런 집단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해방시키는 것이 목표입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을 놓고 웃으실 수 있어야만 천하에도 기쁨과 해방의 한 날이 옵니다. 그러니 그것을 책임질 정병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이념이 한 많은 한반도에서 실현될 수 있다니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그러면 이 좋은 날을 찾아가는 비결은 무엇이냐? 어떻게 그 한 날을 찾아갈 것이냐? 그 비결이 무엇이냐? 과거․현재․미래가 있거늘…. 우리는 이제까지 한 많고 슬픈 역사노정을 걸어왔습니다. 과거보다는 오늘, 오늘보다는 내일이 나아져야 합니다. 오늘의 나를 세워 어제의 나보다 나아져야 하고, 금년보다 내년은 주먹 하나만큼이라도 나아져야 합니다. 지식도 지식이지만 마음과 몸의 인격에 있어서도 점점 좋아지는 생활을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낙오자가 됩니다.
미래에 낙오자가 되지 마십시오. 오늘의 황폐한 현실을 보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미래가 있으니 낙망하지 마십시오. 만일 길이 막혀 다른 어느 민족도, 다른 어느 누구도 못 간다면 우리는 이 기회에 제일 약소한 무리라 할지라도 그 길을 뚫고 가야 합니다. 그러면 복 받는 무리가 될 것입니다. 좋은 환경에서는 노래에 맞춰 춤을 출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거운 보따리를 짊어지고 고개를 넘으라고 한다면 그럴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모두 하나님 앞에 바쳐져야 될 것이니 그렇게 하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모든 사람들은 그 앞에 모든 것을 바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한국인은 숙명적으로 비애, 절망, 낭패 등을 당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런 절망을 멋지게 넘어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위하여 수고하겠다고 하며 나서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좋아하시지 않겠습니까?
지금까지 나는 탄식만 해 왔으나 이제부터는 ‘미국 백성도, 공산주의자도 나와 비교해 보자. 너희들이 가지 못하고 쓰러지는 길을 나는 가겠다.’는 자신을 가져야 합니다. 그들이 자기들끼리 싸우다 쓰러지면 그때 승리의 깃발을 듭시다 하는 것이 도인의 입장입니다. 이러한 것을 가르쳐 주는 곳이 통일교회입니다.
오늘보다 내일이 나아져야 하고 내일보다는 모레가 나아져야 합니다. 자꾸만 나아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고생을 많이 해야 합니다. 뼈가 부서지도록 고생해야 합니다. 공부를 하거나 농사를 짓거나 편안해 가지고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습니다. 십자가가 동반되어야 합니다.
위대한 지도자란 인생이 필시 가야 할 정도를 발견한 사람입니다. 6천년의 고생 보따리를 짊어지워 줘도 ‘하겠습니다.’ 할 수 있는 지도자가 되어야 됩니다. 생명을 걸고 가겠다고 할 수 있고, 가다가 쓰러져도 ‘고맙습니다.’라고 할 수 있다면 세계는 그의 것이 됩니다. 쓰러져도 그러한 입장에서 쓰러지면 천지의 운세가 동하여 천지를 정복할 수 있습니다. 예수는 죽었으되 세계를 정복했습니다.
우리들의 임무는 이 삼천리 강토에 널려 있는 청년 남녀를 불러다가 수련을 시켜 역사적인 한의 곡절을 총청산하는 충신, 효자, 열녀를 만드는 것입니다.
통일교인은 슬픔과 고통의 자리로 몰림을 당하기도 합니다. 거기서 힘을 다하다 쓰러지면 망하느냐? 그 길이 정도라면 망하지 않습니다. 선생님에게는 그러한 길로 몰아넣을 수 있는 배포가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처해 있는 이 자리는 어떠한 자리인가? 오늘에서 내일로 넘어가는 역사적인 자리입니다. 젊은 청년들인 여러분은 ‘역사적인 모든 사람들이여 오라! 내가 매를 맞아 주마. 대신 죽어 주마.’ 하고 선봉에 나서야 합니다. 과거에는 어려움을 당하면 도망치던 내가 변하여 새로운 역사의 파수꾼이 되겠다고 나선다면 나쁜 일입니까, 좋은 일입니까?
하나님은 힘쓰는 자의 것이 되게 되어 있으니 새 시대는 필시 ‘하나님의 수고를 나에게 인계하여 주십시오.’ 하며 싸우는 자들의 것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책임을 지고 싸우십시오. 하나님이 무엇이든 갖다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드는 것이 통일교회의 이상입니다. 어제보다는 오늘이, 오늘보다는 내일이 나아지도록 합시다. 그러면 기쁨의 왕자가 될 수 있습니다.
선생님은 본부에 있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전국을 다 돌아보고 싶습니다. 뿐만 아니라 전세계와 천상까지도 다 돌아보고 싶습니다. 오늘보다는 내일 더 가치 있는 투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하나님!’ 하는 소리가 수많은 종교인과 도인들이 부르는 ‘하나님!’ 소리보다 더 커야 합니다. 또 ‘아버지는 틀림없이 우리의 말을 들어주신다.’ 하는 자신감을 갖고 그럴 수 있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 있는 내가 되어야 합니다. 하늘과 땅과 만물이 영원히 부러워할 수 있는 불변의 기대를 닦아 전체가 기뻐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소망하는 기쁨의 날은 시작될 것입니다.
인간들은 어떤 한스러운 일이 있으면 형제나 자녀, 혹은 동지를 붙들고 의사를 표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금까지 당신의 한을 사랑하는 자녀들에게도 말하지 못하셨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무한한 고통과 슬픔과 탄식 속에 계시는데 아직까지 우리 인간에게 나타내지 못하셨습니다. 인간의 고통은 하나님의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인간에게는 한이 있다 해도 1대의 한인데, 인간들은 그것을 푸는 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한은 역사적인 한이요, 하늘의 원수는 역사적인 원수입니다. 때문에 인간이 제아무리 큰 한을 품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을 하늘 앞에 내세울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인간은 혈연관계에 있는 사람이나 종족, 혹은 민족을 붙들고 한을 토로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그러실 수 없습니다. 왜? 이 세계가 원수의 세계요, 인간들이 원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인 고통이나 불행이나 억울함이 있어도 인간 앞에 ‘내게 이러이러한 억울함이 있다.’고 말할 수 없는 하나님입니다. 자신이 원수에게 찢기는 원통함과 고통스러움이 있다 할지라도 인간 앞에 호소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사정과는 전혀 비교도 할 수 없는 사정을 가지신 하나님입니다.
인간은 깨깨(충분히 또는 심히.《평북방언 사전》참조) 불행해야 합니다. 전세계 인류가 다 깨깨 불행해야 합니다. 불행하거나 고통스러워서는 아니 될 하나님을 인간이 불행하고 고통스럽게 만들었으니, 이 땅의 인류는 고통의 자리에 들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역사적인 불행을 갖고 계십니다. 이 불행을 청산하기 위해 하나님은 지금도 역사를 끌고 심판의 한 날을 향하여 매진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누가 앞장을 서야 할 것이냐? 하나님을 안 사람이 앞장을 서야 합니다. 먼저 뜻을 안 사람이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이상적인 평화를 노래해야 할 하나님이 어찌하여 양을 잡고 소를 잡아 드리는 제물을 받아야 하는가? 참다운 도라 할진대 제물의 과정을 밟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인간이 비참한 자리로 나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저지른 죄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비참을 당신의 것으로 연결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쓰러지시는 대가로 개인으로부터 가정, 종족, 민족, 세계적인 시대로 넓혀 나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세계적인 뜻을 가지고 쓰러지셨습니다. 하나님이 거기에 동반하신 것입니다. 인간은 모르고 있지만 하나님은 책임지고 나오십니다.
기독교에서는 끝날에 7년 대환난이 있다고 합니다. 그때에 부름을 받을 수 있는 자는 행복을 노래한다거나 부러움을 받는 자가 아닙니다. 7년 대환난은 가정적인 것이 아니고 세계적인 것이니 세계적인 심정을 가지고 넘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을 책임지고 오시는 분이 끝날에 오실 메시아입니다.
하늘 길을 가는 이들은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마음대로 입지도 못합니다. 더구나 행복이니 평안이니 하는 명사는 허락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하늘이여, 온 세계 인류여, 쳐라. 과거의 역사를 통하고 현재와 미래를 연결 짓는 심정을 걸어서 쳐라. 과거의 원수와 현재의 원수와 앞으로 나타날 원수까지, 나아가 영계의 사탄까지도 전부 동원하여 쳐라.’ 해야 합니다. 역사적인 불행을 탕감하려면 주위 환경이 총동원하여 나를 몰아쳐도 그것을 이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승리자가 됩니다. 사탄들이 있는데 어찌 불행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쓰러져도 하나님을 붙들고 쓰러져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자의 생활입니다. 역사를 더듬어 볼 때 아벨, 모세, 예수는 모두 효자로서 쓰러졌습니다. 그러나 아담가정이나 노아가정이나 아브라함가정, 나아가서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을 붙잡고 쓰러지지 못했습니다. 불행의 왕자가 되더라도 불행이라는 명사에 깔려서 쓰러져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불행의 명사를 깔고 하늘을 붙들고 쓰러져야만 천적인 뜻이 이루어집니다. ‘내게서 모든 불행을 청산하시옵소서.’ 해야 거기서부터 민족적인 출발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쓰러지되 하나님을 붙잡고 쓰러져서 심정의 터전을 남겨 놓아야 발전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쓰러져도 소망의 일념을 가지고 ‘하나님!’ 하며 하나님을 붙들고 쓰러져야 새로운 시대의 상속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원칙입니다.
지금 때는 이념주의시대요, 세계주의시대입니다. 자녀를 중심삼은 가정이 종족, 민족을 위하는 때가 아니라 세계를 위해야 할 때입니다. 이러한 때에 나는 어떻게 될 것이며, 세계는 어떻게 될 것이냐? 그 세계와 오늘의 나는 어떤 관계가 있느냐? 차이가 크면 클수록 고통과 불행은 커지는데, 우리는 그러한 것들을 물리쳐야 합니다. 그래야 역사적인 불행이 탕감됩니다. 그냥은 안 됩니다.
과거와 현실을 두고 볼 때 앞으로도 불행의 요소와 대결하게 될 것입니다. 지긋지긋한 불행과 고통을 느끼는 때가 바로 이때입니다. 불행이 크면 클수록, 즉 그 불행이 세계적이거나 천주적일수록 복된 시기가 빨리 돌아옵니다. 현실의 복잡한 것들이 모두 지나가야 이상세계가 이루어집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 속에 굶주리고 있고, 또는 억울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바라시던 세계는 이러한 세계인데, 오늘날의 세계는 이렇습니다.’ 하는 탄식의 기도를 하셨습니다.
제물의 극치점을 넘어가야 합니다. 심정의 골수는 직선을 그으면서 외적으로 환경을 넓혀 나왔습니다. 개인적인 기대 위에 가정, 종족, 민족, 세계적으로 환경을 넓혀 나오면서 하나님의 심정은 그 사명을 맡은 사람들을 통해서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탕감복귀를 하기 위해서는 심정의 내용을 알아야 됩니다. 첫째는 타락의 심정, 둘째는 복귀의 심정, 셋째는 부활의 심정, 이 3단계의 심정을 알아야만 합니다.
멋진 하나님의 이상은 깨어졌습니다. 따라서 가치적으로 보면, 역사상의 모든 사람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뱃속의 아이와 같은 입장에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재림은 세계사적인 왕자가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복중의 아이는 어머니가 겪는 모든 것의 영향을 받습니다. 오늘 세계에 널려 있는 모든 사람들은 죽은 사람입니다. 제아무리 내가 누구니 누구니 해 보았자 다 죽은 자들입니다. 타락의 심정을 모르고 복귀노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부활할 수 없습니다. 역사적인 심정이 현실과 미래의 생활의 기반이 되어야 합니다. 잘났든 못났든 이러한 심정은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인간이 타락한 이후 하늘의 한이 있다면 그것은 심정적인 존재가 없다는 것입니다. 개인과 가정과 종족, 민족, 세계 그리고 하늘땅을 대신한 심정의 소유자가 필요합니다. ‘너는 누구냐?’ 하면 ‘나는 역사적인 아담이요, 해와요, 노아요, 아브라함이요, 또 누구 누구요.’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타락의 심정과 복귀의 심정과 부활의 심정을 가지고 하나님을 붙잡고 눈물을 흘리며 ‘나입니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무엇으로 심판하시겠습니까? 심정을 가지고 하십니다. ‘나는 이런데 너는 나와 같은 아들딸이 되었느냐?’ 하며 심정문제를 가지고 나올 때에도, ‘어느 누가 아버지 앞에 칭찬을 받을 수 있느냐?’ 할 때에도 ‘그렇습니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한을 풀 수 있는 실체다.’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한을 풀 수 있는 실체다.’ 라고 할 수 있는 신념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자는 개인이로되 개인적인 존재가 아니라 역사적이요, 시대적이요, 미래적인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바라는 소망의 실체입니다.
만물을 주관하라는 것은 아무나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심정적인 존재를 두고 한 말입니다. 만물은 하나님이 창조 전의 심정과 창조 후의 소망의 심정을 가진 자의 주관을 받으려 합니다. ‘삼라만상 모두는 내 심정권 내에 들어와 있다. 뿐만 아니라 내 것이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온 피조세계와 심정을 통하여 인연을 맺어 내 것이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아담과 노아와 아브라함과 야곱의 노정이 문제되지 않습니다. 모세의 노정도 문제없습니다.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 인간세계가 반대하고 하나님이 버린다 해도 나는 변할 수 없습니다. 변치 않을 것을 하나님의 심정과 맹세합니다. 나는 변치 않습니다.’ 해야 심정적인 탕감이 됩니다.
예수가 당한 십자가의 고통을 실체적으로 당할 수 없는 것을 한스럽게 생각해야 합니다. 비원리적인 고통으로 하나님의 심정을 느낄 수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생각하지도 않고 소망하지도 않는 것을 누가 갖다 주겠습니까?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런 것을 알고 눈물을 흘려 역사적인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에는 죽은 자와 산 자를 심판한다고 했는데, 무엇으로 죽은 자와 산 자를 심판하겠습니까? 심정입니다. 길을 걸어도 아담, 노아, 모세, 예수, 하나님의 심정을 가지고 걸어야 합니다.
보잘것없는 우리에게 뜻을 부탁하시는 하나님이 얼마나 불쌍합니까? 그런데 ‘아담이나 노아, 아브라함, 모세, 예수의 일면이라도 제게 책임 지워 주십시오’ 하고 기도해 봤습니까? 해 봤느냐 말입니다. 아브라함의 심정과 모세의 심정과 예수의 심정을 아시는 하나님은 그 이상의 심정을 가진 자가 나타나기를 고대하십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역사적인 그 곡절의 사정을 걸고 심각한 기도를 해 봤느냐 말입니다. 천지를 밝게 비추며 떠오르는 아침 해를 바라보거나, 어두운 밤하늘에서 총총히 반짝이는 별빛을 보고 역사적인 한과 소망을 느껴 보았습니까? 하나님은 햇빛이나 달빛을 보기에도 미안해하십니다. 아들을 세워 만물을 주관하라고 축복해 주신 것이 거꾸로 되었으니 하나님이신들 면목이 있겠습니까?
만물이 탄식한다는 것은 물론 사실입니다. 자기들이 고통스러워 탄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탄식하시기에 탄식한다는 것입니다. 팔을 들어 사방을 휘둘러 부딪치는 것 중 어느 것 하나 한을 품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인간들은 슬퍼할 줄이라도 알아야겠는데, 그러한 자가 어디 있습니까? 이 탄식권을 누가 풀어 줄 것이냐? 하나님 혼자서 못 하십니다. 만물도 못 합니다. 사탄은 더욱 못 합니다. 사탄은 파괴만을 하지요.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적어도 슬픔의 동지라도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반역자입니다.
여러분은 남이 안 가는 길을 무엇 하러 왔습니까? 이 길은 우리가 안 가면 우리의 후손들이라도 가야 하는 심각한 길입니다. 이 일을 우리가 안 하면 누가 합니까? 선생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길을 가야 해요.
여러분, 만물 앞에 부끄럽지 않은 모습입니까? 과거․현재․미래에 걸쳐 밥에게 신세를 지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까? 밥에게 ‘너 하루 세 끼를 봉사하는데 마음이 시원하냐?’고 할 때 ‘아! 억울합니다.’, ‘네 동지는?’ ‘모두 같습니다.’ 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만일 그 밥들이 일제히 파업을 한다면 이 소란한 세상은 일시에 조용해질 것입니다.
밥은 인간을 대하여 말할 것입니다. ‘남의 신세만 지는 무가치한 인간들아! 너희들은 아담 해와 때부터 내게 신세만 져 왔다.’라고 말입니다. 아무리 예수님의 말씀이 생명의 말씀이라 할지라도 밥이 동맹파업을 하면 모든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밥만이나 합니까? 밥만도 못하지요. 사람 같으면 ‘이놈의 인간들아!’ 했을 것입니다. 또 공기를 불러서 ‘나와의 인연은?’ 하고 물어 보십시오. ‘온통 사람의 안팎을 점령하고 있노라.’고 할 것입니다. 만일 이 공기까지 동맹파업을 하는 날엔 전세계의 인류가 7분 이내에 죽게 될 것입니다. 하다못해 장마 끝에 질퍽대는 진창도 큰소리를 칠 것입니다. ‘내 꼬리는 전세계에 뻗쳐 있으며 지구의 3분의 2는 내 것이다.’라고. 땅도 항의하며 본전을 찾아간다 할진대 세상에 남는 것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태양도 같습니다. 밥을 먹을 때 찬송도 안 하고 인사는커녕 소식도 없이 먹는다면 도둑놈입니다.
만물을 내 것으로 대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있을 때 가능한가?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특별한 가치를 갖고 살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이냐? 만물 보다 먼저 있었고 이후에도 영원히 있을 하나님의 심정을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가지면 무엇보다도 앞설 수 있습니다. 중심, 즉 뿌리와 인연을 맺고서야 비로소 인간의 가치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심정입니다. 이 심정은 태초부터 하나님과 더불어 있는 것입니다. 이 심정을 가지고 호령할 때에 만물은 ‘예. 지당합니다. 감사합니다.’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도 만물도 왜 슬퍼하느냐? 그것은 이 심정의 인연이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이 끊어진 심정의 인연을 잇기 위한 것이 복귀역사요, 부활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을 대하여 당신은 내 아버지요, 나는 당신의 아들딸이라는 것을 부정할 논리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부자간의 심정적인 인연은 어떠한 무엇으로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세상이 다 갈라지지만 신앙자들은 연연히 소망의 한 날을 고대하는 것을 볼 때,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심정이 재현될 한 날을 바라보고 역사하고 계시니, 우리도 그러한 심정을 가져야 하나님의 해원 역사에 동참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해원 역사는 오직 심정으로만 가능합니다. 다른 어떤 것 가지고도 안 됩니다.
인간은 본래 우주의 왕자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 아버지의 것인 하늘과 땅은 내 것이다.’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점령해야 비로소 안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점령하면 하나님을 점령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중심하고 만물만상을 품어야 다른 어느 누구도 점령할 수 없게 되어, 거기에서 비로소 천운이 움직이고 천하의 복이 머물게 되는 것이며, 에덴동산이 열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과 만물, 또 하늘과 사람과 땅, 이 셋이 심정적으로 합친 곳이 지상의 낙원입니다. 심정이 아니고는 안 됩니다. 역사적인 사정과 심정이 연결된 자리에서 고통스럽다, 억울하다, 분하다 할 사람은 없습니다.
여러분은 세 가지의 심정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어떠한 고통도 한으로 삼지 말고 심정으로 소화하십시오. 하나님께서 그러하셨으니 여러분도 심정으로 소화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원수를 정복하되 칼이나 주먹이 아니라 심정으로 정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무기를 가지고 정복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아직까지 위신을 세우지 못하고 계시니, 오늘 우리들도 온유하고 겸손하게 못난이같이 머리 숙이며 살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고통은 승리의 터전이 되었고, 예수님의 희생은 후대의 복된 자리가 되었습니다. 벌거숭이가 되어서라도 이 세계를 정복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여러분의 재산은 무엇이어야 하겠습니까? 소유할 가치가 있는 것은 재력도 명예도 아니요 심정입니다. 하나님의 역사적인 심정의 동반자가 되어야 합니다. 벌거숭이의 몸으로 하나님의 심정의 상대가 되어 황무지 같은 원수의 세계에서 모진 바람을 헤쳐 나가야 합니다. 잠을 자도 자기 잠으로 자지 말고, 밥을 먹어도 자기 밥으로 먹지 마십시오. 식구의 것으로, 아버지의 것으로, 세계 30억 인류를 대신해서 자고 먹으라는 것입니다.
불행이라는 두 글자에 깔리지 말고, 소망을 가지고 세계적인 싸움터를 이겨 나가야 하는 것이 통일교도입니다. ‘인간들은 몰라도 내 아버지는 아신다.’는 역사적인 심정으로 눈물을 흘린다면 그 눈물의 가치는 역사상의 그 누구, 어떠한 충신의 것보다도 더 값비쌀 것입니다. 여러분, 잃어버린 아버지, 눈물지으시는 아버지를 찾아 모십시다. 행복을 노래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고 오시는 하나님을 모시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충신의 도리입니다. 한술의 밥을 먹고 쓰러지는 자는 시대적인 대표자가 될지 모르지만, 밥 한술 못 먹더라도 하늘을 생각하며 눈물짓는 자는 역사적인 가치 위에 설 것입니다.
우리가 ‘성 프란시스’의 성업을 통해 알고 있듯이 만물, 즉 온 피조물이 옹호해 주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물론 그동안 여러분들은 핍박도 많이 받았을 줄 압니다. 미안합니다. 그러나 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가 그러셨으니 말입니다. 대신 아버지를 소유하고 아버지의 심정을 소유하십시오. 금년 일년은 중대한 기간입니다. 명심하고 열심히 일해 주기 바랍니다.
서로 사정이 다른 여러분들이 모여서 하나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복잡한 생활을 해 나왔습니다. 그동안 고독한 때도 많았고, 고충도 많았을 것입니다. 반면에 자각한 일도 많았을 줄로 믿습니다. 이제 10회 수련생으로서는 더 이상 가질 수 없는 수련회의 마지막 날을 맞이하였습니다. 미래에 추억이 될 한 날을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지도하신 분들과 훈련부장, 식구님들 그리고 수련생 여러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오늘 여러분께 드릴 말씀의 제목은 ‘우리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하늘에도 해야 할 일이 남아 있고, 땅에도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습니다. 또 인류에게도 할 일이 남아 있습니다. 아주 큰 것에서부터 작은 것에 이르기까지 반드시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습니다. 선한 일도 악한 일도 이러한 과정에서 나타납니다. 여기에는 우주적인 명제가 있으니, 기쁨도 슬픔도 우리의 눈앞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일을 하는 데에는 반드시 그 일의 목적이 있고, 사명 분담이 필요하며, 그 일을 추진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 역시 같은 입장에 있습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어떠한 존재물이든지 반드시 해야 할 책임분담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쁜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떠한 것을 원하시는가? 천지의 주인공과 만물이 일치하여 창조 목적을 이루는 것입니다. 인간의 타락으로 하나님과 인간과 만물이 일치되지 못하고 제각기 갈라져 버렸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과 인간이 하는 일이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의 소망과 인간의 소망이 달라졌고, 하나님의 행복과 인간의 행복이 달라졌습니다. 이러한 양상은 생활과 역사를 통하여 절망으로 나타났습니다.
이제까지 인간은 개인적인 일과 가정적인 일, 그리고 기껏해야 민족적인 일을 해 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개인이나 가정, 국가 정도가 아니라 천주의 문제를 걸어 놓고 일해 오셨습니다. 당신이 기뻐하실 수 있는 동시에 만물이 기뻐할 수 있는 기준을 향해 지금까지 일해 나오셨습니다. 그것은 어떠한 고충이 있었어도 전혀 변동이 없었습니다. 인간은 몰랐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목적을 위해 수고하고 싸워 나오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께서 어떠한 일을 하시는가를 몰랐고, 하나님이 우리와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가를 몰랐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개체를 위한 일보다는 하나님의 목적관과 일치하는 일입니다. 그래야 비로소 하나님의 입장과 우리의 입장이 같아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이 내가 할 일이요, 내 일이 곧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을 철저히 느껴야 할 때가 왔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천주적인 것이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수많은 선조들이 협조하였던 것입니다. 아담을 비롯하여 노아, 아브라함, 모세, 예수와 오늘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은 선조들을 이 일에 가담시켜 오셨으나 이 일에 대하여 확실히 안 사람은 없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한 사람이 없었기에 하나님의 일은 그대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느 한 날 한시도 그 목적을 망각하거나 방심한 때가 없으셨습니다. 인류의 조상이 타락한 이래 인간은 하나님을 망각하여 왔으나, 하나님은 한시도 잊지 않으시고 쉬임 없이 수고하여 나오셨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각자 ‘나는 누구를 위해 사는가? 나는 누구를 위해 살아왔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기껏 개인을 위해 살아왔고 부모나 형제를 위해 살아온 자신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나님의 뜻은 이러이러한데 우리는 그 뜻대로 살지 못했으니 후회하고 반성하고 원통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니 이제라도 하겠다는 결심을 해야 합니다. 마땅히 충성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못한 것을 뉘우치고 충성해야 합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일을 인계 받아 감당해야 합니다. 이런 결심이 없는 한 하늘이 축복해 주어도 감당치 못하게 됩니다. 아버지의 일을 내 일로 상속 받을 결심을 해야 합니다. 타락한 아담 해와를 대하며 느꼈던 하나님의 슬픔을 내가 느껴야 합니다. 과거에 찾아 세우지 못한 기준을 오늘날 우리가 찾아 세워야 합니다. 가인을 아벨에게 굴복시키는 책임을 해야 합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120년 동안 수고하는 노아를 일시적인 기쁨으로가 아니라 영원한 소망의 심정으로 바라보셨습니다. 그것은 노아에게 부족함이 없는 우주적인 사명자가 되기를 바라는 기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알진대 노아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뜻을 대하고 일을 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함에 대해서 큰 기대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기대가 큰 만큼 타격도 컸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우주적인 슬픔을 가지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일을 상속 받고,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아브라함과 모세, 예수를 거쳐, 곧 구약시대와 신약시대를 지나 창조목적이 종결될 시기가 박두하고 있습니다. 이때에 하나님의 일을 내 일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비록 개인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개체로 보시지 않고 우주적이며 천주적인 존재로, 하나님의 일을 책임 맡는 대신 존재로 보시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 아버지의 크나큰 뜻과 섭리가 있다는 것을 안다면, 역사상의 어느 누구보다도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움직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움직여야 할 때가 이때인 것입니다. 아버지의 일이 역사적인 일일진대, 여러분은 아버지의 일을 상속 받은 사람으로서 역사상에 왔다 간 어느 누구보다도 큰 사명을 진 자신임을 느껴야 합니다. 과거에는 그 당시까지만의 사명만 하면 되었으나 오늘날에는 6천년 동안의 사명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할 일이 나의 할 일이라는 것을 철저히 느껴야 합니다. 또한 내 자체는 아담, 노아, 아브라함, 모세와 예수님의 해원, 그리고 하나님의 해원까지도 책임져야 하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나는 역사적인 목적과 소망의 실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대신하여 실천하는 데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지금까지 아버지는 슬픔과 고통과 불행의 아버지였고, 일찍이 인류가 겪어 보지 못한 불행 중의 불행을 겪어 오신 아버지입니다. 그러니 우리들은 행복의 길이 아니라 불행과 탄식의 길을 체험해야 합니다. 그래야 역사적인 불행과 탄식과 원한을 풀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쁨과 소망에 넘치는 날을 하루도 갖지 못하셨습니다. 그런 가운데에서 일을 해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개인, 가정, 종족, 민족, 세계를 복귀하기 위해 탕감적인 제물의 길을 걸어오셨고, 그 어려운 자리를 지키며 홀로 일해 오셨습니다. 이러한 아버지임을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아버지의 일을 상속 받은 내가 가야 할 길은 어디인가? 행복을 노래하는 길이 아니라 탄식하던 아버지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하나님과 더불어 기쁘게 살기를 바랐으나 그렇게 살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의 일을 상속 받은 나일진대 어떠한 일도 책임져야 합니다. 개인, 가정, 민족, 세계, 더 나아가서는 천상세계를 책임져야 합니다. 기쁨의 책임이 아니라 탄식의 책임을 져야 합니다. 아버지의 일을 상속 받은 나로서 아버지의 슬픔과 불행을 책임져야 합니다. 사탄을 굴복시켜 무저갱에 가두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사탄을 막기만 하셨지 심판을 못 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싸울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탄을 심판하여 무저갱(無底坑)에 가둘 책임이 바로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책임을 완결 짓지 못하면 하나님께 결코 기쁨의 날은 있을 수 없고, 또한 우리에게도 본래의 기쁨의 날과 기쁨의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하나님의 슬픔을 느끼지 못한 자신임을 알았을진대 그 슬픔을 느낄 수 있는 자리로 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고통과 슬픔과 역경을 느끼는 자리를 거치지 않고는 아버지의 일을 상속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제부터 슬픈 곳과 억울한 곳을 찾아 가야 합니다. 천하는 아버지의 일터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달라진다 해도 아버지의 일터임에 틀림없습니다. 한국에서 일하는 것이 쉽다면 좀더 어려운 데에서 일하지 못하는 것을 민망하게 생각하여야 합니다. 어려운 자리에 동참해야 혜택의 자리에도 동참할 수 있습니다. 제일 어려운 곳에 가서 일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수련을 받고 나가는 여러분은 더욱 그래야 합니다. 아버지의 심정을 고이고이 이 민족 앞에 분배하고 전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가 뜻을 알았을진대 아버지의 일을 아버지의 일로 남겨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조상들이 저끄러 놓았으니 후손 된 우리가 책임져야 합니다. 우리의 선조들은 땅에서는 몰랐다가 저나라에 가서야 알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알지 못한 탄식도 크지만 알고도 행하지 못하면 탄식은 더욱 가중되는 것입니다.
크나큰 아버지의 일을 부디 여러분들만은 상속 받아 감당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으로 말미암아 하늘이 한 순간이라도 슬픔을 잊고 기쁨을 누릴 수 있게 해주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는 기쁨의 하나님이 되지 못하셨지만 그 일을 여러분이 대신하여 기쁨의 시간을 마련해 드려야 합니다. 그래야 천상에 가서 아버지를 대할 면목이 서는 것입니다. 슬픈 일을 많이 남겨 놓고 어떻게 아버지를 찾아갈 수 있습니까? 그렇게 되면 아버지를 대할 수도 없고 모실 수도 없습니다. 비록 책임할 수 있는 분야는 갖추지 못했다 할지라도 심정만은 삼천만을 넘어서 천하를 대할 수 있는 기준을 갖추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바친 모든 충성은 이 땅에 뜻이 이루어질 때 우리를 거기에 갖다 놓아도 부끄럽지 않게 만들 것입니다. 심정적인 면에서는 큰일을 하는 사람이나 작은 일을 하는 사람이나 차이가 없습니다. 충성에 있어서는 누구의 것이나 같은 가치로 보신다는 것입니다. 작은이는 작은이대로 아버지께 충성을 바치어 기쁨을 함께했을 때 그것을 어디에 갖다 놓아도 기쁨의 조건으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맡은 지역을 책임져야 합니다. 그리하여 기쁨의 기준에서 볼 때 부끄러움이 없다고 할 수 있어야 하고, ‘나의 기쁨인 동시에 당신의 기쁨이오니 받아 주시옵소서.’ 해야 합니다. 그래야 성소가 되고 지성소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조건을 갖고 아버지 앞에 가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역사적인 하나님, 시대적인 하나님, 미래적인 하나님을 대신하여 남겨 주고 보여 줄 수 있는 여러분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다 알았지만 행하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바칠 수 있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수 있는 터전, ‘아버님, 받으시옵소서.’ 하고 바칠 수 있는 터전을 갖추지 못한 것입니다. ‘이제 내가 할 일을 알았습니다. 아버님의 일이자 내 일이요, 내 일이자 아버지의 일입니다.’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버지가 기뻐할 수 있는 승리적인 터전을 만들고 이것을 점점 확대시켜서 하나님의 동산을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새로운 동산입니다. 이제 이 땅에서 죽기 전에 해야 할 일을 해야 합니다. 내 개체가 행복해서는 안 됩니다. 내 개체를 바치어 하나님의 일을 다 이루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제자들도 같은 입장입니다. 그러므로 머리를 둘 수 있는 곳을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아버지에게 기쁨을 주는 것도 좋지만 나를 위시한 가정, 곧 영원히 하나님께 속하는 최소 단위의 기준인 가정적인 기대를 세워야 합니다.
복귀의 목적은 사위기대를 완결 짓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승리의 조건을 제시한 후에 내가 안식할 수 있는 터전, 곧 가정을 마련해야 합니다. 이것은 죽는 한이 있더라도 해야 합니다. 이 사명을 완수하기 전에는 만족이나 행복 같은 것은 아예 생각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고통에서 출발했습니다. 백두산을 올라가는 것보다 어렵습니다. 역사상 수많은 선지자와 도인이 왔다 갔지만 섭리적인 사명의 분담 면에서 볼 때 허사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나만은 다르다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6천년 섭리의 길에는 하나님께서 흘리신 피눈물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피눈물의 흔적은 천상에도 남아 있고 지상에도 남아 있습니다. 여러분이 가는 길은 과거·현재·미래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고통과 시련도 역사적인 과거와 시대적인 현재와 소망적인 미래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복귀의 역사를 제1이스라엘과 제2이스라엘과 제3이스라엘을 통해서 해 나오고 계십니다. 뜻적으로 보면 제1이스라엘은 영계에 해당하고, 제2이스라엘은 오늘날 땅 위에 있는 성도들에 해당하고, 제3이스라엘은 소망의 아들딸을 의미합니다. 제1이스라엘을 통하여 제2이스라엘이 나오고, 제2이스라엘을 거쳐서 제3이스라엘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제1이스라엘의 상속을 받으려면 모세의 축복을 받아야 하고, 제2이스라엘의 상속을 받으려면 예수님의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원래는 그렇습니다. 40일 금식을 조건으로 시내산에서 축복을 받지 못하였으면 모세가 모세 될 수 없고, 골고다의 십자가상에서 저들을 저주하여 축복을 받지 못하였으면 예수가 예수 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이치에서 볼 때 다시 오시는 주님 역시 결정적인 최후의 자리에 가지 않고는 축복의 기반을 닦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대하여 얼굴을 돌이키시던 비참한 자리가 아니고는 축복하실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한때에 노아, 아브라함, 모세, 예수님, 그리고 선생님과 같이 축복받을 수 있는 자리에 동참한 일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석판을 가지고 내려왔고, 십자가를 진 예수님은 피 살을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십계명을 지키고 피살을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전체 역사, 즉 섭리노정은 한결같이 탕감조건을 세워 내려왔습니다. 곧 모세의 석판과 예수님의 십자가도 부활의 성체를 인류에게 주기 위한 것입니다.
가정이나 종족이 하늘 앞에 서는 데는 언제나 축복의 조건을 세웠습니다.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적극적인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당신은 나를 말세에 세워 주셨습니다. 책임을 다하겠사오니 안심하시옵소서.’ 할 수 있는 조건이라도 세워 놓고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화가 미치게 됩니다. 축복의 계대(繼代)의 일면이라도 상속 받기 위하여 피땀을 흘리고 호소하면서 책임을 다하여야 합니다. 그리하여 선조들이 수긍할 수 있는 승리적인 존재로 서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남아 있는 책임입니다.
이제까지는 조건적인 모심이었으나 끝날에는 실체적인 모심이어야 합니다. 앞으로 성도들은 실체적인 모심을 해야 합니다. 조건적인 모심을 해서는 충신이 되지 못하며 책임을 다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역사적인 죄를 회개하고, 원수에 대한 적개심을 품고, 미래의 책임분담을 완수하겠다고 맹세하는 실체적인 사명자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 통일신도들이 가는 발걸음 앞에 ‘조금 천천히 가라.’는 말은 있을 수 없습니다. 어서어서 가야 합니다. 늠름한 모습으로 가야 합니다. 얼마나 영광입니까? 그러한 입장에서 하늘의 보내심을 받고 승리의 발판을 세워 하나님이 영원히 기억하지 않을 수 없는 지역이면 지역, 세계면 세계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내 한 개체만이 아니라 후손들까지 아버지께 ‘길이길이 영광 받으시옵소서.’ 할 수 있는 세계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한 일을 하기 위해 가는 나이기에 내 손은 내 손이 아니라 삼천만을 대신한 손이요, 세계 인류를 대신한 손입니다. 그러한 것을 느껴야 합니다. 이 손은 아버지의 손으로 선조들이 자랑하고 후손들이 기념할 수 있는 손이라는 것을 실감해야 합니다.
여러분에게는 아브라함의 모습, 모세의 모습, 예수의 모습, 하나님의 모습까지 다 있어야 합니다. 내 주관권 내에 있는 것은 사탄이 결코 빼앗을 수 없다는 불변의 터전을 닦아 놓아야 합니다. 이 손은 아버지의 손이요, 이 몸은 아버지의 몸이라고 해야 합니다. 때문에 사탄이 덤벼도 까딱하지 않는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나가서 일을 할 때는 아벨의 제단을 대신하는 마음으로, 노아의 일을 대신하는 심정으로 해야 합니다. 또 하나님께서 함의 타락을 대하시며 얼마나 슬퍼하셨을까 하는 심정을 가지고 해야 합니다. 그런 심정을 체휼하여 나만은 함이나 다른 선조들같이 실패하지 않겠다고 결심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핍박을 받되 ‘역사적인 누구 누구를 대신하여 핍박을 받습니다.’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로 말미암아 아버지가 기뻐할 수 있는 승리를 하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버지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아버지의 일을 하는 데 있어서는 종 중의 종, 즉 종 가운데에서 제일가는 종이 되어야 하고, 양자 중의 양자가 되어야 하고, 아들 중의 아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통일식구들은 고생을 하더라도 자기가 속한 도에서 ‘내가 제일 고생하는 사람이다.’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 지구를 책임진 지구장이 사탄에게 쓰러지더라도 나는 사탄을 물리칠 수 있다는 자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내가 그 지구장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통은 많았으나 기쁨은 적었습니다. 끝날은 고통과 기쁨, 불행과 행복이 같이 나타나는 때입니다. 복은 편안한 사람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못 먹고 애달프고 눈물 흘리는 자에게 오는 것입니다. 심정이 좋아지면 좋아질수록 그에 따라 축복은 커지는 것입니다. 나 한 사람의 행동이 천추만대의 후손에까지 미치는 때가 이때입니다. 고통의 자리를 거치지 않은 자에게 복은 찾아오지 않습니다. 고통에 어리어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리는 자리가 아니면 복은 찾아오지 않습니다. 종 중에도 가장 고통스러운 종의 자리, 양자 중에서도 가장 고통스러운 양자의 자리를 거쳐야 합니다. 가장 불쌍한 종의 자리보다 가장 불쌍한 양자의 자리를 거쳐야 더 많은 복을 받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잘사는 사람보다 고생을 많이 하는 사람이 복을 받는 것입니다. 제일 높은 기준은 제일 고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여러분을 고생하는 자리로 내모는 것입니다. ‘그 분야에 있어서는 내가 아니면 안 된다.’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책임을 수행하는 것이 됩니다. 종 중의 종이 되고, 양자 중의 양자가 되고, 아들 중의 아들이 되어 후손까지도 공인하는 영원한 축복의 자리까지 나아가야 책임을 다한 여러분이 되는 것입니다. 가는 데는 종으로 가고, 양자로 가고, 아들로 가고, 성신과 예수의 자격으로 가고, 최후에는 아버지로 가야 합니다. 아들딸의 자리까지는 자기를 위한 탕감 분야요, 성신과 예수의 자리는 아버지를 위한 탕감 분야입니다. 아버지의 책임까지 다해야 자신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 되고, 과거·현재·미래를 대해 부족함이 없는 자신이 됩니다.
길을 가는 데는 협조를 받지 마십시오. 각각 흩어져서 책임 맡은 곳으로 갈 때는 이곳은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각오를 갖고 가야 합니다. 아버지의 일을 위해서 삼천리 방방곡곡으로 힘차게 나서야겠습니다. 그래야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을 앞에 두고 하늘땅을 위해 싸우겠노라 맹세해야 하겠습니다.
오늘은 작년에 새로운 기념의 날로 정했던 ‘실체부활의 날’ 입니다. 이날은 후대에까지 기념하게 될 날인 것을 여러분은 알고 있을 것입니다.
부활이란 명사는 기쁨을 전제로 해서 성립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이상은 모든 피조물이 실체적 가치를 갖추어야만 하늘도 땅도 사람도 하나님도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피조만물 전체가 그러한 이상적인 기준, 소망적인 기준, 승리적인 기준, 최고의 영광된 기준에서 융합할 수 있었다면 말할 수 없이 행복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길로 지어진 만물, 하나님의 말씀으로 실현된 만물, 그 영광을 상상해 보십시오. 오늘의 하늘과 땅은 그렇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원통하고 분한 일입니다. 창조의 동기와 목적도 이러한 것이 아니었는데 뜻하지 않은 인간의 타락으로 창조의 동기와 목적을 유린한 결과가 되고 말았습니다. 타락은 고통과 슬픔과 불행의 원천이 되었고, 인간들이 싫어하는 모든 것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원수란 칼을 든 사람만이 아닙니다. 타락! 이것이야말로 인류의 원수요, 만물의 원수요, 창조주의 원수인 것입니다.
이 원수는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가? 수천년 전 우리 조상에게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니 결사적인 투쟁도 물론 필요하지만, 이 죄악의 뿌리를 뽑아 버리기 위해서는 타락의 본거지를 발본색원하여 폭파시키고 잘라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지상 인간과 관계를 맺지 못합니다. 그것이 아직까지 남아 있기 때문에 세상에 죄악이 만연하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결과적인 것을 두고 투쟁할 것이 아니라 타락의 본거지를 찾는 데에 제1의 목표를 두어야 합니다. 원수의 근거지, 타락의 원천을 찾아 하나님과 인간과 사탄의 3자 사이에서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불행의 실마리는 풀리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최고의 선을 추구해 왔습니다. 예수께서는 ‘천하를 얻고도 생명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온 세계를 향하여 자기의 가치를 내세워 ‘나를 부러워할지어다.’ 할 수 있는 사람이 아직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가치적인 존재가 되려면 이 땅에서 자기 자체에서부터 혈통적인 죄의 뿌리를 뽑아야 합니다. 내 자신이 원수입니다.
그 책임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것을 오늘 우리에게 이르도록 해결하지 못했으니 존재하는 모두가 원수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의 우리는 모든 경전을 살피어 실패의 역사들을 지적해 내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인류역사상에 있어서 원수가 등장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어떠한 가정이나 사회 환경보다도 내 개체가 원수요, 내 마음이 문제입니다.
끝날에 있는 우리들은 부활의 소망으로 심판의 한 날을 앞둔 이상, 먼저 나 자신을 해결해야 하겠습니다. 내 자신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한 입장에서는 부활의 인연이 나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내 몸뚱이가 원수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나를 보호해 주는 사회환경 역시 원수의 입장에 있습니다. 왜? 타락 때문입니다. 타락의 동기는 선을 통하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시대적인 사정과 형편으로부터 도피하여 창조주 하나님을 향해 올라갑시다.
그러면 우리가 다시 소망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앞으로 나갈 것이 아니라 뒤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타락한 인간의 시조 이전 단계까지 올라가 창조주 하나님과 인연을 맺어야 합니다. 그러면 사탄은 도망치게 되어 있습니다. 도피하는 것이 곧 사망세계에서의 인생행로입니다. 그런 길을 갈 때 하나님과 인연을 맺고 비로소 참다운 사람, 참다운 사랑, 참다운 역사, 참다운 형제, 참다운 부모, 참다운 민족, 참다운 세계가 대두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눈앞에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되돌아가서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본래의 이상인 참된 평화, 참된 자유, 참된 행복, 참된 이상, 참된 가치는 지금 우리 앞에 없습니다. 타락의 본거지를 넘어서야 합니다. 오늘날 수많은 종교가 있습니다. 그것들은 제물은 될 수 있으나 제사장이 될 수는 없습니다. 제사장이 되려면 왔던 길을 되돌아가 하나님과 심정의 인연을 맺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이런 면에 있어서 하나님의 섭리적인 입장과 일반 사람들의 관점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본래 심정의 인연을 맺은 터 위에서 대하기를 바라셨는데, 옛날 아담과 해와 그 밖의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그냥 상대적으로 천지를 호령하고자 하였습니다. 이 인연을 아직 어느 누구도 맺지 못했기에 이것을 맺기 위하여 메시아가 왔었던 것이요, 그의 재림도 이 인연을 다시 맺기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국가들을 그냥 이끌고 나가기만 하면 이상세계가 되는 줄 알지만 사실은 그 반대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아브라함 때부터 시작되어 내려왔습니다. 당대에서 보면 역사가 직선 같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역사는 돌고 있습니다. 메시아는 돌게 하는 중심으로 오신 분입니다. 메시아는 역사의 원천과 직선을 그을 수 있는 기준을 세워 돌게 하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이것을 알았더라면 이스라엘 민족은 참된 ‘나’를 제시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참된 자아, 곧 본연의 자아를 찾는 것이 부활입니다. 이것은 예수 한 분으로부터 시작하여 가정, 민족, 국가로 확대시켜 나아가야 했습니다. 그랬더라면 소망하는 참된 세계는 이어졌을 것입니다.
예수와 마음으로, 생활로, 심정으로 같지 않으면 같이 갈 수 없습니다. 구원은 곧 메시아와 같이 가는 것입니다. 마음으로나 생활로나 심정으로나 메시아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으면 자동적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배우는 것은 메시아의 생활과 접하는 것입니다. 사실 지금까지의 모든 환경은 원수였습니다. 그러니 색다른 것을 목표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가야 합니다. 그래야 구원과 복귀, 재창조, 부활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가기는 거꾸로 가되 결국은 중심점과 접하게 됩니다. 고마운 하나님의 섭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종적으로는 돌아갈 수 없기에 예수를 보내어 그의 생활과 접하게 함으로써 돌아가게 했던 것입니다. 예수가 구원섭리를 종결지으려면 4천년 역사의 원수인 사탄을 굴복시켜 고비고비 맺힌 그 한을 풀고 사탄과 작별을 고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붙드는 것은 그가 타락의 뿌리까지도 뽑아낼 수 있게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신앙생활의 기준은 예수입니다. 인류의 조상이 타락할 때 심정, 인격, 실체가 다 타락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가 와서 심정, 인격, 실체를 부활시키려 했습니다. 그러나 실체와 인격을 부활시킬 기준은 세웠으나 심정을 부활시킬 기준은 세우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그것은 신랑 신부의 소망의 기준으로 남아졌습니다.
우리는 타락하지 않은 본연의 심정을 가지고 하나님과 일치되어야 합니다. 또한 심정과 인격과 실체가 하나되어 하나님과 불변의 기대를 연결 지어야 합니다. 이것이 구원의 궁극 목적입니다. 예수는 양심의 구원 기준은 세웠으나 실체의 구원 기준을 세우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양심의 기준 위에 선 오늘의 기독교인들은 실체구원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재림역사를 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는 지금 우리에게 당신의 대신 실체가 되어 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날 신자들은 예수가 가야할 길을 가야 합니다. 고난의 길을 걷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에 가서 형을 받지 않더라도 그대로 가치적인 실체가 되어야 그 기반 위에 예수가 재림하는 것입니다.
예수가 바라는 소망과 주권이 일치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까지 재림이 연장되어 내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의 제자 가운데 예수의 대신 실체가 될 만한 사람이 있었다면 그때 재림 역사는 끝났을 것입니다. 성도들이 본연의 양심과 하나되어 신랑 신부의 기준을 세우는 날이 재림의 날입니다. 이러한 기준 위에 예수가 재림하여 뜻을 이루는 것이 재림의 역사입니다. 실체부활 기준을 세우지 못한 사람이 신부가 될 리 만무합니다. 삼위신의 소망은 재림하실 한 분에게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역사상에 왔다 간 모든 사람과 현재의 우리, 그리고 미래인의 소망도 그렇습니다. 이런 것도 모르고 사람들은 ‘죽어 천당 가면 그만이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힘들어도 그 기준까지 가야 하는 것이 기독교인의 도리입니다.
6천년 동안 이어 내려온 만물의 모든 고통과 불행의 요소, 그리고 인간의 수천만 줄기의 고통과 탄식의 조건들을 한꺼번에 짊어지고 사탄의 도성에 들어가 사탄을 굴복시켜야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제물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죽는 데는 자기 개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역사노정에 있어 온 선조들과 만물의 모든 고통의 조건을 해소하기 위하여 죽어야 합니다.
사람은 타락했기에 복귀해 나아가려면 원칙적으로 종에서 양자로, 양자에서 자녀로, 자녀에서 신랑 신부로, 신랑 신부에서 참부모로 나아가야 합니다. 타락되었기 때문에 아랫급의 입장은 그 윗급에 대하여 제물의 입장입니다. 그러니 각각 윗급을 위하여 있다고 볼 수 있겠으나 통틀어 보면 하나님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복귀의 길은 실로 한이 많은 길입니다. 제사장은 당대의 책임만 할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모든 기준을 탕감해서 사라지지 않고 나서야 제사장의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는 땅에 와서 선조들의 심정을 더듬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시대적인 예수가 될 뿐 아니라 역사적인 예수도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시는 데 있어서도 역사적인 하나님을 모셔다가 시대적인 하나님으로 모셔야 합니다. 그래야 최고의 효자가 되는 것입니다.
앞으로 실체부활을 할 수 있는 한 존재가 되려면, 그는 역사적인 기준을 탕감하고 현실의 싸움에서 쓰러지지 않고 승리해야 합니다. 그래야 실체 부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는 날이 실체부활의 날입니다. 이 기준이 세워져야 ‘슬픔의 세상이여, 잘 있거라. 우리는 되돌아간다.’ 할 수 있는 것이요, 실체의 시대가 오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투쟁 과정을 거쳐 예수의 소망인 신랑 신부의 기준을 완결 지어야 비로소 우리가 소망하는 지상천국 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의 말씀을 다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는 최후의 말씀을 못하셨습니다. 심정의 말씀을 못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 사정을 통하지 못하였습니다. 형제의 도리를 가르쳐 주지 못하고, 자녀의 도리와 부모의 도리를 가르쳐 주지 못하고, 하나님의 성상과 축복의 예식도 가르쳐 주지 못하는 성경입니다.
역사적인 모든 기준을 완성하여 무엇이라도 지킬 수 있다고 해야 재림의 한 날을 맞을 수 있습니다. 이제 이 땅에 예수의 사명을 인계 받고 하나님의 심정을 인계 받고 오시는 분이 계시다면, 그분이 이 세계의 주인공입니다. 실체부활은 심정까지 통해야 합니다. 그날은 천지가 돌아가는 날입니다.
실체부활의 날이 나오려면 실체부모가 있어야 하고, 실체자녀를 세워야 합니다. 여러분은 실체부활을 통해서 영광의 자리에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피나는 싸움을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영광의 주권을 세워야 합니다. 이 길은 죽든 살든 가야 할 길입니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지금까지 인간들은 죽음과 이마를 맞댄 생활을 해 왔습니다. 실상 죽음이 없이는 부활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가 부활한 것도 죽음 이후였으니 우리 또한 짧게라도 십자가의 길을 거쳐서 부활을 해야 합니다. 예수는 당시 민족적인 기준에서 십자가를 졌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직까지 국가적인 십자가를 넘어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국가적인 기준을 넘어 세계적인 기준에서 역사와 시대의 십자가를 지고 싸우러 오는 분이 재림주입니다.
여기서 쓰러지면 안 됩니다. 어떠한 고난을 당하더라도 절대 쓰러지지 말아야 합니다. 국가적인 기준까지가 문제입니다. 그 기준만 넘으면 자연히 세계적인 기준이 접해 들어오게 됩니다. 예수의 고난의 기준을 넘어야 실체를 중심한 영광의 기준이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아담부터 예수까지 4천년, 아브라함부터 예수까지 40대, 이 공식적인 기준에 따라 뜻의 완결도 40고개를 중심삼고 좌우됩니다.
실체를 쓰고 영광된 부활의 날을 맞아 하나님 앞에 보답할 수 있는 때가 끝날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딸의 이름으로 사탄을 때려부수는 것이 바로 전도입니다. 전도하는 자리는 눈물짓는 자리요, 역사적인 선조들이 잘 싸워 달라고 축복해 주는 자리요, 미래의 후손들까지 기대에 넘치는 눈으로 바라보는 자리입니다. 다시 말하여 그 자리는 종의 자리에서 양자의 자리로, 양자의 자리에서 자녀의 자리로 재생하는 자리입니다. 우리 인간이 이러한 재생의 인연을 세워 실체부활하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역사적인 기준을 횡적으로 세워 부활의 기준을 세워야 합니다.
앞으로 우리는 죽음을 모르는 기쁨만을 노래할 수 있는, 무엇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존재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영원히 같이 산다는 소망의 기준을 세우고, 하나님이 바라시는 실체부활까지 이루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 앞에 갈 수 있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합니다.
금년은 중대한 기간의 마지막 해로 접어드는 해입니다. 더욱이나 봄절기라는 이 기간은…. 지나온 해도 중요한 기간인 것은 물론이지만 금년도 역시 천적으로 중요한 의의가 있는 기간이기 때문에 여러분들을 이렇게 모이게 했습니다. 일단 여러분이 여기 모였으면 모인 이제부터 여러분들은 과거의 여러분이 아닙니다. 전체를 대표할 수 있는 여러분으로서 생활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 앞에 이런 것을 말씀하고 싶습니다. 여러분 자신으로 말하자면 `나'라는 것 즉, `나는 누구였던가' 이러한 제목을 가지고 잠깐 말씀하고자 하니 새로운 각오 밑에서 들어 주기 바랍니다.
역사나 혹은 전통은 각 종교를 중심삼고 달리 거쳐왔지만 변할래야 변할 수 없는 하나의 줄거리를 갖고 나왔습니다. 그 줄거리라는 것은 타락된 죄악사회의 인연을 벗어나지 못한 줄거리 밑에서 우리가 지금까지 걸어왔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라는 존재는 하나님의 창조이념으로 보게 될 때는 무한히 큰 존재였으나 우리 선조의 실수로 말미암아 타락하고 난 후에는 지극히 천하다면 천하고 지극히 무가치하다면 무가치한 존재로 떨어진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 자신 한 개체를 두고 보게 될 때, 이 한 개체가 오늘날 여러분이 생각하는 그런 단순한 개체가 아닙니다. 이개체에는 역사성이 깃들어 있고, 더 나아가서는 이 시대와 미래 전체를 중심삼고 인연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또, 이것이 비단 타락한 세계에 있어서의 인연만이 아니라 앞으로 타락한 이 인류를 복귀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를 중심삼고 인연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자신에게 있어서는 자기 한 개체가 자기 개체로 머물러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개체는 지극히 엄청난 환경에 놓여진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한 자체라는 것은 타락의 후손이 된 연고로, 즉 우리 자신들은 원죄를 벗지 못한 후손이 된 연고로 타락한 그날부터 지금까지, 우리 선조로부터 지금까지 하늘 앞에 말할 수 없는 죄의 인연을 상속받아 오고 있습니다. 끝날이라는 한때를 세워서, 여러분들을 대표적인 현재의 입장에 세워 놓고 그 죄에 인연이 된 것을, 모든 타락의 인연을 종결지어야 할 하늘의 섭리가 있는 동시에 인간으로서 응당히 책임져야 할 문제가 남아져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늘이 소망하고, 또 이것을 해결할 중대한 책임적인 분야에 있는 , 죄의 모든 것을 제거해야 할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우리들은 여기에서 다시 한 번 느끼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자신은 오늘날의 나로되, 인연되어 내려오는 `나'라는 것은 아담으로부터 지금까지 섭리해 나오는 하늘의 뜻 앞에 세워진 수많은 사람을 대신한 내가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섭리의 뜻을 대신하여 하늘의 뜻을 받들지 못하고 하늘을 서럽게 했던 모든 존재들과도 역시 내 자신이 인연을 맺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나'라는 것은 선한 입장의 일면도 접할 수 있고, 또 선과 배치되는, 반대되는 입장의 일면을 내가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두 기로에서 하나를 완전히 청산하고 하나의 선한 면에 내 자신을 세워 악을 청산한 아들로서, 악에서 돌아서서 선을 향하여 환희의 심정을 갖고 나가지 않으면 안 될 중대한 입장에 처한 `나'라는 것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녹음이 잠시 끊김) 우리들에게 이 사명이 있는 연고로 결국 여기에 모인 여러분 자신들이 이러한 사명을 감당해야 할 책임을 짊어지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껴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내 자신이 이제 움직여야 할 내 행동에 있어서 이 행동도 지금까지의 행동과는 달라야 되겠고, 또 내가 지금까지 마음으로 생각하거나 혹은 어떠한 목적을 향하여 싸우는 입장에 서더라도 과거와는 달리 좀더 선하고 좀더 하늘이 기뻐할 수 있고 하늘이 믿을 수 있는 이러한 내 자신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그런 자신이 되지 않는 한 지금까지 하늘의수고 앞에, 혹은 고대하고 있던 소망 앞에 우리들은 제 2차적인 배반자가 될 수 있으며, 도리어 하늘이 나를 대하여 소망하시는 그 기준 앞에 실망을 가져다 드릴 수 있는 입장에 서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자기 자신을 다시 한 번 분별시켜서 이제 여러분 자신을 여러분 자신의 입장으로만 세울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든지 아버지 입장의 인연과 더불어 연결시키어 나는 나만으로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대신하여 있고, 우리 선조들이 실패하지 아니한 입장을 지켜 서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껴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라는 존재는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하늘 앞에 배반하던 나였으나 이제 이 시간부터 여러분 자신들은 배반을 하는 자신이 아니요, 배반의 반대 입장에 서서 하늘 앞에 충성을 하고 어떠한 희생이 있더라도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 여러분 자신으로서 책임을 져 하늘 앞에 다시 수고의 길을 남기지 아니하는, 자신으로 하여금 청산지을 수 있는 여러분 자신들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러한 여러분 자신들이 되지 않는다 할진댄 여러분들이 여기에 모인 의의는 있다고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여러분이 여기에 모인 이상 이제 `나는 누구였던가'하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하늘 앞에 어떠한 면을 찾아보게 될 때에도 용납을 받을 수 없고, 세움을 받을 수 없고, 하늘의 축복이라는 명사 자체도 바라볼 수 없었던 부족한 자신이었다는 것을 철저히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이런 운세를 대함에 있어서 우리의 몸과 마음 전체가 하나님의 마음 앞에 용납받을 수 없는 나 자신인 것을 여기에서 느끼면 느낄수록 아버지 앞에 더욱 내 자신을 몽땅 바쳐 드려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내 모든 소원이라든가 요구라든가, 혹은 사적인 감정이나 내용을 첨부시켜 가지고 여기에 나타나서는 안 되겠습니다. 모든 것을 몽땅 바치고 `나는 공의의 입장에서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는, 선과 악에 있어서 이것을 분립시켜야 할 책임적인 사명을 할 수 있는 내 자신이 돼야되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하늘이 여기에서 이 일을 감당해 달라고 솔직히 내맡길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지 않는 한 이제부터 21일 기간을 움직여 나가는 데 있어서 하늘이 요구하는 뜻을, 요구하는 목적을 달성하기에는 여러 가지 지장이 있으리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라는 존재는 무(無)입니다. 없다는 것입니다. 이미 죄로 말미암아 내 자신을 찾을 수 없던 과거의 모습이었으니 이 과거의 모습을 이제 이 시간서부터 매장해 버려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이미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하늘 앞에 용납받을 수 없는 자신이니 하늘이 어떠한 조건을 세워서 우리에게 축복의 명사를 세울 수 없었던 우리들이라는 것을 알고, 또 그러한 선조의 혈통을 받고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입장에 있었던 자신인 것을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여기에서 하늘의 긍휼만 바라며 맡기고, 선과 악의 분별된 입장을 하늘이 친히 책임져 주시는 가운데서 여러분은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선한 편으로 옮겨 가겠다는 각오와 신념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각오와 신념을 갖지 않는 한 여러분은 현재 상태에서 앞으로 하늘이 요구하는 그 뜻 앞에 해결의 어떤 조건을 세워 나갈 수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 무(無)의 상태예요, 무의 상태.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자신들이 아담가정을 다시 한 번 회고해 보며 아담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늘을 서럽게 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가인과 아벨이 제사를 드리게 될 때 가인이 순종치 않고 아벨을 죽임으로 말미암아 하늘 앞에 서러움을 남겼다는 것을 우리들은 다시 한 번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노아가정을 중심삼아 가지고 슬펐던 사실, 함을 중심삼고 슬펐던 사실, 아브라함을 중심삼고 슬펐던 사실, 모세를 중심삼고 슬펐던 사실, 세례요한 혹은 예수를 중심삼고 슬퍼했던 모든 사실, 예수 이후 2천 년 동안 지금까지 예수와 성신의 역사를 협조해 나오던 수많은 성도들이 하늘의 뜻 앞에 있어서 슬픔의 조건을 맺었던 그 원통한 사실들을 여러분 자신들이 오늘 이제부터 어느 한 때 어느 한 순간이라도 마음에서 잊어서는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원통하였고 분하였던 이 한 사실을 오늘 우리 자신들이 탕감하고, 분하였던 모든 천적인 한을 우리들이 제물 됨으로 말미암아 해원해 드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우리의 책임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느껴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자신들이 아버지의 뜻 앞에 자기 자신을 바치는 마당에 서게 될 때 여러분 자신들은 어떠한 존재로 바쳐야 되느냐? 아담의 슬펐던 모양으로 바쳐야 되겠고, 아벨의 슬펐던 모양으로 바쳐야 되겠고, 노아의 슬펐던 모양과 함의 슬펐던 모양,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 모세, 혹은 지금까지 역대 우리의 모든 선조들이 슬펐던 모양을 대신해 여러분이 바쳐야 되겠습니다. 그 바친 자체가 슬픔으로 보답되는 것이 아니고 슬픈 면을 탕감하여 다시 한 번 새로운 소망의 한 점이라도 내 자신을 세워서 남겨 줄 수 있으며 지닐 수 있게 세워 놔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분 자신들이, 뜻 앞에 있어서 책임 못 하였던 우리 선조들의 슬펐던 그 모습을 느껴 가지고…. 내 자신이 노아의 입장에서 슬픔을 절절히 느끼고, 아벨·아브라함·모세·예수, 혹은 지금까지 역대 우리 선조들이 슬퍼하였던 그 모든 슬픔을 다시 한 번 느끼는 자리에 서서 하늘의 슬픔의 마음을 다시 나로 말미암아 슬프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슬픈 마음을 체휼하면서 `나는 아담과 같이 되지 않겠습니다. 나는 아벨과 같이 되지 않고, 가인과 같이 되지 않겠습니다. 노아나 함과 같이 되지 않겠습니다. 또,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 모세, 혹은 세례 요한과 예수와 같이 되지 않겠습니다' 할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오늘날 우리 통일 신도들을 중심삼고 보게 될 때, 뜻을 대신하여 여기에 불충성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나는 저런 무리와 같이 되지 않겠습니다' 할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있어서 역사적인 우리의 선조들의 모든 슬픈 면을 비교하여 슬픈 입장에 설지라도 내 자신은 슬펐던 선조들의 그런 위업을 상속하는 것이 아니라, 슬픔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염려를 남겼던 선조의 위치를 박차고 나로 말미암아 슬플 수 있는 환경을 돌이켜 다시 내 자신이 하늘 앞에, 선조들이 충성하지 못한 충성의 일점을 세워서 나로 하여금 새로운 면에서 하늘의 소망의 일점을 남겨 주는 사명을 감당하겠다는 마음을 여러분들이 가져야만 되겠습니다.
그런 입장에 서 가지고 그런 마음만 가질 것이 아니라, 그런 입장에 내가 섰다 할진대는 여기에서 하늘 앞에 나선 우리들이 호소해야 할 것은`아버지여, 아담을 대신하여 당신이 주고 싶었던 심정의 축복이 무엇입니까? 슬픈 마음으로 아버지는 돌아서서 갔지만, 아담을 대신하여 슬플 수 있는 입장에 섰던 나였으나 슬픔의 입장에서 하나님을 배반하는 아들이 되지 아니하고 슬픔의 자리에 설지라도 슬픔의 아버지를 내 자신이 환영하여 나로 하여금 그 심정의 인연을 다시 연결시키겠사오니 축복의 인연을 남겨 주고 가시옵소서' 하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그 마음은 아담만이 아니라 가인·아벨·노아·함, 혹은 역대 우리의 선조들이 그런 입장에서 하늘과 심정적인 인연을 맺으려 했던 마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서러워하는 입장에 있는 하늘을 이해해 드리고 그런 하늘의 입장에 심정적 기준을 다시 한 번 연이어 가지고 역사적인 심정을 상속받지 않으면 안 될 책임을 져야 할 나라는 것을 느끼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슬픈 면에 있어서는 역사적인 선조들의 모든 슬픈 면을 제거해 버리고, 심정적인 분야에 있어서는 역사적인 우리의 선조들이 하늘의 심정적인 위업을 상속하지 못하였던 그 분야를 상속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아담가정을 중심삼고 아담과 해와의 입장에서 다시 한 번 이것을 생각해 보게 될 때, 여러분들은 아담된 입장에 있지만 아담이 아닌 것입니다. 해와가 될 수 있는 입장에 섰더라도 타락한 해와가 아닌 것입니다. 타락한 아담이 아니요, 타락한 해와가 아니요, 혹은 가인과 아벨적인 입장에 섰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배반하는 가인이 아니요, 가인이 죽이려고 하는 아벨이 아닌 것입니다. 노아가 아니요, 혹은 함이 아니요, 역대 여러분의 선조가 아닌 입장에 서 가지고 하나님의 심정적인 기준을 중심삼고 심정의 위업을 받아 나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아담가정으로부터 아벨에게로 이것을 연결시킬 수 없고, 아벨에서부터 노아가정으로 연결시킬 수 없고, 노아가정으로부터 함, 함으로부터 아브라함,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삭, 이삭으로부터 야곱, 야곱으로부터 모세, 모세로부터 예수까지 연결시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자신들은 역사적인 면에 있어서 말할 수 없이 심정적으로 갈라 나왔다는 것입니다. 아담가정에서 갈라 나왔고, 노아가정에서 갈라나왔고, 아브라함가정에서도 갈라 나왔고, 모세가정에서도 갈라 나왔고, 예수님을 중심삼고도 전부 다 갈라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 갈라 나온 심정적인 인연을 오늘날 우리들은 아담으로부터 연결시켜 나가지 않으면 안되는 입장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이런 책임을 땅 위에 있는 , 오늘날 끝날에 있는 우리 성도들 각자가 책임을 했다 하는 조건을 반드시 세워 놓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심정적인 위업을 상속받았다 할 수 있는 입장을 세워야 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 신도들의 책임이요, 또 이러한 책임을 전체 앞에 감당시켜야 하는 것이 여러분을 지도하고 있는 선생님의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선생님은 지금까지 어떠한 길을 걸어왔느냐? 아담가정에 있어서 아담이 하늘 앞에 슬프게 했던 내용을 탕감해야 되겠고, 슬프고 애달픈 마음을 갖고 심정적인 위업을 상속하기 위한 하나님의 심정을 상속해야 됩니다. 그래서 아담가정만이 아니라 노아가정을 거치고 아브라함가정을 거치고 모세가정을 거치고 예수 이후 지금까지 역사적인 모든 심정의 인연을 거쳐 가지고 비로소 승리했다는 , 역사적인 슬픔을 탕감하여 하늘이 심정적인 위업으로 상속해 주시고자 했던 그 모든 것을 상속받았다 할 수 있는 승리적인 기준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이것이 여러분들이 배우고 있는 원리적인 내용이요, 이 원리적인 말씀을 중심삼고 지금까지 땅 위에서 싸워 나오는 내용이 돼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역사적인 모든 슬픔을 제거하고, 하나님이 각 시대 시대에 우리의 선조를 찾아와서 상속해 주고 싶었던 심정의 위업을 지금까지, 아담가정으로부터 역사적인 종말까지 연결시켜 하나의 승리적인 심정의 실체로서 하늘땅 앞에 내세우고자 하는 그 자체가 무엇이냐? 그것은 하늘땅 혹은 모든 인류가 바라고 있는 재림의 이상, 즉 참부모의 이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참부모를 중심삼아 가지고 참부모를 완전히 여러분들이 상속받을 수 있고, 참부모를 여러분의 부모로서 모실 수 있으며, 참부모의 해원을 여러분의 해원으로서 느낄 수 있는 자리에 서지 않으면 하늘의 축복, 혹은 상속이라는 명사를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오늘 여기에 모인 여러분들은 누구냐? 하늘 앞에 말할 수 없는 배반자인 나였고, 하늘 앞에 용납받을 수 없는 나였고, 지금까지 역사적인 면에 있어서 세움받을 수 없는 나였으나 오늘 이러한 탄식의 조건을 탕감하여 역사적이고 심정적인 위업의 실체가 된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 앞에 대신 줄 수 있는 시대적인 환경을 마련해 놓고, 이 환경 위에 하늘과 땅과 온 인류를 대신하여 실체의 부모의 자격을 가질 수 있는 그 실체의 부모야말로 여러분의 심정의 위업의 실체요, 탄식과 한의 모든 것을 청산할 수 있는 중심의 존재라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부모를 여러분들이 완전히 상속받아야 돼요.
단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이 소원하시던 참부모요, 인류가 바라던 참부모요, 하늘땅이 고대하던 참부모는 역사적인 해원을 하고 하나님의 심정적인 위업을 상속받기 위하여 이 땅 위에 오신 분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참부모를 다시 상속받기 위하여 찾아온 사람이 우리라는 것, 나라는 것을 여러분들이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그러면 이런 부모를 상속받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슬픔은 다 모를지라도 부모의 슬픔의 일면을 체험해야 되는 것입니다. 땅을 새로 찾기 위하여 하늘이 해온 수고도 물론 알아야 되겠지만, 그건 다 모르더라도 땅 위에서 수고하신 참부모의 심정적인 인연이 어떻다는 것과 슬픈 내용이 어떻다는 것을 어느 일면이라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여러분 자신들은 그분과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분과 일치가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가 줄기라면 여러분들은 가지가 되어 있다는 것을 느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의 슬픔은 여러분의 슬픔이요, 그의 소원은 여러분의 소원이요, 그의 싸움은 여러분의 싸움이니 그에게 상속된 위업은 여러분의 위업이라고 자신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이번 21일 기간에 있어서 수련을 받고 어떠한 입장에서 문답을 하더라도 모든 그 중심 문제에 있어서는 참부모를 중심삼아 가지고 내 자신이 하나된 입장에서 답을 하고, 하나된 입장에서 생활을 하고, 하나의 대신된 입장에서 이러한 기간을 가져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간을 갖지 않는다 할진대는 여러분 자신들이 여기에 참석한 것은 아무런 효과를 가져오지 않는다는 것을 여러분이 잘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여러분 자신들이 이런 입장에 서야 할 자신이니 하늘땅 앞에…. 이제 우리들은 되돌아 찾아 올라가 아담가정에 있어서도 참부모를 대신한 나요, 아벨 앞에 있어서도 참부모를 대신한 나요, 노아가정에 있어서도 참부모를 대신한 나요, 아브라함가정에 있어서도 참부모를 대신한 나요, 모세가정에 있어서도 역시 참부모를 대신한 나요, 예수님 앞에 있어서도 역시 참부모를 대신한 나요, 더 나아가서는 하늘과 땅 앞에 있어서 참부모를 대신한 나라는 것을 확실히 느껴야 되겠습니다. 그러지 않는 한 여러분들은 여기에 축복의 명사를 대할 수 없다는 것을 잘 느껴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남자는 아버지의 분신으로서 여자는 어머니의 분신으로서 세움받아야 할 자신이니 아버지 어머니의 분신된 자신 위에는 하나님의 눈물이 젖어 있고, 아버지 어머니의 눈물이 젖어 있고, 지금까지의 선조들의 눈물이 젖어 있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기에 눈물이 젖어있는 이 한 자신이 하늘 앞에 불리움을 받고 택함을 받는 입장에 서게 될 때 그 눈물의 가치를 탕감해야 되겠고 슬픔의 가치를 탕감해야 될 것입니다. (녹음이 잠시 끊김)
그렇기 때문에 자기 일신을 세워 `내가 무엇 무엇, 혹은 내가 이러 이러한 과거를 가졌는데 어찌하여 나는 하늘이 축복을 안 해주느냐? ' 하는 아무런 내용을 가질 수 없는 우리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몽땅 맡겨 놓고 `우리 자신의 몸 마음은 전부 다 아버지의 몸 마음으로서 완전히 접붙여 주시옵소서. 혹은 내가 부족하거든 때려서라도 그런 자리에 세워 주시옵소서' 할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 기간에 있어서는 여러분이 과거로부터 지금, 혹은 미래까지 전부를 걸어 놓고 참부모의 마음과 참부모의 심정과 참부모의 실체, 혹은 참부모의 모든 말씀을 중심삼아 가지고 완전히 접붙일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럴 수 있는 기간으로 여러분들이 지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축복받은 선조들과 가정을 대신하여 축복받은 분들이 있을진대, 참부모를 대신하여 그들도 역시 축복을 받았으니 축복받은 그들 앞에 여러분들이 어떤 면에서도 지지 않겠다는 각오를 해야 될 것입니다. 축복받은 그들 앞에 있어서 더욱이나 내 자신을 하늘 앞에 보여줄 수 있는 내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각오를 가져야 되겠습니다. 과거에 축복받은 형님 혹은 누나들이 책임 못 한 것이 있을진댄 여러분 자신들이 그들의 책임까지 질 수 있는 각오와 신념을 갖지 않는 한 앞으로 이 사탄세계와 대결하여 싸워야 할 우리의 책임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 있어서 `과거의 내 자신은 부족하였으나 이제부터는 부족한 내가 절대 될 수 없다' 하는 신념을 가지고 여러분이 이 기간에 수련과정을 거쳐 주길 부탁합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어떠한 여건은 인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들이 이 기간에 수련을 하는 중요한 목적은 무엇이냐? 참부모를 대신한 자로 서야 할 내가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 수련의 목적이요, 이 21일 기간을 지내는 목적입니다. 이러한 수련과 이러한 신념을 갖지 않는 한 축복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족한 `나'지만 이 기간은 하늘이 내 자신이 다시 찾아질 수 있는 , 제2 부모의 입장에 세워질 수 있는 조건적인 은사를 허락하는 기간이니, 이 허락한 기간에 있어서 여러분은 이것을 완전히 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자신이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게 되기를 결의하고 여러분 자신들이 서로서로 협력하고 서로서로 부족한 것을 보충하면서 이 21일 기간을 지내 주기를 부탁합니다.
그러니 이제 여러분은 내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자는 아버지 대신의 입장에 서야 되겠고, 여자는 어머니 대신 입장에 서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목표 밑에서 그 기준을 갖는 것이 먼저예요. 그 기준을 갖지 못하였을 때는 아무것도 안 되는 거예요. 그러한 기준을 갖기 위해서, 역사적인 해원과 심정적인 상속을 받기 위해서 여러분들은 부모의 심정을 체득하고 형제들의 심정을 체득하여 하늘이 축복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기간으로 가져 주기를 부탁합니다.
아버님, 나라는 것은 하늘 앞에 용납받을 수 없는 나인 것을 알았고,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담이 타락할 때 하늘의 슬픔을 남겼던 나인 것을 알았고, 그날부터 당신에게 복귀의 한을 품으시고 무한한 고통의 길을 걷게 한 나였음을 알았습니다. 타락의 한이 있는 동시에 복귀의 한이 남아졌고, 복귀의 한이 있는 동시에 부활의 한이 남아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늘은 슬픔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아담으로부터 지금까지 슬픔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그 슬픈 인연을 내가 대신 상속하여, 슬픈 자로 서 가지고 하늘을 다시 슬픔의 자리로 돌려보내는 내 자신이 돼서는 안되겠습니다. 역사적인 슬픔을 상속받아 이 슬픔을 내가 책임지고 아버지의 본연의 아들로, 다시 제2소망의 실체로 서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알았사옵니다. 이러한 내가 되지 않으면 하늘의 심정적인 축복의 인연을 나로 하여금 연결시킬 수 없고, 이것을 연결시키어 후대의 계대를 만들 수 없다는 것을 저희들이 알았사오니 그걸 할 수 있는 자리에 서기 위해 부족함이 없는 자들이 되지 않으면 안 되겠사옵니다.
아버지, 어떠한 면에서 보더라도 저희 자신은 부족한 모습이옵니다. 과거에도 그러했고 현재에도 그렇고 미래에도 그럴 수 있는 저였으나, 이제 참부모의 공로로 말미암아 심판적인 기준을 세워서 말씀심판, 인격심판, 심정심판을 갈라내지 않고는 축복의 인연을 세울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희들의 말씀 실체도 참부모요, 인격 실체도 참부모요, 심정의 실체도 참부모인 줄 알았습니다. 참부모는 모든 심판의 절대적인 기준 위에 섰습니다. 말씀도 그로 말미암고, 실체도 그로 말미암고, 심정도 그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이것은 아버지께서 이 하늘땅을…. (녹음이 잠시 끊김)
축복의 인연을 가져 다시 심판을 할 수 있는 자격자가 없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이제 여기 모인 당신의 아들딸들 하늘이 수고한 모든 것을 합하여 축복받기 위해 모였사오니, 하늘이여, 여기에 각별한 은사를 베푸시옵고 각별한 섭리의 심정을 가하시어서, 이날부터 당신이 염려하시던 그 마음을 푸시옵시고, 이들로 하여금 심정의 인연을 펴시어 운행할 수 있는 시간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들의 마음 가운데 새로운 결심을 하여, 과거의 나로 돌아가는 자들이 되지 말게 하여 주옵고, 새로운 나로서 아버지의 사랑의 품에 품기기에 부족함이 없는, 약속과 축복의 인연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당신의 아들딸로 연마시킬 수 있는 이번 기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런 수련기간이 되게 하여 주옵고, 혹은 명령할 수 있는 시험 기간이 되게하여 주옵기를 ,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당신이 바라시는 선의 기준, 당신이 찾고 있던 소망의 실체들로서 나타나기에는 저희들이 부족한 모습이었사오나 긍휼의 사랑으로 용납하시어서 저희들을 부르셨으니 모든 미비한 것을 굽어살피지 마시옵고, 아버지, 이들로 하여금 당신이 허락할 수 있는 생명적인 인연과 당신이 허락할 수 있는 승리적인 인연과 당신이 허락할 수 있는 심정적인 인연을 세우시옵소서. 사탄이 저희들을 엿보고 있사오니, 아버지, 엿보는 모든 참소의 조건을 막으시어서 축복의 손길을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이날부터 남아진 기간을 아버지께서 친히 맡아 주관하여 주시옵고, 생명적인 인연을 두터이 하시어서 이 기간에 다시 성령에 성별을 가하시어 아버지의 약속된 실체로 서기에 부족함이 없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번 이 모임을 위해 지방에 널리어서 외로운 심정을 갖고 기도하는 자들이 있사옵니까? 있사올진댄 같은 은사의 부류들로 그들을 보호하여 주옵고, 같은 은사의 손길로 그들을 연결시켜 주옵시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이 시간 이후에 남아지는 모든 절차 위에 있는 당신의 전권의 행사가 이들 위에 같이하여 주옵고, 생명의 움직임이 이들과 더불어 인연 맺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니다.
이제 저희 자신들이 어떠한 존재인가를 다시 한 번 재분석하면서, 아버지의 심정의 실체가 되기 위한 입장에서 저희들이 마음과 몸을 다시 한 번 단속하여 아버지 앞에 고스란히 바쳐 드릴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부탁하면서,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써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
<말씀 요지> 금년은 천적으로 의의가 깊은 3년 기간 중의 마지막 해입니다. 금년의 봄철은 더욱 중요한 시기입니다. 지난 2년이 그러했듯이 금년도 천적으로 중요한 의의를 갖고 있는 해입니다. 여러분이 일단 이 자리에 모였을진대 전체 식구를 대표하였다는 책임감을 가지고 마치는 날까지 무사히 지내 주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드릴 제목은 ‘나는 누구였던가’입니다. 여러분은 각자 다르게 살아왔고, 종족은 그들의 전통을 중심삼고 다른 생활을 해 왔습니다. 그러나 공통된 점은 죄악사 속에서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이상으로 볼 때 원래 ‘나’라는 존재는 무한대의 가치를 지닌 존재이지만 현재의 나는 무가치한 존재입니다.
개체 하나에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연관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자기 한 개체는 자기 한 개체에 머무르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적 개체입니다. 원죄를 벗지 못한 후손이요, 죄의 인연을 상속 받은 ‘나’입니다. 그러기에 나에게는 타락의 인연을 종결지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는 아담 이후 역사를 거쳐오면서 등장하였던 수많은 섭리적 사명자들의 대신체입니다. ‘나’는 선한 입장과 그와 반대되는 입장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제는 죄악을 청산하고 오로지 선의 입장을 취해야 합니다. 그러나 나는 아직까지 죄악이 청산된 내가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나를 청산하여 어느 한때에 가서는 선의 기준을 세워 아버지 앞에 나아가야 할 사명이 우리에게는 남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믿을 수 있는 내 자신이 되지 않는 한, 수고한 하나님 앞에 배반자가 되고 실망을 드리게 됩니다. ‘나’는 나만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실패하지 않은 선조의 입장에도 놓여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시간부터는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고 하나님께 수고를 끼치지 않는 내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는 한 여기에 모인 의의가 없습니다.
나는 누구였던가? 축복이라는 명사를 바라볼 수 없었던 내 자신입니다. 그러한 것을 느끼면 느낄수록 아버지 앞에 의탁해야 하겠습니다.
이제부터 ‘나’는 사적인 것이 전혀 없는 순수한 입장이 되어야 합니다. 곧 나에겐 아무것도 없다는 입장에서 내 자체를 온전히 아버지 앞에 내맡겨야 합니다. ‘나’라는 존재는 없습니다. 과거의 나는 용납받을 수 없는 모습임을 깨닫고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이 선과 악을 책임져 주시고 선으로 옮겨 갈 수 있도록 무(無)의 자리에 서도록 해야 합니다.
아담이 타락으로 하나님을 서럽게 한 사실, 가인이 아벨에게 순종치 않은 죄, 노아를 중심한 섭리에 있어서의 함의 실수, 아브라함을 중심한 곡절의 역사, 모세를 중심한 슬픔의 역사, 예수를 중심한 한의 역사, 이러한 원통하고 분하였던 역사와 여러분 자신의 입장까지 탕감해야 합니다. 아담의 슬펐던 일과 아벨의 슬펐던 일, 노아와 함의 슬펐던 일, 아브라함이나 모세의 슬펐던 일을 대신 탕감하여 하나님께서 소망으로 바라보실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책임입니다. 아담이나 아벨, 노아, 아브라함, 모세, 또는 예수의 사정과 심정을 체휼하고 ‘아버지, 나는 그들의 입장처럼 되지 않겠습니다. 세례 요한이나 예수님의 처지와 같이 되지 않겠습니다.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무리가 되지 않겠습니다.’ 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선조들이 하지 못한 충성으로 하나님 앞에 소망을 돌려드리겠다는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여, 아담에게 주고 싶었던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축복의 인연을 남기시옵소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노아, 아브라함, 모세 등의 사명자들이 맺고 싶어했던 심정의 인연을 맺어야 합니다. 역사적인 선조들이 상속 받지 못한 심정을 상속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타락한 아담 해와도 아니요, 가인 아벨도 아니고, 노아나 함도 아니며 역대 조상 어느 누구도 아닙니다.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노아, 아브라함, 모세, 예수의 심정을 연결 지어야 합니다. 아담으로부터 갈라진 역대 사명자들의 심정을 연결 지을 책임이 여러분과 선생님에게 있습니다.
선생님은 아담으로부터 예수까지의 심정을 상속 받아 승리적인 인연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싸워 나오고 있는 역사적인 내용인 것입니다. 아담으로부터 끝날까지 연결시켜 하늘땅 앞에 내세우고자 하는 것이 재림의 이상이요, 참부모의 뜻입니다. 참부모의 이상, 참부모의 뜻을 느끼지 못하면 축복받을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의 나는 역사적인 배반자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니 탄식과 한을 풀고, 실체의 중심을 모실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 놓은 자에게만 실체 부모를 인연 맺어 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유업을 상속하기 위해 참부모가 있는 것이고, 여러분은 참부모의 유업을 상속 받기 위해 있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참부모의 심정과 섭리역사의 슬픈 내용을 알아야 합니다. 참부모와 일체가 되어야 축복의 자리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참부모의 슬픔과 고통과 기쁨, 예수의 슬픔과 고통과 기쁨을 나의 것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완전히 하나가 되어 생활하며 대신자의 입장이 되지 않으면 아무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아담 앞에서도 참부모를 대신한 나요, 노아나 아브라함, 모세, 예수 앞에서도 참부모를 대신한 나요, 하늘땅 앞에서도 참부모를 대신한 내가 되지 않고서는 축복의 자리에 설 수 없습니다. 남자는 아버지의 분신이요, 여자는 어머니의 분신입니다. 이 분신이라는 말에는 역사적인 눈물이 어려 있고 역사적인 슬픔과 곡절이 어려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역사적인 눈물과 슬픔과 곡절을 탕감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나는 이러이러한데 왜 축복을 해 주지 않습니까?’ 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걸친 참부모의 심정과 실체와 모든 말씀을 접붙임 받아야 합니다. 참부모를 대신하여 축복받은 선배들에게 지지 않고, 선배들이 책임을 못하면 그들의 책임까지 대신하겠다고 하면 틀림없이 그들과 같은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과거에는 부족했으나 끝까지 부족한 내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각오를 가져야 합니다. 개인의 목적은 허락이 안 됩니다. 참부모를 대신하지 않으면 축복받을 수 없습니다.
제2의 부모의 입장, 즉 특권적인 입장에서 20일 동안을 지내 주기 바랍니다. 남자는 아버지를 대신한 입장이요, 여자는 어머니를 대신한 입장입니다. 이번 수련 기간을 통하여 부모의 심정과 형제의 심정을 체득하기를 부탁합니다.
혈통과 실체와 심정을 자랑하는 사람이 됩시다. 보는 것, 듣는 것, 말하는 것을 삼가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선조가 됨을 자랑해야 합니다. 이런 면에 자신을 갖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금년 이후의 잘못은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선의 조상이 되는 것뿐입니다.
매월 말 3일 전에 기도하고 준비하세요. 그 전날은 경기도에 있는 식구들이 전부 모여 서로 공의를 놓고 의논해야 합니다. 공과 사를 명확히 해야 합니다. 하늘 편에서는 사적인 것을 3분의 1도 인정해 줄 수 없습니다.
뭇사람 앞에 선다는 것은 참으로 두려운 일입니다. 먹고 입고 사는 것보다 뜻에 앞장서서 행동해야 참소를 받지 않습니다. 즐거운 일을 할 때에는 반드시 회개하는 입장에서 해야 됩니다. 선생님은 혼자 구경을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합니다.
부부끼리 재판자의 입장에서 심판할 자신이 없이는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됩니다. 함부로 말하는 것은 부부끼리 전도 나가 고생해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중심한 세계관을 수립해야 합니다. 믿음의 아들딸을 세우기 전에는 자기 자녀를 사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자신이 전도에서 빠지면 선조가 없는 것과 같으니 그 후손이 예를 갖출 수 없는 것입니다.
아기 어머니들도 전도해야 합니다. 천국에 갈 사람은 자기의 아기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도 아담 해와보다 자기의 이념을 더 중시했습니다. 자기의 아기를 보면서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해야 됩니다. 아이들은 좋은 것이나 나쁜 것이나 어머니 아버지를 닮게 됩니다. 자기가 해야 할 조건이 있는데도 회개하지 않으면 자식이 좋은 것을 본받을 수 없습니다.
이번 6월 4일 잔치는 여러분이 해야 합니다. 선생님은 부모의 입장에 있기 때문에 가인적인 아들딸들에게 잔치해 준 후에야 아벨적인 아들딸에게 잔치를 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돈을 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이 해야 됩니다. 식을 끝낸 후에 곧 내모는 것을 나는 원하지 않지만 사탄을 막으려니 할 수 없습니다.
여자들은 장사를 해서라도 재물을 복귀해야 합니다. 남자는 뼈고 여자는 살입니다. 제1, 제2, 제3가정이 뭉쳐 돌아가는 것은 천지가 뭉쳐 돌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자리잡는 생활을 하려면 말단에 있는 식구들까지 자리 잡은 후에 자리를 잡아야 합니다.
지금은 오전 1시 40분, 이 시간은 숫총각이 신부 방에 들어가는 것과 같은 시간입니다.
하나님을 중심하고 좌우가 하나되어 사랑의 목적을 달성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기에 있는 것은 술입니다. 이 술에 대한 의의 중 한 가지는 유효원 씨도 모릅니다. 이 술에는 예수님의 생명수를 마신 자가 영생한다고 하신 말씀과 같은 것이 들어 있습니다.
이 시간의 전과 후는 다릅니다. 이 술을 마시는 것은 신랑 신부가 사랑의 인연을 맺는 것보다 중요합니다. 이것은 생명적인 인연을 대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술은 술이지만 생명의 원핵과 같습니다. 이 식 후에는 거짓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과거는 묻지 말고 이제부터 축복의 부부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보다 큰 목적을 위하여 오늘 이곳에 수련을 받으러 왔습니다. 그런데 앞으로 자기 중심한 생활을 한다면 더 큰 목적을 위하여 수련을 받는 의의가 없어집니다. 자기를 버리고 뜻 앞에 절대복종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러분은 이제부터 40일간의 단체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니, 오늘 여러분은 공적인 ‘나’로서의 제일보를 내딛는 엄숙한 순간에 놓여 있습니다. 공적인 목적 앞에 흡수되어야 하고, 또 그 목적을 이루는 데 각자 재료가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결심을 이미 하였으리라고 봅니다. 그러니 이후부터는 눈이 있어도 마음대로 보면 안 되고, 입이 있어도 마음대로 말하면 안 되고, 귀가 있어도 마음대로 들으면 안 됩니다. 본부의 식구들로 하여금 여러분에게 푸대접을 하게 하는 시련을 주어 단련을 시키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이 지방에서 본부를 향해 떠나 올 적에 그렇게도 그리던 서울 본부에 가면… 하고 많은 기대를 했겠지만, 사실은 기대한 것에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외모는 이처럼 초라하고 볼 것이 없어요. 그러나 내적인 기상만은 하늘땅을 쥐었다 폈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뜻을 품었다면 남자고 여자고 한번 해볼 만한 일입니다.
단번에 천하를 호령할 수 있는 자리에 올라갈 수는 없습니다. 올라갈 수 있다 해도 그래서는 안 됩니다. 내적으로 외적으로 환경을 갖춘 인격적인 위인이 된 후에야 가능합니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사람이 문제입니다. 자기가 자신을 자랑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역사를 대하여 공적인 명령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공적(公的)이라는 것은 자기를 위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위하고 나라와 세계를 위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공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어떠한 일이라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남자가 없으면 여자들로만이라도 남자의 일까지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손도 여러분의 것이 아닙니다. 손으로 밥을 먹을 때도 삼천만을 위해서 먹으면 세계 인류의 손을 대신해 먹는다는 생각을 하고 먹어야 합니다. 비록 꽁보리밥에 된장찌개라도 공적인 입장에서 먹어야 합니다. 사지백체를 다 그렇게 움직여야 합니다. 그러니만큼 불평불만은 있을 수 없습니다. 때로는 3일 금식을 하라고 명령할지도 모릅니다.
수련이란 닦고 연단한다는 것 아닙니까? 닦고 연단하는 데는 무엇을 표준으로 할 것인가? 여러분 가운데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고깃덩이뿐인 겉사람과 다른 하나는 속사람이 그것인데, 타락한 입장에서 보면 타락한 겉사람과 타락한 속사람이 있습니다.
이것들이 본연의 인격체를 닮아 나가자는 것입니다. 본연의 인격체란 만물이 경배하고 하나님이 품에 품으시고 입을 맞춰 줄 수 있는 어린애와 같은 모습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본연의 인격체를 표준으로 수련을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실상 형편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니까 최하의 경지에서부터 훈련해야 합니다. 내일부터는 진짜 수련입니다. 천하를 품을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더 나아가 사탄까지도 굴복시키기 위해서는 지옥 밑창의 세례를 받아도 이를 극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수련은 이러한 본성의 자아를 찾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누구였던가? 오늘 말씀의 중심이 바로 이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내세워 자랑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내세울수록 추태입니다. 잘났다고 하는 여러분의 모습이 실상 알고 보면 형편없습니다.
눈을 높이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거기에 창조의 주인공이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 앞에 무엇을 내세울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만물 앞에 기쁨을 줄 자신이 있습니까?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중심삼고 보면 누구도 효자 효녀 충신 열녀라는 간판을 못 붙일 것입니다. 천륜 앞에 내세울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인륜 도덕 앞에도 내세워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불효라는 간판이 붙으면 아무리 개인적으로 잘났어도 가정이나 국가, 세계, 하늘땅, 그리고 창조주 앞에 결코 내세울 수 없습니다. 죄란 개인적으로는 의리를 지키지 않는 것이요, 사회적으로는 용납받을 수 없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죄를 졌을 때에는 하나님도 ‘오냐, 내가 용서해 주마.’ 하실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공적인 하나님 앞에 내세울 건더기를 갖고 있습니까? 없을 것입니다. 공적인 세계관을 갖고 나오시는 하나님께서는 창조주로서 결국 세상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오늘의 이 끝날이 바로 그 심판 때입니다.
이 심판을 면하려면 하나님께서 6천년 동안 분부하신 말씀을 일생 동안에 다 지키겠다고 맹세하고, 또 다 행했다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심판의 고개는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명령에 절대복종하고, 자기 일생 동안 다 못하면 후손에게 유언을 해서라도 기어이 이루겠다고 해도 넘을지 말지 합니다.
하나님은 역사적인 명령 앞에 순종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어찌하여 이렇듯 처량하게 되셨는고! 명령만 내리소서. 나만은 지키겠습니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생각이라도 그렇게 해야 돼요.
그러면 ‘나’는 어떠한 모습인가? 내 모습은 더욱 시원찮습니다. 엉망진창입니다. 그러기에 내 속에서 준동하는 죄를 갈라 쳐서 불에 태워 버리고, 나의 마음을 정화하겠다는 마음이라도 가져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하늘 앞에 ‘세계적인 명령이라도 내리기만 하소서.’라고 해야 지상의 낙원, 자유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용납받을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이런 용납받을 수 없는 인간에게 하나님은 지금까지 배반당해 오셨습니다. 이놈의 몸뚱이! 이놈의 몸뚱이가 사탄의 제물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본래의 실체가 되기를 바라고 나오셨으나 그러한 실체가 되지 못했으니, 인간은 말씀의 배도자요, 실체의 배도자요, 심정의 배도자요, 혈통의 배도자입니다.
그러면 역사적 배도자의 후손인 여러분을 수련시켜서 무엇을 할 것이냐? 여러분을 훈련시켜 사탄 앞에 내보낼 것입니다. 그래서 모질고 무서운 시련을 받게 할 것입니다. 사람다운 사람을 만들어서 사탄 앞에 내보내야 할 처지에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제까지 역사상에 왔다 간 수많은 선조들, 아브라함, 모세 등을 불러 놓고 ‘당신들은 무엇을 했는가? 나는 당신들이 못한 것을 다 하겠다.’ 해야 합니다. 또 사탄에 대하여 ‘역사적인 사탄들아! 와라’ 해야 합니다.
오늘 여러분이 여기 모여서 수련을 통하여 이런 것을 알게 되는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릅니다. 이때는 효자라는 명사를 갖고 뜻길을 가야 승리자가 될 수 있습니다. 6천년 죄악의 역사를 책임지겠다는 각오 아래 하나님 앞에 순종의 왕자, 복종의 왕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 뜻대로 하시옵소서.’ 했던 것처럼 효자의 기준을 세우고 난 다음, ‘사탄이 드디어 저희 앞에 굴복하였나이다.’ 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말씀의 조상이 되고, 실체의 조상이 되고, 심정의 조상이 되고, 순종의 조상이 되고, 혈통의 조상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며, 여러분 각자가 역사의 배도자임을 자각하고 역사적인 공분을 품고 사탄과 싸워 이겨야 합니다. 사탄의 항복을 받아야만 ‘나는 누구였던가’를 알게 됩니다. 새로운 말씀의 조상, 새로운 심정의 조상, 새로운 실체의 조상, 새로운 혈통의 조상이 되어야 합니다. 새로운 승리의 조상이 되어야 합니다. 본래 우리는 이런 모습이 되었어야 했는데 타락으로 말미암아 그러지 못했으니 ‘분하구나.’ 하며 이 모든 것을 내가 해내고 말겠다고 나서야 합니다. 이게 쉽겠어요? 그러나 우리 당대에 우리의 손으로 복귀의 역사를 끝마쳐야 합니다.
역사상에는 제사를 잘 드리는 사람도 많았고, 원수를 쳐 갈기는 용자도 많았고, 어떤 일을 잘 해 공적을 세우는 자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정을 바로 체휼하고 대신한 사람은 일찍이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날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바로 심정을 같이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두 가닥으로 뻗쳐서는 멀리 못 갑니다. 그러므로 생활환경을 단일화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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