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님, 이 해도 절반이 지났사옵니다. 이 민족이 악의 세력에 의해 침범당하던 날로부터 10년이 지났습니다. 그저 염려와 수심을 품은 채, 내일을 소망으로 삼고 오늘을 근심 가운데서 지내던 불쌍한 이 민족, 불쌍한 저희들이었습니다.
아버지, 오늘에나 새로운 무엇을 하늘 앞에 세울 것인가 하며 하루를 보내고, 또 그러한 내일을 소망하면서 한 달을 보내고, 그러한 한 달을 소망하면서 또 한 해를 보내는, 걷잡을 수 없는, 허둥대는 걸음을 걷기에 바쁜 인간의 실상(實狀)임을 잘 알고 있사옵니다. 이와 같은 흐름의 와중(渦中)에 처하여 있는 저희들이 그 처해진 자리에서 가던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당신을 대할 수 있는 시간을 갖기 위해 허덕이고 있다는 것을 당신은 잘 알고 계시옵고, 심정의 그 무엇을 당신 앞에 돌려드리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저희들에게 있다는 것도 당신은 잘 알고 계시옵니다.
남이 바치지 못하는 시간을 아버지 앞에 바쳐야 할 책임이 저희들에게 있는 것을 아옵고, 남이 들이지 못하는 정성을 아버지 앞에 들이지 않으면 안 될 책임이 저희들에게 있는 것을 아옵니다. 그런 연고로 날이 가면 갈수록,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세상을 향한 마음이 아니오라 아버님의 뜻을 대한 초조한 마음과 절박한 심정을 저희들 각자가 느끼고 있음도 당신은 잘 알고 계시옵니다.
아버님, 내일을 염려하고 오늘을 염려하며 살 때는 지나갔습니다. 어차피 와야 할 날은 다가오고 있사옵고, 어차피 청산해야 할 날도 다가오고 있는 줄 알고 있사옵니다. 그런 날을 대비하여 하늘은 저희의 생활권 내에서 저희를 움직이고 계신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나이다. 저희들은 사정을 통해서나 심정을 통해서나 체휼을 통해서나, 또는 어떠한 실증적인 사실을 통해서 저희가 어떻게 살고 또 어떻게 가야 될 것인가를 뚜렷이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님, 6천년 섭리의 서글픔도 크지만, 그보다 주저하지 않을 수 없는 환경에 처해 있는 오늘날의 저희들을 바라보시는 당신의 마음은 더욱 애달프실 줄 알고 있습니다.
아버님, 기쁨을 느끼시지 못하고, 만천하에 자랑하시지 못하는 당신의 애달픈 심정을 저희들이 알았사옵고, 이 땅을 찾기 위해 수고하시던 그 사정을 털어놓고 역사적인 내용을 폭로하여 원수들에게 보복하지 않으면 안 될 당신의 내적인 애달픈 심정도 알았사오니, 아버님, 이제 저희들 죽든지 살든지 오직 당신만을 위해 나서는 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모진 바람이 부나, 더 나아가서는 저희의 앞길에 쇠사슬과 철망이 가로놓여 있다 할지라도, 뼈가 깎이고 살이 찢기는 한이 있다 할지라도 당신과 맹세한 절개만은 변하지 않겠다는 마음을 갖고 있사오니, 당신은 이것을 믿어 주시옵소서.
당신이 보시기에 믿고 안심할 수 있는 모습이 되는 것이 타락한 선조의 후예로 태어난 저희의 소원이옵니다. 아버지가 믿을 수 있는 모습, 아버님께서 영원하고 천적인 고귀한 것을 맡기시며 참되다 할 수 있는 아들딸이 되기를 저희는 진심으로 바라옵나이다. 또 그런 아들딸이 될 것을 맹세하며 저희들은 다시 한번 아버지 앞에 엎드렸사옵니다. 아버지는 어떠한 교회의 아버지만도 아니옵고, 어떠한 나라의 아버지만도 아닌 것을 아옵니다. 나라의 아버지가 되고 교회의 아버지가 되려면 먼저 내 아버지의 과정을 거쳐야 함을 알았사옵니다.
아버지! 저희가 진정 당신의 사정을 알았사옵니까? 진정 당신을 내 아버지로 모시고 있사옵니까? 문제는 여기에 있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그 누가 뭐라고 해도 아버지와 저희 사이에 엉클어진 이 한 사정은 세상의 그 어느 것과도 비할 수 없을 만큼 큰 것이온데, 저희는 세상의 큰 것을 찾아 헤매었사옵니다.
모든 것은 내가 해결지어야 함을 저희들이 알았습니다. 이 땅에 오셨던 예수님도 사랑하는 제자들이 이러한 기준을 세우기를 고대했다는 사실을 저희들은 말씀을 보아서 알았습니다. 하늘 앞에 짊어진 책임을 못하면 얼굴을 들 수 없는 부족한 모습이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예수님의 제자들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 앞에서 선후를 놓고 다투었던 것을 저희들은 알았사옵니다. 하늘 앞에 심정적으로나마 황공함을 느껴야 할 그들이 천국에서는 누가 큰 자냐고 물었던 것을 저희들은 알았사옵니다. 이 제2천년의 역사가 지난 오늘날 저희들은 뿌리를 잃지 않는 모습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 배고플 때 배고파하고, 슬플 때 눈물지으며, 어려운 사정을 제자들과 의논하시던 그 예수님을 오늘 이 땅 위에서 저희들이 모실 수 있다 하더라도, 하늘이 바라시는 그 기준 이상으로 모실 자가 없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이미 그 분을 하늘나라로 보내고 난 뒤인 오늘에 있어서나마 그의 심정과 사정을 안 저희들이 가신 그 분을 위안해 드려야 되겠사옵니다. 땅에 오셔서 서글픈 행로를 거쳐가신 그 분을 위안해 드려야 할 책임이 저희에게 있는 것을 알았사오니, 저희들로 하여금 당신이 기뻐할 수 있는 일이라면 죽음의 길도 서슴지 않고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며 나아갈 줄 아는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높고 낮음은 당신만이 알고 계신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고, 아버님을 소유한 자는 높은 자도 없고 낮은 자도 없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오며, 깊은 심정으로 아버지를 사랑하는 자만이 더 높은 아들의 자리에 선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품을 그리워하며 모든 것을 잊고, 아버지의 심정을 체휼하기에 급급할 줄 아는 아들딸이 되어야 할 것을 아옵니다. 당신의 깊은 심정과 더불어 살고, 당신의 깊은 심정과 더불어 사랑하고, 당신의 깊은 심정과 더불어 의논하면서 사는 자는 겉으로 보기에는 지극히 낮은 자로되 하늘땅을 소유한 자인 것을 저희들이 알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한스러웠던 예수님의 심정의 친구가 이 땅 위에 없었던 것을 알았사오니, 오늘 저희들이라도 예수님의 심정의 친구가 될 수 있는 영광을 이 시간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니다.
이날 남한 각지에서 외로운 심정을 갖고 아버지 앞에 호소하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있사오니 그들 위에도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고, 수많은 교단과 민족 위에도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천상(天上)에 있는 수많은 영인(靈人)들이 이 땅 위에서 해원의 조건을 찾고 있사오니, 그들 앞에 남은 책임을 저희들이 다 감당하고 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올 때,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니다. 아멘.
<말 씀> 이 시간 우리가 잠깐 생각하려는 말씀의 제목은 ‘길을 잃은 양과 아버지’입니다. ‘길을 잃은 양과 아버지’ 이런 제목을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땅에 살고 있는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마음속으로 항상 무엇을 찾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물론 좋은 환경을 만들 수 있는 가치를 찾는 것도 귀하겠지만, 그것보다도 자기 자신을 찾고, 자기 자신의 생명과 자기 자신의 심정을 찾아 가지고, 그 찾아진 생명과 심정의 주인을 만나든가 아니면 자기가 즐길 수 있는 대상을 찾든가 하는 것이 더 귀한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학자는 학문을 통하여 자기가 목표하는 그 무엇을 찾기 위해서 노심초사 연구하고 노력하는데, 그렇게 해서 자기가 목표하던 것을 달성한다면, 그다음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권력가는 자기가 구상하는 권력을 얻기 위해 부단히 싸우는데, 그 권력을 얻고 난 후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평범한 사람들도 다 가치적인 그 무엇을 찾고 있는데, 그것을 찾은 후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여기에 있는 여러분 자신들이 그러한 입장에 처한다면 여러분 자신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것이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자신들이 그러한 입장에 처한다 하더라도 우리가 찾던 그것이 우리 자신의 것만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상대적인 관계가 맺어져서 전개되어 나가게 되는 것을 누구나 다 체험하는 사실입니다. 찾던 그것이 내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관계를 맺어서 가정, 사회, 국가, 세계 더 나아가서는 전천주(全天宙)에까지 그 가치를 연결시키고자 하는 것이 우리 인간의 태도요, 마음이요, 심정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은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기 한 개체만을 내세워서 무한한 가치를 찬양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할지라도 그것은 자기만을 중심삼고는 되어지지 않습니다. 어떠한 가치의 기준에 접근하면 접근할수록 그 사람은 그 가치를 주변 환경이라든가 세계, 더 나아가서는 천주에까지 비준(比準)되는 가치로 연결시킬 수 있는 내용을 갖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 가치를 전체의 가치로 세울 수 있고, 또 그런 사람에게 행복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무리 잘나고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 만천하에 자랑할 수 있는 그 무엇을 가졌다 할지라도 그것은 만민이 누구나 갖고 싶어하는 것이어야 하고, 또 빠른 시간 내에 만민이 그 가치를 같이 느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가치를 지닌 사람이 있다면, 그는 그야말로 세계적인 인물이 될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사람이 그렇다면 인간을 지으신 절대자 하나님도 그럴 것입니다.
하나님이 피조물(被造物)을 창조하실 때에는 반드시 목적이 있어서 지었을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한 개체로부터 대우주까지 피조세계 전체를 창조해 나아가는 과정에는 반드시 목적이 있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은 무엇인가? 하나님만이 알고 계시는 그 무엇을 인간을 통하여 이루시려고 인간을 지으시고, 지금까지 인간과 인연을 맺어 나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생활을 통하여 헤아리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오늘날 인간들은 그 무엇을 찾고 있습니다. 인간뿐만 아니라 인간을 지으신 절대자 하나님께서도 그 무엇을 찾고 계십니다. 인간은 무엇을 찾고 있느냐? 인간은 제일 가치 있는 것을 찾고 있습니다. 그러면 제일 가치 있는 것은 무엇일 것인고? 내 개체를 예로 들어 말한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생명일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것이고, 실생활에서 그 가치를 체휼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생명의 가치를 그리워하며 찾고 있는 것입니다. 동시에 그 생명의 가치 앞에 대상이 되는 가치를 찾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대상의 가치를 찾고 난 후에는 어떻게 될 것이뇨? 상대적인 기준이 결정되면 거기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만우주와 같이 움직이고 작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필연적인 결론입니다. 무엇으로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느냐? 물리적인 현상을 보아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상대적인 관계를 맺으면 반드시 작용하고 운동하는 현상, 또 직선적인 운동보다는 원형적인 운동을 하는 현상, 또 개체보다는 전체와 관계를 맺기 위해 움직이는 물리적인 현상을 보아서도 그런 결론을 내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까지의 역사노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찾고, 수많은 사람이 고대하고, 수많은 사람이 목표로 하던 그런 가치의 생명체로서 살다 간 사람이 과연 있을 것인가? 문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또 천주(天宙) 이상의 가치를 가졌다고 자랑할 수 있는 생명적인 기준을 갖춘 인간이 되어야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데, 인간은 그런 기준을 갖추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만물의 영장의 가치를 부여한 목적은 어디 있을 것인가!
여기에서 우리는 생명의 가치를 찾고 있는 인간이란 것을 알았는데, 창조주 하나님도 인간의 생명의 가치와 전체적인 인연을 맺기 위해 역사노정을 걸어오시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헤아려 볼 때에, 하나님은 반드시 역사적인 하나님으로 나타나셔야 되고, 시대적인 하나님, 즉 생활감정을 통하여 우리의 생명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분으로 나타나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필연적인 조건이며 필연적인 인연이라 할진대, 이와 같이 생활감정을 통하여 생명의 가치의 중심으로서 나타나시는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인간이 있느냐 하는 것이 또한 문제입니다.
그러한 기준 위에 서야 할 것이 우리의 인생이요, 그러한 기준 위에 우리를 세워 놓고 우리의 근본문제를 해결짓고자 하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도 인정하시고 나도 인정하는 동시에 피조세계 전체도 인정할 수 있는, 즉 완전한 생명의 가치를 가진 완전한 하나의 사람이 이 땅 위에 나온다 할진대, 하나님께서 찾고 계시는 그 ‘찾음’의 제1단계의 문제는 해결될 것입니다. 그러한 입장에 처해 있는 우리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서 본 바와 같이 우리들은 길을 잃은 양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어떠한 주인 밑에서 자라났는지 모르고 있고, 어떠한 주인이 우리에게 꼴을 먹이고 우리를 양육시켰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결국 이 세계에서 살고 있는 우리 자신들은 길을 잃어버린 양과 같은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주인이 있는지 없는지, 주인이 자신들을 기르던 보금자리가 있는지 없는지, 또 자신들을 먹이던 초원이 있는지 없는지를 모르는 양과 같은 입장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태어나 보니 어떠한 가정의 자식이 되어 있고, 한 나라의 백성이 되어 있는 것을 알게 되고, 나중에는 하나의 부부가 되어 가정을 이룬 것을 알게 되는데, 이것이 인생이 찾아 헤매던 모든 문제를 해결지은 ‘찾음’의 내용인가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타락의 보응입니다.
그러기에 내 한 개체를 중심삼고 볼 때에 내게 부모가 있으되 나의 참된 부모가 못 되며, 처자가 있으되 나의 참된 처자가 못 되며, 형제가 있으되 나의 참된 형제가 못 되며, 동포가 있으되 나의 진정한 동포가 못 되며, 세계가 있으되 내가 바라는 세계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심정의 깊은 골짜기를 흡족히 채워 줄 수 있는 환경이 못 되어 있고, 사회가 못 되어 있고, 세계가 못 되어 있고, 그런 가정, 그런 처자, 그런 부모가 못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나를 사랑하는 부모가 있다 할지라도 그 부모의 사랑에 백 퍼센트 만족하지 못하는 나 자신입니다. 아무리 나를 사랑하는 처자가 있다 할지라도 그들로 인하여 내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백 퍼센트의 행복감을 느낄 수 없는 나 자신입니다. 어떠한 주의나 이념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으로써 백 퍼센트 만족할 수 없는 나 자신인 것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현재의 부모가 자기의 부모로 찾아질 참부모가 아니요, 현재의 처자가 자기의 처자로 찾아질 참된 처자가 아니요, 현재의 형제나 동포, 세계의 인류가 자기의 것으로 찾아질 참된 것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우리들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먼저 참된 개인을 찾아야 하고, 참된 부모를 찾아야 합니다. 그러면 참된 부모는 어디 있을 것인가? 참된 부부, 참된 자녀, 참된 형제, 참된 나라, 참된 세계, 참된 천주(天宙)는 어디 있을 것인가? 또 하나님은 어떻게 찾을 것인가? 이런 것들이 문제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이 민족과 저 민족, 이 족속과 저 족속이 서로 부딪치고 싸우는 것을 해결지어 놓지 못하는 입장에서 역사와 인류를 붙들고 나오셨습니다. 도의 길을 가는 어떠한 사람이 오로지 하나님께 충성을 바치고 하나님만을 사모하는 생활을 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자유스런 환경에서 자유자재로 그 앞에 나타나 가지고 그가 요구하는 것을 충당해 주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은 어떠한고? 우리가 믿고 의지하고 있는 가정, 부모와 처자, 혹은 형제가 나의 안식의 원천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인간에게는 이 이상 더 허무하고, 이 이상 더 앞이 캄캄하고, 이 이상 더 불쌍한 일이 없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에게 생명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생명이 있는 자신이라는 것을 인정할진대, 반드시 자신과 관계된 세계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 관계의 세계를 영원히 연결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천륜을 중심삼고 심정의 인연을 세워 나가야 합니다.
인륜이 있는 한 인정이 있고, 천륜이 있는 한 천정이 있습니다. 그런데 인륜과 천륜이 같은 보조로 움직여 나가듯이 인정(人情)과 천정(天情) 역시 같은 보조로 움직여 나가야 합니다. 인륜을 따른 인정이요 천륜을 따른 천정이라 할진대, 인정과 천정이 통할 수 있는 한 때가 와야 합니다. 그리고 나를 중심삼고 맺어지는 인정이 천정으로 공인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만일 그런 자리에 선 사람이 있다 할진대, 이는 역사가 출발한 이후 타락한 인간이 찾고 있는 최고의 그 무엇을 찾은 자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간에게 지정의(知情意)가 있는 한 하나님께도 지정의가 있을 것입니다. 심정을 중심삼고 어쩔 수 없이 약해지는 것이 인간이라 할진대, 하나님도 천정, 즉 심정을 중심삼고는 어찌할 수 없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본래부터 인간이 이러한 관계와 인연을 갖고 태어났다면, 여러분 자신들은 그 자리에서부터 출발했을 것입니다. 내 생(生)의 가치는 무한한 가치와 인연되고, 생활감정은 영원한 천정과 인연되고, 내가 소원하는 어떠한 목적은 하나님의 영원한 이념과 연결되어 있어야 할 것이었는데,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내 생활감정과 나의 소원, 나의 모든 가치는 상실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가장 불쌍한 사람은 제일 많이 가졌다가 한꺼번에 잃어버린 사람일 것입니다. 그보다 불쌍한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제일 행복한 사람은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세상의 귀한 것 전부를 영원히 가질 수 있다는 보장을 받은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가 가장 행복한 사람일 것입니다. 세상에서 어떠한 지위를 가졌다 할지라도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며, 아무리 부귀영화를 누린다 할지라도 그것 또한 일시적인 것이며, 자기의 생명의 가치를 한 시대에 있어서 자랑한다 하더라도 그것 역시 일시적인 것입니다. 역사가 흐르면서 바뀌어감에 따라 이제껏 자랑하던 것은 비판을 받게 됩니다. 이러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 인간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인간은 본래부터 이러한 입장에 놓여 있도록 창조되었는가? 인간이 절대자인 하나님의 손에 의해 지음 받고, 절대자의 심정을 통하여 절대자의 목적의식을 상대적으로 느낄 수 있는 가치적인 존재로 지음 받았다 할진대, 하나님이 인간에게 어떠한 약속을 하였다면 그 약속은 일시적인 약속이 아니라 하나님이 영원하신 것처럼 그 약속도 영원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심정적인 인연이 있다 할진대 그 심정적인 인연 역시 영원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영원한 심정의 인연, 영원한 약속의 인연, 더 나아가서는 영원한 생명의 인연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본래 이러한 것을 주지 않기 위해 인간을 지으신 것은 아닙니다. 본래는 인간이 완성하면 이러한 모든 것을, 한 번 주면 더 줄 것이 없을, 그런 전체의 가치를 우리 인간에게 주려고 하셨는데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이러한 가치를 주시지 못한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인간은 그런 가치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것도 시간적인 거리를 두고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타락과 더불어 일시에 잃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일시에 잃어버린 인간은 어떠한 입장에 놓여지게 되었는고? 많은 것을 가질 수 있는 입장에서 많은 것을 잃어버린 입장, 즉 무한히 외롭고 무한히 서글프고 무한히 허탈한 입장에 떨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이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이 가진 것이 많다고 해서 행복하지는 않습니다. 가진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것이 고통을 재촉하는 요소는 될 망정 행복과 만족을 재촉하는 요소는 되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무엇을 많이 아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이 알면 행복할 줄 알았더니 알면 알수록 불행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제일 귀한 것은 무엇이뇨?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은 생명입니다. 이것을 우리들은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을 중심삼은 생명과 내가 하나되어 하나님의 사랑을 통할 수 있는 나 자신이 되고,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노래할 수 있는 나 자신이 되는 날, 비로소 온 인류는 행복의 기준을 찾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은 지금 어떠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방황의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갈 길을 모르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왜 방황하게 되느뇨? 중심이 서 있지 않기 때문이며 목적의식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또 내 생명의 가치와 내 생명이 관계되어 있는 어떠한 절대적인 내용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방황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의 가치, 우리의 삶의 중심,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목적, 이러한 것들이 영원한 하나님의 심정과 같은 기준 위에 놓여질 수 있다면 문제는 해결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아직까지 그런 기준을 세우지 못한 채 방황하고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여러분 자신에게 ‘나는 어떠한 입장에서 방황하고 있는가’하는 반문을 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여러분이 방황하는 자신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은 자신에게 중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중심을 갖고 있느냐, 더 나아가서 목적의식을 갖고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인간은 절대적인 생명의 중심을 갖고, 또 거기에서 가치를 느끼고 목적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 후 만천하 앞에 나타나야 비로소 인간은 자기의 자리를 잡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래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었는데, 인간들은 이러한 내용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기에 온 세계 인류는 중심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는 것입니다. 방황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혼돈하고 혼란된 입장에 처하여 있습니다. 이와 같이 자기 자신을 세울 수 없는 입장에 처해 있는 인간은 공포와 초조와 불안감을 느끼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어떠한 현상인가? 곧 길을 잃어버린 양과 같은 현상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주인의 손길을 통해 양육이 되던 양은 주인을 떠나 길을 잃어버리더라도 주인이 있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주인의 사정이 어떠하다는 것을 알며, 주인의 심정이 어떠하다는 것을 알며, 주인과 자기와 어떠한 관계에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또 자기가 외로울 때, 자기가 배고플 때, 자기가 어려울 때에 주인이 어떻게 대해 주었다는 것도 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아는 양이 주인을 잃게 되면 먹을 것을 잊고 자기의 처지와 형편을 생각하지 않고 주인을 찾을 것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동물도 그렇거늘, 인간도 자신을 지어 주고 길러 준 절대적인 주인이 있다는 것을 안다면 필시 그러할 것입니다. 자기의 생명과 자기의 심정과 자기의 이념과 자기의 가치를 통해서 어떤 보장을 해줄 수 있는 불변의 주인이 있고, 또 그 주인과 자기와 어떠한 관계가 있고 어떠한 인연이 맺어져 있다는 것을 안다면, 인간도 오늘날 이 타락된 세상의 불안과 초조와 공포감에 휩싸여 방황하는 자리를 박차 버리고, 자기의 처지와 환경을 잊어버리고 주인을 찾아 헤맬 것입니다. 그럴 때의 그 모습은 사랑을 받고 길리움을 받던 양이 길을 잃어버리고 주인을 찾으려고 허덕이는 그 이상의 모습일 것입니다.
양이 비록 하찮은 동물이지만 주인을 잃고 나면 환경의 제재를 받지 아니하고 주인을 그리워하며 울부짖을 것이요, 주인과 사정을 통할 수 있는 곳, 주인이 있는 곳을 향하여 달려갈 것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그에게 발이 있어 달릴 수 있는 한 달려갈 것입니다. 느낄 수 있는 감정이 있는 한 사모할 것이요, 사모하고 있는 한 자기의 감정을 통하여 주인에게 알리고 싶은 모든 것을 표시할 것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그와 같이 인간도 있는 힘을 다 기울여 울부짖으며 주인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목자의 품을 떠나 길을 잃은 외로운 양의 무리보다도 더 불쌍한 처지에 놓여진 것이 우리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 우리가 살고 있는 가정이나 이 나라, 혹은 이 세계, 더 나아가서는 수억천만 명이 살고 있는 무한한 영계(靈界)도 하나님을 마음대로 대할 수 있는 자리에 놓여 있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필히 천정(天情)의 인연을 그리면서 목적의 세계를 찾아가야 하는 운명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한 우리의 마음과 몸과 생활감정은 이 시간도 그 세계를 찾아가라고 재촉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자신이라는 것을 자각하는 그 시간은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귀한 시간입니다.
길을 잃어버린 입장에 놓여 있는 우리의 인생은 지극히 불안한 인생입니다. 길을 잃은 양이 흘러가는 물을 마실지라도 그것이 그 양에게 생명의 물이 못 되고, 초원에서 풀을 먹더라도 그것이 그 양에게 생명의 양식이 못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기 주인이 주는 물과 풀이 아니라 다른 주인의 물과 풀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오늘날 우리가 생활하는 모든 것, 먹고 마시고 입고 살아가는 모든 것은 결국 길을 잃은 양이 먹고 마시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거예요. 우리가 먹고 마시고 입고 있으되, 먹고 나서는 그 대가를 지불해야 하고, 마시고 나서도 그 대가를 지불해야 하고, 입고 나서도 역시 그 대가를 지불해야 할 입장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입장에서 지금까지 생활해 나온 인간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이 땅의 주인은 누가 되어 있느뇨? 이 땅을 창조하신 절대자 하나님이 이 땅의 주인이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원치 않는 사탄이 이 땅의 주인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아무리 잘 먹고, 잘 입고, 많은 재미를 느끼며 사는 사람이라도 그 역시 최후에는 사탄으로부터 ‘야! 이놈아, 너에게 해준 대가를 지불해라, 보상을 해라.’ 하는 요구를 받게 된다는 거예요. 그런 운명에 놓여 있는 인생이라는 거예요. 그러기에 이것 이상 억울한 것이 없음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지음받은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자녀로서 세계를 주관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타락한 우리 인류 중에는 그러한 위신과 위치, 그러한 권한을 갖추어 천상(天上)에 자랑한 존재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가진 자여! 자랑하지 마십시오. 오늘의 생활에서 안일함을 자랑하는 자여! 자랑하지 마십시오. 세상 권세를 갖고 행사하는 자여! 자랑하지 마십시오. 그 모든 것이 다 지나가 버릴 것입니다. 지나가 버릴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거기에 대한 대가를 보상해야 합니다. 그런 자리에 처해 있는 우리 인간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타락한 인간을 구하기 위해 어떻게 지도하고 계시는가? 주인을 잃어버린 양이 애달프게 울부짖으며 있는 힘을 다하여 주인을 찾아 헤매는 것과 같이, 오늘날 땅 위의 인간들도 애달픈 심정으로 울부짖으며 정열을 다하여 하늘을 찾아 나가야 하겠습니다. 그러기를 하나님은 우리에게 권고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주인을 잃어버린 양은 환경이 편안하다고 해서 잠을 자서는 안 됩니다. 잠들어 있는 그 자리는 주인이 없기 때문에 항상 사자 떼와 이리 떼가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자기가 먹고 있는 풀에는 독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고, 자기가 마시고 있는 물에도 독이 들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리고 자기의 처지와 환경을 개의치 말고 있는 힘을 다하여 달음질쳐야 합니다. 달음질칠 뿐만 아니라 있는 힘을 다하여 울부짖어야 합니다. 이것이 주인을 찾는 비결입니다. 옛날에 마시던 물을 마시고, 옛날에 먹던 풀을 먹어야 하는데, 주인이야 있건 없건 제멋대로 잠을 잔다면 그는 필시 이리나 사자의 밥이 되고 말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 위에 어린양으로 오셨습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고 세례 요한은 외쳤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떠한 어린양으로 오셨느뇨? 길을 찾아 주기 위한 어린양으로 오셨습니다. 길을 잃어버린 어린양이 아니라 주인이 어디 있는지를 아는 어린양으로 오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네가 살고 있는 가정을 버리고 나오라고 하셨습니다. 가정이 좋으니 거기에서 책임 다하고 나오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네가 살고 있는 나라가 좋으니, 네가 믿고 있는 교회가 좋으니 거기에서 책임을 다하고 나오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이 땅은 원수의 땅입니다. 주인이 달라요. 나를 낳아 주고 길러 주던 본래의 주인은 내가 먹고 입고 자는 생명적인 모든 요소에 값을 칠 줄 모릅니다. 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원수는 먹고 입고 자는 모든 것에 값을 치고 나중에는 생명까지 보상해 달라고 요구합니다. 이러한 인생이기에 하나님은 이제까지 인간을 대할 때 모순되게 또는 역설적으로, 억측으로 대했고, 그런 입장에서 역사를 지배해 나왔던 것입니다.
그러니 원수들을 조심해야 됩니다. 조심하는 동시에 원수들의 비밀을 알아야 합니다. 원수가 오는 길도 알아야 되고, 원수가 있는 곳도 알아야 됩니다. 비밀을 알면 피할 길이 있습니다. 그러나 비밀을 모르면 피할 도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저 편안히 잠자고 제멋대로 살다가는 자기의 생명마저 빼앗기게 됩니다. 이것이 이 땅에 살고 있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잘났건 못났건 다 마찬가지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경고하셨습니다. 경고하셨어요. 세상을 붙들라고? 아닙니다. 세상을 박차고 나서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야 될 것 아닙니까? 그래야 참주인입니다. 본연의 주인을 잃어버린 인간을 보고 잘 살라고만 한다면 그건 원수란 말입니다.
그러기에 도의 길은 박차고 나서야 하는 길입니다. 그래야 됩니다. 하나님은 주인을 잃어버린 인간, 주인의 인연을 모르는 인간이 박차고 나서기를 원하시지만 인간은 그러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가는 길을 모르기 때문에 가긴 가야겠는데 가는 길을 알 수 없단 말입니다. 어떤 철학자의 학설에 내 생명을 의지해요? 어떤 주의나 사상에 내 생명을 의지해요? 여러분, 안심이 돼요? 안심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까지의 어떠한 철학이나 주의 사상은 한 시대에는 알맞을 수 있었으되, 영원한 생명과 심정의 세계에 있어서는 알맞지 않았습니다. 그런 것들은 결국 우리가 믿고 안식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러기에 인간은 불쌍한 나그네와 같습니다. 그런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나그네는 먹고 자는 데 있어서 반드시 보상을 해야 됩니다. 주인은 거처를 마음대로 옮기고 물도 밥도 마음대로 마시고 먹을 수 있으되 나그네는 그럴 수 없습니다. 보상해야 합니다. 배상해야 합니다. 먹는 밥도 마시는 물도 자는 자리도 보상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인간이 바라보고 소망하는 것은 무엇인가? 참다운 생명의 주인을 맞이하여 내 생명이 즐거울 수 있는 세계, 무한한 영양소와 무한한 행복의 요소를 아무리 취하고 아무리 가져도 보상을 요구받지 않는 세계입니다. 보상을 요구받지 않는 그 세계가 진실로 행복한 세계입니다. 이러한 세계를 잃어버린 인간들의 사정을 잘 아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인간들을 대해 세상과 짝하여 오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세상을 등지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땅 위에 예수님이 2천년 전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오셔서 어떠한 생활을 하셨느뇨? 예수님은 고아나 거지와 같이 불쌍한 인간들, 아니 그보다 더 불쌍한 인간들, 얻어먹고도 또 보상을 받으려는 인간들 앞에 무엇을 갖고 오셨느뇨?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고. 진짜 그래요? 정말 그런가 말입니다.
그러면 그 길은 어떠한 길이냐? 보통이 아닌 길, 하나의 길, 용서가 없는 길입니다. 모든 존재가 소원하는 하나의 길이 있다면 그 길은 어떤 길입니까? 살다가 죽는 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살다가 죽는다는 것은 생명을 종결짓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주장하고 가신 길은 어떠한 길이냐? 죽지 않고 사는 길입니다. 가면 살고 안 가면 죽는 길입니다. 생사의 결판을 짓는 길입니다. 여러분은 돈을 모아서 잘사는 길을 찾을 것이 아니라 생사의 결판을 지어 주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다음에 그 진리는 어떠한 진리냐? 그 진리에 속한 자는 보상을 넘어설 수 있는 진리입니다. 그 진리에 속한 자는 먹고 입고 자는 모든 문제에 있어서 보상의 문제를 넘게 할 수 있는 진리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안 초대 기독교 신자들은 먹고 입고 자는 문제를 초월했던 것입니다.
그다음에 생명은 어떠한 생명인가? 예수님이 말씀하신 생명은 하나님까지도 움직일 수 있는 권한을 지닌 생명입니다. 생명의 권한을 갖고 있다는 것은 사랑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생명을 내포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생명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 14:6)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따라가는 우리들은 무엇을 가져야 할 것이뇨? 길을 가져야 됩니다. 진리를 가져야 됩니다. 생명을 가져야 됩니다. 길을 잃은 양이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길과 진리와 생명을 주기 위해 세워진 것이 기독교입니다. 그 사상을 중심삼고 나가는 여러분은 첫째, 물질 관념을 초월할 수 있는 기준에 서야 합니다. 먹고 입고 자는 관념을 초월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초월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지 못한다 할진대, 이 세상을 이길 수 없습니다. 못 당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예수님의 이름을 중심삼은 우리는 죽음이 문제가 아닙니다. 죽음의 공포를 넘어설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그래야 됩니다. 10년 후에 죽으나 50년 후에 죽으나 죽는 것은 마찬가지라는 거예요. 영원한 생명을 노래하는 자라면 천년 후에 죽으면 어떻고 일년 후에 죽으면 어떻습니까? 우리는 죽음의 고개를 넘어설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는데, 나는 거기에 사랑도 들어가야 한다고 봅니다. 만일 내가 말한다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사랑이니….’라고 할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중심은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라는 것은 갈 길을 다 가고 난 후에 세우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일이 잘 안 된다고 눈물을 흘려서는 안 됩니다. 신앙자는 또 ‘아! 나는 도저히 못 살겠소.’ 하면 안 됩니다. 생명의 위험이 닥쳐온다 할지라도 사망권을 넘어설 수 있는 신념이 있어야 합니다. 이 땅이 역사적으로 엉클어져 내려온 것도 정적인 문제에서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정적인 문제에 있어서도 우리는 혁명을 해야 합니다. 수십 명이 쓰러지는 상황에서도 뜻 가운데 쓰러진다는 생각을 한다면 늠름히 넘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배포를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기쁘다 하는 입장, 세상의 인간들이 보고 느끼고 즐겁다 하는 행복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님은 불쌍한 분이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언제 낳을지 알지 못하는 입장에서 자기들의 고향을 찾아가다가 결국은 마구간에서 예수님을 낳았습니다. 그 후 예수님이 잘 살았을 것 같아요? 천만에요. 예수님은 의붓자식으로 자랐습니다. 요셉의 의붓자식으로서 말입니다. 요셉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모시고 살았을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요셉의 의붓자식으로 자랐습니다, 의붓자식으로.
웬 일인지도 모르게 꿈에 천사가 나타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기에 그렇게 믿었으나 낳아 놓고는 다 잊어버렸습니다. 동방박사가 찾아와 예물을 드리고 하던 것도 지나고 나니 전부 잊어버리고 보통으로 대하는 생활을 매일 하게 되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의 가정생활에 휩쓸려 들어가 생활하셨던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증거하는 때는 한 때이나 증거가 이루어지는 소망의 때는 어떤 기간이 지나야만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증거했던 동방박사도 다 가버리고 안나, 목자도 다 가 버렸습니다. 형뻘 되는 세례 요한까지도 처음에는 증거했으나 나중에는 반대했습니다.
하늘의 이념을 가지고 오셨던 예수님을 요셉가정은 싫어했습니다. 그의 동생들, 누이동생이나 남동생들이 다 싫어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자라실 때 싸움이나 하고 그러셨을 것 같습니까? 말이 없었습니다. 묵묵했습니다. 그의 눈은 다른 것을 보고 싶었고, 귀는 다른 것을 듣고 싶었고, 입은 다른 말을 하고 싶으셨다는 것입니다. 느끼는 것도 다른 것을 느끼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요셉가정에서 불쌍하게 크셨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안 맞았습니다. 오죽하면 열두 살 때에 집을 나가셨겠습니까? 예루살렘 성전에 혼자 올라가 제사장들과 변론을 하실 때 부모가 찾아다니지 않았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물론 뜻적인 사명도 있었겠지만 인간적으로 볼 때도 오죽하면 열두 살 때에 집을 버리고 나가셨겠습니까? 예수님의 심정이 어떠하셨겠습니까?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자기의 30여 년 생애의 모든 감정을 말할 수 있었지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소년 시절에 집을 나서야 했던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하셨겠습니까? 불쌍하신 예수님이었습니다. 성경에는 그런 것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명절 때가 되면 맛있는 밥이 먹고 싶으셨다는 거예요. 고운 옷, 때때옷을 입고 싶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이 없으셨던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런 예수님을 함부로 대접했습니다. 목수인 양아버지의 시중을 들면서, 묵묵히 대패질을 하며 사시던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날 여러분이 ‘오! 주여’ 하며 믿고 있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오늘날 잘 믿는 사람들이 그때에 태어났더라도 ‘이 사람이 너의 주님이다’라고 하면 안 믿었을 것입니다. 한 사람도 안 믿었을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예수님의 가치를 세계적인 기준에 올려놓고 믿으라고 하니 믿는 거지요.
옛날 제사장들이 여러분만 못해서 예수님을 죽였겠어요? 천만에요. 예수님은 가문으로 보든지 그 무엇으로 보든지 형편없는 입장에 계셨습니다. 예수께서 돌아가신 후에 성경에서 그 가문이 훌륭하다고 하니까 그렇게 알지 그 당시의 사람들이 알게 뭡니까? 과거를 보나 현실을 보나 무엇 하나 믿을 수 없는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동생들까지도 예수님 대해서 흉을 보았습니다. 오순절이나 어떠한 행사 때가 되면, 형님이 무엇을 나타내기를 바란다면 사람들이 모이는 예루살렘에 가지 왜 이러고 있느냐고 핀잔을 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노정에서 하나님의 권능에 힘입어 이적과 기사를 행하시면서도 수난을 겪으셨습니다. 예수님을 보고 저 사람의 동생이 누구이며 아무개 형이 아니냐고 경시(輕視)했습니다. 형편이 없었단 말입니다.
예수님은 30여 년의 생애를 준비하면서 자기 어머니를 붙들고 간절히 말씀하시고 싶은 무엇이 있었습니다. 형제들을 붙들고도 간절히 말씀하시고 싶은 무엇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말씀하시지 못하였습니다. 왜? 상대기준이 조성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 그리고 자라는 동생들과 함께 엉클어진 심정을 끊고 나설 수 있는 환경이 되지 못한 것을 아신 예수님은 서른 살이 되자 집을 박차고 나오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복음을 전하시기 위하여 나오신 줄 알지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만민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나와요? 예수님이 요셉가정을 중심삼고 친척을 중심삼고 왜 전도를 하시지 못했습니까? 친척들이 예수님의 울타리가 되었더라면 그는 돌아가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형편이 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집을 박차고 나온 예수님이었기 때문에 가나의 잔칫집에서 마리아가 나타나서 포도주가 없다고 예수님에게 말하였을 때에 마리아에게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당연하다는 겁니다. 당연해요. 뺨을 안 치신 것이 다행입니다. 나는 그렇게 봅니다. 그 심정을 누가 알겠어요? 이렇게 사정이 엉클어지고 가슴이 미어지는 듯한 심정에 사무치면 사무칠수록, 천륜을 대하는 마음이 간절하면 간절할수록, 때가 가까워 옴을 느끼면 느낄수록 그의 초조함과 불안함은 더해간 것입니다.
이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은 갈 길을 몰라 초조해지고 불안해하지만 예수님은 인간이 가야 할 길을 가르쳐 주시지 못해 불안해하고 초조해하셨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4천년 동안 준비해 온 바리새교인들이요, 유대교인들이요, 이스라엘 민족이었습니다. 4천년 동안 섭리를 통하여 하나님은 그들에게 율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성전을 세우게 해서 메시아가 오면 맞을 수 있고 모실 수 있는 준비를 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가 베드로라니요? 분한 일입니다. 베드로가 웬 말입니까? 베드로는 어부였습니다. 2천년 후인 오늘날 한국에서도 고기잡이, 어부라 하면 형편 없게 생각하는데 그런 자가 예수님의 제자라니요? 무식한 어부가 예수님의 제자라니요?
만왕의 왕, 하나님의 독생자, 하나님의 황태자로 이 땅에 오신 분이 어부인 베드로를 제자로 삼다니요? 생각해 보란 말입니다. 훌륭하고 잘나고 그 시대를 지도할 수 있는 사람들이 ‘선생님이 명령만 하시면 죽든지 살든지 따르겠습니다.’라고 해야 했는데, 그런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었는데 어부를 제자로 삼았던 말이에요? 천만에요.
그러기에 철저히 떨어진 예수님이었습니다. 불쌍한 자리로 떨어진 예수님이 되었습니다. 지혜롭지 못한 제사장들, 그들은 어느 한 사람도 예수님께 ‘당신이 메시아입니까?’ 하고 묻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보세요. 그랬나, 안 그랬나? 바리새교인 또는 제사장, 교법사의 지위를 갖고 있는 사람은 어느 누구도 예수님의 열두 제자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대표자들에게 몰린 예수님이었고, 교법사들에게 몰린 예수님이었고, 제사장들에게 몰린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러니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어디로? 산이 좋아서 산에 들어가 밤을 새우며 기도를 하셨겠습니까?
여러분은 지금까지 믿어 왔던 것을 다 뒤집어야 합니다. 갈 곳이 없어도 뜻은 이루어야 하는 예수님이었습니다. 변변찮은 존재라도 세워서 모양만이라도 갖추어 뜻을 땅 위에 이루어야 한다는 사명감을 느끼셨고, 그런 심정에 사무치셨기에 할 수 없이 어부를 찾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께서 ‘야, 베드로야 모든 것 다 버리고 나를 따르라.’ 하셨을 때, 베드로가 ‘예.’ 하고 굽실거리며 따랐겠어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몰리고 쫓기는 것을 다 보고 다 알았던 베드로였어요. 성경에는 ‘야, 베드로야’ 하고 한 번 말하니, 하나님의 아들의 권능에 의해 베드로가 따른 것 같지요? 천만에요. 이스라엘의 모든 교법사들에게 천대받던 어부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교법사들에 대한, 그 시대를 지배하는 지도자들에 대한 반감이 있었습니다.
공의의 노정을 세우기 위하여 정의의 모습으로 순수하게 부르짖으시는 예수님의 말과 행동을 보면 틀림없이 선한 사람인데 교법사들이 미워하고 몰아대니, 그들은 예수님의 뒤를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몰리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뒤를 따르게 되었던 거예요. 오늘날 한국의 실정도 그렇지 않아요? 마찬가지입니다. 마찬가지예요.
여러분, 보십시오. 3년 동안이나 무식쟁이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예수님이 얼마나 고생하셨어요? 오죽이나 안타까우면 물을 떠다가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겠어요? 그것이 좋아서 하셨겠어요? 아닙니다. 알고 보니 비통한 사실이란 말입니다.
이렇게 되니 갈 곳이 없었습니다. 나중에는 3년 공생애 노정에서 희로애락을 같이하고 죽음을 맹세하던 열두 명의 사도가 다 배척하니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그러니 십자가의 길로 가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죽으러 갈 수밖에 더 있겠어요? 그런 날이 앞으로 멀지 않아 올 것을 아신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 가셔서,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마 26:39)라고 담판기도를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사태는 글러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이었던고? 그는 길을 잃어버린 양의 무리와 같이 황야에서 방황하는 민족과 세계 인류 앞에 참다운 길을 소개하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이런 목적으로 하나님이 보내신 독생자였으나 그가 가신 길은 처량한 길이었다는 겁니다.
예수께서 자신이 30여 년의 생애노정을 어떻게 살았다고 말씀하시지 않았기 때문에 성경에 그것에 대한 내용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에게 나는 어떤 길을 걸었고, 어떤 슬픔을 느꼈고, 부모로부터 어떤 천대를 받았고, 또 동생과는 어떠했다는 곡절에 사무친, 심중에 사무친 한이 많았지만 한마디도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노정에 무엇이 있었습니까?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었기에 말씀을 못하셨던 것입니다. ‘제자들아, 너희는 내 아버지의 본을 받고, 너희는 내 어머니의 본을 받고, 너희는 내 동생의 본을 받아라.’할 수 있는 조건이 없었기에 말씀을 못하셨다는 거예요.
30년 동안 요셉가정에서 자라신 예수님의 생애는 후회의 생애였고 한숨의 생애였습니다. 이런 생활을 하시던 예수님, 몰리고 몰리시던 예수님, 맨 나중에는 믿던 제자들마저도 배척하자 죽음밖에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을 찾아가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만민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죽어야만 했습니까? 죽지 아니하고는 만민을 구원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그러면 예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말씀하신 때가 십자가에 달리고 난 후입니까, 전입니까? 어느 때입니까? 그것은 전입니다. 다 전입니다. 4복음서에 나온 대부분의 말씀은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에 하신 말씀입니다. 몰리고 몰려 돌아가시게 되었을 때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돌아가시지 않고 사실 때 구주로 모심 받으셨다면 얼마나 좋았겠어요?
하나님은 길을 잃은 양떼와 같이 방황하는 인생들, 목적관도 생명의 가치도 잃어버린 인생들 앞에 필시 참다운 목자를 보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선지자를 다리 놓고 독생자라는 이름을, 구주라는 이름을 세워 하나님의 아들을 이 땅 위에 보내 주신 것입니다. 그 분을 중심삼고 역사적인 새로운 움직임을 이루어 나온 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러면 예수께서 30여 년의 생애를 거치시면서 이루고자 하신 것은 무엇이뇨? 하나님의 심중을 통하고 하나님의 생명을 통한, 생사의 기준을 넘어선 영광된 아들딸, 승리적인 아들딸을 만들어 만천하 앞에 세워 놓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일편단심으로 소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소망이 다 깨져 버렸습니다.
하고 싶은 말을 못하고 가신 예수님이었습니다. 성경에 예수님이 하고 싶은 말을 다했다고 쓰여진 곳이 어디 있습니까? ‘내가 이를 것이 많으나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그러나 때가 이르면 모든 것을 밝히 이르리라.’고 하셨어요.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하고 남겨 놓고 가신 예수님이었습니다.
인류 앞에 목자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찾아가는 길, 주인을 찾아가는 하나의 길을 가르쳐 주어야 할 책임이 있었으나 땅 위의 어느 누구에게도 가르쳐 주지 못하고 가셨던 것입니다. 그러한 예수님의 심정을 여러분은 생각해 보았습니까? 그러니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기도를 시켜야 됩니다.
그러면 기도의 목적은 어디에 있느뇨? 예수님이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 기준을 개척하고 가셨으나, 그러한 길을 간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기독교에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이러한 실정에 놓여 있는 세계에 일격을 가할 수 있는 새로운 움직임이 나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탈을 태워 버리고, 새로운 심정을 불러일으켜서 이 시대에 대한 사명, 인류와 세계에 대한 사명을 하는 무리가 나와야 합니다. 그런 길, 그런 생명, 그런 진리, 그런 사랑의 세계가 천륜의 소망임에 틀림없거늘, 그러한 뜻을 이루기 위해 행동하는 준비의 무리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가는 길이 우리가 필히 가야 할 길입니다. 타락의 후손임을 인정할진대, 우리는 그러한 길을 가야 합니다.
그러면 요셉은 누구였습니까? 남자를 대신한 존재였습니다. 마리아는 누구였습니까? 마리아는 여자를 대신한 존재였습니다. 예수님의 동생들은 누구였습니까? 예수님의 동생들은 백성을 대신한 존재였습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하여 예수님을 사랑하지 못했던 요셉,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하여 예수님을 사랑하지 못했던 마리아,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하여 예수님을 사랑하지 못했던 형제들이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남자들은 하나님이 사랑할 수 있는 요셉이 되어야 됩니다. 여자들은 하나님이 사랑할 수 있는 마리아가 되어야 됩니다.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이 사랑할 수 있는 형제들이 되어야 됩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할 수 있는 백성, 인류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마리아 이상, 요셉 이상, 그의 형제들 이상의 기준으로 주님을 모셔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새로운 역사는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견지에 입각하여 생각해 볼 때에, 과연 오늘날 기독교 신도들은 어떠한 입장에 처해 있습니까?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예수님을 보고 도망가던 열두 제자와 같은 모습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를 분히 여겨야 합니다. 그렇게 된 것은 민족의 실수요, 가정의 실수요, 요셉의 실수요, 마리아의 실수요, 형제들의 실수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비통하게 여겨야 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이 예수님을 사랑하지 못한 것을 한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대접하지 못한 것을 한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입혀 드리지 못한 것을 한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지극히 적은 것이라도 소자에게 주는 것, 사무친 심정을 가지고 소자에게 옷 한 벌이라도 주는 것은 곧 나에게 주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은 생활 가운데서 어떤 소년 혹은 소녀를 바라볼 때, 만일 그 소년 소녀가 예수님이라면 나는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 하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생활 속에서 어느 한 사람을 보고도 30여 년의 생애노정을 거쳐 가신 예수님과 같이 생각하고, 그리워하고 위하고 섬기고 싶은 마음이 넘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틀림없이 예수님의 제자보다 낫습니다. 저 나라에 있는 베드로보다 더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요한복음 17장을 보세요. 예수님께서 하나되기를 얼마나 기도하셨습니까? 그러기 위해서 예수님의 이름을 걸고 모든 사람을 사랑해야 할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동생이 되어야 할 사람들이요, 예수님의 누나가 되어야 할 사람들이요, 예수님의 가족이 되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이런 것을 알고 생활 속에서 예수님 대신 인간들을 높일 줄 알고, 섬길 줄 아는 여러분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을 예수님을 대하듯이 기쁜 마음으로 대하면서 주님을 그리워하고 애달파하는 무리들이 있다 할진 대, 그들은 절대로 지옥에 안 갑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그런 입장에서 예수님을 모셔야 합니다. 모시는 동시에 예수님을 대신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길 잃은 양입니다. 지금 우리는 영원히 살 수 있는 땅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한 번 청산해야 할 땅, 심판받아야 할 땅, 원수를 갚아야 할 땅에 살고 있으니 주인에 대한 간절한 마음이 사무쳐야 합니다.
이제 길 잃은 양으로서의 의무가 무엇이뇨? 해야 할 일이 무엇이뇨? 먹고 입고 자는 것을 초월해야 합니다. 이런 것을 다 뛰어넘어야 합니다. 내가 방황하는 것은 가야 할 길을 잃어버린 연고요, 살면서 애달픔과 공포와 초조함을 느끼는 것도 가야 할 길을 찾아야 할 운명에 놓여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주인을 잃어버린 양이 주인을 사모하는 것과 같이 여러분 역시 그러해야 합니다.
어떤 간절한 마음을 가져야 하느뇨?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 이상의 간절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 이상의 간절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타락한 이 세상에 어떠한 충신이 있다 할진대, 그 이상이 되어야 합니다. 수억천만의 충신이 있다 하더라도 그 이상 될 수 있는 간절한 마음을 갖고 사모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위신이 설 게 아닙니까? 간절한 마음에 사무쳐 먹으나 입으나, 자나 깨나, 듣거나 보는 것이 나와 하등의 관계가 없어야 합니다. 일편단심 보고 싶고 모시고 싶어야만 합니다. 주인의 발끝이라도 한번 만져 보고 싶어 해야 합니다.
마리아는 얼마나 행복했어요? 예수님의 발에다 3백 데나리온이나 되는 향유를 붓고 머리를 풀어 발을 씻겨 드렸으니 얼마나 복된 일이에요? 여러분 생각해 보았어요? 여러분은 그 이상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붙들려 할 때 예수님이 나를 붙들지 말라고 그랬습니다. 그랬어요, 안 그랬어요? 여러분은 그 이상이 되어야 해요. 여러분의 표준은 그 이상이어야 합니다.
먹는 것을 잊고 입는 것을 잊고, 자는 것을 잊어버리고 사무친 심정으로 예수님께 미쳐야 됩니다. 그래 가지고 주인을 찾아 나서야 됩니다.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됩니다. 애달픈 심정을 가지고 소리를 지르며 찾아다녀야 합니다. 끝날이 되었으니 찾아 다녀야지요. 기도하는 가운데 음성이 들려옵니다. 주인의 음성이 멀리서 들려옵니다. 그러면 그곳으로 달음질쳐야만 합니다. 다리가 찢어지든, 배가 째지든, 머리가 터지든, 옷이 찢겨지든 가야만 합니다. 그러한 길을 내 처자나 부모 때문에 가지 못한다면 안 됩니다.
본래 기독교의 길이 그런 길입니다. 기독교의 길은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고 가는 길입니다. 아까 말한 바와 같이 이 땅은 대가를 치러야 할 땅이지만, 우리는 일평생 살면서 사탄 앞에 한푼도 변상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절개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인들이 갖추어야 할 절개란 말입니다. 하나님이 6천년 동안 이 원수들한테 변상해 왔으니 동전 한푼도 변상하지 않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한 마음을 갖고, 그러한 사무친 심정을 갖고 주인의 모습을 그리워하면서 하늘을 향하여 울부짖는 하나의 교단이 있다 할진대, 다시 오시는 주님은 그 교단으로 오실 것입니다. 그 교단으로 안 오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심정이 제일 사무친 자를 찾아가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부모나 처자 혹은 그 누구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최고로 받들고 모셔야 된다는 말입니다. 누가복음 14장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처음 선포하신 말씀이 그 말씀입니다. ‘나를 따라 오려거든 너의 처자나 부모나 그 누구를 사랑하는 것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게 요즈음에 와서 변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에는 신식 예수쟁이가 많습니다. 요즈음 신식 예수쟁이들이 참 많아졌어요. 뭐가 어떻고 뭐가 어떻고 합니다. 뭐 조금 안다는 사람들이 더 그래요. 이런 믿음을 청산해야 되겠어요. 내가 죽기 전에 말입니다.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 민족, 이 세계 앞에 심정의 제단을 쌓아 나가야 할 기독교인들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런데 인정을 중심삼고 화합하는 기독교가 되느냐, 천정을 중심삼고 화합하는 기독교가 되느냐? 문제는 간단합니다. 어느 편이 참입니까? 예수님이 죽는다는 소식을 듣고 도망가는 제자가 예수님의 제자입니까? 예수님이 죽는다는 소식을 듣자 도망가는 열두 제자를 보실 때 하나님은 원통해하셨습니다.
오늘 여기에 모인 여러분들은 죽어가는 예수님의 뒷일이 두려워 도망가던 자들과 같은 모습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죽어가시던 예수님, 몰림받으시던 예수님보다 먼저 죽겠다고 할 수 있는 제자가 땅 위에 있었던들, 오늘날 기독교의 역사는 이렇게 처참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일 그때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에 죽은 제자가 있었다면 예수님의 부활과 동시에 그 제자의 부활도 있었을 거예요. 제자 부활이 있었으면 하나님의 뜻은 2천년이나 연장되어 내려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럴 게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예수님만 부활시키겠어요? 예수님만 살리겠느냐 말이에요?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의 부활과 동시에 제자의 부활을 못 본 것이 하나님의 한입니다. 그 한이 남아 있기 때문에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재림의 날을 고대하며, 사도들이 책임 못한 부활의 운명을 뚫고 나가야 할 권내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탄에게 승리하시어 부활의 권한을 갖고 나타나셨듯이 오늘날 기독교에서도 인간을 대표하여 사탄세계를 박차고 부활의 권한을 자랑할 수 있는 모습들이 나타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제까지 쌓아온 기독교는 허물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요즈음이 바로 그런 때입니다. 그래서 신령한 사람들은 그러한 사명과 책임을 부여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저 바람꾼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을 보면 심각합니다. 기독교인들은 근본문제부터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입장에 떨어진 인간이니 몰랐던 주인, 몰랐던 하나님을 알아야 됩니다. 즉 나를 창조하신 본연의 주인을 알아야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인을 알고 주인의 심정과 통할 수 있는 인연을 가진 사람이 없습니다. 타락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정과 인연맺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기와 심정의 인연을 맺은 예수님을 보내시어 만민에게 심정의 인연을 맺어 주려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 그 심정적인 내용을 소개하지 못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걸고 서로 사랑하라는 말과 신랑 신부라는 말을 남겨 놓으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들은 각성해야 합니다. 보내신 메시아를 땅에서 죽이다니요? 메시아를 죽인 자들은 멸망해야 됩니다. 메시아를 죽인 제1장본인은 누구뇨? 제1장본인은 사탄입니다. 제2장본인은 누구뇨? 교법사들입니다. 제3장본인은 누구뇨?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이러한 현상이 오늘날에 재판(再版) 되고 있습니다. 기독교를 중심삼은 세계의 역사는 그러한 입장에서 흘러나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의 역사는 되돌아가고 있습니다. 가신 주님을 모셔야 할 때가 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끝날인 이 때에 여러분 자신들이 해야 할 것은 무엇이냐? 신부 단장입니다. 신부 단장이란 무엇이냐? 예수님은 이 땅 위에 오셔서 음식을 드시되 성별하고 드셨고, 입으시되 기도하고 입으셨고, 주무시되 기도하고 주무셨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땅 위에 오셔서 드시고 입으시고 주무시는 데 있어서 참소의 조건을 회피하기 위해서 사탄과 33년 동안 싸우며 살다 가셨습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입장에서 예수님이 살다 가신 것을 분하게 여겨야 합니다.
여러분, 주님이 다시 오시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여러분은 신랑 되시는 주님이 오시면 구름 타고 하늘로 올라가고, 7년 대환난이 벌어지고, 지상세계에는 심판이 벌어지는 것으로 알고 있지요? 천만에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땅에서 모든 것이 풀려야 됩니다. 땅에서 매이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립니다. 인간이 예수님을 한스럽게 보냈으니 그것을 인간이 풀어야 됩니다.
여러분은 주님이 오시면 주님께서 성별하지 않고 입으실 옷 한 벌이라도 장만했습니까? 주님이 오시면 성별하지 않고 그냥 드셔도 하늘땅이 좋아할 수 있는 밥 한 그릇을 준비했습니까? 어느 방에 들어가시더라도 기도하지 않고 거하실 수 있는 방을 마련해 놓았습니까?
사탄에게 점령당한 곳이기에 성별하고 거하셔야 했던 예수님이었음을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책임을 다하여 성별한 거룩한 성소와 지성소, 주님이 오셔서 기도 안 하고도 마음대로 거하실 수 있는 편안한 안식처를 만들어 놓았어요? 물론 외적인 환경도 준비해야 되지만 여러분의 몸뚱이가 그렇게 준비되어 있어요? 어림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기준으로 우리를 찾아오고 계십니다.
잃어버린 양을 찾는데 어떠한 양을 찾느뇨? 잠자고 있는 양을 찾지 않습니다. 그런 양은 안 쳐다봅니다. 주인을 잃어버렸는지도 모르고 자고 있는 양은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목마르다고 아무 물이나 잔뜩 먹고 자빠져 자는 그런 양은 안 쳐다봅니다.
그래서 끝날에는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밀실에 들어가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기도를 하는데도 ‘하나님, 밥도 주고 편안한 자리에서 잘 살게 해 주십시오’라고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심정을 붙안고, 그리움에 눈물이 앞서고, 애달픈 사정과 서글픈 감정을 초월하여 주님이 오시기를 고대하기에 미쳐야 합니다.
잃어버린 사랑하는 자식을 찾기 위해 미친 부모가 있다면 하늘은 그 부모에게 벌을 주지 못합니다. 벌을 줘요? 벌을 못 줍니다. 그런 부모가 있으면 인간들은 그 부모 앞에 머리를 숙이는 것입니다. 이 땅 위에 그렇게 미친 부모가 있다면 국가도 그 부모 앞에 머리 숙여야 합니다. 천리(天理)의 원칙을 따라 심정적인 기준을 이루기 위해 미친 자가 있다면, 그를 국가적으로 모셔야 된다는 거예요.
자기 자식을 위하여,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미쳐간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께 미쳤던 사람은 몇 사람이나 있었습니까? 그런 사람이 있어야 무슨 일이 벌어집니다. 그런 사람이 있었던들,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제사장 교법사들 가운데 간절한 마음과 최고의 심정을 가진 사람이 있었던들, 하나님께서 동방 박사들에게 예수님을 증거하게 하셨겠어요?
여러분 동방 박사는 점쟁이입니다. 점쟁이란 말이에요. 예수님의 탄생이 그들에 의해 증거 된 것은 억울한 일입니다. 억울하다는 거예요. 그때에 대제사장들이 증거해야 했습니다. 대제사장들이 예물을 갖추어 놓고 거룩한 성물(聖物)을 갖다 놓고 머리를 숙여야 했던 것이에요.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했기 때문에 기독교는 이방인 종교가 됐고 제1이스라엘도 망했습니다. 그러기에 여러분들, 정신 차려야 합니다.
오늘날 이 민족이나 우리는 다 잃어버린 자들입니다. 그러나 감사해야 합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갖고 싶은 모든 것을 빼앗겨 버렸습니다. 우리가 사랑하고 싶은 것 다 빼앗겼어요. 남북이 갈라져 부모와 자식이, 남편과 아내가 흩어져 통곡하는 삼천리강산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할 거예요? 이것이 이 민족을 세계적인 하나의 제단으로 세우기 위한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라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면 억울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민족을 위한 천륜의 뜻이 없다 하더라도 낙심할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심정적으로 단결하여 세계에 있는 어떤 교단이나 교파보다도, 어떤 교단의 교주나 책임자보다도 정성을 들이는 면에 있어서나 심정적인 면에 있어서나 진실한 면에 있어서 제일인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 하나님께서 이 시대를 대표하여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이 한국 민족 가운데서 한 사람만 나오면 됩니다. 한 사람만 나와도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낙망하지 맙시다. 낙망하지 맙시다. 길을 잃은 양도 살 길이 있고 갈 길이 있거늘, 우리에게 살길이 없겠습니까? 그런데 그 길은 어떤 길이겠습니까? 하나님을 붙들고 심정으로 호소하는 참목자를 찾아가는 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어떠한 인연이 맺어져 있고 하나님과 어떠한 관계가 맺어져 있는지를 몰랐습니다. 우리는 내 마음이 클클하고 무엇인지 모르게 안식할 수 없으면 애달파하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나를 보고 나보다 몇천 만 배 더 애달파하시는 분이심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알겠어요? 이 땅 위에 하늘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자, 최선을 다하다 쓰러지는 자, 하늘을 위하여 눈물짓는 자,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던 것처럼 충성하는 자가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그보다 몇 천만 배 더한 심정으로 그에게 찾아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최소한 그 분의 모양이라도 본받겠다고 하며 움직여야 되겠습니다. 그런 사람은 은혜 받습니다. 그래야 은혜 받는 것입니다. 소문 내지 않고 심정적으로 들려주는 한마디가 단에 서서 큰 소리로 설교하는 사람의 말보다도 더 뼈 살을 녹이고, 공 같은 것이 터질 때처럼 전세포가 울리는 느낌을 주고, 마음으로부터 그에게 아니 가려야 아니 갈 수 없는 느낌을 주는 사람이 있거든 그 사람을 붙들고 놓지 말아야 됩니다. 붙들고 놓지 마십시오. 죽기 아니면 살기로 말입니다. 그러다 망하게 되면 먼저 망하고, 복을 받게 되면 먼저 복을 받습니다. 그러니 결판을 내야 하지 않아요?
우리들은 잃어버린 주인과 내가 어떠한 인연을 갖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그 주인에게 돌아가려면 어떠한 자극을 받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을 믿고 있는 우리들은 이 시대에 있어서 예수님과 같은 사람,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있는 정성을 다 기울여 기도하신 것처럼 생사를 넘어서 기도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나는 사람을 몇 번만 접촉해 보면 그 사람이 진짠지 가짠지 알 수 있습니다. 열 사람 혹은 백 사람이 문제가 아닙니다. 어떤 교파가 문제가 아닙니다.
오늘날 한국에는 42개의 교파가 있습니다. 거기서 41개의 교파는 이단입니다. 이단이에요. 길이 둘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러니 41개 교파는 이단입니다. 어느 때에 가든지 걸리게 됩니다. 이제 진리만 내세우는 교파는 지나갑니다. 진리라는 것은 대상적인 것입니다. 진리란 아직까지 먼 거리에 있고 하나가 못 되었을 때 필요한 것입니다. 길도 진리도 과정적인 것입니다. 생명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일체를 이루게 하는 것입니다. 또 말없는 가운데 크게 행할 수 있는 것이 사랑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사랑의 심정에 사무쳐 세상의 모든 것을 비웃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무엇을 준다 하더라도 이것과는 바꿀 수 없다, 어느 누가 암만 잘났다 하더라도 이것과는 바꿀 수 없다고 할 수 있는 그 무엇을 소유해야 합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예수님의 심정과 사정을 알아서 예수님을 위하여 충성을 다하고 그에게 미쳐 떠돌아다녀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있으면 본받아야 합니다. 그러한 길을 가야만 우리들은 잃어버린 아버지를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여러분을 대해 오셨지만 여러분은 그러한 하나님을 몰랐습니다. 여러분과 하나님은 어떤 관계입니까? 부자의 관계입니다. 아버지와 아들 관계요, 아버지와 딸 관계입니다.
하나님이 지금까지 소원한 것이 무엇이며, 최후의 소원은 무엇이뇨?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때는 언제이뇨? 잃어버린 자식을 다 찾은 때입니다. 그런 후에라야만 부모는 안식하시는 것입니다. 여기 모인 부모들, 그렇지 않아요? 자식을 백 명쯤 가졌다고 해 보세요. 그리고 백 명 가운데서 한 명을 잃어버렸다고 해 보세요. 그 한 명을 찾지 못하면 아흔 아홉 명의 자식이 암만 효성을 하여도 기쁘지 않은 것입니다. 기쁨을 느낄 수 없는 것이에요. 안 그래요? 이게 그 말이에요. 백 마리 양 중 한 마리가 없어졌을 때 심정의 세계에서는 기쁨이 있을 수 없습니다. 심정의 세계에서는 수(數)를 초월하고 양(量)을 초월합니다. 질적인 면에 있어서 모든 것은 평등합니다.
하나님의 한은 어디서 해원되겠느뇨? 하나님의 효자와 충신이 되는 길은 어디 있느뇨? 아버지를 위한 성전을 짓기 위해 뼈가 부러지도록 일을 하고, 허리가 부러지도록 돌을 나르고 흙짐을 지고 재목을 나르더라도 그런 것들은 때가 되면 다 사라집니다. 사랑하는 아들딸을 찾는, 잃어버린 아들딸을 찾으시는 아버지께서는 우리 인간들이 ‘아버지께서 찾으시는 아들딸이 여기 있사오니, 아버지여, 영광 받으시옵소서.’ 하는 모습들이 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우리는 잃어버린 양의 무리가 바로 우리 자신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우리들에게 하나님이 갈 길을 가르쳐 주셨다 하더라도 우리 자신들에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나만을 사랑하시는 아버지가 아니라 민족을 넘어 세계를 넘어 천주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가치적인 모든 것을 찾아 세우도록 불림 받아 세워진 자들이라는 것을 느껴서 하루속히 이 삼천만 민족 앞에 나서야 되겠습니다. 아버지가 찾아오신 길을 대신하여 찾아 나가고, 가실 길을 대신 가고, 아버지가 수고하셔야 할 것을 대신 수고하며, 모든 것을 아버지 앞에 돌리는 아들딸이 있다 할진대, 이 민족은 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들은 이제 하나님의 심정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진리가 어떻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섭리의 뜻이 어떻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에게는 중대한 사명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 앞에 피눈물이 맺히는 곡절이 있고 수많은 고난이 있다 할지라도, 그 고개를 넘어가야 할, 싸워서 헤쳐 나가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내 생명이 수백 번 제물이 된다 해도 어느 한 때에 하나님의 한을 풀어 드려야 할 책임과 사명이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가 하루를 연체(延滯)하면 그날 밤에도 쓰러지는 형제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제 하늘의 행군 나팔이 우리의 손에 들려졌고, 하늘의 승리의 방패도 우리에게 들려졌으니, 승리의 깃발을 높이 들고 민족을 향하여 행군 나팔을 불어야 되겠습니다. 그럴 때가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찾고자 하시는 것은 나를 넘어 가정이요, 가정을 넘어 사회요, 사회를 넘어 나라요, 나라를 넘어 세계요, 세계를 넘어 천주(天宙)입니다. 나보다도 더 크고 나보다도 더 높은 목적과 가치를 세우고자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나를 조건 삼아 전체와 인연을 맺기 위하여 재촉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될 때, 비록 행하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기도라도 해야 합니다. 천상(天上)에 있는 수많은 영인(靈人)들과 땅 위에 있는 수억의 인류를 붙안고 심정적으로 눈물을 뿌리는 주인공들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생사를 결단하는 순간에도 이스라엘 민족을 염려하셨습니다. 사망과 고통의 고개를 넘어야 할 후대의 그리스도 교인들을 위하여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신 그리스도의 심정을 본받아야 합니다. 만약 한국의 강토가 그때의 겟세마네 동산과 같은 강토가 된다면 이 민족은 망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심혈을 기울여 민족을 하나님 앞으로 돌이키려고 제자들을 하나님 앞으로 이끌고 나아가 하나님의 복을 같이 나누고 싶은 마음, 불타는 마음을 갖고 기도하셨으나, 어느 누구도 그의 친구가 되어 주지 않았습니다. 그를 따르던 세 제자마저 졸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민족이 불신하고 제자가 졸아도 홀로 하늘 앞에 심혈을 기울여 민족의 운명과 세계의 운명을 붙들고 눈물지으며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오늘날 그와 같은 참다운 성도의 모습이 몇 명이나 있습니까?
하나님은 그러한 자를 찾고 계십니다. 그런데 ‘비 오는 날에도 바람 부는 날에도 비바람 몰아치는 날에도 주는 끝날에 예비한 그 수를 채우시기 위해 오늘 이 시간에도 어느 산중이나 노동판이나 빈민굴을 헤매시지는 않는고. 처참한 전쟁터나 머물 수 없는 토굴 속을 헤매시지는 않는고.’ 하며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고 염려하며, 눈물짓는 무리가 어디 있느냐 말이에요. 여러분, 삼천만 이 민족은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지금은 교직자들이 피를 토하면서 눈물로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베드로와 야곱과 요한이 예수님을 돌아가시게 한 후에 자기들의 과거를 뉘우치고 울부짖었던 것과 같이 울부짖어야 할 때입니다. 그러니 우리들은 손에 손을 잡고 단합해야 됩니다. 교파가 문제 아닙니다.
심정이 통하는 하나의 기준을 세운 아들딸,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때문에 돌아가셨다는 심정에 북받쳐 올라 사회적인 모든 풍습과 형식을 넘어 ‘사랑하는 형제여, 사지를 넘어 생명의 곳에 같이 가자.’고 권유할 수 있는 산 아들딸들이 어디 있는고…. 하나님은 필시 찾고 계심에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이 6천년 동안 수고하신 목적은 그러한 아들딸을 만나는 것입니다.
주인을 잃어버린 양이 주인을 다시 만나게 될 때, 양은 그 자리에서 피곤하여 쓰러질지언정 그 주인은 그 양을 붙들고 통곡한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주인을 찾은 양은 자기의 처지를 잊어버리고 자기가 실수한 행동을 잊어버리고 쓰러질지라도, 양을 찾은 주인은 그 양이 가시밭길과 돌짝밭 길을 걸어온 것을 생각하면서 더 큰 눈물을 흘려준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목자가 참목자일 것입니다.
그러한 목자가 이 땅 위에 오셨다 가셨습니다. 이 땅은 불쌍한 땅입니다. 그 분은 모든 생명의 가치와 우주 전체의 가치, 천주의 가치를 대신하여 이 땅에 오셨던 분입니다. 심혈을 다 기울여 벌레만도 못한 내 한 생명을 찾아 주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던 분입니다. 여러분은 그 분을 비통하게 보낸 분함에 울 줄 아는 기독교인들이 되었습니까? 그러니 그렇게 한스러운 일이 또 있을까 봐 자기의 아들딸을 붙들고 너는 나와 같이 되지 말라고 나면서부터 기도해 주고 권고해 주는 그런 부모, 그런 형제, 그런 친구, 그런 무리들이 모인 교회가 하나님은 얼마나 그립겠습니까?
여러분들이 떳떳하게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다면 하나님은 걱정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참소한다는 거예요. ‘수천년 동안 내가 지배했던 당신의 아들딸 가운데는 나에게 충성을 하고 나를 위해 피를 흘린 아무개가 있다.’고 말입니다. 그러니 천상천하에 홀로 계시고, 만우주의 주인 되시는 참아버지의 심정이 어떠하겠습니까? 사탄이 ‘아무개는 하늘을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한다.’는 조건을 세워 하늘을 비웃는다는 것입니다. 하늘 을 비웃는다는 거예요. 이러한 조건을 무시하고 그 조건을 넘어설 수 있는 진정한 아들딸들이 이 땅에 나타나기 전에는 여러분이 하늘의 선한 조상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눈물을 흘리는 성도들을 몰아내오고 있습니다. 기도하는 성도들을 몰아냅니다. 그러나 ‘눈물을 흘려라. 입고 있는 옷을 적시고 발꿈치를 적시도록 흘려라. 그걸로 구할 수 있다면 샘물과 같이 흘려라.’고 할 수 있는 무리가 나와야 됩니다.
그렇게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많이 해야 하는 때가 끝날입니다. 또 눈물만이 아니라 피를 쏟으면서라도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눈물의 고개, 십자가의 고개를 넘어왔습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눈물 나는 기도를 하셨습니다. 민족을 붙안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런 기도는 사탄의 권한을 눌러 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빌라도 법정에서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할 때 ‘네 말이 옳도다.’ 하신 예수님이었습니다.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천적인 위신은 세우고 가겠다는 예수님이셨기에 골고다의 길을 늠름히 가셨습니다. 눈물과 피땀을 흘리면서 넘어가셨습니다. 피를 흘리고 땀을 흘리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은 원수가 아버지의 도성(都城)을 점령해 들어온다면, 자기 한 개체가 십자가에 죽어서라도 막아야겠다는 마음을 가지셨고, 자기 한 개체가 고임돌이 되어 하늘의 용사들이 넘어갈 수 있게 해주려는 마음을 가지셨던 것입니다. 그 후 기독교인들이 이러한 마음을 갖고 앞을 다투어 나갔을 때, 로마제국도 그들 앞에 굴복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 시대의 첨단에 서서 갖은 폭풍을 다 만나고 갖은 시험을 다 당하는 일이 있더라도, 뼈가 부서지고 살이 찢어지더라도 숨이 남아 있는 한, 죽어도 이것이요 살아도 이것이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늘이 세우고자 하는 이 민족의 4천년 역사에 빛날 수 있는 자랑스런 아들딸들이 되어 피의 제단이라도 남기고 가야겠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들에게 부여된 사명인 것입니다.
이러한 무리가 이곳 저곳, 방방곡곡에서 나와야 합니다. 황무지와 같은 이 땅 위에 하나의 생명체를 세우지 못한다면 죽음만이 있을 뿐입니다. 살고자 하는 욕망을 가진 후대의 인간들 앞에 어떤 표적이라든지, 어떤 전통적인 힘의 원천을 만들어 남겨 놓아야 할 사명이 여기 모인 우리들에게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가야 되겠습니다. 찾아가야 되겠습니다. 역사적인 눈물의 터를 박차고, 역사적인 피와 땀의 터전을 무시하고 가야 되겠습니다. 내 앞에 적수(敵手)로 나타난 사탄과 최후의 결판을 짓는 자리에서 내가 힘이 부족하여 쓰러지더라도 나를 대신하여 설 자가 있고 형제가 있고 아들딸이 있노라고 주장할 수 있는 참목자는 어디 있느뇨? 그 참목자를 찾아야 민족이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 이 민족은 망하지 않습니다. 시기적인 어떠한 차이는 있을망정, 혹은 한 때의 고통은 있을망정 심정의 원칙으로 이루어진 천정(天情)의 기준을 통한 사람이 민족을 점령했던 역사는 없었습니다.
우리는 가야 되겠습니다. ‘나의 소원은 살아생전 아버지를 모셔 놓고 아버지 앞에 승리의 산 제물과 예물을 드리고, 사탄 때문에 맺힌 아버지의 한을 풀어 드리는 것입니다. 아버지, 당신이 찾고 싶으셨던 것이 이것이 아니옵니까? 이것을 받으시옵소서.’라고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런 승리의 발판을 1대에 못 남기면 2대(二代), 3대(三代)에 걸쳐서라도 필시 남기겠다는 결심을 하고, 천상 앞에 약속이라도 세워 놓고 가야 되겠습니다. 이런 사명이 우리에게 있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가야 되겠습니다. 주가 눈물을 흘리던 그곳으로 우리는 가야 되겠습니다. 주가 피땀을 흘리던 그곳으로 가야 되겠습니다. 그 과정을 거치지 않는 한 그 영광이 우리에게 허락되어도 그것은 도리어 고통이 되는 것입니다. 한술의 밥을 먹을 때 가슴을 치고, 한 벌의 옷을 입을 때 몸 둘 바를 몰라 하는 성도, 주님을 모실 준비를 하는 무리가 하늘은 그립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들은 알았습니다. 무엇을 알았느냐? 하나님의 심정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사정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소원을 알았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가 천상천하에 어떠한 위치에 놓여 있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나 자신이 어떠한 가치적인 존재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이만하면 늠름하다는 겁니다. 이만하면 아버지 앞에 나설 수 있습니다. 이런 나를 아버지께서 바라고 고대하시고 계시거늘, 갖춘 바가 없다고 탄식하지 맙시다.
말을 잘하는 것으로만 세계를 움직이는 것도 아니요, 어떠한 진리로 만사가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슬픔과 피눈물의 골짜기에서 썩어짐을 당하더라도 그 민족의 장래에는 새로운 서광이 비치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것은 천상에서나 지상에서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민족을 위하여 먹어야 되겠고 민족을 위하여 입어야 되겠습니다. 민족을 위하여 살아야 되겠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세계를 위하여 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빚지고 빚진 자들입니다. 갚고 갚아도, 밑천을 다 털어서 갚아도, 자기의 뼈 살을 다 살라 갚아도 1대(一代)로는 청산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빚을 진 자들입니다. 우리는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져 가는 살인강도를 대해 그가 내 형제라 해도 부족함이 없을 만한 죄인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에는 수천 수만인을 죽인 것과 같은 범죄의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것입니다.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하시고 싶은 말씀을 다 못 하시고 아픈 가슴을 억누르면서 세상을 위해 눈물을 흘리다 가셨습니다. 그러기에 채찍을 맞아도 부족하고 탕감을 받아도 부족한 우리입니다.
여러분들은 불쌍한 한 생명을 붙들고 통곡해 보았습니까? 거리에서 짐을 지고 가는 지게꾼을 붙들고 ‘형제여, 그대의 생명이 어디 있느냐?’고 통곡해 보았습니까? 빈민굴에서 입을 것을 제대로 입지 못하고 먹을 것을 제대로 먹지 못해 쓰러져 있는 사람을 위해 눈물을 흘려 보았습니까?
우리의 주, 우리의 아버지는 눈물의 왕자요 눈물의 아버지입니다. 고통의 왕자요 고통의 아버지입니다. 아버지의 가슴속에는 인간이 말하는 행복의 요소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 것은 하나도 못 가지신 분입니다. 왜? 잃어버린 아들딸을 찾지 못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제는 개인을 위하여 울 때는 지나갔습니다. 나를 낳아 준 향토를 붙들고 울어야 되겠습니다. 예수께서 복음을 전하실 때도 잃어버린 이스라엘에 가서 전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요셉가정을 원망하지 않고 마리아를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들을 불쌍히 여겨 구하려 하셨습니다. 그들을 구하는데 자기가 직접 가서 구원하는 것보다도 제자들을 통해 구원하기를 바라셨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제 우리들이 이 민족을 대하여 경고를 하지 않으면 안 될 때에 들어왔습니다. 하고 싶은 말을 다 해야 할 때가 온 것입니다. 하고픈 일을 다 할 수 있을 때가 왔습니다.
이제 우리들은 하늘의 심정에 연결될 수 있는 길을 가야 되겠습니다. 피땀을 흘리며 최후의 고개를 넘어가야 되겠습니다. 가다가 쓰러지는 한이 있을지라도 그 자리에서 아버지를 찾고 있는 아들딸이 없느냐고 염려하면서 쓰러질 수 있는 무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될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토굴에 가서라도 아버지를 찾고 있는 아들딸이 이 굴 가운데 없느냐고 외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이 어디에서 허덕이고 있지는 않은가 하면서 아버지 대신 눈물을 짓는 자가 있다면, 하나님도 필시 그를 모른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 남이 아니라 하는 길을 찾아 들어온 우리는 참아야 합니다. 여기서 외치는 사람도 감정이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참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6천년 동안 가라지와 곡식을 한 밭에 두고도 분함을 참았듯이 나도 그렇게 참고 견디어 나왔습니다. 1년을 참고, 2년을 참고, 10년을 참고, 20년을 참았습니다. 이제 40년만 두고 보십시오.
여러분은 어느 한날 사탄 앞에 제물이 될까봐 염려하는 마음을 갖고 남겨진 사망의 길을 개척해야 되겠습니다. 복귀의 이 노정을 누가 개척하겠습니까? 이 민족의 운명을 누가 책임지겠습니까? 다 바라만 보고 있습니다. 이 가슴에 북받쳐 오르는 피맺힌 심정과 고동치는 심장의 맥박이 다하기 전, 이 생명이 다하기 전에 우리가 한번 해봐야 되겠습니다.
지금까지 어떠한 뜻도 그 시대에 다 이룬 역사는 없었습니다. 어떠한 주의나 사상도 그 시대에 영광의 자리에 섰던 것은 없었습니다. 그 주의나 사상을 주장한 사람이 죽어간 후에, 천 년이나 2천 년이 지난 후에 영광의 자리에 섰던 것입니다. 예수님도 갈보리 산상에서 반역의 무리들에게 몰려 십자가에 처량하게 돌아가신 분이지만, 오늘날엔 세계적인 인물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될 줄 그때 누가 알았습니까?
그러면 예수님이 남기고 가신 것이 무엇이냐? 피와 땀과 그리고 심정입니다, 심정. 하나님은 심정의 동산, 평화의 동산을 그리워하셨습니다. 자유의 동산, 행복의 동산을 꿈꾸셨던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 앞에 우리는 막대한 타격을 준 불효자요, 배반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우리들이 살 수 있고 환영받을 수 있는 은사를 허락하심에 항상 황공한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주 앞에 가면 갈수록 몸이 떨리고, 주의 사정을 체휼하면 체휼할수록 몸 둘 바를 몰라 고개를 들 수 없는 죄인과 같은 느낌을 느껴야 됩니다. 이러한 자들이 먼저 하늘의 세움을 받아 들어가는 곳이 바로 천국인 것입니다.
그들은 알면서도 모르는 자요, 갖고 있으면서도 없는 자입니다. 모든 것을 갖추고 있되 아무것도 없는 자입니다. 마치 어린아이와 같이 가문이 있어도 모르고 부모가 있어도 모르는 자입니다. 단 하나 간절한 마음이 있다면 주의 품에 안기고 싶은 마음, 그것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러한 마음만 갖고, 어떠한 자리에서도 아버지로부터 끊기거나 떨어지지 않겠다는 마음만 갖고 나간다면 아버지의 품에 품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십자가에 달리더라도 그러한 마음을 지니겠다는 사람은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통곡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 내가 여러분을 만나기 위하여 지금까지 뜻길을 걸어왔지만, 현재 인간들의 사정과 상반된 입장과 현재 인간들의 심정과 상반된 입장에 있다는 비판을 받아 왔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그들이 나를 알 때가 올 것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야 할 통일의 용사들입니다. 통일의 용사란 어떤 사람이냐? 땅에서 눈물을 많이 흘리고 가는 사람, 땀을 많이 흘리고 가는 사람입니다. 목적관과 우주관과 세계관을 잃고서 방황하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혼돈된 세상을 바로잡기 위한 철저한 정신과 철저한 의식과 철저한 가치관과 철저한 목적관을 가지고 가는 사람입니다. 피눈물을 흘리면서도 이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이 민족을 대신하여 눈물을 흘리고 피를 흘려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이 민족이 눈물을 흘리고 있고 피땀을 흘리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이 민족과 함께 피와 땀과 눈물을 흘려야 되겠습니다. 울어도 이 민족과 같이 울고, 죽어도 이 민족과 같이 죽고, 살아도 이 민족과 같이 살아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천적인 운명에 놓여 있다는 것은 무시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야 되겠습니다. 죽더라도 그런 마음을 가지고 죽어야겠습니다. 사탄과 싸워야겠습니다. 그리하여 ‘아버지여, 제가 사탄과 싸워 승리했습니다.’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천상에 가서도 사탄을 굴복시켜 심판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기준을 갖고 가야 되겠습니다.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고 싶은 사람들은 이 길을 따라오지 마십시오. 우리가 가는 길은 지옥의 밑창을 뚫는 길입니다. 자기 자식이 더 사랑스러우면 자식과 잘 사십시오. 자기 처가 더 사랑스러우면 처와 잘 살아요. 자기 부모가 더 귀하다고 느껴지면 부모와 잘 사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에게 배상과 보상을 요구할 수 있는 입장에 계시지만 우리에게 어떠한 배상이나 보상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 앞에 충신의 절개와 효자의 절개와 열녀의 절개를 가져야 되겠습니다. 그런 절개를 품고 출발하였으면 쓰러져 죽는 한이 있더라도 가야만 합니다. 우리는 잃어버린 본연의 아버지를 찾아 나아가는 데 총진군해야 되겠습니다.
아버님, 땅 위에는 많은 사람이 살고 있사옵고 많은 민족이 살고 있되, 당신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몰림받는 무리를 중심삼고 역사는 흘러 나왔고, 세계는 창조되어 나왔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이제 다시 돌아가야 할 운명에 처한 저희들, 길을 잃어버린 저희들은 부모의 무릎을 찾아, 형제의 인연을 찾아, 백성의 인연을 찾아 다시 아버지와 부자의 인연을 맺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하나님의 한을 풀어 드리고, 예수님의 한을 풀어 드리고, 역사의 한을 푸는 최후의 한 날까지 참고 나아가는 저희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고 원하옵니다.
오늘 허락하신 모든 은사로 말미암아 저희들에게 아버지와의 생명적인 약속과 생명적인 기약을 세워 주시옵고, 저희들이 철천지원수 사탄 앞에 조롱받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아버지, 저희들은 남은 생애 동안 어떠한 환경이라도 아버지와 같이 갈 것을 마음으로 맹세한 무리이옵니다. 여기에 모인 당신의 자녀들을 굽어 살피시사 장중에 쥐신 바에는 한 생명도 놓지 마시옵고, 허락하신 그곳, 축복하신 그 자리까지 한 생명도 떨어지지 않고 각오하고 맹세한 바를 다 이루어 하늘 앞에 갈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단에 섰사오니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저희들은 여기에서 하나님의 심정을 품고 왔던 예수 그리스도의 성상을 배우고 닮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아옵니다. 성경 말씀을 보니 말씀과 더불어 이 땅 위에 사시던 예수께서는 과연 불쌍한 생애노정을 걸어 가셨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온 인류가 의지해야 할 천적인 인연을 갖고 오신, 이 땅을 책임진 분이었기에 그가 단 하나 이 땅 위에 세우고 싶었던 것은 아버지의 심정뿐이었음을 저희들은 알았사옵니다. 그가 눈물지으신 것도 하늘 아버지의 심정을 대신한 것이었고, 그가 굶주리는 자리에 처한 것도 자기 일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위한 것이었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생애 최후의 한 시간을 바라보면서 비장한 각오와 더불어 불타오르는 심정을 갖고 나선 예수님의 발걸음이 겟세마네 동산에 머물게 될 때, 천지는 서러움에 잠기고 하찮은 미물까지도 예수의 심정을 헤아리는 비장한 자리에 있었으나, 책임을 다하여 만물의 주인공이 되어야 할 인간들은 예수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해 같이 서러워하지 못한 사실을 아옵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품고 왔던 메시아를 그 같이 대접하여 천적인 인연을 끊어 버린 억울한 사실을 저희들, 이 시간 다시 한번 상기하여 2천년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잠을 자던 제자들의 모습을 회상하는 동시에 저희들 자신이 그와 같은 자리에 선다면 과연 어떠한 모습들이 되겠는가를 생각하여 새로운 각오와 결심을 할 수 있도록 특별한 은사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그 은사가 저희들의 심정 깊이 깊이에 머물게 하여 주시옵기를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시간 무슨 말씀을 하든지 아버지께서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고 심정 심정이 통하고 마음 마음이 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의 목적을 향하여 움직이는 과정적인 입장에 있는 저희들이 하나의 인연과 하나의 목적을 향하여 심정을 움직일 수 있게 하여 주시옵고 말씀 말씀을 통하여 아버지의 심정 앞에 새로운 각오와 새로운 결심을 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전하는 자의 마음이나 대하는 자의 마음이 하나되게 하여 주시고 아버님의 뜻으로만 움직이시옵소서. 이 시간에도 외로이 무릎을 꿇고 아버지 앞에 경배하는 수많은 당신의 아들딸들과도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일률적인 축복의 손길을 그들에게도 펼쳐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오며, 이 시간 맡기오니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였사옵나이다. 아멘.
<말 씀> 오늘은 ‘답답하고 민망하신 예수’라는 제목을 가지고 말씀 드리겠습니다.
땅 위에 살고 있는 사람 가운데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하는 것을 정확하게 알지는 못하지만, 마음으로는 누구나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신앙자들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확실하게 믿고 있습니다. 온 만물은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되었고, 인류 전체의 역사는 하나님의 경륜에 의하여 어떠한 목적의 세계를 향하여 움직여 나아간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인류와, 더 나아가서는 나와 직접적인 인연을 맺고 계신 것으로 믿고 있으며, 지금까지 항상 기쁨의 자리에 계신 줄로 알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심정에는 아무런 고통도, 근심도, 슬픔도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타락한 그날부터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대하여 한을 품고 계십니다. 진정한 사랑의 심정을 가진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지으신 창조이념과 그 이념을 통하여 바라보고 경륜하셨던 그 원칙과 이념을 포기하실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을 대하여 한을 품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람 지은 것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셨습니다.
인류역사가 행복으로 시작하였느냐 불행으로 시작하였느냐 할 때에 행복으로 시작하였다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증명된 사실입니다. 더욱이나 우리들 개체에 육체적인 고충과 정신적인 고충이 있는 것을 볼 때에 우리 인간 조상이 행복의 길을 출발한 것이 아니라 불행의 길을 출발하였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인간들은 자신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처하는 그들이 기쁜 모습으로 만물의 영장이 되어 있느냐 할 때에 어느 누구도 그렇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위하여 지으신 만물이 인간의 주관을 받게 될 때 그들의 소원이 있다면 그게 무엇일 것인가? 즉 만물은 어떠한 주인공을 맞고 싶어할 것인가? 무한히 행복스럽고 무한히 자유스럽고 무한히 영광스런 모습을 갖춘 주인공을 맞고 싶을 것입니다. 만물은 인간이 자기들을 품어줄 수 있는 그러한 주인공으로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땅 위에 살고 있는 인간들은 애당초부터 행복이라는 명사나 자유나 평화라는 명사가 아닌 불행이라는 명사를 중심삼고 출발한 인간들입니다. 그런 연고로 제아무리 호언장담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만물 앞에 나타날 때에는 부끄러운 모습인 것을 자증(自證)해야 할 한스러운 입장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먼저 우리는, 하나님이 만물을 대표하여 우리를 내세우려 하셨던 천륜 앞에 설 수 없는 부끄러운 자들이요, 나아가서는 심정적으로 우리와 인연을 맺어서 온 피조만물 앞에 내세워 자랑하고 싶어하시는 하나님의 간곡한 마음이 있음에 틀림없거늘, 그 아버지의 심정적인 인연 앞에도 설 수 없는 부끄러운 자들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불행으로 출발한 인간이기에 불행으로 종결되어야 할 인간이지만, 이러한 인간을 붙들고 행복의 곳으로 이끄셔야 할 하나님은 행복할 리가 만무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수천년 동안 인류를 이와 같은 불행한 자리에서 이끌어 내지 못하고 계시는 하나님은 무한한 고통을 느끼시는 것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어떤 개인이 느끼는 불행, 혹은 고통이나 슬픔은 개인적인 불행이요, 개인적인 슬픔입니다. 이러한 인간들을 하나님은 오랜 역사를 통해 행복의 동산으로 이끌어 오셨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 목적을 다 이루지 못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고통의 자리에서 이끌어 내지 않는 한 인간이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것은 필연적인 사실입니다. 이와 같은 책임을 지신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은 어느 누구보다도 불행을 더욱 뼈저리게 느끼시는 분이고, 어느 누구보다도 더 고통과 슬픔을 뼈저리게 당하시는 분이며 그 사정을 벗어나지 못하고 계시는 분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지금까지 도의 길을 찾아 나오고,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나온 사람 가운 데 많은 사람들은 고통이 있을 적마다 ‘하나님, 이 고통을 받으시옵소서.’라고 호소했습니다. 슬픔이 있을 적마다 하늘 앞에 ‘이 슬픔을 당신이 맡아 주관하시고 나를 평안한 자리로 옮겨 주시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지금까지 많은 종교인들이 이렇게 해 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입장에 계시는 하나님이라 할진대 하나님은 참으로 불쌍하신 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불쌍한 사정과 불쌍한 심정과 불쌍한 마음을 갖고 계시되, 타락한 인간 앞에 자신의 불쌍한 모습을 보이고 싶어하시지 않는 하나님이요, 타락한 인간들 앞에 당신의 한스러움을 나타내고 싶어하시지 않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왜냐? 이 세상을 사탄이 주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탄 앞에 당신의 처참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날까지 사탄의 주권 내에 있는 수많은 인류 앞에 당신의 고통과 처참한 사정을 나타내지 않으신 채 섭리해 오고 계십니다. 이것은 우리가 미루어서도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제 여러분이 간곡한 소망이 있어서 아버지 앞에 기도할 때에 알아야 할 것은, 이같이 고통스럽고 처참한 입장에 계시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또 어떠한 소원이 있어서 뜻을 따라 나가게 될 때에도 이러한 하늘 앞에서 자신이 뜻을 책임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여야 되겠습니다.
만일 과거 역사노정에 왔다 갔던 수많은 선지선열들 중에 이러한 하나님 앞에 자기가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짊어진 책임과 사명을 감당하겠다는 의무감에 불타서 민족을 향하여 외친 자가 있었다 할진대, 그는 민족이 자신을 배반하고 자신을 모함한다 하더라도 하늘을 배반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과거에 왔다 갔던 선지자들은 때와 시기를 잊어버리고 하늘을 배반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러한 동기와 원인이 어디 있느뇨? 하나님은 언제나 기쁜 자리에 계시고, 우리의 소원을 전부 이루어 주어야 할 자리에 계신다고 생각한 데 있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선지자들이 하늘을 배반하고 하늘 길을 역행(逆行)해 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선조들이 하늘이 자신보다 더 불쌍하고, 자신보다 더 억울하고, 자신보다 더 외롭고, 자신보다 더 고통스러운 자리에 계신다는 것을 알았던들, 그런 심정을 가지고 생활의 분위기를 잡고 생활적인 감정을 주관해 나왔던들, 배반이나 배척이란 단어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과거에 왔다 갔던 선지자들은 그러한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항상 행복과 평안의 근원자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역사적인 오점을 남긴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통하여 우리들은 다시 한번 하나님의 심정을 헤아려 보아야 되겠습니다.
오늘 여기 모인 우리들은 하나님의 사정을 말하여 왔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말하여 왔습니다. 또한 우리들은 하나님의 뜻이 어떻고, 하나님의 사정이 어떻고, 나아가 하나님의 심정이 어떻다는 것을 배워서 알고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심정을 몰랐고, 하나님의 사정을 몰랐던 선조들 앞에 항의해야 할 때는 왔습니다. 하나님의 사정을 알고 난 우리들은 하나님과는 반대의 길을 가고 있는 땅 위의 인류 앞에 새로운 봉화를 들고 나서야겠다는 의무감에 불타야 하겠습니다.
이제 역사적인 전체의 노정을 책임지고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다시 한번 회상하여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민을 구원하기 위하여 당신의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실 때, 어찌하여 유대나라의 왕실이나 대제사장의 집에 보내지 않으셨는가? 뜻으로 볼 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그러한 자리에 세우고자 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런 환경 가운데 세우시지 않았던고? 예수님이 만민을 구원하는 구세주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이 땅 위에 세워야 할 그 무엇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슬픔을 인간들에게 소개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사명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외로움과 곡절을 품고 이 땅에 오셔서 4천년 동안 인간들에게 통고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외로움과 곡절을 만민 앞에 통고해 주기 위해 오셨던 분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여 메시아를 보내마고 약속을 하시고 메시아를 보내기 위하여 4천년 동안 수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어 준비하게 하신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심정을 갖고 오실 때 그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놓기 위함이요, 나아가서는 예수님이 그런 심정을 중심삼고 살 때에 같은 심정으로 의논하고 같은 심정으로 하나님을 위하여 싸울 수 있는 무리들을 찾아 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예수님이 땅에 오셨을 때 예수님의 사정을 통하고 예수님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무리가 있었느냐 하면,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정성을 들이는 제사장이 있었습니까? 진정한 이스라엘 백성이 있었습니까?
천적인 심정을 그 마음에 품으면 품을수록, 세상의 모든 사리를 헤아리면 헤아릴수록, 천륜을 자기 일신에 지니고 있다는 책임감을 느끼면 느낄수록, 예수님의 시선과 감촉 속에는 하나님을 대신해야 한다는 심정에 사무쳤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택한 이스라엘 민족에게도 당신의 심정이 어떻다는 것을 통고하지 못하신 하나님께서 4천년 만에 당신의 심정을 통고할 수 있는 하나의 대표자를 보내셨으니, 그 분이 바로 메시아이신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메시아를 고대하던 이스라엘 민족은 그 예수님 앞에 가서 예수님이여, 당신께서 마음 깊이 체휼한 하나님의 심정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정이 무엇이며,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하며 거족적으로 호소하고 요구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예수님을 반대하기를 일삼았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세우시고 4천년 동안 수고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지도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보내셨고, 믿을 수 없는 이스라엘 민족이지만 믿어 주려는 마음을 갖고 예수님을 보내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스라엘 민족이었고 하나님 앞에 충성한다는 이스라엘 민족이었으나, 하나님께서 믿을 만한 민족이 되지 못하셨습니다. 이 한이 오늘날 우리들에게까지 미친 것을 우리는 절통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심정과 사정을 품고 오신 예수님이었지만, 그는 태어난 그날부터 하늘의 심정과 사정을 말하고 그 뜻을 이룰 수 있는 환경을 가지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붙안고 자유스러운 자리에서 당신의 사정과 심정이 어떠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자유스러운 자리에서 만천하 앞에 인간을 내세워 축복하고 싶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소원이었습니다. 그러나 4천년 동안 이스라엘 민족을 택해 섭리해 나오신 하나님은 어느 한때에 자유스럽게 그 민족 앞에 나타나시어 행사해 본 적이 없고, 자유스럽게 하늘의 모든 비밀을 얘기해 본 적이 없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생각해 볼 때, 하나님은 인간에 대하여 무수한 곡절이 있었으나 하나에서부터 열까지의 모든 곡절을 말하지 못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4천년 동안 구원섭리를 해오신 하나님의 슬픔을, 모든 역사적인 서러움을 해원하시고자 예수님을 보내셨던 것입니다. 인간들이 하늘을 배반하고, 하늘을 저버렸던 모든 슬픔의 곡절을 예수님 한 분을 통해 풀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민족 앞에 하늘의 사정을 털어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입장에 섰었던들 이스라엘 민족은 세계를 유리(流離)하는 민족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홀로 천적인 전체의 인연을 품고 땅 위에 오셔서 하나의 관계를 맺어 놓아야 했던 예수님의 30여 년의 생애는 비장한 생애였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철두철미하게 비장하였습니다. 하늘을 향한 그의 심정은 때와 시기가 지날수록 두터워졌고, 땅의 일과 하늘의 일을 헤아리면 헤아릴수록 한 순간도 하나님의 심정을 잊어버릴 수 없었고, 한 순간도 아버지의 사정과 뜻을 잊어버릴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이 땅 위에 오셔서 자유롭게 행동한 적이 있었습니까?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야.’ 하고 말한 적이 있었습니까? 요셉의 가정에서도 그는 자유로운 생활을 못 하였습니다. 행복한 생활을 못 하였습니다.
기쁨의 생활을 못 하였습니다. 환경이 그러하고, 대하는 사람들이 그러하고, 국가적인 사정이 그러했기 때문에 예수님 자신도 마음으로는 무한히 자유스럽고 싶고, 무한한 영광과 은사의 자리에서 만민을 거느리고 하나님 앞에 경배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신한 참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이었지만 그도 인간인 연고로 슬픔을 알았고, 외로움을 알았고, 고통을 느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빼놓으면 예수님에게도 인간의 감정과 인간의 소망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한 분을 모신 그날부터 자기의 뜻과 자기의 느낌, 그리고 자기의 모든 환경을 개의치 않고, 세상 사람들이야 뭐라고 하든 자신이 짊어진 책임과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사정과 하나님의 심정을 붙들고 일생을 바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비장한 각오를 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예수님의 모습을 하나님이 보실 때 하나님의 심정이 어떠셨겠습니까? 무한히 불쌍한 예수였음을 여러분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뜻을 성취하기 위하여 이 땅 위에 오신 예수님은 민족 앞에 나타날 때 비장한 각오를 했습니다. 이미 일단 출발한 후에는 일보의 후퇴도 없다는, 죽음의 길이 가로막히는 한이 있다 할지라도 물러설 수 없다는 비장한 각오를 했습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나섰던 것입니다.
오늘 본 성경 말씀 가운데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굶주렸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만민의 구주요, 4천년 동안 선민이 바라던 소원의 실체요, 천적인 사정과 천적인 심정을 품고 오신 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분이 기뻐하지 않는 한 땅 위의 어떠한 존재도 기뻐할 수 없고, 그 분이 행복하지 않는 한 땅 위의 어느 누구도 행복할 수 없고, 그 분이 영광을 받기 전에는 땅 위의 어느 누구도 영광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대의 사람들은 그 분이 기뻐하기 전에 기쁘기를 원했고 그 분이 영광을 받기 전에 영광의 자리에서 즐기기를 고대하였습니다. 예수님이 권세를 갖고 호령하기 전에 시대를 움직여 나오던 주권자들이 그 분 앞에서 호령하였다는 것입니다.
하늘은 참다운 자유의 한 날을 찾기 위하여 나오고 있습니다. 참다운 한 사람을 세워 자랑하기 위해 나오고 있습니다. 참다운 한 분을 세워 역사가 생긴 이후 제일의 영광을 받을 수 있는 모습으로 만들기 위하여 나오고 있습니다. 참다운 한 분을 세워 만우주를 주관하게 하기 위하여 나오고 있습니다. 그래야 될 게 아니에요?
그 분이 주권을 행사하기 전에 먼저 행사하는 자는 전부 역적입니다. 그분이 기뻐하기 전에 먼저 영광의 자리에 서는 자는 하늘로부터 어느 때든지 맞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유와 평화와 행복과 이상은 하늘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악한 사탄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선한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원칙입니다.
예수님이 심정으로 그리워하고 소원한 것이 있다 할진대 그것이 무엇일 것인고? 하나님을 중심삼은 자유를 그리워하고 소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중심삼은 행복, 하나님을 중심삼은 평화, 하나님을 중심삼은 주권의 세계를 소망하셨던 것입니다. 그럴 게 아니에요?
그런데 역사가 시작된 그날부터 오늘날까지 수천년 역사는 경과하였으나, 하나님이 보시고 ‘오냐, 너는 자유의 왕임에 틀림없다. 너는 내 자유의 이념을 갖고 살기에 합당한 자요, 행복과 선의 이념을 중심삼고 살기에 합당한 자요, 온천주가 기뻐할 수 있는 자다.’ 하시며 기쁘게 내세울 수 있는 역사적인 인물이 있었어요?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소원이 있다면 그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어 드릴 수 있는 하나의 주인공, 하나님의 사정이 있다면 그 하나님의 사정을 대신할 수 있는 하나의 주인공, 하나님의 심정이 있다면 그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할 수 있는 하나의 주인공이 천지간에 나타나지 않는 한 인간들은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주인공이 나타나지 않으면 설령 행복하다 해도 그것은 하나님이 인정할 수 있는 행복이 아니요, 이 땅이 평화스러운 것같이 보여도 그것은 하나님이 인정할 수 있는 진정한 평화가 아닌 것입니다.
누가 이러한 것을 알았느뇨? 메시아를 고대하던 이스라엘 민족이 알았느냐? 아닙니다. 메시아를 맞기 위해 준비하던 대제사장도 몰랐고 유대인들을 지도해 나오던 교법사도 몰랐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안 분은 오직 예수님, 예수님 한 분뿐이었습니다. 오직 메시아뿐이었어요, 메시아.
그러면 우리가 느껴야 할 본연의 자유와 소망과 사정과 심정은 어떠한 것이냐? 이것을 알기 위하여 우리는 성경을 연구해 보아야 됩니다. 이것을 알기 전에는 예수님의 인격관과 예수님의 생활 감정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세우려 하시던 소망과 하나님이 세우려 하시던 심정은 어디로 갔는고? 오늘날 기독교는 수많은 성도가 있다고 자랑하지만 전세계 기독교인들이 이제 알아야 할 것은 아직까지 이 땅은 평화의 세계를 개척해 나가는 과정에 있지, 하늘땅이 공인할 수 있는 평화로운 곳이 되지 못했고, 한 분을 맞이하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 아무리 주의나 사상이 많다 하더라도 그것들은 과정에서 지팡이의 사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들은 하나님께도 고통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도 인간 이상의 슬픔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등에 지고 인류를 이끌고 나오신 것을 알았습니다. 그 하나님도 당신이 자유로울 수 있는 한 날을 틀림없이 고대하고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 당신이 행복의 동산에서 만민을 거느리고 싶으실 것은 불문가지(不問可知)입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 당신의 소원과 사정과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자유의 동산을 그리워하심이 틀림없거늘, 하나님을 따르는 무리들도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땅을 찾아 내려오고 인간은 하나님을 찾아 올라갑니다. 이것을 연결시키기 위하여 하늘을 대신하고 인간을 대표하여 오신 분이 메시아입니다. 구주예요, 구주.
만일 역사노정에 그러한 분이 나오시지 않았다면 복귀역사는 아직 멀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고맙게도 때와 시기는 지나갔을망정 지금부터 2천년 전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땅 위의 인간을 대표한 아들로서 땅에 오셨던 것입니다. 참으로 고마운 일입니다. 그 분의 가슴에는 평화의 세계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 분의 마음에는 자유의 이념이 싹터 있었을 것입니다. 그 분은 만인간의 사정을 전부 풀 수 있는 내용과 하나님의 심정과 통할 수 있는 인연적인 무엇을 가졌음에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왔다 간 이후 하나님이 부르시는 자유를 구가하는 기쁨의 노래 소리를 들어 보았어요? 예수님이 기뻐서 춤췄다는 말을 들어 보았어요? 예수님이 ‘하늘이여, 땅이여, 만물이여, 나와 더불어 기뻐하옵소서.’ 해보셨습니까? 옛날 다윗왕이나 솔로몬왕과 같은 분들은 영광의 자리에 서게 될 때 시를 읊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에게 시정(詩情)이 없었던 것도 아니요, 감정이 없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 분이 노래를 부른다면 슬픈 노래를 불러야 했고, 말을 한다면 슬픈 말을 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불쌍한 메시아였습니까? 안 그래요?
복음 전파의 사명을 띠고 나선 걸음으로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서 상을 뒤집어엎으신 예수님입니다. 좋아서 그랬겠어요? 만일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님을 믿었더라면, 그리하여 예수님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자유의 이념을 개방시켰더라면 오늘날 이 땅이 이렇게는 안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최고의 이상주의자였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최고의 이념주의자였던 것입니다. 무슨 주의니 무슨 사상이니 하는 것을 다 합해도 예수님의 주의와 사상을 넘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그 분이 기뻐했더라면 그 주의와 사상을 통하는 자 전부가 기뻐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면서부터 슬픈 분이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의 옷이 남루하였다니 웬 말입니까? 예수님께 이스라엘 민족의 어느 누가 먹는 음식보다 더 좋은 최고의 음식을 드렸던들, 4천년 동안 영광과 영화를 누리고 간 수많은 국왕들보다 더한 영광을 누리게 했던들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벌을 주시겠습니까?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어느 누구도 갖지 못한 이념을 갖고 오셨습니다. 어느 누구도 갖지 못한 심정과 사정을 갖고 오셨습니다. 인간의 사정과 인간의 심정과 인간의 이념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심정과 하나님의 사정과 하나님의 소원까지 갖고 오셨습니다. 이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예수님은 오셔서 기도하셨습니다. 여러분, 성경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우셨습니다. 홀로 외로운 자리를 찾아 들어가 우셨습니다. 예수님이 외로울 때 찾아가신 곳은 고요한 산중이었습니다. 만일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과 하나가 되었더라면 그날부터 예수님은 하고 싶은 일을 하셨을 것입니다. 계획과 실천 방법까지 다 갖고 계신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계획을 실천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기억하여야 되겠습니다. 민족을 장중(掌中)에 넣고, 민족을 앞장세워 세계 개척을 위하여 새로운 행군을 해야 할 하늘이 보내신 메시아가 그렇게도 불쌍하였던 것입니다.
오늘날 믿는 사람들은 죽기 위해 오신 예수님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아니에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을 말하고, 하나님의 사정을 말하고, 민족의 운명을 말하고, 민족의 갈 길을 지도하러 오신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민족 전부가 배척하였습니다. 그랬어요, 안 그랬어요? 전부 배척했던 것입니다. 이 고을에 가도 배척당했고, 저 마을에 가도 배척당했습니다. 만민을 위해 오신 구주의 모습이 이러했던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옷을 입는 데도 여러분 이상 입지 못했고 먹는 데도 우리 이상 먹지 못했다는 거예요.
3년 공생애의 길을 나서는 예수님은 비장한 각오를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영광의 길이 아닌 고난의 길이 자기 앞에 놓여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무한한 영광과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자리에 보내졌으나 영광과는 반대의 자리로 가야 할 것을 느낀 예수였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마음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영광의 심정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수습하려 하셨으나, 하나님의 자유와 하나님의 이념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을 수습하여 이스라엘을 하나님 품에 안겨 주려 하셨습니다. 그런 마음을 갖고 나섰으나 민족이 배척하니 반대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영광의 길이 아닌 십자가의 길을 가야 했던 예수님이었습니다. 평지로 가야 할 예수님이 길도 없는 험한 태산준령을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4천년 동안 하나님이 닦아 놓은 길, 이스라엘이 닦아 놓은 길은 없어졌습니다. 하나님이 택한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내모니 예수님은 어디로 갔어요? 어디로 갔어요? 가면 몰리고 가면 쫓기니 죽음을 각오하고 겟세마네 동산을 넘어 갈보리 산정으로 가야 했던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자유와 평화의 심정을 갖고 통치하여야 할 예수님이 몰리고 쫓기는 불쌍한 처지에 놓이게 되니 그런 이념을 말할 수 있었겠습니까? 할 수 없었습니다.
메시아가 모든 사람들이 정성어린 마음으로 드리는 음식을 먹고 살아도 하늘은 부족하다고 느끼실 텐데 메시아에게 배고픔이 웬 말입니까? 배고팠던 예수님이었음을 알아야 됩니다. 복음의 깃발을 들고 나선 예수님께도 우리처럼 먹고 싶은 마음, 입고 싶은 마음, 평안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니 40일 금식쯤이야 문제없었겠지.’ 하지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메시아도 밥을 안 먹으면 배고픈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배고픈 기색을 나타내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래야 했느냐? 여러분은 타락한 후손이니 금식을 아무렇게나 해도 섭리에 영향을 주지 않겠지만, 예수님께는 하나님의 위신이 있기에 아무렇게나 할 수 없었습니다. 4천년 인류역사를 대신한 만왕의 왕, 하늘의 황태자, 하늘의 독생자로 오신 예수님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위신이 있었다는 거예요.
자신이 아무리 남루한 옷을 입고 있어도 ‘아버지 참으시옵소서.’ 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이러한 길을 가셨거늘 내 어찌 안 걸으리오.’ 하셨다는 거예요. 배가 고플 적마다 ‘아버님, 당신이 이와 같은 길을 걸으시면서 선조들을 지도하신 것을 아옵니다. 아들 된 제가 당신의 발자취를 따라 이 길을 가오니 참으시옵소서.’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 당시에 이스라엘 민족이 저주받을 것을 모면하였던 것입니다.
자유스러운 자리에서 만민을 모아 놓고 기쁨 가운데에 잔치를 베풀고 즐기셔야 할 예수님이 처량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최고의 자리에서 최저의 자리로 떨어졌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심정을 통하여 볼 때 만왕의 왕임에 틀림없고, 만천하에 하나님의 위신을 세우기 위해서 어느 누구보다도 영광의 자리에서 떨어지게 될 때에도 낙심하지 않고 원망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럴수록 자기 자신의 책임감을 느꼈고, 하늘 앞에 민망해하셨습니다. 민망해하셨어요.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낼 때는 영광의 한 날을 바라보고 보내셨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택해 4천년 동안이나 수고해 나오신 목적도 메시아를 보내서 영광의 한 날을 맞이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유의 환경을 개척하여 만민으로 하여금 당신께 자유의 노래, 해방의 노래를 불러드리게 해주기를 바라고 예수님을 보내셨음에 틀림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이 가신 길은 어떤 길이었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의 입장은 떨어지고 자기의 형편은 떨어졌을망정, 하나님의 뜻을 염려하시고 하늘 앞에 민망해하셨습니다. ‘아버지 면목 없습니다, 아버지 면목 없습니다.’ 하셨다는 것입니다. 외로운 자리에서도 자신을 놓고는 슬퍼하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4천년 동안 민족을 붙안고 싸워 나오신 하나님의 수고를 생각할 때, 아버지의 심정에 사무친 한을 생각할 때 자기가 핍박받아 쓰러진다 해서 민족을 한꺼번에 쳐버려야겠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는 거예요. 왜? 하나님께서 뼛골의 인연을 맺으며 세워 놓은 이스라엘 민족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쓰러지면서도 이스라엘 민족을 붙들고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이었음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기도하는 자리에 나가는 예수님은 처량했습니다. 민망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신 것은 자유의 한 날을 찾기 위해 보냈던 것이요, 뜻의 해원을 위해 보냈던 것이요, 심정의 인연을 맺기 위해 보냈던 것이 틀림없거늘, 민족 앞에 배척을 받고 몰리어 외로운 산중에 들어가 기도하는 예수님은 민망한 예수님이었다는 거예요. 그럴 게 아니에요?
예수님이 뜻을 이루었으면 하나님은 자유의 한 날을 맞이하셨을 것이고, 예수님이 뜻을 성취하셨으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심정의 인연이 맺어졌을 것입니다. 또한 천적인 위신이 땅에 세워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영광의 자리에 선 예수님을 사탄 앞에 세우시고 ‘야, 이 사탄아 예수의 인격과 예수의 위신과 예수의 위엄을 바라보라.’고 자랑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랑할 아무런 내용도 갖추지 못한 예수님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심정이 어떠하셨겠는가를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민족 앞에 배척하는 그날부터 예수님은 각오하셨습니다. 하늘이 4천년 동안 수고하여 택해 세운 이스라엘 민족이 사경(死境)에 놓인 것을 바라보신 예수님은 민족이 굶주리는 것을 느껴 굶주림의 길을 자진하여 가셨고, 민족이 헐벗는 것을 느껴 헐벗음의 길을 자진하여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앞으로 십자가를 지고 죽음의 길을 갈 것을 겟세마네 동산에서 결정하셨습니다. 물론 3년 공생애 노정에서도 그런 생각을 하셨지만 최후의 결정은 거기에서 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했겠어요? 답답하였습니다. 민망하였습니다. 답답한 예수님이었습니다. 민망한 예수님이었습니다. 하늘을 바라볼 때는 민망하고 세상을 바라볼 때는 답답한 예수님이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만왕의 왕으로 왔으되 만왕의 왕으로서의 기쁨을 한순간도 느껴 보지 못한 예수님이었습니다. 체면을 세울 수 있는 예수님이 못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그러한 예수님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예수님이 체면을 세우지 못하였고, 자유의 한 날을 맞지 못하였고, 영광의 한 시간을 갖지 못하였으니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은 전부 다 그런 길을 가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려면 굶주린 예수님을 본받아야 됩니다. 예수님을 따라 가려면 그 분의 답답한 사정을 알아야 됩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려면 하늘 앞에 민망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자가 가져야 할 마음입니다.
오늘날 기독교 신도들이 가져야 할 것은 무엇이냐? 그것이 하늘 대한 민망한 마음입니다. 그리고 이 하늘을 대한 민망한 마음이 자기의 모든 감정을 사로잡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마음을 가져야 예수님 앞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땅을 대할 때는 답답해해야 됩니다. 땅을 대해서는 답답함을 갖고 하늘을 대해서는 민망함을 갖고 생애를 사는 사람이라 할진대 먹는 것이 문제가 아니요, 입는 것이 문제가 아니요, 욕먹는 것이 문제가 안 됩니다. 이 답답하고 민망한 마음을 풀 수 있는 길이 있다 할진 대 죽음의 길도 갈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으면서 이러한 것을 느껴 보았습니까?
보세요. 사람들은 크나큰 욕망을 품고 나왔습니다. 우리에게는 크나큰 욕망을 품은 몸뚱이가 있습니다. 마음이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심정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수많은 인류가 살고 있으되 마음을 중심삼고 사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몸뚱이를 중심삼고 사는 사람은 많으나 마음을 중심삼고 사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몸뚱이를 중심삼고 사는 사람들 가운데에도 답답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안 그래요? 이 몸뚱이가 하고자 하는 대로 안 됩니다. 몸뚱이 하나를 갖고 생애를 영위하기에도 고통을 느끼는 것이 보통 사람의 삶인 것입니다. 보통 사람의 삶도 이렇거늘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정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소원을 알았습니다. 그의 그런 몸과 마음과 심정은 하나였습니다. 그의 몸은 그의 마음 앞에 사로잡히고 그의 마음은 그의 심정 앞에 사로잡혀, 죽으나 사나 일편단심이었습니다. 그의 마음은 오로지 한마음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품고 출발하려는데 세상이 가로막고 있습니다. 마음대로 행사하려니 몸이 제한을 받습니다. 마음과 몸과 심정이 하나된 예수님은 하나님의 심정을 인류에게 연결해 주는 주체로 살아야 했었는데, 마음 따로 몸 따로 하나님의 심정 따로인 세 갈래의 길을 가야 했던 예수의 입장을 여러분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런 사정에 처한 예수님은 무엇을 수습해야 했는고? 몸을 수습할 수 없으니 하나님이 가까이 찾아오실 수 있는 이념을 수습해야 되고 심정을 수습해야 했습니다. 이것들을 수습해 가지고는 어떻게 해야 되었느냐? 땅 위에 세워 주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 다음엔 어떻게 해야 되었느냐? 다시 마음에 몰아넣어야 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고통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답답한 예수님이었습니다. 하늘을 보며 4천년 동안 수고하신 아버지 앞에 민망해한 예수님이었습니다.
오늘날 여러분들은 어떠한 환경에서 살고 있습니까? 그것은 여러분 자신이 잘 알 것입니다. 누가 여러분에게 몸을 중심삼고 살고 있느냐, 마음을 중심삼고 살고 있느냐, 혹은 어떠한 주의나 사상이나 이념이나 심정을 중심삼고 살고 있느냐 하고 물을 때에 여러분은 어떤 대답을 하겠습니까? 자신이 어떠한 위치에 놓여 있는가를 알아야 되겠습니다. 몸 하나를 붙들고 살고자 하는 사람에게도 고통이 있지만, 마음을 위주로 해서 살려고 결심하는 사람에게는 그보다 몇 배는 큰 고충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역사적인 심정과 역사적인 사정과 역사적인 소원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시대적인 심정과 사정과 소원뿐만 아니라 미래적인 심정과 사정과 소원까지 가지고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심정과 사정과 소원은 인간의 심정과 사정과 소원을 대신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심정과 사정과 소원을 대신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소원을 성취해 드리고, 하나님과 사정이 하나되어서 심정을 해원해 드리기 위하여 오신 예수님이었습니다.
성경은 무엇을 중심삼고 무엇을 수습하기 위한 경서(經書)냐 하면, 마음을 중심삼고 몸을 수습하기 위한 경서입니다. 그래서 몸을 쳐라, 몸을 쳐라 하는 겁니다. 그리하여 몸을 수습하고 마음을 수습하고 심정을 수습하여야 됩니다. 오늘날까지의 윤리와 도덕은 몸을 다스리는 제도입니다. 양심을 다스리는 제도가 아닙니다. 몸의 행동을 제한하여 양심의 명령에 따를 수 있는 인격을 조성하기 위한 중간적 사명을 다하는 제도입니다. 이것이 이제까지의 도덕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땅에 와서 무엇부터 수습하려고 했습니까? 이스라엘 민족의 마음과 몸은 예수님이 오기 전에 수습되어 하나되었어야 했습니다. 그래야 예수님이 오셔서 메시아로서의 행사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은 몸 따로 마음 따로 갈라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대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몸과 마음과 심정은 하늘을 대신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대표자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이 대표자가 천지를 움직여 나가는 데는 그의 몸으로 움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정으로 움직여 나갔습니다. 인간들도 인정을 통하여 사회적인 인연을 두텁게 하는데, 하물며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께 천정(天情)이 없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시간의 한계권 내에서 변하는 일시적인 인정(人情)이 아니라 천지의 운세와 더불어 변하지 않는 인정(人情)과 하늘의 이념적인 원칙과 통할 수 있는 천정(天情)을 가진 인격을 완성한 하나의 최고의 모범형으로 나타내고자 원하셨음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이 심정을 걸어 놓고 지극히 사랑하셨던 한 사람을 보았습니까? 못 보았습니다. 여러분, 그런 사람을 보았습니까?
막달라 마리아―스승의 죽음에 대해 한을 품고 어둠 속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 방황하던―는 영광 가운데 부활하여 자기 앞에 홀연히 나타나신 그리웠던 예수님을 붙들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손대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한스러운 말씀입니다.
오늘날 믿는 성도들이 알아야 할 것은 무엇이뇨? 땅 위의 수십 억 인류를 대표한, 예수님이 진정코 사랑할 수 있는 그 한 분이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 한 분은 복받은 자입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함으로써 예수님이 백 퍼센트의 심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 예수님이 마음으로 어떤 이념적인 세계를 고대하고, 어떤 소원이 성취되기를 바라더라도 그것을 이루어 드릴 수 있는 입장에 섬으로써 예수님이 마음으로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을 우리는 보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심정으로 기뻐하고 마음으로 기뻐하는 사람을 못 본 것은 물론이로되 몸으로 기뻐하는 사람도 보지 못한 우리들입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살다 가셨어요? 몰림뱅이, 눈물쟁이였습니다.
이제 우리들이 살아생전 하늘 앞에 기도해야 할 것은 ‘주님이 한을 남기고 가신 것을 알았사오니 당신이 마음으로 즐길 수 있는 하나의 아들딸을 이 땅에 보내 주시옵소서.’ 하는 것입니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심정을 백 퍼센트 지니고 하나님과 만물과 더불어 즐길 수 있는 모습으로 만민 앞에 세워지기를 바라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자신이 되지 못하면 그러한 사람을 보고라도 하나님 앞에 감사하겠다는 마음이라도 가져야 됩니다. 그런 마음도 갖지 못한 자는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와 하등의 관계가 없습니다.
우리는 기도하여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정성을 들여야 되겠습니다. 모든 것을 다 희생하는 한이 있더라도 정성을 들여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한과 하나님의 한을 해원하기 위하여 부름받은 자들입니다. 비록 몸은 작으나 마음은 천주(天宙)를 넘고 넘어서 천성(天城)의 길을 꿰뚫어 하나님의 마음과 연락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몸으로 안 되면 마음으로 심정의 예수님을 모신 후에 다시 몸으로 모셔야 하겠습니다. 그러지 못하는 자는 앞으로 주님이 오시더라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체포되시기 전에 최후로 사랑하는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한 내용이 무엇입니까? ‘아버지와 내가 하나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 몸이 아버지의 것이요, 내 마음이 아버지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내 심정까지도 아버지의 것이라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는 몸으로 쓰러져 간 예수님을 생각하고 슬퍼하지 맙시다. 예수님은 몸에만 못이 박힌 것이 아닙니다. 마음에도 못이 박혔습니다. 몸에 못이 박혀 피를 흘리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애석하게 우는 것보다 마음에 못이 박혀 마음으로 피를 흘리는 예수님을 더 애달프게 여겨야 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품고 인류와 더불어 살기 원했던 사랑의 심정이 아팠다는 것도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한스러워했던 예수님, 답답해했던 예수님, 민망스러워했던 예수님이었음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성도들은 십자가를 붙들 줄도 알고, 피 흘리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애석해하며 울 줄은 알되, 그렇게 피가 흘러넘칠 때까지 져야 했던 심정의 십자가는 모르고 있습니다. 사정의 십자가는 모르고 있습니다. 소원의 십자가는 모르고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못 박힐 때에 몸과 더불어 마음에도 못이 박혔거늘, 그 마음의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심정의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얼마나 억울하고 분하기에 2천년의 역사가 지나가도록 당신의 마음의 십자가를 인류 앞에 가르쳐 줄 수 없었으며, 당신의 심정의 십자가를 인류 앞에 가르쳐 줄 수 없었습니까? 말하고 싶어도 말하지 못하고 가신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요 16:12),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눅 12:49-5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몸이 굶주려서 답답한 거예요? 그렇다면 40일 금식이 웬 말이며, 고난과 핍박이 웬 말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고난보다 더 큰 고난을 하나님이 겪고 계시다는, 자신이 져야 할 십자가보다 큰 십자가를 하나님께서 지고 계시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십자가의 길, 고난의 길을 가셨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들은 지금까지 영광의 주를 고대하였습니다. 호화찬란한 부활의 이념을 가지고 지상에는 7년 대환난이요, 공중에서는 어린양 혼인잔치라는 관념 속에서 지금까지 ‘예수님, 나를 도와 주시옵소서.’라고만 했습니다. 그런 신자는 강도입니다, 강도. 주님의 마음과 다른 자는 전부 원수입니다.
이제 우리들은 예수님이 걸으신 십자가의 고난 길을 넘고도 남을 수 있는 마음, 그 이상의 길이라도 가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자신의 갈 길을 염려하면서도 하나님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기도하시기 전부터 민망함을 느끼고 기도하시고 나서도 민망함을 느끼신 예수님이었습니다. 자신을 반대하는 무리를 보고 욕하는 제자들을 책망하시던 예수님은 얼마나 민망하셨겠습니까? 하나님이 보낸 사명적인 면으로 보면 자기 일신(一身)이 그래서는 안 되겠지만, 책임을 못 다하고 가는 입장이기에 응당 채찍을 맞아야 한다고 느끼신 예수님인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영광의 주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주가 오시면 행복의 문이 열리고, 주가 오시면 평화의 동산이 건설되어서 주와 더불어 억천만 년 행복스럽게 살 수 있을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천만부당한 생각입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살 수 있는 자가 되려면 몸의 십자가를 통과하고, 마음의 십자가를 통과하고, 심정의 십자가를 통과해야 됩니다. 그럴게 아니에요? 몸의 십자가를 남기고 가신 예수님, 몸의 십자가의 절개를 따르라고 가르쳐 주신 예수님은 마음의 십자가의 절개를 가르쳐 주고, 심정의 십자가의 절개를 가르쳐 주기 위해 다시 오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오시는 예수님을 만나 영광을 받고 복을 받고 살 것을 생각합니까? 천만 부당한 생각입니다. 두고 보세요. 여기서 말하는 사람의 말이 거짓말인가, 참 말인가.
만일 오시는 주님을 영광 가운데에서 만나고 싶거든, 주님이 보시기에 지극히 사랑스런 모습이 되고 싶거든, 주님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싶거든 여러분 자신이 몸의 십자가를 거쳐서 마음의 십자가가 무엇이고 심정의 십자가가 무엇인가를 알아서, 주님이 소원하시는 앞길을 위하여 기도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지 못하면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을 보세요. 우리의 몸은 땅을 상징하고, 우리의 마음은 공중을 상징하고, 우리의 심정과 영(靈)은 하늘을 상징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의 마음에 구름이 끼면 눈물이 나는 것같이 공중에 구름이 끼면 비가 내립니다. 천지의 모든 형태의 축소형으로 지어진 것이 인간인 것입니다. 인간이 하늘땅의 축소형이라면 인간 안에 모든 것이 들어가야 합니다. 인간이 소우주적(小宇宙的)인 실체(實體)이기에 우리의 마음은 하늘(天)과 인연을 맺고 있고, 우리의 몸은 땅(地)과 인연을 맺고 있습니다. 인간은 마음을 중심삼고 세계의 모든 것이 다 들어가야 합니다. 사상과 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발판에 무엇을 세웠느뇨? 예수주의를 세웠습니다, 예수주의. 이 예수주의로 마음세계의 문을 개방해야 합니다. 이 마음세계의 문을 개방하고 난 후에는 심정세계의 문을 개방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최후에는 신랑신부로서 사랑의 동산을 건설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의 문을 개척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떠한 사람이냐? 주를 믿는 사람은 핍박받는 것을 보고는 잠을 못 자는 사람입니다. 선한 사람이 못 먹고 못 입고 핍박받는 것을 보면 피가 끓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 마음이 되어 있습니까?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이 살다가 떨꺼덕하고 죽으면 그 영(靈)은 하늘나라로 넘어갑니다. 죽는 순간 그 영(靈)이 한 고개를 넘어가게 될 때, 천상(天上)의 수많은 성도들이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천군천사가 옹위하는 가운데 오는 그 영(靈)을 축하하면서 맞고 싶어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심정이라는 것을 알아 야 되겠습니다.
응당 죽어야 할 타락의 후손이지만 한 사람이 땅에서 구원을 받아 천상(天上)의 문을 열고 생명의 동산에 들어오는 것을 보면, 당신의 주위를 옹위하고 있던 천천만 성도들까지 전부 동원하여 그 한 사람을 환영하고 싶은 것이 아버지의 마음이라는 것이에요. 여러분도 탕자의 비유를 알지요?
죽을 때에는 반드시 하늘의 천사가 옵니다. 동시에 사탄도 옵니다. 이건 막연한 말이 아닙니다. 어떠한 경지에 들어가면 항상 느끼는 거예요. 천사가 하나님의 특사로서의 사명을 갖고 선한 조건을 찾아내어 사탄과 싸워서 하나님 편으로 데려가려 합니다. 사탄은 검사와 마찬가지이고 천사는 변호사와 마찬가지인데, 사탄에게 끌려가게 되면 하늘에는 말할 수 없이 큰 슬픔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걸 알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이 가신 길을. 예수님이 어찌하여 민망해하셨는가? 예수님은 4천년 동안 수많은 선지선열들이 이 땅 위에 와서 메시아 한 분을 맞기 위하여 무한한 고통과 무한한 희생으로 터를 닦은 것을 알고, 자신은 그런 터 위에 하늘이 보낸 메시아로서 이 땅에 왔는데 만민의 한을 풀어 주지 못하고 가게 되니 얼마나 민망했겠어요? 민망했겠나 안 했겠나 생각해 보십시오. 죽어 가면서도 얼굴을 못 든 예수님이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낙원에 가서 기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늘 보좌에 앉혀 놓는다 해도 예수님은 민망해서 못 견딘다는 거예요. 참으로 메시아의 자격이 있는 분입니다.
여러분, 영계(靈界)의 수많은 영인(靈人)들이 지금 춤추며 놀고 있는 줄 알아요? 그렇지 않습니다. 땅을 위하여 협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땅 위에서 영인들에게 심부름을 많이 시키면 시킬수록 거기에 대한 보응은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형무소에 가게 된단 말입니다.
예수님은 땅에 계실 때 만왕의 왕으로서, 하늘에는 12진주문과 24장로를 중심삼고 천천만 성도들을 움직일 수 있는 조직을 갖추어 놓았는데, 땅에도 그런 조직을 만들어 놓고 가야 했습니다. 그러한 사명을 갖고 왔던 예수님인데 그렇게 해 놓고 갔어요?
12제자? 여러분, 새 예루살렘의 기초석(基礎石)에 제자의 이름이 써 있다고 했지요? (계 21:14) 그들이 다 어떤 사람들인지 알아요? 살아생전에 예수님을 배반한 사람들이에요. 12제자에게도 환영받지 못한 예수님이었기에 저 나라에 갈 때 하늘 앞에 민망했던 것입니다. 알겠어요? 이제 여러분은 그렇게 가신 예수님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게 가신 주님이 끝날이 되었으니, 이제 다시 오실 것입니다. 몸을 밟히어 이 땅 위에 수많은 기독신자를 세워 놓았으니 이제는 밟히지 않는 마음을 갖고 오셔야 됩니다. 이제 다시는 인간들에게 밟히지 않는 마음을 갖고 오셔야 됩니다. 이제 다시는 인간들에게 밟히지 않는 마음을 갖고 오셔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이냐? 예수님이 말씀하지 않은 말입니다. 여러분들 모르지요? 예수님의 심정이 어떤지,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했는지 알아요? 예수님은 아셨지만 우리들은 몰랐습니다.
예수는 30여 년의 생애를 마치고 십자가를 지실 때 몸은 물론 마음과 심정도 못 박혔기에, 이제 심정의 십자가를 해방시키고, 마음의 십자가를 해방시키고 몸의 십자가까지 해방시키기 위하여 다시 오셔야 되는 것입니다. 심정의 십자가를, 마음의 십자가를, 몸의 십자가를 해방시키기 위하여 오시는 분이 재림주님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 위에 오시지 못하고 지금까지 2천년 동안 수고하신 것은 무엇 때문인가? 마음의 십자가를 하나님 앞에서 풀기 위해서입니다. 땅 위의 인간들에게 그것을 말하지 못했는데, 그것을 그들에게 말하려면 그냥 그대로 되겠어요? 그것을 풀 수 있는 조건을 세워야 됩니다. 심정의 십자가를 풀 수 있는 조건을 세워야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오기 전에 천적인 세계에서 하늘과 해결지어야 할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이 땅 위에 몸의 구주요, 마음의 구주요, 심정의 구주로 오셔야 할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이 땅 위에 있는 인간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모르고 예수님의 심정을 모르는 것이 행복하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다 가르쳐 주고 가셨더라도 인간들은 예수님의 심정을 풀어 드릴 도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제 때가 되었습니다. 끝날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 위에 오실 것입니다. 오시는데 영광 중에 홀연히 나타나실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그렇게 안 옵니다. 그렇게 안 와요. 여러분, 여기서 말하는 사람의 말이 거짓말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이 다음 영계(靈界)에 가게 되면 자연히 알게 될 것입니다. 그때 가서는 이런 말 못 들었다고 안 하겠지요? 그렇게는 안 옵니다. 천번 만번 알아 봐도 그렇게는 안 옵니다.
오시는 주님은 어떻게 오실 것이냐? 몸의 십자가를 남기고 가신 예수님이 이 땅 위에 오실 때는 마음의 십자가를 다시 품고 오십니다. 심정의 십자가를 다시 가지고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땅 위에 있는 배반한 자들의 후손들을 붙들고 ‘옛날에 너희의 선조들은 몸의 십자가를 지고 허덕였지만 마음의 십자가는 몰랐다. 심정의 십자가는 몰랐다. 몰랐으니 용서해 줄 수 있는 것이다.’ 하실 것입니다.
이제 오시는 주님은 마음과 심정과 사정을 갖고 오시는데, 여러분이 심정에 사무쳐 ‘오, 주여!’ 할 때,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한 예수님을 붙들려 할 때처럼 만지지 말라 하시지 않고 ‘오냐!’ 하실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타락한 몸으로 하늘을 그리워하고 고대했지만, 그 중의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의 전권적(全權的) 축복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제 이 땅 위에 주님이 오신다면, 이제까지 인간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던 하나님의 심정, 하나님의 사정, 하나님의 이념을 대신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오십니다.
예수님의 마음속 깊이 묻혀 있던 답답함과 민망함은 누구로 말미암은 것입니까? 타락한 후손들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못나서 그런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능력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자식을 잘못 둔 부모의 입장에 선 예수가 되었으니 자식이 잘못한 죄를 부모로서 대신 탕감하고 간 것이 십자가의 길입니다. 우리들은 예수님이 몸으로 고생한 것은 알았지만 그 마음은 몰랐습니다.
주를 대하여 천만 번 변했던 것이 우리의 마음이요, 주를 사랑하면서도 천만 번 변했던 것이 우리들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늘을 대신할 수 있는 마음, 예수님이 찾고자 하는 마음은 하나님을 대하여 예수님을 대하여 한번 결심했으면 억천만의 고통이 휘몰아치더라도 변할 수 없는 마음입니다. 이 기준이 잡혀져야 됩니다. 사조에 따라 변하지 않고 주의 사상에 따라 변하지 않는 마음의 기준이 잡혀야 된다는 것입니다. 오시는 주님을 맞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민족 이상의 심정을 가져야 하고, 예수를 따르던 베드로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정신을 차리고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리는 것도 달게 받던 것 이상의 마음을 가져야 하고, 각오를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답답함과 민망함을 이 시대에 느끼는 자라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답답함이 무엇인가? 예수님은 민족을 자기 품에 넣으려 했고, 세계를 자기 품에 넣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때의 예수님은 돈 많은 예수가 아니었습니다. 권세를 가진 예수님도 아니었습니다. 혈혈단신 눈물의 길을 가신 예수님이었던 것입니다.
하늘의 능력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하늘의 영광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하늘의 복이 없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들보다 예수님은 먼저 땅을 해결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그리워한 것이 많았습니다. 맨 처음에는 무엇을 그리워한 줄 알아요? 그 마음으로 무엇을 그리워한 줄 알아요? 참다운 사람을 그리워했습니다. 참다운 사람! 몸과 마음과 심정을 쪼개고 쪼개어도 변할 줄 모르는 사람을 찾고자 하신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그리워하였습니다. 어떤 사람? 마음의 사람, 심정의 사람을 그리워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무엇을 그리워했느냐? 나라를 그리워하였습니다. 나라! 또 무엇을 그리워했느냐? 세계를 그리워하였습니다. 또 무엇을 그리워했느냐? 아버지입니다, 아버지. 아버지를 그리워했어요.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동시에 아버지의 나라를 그리워했고 아버지의 세계를 그리워했습니다. 여러분, 이것만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은 과연 이런 사람이 필요하다고 느껴 이런 사람을 찾기 위해 거리를 다녀 보았습니까? 내가 요구하는 나라는 이러한 나라라고 생각하고 그러한 나라를 찾기 위해 싸워 보았습니까? 우리들이 소원하는 세계는 이러한 세계다 하며 그런 세계를 찾기 위해 싸워 보았습니까?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하늘이 공인하고 예수님이 공인하고 내 심정의 근본으로부터 공인할 수 있는 그러한 소원의 대상이 되는 사람, 소원의 대상이 되는 나라, 소원의 대상이 되는 세계를 찾기 위하여 싸워본 사람은 없습니다. 일개 민족을 위하여 싸우고, 일개 주의를 위하여 싸우고, 일개의 어떤 사상을 위해서 싸우는 사람은 있었지만, 하늘땅이 안식할 수 있는 기쁨의 보금자리인 하늘의 심정의 세계, 하늘의 마음의 세계, 하늘의 몸의 세계, 모든 존재들이 다 인연맺기를 원하고 그리워하는 곳을 찾기 위하여 싸운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없어요.
예수님은 30여 년 동안 싸웠습니다. 말없이, 무언으로 싸우다 가셨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아도 그 말을 해 보아야 거두지 못할 것을 아셨기에 아예 입을 다무신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운 사람을 찾기 위해 3년 공생애노정을 출발하여, 희로애락을 같이하면서 먹을 것이 있으면 먼저 먹여주고, 입을 것이 있으면 먼저 입혀 주고, 편안한 자리가 있으면 자기가 쉴 자리를 넘겨주면서 제자들을 데리고 다녔습니다. 그런데도 3년 공생애노정 끝에 배반자가 된 제자들, 예수님께서 그리워한 사람이 그런 배반자들이었겠습니까? 아닙니다.
부활하신 후에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요 12:15-17)고 세 번씩이나 물으시던 예수님, 얼마나 처량합니까? 배반한 자를 찾아가서 다시 인연 맺자고 하신 예수님이었으니, 얼마나 원통합니까? 예수님의 죽음을 분히 여기는, 베드로보다 잘 나고 베드로 이상 열렬한 사람들이 그 시대에 있었던들 예수님은 한을 풀었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순교한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패배자의 길을 가신, 처량한 심정을 품고 왔다 가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는 자기가 그리워하는 인격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말하지 못하고 갔습니다. 그런 인격을 갖춘 인간들이 주관하는 국가가 어떻다는 것도 말하지 못하고 갔습니다. 그 국가의 이념을 통하여 복귀된 세계,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나라가 어떻다는 것도 말하지 못하고 갔습니다. 원통합니다. 원통해요. 그러니 답답할 수밖에요.
먼 산을 바라보는 예수의 눈에는 억천만 인류가 움직이는 것이 보이고, 천상에서 수고하는 천천만 성도들이 자기를 주시하는 것이 보이니, 그들 앞에 머리를 들 수 없는 예수님이었던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고개를 들 수 없는 예수님이었고, 시일이 지나가면 지나갈수록, 배척을 받으면 받을수록 죽음밖에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도리어 죽는 길이 편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렇다고 그것으로 종결을 짓고 간 것이 아니라 다시 오마 하셨습니다. 다시 오시는데 무엇을 찾기 위해 오시는가? 30여 년의 생애노정에서 마음으로 그리던 사람을 찾기 위해 오십니다. 30여 년의 생애노정에서 마음으로 그리던 나라를 찾기 위하여 오십니다. 30여 년의 생애 동안 마음으로 그리던 그 세계를 찾기 위하여 오십니다. 마음으로 그리던 그 나라의 백성을 찾기 위하여, 그 세계를 이루기 위해 오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어떠한 입장에 있습니까? 여러분은 무엇이 그립습니까? 그리운 마음이 있습니까? ‘아버지여,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딸이 어디에 있사옵니까?’ 하며 몸부림치면서 먹는 것을 잊어버리고, 입는 것을 잊어버리고, 자기 일신(一身)이 망하는지 자기의 처지가 몰락되는지도 모르고 그런 아들딸을 찾는 성도가 이 땅 위에 있습니까? 이 민족 가운데 그러한 성도가 없다면 이 민족은 망합니다. 이 세계에 그런 무리가 없다면 이 세계는 망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통일교인으로서 배척받고 몰림받고 지극히 외로운 자리에 선 것을 고맙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돈도 없고 세력도 없습니다. 그것도 고맙게 생각해야 됩니다. 예수님은 몸의 일체를 밟히셨습니다. 십자가에 몸을 쓰러뜨리면서 품고 가신 예수님의 그 심정, 그 마음, 그 사정을 아는 우리입니다. 심정의 십자가를 붙안고 가신 예수님의 사정을 내 몸은 모를지라도 내 마음은 알고 내 심정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땅을 위하여 마음의 사람을 그리워하고 심정의 사람을 그리워하며, 먹을 것을 보고도 그들을 생각하고 입는 것이 남루하더라도 그들을 생각하는, 마치 탕자를 둔 부모와 같은 마음을 가진 자들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답답한 마음을 품고 십자가의 길을 갈 때에도 원망하지 않던 예수님의 심정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의 사정을 알았습니다. 민망한 심정을 품고 가야 했던 예수님의 운명도 알았습니다. 귀하신 몸이 굶주림도 참아야 했고, 귀하신 몸이 남루한 옷을 걸쳐야 했으며, 나중에는 홍포를 입으시고 눈물 없이 십자가를 지고 가시면서, 탄식하는 부녀자들을 향하여,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하신 예수님이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제 우리들은 마음을 열고 몸을 가다듬어 마음의 사람을 그리워해야 되겠습니다. 심정의 사람을 그리워해야 되겠습니다. 그런 사람들로 이루어진 그 나라를 그리는 우리는 단결하여 굶주림의 십자가의 길을 넘어가야 되겠고, 억울하게 배척받는 십자가의 길을 넘어가야 되겠습니다. 나중에는 쓰러져 죽는 죽음의 길을 넘어서라도 남기고 싶어했던 예수님의 사정을 통하고 심정을 통하여 그의 민망함과 답답함을 대신하겠다고 나서는 무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자기 일신의 처지를 잊어버리고 십자가 산정, 골고다 산정, 겟세마네 산정에서, 따르던 무리들로부터도 배신당하며 피눈물을 뿌리시던 예수님을 대신할 수 있는 승리적인 모습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배반자, 베드로의 길을 넘어 예수님보다 앞장서서 울 줄 아는 무리가 되어야 되겠고, 예수님보다 앞장서서 죽음 길을 자처해 나갈 줄 아는 무리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각지에서 오신 청년 남녀 여러분, 여러분의 사명이 큽니다. 오늘 여기서 외치는 이 한 젊은이의 외침은 개인의 사정을 걸어 놓고 외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하늘을 위하여 굶주릴 때, 남들이 밥 먹는 모습을 보면서 눈물지으며 ‘아버지’ 하는 그 음성은 수십일 금식기도보다 귀한 것입니다. 참다운 선의 사람을 그리워하고, 그 사람을 찾지 못해 눈물지으며 ‘아버지’ 하는 그 한마디의 음성은 하나님의 간장을 녹이는 음성인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는 보호자가 되기 위하여 허덕이는, 부모와 같은 마음을 갖고 심정에 굶주려 이리 허덕이고 저리 허덕이며 심정을 따라 나가는 발걸음은 인간들로부터 배신자라는 평판을 듣더라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어느 교파가 배반자라고 해도 괜찮고, 어느 민족이 배반자라고 해도 괜찮고, 어떠한 스승이 배반자라고 해도 괜찮다는 거예요. 이렇게 몰림을 받으면서도 하늘을 향한 심정에 있어서만은 배반자라는 말을 들을 수 없다고 외치면서 일편단심 심정의 복지(福地)를 찾아 헤매는 무리가 있다 할진 대, 그들의 발걸음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알았습니다. 아버지의 소원을 알았고, 아버지의 사정을 알았고, 아버지의 심정을 알았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충만해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마음이 무엇에 사로잡혀 있습니까? 이 몸은 쓰러지더라도 아버지의 뜻을 위하여 싸우다 쓰러지겠다는 마음이 있어야 됩니다. 피를 흘리며 쓰러지더라도 이 몸속의 산피가 고동치고 이 생명의 맥박이 뛰는 한, 아버지의 생명의 깃발을 세울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쓰러져야겠습니다.
‘나는 가진 것이 없고, 부모나 처자도 없고, 국가나 세상에 대한 아무런 미련도 없다.’는 것이 예수님께서 일편단심으로 가졌던 주의와 사상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오직 아버지뿐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심정뿐이었고, 아버지의 마음뿐이었고, 아버지가 소원하시는 하나의 참사람뿐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세상을 볼 때마다 그가 품은 것은 답답함뿐이요, 그가 가진 것은 민망함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죄악 된 세계에서 그렇게 살다 가셨거늘, 그 답답함을 풀어드릴 수 있고 그 민망함을 풀어드릴 수 있는 그 무엇이 있다 할진대 우리는 결심합시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삼천리반도를 향하여 최후의 정열까지 다 쏟아야 되겠습니다.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아버지’ 하면서 가야 되겠습니다. 이것이 타락한 후손이 지녀야 할 승리적인 조건일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해야 됩니다. ‘답답한 예수님의 심정, 민망한 예수님의 심정이 제 일신에서 풀어지이다.’ 하고 기도해야 됩니다. 예수님은 민족적으로 배반을 받고 갔습니다. 12사도 앞에 배척을 받고 갔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배척을 받고 나갔습니다. 그러기에 오시는 주님은 12제자 앞에 환영을 받아야 되겠고, 제2이스라엘인 기독교인들 앞에 환영을 받아야 되겠고, 27억 인류 앞에 환영을 받아야 되겠는데, 환영받을 수 있는 사정이 못 되어 있거든 우리는 싸우다 쓰러지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환영 받을 수 있는 환경을 개척하여야 되겠습니다.
그것을 위하여 자기의 피와 살을 뿌리고, 그것을 위하여 자기의 정열을 쏟을 수 있는 각오와 신념에 찬 무리를 우리는 이 삼천리반도에서 찾아 모아야 되겠습니다. 그런 무리를 찾기 위해 잠들어 있는 27억 인류와 잠자고 있는 수많은 종교인들을 향하여 나아가야 되겠습니다. 한끼의 밥도 자신만을 위하여 먹지 말고, 한 벌의 옷도 자신만을 위하여 입지 말고, 하루의 생활도 자신만을 위하여 하지 맙시다. 그런 무리가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보다 많은 물질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보다 편안합니다. 우리는 예수님보다 잘 살고 있습니다. 주님의 가신 길이 그러했고 또 불쌍하게 보냈거든, 그의 제자가 되고 자녀가 되어야 할 우리는 밥을 먹어도 그 이상 먹을 수 없다는 마음, 옷을 입어도 그 이상 좋은 옷을 입을 수 없다는 마음, 잠을 자도 그 이상 잘 수 없다는 마음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만일 형편과 사정이 어려운 자리에 있거든 눈물을 갖고 먹고 눈물을 갖고 입고, 눈물을 갖고 사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무리가 오늘날 교계의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국의 기독교를 바라볼 때 우리는 분개하여야 합니다. 우리의 피가 아직까지 식지 않았고 우리의 심정이 아직까지 식지 않았거든, 이러한 무리가 없어 안타까워하시는 하늘 앞에 그러한 무리가 되어 드려야 하겠습니다. ‘내가 갖춘 지식이 없고, 내가 가진 무엇이 없다 하더라도 일편단심(一片丹心)의 심정과 마음만은 이 민족 앞에 보여 주겠다.’고 하는 무리를 하늘은 찾으신 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들은 때가 가까워 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세계가 최후의 생사의 기로에서 허덕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 어디로 가야 되겠습니까? 가신 예수님, 이념의 세계를 남기고 십자가를 지고 가신 예수님은 지금 우리에게 통고하고 계십니다. 영광의 길이 아니라 십자가의 길을 가라고 하십니다.
우리들은 이제 비장한 각오를 해야 되겠습니다. 과거의 생활을 정비하여야 되겠습니다. 주위 환경을 수습하여야 되겠습니다. 재수습하여야 되겠습니다. 사랑하는 아내가 있습니까? 주님이 품고 사랑할 수 있는 아내로 만드십시오. 사랑하는 자녀가 있습니까? 부디 주님이 무릎에 앉히고 품에 품으시고자 ‘아무개야 이리 오너라.’ 하실 수 있는 자녀로 만드십시오. 여러분이 살고 있는 지금의 자리가 그러한 자리입니까? 아닙니다.
가신 주님이 그렇게 가셨으니 오시는 주님도 십자가로 오실 것이거늘, 오늘 우리들은 비장한 각오를 하여야 되겠습니다. 마음과 심정을 무장하고 몸이 맞는 자리로 나아가야 되겠습니다. 몸이 답답하고 민망한 자리에 나아가야 되겠습니다. 그러니 농촌으로 전도하러 가는 자는 곡괭이를 먼저 메어야 되겠습니다. 노동판으로 전도하러 가는 자는 짐짝을 먼저 멜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수고하는 자들 앞에 나가는 자는 그들 앞에 서서 그들보다 더 수고해야 되겠습니다. 학자들 앞에 나가는 자는 그들 이상의 힘을 들여 배워서 그들을 지도해야 되겠습니다. 땅 위에서 이러한 일이 벌어져야 하늘의 답답함이 풀리고, 이러한 과정을 거쳐야 하늘의 민망함이 풀린다는 것을 알고 여러분은 비장한 각오를 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몸이 귀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을 책임지고 지도하는 저도 여러분을 고생시키고 싶지 않습니다. 여러분을 고생시키는 것은 저의 본의(本意)가 아닙니다. 민족을 위하여, 세계를 위하여, 철석같은 기초를 닦아 놓아야 할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멀지 않아 우리들은 뜻을 위해 나아가야 되는데, 모든 것을 저버리고 가야만 되겠습니다. 피난민 이상의 처지가 되는 한이 있어도 이 길을 가야만 되겠습니다.
나는 이 해의 벽두에 여러분 앞에 선언하였습니다. 이 한 해에 일생을 통해 잊을 수 없는 제일 큰일을 하라고 말입니다. 여러분의 수중(手中)에 지금 돈이 있습니까? 수십억, 수천만 원의 돈을 쥐어 보았습니까? 여러분의 생애노정에 여러분의 일신을 위하여 일신의 행복을 위하여 돈을 벌려고 싸운 적이 있습니까? 한탄하십시오. 그러한 돈이 있거든 생명을 위하여, 하늘나라를 위하여 써야 합니다. 호화스러운 거처를 붙들고 지금까지 싸워 왔습니까? 하늘 백성을 안식시키기 위하여 그러한 것을 잊어버릴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비장한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과거에 잘 먹었던 일이 있으면 이제 후회해야 되겠습니다. 잘 입었던 일이 있으면 후회해야 되겠습니다. 왜? 주님보다 잘 살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세계 인류가 그러한 자리에 서게 되면 평화의 세계가 될 것입니다. 평화의 왕자는 그러한 길을 가는 자입니다. 평화를 건설할 수 있는 자는 그러한 자입니다.
이제 삼천만 민족이 울부짖는 곳을 향하여 나아가게 될 때, 피땀을 흘리는 곳이 있다면 내가 가겠다, 욕먹는 곳이 있거든 내가 가겠다고 이를 악무는 그런 자리에서 아버지를 부르며 눈물짖는 인연을 남기라고 나는 여러분 앞에 강조하고 싶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람이 그런 길을 걸어 왔습니다. 지금도 여러분의 마음 이상 사무친 마음이 있습니다. 하늘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지 다 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을 무한히 아낍니다. 여러분을 마음껏 축복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을 대신하여 어떠한 고난의 자리라도 가고 싶습니다. 그러나 하늘이 있기에 이리도 못 하고 저리도 못 하는 곡절과 사정이 있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주의 발걸음은 산중에서 토굴을 파고 기도하는 무리는 물론이요, 화전(火田)을 일구어 감자 농사를 지어서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까지도 고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아버지는 그러한 자들에게까지 심정을 두고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가야 되겠습니다. 가야 되겠습니다. 어떤 기념할 날이 있다고 그날을 축하하기 위해 모이는 것보다, 그것은 못 할망정 남아 있는 이스라엘을 위하여 울라고 하시던 예수님의 마음을 짐작할 줄 아는 여러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위신을 무한히 변명하고 싶은 것이 여기에서 말하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미국에 있는 어떤 식구는 선생님이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겠으니 명령만 해 달라고 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앞에 명령하지 못한 나이기에 그들 앞에 명령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복이 있으면 여러분에게 주고 싶고, 하늘의 인연이 있다면 여러분 앞에 세워주고 싶은 것이 이 민족의 피를 받고 태어난 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우리 민족에게는 세계적인 사명이 있습니다. 6.25동란 때 수십개국이 이민족을 위하여 피땀을 흘렸는데, 이 민족을 위하여 피땀을 흘리고 쓰러진 그들의 은혜를 피로 갚고 땀으로 갚아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사명을 생각하고 염려하는 마음이 있다 할 진대 무한히 답답하고 무한히 민망한 심정으로 염려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부터 원컨대 그토록 슬프시던 주님이 활개를 펴시고 자유의 환경에서 춤을 출 수 있게 된다면, 우리가 그런 주님을 모실 수 있다면, 무슨 한이 있겠습니까? 사랑하고 싶었던 그 분을 사랑하고 죽는다면 무슨 한이 있겠습니까? 무수한 고통을 당하신 주님께서 편안한 자리에서 하늘 앞에 ‘다 이루었다’는 한마디를 할 수 있는 날을 맞이한다면 무슨 한이 있겠어요?
우리는 그것을 위해 싸워야 되겠습니다. 그것을 위해 탄식해야 되겠습니다. 모두가 그것을 위해 움직여야 되겠습니다. 이것을 위하여 여러분 각자 각자가 비장한 결심을 하기를 부탁하는 바입니다.
때로는 한민족으로 태어난 것을 한탄한 적도 있었사옵니다. 불쌍하고 외로운 이 민족을 대신하여 배반자라고 핍박받는 자리에 서야 할 것을 알면서도, 민족을 바라보고 원망하고 싶을 때도 있었사옵니다. 그러나 하늘을 바라볼 적마다 맞고 또 당하고라도 가야 할 길임을 알기에 오늘 이날까지 왔습니다.
오늘날 이 세계와 국내 정세는 복잡하옵니다. 생사의 기로에서 좌우의 판결을 내려야 할 때입니다. 세계적인 운세와 천적인 운세는 천적인 한 생명을 저울로 삼고, 나를 추로 삼아 저울추와 같이 움직여 들어오게 하는 것을 알고 있사온데, 저희가 어떠한 자리에 놓여져야 하겠사옵니까? 모조리 하늘 편으로 기울어질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답답하셨던 예수님의 심정과 민망스러웠던 예수님의 사정을 오늘 저희들은 짐작하였사오니, 예수님의 그 답답한 심정과 민망한 사정을 이 민족을 대신하여 풀어 드리고, 세계 인류를 대신하여 풀어 드리겠다는 단단한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 되겠사옵니다. 저희들, 이러한 책임과 사명을 다 할 수 있도록 아버지께서 맡아 주시옵고, 오늘 느낀 바의 심정을 통하여 새로운 각오와 결심을 갖게 하여 주시옵소서.
각자 맹세를 하고, 각자 아버지 앞에 약속을 하게 해주시고, ‘내일의 나는 불변의 모습, 철석같은 모습입니다. 저를 산 제물로 바치오니 받아 주시옵소서.’ 할 수 있는 이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간절히 부탁하올 때,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지금 이때와 예수가 살던 시기 사이에는 많은 시간적인 간격이 있으나, 지금 읽은 말씀을 통하여 초조하고 비장한 심정으로 나섰던 예수의 성상을 저희들이 다시 한번 회상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4천년 동안 수고하여 이끌어 오신 이스라엘의 종말을 바라보면서 그 민족을 대하여 치하(致賀)의 말을 하지 못하고 탄식의 말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이 얼마나 안타깝고 한스럽고 슬펐으며 얼마나 고통스러웠겠나이까?
아버지, 사망선상에서 몸부림치고 있는 수많은 백성들을 바라보는 예수의 심중에는, 권고하여도 듣지 아니하고 깨우쳐 주어도 깨우칠 줄 모르는 무지한 무리들을 대하게 될 때, 하늘의 안타까움이 그 일신(一身)에 사무쳤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안타까움이 사무치면 사무칠수록 땅을 대해 원망하고 싶은 마음도 아울러 높아간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나 이것을 억누르고 참으신 그리스도의 심정을 아는 사람은 땅 위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외로운 노정을 개척하기 위해 수고하시던 그리스도의 성상을 형같이, 아버지같이 모시면서, 그와 한마음이 되어, 그가 눈물짓는 자리에 있으면 같이 눈물짓고, 굶주리는 자리에 있으면 같이 굶고, 헐벗는 자리에 있으면 같이 헐벗고, 매 맞는 자리에 있으면 같이 매 맞고, 몰리는 자리에 있으면 같이 몰리는 자리에 서지 못한 것이 역사적인 한이었음을 저희들은 알았사옵니다.
심정의 세계는 역사적인 거리를 초월한다는 사실을 저희들은 알았습니다. 그러기에 저희들, 이제 심정의 바탕을 찾아 들어가 그리스도의 성상을 붙안고, 그의 사정을 통할 수 있는 심정의 친구가 되어 예수 대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할 줄 알고 예수 대신 갈보리 산상을 향하여 달려갈 줄 아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런 아들딸이라 할진대 그는 그리스도의 친구요, 역사를 넘어 하늘의 아들을 모신 자라는 것을 저희들이 체휼하게 하여 주시옵기를,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여기에 모인 당신의 아들딸들을 굽어살피시옵소서. 저희들은 가진 것이 없사옵니다. 땅에서 의지할 만한 그 무엇도 갖고 있지 않사옵니다. 이 민족도 그렇지만 저희들은 더욱 그렇습니다. 자랑할 것이 있다 할진대 주를 위하여, 하늘을 위하여 욕먹고 매 맞고 상처 입은 남루한 모습밖에 없사옵니다.
이런 저희들을 붙들고 이런 저희들의 편을 들고자 하시는 당신임을 생각할 때 원통하옵니다. 땅 위에는 잘난 사람도 많고 잘난 민족도 많사온데 이처럼 못난 저희들을 붙들고 사정하셔야 하는 당신의 사정을 통분히 여기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예수는 이 땅 위에 와서 수없이 눈물을 흘렸사오나 그 누구도 그것을 몰랐사옵고, 피눈물나는 애통(哀痛)의 심정을 갖고 천성을 대하여 호소하였사오나 그것을 아는 자도 없었사옵니다. 아버님, 오늘날 통일의 신도들을 불쌍한 자리로 몰아 연단시켜 주신 것을 감사드리옵니다. 굶주림 가운데에서 단결시켜 주신 것을 감사드리옵나이다. 아버지, 헐벗으면서도 뜻을 염려하고 매를 맞으면서도 당신을 염려하는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것이 아버지의 소원이요, 이런 모습을 세워 이 민족 앞에 자랑하시려는 것이 아버지의 뜻인 것을 아옵니다. 이제 그런 모습을 찾아 세우기 위한 사명을 할 때가 왔사오니, 이 사명 앞에 저희들이 비굴하지 않게 하여 주시옵고, 이 사명 앞에 주저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에게 있는 모든 정열과 성심을 다하여 당신 앞에 실적을 남기고 당신의 심정에 기억 될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제 여기에 나섰사온데 무슨 말씀을 하오리까? 아버지, 원컨대 이 시간 남한 각지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외로운 당신의 아들딸들을 굽어살펴 주시옵고, 피 살이 움직이는 심정을 갖고 아버지 앞에 부복하는 곳곳마다 생명의 인연을 두텁게 하여 주시옵소서.
외로운 자의 뒤를 따르는 자도 외로운 자이옵고, 몰리는 자의 뒤를 따르는 자도 몰리는 자이옵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늘을 위한 것이라 할진대, 하늘은 언제나 그들의 편이 되어 주실 것을 믿사오니, 그들이 외로울 때 붙들어주시옵고, 염려하고 위로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오늘, 하늘을 향하여 엎드린 당신의 외로운 아들딸들의 무릎 무릎을 강하게 하여 주시옵고, 하늘 앞에 머리 숙여 감사의 눈물을 흘리며 맹세하는 무리들이 되게 인도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 이 시간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은 많은 것을 배웠사옵니다. 지나칠 만큼 많이 배웠사옵니다. 천적인 사명을 배우되 인간적인 지식으로 배웠사옵니다. 이제 저희들이 하나님의 심정을 간직하게 하여 주시옵고 천적인 사정을 감득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아버지 이 시간 친히 같이하여 주시고, 전하는 자의 마음이나 받는 자의 마음이 하나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억만 사탄들은 이 시간도 저희들을 노리고 있다는 실감이 골수에 사무치게 하여 주시옵소서. 원수의 장벽을 헤치고 생명의 길을 찾아 전부가 웃으며 아버지의 품에 안길 수 있는 은사를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남겨진 전부를 아버지의 뜻 앞에 드리오니 받아 주시옵소서. 간절히 부탁하올 때,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말 씀> 잠깐 드리려 하는 말씀의 제목은 ‘원수를 대한 아버지의 원한’ 입니다. ‘원수를 대한 아버지의 원한’이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모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이 선한 땅이 못 되어 있고 땅 위에 사는 인류도 선한 인류가 못 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세상이 악한 세상임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이 선을 소망하고 오늘의 부족함을 염려하면서 내일의 완전한 모습을 그리워하는 것은 여러분이 생활을 통해 잘 아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땅 위에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에는 좀 나은 사람이 있는 반면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고, 좀더 충성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그 충성의 길을 막고자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세상이 그런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들 자신도 좀더 잘 될 수 있는 길을 가고자 할 때, 선한 그 무엇을 세워 나가고자 할 때 이를 방해하는 요소가 앞을 가로막는 것을 여러분은 여러 번 느꼈을 것입니다.
내가 선한 사람이라고 만우주 앞에 자처할 수 없는 것을 느끼면 느낄수록 자기가 처한 환경을 악한 환경이라고 원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자신이 이렇게 악한 세상에 살고 있으니 그러한 환경에 휩쓸려 악한 입장에 서게 되었다고 일시적인 변명을 하며 살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이렇게 되었느뇨? 자신이 선한 사람이 못 되고 선과 반대인 악한 사람이 된 것이 환경 때문이라고 한탄하는 원인은 어디에 있느뇨? 그렇게 된 원인은 어디에 있느뇨? 그 원인을 추궁해 보면 타락의 보응(報應)에서 온 사실임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선이니 악이니 하는 명사가 남아진 것도 타락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을 놓고 볼 때 선한 편 사람과 악한 편 사람, 또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나 개인을 놓고 볼 때도, 어느 한편에서 나를 끌어가려고 하는가 하면 또 다른 편에서 나를 끌어가려고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람이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이 있는 것처럼, 신(神)이 있다 할진대 그 신도 선한 신과 악한 신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들 자신을 미루어 보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내 마음은 선을 향하여 가고자 하는데 환경에 이끌려 악한 길로 가게 되는 원인은 어디에 있느뇨? 내가 동기적인 주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할진대, 여기에는 필시 나 이상의 원인과 동기가 되는 어떤 힘이 작용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봄이 오면 봄의 기운이 모든 산천을 뒤덮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나 자신이 환경으로 인한 감정에 얽매이거나 환경으로 인한 죄 가운데 얽매이는 그 모든 것은 내가 직접적인 동기가 되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어떤 동기적인 힘 밑에서 간접적인 동기가 되어 움직이는 것입니다.
선을 찾다 보면 결국 절대자를 세우지 않을 수 없고, 악을 규명하다 보면 절대자와 반대되는 신과 만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개체에게는 중요한 책임이 있습니다. 내가 잘하면 선하게 되고, 못하면 악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잘하면 절대자를 기쁘게 하는 것이고, 못하면 악한 원수를 기쁘게 하는 것이 됩니다. 이러한 기로에 선 인간이기에 아무리 미미한 생명이라고 생각되는 인간일지라도 그는 천적인 싸움과 역사적인 싸움을 하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사상이나 이념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향해 움직여 나온 것이 지금까지의 인류역사입니다. 역사의 방향을 이상세계로 전향(轉向)시키기 위해 전개되어 나온 것이 문화사(文化史)의 변천 과정입니다. 이것을 볼 때 인간이 주체가 아니라 인간은 제2원인의 입장에서, 제1원인의 대상으로서 행동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인간이 타락하여 죄악된 세상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이러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선의 이념을 세워 나오는 절대자, 즉 하나님이 존재한다 할진대 그 하나님 앞에 반대되는 것들이 있으니 그것이 죄요, 마귀요, 사탄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원수인 동시에 하나님의 원수라고 규정짓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주장하기 전에 우리의 주변에 누가 있는가를 먼저 알아야겠습니다. 우리의 주변에는 하나님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수인 악한 신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창조주 하나님은 인간을 원수의 품에 넘겨주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인간을 위해 지어진 모든 피조물도 악한 원수 사탄에게로 넘어간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의 주인이요, 우리의 몸의 주인이요, 우리의 생활의 주인이시지만 우리 인간이 어찌어찌한 곡절로 인하여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되는 입장에서 허덕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누구로 말미암아 이렇게 되었느냐? 하나님의 원수인 악신(惡神)으로 말미암아 이렇게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인간에게는 몸이 있고 마음이 있습니다. 더 나아가 심정이 있습니다. 심정과 마음과 몸을 갖추어 세계를 대해 나가는 데 있어서는 사정에 엉클어진 생활 무대를 떠나서 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느끼고 보고 만지고 먹고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누가 점령하고 있느냐? 하나님이 주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수 사탄이 점령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원수 사탄이 주관하는 세상을 돌이켜 본연의 상태로 회복하려고 하십니다. 이것이 구원섭리입니다. 회복하는 데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이뇨? 원수를 항복시키지 않고는 회복할 수 없습니다. 장차 천상(天上)과 지상(地上)에 큰 싸움이 벌어지게 되는데, 그 싸움은 하나님이 원수, 즉 마귀 사탄을 굴복시키기 위해 벌이는 싸움입니다. 이것이 제일 큰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역사노정에서 인간들은 부분 부분, 즉 지역이면 지역, 종족이면 종족끼리 싸움을 해 나왔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싸움을 해결하기 위하여 인간들을 선한 편으로 끌어 왔습니다. 악한 편으로 끌려가면 또 끌어오면서 개인에서부터 세계까지 끌고 나오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악한 편이 이긴 것 같지만 결국은 선한 편으로 역사를 끌고 나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대원수를 알아야 되겠습니다. 어떤 원수가 대원수인가? 이를 갈면서 보복하겠다고 하는 개인의 원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원수 중의 대원수가 누구뇨? 하나님의 창조 위업을 이루려 했던 이 세계를 파탄시킨 사탄, 마귀, 악신이 바로 우리의 대원수입니다. 그는 온 피조세계의 원수인 동시에 우리 전인류의 원수인 것입니다. 이 원수를 갚기 위한 노정(路程)에서 인간들은 그 싸움의 재료로 사용되어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싸움은 이미 벌어졌습니다. 여러분이 편안히 잠을 자는 밤에도 선의 하나님께서는 원수를 격퇴하기 위한 싸움을 하고 계십니다. 밤이나 낮이나 이 싸움을 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원수를 갚아야 합니다. 이런 대원수가 우리 앞에서 생명을 노리고 이념을 파탄시키고 역사적인 행로를 더럽히면서 우리를 악의 함정으로 몰아넣으려는 움직임이 지상에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건이 생기면 그 사건을 중심삼고 오른편이 생기고 왼편이 생기는 것입니다. 좌익이 있는가 하면 우익이 있습니다. 전후가 있고 상하가 있습니다.
사탄이 점령하고 있는 지역은 하늘땅 전체입니다. 이 땅은 사탄이 점령한 지역, 원수가 점령한 지역이라는 것입니다. 본래 인간은 원수에게 점령 당해 살도록 되어 있지 않았지만 주인의 가르침을 어김으로 말미암아, 주인의 명령을 어기고 죽는다는 그 길로 감으로 말미암아 원수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포로가 되었어요. 그러한 종족으로 번식되어 내려온 것이 오늘날의 인류입니다. 천지에 대원수가 있나니 그는 역사적인 원수요, 이 시대적인 원수입니다. 또 미래에도 원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는 인류의 원수인 동시에 만물의 원수요,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역사적인 전쟁, 혹은 천주적인 투쟁시기가 온다 할진대 그 때에 선두에 서서 사탄을 박멸시킬 수 있고 굴복시킬 수 있는 의(義)의 정병(精兵)이 있다면 그는 필시 하늘의 아들딸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종교니 선이니 하는 것들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편안히 잘사는 것이 아닙니다. 남이 부러워할 정도로 땅에서 잘사는 것이 아니라, 나를 넘어서 내 후손까지 침범하여 유린하는 원수 사탄을 격멸시켜 지구상(地球上)에서 몰아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목적이요, 하나님의 목적이요, 온 피조세계의 목적입니다. 또한 그것은 이제까지 싸워온 목적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의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먹는 밥도 여러분의 것이 아닙니다. 밥을 먹고서 움직이는 여러분의 몸뚱이도 여러분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것이 아니에요. 그러면 누구의 것이뇨? 마귀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을 지배하고 있는 이 마귀를 박멸시키기 위한 기지로 세워 놓은 것이 무엇이냐 하면 양심입니다. 양심은 시간성을 넘어서 여러분과 투쟁하고 있습니다. 이 사회와 투쟁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역사 노정에서도 투쟁해 나왔고, 오늘 이 시대에도 투쟁하고 있으며, 내일의 역사노정에서도 투쟁해야 할 일선의 장병이 바로 여러분의 양심입니다.
내 한 개체에는 하늘의 작전본부도 있고 사탄의 작전본부도 있습니다. 우리의 양심을 근거로 하는 것이 하늘이요, 우리의 몸을 근거로 하고 있는 것이 사탄입니다. 이 양심과 몸이 싸우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아우성치고 싸우며, 쓰러졌다 일어서고, 맹세했다 또 꺾어지고, 결심했다 또 무력해지는 생활을 반복해 나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몸을 쳐서 일어서지 못하게 할 수 있는 양심의 권한을 회복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최고의 목적입니다.
종교적인 술어로 말한다면 우리의 마음은 천국에 연하여 있고 우리의 몸은 지옥에 연하여 있다고 하겠습니다. 마음을 다스리는 신은 하나님이요, 몸을 다스리는 신은 마귀라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여러분, 하나의 곤충을 보아도 상대적인 관계로 대할 때는 상충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되었느냐? 하나님이 잘못 지으셔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원래는 인간의 몸과 마음이 상대적으로 무한히 주고받고, 주고받고, 또 주고받을 수 있게 지으셨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주려 해도 받지 않고 서로 싸우기만 하는 것은 타락의 보응입니다.
이 싸움을 누가 정비해야 되느냐? 누가 책임을 져야 하느냐? 하늘과 인간이 합동작전을 해서 정비하지 않는 한 신앙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습니다. 이념이니 이상이니 해도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오늘날 인간들은 ‘양심적으로 살자’, ‘선을 지향하자’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이 땅이 사탄의 점령권 내에 있기 때문에 수많은 민족으로 갈라졌습니다. 민족과 민족간의 풍습이 다르고 전통이 다릅니다. 이 사회는 사탄이 주관하고 있고 사탄을 중심삼고 전통과 풍습이 뿌리박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사탄들을 박멸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늘은 시대 시대마다 인간이 새로운 양심의 충격을 받도록 역사하시면서 그들의 마음과 이념을 개척하시고 혁명을 통하여 사탄의 세력을 깨뜨려 나오셨습니다. 그러니 지금까지 얼마나 수고하셨겠습니까? 우리가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역사노정에서 하나님은 싸워 나오신 것입니다.
인간이 이 땅 위에서 아무리 선을 위해 외친다 해도 100년 이상을 계속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선의 세계를 이룰 때까지 원수를 대해 싸움을 계속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금까지 원수 앞에 하늘 편의 정병을 내세워 행진 명령, 출동 명령을 해보신 적이 없습니다. 지금까지의 역사노정에서 하나님은 새로운 이념을 세워 인간들의 마음을 움직이시면서 악한 세상을 정복할 수 있는 정병을 모으셨습니다. 이것이 지금까지의 역사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원수를 갚아 줄 수 있는 군대가 있어야 할 텐데 아직까지 그런 군대가 없습니다. 선한 정병이 모아진다면 그 선한 정병과 합동작전을 펴서 원수인 마귀 사탄을 사로잡아 무저갱(無低坑)에 가두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이 목적이 이루어져야 이 땅에 평화가 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좀더 차원 높게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보통 사람들은 일상 생활적인 감정을 통하여 자기와 대립된 자, 혹은 몇 대 선조로부터 무슨 상충이 있어서 원한이 맺힌 자를 원수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원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이 원수를 갚기 전에는 어떤 원수도 갚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 개인적인 원수는 문제가 아닙니다. 개인적인 원수를 갚다가는 선한 사람이 희생을 당합니다. 그러니 참으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랑을 강조하고 원수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면서도 왜 끝날에 심판한다는 명제(命題)를 세웠느냐? 그것은 원수 사탄을 위해 기도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인간을 타락시킨 장본인인 사탄을 위해 기도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 원수에게 농락당하고 억울함을 당하는 인간을 위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무엇 때문에 심판이라는 명사를 세웠겠습니까?
하나님은 공의(公義)의 심판주이십니다. 전세계에 있는 하늘 편의 선한 정병들은 하나로 뭉쳐 하나님의 출동 명령에 따라 이 악한 세상을 들이치고 사탄을 사로잡아야 됩니다. 그때까지 각자가 준비를 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날을 맞기 위해 6천년이란 역사를 끌고 나오셨으나 아직까지 그 한 날을 맞지 못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인간이란 마음과 몸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분석해 볼 때 우리의 마음이 절대적으로 하늘 편에 서 있느냐?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은 어떤 사상적인 혹은 이념적인 환경에 좌우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먼저 침범을 당한 곳이 어디냐? 먼저 침범을 당한 곳은 몸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내 마음에서 지금까지 작용하고 있는 양심의 기준은 아담 해와가 타락하기 전의 기준입니다. 본래의 선한 사람, 완성한 사람이 지녀야 할 양심 기준이 아닙니다. 이것이 옳은지 저것이 옳은지 완전하게 판결을 지을 수 없는 양심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타락하기 전 미완성한 아담 해와의 양심 기준이 오늘날 세계 인류의 양심과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만일 타락하지 않았다면 이 양심 기준이 어디까지 올라갔겠느냐? 하나님에 대한 해명이 필요 없는 기준까지 올라갔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라는 것을 자동적으로 느끼는 기준까지 올라갔을 거예요. 그러한 양심 기준이 완결되었다면 그 양심이라는 씨에서 태어나야 할 것이 무엇이뇨? 그것은 심정입니다. 사랑이란 말입니다. 인간이 그러한 기준을 갖추었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만우주를 지배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시간성을 초월합니다. 공간성을 초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양심 작용도 심정을 따라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어떤 일이 벌어졌느냐? 본래 하나님이 세우신 양심의 기준, 즉 타락하지 않고 완성한 아담 해와의 양심 기준을 갖출 수 없게 되었습니다. 타락하지 않고 완성한 아담 해와의 심정을 인간이 갖추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창조 계획대로 아담 해와가 완성하여 완성한 심정을 갖추었다면 하나님을 몰랐겠습니까? 알고도 남는다는 것입니다. 천사가 누구이며 만물이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靈長)으로서, 심정에 있어서나 마음에 있어서나 몸에 있어서 어떠한 미비함도 없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의 심정과 연결되어 그 절대자를 대신하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지어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마음 기준은 타락한 아담, 타락한 해와의 마음 기준에서 출발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의 마음으로는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 모릅니다. 아담 해와도 하나님이 나타나서 따먹지 말라고 명령하니 그대로 믿었다가 하나님이 나타나지 않으니까 자기들 마음대로 행동하여 타락한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몸을 굴복시키지 못하는 원인은 어디에 있느뇨? 마음 기준이 사탄에게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오늘날 땅 위에 살고 있는 인간들의 마음이 몸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본성적으로 남아진 양심 기준이 하늘을 향하여, 천륜을 향하여 움직이는 방향성을 잃지 않기 때문에 이것을 뚫고 나온다는 것입니다. 과거를 뉘우치는 순간 폭발합니다. ‘아이고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할 때 폭발된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틈만 나면 폭발되어 나오고자 하는 마음의 작용을 여러분은 지금까지 생애노정에 혹은 시간 시간 생활과정에서 무수히 유린했습니다. 그러기에 사탄의 종, 사탄의 아들딸이란 말입니다.
만일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뜻이 완전히 이루어진다면, 우리의 양심을 하나님의 창조이념으로 꽉 채우는 날에는 이 몸 같은 건 문제가 안 됩니다. 몸뚱이가 문제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데 이 양심 기준이 하나님이 세워 놓으신 기준만큼 차지 않았을 때 타락하여 사탄에게 깔려 버렸기 때문에 오늘날 인간들은 그 원칙의 기준까지 올라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사망의 장벽을 세워 놓고 있습니다. 그 밑에 깔려 있는 것이 우리의 몸입니다. 하나님 앞에 원수가 된 사탄은 본래 천사장입니다. 하나님이 주체이면 천사장은 영적(靈的)인 대상(對象)입니다. 마음은 하늘을 상징하고 몸은 그 대상(對象)을 상징하기 때문에 사탄은 인간의 몸을 발판으로 활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종교든지 몸을 치는 것입니다. 어떠한 국가나 어떠한 주의를 정복하는 것이 종교의 목적이 아니라 몸을 정복하는 것이 종교의 목적입니다. 그리하여 본연의 양심 기준에 들어가려 하는 것입니다. 몸이 요구하는 모든 조건을 무시해 버리고 마음문을 열고 아담 해와가 타락하지 않고 올라가야 했던 양심 기준에 들어서게 될 때에 비로소 거기에서 평화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사명은 무엇이뇨? 예수는 말하였습니다, ‘천국은 네 마음에 있다’고. 사탄을 굴복시켜 안식처를 만들지 못하면 지옥입니다. 천국 가겠다고요? 그런 망상(妄想)은 버리십시오. 알고 보니 믿었다는 조건만 가지고는 천국 갈 수 없습니다. 신앙의 힘을 갖고 하늘과 대적(對敵)하고 있는 사탄, 즉 이 몸을 때려잡은 승리자가 되어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것만 통과하면 지옥은 안 갑니다. 절대 안 갑니다. 오늘날 인간들이 수양이니 도덕이니 하지만 그것 가지고는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들이 손을 들고 항복할 수 있겠습니까? 항복할 수 없습니다. 왜?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면 어떻게든 이 길을 뚫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타락인간은 세상에 대한 욕심밖에 없습니다. 땅만 주관(主管)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본래 인간은 땅만 주관하게 지어지지 않았습니다. 영계(靈界)까지 주관하게 지어졌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이것을 모르고 있다는 말입니다. 인간을 주관할 하늘은 있으되 하늘의 명령을 통하여 직접적으로 주관할 수 있는 다리가 없습니다. 인류의 시조(始祖)가 그것을 끊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후손 중에도 그것을 연결시킨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본부에는 작전참모부가 있어서 모든 계획을 하고 있지만 그 계획을 연락해 줄 전화 줄이 끊어진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이어 놓는 날에는 양심의 빈 자리를 채울 수 있는 힘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생명력이 흘러들어온다는 것입니다. 즉 타락하지 않고 완성한 본연의 양심 기준을 세우는 날에는 몸은 문제없다는 것입니다. 몸뚱이 정복은 문제없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런 마음 기준을 세워 놓고 하나님이 모른다고 하실 수 없는 심정의 인연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인간을 부자(父子)로 인연맺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요, 인간은 아들이라는 인연을 맺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오늘날 인간 가운데 그런 인연을 맺은 사람이 있습니까? 한 사람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감정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면서 느끼는 모든 감정은 양심의 완성 기준에서 하나님의 심정과 연락되어 나온 것이 아닙니다. 아니란 말입니다, 아니에요. 그러면 어디서 나온 것이냐? 악신(惡神)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악신이 우리의 마음을 점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악신의 핏줄이 우리의 마음과 우리 몸의 세포에까지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원수가 하늘에 있는 줄 알지만 여러분의 피와 살이 원수 사탄의 요소입니다. 피와 살이 원수입니다. 원수의 피가 몸에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할 때 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껴야 되겠습니다. 이 고깃덩이에, 이 세포에 대원수의 피가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피와 살에 원수의 뿌리가 연하여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이러한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이런 고깃덩이를 잘 보양(補養)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이 있기 때문에 종교는 이 원수를 때려잡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는 원수는 네 집안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의 몸을 성전(聖殿)이라고 하였지요? 이 몸은 성전이니 곧 집입니다. 집안에 원수가 있다고 했으니 몸이 곧 원수가 되지요. 그러니 이 몸을 정복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창조이념을 완수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방법으로 원수를 정복해야 될 것인고?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어떤 원수가 있다면 그가 어떻게 해서 원수가 되었는지 그 사정을 모르고서는 그를 정복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알아야 됩니다. 아담 해와에서부터 어떻게 해서 몸이 원수가 되었고, 원수 사탄이 우리의 선조들을 어떻게 농락했으며, 또 예수를 어떻게 했고, 나를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역사적인 원수를 알아야 합니다. 역사적인 원수로서 행동한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또한 이 시대의 원수가 나를 침범하여 나를 농락하고 있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내 생명을 미래에까지 영원토록 종으로 만들고자 하는 원수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원수들의 세계가 지옥입니다. 이놈의 원수를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원수를 모르고서는 원수를 굴복시킬 수 없습니다. 또한 원수를 갚으려면, 먼저 천상(天上)과 지상(地上)에 뿌리박고 있는 원수에 대한 하나님의 원한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원수를 대한 하나님의 원한이 누구 때문에 생긴 것이냐? 땅 위에 있는 인간들 때문입니다. 땅 위에 살고 있는 이 무리들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본래 어떤 무리였느뇨? 하나님의 품에서 애지중지 사랑을 받던 무리였습니다. 하나님의 피를 받은 하나님의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요, 세포 중의 세포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던 인간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칙을 세워 놓고 만우주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그 기준을 무시하는 날에는 온 피조물이 다 깨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인간들은 그러한 기준을 중심삼고 서로 좋아하며 살아야 했는데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그 기준을 놓쳐 버리고 오른손엔 하나님을 붙들고 왼손엔 이 땅을 붙들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인간을 끌어다 접붙이려는 놀음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섭리입니다.
타락이 무엇이뇨? 하나님과 심정적인 인연을 배반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양심의 기준을 완성하지 못하고 배반한 것이 타락입니다. 하나님의 이념을 세우지 못하고 배반한 것이 타락이라는 말입니다. 초점은 하나님의 심정 기준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늘은 인간을 찾아오십니다. 찾아오실 때에는 ‘너희들의 몸뚱이를 사랑하라. 어떠한 학문이나 지식을 사랑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찾아 나서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찾아 나서라.’고 하셨어요. 이것이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도의 길을 세워 나오시는 기준입니다.
이러한 곡절을 모르고, 사탄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원수가 되었는지, 우리 선조가 어떤 죄를 지어 하나님으로부터 쫓겨났는지를 모르고 어떻게 원수를 정복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원수에 대한 한을 풀 수 있겠습니까? 맺혔으면 풀어야 합니다. 맺힌 것을 풀려면 반대 방향으로 뚫고 나가야 합니다. 원수들이 못 나가게 하더라도 뚫고 나가야 합니다. 원수의 장벽을 뚫고 나가기 위한 것이 지금까지의 인류역사입니다.
인간들은 앞으로 세계가 하나의 세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알고 그 길을 찾아 나가고 있으되, 양심과 심정이 통일되어야 한다는 것은 모르고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연결시켜야 되겠느냐? 역사적인 사조(思潮)를 볼 때, 인간들은 하나의 세계를 향하여 나오되 하나님이 원하시는 본연의 양심과 그 양심에 불어넣고자 하시는 본연의 심정을 모른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외적으로, 환경적으로, 상징적으로 수습해 나오는 것이 사상이요, 주의입니다. 사상이나 주의는 양심적인 감흥을 일으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목적이 땅에 있다면 그것은 사탄입니다.
하늘을 통하여 인간의 양심을 폭발시켜서 환경을 혁명시키는 운동이 이 시대에 나오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 일면을 갖추고 나온 것이 오늘날의 좌익입니다. 유물사관이에요. 이것은 이 땅 위에서 어느 정도까지는 득세(得勢)하게 됩니다. 그러나 천상(天上)의 인연을 중심삼고 나오는 주의 앞에는 손들어야 됩니다.
인간이 최후의 안식처로 삼을 곳은 어떤 곳인가? 마음이 편안하다고 행복하지 않습니다. 마음 가운데 심정의 안식처를 개척해야 합니다. 좀 어려운 말이지요. 마음이 편안한 환경을 가졌고 자기 마음대로 세상을 주관할 수 있는 기준을 가졌다 할지라도 그 마음에 핵심이 없으면 안 됩니다. 그 핵심은 심정입니다. 그 심정을 채워 놓아야 그것이 만사(萬事)의 동기가 되어 조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부모가 좋은 까닭이 무엇입니까? 부모의 마음과 내 마음이 같기 때문입니다. 심정이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떼려야 뗄 수 없는, 환경을 넘고 시대를 넘을 수 있는 내용이 있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처해 있는 우리들, 심정을 잃어버리고 양심의 중심을 잡지 못하고 생활의 목표를 잃어버린 몸을 가진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될 것이뇨? 한꺼번에 다 안 됩니다. 악한 것은 떼어 버려야 합니다. 떼어 버려야 돼요. 양심이 하늘 편에, 선한 세계에 제일 가깝기 때문에 양심이 문제가 되지 몸뚱이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에서는 몸을 치는 것입니다. 밥을 먹는 것이 다 뭐야! 원수의 배통을 이겨야 합니다. 몸뚱이를 편안하게 하는 것은 사탄을 안식시키는 것입니다. 이 몸뚱이에 대해 적개심을 가져야 합니다. 원수인 이 몸을 대해 보복할 자신을 가진 자라야만, 그런 자신을 갖고 승리한 자라야만 하늘의 정병이 될 수 있습니다. 출발 기준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크나큰 선의 이념을 중심삼고 몸의 정욕이나 식욕 등 욕망의 일체를 자유자재로 주관할 수 있는 사나이나 여인이 되지 않는 한 하늘이 세우실 수 없는 것입니다.
종교에서 말하는 끝날이 되면 어떠한 현상이 벌어지느뇨? 누구의 명령을 받지 않고도 세상만사를 다 잊어버리는 자리에 들어가게 됩니다. 지금까지 아들이니 처자니 무엇이니 무엇이니 하던 모든 것이 전부가 꿈같습니다. 이런 심정적인 혁명이 벌어지지 않는 한 천국 백성이 못 됩니다. ‘아이고 내 사랑하는 아들딸, 아이고 내 사랑하는 남편 아내, 아이고 내 사랑하는 어머니 아버지.’ 하는 것들이 다 어디서부터 출발한 것입니까? 사탄을 근거로 하여 인연된 것들입니다.
대심판이 무엇이뇨? 사탄세계의 무대를 쳐갈기는 것입니다. 사탄세계와의 심정의 인연을 끊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는 부모와 자식을 배반하게 하는 사조(思潮)로 흘러갑니다. 암만 붙들고 앉아 있어도 갈라 세운다는 것입니다. 형제와 형제가 싸우게 만들고 부부가 서로 싸우게 만듭니다. 그래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것을 세워야 합니다. 하늘의 심정을 다시 접붙여 주려니 그런 놀음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는 이 땅 위에 와서 ‘누구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과연 메시아입니다. 이런 원칙적인 관(觀)으로 볼 때, 과연 예수는 메시아입니다. 어떤 메시아? 사랑의 구주입니다, 사랑의 구주. 고마운 일입니다. 역사노정에서 이러한 부르짖음이 없었던들, 오늘날 우리들은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고마운 일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칭하고 세상의 부모를 버리면 하늘 부모를 주겠다는 것입니다. 하늘 부모를 주겠다는 말이에요. 여러분을 낳아 준 부모가 진짜 부모예요? 나를 지으시고 생명까지 불어넣어 주신 부모가 진짜 부모입니다. 사랑하는 육신의 부모 대신 하늘의 부모를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세상 것과 합동작전을 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 것은 원수입니다. 원수! 원수란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가 복음을 외치고 나설 때 ‘누구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 ‘아비나 어미나 혹은 처자나 시어머니나 그 누구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과연 메시아입니다. 성경 66권 다 필요 없습니다. 자기 자식 이상 하나님을 더 사랑하면 됩니다.
어떻게 해야 천당 갈 수 있느냐? 천당 갈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이냐? 자기 아들딸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남편이나 아내보다도 주님을 더 사랑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 몸보다도 성신을 더 사랑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삼위일체입니다.
마음은 몸의 신랑이고 심정은 마음의 신랑이며 하나님은 우리의 심정의 주인이십니다. 또 예수는 신랑입니다. 성신은 신부입니다. 그래서 마음적인 형이 예수요, 몸적인 형이 성신입니다. 천지를 대신하고 심정의 하나님을 대신하여 마음적인 형인 예수와 몸적인 형인 성신이 역사(役事)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는 마음세계를 찾아 나가는 중심입니다. 신랑이에요. 우리가 마음으로 그리워하는 것이 무엇이뇨? 신랑입니다. 신랑! 우주가 생겨난 이후 처음이자 마지막인 혁명을 제시하기 위해 오셨던 분이 예수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이런 견지에서 볼 때 기독교인들, 끝날에 하나님 앞에 서야 할 기독교인들이 ‘하나님, 내 아들 아무개를 데려왔습니다. 또 누구를 데려왔습니다’라고 하는 것은 안 통합니다. 이들 모두 사탄을 근거로 하여 출발하였기 때문에 그들이 사랑하는 일체를 하나님께서 대해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탄이 좋아하는 무대에서부터 출발했으니 원수입니다. 원수! 이것을 생각할 때는 이가 갈립니다. 오늘날, 역사의 종말까지 왔지만 아직까지 심정의 혁명을 주창하지 못했습니다. 부분적으로 해 나왔습니다. 기독교에서부터 부분적으로 해 나왔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가정도 돌보지 않고 돌아다니지 않아요? 예수에게 미쳐서 말이에요. 그래야 됩니다. 그래야 돼요.
도의 길은 독신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여자는 여자대로 독신 생활을 하고, 남자는 남자대로 독신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제일 먼저 채워야 될 것은 무엇이뇨? 마음입니다. 마음을 채워서 천정(天情)과 인연을 맺어 놓은 후에 세상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곡절의 동기를 풀기 전에는 하나님의 원수를 갚을 수 없습니다. 원수는 영원히 남게 되는 것입니다. 똑똑히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낭설(浪說)이 아닙니다. 사실입니다, 사실. 그래서 예수는 모친인 마리아에게도 ‘여인이여, 너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뇨?’ 했던 것입니다. 세상적인 혈육의 인연을 갖고 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의당한 말입니다. 의당한 말이에요. 하늘을 사랑해야 할 이스라엘 민족, 하늘의 뜻을 받들어야 할 유대교인들은 자기의 아들딸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한다는 인정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탄 세상에서 가지고 놀던 찌꺼기를 하나님이 받아 주실 것 같습니까? 안 받아 줍니다. 안 받아 줘요. 원수의 손길이 닿은 것을 취하실 것 같습니까?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 몸에는 독소가 있습니다. 악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는 사탄의 피 살이 스며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 눈, 이 몸, 이 입, 이 귀, 이 모두가 사탄의 행락(行樂)과 사탄의 이념을 세워 나오는 통로입니다. 그래서 불교는 세상을 멀리하고 산중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래 가지고는 안 됩니다. 악과 싸워서 승리해야 하는데 싸움도 안 하려고 합니다. 기독교는 세상에 속해 있으면서 악과 싸워 이기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적인 것과 싸워 이기겠다고 하는 무리가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원수 중에 제일 큰 원수는 어떤 원수뇨? 사업상의 원수가 아닙니다. 제일 큰 원수는 사랑하는 남편이나 아내를 빼앗아 가는 사람입니다. 이 이상 큰 원수는 없습니다. 여러분도 다 알겠지만, 본래 그런 곡절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그런 선조들에게서 피 살을 받아난 우리는 몸에 대한 애착심을 전부 버려야 합니다. 굶주려 보아야 됩니다. 도의 길은 굶주리는 길입니다. 이 몸이 피곤해서 나가떨어질 때까지 노동판에 나가 일도 해봐야 합니다. 막 쳐야 됩니다.
그런 자리에 나간 사람은 부모가 와서 ‘야, 아무개야.’ 해도 늠름히 넘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아내가 과거의 인연을 내세우면서 나타나도 단연히 끓고 나서야 됩니다. 세상의 어떠한 욕망이나 주위의 인연이 휩쓸어 오더라도 그것을 끊고 나서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하시고 다시 보내 주십니다. 너희 아들딸을 구하고 부모를 구하고 아내를 찾아가라고 다시 보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예수는 이러한 사명을 하기 위해 이 땅에 와서 제자라고 세워 놓긴 하였지만, 그러한 제자를 갖지 못하였습니다. 오늘날까지 수천년 동안 믿는다 하는 신앙자들은 세계적으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있었으나 그러한 신자는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통일이념을 갖고 나선 우리들은 무엇을 해야 하느냐? 심정적인 인연을 회복해야 합니다. 목적은 이것입니다. 잘 먹고 잘 사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거지 할아버지의 옷을 입었든지 얼굴이 찌그러졌든지 어떻게 되었든지간에 하나님이 ‘오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실 때에 ‘아버지!’ 하고 달려나가 통곡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심정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오늘날 인간들은 아버지가 아버지인지, 누가 누구인지 모릅니다. 깜깜천지에서 살고 있습니다. 아버지를 잃어버리고 보지 못했으니 그 아버지가 어떻다는 것을 설명해 주는 사람이 나와야 합니다. 아버지가 어떻고 어떻다고 설명해 줄 수 있는 내용을 갖고 오는 사람이 참목자입니다. 그 모습을 바라볼 때, 자신도 어쩔 수 없이 자기의 마음이 그리로 끌려가는 핏줄의 인연을 느낄 수 있는 지도자를 만나야 됩니다. 여러분, 예수가 이 땅 위의 인간들 앞에 참아버지로 오셨지만 그런 인연을 느낀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면 사탄세계에서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이뇨?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해명하여 하나님도 눈물지으실 수 있는 자리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자가 하나님의 아들딸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당신은 역사노정에서 수많은 원수들 앞에 농락받고 고충을 겪으시면서도 저희들을 아들 삼고 딸 삼기 위하여 피눈물의 역사노정을 개의치 않고 이 시간까지 참아 나오신 저희들의 참아버지시옵니다. 당신의 심정은 이러하고 당신의 마음은 이러하고 당신의 몸은 이러한 것을 알았습니다.’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대성통곡을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신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보좌를 생각하지 않고 대성통곡을 하실 것입니다. 그 모습이 남루하고 타락세계에서 지친 형편없는 모양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위신을 잊어버리고 통곡하시게 만들 수 있는 자라야만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들은 많은 욕심을 갖고 있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을 욕먹는 자리에 몰아넣어서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하늘의 아들딸이 될 수 있는 인연을 맺는 자리에 세우고 싶습니다. 여기에 들어와 말씀을 들으면, 즉 하나님이 어떻다는 것을 보여 주다시피 해명해 주는 말씀을 들으면 하나님을 붙들지 않을 수 없는 사무친 마음이 우러날 것입니다. 그런 느낌이 일어나지 않는다 할진대 그 운동은 세계적인 운동이 아닙니다. 가다가 깨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통일교회를 믿고 여기에 나온 여러분! 원컨대 여러분은 그러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런 사람이 되어 있습니까? 그런 운동이 내 개체를 중심삼고 벌어져야 합니다. 참다운 양심을 중심삼고 참길을 찾아 헤매는 사람에게 하나님을 해명해 주면 자기도 모르게 휩싸여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돌아가게 할 수 있는 것은 천적인 내용, 본연의 양심의 힘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갖고 있는 양심이 아니라 본연의 양심의 힘입니다. 그 본연의 양심의 힘과 본연의 심정이 폭발되어 나오는 느낌을 신앙노정에서 찾지 못한다 할진대 천국 못 갑니다. 하나님의 아들딸로 서지 못해요.
하나님의 원수를 갚는 데는 창으로 찔러서 갚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갚아야 하느냐? 절대자이신 하나님 앞에 사탄을 해명해야 합니다. 하나님, 이렇고 이렇고 이렇지 않습니까? 할 때 하나님이 ‘오냐, 오냐’ 하실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몽땅 참소해서 사탄을 갈겨 버려야 됩니다. 사탄은 심정의 도적입니다.
그러면 사탄이 어찌하여 하나님의 대원수가 되었느뇨? 인류를 빼앗아간 그날부터 대원수가 되었거늘, 원수가 된 내용이 무엇이뇨? 하나님께서 창조이념으로써 인류시조와 영원한 인연을 맺으려던 천적인 사랑의 인연을 빼앗아 간 것입니다. 그러니 대원수입니다. 대원수예요. 이제 이 사실을 우리는 알았습니다.
사탄의 역사는 내 몸에서부터 벌어집니다. 그러니 내 몸을 정복해야 합니다. 이것을 생각할 때 굶고 헐벗고 욕먹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철창에 갇히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죽기 전에 원수를 갚아야 합니다. 여러분, 죽기 전에 원수를 갚지 않으면 안 됩니다. 원수를 갚고 죽어야 합니다. 참부모의 원수, 참신랑 참신부의 원수, 참자녀의 원수가 하늘땅에 남아 있거늘 이 원수를 박멸시켜야 할 책임이 기독교에 있는 것입니다.
원수를 박멸시키려면 하나님의 심정을 유발시켜야 됩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유발시키려면 하나님의 속사정을 알아야 합니다. 몰랐으니 알아야 합니다.
아담 해와를 지으시고 그토록 기뻐하신 하나님이지만, 아담 해와가 타락했을 때 그토록 서러워하신 하나님이란 걸 알아야 돼요. 아벨과 가인을 중심삼고 싸우신 하나님, 노아를 중심삼고 싸우신 하나님, 아브라함, 모세, 예수를 중심삼고 수천년 동안 싸워 오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아버지인 것을 알게 될 때 심정이 터져 나갈 것입니다. 충격을 받아야 합니다. 마음 깊이 충격을 받아야 합니다. 세상의 어떠한 설교자, 어떠한 스승의 말에서 받아 보지 못한 감동을 받아야 합니다. 역사적으로 시대적으로 미래적으로 심정의 인연을 증거할 수 있어야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니 원수를 갚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대원수를 갚아야 되겠습니다. 이 땅은 선한 사람들이 피를 흘린 땅입니다. 원수 때문에 피를 흘린 땅이에요.
하나님을 대신하여 여러분들을 내세우는 하나님의 마음은 처량합니다. 인간이 어찌하여 이런 길을 거쳐서 하늘을 배반한 보응을 탕감해야 되는고? 곡절이 이렇게 되었으니, 그것을 풀려면 반대의 길을 가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버지가 그리워 몇 번이나 통곡해 보았습니까? 잃어버린 아버지가 울부짖고 계시는 곳을 찾기 위해 다리가 부러져도 개의치 않고 산이나 들을 허덕이며 다녀 보았습니까? 아버지가 나를 그리워하며 통곡하시는 자리가 있을 것이거늘, 그곳이 어디일 것이뇨? 그곳을 찾으려 해매어 보았습니까?
오늘날 우리들은 전세계 앞에, 온 천주 앞에 절대적인 내용을 주장하며 나섰거늘, 아는 것이 무엇이뇨?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라는 것과 아버지의 심정이 어떻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니 이제 ‘아버지께서는 효자 효녀의 모습을 바라보시며 웃고 즐거워하시기 위해 인간을 지으셨는데 슬픔이 웬 말입니까? 탄식이 웬 말입니까? 곡절이 웬 말입니까? 이 모두가 아들딸이 못된 저희들의 죄입니다’ 하며 통곡하는 무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돌아갑니다. 그래야 돌아가요. 그래야 새것이 됩니다.
우리는 다 잃어버렸습니다.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 자신도 가진 것 없습니다. 나는 명예도 원치 않습니다. 여러분의 스승이 되는 것도 원치 않습니다. 단 쓰러지는 그 순간에 ‘내가 사는 동안 아버지를 대신하여 이것을 좀더 할 걸…. 하는 후회를 남기지 않는 자리에서 죽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할 뿐입니다.
외로운 무리들을 앞에 세우게 될 때 하늘은 고통스럽다는 거예요. 마음에서, 심정에서 억제할 수 없는 그 무엇이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인연을 박차고 천정(天情)으로 돌아섰습니다. 돌아선 발걸음이니 낙망의 모습으로 갈 것이 아니라 힘차게 가야 되겠습니다.
하늘은 몇천 년씩이나 기다리셨습니다. 지금도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사망의 골짜기를 지나갈지라도 기다리십니다. 여러분이 나가서 허덕일 때마다 하늘은 기다리십니다. 여기 이 자리에서 외치고 있는 사람이 잘 알고 있습니다. 마지막이고 끝인 줄 알았으나 끝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절망으로 쓰러질 줄 알았으나 하늘이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참부모를 붙들고 통곡하는 무리, 참부모를 찾기 위하여 허덕이신 아버지의 팔을 붙들고 통곡하는 무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참부모 앞에 세워지는 참다운 자녀가 되는 동시에 참다운 형제를 그리워하는 여러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여러분이 갖추어야 할 내용입니다.
인간은 종적으로 부모이신 하나님을 그리워하고 그 하나님 앞에 반드시 효성의 도를 세워야 합니다. 그러나 타락의 한을 풀지 못한 우리입니다. 효자가 무엇입니까? 탕자의 비유를 여러분은 알지요? 눈물을 머금고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와 같은 마음을 갖고 돌아오는 탕자 앞에 달려나갈 수 있는 형제가 있다면, 아버지는 그에게 전체의 유업(遺業)을 넘겨주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알았습니다. 세상의 탕자들도 한 혈육지친(血肉之親)임을 알았습니다. 역사는 흘렀으나 그 심정에 있어서는 사망의 아들딸들을 잊지 못하시고 6천년의 곡절을 거치시고도 그들을 놓지 못하신 아버지입니다. 아버지의 심정과 원한이 그들에게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하늘을 대하게 될 때, 벅찬 심정에 눈물이 앞놓여 가는 부모의 심정을 여러분은 가져야 합니다. 그러한 심정에 불타십시오. 삼복더위에 짐을 지고 가는 사람이 있거든 그를 붙들고 통곡하여 아버지의 심정, 어머니의 심정을 느껴 보십시오. 그가 수고하는 것은 나 때문이거늘, 내가 짐을 지겠다고 해보십시오. 가는 길을 막고, 형제여! 가야 할 길이 남아 있는데 어디로 가고 있느냐고 애달픈 마음을 갖고 통곡해 보십시오. 그런 여러분이 되었다 할진대, 여러분이 가는 길에는 하늘이 함께할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람도 동반자가 없었습니다. 외로운 길을 걸어왔습니다. 한스럽고 분하고 통분한 사실이 가슴에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수고에 비할 수 없고 6천년 동안 한을 품고 나오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것을 나는 느낍니다. 그러나 내가 진 책임을 감당하기에 부족한 것을 느끼고 통탄할 적마다 하늘이 붙들어 주시고 권고하여 주심을 또한 나는 압니다. 남이 도망치는 자리에서도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맞이하여 그 하나님께서 내 아들딸이라고 자랑하실 수 있는 아들딸이 되십시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리에서 여러분을 고대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되었을 때 제자들은 십자가가 두려워 도망갔습니다. 그러나 강도일망정 죽는 예수의 처지를 서글프게 생각하면서 예수의 몸을 손으로 만져 보고 싶고 건드려 보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 찼을 때, 그 강도는 구원을 얻었습니다. 하늘의 혈족은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말만으로 안 됩니다. 말 많은 사람은 많습니다. 수단과 방법은 수천 수만 가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진실 중의 최고의 진실은 사랑의 심정입니다. 사랑의 심정에는 수단과 방법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만이 하나님의 대원수를 박멸시키는 하나의 길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을 붙들고 그 하나님의 마음과 심정을 받아서 사탄과 대결하여 나서는 자가 있다면, 그보다 나은 사람도 그 앞에는 입을 못 벌립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모를 때는 사탄이 인간을 마음대로 농락할 수 있고 마음대로 지배할 수 있으나 천상의 심정을 통하여 우러나는 내용을 갖고 나타날 때는 억만 사탄이 항복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죽더라도 아버지요, 살더라도 아버지입니다. 이 피가 사탄으로부터 받은 피지만 이 피가 변하여 아버지의 피로 거두어지는 그 자리를 그리워하며 달음질쳐야 합니다. 그래야 사탄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의 피 살이 지금 사탄에게 속해 있습니까? 여러분의 피가 뿌려지고 살이 떨어질 때, 사탄이 와서 아이고 내 피요, 내 살이라고 부르짖으며 붙들어 갈 자가 되지 말게 기도해야 합니다. 피를 토하며 쓰러질 때 아버지께서 붙들고 우실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이 땅에 왔다 갔습니다. 또한 수많은 사람들이 오늘날 이 땅에 살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도의 길을 찾아 나가고 있으나 오늘날까지 그러한 아들딸을 맞지 못하였습니다. 베드로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도 예수를 배반한 배반죄가 걸려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도 붙드실 수 없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형장(刑場)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하나님이 보내신 독생자를 배반한 죄가 있기 때문에, 그 죽음을 탕감조건으로는 인정할 수 있으되 하나님을 위하여 선의 피 살을 뿌리고 죽었다고는 인정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삼천만 민족이 갈 길을 몰라 허덕이고 있습니다. 그러니 굶주린 이 민족 앞에 지도자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사망세계에서 피땀을 흘리며 애걸하는 민족 앞에 생명의 철장(鐵杖)을 가지고 사망의 철망을 끊고 나아가, ‘동지여, 형제여, 내가 여기 있노라.’고 외쳐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부자(父子)의 인연을 높이 세우고 형제의 인연을 세워서 종족과 민족을 형성하여 하늘 백성으로 등장하는 날 천상(天上)의 주권(主權)은 회복될 것이 요, 천상에 사무친 심정의 원한은 해원(解寃)될 것입니다. 이것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 입고 있는 옷이 아깝습니까? 벗어 치웁시다. 보물을 갖고 있습니까? 허공에 던져 버립시다.
그것이 하늘 앞에 나아가는 데 있어서 사탄의 미끼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선을 위하여 피눈물을 개의치 않고 나서는 이들 앞에 한 치의 땅이라도 한 벌의 옷이라도 제공하기 위해 잠을 못 이루는 민족만 되면, 그 민족은 세계를 지배할 것입니다.
하늘은 그러한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그리워 눈이 물크러지도록 울다가 미친다 할지라도 그 사람은 지옥 안 갑니다. 굶주리고 뭇 사람의 손가락질을 받고 조롱을 받다가 쓰러졌다 할지라도, 아버지를 그리워하다 쓰러졌다 할진대 그 자리는 공터가 안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시대를 창조하기 위하여 나선 것입니다. 천륜의 혁명의 노정에 새로운 개척자로 나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몸에는 개척의 피가 약동하고 개척의 살이 약동하여야 되겠습니다. 잠자는 이 민족을 붙들고 천상을 향해 기도해야 되겠고, 굶주린 이 민족의 위안자가 되기 위해 허덕여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여러분이 된다면, 오늘 이 시대에 밟힘받고 몰림받는다 해도, 이 민족 앞에, 이 인류 앞에 필요한 그날이 틀림없이 올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무리가 그리운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식구가 그리운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람들을 규합하기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해 나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부모를 모르는 자들에게 부모를 해명해 주고, 형제의 인연을 모르는 자들에게 이제까지의 통설(通說)을 깨뜨려 영계(靈界)와 육계(肉界)의 한계를 넘어 참다운 형제의 인연을 알려 줘야 합니다. 그리하여 네가 굶주리면 내가 먹을 수 없고 내가 먹을 때 너도 먹어야 한다는 심정이 민족 감정 이상, 세계의 어떠한 사상이나 주의의 감정 이상 강하게 된다면 하나님의 해원 역사는 자동적으로 벌어진다는 것을 여러분은 똑똑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전도하러 나갔다 들어오면서 욕을 먹었다는 말을 하면 일면 분한 생각도 들지만 마음으로는 기뻐하며 기도합니다. 왜? 그 사람은 그 마음에 인간의 심정이 아니라 하늘의 애달픈 심정과 두터운 인연을 맺고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하늘 앞에 자랑할 날이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새로운 각오 밑에, 있는 정열을 다 쏟아 세계 인류를 대신하여 천적인 한(恨)을 일신(一身)에 지니고 하나의 폭탄이 되어 지옥에 가서 터져 피를 흘린다 할진대, 거기에 승리의 탑이 세워진다고 나는 믿습니다.
이러한 무리가 나와야 이 민족의 해원이 벌어지고, 이 민족은 새로운 이상을 향하여 나아갈 수 있고, 세계적인 정신을 중심삼고 새로운 민족의 발판을 닦을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철저히 느껴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기준을 세워 놓으면 이것이 영원히 하나님의 원한을 풀어 드릴 수 있는 승리의 방패가 된다는 것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아버님, 지나온 40고개를 생각해 보면 인간적인 입장에서는 지긋지긋하옵니다. 한스러운 날이 지나가는 것은 역사의 필연성이고, 오늘 땅 위에서 행동하는 우리가 비운의 암초에 부딪치는 것 또한 타락한 세상의 곡절을 해결하는 천적인 노정이라는 것을 저희들은 알았사옵니다.
하나님의 대원수를 갚는 길은 심정이 기초가 되어 부모가 없는 이 땅에 부모가 되는 것이요, 형제가 없는 이 땅에 형제가 되는 것이며, 하늘의 백성이 없는 이 천지에 하늘 백성이 되는 것임도 알았사옵니다. 그래서 세상의 부모의 인연을 다 끊어 버리고 세상의 부부의 인연을 다 끊어 버렸사옵니다.
새로운 천적인 정적 인연(情的因緣)이 이 땅에 뿌리 내려야 할 때가 옴으로 말미암아, 오늘날의 사조(思潮)가 그러한 방향으로 활발히 휩쓸려 들어가는 것을 목전(目前)에 바라보고 있사옵니다. 좌우가 투쟁하는 오늘날 하늘은 심정의 중심이 천상(天上)으로부터 지상(地上)에 뿌리박히는 한 지역을 찾고 계시오매, 그 한 곳이 필시 있어야 천적인 뜻은 이루어질 것이며, 또한 저희들은 하늘의 원한을 해원하여 만민 앞에 승리의 깃발을 높이 세울 날이 반드시 올 것을 아옵니다.
그러기에 오늘 이런 심정의 기반을 찾아 헤매는 운동이 외로운 삼천리 반도 위에, 피 흘리며 쓰러지고 남은 이 민족 가운데 벌어진 것을 생각할 때, 아버님, 황공 망극하옵니다.
이제 죽어가는 이 민족 앞에 새로운 생명의 말씀을 전하여야 되겠고, 피눈물로 엉클어진 곡절을 전하여야 되겠사옵니다. 그리하여 수많은 생명들이 새로이 소생함을 받아, 이 민족, 이 세계는 가을 절기에 있사오나, 새로운 말씀을 중심삼고 봄 절기의 기운을 갖추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여름 절기를 향하고 새로운 가을 절기를 바라볼 수 있는 새로운 방향의 세계로 전환시킬 수 있는 역사를 다할 수 있도록, 아버지, 피눈물 어린 심정을 갖고 나가는 이들의 발걸음 위에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맡겨진 40일노정을 마치고 다시 만나 손에 손을 잡고 마음을 터놓고 내가 민족을 위하여 눈물을 흘리고 이 민족에게 배척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나누며, 서글프고 원통한 사실이 있다면 ‘아버지!’ 하며 오히려 민족에게 복을 빌어 주면서 이 민족을 사랑했다는 산 증거적인 조건을 이들의 가슴 가슴에 품고 돌아올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기를 이 자리에서 아버지 앞에 호소하옵니다.
어려운 길로 보내고 싶지 않은 것이 여기 책임진 자의 마음이오나 천상의 곡절이 남아 있는 연고로 이들을 그 길로 아니 보내려야 아니 보낼 수 없사옵고, 또한 그 길이 우리들이 가야 할 필연적인 노정임을 아옵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있는 정성을 다하여 한 방울의 피라도 아버지 앞에 드리기를 원하고, 한 점의 살이라도 아버지 앞에 드리기를 원하고, 하나의 행동도 아버지를 위하여 하고자 하오니 잘못된 일이 있을지라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들을 부디부디 품으시사 보호하여 주시옵고 지켜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심정을 더듬어 가는 길은 외로운 길이요, 서글픈 길이요, 눈물의 길인 것을 아오니, 아버님, 친히 위로하여 주시옵고 축복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죽든지 살든지 하늘만을 붙들고, 쓰러지는 그날까지 최후의 승리의 영광을 아버지께 돌려 드릴 수 있는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그리하여 하늘땅을 아버지 품에 안겨 드리고 원수를 굴복시키는 그날까지 행군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하여 주시기를 바라옵나이다. 아버지께서 이 행군 대열에 천상(天上)을 동원하고 지상(地上)의 양심 있는 자를 동원하여 획기적인 승리의 영광을 노래할 때까지 함께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올 때,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우리의 원리는 땀과 눈물과 피를 흘려 얻은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피와 살을 다 투입하여 세계와 천주를 품고 아버지 앞에 나아 갈 수 있는 아들딸이 되어야 합니다.
영광의 날을 위해 눈물의 길을 가야 합니다. 선을 위하여 흘리는 땀과 눈물과 피는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가고 가도 또 가야하고 아무리 행하여도 부족한 나입니다. 과거의 일체를 잊어버려야 합니다.
이제는 형제를 위하여 싸워야 합니다. 최후의 종말시기가 오면 세상에 대한 애착심을 끊어야 됩니다. 그 때에는 대심판이 있게 되는데, 심판에는 말씀심판이 있고 인격심판이 있으며 심정심판이 있습니다. 이것을 모두 통과해야 합니다.
지금은 개인만을 중심삼고 섭리하는 시기가 아닙니다. 내 개인은 물론 민족, 국가, 세계, 영계까지 하나되어 창조이념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도의 길을 가는 사람은 민족 관념도 국가 관념도 다 초월해야 합니다. ‘사랑’이란 테마(theme)를 가지고 국적 없이 사는 사람들이 기독교인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은 모두 사랑으로 뭉친 한 형제요, 하늘 백성입니다.
지금은 천국 백성을 찾아야 할 때입니다. 맹목적으로 신앙하는 때는 지났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다시 한번 자아를 비판해야 되겠습니다.
심정의 세계에서는 개체와 전체의 가치가 동일합니다. 역사에 남아지는 것은 인정(人情)이 아니라 천정(天情)입니다. 하늘의 신부가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세상의 어떠한 효자, 충신, 열녀라 할지라도 끝날에 하나님의 심정을 아는 한 사람을 능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의 진리를 이 땅 위에 세우시기 위하여 6천년간 수고하셨습니다. 그동안 하고픈 말씀을 못 하셨습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친히 내 아들아 하시는 소리가 이 땅 위에 들릴 때, 이 땅에서 심판은 끝나는 것입니다. 한없이 울기도 하시고 억울하게 맞기도 하신 불쌍하고 원통한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말씀과 실체와 심정의 메시아로 오셨으되 유대민족의 불신으로 인하여 메시아 노릇을 온전히 못 하고 가셨으니 다시 오셔야 합니다. 이제 다시 오실 때가 되었습니다.
교만, 시기, 혈기, 고집의 타락성을 버리고 아버지의 유업, 슬픔과 고통과 억울함을 상속받는 자가 돼야 합니다. 성심 성의껏 열심히 일하면서 눈물 흘리는 자는 쓰러지지 않습니다. 이제까지는 개인을 위해서 나왔지만 앞으로는 민족을 위해서 세계를 위해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 많은 땀과 눈물과 피를 흘려야 합니다. 새로운 각오와 맹세를 해야 되겠습니다. 하늘을 향한 사무친 심정을 가져야 합니다.
땀은 땅을 위하여, 눈물은 민족과 인류를 위하여, 피는 하늘을 위하여 뿌리는 우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내 몸과 마음은 내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것이니, 의지할 곳 없고 신뢰할 것 없는 이 민족과 인류를 위하여 내 몸과 마음을 다 바쳐야 되겠습니다.
지금은 모든 인간들이 민주주의에 대해서도, 공산주의에 대해서도, 그 어떤 주의에 대해서도 애착심을 잃어가고 있는 때입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한 애착심까지 잃어가고 있습니다. 한국의 실정도 역시 그러합니다. 사농공상(士農工商)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모두 자기 직업에 대한 애착심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애착심을 불러일으켜 주는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우리는 애착심을 잃어가고 있는 그들에게, 그들이 이제까지 어떤 것에 애착심을 두려 했던 것보다 더 큰 애착심만 보여 주면 됩니다. 이것은 결국 뜻을 위한 심정문제에 귀착(歸着)되는 것입니다.
그들의 생명에 대해서도 그들 자신보다도 더 큰 애착심을 보여 줄 때 영원한 생명에 대한 애착심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은 밟히는 자리에서 역사를 이루어 나왔습니다. 모든 문화는 밟히는 무리를 통하여 개인에서 민족, 국가로 이어져 나왔습니다.
이 때는 각자의 애착심을 버려야 할 때입니다. 모든 도(道)는 자기 것에 대한 애착심을 끊어 나왔습니다. 하늘도 모든 인간이 애착심을 잃는 방향으로 몰아냅니다. 세상의 것에 애착을 갖고서는 하늘 것을 세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때가 종말시대입니다.
현세(現世)는 민주주의자나 공산주의자들도 애착을 잃게 하는 방향으로 역사가 흐릅니다. 종교인과 도인(道人)도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교는 더욱 분열되고 자기 종파를 버리게 됩니다. 이것은 선(善)을 위하여 악(惡)의 것을 청산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에 대한 애착까지도 잃어버리고 하늘이 아니면 아니 된다는 지경에까지 몰아내는 것입니다.
심판에는 말씀심판이 있고 심정심판이 있고 인격심판이 있습니다. 예수 이후 지금까지는 말씀을 믿고 안 믿고에 따라서 심판했습니다. 타락으로 인하여 참의 실체(實體)를 찾지 못하였으므로 실체를 찾아 심정적인 인연을 맺어야 합니다.
말씀은 개인에서 천주(天宙)까지 소생시킬 수 있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고로 말씀은 천주를 초월해야 합니다. 성서에 있는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이 독신으로 계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도인(道人)은 나라 없는 백성입니다. 도(道)의 이념으로 국가를 세울 수 있어야 합니다. 도(道)의 이념은 각각 다르지만 거기에는 귀일점(歸一點)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사랑으로 세웠습니다.
심판의 궁극적인 목적은 개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전체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목적은 우주적인 것에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신도들이 형제의 인연을 맺지 못하였습니다. 오늘의 종교는 그러한 목적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애착심을 버리게 하는 것은 지금까지 가졌던 애착을 버리고 새로운 애착을 갖게 하기 위함입니다. 인간에게는 정성을 다하여 믿고 애착을 갖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제 새로운 애착심을 일으킬 수 있는 말씀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은 자아를 밟고 일어설 수 있는 말씀이어야 합니다. 또 심정적인 인연을 통하여 나오는 천주주의(天宙主義)의 말씀이어야 합니다.
역사의 전체를 청산하고도 남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심정뿐입니다. 심정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개체나 전체의 가치를 초월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역사는 인간이 안심할 수 있는 심정을 찾아 나왔습니다. 나를 더 사랑하라 하시는 것도 심정의 궁극지(窮極地)를 찾게 해주기 위함입니다. 심정의 자녀를 찾아 축복하려는 것이 역사의 목적인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심정은 둘이 아니고 하나입니다. 천정(天情)에 불을 붙여 주는 말씀이 아니면 이것도 버려야 합니다.
아버지의 눈물과 피와 땀이 이 땅에 남아 있는 한, 다시 이것을 돌려드려야 합니다. 부모와 자녀의 심정의 울부짖음이 이 땅에 가득 차야 합니다. 메시아는 말씀, 심정, 실체의 메시아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완결짓지 못하고 가셨습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애착을 일으킬 수 있는 말씀의 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하늘을 위한 피, 인류를 위한 눈물, 땅을 위한 땀을 요구합니다. 그러니 심정의 피, 심정의 눈물, 심정의 땀을 흘려야 합니다.
이번 기간에 남한 각지 400여 곳에 나가 전도해서 이제는 많은 교회가 생겼습니다. 그러니만큼 이제부터 우리 통일신도들이 새로운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될 때가 왔다고 봅니다. 이제 협회장도 말씀했지만 피땀을 흘려 가면서 그 지방이면 지방을 부여안고 생명을 각오하고 싸워 준 데 대해서는 고맙게 생각합니다.
여러분들 앞에 한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이제부터는 우리가 싸워야 할 때가 왔고, 또 하늘이 바라는 시기를 대하는 입장에 처해 있어서 우리들은 어떤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우리 개인적인 각오보다도 하늘땅을 대신해서 하늘을 움직일 수 있고 땅을 움직일 수 있는 동시에, 수많은 인류를 움직일 수 있는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이번 전도기간을 통해서 절절이 체험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 시대적인 기준을 우리들이 먼저 알았기 때문에 이 때가 어떤 때냐 하는 걸 잘 알아야 됩니다.
하늘은 반드시 선한 무리들을 이끌게 될 때 평평한 길을 통해서 이끌어 나오지 않았습니다. 밟히는 자리에서도 눈물과 땀과 피의 재단을 연하여서 지금까지 역사를 붙들어 나오고 있다는 것은 어떠한 역사적인 서적을 보나 섭리적인 노정을 관찰해 보더라도 피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이만한 역사의 문화를 찾아 세울 수 있었던 것도 그 환경에서 즐기며 안락한 자리에서 살고 있던 무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밟히고 쫓김받는 무리들을 통하여, 그들의 눈물과 땀과 피에 의해 이것이 이루어져 나왔다는 것을 우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개인으로부터 가정을 거치고, 혹은 사회, 민족, 국가를 거쳐 세계를 넘어서서 하나의 목표를 향하여 역사는 엮어져 나왔고 지금까지 인류의 문화는 발달해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때는 어떠한 때냐? 양심을 가진 자나, 혹은 도의 생활을 하는 사람이나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새로운 각심을 하지 않으면 안 될 때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때는 자기가 처하고 있는 그 사회에 있어서 애착심을 잃어버린 때가 되었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이 땅을 대해 섭리하는 데 있어서 도의 길을 가는 수많은 무리들이 있게 될 때 그들을 세상에 대한 애착심을 끊는 길로 몰아내야 합니다. 가정으로부터 자기 육신으로부터 세상에는 어떤 욕망적인 속성이 다 있지만 하나님은 이것을 제거시키는 방향으로 이끌어 나왔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것은 비단 종교인뿐만 아닙니다. 오늘날 종교면 종교인을 중심삼고 하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 있다 할진대는 최후의 종말시대에는 어떠한 세계가 올 것이냐? 거기는 반드시 모든 사람들이 애착심을 잃어버리는 그런 사회환경으로 하나님은 몰아넣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끝날은 어떤 때냐? 끝날은 어떤 때가 되어야 하느냐 하면, 어떠한 사람들이 자기들이 생명을 기울여 나오는 그 어떤 것에 대해 애착심이 점점점점 희미해져 가지고 마침내는 잃어버리는 때입니다. 그런 종말시대가 반드시 어느 한 때에 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건 왜 그래야 되느냐 이거예요. 하나님이 세우려 하는 나라와 악이 이끌어 나오는 세계와는 반대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애착심을 가져 가지고는 하늘의 일은 달성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기필코 목적을 달성하고 뜻을 세우려 하고 있다 할진대는 기필코 땅 위에 있어서 수많은 인류, 혹은 국가에 대한 애착심, 민족에 대한 애착심, 혹은 자기가 하고 있는 학문에 대한 애착심, 더 나아가서는 가정에 대해서, 혹은 부자의 관계에 있어서, 각 분야 각 부처에 있어서 애착심을 끊어 버리는 것으로써 하늘은 섭리해 나가고 있다는 것을 총괄적으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지금 현재를 총괄적으로 관찰해 보게 될 때, 민주와 공산세계가 대결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조가 지금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민주진영에 있는 사람 자신들도 민주진영에 대해서 애착심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 반면 공산주의자들도 공산주의에 대해서 애착심을 잃어버리는 방향으로 반드시 세계는 움직여 나간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투쟁적인 현상을 거쳐 가지고 인류에 대한 애착심을 끊는 방향으로 지금까지 역사는 전개되면서 종말적인 노정을 이어 나왔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우리가 하늘편 입장에서 관찰해 보게 될 때, 반드시 개인으로부터 가정을 통하여 사회와 국가를 넘어 세계, 천주의 사상권까지도 그런 경향으로 나아가는 동시에, 더 나아가서는 종교나 양심을 붙들고 나가는 교인, 혹은 도인들에게 있어서도 그런 경향으로 반드시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기성교회나 모든 종교들을 보게 될 때, 그 사람들이 기필코 새로운 종단을 향한 본래의 뜻을 대해야 할때가 왔기 때문에 어느 종파를 막론하고 거기에는 반드시 분열이 벌어지고, 성심성의를 다 기울여 순교를 당하고 나가던 수많은 성도들이 그것을 배척하고 나가지 않으면 안 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종말시대는 반드시 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하나님은 그러한 방향으로 나가야 되느냐? 여러분은 그걸 알아야 됩니다. 악의 세상과 선의 세상, 악의 세상에서 한 고개를 넘기 위해서는 반드시 청산지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청산하기 위한 때가 어느 때냐 하면 심판시대입니다. 그때가 심판시대예요. 우리가 세상의 모든 것에 애착심을 가지고 끝까지 붙들고 있으면 하늘 앞에 크나큰 심판의 자리를 넘어갈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은 전부 정리시켜 나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중에는 언제나 나를 믿을 수 없고, 어떤 사랑하는 사람까지도 믿을 수 없다는 경지의 고독한 자리까지 내몰아 가지고, 애착심을 갖고 세상 앞에 자랑할 수 있는 그 무엇을 가질 수 없는 자리로 몰아넣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몰아 가지고 거기에서 인간의 힘으로는 안 된다는 공감을 표하게 해 가지고 다시 하늘을 바라봐 하늘에 대한 애착심을 일으켜야 할 섭리의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나가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이 시대에 있어서 이 시대가 심판 시기니만큼 심판을 어떻게 할 것인가? 말씀심판인 동시에 인격심판이요, 인격심판인 동시에 심정심판이 되는 것입니다. 원리를 배웠기 때문에 여러분은 잘 알 것입니다. 그냥 맹목적으로 심판하는 게 아니예요. 불을 퍼붓고 이 땅에 천변지이가 생겨나 가지고 다 없어지는 게 아니예요. 절대 그렇게 안 된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심판에는 말씀심판이 있고, 그다음에는 인격심판이 있고, 그다음에는 심정심판이 있습니다.
기독교 전체 역사를 대조해 보게 되면, 예수 전까지 4천 년 동안 찾아나온 것이 뭐냐? 참된 진리를 찾아 나왔어요. 나아가 진리를 중심삼은, 진리로 화한 하나님 앞에 서 가지고, 하나님을 마음대로 부를 수 있고, 하나님께 마음대로 말할 수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대할 수 있고, 하나님의 말씀에 직접 답할 수 있는 하나의 인격자를 찾아 나온 것입니다.
그 인격자를 세워 가지고 어떻게 할 것이냐? 하나님과 그 사람과 일체가 되어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으며 하나님 앞에 사랑으로 답할 수 있는 자리까지 이끌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가 온 이후 지금까지는 말씀을 중심삼은 심판역사라는 것입니다. `믿으면 구원 얻고 믿지 않으면 구원 못 받는 다'는 이런 표어 밑에서 지금까지 나왔습니다. 그러니 말씀과 실체가 반드시 합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참말씀은 반드시 실적과 실체를 남겨야 된다는 거예요. 이것이 천리원칙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땅에 만물을 지을 때 참아들딸을 위하여 만물을 지었는데 참의 실체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타락이예요. 참의 실체를 갖춰 가지고 하나님과 같이 살 수 없는 세계가 된 것이 타락한 세계입니다. 이것을 다시 한 번 찾기 위해서는 다시 하나님이 말씀을 줘 가지고 심정과 연결해야 합니다. 그 말씀을 다시 한 번 세워 가지고 말씀을 대신한 실체의 모습을 세워, 그 실체의 모습이 완결된 후에 하나님의 심정을 가하여 부자의 인연을 맺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이 창조목적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잘 알 것입니다.
이렇게 돼 있기 때문에 하늘이 지금까지 섭리를 해 나오는 것은 말씀을 찾아 세우기 위해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예수가 왔다 간 후에 참다운 말씀이 나오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말씀은 무슨 말씀이며 말씀의 목적은 무엇이냐? 그것은 개인과 나라를 살리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말씀의 목적은 개인을 넘고 가정을 넘어서, 사회, 국가, 세계, 더 나아가서는 무형의 세계까지 이 천지의 이념을 소생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이 목적을 달성해야만 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나님은 아담 해와를 지어 놓고 축복하기를 만물을 주관하라고 했습니다. 주관하는 데는 외적인 면만이 아닙니다. 내적인 면까지 주관하라는 기준이 있는 것입니다. 그 말씀은 어떠한 말씀이냐? 내 개인이 믿고 천당가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내 개인이 믿는 동시에 내 가정이 믿고, 내 가정이 믿는 동시에 사회, 국가, 온 세계, 더 나아가서는 천상에 있는 수많은 영인들까지 하나되어 하나님이 창조하시던 이념과 더불어 일체의 자리까지 나가게 하기 위한 뜻에서 그런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보게 될 때, 오늘날 기독교를 바라보면 아직 기독교의 세계관이 안 서 있습니다. 개인은 반드시 본연의 가정을 기반으로 하여 사회이념을 거쳐 가지고 국민, 혹은 세계 인류로서의 관계를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 개체를 중심삼고 구원의 목적을 찾아 세워야 할 때는 지나갔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여, 구해 주시옵소서' 하고 피땀 흘려 기도할 때는 지나갔어요. 때가 그런 때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옛날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역사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이 수많은 인간들을 악한 품에 품겨 놓고 그냥 그대로 섭정해 나가면서 새로운 각도에서 새로운 색다른 모습을 갖추어 가지고, 개인으로부터 혹은 가정으로부터 사회, 국가 형태를 갖추어 선민이라는 민족을 여기에 내세우기 위해 역사해 오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 목적은 우주적인, 더 나아가서는 천주적인 목적 달성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인간들이 필요로 하는 말씀심판시대에 요구되는 그 말씀도 역시 천주의 이념을 넘어설 수 있는 말씀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이 구원받아 가지고는 안 된다구요. 세계관으로부터, 천주관으로부터, 철두철미한 원칙적인 그 말씀을 중심삼고 내가 부딪치게 될 때, 오늘 내 자신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흙덩이가 빛을 받아 지어진 것과 마찬가지로 여기에 생명이 생겨나고, 감정이 생겨나고, 여기에 이념적인 방향을 찾아 나설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충정의 말씀을 인간은 반드시 필요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그러한 내용을 가진 말씀이 이 땅에 나왔느냐? 안 나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타락 이후부터 지금까지 성경 연대로 볼 때 육천 년 역사를 갖고 있지만 육천 년 역사노정에 있어서 하나님이 하고픈 말을 다 하지 못했습니다. 성경의 말씀은 예수님이 독신으로 살 때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를 중심삼은 그 이념은 전체적인 우주 앞에 세워야 할 그런 것이어야 됩니다. 그러나 개인 구원섭리를 중심삼고 지금까지 나오고 있다는 거예요. 그걸 알아야 돼요. 개인구원을 지나 가정구원, 가정구원을 지나 사회구원과 국가구원까지 하늘은 반드시 세워야만 되는 것입니다. 최소 단위로 국가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세계적인 역사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나라 없는 백성인 걸 알아야 됩니다. 도의 길을 가는 사람들은 나라 없는 백성이예요. 여기에는 국적도 없고 자기가 넘어올 수 있는 국가도 없어요. 자기가 자기의 종족이라 할 수 있는 민족도 없습니다. 그런 걸 다 알아야 돼요.
이런 현 세계에 있어서 오늘날 이 시대는 어떤 것을 요구하고 있느냐? 오늘날 이 시대 현상에 있어서 우리는 종교인들 앞에 무엇을 요구하고 있느냐? 도의 이념을 중심삼고 국적을 세울 수 있는, 도의 이념으로 국토를 확정할 수 있는, 도의 이념을 중심삼아 가지고 백성으로서 설 수 있는 기준이 하늘이 섭리하신다면 반드시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을 수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이냐? 한 분야를 두고 볼 때, 백 집이 있으면 백 집의 살림살이가 하루를 사는 데도 전부 다릅니다. 다르더라도 어떤 원칙적인 심정에 일치된 귀일점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귀일점을 세우기 위해서 기독교는 사랑이라는 테마를 내거는 거라구요. 그렇게 되면 그 사랑 앞에 누가 접붙여서 복귀되겠느냐? 그 사랑의 말 앞에는 누구든지 존경할 수 있는 이런 기준을 하늘은 솎아 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 신랑 신부라는 명사를 걸어 놓고 절대적인 기준을 세우기 위하여 교회나 성경 가운데 이것을 훈계했으나 오늘날 교회를 믿는 수많은 기독교인들은 그런 경지에 서 있지 못하니 문제가 크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섭리를 해 나오기 때문에 이제 이 시대에 하나님이 최후에 바라는 것은 심정적인 기반에 있어서 어떠한 개인이 잘 믿고 천당 가는 것을 원치 않는 것입니다. 개인을 중심삼은 가정, 가정을 넘어 국가, 혹은 세계 전부가 하나님의 심정 앞에 하나될 수 있는, 말씀을 중심삼은 그런 세계를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불가피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맹목적으로 믿던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모든 사리는 우리의 생활적인 감정에까지 이치와 공식적인 법도 과정을 조건삼아 가지고 우리와 관계를 맺고 있는 실생활을 부정 못 할진대는 오늘 우리들은 신앙 관념에 있어서도 역시 더 치밀해야 됩니다. 맹목적인 것과는 틀립니다.
그러면 오늘날 성경에서 지시하고 성경에서 바라고 있는 그 목적이 어디에 있느냐?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이냐? 심판의 목적이 어디에 있느냐? 한 개인을 심판해서 구원해 가지고 천당 보내기 위한 목적이 절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의 나라를 이루는 것이 목적입니다. 다 죽여버리기 위한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 아니예요. 하나님은 죽여 버려서는 안 될 사랑의 심정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연고로 오늘 이것을 수습하기 위해서 이 역사를 어떤 면으로 이끌어 나오느냐 하면 반드시 막힌 과정을 거쳐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는 해결 안 난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이것을 청산해야만 새 일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악과 선이 한자리에서 놀 수 있어요? 한자리에서 자리를 같이할 수 없습니다. 갈라져야 돼요.
그러면 지금 악한 세상에서 선한 세계로 옮아가기 위한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할진대는 여기에는 반드시 심판적인 조건을 제시해 나오는 것입니다. 그 심판하는 데 있어서는 말씀을 갖고 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의 목적이라는 것은 모두가 구원이예요. 이것은 개인의 심정에 통하고, 가정 식구들의 심정에 통하고, 국민, 혹은 국경이 다른 그런 민족의 심정세계에 통할 수 있는, 하나님편에서 볼 때 하나의 심정과 통할 수 있는 기준을 갖출 수 있는 이러한 우주적인 이념을 중심삼고 섭리해 나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오늘날 전세계 기독교인들이 누구인 줄 알아요? 전세계 기독교인들은 형제요, 하늘나라 백성입니다. 형제의 관념을 갖지 못한 자는 백성이 될 수 없습니다. 형제의 인연에 벗어난 자는 백성이 될 수 없어요. 오늘날 이 교회현상을 볼 때 서로 물어뜯고 있습니다. 형제의 인연이 다 어디로 가고….
이 때는 지금 어떠한 때를 요구하고 있느냐? 하늘나라, 천국을 건설하기 위한 새로운 때가 왔기 때문에 백성의 과정을 거쳐 넘어가야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형제의 시대를 갖추었느냐? 이것을 각자에게 반문해야 할 이런 때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에 있어서는 지금까지 역사적으로, 혹은 지금까지 내 생활적인 배경을 중심삼고 살아오던 사회의 모든 체제라든가 가정의 모든 체제라든가 신앙의 모든 신조라든가 이 모든 전부가, 나로 하여금 형제들을 하늘 앞에 찾아 세울 수 있는 참다운 형제의 인연을 못 맺게 했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형제의 인연을 갖지 못한 이들이 단결되어서 백성으로 자처했댔자 그것은 반드시 깨져 나갑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데 있어서 형제보다 더 사랑해야 돼요. 그러한 노정으로 하늘은 내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날 전세계 기독교인, 더욱이나 도의 길을 가고자 하는 수많은 인류들은 이제 마음을 같이하여 형제적 인연을 찾아 세워서 `우리의 인연을 누가 빼앗을소냐' 하는 도를 중심삼고 움직여야 합니다. 이런 형태가 반드시 이 땅에 나와야 된다는 거예요.
보라구요. 기독교의 초대교회 시대에 있어서는 형제가 피를 흘려 쓰러지게 될 때 자기 생명을 바쳐 쓰러지고, 죽음의 자리도 개의치 않고 뚫고 나갈 수 있는 인연을 남기면서 악의 세계를 대하여 힘차게 행군해 나왔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서로서로 형제의 인연을 찾지 못하고 싸우는데 여기에서는 붕괴예요, 붕괴. 붕괴의 일로를 갖추어 나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의 때는 다가왔습니다. 하늘이 요구하는 것은 천국 백성을 찾기 위한 것인데, 백성은 반드시 형제지인연의 과정을 거쳐 나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부 다 끊어졌습니다.
오늘날 지금까지 세상에서 되어진 인연을 끊는 것은….하늘은 그것이 깨지니까 좋아합니다. 오늘날 모든 것을 깨쳐 가지고 애착심을 없게 만드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그것을 빼앗아 가지고 다른 면에 애착심을 가질 수 있는 방향으로 돌려 놓기 위해서 오늘날 역사과정을 전부 다 끊어 청산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 시대에 있어서는 모든 분야에 있어서 애착심을 둘 수 없는 이런 세계적인 현상을 지금 만들어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 목적은 어떻게 귀결될 것이냐? 애착심을 전부 다 버리자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잘못된 것에 대해 애착심을 끊어 버리는 반면 하늘을 표준하는 사람들은 서로서로가 애착심을 갖고, 세상의 형제 이상 형제로서 세상의 부모 이상 부모의 인연을 노래할 수 있는 형태를 갖추게 하는 거예요. 이런 형태를 반드시 갖추지 않으면 멸망당한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한국에서 통일교회가 나와 가지고 수많은 비난의 대상이 돼 나왔지만 망하지 않았어요. 이 민족이 모든 애착심을 전부 다 끊고 우리와 어깨를 겨룰래야 겨눌 수 없는 그런 한 때가 언제 오는가?
만약에 하나님의 심판을 먼저 받는 민족이 있다고 한다면 그런 민족이 먼저 받는 거예요. 그렇지만 심판을 먼저 받는 민족 가운데서 심판을 안 받는 민족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민족인 것입니다. 아무리 세계 천지가 넓다 하더라도 그러한 소재가 반드시 오늘날 우리 사회, 혹은 우리의 풍습권 내 전체를 휩쓸어 가지고 그런 사회 규정을 이뤄 줄 수 있는 한때가 오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고 반성해 보십시요. 여러분이 생명을 각오하고 믿는 그 누가 있느냐? 내가 정성을 다하여 모시고 싶은 그 누구를 갖고 있느냐? 부모가 자식을 죽이고 자식이 부모를 죽이고 처자식이 서로 반발하여 참혹한 현상으로 벌어져 가는 현실이 되어 있습니다. 오늘 이 가정을 대하여 내가 애착심을 가질 수 없어요. 자기가 전공하는 어떤 학술적인 분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그러냐? 나라가 망하고 민족이 망해 들어가는 그런 환경에서는 가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걸 못 갖느냐 이거예요.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실사회, 더욱이나 한국 실태를 바라보게 될 때 애착심을 둘 수 없는 민족이 돼 있다는 것입니다. 이럴수록 우리가 절망 가운데 쓰러질 것이 아니라 이래야만 된다는 , 기필코 와야 할 한때가 왔다는 걸 우리들은 여기서 명심하지 않으면 안 될 때가 되었습니다.
하늘이 이런 자리에 몰아내는 그 목적이 어디에 있느냐? 우리들을 깨뜨려 지옥에 쳐넣기 위한 것이 목적이 아니라, 우리를 그런 자리에 있어서 그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리고, 다 끊어 버리고, 일편단심 하나의 마음을 다시 한 번 재수습하여 하늘을 바라보고 호소할 수 있는 하나의 길을 터놓는 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민족이 더욱이나 이때에 있어서 이제 갈 길은 종교도 아니요, 정치도 아니요, 문화도 아니요, 지금까지의 어떤 기존 종교도 아닙니다.
왜? 그들이 생명을 내놓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런 애착심을 가질 수 있는 종교의 내용을 갖지 못하고 있는 한 이는 다 지나간다는 거예요. 이러한 때가 왔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더더욱이나 안다는 청년 남녀들에게 있어서는 예리한 시선을 갖고 비판하고 분석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보라구요. 종교도 막혀 버렸습니다. 또, 철학도 막혀 버렸습니다. 오늘날 환경의 정치나 무엇 무엇 무엇, 믿을 수 있어요? 여러분이 애착심이 있느냐 말이예요. 애착심이 있다면 하루에 먹는 빵 한 덩어리에 애착심을 갖고 있는 거예요. 이러한 관점에서 벌어진 것이, 요것을 들고 나온 것이 오늘날 유물사관입니다. 이 유물사관이 세계적인 무대를 갖출 수 있는 때에 있습니다. 그러한 경향으로 한때를 바라보고 나오는 겁니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안 돼요.
인간은 먹는 것만으로 안 됩니다. 아무리 내가 배부른 자리에 있다 할지라도 내 심정적인 천운이, 오늘날 내 심령을 파고들어오고 숨어 들어오는 이러한 사조의 모든 운세를 내가 막아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막아낼 수 있고 소화시킬 수 있는 역량이 있어야 기쁘지 그렇지 않으면 기쁘지 않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이때는 심판 때가 다가오는 때이기 때문에 불안과 초조 공포에 떨어야 할 때요, 그 무엇 하나 내 심정을 기울여 애착심을 갖고 대할 수 없는 종말시기입니다. 이런 시기에 처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오늘날 다시 한 번 우리가 애착해야 할 것은 세계인류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새로운 애착심을 일으킬 수 있는 하나의 말씀을 찾자고 외치고 나가야 됩니다. 내 부모로부터 내 모든 일체 전부를 다 잃어버렸으니 잃어버린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애착을 일으킬 수 있는 하나의 말씀이 필요한 그런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세계 사조에 있어서 어느 주의를 믿을 수 없는 시대에 왔으니, 이것 이상의 무엇을 느껴 가지고 그것에 대해 내 생명을 기울여 죽음의 자리에 내가 쓰러지는 한이 있다 할지라도, 생명 이상의 애착심을 느낄 수 있는 하나의 말씀이 필요하고 하나의 이념이 필요할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이런 견지에서 여러분이 자아비판을 해봐요. 자아비판을 해보란 말이예요.
그러면 하늘이 전부 다 깨뜨려 버리겠느냐? 그러한 때가 왔으니 이 말씀을 통하여 내 개인이 살고, 개인이 사는 동시에 민족이 살고, 민족이사는 동시에 세계가 살고, 세계가 사는 동시에 하나님이 살고, 하나님까지도 육천 년 동안 탄식의 한을 벗어나 해방의 통치권을 갖춰 가지고 만천하를 호령할 수 있는 한 때를 맞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깨뜨려 버리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면에 있어서 하나님이 있다면 애착심을 가질 수 있는 하나의 운동이 벌어져야 된다는 것이 필연적인 사실인 것입니다. 그럴 게 아니예요? 맹목적인 신앙, 주먹구구식으로 할 때는 지나갔습니다.
이제 우리들이 애착심을 가질 때는 그 애착심을 가질 수 있는 동기의 말씀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자아를 밟고 넘을 수 있는 말씀이어야 됩니다. 이 말씀은 지금까지 내가 믿고 나가던 관념적인 종교를 타파할 수 있는 말씀이어야 된다는 거예요. 이 말씀은 오늘날 시대적인, 사회의 어떤 주의 사상의 모든 문제를 박차고 새로운 깃발을 중심삼고 천주를 향하여 내가 외치게 될 때 하늘땅이 반응할 수 있는 말씀이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내용의 말씀을 갖고 나오려면 오늘날 논리적인 관에 서 있는 세계주의 갖고 안 됩니다. 이 논리를 넘어서 심정적인 이념을 통하여 나오는 천주주의여야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행복하다 할 때는, 내가 많이 아는 게 행복이 아니요, 내가 어느 대학교 학장이 되고 총장이 되어서 행복한 것이 아니요, 오늘 내가 일국의 무엇이 되어서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천만에요. 그 심정이 자기가 갖고 있는 환경을 넘고 넘어 그 어떠한 가치의 것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안정된 가치를 노래할 수 있는 자리에 있어서만이 행복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금까지 고통을 받는 것이 무엇 때문이냐? 하나님이 지금까지 고통을 받았고 수고했다는 그 명사를 하나님 앞에 붙일 수 있는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느뇨? 심정적인 가치를 오늘날 창조의 세계에 있어서 세울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슬픔이요, 고통인 것입니다.
역사를 전체적으로 수습해 가지고 최후에 남을 것이 무엇이뇨? 인류의 심정만이 남습니다. 그걸 알아야 돼요. 인류의 심정이 남는데 그 심정은 어떠한 심정이냐? 타락한 세계에서 지금까지 쫓김받고 파괴받은 그런 것이 아니요, 무애착한 그런 자리에 머무르는 그 심정이 아니라, 영원무궁토록 이 마음을 누가 점령할 수 없는 그런 내용의 심정이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말씀이어야 돼요. 그러면 개체와 전체는 하나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심정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가치를 초월하는 것입니다. 상대적인 비교의 가치를 초월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크고 높으신 하나님이라도 내 심정을 통하여 나서게 될 때, 내 자신이 하나님의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 있더라도 가치적인 분야에 있어서 상대성을 갖고 나오게 됩니다.
그런 자리에 있어서 하나님을 중심삼고, 하나님을 심정적으로 존경해 가지고 내가 즐길 수 있는 어떤 인간이 되었다 할 때 그는 무한한 행복한 자일 것입니다. 종교의 이념은 그곳까지 넘어가야 됩니다. 사람이 명령을 받고 움직이게 안 되어 있습니다. 하늘은 그런 표준까지 인간을 이끌기 위하여 지금까지 섭리해 나왔던 것입니다. 역사의 전통으로 최후에 남아질 것은 심정입니다. 무슨 심정이냐? 인정이 아니예요. 인정적인 심정이 아니라 천정적인 심정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역사를 보게 되면 효자 충신 열녀가 많았습니다. 인륜을 통할 수 있는 심정적인 발판은 얼마든지 배울 수 있고 얼마든지 들을 수 있으되 나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어요. 민족과 민족의 관계를 지울 수 없다는 말이예요. 그것으로써 해결이 안 돼요. 그렇기 때문에 이걸 처단함에 있어서 전부 다 뒤섞여야 된다구요. 그렇기 때문에 무애착 시기의 풍조는 반드시 세계심판 직전에 들어오는 현상을 보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걸 알아야 돼요.
우리의 가슴을 헤쳐 놓고 보게 될 때, 아버지를 내가 부르면서 주를 믿는다고 하는 그 심정적인 내정을 살펴보게 될 때, 하나님의 자녀라고 자처하고 나서는 자가 있다 할진대 그가 하나님의 심정문제를 아느냐? 개인을 대하는 하나님의 심정이 어떻게 돼 있고, 민족을 대하는 하나님의 심정이 어떻게 돼 있고, 또 국가를 대하고 세계를 대하는 하나님의 심정은 어떻게 돼 있느냐? 그걸 모르고 있다면 절대 충신 열녀가 될 수 없습니다.
역사의 목적은 인류가 공통히 즐길 수 있는 심정의 안식처를 찾아 나가고 있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문화의 목적이나 예수의 목적이나 개개인의 목적이나, 모든 목적의 전부는 그 기준에 있어서 하나의 청산을 짓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관점에서 이런 내용을 걸고 나오는 종교가 무엇이냐? 첫째로 등장한 종교가 기독교라는 것입니다.
예수는 자신은 신랑이요, 너희들은 신부라고 했던 그 심정적 기반은 오늘날 타락세계 인간을 중심삼은 신랑 신부의 심정이 아닙니다. 천정의 인연을 찾아 나가게 하기 위해서 오늘날 무지한 백성 앞에 그런 조건을 세워나가는 것입니다. 인연 맺었던 사람을 따라 죽음의 적진을 넘어 역사를 넓혀 나오면서 세계 기대상을 만들어 나오면서 역사해 나왔습니다.
여러분이 신부를 알지요. 신부는 그렇게 쉬운 자리가 아닙니다. 오늘날 신부 될 수 있는 자격자가 이 땅 위에 있다 할진대 이 땅 위에서 신부라고 자처할 수 있는 사람은…. 오늘날 사탄세계, 악한 세상에 있어서 어떤 충신이 있다 할진대는 수많은 충신자 가운데서 어느 누구도 비교할 수 없는 내용과 심정적인 절개를 갖춘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는 한 하나님이 그를 하늘의 충신이라고 세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사탄세계의 충신자를 하늘세계의 충신으로 세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위신상. 표준이 그 표준입니다.
`열녀나 혹은 효자가 있다면 그 가운데 어떤 누구누구가 있다 하더라도 육천년 동안 수많은 효자를 한꺼번에 세워 가지고 하늘 앞에 세울 수 있는 한 사람 효자와 비교하게 될 때 바꿀 수 없어요!' 그런 가치의 효자가 나타나기 전에는 하나님 아들이 못 됩니다. 사탄이 갖고 놀고 사탄이 깔고 놀고 그러던 그 자리에 가 가지고는 하나님이 당하는 거예요. 이렇기 때문에 기독교의 내용에 `누구보다 나를 더 사랑하라'는 조건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걸 똑똑히 알아야 됩니다.
그러한 심정을 갖고 오늘날 인류를 찾아 나오는 아버지의 심정이 얼마나 슬픈가를 알아야 됩니다. 알고 보면 천년 만년 통곡을 해도 그 심정을 위로해 드릴 수 없는 한을 품고 나온 아버지인 것을 우리가 알아야 돼요. 심판의 한 때를 찾아 이러한 한의 심정을 위로해 드릴 수 있는 하나의 아들딸을 세워서 온 만우주를 재차 축복하기 위한 때가 재림시대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들은 자문자답해 보라구요. 하늘을 위하여 눈물을 얼마나 흘려봤으며, 하늘을 위해 땀을 얼마나 흘려 봤으며, 하늘을 위해 내 생명의 피를 얼마나 흘려 봤느냐? 하늘의 어떠한 기준 앞에 인정받지 못한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딸이라고 자처하면 강도가 웃는 거예요. 나는 그렇게 보고 있다는 거예요. 이번 전도 기간에는 수많은 식구들이 생겨나리라고 보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들이 각오를 어떻게 해야 될 것이냐? 이것이 먼저 우리에게 있어서 생각할 문제입니다.
이 때는 어떠한 시대냐? 이 때는 심판 때이므로 하나님이 재섭리하는 말씀 심판시대가 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원리 원칙입니다. 수학의 공식은 어떤 국경을 초월해 있습니다. 어떤 위대하다는 인물의 모든 내용을 초월하고 있다는 거예요. 이것은 지극히 평범하고 지극히 만사일통이예요.
여러분, 공식적인 하나님의 심정을 알았습니까?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곳은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진정히 사랑하는 곳은 둘이 아니라 하나예요.
공식 법도 위에 새로운 이상적인 모델을 만들어야 할 천적인 심정세계의 내용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저 우리가 믿고 천당가자' 하는 거에요. 그러면 얼마나 쉽겠어요? 땀을 흘리면서 여러분에게 이런 말도 안 할거예요. 여기 서서 말하지요. 생애를 바쳐 핍박의 길을 가면서 오늘날 민족 앞에 이런 싸움을 안 해도 되는 거라구요.
통일의 청년들, 더욱이나 우리 통일신도들에게는 새로운 각성이 필요할 때가 왔습니다. 만일 통일교회에 들어와 가지고 이런 내용의 모든 것을 해결 못 해주거든 보따리를 싸 가지고 가라는 것입니다. 이미 말한 것과 마찬가지로 천정이 숨겨진 말씀을 못 해주고, 내 눈에 불을 붙여 주지 못하는 내용의 말씀이라면 가짜예요. 적그리스도입니다. 아무리 성경 66권을 다 외워 가지고 유창한 설교를 한다 할지라도 엉크러진 죽음의 피를 갈라낼 수 있는 내용의 진리가 없다면 진리가 아닙니다.
변천의 역사를 혁명시켜 나온 것도…. 이 시궁창에서 싸우고 있는 이 피의 감정을 새로운 피의 감정으로 돌릴 때만이 역사는 새로운 혁명시대로…. 우리는 이제까지 새로운 역사의 개문을 향하여 나왔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심정에 새로운 핏줄기가 심어지게 하고, 새로운 피살이 약동하는 새로운 이념의 목적을 향하여 그 위치에 있어서 가치를 자랑할 수 있는 그 모습을 찾고 있느냐? 내 위치와 내 가치와 내 목적이 방향을 갖고 있느냐를 반문해 보게 될 때 심각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원불변의 위치요, 영원불변의 가치요, 영원불변의 목적의 주체인 것을 분명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 자신도 영원불변의 위치요, 영원불변의 가치요, 영원 불변의 목적의 대상체를 갖출 수 있느냐 이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들은 이 거리 저 마을, 이 교회 저 교회, 이 교파 저교파, 수많은 인사를 찾아 헤매다가 결국은 통일이라는 여기에 찾아들었습니다. 여러분이 이 길까지 찾아오게 된 그 이마에는 땀이 흘렀고, 그 등에는 매자국이 남아진 것도 알고, 그 발걸음에 상처가 난 것도 알았지만 나는 역사의 일각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의 땀과 눈물과 피가 아직까지 이 민족 앞에, 오늘 이 세계 인류 앞에 남아 있는 한 우리는 천적인 심정을 위로해 드리는 효자 열녀 충신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피를 아버지의 피로, 우리의 땀을 아버지의 땀으로, 우리의 눈물을 아버지의 눈물로 돌릴 수 있는 자신이 있거든 오고, 없으면 오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여러분들이 잘 알아야 된다구요.
하나의 천리의 말씀을 세우기 위한 것이 하나님의 육천 년 역사였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하나님이었다는 걸 여러분은 알아야 돼요. 원통합니다. 원통해요. 아버지된 입장에서 자녀라는 이름을 가져온 타락한 인간, 인연으로 보면 아들인데 사정으로 보면 원수의 입장에 서 있거늘 이것을 어떻게 터쳐 나가느냐? 이렇기 때문에 뜻 있는 양심적인 사람을 움직여 이 담을 터쳐 나온 것입니다. 내 심정의 피가 끓어오르면서 아버지라 부를 수 있으며, 아들이 아버지라 부르는 그 음성과 아버지가 아들이라 부르는 그 음성에 온 천지가 녹아지고도 남는 그런 시기가 반드시 와야 합니다. 그래야만 이 땅 위에는 심판이 끝날 때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아버지를 생각할 때 통곡할 수 있는 마음의 심정이 간곡하고, 내 육신이 찢어지고 밟히는 어떠한 억울함을 게의치 아니하고 눈물의 담과 눈물의 바다를 깨쳐 목표량을 다할 수 있는 개체가 되어 있느냐? 반성할 때라는 것입니다. 나는 한때 울어 본 적도 있습니다. 한 없이 울어 본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 일개인의 어떤 욕망과 목적 때문이 아닙니다. 이러한 기점을 중심삼은 역사적인 전환점을 해결해야 할 때가 반드시 심판 때에 올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되어 역사적인 곡절을 중심삼은 한의 인류의 참상을 만들어 놨느냐고 생각하게 될 때, 하나의 천정을 대신할 참다운 아들의 모습이 그리워 허덕이며 통곡한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버지가 그리워서 찾아 헤매는 그 음성과 화하여 들려오는 그 음성 앞에 내가 여기에 있노라고 외칠 수 있는 한 자리가 그리웠다는 것입니다.
수십 년 종교생활을 자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버지 부르시는 그 음성 앞에, 그 심정을 염려하면서 부르시는 대답 앞에…. 아버지의 사정적인 모든 것을 이어받아 책임 감당할 수 있는 참다운 아들딸이 이 땅 위에 있느냐? 생각해 보라구요. 여러분 자신을 중심삼고 생각해 보라는 거예요. 불쌍하고 원통한 하늘이었습니다. 할 수 없는 아버지의 심정이었다는 거예요. 사탄, 이것은 벌써 몇천 년 전에 심판의 제물로 지옥 불구덩이에 쓸어 넣어 유황불에 사라지게 해도 아깝지 않을 이런 한을 가진 인류역사였습니다. 그것을 참고 지금까지 나온 거예요. 나는 아버지요, 너희들은 아들이라는 인연을 남긴 것이 없다면 여러분이 자신을 가지고서 살아갈 수 없다구요.
복귀의 심정을 우리들은 노래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여기에 아버지의 음성으로 불러져 들려오는 그 음성이 필요할 때입니다. 여기 내 자신에게 있어서 그리운 것은 어떤 세상적인 그 무엇이 그리운 것이 아닙니다. 세상은 이미 다 끊기고 막힐 때가 돼 왔으니 이제 여기에 있어서 내 귀가 있고, 내 눈이 있고, 내 입이 있고, 내 감정이 있다 할진대는, 이목구비나 오관을 통하여 들어오는 그 감정이 옛날의 감정을 넘어설 수 있는 새로운 감정을 통할 수 있어야만 되겠습니다. 그 감정은 천정과 더불어 인연되었다는 사실을 확실히 파악한 자리에서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요 딸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겠습니다.
이런 과정을 넘어야 할 인간이기 때문에 무지한 인간들을, 떨어지고 밟힌 처량한 그 인간들을 손짓으로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 구원이라는 방패입니다. 비유와 상징으로써 심정의 내정을 통과하지 못한 채 지금까지 나온 인류를 보호해 주기 위해서 왔던 것이 메시아입니다. 그 메시아는 어떠한 메시아냐? 심정의 메시아. 그 메시아는 어떤 메시아냐? 실체의 메시아. 그 메시아는 어떤 메시아냐? 말씀의 메시아로되 예수가 이 땅에 와서 보여 준 것은 말씀의 메시아로서의 노릇을 완결 못 한 것입니다. 말씀 기준도 완결짓지 못하고, 인격 기준도 완결짓지 못하고, 심정 기준도 완결짓지 못한 채 갔습니다. 말씀 같은 말씀을 남기고 간 것이 간 것이 성경이예요. 그게 비유와 상징이예요.
우리는 이제 여기에서 무엇을 찾아야 될 것이뇨? 말씀과 더불어 말씀 통과 후에는 실체 통과시대가 온다는 걸 알아야 됩니다. 이것을 기독교가 지금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고 연구하는 목적은 실체 기준을 통과하기 위해서입니다. 실체의 기준을 통과 하지 않으면, 그 실체를 붙들고 이 땅 위에서 사정을 알지 못한다면 신부가 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땅 위의 인류는 주님을 맞이해야 됩니다. 말씀을 완전히 통과 못 한 우리, 실체를 완전히 통과 못 한 우리, 심정을 완전히 통과 못 한 우리가 가만히 보면 제일 좋은 것만 바라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오, 신랑이신 주님! 사랑이신 주님! 사랑 자리까지 나가기 위해서는 말씀을 해결해야 됩니다. 말씀을 내재했으면 말씀과 하나될 수 있는 예수를 대신한 인격자가 돼야 합니다. 이걸 다 무시해 버리고 믿으면 천당 가고 신부가 돼요? 가나 안 가나 보자구요. 우리는 성경을 연구합니다. 성경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 어떤것이 문제냐? 성경을 보면 그저 뭐 전부 다 요한복음 3장 16절같이 누구든지 다 그래요? 천만에요.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게 슬픔이 있다면 제일 슬픈 것이 무엇이냐? 하나님에게 십자가 고통이 있다 할 때 제일 큰 고통이 무엇이고 억울함이 무엇이냐? 성경 다 안다고 청산 못 해요. 뿌리가 없어요, 뿌리가. 오늘날 성경을 찾아볼 때 뿌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큰일이라는 거예요. 방황하고 싸우고 이단 저단하는 왕자들이 돼 버리고 만 거예요. 그러나 암만 싸웠댔자…. 가지는 가지끼리 싸우고 앞사귀는 잎사귀끼리 싸워야 되겠느냐 말이예요. 가을이 되면 다 떨어져 나갑니다. 생명의 진액이라는 것은 뻗어 나가는 거예요. 돌아가는 것입니다. 어디를 통하여? 뿌리를 통하여. 여러분이 그것을 알려면…. 베드로가 십자가에 꺼꾸로 달려 죽으면서도 `주여!' 했듯이 죽으며서도 주와 심정적으로 통할 수 있는 뿌리의 내용을 들추어 나와 인연을 맺어야 돼요.
예수가 십자가 도상에서, 죽는 자리에 나가면서도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시옵소서' 하는 이 심정으로 흘러내리려던 그 사정이 무엇인가 알아야 됩니다. 그걸 모르면 죽은 거예요, 죽은 거. 성경의 미해결 문제를 해결해야 할 때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다 주었는데 다 해결하지 못해 가지고 무얼 또 바래요. 끝날에 왔다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그걸 똑똑히 알아야 돼요.
그러니 예수는 이 땅 위에 올 때 신부를 찾아 온 것입니다. 반대하는 이스라엘 민족 앞에 나서서 외친 목적은 예수 믿고 천당 가기 위한 개인의 목적이 아닙니다. 나를 믿고 이스라엘을 구하라는 것이 목적이예요. 그걸 알아야 됩니다. 똑똑히 알아야 돼요. 나를 믿고 이스라엘을 구하고 이스라엘을 믿고 세계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는 영계와 땅을 구하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예수 믿고 나서 나만 천당 가는 게 아니예요. 천만부당한 말입니다. 어디에 그런 선의 목적이 있어요?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도 민족을 위하여 믿는 것이라야 됩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세계를 위하여 사랑하는 것이어야 됩니다. 하나님이 있다면 그러한 신자를 그리워할 것입니다. 어떨 것 같아요?
여러분, 바꿔 생각해 보라구요. 대천주의 공업(公業)을 완성시켜야 할 책임을 바라보면서 수많은 민족을 동원하여 양심적인 사람을 연결시켜서 하나의 형태를 갖추어 선의 주권을 해방하기 위한 것이 하나님의 섭리의 뜻이라 할진대 내 개인을 위한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개인을 위하기 위한 것은 깨져 나가요. 불에 빠진다 말이예요. 그건 깨져야 됩니다. 깨지지 않으면 하나님이 망해요. 자기의 일족을, 한 나라를 위한 종교는 깨져야 됩니다. 그거 안 깨뜨리면 하나님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전세계 기독교는 혼란의 때에 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깨뜨려야 돼요. 왜? 하나님의 목적과 자기들이 갖고 있는 위치와 가치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통일의 이념을 우리들이 부르짖고 나오게 될 때, 우리가 믿는 것이 내가 믿고 천당 가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걸 끊어 놓아야 돼요. 만약에 내가 믿어 가지고 민족을 구하고 그 구한 민족이 천당 간다면 내가 천당 가지 지옥 가겠느냐 말이예요. 신앙의 방향성이 다 거꾸로 됐으니 곡절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걸 알아야 돼요.
우리 통일신도들은 `내가 믿는 것은 이 민족을 구하고, 내가 믿는 것은 이 인류와 세계를 구하고,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이 슬픔 가운데 있으니 하나님의 슬픔까지 해방하기 위한 것이다' 이거예요. 여러분들 모르는 사람들은 `하나님은 무슨 전지전능한 하나님….' 하지만 그건 다 몰라서 그러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람의 모든 본의를 알려면 요거 공부를 해야 되겠다구요. `아, 하나님은 슬펐구나….' 여러분의 슬픔은 어디서 나왔어요? 우리의 희노애락은 하늘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그렇게 돼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들은 몰림받는 데 최고로 몰림받자는 거예요. 수많은 종교인들의 반대를 받되 거기에서 우리는 사라지는 무리가 돼서는 안 됩니다. 대중을 위하여 나가 외치게 될 때 거기에 타오르는 하나의 불길이 대중의 마음을 뒤집을 수 있는 내용을 가졌다면 산다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 시대에 있어서는 천법 말씀의 시대가 오는 것입니다. 말씀을 찾아야 할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말씀시대가. 말씀을 찾아내어 신부가 되려면 주체와 대상의 모습을 통하여야 된다는 거예요. 신부가 되기를 원하는 자는 인격적인 기준에 있어서 예수가 거치던 모든 심정의 내용을 통한 생활적인 감정이 화할 수 있는 이런 인격자여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 있어요?
오늘날 우리가 영적인 세계에 있어서 그 심정을 찾아보게 될 때 예수님이 재림하기를 무한히 고대했다는 것입니다. 그걸 알아야 돼요. 하나님이 2천년 동안 기다렸어요. 예수님 시대에 주님이 언제 오겠느냐 할 때 전부 다 얘기하지 않았어요? 그들은 살아서 올 줄 알았지만 재림의 이념을 대할 수 있는 심정적인 기반이 안 되어 있기 때문에, 한스러운 희생의 역사노정을 엮어 오면서 때와 사람을 세워 가지고 세계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때를 바라 지금까지 2천 년 동안 찾아 나온 것입니다.
재림하고 싶었던 하늘의 심정이 간절하였으되 오지 못한 그 사정이 어디에 있었느뇨? 여러분들이 무지하였기 때문에, 더 나아가서는 무정하였기 때문입니다. 그거예요. 주님은 이 땅 위에 오실 때 만국을 통치하기 위해 오려고 하는데 여러분의 신앙관은 자기가 구원받고 천당 간다고 하는 거예요. 그런 졸장부가 돼 가지고 신부라고 하겠어요? 상식 부족이예요, 상식 부족. 예수는 만왕의 왕이요, 만유의 주요, 하나님의 황태자예요. 하나님의 왕자예요, 왕자. 그걸 알아야 돼요. 오늘날 대통령 아들만 돼도 뽐내고 그러는데 전무후무한 역사적인 주인공이요, 시대적인 주인공이요, 혹은 미래적인 주인공으로 계실 수 있는, 영광된 자리에 주체로 계시는, 홀로 계시는 그 절대자 아들입니다. 그의 신부가 되어야 해요, 그의 신부가. 그런데 이런 엉터리가 없다는 겁니다.
예수가 믿으라는 내용은 여러분 하나를 중심삼고, 개인 천국 보내 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믿으라는 것은 온 천주에 대해서 호소한 말입니다. 천주의 심정 깊이 사무친 예수의 이념의 내용을 통하여 흘러 나오는 말씀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된다는 거예요. 그런 경지에 서 가지고 사망의 세계, 죄악의 세계를 대하여 싸움을 해 나서는 하늘의 정병이 그리웠다는 거예요. 이런 대표자로 로마제국을 향하여 나섰던 것이 70문도의 모습이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 그런 말이 있지요. 예수의 성경 말씀을 믿고, 그런 내용을 알아 가지고, 인격적인 내 한 자체가 돼 가지고 심정에 있어서 만민을 대하여 내 피를 흘리면서 원수까지 복을 빌 수 있는 어머니 아버지 이상의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우선 우리가 상식적으로 비판해도 이런 논점을 해명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그런 사람 봤어요? 그런 목자를 봤어요? 그러한 성도를 봤어요? 문제는 거기에 있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그런 자리를 기필코 뚫고 나가는 무리가 있다면 그런 무리는 망하지 않는다 이거예요. 이것이 가설이라고 할지라도 그런 내용으로 나가는 아들딸이 있다 할진대 하늘이 벌주겠어요? 사실이 그래요, 사실이.
이때는 말씀이 그리워 허덕이는, 말씀의 곤궁을 느껴 허덕이며 지치는 때입니다. 이들을 깨우칠 자는 누구뇨? 끝날이 되어 오니 끝날 앞에 지친 무리를 찾아오는 모습이 실체입니다. 주 대신 지친 그 모든 내용을 풀어 줄 줄 알고, 주 대신 지친 내 환경을 수습해 줄 수 있는 하나의 지도자가 필요한 때가 왔습니다. 오늘 전세계 기독교를 바라보게 될 때 교회당은 크고 교인들은 많다고 하지만, 거기에는 그런 사람 몇 사람을 찾아볼 수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내가 여러분 앞에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 통일신도들은 이미 거쳐야 할 걸음을 다 거쳐왔습니다. 장로교 교리가 어떻고 감리교 교리가 어떻고 신약사조가 어떻게 나오고 이런 걸 다 알 수 있는 기준을 가지고 허덕여 나온 무리들입니다.
이제 여기에 무엇이 필요하느냐? 내가 지친 이 자리를 다시 한 번 용솟음치게 만들어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말씀을 가지고 연구하고 연구하여 지쳐 쓰러질 때는 말씀으로 다시 한 번 말씀의 자신을 갖출 수 있는 거예요. 말씀 애착 회복운동을 제시시키는 새로운 움직임이 지상 위에 나타나지 않는 한 갈 길이 막혀 버린 이 인류가 어디로 갈 것인고? 달려가 보니 막혀서 돌아서 가야 하는 데 어디로 갈 것이냐?
오늘날 이렇게 단말마적인 첨단에 처해 있는 우리 역시…. 말씀에 지치고, 신앙 생활에 지치고, 교회 생활에 지친 나로 하여금 지친 말씀과 지친 신앙에 감정을 새로 일으켜 지금까지의 것보다 더 좋은 가치로써 `아버지여 알았소이다' 할 수 있는, 말씀에 대한 애착심을 일으킬 수 있는 운동이 필요한 때가 되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들, 이러한 심판의 때에 있어서 말씀심판과 인격심판과 심정 심판이 끝날에 벌어진다고 하였습니다. 말씀의 심판을 하기 위해서는 말씀의 심정을 일으킬 수 있는, 말씀에 대해서 애착심을 일으킬 수 있는 하나의 말씀을 세워 놓고 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인격심판을 하기 위해서는 인격심판의 어떤 기준을 이 땅 위에 내세우고 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한다면 그것도 하나님이 아니예요. 심정 심판을 하기 위해서는 심정의 기준을 수습할 수 있는 그 한 기준을 세워 놓아야 해요. 안 세우고 하게 되면 다 망해 버린다 이거예요. 그렇게 때와 시기를 바라보게 될 때 이 때는 심판시대입니다. 알겠어요? 심판시대예요, 심판시대.
여러분, 이제 여러분 손에 쥔 것을 놓고 `내가 지금 갖고 있는 것이 아버지가 제일 사랑하던 것이 아닙니까?' 하고 물어야 합니다. 답을 받아야 할 때예요. 목을 매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죽을 각오까지 하고 해결해야 된다 말이예요. `그럴 것이다' 하는 시대는 지나갔어요.
지금은 여러분 마음에 이제 다시 한 번 용솟음쳐 새로운 무엇으로 나가기 위해 허덕이는 자신을 반성할 때입니다. 거기에 있어서 자기가 지금까지 제일 사랑하는…. 천지운세가 도수를 맞춰 들어오는 그런 총괄적인 관점에서 볼 때, 오늘 내 자신이 애착심을 가지고 있어요? 그것을 들고 `하나님이여, 이것 보시옵소서' 할 수 있는 그런 것을 갖고 있어요? `주인이여, 이것 받으시옵소서' 할 수 있는 걸 갖고 있냐 말이예요. 다 잃어버렸습니다. 가진 것 같지만 다 잃어버렸어요.
그렇기 때문에 끝날에는 최후 청산시대가 옵니다. 최후 심판시대이기 때문에 말씀을 중심삼은 각도대로 180도 돌아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현상이 벌어져야 나라가 살든가 교회가 살든가 새로운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판시대에 처해 있는 세계인류라는 거예요. 그대들의 마음이 어느 누구에게 자랑할 수 있는 애착의 발판을 갖고 있느냐? `어서어서 데려가 주시옵소서' 해야 합니다. 주님 앞에 갈 때 내 아들딸이 귀하고 내 무엇이 귀하지만 그럴 수 있느냐 이거예요. 사조가 그렇게 됐다는 거예요.
그러니 그러한 시대가 오게 되면 민족적으로 그런 사조에 휩쓸려 가지고 안 끊을래야 안 끊을 수 없는 그런 환경에 선 민족과 국가와 세계 사조를 대표하여 고통받는 그런 한 지역과 한 백성이 생겨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세계적으로 볼 때 한민족이예요, 한민족. 남북이 딱 갈라져 가지고 부모 처자가 다 갈라져 버렸어요. 심정적인 파탄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의 6. 25동란으로 경제적인 파탄이 나오고, 이론적인 파탄이 나오고, 정책적인 파탄이 나오고, 종교적인 파탄이 나오게 되었다 이거예요. 그렇지만 여기서 낙망하지 않습니다. 또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하늘의 뜻이 이 민족 앞에 있을 것이 틀림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역사를 봐도 부패한 고비를 통하여 새로운 역사는 시작돼요.
오늘날 이 정권의 12년 동안 부패정치로 말미암아 새로운 청년들의 피가 끓어올랐어요. 올랐으면 거기서부터 새로운 역사로 뻗어 나가야 정상입니다. 심어 놓고 보니, 뿌려 놓고 보니 비료를 뿌린 옥토가 되지 못하고 또 마찬가지예요. 내가 여기에 뭐 어떤 욕망을 갖고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종교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고, 세계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젊은 청년 남녀가 있다 할진대는 4. 19혁명 당시에 뿌린 피를 어디로부터 끌고 나갈 것이냐?
그런 마음을 품고 하늘 앞에 기도한 수백 명의 젊은이들이 피를 흘렸지만 수백 명의 부모는 여러분보다 더 통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으로 그 부모 이상 아버지 앞에 호소하면서 `이 피의 대가가 부디 이 민족의 생명의 피의 대가로, 천륜의 법도의 때를 위하여 하늘이 사랑할 수 있는 기적의 절개의 한 맥박으로서 남아질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하고 눈물짓는 무리가 어디 있는 지를 찾아야 할 때라는 거예요. 그러지 않으면 이 민족은 고개를 들고 나올 수 없다구요. 이렇게 전진을 명령하고 방향을 제시하여 사명을 다 할 수 있는 새로운 문을 개방해야만이 이 길을 헤치고 나갑니다.
이제 하나님의 목을 부여안고 싸우는 청년 남녀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젊은이들은 그것을 그리워한다는 거예요. 갈 곳 없고 지치고 방황하는 무리는 기필코 어느 한 때 통일의 봉화를 반드시 볼 것이며, 봉화의 불에 새로운 충격을 받는 한 날이 있거든, 거기서 주저할 것이 아니라 방향성을 제시하여 천적인 섭리와 더불어 박자를 맞출 수 있는 심정적인 내용의 그 무엇을 찾아야 합니다. 이것을 어떻게 찾아 세울 것이냐? 그것은 인간 중심이 아닙니다. 천정을 대신할 수 있는 심정적인 기준을 어떻게 세울 것인가? 이것이 오늘날 한국 기독교인들이 해결해야 할 문제요, 소위 각 교파, 혹은 종파, 혹은 도를 숭상하는 수많은 도의 권내에 머물러 있는 인사들이 해야 할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가야 할 곳을 알았고, 우리가 처해 있는 위치와 우리의 목적을 알았고, 우리의 가치적인 그 무엇이 하늘을 중심삼고 저울질한 것을 알았다 할진대는 여러분 자신들이…. 여기에서 우리는 땅과 하늘을 대신한 새 사람들을 찾아 가지고 심정적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말씀을 발표해야 됩니다. 그 말씀이 역사적인 말씀을 심판할 수 있는 말씀으로 돼 있느냐? 그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됩니다. 맹목적이 아니예요, 맹목적이.
오늘날 사회 인사들은 통일교회 문선생 하면 그저 바보 천치 미급자(未及者)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이거예요. 이런 길을 가기 위해서는 누구보다도 피땀을 많이 흘렸고, 누구보다도 머리를 기울였고, 누구보다도 생사의 판가름의 싸움을 몇 고비 넘어왔습니다. 자기에 대한 각오와 자기에 대한 신념과 자기에 대한 실천적인 증거 그 무엇 갖고 인류를 대하고, 민족을 대하고, 어떠한 국가 어떠한 사상을 대해 가지고 싸울 수 있는 자신을 가졌느냐? 이러한 문제를 놓고 무한히 고뇌한 사람이라는 거에요. 그래 가지고 이러한 자리에 욕먹는 간판을 들고 나온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 우리는 여기에 있어서 이러한 과거 현재 미래의 역사를 엮어 나오고, 부여 안고 싸워 나오는 하나님이 계신다면 그 하나님을 중심삼고 과거의 피와 땀과 눈물로 엮어 나오던 하나님의 심정이 무엇이며, 이 시대에 눈물과 땀과 피로 엮어 오신 하나님의 뜻을 실천한 그 심정이 무엇이며, 미래의 심정이 무엇이냐 반문하게 될 때, 여러분이 말은 못 할지언정 내 가진 모든 모양으로 증거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걸 여러분은 알아야 돼요. 신념이 없는 자를 하나님이 축복 못 해줍니다. 하늘은 자조자(自助者)를 돕는 것입니다.
예수는 불초한 몸으로 나타났을지라도, 초조한 모습으로 갈릴리 해변가에서 가난한 어부의 스승이 되었을지언정, 어떠한 교법사 빌라도, 그 누구한테…. 가진 천적인 신념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심정까지 움직일 수 있는 신념을 가졌습니다. 그 신념은 인류가 필요로 하는 신념이었기 때문에 신념을 통한 말씀의 인연이 남아 있는 한, 그 말씀의 목적이 종단될 때까지는 그분과 더불어 관계를 맺어야 할 것이 필연적인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기독교는 세계적인 종교로써 발전해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걸 알아야 돼요. 민족을 대하여 싸울 수 있는 신념, 세계에 어떠한 반대자가 있다 하더라도 이걸 헤치고 나갈 수 있는 신념을 가져야 됩니다. 더군다나 통일 신도들은…. 여기에서 말하는 사람은 많은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대포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지금은 원자포시대입니다. 일을 하다가 피땀을 흘리며 도중에 쓰러지게 될 때 그 고을이 터져 나갈 수 있는 그러한 신념을 가져야 돼요. 그런 자신과 그런 신념을 가진 여러분이 돼 있느냐? 그것이 문제가 됩니다. 그런 견지에서 아버지의 말씀이 이것이요, 아버지가 찾고자 하는 진리가 이것이요, 이것이 아니면 이세계를 구할 수 없다는 말씀적인 내용을 가지고 신념을 갖추어 피조세계를 대하여 주인답게 만물을 주관하라 했으니, 주관에 대한 행사를 늠늠히 할 수 있다는 신념을 자신 있게 가져야 됩니다.
자신을 가지고 선 위치를 어기지 않고, 그 가치에 천지가 머리 숙일 수 있는 자리에 서서 하늘을 대하여 아버지라 부르는 아들딸이 있다면 `예이, 이 녀석아, 너는 망령된 자야' 그러지 않습니다. 내가 바라볼 때 몰리고 쫓김받는 것이 고맙다는 거예요. 참된 것이 욕을 먹고 망해 본 법이 없어요. 맞고 근절된 법이 없어요. 이는 지극히 적은 것이로되 하나에서부터 둘로, 둘에서부터 퍼져 나가는 것입니다. 하늘은 크게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말없이 합니다. 자랑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소리없이 합니다. 이래야 명실공히 통일교회가….
통일교회가 지금까지 문제 돼 왔지만 앞으로는 기독교가 문제예요. 미안하지만 말이예요. 여러분 잘 알겠지만 기독교는 문제가 커집니다. 두고 보라는 거예요. 아무리 벽돌담을 쌓고 아무리 어떻게 하더라도 이치에 맞아야 돼요. 진리는 이치예요. 이치인데 개인생활 이치가 아니예요. 세계생활 이치요, 천주생활 이치입니다. 그걸 알아야 됩니다. 진리란 성경 한 귀절 해석 잘 한다고 진리가 아닙니다. 자랑하지 말라는 거예요. 하나님과 더불어 살 수 있는 생활적인 이치, 지극히 평범한 것 같은데 지극히 고상하고, 지극히 보편적인 것 같은데 지극히 무한한 가치를 가진 것이 우주적인 진리입니다.
그런 진리의 기준에 서 가지고 여러분 자신들이 민족을 살리고 국가를 살려야 됩니다. 하늘을 움직일 수 있고, 땅을 움직일 수 있고, 하나님의 심정을 돌려 잡을 수 있는 여러분이 돼야 됩니다. 그런 사람만 되면 주님이 미국에 가도 주님을 끌어 올 수 있다 이거예요. 미국 같은 나라에 하나님이 축복을 해주고 싶어도 축복 못 해줘요. 왜? 천국은 힘쓰는 자가 빼앗아 오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이 몇 사람만 있어 보라구요. 이 세계에 크나큰 축복의 보따리가 있다 할 때는 항의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렇다구요.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것이 없다구요. 신부의 구비조건을 갖추어 하나님이 눈물지을 수 있고, 천상의 모든 것이 감동받을 수 있는 진리의 내용을 가진 어떠한 사람이 있다 할진대는 그것을 통하여 주님이 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사람, 아버지의 손길을 붙들고 내 아버지라고 부르며 서슴지 않고 나가서 아버지와 자식 된 부자의 인연을 회복해서 6천 년 동안 잃었던 아들을 찾기 위한 과거의 역사적인 슬픔과 고통과 어려움에 사무친 모든 것을 풀어 놓고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면서 아들이라고 할 수 있는 자리에서 심정적 인연을 체험한 주인공이 이민족 앞에 단 세 사람만 있어도 전세계 기독교는 이들로 말미암아 해결됩니다. 나는 그렇게 믿고 있어요. 또, 그렇게 알고 있어요.
내가 말하건대, 수많은 기독교인과 수많은 도인이 있다 할지라도 최후의 영적인 세계문제와 인간적인 최후의 심정문제에 있어서 해결 지을 수 있는 기점은, 통일교회가 아니면 해결하지 못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자신하고 나서서 통일하자고 나서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걸 가지고 나오기 위해서는 말씀심판 과정을 거쳐야 되겠으니 이 말씀에 있어서 내가 심판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찾기 위하여 피눈물 나는 그런 죽음의 고비도 가는 것입니다. 말씀을 찾기 위하여 기도하는 데 있어서도 누구한테 지지 않는 기도를 해야 돼요. 이를 악물고, 실제로 얼굴을 들어 가지고 모든 것을…. 천리가 알아 주지 않고는 절대 안 된다는 그런 기도를….
이러한 말씀을 찾아 이 땅 위에 참다운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내가 존경하는 형제여! 그 심정적인 기준이 어떻게 돼 있느냐' 하고 외쳐야 하고 내가 이말씀이 옳다 하여 `하나님!' 할 때 하나님이 `오냐' 하는 답을 가르쳐 줄 수 있는 말씀의 내용을 지녀야 됩니다. 우리 민족 앞에, 여러분 앞에 믿겨지지 않는 진리라 할진대 이미 그런 진리는 지나갑니다. 그건 지나간다구요.
여러분, 오늘 통일교회에 들어와 가지고 뭘 느낀 바가 있을 것입니다. 느낀 바가 있으면 그걸 재감정하라는 거예요. 맹목적으로 믿지 말라는 거예요. 여기에서 달라지지 않으면 저 끝에 세계일주를 해 가지고 다시 와야 됩니다. 말하고 싶은 건 그 말이라구요. 그래야 다부지게 명령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기 있는 여러분들은 말씀을 들었기 때문에….
오늘 여기에서 말하는 자신에게 있어서 말씀심판 과정을 거치기 위한 보이지 않는 세계와 보이는 세계를 비교해 볼 때, 보이지 않는 세계에 있어서 승리의 무엇을 해결지었기 때문에 보이는 세계에 있어서 이 기준을 거쳐 나가는 것입니다. 영적 완결과 육적 완결, 무형세계 완결과 지상세계 완결을 지어야 되겠으니 여기서 수많은 원수가 전부 다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기도해야 하는 거예요. 24억 인류가 나타나서 통일교회를 몰아치겠다고 하는 그런 소리가 들려오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여러분이 천정을 대신하여 나타난 그 모습 앞에 있어서는 누구한테 양보하지 않는, 나만이 우리만이 아버지 앞에 가겠다는 그 내용을 안고 나타나게 될 때, 그 인연을 갖지 못한 수많은 인류는 반드시 움직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안 움직일 수 없다는 거예요. 움직일 수 있는 영적인 모든 내용이 돼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령이라고 합니다. 기독교통일신령이예요. 어떤 사람들은 `신령' 하면 요술판이기 때문에 `신령' 이라고 생각하는 데 그게 아니예요. 이치적인 내용을 통하여….
이래 가지고 여러분들이 말씀과 더불어…. 그다음에는 실체통과시대예요. 여기서 말하는 이 사람도 지금까지 40평생을 싸워왔습니다. 내가 쓰러지는 그 순간에 있어서 아버지 앞에 내 정열을 다 기울여 무엇을 할 수 있는 미련의 감정이 남을까봐 염려하는 사람입니다. 이 일에 어떤 수단 방법으로 자기 일개의 어떤 욕망을 가졌다면 천벌을 받아요. 만일 그렇게 됐더라면 벌써 망해 버렸어요. 왜정 때부터 수십년 역사노정에 이런 놀음을 해 왔습니다. 가는 곳마다 감옥생활을 해나왔어요. 가는 곳마다 조롱을 받아 나왔습니다. 그렇지만 원수는 내게 없습니다.
그건 왜 그래야 되느냐? 천륜의 법도가 말씀통과시대의 과정을 거치면 반드시 실체통과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십자가의 길이 남아 있고, 이 땅 위에 있어서 한을 남긴 원한의 기준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라구요. 아벨의 피가 호소한다고 했지만 만왕의 왕 되신 하나님의 왕자가 이 땅 위에서 눈물짓고 피흘리며 호소 만 할 것 같아요? 안 할 것 같으냐 말이예요. 예수의 피눈물이 호소한다는 것입니다.
피눈물의 호소를 어디서 탕감할 것이냐? 오늘날 성도들이, 지금까지 이 기독교가 피의 전쟁으로 기독교의 참다운 피를 연결시키기 위해서 호소하며 탕감해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이런 모든 문제를 걸고 들어갈 때 여러분은 남겨 놓은 십자가의 길을 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당장에 여기서 말하고 있는 이 자리가 여러분이 바라볼 때 좋은 자리 같지만, 당장에 이 자리에서 나가 영어의 몸이 될지라도 거기에 대한 심리적인 변동은 없어야 됩니다. 그런 신념을 갖고 나가야 돼요.
오늘 우리에게는 이 현실무대에 있어서 사탄세계를 해결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될 비운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오늘날 통일교회가 이러한 형태를 갖추어 나오기 위해서 무한한 눈물을 흘린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하나의 사실에도 피와 땀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들은 갖고 쓰다 남은 그러한 무엇으로써 하나님을 위하여 지금까지 움직여 나오지 않았습니다. 먹지 않고 굶고 쫓기면서, 헐벗고 떨면서 나온 거예요. 오늘날 이런 형태를 가지고, 민족의 문제의 제시 조건을 갖고 나타났다는 거예요.
이런 데서도 침묵을 지켜 나왔습니다. 언제나 이럴 수 없다구요. 때가 이런 때가 왔거든 새로운 문화에 있어서 내 진리를 통하여 오늘날 지성인들이 관심을 잃어버린 이 민족 앞에 관심을 일으켜야 되겠고 애착심을 일으킬 수 있는 운동을 전개해야 됩니다. 이걸 실천해 가지고 나라에 대한 애착심, 혹은 우리의 이상세계에 대한 애착심을 잃어버린 이 무리들을 격려하지 않으면 안 될 때가 왔다는 거예요. 그것이 안 되거든 제를 올려서라도 이들을 깨우쳐 하늘이 품어 줄 수 있는 민족으로 돌려 놓지 않으면 안 될 민족적인 사명에 불타 가지고 우리들이 나가야 됩니다.
여러분이 말씀을 통하여 지금까지의 기성 진리를 심판할 수 있는 말씀을 지닌 자로 나타날 수 있기 위해서는 먼저 신념을 가져야 됩니다. 신념을 가졌거든 그 실체적인 몸을 가지고 배신한 원수들을 대하여 정면 충돌하게 될 때, 자유스럽고 평화스러운 환경에서 그들을 버젓이 훈시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어야 됩니다. 그것도 불신하거든 참과 거짓을 증명하기 위해 피를 뿌려 하늘 앞에 제물로써 보여 줄 수 있는 신념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통일신도들이 그걸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그걸 알아야 돼요.
생활을 움직일 수 있는 말씀, 생활의 실체를 감동시킬 수 있는 사랑, 생활에 허덕이는 마음의 터전을 안식시킬 수 있는 심정의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무리로서, 하늘을 배경으로 하여 역사적인 과거와 현재와 미래적인 소망의 터전 위에서, 뚜렷한 출발에서부터 목적까지 변치 않는 원칙적 노정을 향하여 달려갈 수 있는 무리가 됐다 할진대는 여러분은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여러분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이때는 진리심판의 때요, 인격심판의 때요, 심정심판의 때라는 거예요. 외적인 현상으로 볼 때, 섭리적인 조건에 비춰 본다면 그렇게 돼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이 말씀을 붙들고 나가 싸우게 될 때, 이 말씀을 외칠때 여러분들은 말씀의 심정, 여기서 말하는, 혹은 우리가 말하는 이 말씀이 나올 때까지 그 숨어 있는 곡절의 처참상을 느끼면서 하늘 앞에 감사할 수 있는 벅찬 마음을 갖고 여러분들이 이 말씀을 위해 나간다면, 나가는 곳곳마다 여러분에게는 하늘이 같이합니다. 틀림없다는 거예요. 하늘이 같이합니다. 이 말씀을 갖고 나가는 곳곳마다 묻혔던 마음에 혁명이 일어나요. 양심의 혁명으로부터 심정의 혁명을 갖출 자신이 있다는 거예요. 그걸 자신하기 때문에 오늘 여기서 말하는 사람도….
또, 타락된 우리 후손을 보게 될 때…. 우리는 타락성을 갖고 있습니다. 타락성의 4대 조건이 뭐예요? 교만과 시기와 혈기와 거짓입니다. 교만, 질투, 혈기, 거짓, 이것이 타락성이예요. 여러분도 그걸 벗어야 된다 말입니다. 이걸 벗으려니 지금까지 금식을 하고 야단을 하는 거예요. 이걸 벗으려면 복귀노정의 심판시대에 있어서 어떻게 해야되느냐? 내 자신이 말씀으로 무장하고 말씀의 실체가 돼야 됩니다. 실체과정을 통과하려면 반드시 타락성 본성을 벗어야 됩니다. 여기에는 4대 조건이 남아 있으니 이것을 벗으려면 핍박도 받고 시련도 받고 해야 된다 이거예요. 지금까지 이런 도상에서 여러분들이 남아 있다는 거예요.
그런 자리에서 보게 될 때 거기에서 비로소 아버지께서 오늘날 우리를 구하기 위해 이런 수고를 하셨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로소 그 자리에서 심정을 체휼한다는 거예요. 성경을 보고는 절대 그것을 몰라요. 기도 가운데 얼마든지 체험할 수 있어요. 실체적으로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생활적인 감정 가운데서 원수들 앞에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심정이 거기에 파묻힐 수 있어야 됩니다. 많은 핍박을 받아 가지고 싸우는 노정에 있어서, 이 실천무대에 있어서 여러분들이 잘 해야 돼요.
그러니 여러분이 나가 싸우지 않으면 안 돼요. 나 하나를 구하기 위해 지금까지 이렇게 싸워 나왔다는 걸 알아야 되겠어요. 이렇게 싸워 나왔으니, 하나님께서 나 하나를 찾기 위하여 6천 년 동안 수고했다는 것을 알았으니, 오늘날 찾아진 나로서 혹은 진리를 대신한 모습으로서 심판의 기준을 넘어 설 수 있는 자신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내 개체를 중심삼고 하나님의 뜻이 완전 종결된 것이 아닙니다. 나를 넘어서 민족이 남아 있고, 나를 넘어서 세계가 남아 있고, 나를 넘어서 우주가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았으니 이제 하늘은 나를 넘어서 피땀을 흘려야 되겠고, 눈물을 흘려야 되겠고, 죽음이 고개를 넘어야 할 것을 생각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딸이 될 수 있는 심정적인 체휼을 하고 난 후에는 아버지 앞에 효자가 되어야 합니다. 아들딸이 되려면 먼저 어떻게 해야 되느냐? 아버지의 유업을 상속받는 자가 돼야 되고, 아버지의 자녀를 거느리는 사람이 돼야 합니다. 그래야 되는 거예요.
내 개인이 종적인 면에 있어서는 하늘과 내가 내 개체에 있어서 종적인 관계에 있어서 부자의 인연을 맺었을망정, 내게 있어서는 종적 관계로 하나돼야 합니다. 형제적 관계를 중심삼아 가지고 민족을 통하여 지금까지 뻗어 있다고 하자구요. 그러나 이제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종적인 문제를 해결했으면 횡적인 문제에 있어서 형제적인 노정, 형제를 찾기 위한 하나의 수고가 남아 있는 것을 알았으니, 오늘 여기 우리들은 참다운 효자와 충신과 열녀가 돼야 할 책임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유업을 상속받아야 됩니다. 유업을 상속받는 데는 무슨 상속? 형제를 구해 주지 않으면 안 될 유업을 상속받아야 됩니다. 이 형제를 구하는 데 있어서는 하늘이 넘어가야 할 땅이 남아 있고, 하늘이 넘어가야 할 눈물의 고개가 남아 있고, 하늘이 헤치고 나가야 할 죽음의 고개가 남아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이번 40일간에 나가 전도하며 싸우다 돌아온 통일교회 여러분들은 개체의 심정적인 체휼을 했으리라 보고 있습니다. 또 지금까지 나 하나를 찾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이렇게 수고했고, 나 하나를 세우기 위하여 눈물의 길, 피땀 흘리는 길, 죽음의 길을 개의치 아니하고 6천 년 기나긴 세월을 하루와 같이 불초 이 몸을 구하기 위해 오신 아버지의 심정이 어떻다는 것을 체휼한 기간이, 혹은 핍박받는 자리와 굶주린 자리와 무한히 서글픈 자리에서 어느 누가 알아주지 않아 풀뿌리를 붙들고 산천을 바라보면서 스쳐가는 바람결과 더불어 그러한 심정에 사무쳐 아버지의 모습을 그리면서 아버지 심정 앞에 여러분이 머리 숙이면서 아버지 하며 눈물짓는 심정적인 체휼을 한 기간이 이 40일 기간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으로 끝나느냐? 우리는 지금까지 몰랐던 것을 많이 알았습니다. 심정 심정 외치던 그 말이 통하여 심정이 무엇인지 알았고, 말씀 말씀, 실체 실체 외치던 그 말이 무엇인가를 여러분은 잘 아셨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심정적인 면에 있어서 다시 한번 아버지의 뜻 앞에 참 아들딸로서 인정받고, 새로운 각오를 한 여기에서 뭘 할 것이냐? `이제는 아버지의 아들로서 내가 섰사오니 아버지여 축복을 해주시옵소서' 하고 축복을 받아야 할 입장에 선 우리라고 본다면, 여러분 자신들이 축복으로 무엇을 받을 것이냐? 아버지의 위업을 상속받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분 자신이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나님 속에 있는, 하나님 가운데 있는 기쁨과 영광을 상속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속에 있는 슬픔과 고통과 억울함을 먼저 상속받아야 합니다. 효자 열녀가 어디 있느냐? 기쁠 때 효자는 어느 누구나 다 합니다. 억울하고 분하고 외롭고 슬플 때에 효자가 될 수 있는 아들딸이 되지 않으면 안 돼요. 그러려면 하나님의 슬픔 이상 아버지의 가슴 속에 있는 슬픔을 알고 피눈물을 흘려야돼요. `6천 년 수고하셨던 것을 한 1년 동안에 피를 품고 죽지 않을정도가 되어 한꺼번에 그것을 탕감할 수 있사올진대는 나를 보내 주시옵소서' 이런 신념을 가져야 됩니다.
우리는 이제 다시 한 번 정의의 싸움을 위하여 나가지 않으면 안 될 책임이 있습니다. 이런 말씀을 내려 여러분을 격려하는 여러분 앞에 서 있는 이 사람도 가슴이 아픕니다. 이번 순회 노정에서 어린애들이 피땀을 흘리면서 마을 마을로부터 몰림을 받고, 처참한 사정에 놓여서 흐느껴 눈물이 떨어지는 것을 바라보는 여기 스승의 마음은 아픈 것입니다.
마음으로 통곡했다구요. `하나님이여! 이 길이 만약에 거짓이요, 그릇된 길이요, 내 자의의 무엇으로 나왔다 할진대는 당장에 천벌을 받을 것을 압니다' 했어요. 천벌을 받는 거예요.
아니 갈래야 아니 갈 수 없고, 죽어서도 안 가면 안 될 사명이 있는 것을 알았고, 민족의 처참상과 이 민족을 대한 하나님의 수고의 손길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아는 한 가야 할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누가 비교의 어떤 시각과 지능이 있다 할진대는 이런 길을 가기를 원치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니 가면 안 되는 사정과 곡절이 남아 있는 것을 바라보게 될 때, 눈물을 머금고 쓰러질 적마다 하늘이 권고했고, 몰리고 쫓김받는 그런 자리에 있게 될 때 하늘은 품어 주는 사랑을 갖고 여기가 아니면 갈 데가 없다는 책임적인 신념을 갖고 다짐해 온 것입니다.
나는 이 길을 기억할 적마다 여러분이 가는 곳곳마다 눈물을 떨어뜨릴 것을 알았습니다. 여러분이 가는 곳곳마다 땀을 흘려야 할 것을 알았습니다. 여러분들을 보내면서 내 자신이 하늘 앞에 기도한 것은 `아버지여, 이들에게 참다운 하늘 뜻을 위하여 흘린 눈물이 있거든, 흘린 땀이 있거든, 아벨의 피가 천주를 대신하여 선의 목표를 세우기 위하여 탄식한다고 했고 호소한다고 했거늘, 이들의 땀과 이들의 눈물이 기필코 이 민족과 이 시대 앞에 호소할 날이 있을 것을 나는 아노라'고 마음으로 몇 번이나 각오하면서 여러분을 내보냈습니다.
성심성의를 다하고 지성을 다하여 흘려진 땀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심정으로 애달파하며 민족을 사랑하고 뜻을 사랑하면서 흘려진 눈물은 무심치 않습니다. 죽을 목숨이요, 최후의 절벽이요, 막힌 문이라고 탄식할 적마다 하늘은 갈 길을 열어 주던 것을 알았기 때문에 여러분을 그러한 자리에 내몰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가진 것이 없습니다. 돈도 없어요. 세력도 없어요. 우리는 세상에 어느 친구도 없습니다. 부모가 반대하고, 친척이 반대하고, 형제가 반대하고, 기성교인이 가로막고 반대하여 다 잃어버린 자리입니다. 세상에 대한 인연과 세상에 대한 애착심을 전부 다 끊어 버렸거늘, 천운이 동시에 나타날 수 있는 이 한 시운에 대하여 비로소 생각해 보게 될 때 과연 알맞은 모양으로 아버지께서 참작하여 내세운 것을 감사를 드리고 이런 자리에 설 적마다 쓰러져 낙망하는 자가 되지 말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산 말씀으로, 산 실체로, 산 심정으로 그 흔적을 남겨 놓은 곳곳마다 오늘날 지상이 인간들이 반대하거든 총영계를 동원하여 기필코 성취해야 할 책임감을 느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흘리는 눈물을 조건으로 하여, 땀방울을 조건으로 하여 탕감적인 선의 투쟁 역사는 벌어질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인간이 반대하더라도 영적인 세계의 수많은 영혼은, 하나님을 대신해서 나타난 수많은 선한 영들은 통일교회편입니다. 여러분이 믿어지지 않으면 기도해 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여러분들이 눈물 흘릴 적마다 아버지께서는 이 말을 듣고 곤경에 처한 여러분의 편을 지키시어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믿을 것을 권고해 주고, 외롭고 몰리는 자리에 있어서 혼자 환경을 개척하기 위해 주저할 적마다 하나님은 보호자를 내세워서 여러분의 환경을 지켜 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이런 산 실질적인 체험으로 여기에 솟구쳐 오르는 새로운 결심과 새로운 각오를 갖고 나가야 되겠습니다. 지금까지는 교회를 위하여 나섰지만 이제부터는 민족을 위해 나서고, 세계를 위하여 나설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통일교회가 기독교를 대신한 한 교파의 간판을 들고 교회적인 진리의 기반 밑에서 나왔습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이 민족을 구하기 위해서는 무리들은 우리가 아니면 안 된다구요. 이 민족의 살 길을 거쳐 나가 대번에 승리의 왕자로 등장해 하늘땅 앞에 자랑할 수 있는 모습을 이루어 놓아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기에 수많은 눈물이 있어야 되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수많은 땀이 있어야 될 것을 알았고, 수많은 희생이 있어야 될 것입니다. 굶주린 몸을 터로 하여 굶주린 손길을 붙들고 새로운 각오와 맹세의 손길을 번쩍 들어 아버지 앞에 나서지 않으면 안 될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이제 나가는 데는 아버지의 유업을 상속받아 형제들을 구하기 위한 천추의 원한을 풀기 위한 사명을 해야 되겠습니다. 그런 사명을 이제는 알았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눈으로 똑바로 봐야 되겠습니다. 그런 사명을 이제는 알았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눈으로 똑바로 봐야 겠습니다. 얼굴을 똑바로 봐야 되고, 사무친 심정을 똑바로 봐야 되겠습니다. 누구를 향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문제의 해결점이 여기에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오뉴월 삼복 중에 전도지를 들고 방문할 적마다 땀을 흘리며 생활했습니다. 혹은 환경에 몰려 굶주리는 자리에 서서 눈물짓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게 고맙습니다. 고맙다는 거예요. 내게는 부모도 친구도 스승도 어떤 환경적인 내 생활도 없는 외로운 심정뿐이었습니다. 혈혈단신 하나님과 나…. 서글픈 황무지와 같은 천지 앞에 홀로 심정을 가다듬어 아버지라 부르는 그 마음과 더불어 눈물짓는 그 자리에 있어서 흘러 들어오는 바람결이 나에게는 친구였습니다.
떠올라오는 아침 동녘 햇빛이 내 심정의 친구였고, 처량하게 누워 있는 그 흙이 나의 친구였고, 바라보이는 자연이 나의 친구인 것을 여러분이 느껴 봤었다면, 여기에 있어서 새로운 자아를 발견할 수 있고, 새로운 가치와 새로운 인연이 약동하는 결심을 재차 가지리라 보고 있습니다. 이 결심을 가지고 이 원한을 풀기 위해서는 내 한 자체만 엎드려 기도할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이 민족을 붙들고 일족을 바치더라도 하늘을 붙들고 눈물과 땀과 피를 흘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런 새로운 결심을 했으리라 보고 있어요.
이제 하늘의 총결산적인 조건이 있다 할 때는 그것이 어떤 성경 말씀의 조건이 아닙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유업을 상속받아 다시 형제를 대신하고 영원을 대신하여 눈물을 지을 수 있는 심정의 주인이 되었느냐? 일생을 땀을 흘려도 개의치 않는다는 심정의 인격자가 되었느냐? 그것이 아니면 내 피를 흘려 제물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가겠다는 그 심정적인 한 모습이 되었느냐? 그런 내가 되어야 됩니다.
통일교회 신도들은 가슴에 손을 얹게 될 때, 울려 나오는 고동소리와 뛰는 맥박 소리를 느낄 적마다 이 피는 어느 날 어느 시에 끊길 것인데, 끊기는 것이 누구를 위하여서냐 할 때 나를 위하여 이것이 된다면 천추의 한이 된다구요. 끊기는 날 이 피와 맥박이 인류와 하늘과 땅을 위한다면 여기에 있어서 여러분이 지옥 가겠다고 발버둥쳐도 자연적으로 천국으로 가게 됩니다. 통일신도들이 가야 할 생애의 목표는 이것입니다. 생애의 목표는 이것이예요!
언제 내가 호미를 들든가 망치를 들든가 피를 흘리고 땀을 흘리며 일할 자리에 나가야 됩니다. 거기에서 아버지와 더불어 눈물을 흘리고 땀을 흘려야 되겠어요. 위하는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 천주의 위업을 성취하지 못해서 인류와 더불어 눈물짓고, 하늘과 더불어 성과가 나지 않아 애달파 눈물짓는 자리에 있거든 아버지와 더불어, 인류와 더불어, 역사와 더불어 피를 뿌려 이 일을 종결짓겠다는 결심을 가진 무리가 이 민족 앞에, 한 마을에 한 사람씩만 생겨나면 망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가담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은 가라구요. 여기에서 말하는 사람이 편안한 자리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그러니 여러분도 그래야 돼요. 이렇게 살았고 이렇게 싸우고 있기에 여러분도 그래야 됩니다.
우주의 모든 생명의 운세를 휘감아 품에 안고 손을 움켜 쥐고 놓지 맙시다. 이런 심정을 품에 품었다가 놓는 날에는 하늘땅이 망하는 것입니다. 놓지 맙시다. 내 손등이 끊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놓지 맙시다. 잃어버리는 무리가 돼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이제는 여러분 자신에게 돌아와 가지고 반성해 보라는 것입니다. 하늘이 어떤 관점에서 여러분 개체를 지도했나 반성해 보라구요. 여러분 심정으로부터 어떤 목표를 향하여 지도했던가를 생각해봐요. 여러분이 1년 6개월 이상, 혹은 2년 가까이 심정문제를 외쳐왔습니다. 이때는 진리와 인격과 심정을 한꺼번에 하나님 앞에 참소의 조건으로 제시할 때가 된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이 한 기준을 완전히 종결짓기 위해서는 피와 땀과 눈물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알았기에, 이번에 천지의 도수를 대신할 수 있는 어떤 수의 조건을 대비하여 여러분을 만민 앞에 보냈던 것입니다.
이제부터 나가서 여러분들이 이런 신념을 붙안고, 천지의 대명분을 대신할 수 있는 본연의 한 가정의 기준을 가슴에 품고 여러분들이 나가 싸우는 데 있어서 가는 곳곳마다 섭리는 엄청나게 달라진다구요. 사람으로 안 되면 영계가 움직여 준다는 거예요. 여러분이 이번에 많이 증거했을 것입니다. 희귀한 일이 많아요. 희귀한 어떤 소식을 많이 접했을 거라구요. 벌레만도 못한 가치 없는 자기 한 개체를 중심삼아 가지고, 그 이론적인 심정을 붙들고 나가게 될 때, 이것이 하늘을 통하여 자기 환경을 넘어서 움직이는 것을 볼 때 얼마나 황공한 사실이냐 이거예요.
그렇게 하여 여러분이 돌아왔으니 이제부터는 심정의 무장, 말씀의 무장, 인격의 기준을 완결지어서 해결지어야 합니다. 이러한 때에는 하늘 앞에 하나의 상속적인 권한을 갖고, 믿고 축복해 주면 축복한 대로 된다는 신념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아들딸의 심정을 대신한 이러한 기준 앞에 서 가지고 하나님의 위대함을 대신해 사탄세계를 향해 나섰으니 해결하자는 거예요.
어느 마을에 들어가게 되면 우리가 그 마을을 위해 수고하는 사람에게 져서는 안 됩니다. 그 마을에 들어가서 져서는 안 돼요. 뭘 하는 데? 싸움하는 데가 아닙니다. 땀을 흘리고 눈물 흘리는 데 있어서 져서는 안 돼요. 더 나아가서 희생하는 데 있어서 져서는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먹지 않고 더 심한 결심을 가져야 돼요. 여러분들이 희생해야 됩니다. 그리하여 이제부터 3년 동안 여러분이 총단결하여 나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알아야 됩니다.
최후로 말할 것은, 어찌하여 피와 눈물과 땀이 필요하느냐 이거예요. 역사는 이것으로 싸워 나왔습니다. 인류역사는 선의 땀을 흘리며, 혹은 눈물을 통하여, 피를 통하여 엮어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기독교는 피를 부르짖었고 눈물을 부르짖으면서 회개하라고 외쳐 왔습니다. 예수의 피를 중심삼고 눈물을 흘려 나왔지만 여기에 플러스할 때는 땀을 가하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땀을 가해야 돼요.
이번에 수많은 사람들이 210곳에 교회를 세웠으니 이것을 우리가 책임져야 되겠습니다. 지금 그런 발판이 되어 있어 그렇게 나가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들이 이제 보십시오. 역사적으로 볼 때도 그렇고 뜻적으로 봐도 그런 입장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 우리의 피는 무얼 할 것이냐? 하나님의 영광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피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의 대가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인류는 눈물의 대가를 요구하고 있고, 땅은 땀의 대가를 요구하고 있다는 거예요. 왜 그러냐? 수많은 사람들은 이 땅에 와 가지고 악한 세계에 땀을 많이 흘려 왔습니다. 이 인류는 지금까지 악한 눈물을 많이 흘려 왔습니다. 악한 피를 많이 흘려 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탕감 원칙에 의해서 이 땅은 우리 선한 사람의 땀으로 씻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인류는 선한 사람의 눈물을 통하여 씻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하나님 앞에 우리의 피로써 갚아 드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이제부터 통일교회의 생활신조는 하늘을 위하여 내 피, 인류를 위하여 내 눈물, 땅을 위하여 내 땀을 흘리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러한 생활적인 감정으로써 그것을 부여안고 `아버지!' 하면서 `나는 아들이니 이랬고, 당신은 아버지이시니 이랬다' 하는 , 이러한 부자의 인연이 있기에 이러지 않을 수 없다는 심정적인 기지를 세워 놓음으로서 만사는 종결지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심정의 눈물, 심정의 땀, 심정의 피를 우리가 가는 곳곳마다 세워 놓자는 것이 이제부터 싸우러 나가는 여러분의 의무요 책임인 것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어요. 아시겠어요? 「예」
왜 그래야 되느냐? 남한 각지를 순회할 때 나는 그것을 더욱 절절히 느낍니다. 그 부락부락마다 드나드는 고을의 사람들은 지칠 대로 지쳤습니다. 많이 속아 봤습니다. 외식자한테도 속아 봤고, 혹은 주먹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속아 봤고, 혹은 종교인들한테도 속아 봤고 다 속아 봤습니다. 그들은 이제 앙상한 뼈와 살만이 남고 감각을 잃어버렸습니다. 땅 문제에 목을 걸고 이 민족을 구하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이 무엇인가 갖고 나가야 될 줄 알아야 됩니다.
속아 본 무리들 앞에 진실을 갖고 나가야 되겠습니다. 이제는 말보다도 실천을 해야 됩니다. 말하기 전에 사무친 심정으로 눈물 흘리며 그를 붙들고 `형제여', `동포여' 하고 눈물지을 수 있는 가슴을 가진 소유자가 돼야 된다는 거예요. 이 민족이 이렇게 처참하게 되고 이 민족이 이렇게 의지할 곳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자기 몸을 가누지 못한 걸 통곡할 줄 아는 심정의 주인공들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민족을 부여잡고, 가던 길이 막혔으니 돌이켜 돌아갈 수 있는 길이라도 개방하지 않으면 안 될 때인 것을 절실히 느꼈기 때문에, 말하기 어렵고, 강조하기 어려운 말을 스승으로서 여러분 앞에 하고 있는 괴로움을 여러분께서는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늘이 가진 바의 영광이 있거든 나는 원치 않습니다. 여러분을 위하여…. 여러분이 나가싸운다 할진대는 싸우는 노정마다 그 눈물은 아버지의 눈물로서, 그 땀은 아버지의 땀으로써 배가 고플 때는 금식을 하여 피를 말려 가면서 호소할 것입니다. 그 모습 위에 하늘은 역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참다운 동지자의 몸은 천합니다. 그러기에 지금까지 통일교회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나는 물질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굶주린 자를 붙들고 그와 더불어 위로할 자를 찾았고, 불쌍한 자를 붙들고 그와 더불어 즐길 수 있는 자리를 찾았습니다. (이하는 녹음상태 불량으로 수록하지 못했음)
하나님의 창조목적은 신본주의적 인본주의(神本主義的 人本主義)를 세우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늘을 향하여 나아가는 이상 민주주의도 신본주의(神本主義)의 이념을 세워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을 지배하고 그 인간은 땅을 지배하는 것입니다. 천정(天情)과 인정(人情)이 하나로 설 수 있는 새로운 세계가 되려면 그에 합당한 땅이 있어야 하고 새로운 이념이 있어야 합니다.
모든 새로움은 마음의 새로움에서 시작하지 않으면 아니 됩니다. 의식혁명이 문제가 아니라 문제는 양심혁명이요, 보다 더 큰 문제는 심정혁명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동기가 된 양심을 세워야 합니다. 미완성기에서 타락되었으므로 완성 기준에서 하나님을 대할 수 있는 심정 기준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지금까지 종교는 사람들의 양심의 혁명을 일으켜 절대적인 위치에 세워 놓지 못했습니다.
인류의 고통은 하늘과 인류와 땅을 붙들고 기뻐할 수 없는 데 있습니다.
자연을 보고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도인(道人)이 아닙니다.
증오의 마음을 넘어서기 위하여는 그것을 초월할 수 있는 보다 큰 힘이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자신과 인류와 하나님을 품을 수 있는 인간이 완성한 인간입니다.
자기를 진정으로 사랑해 주는 사람의 훈계는 잊혀지지 않습니다. 절대적인 사랑의 주체가 되는 분의 훈계가 있다면 그것은 영원히 잊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절대자의 훈계와 명령을 받는 때가 와야 합니다. 기독교는 이러한 한 사람을 찾는 것입니다.
천·지·인(天地人)은 하나님의 심정으로 맺어져야 합니다. 부모는 무엇으로 부모가 되는가? 외형(外形)인가, 지식인가? 심정으로 부모가 됩니다. 부부도 그러합니다. 외적 조건으로 부부가 된 것은 외적인 조건과 더불어 깨어집니다.
기독교 신자가 죽음의 자리(死處)도 개의치 않는 이유는 하늘과 맺어진 심정적인 인연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대신하여 죽을 수 있는 것은 그러한 심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참마음은 하나님을 대하여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라 하신 것은 하나님과 관계 맺어야 할 마음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참다운 주인 앞에 세우기 위해서는 땅을 위한 땀과 인류를 위한 눈물과 하늘을 위한 피를 뿌려야 합니다. 새 세계는 하나의 말씀에서 시작되어 마음을 일으키고 심정을 불러 일으켜 세계적인 형(型)으로 세우게 될 때 실현이 가능합니다.
하나님이 군림할 수 있는 지상운동(地上運動)이 필요합니다.
나를 중심한 종교는 있을 수 없습니다. 고로 자기가 구원받은 혜택을 민족과 세계 앞에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개인 중심의 종교는 망하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과 사람을 합할 수 있는 이념을 가지고 천국운동을 일으켜야 합니다.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아담주의가 바로 세계주의가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아담주의를 갖고 오셨던 것입니다.
<기 도> 역사는 지났을망정 오늘 이 시간 저희들은 멀지 않아 십자가에 달리실 몸으로 민족 앞에 나타나신 예수의 초초한 형상을 대할 수 있고 접할 수 있기를 바라옵니다. 얼마나 섭섭하셨으며 얼마나 분하셨으며 얼마나 외로우셨으며 얼마나 억울하셨사옵니까? 그때 택한 이스라엘 백성 중에 하늘을 위하고 하늘을 받든다는 사람은 많았사오나, 진정 하늘을 위하여 이슬같이 사라질 최후의 길, 죽음의 길을 가시는 예수의 무릎 앞에 엎드려 그의 소맷자락이라도 붙들고 눈물짓는 이가 없었다는 원통한 사실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한스러웠던 그날, 땅 위의 무지한 수많은 인류는 물론이거니와 아버님께서 4천년 동안 피어린 역사를 엮어 오시면서 피의 제단을 연하여 택하신 이스라엘 민족조차도 통곡하고 통곡하여도 풀 수 없는 원한이 그 한 시간에 맺혀졌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도리어 억울한 심정을 품고 가야 할 길을 염려하시는 예수를 재촉하여 몰아낸 이 분한 사실을, 뼈 살에 사무치는 이 원한을 오늘 저희들이 천만번 죽는 한이 있더라도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될 현실적인 싸움이 남아 있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그 분은 저들을 위하여 오셨사오나 저들은 그 분을 몰아쳤고 십자가에 못박았사옵니다. 이처럼 천륜 앞에 용서받을 수 없는 무리, 지옥 불 중에서도 꺼지지 않는 유황불에 들어가 마땅한 무리들이오나 그래도 고난의 길을 넘고 십자가의 길을 거치고 시대와 세기의 연속된 피의 역사노정을 거쳐 나오면서 남아진 무리를 찾고 그러한 무리를 이뤄놓기 위하여 수고하신 아버지 앞에 저희는 감히 머리를 들 수 없는 부족한 모습이옵니다.
하늘을 찾아 나가는 데는 자기의 모습을 들어 자랑할 수 없는 것을 알았사옵고, 하늘을 위하여 충성하려는 자는 모든 것을 버리고 모든 것을 희생하고 자기 자신을 잊어야 한다는 것을 저희들은 깨달았사옵니다. 여기 모인 저희들, 누구를 위해 왔사옵니까? 믿는 것도 자신을 위하여 믿는 저희들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신앙이라는 두 글자를 앞에 놓고는 그 목적도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위한 것이요, 주를 위한 것이요, 민족과 하늘땅을 위한 것임을 아는 저희들이 되어야 하겠사옵니다. 과거에는 저희들이 일신의 구원을 위하여 믿었사오나 이제는 보다 큰 천주의 구원역사를 위하여 믿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는 한평생을 이런 심정으로 싸웠고, 한평생을 아버지와 더불어 살았고, 아버지와 더불어 말씀하셨다는 것을 저희들이 잊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저희들은 역사적인 종단을 향하여 급속도로 변해가는 혼란한 시대에 처해 있사오나 저희의 중심만은 아버지의 것으로 바쳐지기를 원합니다. 저희의 모든 것을 아버지의 것으로 드리기 원하오나 아버지께서 받으시기에 합당치 못한 저희가 아닌가 하고 염려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이날도 부족한 자신임을 아버지 앞에 직고하면서 아버지의 긍휼의 손길과 사랑의 심정과 아버지의 품이 그리워 모였사오니, 이 한시간 땅 위에서는 느껴보지 못한 아버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느끼게 하여 주시옵고, 아버님의 품에 안기어 영원히 아버지의 뜻을 노래할 수 있고, 아버지와의 인연을 찬양할 수 있는 은사를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많은 무리가 아버지 존전에 머리를 숙였사온데 아버님, 제가 무슨 말을 하오리까? 많은 말보다도 당신과의 인연을 두터이 할 수 있는 심정만이 우러나오게 하여 주시옵소서. 스스로 과거를 뉘우치고 오늘의 부족함을 깨달아 아버지께서 찾고자 하시고 세우고자 하시는 본성의 한 모습을 그리워하며 하늘을 향하여 울부짖고 나설 수 있는 간곡한 마음의 혁명이 일어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전하는 자의 마음과 대하는 자의 마음이 하나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 세상의 그 무엇을 갖고 이 자리에 임하지 말게 하여 주시옵고,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가 분부하시는 아버지의 은사 앞에 동하여 뼈와 살이 다시 빚어질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시간도 외로운 식구들이 남한 각지에서 서글픈 심정을 아버지 앞에 털어놓고자 많이 모인 것을 당신은 아실 줄 믿사오니, 이 시간 그들에게 같은 은사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또 멀리 바다 건너에서도 수많은 형제들이 핍박받고 시련당하는 환경 가운데서 이 시간 뜻을 위하여 염려하고 근심하고 있는 것을 당신은 아실 줄 믿사오니, 그들을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뜻을 표준으로 하여 싸우는 저희들, 그 표준에 이를 때까지, 아버지 앞에 승리자가 될 때까지 한 심정, 한 사정, 한 식구로 단결하여 나갈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일체를 아버지께서 주관하여 주시옵고, 저희의 전체를 아버지 것으로 세워 주시옵기를 부탁하올 때,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니다. 아멘.
<말 씀> 여러분들에게 드리려 하는 말씀의 제목은 ‘참되신 아버지와 자녀’입니다. ‘참되신 아버지와 자녀’ 이러한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땅 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참에서부터 시작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참되신 연고로 그의 손을 거쳐 지음 받은 모든 것은 참된 것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참이기에 이 우주가 존재하는 목적도 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참된 존재 세계를 창조하신 참된 주인이신 창조주 앞에 모든 피조물은 참된 것으로서 영원히 존재해야 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창조주는 참된 분으로 남아 있으되 창조함을 받은 모든 피조물은 참의 가치를 상실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나 환경적으로 보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참에서 시작하였으니 영원히 그 참의 가치를 노래하는 천지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천지가 되었던들, 오늘날 우리 인생의 어느 일면을 들춰보아도 참과 인연 맺지 않은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이 그러하지 못하니 이 이상 슬픈 일이 없고 이 이상 근심된 일이 없는 것입니다.
참의 주체 앞에 참의 가치를 중심삼고 시간을 초월하여 영원히 자기 존재 가치를 자랑할 수 있는, 전체와 개체라고 하는 차이는 있을망정 그 가치에 있어서는 차이를 찾아볼 수 없는 세계가 되었던들, 오늘날 모든 존재물은 행복한 자리에 머물지 않으려야 머물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극히 참되신 분, 지극히 참되신 주인이 계신 그 세상은 우리의 소망으로서만 남아 있으니, 다시 그러한 세상을 찾아 나아가 지극히 참되신 그 분 앞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이 우리의 인생행로입니다.
그러면 참이라는 것은 어떠한 것인가? 참이란 시작한 그날부터 끝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참이란 그것이 존재하는 한, 영원무궁토록 시간성과 공간성을 초월하여 그 가치가 빛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그러한 가치를 지닌 참을 만나본 적도 없고 느껴본 적도 없습니다.
창조주가 계시다면, 인간이 생활환경에서 참의 가치와 더불어 영원히 즐길 수 있는 참된 선의 세계로 다시 돌려놓기 위해 역사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왈 구원섭리요, 구주를 보내 이 억조창생을 구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참이란 존재 자체가 참된 동시에 그 나타나는 모든 현상이나 작용까지도 참된 것입니다. 우리 인간에게 존재의식이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 존재의식까지도 참된 인간이 되었던들 우리는 탄식하려야 탄식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말미암아 탄식이라는 것이 생겨나느뇨? 최고의 목적을 바라고 최고의 가치를 바라고 있는데 생활환경에서 그 소망이 충족되지 않으면 슬픔이 생기고 고통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런 고통을 넘어설 수 있는 참의 기준, 어떠한 고통도 밀어낼 수 있는 참의 기준을 완전히 세워 놓은 자리에서 우리의 인생이 출발하였던들, 고통이라는 두 글자는 하등의 위력을 나타낼 수 없는 것입니다. 참된 천리 원칙의 가치를 엄연히 세운 존재 앞에서는 고통이 어떠한 위력을 나타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참을 찾고 있으되 참과 더불어 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인간이 타락한 까닭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 자신들이 사회 환경에서 참을 찾는다 할진대 어떠한 참을 찾고 있느뇨? 몸의 참을 찾고 있습니다. 나아가서는 마음세계의 참을 찾고 있습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이 더 큰 우주적인 이념과 통할 수 있는 인연을 가지고 있기에 우리의 몸과 마음은 참된 인연을 찾고 있습니다. 참된 환경과 참된 우주를 찾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 자신이 참되기 전에는 참된 것을 감정할 수 없습니다. 상대방이 아무리 참된 가치를 지니고 나타난다 하더라도, 나 자신이 참될 수 있는 조그만 본질이라도 갖고 있지 않는 한, 그것을 헤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참을 찾아 나가기 위해서 자신의 양심을 세워 인륜과 도덕의 방향과 일치시켜 나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역사적인 현실입니다.
내 마음이 참을 헤아릴 수 있는 참된 입장에 서고 내 몸이 생활환경에서 참을 중심삼고 살 때, 거기에서부터 참은 나와 더불어 인연을 맺고, 나를 통하여 환경과 인연을 맺고, 환경을 거쳐 이 땅과 천상까지 인연을 맺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자신을 돌아보면 여러분의 몸이 참되지 못한 것을 인정하고 마음이 참되지 못한 것을 인정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뇨? 몸을 참이라고 증명할 수 있는 그 무엇과 마음을 참이라고 증명할 수 있는 그 무엇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내 자체에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적인 참의 기준이 나타나지 않으면 내 몸의 참을 해명할 수 없고, 내 마음의 참을 해명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타락한 우리 인간들은 자체 내에서 참을 해명할 것이 아니라, 어떠한 참되신 절대자가 있다 할진대 그 절대자의 원칙적인 기준을 통하여 참을 해명하고 참된 인간의 위치를 밝히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지금까지 인간이 역사노정을 거치고 시대 시대를 지나오면서 무엇을 찾아 나왔느뇨? 참된 나, 참된 나라, 참된 세계, 참된 하늘땅을 찾아 나왔습니다. 그러면 참된 ‘나’라는 기준을 어디서 찾을 것인고? 철학에서냐? 과학에서냐? 종교에서냐? 아닙니다. 마음의 근본을 통할 수 있는 인연을 거치지 않고는 참의 인연을 증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계시어 참되지 못한 입장에 떨어진 인간들을 참의 이념세계로 이끌기 위한 구원섭리를 하신다 할진대, 그 하나님은 우리 앞에 참의 모습으로 나타나 주셔야 됩니다. 그런 하나님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이 우리 앞에 나타나야만 생활감정을 통하여 우리의 몸과 마음이 그분과 인연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타락세계에 있는 우리 인간들을 참의 모습으로 찾아 주셨습니다. 이 사실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까지의 역사노정, 혹은 신앙노정에 있어서 선지선열들은 어떠한 입장에서 왔다 가신 분들이뇨? 참된 나를 찾아 나아가는 노정 속에서 하늘의 참된 몸의 입장으로 하늘의 참된 마음의 입장으로 왔다 가신 분들입니다. 이와 같은 참된 몸과 마음을 가진 분이 생활적으로 마음적으로 심정적으로 우리 인간을 찾아와 주지 않는다면, 오늘 우리는 참된 인연을 찾을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참된 물건을 통하여 인간을 찾아 주셨습니다. 성별된 참된 물건을 제물로 하여 우리 인간을 찾아 주셨던 것입니다. 참된 물건은 어떤 것입니까? 이 물건은 타락한 세계의 것이지만 하나님이 간섭하실 수 있는 거룩한 물건입니다. 그 참된 물건을 통하여 하나님은 인간과 관계를 맺어 나오신 것입니다.
여기에는 만물이 다 동원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선한 편으로 성별된 동물, 식물, 광물 등 모든 물건을 통하여, 즉 제물이라는 조건을 통하여 인간과 인연맺으려 하셨습니다. 그러한 시대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참된 제물과 하나되어야 했습니다. 이런 시대가 왈 구약시대입니다. 참된 가치의 인연을 찾아 나아가야 할 타락의 운명을 진 인간들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들로 하여금 참된 물건을 통하여 참된 가치의 인연을 맺게 하기 위하여 수고해 나오셨습니다.
원래 인간은 만물을 주관해야 합니다. 만물, 곧 물질을 통하여 하나님과 인연맺게 되는 입장에 서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물질을 통하여 인연맺을 수 있는 구약시대를 지나 실체로서 인연 맺을 수 있는 한 때를 맞이하여 한 분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메시아사상입니다, 이스라엘 선민에게 있어서의 메시아사상.
이 메시아는 어떠한 분이뇨? 타락한 인간, 죽어 마땅한 이 땅 위의 인류 앞에 타락하지 아니한 참된 부모의 인연을 갖고 나타나시는 분입니다. 고마운 은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믿는 구주는 막연한 구주가 아닙니다.
이 땅 위의 타락한 인간들은 참부모의 혈통적인 인연을 맺지 못하였습니다. 이렇듯 참부모의 자식으로 태어나지 못한 인간, 참부모를 잃어버린 인간 앞에 제일 귀한 선물이 무엇이겠습니까? 부모를 잃어버린 고아와 같이 불쌍한 인간 앞에 부모를 보내주는 것 이상 귀한 선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선물을 고대하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구주를 세워 무엇을 하자는 것입니까? 우리는 타락한 인간이기 때문에 참부모를 잃어버린 족속입니다. 참부모를 잃어버렸으니 참자녀가 되지 못한 무리들입니다. 창조 당시 최대의 선의 이념으로 세우려 한 참부모와 참자녀가 다 깨져 나갔으나, 하나님께서는 역사적인 수고의 노정, 수많은 역경과 수많은 고통의 노정을 거쳐서라도 다시 참다운 부모의 인연을 세워주겠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참다운 자녀의 인연을 세우고, 참다운 부부, 참다운 형제, 참다운 국가, 참다운 세계, 참다운 인류, 참다운 천주의 인연을 세워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타락한 인간의 마음 가운데 들어와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라 저 먼 곳, 상대적 입장에서 타락한 인간에게 만물을 연결시키고 참다운 아들과 연결시킨 후 나중에 인간의 마음속에 들어와 심정의 아버지가 되겠다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섭리의 최후의 종착점입니다.
오늘날 이 땅 위에서 아무리 잘나고 훌륭하다고 자인하는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하나님이 찾고 계시고, 이 천지의 대이념으로 세우고자 하는 절대적인 참의 원칙과 관계를 못 맺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이것을 공인해야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부모 잃은 불쌍한 고아와 같고 남편 잃은 과부와 같은 타락한 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어떤 인연을 갖고 나타나셨느뇨? 사정의 인연이 아니라 심정의 인연을 갖고 나타나셨습니다. 소망의 인연이 아니라 생활적인 심정의 인연을 갖고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타락하지 않은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 모습을 세운 후 그를 통해서 만물과 인간의 몸과 마음과 심정까지 관계 맺으려 하십니다. 그러한 존재가 나타나지 않으면 인간의 완전구원이란 것은 성립이 안 됩니다.
신앙의 목적은 무엇이뇨? 선한 몸과 마음과 심정을 중심삼고 세계적인 무대, 더 나아가 선의 가치를 노래할 수 있는 천주적인 무대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역사적인 위인과 선열들을 숭상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뇨? 그들을 본받고 그들과 인연을 맺자는 것입니다. 생활에서 인연을 맺고 몸과 마음이 인연을 맺고 그들의 이념과 인연을 맺자는 것입니다. 인연을 맺을 뿐만 아니라 그들과 하나되어 더불어 살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어떠한 도를 믿는 사람들의 모습일 것이며, 어떠한 주의를 따르는 사람들의 모습일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현실에 살고 있는 여러분은 자신을 냉정히 비판해 볼 때 어떠한 입장에 처하여 있느뇨? 하나님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로 하여금 만물과 인연을 맺게 해주셨고, 당신의 아들과 인연을 맺을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 자신은 그러한 관계를 맺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세워 주신 절대적인 기준이 자신의 생활을 휩쓸고 있고 자신의 마음을 휩쓸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모른다 할진대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해야 돼요. 죄인 중에서도 이 이상 더 큰 죄인이 없습니다.
역사는 개인으로부터 출발하여 세계까지 벌어져 있는데 어디서 종결될 것이뇨? 절대자, 즉 최고 선의 본체가 있다 할진대 인류가 절대자, 즉 그 본체와 더불어 영원불변한 인연을 맺을 때까지 움직일 것입니다. 최고의 선은 영원불변한 것입니다. 그 이상의 발전이 없습니다.
오늘날 이 세상을 바라보게 될 때, 생활감정이 다르던 민족들이 점점 생활감정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또 이념을 달리하던 수많은 도(道)들이 이념을 같이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근본은 하나입니다. 이 절대적인 하나의 가치를 향하여 역사는 총진격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현실에 나타난 가치는 창조주의 목적관을 통할 수 있는 원칙에 의하여 나타난 상대적인 가치밖에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참되신 아버지와 자녀’라고 하였는데, 여러분은 여기서 참되신 아버지는 어떠한 분이며, 참된 자녀는 어떠한 존재인가를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참 되신 아버지는 어떠한 분이며 참된 자녀는 어떠한 존재이뇨? 참되신 아버지는 참된 아들딸을 찾기 위하여 역사노정에서 무한히 고생하신 분입니다. 수천년 역사노정에서 선을 위하여 목베임 당하고 죽임당한 그 어떠한 사람보다 더 큰 고통을 당하신 분입니다. 이 분은 시대적인 주인공이 아니라 역사적인 주인공이기 때문에 역사적인 슬픔을 품고 나오셨습니다. 역사적인 고통과 역사적인 억울함을 품고 나오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의 고통과 억울함을 해결하기 위하여 한 분의 구세주를 보내서 인간과 천적인 모든 인연을 맺어주고자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명을 갖고 이 땅에 오신 그 분이 인간들에 의해 십자가상으로 추방당했습니다. 죽어 갔다는 말입니다. 죽어간 예수님은 어떠한 분이뇨? 우리가 영원히 인연 맺어야 할 참아버지로 오신 분입니다.
그 예수는 십자가에 돌아가셨을망정 타락한 세상의 여러분을 다시 찾아오실 때에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를 졌노라.’ 하는 마음을 갖고 찾아오시지 않습니다. 불쌍한 우리 인간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다시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참되신 아버지는 어떠한 분이뇨? 억천만 년이 지나도 풀래야 풀 수 없는 십자가의 한이 사무쳐 있으되, 우리를 위하여 고생을 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억울한 자리에 계셨으되, 우리가 불쌍한 자리에서 눈물짓는 것을 보실 때 그것을 내색하지 않고, 도리어 불쌍한 우리를 위하여 눈물지으시고 우리보다 앞서 고통의 길을 가고자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러한 분이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러기에 끝날에 심판을 하신다 하더라도 이 땅 위의 인간을 위하여 매를 맞고 핍박을 받고 억울함을 당하고 죽임을 당했다는 역사적인 곡절의 한을 걸어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과거에 수고한 내용을 갖고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보다도 더 큰 사랑의 심정을 갖고 인간을 대하고, 억울함과 슬픔을 느끼는 마음보다도 더 큰 사랑의 심정을 갖고 인간을 대해 심판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불벼락을 내려서 다 죽여요? 천만에요. 우리에게 그런 하나님은 필요 없습니다. 여러분, 이걸 분명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의 참아버지는 어떠한 분이뇨? 자식된 인간에게 천번 만번 맞고서는 그것을 기억하시지 않는 분이십니다. 그러한 심정의 주인공이시기에 6천년 죄악사의 종족으로 태어난 우리를 용서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아버지는 이러한 분이십니다.
그러면 참다운 도의 길을 가는 사람은 어떠한 사람이뇨? 참다운 아버지를 모실 수 있는 사람이 참다운 도인입니다. 천국은 어떠한 곳이뇨? 죄라는 명사를 기억할 수 없는 곳입니다. 그러기에 죄 있는 사람은 그곳에 가지 못합니다.
오늘날의 세상은 어떻습니까? 형제간에, 부부간에, 부자간에 있어서도 상대를 위해 조그만 일을 해주었다면, ‘내가 너를 위해 이만큼 했으니 너도 나에게 이만큼 해주어야 되지 않겠느냐.’ 하면서 그것을 영원히 기억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그런 담을 무너뜨려야 되겠습니다.
이 현실세계에서 천국 문을 개방하고 천적인 아버지를 모시기 위한 자녀의 명분을 갖추고자 하는 자가 있다 할진대, 천만번 맞고도 사랑이 솟구쳐 오르는 아버지의 마음을 본받아야 됩니다. 하나님과의 인연을 생각하고 자기의 모든 어려움을 딛고 넘어설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가는 곳이 선의 세계일 것입니다.
타락한 세계는 어떠한 곳이뇨? 한 가지 수고를 하고도 열 가지를 요구하는 곳입니다. 그러다가는 망합니다. 남을 한번 도와주고, 남을 위해 피 한 방울 흘려주고 억천만 년 우려먹으려 하는 무리들이 사는 곳이 악의 세계입니다. 여기에 선의 세계와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의 아버지는 6천년이라는 기나긴 역사노정에서 말할 수 없는 곡절을 거치셨으나 그것을 기억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찾아주십니다. 우리가 헐벗고 굶주려 떨고 있을 때, 천만번 하늘을 배반한 종족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지 아니하시고 본래의 인간에게 주신 인연만을 기억하시면서 발길을 멈추고 눈물을 지으시는 분이 우리의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서도 그렇잖아요? 사랑하는 자식이 부모의 슬하를 떠나서 온갖 흉악한 짓을 다하고 돌아다닌다 할지라도 그 자식을 생각하는 부모의 마음은 더 안타까워지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을 가진 부모라 할진대 그 자식에게 주먹을 들이대기 전에 그를 붙들고 목놓아 통곡할 것입니다. 그런 부모라면 기필코 그 자식을 회개시킵니다. 그런 심정에 사무쳐 자식을 대하는 부모는 아무리 무지몽매하고 목석같은 자식이라도 기필코 선한 자식으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그러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게 그런 마음이 있기 때문에 이 땅이 아무리 악하더라도 세상에서 선한 아들딸을 찾아 세울 수 있는 것입니다. 철칙이 그렇기 때문이에요. 억천만 가지의 죄가 있다 할지라도 사랑하는 마음이 앞서 죄를 기억하시지 않는 분을 아버지로 모신다면 우리는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타락한 인간으로서 그런 아버지를 한 번이라도 만나볼 수 있다면 한이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역사를 보십시오. 이스라엘 민족이 얼마나 악당이었습니까? 성경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얼마나 권고했습니까? 이렇게 권고해도 안 듣고 저렇게 권고해도 안 들었어요. 나중에는 그 족속을 치면서 권고했지만 그들은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채찍을 드는 것은 죽이기 위함이 아닙니다. 채찍을 드는 목적은 살리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역사해 오셨습니다. 그러면서 오늘날까지 6천년이란 기나긴 세월을 거쳐 나오신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이 시대는 어떠한 때뇨? 이 시대는 만물과 더불어 인연을 맺고, 환경과 더불어 인연을 맺어야 할 끝날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주님을 신랑이라 하고 성도를 신부라고 합니다. 신부 되기를 바라는 여러분! 여러분은 어떠한 생활을 해야 될 것이뇨? 신부를 찾아오시는 주님의 심정을 몰라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들은 끝날에 오실 주님을 고대하고 있지만, 주님께서는 2천년의 역사노정을 거쳐 나오시면서 하루하루를 끝날이라 여기셨습니다. 그러한 때가 이르려니와 지금도 그때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들은 끝날에 주님 앞에 신부로 서 가지고 영광받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쉽게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 위에서 신부를 만날 소망을, 신부를 대한 간곡한 심적 기준을 어느 한 순간도 잃은 적이 없습니다. 이것이 신랑의 마음입니다. 여러분 중에 ‘나는 수십년 동안 예수를 믿었다.’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 수십년 동안 진정으로 예수를 얼마나 그리워했습니까? 그리고 오실 예수를 모시기 위해 얼마나 준비했습니까?
끝날이 온다 할진대 그 끝날에는 반드시 영원한 최고의 선을 중심삼고 가치를 세워야 합니다. 그 가치는 천주적인 가치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러한 가치로 나타나는 때는 언제이냐? 참아버지와 참자녀가 만나는 때입니다. 딴 것이 아닙니다. 참아버지와 참아들딸이 만나는 때입니다. 그런 때가 기필코 올 것입니다.
참아버지와 참아들딸은 가만히 있어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찾아야 됩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그런 역사를 하셔야 됩니다. 왜냐하면 세상을 하나의 세계로 귀결짓기 위해서입니다. 이러한 목적의 세계를 이루려는 핵심이 하나님이라 할진대, 이 하나님과 천지 전체가 합하여 영원이라는 명사 아래 동일한 가치로서 생활감정을 통할 수 있는 세계를 만들어 놓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이런 목적의 세계를 찾아가려면 어떻게 가야 되느뇨? 하나님은 우리를 말씀을 가지고 부르고 계시니 우리는 그 말씀대로 가야 합니다. 참다운 부모와 참다운 자녀가 상봉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이뇨? 참다운 말씀을 통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은 아버지의 말씀입니다. 아버지의 말씀을 모르고서는 자식이 될 수 없습니다. 아버지의 말씀이 절대적이요 참다운 말씀이라 할진대, 똑같은 말씀을 천년 만년 들어도 싫증이 안 납니다. 끝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말씀을 찾아 나아가야 됩니다. 그 말씀은 어떠한 논리적인 조건에 딱 들어맞는다고 해서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대원칙이면서 듣고 듣고 또 듣고 영원히 들어도 생명이 될 수 있는 말씀입니다. 그런 말씀을 찾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부모의 말씀은 영원한 것입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은 역사를 초월합니다. 시대를 초월합니다. 주의를 초월합니다. 사상을 초월합니다. 그래서 어느 누구의 말씀보다도 귀한 것입니다. 이 말씀은 밤에 들어도 낮에 들어도, 밤에 보아도 낮에 보아도 여러분의 마음에 무한히 흘러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 말씀을 찾아야 됩니다.
오늘날 기독교에서는 그 말씀이 성경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비유와 상징으로 되어 있습니다. 참다운 아버지께서 참다운 자식에게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왜 그랬느뇨?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는 원수 사탄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타락하여 형편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릅니다. 지금 20세기에 와서도 하나님이 없다고 부르짖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아버지를 아버지로 알지 못하고, 자식이로되 자식인 줄 모르는 타락한 인간들에게 아버지로서 심정을 통할 수 있는 말씀을 한마디도 못 하셨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도 못 하셨다는 거예요. 말씀을 하셨다 하더라도 눈짓으로 하거나 세상의 것을 빙자해서 하셨습니다.
참아버지의 말씀이라면, 영원을 통할 수 있는 내용이어야 하고 우리의 생활환경을 넘을 수 있어야 합니다. 악한 생활환경이 참다운 말씀을 삼켜버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참다운 말씀이라면 악한 세상의 무엇으로도 그 말씀을 제재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가지고 악한 환경을 넘고 또 넘어갈 수 있는 마음을 유발시켜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기 때문에 오늘날 전세계 기독교가 혼란 상태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러면 사랑의 마음을 갖고 오시는 아버지께서 사랑하는 자식을 대하여 진정한 말씀을 하실 수 있는 장소는 어디일 것인고? 어디엔가 그러한 곳이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그곳을 찾아야 됩니다. 만일에 그러한 자리를 찾아서 말씀을 듣는다면 어떨 것인고? 천 번 들어도 새로울 것입니다. 참다운 선의 가치로써 영원을 통할 수 있는 내용일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러한 말씀을 찾지 못한다면 참다운 자녀가 못 됩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 앞에 갈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생각으로는 거기에 사랑이라는 명사를 하나 더 붙여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사랑이니….’ 라고 했으면 좋겠습니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에게 갈 자가 없다 하였으니, 말씀을 통하여 문제되는 것은 말씀의 본체입니다. 말씀하시는 그 자체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자체는 누구뇨? 참아버지입니다. 이 참아버지 앞에 참자녀의 입장으로 서려면 참말씀을 찾아 들어가야 됩니다.
여러분은 참부모를 찾아 나가는 데 있어서, 참부모의 말씀, 영원한 가치와 인연맺게 해주는 참다운 말씀의 가치를 느껴 보았습니까? 못 느껴 보았다 할진대, 참다운 가치의 말씀을 하시는 아버지가 오셔도 모릅니다. 이러한 참다운 말씀의 가치를 밝히 알기 위해서는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이 땅 위의 인간들은 참아버지의 말씀을 찾아 나가야 됩니다. 참아버지의 말씀, 참말씀을 찾아 나가야 됩니다. 그 말씀은 예수의 심정이 동하는 말씀이요, 또한 6천년 동안 섭리해 오신 하나님의 심정이 동하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이 이 땅 위에 나오게 되면 6천년 곡절의 역사를 밝혀줄 것이요, 하나님의 분함과 하나님의 억울함과 하나님의 원통함을 밝혀줄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심정이 동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잖아요? 자식이 부모를 감동시키려면 자기의 요구와 소원 가지고는 안 됩니다. 부모가 자식을 위하여 얼마나 수고하고 얼마나 고생했는지를 알아 가지고 부모의 고통이 내 고통이요, 부모의 수고가 내 수고라고 느끼면서 부모의 역사를 말해야 합니다. 이런 자식이 되어야 부모를 감동시킵니다. 이러한 자식을 대하는 부모는 가슴이 터져 나갑니다. ‘오냐, 내 아들아!’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찬가지예요.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가슴속 깊이 묻혀 있는 한을 속속들이 폭발시켜야 되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우리를 찾기 위해 수고하신 것을 낱낱이 알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나를 찾기 위해 이러이러하게 수고하신 아버지!’ 하면 그 한마디에 하나님은 ‘오, 사랑하는 내 아들아!’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을 보고 울고 십자가를 붙들고 우는 자는 많지만 아버지의 마음을 붙안고 우는 자는 없습니다. 이 땅의 기독교 신자가 대개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십자가를 붙안고 울 것이 아니라, 십자가까지 넘어가면서 참고 사랑해야 했던 아버지의 마음을 붙들고 울어야 합니다. 그런 자는 천국 갑니다. 십자가가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이길 수 있는 예수님의 사랑의 힘이 구원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것은 십자가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성경을 어떻게 보아야 되느냐? 심정적으로 봐야 됩니다. 우리가 은혜에 깊이 사무쳐 기도할 때, 하늘의 심정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분하고 애달픈 마음에 사무쳐, 아버지여! 사무친 한이 무엇입니까? 성경 역사를 엮어 내려오시는 당신의 한이 무엇입니까? 하며 통곡해야 됩니다.
한이 무엇이뇨? 아담 해와가 타락하게 될 때 기뻐하신 하나님인 줄 아십니까? 만약 그런 하나님이라면 멱살을 잡고 싸울 것입니다. 당신이 하나님이야?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한이 있습니다. 타락으로 말미암은 한이 있다는 것입니다. 말 못할 곡절과 한의 내용이 있다는 것입니다.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허덕이시며 찾아 나오신 하나님은 어떤 신세뇨? 슬픈 신세입니다. 이 땅 위에 어떤 거지도 하나님보다는 낫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보좌에 앉아 천지 만물을 호령해서 모든 것이 마음대로 된다면 왜 6천년 동안 죄악의 인류를 끌고 나오셨겠습니까? 제일 불쌍한 분입니다. 주인인데도 불구하고 주인 노릇을 못 하셨습니다. 아버지이신데도 불구하고 아버지 노릇을 못 하셨습니다. 이처럼 분한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지으신 것이로되 당신 마음대로 못 하셨고, 당신의 아들딸이로되 아들딸이라 하지 못하셨습니다. 이 담을 무너뜨리기 위해 섭리해 나오신 것이 6천년 역사입니다.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은 6천년 동안 한을 품고 오셨습니다. 그 아버지가 아들딸 앞에 나타나실 때의 모습은 어떠하겠느뇨? 상처 입은 모습이요, 말할 수 없이 남루한 모습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모습으로 이 땅 위의 타락한 인간 앞에 몇 백번 몇 천만번 오셨다 가셨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몰랐습니다. 오늘 이 시간도 우리 자신들 앞에 그런 모습으로 그러한 심정을 갖고 찾아오시되, 우리는 꿈도 꿀 줄 모르는 사람이 되어 있으니, 그 얼마나 억울하시겠느냐 말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하나님을 감동시키고 하나님을 움직일 수 있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은 어떠한 이상주의나 이상론이 아닙니다. 호화찬란한 환경을 이루어 거기에서 춤추며 살도록 하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떤 말씀이어야 하느냐? 먼저 하나님의 곡절의 심정을 드러내어 ‘나를 위해 이렇게 수고하신 아버지!’라고 부를 때, 아버지께서 ‘오냐, 내 아들아! 지금까지 역사노정에 수많은 사람이 왔다 갔으되, 아무도 나의 심정을 모르더니 너는 알아주는구나.’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아들을 찾으십니다.
호화로운 자리에서 수많은 대중으로부터 영광받는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남루하고 불쌍하고 추한 자리에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애통스러운 사정이 이렇잖습니까?’ 할 때, 하나님께서는 ‘오냐! 네 말이 옳다. 아담으로부터 노아, 아브라함, 모세, 예수를 거쳐 지금까지 6천년 역사노정에서의 내 심정의 깊은 한의 곡절을 네가 아는구나.’ 하십니다. 이런 아들을 하나님은 찾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역사적인 분이십니다. 그러니 역사적인 하나님의 심정을 아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천당은 어떠한 사람이 가는 곳이냐? 역사적인 하나님의 심정을 아는 아들딸들이 가는 곳입니다. 여기서의 역사는 곡절의 역사를 말합니다. 이 곡절은 평안하거나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과 배치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땅 위에 있는 사람들은 그저 믿고 천당 가겠다고, 예수 믿고 복받겠다고 합니다. 천만 부당한 일입니다. 예수 믿고 복받겠다는 무리는 다 망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보십시오. 하나님 믿고 복받겠다고 하다가 다 망했잖아요? 그게 아닙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믿고 무엇을 해야 할 것이뇨? 하나님을 위로해야 합니다. ‘당신은 저의 역사적인 아버지로소이다. 시대적인 아버지로소이다. 또 영원한 아버지로소이다’ 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바이기 때문에 땅 위에 있는 아들딸이 그런 말을 하면, 하나님께서는 ‘오냐! 너는 나와 더불어 역사노정에 있지는 않았지만, 나의 역사적인 심정을 아니 내 아들딸이다. 네가 이 시대적인 섭리의 뜻 앞에 서진 않았지만, 이 시대적인 섭리의 뜻 앞에 설 수 있는 내 아들딸이며, 미래의 섭리의 뜻 앞에도 설 수 있는 내 아들딸이다.’ 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두운 골짜기, 깊은 골짜기에 가도 하나님을 만납니다. 십자가 중의 최고의 십자가에 나아가도 하나님을 만납니다. 선을 찾아 헤매다가 눈물의 골짜기 끝에까지 몰려나가도 거기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의 왕이요 억울함과 분함의 왕이십니다. 이 땅의 모든 악과 반대되는 입장에 계시는 분이요, 몰림받는 자의 주인공이십니다.
예수님은 어떤 길을 거쳐 천국을 건설하려 하였느뇨? 물론 평탄한 길도 있었지만 예수님은 죽음의 고개를 넘어 천국을 건설하려 하였습니다. 죽음의 고개를 넘어 천국을 건설해야 사망세계까지도 주관할 수 있습니다. 사망세계를 삼켜 버리고 천국을 건설하는 길, 이 길이 제일 빠른 길입니다.
왜 그러뇨? 타락한 이 땅에는 아직까지 하나님의 기쁨과 행복의 문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문이 닫혀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슬픔과 고통과 억측과 모순이 있습니다. 그러니 가는 길을 돌이켜서 하나님이 당하신 그 곡절을 찾아 나서는 것이 하나님을 만나는 제일 빠른 신앙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대중으로부터 반대받고 쫓김받아 찾아가신 감람산 기슭이 어떤 자리인 줄 알아요? 그 자리는 눈물 흘리는 자리요 통곡하는 자리요 가슴을 치는 자리였습니다. 또한 그 자리는 고통 가운데 사무친 예수의 눈물이 하나님의 눈물로, 예수의 분함이 하나님의 분함으로 뒤넘이치는 자리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참말씀을 찾고 있습니다, 참말씀. 그 말씀을 접하게 되어 하나님께서 역사적인 사정을 다 털어놓고 ‘오냐! 아는구나. 너는 내 아들딸이다.’ 하시는 자리까지 여러분은 들어가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후회합니다.
역사적인 하나님이요 시대적인 하나님이요 미래적인 하나님인 것을 알고 역사적인 하나님을 감동시키고 시대적인 하나님을 감동시키고 미래적인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있어야 됩니다.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한 곡절의 역사를 책임지신 아버지를 대신하지는 못할망정, 아버지의 슬픈 심정을 알아서 위로해 드릴 줄 아는 아들딸이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성경을 볼 때는 제일 슬픈 것을 보아야 합니다, 제일 슬픈 것을. 천국에 대한 내용이나 묵시록 같은 것은 빼놓더라도 제일 슬픈 것을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의 가까운 친구가 되려면 그 사람의 제일 슬픈 사정을 통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어야 되잖아요?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딸의 자리를 찾아 나가는 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한 내용의 말씀을 여러분이 찾아 나가야 됩니다. 그런 말씀이 이 땅 위에 나타나 여러분이 그 말씀을 듣게 될 때는 뱃속에서부터 한없는 설움이 터져 나올 것입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뱃속에서부터 통곡이 우러나올 것입니다. 열흘, 백날, 천날 울어도 한없이 울고 싶어질 것입니다. 그런 느낌을 줄 수 있는 말씀이 이 땅 위에 나와야 하나님의 복장을 들춰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말씀을 찾아야 됩니다.
겉만 빤질빤질하고 호화찬란한 말보다도 마음이 뒤넘이치고, 뼛골이 녹아 들어가는 느낌을 줄 수 있는 말씀을 찾아야 됩니다. ‘이 말씀이다. 오너라, 형제여!’ 할 때 그 형제도 ‘이 말씀이다’ 할 수 있는 말씀, 나도 그렇고 너도 그렇다고 느낄 수 있는 말씀을 찾아야 합니다. 혈족을 넘고 동족을 넘고 민족을 넘어서 세계의 모든 참다운 마음을 가진 자, 참다운 몸을 가진 자가 전부 공명할 수 있는 폭발력을 지닌 말씀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시니 천지가 안 울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대성통곡을 하시는데 천지가 통곡 안 할 수 있느냐 말입니다. 그러니 어서 속히 하나님의 역사적인 슬픔의 곡절을 해원할 수 있는 말씀이 나와야 됩니다. 그 다음에는 실체가 나와야 됩니다. 실체가 나와야 돼요. 지금까지 우리 성도들은 말씀을 찾아 헤맸습니다. 무엇 때문에? 주님, 실체를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참목자와 거짓 목자를 무엇으로 분별할 것이뇨? 참것과 거짓 것을 무엇으로 분별할 것이뇨? 우리들은 참목자를 대번에 알 수 있습니다. 처음 보는데 어디선가 본 것 같습니다. 첫인상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생명을 찾아가는 노정에 있어서 뜻이 있고 필요한 인연이 있는 사람은 처음 만난 사람이로되 본 사람 같다는 것입니다. 처음 만났지만 자기 오빠보다도, 자기 주위의 그 누구보다도 가깝게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본심의 작용을 평면적으로 일으킬 수 있는 소질을 가진 자라야 진짜 목자입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어느 한 때에 가서 여러분을 등쳐먹습니다.
우리가 끝날에 주님을 만나 그 주님의 눈 하나만 들여다보아도 영원히 싫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의 눈 하나에도 천국을 본 이상으로 기뻐할 수 있는 내용이 있습니다. 여러분, 그러한 주님을 만나 보았습니까? 천년만년 이마를 맞대고 있어도 싫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그분을 찾아가는 길은 천년을 걸어도, 몇 억만 번을 왔다 갔다 해도 싫지 않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교회 가는 게 그렇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은혜가 떠난 것입니다. 목자가 그런 내용의 움직임과 풍김이 없으면 가짜 목자입니다. 왜? 천국에는 모든 것이 영원이기 때문입니다. 바라보는 감정까지 영원이란 말입니다.
여러분! 이런 말 하면 이해가 잘 안 될 것입니다. 천국은 입체적인 세계입니다. 예를 들어 손수건을 보면 평면밖에 안 보입니다. 그 이면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그 이면을 보면 무궁무진합니다. 평화로운 감정으로 보면 평화의 대상으로 나타납니다. 평화로운 감촉을 전해 준다는 것입니다.
완전한 플러스가 있으면 완전한 마이너스는 자동적으로 생겨나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그렇지요? 물리적 현상이 그렇습니다. 완전한 플러스가 생기면 완전한 마이너스는 자연적으로 발생합니다. 완전한 존재 앞에 그 상대는 자연히 존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천주(天宙)를 통할 수 있는 평화의 심정을 갖고 천지를 바라보면 모든 것이 다 꽃입니다. 천지가 꽃이에요. 그 아름다움은 다 형용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그러한 심정으로 사람을 바라보면 사람 이상 아름다운 것이 없습니다. 영계에 가게 되면 처음 만나는 사람도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출 수 있습니다. 그 이상입니다. 끝이 없습니다. 우리가 필요로 하고 생명적인 인연을 갖춘 것, 이상적이라든가 이념적인 요소를 갖춘 것은 같은 것이로되 싫지 않습니다. 같은 모양이 반복되어도 싫지 않다는 것입니다. 밥 먹는 것도 그렇지 않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일을 하는 데 있어서 반복한다고 해서 싫어지면 그 일은 참된 일이 아닙니다. 선한 세계의 사람은 한 가지 일을 천년만년 반복하여도 좋고 좋고 또 좋다는 것입니다. ‘뭐 그런 망상적인 일이 어디 있어?’ 할지 모르지만 있을 수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주님을, 실체를 대하는 날에는 만사가 해결됩니다. 그 분을 대하면 고통스러운 마음이 다 잊혀집니다. 그래서 주님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고, 신앙을 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 즉 그 영광의 실체를 대하기 위해서입니다. 생활 감정을 통하거나 이상적인 감정을 통하더라도 싫어하는 부분이 없는 내용을 갖춘 분이 참주인공입니다. 선의 가치라는 것은 절대적입니다. 절대적이란 무한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믿는 노정에서 주님의 말씀 한마디에 세상의 모든 고통이 다 사라져가는 것을 느껴야 됩니다. 말로만이 아니고 실제로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내 눈, 내 감정, 내 생활, 내 모든 존재가치가 영원 절대적인 실체와 관계를 맺는 그날부터 행복은 찾아옵니다. 여러분은 아직 실체와 영원한 관계를 못 맺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지으신 후 먼저 실체를 지으셨습니다. 몸뚱이를 먼저 지으셨어요. 그러니 우선 실체와 인연맺어야 합니다. 그 분이 죽으면 죽고, 그 분이 가는 대로 가야 합니다. 그 분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두에 필요합니다. 검둥이와 흰둥이가 문제가 아닙니다. 남녀노소가 문제가 아닙니다. 전부에게 필요합니다. 그런 분이 나온다면 세계는 하나됩니다.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신 분이라면 그런 조화를 일으켜야 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실체와 상봉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실체를 만난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되느냐? 그 분을 위해서 모든 것을 주고 또 주어도 부족하고, 나의 피를 다 빼 드려도 부족함을 느끼고 사랑의 풍성함을 느껴야 됩니다. 심정의 양이 무한함을 느껴야 됩니다. 그 분을 위해서 희생하고 내 모든 피 살을 다 바치더라도 더 주고 싶어해야 됩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분입니다. 우리의 아버지는 그러한 분입니다.
세상에서도 그렇지 않습니까? 자기의 아버지를 위해서 땀을 흘리고 힘든 일을 했다 해서 아버지에게 그 대가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 대가를 요구한다면 불효자입니다. 여러분은 무한한 수고를 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치고도 부족하여 더 바치고 싶은 사무친 심정을 가져야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틀림없이 하나님의 아들딸이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딸의 표준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저 돈 몇 만원을 빌려 주고도 이자까지 안 주나 합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주고 잊어버려야 합니다. 주고 주고 또 주어도 부족함을 느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그러한 자리에 계셨습니다. 무한한 사랑의 경지에서는 자신의 몸이 죽어 들어가더라도 그것은 죽는 것이 아니고 죽음을 넘어 하나님의 심정과 인연되는 것임을 아셨습니다. 땅의 고통과 죄로 말미암아 구속되고 깨어지는 사람은 하나님의 심정세계를 정복하지 못합니다. 어떠한 고통과 어떠한 무서운 것도, 악을 대표하는 그 무엇도 하나님의 심정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사랑의 감촉을 막을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심정적인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내용을 갖춘 사람을 만들어 놓으셔야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러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한번 말씀하시면 천지가 영원히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영계의 내용을 알고 보면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한번 울리면 모든 존재물은 지극히 엄숙해집니다. 이것은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그 한 마디는 이 세상에서 생각할 수 없는 영원히 귀한 말씀으로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실존을 인식하게 되면 그렇게 생각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인간을 대해 그렇다는 것입니다. 인간을 위하는 길이 있다면 한 시간에 천만번 뒤넘이치는 일이 있더라도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이 앞서는 세계, 그런 작용으로 인연된 세계가 아버지께서 계신 세계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땅 위에서 그런 세계에 들어갈 수 있는 하늘의 말씀을 듣는다면, 먹는 것, 입는 것, 잠자는 것 등 모든 욕심을 초월할 수 있고, 자기 자신까지도 초월할 수 있습니다. 하늘의 사명을 가진 사람이 있다 할진대, 자나 깨나 그 분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드려도 부족하다는 심정에 사무칠 것입니다. 그때에야 여기서 말하는 천국의 아들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아들딸이 있다 할진대, 그는 천상천하의 모든 만물을 상속받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표준은 그것입니다. 왜 그런가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어떠한 모습으로 지으려 하셨겠습니까? 속에 집어넣고 집어넣어도 부족하고, 영원히 사랑해도 부족한 모습이 되게 하겠다는 마음으로 지으셨습니다. 여러분 중 아주머니들은 알 것입니다. 자기가 낳은 아기가 예뻐서 안아 주고 야단하지요? 그저 안고 안고 또 안고 영원히 계속 안아도 싫지 않다는 느낌을 일으키는 본체가 하나님입니다. 때문에 그 분의 아들딸이 되려면 그러한 자격을 가져야 합니다. 아버지의 말씀은 천년 동안 반복해 들어도 고기가 물을 먹는 것같이 마냥 맛이 있는 거예요. 같은 말씀이라도 슬플 때 들으면 위로가 되고 기쁠 때 들으면 축하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 상태, 생활 감정이 다름에 따라 거기에 해당하는 멋진 대상의 가치로서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보편적으로 볼 때, 진리의 말씀은 같은 내용을 120번 이상 들어도 싫지 않습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체험해야 됩니다. 같은 말씀을 백 번 이상 들어도 또 듣고 싶은 진리의 말씀을 가진 교회에 나가면 여러분은 틀림없이 천국 갑니다. 또 백번 보고 천번 보아도 또 보고 싶은 교회 지도자를 만났으면 떨어지지 마십시오. 한 손을 자르면 나머지 한 손을 가지고라도 그를 붙드십시오. 그런 지도자를 만나면 틀림없이 천국에 갑니다.
그런 인연을 거쳐야 비로소 타락의 한을 벗은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고, 타락의 한을 갖지 않으신 하나님의 심정이 우리에게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인연을 거치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타락의 감정을 잊어버리실 수 없습니다. ‘이놈의 자식들!’ 너희는 아담 해와로부터 타락의 혈통을 받은 자식들이야. 나를 배반하고 지금까지 별의별 추악한 행동을 해온 종족이야. 하는 감정을 잊어버리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가슴을 들추어내고, 하나님께 자극을 일으킬 수 있는 사람이 될 때, 비로소 아버지께서 역사적인 한을 잊어버리고 창조이상 세계의 본연의 심정 기준을 세울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그러한 기준까지 나아가지 않으면, 참다운 아버지가 아버지 노릇을 할 수 없습니다. 참다운 아버지의 마음과 참다운 아버지의 사정과 참다운 아버지의 소원과 참다운 아버지의 심정을 통하여 가지고 아버지라 부르는 아들딸을 못 만나는 한, 하나님은 영원히 참다운 아버지가 못 된다는 것입니다. 영원히 못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아들딸이 이 땅 위에 많이는 못 나오더라도 남자 한 사람, 여자 한 사람은 나와야 됩니다. 앞으로 그런 분이 오신다면 그 분이 인류의 참부모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모를 잃어버렸으니 이런 심정을 가진 부모를 만나야 합니다.
지금까지 6천년 역사는 하나님의 아들 한 사람 등장시키기 위한 역사였습니다. 잃어버린 아담 한 사람 찾는 역사였습니다. 본래 아담 해와가 타락하지 않았으면 인류의 참부모가 되어서 하나님의 심정을 통하고 하나님의 사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소원과 목적을 모두 달성했을 것인데, 타락하여 다 꺾여졌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다시 찾기 위해서는 재창조의 역사를 거쳐야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아담을 재창조하여 잃어버렸던 인류의 참아버지의 입장에 다시 세워서 하나님이 그의 머리에 손을 얹으시고 ‘너는 내가 창조 이념으로 지었던 아담으로서 나의 사정과 심정을 헤아릴 수 있는 아들이다.’ 하고 축복해 주셔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책임을 지고 이 땅 위에 오시는 분이 재림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6천년 역사는 하나님이 찾고자 하시는 완성한 인류의 조상 한 사람을 만들기 위한 역사라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아담을 창조한 후에 아담의 갈빗대를 뽑아서 해와를 만들었다고 했는데, 실지로 갈빗대를 뽑은 것이 아닙니다. 이런 말 한다고 뭐 저 청년이 성경을 여지없이 어떻게 한다고 할지 모르지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진짜 갈빗대를 뽑은 것이 아니라 골격을 본떴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책을 읽고 무엇을 빼냈다고 그러지요? 무엇을 빼냈다고 합니까? 그 책의 골자를 빼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해와도 아담의 골격을 본떠서 만든 겁니다.
그러니까 아담만 나오는 날에는 해와는 저절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완전한 플러스가 나오면 완전한 마이너스는 저절로 나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심정을 통한 실체로서 만우주 앞에 자랑할 수 있는 참다운 아담의 입장이 못 되었습니다. 그럴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이 못 되었기에 예수는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 시대는 민주주의 시대입니다. 하나님이 민주주의를 세우는데 6천년이 걸렸습니다. 여기서는 어떤 말을 하더라도 어떤 종교를 믿더라도 목이 달아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와 같은 시대에 예수가 오시면 핍박은 받을지라도 반드시 잃어버린 참아들과 참딸을 찾아 세울 것입니다. 잃어버렸던 것을 거꿀잡이로 찾아 세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역사를 벌여 놓았습니다. 두 가지 형태로 벌여 놓았습니다. 하나는 플러스요 하나는 마이너스인데, 이것이 합해져야 됩니다. 알파와 오메가가 하나로 종결되어야 합니다. 참부모에서 출발해야 할 역사인데 인간이 참부모를 잃어버리고 거짓 부모의 자식이 되었으니, 참부모를 복귀하여 하나님 앞으로 다시 나아가게 될 때, 평화의 동산이 개방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심정적인 인연을 갖지 않는 한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아들딸이 못 됩니다. 돈이나 세상의 지위, 권세, 내 아들딸, 이런 것들이 뜻을 이루는 조건이 되는 줄 아세요? 아무 조건도 안 됩니다. 조건이 된다면 그것들을 찾아가십시오. 그러나 그리로 가면 하나님의 아들딸이 못 됩니다.
앞으로 이 민족, 이 세계 앞에 새로운 이념을 갖고 나오는 교회가 나타난다 할진대, 전세계가 반대하여 몰아 때릴 것입니다. 이 악한 세상에서 몰아내야 분별됩니다. 그 교회는 세상이 아무리 몰아내고 밟고 두드려도 퍼져 나간다는 것입니다. 맞는 자리에서 생성되어 번식하고, 맞는 자리에서 뿌리를 박고, 맞는 자리에서 희망을 갖고, 맞는 자리에서 산 모습이 되어 나아가는 곳이 있거든 그곳을 찾아가라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런 곳을 찾았다 할진대, 여러분은 역사적인 심정, 시대적인 심정, 미래적인 심정을 격동시켜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바치고, 무한히 뻗어 나가 최대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경지에 서야 합니다. 그러한 경지에서 아버지를 불러야 합니다. 아버지라는 그 한마디면 됩니다. 딴 것 필요 없습니다. 많은 기도도 필요 없습니다. ‘아버지!’라는 한마디는 슬플 때는 위로가 되고, 여러분의 감정에 따라서 거기에 맞는 감정으로 대응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라는 명사는 모든 것을 종결하고 심판하고 해결지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러한 자리에서 ‘아버지!’ 하면 하나님의 아들딸이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틀림없이 천국 백성으로 피조만물 앞에, 혹은 저나라의 수많은 영인들 앞에 당당하게 나서서 천적인 자녀의 권한을 자랑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인간들에게 슬픔을 더욱더 북돋우고 복잡함과 곡절을 북돋우고 있는 이 시대의 현상을 저희들이 목도하고 있사옵니다.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의 심정의 세계에 슬픔이 점점 더 가해 들어가는 것을 저희들이 감히 헤아릴 수 있사옵니다.
아버님! 여기에 모인 저희들의 마음을 넓히시옵소서. 이제 저희의 몸은 지금까지 갖고 있는 의식과 주의, 주장, 관념 등의 일체를 재분석하여 영원한 가치의 선과 인연맺어야 할 역사적인 종말시기에 처하여 있사옵고, 저희의 마음은 영원한 아버지의 심정세계와 인연맺어야 할 심판의 시대에 처하여 있사옵니다. 이런 것을 아는 저희들로 하여금 당신이 무한한 사랑의 아버지이신 것을 체득하게 하여 주시옵고, 십자가의 고통을 넘고 죽음의 고통을 잊은 채 사랑하고 싶어하시는 아버지이심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무것도 아닌 저희들, 천만번 죽고 쫓김을 당하더라도 부족한 저희들을 위하여 귀하고 존엄하신 당신께서 억울한 노정을 걸으시고, 억울한 사정에 처하신 것을 무엇으로 해원해 드리겠습니까? 저희는 천만번 죽어도, 피살을 다 뿌리고 눈물과 피땀을 다 바쳐도 부족한 것을 아옵니다. 욕을 먹어도 부족하고 반대를 받아도 부족하옵니다.
아버님께서는 그런 가운데서도 원수의 심장을 녹여 내리는 본연의 참주인공으로 설 수 있는 모습을 찾아 나오셨거늘, 저희들이 그런 모습이 되어야겠사옵니다. 형제에게 핍박받게 될 때 분해하는 자는 하늘에 가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사옵고, 또한 형제에게 쫓김 받게 될 때 그를 대하여 원수라는 마음을 갖는 자는 본연의 세계와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사옵니다.
오늘 여기에 모인 당신의 아들딸들, 불쌍한 자들이옵니다. 교회 생활에 지쳐 있는 자들이옵니다. 하오나 참다운 목자를 붙들고 참다운 말씀에 잠겨 영원한 생명의 동산에서 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신앙노정에서 절망을 느끼는 저희들이었습니다. 절망하고 있는 이들을 깨우치기 위해서 그들보다 몇 배의 수고를 하고 정성을 들이지 않으면 다시 일으킬 수 없는 것을 아옵니다. 역사적인 원한으로 엮어진 모든 교파의 처참상을 용납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오늘 통일이란 명사 밑에 여기 모인 당신의 아들딸들, 이들은 누구를 위하여 이 길을 가는 것이 아니옵니다. 어떤 교회를 위하여 믿는 것도 아니옵니다. 자기의 가치를 믿고 자기의 마음과 몸으로 자기의 가치를 노래하며 아버지와 관계를 맺으려는 신앙생활이요, 이것을 해결하기 위한 단체가 통일교회라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하늘의 주인은 당신이옵고 땅의 주인은 저희들이옵니다. 당신과 합해지기를 갈망하는 저희들의 마음을 당신이 아시오니, 당신과 저희가 합해지는 날을 위하여 있는 지성을 다하고도 부족하여 눈물짓고, 매를 맞고도 감사할 줄 아는 무리로 양육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은 역사적인 한을 품으시고 눈물지으시면서 저희들을 찾아오셨사옵니다. 하오니, 이제 당신께서 ‘아들딸아!’ 하고 부르실 때, 저희들이 ‘아버지’ 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땅 위에 한스러운 당신의 심정을 아는 자가 없사옵고, 억울하고 분통한 역사적인 설움을 대신 책임질 자가 없사옵니다. 삼천만 민중을 깨우쳐 주시옵고, 잠들어 있는 청년들을 모아 주시옵소서. 죽음의 축대를 쌓고 있는 이 민족, 이 민족의 앞길을 염려하는 자가 어디 있사옵니까? 산 피와 살을 가진 자가 아직 남아 있을 줄 아오니, 그들을 택해 주시옵소서. 그들이 머물 곳을 당신이 이미 준비하신 줄 아오니 그들에게 갈 길을 열어 주시옵고, 당신께서 그들과 깊은 인연을 친히 맺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님을 만나는 것이 처음일지라도 대하는 심정만은 영원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여기 참석한 이들이 그 무엇을 알았습니까? 아버지를 부르고 아들딸을 부르는 그 음성이 천지에 울려 퍼지고, 악은 물러가고 선만이 싹트며 선만이 활동할 수 있는 인연이 이들의 몸 마음에 맺어지기를 바라옵나이다.
이 길을 가라고 분부하시기 전에 당신은 이미 우셨사옵고, 저희에게 어려움이 있기 전에 당신께서 먼저 자처하여 어려움을 당하셨고, 당신께서는 저희가 슬플 때 권고하여 일으켜 주셨사옵니다. 개척해야 할 선구자의 입장에서 저희가 슬플 때 아버지께서 같이 슬퍼해 주셨고, 저희가 어려울 때 아버지께서 같이 염려해 주셨사옵니다. 황공 망극하옵니다.
이제 영광이 있다 할진대 당신이 받으시옵고, 자랑할 그 무엇이 있다 할 진대 당신만을 자랑할 수 있게 하시옵소서. 눈물을 뿌리고도 더 슬퍼하는 마음이 저희들 마음에 사무치게 하여 주시옵고, 땀을 흘리고 나서도 더 많은 땀을 흘리지 않으면 편치 않은 것을 느낄 수 있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내 피 살을 뿌리고 이 몸을 살라서라도 하늘의 의의 제단을 쌓게 하여 주시옵고, 아벨의 피 살이 선을 호소했듯이, 저희의 피 살도 이 땅 위에 그러한 조건을 남길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시간도 지방에 널려 핍박을 받으며 한스러운 심정을 붙안고 몸부림치는 자들이 있사오니 일일이 지켜 주시옵소서. 이 길이 하늘을 향한 길이 아니라 할진대 망해야 될 줄 알고 있습니다. 이 길을 막는 자 많사오나 당신께서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시면서 이끌어 주시니 감사하옵니다.
당신의 어린 아들딸들이 나아가는 길을 이끌어 주시옵기를 당신 앞에 호소하오니, 이들이 눈물지을 때 같이 눈물짓고, 이들이 통곡할 때 같이 통곡하여 주시옵소서. 심정적인 자녀의 인연을 맺은 새로운 핏줄기로서 삼천만 민중 앞에 천상을 노래하고 하늘을 위하여 싸워 나가는 새로운 모습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천지를 아버지의 동산으로 연결하는 중보적인 사명을 하는데 부족함이 없도록 맡아 주관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 이날 이후에 되어지는 전체 위에 함께하여 주시옵소서. 소원을 성취하는 노정에 있어서, 밤이나 낮이나 저희의 마음과 몸, 또는 저희의 사회적인 생활환경에 있어서 오직 당신만이 주인 되시옵소서. 그리하여 최후에는 아버지와 자녀의 인연을 이루어 할렐루야 찬양하며 사탄세계 앞에 자랑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오며,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40수(數)는 사탄 분별수(分別數)요, 3수는 개체를 성별(聖別)하는 수입니다.
앞으로 3년간은 지상(地上)의 성도가 하늘나라의 성도와 힘을 합하여 책임을 완수해야 하는 기간입니다.
선생님은 영적(靈的)인 세계의 사탄을 이미 분별하였습니다. 그런 고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의 95퍼센트는 선생님이 한 것입니다. 그러니 이 기간은 그 나머지 5퍼센트를 완수하는 기간입니다.
우리는 6천년을 횡적으로 탕감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애가 60년이라고 한다면, 성장기간 20년을 뺀 40년 동안 이것을 탕감해야 합니다.
과거에는 선령(善靈)이 도수(度數)가 맞을 때에만 잠깐 역사(役事)했지만 이제부터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이 기간에는 모든 영을 동원해야 합니다. 영원한 기준을 한국 식구들이 세워야 합니다.
선생님은 본부를 떠나 지방으로 가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탕감조건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 120명을 중심하고 찾아오십니다(성신강림).
3수는 개인 완성수(아담을 완성시키기 위하여 3자식이 필요했던 것처럼), 12수는 가정 1대 복귀 완성수(一代復歸完成數), 70수는 민족복귀 완성수(民族復歸完成數), 120수는 세계형(世界型)을 나타낸 수입니다. 그러므로 남녀는 3자 3녀(三子三女)를 세워야 합니다.
예수님은 세 제자를 친혈족(親血族)처럼 만들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한을 풀어 드려야 합니다. 예수님의 탕감해원(蕩減解寃)과 실체완성(實體完成)을 하려면 3년간에 120명을 전도해야 합니다. 이것을 하려면 부모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어떤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의식주를 초월하는 사람이 가장 무섭습니다.
명년(明年)에는 1,400개 처 이상 되는 지역에 전도를 나가야 합니다. 지방에 못 나가는 사람은 각자가 있는 곳이 전도파송지역(傳道派送地域)입니다. 16세 이상은 전부 동원하기 바랍니다.
영계(靈界)는 제1이스라엘이고, 현재 지상에 있는 기독교 신도들이 제2이스라엘이며, 우리는 제3이스라엘로서 세계적 가나안 복귀를 완성해야 합니다.
제2이스라엘이 교파분열로 인해서 지파(支派)를 편성하지 못했기에, 우리는 그들이 못한 것을 탕감복귀하여 제2이스라엘의 믿음의 조상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도를 잘하여 제3이스라엘로 넘어가야 합니다. 특히 이 기간에는 아벨형인 처녀 총각이 앞장서서 전도해야 합니다. 3년 후에는 선생님이 전도계획을 세우지 않아요.
여러분은 선생님의 심정적인 빚을 진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것을 갚아야 합니다. 지방에서 이 내용을 말씀했기 때문에 본부에서도 말씀하는 것입니다. 선생님 자신도 이 문제 때문에 고난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기 도> 하늘이 맡기신 위업을 감당하지 못하고 지쳐 떨어지는 자들이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쓰러지고 또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피를 토하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 사명을 다한 후에 쓰러질 수 있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일을 위하여 이 시간도 외롭고 험한 자리에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고 싸우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산지사방에 널려 있는 것을 아옵니다. 아버지, 그 자리에도 같이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당신은 무심치 않으신 것을 아옵니다. 외로울 때 붙들어 주셨사옵고, 뜻을 품고 처량한 자리에서 호소하는 자들을 강하게 해주셨사옵고, 그들의 심정을 위로해 주신 줄을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지, 이 시간도 같은 심정으로 같은 역사로 같은 능력으로 움직여 주시옵소서. 남아진 최후의 장벽을 점령할 때까지 끝까지 참고, 끝까지 싸우고, 끝까지 이 인류를 위하여 책임을 지고 나갈 줄 아는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삼천리강산뿐만이 아니라 먼 해외에서도 수많은 당신의 아들딸들이 이 시간 이 곳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며 호소하고 있사옵니다. 그들은 비록 피부 색깔이 다르고 생활환경도 다르지만 뜻을 대해서는 한 핏줄로 인연된 형제이오니, 그들이 모이는 곳곳마다 당신이 같이하여 주시옵고 은사의 불길로 품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거리는 떨어져 있을망정 심정의 세계에 있어서는 아버지를 중심삼고 영원한 인연을 노래할 수 있고 생명적인 움직임이 나타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시간 이 민족 위에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불쌍한 이 민족 앞에 새로운 길을 열어 주시옵고, 희망의 동산에서 노래를 부르며 하늘 앞에 감사드릴 수 있는 민족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흑암세계의 모든 것을 저버리고 생명이 약동하는 새로운 나라, 새로운 세계를 향하여 움직여 나갈 수 있는 새로운 날이 어서 속히 이 민족 앞에 임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자리에 모인 당신의 아들딸 앞에 무슨 말을 전하오리까? 아버지, 마음으로 마음을 전하고, 심정으로 심정을 전하고, 애달픈 사정으로 사정을 전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전하는 자의 마음과 대하는 자의 마음이 하나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둘을 세워 놓고 사탄은 싸움을 붙이려고 하고 하늘은 이 싸움을 제거시키려고 하는, 즉 사탄은 분열의 역사를 하고, 하늘은 총합의 역사를 하고 있사옵니다. 저희들, 당신의 모습을 닮은 하나의 형상을 갖추어 같은 몸 마음으로 아버지 앞에 머리 숙이는 이 시간이 되고, 하늘의 은사를 받을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모든 것 당신 앞에 맡기오니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말 씀> 이 시간 여러분들과 같이 생각하려는 말씀의 제목은 ‘참된 발판을 찾아서’, ‘참된 터전을 찾아서’입니다. 이런 제목을 가지고 잠깐 말씀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이 천지 만물을 지으신 데에는 변하려야 변할 수 없는 어떠한 터전을 기준으로 하셨음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인간도 목적하는 바가 있어서 지으셨고, 모든 만물도 목적하는 바가 있어서 지으셨다는 것을 우리들은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목적 밑에서 지음 받은 우리라면, 우리의 마음에 있어서나 몸에 있어서나, 혹은 생활에 있어서나 이념에 있어서 어느 누구도 움직일 수 없는 철두철미한 터전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자신을 헤아려 볼 때 내 생활, 내 몸, 내 마음, 더 나아가서 내 심정이 변하려야 변할 수 없는 불변의 터전 위에 서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공히 변치 않는 발판을 갖지 못한 신세입니다.
절대자이신 하나님께서 어떠한 목적관을 중심삼고 피조물을 지으셨다 할진대 지음 받은 그 존재도 그러한 목적 밑에서 변하려야 변할 수 없는 발판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우리가 그렇지 못하다면 이것은 타락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루려 하셨던 목적, 변하려야 변할 수 없는 그 천적인 발판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인간과 인연을 맺지 못하고 어긋나 버렸습니다. 이것은 부정하려야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우리들은 흔히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이 땅 위의 인간들을 사랑하신다 할진대 그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불변의 발판을 갖춘 자가 있느냐? 또 하나님은 참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참되신 하나님 앞에 참된 발판을 갖춘 존재가 어디에 있느냐? 또 하나님은 생명이시요 불변의 이념이라 할진대, 그 생명과 이념을 계승할 수 있는 발판을 갖춘 자가 이 땅 위에 있느냐고 묻는다면 없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땅 위에서 제아무리 잘나고 권세를 가지고 자기를 자랑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의 가슴을 헤쳐 놓고 보면 하나님이 바라시는 절대적인 가치, 혹은 선, 혹은 생명, 혹은 사정 앞에 불변의 발판이 될 수 있는 대상자라고 하면서 자신 있게 나설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참된 생명, 참된 사랑, 참된 선의 본체가 되시는 창조주가 계시다 할진 대 그 분은 그러한 발판을 갖추지 못한 환경을 파괴해 버리고 어떤 형태로든 참된 터전, 혹은 참된 발판으로 만들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역사해 나오는 것이 구원섭리요, 그 구원을 이루기 위한 수단과 방법으로 종교가 나왔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온 피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즐길 수 있는 불변의 발판은 누가 되어야 하느냐 하면 지음 받은 만상 가운데서도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생명을 중심삼고 볼 때도 그러하거니와, 하나님의 불변의 사랑을 중심삼고 볼 때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변하려야 변할 수 없는 영원한 발판이 되어야 할 사람이 그렇지 못한 것이 탄식입니다.
만약 우리가 절대적인 생명, 절대적인 사랑이신 하나님 앞에 불변의 발판이 되었다면 불행이란 있을 수 없고, 사망도 있을 수 없고, 고통도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생명, 절대적인 사랑, 절대적인 이념, 절대적인 선 등 절대적인 제 조건을 갖춘 존재는 어느 누구도 굴복시키려야 굴복시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사랑을 갖고 나타나셔야 할 하나님이요, 절대적인 선을 갖고 나타나셔야 할 하나님이요, 절대적인 생명과 절대적인 이념을 갖고 나타나셔야 할 하나님이요, 지으신 모든 만물 앞에 절대적인 가치로 나타나셔야 할 하나님이 절대적이라는 명사를 쓸 수 없는 입장에 계시게 되었으니 그 고충이 얼마나 크시겠으며, 탄식과 슬픔이 얼마나 크시겠습니까? 이것을 우리들은 생각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땅을 대하여 섭리하신다 할진대 인간들이 이념적인 제 조건들을 모두 갖추어서 완전한 발판이 될 때까지 채찍을 들어 치든가 어떤 방법으로든지 목적하시는 곳으로 몰아내는 역사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어느 누구도 망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망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잘났으면 잘난 사람일수록 망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더욱 없다는 것입니다. 역사노정에서 수많은 영웅열사들이 자기의 위세를 당당하게 자랑하였지만 다 꺾였습니다. 자기가 바라던 욕망대로 다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역사는 시대 시대를 거쳐오는 동안 갈라지면서도 뚜렷한 하나의 목적 밑에서 움직여 나오고 있는 사실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지금 여러분 자신들이 서 있는 위치와 발판이 완전무결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완전치 못한 자리에서 자랑하는 자는 반드시 탄식하며 굴복당할 날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참다운 양심, 참다운 이념을 찾아 나가는 이들은 마음 깊이 자기를 살피고, 마음 깊이 자기의 모습을 측량하고, 마음 깊이 자기의 가치를 찾아 헤매는 것입니다.
선지선열들이 왔다 갔지만 어느 누구도 자기를 중심삼은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흘러갔고, 그 문제는 오늘날의 우리에게까지 심각한 문제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이냐? 영원한 천도(天道)가 있어 그 천도 앞에 불변의 발판으로 설 자신을 가졌느냐고 반문할 때 그렇지 못하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할진대, 여러분은 자신이 살고 있는 이 사회와 세계를 재검토하고 재분석하여 새로운 불변의 발판으로 이끌어 나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생활무대를 살펴봅시다. 흔히 사람들은 자기를 주장하고 싶어합니다. 자기의 무엇을 주장하고 싶어하고, 자기의 가치를 높이 드러내고 싶어하고, 자기의 그 무엇을 남기고 싶어합니다. 원하는 모든 것이 평면적인 시대상으로는 나타날는지 모르지만, 종적으로 연면히 흘러나오는 역사와 더불어 어떠한 관계를 맺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여기에 역사적인 문제가 개재되고, 역사를 거쳐 나온 인륜도덕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인륜도덕을 중심삼고 볼 때 양심은 그 기준을 통할 수 있는 어떠한 목적, 즉 대상을 요구합니다. 그러기에 사람은 어떠한 목적을 중심삼고 양심의 기준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어떠한 목적을 중심삼고 양심 기준을 세우지 않는 한 시대는 변해 갑니다. 세계는 혁명 과정을 거쳐 변천해 갑니다.
한 인간이 생을 영위해 나가는 데 있어서도 마음에 의해 몸이 움직일 수 있고, 한 목표를 향하여 달려갈 수 있는 목적의식에 의해 생활감정이 움직일 수 있는 자체가 되지 않는 한 완전한 터전 위에서 살아간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일개 국가면 국가, 일개 민족이면 민족을 보게 될 때도 그들이 바라보는 목표가 천이면 천, 만이면 만 모두가 달라서는 안 됩니다. 천사람, 만 사람이 각각 다를지라도 그 목표만은 하나로 귀결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희로애락을 느끼는 감정이 있는데 이것이 목적의식을 통하여 느껴지는 감정이 아니라면 이 땅 위에 평화는 있을 수 없습니다. 행복이 있을 수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피부색이 다르고, 사정이 다르고, 생활이 다르다 할지라도 소망하는 목표, 고대하는 목적만은 민족을 넘고 역사를 넘어 같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민족 민족이 다르매 그 목적도 각각 다르고 생활 형태도 다릅니다. 천태만상으로 다르게 움직여 나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이 섭리하신다 할진대 반드시 이들을 한 방향으로 수습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수습하는 데는 생활을 수습해야 됩니다. 생활을 수습하는 동시에 느끼는 감정까지도 수습해야 합니다. 생활에서부터 감정까지 전체의 분야를 수습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기에는 온 만물이 다 관여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목적 아래서 새로운 불변의 터전을 찾기 위하여 하나님이 섭리해 나오신다는 것입니다. 불변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역사노정이라 할진 대, 우리들은 목적지에 도달해 있는 것이 아니라 목적지를 향해 가는 과정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믿고 있는 종교, 국가가 주장하고 있는 이념, 혹은 세계적인 이념, 어떠한 단체나 어떠한 민족이나 어떠한 국가가 바라고 소망하는 목표도 과정적인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믿고 있는 기독교도 목적과 전면적으로 화할 수 있고, 부딪칠 수 있는 결과적인 내용을 갖추었느냐 하면 그렇지 못합니다. 과정적인 위치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 과정적인 한 단계가 남아 있으니 이 과정을 지나 목적지에 가야 합니다. 그 길은 결코 평탄한 길이 아닙니다. 뒤넘이치는 곡절의 길인지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대에 따라 변해 오는 역사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라 할진대 자신이 처해 있는 위치를 행복한 곳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 위치에서 만족하면 망한다는 것입니다. 왜? 이 세상은 아직까지 목적이 이루어진 세계가 아니요, 불변의 터전으로 결정난 자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야 할 과정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범위가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그만큼 복잡한 내용이 우리 앞을 가로막는다는 것입니다.
학문을 하는 사람이 학문을 중심삼고 일체의 목표를 세우고 그것으로 행복을 느낀다 할진대, 그는 시대적인 행복은 느낄 수 있을지 몰라도 역사적인 행복을 즐기면서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불변의 터전에 남길 수 있는 영원한 것이 될 수는 없습니다. 현실에서 만족하는 위치는 불변의 위치가 못되고 변합니다.
오늘날 국가 정세도 그렇고, 종교도 역시 그렇고, 사회제도나 모든 것이 그런 과정에 처해 있습니다. 이러한 난관을 거쳐 나가야만 완전한 터전, 완전한 발판을 세울 수 있는 것입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세우신 그 목표는 변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시대가 변하고 역사가 곡절의 과정을 거쳐 간다 할지라도 모든 사람의 양심의 중심이 되고, 모든 사람의 소망의 목표가 되는 하나님은 결코 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변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고 하셨습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인간은 동기로부터 결과까지 나아가는 과정에서 떨어졌습니다. 그러면 곡절을 거치며 흘러가는 역사 과정에 있어서 어떠한 길을 가야 되느냐? 결과적인 방향을 찾아 나가든가 아니면 반대로 원인적인 방향을 찾아 나가든가 둘 중의 하나를 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운명에 있습니다. 현실에 만족하다가는 망합니다. 목적의 세계를 찾아 나가든가 아니면 원인의 세계를 찾아 들어가든가 둘 중의 한 방향을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원인적인 세계를 추구해 나가는 것이 철학과 종교요, 결과적인 세계를 추구해 나가는 것이 자연과학입니다. 이 두 갈래 길 중 어느 방면에서 목적의식을 느낄 수 있으며, 절대자의 존재를 의식할 수 있으며, 절대자의 불변의 발판으로 섰노라고 자랑할 수 있겠느냐? 이것이 타락한 인간 앞에 제시된 불변의 명제입니다.
이러한 견지에서 우리 자신들을 되돌아볼 때 과연 우리는 어떠한 위치에 처해 있느뇨? 나 자신은 어떠한 위치에 있느뇨? 아무리 과정의 생활을 즐긴들 목적과 관계가 없다면 이는 하등의 의미가 없습니다. 지난날의 생활이 목적과 관계가 없다 할진대 그 과정이 복잡하면 복잡할수록, 고충이 많으면 많을수록 목적의 때에 이르러서는 고통밖에 되지 않습니다. 주저의 조건, 갈 길을 가로막는 조건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아시기에 인생행로를 가는 데 있어서 단순하게, 철저하게 한 가지만 알고 나오라고 주장해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라는 것은 단순합니다. 하나님을 ‘믿어라!’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고 무조건 믿으라고 하면서 인간을 이끌어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시대가 지나고 사람들의 지능이 발달됨에 따라 그것은 도무지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모든 현상을 볼 때에도 아무런 내용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세기말적인 끝날에는 신앙자들이 세파에 몰리지 않을 수 없고,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낙망하지 마십시오. 과정적인 노정은 반드시 지나갈 것이거늘 지나가는 과정에서 비판받는다고 낙망하지 말자는 겁니다. 지나가는 역사를 밟고 넘어갈 수 있는 신념을 가지십시오. 어차피 지나갈 이 복잡한 환경을, 이 과정을 밟고 넘어설 수 있는 신앙만 가지라는 겁니다. 어느 누가 뭐라고 해도 변치 않는다는 신념을 가지고 살아 나가면 됩니다.
하나님을 무조건 믿는 것도 좋습니다. 무조건 믿는 데는 알파와 오메가 적인 하나님, 처음과 나중인 하나님이라고 결정해 놓고 믿어야 합니다. 이는 역사적인 과정을 초월한 신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맹목적인 신앙관을 세우는 것도 일리가 있습니다. 신앙이라는 두 글자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불변의 발판 위에 서게 한다면 복잡하게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신앙을 세우셨다 할진대, 그 본연의 심정에 일치하는 신앙관념을 가지고 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신앙자가 있느냐? 없습니다.
아무리 끝날이 오고, 말세에 심판이 있다 하더라도 그 심판은 나와 관계 없다고 할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오늘날 이 땅 위에 벌어지는 모든 죄, 혹은 죄상과 연관된 만사는 나와 하등의 관계가 없다고 할 수 있는 자리에 서야 됩니다. 그러나 어디 그래요? 회개하고는 또 죄 짓고 또 회개하고 그럽니다. 죄와 관계없다고 하는 신앙을 찾아볼 수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사조의 시대가 왔으니 이러한 동기로부터 이러한 과정을 거쳐 이러한 목적의 세계로 간다.’ 하는 것을 해명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아무리 세계적인 종교가 되었다 할지라도 이것을 못하는 날에는 반드시 깨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의 종교인들은 그들이 처해 있는 위치에서 모든 것을 해결짓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새로운 각도와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기까지의 남아진 과정이 짧으면 짧을수록 한꺼번에 몰아치는 사조를 밟고 넘어갈 수 있는 믿음을 갖든가 그것을 헤치고 나갈 수 있는 내용을 갖든가 둘 중의 하나를 갖추지 않으면 망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역사적인 신앙자를 해명해야 합니다. 역사적인 신앙자는 그 누구였으며, 이 시대적인 신앙자는 그 누구인가를 해명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두고 보십시오. 여기서 말하는 사람의 말이 맞나 안 맞나. 역사적인 신앙자가 누구뇨? 하나님께서 시대를 대신하여 세운 민족의 대표자로서 민족을 이끌고 나갈 불변의 발판으로 설 수 있는 신앙자가 누구인고? 가정을 이끌고 나갈 수 있는 불변의 발판이 누구인고? 개인을 지탱해 나갈 수 있는 불변의 발판이 누구인고? 또 세계를 대신하여 나설 수 있는 불변의 발판이 그 누구인고? 끝날에 오시는 주님 앞에 신부로 나타날 수 있는 불변의 발판이 그 누구인고?
그러기에 역사를 생각해야 됩니다. 역사적인 충신, 역사적인 성현들을 추궁하는 원인이 여기에 있습니다. 아울러 현재 어떠한 새로운 이념을 따라 나가면서 생활하는 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함부로 날뛰다가는 어느 구덩이에 빠질지 모릅니다. 대우주를 세우시고 대목적관을 세워 나오시는 하나님이 계신다 할진대 그 분이 바라보시는 역사적인 본연의 발판은 어디인가? 종교적인 불변의 발판은 어디인가? 이것이 문제입니다. 성경을 연구하고 기도를 하는 목적도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수백만의 군중을 한꺼번에 규합하고 해체시키는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쓸데없습니다. 그러기에 역사노정에는 혁명이 있었습니다. 망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자기의 지위를 내놓고 싶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돌아가야 할 때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불쌍한 자리에 들어간 자들이 불쌍하지 하나님의 뜻은 변하지 않습니다.
현실로 돌아와서 세계를 바라보면 민주와 공산이 대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어느 것이 결과이고 어느 것이 원인인지 해명해야 합니다. 어떠한 일을 저끄르면, 그 일을 저끄르기 전의 상태로 회복해 놓고야 다시 출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렇게 불쌍하고 처참한 환경에 놓여 있는 이 인류들이 찾아야 할 것이 무엇이뇨? 새로운 관점을 세워 다시 한번 헤아릴 수 있는 조건을 찾아야 합니다. 오늘의 현실에서 어느 것이 원인이고 어느 것이 결과인가를 해명하여 원인을 통할 수 있는 곳이 아니면 결과를 통할 수 있는 곳으로라도 나아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망합니다. 망해 버린단 말입니다.
오늘날 공산주의도 결과적인 것을 해명하지 못하고 원인적인 것을 해명하지 못합니다. 민주주의도 원인과 결과를 해명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누가 이것을 해명할 것이냐? 여기에 등장해야 할 것이 종교입니다. 어떠한 종교가 나와서 ‘너희는 어떤 동기로부터 시작하여 어떠한 결과를 향하여 나아가는 과정에 있다.’고 주장하고, 그것을 대다수가 공인할 수 있는 해명 기준으로 세워야 합니다. 그 해명 기준은 인본주의가 아니라 신본주의로 끝나야 합니다.
보십시오. 1차대전까지는 국가를 중심삼은 투쟁인 동시에 경제적인, 즉 세계 시장화를 위한 투쟁이었습니다. 외적인 환경, 즉 땅을 빼앗기 위한 싸움이었습니다. 그러다 2차대전에 들어와서는 사람을 빼앗기 위한 싸움을 했습니다.
그러면 땅을 빼앗고 사람을 빼앗은 후에는 무엇을 빼앗을 것인가? 사람이면 다 사람입니까? 사람이라고 다 사람은 아닙니다. 올바른 양심을 가져야만 사람입니다. 그러면 올바른 양심의 기준은 무엇이냐? 역사를 밟고 올라설 수 있고, 시대를 밟고 올라설 수 있으며, 미래의 목표를 지향시켜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떠한 주의가 무엇을 주장하여 주위의 수많은 사람을 포섭하였다 할지라도 마음으로 행복을 느끼고, 그 가치가 천상에 드러난다고 느낄 수 있는 사람을 못 만들어 놓는 한 지나가고 맙니다.
사람을 빼앗고, 사람을 포섭하는 시대 후에는 어떤 시대가 오느냐? 개개인의 마음을 포섭하는 시대가 옵니다. 그 시대가 마음주의시대입니다. 선을 대하는 방향에 있어서 사람의 마음은 천년 전이나 만년 전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마음을 중심삼고 움직이는 것이 달라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옳다고 할진대는 너도 나도 그곳을 향해 마음이 달음질쳐 가야 되는 것입니다. 달음질치는 데는 하루쯤 달려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 끊어져도 달려가야 합니다. 그러기에 마음을 포섭하는 동시에 마음이 영원을 향하여 출발할 수 있는 충격을 일으키는 주의가 아니면 안 되는 것입니다.
마음은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번 발동하면 생명의 고개를 넘고 그 시대의 모든 것도 다 넘어 어떤 결말에 도달할 때까지 끝까지 달음질치겠다는 신념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런 움직임을 일으킬 수 있는 주의가 나와야 됩니다. 나아가서 그런 마음을 더 크게 하려면 심정이 필요합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 자식이 부모를 위하는 마음은 제아무리 위대한 사람도 막을 수 없습니다. 어떠한 세력가, 어떠한 권력가도 막을 수 없고, 제재할 수 없고, 변경시킬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절대적인 자연원칙에 의하여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천 사람, 만 사람의 마음은 평면적이지만, 이 마음 안에 하나님도 좋다고 들어오실 수 있고, 인류도 좋다고 뛰어들어올 수 있고, 하늘땅의 온 만물도 좋다고 뛰어들어올 수 있는 심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 마음으로 간절히 사랑하는 그 사랑의 본의는 내 자식만을 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마음은 천심과 통해 있기 때문에 그런 마음을 지닌 사람은 하나님이 보시는 것처럼 인류 전체가 형제요 자녀로 보입니다. 그 심정을 통한 자리에서는 만민이 형제요, 만민이 내 지체인 것입니다.
이런 느낌을 가지고 만민을 결속시킬 수 있는 불변의 동력이 우리의 이념과 더불어 하나의 존재를 중심삼고 이 땅 위에 불변의 터전으로 세워지지 않는 한 세상일은 해결이 안 됩니다. 이것을 결정적으로 해결지어 완전한 불변의 발판으로 설 자가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신부입니다. 오실 주님을 모실 신부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시간 시간 변하는 것들을 신부로 맞겠습니까? 안 맞습니다. 절대로 안 맞을 거예요.
내게서 물질을 빼앗아 가고, 몸뚱이를 빼앗아 가고, 마음을 빼앗아가도 나의 이 사랑만은 어떠한 것에 의해서도 동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요 이 심정만은 하나님의 것이요 땅의 것이요 인류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자가 이 땅 위에 나타나야 됩니다. 그러면 그로 말미암아 세상만사가 다 풀릴 것입니다. 원칙이 그렇게 되어 있어요.
공산주의자들이 말하는 의식혁명이 문제가 아닙니다. 의식혁명은 문제가 아니에요. 그것을 넘어서 앞으로 종교가 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오늘날 종교가 세계를 위해서 한 일이 무엇입니까? 물론 약간은 있겠지만 진정 하늘이 세운 종교로서의 사명은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 다 지나가고 지쳐 버린 그 때에, 다시 한번 마음을 수습해서 천륜을 향한 대행군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 때를 바라보며 준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신자들도 신천 신지의 이념을 품고 그때를 소망으로 바라보며 나오고 있습니다.
여러분, ‘욥’ 같은 사람을 보세요. 자기의 재산, 자기의 자녀, 자기의 모든 것 다 빼앗아 가도 하나님을 향한 마음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자기에게 있는 물질을 다 빼앗아 가고, 사랑하는 자녀를 빼앗아 가고, 그에 속한 일체의 모든 것을 다 빼앗아 가도 까딱하지 않았습니다. 그와 같이 우리도 어떠한 환경의 공포에도 하나님을 위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나의 마음을 굴복당할 수 없다고 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러한 불변의 한 터전을 찾기 위하여 인간도 복귀노정을 헤매어 나오고 있고, 하나님도 복귀노정에 있는 인간들을 붙들고 그 터전을 개척해 나오고 있습니다.
인간은 지금까지 땅을 빼앗는 싸움, 사람을 빼앗는 싸움을 해 왔습니다. 유물론은 사람의 몸뚱이를 끌어가려는 이론입니다. 거기에는 마음과 영원한 이념과 천륜의 대목적과 더불어 동행할 수 있는 심적인 이념이 없습니다. 그런 이념을 세우는 것이 종교의 사명입니다. 그런 이념을 확대시켜 우리가 세계적으로 혹은 하늘땅을 대신하여 나타날 수 있는 한 때, 한 시대, 혹은 한 세기를 바라며 하나님은 지금까지 역사해 오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자신들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은 밥을 먹고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자신의 생활을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입증할 수 있습니까? 아들딸을 대해 네가 내 아들딸이 되려면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하면서 자신의 생활을 입증할 수 있습니까? 혹은 어떤 지도자로서 따르는 사람들을 향해 너희는 이렇게 해야만 된다고 하면서 자신의 생활을 입증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저 말로만 이러이러하게 살아야 한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 지도자는 필요 없습니다. ‘이렇게 살아야 돼. 이것이 결과인 동시에 근본이다. 인간은 어차피 그 자리를 통과해야 된다.’ 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렇게 되면 새로운 이념도 필요 없습니다. 과정적인 현상에서 그것을 해결하기 위하여 뒤넘이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살고 있는 생활을 재감정하고 재분석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아침에 밥을 먹고 직장에 나갈 때에 한 발을 내놓고 ‘이놈의 발아, 너는 천륜의 대이념세계와 더불어 보조를 같이할 수 있는 생활환경을 향하고 있느냐?’ 하고 물어 보면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을 것입니다. 처량한 인간입니다. 뭐 잘났다고 꺼떡거리고 나불대도 처량한 인간이에요. 생활이 그러하니 사회가 그러하고, 사회가 그러하니 국가가 그러하고, 국가가 그러하니 현실세계를 믿을 수 없습니다. 마음을 둘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 마찬가지입니다. 바람이 동에서 불면 서쪽으로, 남에서 불면 북쪽으로 밀려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리 덤벙 저리 덤벙 합니다. 행동 일체를 천륜 앞에 세울 수 없는 무가치한 존재들입니다. 이렇게 나가다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이뇨? 결국에는 깨져서 하나님의 서러움과 인류의 서러움으로 종결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하겠습니까?
‘불변의 발판이여, 참의 발판이여 나타날지어다! 참의 터전이여, 내 마음 문을 개방하고 내 몸과 생활문을 개방하여 나를 찾아 줄지어다!’ 세계적인 공포와 위협에 휩쓸리는 절박한 이 시대에 있어서 참된 양심을 가지고 외칠 것이 있다 할진대 이것밖에 없습니다. ‘참다운 발판이여, 이 민족 앞에 나타날지어다! 참다운 터전이여, 이 민족 앞에 개방될지어다.’ 하게 될 때 여기에는 모든 것이 다 들어오는 것입니다. 참다운 국토요, 참다운 주권이요, 참다운 백성이요, 참다운 기관이요, 참다운 개인이요, 참다운 문화가 됩니다. 허수아비처럼 춤을 추고 있는 현실의 자아를 무자비하게 비판하여 뛰어넘을 수 있어야 합니다. 누가 이렇게 하도록 해줄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충격을 일으킬 수 있는 하나의 움직임이 있어야 됩니다. 목적을 이루지도 못하고 동기도 잃어버린 현실을 넘어야겠다는 충격을 일으킬 사람이 나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핍박받는 무리들이여, 낙망하지 말지어다. 쫓김받는 무리들이여, 절망하지 말지어다. 몰리고 쫓김받는 무리를 통하여 역사는 혁명되어 나왔으니, 과거의 우리 선조들이 걸어나온 빛나는 역사의 터전 위에 서 있는 사람이라 할진대 낙망하지 말지어다. 과거를 지나 현실을 넘어 내일과 인연맺을 수 있는 그 무엇을 가졌다 할진대 힘있게 싸울지어다.’ 하고 외치면서 참고 연단하여, 끝날 세계적으로 몰리고 쫓기는 현상이 벌어질 때에 역사의 전기를 마련하는 동기나 결과는 되지 못할지언정 망하는 인류로 하여금 일어서서 넘어가게 하거나 돌아서게 하는 무리라도 되어야 합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좁은 문을 찾아왔습니다. 사방으로부터 맞고 비판받는 통일교회를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무엇을 기대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사명은 이러한 역사적인 전환기에 있어서 원인이 되든가 결과가 되든가 둘 중의 하나는 되어야 합니다. 그러지 못한다면 원인을 향한 행군나팔이나 결과를 향한 행군나팔이라도 불 수 있는 사도들이 되어야 됩니다. 이 중 하나의 사명이라도 담당할 수 있는 종교, 기관, 민족, 주권이 있다 할진대 이는 절대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목적 없이 창조하셨겠어요? 반드시 창조목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창조목적이란 개체 혼자만 즐기는 것이 아닙니다. 개인이 즐거워하는 동시에 개인이 전체의 가치를 노래하여 전체가 그 노래를 듣고 즐거워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야 되는 것입니다. 전체는 하나를 빛내기 위한 것이요, 하나는 전체를 빛내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이런 관점에서 어떠한 주의, 사상을 가지고 지배하고 있는 선진국가들이 전체적인 위치에 서 있는 것은 지극히 작은 국가들을 돕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이러한 책임을 하지 못하면 망합니다. 앞으로 미국 같은 나라는 자기들의 보따리를 전부 풀어 저 미개한 민족과 더불어 생활하고 더불어 즐거워하고 같이 울 수 있어야 됩니다. 너희들의 행복은 우리들의 행복이요, 너희들의 고충은 우리들의 고충이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옆에서 침질을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공산주의가 나왔습니다. 안 나오면 안 되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이 계신다면 방편 상으로도 나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견지에서 이 말씀은 이 시대에 지극히 적절한 말씀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길거리에서 물결같이 휩쓸려 다니는 청년 남녀들, 혹은 배운다는 사람들, 그들의 가슴을 한번 헤쳐 보십시오, 무엇이 있는지. 무엇이 남아 있는지 보란 말입니다. 이들이 나라를 살리고 세계를 살리지 못합니다. 안 됩니다.
그러기에 나는 종교인을 대하여 외치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원인인 동시에 결과입니다. 그의 가치를 어느 정도까지 압니까? 그 가치를 중심삼은 내 생활, 그 가치를 중심삼은 내 몸, 그 가치를 중심삼은 내 마음, 그 가치를 중심삼은 내 심정이 되어 있느냐? 여러분은 그 가치를 어느 정도 나타내고 있습니까? 아무것도 나타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의 교회에서만 하나님이 움직인다고 말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생활 속에 들어가 종이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 교회의 하나님이다, 어느 교파는 이단이다, 하는 따위의 시시한 이야기는 그만두라는 거예요.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 오래 가나 두고 보란 말입니다.
사람들은 앞으로만 나갈 줄 알지 뒤에 따라오는 사람이 있는 줄은 모릅니다. 만일 앞서 가는 사람이 계속 나아가지 못하면 뒤에 따라오는 사람이 그 앞 사람을 밟고 넘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는 행군해야 할 운명의 노정에서 처참한 모습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주관적인 관념으로 하나님이 친히 경영하신다고 생각하지 말란 말입니다.
여러분, 지금 이 통일교회는 한 교파로 나와 가지고 갖은 핍박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도 좋습니다. 그렇지만 일개인의 어떠한 주관적인 관념대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생각은 하나님이 뜻하시는 동기와도 멀고 목적과도 먼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제 동기와 목적을 중심삼고 가자고 외칠 수 있는 무엇이 나온다면 그것이 마지막입니다. 마지막 곳입니다. 동기와 목적을 갖고 세계를 넘어 가지고 외칠 수 있는 움직임이 나온다면 그것을 통하여 세계는 수습될 것입니다. 틀림없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바라는 기준이요, 복귀노정에서 맺힌 한을 푸는 것입니다.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면서 어차피 풀어 놓아야 할 인류의 운명이라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됩니다. 타락한 인간을 복귀하는 데 있어서도 동기는 하나님입니다. 목적도 역시 하나님에게 귀결됩니다. 그러면 과정을 이끌어가는 것은 누구냐? 사람입니다. 역사에 기록된 사건이 아니라 사람이에요.
원인과 목적을 전부 붙들 수 있는 존재는 무엇이뇨? 인류역사도 아니요 사회적인 제도도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역사는 원인과 동기를 통할 수 있는 사람을 해명하고 입증하여 그 자리를 잡게 하기 위한 피어린 행로입니다. 이렇게 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 마음대로 역사를 몰고 변경시킬 수 있느냐? 천만에요. 왜? 여러분은 자신의 동기를 돌릴 수 없고 결과적인 현상을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자신의 동기를 스스로 찾을 수 있는 힘이 있어요? 그렇다면 여러분이 창조주입니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우러나오는 마음의 동기를 시간을 초월하여 자유자재로 돌이킬 수 있느냐 하면 없습니다. 자기 마음을 마음대로 못합니다. 여러분은 동기가 아닙니다. 또 여러분들은 어떠한 결과적인 현상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어요? 피할 수 있어요? 그렇게 안 되었으면 좋겠다고 해서 그것을 피할 수 있느냐 말입니다. 그러기에 큰소리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동기와 결과를 돌이킬 수 없는 인간입니다. 낙인이 찍힌 타락한 종족밖에 안 됩니다. 아무리 큰소리 해보았자 아무것도 아닙니다. 여기에 필요한 것은 동기의 주체요, 결과의 주체입니다. 동기와 결과는 서로 주고받아야 됩니다.
내가 하나의 중심이 되어 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그 마음을 받아들이고, 또 나의 마음을 만물 앞에 돌릴 수 있는 자리에 서야 됩니다. 그러면 동기와 결과에 대한 문제는 다 해결됩니다.
마음은 동기적인 하나님과 왕래하고, 몸은 결과적인 세계와 왕래하면 나중에는 오른손에 동기의 하나님, 왼손에 결과의 하나님을 모시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이 피조세계를 지으신 뜻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왈 주체와 대상의 관계입니다.
여러분들은 결코 하나님을 중심삼은 동기적인 주체와 결과적인 환경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인간을 중심삼고 결과적인 환경과 동기를 결속하자는 것입니다. 무엇을 갖고? 인륜도덕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부자의 인연, 식구의 인연, 즉 가정적인 인연을 가지고 결속하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최후의 발판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여러분이 가정에 돌아가면 자녀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 자녀들을 여러분의 영원한 발판으로 삼을 수 있습니까? 없을 것입니다. 위로는 부모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부모 또한 영원불변의 발판이 못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활이 그렇고, 사회가 그렇고, 인류가 그렇습니다. 그러나 어차피 이러한 환경을 청산하여 새것으로 대치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최후의 목적은 무엇이냐? 사랑으로 아들딸을 세워서 종족을 만들고, 민족을 만들고, 백성을 만들어서 무엇을 할 것이뇨? 하나님께서 천지의 주체가 되시고 당신의 아들딸로 하여금 종족, 민족, 백성, 그리고 하늘과 땅과 온 피조세계를 주관할 수 있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즉 사랑하는 아들딸로 하여금 참의 재료, 참의 발판이 되도록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러한 목적이 있다 할진대는 그러한 세계를 향하여 나갈 것임에 틀림 없거늘, 이런 하나님을 놓고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는 어떻게 믿어야 되겠느뇨? 하나님 믿고 천당 가겠다고 하는 신앙은 그만두십시오. 개인을 주장하는 자는 친구를 잃어버립니다. 그렇습니다. 가정제일주의로 나가는 사람은 씨족을 잃어버립니다. 종족을 잃어버려요. 민족을 위주해 나가다가는 국가를 잃어버립니다. 국가를 위주해 나가다가는 세계를 잃어버립니다. 세계를 위주해 나가다가는 하늘땅을 잃어버립니다. 하늘땅을 위주해 나가다가는 하나님을 잃어버립니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를 밟고서 가정을 붙들고, 가정을 밟고서 사회를 붙들고, 사회를 밟고서 국가를 붙들고, 국가를 밟고서 세계를 붙들고, 세계를 밟고서 하나님을 붙들어야 됩니다. 이것이 천륜이 움직여 나오는 공식입니다.
내가 믿고 천당 가겠다는 신앙이 아니라, 내가 믿어서 가정을 구원시키겠다는 신앙을 해야 되겠습니다. 내가 믿어서 민족을 구원하고 세계를 구원하고 하나님을 해방시키겠다는 신앙, 이것이 정통적인 신앙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반대를 받는 한이 있더라도 이 일을 위하여 나는 싸울 것입니다.
통일신도 여러분, 우리들은 알았습니다. 우리들이 가야 할 곳을 알았습니다. 천국은 개인으로부터 출발하여 세계의 끝을 지나야만 가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한 것도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에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죽었다가 부활한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나 혼자 천당 가겠다는 신앙을 하다 보니, 전부 내 것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교회도 잡아먹고, 모든 것을 다 내 것으로 삼켜 버리려고 합니다. 이것이 사탄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신앙노정을 개척하는 데 있어서 모든 사람을 위한 재료가 되는 위치를 떠나, 나 하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전체를 배반한다면 그는 사탄입니다. 6천년 복귀섭리 역사노정에서 천륜의 대역사를 위한 재료로 쓰여야 할 인간이 이 재료를 내 것으로만 삼으려 했던 것, 이것이 사탄의 본질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신앙관념을 타파해야 되겠습니다. 현실세계에 이러한 신앙사조가 흐르고 있거늘, 이것을 깨뜨려 버려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목표 아래 나가는 것이 통일신도입니다. 일요일 아침 9시만 되면 사방에서 교회 종소리가 울립니다. 들려오는 그 종소리는 처량합니다. 그들의 목표는 개인의 구원입니다. 그러나 예수의 목표는 개인의 구원이 아니라 세계의 구원입니다. 믿는 식구를 붙들고 사랑할 줄 모르고, 믿는 형제를 붙들고 사랑할 줄 모르면 망하는 것입니다. 신앙적인 본질이 틀렸으니 혁신해야 됩니다. 이것은 여기에서 말하는 사람의 주장이 아닙니다. 천도가 그래요. 천륜이 그렇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보십시오. 일개 국가의 충신 중에 사랑하는 처자가 가는 길을 막는다고 해서 ‘그래, 네 말이 옳다’ 하고 발걸음을 멈춘 사람 있어요? 그들을 밟아 치우고 갔습니다. 그래도 정 말을 듣지 않으면 칼로 그들의 목을 치고 나라를 위해 나갔던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선이 향하는 목표는 나 하나를 발판으로 하여 둘로 연결짓고, 이 둘을 발판으로 하여 넷으로 연결지어 세계적으로 퍼지게 하는 것입니다. 전세계까지 퍼진 다음에는 어디로 돌아가느냐? 몸뚱이가 아니라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마음의 하나님은 무형의 하나님이시고, 몸의 하나님은 앞으로 오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의 근본목적은 잃어버린 하나님을 찾는 놀음이요, 잃어버린 주인을 찾는 놀음입니다. 자기를 찾는 놀음이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 자기를 찾으려고 헤매던 모든 유대교인과 바리새교인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대했습니까? 결국 예수님을 잡아죽이지 않았습니까? 자기를 찾으려 하다가는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단 말입니다. 절대로 하나님은 일개 교회만을 위해서 계신 것이 아닙니다. 그래야 될 거 아녜요? 자기만 위주한 신앙은 눈먼 신앙입니다.
결과와 동기의 환경을 뚫고 넘어가야 할 시대가 종말시대입니다. 이 종말시대에 세계적인 사조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세계는 지금 민주와 공산의 두 사조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둘은 하나에 제일 가깝습니다. 둘이 합하여 들어가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유엔기구를 보십시오. 그렇게 되나 안 되나. 하나의 세계는 필시 와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께서 목적을 중심 삼고 이 세계를 창조하셨고, 그 목적 밑에서 타락한 인간을 복귀하여 나오신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님이 계신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는 민족주의시대도 지나갔습니다. 세계의 어떠한 사조와 주의를 중심삼고 부르짖는 시대도 지나갔습니다. 주의가 남아 있다 할진대, 만민의 양심을 공통으로 영원한 하나님의 심정과 접속시킬 수 있는 심정주의밖에 안 남아 있습니다. 만일에 이 심정주의가 우리 인간에게 스며든다면 역사적인 모든 것을 일시에 혁명하는 것은 문제없습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 못하겠지요?
하나님의 심정과 백 퍼센트 인연되어 ‘당신은 나의 아버지요, 나는 당신의 아들’이라고 할 수 있는 불변의 발판 위에 선 사람에게는 세상의 정이니 뭐니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일시에 그림자도 없이 백 퍼센트 혁명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이 땅 위의 인간들 가슴에 부딪쳐 와야만 근본적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 땅 위의 인간을 대하여 구원섭리를 하신다 할진 대 어떻게 하실 것이뇨? 좋은 환경을 만들어서 잘 먹고 잘 살게 하실 것이냐? 물론 그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몸을 편안하게 한다고 해서 마음이 편할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번 붙들면 영원히 계속할 수 있는 심정의 세계와 결속해야 됩니다. 이 심정의 세계는 한번 사랑하면 끝이 없습니다. 붙들어도 붙들어도 영원토록 붙들고 싶은 세계입니다.
인간의 최고의 이념은 이상(理想)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이상은 사랑의 요소를 떠나서는 완결지을 수 없습니다. 논리나 어떠한 조직적인 형태로는 불가능 합니다. 심적 기반을 움직이고 심정적인 기반 위에서 안식시킬 도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상은 인정을 초월한 천정적인 내용을 내포하고 있어서 이 땅 위의 만민을 일시에 움직여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상의 새로운 문이 개방된다 할진대 세계의 구원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빨강인가 노랑인가만 구별시켜 주면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간단합니다. 어떤 것이 선이고, 어떤 것이 악이란 것만 가르쳐 주면 문제는 간단하게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복잡다단한 세계가 아닙니다. 그렇잖아요?
심정의 세계는 설명을 초월하고 견해를 초월합니다. 사랑한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합니까? 거기에는 무슨 관이 없습니다. 관이라는 것은 상대적인 조건이 있을 때, 즉 원인과 결과가 상대적인 위치에 있을 때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심정세계에서의 원인이 되는 주체는 영원한 주체요, 결과가 되는 대상은 영원한 대상으로서 둘인 동시에 하나이니 관이 있을 수 없지요. 심정을 통해서는 하나님과 인간이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그런 심정의 세계가 이 땅 위에 벌어지는 날에는 천지가 되살아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상적인 창조주요, 인간을 대해서 만우주와 결탁한 영원불변의 발판을 만들고자 하신 창조목적이 있다 할진대, 그것은 무엇을 중심삼은 목적일 것이뇨? 심정입니다. 보고 또 보고 영원히 봐도 좋은, 싫다는 말을 생각할 수도 없는, 눈 하나를 보고도 영원히 좋아할 수 있는 그 무엇을 갖고 인간을 지었어야 멋진 하나님 아닙니까? 이러한 심정으로 충만된 세계가 천국입니다. 여러분은 천국이 어떠한 곳인지 알아요? 하나의 존재를 대하여 천년을 감상해도 다 감상할 수 없는 곳입니다.
만일 인간이 타락하지 않고 본연의 동산에서 본연의 주인을 맞이하여 본연의 심정을 통하고 천정과 인정으로 결속하였더라면 세계가 이 꼴이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합니까? 타락한 인간 세상에서도 사랑 때문에 죽고 살고 야단인데 하나님의 사랑과 인연맺으면 어떻겠습니까? 죽고 사는 게 문제가 아닙니다. 이런 원칙과 기준을 잃어버린 인류는 허덕이게 되고 통곡하게 되며 방황하고 유린당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망하면 하늘 원망, 땅 원망, 역사 원망, 시대 원망…. 만사를 원망으로 시작하여 원망으로 끝맺게 됩니다.
그러나 목적을 가진 천륜이 남아 있고 우리가 모르는 깊은 심정의 기반 위에 천도를 세워 나가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안심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접촉할 수 있는 그 면이 동에 있느냐 서에 있느냐, 남에 있느냐 북에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환경적인 차이, 혹은 거리가 멀어서 지금 당장은 접할 수 없지만 세계적인 끝날에는 만민이 공동으로 찬양할 수 있고 공동으로 접할 수 있는 한 때가 올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래야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전부 불심판으로 죽여 버린다고요? 죽여 버리려면 벌써 죽였을 것입니다. 아담 해와 둘만 있을 때 죽여 버렸으면 오죽 좋습니까?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시대적인 각성을 하고 미래적인 소망을 품고 각성을 해야 합니다. 오늘날 세상을 가만히 보면 철학도 종교도 예술도 과학도 다 끝까지 왔습니다. 이제 인류 앞에 최후의 혁명이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어떠한 혁명일 것인고? 하나님을 중심삼은 인간의 양심혁명, 심정 혁명입니다. 이것을 제시할 수 있는 천지운세가 반드시 와야 되는 것입니다. 이 때에 행차하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영계에 있는 천사장을 시키고, 아들을 시키고, 성신을 시켜서 역사해 나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심정을 접속시키는 역사가 아니었습니다. 구약시대에 천사를 시켜서 역사하셨고, 신약시대는 아들을 세워서 역사하셨습니다. 따라서 구약시대는 천적으로 볼 때에 백성을 수습하기 위한 시대요, 신약시대는 자녀를 수습하기 위한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신약시대에 낙원이라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끝날에는 새로운 것을 통하여 구약과 신약,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심정적으로 접붙일 수 있는 한 때가 나와야 합니다. 이 때에 주님이 오십니다. 여러분, 이걸 알아야 됩니다. 주님은 신랑으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로 오십니다. 마태복음 16장 27절에도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오신다고 했지 않습니까?
천사장의 심정을 가르쳐 주고 천사장의 마음 바탕도 가르쳐 주고, 아들의 심정도 가르쳐 주고 아들의 마음 바탕도 가르쳐 주었으니, 이제는 아버지의 심정을 접붙여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영원한 세계와 관계를 맺지 못한 타락한 인간들 앞에, 불을 내려 심판해야 마땅한 무리들 앞에 진정한 당신의 종들을 보내시어 그 종의 심정을 본받게 함으로써 종의 신분이 되게 하시고, 아들을 보내시어 아들의 심정을 통하게 함으로써 아들의 신분이 되게 하셨으니, 이제 남은 것은 아버지와 아들을 연결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는 때가 말세입니다. ‘내 아버지’ 할 수 있고 ‘오! 내 아들아’ 할 수 있는 날이 오면 세계는 완결됩니다.
영원한 동기가 하나님이요, 영원한 결과는 아들이요, 영원한 과정적인 인연은 피조만물이거늘, 아버지와 아들딸이 사랑으로 붙안는 그 시간에 천지도 안기지 않겠습니까? 원인도 나로 인하여 해결되고, 결과도 나로 인하여 해결되고, 과정도 나로 인하여 해결되면 과정의 투쟁역사 속에서 세계적인 이념을 찾아 나오던 이 세계도 내 품에 안길 것이고, 만사는 해결될 것입니다. 이럴 수 있는 발판이 나타나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만군의 여호와요, 만왕의 대주재자로서 하나님의 독생자, 하늘의 황태자를 세워 만우주에 사랑하는 혈족을 만들고 만민을 백성으로 삼아 만국통치의 주권을 행사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중세 봉건사회에서는 기독교가 성했습니다. 그런 기독교를 세운 것은 기독교 일파만 위한 것이 아닙니다. 세계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국가를 넘고 세계를 넘어가야 할 기독교 이념인데도 불구하고 이러한 이념을 저버림으로써 중세 봉건사회는 망해 버렸습니다. 그리하여 군주사회로 넘어갔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의 사람들도 하나님을 외면하고 자기들 멋대로 했습니다. 그래서 민주사회로 넘어왔습니다.
여기에서는 하나님과 백성이 부자의 관계입니다. 여기에는 세상의 무엇도 필요 없습니다. 세상의 무슨 주권자, 무슨 교회라는 것이 필요 없어요. 아버지와 내가 직접 관계됩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대통령이니 무엇이니 하는 것은 모두 넘어갑니다. 왜냐하면 만민에게 아버지의 심정을 연결시키기 위해서 깨뜨려 나오기 때문입니다. 사탄 편의 주권을 깨뜨려서 봉건사회에 기독교의 주권을 세웠고, 다음에는 군주사회를 세웠고, 이것을 또 깨뜨려서 민주사회를 세웠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딸들이 주권을 잡아 ‘아버지!’ 할 수 있는 한날이 와야 합니다.
지금까지 도의 길을 간 사람들은 무참히도 짓밟혔습니다.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하고, 코가 있어도 냄새를 맡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발이 있어도 마음대로 걸음을 옮기지 못한 불쌍한 무리가 도의 길을 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참아야 됩니다. 악한 세계의 주권을 다 때려부수고 가르고 또 갈라서 만민이 평등하고, 대주권자와도 ‘너자 나요, 나자 너다.’ 할 수 있는 위치에서 하나님이 군림하셔야 됩니다. 얼마나 근사합니까?
인간이 모르는 가운데 역사는 흘러나왔으나 하나님은 그 배후에서 선지 선열들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하면서까지 종말의 이념을 세우시고, 여기에 결사의 자유와 신앙의 자유 등 모든 자유와 권한을 부여하여 구속이 없는 입장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실 수 있는 운세를 만들어 나오셨습니다.
민주주의를 무엇 때문에 만들었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인간을 아들로 품기 위한 크나큰 사랑 때문에 만들었습니다. 옛날의 주권자들은 종으로 품었고, 혹은 심부름 시키는 백성으로 품었지만 그것은 다 거짓 것이기에 하늘은 참된 종을 보내시어 악한 원수의 품에 있는 인간들을, 하나님을 배반하고 저주하는 무리를 품게 하셨고, 그것으로 끝내지 않고 다시 아들을 보내셔서 죽으면서라도 인간을 품게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이 세상을 무너뜨려 온 것입니다. 종을 보내서 품게 하실 때에는 사탄세계의 종 된 입장의 모든 주권자들을 물러가게 하고, 아들을 보내어 품게 하실 때에는 사탄세계, 악한 세계의 아들적인 모든 주권자들을 물러가게 하셨습니다. 이제는 아버지적인 주권시대를 향하여 몰아내고 있습니다. 이는 종족과 혈족을 초월하여 같은 양심과 같은 심정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에는 어떠한 제도도 개재되지 않습니다. 어떠한 형식도 초월합니다.
사랑의 법도, 이것은 천륜을 벗어나려야 벗어날 수 없는 법도입니다. 만일에 벗어난다면 공포가 스며들어 파괴되어 버립니다. 오늘의 죄악된 세상에서는 죄를 지어도 그 보응이 역사성을 두고 오지만 앞으로 심정세계에서는 어떠한 잘못을 하면 시간성을 초월하여 그 보응이 즉각적으로 옵니다. 그러니 그 세계에서는 죄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세계가 되어야 합니다. 그 세계가 이상세계입니다. 그런 세계에서 내 피 살과 세포까지 통합한 심정의 기반 위에서 아버지와 아들딸이 상봉할 수 있는 날이 와야 되겠습니다. 그런 날이 온다 할진대 타락한 인간들에게는 그 이상 복된 일이 없을 것입니다.
참부모를 찾고, 참주인을 찾고, 참백성을 찾고, 참국토를 찾아 하늘에 있는 모든 영인들과 지금까지 죽어간 모든 선조들과 앞으로 수천만대 후손들까지 전부가 하늘 백성으로서 아버지를 높이고, 아버지의 사랑의 세계, 사랑의 가치, 사랑의 윤리, 사랑의 법도 등 사랑의 모든 조건을 노래할 수 있는 세계가 바로 이상세계입니다. 이것은 여기서 말하는 사람의 말이 아닙니다. 사실입니다.
오늘 여기서 말하는 이 사람은 여러분이 알다시피 사회에서 온갖 모략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좋습니다. 여기 있는 이 사람은 수십년의 생애를 이것을 위해 달음질쳤습니다. 내 생명이 끊어지면 끊어진 그 터전 위에서 다시 이 봉화를 들고 달릴 자가 있으리라고 나는 자신합니다. 죽었다고 해서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넘어서서 달릴 무리가 있을 것입니다. 하늘은 그것을 바라고 계십니다.
예수가 이슬같이 쓰러져 사라질 줄 알았으나 하나님께서 부활의 역사를 행하시니 도망갔던 제자들도 이 부활의 역사를 이었습니다. 원한스러운 죽음을 발판 삼아 세계를 향하여 행군할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에게는 신념이 있습니다. 우리의 이 철두철미한 신념을 누가 빼앗을 수 있겠습니까? 어떠한 정성으로도, 어떠한 수단 방법으로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만일 빼앗길 가능성이 있다면 이런 놀음 안 합니다. 어느 누가 욕먹기를 좋아하고, 어느 누가 억울한 자리에 있기를 좋아하겠습니까? 그런 자리에서 정신이 바로 박힌 사람이라면 멱살을 잡고 달려들 것입니다. 무엇이 모자라서 이런 놀음을 하느냐 말입니다.
그러나 참고 또 참아왔습니다. 이 참음은 내 참음이 아니요, 아버지의 참음입니다. 아버지께서 이렇게 걸어오셨습니다. 인류의 불변의 터전을 닦기 위하여 아버지는 눈물의 골짜기를 걸어오셨습니다. 그러니 내 어이 그 길을 즐거이 가지 않으리요. 또 아버지께서는 이 터전을 닦기 위하여 땀 흘리는 길을 걸어오셨습니다. 한 날도 아니요, 7, 80년도 아닌 6천년이란 기나긴 세월 동안, 한 사람도 아닌 많은 선조들을 죽이고 눈물을 흘리며 나오셨습니다. 그래도 안 되니 나중에는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시어 그 아들을 죽이셨습니다.
그 죽음은 예수 일신의 죽음이 아닙니다. 이 죽음은 그때까지 죽음의 길을 간 수많은 사람에 대한 보응이요, 승리의 열매였습니다. 그리하여 인류 앞에 생명의 문을 개방하신 것입니다. 예수도 이렇게 오셨다가 가셨거늘, 오늘날 우리들이야 천만번 당해도 아무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매장됨으로써 민족이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한 몸이 밟혀서 민족이 살 수 있다면 얼마든지 밟히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밟힘으로써 끝나는 것이 아니요, 밟힘으로써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는 천성문을 향하여, 본향을 향하여 두 주먹을 불끈쥐고 하늘 앞에 맹세하고 나서는 무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일편단심, 편편이 움직이는 세포 하나도, 뻗어 흐르는 혈관도, 말없이 움직이는 신경도, 우리의 의식적인 모든 것이 하늘 앞에 맹세한 것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먹는 것도 그 일 때문이고, 듣는 것도 그 일 때문이고, 보는 것도 그 일 때문이고, 말하는 것도 그 일 때문이어야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역사 노정에서 사람을 보고 싶어 하셨으나 볼 사람이 없었고, 말하고 싶었으나 할 사람이 없었고, 대하고 싶었으나 대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대신 민족 앞에 말해 줄 수 있고, 하나님 대신 대해 줄 수 있고, 하나님 대신 보여줄 수 있다 할진대 우리 개체가 쓰러지고 망하는 자리에 들어가고, 사라지는 자리에 처한다 해도 절대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런 길을 걸어오신 아버지인 것을 아는 우리들이라 할진대, 자녀의 명분을 찾아 책임을 다하겠다는 각오와 결심을 해야 되겠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하루를 예시할 줄 아는 여러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일어서서 발걸음을 내디딜 때는 ‘내 마음속에 사탄이 우거(寓居)할 수 있는 불평불만의 요소를 모두 제거시키시옵고, 기쁨의 웃음과 더불어 오늘을 힘 있게 살게 하시옵소서.’ 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무리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이렇게 험하고 불쌍한 천지에, 소망을 둘 수 없는 이 땅 위에 한 무리에게라도 소망을 남겨야 할 하나님의 심정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가진 것이 없습니다.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불쌍한 민족입니다. 후진국 중의 후진국으로 선진국의 원조를 받아야 할 입장입니다. 그러나 외적으로 원조를 받기보다도 내적으로 하나님의 원조를 받을 수 있는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외적인 원조는 받고 내적인 하늘의 원조를 배척해서는 안 됩니다. 불쌍한 이 민족을 동정하여 후원해 주는 그 이면에는 하나님의 후원이 있는 것입니다. 이 민족이 그것을 아는 날 세계 만민 앞에 억천만 배의 보답을 하게 될 것입니다.
역사는 그런 것입니다. 사망이 있는 곳에 생명이 잉태됩니다. 파괴와 건설, 부패와 소생은 한 점에 같이 있는 것입니다. 만민이 동정하고 후원해주는 이면에는 하늘의 도움이 있는 것입니다. 알고 보면 그렇습니다. 여러분, 이러한 천적인 의미에서 지상을 대한 섭리적인 운세가 우리를 찾아온 것입니다. 그러나 민족을 찾아온 이 뜻은 교단 앞에 몰리고, 가정 앞에 몰리고 개인 앞에 몰리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낙심하지 맙시다. 틀림 없으니 낙심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옛날의 선지선열들 중 어느 누가 이러한 길을 가지 않은 자가 있었습니까? 우리가 믿는 예수의 생애를 헤아려 보십시오. 4천년 동안 준비해 온 민족을 품기 위하여 오셨던 그 분을 민족이 배반하다니 이게 웬 말이뇨?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여 조성한 유대교단을 품기 위하여 오셨던 예수 앞에 교단이 반기를 들다니 이것이 웬 말이뇨? 국가에 몰리고, 교회에 몰리고, 가정에 몰리고, 형제에게 몰리고, 사랑하는 세 제자한테까지 몰려 나중에는 죽고 말았습니다. 그가 영원히 죽은 줄 알았는데 재출발할 줄이야 누가 꿈엔들 생각했겠습니까? 원컨대 우리 통일교인은 그렇게는 못 한다 할지라도 그러한 입장에라도 나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이상의 것을 맞이할 때가 올 것입니다.
나는 개인이 아닙니다. 내가 죽은 자리에 있을 때에는 영원히 개인이로되, 살아 있는 생명의 주권과 더불어 있을 때는 개인이 아닙니다. 몰리는 자리, 불쌍한 자리에 처하고, 쇠사슬에 묶여 영어의 몸이 되더라도 그 마음의 세계에 있어서는 홀로가 아닙니다. 그것은 역사적인 실증을 통하여, 생활을 통하여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싸움터에서 쓰러져서 발길로 차이더라도 ‘이놈아 내가 있으니 낙망하지 말라.’고 하시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도 그러했고 현재에도 그러하거늘 내일도 그럴 것이라는 심정적인 발판만 잃어버리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가는 길은 외롭지 않을 것입니다.
하늘과 인연맺은 사람이라면 옥중에 가도 무지한 백성들이 먹을 것을 가져다줍니다. 몰리어 처마 밑에서 잠자는 신세가 될지라도 그 부락에 양심적이고 천륜을 따라가는 사람이 있다면 밤잠을 안 자고 찾아 헤맬 것이요, 아침 해가 떠오르기 전에 찾아 줄 것입니다. 이렇게 전후, 좌우, 상하로 하늘과 관계되어 있는 한, 시대적인 핍박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가다가 거꾸러지면 일어나서 또 가고 열 번을 거꾸러져도 또 일어나 가고, 만약에 생명이 다하여 쓰러지게 되면 영적으로라도 가야 합니다. 가야 할 곳을 다 가지 못한 한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도 부활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영원한 소망은 무엇입니까? 역사적으로 물리치지 못한 대원수 사탄부대를 우리가 연마한 칼로 쳐서 쓰러뜨리고 굴복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사탄의 종족이 굴복하는 날까지 행군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눈앞에 바라보이는 곡절과 만상을 보고 낙망할 것이 아니라, 이것을 넘어서 나를 안타까이 보고 싶어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모습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내 슬픔이 문제가 아닙니다. 나는 개인의 생애노정을 가면 그만이지만 역사적인 섭리를 품고 나오시는 아버지께서는 내 생애를 지나 미래까지 허덕이셔야 하고, 내가 가고자 하는 마음보다 몇 백배, 몇 천배 더 간절히 나를 기다리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안다 할진대 그 누가 어떻게 안 가겠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위로해 드립시다. 영원한 발판이 없는 하나님을 우리들이 위로해 드립시다. 심정의 발판이 없어 애를 태우는 예수의 처참한 모습, 겟세마네 동산에서 홀로 찬 이슬을 맞으며 풀뿌리를 부여잡고 호소하며 눈물짓던 초초한 예수의 모습, 누가 예수를 그러한 모습으로 만들었습니까? 온 세계인류가 공히 역사의 심판대 위에 서서 공동적으로 죄의 탕감을 받아야 할 운명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는 소망하였습니다. 그는 믿어 주었습니다. 자기를 못 박고 쫓아내는 그 무리들을 믿고 갔습니다. 배반하는 제자들을 믿고 갔습니다. 그렇게 믿었다는 조건이 있었기에 부활하신 후 다시 찾아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배반한 자, 역적 된 자를 탕감 없이는 다시 세울 수 없는 것입니다. 천륜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어떻게 배반한 제자를 찾아갈 수 있었던고? 빌라도 법정에서도, 최후를 맞는 순간에도 베드로를 믿어 주었습니다. 배반의 자리에서 춤을 추고 있는 베드로를 그렇지 않은 것으로 믿어 주었습니다. 자신이 쓰러지는 한이 있다 할지라도 그렇지 않은 것으로 믿어 주었기 때문에 부활한 후에 제자들을 찾아가도 사탄이 반대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 믿음이 동기가 되어 제자들을 다시 몰아 지상복귀운동의 선봉에서 깃발을 들게 할 수 있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 죽기는 매일반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한스러운 역사적인 원한을 탕감하고 해원해야 할 운명에 있습니다. 죽음의 길을 가더라도 이것을 해결지어야 합니다. 먹어서 안 되거든 굶고라도 가야 되겠고, 입어서 안 되거든 벗고라도 가야 되겠고, 자고서 안 되거든 밤을 새워서라도 가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남의 신세를 지면 안 됩니다. 만일 신세를 졌을진대 내 피와 땀을 흘리고 내 살과 뼈를 깎아서 갚아야 합니다. 그래야 사탄 앞에서 천륜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자녀의 위신을 백 퍼센트 세울 수 있고, 하늘이 바라는 승리적인 발판이 될 수 있습니다. 승리의 발판, 승리의 그 발판을 하나님께서 얼마나 그리워하시는 줄 아십니까? 학교를 바라보면 학교도, 사회를 바라보면 사회도, 교회를 바라보면 교회도, 어떠한 정당, 어떠한 재단, 어떠한 기구를 보아도 승리의 발판은 다 막혀 버렸습니다.
일편단심 한 길을 가야 할 운명에 있는 천국 백성들은 어떻게 그 길을 가야 할 것이뇨? 지혜로 갈 수 없으면 땀과 눈물로, 땀과 눈물로 갈 수 없으면 피로라도 가야 합니다. 우리의 땀을 하나님의 땀으로, 우리의 눈물을 하나님의 눈물로, 우리의 정력을 하나님의 정력으로 바쳐야 합니다. 피는 하나님을 위해, 눈물은 인류를 위해, 땀은 땅을 위해 흘려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땅과 인류가 상봉할 수 없는 원한의 터전을 여지없이 밟아 치워야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내 생활감정이 ‘하나님의 일이자 나의 일이요, 나의 일이자 땅의 일이요, 나의 일이자 인류의 일이다.’ 할 수 있는 자리까지 나아가 나를 중심한 천적 가치를 노래할 수 있어 야 합니다.
지금까지의 역사는 하늘은 하늘대로, 종교는 종교대로, 땅은 땅대로 갈라져 나왔습니다. 하늘을 찾고 보니 인류를 잃어버린 상태였고, 인류를 찾고 보니 하늘과 땅을 잃어버린 상태였습니다. 이제는 천적인 심정을 통하여, 우리의 생활감정을 통하여 그것을 찾는 것이 아버지의 일이요, 땅의 일이요, 인류의 일인 동시에 나의 일이라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시작부터 끝까지 하나로 종결지은 하나의 이념적인 기준, 영광된 승리의 모습을 갖추고 쌍수를 합장하여 ‘잃어버린 것을 찾아 드리오니 받아 주시옵소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아들딸들을 천상에서 상봉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세계 만민이 모인 호화로운 자리에서 만나기를 소망하는 것도 아니요, 행복의 동산에서 만나려는 것도 아닙니다. 피 흘린 터전 위에서, 눈물지을 수밖에 없는 복잡한 환경에서, 싸우는 도장에서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여러분,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영광 중에 아버지를 모시려고 하는 자는 아버지를 못 만납니다. 피눈물을 흘리는 자리에서, 만민이 중심을 잃어 혼란하고 혼돈된 자리에서, 생사가 뒤넘이치는 자리에서 승리의 모습으로서, ‘하늘이여, 땅이여, 인류여, 나의 아버지여’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오냐, 내 아들아, 너는 이제까지 천상에서 바라던 내 아들이다. 만민 앞에 세우고 싶었던 내 아들이다. 천상천하에 자랑할 수 있는 내 아들이다.’ 하는 하나님의 축복의 은사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오늘 말씀드린 참된 발판, 참된 인류의 터전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로 말미암아 하늘과 땅과 인류의 행복의 기점이 이 땅 위에 나타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일은 누군가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눈물이 앞을 가리어 걸음을 걷지 못하고 뒤넘이치면서 이것을 책임지겠다고 엎드려 호소하는 자가 있거든 그의 무릎 앞에 머리를 묻고 통회하십시오. 처참하고 절망스러운 처지에 있으면서도 자기의 한 몸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그 자리에서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하늘을 위하여, 뜻을 위하여 피땀을 흘리며 나아가는 무리가 있거든 결사적으로 그들을 따라갈 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신자, 이러한 양심적인 인사가 이 민족 가운데서, 특히 이 민족의 청년 남녀들 가운데서 나타나지 않으면 이 민족은 망합니다. ‘제가 하나님의 영원불변의 이념적인 발판입니다. 이 모습이 비록 헐벗고 굶주리고 갖춘 것 없다 할지라도 심정에 있어서는 제가 아니면 당신의 손을 붙잡아 줄 자가 없고, 제가 아니면 당신의 옷을 매만져 줄 자가 없고, 제가 아니면 당신의 신발을 고쳐 줄 자가 없습니다. 당신의 어느 한 부분도 제가 아니면 안 됩니다.’ 할 수 있는 무리들이 모이는 날에는 싸움을 하지 않고도 이 사탄천하를 정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들 자신입니다. 문제는 나 자신이라는 것을 철두철미하게 알아야 합니다. 한 목적을 위하여 가는 우리는 형제입니다. 나는 나요, 너는 너가 아니라 너자 나요 나자 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싸움터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가는 형제를 보고 밤잠을 못 이루고 그 자리에 나의 피를 가하겠다고 하늘 앞에 맹세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눈물을 흘리는 자리에서도, 땀을 흘리는 자리에서도 그러해야 합니다. 산 발판, 승리적인 발판이 여러분의 심정을 통하여 세워질 때까지 여러분, 낙망하지 말고 가십시오. 그러면 필시 여러분 앞에 천주적인 대승리가 올 것이라고 나는 자신합니다.
아버지, 당신은 너무도 저희를 사랑하시기에 그러한 길로 오라 하신다는 것을 안 저희들, 오늘도 가고 내일도 가겠습니다. 슬퍼도 가고 욕을 먹어도 가고 밟혀도 가야 되겠습니다. 하도 큰 사랑이요, 하도 큰 은사이기에 이 한국은 무엇으로도 보답할 수 없사옵니다. 무엇으로 아버지께 보답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마음을 가지고 몸을 굽혔사오니 당신의 뜻대로 받아 주시옵소서.
오늘 여기에 많은 생명들이 참석했사옵니다. 자신이 어떠한 입장에 처해 있는가를 명시하여 과정적인 이 세계를 밟고 넘어설 수 있는 신념을 갖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렇지 못하다면 현실을 넘어 미래의 일이라도 염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사오니, 오늘 여기에 모인 이들, 생활의 일편이라도 하나님의 참된 발판, 하나님의 참된 터전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몸 마음 심정의 일편이라도 그러한 터전을 갖추어 이 악한 세상에 보여줄 수 있고, 이 악한 세상을 수습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한 자리에서 아버지 앞에 영광을 돌려 드리고 당신의 아들딸이라는 칭찬을 받을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부탁하오니, 모든 것을 받아 주시옵소서.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였사옵나이다. 아멘.
오늘 말씀드리려 하는 제목은 ‘참 가고 싶은 곳’입니다. ‘참 가고 싶은 곳’ 이러한 제목을 가지고 잠깐 말씀드리겠습니다.
땅 위에 살고 있는 수많은 인간들은 이 시간 자기도 알지 못하는 더 좋은 곳을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땅 위에 살고 있는 인간이 그러하듯이 땅을 대하고 계시는 하나님도 역시 그러하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이 진정 참 좋은 곳이 못 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할진대, 그 가운데 살고 있는 우리 개체 역시 참되지 못하다 하는 사실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참된 세상과 참된 나 자신이 되어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이 세상과 우리들을 대하시는 하나님도 본래의 모습대로 계시지 못하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이 인간을 이끌어 나오시는 역사노정에 있어서, 하나님이 인간을 참것으로 고대하던 존재라고 하면서 불변의 터전 앞에 세워 놓을 수 있었더라면, 우리 인간도 참된 그 자리에 설 수 있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하나님께서 그런 자리에 계시지 못하기 때문에 오늘의 우리 인간도 역시 원치 않는 이런 자리에서 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불완전한 상태에서 참된 모습을 그리워하는 자리에 있기 때문에, 인간과 끊을 수 없는 인연을 가지신 하나님도 인간과 더불어 불완전한 자리에 계시지 않을 수 없는 억울한 입장이라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늘과 땅이 그러한 동시에 하늘로부터 연유된 모든 것도 역시 참된 것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보나 현실적으로 보나 그 무엇을 살펴보더라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참된 곳, 참 가고 싶은 그곳은 현실의 우리들이 그리워할 뿐만 아니라 역사를 엮어 왔던 과거의 선지자들도 그리워했고, 또한 우리의 후손도 그리워하지 않을 수 없는 곳입니다.
진정 하나님이 사랑이요, 모든 것의 중심이 하나님이라 할진대, 하나님은 기필코 참되지 못한 이 인간세계를 개척해야 할 책임이 있고, 땅 위에 살고 있는 우리들도 하나님과 공동 목표 아래 함께 움직이면서 그리워하는 참된 그곳을 개척해 놓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선을 지향하는 양심이 있다 할진대 그 양심은 이러한 목적 밑에서 움직여야 하고, 종교단체가 있다 할진대 그것 역시 그러한 목적을 위하여 움직여야 하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즐길 수 있고, 생활로 즐길 수 있고, 사회가 즐길 수 있고, 인류 전체가 즐길 수 있는 ‘참 가고 싶은 그 곳’을 인생행로에 있어서 상봉하지 못한다면 역사가 지나가고 또 지나간다 할지라도 인류에게 진정한 행복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행복을 주장하는 어떠한 이념도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한 반드시 참 가고 싶은 곳, 기쁨으로 살 수 있는 그곳을 이 땅에서 완결지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완결되지 않는 한 이 땅에서 전쟁은 끝날 수 없는 것이요, 모든 모순된 현상들이 제거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들을 구하기 위한 구원의 목표를 총체적으로 종교적인 명사를 빌어 말하기를 천국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교에서 말하고 있는 천국, 그 천국 회복운동이 전개되지 않는 한, 우리는 참 가고 싶은 그 세계에 가려야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신다 할진대 그러한 세계를 기필코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인간 대하여 약속하신 그 말씀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는 하나님이라면 우리에게 그런 하나님은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이 계신다 할진대 이 일을 해결지어야 되고, 또 하나님을 따라가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 사람은 생애노정에서 이 일을 맡아 가지고 해내지 않으면 안 되는 운명길을 가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이루어진 세상을 이상세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만일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참으로 가고 싶은 곳이라는 말은 필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타락하지 않았다면 이미 그 자리에 가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세계에서 인간이 살았던들 복귀섭리, 즉 구원섭리라는 것은 우리에게 필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러한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그러기에 이제까지 왔다 갔던 수많은 영웅열사들도 모두 잃어버린 입장에서 출발했던 것입니다. 과거의 모든 사람들이 참 가고 싶은 그곳을 찾기를 원했고, 지금도 찾고 있으니, 우리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입장에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타락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타락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바라는 그 소망의 세계는 상관없는 것이 되었고, 영원한 존재를 향하여 전진해야 할 심적인 이념의 세계는 간 곳이 없어지고 육적인 이념을 이루기에 급급한 세계가 되고 말았습니다. 마음으로 바라고, 마음이 즐거워할 수 있는 이념의 세계, 곧 천국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작용하는 한 기필코 마음이 지향하는 목적의 세계를 이루어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참 가고 싶은 곳이 있다 할진대, 그곳은 어떤 곳이냐? 그곳은 우리가 부르고 있는 하나님을 상봉할 수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을 상봉할 수 있는 동시에 참부모를 중심삼은 참가정이 있는 세계요, 참형제들이 사는 세계입니다. 더 나아가서 참된 백성과 참된 주권을 중심삼은 참된 나라인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노정에 수많은 사람들이 왔다 갔지만, 하나님의 참모습을 본 자가 없었고, 참된 부모를 가진 자가 없었고, 참된 형제를 가진 자가 없었고, 참된 군왕과 참된 주권을 가진 국가가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도 그런 것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에 우리는 최선의 이념적인 요소를 다 잃어버린 상태에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 자신이 얼마나 불쌍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느낄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런 현실 가운데 살고 있는 나 자신이 얼마나 불쌍한가를 느껴야 한단 말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인생행로를 새로운 방향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기준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현재 자기가 처해 있는 자리가 제아무리 행복하다고 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행복이 영원히 계속될 수 있느냐 하면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땅 위에 살고 있는 모든 인간은 말할 수 없이 불쌍한 자들입니다. 물론 현세에서 불쌍하게 사는 사람도 불쌍하지만 아무리 권력이 많고 위세가 당당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들 역시 불쌍한 존재라는 것을 느끼지 않으면 안 될 때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한국의 실정을 바라보면 모두가 생활에 얽매여 있습니다. 사회적인 사정에 얽매여 있습니다. 해결하려야 해결할 수 없고 어떻게 해보려야 해볼 수 없는 자리에 얽매여 있습니다. 내일을 향한 소망의 심정은 간절함에도 불구하고 그런 문제를 해결할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사정에 얽매여 있습니다. 이 현실이 나를 영원한 행복의 복지, 참 가고 싶은 그곳으로 끌고 가면 좋겠는데 오히려 그것과 반대 방향으로 나를 끌어가고 있습니다. 여기에 싸움이 있고, 고통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러한 환경을 해결하는 데 있어서 친구가 필요함을 느낄 때가 있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이러한 환경을 개척할 수 있는 지도자가 있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러나 친구와 지도자가 있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된다면 모르지만, 그렇지 못할 때에는 깊은 심정을 통하여 이러한 환경을 해결할 수 있는 참다운 형제가 그리워지는 것입니다. 형제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이러한 환경을 책임질 수 있고 나를 품고 사랑해 줄 수 있는 참된 부모를 그리워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여러분이 그 환경에서 대하고 있는 친구가 참된 친구입니까? 여러분이 그 환경에서 대하고 있는 형제가 참된 형제입니까? 여러분이 그 환경에서 대하고 있는 부모가 참된 부모입니까? 아닙니다. 아니라는 거예요.
타락의 인연으로 엉클어진 환경이기 때문에 여기에 있는 모든 친구도 타락의 인연을 벗어나지 못한 친구요, 부모나 형제도 역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리에 얽매여 있는 우리입니다.
만일 참 가고 싶은 그곳에서 하나님을 중심삼고, 본연의 부모를 중심삼고, 본연의 형제를 중심삼은 본연의 이상적인 한 가정이 이루어졌다면 그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그러나 그러한 이상적인 제 조건을 모두 잃어버리고 이것을 그리워하며 관념적으로 생각해야 하는 입장의 인간이 되었으니 얼마나 불쌍합니까? 이러한 불쌍한 인간을 구하려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하나님이기에 땅 위의 인간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땅 위의 인간들이 사망권에 얽매여 허덕이는 생활을 하는 동안에, 하나님은 우리의 배후에서 혹은 앞에서 이 길을 개척하기 위하여 무한히 애쓰셨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환경이 싫증날 적마다 새로운 무엇을 동경하고, 처하여 있는 위치가 싫어질 적마다 새로운 무엇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러분 자신만이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럴 적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배후에서 혹은 앞에서 여러분을 본연의 목적세계로 이끌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손길이 여러분과 같이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 시간은 하나님이 이런 환경에 있는 불쌍하고 처참한 우리의 마음 문을 열고 들어와 우리를 참된 곳으로 가라고 충격을 가하고 계시는 엄숙한 시간입니다. 그러기에 이 시간이야말로 내 일생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시간임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 시간에 받는 새로운 충격과 느낌을 통하여 우리는 지금까지의 생활을 분석하고 자아를 비판하여 새로운 나로서 내일을 향하여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여러분이 개인생활이나 가정생활을 혹은 사회생활을 통하여 많이 체험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역사노정에서 고아와 같은 불쌍한 처지에 있는 인간을 구하기 위하여 친구의 입장에서, 혹은 형제의 입장에서, 혹은 부모의 입장에서, 더 나아가서는 스승의 입장에서 섭리해 나오셨습니다. 그래도 안 될 때는 종의 입장에서 섭리해 나오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하늘은 구주로서, 혹은 부모로서, 혹은 형제나 친구로서 우리 앞에 나타나고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역사적인 성현이나 위인들이 이 땅에 와서 인류역사에 공헌하고 간 것은 자기 스스로가 잘나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들은, 환경과 악에 대한 적개심을 느껴 시대를 비판하고 대중 앞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게 하기 위하여, 하늘이 보낸 사람들입니다.
역사노정에서 그러한 사람들을 우리의 선조들은 한번도 환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핍박했고 나중에는 죽음의 고개로 내몰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뻔뻔스럽게 머리를 들고 다니며 아무리 잘난 모습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용납할 수 없는 반역의 족속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몸에는 하늘의 보내심을 입은 사람, 하늘을 경외하고 하늘을 위하여 살았던 그 사람들을 죽인 선조의 피와 살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옛날 그런 사람들을 죽인 그들만이 역적이 아니요 하늘을 배반했던 그들만이 배반자가 아니라, 그 피와 살이 연하여 있는 오늘 우리 자신도 그런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하늘은 과거의 역사노정에서만 역사하신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살고 있는 오늘의 현실에서도 역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르지만 하늘은 진정한 친구로서 여러분을 찾아오신 때도 있었습니다. 어떤 때는 진정한 형제로서 찾아오셨고, 어떤 때는 부모로서, 스승으로서 여러분을 찾아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하나님을 친구로 모시지 못하였고, 형제로 모시지 못하였고, 부모로 모시지 못하였고, 스승으로 모시지 못하였습니다. 이것 이상 더 큰 죄가 어디 있겠습니까?
보내심을 입은 그들은 일개 국가를 대표한 자들이 아닙니다. 천상(天上)으로부터 지상(地上)에 이르기까지 온 피조세계를 대신하여 창조주에 의해 보내어졌던 사람들인데도 불구하고 지상의 인간들은 이런 사람들을 배반하고 핍박하고 쫓아내고 죽이고, 하고 싶은 대로 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견지에서 헤아려 볼 때에, 우리는 역사적인 혈통을 통하여 생명을 얻은 존재이기 때문에 너나 할 것 없이 전부가 하늘 앞에 용납받기 어려운 배반자요 죄인들이 아닐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죄가 있는 곳에는 행복이 있을 수 없습니다. 죄가 있는 곳에는 고통이 따르고 고통스런 사정이 부딪치게 됨으로 말미암아 파괴로 끝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땅 위에 살고 있는 수많은 인류들은 마음속 깊이 스며 있는 역사적인 고통을 아직까지도 청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인 비애를 우리의 몸에서 제거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역사적인 절망, 역사적인 고통, 역사적인 슬픔, 역사적인 사망의 세력을 어떻게 수습할 것이냐? 역사적인 고통을 통하여 찾아 들어오는 역사적인 사망의 세력을 어떻게 청산하며, 이 슬픔과 고통을 어떻게 없앨 것인가?
인류는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이것이 이 시대에 처하여 있는 우리들의 절박한 운명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마음을 모으고 정성을 모으고 성심을 다 기울여 수습해야 합니다. 지금은 그럴 때입니다. 환경도 다시 수습하고, 더 나아가서는 마음과 심정까지 다시 수습해야 할 때인 것입니다. 자기를 중심삼고 이러한 생활을 어떻게 수습할 것인가가 문제입니다. 최후에 찾아오는 역사적인 심판의 관문을 향해 나아가는 인류는 이 사망의 세력을 해결짓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한, 참 가고 싶은 곳이 있다 하여도 그곳은 우리와 하등의 관계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전체를 청산해야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도 알고 하나님과 반대되는 사탄이 있다는 것도 압니다. 사탄은 어떠한 존재냐? 역사노정에서 죄인 중에 최고의 죄인입니다. 역사노정에 있어서 최고의 죄인이요 그 괴수입니다. 지금까지 6천년 동안 섭리하여 나오시는 하나님 앞에 사탄은 반대하여 나왔습니다. 6천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반대했고 지금 이 시간도 반대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아무리 악하다 할지라도 마음으로는 하늘을 따르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참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이러한 인간의 마음까지 파괴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늘의 역사를 반대해 나온 사탄이기에 전세계가 그의 무대가 되어 있는 동시에 여러분 자신까지도 사탄의 무대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사탄을 굴복시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뇨? 지나온 역사상의 죄를 청산하여야 합니다. 역사상에 누적되어 온 고통을 제거해야 합니다. 시대적인 고통이 문제가 아니라 역사적인 고통을 제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사탄을 내게서 추방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뇨? 역사적인 슬픔에서 내가 해방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될 거 아니에요?
세상에서 무서운 것이 있다 할진대 사탄보다 더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 이 시대가 아무리 무섭다 할지라도 이 시대는 어차피 지나갑니다. 그러나 인간이 타락한 그날부터 인간에게서 떠나지 않는 하나의 원수가 있나니, 그것은 사탄, 마귀, 악신인 것입니다.
우리가 땅 위에 살고 있을 때 어떠한 원수가 있다 할진대, 우리는 그에 대해 원수를 갚을 수 있습니다. 일대(一代)에 갚지 못하면 후대(後代)를 통하여서라도 갚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6천년 동안 하나님을 대신해서 행세한 원수 사탄을 인류는 추방하지 못했고 한번도 그 원수를 갚아 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분함 중에 가장 큰 분함은 이 원수를 갚지 못한 것입니다.
대심판이란 무엇이냐? 땅 위의 인간들을 전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대원수 사탄을 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심판입니다. 역사적인 원수요, 이 시대의 원수요, 미래에도 원수가 될 수 있는 이 사탄을 다 처단하는 것이 대심판입니다.
이제까지 사탄은 참사람이 되기 위하여 가는 성도의 길을, 참된 양심을 가진 사람들이 가는 길을 이리저리 엉클어 놓았습니다. 예를 들어 이 시대에 어떤 주권 국가가 있다고 합시다. 그 국가의 헌법이나 그 국가의 이념 밑에서 선하게 혹은 양심적으로 살면 의로운 사람이라고 인정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선은 아무리 인정하였다 할지라도 시대가 지나가면 뒤집어집니다. 그렇게 되면 과거에 선이라고 했던 것이 오늘에 와서 선이 될 수 없고, 오늘에 선이라고 하던 것이 내일에는 선이 되지 못합니다. 안 그래요? 동쪽이 서쪽이 될 수 없고 서쪽이 남쪽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선은 절대적인 선이 아닙니다. 일시적인 선은 될 수 없지만 절대적인 선은 될 수 없습니다. 나무에 비유해서 말하면, 그런 선은 잎에 해당하는 선의 행사는 할 수 있으나 줄기나 가지에 해당하는 선의 행사는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시대가 달라짐에 따라 선에 대한 정의도 달라지고 악에 대한 정의도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타락한 후의 세상은 기준이 왔다갔다 하기 때문에 말할 수 없이 엉클어진 세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계신다 할진대 이렇게 엉클어진 세상을 몽땅 선으로 인정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몽땅 깨뜨려서 다시 만들든가, 몽땅 끊어서 없애든가 셋 중의 하나는 해야 됩니다. 이 셋 중의 어떠한 하나의 방법을 세우지 않고는 이 땅을 도저히 선의 세계로 이끌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땅 위의 사람을 아무런 조건도 없이 선하거니 악하거니 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의 차이가 있지만 그 차이는 백지장의 차이에 불과합니다. 선의 기준은 하나님이요 악의 기준은 사탄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선과 악 사이에서 선에 접할 수도 있고 악에 접할 수도 있는 처지에 있습니다. 그러면 끝날에 가서는 이것을 어떻게 해결지어야 할 것이뇨? 악의 주체인 사탄을 쳐내야 합니다. 그래야 악이 끝난다는 것입니다. 아까 말한 세 가지 방편 중에서 때려부순다는 것은 무엇을 때려부순다는 말이냐? 사람을 때려부순다는 말이 아닙니다. 최고의 선인 하나님과 상반되는 사탄을 때려부순다는 말입니다. 그 사탄만 제거시키면 인간들이 악한 일을 하려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부모가 선하면 그 자식도 선하게 마련입니다. 유전법칙이 그래요. 부모가 악하면 그 자식도 악하게 마련입니다. 악의 뿌리가 끊어져 작용하지 못하게 되면 자연적으로 악이 해소되는 것입니다.
끝날이 가까워 오면 가까워 올수록 우리의 세포 하나 하나에까지 악이 점령해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에서 제아무리 잘났다고 하는 사람이라도 그 사람의 세포까지 사탄이 점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는 것도 먹는 것도 전부 사탄에게 주관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권내에서 오늘날 세계가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중심한 선이 점령해 나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두 갈래로 나오는 것입니다.
앞으로 하나님 편은 최고의 선이요, 사탄 편은 최고의 악으로 인정될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아요? 대한민국 사람이라고 전부 다 선한 사람입니까? 대한민국 사람은 대한민국 사람을 옳다고 합니다. 우익 사람이면 우익이 하는 것을 옳다고 봅니다. 그렇다고 그 위에서 볼 때도 그것이 옳으냐 이겁니다. 주체와 어떠한 상대적인 관계를 갖고 있다면 전체적인 정의로 인정해 준다는 것입니다. 그 세부적인 것은 조정하면 됩니다. 중심이 어디냐가 문제입니다.
역사노정에 수많은 사람들이 살았고 이 땅 위에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으되, 그들이 하나님 편이냐 사탄 편이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 할진대, 여러분들은 악의 권내에서 도저히 벗어나려야 벗어날 도리가 없습니다. 6천년 동안 엉키고 엉킨 사탄의 철망에서 벗어날 도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의지하여 생사의 결정이 벌어지는 자리에서 ‘나는 하나님 편입니다.’ 라고 할 수 있는 신념만 가지면 망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선권 내(善圈內)에 넘어가려면 여러분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나는 이러이러한 죄인이었습니다.’라고 직고(直告)해야 합니다. 그냥은 못 넘어간단 말입니다. 청산하고 넘어가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이라는 명사를 세웠고 용서라는 명사를 세운 것입니다. 그래서 끝날은 크게 용서 받을 수 있는 때요, 또 크게 벌 받을 수도 있는 때입니다. 그걸 알아야 합 니다.
심판날에 인류 앞에 자기가 역사적인 죄인이었다는 것을 직고하는 자는 역사적인 선의 권내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 하나님 편이라고 자처할 수 있는 사람들은 천상세계와 지상세계를 주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죄의 소굴에서 헤매던 모든 것을 청산했다는 입장에 서야만 사탄을 몰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의 뿌리가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는 아담 해와가 저지른 죄로부터 오늘날의 시대적인 죄까지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하늘이여! 저희들은 섭리의 뜻 가운데서 하늘을 배반한 역사적인 종족이로소이다. 구원섭리의 뜻을 대표하여 시대 시대마다 왔던 선지선열들, 다시 말하면 아담가정으로부터 노아가정, 아브라함가정, 모세가정, 예수, 그리고 앞으로 재림주가 오신다면 그 분까지 배반한 역사적인 죄인입니다’라는 조건을 제시해야 한단 말입니다.
사람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소망을 갖고 있습니다. 소망을 이루기 위하여서는 사정이 통해야 합니다. 사정이 통하려면 심정적인 기준이 서 있어야 됩니다. 안 그렇습니까? 어느 누구도 심정과 사정과 소망, 이 세 가지는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항상 있어야 할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소망은 무엇이뇨? 하나님의 소망은 우리가 참 가고 싶어하는 그곳에 당도해서 더불어 사는 것입니다. 이런 세계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들도 그 소망의 세계, 참 가고 싶은 곳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습니다. 또 하나님에게는 소망이 있는 반면 사정이 있습니다. 그 사정은 어떤 사정이냐? 슬픈 사정입니다. 기쁜 사정을 가지고 온 천하가 희희낙락 한다면 그 소망의 세계는 기쁜 세계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슬픈 사정에 얽매여 있기 때문에 기쁜 소망이 찾아와도 보따리 싸 가지고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그렇다는 겁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하고 아무리 은혜를 많이 받았다 할지라도 소망의 때나 소망하는 그 뜻이 죄악과 슬픈 사정권 내에 살고 있는 우리를 중심삼고는 영원한 것으로서 행세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아침이 다르고 낮이 다르고 저녁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춘하추동이 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정이 천태만상으로 변하니 하늘의 은혜가 소망의 터전을 갖고 우리의 생활을 통해서 장구하게 움직여 나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받은 은혜는 일시적인 것밖에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은사를 넘어 하나님은 세계적으로 은사를 주시는 것입니다. 은혜를 주되 한 사람에게만 주지 않습니다. 땅 위에 있는 수많은 성도들에게 줍니다. 그렇게 은사를 줘도 그 가운데서 쓰러지는 자가 더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은 열 사람 중에서 아홉 사람이 쓰러지고 한 사람만 남더라도 그 사람을 표준하여 열 사람을 세운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라도 올바른 형태의 기준을 세우면 그것을 중심삼고 한 단계 올려 세우고 또 올려 세워 나가는 것입니다. 이래 가지고 수많은 종교와 수많은 민족 형태가 벌어져 나온 것입니다.
우리는 소망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환경과 사정이 통하지 않으니 이것을 수습하기 위한 방법을 개척해 나온다는 것입니다. 사랑이라든가 주의를 중심삼아 최후에는 이념 통일을 목표로 하여 생활통일로부터 환경통일을 해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소망과 사정이 선의 소망과 선의 사정으로 완전히 성립되어야 비로소 선의 심정의 동산이 건설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이루고자 하셨던, 또 재림하셔서 이루어야 할 지상천국입니다.
그러면 참된 그곳, 우리가 영원히 살 그곳은 어떤 곳이뇨? 그곳은 내 소망이 상대적인 가치로 나타나는 곳이 아니라 내 심정과 사정과 더불어 사방성의 가치로 나타날 수 있는 곳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입체성으로 나타날 수 있는 곳입니다. 동시에 그곳에서는 모든 것을 잊고 살더라도 불행해질 수 없고 슬퍼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곳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기쁘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감사하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내 감정으로는 억제할 수 없는 기쁨이 내 몸에 스며드는 곳입니다. 그렇게만 되면 모든 것이 다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렇지 않아요? 마음이 지극히 기쁠 때는 모든 사람의 잘못을 다 용서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도 이 땅 위의 수억천만의 죄인들을 용서해 주고 싶다는 것입니다. 죄를 지었지만 그냥 용서해 주고 싶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땅 위에 어느 누가 나와 가지고 ‘당신은 이러이러한 심정과 이러이러한 소망과 이러이러한 사정을 가지고 인간 대해 수고하면서 구원역사를 해 나오시지 않으셨습니까?’ 하고 위로해 주기를 원하십니다. 역사적인 심정과 사정과 소망, 시대적인 심정과 사정과 소망, 미래적인 심정과 사정과 소망을 붙안고 승리의 모습으로 이 땅 위에 나타나 ‘아버지! 지금까지의 역사적인 슬픔과 한을 풀어 놓으시옵소서.’ 할 수 있는 한 사람이 나와야 합니다. 그건 왜? 역사적인 죄를 용서해 주려니 그렇다는 것입니다.
역사적이고 시대적이고 미래적인 하나님의 사정과 소망과 심정을 통하여 가지고 ‘아버지여!’ 할 수 있는 아들이 나온다 할진대, 하나님은 아주 기뻐하시며 ‘오냐, 내 아들아!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아들은 무어라 대답하겠습니까? 그 아들은 사망의 세계를 넘어오기가 무척 힘들었을 것입니다. 사망의 노정을 개척하기에 굉장히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힘든 이 길을 개척해 나온 것이 아버지의 역사요, 이 길을 개척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죽음도 개의치 않고 최후에 승리의 성벽을 건설해 놓아야 하는 것이 인류의 공동운명임을 잘 아는 아들입니다. 그런 아들이 어찌 ‘나를 하늘에 데려가 복을 주고 그저 무한정 살게 해주시옵소서.’ 하는 요구를 하겠습니까? 당신의 소원이 땅의 죄 많은 인류를 구원하는 것이요, 6천년의 원수 사탄을 굴복시키는 것이니, 제가 그것을 하겠습니다라고 할 것입니다.
심정을 걸어 놓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못 했고, 사정을 걸어 놓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못 했고, 소망을 걸어 놓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못 했기 때문에 오늘날 인간이 이렇게 허덕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당장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라 하고, 사탄을 ‘야, 이놈 사탄아’ 한다고 해서 사탄이 굴복할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천상에서 하나님이 세우고자 하셨던 원칙적인 아들딸의 기준이 잡히고, 지상에서도 하나님이 세우고자 하셨던 원칙적인 아들딸의 기준이 잡혀야 되는 것입니다. 그 원칙은 악이 주관할 수 없습니다. 그날에야 비로소 사탄이 굴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역사적인 대승리의 신앙자가 나와서 승리의 기쁨을 만민 앞에 돌려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자가 나온다면 그로 말미암아 인간은 심판의 고비를 넘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탄만은 용서하지 않습니다. 그런 때가 대심판의 때입니다. 불벼락을 내려 땅을 없애는 것이 심판이 아닙니다. 그런 하나님이라면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세상에서도 그렇지 않습니까? 잃어버린 자식을 찾거나 혹은 결혼식을 하거나 기쁜 일이 있을 때는 과거의 원수도 용서하고 과거의 슬픈 일도 전부 잊어버립니다. 하나님도 땅 위에 있는 수많은 죄인들을 기쁨을 조건으로 하여 용서하고 싶은데, 인간을 용서할 수 있는 기쁨의 자극을 일으켜 줄 수 있는 아들딸이 없다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예수도 영광스러운 승리자의 모습으로서 ‘아버지, 당신의 심정은 이렇고 당신의 사정은 이렇고 당신의 소망은 이러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당신이 소원하신 바를 성취하였사오니 나를 보고 기뻐하십시오.’라고 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슬픈 자리에서 인간들을 용서해주셨습니다. 슬픔의 권내에서 용서해 나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용서하여도 사탄이 또 달려든다는 것입니다. 슬픔의 터전이 사라지기 전에는 용서 받고도 또 죄를 짓고 또 죄를 짓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쁨의 한 날을 맞이하여 하늘땅, 온 우주 앞에 ‘하늘이여! 땅이여! 내 아들을 높일지어다. 오늘의 이 기쁨을 천추만대에 길이길이 남길지어다.’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을 바라고 계시는 것입니다.
오늘의 대한민국도 보십시오. 제2공화국이 들어서니까 그전에 사건에 걸렸던 사람들을 기쁨의 조건을 내걸고 사면해 주지 않습니까? 영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것을 생각할 때에, 여러분은 이 땅이 악하다고 슬퍼할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해결점을 찾지 못한 것에 대하여 슬퍼해야 합니다. 나 자신이 그것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은 기필코 그 목적을 이룰 수 있는 실체를 세워서라도 역사하실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거늘, 그러한 자가 어디 나오지 않나 하고 눈을 크게 뜨고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찾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영원한 사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기 위하여 사탄은 밤낮없이 싸웁니다. 여러분을 지옥으로 끌고 가려고 사탄이 밤이나 낮이나 쉬지 않고 싸웁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하고 싶은 것 다 합니다. 이래서 되겠습니까? 이래서는 안 되겠습니다. 비록 몸은 편한 생활을 할지라도 심정에 있어서는 밤낮없이 싸워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합니다. 그는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모신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그와 같은 정성을 다하여 심정의 인연을 연결지은 심정적인 자식을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진정한 자식은 아브라함이 낳은 자식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심정을 따라 하나님을 아브라함이 부르던 하나님으로 부를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가 바로 아브라함의 자식입니다. 또 예수의 심정을 따라 예수가 부르던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줄 아는 사람이 예수의 형제가 되는 것입니다.
구주라는 것은 죄악의 세상에서 필요한 것입니다. 구원을 받은 다음에는 구주가 필요 없습니다. 그 때에는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친구만이 아니라 형제도 되는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이 배포를 갖고 ‘예수님은 내 형님이야.’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면 지옥에 안 갑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예수의 친구라 할 수 있는 조건을 가지고 있습니까? 역사적인 예수, 시대적인 예수, 미래적인 예수를 친구로 삼을 수 있는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것만 있으면 문제가 없습니다. 그것만 있다면 여러분들은 복잡한 환경과 사정에 엉클어진 이 세계가 어떻게 선의 세계가 되겠는가 하는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좌우가 대립하고 있는 긴박한 세상에 있어서 오늘 여러분들은 바른발은 우익을 밟고 왼발은 좌익을 밟고 있습니다. 바른손은 우익을 붙들고 왼손은 좌익을 붙들고 있습니다. 이것들이 서로 싸우게 됩니다. 싸우게 될 때에는 가슴을 치는 것이 아니고 머리를 칩니다. 이럴 때에 이념도 없이 하나님도 없이 싸우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는 그 싸움의 목적을 해명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싸우고 싶어서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돌리는지도 모르면서 컴퍼스의 다리는 돌아갑니다. 컴퍼스의 머리는 다른 곳에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금이 그어지는 것만 바라보고 있을 뿐입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망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여러분, 명동거리에 가 보십시오. 눈이 시퍼래 가지고 단돈 십 원도 손해 보지 않으려고 합니다. 모두가 십 원이라도 이익을 보려고 다닙니다. 그건 누가 그렇게 만드느냐? 자기가 그렇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원해도 원하는 대로 되지 않습니다. 뜻하는 대로 되지 않는 이유는 제일 원인이 자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은 천지운세로 말미암아 그 시대의 사방성에 의해 전부 다 복잡하게 벌어지는 것입니다.
오늘날 유엔 총회를 중심삼고 비동맹국가의 거두들이 모여서 회의를 난장판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중대사는 인간끼리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끼리 하게 되면 결론을 내릴 때도 부딪쳐서 결론을 내야 하고 합할 때도 서로 부딪쳐서 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끝날에는 그러한 일이 자꾸 벌어집니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이 계신다면 우리는 안심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불안합니다. 만약 모든 것을 조정하는 하나님이 계신다면 어떠한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어떤 해결점을 만들기 위하여 거기에 맞게끔 이끌어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안심하려야 안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다면 걱정이 되지만 하나님이 계신다면 좀 생각할 여유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해결짓는다 할진대 반드시 사람을 통하여 해결짓습니다. 하나님 혼자 뜻을 세우고 하나님 혼자 해결한다면 인간을 지을 필요가 없단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상대적인 관계, 즉 상대적인 입장에 있는 인간을 통하여 이 땅과 연결이 되게 되어 있지 하나님 혼자서는 안 됩니다. 직접 할 수 있게 안 되어 있습니다. 법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계시는 한 세계적인 종말시기에는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인간을 필요로 하게 될 것이거늘,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어야 할 것이냐? 지선(至善)하신 하나님이 계시고 최악의 사탄이 있는데, 이것을 어떻게 해결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 역사적인 사탄을 어떻게 해서든지 처단해 버리고 역사적인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 할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아까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이 참아들딸로 맞을 수 있는, 과거 현재 미래의 심정을 통한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아무리 효도를 하고 싶어도 부모를 모르면 효도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몇십 년 전에 갈라진 아버지를 만나 가지고 대번에 효도할 수 있어요? 그렇게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얼굴을 자세히 보아 내가 아버지를 닮았는지 생활감정이 통하는지를 알고, 또한 어느 만큼의 심정의 기준까지 맞춰 들어가야 효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대번에 못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과 하나님 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영원히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잃어버렸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종을 세워서 내가 네 아버지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종을 시키고 천사를 시켜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한 시대가 구약시대입니다. 다음에는 아들을 시켜서 역사하였습니다. 그 시대가 신약시대입니다. 그 다음에는 성신을 시켜서 역사해 나오셨습니다.
여러분, 성신이 무슨 신인지 압니까? 어머니 신입니다. 어머니 신을 세워서 역사하였던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아버지를 세워 역사하십니다. 종을 시켜서 역사하였고, 아들을 시켜서 역사하셨고, 성신을 시켜서 역사하였습니다. 이제 끝날에는 아버지를 세워서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 천지에는 하나님의 참다운 효자가 없었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만민의 메시아요 하늘의 독생자로 왔었지만, 이 땅 위에서 하나님 앞에 효성을 다 못하고 갔습니다. 마음으로는 간절했으나 환경이 갖추어지지 않아 효자 노릇을 다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를 이스라엘 민족 앞에 세운 목적은 이스라엘 민족을 거느려 가지고 세계 앞에 하늘이 택한 민족이 사탄세계의 어떠한 민족과 국가보다도 더 놀랍다는 사실을 인식시키고, 또 그로부터 인정을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인정받은 자리에서 하나님 앞에 효도해 보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과 땅을 대신하여 이 땅 위에서 참다운 효성을 다하는 분이 오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 분이 재림주입니다. 다시 오시는 주님이 무엇하러 오시는지 아십니까? 예수님이 땅 위에 오셔서 이스라엘 민족을 거느리고 하나님 앞에 효성을 다 드리지 못하였으니, 이것을 하기 위하여 오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한 때를 바라보면서 6천년 역사노정을 거쳐오셨습니다. 수천년의 역사노정을 뒤넘이쳐 오면서 아버지의 심정을 가르쳐 오셨습니다. 나는 네 아버지이고, 너는 어떻게 자랐고, 네 죄가 무엇이고, 네가 어떻게 되어 있고, 어떤 원수가 너를 끌고 갔다는 것들을 가르쳐 오셨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사탄이 무엇인지 알아야 되겠습니다. 사탄이 어떻게 해서 원수가 되었는지를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이놈, 사탄아! 너는 과거에 하늘 앞에 용납받을 수 없는 죄를 지었지? 우리 인간에게 용납받지 못할 죄를 저질렀지?’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사탄의 죄를 알아야 되겠습니다. 사탄은 6천년 동안 하늘 아버지의 역사를 반대해 나온 원수임을…. 여러분! 자신이 있어요? 사탄을 대하여 ‘지금까지는 네가 이 세계를 통치해 나왔지만, 이제 너는 내 앞에서 물러갈지어다.’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할 수 있는 승리자가 나와야 합니다.
여러분은 다 성경을 붙들고 있습니다. 성경만 붙든다고 다 될 것 같아요? 기성교회에서는 문 아무개가 성경대로 안 한다고 비난합니다. 성경의 문자대로 살지 말고, 성경의 내용대로, 성경에 흐르는 심정대로 살아야 합니다. 말이 문제가 아닙니다. 마음은 이렇지만 말은 이렇게 할 수도 있고 저렇게 할 수도 있습니다. 기술자와 이야기한다면 그 사람에게 알맞은, 적당한 말을 할 게 아니겠어요? 때와 장소와 수준에 따라서 달리 표현한다는 것입니다. 말에서는 내용을, 내용에서는 심정을 찾아야 합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말을 조건 삼아 가지고 역사합니다. 심정을 통하지 않은 말은 암만 해주더라도 사탄이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은혜 받았다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 은혜 받은 사람인지 미치광이나 정신병자인지를 대번에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정을 통하느냐 통하지 않느냐가 문제입니다. 성경을 많이 아느냐 모르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말씀 뒤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심정과 통하고 있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통한 자리에서 이놈아 하게 되면 사탄도 어찌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예수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아무리 예수의 얼굴을 만져보고, 아무리 예수와 같이 다니고, 아무리 예수와 같이 살았다 하더라도 심정이 통하지 않으면 모두 소용이 없습니다. 심정을 통하여 만지고, 심정을 통하여 같이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중심은 예수요, 예수의 중심은 신랑 신부입니다. 그러면 신랑 신부의 중심은 무엇이뇨? 신부입니다, 신부. 신부가 말만 가지고 되겠어요? 이 말씀 가운데는 하나님의 눈물 자국이 있습니다. 이 말씀 가운데는 하나님의 피가 어려 있습니다. 이 말씀 가운데는 하나님의 땀방울이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눈물과 피와 땀…. 그것뿐이 아닙니다. 그것으로 안 되기 때문에 죽음의 고개까지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는 장면마다 사탄과 일대 격전을 벌였습니다. 피를 흘리는 장면마다 대원수와 격전을 벌였습니다. 죽음의 고비를 넘을 적마다 사탄과 대결을 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아요?
역사를 아무리 알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역사를 통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지요. 안 그렇습니까? 이제 여러분은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눈물을 찾아야 되겠습니다.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땀방울을 찾아야 되겠습니다.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피를 찾아야 되겠습니다. 성경을 통하여 죽어가 던 예수의 심정을 찾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용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탄은 몇 천만번 하나님 앞에 대적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이 흘리신 원한의 눈물과 억울하고 분하셨던 고비 고비를 해원해 드려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사탄아, 너는 우리 아버지의 원수로구나. 이분은 우리 아버지이시다. 이 땅은 내 땅이다. 너는 내 종인 동시에 원수다.’라고 할 수 있어야 한단 말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도가 있고 수많은 종교가 있지만,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한, 이 세상에는 평화가 오지 못합니다. 올 수 없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에 우리 한국 민요는 참 놀라운 것입니다.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 양친 부모 모셔다가 천년만년 살고지고.’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양친 부모를 모셔다가 천년만년 살고 싶다니…. 우리 민족은 지금까지 효도를 주장해 나왔고, 효자와 열녀와 충신을 높여 왔습니다. 수백년동안 이러한 민족 정기를 지니고 나온 여러분인 것입니다. 이제는 이것이 어느 한 때에 결실되느냐 못 되느냐 하는 것만 남았습니다. 무엇과 더불어? 하늘과 더불어 결실하느냐 못 하느냐 하는 것이 경각에 달려 있습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을 위하여 얼마나 죽었습니까? 그것이 이때에 결실되느냐 못 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성경을 많이 안다고 자랑하지 마십시오. 학박사가 되었다고 자랑하지 마십시오. 울고 있는 하나님이 계시는 것을 알고 같이 울 줄 아는 아들딸이 되어야 합니다. 하늘이 얼마나 바빠하고 얼마나 긴장하는지를 알고 안타까워 몸 둘 바를 모르는 여러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아버지는 아파서 죽겠다고 야단하고 고통스럽다고 야단하는데 자식이 잠만 자요? 그런 자식은 원수입니다.
신앙에 있어서 가장 귀한 것은 체휼(體恤)입니다. 체휼해서 나 자신도 알 수 없는 눈물을 한없이 흘려야 합니다. 여러분은 의식을 초월하여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는 것을 느껴 보았습니까? 누구한테 욕을 먹었다고 해서 분하고 서러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도 알 수 없는 비장한 심정이 감돌아 하염없는 눈물이 떨어져야 합니다. 신앙자의 본질적인 생활상은 그래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도 모르는 고통이 사무쳐 들어와야 합니다. 가슴이 메어지고 몸 둘 바를 모를 정도까지 사무쳐 들어와야 합니다. 내 마음이 그런 것은 알고 보면 하늘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하나님의 아들딸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라고 소리치고 계시는데, 의식적으로 안 들으려 하고 꿈만 꾸고 있는 것이 아들딸입니까? 인류역사 6천년 동안 하늘은 얼마나 안타까워 하셨으며 얼마나 많은 죽음의 고비를 겪으셨겠습니까? 그러한 고비를 겪을 때 우리의 선조 중에 ‘아버지여, 얼마나 서러우십니까?’ 하고 위로한 사람이 있었습니까? 눈물의 동참자가 없었다는 거예요. 땀을 흘리는 자리에서 동참자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다 지나간 다음에 울고불고 야단입니다. 예수의 생전에 그 제자들은 예수가 흘린 눈물을 몰랐습니다. 예수가 흘린 땀과 쏟은 피의 가치를 몰랐습니다. 죽고 난 후에야 알았습니다.
종말시대에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오신다면 어떠한 자를 찾아오실 것이냐? 말씀드린 바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가슴에는 눈물의 성전과 애달픈 사정이 남아 있습니다. 피땀의 성전과 죽음의 고개가 남아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 역사노정에 동참은 못 하였을망정 아프고 안타까운 그 심정은 느껴야 되겠습니다. 노아의 수고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고, 모세의 억울함과 안타까움을 생각하면 자신의 일같이 안타깝고, 예수의 적적함과 외로움을 생각하면 몸 둘 곳을 몰라 해야 되겠습니다. 역사는 지났을망정 그 당시 그들의 애달픈 심정을 체휼하고 울 수 있는 친구의 자리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내가 모세의 시대와는 역사적인 거리를 두고 있지만, 심정에 있어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바라볼 적마다 애달픈 마음이 사무쳐 눈물짓던 모세와 같이 눈물지을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런 사람이 진짜 이스라엘입니다. 역사적인 비참사, 역사적인 서러운 사실을 듣게 될 때 뼈 살에 사무치는 무엇을 느끼고 이 시대의 처참함과 더불어 같은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를 부를 수 있어야 역사적인 사탄을 대하여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림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몰랐던 이러한 사실들을 누가 가르쳐 주느냐? 하나님께서는 심판문을 여실 때에 반드시 당신의 심정을 대신하여 알려 줄 수 있는 사람을 세우십니다. 그러기에 이 땅 위에 그런 사명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나와야 합니다. 여러분, 외형적으로 호화찬란하고 수천 명이 모이는 교회가 그런 사명을 할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왜?
끝날에는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밀실에 들어가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의 말을 들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의 말을 들어서는 안 될 때입니다. 신랑의 말만 들어야 할 때입니다. 목사도, 신앙의 동지도 최후의 고개에 가서는 내 후원자가 못 됩니다. 나는 천당에 가고 그는 지옥에 가게 된다면 지옥에 가는 그 사람이 나를 붙듭니다. 사랑하는 친구가 물에 빠졌을 때 구하려고 물에 들어가면 그 친구가 붙드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그때는 동정해 줄 수 없는 때입니다. 어떤 지도자도 나의 생명을 구해 주지 못합니다. 그럴 때가 옵니다.
그러한 때를 먼저 맞이한 지역, 국가, 교단, 사회에서는 혼란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서로가 믿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목사가 장로를 못 믿고, 장로가 목사를 못 믿고, 평신도가 당회를 못 믿고, 교파는 교파끼리 못 믿고, 사회나 정당도 서로 못 믿습니다. 국민이 대통령을 못 믿고, 대통령이 국민을 못 믿고, 백성이 나라를 못 믿는 가운데 뒤넘이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이냐? 사방을 바라봐야 믿을 수 없는 혼란한 세상입니다. 그 속에서 자기가 자기를 믿고, 하늘이 인정할 수 있는 믿음의 자리를 찾으라는 것입니다.
자기의 아버지 어머니도 믿을 수 없습니다. 다 갈라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민주주의입니다. 다 갈라지고 다 잃고 나면 고독과 부딪치게 됩니다. 고독한 자리에서 하늘의 심정에 접촉시킨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는 지극히 없는 자 같지만 지극히 많은 자요, 지극히 외로운 자 같지만 지극히 행복한 자라는 것입니다. 다 잃고 보다 크고 참된 모습과 부딪치는 자리에서만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세상을 바라보게 될 때, 더욱이나 한국의 실정을 바라보게 될 때, 여러분들이 대학을 다니고 대학원을 다녀요? 무슨 학박사가 되어요? 마음을 팔아먹고 심정을 팔아먹고 선을 유린한 여러분입니다. 지금 한민족은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에게 이끌려 광야에 나갔던 때와 같은 시대에 처해 있습니다. 광야에서 모세가 쓰러졌을 때 여호수아와 갈렙과 같은 새로운 지도자가 나온 것처럼 이 땅에도 새로운 지도자가 나와야 할 단계에 와 있습니다.
그러면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은 무엇이뇨? 이 민족이 살길은 무엇이뇨? 이 민족의 청년 남녀들이 어떠한 국가적인 이념, 더 나아가서 천적인 이념을 심정을 기반으로 하여 무장하는 것입니다. 그렇게만 한다면 이 민족은 세계를 지도할 수 있게 됩니다. 지금 한국이 고통을 받고 고충을 겪는 것이 이 민족에게는 나쁜 것 같지만, 이것은 하늘이 하나의 중심을 세우기 위하여 그렇게 움직여 나오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반드시 한국 청년들을 움직일 수 있는 새로운 무엇이 나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무엇이 나오려니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불교, 유교 할 것 없이 전부 싸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마음이 참 가고 싶어 하는 그곳을 찾아가려면 지금까지 인연되어 있는 것을 모두 끊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도의 길을 가려면 모든 것을 청산하고 나서라고 했습니다. 모든 것을 청산하고 출발하라고 했습니다.
한국은 남북으로 갈라져 있습니다. 부모와 자식이 갈라지고 남편과 아내가 갈라지고 다 갈라졌습니다. 교회는 교회대로, 사회는 사회대로 갈라져 있습니다. 이것에 대한 방침이 세워지지 않는다면 이 민족은 망합니다. 여러분, 문예부흥시대를 아시지요? 역사를 상고하여 역사적인 심정을 탐지해 들어가 보면 그 시대적인 사조에 새로운 충격을 가한 것이 문예부흥입니다. 중세의 봉건사회를 걸어 놓고 문예부흥을 일으킨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정은 역사의 저변을 통하여 지금 우리의 생활 밑창을 흐르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가던 발걸음을 돌이켜 타락하기 전의 인간조상을 대하시던 하나님의 심정을 찾아야 합니다. 타락한 우리의 선조를 대하시던 하나님이 아니라 타락하기 전의 우리의 선조를 애지중지하며 대하시던 하나님의 심정, 지으신 아들딸을 만물 앞에, 혹은 천상세계와 지상세계 앞에 자랑하고 싶고, 품고 사랑해 주고 싶어하시던 하나님의 심정을 찾아야만 합니다. 이제는 그게 필요합니다. 아담이 타락한 후의 하나님의 심정은 아무도 모릅니다. 알고 보면 눈물 바가지요, 고통 바가지요, 슬픔 바가지라는 것입니다. 그걸 알면 통곡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담이 타락하던 장면을 여러분이 체휼해 보게 되면 십년을 울어도 다 끝낼 수 없는 그런 북받쳐 오르는 하나님의 사정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제 이러한 슬픔의 역사, 고통의 역사는 다 지나가야 합니다. 이런 모든 비애의 근원이 사탄과 더불어 이루어졌다 할진대, 이것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먼저 아버지의 심정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성경 해설자도 많았고 신학박사도 많았습니다. 이러한 것은 다 지나가야 합니다. 신학이란 말도 들어 보지 못하던 태초의 아담 해와와 같이 순진무구한 어린아이의 심정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성경에서도 어린아이와 같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죄를 짓기 전의 아담 해와와 같은 입장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만일 아담 해와가 아버지 품에 안겨서 아버지의 뺨을 긁든가 쥐어박든가 어떠한 행동을 하더라도 그 행동 모두를 선이라고 공인받을 수 있는 입장이 되었다면, 우리는 이 같은 처참한 자리에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선조 때부터 그러한 한 때를 갖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만일 인간이 참된 자식이 되었다면 아무리 원망을 해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수고스러운 자리에 나가게 되더라도 원망할 수 없는 인연의 세계가 선의 세계입니다.
여러분, 성경도 필요하고, 교회도 필요하고, 동지도 필요하고, 스승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 천지가 황무지가 되었거늘, 교회가 없어서 황무지가 된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이 흉년이 들었거늘 무엇이 없어서 흉년이 든 게 아닙니다. 참다운 사람이 없으니 황무지요, 참다운 심정의 발판이 없으니 메마른 땅이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들이 제단을 앞에 놓고 하늘 앞에 요구하여야 할 것은 무엇이뇨? 성경에도 ‘네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 교회를 사랑하라고 하였습니까? 정성을 다하여 자식을 사랑하라고 하였습니까? 아닙니다. 수많은 교회나 교파, 종파를 막론하고 본질적으로 틀려먹었다는 것입니다. 정성을 들이는 것도 내 아들 때문이고, 내 남편 때문이고, 내 아내 때문입니다. 그런 법이 어디 있어요? 만일 그렇다면 성경에 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 대신 네 아들딸을 더 사랑하라고 해야지요. 안 그렇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을 더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역사적인 고통을 넘어서야 되겠습니다. 역사적인 고통과 역사적인 슬픔과 역사적인 사망권을 청산해 버려야 하겠습니다. 여기서 청산해야만 됩니다. 역사적인 고통과 슬픔과 사망권이 내 마음을 얽매고 내 심정까지도 얽매고 있습니다. 내 생활과 내 몸과 내 마음과 내 심정까지 얽어맨 철천지원수의 발길을 물리쳐야 합니다. 자기의 몸을 쳐서라도 물리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원수는 상대방이 아닙니다. 여러분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는 몸이 원수요, 몸에 대해서는 생활환경이 원수입니다.
우리는 역사적인 비애가 되었던 모든 것을 청산해 버리고 타락 전 아담 해와를 대하시던 하나님의 기쁜 모습을 맞이하여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대해 타락한 아들딸이라는 감정을 해소할 수 있는 날을 학수고대하고 계십니다. 만일 아들딸을 구해 하나님 앞에 세워 놓았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대하실 때 너희는 죄악세계에서 죄를 범한 후손들이고, 그런 혈통을 받은 자식들이라는 감정을 잊어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라야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모실 수 있는 것입니다. 죄의 감정이 남아 있으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죄의 감정을 초월하여 아버지 앞에 나가면 부끄러움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자가 있다 할진대 그 사람은 사탄이 침범하지 못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교회를 찾습니다. 좋습니다. 교회에 와서는 ‘역사적인 하나님의 심정이 이랬구나, 시대적인 하나님의 심정이 이렇구나, 다시 오시는 아버지의 심정이 이렇겠구나’ 하는 것을 알아 가지고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릴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놈의 원수를 갚고 굴복시키고야 말겠다고 영원을 걸어 놓고 맹세할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역사적인 모든 것을 밟고 넘어설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들이 소망하고, 온 천주가 바라고 찾고 있는 ‘참 가고 싶은 곳’으로 가야 합니다. 여러분, 그것에 대하여 더러 생각 안 해 봅니까? 죄를 짓기 전 하나님의 뒤를 좇으며 하나님의 보호 아래서 자라던 아담을 그리워해야 합니다. 제아무리 잘 생기고 제아무리 잘났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모두 타락의 종족이요, 타락의 혈통을 벗어나지 못한 인간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죄짓기 전 본연의 아담의 성상을 보고 즐거워할 수 있고, 그 성상을 통하여 하나님을 노래할 수 있는 그런 존재를 찾아야 됩니다. 그런 심정을 가진 자를 찾아야만 심판으로 불살라 버릴 이 세상을 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원칙적인 관에서 바라보게 될 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역사노정에 없었습니다. 어떠한 영웅, 어떠한 성인, 어떠한 성현들도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이제는 지금까지 믿었던 도를 버려야 할 때입니다. 불교를 믿던 사람들은 불교를 버려야 합니다. 석가모니 자신이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어떠한 도(道)도 근본문제를 해결하여 하나님의 심정과 인연을 맺어주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것을 다시 맺어 주기 위하여 오시는 분이 재림주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그 분이 구름을 타고 오실 줄 알고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심정과 본연의 아담의 심정이 인류의 심정에 스며들 수 있는 길을 터놓기 위한 역사적인 사명을 띤 분이 나타나야 할 것이거늘, 그 분이 불교에서 말하는 미륵불이요, 유교에서 말하는 진인이요, 기독교에서 말하는 재림 예수입니다. 이는 이름만 다를 뿐 결국은 한 사람입니다.
천국에는 어떠한 사람이 들어가느냐?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이 들어갑니다. 그러려면 하나님이 아담 해와를 지어 놓으시고 기뻐하시던 그 심정의 인연을 다시 회복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천지 만물을 지어 놓으시고, 죄 짓기 전의 아담 해와를 바라보시며 기뻐하시던 그 기쁨의 감정을 어떻게 회복시키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을 회복시켜 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본연의 심정을 갖추어 역사적인 한을 다 제거하고 사탄을 굴복시켜야 합니다. 그렇게 하여야 ‘야 천사장아!’ 하면 ‘예이!’ 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래는 종이었던 천사장이 사탄이 된 것입니다. 이놈이 심부름꾼 주제에 주인의 아들딸을 유린했습니다. 그런고로 인간은 그 종과의 인연을 끊고 하나님과 심정적인 인연을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곳에 못 들어갑니다.
우리는 문을 열어야 합니다. 무슨 문을? 진리의 문, 인격의 문, 심정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성경을 중심삼고 근본문제를 완전히 해명해야 합니다. 이 문제를 해결한 후에 완전한 인격의 문을 통과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과한 후에는 완전한 심정의 기준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아직까지 멀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믿는다는 사람들을 보면 자기 딴에 잘난 척 떡 버티고 서서는 ‘나는 진단(眞端)이고 너희는 이단(異端)이다.’라고 합니다. 어떻게 그런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까? 과거를 보십시오. 처음엔 구교가 신교에게 ‘이놈들!’ 했는데 어떻게 됐습니까?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구교가 신교에게 몰렸습니다. 모든 것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지금은 세상의 수준이 높아지는 반면에 교회는 내려갑니다. 세상이 올라가기 전에는 교회가 올라갔습니다. 올라갔는데 하나님 이상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세상을 올라가게 하고 교회를 내려가게 했습니다. 그리하여 중세 기독교 봉건사회는 깨지게 됐습니다. 어느 교회나 교파든지 한번은 득세합니다. 그러다가는 내려갑니다. 내려갈 때는 자리 잡으라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에 있어서 기독교가 이 정권하에서 전부를 움직여 나왔지요? 그러나 이제는 내려가야 할 때가 됐습니다. 내려가면 얼굴을 못 들고 엎드려서 기도나 해야 합니다. 죄인이라고 해야 합니다. 그러면 소망이 있을 것이로되, 그러지 않고 뻘떡대다가는 다칩니다. 세상 사람들이, 제삼자들이 들이친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놈들 때려잡아라.’ 하는 일들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번에 남한 각지를 쭉 돌아보고 왔는데 가는 곳곳마다 예수 믿는 사람을 전부 다 원수라고 합디다. 여기에 누군가 불만 붙여 놓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니 갈 길을 바로 가지 못할 때에는 악한 원수를 불러들여 칩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십시오.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통일교회는 고맙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가만있는데 세상에서 자꾸 쳐주니 고맙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교회가 무너지고, 신앙하는 데 있어서 중심을 잡지 못하고 허덕이는 자리에 있다 할지라도 낙망하지 마십시오. 낙망은 왜 하게 되느냐? 사람을 보니까 그렇습니다. 사람을 바라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눈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어야 합니다. 만일 인간이 타락하지 않고 근본적으로 잘 되었다면 90도 이하를 바라보면서 살 수 있는 것인데 타락하였기 때문에 눈은 하늘을 바라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자들에게는 90도 이하를 바라보는 것이 용납되지 않습니다. 하늘을 바라보아야 됩니다. 그런데 땅을 바라보고 가다가는 망합니다. 나를 중심삼고 가다가는 망합니다.
이제 이 시대에 있어서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수습해야 합니다. 생활에서부터 몸, 마음, 심정에 이르기까지 전부 수습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심정의 기반은 어디에 두어야 할 것이뇨? 신령한 목사에 두지 마십시오. 신령한 교파에도 두지 말란 말입니다. 통일교회에도 두지 말란 말입니다. 심정의 기반은 역사노정에 두는 것이 아니라 타락하기 전 아담 해와의 심정에 두어야 합니다. 그래야 됩니다. 그래 가지고 그 심정을 통하여 하늘과 더불어 오늘의 생활감정과 시대적인 모든 사조를 소화시키고, 하늘과 더불어 해결짓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러한 아들딸들이 이 땅 위에 나와야 합니다.
여러분들 생각해 보십시오. 성경의 창세기 1장도 해결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심정의 동산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창세기 2장의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부터 해결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근본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알아야 무엇을 하지 무지해 가지고는 완성할 수 없습니다. 그냥 믿기만 하면 될 것 같아요? 믿고 될 것 같으면 여기서 말하는 사람이 이렇게 핍박을 안 받을 것입니다. 이렇게 욕을 안 먹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남이 모르는 핍박의 길을 자진하여 찾아왔습니다. 출발한 길이 망하는 길이면 모르거니와, 그렇지 않다 할진대 이 길을 처음 나선 그 날의 결심을 버리지 마십시오, 그날의 결심을.
이 길을 가는 데는 폭풍우가 거세게 몰아치고 가시밭길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바라보고 나가는 그 길에는 하늘의 핏자국이 어려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가는 길은 결코 여러분 자신만이 가는 길이 아닙니다. 여러분 자신은 처음으로 가는 길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길을 몇 천만번이나 걸으셨습니다. 그 길에는 그분이 걸으시면서 흘린 핏자국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아브라함도 그 길을 갔고, 노아도 그 길을 갔고, 모세도 그 길을 갔고, 예수도 그 길을 갔고, 예수 이후에 수많은 성도들도 그 길을 갔거늘, 여러분은 그 길 가기가 싫습니까? 그러면 천상(天上)에 가서 벌을 받아야 됩니다. 그 길을 가려면 천적인 정통을 세운다는 심정이 있어야 합니다. 한 발자국 내디딜 때마다 선조의 피가 끓는다는 것을 느끼고, 가시가 내 몸을 스칠 때에는 선조의 피 살을 찢던 그 가시가 내 몸을 찢는다는 것을 느껴야 되겠습니다.
그렇게 간 사람은 시대적인 개인이로되 한 시대에 그치는 인물이 아닙니다. 6천년 동안 아버지와 함께 간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 이 길을 가다가 쇠고랑에 얽매여 영어의 몸이 된다 할지라도, 황공함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찾으시던 이 길, 이 자리에 불초하고 멸망할 수밖에 없는 죄인의 후손인 이 몸이 이런 영광된 자리에 참석할 수 있다니, 황공하옵니다. 수많은 순교자들이 거룩한 피를 흘린 이 터전 위에 더러운 이 몸이 발을 들여놓을 수 있다니 황공하옵니다.’ 해야 합니다.
통일의 용사 여러분! 여러분들은 최후의 길인 이 길을 가야 합니다. 참 가고 싶은 그 한 곳이 있기 때문에 수많은 선지자들이 그런 길을 갔고, 참 가야 할 길이기에 우리는 기필코 이 길을 가야 하겠습니다. 이 길을 따라 가다가 몸이 찢겨 눈물을 흘리게 될 때에 그것은 나 홀로 흘리는 눈물이 아닙니다. 그런 길을 걸으며 찢김 당한 수많은 선지들이 같이 울어주는 눈물입니다. 그래서 지상에서 그런 길을 가는 사람을 역사적인 산 실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모습으로 하나님을 상봉하여 ‘아버지’ 하고 붙드는 그 순간에는 천지가 아득해지는 것 같은 감격을 느낄 것입니다.
누구한테 억울한 사정을 한마디도 말하지 못하고 마음에 못이 박힌 하늘입니다. 그 못은 사탄이 박았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못은 죄악까지도 수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려면 상대적 관계가 벌어져야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딸이 있다 할진대 그들을 통하여 사탄까지도 용서해 주고 싶은 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입니다. 이제까지 반대하던 사탄이 하나님의 아들딸 앞에 경배하는 날에는 그 사탄을 무조건 용서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의 못은 죄악도 수습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할 수 있는 아들을 대하여 사탄까지도 동정하고 그리워하게 되면 치질 못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심판을 안 받는 것은, 예수를 사랑하고 예수를 위하여 피 흘린 흔적을 갖고 있으며 예수가 남긴 심정적 인연을 붙들고 몸부림친 사랑의 인연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이 사랑의 인연을 가진 존재는 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드린 것 다 잊어도 좋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개체는 역사의 선물입니다. 비록 눈먼 봉사요, 언청이요, 병신일지라도 그들에게는 선조의 유업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도 하늘이 보낸 귀중한 선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몸이 악담을 할 때에는 역사가 슬퍼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몸이 비관을 할 때에는 심정을 통해 천성에서까지 비관을 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 몸이 낙망할 때에는 하늘나라의 수천만 사람들이 낙망하여 서글픔에 사무치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이러한 사실을 실감적으로 느낀다 할진대, 백 번 죽는 한이 있더라도 하늘을 원망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가면 갈수록 알면 알수록 머리를 숙이고, 나중에는 손 하나도 조심스럽게 움직일 수 있는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그러한 심정에 사무쳐 일년을 지내 보았습니까? 그렇게 지냈다면 그 일년은 여러분 앞에 영원히 남아지는 것입니다. 만일 그러한 기준이 여러분에게서 사라지게 되면 그 일년은 천상에 가서 말할 수 없이 큰 참소의 조건이 됩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그 기준을 잃어버리면 망합니다. 망해도 깨깨 망합니다.
그러기에 하늘 앞에 충성을 했다 하더라도 했다고 생각하지 말고,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란 말입니다. 내가 몸이 찢기면서도 달려 나가는 그 힘은 내 자체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힘입니다. 아버지의 힘을 동맥을 통하여 나에게 주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주관을 해주었기 때문에 그 힘이 나온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내가 찢기는 것은 아버지가 찢기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렇게 걸어왔다고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자랑할 것이 없어요.
여러분은 그런 노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적인 슬픔과 사정을 알고, 또 하나님이 겪으시는 모든 고통을 체험하면서 새로운 식구가 연결되고 연결되어서 아버지 앞에 부름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하나의 민족을 세우고 하나의 국가를 형성하여 세계적인 새로운 주권의 세계를 복귀하는 것이, 하나님이 이 땅의 인간을 대하여 섭리하시는 최후의 목적입니다. 그 중심은 무엇이뇨? 타락 전 아담 해와의 심정적인 기준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타락한 아담 해와는 몰랐지만 우리는 사탄의 모든 사실을 다 해명하여 다시는 사탄의 침범을 받지 않는 심정적인 기준을 갖추어 역사적인 사탄까지도 주관할 수 있는 자리에 서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통하여 하늘과 땅을 호령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하나님의 직계 아들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내 아들아 딸아, 이제는 네 때요 네 날이다. 이제는 네 마음대로 할 수 있다.’라고 축복을 받는 그 날까지 나아가야만 비로소 참 바라던 그 곳, 참 가고 싶은 그 곳에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역사적인 죄상을 청산하고 역사적인 사망의 울타리를 청산하여 하나님의 창조이상을 이룰 수 있는 심정을 갖추어야 합니다. 역사적인 사망의 권세를 역사적인 생명의 권세로, 역사적인 죄를 청산하여 역사적인 선으로 복귀해야 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역사적인 하늘의 심정을 세울 줄 아는 여러분이 되어야 비로소 참 가고 싶었던 본연의 세계에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후 여러분들은 이러한 관점에서 자신들이 어떠한 위치에 있는가를 스스로 알고 성별하는 데 있어서 무자비한 투쟁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하기 바랍니다.
아버님, 저희들은 큰 것을 잃어버린 것을 알지 못하였사옵니다. 이러저러한 곡절과 역사적인 슬픔을 안고 사라져 갔던 우리 선조의 사정을 회고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모든 죄악을 청산해야 할 마지막 때이기에, 오늘 저희들의 마음은 심히 초조함을 느끼고 있사옵니다. 이 땅에는 고통의 신음이 꽉 차 있사옵니다. 여기에 하늘의 옥동자를 출생시키시어 역사적인 고통과 죄상을 청산할 수 있게 함으로써 창조 당시의 아버지의 심정을 새롭게 꽃피울 수 있는 한 날이 오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승리적인 새로운 동산이 그로 말미암아 출발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그 때는 내가 아버지와 직접 상대할 수 있는 시대이기 때문에, 각자의 몸에서 사탄이 물러가고 아버지께서 내 마음에 깃들어 영원한 부자의 인연을 노래하고 동시에 만우주도 함께 송영을 드릴 수 있는 자유의 세상인줄 아옵니다. 그런 세상이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오니 현실적인 고통을 견딜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가야 할 길에는 아직도 피의 고비 고비가 남아 있고, 멀고 힘든 험산준령이 가로놓여 있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나 이 길은 저희만이 가는 길이 아니옵니다. 아버지께서 저희들보다 먼저 수십 번, 수천 번, 수만 번 왕래하신 길이옵니다.
이제 이 어려운 길을 아버지가 닦을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닦아 나가야 한다는 사실도 알았사옵니다. 험한 길을 오시느라 수고하신 아버지를 위하여 저희들이 최후의 한 걸음을 옮길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가야 할 길이 남아 있사오니, 가다가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아버지께서 걸어가신 그 발자국을 밟고, 아버지께서 남기신 핏자국을 본받으면서 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찢기고 상처 입은 이 몸을 아버지 앞에 산 제물로 바치게 될 때, 아버지께서 만천하에 자녀의 명분을 세워 주시며 축복해 주신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그러한 자리까지 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사오니 그곳에 갈 때까지 지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지칠 때마다 아버지께서는 저희들을 부축해 주셨고, 낙망하고 외로워할 적마다 하늘은 저희를 재촉하여 주셨으며, 저희가 수고하기 전에 이미 아버지께서는 몇 백 번, 몇 천 번 저희를 위해 수고하신 사실을 잊어버리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무형의 존재로서 실체를 가진 인간과 인연을 맺어 자극을 주고 깨우쳐 주기가 얼마나 힘들다는 것을 저희들은 배웠사옵나이다.
이 길을 쉴 새 없이 개척해 오신 아버지였사옵니다. 쉬지 않고 반대해 나오는 사탄이 있기에 이 길을 개척하기 위해 쉴 새 없이 수고의 역사를 해 나오시고, 내 한 개체의 생명을 위해서 지칠 줄 모르고 싸워 나오신 아버지이심을 알고 황공한 마음으로 아버지를 붙잡고 싶은 마음이 사무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애달픈 마음이 사무쳐 미칠 듯이 아버지를 부르는 안타까운 심정이 저희 각자의 마음에 폭발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한 자를 아버지께서 위로하여 주시고, 그러한 자를 수습하시어 새로운 약속의 세계, 천적인 위업을 약속해 주시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그 자리를 확정할 때까지 끝까지 참아 승리의 영광과 승리의 개가를 온 천주 앞에 높이 올릴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오면서,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였사옵니다. 아멘.
인간의 모든 운명은 18~24세 사이에 있어서의 태도(신념과 방향) 여하에 따라 좌우됩니다.
신념을 갖고 사는 사람의 결과는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나타납니다.
신념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그의 현실이 화려할지라도 도중에 꺾일 우려가 많고, 신념이 서 있는 사람은 가는 노정이 미미하고 어려울지라도 끝까지 관철할 수 있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지식을 가진 사람도 신념을 가진 사람에겐 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성경에도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하라고 했지 지식을 다하라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신념이 서 있는 사람은 곡절이 많으면 많을수록 꺾이지 않고, 극복하고 넘어갑니다. 그리하여 그 결과는 더욱 빛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인간의 신념뿐만 아니라 천주적인 신념도 있고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신념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신념과 인간의 신념이 하나되는 것을 목표로 역사를 섭리하여 내려온 것이 하나님의 역사인데, 그 방편으로 종교가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념은 곧 창조목적을 달성하려는 신념입니이다. 그 내용은 하늘을 먼저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고 만우주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즉 천지인(天地人)이 사랑을 중심삼은 하나의 세계를 이루자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입니다.
끝날에는 이와 같은 신념을 가진 사람이라면 결코 심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멸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말씀 요지> 만물이 우리 인간이 타락됨으로 말미암아 탄식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도 복귀해야 합니다. 만물을 창조한 후에 인간을 지었기 때문에 만물복귀를 하기 위한 성별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과 싸우고 있음은 물론 사탄과 싸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뜻을 판단할 지능이 없을 때에는 무조건 순종해야 합니다.
탕감을 하기 위하여는 물건을 조건으로 삼습니다. 우리가 십일조를 하늘 앞에 바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9수는 타락세계의 수요, 10수는 이것을 벗는 수요, 하늘세계의 수입니다.
만물의 종자를 타락인간이 먼저 땄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성별(聖別)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가나안 복귀에 있어서도 3년의 성별기간이 있었습니다.
모든 식물의 종자 하나 하나도 성별한 것으로 남겨 놓아야 합니다. 이 한반도를 우리의 손으로 녹화(綠化)해야 합니다. 많은 산이 나무로 푸르러지는 것을 보아 이 녹화는 용이한 것입니다. 일생 동안 120주 내지 360주의 나무를 심어야 합니다. 인간은 땅 위에 산 인연을 영원히 남겨야 합니다. 앞으로 3년간 이런 일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4천년 역사를 2년 8개월로 탕감하려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세 제자를 둔 것은 사랑하는 아들딸을 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제1이스라엘의 조상이 되어 제2이스라엘을 세우려 하셨습니다. 제1이스라엘의 조상이 되려면 그때 12지파를 수습해야 했었습니다. 그러므로 제1이스라엘의 대표로 3제자와 12제자를 세우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예수님과 하나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망한 이스라엘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이루려 했던 이 뜻은 연장되어 제1, 제2이스라엘을 찾아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이후에 죽은 전세계의 기독교인들은 영계(靈界)에서 제1이스라엘을 형성했습니다. 이것이 지상에서 이루어지지 못하고 영적인 세계에서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지상의 기독교 신자는 예수님 당시의 제1이스라엘에 해당합니다.
재림주는 제3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제1, 제2이스라엘의 조상으로 와야 합니다. 우리 식구는 예수님 당시의 제1이스라엘이 의심하던 것과 같은 그런 자리를 넘어서서 아버지의 심정을 통하여 아버지의 뱃속에 있는 자녀와 같은 입장에 서야 합니다. 재림주는 영계를 수습해야 합니다. 영계를 수습하고 옴으로써 제1이스라엘을 세운 기대(基臺)위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영계에 있는 사람들은 참부모와의 인연을 가지고 있지 못하므로 이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영계에는 12지파형(一二支派型)이 있지만 제2이스라엘이 되어야 할 기독교는 지파 편성을 할 수 있는 중심을 잃었습니다. 그러므로 통일의 이념을 세워 지파 편성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40년 광야노정 중 애급에서 태어난 이스라엘 백성들이 세우지 못한 가나안 복귀의 목적을, 여호수아와 갈렙이 담대한 믿음과 용기로 이루었던 것과 같이 굳건한 믿음과 용기로 이루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파편성을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를 제2이스라엘의 지파로 세워야 합니다. 이것을 이루려면 예수님의 3년 공생애를 방불케 하는 역경의 노정을 뚫고 나아가야 합니다.
제1이스라엘을 영계에 보내고 제2이스라엘을 지상에 세워 그것을 터로 하여 제3이스라엘을 지상에 세워야 합니다. 예수님이 찾지 못한 제2이스라엘을 다시 찾아 세우려는 것이 지난 2천년의 기독교 역사입니다. 제2이스라엘을 찾아 세워야 할 기독교가 책임을 다 못 했으니 우리는 제2이스라엘의 조상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자유로이 대할 수 있는 제2이스라엘을 찾아 세워야 합니다. 이제 3년간은 이것을 찾아 세우기 위한 근본복귀를 하는 기간입니다. 부모의 심정으로 자녀를 찾아야 합니다. 부모가 되려면 자녀를 낳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아버지의 뱃속과 어머니의 뱃속을 거쳐 낳은 자녀와 같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가인적인 믿음의 자녀를 세워서 그를 아벨적인 친혈족과 같은 입장에 세움으로써 가인 아벨을 복귀한 입장에 서야 합니다.
재림주는 제1, 제2, 제3이스라엘의 심정을 통과해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아담 하나를 찾아 나오는 때였기 때문에 모자가 협조를 했지만 이제부터는 부녀가 협조를 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의 자녀를 축복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아야 합니다. 아들을 찾아오다 쓰러진 부모의 심정을 붙들고 위로할 수 있는 효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인격 기준은 우리가 통곡할 때 아버지께서 어느 정도 눈물을 흘릴 것인가 하는 것으로 결정됩니다. 6천년을 찾아오신 아버지도 위신을 잃어버리고 통곡할 수 있어야 합니다.
타락세계의 부모들도 사랑하는 자식이 죽어갈 때는 하늘땅이 무너져도 이것을 구하려는 심정을 갖거늘 사랑의 하나님은 더할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잊어도 좋습니다. 그러나 하늘을 감동시킬 수 있고, 형제를 감동시킬 수 있고, 땅을 감동시킬 수 있는 눈물을 흘릴 줄 알아야 합니다.
전도는 아버지 대신 잃어버린 자식을 찾는 심정으로 해야 합니다. 감옥살이를 하더라도 이것만은 해야 합니다. 지옥을 뚫고서야 천국을 찾습니다. 그러므로 최하에서 최고까지 복귀해야 합니다.
선생님이 가더라도 뜻은 기필코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선하고 지혜로운 싸움을 하려 합니다. 양자를 먼저 만들어 놓고야 부모의 자리에까지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한을 남기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3년 동안만이라도 일편단심 변치 말기를 바랍니다.
아버지, 이제 저희들이 당신의 무릎 앞에 엎드렸사오니 일일이 분부하여 주시옵소서.
어린애와 같은 저희들이옵니다. 더욱이나 헐벗고 굶주린 어린애입니다. 저희는 몸에 상처를 입었사오며 굶주려 있사옵니다. 그러나 저희는 당신께서 친아버지로 지금까지 저희를 찾아오신 줄 알기에, 저희의 상처와 저희의 모습이 어떠한가 하는 것도 잊어버리고 아버지의 말씀이 그립고 아버지의 음성이 그리워서 당신을 내 아버지라 부르며 나왔사옵니다.
아버지, 당신의 심정을 대신한 자녀를 찾는 것이 아버지의 소원이옵고, 잃어버린 아버지를 다시 모시는 것이 자녀의 소원인 것을 저희들은 아옵니다. 아버님, 이 시간 불쌍한 저희들을 보시고 아버지께서 눈물을 흘리시며 긍휼히 여길 수 있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시옵고, 저희는 아버지의 긍휼의 품에 품기어 한없이 후회하면서 뉘우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하늘은 잘난 자만 찾지 않는 것을 아옵니다. 또한 타락한 이 땅 위에는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릴 그 무엇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나이다. 다만 죄악의 늪에서 허덕이는 자기 자신을 뉘우치고, 아버지의 서글픈 심정에 사무쳐 머리 숙여 눈물을 흘리는 자를 품어 주시고 찾고 계신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지, 저희들이 걸어온 발걸음이 그러하고, 저희의 심정이 그러하옵거든 오늘 저희들을 대하여 주시고 품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를 모시고 머리 숙여 경배하는 이 날 이 시간, 하늘과 땅이 하나 될 수 있는 심정의 인연이 높이 드러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심장을 통하여 뿜어 나오는 환희에 찬 피가 저희의 동맥에 뻗쳐 흐를 수 있는 이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아버지의 가슴이자 저희의 가슴이요, 아버지의 심정이자 저희의 심정이요, 아버지의 감각이자 저희의 감각이 되어 한스러웠던 아버지의 고통을 저희들이 체험하게 하시고, 슬프셨던 아버지의 사정을 체휼할 수 있는 이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여기에 모인 당신의 아들딸들을 버려 두지 마옵소서. 그리워하셨던 이들의 마음의 문을 열어 주시옵고, 아버지께서 하시고 싶은 그 말씀을 이들의 마음 깊이 느낄 수 있는 이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 아버지의 말씀을 전하고자 하오니, 아버지,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어린애의 심정으로 돌아가 아버지의 그 심정만을 좇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 슬프면 저희도 슬픈 심정, 아버지께서 기쁘면 저희도 기쁜 심정, 아버지께서 억울하면 저희도 억울한 심정이 되어 심정을 통하여 말하고, 심정을 통하여 받고, 심정을 통하여 하나될 수 있는 이 시간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그렇지 못할진대, 황무지와 같고 광야와 같고 쓸쓸한 빈 들판과 같은 이 땅에 살고 있는 삼천만 민중의 심정을 녹여내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하늘 앞에 불길처럼 타오르는 뜨거운 심정만이 이 민족 앞에 필요한 것을 아옵니다. 이것을 위해서는 저희들이 눈물의 길을 자진해서 걷지 않으면 안 될 것이며, 십자가의 길과 핍박의 길을 개척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며, 고난과 더불어 죽음과 더불어 싸움의 길을 개척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옵니다. 이러한 책임이 저희에게 있음을 알았사오니, 이를 감당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시옵고 능(能)을 가하여 주시옵소서.
새로운 각오와 결심으로 내일을 위하여 싸울 수 있는 강한 당신의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말씀을 보았사오니 2천년 전 예수님에게 세례를 주던 세례 요한의 모습을 그리워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는 30여 년의 생애노정에 있어서 먹을 것을 먹지 못하였고, 입을 것을 입지 못하였습니다. 먹은 것은 석청과 메뚜기였고, 입은 것은 가죽 옷 뿐이었습니다. 초조한 심정, 정성들인 그 한 몸에는 하늘의 슬픔의 자국 자국이 남아 있었사오나, 슬픔의 그 주인공을 심정으로 대하지 못할 때는 그것이 도리어 화로 변한 것을 알았사오니, 세례 요한이 외치던 그 음성을 오늘 여기에 모인 당신의 아들딸들도 심정으로 느끼게 하여 주시옵소서.
세례 요한에게 머리를 숙여 세례를 받던 예수의 모습을 심정으로 모셔 들일 수 있는 자가 되지 못하면, 2천년 전에 이스라엘 민족이 저끄린 죄상(罪狀)을 거듭 저지르게 된다는 것을 배웠사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아버지 앞에 새로운 봉화를 들고 나서는 세례 요한이 되게 하여 주시옵고, 예수의 대신자가 될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잠들어 있는 이 땅, 사망의 물결이 짙어 가는 이 땅 위에 아버지의 생명과 영광의 흔적을 드높여, 잠든 자들의 마음 골짝 골짝을 다시 한 번 깨우쳐 일으켜 세울 수 있는 하늘의 역사가 이 천지에 나타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를 위하여 저희들의 손과 발이 필요하고 몸이 필요한 것을 알았사옵니다. 명령하시는 대로 어느 곳이든지 가겠다고 아버지 앞에 맹세한 바 있사오니, 저희의 모든 것을 몽땅 아버지 것으로 사용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런 뜻을 위하여 이 시간 새로운 각오와 결의를 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 아버지와 아버지의 뜻을 대할 수 있고 영원히 기억될 수 있는 저희들의 모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올 때,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나이다. 아멘.
<말 씀> 이 시간 여러분에게 ‘우리를 위하여 당하신 일들’이란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하늘과 땅이 누구의 것이냐 하면, 아버지의 것인 동시에 우리의 것입니다. 이 하늘과 땅은 어떠한 하늘, 어떠한 땅이 되어야 하느냐 하면 선의 하늘과 선의 땅이 되어야 합니다. 선의 땅이기에 그 땅에 존재하는 것은 어떠한 것이라도 선해야 합니다. 선으로 출발하여 선의 목적을 그리면서 하나님 앞에 기쁨의 조건을 제시하는 천지여야 합니다. 그런데 그와는 반대로 고통의 하늘이 되었고, 고통의 땅이 되었으며, 악의 땅이 되었고, 악과 싸워야만 하는 하늘의 입장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선으로 시작하여 선으로 종결되어야 하며, 또 그 과정의 어떠한 현상도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않는 것이 없어야 할 천지였는데, 그 천지는 간 곳이 없고, 대하는 곳곳마다 슬픔이요, 대하는 사람마다 울음이 나오고, 고통을 느껴야 하는 천지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슬픈 사정을 대할 수밖에 없는 것이 하나님의 입장입니다. 그런 입장에 계시면서도 우리들을 다시 품어야 하는 게 하나님의 고통임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슬픔으로 시작되어야 할 세상이 아니었고, 고통으로 출발해야 할 세상이 아니었고, 죽음이나 낙망으로 결실을 맺어야 할 이 땅이 아니었건만 어찌하여 이러한 결과를 초래했고, 어찌하여 이러한 과정적인 역사노정을 거쳐 왔는고! 이 곡절의 원인이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있습니다. 보기에는 지극히 작고 아무것도 아닌 이 한 몸이 동기가 되어 하늘에 대해 슬픔을 저끄러 놓았고, 역사노정에 고통과 죽음을 저끄러 놓은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우리는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볼 수 없고 땅을 바라다 볼 수도 없는 죄인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내 눈이 그러하고, 내 손발이 그러하고, 내 몸이 그러하고, 일체의 감정까지도 그러하다는 것을 알아야 할 때가 왔습니다.
오늘 내가 생명을 영위해 나가는 생활노정에 관계되어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기쁨으로 바라볼 수 있는 입장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기쁨으로 취할 수 있는 입장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소망으로 대할 수 있는 자리에서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전부가 반대의 입장에서 시작되어 반대의 노정을 통하여 반대의 결실을 맺은 것임을 우리는 명백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느끼지 못하고 깨닫지 못할진대, 하늘이 우리를 위하여 어떠한 일을 당하셨다는 사실을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눈물을 흘리셨다고 외치는 자가 아무리 많다 할지라도 그 눈물이 나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피를 토하며 죽음의 자리에서 하늘의 사랑을 노래하는 자가 아무리 많다 할지라도 그 사랑은 우리와 하등의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타락되어 있는 자신인 것을 인정하고 이 운명의 노정을 개척하며 새로운 소망의 날을 흠모하고 있는 자신임을 인정할진대, 우리는 알아야 됩니다. 무엇을 알아야 되느뇨? 우리 자신이 이러이러한 참사를 일으킨 장본인이요, 역사적인 슬픔을 쌓아 놓은 장본인이요, 이 시간도 결과적으로 하늘에 대하여 슬픔의 조건을 연결시키고 있는 장본인임을 알고 우리는 그것을 밝혀야 합니다. 그러지 않는다 할진대 역사적인 하나님의 고통이 크고, 시대적인 하나님의 슬픔이 크다 할지라도, 우리는 어떠한 해결점을 지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날 우리들은 하늘땅 앞에 용서 받을 수 없는 역사적인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날 이 땅 위에 슬픈 사실이 있다 할진대 그것은 나 자신에서 시작된 것이요, 고통스러운 사실이 있다 할진대 그것도 나 자신에서 시작된 것이요, 죽고 쓰러지는 억울한 사실이 있다 할진대 그것도 나 자신으로부터 시작되고 연결된 것이라는 것을 느껴야 되겠습니다. 그래야만 이 사회의 슬프고 고통스러운 사실, 많은 사람이 죽고 쓰러지는 사실을 보면서 그것이 나 자신의 일로 느껴져서 책임지는 입장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나 한 개체를 연하여 있는 세상, 즉 대한민국이면 대한민국을 통하여 세계가 연하여 있고, 세계를 통하여 천주(天宙)가 연하여 있다 할진대, 오늘 이 나라에서 되어지는 모든 일들은 그 자체들로 말미암아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동기는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물론 오랜 역사가 흘러나오는 동기의 인연이 멀리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결국 나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며, 그 동기의 원인자로서 가담되어 있는 나 자신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이 세상의 슬픈 것을 보고 나의 슬픔으로 느끼고, 고통스러운 것을 보고 나의 고통으로 느끼며, 참혹한 것을 보고 나의 참혹함으로 느낄 줄 아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네 것이 아니라 내 것이요, 이 나라의 것이 아니라 내 것이라고 느끼며, 그것을 생활 무대에서 내가 대신하겠다는 심정이 스며들게 될 때, 거기서부터 비로소 새로운 혁명과 새로운 역사가 내 개인을 통하여 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회를 혁명할 수 있고 국가를 건설할 수 있는 원천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실 때의 목적은 타락한 인간을 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타락한 그날부터 하나님은 타락의 책임이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인간을 지은 자신에게 있다는 마음을 품으셨기에 복귀섭리의 뜻을 세우실 수 있었던 것을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복귀의 뜻을 세워 나오신 하나님이 그러하시거든 타락하여 복귀의 사업을 일으키게 한 우리 인간도, 이것이 나로 말미암아 되었다는 것을 느껴야 새로운 길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 하나를 개혁하는 것은 사회를 개혁하는 것이요, 국가를 개혁하는 것이라고 느껴야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이 사회, 국가와 인연되어 있는 나 자신의 모든 문제들을 깨끗이 청산한 후에야, 이 땅은 새로운 세계로 발전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회의 실상에 대하여 밝히 알면 이 사회는 나와 관계를 맺기가 어렵고, 내 심정이 반영되어 접할 수 있는 환경이 되어 있지 못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여기에서 부딪쳐 오는 슬픔과 고통으로 인하여 몸부림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사회와 나와의 관계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나아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도 그렇다는 것을 느껴야 됩니다. 그렇게 될 때에 하나님과 나와 이 세상이 인연맺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모든 슬픔의 조건을 만들어 놓은 자기 자신임을 알게 되고, 자신의 일생 일로(一生一路)가 편하지 못한 것을 알게 될 때, 여러분은 영원한 이념을 성취하기 위하여 6천년 동안 복귀섭리노정을 걸어 나오신 하나님의 심정세계에 얼마만한 고통이 뒤따랐는지도 헤아릴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 자신이 그런 입장에 들어가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하신 일이 어떠했으며,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시기 위하여 어떠한 싸움의 노정을 거쳐오셨는지를 회상할 때, 하나님과 내가 하나의 동기와 인연을 갖추어서 새로운 모습을 빚어낼 수 있는 복귀의 이념을 성취해 나가기 시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땅 위에 왔다 간 수많은 선지자들 중에 악한 이 세상을 보고 기쁨을 체휼하고 간 사람이 없었다는 거예요. 위인이나 성현들은 땅이 악하면 악할수록 이 땅을 위하여 눈물과 피와 땀을 흘렸고, 더 나아가서는 생명을 바치고 갔던 것입니다. 그것은 왜냐? 그렇게 된 원인이 바로 자신에게 있었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역사적인 위인을 찾고 있으며, 세계적인 지도자를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역사적인 위인도, 세계적인 지도자도 다 지나갑니다. 문제는 이 시대에서 나를 확실히 찾는 것입니다. 갖가지의 죄상을 가지고 있는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을 대신한, 그런 형상을 갖춘 모습임을 알고 스스로 비판을 하고 냉철히 심판할 수 있는 인격을 갖춘 내가 된다 할진대 이 땅 위에 훌륭한 지도자와 역사적인 성현이 있다 할지라도 그에게 전적으로 신세지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하늘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땅도 대신하고 있습니다. 내 마음은 하늘을 닮았고 내 몸은 땅에 처해 있는 연고로, 비록 내 일신(一身)이 지극히 작다 하더라도 내 일신이 움직이는 것은 천지가 움직이는 것과 같은 것이며, 하늘땅을 품고 하늘땅을 대신하여 행동하는 것입니다. 하늘은 아버지요, 땅은 아들이기에 내 마음이 하늘을 대신하고 내 몸이 땅을 대신한다 할진대, 내 마음은 아버지요 내 몸은 아들입니다. 이렇게 내 마음과 몸을 크게 보면 하늘과 땅이요, 작게 보면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늘에 고통이 있고 땅에 고통이 있는 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느뇨? 내 마음이 편하지 않고 내 몸이 편하지 않으니 하늘과 땅에 고통이 있는 것은 당연지사입니다. 이 마음에 고통이 있기를 원치 아니하고 이 몸에 슬픔이 있기를 원치 아니하여도, 거치는 곳곳마다 마음에는 고통이 있게 되고 몸에는 슬픈 일이 부딪히게 됩니다.
하늘과 땅을 대신한 이 마음과 몸의 싸움을 해결하지 못하는 한, 하늘과 땅에 있는 슬픔의 명사를 제거시키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당한 모든 일들은 우리의 몸과 마음에 반영됩니다. 몸이 행동하는 하나 하나마다 마음은 선의 목표를 지향하도록 환경을 단속하며 쉴 새 없이 노력합니다. 또 몸이 그 목적과 방향을 잃어버리고 사망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될 때, 마음은 몸을 향하여 선한 것을 바라보라고 권고합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생활 속에서 많이 느낄 것입니다. 그러기에 나 자신부터 해결해야 됩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늘을 대신한다 할진대 마음이 바라는 목표와 하늘이 바라는 목표가 일치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마음의 중심이라 할진대, 그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목표와 우리의 마음이 바라는 목표가 일치되어야 합니다. 또 몸과 마음이 하나되기 위해서 몸은 이 땅의 이상적인 기준과 일치되어야 하고 마음은 하나님이 목표하는 방향과 일치되어야 합니다. 역사적인 최후의 종말시대, 선의 이상세계가 기필코 올 것이거늘, 내 몸이 생활에서 선의 이념세계와 접할 수 있는 인연을 갖고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마음의 기준이 하나님의 기준과 갈라지게 될 때 고충이 생기게 되고, 몸의 생활 기준이 세계적인 이념과 상충될 때 또한 고충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어디서부터 시정(是正)할 것이뇨? 우리의 마음과 몸을 목적의 이념세계, 새로운 이념세계로 어떻게 시정할 것이뇨? 시정의 방법은 상대방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있습니다. 그러기에 선을 지향해 나가는 사람들은 양심을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들은 마음속에 어떠한 것이 옳다고 인정되면 그것을 근거로 삼아 그 원칙 밑에서 움직여 나갑니다. 그러기에 그들의 마음과 몸과 생활을 그런 방향으로 움직여 나간 것입니다.
그러면 어떠한 사람이 선한 사람일 것이냐? 하나님의 뜻과 내 뜻이 같은 사람이요, 하나님의 생활과 내 생활이 같은 사람이 선한 사람입니다. 타락의 인연으로부터 벗어난 사람이 선한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되는 것이 하나님이 바라는 최후의 목적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자기의 생활이 어디를 향하여 가고 있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의 이념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습니다. 자기의 마음의 중심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이렇게 혼돈되고 혼란된 위치에 처해 있는 우리 자신임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니 가다 보면 서로 부딪칩니다. 천 갈래 만 갈래로 갈라져 천태만상으로 행동을 하니 행동할 때마다 부딪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류역사를 섭리해 나오시는 하나님 앞에 좋은 열매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슬픔과 고통의 열매로 나타납니다. 인간들은 말할 수 없이 얼크러져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신다 할진대 하나님은 반드시 이렇게 얼크러진 인간들을 수습하고 구원해야 합니다. 수습하는 데는 인류 앞에 무엇을 제시하실 것이뇨? 천지에는 중심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이 중심을 대할 수 있는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지으셨으니 우리가 하나님의 목적이 될 수 있고, 동시에 하나님이 우리의 목적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원인과 결과의 관계이지만, 이 원인과 결과의 관계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상대적인 조건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소망이 있고, 새로운 창조적인 목적이 있고, 새로운 뜻이 있는 연고로 하나님과 우리는 하나가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야 할 뜻이 있다는 거예요.
아무리 내 몸과 마음이 하나되어 있더라도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몸과 마음이 하나된 나 자신이 선의 이념세계와 화할 수 있도록 생활권 내에서 전체적인 가치와 더불어 즐길 수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것은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에서 뿐만이 아니라 사람을 중심으로 하여 온 천주를 품고 즐거워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목적은 온 하늘땅과 화하여 하나가 되기 위해서라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타락하여 천 갈래 만 갈래로 갈라져 수습하려야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얼크러진 이 인류의 역사노정을, 혼돈된 이 세상을 수습하기 위하여 어느 한 곳에서부터 손을 대어 길을 닦아 나오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떠한 길을 닦아 나오셨느뇨? 참는 길을 닦아 나오신 것입니다. 여러분, 종교의 길은 참는 길입니다. 참고 희생하고 죽을 때까지 가는 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을 추구해 나오는 사람 중에는 참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참지 않으면 선한 목적을 달성할 수가 없습니다. 봉사와 희생을 목표로 삼지 않고는 선의 터전을 넓힐 수 없습니다. 이같이 하나님께서는 복잡하고 얼크러진 이 땅 위에 참는 길, 희생하는 길, 죽는 길을 닦아 나오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목적이 아닌 과정적인 현상입니다.
그러면 목적은 무엇이겠는가? 기쁨과 만족을 느끼는 행복한 세계입니다. 그 세계는 봉사 대신에 높임을 받을 수 있고, 희생 대신에 소생할 수 있는 곳입니다. 이러한 세계를 향하여 하늘은 이끌어 나오신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노정을 개척하여 나오시는 하나님이라 할진대, 앞으로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민족은 어떤 민족일 것이뇨? 참는 민족, 봉사하는 민족, 선을 위해 죽을 수 있는 민족입니다. 이 세계의 역사노정에서 참아 나오는 민족이 있으면 하늘은 붙들 것입니다. 희생하는 민족, 죽음의 자리까지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나갈 수 있는 민족을 하늘은 붙들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 때문이뇨? 하나님께서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그러한 노정을 거쳐오셨기에 하나님과 같은 목적으로 따라 나오는 사람도 필시 그러한 길을 걷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기에 개인을 찾기 위해서는 개인적인 고통, 민족을 찾기 위해서는 민족적인 고통, 국가를 찾기 위해서는 국가적인 고통, 세계를 찾기 위해서는 세계적인 고통이 따르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의 시대입니다. 마음의 방향이 어디로 가야 할지 알지 못하고 어디를 가더라도 마음을 의지할 수 없는 혼란과 혼돈의 시대입니다. 이것 가지고도 안 되고 저것 가지고도 안 됩니다. ‘아, 나는 되었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그 마음속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의 물결이 뒤넘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고통을 참고 견디어 낼 수 있는 사람, 이런 복잡한 과정에서도 끝까지 참으면서 희생하고 봉사할 수 있는 사람, 어떠한 위험과 공포가 휘몰아친다 할지라도 넘어갈 수 있고 죽음의 고개까지도 넘어갈 수 있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있다 할진대 하늘은 반드시 그 무리를 통하여 새로운 시대를 형성해 나갈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기독교 역사는 소망의 한 때를 바라보고 참아 나오고, 희생해 나오고, 죽는 자리까지도 자진하여 나온 역사였습니다. 지금까지 가정을 대신할 수 있는 시대, 민족을 대신할 수 있는 시대, 국가를 대신할 수 있는 시대로 나오는 데 있어서도 그러한 길을 걸었거든, 이제 세계를 대신한 시대로 넘어가야 할 이 때에 있어서는 세계적인 고통, 세계적인 희생, 세계적인 죽음의 고개를 넘어야 됩니다. 이러한 각오와 신념을 가진 신앙자, 이런 이념을 품은 자가 있다 할진대, 그는 절대로 망하지 않습니다. 이제까지의 역사노정이 모두 그러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섭리노정에서 시대가 바뀔 때마다 하늘의 뜻을 대하게 하기 위하여 어떠한 민족을 택하여 고통의 자리에 몰아넣었습니다. 또한 제물의 자리, 희생의 자리, 피를 뿌리는 자리에 몰아넣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타락한 그날부터 인간에게 속죄의 조건을 세워 주시기 위하여 제물을 바치도록 하셨는데, 거기에는 양으로부터 예수까지도 제물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들은 예수를 대할 수 있는 민족, 그 민족을 대할 수 있는 국가, 그 국가를 대할 수 있는 세계로 거쳐 나아가야 됩니다. 이것이 복귀섭리입니다. 양을 제물로 바치다가 양 대신 예수가 만민을 대신하여 제물이 되어 피를 흘렸습니다. 그런데 그 피를 받은 민족은 민족적인 제물이 되어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앞으로 끝날은 세계적인 제물시대입니다. 전세계에 널려 있는 기독교를 위시하여 수많은 종교들은 세계적인 제물이 되어 나아가야 하나니, 그 때가 바로 대심판 때인 것입니다.
그러면 역사적인 종말시대에 있어서 우리들은 어떠한 민족이 되어야 될 것이뇨? 호화찬란하게 입고 배불리 먹고 사는 민족이 아니라, 역사를 대신하여 참고 봉사하는 민족이 되어야 합니다. 거꿀잡이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공평합니다. 주권을 가지고 남의 생명을 빼앗아 나오던 어떠한 이념과도 반대의 입장에 서야 합니다. 그런 때가 와야만 됩니다. 필연적으로 이러한 과정을 거쳐야 할 역사노정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길이 막힙니다.
하나님이 가는 길, 하나님의 아들딸이 가는 길, 하나님의 백성이 가는 길은 어떤 길이뇨? 참고, 봉사하고, 희생하며 나아가는 길입니다. 여러분, 참는데 맹목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구주를 위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참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참아야 합니다. 한 때가 있겠거늘, 그 때를 위하여 참읍시다, 이거 아니에요? 그렇기 때문에 재림사상이 없는 도(道)가 없습니다.
한 때가 온다고 하는데, 그 때는 어떠한 때냐? 마음의 주체이신 하나님께서 마음의 목적을 달성하는 때입니다. 인간은 마음의 주체이신 하나님의 뜻을 본받아 싸우며 그 때를 위해 찾아 나아가야 할 역사적인 운명에 처해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본받고 하나님의 목표를 향하여 나가는 데는 싸움의 노정이 없을 수 없으니, 이러한 곡절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 역사입니다.
그 싸움은 어떠한 싸움인가? 참는 자가 먼저 맞는 싸움이요, 희생하는 자가 지배받는 싸움이요, 새로운 이념과 새로운 소망을 가지고 나가는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는 싸움입니다. 그런 싸움의 역사노정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땅 위에 선을 부르짖고 나왔던 사람은 어느 누구나 고통의 노정을 참지 않으면 안 되었고, 민족을 대신하여 희생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자기 신념을 굽히지 않기 위하여 죽음의 자리에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역사가 이러한 곡절로 출발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원치 않는 방향으로 걸어 나왔고, 하늘도 우리 인간 이상 어려운 입장에서 원치 않는 길을 개척해 나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고통스러운 모든 것들을 홀로 지시고 이 역사노정에서 길을 닦아 나오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몰라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그걸 생각해 봤어요? 백만장자의 아들이 자기의 호화찬란한 생활의 이면에 부모의 엄청난 고통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이 사회 환경에서 자기 자신의 근거를 명시(明示)하지 못한 채 오늘에 만족하고 도취되어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몰랐던 사실을 온 역사를 걸어 놓고 밝혀야 할 때가 올 것이거늘, 그 때가 끝날이요 대심판의 날인 것입니다.
오늘날 이 땅 위에는 수많은 민족과 국가가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수많은 국가 가운데 어떠한 국가를 찾아오실 것이뇨? 미국? 소련? 아닙니다. 민주주의? 아닙니다. 공산주의? 아닙니다. 최후에는 무슨 주의? 심정주의가 되어야 합니다. 죽어도 뜻 때문에 죽고, 그것을 본받다 죽고, 그것의 명령 따라 죽고 산다는 이런 주의만이 최후에 남아지는 것입니다.
그 뜻, 그 주의는 하나님주의입니다. 이 하나님주의가 나의 주의요, 하나님의 뜻이 나의 뜻이라 할 수 있고, 그 주의와 나와 심정적으로 인연되어 그 인연을 세상의 어떠한 부귀영화와 바꿀 수 없고, 그 인연을 끊으려야 끊을 수 없게 될 때 최후의 종착점이 도래한다는 거예요.
그러한 한 때를 맞이해야 할 끝날의 우리들은 시야를 넓혀 세계를 냉철히 비판해야 됩니다. 이제까지 우리가 배워온 역사관(歷史觀)을 가지고는 안 됩니다. 방향이 다릅니다. 역사가 무턱대고 흘러가는 것 같지만 흘러가는 데는 어떤 동기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서 혹은 먼 거리에서 이 세계를 돌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왜 그러느냐? 어떤 나라에 어떠한 주권자가 있다면 그 주권자가 스스로 망하고 싶어합니까? 어느 국가의 주권자도 망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주권자든지 주권을 갖고 세계를 제패하고 만민을 자기 손아귀에 넣고 통치하고 싶은 마음이 다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원하는 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렇잖아요? 그 주권자들은 그러한 민족과 국가를 바라고 있는데 죽음의 고비는 왜 오고 망함의 고비는 왜 옵니까? 소원하지 않았던 일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 역사노정의 비참사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자체가 동기와 해결점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 동기와 해결점은 다른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는 그 동기의 세계와 결과의 세계를 찾아 헤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동기와 결과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인간으로 말미암은 동기가 아니라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동기가 되어야 하고, 인간으로 말미암은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결과가 되어야 합니다. 참이라 할진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고 끝나야 됩니다. 그렇게 되면 문제는 간단한데 거꿀잡이가 된 것입니다. 인간이 동기가 되었고 인간이 결과가 되었으니, 이 동기와 결과는 말할 수 없이 엉클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인간의 동기와 결과를 제해 놓지 않고서는 새로운 동기와 결과를 옮겨 놓을 수 없습니다. 이것을 옮기기 위하여 하나님은 무한한 수고를 해 나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인간 세상에 죽음의 길이 있다 할진대 그 이상의 자리에 서야 되었고, 고통의 길이 있다 할진대 그보다 더 심한 고통의 길을 걸으셔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야 될 게 아니에요? 인간이 사망의 구렁텅이에 굴러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그보다 몇 배의 힘이 필요한 것입니다. 안 그래요? 굴러 들어가는 그 정도의 힘 가지고 되겠어요? 그보다 몇 배의 힘이 필요합니다. 이 땅을 살리기 위한 하늘의 뜻이 있다 할진대 부패하여 썩어진 곳을 해부해 도려내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 오늘 내가 당하는 고통보다 몇십 배, 몇백 배의 심한 고통을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가 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알게 하자는 것이 종교의 목적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섭리를 하신다 할진대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 하면, 이러한 사실을 알게 하여 구원섭리를 하시려는 하나님의 마음과 우리 인간의 마음이 한 방향이 되도록 하려는 데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처음 말씀드렸듯이, 이 사회와 시대의 슬픔과 고통은 나에게서 인연된 것이고 반영되어진 것이거늘, 여러분의 마음과 몸에 스며드는 슬픔과 고통의 구렁텅이를 메우지 않는 한, 여러분과 관계된 이 세계의 비운의 곡절을 제거시킬 도리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도 이 땅에 와서 어떠한 상대적인 곳에 천국이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천국은 네 마음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마음에 천국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다른 어떠한 곳에 천국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아무리 악하다 할지라도 낙심해서는 안 됩니다. 이 세계는 나 자신과 인연되고 나 자신이 반영된 세계임을 알고, 나 자신이 하나되지 못하고 미완성된 것을 발견하고 완성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탄식하고 저주할 일이 있거든 자기 자신을 저주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그 자리에서부터 소생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됩니다.
개인 개인이 모여서 형성된 것이 세계요 인류입니다. 그러니 종말시대에 있어서 전세계의 인류는 한 사람과 같습니다. 전세계에서 벌어지는 사실들은 한 사람의 생활 무대에서 벌어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을 한 사람의 마음의 반영이요 몸의 반영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끝날에 어떻게 해야 승리할 수 있는가? 마음을 수습하여 몸과 하나가 되어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전세계에 있는 인류의 마음을 수습하여 인류의 몸적인 생활 무대와 하나되게 만들 수 있는 무엇이 나와야 합니다.
개인은 천주의 모방이요, 하늘과 땅의 반영체이며, 하늘과 땅을 대신한 존재입니다. 그러기에 나 하나는 가정의 주인도 될 수 있고, 사회의 주인도 될 수 있고, 국가의 주인도 될 수 있고, 세계의 주인도 될 수 있고, 하늘과 땅의 주인도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나’가 되어야 합니다. 하늘과 땅을 대신하고 하늘과 땅의 반영체인 마음과 몸이 실체의 마음과 몸의 세계와 완전 일치, 완전 자동, 완전 자주하게 될 때, 온 우주는 그 사람으로 말미암아 좌우되는 것입니다. 원칙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그러한 나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러한 나를 회복해야 합니다. 찾아야 합니다. 찾는 데 있어서 어떠한 민족주의시대의 나를 찾게 된다면, 하늘과 땅을 대신한 마음과 몸의 가치가 그 시대의 지도자밖에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끝날에 하늘과 땅을 대신하여 마음과 몸이 하나가 되어, 새로운 영광과 새로운 이념을 대신할 수 있는 인격을 갖춘 하나의 모습을 세우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이러한 인격을 갖추고 나타나시는 분이 오시는 주님입니다. 오시는 주님은 하늘과 땅을 대신한 분이기에 마음으로는 하늘을 움직일 수 있고, 몸으로는 땅을 움직일 수 있는 존재입니다.
본래 인간은 본연의 실체로서 하늘땅을 움직여 낼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할 것이었는데,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계로 떨어졌습니다. 이러한 인간을 깨우쳐 민족적인 대표로 세웠고, 국가적인 대표로 세웠고, 세계적인 대표로 세웠습니다. 인간과 하늘과 땅을 하나로 화하게 하는 것이 창조원칙이므로, 인간을 세계적인 하나의 중심존재로 세우기 위한 것이 구원섭리의 목적입니다.
그러면 그런 중심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야곱을 중심삼고 볼 때, 그는 하늘이 인정하는 가정적 중심 존재가 되기 위해서, 그 일대에 있어서 고통의 길과 희생의 길과 죽음을 각오하는 노정을 거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가정적인 환경의 모든 어려움을 넘어야 했습니다. 마음으로는 모든 이념을 품고, 몸으로는 환경적인 핍박을 이겨야만 자기에 대한 중심 사명을 완결지을 수 있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모세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세가 새로운 이념을 품고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가나안 땅을 향하여 나가는 노정에서, 고통과 희생과 곡절이 부딪치는 환경을 참고 넘어야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하고 쓰러졌습니다. 민족적인 시련에 부딪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가정을 지나고, 민족을 지나고, 국가를 지나고, 세계를 향하여 나아가야 한다 할진대, 구주로 오신 예수도 이 땅에 와서 편안한 자리에서는 구주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일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를 죽이지 않고 예수와 하나가 되었더라도, 이 세계를 하나님의 나라로 이루어 나아가는 데 있어서 고통의 싸움, 곡절의 노정을 거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개인에서부터 가정, 민족, 국가, 세계를 거쳐 나오는 역사적인 섭리노정도 모두 그러하다는 거예요. 그러기에 전세계 기독교인들도 어떠한 길을 거쳐야 하느냐 하면, 제1이스라엘인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를 십자가에 죽임으로 말미암아 망하였으니, 제2이스라엘인 전세계 기독교인들도 새로운 주권국가의 백성이 되기 위하여, 죽음과 핍박과 고통과 인내의 노정을 개척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끝날에 주님이 오신다 하더라도 영광 가운데 나타나서 역사적인 슬픈 사정이 엉켜 있는 이 땅을 향해 대번에 호령할 수 없습니다. 역사를 지배할 자는 역사를 통하여 나와야 됩니다. 세계를 지배할 자는 세계를 통하여 나와야 하고, 하늘땅을 움직일 자는 하늘땅을 통하여 나와야 됩니다. 여러분들, 그렇지 않아요?
역사적인 종말시대, 세계적인 종말시대, 혹은 섭리적인 종말시대인 이때에 이 세상을 지배할 수 있는 주님이 오신다 하더라도, 역사와 하나님의 뜻을 중심삼고 볼 때, 그 분도 역사적인 인연의 시기를 통과해야 됩니다. 그러지 않고는 이 세계를 지배하지 못한다는 거예요. 그 분은 슬픔과 고통과 죽음과 비애의 곡절이 사무쳐 있는 이 땅의 역사적인 현실에서 승리한 자라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모순입니다. 역사적인 환난을 통과해야 하고, 섭리노정에서 승리하신 분이어야 합니다. 이 섭리노정에는 보이는 이 땅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무형(無形)의 사탄도 있다는 것입니다. 즉 원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원수와 싸워 승리해야 됩니다. 하나님을 찾아 나가는 노정에서뿐만 아니라 원수와 싸우는 역사노정에서도 승리해야 합니다. 원수까지도 승리한 자라고 공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 다음에는 끝날에 가서 이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주인은 어떠한 승리자가 되어야 하느뇨? 하나님의 심정의 바탕에서 승리한 자라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자녀로 세우셨기에 그를 지극히 사랑하고 싶은 것이 아버지의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그 마음을 채워 드리지 못하였으니,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 하나님의 마음 깊이 스며 있던 심정, 그 사랑의 심정을 채워 드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대번에 될 수 있겠습니까? 인간이 타락한 그날부터 하나님께서는 슬픔을 동반하게 된 것입니다. 타락 이후 아담가정으로부터 노아, 모세, 예수, 그리고 예수 이후 지금까지 2천년 역사노정에서 예수와 성신이 싸워 나왔던 심정적인 역사의 기반을 통하지 않고서는 안 됩니다. 앞으로 오시는 주님은 바로 그런 분이어야 합니다. 그런 주님이 우리에게 필요하고 이 땅에 필요합니다. 그런 분이어야 원수의 세력을 꺾고 승리할 수 있고, 하나님 앞에서 모든 것을 마음대로 주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승리하셨습니까? 못 했습니다. 섭리노정을 걸으시다가 사탄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는 비애의 인연을 남기고 가셨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아버지도 고충이요, 아들도 고충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선을 중심삼고 아들딸을 자유로이 품에 품고 사랑할 수 있는 인연의 터전을 이루지 못하고 예수님은 가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가신 주님이 그냥 오시면 되겠습니까?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끝날에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새로운 이념을 향하여 나아가려는 무리가 있다 할진대, 역사적인 인연과 섭리적인 인연과 천정적(天情的)인 인연을 통과해야 된다는 거예요. 인정(人情)이 아닌 천정(天情)의 인연을 통과해야 합니다. 역사가 공인할 수 있고, 섭리가 공인할 수 있고, 아버지께서 심정으로 사랑하고 ‘너는 진정한 충신이요, 효자요, 열녀’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내용을 가지고 오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면 다시 오시는 주님이 천상세계에서 그런 내용을 갖추고 오실 것이냐? 그러면 구주가 될 수 없습니다. 악한 자의 구주가 되려면 악한자 이상 내용을 가져야 하고, 죄인의 구주가 되기 위해서는 죄인 이상의 깊은 내용을 가져야 하고, 살인강도의 구주가 되기 위해서는 살인강도 이상의 곡절의 심정을 통해야 됩니다. 그러지 않고는 그들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오시는 주님은 어떠한 마음 바탕을 갖고 오실 것이뇨? 그분은 역사의 곡절이 아무리 많고 크다 하더라도 그 모든 곡절을 내 것으로 갖고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구주가 되는 것입니다. 죽음의 자리에 들어가서도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이 이 땅 위에 오시기 전에 어떠한 일이 벌어져야 되느냐? 이 땅 위의 악한 모든 것이 모두 나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 무리들이 나와야 됩니다. 이렇게 된 것도 내 책임이요, 저렇게 된 것도 내 책임이라고 하는, 모든 것에 대하여 책임지겠다는 무리가 나와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주님이 오실 수가 없습니다. 내가 알기에는 그래요.
이렇게 볼 때 오늘날 이 세계에서 원수로부터 맞든가 칭찬받든가 하는 민족이 있어야 합니다. 판결은 어디서 벌어지느냐? 내 편과 남의 편이 부딪친 자리에서 벌어집니다. 그리고 맞는 데 있어서도 억울하게 맞느냐 당연히 맞느냐가 문제입니다. 고통을 당하는 데 있어서도 억울하게 당하느냐 당연히 당하느냐가 문제입니다.
나는 혹시 여러분이 고통당할 일이 있다면, 당연하게 당하는 자가 되지 말고 억울하게 당하는 자가 되길 바랍니다. 그러한 여러분이 되어야 합니다. 아시겠어요? 이것은 삼천만 민족 앞에 외치고 싶은 내용입니다. 지금까지 한민족이 당연한 고통을 당하고 당연한 슬픔에 부딪쳤느냐, 아니면 억울한 고통을 당하고 억울한 슬픔에 부딪쳤느냐 하는 것을 헤아려볼 때에 언제나 억울하게 당해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은 망하지 않습니다.
천륜은 이러한 방향으로 찾아오거늘, 이 민족 가운데에서 억울한 자를 규합하여야 할 때가 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억울하게 고통받고, 억울하게 몰리고, 억울하게 쫓김받는 무리를 통하여 새 시대의 문이 열립니다. 쫓김받는 무리가 시대를 혁명해 나왔습니다. 억울한 자들이 시대를 혁명해 나왔습니다. 당연한 사실이 아닌 자리, 즉 그 시대의 원칙이 아닌 자리에서 혁명해 나왔습니다.
여러분, 이 한민족에 있어서 특히 청년 남녀들은 알아야 합니다. 분한 일이 있으면 이 분함이 누구를 위한 분함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나 때문에 분하거든 참아야 됩니다. 도의 길은 나를 중심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중심하는 것은 선이 아닙니다.
선이란 나 이외의 상대적인 세계를 위하는 것이며, 그 위함이 크고 작으냐에 따라 그 가치도 크고 작아지는 것입니다. 참이라는 것은 나 위주가 아니라 하늘 위주인 것입니다. 그러니 큰 하늘을 위주하기 위해서는 큰 세계를 내 것으로 알고 큰 하늘 앞에 가까이 나아가야 되겠습니다. 세계를 자기 마음에 품고 나아가자는 것이 하늘의 생각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슬프고 어렵고 분하더라도 그것으로 끝나야 합니다. 여러분 개인이 천만 번 분하다 하더라도 이 민족은 분한 자리에 서지 않아야 합니다. 이 민족이 아무리 분한 자리에 선다 하더라도 이 세계가 분한 자리에 서서는 안 됩니다. 더 나아가 이 세계가 아무리 분한 자리에 선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분한 자리에 서면 안 됩니다. 더 큰 것이 분한 자리에 서서는 안됩니다. 선은 나를 기반으로 하여 더 큰 것으로 뻗어 나가는 것입니다.
가정을 위하여 봉사를 하고 피와 땀을 흘리고 죽음을 각오한 자는 그 가정의 주인이 됩니다. 사회를 위하여 고통을 당하고 봉사를 하고 죽음을 각오한 사람은 그 사회의 책임자가 되는 것입니다. 나라를 위한 충신도 그러하고, 하늘을 위하여 싸워 나가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6천년 동안 섭리해 나오시면서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세상을 위하지도 말고, 세계를 위하지도 말고, 자기 나라를 위하지도 말고, 자기 가정을 위하지도 말고, 이 땅 위의 그 누구를 위하지도 말고 하나님 자신만을 위하라고 하셨습니다. 큰사람이 되라고 그러신 것입니다.
가정을 위하여 세워 놓으면 국가가 때려부숩니다. 국가를 위하여 세워놓으면 세계가 때려부수고, 세계를 위하여 세워 놓으면 하나님이 때려부숩니 다. 그러면 맞지 않을 수 있는 제일 중심이 무엇이냐? 하나님을 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귀섭리 역사노정을 거쳐 나오는 동안 우리의 선조들은 피를 흘리며 죽음의 고개를 넘어왔습니다. 이제 민족주의시대가 지나가고 세계주의시대도 지나서 새로운 통일의 이념을 갖추어 하늘을 중심삼을 수 있는 시대가 기필코 옵니다. 그 때에는 역사노정에서 참상을 당하던 무리들이 해방을 받습니다. 그 해방의 시대가 오늘날 기독교의 명사로 말하면 ‘천년왕국시대’입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는 다시 한번 살펴야 되겠습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 억울하게 맞는 대한민국은 불쌍한 나라입니다. 세상에서도 억울하게 맞으면 동조해 주고 협조해 줍니다. 억울하게 맞는 사람에게는 편이 생깁니다. 이 한민족도 억울하게 맞았기 때문에 편이 많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처하여도 이제는 굶어 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 민족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이뇨? 하나님을 붙들어야 됩니다. 하나님을 붙들어야만 돼요. 하나님은 억울하고 분할 때 그 억울하고 분함을 누구에게도 호소한 적이 없었습니다. 인간에게 호소한 적이 없었습니다. 양심적인 사람들도 억울하게 죽음의 자리에 나가게 될 때에 이 나라를 대해 자신을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만이 알아주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개인이 그러하거든 가정도 그러하고, 민족도 그러하고, 국가도 그러해야 합니다. 그러니 억울한 국가의 입장에 선 이 나라의 삼천만 민족은 마음을 한데 모아 ‘하나님, 저희들을 알아주십시오.’ 하는 운동을 벌여야 합니다. 그러면 망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다시 한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하나님, 저희들을 알아주십시오.’ 할 때 하나님의 입장은 어떠하실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만 억울하고 분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보다 더 억울하고 더 분한 입장, 더 불쌍한 입장에 처해 계십니다. 왜 그러냐?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아들딸, 선한 편이 불쌍하게 몰리고 맞는 것을 보실 때, ‘오, 잘했다.’ 하시겠습니까? 가슴이 터지고 녹아지는 아픔을 느끼실 것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슬픔보다 더 큰 슬픔을 당하시며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입니다.
이 민족이 하나님의 마음만 아는 날에는 이 민족은 하늘땅을 지배하게 될 것입니다. 어째서 그런가? 수많은 자식이 있고, 수많은 백성이 있다 하더라도 최고의 효자, 효녀, 충신은 한 사람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부모도 같은 자식이라 하더라도 억울하게 맞고 있는 자식을 더 생각하는 것이 상정(常情)이거늘, 하물며 하나님이 안 그러시겠습니까?
그러니 우리는 이 때에 우리 민족이 고통당하는 것을 하나님께 호소할 것이 아니라 ‘이 민족을 바라보시는 아버지의 마음은 어떠하시옵니까? 부디 저희들의 고통으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고통받지 않으시길 바라옵니다. 저희가 고통받는 그 길을 자진해서 가겠습니다. 죽음의 길 때문에 고통받지 마십시오. 저희가 그 길을 가겠습니다.’라고 하는 굳은 각오를 가져야만 됩니다. 그래야 최후의 충신을 결정하는 고비에서 하늘땅이 공인할 수 있는 최고의 충신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찾으시느뇨? 하나님은 어떠한 백성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제일 사랑하는 효자 효녀를 찾으십니다. 효자 효녀를 찾아 세워 그 백성에게 자랑하고 싶어하십니다. 세계를 수습하여 한 민족을 찾고, 이스라엘을 세워 여기서 하나의 혈족을 찾고, 하나의 혈족을 수습하여 하나의 가정을 찾고, 하나의 가정을 수습하여 한 사람을 찾는 것입니다. 그 한 사람을 찾는 것이 세계를 찾는 것이기에, 그 한 사람은 하나님의 모든 역사적인 한을 풀어 드릴 수 있는 마음을 소유한 효자이어야 합니다. 그런 효자가 나와야만 그로 말미암아 악한 사람들이 속죄함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억울한 자리에 있으면 하늘은 더 억울해 하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새로운 시대를 향하여 넘어가는 데는 역사적인 인연과 섭리적인 인연과 심정적인 인연의 과정을 통과해야 합니다. 그러한 노정을 통과하는데 있어서 민족이 억울하게 맞고 있는 것을 보고 그저 바라보고만 있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이것을 바라보시는 아버지의 마음은 더 고통스럽거늘, ‘저희가 기쁜 마음으로 그 자리에 서겠사옵니다. 저희를 보시고 민족을 용서하시고, 세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된다면 틀림없이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딸이 되는 것이요, 하늘땅의 유업을 상속받을 것이요, 온 민족이 그 앞에 머리 숙일 것입니다. 나는 이것을 확신합니다. 역사는 그렇게 흘러나온다는 거예요.
오늘 여기에 모인 여러분에게 말씀을 전했습니다. 앞으로 나아가자고. 한많은 이 민족, 이제 우리는 이 민족의 한의 원인이 어느 주권자에게 있다고 말하지 맙시다. ‘내 책임이요, 우리의 책임입니다. 그들은 우리를 대신한 자입니다.’라고 합시다. 그들이 서러워할 때 우리도 서러워하고, 그들이 고통을 받을 때 우리도 고통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갈 길입니다. 이 나라의 운명을 바라보고, 이제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은 이 길뿐입니다. 이것이 내 일이다, 나라에 슬픔이 있으면 그것이 내 슬픔이라고 할 수 있고 ‘만민이여! 너희의 슬픔을 하나님께 고하지 말고 우리에게 고하라.’고 할 수 있는 아들딸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시겠어요?
우리들에게 슬픔이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슬픔을 아는 우리는 그것을 한하지 맙시다. 민족 앞에 나서서 너희의 모든 슬픔을 우리에게 고하라고 하며, 그들의 슬픔을 책임지고 죽음과 희생과 인내로써 막아내겠다고 나서는 무리가 있다면, 그 무리는 하나님의 뜻을 대신한 산 실체(實體)들로서 이 땅 위의 선과 악을 심판할 수 있는 주인들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민족, 어느 교파에서 그러한 무리들이 나타날까 하고 6천년 동안 고대해 나오셨습니다. 우리 이상의 고통을 당하고, 우리 이상의 죽음의 고비를 넘고, 우리 이상의 애통한 곡절의 심정을 품고 안식의 터전을 찾지 못한 채 허덕이며 찾아 나오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아버지의 모습을 알아드려야 되겠습니다.
아버지의 이러한 모습을 알고, 아버지가 역사노정에서 수고하신 것도 나 때문이요, 이 시대의 섭리의 뜻을 위해 수고하신 것도 나 때문이요, 미래의 소망을 위하여 수고하실 것도 나 때문이니, 나를 위하여 수고하신 아버지 앞에 효자가 되어야 할 인연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만민을 대신하여 책임지겠다고 나설 수 있는 자들만이 새 시대의 역군이 되고 새 시대의 하늘의 일을 맡아 처리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끝날에 오시는 주님은 구름을 타고 안 오십니다. 구름 타고 와서는 안 됩니다. 그 분은 고통의 왕자요, 핍박받는 왕자요, 인내의 왕자입니다. 최고의 핍박도 받고 최고의 원한이 사무치고 비통한 심정을 품고서도 세계를 품고, ‘아버지, 이러한 것은 제가 응당 받아야 할 인간적인 세상일이오니, 저를 대하여 섭섭해하지 마시고 고통스러워하지 마시고, 가슴 아프게 생각지 마소서. 이것은 이제 제가 해야 할 책임입니다.’ 하며 내가 인류의 고통과 사망권에 있는 전부를 일신에 짊어지고, 아버지의 책임을 이 땅 위에서 완수하겠다고 나서는 자라야 구세주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인격체(人格體)를 세우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이런 것이 아까 여러분에게 말씀드린 제목입니다.
하늘은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당하셨느뇨? 우리는 우리를 위하여 당하신 하나님의 그 고통의 내정을 알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사람들은 70, 80년의 짧은 생애를 살면서 원수가 많고 뭐가 어떻고 하면서 마음 편안한 환경이 못 된다고 합니다. 하늘의 반영이요 땅의 반영인 개인이 그러할진대, 그러한 개인의 주체요, 땅의 주체로 계시는 하나님은 어떠하셨겠습니까? 6천년 동안 하루도 하나님의 눈물은 마른 날이 없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무슨 눈물을 흘리시겠느냐고 하겠지요. 여러분의 눈물은 어디서부터 시작이 되었습니까? 하나님께서도 정지의(情知意)를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지음을 받은 인간에게 정지의가 있을진대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말할 것도 없다는 거예요.
비록 이 땅 위의 인류가 타락의 후손이지만 하나님 자신의 혈족이요, 직계의 아들딸이기 때문에 잃어버린 아들딸을 찾는 부모의 심정, 그 이상의 심정을 가지고 오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 땅을 대하여 눈물을 흘리고 죽음과 고통으로 쓰러지고 비애에 사무쳐 서러워하는 장면이 바로 하나님의 슬픔과 서러움이 반영된 장면 장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한 사람을 업신여기고, 선한 사람을 핍박하고, 선한 사람을 죽인 개인, 가정, 민족은 오래 못 갑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것을 기억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자신의 눈물이 떨어질 때마다 하늘의 눈물이 떨어지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원수를 대하여 분하고 절통(切痛)한 마음이 우러날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용서의 눈물을 흘리신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원수를 갚고 나서도 ‘야, 이놈 너 잘 죽었구나.’ 하는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사람을 원수로 여겨 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원수가 아닙니다. 6천년의 대원수가 있다 할진대 그것은 사람이 아니라 사람을 꾀어 나오는 사탄입니다. 사탄이 원수입니다.
훌륭한 법관이라면, 어떤 죄수에게 최고의 형(刑)을 내렸다 할진대, 그를 위해 눈물을 흘릴 줄 알아야 합니다. 인간 개체는 지극히 선한 것입니다. 이목구비를 갖춘 그 실체(實體)는 만우주를 대신한 거룩한 성체(聖體)입니다. 그런 성체의 마음을 움직이는 악이 나쁘기 때문에 그 악을 심판할 권한은 있지만, 그 몸을 심판할 권한은 없다고 하며 눈물지을 수 있는 법관이라야 천상(天上)에 가서 걸리지 않습니다. 만약 이러한 마음이 아닌 비법도적(非法度的)인 마음을 가지고 하늘 앞에 한번 가보십시오, 어떻게 되나.
하늘은 멸망하는 민족을 저주하는 민족을 칩니다. 심판받아 쓰러지는 그 민족을 보며 비웃는 사람을 칩니다. 우리 한민족은 역대에 걸쳐 수많은 민족의 피압박 국가로서 이리 밟히고 저리 밟혀 나왔지만, 이 민족은 다른 민족에 대한 원한이 없습니다. 침략을 모르는 민족입니다. 내가 보건대는 고마운 일입니다. 맞는 자리에서 눈물지으며 자탄할 줄 알지만 남을 원망할 줄 모르는 민족성을 가지고 있어요. 이것을 볼 때, 이 민족에게는 소망이 있다는 것을 저는 느낍니다.
여러분, 여러분 앞에 철천지원수의 사람이 있습니까? 그 사람이 원수가 아닙니다. 민족과 대결하고 이념과 대결해 나오는 반역자는 인간이 아니라 바로 대원수 사탄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이 하나되기를 얼마나 원하셨는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 선조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그 순간부터 하나님과 우리 인간이 부자지간(父子之間)의 심정을 통하여 하나되기를 고대하셨습니다. 만일에 인간이 타락하지 않고 하늘을 배반하지 않아 원수가 생겨나지 않았던들, 우리는 벌써 이상세계를 맞이했을 것입니다. 오늘날 20세기와 같은 과학 문명은 벌써 몇 천년 전에 이룩되었을 것입니다. 현대 문명은 문예부흥 이후 4백년이란 세월을 통하여 이루어진 것입니다. 오늘날 이 문명을 4백 년 동안에 건설했다고 자랑하고 있지만, 만일 하나님께서 직접 간섭하셨다면 40년, 아니 일대(一代)에 이런 문명의 세계를 건설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곡절이 벌어졌으니 하나님은 여기에 하나의 이념을 세우고 하나 되게 하기 위한 고충의 역사를 홀로 책임지고 나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민족을 대해, 국가를 대해 나오시는 동안 이 천지에 당신의 발자국을 남기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선한 자가 쓰러질 때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눈물이 떨어졌습니다. 선한 혈족은 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딸이 핍박 받고 몰림받는 그 자리에는 하나님의 땀방울이 떨어집니다. 그 하나님의 눈물과 땀을 점령할 자가 없습니다. 사탄도 못합니다.
악이라는 것은 이용하는 것이 본질이고, 선이라는 것은 이용당하는 것이 본질입니다. 이용하는 본질을 가진 사탄이 이용당하는 본질을 지배할 수 없습니다. 지배하려면 자기도 그렇게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도의 길은 위하는 것이 본성이며 본질입니다. 위하는 본질을 높이기 위하여 쓰러져 간 자들이 흘린 눈물은 하나님의 눈물이요, 그들의 피땀은 하나님의 피땀입니다.
이 민족은 지금 혼란한 상태에 처해 있습니다. 청년 남녀 여러분, 우리에겐 피와 살이 있습니다. 우리의 심정에는 정(情)이 흐르고 있습니다. 심장이 고동칠 때마다 동맥과 정맥을 통하여 피가 약동하고 있습니다. 뼈와 살과 피를 통하여 흘리는 땀과 눈물이 있습니다. 누구를 위하여 이것을 흘립니까? 민족을 위하여 쓰러지는 것도 좋습니다. 어떠한 주의 사상을 위하여 쓰러지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붙들고 쓰러져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망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보십시오. 그들은 예수가 왔다 간 이후 2천년 동안 유리고객 하는 민족이 되었습니다. 어느 사회에 가든지 그 사회로부터 몰림을 받았으나, 오늘날 세계의 경제는 그들이 좌우하고 있고, 신문화도 그들의 터전으로 이루어져 나왔습니다. 그들은 채찍을 맞을 때에 이를 악물고 눈물로 하나님을 불렀습니다. 이러한 역사노정이 남아 있는 한 하나님은 슬플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이 통일교회에 와서 무릎을 꿇고 있습니다. 이 통일교회의 사람들은 몰림을 받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로 분하고 원통한 사정이 있고 억울한 심정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원수가 없습니다. 내 한 존재를 몰아세워서 이 민족이 복 받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하기를 바라는 사람입니다.
통일 식구 여러분, 우리의 가슴에는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지백체를 통하여 흐르는 피가 멈추는 날에는 죽습니다. 여러분은 아버지가 있음을 잊지 말고 죽는 순간까지 이 뜻을 위하여 땀을 흘리십시오. 이 뜻을 결코 후대에까지 연장시키지 않고 자기가 기필코 이루고야 말겠다는 굳은 마음을 가지고 몸부림치면 여러분은 망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자식이 매 맞는 것을 볼 때, 하나님은 때리는 민족을 짓밟아 버리고 싶은 생각이 얼마나 간절했겠습니까? 그러나 원수를 망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지, 사람을 망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기에 그러지 못하신 것입니다. 원수는 미워하지만 사람은 사랑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하늘땅을 원망하고 저주한다면 하늘은 슬퍼하고 사탄은 좋아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기에 원수를 갚았다 하더라도 사람을 위해서는 눈물지어야 됩니다. 그래야 돼요.
통일 용사 여러분, 우리의 앞길에는 싸움의 길이 첩첩이 놓여 있습니다. 험한 가시밭길이 남아 있습니다. 이것이 이 민족의 어떠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서 끝나는 게 아니라 세계를 넘어 천상(天上)의 세계까지 나아가야 할 길이 남아 있습니다. 이 길을 가는 여러분의 눈물은 6천년 전의 아버지의 심정의 맨 밑바닥이 동기가 된 눈물이고, 천만년 동안 하나님이 기쁨의 동산에서 춤출 수 있는 그 세계를 위해 흘리는 눈물입니다. 그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여러분은 쓰러질 줄 모르고 힘차게 돌진하여야 되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여기에서부터 하나님이 당한 사정은 풀려 나갑니다. 이렇게 되어야 하나님은 ‘오냐, 사랑하는 아들딸아, 땅 위에 수많은 사람이 살고 있었지만 내 심정을 대신하여 싸웠던 사람이 없었는데, 이제는 네가 나와 같은 자리에 서서 싸우는구나.’ 하시며 위안 받으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모습들이 몰림받고 있는 통일의 무리입니다. 좁은 길을 가야 하는 우리에게 곡절이 있는 이 마당에서도 우리는 자탄할 수 있는 환경을 극복하고, 이 민족의 한을 자기 일신에 지고 세계적인 몰림을 책임지겠다고 해야 됩니다. ‘아버지, 이 모든 것을 제가 책임지겠사오니, 오늘 제가 맞는 것으로 세계가 맞는 것을 대신할 수 있고, 제가 통곡하는 것을 후세의 통곡으로 받아 주시옵소서.’라고 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망하지 않습니다.
선생님은 지금까지 여러분 앞에 이제부터 가야 하는 데 있어서 눈물을 흘리자고 했습니다. 피와 땀을 흘리자고 했습니다. 여기에 서 있는 사람은 그렇게 싸워 왔습니다. 변명하고 피하려는 자가 결코 아닙니다. 여러분이 눈물을 흘리면 나는 피를 흘리기를 개의치 않으며, 여러분이 땀을 흘리면 눈물을 흘리기를 개의치 않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지 않고서는 민족의 갈 길을 돌려 잡을 수 없습니다.
오늘 여러분께 드린 이 스승의 권고를 말로 듣는 것만으로 끝내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하늘이 우리를 위하여 당하신 고비 고비의 역사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어떠한 무엇을 당한들 하늘이 당하신 고비에 비할 수 없고, 아무리 억울한들 하나님의 억울한 심정에 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역사적인 죄악의 종족입니다. 부디 원컨대,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여러분들, 왔다가 그저 돌아가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심정의 억울함과 분함을 품고 있는 인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한을 도려내는 동시에 하나님을 모셔야 하고, 사탄과의 싸움을 책임져야 할 입장이요, 더 나아가 불쌍한 사람을 품고 사랑해야 할 입장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 세워 주신 것은 당신의 일들을 맡기기 위한 뜻이 있음을 알고 이러한 책임을 질 수 있는 여러분이 되기를 부탁하는 바입니다.
아버님, 말씀을 전하다 보니 심히 부족함을 느끼옵니다. 얼마나 외치고 싶으셨고, 얼마나 통곡하고 싶으셨으며, 얼마나 발을 동동 구르고 싶으셨사옵니까? 천적인 위신과 아버지의 체면이 있는 연고로 울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도 울지 못하시는 아버지의 사정을 알았사옵니다.
아버지, 역사노정을 거쳐 나온 저희들이 자신의 반영을 세계로 돌리고 세계의 반영을 내 일신에 지녀, 이 세계를 움직이시는 아버지를 모실 수 있는 효자, 효녀, 충신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것이 아버지의 소원임을 알았고, 원수를 아버지 앞에 서게 하지 말고 저희가 책임져야 함도 알았사옵니다. 저희들 이제부터라도 뜻을 위해 희생하겠다는 새로운 각오 아래 하늘 뜻 앞에 늠름히 설 수 있는 아들딸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 앞에 험한 길이 찾아 들고 핍박이 연할지라도 아버지를 생각하고, 외로움에 눈물이 솟구칠지라도 아버지를 생각하고, 비애의 곡절에 사무쳐 몸둘 바를 모를 때에도 아버지를 생각하며, 이 길은 내가 가야 할 길, 일생의 일로 삼아야 할 길이라고 생각하여 감사히 여기며 갈 줄 아는 아들딸이 된다면 저희들은 망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한 저희들을 통하여 이 민족은 새로운 방향을 알 때가 올 것이고, 세계 인류의 새로운 문화의 기준, 새로운 시점을 세울 때가 올 것을 아오니, 저희들, 인정의 기준을 넘어 천정의 인연을 갖추고, 천적인 심정의 동산을 건설하기 위한 나팔을 드높이 불며 행군하는 용사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사탄의 종말을 보기 위해서 원수의 적진을 향해 총진군하는 당신의 아들딸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하늘이 잃어버린 인간들을 찾아 하늘의 품으로 돌려보내고 승리의 개선가를 부르고도 남을 수 있는 아들딸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시간, 남한 각지에서 외로운 자의 뒤를 따르며 외로운 심정을 품고 눈물짓고 있는 아들딸들에게도 당신의 심정의 인연으로 이때를 알고 천상의 심정을 상속받아 책임을 다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불쌍한 만민을 자기의 자녀같이 품을 줄 알고, 사탄을 대하여 책임지고 싸울 줄 알고, 더 나아가서 아버지를 모시고 효성을 다할 줄 아는 아들딸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늘이 맡기시려는 시대적인 위업, 세계적인 위업, 더 나아가서 천주적인 위업을 맡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아버지께서 품어 주시옵고, 연단시켜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오면서 모든 말씀을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후방은 전방을 물질적으로나 행동으로나 심정적으로 지원해야 합니다. 주고받지 않으면 죽게 됩니다.
이상세계는 전체는 개인을 위하고, 개인은 전체를 위하는 세계입니다.
본래는 자기 중심삼고 위로 셋, 아래로 셋과 관계 맺어야 합니다. 그래서 7수를 이뤄야 합니다.
아버님께서 쉬어 가고 거쳐가실 수 있는 집과 마을, 면, 군, 도, 나라가 있어야 합니다.
방을 준비해도 하늘의 방과 공적인 방을 준비해야 합니다. 밥을 지어도 하늘의 밥과 공적인 밥을 지어야만 합니다.
외부에서 귀한 손님이 찾아오게 되면 구경시키고 접대할 수 있는 곳이나 집이 적어도 한 부락에 세 곳씩은 있어야 합니다. 앞으로는 서로 교회를 더 잘 짓는 경쟁을 해야만 합니다.
앞으로 세계는 누가 더 남을 위해서 충성하는가 하는 것을 경쟁하는 세계가 됩니다. 그리하여 가장 충성하는 사람이 대표자가 되고 출세하게 됩니다.
선생님은 일생문제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영생문제를 생각합니다.
앞으로는 영원한 가정과 영원한 인격자를 표준으로 합니다. 우리가 옷을 입어도, 음식을 먹어도 그렇지 못한 식구(사람)들을 생각하면서 살면 복을 받게 됩니다.
선이라는 것은 나 한 사람을 중심삼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나보다 다른 사람을 또 현재보다 장래를 위하여 움직이는 데서 결정됩니다.
사회를 위해 수고하면 사회권 내에 기억되고, 국가를 위해 수고하면 국가권 내에 기억되고, 세계를 위해 수고하면 세계권 내에 기억되게 됩니다. 위해서 수고한 그 범위만큼 기억된다는 것입니다. 또 위해서 수고한 기간만큼 기억됩니다. 천년간 위해서 수고했으면 거기에 정비례해서 기억되고, 또 만년간 위해서 수고했으면 그만큼 기억되게 마련입니다.
단 하나 품어야 할 것은 오늘을 위하여 눈물 흘리지 말자는 것입니다. 천추만대의 후손을 위하여 눈물 흘려야 합니다. 그러면 오늘을 살지만 후대의 그들과 같이 사는 것이 됩니다.
예수는 이스라엘이나 당대를 위해서 살지 않았습니다. 그는 세계를 위해서, 그리고 역사와 시대와 미래를 위해서 살았습니다.
이 시대에 태어난 것이 고마운 것은 창세 당시의 심정, 타락 당시의 심정, 과거의 심정, 현재의 심정, 미래의 심정을 품고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역사와 더불어 살아야 합니다. 역사 속에는 과거 현재 미래가 다 들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좋은 사람이 되려 하고 좋은 일을 하려 합니다.
그러면 세상에서 제일 좋은 사람이란 어떠한 사람인가?
모르는 사람에게는 가르쳐 주는 사람일 것이고, 고아에게는 그를 길러주는 자일 것이요, 국가에서는 국민들을 행복스럽게 살도록 해주는 지도자일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좋은 사람은 지상인(地上人)과 영인(靈人)을 죽을 자리에서 살 자리로 옮겨 주는 사람일 것입니다. 나를 구원해 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남이 갖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제일 좋은 사람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자기의 생활권 내에서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사람입니다.
앞으로는 본부나 지구의 후원을 바라서는 안 됩니다. 자기 아들딸을 낳는데 누구의 후원을 받을 수 없는 것처럼 자기 집은 자기가 책임져야 합니다.
하늘은 쉽사리 되어진 터전을 원치 않아요. 피와 땀과 눈물을 합하여 세운 터전을 원합니다. 형제에게 신세를 지지 말고 형제를 위하여 신세를 지워야 합니다.
이 땅의 인류는 누구나 잘잘못을 불문하고 타락의 피를 받고 태어났습니다. 우리는 타락한 종족입니다. 타락한 나에 대하여 얼마나 혐오감을 느꼈는가! 이것을 느끼는 것이 타락하지 않은 나로 돌아가는 외적인 첫 출발입니다.
이 불쌍한 인류를 그대로 두면 파멸할 것입니다. 이것을 일으켜 주고 깨우쳐 주고 살려 준 이가 계시니, 그분은 어떠한 누구도 아니고 선이라면 선, 사랑이라면 사랑 그 전체이십니다. 그분은 바로 단 한 분뿐인 아버지이십니다.
그분은 여러분이 모르고 있는 동안에 그 길을 개척해 오셨고, 여러분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분은 모든 것을 완결짓는 분입니다. 온 우주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분입니다. 그분은 우리들이 생각하지 않을 때 피를 흘리신 주인공이요, 눈물을 흘리신 주인공이요, 땀을 흘리신 주인공입니다.
그분을 위하여 모든 것을 바치려 하는 것이 종교입니다. 수많은 종교가 있으되, 그 단 한 분의 아버지는 어느 종교에도 통사정 한번 해보지 못하셨습니다. 원수가 있으니 갚아 달라고 할 수 있는 한 사람을 찾아야 하는 것이 아버지의 사정입니다. 그 하나의 인격자, 그 하나의 효자 효녀가 이 땅에 나왔더라면 역사는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자기밖에 모르는 사회에 봉사의 대왕이 있다면 서로 상극이 될 것입니다.
선은 나를 위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생하는 것은 아버지를 닮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옷이라도, 신이라도, 걸으시는 땅이라도 되어야 합니다. 아버지는 만우주의 주인공이시요, 그 무엇에 구애를 받지 않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최고의 가치의 중심으로 계시는 분이 아버지이십니다. 그와 같은 아버지가 나를 위하여 땀과 눈물과 피를 흘리시나니, 그 아버지 앞에 모든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아버지의 이름조차 몰랐던 자신을 회개해야 합니다. 부르고 또 불러도 시원치 않을 그 아버지를 6천년의 사무친 심정으로 불러야 합니다. 아무리 어렵더라도 여러분은 아버지라는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자신에 대해 감격해야 합니다.
선생님은 여러분이 눈물 흘릴 때 눈물도 많이 흘리고, 여러분이 고이 잠들었을 때 기도도 많이 했습니다. 여기 사람이 많이 살지만 이 지경리의 사정을 통하여 손을 붙잡고 네 것이 내 것이요, 내 것이 네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아들이 단 3명만 있어도 이 땅은 망하지 않고, 3천만 가운데 그런 사람이 몇백 명만 있어도 이 민족은 망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감격이 불타올라야 문제가 해결됩니다.
여러분은 금은보화를 갖지 못했다고 한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나의 아버지요, 나는 당신의 아들이오니 아직 하시지 못한 사정을 말씀하시고, 하시고 싶은 걱정을 말씀하십시오.’ 할 수 있는 아들딸이 되어야 합니다. 아버지는 아들도 딸도 민족도 백성도 없었습니다. 아들이라 부르고 싶은 본연의 심정에 사무쳤으나 그러한 심정으로 불러보지 못한 아버지입니다.
단 한 분의 아버지를 아버지답게 불러 보십시오. 우리가 이 길을 걷는 목적은 아버지를 진실로 아버지라 부르는 데 있습니다. 아버지는 잘난 사람을, 잘 난 민족을 찾아오시지 않습니다. 어렵지만 하늘의 일을 해보겠다고 하는 아들딸들을 찾아오십니다.
한국 민족은 불쌍합니다. 죽느냐 사느냐를 해결해야 할 입장에 서 있습니다. 몸 마음을 정결하게 해 가지고 모든 허물을 다 벗고 벌거숭이와 같은 모습으로 아버지를 만나는 것이 세례의 원칙입니다. 고로 도(道)는 모든 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못난 사람이 몰리면 억울하겠지만 우리는 못나지 않았습니다. 불쌍하기를 잘했습니다. 선생님은 돈 없는 것을 식구들 앞에 자랑합니다.
우리는 6억년, 7억년이라도 가야 됩니다. 선생님은 인정도 많지만 무자비하기도 합니다. 그 단 한 분 아버지를 생각만 하면 통곡하게 됩니다. 그분은 억울하다면 제일 억울하고 분하다면 제일 분한 분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아버지로 모시고 통일의 기치를 내걸고 나왔습니다. 통일, 이 통일의 정신을 갖고 원수를 심판하는 자리에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날 27억, 28억의 인류가 있는데 아버지는 끝까지 가지 않고는 돌아서지 않습니다. 사탄에게까지 항복받지 않고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선생님은 역사와 세계와 억천만민을 위해서 나왔습니다. 전인류의 신천지를 바라고 나왔습니다. 지옥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밑창까지 복귀하기 위하여 나왔습니다.
먹지 못하는 것이 고통이라면 굶어야 합니다. 입지 못하는 것이 고통이라면 벗어야 합니다. 땀을 흘리는 것이 힘든 것이라면 땀을 흘려야 합니다. 무엇이든 사탄세계보다 나은 것이 하나 더 있어야 합니다.
통일은 무엇이냐? 아버지와 하나되는 것입니다. 통일하는 데는 생활을 통일해야 합니다. 지상에는 아버지의 생활 무대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버지의 생활관을 중심삼고 통일해야 합니다. 그리고 행동을 통일해야 합니다. 아버지의 심정을 중심삼고 행동을 통일해야 합니다. 생활은 달라도, 행동은 달라도 그 심정을 중심한 생활과 행동은 같아야 합니다. 또한 이념을 통일해야 합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원수다. 하나님의 원수는 곧 나의 원수다.’ 하며 책임지고 나가야 합니다. 사탄은 때리고 뺏고 나서 망합니다. 그러나 하늘은 맞고 나서 빼앗아 나옵니다.
3년 기간이면 됩니다. 제1단계의 임무 완수는 3년이면 된다고 보고 있습니다.
밥을 먹는 그 자리에서도 아버지와 같이 하십시오. 잠을 자는 그 자리에서도 아버지와 같이 하십시오. 행동하는 그 전체의 자리를 아버지와 같이 하십시오. 형제를 의식하지 말고 아버지와 같이 하십시오.
‘아버지 무엇을 하십니까? 저도 같이 하겠습니다. 아버지, 어디로 가십니까?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아버지, 누구를 사랑하십니까? 저도 같이 사랑하겠습니다.’ 하며 아버지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을 맺어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것을 후회하지 않고 앞으로 영원히 기념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각자는 6천년 섭리역사에 죽지 않고 살아 나온 형(型)의 사람이므로, 아담의 입장을 탕감하고 예수님의 입장을 탕감하고 재림주의 입장을 탕감하여야 완성합니다.
우리는 지금 예수님의 입장을 탕감해야 하는데 예수님은 첫 열매요, 우리는 다음 열매이므로 예수님의 입장을 해원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자녀를 낳아야 합니다.
예수님보다 더 큰 일을 해야 될 우리는 아벨적인 친자녀를 낳아야 하고 가인적인 믿음의 자녀를 세워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형(型)과 재림주형(型)의 자녀가 합해집니다.
성신을 모셔온 3배 이상의 성의(聖衣)를 어머님께 바쳐야 합니다. 선생님에게는 영계(靈界)가 울타리가 되어 있지만, 어머님에게는 땅이 울타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여성시대요, 암소시대입니다.
아기가 어머니의 뱃속을 거쳐서 태어나듯이 전인류도 어머니의 뱃속을 거친 것과 같은 입장을 취해야 거듭날 수 있습니다.
아담 한 분을 찾기 위하여 수많은 선령(善靈)들이 희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어머님을 찾는 노정에도 희생자가 있게 됩니다.
어머님을 모시기 전까지의 잘못은 잊으려 합니다. 그러나 어머님께 걸리는 자는 용서 못합니다. 어머님이 하셨기 때문에 그런 일을 했다고 걸고넘어지게 되면 문제가 큽니다.
효원(유효원 협회장)이가 충성하듯이 충성했노라고 걸고 구원받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계몽운동은 외적 지(知)을 일깨우기 위한 운동이요, 원리 말씀은 내적 지(知)를 계발하기 위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양면(兩面)의 교육이 필요합니다.
아버지! 6천년 동안 잃어버린 본연의 아들딸을 찾으시기 위해 당신께서 겪으신 슬픔을 저희들은 알았사옵니다. 이 인간을 어느 한 날 당신이 축복할 수 있는 아들딸이라고 해보시지 못하고 붙들고 사정을 나누어 보시지 못한 아버지라는 것도 알았사옵니다.
수많은 민족 가운데서 불쌍한 이 민족을 사랑하시고, 특별히 이 땅과 이 국가를 사랑하시는 아버지! 불쌍하고 보잘것없는 민족이오나 참을 따라 살고자 하는 숨은 무리들이 이 민족 가운데 있는 것을 아옵니다. 헐벗고 굶주리며 초가삼간이나 초막에서 슬픈 심정을 품고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새 나라와 새 약속을 고대해 나온 이 민족이옵니다. 벌거숭이와 같은 모습으로 아버지 앞에 호소하는 민족이기에 이 민족을 버릴 수 없는 심정의 인연이 두터울 것을 아옵고, 고생하고 굶주리는 자리에서 당신을 향해 호소하는 민족이기에 같은 심정으로 호소하더라도 불쌍한 자리에서 호소하는 자들을 더 귀히 여기시는 아버지께서는 어느 민족보다도 이 민족을 더 귀히 여기신다는 것을 아옵니다.
저희들은 그러한 심정으로 아버지 앞에 엎드렸사옵니다. 저희들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사옵니다. 자랑할 것도 없사옵고, 당신께 드릴 예물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드리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오나 드릴 것이 없사옵고, 당신의 위신과 환경을 지켜 드리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오나 그럴 수 없는 입장에 있는 저희들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그러나 저희들의 마음은 어느 누구보다도, 어느 민족보다도, 어떤 신자보다도 더 당신을 위하고 싶사옵고, 모시고 싶사옵고, 당신의 슬하에서 당신과 더불어 모든 싸움을 치르고 싶사옵니다. 수많은 민족 가운데서 불러주신 이 민족이었사옵고, 수많은 신도 가운데서 불러 주신 당신의 아들딸이오니, 이들의 마음을 미쁘게 보시어 찾아 주시옵기를 감히 바라옵나이다.
오라 하시는 당신의 명령을 저희들이 알았사옵고, 이 길을 개척하라고 몇 번이고 저희를 내모시는 뜻도 알았사옵니다. 낙망할 때 권고해 주시고 슬픈 자리에 있을 때 ‘내가 여기 있다’고 하시며 위로해 주시던 당신이심을 알았사옵니다. 과거에도 그러하였고, 이 시간에도 그러하오며, 내일도 그러할 줄 알고 있사옵나이다. 편안한 자리에서는 당신과 인연맺을 수 없고, 평탄한 길에서 당신을 만날 수 없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이것은 아직까지 당신이 편안한 자리에 계시지 못한 연고요, 아직까지 당신이 평탄한 길을 가시지 못한 연고인 것을 아옵니다.
아버지의 슬픔을 자신의 슬픔으로 감당하려 하고 아버지의 고통의 길을 대신 걸으려 하는 자라야 당신이 친히 대할 수 있고, 자연스런 심정의 발판에서 당신의 사정을 터놓고 토로할 수 있다는 것을 저희들은 배우고 깨닫고 체험하였사옵니다. 또한 이것이 가장 귀하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아버님! 이 시간을 당신이 각별히 기억해 주시옵소서. 수많은 인간들에게 축복하여 주시옵고 그 가운데서도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수많은 교단 위에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더욱이 당신의 심정을 붙들고 몰리고 있는 자들을 축복하여 주시옵고, 피와 땀과 눈물을 개의치 않고 하늘의 산 제물로 드려지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나선 자들 위에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이 그들과 함께하여 주실 것을 믿사옵고 그들과 함께 싸워 주실 것을 믿사옵니다.
외로운 길을 가시는 당신의 걸음을 따르는 자들도 외로운 자들이옵니다. 당신이 그러하시기에 그러한 자리에 있는 자들을 거두시기에 밤낮을 개의치 않는다는 것을 아오니, 이 시간도 같은 사정과 같은 심정과 같은 소망을 갖고 하나의 뜻을 위해 뭉쳐 있는 당신의 아들딸 위에 친히 보호의 손길을 펴 주시옵고, 같은 은사로써 안위(安慰)의 터전으로 옮겨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이제 이 한 시간을 아버지 앞에 맡기옵니다. 여기 모인 무리들을 굽어보시옵소서. 당신이 친히 좌정(坐定)하신 가운데 저희의 몸 마음이 자기도 어찌할 수 없는 감동에 사무쳐 솟구쳐 나오는 본연의 심정을 붙안고 회개의 심정을 갖추어 당신만을 의지하고 받들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만일 그렇지 못한 자들이 있다 할진대 당신께서 재창조의 능력의 손길을 가하시옵소서.
회개하는 심정을 갖고 나타나는 자들을 당신은 절대로 버리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부족한 자신을 깨닫고 부족한 자신을 뉘우치어 간곡한 마음으로 ‘아버지, 굽어보아 주시옵소서.’ 할 수 있는 각자 각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하늘이 허락하신 은사권 내에 잠겨, 높고 귀하신 당신의 인연을 그 마음 몸에 다시 한번 체험할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사망의 철망을 끊어 버리고 생명의 동산으로 들어갈 수 있는 부활의 역사와 재창조의 역사가 이루어질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저희의 몸에 뿌리박힌 악의 근성과 악의 쓴 뿌리를 제거시키시어서, 당신과 화(和)할 수 있는 선한 마음이 이 시간 싹틀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성삼위신이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첫 시간부터 끝나는 시간까지 맡기오니 당신만이 주관하여 주시옵고, 당신의 권한만을 여기에 나타내시옵소서. 불의한 모든 것을 제거시키시옵소서. 실체적인 선(善)의 기대(基臺)를 갖추어 이 시간 산 역사를, 산 증거를 남길 수 있는 각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오며,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하늘(天)과 땅(地)과 사람(人), 이 셋은 하나님을 중심삼고 일체(一體)가 되면 변하려야 변할 수 없는 진리의 중심체가 됩니다. 그러기에 이 진리는 유일하고 불변하고 영원해야 될 것을 알았사옵니다. 하늘과 땅과 사람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하늘이 동하면 땅도 동하고, 하늘땅이 동하면 인간도 동해야 할 것이었사옵니다. 그런데 그 본연의 창조이념은 간 곳이 없고 땅은 땅대로 움직이고 있고, 인간은 인간대로 흩어져 있으며, 하늘은 하늘대로 아직까지 중심을 잡지 못한 채 나를 대신하여 수많은 악과 싸우고 있는 것을 역사노정을 통하여, 현실을 통하여, 더 나아가서는 미래를 통하여 저희들은 깨달았사옵니다.
저희들에 앞서 선(善)의 발판을 구축하기 위해서 수많은 하늘의 역군들이 왔다 갔사옵고, 앞으로 저희들이 가는 길에도 하늘을 대표하여 희생의 길을 가야 할 제물이 많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님은 인간을 세워서 크나큰 목적의 세계로 가셔야 하고, 인간은 아버님을 믿고 그 목적의 세계로 가서 아버지와 아들딸과 땅이 합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저희들은 아옵니다. 그런고로 소망의 터전을 바라기에 앞서 먼저 나 자신의 몸과 마음이 하늘과 땅과 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염려할 줄 아는 저희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몸은 땅의 요소를 받아 태어났고 우리의 마음은 하늘의 요소를 받아 태어났기에, 땅은 우리의 몸을 있게 해준 부모이며 하늘은 우리의 마음을 있게 해준 부모임을 아옵니다. 하늘과 땅을 부모로 해서 태어난 저희들, 즉 하늘을 아버지로 땅을 어머니로 하여 육신의 부모의 혈육을 받아 태어난 저희의 모습인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우리는 삼대(三大) 부모를 가졌다는 것을 망각해서는 안 되겠사옵니다. 그러나 아버님! 아버님의 땅이 되지 못하고 저희들 역시 아버님의 아들딸이 되지 못하고 아버님이 온전히 주관할 수 있는 하늘이 되지 못하였사오니, 이 이상 슬픈 일이 어디 있겠사옵니까?
아버님께서는 실체를 갖춘 하나의 아들과 딸을 만나지 못해서 슬퍼하시는 것이 아니오라, 진정 당신의 뜻을 통하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하여 수고하신 당신의 심정을 상속해 줄 심정적인 일체를 갖춘 아들딸이 없어서 탄식하신다는 것을 저희들은 배워서 알았사옵니다. 슬프디 슬픈 이러한 사실을 배워서만이 알아야 하는 것 또한 지극히 슬픈 일이옵니다.
본연의 우리 아버지는 영원한 우리의 아버지였사옵니다. 그러기에 그곳에서 인간은 배우기 전에 아버지를 느낄 수 있고 느끼기 전에 아버지와 화하여 아버지를 대신할 수 있는 아름다운 모습이었사오나, 인간시조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상대적인 관계를 갖고 찾아 나가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사옵니다. 아버지께서도 주체적인 입장에서 인간과 관계를 맺기 위하여 개인에서부터 종족, 민족을 거쳐 국가와 세계, 더 나아가서는 하늘땅과 인연맺어 나오셨사옵니다.
이러한 아버지의 수고의 역사가 인간시조의 실수로 말미암아 저끄러졌으니, 그 죄악상을 폭로시켜 놓고, 인류 전체를 대신하여 회개할 줄 아는 저희들이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아옵니다. 이 땅에 악의 피를 뿌린 조상으로부터 수많은 인간들이 아직까지 악에 굴복하여 하늘을 배반하고 있는 죄상과, 우리의 후손이 하늘과 화할 수 없는 악의 요소 전체를 걸어 놓고, 하늘 앞에 심정적으로 호소할 수 있는 무리가 이 천지간에 많이 나와야 되겠사옵니다.
이 땅에는 슬픔이 꽉 차 있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이 땅은 선과 악을 분별하지 못해 하나님이 친히 운행하실 수 있는 자유의 천지가 되지 못했기에 하나님은 아직까지 슬픔으로 이 땅을 바라보시지 않을 수 없사옵고, 어려운 역사의 투쟁을 계속하시어 인간들이 가야 할 정의의 발판을 개척해야 한다는 것을 저희들은 아옵니다. 이러한 사명을 직접 하실 수 없는 당신께서는 대신할 수 있는 아들딸을 그리워하시며 찾고 계신다는 것 또한 아옵니다. 그러하오니 이 시간 모인 저희들, 당신의 어떠한 복이나 축복이나 은혜를 받기 위하여 나온 자들이 되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배워서 알고 깨닫고 맹세하고 각오했을진대, 아버지의 전체적인 뜻과 사명과 심정을 상속받아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소망의 곳을 향하여 나갈 수 있는 자들 되게 하여 주시옵고, 지금까지 6천년 동안 반대해온 사탄을 대해 싸워 나갈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부족한 마음들을 아버지 앞에 드리오니 받아 주시옵소서. 아버지, 당신이 고대하시는 것이 무엇이옵니까? 당신이 진정 찾으시는 것이 무엇이옵니까? 당신은 늘 저희들에게 권고하시기를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산 제사를 드리라 하셨습니다. 피 흘리는 제물의 모습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흉 없고 티 없이 아버지를 반기고 아버지의 심정에 품길 수 있는 아들딸을 찾기 위하여 역사적으로 참혹한 제물의 형상을 전개시키신 것을 알았사옵니다.
이제 저희의 몸이 제물을 통과하고, 저희의 마음이 제물을 통과하고, 저희의 심정이 제물을 통과하여 죽은 자가 아닌 산 자로서 아버지의 손길 안에서 사랑을 받으며 축복받을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 지극히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아옵니다. 당신이 6천년의 역사노정을 거쳐 투쟁해 나온 목적도 이것인 줄 알고 있사오니, 오늘 저희들이 가지고 있는 소망과 환경을 모두 당신 앞에 맡기고 가치적인 은사의 자리에서 심정적인 인연을 노래할 수 있는 영광을 저희에게 부여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어린 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누구를 보나 반길 수 있는 마음의 터전은 지극히 아름다운 것이옵니다. 오늘 여기 모인 저희들의 심정이 아무리 악한 자를 보아도 웃을 줄 아는 어린 아이의 모습을 닮아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난 무엇을 보고라도 감사할 줄 알고 기뻐할 줄 아는 마음이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알았사옵니다.
모든 것을 당신 품에 맡기고 부모의 품에 안긴 어린 아이의 심정으로 돌아가게 하시옵소서. 전하는 자의 마음이나 받는 자의 마음이 하나되게 하시옵소서. 당신이 운행하시고 싶은 대로 운행하시고 세우시고 싶은 당신의 아들딸이 있거든 그 아들딸들을 세우시어 축복하시옵소서. 모든 것을 아버지께 맡기오니 처음부터 끝나는 시간까지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봉독한 성경 말씀은 예수님이 복음을 들고 나선 후 가장 슬프고 가장 억울하고 가장 안타까운 심정에서 말씀하신 것임을 저희들이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진리의 길을 개척하고 생명의 원천을 세우려 했던 그 마당은 지극히 어려운 자리였다는 것을 저희들이 깨닫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옵니다. 전체를 당신이 품어 주시옵소서.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말 씀> 오늘 여러분과 같이 생각하고자 하는 말씀의 제목은 ‘우리들의 각오’입니다. ‘우리들의 각오’ 이러한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자기의 인격을 무시하는 사람을 용서하고 싶지 않은 것은 어느 누구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마음이나 몸, 혹은 행동, 혹은 생활, 혹은 지극히 작은 한마디의 말에까지도 어떠한 권위와 가치를 부여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 우리 인간의 마음입니다.
자기는 자신을 지극히 귀한 존재로 알고 있는데 남들은 그렇게 생각해 주지 않는 경우가 세상에는 많습니다. 자기는 지극히 참되다고 자랑하는데 남들이 그렇게 알아주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런 것을 헤아려 볼 때에, 이 땅 위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를 주장하며 살고 있는 이러한 개체의 사실들이 전체에 공인될 수 있는 때가 온다면, 그 때는 진정한 평화의 시대가 될 것이요, 우리가 소망하는 시대가 될 것입니다.
과거에 수많은 성현들이 이 땅에 와서 자기들이 생활하고 실천한 것을 후대에 남기기 위하여 피와 땀을 흘리기를 개의치 아니하고, 죽음도 개의치 아니하고 개척의 길을 걷다가 사라져 간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남기고 간 생활의 터전, 말씀의 터전, 교훈적인 터전이 오늘날 우리 실체를 놓고 볼 때 산 결과를 거두었느냐고 묻는다면, 누구나 아니라는 대답을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 자신을 두고 보더라도 내가 옳다고 주장하는 것을 환경적으로 시인 받을 수 없고 사회적으로 공인 받을 수 없는 자리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이 주장한 모든 것은 가치적인 입장에서 전체 앞에 공인 받을 수 있는 것이 되지 못 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역사적으로 믿어온 신앙이나 사회적으로 세워진 어떠한 주의를 갖고 있다 할지라도, 시간적인 거리를 넘어서서 자연스러운 환경에서 내 마음이 동할 때 상대방의 마음도 동하고, 내가 즐거워할 때 상대방도 즐거울 수 있는 시대가 오기를 어느 누구나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다른 주의는 빼놓고 종교적인 분야만 보더라도 불교신자도 그렇고, 유교를 숭상하는 사람이 그렇고, 기독교를 신앙하는 사람도 그렇습니다. 그러니 오늘 현실세계에서 ‘나’라는 존재가 완전한 기대 위에 존재하고 있는가를 스스로 반문하여 해결짓지 않고서는 자기가 처한 자리와 가는 방향과 살고 있는 모든 것이 가치적인 것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런 환경에 있는 우리들은 새로운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새로운 각오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새로운 각오가 필요할 때입니다. 그 각오는 내 일신을 통하고 환경을 통하고 사회를 통하고 세계를 통할 수 있으며, 나아가 양심을 통할하는 절대자가 계신다면 그 절대자에게까지 공인 받을 수 있는 각오라야 합니다. 그러한 새로운 각오를 통하여 가치적인 무엇을 제시할 수 있는 사람이 되지 않는 한, 여러분은 어느 때에 가서 천륜 앞에 배반자가 될지 모르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믿고 있는 그것 가지고 통할 수 있을 것이냐? 안 됩니다. 왜? 성서에는 끝날에 반드시 대심판이 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대심판이라는 말은 들었지만 내용은 잘 모릅니다. 오늘날 사회적인 사조나 세계적인 사조를 보더라도 모든 것이 진퇴양난에 처해 있습니다. 자기 자신도 수습할 수 없을 역사적인 흐름이 여러분을 휘몰아치고 있는 현실인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민주주의는 민주주의대로 공산주의는 공산주의대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렇다 할 해결점을 지어 가지고 새로운 각오의 기반을 세워 놓고 행군할 수 있는 환경이 못 되어 있는 것을 우리는 목전에서 보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런 환경에서 태어나서 자기 자신을 스스로 위로하고 스스로 믿으며 살다가 죽을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각오를 하여야 되겠습니다. 환경을 밀고 나가 악한 무리가 있으면 쳐부술 수 있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는 세계를 넘고 하늘까지 통과할 수 있어야 됩니다. 이런 신념과 각오를 가진 사람을 필요로 하는 시대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들의 각오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아무리 잘났다고 하여도 그냥 그러다가는 맙니다. 아무리 큰소리친다 하더라도 그러다 말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간은 역사적인 존재입니다. 여러분이 이 시대에 한 개인으로 생활하고 있다 할지라도 오랜 역사의 인연을 거쳐서 오늘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 인연은 현실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시대적인 동시에 미래적입니다. 이러한 인간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갈팡질팡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소망하는 이상세계는 불완전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역사적인 나를 해명하고, 시대적인 나를 해명하고, 미래적인 나를 해명할 수 있는 신념을 갖추어 반대하는 사람 앞에서 공인 받을 수 있는 그 무엇이 없다 할진대 악한 세상을 선한 세상으로 돌이킬 수 없습니다. 이것은 어떠한 힘으로도 안 되고 어떠한 세력으로도 안 됩니다. 마음과 몸이 환경의 고충을 넘어서서 역사적인 모습을 무시하고 시대적인 모든 복잡한 것을 다 살라 버리고 오직 미래를 향하여 새로운 불을 밝혀 줄 수 있는 그 무엇이 오늘날 이 시대에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디에서 동기가 된 것이어야 하느뇨?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서 동기가 된 것은 안 됩니다. 왜? 우리 인간은 역사적인 존재요, 시대적인 존재요, 소망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역사적인 내용을 가져야 되고 시대적인 내용을 가져야 되고 미래적인 내용을 가져야 됩니다. 그러나 인간은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어떻게 되어 있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이러한 입장에 처해 있는 연고로 그 무엇을 찾고, 찾다가 안 되니 그 무엇을 믿고, 믿다가 안 되니 기도를 하고 희생을 하고 죽음의 자리까지 나아갑니다. 이러면서 지금까지 나온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우리의 환경을 타개해 줄 수 있는 내용의 원천은 무엇일 것인가?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근본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라야 합니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근본이 아닙니다. 인간 이상의 근본이 있나니 그것을 관념적이나마 하나의 절대적인 주체로 세워 하나님이라 하는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근본에서부터 해명을 지어 하나님이 계신다면 그 하나님은 어떠한 존재이시며, 우리와는 어떤 관계를 맺고 계시는가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하나님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계셔서 인간을 지도해 나오신다 할진대 거기에는 어떤 뜻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도 그 뜻을 어떤 각오 밑에서 세웠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타락한 인간의 후손임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부정하려야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을 구원하는 방안으로써 어떠한 각오 밑에서 역사를, 시대를, 미래를 처리해 나가실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안 그렇겠어요? 여러분들이 어떤 각오를 하고 새로운 결심을 하고 새로운 맹세를 하지만 그것은 완전무결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근본을 통하지 못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는 절대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 절대자가 이 악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구원섭리를 해 나오는 데는 반드시 어느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절대자로서의 각오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각오가 어떤 것이냐? 죄인을 대할 때는 어떻게 대하고 선한 사람을 대할 때는 어떻게 대하여 개인으로부터 가정, 민족, 국가, 세계, 더 나아가 서는 온 천주를 창조이념세계로 완결지을 때까지는 어느 누구의 충고로도 변할 수 없고, 어느 누구의 사정에도 양보할 수 없는 각오라는 것을 알아 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억천만 년이 지나도 변할 수 없는 각오인 것입니다. 그 각오를 만인에게 제시하는 날이 바로 기독교에서 말하는 심판날입니다. 그 날은 우리 죄악된 인간들 앞에 하나님의 각오를 실제로 보여 주는 날입니다. 오늘날 이 땅 위에 수많은 인간들이 살고 있고 수많은 도인들이 살고 있으되, 그들은 하나님의 각오가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변치 않는 각오 밑에서 구원섭리를 해 나오고 계십니다.
사람은 역사적으로 공인을 받아야 됩니다. 우리가 당당히 심판대에 나서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역사적인 공인을 받아야 됩니다. 역사적인 인연을 가진 인간들이기 때문에 역사적인 공인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음에는 섭리적인 공인을 받아야 됩니다. 하나님이 없다면 모르되, 인간을 대해 섭리해 오시는 하나님이 계실진대 인간은 그로부터 섭리적인 공인을 받아야 합니다. 이 공인을 받기 위한 터전을 닦으려니 인간 세상에 종교라는 것이 나오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역사상에 어떤 사조가 나왔다 할진대, 그 사조는 하나의 세계를 대할 수 있는 입장에서 공인 받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주의와 이념, 혹은 이상을 찾아 나서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이상과 우주적인 이상을 찾으려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인가? 땅 위에 살고 있는 만민이 역사적인 공인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전체가 역사적인 인연의 세계로 들어가자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역사적인 공인을 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역사적인 공인만 받는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느냐? 아닙니다. 이 땅에서 아무리 위대한 정치가요 위대한 인물이라 하더라도, 시대와 역사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다 해도 그것 가지고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움직여 나오는 천지를 수습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인 공인을 받을 수 있는 기준을 통한 후에는 반드시 섭리적인 공인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땅을 대해 역사해 나오시는 하늘의 목적이 있거늘, 그 목적을 대할 수 있는 인정을 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지금까지 수많은 도인들은 이 땅을 저버리고, 이 시대를 무시해 버리고 새 시대에 흡수되려고 했습니다. 섭리적인 새 시대를 향하여, 섭리적인 한 때를 향하여 자기 자신을 투신해 나온 것이 종교인들입니다.
이들은 민족 민족이 다름에 따라 각기 하나의 주의를 세워 가지고 자기 민족을 수습하였고, 그 수습된 환경을 벗어날 수 있는 새로운 종교 형태를 갖추어 오늘날 세계적인 주의시대에 와서는 세계적인 종교이념을 갖출 수 있는 섭리적인 시대를 거쳐 넘어가는 것입니다. 세계와 역사가 혁명의 노정을 거쳐 온 것과 마찬가지로 종교도 혁명의 노정을 거쳐 온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적인 사조를 보더라도 자유와 평등의 이념 밑에서 하나의 세계, 즉 하나의 주권세계와 하나의 이념세계를 바라보고 나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외적인 세계 운동만이 아니라 그 반면 세계적인 종교운동을 제시해야 할 시대가 반드시 온다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역사적인 공인을 받고 전체 역사 앞에 그릇됨이 없는 존재로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시대가 와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대가 우리가 바라는 소망의 시대요, 역사가 바라는 소망의 시대요, 이상시대입니다.
그러면 그것으로써 모든 것이 종결되느냐? 아닙니다. 그러한 토대 위에서 섭리적 공인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는 시대를 이루어 그 시대와 합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인 공인을 받아야 되고 섭리적인 공인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이후에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이뇨? 섭리는 종교의 이념을 통하여 방향을 취해 나가고 있는데, 이것이 어느 기준까지 이르게 되면 결국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야 합니다. 지금까지 인류가 추구하고 종교가 더듬어 온 목적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제까지 종교는 하나님을 끌어내리고 사람을 끌어올려서 하나님과 사람을 합하기 위해서 수고했습니다. 종교의 목적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종교가 나와서 타락한 인간, 악에 처한 인간, 도저히 하늘과 관계 맺을 수 없는 인간을 끌어올려 왔습니다. ‘하나님이여! 내려오소서.’ ‘인간들이여! 올라오소서.’ 하여 하나님과 인간을 합하여 하나의 심정으로 맺어 놓겠다는 것이 종교의 목적입니다.
절대자이신 창조주는 우리 인간을 찾아오시기 위해 많은 수고를 하셨습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창조주는 인간을 찾아 나오시기 위해 기나긴 역사노정에서 홀로 수고하셨어요. 또 인간은 창조주를 찾기 위해서 수많은 희생을 당했습니다. 찾아오시는 하나님과 찾아가는 인간, 하늘은 선의 기점을 찾기 위해 땅을 향하여 출발하였고 인간은 하늘을 향하여 출발하였다면 언젠가는 상봉할 때가 올 것이거늘, 그 때가 끝날입니다. 이치가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역사적인 발판입니다. 발판이에요. 우리는 변치 않는 역사적인 발판이 된 자리에서, 변치 않는 신념을 갖추어 몸과 마음이 하나된 자리에서 하나님과 인연을 맺어야 합니다. 구주를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때를 바라시면서 섭리해 나오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최후에 가서는 전역사적인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전섭리적인 면에서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어떠한 종파가 문제가 아니요, 어떠한 민족이 문제가 아닙니다. 만민이 공히 느낄 수 있고, 지금까지의 전통이나 시대적인 환경이 막을 수 없고, 그걸 넘어서 누구든지 공인할 수 있는 역사적인 전체의 인정, 섭리적인 전체의 인정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대가 올 것이기 때문에 오늘날 세계가 하나의 운동을 제시하고 있는 반면 종교도 하나의 이념을 갖추어서 움직이는 역사가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통일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무슨 공인을 받아야 되느냐? 역사적인 공인을 받고 섭리적인 공인을 받은 다음에는 하나님의 심정적인 공인을 받아야 합니다. 왜 그러뇨?
어떤 부자가 있다 할진대 그 아버지가 아들을 보고 ‘너는 죽을 때도 내 아들이요, 어려울 때도 내 아들이요, 누구로부터 핍박받을 때도 내 아들이다.’라고 할 수 있어야 어느 누구도 그 인연을 꺾을 수 없고 뗄 수 없는 완전한 부자(父子)가 되는 것입니다. 완전하고 모범적인 부자, 여기에는 무슨 불만이 있어도 아버지는 아버지이고 아들은 아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각오를 가지고 하나의 목적의 세계를 향하여 구원섭리를 해 나오신다 할진대 땅 위에 있는 인간은 어떻게 해야 되느냐, 역사적인 공인을 받고 섭리적인 공인을 받은 후에 하나님의 심정의 공인까지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 됩니다. 그러려면 ‘네가 죽으면 나도 죽고, 네가 살면 나도 산다.’ 할 수 있고, ‘네 것이자 내 것이요, 내 것이자 네 것이다.’ 할 수 있는 기준까지 올라가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소개를 해놓고 하는 놀음이 아닙니다. 이걸 알아야 돼요. 예수가 와서 다리를 놓고 하는 일이 아니에요. 직접 하는 것입니다. 심정의 공인을 받는 시대는 직접적인 시대입니다. 심정의 공인을 간접적으로 해줄 수 있어요? 믿을 수 있는 제자를 통하여 심정이 이러이러하다고 설명한다 해서 심정이 통해요? 직접 해야 합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당신이 목적하시는 심정의 세계를 이룩하기 위하여 이 땅의 수많은 민족을 수습하고, 수많은 주의와 사조를 수습하면서 하나의 세계를 향하여 몰아 나오시는 것입니다. 지금은 하나의 세계에 제일 가까운 두 주의가 남아 있으니 끝날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세상에는 서로 부딪치고 깨지고 문제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세상이 그러니 종교도 역시 부딪쳐야 합니다. 그냥 그대로는 해결지을 수 없습니다. 부딪쳐야 합니다. 책임자는 책임자끼리 부딪치고, 교인들은 교인들끼리 부딪쳐야 합니다. 이러한 혼란을 거쳐 혁명이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역사적인 사실이에요.
우리는 이렇게 복잡한 환경에서 낙망할 것이 아니라, 이 시대가 우리에게 새로운 각오를 요구하고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기에서 낙망하고 뒤를 돌아볼 것이 아니라 앞을 보고 나아가야 합니다. 여기에서 움직이지 않고 포기 상태에 있을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각오를 해야 할 때인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과거의 어떠한 주권자도 역사노정에서 사라졌습니다. 일대에 어떤 주의를 제창한 사람도 세계적인 이념시대가 오면 사라져 가는 것입니다. 과거에 어떠한 종파를 주장하던 자도 새로운 이념시대를 향하여 넘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렇잖아요.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그들은 아담으로부터 4천년, 아브라함으로부터 2천년이라는 역사노정을 거쳐 천신만고 끝에 이스라엘이라는 선민권을 찾아 세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민족과 더불어 눈물 흘리고 그 민족과 더불어 피를 흘리시며 싸우셨습니다. 그러다가 아담 이후 4천년, 아브라함 이후 2천년의 종말시대에 국가적인 위신도 허물어지고, 사회적 환경도 흐려지고, 종교적인 이념도 사라질 무렵 예수님이 탄생하였습니다. 그 시대에 이스라엘 민족은 역사적인 사명을 완결지어 역사적인 공인을 받고 섭리적인 공인을 받을 수 있는 자리까지 나아가야 했으나 그러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어떠한 목적을 갖고 이 땅에 오셨느뇨? 인간을 하나님 앞에 직접적으로 인연맺어 주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심정적인 해결점을 찾아 주기 위해 오셨던 것입니다. 최후에는 죄짓고 타락하는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것은 다 곁가지입니다. 심정적인 문제만 해결되면 그런 것은 염려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타락한 인간은 모든 정성을 다 바쳐서, 피와 살을 다 짜내어서 뼈에 사무친 하나님의 심정의 한을 해원해 드려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이것이 섭리노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의 뜻을 따라 역사적인 환경을 수습하고 섭리적인 대표자들이 되어 하나님의 심정적인 공판대 앞에 승리자로 설 수 있었던들, 예수 이후 2천년의 섭리는 연장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나님의 심정으로 결정짓고 하나님의 심정으로 해결짓는 것은 어느 누구도 주관할 수 없고, 어느 누구도 돌이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거기에서는 사탄도 꺾여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은혜 받은 사람은 사탄이 먼저 압니다.
하나님과 심정적으로 통하고 심정적으로 체휼해야 합니다. 심정적인 체휼을 하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아버지 앞에 못 갑니다. 그런데 예수 당시의 이스라엘 민족은 어떠했습니까? 하나님의 눈물로 세우고, 하나님의 피로 세우고, 하나님의 땀으로 세운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심정을 통한 눈물이 남아 있고, 하나님의 심정을 통한 피가 남아 있고, 하나님의 심정을 통한 땀이 남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택함 받은 이스라엘 민족은 그것을 다 잊어버렸습니다. 모두 잊어버렸던 것입니다.
그런 민족 앞에 예수님은 재무장하여 나타나셨나니 그 분의 사명은 무엇이었는가? 그 시대 사람들을 끌어다가 천국 보내는 것이요? 아닙니다. 역사적인 하나님의 눈물, 역사적인 하나님의 피와 땀을 해원해 드리는 것이 예수의 사명이었습니다. 그 사명을 못하면 하나님의 뜻은 종결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뜻을 이루는 데는 반드시 역사적인 민족이 필요합니다. 세계 인류를 대신해서 하나의 이념국가를 세울 수 있는 하나의 민족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민족의 기반 위에 예수님이 그들이 모르는 가운데 흘리신 하나님의 눈물과 피와 땀이 그들의 몸 가운데 어려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실제로 보여 주어서 그 민족과 하나되었던들, 기독교 2천년 역사의 소망인 재림사상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는 이스라엘 민족을 대해서 이 땅에 오셨나니 무엇을 목적으로 오셨느뇨? 택한 민족이 역사적인 내용을 잃어버렸으니 이것을 보여 주기 위하여 오셨고, 그 다음에는 섭리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오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형(無形)의 신(神)으로서 눈물 흘리고 무형의 신으로서 피와 땀을 흘리는 것을 개의치 않으셨으나, 그것을 인간 앞에 실체로 보여 주지는 못하셨습니다. 그것을 실체(實體)로서 인간 앞에 보여 주고 실체로서 인간을 품어 주기 위해 인류의 참아버지로 오신 분이 예수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늘이 어떠한 절대적인 각오 밑에서 민족을 지도하는 한, 하늘을 따른다는 이스라엘 민족도 절대적인 각오 밑에서 단결하여 메시아를 모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했던들, 그들은 오늘날처럼 비참하게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지상에는 아직까지 유대교가 남아 있습니다. 예수님을 잡아죽인 선봉자들이요, 핍박자들이요, 사탄의 이용물로서 하늘을 배반한 그 유대교가 아직도 남아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 하나님은 아직까지 원수를 못 갚았습니다. 원수를 못 갚았어요.
예수님이 죽음의 자리에서도 원수를 위해 기도할 수 있었던 본연의 심정은 어디 있었던고? 하나님이 어떤 각오 밑에서 인류를 완전복귀하기 위하여, 선의 세계를 복귀하기 위하여, 악을 멸망시키기 위하여 섭리하신다는 것을 예수님은 철두철미하게 아셨습니다. 자신이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악을 대하여 싸워야 할 싸움의 터전이 남아 있는 것을 아신 예수님은 자기를 죽음의 자리로 내모는 이스라엘 민족을 바라볼 때 저주의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이 땅에 와서 고생한 자신의 생애가 문제가 아니라 민족 전체를 책임지고 역사적인 하나님의 슬픔과 하나님의 고통과 하나님의 억울함을 해원해야 할 자신임을 아신 예수님은 자기의 괴로움이나 피 흘리는 고통보다도 역사노정에서 불쌍한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어 나오시기에 자신이 죽는 것의 몇 배가 되는 고생을 하신 하나님인 것을 아셨기에 입을 벌려 저주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있어서 그랬다구요? 아닙니다. 알고 보니 그런 심정이 있었던 것입니다.
노아로부터 아브라함, 모세는 모르는 가운데서 막연히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각오와 결심을 하고, 피를 뿌리면서 생명을 던져 나왔지만, 무지한 인간들을 깨우치고 수습시켜 하나의 목적을 향하여 나오신 하나님의 고통과 하나님의 눈물과 하나님의 억울함, 하나님의 수고를 아신 예수님은 자기 하나쯤 죽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런 예수의 심정을 느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보낼 수 있는 소망의 민족을 세우시기 위해 얼마나 많은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리며 수고하셨는데, 이들마저 쓰러지면 어떻게 되는가를 예수님은 생각하셨던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예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심판하여 ‘멸망받을지어다.’ 하고 저주하였다면 그날로 그들은 전부 멸망하였을 것입니다. 축복받았다는 그 무리들은 전부 심판에 걸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만번 자신을 치는 한이 있더라도 그들을 위하여 복을 빌어 주시던 예수님의 심정을 여러분은 똑똑히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30여 년의 생애를 거치면서 예수님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뼈와 살에 사무친 눈물을 흘렸습니다.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예수님은 슬픔에 사무쳐 살았어요. 죄악이 가득 찬 이 땅 위에는 안일한 가운데 즐거운 생활을 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정작 영광 중의 영광 가운데 살아야 할 예수님은 눈물로 살았습니다. 눈물뿐만 아니라 땀까지 흘렸습니다. 최후에는 골고다에서 피를 흘리셨습니다. 이 땅을 위해 눈물과 땀을 흘리는 것도 부족하여 나중에는 피까지 흘렸습니다.
그 피는 어떤 것이뇨? 아브라함으로부터 2천년, 아담으로부터 4천년 동안 하나님이 흘리신 눈물을, 민족은 망할지라도 그 민족을 대신하여 상속 받아 놓으신 것입니다. 그 눈물을 상속받지 않으면 이스라엘이 망할 때에 하나님의 섭리도 끊어져 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물을 상속받아야 할 예수였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배반할망정 지금까지 그들을 이끌고 나오시며 수고하신 하나님의 땀을 상속받아야 할 예수였습니다. 역사를 대신하여 나타나신 예수는 눈물을 상속받아야 할 자이니 눈물을 안 흘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나와 예수를 맞게 하기까지 수많은 선지자들을 희생시키고 피 흘리며 죽게 했는데, 만일 예수가 거기서 이스라엘 민족을 끊어 놓으면 하나님이 수고하신 눈물의 역사가 끊어진다는 것입니다. 피의 역사가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4천년 동안 하나님께서 수고하신 피의 역사의 전통, 그 험난한 역사를 무너뜨리지 않기 위하여 피 흘리는 길, 죽음의 길을 갔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떨어져 나갔지만 이스라엘 민족을 대해 섭리해 나온 4천년사, 하나님의 심정을 통하여 엉클어진 심정적인 4천년사는 예수로 말미암아 오늘날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인계되어 제2이스라엘을 창조한 것입니다. 만일 예수가 그들을 저주하고 원수를 원수로 갚았더라면 자기 일신의 욕망은 충족시켰을지 모르지만 역사적인 인연은 끊어져 나갔을 것입니다. 역사적인 인연은 끊어져 나갔을 거예요. 이스라엘 민족은 망하더라도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흘린 땀과 눈물과 피의 역사가 끊겨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본의(本意)는 거기에 있었습니다. 아벨의 피가 호소하는 제단이 무너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 흘리며 기도하시는 예수의 모습, 골고다를 향하여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의 거룩한 모습을 통하여 이스라엘 민족은 하늘을 배반한 배역의 무리가 되었으나 그들을 세우기 위하여 수고하신 하나님의 슬픈 역사는 인계된 것입니다. 이 눈물의 역사, 이 땀의 역사, 이 피의 역사를 상속받은 것이 기독교라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내용을 모르는 자는 망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것을 몰라서 망했습니다. 여러분도 그저 성경과 찬송가만 들고 교회에 출입할 것이 아니라 피 흘리는 하나님을 대신한 예수를 알고, 눈물 흘리는 하나님을 대신한 예수를 알고, 땀 흘리는 하나님을 대신한 예수를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희생과 죽음으로써 세계를 점령해 나오는 것이 기독교의 전통이요,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오시는 전통적인 노정입니다. 무슨 교파니 정통이니 하는 것은 문제가 안 됩니다.
우리는 배워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성경을 보더라도 교훈적인 것만 볼 것이 아닙니다. 기도를 하더라도 ‘예수와 동참할 수 있게 예수가 땀 흘리던 골짜기로 나를 몰아내 주시옵소서. 예수가 피 흘리던 골고다로 나를 몰아내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본질적인 요소요, 영원히 변할 수 없는 전통 중의 전통이라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것을 가로막는 그 무엇이 있다면 최후의 심판을 걸어 놓고 싸워야 합니다. 이러한 무리가 이 끝날에 나와야 합니다. 심정의 인연을 갖추어서 역사적으로 엉킨 하나님의 원한과 예수와 성신의 한을 풀어 드리고 승리자가 되어 ‘아버지’ 하면 아버지께서 ‘오냐’ 하실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모습을 바라시고 하나님은 섭리해 나오셨음에 틀림없습니다. 이것은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그러하고 이론적으로 따져 봐도 그러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전부 다 이단입니다, 이단.
오늘날 제아무리 잘 믿는 신앙자라 해도 옛날 유대교 신앙자들을 따를 수 없습니다. 그들은 그만큼 철저했습니다. 밤낮으로 메시아가 오기를 고대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결여되었던고? 그들은 역사적인 눈물을 밟고 올라섰습니다. 역사적인 피와 땀을 무시하고 자기를 중심한 입장에 섰습니다. 그러니 망해야지. 망해야 됩니다.
하늘은 예수를 죽음의 자리로 내놓으시고 눈물 흘리셨습니다. 아무려면 교법사 제사장들을 제자로 삼고 싶은 마음이 없었겠습니까? 4천년 동안 메시아가 오기를 정성들여 고대하던 그들 중의 몇 명만 예수의 제자가 되었던들 유대교 전체는 하나님의 뜻 앞에 설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쌍한 예수였습니다. 영광의 뜻을 대신하는 각오를 갖고 오셨으나 고난의 뜻을 대신하는 새로운 각오를 세우고 가셔야 했던 예수였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고난의 각오를 십자가로 종결지었던 것입니다. 영광의 심정을 대신하는 그 영광의 뜻은, 그 영광의 각오는 아직까지 우리의 신앙노정에 나타나지 않고 소망의 한 날인 신랑 신부가 만나는 어린양 잔치를 보시지 못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경을 보는 목적, 예수를 믿는 목적이 고난받기 위해서입니까, 영광을 얻기 위해서입니까? 이 둘 중에 어떤 입장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셨으되 어떠한 심정의 동기에서 하셨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걸 알면 천당 갑니다. 간단해요. 오늘 여기서 말하는 이 젊은 사람도 그냥 믿고 천당 가려면 이런 놀음 안 해요. 가다 보니 아니 가면 안 될 길이기에 이런 놀음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만은 철저히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왔다 가신 이후 2천년이 지나고, 아담 이후 6천년이 지난 오늘날을 역사의 종말시대, 최후의 판결을 지어야 할 끝날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 재폭발시켜야 할 것이 무엇인가? 예수의 정신을 재폭발시켜야 합니다.
이제 이 시대에 있어서 역사적인 인연을 수습하고 새로운 미래의 발판을 세우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이뇨? 무슨 운동을 해야 할 것이뇨? 예수 재현 운동을 해야 합니다, 예수 재현 운동을.
예수 재현 운동은 잘 먹고 잘 살자는 것이 아닙니다. 눈물을 뿌렸으니 눈물로 거두어야 합니다. 땀을 뿌렸으니 땀으로 거두어야 합니다. 피를 뿌렸으니 피로 거두어야 합니다. 결론은 그것입니다. 거두는 데는 뿌리시던 그 심정을 갖추어 가지고 거두어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2천년 전의 심정을 갖춘 재현자(再現者)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피와 눈물과 땀의 역사입니다. 피는 하늘을 위하여 바쳤고, 눈물은 인류를 위하여 흘렸고, 땀은 죄악의 땅을 위하여 흘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의 때는 누구한테 물어볼 때가 아닙니다. 어떤 스승을 따라 자기 생애의 운명을 해결할 때가 아닙니다. 자기의 부모를 따라서 무슨 일을 판결지을 때도 아닙니다. 그러기에 오늘날 인간들은 전부 다 개인주의적 입장에 있습니다. 부모도 그렇고 자식도 그렇습니다. 땅 위의 모든 존재는 자기의 가치를 갖추어서 결실의 미(美)를 하늘 앞에 드려야 할 때입니다. 콩으로 된 자는 콩으로 맺어야 하고, 팥으로 된 자는 팥으로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한 부모 밑에서 태어난 형제가 열 명이라도 그 열 사람 전부 다 다르듯이 각자의 모양대로 결실을 맺어야 할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끝날에는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밀실에 들어가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믿고 따르고 의지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민족 혹은 국가의 이념도 생명을 걸어 놓고 믿을 것이 못 되고, 세계적인 사조도 생명을 걸어 놓고 믿을 것이 못 됩니다. 전부 다 그렇습니다. 믿을 수 있는 것이 되었더라면 문제는 벌써 해결되었을 것입니다. 누구도 믿지 말라는 거예요. 여기서 말하는 사람도 막연히 믿지 말란 말입니다. 여러분이 이 사람의 말을 듣고 있지만 사실인지 분석해 봐야 합니다. 분석해 보고 비교해 보고 가치를 찾아내어 영원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내용인지 아닌지를 따져 보아야 합니다. 맹목적인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스승도 믿지 말아요. 돈 보따리에 팔려 다니는 스승들을 믿지 말아요. 달콤한 말로 일생을 몰락시키는 그런 스승들을 믿지 말란 말입니다.
자고 있는 것을 깨워만 놓으면 하늘땅의 영원한 유업을 상속받을 수 있는 것이 있으니, 그것이 무엇이냐? 마음입니다. 양심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자고 있습니다. 자고 있는 그 자리가 죽은 자리인지 살 자리인지, 산인지 바닷가인지 우물가인지 모르고 자고 있습니다. 자고 있는 이것을 깨워 양심의 말을 듣게 할 수 있는 운동이 역사의 종말시기에 나타나지 않는 한 인류는 갈팡질팡하게 됩니다. 어떠한 사조나 주의에 휩쓸려 언제 고난 가운데 빠질지 모른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나는 당당한 하나의 인격자인데 내 양심이 뭐가 잘못되었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여러분의 양심은 자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자고 있어요. 틀림없이 자고 있습니다. 양심은 누구의 제재나 지배받기를 원치 않습니다. 양심은 쉬지 않습니다. 아무리 캄캄한 밤중에도, 환한 곳에서나 호화찬란한 곳에서도 잘못되게 내버려두지 않아요. 조금만 잘못하면, 야, 이놈아! 하면서 몸을 치는 것이 양심입니다. 이러한 스승이 어디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여러분의 양심이 자고 있다고 말하는 이 젊은 사람의 말이 사실이냐 하는 것입니다.
자고 있는 양심을 깨웁시다. 하나님의 심정을 모르고 잠자고 있는 민족의 양심을 깨웁시다. 하나님의 심정을 모르고 잠자고 있는 세계 인류의 양심을 깨웁시다. 하늘땅을 품고 하나의 세계를 건설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종말세계를 향해 아니 가려야 아니 갈 수 없는 입장에 처한 인간들의 양심을 깨워 줍시다.
오늘날 우리들이 믿고 있는 종교가 세계 인류 전부에게 가르침을 줄 수 있고 잠자고 있는 양심을 깨울 수 있는 종교가 되어 있습니까? 그런 내용을 갖춘 주의나 이념이 있습니까? 양심이 깨어 거기에 들어오는 그 충격, 그 결의, 그 각오는 세상만사를 일시에 밟아 치울 수 있는 힘으로 나타나야 됩니다. 칼이 무서워? 죽음이 무서워? 내 양심에서 일어나는 이것을 어느 누가 막을소냐? 못 막습니다.
이런 충격을 받아 각오한 주의와 이념을 여러분의 가슴에 품고 하나의 목적을 위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밤이나 낮이나 내가 잠든 사이에도 양심이 ‘왜 자니, 또 가야지’ 하고 재촉하는 소리를, 그 힘의 원천을 여러분은 느껴 보았습니까? 못 느껴 봤으면 회개하십시오. 이런 것을 회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결의와 각오가 있다 할진대 그 각오와 결의의 목적은 무엇일 것이뇨? 인간들의 자고 있는 양심을 깨우는 것입니다. 이 양심을 깨우기 위해 지금까지 터전을 닦아 나온 것입니다. 이렇게 가르쳐 주고 저렇게 가르쳐 주면서 말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세계적인 섭리입니다. 이것이 역사적으로나 현실적으로 보아서 ‘오! 그것이 맞구나.’ 할 수 있을 시대까지 참아 나왔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수많은 민족을 복잡한 환경에 처하게 하여 일깨워 가지고 ‘하늘의 섭리가 이랬었구나. 알고 보니 그렇구나.’ 할 때까지 역사해 오신 것입니다. 복잡한 환경을 거쳐 세계적인 무대에서 전체 역사를 종결짓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기 때문에 인간들의 양심을 일깨워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양심에 따라 방향성을 갖추어 사는 것입니다.
이런 양심의 키를 잡고 하늘땅을 움직여낼 수 있는 힘 있는 용자가 나타나기를 하나님은 그리워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까? 그렇게 되는 것이 우리의 목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을 대해 심판하시기 직전에 하나님의 각오를 인간에게 실현하느냐 못 하느냐 하는 마지막 실현무대가 올 것입니다. 그러한 때가 오지 않고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면 그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몸은 자기도 모르게 천주(天宙)의 운세에 휩쓸려 들어가는데, 여러분의 마음은 어딘지 모르게 클클합니다. 안정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소망에 넘치고 풍부하고 여유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할 텐데 그러지 못하고 쭈그러 들어가는 자신의 모습, 갈수록 희망찬 모습은 흔적 없이 사라져 가고 신음하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아야 하는 여러분은 하루도 편히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은 고마운 것입니다.
안팎을 수습할 수 없고 좌우도 분별할 수 없는 이런 때에 하나님의 외침이 나와 가지고 우리의 힘을 폭발시켜 세상의 모든 것을 일시에 심판할 수 있는 승리의 인격자를 세우는 운동이 하늘로부터 인간을 통해 나타나야 합니다. 그러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무자비한 심판주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무슨 사랑의 하나님? 반드시 그런 운동이 일어나는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깨우치고 나서야, 옳고 그른 것을 다 가르쳐 주고 나서야 심판하시지 아무것도 모르는 것들을 어떻게 심판하겠어요? 전(前)은 이렇고 후(後)는 이렇다는 것을, 네 마음의 도(道)는 어떻다는 것을 가르쳐 주어 가지고, ‘옳소이다’ 할 수 있는 그 무엇을 제시한 후에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도 예수도 성신도, 지금까지의 모든 선조들도 전부 여러분의 마음을 깨우치기 위해 수고하셨습니다. 천국이 딴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은 내 마음에 있습니다. 이 마음은 천국도 잡아넣을 수 있는 것이요, 슬픈 하나님의 심정도 녹여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 될 거 아니에요?
6천년 동안 통곡하신 하나님, 피 흘리고 땀 흘리고 죽음의 길을 개척해 나오신 그 하나님을 대하여 ‘아버지’ 할 때 하나님께서 지금까지의 죽음의 고통도, 눈물도 모두 잊어버리고 ‘오냐, 지금까지 섭리해 온 목적이 너 때문이었다.’ 하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마음을 재출현시키고, 근본 양심을 재소생시키기 위한 것이 끝날을 대한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섭리가 남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권위 있다는 케케묵은 전통이나 자랑하는 그런 교파에 몸을 매지 마십시오. 그렇다고 통일교회 믿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려면 오고 말려면 마십시오. 그건 자유입니다.
이 끝날에 잠자고 있는 자기의 양심을 깨우지 못한 자들 앞에 경고할 것은 무엇이뇨? 잠자고 있는 자리에서 제일 좋아하는 것이 심판의 조건이 됩니다. 제일 좋다는 것이 심판에 걸리게 하는 중심조건이라는 말입니다. 아들을 좋아하면 그 아들이 심판의 중심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그 아들 때문에 심판받아요. 그것 때문에 깨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아무리 인격자이고 권세가 당당하다고 해도 어차피 심판의 문을 거쳐 새로운 무엇으로 소생해야 합니다.
이러한 것을 안다 할진대, 자기가 온 심정을 다 기울이고 몸 마음을 다 기울이고 자기의 의식과 인식 전체를 기울여 꼼짝달싹 못하고 좋아하는 그것이 자신을 잡아먹는 함정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도 나는 양심적으로 산다고 하는 사람들, 그 양심이 하나님을 압니까? 하나님을 알아요? 하나님이 그 양심을 알아줍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사람을 대해서는 알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뜻은 모릅니다. 왜? 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깨워야 합니다. 잠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지금은 여러분들이 깨어나야 할 때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의 각오가 그러하고 예수와 역대 선조들도 그러하였거늘, 오늘 이 시대에 사는 사람들도 각성해야 됩니다. 깬 모습이 되어 새로운 이념적인 무엇을 자극시켜서 현실을 타개해 나가야 합니다. 이것은 혁명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끝날에 처한 우리는 하늘땅을 준다 해도 세상의 어떤 부귀영화를 준다 해도 그것을 무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영원히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고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절대적인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 마음이 깨어 하늘을 새로 알고 인류를 새로 알고 이 땅을 새로 아는 운동이 여러분 자신에게서 일어나야 합니다. 그러지 않는 한 여러분은 심판을 면치 못하고 낙오자가 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과 마찬가지로 우리들은 각오를 해야 합니다. 무슨 각오를 해야 할 것이뇨? 세계를 정복하려는 각오보다도, 훗날 자기가 잘되기 위한 각오보다도 자고 있는 양심을 깨우려는 각오를 해야 합니다. 그러기 전에는 다 허사입니다. 아무리 결심을 하고 아무리 각오를 했댔자 허사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자고 있는 양심을 깨우려는 각오를 해야 합니다. 이것을 하지 못하는 한 아무리 호화찬란한 영광의 세계가 있다 할지라도 우리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습니다. 아무리 천지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라 하는 이름을 갖고 있다 하여도 우리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지금까지의 기성관념, 어떤 신앙, 사상, 주의 등을 일소해 버리고 우리의 마음 밭을 계발하는 운동을 벌여야 합니다. 무엇을 갖고? 인정(人情)을 떠나 천정(天情)으로 우리의 심전(心田)을 계발하는 운동을 벌여야 합니다.
천정이 무엇인지 알아요? 천정을 중심삼고 우리의 마음밭, 즉 심전을 계발해야 되겠습니다. 일으켜서 안 일어나면 들이쳐서라도 깨워서 알려 주어야 할 때입니다. 이런 운동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다가 지칠 대로 지쳐서 이곳에 들어왔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람이 제일 서러운 것이 그것입니다. 서럽다는 거예요. 꽃다운 청춘시대, 혈기 왕성한 그 시절을 다 지내고, 정의에 불타는 정열을 가지고 하나님의 심정에 목을 걸고 피를 토하며 쓰러질 수 있는 시절을 다 보내고 지칠 대로 지쳐서 들어온 것이 서럽다는 거예요. 그렇다고 낙망할 것은 없습니다. 여러분이 못 하면 여러분의 아들딸이 있고, 여러분의 몫을 해줄 청년들이 있으니까요.
여러분은 그들의 심부름꾼이라도 되어야 합니다. 심부름꾼이라도 되어야 해요. 그리하여 천정을 대신한,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한 마음 밭을 계발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늘을 알고 땅을 알고 인류를 아는, 하늘을 사랑하고 땅을 사랑하고 인류를 사랑하는, 더 나아가서 영계(靈界)까지, 또 더 나아가서는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는 여유 있는 마음밭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우리들이 해야 할 마지막 각오입니다.
여러분! 오늘 여기 왔다가 그냥 돌아가지 마십시오. 오늘날 이 시대는 절박한 때입니다. 보십시오. 금년 다르고 명년이 다릅니다. 더욱이나 한국은 더합니다. 갈피를 못 잡고 헤맵니다. 얼크러져 들어갑니다. 이제부터 3년은 세계적 전환기입니다. 늦으면 7년까지 갑니다. 전환기예요, 전환기.
이제 여러분은 마음의 본향을 찾아가야 합니다. 나를 낳아 준 어머니의 무릎이 그리워 찾아가 보았자 허사입니다. 마음의 본향, 마음의 주인을 찾아가야 합니다. 사회적인 선(善)을 2천년 동안 찾아왔으나 안 되었으니 마음의 선(善)을 추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내 마음이 얼마나 선한가 돌이켜 보고 탄식해야 되겠습니다. 내 마음이 얼마나 넓고 얼마나 존귀하며, 내가 얼마만큼 귀한 가치의 모습으로 늠름하게 살 기력을 갖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안 되어 있다 할진대 그것을 계발시킬 수 있는 협조자, 한마디 말로써 내 마음을 일으킬 수 있는 어떠한 교리나 이념이 필요합니다. 그리하여 이것이야말로 마지막이요, 어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를 지닌 것이라는 기준에 서서 천지를 품고 대우주를 품고 편안한 잠을 잘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잠을 자고 깨어나야 새 나라의 아들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마음을 품고 승리자가 되어 다시 깨어나야만 하나님의 상속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누구의 말을 듣지 마십시오. 영적으로 보면 지금 이때는 점점 클클해져 가고 있습니다. 똑똑한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지탄의 대상이 됩니다. 친구의 의리는 간 곳 없고 가는 곳마다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뿐입니다. 믿고 있던 사회적인 기반은 자기에게 자극을 줍니다. 가정에 들어가도 그렇고, 사회에 나가도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마음이 편하냐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어떻게 하겠어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잘났다고 해도, 아무리 똑똑한 체 해도 별수가 없는 것입니다.
끝날에 접어든 이 시대에 있어서 여러분은 양심의 잠꼬대를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마음의 잠꼬대를 박차고 때와 시대를 분별하여 자기의 마음 밭을 계발할 수 있는 하나의 곳, 하나의 둥지, 하나의 이념적인 터전을 여러분의 생애에서 갖추지 않는다면 여러분이나 이 민족은 불쌍하게 될 것입니다. 만일 우리 삼천만 민족이 이런 혼란된 세상에서 그러한 이념을 갖추게 된다면 세계를 지배하게 될 것입니다. 세계의 문화, 세계의 역사, 세계의 모든 주권은 없어질망정 새로운 문화시대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민족만 된다면 그 민족은 세계를 지배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이상시대에 없어서는 안 될, 그 민족을 동기로 하지 않으면 안 될 민족이 된다면, 그 민족은 세계를 지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주권도 문제없고 큰소리치는 이들도 지배할 수 있단 말입니다. 그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 죽어도 좋다고 하는 때가 되면 그때가 끝날입니다.
이제 끝날이 왔으니, 여러분은 심전을 계발하기 위해 새로운 각오를 해야 합니다. 새로운 각오를 하는 데는 어떻게 해야 되느뇨? 눈물의 길이든 죽음의 길이든 자진하여 하나님과 더불어 나가겠다는 결의를 해야 합니다. 죽고 사는 것을 초월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도 맨 처음 복음을 선포하러 나설 때 비장한 결심을 하셨습니다. 잠들어 있는 이스라엘 민족을 깨워야 할 예수의 심정은 불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그들의 잠을 깨우려 하지 않았습니다. 자고 있는 그들을 깨우려 한 것이 아니라 자고 있는 집을 헐어 버리려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주의입니다. 살고 있는 집이고 성전이고 다 헐어 버리겠다는 것입니다. 집에서 자꾸 자고 있으니 집부터 헐어 버려야 되겠다는 거예요.
인간이 살아가는 근본은 심정입니다. 사랑입니다. 타락한 인간들이 부모를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고, 부부끼리 사랑하고, 누구를 사랑하고 하는 것들을 뒤엎어야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마 10:37-38)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인간들의 잠든 양심을 깨우치기 위해 심정혁명을 주장했던 것입니다. 4천년 역사노정에서 수많은 선조들이 수많은 주의를 외쳤지만 어느 누가 부모나 형제보다 나를 더 사랑하라고 했습니까? 예수님은 심정혁명을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땅 위에 엉클어져 있는 것, 사탄이 소유하고 있는 것을 심정의 힘으로 혁명하려니 반대를 받았지요.
예수께서는 자기 어머니에게 ‘여인이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하셨지요? 당연합니다. 그 말씀 한번 잘하셨습니다. 모친과 동생들이 와서 예수를 찾는다고 할 때도 예수님께서는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셨습니다. 이런 것을 보고 예수님을 숭상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심정혁명을 주장하고 나선 예수의 첫 선포입니다.
말씀을 놓고 주저하고 방황하는 무리는 최후의 심판을 못 넘어갑니다. 예수께서는 심전(心田)을 계발하기 위하여 잠들어 있는 인간들을 깨우치려고 하였습니다. 이불을 벗겨 버리고 궁둥이가 불이 나게 때려서 지옥으로 떨어뜨려 거기서부터 일어나겠다는 민족을 만들어 가지고 다시금 깨우치는 길을 개척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인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세계적인 종말시대에 제일 불쌍한 민족을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가 벌어질 것입니다. 한국 같은 나라는 축복받을 수 있는 조건을 많이 갖춘 나라입니다. 그러니 낙심하지 마십시오. 고마운 것은 하나님께서 그러한 조건을 갖춘 민족을 찾아오신다는 것입니다. 지금 한국은 남북으로 갈라져서 부모는 이북에서 자식은 이남에서, 남편은 이남에서 아내는 이북에서 심정적으로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자연적으로 심정을 분리한 것입니다. 어렵게 어렵게 피난민 생활을 하다 보니 서로 믿지 못해 다투고 싸우곤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교회 장로도 그렇고 목사도 그렇습니다. 원칙을 두고 볼 때 이러한 것들은 나쁜 현상이 아닙니다.
예수가 주장한 이념적인 세계가 반드시 온다면 이런 민족을 통하여 가까운 데서부터 갈라 나온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나보다도 예수님을 더 사랑하고 예수님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해야 되겠습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아까 말한 바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역사적인 공인을 받아야 되고 섭리적인 공인을 받아야 되며 시대적인 공인을 받아야 됩니다.
하늘 앞에 제일 가까이 설 수 있는 조건이 무엇인가? 여러분 자신들입니다. 여기 나이 많은 아주머니 아저씨들은 아들딸을 낳아서 길러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아이를 품고 안고 젖을 먹이며 귀여워하는 마음 이상으로 하나님을 사랑해 보았습니까? 못 해보았다면 절대 안 됩니다. 다음에 그 아이가 심판대 앞에 나타나서 호소할 것입니다. 자기 남편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했습니까? 이 다음에 심판대에서 그 남편이 호소할 것입니다.
도의 길은 버리는 길입니다, 버리는 길. 이런 말을 하고 싶지 않지만 원칙이 그렇습니다. 사랑스러운 자식도 버리고 가야 합니다. 그 자식이 억울하고 분한 자리에 있어도 내버려두어야 합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은 그런 놀음을 다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자식을 이 땅에 보내시어 억울하게 천대받게 했습니다. 택한 선조들을 억울하게 맞게 하셨습니다. 사랑이 없어서 그랬겠습니까? 사랑하지만 땅을 대신한 제물이 되어 사랑의 피, 선의 피를 뿌려야 했기 때문에 그러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개인을 제물로 하여 가정을 세우고, 가정을 제물로 하여 민족을 세우고, 그 민족을 제물로 하여 세계를 세우려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제물로 하여 세계를 세우려 하셨던 것입니다. 똑똑히 알아야 됩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피로써 망했습니다. 사랑하는 민족을 망하게 해 가지고는 세계를 점령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이제 세계를 그런 자리에 처하게 해 가지고 무엇을 찾게 하실 것인가? 하나님을 찾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는 그런 도탄 속으로 휩쓸려 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심전(心田)을 계발하기 위해서 비장한 각오를 해야 됩니다. 여러분의 눈앞에 있는 사랑하는 아들딸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노아를 부르시어 120년 동안 믿으라 하시고는 배척하는 길, 핍박받는 길로 내몰았습니다.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사랑한다고 해놓고는, ‘너희의 자손들이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라.’고 축복해 주시고는 갈대아우르를 떠나라 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야곱이 하란으로 가는 도중 돌베개를 베고 자는데 나타나시어 축복하시고는 하란으로 보내어 21년 동안 고역살이를 시켰습니다. 모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선민이요, 하나님의 뜻 앞에 서야 할 민족임을 알고, 그의 형제, 즉 이스라엘 사람과 싸우는 애급 사람을 돌로 때려죽이는 모세의 불타오르는 민족 정기를 보고 하나님은 그를 미디안 광야로 내몰아 40년 동안 고생하게 하셨습니다.
또 예수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이 땅의 구세주로 보낸 하늘의 황태자요, 하나밖에 없는 하나님의 독생자였습니다. 만군의 여호와,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실 때 천한 마구간에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고맙게 여겼습니다. 이래도 고맙고 저래도 고맙다는 것입니다. 적수(赤手)로 왔으니 적수로 간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심정에서 왔으니 가는 것도 아버지의 심정을 붙들고 가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의 인생 목표였습니다.
부모의 피와 살을 받고 사랑의 씨를 받아 태어났으니, 그것을 안고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으로부터 뿌려졌으니 그것을 붙안고 가지 않으면 천상 세계에 가서 입적을 못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시는 예수는 이 땅에 오셔서 30여 년을 사는 동안 배척만 받다가 가셨습니다. 부모한테 배척받았습니다. 민족한테 몰렸습니다. 친구한테 몰렸습니다. 교단한테 몰렸습니다. 나중에는 그를 따르던 12사도한테까지 배반당했으며, 더 나아가서는 사랑하는 세 제자에게마저도 배반당했습니다. 최후에는 하나님까지도 모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바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나님이 버리는 자리에서도 예수는 ‘하나님이 나를 버릴지언정 당신을 사랑하는 이 마음의 중심만은 변할 수 없습니다.’ 하셨던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예수는 하나님이 떠나가도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을 대신한 심정의 중심으로서 비로소 만민을 대할 수 있는 자격자가 된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이 시대에 우리는 이런 이념과 뜻을 알고 마음의 혁명을 일으켜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는 심정혁명까지 해야 합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의식혁명을 떠들고 있는데 우리는 그것이 아니라 양심혁명을 제시하여 양심을 깨우치고 심정혁명까지 일으켜야 됩니다. 이러한 움직임이 이 천지에 나타나는 날에 사탄세계는 무너집니다. 악의 터전이 무너진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마음을 붙들고 마음을 깨우치는데 방해되는 모든 것을 제거하고 스스로를 정비하여 비장한 각오와 결의 밑에서 자신의 마음밭을 가꾸어 나가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타락하기 이전의 본연의 모습을 회복하여 하늘땅을 품을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심정의 주인들이 되어 주기를 바라 마지 않습니다.
아버지! 어려운 길을 헤매다가 더 어려운 길을 찾아 나왔습니다. 사망으로 인도하는 길은 넓고 평탄하되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은 좁고 험하다고 하였습니다.
아버님! 가고 나면 끝인 줄 알았더니 또 가야 할 길이 남아 있사옵니다. 6천년 동안 저끄러 놓은 역사의 모든 것을 저희들의 사정으로 풀려면 억천만 가지의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아옵니다. 이 모든 어려움을 다 이겨낼 수 있는 심정의 폭발을 일으켜 자신의 모습을 붙안고 노래할 수 있는 날이 그립사옵니다. 이것을 혁명하기 위해 새로운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 되겠사옵니다.
이제 이러한 이념을 갖고 그 기준을 개척하지 않으면 세계를 개척할 수 없다는 것을 저희들은 알았사옵니다. 자신의 마음 밭을 개척하고, 잠들어 있는 마음을 깨우쳐 본연의 아버지를 바라보고 쌍수를 합장하여, 몸 마음을 위시한 세포와 피 살과 뼛골이 전부 다 움직이는 가운데서, 아버지를 부르며 감사와 황공함의 눈물을 흘리며 몸 둘 바를 몰라 머리 숙일 수 있는 감격스런 자리로 저희들을 이끌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세상의 그 무엇을 주고도 바꿀 수 없고 죽는 한이 있어도 배반할 수 없는 하나의 길, 하나의 움직임, 하나의 최후의 이념이 이 땅 위에 나타나기를 바라옵니다.
심판의 날이 오기 전에 그런 운동이 반드시 이 땅 위에 나타날 것을 알았기에 오늘 저희들은 통일의 명색을 갖추고 나타났사옵니다. 민족으로부터 몰리는 것을 고맙게 생각하고 사회 환경으로부터 핍박받는 것을 억울하게 생각하지 않사옵니다.
그럴 때마다 그것이 역사적인 한의 줄기 줄기를 끊고 역사적인 슬픔의 장벽을 허는 데 재료가 된다는 것을 생각하며 마음이 기뻐하는 그 세계를 향하여, 마음이 품고자 하는 인류를 향하여, 마음이 머물고자 하는 새로운 땅을 향하여 땀과 눈물과 피를 흘릴 각오를 하고 나섰사오니, 지켜 주시옵소서. 이 시간도 그와 같은 환경에서 피와 살을 개의치 않고 싸우고 있는 사랑하는 아들딸들이 있사옵니다. 그들을 친히 보호하여 주시옵고 지켜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잠들어 있는 민족을 깨우치기 이전에 먼저 내가 깨어서 민족이 어떻게 자고 있는지 알고, 세계 인류가 어떻게 자고 있는지 알아야 되겠사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알아 가지고 깨우쳐야 할 사명이 있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아버지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마음과 깬 자의 모습을 갖추어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고 땅의 인류를 형제라 부를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네가 바로 영원히 머무를 수 있는 안식의 보금자리다.’ 할 수 있는 자격자들이 다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새로운 각오, 새로운 마음을 다시 한번 일으켜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려는 것이 제일 큰 것임을 이들이 절절히 느끼고 돌아가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올 때, 모든 말씀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였사옵나이다. 아멘.
오늘 말씀은 금번에 입교한 사람을 중심하고 하는 것입니다. 환경을 비판만 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환경과 조건들을 소화하는 입장을 취하도록 해야 합니다.
맹세하고 나선 몸이니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 자신만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공적인 입장을 취하도록 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하늘땅을 대신하고 전체의 뜻을 대신한 우주사적인 입장인 것입니다. 그러니 책임적인 자리에서 각오와 맹세를 해야 합니다.
수련을 받은 후에는 지도자의 입장을 가지고 나가야 합니다. 재삼 여러분 자신을 알고 우리의 입장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타락의 혈통을 물려받은 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타락의 혈통을 청산하고 새로운 역사를 이어 나갈 자신임을 명심하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역사와 현실을 바라보면서 원통하고 분하고 참을 수 없음을 느낀다면 역사와 현실에 타락의 혈통과 죄악의 씨가 들어 있다는 것을 실감해야 할 것입니다.
자신을 정복하는 것이 하늘 앞에 실적을 세울 수 있느냐 없느냐를 결정하는 관건입니다. 지금까지는 입으로 욕도 했고 저주도 했지만 이 뜻을 알고 난 다음부터는 그래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죄악의 인연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끊기 위해서는 무자비해야 됩니다. 성경에도 손이나 눈이 잘못하면 그것을 제거하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가능할 때 힘이 납니다.
이 길을 출발하게 될 때에 선생님은 ‘우주 주관 바라기 전에 자아 주관 완성하라’는 표어를 세우고 출발했습니다. 남이 모르는 길을 갈 때에는 핍박도, 몰이해도, 총칼도 받아야 합니다. 모든 것을 감싸고 넘어가 적진을 돌파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있으면 됩니다.
자기의 모든 환경을 재료로, 교재로 쓸 수 있어야 합니다. 나를 환경적으로 몰 때가 오면 고맙게 생각해야 됩니다. 여러분을 완전히 점령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로 모실 수 있는 자리를 잃은 것이 가장 분합니다. 선조로부터 그런 분한 마음이 있어 왔습니다.
참다운 하나님, 참다운 사람을 몰랐습니다. 참된 개인과 가정이 사회, 국가, 세계를 넘고 하늘땅을 넘어 공적 가치를 지닐 수 있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분한 것이 있다면 타락된 것처럼 분한 것이 없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악한 것은 알고 있으나 타락의 혈통을 물려받은 후손이라는 것은 모르고 있습니다. 참하나님, 참부모, 참부부, 참형제, 참국가, 참세계를 모릅니다. 만일 하나님이 이런 사람들을 구원하려 하신다면 먼저 택하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개인, 가정, 민족, 국가의 선택이 있어야 합니다.
역사상에 선민사상이 있었고, 또 택한 민족이 있었으니 그 민족이 곧 이스라엘이었고, 그 이념에는 하나님을 참아버지로 모시는 이념이 있었습니다. 참하늘땅이 그 이념 가운데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분하지만 더 분한 분이 있으니, 그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참된 하나님 나라의 이념이 있기 때문에 그 이념을 이루려면 이 분함을 풀어야 합니다. 이 분함을 풀려면 근본적인 선포가 있어야 합니다.
처음과 나중, 시작과 끝은 경우에 따라서는 제일 가깝습니다. 끝과 끝은 바로 만나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순간도 격전의 노정을 가고 계십니다. 하나님도 분하고 나도 분하다면 이 분함을 풀기 위하여 그 내용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해결할 무엇이 나왔다면, 여러분은 그 가치를 어느 정도 아느냐? 참하나님, 참부모, 참식구, 참형제의 가치와 관련하여 어느 정도 분히 여겨 보았느냐? 그렇지 않으면 풀 도리가 없습니다. 조상이 타락할 때는 몰랐었지만 타락 후에는 분했습니다. 땅에 어떤 원수가 남아 있다면 우리는 그들을 굴복시켜 해원의 날을 맞이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분(忿·憤)은 하나님 자신으로선 풀 도리가 없습니다. 우리 인간으로 말미암은 분함이기 때문에 우리 인간들이 풀어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분함 이상의 분한 심정을 우리가 갖기 전엔 그 분함을 풀 수 없습니다. 오늘날 이 길을 가는 사람은 분한 일이 있어도 발(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직 분함을 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살아서 아담 해와가 저끄린 타락의 한을 해원해야 합니다. 사탄의 작전의 선을 끊어 나오는 것이 도를 세워 나오는 목적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세워 나오는 데 있어서 제1원수, 제2원수가 누구라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합니다. 제1원수는 사탄이요, 제2원수는 하나님을 배반하는 악한 인간입니다.
제1중심은 하나님, 그리고 제2중심도 하나님입니다. 끝날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종교적 형태가 나오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제1선은 제1악을, 제2선은 제2악을 갈라 가지고 쳐갈겨야 할지니, 그렇게 하는 날이 심판날입니다.
제1원수와 제2원수가 합쳤는데 제1선과 제2선이 합치지 못하면 망합니다.
악은 한번 망하면 그만이지만 선은 악을 무찌르고 소생한다는 점에서 악과 다릅니다.
하나님이 분을 풀기 위해서는 우리가 제1원수의 종이 되고, 제2원수의 이용물이 되었던 것을 분히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소망의 실체가 되어 하나님의 분을 해원해 드려야 합니다.
땅에 있는 모든 사람은 슬픔 가운데 있습니다. 본래의 고향을 잃어버렸고, 본래의 부모 형제를 잃어버렸고, 본래의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이것을 느끼지 못하면 안 됩니다.
타락으로 인한 슬픔을 알진대 그것을 기필코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눈물을 많이 흘려야 합니다. 민족이나 국가나 혹은 하늘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면 그에 해당하는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고요한 자리에 슬픔이 스며들면 거기에서부터 소생의 역사가 싹트는 것입니다. 그 자리는 갱생의 자리입니다. 지극히 거룩한 자리입니다. 민족과 세계를 붙들고 눈물을 흘리면 각각 그들의 복을 대신 받을 수 있고, 하나님을 붙들고 눈물을 흘리면 하나님의 복을 받는 자리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땅 위에 이러한 움직임이 있어야겠는데 고맙게도 기독교가 눈물의 종교입니다. 먹어도 기쁘지 않고 입어도 기쁘지 않은 이가 있다면 그것은 종교인입니다. 사회 국가 세계가 하나님을 위하여 슬퍼할 수 있다면 그것들은 세계의 주인공입니다.
애국자, 충신들도 모두 눈물의 골짜기를 넘어온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은 분한 후손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밥을 먹어도 일을 하여도 편안치 않습니다. 머리를 들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이상 수고하시고 일하셨기 때문에 여러분의 마음에 슬픔이 느껴지거든 ‘사랑하는 아버님이여, 당신의 슬픔 전체를 저에게 상속하시옵소서.’ 해야 합니다. 세계사적인 슬픔을 상속받는 자가 있다면 그로 말미암아 하늘의 역사는 전개될 것입니다.
6천년 동안 하나님은 내가 네 아버지요, 네가 내 아들이라는 말씀을 못하셨습니다. 그런 아들딸을 찾지 못하신 것입니다. 그런 아들딸을 찾아 나오는데 6천년 걸렸습니다. 그러니 슬픈 역사는 우리가 맡아 책임져야 하겠습니다. 선한 자를 협조해 주어야만 먹을 수 있고 잘 수 있는 내가 됩니다.
하나님의 슬픈 입장을 대신해야 합니다. 예수는 이스라엘의 왕으로 왔지만 그 왕의 주권을 가지고 한번도 명령해 보지 못하고 사신 분입니다. 실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패망의 왕자 노릇을 한 그런 슬픈 분이 바로 예수입니다. 충신이 되기 위하여,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참아들딸이 되기 위하여 우리는 2천년 동안 수고한 예수의 그 수고를 대신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지극히 슬픈 자리에 있는 자신임을 발견하십시오. 여러분은 이것을 절실히 느껴야겠습니다. 그런 슬픈 나이고, 문제해결의 초점이 되는 나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분한 자리를 침범하여 들어오는 원수가 있다는 것을 실감하고 다시 한을 품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한스러운 역사의 후손이 되었으니 하나님의 한을 대신 책임지고 풀어야 합니다. 심판장에 가서 한스러워하시는 하나님을 위로해 드리며, ‘이 죄악된 민족을 심판하지 마옵소서.’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여유의 심정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충신이요 효자이오니, 우리를 보시사 우리와 같이 있는 이들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할 수 있어야 새 시대에 남아지는 사람이 됩니다. 분한 하나님을 위로하여 드리려니 분한 자리에 들어가야 하고, 슬픈 하나님을 위로해 드리려니 슬픈 자리에 들어가야 합니다. ‘무한히 한스러운 하나님을 모시러 나갑시다. 무한히 슬프신 하나님을 위로해 드리러 나갑시다. 무한히 분한 하나님의 한을 풀어 드리러 나갑시다.’ 하는 아들딸이 나와야 죄악의 역사는 끝납니다.
‘우리들의 원수는 갚지 마시옵소서. 하나님은 제1원수만 갚으시옵소서. 제2원수는 하나님 대신 우리가 맡아서 갚겠습니다.’ 하는 것이 성도의 심판입니다. 사탄 대하여는 분개심을 일으키되 세계나 인류를 위해서는 기도해줄 줄 알아야 합니다.
말씀을 배우는 목적, 인격을 연마하는 목적, 심정을 갖추는 목적은 하나님의 심정을 알아 사탄을 쳐부수고 사탄 편에 있는 사람을 빼앗아 올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함입니다. 그래야만 사탄 대하여 승리하였다는 승리의 영광을 누릴 수 있습니다.
분함을 품고, 슬픔을 품고, 한을 품고 틀림없이 승리한다는 여러분을 만드는 것, 원수를 퇴치할 때까지 총단결하여 싸워 낼 수 있는 하늘의 병사를 만드는 것이 선생님의 목적입니다.
때의 변화를 느끼듯이 신앙생활에서도 변화를 느껴야 합니다. 일년 중에 춘하추동(春夏秋冬)이 있듯이 하루에도 그런 순환기가 있습니다. 우리의 일생에도 봄 여름 가을 겨울절기와 같은 시기가 있습니다.
요즘이 추수기인 것처럼 역사적으로 보면 지금 이때가 수확기입니다. 가을이 여름과 다른 것은, 여름에는 잎이 나무의 모든 흠을 가려 주지만 가을이 되어 잎이 지면 그 나무의 정체를 샅샅이 드러내 준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섭리적으로 봐도 그렇습니다. 이 시대의 여러분 자신들은 어떠해야 되겠는가? 역사상에 나타난 사조(思潮)를 보면 흠이 많지만 거기에서 어떠한 결실을 해야 합니다.
가을의 목적을 위하여 춘하(春夏)가 있습니다.
변치 않는 모습으로 하나의 결실을 거둘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나무에는 아무리 흠이 있더라도 결실이 있으면 주인은 그것을 보고 기뻐합니다.
심어진 씨가 겨울을 지나 봄이 되면 싹이 트고 여름에 성장하여 가을에 새로운 결실을 가져오듯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다시 한번 떨어지는 시련기를 거쳐서 새로운 생명을 낳아야 합니다.
우리가 역사적인 결실체라 할진대 흠이 드러나는 이 땅에서 새로운 생명체로서 결실되어 하나의 소망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고대문명은 열대문명, 현대문명은 가을절기와 같은 양대문명(凉帶文明)입니다. 겨울절기와 같은 문명의 바람이 공산주의의 사조입니다.
잎이 떨어진 앙상한 가지에서 결실을 거두는 것입니다. 이제 새로운 싹을 틔우고 새로운 생명체를 번식해야 합니다.
창조주께서 ‘너는 어떠한 가치적인 존재이며, 어떠한 목적을 향하고 있는가?’라고 질문할 때에 어떠한 답변을 할 것인가?
환경을 자랑하고, 무성한 잎을 자랑하고, 앙상한 결실 혹은 땅에 묻힌 씨를 자랑할 것인가?
지금까지 어떠한 것을 표준삼아 살아왔는가 생각해 보십시오.
봄이나 여름을 고대하고 지내다 보면 어느새 가을과 겨울이 옵니다. 겨울절기를 지내야 봄이 또 옵니다.
결실이 되었으면 땅에 한번 들어갔다 나와야 합니다. 일단 밟히고 가치가 없는 것 같은 존재로서의 기간을 거쳐야 합니다. 그때는 봄절기나 여름절기 같은 것을 꿈꾸어서는 안 됩니다.
겨울절기, 곧 크나큰 시련을 느끼게 되고 새로운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 때가 심판 때입니다.
초목의 결실이 주인 앞에 거두어지는 것과 같이 여러분도 하늘 앞에 거두어질 수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여러분도 어떠한 결실체가 되기 위해서는 어떠한 인연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환경과 마음이 어떠한 기준 앞에 규합되어야 합니다.
오시는 재림주는 가을절기에 나타나는 대표적인 결실적 존재로 오시는 분입니다.
주인은 심을 때에 원했던 그 결실을 요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결실체를 잃고 죽은 나무의 모양과 같은 것을 가지고 나왔던 것입니다.
주인은 여러분을 결실체로 내세우실 것인데, 주인이 어떠한 가치 있는 존재로 내세워 주시겠는가? 나 자신은 현재 어떠한 결실체가 되어 있는가?
지금까지 혈통이 다르고, 환경이 다르고, 생활의 목표가 다르고, 결실의 형태가 실로 천태만상이었습니다.
하늘이 원하시는 결실체의 모습이 있다면, 그와 나는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나는 어떠한 상태에 놓여 있는가?
봄이나 여름에도 자랑할 수 있는 무엇을 가지고 있으나, 가지나 모든 진액을 뭉쳐서 거두는 것이 열매입니다.
악조건의 모습도 선조건의 모습도 모두 갖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여러분이 마음을 풀어서는 안 됩니다. 환경적인 모든 것을 흡수해야 합니다.
여러분 자신은 어떠한 존재가 될 것인가? 절대자 앞에 결실로 나타날 때 칭찬 받을 수 있는 결실이 되는가, 잡았다가 옆에다 비켜 놓는 결실이 되겠는가, 쓸데가 없어서 돼지우리 같은 곳에 버릴 수밖에 없는 결실이 되겠는가?
소망의 결실이 못 됐다면 죽을 수밖에 없는데, 그러지 않기 위해서 지금까지의 모습을 잘라 버리고 완전한 가지에 접붙여서 좋은 결실을 얻게 하기 위한 것이 하늘의 구원섭리입니다.
결실이 되었으면 열매를 따다 땅에 심으면 되겠거니와, 되지 않았으면 좋은 가지에 접이라도 붙여야 합니다. 하늘은 원래 접붙이는 게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게 안 되어 완전한 가지에 접붙이려 하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릅니다.
이제는 지금까지 이어 내려온 종자 중에서 나쁜 것은 모두 잘라 버려야 합니다. 잘리는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수련생도 지금까지는 자기 멋대로 살았으나 이제부터는 잘못된 가지를 잘라 버리고 새로운 접을 붙여야 합니다. 새로운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자신이 결실체가 되려거든 겨울절기를 통해야 합니다. 이 시대는 수확의 시대요, 결실기입니다.
겨울절기가 되면 북풍한설이 쳐 옵니다. 그런 가운데서 묵묵히 땅 속에 파묻혀 새로운 생명을 번식시켜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열매를 맺지 않으면 잘라야 합니다. 예수님은 결실이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끝날의 모습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끝날에는 잘라서 새로운 가지에 접붙여야 합니다.
새로 온 수련생은 때가 늦은 것을 알 것입니다. 늦어도 형편없이 늦었습니다. 잘라 가지고 제2의 결실을 거두어야 합니다.
잘릴 수 있는 자가 되어 하늘이 마음대로 접붙이도록 해야 합니다.
스스로 결실체임을 느끼면 겨울절기를 당할 각오를 해야 합니다. 겨울절기를 맞는 것은 개인만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그렇고 총체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에덴동산에 벌레 먹은 씨가 심어졌습니다. 이것을 다시 완전한 결실로서 거두기 위한 것이 6천년 섭리역사입니다.
내가 찍혀야 할 것이냐, 거두어져야 할 것이냐. 찍히는 것은 부정되는 입장입니다. 거두어지는 겨울절기 앞에 썩어져야 할 것입니다. 썩어지는 것은 살이니 몸은 고생해야 합니다.
3년을 죽을 각오를 하고 싸워 넘어가야 합니다. 오래된, 즉 4년 이상 된 사람은 어렵습니다. 7년 된 사람은 더 어렵습니다. 벌써 5년, 6년 된 사람은 옛날 그 감정이 되살아납니다. 짜증이 납니다.
오래된 사람은 떨어지기 쉽습니다. 씨 없는 열매로 땅에 떨어지기 쉽습니다. 모양은 같은데 내용은 없습니다.
결실체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찬바람을 거쳐야 합니다. 결실체는 모든 것을 몰아넣고 수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씨로서 남을 수 있는 자기 자신이 못 될 때는 주인이 와서 따버리거나 자기 자신이 떨어져야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상태에 있습니까? 지금은 자고 있는 것 같지만, 생명만 있으면 언젠가 한번 때가 오면 가치를 발휘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어디에 가든지 문제가 없습니다. 더욱이 지금까지 바라던 것은 축복받을 수 있는 생명체(生命樹, 善惡樹)로서 결실되는 것이었습니다. 주인은 이것을 고대했으나 이것이 되지 않을 때 섭섭한 것입니다.
이 가을절기를 낙심스럽게 보내지 마십시오. 이제 총결실해야 합니다.
이 씨를 주인이 어디다 심든지 뿌리를 박고 살아날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잘리어지게 됩니다. 이 가지 저 가지를 골라서 자르는 것이 아니라 뭉텅뭉텅 자릅니다.
양심을 토대로 하여 새로운 생명의 싹을 틔웁니다. 자신이 바쁠 때입니다. 비평할 때가 아닙니다. 심판대 앞에 나타나 ‘당신의 소망이 이러한 것인 줄 아오니 저에게 맡겨 주시옵소서.’ 할 수 있는 결실체가 되어야 합니다.
외지(外地)에 나간 전도사를 위하여 특별한 기도를 해주기 바랍니다. 3년 동안 특별한 기도를 해주도록 하기 바랍니다.
정성을 들이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본부 식구들은 핵심임을 알고, 자기들에게 세기적 책임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동쪽을 보면 동쪽의 식구에 대해서 그렇게 하고, 서쪽 북쪽 남쪽에 대해서도 다 그렇게 하기 바랍니다.
3년간은 국내뿐 아니라 국외에도 이러한 과제를 제시하려고 합니다.
기도하면 상대방에 나타납니다.
외국 사람들에게 면목을 세울 길은 고생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3년간은 죽을 고생을 해야 합니다. 그때 가 보면 알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후손에게도 면목이 안 섭니다. 3년 동안 움직이지 않은 사람은 말할 수 없이 후회하게 되고, 크게 뒤떨어질 것입니다.
지금 들어온 사람들은 지난번 전도 때 아직 비어 있는 지역에 파송되어 어떠한 고생도 감당해야 합니다. 먼저 들어온 식구들도 이제 옛날과 다릅니다.
예배에 출석이나 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시작 안 하면 때가 없습니다. 선생님이 몰 때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선생님이 있는 동안에 시작하여 행동한 조건을 세우도록 하기 바랍니다.
선생님은 때를 알기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 3년 후에는 역사를 꾸밀 텐데 거기에 이름이 있으면, 수많은 사람이 추모하고 맨발로 그곳을 순례할 것입니다.
지금은 전통을 세워야 할 중요한 때입니다. 오래된 사람은 점점 면목이 없어질 것입니다. 지금과 같이 밀고 당기고 할 때에 하기 바랍니다. 실력과 경험이 얕더라도 충성이 옛 사람과 같으면 같은 효과가 납니다.
지금이라도 미국에 명령하고 싶어도 여러분 때문에 안 합니다. 불쌍한 한국 사람 때문에 안 하는 것입니다.
아버님! 오늘 이 시간 역사노정에서 당신께서 흘리신 눈물의 제단을 연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당신께서 흘리신 땀의 제단을 연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죄악된 땅 위에서 살고 있는 인간들은 반드시 전통을 찾아가야 할 운명에 놓여 있는 것을 저희들은 아옵니다. 이 땅은 어느 누구도 믿을 수 없는 땅이 되었사옵니다. 사랑하는 자식도, 사랑하는 처도, 사랑하는 부모도 믿을 수 없게 되었사옵니다. 어느 누구를 믿으려고 손을 내밀어도 그 손을 잡아주는 이가 아무도 없어 허전함과 외로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처참한 땅이 되었사옵니다. 그러기에 저희들은 인류 앞에 그렇지 않은 한 분의 아버지를 찾아 주고, 한 분의 신랑을 모시게 하고, 한 분의 아들을 맡겨주기 위한 아버지의 지극한 사랑이 그 배후에 있는 것을 무한히 감사드리옵니다.
오늘 저희들은 빈손으로 당신의 이름을 붙들고, 빈 마음으로 당신의 심정을 닮기를 바라고,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리고 빈 가슴으로 당신의 뜻을 품기를 고대하고 나왔사오니, 당신이 현현하시옵소서. 어린아이같이 믿을 것 없고 의지할 곳 없는 외로운 자리에서 허덕이는 몸들이오나 당신을 믿고, 당신을 의지하고, 당신과 더불어 기뻐하기 위하여 이 시간 무릎을 꿇었사오니 당신이 친히 현현하시어 무지한 자들에게는 당신을 느낄 수 있게 하여 주시옵고, 아는 자들에게는 당신 앞에 다시금 새로운 각오를 할 수 있는 이 시간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시대에는 천성의 길을 향하여 달음질치라고 호소하는 자가 없사옵니다. 그러하오니 아버지, 여기에 있는 당신의 아들딸들을 세우시어서 그와 같은 사명을 감당하게 하시고, 모든 처참한 싸움터에서 하늘의 이름으로 싸울 수 있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당신이 믿을 수 있고, 당신이 사랑할 수 있고, 당신이 보호해 줄 수 있는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오니, 부족하나마 당신이 맡아 주시옵고 당신이 이끌어 주시옵소서.
친히 오라 하시는 명령을 받자와 저희가 오늘 이 자리까지 나왔사온데, 이 자리가 있기까지에는 당신이 저희보다 더 수고하신 것을 잘 알고 있사옵니다. 저희들이 낙망할 때 위로하여 주셨사옵고, 쓰러지려 할 때 붙들어 일으켜 주셨사옵고, 외로이 눈물지을 때 친히 나타나 권고해 주셨사옵니다. 오늘 여기에 엎드린 당신의 아들딸들도 그와 같은 하늘의 심정을 느끼고 있을 줄 알고 있사오니, 그 마음으로 아버지의 실존하심을 인식할 수 있는 체험적인 사실이 그들의 뼛골과 피 살에 사무치게 하여 주시옵소서.
<말 씀> 우리는 하나의 결실, 하나의 목표를 향하여 움직여 나가는 과정적인 실존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하늘이 요구하는 목적이 있고 내용이 있다 할진대 그 목적과 내용은 무엇일 것이뇨? 그것은 하나님이 좋아하는 동시에 전세계 인류가 민족 감정을 초월하여 좋아할 수 있는 믿음이 결실된 세계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떠한 목적을 가진 분이라 할진대 역사의 발전 과정도 어떠한 목적의 세계를 향하여 나아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믿음의 목적과 역사노정에서 인류가 바라는 소망의 목적이 일치되어 하나님도 기뻐하시고 인류도 기뻐할 수 있는 그 한 날이 필시 역사상에 나타나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한 행복이니 기쁨이니 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제아무리 이 땅에서 신앙생활을 잘하고 하나님과 동거하는 생활을 한다 할지라도 전체 세계와 천주 앞에 추앙 받을 수 있는 하나의 결실체가 나타나지 않는다 할진대 하나님은 맹목적인 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이라면 인간이 그 분을 소망의 주체로 사모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회적인 현상을 보아 역사의 미래상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역사가 어떠한 목적의 세계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는 것이 틀림없을진대, 종말의 때에 있어서는 반드시 궁극적인 가치를 논할 수 있는 어떠한 결실체가 나타나야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인간은 결실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하루의 생활을 했으면 하루의 결실을 거두어야 하고, 일년의 생활을 했으면 일년의 결실을 거두어야 합니다. 여러분 자신은 결실을 추구하면서 생활 속에서 말이나 행동 등 일체를 걸어 놓고 저울질한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여기서 결실을 거두게 되면 그것이 선으로 종결되는 것이요, 아무리 노력을 하고 충성을 다했을지라도 결실을 거두지 못하게 될 때에는 악으로 종결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사회생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 가치적인 그 무엇으로써 새로운 인식과 새로운 힘의 작용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이 선으로 결실될 수 있으되, 오늘은 자기 스스로 가치적인 결실이라고 인정하여 좋아하지만 내일에 가서는 후회하고 낙심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악으로 결실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견지에서 전체 인류역사를 회고해 볼 때, 인류역사는 지나고 나서 후회하는 역사였습니다. 역사 과정에서 제아무리 완비된 그 무엇이 나타났다 할지라도 그것이 역사적인 완전한 결실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직까지 미급한 상태에서 결실의 세계를 향하여 달음질치고 있는 우리요, 역사요, 현실이라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학교에서 공부하는 학생도 반드시 어떠한 결실을 바랍니다. 이러한 우리는 민족적, 국가적 차원을 넘고 세계적 차원을 넘어 하늘까지 결실의 가치를 연결하고자 하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타락된 인간도 이러하거늘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가 계신다면 그도 창조주로서 바라는 이념과 소망의 열매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것이뇨? 그것은 이 땅 위의 어떠한 조직도 아니요, 어떠한 단체도 아닙니다. 그 목적의 중심은 바로 우리들 자신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절대자가 바라는 결실의 대상은 세계도 아니요, 천주도 아닌 인류입니다. 천주보다도 더 가치적인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이 인류라는 것입니다.
역사는 발전하고 있습니다. 민족을 거치고 국가를 거치고 세계를 거쳐 발전해 나가고 있습니다. 이 땅에는 수많은 민족이 살고 있지만 그 민족들은 하나의 이념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습니다. 동서로 갈라져 있을망정 역사는 섭리에 따라 동시성의 역사 형태를 반복하면서 합해져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권이 바뀌고 바뀌면서 하나의 목적의 세계를 향해 지금까지 나왔습니다. 이러한 목적의 세계를 이루어 나온 역사적인 근본 사실은 모르나 역사적인 결과를 보게 될 때 오늘날 현실은 하나의 세계가 될 수 있는 최단거리(最短距離)에 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민주와 공산이 대결하고 있는 현상을 보아서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제 여러분 자신들이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통하여 소망의 결실, 믿음의 열매를 맺고자 하실진대, 그런 인간을 세워야 할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그런 인간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물이 고대하고 만민(萬民)이 고대하고 천상(天上)이 고대하는 승리의 결실체로 세울 수 있는 하나의 모습이 반드시 등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필연적인 사실입니다. 필연적으로 등장해야 할 이 인물을 기독교에서는 재림 예수라고 말합니다.
이런 재림 사상은 어느 종교에나 있습니다. 그들이 바라고 있는 그 존재는 어떠한 종교나 일개 교파를 대표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이는 하늘과 땅을 대신할 수 있는 창조주가 바라던 소망의 결실, 즉 믿음의 열매로서 이 세계를 대표하는 동시에 하늘을 대표하고 하늘이 인정할 수 있는 참된 열매입니다. 이러한 열매가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열매란 무엇이냐? 열매라는 것은 봄에 씨를 뿌리면 싹이 나서 가지와 잎이 무성해지고 가을이 되어야 비로소 결실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류의 조상은 이 땅 위에 하늘이 기뻐하는 씨를 뿌리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품에 품으시고 심정을 기울여 영원히 사랑할 수 있는 자리에서 씨를 뿌리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즉 아담 해와가 하나님의 사랑의 축복을 받고 하나님의 공인을 받아서 만우주에 승리의 결실체로서 등장하지 못한 채 자손을 번식했다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지금까지 내려온 것이 타락역사입니다.
이렇게 되었으니 하늘은 어떠한 방편을 세워야 할 것이뇨? 본연의 목적은 이것이 아닌데 이렇게 되어 버렸으니 이것을 잘라 버리고 딴 것을 가져다 접붙여야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셔야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접을 붙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접붙이는 데는 무엇을 접붙여야 되느뇨? 하늘의 새 생명의 싹을 접붙여야 됩니다. 썩은 열매를 맺는 나무를 잘라버리고 거기에 새 생명의 싹을 접붙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만일 창조주가 지으신 목적에 어긋난 것이 있어서 이것을 회복하고 다시 만들어야 한다 할진대는 어떻게 할 것이뇨? 하늘은 이 땅을 뿌리째 뽑아 멸망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러기에 가지를 잘라 버리고 거기에 하늘이 공인할 수 있는 새로운 싹을 접붙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접붙여 주는 것이 종교입니다.
종교라는 것은 우리의 생활 문제를 해결하는데 직접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종교는 반드시 미래를 표방하고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이 현실, 즉 제1의 입장을 해명하고 제1의 행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제2의 행복을 위하여 제1의 입장을 무시하고 몰아내는 것이 종교의 길입니다. 제1의 입장을 무자비하게 잘라 버리는 것이 종교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왜 잘라 버리느뇨? 하늘이 구원섭리를 한다 할진대 본래 이루려 하셨던 목적의 결실을 위해서는 그러한 조건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역사노정에서 선을 지향하고 도의 길을 간 사람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고, 몰리고 쫓기는 처참한 길을 걸으며 슬픈 흔적을 남긴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종교인들은 현실의 소망적인 모든 것을 부정해 버리고 제2의 소망을 품고 나오고 있습니다. 그것도 몇 세기 동안이 아니라 역사의 종말까지 허덕여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도의 길을 가는 자들은 쉬는 자리나 자는 자리에서도 가야 할 운명에 처해 있습니다. 언제까지? 끝날까지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현실을 행복처로 삼고 있는 인간들이 보기에는 불쌍한 자들입니다. 인간의 감정은 현실을 부정할 수 없지만 이 현실을 부정하고 이념을 중심삼고 미래를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 도인(道人)들이 가는 길입니다.
모든 것은 현재에서 해결짓지 못하면 그것이 미래까지 연결된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어차피 한번 잘라야 됩니다. 이치가 그렇습니다. 자르는 데는 한꺼번에 세계를 쳐서 자르는 것이 아닙니다. 어떠한 민족이 있으면 그 민족의 전통과 풍습 등 모든 것을 일시에 자르는 것이 아니라, 중세와 현대를 거쳐오면서 그 시대상황에 맞추어서 한 가지 한 가지씩 잘라 나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상대방이 응할 수 있는 조건이 성립되면 혁명을 일으켜서 그것들을 합하는 놀음을 해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땅을 대하여 섭리해 나오시는 하나님의 사정인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세계가 좌우 양진영으로 갈라져서 투쟁하는 것은 우연히 되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 세계는 창조 당시 창조주께서 만일 인간이 타락하면 기필코 거쳐야 될 과정으로 예상하신 세계임에 틀림없습니다. 만일 인간조상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우리 눈으로 보아도 지긋지긋한 이 세계를 땅 위에서 볼 수 없었을 것이나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이런 세상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의 창조목적은 불변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기필코 이 세상을 정리하실 것입니다. 최후에는 양진영을 부딪치게 해서 하나의 목적세계로 이끌어 나가실 것입니다. 목적의식을 가진 창조주가 하시는 일이라면 반드시 목적하신 대로 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 목적하시는 바의 뜻에 따라 역사는 움직여 나가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몇십 년을 살았어도 왜 이 세상이 이렇게 되었는지 알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은 목적하신 바의 뜻을 위하여 여러분이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 개인으로부터 민족, 국가, 세계를 수습하면서 오늘 이 때까지 무한한 고충을 겪으셨습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오늘날 역사적인 실상을 보고 그냥 역사의 결과로만 생각하면 단순하겠지만 역사의 동기를 해명하고 인생의 근본문제를 들추어 타진하려 할 때는 심각한 문제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중대사(重大事)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은 자르는 역사를 하시는 것입니다. 완전한 결실을 바라고 잘라 나오는 하늘의 역사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 민족이 천륜을 대하는 입장에서 완전한 목적의 세계로 이끌 수 있는 시대적인 운세에 처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민족의 주권자가 못 이끌면 그 주권자를 칩니다. 그래도 주권자가 쓰러지지 않으면 다른 민족으로 하여금 쓰러뜨리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르는 역사를 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 자르는 놀음이 아직까지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날 종교, 즉 기독교나 도교나 불교나 유교에는 재림사상이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나 기독교 신자들은 자기들이 믿는 것으로는 안식처를 취할 수 없습니다. 하늘이 손을 들어 자르는 시대적인 고통의 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결실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은 잘 모르지만 여러분의 머리 위에는 자르고자 하는 하늘의 칼이 있다는 것입니다.
점점 끝날이 가까워져 이 시대가 혼란되면 혼란될수록, 인간들이 바라는 소망의 목표가 희미해지면 희미해질수록 사무쳐 들어오는 것이 무엇인가? 옛날에는 일방적인 공포와 일방적인 두려움과 일방적인 고충을 겪었지만, 혼란된 세상이 되면 사방적인 공포를 느끼게 되고 자기의 위치가 안정되지 못한 것을 느끼게 됩니다. 자기가 일념으로 믿고 나온 주의도 가 버리고, 성심을 다하여 믿던 것도 끊겨 버리고, 자기가 바라던 소망마저 희미해지고 마는 종말시대가 기필코 온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뇨? 하늘은 가을 절기같이 잎이 떨어지고 생명력이 활발하지 않은 때에 잘라 나오기 때문입니다. 봄철같이 모든 것이 생기왕성한 소생기에 자르는 것이 아니라 천지의 모든 기운이 뿌리로 들어가는 때, 자기의 기운까지도 뿌리로 스며드는 그 때에 자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사회, 어떠한 시대, 어떠한 교파, 어떠한 종파를 막론하고 휘몰아치는 바람에 잎이 우수수 떨어지는 가을절기와 같은 시대가 오거든 자르는 시기가 가까이 온 것을 알아야만 됩니다.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자기가 붙들고 있는 나라, 혹은 종교 단체가 기진맥진한 상태에 부딪쳐 목표가 뚜렷하지 않고 희미해지거든 그런 환경에서 머물 것이 아니라 인정적인 그 무엇으로 얽혀져 도저히 끊을 수 없는 입장에 있을지라도 그것을 끊어 버리고 나설 수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만 종말에 있을 천적인 심판대를 피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역사적인 사실로 보아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때가 오면 교파들로부터 반대받는 자가 망하느냐? 안 망합니다. 반대받는 단체가 망하느냐? 안 망합니다. 반대를 하는 단체가 망하면 망했지 반대받는 단체는 망하지 않습니다. 어떤 주권자가 반대하는 그런 이념을 갖고 움직이는 단체가 있다 할진대, 반대받는 그 단체가 망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하는 주권자가 망하는 것이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타락된 이 세상을 지나가야 할 우리라는 것입니다. 역사도 그러하고 우리의 생명도 그러하거늘, 역사의 모든 장벽을 뚫고 나가 생명을 위협하는 환경권(環境圈)을 치워 버리고 새로운 역사의 새 아침을 맞이하여 새로운 생명력에 사무쳐서 ‘하늘이여 이제야 되었습니다.’ 하면서 울부짖는 외침이 이 천지간에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외침이 한 개인을 통하여 나오지 않는 한 세계는 수습될 도리가 없습니다. 종교도 그러하고 주권도 그러합니다. 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의 결실을 찾아 나오시는 하늘의 목적이 변치 않는 한, 어느 한 때를 맞이하여 어느 한 곳에 한 분을 세우시는 역사를 하실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제 어떠한 종파적인 구세주를 바랄 때는 지나갔습니다. 어떠한 주권자의 시대도 다 지나갔어요. 지금 때는 민족주의시대를 지나 세계주의시대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하나의 이념적인 세계, 통일적이고 전체적인 동시에 개체와 통할 수 있는 하나의 목적세계를 향하여 움직이는 때입니다.
이런 경향을 오늘 현실에서 엿볼 수 있다 할진대, 여러분은 자기의 관념으로 세계를 비방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자기의 관념, 자기의 어떠한 의식에 근거한 주장을 가지고 미래를 논단(論斷)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걸 알아야 됩니다. 과거에 어떠한 시대를 대표한 훌륭하다는 사람들이 새로운 혁명시대에 제물로 사라진 원인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타락한 역사 과정에서 거쳐가는 인간이기에 어떠한 것을 논단하여 함부로 결정지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의 유물을 존중시하는 시대에 머물 것이 아니라 미래에 도래할 새로운 것을 존중시하는 민족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타락한 이 땅위에서 엮어진 역사적인 전통이니 민족적인 전통이니 민족적인 정신이니 문화니 하는 것을 존중시할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다 지나갑니다. 미래적인 새로운 것을 찾아 헤매는 민족이 되어야만 새로운 소망시대에 남아질 수 있는 민족이 되는 것입니다.
지난날의 그 무엇을 자랑하고 그것을 우려먹는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왜 그러뇨? 하나의 결실의 세계를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께서 그러한 세계를 이룰 때까지 자르는 역사를 해 나오시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인간들이 자랑한 문화라는 것은 하늘이 기뻐하고 만민이 기뻐할 수 있는 문화가 못 됩니다. 인간들이 자랑하는 역사도 하늘이 기뻐하고 전세계 인류가 기뻐할 수 있는 역사가 못 됩니다. 그러니 치워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올바로 볼 줄 알고 올바른 방향을 취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취해야 할 생활적인 3대 요소가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 위치를 취하는 것이요, 둘째는 자기가 나아갈 방향을 취하는 것이요, 셋째는 방향을 통하여 자기의 가치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처한 현실의 위치는 어떠한 위치에 놓여 있으며 어떠한 각도에 놓여 있는가? 역사적인 결실의 이상세계가 있다 할진대 그 세계의 방향은 어떤 방향일 것인가? 바른쪽인가 왼쪽인가 직선인가? 방향을 못 잡으면 아무리 노력하여도 결국은 망합니다. 자리를 못 잡으면 아무리 수고해도 중심에 머물지 못하고 주변을 돌다가 떨어져 나갑니다. 완전한 위치와 완전한 방향을 갖추지 못하면 아무리 그 시대에 자랑할 수 있는 가치적인 존재라 할지라도 결국에는 깨져 버립니다.
그러기에 여러분들은 손을 드는 것도 발걸음을 옮겨 놓는 것도 재검토해야 되겠습니다. 밥을 먹는 것도 재검토해야 되겠고, 살고 있는 삶도 재검토해야 되겠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자신의 신앙생활도 재검토해야 되겠고, 자신이 관여한 단체나 주장해온 학설도 재검토해야 되겠습니다.
하나의 목적의 세계가 우리 앞에 가까웠기 때문에 둘이 마주쳐서 하나의 형태를 갖추어야 합니다. 반드시 그 하나의 형태를 갖추어야 참다운 것이 빛나는 것입니다. 아침에 해가 떠오를 때도 밝은 빛이 이 땅을 뒤덮고 나서야 밝은 실체가 나오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일은 준비와 터전을 닦는 연습 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실체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역사노정을 볼 때 어떤 민족은 연습 과정에서 사라진 민족도 있고, 터전을 닦다가 사라진 민족도 있고, 준비하다가 사라진 민족도 있습니다. 그러나 연습을 하고 준비를 하고 터 닦은 것은 다 사라져도 실체만은 남아질 것이거늘, 이 실체를 만인간 앞에, 하늘땅 앞에 나타낼 수 있는 한 날이 있어야 됩니다. 우리는 실체가 되는 그 형상을 보지 못했고, 실체가 되는 그 무엇을 구상하지도 못했으며, 실체의 그 무엇이 있는지도 알지 못하는 불쌍한 인간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어떠한 극(劇)을 꾸며서 연출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다 사실을 빙자한 그림자입니다. 그림자도 정면적인 그림자가 아니라 측면으로 비춰진 그림자입니다. 거기에는 좌측으로 비춰진 그림자도 있고, 우측으로 비춰진 그림자도 있으며, 45도, 60도 혹은 80도 각도로 비춰진 그림자도 있습니다. 그것은 완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림자 말고 실체, 정면에서 90도 각도로 나타날 수 있는 실체가 반드시 나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도 역사의 기운과 역사의 맥을 통하고 현실의 생활을 통하고 미래의 소망까지도 통할 수 있는 것이어야 됩니다. 그런 하나의 결실의 세계를 향하여 나아가는 과정에 있는 우리들 자신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잘라서라도 이러한 목적의 세계와 접붙이고자 하는 것이 하늘의 섭리라 할진대, 자기 민족만 사랑하는 것은 원수입니다. 모든 민족을 사랑하고 세계 인류를 한 식구라고 생각해야 되는데, 자기 민족만이 제일이고, 자기 가정만이 제일이고, 자기 단체만이 제일이라고 하는 것은 원수입니다.
인간들은 그 시대에 허락된 법적인 근거에 의해 어떠한 형태를 갖추어 자기들의 환경을 갖춘 듯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으로부터 민족, 국가, 세계, 더 나아가서는 천주까지 원칙적인 결실의 세계로 이끄는 천륜의 입장에서 볼 때, 시대 시대마다 하늘 앞에 무한한 슬픔과 고충을 드리는 근거가 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기에 하늘은 우리에게 주창하였습니다. 모든 것 다 버리고 하늘만을 바라보라 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첫째 되는 계명이라고 하셨습니다. 만일에 이것이 크고 참진리의 말씀이라면 하나님은 고마우신 분입니다.
이 말씀은 하늘의 섭리에 있어서 개인적으로 자르는 시대를 피하고, 민족적으로 자르는 시대를 피하고, 국가적으로 자르는 시대를 피하고, 세계적으로 자르는 시대를 피할 수 있는 비결의 말씀입니다. 이런 목적의 결실, 신앙의 열매를 목표로 권고해 오신 것이 지금까지의 6천년 역사라는 것입니다.
<기 도> 아버지! 많은 무리가 당신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당신의 성업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당신이 보내실 한 분을 맞기 위하여 고대하고 있사옵니다.
오늘 이 시간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하늘의 모든 유업을 상속받을 자는 신앙의 연륜을 많이 쌓은 자도 아니옵고, 남을 위해 봉사하였다는 실적을 갖춘 자도 아닌 것을 아옵니다. 믿어도 참다운 심정을 통한 신앙을 해야 되고, 남을 위하더라도 심정을 나누어 주는 실적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저희들은 알았사옵니다. 당신은 많은 무리 가운데에서 참사람을 찾고 계신다는 것을 알았사옵고, 많은 사람 가운데에 참사람을 세우시어 당신의 유업을 상속시키려 하는 뜻이 있음을 알았사옵니다.
오늘 보잘것없는 저희들이 놀라우신 아버지의 뜻 앞에 나오게 될 때 먼저 저희 자신들이 부족하다는 것을 확실히 깨달아야 되겠고, 하늘 앞에 감히 설 수 없는 타락된 후손임을 뼈 살에 사무치게 느끼지 않으면 안 되겠사옵니다. 이리 보고 저리 보아도 하늘 앞에 내세워 자랑할 아무것도 갖지 못한 저희들임을 알았사옵니다. 선조로부터 내려온 혈통도 당신을 배반한 혈통이옵고, 선조의 피와 뼈와 살을 이어받은 모든 선지자들도 당신께서 기뻐하며 영원한 사랑의 심정으로 넓으신 그 사랑의 품에 품을 수 없는 죄악의 쓴 뿌리를 지녔기에 오늘의 저희들도 하늘 앞에 용납 받기에 합당치 못한 모습들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사옵니다. 당신께서 지극히 선하게 지으신 몸들이 당신이 싫어하실 수밖에 없는 부분과 요소를 지니고 이 땅 위에 산다는 이 억울한 사실을 알게 될 때, 저희들은 통탄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이제 저희들의 피와 살과 세포 하나 하나에 악의 근성과 악의 요소가 잠재해 있다는 이 지긋지긋한 사실을 헤쳐 버리고 밟아 버리고 무자비하게 끊어 버려야 할 것을 알았사옵니다. 아버님의 거룩한 본성에 인연되지 못하여 본성의 심정과 본성의 혈통과 본성의 뼈 살을 이어받지 못한 한스러운 후손임을 저희들 고백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이와 같은 저희들 가운데서 당신이 영원무궁토륵 유업으로 남길 그 동산 가운데 세워 축복할 수 있는 아들딸이 어디 있겠사옵니까만, 이 부족한 것들에게 사죄의 조건, 용납의 조건을 세워 주시고 이리 감하고 저리 감하시어서 죄없다 할 수 있는 자리에 세워 주시려는 당신의 크신 은사 앞에, 몸 굽혀 머리 숙여 눈물지을 줄 아는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하늘을 알면 알수록 아버지 앞에 민망한 자신임을 깨닫지 않을 수 없사옵고, 가면 갈수록 머리 숙여 아버지 앞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 보이기에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만, 이것이 하늘을 따라가는 길인 것을 아옵니다. 오늘 여기에 모인 당신의 아들딸들, 아들딸이라고 불리기에 합당치 못한 것을 아오나, 그래도 이들을 버리시지 않는 당신의 뜻이 있는 것을 아오니 굽어살펴 주시옵소서. 험한 자리에서 상처받으며 살아온 이들의 모든 흠을 아버지께서 가리어 주시옵소서. 아무리 피와 살의 인연이 끊어졌던 자식이라도 본연의 심정을 통하여서는 모른다 할 수 없는 자리에 있기에 당신은 이들을 참된 자식이라 기억하고자 하신다는 것을 아옵니다. 아버지, 이날을 축복하여 주시옵고 기억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 이날을 저희들이 새로운 역사적인 한 날로 세우고, 몸과 마음과 심정 모두를 아버지 앞에 드려 자녀의 영광과 자녀의 명분에 접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는 아버지 앞에 드릴 것이라곤 아무것도 갖추지 못하고 있사옵니다. 이렇듯 부족한 몸들이옵기에 이 몸에 속한 일체 가운데 아버지 앞에 영광될 게 무엇이 있겠사옵니까? 그러나 저희들은 부족한 것을 깨달으면서 부족한 심정에 하늘이 염려하는 마음을 간직하여 모든 것을 아버지와 더불어 인연맺고 아버지와 더불어 조건적인 무엇을 세우려 하오니, 긍휼히 보시옵소서. 그 마음과 심정의 터전은 억천만금을 주고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아버지께서 너무나도 잘 아시기에 수많은 민족을 두고도 피어린 심정을 가슴에 품고 한 날의 뜻과 한 날의 영광을 위해 참고 눈물 흘리는 민족을 세워 나오신 것을 아옵니다. 그것이 택한 이스라엘 민족이요, 역사적인 선민들이 걸어 나온 길이요, 예수가 오셨다 가신 이후 지금까지 2천년 동안 택한 무리들이 피의 혈통을 연하여 세워 나온 흔적인 것을 아옵니다.
아버지! 이 시간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는 당신 앞에 아무것도 드릴 것이 없사오나, 애달픈 저희의 눈물을 먼저 드리고, 남아진 싸움터를 향하여 새로운 각오를 가지고 나아가 피 살을 아버지 앞에 아낌없이 바치는 저희들이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이 시간 다시 한번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이날은 거룩한 날, 만인류를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수많은 인류는 이 시간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모르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사망의 물결이 눈앞에 다가오고 있으나 깨닫지 못하고 생사의 주권을 지배하시는 당신이 계심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깨우쳐 당신의 품으로 안기도록 해야 할 사명이 저희에게 있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높고 크고 넓고 깊은 마음을 갖고 당신의 심정을 만방에 선포하는 아들딸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나이다. 그와 같은 책임이 저희에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한 저희들, 이 시간 부끄러운 마음을 금치 못하여 아버지 앞에 엎드렸사옵니다. 아버지의 애달픈 심정 앞에 눈물 흘리고 그 눈물과 더불어 아버지의 인연을 노래하고 찬양하고 그 사정에 엉키어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고 아들딸을 아들딸이라 부를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 남한 각지에 널려 있는 새로운 아들딸 위에 더더욱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핍박의 길을 가는 자의 뒤를 따르는 자도 핍박의 화살을 받아야 할 것을 아옵고, 몰리는 자리에서 외로이 눈물짓는 자의 걸음을 따르는 자들도 그와 같은 자리에 처해 있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당신은 지금까지 그런 자리에 처할 적마다 위로해 주셨사옵고, 쓰러질 때마다 권고하여 주셨사오며, 외로울 때마다 붙들어 주셨사옵니다. 그러면서 소망의 동산을 보여 주신 살아 계신 아버지인 것을 아오니, 오늘 이 시간 그와 같은 자리에 있는 당신의 아들딸이 있사올진대 같은 은사로 역사하여 주시옵고 품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그들이 이날 이 시간을 기억하여 아버지 앞에 정성들인 것을 친히 받아 주시옵고, 붙들어 주시옵고 생명의 인연을 세워 주시옵소서.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형편과 사정이 아버지 원하시는 뜻대로 되어지지 못하고 있는 것을 아는 저희들이기에 더욱 슬픈 마음 이루 헤아릴 수 없사옵니다. 저희에게 맡겨진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을 용납하여 주시옵고, 염려하는 그 마음을 보아 모든 것을 덮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불쌍한 이 민족 위에도 축복하여 주시옵고 천상에 있는 수많은 천천만 성도들과 땅에 널려 있는 수많은 천천만 성도들과 나머지 수많은 인간들에게도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생명의 권한이 광명한 햇빛과 같이 비치어 하늘땅이 화동하며 노래할 수 있는 기쁨의 한 날이 올 것을 알기에, 즐거이 그날을 소망하며 고대하고 있사오니, 그날까지 참고 싸워 끝까지 남아질 수 있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허락한 이 시간, 아버지, 제단에 섰사오니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내 무슨 말을 하기를 원치 않사오나 뜻이 있기에 이 자리에 섰사오니,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인간적인 말이나 인간적인 모든 것은 제거시켜 주시옵고 당신이 친히 현현하시고 마음으로 통하여 마음으로 느끼게 하여 주시옵소서. 몸을 굽혀 하늘 앞에 눈물지으며 자기의 과거를 뉘우치고 생명에 부딪침을 받아 부활의 역사와 인연 맺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전하는 자의 심정과 전하게 하시는 하늘의 심정이 부딪쳐 하늘의 뜻을 알고 전하는 뜻을 알아, 영원한 아버지의 복된 동산에 승리의 깃발을 높이 들어 아버지의 영광을 노래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천민사상을 갖춘 당신의 아들딸, 복된 은사의 터전 위에서 길이길이 당신을 모시고 살 수 있는 아들딸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축복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모든 것 아버지께서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고 사탄이 틈타는 시간 되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바라오면서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니다. 아멘.
<말 씀> 이 시간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자 하는 제목은 ‘하나님의 유업을 상속받는 자들이 되자’입니다.
여러분들은 현재 여러분 자신들이 어떠한 위치에 처해 있으며 어떠한 환경에 놓여 있다는 것을 짐작하리라고 봅니다. 여러분이 살고 있는 가정으로부터 시작해서 사회, 국가, 전세계의 정세를 바라볼 때 과연 그것이 절대자의 경륜 앞에 있어서 절대자가 영원히 사랑할 수 있고, 기뻐할 수 있는 가정이요, 사회요, 세계라고는 어느 누구도 생각지 않을 것입니다. 범위를 좁혀서 여러분 자신을 놓고 생각해 보게 될 때, 현실의 여러분의 가치를 만우주에 자랑하고 싶어하고 가장 귀하다고 생각하는 여러분 자신을 놓고 절대자가 영원한 축복을 해주고 절대자의 유업을 상속해 주며 현재의 그 모습으로 길이길이 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내 한 자신도, 또 지극히 크다는 이 세계도, 이 땅도, 더 나아가서는 하늘도, 아니 천주까지도 이 모두를 창조하신 창조주께서 보실 때, 그 유업을 상속해 주고 싶은 참다운 모습이 되지 못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부정하려야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 땅 위에 수많은 민족이 살고 있고 수억의 인류가 살고 있으되 하나님이 영원히 지니고 싶고 품고 싶고 영원히 남기고 싶은 개인, 또 그러한 가정, 민족, 국가, 세계가 없습니다. 그러한 것은 우리들의 생각에 머물 뿐이지 사실로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이상 슬픈 일이 없고 이 이상 억울한 일이 없습니다. 개인으로부터 사회, 국가, 인류 전체가 이러한 것을 알지 못하고 있는 사실을 바라보는 절대자가 있다 할진대, 그 절대자는 어떠한 입장에 계실 것인가?
이러한 사정들은 현실에서만 되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의 조상이 타락한 날부터 이어져 내려온 것입니다. 수많은 선조들이 선을 지향하고 의(義)를 좇아 죽음의 자리도 개의치 않고 싸워 나온 역사를 넘고 넘어 오늘날까지 오면서 하늘은 어느 한 날도 딱한 심정을 풀고 인간을 대한 날이 없었습니다. 이런 하늘임을 아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 하늘은 그 사람을 이 시대의 대표자로 세우실 것입니다.
하늘을 안다고 하는 사람은 많고 하늘을 믿고 따른다고 말하는 사람은 많되, 진정 하늘의 심정을 알고 하늘의 사정을 알고 하늘의 소원을 알아서 그 심정과 그 사정과 그 소원을 자기의 심정과 자기의 사정과 자기의 소원으로 삼고 이 모든 것을 자기 일대에 해결하기 위해 나선 사람이 역사노정에 누가 있었습니까? 그런 가정이 있었습니까? 그런 민족이 있었습니까? 그런 국가, 그런 세계가 있었습니까? 없었습니다. 이것은 지극히 원통하고 분한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일 절대자가 있어 그의 선한 이념을 이런 우리 인간에게 영원히 상속하고자 한다면, 그 절대자는 지극히 불쌍한 절대자일 것이며 지극히 서러운 절대자일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을 바라볼 때 하나님은 과연 이 천지간의 어떠한 사람들을 세워 천적인 유업을 상속시킬 것인가? 여러분,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 보십시오. 성경은 한 생명이 우주보다 더 크다고 높이 평가해 놓고 있습니다. 본연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한 생명의 가치가 우주보다 크다는 것을 알고 계시기에 그 가치를 인정하고 싶은 심정인데 과연 하나님이 바라보실 때에 우주의 가치 이상의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개인이 되어 있고 사회가 되어 있는가? 못 되어 있습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역사노정에서 선을 모방하라, 선의 유업을 상속받으라 하는 말씀들이 하늘의 말씀이라 할진대, 그 말씀을 대하는 우리들은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보고 믿고 있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천적인 유업을 상속시키기 위한 말씀이라 할진대, 오늘 현시대에 살고 있는 이 땅의 수많은 인류가 하늘의 유업을 상속시킬 수 있는 백성이요, 하늘이 유업을 상속해 주고 기뻐할 수 있는 인류가 못 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류를 위하여 지금까지 갖은 수고를 하시고 인류를 위하여 피와 땀을 흘리며 죽음의 길을 개의치 않고 싸워 나오셨는데, 이 한 많은 하늘의 심정이 사랑으로 나타나지 않고 도리어 뒤집어져서 채찍으로 나타날 때는 이 땅을 일시에 멸망시켜도 하나님의 한을 풀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그 분이 지으신 만물도 있는데 어찌하여 하나님의 유업을 상속받는 것이 지금까지 인간의 소망으로 남아 있느뇨? 이것은 타락의 보응(報應)입니다, 타락의 보응. 제 아무리 자기의 인격을 높이 자랑할 수 있는 인격자라 하더라도 그 역시 하늘의 유업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아직까지 기쁨에 넘치는 얼굴로 쌍수를 들어 ‘내가 지은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너에게 영원한 유업으로 상속하노라’ 하고 축복해 줄 수 있는 한 날을 갖지 못했습니다. 축복의 한 날을 갖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축복할 수 있는 자를 세워 만천하에 선포하지 못한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갖은 수고와 고생을 하시고 피어린 싸움의 역사노정을 거쳐 나오신 목적이 어디에 있느냐? 하늘땅 전체의 유업을 기쁜 마음으로 상속해 줄 사랑하는 아들딸을 찾는 데 있습니다. 이 목적을 위해 지금까지 헤매 나오셨다는 것입니다. 그 유업을 상속받을 수 있는 자는 이 땅 위의 수많은 민족과도 바꿀 수 없고, 수많은 국가와도 바꿀 수 없습니다. 수많은 민족과 국가를 잘라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그와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가치적인 모습을 세워 그로 말미암아 새로운 가정, 새로운 사회, 새로운 국가, 새로운 세계를 통할 수 있는 새로운 주권을 세워 하늘과 땅을 합하여 하나의 주권으로 통치할 수 있는 유업의 시대를 향하여 나아가는 것입니다. 창조주가 우리 인간을 창조목적을 두고 지으셨다 할진대 기필코 그러한 목적의 자리까지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을 바라보면 사방에는 싸움뿐입니다. 이 시간도 서로 물고 뜯고 죽이는 이런 판국에 놓여 있습니다. 어차피 어느 한 때에 가서 모두 청산되고 정비되어야 할 사회입니다. 6천년의 역사가 흘러왔지만 이 역사노정에 있어서 절대적인 것으로 남아질 수 있다고 하늘이 결정하여 선포한 것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수천년 동안 선민의 권한을 자랑해 나왔습니다. 그들은 선민, 즉 택한 백성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택한 백성은 되었지만 택한 나라는 못 되었습니다. 선민권은 자랑했지만 택한 나라가 되지 못했어요. 그들은 선민으로만 남아질 것이 아니라 선민을 지나 하나님의 유업을 상속 받을 수 있는 하늘의 백성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역사노정에 선민임을 자랑한 흔적은 있으되 하늘이 택한 나라를 세웠노라고 자랑한 흔적은 없습니다. 더 나아가 그런 나라를 택해 세워서, 이 세계는 택한 나라의 것이라고 주장한, 그런 나라는 나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하실진대 그 분이 창조하신 창조물도 선할 것이고 창조한 물건에는 목적이 있을 것입니다. 어떠한 존재물이든지 목적을 떠나서는 가치적인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그 존재의 가치는 반드시 전체목적을 이루려 하는 데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실존세계에 존재하는 만상이 다 그렇습니다. 우주 전체를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그 창조목적을 향하여 만우주를 이끌어 나갈 것이거늘, 그 목적은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하나. 종교도 하나요, 민족도 하나요, 국가도 하나요, 주권도 하나요, 세계도 하나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땅과 하늘도 갈라진 것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하나님과 인간도 갈라진 것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지선(至善)이시기에 인간도 최후에는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하늘이 지선이면 인간도 지선 할 수 있는 하나의 기준을 세워 개개인이 전체의 가치를 대신하여 만상 앞에 나타날 때, 모든 것은 거기서 하나의 자리를 잡을 것이라고 본인은 생각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는 구원섭리를 하시는 데 있어서 민족 민족이 다름에 따라 여러 형태의 종교를 세워 민족들을 움직이고 지도해 나오셨습니다. 하늘이 태초로부터 오랜 역사 과정을 거쳐 역사의 종말까지 목적의 세계를 향해 일관하여 뚫고 나가는 하나의 정통적인 방향이 있나니, 그 방향을 따라 나오는 종교가 있어야 됩니다. 또 그러한 종교에는 반드시 선인(選人)이 있어야 합니다. 택함 받았다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선민(選民)이 있기 전에 택함을 받았다고 하는 선인이 있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택한 집인 선가(選家)가 나와야 되고, 그 다음에 비로소 선민이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역사의 최후에 남아질 수 있는 종교라 할진대 거기에는 절대자가 축복하여 택했다는 선인적인 하나의 중심, 이 온 세계 가운데에서 무엇으로 태어났다는 하나의 중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중심인물이 없으면 역사적인 종교로 남아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개인을 통하여 가정을 축복하고, 가정을 통하여 민족을 축복하고, 민족을 통해서 국가를 축복하고, 국가를 통하여 세계를 축복하고, 세계를 통하여 하늘땅을 축복할 수 있는 그 때까지 역사는 발전되어 나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타락 이전 본연의 선한 자리에 있던 아담과 해와에게 하늘땅을 총합하여 여기에 하나님의 실체까지 겸하여 유업으로 주려고 하셨습니다. 하늘땅을 주는 동시에 창조주까지 주겠다는 것입니다. 이 이상 큰 유업이 어디 있겠습니까? 인간이 타락한 그날부터 하나님은 하늘을 수습하고 땅을 수습하고 인간을 수습하여 네 것이자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날을 향해 나오십니다. ‘너자 나요, 네 가정인 동시에 내 가정이요, 네 사회인 동시에 내 사회요, 네 나라인 동시에 내 나라요, 네 세계인 동시에 내 세계’라 할 수 있는 것을 바라시며 하나님은 지금까지 나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늘땅 전체의 유업을 홀로 붙안고 그 유업을 상속해 줄 인간을 찾아 나오시는 것입니다.
땅 위에 큰 야망을 가진 어떠한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의 야망은 이 세계, 보이는 이 세계입니다. 오늘날 민주와 공산이 대결하여 싸우고 있는데 그들의 욕망은 무엇인가? 이 세계를 자기들의 주의와 사상으로 규합시켜서 하나의 이념권 내에 몰아넣기 위해 서로 대결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인간들이 자기 욕망을 성취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 땅에 국한될 뿐입니다.
본래의 인간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이 세계를 자기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그런 승세를 가지고 있는 장군이라 할지라도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활동하는 데 있어서 초보단계에 불과합니다. 그러면 인간의 최고 발판, 즉 인간이 활동할 수 있는 최고의 발판이 무엇인가? 온 세계입니다. 여러분이 살고 움직이고 있는 이 사회의 일부분이 인간의 활동무대가 아닙니다. 하늘 전체를 대신한 이 세계가 인간의 최고의 발판입니다. 그 발판을 단장하려니 사회니 무엇이니 하는 현실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누구든지 아무리 못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욕망을 세계 무대에 두고 있습니다. 민족적인 기반에서 욕망을 충족시켰다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기의 민족권을 넘어서 혹은 자기의 민족권으로 모두를 끌어들여서라도 세계를 정복하려 합니다. 이러한 인간 본연의 심정, 인간 본연의 마음은 죄를 지은 자나 선한 자리에 있는 자나 마찬가지입니다. 선한 사람은 선을 통하여 그 목적을 이루려 하고, 악한 사람은 악을 통하여 그 목적을 이루려 하니, 언젠가는 선악이 서로 부딪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지금이 바로 그런 때입니다. 이 둘이 부딪치는 때가 되었다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있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없다고 합니다. 죄 중에 가장 큰 죄는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이상 큰 죄가 없습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창조주께서 인간에게 주고자 하시는 유업은 무엇이냐? 인간들이 살고 있는 땅덩어리가 아닙니다. 이 땅덩어리가 아니에요. 우리가 상속받아야 할 것은 이 땅에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이 땅을 토대로 하여 영원무궁한 세계, 광대무변한 세계를 우리 인간에게 상속해 주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하늘과 땅은 물론 천주를 창조하신 창조주까지 주겠다는 것입니다. 참다운 종교의 목적지는 어디인가? 땅이 아닙니다. 땅이 아니에요. 전부 다 한 중심인 유일신을 지향합니다. 종교를 세워 그것을 지향하는 개인, 가정, 사회, 민족, 국가의 형태로 역사를 이끌어 나오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께서는 아직까지 하늘과 땅, 거기다가 하나님 자신까지 합하여 이 모든 것을 영원히 너희에게 주노라 하는 축복을 못 하셨습니다. 축복을 못 하셨어요.
선민사상을 자랑하던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은 무엇을 주려고 했습니까? 하나님 자신을 주기 전에 당신의 아들을 주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아들을 때려죽였습니다. 하나님의 선민이라 하여 그 아들을 통해 유업을 전부 주려 하셨습니다. 보십시오. 이스라엘 민족을 세우기까지 하나님이 얼마나 수고하셨는지. 민족을 세워 놓고는 무엇을 주려고 했느뇨? 하나님의 사랑하는 독생자를 주려고 하셨습니다.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는 하나님 자신까지도 주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최고 목적점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를 믿고 성신을 받아 가지고 예수와 인연맺어, 부활한 성체(聖體)로서 하나님 앞에 서기를 바라고 주를 만나면 그만인 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상속하려 하시는 것은 주만이 아닙니다. 자신까지 주려 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어 가지고 주님만 만나면 다 되는 줄 알지만 아닙니다. 요한계시록 14장 1절을 보면 “어린양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함께 14만 4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라고 했습니다. 예수의 인정을 받는 동시에 아버지의 인정을 받아야 됩니다. 오늘날 이 땅 위에는 수많은 기독교 신자들이 있으되 진정 하나님의 아들을 받들 수 있는, 보내신 하나님의 본의에 합당하게끔 모시는 자가 몇 사람이나 있으며, 그런 교회가 몇 군데나 있습니까? 하나도 없습니다.
하늘이 주신 아들을 받들지 못한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그들이 만약 하나님이 주신 아들을 받들어 모셨던들 그 아들을 통해 하나님까지 상속받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상속받았던들 이스라엘 민족은 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잡아죽인 죄로 이스라엘 민족은 2천년 동안 세계를 유리고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땅 위의 어떤 조그만 민족을 대표하는 시시한 지도자의 아들을 죽여도 살아남지 못하거늘 하물며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 세계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하나님의 아들을 잡아죽였으니 편할 리 만무하지요.
그러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민족, 선민이라는 이스라엘 민족이 어찌하여 지금까지 나라 없이 유리고객하면서 여러 민족에게 몰리고 쫓기며 고난의 노정을 면치 못하고 비참한 노정을 걸어 나왔는고? 예수를 죽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죽인 죄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는 왔다가 갈 적에 민족에 대한 억울한 심정을 품고,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 ‘아바 아버지여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피하게 해주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4천년 역사가 글러 버리게 될 환경에 있던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은 몹시 안타까웠던 것입니다. 예수가 죽으면 4천년 역사가 다 끊겨져 나가는 것입니다. 구약성서를 통하여 예언했던 대로 메시아가 죽는 날에는 구약의 역사가 슬픔의 역사로 종국을 본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스스로 죽었나요? 죽임을 당했지. 예수를 죽임으로 말미암아 택함 받은 이스라엘 민족은 선민사상을 잃어버렸습니다. 선민권을 빼앗겨 버렸다는 것입니다.
4천년 동안 선조들이 공들여 닦아 놓은 토대 위에 예수님은 민족을 품기 위해 오셨습니다. 민족을 품기 위해 오셨어요. 그러나 그 민족을 품지 못하게 됨으로 말미암아 그 민족 대신 오늘의 기독교가 세계적으로 제2의 이스라엘이 되었습니다. 예수는 오늘의 이스라엘 민족을 품어 주지 않습니다. 유대교를 품어 줄 수 없어요. 그들은 아직까지 메시아가 오기를 바라고 있으니 그게 무슨 이스라엘입니까? 죽어간 예수는 유대교를 품고 사랑할 수 있는 처지가 못 됩니다. 유대교가 뜻을 받들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그 뜻은 예수를 믿고 예수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가 선민권을 부여받게 된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은 택한 제2의 이스라엘이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제2의 이스라엘을 세우셔서 민족을 품고 나서 세계를 품어야 할 노정이 남아 있기 때문에 지금까지 기독교인들을 소망의 곳으로 몰아내는 거예요.
예수는 세계를 품기 위해서 오셨기에 세계가 기독교 이념을 중심삼고 움직일 수 있는 한 때를 맞기 위해 예수가 다시 와서 세계적인 조상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땅에 민족을 세우고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그 하나의 이념 세계를 이룰 때까지 하늘의 싸움의 역사는 끝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유업은 언제 상속되느뇨? 하늘땅이 하나되어서, 하나님께서 이 땅 위에 수많은 인류가 살고 있고 수많은 민족과 국가가 있지만 다 제쳐 놓고 ‘나는 네 하나님이요, 이 민족의 하나님이요, 이 나라의 하나님이다’ 하실 수 있는 존재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유업이 상속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개인은 존중시되고 높이 평가되어야 하며 우주를 대신할 수 있는 가치를 갖고 있는 존재로되, 횡적인 관계를 맺어 가정에 들어가게 되면 가정의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천리원칙이 그렇습니다. 광물은 식물을 위하여, 식물은 동물을 위하여, 식물과 동물은 사람을 위하여 있듯이, 한 개체도 그 가치를 존중시하는 반면, 전체의 가치 앞에 굽히고 들어가야 하는 인연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천지의 원칙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자기 개인을 하늘땅과 맞먹는 가치로 평할 만큼 귀하다 해도 가정이 있으면 가정을 위해 봉사해야 됩니다. 개인보다는 가정을 위주해야 하고, 가정보다는 사회를 위주해야 하며, 사회보다는 국가를 위주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국가보다도 세계, 세계보다도 하늘, 하늘보다는 하나님을 위주해야 합니다. 원칙이 그렇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께서 오늘날까지 우여곡절의 노정을 거쳐, 역사노정의 변천을 거쳐 역사를 이끌어 오신 것은 최후의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들 멋대로 점령하고 점령당하고 있지만, 최후에는 하나님께 점령당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점령당하는 동시에 하나님을 점령해야 합니다. 거기에서 모든 것은 종결됩니다.
이는 땅 위의 모든 인류가 가야 할 운명의 길입니다. 이 운명의 길을 헤치고 나아가 하나님을 모셔 놓고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피조세계를 품어 가지고 그 앞에 서서 ‘아버지여, 축복해 주소서.’ 할 수 있는 이런 한 날을 맞이할 때까지 싸워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절대자가 있다 할진대 그 절대자는 그런 한 날을 맞이하고서야 안식의 자리를 잡을 수 있습니다. 그래야 하늘과 땅이 다 자리를 잡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어떠한 민족을 믿으려 하셨으되 진정으로 믿지 못하셨습니다. 성경 말씀, 이스라엘 선민에게 준 성경 말씀을 보아 가지고 하나님을 점령할 수 없습니다. 믿지 못한 인간들입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성경이 비유와 상징으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실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목적하는 바의 귀일점이 이렇다는 것을 알았다 할진대, 이 땅 위의 수많은 인류와 민족들은 이제 무엇을 먼저 점령해야 하느냐? 자기의 어떠한 주의나 욕망으로 국가를 통치하고 세계를 정복하는 것도 좋겠지만, 그보다 귀한 것은 하늘땅을 맞붙여 가지고 하늘땅을 지으신 창조주를 점령해야 합니다. 그때까지 인간은 나아가야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 아버지는 내 것이다. 영원한 내 것이다. 이 땅도 내 것이요, 하늘도 내 것이다.’라고 인정하지도 아니하고 알지도 못하는 자를 축복해 주시겠어요? 천만부당한 일입니다. 인간이 가야 할 길이 어디뇨? 하늘을 바라보며 이 하늘은 우리 하늘, 땅을 바라보며 이 땅은 우리 땅, 하늘과 땅을 지배하고 계시는 하나님은 우리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는 사상이 나오기 전에는 이 세계에 평화가 오지 않습니다. 이리하여 내 땅이며, 이리하여 내 하늘이며, 이리하여 내 하나님이라고 말할 때 어느 누구도 아니라고 변명치 못할 자리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그 관념이 철두철미하게 세워지기 전에는 하늘의 유업은 하늘 땅 어디에고 자리를 잡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지도 못하고 생각지도 않는 그런 자들에게 주겠습니까? 그러면 또 망하지요.
그러기에 지금까지 종교에 있어서는 땅은 떼어 버리고 ‘하늘은 내 것이다.’라고 하며 나오고 있습니다. 땅은 사탄세계예요. 그러기에 땅은 떼어 버리고 하늘은 내 것이라며 지금까지 나왔습니다. 개인으로부터 가정, 민족, 국가, 세계에 이르기까지 땅은 떼어 버리고 하늘만 붙들게 해 왔습니다. 그리하여 하늘을 붙잡은 그 백성을 동원하여 공중 권세를 잡고 있는 사탄을 쳐 몰리게 해 가지고 땅을 정복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노정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제 끝날에는 이 땅과 하늘을 규합시킬 수 있는 종교가 나와야 할 것이거늘 그 종교는 지금까지 역사적인 정통의 노정을 거쳐 온 개인을 통할 수 있고 가정을 통할 수 있고 선민사상을 통할 수 있는 내용의 역사적인 종교여야 됩니다. 현시대에 있어서 일개 종파적인 관념에 사로잡힌 그런 종교로서는 안 됩니다. 어떠한 주의나 사상에 휩쓸려 들어가서도 안 됩니다. 어떠한 종파도 문제없고 어떠한 주의 사상도 문제없다고 할 수 있는 종교라야 합니다. 또 그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이 땅은 우리의 것, 이 하늘도 우리의 것, 하나님도 우리의 것이라고 자신 있게 누구에게나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나 사탄 앞에서는 물론 천상에 있는 수많은 선지선열 앞에서까지도 당당히 변명할 수 있는 재료를 가져야 됩니다. 그런 내용을 갖는 동시에 실적을 가져야 축복의 은사가 내린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땅에 살고 있는 인류는 지금까지 역사노정에서 이 땅이 어떠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늘이 어떠하셨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하늘과 땅과 하나님이 우리 인간들 때문에 어떠한 고통을 받으셨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역사적인 동시에 천주적인 유업을 상속시키려 하는 하늘은 이 끝날에 있어서 수많은 민족 앞에 무엇을 예고할 것인고? 어떤 일개 종파만 중심하고 구원받자고 하는 따위는 안 됩니다. ‘오! 하나님, 그저 불쌍히 여기시어 천당 보내 주소서.’ 해서도 안 돼요. 어떤 사람에게 그 유업을 상속해 주시겠습니까? 아버지의 집, 창고에 있는 모든 것을 달라고만 하는 사람들에게는 안 해줍니다. 하늘의 유업을 상속받고자 하는 사람은 아버지 대신 고난의 자리까지 나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성도들에게 어찌하여 땅은 버리고 하늘만 찾으라고 했느뇨? 땅이나 하늘이나 모두 하나님이 창조하셨는데 어찌하여 땅은 빼놓고 하늘만 찾게 했는가? 하늘을 찾은 후에 땅은 어떻게 할 것이냐? 땅과 하늘을 찾은 후에 하나님은 어떻게 될 것이냐? 이런 모든 문제를 해명해야 됩니다.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요, 하늘은 내 하늘이요, 땅은 내 땅이요, 인류는 우리의 인류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도 부정할 수 없고, 천상의 천사도 부정할 수 없고, 사탄도 부정할 수 없는 재료를 가져야 합니다. 그 중심을 내 것으로 소유하고야 말겠다는 철두철미한 사상을 가진 자가 되기 전에는 아무리 은혜가 많고 사랑이 많은 하나님이라도 축복을 해줄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유업을 상속해 줄 수 있는 한 분, 한 때, 한 민족, 한 터전이 나타나기를 바라며 6천년 동안 수고하신 하나님 앞에 나타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축복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신자들은 ‘믿고 죽으면 천당 가겠지.’ 하고 생각하지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여러분, 영계에 가 보십시오. 잘 믿는다고 하는 목사 장로들, 가 보란 말입니다. 손들고 이럴 줄 몰랐다고 하게 되나 안 되나 가보란 말입니다. 왜? 하나님의 소원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심정이 어떠한지, 하나님의 사정이 어떠한지 모르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소원이 예수 잘 믿는 것인 줄 압니까? 예수만 믿어 가지고 뭘 하겠다는 거예요? 예수를 믿어 가지고 사탄세계를 정복해야 됩니다. 목적은 그것입니다. 일개인의 구원이 목적이 아닙니다. 개인을 찾아 세워 가지고 개인으로 말미암아 이 세계를, 사탄세계를 빼앗아 와야 됩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믿고 천당 가겠다고요? 가 보십시오. 가보란 말입니다. 그런 신앙 할 때는 지나갔습니다.
이제 우리 신도들은, 전세계 기독교인들은 하늘이 택하신 제1이스라엘 민족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일개인이나 일개 국가를 대신하여 나타난 것이 아니라 세계를 대신하여 나타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제2이스라엘 선민권 내에 들어있는 전세계 기독교인들은 단결하여야 합니다. 모세가 가나안 복지를 향하여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7족을 멸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러면 이 시대에 있어서 하늘이 바라시는 소원은 무엇일 것인가? 하나님이 없다 하는 곳에는 한 치의 땅도, 지으신 만물 하나도 두고 싶어하지 않으십니다. 만물도 하나님의 손길을 거쳐 지어진 것이요, 만민도 하나님의 손길을 거쳐 지어진 것일진대, 주인을 배반한 곳에 하나님은 최후의 승리의 터전을 갖출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전세계 기독교인들은 단결하여 어떠한 사람들을 내세워야 할 것이뇨? 역사적인 심정을 대신하였던 사람들을 내세워야 합니다.
지금까지 6천년 동안 섭리해 나오신 하나님의 역사는 무엇을 빼앗아 나왔느냐 하면 축복을 빼앗아 나왔습니다. 즉 다시 말해서 상속권을, 유업을 남겨 나왔습니다.
아담이 타락한 그날부터 2천년이 지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택해 세우셨습니다. 아까 성경 본문에서 본 것과 마찬가지로 아브라함을 택하셨는데, 이는 아브라함 하나를 위해 택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악한 땅 위에, 하늘을 알지 못하는 이 땅 위에 아브라함을 택한 것은 아브라함 일개인이나 그 종족을 위해 택한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그 민족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택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그 후손을 택한 것은 하나님을 위하여 택한 것이지, 그 민족을 위하여 택한 것이 아닙니다.
당시의 아브라함은 ‘저는 몰랐사온데 하나님 고맙사옵니다. 역사노정에서의 믿을 수 있는 하나의 선조로 세워 주시니 고맙습니다.’ 하는 입장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하늘을 믿고 따르고 있었으되, 하나님은 그 가운데에서 아브라함을 대하여 ‘나는 네 하나님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네 하나님이다.’ 하였습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아담이 타락한 그날부터 2천년 동안 수고하여 찾아 세운 사람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능력으로 아브라함을 일시에 몇백 번 택할 수 있지만, 창조 법도에 의하지 않고는 택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원리원칙과 순리적인 조건과 전후·좌우·상하의 구비할 점을 갖추어 가지고 수많은 민족을 수습하셨고 수많은 가정을 수습하셨고 수많은 개인을 찾았습니다. 그 가운데에서 아브라함을 불러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 세우게 될 때, 아브라함 하나만 붙들고 불러 세웠겠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아브라함 하나를 세울 때는 수많은 사람들을 다 테스트해 가지고 그 가운데에서 아브라함을 세웠습니다. 아브라함이 재산이 많고 가문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하늘 앞에 정성을 들임에 있어서 그 시대에 최고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개인적인 기대가 되었기 때문에 택한 것입니다.
그러면 개인 아브라함은 어떤 개인이뇨? 개인을 찾는 하나님의 섭리의 상속자요, 하나님이 남겨 주신 땅의 상속자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돼요.
아브라함은 어떤 사람이뇨?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전체의 유업을 상속하는 것이 섭리의 목적인데, 그 목적을 이루어 나가는 데 있어서 한 사람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2천년 동안 수고하여 찾아 세워 축복하신 하나님의 유업 상속자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민족들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아브라함의 유업을 상속받아야 했습니다. 그것이 곧 축복입니다, 축복.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손을 들어 축복하던 그 축복을 상속받아야 합니다. 고마운 것은, 이 땅에 수많은 종족이 살고 있고 수많은 사람이 살고 있으되 단 한 분 미래의 조상이라고 하여서 개인을 찾아 세울 수 있는 하나님의 유업을 우리에게 주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함부로 대한 민족은 망했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개인적인 축복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떠한 자리로 나아가야 했느뇨? 이는 자기가 살고 있는 땅 위에서 최고의 정성을 들인 자로 하늘이 알아주신 바 되었지만, 일단 하늘이 불러 세운 그 시간부터는 하나님이 명령하십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거예요. 하나님은 인간 대해서 명령을 해보지 못하셨습니다. 본연의 선의 심정을 지니신 하나님으로서 참다운 유업 상속의 대표자를 세워 명령을 해보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으려면 지금 자기가 좋다고 하면서 살고 있는 그 환경에서는 안 됩니다. 특정한 지역을 택해 가지고 거기에 가라 하십니다. 가고 나서부터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어떠한 내용을 설명하지 않으시고 무작정 가라고 하셨습니다. 인근 친척들과 재미있게 살고 가정 기물을 다 갖추어 안락하게 살던 아브라함에게 갈대아우르를 떠나라는 청천벽력과 같은 명령이 내렸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예 아버지, 당신의 명령이온데 내 어찌 아니 가오리까’ 하며 떠났습니다.
그가 행랑 보따리를 짊어지고 나서게 될 때 좋은 곳으로 보낸 것이 아니었습니다. 광야로 내몰았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쓸쓸한 곳으로 내몰았습니다. 내모는 데는 사탄들이 많은 곳으로 내모는 것입니다. 사탄들이 많은 곳으로 내몰아요. 이걸 알아야 됩니다. 왜? 하나님의 유업을 상속받을 자는 사탄의 참소를 벗어나야 되기 때문입니다. 사탄의 참소를 받는 자에게 하늘의 유업을 상속시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의 길로 내모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를 버리고 가정을 버리고 환경을 버리라 하신 하나님이시여! 나를 사랑하시는 당신의 마음, 나를 사랑하시는 당신의 뜻을 내가 압니다. 내가 당신을 배반하기 전에는 당신은 나를 배반하지 않으시고, 내가 당신을 저버리기 전에는 당신은 나를 저버리지 않으시며, 죽을 자리에 들어갈 지라도 그 자리에서 내가 당신을 배반하지 않으면 쓰러져 죽은 나의 영을 일으켜서라도 살아서 뜻을 이루어 승리한 자의 자리에 두시려 하는 당신의 마음을 압니다.’ 한 아브라함이었습니다. 이러한 기준이 어느 누구보다 철두철미했기 때문에 그는 개인적으로 세계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유업을 상속받고 미래의 축복을 약속받았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개인적인 유업 상속자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축복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너로 말미암아 이제 네 민족이 해야 할 것은 무엇이뇨? 너는 내 뜻을 본받아 하늘의 명령에는 생사지경도 개의치 않고 움직일 수 있는 후손을 가져 목적하는 이 세계를 정복하고 하늘과 땅을 통일시켜야 한다. 그 다음에는 나까지도 너희의 하나님으로 인정하노라.’라고.
아브라함은 개인적인 유업을 상속받은 축복받은 자이기에, 개인적인 유업을 상속받는 데 동참하기 위해서는 아브라함을 지성껏 모셔야 됩니다. 이것이 원칙입니다.
아브라함 한 개인을 택해 세웠지만, 아브라함이 제물 실수를 함으로 말미암아 가정을 택하지 못했기에 이삭을 거쳐 야곱에까지 3대를 내려간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3대만에 아브라함 개인에게 축복하였던 개인 유업의 실체를 한 단계 높여 가정적으로 유업의 복귀를 이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가정 복귀의 기준으로서 누구를 택했느냐? 야곱을 택했습니다. 가정을 찾기 위한 축복의 기반으로 아브라함을 세웠지만, 그 축복이 처음 이루어진 것은 야곱 때였습니다. 성경 말씀을 보면,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라고 했고 그 다음에 야곱의 집을 축복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집을 축복하지 않았어요. 야곱 때는 이미 개인 유업 상속시대가 지나 가정 유업 상속권을 복귀해야 할 시대에 들어갔기 때문에, 하나님은 가정 기준을 세우기 위해 야곱을 내몰았던 것입니다. 야곱이 에서를 속인 동기와 그 복잡한 내용은 시간 관계상 다음에 이야기하겠습니다. 어쨌든 하나님은 야곱을 통하여 역사하셨습니다.
야곱은 에서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한 연고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뜻을 대신한 야곱이었기에 에서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세상적인 모든 것 다 끊어 버릴지라도, 혈연관계, 육친적인 모든 것을 다 끊어 버리고라도 하나님의 뜻을 위하고자 하는 야곱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아브라함을 갈대아우르에서 끌어내어 가지고 뜻을 이루기 위해 내몰았던 하나님께서 그 기준에 있어서 어느 누구보다도 야곱이 하늘의 유업을 상속받기에 합당하기 때문에 그에게 축복을 넘겨준 것입니다.
야곱은 하란에 있는 라반의 집에 가서 종살이를 했습니다. 우상을 섬기던 라반의 집에 가서 갖은 고역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21년간의 고역 노정을 무난히 돌파하였습니다. 야곱에게 있어서 라반은 외삼촌이었지만 원수와 같았습니다. 그 라반을 쳐서 축복을 빼앗고 하늘의 협조를 얻어 자기 일가를 솔거(率去)하여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시련 도상으로, 20여 년의 갖은 고역의 노정으로, 춘풍추우에 꺼슬리는 서글픈 환경으로 내몰렸을 때, 야곱은 얼마나 하나님을 배반하고 싶었겠습니까! 그러나 내가 변하기 전에는 나를 축복해 주신 하나님의 뜻도 변하지 않는다는 신념을 가진 야곱이었기에 자기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라반의 집에서 승리했으니 그 다음엔 영적인 사탄까지 승리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탄 대신 나타난 천사와 씨름을 한 것입니다. 그 씨름에서 승리하여 가정적인 기준을 세웠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이 택함받은 민족으로 출생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야곱의 열두 아들이 12지파를 형성하고 12지파는 12사도를 대신하여 역사를 이루어 나온 것입니다.
고마운 것은 타락한 인류가 사는 이 땅 위에, 타락한 민족들이 사망의 촉각을 높이는 이 땅 위에 개인적인 유업의 승리자를 세우고 야곱의 일가를 통하여 가정적인 승리의 기준을 세워 하늘의 유업이 이 땅에 남아지게 된 것입니다. 야곱을 통하여 세운 그 가정은 하늘이 사랑하는 가정입니다.
그러면 야곱은 누구뇨? 가정적인 조상입니다. 아브라함은 개인적인 조상이로되 야곱은 가정적인 조상으로 등장한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야곱의 집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올라가는 것입니다. 야곱을 중심삼은 야곱의 일가는 소망의 동산에서 세계의 유업을 상속받을 수 있는 가정적인 기반으로 하나님이 인정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야곱을 중심삼고 흘러나온 이스라엘 민족은 그들의 지도자를 새 세계의 유업을 상속받을 수 있는 기반 위에 세워 놓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늘은 가정적으로 승리의 기준을 갖춘 이스라엘 민족에게 가정적 축복을 해 준 다음 그들을 어디로 내쫓았는가? 바로 궁중으로, 애급으로 내쫓았습니다.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들, 예수 믿어 복받고 천당 가겠다구요? 천만부당한 일입니다. 반드시 세상을 이겨야 합니다. 자기 환경을 정리해 가지고 이겨야 됩니다. 오늘 여기서 살다가 내일 저리 가라 하면 가야 됩니다. 그 땅이 하늘이 택한 땅이 못 되어서 그 땅에서는 하늘의 뜻을 이룰 수 없고 다른 땅에서 이룰 수 있다면 그곳으로 가야 합니다. 왜? 세계적인 대표이기 때문입니다. 개인으로서, 혹은 가정으로서 세계의 대표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명령하면 세계를 대표하는 가정이 그냥 머물러 있을 수 없습니다. 하늘이 ‘어디 어디를 거쳐서 세계적인 이념을 세울 수 있는 곳으로 가라.’ 하면 ‘예.’ 하고 일언반구의 불평도 없이 절대 복종해야 합니다.
이리하여 야곱의 가정은 애급으로 가서 4백년 동안 갖은 고역을 당하고 학대를 받았습니다. 그러한 어려운 자리에 쳐 넣어졌지만, 야곱의 집을 축복한 하나님의 뜻은 변함이 없고 자기 민족이 하나님을 저버리기 전에는 하나님이 자기 민족을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을 믿고 나온 사람들은 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되어 나온 거예요.
이스라엘 민족이 애급에서 4백년 동안 고역을 하고 60만 대중이 유리고객할 때에, 개인으로부터 가정적 유업 상속의 축복 기준을 세우신 하늘은 한 단계 올라가 민족적인 유업 상속의 대표자를 세워야 했기에, 민족적 유업 상속의 대표자로 세운 사람이 누구냐 하면 모세입니다. 모세는 60만 대중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존재입니다. 민족적으로 볼 때에는 60만 분의 1이로되 뜻으로 볼 때는 조상의 입장에 있었으니, 민족 유업의 뜻을 이루는 데 있어서 모세를 통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애급 고역노정에서도, 원수들의 핍박 가운데에서도 천적인 절개를 지키고 어떠한 호화찬란한 자리에서도 택함 받은 선민이라는 사상을 잊어버리지 않고, 즉 아브라함의 축복과 야곱의 집의 축복을 잊어버리지 않고 일관하여 민족 유업을 상속받을 수 있는 심지(心志)를 굳혀온 모세에게 있어 축복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호화찬란한 바로 궁중에서 공주의 아들로서 천하를 가질 수 있는 환경에 있었으되 내 동기는 다르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생활 속에서도 동편의 자기 조국을 향하여 남모르는 기도를 한 모세였습니다. 좋은 옷을 입을 적마다 도탄 중에 쓰러져 가는 민족을 염려하던 모세였습니다. 좋은 옷을 입고 민족을 바라볼 때 더욱 가슴이 아팠다는 것입니다. ‘차라리 내가 이런 자리에 있지 않고 너희들과 같은 자리에 있고 같은 옷을 입으면 마음이 편할 것을….’ 하고 생각한 모세였습니다. 모든 것이 갖추어진 호화찬란한 환경에서 그들을 바라볼 적마다 가슴에 못이 박혔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 저 불쌍한 민족을 위하여 제가 선두에 서겠습니다.’라고 수십년 동안 남이 모르는 가운데 기도하였습니다. 일편단심, 하나님의 심정 골수에 통할 수 있는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런 동기가 있었기에 하나님은 모세를 택하였던 것입니다. 그런 자유롭고 풍요하고 호화로운 환경 속에서도 하늘을 대하여 정성을 들이고, 민족을 위하는 데 있어서 4백년 고역으로 도탄에 빠진 60만 이스라엘 민족 어느 누구에게도 비할 수 없는 충성의 심정을 모세가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천지를 대신하는 한 개인을 찾아 세우기까지 2천년, 한 가정을 찾아 세우기까지 120년, 거기에 다시 4백년의 노정을 거쳐 모세를 세우기까지 2400년을 수고하였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피어린 심정을 알고 ‘당신이 축복하신 민족이 어찌하여 이렇게 되었으며, 당신이 불러 세우신 민족이 어찌하여 이렇게 되었습니까?’ 하며 통탄한 모세였습니다. 민족의 슬픔을 자기의 슬픔으로, 민족의 아픔을 자기의 아픔으로, 민족의 억울함을 자기의 억울함으로 알았던 모세였기에 애급인을 돌로 쳐 죽였습니다. 그것을 사람을 죽였다는 면에서보다도 민족을 사랑하는 심정적인 면에서 볼 때 ‘하나님이 택한 민족이 어찌하여 이와 같은 자리에 있는가?’ 하는 분하고 원통한 심정, 하나님의 심정과 동일한 심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애급인을 때려죽여도 사탄이 참소 못했던 것입니다. 이는 민족을 위함이요, 하나님을 위함이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자기가 처한 환경이 자유롭지 못한 것을 깨닫고 호화스런 환경을 일시에 다 버렸습니다. 자기의 모든 환경을 저버리고 ‘지긋 지긋한 40평생을 오로지 민족을 위하여 심혈을 기울였거늘, 다시 바로 궁중에 들어가 이 몸을 더럽힐소냐.’ 하며 미디안 광야를 향하여 나서는 모세의 발걸음은 하나님이 동반한 걸음이었습니다. 그가 민족을 뒤로 하고 바로 궁중을 뒤로 하고 미디안 광야를 향할 때에는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그만큼 하나님과의 심정적 인연이 두터웠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목자 생활을 40년이나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민족을 위하여, 철저한 선민사상으로 그러한 길을 간 모세가 자기 일신의 처량한 사실을 갖고 탄식했다면 무수히 탄식했을 것입니다. 1, 2년이 아니라 40년입니다. 모세는 양떼를 몰 적마다 이스라엘 민족을 연상하였고, 주인을 따라오는 양떼를 바라볼 적마다 60만 대중을 연상하여 그들과 더불어 바로 궁중을 나와 택한 축복의 땅, 가나안 복지로 향할 날을 위해 기도하고 명상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모새가 40년 동안 눈물 흘리고 피땀 흘리며 심정을 기울여 호소한 것을 하나님이 아셨기에, 모세는 ‘내 소원의 날이 왔노라.’ 하며 40년 만에 80노구를 이끌고 하나님의 축복의 뜻을 가지고 바로 궁중으로 되돌아갔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모세를 전민족의 대표자로 세우셨습니다. 모세를 세운 날부터 모세가 책임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말씀하시지 민족을 통해서는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일단 책임자를 세웠으면 그에게 전권을 맡겨 가지고 그를 통하여 지배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모세를 불러 세운 그날부터는 60만 대중을 쓸어버리는 한이 있다 할지라도 모세 하나만은 버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중심, 즉 주체가 대상보다도 더 가치적이지 않으면 자리를 못 잡는다는 것입니다. 택하기 전에는 모르지만 일단 택해 놓은 그날부터는 60만 대중을 쓸어버리면 쓸어버렸지 모세는 못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런 기준에서 60만 대중 앞에 모세를 보냈습니다. 바로 궁중에 돌아가서 모세는 10여 차례의 이적 행사를 통하여 바로와 이스라엘 민족을 분립 시키고 승리의 기준을 세워 바로를 속이며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나왔습니다. 야곱이 라반의 집에서 몽땅 가지고 나온 것과 마찬가지로 모세도 애급나라에서 나올 때 몽땅 받아 가지고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죽더라도 모세를 붙들고 죽어야 했습니다. 죽으나 사나 모세가 일편단심 하늘에 충성하던 거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민족도 모세가 가는 곳은 어디든지 따라가야 했던 것입니다. 모세가 눈물을 흘리면 그 눈물은 민족을 위한 눈물이니 민족도 울어야 하고, 모세가 싸우면 그 싸움은 민족의 싸움이니 민족도 싸워야 했습니다. 민족적인 유업의 실체로 택해 세운 것이 모세이거늘, 모세를 잘 받들면 민족이 유업을 다 상속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은 광야에서 모세를 믿지 못하고 불평불만을 했습니다. 애급나라에 살 때는 그래도 굶지는 않았는데, 60만 대중이 광야에 나가서 1, 2년도 아닌 40년을 유리고객 하였으니 이 이스라엘 민족이 어떠했겠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오늘날 전세계에 널려 있는 기독교인들을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황무지에 끌어다 놓고 4년만 살라고 하면 모세를 쥐어뜯어 가지고 가루를 만들어 놓을 거예요. 그래도 이스라엘 민족은 용합니다. 40년 동안 참았으니 말예요. 가자면 갔습니다. 택한 뜻 앞에 이스라엘 민족은 모세를 따라갔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법도란 인간의 법과 달라서 사탄과의 조건이 처리되어야 민족을 처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런 고충이 따른다는 것을 이스라엘 민족은 몰랐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민족을 세워 놓으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사탄도 민족을 빼앗으려 하고 하나님도 민족을 이끌어야 하니 하나님께는 민족을 대하기 전에 사탄을 처리해야 할 조건이 있는 것입니다. 이 조건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40년 동안 유리고객하게 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하는 하나님의 심정은 얼마나 원통하고 안타까웠겠습니까?
잘못되면 아담이 타락한 이후부터 모세까지 2400년의 역사가 한꺼번에 꺾여 나가는 판국인데, 하나님도 얼마나 이스라엘 민족을 곧바로 가나안 복지로 들여보내고 싶었겠습니까? 그렇지만 인간을 대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은 반드시 민족을 걸어 놓고 사탄과 싸우는 조건을 해결해야 합니다. 그러기 전에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조건 때문에 과거의 선지자들이나 모세, 예수가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6천년 역사가 이런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사탄 사이에 공의의 법도를 세워 놓고 그것으로 민족을 걸어 놓고 처리해야 할 조건이 있습니다. 이 조건이 해결되기 전에는 민족을 목적지에 갖다 놓을 수가 없습니다. 시련 과정에는 둘 수 있으되 목적지에 갖다 놓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민족을 놓고 하나님과 사탄이 해결지어야 하는 천적인 내막을 모르는 이스라엘 민족은 배고프고 굶주리는 처량한 사정에 부딪치게 될 때에 모세를 바라보는 것보다도 자기의 자녀를 바라보게 되고, 모세를 생각하는 것보다도 자녀를 생각하게 되고 자기의 처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애급에 있을 때는 그래도 굶주리지는 않았는데, 40년 동안 광야에서 유리고객 하는 생활을 하니 얼마나 처량했겠습니까? 입을 것이라곤 다 해어졌고 먹을 것이라곤 다 없어졌으며 마실 것도 없었습니다. 그런 판국에 놓여 있으니 그 처지가 얼마나 딱했으면 하늘이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 주었겠습니까?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능력이 많아서 그저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준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한번 이적을 행하여 그 이적을 그냥 그대로 믿지 못하고 지키지 못할 때는 그것이 조건이 되어 사탄에게 물려가게 됩니다. 예수도 이적을 행하지 않았으면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모세도 이스라엘 민족을 살리기 위해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리지 않았다면 그도 이스라엘 민족도 광야에서 쓰러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을 몰랐습니다. 그저 권능, 권능만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권능으로만 할 수 있으면 6천년이 걸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권능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하늘과 사탄 사이에 어길 수 없는 법도를 세워 놓고 그런 행사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것을 민족이 하지 못할 때에는 그 민족이 전부 쓰러진다는 조건을 걸어 놓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오늘날 믿는 사람들은 알지를 못했습니다.
만나와 메추라기, 불기둥, 구름기둥을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시기 위해 하늘이 얼마나 많은 고심을 하였던고! 민족 앞에 그런 이적을 행사하기 위해서 하늘은 얼마만큼 사탄과 피어린 혈투전을 벌였겠습니까? 영계에서 제물된 눈물과 제물된 피와 제물된 땀의 기대 위에서 민족을 고이 바친다는 희생의 조건을 세워 놓고 그런 행사를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4백년 동안 애급에서 고역한 대가로, 수천 수백년 동안 택한 이스라엘 민족이 수고한 대가로 광야노정에서 그런 행사를 했던 것입니다. 사탄이 굶주린 것을 먹여 줘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입니다. 굶주린 민족을 먹여 주었으면 사탄도 굶주릴 때 법도에 어긋나지 않으면 먹여 줘야 된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그런 것을 몰랐습니다. 이렇게 하라면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라면 저렇게 할 뿐이었습니다. 곡절은 설명하지 않고 목적을 향하여 인도하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이리 가라고 하면 이리 가고, 저리 가라고 하면 저리 가고, 이래라 저래라 하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모세, 뜻만을 위한 모세도 훌륭하였거니와 이스라엘 민족도 훌륭했습니다.
그렇지만 이들이 최후까지 가야 할 뜻 앞에서 모세가 반석을 두 번 치는 혈기를 부림으로 말미암아 이것이 화근이 되어 모세도 쓰러지고 이스라엘 민족도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이게 무슨 곡절이냐? 천적인 처리 문제가 저끄러졌기 때문입니다. 한 나라의 주권 안에 있는 백성들이 그 나라의 법도를 어기면 망합니다. 천상의 법도에 걸리면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내용에 걸려서 이스라엘 민족은 광야에서 제물이 되었습니다. 그 후손이 남아 가지고 이스라엘의 전통을 세워 나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 앞에는 야곱의 집 대신 민족의 집이 있었나니 그것이 무엇이냐? 광야시대의 장막입니다. 모세를 모시고 나온 후부터는 장막이 집입니다. 민족이 거해야 할 집이에요. 그러니 죽더라도 장막을 붙들고 살더라도 장막을 붙들어야 합니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장막을 떠나서는 안 됩니다. 장막을 붙들고 나가야 합니다. 그러나 그 민족은 장막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그러니 장막을 붙들고 나오는 모세를 등한시하고 조롱을 안 했겠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안 했겠나 말입니다. 60만 대중이 별의별 소리 다 했겠지. 그리하여 민족이 모세와 하나되지 못하고 갈라졌으니 민족이 거해야 할 집, 즉 민족의 집, 장막은 별수 없이 사탄에게 넘어간 것입니다. 민족이 그렇게 되니 사탄이 물어갔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민족의 2세들은 참았습니다. 2세들만은 하늘의 뜻을 따랐습니다. 그래서 2세를 대표한 여호수아와 갈렙을 세워 가지고 가나안 복귀노정을 마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 성전 이념을 중심삼고 지금까지 나온 것입니다. 성전은 무엇이뇨? 성전은 이스라엘 민족의 집입니다. 그것이 앞으로 무엇이 되느냐 하면 하늘땅을 지배할 수 있는 왕궁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장성하여 크게 된다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하나님이 군림하실 수 있는 궁전이 되는 것입니다. 야곱의 집, 가정적인 집, 민족적인 집인 이 성전을 토대로 하여 누가 오시느냐? 약속한 메시아가 오십니다. 모세를 중심삼고 단결하여 장막을 떠나서는 안 될 민족이 마음대로 하다가 전부 다 망했습니다. 민족의 집을 잃어버렸으니 망하는 거지요.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에 복귀한 후에 메시아를 고대했습니다. 천 오륙 백 년이란 기간 동안을 고대하면서 나온 그 노정이 얼마나 복잡했고 그동안 얼마나 고생했습니까? 이것은 민족을 대신하여 지어진 민족의 집을 잃어버린 연고입니다. 민족의 집을 잃어버렸으니 민족의 집을 세워야 합니다.
그러면 그 민족의 집이 완성된 후에는 누가 올 것이뇨? 세계적인 유업의 실체가 오십니다. 하나님이 이 땅 위에 하늘의 유업을 상속할 수 있는 실체로 보내실 세계적인 대신자가 누구뇨? 메시아입니다.
메시아는 이스라엘 민족의 터전 위에 오시는 세계적인 조상입니다. 세계적인 조상이에요. 예수는 이 땅 위에 오셔서 ‘나는 너희들의 집이다. 내 몸이 곧 성전이다.’라고 했습니다. 개인을 거치고 가정을 거치고 민족을 거치고 국가를 거치고 세계를 거친 후에는 실체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내적인 집이 아니에요. 내적인 집을 거쳐 심정의 집까지 들어가야 합니다.
예수는 이 땅 위에 나타났나니, 만민을 대신하여 이스라엘 민족 앞에 나타났나니, 이스라엘 국가를 대신할 수 있는 주권자로 오신 것입니다. 전세계의 수많은 국가는 주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도 싸우려니 최소한의 주권이 있어야 했습니다. 하늘이 이스라엘이란 약소민족을 택하신 것도 뜻이 있습니다. 하늘이 장악할 수 있는 최소한의 주권만 가지면 큰 나라도 부릴 수 있습니다. 안 그래요? 대한민국을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대한민국 같은 조그만 주권국가들도 미국 같은 나라와 일대일로 대할 수 있고 싸울 수 있는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늘이 바라는 것은 국가적인 기반 위에 국가적인 유업을 대신할 수 있는 국가적인 조상을 보내는 것입니다. 이 국가가 세워지면 전세계의 국가는 여기에 굴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라고 했는데 명사뿐만의 왕이 아니라 사실의 왕으로 모셔야 하는 것입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민족이 단결했더라면 아무리 이적기사를 행했더라도 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틈이 날 때에는 망하지만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산다는 각오만 가졌더라면 아무리 이적행사를 했더라도 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와 그 민족이 갈라지게 되니 깨져 나간 것입니다. 예수도 이스라엘 민족과 단결하여 이적기사를 행했더라면 세계의 정복은 문제없었을 것입니다. 문제없이 해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모세도 그 민족과 하나되었더라면 가나안 땅에 복귀했을 것입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60만 대중도 선민이 되기 위해서 원수의 나라에 가서 싸워 가지고 승리했으니, 이스라엘 민족이 선민으로서 천민(天民)이 되기 위해서는 예수와 이스라엘 민족도 원수의 나라에 들어가, 원수의 품에 들어가서 싸워야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때 이스라엘이 반드시 로마제국의 식민지여야 했던 것입니다. 거기에서 단결하여 로마제국과 싸워 가지고 로마제국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했습니다. 이것은 필연적인 조건입니다. 이스라엘의 구주로 온 예수가 빌라도의 법정에서 공판을 받다니요? 이는 민족의 실수였습니다. 예수님을 죽인 것은 민란이 일어날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와 하나로 단결되었다면 못 죽인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온 그날부터 이스라엘 민족은 성전을 대신한 예수, 4천년 만에 성전의 실체로서 나타나신 그 예수를 중심삼고 하나되어야 했습니다. 예수는 이스라엘을 전부 품을 수 있는 민족의 집으로 등장하신 분입니다. 예수를 축복한 그날부터, 예수를 이 땅에 보낸 그날부터 하늘 유업의 중심적인 대표자로 세웠기 때문에 누구와도 바꿀 수 없다는 것입니다. 수백만 이스라엘 민족을 저버리면 저버렸지 예수님은 절대로 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어갔습니다. 이 땅 위에 우리의 영생의 집이 될 수 있는 중심으로 왔던 예수님은 죽어갔습니다. 그가 죽고 난 후에는 바리새인을 위시한 유대교가 아무리 성전을 지켰댔자 하나님이 임재할 수 없기 때문에 그건 깨지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거두어서 축복해 준 예수는 세계적인 대표이기 때문에 예수 하나가 쓰러지는 날에는 모든 것이 깨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죽어간 예수의 뜻을 따라 믿고 충성을 다하던 마음을 받들어 택함 받은 민족을 원수로 삼아 나선 무리가 있었으니, 그 무리가 나사렛 예수당이었습니다. 예수의 무리였습니다. 이들이 민족으로부터 몰리고 로마제국으로부터 몰리면서 쫓기는 무리로서 죽음의 핏줄기를 연하여 세계적으로 확대되어 등장한 것이 기독교입니다. 예수의 이념을 갖추어 잃어버린 이스라엘의 한을 대신 짊어지고 세계적인 형체로 몰아 놓은 것이 오늘의 기독교라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제1이스라엘을 잃어버린 연고로 이스라엘을 통하여 세계를 수습하려던 예수의 이념과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2이스라엘을 축복하여 예수와 더불어 하나되어 세계적인 이스라엘 건국운동을 전개해 나온 것이 기독교의 역사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에는 12지파와 70장로가 있었는데, 이들은 모세의 명령에 복종해야 합니다. 오늘날 전세계에 널려 있는 기독교에 수많은 교파가 있을 수 있으되 모두 예수님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도 야곱을 따랐었고 모세의 12지파도 모세 앞에 복종했듯이 오늘날 전세계에 널려 있는 수많은 교단들은 모두 예수 앞에 복종해야 합니다. 무슨 복종? 야곱의 아들딸은 죽든 살든 뜻 앞에 복종하던 야곱에겐 복종해야 했습니다.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 이스라엘 민족은 죽든 살든 모세를 따라야 했습니다. 오늘날 땅 위에 있는 전세계 기독교인들은 자기 교파가 문제가 아닙니다. 세계적 가나안 복귀를 완성하기 위하여 지상천국을 향하여 행군해야 합니다.
이 땅은 바로의 왕국과 같습니다. 사탄세계입니다. 6천년 동안 지지리 사탄의 발판이 된 땅이기에 이 땅에 사는 기독교인들이 죽음의 길을 걷고 걸어 나온 것입니다. 이렇게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 예수의 발판이 세계적으로 넓혀졌습니다. 기독교가 그래서 세계의 절반 이상 지배할 수 있는 권내에 들어왔습니다. 이제 사탄세계를 쳐부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왜 지금까지 가만히 계셨는지 압니까? 그것은 근본이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이제 하늘의 호령이 내릴 때가 왔거늘, 세계에 널려 있는 기독교인들은 종파를 초월하여 주의 나팔소리와 더불어 제2이스라엘의 방향을 갖추어 새 에덴을 향하여, 새 가나안 나라를 향하여, 새 가나안 천국을 향하여 행군의 나팔을 불어야 합니다. 여기엔 종파가 문제가 아닙니다. 내 교파 네 교파가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 때는 광야시대입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40년은 광야노정에 해당되는 때입니다.
1차, 2차, 3차 40년노정 동안에는 세계가 뒤넘이치는 것입니다. 더 구체적인 내용은 따로 시간을 내서 이야기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도탄 중에 처해 있는 세계 인류입니다. 여기에서 어떠한 종파나 지파가 문제가 아닙니다. 모세를 따르던 70장로와 이스라엘 민족이 그런 길을 걸었습니다. 그러니 종말시대에 있어 제2이스라엘도 그런 길을 가야 합니다. 요단강을 건너 새로운 천국, 새로운 가나안 땅을 향하여 넘어가는 데는 3년 고역노정이 있습니다. 3일의 성별기간이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부활하여 천국동산에 가기 위해서는 십자가의 3일 고난기간이 있었고, 야곱에게도 3일 기간이 있었고, 모세에게도 3일 기간이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세계적인 유업을 계승하여 이루실 실체로 오시는 메시아에게도 그런 기간이 있고, 이스라엘 후손과 전세계 기독교인에게도 반드시 그런 노정이 있습니다. 이 노정을 거쳐야 가나안의 이념세계를 맞이할 수 있는 끝날의 나팔소리가 들려올 것을 알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어떻게 할 것이냐? 기필코 우리는 떠나야 합니다. 아브라함을 대해서도 명령했고, 야곱을 대해서도 명령했습니다. 예수도 민족을 거느리고 세계 유업 복귀의 사명을 완결하기 위해 왔었으나, 그 사명을 완결짓지 못하고 갔기에 다시 온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들은 어떠한 관념을 가져야 될 것이냐? 우리의 목적은 예수입니다. 모세를 따르던 이스라엘 민족의 목적은 모세입니다. 동시에 그들은 모세를 발판으로 하여 예수를 붙잡아야 됩니다. 그래야 될 게 아니에요? 그것이 민족적인 사명입니다. 그러면 이 시대에 있어서는, 주님이 오신다 할진대 우리는 세계적인 가나안 복귀를 완성하기 위한 책임자로 오시는 그 주님을 맞이해서 그 앞에 절대 복종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민족적으로 하나님께 ‘우리에게 명령해 주시옵소서.’ 할 수 있는 자리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앞으로, 오시는 주님을 만난 다음에는 무엇을 할 것입니까? 주님을 만나는 목적은 신랑 신부의 모습을 갖추어 하늘의 축복을 받기 위한 것입니다. 주님만 만나면 다 되는 줄 압니까? 천만에! 주님 만나고 나서는 신랑 신부 동반하여 ‘하나님이 에덴동산에 아담 해와를 지어 놓고 축복하지 못한 그 축복을 우리에게 해주시옵소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계적인 유업을 상속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끝날에 오시는 주님을 맞이해 가지고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오시는 주님을 맞아서 하나님을 붙잡아야 됩니다. 왜? 오시는 주님은 땅 때문에 오십니다. 본래 인간이 땅에서 살았기에 땅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고 가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가는 곳이 천국입니다. 인간이 땅에서 타락했으니 땅에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합니다. 땅에서 완전히 해결해 놓고 가야 천국을 이룰 수 있는데, 주님은 이걸 해결짓지 못한 채 영계에 가셨으니 다시 오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시는 주님은 땅에 오시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마 16 :19) 했습니다. 땅에서 잘못하여 매였으니 땅에서 완전히 풀기 위해 땅에 온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그런 주님을 모셔야 할 때가 되었거늘, 그 주님을 발판으로 하여 하나님을 붙잡아야 합니다. ‘하나님, 당신은 내 아버지입니다.’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반으로 해야만 하늘과 땅의 모든 유업을 상속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건 공론이 아닙니다. 사실입니다.
오늘 이 시대에 전세계의 기독교와 대결하고 있는 원수가 있나니 그것이 공산주의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이냐? 지금 때가 그렇거든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겠느뇨?
역사적인 아브라함, 역사적인 야곱, 역사적인 모세, 역사적인 예수를 상고해 봅시다. 물론 그들은 한 시대의 중심인물이었습니다. 그들은 무엇을 해야 했던고? 사탄으로부터 땅을 빼앗고 영계에서 사탄을 추방하여 ‘하늘과 땅이 아버지의 것입니다.’ 할 수 있어야 하늘의 뜻이 종결되는데, 아직까지 그 일이 해결 안 되었습니다. 그때가 되면 ‘아브라함아, 네가 자랑할 것이 무엇이뇨? 천지의 유업을 상속받을 수 있는 준비를 했는고?’ 하고 심판합니다. 끝날에는 영계에 간 아브라함이나 야곱, 모세, 전부 다 심판받아야 합니다. 책임을 못 했기 때문입니다. 축복받을 수 있는 기준, 이스라엘이 민족적인 기준에 있으면 그 심정적인 기준이 목표인 유업의 기준과 결부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끝날에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아브라함이나 천사를 판단할는지 모릅니다. 고린도전서 6장 3절에 그러한 권한이 있습니다. 유업을 상속받은 아들딸이라 할진대 이는 천상세계나 지상세계에 있어서의 승리자입니다. 그것을 위해 전부 접붙이는 것입니다. 뿌리에 곁가지가 돋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의 싹이 나와 새로운 나무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이 바로 끝날인 것을 알고 여러분들은 오늘 말씀의 제목과 같이 하나님의 유업을 상속받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새로 오는 때는 어떤 때냐? 아브라함 개인을 불러 세우던 때도 지나갔고, 야곱의 가정을 세워 축복하던 때도 지나갔고, 민족 대표로 모세를 불러 세워 축복하던 때도 지나갔고, 세계를 대신한 예수를 땅에 보내 축복하던 때도 지나갔습니다. 이제는 무슨 시대이뇨? 다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가 직접 나의 하나님이라고 불러야 할 때입니다. 아무리 하늘땅의 모든 축복을 다 받았다 해도 하나님이 부인하면 안 됩니다. 망합니다. 지금은 이런 때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으로 하나님을 붙들 수 있느뇨? 정성입니다. 지금은 신앙의 자유가 있으니 핍박이 없습니다. 순교를 할래도 못합니다. 지금 누가 이단적인 말을 한다고 해서 목을 매달아 죽입니까? 언론, 집회, 결사, 신앙의 자유를 향유할 수 있는 민주주의를 만들어 놓은 것은 끝날의 한 때를 위해서입니다. 신앙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것은 다 뜻이 있어서 그랬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시대에 있어서는 아무리 하늘을 위해 수고하고 목을 내놓고 충성해도 핍박받지 않습니다. 그런 때는 지나갔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가져야 하느냐? 심정을 가져야 합니다. 역사적인 하나님의 심정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시대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역사적인 하나님입니다. 역사노정에서 수많은 선지자들을 세워 애쓰시던 하나님입니다. 역사적인 하나님입니다. 여러분을 살려 놓기 위해서 역사노정에서 수많은 사람을 핍박의 길, 순교의 길을 걷게 하여 오늘날까지 나오셨습니다. 그러니 역사적인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과거의 선지자들은 몰랐습니다. 아브라함도 2천년 동안 역사하신 하나님의 역사적인 심정을 몰랐습니다. 야곱도 몰랐고 모세도 몰랐습니다. 어떻게 나왔는지 몰랐습니다. 역사적인 하나님을 몰랐습니다. 예수도 할말을 다 못한 채 갔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때에 무엇을 해야 될 것이뇨? 우리에게는 핍박시대도 지나갔고 순교할 때도 지나갔습니다. 역사적인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역사적인 하나님의 심정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보아 가지고는 모릅니다. 그러기에 끝날에는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밀실에 들어가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적인 심정을 알아야 되고 시대적인 심정을 알아야 되고 미래적인 심정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찌하여 6천년 동안 싸워 나왔으며, 현실은 왜 이렇게 되어 있으며,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세계에 널려 있는 기독교인들, 제2이스라엘은 제3이스라엘로 넘어가야 합니다. 오늘 여기 처음 나온 사람들, 이런 말 처음 들을 것입니다. 제3이스라엘 주권의 이념 동산을 향하여 넘어가야 됩니다. 거기에는 내 본연의 하나님이 계시고, 내 본연의 부모가 계시고, 내 본연의 처자가 있고, 또 거기에는 내 본연의 민족, 내 본연의 나라, 내 본연의 세계가 있습니다. 그곳은 내 본연의 하늘땅이라고 하면서 얼싸안고 춤출 수 있는 곳입니다. 여러분이 암만 잘났다 해도 본연의 하나님을 만나 보았습니까? 역사노정에 피땀을 흘리며 피투성이가 된 하나님은 만나 볼 수 있고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는 예수는 만나 볼 수 있으되, 천군천사가 옹위하는 호화찬란한 영광 중에 하늘땅을 주도하는 예수는 만나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제 끝날이 왔으니 이제 우리는 하늘이 어떤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냥 믿을 때는 지나갔습니다. 다 믿었단 말입니다. 2천년 아니 6천년 동안 믿어서도 해결하지 못했는데 언제까지 믿고 있느냐 말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믿은 기반 위에서 알아야 합니다. 무엇을 알아야 하느냐? 역사적인 하나님의 심정을 똑똑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과연 나를 어떻게 사랑하고 민족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역사적인 심정의 하나님은 서러웠습니다. 6천년 동안 서러웠습니다. 불신한 우리 선조들을 대하여 억울하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억울하고 서러우신 하나님을 위로해 드리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지금 세계에 널려 있는 제2이스라엘을 대하는 하나님의 심정은 서글픕니다. 그 아버지의 소맷자락을 붙들고 ‘아버지, 어찌하여 당신의 심정이 이렇게 딱하고 억울하옵니까?’ 할 때 그 손을 붙들고 ‘오냐, 내 아들아 내 딸아.’ 하실 수 있는 무리가 나와야 합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한 주님을 만나 반가워 붙들려고 할 때 예수는 거절했습니다. 주님을 찾아 밤새껏 헤매던 막달라 마리아 앞에 부활하신 주님은 나타나 ‘오냐, 내 딸아 얼마나 수고했느냐.’ 하며 칭찬하지 않고 막아 세우던 하늘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여러분들은 막달라 마리아 이상이 되어야 주님의 신부니 무엇이니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같은 환경, 지금 여러분이 갖고 있는 심정 가지고 신부가 되었댔자 사탄이 대번에 참소합니다.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오늘 이 세계에는 수많은 사람, 수많은 민족이 살고 있으되 진정 하나님을 위로하는 무리가 없습니다. 역사적인 하나님의 심정을 위로하기 위해 선조를 대신하여 회개하는 그러한 민족이 있다 할진 대 그 민족은 세계를 지배할 것입니다. ‘아버지! 당신은 아담가정에서부터 시작된 일로 해서 말할 수 없이 애달픈 심정과 안타까운 심정이 있었고, 노아를 거치고 아브라함을 거쳐 지금에 이르기까지 6천년 동안 말할 수 없이 애달픈 곡절의 심정을 가지셨습니다. 슬프옵니다. 역사의 아버지여, 우리의 선조들이 당신을 모시지 못한 것을 오늘의 나를 보시고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할 수 있는 최후의 역사적인 회개의 왕자가 나와야 됩니다.
예수는 30여 년 동안 이것을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그는 4천년의 역사적인 하나님의 유업을 상속받을 수 있는 심정의 본질을 갖추고 난 후에 메시아로서 등장한 것입니다. 안 그렇겠어요? 그렇지 않다면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할 수 없다고 봅니다.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인연의 동기로부터 시작해 인연의 과정과 인연의 목적까지 통해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맹목적이 아니란 말입니다. 원수의 자식도 ‘아, 내가 잘못했습니다.’ 하면 심정적으로 사랑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영원한 사랑의 주인이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상처입은 그 심정을 위로해 줄 수 있는 하나님의 왕자를 보내시기 위하여 4천년 동안 천신만고하여 민족을 세우고 그 위에 세계적인 유업의 상속자로서, 이스라엘 국가를 대신한 천적인 유업의 실체로서 이 땅 위에 보내셨는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민족은 그 실체를 배신하였습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4천년의 심정이 얽혀져 있고, 2천년 전 그 당시의 사정이 얽혀져 있고, 이거 잘하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잘못하면 이루어지지 못하는 미래의 현상까지도 얽혀 있는 것을 그들은 몰랐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역사상의 누구보다도 예수를 잘 모셔야 했습니다. 수많은 인간들이 있어도 그들을 다 제쳐 놓고 예수만이 제일이라며 모셔야 했습니다. 과거에도 제일이요, 현재에도 제일이요, 미래에도 제일인 예수를 모시지 못한 이스라엘 민족이었기 때문에 과거의 예수를 잃어버렸고, 현실의 예수도 잃어버렸으며, 미래의 예수도 잃어버렸습니다.
끝날에 있어서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것은 천적인 상속을 기필코 이어받겠다고 하는 민족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맹목적인 하나님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기도할 때 역사적인 하나님을 붙들고 기도해야 하고 역사적인 조상의 죄를 회개하며 내 눈물과 더불어 하나님의 눈물을 뿌려야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6천년 동안 뜻을 위해 살다 죽어갔다고 하지만, 그들은 역사적인 하나님의 심정을 알아 하나님의 눈물을 씻어 드리려는 심정에 사무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끝날인 이 시대에 우리들은 역사적인 하나님을 붙들고 기도할 때, 아담 가정으로부터 수천년을 지내오면서도 선조들이 몰랐던 하나님의 심정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당신은 이러이러한 곡절의 역사노정을 거쳐오셨습니다.’ 하며 슬픈 심정을 갖고 하나님의 친구가 되어서, 아들딸이 되어서, 종이 되어서 ‘당신의 마음이 이렇게 슬프니 저의 마음도 슬프옵니다.’라고 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눈물을 흘리고 역사적으로 피와 땀을 흘리신 하나님의 슬픔을 풀어 줄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딸, 하나의 주인공이 나와야 합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이 시대를 대신하여 ‘아버지! 이제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할 때, 하나님께서 ‘오냐, 네가 눈물 흘릴 때 나도 눈물 흘린다. 내가 이 자리를 떠날지언정 나는 네 것이다.’라고 하실 수 있는 아들이 나와야 합니다. 과거에 슬퍼하신 아버지, 눈물지으신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고 ‘이 시대를 대한 슬픈 심정을 풀지 못한 아버지의 한을 내가 책임지고, 이 시대를 내가 책임지고, 이 시대의 원수를 내가 책임지겠사오니, 아버지, 안심하시옵소서.’ 할 수 있는,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오냐, 땅도 네 땅이요, 하늘도 네 하늘이다. 하늘과 땅이 다 네 것이니 이것을 지은 나도 네 것이다.’라고 하실 수 있는 아들딸이 나와야 합니다. 영원무궁토록 축복할 수 있는,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할 수 있는 심정적인 기반을 그 자체에 있어서 완전히 종결지어 6천년 동안 하나님께 항의하던 사탄이 참소조건을 세울 수 없게 하여 민망함을 느끼게 하는 아들딸이 나타나야 세계는 거기서부터 수습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역사적인 심정을 붙들고 회개의 눈물을 흘릴 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여러분의 손을 붙잡고 위로해 주는 그 위로를 받고, 여러분이 시대적인 심정을 붙들고 눈물을 흘릴 때 하나님이 위로해 주는 그 위로를 받아야 됩니다. 하나님이 ‘네가 눈물지으매 나도 눈물짓고, 네가 웃으매 나도 웃고, 네가 억울함을 당하매 나도 억울함을 당한다.’고 하실 수 있는 일체적인 감정으로 뒤넘이칠 수 있는, 하늘이자 땅이요, 땅이자 하늘이 될 수 있는 승리적인 기준을 갖추어 가지고 하나님이 ‘나는 네 아버지요 너는 내 아들이다.’라고 하실 수 있는 축복의 기준이 이 땅 위에 벌어져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들이 넘어야 할 고비입니다. 그렇게 될 때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과거에 개인적인 유업 상속의 대상으로 세웠던 아브라함 대신 행동을 문제없이 해야 되고, 야곱 대신 행동도 문제없이 해야 되고, 모세 대신 행동도 문제없이 해야 되고, 예수 대신 행동도 문제없이 해야 됩니다. 당장 생명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해야 됩니다. 여러분이 전부 다 그래야 된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오시는 주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실 것인고? 무지몽매한 이 땅의 사람들에게 역사적인 하나님의 심정을 가르쳐 줄 것입니다. 시대적인 하나님의 심정을 가르쳐 줄 것이며 미래적인 하나님의 심정을 가르쳐 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6천년의 슬픔을 일시에 체득하여 오시는 주님을 붙들고 눈물지으면 그것으로써 하늘을 대해 눈물 흘렸다는 기준으로 탕감복귀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이러한 내용을 몰랐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마음의 준비를 해야 됩니다. 과거의 우리 선조들은 개인적으로 혹은 가정적으로 민족적으로 무한히 배반하고 예수까지 죽여 버렸지만, 우리만은 오시는 주님 앞에 배반의 종족이 되지 않겠다고 단단히 각오를 해야 합니다. 우리만은 역사적인 배반자가 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 지금은 어떤 때입니까? 세계적인 때입니다. 가정보다도 나를 더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사회보다 가정을 더 사랑해서는 안 되고, 국가보다 사회를 더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세계보다 자기 나라를 더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은 세계주의시대로 넘어가는 때입니다. 경제전쟁시대를 지나 주의전쟁시대입니다. 물질을 빼앗기 위해 싸우는 시대를 지나 지금은 주의전쟁시대, 즉 사람을 빼앗기 위해 싸우는 시대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물질을 뺏기 위해, 땅덩어리를 빼앗기 위해 싸우다가 이제는 사람을 빼앗기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 그 다음엔 하나님을 빼앗기 위한 싸움이 벌어질 것입니다. 이제는 종교 투쟁시대로 들어갑니다. 이 종교의 투쟁시기는 혼란의 시기입니다. 영적인 현상이 부딪쳐 들어옵니다. 맞부딪쳐 들어옵니다. 아무리 잘났다 하는 사람도 수습할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사탄이 들어오는 것을 막으려고 예수의 이름으로 아무리 쫓아도 안 갑니다. 사탄이 도망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로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주권시대, 세계적인 이념권 내에 있을 때에는 도망갔지만, 하늘과 땅이 통합되는 천주적인 시대로 넘어가면 안 됩니다. 이제는 그런 시대로 넘어갑니다.
그런 시대로 넘어가는 이때에 있는 여러분들은 눈물을 지어야 합니다. 피와 땀을 흘려야 됩니다. 나보다도 이 민족을 위하여, 나보다도 이 세계를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들은 기도할 때 땅만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 땅만을 위해 기도할 것이 아니라 영계에 있는 영인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천상세계에 가 있는 영인들은 허락은 받았으나 축복은 받지 못하였기에 땅에 있는 우리가 아니면 그들은 축복을 받지 못합니다. 저나라 영계에 가 있는 영인들, 불쌍합니다. 땅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 있어서는 땅도 우리의 것이요, 하늘도 우리의 것인 동시에 땅의 모든 인류와 천상에 가 있는 천천만 성도가 모두 우리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오시는 주님은 하늘과 땅을 품을 수 있는 집이요, 하나님까지 품을 수 있는 집입니다.
하늘과 땅을 품은 기준을 가지고 모든 것을 완결지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자신을 한번 보십시오. 여러분은 하나님을 압니까? 모릅니다. 하나님이 찾아 세우려 했던 인류의 참조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인류의 참조상이 없었으니 참가정이 없고, 참가정이 없으니 참형제가 없고, 참형제가 없으니 참종족과 참민족과 참국가와 참주권의 세계가 없습니다. 있어요?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타락의 종족들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몰랐습니다. 참가정, 참사회, 참국가, 참주권이 어떻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될 것이뇨? 우리는 이제 인간이 타락한 이후 6천년 동안 수없이 눈물지어 나오시며 사탄과 싸우는 하나님 말고 영광의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2천년 동안 싸워온 예수와 성신 말고 영광의 예수와 성신을 알아야 됩니다. 싸우는 천상세계의 천천만 성도 말고 영광 가운데 살고 영광을 누리는 천천만 성도들을 알아야 합 니다. 땅 위에 있어서 핍박받고 고통받는 성도들 말고 영광 가운데 있는 성도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성도들을 보았습니까? 못 보았을 겁니다. 아브라함도 야곱도, 모세도, 예수도 영광의 하나님을 소개하기 위해 왔다가 죽어갔습니다. 영광의 참부모를 소개하고 영광의 참아들딸을 소개하고 영광의 참백성과 참천민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여러분, 그런 사람이 될 자신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들을 보았습니까? 모셔 봤습니까?
천적인 유업을 이 땅의 여러분에게 주나니, 하늘과 땅과 하나님을 주는 동시에 잃어버렸던 참부모를 주겠다는 것입니다. 잃어버렸던 하나님을 찾아, 잃어버렸던 하늘을 찾아, 잃어버렸던 땅을 찾아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이냐? 하나님이 축복할 수 있는 잃어버렸던 참부모를 주겠다는 것입니다. 참부모를 주어 가지고는 무얼 할 것이뇨? 참형제를 주겠다는 것입니다. 참형제를 주어서 참종족을, 참종족을 주어서 참민족을, 참민족을 주어서 참국가를, 참국가를 주어서 참세계를, 참세계를 주어서 참하늘땅을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걸 알아요? 땅 위에 남아질 하나의 유업이 있나니 땅을 받는 것도 좋고 하늘을 받는 것도 좋지만, 심정적인 인연을 거쳐 가지고 직계의 인연을 통할 수 있는, 내 집을 기반으로 하여 세계를 품고 사랑할 수 있는 그런 나라의 백성이 되어야 됩니다. 지금 그래요?
하나님의 유업을 상속받기 위해 최후에 넘어야 할 조건은 무엇이뇨? 하나님을 갖고, 참부모를 갖고, 참형제를 갖고, 참백성 참나라 참세계를 가져야 합니다. 온 인류가 내 형제요, 너와 나는 영원불변이라고 할 수 있는, 나눠질 수 없는 형제의 심정을 통하여 천적인 가정의 식구로 살 줄 아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 땅은 우리의 것, 하늘은 우리의 것, 아버지는 우리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참다운 가정을 중심삼고 이 땅 위에 참다운 나라를 이룰 수 있는, 하늘의 유업을 상속받을 수 있는 여러분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이스라엘 민족을 찾아 세우기 위해서 천상세계의 천사들이 와서 일했습니다. 종이 와서 일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아들이 와서 일했습니다. 이제는 아버지가 옵니다. 여러분, 오시는 주님은 아버지로 오십니다. 참부모로 오셔서 참자녀를 거느리고 사랑할 것이거늘, 그때에는 어떻게 될 것이뇨? 여러분 한 사람을 붙들고 밤을 지새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한 사람을 타락한 세계의 인류보다 더 사랑하시고, 모세 한 사람을 온 인류보다 더 사랑하시고, 예수 한 사람을 온 인류보다 더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들딸 한 사람이 얼마나 귀한가를 알아야 되겠습니다.
밤 예배에 주력하기 바랍니다. 지방에 나간 전도사를 생각해 보세요. 반드시 전도를 해 가지고 오도록 해야 합니다.
신앙문제는 곧 영생문제입니다.
밤에 잠자리에 들어갈 때 벗어 놓은 신발을 다음날 아침에 다시 신을 자신이 있습니까?
아무리 바쁘다고 하여도 영생문제 이상 중요한 것이 세상에 없습니다.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이 세상에서 영생문제를 결정짓는다는 심각한 느낌이 그들에게 없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은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때가 없습니다.
천상에 가서 수많은 민족들이 환영할 때에, 그 민족과 심정적인 인연을 맺지 못하고 갔다면 그들을 대할 면목이 없게 됩니다.
선생님이 알고 있는 것은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정도의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자식을 낳게 될 처지가 되면 잘난 자식을 낳고 싶을 것입니다. 선생님도 같습니다. 병신자식들을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거지같은 자식들을 만들고 싶지 않아요.
거리의 거지나 병신들을 흉보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의 영인체(靈人體)가 그 모양이 아닌가 생각해보세요.
갖고 있는 것으로 남에게 무엇을 나누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아직 젊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살다가 간 것입니다.
있는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최고로 긴장된 생활을 하십시오. 일 분 일 초도 긴장을 풀어서는 안 됩니다.
모이기를 힘쓰고 움직여야 합니다.
사탄이 얼마나 능(能)합니까. 6천년 동안 훈련된 사탄과 대결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놀며 사탄과 대결할 수 있겠어요? 때려서라도 만들어야겠습니다. 선생님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선생님은 이제 죽어도 갈 곳에 갈 수 있습니다. 또 여러분이 아니라도 뜻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래도 욕을 하고 고생을 시키는 것은 그렇게 해서라도 하늘 앞에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밤 예배에는 전도를 해 가지고 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본부의 위신이 안 섭니다. 학생이면 학생, 어른이면 어른, 본부 사람들도 사실은 다 나가 전도해야 합니다. 집안이 어떻고, 내가 어떻고 하는 그것은 개인의 사정이지 하늘의 사정은 아닙니다. 얼굴을 못 드는 심정이어야 합니다.
조장과 반장은 이름이 좋아 조장, 반장이 아닙니다. 책임을 해야 합니다.
복귀는 근본복귀입니다.
남자나 여자나 아직 나지 아니한 존재로서, 어머니 뱃속에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기쁘면 같이 기뻐하고, 슬프면 같이 슬퍼해야 합니다.
본부에 있고 싶은 생각 하나도 없습니다.
설교하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선생님이 할 책임은 했어요. 이젠 각자의 책임만이 남았습니다.
정신이 펄쩍 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나는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몰라도 죽어보면 알 것입니다.
예배 시간엔 선생님보다 먼저 와 있어야 합니다.
어떤 길을 떠나도 오나가나 선생님보다 먼저 나서야 합니다.
이제부터는 전도를 나가서 자기의 신앙의 아들딸들을 삼아야 할 때입니다.
남은 나가 전도하는데 집에서 잠만 자서는 안됩니다. 40대 이상은 더욱 바빠야 합니다. 때가 없습니다.
또 부인, 아주머니들이 더욱 힘써야 합니다. 여자가 죄가 많습니다.
다음 주일부터 본부에 있지 않고 지방에 나가려고 합니다.
연대적인 책임을 지고 움직여야겠습니다.
구덩이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가만 두겠습니까? 좇아가서 다리를 부러뜨려서라도 살릴 수만 있으면 살려야 합니다. 선생님은 여러분과 같이 노라리 가락으로 일하지 않습니다. 생명 내놓고 일합니다.
여러분은 쉬고 있어도 선생님은 자꾸 갑니다. 이젠 내려갑니다. 돌아갑니다.
조금 어두워지면, 힘이 빠지면 가긴 가야겠는데 갈 수가 없습니다. 그만입니다. 새로 들어온 사람은 빠릅니다.
언제나 여러분 개인을 위해 줄 수 없습니다. 아버지와 온 인류를 위해서 일하고 있습니다. 목적지가 여기가 아닙니다. 지금도 자꾸 가는 도중입니다.
쓴 말을 해서라도 할 일을 하도록 해야겠습니다.
여러분은 아직 발정(發程)에 있어서 신발도 안 신은 격입니다.
이 때는 마지막인 동시에 처음인지 모릅니다. 취직이 문제가 아닙니다. 전도 나가야 합니다. 정 사정이 있으면 직장에서 전도해야 합니다.
선생님을 알았다고 하지 마십시오. 선생님은 원리밖에 모릅니다. 원리원칙밖에 몰라요. 그것을 통해서 압니다.
전도해야 합니다. 전도해서 신앙의 아들딸을 만들어야 합니다. 최소한 셋은 해야 합니다. 최대의 정성을 기울여야 합니다.
먹다 남은 것 가지고는 안 됩니다.
하늘은 6천년 걸려 한 아들 찾았습니다. 여러분은 6개월이면 다 찾아 세울 수 있는 혜택권 내에 있습니다.
지금은 선생님과 심정적으로 하나되어야 합니다. 부모의 심정과 하나되어야 합니다.
해산(解産)시기입니다.
더욱이 금년에 전도하는 것이 얼마나 귀합니까? 이 해가 가기 전에 전도해야 합니다. 원래는 명년에는 2세가, 내후년에는 3세가 나가 전도해야 합니다.
선생님은 원리밖에 모릅니다. 원리원칙에 입각한 사람만을 압니다.
전도하기 위해 밤을 새워 봤습니까? 선생님은 밤도 많이 새워 봤습니다. 저 나라에서 물어볼 것입니다. 전도하기 위해서 몇 밤이나 새워 봤느냐고. 더구나 이 3년간은 모든 힘을 다 바쳐 전도해야 하는 기간입니다.
선과 악에 대한 분별의 의욕 없이 선의 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나의 생활 하나 하나를 들어 그것이 선의 동기에서 출발했고, 선을 향하여 동하고 있는가를 판단해야 합니다.
그 선의 동기는 자아가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선의 의식 없이 악에 대한 공분(公憤)의 심정이 나오지 않습니다.
책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