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인류는 타락의 역사를 엮어 온 줄 알고 있습니다. 또한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생활권도 타락의 생활권이기에 우리는 타락의 생애노정을 거쳐가야 하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현재 여러분들이 처해 있는 입장을 두고 볼 때, 여러분이 삼십, 혹은 사십대의 연령층에 있다 하면, 여러분들은 그 연령이 되기까지에는 타락의 생의 과정을 거쳐온 것입니다. 그리고 현재 그런 입장에 처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자신의 생애노정을 바라보고 싸워 나가야 할 미래가 있는 것입니다. 과거도 그랬고, 처해 있는 현재도 마찬가지이고 미래도 역시 마찬가지의 운명에 귀결되어야 할 입장에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서 우리가 타락의 권을 어떻게 해결짓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거에도 이 타락권내에서 탈피해 보려고 하였고, 현재도 그러고 있지만 우리는 아직도 타락권에 포위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미래에 이 포위망을 어떻게 뚫을 것이냐, 미래에 이 포위권을 어떻게 해소시킬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 문제는 우리 자신들이 해결하지 못하면 우리의 후손들을 통해서라도 반드시 해결지어야 할 문제인 것입니다.
인류역사는 타락권내에서 시작하여 타락 과정을 거쳐온 역사, 타락의 결과의 세계를 다짐지어 온 역사임을 우리는 어느 누구보다도 잘 알고있습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우리 한 개인을 놓고 생각할 때, 한 개인이 수많은 경쟁자를 물리치고 어떤 목적을 성취하고 승리하더라도 그 환경을 넘어서 승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지 않으면 그 환경에서 보장을 받았다 하더라도, 그 승리의 권한이라는 것은 일시적인 권한밖에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승리했다 하더라도 그 승리는 개인에 제한된 승리로, 혹은 일시적인 승리로는 남아질는지 모르지만, 전체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개인의 승리를 가정의 승리로 대응시킬 수 없는 것이요, 가정의 승리를 민족이라든가 국가를 대표한 승리권까지 확대시킬 수는 없는 것입니다. 또, 국가가 어떠한 국가들과 싸워 승리했다 하더라도, 그 승리의 권은 자기 일국의 승리권으로서 남아질 수 있을지언정 세계적인, 혹은 전체의 승리의 기준으로는 남아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게 될 때, 오늘날 이 시대에 세계는 국가를 넘어서 주의 사상을 중심삼고 공산주의니 민주주의니 하고 서로 대치하는 입장에 있는데, 그들이 싸워 가지고 어느 한 쪽이 자기들이 바라던 바대로 승리를 했다고 할 때, 그 승리가 과연 세계적인 승리로 남아질 수 있겠느냐, 혹은 세계적인 가치의 내용으로서 전인류가 승리의 영광을 찬양할 수 있는 기준에 설 수 있겠느냐?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공산주의면 공산주의가 세계를 제패하게 되더라도 그 세계에서 추구되어지는 그 승리권에는 일면을 타도하지 않으면 안되는 분야가 언제까지나 남아 있을 것입니다. 또, 민주세계면 민주세계에서 그 승리의 권한을 차지했다고 하더라도 그와 반대되는 세계의 잔재가 남아 있는 한 민주세계를 중심삼고 그 세계를 제거하고 타도하기 위한 정지작업(整地作業)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승리라는 기준을 중심삼고 볼 때, 그 승리의 결과가 얻어지는 데는, 어떠한 직접적인 입장에서 정면으로 투쟁하는 과정을 거칠는지 거치지 않을는지는 모르지만, 반드시 거기에는 그것을 소화시키는 투쟁 과정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그것을 어떠한 기준에서 소화시켰다 하더라도 소화시킨 그것이 영원한 승리권이 될 수 있겠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그것 또한 새로운 어떠한 이론과 새로운 어떠한 실천생활을 추구하는 데 있어서 반드시 전세계 인류 앞에 부합되지 않는 지경에 부딪칠 것입니다.
이렇게 보게 될 때 지금까지 인류가 추구해 온 사상체제 앞에 전체 인간들이 동원되어 가지고 승리의 결과를 가져 왔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과연 길이길이 찬양될 수 있고, 인간 세상 앞에 영원히 남아질 수 있는 승리적 가치권으로 조성된 것이라고 단정지을 수 있겠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그것은 타락권내에서는 있을 수 없다는 결론이 자동적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오늘날 인간들은 개인으로부터, 가정으로부터, 종족, 민족, 국가, 세계에 이르기까지 전부가 자기 자신이 살아 나가기 위해서 투쟁과정을 거치고 있습니다. 무엇인지 모르게 경쟁과정을 거쳐 나갑니다. 그런데 그 경쟁과정을 거쳐 가지고 자기가 소원하는 기준을 성사시켰다 하더라도, 그 성사시킨 기준을 중심삼고 기뻐하는 그 기쁨은 어느 한계점에서의 기쁨 밖에 되지 못합니다. 그 승리의 가치는 영원을 두고 보장할 수 있고, 전체가 입증할 수 있는 그러한 승리의 내용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기준이 자기에게 제한된 일시적인 영광의 기준은 될지 모르지만 역사성을 초월하여 전체의 영광의 기준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여러분이 생활 가운데서 많이 보고 느끼고 있는 바입니다.
어떤 사람이 공부를 하는 데 있어서, 자기가 표준한 것을 중심삼고 그 목적을 성사했다고 했을 때, 자기가 기뻐할 수 있는 그 목적 성사의 가치를 전체의 분야에 적응시킬 수 있고, 또 그것을 하나의 요인으로 삼아 활용할 수 있겠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그것이 극히 제한된 한계 권내에 속한다는 것은 불가피한 사실이라고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의 욕망은 제한된 어느 한계권내의 승리의 가치만을 추구하지 않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나의 기점을 중심삼아 가지고 생각해 볼 때, 동기가 되고 전체와 내적인 인연을 맺고 있다 할 때, 그 동기나 혹은 전체와 인연맺은 그 관계가 제한된 한계권내에서의 동기나 관계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또 하나의 어떠한 승리의 내용을 결정지었으면, 그것이 전체에 활용될 수 있는 모체로 작용하여 그 결과가 전체에 미쳐져 가지고 전체의 승리의 가치로 결실되기를 원하는 것이 우리 인간의 욕망인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 개체가 어떠한 성공을 하거나 혹은 어떠한 목적성사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제한된 환경내에서의 결과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가 현실사회에서 보게 됩니다. 그것 가지고는 우리 인간은 완전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승리를 했다 하더라도 그 승리의 터전 위에서 보다 더 큰 승리를 다짐하는 것입니다. 그 승리에서 보다 더 큰 승리를 다짐하여 기필코 세계적인 무대에까지 연결시켜 나가고자 하는 것이 우리 인간의 욕망입니다. 지금까지 인간들은 그러한 욕망을 중심삼고 추구하고 노력해 나왔기 때문에, 세계적 종말시대가 나타나야 된다는 것은 우리의 욕망을 중심삼고 볼 때 필연적인 귀결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세계적인 종말시대에 자기가 바라는 목적 성사의 어떤 기준을 가졌다 할 때, 그리고 그 기준보다 더 큰 가치를 지닌 것이 있다고할 때 그것에서 자기의 승리의 기준이 이탈되기를 원치 않는 것입니다. 최후의 승리의 기반을 중심삼고, 영원을 중심삼고, 보다 큰 내적인 인연을 중심삼고, 일시적이 아닌 영원한 관계를 맺어 승리를 다짐한 자기의 기준이 언제까지나 남아지기를 바라는 것이 우리 인간의 욕망인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볼 때 과연 그럴 수 있는 기준이 있겠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오늘날의 철학이면 철학을 두고 볼 때, 그것은 하나의 이론을 중심삼고 실천을 요하는 학문인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실천을 해야 되는데, 그 실천의 한계점이 어디냐? 그것은 세계입니다. 그러나 세계에서 실천을 다 했다면 그것으로 끝날 것이냐? 그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에 새로운 이론 체제를 중심삼고 새로운 것을 모색하고 추구하는 놀음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 닦아진 승리의 터전이라는 것은 영원히 보장받을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볼 때, 과연 인간들이 추구하는 이상세계, 인간들이 추구하는 영원한 세계, 인간들이 추구하는 행복의 세계가 과연 있을 것이냐 없을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오늘날 이 세계가 타락권내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될 때, 그것을 인정하면 인정할수록 이 타락권에는 어떠한 고착된 승리의 터전으로서 장구한 전통의 내용을 흡수할 수 있는 길이 없는 것으로 우리는 결론지을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승리했다고 해서 그것을 전체화시킬 수 없습니다. 어떤 특정한 내용이 없어 가지고는 전체화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인간들이 찾아 나가는 이상세계라고 하는 것은 타락한 세계에서는 결코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개개인의 승리라고 하는 것은 부분적인 승리로 끝나기 쉬운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전체화시킬 수 없게 될 때는, 즉 전체의 승리로 보장받을 수 있는 내용이 없게 될 때는 그것은 어느땐가는 지나가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또 사람들이 필요로 하지 않는 결과에 부딪치기 때문에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승리가 개체면 개체의 승리로부터, 가정의 승리, 종족의 승리, 민족의 승리, 국가의 승리에 이르기까지 전체의 승리의 요인이 되고, 한 모체가 되고, 하나의 필요요건이 될 수 있는 내용이 결여되게 될때는 그 승리는 분립적인 결과로서 언젠가는 사라져 버리고 만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타락세계에 있어서 타락시켜서는 안 된다고 하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 하나님은 이 세계에 무엇을 가지고 찾아오실 것이냐? 장구한 승리의 터전을 남길 수 있는 그 요인으로 무엇을 가지고 찾아오실 것이냐? 우리 인간적인 견해에서 세계의 모든 존재물을 보면, 이 세계에는 물질이 있고, 그 다음에는 사람이 있고, 그 다음에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면 사람을 중심삼고 사람이 좋아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냐 할 때에 물질이 있을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남자와 여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 가운데에는 마음이 있고 몸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마음과 몸을 중심삼고 볼 때, 마음과 몸이 언제나 싸우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타락권에 있어서 우리 인간 개체를 중심삼고 볼 때 제일 문제되는 것이 무엇이냐? 우리는 생활의 장(場)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생활해 나가기 위해서는 물질적인 요건이 필요합니다. 또한 우리가 생활하는 데는 의식주와 같은 것도 문제이지만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는 반드시 정서적인 생활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상대가 있는 것입니다. 남자가 있으면 여자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남자와 여자는 타락한 남자와 여자입니다. 그리고 남자와 여자가 살아가고 있는 생활권도 역시 타락권내에 있는 생활권입니다. 그러면 타락하지 않은 남자와 여자, 타락권내에 있지 않은 물질은 어떤 것이냐? 이러한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 인간이 타락하지 않은 인간이고, 우리가 타락권내에 있지 않은 물질을 가졌다 할진대는 우리 인간의 생활의 장과 관계되는 그 물질은, 그것이 소용되고 소모되는 데 있어서 탄식과 한의 입장에서 소용 되고 소모되는 것이 아닙니다. 보다 가치적인 내용을 찾기 위한 투입이 되고 소모는 될는지 모르지만, 자체를 희생시키는 소모는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게 될 때에, 과연 타락하지 않은 세계의 물질과 타락 하지 않은 세계의 사람은 어떠한 입장일 것이냐? 타락하지 않은 세계의 사람이 어떤 승리를 다짐했다면, 그 승리는 일시적인 승리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 승리는 반드시 물질세계와 더불어 보다 높은 차원의 인연을 계승시킬 수 있는 요인으로서 흡수되어야 하기 때문에 거기에 상충이 벌어져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물질이라든가 사람이 되어야 될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만일에 그것이 가능하지 않다고 하게 되면, 인간이 추구하는 이상세계라는 것은,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이상세계는 있을는지 모르지만, 그것이 실천된 이상세계는 현현되지 않는다, 이렇게 생각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 있어서 패(敗)의 요인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타락권내의 내용, 그 내연을 지닐 것이 패의 요인이 될 것입니다. 반면에 승(勝)의 요인은 무엇일 것이냐? 그것은 타락권과 관계되지 않는 것일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게 될 때, 참다운 승리를 다짐할 수 있는 그 요인은 어디에 있을 것이냐? 타락권내에 있을 것이냐, 타락하지 않은 권내에 있을 것이냐? 오늘날 이 세계는 이미 타락한 권(圈)이기 때문에 아무리 승리했다 하더라도 온전한 승리의 권한으로 보장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벼랑에서 떨어져 가지고 서로가 좋아하고, 벼랑에서 떨어져 가지고 서로가 주고받는 것은 물론 동정할 수 있는 사연은 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러한 자리에서 아무리 좋다 하더라도 벼랑에 떨어지지 않았을 때의 좋은 입장과는 상관할 수 없는 것이며, 관계를 맺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패의 요인은 어디서 찾을 것이냐? 패의 요인은 타락한 세상 가운데 꽉 차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승리의 요인을 타락한 세상에서 찾을 수 있겠느냐? 그것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타락하지 않은 자리에서 찾아야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통일교회 원리를 중심삼고 보게 되면, 하나님이 있어 가지고 사람을 지었고 만물을 지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정상적인 궤도를 따르지 않는 데서는 정상적인 승리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이 사람을 지었고, 그 사람을 중심으로 만물과 인연이 맺어져 있다면, 하나님이 제일 중심인 핵심이 되고, 그 다음 중간 위치가 사람이며, 맨 바깥이 만물이 됩니다. 그러므로 승리의 요인이라는 것은 사람만으로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어야 하느냐? 그것은 기필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되었느냐? 인간이 어떠한 방향을 따라, 어떠한 내용을 세워서, 어떠한 발판을 거쳐 가지고 승리의 길을 개척할 것이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에, 만일 하나님이 계시다면 하나님과 제일 가깝고, 제일 든든하고, 제일 강하게 묶어질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 길밖에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 길이 먼저 결정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냐? 하나님의 일을 중심삼고 우리가 생활권에서 연결되는 것이냐? 그것은 외적인 연결은 될지 모르지만 내적인 연결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 내적인 연결의 기준이 무엇이냐?
어떠한 것을 놓고 사람이 그것을 붙들거나 하나님이 그걸 붙들면, 그것을 하나의 표준, 하나의 잼대로 삼아 거기에서 하나가 되어 가지고 그것이 둘, 셋, 넷, 사방으로 방향성을 갖춰 나갈 수 있고 수와 양도 가릴 수있는 핵의 기준이 무엇일 것이냐?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에, 우리 인생에 있어서 제일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행복을 추구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행복의 요인은 무엇이냐? 그것은 돈도 아닙니다. 혹은 상대될 수 있는 어떠한 외적인 것도 아닙니다. 반드시 심정적 내연을 갖춘 것만이 행복의 요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게 될때, 하나님과 우리 인간과 내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 그 무엇, 제일 근본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것은 정서적 문제입니다.
정서적 문제로 귀결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서적인 문제도 상대적 여건에 따라 그 기준이 달라집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나라를 찾기 위한 입장에서 나라를 대표하여 충신이 될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있느냐, 아니면 가정적인 입장에서 가정의 충신이 될 수 있는 그런 효자를 찾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에, 물론 효자도 충신이 될 수 있겠지만 그 자체만으로는 하나님과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중심삼고 볼때, 그것은 상하관계는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상대적 관계는 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하관계도 되고, 상대적 관계도 될 수 있는 그런 것을 요구할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관계를 두고 볼 때, 상하관계는 무엇이냐? 하나님은 아버지이고, 우리 인간은 아들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상이면 인간은 아들이니까 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상하관계만 갖고 될 것이냐? 상하관계는 하나의 중심점은 결할 수 있지만 좌우관계는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아들은 아들만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아버지의 아들만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 아버지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인간을 상하적 관계도 되고 상대적 관계의 자리에까지 세울 수 있는 그것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하나님은 '상대적 세계'를 창조하지 않을 수 없는 내적 인연이 있었다고 보는 거예요. 하나님은 상하적 관계뿐만 아니라, 상대적 관계까지 추구하시기 때문에 '상대적 세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자는 아들이라면 그 아들의 입장만 가지고는 안되고 여기에는 반드시 횡적인 상대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아들은 아들로서의 자식만이 아니라, 딸로서의 자식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입장에 세워야 된다는 것을 생각해 보게 될 때,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아들만으로 창조한 것이 아니라, 횡적인 관계에 있어서 당신과 뗄래야 뗄 수 없는 상대적 관계로서 인연맺게 한 것입니다. 그것도 분립된 개체가 아니라 일체화한 개체로서 결속시키고 대표적인 자리에 세우고자 한 것이 남성입니다.
그 남성은 하나님의 아들도 되는 것이요, 하나님의 몸도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아들이 있으면 그 아들을 중심삼은 상대가 있어야 됩니다. 남자가 있으면 여자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을 종적 사랑과 횡적 사랑으로 발전시키기 위하여 자기 사랑을 중심삼고 횡적 터전의 상대로 만든 것이 남자에게는 여자요. 여자에게는 남자입니다.
이렇게 보게 될 때, 그러면 먼저 나오는 것이 무엇이냐? 상대가 먼저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냐? 아들이요 딸입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아담 해와가 창조함을 받은 그때는 상대 시대가 아니라, 자녀의 시대입니다.
그러면 자녀의 시대 가운데서도 최고봉의 요인이 될 수 있는 사랑의 결착점이요, 종착 기준이 될 수 있는 그 자리는 어떤 자리이냐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 자리는 완전한 종적 기준이 결정지어진 후에 횡적 기준의 출발이 이루어져야 하는 자리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 삼고 소원하던 그 창조적 원리 기준을 오늘날 인간 자체에서 확정지을 것이 아닙니까?
그 기준의 때는 어떤 때냐? 아들로서 완성할 수 있는 그때가 언제냐? 사춘기 시대입니다. 사춘기 시대는 일반적인 감정을 표준하여 가지고 바라는 때가 아닙니다. 남자나 여자나 할 것 없이 전부 다 사춘기가 되면 자기 마음의 상대를 그럴 수 있는 세계로 접어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춘기 시대는 봄절기와 마찬가지로 사방으로 전체의 분야와 인연을 맺기 위해서 그 마음이 세계화되는 때입니다. 그때에는 시인이 아닌 사람이 없고, 문인 아닌 사람이 없습니다. 또한 사랑을 중심삼고 최고의 중심으로서 서지 않기를 원하는 존재가 없는 것입니다. 무엇을 보든지 자기가 제일인 시대입니다.
마라톤 시합에서 일등한 사람이 있으면 그 일등이 그 사람의 것으로 남겨질지는 몰라도 자신을 빼놓고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전부 자기를 중심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세계적인 중심으로 세우고 싶은 마음이 어느때보다도 강하게 사방성으로 드는 때가 사춘기 시대입니다.
이 사춘기 시대는 그 무엇을 중심삼고 전부 다 바라는 욕망권을 갖고 있는 때이지만, 정서적인 분야에 있어서는 상대적인 요인을 절대시하는 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의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면 자기 전체의 생명을 기울여 가지고…. (녹음 잠시 중단됨 )
역사를 초월해 가지고 뻗어 나갈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얼마나 멋지겠습니까?(녹음 잠시 중단됨 )
이와 같이 몇천 분의, 몇만 분의, 혹은 몇억 만 분의 일, 그 선에서 일체가 되는 그 기준에 딱 들어맞는 남자와 여자가 있으면 하나님도 그들을 보고 폭발적인 기쁨을 느끼실 것입니다. 타락하지 않은 아담 해와에게서 태어나게 되는 그 아들딸은 하나님이 볼 때는 손자 손녀도 되지만 아들딸도 되는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하나님을 중심삼고 보면, 하나님, 그 다음에 아담이 있습니다. 그 아담의 마음이 하나님을 싸고 있는데 이것을 생심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생심이 무엇이냐 하면, 종적 주체가 되시는 하나님은 횡적인 아담의 마음 가운데 임재하시는데 바로 하나님을 모시는 마음입니다. 그것을 생심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이라구요?(판서하심) 이 점은 하나입니다. 둘이 있을 수없습니다. 둘이 있으면…. 우주의 중심이 없는 데서는 존재가 확정이 안됩니다. 대상 세계에 있어서 중심이 없는 데는 존재가 확정되지 않는다 구요. 창조가 되더라도 그것은 반드시 소모되어 깨져 나가게 마련입니다. 창조가 한번 되면, 빨리 되면 될수록 그것은 더욱 빨리 깨진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중심은 둘이 있을 수 없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이 우주를 보게 되면 이 우주에는 하나님과 사람과 만물이 있습니다. 그걸 횡적으로 보게 되면 하나님, 사람, 만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형이 우리 인간의 몸에서도 마찬가지 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 인간을 중심삼고 보면, 만물보다 한 차원 높기 때문에 횡적으로 보게 되면 하나님, 사람, 만물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한 개인을 놓고 보면, 하나님 자리가 우리 중심의 자리요, 인간 세계를 대표한 자리가 마음 자리요, 그 다음에 만물 세계를 대표한 자리가 몸 자리입니다. 그렇게 축소 되는 것입니다.
그럼 무엇이 있을 것이 아니냐. 그 기준이 무엇이냐? 그것은 심정입니다. 사랑입니다. 그 기준이 연결되었을 때는 어떻게 될 것이냐? 슬픔이 출발될 수 있겠느냐? 아닙니다. 기쁨만이 출발될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그렇잖아요? 일이 잘되어 가면 좋아하거든요. 마찬가지라구요.
여러분도 말을 할 때는 생각을 해서 하지요? 말을 하기 위해서 생각을 하는데 생각 가운데 생각이 있다, 이렇게 되는 거라구요. 생각 가운데 생각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생각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이 관리할 수 있는 생각이 아닙니다. 생각 가운데의 생각인데 그 차원이 높은 생각은 마음을 지배할 수 있는 생각으로 임하여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영적인 체험을 통해서 신령한 권내에 들어가게 되면 마음을 보고 이야기를 합니다. 뭐 있다구요. 마음을 보고 속에서 이야기를 한다구요. 마음을 보고 이야기하는 것이 있고, 마음이 몸을 보고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영적인 체험을 해보면 그렇지 않아요? 대개 영적인 역사가 일어나게 되면 자기도 알지 못하는 말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조금 더 발전하게 되면 가만히 앉아서 마음속에서 말하는 것을 듣게 됩니다. 한번 해보라구요.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대개 이런 원칙을 모르는 사람은…. 최수운(최제우) 같은 사람은 인내천주의(人乃天主義)를 중심삼고 '하나님이 어디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곧 하나님이다'고 했습니다. 그거 맞다는 거예요. 단지 그것을 분간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종적인 인연을 따라서 핵을 결정지어야 비로소 하나님도 여기에 따라오는데, 하나님이 따라오시는 그 거점이 사람의 마음의 중심이니까 결국은 하나님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보는 거라구요. 그것을 몰랐다는 거예요. 횡적 기준만이 아니라 종적인 인연의 횡적 출발기점을 우리의 마음 중심에 갖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모르니 불교도 그 분야에 들어가서는 애매했다는 거예요. 석가가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라는 말을 했지만, 그 자리를 몰랐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가지고 좋아하시느냐? 하나님은 정서적인 주인공이기 때문에 정서적으로 좋아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아담의 마음을 보고 좋아할 수 있는…. 그 마음은 영인체를 말하지요? 마음사람이 있지요? 그렇잖아요? 여러분은 몸을 가지고 있는데, 사람은 뭘 닮았느냐? 마음사람을 닮았다고 하지요? 그 마음사람이 뭐예요? 영인체입니다. 영인체 사람입니다. 영인체 사람은 몸사람을 지배합니다. 이중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요소가 상충하게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공명체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음차(音叉, 소리굽쇠)와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를 딱 치게 되면 둘이 공명합니다.
마음과 몸이 하나되게 될 때는 하나님이 임재했다고 하지요? 그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판서하시며 말씀하심), 이것하고 저것하고 공명하면 하나님도 같은 음차, 즉 공명체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 분이 지상에서 이것을 일체화시키기 위하여 노력해야 됩니다. 그것을 일체화시키는 데는 무엇을 중심삼고 하느냐?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일체화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됩니다. 사랑을 중심삼고 일체화시키기 위하여 노력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통일사상의 기점이라구요.
우리는 타락한 세계에 살고 있는데, 이 세계는 무엇으로 타락되었느냐? 세계뿐만 아니라 나라도 있습니다. 국민도 있다구요. 가정들도 있다구요. 이 전부가 무엇으로 타락되었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정서적인 타락이 틀림없다는 결론을 지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계에서 행복을 추구하고 평화를 추구하기 위하여 지금까지 외적인 세계를 중심삼고 추구해 나왔지만 이것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외적인 세계를 중심삼고 추구해 나오다 보니 결과에 가서 다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더우기 자유 민주주의 사상이 노골화된 현시대에 있어서는 전부 다 개인주의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개인주의가 안 될 수 없다고요. 자기 맘대로 하려고 합니다. 이렇게 개인을 존중시하는 때가 되었기 때문에 세계가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다 잃어버렸다고요. 나라가 어디 있어요? 나라는 누구를 위한 거예요? 자본가들을 위한 것이며 권력자들의 것이다, 이렇게 보는 거라구요.
지금이 그런 거라구요. 그 권력은 사람을 대신한 것이요, 자본은 물질을 대신한 것입니다. 이거라구요. 그 물질을 대표하는 세계의 사조를 우리 인간의 이상으로 맞아들일 수 있겠느냐? 그것을 맞아들이게 되면 영영 망하는 것입니다. 권력을 중심삼은 세계를 우리 인간이 받아들여야 되겠어요? 그것을 받아들여도 망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악으로부터 출발 했기 때문에 추방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것은 부정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계를 민주세계니 공산세계니 해 가지고 안팎으로 갈라내는 그런 형태가 벌어지는 거라구요, 또, 지금까지는 권력적인 주권자 앞에 경제적인 자본가가 지배를 받고 나왔습니다. 지금은 자본가가 권력자를 지배합니다. 거꾸로 되어 있다는 겁니다.
좋다고 하던 사랑 문제에 지배를 받아오던 세상이 좋다고 하는 사랑을 다 깨뜨려 버렸습니다. 이것은 뭘 말하느냐 하면 끝 중의 끝이라는 것입니다. 무엇이 뒤집어지려면 끝에 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바꿔치는데 엇바꿔친다는 것입니다. 그건 왜 그렇게 되느냐? 인간이 원치 않거든요. 그걸 누가 원하는 사람이 없다구요.
미국에 가 가지고 장년들에게 '지금 이 시대가 좋소, 아니면 옛날 2차대전 전이 좋소? 하고 물어 보면 전부 다 2차대전 전이 좋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됐느냐? 그런 사람들이 지금까지 권력을 가지고 국가를 지배해 나왔고, 가정도 다 그들에게 지배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러냐? 원치 않는 게 됐기 때문인 것입니다.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느냐? 그 나라가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닙니다. 그 사회가 그렇게 만들었는지 그 제도가 그렇게 만들었는지,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만일 젊은 청년 남녀들이 만들었다고 하면 그들만이 만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천운이 만든 것입니다. 전세계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보게 될 때 물질이 귀하냐, 권력이 귀하냐 하는 것이 문제인데, 물질을 중심삼아 가지고 세계를 지배하자는 것이 공산주의입니다. 지금까지는 인간을 중심삼고 물질을 지배해 온 것이 아니라, 권력을 중심삼고 물질을 지배해 왔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그렇습니다. 세계적 사조가 물질을 중심삼고 인간을 지배하게 돼 있습니다, 이것이 끝나면 마지막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타락한 세계의 결과로서 빚어질 수 있는 최종점은 기필코 그런 결과를 발생시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승을 몰라보는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아들딸을 몰라봐야 되는 것입니다. 그 나라도 몰라봐야 되는 것입니다. 그 가정에 돈이 있고 땅이 있으면 뭘합니까? 지옥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은 것입니다. 보다 가치적인 것을 맞을 수 없다면 죽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지금 북구(北歐)의 스웨덴 같은 나라는 경제적인 면에 있어서 유복한 환경을 누리고, 사회제도에 있어서도 모순과 상충이 없는 그야말로 외적인 천국상은 이뤄 놓았지만 그 나라 국민들은 '살 가치가 없다. 살아서 뭘하느냐, 무엇에 애착을 갖고, 무엇에 희망을 갖느냐? 차라리 죽는 게 낫다.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게 낫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세계는 다 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왜 그러냐? 타락권이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아무리 자랑할 만한 부의 결과를 가졌다 하더라도 그것을 보장해 줄 수 있는 역사시대는 남아지지 않는 것입니다. 반드시 정반대의 입장에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완전한 승리자는 어디에 있을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만일에 이것이 틀렸다고 한다면 하나님도 없는 것이요, 역사는 무엇 때문에 있으며. 옛날 성인은 무엇 때문에 나왔으며, 또한 우리 부모는 무엇 때문에 나왔으며, 나라의 제도는 무엇 때문에 나왔겠습니까? 인간들은 '어떠한 한 타입으로 만들기 위해 나를 얽어매고 나를 구속하는, 가상적인 구상에 의해 제재를 받는 나의 모습은 원치 않는다'고 합니다. 그것을 타파해 버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반응을 갖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계를 바라볼 때, 이 땅 위에서는 영원한 승리의 요인을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원한 승리의 요인을 어디서 찾아야 되느냐? 하나님 한 분에게서밖에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 길이 어디냐, 그 요인이 어디에 있느냐? 하나님과 참사람에게 있습니다. 또 승리의 요인점이 되는 그 기준, 그 경계선, 한계선이 어디냐? 남성신(男性神)입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요, 우리는 아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종적 중심의 기준은 되지만, 횡적 기준은 못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하나님과 동격인 자리에 서야 되겠으니, 우리는 내적인 입장에서 하나님의 마음의 상대적 입장에 서야 합니다. 이것을 소망으로 갖고 나서게 될 때…. 하나님의 종적인 창조의 심정이 횡적으로 재현되는 출발 기준이 무엇이냐 하면, 상대를 찾아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심정을 중심삼고 말하는 거예요. 사춘기라는 것은 심정을 중심삼고 말하는 거라구요.
그러한 부부, 그러한 아들딸을 중심삼고 가정을 이루어 그 가정에 어느누구도 침범할 수 없다는, 영광의 승리의 그 기준을 세워야 합니다. 그러한 기준이 없다고 하면 이상은 없어지는 것입니다. 개인을 중심삼은 이상은 있을 수 없다구요. 가정을 중심삼은 이상이 있어야 합니다. 개인의 이상보다도 가정을 중심삼은 이상만 성립되면 우리 인간은 가정에 속해 살기 때문에 개인적 이상은 필요 없다구요. 개인적 이상이 없더라도 가정적 이상권이 성립되면 거기서부터 세계는 형성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 기점을 찾아 나가는 것이 통일사상에 있어서 심정문제의 터전이요, 사위기대의 이론입니다. 이것만 있으면 하나님도….
그것을 결정짓고 가는 곳은 하나님이 갈라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하나님은 계셔야 됩니다. 하나님이 계시니 아담을 대해서 하나님이 느꼈던 기쁨, 해와를 대해서 하나님이 느꼈던 기쁨, 아들딸에 대하여 하나님이 느꼈던 기쁨은 언제나 있는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를 대해서 나쁠 수 없는 것이요, 아내를 대해서 나쁠 수 없는 것이요, 자녀를 대해서 나쁠 수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자식이 하나님을 대해서 나쁠 수 있어요?
우리 통일교회 사상은 사위기대 사상인데 그 사상의 터전이 될 수 있는 요인은 무엇이냐? 그것은 하나님의 심정입니다. 그것은 시작인 동시에 과정이며. 과정인 동시에 결과입니다. 그 결과는 나쁠 수 있는 결과가 아니라, 기쁠 수 있는 결과입니다.
그러면 이상세계는 어디서부터 시작될 것이냐? 어떠한 나라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가정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타락한 세상은 어떻게 될 것이냐? 타락한 세상을 가지고는 안 되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되는 것은, 왜 하나님께서 오늘날 세계를 버리고, 나라를 버리고, 가정을 버리고, 부모를 버리고, 형제를 버리고, 자기를 버리게끔 하는 일을 이러한 종말 시대에까지 끌어오셨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을 망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찾기 위한 것입니다. 돌아 가서 찾기 위한 것입니다. 외적인 것을 찾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면 찾아지는 데는 누가 먼저 찾아져야 되느냐? 외적인 세상 사람이 먼저 찾아져야 되느냐, 종교인들이 먼저 찾아져야 되느냐? 종교인들이 먼저 찾아져야 됩니다.
요전에 예수 혁명패라는 것이 나왔지요? 종교인 히피족 말이예요. 그거 재미있는 현상이라구요. 현재 외적인 히피족들이 끝을 맺으려고 하니 내적인 히피족이 나온 거거든요. 예수 혁명패…. 어제도 선생님이 미국에서 온 식구들한테 물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예수 혁명패라고 하는 그패들, 뭐 예수의 히피족이라나요? 그러니 세상이 참 재미있어요. 그런 걸보면 우리 뜻이 점점 퍼져 나갈 거라구요. (웃으심)
그러면 요 끝에는 뭐가 올 것이냐? 혁명가가 오겠지요, 혁명가. 혁명가는 자리가 없습니다. 혁명하는 데 자리가 있습니까? 자리잡고 혁명하나 요? 자리가 없다구요. 떠돌아다니는 겁니다. 이런 입장에서 비종교인과 종교인을 비교해 볼 때, 모두 버리고 야단하는 이 판국에서 종교인은 그히피족을 평하고 비판만 해서는 안 됩니다. 종교인은 그 이상 되어야 됩니다. 그들 이상으로 세계를 버리고 나라를 버리고, 부모를 버리고, 자녀를 버리고, 그 다음에는 자기를 버리고….
사탄세계는 '아' 하고 입을 벌리고 있지만 하늘편은 다 참고 가야 됩니다. 한편은 축 떨어지지만 한편은 승리를 다짐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지금 다 잃어버려 가지고 낙망, 절망, 그저 '꽝' 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판국을 누가 왜 이렇게 만들어 놓았느냐?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 놓았는데 그러한 자리에서 다 잃어버리더라도 '하나님이여, 감사합니다. 세계를 다 잃고 나를 찾았습니다' 할 수 있는 그 자리로 나가야 됩니다.
그것은 결국 아담을 찾는 것 아니냐? 그렇지요? 해와 찾는 것 아니냐? 끝에 와서는 '하날이여, 나만 잃어버리고 다 찾았습니다' 해야 된다구요. 그리하여 다 찾고 나를 잃었다고 주장할 수 있게 될 때에 여기서부터 세계를 다시 이어받을 수 있는 주인의 자격이 결정될 것이 아니냐? 알겠어요?
그리하여 '세계를 준다 해도 바꿀 수 없고, 나라를 준다 해도 바꿀 수 없고, 가정과도 바꿀 수 없고, 어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나를 찾았습니다. 그렇게 찾아진 나는 내 것이 아니오라, 당신 것으로 바쳐져야 되겠습니다' 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마음, 나의 자각을 촉구할 수 있는 최첨단에 서서 내 전체를 하나님의 기쁨으로 긍정하고 웃을 수 있는 하루가 있어야 합니다. 타락권내에 살고 있는 인간에게 그런 하루가 없어 가지고는 소망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랬어요? 보라구요. 세상의 히피족들은 자기의 체면이나 위신도 다 버리는 놀음을 하고 있는 판국인데, 오늘날 기독교는 체면이니 위신이니 하는 것을…. 탈을 딴 데에 쓰고 있습니다. 사탄의 물이 든 체면, 위신 그런 것…. 세계의 종교권내의 사람들은 그런 일을 하지만 통일교인들은 그런 놀음을 할 수 없다구요. 알겠어요?
세상은 그만큼 나와 있는데, 그 세상 끝을 안고 추고, 그것을 끌고 가야 할 사람들이 종교인이 되어야 할 텐데도 불구하고 지금 세상에서 다한 것을 뒤따라가면서 못 하겠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붙들고 패의 요인 가운데에 서 가지고 승리의 요인권내로 들어갈 수 있어요?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예수님의 말씀이 옳다는 것입니다.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 '내가 이 세상에 찾아온 것은 이땅을 화평케 하러 온 것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네 집안 식구가 원수다' 하는 말이 딱 들어맞는 거라구요.
세상에서는 히피족, 이피족 이러는데, 우리는 심정의 히피족이 되어야 합니다. 심정의 히피족이 되어야 한다구요. 알겠어요, 무슨 말인지? 오늘날 지상권내에 나라를 사랑하는 충신의 지조는 어디 갔으며, 부모를 사랑하는 효자의 지조는 어디 갔으며, 박애를 주장하던 종교의 지조는 어디 갔느냐, 어디 갔느냐? 국가의 중심도 하나님이요, 세계의 중심도 하나님이요, 도의 중심도 하나님이요, 내 생애의 중심도 하나님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하나님 앞에 전체를…. 그럴 수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데에서 새로운 세계관은 발전될 것입니다. 그렇게 발전되는 데에서, 하나님에게 귀일되어 가지고 타락하지 않은 심정적, 원칙적 인연이 남자면 남자, 여자면 여자에게 맺어지는 데에서 새로운 승리의 세계는 출발할 것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내 개인의 마음과 몸이 하나되어 가지고 사춘기 시대를 거쳐 상대를 취하게 되면 그것은 패의 요인이 될 수 없습니다. 영원히 영원히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찾아지는 아들딸은 타락과 낙망의 요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랑의 요인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아들 딸이 영원토록 자랑의 요인이 되어야 될 텐데 그렇게 못 됐거든요. 그래 가지고 갖추어진 종족은 낙망과 탄식과 분열의 요인으로 남아지는 것이 아니라, 자랑과 통합과 일체의 요인으로 남아질 것입니다. 한마음과 같이 되는 거라구요.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통일교회 교인들은 결국에는 다 하나님을 통해야 됩니다. 결론이 그렇다구요. 결국에 가서는 하나님을 통해야 되는 것입니다. 초감각적인 권내에 있어서, 초감각적인 심정이야 있을 수 없겠지만, 타락적인 감각 세계를 초월하는 자리에 있어서 본연적인 감각의 기원을 획득해 가지고 그 행복을 찬양하게 될 때는 세계가 무색하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나라를 희생시키고 세계를 희생시켜서라도…. 나라와 세계도 이걸 이루기 전에는 없다구요.
그렇기 때문에 세계를 버리고라도 이걸 찾아가야 됩니다. 세계나 나라는 이 사랑의 터전 위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라나 세계가 있다는 것은 비원칙입니다. 그러니 부정의 결과에 도달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러므로 참사랑을 찾아가려면 세계를 버려야 됩니다. 그 사랑은 참사랑을 두고 말하는 겁니다. 세상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구요. 사랑이 좋다고 하지만 지금까지는 깨져 나가는 사랑이었습니다. 여기서는 그런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이 본래의 참다운 사랑을 갖기 전에는 가정도 아들딸도 없습니다. 본래의 참다운 사랑의 가정을 갖기 전에는 종족도 없고, 민족도 없고, 국가도 없고, 세계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참다운 사랑을 중심삼는 데서부터 국가도 출발하는 것이요, 세계도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서 태어난 아들딸은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아들딸이고, 그 종족들은 세계를 관리할 수 있는 종족이라구요.
이러한 기반을 중심삼고 이러한 사위기대권이 갖추어져 (판서하시면서 말씀하심) 하나님, 아담, 해와…. 여기에서 중심이 딱 결정되어 가지고 서로 사랑을 주고받게 되면 도는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중심이 결정되어 가지고 주고받게 될 때는 돈다구요.
여러분, 팽이를 보십시오. 팽이를 돌릴 때 중심이 딱 잡히게 되면 그것은 살아서 돌아갑니다. 중심이 안 잡히면 들다가 빨리 넘어집니다. 마찬가지라구요. 완전한 중심의 자리는 오래가는 것입니다. (녹음 상태 불량으로 약간 부분 정리하지 못했음)
하나님은 왜 아담을 지으셨느냐? 그것은 종횡의 자극적인 상대적 사랑을 느끼기 위해서였습니다. 일방적인 사랑은 이상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재미가 없다구요. 사방으로 횡적으로 연결되어 돌아야만 360도 방향에 따른 감격과 감미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상적인 사랑입니다. 그럴게 아니예요? 이것이 평면이 아니라 구(球)입니다. 그렇게 구가 되어 가지고 움직이게 되면, 여기에는 하나님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요, 영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일체화하는 것입니다. 일체화한 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높은 것이 남이 아니라 내가 되는 것입니다. 주체와 대상이 하나가 되어야, 그런 세계가 되어야 이상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높은 데는 언제나 높고, 낮은 데는 언제나 낮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무형의 신입니다. 무형의 신으로서는 안 되기 때문에 아담을 통해 가지고 비로소 형상을 입은 것입니다. 형상이라는 것은 반드시 주체와 대상의 관계를 통해서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도 남자와 여자, 즉 주체와 대상이 합해야만 완성이 벌어집니다. 하나님의 완성도 보이지 않는 내적 하나님과 외적 아담 해와가 합해짐으로써,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하나가 되어 내적인 형도 외적인 형을 대신할 수 있고, 외적인 형도 내적인 형을 대신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도 형상을 지녀 가지고 인간의 중심된 하나님으로 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뭘할 것이냐? 사랑의 감미를 입체적인 세계에서 느끼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이상이기 때문에 하늘나라는 사랑으로 이룩된 세계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감도에 적응될 수 있는 소성 비준에 따라 원근의 거리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나무를 보면 태양빛을 많이 받는 나무는 빨리 자라는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빨리 무성해집니다. 그런 나무는 꽃이 피어도 많은 꽃이 피게 되고. 열매를 맺어도 많은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라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사랑의 감도를 흡수하는 입장에서 보게 되면 그 줄기와 마찬가지입니다. 전체가 느낄 수 있는 사랑의 요인이 그를 통해서 거쳐 나가기 때문에, 그는 그 분야, 그 환경에 해당할 수 있는 사랑의 기쁨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 기쁨의 결과가 하나님의 전체의 기쁨과 어떠한 상대적 입장에 해당될 수 있는 기쁨의 기준이냐 하는 문제를 중심삼고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 우리는 내일에 이와 같은 승리를 남기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승리의 기준이 어디에 있느냐? 여자들한테 있는 거예요. 이래서 종교는 지금까지 상대적 세계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을 찾은 자리로 돌아왔기 때문에, 상대 세계를 인정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상대적 이상세계를 허락할 것인데도 불구하고….
통일교회가 그것을 계승해야 할 입장에 있기 때문에 여러분을 축복해준 것입니다. 그러면 축복받은 여러분이 과연 완성한 아담 해와의 자리에 선 사람으로 축복받았느냐?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탕감해야 되는 것입니다. 세계 각국을 묶어 가지고 대신 탕감하는 노정이 있어야 됩니다. 이것이 7년 과정 이후에 가야 할 탕감노정이다, 이렇게 보는 거라구요.
여러분이 그 탕감노정을 가는 목적은 어디에 있느냐? 본연의 부모보다도 나을 수 있는 가정적 기반 위에 서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통일 가정들이 바라보는 표준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여러분은 지금의 상태 그냥 그대로는 안 되는 거예요. 여기에는 새로운 부정이 필요하고 개혁이 필요합니다.
선생님이 지금까지 통일교회를 지도하는 데 있어서 싸워 이긴 것은 일시적인, 지나가는 승리의 기준을 남기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영원한 승리로 남기기 위해서입니다. 영원히 남겨지는 그 자리에 서기 위해 서라구요. 누구와 더불어? 하나님과 더불어. 그러면 한 개인으로 싸웠지만 그 승리의 기준은 영원히 남는 것입니다.
역사 과정에 있어서 그러한 승리의 기준을 세워 놓으려 하는 것이 우리 통일교회에 있어서는 복귀사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타락한 아담 해와보다 나아야 됩니다. 아벨보다 나아야 됩니다. 혹은 노아면 노아보다도 나아야 되고, 아브라함보다도 나아야 됩니다. 그들보다 낫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모세보다 나아야 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보다 나아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보다도 나아야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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