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2월 들어 처음 맞는 안식일이옵니다. 이달에 저희들이 계획하고 경영하려는 모든 일들이 당신의 뜻 가운데서 일취월장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한 달 한 달 지나감으로 말미암아 71년도에는 하늘의 모든 섭리의 프로 위에 승리의 결과를 가져오게 하여 주시옵기를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아침에 모인 어린 자녀들을 당신이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남겨진 복귀의 사명을 책임지고 나라와 세계를 향하여 달려가지 않으면 안 될 저희 들이오니, 이 책임을 다할 수 있는 하늘의 아들딸이 되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한 가지 한 가지 일에 있어서 저희들이 하늘의 뜻을 세우고 그 뜻의 내용을 활용하면서 스스로의 인생길을 밝혀 갈 줄 아는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이 아침에 이곳을 향하여 마음을 모으고 하늘을 우러러보면서 경배하는 당신의 자녀들 위에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이때의 사명을 짊어지고 전세계에 널려 있는 외로운 당신의 아들딸들이 가는 곳곳마다 당신의 거룩하신 은사의 손길이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내내 당신이 같이하신다는 사실을 사탄세계의 모든 사람들 앞에 나타내시어서, 아버지 앞에 굴복할 수 있는 승리의 판도를 넓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더우기 이번 달에는 저희들이 계획하는 두 가지 큰 행사가 있사오니, 아버지, 여기에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저희들이 계획하는 모든 일이 나타나는 일이나 나타나지 않는 일이나, 아버지의 내적인 인연을 따라서 이 땅 위에 승리의 터전을 세워 가지고, 아버지의 영광의 터전을 넓혀 나갈 수 있는 우리 통일교회가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이 나라의 운명을 지키시옵소서. 모든 일이 아버지의 경륜 가운데서 되어지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악의 세력을 꺾으시고 선의 기준을 넓히시사 당신이 친히 주관하시옵소서. 당신이 친히 영광을 받을 수 있는 그날까지 저희들이 충성의 도수를 높이고, 정성의 도수를 높이고, 효성의 도수를 높일 줄 아는 당신의 자녀들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아침, 교계에 있는 수많은 당신의 자녀들도 생명길을 흠모하면서 모여서 기도하는 줄 알고 있사오니, 모인 곳곳마다 당신이 친히 역사를 일으키시어서 당신이 친히 찾아오시는 섭리의 때를 예고시키시옵소서. 그들도 한 곳, 통일의 은사권에 모여 하나의 제단을 쌓아 가지고 아버지 아들딸의 영광의 자리에 동참할 수 있게끔 축복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어린 자녀들이 모인 이 자리에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내가 앉은 이 자리를 중심삼고 볼 때에, 이 시간을 흘러가는 역사의 한 토막, 한 순간이 아니오라 아버지의 생명의 인연을 연결시킬 수 있는 가장 귀한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전체 위에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오며, 아버지의 영광스러운 승리의 결과를 다짐할 수 있는 책임을 진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이 시간 이후의 모든 절차도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을 참부모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이 시간에는 '체휼신앙의 중요성'이란 제목으로 잠깐 얘기해 보겠습니다. 우리 인간이 이 땅 위에서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길은 혼자 가는 길이 아니라는 것을 언제나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신앙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그 대상은 벌써 내가 아니고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하나님을 대상으로 삼고 가는 길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체와 대상 관계가 하나님과 나 사이에 맺어져서 주체에게서 되어지는 사실이 대상에 미쳐지고, 대상에게서 이루어지는 사실이 주체에게 관계되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계가 맺어지지 않으면 뜻과 더불어 이루어지는 나 자신이 될 수 없는 것이요, 뜻을 위해서 움직였다고 하는 그 결과가 하늘의 섭리 앞에 보탬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인간은 반드시 상대적인 관계를 가져 가지고 묶어져야 합니다. 다시 말해 수수작용을 해 가지고 하나되어야 합니다. 하나되는 정도에 따라 우리 생활환경에 변천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변천된 내용을 우리 자체의 생활면에서 봐 가지고 그것이 과거보다도 더 가치적인 것으로 느껴지게 될 때 우리는 신앙의 보람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대개 상대적 관계를 통해 의식을 하게 됩니다. 물론 자기 마음 속에서도 생각은 하겠지만 대다수는 감각적인 기관을 통해서 자극을 받아 가지고, 상대적 관계를 중심삼고 의식하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는 우리의 마음 생활뿐만 아니라, 그 마음에 느껴진 사실을 상대적 생활환경에 어떻게 적용하느냐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어떤 신앙의 기준 밑에서 일 년이면 일 년 동안 '나는 이렇게 이렇게 하겠다'는 계획을 세웠으면, 그 계획이 나와 더불어 관계를 맺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는 어떻게 관계를 맺느냐, 그리고 주체 되시는 하나님과 대상 되는 내가 하나됨으로 말미암아 그 결과를 이 환경에 어떻게 맺히게 하느냐 하는 것이 원리적으로 볼 때 중요한 것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주체와 대상이 완전히 주고받으면 거기에는 반드시 새로운 번식, 곧 제 3의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 제 3의 결과라는 것은 주체의 목적뿐만이 아니라 대상의 목적, 즉 이중목적을 지닌 결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과로 나타난 것이 내 자체에서 주체와 대상의 인연을 맺기 전보다도 가치 있는 것이 되어야만 보다 자극을 느낄 수 있고 보다 큰 기쁨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됩니다.
2월이면 2월 한 달을 중심삼고 신앙적인 면에서라든가 각기 나름대로의 어떠한 목표를 세워 실천해 나간다고 하면 그 목표를 자기 개인의 목표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 목표는 언제나 주체와 대상의 공동목표로, 그 결과도 언제나 주체와 대상의 공동적인 가치의 결과를 추구해 나가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느껴야 됩니다. 이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내가 하는 일이라 해도 그 일은 나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는 반드시 하나님이 개입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나 혼자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동반해서 움직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같이 움직이고 계신다는 사실을 느끼게 될 때 여기에서 체휼신앙이 출발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그러므로 일상생활에 있어서도 무의미하게 생활할 것이 아니라, 의식을 가진 어떤 주체가 있으면 그 주체의 생각과 내 생각이 병행해 가지고, 자기의 하루의 생활 과정이 자기에 한한 과정이 아니라 주체와 더불은 과정으로 느낄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런 입장에 서게 될 때 체휼신앙이 시작된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사람에게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에는 마음문, 즉 심문(心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나면 나를 대해 줄 때가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대하고 계시지만 우리 자신이, 하나님이 우리를 대해 주시는 그 방향 앞에 일치될 수 있는 마음문을 어떻게 갖다 맞추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은 지극히 어려운 문제라는 것입니다.
자연을 보게 되면 춘하추동이 있고, 아침 점심 저녁 밤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성격도 전부가 같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봄절기에 해당하고, 어떤 사람은 여름절기에 해당하고, 어떤 사람은 가을절기에 해당하고, 어떤 사람은 겨울절기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아침과 같은 형의 사람, 낮과 같은 형의 사람, 저녁과 같은 형의 사람, 밤과 같은 형의 사람이 있습니다. 얼굴 모습을 보더라도 각양각이합니다. 이렇게 모습이 각양각이한 것은 서 있는 바탕이 전부 다르기 때문입니다. 처해 있는 위치가 전부 다른 동기에서 빚어진 인간이기 때문에 그 서 있는 기준에 따라 결과되어진 우리의 모습도 전부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봄절기에 해당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여름절기, 가을절기, 겨울절기에 해당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렇게 사람은 한 중심을 중심삼고 춘하추동과 같은 입장에 서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봄절기와 여름 절기의 중간형의 사람, 여름절기와 가을절기의 중간형의 사람도 있습니다. 이렇게 사방을 중심삼고 볼 때, 인간 개체 개체가 서 있는 위치는 전부 다릅니다. 그래서 인간은 언제나 중심을 기준으로 관계를 맺어야 되는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중심이 무엇이냐? 이 중심은 하나님만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중심은 절대적인 기준이 되어야만 되기 때문에 이 기준이 우리의 주체적인 입장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주체를 중심삼아 가지고, 주체 자신도 돌지만 대상인 우리 인간도 돌아가야 합니다.
돌아가는 데 있어서 하나님이 봄절기와 같은 성품으로 나를 대한다면 나도 그 성품을 따라서 언제나 환경적으로 조절해 가지고 거기에 맞출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입장에 서게 된다면 반드시 체휼적인 자극을 느끼게 된다는 거예요. 나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천운이 협조해 가지고, 내가 원하지 않더라도 자연히 그 환경이 이루어져 나가는 것을 세포로 느낄 수 있는 자리에 선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반드시 체휼적인 감각이 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신앙자로서 제일 주의할 것이 무엇이냐? 일을 대하는 데 있어서 사소한 일이든 큰 일이든, 어떠한 일을 막론하고 개인적으로 대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여러분의 마음이 팽팽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팽팽하게 공기를 넣어 완전히 둥글게 된 공과 같은 마음 자세를 가지라 이거예요. 찌그러지지 않고 완전히 팽팽한 공과 같은 마음 상태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불안한 마음이라든가 혹은 개인의 욕심을 중심삼은 사(邪)된 마음을 가지면 둥그런 공과 같은 마음에 모가 생깁니다.
이 마음이 돌 때에는 평면적으로 전부다 접촉되어야 할 텐데, 모가 생기면 모난 끝부분부터 접촉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전체를 원활히 자극시키는 것이 아니라 전체에 반대적인 작용을 하게 됩니다. 그런 입장에 처하면 처할수록 우리의 양심은 가책을 받고, 양심의 기준이 점점 삭감된다는 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원만한 공처럼 팽팽한 마음적 태도가 필요합니다. 그리하여 그 마음에 어떠한 자극이 들어오면 마음 전체가 공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고유 진동수가 서로 같은 음차 두 개를 놓고 하나를 울리면 다른 하나는 치지 않아도 그 음파에 자극되어 같은 진동수로 울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도 공명체가 될 수 있는 원만한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그리하여 언제나 한 주체로부터 전달되어 오는 영적인 파동을 감지하려고 노력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에게는 명상의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좋은 것을 그리며 명상을 하라는 것입니다. 명상을 할 때는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그 마음을 둥글게 해서, 하나님이면 하나님을 중심삼고 하나님의 본성과 내 본성이, 봄절기에 해당하는 사람은 봄절기의 주체 되는 하나님과 더불어 그 성품이 완전히 주고받을 수 있는, 완전히 공명될 수 있는 마음자세를 지녀야 합니다. 이렇게 공명되는 내용을 중심삼고 자기가 요구하는 목적을 대하게 될 때는 반드시 하나님이 같이하십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공명을 느끼지 못하는 자리에서 어떠한 일을 대하게 될때는 이렇게 생각하면 된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이 일을 바라보고 계신다, 나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을 내가 느끼지는 못하지만 관계를 맺고 있다, 이 일에 하나님이 먼저 개입해 계신다, 하나님의 뜻이 여기에 박혀 있다, 지금은 그 뜻을 중심삼고 내가 접선하는 순간이다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어떤 일을 하는 데 있어서 나 혼자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일이면 일 자체를 중심삼고 볼 때에 거기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 먼저 성립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 가 있는 뜻을 따라가서 그 뜻과의 일치점을 기해야 된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생활을 종합해 보면 그렇습니다.
뜻의 일치점을 기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비양심적인 입장에 서서는 안 됩니다. 순결한 마음으로 그 일을 중심삼아 가지고 내 마음이 완전히 주고받을 수 있는, 완전히 공명될 수 있는 생활 태도를 키워 나가야 됩니다. 그러면 아무리 어려운 일을 하더라도, 그 어려운 일이 나에게 마이너스가 되는 것이 아니라 플러스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일로 말미암아 지금까지 처해 있던 입장보다도 한 단계 전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과 더불어 주체와 대상의 입장에서, 마음과 몸이 주고받는 느낌을 느껴 가지고 그 일을 대하여 나가게 될 때는 하늘이 따라옵니다. 이러한 느낌이 없게 될 때는 하나님의 뜻이 먼저 거기에 가 있다는 그러한 실감 있는 감정을 가지고 어떠한 사물을 대하고 일을 하는 입장에 서게 된다면, 그 일에는 이미 뜻이 와 있기 때문에 그 뜻과 더불어 나는 완전히 일체가 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비양심적 기준으로는 안 됩니다. 순결한 양심을 가지고 일을 대하게 되면 그 일을 함으로 말미암아 힘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힘을 얻게 될 때 반드시 하나님이 같이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동기가 마음에 체휼되어 가지고 일을 하거나 상대를 대하지 않으면 뜻이 여기에 와 있으니 나는 뜻을 이루는 자리에 간다 하는 입장에서, 상대적인 일이면 그 일이 동기가 되어 있다고 생각하라는 거야. 그래 가지고 나 자체가 그 동기와 일체가 되어서 결과적 입장을 가져오게 될 때, 그것이 개인적인 목적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공적인 목적에 결부되게 될 때는 그 일을 함으로 말미암아 보람을 느끼고 힘을 느끼게 됩니다. 이러한 생활을 하게 될 때 그 사람들은 기도생활을 하지 않더라도 기도생활을 하는 것 이상의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대하고 있는 것이 대개 어떻게 구분이 되느냐? 첫째, 물건을 대하는 일, 둘째, 사람을 대하는 일, 세째, 말을 대하는 일, 다시 말하면 물건을 대하는 대물관계, 다음에 사람을 대하는 대인관계, 다음에는 대인관계에서의 말을 하는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말은 간접적인 목적, 즉 제 3의 목적을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물건을 대하는 관계에 있어서 천법, 혹은 하나님 앞에 걸리지 말라 ! 사람을 대하는 관계에 있어서도 걸리지 말라 ! 그 다음에 말하는 관계에 있어서도 걸리지 말라 ! 이렇게 되는 거예요. 말하는 관계에 있어서, 그 말한 것에 대하여 걸리지 않기 위해서는 반드시 행동을 촉구시켜야 됩니다. 말은 행동의 동기가 되기 때문에 말하는 데 있어서 걸리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물건을 대하는 대물관계, 사람을 대하는 대인관계, 그리고 말하는 데 있어서 걸리지 않아야 됩니다. 말은 반드시 행동을 촉구합니다. 이것이 우리 일상생활에 있어서의 관계인 것입니다.
그러면, 대물관계에 있어서 어떻게 하늘화시키느냐? 즉, 그 일을 타락한 나로서 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체가 되어 대했다는 입장을 어떻게 세우느냐? 대인관계에 있어서도 나 자체로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나님과 함께 대하느냐? 또, 말을 하더라도 나 혼자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늘의 말을 하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 말한 것은 말만으로 남기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행동을 동반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생활권내에서 관계되어 있는 내용인 것입니다.
우리가 물건을 대하는 데 있어서는 직장 생활이 벌어질 것이고, 사람을 대하는 데 있어서는 인륜관계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도덕관계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을 하는 관계에 있어서는 행동문제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생활권내에서 관계맺고 있는 여건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물건을 대하는 데 있어서 원칙적인 법도에 어긋나지 말라 ! 사람을 대하는 데 있어서도 법도에 어긋나지 말라 ! 말을 하고 행하는 데 있어서도 법도에 어긋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물건을 대하나 사람을 대하나…. 물론 사람을 중심삼고 대물관계가 성립되지만, 이러한 입장에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신앙자로서 물건을 대할 때 어떻게 대해야 되느냐? 어디까지나 공적으로 대해야 합니다. 공적으로 대하는데 그 물건이 열만한 가치가 있다면 열만한 가치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천만한 가치로 보느냐, 이 가치를 어떻게 보다 가치 있는 것으로 보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이 물건의 가치가 미미하다 하더라도 거기에 하나님이 개재해 있다고 생각하면 그 가치를 천만의 비중으로 올릴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이 물건 가운데 하나님이 관계되어 있다고 할 때 이 물건의 가치는 무한한 비중을 갖고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물건을 대하게 되면 그 물건이 참 반갑습니다. 여러분의 생활권내에서나 여러분의 마음의 세계에서 느낌 가운데 그러한 감응이 찾아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일을 하면 그 결과는 반드시 자기 혼자 바라보던 것보다도 더 입체적인 가치의 내용을 느끼게 됩니다.
하나의 일이나 물건을 대했던 것이 나에게 환경적으로 큰 가치의 결과를 느끼게 해줬다는 그 사실은 뭐냐하면, 그것으로 말미암아 내가 영적인 내적 가치를 보다 높은 의미에서 차지할 수 있는 자리에 섰다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 자신이 느껴야 합니다. 그러면 일을 하고 나서도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일이 아무리 힘들다 하더라도 내가 하고 있는 수고보다도 몇백 배, 몇천 배의 가치적인 결과가 나타난다는, 하늘적으로 그러한 가치를 느끼면서 행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일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어려운 그 일이 오히려 감사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자기 일신을 두고 보더라도 대인관계에 있어서 어떠한 어려운 일에 몰려 가지고 피해를 받게 되었다, 말할 수 없는 고역을 극복해야 할 수난의 길에 들어섰다 하더라도 그 수난의 길을 자기 혼자 간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수난의 길을 무한한 가치의 중심인 하나님과 더불어 간다고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같이하는 수난의 길 앞에 자기가 동참한 사실이 얼마나 큰 가치인가를 느끼게 될 때, 그 고통의 대가보다도 감사의 대가가 더 크다는 것을 느끼게 될 때는 그 어떠한 고통의 길도 감사의 길이요, 오히려 하나님 앞에 영광의 길이 될 수 있다고 하는 그러한 자리까지 나갈 수 있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물건을 대할 때 아무 생각없이 대해서는 안 됩니다. 저 물건은 나에게 플러스가 아니면 마이너스를 가져온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즉, 나에게 있어 복이 되든가 아니면 화가 되든가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재 열의 자리에서 내가 저 물건을 대하면 열 하나의 가치가 되느냐 아홉의 가치가 되느냐, 즉 마이너스를 가져오느냐 플러스를 가져오느냐 하는 것을 생각하고, 여기에서 마이너스되는 자리를 피하고 플러스 될 수 있는 입장을 어떻게 세울 것인가 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이렇게 여러분이 찾아 나가게 되면 무슨 일을 대하든 벌써 마음이 안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일이나 물건을 대하게 될 때, 그것이 나에게 플러스가 될지 마이너스가 될지 대번에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일을 하는 데 있어서도 내 마음과 뜻이, 주체와 대상이 주고받는 데 있어서 일체가 되어야만 3점이 되어서 본래의 동기, 즉 하나님의 창조원리에 일치되는 사위기대권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그리하여 그 물건이 나와 주체와 대상의 결과에 부합된다는 가치를 발견하게 될 때 하나님의 창조목적의 결과가 거두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님의 대상의 물건으로서 선의 결과를 가져옵니다.
이러한 선의 결과를 내 주위에 많이 놔두면 놔둘수록 나 자체에 있어서는 재창조 과정의 자리가 점점 넓어지는 것이요 높아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입장에 서면 설수록, 그런 생활을 하면 어떤 물건을 대해도 벌써 그 물건 자체에서 나에게 파장이 옵니다.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원만한 마음으로, 사심을 떠나서 공명할 수 있는 음차와 같은 마음으로 그 물건을 심각하게 대하게 되면, 그것이 좋다든가 나쁘다든가 하는 감정이 우러납니다. 그것이 나에게 플러스가 되느냐, 아니면 마이너스가 되느냐…. 이렇게 언제나 타진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파장이 오지 않으면, 공적인 입장에서 사심을 떠나 가지고 마음을 둥근 다이얼과 같이 해 가지고 일이면 일, 물건이면 물건을 척 대했을 때 첫 인상이나 처음 들어오는 감정을 통해, 이것은 틀림없이 플러스된다 하는 느낌을 가지고 그 일을 해보라는 것입니다. 일을 하는 데 있어서도, 무의미한 자리에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마음으로 진실된 입장에서 해보라는 것입니다. 해보면 좋고 나쁜 결과가 반드시 나타납니다.
그래서 내가 감정한 것이 몇 퍼센트나 적중하느냐 하는 것을 생활 가운데서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생활 가운데서 플러스된다고 느꼈던 첫 감정이 몇 퍼센트나 적중하느냐 하는 것을 언제나 주시해야 됩니다. 그러한 생활태도를 점점 습관화시키면 열 가지 일 가운데서 다섯 가지, 여섯 가지 이렇게 점점 그 도가 높아지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걸 키워 나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도가 높아져 간다는 것입니다. 그 반면에 나쁘다 하는 것을, 좋지 않다 하는 것을 했는데 좋지 않은 결과가 나왔다 하게 될 때는 그것은 뜻이 같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주위에 있는 모든 사물을 대할 때에는 무의미하게 대하지 말고, 반드시 원리원칙을 중심삼고 대해야 합니다. 사위기대 형태의 내용을 중심삼아 가지고 내 체휼적인 감정을 어떻게 계발하느냐 하는 문제가 지극히 중요하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직장생활에서 물건을 대하는 데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그 회사의 일원으로서 회사의 물건은 공적인 물건인데도 불구하고 소홀하게 대한다면 그 사람은 회사에 마이너스되는 사람입니다. 그 물건은 나라의 물건이요, 하나님의 물건이라고 생각하면 종이 한 장도 그렇게 허술하게 대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허술하지 않는 마음을 가지고 그 대가를 추구하고 사소한 일에서부터 큰 일에 이르기까지 전체를 심정적인 체휼의 도를 넓히기 위한 조건물로서 찾기 위해 노력하고 생활적인 감정을 연결시키기 위해 노력하게 되면 생활권내에 있어서 반드시 하나님이 같이하신다는 것을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대하면 대할수록 내가 대하는 그 일에 있어서 하나님이 같이했다는 것을 실감적으로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활하는 사람은 지칠래야 지칠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 혼자 생각없이 돌아다니다가 손해를 보고, 그 손해가 현재의 입장보다 막중하게 될 때는 거기에서 타격을 받아 가지고 떨어져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체휼신앙의 개발을 위해서는 여러분이 언제나 물건을 소홀히 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심각하게 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신앙길 전체가 걸려 넘어갈 수 있는 조건도 거기에서 성립된다는 거예요.
일을 할 때도 그렇게 해야 됩니다. 예를 들어 여자들이 바느질을 한다 할 때, 거기에는 자기 남편을 위한 바느질이라든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바느질도 있을 것이고, 혹은 원치 않는 사람을 위한 바느질도 있을 텐데 한결같이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혹은 삯바느질을 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을 받기 위해서, 이익을 보기 위해서 그저 아무렇게나 가지 수나 늘려 일하게 되면 반드시 막혀 버리는 것입니다. 그 일도 내 일과 같이 나의 사랑하는 사람의 옷과 같이 정성스런 마음으로 하게 되면 그 옷을 입는 사람이 옷을 대할 때 '이것은 선한 물건이구나'라고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체휼신앙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정성을 들였는지 안 들였는지 대번에 감정해 낸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물을 그렇게 관찰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방 안에서 웃으면서 이야기를 해도 벌써 느낌이 다 들어옵니다. 이 웃음이 어떤 웃음이냐? 하나님 앞에 플러스되는 웃음이냐, 마이너스되는 웃음이냐? 느낌이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습관화하고 발전시켜 나가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를 중심삼고 되어지는 주위의 모든 요건들은 무의미한 것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나를 개발시키고 발전시키기 위한 하나의 교재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이런 생활태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혼자 있다고 해도 마음대로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활태도를 중심삼고 살게 되면 처음 보는 사람이든 안면이 있는 사람이든 누구든지 소홀히 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처음 보는 사람이니까 아무렇게나 대하면 되지 이러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지 않느냐는 겁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모든 심정적인 기준을 중심삼아 체휼적인 환경을 개발하는 놀음을 해야 됩니다. 그래 가지고 사사건건에 있어 틀림없이 효과적인 가치를 발견하고 기쁨을 느꼈다면 그 사람의 신앙생활은 관념적인 신앙이 아니라 실질적인 신앙생활이요, 하나님과 더불어 같이 사는 신앙생활입니다.
이러한 생활을 하는 사람은 아무리 어려운 길을 가더라도 지치지 않습니다. 만일에 죽음길을 간다 하더라도 이 죽음이 뜻 앞에 합당한 죽음이냐 아니냐 하는 것을 벌써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고통을 당하고 억울함을 당하는 것도 하나님이 나를 탕감시키기 위해서 하는 것이냐, 마이너스시키기 위해서 하는 것이냐 하는 것을 대번에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괴로운 길을 가더라도 그것이 모든 체휼적인 감정에 접해서 가는 길이라면 웬지 든든하고 희망이 솟구치는 것입니다. 만일에 반대하는 함성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그것이 충격이 되고 자극이 되어 나 자체의 중심이 꺾여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기회로 더 폭발적인 힘이 작용하게 되고 선의의 투쟁의 힘이 솟구쳐 나오게 됩니다. 이런 것을 보게 될 때 내가 가는 길이 하나님이 같이하는 길이냐 아니냐 하는 것을 느낌을 가지고 분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생활권내에서 타락이 벌어지고, 생활권내에서 실패가 벌어지고, 생활권내에서 하나님 앞에 배반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잠을 잘 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눈을 뜨고 활동하면서 사사건건을 대하는 상대적 요건을 중심삼고 내가 발전도 할 수 있고 후퇴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관계이기 때문에 이 관계를 어떻게 잘 조정해서 하늘화된 결과를 가져오게 하느냐 하는 것을 수시로 연구해야 됩니다.
물건을 대해서도 그렇지만 사람을 대하는 데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사람을 척 볼 때, 저 사람은 어떤 사람이다…. 사람의 성질에 따라서 전부 다릅니다. 내가 사람을 대하는 데 있어서 저 사람이 나보다 심정기준이 낮다 할 때는, 내 기준을 낮게 조정해서 상대를 대해야 됩니다. 그러지 않으면 내가 타격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느낌으로써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을 금방 알아야 합니다. 첫인상에서 무슨 감이 오느냐, 마음의 안테나를 통하여 이 둥근 마음에 어떤 느낌이 오느냐, 내 선입감이 아니라 공정한 입장에서 잼대와 같은 마음에 무슨 느낌이 오느냐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가 중심이 되지 말고 느낌을 중심삼고 하나님을 생각하며 나가야 됩니다. 주체 앞에 나는 대상의 입장이 되기 때문에 좋은 결과의 기준을 중심삼아서 발전시키려고 하는 것이 주체의 소원이요, 상대인 우리 인간의 소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개체가 타진한 결과를 중심삼고 보는 것이 아니라 척 보면서 첫번 느낌과 더불어 그 마음에 비춰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첫번 감이 '아하' 하고 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잘 모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발전시켜야 합니다. 그러면 '아하, 저 사람은 좋은 사람이다'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좋은데 어떻게 좋으냐? 그것은 여러분이 점점 그러한 도수를 높여 가게 되면 한 번만 척 보아도 마음이 어떻고 뭐가 어떻고 하는 것이 척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선생님이 약혼을 해줄 때는 될 수 있으면 사람들의 윤곽을 똑똑히 안 보려고 합니다. 이 사람 저 사람 죽 돌아가며 봅니다. 어떤 느낌이 오는지 마음의 잼대로 쭉 비교해 보는 것입니다. 이 둘이 어떠냐? 맞느냐, 안 맞느냐? 어떤 때는 쓱 보면 두 사람이 하나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두 사람을 보는데 나도 모르게 순식간에 하나되는 느낌이 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틀림없는 천생배필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둘이 등을 집니다. 그것은 틀린 것입니다. 그런 느낌이 온다는 겁니다. 그리고 서로서로가 좋아하려고 관심을 갖는 감정이 있습니다. 이것은 앞으로 시일이 지나면 참 좋은 상대가 됩니다. 그런 느낌이 들어옵니다.
그러면 그러한 느낌이 몇 퍼센트 적중하느냐? 그건 여러분이 생활과정을 분석해서 결과를 타진해야 합니다. 내가 느끼는 것은 몇 퍼센트는 맞는다, 몇 퍼센트는 틀림없다 하는 이러한 내적인 인연을 여러분이 환경권 내에서 맺어 가지고 타진할 수 있는, 그러한 결과를 측정할 수 있는 입장에 서지 않고는 하나님이 같이하고 계시는지 악이 같이하고 있는지 분석해 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이런 신앙태도가 필요합니다. 이런 신앙태도를 키워 나가면 틀림없이 체휼되어 들어옵니다. 그렇게 되면 길을 나설 때 기도를 안 해도 괜찮습니다. 첫 걸음을 내디딜 때, 이 길이 어떤 길이냐, 좋은 길이냐, 가면 하나님이 좋을 수 있는 길이냐, 섭섭한 길이냐…. 첫번에 느껴져 오는 감이, '아 이건 좋다, 나쁘다' 하는 느낌이 있다는 것입니다. 나쁘다 할 때는 가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을 감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환경적으로 체휼신앙에 대한 것을 개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사람을 볼 때도 무심히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무개의 정상적인 표정은 이런 것이다 하는 것을 분석하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무개의 정상적인 태도는 저런 태도다, 또 정상적인 말의 음색은 저런 것이다, 웃는 것도 정상적인 것은 저런 것이다, 고충도 안 느끼고 기쁨도 안 느끼는 보통 때의 정상적인 모습은 저런 것이다….
여러분이 앞으로 많은 사람을 대하게 될 때, 더우기 지도자가 되려면 그래요. 그 사람의 정상적인 기준과 비정상적인 기준, 다시 말하면 슬플 때의 기준과 기쁠 때의 기준을 가려야 합니다. 정상적인 기준을 중심삼고 볼 때, 위로 올라갔을 때는 기쁜 것이요, 아래로 내려갔을 때는 슬픈 것이다. 이렇게 눈만 보고도 표정 하나만 보고도 금방 짐작해야 합니다. 벌써 말소리가 정상적인 때는 이렇고, 기쁠 때의 말소리는 저렇더라, 좋지 않을 때는 눈빛이 어떻더라 하는 것을 가릴 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말하는 어조라든가 억양, 태도를 보고 저 사람이 저렇게 말하는 배후에는 좋지 않은 무엇이 있구나 하는 것을 하나님과 더불어 내가 감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둘이 만나러 가는 표정만 봐도 쓱 들어온다 이거야. 무슨 일이 있구만…. 아니나 달라. 이렇게 여러분이 쭉 감정한 것을 실험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이 부합되느냐 안 되느냐 하는 것을 관찰해 보아야 합니다. 부합되었다고 느껴질 때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는 것이 틀림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활권내에서 내 감정이 하나님과 밀착되어 가지고 동화될 수 있느냐, 반대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을 예감을 통해 분석해 가지고 내 생활권내에 어떻게 좋은 결과를 많이 남겨 놓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신앙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지나가는 사람을 보기만 해도 안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일 복잡한 것이 사람입니다. 사람을 척 보게 되면 그 사람이 오늘 교회에 와서 기도를 하고 앉아 있지만, 맥이 있구나 없구나 하는 감이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대인관계에 있어서도 그 감이 오고, 어떤 일이나 물건에 대한 감정도 들어오는 것입니다. 또, 말을 하는 데 있어서도 내가 공명체와 같은 입장에 서서 이것이 파격적이냐, 아니면 순화적이냐, 즉 화합하기 위한 것이냐하는 것을 대번에 측정해야 됩니다. 또한 몇 퍼센트나 직접적인 결과를 가져왔느냐 하는 것을 분석해야 합니다. 이러한 문제를 여러분이 개발하면 누구나 체휼신앙권내에 들어갈 수있습니다. 그런 것을 느끼고 사는 사람은 지칠래야 지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통일교인들은 전부 하늘에 끌려 다니다가 하늘이 떠나 버리면 지쳐 버리고 맙니다. 그것은 왜 그러냐 하면 체휼신앙의 중요성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생활권내에서 승리적 결과, 즉 생활권내에서 신의 목적을 중심삼아 가지고 그런 결과를 타진시킬 수 있는 가치적 내용이, 내가 대하기 전보다 대하고 난 후에 더 좋은 결과로 찾아진다 할 때는 아무리 핍박이 와도 그냥 밀고 나가는 것입니다. 절대 굴복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 행한 결과가 마이너스 될 때는 아무리 힘을 내려고 해도 후퇴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후퇴할 수 있는 일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피해가 어떻겠습니까? 한 번 후퇴하고 난 다음에 그것을 바로잡기란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한 번 실수하게 되면 그것을 보충하기가 얼마나 힘든가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되면 떨어질 수 있는, 즉 마이너스 될 수 있는 것은 생각조차 안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물건은 보려고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또, 그런 사람은 대하려고 조차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 은혜받게 될 때는 사람을 많이 꺼리게 됩니다. 물건도 함부로 이것 저것 접하지 못하고 단조로운 것만을 대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일상적으로 욕심을 갖고 움직일 수 있는 물건은 절대 대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렇지 않은 물건, 즉 무관심하게 대하던 물건들만 대하게 합니다. 대하게 되면 욕심이 앞서는 물건들은 절대 못 대하게 합니다. 말도 그렇습니다. 자기를 변명하려고 하는 말은 못하게 합니다.
실제 신앙생활에 있어서 영적 체험은 그렇게 해 놓고서 벌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와 같은 영적인 체험은 못하더라도 생활에서 느껴지는 느낌을 분석하는 도수를 높여 나가야 합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이런 단계에 이르면 무슨 현상이 벌어지느냐? 삼각적인 관계에서 직접적인 결과를 타진하는 놀음이 많이 벌어집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제 3의 일로서 나와 하등의 관계가 없는 일인데도 불구하고 관계를 맺음으로 말미암아, 계획적인 것은 아니지만 우연하게 체휼적인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노력하게 되면 제 3점의 일로서 나와 관계없는 일이라도, 척 느껴지는 느낌을 통해서 관계를 맺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처럼 생활권내에 있어서 발전할 수 있는 동기를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아침에 집을 나갔다가 저녁에 돌아올 때는 절대 마이너스되어 가지고 들어오지 말라는 것입니다. 돌아올 때는 반드시 아침에 나갈 때보다 기쁜 입장, 즉 플러스된 입장에 서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집안에 불화가 벌어지지 않습니다. 만일 마이너스되어 들어온다면 자기 아내든지 아들딸에게도 마이너스 느낌을 주게 됩니다. 그것은 죄입니다. 선을 추구해 나가야 하는 입장에서 볼 때, 이런 입장에 서는 것은 선을 깎아내리는 입장이 되므로 이것은 하나님 앞에 기쁨이 되지 못하고 서러움이 됩니다.
그러므로 집을 나갔다 돌아올 때는 아무리 어려운 입장에 처했다 하더라도, 반드시 그 어려움을 탕감시켜 놓고 기쁨의 조건을 들고 들어와야 합니다. 만일 직장에서 분하고 기분 나쁜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집에 와서 풀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 자리에서 풀든가, 아니면 다른 일로 대체해서 그 이상의 기쁨의 조건으로 탕감시켰다는 놀음을 해 놓고 집에 들어와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술 같은 것이 일면의 보충작용을 한다는 겁니다.
그러기에 이런 것을 보강할 수 있는 간접적 자기의 비법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길을 가다가 일부러 전신주에 이마를 부딪쳐서 그 아픈 것으로라도 탕감의 조건을 걸라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탕감받는다는 회개의 기도를 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아이들에게 줄 눈깔 사탕이라도 사 가지고 아이들의 기뻐하는 모습을 생각하고 그 기쁨을 가지고 들어오라는 것입니다. 혹은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이면 옛날에 자기가 좋아하던 봄 노래라든가 가을 노래를 불러서 오늘의 슬픈 감정을 넘어 옛날의 기쁘던 감정을 살려서 그걸 중심삼고 들어오라는 것입니다.
집에 들어와서는 아내를 대하나 아들딸을 대하나 그런 기쁜 표정과 기쁜 마음으로 주고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대상이 결정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때까지 직장에서 타격받았던 슬픔을 완전히 넘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 망할 수밖에 없었던 환경을 막아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루 전체를 중심삼고 이러한 생활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이것은 작전입니다. 하루를 무심코 살아서는 안 됩니다.
어떤 일을 대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산이면 산을 보게 될 때도 그 산을 중심삼고 하나님의 창조성에 대한 느낌, 아름답다든가 신비스럽다는 느낌을 통하여, 하나님이 내 한 가치를 이렇게 고귀하게 만들기 위해서 저렇게 훌륭한 상대적 물건을 지으셨구나 하는 것을 느끼고, 기뻐하고 좋아하면서 하나님 앞에 찬양을 돌려 드리게 될 때, 거기에서 충격적인 자극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완전히 주고받으면 하나되기 때문에 취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떠나고 싶지가 않게 됩니다. 그 가운데서 뒹굴고 싶은, 애기와 같은 마음이 되고, 또 부모와 같은 마음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감정을 아무것도 아닌 자연을 보는 가운데서도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혹은 흘러가는 물을 중심삼고도 얼마든지 사색에 잠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체휼적인 감도를 넓혀 가게 되면 하나님이 창조하면서 느끼시던 기쁨까지도 공명해 들어오게 됩니다. 그것이 아무 생각없이 기도하는 것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생활권내에서 이러한 생활을 중심삼아 가지고 체휼적인 감도를 어떻게 배양해 나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상대를 대하게 되면 어떠한 표정을 해야 되겠다고 하는 것을 항상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게 연구해 나가게 되면 자기가 어떤 표정을 지을 때, 상대에게 좋은 인상을 주었다, 그러니 나는 어떻게 나가야 되겠다, 이렇게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대하는 모든 만물은 교재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영적인 세계의 직접적인 감응이 아니면 간접적인 감응을 일으킬 수 있고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대상은 하나님의 창조물입니다. 이 창조물은 하나님의 성상을 닮아난 것이기 때문에 그 가운데는 간접적이나마 그 성상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따라서 그 가운데에는 우리가 반드시 관계 맺을 수 있는 선의 요소, 내적인 성품이 있기 때문에 그 성품을 따라 움직여서 연결시키기 위한 생활을 넓혀 나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는 어떠한 일도 지장이 없고 마이너스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더우기 여러분은 탕감법을 알고 있습니다. 내가 중심적인 존재가 되려면 공적인 입장에서 탕감시켜 놓는 환경을 많이 가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중심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내 밑천을 많이 내줘야 된다는 것입니다. 밑천을 내주는 것은 손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어려움을 당한다, 피해를 입었다 할 때에는 탕감법으로 소화시키라는 것입니다.
내가 선을 행함에 있어서 불쌍한 사람을 위해서도 주지만 원수를 위해서 참되게 주니 이것이 얼마나 멋지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사지에 가더라도 피해를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동기의 존재는 원수가 되었더라도 나는 공적인 입장에서 소화시키고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런 마당에서도 원수를 원수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자리를 보다 양면적인 가치를 차지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자리로 알고 거기에서 느껴지는 깊은 가치를 탐구하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수난길이라 하더라도 그 수난길이 자기에게 피해가 되지 않고, 걸리면 사지에 빠져 헤맬 수 있는 어떠한 사탄의 올무라 하더라도 그 올무와는 하등의 관계없는, 오히려 사탄이 원수시 할 수 있는 승리의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신앙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는 사탄이 아무리 작용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것으로 화해시킬 수 있는 입장에 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악한 세계에 있더라도 언제나 하나님의 입장을 취할 수 있는 분입니다. 어떠한 핍박,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그것들이 나 자체를 꺾어 버리고 망하게 하지는 못합니 다. 오히려 승리의 자료로서 승리의 결과를 가져오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6천년 복귀역사를 해 나오는 데 있어서 사탄이 아무리 반대했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승리의 결과로 체득시키고 소화시켜 나오신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는 틀림없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활태도를 여러분이 관계지어 나가야 됩니다.
물건을 대할 때보다 사람을 대할 때 감정이 더 빠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에 대해서 연구를 많이 해야 합니다. 사람을 대하는 데 있어서는 말로 표현해야 되는데 말만 해 가지고는 안 됩니다. 책임지지 못할 말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행하지 못할 말은 하지 말라는 겁니다.
서로서로가 주고받는 자리에서 교류하고 서로서로가 주고받는 자리에서 하나의 공통목표를 추구해 나가게 될 때는, 반드시 실천될 것으로 알고 그렇게 느끼고 그것이 사실이 됐다 할 때는 그 두 사람 사이는 말하고 행한 그 결과가 있어서 서로 좋아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맺어진 친구는 같은 영계에 안 갈래야 안 갈 수 없습니다. 친구를 잘 두면 그 친구가 높은 영계에 가게 될 때, 나도 그를 따라갈 수 있습니다. 내가 언제나 그와 같이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인연이 맺어졌다면 그 친구가 간 영계를 나도 따라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그가 나를 상대로 하기를 무엇보다도 좋아하게 되면 내 부족한 것을 보충시켜서 좋을 수 있는 주체 앞에 상대적 자리를 결정짓고 나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좋은 선생, 좋은 친구를 구하는 것입니다. 좋은 선생과 더불어 가까이하고 주고받아서 기뻐할 수 있는 기준만 되면, 그 선생이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그 선생이 차지할 수 있는 영광의 자리에 동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체휼적인 환경을 발전시켜 나가라는 겁니다.
여러분이 동네에 들어가게 되면 개가 짖는데, 그 짖는 소리를 무심코 들으면 음색이 다 같아요. 그 멍멍 하는 소리는 마찬가지지만 영적인 분위기를 중심삼아 가지고 하나님과 더불어 같이 있다는 입장에서 들어 보면 그것이 천태만상으로 다르게 들립니다. 동네에서 짖는 그 개가 부잣집 개인지 가난뱅이 집 개인지 느낌이 온다는 것입니다. 망하는 집의 개짖는 소리는 그른 기분이 납니다. 그렇지만 부잣집 개가 짖는 소리는 선하게 들려서 그 짖는 소리에 취하게 됩니다. 기분이 좋다는 거예요. 개가 짖으면 성이 나고 그러잖아요? 그런데 그것이 충격적이고 기분 나쁜 소리로 들려야 할 텐데도 불구하고 그 소리가 박자가 맞는, 화음을 이룬 소리 같은 기분이 든다는 것입니다. 그런 소리를 듣고 쓱 가 보면 아니나 달라, 틀림없이 흥하는 부잣집 개입니다.
또, 아기들이 울어도 그 아기가 흥하는 집의 아기냐 아니냐 하는 것을 그러한 습관적인 입장에서 들어 보면 대번에 알 수 있습니다. 척 들어 보면 '아하, 저 아기는 어째서 우는 구나 ! 그게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들어온 느낌이 맞는지 확인해 보면서 체험을 하면 점점 적중률이 높아집니다. 그렇게 감도를 키워 나가야 됩니다.
선악이라는 것은 생각 가운데서 결정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알겠어요? 선악이라는 것은 생활권내에서 결정되어집니다. 천국과 지옥이 여러분의 관념 세계에서 결정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생활무대에서 결정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게 중요한 것입니다.
전차를 타고 사람들을 둘러보면 기분 나쁜 사람과 기분 좋은 사람을 대번에 압니다. 기분 나쁜 사람은 나보다 영력이 낮거든요. 그러나 기분 좋다는 사람은 그 상대 이상의 사람들입니다. 만일 영적인 체험이 있는 사람이 있으면 쓱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대번에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그렇잖아요? 동물도 자기가 죽고 사는 것을 아는데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자기의 일생을 모르고 살겠어요? 전부다 사리사욕에 얽매여 가지고 하나님을 등지고 사니까 그렇게 되지만, 하나님과 더불어 살게 되면 알게 됩니다. 말을 하더라도 하늘과 더불어…. 이렇게 살게 되면 어떤 때는 설교도 아무 제목도 안 가지고 나와서 그냥 해보는 겁니다. 그래 가지고 내가 공명체가 되어 말을 하게 되면 입이 움직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하나님의 설교입니다. 저절로 제목이 떠오릅니다. 여러분들이 어디에 가서 말을 하다가 질문에 딱 부딪히게 되면 마음의 문을 활짝 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답이 들어옵니다. 빠르다는 거예요. 저 사람이 나를 깎아 먹으려고 하는지 어떤지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미국 가서 어떤 일이 있었느냐 하면, 어느 두 딸의 어머니가 찾아 왔어요. 아주 좋은 예물을 사 가지고 와서 '우리 딸이 좋아하는 동양에서 온 통일교회 선생님을 보러 왔습니다' 하는데 척 대하자 기분이 나빠요. 속이 뒤틀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들어서자마자 뭐냐고 하면서 들이 쏘았습니다. 아예 기분 나쁘게 들이 쏜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신이 어떻게 알고 그러느냐는 것입니다. '알기는 어떻게 알어 ? 당신 마음 보고 물어봐. 그런가, 안 그런가? 천벌이 내릴 거라구' 이 한마디에 때려잡은 것입니다. 그런 일이 벌어진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한 것이냐 악한 것이냐를 분별하지 못하고는 하늘 길을 가지 못합니다. 선생님이 틀림없다 하는 일은 틀림없습니다. 이런 무엇이 있어야 앞으로 남이 모르는 큰 일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어디서 키워 나가느냐? 생활에서 키워 나가야 합니다. 체휼적 신앙이 중요하기 때문에 체휼신앙을 키워 나가야 합니다. 그러려면 나하고 관계되었던 사람을 절대 그냥 돌려보내지 말라는 겁니다. 내가 대하기 전보다 플러스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가 나를 공격하더라도 플러스됐다는 조건을 남겨라 이겁니다. 그렇게 되면 나는 언제나 장사해서 밑지지 않고 남긴다 이겁니다. 알겠어요? 남긴다 이거야.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이 나를 이용해 먹으려다 목적이 틀어질 때는 내가 그 사람에게 빼앗겼던 것을 몽땅 빼앗아 오는 것입니다.
주체와 대상이 하나되게 될 때는 그 결과는 주체와 대상의 것이 되지요? 그렇지요? 하나님이 주체가 되고 내가 대상이 되게 되면 악한 사람에게 절대 지배를 안 받는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악한 사람이 있다고 해도 그 사람의 배후에는 그를 후원하는 선조들의 선한 공적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은 선대로, 악은 악대로 빼앗아 올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우리 생활 가운데에서 배후를 중심삼고 되어지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루의 생활을 그렇게 하고 대하는 일을 무심코 대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것은 전부다 하늘이 실제 생활을 중심삼아 천국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재료로써 하나의 교재로써 나에게 접근시켜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만큼 그것을 좋은 결과로 소화시킬 수 있는 주체적인 자아를 어떻게 발견하느냐 하는 데 노력해야 됩니다.
그것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여러분의 감, 그 첫번 느낌을 아버지 앞에 언제나 의논하고 공명체가 되어야 합니다. 마음을 활짝 열고 밤이나 낮이나 언제든지 하늘을 대할 수 있는 그런 기준만 되면 반드시 영파(靈波)가 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몰라서 그렇지 이것을 차차 통계적으로 키워 나가야 합니다. 키워서 '아! 내가 감정한 것이 몇 퍼센트 맞았다' 하는 자신을 가질 수 있기까지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것이 체휼이 안 되면 내가 정성을 안 들이고 완전한 공명체가 못 되었기 때문에 그것이 안 들어온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안테나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순수한 안테나와 같은 입장에 서서 영계의 파장을 감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영계는 언제나 영적인 파장을 송신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기 때문에, 내가 아들의 입장에서 하려는 데는 반드시 주체적 입장에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어떤 것이 주체와 대상 앞에서 필요한 이중목적의 가치가 되느냐 안 되느냐 하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여러분이 첫번 느끼는 감을 통하여 분석 발전시키는 데 노력하면 자연히 자기 스스로가 실제 생활에 하나님을 모시고 살게 됩니다. 관념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생활적인 하나님으로 모시고 살아야만 이 험악한 세상에서 비로소 타락하지 않고 천국의 인격을 완성할 수 있습니다.
기도를 통해서, 신령의 역사를 통해서 은혜의 기준에 갈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그것은 영계에서 영인들이 협조해 주어서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래 우리 인간은 생명체라든가 생령체를 갖게 되어 있습니다. 나 자체에 영이 있다는 것입니다. 영계의 협조받지 않은 영력을 중심삼아 가지고 영의 작용을 계발만 해 놓으면 영인들이 지도해 주지 않아도 나 자체의 생령체가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 어느 기준만 올라가게 되면 하나님이 서러워하실 때 나에게도 형용할 수 없는 서러움이 찾아오게 됩니다. 어떤 사람을 만났다가 떠나 보내는데 말할 수 없는 서러움이 벌어진다 하게 되면, 그런 사람이 가는 길은 제물의 길이 아니면 하나님이 긍휼히 보시는 길입니다. 두 가지 중에 한 가지 놀음이 벌어져요. 그런 일을 실제로 느끼고 실제로 생활권내에서 자극을 받을 수 있는 입장에 선 사람이라야 체휼적인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슬퍼하시는 것을 항상 감별하면서 사는 사람은 악한 사람이 될래야 될 수 없고, 하늘의 법도에 어긋날래야 어긋날 수 없습니다. 그런 남자는 아무리 미인이 유혹하더라도 안 넘어갑니다. 거기에 동화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공적이든 사적이든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사람은 대인관계에 있어서 남을 이용하려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무엇이든지 자기의 이익을 중심삼고 판단하려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좋아하는 사람은 양보하는 사람입니다. 양보는 무엇이냐 하면 내가 자꾸 그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가 하자는 대로 자꾸 따라가는 것입니다. 자꾸 따라가면 돌게 되고, 돌다 보면 나중에는 내가 그 자리를 점령하게 됩니다. 결국은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점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온유겸손하고, 그 사람이 하자는 대로 순종, 복종, 굴복해야 합니다. 그것은 왜 그러냐 하면 그 사람을 완전히 점령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만을 점령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전체를 점령하기 위한 작전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신앙세계에 있어서는 자기를 부정하고 대신 상대방의 요구에 완전히 순응해 들어가는 작전을 해야 합니다. 그것은 나 자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완전히 점령하기 위한 하나의 작전입니다. 이런 것을 여러분들이 생활에서 감지해야 됩니다.
선생님이 요즘은 그러지 않지만 옛날에는 그런 일을 많이 했어요. 거리에 나가서 지나가는 사람을 보고 어떤 느낌이 오느냐 알아보는 것입니다. '아, 저 사람은 틀림없이 이렇다'고 생각이 될 때, 그것이 진짜 맞는지 안 맞는지 따라가면서 타진을 해보는 것입니다. '당신이 이랬지요? '하고 물어 봅니다. 그것은 영계에서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벌써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이런 사람이지요?' 하고 물어 보면 '어떻게 알지요?' 하고 놀랍니다. 어떻게 알긴 어떻게 알아…. 틀림없이 맞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저 방에 누가 있느냐, 좋은 일 하고 있느냐 나쁜 일 하고 있느냐, 좋은 사람이 살고 있느냐 나쁜 사람이 살고 있느냐 하는 것을 대번에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안테나를 점점점 높여서 그렇게 발전시켜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주의 모든 인연을 따라 가지고 감별하는 감별사의 생활이 신앙자의 생활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여러분은 무심할는지 모르지만 선생님은 여러분이 맨 처음 들어와서 느꼈던 그 인상을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은혜를 받아서 좋아하던 기분과 지금 상태와의 차이를 다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을 대했을 때 벌써 마이너스가 되어 있으면 기분이 나쁩니다.
이제는 내가 책임지고 키워 줄 수 있는 때가 지나갔습니다. 가을 절기가 되었는데 이제야 영양분을 날라다 주는 그런 놀음은 안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놀음을 해서 되겠습니까? 그러나 봄이면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봄은 넘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누어줘도 결실을 맺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가을은 잎이 마르고 줄기가 말라 들어가는 때이기 때문에 나누어주면 둘 다 미완성되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선생님이 안수 기도도 많이 해주었습니다. 기도할 필요도 없이 말만 하면 말하는 대로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놀음을 안 합니다. 왜냐? 그것은 자체가 소모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보다는 다른 일을 해야 되겠기 때문입니다. 그런 문제가 있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체휼신앙이 얼마나 필요한가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기도만 해 가지고는 안 됩니다. 기도를 했으면 실천해야 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공약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공약이니 이것은 맹세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했으면 반드시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가지 문제를 가지고 매일같이 기도할 필요는 없습니다. 진정한 기도는 한번 하는 것입니다. 그러고는 10년이고 20년이고 기도하는 자세로 만나기를 그리워하고 찾는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갖고 가는 사람이 제일 무서운 사람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내가 아버지 앞에 선서하고 맹세했기 때문에 10년, 아니 일생 동안 그 일이 오기를 환영할 수 있는 자세로서 그 일을 어디서 만날까 찾는 사람은 기도한 것을 이루는 자리를 찾아가고 있는 사람입니다. 기도만 10년 하는 사람보다 한 번 찾아가는 사람이 지혜롭기 때문에 10년 돼서 찾았다 할 때는 그 사람은 이미 기도의 목적을 이룬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실천이 문제입니다.
그 실천이 어디 있느냐 하면, 하늘나라의 하나님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생활권내에 있습니다. 우리의 생활권내에서 천국과 지옥이 갈라집니다. 생활권내에서 천국이 이루어지고 지옥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몸과 마음을 중심삼고 거동하는 여기에 플러스 세계와 마이너스 세계가 왔다갔다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주위에 사는 사람들을 보면 그렇게 생활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전부다 둥둥 떠서 뿌리 없는 부평초와 같습니다. 뿌리가 있어야 합니다. 말을 하나 무엇을 하나, 이 삼각관계를 중심삼아 가지고 사위기대 목적을 달성해야 합니다. 여러분, 창조목적이 무엇입니까? 사위기대 완성이지요? 사위기대는 어디나 통하는 것입니다.
일을 할 때도 마음과 몸이 중심과 하나되어 일체를 이루어 가지고 붙들지 못하면 이것은 악입니다. 마음과 몸이 진정하게 붙들면 그것이 사위기대 입니다.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위기대가 목적입니다. 내 마음과 몸이 하나되어 그 일과 일체되지 않으면 사위기대 목적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그 일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감독이 있다고 해서, 누가 본다고 해서 일을 합니까? 천국과 지옥은 공중에서 벌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생활권내에서 마음과 몸이 하나되어 삼대상 목적권을 중심삼고 창조원리 법도에 의해서 벌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사람에 대해서 연구하라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마이너스될 수 있는 사람인가, 플러스될 수 있는 사람인가…. 척 보면 안다는 것입니다. 첫 인상만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는 선생님이 빠릅니다.
선생님이 수택리에서 260쌍, 5백명이 넘는 일본 사람들을 열 시간 이내에 전부다 상대를 맺어 주었습니다. 그럴 때는 안테나를 최고로 높이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이렇게 해서 틀림없다 할 때는 천생배필이 묶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체휼신앙이라는 것은 영계에서 협조해서 하는 것보다 생활권내에서 감정해 가지고 발전시켜 나가야 합니다. 자기가 피해받지 않고 전진적인 신앙과정, 생활과정을 갖출 수 있는 사람은 틀림없이 하나님이 같이하시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발전한 사람에게는 가르쳐 주면 틀림없기 때문에 그가 원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기도만 하고 행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찾아오셨다가도 손해보기 때문에 떠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체휼적 신앙의 기반을 생활권내에 세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임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시겠지요? 「예」
사랑하는 아버님, 저희들은 모든 생활에 있어서 당신과 더불어 대상목적을 추구해야 하는 일생 노정이 남아 있는 것을 명심해야 되겠습니다. 이 과정에 있어서 길이길이 아버님께서 같이하여 주시옵고, 저희가 가는 길을 온전히 아버님 뜻 가운데서 이루어 영광받을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옵고 원하옵니다.
부디 이와 같은 체휼적인 신앙의 중요성을 느끼는 생활을 계발하고, 아버님이 기뻐하실 수 있는 내정적인 인간이 될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옵고 원하옵니다.
만만사의 은사가 저희들의 생활 가운데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옵니다. 모든 말씀을 참부모님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책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