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타락으로 하나님을 잃고 피조만물을 잃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을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지 않으면 안 됩니다. 부모․가정․종족․민족․국가를 어떻게 찾을까? 부모를 어떻게 만날까? 자기 자신이 어떠한 모습이 되어서 만날까?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동안 하늘과 동반한 무리들의 수고가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것은 이 국가를 세움으로써 하나님과 상봉하여 역사적인 수고를 상속 받아야 합니다.
단계를 넘어갈수록 내정적(內情的)인 심정에 그 역사성이 가해지기 때문에 점점 더 어렵습니다.
개인으로서 가정복귀를 할 때 가정적 탕감이 필요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뜻과 완전히 일치될 수 없습니다. 종족 민족 국가 세계로 넘어가는 데는 반드시 탕감이 있어야 하고 희생이 필요합니다. 국가적인 경제 건설에도 정신적인 희생과 육체적인 희생과 물질적인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한 사람을 세우기 위해서 역사 전체가 수고했습니다. 한 사람 찾는 데도 무한한 역사적인 수고가 있었는데, 오늘날 통일교회를 세워 가정 종족을 세워 나가게 된 것은 이 이상 하나님이 기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가정, 아들딸, 친척, 민족의 단계로 거쳐 나갑니다.
폭발적인 심정을 가지고 나서야 합니다. 습관적인 생각 그대로는 안 됩니다.
아담가정의 아벨과 노아가정의 함이 실수했기 때문에 역사가 저끄러졌습니다. 다시는 그 걸음을 안 걷고, 오히려 그 실수를 심판하고 효자 효녀의 기준을 세우겠다고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역사적인 모든 실수를 내 실수로 받아들여 회개하고 회복하지 않으면 역사적으로 내려온 내정적인 심정을 상속 받을 수 없습니다.
일생 동안 회개해도 다할 수 없는 수고의 노정을 하나님은 걸어오셨습니다.
인간은 사특(邪慝)합니다.
주체와 대상이 거꾸로 될 때는 사탄의 지배를 받습니다. 하나님을 주체로 모시고 내가 상대적인 위치에 서야 됩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가 주체로 서서 하나님을 대상으로 대하려 합니다.
그동안 들어왔다가 배반하고 나간 사람들의 것을 뒤에 들어온 사람들이 재탕감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통일교인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선생님의 그동안의 내정적인 소원을 상속 받아야 합니다.
부모는 자기가 낳은 아들딸을 하나님이 아담 해와를 창조하시고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던 것처럼 해야 합니다.
나는 어떠한 모양, 어떠한 자리에서 하나님을 만날 것인가? 이러한 내정을 상속 받지 않고는 전통이 상속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상봉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걸어온 과거의 역사를 알고, 현재의 사정을 알고, 미래의 소망의 기준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하나님과 상봉할 수 없습니다.
가정을 이루는 것은 나 잘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갈라져서 이중의 십자가를 지고 싸우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종족도 민족을 구하기 위해서 흩어지고, 국가도 다른 국가 혹은 세계를 찾기 위해 다시 흩어졌습니다. 축복받은 부부도 단둘이 잘살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가야 합니다. 죽어도 가다가 죽고, 헤어져도 가다가 헤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중심삼고 절대적으로 얽혀 있어야 합니다.
부자의 관계는 어떤 무엇으로도 깰 수 없습니다. 원자탄으로도 깰 수 없습니다. 절대로 깰 수 없고, 헤어질 수 없고, 버릴 수 없는 관계입니다.
하나님을 맞이하고자 할 제, 그럴 수 있는 전체 통일교회 식구들이 되어 있는가? 그럴 수 있는 내 자신이 못 되어 있으면 중심자의 명령에 죽고 살 수 있는 내 자신이 되어야 합니다. 가정도 그 대표자의 명령에 죽고 살 수 있는 자리에 서야 하고, 종족도 그 대표자의 명령에 죽고 살 수 있는 자리에 서야 합니다. 마음과 생활이 거기에 기준을 두고 일치점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대표가 하나님의 내정과 일치된 길을 걸으면 전체가 그러한 것으로 대해 주십니다.
앞으로 통일교인이라면 선생님의 명령에 절대복종해야 합니다. 그러지 못하면 선생님과 상관이 없습니다. 절대복종하게 되면 같은 혜택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자면 같이 산다는 공동적인 생활 감정을 가져야 합니다.
일체의 관심이 교회의 중심에 있어야 합니다. 같은 충격과 같은 아픔을 느껴야 합니다. 자신은 자격이 안 되지만 대신자에 의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혜택을 받습니다.
탕감조건에 순리적인 길은 없습니다. 내가 좋아할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뜻이 좋아할 수 있는 길을 가야 합니다.
‘내가 이 모양 이 꼴이 됐구만.’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인식은 화가 됩니다. 그것이 역사적으로 인정되고 보증 받을 수 있는 길이었느냐가 문제입니다. 고생과 곡절이 없는 순탄한 노정을 걸은 사람의 생활보다 복잡한 곡절의 노정을 걸은 사람의 생활이 더 깊고 넓은 맛이 있습니다.
선생님도 터전을 잡으려 하지 않습니다.
언제 내가 하나님 앞에 진정한 의미에서 부모라고 기쁘게 자신 있게 대한 순간을 가져 보았느냐?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허둥지둥한 때를 가져 보았느냐? 하나님은 허둥지둥한 걸음을 많이 걸으셨습니다.
미친 사람같이 혼자 쑹얼쑹얼하는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부부가 외아들을 낳다가 죽인 그 심정 그 이상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미친 사람과 같이 원수의 아들딸을 데려다가 친아들보다 더 사랑하기에 힘쓴 하나님의 내정을 알아야 합니다.
체면과 위신, 먹고 배고픈 것을 느끼고 할 여지가 없어야 합니다.
자기 자식이 앓는 데 신경쓰는 것보다 뜻의 움직임에 대해서 더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이 안 되어 있거든 절대복종이라도 해야 합니다.
선생님이 무엇을 하시는지 모르면 밤잠이 안 와서 한밤중에라도 뛰어와서 물어보고 갈 수 있는 그런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모심으로 구원받는다고 했습니다. 선생님은 하나님에 대해서 언제나 그렇게 삽니다. 촌분도 방심하지 못합니다. 아기를 품을 때도, 쉴 때도 그 마음을 떠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다 한국에 와 살려고 합니다. 선생님의 소식을 빨리 알기 위해서입니다. 자기에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지고 대한민국의 땅만 짚고 살아도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내 몸을 치고 나서 오히려 하나님을 위로할 수 있는 탕감의 노정을 걸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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