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들이 모두 지방에서 본부에 올라와 가지고 40일 수련회를 시작하여 이제 끝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이제 수련생 여러분은 고향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돌아가기 전에 뜻을 몰랐던 과거와 뜻을 안 지금의 자신이 어떤 차이를 가진 환경에 머무르고있는 지를 알아야 되겠습니다.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참다운 양심기준을 세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해

그러면 과거의, 여기에 올 때의 여러분과 이제 돌아갈 때의 여러분을 이런 입장에서 바라보게 될 때, 이제 하늘편에 서서 세상을 대신하여 혹은 과거의 내 자신을 대신하여 과연 설 수 있는 내가 되어있느냐? 과거에 믿을 수 없던 내 자신을 돌이켜 믿을 수 있는 내 자신이 되어 있느냐? 그리고 과거에 모든 환경에서 보여 줄 수 없었던 내 자신이 세상이나 혹은 하늘 앞에 보여 줄 수 있는 내 자신이 되어 있느냐?

이러한 전반적인 문제를 두고 바라보게 될 때, 여러분 자신을 중심삼고 여러분 자신은 이제 이러한 면에서 당당코 보여 줄 수 있다는 신념이 서 있어야 됩니다. 그걸 비교해 볼 때, 올 때의 여러분과 갈 때의 여러분과는 그 차이가 큽니다. 그것을 여러분 자신이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그 기준 밑에서, 그 깨닫는 범위 밑에서, 혹은 깨닫는 그 도수 밑에서 여러분들의 갈 길이 좌우된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것을 먼저 알아야 됩니다.

다시 돌아가서…. 여기 오기 전에 여러분들은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말할 수 없는 불쌍한 자였던 것을 여러분들은 몰랐습니다. 그 자신에 있어서 내 생애를 맡기고 싶고, 그 자신에 있어서 생활 가운데 남이 믿지 못하는 것을 믿고 싶고, 그 생활 가운데서 남이 갖지 못한 것을 갖고 싶고, 또 그 생활 가운데서도 나를 통하여 남 앞에 무엇을 주고 싶었던 이런 마음을 갖고 산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면, 과거의 뜻을 모를 때의 여러분 자신을 두고 볼 때, 내가 믿고 싶었던 그 믿음 혹은 자랑하고 싶고 무엇을 남겨 주고 싶고 보여 주고 싶었던 이런 생각은 가졌을지라도 과연 그것을 달성할 수 있었느냐? 달성할 수 없었습니다.

세상을 바라보게 될 때, 여러분은 지금 어느 정도 헤아릴 수 있을 거예요. 과거에 살았던 그 세상이라는 것이 믿을 수 없는 세상이었어요. 내가 아무리 좋다고, 믿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던 그 믿음도 때와 환경에 따라서 변해 가는 것입니다. 내가 보여 주고 싶고 내가 자랑하고 싶었던 그 무엇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도 역시 때와 환경이 달라짐에 따라, 시대가 흐름에 따라 영원한 어떤 생명적인 인연을 남겨 주고 가는 것이 못 되기 때문에 가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내가 더 배우고 무엇을 욕망하여 거기에 정성을 다한다 할지라도, 그것 역시 내 자체에 영원한 어떤 크나큰 가치적인 문제를 걸어 놓고 기쁨을 내 마음으로부터 생활환경까지 나타낼 수 있는 그 무엇으로서 찾아질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불쌍한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은 내가 낮은 자리에 있기 때문에 높은 자리에 가야 된다는 것을 쉴 새 없이 내게 명령하는 거예요. 여기보다 조금 더 좋은 곳, 더 좋은 곳…. 부락에 있어서 수많은 사람이 우러러 볼 수 있는, 좋다는 그 기준을 넘어서서 면(面)이면 면 가운데 좋은 사람이 되라고 마음은 명령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 면 가운데 좋을 수 있는 그런 기준에 섰다 할지라도 마음은 그 기준을 넘어선 사람을 대신해야겠다고 하는 거예요.

혹은 군을 통하든가 또 군에서 역시 그런 입장에 섰다고 할지라도 나라를 대신하든가 더 나아가서는 세계를 대신하여 …. 자꾸 커지는 거예요. 무한히 커지는 거예요. 그러한 마음이 내 자신을 자극하고, 내 생활에 있어서 내 스스로 확정적인 사실을 모르더라도 암암리에 방향을 제시하여 나에게 솟구치는 느낌을 갖게 하는 거예요. 이것을 거부할 수 없고, 벗어날래야 벗어날 수 없는 운명에서 지금까지 살아온 우리 자신인 것을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나, 좋을 수 있는 나, 혹은 천상천하에 빛낼 수 있는 나를 고대하는 마음의 인연을 갖고 있는 이 사실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그 사실이 얼마나 귀하다는 걸 알아야 됩니다.

그것은 상대적으로 나타난 어느 스승보다도 더 귀한 스승입니다. 여러분들이 상대적으로 믿고 상대적으로 무엇을 요구하고, 즉 나 외에 그 어떤 존재를 통하여 무엇을 바라보고 거기서 찾고자 하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귀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통하여 여러분을 훈계하는 그 양심적인 존재가 귀하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나를 보다 나은 곳으로 가라고 늘 명령하고 있는 양심

이제 여러분들이 고향에 돌아갈 때는 무엇을 가지고 가야 되느냐? 올때의 나와 갈 때의 나의 차이를 무엇으로 채울 것이냐? 뜻도 좋다 이거예요. 이념도 좋다 이거예요. 물론 그런 기준에 서야 되겠지만 그 뜻과 그 이념이 내 것으로 되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마음 깊이 양심의 터전위에 이 뜻과 그 소망의 실현을 일치시켜야 됩니다. 그런 기준을 세우지 않는 한 안 된다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여러분의 마음이 살아 명령하는 곳에는 뜻이 살아 있는 것이요, 이념이 살아 있는 거예요. 과거에는 여러분들이 그런 양심의 작용, 내가 참다운 모습의 존재로 태어나 그런 욕망 명령을 들을 줄도 몰랐다는 거예요.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는 거예요. 어떤 나를 만들기 위해서 이렇게 쉬지 않고 나에게 명령하고 있는지를 몰랐어요.

그렇지만 이제 여러분들이 가는 데 있어서 하나의 차이점을 놓고 그것을 채워야 하는데 그것은 무엇으로 채우느냐? 양심으로 채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그 기준을 세워야 됩니다. 이 양심을 중심삼고 올바로 세계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세계를 친구 삼을 수 있는 거예요. 이 양심을 중심삼고 나라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양심을 통하여 앞으로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자의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거예요.

만일 이 양심을 통하여 천지를 사랑하는 입장에 선 사람이 된다 할진댄 하나님을 움직이는 입장에 내가 설 수 있는 거예요. 즉 하나님도 양심적인 그 기준에 있어서는 친구와 같은 입장에 설 수 있다는 거예요. 이런 나요, 엄청난 그런 복된 터전이 우리 양심의 터전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그런 양심의 터전을 가지고 여러분들은 얼마나 살아 봤느냐? 그걸 생각하게 될 때에 과거에 이 양심을 중심삼고 살았던 기억이 나지 않아요. 기억이 나지 않아요.

그러면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에 있어서 내 스스로의 가치를 존중하였던 과거의 삶이라는 것은 무엇이었던고? 양심에서 이탈하고, 이런 크나큰 선의 이념을 향하여 나를 끌어 주는 하나의 지도자 중의 지도자요, 친구와 같은 양심 앞에 나는 반역자인 것을 회상하게 됩니다. 이런 과거의 나를 여기서 무자비하게 충고하고 나선다는 이런 확고한 신념이 이제 떠나는 여러분 자신들 앞에 필요하다는 겁니다. 알겠어요? 「예」 그 차이를 발견할 줄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이 마음을 중심삼아 가지고, 양심을 중심삼아 가지고 옛날의 나와 현격한 차이를 여기서 조성하여야 합니다. 이제부터 내가 가는 세상은 하늘나라가 아니예요. 아무리 결심했더라도 여기서 측정한 이런 양심적인 기준을 중심으로 생각해 볼 때, 과거의 나와 현격한 차이를 가졌다면 내가 이제 찾아가는 길은 천국생활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예요.

여러분이 잘못하면 `이 자식' 하며 주먹질하고 혹은 기합을 주는 지도자가 있는 것이 아니예요. 사방이 뻥 뚫려 있어요. 동으로도 갈 수있고, 서로도 갈 수 있고, 남으로도 갈 수 있고, 북으로도 갈 수 있고, 동서남북 사방이 터져 있는 거예요. 자유의 문이 열려진 것과 같은 곳으로 가는 것입니다.

사방으로 열려져 있는 환경이 내 자신을 보호해 주고, 내 양심에 친구의 인연을 가질 수 있는 이런 환경이 되면 모르는데 그렇지 않다는 거예요. 열려져 있는 문마다 나를 몰아서 때려 잡기 위한 원수의 얼굴이 놓여 있는 거예요. 갈 길을 잘 닦아 놓은 것 같지만 지나가다 보면 걸려 죽는 거예요.

여러분들, 농촌에서는 그런 것을 많이 보지요? 오리를 잡으려면…. 오리 철인 요즈음 오리들이 올 거예요. 이 철에는 오리를 잡기 위해서 오리가 좋아하는 먹이를 미끼로 갖다 놓는 거예요. 길을 잘 닦아 놓는 거예요.

그런 식입니다. 보이는 환경이 자연 이상의 것으로 나타나는 거예요. 우리가 대하고 있는 현실 이상의 것으로 나타나는 거예요. 그렇게 움직이다가는 자기도 모르게 그 올가미에 치여 내 자신이 낚기움을 당한다는 걸 알아야 됩니다.

이제 우리 양심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양심은 무엇인가? (녹음상태 불량으로 일부 수록하지 못함)

여기에는 나와의 인연이 두터워지는 것이 아니라 나와는 모든 것이 관계가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래도 마음을 중심삼고 사는 사람이라면 그런 입장에 서지 않을 수 없다는 거예요. 양심적인 기준을 중심삼고 양심을 부르짖고 나서서 참다운 무엇을 찾고 있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이 세상의 복잡한 인연이…. 전체가 양심과 화동할 수 있는 이런 내적인 조건이 못 되고, 양심에 고충을 가져다 주고 양심을 파괴시키는 이런 요소밖에 되지 못하기 때문에 양심적인 사람은 이 세상을 피하고 싶은 것이 본연의 마음이예요. 알겠어요? 「예」

영원히 변할 수 없는 분을 중심으로 모신 사람은 행복한 사람

그래서 무엇을 할 것이냐? 믿을 수 있고, 내가 진정히 가르쳐 줄 수 있고, 진정히 생활할 수 있는 이런 입장의 것을 찾아가라고 양심은 뒤에서 공작을 하고 있다는 거예요. 이제부터는 알 거예요. 알겠지요? 「예」

그러면 이런 양심을 가지고 우리들이 지금까지 허덕여 왔지만 우리 양심이 고대하고 있던 참다운, 믿을 수 있는 그 무엇을 찾았느냐? 여러분 자신이 대답해 보라구요. 지금까지 내 생활 배후에 있어서 내 양심을 재촉하여 내가 믿을 수 있는 하나의 무엇을 찾아 나가기를 수만 번 명령했지만 찾지 못했던 과거의 내 자신이 이제 양심이라는 그런 존재를 세워 놓고 바라보게 될 때, 이제 양심이 소망으로서 찾고 있는, 믿을 수있는 그 무엇을 찾았느냐? 찾았어요? 「예」 그렇다면 그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내 양심이 들을수록 좋고, 배우면 배울수록 좋을 수 있는 그런 배움의 길을 찾는 거예요. 이것이 내가 배우고 싶던 최고의 것이다, 이것을 몰랐다면 어떻게 되었을 것이냐, 이것을 모르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두렵다! 이런 것을 여러분들이 배울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런 걸 배워봤나요? 그거 배워 보지 못 했으면 배워 봐야 됩니다.

이런 생활을 하고 싶은 것이 내 양심이 소원하는 생활이예요. 그런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여러분들이 책임져야 됩니다. 또 이렇게 한번 싸워 보고 싶은 것입니다. 싸워 볼 수 있는 이런 환경을 책임지고….

내가 믿고 내가 배울 수 있고, 내가 같이 살 수 있고, 나와 더불어 같이 싸울 수 있는 영원히 변할 수 없는 그런 소망의 중심을 가졌다 할진대는 이는 행복한 사람이예요. 외로운 사람이 절대 아닙니다. 아무리 혼자 있더라도 외로운 사람이 아니예요. 알겠어요? 「예」 여러분들, 찾았나요? 「예」 무엇이야? 뭐 14회 수련생들, 각 도에서 온 사람들을 내가 만나 봤다구요.

지금까지 여러분들의 생을 생각할 때에, 부모를 모시고 살지만 부모를 믿지 못했어요. 형제와 더불어 같이 살지만 형제를 믿지 못했어요. 이제 여러분이 양심으로 고대하던 믿을 수 있는 분, 진정으로 나를 가르쳐 줄 수있는 분, 진정으로 나와 영원을 걸어 놓고 같이 살 수 있는 분, 진정으로 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천하가 기뻐할 수 있는 크나큰 대이념을 향하여 같이 싸울 수 있는 분, 그런 분과 하나된 사람은 무한히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분이 누구냐? 그는 역사적인 인물이 아니예요. 역사적인 인물이나 어떤 도주들이 아니예요. 물론 도주와 부합하는 것도 있겠지만 제일 우주의 존재중심인 하나님이 그러한 분입니다. 여러분이 살고 싶었고 믿고 싶었던 최고의 중심 존재가 하나님이요, 여러분이 배우고 싶었던 최고의 중심존재가 하나님이요, 여러분이 같이 선의 이념을 세우기 위하여 악한 것을 심판하고 싶은 그런 최고의 분이 하나님이라는 거예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예」 그 하나님을 우리는 발견했다는 거예요. 이제 여러분의 양심이라는 것이 이러한것 을 발견했다고 주장할 수 있는….

믿을 수 있고, 나 같은 자에게 진정 가르쳐 줄 수 있고, 나와 같이 살 수있고, 나와 같이 선한 목적을 위하여 영원히 나와 떨어질 수 없는 이런 양심을 중심삼고 인연 맺었다는 것을 볼 때, 여러분들은 절대적인 존재입니다. 악이 침범할 수 없는 존재라는 거예요. 그러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 하나님을 발견한 것이 얼마나 크냐 이거예요. 이 하늘을 발견함으로 말미암아 만사의 해결의 중심이 결정된다는 거예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마음과 몸의 관계

그러면, 그 하나님을 발견했는데 여러분과의 관계는 어떻게 되느냐? 그분과 나와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라는 거예요. 이 신념…. 알겠어요? 「예」 아버지요 자식이라는 것! 그것이 여러분의 마음을 통하여 명령한다는 거예요. 마음이 명령하게 될 때 그 마음의 명령은 아버지를 통하여 자식에게 하는 명령과 같은 거예요.

또 몸과 마음의 관계에 있다는 거예요. 그러므로 마음이 아버지로계시면 몸뚱이는 아들로 되어 있다는 거예요. 그걸 보면 마음과 몸은 부자(父子) 같이 사는 집이예요. 알겠어요? 「예」 아버지 입장인 그 양심 앞에 아들의 입장에 서야 할 것이 몸뚱이예요. 이 인연을 잊지 말라는 거예요. 알겠어요? 「예」 어디 가든지 그걸 잊지 말라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어 가지고 내가 믿는 것도, 내가 사랑하는 것과 내가 살고 싶고 선을 위하여 싸우는 것도 아버지와 같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 마음의 주인이 아버지요, 내 마음의 중심이 아버지이니 그 아버지와 하나되어야 합니다. 그 마음은 내 앞에 아버지대신 있다는 걸 알아야 됩니다. 그 이념권 내에 있어서 나는 아들의 입장에서 명령을 받고 있으니 아들로서 명령에 순응하는 것이 천도라는 것을 깨달아야 됩니다. 요것만 잘하면 여러분들은 이제 누가 빼앗아 갈자가 없다고 선생님이 단언하는 거예요. 알겠어요? 「예!」

양심을 세워 가지고 양심을 지켜 아버지의 집을 만들어 아버지와 일치된 양심이 나를 자식과 같이 사랑한다면 어디 가든지 승리하는 여러분들이 된다는 거예요. 마음이 고대하는 소원이 있습니까? 소원과 사정을 통할 수 있는 그 기준을 넘어가서는 양심의 심정이 있는 거예요. 그 심정은 양심만이 좋아할 수 있는 게 아니예요. 그 심정은 우리 몸뚱이도 좋아하고 내 환경에 머무는 천지만물 즉, 어떤 미물까지도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심정이 남아져야 됩니다. 그것은 절대적 요인 입니다.

이 땅 위에 영원히 남아져야 하는 하나님의 소원과 사정과 심정

오늘날 이 세상에 있는 수많은 주의가 다 없어지더라도, 오늘날 현하의 그 문명체계의 모든 것이 다 없어지더라도, 아무리 좋다는 사회 체제의 그런 모든 제도가 다 없어지더라도, 오늘날 우리 혹은 우리 개체 한 자신이 없어지더라도 남아져야 할 것은 무엇이냐?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그 소원이 남아져야 됩니다. 소망이 남아져야 돼요. 천지에 소망을 두신 그 하나님의 사정이 통할 수 있는 사정만은 남아져야 됩니다.

소원과 사정이 통할 수 있는 데 있어서 하나님이 기쁨의 하나님으로서 즐거이 살 수 있는 심정만이 남아져야 됩니다. 즉 3대 요건이 영원히 남아져야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알겠어요? 「예」

하나님과 나를 중심삼고 볼 때 양심과 내가 하나되고, 하나님과 하나된 그 양심이 하나님 대신 내 몸을 통하여 아버지 입장에 서는 거예요. 그래서 나에게 명령하면 내 몸뚱이는 자식의 입장에서 명령을 받는다는 신념을 가지고 나가 싸워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이제 나가 싸우는 데에는 양심을 통해 보더라도 소원이 있고, 몸뚱이를 통해 보더라도 소원이 있고, 하나님을 통해 보더라도 소원이 있나니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물건도 목적을 중심삼은 소망을 갖지 않은 게 없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소원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원이 다르고, 우리양심의 소원이 다르고, 내 생활의 소원이 다르고, 이 세상의 소원이 다르고, 만물의 소원이 다르지만 그것은 통일의 이념, 즉 창조주의 하나의 감정을 통하여 지음받은 피조물의 인연을 가졌다는 거예요.

이 세계가 하나의 우주권 내에 존재하여 이런 인연을 통하여 서로 엉클어진 걸 바라보게 될 때, 그것은 모르지만서도, 그 자신들은 모르지만서도 그 소원하는 목적은 하늘의 인연 가운데 전부 맺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소원과 내 양심의 소원과 내 몸뚱이의 소원과 내 생활이나 세계나 전부 다 그 소원이 일치되어야 되는 거예요. 그러므로 일치된 거기서 내 양심의 소원이 이루어졌다고 할 때는 하나님의 소원도 성취되는 거예요. 내 양심이 기뻐하게 될 때는 몸뚱이의 소원도 달성하는 거예요. 모든 존재하는 천하 만물의 소원성취가 거기서 벌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원히 남아져야 할 것은 하나의 세계를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소원이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하나의 세계를 중심삼아 가지고 하나님이 여기에서 천하 만민을 중심삼고 사정을 통하고 싶고, 사정뿐만이 아니라 사랑하고 싶은 그런 어떤 크나큰 창조의 이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영원히 남아져야 할 것은, 우리들은 가더라도 남겨 놓고 가야 할 것은 무엇? 소원. 남겨 놓고 가야 할 것은 무엇? 사정. 남겨 놓고 가야 할 것은 무엇? 심정. 이 세 가지는 영원히 있어야 됩니다.

그런 견지에서 볼 때, 우리가 다시 돌아가서 생각해 봐야 할 것은…. `하나님, 당신의 소원이 성취되었사옵니까? '하면 `아니야' ,`당신의 사정이 통할 수 있게 되었사옵니까? '하면 `아니야' ,`당신의 심정을 두고 기뻐할 수 있는 자리에 있습니까?'하면 `아니야' 한다는 거예요. 알고 보니 하나님이 그런 분이예요. 알겠어요? 「예」 하나님이 그런 하나님이 되었다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이 소원성취하는 데 있어서 자기 사정을 통할 수 있는 이런 환경도 못 가졌고, 자기 심정을 통하여 참 생활적인 영광을 누릴 수 있는 이런 입장에 못 서 있으니까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냐? 불쌍한 하나님이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불쌍하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불쌍하다는 말이예요.

아직까지 복귀섭리라는 , 구원섭리라는 한스러운 역사적인 인연을 남긴 채 그것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마음대로 처리해 보지 못하고 지금까지 안고 나오니 이 얼마나 불쌍해요? 내 양심보다 내 몸뚱이보다 하나님을 중심삼은 소원, 사정, 심정이라는 그런 내용의 여건이 남아져야 할 것인데, 오늘날 양심의 소원성취가 이루어졌느냐? 아닙니다. 전부가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되었느냐? 이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 우리 원리라는 거예요. 알겠지요? 「예」 이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 우리 원리예요. 하나님의 소원이 무엇이고 하나님의 사정이 무엇이고 하나님의 심정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는 거예요. 이 원리를 배운 여러분들은 어떻게 되어야 하느냐? 하나님의 소원을….

양심이 하고자 하는 말은 무엇이냐? 하나님이 하고자 하는 말은 무엇이냐? 이 몸뚱이가, 혹은 천하 만민이 고대하는 말은 무엇이냐?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는 것입니다. 전부 다 그거예요.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어 가지고 뭘할 것이냐? 하나님의 사정을 통하는 것, 전부가 그거예요. 그다음에 하나님의 심정을 통하는 것, 그게 전부예요. 최후의 답은 그거예요.

하나님의 소원과 사정과 심정에 일치되는 사람이 제일 귀한 사람

그러면 천하, 혹은 모든 존재세계 앞에 제일 귀한 사람이 누구냐? 제일 귀한 것이 무엇이냐? 이걸 생각하게 될 때,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고 하나님의 사정과 통하고 하나님의 심정을 지닐 수 있는 이런 사람이 있다면 이 이상 귀한 것이 없어요. 이러한 사람을 놓고 성경에 말하기를 한 생명이 우주보다도 더 크다고 한 거예요. 알겠어요? 「예」

그런 자리에 선 사람은 위대한 거예요. 아무리 과거 역사가 훌륭하더라도 그 역사와 주고 바꿀 수 없어요. 이 천하에 나타난 모든 주의 사상이 아무리 위대하더라도 그 주의 사상 전체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거예요. 그 주의와 사상이 하나님의 소원을 위하고, 하나님의 사정과 하나님의 심정을 위로할 수 있는 내용이 못 되었으니 그것을 주고도 안 바꾼다는 거예요.

그러면 하늘이 찾고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하늘이 찾고 있는 나라는 어떤 나라며, 하늘이 찾고자 하는 세계는 어떤 세계냐? 하늘이 찾고 있는 이 천하는 어떤 것이냐? 하나님의 소원과 일치될 수 있는 사람, 하나님의 사정과 심정에 일치될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을 통할 수 있는 가정, 그런 가정을 통할 수 있는 사회, 국가, 세계입니다. 이러한 것을 이루는 것이 인생으로서 가야 할 길이요, 하나님으로서 해야 할 놀음이라는 거예요. 알겠어요? 「예」

그런 점에서 볼 때, 이 모든 세계가 지금 어떻게 되었느냐? 타락되었다는 거예요. 타락되었기 때문에 그런 세계가 못 된 거예요. 그렇게 되지 못한 세계를 딱 잘라 버리고 그렇게 될 수 있는 세계로 판도를 돌려야 됩니다. 돌아가는 데는 이렇게 갔던 방향을 이렇게 돌려야 됩니다. 알겠어요? 「예」

하나님이 무엇을 위해서 지금까지 계셔 왔느냐? 천하를 위해서 계신거예요. 천하를 위해서 계셔 온 그분이 이러한 천하를 돌이키려니 얼마나 힘이 들었겠느냐 이거예요.

능력이 많은 하나님이라고 해서 마음대로 하는 게 아니예요. 조건에 걸리지 않아야 됩니다. 법을 세워 놓았으면 법도적인 그 조건에 걸려서는 안 된다 그 말이예요. 아무리 대통령이라도 대통령이 제정한 법이면 그 법을 중심삼고 움직여야 정상적인 권한을 가질 수 있는 대통령이지 그렇지 못하면 대통령도 걸려 드는 거예요. 대번에 백성들이 `네가 뭐야 이놈아!' 해도 꼼짝 못 한다는 거예요. 그렇지 않아요?

하나님도 그와 마찬가지로 거꾸로 돌아가는 것을 다시 고쳐 놓기 위해서는 거꾸로 돌아갈 때 맺힌 모든 것을 언제든지 풀어 가지고 돌이킬 수 있는 마음을 가질 줄 알아야 된다는 거예요. 6천 년 동안 거꾸로 돌아 시대 시대마다 걸린 모든 것을 한꺼번에 돌리는 그 순간적인 힘에는, 6천 년 거꾸로 돌아간 것과 비례해 볼 때 그 이상의 힘이 있어야 조금이라도 돌려놓을 수 있다는 거예요.

이러한 일을 하고 계시는 분이 하나님이예요. 불쌍한 하나님이지요? 「예」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알고 보니 믿어야 할 분이요, 나를 진정으로 가르쳐 줘서 영원히 같이 살고 영원히 사랑의 동산에서 살게 하려는 아버지인 것을 알았을지니, 그 아버지는 어떤 아버지냐? 이러한 소망과 이러한 사정과 이러한 심정의 곡절이 사무쳐 있는 아버지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다 이거예요. 알겠어요? 「예」

그러면, 이 하나님이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 나오셨느냐? 하나님의 마음에 근심이라는 이 두 글자를 빼놓고 살아 본 적이 없다! 근심하고 사시는 , 근심을 품고 사시는 하나님이라는 걸 알아야 되겠다 이거예요. 알겠어요? 「예」 뜻을 품은 사나이라 할진대는 , 뜻을 바라보는 그런 소망을 가졌다 할진대는 그 소망을 성취할 수 있는 환경이 될 때까지는 근심을 품고 살아야 됩니다. 알겠어요? 「예」

하나님의 근심을 풀어 드리는 위해 천하를 걸어 놓고 근심해야

이제 통일의 용사 여러분은 남한 각지를 향하여 행진하여야 할 운명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지도하는 여기 스승도 가야 할 책임을 짊어지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도 가야 되고, 스승도 가야 되고, 여러분도 가야 되는 그 운명의 내용은 무엇이냐? 이 근심스러운 것을 해원하기 위하여 가는 거예요. 이 근심의 내용을 해원하게 될 때에 이 근심의 내용은 하나님의 근심입니다. 그 하나님의 근심이 우리 인간의 양심에 전달되어 양심이 근심하는 거예요. 양심이 통할 수 있는 참다운 사람을 그리워하는 그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 사람은 몸뚱이가 그리워할 수 있는 그 양심의 기준에 서 있기 때문에 양심의 기준을 대하는 이 몸뚱이도 근심하는 몸뚱이가 되지 않을 수 없어요. 이것이 하나의 가정으로부터 국가, 세계까지 전개되어 있으니, 이런 근심의 세계에 살고 있는 자신들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 말이예요.

어떤 사람이 애국자냐? 그 나라를 누구보다도 근심하고 나서는 사람이라야 애국자가 되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딸이냐? 잘먹고 잘살면, 하나님은 고생하더라도 나는 잘먹고 잘살아야 된다는 그런 자는 하나님의 아들딸이 아니라는 거예요. 하나님과 같은 입장에서 근심을 놓지 못하고, 이걸 붙들고 싸우는 사람이라야 하나님의 아들딸입니다.

어떤 주의나 사상을 두고 볼 때, 그 주의나 사상의 앞날에 있어서 주도할 수 있는 책임자는 어떤 사람이냐? 그 주의나 사상을 중심삼고 누구보다도 근심하는 사람입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이면 이 대한민국을 중심삼고 이 나라를 지배할 수 있는 앞으로의 후손은 어떤 후손일 것이냐? 이 민족에 대해 누구보다도 근심할 수 있는 후손을 여러분들이 낳으면 여러분의 후손이 이 민족을 지배할 것입니다.

이 세계를 하나님의 뜻을 중심삼고 볼 때에, 이 천지를 어떤 이념적인 관을 중심삼고 볼 때도 그 관에 입각하여 누구보다도 근심할 수 있는 입장에서 그 세계를 내 것으로 처리하겠다는 사람을 많이 가진 나라는 망하지 않아요! 일시에 주권에 깨어지고 일시에 그 국토가 유린당하더라도 그 사상을 지닌 민족이 살아 있는 그 나라는 역사를 뒤집어 박는 거예요. 그 사람들의 때는 오는 거라구요. 알겠어요? 「예」

여러분이 이런 신념 밑에서 이 민족을 위하여 제1보를 내디뎌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이 시간이 지나면 내일은 그런 곳을 향하여 가야 할 운명에 처해 있는 여러분 자신인 것을 절감할진대는, 나는 어떤 입장에서 내 자신을 끌고 갈 것이냐? 이런 엄숙한 과제를 내가 알고 사명적인 분담 앞에 있어서 맹세한 자신인 것을 확신하면 확신할수록 이제 `나는 이러한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하면서 천하를 걸어 놓고 근심할 수 있는 무리들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내가 안되면 내후손을 그런 입장에서 교육하고 그런 입장에서 가르쳐 주고, 1대에서 안 되면 2대 3대, 10대에 걸쳐 이것을 유언으로 남겨 줘야겠습니다. 이것은 선조로부터 전해 온 유언이니 이 유언을 성취하라고 후세에까지 남기고 가야 되겠습니다. 이런 신념을 남겨 줄 수 있는, 그것을 과연 그렇다 할 수 있는, 공인시킬 수 있는 여러분이 되면 여러분의 후손은 망하지 않아요. 그렇게 되면 세계는 여러분에게 순종하게 됩니다. 왜 그러냐? 하나님이 근심하고 있는 하나님이기 때문이예요. 그 하나님 앞에 있어서 하나님의 일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뜻을 붙안고 하나님과 같은 입장에서 근심할 줄 아는 이런 사람이 되어야만 여기서부터 모든 것이 출발되는 거예요.

내가 살고 있는 곳이 하나님의 근심을 풀어 드리는 실천장

여러분들은 이제 고향에 돌아가야 됩니다. 고향에 돌아가면 하나님이 `내 몸뚱이가 안 되었으면 몸뚱이를 위해 근심할 것을 생각하라, 내 마음의 꼴이 안 되었으면 몸뚱이를 위해 근심할 것을 생각하라, 내 생활하는데 있어 그것이 안 되어 있으면 근심할 것을 생각하라' 할 것입니다. 여기서 여러분은 `아버지여, 나를 대해 근심하지 마십시오. 나는 아버지 대신 이제부터 이 마을을 대해 근심하겠습니다. 이 마을을 대해 근심하겠습니다' 이래야합니다. 알겠어요? 「예」

내가 과거에 올 때, 40일 전에 올 때 나는 근심이라는 것을 몰랐다 이거예요. 그렇지만 이제부터 사는 내 자신은 다르다! 이런 신념을 갖고 그 부락에 가라는 거예요. '여기에도 하나님의 소원이 있지, 여기에도 하나님의 사정이 통해야 할 텐데, 여기에도 하나님의 심정이 깃들어야 될 텐데…. 아버지께서 우리 마을을 찾아오게 될 때, 우리 마을을 소원의 한 마을로서 삼으시고 우리 군 가운데서 내가 간 그곳에는 하나님이 소원의 중심으로 찾아와 하나님의 사정을 느끼고 갈 수 있고, 하나님의 심정을 깃들게 하고, 편안히 하루밤을 지내고 쉬고 갈 수 있는 곳으로 만들겠다'고 하는 이런 이념을 가졌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어요.

그러면 하나님의 근심은 무엇을 하기 위한 것이냐? 여러분을 어떻게 해야 하님의 아들딸을 만들 것이냐? 이게 근심이예요. 이 죄악 가운데에서 살고 있던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끌어다가 어떻게 해야 이런 크나큰 창조주의 심정이 통할 수 있는 아들딸로 만들 것인고? 이게 근심이 아니냐 이거예요. 근심이라는 거예요.

나는 어떻게 하고, 그다음에 내 가정을 어떻게 하고, 내 부락과 내 면과 내 군과 내 도와 내 나라를 어떻게 해야 될 것이냐? 나라를 넘어서 세계를 어떻게 해야 될 것이냐? 저 하나님의 근심 무대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알겠어요? 「예」 무엇을 잊어서는 안 돼요? 「근심」

오늘 여러분에게 애기하는 선생님도 40평생 지내 왔지만 한 시간도 이것을 잊어 본 적이 없습니다. 10년을 지내고 또 20년을 지내 오는 데 수많은 원수가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천도와 더불어 근심하는 사람을 하늘이 요구하고 있다는 거예요.

다시 재건하여야 할 이런 입장에 있는 이 나라를 바라보게 될 때, 이 나라를 위하여 근심할 수 있는 사람, 지도자 이상 근심할 수 있는 사람, 더 나아가서는 지도자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류를 바라보고 있는 것과 같이 하나님편에서 근심할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필요한 거예요. 이 세계를 바라볼 때 어떤 세계적인 지도자보다도 하나님의 근심 앞에 영원히 이 세계를 위해 참되게 근심할 줄 아는 사람, 그런 사람을 하나님은 찾고 계시는 거예요.

여러분 가정을 위하여 근심할 줄 아는 사람은 가정이 필요로 하는 것이요, 동네를 위하여 참 되게 근심할 줄 아는 사람은 동네가 필요로 하는 거예요. 거기에 필요한 사람이 되려면 그런 환경에 있어서 근심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근심하라는 것은 망치기 위한 것이 아니예요. 어떻게 하면 더 선한 것으로…. 근심할 줄 아는 여러분이 되어야 겠습니다. 알겠어요? 「예」 이것이 동기가 되어 분하고 원통한 것을 스스로 자극받아 눈물도 흘려야 됩니다.

'아버지, 이렇게 분한데 살겠습니까? 지금은 이러한 땅이지만 몇 해 후에는' 내가 몇 해 후에는 소원하시던 땅으로서의 해원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몇 해 후에는 하늘로서의 해원을 해드릴 수 있습니다. 내 개인을 염려하던 것을 덜어드리고 내 가정을 통하여 염려하던 것을 풀어 드리겠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내 민족을 통하여 염려하는 아버지의 걱정을 덜어 드리겠습니다' 이럴 수 있는 여러분이 된다면 여러분이 배우지 못하고, 갖지 못하고, 아무리 헐벗고 있더라도 망하는 무리가 안 됩니다. 여기서부터 분함을 허락받아 가지고 재기하여 나설 수 있는 이런 무리가 필요하다는 거예요. 알겠어요? 「예!」

우리들이 보는 눈은 전부 다 달라요. 느낌도 다르고 말하는 것도 다르고 행동하는 것도 달라요. 이런 것을 믿고, 그래 가지고 풀 수 있는 길이 있느냐, 없느냐? 이 근심을 풀 수 있는 길이 있느냐, 없느냐? 있다고 할때는 모든 것을 제쳐 놓고 가는 것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럴 것 아니예요? 없게 될 때는 무슨 고생을 하더라도 이어 놓는 거예요.

이것을 어떻게 풀 것이냐? 이것을 풀기 위하여 하늘도 지금까지 수고했으니 나도 그와 같은 입장에 서서 아버지의 근심을 대신하여 분한 것을 전부 다 풀어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책임과 이러한 사명을 땅 위의 인간들이 해주기를 하나님은 지금까지 바라고 있다는 거예요.

양심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근심을 풀어 나가는 용사가 되어야

통일의 용사들은 다른 것 다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배운 것도, 가진 것도, 모양이 어떻든 다 필요 없습니다. 그건 제2차, 제3차, 제4 차, 제5차, 제6차의 것입니다. 제일 중요한 건 벌거벗을망정 하나님을 대신하여 근심하며 `당신이여 참으시옵소서!' 하고 위로해 줄 수 있는 아들이 먼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위로해 드리고 그다음에는 실천하는 거예요. 분함을 풀기 위한 실천이예요. 거기서부터 실천하여야 여러분들이 가는 길에 사탄의 참소가 없는 거예요. 알겠어요? 「예」

분함을 느끼면서 하늘 앞에 통곡하고 그 부락을 붙들고 통곡하면서 `내가 대신 짐을 지고 당신이 원하시는 소원의 곳을 향하여 가겠사오니 여기서 나를 보내 주시옵소서!' 해야 합니다. 그러면 `오냐. 네 부락을 구해라! 이런 곳을 구해라! 오냐. 네 면, 네 도, 네 나라를 구해라!' 하실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이런 내용을 여러분들은 배웠단 말이예요.

그리하여 이런 사람을, 세계적인 근심의 동역자를 하늘은 세워 가지고 그런 사람들로 세계적인 근심을 풀어 나가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하여 싸울 수 있는 이런 사람들이 되기 위해서 우리들은 결의해야 되고, 그것을 위하여 우리들은 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이거예요. 알겠지요? 「예」 그 기준 밑에서 실천해야 된다구요.

그러면, 이 근심은 어디서부터 생겨났느냐? 원수로부터 생겨났다는 거예요. 이놈의 원수! 이 원수의 제일 무대는 몸뚱이예요. 나라는 것을 중심삼고 되었으니 나부터 정복해야 됩니다. 가정과 사회와 국가와 세계와 영계까지 널려 있는 이 원수가 6천 년 동안 하나님을 참소했다는 거예요.

이것이 지금까지 유린해 나오고 있으니, 이 하늘의 분함과 근심된 사실을 알고 일시에 사탄의 총본부를 향하여 돌격할 수 있는 각오와 신념을 가져야 됩니다. 그런 치열한 투쟁 앞에 후퇴하지 않고 쓰러지지 않는 하늘의용사가 되겠다는 기세를 딱 갖추어 가지고, 여러분이 가는 곳에서 부터 하루하루 그런 생활적인 연마와 훈련을 통하여 한 날의 큰 싸움을 대비하기 위한 연습으로 실천할 줄 아는 여러분이 되면 여러분 아까 말하던 것처럼 하나님의 소원을 통할 수 있고, 하나님의 사정을 통할 수 있고, 하나님의 심정의 발판이 될 수 있는 이런 사람이 틀림없이 될 것입니다.

몇 시인가? 「25분입니다」 25분? 시간이 많이 갔기 때문에 조금 더 이야기하면 좋겠지만….

양심을 세워서 그 양심을 중심삼고 아버지를 믿고 배우고 생활하고 거기에서 같이 투쟁할 수 있는 아버지를 모셔 가지고, 그 아버지와 양심이 하나되어야 합니다. 하나된 그 가운데서 양심이 아버지 대신 나를 명령하고, 내 몸뚱이는 아들과 같이 부자의 인연의 심정을 맺어 내가 생긴 그날부터 하나님의 근심을 품고, 이 근심을 해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소원과 사정과 심정을 영원히 남기기 위해 투쟁하는 용사들이 되어 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선생님이 가야 할 여러분 앞에 남겨 주는 말씀이라는 거예요. 알겠어요? 「예」

그러니까 이제부터 여러분들에게 남아지는 것은 다른 게 없어요. 오늘 선생님이 말씀드린 것을 잊지 말고, 여러분이 양심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한을 대신하여 싸워 나갈 수 있는 여러분이 되기를 부탁드립니다. 알겠지요? 「예」

기 도

아버님, 사람이 악하여진 연고로 만물을 사람 앞에 내놓고 제물 드리라는 그런 명령을 하시는 아버지의 사정에 얼마나 상처가 많았습니까? 아버지의 심정에 얼마나 상처가 많았습니까?

아버지의 소원이 이렇게도 서글픈 자리에 있었다는 것을 저희들은 몰랐습니다. 이렇게 역사적인 죄를 짊어진 자신인 것을 알았습니다.

아버님, 하늘을 보아도 부끄러운 자요, 땅을 보아도 부끄러운 자요, 우리를 보아도 부끄러운 모습인 것을 저희들은 이제 깨달았습니다. 여기에 모인 이 수련생들이 이제 40일 수련 기간을 거치고 험한 광야 세계를 향하여 가야 할 날이 가까이 왔습니다.

여기에 미쳐져 있는 모든 전부는 원수로 인한 사망의 여건을 재촉할 수 있는 자리 밖에 안 되는 것임을 저희들은 알았습니다. 이런 환경을 헤치고 나가야 할 저희들이기에 내 마음을 아버지와 일체되게 하나로 만드시어 그 마음을 중심삼고 한을 풀기 위하여 많이 근심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을 저희들이 배웠사오니, 이제 가는 이들 앞에 아버지, 축복의 손길을 펴시옵소서! 가는 모습은 초라하오나 아버지여, 그들의 마음 깊이 결의하는 그 마음은 강하고 담대할 수 있는 마음의 주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제 3천만 민중이 잠들어 있사오니 세계 인류가 흑암의 권세 가운데 있어서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있사오니 여기에 선의 채찍을 가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소원과 아버지의 사정과 아버지의 심정의 인연을 세워 억울한 아버지의 아버지의 한을 풀어 드리기 위하여 원수를 대하여 싸워 승리하는 아들딸이 되게 하시옵소서. 땅에서부터 한이 풀리고 인간의 가슴에서부터 한이 풀려 천상의 한이 풀려질 수 있는 이러한 싸움의 시대가 오는 데 저희들이 거기에 대비할 수 있는 하늘의 용사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지금까지 보호해 주신 은사를 감사하오며 남아진 생애를 아버지의 뜻 앞에 걸어 놓고 맹세한 실체들을 아버지여, 받아 주시옵소서!

모든 것이 당신이 요구하시는 영광 가운데서 생(生)하고 사(死)하고 동(動)하고 정(靜)할수 있도록 아버지, 인(印)치시사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

<말씀 요지> 오늘은 40일 수련회가 끝나는 날입니다. 이제 수련생 여러분은 고향으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차피 고향으로 돌아가야겠지만 돌아가기 전에 여기 올 때와 갈 때의 자신이 어떻게 달라졌는가를 비교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 뜻을 알기 전과 알고 난 후의 차이를 스스로 정리하고 인식해야 되겠습니다.

출발하는 여러분이 세워야 할 것-양심의 기준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 올 때의 나와 갈 때의 나는 달라져야 합니다. 과거에 스스로 설 수 없었던 내가 설 수 있게 되었고, 믿을 수 없었던 내가 믿을 수 있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당당히 스스로를 보여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깨달음의 도수에 의해서 가는 길이 좌우됩니다.

여러분은 과거에 자기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뜻을 몰랐을 때는 자기 마음대로 살아도 자신이 불쌍하다는 것을 몰랐을 것입니다. 그 생활 속에서 여러분은 남이 믿지 못하는 것을 나는 믿는다고, 남이 가지지 못한 것을 나는 가졌다며 보여 주고 자랑하고 싶어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여러분들이 이 뜻을 얼마만큼 깨달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믿을 수 있었고 보여 주고 자랑할 수 있었던 것도 시대가 변함에 따라, 영원한 것이 못 되고 변했던 것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생각하며 불쌍한 세상이요, 불쌍한 자신임을 느꼈을 것입니다.

사람이란 자기가 앉아 있는 자리보다 더 높은 자리, 더 좋은 곳을 바라게 되어 있습니다. 말단 부락에 있는 사람은 부락보다 큰 면을 대신한 자체가 되고 싶어하고, 그 다음엔 군을 대신하고 싶어하고, 그 다음에는 도를, 더 나아가 나라를 대신하고, 세계를 대신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이 뜻과 소망을 잃지 않는 기준을 세워야 합니다. 더욱 양심을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 양심을 중심삼고 세계를 사랑하면 세계의 친구가 되는 것이요, 나라를 사랑하면 애국자가 되는 것이요,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움직일 수 있는 입장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양심을 중심삼고 얼마나 살아 보았습니까? 여러분의 과거의 삶은 어떠했습니까? 양심 앞에 반역자였습니다. 그러니 오늘 떠나는 여러분에게는 바로 이 양심의 기준이 확고히 서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이제부터 가는 곳은 천국이 아닙니다. 동서남북이 터 있는 개방된 자유의 곳이나 나를 때려잡기 위한 원수의 올가미가 널려 있는 곳입니다.

사람들이 오리를 잡을 때는 오리가 잘먹는 미끼를 갖다 놓습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사탄의 올가미에 까딱 잘못하면 걸립니다.

여러분들이 가야 할 무대는 원수의 세계입니다. 거친 광야와 같은 곳이어서 이리와 늑대와 사자가 노리고 있는 곳입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곳으로 가야 합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환경을 제압하고 설 수 있는 자신이 되어야 합니다. 가는 그 순간부터 ‘마음아! 내 가는 길에 친구가 되어 다오.’ 하며 결코 곁길로 가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에서 열까지 마음을 붙들고 나갈 줄 아는 여러분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가는 곳에는 스승도 없습니다. 잘못했을 때에 마음이 기합을 주고 침을 주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은 적어도 3분의 2는 올바른 길로 가는 것입니다. 복귀도상에선 그렇습니다.

멀지 않아 ‘양심적인 인사는 나오라.’고 외쳐야 됩니다. 자신을 명령하고 지도할 수 있는 양심적인 바탕을 가져야 합니다. 양심을 기반으로 하여 배우고 실천한 것은 역사에 남고, 하늘의 용사로 싸운 것은 하늘땅 앞에 자랑의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믿고 싶은 사람을 찾아도 없었습니다. 양심이 자꾸 배우라고 합니까? 예수, 석가, 공자 모두가 다 그렇게 많이 배우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역사를 이끈 사람들은 많이 배운 사람보다도 양심의 기반 위에 서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과거의 사람이나 현재의 사람이나 모두 배우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지식이 많은 학박사와 마음이 선한 사람 중 하나님은 어느 쪽을 택하시겠습니까? 아마도 방금 협회장이 말한 바와 같이 심정을 중심삼고 움직이는 사람을 택할 것입니다.

양심은 하나님의 집

함부로 믿을 수도 없고 배울 수도 없는 세상입니다. 잘못 배우면 큰일납니다. 마음놓고 살 수도 없습니다. 빨갱이와 살다가는 큰일나지 않습니까? 싸움도 잘못 싸웠다가는 큰일납니다. 함부로 싸울 수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도의 길은 모든 것을 버리며 가는 길이며 양심을 찾아 나아가는 길입니다. 양심이 무엇을 요구하고 무엇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지, 이것을 알면 됩니다. 과거에는 양심에 반대되는 것과는 싸울 용기조차 갖지 못했습니다.

양심은 무엇이뇨? 하나님께서 믿으실 수 있는 집이요, 하나님께서 같이 사실 수 있는 집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믿을 수 있는 인간을 기다리십니다. 참답게 믿을 수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에게는 믿음과 소망이 있어야 되겠습니다.

오히려 싸우지 못한 것이 다행인지도 모릅니다. 잘못하면 사탄이 집어가고 맙니다.

여러분의 과거는 어찌하여 불행하였던가? 배우고 싶고, 믿고 싶고, 남기고 싶어도 할 수 없었습니다. 진정한 나와는 관계가 먼 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불행했던 것입니다.

양심적인 사람은 이 세상에는 고충밖에 없기 때문에 이 세상을 피하고 싶어합니다. 양심은 선을 찾아가라고 뒤에서 명령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양심이 고대하던, 믿을 수 있는 무엇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들으면 들을수록 좋고, 배우면 배울수록 좋은 것, 양심이 고대하던 것을 찾았습니다.

이것은 모든 것이 죽는 것보다 더 두려운 것이라고 해야 합니다. 이 내용대로 생활하고 싶어하는 것이 양심입니다. 그 내용대로 사는 사람은 싸우고 싶어도 싸울 것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라 할진대, 그는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홀로 있다 할지라도 외로운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부모와 같이 살면서도 부모를 믿을 수 없었고, 형제와 같이 살면서도 형제를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여러분은 영원히 믿고 같이 살 수 있는 분과 하나되었는데, 이것이 역사적인 행복입니다.

같이 믿고, 같이 배우고, 같이 살고, 같이 악을 심판하고, 같이 선을 세우고자 하시는 최고의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을 발견하고 마음이 명령하는 대로 행동한다 할진대, 그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즉 절대적인 하나님 편에 서서 선과 함께하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제일 귀한 사람이란

하나님을 발견한다는 것은 무엇이냐? 만사를 해결하는 절대의 중심인 그분과 나와는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라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면 절대의 중심인 그분과 나와 하나가 되는 것이요, 마음은 아버지요 몸은 아들로서 부자가 동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은 아버지의 대신, 몸은 아들의 대신이라는 입장에서 아버지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아들로서 아버지의 명령을 받는다 할진대 천하의 누구도 이것을 빼앗지 못합니다.

양심의 명령을 받는 것은 아버지로부터 명령을 받는 것과 같습니다. 마음의 소원은 아버지의 소원인 동시에 나의 소원이요, 몸의 소원이요, 만물의 소원인 것입니다. 그러한 양심은 내 몸도, 천지 만물도 모두 좋아합니다.

앞으로는 사람이나 어느 국가가 영원히 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원과 하나님의 사정과 하나님의 심정이 남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두 다르다면 피조물과 인연을 지을 수 없습니다. 소원은 하나의 인연 가운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소원과 내 소원, 즉 양심의 소원, 몸의 소원과 만물의 소원이 하나의 인연 속에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내 양심의 소원이 이루어진다면 하나님의 소원도, 몸의 소원도, 만물의 소원도 다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천하를 걸어 놓고 염려하는 사람이 되고, 뜻을 이루다가 못 하면 후손에게 유언이라도 하고 갈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사람의 후손은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곧 소원의 일치이니 통일의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영원히 남아지는 것은 하나님의 소원과 하나님의 사정과 하나님의 심정이요, 내가 남겨 놓아야 할 것도 하나님의 소원과 사정과 심정입니다. 이것이 3대 요건입니다. 하나님은 소원과 사정이 성취되어 기쁜 심정을 가지셨습니까? 아직까지 그렇게 되지 못하였습니다. 마음대로 치리(治理)하시지 못하고 지금까지 인간을 찾아 나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얼마나 불쌍하신 하나님입니까?

우리 원리는 어떻게 하여 인간과 하나님이 이렇게 되었는가를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소원과 사정과 심정은 서로 통해야 됩니다. 최후의 담은 이것입니다. 때문에 제일 귀한 사람이란 하나님의 소원과 사정과 심정을 알아 이루어 드리는 사람입니다.

성경에도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하지 않았는가? 인간이 하나님의 소원과 사정과 심정과 일치되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이 타락의 원인입니다. 그렇게 못 되어 있는 것을 되도록 하려는 것이 구원입니다. 구원은 복귀요, 복귀는 돌이키는 것입니다. 그것은 처음보다 배 이상의 힘이 드는 것입니다.

아무렇게나 사는 것은 쉽지만, 양심을 위해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은 배 이상의 힘이 듭니다. 하물며 천지를 위하여 사시는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힘이 드시겠습니까? 법도대로 하시기에 힘이 드시는 것입니다. 더구나 6천 년이나 거꾸로 돌아간 것을 돌이키려면, 그보다 더 힘을 들여야 하니 얼마나 힘이 드시겠습니까? 그러니 불쌍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러한 소원과 사정과 곡절이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아직까지 근심 가운데서 떠나시지 못하고 계십니다. 마찬가지로 뜻을 품은 사람도 뜻이 이루어질 때까지는 근심을 떨쳐 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제 내일부터 남한 각지로 떠나야 합니다. 하나님과, 여러분과, 여기 있는 스승이 해야 할 일은 이 근심스러운 것을 해결하는 것입니다. 양심의 근심, 몸뚱이의 근심이 연장되어 가정과 사회와 국가와 세계에 뻗쳤으니 결국 온 천주가 근심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나라를 위하여 근심하는 사람은 애국자요, 하나님을 위하여 근심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딸입니다. 나라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나라의 장래를 위하여 걱정하는 자녀를 낳는 것입니다. 세계적으로 볼 때도 이러한 민족과 사람들을 가진 나라는 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사람들만이 낡은 역사를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바로 이러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정과 소원과 사정과 일치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자리에 서야 모든 것이 출발되는 것입니다.

선생님의 부탁

여러분은 자신의 몸과 마음의 생활을 위하여 근심하지 마십시오. 우선 찾아가는 마음을 위하여 근심하십시오. 여기에도 하나님의 소원과 사정과 심정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여러분의 마을에 찾아오신다면 이 세 가지를 풀어 드려 편안하게 하룻밤이라도 쉬고 가실 수 있도록 해드리겠다고 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의 근심은 죄악의 아들딸들을 하나님의 아들딸로 만들기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오늘날 개인, 사회, 민족, 나라, 세계를 하나님께서 근심하고 계신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선생님은 40평생 동안 한시도 이것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나라의 재건을 위하여 근심하는 사람은 나라가 필요로 하는 사람이요, 하나님을 위하여 근심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필요로 하는 사람입니다. 가정을 위하여 근심하는 사람은 가정이 필요로 하는 사람이요, 마을을 위하여 근심하는 사람은 마을이 필요로 하는 사람입니다.

뜻의 곡절을 대하면 분하고 원통해서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참고 사오니’ 하고 기도하게 되면 힘도 주십니다. 하나님의 심정이 통한다 할진대 여러분이 가는 길은 결코 멸망의 길이 아니라 승리의 길입니다. ‘이 땅아, 지금은 이러하지만 몇 해 후에 보자!’ 하는 기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소원하는 가정과 민족을 위하여 염려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된다 할진대, 아무것도 갖지 못하고 배우지 못했다 할지라도 불쌍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반드시 재기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보는 눈과 말하는 입이 세상 사람과 다릅니다. 하나님의 소원을 풀어 드릴 수 있는 무엇이 있다 할진대 모든 것을 제쳐 두고 하여야 합니다. 부락에 풀어야 할 문제가 있다면 만사를 제쳐 두고 그것을 풀어 나가야 합니다. 가진 것이나 다른 어떠한 것도 필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위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 마음을 가지고 근심하고 실천해야 사탄의 참소를 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를 보내 주시옵소서.’ 할 때, ‘오냐! 네가 가서 네 부락과 면과 군과 도를 구하고, 더 나아가 나라를 구하라.’ 하실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이것을 위하여 결의하고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결심은 어디로부터 오느냐? 원수에 대한 의분심에서부터 옵니다. 이 원수는 나와 온 세계에 꽉 차 있고, 6천년간 악을 행해 온 원수라는 것부터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알고 실천하면 하나님의 사정이나 심정과 통할 수 있고,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모시고, 아버지와 하나되어서, 양심은 아버지요 몸뚱이는 아들이라는 심정을 품고, 하나님을 위해서 가달라고 하는 것이 오늘 헤어져 가는 여러분에게 하는 말씀이요 부탁입니다.

양심을 스승삼고 나가서 싸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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