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아버님, 여기 모인 당신의 사랑하는 딸들을 굽어살펴 주시옵소서. 이 딸들이 현재 뜻을 대해 중요한 책임을 짊어지고 있사오니 아버님께서 이들과 항상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이들이 지방에 나가서 지내는 가운데 체험한 모든 것은 우리 교회를 위한 체험이 아니라 이 민족과 뜻을 위한 체험인 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이들의 체험과 정성들인 전체가 하늘과 더불어 남아져야 되겠고, 민족과 더불어 남아져야 되겠습니다.
아버지, 이와 같이 산지사방에 있던 딸들이 이번 기회를 계기로 하여 한 자리에 모였사옵니다. 이 수많은 딸들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동으로 서로 남으로 나뉘어져 있지만 서로 한마음 한뜻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맨 처음에는 자신의 몸과 마음이 하나되고, 나가 있는 현지의 딸들과 하나되어 하늘 전체가 동원되게 해야 되겠습니다.
전국에서 움직이는 이들로 말미암아 지금까지 이 땅 위에 왔다갔던 수많은 선한 선조들이 동원될 수 있는 기반이 다져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들이 하나되어 삼천만 민족을 대신하여 하나로 통일된 모형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들이 한마음 한뜻이 됨으로 말미암아 후손들이 아버지의 뜻과 영원히 하나될 수 있는 인연을 세워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오늘은 더우기 오월 초하루로서 협회를 창립한지 만 17주년을 맞이하는 날이옵니다. 그간의 수난길을 아버지께서 친히 인도하시면서 오늘 이와같은 환경을 갖출 때까지 얼마나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르셨사옵니까? 아버님, 이 모든 것은 아버지께서 수고하시고 염려하시고 참고 극복하신 공적의 결과인 것을 생각하면서 감사를 드리옵니다.
오늘 이 아침에 저희들의 마음을 모으고 뜻을 모으고 정성을 모아 이날을 아버지 앞에서 축하의 날로 기념하고자 하오니 아버지시여, 깊이깊이 통찰하시어 마음 가운데에 흐뭇함을 느끼시옵소서.
미래에 하늘나라를 창건하여야 할 새로운 건국의 기념날을 앞에 놓고, 그날을 설정할 때까지 모든 것을 희생시켜서라도 전진에 전진을 거듭하여 최후의 승리를 거두지 않으면 안 될 중요한 사명이 저희에게 있다는 것을 진심으로 느끼고 있사옵니다.
아버지, 이날을 축복하여 주시옵고, 이 한 자리를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이 해와 70년대를 축복하시옵소서. 뜻을 위해 가는 길에 있어서 모든 안팎의 일들이 일취월장하여 당신의 승리를 찬양할 수 있는 날이 속히 오게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나이다. 전체를 맡아 주관하여 주시옵기를 부탁드리면서 참부모님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이야기 좀 할까요? 선생님도 여러분같이 앉아도 괜찮겠습니까? 저게 무슨 말입니까? (제목을 판서해 놓으시고 그것을 가리키며)전통적 생애라,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누가 한번 이야기해 봐요. 이말은 여러분의 생애가 전통이 될 수 있는 생애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살다가 죽고 난 후에는 반드시 사는 동안에 잘살았느냐 못살았느냐 하는 두 가지 가운데 하나로 귀결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잘살고 갔느냐 못살고 갔느냐 하는 그 둘중 어느 한편으로 결정을 지어 놓고 간다는 것입니다. 잘살고 갔다 하게 되면 그 사람은 선한 사람이라는 말이요, 못살고 갔다 할 때는 악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잘살았다고 할 수 있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잘살았다고 하는 기준은 무엇이고 못살았다고 하는 기준은 무엇이냐? 우리는 생애를 걸고 잘살고 못사는 것을 결정하는 일들을 하며 생활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면 누구나 다 잘살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못살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지금 세상을 가만히 보게 되면, 외부적인 요인을 보고 그 사람 참 잘산다고 말할 때가 많습니다. 보통 잘사는 사람이라고 하게 되면 외적으로 남부럽지 않게, 집을 갖고 있고 돈냥이나 가지고 있고 남편이나 아들딸과 함께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을 하는 데 지장을 받지 않을 만한 환경을 갖추어 놓고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환경적으로 아무리 잘산다는 말을 들으면서 생활한다 하더라도 스스로 '내가 과연 참된 생활을 하고, 내가 과연 선한 생활을 하고 있느냐' 하고 마음으로 묻게 될 때 자신을 갖고 '나는 참되게 산다'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어느누구나 하나같이 참되게 살기를 바라고 있는데 참되게 살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이렇게 참되게 살기를 원하고 있지만 참되게 살 수 없도록 되어 있는 환경에서 살고 있는 존재가 바로 인간인 것입니다. 대다수의 인간이 살고보니 후회의 결말에 부딪히게 되고 일생을 헛살았다고 탄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오늘날 우리 인간들의 생활양식인 것입니다.
그러면 참되게 사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이냐? 참되게 사는 사람은 선한 편의 사람이요, 참되게 살지 못하는 사람은 악한 편의 사람인데, 선한편, 참되게 사는 선한 편의 사람은 어떠한 사람이냐? 희망을 갖고 사는 사람입니다. 먼저 희망을 가져야 됩니다. 높은 희망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높은 희망을 가지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희망과 더불어 사는 사람이 선한 편에 속하는 것입니다. 현재 살고 있는 세상은 좋은 세상이 못되기 때문에 좋은 세상에서 살고 싶어해야 되는 것입니다. 현재 살고 있는 세상이 나쁘면 나쁠수록 그 세상과 짝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 그 나쁜 세상에서도 항상 좋은 세상을 그리면서 좋은 세상과 더불어 짝하고 살고싶다는 생각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선한 사람이란 현재에 살고는 있으되 현재를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현재에 살면서 현재와 더불어 살고자 하는 사람은 선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다 살고 나서 잘살았다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현재의 세상이 타락한 세상이요, 현재의 환경이 악한 환경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현재 악에서 나서 악에서 살다가 악으로 결말맺기 쉬운 타락권내에 살고 있는 연고로, 살고 나서 보면 못살았다는 결론이 내려지기가 쉽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환경 가운데 살고 있는 우리들이 잘살았다고 할 수 있는 자리로 나가기 위해서는 현실과 보조를 맞추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극복하고 내일, 희망찬 미래의 세계와 더불어 살겠다고 몸부림치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1년, 10년, 혹은 일생을 살게 될 때, 그 사람은 잘살았다는 말을 남길 수 있고, 선하게 살다 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의 생활에서 엄벙덤벙하면서 자기의 이익과 만족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은 외적으로 아무리 잘살았다고 해도 잘살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그가 타락한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타락권내에 살면서 거기에 박자를 맞추며 사는 사람은 선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악한 환경에 박자를 맞추며 그 환경에 젖어 사는 생활은 악하면 악했지 선할 수는 없기 때문에 못살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항상 지금보다 더 낫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현재보다 더 낫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더 낫기를 바란다는 것은 곧 더 잘살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얼마나 더 낫기를 바라는 것이냐? 한때만 낫기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나으면 내 후손은 더 낫기를 바라고 그 후손이 나으면 그 후손으로 인하여 세계 만민까지, 혹은 역사시대에서 미래까지 연결되어 더욱 나아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터전을 이루어 놓은 사람이 이 땅 위에 있느냐? 없습니다. 찾아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환경에서 사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이냐? 전통적 생애를 남겨야 됩니다. 그러나 악한 전통적 생애를 남겨서는 안 됩니다. 선한 전통적 생애를 남겨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생애란 일생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생애라고 하는 것은 일생을 말하는 것이요, 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하루하루 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생활은 하루하루를 중심삼고 말하는 것이요, 생애는 일생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일생을 두고 볼 때에 과거에는 선했는데 현재는 선하지 않다고 하면 과거의 선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선으로 뿌렸는데 악으로 거두었다면 그것은 선을 뿌리지 않은 것만 못하다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그리고 악을 뿌려 가지고 선을 거둘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을 거두기 위해서는 선을 뿌려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생을 사는 데 있어서 출발 당시에는 '나는 이렇게 선한 자리에서만 살 것이다'라고 결심해 놓고 그 마음이 중도에 시들해지고 희미해지면 선하게 살았다고 할 수 있는 입장이 못 되는 것입니다. 선한 자리에서 산다고 결심했으면 날이 갈수록 점점 완성을 향해 뻗어 나가야 됩니다. 그리하여 자기 혼자 사는 것이 전체에 영향을 미치고 또한 환경이 그를 우러러볼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선하게 살겠다고 한 결심이 선한 결실로 거두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한 결실을 남기려고 하는 사람은 지금 선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지금이 선하면 내일은 더 선해야 되는 것입니다. 나무로 말하면, 오늘 가지가 셋이 나왔는데 내일 그 세 가지에 다시 세 가지씩 더 나와 뻗쳐 오르기 위해서는 오늘보다 더 많은 영양소를 흡수해야 되고, 그 가지가 자랄 수 있는 활동도 많이 해야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도 갈수록 현재의 입장보다 나아져야 됩니다. 그 나은 것이 더 나아지고 더 나아지고 해야만 된다는 것입니다. 보다 나은 개인이 있다면 그 개인은 가정을 보다 낫게 하고 그 가정은 다시 종족을 더 낫게 하고 그 종족은 다시 민족을, 그리고 그 민족은 국가를 더 낫게 만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우리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의 세계, 우리가 이상하는 최고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제보다 오늘이 더 못한 사람은 패하는 것입니다. 오늘보다 내일이 나아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을 중심삼고 사는 사람의 전통적 생활이라는 것은, 똑같이 일선상에서만 지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점점점 커지는 것입니다. 오늘의 이 환경권내에서 돌아가는 전통은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 환경을 뚫고 나가야 합니다. 나라도 뚫고 나가고, 세계도 뚫고 나가고, 하늘땅도 뚫고 나가야 됩니다. 그러한 전통을 세워야 되겠습니다.
악한 사망권내에서 전통을 세우는 데 있어서 이만큼(판서하심) 전통을 세우게 되면 여기에서는 이것밖에 안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사망권 안에서만 뺑뺑 돈다는 것입니다. 사망권을 뚫고 나가려면 아직도 멀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망권은 언젠가는 벗어나야 되는 것입니다. 사망권을 벗어나기만 하면 어떻게 됩니까? 사망권에 싸이는 것입니까, 아니면 사망권을 싸 버리는 것입니까? 싸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같은 양반도 이 땅 위에 와서 누구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라고 했고 나를 위해 생명을 바치고 충성하라고 했던 것입니다. 성경에도 '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했지요? 그것이 첫째 되는 계명입니다. 그러면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요? 생명을 바치고, 목을 내놓고 하라는 것입니다. 간단합니다. 결론이 이것입니다. 생명을 내놓고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 되는 것입니다. 생명을 내놓을 때도 '아이구, 난 내 생명 못 내놓겠다'라고 하면서 할 수 없이 끌려가면서 내놓으면 그건 내놓으나마나 입니다. '이 세상에서, 여기에서 계속 살고 싶은데' 하면서 내놓으면 내놓으나마나라는 것입니다. 이상하는 그곳에서 살고 싶다고 하며 기쁘게 내놓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훌쩍 넘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를 위해서가 아니라 미래를 위해서, 뜻을 위해서, 뜻의 목적을 위해서 생명을 내놓는 사람은 사망권을 벗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씨를 심을 때 바위 위에다 심으려 합니까, 거름 위에다 심으려합니까? 「거름 위에다가요」 사망권은 썩어지는 것입니다. 죽으면 썩어지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생명이 있으면 어떻습니까? 사망한 거름을 흡수하면서 자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세상에서 악한 것을 보면서 '아이구, 악하구나, 아이구 나도…' 이러면 같이 악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악한 것을 볼 때마다 거기에서 자극을 받아 가지고 '나는 저렇게 되지 않겠다' 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회의 악한 것을 볼 때마다, 사탄들이 좋아하는 것을 바라볼 때마다 거기에 궁금증을 가질 것이 아니라 항상 '이는 어느 한때 내 손아귀에서 비료가 될 것이다. 나한테 치리를 받을 것이다' 하는 마음을 갖고 나가야 됩니다.
세상에 악한 것이 많아도 그것을 무서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부딪치면서 생명적인 자극을 받을 수 있다면 악한 것이 결코 나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악이 끌려가는 것입니다. 이제 복귀섭리의 필연적인 운명이 그렇게 되어 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이 좋으냐 할 때,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살아야 되겠습니까? 이 세상을 부정하고 다른 생활 방식을 취해야 하는 것입니다. 악한 사람들이 이렇게 하면 그와 반대되는 생활을 해야 돼요. 악한 편 반대가 선한 편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내가 선한 사람이 되려면, 악한 사람들이 좋아하며 살면 나는 악한 세상에서 서러움을 당하며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전부 다 반대로 해야 돼요. 악한 사람들이 놀면 나는 수고해야 됩니다. 악한 사람들이 잘먹고 잘살면 나는 못먹고 못살아야 합니다. 잘먹고 잘살면 선한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악한 사람들이 오래 살면 선한 사람은? (웃음) 어때요? 오래 못 사는 것입니다. 전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동네를 보게 되더라도 망할 동네 같으면 쓸만한 사람들이 빨리 죽고, 못 쓸 사람들은 오래 사는 것입니다. 나라를 두고 볼 때도 쓸만한 사람은 빨리 죽어 버리고 쓰지 못할 찌꺼기들만 남게 되면 그 나라는 망하는 것입니다. 전부 다 반대입니다.
그러면, 악한 사람이 서서 살면 선한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되겠습니까? 누워서 살아야 된다고요? 서서 사는 것의 반대는 앉아서 사는 것입니다. 앉아서 살아야 돼요. 악한 사람들이 자유스럽게 살면, 선한 사람들은 부자유스럽게 살아야 됩니다. 또, 악한 사람들이 눈을 뜨고 살면, 선한 사람들은 눈을 감고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웃음) 봤어도 보지 않은 것처럼, 아무 상관이 없는 것처럼 살아야 됩니다. 듣는 것, 보는 것, 느끼는 것, 맛보는 것, 태어나는 것, 살아가는 것, 죽는 것, 일체를 반대로 해야 돼요. 사람이 죽었을 때에도 악한 사람들이 '아이구, 나도 같이 죽겠다'고 야단하며 울면 선한 사람은 좋아해야 됩니다. 달라야 됩니다. 소망을 가진 사람들은 달라야 돼요. 이 악한 세상에서 하나에서 열, 백, 천, 만에 이르기까지 전부 다 반대되는 것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선한 사람이 아닐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선한 것은 잠깐 있다가 죽는 것이 아닙니다. 선한 것은 영원히 가는 거예요. 오늘날 세상 사람들은 인생의 가치를 모르고 일생만을 인생의 전부인 것으로 알고 살고 있지만, 인생은 짧은 것이 아닙니다. 선은 그 반대이기 때문에 기나긴 인생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한 사람은 영생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악한 사람이 내려다보면, 선한 사람은 올려다보아야 됩니다. 악한 사람이 왼쪽으로 가면, 선한 사람은 오른쪽으로 가야 됩니다. 전부 다 반대로 해야 돼요.
그러면 역사상 선한 사람은 도대체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느냐? 그 시대에 환영받던 사람 가운데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이것을 잘 알아야 됩니다. 그 시대에 환영받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선한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냥 그대로의 사람들이 그냥 그대로 좋아하는 것은 그냥 그대로의 것이지, 더 좋은 것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냥 그대로 사는 세상에서 좋아하는 패 가운데는 선한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냥 그대로 사는 것을 지긋지긋하게 싫어하는 패 가운데에는 그래도 선한 사람이 있을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거 이해가 되지요? 옆의 사람이 악한 사람이면 길을 가더라도 기분 나쁜 것입니다. 악한 사람들이 땡땡이를 부리기 좋아하는데 선한 사람이 되려고 하는 사람이 땡땡이꾼이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생각을 해보세요. 안 되지요?
또 세상 여자들은 고운 옷을 입고 분을 바르고 해 가지고 기분 좋게 다니기를 좋아하는데, 그런 세상 여자들이 악한 여자들이라면 악한 여자들이 그렇게 사는데 선한 여자가 되려면 어떻게 하고 다녀야 되겠습니까? (웃음) 대답을 해보세요. 반대로 살아야 됩니다. 반대로! 그러니 거지 모양으로 누더기 보따리를 쓰고 다니고 그러라구요. (웃음) 잘 입었다고 자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잘 입었으면 도리어 머리를 숙여야 되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전부 반대입니다. 세상 여자들을 보면 잘 입었다고 궁둥이를 요렇게 요렇게 흔들며 다니지만. (웃음) 선하려고 하는 아낙네들은 잘 입었으면 도리어 미안해 해야 되는 것입니다. (웃음) 아이고 여러분, 미안합니다…. 그렇게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전부 다 반대로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선하기를 바랍니까, 악하기를 바랍니까? 「선하기를요」 악하기를 바란다면 여기 앉아서 수련을 받을 필요도 없고 전도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그냥 그대로 뒹굴며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죄도 막 범하고요. (웃음) 그러면 얼마나 편하겠습니까? 여러분, 편한 게 좋아요, 불편한 게 좋아요? (웃음) 세상에서 편한 것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악한 세상에서는 편한 것이 좋은 것입니까, 불편한 것이 좋은 것입니까? 어떤 것이 좋은 것입니까? 불편한 것이 좋은 것입니다. 택시 타고 다니는 것보다 걸어다니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웃음)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걸어다녀도 생각을 달리하고 다니면 그것이 낫다는 거예요. 전부가 반대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차를 타고 다니면 '아 나는 차를 타고 다닌다'라고 할 것이 아니라 미안하게 생각해야 됩니다. 달라야 됩니다. 근본적으로 달라야 돼요.
그러지 않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좋아하며 살면 살수록, 이것이 점점 길어지겠어요, 짧아지겠어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좋아하면서 살면 여기서 출발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못 하는 것입니다. 출발도 못 한다는 거예요. 거기서 다 막혀 버리고 남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놈의 세상 가운데서는 아무것도 안 되겠다. 나는 한번 다르게 살아 봐야 되겠다'라고 하며 다르게 살면 살수록 거기에 비례하여 그 사람은 높아지는 것입니다. 하나가 달라지는 데서 끝날 것이 아니라 전부가 달라져야 됩니다. 말도 달라야 됩니다. 나는 저런 말 안하겠다고 해야 돼요. 달라지면 달라질수록 악한 사탄권내를 뚫고 나가는 것입니다. 적극적으로 뚫고 나가려면 적극적으로 달라져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이제부터 말을 해봅시다. 선을 위해 사는 사람들은 이 세상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선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살고는 있으되 이 세상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선한 개인을 위해 살려고 하는 것이요, 선한 가정을 위해 살려고 하는 것이요, 선한 종족, 선한 민족, 선한 국가, 선한 세계를 위해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위해서 살려고 하는 분야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거기에는 수난의 길이 가중되는 것이요, 슬픔의 길이 가중되는 것입니다. 가정을 위해서 살려면 개인을 극복하기 위해 사는 것보다도 더 큰 십자가를 져야 되는 것이요, 종족을 위해 살려면 가정을 위해 사는 것보다 더욱 배가된 십자가를 져야되는 것입니다. 또한 민족을 위해 살려면 종족을 위해 사는 것의 몇 배, 혹은 몇십 배, 몇백 배 가중된 십자가를 져야 되는 것입니다. 또. 나라를 위해서 살려면 민족을 위해 사는 것보다 더욱 배가된 십자가를 져야 됩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나라보다도 세계를 위해 살려고 할 때는, 그 나라에서 당한 십자가에 몇백 배, 몇천 배 배가된 십자가를 져야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십자가를 피하고자 하는 사람은 세계를 위해, 선을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하나님을 위해 살려고 하는 사람은 세계를 위해 사는 사람 이상의 십자가의 길을 더듬어 가야 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사랑을 내 것으로 하고,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역사과정의 어느누구보다도 수난을 겪어야 하고 고통을 받아야 하고, 지긋지긋해 보이고 다른 사람이 곁에 가고 싶지 않을 정도로 일생 동안 비참하게 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하나님의 진정한 사랑의 길과 관계를 맺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생각해 보게 될 때에, 이와 같이 살아간 무리들로 말미암아 참이 출발하였고, 이와 같이 살아온 그 역사적 전통으로 말미암아 참의 역사가 우리 후대의 인간들 앞에까지 상속되어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전세계를 두고 보면 세계의 4대 성인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 성인은 바로 예수, 석가, 공자, 마호메트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들 중에는 그 당시의 사회환경에 보조를 맞추며 생활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석가 같은 양반은 정반왕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나라의 영광스런 권위가 자기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것을 전부 부정해 버린 것입니다. 좋은 환경을 떠나서 반대의 환경인 설산에 들어가 수도의 길을 갔던 것입니다. 또, 노나라 시대의 공자라는 양반은 동네에서 개라는 말까지 들었습니다. 냄새를 잘 맡는다는 거예요. 좋지 못한 일들은 전부 알아 가지고 그것을 충고하고 비판하고 그래서는 안 된다는 부정적인 여건을 제시해 가지고, 그 당시의 사람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하고 그런 명칭까지 남겼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봐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부정적인 입장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습니다. 그렇지요? 태어날 때부터 세상 사람들과 같지 않았습니다. 생활하는 것도 여느 사람들과 같지 않았습니다. 전부 달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친척은 물론이요, 자기의 사랑하는 동생까지도 그를 비난하였습니다. 뿐만아니라 그의 어머니까지도 그를 불신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어머니에게 '여인이여! 너와 내가 무슨 상관이 있느냐?'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자식으로서 부모에게 할 수 없는 최고의 욕설을 퍼부을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그것은 부모가 가는 길과 자기가 가는 길이 다르다는 것을 증거하는 한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예수가 그 당시의 사회와 보조를 맞추기 위해 움직였습니까? 빌라도 법정에서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하고 물었을 때, 그렇다고 대답한 예수, 욕설을 퍼붓고 비웃는 사람들 앞에서 자기가 옳다고 변명했더라면 죽음을 면할 수도 있었는데, 그들과 같은 사람이 되어 변명하고 싶지 않아서 입을 다물었던 예수, 그는 전부 반대적인 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그가 죽은 것은 자기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도둑질을 하다가 잡혀서 죽은 것도 아니요, 자기의 출세를 위해서 나라를 정복하려다가 반역자로 몰려 죽은 것도 아닙니다. 소망의 나라를 그리워하면서, 소망의 민족을 그리워하면서, 소망의 생활을 그 마음에 두고 그것이 실천되지 않는 생활환경을 부정하다가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무원리의 환경에서 몰려 죽음을 당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선한 사람은 그런 유의 사람들속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환영받지 못한 내용이 크면 클수록, 그것이 입체성을 띠고 있으면 있을수록 더욱더 역사적인 인물로 빛나고 있다는 사실을 미루어 보게 될 때에, 지금까지 말한 것이 사실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자로 태어난 여러분이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대한민국의 한 여인으로 태어났습니다. 남과 같이 태어나서 자라고 공부를 하고 시집을 가더라도 여러분은 세상 사람들과 달라야 합니다. 세상 사람 같으면 공부만 하면 되지만 우리 통일교회 교인들은 공부를 하면서 미래의 복귀의 길을 개척하기 위하여 이중의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시집을 가되 한 남편만을 위하여 가는 것이 아니라 그 남편을 넘어 나라를 위해 가야 되는 것입니다. 전부 달라야 된다는 것입니다.
보는 관점도 달라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빵을 위하여, 혹은 외적인 물질세계를 바라보고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는 그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외형적으로 어떤 형태를 갖추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내심의 확고부동한 신념을 가지고 성별된 그 터전 위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는 순정의 길을 따라가야 하는 것이 우리들이 가야 할 길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것을 생각할 때, 여러분은 일반 여성들로서는 감히 생각할 수 없는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여성들은 오로지 자기 남편만을 위해 순정을 다 쏟으면 되지만, 우리의 순결된 마음은 남편만을 위해, 그리고 자식만을 위해 다 쏟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소망적인 미래의 남편을 생각하고 미래의 소망적인 자유스러운 환경에서 자라게 될 아들딸을 바라보면서, 사람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 가정을 바라보시며 기뻐할 수 있는 가정을 만들기 위해 마음을 쏟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역사적 전통이 세워질 날을 바라보면서 살아 나가야 하는 것이 오늘 통일가의 아낙네들의 입장이 아니겠습니까? 자기의 남편을 뒤에 두고, 자식을 뒤에 두고 더 큰 나라를 위하여 정성을 들이고 자기의 육신을 희생하며 산다는 이것이 오늘날 대한민국 여성들과 다른 점입니다.
악한 것은 썩어 없어지는 것이지만 선한 것은 남아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대한민국의 역사 가운데 아무리 훌륭한 역사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보다 대한민국을 위해 더 수고하고, 세계를 위해 더 수고하여 역사적인 내용을 남긴다 할진대 지금까지 남아진 역사적인 것들도 거기에 전부 흡수되고 굴복당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있어 온 충신의 도리나 효자의 도리가 현재 우리가 행하는 충신의 도리보다 못하고, 우리가 행하고 있는 효성의 도리보다 못하게 될 때에는 그러한 전통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전통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부터 새로운 길을 걸어가는 우리의 모든 것들이 과거의 전통을 심판할 수 있고, 현재의 인간들이 살고 있는 모든 환경을 심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미래의 절대적인 기준이 되어 참다운 선의 결정적인 기준을 성립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이렇게 한번 성립된 기준이 영원불변한 것으로 남아질 수 있게 되면 그것으로 인하여 그 나라는 올바른 자리에 서는 것이요, 세계는 올바른 터전이 되어 그 터전 위에 새로운 인류의 문화가 형성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형성되어야 할 그 터전은 오늘날 타락권과 화합할 수 있는 터전이 아닙니다. 타락권과는 상반된 터전입니다. 그런 터전 위에서 진실되고 참된 것으로 남아질 수 있어야 새로운 문화가 형성될 것이고, 새로운 이상세계가 형성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생각하게 될 때, 여러분은 환경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출발한 것이 아니라 환경을 탈피하기 위해 출발한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보통 여인들 같으면 혼자 밥을 먹을 수밖에 없는 서글픈 자리에 처했을 때, 남편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밥을 먹을 것입니다. 모든 감정이 남편을 그리워하는 마음에 사무친 가운데, 혹은 자식을 그리워하는 마음에 사무친 가운데 밥을 먹을 거예요. 그러나 우리는 달라야 합니다. '남편도 나와 같은 자리에서, 자식도 나와 같은 자리에서 함께 나라를 찾아야 한다. 내가 찾아야 할 것은 남편과 지식만이 아니다. 남편과 자식이 공히 찾아야 하는 것은 나라이다' 이래야 됩니다. 이 얼마나 엄숙합니까? 얼마나 고차원적입니까?
이 뜻길이라는 것은 혼자만이 가야 할 길이 아니라 남편도 가야 되고, 후손도 가야 되기 때문에 부부가 먼저 가서 후손이 갈 길을 미리 닦아 놓으면 그 후손은 영광의 후손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 일대에 그 길을 닦아 놓지 못하면 우리 후손도 우리와 같이 신음해야 되고, 우리와 같이 어려움을 극복해야 되고, 우리와 같이 수난길을 밟아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식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후손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 할진대 후손이 짊어지고 가야 할 십자가의 길을 내 일대에 끊어놓고, 내가 이 나라와 이 세계에서 선한 터전을 이룩하여 살겠다고 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앞으로 소망의 후손들이 바라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러한 어머니 그러한 아버지를 후손들이 바랄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여러분이 사는 것은, 이 시대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알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이와 같이 어려운 활동을 하는 것도 오늘날 통일교회만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통일교회의 역사가 만민의 역사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렇게 사는 것은 대한민국이 이어받아야 할 전통을 세우기 위한 것이요, 대한민국을 길이길이 남아질 선한 나라로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대한민국을 자기 가정보다 더 사랑하는 아낙네가 없이는 대한민국의 전통적 역사는 남아질 수 없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은 망하게 되는 거예요.
한 남편을 중심삼고 볼 때, 그가 자기 가정만을 사랑하는 것으로 그치는 입장에 서면, 그 나라는 가정 밑에 깔려 버리는 것입니다. 나라보다 가정을 더 사랑하게 된다면 그 가정이 나라보다 높게 된다는 것입니다. 작은 터전 위에 큰 터전이 머무르는 원칙은 없는 것입니다. 가정이 나라안에 속해 있어야지 나라가 가정 안에 속해 있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큰 것 안에 작은 것이 들어가게 되어 있지, 작은 것 안에 큰 것이 들어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의 법도입니다.
악의 법도는 그 반대입니다. 큰 것을 따라 주지 않고 큰 것을 작은 데에 갖다 몰아넣으려고 하는 것은 악입니다. 나라를 이용해 가지고 자기 가정을 살리려고 하는 것은 악이에요. 큰 것을 작은 데에 몰아넣으려고 하는 것이 악이라는 것입니다. 가정을 자기 개인의 욕심 보따리에 넣으려고 하는 아들딸이 있다면 그는 악한 아들딸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큰 것을 작은 데에 몰아넣으려고 하는 것이 악이라는 것입니다. 통일교회는 엄청난 뜻을 중심삼고 나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기 가정의 행복을 위해서 이 뜻을 이용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악한 사람인 것입니다. 용서받지 못할 사람이에요. 지극히 큰 뜻인데도 불구하고 그뜻을 이용하여 자기가 잘되려고 하는 사람은 지극히 악한 사람인 것입니다. 이렇게 상극과 상반이 오늘날 우리통일교회 가는 길 앞에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명심해야 되겠습니다.
나보다도 가정이 귀하기 때문에, 가정을 위해서는 나를 희생시켜야 됩니다. 올바른 가정을 만들기 위해서는 내가 십자가를 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또, 가정보다도 더 큰 것이 종족이기 때문에, 종족을 위해서 가정을 희생시켜야 되는 것이 원칙입니다. 거기에 들어가서 남아지기 위해서는 희생해야 되는 것입니다. 희생하는 가정들 가운데서도 최고로 많은 희생을 치르고 나면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수많은 가정 가운데서 그 가정 전체를 위해서 대표적으로 먼저 희생하고 나서게 되면, 그 수많은 가정들은 대표적으로 희생한 그 가정 앞에 머리를 숙이게 되고 동시에 자기들의 중심이 되어 달라고 부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원칙을 하나님이 아셨기 때문에 사랑하는 아들딸을 희생시켜 나오신 것입니다. 그 환경에 있어서 언제나 남아질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중심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중심은 남아지는 거예요. 없어지더라도 중심은 곁다리들이 전부 다 없어진 후에야 비로소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심만을 남기기 위한 복귀의 도상에서 어떠한 민족을 중심삼고 복귀역사를 할 때,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사람들을 수난길에 내세우는 것이 하나님의 전법입니다.
당장에 보면 망할 것 같은 길이요, 억울함을 당할 것 같은 길이지만, 그런 길을 극복하고 나면 그 환경이 자기 앞에 굴복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칙이기 때문에 영원히 남아질 수 있는 이 원칙적 노정을 사랑하는 자녀들 앞에 상속시켜 주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을 가진 하나님께서는 타락권내에서 불가피하게 이런 전법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번 전도기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36가정, 혹은 72가정, 124가정, 430가정, 777가정 중에서 어떤 가정이 우리가 본받을 가정이냐 할 때, 잘먹고 잘사는 가정을 보고 본받을 가정이라고 합니까? 이렇게 전체가 동원될 때는 어느 누구보다도 선두에 서서 전체의 어려움을 자기의 어려움같이 여기고 전체의 수고를 혼자 책임지겠다고 허덕이는 사람이 있게 될 때에, 그 희생의 범위가 크고 깊고 넓을수록 그런 사람을 보고 본받을 사람이라고 하지, 큰 것은 제쳐놓고 자기 혼자 좋겠다고 꼬리치고 다니는 사람을 본받을 사람이라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 가운데에는 본받을 사람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 있지요? 그래요, 안그래요?
그러면 남아지기를 바라는 사람들, 혹은 후대에 복받기를 바라는 사람들, 선하기를 바라는 사람들, 잘살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시대와 더불어 짝하여 살아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시대와의 간격이 멀면 멀수록 높은 인격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는 꿈도 못 꿀 그런 세계를 향하여, 그런 이상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이 있으면 그는 그만큼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세계에서 그렇게 산 사람이 있다 할진대 이 세계에서는 망하고 몸뚱이는 죽어 없어질망정 그가 살고 간 사상과 선의 실적은 영원히 남아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반드시 승리의 영광을 받는 모습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터전이 다시 한번 재봉춘하기 때문에, 죽었던 그 사람도 부활할 수 있는 영광을 차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지요?
예수님은 유대교인들이 반대하는 자리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반대하는 자리에서, 그리고 로마의 위정자들이 반대하는 자리에서 죽어갔지만, 그 시대의 로마나 이스라엘 민족, 유대교로부터 치리받을 수 있는 내용을 중심삼고는 하루도 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당시에 살고 있던 세상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래야 맺을 수 없는 별다른 가정과 별다른 나라와 별다른 세계를 위하여 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공인하고 온 인류가 공인하고 미래의 세계가 환영할 수 있는, 공인된 터전 위에서 살았기 때문에 누구도 그를 점령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또한 누구도 그를 침범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죽음의 자리에 나가면서도 당당했던 것입니다. 시대의 지배를 받아 내 몸뚱이는 죽더라도 내 사상은 철석같은 터전이 되고 중심 뿌리가 되어 세계를 움직이고도 남을 수 있고, 세계의 중심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생애를 마치고 간다며 당당하게 걸어간 것이 십자가의 길이 아닙니까?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 시대에 죽었지만 미래를 위해 죽은 것입니다. 또한 예수는 그 시대에 죽었지만 그의 희생은 그 시대와 더불어 흘러가 버리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것으로 남아지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음을 통하여 속죄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혜택을 통하여 그의 뜻을 이어받은 사람들은 그의 사상을 중심삼고 씨족이 될 수 있는 것이요, 민족이 될 수 있는 것이요, 국가가 될 수 있는 것이요, 역사와 더불어 발전하는 문명권을 중심삼고 종말시대에 가서 소망의 천국을 이룰 수 있겠기 때문에 예수님이 재림이란 말을 당당하게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뿌려 놓았으니 내가 거둔다는 것입니다. 내가 동기가 되었으니 결과도 내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그러한 자신감을 가지고 갔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 이 땅에 올 때는 실패한 입장이 아니라, 승리한 입장에서 세상 앞에 선의 권위를 갖고 오시는 것입니다. 개인 앞에, 가정 앞에, 혹은 민족 국가 세계 앞에 당당하게 선의 권위를 들고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민이 그분 앞에 머리를 숙여야 되는 것입니다.
잘사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그 시대에 못사는 사람들이 잘사는 사람들입니다. 사탄세계에서 지긋지긋하게 못사는 사람들이 잘사는 것입니다. 사망권에 깃들어 있는 이 땅 위에서 선을 위하여 지긋지긋하게 못사는 사람들이 잘사는 거예요. 세상에서 당당하게 잘사는 사람은 지긋지긋하게 못사는 거예요.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눈을 볼 때에도, 너는 선을 위해서 얼마나 지긋지긋한 것을 바라보고 살아왔느냐고 물어 보세요. '한번 봐도 싫은 것을 어떻게 1년 동안 보고 살고, 백년 동안 보고 살 것이냐'고 하면, '백년도 더 보고 살아야 된다. 그렇게 태어났으니 죽을 때도 그렇게 죽어야 된다'라고 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눈을 가르치는 절대적인 교훈이요, 참된 교훈인 것입니다.
이 입에 대해서도 '이 놈의 입아! 너는 나불나불하면서 남에게 화를 불어넣는 펌프통 노릇을 했지? 남을 꺽어 넘기고, 남을 헐뜯고. 남에게 침을 주고, 남 앞에 가시가 되는 펌프통 노릇이나 했지?' 해야 합니다.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그 반대로 남에게 힘을 주고 소망을 쥐야 합니다. 낙망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어 줘야 됩니다. 손발을 대해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살아 가지고 망하는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완전한 씨라 할지라도 그냥 그대로 있어 가지고는 거기서 절대로 나무가 나올 수 없습니다. 그렇지요? 완전한 씨일수록 땅에 들어가서 썩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곡식이 나오고 나무가 나오는 것입니다. 완전한 씨는 죽으라고 땅 속에 묻어 놓으면, 도리어 거기에서 새로운 활동을 해 가지고 제 2의 모습이 되어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그러면 오늘날 이 세계 가운데 하나님이 찾고 계시는 참다운 씨가 무엇이냐?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 예수님의 사상을 이어받아 가지고 완전히 죽기 위해서 사는 사람은 남아지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이 사망권에서 살고자 하는 사람은 죽고, 죽고자 하는 사람은 사는 것입니다. 정말 알았어요? 「예」 그렇다면 죽으라우요. (웃음) 죽으라고 하니 고맙습니까, 기분이 나쁩니까? 「고맙습니다」 (웃음) 기분 나빠하는 사람은 망해야 됩니다. 죽으라고 하는 것을 고맙게 생각해야 돼요, 알겠어요? 「예」
그러면 김일성이를 잡으러 38선 넘어 사지로 가라 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꽁무니를 빼야지요? 「아니요」 그 길이 40년, 400년 걸리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그것이 걱정입니다. 한 40일 걸려 가지고 목을 잘라올 수 있으면 되는데 40년 걸려도 안 되고 400년 걸려도 안 되면 어떻게 할 거예요? 그래서 후계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혼자는 망하는 것입니다. 예수도 혼자서 그렇게 죽어갔으면, 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사상을 이어받아 죽음의 고개를 밟고 넘어간 사도들의 대열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기독교가 망하지 않고 예수님이 망하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 혼자만으로 끝났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망했을 것입니다. 그 뜻이 아무리 좋더라도 그 뜻을 이어받아 천년 만년 연속적으로 이루어 나갈 수 있는 후계자가 없으면 소용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후계자를 남겨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은 후 부활하여 40일 동안에 흩어졌던 제자들을 다시 모이게 한 것도 후계자의 터전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전에 스승을 버리고 간 그들을 응당히 배반해야 할 입장이었지만 예수님은 그 반대로 행하셨습니다. 정반대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서로가 서로를 배반하는 것이 일쑤지만, 그는 결코 그럴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인 것입니다. 그가 배반한 무리를 대할 때, 옛날에 사랑하던 그 이상의 마음을 가지고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세 번씩이나 진심으로 묻고 다짐을 받은 것도 그러한 연유에서였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생애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세상 사람들의 삶과 반대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 악한 세상에서 선한 세계가 희생할 수 있는 가망성이 있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추측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게 될 때, 여러분 자신들은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이북에 가서 원수를 갚으라는 말이 있을 때, 그 일이 40일 정도에 끝날 수 있는 일이라면 너도나도 하겠다고 할는지 모르겠지만, 40년이 걸린다 하게 되면 '아, 생각 좀 하고' 하면서 손 들기를 주저할 것입니다. 어디 40년이 걸려도 하겠다는 사람 있으면 손들어 보세요. 알긴 알았구만요. 그러면 4백년이 걸려도 하겠다는 사람 손들어 보세요. (웃음) 그래요. 해보라우요. 해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에게 특권을 주겠습니다. 김일성뿐만 아니라 저 모스크바에 가서 소련의 최고 간부들의 모가지를 잘라 와야 되는 것입니다. 김일성이를 굴복시키는 것보다도 하나님은 모택동을 비롯하여 코시킨이나 브레즈네프를 굴복시키기를 더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 혼자서는 안 됩니다. 또한 우리 대한민국 사람만 가지고도 안 됩니다. 그러니 중공 사람을 전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소련 사람을 전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들을 원수로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정성을 들여 가지고 이 사상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나와 똑같게, 머리에서부터 몸뚱이 꽁지 할 것 없이 빨갱이를 만들거나 혹은 흰둥이를 만들어 가지고 '이렇게 이렇게 해라'하며 명령해야 되는 것입니다. 지금 그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선생님이 대한민국에 뜻을 품고 나타나서 뜻의 길을 가야 되겠다 하고 있는 데 선생님은 잘사는 길을 가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뜻을 안 그날부터 나는 수난길을 걸어왔습니다. 오늘이 바로 우리 협회 창립기념일이지만 우리 협회는 창립 이래 17년을 거쳐 나오는 동안 내내 수난길을 걸어왔습니다. 그 수난의 첨단에 서서 다가올 모든 문제들을 해결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 있는 문제들은 어떤 개인을 위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 일을 잘못하게 될 때에는 하늘땅이 왔다갔다한다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이와 같이 생각만 해도 엄청난 문제들을 해결해야 하는데, 그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누구보다도 자신을 가져야 하고, 누구보다도 철두철미해야 하고, 하나도 그릇됨이 없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런 문제들을 해결하여 하늘쪽으로 넘겨야 됩니다. 그러지 않으면 사탄세계로 굴러떨어지는 일도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보기에는 이 자리가 좋은 것 같지만 좋은 자리가 아닙니다. 여러분들을 남한 각지에 배치해 놓고, 여러분들이 고생하고 있는 것을 볼 때 내 마음이 편한 줄 알아요? 도리어 여러분을 배치하지 않았을 때는 잠이라도 편안히 잘 수 있었지만 배치해 놓은 후로는 그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배치된 여러분이 진실된 자리에서 충성을 하는 것이 천의가 바라는 소원인데도 불구하고, 가증된 자리에서 하늘을 원망하게 되면 그 책임을 누가 져야 되느냐? 여러분도 져야 하겠지만 명령한 사람이 책임을 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원망하는 자리를 피하기 위해서는 내가 그 사람 이상의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원망의 자리를 피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 자신이 정성을 들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평하는 사람 이상의 자리에 서게 될 때, 그 평은 나를 넘어서 나와 상관없이 나가 떨어져서 깨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평을 받을 수 있는 자리에 있을 때는 그 평이 내게서 열매를 맺음으로써 내 갈 길을 막는 놀음이 벌어지기 때문에, 그 평에 걸리지 않기 위해 정성을 들여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는 이 큰 섭리의 뜻을 이끌어 나갈 수 없는 것입니다. 주체와 대상이 주고받아 가지고 하나님을 모셔 드린다는 것이 그리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명령하는 사람은 웃고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명령하는 사람은 울고 살아야 되고, 책임을 더 져야 될 입장에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복귀의 뜻을 이루어 나가는 정상적인 행로인 것을 여러분은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이와 같이 모인 자리에서 여러분이 수고한 내용을 내가 낱낱이 듣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지만 시간 관계로 그러지 못합니다. 그렇더라도 여러분은, 내가 마음으로 여러분이 수고한 것을 동정하는 것 이상으로, 그의 몇백 배로 하늘이 여러분을 동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됩니다.
내가 수난길을 걸을 때, 하나님이 나 이상 수고하신 것을 알았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 앞에 한마디의 불평도 할 수 없었습니다. 가중된 십자가가 앞을 가로막는 일이 천만 번 있더라도, 그 이상으로 수고하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수난의 길도 평탄한 길처럼 넘을 수 있었고 시련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내가 가고 있는 이 길을 따르는 여러분 앞에 내가 힘의 모체는 되지 못할지언정, 여러분의 힘을 깎아 먹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겠다고 하는 것이 하늘의 도리를 알고, 하늘로부터 교육을 받은 선생님의 마음입니다. 나는 여러분의 스승으로서 하나님이 나를 위해 수고하시고 나를 위로하시던 것과 마찬가지로, 여러분 앞에 위로와 힘의 모체가 되기 위해서 밤낮으로 책임을 다하려고 하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선생님이 정성들이는 기준이 여러분의 기준보다 앞놓아가게 될 때 여러분은 언제나 새로울 수 있는 것입니다. 5개월이 지나서 지치는 여러분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1970년 12월 1일, 여러분에게 명령을 할 때 이상의 마음을 가지고 이 명령을 단행해야 되겠습니다. 물론 부작용도 일어날 것이고 반발하는 일도 있을 것입니다. 자체 가정에서 동기가 된 불화의 여파가 교회에까지 미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뜻을 염려하는 마음, 뜻 앞에 미치는 피해가 더 클 것을 염려하는 입장에서 결단을 내려 가지고, 내가 여러분을 출동시킬 때 가진 마음 이상의 마음을 언제나 갖고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항상 그 명령에 순종하여 처음 출발하던 때의 마음을 가지고 움직이게 되면 여러분이 가는 길은 무한히 발전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지 못하면 발전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천리입니다. 원리가 뭐냐? 완전한 주체는 완전한 대상을 창조하는 것이요, 주체와 대상이 완전히 주고받으면 비로소 거기에 하나님이 운행하시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이 운행하시면 창조의 결실이 나타나기 때문에 죽었던 생명들이 부활권으로 옮겨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원리적 견해가 아닙니까?
여러분을 이렇게 동원하는 것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역사와 더불어 살아가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 역사권내에서 잘살아 가지고는 앞으로 후대에 남겨 줄 수 있는 선물이 없는 것입니다. 후대에 남겨 줄 수 있는 전통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생애 가운데에 남겨야 할 것은 무엇이냐? 오늘날 이 썩어빠진 사회에, 심판권내에, 언젠가 한번 제거당하여야 할 이 세상에 남아질 전통이 아니라 심판권을 넘어 미래에 남아질 수 있는 전통을 남겨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통일가를 대표하여 이 시대의 중차대한 사명으로 짊어진, 가냘픈 여인의 몸들을 한 여러분의 책임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은 눈물을 흘려도 자기 아들딸을 위해 흘려서는 안 됩니다. 기도를 해도 자기 아들딸을 위해 기도해서는 안 됩니다. 아들딸을 제물로 삼고 남편을 제물로 삼아서 민족을 살리기 위하여 눈물을 흘려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움이 사무치거든 그 그리움도 자기의 혈연적 관계에서 열매맺게 할 것이 아니라, 민족을 통하여 열매맺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지 못하면 망하는 것입니다. 가정을 떠나서 소망의 심정을 품고 출발하여 사랑하는 남편과 자식을 소망의 귀착점으로 생각하면서 기도하고 몸부림치는 아낙네는 망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남아지지 않아요. 그런 사람은 역사와 더불어 심판받을 것입니다. 심판의 한계선을 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남편을 향해 사무치는 그리움의 마음이 있거들랑, '우리 가정보다도 나라를 중심삼고 머물고 싶은 것이 하나님의 소원이 아니겠느냐? 나아가서 우리 가정보다도 세계를 중심삼고 머물고 싶은 것이 하나님의 소원이 아니겠느냐? 그러니 내 마음을 남편에게 둘 것이 아니라 나라에 두고, 세계에 두자'라고 해야 하고, 그래서 '나라와 세계에 마음을 준 것처럼 남편에게도 같이 줄 수 있는 마음을 갖게 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남편도, 현세에 살고 있지만 미래를 위해 산다고 할 수 있는 자리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또한 그럼으로 말미암아 그 가정은 타락권내에 있는 가정이 아니라, 미래의 한때를 맞이하여 남아질 수 있는 가정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원리적인 견해라는 것을 여러분들은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밥을 먹어도 이 시대를 위해서 먹어서는 안 됩니다. 미래를 위해서, 나라를 위해서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잠을 자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편하기 위해서 잠을 자서는 안 됩니다. 나라를 위해, 내일의 나라의 싸움을 책임지기 위해 자야 되는 것입니다. 먹고 자고 활동하는 일체를 현재의 환경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전통을 남기기 위해 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현재의 통일가의 전통을 누가 미래의 전통으로 남길 수 있을 것이냐? 그때에 가서 하려고 하면 이미 늦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그 전통을 만들어 놓지 않고는 그러한 때를 맞이할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예수가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 담판 기도를 하는 자리에서 '아바 아버지시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나에게서 피하게 하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와 연결되어 있는 제자들도 당시의 환경에 보조를 맞추려 하고 그와 관계되어 있는 친척들도 환경엔 보조를 맞추고 있었기 때문에, 심정적 인연을 중심삼고 볼 때 그 자신도 그들과 같은 입장으로 끌려가는 것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런 그의 마음은 그들과 같이 살며 거기에서 그들과 더불어 뜻을 이루고 싶었지만, 이미 기울어진 형세권내에서는 뜻을 세울 수 없다는 것을 아신 하나님께서는 그 뜻을 이 세상이 아니라 다른 세상으로 옮기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가 살던 그 환경이 아니라 예수가 죽어서 가야 할 미래의 세계로 하나님의 뜻이 옮겨졌던 것입니다. 옛날 이 세상에 주었던 그 뜻을 중심삼고 생각할 때 예수는 서글픈 마음을 가지고 '아바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내 뜻대로라는 것은 그 시대를 중심삼고 이루려는 뜻인 것입니다. 예수는 그 시대를 중심삼고 뜻을 다 이루어 가지고 세계를 대해 호령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뜻을 이룰 수 있는 환경이 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그 뜻을 미래에 두게 되었다는 것을 생각하고 상반된 입장에 서서,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 뜻대로 하시옵소서'라는 담판 기도를 세 번씩이나 신음을 하고 피눈물을 흘리면서 했다는 사실을 알고 그를 동정해야 되겠습니다.
당시의 사회 환경에서 자기 뜻을 중심삼고 변명할 조건이 많았지만, 그 뜻이 현재의 환경에 이루어질 수 없고 미래에 이루어야 할 뜻으로 옮겨졌을 때에도 거기에 순응하는 것이 하나님의 효자의 도리요, 충신의 도리인 것을 예수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길을 따라가기 위해서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 뜻대로 하시옵소서' 했던 것입니다.
거기에 죽음이 가로놓여 있고, 십자가의 비참상이 가로놓여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자기 개인이 비참한 것을 문제삼은 것이 아니라, 그 고개를 넘어 가지고 뜻을 연결시키지 못하면 미래에 억천만년을 두고, 몇억천만 배 가중된 수난의 길과 비참상이 인류 앞에 몰려올 것을 생각한 예수는, 자기 일신을 탕감의 제물로서 십자가에 내놓기를 서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한 결의 밑에서 역사는 진전되고, 새로운 시대의 터전이 닦여 나왔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혼자 이 뜻을 다 이루지 못하겠으면 어떻게 해야 될 것이냐? 후손들에게 올바른 전통을 이어주어야 합니다. 오늘날 통일교회, 통일가에 있어서도 올바른 전통을 이어줘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이어줄 것이냐? 플라스 앞에는 마이너스가 상대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통일가를 중심삼고 볼 때에, 통일가의 중심이 선생님이라면 선생님을 중심삼고 누구를 동원해야 할 것이냐? 여자를 동원해야 됩니다. 알겠어요? 「예」 여자를 동원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원리를 중심삼고 보면 이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여자는, 타락한 해와는 두 남자를 망하게 했습니다. 왼쪽으로는 천사장을 망하게 했고, 바른쪽으로는 아담을 망하게 한 것입니다. 그렇지요? 여자들의 조상인 해와가 그런 죄를 지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동원되어서 역사적 전통을 근본적으로 파탄시킨 해와의 한을 풀어 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 해와는 개인적인 한을 맺히게 한 것이 아니라, 가정의 한을 맺히게 한 것입니다. 그렇지요? 그렇기 때문에 여자 된 여러분들이 두 남자를 위해서 해방의 역사를 이어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알겠지요? 해와가 동기가 되어 타락했기 때문에 그것을 복귀하기 위해서는 여자가 동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반대입니다. 반대예요.
여러분이 선생님을 중심삼고 동기가 됨으로써 오른편쪽 남자를 망하게 했던 그 인연을 메울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여자로서 얼마나 복인지 모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오른편쪽 남자와 의논해 가지고 움직이게 될 때에 천사장은 굴복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여러분이 선생님과 하나되어 가지고 나가게 되면 여러분의 남편은 자동적으로 굴복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되었다 할 때는 자동적으로 굴복한다는 것입니다. 남편을 굴복시켜 가지고 계대를 이어받아 새로운 가정을 형성해야 하는 것이 여러분의 갈 길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려면 여러분이 먼저 무엇을 생각해야 되느냐? 개인을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은 개인의 때가 아니예요. 가정을 가진 여러분이 동원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처녀 총각은 동원하지 않고 가정을 가진 주부들만 동원하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이 가정의 때이기 때문입니다. 알겠습니까? 옛날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중에 60년도에 전도 나갔던 경험이 있는 사람이 있으면, 그때에 기울였던 노력의 3배의 노력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는 핍박을 받으면서도 정성을 들이고 눈물로 싸우며 환경을 개척하고 수난길을 응당히 가야 할 운명길로 알고 달가이 따라왔지만, 이제는 외적인 핍박도 없으니 그저 적당히 하면 되겠지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러면 안 됩니다. 정성을 더 들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남편이 달려 있고, 아들딸이 달려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이 달려 있고, 사위기대가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달라야 하는 것입니다. 알겠습니까?
여자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사위기대를 몽땅 잃어버렸기 때문에, 여자 한 사람을 중심삼아 가지고 잃어버린 것을 모두 복귀해야 하는 것입니다. 천사장을 남편으로 대해 가지고 그런 일이 벌어졌으니 앞으로 하늘편 남성, 본연의 남성을 모시는 자리에서 이것을 지워 버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이 가정으로서 넘어야 할 가정적 탕감기간인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렇게 엄청난 사명을 짊어진 것을 여러분들이 알고, 선생님과 일체가 된 입장에서 정성을 들여야 되겠습니다. 알겠어요?
자, 이제 복귀역사를 더듬어 아담 가정에서부터 한번 생각해 봅시다. 아담 가정의 아담 해와는 두 세계의 모체입니다. 두 세계의 모체이기 때문에 아담 해와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갈라 가지고 가인 아벨을 중심삼고 싸웠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가인이 아벨을 죽였지요? 그 후 가인은 두려워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때려 죽일까봐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가인에게 '너를 죽이는 자에게는 7배의 벌을 내리겠다'고 하셨습니다. 세상에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아벨을 죽인 가인을 당장에 죽여 버리든가, 무슨 처벌을 해야할 텐데, 도리어 그를 죽이는 사람에게 7배나 뭘 주겠다고요? 복을 주겠다고 했습니까, 화를 주겠다고 했습니까? 화를 주겠다고 했잖아요. 그러면 하나님이 사람 죽인 살인자의 편입니까, 죽인 것을 모르겠다고 하는 편입니까? 이것을 묻는 사람이 지금까지 없어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그런 역설적인 발언을 하셨겠는가.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하나님이 가인을 죽이려고 했다면 세상을 복귀할 수 있는 길이 막혀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세상의 원수가 되는 거예요. 알겠어요? 하나님과 세상이 원수가 된다는 것입니다. 형제끼리는 원수가 될 수 있어도 부자간에는 원수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원수가 되면 복귀의 길이 끊어지게 되고, 부자관계도 끊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형제를 살육한 사실은 나쁘지만, 천도를 남겨야 할 하나님은 가인을 벌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를 때려 죽이게 되면 천도가 끊겨 나가기 때문에 복귀고 무엇이고 다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도를 남겨야 할 하나님은 뜻을 생각하고 반대적인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전부 반대입니다. 무엇 때문에 그랬겠습니까? 현재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고 미래 때문에 그런 명령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노아 할아버지를 보세요. 노아 할아버지가 120년 동안 방주를 지을 때 그의 친구나 동네 사람들, 그리고 그의 어머니 아버지와 아내, 아들딸, 며느리들이 그를 좋아한 줄 알아요?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시아버지라는 사람이 매일 까뀌 보따리를 짊어지고 새벽같이 나가면서 며느리에게 '아가 아가, 밥 좀 일찍 해라' 그랬겠어요, 안 그랬겠어요? 분명히 그랬을 거예요. 마누라 보고도 '여보 마누라, 이 영감이 일하러 나가는데 해가 중천에 떴을 때 가서 올라가다 말고 내려와서야 되겠나. 좀 빨리 해주게'라고 간절히 말을 했을 것입니다.
120년이라는 말할 수 없이 기나긴 기간이 있었기 때문에 '놀다가 한 10년 후에 해도 되겠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은 그런 것을 원치 않은 것입니다. 명령받은 그날부터 끊임없는 정성을 들이고, 일어날 때도 누구보다도 먼저 일어나 일을 시작하고, 일을 마칠 때도 누구보다 늦게 마치고, 잠은 누구보다도 적게 자고, 정성은 누구보다 많이 들이기를 하늘은 원했을 것 아닙니까?
'노아야, 너는 이 시대의 대표자가 아니다. 그러니 너는 천추만대 역사 끝까지 남길 전통을 세워야 하고 복귀섭리에 보조를 맞춰야 한다. 너는 그런 대표자이기 때문에 너는 나와 더불어 살 수 있는 전통을 세워야 된다'라고 하시지 않으면 안 되는 하늘의 사연이 있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역사적 환경에 맞지 않는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노아 할아버지는 역사를 넘고 넘어 복귀섭리의 노정에 전통을 남겨야 했던 것입니다. 그의 전통을 따라가야 할 후손들이 있기 때문에 그 자체를 보면 비참하고 불쌍하지만 뜻을 사랑하고 계획했던 복귀의 천국을 잃어버릴 수 없는 하나님은 그를 동역자로 남기려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현실세계와 더불어 짝할 수 없고, 현실적인 환경에서 배척받는 입장에 있기 때문에, 인류역사노정에 믿음의 전통을 세우는 데는 자그마치 120년 동안 수난을 당하는 것이 필연적인 조건이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노아 할아버지에게 시대의 걸인이 되고, 시대의 추방자가 되고, 시대로부터 몰림받는 환경에서도 그것을 극복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즉, 그 시대를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소생되어 오는 미래의 뜻의 세계와 더불어 살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은 노아를 그렇게 무자비한 입장으로 내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노아 자신도 그 뜻을 알았기 때문에 자기의 아들딸을 무자비한 입장으로 내몰지 않을 수 없었고, 자기 부인을 무자비한 자리로 나가도록 권고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노아의 아내와 그 아들딸이 그러한 노아의 권고를 고마운 권고로 받아들이고, 아버지가 행하는 것이 응당히 해야 할 책임을 하는 것으로 여기고, 120년동안 노아를 협조했던들, 노아의 가정에 그러한 불상사의 끝날이 나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불평하고 비판함으로 말미암아, 120년간 정성들여 방주를 지은 노아 할아버지는 내적인 면에서 미래의 전통을 세우기는 했지만 실체적인 승리의 터전을 갖추지 못하고 실패한 운명권내로 흘러가 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노아 할아버지는 그 시대를 위해 산 것이 아니라 미래를 위해 살았던 것입니다. 민족 가운데서도 보다 높은 중심민족으로, 길이길이 남아질 수 있는 민족으로 세우고자 하신 하나님의 뜻이 있었기 때문에 미래의 역사앞에 뒷받침이 될 수 있는 전통을 남기기 위해 노아로 하여금 그 시대에 부정받는 생활을 하게 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미래와 더불어 살게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노아에게 그런 놀음을 시켰다는 것입니다.
또, 아브라함을 보세요. 우상장사의 사랑스러운 아들로서 어머니, 아버지의 슬하에서 잘 자라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그를 불러 가지고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너는 데라의 집에서 떠나라.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예고하고 내린 명령이 아닙니다. 불러 가지고 바로 내린 벼락명령인 것입니다. 청천의 벽력 같은 명령이 떨어진 것입니다. 그때에는 우물쭈물하면 안 됩니다. 떠날 때는 기다렸다는 듯이 당장 떠나야 합니다. '아이쿠,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하며 망설이면 안 돼요. 출발이 깨끗해야 하는 것입니다. 출발이 그릇되게 되면 천추만대의 역사에 한이 될 오점을 남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사탄의 참소조건이 되어 지나온 모든 역사가 부정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알기 때문에 하늘의 명령을 받들고 나선 사람들은 명령을 받은 즉시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명령을 받은 아브라함도 즉시 갈대아 우르를 떠났던 것인데 그때 아브라함은 얼마나 기가 막혔겠습니까? 정든 고향산천과 부모친척 거느리고 형제자매와 같이 재미있게 살던 가정을 떨치고 야간 도망을 해야 했던 아브라함의 심정이 얼마나 기가 막혔겠느냐는 것입니다. 어머니 아버지가 알면 가라고 그러겠습니까, 또 형제자매가 알면 가라고 그러겠습니까? 그러니 할 수 없이 부모 형제자매들이 깊은 잠에 빠진 밤에 보따리를 싸들고 대문을 나섰던 것입니다. 그때 아브라함의 심정이 어떠했겠느냐는 것입니다. '어머니 아버지 안녕히 계십시오. 형제들아 잘 있거라. 나는 천명을 따라가는 길이니 내 앞에는 당연히 비참한 길이 있을 것이고, 연이어 수난길이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나 기필코 이 길을 가서 내가 뜻한 바를 이루고 돌아오겠으니, 그때까지 죽지 말고 살아남아 주십시오' 하며 엇갈리는 마음으로 식구들의 편안을 빌며 돌아서던 아브라함, 슬픔에 엇갈리는 심정을 가지고 고난길을 향하여 나서서 재작전을 하고 내일의 용사로서 결의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입장에 섰던 아브라함의 심정이 얼마나 비장했겠느냐? 그것은 오늘날의 세상 환경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지만 아브라함은 그 명령을 기다렸다는 듯이 이행한 것입니다. 그의 행동 자체는 우상장사 데라, 즉 사탄의 소굴을 완전히 거부하는 하나의 선을 긋는 것이었고, 사망권을 잘라내는 것이었습니다. 고향과 가정을 버리고 미련없이 떠난 그 자체가 사망권에서 완전히 탈피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를 에워싸고 있던 사망권을 완전히 제거시키고 넘어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놀음을 하라고 명령하셨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됩니다.
아브라함은 명령을 받는 순간부터 국경을 넘어 이방의 나그네요, 유랑민 신세가 되었던 것입니다. 짚시의 선조가 될 수 있는 길을 나선 거예요. 그런 아브라함의 생활이 얼마나 비참했겠습니까? 애급에 들어가서는 바로왕에게 아내를 빼앗길 뻔한 일이 있기도 했고, 그랄왕에게 몰리는 처참한 환경에도 처했습니다. 그러한 수욕의 노정이 첩첩이 계속되는 입장에서도 아브라함은 서슴지 않고 아내를 보낸 것입니다.
하나님은 출발이 틀림없기 때문에 모든 것이 틀림없을 것이라고 여기게 된 것입니다. 또한 틀림없는 길을 출발했기 때문에 틀림없는 그날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틀림없이 모든 어려움을 극복해야만 된다고 하는 것이 아브라함의 신념이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아브라함은 백세에 만득자 이삭을 얻어 하나님이 같이하신다는 증거적인 실체를 보았고, 약속하신 하나님이 틀림없다는 것을 알고 또다시 가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결의를 다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입장에서 자식을 잡아 제물로 드리라는 명령이 내렸던 것입니다. 그건 전부 그 시대에 맞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시대에는 누구에게 그런 명령을 내린다 해도 한 사람도 따라갈 사람이 없었을 것입니다. 전부가 부정적인 여건이요, 부정적인 행동이요, 부정적인 조건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조건 앞에 아브라함은 '나는 당신 앞에 바쳐진 종의 몸인데, 주인된 당신을 거역하고 어떻게 내 마음대로 하겠습니까?' 하면서 절개와 지조를 가지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응하는 것이 도리인 것을 알고 수난의 길을 걸어갔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그러한 행로를 거쳐 120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야곱을 중심삼고 복귀의 터전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노아 때에 실수한 것을 재차 수습함으로 말미암아 복귀역사를 되돌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전부 부정적인 생활을 하였습니다. 야곱도 보십시오. 자기 형님을 속이는 일이 있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방에 가서 종살이를 했던 것입니다. 종살이를 했어요. 그 시대의 부정적인 환경에 몰림을 당하고, 환경에 에워싸였지만 환경에 지배받지 않았습니다. 원수의 포위망에 사로잡힌 포로와 같았지만 그의 마음은 그 환경을 넘어서 하나님을 그리워하고 미래의 이스라엘 천국을 꿈꾸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오늘날 복귀세계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그러한 생활을 했고, 야곱도 그러했습니다. 그 시대에 환영받아 가지고는 망한다는 것입니다. 그 시대의 전통을 씻어 버리고 미래의 전통을 남기기 위해서는 그런 수난의 길, 수욕의 길을 거쳐야 됩니다. 그러지 않고는 우리의 선조의 자리에 설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길을 거쳐 선조의 자리에 선 것이 우리의 조상들이 아닙니까?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모세를 보세요. 호화찬란한 바로 궁중에서 왕녀의 아들로 자란 그는 무엇 하나 부러울 게 없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런 모세는 누구보다도 애급 나라에 충성해야 할 입장인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에 대한 자기의 절개를 잃지 않고, 자기 민족을 위해 수고의 길을 나섰던 것입니다. 그 나라 전체가 반대하고, 그 나라 전체가 원수가 되는 입장에서 한 사람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나선 것입니다. 그렇듯 한 사람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나라 전체와 주권을 부정한 그의 단호한 행동은 길이 찬양할 수 있는, 하늘의 절개를 지닌 사나이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이스라엘 나라 전체가 환영하지 않는 독단적인 입장에서 전체의 반대를 받으면서 한 사람을 옹호하고 나섰던 것입니다. 한 사람의 이스라엘인을 옹호하기 위해서 자기의 전체를 희생하고 생명까지 걸고 나섰다는 것은 그 당시의 사회 환경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행동인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선조들은 전부 다 역설적인 행동과 역설적인 방법을 통하여 신앙계의 터전을 닦아 나온 것입니다. 그 터전은 그 시대를 위해서 닦은 것이 아니라 후대 후손인 오늘날의 우리 앞에 남겨 주기 위해서 닦은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이어받아 가지고 탕감복귀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세례 요한도 보세요.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산짐승처럼 살았잖아요? 또 약대 털옷을 입고 살았다지 않습니까? 잘 입을 것이 뭐 있겠습니까? 30년 동안 그렇게 살았으니 그 주제가 형편이 있었겠어요? 전부 다 그런 환경에서 부정적인 행로를 갔던 것입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하늘의 뜻을 따라가는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느냐? 또 그렇게 시키지 않으면 안 되는 하나님의 야속한 내적인 사연은 무엇이냐? 고생시키지 않고 될 수 있었으면 왜 그렇게 안 했겠습니까? 그런 방법이 아니면 안 되겠기 때문에, 사망권을 벗어날 길이 없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빠른 길이요, 그것이 해결할 수 있는 비법이기 때문에 그 비법을 아신 하나님께서는 불가피하게 눈물을 머금고, 이를 악물고 신음하는 소리를 응당히 들어야 할 소리로 여기고 들으면서 오늘날까지 우리 조상들을 거느려 나오신 것입니다. 이렇게, 새로운 미래의 시대에 남길 수 있는 전통을 마련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고 희생했는가 하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태어날 때부터 달랐습니다. 자랄 때에도 달리 자랐습니다. 예수님은 장가가는 것도 달라야 했습니다. 아내를 취하는 것도 달리 취해야 되고, 살림살이도 달리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수고하더라도 그 사회 제도권내에서는 전체가 다른 환경을 이뤄 놓을 수 없는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죽음의 자리로 내세워 가지고 다시 시대를 연장시켜 나오신 것입니다.
그러한 피의 대가를 치러 가지고 복귀의 터전을 넓혀 나온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의 생활도 비참한 것이요, 예수님의 생애도 비참한 것이었습니다. 그런 비참한 생활을 바라보고 좋아할 사람이 그 시대에 누가 있었겠으며, 그런 생활을 하는 예수님 자신은 기뻤겠느냐? 아닙니다. 가는 곳곳마다 눈물을 흘려야 되고, 가는 곳곳마다 도망 다녀야 되고, 가는 곳곳마다 깊은 산중에 들어가 밤을 새워 가며 철야기도를 해야 하는 운명길을 누가 원했겠습니까? 그 시대 사람은 그 누구 하나도 원하지 않았습니다. 다 싫어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상치되는 생활을 하는 것이 선이기 때문에, 참이기 때문에, 하늘을 따르는 길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렇게 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래야 한줄기 하늘의 길이 가려지고, 한줄기 하늘의 전통이 세워지겠기에, 또 그 전통을 따라 하나의 종이면 종, 아들딸이면 아들딸의 모습이 남아지겠기에, 이렇게 하지 않고는 그런 사람들을 만날 수 없겠기에 하나님은 불가피하게 서글프고 또 서글픈 길을 찾아 나왔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통일교회 문선생은 어떠한가?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간 길이 기독교가 걸은 길이었습니다. 아담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전 후손도 아담과 마찬가지로 타락한 길을 걷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예수님이 그러한 타락의 원한을 막아 놓고, 죽음으로써 영적으로나마 복귀의 길을 가려 놓고 갔기 때문에, 사도 이후 지금까지의 기독교는 피의 제단을 연결시켜 나온 것입니다. 피를 뿌려서 출발했기 때문에, 피를 뿌려서 거둬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사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운명을 이어받아야 할 최후의 민족은 피를 흘려야만 비로소 국가적인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은 일본의 압정하에서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습니까? 그렇게 피를 흘려야 되는 것입니다. 피뿌림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에 피뿌림으로 국가를 거둬야 합니다. 이것이 다른 민족을 통해서 미리 이루어졌는데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이 뜻을 받들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제 2차적으로 더 큰 원수를 만나 난데없이 피를 흘린 것이 바로 6·25동란입니다. 6·25동란이 끝났다고 해서 나라의 통일을 가져온 것도 아니고 평화의 국권이 이루어진 것도 아닙니다. 국가는 양단되고 오늘날 신앙자가 걸어가야 할 길은 더욱 피폐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새로운 이스라엘 교권을 중심삼아 가지고 새로운 제단을 묶고, 흩어진 총체를 모아 새로운 건국이념을 들고 나라를 향하여 나서야 할 무리가 통일의 무리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통일교회를 지도하는 선생님의 걸음도 지금까지 하늘의 뜻을 따라 나오던 선조들의 걸음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눈물로 출발했기 때문에 그 나라를 찾아 하나님 앞에 봉헌할 때까지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갈 수 없는 길이 복귀의 길인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선생님을 사모하고 선생님을 따라온 것은 좋지만 선생님의 눈물어린 내적인 생활을 모르면 안 됩니다. 선생님이 역사적으로 어떤 투쟁을 해 나왔는지를 여러분은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선생님 앞에는 개인적인 십자가가 가로놓여 있고, 가정적인 십자가가 가로놓여 있고, 자녀적인 십자가가 가로놓여 있고, 교회적인 십자가도 가로놓여 있고, 국가적인 십자가도 가로놓여 있습니다. 선생님은 나라가 없는 사람이요, 교회가 없는 사람이요, 가정이 없는 사람입니다. 또한 아내가 있으되 아내가 없는 사람과 같고 아들이 있으되 아들이 없는 사람과 같은 외로운 입장에서 싸워나온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그렇습니다. 아들이 없는 하나님이 되어 있고, 아내가 없는 하나님이 되어 있고, 종족이 없는 하나님이 되어 있고, 나라가 없는 하나님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 뜻을 이어받을 수 있는 아들도 없고, 아내도 없고, 가정도 없으며, 종족도 없고, 민족도 없고, 국가도 없는 것입니다. 고독단신으로 고독한 자리에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고독한 것과 마찬가지로 선생님도 고독한 자리에 서서 아들 아닌 아들을 아들로 삼아야 되고, 아내가 될 수 없는 사람을 아내로 삼아야 되고, 종족이 될 수 없는 무리를 종족으로 삼아야 되고, 교회가 될 수 없는 것을 교회로 만들어야 되고, 나라를 이룰 수 없는 무리를 묶어 나라를 만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출발하였으니 역설적인 길을 걸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고 기쁠 수 있는 길을 두고 서글픈 길을 걸어 탕감노정의 대가를 치르면서 민족을 대하고 교회를 대할 수 있는 터전까지 닦아 온 것입니다. 그렇게 거친 수난길을 여러분은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산 것은 모두 이 시대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전부가 이 시대와는 역설적인 생활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생활을 해 나온 것은 앞으로 천년 만년 남아질 수 있는 전통을 남기기 위해서입니다. 이 전통 위에 서게 될때 미래의 역사도 수습될 수 있고, 이 전통을 기원으로 할 때 미래의 역사도 완성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전통적 기원을 올바로 세워 놓지 않고는 역사를 두고 수난길을 거쳐온 하나님의 뜻이 성사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지금까지 이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도상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행복만을 꿈꾸고, 혹은 편안을 꿈꾸고, 혹은 자기 가정을 중심삼고 염려하는 입장에 서 가지고는 이 길을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못 간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오늘날 이 시대를 위해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 시대로부터 핍박받고 모욕당하고 이 시대와 상충하고 상극점에 부딪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부딪치되 죽어서는 안 됩니다. 죽을래야 죽을 수 없는 것입니다. 죽더라도 부딪치는 것을 부숴 없애 버리고 죽어야 할 운명인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국가의 한계점까지 죽지 않고 넘을 것이냐 하는 것을 밤이나 낮이나 생각해야 됩니다. 밤이 오면 무서움을 느끼듯 그것을 생각해야 되고 낮이 되면 싸움터에서 질까봐 염려하는 마음으로 그것을 생각하고 다짐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생활을 하며 한치의 앞길을 개척하기 위해 후퇴가 있을 수 없는 길을 가려 나가야 하는 것이 복귀의 길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 통일교회는 소수의 무리를 거느리고 나왔습니다. 1960년대의 식구 수와 오늘의 식구 수를 비교해 보면 지금이 더 적습니다. 이 수를 가지고 가중되고 전진되는 무대가 입체적으로 넓어지는 터전을 보충시키고 메워 나가기 위해서는 개인적인 희생 가지고는 안 되기 때문에 가정을 희생시킬 수밖에 없는 운명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을 내세워서 죽음길로 보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민족이 망하기 전에 여러분을 먼저 망하게 만들기 위해 동원한 것입니다. 가정들이 망하기 전에 여러분을 먼저 망하게 만들기 위해서 동원한 것입니다. 국가가 망하기 전에 여러분을 먼저 망하게 하기 위한 싸움이 벌어져야 됩니다. 그러한 싸움이 벌어지거든 마지막 싸움의 때가 된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통일교회 안에서도 말이 나고, 기성교회에서도 통일교회 때문에 무슨 말이 나고, 나라에서도 통일교회 때문에 말이 나고, 이 아시아에서도 통일교회 때문에 말이 나고, 세계 정상의 위정자들 사이에서도 통일교회 때문에 말이 나는 때가 되면 세계는 너와 나와의 한판 싸움만 남았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때가 마지막 때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알겠습니까?
세계의 마지막 때가 점점 우리의 눈앞에 다가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고 그야말로 허리띠를 바싹 졸라매야 됩니다. 내 비록 50이 넘었지만 30 장년기에 뜻을 품고 이 민족과 세계 앞에 호령하던 신념을 어떻게 가질 것이냐 하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이상의 기백과 그 이상의 신념을 가지고 원수의 진지를 향하여 나가는 데 있어서 총사령관으로서 서슴지 않고 단안을 내려 호령해야 할 때가 목전에 다가왔다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세계적인 정세를 바라보게 될 때, 오늘 우리의 뜻이 여기까지 온 것은 우리들이 잘 싸워서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배후에서 하나님이 수고하고 수많은 선조들이 세상과 반대되는 부정적인 생활을 해 나왔기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조들이 역사적 전통을 세우기 위해 발을 구르며 십자가의 고난길을 극복하고 우리의 길을 개척해 주고 지상의 터전을 보호하기 위해 얼마나 수고하였던가 하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선조들 앞에 빚진 자가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들의 빛을 가려 주고 그들의 빛을 져 주어야 할 통일신도들이니 아브라함 앞에 부끄러운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겠고, 노아 앞에 부끄러운 사람이 되어서도 안 되겠고, 모세 앞에 부끄러운 사람이 되어서도 안 되겠고, 예수 앞에 부끄러운 사람이 되어서도 안되겠습니다. 그들이 우리를 보고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도록 되어야만 역사를 바로잡을 수 있고, 비로소 이 땅에서 소망의 천국문을 개문할 수 있는 선봉장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분명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모든 놀음을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이 세상이 사탄권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탄권내에 보조를 맞추지 않고 운명길을 가려 가야 하는 것이 복귀의 길인 연고로, 하나님은 이를 악물고 죽음을 각오하고 희생을 치르면서 나오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늘의 길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내가 그 길에 보탬은 못 될망정, 그 길을 가로막거나 그 길에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죽더라도 그렇게는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제부터 우리가 해야 할 사명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치마를 두른 여자의 몸이요, 연약한 아낙네의 몸이지만 치마를 두른 일개 연약한 여자의 몸만은 아닙니다. 세기적인 사명을 띠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망하게 하느냐, 흥하게 하느냐 하는 갈림길에서 죽더라도 하나님을 흥하게 하는 길을 가려 놓아야 할 사명을 짊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한 남편의 사랑하는 아내요, 자녀들의 어머니라는 것입니다. 아내가 잘못하게 되면 그 남편도 걸리는 것이요, 어머니가 걸리면 그 자녀도 걸리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천추의 한을 풀고 가지는 못할망정 남편에게 이 한을 넘겨 줄소냐? 자식에게 이 한을 넘겨 줄소냐? 남편의 한과 자식의 한을 벗겨 주어야 할 것이 타락의 동기의 인연을 갖고 있는, 복귀의 천국을 바라보는, 가정을 가진 해와들의 중차대한 사명인 것을 여러분들은 분명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이 눈이 그리워하는 것을 보며 사는 것이 아니라, 이 눈이 싫어하는 것을 보며 살아야 합니다. 또 이 손이 좋아하는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싫어하는 것을 해야 합니다. 극에서 극을 탐구하면서 그것을 밟고 넘어간 후에야 비로소 소망의 한날이 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알고 내적으로 다짐하면서 극복의 일로를 거쳐가야 하는 것이 여러분의 3년노정인 것을 부디 명심하고, 망해 가는 이 현세에 있어서 하나의 새로운 전통을 남기는 가보들이 되어 주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그런 사상을 가지고 그렇게 움직여야 대한민국이 위기일발의 입장에 서게 될 때, '여성들이여! 동원하자'고 할 수 있는 선동자들이 될 수 있는 것이요, 그들을 모집할 수 있는 모집요원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망해 가는 국가 앞에 여자들이 단결하여 총을 들고 나서 가지고 국경선을 수비하는 입장에 서게 될 때, 남자들을 자극시키고, 저 이북까지 통일의 기운을 몰고 갈 수 있는 동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엄청난 사명이 여러분들이 살고 있고, 여러분이 싸우는 터전 위에서 뒤넘이친다는 것을 항상 생각해야 합니다. 내일 강자로 살기 위해서 오늘 약자의 모습으로 산다고, 오늘은 슬픈 모습이로되 내일은 영광의 모습을 갖기 위해서 이렇게 산다고 다짐하는 생활을 하면 여러분은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살고 간 후에는 못살았다는 레테르가 붙는 것이 아니라 잘살았다는 레테르가 붙어 영광과 찬양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결과를 거두느냐 하는 것은 이제부터 움직여야 할 3년 기간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통일가의 주부들은 잘살았다, 통일가의 남편들은 잘살았다, 통일가의 아들딸들은 잘살았다, 통일가에서 축복받은 온 세계의 통일 족속들은 잘 살았다는 명분을 세우지 않고는 민족복귀를 성사시키기 어렵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합니다.
이런 엄숙한 사명이 여러분의 두 어깨에 지워진 것을 알게 될 때, 비록 배가 고프더라도 비틀걸음을 걸을 수는 없다, 억울한 가슴을 붙안고 돌아서게 될 때, 보통사람 같으면 저주하겠지만 나는 그럴 수 없다고 해야 됩니다. 남다른 길을 가야 되겠기 때문에 복을 빌어 줘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도 죽음길에서 원수들에게 복을 빌어 주었습니다. 예수는 자기가 십자가를 지고 죽어 가는 데 있어서, 최후의 그 순간까지 하나님께서 구레네 사람 시몬을 협조자로 세워 준 것을 볼 때, 사지에까지도 동역자를 세워 준 하나님이 얼마나 마음 졸이며 자기의 뒤를 따라다니셨는가를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알았기 때문에 예수는 죽으면서도 황공한 마음으로 죽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희생하면서도 부끄러운 마음을 느끼면서 희생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역사시대의 그 누구보다도 비참하게 산 사람이로되 누구보다도 멋지게 산 여성의 전통적 기반을 닦아 온 인류 앞에, 혹은 국가 앞에 길이 빛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기를 바라시고 여러분에게 명령하신 것이요, 여러분을 축복해준 이 스승도 이러한 원칙에 입각하여, 여러분을 이 민족 앞에 세우지 않으면 이 민족의 미래에 비운이 찾아올 것을 염려하여 여러분을 동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것을 깊이 명심하고 금후의 갈 길을 가고, 새로운 자세와 결의를 가지고 선조들이 남긴 전통을 고이 이어받아야 되겠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역사상의 선조들을 대신한 대표자요, 세계를 수습할 수 있는 하나의 구세주와 같은 입장에서 미래의 환난을 전부다 무너뜨려서 최고의 행복의 터전과 천국의 기틀을 마련하고, 하늘에 무한한 영광된 터전을 생전에 만들어 놓고 죽겠다고 하며 한의 고빗길도 감사하며 가야 됩니다. 그렇게 되면 반드시 이 시대의 십자가는 끝이 날 것입니다.
끝장이 나는 것은 세계의 끝이 아닙니다. 대한민국입니다, 대한민국! 대한민국이 우리를 반대하지 않고 환영할 수 있는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3·8선 이북이 우리와 대등한 입장에서 우리와 터놓고 이야기하게 될 때 우리가 우위에 서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들보다 우세한 입장에서 그들을 먹여 살리고 사랑으로 품어 가지고 녹여내지 않으면 안 될 길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생각할 때, 우리들은 이북 원수들을 사랑할 수 있는 훈련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오늘날 우리 국민들로부터 받는 수난을 훈련으로 삼아야 됩니다. 미래의 제 2의 싸움터에서 승리의 결과를 얻도록 발돋움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하나의 훈련으로 여길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보다 더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우리는 간단히 실행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나간다 할진대 여러분은 어떤 길을 가도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 지방에 있는 지구장이나 지역장을 믿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선생님과 일치되기만 하면 얼마든지 지역장이나 지구장을 대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무슨 말인지? 「예」 그렇기 때문에, 지구장이나 지역장 회의 때 여러분들을 지역장이나 지구장의 조직 밑에 넣어야 된다고들 하지만 원칙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선생님이 안 된다고 명령했습니다.
여러분을 그들보다 더 높은 곳에 세워 놓은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그들로부터 도움을 받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수고하는 여러분의 얼굴을 바라보고 감동을 받아 거무스레한 남자의 얼굴을 해 가지고 여러분의 무릎 앞에 엎드려 통곡하며 사죄할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그런 감동의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들에게 배우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가르쳐야 되는 것입니다.
정성을 들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 스승의 도리를 따라가는 데, 하늘가정의 전통을 존중하는 데 있어서 어느누구보다 새로운 전통을 세워 나가야 하는 것이 오늘날 통일가를 대표한 여러분들의 사명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러한 사명을 다하면 통일교회는 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또, 망할 운세권으로 들어가는 가정들도 여러분으로 말미암아 재봉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중차대한 사명이 여러분에게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시대와 더불어 사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선각자로 사는 것이요, 미래의 공고한 기반을 닦기 위해 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1971년의 표어가 통일기반 확보인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통일기반 확보는 여기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선조들이 남긴 전통을 이어받는 데서부터 역사는 발전되었고, 그 사상을 근간으로 후계자들이 발전해 나온 것입니다. 그러면 통일기반 확보를 누가 해야 되느냐? 선생님과 여자들이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알겠습니까? 「예」
하늘이 추모하는 자리에서 죽음의 길을 가고, 하늘이 기억하는 자리에서 쓰러져야지, 하늘의 원망을 받는 자리에 서면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이 3년 기간에 못 살았다고 할 수 있는 길을 찾아가지 말고, 잘살았다고 할 수 있는 길을 찾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울음) 여기서 잘산다는 것은 외적인 여건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 부정하는 자리, 세상이 못산다는 자리입니다. 그 자리를 운명으로 알고 거기에서 잘살기 위한 전통을 세워서 미래에 남길 공고한 터전을 닦아야 할 것이 여러분의 사명인 것입니다.
이런 것을 알고 천의에 의한, 한 번밖에 없는, 역사과정에서 전무후무한 이 기간에 여성들의 권위를 다시 찾을 수 있는 최후의 때를 사수함으로써 전통적 권위를 세워야 합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책임입니다. 그러니 부디 이번 기간을 통하여 열심히 연마하기 바랍니다. '내가 졸소냐. 한마디라도 놓칠소냐' 하며 안팎으로 무장해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이 삼천리 반도를 여러분의 치마폭으로 휘어 싸 놓고 하나님 앞에 속죄의 제사장의 아내가 되어 가지고…. 제사장이 죽으면 내가 제사장의 사명까지 대신하겠다는 입장에 서서 아녀자지만 제사장의 책임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만 되면 여러분이 가고 난 뒤에도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틀림없어요. 이것은 하나님과 더불어 선생님이 여러분에게 약속합니다.
이러한 결의 밑에서 최후의 싸움터를 지키고, 최후의 개척자로서의 사명을 다하고, 천의에 의한 탕감노정을 가는 데 있어서 슬픔을 극복하여 하나님 앞에 기쁨의 결과를 돌려 드리고 이 민족 앞에 소망적인 산 실적을 남겨 놓고 가겠다고 해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결의를 하고 소기의 사명을 감당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버님! 여기 통일가가 남아 있나이다. 엘리야가 아버지 앞에 '나만 남았나이다'라고 외로운 자리에서 호소하게 될 때 아버지께서는 바알에게 굴복하지 않은 7천여 무리가 있다고 말씀하셨던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오늘 여기에 모여 있는 당신의 딸들은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과 하나되어야 하겠습니다. 그 누가 반대를 하더라도 하나되어야 되겠습니다. 그 누가 가로막더라도 하나되어야 되겠습니다. 죽음이 가로놓이더라도 죽어서 피로라도 호소할 수 있는 몸이 되겠다고 결의하는 이 시간이오니, 아버지, 받아 주시옵소서.
이번 기간을 통하여 이들 앞에 하늘의 전통을 고이 심어 줘야 되겠사오니, 이들로 하여금 하늘의 전통과 더불어 고이 살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선조들이 이어 남겨 준 이 전통을 붙안고 의의 있게 사는 당신의 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부탁드리옵니다.
이들의 생애에 부끄러움이 없게 하여 주시옵고, 과거와 현재의 전통이 생활 가운데 길이 길이 남게 하여 주시옵기를 재삼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의 성호 받들어서 아뢰었사옵니다. 아멘.
책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