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일생을 살아가는 데는 여러 가지 변화가 많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소년시대 청년시대 장년시대를 거쳐 노년시대에 이르게 되는 것을 우리들이 다 알고 있는 바입니다. 여기서 우리 젊은 사람들에게 특히 한 가지 말하고 싶은 것은 젊은 시절이 길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이 많은 분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이제 나이가 60이 넘고 70이 가까와지니, 혹은 백 살이 되어 가니 가야 할 길을 가야 되는데 그냥 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후계자를 남겨 놓고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절정기인 청춘시대를 어떻게 보낼 것이냐

후계자 가운데에는 자기의 손자라든가 혹은 자기의 외손자라든가 하는 혈족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후계자들 가운데에서 자기의 젊은 시대를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을 남겨 놓고 가지 않으면, 갈 길을 가기가 좀 어렵지 않겠느냐 생각하게 됩니다. 자기가 눈을 감고 하늘나라를 가게 될 때 세상에서 자기 대신 일해 줄 수 있는 사람, 즉 자기가 뜻 앞에 다하지 못한 일을 대신해 달라고 부탁할 수 있는 젊은 사람을 남겨 놓지 못하면 가는 길도 순탄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를 두고 볼 때에 나이 많은 분들은 필시 자기 후손을 뜻 앞에 세우는 데에 노력해야 될 것입니다.

그 다음에 젊은 사람들은 그 젊음의 때가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왕에 뜻을 안 사람으로서 하늘 앞에 헌신하고자 나섰으니 귀한 청춘시대, 고기로 말하면 가운데 토막과 같은 청춘시대를 몽땅 아무런 미련없이 하늘 앞에 완전히 바친다면 그것이 얼마나 귀하겠느냐 하는 것을 여러분은 생각해야 됩니다.

간혹 청춘시절을 뜻과 더불어 전부 다 무의미하게 보냈다고 후회하는 사람들을 보게 되는데, 그런 사람들은 뜻이 어떤 것이고 젊은 시대에 뜻과 더불어 지냈다는 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가 하는 것을 망각한 자리에서 불평하고 탄식하는 것입니다. 이 젊은 시대에는 반드시 고개가 있는 것입니다. 청춘시절, 20세를 중심삼고 35세까지 한 15년간을 두고 볼 때 거기에는 반드시 고개가 있다는 것입니다.

각자에게는 반드시 최고의 절정기라고 할 수 있는 청춘시절이 있는데 그 한때를 누구와 더불어 지내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자기 아버지 어머니와 더불어 지내느냐, 뜻 있는 스승과 더불어 지내느냐, 자기 가정에서 자식과 아내와 같이 지내느냐, 혹은 자기 개인을 중심삼고 직장이나 학교에 투신하고 지내느냐 하는 것들을 중심삼고 볼 때,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 것이 가장 귀중하냐? 자기 일신의 행복을 위해 지내는 것보다, 자기 일가의 행복을 위해 지내는 것보다, 나라면 나라, 세계면 세계를 위해 역사와 더불어 영원히 남을 수 있는 문제를 중심삼고 지내는 것이 생애에 있어서 가장 귀하지 않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편적으로 생각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입장에서 지내는 데는 어떻게 지내야 되느냐? 뜻을 중심삼고 볼 때, 이 뜻이 천주사적인 뜻이란 것을 알면 알수록 이 뜻을 중심삼고 최고의 절정기인 청춘시대를 넘는 데에 있어서 어떠한 모습으로 지낼 것이냐가 문제입니다. 다시 말하면 뜻 앞에서 내가 어떻게 행복을 느끼며 지낼 것이냐, 뜻을 중심삼고 보다 나은 행복의 터전을 향해 전진하기 위한 희망의 터전 위에서 지낼 것이냐, 이 뜻을 중심삼고 수많은 나라와 수많은 대중, 그리고 그 국가의 주권까지 반대하는 최고의 고독한 자리에서 세계를 대신하여 영어의 몸이 되더라도 그것을 가치 있게 생각하며 지낼 것이냐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젊은 청춘시대 하면 최고의 절정기인 그때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행복하고 무엇보다도 좋을 수 있는 것을 얼핏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공적인 뜻을 중심삼고 볼 때는 외면적으로 좋을 수 있는 환경보다도 고독한 자리에서라도 내면적으로 하나님의 동정을 받고 하나님께 기억되는 것이 행복한 것입니다. 수많은 국민과 주권에 몰려 영어의 신세가 된다 하더라도 그 자리가 도리어 불행하지 않은 자리요, 일생에 있어서 청춘시대를 빛낼 수 있는 좋은 계기도 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곡절의 과정을 거치며 사는 것도 보람 있는 일

보다 큰 행복이란 것은 하루의 기쁨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천년 만년 수난의 고비 가운데에서 피어날 수 있는 영광의 때를 맞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리에서 평범한 행복보다 고차원적인 행복의 터전이 싹트고 그러한 내용의 인연을 통하여 그 행복이 지상에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게 될 때, 평탄한 생활보다 곡절의 과정을 거치면서 뜻 있는 생애노정을 지내는 것이 인간으로서 보람 있는 생활이 아니겠는가 생각케 되는 거예요.

우리가 자연을 바라보게 될 때 갖가지 수목이나 풀들이 갖가지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잘 자란 나무가 있으면 그 나무는 편안히 자랐을지도 모른다고 감정하고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그 나무는 나무로서 자기의 소질에 부합될 수 있는 영양소를 흡수하기 위해 배후에서 백방으로 노력했을 것입니다. 또, 자라는 데 필요한 영양소를 흡수하는 데에 있어서 여러 가지 반대적 소성들의 훼방을 받아 투쟁과정을 거치는 데서 오는 고통을 받고 있는 나무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나무를 보면 외면적으로 나타난 모습은 꼬부라지고 쪼그라진 비참한 모습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 볼 때에 잘 자란 나무는 외면적으로 평할 수 있지만, 잘 자라지 못한 나무를 바라보게 될 때에는 도리어 동정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꼬불꼬불 꼬부라진 나무는 그 배후에 어떠한 나무도 지니지 못한 곡절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뿌리 밑에 바위가 있다든가, 혹은 바위 위에 심어져 바위틈에 뿌리를 박고 뻗어 나가지 않으면 안 될 수난길에 서 있기 때문에 그렇게 꼬불꼬불한 나무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무절목으로 원만히 자란 나무를 원하지만 그런 나무는 꼬불꼬불하게 자란 나무보다 연륜이 지극히 짧습니다. 그런데 꼬불꼬불한 나무가 지닌 특성은 무엇이냐 하면 강하다는 것입니다. 그 나무는 키가 크지 못하고 쪼그라지고 가늘지만 반면에 이 나무의 한 토막 한 토막은 강하다는 것입니다.

자유스럽게 자란 나무토막과 시련과정에서 자란 나무토막이 부딪치면 어떤 것이 깨질 것이냐? 수난과정을 거치지 않고 자란 나무토막은 쪼개지더라도 시련 가운데서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자란 나무토막은 쪼개지지 않을 것입니다. 큰 것만이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큰 것이 좋은 반면에 시련과정을 통해서 자라난 나무는 강하다는 것입니다. 강한 것이 오래가는 것입니다.

나무가 중도까지 잘 자라다가 그 밑에 뿌리가 뻗어 나가는 데 방해되는 반석이 나왔다면 그 나무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나무는 거기서 죽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정상적으로 무절목으로 자랐는데 그만큼 자란 뿌리이상 되는 반석이 깔려 있을 때에는, 그 나무는 반석을 뚫기 위해서 아무리 애쓴다 하더라도 갖추어진 그 입장에서는 밑에 있는 반석을 뚫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반드시 죽고 말 것입니다.

그렇지만 반석의 틈을 뚫고 뿌리를 뻗어 나가며 자라던 꼬부라진 나무는 그 바위 밑에 옥토가 있으면 무한히 뻗어 나갈 것입니다. 그 나무에는 무한히 뻗어 나가다 반석을 만나더라도 이것을 뚫고 나갈 수 있는 생명의 기운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순조롭게 자라고 외면적으로 보기에 좋게 자란 나무는 환경이 급변하게 되면 자기 자체를 지탱하고 남아지기는 심히 어렵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뜻을 놓고 볼 때에 복귀섭리노정이란 평탄한 길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복귀섭리노정은 반드시 탕감복귀노정을 거쳐야 됩니다. 탕감복귀노정을 거치고서 비로소 정상적인 복귀노정이 우리 앞에 전개되고, 그 정상적인 복귀노정이 끝나게 될 때 영광의 한때가 온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탕감복귀노정은 수난의 길입니다. 희생의 대가를 치르고 피의 대가를 치르고 그 누구도 환희하지 않는 환경 가운데서 뿌리를 박아야 되고 거기에 생명의 여력을 남겨야 되는 것이 탕감복귀의 노정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무를 두고 말한다면, 하나의 소나무면 소나무가 반석의 틈에서 뿌리를 박기 시작한 것과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주위에 있는 다른 나무들은 자기가 자랄 수 있는 좋은 바탕이 되어 있다고 좋아할는지 모르지만, 바위틈에 뿌리를 박은 소나무는 바위가 햇볕을 받으면 받을수록 뜨거워짐으로 말미암아 생사문제가 좌우되는 지극히 위험한 환경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죽지 않고 뿌리를 박아 가지고 1년, 2년, 3년 이렇게 자랐다면, 그 나무는 이전보다 가중된 시련이 자기 앞에 오더라도, 자기 생명에 위험이 미쳐 오더라도 살아 남을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나무는 시련과정이 오게 될 때는 꺾여 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시는 민족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인류가 이어온 역사과정도 역시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선을 지향시켜 나오고 참뜻을 지향시켜 나오시는 하나님께서는 참다운 인간의 종자를 구한다면 어떤 종자를 구하실 것이냐? 무절목처럼 잘 자란, 즉 오늘날 미국 국민과 같이 짧은 역사과정에서 세계 문화권을 이룬, 누구든지 다 동경할 수 있는 그런 민족 가운데에서 종자를 구하실 것이냐? 만일에 현재의 문명권내에서 최고의 문화를 누리며 생활하는 민족에게서 종자를 구하셨다면 그 생활 이상은 발전할지는 모르지만, 여기에 섭리적으로 반대되는 입장에 서서 가는 길이 있다 할진대는 전부 다 후퇴하고 말 것이 아니냐?

이런 것을 볼 때, 하나님의 복귀섭리는 평탄한 행로를 통하여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는 수난길을 거쳐야 할 역사적인 과정이 남아 있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쪼그라지고 메말라서 보기에는 가냘프고 연약하지만, 그 가운데서 생명의 여력을 가지고 생명의 영양소를 흠뻑 품을 수 있는 그런 주체 능력을 가진 사람들로 역사과정에 남아질 수 있는 하나의 종자를 구하실 것이 아니겠느냐?

시련도상에서 어려움을 극복하고 시련과정에서 자기 생명의 자체력을 보강한 존재가 있다 할진대는, 그 자체는 자기에게 가중된 시련이 오더라도 그것을 뚫고 나가 투쟁할 수 있는 재기의 결의의 요건이 남아질 수 있으나, 그렇지 못하고 자연스럽게 자란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그 몇 배의 시련 고비가 다가오게 될 때는 전부 당황하고 후퇴하게 되는 것이 인간의 실정인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볼 때, 하나님께서는 역사상에 끈기 있는 민족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끈기 있는 민족뿐만 아니라, 험한 폭풍우가 몰아쳐오는 환경에서, 어느 누구도 남아질 수 없는 최후의 고빗길에서 온갖 수난을 극복해 나올 수 있는 생명의 여력을 가진 종족이면 종족, 민족이면 민족을 통해 섭리해 나가시는 것입니다. 최후의 세계적인 수난을 극복해 나가야 할 섭리노정에 있어서 이러한 것을 책임지기 위해서는 자기 생명과 엇바꾸는 일이 있더라도 감사하며 나갈 수 있는 사상을 가진 그런 무리와 그런 민족이어야 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를 두고 생각해 볼 때, 그런 무리, 그런 민족은 반드시 역사상에 남아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사상을 가진 민족의 예를 들어 보면, 유대 사상을 가진 이스라엘 민족은 2천년 전 예수님을 박해한 그날부터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자리에서 세계를 유리고객하는 민족이 되었지만, 하나님을 위하는 경천사상과 자기들이 선민이라는 선민사상을 가지고, 어떠한 환경의 여건도 자기들의 사상을 뿌리 뽑을 수 없다는 철두철미한 사상적 기원을 중심삼아 가지고, 역사의 흐름과 더불어 부대끼며 가는 곳곳마다 죽음의 교차로와 상봉하는 일이 있더라도 자기들의 민족적 긍지를 중심삼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선서하고 하나님을 추앙하며 하나님을 붙들고 나온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의 인연을 통해 나온 선민이기에 하나님도 이스라엘 민족의 뜻을 무너뜨릴 수 없을 뿐더러 그 이스라엘 민족은 세계 민족을 이끌어 나올 수 있는 새로운 한 시대를 맞이할 것이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이스라엘 민족을 두고 보면 그들이 거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아예 그들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세계적인 학술 분야에 있어서 권위를 나타내고 있는 사람들은 유대 민족 가운데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미국이 아무리 부자 나라라 하더라도 5분의 3이 되는 돈을 누가 갖고 있느냐 하면 유대 민족이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월가(Wall Street)의 재정적 권한을 유대 민족이 좌우하고 있습니다. 또는 정치 분야라든가 그 외의 모든 분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소련에서도 최고간부의 3분의 1 이상을 유대 민족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두고 볼 때, 어떻게 해서 수난받던 민족이 세계도상에서 중요한 책임을 짊어지고 다른 민족들의 추앙의 대상이 되며, 다른 민족이 서지 못하는 최고의 자리에 서 있을 수 있겠느냐?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끈기 있는 민족을 통하여 세계를 복원시키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 하는 생각을 해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온갖 시련을 극복하고 남아진 민족으로서 하나의 주권을 마련하여 세계적 승리를 획득하게 될 때, 그 기쁨은 얼마나 클 것인가? 그때의 기쁨은 그야말로 역사적인 기쁨이 될 것입니다.

수천년 역사과정에서 반대하던 폭군, 혹은 악한 정치이념권 아래에서 부덕하였던 과거의 모든 것들은, 이 민족이 승리를 획득할 때 이 민족의 영광의 한 날을 조롱하는 것으로 남아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세계적이요 천주사적인 영광의 가치를 자극시킬 수 있는 동기가 된다는 것입니다.

수난길을 간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뜻을 더 잘 알아

이런 사실을 두고 보면 고생한 사람일수록 그 가치를 아는 것입니다. 고생한 보람을 느끼는 사람일수록 그 고생한 뜻에 대해서 보다 낫게 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중심삼고 볼 때에도 그 뜻과 이념을 중심삼고 자기의 생명을 걸어 놓고 수난길을 걸어간 사람일수록 그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알 것입니다. 그러한 개인들이 합하여 민족이 되었다면 그 민족은 어느 민족보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가치를 높고 넓고 깊게 알 것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뜻을 따라가는 길에 있어서, 혹은 천운의 도리를 실천해 가는 길에 있어서 행복이 좋으냐 환난이 좋으냐 할 때, 행복보다도 환난이 좋다는 것입니다. 환난은 우리의 후손들이 망하지 않도록 방비하기 위한 하나님의 작전이란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또, 희생과 시련의 터전 위에서 전통을 상속받아 더욱 발전한다면 앞으로 어떠한 어려운 길도 뚫고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기반을 닦지 못한 민족이 영광스런 한 날을 맞이했다가 거기에 다시 어려움이 몰아치게 될 때는 그들은 좌절하고 말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은 가중된 탕감노정을 통하여 발전하는 입장에 서 있는 것입니다.

개인을 복귀하면 가정복귀가 남아 있는 것이요, 그 다음에는 종족복귀가 남아 있는 것이요, 민족복귀, 국가복귀, 세계복귀, 천주복귀라는 몇 배, 몇백 배, 몇천만 배의 가중된 수난길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시는 하나님은 그 길을 갈 수 있고 그 뜻을 따를 수 있는 사람을 위해서 그에게 시련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싫다고 하는 사람은 그 이상의 복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생명을 걸고 하늘의 복을 받기를 바라면 생명 이상의 복을 받을 수 있지만, 생명 이하에서 복을 받기를 원하면 생명 이하의 복밖에 받지 못합니다.

오늘날 사망권내에 있는 세계 인류를 생명권내로 부활 시킬 수 있는 주체적인 힘을 지구상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명 이상의 희생의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 이상의 가치를 알고, 당당코 이것을 획득하기 위하여, 이것을 당당코 세우기 위하여 무난히 돌파할 수 있는 사상을 가진 하나의 민족이 있다 할진대, 그 민족이 수난길을 거듭하면 거듭할수록 망하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생명을 중심삼고 무엇보다도 강하고 무엇보다도 두텁고 무엇보다도 강직한 생명력을 지닐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 나가는 것입니다.

통일교회가 가는 길도 그런 길을 갖추고 가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탕감복귀노정을 지도하고 있는 선생님의 주요 사상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통일교인들은 이 사상을 중심삼고 가자는 것입니다. 옆을 바라보고 자기 스스로를 비판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가고 또 가야 되겠습니다.

어떠한 주체가 말하기 전에 자기들이 서로 권고하고 자극시켜 가지고 가자는 것입니다. 그러한 명령을 하는 사람이 할아버지일지라도, 홍안의 미소를 자랑하는 젊은이가 아니라 얼굴에 주름살이 가득한 노인이라 하더라도 그의 말을 듣자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어 백발이 휘날리는 노인의 모습이라 하더라도 그 노인에게서 우러난 한마디의 결의가 젊은이를 심판할 수 있는 기운이 있다면, 하나님은 젊은이를 저버리고 늙어 쪼그라진 할아버지를 중심삼고 하늘 역사의 발전 동기를 엮어 나가신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젊은이들은 노인들을 존중해야 한다

오늘날 소위 통일교회 간부들도 우리들이 아니면 책임을 못 한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는데 그러한 퇴폐적인 사상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중심삼고 섭리하시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정성은 여러분들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이 더 들입니다. 그 사람들은 갈 길이 한 길밖에 없습니다. 횡적인 소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젊은 사람들은 횡적으로 뻗어 나가는 욕심의 보따리를 칭칭 차고 있으되, 육십 살 이상 된 늙은이들은 한해 한해 흰머리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단 한 곳, 이제 갈곳을 위해 준비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신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뜻을 이루기 위해서 누구보다도 뜻을 사랑하고, 그 뜻을 이룬 그 앞에 누구보다도 보람 있는 자기를 세우기 위해 불철주야 하나의 목적을 향해서 전진하는 자리에 서지만 젊은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젊은 사람들에게는 공상과 망상 밖에 없습니다. 이런 입장에서 볼 때 젊은 세대의 사람들보다 나이 많은 노인층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기대를 남길 수 있고 하나님께서 기대를 걸 수 있다는 것을 젊은 사람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젊은 사람들은 나이 많은 사람들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에 정석온 노인이 왔지만 얼굴을 보면 쭈글쭈글하니 보기 싫습니다. 거기에 이빨까지 빠져서 황금니를 딱 끼워 놓았는데 그 입만 보면 괜히 기분이 나쁩니다. 그 얼굴을 보면 쭈글쭈글하게 되어 가지고 어느 한 부분 팽팽한 곳이 없고, 또 몸집도 호리호리해 훅 불면 날아갈 것같이 불안하지만 여러분들은 이런 할머니를 무서워해야 됩니다. 이 할머니의 한마디의 말은 개인이 생각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계를 통하여 뜻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 선조로부터 관계되어 있고, 혹은 기독교 역사의 중요한 순교 열사들의 생명의 인연을 뒷받침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하나의 기수가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젊은 사람들은 가다가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되면 자기 혼자서 고충을 해결하려고 하는데 그것은 틀렸다는 것입니다. 어려움을 당하게 되면 자기 혼자 해결하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할머니가 계시면 할머니께 의논 드리고 아버지가 계시면 아버지께 보고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뿌리가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원뿌리가 클 수 있는 동기가 안 되어 가지고는 겉뿌리가 강하게 퍼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할머니들을 무시하는 입장에 서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통일교회에는 기도하는 사람들을 평하는 무리가 많습니다. 이것이 현재 통일교회의 폐단이라는 것입니다. 신앙세계에서 이런 무책임한 행동을 하는 것을 선생님은 많이 보았습니다. 선생님 자신도 그런 할머니들을 불러 가지고 영계에서 무엇을 얘기했는지 물어 봅니다. 선생님이 다 아는 사실이지만 말입니다. 그 할머니들이 영계를 통해서 이래라 저래라 얘기합니다. 선생님을 따르는 사람이 그런 소리를 하는데 선생님이 그런 것을 모르겠습니까? 말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을 불러 가지고 믿지 않는 사람들과 얘기하도록 합니다. 사람은 자극이 필요한 것입니다. 자기가 아무리 안다 하더라도 그 아는 것만으로는 자극이 안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안다 하더라도 그 아는 길을 못난 사람을 통해 분배시킴으로 말미암아 그 자극이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창조원칙입니다.

주체와 대상이 주고받으면 번식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주체가 아무리 완전하더라도 그 주체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반드시 상대적인 여건이 있어야 번식작용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창조의 원칙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그런 할머니들이 절대 필요합니다. 공밥을 드시게 하더라도 그 할머니들을 모시며 가야 됩니다.

그런 관점에서 오늘날 지구장들, 귀여운 아가씨를 자기 아내로 모셔들이어 그 귀여운 아내와 더불어 같이 살고 싶은 생각은 있을는지 모르지만, 그런 할머니들을 신앙적인 어버이로, 조상으로 모시어 그 할머니의 아들딸보다 더 효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 하늘이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은 보기 드물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복귀역사를 중심삼고 볼 때, 복귀역사는 과거역사를 현재에 재부활시켜 가지고 탕감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자신들이 지난날의 역사적인 자기 조상들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내적으로 발전하여 현실에 있어서 자기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을 존중시하는 기준에 서지 않고는 탕감부활권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나이 많은 사람 혹은 신앙길에서 수고하는 사람이 있거든 그분들을 모셔다가 자기의 어머니와 같이, 자기의 할머니와 같이 단 한 달이라도 모셔 보았으면 하는 젊은이는 손을 들어 봐요. 이런 사상적인 내용이 없이 자기만을 위주하고 자기만이 잘되겠다고 하면 그 사람은 망하는 것입니다. 자기만 잘되는 법이 선이 될 수 없습니다. 자기만 잘되고자 하는 것은 전체를 부정하는 자리에 서기 때문에 지지를 못 받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생활 주변에서 벌어지는 인생의 인연을 통하여서 그런 것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을 볼 때, 하나님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하늘의 복을 이 땅에 남기는 중심존재가 되려면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수난의 길을 가고, 일생을 바쳐 고생한 사람들을 앞으로 태어나는 자기의 아들딸보다도 먼저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던 그 복을 오늘날 우리의 환경, 교단이면 교단, 혹은 가정이면 가정에 인연맺을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영광이냐 이거예요. 그 수고의 터전을 자기의 가정과 더불어 자기 생활, 즉 생애노정에 접근시키고 인연맺겠다고 하는 이는 하나님의 복을 추수할 수 있는 역군이 되고, 하늘의 복을 이 땅 위에 남길 수 있는 하나의 중심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 앞으로 노력하기보다 과거에 노력하여 선의 실적을 쌓아 놓은 사람을 모시는 것이 얼마나 복된 것인가를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모시고 나가는 것도 마찬가지 입장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살아 계시다면 2천 살이 되었을 것입니다. 33세에 돌아가셨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2천 살이라면 어떠한 할아버지가 되었을 것인가 생각해 보았습니까? 만일에 돌아가시지 아니하고 2천년 동안 쭉 살아 나오신 예수님이라면, 여러분은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로 모시고, 하나님의 왕자로 모시고, 자기 생명을 희생하면서도 '감사합니다' 하며 모실 수 있는 자신이 있습니까? 그분을 모실 수 있는 자격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때요?

예수님은 33세의 청춘시대에 하나님을 위해 자기의 생명을 바쳤습니다. 그 예수님은 누구나 다 좋아합니다. 그런데 죽지 않고 동네방네 다니면서 문제를 일으키고, 가는 곳마다 환영받지 못하고 몰리고 쫓기고 모든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집어던지는 돌멩이에 맞던 예수였다면, 여러분은 어떡하겠어요? 그 예수도 예수님임에 틀림이 없다면 어떡하겠어요? 영광의 자리에 태어난 예수와 이렇게 시련과정을 거친 예수가 예수님임에 틀림없지만 나타난 결과가 다를 때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내게 좋으면 하고 내게 나쁘면 하지 않는 사람은 역사적인 위업을 상속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효도하는 사람이 부모가 효도할 수 있게끔 해줘야 효도합니까? 충신이 신하로서 충할 수 있는 길을 군왕이 제시해 줘야 충신이 됩니까? 누구나 다 갈 수 있는 자리에서 충효라는 명사는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전인류를 전부 다 옹호할 수 있는 자리에서 참다운 효와 참다운 충이 발생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젊은 예수님을 다 좋아하지만, 만일 예수님이 꼬부라지고 마르고 머리카락이 없는 대머리라면 고심할 것입니다. 손도 오그라들어 가지고 뭘 주더라도 잘 받지 못하고 음식을 먹더라도 질질 흘리는 그런 예수님이었다면 어떠할 것이냐는 것입니다. 그런 예수였다면 따라가겠다는 사람 손들어 봐요. 사람은 좋을 때 충고를 하는 사람과 좋을 때 축하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참다운 사람이 누구겠어요?

오늘날 제일 사랑하는 심정적 인연을 거쳐갈 수 있는 부자의 인연 가운데에서, 자식이 병신일 때에는 그 자식의 병신 모습을 대신하여 그 이상의 고통을 받고 그 이상의 수난을 느끼며 사는 것이 부모의 심정입니다. 이와 같은 모습으로 예수님이 오늘날 우리 시대에 나타난다면, 2천년 혹은 4천년의 역사적인 시대에 족보의 기원으로 남아질 수 있는 분인데도 불구하고 그런 모습으로 나타난다면, 그 예수님을 영광 가운데에 만민의 추대를 받을 수 있도록 모실 수 있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오늘날 통일교회가 가는 길이 있는데 그 길을 가기가 힘들다고 옆으로 빠지고 뒷걸음질치는 사람은 망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종자로 남길 사람이 못 됩니다. 그렇지 않아요? 여러분은 그런 사람을 종자로 남기겠어요? 부모는 지금 큰 근심을 품고 나가는데 '아이구, 아버지 어머니는 꼴이 그저 저 꼴이라구. 말하는 것이나 모양이나 별수없어. 여기 있다가는 내 신세 다 망치겠다' 하고 구박하고 타령한다면 그런 사람들을 종자로 하겠어요? 그런 사람을 중심삼고 만대의 축복을 해주고 싶은 마음을 가질 수 있는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수난길을 가려거든 아예 아버지 어머니 앞에 가라는 것입니다. 부모가 열 시에 일어나면 아홉 시에 일어나고, 아홉 시에 일어나면 여덟 시에 일어나고, 한 걸음 앞서 가지고 수난길을 개척하고 수난을 먼저 책임지겠다고 몸부림치는 데서부터 역사적인 상속이라든가 참다운 인연이 맺어지는 것입니다. 너는 이러면 나는 저러겠다 하는 대립적인 생각을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정예가 되려면 수난과정을 거쳐야

오늘날 통일교회가 갈 수 있는 최고 정상의 수난의 고빗길이 어떤 길일 것이냐를 여러분 생각해 보았어요? 통일교회가 가야 할 길에서 최후에 남아져야 할 십자가의 승자 앞에, 혹은 환난 고통 핍박의 승자 앞에 어떤 자리가 최후의 고비가 될 것이냐? 선생님은 이것을 생각합니다. 만약 어떤 독재자가 나타나서 통일교회 문선생은 물론이요 통일교회를 믿는 무리들을 한꺼번에 끌고 가는 일이 벌어진다면 어떻게 될 것이냐?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다고 가정하거든 오늘날 우리가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 기준을 넘는 자신을 발견하기에 노력하는 무리가 되지 않고는 그때에 남아질 정병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적진을 향하여 정예부대로서 출전하기 위해서는, 즉 정예의 군력을 갖추어 출전하기 위해서는 무수한 수난의 훈련과정을 거쳐야 된다는 것입니다. 실전에 부딪쳐 가지고도 남아질 수 있는 실력자가 되기 위해서는 실전 이상의 과정을 거쳐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실전도상에 필요한 정예부대를 형성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최후에 하늘땅이 통합해 가지고 총공격하는 전선, 죽음의 밑바닥 중의 밑바닥이 될 수 있는 그런 치열한 전투장이면 어떡할 것이냐? 현재 통일교회 입장을 생각하게 되면, 선생님이 아직까지는 나라를 위해서 생명을 내던지고 죽으라고 못 합니다. 이 나라 이 민족을 살리기 위해서 통일교인 누구나 다 생명을 걸라고 명령할 수 있는 때를 못 맞았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때는 아직 맞지 못했습니다.

그때는 전략의 한때가 될 것입니다. 자기의 의식기관 전체 사지백체를 움직여 가지고 한 목적을 위해 나아가고, 총탄과 같이 쏴 놓으면 돌아올 수 없는 곳에 가서 폭발하는 것이 자기의 의무라고 할 수 있고, 자기의 존재의식에 어떤 흥패를 요구할 수 없는 포탄의 입장에 선 때가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그때는 '나는 이런 조각으로 요것은 다 쓰고라도 저것은 남아야 되겠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깨질 수 있는 대로 산산조각으로 깨지는 것이 폭탄의 사명, 총탄의 사명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분해가 되어 이 나라 이 민족을 향하여 한번 폭발할 수 있는 포탄이 되어 가지고 격파되어 어떻게 산화할 것이냐? 사나이라면 이런 사나이다운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서 자식이 방해된다면 자식을 청산해야 되겠고, 아내가 방해된다면 아내를 청산해야 되겠습니다.

대립될 수 있는 가치의 내용을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나를 통하여 요구하신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수난길을 피할 것이 아니라 전진적인 수난도상에서 자아를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을 위해 노력하지 않는 무리는 후대에, 최후의 결투장에 남아질 수 있는, 최후의 영광을 차지할 수 있는 왕자 왕녀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을 종자로 남길 것이냐? 여러분이 이것을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오늘 아무개 누구 누구가 하나님의 대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은 가는 도상에 있어서 꼬부라지고 말라빠지는 입장에 서게 되더라도 그 마음에서는 재봉춘하는 자일 것입니다. 남향으로 갔던 태양빛이 북향으로 올라오는 동지를 지나면 누구보다도 생명의 여력을 가지고 환경을 중심삼아 좌우로 흡수하고 자기의 진액을 부어서라도 풍화작용을 일으켜 생명의 요소를 스스로 보급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일선에 선 지역장, 지구장, 혹은 책임을 짊어진 사람들이 자기주의에 떨어져 가지고 남을 배격하고 비방하는 것, 그것은 망하는 일입니다. 자기가 처해 있는 환경에서 하나의 나무를 위해 물을 품고, 그 물이 없으면 피를 뽑아 가지고 거기에 풍화작용을 일으켜 그 밑에서 생명의 요소를 흡수할 수 있는 자체력을 갖춰 전체에 마이너스 시키지 않는 뿌리면 뿌리, 가지면 가지의 입장에 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없으면 그 나무는 망하는 것입니다. 뜻은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통일교회의 오늘이 있기까지의 하늘의 수고를 알아야

오늘 통일교회가 가는 도상에서, 미스터 문이 걸어가는 그 도상에서 종말기에 남을 수 있는 형상으로서 어떠한 무리를 요구할 것이냐? 많은 무리가 아니라 한 사람입니다. 만민을 대표할 수 있는 하나의 대표적인 형이라는 것은 '이러한 사람이어야 되겠다' 혹은 그러한 입장에서 책임을 진 '나'라면 '나는 이러한 책임자가 되겠다' 하고 결의를 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데 죽음의 수난길일지라도 시대적 수난을 거쳐서 어려운 환경을 극복한 결정적인 터전이 벌어지는 그날, 거기서 새로운 터를 마련하여 새로운 봄날을 맞이하고, 하늘의 법도를 따라 발전할 수 있고 천리적이고 순리적인 환경에서 자랄 수 있는 모습이 없다면 얼마나 허전하겠느냐는 것입니다.

비뚤어지고 말라빠지는 과정을 거쳐 거두어들인 씨는 비록 작고 말라 있더라도 그 나무의 본심 본성의 요소를 지닌 순수한 씨인 것입니다. 그 씨가 작고 말라 있지만 봄을 맞이하여 심어지게 될 때는 일대 이대 삼대에 본연의 형태를 중심삼고 자랄 수 있는 본질적인 나무의 형태를 갖출 것이 아니냐? 여러분은 이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아직까지 수난길입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이런 무대를 가지고는 뜻을 이루지 못합니다. 사탄세계를 정복하지 못합니다. 책임자들이 향상되어야 됩니다. 책임자들이 철두철미한 사상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전통과 사상이라는 것은 이어받는 것입니다. 부모가 올바르지 못하면 자식도 올바른 자식이 못 되는 것입니다.

누구나 어려운 길을 싫어하고 더 편안한 길을 가고 싶어합니다. 무슨 단체라든가 하는 것들도 상금을 준다면 많이 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놀음을 계속하게 될 때는 3년, 10년을 거쳐도 누구 하나 남지 않을 것입니다. 상금만 없어질 것입니다. 앞으로 때가 오게 된다면 선생님이 그런 일을 거쳐서 진실을 가려낼 것입니다. 하는 수 없다는 것입니다. 뜻의 길에 아직까지 이렇게 수난길이 남아 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봐요. 자식을 20세까지 키웠는데, 그 자식은 아무것도 모르고 자기가 저절로 큰 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자식이 자랄 때의 부모의 희생은 얼마나 큰 것입니까? 부모가 20년 동안 안팎으로 생활 전면에서 그 자식을 위해 수고하였고, 또는 가정, 가문 전체가 그를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면 가문 전체가 그에게 걸고 있는 기대가 있을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기 혼자 자란 줄 알고 있으니 항상 부모 앞에 불효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식을 바라볼 때 부모는 절망하고, 과거에 자식을 키우느라고 들였던 정성이 그 환경으로 말미암아 부정적인 요건으로서 그 자체를 공격하고 그 자체를 파탄시키고 싶은 반격적인 마음으로 폭발될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중심삼고 복귀섭리의 뜻을 보게 되면 오늘 통일교회가 이만큼 성장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수고하셨는가 하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수고하신 터전 위에서 자란 그 자리는 얼마나 두렵고 엄청난 자리인가를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책임자의 소행이 전통에 침식이 되고 침범될 수 있는 입장이 될 때는 천추에 한을 남기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후대 후손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모든 원한까지 거기에 빨려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 그 자리는 지극히 두려운 자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봄날을 맞이해 보여지는 모든 것을 감상하게 될 때, 나무 중에 '저 나무가 제일 좋다' 라고 생각하겠지만 그 나무의 수고는 느낄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몇몇 시련을 겪고 극복할 수 있는 입장이라면 모르지만…, 수령이 들고 말라지고 쪼그라지고, 혹은 자기 영역에서 어찌할 수 없는 급변하는 환경에 처하게 될 때에도 여기에 밀어닥친 운명을 뿌리를 깊이 박고 있는 나무는 극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걸 알아야 됩니다.

미래에 남아지는 무리

참다운 길, 참이라는 것은 수난의 과정을 거쳐가는 것입니다. 참이라는 것은 선의 요소를 중심삼고 플러스 마이너스의 자연적 환경에 있어서 행복의 여건이 부합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상극이념을 소화시킬 수 있는 주체성을 갖추는 데에서 비로소 미래의 행복의 터전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오늘날 통일교단을 사랑하는 통일교회의 젊은이들이여! 여러분의 갈 길이 무엇입니까? 나는 편안한 길을 가라고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생하는 길을 가라는 말은 여러분이 충분히 복받을 수 있는 말입니다.

민족정기를 되찾기 위해서 망할 때 망하더라도 한판 싸우겠다는 무리는 그냥 흘러가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보여지는 실상과 더불어 박자를 맞추고 모든 환경에 환영받는 것을 중심삼아 자기의 일신을 맡겨 버리는 입장에서 행복을 구하는 무리는 그냥 흘러가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어떠한 길에서도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강인하고 끈기 있는 철두철미한 사상을 가지고 내일의 시련도상을 염려해야 됩니다. 오늘의 시련이 문제가 아니라 내일의 시련을 어떻게 감당할 것이냐가 문제입니다.

오늘 아무리 승리를 자랑하고, 아무리 영광의 절정에서 환영을 받는다 하더라도 그가 한때 잘못하여 걸리는 날에는 참소를 받고 쪼개지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우리 대한민국의 근세사에 있어서 우리들이 목격해 보고 체험한 사실이 아닙니까? 민족의 수난길을 중심삼아 가지고 그 일신이 선의 실적을 남기고, 내일의 소망의 봄날을 맞이하기 위해 자기를 뿌려서 민족의 새로운 법도를 세워야겠다는 사상을 가지고 드러나지 않고 거름이 되고 비료가 되는 무리가 있다면, 그들은 기필코 민족 앞에 환영받고 민족의 정기를 이어받아 그것을 더욱 배양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이 세상 어디에 하늘 뜻을 위해서 하늘을 중심삼아 가지고 내일 죽더라도 가겠다고 다짐하는 처량한 무리가 있다면, 여러분과 여러분의 후손 앞에 책임자로서 남아질 수 있는 무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사실을 생각할 때 여러분은 흘러가는 입장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태양빛이 내려쬐고 바람이 불어치는 가운데에서도 뻗어 나갈 수 있고 생명의 요소를 흡수할 수 있는 자력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자기 앞에 크나큰 시련이 오더라도 그것을 책임지고 싸워 나갈 수 있는 책임자가 되어야지, 현재보다 못한 입장에 처해 행복을 찾아 나간다면 미래에 남아지는 무리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할머니(어떤 할머니를 지칭)가 옛날에는 앞에서, 누가 보지 않는 자리에서 뜻을 위해 희생해 나가더니 요즘에는 그런 것 같지가 않아요. 얼굴을 보면 젊은 것 같은데…. 머리카락이 조금 세었다면 물들이면 그만이라구요. 나도 변하게 되면 저렇게 될 것이냐? 백발을 휘날리는 팔십, 구십이 되더라도 '젊은이들아, 가자' 하고 호령할 수 있는 사나이가 될 것이냐? 아니면 비참하게 죽어가는 사나이가 될 것이냐? 생각해 보라구요.

죽음을 딛고 일어서지는 못할지라도 정의에 불타 하늘을 위해 충효의 도리를 다하는 자신이 되고자 할 때, 그 자리는 하나님이 염려하시는 것입니다. 반항적인 자식을 가진 부모는 그 자식이 현재에 아무리 거지 신세가 되어 지팡이를 들고 문전 구걸하는 입장이라도 앞날에 누구보다 당당한 자식이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나를 바라보실 때에 낙망과 실망으로 얼룩진 패망의 대신자가 되기를 바라시는 것이 아니라 다가오는 소망의 세계 앞에 있어서의 싸움의 기수로서 내세우기에 부족함이 없는 모습을 요구하실 것이 아니겠어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되려면 선의 기준을 알아야 합니다. 거기에 제일 가까운 선한 길이 통일교회의 길입니다. 그것을 만들기 전에 내가 가려고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일시에 폭발하더라도 이 기반을 만들어 놓고 갈 것입니다. 만일에 그 이상의 기반을 만들 때까지 피눈물을 흘리고 정성들이며 불철주야 노력하는 길에 있어서 앞에서 선도할 수 있는 한 사나이가 나타나면 하늘은 불시에 악을 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일을 한 것입니다.

오늘날 통일교회 교인들 중에 그런 문제를 중심삼고 볼 때 '통일교회 전부를 희생시켜서라도 구해야 되겠다'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요? 외적인 분야에서 그런 아들딸의 모습이 없다면 나 자신을 통해서 그런 아들딸을 만들고야 말겠다는 각오를 해야 됩니다. 복귀의 원칙을 볼 때 이런 상극적인 운명이 출발한 하늘의 서글픈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이렇게 되면 여러분들은 천사 세계의 무리와 같은 모습밖에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엄청난 원한이 뜻길 앞에 가로놓인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여러분은 몇백 배의 소원을 갖고 몇천 배의 수고를 해야 되겠습니다. 원수가 막을 수 있는 수난길이라면 내 목이 찔리더라도 그 원수를 찔러 죽여야 되겠다는 결의가 있어야 되겠습니다. 나를 따르려거든 바람직한 관계를 맺고 따라야 되겠습니다. 그것을 통해 책임을 완수해 가지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자기 생명을 부탁하며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기성교회보다도 더 참신하고 더 멋지게 해야겠다는 사람이 누구냐?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나를 찾아오던 역사과정에 심을 수 있는 한 생명이 되겠다고 나를 맡기고 죽을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것은 충신이 갈 수 있는 사랑의 길입니다. 자기의 아들딸을 이렇게 만들어 할아버지 앞에 연결시켜야 합니다. 우리 집은 천추만대에 어떤 민족에게도 지지 않는 가문이 될 것이라고 자랑하고 싶고 그런 일가를 만들고 싶기에 자식에게 이것을 귀결시키는 것이 부모가 가르칠 수 있는 효자의 도리가 아니겠어요?

좋은 것을 먹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좋은 길로 가는 것을 기뻐하지 마십시오. 아직까지 우리는 훈련기간입니다. 아직까지 우리 앞에 치열한 투쟁의 노정은 끝나지 않았고, 내 일생에 있어서 하나님 앞에 치열한 투쟁의 노정은 끝나지 않았으며, 내 일생에 있어서 하나님 앞에 맹세한 그때를 아직 맞지 못했습니다. 내가 갈 때가 오면 가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통일교회를 볼 때, 통일교회의 한 식구로서 남아질 수 있고, 과거와 현재는 물론 미래 앞에 남아질 수 있는 하나의 조상적인 씨가 되어야 됩니다. (중략)

수난을 피하는 사람은 흘러가 버려

선생님은 20여 년의 수난노정을 걸었습니다. 60년대까지 수난길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40수를 못 채웠습니다. 20대에 이 뜻을 중심삼고 출발했기에…. 60년도를 중심삼고 보면 선생님이 40세인데 80세까지 가야될 것이 아니겠어요? 탕감복귀노정 40년간의 서러운 역사 가운데에서 하나님과의 인연이 맺어졌거든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수 있는 소망의 터전을 내 일생에 만들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2천년대가 되면 통일교회는 어떻게 될 것이냐? 이렇게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수난의 대가를 많이 치러야 할 탕감노정에서는 한 사람 결실시키는 것보다도 두 사람 결실시키는 것보다도 백 사람 결실시키기 위해서, 그것을 단축시킬 수 있는 터전을 개척하며 나아가야 할 길이 여러분의 길인 것입니다. 이 길을 피하는 사람들은 만민 앞에 나타날 때, 어디 가서 나타나겠습니까? 역사적 사실을 돌이켜 볼 때 어디 가서 남아지겠어요? 이 길을 피하고자 거기에 순응하고 거기에 호응하는 무리는 흘러가 버리는 것입니다. 바람결에 부딪쳐 자빠지는 것입니다.

지금 대한민국을 볼 때 남북으로 분립되어 가지고 어려운 입장에 놓여 있습니다. 아시아 정세나 세계 정세가 혼란된 와중에서 방향을 바로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시기에 있어서 여러분은 이 비참한 세계적인 수난을 수습해야 되겠습니다. 한국에서 탕감하여 남아지고, 아시아 정세의 수난과정에서 남아지고, 세계의 수난과정에서 남아질 수 있는 단 하나의 사상적인 기반, 오늘의 수난과정에서 꽃필 수 있는 저력을 갖춘, 그러한 힘의 상징을 가진 사상이 오늘날 지구상에 나타났다 할 때는 금후의 새로운 문화세계에 있어서 20세기뿐만 아니라 22세기, 23세기 이상 꽃필 수 있는 기원을 형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좋은 밥을 대하게 되면, 그것이 이 나라의 원수입니다. 잘살 수 있는 환경이 되면, 그것이 원수라는 것입니다. 지금 부산항에 미국에서 보내 온 링컨차가 도착했습니다. 이것은 물론 777가정 합동결혼식 때에 선물로 온 것이지만 이 차를 타야 될 것이냐? 이것을 팔았으면 딱 좋겠지만 이것은 역사상에 거룩한 눈물과 더불어 하늘의 명예를 걸고 보내 온 것이기에 이것을 파는 날에는 위신, 777가정이 축복받았다는 그런 위신도 서지 않겠으니 그것을 찾아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차를 보내 주었는데 이것을 누가 찾아야 할 것이냐? 한국에서 세관을 통과하려면 차 값의 250퍼센트 내지 300퍼센트에 해당하는 세금을 내야 합니다. 이 세금을 누가 내야 되겠어요? 선생님이 지갑을 털어서 내야 되겠어요?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심각하다는 것입니다. 차가 오는 것이 얼마나 고통인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지갑에서 돈을 꺼내 가지고 그 세금을 낼 수가 없습니다. 선생님이 가지고 있는 돈은 선생님 마음대로 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차로 말미암아 통일교회에 플러스되는 것이 무엇이냐? 국내에서는 마이너스 될 것입니다. 선생님은 차를 자랑하고 싶은 사람이 아닙니다. 오늘날 한국에 있어서 종교인들은 차를 가지고 아이들이 딱지를 가지고 자랑하듯이 네 것이 좋으냐 내 것이 좋으냐 하며 자랑을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어 가겠어요?

선생님은 아직까지 정성을 들여서 하나님의 성전을 못 지은 것이 한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펼치지 못한 것이 한입니다. 차를 못 타서 한이 아닙니다. 잘살지 못해서 한이 아닙니다. 선생님이 수난길을 갔던 것이 한이 아닙니다. 마룻바닥에 엎드리게 될 때는 우리 선조들을 추모하며 천추만대에 영광된 사상으로서 환영할 수 있는 전통적인 내용을 남기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면 7백만 원에 가까운 돈을 누가 낼 것이냐? 그렇다고 미국 사람들이 세금까지 마련해서 보낸 것도 아닙니다. 그래 여러분들 팔아야 되겠어요, 그냥 두어야 되겠어요? 세관에 그냥 두어야 되겠어요, 찾아와야 되겠어요? 어떻게 생각해요? 여러분 내가 돈을 주고 그 차를 찾아 타고 다니면 편안한 점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그 차를 찾는 것을 연기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선생님에게 집을 예물로 사준다고 현금을 5천여만 원 준비해 놓은 모양인데 그러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 돈이 있거든 내가 고생하더라도 여러분들의 후대에 남아질 수 있는 그 무엇을 위해 쓰고, 오히려 더 보태 주겠다는 마음입니다.

선생님이 지금 통일교회를 외곽적으로 볼 때 절박한 문제가 뭐냐? 교회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집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사람보다 집을 보려고 합니다. 주님 모실 것을 대비해야 할 때가 왔기 때문에 외적인 문제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땅도 산 것입니다.

요즈음 돈이 없어서 쩔쩔매면서도, 선생님이 빚을 지면서도 청평 땅을 사고 있습니다. 누구를 위해 땅을 삽니까? 세계를 위하고 대한민국을 위해서입니다. 여러분의 교회를 위해서는 여의도를 샀고, 여러분의 자녀들을 위해서는 이 땅을 샀고, 앞으로의 후손들을 위해서는 청평 땅을 샀습니다. 여러분, 70여만 평의 땅을 샀는데 이것을 7배 이상 늘려야 됩니다. 그러면 이 땅을 살 때 그 누가 헌금을 했습니까? 선생님이 무슨 땅장사를 하기 위해서 그런 줄 알아요? 천만에요. 찾아온 때와 더불어 준비한 사람은 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날 통일교인들은 무엇을 했습니까? 여기 참석한 여러분들 얼굴을 못 들 때가 올 것입니다. 만일에 선생님이 미국에 편지해 가지고 여기 차가 오는데 세금을 내 달라고 하면 내줄 것입니다. 일본 간부들이 이런 문제를 중심삼아 가지고 의논하고 있습니다. 지구장 지역장들이 이런 문제를 의논해 가지고 일치단결하여 돈을 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 재산입니다. 그 차는 외국으로부터 들어오는 첫 선물입니다. 알겠어요? 대한민국 전체 앞에, 하늘땅 전체 앞에 첫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을 팔아먹을 것이냐? 그러면 여러분들 위신이 좋겠어요? 본부의 위신이 좋겠어요? 그 세금은 여러분이 못 내니까 할 수 없이 내가 내는 것입니다. 이런 줄도 모르고…. 이런 일을 반성해야 됩니다.

여러분이 현실적인 무대를 중심삼고 살아가면서 어렵다고 수난길을 거부할 것이 아니라 이 수난길을 넘어서 다가오는 내일에 있어서 또다시 기수가 되고 민족과 세계를 넘어서 남아질 수 있으려면, 이와 같은 사상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마음으로 뒷바라지를 해주고 환경의 개척사업에 말뚝을 박고 철책을 꽂아 놓는 무리가 없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러한 일을 하는 데 기수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승리의 기준이 결정되는 자리

젊은 사람들은 좋은 옷을 입으면 좋아하고, 또 '뜻은 자기를 중심삼아 가지고 이루어지지 뭐. 선생님은 언제나 저러려니…' 하고 생각합니다. 참 기가 막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오지 못하면 선생님은 홀로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터전을 닦지 못하면 일본을 통하든지, 일본이 안 되면 미국을 통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독일을 통해서 공산당을 쳐부숴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재각성하여 내일의 선각자가 되고 미래의 출발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보다 강력한 시련과정에 있어서 망하는 것이 아니라 외적으로는 살을 에이는 것 같지만 뼛골에서는 영양을 흡수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런 사람이 한 명이 있더라도 하늘은 그 사람을 통해서 섭리해 나가시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책임자 자리를 떡 맡겨 놓으면, 자기들이 이렇게 이렇게 하고 싶으면 일부러 그 이상 더 합니다. 그리고 앞장서서 가겠다고 합니다. 그래 그런 사람에게 돈을 얼마쯤 푹 줘 보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되겠는가, 선생님에게 돈이 어떻게 쓰였는가, 혹은 무엇을 못 했는가를 다 보고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을 한 번 두 번 세 번 착실히 하게 되면 선생님은 그 사람을 중심삼고 일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그렇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강의를 할 때에 처음에는 잘하지만 나중에 가서는 자기를 자랑하고 나옵니다. 하나님을 자랑하고 나와야 됩니다. 나 자신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내가 잘났다고 자랑할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이만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했다고 자랑할 것이 아니라 커지면 커질수록 높은 곳에서 바라보시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작으면 작을수록 높은 곳을 바라보고 먼 곳을 바라보아야 되지만, 커지면 커질수록 자기 분수를 알고 가야 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사망이란 것은 다른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버리는 데서 오는 것이요, 원수라는 것은 다른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간신이라는 것은 다른 데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제일 가는 충신과 같이 어깨를 겨눠 가지고 가는 데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통일교회가 가는 길에서도 통일교회 자체적으로 가인이 있고 아벨이 있는 것이요, 그 아벨에게 있어서는 전후좌우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옆방에 같이 있는 사람 중에 가인 아벨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 가인 아벨의 싸움 가운데 남아질 수 있는 것은 무엇이냐? 자기가 고생하고 자기가 책임지겠다 하며, 싸울 때도 눈물 흘리고 자기가 잘못했다고 하는 사람은 남아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것을 남기고 싶으신 것입니다. 선생님도 앞날의 그런 분야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각자 자기를 중심삼고 그런 심정적인 터전을 남기게 되면 반드시 하늘의 상속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선생님이 왜 이 말을 하느냐 하면, 여러분이 만약 나무라면 큰 나무가 되기 전에 강한 나무가 되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폭풍우가 몰아쳐 다른 나무들은 다 부러지고 쓰러지더라도 살아 남는 나무는 그 동산 가운데에서 제일 쪼그라졌지만 제일 어려운 수난길을 극복할 수 있는 생명력을 지닌 나무일 것입니다. 이런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무엇을 하게 될 때는 쉽게 하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남이 쉬운 자리에 서 있어도 쉽게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섭리의 뜻을 받들어 나가는 우리들을 볼 때에 자기의 일생노정, 즉 50평생이면 50평생 가운데 하나님을 위해 고생한 기간이 25년 이상이 되느냐, 혹은 3분의 1이 되느냐, 혹은 3분의 2가 되느냐 하는 것을 따져 봐야 합니다. 그 시일이 많아짐에 따라 보다 효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천리원칙이기 때문에 이런 관점에서 한 그루의 나무라도 새로이 심어야 되겠습니다.

선생님이 아까 죽은 나무를 쑥 뽑아 보았습니다. 산 나무들은 쑥 뽑히지 않는데 죽은 나무는 뽑으니까 쑥 뽑혔습니다. 죽은 나무가 왜 죽었는지 가만히 보니까 그저 슬쩍슬쩍 심었더라 이거예요. 그렇지만 산 나무를 뽑아 보니까 딴딴했습니다. 아주 딴딴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런 것을 느끼고 고생하는 길이 있다면 역사의 승리적 기준이 거기에서부터 결정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것을 알고 이 동산을 앞으로 어떻게 만들 것이냐, 여러분이 죽기 전에 이 동산을 어떻게 만들 것이냐 하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이 땅 위에 천국이 오면 여러분이 그저 자기를 위해서 한 것은 자기의 영광에서 끝나지만 남을 위해서 한 것은 국가와 세계에까지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효성을 다하고 수고를 다해 가지고 가는 선한 길은 오래가는 것입니다. 보다 많은 생명력을 희생시켜 가지고 나가면 통일교회 이념은 영생, 발전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것이 통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현재 부름받은 자리에서 이것을 부인하면 통일교회 신앙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늘 통일교회의 영광은 여러분들의 것입니다. 통일교회가 자랑할 수 있는 것을 여러분이 가지고 나라와 세계를 넘어 자랑할 수 있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여러분이 되어야만 역사에 남아진다는 것을 알고 열심히 일해 나가기를 바랍니다.

수난과 생의 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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