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이란 대상적인 문제들이 점점 좋은 면으로 전개될 때 생긴다

​신앙 생활에 있어서 우리의 목표는 현실이 아니고 신(神), 하나님이기 때문에 현실과는 상반되어 있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 있어서는 실제 문제를 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면에 있어서 부딪치는 일들의 결과가 반드시 빨리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실제 생활에 있어서는 무슨 소원이 있으면 그 소원하는 바에 대해서 누구와 의논할 수도 있고, 그 해결방법도 빠르지만 신앙적인 세계는 그런 것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여러분이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일상생활에서 기쁨을 느끼면서 살고 싶어하는 것이 우리 인간들인 것입니다. 기쁘기를 바라는 데 혼자서는 기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을 통해서 기뻐하든가, 다음에는 물질을 통해서 기뻐하든가, 다른 무슨 학문이라든가 이런 것을 통해 가지고 기뻐하게 마련인 것입니다. 사람을 대해서나 혹은 물건을 대해서나 좋고 나쁜 것을 반드시 해결해 가지고 거기에 대한 비판을 할 수 있는 것이 우리 인간들인 것입니다. 그런 생활 가운데서 기쁨을 느끼게 되려면 대상적인 문제들이 시간이 감에 따라서 점점 좋은 면으로 전개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기쁜 일은 계속되지 않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기쁨을 느끼기 위해서는 상대적인 자극이 절대 필요한 것입니다.

목적에 대한 상대적 자극이 지속될 때 성공이 이루어진다

여러분이 어떠한 크나큰 목적을 정해 놓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시간과 과정이 필요한데, 그 과정을 어떻게 극복해 나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그 목적을 중심삼고 매일같이 생활환경에서 목적을 대하여 대상적인 자극을 어떻게 계속 받아 나가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어느 정도의 기간까지는 자기가 결심해 가지고 계속 유지해 나갈는지 모르지만, 그 자극이 목적을 이루는데 상대적 요건으로 계속 남지 못하게 될 때는 거기서 탈락이 벌어지고, 후퇴가 벌어지고, 낙망이 벌어지고, 실패의 요인이 조성되는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일상생활에 있어서나, 실제 생활에 있어서 이 자극이라는 것이, 즉 기쁜 자극이거나, 이상적인 자극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 면으로 부딪치는 환경에 있어서는 좋은 면의 자극은 절대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도 세상에서 공부를 해 가지고 무엇이 되겠다 하는 이런 작정을 하게 되면, 거기에 대한 의욕을 중심삼아 가지고 자극을 어떻게 느끼느냐 하는 것이 성패의 결정 요인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어떤 목적을 성취하겠다고 결심한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그 의욕에서 이러한 자극적인 요인을 빼 버리게 되면, 그 사람은 그 목적을 중도에서 포기하거나 미완성인 채로 끝내버리고 말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가 우리의 실제 생활에 있어서 문제되는 거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역시 마찬가지의 현상이 벌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에는 이 대상이라든가 목적관에 대한 확실성을 입증하기 위해 실험할 수 있는 내용이 희박한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 사람은 반드시 대상이 없으면 자극을 못 받는데 그 자극의 기원을 어디에서 찾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 자극의 기원을 어디에 둘 것인가

여러분은 우리 통일교회에 들어와 가지고 통일교회 원리를 통해서 기본적인 상식은 어느 정도까지 배우고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에 있어서 제일 문제 되는 것은, 신앙적인 모든 막연한 대상과 우리가 실제적으로 관계를 맺는 것인데, 여기에 있어서 하나의 조건물이 되는것이 뭐냐 하면 원리입니다. 신앙생활을 중심삼은 인간 관계가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물질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안다는 인식, 지식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반드시 인식을 통해가지고 모든 것을 판단하게 되고 결정하기 때문에 인식의 결과를 어떻게 실제 문제와 연결시켜서 결정짓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하는 대상으로 실제의 사람을 중심삼고 그런 동기를 찾기는 힘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역사상에 왔다갔던, 우리가 알고 있는 아담으로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내려오면서 신앙의 책임자들이 그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어떻게 싸워 나갔느냐 하는 문제를 우리는 표준으로 세우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중심된 사람들이 대인관계라든가 물질관계, 혹은 모든 사회적인 환경을 어떻게 대해 나갔느냐 하는 것이 우리의 표준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크게 볼 때 노아 같은 사람, 아브라함 같은 사람, 모세 같은 사람, 세례 요한 같은 사람, 이런 사람들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그런 시대적인 사명을 하게 된 동기가 우리는 궁금한 것입니다. 그들의 생애는 자기 개인을 중심삼은 생애가 아니라 하나님을 중심삼고 출발한 생애인 것입니다. 자기를 중심삼고 자기로 말미암아 출발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출발된 것입니다. 유명하게 된 것이, 오늘날 우리가 추앙할 수 있는 대상이 된 것은 자기 노력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닙니다. 이것도 역시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 가지고,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하나님을 대신한 자리에 섰기 때문에 우리가 추앙하는 대상이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는 것입니다.

섭리사의 인물들은 모든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해 왔나

그러면 그 사람들이 생활하는 과정에 있어서 어떤 길을 걸어 왔느냐하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매일의 생활에 있어서 현실문제와 부딪치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고 언제나 상충적인 현실을 가졌던 것을 우리는 여기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문제에 부딪치게 되면 언제나 자기 마음대로 하지 않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그럴 때에는 반드시 하늘을 세워 가지고 하늘이 결정하는 그 길을 따라가기 위해서 노력한 대표자들인 것을 우리는 알고 있는 것입니다. 또 그러한 책임자들이기 때문에 그 시대의 섭리에 따라, 그들을 대하는 환경이 달라짐에 따라 핍박과 어려움이 점증했던 것을 우리는 알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그들이 취해 나간 자리는 어떤 자리냐 하면, 언제나 환영받는 자리가 아니라 핍박받는 자리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독한 생활을 했다는 것을 우리는 여기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상대해서 말할 수 있는 환경이 못 되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그런 환경을 갖는 것 보다도 말하고 싶은 마음이 있으면 신을 대해서 말하는, 이런 놀음을 하지 않을수 없었다구요. 또 그다음에는 외적으로 무슨 물질문제라든가 이런 문제에 부딪치게 되거나 어떤 어려움이 있으면 인간으로서는 해결할 수 있는 방도가 좁기 때문에, 그것보다는 하늘과 더불어 의논하고 해결하고 싶은 마음, 거기에 하늘이 동기가 되어서 해결해 주기를 바라면서 살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 되어 있었던 거라구요. 그 다음에는 외적인 환경에 있어서 자기가 필요로 하는 인식의 문제라든가 실제 문제에 있어서 전부 다 협소하여 막히는 입장에 있기 때문에, 그러한 모든 문제를 하늘과 더불어 의논하고, 하늘을 통해서 그것이 인식되고, 하늘을 통해서 그것이 해결되기를 바라지 않을 수 없는 입장에 놓여 있었던 것을 우리는 여기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됨에 따라 전체를 신과 더불어 일체화하기 위한 노력을 할 수 있게끔 환경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인간은 실제적인 상대를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실제적인 상대로부터 모든 것을 저버림 받았기 때문에 하늘을 대함에 있어서도 실제 상대를 구하는 것 이상의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나서게 되고, 실제 생활을 중심삼고 생활하는 것보다 더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하늘을 대해서 생활하고 싶고, 생활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에 몰려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현실 문제는 점점점점 좁아지기 때문에, 하늘을 중심삼고 현실과 반대되는 입장에서 점점점점 자기의 고독을 넘어서 하늘을 희망삼아 현실 문제를 포괄할 수 있고, 기쁨을 느낀다든가 자기의 중심적인 가치관을 어떻게 설정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좁혀져 들어간다고 해서 낙망과 절망을 해서는 안 됩니다. 낙심과 절망을 해서는 절대 안 되는 것입니다. 불평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천지만물을 지을 때, 본래 어떤 자세를 가지고 지었느냐하면 기쁨과 만족을 위해서 지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상대할 수 있으려면 우리가 그런 핍박, 그런 좁은 절정에 임하게 될 때에도 내자신의 마음에 평화와 감사와 기쁨을 어떻게 유지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에게 상대될 수 있는 여건이 되느냐 못 되느냐하는 것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기점에서부터 하늘은 우리와 관계를 맺고 출발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중세에 있어서 청빈한 생활을 한 대표자로서 프란체스코(Giov-anni Francesco Bemardone)라는 양반을 아실 것입니다. 그는 청빈을 주장했어요. 그렇게 하면서 어려운 생활, 외적인 환경에서 몰린다고 해서 원망하고 불평하고 슬퍼하고 고통을 느끼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느꼈더라면 하늘의 뜻을 이어받을 수 없었지마는 그 고통 가운데서도 감사하고, 고통 가운데서 희망을 갖고, 고통 가운데서 새로운 것을 모색하는 그러한 입장에 섰기 때문에 하나님이 협조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새로운 시대를 우리가 거기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두 세계의 엇갈린 중앙에 섰다는 것을 언제나 깨달아야 된다구요. 실제 문제가 엇갈린 것이 점점점점 초점에 가면 갈수록 우리가 바라는 소망의 목적지를 향하여 출발할 때가 온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노아와 같은 양반에게도 그 환경이 반대하고 나중에는 가정 전체가 반대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러한 120년이라는 기간이 있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전부 다 부정한다 하더라도, 그걸 다 잃어버리더라도 다 가진 것 이상의 소원을 하나님과 더불어 갖고 있느냐 하는 문제가 현재에 자기가 축복의 기대를 갖고 있는 이상의 기준을 세우느냐 하는 문제를 결정짓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역시 그런 과정을 거친 것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 원칙은 모세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세례 요한도 마찬가지입니다.

세례 요한을 보게 되면, 그는 30대청년으로서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살았습니다.그러니 그 동네라든가 어디를 다니게 되면 사람들이 그를 흉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불평을 하려면 얼마든지 불평할 수 있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부딪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부딪치는 환경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 환경을 극복해 가지고 하나님의 섭리를 문제로 삼은 사람인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된다구요.

여러분은 주체인 하나님 앞에 대상자로서의 자격이 있는가

여러분들은 신앙생활을 시작하면서, '내가 하나님을 부르고 하나님을 믿는데 하나님은 나와 직접관계를 맺어 주지 않고 도와주지 않는다' 이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현재 입장만을 도와주는 것이 하나님이라면 그 하나님은 무슨 가치가 얼마나 있느냐 하는 것을 생각해야 된다구요. 하나님과 내가 관계를 맺은 자리에 있다면 모르지만 그런 관계가 아직까지는 되어 있지 않다 이거예요. 하나님이 주체라면 나는 하나님 앞에 대상적인 어떤 내용을 갖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체와 대상의 사이라면 서로 좋아할 수 있는 그러한 내용을 지니고 있어야 되는 거라구요. 연결될 수 있는 어떤 내용을 가지고 관계가 되어있어야 된다구요. 그렇게 돼 있는 우리들이 당장에 하나님을 믿었다고 해서, '하나님 나를 도와주소. 나한테 말해 주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체자로서 대상자에게 대할 수 있는 기준이 없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학교에 가게 되면, 기술면이라든가 전문분야의 학교에 가면 그 전문 분야의 지식을 가르쳐주는 선생님이 있습니다. 선생님이 단에 나타나면 대상을 필요로 하는데, 그 대상은 거기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아니면 안 되게 돼 있습니다. 받아들일 수 있는 요인이 있어야 되고, 관심이 있어야 되고,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상대적 요건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걸 알아야 됩니다. 그렇게 되려면 주체자 앞에 대상자는 언제나 방향이 같아야 되고, 위치가 같아야 됩니다. 이런 문제는 자연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라구요.

신앙생활하는 여러분 개인들이 생각하게 될 때, 주체인 하나님 앞에 대상자로서의 자격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느냐 이거예요. 하나님은 한번 딱 정하면 억천만 년이 가더라도 변하지않고 행하지 않을 수 없는 분이라구요. 그러나 여러분들의 마음을 보게 되면 하루에도 몇번 변한다구요. 아침에는 '이렇게 해야되겠다'고 결심을 했다가는 저녁에 가서는'아이쿠…' 한다구요. 여러분이 수련을 받을 때에, 말씀을 듣게 될 때는 '그렇게 해야 되겠다' 하고 결심을 하지만 돌아서게 되면, 며칠도 안 가서 사회에 부딪치게 되면 '뭐-' 이래 가지고는 다 흘려 버린다구요.

여러분이 지금 어떤 결심을 했다 한다면 그 결심을 몇 해나 갖고 갈 자신을 가졌느냐? 하나님은 한번 결심하면 그것을 몇천 년이고 문제삼아 영원히 간직할수 있는 분이라고요. 가다가 이러고저러고 하는 게 없다 이겁니다. 여러분이 지금은 '내가 뜻을 위해 간다' 하지만 금년 말, 혹은 내후년 혹은 십 년,이십 년, 일생을 그렇게 갈 거예요? 이것이 내려가기 쉽다는 거예요. 그리고 가는 데는 '내가 좋아야 가지 나쁘면 못 가겠다' 이렇게 나오는 거라구요.

참이라는 것은 내가 죽든지 살든지 참이라는 거예요. 그것은 죽음 위에 있을 수 있는 것이요 변하지 않는 불변의 자리에 서 있는 거라구요. 그러니까 그러한 나, 죽음 위에 있는 그것을 소유할 수 있는 내가 되기 위해서는 죽음을 극복해야 되고, 변치 않는 참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당연한 거라구요. 다시 말하면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은 확실히 틀린 거라구요.

이것들이 부딪치게 되면 변하는 것은 깨져 나가지만 변하지 않는 것은 완연히 남아지는 것입니다. 죽음과 삶이 부딪치는 거라구요. 그때 죽음을 극복하고 삶으로 남아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과정을 넘어서야만 하나님과 관계된다는 것은 정한 이치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두고 볼 때 참이 찾아올 수 있는 그런 때, 참이 우리앞에 나타날 수 있는 때는 어느 때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이 나타나는 때입니다. 그 다음에는 죽음과 삶이 여기에 나타나는 때입니다. 그래서 둘이 대결하는 때다 이겁니다.

절대 변치 않는 주체자 앞에 상대가 되려면

오늘날 현실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입장에서 보게 된다면, 우리는 변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구요. 변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요. 또, 죽는것을 원치 않고 망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러니 변하는 것이 아주 변하여 없어지기 전에 전해져야 됩니다. 죽을 세계, 죽음의 자리를 거쳐가지고 아주 없어질 수 있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참 변하지 않는 것과 참 삶을 찾을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변하는 것과 죽음과 망하는 것을 싫어하는 입장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된다 이겁니다. 주체자가 악이라면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끝날이 언제냐 하는 문제도 우리는 여기서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이 급변하는 시대가 올 것입니다. 모든 것이 망한다, 죽는다하는 그런 세계로 끌려갈 것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변하지 않고, 죽을수 있는 환경에서 죽지 않고 당당한 권위를 가질 수 있는 생명력을 가진 사람이 있어야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가지고 부딪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좋은 검, 강한 검과 나쁜 검이 부딪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부딪치게 되면 어느 하나가 변하게 됩니다. 변하는 것은 망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꺾여 나가는 것은 망하는 거예요. 그러니 정녕변하지 않고 영원한 주체적인 그러한 사람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변하지 않는 주체요 생명의 주체이신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러한 자리에 선사람을 대상으로 중심삼고 싶어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자랑이라 한다면, '세상이 변하고,모든 것이 전부 자기의 환경에 따라서 변하였지만 나는 변하지 않았다'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자랑이에요. 또, 하나님이 자랑할 수 있다면 '나는 주체자로서 당당하다. 어느 때고 주체적인 목적을 위해서 변함없이 소망을 가지고 나갔지만 이 세상은 그러지 못했다' 하는 것을 자랑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희망의 중심, 생명의 중심입니다. 그러한 주체자이니 우리들도 그러한 주체자 앞에 상대가 되기 위해서는 주체와 같은 입장에 서지 않을 수 없다구요. 내가 그런 사람이 되었느냐 안 되었느냐 하는 것을 한번 테스트해 보겠다 하는 마음을 가지라구요. 그러한 자체가 되었나 안 되었나를 알기 위해서 처넣어야 됩니다. 고생의 자리에 들이 처넣고, 슬픔의 자리에 처넣고, 고통의 자리에 처넣어야 되는 것입니다. 시험과 시련이라는 것이 나를 못살게 하는 것 같지만 그것이 하나의 가치를 부각시킬 수 있는 조건적 내용이 되는 거라구요.

인간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욕망

여러분들이 시험을 쳐 가지고 그 채점 결과가 좋게 된다면 그것으로 인하여 인정을 받게 되는 거라구요. 가치적 내용을 결정해 준다는 거예요. 시험이라는 것은 학생들이 다 아는 문제를 내느냐, 모르는 문제를 내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진짜로 일등을 내기 위해서는, 여기에 오십명 가까이 있지만 이 오십 명이 모를 제목을 뽑는 것입니다. 못 할 것을. 그것을 문제없이 해치우게 되면 그 교수 분하고 상대가 될 수 있다구요.

그 다음에는 보기만 해도 좋아하는 거예요. 일생 동안에 테스트를 해봐도 누구도 몰랐는데, 그 문제를 푸는 어떤 한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후계자가 될 수 있는 평가의 기준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하나님은 뭘 하자는 것이냐 이겁니다. 일을 시키는, 사업을 하는 그런 무슨 책임자를 만들려는 것이냐? 그것도 아니라구요. 그러면 뭐 하늘나라에 설 수 있는 백성을 만들자는 것이냐? 아닙니다. 사랑하는 아들딸을 만들자는 거라구요. 그 사랑하는 아들딸을 왜 만들자고 하느냐 이거예요. 그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의 기쁨의 자극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그것을 느낄 때에는 제3자는 불가침적인 입장에 세워 놓고 느끼자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침범을 받았던 경과를 알고 계시는 하나님이라면 그 하나님이 인간을 대해 가지고 그런 사랑을 다시 찾기 위해서 복귀역사를 해 나오시게 될 때, 그 사랑이 차지할 수 있는 자리는 에덴동산 이상의 자리가 아닐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찾기 위해서 애쓰시는 하나님이라면 그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대해 가지고 최고의 자리로 끌고 가려고 하실 것입니다. 노아에게도120년 동안 수고를 시켜 가지고 이것을 했지만 실패했다구요. 아브라함도 제물을 드리려다가 실패했다구요. 또 모세도 실패했다구요. 또 세례요한도 실패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보다 나아야 된다 이겁니다. 그런데 노아에게 시험하던 대로 일백 이십 년 동안 하면 안 되겠으니 단시간에 해봐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던 것도 단시간에 해봐야 되겠고, 모세가 하던 것도 단시간에 해봐야 되겠고, 세례 요한이 하던 것도 단시간에 해서 여기에 합격함으로써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을 만들고 싶은 것이 하나님의 욕망이 아닐 수 없다구요.

오늘날 하늘이 바라고 있는 아들의 자격

그런데 변하지 않는 하나님이지만, 변하지 않는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는 변하는 하나님으로 나타나시지 않을 수 없다 이겁니다. 시험하실 때에는 하나님 자신이 변하는 하나님으로 나타나셔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편에서 보게 된다면 이렇게 했다 저렇게 했다 하시고 '가라 오라' 하는 변덕장이 하나님으로 나타납니다. 변하지 않는 사람을 택하려면 최고로 변하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테스트를 하여 변하지 않아야 변하지 않는 사람으로 등장할 수 있는 거라구요. 생명의 하나님이 생명을 완전히 소유하기 위해서는 죽이는 하나님으로 나타나는 거와 마찬가지라구요.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 역사를 보더라도 수많은 사람에게 그렇게 비참한 피를 흘리게 하고 희생을 시켜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변하지 않기를 각오하고 믿다가 죽어갔고, 또 그렇기를 간절히 구했지만 하늘은 나타나지 않아 가지고 그러한 일을 계속하는 이런 놀음을 해 나온 거와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맨 나중에 하나님은 어떻게 하실 것이냐? 세상을 뒤흔드는 때가 와 가지고 기독교도 다 떨어질 것이고, 세상도 다 하나님을 부정할 때에 맨 나중에 기독교를 대표하고 인류를 대표하는 한 사람이 남게 되는 것을 바라보고 역사할 것이다 하는 것을 여기서 우리는 알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전부 다 아들이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구요. 아들은 첫째서부터 둘째로 찾아 나가려면 그럴 수 있는 사람부터 찾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사탄이 그 아들을 대해 가지고 '아이구-'하면서 보기만 해도 무서워 물러나게끔 시험을 해보자 이거예요. 뭐, 참소해서 '하나님 이렇게 하면 좋겠소' 하는 이런 자리까지 끌고가야 될 것이 아니냐? 그거 당연한 말이라구요.

그렇게 보게 될 때, 세상에는 지금 기독교가 다 무너져 내리고, 미국도 그 큰 나라가 다 흔들거리는 그러한 판이 벌어지고 있다구요. 그러면 변하지 않는 하나님이, 전체의 주체 되시는 하나님이 어떠한 대상을 찾아야 되겠느냐? 여기에 같이 보조를 맞춰서 춤추는 사람이 될 수 있겠느냐 이겁니다.

그러므로 변하는 사람이요 변하는 세상이지만, 그런 사람과 세상이지만 나는 안 변한다 하는 사람, 그 다음에는 세상이 다 망하고 없어지더라도 나는 안 망한다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뿐만이 아니라구요. 실제적으로 그렇다 하는 확정된 자리에 서야 된다는 것입니다.

너 미국은 망하고, 너 사탄 세계는 망하고, 너 세상은 다 망하더라도 나는 안 망한다. 너는 다 변하더라도 나는 안 변한다 하는 절대적으로 확정한 아들딸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세상은 나로 말미암아 시작할 것이고, 세상은 나로 말미암아 수습되고, 세상의 모든 것이나로 말미암아 중심이 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날의 실제 생활에서 하늘이 바라고 있는 아들의 자격이 아니겠느냐.

이러한 자기를 확보하는 데 있어서 만약에 하나님이 도와주지 않고 나온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을 모르더라도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아들로 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한 사람이 있고, 한쪽에는 하늘이 '요래라. 요래라' 하면서 가르쳐줘 가지고 이 자리에 나온 사람, 이렇게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하자구요. 그러한 최후에 남아질 수 있는 사람이 두 사람 있다 할 때 하나님이 어느 사람을 더 칭찬하겠느냐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라구요.

하나님이 있다면 이래야 된다는, 이렇게 해주어야 된다는 것을 알고 그렇게 나온 사람과, 하나님이 있는 줄 알고도 가르침을 받아 가지고 나온 사람이 있을 때, 여러분이 하나님이라면 어떨까요? 여러분이 하나님이라면 어떻게 결정할까요?

끝날에 하나의 이상을 위하는 하나의 어떠한 중심이 있다면, 그 중심은 이래야 된다는 그런 관을 가지고 세계를 위하여 목숨을 각오하는 그런 주의와 사상을 가진 사람은 지금까지 종교의 이끎을 받던 모든 신자들보다도 복 받을 수 있는 한 때가 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가망성을 우리는 여기서 찾아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세계를 위하는 것보다도 더 세계를 위하고 하나의 목적인 인류를 위하는 그 기준을 가진, 하나님이 있을 때, 이렇게 해야 된다는 마음을 가지고 나아가는 사상가 혹은 주의가가 있다면 그는 기독교인들보다도 복 받을 수 있는 한 때가 온다는 것을 우리는 여기서 느끼는 것입니다.

종교인들과 비종교인들이 어디 한번 경쟁해 보라는 거예요. 그러면 공산당하고 기독교인하고 누가 복을 받겠느냐 이겁니다. 세계를 하나 만들고 인류를 위하는데 있어서 기독교인보다도 공산당이 일면 낫다고 하면 하나님은 어떻게 해요? 공산당을 축복해 줘야 된다는 말이 된다구요. 그러나 공산당은 하나님을 부정합니다. 하나의 중심자인 하나님을 부정합니다. 하나의 중심자를 부정하기 때문에 그것은 안 되는 것입니다.

공산당이 무신론이기에 그렇지 만약에 유신론으로써 하나님을 주장하게 되면 어떻게 할 것이냐? 하나님을 주장한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하실 것이냐? 하나님을 주장하는 입장에서 그렇게 됐다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기독교를 칭찬하시겠어요? 하나님이 있다고 하는 공산당 같은 녀석들을 칭찬해요, 어딜 칭찬해요? 그건 뭐, 말할 필요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여기서 이러한 사상을 새로이 발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중심삼은 공산당 이상 세계를 위할 수 있으면 하나님은 당연히 그를 축복해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책임자라든가 지도자, 기독교인들이 편안히 있으면서 '남도 잘사는데 우린 더 잘살아야 된다' 하는 것보다도 '남은 잘살지만 우리는 세계를 잘살게 하기 위해서 이렇게 한다'는 패가 있으면 하나님은 틀림없이 그런 패를 축복하고, 그런 패의 편이 안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틀림없는 거라구요.

현실은 변하지만 신앙은 변하지 않는다

그래 가지고 변하는 생활에서도 변하지 않고 세상에 없는 중심자로서 세상에 알려지는날에는 이 세계를 한꺼번에 바라볼 수 있는 때가 불원한 장래에 올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에, 신앙과 현실에서 신앙이라는 것은 막연하지만 믿을 수 있는 것이요, 현실은 확실하지만 믿을 수 없는 것이다 하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불신, 믿을 수 없다는 거예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예」 세상은 확실해요. 그저 자극적이면서 실재적입니다. 그러나 변해야 되는 거예요. 변해야 될 것이라구요. 신앙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중심삼고 변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구요. 이것이 무슨 말이냐 하면 반대가 돼 있다는 겁니다. 엇갈린다 이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먼저 인정을 받아야 됩니다. 신앙길에서 인정을 받아야 된다 이거예요. 역사적인 인물들과 비교해 가지고 져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옛날의 우리 선조들은 전부 다 그런 중심존재가 되었다가 사탄세계에서 지고 갔지만 우리는 이겨야 된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 주었지만 지금은 우리가 하나님을 도와줘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없이 하나님이 하는 이상의 일을 해 가지고 하나님을 해방해 드리겠다 하는 사람이 되어야 진짜 아들이라구요. 진짜 효자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 아들 때문에 아버지는 모든 원한을 없애 버리고 비로소 기쁨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잃어버렸던 것의 뿌리를 뽑아 가지고, 그 아들 때문에 기쁨이 시작됨으로 말미암아 복귀섭리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자리까지 나아간 아들이 있어 가지고 하나님이 '야, 어서 오라!' 할 수 있어야 됩니다. 조금만 어려워도 '하나님, 날 도와주소서!' 이래야 됩니까? 결국은 나보다도 더 큰것을 도와 달라는 말이라구요.

그 사람은 형제들이 많은 부모 앞에 나는 어렵지만 형제들을 다 사랑하고 복 주라고 하는 거와 같은 아들이라구요. 그런 아들딸이 되면 부모는 어려운 문제를 그런 아들딸을 통해서 의논합니다. 그 부모는 다 잠잘 때, 고요한 가운데 가정문제라든가 전체문제를 그런 자식을 통해서 의논하자고 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라구요. 그렇기 때문에 그 부모의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비밀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아들딸이 자연히 되는 것입니다. 그렇겠어요, 안 그렇겠어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아직 그런 자리에 서도록 못 돼 있다구요.

신앙생활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극을 찾아가는 것이다

여러분이 영화 같은 것을 보면, 원수에게 잡혀 가지고 고문을 당하고 죽고 하는 것을 가끔 볼 것입니다. 그 주역을 하는 사람이 나라고 생각해 봐요, 나! 내가 그와 같은 자리에 서 가지고, 내가 뜻을 위해 일을 하다가 저런 고문을 당한다고 할 때 어떻게 할 것이냐? 그렇게 전부 다 소화시키고 연결시켜 가지고 실제 생활을 처리할 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거리를 걷게 되더라도 그 걸음은 혼자서 그냥 걷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거리를 걷는 것과 마찬가지로 좋고 나쁜 것을 척 판단하면서 걷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거리를 걸을 때에도 '이 나쁜 것은 불원한 장래에 내가 와서 다시 손을 대어 처리할 것이고, 좋은 것은 내가 몰리고 쫓기고 있지만 들어 가지고 이 세계에 자랑하고 싶은 마음으로 복을 빌어 주어야 되겠다' 하는 마음을 가지고 걸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민주세계를 대표한 미국이라든가 공산세계를 대표한 소련을 보게 될 때, 어느 쪽이 더 잘 변하느냐 이거예요. 그런 것을 볼 때, 변하는 것을 볼 때 '음, 안되겠다. 내가 이것을 전부 뜯어고쳐야 되겠다' 이렇게 생각했어요. '만약에 누가 안 하면 내가 할 것이다' 그런 결심을 했다면, 구원을 안 받겠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자연히 천군 천사를 동원해서 그 사람을 구원한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그런 입장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런 것을 알고 내가 그런 모험적인 자리에 가더라도, 세상 사람 같으면 무서워할 것인데 신나는 것이라고 하며 그런 입장에 서서 가려고 하면, 반드시 무슨 일이 생길 것인지 미리 보여 준다구요. 그렇지 않으면 꿈이라든가 환상을 통해서 가르쳐 주기 마련입니다. 그것이 딱딱 들어 맞는다구요. 그러한 자리, 그러한 자극, 그러한 힘의 자극이 오늘날 우리 신앙생활에 없어 가지고는 이 어려운, 변하는 세상을 극복해 나가기가 어려운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생각할 것은, 여러분은 언제나 극과 극을 간다는 거예요. 극과 극의 길을 간다는 것입니다. 극과 극을 내가 찾아가게되면 이 극을 다 가 가지고도 하나님 앞에 다시 돌아 내려와야 되고, 이쪽으로 가더라도 돌아와야 되는 거라구요. 다른 길로 들어와요. 그 끝에 가면 새로운 길이 온다 그 말이라구요. 그래서 성경에도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는 말을 했다구요.

여러분이 그러한 생활을 각오하고 간다면 협조를 바라지 않아도 하늘은 틀림없이 협조해 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거기에서 받는 충격과 감사는 이루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있으면, 누가 그를 망하게 하려 하고 세상이 그를 죽을자리에 몰아넣더라도 하늘이 벌써 세상에서 해방된 자리로 갖다 옮겨놔 준다 이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극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혹은 단시간이라도 지극히 조용한 시간, 지극히 잔잔한 시간이 있으면 그런 시간을 찾아갈 줄도 알아야 된다구요. 또, 여러분이 말을 하더라도 '하나님이여' 이렇게 크게도 하지만 그 다음에는 점점 작아져서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나중엔 없어지는 거예요. 그렇게 하면 점점점점 작아져 가지고 입을 다물고 말이 끝난 그 뒤에도 그 말을 내가 쭉- 듣는 거예요. 이런 것도 필요하다는 거예요. 말은 그쳤지마는 내가 스스로 말한다고 하고, 듣는다고 생각하라는 거예요. 그러면 내 마음의 말이 들린다는 거예요. 그런 훈련이 필요한 거라구요.

내가 보는 것에 대해서도 먼 데서 보지만 점점점 본다 하는 것을, 전부 다 보면서도 안 보는 것과 같고 안 보면서도 보는 것과 같은 입장에 서게 되면 그게 보인다는 거예요. 극과 극을 탐구해 가지고…. 그러려니 여기서 가는 것이 쉬운 게 아니다 이겁니다. 여기에는 많은 과정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넘어갈 수 있고 극복할 수 있는 자신이 되려면, 그러한 훈련과 연단된 자아가 문제 되는 거라구요. 그렇게 되면 세상이면 세상 안에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세상 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 세상 밖에 있는 거와 같다구요. 세상이 출발하기 전부터 있는 '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작하기 전으로 가야 됩니다.

신앙의 시대가 실제적 시대로 엇바뀔 수 있는 시대가 왔다

여러분은 복귀라는 말을 배웠습니다. 복귀라는 것은 끝에 가지 않고는 안 되는 거라구요. 완성한 개인이 있으면, 그 개인의 생활을 중심삼고 최고의 기쁨의 자리가 벌어지고 완성도 거기서 벌어지고 가정의 완성도 거기서 벌어지는 거라구요. 씨족의 완성도 거기서 벌어지는 것이고, 민족의 완성도 거기서 벌어지는 것이고, 국가의 완성도 거기서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게 어디냐 하면 이 세상의 끝과 같은 곳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과는 반대라구요. 세상은 이런 세상이 되어 있고, 우리는 세상과는 반대라구요. 우리는 몇 사람이 여기에 있다구요. 시일이 가면 좀 늘 것입니다. 그러니 다르다구요. 여기 있는 사람은 세상에서 볼 때, 전부 다 불쌍한 사람이라구요.

이것을 중심삼고 볼 때, 아직은 경계선이 없지만 앞으로 조금만 가면 경계선이 된다구요. 한편에서는 죽겠다고 야단하고, 하나는 망한다고 하면 우리는 그것을 보고 '그래야지!' 그래야 됩니다. 다르다구요. 그렇기 때문에 복귀는 끝에 가야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여기에 구라파 사람들도 왔지만 선생님이 '여기 있어라'하면 있는 거예요. 여러분들 마음대로 못 가게 되어 있다구요. (웃음) 또, 구라파에 가서 '오라' 하게 되면 와야 되는 거예요. 그건 하나님이 '야! 애급에서 나가라' 했을 때 나가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행하지 않으면 망하는 거라구요. 무슨 뭐, 부모가 있고, 아이들이 있고하더라도. 그러지 않고는 새로운, 뉴이스라엘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새로 승리해야 되는 것입니다, 옛날에 야곱은 과정에서 승리했지만 이제는 끝에서 승리할 것입니다. 여기서 하늘이 들이쳐 버리면 이제는 그만이라구요. 이놈의 가정아! 이놈의 나라야! 이놈의 세계야! 차버리고 우리가 차지한다는 말입니다. 세상아 잘 있거라 나는 간다 이거예요. (웃음) 그러려면, 여기까지 나오려면 쉽지 않다구요.

여러분, 선생님은 세계를 대표해 가지고 개인적인 승리의 기반, 가정적인 승리의 기반을 닦아 가지고 미국까지 왔습니다. 지금 많이 왔다구요. 여러분이 아무것도 모르면서 여기에 와서 선생님을 만났다는 사실은 놀라운 기적이라구요. 여기에 있는 게 싫어서 돌아가겠어요? 돌아가려면 돌아가라는 거예요. 마지막 기회예요. 과거의 신앙은 믿음으로만 갔지만, 우리의 신앙은 사실로 이루어집니다.

이와 같이 과거의 신앙세계와 반대되는 모든 요건을 넘어설 수 있는 이때에 있어서, 우리가 싸우고 하늘의 명령을 받을 수 있는 이 자리에서 못 하겠다는 말이 있을 수 있겠어요? 과거의 신앙자들은 노력했더라도 그것이 자기 것이 안 됐다구요. 그것을 넘겨 줘 가지고 키워 주는 일이 됐다구요. 그러나 지금 우리들이 믿고 실천하는 것은 내 것이 될 수 있는 때가 왔습니다. 과거는 고통의 시대였지만, 이제부터는 선생님을 중심삼아 가지고 자기가 실제로 기뻐할 수 있는 시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신앙의 시대가 실제적 시대로 엇바뀔 수 있는 놀라운 시대에 들어온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신앙과 현실

책을 불러오는 중입니다...

테마
글꼴
글자 크기  1.1re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