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일본의 현상황이 이제부터 어떠한 운세권으로 전개되어 질 것인가를 모릅니다. 일본의 운세도 모르거니와 자기 자신 또한 어떠한 운명길을 갈 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생각해 보자면 여러분은 일생의 문제도 모릅니다. 한해의 문제도 모릅니다. 한달의 일도 모릅니다. 더 따져 들어가 보면 하루의 운명도 모릅니다.

​불쌍하신 하나님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위태로움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지금이라고 하는 시간마저도 자기의 시간이라고 믿을 수가 없습니다. 확실한 자기의 터 위에서 자기가 주체가 되어 상대관계를 맺는 가치 관을 얻은 처지에서의 지금이 아니라는 거예요.

자기 자신도 신뢰하지 못하는 권내에 있는 것이 우리의 인생길입니다. 세계가 그렇고, 나라가 그렇고, 종족, 가정 혹은 자기의 생애, 그리고 자기의 하루가 그러합니다. 하루는 깁니다. 24시간입니다. 한 시간 또한 그러합니다. 즉, 60분도 깁니다. 1분 60초도…. 결국 1초가 자기의 승패를 결정하는 운명을 날라다 준다고는 누구도 생각지 않습니다. 승패의 정점은 도대체 어디에 있다는 말이냐 하는 문제를 추궁해 들어가면, 그것은 국가도 아니요. 종족도 아니요 자신의 전생애도 아니요, 하루 24시간도 아닙니다. 보일까 말까 하는 순간에 자기의 운명이 결정되어진다는 것입니다. 그 순간에 갈림길이 교차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이 그 교차점에 서서 그것을 판단해서, 그것을 분명히 헤쳐 나가고 있는 그런 사람이 있을 것인가? 이걸 생각할 때, 한심스러운 인생이요, 불안한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인간이 자신은 세계적이니, 자신을 존중하라든가 한다면, 그 발판을 생각해 볼 때, 그것은 비참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한 군상이라 할 때, 그가 어떤 인간, 어떤 개인이든간에 얼마나 비천하고 얼마나 무가치하며 얼마나 가엾은 것입니까?

그 순간, 1초, 1분의 승리권, 1일의 승리권, 한달의 승리권 한해의 승리권, 1대(代)의 승리권, 종족의 승리권, 민족, 국가의 승리권, 세계의 승리권, 천주적인 승리권까지 확대한 그 권내에 계셔야 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 하나님은 참으로 불쌍하신 하나님인 것입니다. 본래 전능한 승리권을 기대로 하여 서 계셔야 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생각해 볼 때, 나를 신뢰하지 못하는 입장에 계신 하나님이 얼마나 불쌍하신 분인가. 언제 한번이라도 세계적이요 천주적인 승리의 일순(一瞬) 을 지켜, 그 일순의 절정에 서서, 천주가 주목하고 전체 심정이 교류하는 그런 중심에 서서 하나님의 자녀로 자각한, 혹은 승리를 획득한 실체를 하나님께 바쳐 본 적이 있었습니까?

지금 열두 시를 가리키는 종이 울렸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정확한 열두 시인지는 모르는 것입니다. 시계는 수만 개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진짜 열두 시를 알리는 것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전세계적으로 넓혀 나갈 경우 천주적으로 최고로 정확한 열두 시를 맞힌 것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입장에서 볼 때, 그러한 기준과 연결되는 완전한 선이라고 하는 것이 지상에 있을 수 있겠느냐? 절대로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복귀섭리라는 것을 생각해 볼 때, 하나님의 완성이상권이라는 것은 지고 또 지구 그 위에다 덤을 붙여 진 것과 같은 것입니다. 즉, 그러한 입장에 서 있는 분이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을 우리들이 모신다고 할 때, 이것은 서글픈 일입니다. 그러면 굉장하신 본연의 하나님을 모든 승리적, 그리고 영원성의 절대적 기준으로 대해 가지고 하나님께 효도 혹은 충성할 길이 없겠느냐고 반문 한다면, 거기에는 불가능이라는 답이 있을 뿐입니다. 그것을 이상으로 하고 지상을 대해 소원해 오신 하나님의 수천 년 역사를 되새겨 볼 때, 실로 하나님은 불쌍하기 그지 없는 분이십니다.

일순간이 일생을 좌우해

그렇게 보았을 때, 영원한 승리권이라는 것은 우리들이 일생 동안 애써도 찾아 돌려 드릴 수 없는 것입니다. 일순간이라도 승리의 기대를 하나님께 돌려 드릴 길이 있다면 그것은 생애를 걸고 완성해 가는…. 만민을 대표하여 일순간을 하나님께 바칠 길이 있다고 하면, 나는 패자이지만 그 기준에 있어서는 누구보다도 훌륭히 승리한 일순간을 기록한 것이 아닐 것이냐? 그 일순간은 무한한 가치의 기준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았을 때, 가치관이라고 하는 것은 장기적인 승리의 기준이…. 그것이 물론 소망적이기는 하지만, 장구한 승리의 기대를 세워 나가던 중에 일순의 기대를 잃었을 경우에는 결국 또 어렵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일순을 지키고, 그 일순간 안에 승리의 기대를 획득하여 자각의 본심과 함께 생의 위치를 굳혀 가야 합니다. 전능한 신의 승리권을 바라고 계신 하나님을 생각해 볼 때, 우리는 그 기대로부터 이것을 지켜 승리의 기대를 찾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발을 이렇게 내디디는 일순간, 이때가 자신의 생애 전체를 좌우하는 일순간일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일생에 있어 한 번밖에 없을 그러한 일순간의 때가 발을 내디디는 그 순간에 자기에게 찾아들었는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볼 때, 그 일순간, 발을 내딛는 그 순간이라는 것은 생애에 있어서 매우 중대한 것입니다. 거리를 걸어갈 때, 손을 앞으로 내젖는 그 순간, 혹은 이 순간, 불쑥 일어서는 이 순간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이 일순간을 붙잡는 것과 같은 마음으로 참된 성의를 가지고 순간을 맞이 해야 합니다.

친구들끼리 이야기를 하는 그 순간, 그 순간은 생애에 걸쳐서 승리의 기준을 세우기를 바라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순간일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혹은 자는 시간이 혹은 일어나는 시간이…. 이렇게 생각하면 마음대로 잘 수도 없고, 어디에 갈 수도 없습니다. 옷을 입을 수도 없고, 밥을 먹을 수도 없습니다. 모든 순간 순간의 위치를 지키지 않으면 안될 자신을 발견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단 한순간이라도 마음을 놓거나 마음의 줄을 늦출 수 없습니다. 그러한 견강(堅强)한 심정의 자리에 설 경우, 앞으로 가는 것도, 아래로 내려 가는 것도 절대적인 순간의 자리에 끼어 있는 자신임을 느끼게 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거기에서 일순간의 승리를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일순간을 그러한 일순간이라는 견지에서 맞아들이게 될 때, 우리의 발, 손, 눈, 귀, 또는 입 가운데 어디에서부터 맞이할 것이냐? 우리 본심의 생각에서부터 그것을 맞이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본심의 생각에서부터 자기의 일순을 지킬 수 있는 자신인가 하면 그렇지 못합니다. 슬픔을 느끼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생각해 볼 때 나는 과연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는 자신일 것인가?

이와 같이 일순간의 생명을 아무도 모릅니다. 십자군의 단원이 마이크로 버스에 올라타는, 바른발을 내딛는 순간이 그 순간일는지도 모릅니다. 그러한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편안할 때에는 그와 같은 절실한 가치를 찾기가 힘든 것입니다. 쓰라리다면 쓰라린 그 순간, 높다면 높은 그 절정을 맞이하여 하나님은 사랑 하는 자녀의 일순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린 최후의 일순간에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고 부르짖었습니다. 최후의 일순간, 돌아다 볼 수도 없는 처지에서, 그렇듯 모든 것을 잃어버릴 것 같은 처지에서 예수님은 생애에 한 때밖에 없는 그 일순간에'나의 아버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생애를 통하여 그 한 순간을 바라 나왔다면 그 순간에 소원해 왔던 모든 것을 말했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어찌하여 버리셨나이까’하는 말을 했다는 것을 두고 볼 때, 과연 예수님이 승리했느냐 못했느냐 생각해 볼 문제라고 봅니다.

십자가의 길도 기쁨으로 소화하고 극복하라

따라서 그렇게 되었을 경우에는 생애노정에 있어서 자기의 시간이라는 것은 기쁜 시간인 반면 슬픈 시간이요. 괴로운 시간인 것입니다.

한국 말 가운데는 '기뻐 죽겠다, 기분 나빠 죽겠다, 괴로워 죽겠다’등 '죽겠다’라는 말로 결말을 짓는 것이 많습니다. 다 죽겠다는 말로써 결론을 내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이는 민족의 말입니다- 그런 말을 하는 민족은 한국 민족뿐이므로 한국 민족을 세계적인 탕감을 지닌 민족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수밖에 없는 경우든 기쁜 경우든 죽겠다는 말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괴로울 때와 슬플 때와 기쁠 때는 통하기 때문에 이 말에는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가장 슬픈 일순간의 탕감이 우리에게 닥쳤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이냐? 내가 슬프더라도 하나님의 기쁨의 상대적 입장에 서서 그것을 맞이해야 합니다. 그런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괴롭고 슬프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 무례가 됩니다.

혹, 참지 못할 괴로움을 당해서 맨 밑창에 떨어져 어떻게 해도 뚫고 나갈 수 없는 입장, 막다른 골목에 들어서서 어떻게 할 아무런 방법이 없는 입장에 있을지라도 그때에 하나님 앞에 잘 기도하면 일순간에 통하는 것입니다.

신앙하는 사람은 최고로 기쁠 때에는 최고로 슬픈 한 점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또, 최고로 슬픈 때에도 최고의 기쁨을 맞이할 내심의 준비를 해 두지 않으면 안 됩니다. 최고로 괴로울 때에는 최고로 인내력을 높이어 하나님의 절대적 기대가 될 수 있는 결의를 내심에 굳혀 두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지금 자신이 울고 있는 때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순간이라면 그 순간을 만면의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는 마음의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또한 자신이 기쁨의 자리에 서 있다 할지라도 괴로움과 슬픔을 느끼는 것 같은. 즉 극(極)에서 극으로 통하는 상이한 입장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왜 그러냐 하면, 복귀노정에서는 하나님의 입장과 인간의 입장이 서로 반대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반대로 끌어들인다는 거예요. 그러니 그러한 준비를 해 두지 않으면, 하나님의 절대적 승리의 일순간을 맞을 수 있는 발판을 자신의 생애를 통하여 맞아서 이루어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문제는 오늘입니다. 일순간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니 일순간을 연장하고 확대하여 하루하루를 자기 쪽으로 바로잡아 둡시다. 그 하루하루를 쌓아서 한 달을 자기 쪽으로 세웁시다. 그 한 달을 쌓으면서 하루하루를 자신이 승리했다는 기준으로 보내야 되겠습니다.

벌써 1972년도 다 지나가고 있습니다. 앞으로 사십 수일이면 1972년이라는 해는 영원히 지나가 버리고 맙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1973년도도 하나님 쪽으로 다스려야 합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 일년의 승리적 기대 위에 서려면 세계에 없는 십자가의 가시밭길을 걷는 것과 같은 쓰라린 길을 가야 할 것입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슬픕니다.

그러나 아무리 슬플지라도 자신이 그것을 극복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몇십 번이라도 같은 훈련을 시키시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순간 순간에 승리를 하지 못하고 실패를 하게 되면 하나님을 몇십 번 차 버리는 것과 같은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길이 아무리 십자가의 길이고 가시밭길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전부 다 기쁨으로 소화하여 하나님 앞에 일순간의 승리의 기대를 인계하기 위해서 그것을 극복하는 자신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일념으로 하나님 앞에 하루를 바치는 것이 하나님 자체의 승리의 하루로서 쓰임받아 섭리역사상에 있어서 찬양의 하루가 되어진다면 그것은 천주에 있어서…. 전체를 희생해 가지고라도 그것이 허락될 수 있다면 밤이나 낮이나 그렇게 하고자 할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본심의 소원이며 자기 실체의 소원인 것입니다. 그러니 당당히 가야 합니다.

그러면 자기 나름의 소원을 생각해 볼 때, 여러분 자신들은 지금 어떠한 입장에 서 있습니까? 그러한 일년의 승리권을, 순간의 승리 기대를 획득하여 일년의 승리권을 하나님 앞에 바쳐 가지고…. 하나님께서 1972년도의 세계복귀의 괴로움이 있으시겠지만 내가 1972년도의 절대적 승리 기대를 세우겠으니, 그것을 세워 주시기를 바란다는 마음을 가지고 이 1972년도를 지내 본 적이 있느냐는 겁니다.

전체를 바치고도 미련없는 사람이 되라

여러분은 통일교회에서 십 년 폭은 십이 년이라는 역사를 지내왔습니다. 그것을 쭉 되돌아 보면, 형편이 없습니다. 올라갔다 내려갔다…. 그러면서도 앞으로 나아가기만 했으면 괜찮겠지만, 후퇴도 하고, 툴툴거리기도 하고, 발길질도 하고, 많은 피해를 입히면서 겨우 따라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내용은 엉망진창입니다. 그런 사람이 '나는 탕감복귀의 길의 선두에 서 있는 통일교회의 식구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말도 안됩니다.

그런 것을 생각해 볼 때, 자기가 승리의 순간을 확대한 기대를 세우지 못했다면 영원한 승리의 천주세계는 자기와 거리가 멀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영원한 천주세계와 멀다면 하나님이 그러한 자기를 영계에 데리고 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할 때, 하나님은 얼마나 불쌍하신 분이신가요. 그렇게 생각할 때, 얼굴을 들 수조차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내심으로 생각하면서 자기의 그 모습이 꺼져 없어지도록 생각하는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모든 것을 바치고도 미련이 없는 사람이 됩시다. 그러한 눈동자, 그러한 코, 그러한 귀, 그러한 팔다리,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과연 자기를 중심하고 변명하는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바라는 눈동자가 있을 수 있을 것인가, 또 남과 이야기하는 입 따위가 있을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따라서 영계는 최고의 심각한 승리권을 이룩한 본향의 땅인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 자신이 서야 할 입장은 어떠한 것인가? 자기 한평생을 눈물 흘리며 회개하면서 걸어가야 할 비참한 입장인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나름의 어떠한 잔소리가 있을 수 있겠는가? 자기를 중심하고 괴롭다든가 외롭다고 하는 느낌이나마 가질 수 있겠는가?

일체 무의 모습이 되어 하나님의 뜻에 받아들여진다는 그 말씀만으로도,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의 존재가 아닙니다. 감옥에 들어가서 고문을 받아 사라져 버린다 하더라도 그것이 오히려 하나님께서 취하실 조건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불평이라든가 불만의 말은 단 한마디도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입이 타락의 요인이 되어 왔습니다. 그러한 한을 남기는 입이 되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한평생 말을 하지 아니하고 말없이 생애를 바칠지라도…. 도리어 그것이 좋지 않겠는가?

그러한 입장에서 생각해 볼 때, 선한 것과 악한 것을 알면서도 악을 행한다고 하는 것을 절대로 허용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희생의 길을 걸어서라도 가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순간의 승리를 외적인 승리권으로 확대시켜 나가자

그러니까, 순간을 지켜라 지금을 지켜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멀리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맞아들일 수 없는 사람은, 영원히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맞아들일 수 없습니다. 지금 승리의 하나님을 맞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승리는 영원히 먼 것입니다.

지금이 문제입니다. 지금을 무시하는 사람은 영원한 승리의 하나님의 세계를 무시하는 사람입니다. 지금, 이 순간이라고 하는 것은 영원을 판결하는 지점인 것입니다. 그러한 매일의 순간이 계속되어지고 있는 인생 항로에 우리는 서 있습니다.

그것을 알게 될 때, 절실하게 살게 됩니다. 일거수 일투족이 실로 생명을 건 것이 된다는 겁니다. 이렇게 생각해 볼 때, 자기의 일순간을 확대하여 일생의 승리를 세우고 그 위에 가정의 승리를 세우지 아니하면 안 되는 하나님의 섭리, 그 가정의 승리 위에 종족의 승리를 세우지 않으면 안 되는 하나님의 섭리, 그 종족의 승리 위에 국가의 승리를 세우지 않으면 안 되는 하나님의 섭리, 국가의 승리 위에 세계의 승리를 세우지 않으면 안 되는 하나님의 섭리, 세계의 승리 위에 천주를 복귀하지 않으면 안 되는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할 때, 그 섭리를 소망으로 하고 계시는 하나님이 얼마나 불쌍합니까?

그러한 것을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아무리 만민에게 괴로움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순간순간 하나님을 위로하고 승리의 하루 한순간을 바쳐 드림으로써 희망에 넘치게 해 드리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어두운 역사 가운데 일순간이라도 하나님의 마음을 밝혀 나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바람직한 것입니다. 자신의 생애에 그러한 일순간이 얼마만큼이나 있었는가가 문제입니다.

전기가 합선되어 스파크를 일으키는 것과 같은, 꺼지지 아니하고 빛을 내는 일이 일생 동안 계속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사다리로 하여 영원히 왕래하실 겁니다. 그러면 이 일본에 있어서 그러한 길을 누가 갈 것인가. 또한 그 순간의 승리의 기대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상에 유지시켜 가실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것은 기쁜 길에서는 절대 불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슬픈 길에서, 누구도 반대할 수 없는 자리에서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도 긍정하지 아니하는 사라져 가는 일순간에도 하나님을 향하는 생명과 연결지어, 그러한 외적 인연의 승리권을 확대하여, 그것을 승리의 일순간, 즉 외적인 승리권 확대의 조건으로 쌓아 나오는 것이 오늘날 종교권을 중심삼은 하나님의 섭리인 것입니다. 거기에는 수많은 사람이 비참히 희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와 하나님 사이에 터쳐지는 그 순간 이외의 길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두고 볼 때, 이것은 역사를 통한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 사람의 인격 완성이라고 하는 것을 지금까지의 우리 복귀역사를 두고 생각해 볼 때, 6천년의 역사는 무슨 역사였던가? 그것은 아담 완성의 역사였습니다. 이것이 성서적으로는 6천년이지만 과학적으로 보면 팔십만 내지 백만 년으로 헤아릴 수 있습니다. 그토록 긴 역사를 하나님은 지금까지 희생의 길을 걸으시면서 심판의 길에 있어서 승리의 일점을 추구하여 나오신 것입니다. 오늘날 시대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국가와 세계를 타고 넘지 못한 채, 승리적 일순간을 추구해 나온 것을 생각하면 이것이 꿈인지 뭣인지 알 수 없습니다. 생각할 수 조차 없습니다.

일순간의 승리의 기대도 갖고 있지 못한 우리가 지금 국가적 승리의 기준에 설 수 있게 된 것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던 일입니다. 세계는 이러한 시대에 있어서 하나님의 양 극점에 섰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 정세로 볼 때 그것은 사실입니다. 이것은 중대한 문제입니다.

지금부터 이 길이 역사에 남아져 계승되어진 일순간을 후퇴시키느냐. 아니면 앞으로 밀고 나아가느냐 하는 것은 우리들의 노력 여하에 따라서 결정되어질 것입니다. 이런 시대는 이제 안 옵니다. 그러므로 지금 순간 순간의 승리의 기준을 모아 가지고 그 기대를 여하히 크게 만드느냐 하는 것이 우리들에게 부여된 사명인 것입니다.

모든 일순간을 바쳐야만 영원한 승리가 결정된다

그런 것을 돌아다 보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께 얼마만큼이나 감사해야 되느냐? 우리의 생각이 미치지 못할 만큼 감사해야 됩니다. 이 모든 것이 이 일점에 바쳐진, 즉 그러한 입장에 선 현세의 하루, 혹은 일년, 일생을 맞이한 이것은 천주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류의 슬픈 역사를 우리의 생애를 통해서 단절시키고 기쁨과 희망을 바라보는 입장에서의 새로운 역사는 출발시켜야 하는 것이 우리의 입장이 아니냐.

일본에서도 지금을 맞이하기 위하여 수많은 선인들이 희생되어 왔습니다. 하루, 일년의 승리적 기준을 마침내 우리가 맞이했다고 했을 때, 그것은 거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영원의 승리의 생애를 맞이한 것과 같은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하루를 우리는 잃어버려서는 절대 안 됩니다. 만일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일년을 탄식하시고 슬퍼 하시는 것입니다. 또, 지연시켜 버리는 하루가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일년이면 일년이라고 하는 과거를 되돌아 보았을 때, 진지하고 긴장한 하나님을 향해서 자기가 따라가지 못했다면, 몇백 년, 몇십 년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다는 괴로운 생각에 부닥친 경험도 있을 것입니다. 이제는 절대, 죽더라도 그러한 슬픈 입장, 슬픈 경지에 빠져서는 안 되겠습니다.

여러분의 일순간에 일본의 운명이 걸려 있습니다. 여러분이 한걸음 움직이는 방향에 따라서 일본의 장래가 좌우됩니다.

그러한 중심적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이 우리 통일교회 식구들입니다. 섭리상에서 본 방향과 일본의 행방을 볼 때, 있는 힘을 다하여 이 일순 간을 잡아야겠습니다. 놓쳐서는 안 되겠습니다. 1974년까지 총동원하여 지금의 시간을 사수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그것이 우리들의 사명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볼 때, 우리의 지구장 단장의 결의, 심정적 태도, 각자의 순간의 투쟁에서 패배자가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자기 자신을 되는 대로 낭비하는 사람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청춘을 되는 대로 보내는 자가 되지 말고 존귀한 청춘을 지키는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힘 있게, 그리고 높게 모든 사람들로부터 찬양을 받을 수 있도록, 인격의 가치를 나타내는 때로서 지켜야 되겠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젊은 시기에 있습니다. 그렇게 지켜진 청춘의 기대 위에 이 청년시대를 어떻게 보탤 것이냐? 이때 만약 승리의 기대를 이루어 놓게 된다면 그것은 몇십 배의 효의 길, 충의 길이 될 것입니다. 지금을 지키십시오! 지금이라고 하는 때를 못 지킴으로 말미암아 일본이 하나님께 빚지게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개개인이 빚지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모든 하는 일에 대해서 싫다거나 괴롭다고 생각해서는 하나님께 면목이 안 섭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불쌍하신 분입니다.

일순간이라도 하나님께 승리의 기대를, 세계복귀의 기초를 세워 드리지 않으면 안 되는 우리들의 입장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런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 길을 가게 될 때, 하나님은 반드시 여러분을 동정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순간을 지키십시오. 지금을 지키십시오.

특히 한 생애 가운데서 빛나는 역사를 창조할 청년시대에 있어 오늘을 가치 있는 하루로 지키십시오. 오늘 하루를 충효로써 지키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것은 생애의 절정을 넘는 것과 같은 결정적인 순간일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잠을 잘 때에도, 일어날 때에도 그러한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 통일교회에 있어서 지금의 시간을 지키십시오. 통일전산은 수호해야 합니다. 통일교회의 책임자와 식구들 모두가 한 방향으로 일치한 기대를 굳히지 앉으면 통일교화의 지금의 승리권은 이룰 수가 없습니다.

한 사람이 이룩한 진실한 기준같이 통일교회의 식구 전원이 진실한 결속점을 중심삼고 하나만 되면 그것은 문제없습니다. 그러나 통일교회 자체가 개인의 순간의 승리를 지키고 책임자와 식구가 종적, 횡적으로 일치하여 진실하게 나아가지 않는다면 통일교회의 지금을 수호할 수 없습니다.

생명을 바쳐서 모두가 일체되어 있는 곳에 승리권이 서지 않을 까닭이 없습니다. 통일교회의 이익을 채우기 위해서가 절대로 아닙니다. 그것을 아신 예수님은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러한 입장에 처한 심경에서 하신 말씀인 것입니다. 그걸 생각해 보면 선생님도 불쌍한 사람입니다.

신을 신는 시간에도, 노는 시간에도, 쉬는 시간에도, 잠자리에 든 시간에도 그 일순간을 지키십시오. 효의 길을 사모하면서 충의 길에 몸을 바쳐 나가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멀리하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선생님은 심술궂은 사람입니다. 그것을 기억해 주십시오.

일본에도 도오고 원수의 '황국의 흥패가 이 일전에 있은 즉 각원 일층 분려 노력하라'고 한 말이 있지요? 여러분, 일순간을 지키도록 노력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하면 일본은 틀림없이 발전합니다. 모든 일순간을 바쳐야만 영원한 승리가 결정됩니다.

지금을 지켜라

책을 불러오는 중입니다...

테마
글꼴
글자 크기  1.1re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