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아버님 ! 오늘은 1971년 4월 11일, 음력으로는 3월 16일, 이달 들어 두번째 맞는 안식일이옵니다. 이 아침 당신이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흘러가는 세월 가운데 한 생명으로서 하나님을 모시고 뜻있는 생애노정을 걸어간다는 것은 무한한 가치의 인생길이 되는 것을 저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어제와 오늘이 다르듯이 오늘과 내일도 달라야 되겠습니다. 흘러가는 그날들이 인생행로에 있어서 보람된 날로 맞아지는 곳에는, 인간으로서 소망하는 일들이 시작된다는 것을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뜻의 노정에 있어서 새로운 날들을 맞이할수록 당신이 소망하시는 뜻이 이 땅 위에 넓혀지기를 얼마나 얼마나 고대하고 계시옵니까? 땅 위에 있는 자녀들도 그럴 수 있는 한날을 맞이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수난길을 극복하면서 나왔사옵니까? 아버지, 여기에 찾아와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날을 맞이하여 지나온 십년 세월을 다시 한 번 돌이켜보게 될 때, 때로는 아버지 앞에 염려를 남긴 슬픔의 날도 있었사옵니다. 그렇지만 아버님이 참아 나오신 것을 아옵니다.
아버님이 저희 교단을 이끌어 나오시기에 얼마나 수고하셨다는 것도 알고 있사옵고, 이 나라 이 민족을 보호하시기 위해 얼마나 수고하셨다는 것도 알고 있사옵니다. 보잘것없는 저희 가정을 아버지께서 지키시고, 오늘까지 당신의 은사 가운데 보호하여 주신 것을 감사드리옵니다.
금년에 있어서 아버님이 기뻐하실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많았고, 아버님이 슬퍼하실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많았는가 묻게 될 때, 기뻐하실 일보다 슬퍼하실 일이 많았던 것을 생각하게 되옵니다. 다시 한 번 아버지 앞에 용서를 빌어야 되겠습니다. 승리의 한날을 찾아오시는 당신의 발걸음이 얼마나 조심스러웠는가를 생각하게 될 때, 뜻의 길을 조심스럽게 따라 나오지 못한 자녀들이 여기에 모여 당신 앞에 부복하였사오니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 70년대를 맞이하면서 당신의 나라와 당신의 뜻과 당신이 소원하시는 모든 목적이 보잘것없는 인간들을 통하여 이루어져야 된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그 인간들이 바로 여기 모여 당신의 자녀들이라고 하는 저희들인 것을 아옵니다. 당신이 소원하시는 그 뜻 앞에는 부족한 모습이로되 저희들 자신이 그 부족함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마음으로 부족함을 느끼면서 겸손하고 스스로 희생하여 당신 앞에 고임돌이라도 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갖고 있사오니, 아버지, 긍휼히 보시어서 자랑삼아 주시옵소서. 이들을 세우시어서 축복하여 주신 그 축복을 더욱더 빛낼 수 있게 하여 주옵길,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아침 남한 각지에서 이곳을 바라보며 당신의 은사의 날을 맞아 감사 하는 자들이 있거든 복을 주시옵소서. 섭리의 한때와 남아진 역사노정에 있어서 가야 할 길을 다짐하고, 저희 가정과 교회와 나라를 위하여 축복 하는 자들이 있거든 만복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영계에 있는 수많은 영인들과 저희 조상들도 오늘날 이와 같은 때를 위해서 수고하고, 해방의 천국의 한날이 이 땅 위에 오기를 고대하고 있는 것을 저희들이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님, 수고의 노정을 다짐하지 않고는 이러한 날을 맞이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여기에 모인 당신의 자녀들, 부족한 무리를 강하게 하여 주시옵고, 부족한 모습이 아버지 앞에 자랑스런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여, 이 시간 저희들의 몸과 마음을 온전히 장중에 쥐시어서 당신이 찾고 싶었던 아들의 모습을 찾은 듯이 기뻐하여 주시옵고, 저희들에게 분부하시고 싶은 것을 은은한 가운데 분부하시옵소서. 저희에게 새로운 사명을 분부하시옵소서. 이 70년대에 있어서 보람있는 인생의 한 전성기를 이룰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셔야 겠습니다. 축복받은 가정들 위에 복을 베풀어 주시옵고, 더우기 일선에 나가 있는 어린 딸들을, 아버지, 지켜 주시옵소서. 그들의 모든 사정을 아시오니 복을 내려 주시옵소서.
아직까지 저희들이 아버지 앞에 행하여야 할 일들이 많은 것을 생각할 때, 저희들이 수행해야 할 책임이 얼마나 지중한 것인가를 느끼옵니다. 당신이 이 재단 위에 같이하여 주신 것을 감사하오며 계속 같이하여 주시기를 바라고 있사옵니다.
아버지 앞에 빚지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생애노정에 있어서 온갖 힘을 다하더라도 아버지 앞에 빚지지 않는 당신의 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고, 남모르는 가운데 여러 가지 고충을 느끼면서 염려하는 남편들과 자식들에게, 아버지, 복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1971년도에 있어서 저희의 있는 정성을 다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아버님이여, 불쌍한 이 민족을 지켜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고 원하옵니다. 아버님이 온전히 지키시어서 당신의 뜻과 더불어 이 민족이 살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남북이 분립된 책임이 누구에게 있느냐고 묻게 될 때, 이 백성에게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백성을 중심삼은 수많은 교단에게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교단들이 졌던 책임을 저희들이 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저희들은 자신하면서 내일의 개척자의 사명을 보람있게 다짐해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선구자의 행각노정에 있어서 스스로 낙심하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 되겠사오니, 아버님, 권면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남북이 통일되는 그날, 수많은 민족들이 찬양을 하고 당신이 기뻐하실 수 있는 그날이 어서 와야 되겠사옵니다. 삼천리 반도에 당신의 해원성사가 이루어지는 승리의 천국을 건설할 수 있는 날이 와야만 되겠습니다. 악이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당신을 위하는 효성지자가 남아 있고, 충성 지자가 남아 있는 곳에는 악이 침범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여기 모인 당신의 자녀들, 효성이 미달하고 충성이 미달한 것을 한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여러 사람이로되 한 몸과 같이 되어야겠고, 한 마음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뜻을 중심삼고 하나되는 날에는 흥하는 것이요, 분립 되는 날에는 망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통일이라는 그 이름이 지금까지 수난의 이름으로 불려왔지만 이제부터는 영광의 이름으로 남아져야 되겠습니다. 영광을 향하여 가야 할 길이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오늘날 저희 자신들이 통일의 기반을 확보해 놓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막중한 사명을 느껴야 되겠습니다.
이 교회가 하나되고, 남한 각지에 널려 있는 당신의 자녀들이 하나되고, 세계에 널려 있는 당신의 자녀들이 하나되어 최후의 교단으로서 통일 교회가 이 시대 앞에, 이 세계 앞에, 역사 앞에 부끄러움 없이 책임을 다할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이제 71년도 이후의 70년대를 맡아 주시옵소서. 80년대를 맞이하는 그때에는 저희들이 아버지 앞에 감사할 수 있는 그날이 되고, 그때 가서 지난날들을 회고할 때, 그야말로 감사할 수 있는 생애를 그릴 수 있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보람 속에 당신의 복을 받고 선한 자녀로서 부족함이 없는 아들딸들로 세워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니다.
이 4월에는 부활절을 맞게 되는 달인 것을 알고 있사오니, 모든 일들이 아버지의 영광 가운데 있게 하시고, 이 땅 위에 새로운 봄이 찾아들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니다. 모든 말씀 참부모의 성호 받들어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오늘은 4윌 11일로서 4월 들어 두번째 맞이하는 주일입니다. 일반 교회에서는 부활절로 지키는 날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우리 타락한 인류에게 있어서 복귀, 즉 다시 돌아간다는 희망이 없다면 그야말로 절망이요, 그야말로 인간으로서는 소망의 세계를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타락은 인간에게 있어서 그 이상 없는 슬픔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배후에서 이 슬픔의 길을 해소해 주기 위해 우리의 길을 엮어 나오시면서 잃어버리지 않은, 쫓겨나지 않은 선한 본연의 자리를 더듬으며 이끌어 주고 계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우리 인간들은 감사를 드려야 되겠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인류를 빠른 시일내에 완전하게 구원하고 싶으실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인류 구원을 빠른 시일안에 성사시키고 싶겠지만 타락이라는 것이 심정 문제, 사랑 문제로 저끄러진 일이기 때문에, 외적인 문제만 가지고는 복귀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반드시 사랑을 중심삼고 인연맺지 않고는 안 되는 것이 복귀의 길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 사랑이라는 것은 부모의 사랑과 자녀의 사랑과 부부의 사랑을 겸한 사랑이어야 됩니다.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슬픈 일이 있다면 그것은 부모의 사랑을 잃고, 부부의 사랑을 잃고, 자녀의 사랑을 잃는 일입니다.
그 이상 슬픈 일이 없는 것입니다. 원통한 일이 있다면 거기에 있을 것이요, 비참한 일이 있다면 그 자리에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를 두고 볼 때, 인간이 이렇듯 가장 귀한 사랑을 잃어버림과 동시에 하나님도 우리 인간과 더불어 가장 귀한 사랑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타락은 인간 개체에 한정된 타락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 까지도 비참한 자리에 떨어지게 하였고, 모든 피조세계에 그 영향을 미치게 하였습니다. 그 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정에 못을 박게 됐고, 인류 역시 지루한 복귀노정의 수난의 십자가를 지고 형극의 노정을 가게 된것입니다. 그러한 것이 섭리의 때를 따라 지금까지 계속되어 나오고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복귀노정이라는 것은 개인을 복귀하고 나서 가정을 복귀해야 되고, 가정을 복귀하고 나서 종족, 민족, 국가, 세계를 복귀해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개인에게서 출발하여 세계 끝까지 혹은, 역사의 기원에서 출발하여 역사의 종말까지 이 복귀의 운세는 계속 남아져 있는 것입니다.
이미 과거에 이 땅에 왔다 간 선조들도 역시 타락의 후손권내에 있기 때문에 복귀의 길을 가야 할 운명에 놓여 있는 것이요, 현재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30억 인류도 역시 타락권내에 속해 있기 때문에 복귀의 운명길을 해결해야 할 입장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우리 시대를 넘어서 앞으로 찾아올 후손에게 있어서도 이 타락권을 격파하지 못하고, 청산짓지 못하게 될 때는 복귀의 길은 남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 길이 되풀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개인만이 승리해 가지고는 그 길이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 개인의 승리는 가정의 승리로 연결되어야 되고, 가정의 승리는 종족의 승리로 연결되어야 되고, 종족의 승리는 민족의 승리로, 민족의 승리는 국가의 승리로, 국가의 승리는 세계의 승리로, 세계의 승리는 하나님의 승리로 연결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승리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은 해방의 천국이 벌어져야만 모든 것이 끝나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사랑으로 인하여 맺혀진 복귀의 근원을 사랑으로 해결 짓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통해 가지고 이러한 길이 개척 되고, 이러한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인간관계에 있어서의 사랑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과 인간끼리의 사랑도 아니고, 인간과 어떤 특정한 영들이 있으면 그 영들과의 사랑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타락의 동기가 무엇이냐? 인간관계의 분립이 동기가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분립된 것이 타락의 동기인 것입니다. 본래 사랑은 인간으로 말미암아 출발해야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출발해야 했던 것입니다. 타락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사랑의 인연이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 말미암아 사랑의 인연이 출발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타락은 인간을 위주한 데서 출발했습니다.
인간을 위주한 이런 입장에서 본연의 입장으로 되돌아가기 위해서는 인간 위주한 사랑을 주장하여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자리에서는 되돌아갈 길이 없는 것입니다. 인간을 위주해 가지고 사랑하고, 인간을 위주해서 사랑을 제시하는 그런 자리는 복귀의 행로에 있어서 한 기업이 되고, 터전을 넓힐 수 있는 내적인 인연은 될는지 모르지만, 이것을 극복하고 다시 새로운 하나님의 심정의 세계와는 관계를 맺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타락의 원칙을 두고 볼 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맨 처음 이루어진 사랑이 무엇이냐?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는 부자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시냐? 하나님은 막연한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의 감각 중에 최고의 감각으로 느낄 수 있는 분이요, 우리의 의식기관, 혹은 우리의 모든 감각기관을 통하여 느낄 수 있는 전체의 주체자요, 중심적인 분입니다. 그를 대함으로 말미암아 만족이 시작되는 것이요, 행복의 요인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 외의 일체는 우리 인간 앞에 행복의 요인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자식 앞에는 부모가 전체의 기쁨을 대신하고 행복의 중심이 될 수 있는 것이요, 더 나아가서는 생명의 중심이 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 앞에 하나님이 그래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의 중심은 물론이요, 생명의 중심도 물론이요, 소망의 중심도 하나님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거쳐 나가고 움직이고 변하고 생활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으로만 느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체의 행동이 인간의 행동으로 상속되어야 하고 일체의 심정도 인간의 심정으로 상속되어야 합니다. 그 상속된 심정으로 말미암아 자란 남성과 여성이 합해서 부부의 정을 이루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인류의 선조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길리움을 받아 타락으로 인한 슬픔의 한날을 맞지 않고, 기쁨의 자리에서 성숙되어 가지고 소망의 한날을 맞이하여 하나님을 중심삼은 사랑권내에서 축복을 받았더라면, 다시 말해서 결혼식을 올렸더라면 그 부부는 악한 부부가 되는 것이 아니라 틀림없이 선한 부부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셨을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 기쁨은 생리적인 기쁨이 아니라 사랑을 중심삼은 환희 가운데 맞이하는 기쁨이었을 것이며, 그날은 우리 인류시조에게 있어서는 행복된 출발의 날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날이야말로 인간에게 있어서는 제일 기쁜 웃음을 웃을 수 있었을 날이요, 제일 기뻐할 수 있는 날이요, 제일 자랑할 수 있는 날이었을 것입니다. 온 정성을 다 들여 지어서 적자와 같이 키워 나오던 그들이 기뻐했을 그날은 부모와 같은 입장이 있는 하나님께도 기쁜 날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날은 인간의 기쁜 날임과 동시에 하나님의 기쁜 날이요, 그 기쁨 가운데 이루어지는 부부의 사랑은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 있는 사랑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쁨으로 말미암아 연결되고, 기쁨으로 말미암아 화합하고, 기쁨으로 말미암아 출발을 보아야 할 인류의 조상이 도리어 슬픔과 더불어 저주의 한 기원을 마련한 것이 타락인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품에서 떠난 것도 물론 슬픔이로되 그보다도 영원한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의 사랑권내에서 추방을 받았다는 사실이 더욱 슬픈 일인 것입니다. 이처럼 어떠한 개인의 노력으로도 되찾을 수 없는 슬프고도 원통한 타락권내에 떨어진 것이 인류의 비극의 동기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또 그러한 부모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 오늘날 인류의 비참상인 것을 우리들은 생각해 보아야 됩니다. 그러한 부부로서 엮어진 인연 가운데서 태어난 아들딸을 대하게 될 때, 기쁨의 얼굴로서 대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소망과는 상극된 입장에서 타락의 한을 품고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을 느끼는 입장에서 대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태어난 것이 아담 가정의 맏아들인 가인이요, 둘째 아들 아벨입니다. 아벨은 가인을 극복할 수 있어야 되고, 또 부모의 어려움까지 극복하지 않고서는 기쁨을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자리가 얼마나 비참한 자리인가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으로부터 부부의 인연, 자녀의 인연까지 흘러 나오는 이런 가정적 기틀이 마련되었다면 거기에서 이루어진 그 사랑이야말로 하나님의 사랑이자 부부의 사랑이요, 부부의 사랑이자 자녀의 사랑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부부의 사랑, 자녀의 사랑이 하나된 가운데서 화합하는 그 전체는 그야말로 하나님도 기뻐하고, 인류의 조상도 기뻐하고, 인류의 후손도 기뻐할 수 있는 행복스러운 자리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 자리를 하나님이 얼마나 고대했겠으며, 우리 인류시조가 얼마나 소원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타락으로 말미암아 그러한 자리는 아직까지 우리 인간 앞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 자리는 위로는 하나님이 계시고 아래로는 인류가 있어서, 하나님과 아담과 그의 아들까지 삼대(三代)에 걸친 종적인 역사노정이 하나님의 사랑권내에 안길 수 있는 터전이었습니다. 그것은 말할 수 없는 기쁨의 터전일 것이고, 하나님의 사랑의 터전일 것입니다.
아담 해와는 인류의 조상인 만큼 처음으로 부모된 자리에서 자식을 낳자마자 자랑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자랑할 상대가 누가 있느냐 할 때, 물론 아담 해와 부부끼리 서로 자랑도 하겠지만, 아담 해와를 창조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종들로 지어 주신 천사세계에 자랑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누구에게 자랑하고 싶었겠느냐? 하나님 앞에 자랑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자식을 낳았을 때 그 자식이 훌륭한 가계를 이어받은 자식이요, 혈통적으로 보나 인격적으로 보나 훌륭한 자질을 이어받은 그런 자식이라면 해와는 얼마나 행복했겠습니까? 그 아기가 귀여우면 귀여울수록 그 귀여움은 자기 일신만이 느끼는 귀여움이 아니라 하나님과 아담과 미래의 소망의 세계에까지 자랑하고 싶은 귀여움인 것입니다. 그런 장하고 놀라운 사랑이 맺힐 것인데도 불구하고 해와는 사랑하는 자식을 품고 하나님 앞에 면목없어 얼굴을 숙여야 할 입장이 되었습니다. 자기의 처신을 잘 갖추어 가지고 늠름한 자세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위축된 입장에서 스스로 땅을 바라보면서 자기 자체를 자탄하지 않으면 안 될 탄식의 요인이 그 마음속에 용솟음쳤다는 사실, 이것은 지극히 비참한 내용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가 엮어져 가지고 횡적으로 뻗어나와 민족을 형성하고, 국가를 형성하고, 세계를 형성하여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권이 이루어진 것을 알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 되돌아가야 됩니다. 되돌아 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되돌아가는 데는 그냥 되돌아갈 수 없습니다. 나쁜 조상을 가진 후손은 그 조상들이 이루어 놓은 선한 업적이나 악한 업적을 넘어서 되돌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계승해 가지고 되돌아가야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역사시대를 거쳐 30억 인류가 살고 있는 오늘날의 이 지구성 자체가 타락세계입니다. 여기에는 인류의 한이 있습니다. 전세계 30억 인류의 한이 있는 것입니다. 민족과 국가를 초월한 인류의 한이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인류의 한이 깃들어 있을 뿐만아니라 여기에는 수많은 국가와 민족과 씨족과 가정과 개인의 한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인류의 한에 한가닥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크나큰 인류의 한의 덩치에 하나의 끈으로 연결되어 한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노력을 하고 아무리 몸부림을 친다 하더라도 그 한의 끈을 끊고, 그 한을 극복하고 나섰다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한 입장에 처해 있는 인류 가운데 한 존재가 여러분이요, 오늘날 우리의 인생인 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그 한 줄기의 한의 길을 나 한 개체에서 끊었다고 해서 끊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한의 길을 나에게서 끊었다고 해도 또 가정에 달려 있는 것이요, 가정에서 끊었다고 해도 종족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종족에서 끊었다 하더라도 민족에 달려 있고, 민족에서 끊었다 하더라도 전인류에게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류가 공히 운명을 지고 비참한 복귀의 행로를 해결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할 개인이요, 가정이요, 종족이요, 민족이요, 국가요, 세계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는 무엇을 요구하여야 할 것이냐? 우선 자기를 위한 요구는 생각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을 어떻게 극복하느냐? 인류의 한(恨)권내에서 초월적인 자아를 어떻게 발견할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를 위해 몸부림을 쳐 나온 것이 지금까지의 역사요, 철학이요, 종교가 분담해 온 사명이었습니다.
종교가 바라고, 철학이 바라고, 모든 진리가 탐구하여야 할 최후의 궁극적인 기점이 어디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지금까지 막연한 것입니다. 철학은 지금까지 인생의 문제를 중심삼고 그 존재의 가치와 기원을 찾기 위해서 몸부림쳐 나왔지만, 그 존재를 발견했을 때에는 어떻게 될 것이냐? 그 존재를 발견하는 자체보다도 발견하고 난 후에 수난의 길, 곤경의 길, 역경의 길에 부딪치게 될 때는 더 큰 문제가 되지 않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인간이 타락으로 말미암아 한의 권내에 사무친 일이 있었기 때문에 내가 이렇다 하는 기준을 세웠다 하더라도 그 후에 첩첩이 가로놓이고 엇갈려져 있는 것을 해결해야 할 중차대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자기 일생의 문제보다도 더 큰 우주에, 혹은 인류를 중심삼은 사랑입니다. 인간끼리의 사랑이 아니라 절대자 하나님과 상관되어 있는 사랑의 문제가 부딪혀 온다 할 때 그 해결의 기준을 어디에 두어야 될 것이냐 하는 문제를 놓고 볼 때, 인간 자체를 중심삼고 해결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아니겠느냐?
하나님은 인간에게 더 큰 책임을 지우게 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금후에 인류에게 찾아올 더 비참한 수난의 길을 생각하고 철학이나 종교를 세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자기 인생 자체의 생명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하나님은 아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먼저 어려운 문제를 책임져 나오시고 인간들이 최후에 찾아야 할 사랑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인류역사와 더불어 관계를 맺고 나오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종교를 세워서 하나님의 사랑을 제시해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많아서 그것을 자랑할 수 있다 해도 그 사랑 앞에 있어서의 자랑에는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자랑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가진 것은 육신과 더불어 사라질 것입니다. 그렇지만 인격을 중심삼고 볼 때에 세계적인 가치의 내용을 지닌 사람이 있다면, 그의 일생이 다하여 돌아간다 하더라도 그의 인격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남아지는 것입니다.
인격 가운데서도 보람있는 인격을 지탱시키고, 가치있는 인격의 내용을 연결시킬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이것은 사랑 문제에 귀결됩니다. 동포를 얼마나 사랑했느냐, 민족을 얼마나 사랑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민족을 위해서 살았다고 내세울 수 있는 사람이라 할 때, 위해서 살았다는 그 배후의 구체적인 내용이 애국자의 기준을 결정짓는 것입니다.
효자 중의 효자는 어떠한 효자냐? 대한민국적인 효자냐? 대한민국의 역사에 없었던 그런 효자가 있다고 합시다. 그 역사적인 효자는 대한민국에서는 제일이지만 세계무대에 연결시켜 볼 때, 그가 효자 중의 효자라는 것을 무엇으로 측정할 수 있겠느냐? 인기가 있고, 혹은 부모의 외적인 모든 사연에 응할 수 있는 입장이 있다고 할지라도 효자가 아닙니다. 심정문제에 귀일점을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평탄한 자리에서 부모에게 효도한 그런 효자였느냐, 아니면 모순되고 상충된 종의 자리에서 부모에게 효도한 효자였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인간으로서는 가히 측량할 수 없는 역경 속에서 인간의 희생적인 심정의 내용을 깊이 느끼면 느낄수록 세계적인 효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주 가운데 슬픔만이 남아진다고 하면 인류에게 소망이니 희망이니 하는 것은 다 망상일 것입니다. 이 우주는 절망으로서 끝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희망은 전부 다 절망 속에 무너져 버릴 것입니다. 그런 희망은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행복의 요인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주의 슬픔도 지나가고 절망도 다 지나갔을 때 남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인간들이 원하는 경제문제냐, 아니면 우주적인 인격이냐? 사람이면 사람,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인격을 연결하고 있는 정서적인 면이 문제입니다.
슬픔을 극복할 수 있는 기쁨이 있다고 할 때, 그 기쁨은 무엇으로 말미암아 기쁨이 되느냐? 절망을 해결해 줄 수 있는 희망이 있다면 그 희망은 무엇으로 연결되느냐? 그것은 돈도 아니요, 사람도 아닙니다. 사람이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그들 각자가 지고 오던 수난을 넘었다 하는 보람을 느끼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인격이 문제가 아니라 그 인격 형성의 밑바탕이 되는 정서가 문제되는 것입니다.
자식을 잃어버린 부모는 수십년의 수난의 행각을 걸었다 하더라도 그 자식을 찾고 나면 기쁨만이 남아지는 것입니다. 어느때엔가 꼭 자식을 찾고 평안함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고 갈 때, 어떠한 수난의 길도 그 부모의 심정을 막아낼 수 없는 것입니다.
남편을 찾고 있는 아내의 걸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난의 길이 아무리 험하다 하더라도 남편을 만난 이후에 있을 정서적인 면을 아는 그 아내 앞에는 수난의 길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자기 생명보다도 더 가치있는 사랑이 있다는 것을 알고 가는 아내가 있다면 그에게는 수난의 길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참한 역사과정에서 탄식할 수 밖에 없는 오늘날 인류 앞에 최후로 남아질 것이 무엇이냐? 돈많은 사람도 아니요, 지식 있는 사람도 아닙니다. 철학자들이 찾고 있는 절대적인 존재가치도 아닌 것입니다. 절대적인 존재가치는 심정문제와 사랑문제를 해결하는 자리에서만 이야기가 되는 것이며, 그때에 비로소 나는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를 안고 있는 타락한 인류를 구하기 위해 하나님은 지금까지 사랑의 마음을 갖고 나오셨습니다. 사랑의 마음을 갖고 나온 하나님은 섭리의 출발 당시부터 인간들에게 지식의 내용을 가르치는 것보다도, 인간은 이래야 된다는 외적인 진리를 교육하는 것보다도, 사회와 세계에 대한 사정을 이야기하기 보다도 보다 가치있는 사랑에 대한 내용을 가르쳐 주어야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류를 대해 가르치는 데 있어서는 제일 중요한 것을 중심삼고 가르쳐야 됩니다. 사랑하는 자녀에게 아버지 입장에서 가르쳐 줄 수 있는 교육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이냐? 사랑밖에 없을 것입니다.
오늘날 종교의 경전은 사랑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지 못한 만큼 더 갈라짐이 있고, 더 고충이 있고, 더 수난이 깃들어 있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구체적으로 가르쳐 줄 수 있는 때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극복 해야 할 수난의 길과 탄식과 한의 길이 지나가야 할 그 자리를 가로막고 있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성경의 중요한 내용은 전부 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사랑을 제시하는 것들입니다. 성경 요한복음 3장 16절을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막 12:30)"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은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데 인간만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본래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사랑은 주면 반드시 돌아오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에 내가 무한한 사랑을 주었으니 너도 무한한 사랑을 돌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속적으로 주신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주었는데 돌아오지 않으면 천지의 인연이 끊어지게 됩니다. 반드시 주고받는 데서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웃을 때도 혼자 웃고 나면 그 후에는 허탈감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라 하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라 하는 그 말이 무슨 뜻이냐? 내가 너를 누구보다 더 사랑하겠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이 우리 앞에 제시한 그 내용은 사랑으로 귀결됩니다. 막연한 박애주의를 중심삼은 사랑이 아닌 세계적인 사랑이 출발하는 곳은 어디냐? 민족의 사랑이 연결된 자리입니다. 민족의 사랑이 출발하는 곳은 어디냐? 종족의 사랑이 연결된 자리입니다. 종족의 사랑은 어디서 출발하느냐? 가정의 사랑이 연결되지 않고는 종족의 사랑이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이것은 남편과 아내를 중심삼은 사랑의 인연으로 나타난 것이 종족이기 때문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사랑하다 보니 그 역사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역사를 사랑하는 데 있어서 하나가 아닌 전체를 사랑하려니 결국 종족이 포함되는 것입니다. 그 종족의 사랑은 가정을 출발로 하지 않고는 인연지을 수 없는 것입니다. 또 그 가정의 사랑은 개인의 사랑을 중심삼지 않고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개인을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개인으로서 정서적인 문제를 중심삼고 요구하는 것이 무엇이냐? 여기에 결론적으로 부딪치는 것이 무엇이냐? 부모의 사랑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이 현실적으로 세계에 전개될 수 있는 형성체가 있다면 그것은 국가를 형성할 수 있고, 세계를 형성할 수 있는 가정이 아니겠느냐? 어떤 국가나 세계든지 가정을 기반으로 하지 않고는 형성되지 않습니다. 가정이 문제입니다.
그러면 가정은 무엇을 기반으로 해야 되느냐? 가정의 구성 요소인 개인의 사랑을 가장 필요로 하는데 그것은 부모의 사랑입니다. 부모의 사랑에는 아버지의 사랑과 어머니의 사랑이 있습니다. 부모의 사랑이 왜 귀하냐? 자기 생명보다도 더 높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사랑은 자기 생명도 잊어버리고, 자기의 행복과 소원도 포기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부모의 사랑이 없으면 아무리 행복하다 하더라도 그것은 자기들끼리 기뻐하는 것밖에 안 됩니다. 부모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무엇을 가지고 기뻐할 것이냐? 옷이나 잘 입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밖에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고아(孤兒)의 심정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내심 깊숙이 스며드는 정서적인 면에 있어서의 기쁨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부부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혼자서 아무리 사랑을 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쓸데없는 사랑입니다. 사랑의 제일보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부부는 반드시 상대적 관계이기 때문에 사랑에도 상대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은 종적인 사랑이요, 부부의 사랑은 횡적인 사랑입니다. 그 횡적인 사랑이 횡대로 퍼져 나가면 이것이 중심이 되기 때문에 횡으로 연결시켜서 또 하나의 종적인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이렇게 평면과 입체, 종횡(縱橫)의 관계를 연이어 하나의 가정의 형태를 다시 횡적으로 연결 지으면서 인류는 발전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자신이 행복하냐, 불행하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여러분들은 막연하게 하나님이 있으니 행복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문제가 아니라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과 얼마만큼 관계를 맺고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거기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행복의 속성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계시다고 내가 있다고 행복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나의 관계에 있어서 일체적인 기준이 있느냐 하는 데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 일체적인 중심의 핵이 뭐냐? 그 핵은 인격도 아니요, 어떠한 지식도 아니요, 어떠한 권위도 아닙니다. 사랑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통일교회가 부모의 사랑, 부부의 사랑, 자녀의 사랑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인간들은 그러한 사랑을 찾아가지고 거기에 정착 하여야만 비로소 안식할 수 있는 자리를 갖게 되는 것이며, 부모의 품에 안길 수 있는 행복한 아들딸이 되는 것입니다. 그 자녀가 행복하고 평탄한 환경에서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서 '남자와 여자는 이렇게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 아버지 어머니와 같이 우리도 그렇게 되고 싶다'는 부러움을 느끼며 그것을 소망의 기점으로 하여 성숙해 가지고 사랑할 수 있는 날을 갖게 될 때, 비로소 필생의 소원의 날이 될 것이며, 부모에게 받는 최고의 선물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성립된 자리가 부부의 자리인 것입니다.
그것은 어머니 자리를 대신 이어받은 것이요, 아버지 자리를 대신 이어받은 것입니다. 이 사이는 부모와 자식간에 맺어진 정 이상의 정으로써 연결된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마음뿐만이 아닙니다. 생활권내에서 느끼는 모든 사랑은 부모들이 가지고 느끼던 모든 사랑을 그냥 그대로 이어받은 것입니다. 부모를 대한 기쁨이 나에게서 어우러져 기쁠 수 있는 상대를 갖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부의 인연입니다.
이런 부부의 인연 가운데서 자녀를 낳게 되면 그 부부와 자녀는 하늘과 땅의 관계입니다. 상하관계가 연결되는 것입니다. 부모는 하늘 대신이요, 자녀는 땅이라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듯이 자식들을 사랑해 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뿌리의 진액이 가지로 뻗어나가는 것과 마찬 가지로 그대로 계승되는 것입니다. 계승되어 끝에 가서는 돌아오는 것입니다. 돌아옴으로 말미암아 또다시 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 앞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인간은 후손에게 전통으로서 연결해야 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그러했으니 우리 후손도 그럴수 있고 자손만대 세계 끝까지 그럴 수 있는 사랑으로서 퍼지게 될 때, 나무에 달려 있는 하나의 잎이 그 나무를 떠나서는 살 수 없듯이 우리 인간도 그 사랑의 인연권내에서 떠나게 될 때는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사랑권내에 속해 있을 때만 생명의 기틀을 간직할 수 있고, 서로 주고 받는 가운데에서만이 하나의 형성체, 연결체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랑권의 세계에서는 하나의 잎이 상하게 되면 나무 전체에 피해가 옵니다. 전체의 피해는 전체의 슬픔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의 슬픔이 전체의 슬픔으로 나타나는 세계가 이상세계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 타락권내에서 그런 사랑을 찾아가려면 어떻게 가야 되느냐? 그 길을 가려면 어떻게 가야 되느냐? 복귀의 행로를 찾아가야 됩니다. 그러면 복귀해 나가는 길을 어떻게 찾아야 되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런 사랑이 있어야 될 것을 알았다면 그 사랑을 어떻게 찾을 것이냐? 이 타락권내의 것을 다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사랑, 그 사랑을 찾아야 됩니다.
사랑이라는 것이 제일 가는 최고의 것이라면, 그 최고의 것은 또 다른 상대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단 하나의 것이어야 합니다. 최고의 것을 찾았기 때문에 최고의 것을 가지려면 나도 단 하나밖에 없는 최고의 자리로 나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단 하나의 자리, 그 하나를 형성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은 백이 될 수 있는 요소를 남긴 자리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를 형성하는 데 있어서 보충되고 보강될 수 있는 요건을 원하여 그것이 투입될 수 있더라도 그 하나를 형성하는 데 있어서 반대되는 요건이 가해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들이 타락권내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타락권 형성의 요소가 남아 있는 그 자리에 가기 전에는 완전한 하나의 참이 형성된 자리를 맡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타락권내의 모든 것을 부정하고 단 하나의 참을 형성의 요건으로 거기에 대치시키지 않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인간 세상에서는 자기 욕망을 중심삼고 자기 울타리를 치려고 하는 것입니다. 본래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자기를 중심삼고 가정을 생각하고 종족을 생각하고 민족을 생각하고…. 점점 커 올라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나는 세계와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관계를 맺는 것이 본성인데도 불구하고, 관계를 맺고 난 후에도 타락권내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타락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중심삼고 복귀해야 되느냐? 돈도 아니요, 역사적인 어떤 성현의 가르침도 아닙니다. 무엇을 중심삼고 해야 되느냐? 하나님도 희구하고 인류도 희구하며, 하나님도 인류도 '바로 이것이다'라고 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절대적인 하나님이 '이것이다' 할 수 있는 것은 절대적인 사랑밖에 없습니다. 그 사랑을 인류가 '바로 이겁니다' 할 수 있는 그 자리는 타락세계의 심정적 요인을 부정하는 자리인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실례가 될는지 모르겠지만, 어떤 부인이 본 남편과 아들딸까지 낳고 살다가 다른 상대를 만나서 다시 시집을 갔다고 합시다. 다시 만난 그 상대가 본 남편보다 모든 면에서 낫다 할 때는 본 남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딸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본 남편과 관계맺었던 모든 인연을 끊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왜 그러냐 하면, 보다 나을 수 있는 사랑을 막는 자극제가 되기 때문에 그것을 전부 다 불사르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본 남편보다 더 못하다 할 때는 그가 하는 일체를 원치 않는 것입니다. 하면 할수록 끝이 가까와 오고 관계를 맺으면 맺을수록 완전히 거부하고 싶은 마음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인류가 타락한 세계에 애착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해서 행복이 있겠느냐? 현재 세계 인류가 찾아 나가는 정서적인 문제라든가…. 현재 청소년 윤리 문제가 세계적인 문제가 되고 있는데, 이런 문제들을 중심삼고 살펴볼 때, 사람의 행복이 무엇이냐? 쾌락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극단주의인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요, 인간 자체의 본연의 심정이 요구하는 것이요, 화동의 모든 박자가 맞아 가지고 그야말로 '이것이다' 할 수 있는, 긍정적인 내용의 상대 요건을 제시할 수 있는 바탕이라면 가면 갈수록 거기에는 신이 나고 가면 갈수록 자극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가면 갈수록 파탄이 벌어지고 가면 갈수록 부정이 튀겨 나온다면, 그런 사랑, 그런 정서적 밑바탕이 된다면, 그 자체가 타락세계임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보다 가치있는 사랑권, 가면 갈수록 좋고, 가면 갈수록 부정당할까봐 생명을 바쳐서라도 방비하고 싶은, 생명을 가진 인간이라면 부정할 수 없고 또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그렇지 않아요. 사랑의 세계는 그런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오늘날 인류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타락된 세계입니다. 인간들은 보다 나은 사랑의 세계, 보다 나은 사랑의 근원을 찾아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금후의 세계에 있어서 이것이 문제가 될 것입니다.
인간 앞에 신념을 제시하고, 어떻게 참된 가치를 상속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가치를 넘어서 가치의 내용을 집약시킨 사랑을 어떻게 형성 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 사랑이 개인의 사랑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역사가 소원하던 사랑, 극치의 사랑, 미래의 영원한 출발의 기원이 될 수 있는 사랑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의 기점이 인류의 역사과정에 나타났다고 할 때는 사람들은 그러한 자리에서 떨어질까봐 걱정을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그렇잖아요? 재미있게 잘살고 있는데 이것을 갈라놓으면, 서로 그 자리를 떠나지 않으려고 생명을 버리면서까지 투쟁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보다 가치있는 사랑에 의해 인연되어진 그런 행복의 터전을 지닐 수 있는 한 곳이 있다면 거기에서는 만사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까 말한 거와 같이 어떤 부인이 시집을 다시 가서 옛날보다 정서적인 관계가 나은 남편을 만났다 하게 되면 그 전실 자식까지도 좋아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타락권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그냥은 안 됩니다. 무엇으로 할 것이냐? 우리 인간의 생명의 힘 가지고는 못합니다. 왜? 우리의 생명의 근원이 파탄되어 있고, 생명의 뿌리가 악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보다 강할 수 있는 것이 있어야 됩니다. 생명보다 강한 것이 아니고는 타락권에서 빼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을 들고 나오는 것이 종교의 본질입니다.
사랑, 하나님의 사랑은 어디에 나타나야 하느냐? 내 개인 자체에 나타나야 합니다. 그 사랑이 오늘날 인간 세상에 있어서 내 부모에게 인연 되었던 사랑보다도 더 귀한 것이냐 할 때 '예', 부부에게 나타난 사랑보다도 더 귀한것이냐 할 때 '예', 자녀에게 나타난 것보다도 더 귀한 것이냐 할 때 '예', 오늘날 민족과 국가에 나타난 사랑보다도, 혹은 인류애, 박애주의 사랑보다도 더 귀하게 생각하느냐 할 때에 '예' 할 수 있는 그런 일변도적인 사랑의 힘이 우리와 생활에서부터 이 우주간에 형성되었다면 거기서부터 새로운 역사는 출발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슨 지식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 아니요, 무슨 과학 기반을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과학 기반을 안팎으로 움직여 낼 수 있는 길이 무엇이냐? 사랑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오늘날 통일교회에서 말하는 심정의 세계라는 말은 앞으로 세계 인류 앞에 소망의 닻이 되고, 기쁨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여러분, 사람이 죽을 때 찾는 것이 뭐예요? 돈도 아니요, 인격도 아니요, 지식도 아닙니다. "내 돈 어디 갔어? 내 금괴 어디 갔어?" 그래요? 그때 찾는 것이 뭐냐? 사랑입니다. 아무리 병신 자식이라 하더라도 '야 !아무개야' 하고 찾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 자기가 제일로 갖고 가야 할 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최후로 해결짓지 않고서는 갈 수 없는 실체의 내용이 있기 때문에 죽을 때 사랑을 찾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떠할 것이냐? 만일 하나님이 죽게 되었다면 무엇을 찾을 것이냐? 하나님이 돈을 필요로 해요? 무슨 인격을 필요로 해요? 무슨 지식을 필요로 해요? 전부 필요없습니다. 오직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럴 것 아니예요? 여러분들이 '영원한 금전'이라는 말을 해요? 제일 멋진 말은 어떻게 쓰느냐? '영원히'라고 합니다. 길 영(永)에다 멀 원(遠)이지요. '영원'이라는 말은 최고의 말입니다. 또 '절대적이다' 하는데 돈이 절대적이 돼요? '영원한 돈이다' 그 말이 돼요? '불변의 돈이다' 말이 돼요? '영원한 인격'이라는 말도 어색합니다. '절대적인 인격' 그래도 어색하다는 것입니다. 다 어색하지만 여기에 제일 멋지게 맞는 것이 무엇이냐? 사랑입니다. '영원한 사랑, 절대적인 사랑' 이것이 제일 멋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못난 사람에게도 쓰일 수 있는 말입니다.
절대적이란 말은 최고의 형용사입니다. 그 말은 무엇에 쓰기 위해 생겨 났느냐? 생명에도 조금 쓰이기는 하겠지만 '절대적 생명' 하면 자기 혼자 만입니다. 혼자 있는데 절대라는 말이 무슨 필요가 있어요? 그렇지만 '절대적 사랑' 하게 되면 전체가 다 들어가는 것입니다. 사랑하게 되면 상대적 여건이 있기 때문에 그 사랑의 대표자는 전체를 대표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게 되면 절대적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절대적 사랑' 하면 좋아요. 안 좋아요?「좋습니다」 사람도 그런데 하나님은 어떠하실 것이냐? 우리 인간은 하나님 닮았습니다. 자식이 아비 닮지 별 수 있어요? 절대적 사랑, 유일한 사랑, 불변의 사랑, 영원한 사랑 전부가 들어맞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일 좋은 형용사는 사랑에 갖다 붙여야 하는 것입니다. 비둘기 같은 눈동자이니 하는 말도 무엇을 찬양하는 것입니까? 사랑을 두고는 우주만상에 있는 좋은 말은 전부 다 갖다 붙이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이 '절대적인 사랑' 하면 누구를 생각해야 되느냐? 절대적 사랑이 남자 여자를 생각하는 것이냐? '유일한 사랑' 하면 누구를 생각해야 되느냐? 자기 부모? 아니면 자기 아내? 자기 남편? 인간이 태어나서 칠팔십년, 길어야 백년 밖에 못 사는데 그것을 영원한 사랑이라고 할수 있어요? 결혼해서 평균 40년 살기도 힘드는데 그것을 영원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영원한 사랑' '불변의 사랑' 그 말들은 하나님을 중심삼고서야 쓰여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어디서부터 오는 것이냐? 절대적인 것으로부터, 유일한 것으로부터, 영원한 것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사랑이 영원한 것이기 때문에 그 사랑을 가지게 되면 영생하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말미암아 생명이 생겨났기 때문에 사랑은 생명의 원천입니다. 유일한 사랑으로 말미암아 유일한 생명이 생겨난 것이요, 절대적인 사랑으로 말미암아 절대적인 생명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제외하여 놓고 그런 말이 성립되느냐, 안 되느냐? 내가 스스로 절대적이라고 한다고 해서 절대적이 될 수 있어요?
사랑이 필요하다…. 오늘 여기에 처음 온 사람은 '아! 글쎄 통일교회에 갔더니 문 선생이란 양반이 아침부터 사랑 이야기만 하더라'고 할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실연을 당해서 사랑과는 상극권내에 있는데 사랑이 좋다니…' 그런 사람이 있으면 그는 실연당하길 잘했습니다. 그 이상의 사랑을 못 찾아서 탈이지 만일 찾아 보라는 것입니다. '아이구 잘했다. 아이구 잘했다' 할 겁니다. 남자들은 전부 도둑놈이라느니, 늑대 같다느니 하지요? 그것은 왜? 남자들은 더 큰 사랑이 있으면 인사도 안 하고 보따리 싸 가지고 도망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세계에서 어느 누가 제일 가느냐? 누가 일등 갈 것이냐? 일등은 단 한 사람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길 '하나님은 내 아버지다' 라고 했습니다. 나는 참으로 잘 말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 '나는 독생자다'라고 했습니다. '독생자' 라는 말은 하나님의 사랑을 독차지했다는 뜻입니다.
그 다음에는 인류를 대해 '나는 신랑이요, 너희는 신부다'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너희는 형제'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맺어 가지고 하나님이 사랑을 중심삼고 인간 세계에 나타나게 될 때 거기에는 천지조화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만일 그러한 것을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사랑의 계보에 있어서 제일 조상이 되지 않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통일교회에서 가르치는 원리는 구체적인 것입니다. 막연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인류의 제문제를 들고 나와서 역사를 따지고 나서는 데 있어서는 세계적으로 통일교회가 둘째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 갈수 없으니 몇째 가는 거예요? 꼴찌 아니면 첫째 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별의별 욕을 먹어도 기분이 나쁘지 않습니다. 앞으로 세계 인류를 해방시켜야 할 그 길을 찾아가는 데 있어서 통일가의 전통적인 사상과 내용이 득세할 날이 올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뛰쳐 나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개가하는 아낙네가 옛날 신랑이 해준 손수건으로부터 그와 관계되어 있는 전부를 인정하고 뛰쳐나올 수 있어요? 모든 관계를 부정해야 됩니다. 시집갈 때 해가지고 갔던 금반지, 양단 저고리를 가지고 갈 수 있어요? 가지고 가면 안 됩니다. 그 모든 것 다 버리고 가야 합니다. 신랑도 외적으로 관계 되어 있는 것을 전부 끊어버리고 오라고 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이 우리를 대해 오라 할때 '옛날에 가졌던 것 다 보따리에 싸 가지고 와라' 그러겠어요? 다 버리고 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버리는 데는 무엇부터 먼저 버리느냐? 제일 사랑하는 것부터 버리고 오라는 것입니다. 제일 사랑하는 것이 뭐예요? 어머니 아버지입니다. 그 다음에는 남편이요, 그 다음에는 내 자식, 내 친척, 내 나라 전부를 버리고 오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도 네 아비나 네 남편이나 네 자식이나 누구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지 않으면 나에게 합당치 않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 말이 무슨 말이냐? 그것을 갖고 오라는 거예요. 갖고 오지 말라는 거예요?「갖고 오지 말라는 것입니다」 요전에 어떤 사람이 통일교회에 나가면 가정이 파탄된다고 했다는데, 통일교회에 잘 나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2천년 전에 그런 말을 하고도 사람들에게 당장 몰매맞아 죽지 않고 33세까지 살았다는 것이 용합니다. 그런 소리를 하고 다니는데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야 ! 이놈의 자식아, 뭐야' 나부터라도 그랬을 텐데….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에서는 좋다 하는 것을 다 싫다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할 때 할 수 있다면 환영하고 할 수 없다면 추방해야 됩니다. 그럴 수 있는 길이 있다 하게되면 다 할 수 있다고 할 것입니다. 다만 믿지 못하고, 모르기 때문에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종교에 그러한 내용이 없다면 종교인들은 최고의 사기꾼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복귀의 행로를 찾아가야 하는데, 어떻게 가야 하느냐? 찾아 나서는 데는 어떤 길이 빠른 길일 것이냐? 사람은 전부 다 높아지길 원하지요? 그런 세상에서 지금 살고 있습니다. 점점 높아져서는 어떻게 되느냐? 점점 높아져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는 최고 정상에 이르게 되면 내려 오게 마련입니다. 더 이상 갈 곳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본성을 두고 볼 때, 타락하지 않았으면 세계를 내 것으로 만들겠다고 해도 죄가 되지 않습니다. 원래 그렇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욕심은 하나님까지도 내 것 만들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타락의 동기를 분석해 보면, 낮아지겠다고 해서 타락한 것이 아닙니다. 타락은 떨어진 것이요, 떨어졌다는 것은 낮아진 것을 말하는데 우리 인간 세상에서 어디 가든지 자기의 입장을 남에게 양보하고 스스로 낮아지겠다고 하는 겸손한 자리에서 타락이 성립되는 법이 있어요?
호랑이 같은 시어머니 앞에서 며느리가 같이 싸우면 둘중의 하나가 죽든지 살든지 끝장이 납니다. 그렇지만 그 시어머니 앞에서 겸손하고 낮아 지게 되면 그 호랑이 시어머니를 잡을 수 있어요, 없어요?「있습니다」 그러면 호랑이 같은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잡혀 가지고 그 며느리를 미워 할까, 사랑할까? 며느리를 쫓아내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며느리에게 굴복한다는 것입니다. 며느리는 사랑받게 되고 결국 둘이는 사이좋게 지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그러니 환영받아 가지고 좋게 지낼 수 있는 길을 찾아가야 되겠습니다. 이런 입장에서 볼 때, 며느리가 시어머니한테 '시어머니 뭐야, 당신은 80여년을 살면서 지금까지 밥을 먹었어도 나보다 더 먹었고, 옷을 입었어도 나보다 더 입었으니 이제부터는 내가 더 많이 먹고, 내가 더 많이 입어야 겠소'라고 해서야 되겠어요? 그러다가는 이틀도 못 가서 쫓겨나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느냐? 당신이 지금까지 많이 먹었지만 더 먹어야 합니다. 자기가 못먹더라도 그래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꾸로 되는 것입니다. 주객이 전도되는 것입니다. 만일 여기서 맞서고 나섰다가는 국물도 없다는 것입니다. 가면 갈수록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사 인간에게 어떻게 가르쳐 주셨느냐? '내 아들딸이 되려면 교만해라'고 가르쳐 주셨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렇지만 악당들 앞에서 그렇게 가르쳐 주셨다가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꼭대기에 올라가서는 전부 다 전멸당하는 것입니다. 전부 다 물고 뜯고 싸우다가 마지막에 두 사람이 남게 될 것이고, 그들도 끝까지 싸 다가 둘 다 망하는 것입니다. 망하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모두들 안전하게 올라가게 하기 위하여 결론지어 가르친 것이 온유겸손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맨 나중에 가서 모두다 전멸해서는 안 되겠으니 이들을 구하기 위한 뜻에서 온유겸손한 길이 제일 안전 하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올라가고자 할 때 쉬워요, 힘들어요? 한 사람 거치고 나면 열사람 백 사람의 원수가 나타납니다. 올라갈수록 많아지는 것입니다. 천사람이 나타나면 그 뒤에 또 만 사람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점점 그 범위가 넓어집니다.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원수가 점점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냥 그대로 올라가는 것은 절대 어렵기 때문에 내려가야 합니다.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원수는 점점 없어지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내려가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여기 내려가기 좋아하는 사람 있으면 손들어 봐요? 내려가면 만사가 다 해결되는 것입니다. 어머니 아버지에게 나를 사랑해 달라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너 어디 가니? '내려갑니다', '내려가는 것도 좋지만 이만큼에서 그만하자', '아니예요. 조금만 더 내려가겠어요' 이렇게 하면 싸움 없이, 부작용 없이 전부 다 떼어 놓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를 저끄린 사탄까지도 내려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사탄이 내려가는 것을 좋아했다간 볼장 다 보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반대로 되는 것입니다.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어떻게 되어진다구요? 많아져 요, 적어져요? 이것을 여러분들은 똑똑히 알아야 합니다. 적어지니까 맨나중에는 어떻게 됩니까? 나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이 우주의 사랑의 주인은 누가 되겠습니까? 절대적인 우주의 주인인 하나님과 나만 남았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나만 남았느냐? 절대적인 사랑을 찾아서 가다 보니 이렇게 나 혼자만 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도 별수 없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나만 남았나이다' 할 때 하나님이 말씀하시길 바알 앞에 굴복하지 않은 칠천 무리가 남아 있는 것을 생각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뜻을 품고 나가는 사람은 외로운 사람입니다. 인간 앞에 저주를 받고 그들 앞에 부정을 받지만 당당히 인류를 위하고, 하늘의 공적에 일치될 수 있는 자리에서 '나만 남았나이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갈 데가 어디 있습니까? 삥 돌아가는 것입니다. 한바퀴 돌면 이만큼 잘라먹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귀의 행로를 찾아가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올라가면서 해결하는 방법이요, 다른 하나는 그 반대로 내려가면서 해결하는 방법입니다. 어느 방법이 하나님께도 인간에게도 피해를 많이 입히지 않고 보다 효과적이고 보다 가치적인 결과의 내용을 가져 오겠느냐? 교만의 반대입니다. 즉, 온유겸손하라는 것입니다. 죽고 못사는 놀음을 해서 희생봉사하라는 것이 통일교회의 가르침입니다. 인류에게 행복을 줄 수 있고, 우리가 해방을 받을 수 있는 제일 가까운 직선 길이기에 그 길을 가르쳐 주는 것임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 길이 예수님이 가신 길이요, 수많은 종교가 가는 길입니다. 고해입니다. 수난의 길입니다. 위대한 역사와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동기와 사연이 여기에 깃들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복귀의 행로를 찾아가는 우리에게 있어서 희생봉사하는 것을 천명으로 알고 나가야 되겠습니다. 보다 빠른 복귀의 길은 개인적인 고통의 길을 극복하고, 가정적인 고통의 길을 극복하고, 종족적인 고통의 길을 극복하고, 민족적, 국가적 고통의 길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우리 통일교회에서는 개인적 수난사를 극복하라고 합니다. 우리 통일교회 식구는 통일 족속입니다. 통일민족 형성을 위해서 통일교회는 고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축복받은 부인들을 내가 다 빼내는 것입니다. 좀 미안하지만 할수없다구요. 이렇게 나온 통일교회가 망하겠어요, 흥하겠어요?「흥합니다」 만일에 삼천만 민족이 그러한 원칙을 알아서 '세계를 위해 죽자. 세계를 위해 봉사하자' 하는 운동이 벌어지면 이 민족은 세계를 지배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류가 갈 길은 이 길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길, 다른 방법이 있다면 내가 왜 이런 길을 가겠습니까? 어느 누구보다 못나서 일생을 욕을 먹으며 이 길을 가는 것이 아닙니다. 욕 먹는 것이 복입니다. 손가락질받는 것이 복이예요. 손가락질이 복을 갖다 주는 다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욕을 해라 이겁니다. 욕을 하면 욕하는 사람의 복은 나한테 빼앗긴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욕을 하더라도 욕을 하지 않으면 송두리째 걸려드는 것입니다.
자 그런 장사를 하겠어요, 한 푼 두 푼 편하게 모으는 장사를 하겠어요? 통일교회가 망하는 것 같지만 망하지 않습니다. 자꾸 떨어져 나가는데 또 뭐가 붙어서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공산당은 없는 것도 있는 것같이 선전하지만 하나님은 있는 것도 없는 것같이 보입니다. 성경에 하나님이 있다는 것이 확실히 되어 있어요? 있긴 있는데 없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있는 것 같기도 한데 잘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에서 통일교회는 선전을 할 줄 모른다고 하지만 선생님이 선전할 줄 몰라서 안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전을 했다가는 도둑놈들이 많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귀한 물건은 도둑이 다 떨어져 나간 다음에야 마음 놓고 내 놓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리에 들어가려니 복귀의 노정에 있어서는 희생봉사하는 길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 길이 싫다고 도망가는 사람은 다시는 못 들어옵니다. 여기에 왔다가 '아이쿠 못 가겠다' 하고 도망가면 다시는 못 들어오는 것입니다. 사탄이 꽁무니에 붙어 있기 때문에 돌아서는 날에는 살아남지 못합니다. 한번 돌아서는 날에는 통일교회에 다시 못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왜? 사탄이 있기 때문에 고생길을 가다가 못 가겠다고 돌아서면 그 길은 다시 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길은 고생스럽다고 생각해서는 못 가는 것입니다.
배가 고플 때 뭐가 제일 맛있어요? 불고기보다도 빈대떡이 더 맛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배가 고플 때는 보리밥이 더 맛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해 볼 때, 홀로 망하지 않고 영원히 남아질 수 있는 길은 아까 말한 거와 같이 하나님의 사랑권을 중심삼고 이상세계를 찾아 나가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 길은 올라가려고 하다간 갈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내려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인류역사의 깊은 골짜기를 더듬으며 인간들이 낙오자된 길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복귀의 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 길을 가는 데 있어서 절대적인 주인을 만나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상대의 입장에 서야 되는 것입니다. 그 절대자와 우리와의 상대적 관계가 결정되기 위해서는 타락권내에 있는 우리가 반대의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그 고생길을 달게 받고 갈 줄 아는 여러분들이 되어 주길 바랍니다.
사랑하는 아버님! 여기에 모인 통일의 자녀들, 이 길을 극복해야 할 것을 알았고, 사망권을 타파해야 할 운명에 놓여 있음을 알았습니다. 고착되어 있는 현실적인 모든 것을 극복하고 타파하지 않으면 안 될 역사적 갈림길에 서서 통일교단이 오늘날까지 걸어 나온 것을 아옵니다. 역사시대를 거쳐 나오면서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심정적인 내연을 살펴 가면서,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수난의 길을 생활철학으로 믿고 따라 나올 수 있는 역사적인 노정을 남겨 주신 아버지의 거룩하신 사랑 앞에 감사를 드립니다.
이 아침에 모인 당신의 자녀들이 이 말을 그냥 흘려 보내지 말게 하시옵고, 이 말과 더불어 내 스스로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인 것을 알게 하시옵소서.
나 자신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있어야 되겠고, 가정을, 종족을, 민족을, 국가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있어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통일교단의 가정들이 국가와 민족을 붙들고 몸부림치며 선두에 섰사오니, 아버님, 버리지 마시옵소서.
내일의 천국이 그립거든 오늘의 현실에 있어서의 가야 할 길을 달려가게 허락하여 주옵소서. 만일 내일의 행복을 꿈꾸거든 오늘 제사장의 옷을 입고 한숨과 절규의 수난이 있어도 하늘의 애절함에 불타 가지고, 내 스스로를 아버지 앞에 맡기는 최후의 담판노정이 있어야 되겠습니다. 철부지였던 과거지사를 다시 한 번 회상하며 아버님이 기뻐할 수 있는 최후의 결정적인 스스로의 모습을 그리면서 아버지 앞에 섰사오니, 아버님이여, 명령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두 갈래 길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다시 내려와야 하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 인류에게 수난의 길을 가라고 지금까지 수많은 종교가 가르쳐 나온 것을 생각하게 되옵니다. 이제 그 뜻을 알았기에 그렇게 살기를 바라는 통일가의 무리들을, 아버지, 긍휼히 보시옵소서.
세상이나 환경이 어떻든간에 이 두 길 가운데서 아버님이 가르쳐 준 길만은 틀림없기 때문에, 이 길 앞에 자기의 모든 것을 청산짓고 나갈 줄 아는 아버지의 아들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금후에 갈 길을 당신에게 맡기오니 맡아 주시옵소서. 오늘은 거룩한 날이오니 남한 각지에 널려 있는 당신의 아들딸들 위에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세계에 널려 있는 뭇 자녀들, 고향땅을 그리며 기도하는 모습 위에 아버지의 손길이 떠나지 마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옵니다. 전체 위에 당신의 긍휼이 같이하여 주시옵고, 우리 생애노정에 있어서 빛이 되어 이끌어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면서, 이 모든 말씀 참부모의 성호받들어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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